한반도 1권
김진명
케임브리지
하버드대학교 앞 케임브리지 광장.
행인들로 붐비는 광장에서 구성진 목소리의 판소리 한마당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훈은
오봉펭 노천 카페의 의자에 앉아 아이스 티를 한 모금씩 마시며, 한창 신이 올라 걸쭉
한 모소리를 뽑아내고 있는 인남을 바라보았다. 개량 한복을 입고 합죽선을 든 인남은
호기심에 사로잡힌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한국의 1인 오페라를 이제껏 접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저 잠시 서서 구
경하다가 곧 땅바닥에 신문지 따위를 깔고 앉았다. 그들의 표정엔 인간의 목에서 어떻
게 저런 소리가 나오는가 하는 놀라움이 차츰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서 간간이
탄성이 터져나왔다.
「춘향이 비몽사몽간에 고개를 들어보니 꿈에도 그리던 이 도령이라…….」
인남은 어깨를 가로지른 삼베끈에 맨 북을 이따금 두들겨가며 한껏 흥이 오른 목소리
로 판소리 <춘향가>의 절정을 넘어가다가 경훈을 보자 짐짓 여유를 두며 눈짓을 보내
왔다. 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 하는 정식 공연은 아니었지만, 인남은 서둘러
마치는 태가 역력했다.
「이젠 너 아주 제대로 하는 소리꾼이 되었구나. 네 구성진 목소리에 제법 기분이 동
하던데.」
경훈은 이제 삼십대 초반이지만 얼굴은 서른이 채 안 돼 보였다. 담배를 피지 않는 듯
소년처럼 입술이 붉었고, 체격은 약간 가냘파 보였으며, 움푹 파인 눈은 그가 속이 깊
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일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는 한여름의 태양에도 불구하
고 넥타이를 맨 긴 와이셔츠 차림이었고, 그의 하얀 피부는 햇볕에 전혀 그을리지 않
은 듯했다.
「호호, 이것도 자주 하니까 이제는 정말 인이 박였나 봐.」
화장기 없는 건강한 피부가 돋보이는 인남은 경훈과 동갑이었지만, 뒤로 질끈 동여맨
말총머리에 거침없이 분방한 태도 때문인지 신중한 경훈에 비해 훨씬 어려 보였다.
「괜히 나 때문에 일찍 끝낸 거 아냐?」
「그래, 너 때문이야. 하지만 바쁜 사람이 여기까지 와줬는데 내가 이거나 두들기고
있으면 되겠어?」
인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북을 들어 보였다.
「그래도 예술인데……?」
「예술? 호호호. 좀 부끄러운걸.」
인남은 1달러짜리 지폐가 수북이 쌓인 통을 들여다보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
녀는 재미 삼아 광장에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 이제는 제법 벌이가 되기도 해서 토요일
이면 어두워질 때까지 공연을 계속하곤 했다.
「오랜만에 너하고 맥주나 실컷 마시고 싶어.」
인남은 편안한 표정으로 친구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했다. 경훈의 반응을 떠보는 그녀
의 눈길에 기대감이 비쳤다. 사실 경훈은 인남에게 마냥 편하기만 한 친구는 아니었다.
「그래, 바닷가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면서 마시자.」
「좋아.」
인남은 아예 차를 집에 두고 나왔던 터라 경훈의 옆자리에 앉았다. 자동차는 시원한
해안 도로를 상쾌하게 달렸다.
「우리가 미국에서 처음 만난 게 벌써 2년 가까이 되는 것 같아.」
인남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럴 거야. 내가 연수 오자마자 너를 봤으니까.」
「참, 얘기 들어보니까 너 회사에서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면서.」
「누가 그래?」
「일전에 한국에 물건 사러들어갔을 때 마침 동창회가 있어 나갔더니, 애들이 네 얘길
많이 하더라.」
「회사는 모든 직원들을 동등하게 대우해. 다만 순서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난 그렇게 어려운 말은 잘 몰라. 하지만 너처럼 입사한 지 3년 만에 하버드에 1년,
로펌에 1년 보내주는 케이스는 이제껏 없었다던데.」
경훈은 대답 없이 운전을 하면서 한국을 떠나오던 때를 떠올렸다.
-이 변호사, 도대체 무슨 일이오? 어떻게 사람이 이처럼 변할 수가 있소?
-죄송합니다.
-그렇게 정열적으로 일하던 사람이, 그 불리한 소송들을 기적적으로 이겨내곤 하던 이
변호사가 이렇게 나약해지다니, 미안하지만 지금의 이 변호사에게는 나약하다는 표현
을 안 쓸 수 없소. 이제까지 이 변호사는 영웅적 변호사들의 기록을 모두 깨왔잖소?
-큰 의미가 있는 일들은 아닙니다.
-혹시 개업을 하려고 합니까? 물론 그 실력이면 엄청난 돈을 벌겠지. 하지만…….
-아닙니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습니다.
-음, 나도 이 변화가 이렇게 성급하게 개업하려 들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틀림없
이 말못할 사정이 있겠지. 내가 관찰하기로는 마음의 병을 앓는 것 같던데…….음, 그
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이 변호사가 원한다면 지금 연수를 떠나도록 하시오. 하버
드 로스쿨에서 1년, 그리고 로펌에서 1년. 세월이 흐르면 마음의 병도 낫지 않겠소?
자동차는 해안 도로에서 조금 벗어난 조용한 모래사장에 바퀴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멈
추었다. 경훈이 문을 열고 나오자 소금기 머금은 바람이 얼굴을 스쳐갔다. 대서양은
언제나처럼 잔잔했다. 끼룩끼룩 울어대는 갈매기가 그림처럼 파란 하늘을 가르며 날아
오르는 풍경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여긴 처음인데.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곳이구나. 너는 자주 오니?」
인남이 경훈에게 말을 건넸다.
「가끔」
「이런 데 올 땐 좀 데리고 오잖구?」
인남이 곁눈질로 경훈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경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먼바다만 바
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비치 바가 있네. 찬 맥주나 한잔하자. 그것도 소리라고 목이 컬컬하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인남은 맥주를, 경훈은 스카치를 시켰다. 인남이 맥주 한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경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경훈은 자신이 너무 말이 없었다
고 생각했는지 인남을 향해 한마디 툭 던졌다.
「인남이 네 얘길 좀 해봐.」
「나? 뭐 얘기할 만한 게 있어야지.」
인남은 반색하며 말했다.
「나처럼 따분한 인생은 아닐 것 같은데……」
「글쎄, 그럴는지 몰라도 너처럼 우아한 인생은 못 된다.」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고등학교 때 공부는 젬병이었잖아.」
「그래.」
경훈은 인남의 남자 같은 말투에 소리 없이 웃었다.
박인남, 그녀는 경훈과 고등학교 동창이다. 인남은 맑고 시원한 인상을 주는 미인이지
만 말썽꾸러기로 유명했다. 좋다고 소문난 영화나 연극이 공연되면 수업을 제쳐두고
거기에 가기 일쑤였고, 수업 시간에는 수필집이나 잡지를 보다가 벌을 받곤 했다. 그
러나 그녀는 명랑하고 상냥해서 모든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아버지를 졸랐지. 제발 억지로 대학에 집어넣으려 하지는 말아
달라. 일찍 결혼도 안 한다, 나도 남자처럼 돈 벌겠다, 기왕이면 미국에서 스스로 인
생을 개척하고 싶으니 미국까지 비행기 요금과 한 달 간 머무를 수 있는 최소한의 경
비만 달라고 말이야.」
이번에도 인남은 맥주를 단숨에 쭉 들이켰다. 경훈에게는 그런 모습이 그녀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자신감을 내보이는 것으로 생각됐다.
「처음엔 고생 좀 했어. 하지만 미국 생활이 내게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었어. 적성에
맞다고나 할까. 웬만큼 성공한 적도 있었으니까.」
인남은 다시 잔에 맥주를 따르고 나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 왔을 때처럼 밑바닥에서부터 뛰고 있어. 교포 아저씨 한 분을
밀어드렸다가 같이 망했거든. 그러나 후회는 안 해. 그 아저씬 좋은 분이셨어.」
「너, 지금은 무슨 일하니?」
경훈은 별로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한국에서 액세서리 수입해. 이젠 제법 규모가 큰 가게에 공급하게 됐어. 틈틈이 하
던 아르바이트도 졸업했고.」
「판소리 공연은 어떻게 하게 됐어?」
「호호. 그건 실은 내가 좋아서 시작했던 건데, 뜻밖에도 제법 돈이 되네. 그러려고
했던 것은 전혀 아닌데.」
인남은 공연으로 돈을 버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보스턴 처음 와서 케임브리지 광장에 갔는데 전세계의 수많은 민속 악기들이 연주되
고 있잖아. 근데 우리 것만 없는 거야. 갈 때마다 찾았는데 우리 건 통 나오질 않더라
구. 열 받치지 뭐야. 우리 사물놀이며 가야금 같은 게 나오면 히트 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에이, 내가 못 나설 건 뭐야 싶었지. 근데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그래
서 아예 판소리를 배워버렸어. 내가 본래 노래에는 소질이 있잖아.」
「데뷔 공연은 어땠어?」
「대성공이었지 뭐니. 양코배기들이 사람의 목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 이젠 광장에서 돈 제일 잘 버는 사람이 바로 나야. 호호」
「하하. 네가 그걸 안 했다면 우리도 아마 못 만났겠지. 그냥 지나치려다가 도대체 누
가 이렇게 우리 판소리를 하나 싶어 봤더니 너더라구.」
「경훈이 넌 날 못 벗어날 운영인가 봐. 보스턴에서 이렇게 만날 거라고 누가 생각이
나 했겠어?」
「뭐, 운명? 하하하.」
「하긴 내가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거창하게 운명 운운하겠어.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다가 졸업 후 보스턴에서 우연히 만난, 특별할 것 없는 관계일 뿐인데 말이
야.」
「자, 건배할까? 명창 박인남을 위하여!」
「위하여!」
인남은 미국에서 경훈을 다시 만난 후 그를 좋아하게 됐다. 그녀는 경훈을 통해 똑같
은 무게의 뇌라고 그 성능은 무섭게 다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인간에게 머
리란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삶이란 오직 몸으로 뛰면 되는 거지 하는 태도로 살아
왔던 인남은 경훈을 만나며서 가끔 그 머리의 성능에 대해 섬뜩한 느낌을 갖게 된 것
이다. 인남은 자기와 경훈이 머리만 아니라 성격까지도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잘 알았다.
경훈은 말이 별로 없는 편이지만 언제나 사물의 원리를 꿰뚫었다. 그의 목소리는 항상
같은 톤이었고, 결코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으며, 흥분하는 모습은 한평생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반면 말이 많고 다정다감한 편인 인남은 경훈의 군더더기 없는 언행을 보며 자신의 경
망함을 자책하기도 했고, 그의 약간 건조한 성격조차 좋아하게 되었다.
「근데 네게는 하나 이상한 것이 있어.」
「뭔데?」
경훈은 빙그레 웃으며 인남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너는 유독 술은 사양하지 않고 완전히 취할 때까지 마시더라. 매사 절제
하는 스타일인데도 말이야. 너의 성격과 술은 연결이 안 돼. 겉으로는 냉정해 보여도
가슴속은 뜨거운 모양이지?」
「…….」
「취할 때까지 마시면서 무얼 생각하니?」
경훈은 말없이 씩 웃더니 스카치 잔을 들었다. 인남은 과묵하지만 매력 있는 경훈의
분위기에 취했다.
경훈은 인남에게 먼저 연락을 해오는 법이 한 번도 없었다. 지난 2년 동안 언제나 인
남이 먼저 연락해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나마 경훈이 로펌에 들어가 소송에
관여하고 나서는 더욱 만나기 힘들었고, 만나도 그가 양복 차림으로 나타나 편하지 않
았다. 그러고 보면 토요일 오후에 경훈 스스로 인남의 공연장까지 와준 것은 보통 일
이 아니었다.
인남은 감정이나 행동의 낭비가 없는 경훈이 이렇게 친절하게 자신을 찾아준 이유를
생각하다가 이내 불안해졌다. 연수를 마친 경훈이 보스턴을 떠날 날이 임박했다는 사
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인남은 문득 경훈에게 도발하고 싶은 생
각이 들었다. 이제 곧 못 보게 되리라는 생각과 지난 2년간의 아쉬움이 그녀를 부추
겼다.
「참, 셰인이라고 내 남자 친구가 있거든, 걔가 오늘 저녁때 댄스 파티에 같이 가자고
하더라.」
「좋겠구나.」
「춤추고 나면 바로 헤어질 것 같지 않아. 교외에 있는 친구네 집에 여럿이 가기로 했
거든.」
「그럼 잘 갔다 와.」
인남은 경훈의 반응에 실망했지만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근데 약간 문제가 있어.」
「…….」
「내일 한국에서 전화가 올 게 있거든. 꼭 받아야 되는 중요한 전환데…….」
경훈은 무심하게 듣고 있었다.
「전화 때문에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고…….」
「무슨 전환데?」
「장사와 관련된 일이야. 여기에 액세서리 대리점을 내려고 하는데 한국에서 확인 전
화가 올 거거든. 자동 응답기 같은 걸로는 안 돼. 꼭 전화 받는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데, 한국전화라 미국 애들한테 부탁할 수도 없고…….」
「…….」
인남은 곁눈으로 경훈의 얼굴을 슬쩍 넘겨다보며 잠시 생각하다는 듯하다가 말을 이었
다.
「네가 좀 받아주지 않을래?」
「내가, 어떻게?」
「나한테 오는 전화를 네 번호로 자동으로 연결되도록 해두면 네가 집에서 받을 수 있
잖아. 한국인이 전화해서 물으면, 나는 나갔고 전화 받는 곳은 가게라고 하기만 하면
돼. 내가 가게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단순한 전화니까.」
「저쪽과 내가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대화가 될 리 있겠어?」
「단순한 확인 절차야. 그냥 가게라고 하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야. 좀 도와줘.」
경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알았어. 내일 어차피 집에서 하루 종일 서류 좀 들여다볼 게 있던 참이니까 받아주
지 뭐.」
「그럼 이따 저녁때 네 번호로 돌려놓을게.」
인남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경훈을 이렇게 하찮은 자기의 일에 매어놓을 수 있어 무
척 기분이 좋았다.
한밤의 전화
「때르르릉 때르르릉 때르르릉…….」
경훈은 벌써 열 번도 넘게 울리는 전화를 향해 짜증이 밴 손길을 뻗으며 무의식적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언뜻 눈에 수치는 바늘의 위치가 턱없이 낯설게 느껴지자
그는 눈가를 찌푸리며 숫자판에 동공의 초점을 맞췄다.
새벽 2시.
분명 잘못 걸려온 전화일 것이다. 경훈은 전화를 향해 내밀던 손길을 거둬들이며 베개
에 머리를 더 깊이 묻었다.
「때르르릉. 때르르릉.」
그러나 전화 벨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이때 경훈이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인남의 전화.
「제기랄!」
다음 순간 경훈의 손은 급히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여보세요?」
그러나 수화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경훈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메마른 목줄기를 타고 나왔다.
「여보세요?」
상대편에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경훈은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베개 속으
로 머리를 묻은 지 2~3분이나 지났을까, 전화기는 다시금 요란한 벨 소리를 냈다. 무
슨 전화가 이런 한밤 중에 올까. 경훈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전화를 인
남과 연결시킬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의 전화, 혹은 인남이 친구들과 어울려 취한
채 장난 전화를 해대는지도 몰랐다. 경훈은 화를 참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던 경훈은 이미 귀를 떠난 수화기에서 마치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처럼 작은 소리를 들었다. 그는 황급히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인……남…….」
고통에 찬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왔다.
「말씀하세요.」
「인……남…….」
생명이 꺼져가는 듯한 노인의 가냘픈 목소리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 위급한 중에
도 인남을 찾았다.
「지금 박인남 씨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경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인남의
이름만 반복해 불러댔다.
경훈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목소리의 느낌으로 어쩌면 상대가 죽어가는 중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상대가 그런 상태라면 경훈은 자신이 인
남 대신 전화를 받아주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네, 인남입니다.」
상대는 남자 목소리인지 여자 목소리인지도 가늠하지 못한 채 계속 횡설수설하더니,
인남이라는 이름이 귀에 들어오자 정신이 드는지 낮고 가는 목소리가 실낱같이 이어졌
다.
「나……제럴드 현……제럴드 현……이야.」
「네,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러세요?」
들끓는 가래 때문에 잘 이어지지도 않는 목소리는 듣기에도 음산했다. 경훈은 이것이
노인의 본래 목소리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아직도……내가……살아 있나?」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살아 있느냐구요?」
「그……그래……추워……춥……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사고가 생격나요?」
「아……출혈이……너무 심해. 출혈이……. 이젠 가망이 없어. 이제 곧……이제 곧…
…죽을 거야.」
너무도 싸늘한 노인의 목소리에 경훈은 약간 남아 있던 잠이 싹 달아났다.
「911 신고는 하셨나요?」
「아니야, 이미……너무 늦었어. 너무…….」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911 신고……근데 거기가 어디죠?」
그러나 이미 상대방은 완전히 체념을 한 상태였다.
「아냐……안 돼. 소용이……소용이 없어.」
「무슨 일입니까? 사고가 생겼나요?」
「다……터졌어. 피가……내장이…….」
「그래도 구급차를 불러야조. 어디세요?」
「아니, 늦었어……. 이제……5분도……안 돼……죽을 거야……. 그런데 내 말……내
말 잘 들어. 꼭……기억을…….」
「말씀하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구급차를 부르겠어요. 거기가 어딥니까?」
이때 경훈은 수화기가 무엇엔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노인이 수화기를 떨
어뜨린 모양이었다. 경훈은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전화를 끊고 교환을
부르면 상대방의 주소를 알 수 있을까. 아니면 수화기를 그대로 든 채 노인의 목소리
가 다시 흘러나오기를 기다려야 할까.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무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경훈은 버튼을 누르려 했다.
이때 모기만한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아까보다 훨씬 힘겨운 목소리였다.
「바……바……박 대통령……아……그……비밀……10·26……비밀을……내가……비밀
……인남……하……하……하우스……으……으……헉.」
노인이 다시 수화기를 떨어뜨리기 직전에 들린 것은 분명 숨이 넘어가는 소리였다. 경
훈은 수화기를 귀에 더 바싹 갖다 대고 기다렸지만 10분이 지나도록 저쪽에서는 아무
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경훈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놨다. 가슴히 쿵쿵 뛰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고, 그때마다
머리의 실핏줄도 같이 흔들리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경훈은 냉장고에서 찬 얼음물을
꺼내 들이켰다.
하지만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엇이가. 어떻게 된 일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던 경훈의 뇌리에 어쩌면
이것은 인남의 장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처음부터 인남의 요구는 무리한 것
이었다. 자기는 놀러가니 한국에서 올 전화를 받아달라는 것부터 수상하기 짝이 없었
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경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노인의 목소리가
너무나 절박했다. 이 늦은 밤에 한국인 노인을 미리 대기시켰다가 어떤 연극배우도 흉
내내지 못할 죽음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아무리 장난이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 장난이
라면 그냥 끝날 일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경훈은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든 간에 지금은 일단 빨리 신고부터 해야 한다.
경훈은 물컵을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교환, 지금 이리로 걸려온 전화 번호를 확인해 주세요. 주소가 필요합니다. 저쪽에
응급을 요하는 급한 환자가 있습니다. 911에 신고해 주세요.」
전화를 끊은 후에도 경훈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혹시 전화 벨이 울릴지 몰라 방
안을 서성이며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긴장으로 지쳐 먼동이 틀 무렵에야 스카치 몇
잔을 바시고 겨우 잠이 들었다.
10.26의 비밀
점심 무렵 잠을 깬 경훈은 인남이 얘기한 한국으로부터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는 사실
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인남의 장난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장
난이라도 그런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경훈은 인남에게 전화를 해봐야 자신의 전화
로 다시 연결될 테니 그녀로부터 전화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인남에게서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전화가 왔다.
「경훈아, 전화 왔었니?」
「……」
「왜 그래? 기분 나쁜 일 있었니?」
경훈은 전화로 얘기할 상황이 아니어서 바로 뛰어나가 시내의 한국 음식점에서 인남을
만났다. 인남은 경훈의 표정이 심각하게 얽혀 있는 것을 보자 불안해졌다.
「너 제럴드 현이란 사람 아니?」
「제럴드 현?」
「그래.」
「아니, 모르겠는데,」
경훈은 인남의 대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죽기 직전에 전화를 걸어올 정도라면
보통 사이가 아니었을 텐데.
「널 알던데. 노인 목소리였어.」
경훈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보자 인남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
「아, 참, 그래. 그렇구나. 그분의 미국 이름이 제리 현이었어. 현 선생님. 바로 그분
이구나.」
경훈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인남의 입가를 응시했다.
「가끔 통화를 하곤 하는 분이야. 근데 왜 그래? 그분한테 전화 왔었니?」
「응. 그런데 어떤 사람이지?」
「왠지 모르게 처음부터 연민이 느껴지던 노인이었어. 무척 쓸쓸해 보이셨지.」
짧은 순간 인남의 머리에 처음 그 노인을 만났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꽤 오래 전,
인남이 아르바이트하던 한국 식당에 온 그 노인은 먹성 좋게 서너 가지 안주와 소주
세 병을 비웠다. 그러고 나서는 인남을 불러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식대가 없다고
했다.
인남은 처음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지만 육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 노인의 말투와
행동에 왠지 모르게 끌렸다. 노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인이 나와 호되게 몰아치려는 순간 인남은 자신이 대신 돈을 내겠다고 해서 노인을
곱게 돌려보냈다. 뿐만 아니라 택시를 불러 기사에게 집까지 잘 모셔다 드리라고 부탁
하고 요금도 치러주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비굴한 표정이나 인사치레가 없었다. 다
음에 와서 갚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나는 노인을, 주인은 경멸에 찬 눈초리로 쏘아
보았지만 인남은 왜 그런지 마음이 갔다.
그후로 그 노인은 식당에 자주 나타났다. 전처럼 돈을 내지 않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
렇다고 인남이 앞서 대신 내주었던 돈을 갚지도 않았다. 적지 않은 돈이었으나 인남도
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표정이 무척 쓸쓸해 보이셨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있는 분이셨지.」
「그 사람이 네 집 전화 번호는 어떻게 알지?」
「내가 적어드렸어. 식당에 이따금 오시기에 여쭤봤더니 혼자 사신댔어. 어쩐지 안돼
보여서 외로우실 때 연락하라고 했지. 그후로 가끔 전화를 하곤 하셨어. 그러데 도대
체 왜 그래? 뜬금없이 그분은 왜 물어?」
경훈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인남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래? 그분이 전화를 하셨단 말이지? 그것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경훈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남 역시 비감한 얼굴로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인남은 그 외로워 보이던 노인이 죽기 직전에 자신에게 전화를 걸
어왔다는 사실의 무게를 깊이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현 선생님이 정말 돌아가셨을까?」
「아마 그럴꺼야.」
「혹시 모르니까 한번 확인해 볼래. 교환이 911로 신고했댔지?」
「……」
인남은 미련이 남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걸러 갔다. 잠시 후 돌아온 인남의 눈
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정말 돌아가셨대. 어디 연락할 연고자도 없이……」
인남은 말 끝을 흐렸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나마 가끔 전화하셔서 나하고 얘기 나누시는 것이 그분의 유일한 낙이었는데.」
인남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경훈은 그 모습을 보며 기분이 묘해졌다. 그다
지 특별한 관계도 아닌 노인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인남의 심성에 잔잔한 감동을 받았
다. 아까 그녀가 외로울 때 연락하라고 노인에게 전화 번호를 적어주었다고 했을 때는
적잖이 놀랍고 이상하기도 했던 것이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인남에게는 경훈 자신이
가지지 못한,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이 있는 것이다.
「진정해.」
경훈은 인남을 위로했다.
「그분은 불행하셨나 봐. 가끔 당신의 얘기를 들려주셨는데 조울증으로 고생했다고 하
셨어.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통원 치료도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끔
히 나았다고 하셨는데……」
「가족은?」
「부인과는 사십대 초반에 이혼한 후로 보지 못하셨대. 자식은 없고, 부인은 재혼했다
는 것 같았어. 이미 20년 넘게 만나보지 못하셨대.」
「말년을 외롭게 보냈구나.」
「어쩌면 조울증도 그런 외로움에서 비롯되었을지 몰라.」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이라도 현 선생님의 외로움을 덜어드리려고 내 전화 번호를 일러드렸어. 낯선
외국 땅에서 얘기 나눌 사람인들 제대로 있으셨겠어.」
인남은 노인의 외로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지만 경훈은 그보다 인남의 착한 마음이
가슴에 와닿았다. 생김새는 시원했지만 공부는 못했던 기억 속의 인남이 이렇듯 갸륵
한 마음씨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경훈은 세상을 보는 자신의 시각이 우등생과 열
등생으로 너무 이분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하던 사람이었어?」
「당신 말씀으로는 은퇴하기 전에는 일반 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어째서?」
「연금을 받고 계셨는데 일반 사회보장연금은 아닌 것 같았거든. 게다가 그다지 돈이
궁한 모습도 아니었어. 오히려 내키는 대로 쓰시는 편이었어.」
「무슨 소리야? 소주 마시고 돈이 없어서 네가 대신 내드렸다고 했잖아.」
「참, 그게 말이야. 아주 우스운 일이었어. 언젠가 전화해서 고백하시기를, 그때 돈이
없다고 한 것은 순전히 장난이었다는 거야. 무척 외로우셨던데다가 내 인상도 마음에
들고 해서, 한번 그래 보셨던 거래. 돈이 없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셨대
나.」
경훈은 웃음을 머금었다.
「틀림없이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던 분은 아니셨어. 이따금씩 어딘지 모르게 오만한
표정과 자신감을 내비치곤 하셨는데, 그것은 무언가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에
게서만 볼 수 있는 표정이었어. 나는 그 표정을 보고 '지금은 이렇게 퇴락했지만 예전
에는 보통 분이 아니었겠구나'라고 생각했어. 」
인남은 말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더욱 굳혔다. 오랜 세월을 조울증에 시달려 그 흔
적이 많이 지워지긴 했지만 분명 그 표정은 세상의 어느 한 부분에 대해 강력한 영향
력을 행사했던 사람만의 것이었다. 아마 처음 보았을 때에 느꼈던 연민도 그 흔적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 분은 결코 쓸데없는 말씀을 하실 분은 아니야. 」
「그렇겠지. 죽기 직전에 전화를 걸어 거짓말할 사람은 없으니까. 특히 너와 그 사람
의 관계를 본다면 더 그렇지.」
「나와 그분의 관계가 어떤 건데?」
인남은 눈가를 훔치며 경훈의 입가를 빤히 쳐다보았다.
「별 사이가 아니란 뜻이야.」
「……」
인남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슨 생각이라도 났는지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경훈아. 그렇지 않을수도 있어.」
「……」
「어쩌면 그분에게는 내가 가장 가까운 동무가 아니었을까?」
「글쎄……」
「내가 유일한 친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언젠가 그분은 아무도 안 만난다
고 말씀하셨거든. 게다가 조울증이라는 병이 나았다 해도 사람 만나기를 즐기셨을 것
같지는 않아.」
「그럴 수도 있겠지. 어쨌든 그 사람은 네게 그 말을 하고 싶어 전화했던 거야.」
「그분이 남기신 말을 다시 한 번 그대로 해봐.」
경훈은 제럴드 현이 남긴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게 무슨 뜻일까?」
「일단 그것은 제럴드 현이라는 사람이 10·26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
돼. 그리고 그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한 것인지도 몰라.」
인남은 미간을 좁혔다.
「10·26이라면 김재규 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 아니니?」
「그래. 김재규가 경호실장과 대통령을 살해한 엄청난 사건이지.」
「그런데 현 선생님은 왜 갑자기 20년이나 지난 사건에 비밀이 있다며 밝히려 하셨을
까?」
경훈도 인남을 따라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우스'라는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숨이 넘어가는 상황이었지만 제럴드 현은 비교적 명확하게 자신의 뜻을 전화를 통해
전달한 것이다. 그러나 경훈과 인남은 그 하우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한참이나 생각하던 인남이 여전히 복잡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나름대로의
짐작을 조심스럽게 내놨다.
「청와대와 얽힌 어떤 비밀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청와대를 영어로 블루 하우스라고
하잖아. 여기서는 늘 영어를 쓰셨으니까 청와대를 하우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
까?」
경훈은 대답 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인남의 추리가 재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켜 보아도 하우스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은 역
시 청와대뿐이었다.
인남은 의외로 순발력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무슨 얘기인지 도저히 알아낼 수 없어. 그런데 하우스라는 말보다 더
심각한 말이 있어.」
「그래? 그게 뭐지?」
경훈은 의아해하는 인남의 표정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저히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어. '박 대통령, 그 비밀을'이라니. '10·26비밀'
이라니? 그 사람 얘기로는 10·26에 얽힌 비밀이 있다는 것 같은데, 이상하잖아. 10
·26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남아 있다는 거야?」
인남도 물론 짐작할 수 없었다. 경훈이 오래도록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을 지켜보던 인남은 갑자기 답답해졌다. 저렇게 생각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
가. 무슨 일이든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인남의 철학이었
다.
인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게 아니라 가봐야겠어.」
「어디를?」
「어디긴, 병원이지. 가서 왜 돌아가셨는지, 연고자에게 연락은 됐는지 알아봐야겠
어.」
인남은 응급 구조센터에 전화를 걸어 병원을 확인했다. 메트로폴리탄 하스피틀이었다.
경훈은 서둘러 나서는 인남을 마뜩찮은 표정으로 따라나섰다.
연고자
병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구급차가 제럴드 현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사인이 뭐죠?」
「위정맥 출혈로 인한 쇼크사입니다.」
「위정맥 출혈은 왜 일어났는데요?」
「술이죠. 벌써 열 번도 더 터졌던 걸 때워왔던데요.」
「세상에, 가엾어라! 지나친 음주 때문에 그렇게 되셨단 말이죠?」
「그래요.」
단 세 마디로 제럴드 현의 죽음은 설명되었다.
「연고자는 없습니까?」
「그런 건 원무과에 가서 물어보세요.」
경훈과 인남이 원무과에서 담당 직원을 찾아 연고자에게 연락은 했는지 여부를 묻자,
오히려 그 직원이 두 사람에게 신문하듯 되물었다.
「사망자와 어떤 사이신가요?」
「아니, 특별한 사이는 아닙니다.」
경훈이 서둘러 대답했다.
「혹시 연고자를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경훈이 냉정하게 대답하는 것을 옆에서 우두커니 지켜보던 인남이 불쑥 끼여들었다.
「지금 연고자가 없나요?」
담당 직원은 인남을 훑어보며 대답했다.
「그래요, 아무데도 연락할 곳이 없어요.」
「저를 연고자로 기입해 주세요. 그분은 아마 연고자가 없을지 몰라요. 저라도 장례식
을 지켜보아야 할 거예요.」
「사망자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아무런 관계도……」
「그럼 안 됩니다.」
「연고자가 되려면 꼭 무슨 관계라야 하나요?」
「가족이나 친척, 혹은 오랜 친구.」
「바로 그거예요. 제가 그분의 유일한 친구였어요.」
담당 직원은 잠시 인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서류를 한 장 내주었다.
「빈칸에 기입하고 서명하세요.」
서류에는 '별도의 법적 서류없이 이 신고서만으로는 어떤 법적인 관계도 성립하지 않
는다'라고 씌어 있었다.
「이런 게 왜 여기 씌어 있지? 무슨 의미야?」
인남이 서류를 들이밀며 쳐다보자 경훈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경훈은 인남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서류만으로는 상속 등의 법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야.」
인남은 꼼꼼히 읽어보지도 않고 서류를 작성하고는 서명했다.
「연고자로서 상속과는 상관없이 공식적 비용 외의 사적 비용을 부담할 용의가 있습니
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사적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처리가 아무래도 좀
부드럽단 뜻이지요.」
「장례는요?」
「장례는 치를 사람이 없으면 시에서 대신 해줍니다만 아무래도 빈약하죠. 연고자가
있으면 자비로 장례를 치룹니다.」
「제가 장례비를 부담할 테니 장의사나 소개해 주세요.」
「그럼요, 그게 낫습니다. 아무런 연고자도 없이 혼자 쓸쓸히 죽는다는 건 이 세상에
서 가장 슬픈 일이죠.」
담당 직원은 인남이 장의사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신나는 표정으
로 전화 번호를 일러줬다.
「이 회사는 우리하고 협조가 잘되니까 모든 것을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겁니다.」
담당 직원의 인사를 뒤로 하고 병원 문을 나서면서 경훈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
다.
「정말 그렇게 쉽게 연고자를 자처하고 나설 만한 관계야?」
「아니.」
인남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 쓸쓸하던 얼굴을 잊어버릴 수가 없어. 아무런 연고자도 없다는 사실은 더
견딜 수가 없고.」
경훈은 뭐라고 한마디하려다가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무얼 하지?」
「집으로 가보자.」
경훈은 여전히 무거운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대답했다.
「집? 제럴드 현 선생님의 집 말이야?」
「그래.」
「참. 그래야겠네. 이혼한 부인에 대한 무슨 기록이라고 있을지 모르니까.」
제럴드 현의 집은 보스턴대학 부근의 분위기 좋은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머, 집이 꽤 크네.」
「정말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크군.」
경훈은 자동차를 현관 앞에 바로 갖다 댔다. 어둠이 짙게 깔렸지만 불은 켜져 있지 않
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이상하군. 아무 연고자도 없는데 누가 문을 잠갔을까?」
「이웃집에서 잠그지 않았을까?」
「확인해 봐야겠어.」
그러나 이웃집의 벨을 누르자 나타난 사십대 남자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깊
은 밤에 구급차가 와 사람을 실어간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인남은 이웃 남자에게
애원하듯 부탁했다.
「장례식에 와줄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데요, 동네 사람들에게 좀 알려주시겠어요?」
이웃 남자는 인남을 훑어보면서 냉담하게 대답했다.
「교회에는 안 나가던 분이지만 목사님께 연락하겠소.」
경훈은 인남을 집 앞의 거리에 내려줬다.
「차 한잔하고 갈래?」
「그러고 싶지만 오늘은 그냥 갈게.」
「장례식에 올 거야?」
「글쎄. 장례식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내일부터는 바쁘거든.
경훈이 다소 무관심한 듯 말하자 인남은 입을 비쭉거리다가 홱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
가 버렸다.
집에 돌아온 경훈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의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죽음의 순간에 전화를 걸어와 마지막 한마디를 비명처럼 남기고 갔다면 그 한마디가
결코 거짓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경훈의 머리를 무겁게 짓눌러왔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순간에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도 자
신이 일부러 전화를 걸어서까지, 더군다나 특별한 관계도 아닌 인남에게 말이다. 비록
그 노인이 외로워서 인남과 가끔 통화를 했다 하더라도 그녀가 그와 아무런 손익 관계
가 없다는 사실은 그의 진실성이 더욱 강조되는 부분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 말이 진실이라면? 그러나 경훈은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10·26에 무슨 비밀이 있다는 말인가.
김재규 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쏘아 죽인 그 사건으로 말미암
아 한반도의 역사는 급격히 몸부림치기 시작했지만, 사건 자체야 너무도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 않았던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아니 전세계에 그 사건의 진상은 하
나도 숨김없이 드러나지 않았던가. 그런 10·26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다는 얘긴가.
경훈은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의 수사는 온 국민이 똑바로 지켜보았
다. 제럴드 현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의 수사가 조작되었다고 얘기하는 것일까? 그건
더욱 불가능한 얘기였다. 누가 그 시점에서 수사를 조작할 수 있었단 말인가. 결국은
한 노인의 헛소리, 혹은 인생의 벼랑에 선 정신병자의 독백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경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 자신이 그 순간에, 그런 독백을 듣다니.
경훈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잊어야만 하는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기억에서 지워버려야만 하는 불쾌한 주말이었다. 경훈은 일찌감치 자리에
들어 잠을 청했다. 자고 나면 모든 것이 잊혀지리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잊으려 할수록 노인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귓전을 울려왔다.
그 가쁜 숨소리와 더불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한마디
한마디를 떠올리던 경훈은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자리에 누워 있을 수
가 없었다.
그래, 죽는 순간에 일부러 그런 전화를 걸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더구나 노인의
의식은 남자의 목소린지 여자의 목소린지조차 구분을 못하지 않았던가. 그는 죽기 직
전에 전력을 다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만약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경훈은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렸다.
과연 10·26의 진실은 무엇인가? 표면으로 드러난 사실과는 다른 진실이 은폐되어 있
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한 노인의 헛소리에 불과한가?
곰곰이 생각하던 경훈은 일단 제럴드 현의 내력을 알아봐야겠다고 결론지었다. 나머지
는 그 다음에 생각해도 충분했다. 제럴드 현이 무엇을 하던 사람인가를 알면 그가 토
해낸 말들의 신빙성이 가려질 것이다. 경훈은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서도 한참이 지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뜻밖의 유산
제럴드 현의 장례식은 초라했다.
「주님이시여, 여기 외롭고 가련한 영혼이 주님의 곁으로 가나이다. 비록 그의 인생이
힘들고 외로운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제 그는 모든 고통을 접고 주님의 곁으로 가나이
다. 부디 이 불쌍한 영혼을 받아주소서.」
목사의 추도사는 지극히 짧고 형식적이었다.
경훈은 인남이 검정 드레스까지 차려입고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내는 것을 보자 마음
이 움직였다. 마치 상주인 양, 서둘러 떠나가는 몇몇 동네 사람과 목사에게까지 인사
를 차리던 인남은 경훈을 보자 눈가에 얼룩진 눈물 자국을 닦으면서 반가운 미소를 지
었다. 경훈이 와주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켰는지 이내 얼굴이 밝아졌다.
경훈은 인남을 위로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 묘 앞에 섰다. 떠나는
사람에게 묵념만 하는 것은 어딘지 아쉬웠다. 이 세상에서 그와 마지막으로 대화한 사
람으로서 무게를 느꼈기 때문이다. 경훈은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몸을 구부리고 머
리를 숙이자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리고 가슴 한편에서 자신도 모르게 노인에 대한 약
속의 말이 흘러나왔다.
'편안히 가십시오. 마지막 순간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었다면 얼마나 가슴에 맺혀 있었
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한 당신의 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경훈이 몸을 일으켜세우자 인남이 뒤이어 절을 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어깨를 들썩이
며 흐느꼈다. 인남은 다시 한 번 노인의 묘에 묵념을 올리고는 주차장으로 걸어 내려
오며 무의식중에 경훈의 팔을 잡았다. 누군가를 저 세상으로 보냈다는 허전함과 단둘
이 그 의식을 치렀다는 동질감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자아냈다.
주차장에 이르자 인남이 경훈에게 묘지에서부터 뒤를 따라오던 사나이를 눈짓으로 가
리키며 속삭였다.
「경훈아, 아까부터 저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던데 기분이 좋지 않다.」
「음, 나도 느끼고 있었어. 하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어머, 저 사람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잖아.」
과연 묘지에서부터 인남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사나이가 묘한 웃음을 띠며 두 사람에게
로 다가왔다.
「안녕하시오. 박인남 씨 맞지요?」
「예.」
「나는 윌리엄이오. 윌리라고 불러도 좋소.」
검정색 양복을 점잖게 차려입은 사십대 중반의 사나이는 인남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런데 누구시죠?」
「변호사요. 제럴드 현 씨의 유언을 집행하기로 계약을 맺었소.」
「네. 유언이오?」
「그렇소.」
「아니, 현 선생님은 갑작스러운 쇼크사로 돌아가셔서 유언을 하실 여유가 없었을 텐
데요?」
「사전에 유언을 해두셨소. 열흘 전에 나를 찾아오셨소.」
「어머, 그럼 현 선생님은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는 것을 진작에 알고 계셨던 모양이네
요.」
「다시 위정맥에 출혈이 있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계셨소. 하지만 도저히 술은 끊지
못한다고 하셨소. 마시다가 죽겠노라고.」
인남을 얼굴을 찡그렸다.
「아마 가족이 없어 의지가 그만큼 약해지셨을지도 몰라요.」
변호사는 인남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관찰이라도 하겠다는 듯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
으며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전했다.
「제럴드 현 씨는 인남 씨에게 전 재산을 남기셨소.」
「뭐라고요?」
「유산을 모두 인남 씨에게 주라고 하셨소. 여기 유언장 사본이 있소.」
인남은 유언장을 받아들고 한참 읽어보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안돼요. 이럴 수는 없어요. 나는 그분의 유산을 받을 수가 없어요.」
「네?」
「받을 권리가 없다고요. 아무런 연고가 없단 말이에요.」
변호사의 입가에 다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뜻밖이군요. 모두가 횡재라 생각하고 덥석 받을 텐데. 연고가 없다고요? 그럼 왜 이
장례식에 검정 드레스를 입고 장례비를 부담하는 거죠?」
「외로우셨던 그분한테 아무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나섰을 뿐이에요.
그분에게는 이혼한 부인이 계세요.」
「알고 있소. 하지만 그분은 유산을 모두 인남 씨에게 남기셨소. 부인에게는 이혼할
때 일시불로 합의금을 지불하셨소. 어쨌든 나에게 못 받겠다고 얘기해 봐야 아무런 소
용이 없소. 나는 변호사로서 유언대로 집행할 의무가 있소.」
인남은 경훈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경훈은 인남의 유산
상속보다 오히려 제럴드 현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는 사실에 관심이 끌리
는 눈치였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어지자 변호사에게 물었다.
「제럴드 현 씨에 대해 잘 아십니까?」
「아니오. 열흘 전에 찾아오셨을 때 처음 뵈었소.」
「그 사람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을까요?」
「글쎄요. 그건 모르겠소. 하지만 아까도 얘기했지만 머잖아 돌아가실 걸 예감하셨던
것 같고.」
「유산 이외에 다른 얘기는 없었습니까?」
「없었소.」
「유산은 모두 얼마입니까?」
「살던 주택을 빼곤 모두 현금이오. 현금만 180만 달러요. 여기서 상속세와 몇 가지
사소한 지불금만 빼면 되오.」
인남은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 하느님. 안 됩니다. 안 돼요. 이건 뭐가 잘못됐어요. 제가 그런 돈을 받을 순
없습니다. 제 것이 아니에요. 」
변호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인남의 놀라는 표정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경훈은
여전히 변호사를 주시하며 물었다.
「그는 무엇을 하던 사람인가요?」
「그런 얘기는 나누지 않았소. 고객이 얘기하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 것이 내 원칙이
죠.」
경훈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쳐갔다.
「유언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나의 의무는 아니잖소.」
변호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인남에게 편한 시간을 택해 사무실로 나와달라고 요청했다.
「잠깐, 그런데 그 집의 열쇠는 누가 가지고 있죠?」
경훈은 돌아서는 변호사에게 급히 물었다.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소. 구급대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갔기 때문에 내가 다음날
아침 사람을 불러 바로 수리했소.」
「그런데 제럴드 현 씨가 사망한 것은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아, 매일 오전 10시에 내가 전화를 걸기로 약속했소. 안 받으면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기로 했던 거요.」
「그랬군요.」
제럴드 현이 사망한 것은 일요일 새벽이라 변호사는 곧장 그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
경훈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쇠를 줄 수 있나요?」
「안 되오. 당신에게는. 인남 씨가 요구하면 줄 수 있지만.」
변호사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인남이 열쇠를 달라고 하면 그것은 곧 상속을 받아들인
다는 뜻이었다.
「네, 그럼 제게 주세요.」
인남은 열쇠를 받아 바로 경훈에게 건넸다. 경훈의 입장을 배려하는 의도였다. 변호사
는 무슨 의미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가보자.」
「잠깐, 옷이라도 갈아입고.」
인남은 검정 드레스가 거추장스러운 듯 어색한 몸짓으로 주춤거렸다.
「그런데 그 검정 드레스는 어디서 난 거야?」
인남의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장의사에서 빌렸어. 검정 드레스는 입을 일이 없어서..... 아예 그 장의사에 가서
갈아입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
최상급 비밀 보호자
제럴드 현의 집은 큰 규모와는 달리 내부가 매우 검소했다. 어느 집에나 몇 개쯤 걸려
있을 법한 싸구려 그림조차 없는 하얀 벽이 오히려 깔끔한 장식이었다.
「그렇게 많은 유산을 남긴 분이 이처럼 검소하게 사셨다니.....」
인남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책상 서랍을 찾아봐. 뭔가 인적 사항이 나오겠지.」
경훈은 인남과는 별도로 책장과 옷장 등을 샅샅이 훑었다.
몇 시간 동안을 찾았지만 제럴드 현의 내력을 얘기해 줄 신분증이나 면허증, 사회보장
카드는 물론 보험 카드 하나 나오지 않았다. 경훈은 얼굴을 찌푸리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걸. 아무리 이혼하셨다 해도 어쩌면 이렇게 전 부인의 사진
한 장조차 없을까?」
몇 번이나 책상 서랍을 부지런히 뒤지던 인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남아,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야. 뭔가 이상해.」
「우연이 아니란 건 무슨 얘기야?」
「보통 사람이라면 이처럼 철저하게 사진이나 기록이 없을 수는 없어.」
인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럴드 현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짐작조차 할 수 없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
서 살아왔을 거라는 점이야. 이렇게 돈이 많은 사람이 사업상의 명함 한 장 가지고 있
지 않다는 것은 설명이 되질 않아. 증권이나 투자 관계 서류도 한 장 없고.....」
이때 경훈은 머릿속을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너 저번에 연금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니?」
경훈의 날카로운 표정에 놀란 인남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연금을 받으신다고 했어.」
「그렇다면 연금을 수령하던 통장이 있을 것 아냐. 연금 증서와 번호도 있을 거구.」
「그렇네. 하지만 지금 이 집에서는 연금 증서를 찾을 수 없잖아. 왜 그럴까? 그런 걸
딴 데다 보관하실 리도 없을 텐데.」
「어쨌든 그걸 추적하면 제럴드 현이 무슨 연금을 받았는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알
수 있어.」
「연금 증서를 찾을 수 없는데 어떻게 추적한다는 거니?」
「유산이 있잖아. 유산 통장으로 추적하는 거야. 은행에 가서 통장을 정리하면 되지.
이제 통장은 네 거니까 얼마든지 정리해 달라고 할 수 있어.」
「아. 그렇구나. 그 통장에 연금을 보내는 기관이 기록되어 있겠구나. 역시 너는 머리
가 좋아. 그러면 먼저 변호사 사무실로 가야겠네.」
「그래. 가서 연금을 보낸 기관의 이름을 찾으면 내게 전화해 줘.」
「왜? 같이 안 가고?」
「응. 회사에 일이 있어.」
「알았어.」
경훈이 회사에서 소송 관계 서류를 훑어보고 있을 때 인남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경훈, 너는 역시 머리 하나는 알아줘야 해.」
「무슨 소리야?」
「나왔어. 연금이 나오는 기관 말이야.」
「어디지?」
「공무원 연금관리공단이야.」
「공무원이라구?」
「그래.」
「연금 번호는?」
「그런 건 안 나와 있어.」
「연금 번호가 없을 리가 있나? 번호가 아니라면 무슨 다른 표식이라도 있겠지.」
「아냐. 아무것도 없는데.」
「다시 한 번 잘 살펴봐.」
「아니야. 정말 없어. 없다니까.」
「알았어. 내가 알아보지. 수고했어.」
「어머. 그냥 끊을 거야?」
「왜, 더 할말 있어?」
「지금 나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상속 때문에?」
「그래. 분명 내가 받을 돈이 아니야.」
「일단 받아둬. 네 말대로 네가 그분의 유일한 친구이자 연고자니까.」
「그래도.....」
「자, 그럼 또 연락하자.」
경훈은 전화를 끊고는 바로 비서를 불렀다.
「공무원 연금관리공단에 연락해서 이 사람의 연금 종류와 수령액을 알아봐 줘요.」
비서는 늘씬한 허리와 금발을 흔들며 경훈의 방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후 고개를 흔들
며 돌아왔다.
「블랙이에요.」
「어느 정도요?」
비서는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최상급 비밀 보호자라는 뜻이었다. 그 정도면 공
단과 아주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알아낼 수는 없었다. 미국 정부에서는 연금을
지불하는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단계를 나누어 보호하고 있었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제럴드 현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집에 인적 사항을 알 수 있는 종이 한 조각 없던 것
도 이해가 갔다. 그는 철저하게 과거를 숨기고 살았던 것이다.
「알았어요. 수고했어요.」
비서는 애교 있는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경훈은 인터폰을
눌렀다.
「케렌스키 대표 자리에 계십니까?」
「네.」
「지금 올라가도 되는지 여쭤보세요.」
비서는 잠시 후 대답했다.
「기다리시겠답니다.」
경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윗도리를 챙겨입고 건물 맨 꼭대기에 있는 케렌스키의 방으로
갔다. 비서는 경훈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즉각 문을 열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비서
의 방은 웬만한 신입 변호사의 방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화려했다.
비서를 세 사람이나 쓰고 있는 케렌스키 대표는 마치 자본주의의 화신 같은 인물이었
다. 직원들 사이에서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을 들라면 바로 그를 뽑겠
다는 얘기가 돌 만큼 그는 모든 변호사들의 선망의 대사이었다. 케렌스키는 전 미국을
뒤흔든 수많은 사건들을 끌어왔고, 일단 맡은 사건이라면 승소하지 못한 적이 거의 없
었다.
「이 변호사. 어서 오시오. 하버드대학 교수들로부터 당신이 이제껏 봐오던 변호사들
과는 다르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한마디로 당신은 천재요.
천재. 연수 기간이 끝나도 부디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나와 함께 일합시다.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소.」
「고마운 말씀입니다.」
「이제 그 허드슨 일렉트로닉 건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요. 이 변호사가 파헤친 그들의
탈법 메커니즘을 재판부가 전부 인정했소. 세상에. 어쩌면 그런 엄청난 비밀을 손금
보듯 낱낱이 파헤칠 수 있었소? 내일 저녁 우리 집에서 이 변호사를 위한 파티를 열겠
소.」
케렌스키는 경훈을 보자마자 칭찬하기에 바빴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요? 내 힘이 닿는 한 다 해드리지.」
「이 사람의 인적 사항을 좀 알아봐 주십시오. 정부에서 연금을 받는데 그 신분이 블
랙3입니다.」
「블랙3라..... 그렇다면 최상급 비밀 보호자라는 뜻인데.」
「그렇습니다.」
케렌스키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결단을 내렸다는 듯이 힘주어
말했다.
「보스턴에 있는 그 누가 부탁을 해왔어도 나는 거절했을 거요.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변호사가 부탁하는 일이니 반드시 들어주고 싶소. 시간을 주시오. 안전한 루
트를 통해야 하니까. 내일 정오까지 알아봐 주겠소.」
「고맙습니다.」
경훈은 회심의 미소를 애써 감추었다.
「그건 그렇고, 내일 저녁 파티 잊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케렌스키는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나 문을 열어주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경훈을 향해 만연에 미소를 띤 채 과장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케렌스키
다음날 점심 무렵, 케렌스키는 경훈을 불러 한 통의 봉투를 건넸다. 봉투는 테이프로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다.
「워싱턴에서 방금 도착한 거요. 아무도 보지 못했소. 보스턴에선 오직 이 변호사만
이 봉투를 뜯어볼 자격이 있소.」
케렌스키는 오만과 과장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경훈은 봉투를 받아 방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과연 이 사람의 정체가 무얼까 긴장된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성 명 Gerald Kangil Hyun
한 국 명 현강일
가 명 GH. 제럴드 현
생년월일 1930.10.14
직 업 (전) 미국방성 정보.공작 전문 요원
학 력 1945. 3 서울 일신국민학교 졸업
1945. 4 보성중학교 입학
1951. 6 보성중학교 6년제 졸업
1951. 12 고려대학교 영문과 입학
1952. 3 국립서울대 문리과대학 영문과 2학년 편입
1953. 미국 워싱턴주립대학 정치학과 전학. 교환 유학
1955. 미국방성 언어대학원 교수(한국학)
1956. 미육군 소집, 교수 자격2년 간 징집 연기
1957.11 미육군 소집, 입대
1958. 미국 태평양사령부 첩보정찰사령부 소속
일본 도쿄 신주쿠 지구 미육군 대위 현지 임관
1959. 문관 자격 미태평양사 첩보사 극동지역 한국 담당.
국내 정치.군사책(도쿄, 서울 근무)
1960. 한국 육군 HID부대 미육군 고문 겸입
1961. 미육군 8군사 G2 전적
1963 한국 주둔 유엔군 총사령관 특별고문관실
1972 한미 관계 미의회 특별조사위 출두(워싱턴 D.C.).
국제 관계 비밀 증언(한국 국내 정치.군사 전반)
1980. 12 미국방성 육군 대령 정보.공작 전문 요원 전역 (28년 근속)
경훈은 제럴드 현의 이력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침내 그는 서류를 내려놓으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제럴드 현은 경훈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거물이었다. 경훈은 고시 합격 후 바로 공군 검찰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이
런 종류의 이력서를 읽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제럴드 현은 이미 1953년부터 미육군 첩보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서울대학
교 영문과 재학 중 워싱턴대학으로 교환 유학했다는 것은 미국의 정보 계통에서 그를
포섭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미국방성 언어대학원에서 한국학을 가르쳤다는 것은 한국
에 파견될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스파이 교육을 시켰다는 얘기고. 1958년에 한국인으
로서는 드물게 미육군 대위로 도쿄 첩보사에 임관했다는 것은 향후 한국에서의 그의
역할과 영향력을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화려한 경력이었다.
제럴드 현의 이력은 처음부터 전역할 때까지 완전히 준비되고 예정된 것이었다. 결국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그것도 정보.공작 전문 요원으로서는 미국인에게도 드물게 주
어지는 최고 계급인 미육군 대령으로 전역했다는 사실은 그의 화려한 경력을 그대로
증명해 주었다.
경훈은 좀처럼 피우지 않는 담배를 빼어물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 경력의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했던 이야기라면 그냥 넘겨버릴 수 없다는 생각
이 서서히 머리를 채웠다.
제럴드 현의 경력과 그가 마지막 순간에 남기고 간 말을 보면 10.26에는 분명 어떤
비밀이 있을 거라고 여겨졌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은 혼
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신변 안전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결정인 만큼 인남과
도 의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훈은 인남에게 곧 전화를 걸었다.
인남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 선생님이 보통 분은 아닐 것 같았지만 이렇게까지 엄청난 경력을 가지셨을 줄은
몰랐어.」
「대단한 이력이지. 한국인으로 미국 정부에서 이 정도 역할을 한 사람은 없었을 거야.
어쨌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 자리에서 결정해야 해.」
「그분이 돌아가시던 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실의 의미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을
까?」
「나는 그 사람이 평소 깊은 갈등을 겪어왔다고 생각해. 신분을 증명할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는 철저하게 첩보원으로서의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온 거야.
물론 자기가 알고 있는 비밀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입을 다물었겠지.」
인남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훈은 쓸모 없는 얘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논리가 정연했다. 인남이 경훈에게 갖는 호감의 근원은
바로 이런 모습에 대한 신뢰감이었다.
「조울증도 입을 다물어야만 하는 정보원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나 봐.」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지. 비밀이 엄청난 것일수록 스트레스의 크기도 비례할 테고.」
「그럼 결국 마지막 순간에 그 비밀을 털어놓으신 것으로 봐야 하니?」
「그렇지.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그런 말을 한 데는 그 비밀의 가치가 크게 작용했을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지?」
「그도 인간이라, 자신이 생각해서 옳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는 회의를 느꼈을 거야.
하지만 평소에는 정보.공작 요원으로서의 본분에 가로막혀 있다가 죽음의 순간이 되어
서야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거지. 그 전화를 내가 받게 된 거구.」
「네 말은 언제나 어려워.」
인남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신 것이 바로 박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거지?」
「그래.」
「그분은 왜 10.26에 비밀이 있다고 하셨을까?」
「그는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볼 만한 지위에 있었어. 그런 사람들은 결코 짐작만
가지고 얘기하지는 않아. 무언가 분명한 것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설마 명백한 사건인 10.26에 어떤 비밀이 있을까?」
「수사나 발표, 그후 언론의 추가 확인 모두 완벽했어. 하지만 그 못지않게 완벽한 것
이 또 하나 있어.」
「그게 뭐야?」
「바로 제럴드 현의 신분, 그리고 그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
실.」
「하필 현 선생님은 왜 내게 전화를 거셨을까?」
「제게 전화를 한 건 당연한 일일 거야.」
「왜 그렇지?」
「그의 갈등을 그대로 나타내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걸. 난 너처럼 머리가 좋지 않으니까 되도록 자세히 설명해 줘.」
「그 사람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첩보원이었어. 자기 이력에 대한 단서를 전혀 남
기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그는 죽음의 순간에야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알
려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막상 그런 결심을 했을 때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어. 유일
하게 전화 번호를 외고 있는 사람은 바로 너. 박인남뿐이었지. 하지만 네가 그의 전화
를 받는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는 한 인
간으로서 갈등 끝에 비밀을 털어놓았지만, 결국 무덤까지 비밀을 가지고 가야만 하는
첩보원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볼 수 있지. 미국방성의 현지 정보.공작 요원으로서, 그
리고 30년간이나 한반도를 좌지우지해 온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여실해 보여.」
인남은 경훈의 얘기를 들을수록 제럴드 현에 대한 연민이 더해졌다.
「그러니까 현 선생님이 비밀을 털어놓아야겠다고 결심하신 순간이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이구나.」
「늦은 게 아냐. 죽음의 순간에만 가능한 일이라니까.」
「그래, 이제 이해가 돼.」
경훈의 시선이 인남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거쳐 가는 목줄기를 지나쳤다. 인남은
자신을 바라보는 경훈의 시선이 한순간 강렬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중요한 얘기
가 터져나올 것 같았다. 한동안 침묵하던 경훈이 평소와 다르게 긴장된 목소리로 말문
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어.」
「문제라니?」
「죽음의 바로 그 순간에야 나올 수 있는 엄청난 고백을 들어버렸다는 사실이지.」
「그렇구나. 이제 어떻게 하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
경훈은 인남의 불안해하는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소용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말만 전한다고 뭐가 되는 건 아니야. 우
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둘 중 하나야.」
「하나는?」
「못 들었던 걸로 해두고 그냥 넘어가는 거지. 너는 그저 유산만 받은 거야.」
「또 하나는?」
「우리가 직접 그 비밀을 파헤치는 거지.」
「우리 둘이서?」
「그래. 바로 우리 둘이서.」
인남이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봉착한 상황이야. 잘못하면.....」
경훈의 목소리가 더욱 긴장되어 떨려 나왔다.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어. 삶까지도 말이야.」
「목숨까지란 뜻이야?」
경훈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볍게 생각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한동안 침
묵의 시간이 흐른 뒤 인남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분의 바람은 묻어버린 채 유산만 받는다는 것은 옳지 않아. 그렇다고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인남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경훈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너하고 함께라면 할 수 있을것 같아.」
만년 경장 손 형사
반장은 형사들이 거의 다 출근하자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한쪽으로 밀어놓으며 조회
를 시작했다.
「뭐야, 아직 안 나온 친구가 있잖아.」
아침에 집에서 다투고 나오기라도 했는지 반장의 눈은 사납게 직원들의 명패를 훑었다.
「또 이 자식이구나.」
반장의 고리눈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반욕설과 어울려 여우눈처럼 쪽 찢어지는 순간 복
도에서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급하게 뛰어들어왔다.
「손인영 이 자식, 또 너야.」
「아- 예, 반장님. 마누라가 늦잠을 자가지고 밥을 늦게 하는 바람에 쪼매 늦었십니데
이. 아, 이 망할 놈의 마누라는 내가 맨날 식은 밥을 남가나라 카는데도 밤마다 지가
싹싹 다 긁어묵고는 아침마다 늦밥을 하나라 부산을 떠는데 내 진짜 죽겠십니데이. 근
데 반장님, 지각을 한 거는 한 거구 반장님 말투가 와 그렇십니꺼. 자슥이라꼬예? 내
가 반장님 자슥이라는 깁니꺼, 멉니꺼?」
「시비하는 거야? 늦게 온 주제에.」
순간 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들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굽실굽실하던 손 형사의 태
도가 갑자기 딴사람이나 된 듯이 백팔십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야, 임마. 늦게 오믄 니한테 자슥 소리 들어야 되나. 이 새끼가 잘못했으믄 잘못했
다 캐야지. 칵 직이뿔라, 누구한테 자슥이라 카노!」
반장은 어안이벙벙해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어대는 손 형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니 한 번만 더 자슥이나 뭐니 카믄 죽을 줄 알아라. 이 자슥아. 나도 내일이면 형사
생활 20년이다. 니처럼 시험치고 진급하는 재주는 없지만 계급 좀 높다고 나대는 꼴
은 죽어도 몬 봐준다.」
만년 경장을 못 면하는 손 형사였지만, 반장의 시수를 질타하는 입심으로 그의 기를
확 꺾어놓았다.
「당신, 전근 온 지 며칠도 안 되는 사람이 벌써 사흘이나 지각을 하니 내가 반장으로
서 한마디한 것이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반장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자 손 형사의 목소리도 상대적으로 고른 톤을 유지했다.
「그러믄 이자슥아, 점잖게 타이르믄 될 거 아이가. 나도 임마. 자손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꼬박꼬박 니를 반장님이라 불러주는데 계급 가지고 사람 그렇게 무시하는 거
아이다.」
「하여튼 이따가 나하고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우선 오늘 조회부터 하자구.」
녹녹치 않아 보이는 반장도 이 억센 사나이 앞에서는 별도리가 없는지 떨어진 위신을
'조회‘라는 수단으로 만회하려는 태가 역력했다. 반장은 고소해하는 직원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업무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간단한 업무 지시를 마친 반장은 마지막
으로 손 형사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손 형사는 이 사건 좀 알아봐요.」
반장의 말투가 어느새 바뀌었다.
「예, 반장님.」
손 형사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능청스럽게‘님’자를 붙였다. 그러나 서류를 잠시
훑어본 손 형사는 이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건 교통 사고 조사반에서 할 일이 아닌교?」
「검찰에서 재조사 지시가 내려왔소.」
「재조사예? 그럼 먼가가 잘못됐다는 얘기 아인교?」
「그러니까 당신처럼 노련한 형사한테 맡기는 거 아니오.」
손 형사는 반장의 한마디에 우쭐해졌다.
「알겠십니더.」
조회가 끝나고 반장이 나가자 형사들이 다투어 손 형사 곁으로 몰려들었다.
「형님, 진짜 대단하십니다. 그 여우 반장이 찍소리도 못하고‘요’자를 붙이는 걸 보
니 꽤 겁먹은 것 같던데요.」
「아새끼 칵 직일라 카다가 조회라서 고마 나뚜었다.」
중키의 손 형사는 단단한 가슴팍하며 만만치 않은 눈매가 결코 보통 깡다구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의 옆얼굴에는 10센티도 넘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반
대쪽 구는 중간부분이 달아나고 없는 것을 아래위를 꿰매어놓아 우스꽝스러웠다. 원래
는 과히 못생기지 않은 균형 잡힌 얼굴이었지만 워낙 큰 상처들이 마구 교차하다 보니
이제는 인물을 논할 계제가 못 되었다.
「이 상처는 어떻게 해서 생겼어요?」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신참이 존경하는 눈길로 손 형사의 상처를 쳐다보며 물었다.
방금 반장과의 한바탕 드잡이질을 본 현사들에게 손 형사는 영웅이 아닐 수 없었고,
그런 큰 상처는 그의 과거를 담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손 형사는 설명하기 싫지
만 어쩍 수 없다는 듯이 머뭇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내 혼자서 치기배놈들 한 3백 명은 잡았을 끼다. 그때 생긴 훈장들이다. 진짜배기
를 볼라카믄 내 머리를 봐야 된다 아이가. 아마 270바늘을 꿰맸을 끼다. 각목, 칼침
안 맞은 기 없데이. 하지만 아무 쓰잘데기없는 것들이지. 몰골만 숭악해지고, 이 나이
되도록 어린 반장놈한테 자슥 소리를 들어가믄서.....」
「아, 형님도 참. 저 여우 반장이 형님이 하신 일의 10분의 일이나 했겠어요? 맨날
근무 시간에 책이나 보고 약삭빠르게 시험이나 쳐서 올라간 양반이. 형님이야말로 진
짜 이 사회를 위해서 그렇게 온몸에 상처를 입어가면서 봉사하신거 아닙니까?」
젊은 형사는 어느새 손 형사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하모, 형사는 검사가 아이제. 몸으로 뛰는 기야. 이렇게 3백 바늘이나 꿰매가면서
도 말이다.」
손 형사는 후배 형사가 치켜올리자 기분이 좋은 듯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쳤다. 그러나
이내 시무룩해졌다.
「근데 다 소용없다. 세상은 나 같은 똘빡 형사는 아무도 안 알아주더라. 근무 시간에
시험 공부나 해갖고 진급하는 놈들이나 업소에 다니면서 공짜술 묵고 돈이나 받아 챙
기는 놈들 세상이니까. 썩을 놈의 세상.」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단순히 손 형사의 말에 동조
하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손 형사처럼 우직하게 살지 않고 나름대로 먹고 살 길을 찾
아온 자신들의 인생에 대한 안도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들은 우직하게 살면 저렇게
말년이 비참한 법이라는 생각을 하며 손 형사를 떠났다.
「그나저나 이걸 우짜지?」
수다를 떨던 동료들이 모두 근무지로 나가자, 손 형사는 자판기에서 뽑은 종이 커피
잔을 입에 물고 반장이 준 서류를 찬찬히 살폈다. 교통 사고 조사서였는데 술에 잔뜩
위해 무단 횡단하던 피해자는 사망하고 가해자는 도망친, 흔하디흔한 뺑소니 사건이었
다. 한 가지 특색이 있다면 피해자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손 형사는 이런 사건
은 대부분 가해자를 잡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썩을 놈의 자슥!」
형사반장을 일컫는 말이었다. 발에 땀나도록 돌아다니기만 하고 성과는 얻지 못할 그
런 사건이었다.
「게다가 검사로부터 재조사 지시를 받은 사건 아이가?」
보통 사건처럼 쓱싹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하루 종일 서투르기 짝이 없
는 타자기를 두들겨가며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사실이 손 형사를 불쾌하게 만들었
다.
손 형사는 검사한테 잘못 걸리면 불편하고 귀찮아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
다. 손 하나 까딱 안 하면서 밥 먹듯이 이래라저래라 시키는 것도 그렇지만, 밥도 안
먹고 뛰어다니면서 조사해 며칠 걸려 타이프를 쳐서 가져가면 그 두꺼운 서류를 휘휘
넘겨버리고는 재수사를 해라, 어째라 하기 일쑤였다.
손 형사는 될 수 있으면 검사와는 접촉을 안 하는 것이 만수무강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졸병이나 할 이런 일을 자신에게 시킨 것은 순전히 간교한 반
장의 보복이라고 생각하면서 경찰서 문을 나섰다.
교통사고
손 형사는 먼저 사건 현장을 찾아갔다. 현장을 봐야만 영감이 떠오르든 냄새를 맡든
할 수 있다는 것이 오랜 형사 생활을 통해 얻은 지론이었다.
유흥가라고는 하지만 리츠칼튼호텔 주변에는 술집 같은 것이 별로 없었다. 모텔과 아
울러 식사 위주의 식당이 몇 개 있는 이 곳은 밤에는 인적이 드물 성싶었다.
손 형사는 현장 보고서를 꺼냈다. 스케치한 것을 보니 피해자는 리츠칼튼호텔 앞에서
차도를 무단으로 건너다 중앙선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에서 달려오던 자동차에 치여 사
고를 당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피해자는 피할 새도 없이 차에 치여 하늘로 튕겨 올라
갔다가 떨어지면서 머리가 땅에 부딪혀 현장에서 즉사한 것으로 보였다.
사고 시각이 자정에 가까웠으므로 목격자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교통 사고란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일어났다 하더라도 의외로 목격자가 드문 편이다. 그리고 목격자
가 있었다면 이미 교통 사고 조사반에서 탐문해 알아냈을 것이다.
검사는 피해자가 외국인인데 간단하게 목격자 없는 뺑소니로만 처리되어 있었기 때문
에 재조사를 지시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누가 맡더라도 엿먹을 수밖에 없
는 그런 부류였다.
「빙신 새끼들!」
손 형사는 혀를 찼다. 이런 경우는 보고서에 피해 외국인의 인적 사항을 비교적 자세
히 기입하고, 어떤 경위로 사고를 당했으며, 어떻게 조사를 했는지 빽빽히 채워야 검
사가 마음에 들어할 것이다. 경험에 의하면 그 사건 내용의 진위 여부는 별문제가 아
니었다. 뭔가 열심히 일했다는 흔적을 보여도 넘어가기 쉽지 않은 외국인 사망 사건을
이렇게 무성의하게 보고했으니 검사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외국인 사망자.
손 형사의 눈길이 피해자의 인적 사항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로버트 숀.
누군가 원어 옆에 한국어로 이름을 써놓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손 형사는 이름조
차 읽지 못할 뻔했다. 로버트까지는 그런대로 떠듬떠듬 읽었지만 숀이란 글자는 발음
하기조차 힘들었다.
교통 사고 조사반의 탐문 결과에 의하면, 어려운 이름의 이 사람은 리츠칼튼에 며칠째
머무르고 있던 중이었다.
손 형사는 다시 한 번 현장의 구조를 살핀 후에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무단 횡단을 하
여 리츠칼튼호텔로 들어갔다. 특급 호텔이라는 곳은 언제나 기를 죽게 만들었다. 손
형사는 어깨를 약간 움츠리며 주위를 살피다가 프런트 데스크로 갔다.
「강남경찰서 형사계의 손형삽니더. 요 앞에서 사망한 외국인에 대해 조사하고 있십니
더.」
마침 근무 중이던 직원은 피해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 로버트 숀 씨 말이군요. 참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 사람이 언제부터 투숙했는교?」
「지난 12일에 저희 호텔에 오셨습니다.」
「예약은 누가 했는교?」
「본인이 직접 하셨습니다.」
「영어로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그거 쫌 알아볼 수 없는교?」
「글쎄요...... 아마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직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알아보더니 밝은 안색으로 대답했다.
「공항에서 예약을 하셨더군요. 영어를 사용하셨구요. 예약과 직원이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그럼 한국어를 몬한다는 얘기네. 그런데 사고가 나던 날 밤 이 사람은 호텔에 있다
가 나갔는교?」
「네, 객실에 계사다가 나갔습니다.」
「몇 시에 나갔는교?」
「글쎄요, 그건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알아볼 수 없는교?」
「아마 정확한 시간은 알기 어려울 겁니다.」
손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이해해서가 아니었다.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옛날 같으면 겁을 주면 굽실굽실 대답을 잘해 주겠지만 요즘은 겁준다고 통하는 세상
이 아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가 종종 그리
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뵤쇼, 내사 지금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 아이요. 이 사람은 억수로 중요한 사
람이요. 협조 쫌 부탁하입시더.」
「네? 교통 사고로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글쎄, 그기 교통 사고를 가장한 살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단 말이요. 알겠는교? 살인,
사람을 죽이는 것 말이요.」
손 형사의 험악해진 표정과 거칠어진 목소리에 놀았는지 뺀질뺀질하게 생긴 직원은 이
내 전화기를 들어 뭐라뭐라 통화를 했다.
「그날 근무하던 직원이 이제 곧 올 겁니다. 저기 앉아서 좀 거다리시지요.」
「고맙소.」
손 형사는 자리에 앉으면서 속으로 낄낄거렸다. 형사는 다루는 사건에 따라 대접받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이라고 공갈을 치자 당장 달라지는 태도가 고소했다. 사실
사망자가 있긴 하지만 교통 사고를 조사하러 다니는 것은 좀 창피하게 느껴졌다. 자신
에게는 역시 치기배 검거 같은 것이 어울렸다.
로비의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사건 당일 근무자가 나타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얼굴부터 친절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로버트 숀 씨가 몇 시에 나가셨는지 물으셨다구요?」
「그렇소.」
「제 기억으로는 밤 11시 반쯤에 나가신 것 같습니다.」
「술을 마셨다던데, 얼마나 마셨던교?」
「제법 취하셨던 것 같습니다.」
「뭐라고 하지는 않았는교?」
「기분은 좋아 보였지만 별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어데 간다거나 길을 묻거나 하지도 않았는교?」
「네.」
「잘 알겠소. 고맙소.」
「또 물어보실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오십시오.」
「그라입시더. 아, 참, 나가기 전에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거나 한 것은 없었소?」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알아봐 드릴까요?」
「쫌 부탁하입시더.」
그 직원은 프런트에 가서 교환실과 연락해 통화 내역을 확인해 주었다.
「나가시기 10분쯤 전에 객실로 전화가 한 통 왔었답니다.」
「전화를 받고 나간 것으로 봐도 되는교?」
「그걸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호텔 손님의 경우 대개 어떤가 말이오?」
「나가기 직전에 전화를 받으신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 그런 것 같은데요.」
「아무튼 고맙소.」
손 형사는 호텔에서 나와 차도로 길을 건넜다. 느낌이 이상했다. 이 길은 어쩐지 건너
기 싫었다. 왜 그런가 생각하던 손 형사는 이내 이 도로가 왕복 6차선의 넓은 길인데
다가 언덕이 있어서 무단 횡단하기에는 불안감이 든다는 것을 알아냈다.
「빙신 같은 놈, 남의 나라 와서 와 술 쳐묵고 무단 횡단까지 해쌌노. 괜히 애꿎은 사
람 하나 뺑소니로 만들어놓고.」
손 형사는 경찰서로 돌아와 피해자의 유류품을 살폈다. 여권, 약간의 돈과 돌아갈 비
행기표, 옷가지와 세면 도구, 그리고 잡동사니 속에 메모지 한 장이 있었다. 그는 이
상한 생각이 들어 교통 사고 조사반으로 내려갔다.
「형사계의 손 형사올시다. 그 외국인 뺑소니 사건 말인데, 재조사 지시가 떨어져 지
가 맡고 있십니더.」
담당자는 손 형사가 그 사건을 다시 조사하는 것을 보자 약간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개뿔도 나올 것 없는 사건인데 솜털 박힌 신뺑이 검사라 조바심이 나서 그런가 보
우.」
오십대 초반의 배가 잔뜩 나온 경사는 책상 서랍에서 박카스를 내놓으며 손 형사의 노
고를 안쓰러워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인교. 최대한 써서 올려야제. 그런데 그 친구 소지품이 너무 없던
데, 무슨 명함 같은 것도 없었는교?」
「주머니에 있던 것하고 호텔 방에 있던 것하고 소지품이란 소지품은 몽땅 가지고 왔
는데 그게 다여쏘.」
손 형사는 전화 번호가 적겨 있는 메모지를 내보이면서 물었다.
「그라믄 이쪽에 전화를 걸어봤는교?」
그 메모지는 피해자의 유류품 중에 섞여 있던 서울 어딘가의 전화 번호였다.
「그렇소, 하지만 피해자가 누군지 모른답디다.」
「리엔지니어링, 여기는 어디라 카데요?」
「무슨 무역 회사라는 것 같던데요.」
「무역 회사?」
교통 사고 조사반에서는 더 얻을 것이 없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손 형사는 메모
지의 필체와 호텔 숙박부에 기재된 숀의 필체를 면밀히 비교했다. 7을 십자가처럼 쓴
것이나 2의 끝을 짐승의 꼬리처럼 말아올린 것이나 틀림없이 동일인의필체였다.
다음으로 종이의 질을 세심히 살폈다. 한국의 종이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숀은 미국에서부터 이 회사의 이름을 적어왔단 얘기다. 그런데 문제
의 회사에서 숀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면 뭔가 이상했다.
가슴이 뛰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오던 사건이 손아귀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손 형사가 경찰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은 순전히 추리소설 때문이었다. 공부를 죽
기보다 싫어하던 손 형사는 중·고등학교 때에는 무협소설에, 졸업 후 체육대학에 다
닐 때에는 추리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텔레비젼에서 <형사 콜롬보>를 하는 날은 데이
트도 미루고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와 채널을 잡아둘 정도였다.
손 형사는 대학에서 유도를 전공하고 졸업한 뒤 자연스럽게 무술 경찰로 사회에 첫발
을 디뎠다.
그후 경찰 생활 20년이 다 돼가지만 손 형사는 한 번도 자신이 바라던 일을 한 적은
없었다. 모두가 치기배나 강력범 검거가 그의 주특기라고 알고 있었고, 자신도 그렇게
행세해 왔다. 하지만 손 형사가 실제로 하고 싶었던 일은 오리무중인 사건을 맡아 치
밀한 추리와 수사 끝에 지능범을 잡는 것이었다. 마치 형사 콜롬보처럼.
좌절
다음날 아침 반장은 깜짝 놀랐다. 일찌감치 출근한 손 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공손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근무 보고를 해왔기 때문이다.
「반장님, 이 사건에는 뭔가가 있십니더. 단순한 뺑소니 사고는 아이라는 심증이 갑니
더.」
「그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반장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손 형사가 그 상처 투성이의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까지 바꿔가면서 늘어놓는 추리가 너무나 가당
찮았기 때문이다.
「명함 한 장 없이, 있는 거라곤 메모지에 적힌 전화 번호 하나. 그러나 그 회사에서
는 아는 바가 없다고 합니더. 미스터리가 아일 수 없십니더.」
「그런데 당신 목소리가 왜 그래?」
「아, 그건 추리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까 콜롬보와 비슷한 목소리가 안 나는교.」
주변에 있던 형사들 사이에서 와 하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조용히 해. 뭐가 그리 우스워? 이 손 형사처럼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쓰는 태도가
형사로서는 얼마나 중요한데 그렇게 웃고 난리들이야.」
반장은 형사들에게 일갈한 후 손 형사를 격려했다. 그로서는 무엇보다도 어제 그렇게
나 대들던 손 형사가 깍듯이 반장님이라고 부르며 자청해서 보고를 하는 것이 고마웠
던 것이다.
「하여튼 소신껏 열심히 해봐요. 혹시 인력 지원이 필요하면 바로 얘기하고.」
「고맙십니더. 하지만 당분간은 혼자서 맡겠십니더. 콜롬보도 늘 혼자서 문제를 해결
하지 않았십니꺼?」
다시 한 번 형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왔지만 이번에는 반장도 말리지 않고 같이
웃었다.
조회가 끝난 뒤 손 형사는 바로 리엔지니어링사로 갔다. 그 회사는 시내 중심가의 고
층 빌딩에 매우 넓은 사무실을 쓰고 있었는데, 사무실 면적과는 어울리지 않게 직원은
몇 사람에 불과했다. 사무실의 실내 장식은 웬만한 호텔보다 격조 있는 분위기를 자아
냈다.
「야, 이 정도면 정말 일할 맛 나겠십니더.」
손 형사가 너스레를 떨자, 그를 쳐다보던 삼십대 중반쯤 된 직원의 눈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사장님 쫌 만나러 왔십니더.」
손 형사는 사무실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일부러 팔을 한차례 내저으며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콜롬보가 늘 그러는 게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자신이 생겨, 고개를 들 때에는 여유로운 미소조차 머금을 수 있었다.
「지금 안 계십니다. 메시지를 남기시겠습니까?」
「아입니더. 그라믄 그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분을 만나믄 됩니더. 아주 중요한 일로
상의를 좀 해야 합니더.」
「용건을 먼저 말씀해 주시죠.」
철 지난 낡은 코트를 입고 나타나 간부를 찾는 손 형사의 행색이 못마땅한지 직원은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아, 내는 지금 중요한 사건을 수사 중인 형삽니더. 형사란 말입니더.」
「무슨 사건이죠?」
손 형사는 약간 당황했다. 어디서건 형사라는 신분을 밝히면 상대는 당황하거나 주눅
들기 일쑤인데, 이 친구는 전혀 놀라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귀찮다는 듯 물어오는 것이
아닌가. 손 형사는 화가 치밀었다.
「아, 이보쇼. 간부를 만나야겠다는데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묻소? 수사의 필요상 아무
에게나 함부로 애기할 수 없단 말이요. 알겠소?」
「소속이 어딥니까? 경찰청입니까? 검찰청입니까? 어느 검사가 보내서 왔습니까?」
손 형사는 상대의 위압적인 태도에 다시 주눅이 들었다. 직원의 그 한마디로 리엔지니
어링은 보통의 회사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서에서 놔왔는데.....」
「서? 경찰서 말입니까?」
「예, 뺑소니 교통 사고를 조사 중이오.」
「그런데 그게 우리 회사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그게, 그게, 피해자가 이 회사 전화 번호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요.」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그런 일로 여길 찾아왔단 말입니까?」
「그게 유일한 메모라 뭘 쫌 물어볼라꼬.....」
「그럼 서면으로 보내십시오. 알겠습니까? 경찰서장 명의로 서면 질의서를 보내란 말
입니다. 우린 그런 데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뭐, 이 자슥아! 시간이 없다꼬? 니 머하는 새끼야! 이 새끼야, 내는 시간이 있어서
이러고 돌아다니는 줄 아나!」
이것이 손 형사가 콜롬보와 다른 점이었다. 콜롬보라면 더 심한 모욕을 받아도 교묘하
게 상황을 만들지만 손 형사는 바로 폭발해 버리는 것이다.
「뭐, 당신, 말 다했어? 당신 어느 경찰서 소속이야?」
「소속은 와 묻노, 이 자슥아.」
「당신 형사 맞아? 신분증 꺼내봐.」
손 형사는 아차했다. 사전에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요즘 들어 간부
들이 늘 강조하는 게 신분증 제시였다. 손 형사는 말단으로 보이는 직원조차 이렇게
깐깐하다면 자칫하다가 꼬투리가 잡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여 있다. 이 자슥아, 똑바로 바라!」
「강남경찰서 경장. 겨우 경장이야? 당신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경장 신분으로 감히 큰
소리치는 거야.」
「뭐, 이 자슥아! 경장이 어때서. 내가 경장 되는 데 니가 뭐 도와준 거 있나?」
「당신, 잠깐 기다려.」
직원은 바로 전화기를 들더니 114를 눌렀다. 손 형사는 만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버텼다.
「강남경찰서 서장실 대주시오.」
반장과 함께 서장실에서 실컷 혼이 난 손 형사는 역시 자신에게는 치기배 검거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반장에게 미안해진 손 형사가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점심
을 사겠다고 했는데도, 속 좁은 반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후배 형사 한 명이 잔뜩 풀죽은 손 형사가 안돼 보였는지 그에게 점심을 사겠다고 했
다.
「우짠지 그 회사 사무실이 호텔맨쿠로 고급이더라......」
손 형사는 설렁탕을 한 그릇 먹고 나자 다소 마음이 풀린 듯 후회 섞인 목소리로 말했
다.
「뭐하는 회사랍디까?」
「무기 중개상이라나. 5·6공 때는 장관은 보통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도 직접
만나던 놈들이라 카더라고. 말단 직원 같아 보이는 녀석도 글쎄 외국에서 명문 대학을
나와 외국 정부의 관리로도 근무를 했다 카니까.」
「진짜 센 놈들이구만요.」
「난 그런 놈들하고는 안 맞는다. 법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놈들은 역시 밥맛이 없다
카이.」
「형사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인데 법이 싫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나저나 손 선배가 너
무 앞서 나갔던데요, 뭘.」
「머라 카노?」
「세상에, 뺑소니 교통 사고를 살인이니 뭐니 하고 다녔다면서요. 우리 나라에서 뺑소
니 사고를 고의 살인으로 기소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요?」
「글쎄, 내사 마 잘 모르겠는데?」
「술 먹고 마구 차를 몰아 대형 사고를 낸 운전자를 살인죄로 기소한 적은 있었지만,
선배 생각처럼 살인 수법으로 뺑소니를 이용했다고 기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즉
선배의 발상이 너무 지나쳤던 거죠. 돈키호테처럼 말이에요.」
「그랬나?」
손 형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정말 자신이 너무 심했는지도 몰랐다. 한반도에서 뺑
소니를 살인으로 기소한 적이 단군 이래 한 번도 없었다면 자시의 가정부터가 황당한
것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한편 손 형사는 자신이 잘못한 점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뺑소니 사고 피해
자의 유류품 중에 어떤 회사의 전화 번호가 있었고 그 번호가 미국에서부터 기록된 것
이라면, 피해자는 그 회사와 관계된 어떤 일로 한국에 온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회사를 찾아간 것이 잘못된 일일 수는 없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일개 형사 신분으로, 장관은 물론 사안에 따라 대통령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사람들의 회사에 찾아가서 너무 무게를 잡았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센 작자
들인지, 재조사를 지시했던 검사조차 바로 연락해 와서는 종결 보고를 하라고 할 정도
였다.
「선배, 싹 잊어버려요. 괜히 헝뚱한 거 가지고 더 쑤석거리다가는 모가지가 열 개라
도 모자랄 거예요.」
손 형사는 형사란 신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남은 설렁탕 국물을 들이마시
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사 무슨 일이 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영역 밖의
일이었다.
손 형사는 오후 내내 검찰청에 보낼 종결 보고서를 쓰면서도 가슴에 맺힌 의문이 풀리
지 않았다. 명함 한 장 없이 온 외국인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유일한 전화 번호. 그 번
호를 가진 회사에서 전화 한 통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그러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리면서 뺑소니 사고로 결론
지은 보고서를 마무리하던 중 뇌리에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경훈 시보.
4∼5년 전 손 형사가 검찰청에 파견나갔을 때 검사실에 와 있던 새파랗게 젊은 검사
시보.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노련한 부장검사도 쩔쩔 매던 화이트 칼라의 지능적
범죄를 천재적 두뇌로 풀어냈던 인물이다.
손 형사는 망설였다. 전화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몇 번 수화
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던 손 형사는 가시돋친 반장의 목소리에 전화를 그만 멀리 밀어
놓았다.
「손인영, 뭘 그리 꾸물거려! 오늘 내로 검찰청에 종결 보고서 갖다 주고 와. 또 어딘
가 전화해서 살인이니 뭐니 지껄이면 당신은 즉각 모가지야. 알았어? 이 덜떨어진 인
간아!」
이제 반장은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로펌
보스턴이라는 도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들에게 가장확실한 법률 회사를 들라
면, 그들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우며‘에이펙스로펌’을 꼽을 것이다.
이름 그대로 지난 10여 년 간 단연코 정상을 유지하고 있는 에이펙스로펌은 유수한
보스턴의 로펌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훌륭한 법률 회사다.
이 회사가 수많은 전통적 로펌들을 따돌리고 업계의 선두를 다투는 것은 전적으로 대
표인 케렌스키 때문이었다. 천재로 소문난 그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고, 자신
이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경훈은 원래 하버드의 로스쿨에서 수강만 할 예정이었는데, 케렌스키가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이유는 경훈의 직관이 특별하다는 것이었다. 로스쿨에서 벌어진 모의
재판에서, 경훈은 초빙된 배심원들의 얼굴을 보고 누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누구
를 기피해야 하는지를 족집게처럼 집어냈다.
케렌스키는 그때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천재란 본래 뛰어난직관의 소유자라고 믿는
그에게 경훈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케렌스키는 이제까지 그 누구를 스카우트하던 때와
도 비교할 수 없는 열정으로 경훈을 초빙했다.
경훈은 에이펙스 같은 일류 로펌이 보스턴에 있는데 굳이 뉴욕까지 갈 필요는 없겠다
는 생각에서 케렌스키의 초빙을 수락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껏 케렌스키가 거둔 가
장 큰 성과 중 하나였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는 표현은 이런 때 쓰는 것일까.
경훈은 오직 논리와 거짓말이 횡횡하는 법정 싸움에서 전혀 색다른 무기를 선보였다.
관상으로부터 오는 직관.
케렌스키는 직관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판단이자 천재들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
고 생각했다. 사색이나 추론은 평범한 사람들의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케렌스
키는 이 이상한 직관 능력을 지닌 경훈을 천재 중의 천재로 여겼다.
아닌게 아니라 경훈은 사건의 당사자들을 보는 순간 즉각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
지 꿰뚫었다. 물론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겠다는 것도 훤히 내다보았다. 이미 해
답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음모와 배신의 바다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밧줄을 잡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에이펙스에 사건을 의뢰하는 사람은 경훈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야 했다. 소송의 승
패는 여기서 결정되었고, 에이펙스는 의뢰인의 관상에 따라 사건을 골라 받을 정도였
다.
「이 변호사, 좀 올라와 주겠소?」
경훈은 인터폰에서 흘러나온 케렌스키의 목소리를 듣자 쓴웃음을 지었다. 케렌스키는
사람에 대한 차별이 유난스러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언제 내가 당신
을 알았느냐는 식이지만, 자신이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여자보다 더 섬세
하게 대했다. 경훈은 윗도리를 입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어서 오시오, 이 변호사.」
케렌스키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경훈을 맞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
는 친구처럼 반가운 표정으로 경훈을 힘껏 포옹했다. 케렌스키 특유의 제스처였다.
「여전하시군요.」
경훈의 의미심장한 인사에 케렌스키는 웃음을 터뜨렸다.「자, 들어가서 앉읍시다.」
방에는 여러 응접 세트가 있었다. 몇 사람이 둘러앉아 회의를 할 수 있는 원탁과 손님
을 맞을 때 쓰는 소파, 그리고 탁 트인 유리창 너머로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위
치에 두 개의 편한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친근한 사람과 같이 앉아서 앞뒤로 흔들
며 마치 소꿉친구 같은 기분을 낼 수 있는 의자였다.
케렌스키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경훈에게 안락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경훈이 자리에 앉자 케렌스키는 홈 바에서 스카치를 꺼내왔다.
「이 변호사, 한잔하겠소?」
경훈이 대답할 새도 없이 케렌스키가 얼음을 채운 온더록스잔을 쥐어주었다. 얼음을
채우고 술을 따른 케렌스키는 잔을 부딪쳐왔다.
경훈은 케렌스키가 스트레이트, 그것도 더블로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뭔가 이상했
다. 경훈이 알기로 케렌스키는 이렇듯 격정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차가운 눈초리로 상
대방의 표정을 계산하며 술잔을 홀짝거려야 제격인 그가 지금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
길로 경훈 자신의 얼굴을 훑어내리고 있지 않은가. 경훈은 거대한 분노가 타오르는 것
같은 케렌스키의 눈길이 낯설었다.
경훈은 케렌스키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무언지를 생각했다. 불가능한 모든 것
을 가능하게 해왔던 사람,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고 질 수도 없는 위치에 오른 사람,
이미 미국에서 가장강력한 인물로 떠오른 케렌스키가 한국의 일개 변호사에 불과한 자
신을 불러 이처럼 분노에 찬 모습을 여과 없이 보이는 것을 경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경훈은 온더록스 잔을 들어 얼음에 혀를 댔다. 그리고 위스키의 톡 쏘는 맛을 입 안
가득 느끼며 케렌스키의 표정을 주시했다.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
체 무엇이 이 냉정한 사람을 이렇게 흥분하도록 만들었을까.
「나는 인생을 원칙대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을 경멸하오.」
케렌스키는 경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푸른 창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낯선 모습이었다.
비록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있고 강했지만 이제까지 익히 봐오던 케렌스키의 모습에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바로 자신감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은 천재
들의 것이라고 강변하던 그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케렌스키는 새장에 갇혀 자유를 찾는 맹금류처럼 외로워 보였다. 상실된
자신감의 빈자리에 파고든 외로움이 그의 얼굴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소송 따위의 문
제 때문은 아닌듯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는 같이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케렌
스키 혼자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인 모양이었다.
경훈은 어쩌면 케렌스키가 지금 에어날 수 없는 어떤 위기에 봉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겼다. 그러자 궁금증이 더했다.
「그들은 모험을 하지 않소. 원칙이란 것 자체가 모험적인 요소를 다 빼버린 절대 안
전한 선 같은 것이 아니겠소.」
경훈은 차츰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인생이란 자유를 향한 비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오. 의식의 자유 말이오」
경훈은 케렌스키 같은 사람에게 있어 어려움은 어떤 것이며, 어째서 그어려움을 자신
에게 얘기하는지 긍금했다.
「나는 바로 그 자유를 향한 비상에 인생을 바쳐왔소.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인생의
또다른 면을 보려고 애썼고, 원칙과 구질서를 부정하며 사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
각해 왔소.」
경훈은 말없이 케렌스키의 얼굴을 훑었다. 세계 최고의 강자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
야기한다는 것, 더욱이 어떤 어려움에 봉착하여 자신에게 변명과도 같은 논리를 늘어
놓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며 케렌스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원칙과 구질서에 대한 투쟁에서 늘 이겼소. 나야말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자
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소. 천재, 천재 말이오. 이 세상의 뭇사람들이 내가 생각
하고 본 대로 따를것이라 믿었고, 그런 점에서 나는 분명히 많은 새로운 시각들을 세
상에 제공했소. 나는 내 운명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던 것이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
다. 케렌스키는 분명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은 경훈이 보기에도 성공한 인생임에 틀림
없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었다. 당장 신임 변호사를 스카우트하는 것만 봐도 그가 자
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도전해 왔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어떤 로펌도 감히 케렌스키
처럼 철저히 성적을 무시하고 신입사원을 뽑지는 못했다. 과연 케렌스키는 세상에 신
화를 남길 수 있는 승리자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듯 자신감을 잃게 만
들었을까.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내가 이겨온 그 모든 것들이 보잘것 없는 허접쓰레기 같은 게
아닐까, 혹은 나는 진정한 싸움은 한 번도 치러보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회의에 빠지
게 됐소. 도대체 변호사로 성공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던
것이오.」
경훈은 고개롤 끄덕였다. 누구나 품을 수 있는 회의였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회의일
지도 몰랐다. 경훈 자신도 이 같은 회의를 여러번 느끼지 않았는가. 인간이란 가끔 이
런 종류의 회의를 느끼곤 하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나 허무를 느끼는 법이지요.」
경훈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렌스키는 다시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따라 단숨에
마셨다.
「모든 인간이 법대로 살 수는 없는 법 아니오? 그러니 인간은 누구나 약점을 갖고 살
게 되어 있지. 바로 그 인간들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돈을 벌어온 것이 우리 회사
고 나라는 생각이들자 괴로웠소. 물론 그렇게 번 돈으로 무엇을 했는가는 논외의 문제
요. 범죄를 저질러 번 돈으로 자선 사업을 했다고 해서 그범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소. 나는 어떻게 보면 남의 약점을 뜯어먹고 살아온 기생충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오」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
경훈이 무의식적으로 끼여들었다. 그러나 케렌스키의 허무감은 생각 이상으로 깊었다.
「틀림없소. 어떤 면에서 나는 약자들을 뜯어먹고 살아온 기생충이었단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경훈은 잠자코 케렌스키를 주시했다.
「소위 천재라는 내가 이제껏 약자들만 후리는 짓을 열심히 해온 대가로 돈과 명성을
거머쥐었다는 회의와 고민 끝에 나는 나를 거부하기로 마음먹었소.」
케렌스키는 다시 술잔을 비웠다.
「나는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소. 더
이상 헛된 이름을 얻거나 돈을 벌지 않고, 세상을 속이지 않으며, 나 자신과 진지하고
도 처절하게 대면해야만 하는 일을 찾아야 했소. 나의 헛된 발판이나 인맥이 소용없는,
오직 나의 능력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단 말이오.」
그 순간 케렌스키의 목소리는 당당하다 못해 오만하게까지 들렸다. 그가 보통 사람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패배와 허무를 넘어 새로운 지평에 다다르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은 명백해 보였다.
경훈은 케렌스키가 과연 어떤 새로운 길을 택했는지 궁금해졌다.
천재의 패배
「이 변호사, 내가 어떤 길을 택했는지 짐작하겠소?」경훈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
다.
「세상에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소. 오지 탐험, 유적 발굴등…….
하지만 그런것은 나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것은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나 역
사에 정열을 가진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천재라면 새로
운 물리 이론의 연구 등에 자신의 정열을 바칠 수 있을 거요. 하지만 나처럼 허무의
심연 속에서 가치의 부재를 혹심하게 느낀 인문 분야의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오.
이 변호사, 나는 말이오, 나는……」
케렌스키는 이 부분에서 감회가 솟구치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케렌스키는 다시 눈길을 돌려 경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
았다.
「내가 택한 것은 도박이었소.」
케렌스키의 이 한마디에 경훈은 뒷머리를 꽝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냉정하리만큼 합리적인 케렌스키 같은 인물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도박이라니, 그 종말은 뻔하지 않은가. 그러나 경훈은
애써 감정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케렌스키의 눈을 지켜봤다.
「수학의 확률로부터 나온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도박의 룰과 수학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강력한 기의 흐름 사이에서 판을 읽고 승리를 일궈내는 도박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소.」
케렌스키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경훈은 그가 이미 도박에 상당한 경험을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도박을 얘기할 때 확률만 언급하겠지만, 지금
케렌스키는 역시 천재답게 '기의 흐름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의 입에서 기라는 동양적인 개념이 흘러나오기까지에는 많은 경험이 필요했으리라.
「카지노의 테이블 위에서 나는 더 이상 명성을 날리는 변호사 케렌스키가 아니오. 보
통 사람과 똑같은 위치에서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하여, 언제 무엇이 튀어나을지 모를
험한 정글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오. 보통 사람은 99퍼센트, 아니 100퍼센트 실패하
고 마는 무서운 정글이오. 물론 몇 번은 딸 수 있겠지. 그러나 결국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 도박의 속성이오. 나는 그 도박에 도전하고픈 강한 욕구를 느꼈소.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시험할수 있는 최고의 게임이라는 생각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쳤소. 강자
에게는 진실을 가지고도 질 수밖에 없고, 약자에게는 거짓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군림
할 수 있는 로펌의 위선이 통하지않는, 오직 자신의 실력에 의해서만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도박이야말로 내가 갈 길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됐던 것이오. 이 혐오스
런 세상을 벗어나 무한한 자유의 세계로 나이가는 탈출구였단 말이오.」
경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주식이 자본주의의 꽃이라지만, 나는 돈이 알파요 오메가인 이 우스운 세상에
서 도박이야말로 꽃 중의 꽃이라고 생각하오.」
경훈은 케렌스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케렌스키는 왜 하필 자
신을 불러, 평소에 하지 않던 얘기를 이렇게 강변하는 것일까. 경훈의 직관이 꿈틀거
렸다. 그리고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후후, 이 변호사. 지금 불안한 기색이 얼굴에 스치는군. 그래요, 나는 천재가 아니
었소. 다만 천재를 좋아하는, 천재이고 싶은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오. 나는 일생 동
안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아왔소. 나는 그것을 카지노의 테이블 위에서 더욱 확실히 깨
달았던 거요.」
갑자기 케렌스키의 목소리가 비관적으로 바뀌는 게 뚜렷이 느껴졌다.
「짐작하겠지만 나는 다시금 인생에서 실패했소. 도박에서 졌던 것이오.」
케렌스키는 표정까지 한없이 가라앉았다. 열을 띠었던 그의 표정이 이렇게 가라앉자
경훈은 더욱 심한 불안을 느꼈다.
「이 변호사, 당신은 내가 왜 당신을 불러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모를 거요. 사실
내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소.」 케렌스키는 경훈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
을 이어나갔다.「나는 이 번호사의 직관력을 무한히 부러워했소. 특히 카지노의 테이
블 위에서는 말이오. 나는 도박에서 지고 돌아올 때마다, 아니 여기 보스턴에서도 하
루 종일 내가 진 이유를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는 데 몰두했소. 그러나 수십 번이나 새
로운 계획을 세워가지고 도전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였소.」
「도박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닙니까? 천재라고 해서 도박에 이기는 것은 아니죠.」
「아니오, 천재는 틀림없이 이기오. 동양 고전을 섭렵할 당시『삼국지』란 책을 읽었
소. 그 책에 나오는 제갈공명이 도박을 한다면 이길 것 같소, 질 것 같소?」
천재에 대한 케렌스키의 신념은 아직도 대단했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도 도박을 한다면 이기지 못할 것 같은데요.」
「그는 과학자일 뿐이오. 도박에는 과학이나 수학으로는 풀리지 않는 그 무엇이 있
소.」
「제갈공명은 소설에서 과장한 인물이라 그렇지, 실제로 도박에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오. 내가 왜 이 변호사를 부러워하는지 알고 있소?」
「저를요?」
「그렇소, 당신의 직관이 부럽소. 나는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서 한 사람을 만났소.
그는 대단한 직관력을 가지고 있었소. 마치 당신처럼 말이오.」
「직관이 뛰어난 사람은 꽤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러나 나는 직관이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소. 어떤
특수한 문화권의 사람들은 매우 직관적이거든. 이 변호사가 잘 보는 관상이라는 것도
사실은 직관의 소산이잖소. 카지노에서 만난 그 사람도 바로 이 변호사와 같은 한국인
이었소.」
「네? 한국인이라구구요?」
「그렇소.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이 변호사를 생각했소. 그와 이변호사는 무척 닮았소.
두 사람 모두 직관력이 대단하다는 점에서 말이오.」
「그러나 저는 도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데요.」
「그것은 도박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오. 문제는 과학이나 확률로 설명할 수 없
는 분야에서 당신들이 발휘하는 힘이라는 거지. 나는 그 힘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풀
지 못하고 있소. 그래서 이 변호사에게 이렇게 넋두리를 하는지도 모르오.」
경훈은 미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하기로 소문난 케렌스키가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데
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 한잔 더 하시오.」
케렌스키는 술병을 들고 일어섰다. 경훈에게 다가와 술을 따르고는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는 책상 속에서 작고 검은가방 하나를 꺼내들고 돌아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부탁이 있소.」
「……?」
「지금 즉시 출발하여 이것을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그 한국인에게 전해주시오. 그러면
내가 맡긴 물건을 줄 것이오. 그것을 나에게 갖다 주시오.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 물건을 반드시 건네받아야 하오.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말이오.」
이 말을 할 때 케렌스키의 눈이 유난히 빚났다. 경훈은 직감적으로 그 물건이 아주 중
요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케렌스키는 경훈에게 검은 가방을 건데주었다.「이게 뭐죠?」
「돈이오.」「얼맙니까?」「70만 달러.」「네?」
경훈은 놀랐다. 현금으로 주고받기에는 너무나 큰 액수였다.「라스베이거스의 엠지엠
카지노에 가서 그 사람을 찾으시오. 이름은 필립 최요.」
경훈은 못마땅했다. 이런 일을 자신에게 부탁하다니. 돈을 받을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사실과 뭔가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 먼저 나갔다.
「글쎄, 이런 일은 제가하기에는 좀…」
「꼭 이 번호사가 맡아주시오.」
케렌스키는 강한 눈빚으로 경훈의 눈을 쏘아보았다.
「무슨 돈입니까?」「빌린 돈이오.」
「그런데 꼭 제가 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직원들을 보내기에는 액수가 크고 현금이
라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다른 까다로운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오. 아무것도 묻지 말고 갖다 주시오.」
경훈은 자신이 돈을 운반한다 하더라도 법적으로 별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
만 어딘지 모르게 께름칙했다. 그러나 애써 좋지 않은 기분을 털어버렸다. 비록 이상
한 느낌이 들기는해도, 회사 대표인 케렌스키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 사실은 나와 이 변호사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해주시오.」경훈은 당연한 일이라
고 생각했다. 이런 일을 누구에게 말한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케렌스키는 다른 직원
을 보내는 것보다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갈 경훈에게 일을 시키는 편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네.」
케렌스키는 양복 주머니에서 얼마간의 현금을 꺼냈다,「카드를 쓰지 말고 모든 비용을
현금으로 지불하시오.」
「네」
케렌스키는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형제, 이것은 내 일이지만 동시에 이 변호사의 일이기도 하오. 언젠가 이 형제라는
단어가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오.」
케렌스키는 방을 나서는 경훈의 등뒤에 대고 뜻 모를 말을 던졌다. 경훈은 그가 불쑥
내뱉은 '형제'라는 단어가 몹시 신경에 거슬렸지만 왜 그런 단어를 썼는지 물어볼 수
는 없었다.
의문의 죽음
라스베이거스. 세계 최고의 환락의 도시인 라스베이거스는 매일 밤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한숨을 잉태한다. 일확천금의 꿈을안고 이 도시에 발을 디디는 사람들은 주변을
스치는 단 한번의 기회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빚내며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
러나 그들은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이 도시가 뿜어내는 마성에 시든 푸성귀처럼 생명
력을 잃고 만다.
수많은 기회가 스쳐가지만 아무도 그 기회를 주워담지 못한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무한한 욕망이 결국은 모든 것을 놓치게 만든다.
마침내 그들은 그 화려했던 꿈만큼이나 비통한 한숨을 내쉬며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
동전 한푼 남아 있지 않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다시는 이 괴물 같은 도시를 찾아오
지 않으리라 맹세하지만, 그들은 다시 라스베이거스에 갈 날만 기다리며 한평생을 살
아간다. 탐욕은 나방의 애벌레처럼 잠복하고 있다가 그 화려했던 순간을 못내 잊지 못
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마치 부나방인 양 이 도시를 찾아들게 하는 것이다.
경훈이 공항에 내려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어떤 사람이 그의 이름을 쓴 피겟을 들고 있
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리무진의 운전기사였다. 그는 카지노 호스트로부터 나가라
는 얘기를 듣고왔다고 했다. 경훈이 호텔에 도착하자 VIP 서비스의 직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았다.
「여행은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올 줄 알고 있었죠?」
「케렌스키씨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대접을 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는 게임을 하지도 않을 텐데.」「게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
습니다.」
경훈은 직원의 태도로 보아 이 카지노에서 케렌스키가 VIP 중의 VIP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훈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카지노에서 제공하는 펜트하우스로 들어갔다.
32층의 펜트하우스에서 야경을 내다보던 경훈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전
체 도시가 마치 네온사인으로 만든 듯 번쩍거렸고, 불빛이 문자 그대로 불야성을 이루
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걸작인 동시에 기형인 도시였
다.
경훈은 샤워를 마친 뒤 돈을 금고에 넣어두고 바로 카지노로 내려갔다. 케렌스키가 얘
기하던 한국인을 찾아 돈을 전해주어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경훈은 카지노 호스
트를 전화로 불러 필립 최가 묵고 있는 방을 물었다.
「그분은 지금 어딜 가셨습니다. 이틀 후에 돌아오겠다고 하셨습니다만…….」
「뭐요? 가다니 어디로 가셨다는 얘깁니까?」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언제 가셨습니까?」
「불과 세 시간도 안 됐을 겁니다. 그런데 혹시 이 변호사가 아니십니까?」
「네. 맞습니다.」
「그분이 무얼 맡기고 가셨습니다. 이 변호사님께 전해드리라고 하시던데요.」
「뭐죠?」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방으로 올라갈테니 거기로 갖다 주시오.」
방으로 찾아온 카지노 호스트는 경훈의 신분을 확인하고 나서 작은 나무 상자를 내놓
았다. 뚜껑과 몸체가 맞닿은 자리에는 얇은 셀룰로오스 띠 같은 것을 붙이고 그 위에
다시 테이프를 붙여 누구라도 열어보면 당장 표시가 나게 해둔 목갑이었다. 케렌스키
가 아닌 다른 사람은 열어보지 못하도록 장치를 해둔 것이었다.
경훈은 자신이 찾아올 것을 아는 것으로 보아 이미 케렌스키가 이 사람과 통화를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케렌스키가 얘기하던‘그 물건’이란 바로 이것일 테지만 돈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경훈은 혹시 케렌스키가 아직 회사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들어 전화를 걸었다.
「네 , 에이펙스로펌입니다.」
이상했다. 이렇게 밤 늦은 시각에 교환기가 아니라 누군가 직접 전화를 받다니.
「저는 이 변호산데 누구시죠?」
「아, 이 변호사님. 비상팀의 윌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죠? 기계 교환 장치가 풀리고 비상 팀에서 직접 전화를 받다
니?」
「……케렌스키 대표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네?」
「대표께서 사망하셨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사망이라니?」
「너무나 급작스런 일이라 저희도 모두 당황하고 있습니다만, 하여튼 돌아가셨습니
다.」
「아까 낮에도 사무실에 계셨잖아요?」
「틀림 없습니 다.」
「아!」
오후에 케렌스키의 방을 나설 때 느꼈던 께름칙한 기분은 결국 그의 죽음에 대한 예감
이었던가.
「모두 회사에 계십니다. 부대표께서 통화를 하고 싶어하시니잠깐 기다리십시오.」
이내 수화기에서는 부대표 사이몬 변호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변호사, 거기 어디요?」
경훈은 대답을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케렌스키는 철저한 비밀을 당부하지 않았던가.
「시내에서 한잔하고 있습니다.」
「아까 케렌스키 대표의 방에서 단둘이 얘기를 나눴다고 하던데, 뭐 특별한 내용은 없
었소?」
「글쎄요, 특별한 얘기는 없었습니다.」
「케렌스키 대표께서 오늘 오후 돌아가셨소.」
「방금 들었습니다만 사인이 뭡니까?」
「실족사요, 마음이 울적하다면서 보트를 타고 낚시를 하러 나갔다가 바다 한가운데에
서 빠지신 모양이오. 났싯대가 드리워진 보트만 파도에 흔들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신발 한 짝이 남아 있었소.」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까?」
「자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오. 그러나 워낙 바다 한가운데에서 일어
난 일이라 정확한 사인은 아무도 알 수 없소. 다만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사실만은 확
실하오. 조금 전, 그분이 입고 나가셨던 방풍 재킷이 파도에 떠밀려다니는 것을 해안
경비대의 순찰선이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소.」
「구명 재킷은 입지 않으셨나요?」
「보트 관리인에 의하면 오늘따라 구명재킷을 놔두고 나가셨다는 거요.」
「평소에도 그러신 적이 있습니까?」
「부인의 말에 따르면, 그분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도 구명 재킷을 입지 않으면 보
트를 못 타게 할 정도로 구명 재킷에 대해서는 철저하셨다고 하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런분이 구명 재킷을 두소 배를 타셨다는 것이......」
「머리가 아주 복잡하셨던 모양이오. 이 변호사도 알다시피 그분은 머리가 복잡할 때
면 주변에 잡동사니가 널려 있는 것을 싫어하시잖소? 지금은 나도 정신이 없소. 내일
아침 출근해서 얘기합시다.」
「네.」
경훈은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석연치 않은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케
렌스키가 갑자기 그렇게 사망한 것 자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깊은 바다
에서의 실종, 더군다나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던 구명 재킷을 놓고 간 날 하필 실족이
라니.
경훈은 이런 우연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살 가능성이 오히려 더 크게 다가
왔다. 그날 그렇게 흔들리던 모습을 보아서는 낚시를 던져놓고 이것저것 생각하던 그
가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 바다로 뛰어들었을 가능성이 있을 법도 했다.
그러나 자살이라니. 아무리 도박에 졌다고 해도 케렌스키는 여전히 세상엣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더구나 그의 진정한 힘은 재산이 문제가 아니다. 미국사회를 움직여나
가는 그의 힘은 재산으로 환산하기 곤란할 정도로 엄청나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런 힘을 얼마든지 돈으로 바꿀 수도 있을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케렌스키의 자살은 전적으로 정신적 문제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도대체 무슨 정신적 문제가 있단 말인가. 그는 불과 대
여섯 시간 전에 경훈을 불러 삶과 도박에 대해 이야기 했고, 돈을 주면서 빌린 돈을
갚아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70만 달러쯤은 케렌스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경
훈은 잘 알고 있었다. 굵직한 소송을 이겼을 때 들어오는 금액은 그보다 몇 배 혹은
몇십배가 아닌가.
케렌스키는 정말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회의를 품고 그 충격으로 자살했을까? 그러나
경훈은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자살 충동을 느꼈다면 구명 재킷을 두고 나
갔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는 차분히 자살을 준비했다는 얘기일까? 아니면 혹시 타
살당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리 그가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사고 직전에 70만 달러라는 거액을 라스베이거스
에 갖다 주도록 부탁한 것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게다가 그 거액을 받기도 전에 물건
을 맡겨두고 사라진 필립 최라는 인물도 여간 수상쩍지 않았다. 어떤 일도 현금으로
70만 달러라는 거액을 받는 일보다 바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정황들로 보아 케렌스키의 사망은 단순히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훨
씬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저것 생각하던 경훈은 빨리 보스턴으로 돌
아가기로 했다. 그는 곧바로 호텔을 빠져나와 공항으로 향했다. 일이 어떻게 되어가더
라도 일단은 케렌스키가 자신에게 부탁한 것을 함부로 노출시키지 않기로 했다.
다음날, 경찰은 케렌스키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그 증거로 그가 구명 재킷을
두고 나간 것을 내세웠다. 자살 의도를 가진 케렌스키가 일부러 구명재킷을 둔 채 바
다로 나갔다는 것이다. 구명 재킷을 두고 나간 이유는 혹시 마음이 변할까 봐 그랬을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자살의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직원들은 여자 관계니 뭐니 하고 떠들었지만
그저 헛소문에 불과했다.
「케렌스키 대표는 그야말로 천재였어. 자살밖에는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을 거야.」
사무실에서 로펌의 변호사들은 영문도 모르면서 케렌스키의 자살에 뭔가 의미를 부여
하려 했다. 경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동료들의 근거 없는 짐작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훈은 하루종일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경찰은 신발 한 짝이 보트에 남아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신발을 벗고 싶어하는 심리는 경훈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러나 하필 왜 한 짝이란 말인가. 이 남은 신발 한 짝은 자살과 실족사라는 두 가지 유
력한 가능성 중 어느 하나를 결론으로 채택하기 어렵게 했다. 타살도 역시 마찬가지였
다. 누군가 그를 죽였다 하더라도 신발 한 짝을 남겨두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사인은 자살과 실족사로 압축되는데, 경찰은 자살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경훈이
생각해도 실조사는 너무 우연적이기데 사인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왜 자살을 하고 말았나?'
경훈이 보는 한 케렌스키의 자살은 천재의 광기 때문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재능이 천재에 미치지 못함을 절실하게 고백하지 않았던가.
며칠이 지나자 그나마 제기되던 다른 가능성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차츰 멀어져 갔다.
그것은 케렌스키 부인이 발견한 메모때문이었다. 딱히 유서라고 보기에는 어려울도 모
르지만, 케렌스키가 실종되던 날 아침 집에 써두고 나온 그 메모를 경찰은 유서로 단
정했다.
점점 숨이 막혀온다.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사랑하는 아내여, 이제 한 줄기 빛조차 스러지고 나면 알바트로스의 날개에 올라 안개
깔린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동안 안녕.
다시 일주일이 지나자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케렌스키가 자살했다고 단정지
었다. 특히 에이펙스의 이사회에서는 의결권과 경영권 등의 문제 때문에 실종이 아닌
사망으로 확정짓고자 했다. 그를 실종으로 처리했을때 오는 손실은 숫자로 따지기 어
려울 정도였다.
케렌스키의 부인은 남편의 정열이 깃들인 에이켁스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녀
는 모든 사람이 편하도록 케렌스키의 유서와도 같은 메모를 경찰과 법원에 제출하여
그의 실종을 자살로 단정 짓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시신도 없는 상태에서 진행된 케렌스키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보스
턴의 저명 인사들뿌만 아니라 뉴욕과 워싱턴에서도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검게 선팅된 자동차 안에 있다가 입관 직전 잠깐 내려 애도를 표하고는 그 길
로 바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기대에 들떴던 기자들을 실망시켰다.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지. 케렌스키와 같은 유대인들이야.」
그들의 태도와 기자들의 아우성을 보고 의아해하는 경훈에게 동료 변호사가 말했다.
「저들은 평소에는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아. 전설적인 인물들이지.」
「케렌스키 대표 역시 유력한 멤버였지.」
「멤버였다고? 그럼 지금은 아냐?」
「문제가 있었어.」
「무슨 문제?」
경훈은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동료 변호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팬암 사건 때문일 거라고 짐작은 하지만......」
「팬암 사건이라니?」
「케렌스키 대표가 직접 뛰어들었던 소송이야. 엄청난 사건이었지. 결국 팬암은 그 사
건으로 망하고 말았지만.」
「케렌스키 대표는 어느 쪽이었어?」
「팬암 쪽. 패소했어.」
「패소했기 때문에 그들 그룹에서 축출됐다는 얘기야?」
「그 내용은 자세히 몰라. 아마 그 성격에 스스로 나와버렸겠지. 당시 팬암의 상대는
정부였으니까.」
순간 경훈의 뇌리에 무언가가 스쳐갔다. 케렌스키의 자살이 얼마 전 자신에게 부탁했
던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지나자 경훈은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수 기간도 끝나가고 케렌스키도 없는 이 마당에 에이펙스로펌에서의 근무는 무의미
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케렌스키가 자신에게 넘겨준 70만달러
의 돈이었다. 그 돈을 필립 최에게 넘겨주어야 할지 케렌스키의 부인에게 주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작은 목갑도 문제였다. 경훈은 생각 끝에 케렌그키의
집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경훈은 택시가 케렌스키의 집 앞에 이르자 감회가 교차하며 가슴이 답답했다. 불과 얼
마 전에 케렌스키는 이 집에서 경훈을 위해 파티를 열어주었다. 경훈이 불가든애 보이
던 소송을 이겼다는 사실이 케렌스키를 기쁘게 했던 것이다.
케렌스키의 부인은 경훈을 보자 새삼 슬품이 복받쳐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경훈이
예상했던 정도로 파리한 얼굴은 아니었다. 의외로 부인의 작은 얼굴에는 여느 때와 다
름없는 안정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경훈은 무심코 거실을 둘러보다가 한구석에 놓여있
는 여자용 여행가방을 발견했다.
케렌그키의 부인이 차를 내오자 경훈은 정중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케렌스키 변호사께서는 결코 보통 분이 아니섰습니다. 그분의 죽음에는 분명 어떤
뜻이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과연 그럴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분이 자살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도박을 하셨지만, 모든
것을 잃으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설사 재산을 다 일었다 해도 그분의 실력이면 얼
마든지 새로 출발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요. 제게도 돈은 있었어요.」
「그분이 왜 그러셨어야 하는지 아직은 미궁에 빠진 상태입니다. 사실 그분을 마지막
으로 뵈었을 때 무슨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계획이라구요?」
부인의 얼굴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단지 제 느낌입니다만 그분이 돌아가신 이유는 결코 간단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지긴 하는데......」
「무엇입니까?」
경훈은 부인의 눈을 응시했다.
「남편은 요즘 와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을 자주 쓰곤 했어요. 무엇이 새로운 시작이
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하지 않았지ㅏㄴ 어떤 결의에 찬 표정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 분의 서재를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사실 그렇게 오랬동안 같이 일하던 동료들도 막상 남편이 돌아가시고 나자
한번 찾아오지도 않는데 이렇게 와준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경훈은 부인의 안내를 받아 케렌스키의 서재에 들어갔다. 그 서재는 수많은 책이 빽빽
히 꽂혀 있는 보통의 서재와는 좀 달랐다. 책들은 모두 회사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어
서 그런지 서재에는 별다른 책이 없었다. 다만 소송 기록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늘
천재를 부르짖던 그였지만 소송 기록을 다 외우고 있을 도리는 없었을 것이다.
기록은 주로 소송에 관한 특이점, 전략 등과 더불어 케렌스키 자신의 개인적 평가들이
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소송에 관여한 변호사들의 점수를 빠짐없이 기록해 둔 사실
이었는데, 경훈에게는 처움 한두 번을 빠고는 항상 A를 주었다.
재판기록에서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한 경훈은 케렌스키의 다이어리로 손길을
돌렸다. 다이어리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을 때 경훈의 눈에는 낙서처럼 적어둔 한
당어가 들어왔다. 날짜를 보니 케렌스키가 실종된 날이었다.
'성전'
경훈은 이 글자를 제외하고는 특이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곧 다이어리를 덮고 일
어났다. 그가 서재에서 나오자, 거실에서 여행가방을 치우고 있던 부인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감추었다.
「어디 여행이라도 가시는 모양이죠?」
「아, 네. 마음이 산란해서요. 여행을 하면 좀 나을 것 같아서......」
경훈은 아직도 상당한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부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따뜻한 서해안이 좋을 것 같군요. 샌프란시스코나 시애틀이 분위기 전황에는 제격일
거에요.」
경훈이 가볍데 던진 이 말에 부인의 얼굴은 이상하게 달아올랐다. 경훈은 얼른 인사를
하고 케렌스키의 집을 나왔다.
성전이라. 만약 자살하던 날 아침에 적어둔 단어라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
을 것이다. 경훈은 택시 안에서 그 단어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밑도끝도
없는 그 단어 하나만 가지고는 논리적 유추를 할 수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그 단어의 의미에 푹 빠져 있던 경훈에게 이윽고 하나의 영감이 떠올랐
다. 그것은 '성전'이라는 단어가 종교에서 유래했다는 점과 케렌스키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에서 유추한 것으로, 그의 죽음은 어쩌면 성전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었다.
케렌스키는 무슨 종교 전쟁이라도 치르는 것일까? 게다가 케렌스키가 마지말 순간 자
신을 '형제'라고 부르면서 보였던 이상한 태도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경훈
자신과도 무관하지 않을지 몰랐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에게 돈과 목갑을 맡긴 것 역시
단순한 심부름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분명히 하나의 역할을 할당한 것이다.
경훈은 그 점이 궁금했다. 도대체 자신이 케렌스키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역할을 맡겼
단 것일까. 그리고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란 말인가.
경훈은 생각 끝에 일단 돈은 케렌스키가 말한 대로 부인보다는 필립최에게 주기로 했
다. 케렌스키는 돈을 주고 물건을 받아 오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경훈은 출근하자마자 부대표의 호출을 받았다.
「이 변호사, 내 방으로 좀 올라오시겠소?」
케렌스키의 사망 직후부터 바로 그의 자리는 대신하고 있는 부대표의 호출에 경훈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사실대로 밝혀야할지 어떨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만약 케렌스
키가 그날 회가의 공금을 주면서 라스베이거스의 한국인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던거라
면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경훈은 일단 부딪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부대표는 어느개 케렌스키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이 변호사.」
「축하드립니다.」
경훈은 그동안 케렌스키에게 정이 들었는지, 즉각 케렌그키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선
부대표에 대한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하. 무슨 말씀을.」
「무슨 일이 있습니까?」
경훈은 먼저 분위기를 짚어보았다.
「다름이 아니고 이 변호사가 그동안 우리 회사를 위해 기여한 바가 워난 커서 이제는
정식으로 계약을 맺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요. 그래서 말인데, 어떤 대우를 해주면
좋을지 의논하고자 하오.」
경훈은 내김 안도의 한숨을 위었다. 부대표가 케렌스키의 자금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
다면 무척 곤란했을 것이다. 아마 할 수 없이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말았으리라.
「말씀은 고맙지만 이제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경훈은 단호하게 의사를 표시했다.
「이변호사, 한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모든 변호사들에게 미국
은 최고의 기회를 보장할 거요. 미국이야 말로 변호사들의 천국이 아니겠소?」
「물론 저도 잘 아고 있습니다. 여기서 수습직으로 받는 보수만 해도 제가 한국에서
받는 보수보다 월등히 많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한국의 로펌에서 연수를 보내주어서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 그쪽에서 문제 삼는다면 배상을 하면 되지 않겠소?」
「법률적으로는 해결책이 있겠지요. 하지만 인간적인 빚이란 숫자로 갚을 수 없는 것
입니다.」
부대표는 의외의 답변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경훈의 의지가 확고한 것을
아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저는 오늘부로 그만두겠습니다.케렌스키 대표와 언제든지 임의로 그만둘 수 있도록
약속했기 때문에 문제는 없습니다.」
경훈이 아예 당장 그만 두겠다고 하자 부대표는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지
신이 회사를 장악하자자 유능한 변호사가 그만 둔다는 것은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하
지만 그는 일을 위해서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황인종에세 구개를
숙이면 사정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좋소. 마음대로 하시오. 경리부에 말해, 보수는 구좌로 입금시키겠소.」
당장 떠나라는 얘기였다. 케렌스키 같으면 파티라도 열어주겠지만 지금 부대표는 회사
를 장악한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부대표로서 자신의 이미지에 해를 주는 일은 될
수 있는 한 덮어 두어야 했다. 경훈이 있어 준다면 좋지만 굳이 떠난다면 다른 직원들
사이에서 비난 여론이 일지 않게 조용히 가주어야 하는 것이다.
경훈은 비서에게 자신의 짐을 챙겨 한국으로 보내줄 것을 부탁한 수 가까웠던 몇 사람
에게만 작별인사를 하고 회사를 나왔다. 모두 안타까워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경훈의
특별한 직관을 배우고 싶어하던 로버트 변호사가 제일 아쉬워했다.
경훈은 회사를 아돠서 바로 집으로 갔다. 이삿짐 회사에 전화를 걸어 모든 짐을 한국
으로 보내달라고 해놓고는 케렌스케가 둔 돈 가방만 들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ㅇㄴ행
에 찾아가 대여 금고에 목갑과 돈을 집어넣었다.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다닐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돈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스베이거스에 들러 필립 최라
는 사람들 찾아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훈의 직관은 자신도 모르게 모든 일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고 있었다.
남과 여
경훈은 인남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약속 장소로 나온 인남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머? 지금 바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그래. 지금 곧 가야 할 일이 있어.」
「왜? 현 선생님 일 때문이니?」
「아냐. 어차피 돌아갈 때가 되었어.」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쟎아. 상속 일도 네가 도와줘야 하고, 무엇보다 현 선생님 일
을 같이 해결하기로 했쟎니?」
인남은 경훈이 그녀와 상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결정내린 것을 원망하는 기색이었다.
「자주 올텐데 뭐.」
경훈은 차를 마시며 자신이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아마 거
기에는 제럴드 한이 얘기하는 10.26의 비밀을 캐내고싶은 마음도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경훈은 무의식중에 어떤 위험을 감지했다. 물론 케렌스케가 부탁했던 일을 털어놓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아무 부담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사라져버린
케렌스키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네가 없으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모든 것이 두렵고 낯설어.」
인남의 말에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하지 마. 이 일이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될 때까지는 다도 다른 일은 하지 않을
작정이야. 일단 한국에 가서 10.26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 제럴드 현이라는 인물이
과연 있었는지 알아볼께.」
인남의 얼굴에 불안감과 아쉬움이 짙게 깔렸다.
「할 수 없지 뭐. 그럼 오늘 밤이 보스턴에서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겠구나.」
두 사람은 잠깐 동안 서로의 생각에 빠져들며 침묵했다.
두 사람은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재즈 클럽으로 갔다. 4인조밴드가 흘러간 컨트리로
부터 최근의 헤비메탈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으를 연주해서, 나이네 상관없이 팬들이
몰려드는 싸고 편안한 클럽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인남은 맥주를, 경훈은 스카치를 시
켰다.
「역시 너는 고급 술을 마시는구나.」
「고급 술이 아니라 독한 술이지.」
「나는 감히 스카치를 시키지 못해.」
「왜?」
「수준에 맞지 않아서.」
「수준? 무슨 수준?」
「비싸서 말이야.」
「......」
「독한 술은 비싸. 나는 맨날 살찌는 게 두려우면서도 맥주밖에 못 시키거든.」
「스카치도 한잔만 시키면 맥주보다 비쌀 게 없쟎아.」
「얼음 잔뜩 넝ㅎ고 겨우 요만큼 넣어주는 스카치가 비싸지 않다고? 나는 일단 양이
어느 정도는 돼야 안심이야.」
경훈은 웃었다. 인남의 얘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남은 돈보다도 미국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불안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제 너는 부자가 됐어. 고급 위스키를 병째 시켜도 되잖아.」
「안돼. 현 선생님의 돈을 그렇게 펑펑 쓸 수는 없어.」
「그분은 너에게 돈을 쓰라고 주셨어.」
「그래, 알아. 하지만 일단 그분이 남기신 숙제부터 풀어야지. 그분의 재산은 그 일
에 써야 한다고 생각해. 가령 네가 그 일과 관련해 한국에서 활동한다면 내가 제반 경
비를 줘야 한다는 말이지.」
경훈은 말없이 웃었다. 인남이 비록 단순하긴 하지만 돈에 휘둘리지 않는 깨끗한 심성
을 가졌다는 사실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학교 시절엔 그저 문제아로만 알았는데 이렇
게 맑고 건겅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경훈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인
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니?」
경훈의 눈길을 의식한 인남은 얼굴을 붉혔다.
「음, 역시 너는 미인임에 틀림없구나.」
「얘는,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럼 내가 미인인 줄 여태껏 몰랐단 말이
야?」
인남의 해맑은 웃음이 스스럼 없이 잘게 무셔졌다. 경훈은 인남의 맑은 웃음을 보는
순간 갑자기 한국에서 선민과 헤어지던 날 밤이 연상되었다. 그 밤에도 이별이 있었고,
그 이별을 조롱이나 하듯 해맑은 웃음이 있었다.
경훈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을 본 인남은 스카치를 한잔 더 시켰다. 오늘 밤
에는 경훈의 취한 모습을 보고싶었다.
「후후. 너는 뭔가를 아는 애 같구나.」
「애가 뭐니? 우리가 언제까지나 고등핵생인 줄 알아? 나이가 서른이 넘었으면 숙녀라
고 불러줘야지.」
인남은 일부러 분위기를 가볍게 돌리려 했다.
「그래, 너도 이제 숙녀지. 숙녀도 한참 숙녀. 그런데 나는 뭐지?」
「신사.」
「신사? 신사라?」
「그럼, 너야말로 신사 중의 신사지.」
「그럴까? 과연 내가 신사일까?」
경훈은 스카치를 털어 넣고 다시 한잔을 시켰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을 이
었다.
「아닌걸, 나는 신사는 아냐.」
「왜 그래? 네가 신사가 아니면 누가 신사야?」
「인남이 너는 나에 대해 얼마큼 알고 있지?」
인남은 경훈의 표정이 무거워지는 것을 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신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경훈은 웨이터가 가져온 잔을 한번에 털어넣고는 또 한잔을 주문했다. 인남은 경훈이
약간 취했다고 생각했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냐?」
「마실만큼만 마셔.」
「네 말은 언제나 알아듣기가 힘들어 신사가 아니란 건 무슨 뜻이야?」
「그만두자.」
경훈은 아무 말도 아니었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여자문제 같은데?」
인남이 은근히 떠보아도 경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만두자. 내가 그런 얘기를 들을 자격이나 있겠니? 네 옆에는 가문 좋고 돈
많은 애들이 줄을 서 있겠지. 너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들을 만날테고, 사랑하겠
지.」
인남의 말이 끝나자 경훈은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난 말이야, 쓸데없는 일에 윤리적,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바르게 살아야 하
니 어쩌니 해도 인간의 윤리란 건 고작 한 세대 혹은 한 세기를 못 넘기는 것들이 대
부분이지. 나는 그런 쓸데 없는 관념에 좌우되진 않아.」
인남은 농담 한마디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경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이성적이던
그에게 이런 점도 있었나 싶었다. 인남은 계속해서 물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여자들을 마구 만난다는 말이니?」
「나는 나를 지배하는 힘에 의해 경험을 추구해.」
「그럼 너를 지배하는 힘은 원데?」
「호기심과 정열이야. 여자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그리고 진리에 대한 끝없는 정열
이 나라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기본 개념들이지.」
「또 어려운 애기구나. 하지만 기분은 좋다. 여자에 대한 끊임없는 정열이 있다면 내
게도 관심이 있다는 얘기니까. 어쨌든 나도 여자잖아.」
「춤이나 같이 출까?」
「좋아. 너는 정말 엉뚱한 데가 있어. 도대체 종잡지를 못하겠다.」
인남은 반가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4인조 밴드는 어두운 실내에 묵직하게 깔리도록 <
오텀 리브스>라는 곡을 연주했다. 인남은 취한 경훈의 팔이 허리를 휘감아오자 숨이
멎는 듯 했다.
「서울을 도망쳐 나왔어, 2년전에.」
경훈이 인남의 귀에 입술을 스치며 얘기를 꺼냈다.
「매일 밤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어. 그 여자가 있는 도시로 말이야.」
인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귀에 닿을 듯 말 듯하던 경훈의 입술이 그대
로 느껴졌다. 인남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말상 돌아가려니까 그냉 이대로 여기 있고 싶어.」
「너 겁내고 있구나.」
경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사람이었니? 네가 그렇게 못 있던 그 여자는?」
경훈의 목소리가 숨결과 함께 인남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아름다운 여자지.」
「그런데?」
「이해할 수가 없어. 헤어지자더군. 모든 것을 내개 바친 그 순간에 말이야.」
경훈의 얼굴에 아쉬움과 쓸쓸함이 교차되었다. 그는 괴로운듯 얼굴을 찡그렸다. 인남
은 뺨을 앞으로 내밀어 경훈의 찡그린 뺨을 가볍게 눌렀다. 경훈은 옅은 화장을 한 인
남의 살결에서 은은한 향기가 전해지자 숨이 막혔다. 여인의 향기였다. 그는 지금 인
남을 여자로 느끼고 있었다.
인남.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여자였다. 경훈은 팔에 힘을 주어 인남의 허리를 끌어당
겼다. 그리고 인남의 잘록한 허리가 기분좋게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아!」
인남의 두 가슴이 해면처럼 부드럽게 경훈의 가슴에 밀착외었다. 균형을 잃은 듯한 그
녀의 무게 중심이 경훈의 가슴으로 밀려왔다.
경훈의 혀가 인남의 입술을 부드럽게 축인 후 새하얀 치아를 밀고 들어가서는 입천장
을 거칠게 훑었다. 인남은 자기도 모르게 놈이 뜨거워졌지만 애써 경훈을 밀어냈다.
「왜 그래? 나 인남이야. 나를 딴사람으로 혼동하지 마.」
인남이 말에 경훈은 당황했다.
「경훈아, 너 오늘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
「그만 돌아가자.」
경훈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굳어졌다.
「그래, 내가 집까지 바래다 주지.」
「경훈아, 미안해」
「괜찮아」
택시는 인남의 집 앞에 멎었다.
「한국으로는 언제 떠나니?」
「네바다에 잠깐 들른 후 바로 떠날 거야.」
경훈은 라스베이거스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무의식중에도 조심하고 있었다.
「연락할 거지?」
「음.」
「연락할 일이 있으면 이리로 해.」
경훈은 한국의 전화 번호를 적어주었다. 인남은 안심했다. 경훈이 비록 화가 나긴 했
지만 자신과의 연락을 아주 끊지는 않으리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남은 경훈의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 나서 택시에서 내렸다.
인남이 내리자마자 택시는 가속음을 남기고 야속하리만큼 빨리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인남은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보며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네가지 조건
다음날 아침 일찍 경훈은 가방 하나만 들고 공항으로 나갔다. 그는 라스베이거스행 비
행기를 타고 보스턴 상공에 떠올라서야 비로소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즐
겁고 유익했던 유학 생활이었다.
하버드의 로스쿨에서 미국의 유수한 법률가들과 논쟁을 벌이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
쳐갔다. 특히 법률과 문화의 상관 관계에서 문화적 관점의 우위를 주장한 자신의 생각
에 저명한 교수들이 전적으로 동의해 준 것이 인상 깊었다. 한국의 경우 개인주의에
치우친 조문대로의 법 집행이 고유 문화 파괴에 앞장서기 때문에 늘 유감스러웠다.
라스베이거스는 여전했다. 늘 똑같은 서비스, 그리고 똑같은 결말의 분위기가 이 기괴
한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케렌스키의 자살에 대해서는 이 도시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필립 최 씨 계신가요?」
「네, 아마 방에서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저녁때 바카라 테이블로 나오실 거구요.」
「바카라 테이블이라고요?」
「네, 세계의 큰 도박은 모두 이 바카라로 한답니다.」
「어떤 게임이죠?」
「간단히 얘기하면 카드를 두 장씩 나누어서 합이 '나인'에 가까운 사람이 이기는 겁
니다.」
「손님이 카드를 선택할 수는 없나요?」
「없습니다. 손님은 배팅을 할 뿐입니다.」
「간단한 게임이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도박은 가장 간단한 게임이 가장 무서운 법이죠.」
「그럴 법하군요.」
바카라는 아무런 테크닉이 필요 없는, 마치 가위바위보와 같은 게임이었다. 경훈은 이
게임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오로지 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케렌스키는 이 간단
한 게임에 인생을 걸 만큼 열중했다가 결국 패하고 자살해 버렸다는 말인가? 경훈은
의아했다. 이렇게 간단한 게임을 과연 도박이라 할 수 있는가?
바카라는 누가 하더라도 이길 확률과 질 확률이 정확히 반반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기
술도 필요 없다. 개인의 테크닉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게임이다. 그런데도 이 바
카라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어려운 도박이라는 사실을 경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새삼스럽게 도박의 원리에 대해 흥미가 일었다. 또한 케렌스키가 말한 엄청난 지고간
을 가진 사나이에 대해서도 관심이 커졌다.
필립 최, 케렌스키로 하여금 존경과 감탄을 자아내게 한 사나이, 일개 도박꾼에 불과
하다고 평가해 버릴 수도 있지만, 도박의 세계에서는 신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나이임에 틀림없었다.
경훈은 케렌스키는 절대로 최고가 아닌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너무
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바카라는 게임의 단순성이 경훈으로 하여금 필립 최란
사나이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필립 최는 어떤 기술을 가졌기에 이 단순한 게임에서 명성을 쌓았을까? 경훈은
어쩌면 이 단순함이야말로 오히려 최고의 기량을 요구하는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다.
라스베이거스의 밤은 카지노의 네온이 하나 둘 켜지면서 시작된다. 이 사막 한가운데
자리잡은 도시를 찾은사람들이 관광이니 오락이니 하면서 낮에 부산을 떨어도, 정작
이 도시는 밤에 향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검은 양복을 깨끗이 차려입은 딜러들이 휘황
한 샹들리에 밑에서 카드를 앞에 놓고 옅은 미소를 띤 채 밤의 항해에 참가할 손님을
기다린다.
경훈은 식사를 마치고 느지막이 바카라 테이블로 내려갔다. 경훈은 첫눈에 필립 최를
알아봤다. 왜냐하면 아직 초저녁이라 그런지 카지노에는 게임을 하는 사람이 단 한 명
밖에 없었고, 그가 바로 동양인이었기 때문이다.
동양인이라 해서 한국인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경훈의 안목은 한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중국인을 가려내는 데 실수한 적이 없었다. 세 나라 사람은 아주 비슷해 보여
도 한국인에게는 일본인이나 중국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아집 같은 것이 엿보였다.
필립 최는 엄청난 금액에 해당하는 칩을 테이블 위에 놓고 있었다. 카지노에서의 게임
은 모두 칩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게임 도중에 화가 난 손님이 현금으로 배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거래는 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경훈은 한동안 말없이 필립 최가 게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필립 최는 엄청난 칩을
쌓아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적은 금액만 배팅하곤 했다.
경훈은 처음 접하는 게임이라 지루한 줄 모르고 구경을 했지만, 슈에 담은 카드가 다
되었을 때는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이번 슈에는 3만 달러를 땄군. 칩을 모두 바꿔줘.」
필립 최는 앞에 있던 칩을 딜러 쪽으로 밀었다.
딜러가 몇 번씩이나 칩을 세고 또 세어 고액 칩으로 교환해 주자 필립 최는 그것을 모
두 손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팁이야.」
필립 최가 일어나며 던지는 칩에 딜러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댕큐를 연발했다. 그
광경은 마치 주인에게 먹이를 받은 강아지들이 고맙다고 짖어대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경훈은 필립 최에게 한국말로 물었다.
「혹시 최 선생님이신가요?」
필립 최는 의아스러운 듯 경훈을 잠시 훑어보고는 대답했다.
「그렇소만…….」
「저는 보스턴에서 왔습니다. 케렌스키 변호사님의 일로 왔죠.」
「아, 이 변호사군요. 어디 조용한 데서 얘기할까요?」
「그러죠.」
필립 최는 칩을 모두 캐시어에게 맡긴 후 경훈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방은 초호
화판이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야경이 대형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왔다. 필립 최는
냉장고에서 마실 것을 꺼내왔다.
「돈을 전달해 달라고 하셨기에 왔습니다.」
경훈은 가방을 내밀었다. 필립 최는 가방을 열고는 돈을 세어 보지도 않고 눈으로 쓱
훑은 다음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분의 근황은 아시죠?」
경훈은 혹시 필립 최가 케렌스키의 죽음에 대해 알지 모른다는 생각에 말을 꺼냈다.
「이상한 일이오.」
필립 최도 케렌스키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경훈은 케렌스
키가 필립 최를 대단하게 얘기하던 것이 생각나 도박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케렌스키 변호사님은 왜 지셨을까요? 평소 천재라 자부하던 분이었는데...... 도박
이란 것이 그분의 머리로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겁니까?」
경훈은 쓸데없는 질문이라 생각하면서도 필립 최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물었다. 도박
에서 항상 이기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문제는 머리가 아닌데, 케렌스키는 천재의 능력에 너무 기대를 걸었소.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얘기요. 결국 그는 깨우치지 못하고 말이지.」
「깨우치지 못하다니요?」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말이오.」
「그럼 도박을 이기는 힘이란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오.」
경훈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면 이길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경훈이 약간 비아냥거리는 조로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립 최는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
다.
「도박에서 이기려면 일차적으로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오.」
「그 조건들은 무엇입니까?」
「우선 직업이 없어야 하오.」
「직업이 없어야 한다구요?」
「그렇소.」
「그건 무슨 의미죠?」
「무한히 많은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오.」
「무한한 시간?」
「그렇소. 시간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지. 카지노와 손님을 비교해 보시오. 카지노에
서는 수십 명의 딜러가 교대로 손님을 대하고, 무한한 자보노가 시간을 가지고 있소.
반면 손님은 혼자서 피곤에 절어 게임을 하지 않소? 일을 잠시 제쳐둔 채 며칠 여유를
내서 게임을 하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할 수 밖에 없지. 자본도 카지노에 비하면 새발
의 피와 같소. 조건 면에서도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하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미국에 있는 동안 가끔 카지노에서 블랙잭을 하곤 했는
데 그때마다 잃었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카지노에 오는 손님의 99퍼센트, 아니 100
퍼센트가 일고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태백의 폐광 지역에 카지노르 만든다고 하자 관련 기업의주식이 무려 열
배나 뛰지 않았던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카지노는 누가 뭐래도 황금 알을 낳는
거위임에 틀림없고,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확산 일로에 있는 것이다.
카지노르 상대해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런데 경훈이 은근히 경
시했던 필립 최라는 사람은 그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조건은 무엇입니까?」
「많은 돈을 잃어보아야 하오.」
그럴 법한 얘기였다. 이것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바둑을 이기려면 우선 많이 져보아
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나 카지노 도박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경험을 얻을 만큼만 잃기는 어렵소.」
「무슨 뜻이죠?」
「돈이 있는 동안은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잃고 만다는
뜻이오.」
「그러나 잃은 경험이 있다면 다음에는 적은 돈으로도 재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필립 최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되오. 왜냐하면 많은 돈을 잃는다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조건이기
때문이오.」
「그 다음 조건은 무엇입니까?」
「창조적 머리와 배짱,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부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오.」
「창조적 머리라고 하는 것은 그냥 좋은 머리로는 안 된다는 뜻입니까?」
「그렇소.」
「배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승부에 대한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승부욕이 승화되어 더욱 안정되고 깊이가 있는 단계요.」
「어렵군요. 마지막 네 번째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요?」
「항상 이길 수 있다는 굳센 자신감, 그리고 돈을 다 잃더라도 자신이 돈 따위에 휘
둘리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고 여기는 스스로에 대한 경애감을 뜻하오. 이것은 자신
이 세운 원칙을 존중하게 해주지.」
「참 어렵군요. 」
필립 최의 얘기는 다분히 철학적이었다. 경훈은 만약 이 사람이 말이 맞다면, 케렌스
키가 비록 천재적 머리를 가졌다 하더라도 도박에서 이기기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네 가지 조건은 단순히 외적, 내적 조건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
서는 갖추기가 불가능한 경지의 것들이었다.
경훈은 이렇듯 합리적이고 철학적으로 도박을 이해하고 있는 필립 최에게 차츰 호감이
갔다.
「최 선생님은 그 네 가지조건을 다 갖추고 계십니까?」
경훈이 웃으며 묻자 필립 최도 미소를 지었다.
「그 네 가지 조건은 겨우 출발에 불과하오.」
「또 있습니까?」
「그렇소. 그 다음 단계인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이겨야 하오.」
「자신과의 싸움이라구요?」
「욕망과의 싸움이지.」
「.......」
더욱 어려운 얘기였다. 누가 욕망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수도사나 고승에게조차 쉽지 않은 일인데요.」
필립 최는 고개를 들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유난히 하얀 피부 위에 건너편
엑스캘리버 카지노에서 내쏘는 파란 네온 불빛이 비쳐 신비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는
손등으로 잔 수염이 나 있는 턱을 문질렀다.
「도박에서 이기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크게 깨달은 수도사나 고승이 되는 것보다 훨
씬 어려운 일이오. 바늘 끝만한 실수도 바로 파멸이나 죽음으로 이어지니까.」
「도박이란 운이 좋아 이기는 게 아닙니까? 흔히 처음 하는 사람들이 딴다고 하잖아요.
처음 하는 사람은 기술이 좋을 리 없으니까 운이 모든 것을 좌우하지 않습니까?」
「프로는 운을 얘기하지 않는 법이오. 」
필립 최의 대답은 간단했다. 경훈은 그의 수준이 이미 도인에 못지 않다는 것을 간파
했다.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는 법이다. 경훈은 케렌
스키가 이런 필립 최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날 경훈은 로스엔젤레스로 가서 한국행 비행기표를 샀다. 그는 자신이 2년 간의
미국 생활 끝에 커다란 숙제를 얻어간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우
연히 휘말리게 된 일에 대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추적
「여어, 이 변호사. 얼굴이 좋아졌어.」
법무법인 코리아인터내셔널 대표는 귀국한 경훈을 반갑게 맞았다. 그는 경훈으로부터
케렌스키의 자살에 대해 듣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 케렌스키가 도박에 져서 자살했다니, 얼마를 잃었는지 모르
지만 그 사람 능력으로는 얼마든지 헤쳐나갈 수 있었을 텐데.」
「단순한 도박이 아닙니다. 케렌스키 변호사는 인생의 의미를 도박에서 찾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시고 말았죠. 게다가 본인이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도박을 통해 깨달으
셨던 것입니다.」
「하긴 이해할 만해. 그 사람 언젠가 모임에서도 어찌나 천재를 부르짖던지......」
「…….」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 변호사 칭찬을 했는데…….」
「소송 몇 건 이긴 것밖에 없는걸요.」
「그건 그렇고 다시 같이 일하게 되어 반갑소.」
「좀 쉬었다가 나왔으면 합니다.」
「그렇게 해요. 쉬면서 이쪽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지. 오자마자 일에 파뭍혀
버리면 능률도 안 오를거요. 하지만 주변의 지인들이나 고객들에게 돌아왔다는 인사
정도는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소. 이 변호사를 아끼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잖소. 내
일부터 사무실도 마련해 둘테니 당분간 개인 사무실로 쓰시오.」
「고맙습니다.」
역시 대표는 깐깐하면서도 세심했다.
제럴드 현이 얘기한 10·26의 비밀을 추저하자면 경훈은 회사를 며칠 쉬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휴가를 내기도 곤란한 참이었다.
경훈은 며칠 간 지인들과 고객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잠시 만나 인사를 나눈 뒤 차분히
도서관에 들어앉아 10·26에 관련된 내외의 기사를 빠짐없이 검토했다. 국내 언론의
보도는 거의 대동소이한 것으로, 당시 보안사가 주축이 된 합수부의 발표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경훈은 기존의 발표와 분석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가설을 수없이 세웠다가 무너뜨리곤
했다. 사건 자체가 워낙 최고 권력층에서 일어난데다가 수사도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
을 구가하던 보안사에서 독자적으로 한 것이고 보면, 기존의 발표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열흘 간이나 당시 자료들을 꼼꼼히 검토하던 경훈은 10·26에 대한 의문점
을 나름대로 새롭게 정리했다.
막상 정리하고 나니 새로운 의문점이 불거져나왔다. 우선 같은 합수부의 수사 발표와
기소 내용부터가 모순되었다. 합수부는 김재규 정보부장의 박 대통령 시해를 우발적
범행으로 발표하고 나서 기소할 때는 내란 목적 살인죄를 적용한 것이다.
또 김재규 부장의 진술도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는 합수부에서 심한 고문을 당할 때는
“야당에 대한 정보부의 공작 실패와 부마사태에 대한 유약한 대응으로 대통령으로부
터 질책을 받았다. 따라서 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던 중 차
지철이 말 끝마다 자신을 깔아뭉개고 대통령이 동조하여 인격적으로 모멸감을 느껴 범
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을 받을 때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유
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진술했다.
경훈은 아무리 사소한 자료라도 놓치지 않고 읽고 또 읽었다.
10·26에 관한 자료 중 경훈의 눈길을 잡아끌었던 것은 박정희의 ‘자주 국방론’이
었다. 김재규가 정책상 박정희를 반대한 가장 큰 이유로 들었던 자주 국방과 관련된
모든 자료 검토를 끝내자 경훈의 발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무슨 일이든 시작
하면 대충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경훈은 탐문 끝에 말이 좀 통할 만한 수사관을 찾아냈다. 부자검사로 있는 선배를 통
해 만난 오십대 중반의 전직 수사관은 처음에는 다소 불안한 눈길로 경훈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이미 김재규 건과 관련해서는 모든 공소 시효가 소멸된 것을 떠
올린 듯 곧 당당한 태도를 회복했다.
경훈은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소주 한잔쯤 걸칠 수 있는
편한 음식점으로 그를 안내했다. 전직 수사관은 소주를 반 병쯤 마시자 거북살스런 느
낌이 없어졌는지 탁한 목소리로 얘기를 꺼냈다. 그는 경훈보다 스무 살 이상이나 나이
가 많았지만 변호사라는 신분이 부담스러운지 말투가 아주 깍듯했다.
「하루는 왼쪽만을, 또 하루는 오른쪽만을 무자비하게 팼습니다. 대통령을 시해한 인
간이니까 보호할 가치고 뭐고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왜 그렇게 한쪽만을 때립니까?」
「그래야 더 고통스럽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온몸을 다 맞으면 감각이 무뎌지거든
요.」
경훈은 전직 수사관의 얼굴에서 표독스런 표정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
을 보며, 김재규가 서빙고에서 당했을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건강이 몹시 나빴는데 고문을 할 수 있었습니까?」
「아무추어는 따귀 한 대 때리다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는 전문가들입니
다. 전문가들은 흔적도 없이 지옥보다 심한 고통을 줄 수 있다 그거죠. 건강 같은 것
은 문제도 안 됩니다.」
전직 수사관은 일단 자신의 전공 분야에 들어가자 학술적 설명이라도 하는 듯 진지해
졌다.
「김재규는 수사 중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김재규의 모든 진술은 박 대통령을 존재한다는 베이스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
서 박 대통령의 여자 관계 등에 대해서도 부하들에게 입을 다물 것을 요구했지요. 그
것은 자신에 대한 동정 여론을 구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요소였는데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박 대통령을 영화배우·탤런트·모델·가수, 심지어 여대생까지 당대의 미인
들이라면 가리지 않고 탐닉한 독재자로 밀어붙이면 여론이 얼만 들끓었겠습니까? 사람
들은 그런데 민감한 법익, 그런 사실이 유신 독재의 폐해를 간접적이지만 가장 감각적
으로 보여줄 테니까요.」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네, 김재규는 처음에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강한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자신을
반드시 살아난다고 믿는 것 같았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자신감은 엷어지고
있었지요. 12·12 후에는 극도로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을 보였습니다. 무언가를 애타
게 기다리다가 결국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듯한 모습이었거든요. 그때부
터 그는 논리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혁명론을 구성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지
요.」
「그에게 자유롭게 진술한 분의기가 주어진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수사관에게는 본능적 판단력이 있어요. 자신이 신문하는 이 사람이 나
중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정확하게 예측합니다. 우리에게는 김재규가 죽는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큰일을 저질렀는데, 나타나는 배후 세력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러니 그의
운명은 뻔한 것이고 진술은 다만 형식적이었던 겁니다. 갈길이 정해져 있었단 말이지
요. 그는 연행되던 그날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
경훈은 잠시 그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사건이 있던 날 밤 김재규는 육군 본부 벙커로 갔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대통령을 살
해한 사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결국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사실을 전해들은 정승화,
노재현에 의해 체포된다. 그후 그는 보안사 정동 분실에서 김재규는 이학봉 중령의 지
시를 받은 신동기 수사관에 의해 무참하게 얻어맞는다.
키는 작지만 갖가지 무술에 능하고 간이 큰 신동기는 “이왕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보
아야 할 상황이라서 무식하게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그는 한 달 전 중앙정보부 부설
정보학교에서 여섯 달 과정의 정보 교육을 마칠 때 성적이 우수하여 김재규 부장으로
부터 상을 받은 적도 있고 호송하는 과정에서 다소 정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은 안면을 몰수 할 때라고 판단했다. 김재규와 공모한 반란 부대를 알아내 조치를 취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수사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자백을
빨리 받아내는 방법은 물리력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어이, 김재규, 솔직히 이야기하자. 어느 군부대를 몰고 올 거야? 우리도 알아야 손들
고 항복할 것이 아닌가.
신 수사관은 이때부터 한 30분 간 김재규를 ‘거칠게’ 다루었다.
정보부장 김재규는 살인범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어느 군단과 결탁했어?
-없습니다. 단독으로 시해했습니다.
김재규는 쇠로 만든 의자에 앉았다가 나뒹굴어질 때마다 스스로 의자를 바로세운 뒤에
자세를 딱 바로잡고 앉아서 다음의 타격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꼭 일본 무사 같았다.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조갑제.『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비판 한 적은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그는 깍듯이 자신이 살해한 대통령이 잠들어 있는 북망산을 향사여 무릎
을 꿇고 고개를 숙이곤 했습니다.」
「박 대통령의 정책 등과 관련해서는 어땠습니까?」
「글쎄요. 김재규는 실상 철저한 박정희주의자였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이념보다는
감정으로 인간 관계를 설정하는 듯한 태도를 느낄 수 있었는데, 그는 한평생 박 대통
령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를 추종하는 듯한 그로서는 은
혜를 배신으로 갚은 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겁니다. 그는 틈만 나면 살해한 무
슨 뚜렷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까?」
전직 수사관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김재규는 무조건적으로 박정희를 추종했지만, 굳이 들자면 한 가지 점에서는 비판했
습니다.」
「자주 국방?」
「내 나라를 내가 지키자는 게 자주 국방인데 그게 왜 나쁘다고 생각했을까요?」
경훈은 전직 수사관을 통해 김재규가 박정희의 자주 국방론을 부정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전직 수사관과 헤어져 돌아오면서도 경훈의 머리에선 의문이 떠
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10·26의 비밀이 무엇이든 간에, 의리의 사나이 김재규가 유독 자주 국방을 박정희의
잠꼬대라고 했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실마리
경훈은 제럴드 현의 한국에서의 활동을 알아보려 했지만 그가 근무하던 주한 미군의
고문관실이란 곳은 그리 만만하게 접근할 수 있는 데가 아니었다. 매우 민감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이 기관은 실제 주한 미군의 귀와 눈인 동시에 수많은 한국의 유력
인사들을 보이지 않게 지배하는 곳이었다. 선이 닿을 만한 선배 몇 명을 찾아가서 부
탁해 봤지만 모두 난색을 표했다.
그렇게 고전하다가 경훈은 제럴드 현이 조울증에 걸렸던 것을 생각해 냈다. 군에 있을
때 병을 얻었다면 그는 미8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미8군병원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었다.
저심때 경훈은 같은 회사의 변호사인 지미를 불러냈다. 미국에서 예일대를 졸업하고 2
년간 뉴욕의 로펌에서 근무하다가 한국으로 온 그는 성품이 선략하고 친절했다. 지미
는 회사의 많은 변호사들 중에서 특히 영어에 능통한 경훈과 가까이 지냈다.
경훈은 지미를 인사동의 한식집으로 데려갔다. 여느 외국인과 달리 한국 음식에 매료
되어 있던 지미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경훈은 식사를 끝내고 부근의 전통 찻집에
들어가 차를 시킨 다음 얘기를 꺼냈다.
「이봐, 지미. 8군병원 일을 맡고 있지?」
「그래. 그런데 왜?」
지미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경훈이 평소와 달리 식사 도중에도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
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전담하다시피한 미국 대사관과 관련하여 어떤 부탁을 하려는
게 아닌가 짐작했다. 한국인들은 비자 발급이 여의치 않을 경우 종종 자신에게 문제를
상의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훈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에도 미8군병원이었다.
「8군병원의 기록을 좀 볼 수 있을까?」
「기록? 무슨 기록?」
「진료 차트 말이야.」
「음, 이런 부탁은 처음인데.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아.」
「아냐,어려울 수도 있어.」
「글쎄, 그까짓 게 뭐 그리 어렵겠어.」
「그런 일이야 네가 더 잘 알겠지만 하여튼 한 환자의 진료 차트를 좀 보게 해줘.」
「알았어.」
경훈은 제럴드 현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적은 쪽지를 지미에게 넘겨주었다.
「어디가 아팠던 사람이야?」
「조울증.」
「조울증?」
「그래.」
지미는 조울증이란 말에 관심이 가는지 쪽지를 살피더니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나이를 보니 옛날에 근무했던 사람 같은데…….」
「기록이 없어지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환자 기록은 무엇에 쓰려고 그래? 소송이라도 붙었나?」
「이유는 물어보지 마.」
「급한 거야?」
「가능한 빨리.」
「알았어. 병원에서 물어보면 내가 적당히 둘러대지.」
지미는 오후에 바로 경훈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경훈이 찾아가자마자 그는 제럴드 현
에 관한 자료를 꺼내놓았다.
「찾느라고 고생 좀 했어.」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짐작이 갔다.
「차트실에는 기록도 안 돼 있는 사람이더군.」
「그런데 어떻게 찾았어?」
「둘어대다 보니까 나도 몰래 정곡을 찔렀더라구.」
「무슨 소리야?」
「차트에 없다 하더라도 엑스레이나 기타 검사실에서 독자적으로 보관하는 기록에는
이 사람의 이름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 다른 병원에서도 그렇게 기록을 찾아 환
자의 이익을 보장해 준 선례가 있다고 우겼어.」
「천재적 거짓말이군.」
「병원에 있는 기록이란 기록은 모두 다 뒤졌어. 컴퓨터에 입력된 자료는 하나도 없더
군. 그런데 어떤 친절한 여직원이 서류 보관창고를 한번 뒤져보라고 했어. 혹시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통상 혈액형 대장이 가장 잘 보관되어 있을 거라고 하더군. 과
연 그랬어. 긴급 수혈에 대비해 모든 입원 환자들의 것을 기록해 두었더라구. 이 사람
이름도 거기에 있었지.」
「고마워.」
경훈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서류를 펼쳤다. 지미가 넘겨준 제럴드 현에 관한 기록
은 의외로 간단했다. 의무 기록이 아닌 혈액형 대장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환자명 : 제럴드 현
병 명 : 조울증
입원일 : 1979년 10월 18일
퇴원일 : 1979년 10월 27일
혈액형 : A (RH+)
내용을 훑어본 경훈의 눈길이 다시 거슬러 올라가 제럴드 현의 입·퇴원일에 가서 멎
었다.
79년 10월 18일에 입원하여 10월 27일에 퇴원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경훈의 직관은 날카롭게 번득였다. 제럴드 현은 바로 10.26을 사이에 두고 입원했다
가 퇴원한 것이다. 특히 퇴원일은 바로 10.26 다음날이었다. 10.26에 비밀이 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은 그가 10.26 다음날 병원에서 퇴원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중요한 것은 퇴원 날짜만이 아니었다. 입원 날짜도 마찬가지로, 아니 오히려 퇴원 날
짜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 있었다. 퇴원 날짜가 제럴드 현이 10.26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보여주듯이, 입원 날짜는 그가 어떤 형태로 10.26과 관련을 맺고 있었나
를 보여주는 단서일 것 같았다.
10.26을 피하려는 듯 입원했다가 10.26이 발생하자마자 부랴부랴 퇴원한 것이 아닐
까? 그렇다면 그는 10.26이 발생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온갖 경우를 떠올려보던 경훈은 마침내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뚜렷한 결론도 나오지
않았다. 이 세상에 김재규 본인말고 과연 누가 10.26을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설사
제럴드 현이 10.26이 발생할 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왜 하필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
원했다는 말인가.
혈액형 대장은 짧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기록은 경훈
의 가슴속에 최소한 제럴드 현이 10.26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 거라는 심증만은 아주
뚜렷하게 남겨주었다. 따라서 그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은 이제 신빙성을 더했다.
경훈은 제럴드 현이 한국에서의 행적을 좇는 것이 10.26의 비밀을 알아내는 지름길임
을 더욱 확실하게 깨달았다.
케렌스키가 구해준 제럴드 현의 신상 명세서에 따르면 그가 한국의 정보와 공작 전문
가로 근 30년 가까운 세월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었다. 따라서 경훈은 한국인 중에 제
럴드 현을 아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훈은 공안검사로 있는 동기와 선배들을 통해 수소문한 결과, 제럴드 현을 알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우선 순위로 작성했다. 그러나 그 명단 속의 인물들 대
부분이 제럴드 현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답했다. 그들이 정말 제럴드 현을 모르고 있
는 것인지, 알고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정보와 공작
계통의 인물들은 경훈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입이 무거웠다.
그러나 마침내 성과를 얻었다. 명단의 맨 끝에서 한두 명을 남겼을 무렵 경훈은 뜻밖
에도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경찰에서 오랫동안 정보 계통에 종사하다가 은퇴한 사람
이었다.
「제럴드 현? 혹시 그 사람이 이름이 현강일이오?」
「네, 그렇습니다.」
경훈은 귀를 곤두세웠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그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있소.」
「누굽니까?」
「오세희, 예전에 치안본부 외사과 간부였소. 지금은 캐나다에 가서 살고 있지.」
「캐나다에요?」
경훈은 맥이 풀렸다. 기껏 찾았는데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니.
「혹시 주소나 전화 번호를 아시는지요?」
「그런데 무슨 일로 그러시오?」
「결코 그분에게 해가 되거나 할 일은 아닙니다.」
「해 될 일이야 뭐 있겠소. 혹 모르니 이 변호사의 전화 번호를 주시오.」
비록 나이 든 노인이었지만 아직도 정보 계통에서 일하던 깐깐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
다. 웬만해서는 남의 전화 번호를 쉽게 가르쳐줄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경훈의 선
량해 보이는 얼굴과 말하는 품 등이 신뢰를 준 모양이었다.
노인은 경훈의 전화 번호를 받아적은 후 낡은 수첩을 꺼낸 한참 이름을 찾더니 상대편
전화 번호를 불러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오. 가끔은 한국에 들어와 옛날 동료들을 찾아 술도
사고 그러지. 캐나다에서는 크게 성공했다더군.」
노인은 오세희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처음과 달리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경훈은 집으로 돌아와 캐나다와의 시차를 확인하고는 오세희라는 인물에게 전화를 걸
었다. 전화는 오세희의 비서로 여겨지는 한 여자를 거쳐 그에게 연결되었다. 한국에서
온 전화라고 하자 오세희는 반가워했다. 그런데 경훈의 질문을 듣고는 어투가 달라졌
다.
「뭐요? 제럴드 현을 아느냐구요?」
「그렇습니다.」
목소리는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오?」
「변호삽니다.」
「변호사, 그런데 무슨 일이오?」
「그분에 대해 뭘 좀 여쭈볼 것이 있습니다.」
「뭐 말이오?」
「전화로 여쭤볼 일이 아닙니다. 괜찮으시다면 찾아뵐까 합니다.」
경훈의 다짜고짜 찾아가겠다고 하자 오세희는 꽤 놀란 모양이었다. 다시 짧은 침묵이
이어진 후에 오세희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분에게 무슨 법적 문제라도 생겼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캐나다까지 오겠다는 거요?」
경훈은 도저히 무언가를 얻어낼 수 없을 것 같자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꺼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현 선생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죽음과 관련하여 몇 가지 조사를 하고 있
습니다.」
「아니, 뭐라구요? 강일이 형님이 돌아가셨다구!」
「그렇습니다.」
순간 저쪽에서 말이 끊겼다. 한동안 말이 없던 오세희는 목이 메이는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뭘 조사하는 거요?」
「제 친구가 현 선생님의 상속인입니다. 친구와 제가 그분의 마지막 유언을 듣게 되었
지요.」
「그게 무엇이었소?」
「수수께끼 같은 내용이라 저도 그 뜻을 알아내고 싶은 겁니다.」
오세희는 다시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짧게 말했다.
「그렇다면 오시오.」
「고맙습니다.」
천기누설
다음날 아침 경훈은 바로 공항으로 나갔다. 캐나다행 비행기 표는 어제 오후 전화로
예매를 해두었다. 그는 제럴드 현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경쾌하게
비행기 트랩을 올랐다. 제럴드 현이 죽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걸로 보아 오세희는 제럴
드 현과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비행기는 태평양을 가로질러 밴쿠버에 착륙했다. 입국 수속을 마친 경훈은 다시 비행
기를 갈아타고 약 두 시간을 날아 오세희가 살고 있는 에드먼턴에 도착했다.
「어서 오시오.」
공항에서 첫눈에 경훈을 알아본 오세희의 눈매는 예사롭지 않았다. 비록 점잖고 온화
한 인상이었으나 그 예리한 눈빛은 결코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었
다. 관상에
특별한 조예가 있는 경훈도 그의 나이를 쉽게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오세희요.」
「반갑습니다. 오 선생님. 현 선생님과는 가까운 사이셨던 모양입니다.」
오세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집게손가락이 잘려나가고 없었다.
「이 손가락이 잘려나갔을 때 형님이 캐나다까지 와서 나를 위로해 주셨소. 용기를 잃
지 말라고 격려해 주셨는데…….」
오세희의 굳건해 보이던 표정에 잠시 동요가 일었다.
두 사람은 주차장까지 같이 걸어가 차를 탔다. 차가 공항을 벗어나자 금방 널따란 평
원이 눈에 들어왔다. 대지는 잔디와 추수를 마친 밀밭으로 온통 덮여 있었다. 산들거
리는 바람을 맞으며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무척 상쾌했다.
「매우 평화로워 보이는군요.」
「그렇소. 여기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살아가지. 대자연을 완상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겸허함을 배우며 살다가 돌아가는 거요.」
「여기서는 어떤 일ㅇ르 하셨습니까?」
경훈은 대형 링컨컨티넨털 타운카를 유유히 몰고 있는 오세희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가 마냥 편평해 보이기만 하는 이 대지에서 어떻게 성공했는지 궁금했다.
「개발을 했소.」
「개발이라면요?」
「땅을 사서 거기에 전기와 상하수도를 놓고 도로를 만든 다음 사람들에게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분양하는 것이오.」
「그렇군요.」
경훈은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사람도 틀림없는 한국인인 것이다. 부동산이라
면 천재적 내능을 발휘하는 데는 국내외에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훈의 표정
을 슬쩍 훑은 오세희는 약간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개발을 한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오.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성
실과 인내 덕분이오.」
오세희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나는 한국에서 단돈 1천 달러도 가져오지 못했소. 요즘의 투자 이민과 비교하
면 하늘과 땅 차이지. 나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하나를 잃고 받은 보상금 3천
달러로 빈병 수집 장사를 시작했소.」
경훈은 고개를끄덕였다. 오세희는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차츰 믿음이 갔다.
「나는 우리 나라의 이민 정책과 외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오.」
경훈은 말없이 오세희의 입가를 주시했다.
「우리 나라의 잘사는 사람들, 가령 국민의 상부 30퍼센트 가량에게는 마음대로 돈을
가지고 외국에 이민 갈 수 있도록 해야 하오. 미국이든 캐나다든 돈 없이 오면 하류
생활을 면치 못하오.」
「요즘 이민 가는 사람들은 제법 돈을 가지고 나가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그냥 가게나 하고 생활을 즐길 정도밖에 안 되오. 돈 있는 사람들이 큰돈
을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하오. 그래서 사업을 할 수 있게끔 말이오.」
「언어도 짧은데 사업이 잘될까요?」
「한국인들은 반드시 성공하오. 사업을 하기에는 사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곳 중 하나요. 게다가 국내에서 돈 잘 버는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못사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계승하여 돈을 벌 수 있지 않겠소. 그들이 부유해지면 또 외국으로나가는 것이
오. 한국은 이렇게 순환되어야 하오.」
「국부가 빠져나가지 않을까요?」
「걱정 마시오. 한국인들처럼 핏줄 근성이 강한 사람들은 없소. 유대인이 유일하게 그
뒤를 따를 정도요. 이 두 민족은 가히 불가사의라 할 만하지. 중국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두 나가서 돈을 벌었소. 세계 경제를 장악한 화교들을 보시오.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모두 밖에서 번 돈으로 조국에 힘이 되고 있소. 한국도 풀어놓아야 하오. 자원
도 없는 나라에 똑똑한 사람들만 득실거리닌 갖은 사기 수법이 나오는 것 아니겠소.」
경훈은 오세희의 말에 뭐라 당장 답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느낄
수 있었다.
「아까 다치셨을 때 현 선생님이 와서 걱정해 주셨다는데 그때가 언제쯤이었습니까?」
「82년 가을 무렵이었소.」
「그분이 전역을 하신 후였군요.」
「그렇소. 미국 정부는 중요한 사람을 절대 외국에서 살도록 하지 않소. 형님은 전역
후에 바로 미국으로 들어가서 사셨소.」
경훈은 오세희가 제럴드 현에 대해서 생각 외로 많이 알고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오 선생님은 어떻게 해서 현 선생님을 알게 되셨습니까?」
「간부 후보생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한 나는 어느 정도 경력을 쌓고는 치안본부 외사
과에 근무하게 되었소. 당시 내가 하던 일은 주로외국인들의 동태를 살피고 그들 사이
에 떠도는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소.」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위치라면 자연히 제럴드 현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강일이 형님은 부정을 멀리하고 충직하게 일하는 나를 상당히 좋아하셨소. 나에게
고급 정보를 맣이 주면서 키워주셨지. 덕분에 나는 언젠가부터 대통령도 직접 뵐 수
있었소.」
「대통령을요? 박정희 대통령 말입니까?」
「그렇소. 대통령께 올라가는 경찰 보고서에 내 이름 석 자가 박혀 있곤 했소. 나는
약점이 없었기 때문에 오직 애국심 하나로 좌충우돌할 수 있었지. 박 대통령께서는 민
감한 현안에 대한 서면 보고가 올라가면 나를 직접 부르곤 하셨소. 대통령께서 일개
경감에 불과한 나를 청와대로 부르셨던 것은 우리 사이에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
오. 바로 사심 없는 애국심이 그것이오. 우리는 서로 느낄 수 있었소.」
경훈은 오세희가 사업을 한다지만 아직도 깨끗한 공직자의 기개 같은 것이 살아 있는
사람임을 느꼈다.
오세희는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달리면서 간간이 바람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렸
다. 그의 빈틈없고 깨끗한 매무생서 한국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르는 듯 했다.
「나는 죄질이 나쁘면 고위 공직자든 재벌이든 가리지 않고 보고서를 써댔소. 어떤 때
는 감히 대통령께도 달려들었소.」
「무슨 일로요?」
「지금 생각하면 대통령의 입장이 이해되지만…… 당시 나느 젋었겠다. 오직 애국심
하나로 사리를 판단했기 때문에 대통령께서 통치적 이유로 몇몇 부패한 사람들을 보호
하시는 것을 참을 수 없었소.」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부패를 경멸하는 젊은 공무원과 나라를 끌고 가야 하는
대통령 간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갈등이었다.
「사실 내가 민감한 보고를 잘할 수 있었던 것은 강일이 형님 덕이었소. 그분은 모든
정보를 알고 계셨으니까. 마치 구름 위를 노니는 신선 같았다고나 할까.」
「현 선생님은 무엇을 하시던 분입니까?」
「모든 것을 다 하셨소.」
「네?」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관장하시던 분이오.」
경훈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제럴드 현이 한국의 정보와 공작을 관장하던 인물이었
다고 하나 그렇게까지 표현하는 것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세희는 경훈의 그런 심리를 짐작한 듯 말을 이었다.
「형님은 5.16혁명 때부터 관여하시기 시작했소. 형님과 한국 정부의 관계는 바로 한
국의 현대사와 다름없소.
「그분은 5.16이전에 한국에 오셨나요?」
「그렇소. 형님이 한국에 오시고 얼마 안 돼 바로 군사 혁명이 났소. 그런데 형님은
이미 5.16이 날 것을 아시고는 앞으로 한국에서 당신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소. 당시 태평양 사령부 소속으로 한국에 건너오셨으니까.」
「5.16이 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구요?」
「그렇소. 형님은 조국에 깊은 애정을 품고 계셨소. 도쿄의 사령부에서 정보장교로 근
무하시던 때부터 틈만 나면 한국으로날아와 정보를 수집하시곤 했소. 그러다가 5.16
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셨지.」
「도대체 어떻게 그런 극비 정보를 얻으셨을까요?」
「거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소.」
오세희는 옛날이야기라도 하는 듯 감회 어린 얼굴로 서두를 꺼냈다.
「당시 박정희 소장은 이미 군사 혁명을 결심하고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소.
워낙 큰일이라 노심초사하던 그는 종내는 대여섯 명의 부하를 데리고 동대문 옆에 사
무실을 내고 있던 지창룡을 찾아갔지. 지창룡은 6.25를 예견하고 동작동 국립묘지 자
리를 지정하는 등, 이승만 대통령의 국사(國師)로서 이름이 높았소.」
「박정희 소장이 거사 전에 그를 찾아간 것은 무모한 행동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면도 있겠지.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계산이 서 있는 행동이었다고도 할 수 있
소. 즉 성공할 관상이라면 지창룡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리라 확신했던 거요.」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혁명을 일으킨 사람다운 대담한 행도이었다.
「동대문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하오.」
1961년 벽두였다.
사복 차림의 다부진 사내 다섯 명과 군복 차림의 사내 두 명, 이렇게 일곱 명이 동대
문운동장 옆 을지로 7가에 있는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군복 차림을 한 두 사람의 계급을 보니 하나는 육군 대령이요 다른 한나는 중령이었다.
나머지 사복 차림들도 단정한 머리와 절도 있는 거동 등으로 봐서 군인들임을 알 수
있었다.
「선생, 선생의 역술이 귀신 같다기에 이렇게 찾아왔소. 오늘이 마침 토요일이고 해서
오후에 잠깐 시간을 냈소이다. 우리 모두의 신수나 좀 봐주시오.」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령 한 사람만 빼고 나머지 여섯 사람 모두가 얼
굴 가득 상서로운 기색으로 차 있는 게 아닌가. 아무리 일행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모
두가 길상일 수는 없었다. 중령의 얼굴을 보니 머지않아 곧 차관급으로 영달할 상이었
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장관급에 오를 대길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
는가.
아찔했다.
나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핑계를 대고는 자리를 피해 바깥으로 나왔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연방 눈을 비벼보았다. 참 별스러운 일이었다. 그간 수많은 사람들을
상담해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직감적으로 와닿는 게 있었다. 나는
냉정한 마음으로다시 들어갔다. 한 번 더 그들의 상을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두 번
보아도 분명 만면달기의 기색들이었다.
「당신의 나이가 올해 몇이오?」
더 이상 거칠 게 없었다. 나는 사복 차림을 한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나이를 물으면
서 선언하듯 일러줬다.
「곧 장관이 될 것이다.」
네 사람 다 장관이 될 거라고 하자, 모두가 어이없어하는 기색들이었다.
다음은 중령의 나이를 물었다. 처음에 본 대로 장관은 어렵겠고, 차관급은 될 상이었
다.
그 다음은 대령이었다.
「당신은 일심을 가지면 충신인데, 지금은 분명 이심을 가지고 잇으니 부디 관계를 조
심하시오. 화를 당할 것이 염려되오.」
그랬더니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그의 상을 보니 인당이 붉고 준두에 흑기가 끼어 있
었다.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모두 다 보아주고 이제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아주 다부진 인상의 키가 작은 위인이
었다. 두 눈에서 불꽃 같은 영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선생, 나는왜 안 봐주는 거요? 나도 마저 보아주시오.」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허허, 물론 봐드려야지요. 여러분들은 잠시 나가서 기다려주시오. 이분만 남게 하고
말이오.」
나머지 여섯 명이 두말 않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들이 꾸미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지금은 정치적 혼란기였다. 4.19의거를 계기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7.29총선을
통해 집권한 민주당은 신구 양파로 분열되어 원색적인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국
민들의 정치 의식도 성급하게 고양된 나머지 남북 분단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다소 잊
고 있는 시점이었다. 뿐더러 군부 내부에는 파벌간의 대립 구조가 심화되어 있는 상태
였다. 그렇다면 자명했다.
혁명, 그리고 새로운 제왕, 대통령의 출현!
이들은 성공할 것인가.
찰나에 걸쳐 생각을 달려야 했다. 입술이 타들어 오는 결단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감췄다. 천기누설을 하지 않으려는 뜻이었다. 오직 마으으로만
전해야 하는 극비 사항이었다.
나는 사복 차림의 마지막 사람과 마주앉아서 아주 조용히 말했다.
「먼저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
「실례의 말씀이오나 오해는 마시고 제 말씀을 들어주시오. 지금 선생님께서는 뭔가
계획하고 계신 일이 있습니다. 아마 4월 며칠쯤으로 잡아놓고 있을 겝니다. 이날은
실패의 날입니다. 한달 뒤인 5월로 연기하여 거시하시면 뭔지는 몰라도 대성하실 겝
니다.」
내가 여기까지 말해도 그는 아무런 응답이나 미동도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 까닭을 설명해 주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선생 얼굴 전체가 좋은 기색으로 충만하기는 하온데 이마의
일각 옆의 보각 부위가 꽉 막혀 있어서 선생이 생각하신 날에 거사하시면 실패로 끝납
니다. 반드시 내가 일러준 날을 참고하십시오.」
그는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거였다. 물론 입은 열지 않았
다.
이로써 나의 감정은 끝났다. 그가 밖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만 들어오라고 하자 모
두가 들어와 앉았다.
그중 한 사람이 내게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보시오. 우리는 선생이 관상을 잘 보신다고 해서 심심풀이로 신수나 좀 볼까 하고
왔는데 엉뚱하군요. 선생 같은 엉터리는 처음 봤소이다. 아니, 저 친구가 이제 중령인
데 곧 장관급에 오른다니 어디 생각 좀 해보십시오. 장관급이 되자면 적어도별 셋 정
도는 달아야 하지 않겠소? 나도 장관, 저 사람도 장관, 아니 선생은 장관 병이라도 걸
린 사람 같소이다. 너무도 틀리니 없었던 걸로 하십시다 그려.」
「그럼 그러십시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돌아갔다. 없었던 걸로 하자는 말은 일종의 묵계 같은 거였다. 그
쪽에서는 비밀을 보장해 달라는 뜻이고, 이쪽에서는 염려 말라는 뜻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하루하루 초조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정월 대보름, 여느 때처럼 지방
으로 별자리를 보러 갔던 나는 북방 8수 가운데 하나인 위성이 심하게 요동치는 걸
똑똑히 보았다. 세 개의 별로 구성된 위성이 움직이면 군사가 일어날 징조였다. 과연
몇 달 뒤 5·16군사혁명이 터졌고, 예전에 찾아온 눈이 서리한 군인이 박정희 소장이
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떠올랐다.
-지창룡,「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혁명가
오세희는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들은 모두 비밀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형님의 정보망을 빠져나가진 못했소.」
「아마도 그 대령이....」
「자세한 것은 모르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지금이나 당시나 미국의 정보망이 대단하
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지. 당시 형님은 미국의 눈이요. 귀였으니까. 일선에서
의 정보를 독식하셨소.」
「현 선생님은 그 정보를 상부에 보고하셨습니까?」
「아니오. 형님은 진지하게 고민하셨소. 당시의 남북 대치 상황에서 민주당 정부는 갈
피를 못 잡아 흔들리고, 사회는 혼란에 빠져 있었소. 군부조차도 파벌이 갈려 있는 상
황이라 형님은 과연 어떤 길이 최선인가를 깊이깊이 생각하셨소. 그러다 그 지창룡이
라는 사람을 직접 찾아가 보기로 하셨던 거요.」
「그를 취조하셨습니까?」
「아니오. 과연 그가 용한가 어떤가를 알아보시려 했던 거지.」
「그거 참 재미있군요.」
「형님은 지창룡에게 신수를 봐달라고 하셨소. 그러자 그 양반은 첫마디에“당신은 물
건너서 온 분이군요”하더라는 게지.」
「그래서요?」
「형님은 시침을 떼고 무슨 일을 하면 먹고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소」
「그랬더니요?」
「그 양반 얘기가“세상에서 제일 큰 나라가 평생 먹여 살리는데 무슨 먹고 살 일을
걱정합니까”하더라는 거요. 형님은 그 소리를 듣고 얼른 나와버렸다고 하셨소.」
「그래서 그 지창룡이라는 사람의 말을 믿고 박정희 소장을 밀어주셨습니까?」
「아니오. 혼자서 고민을 거듭하시던 어느 날 혁명이 터저버렸던 거요.」
「그럼 현 선생님은 5·16을 방관하셨나요? 미국의 정보장교로서 모든 것을 알면서도
방조하셨나요?」
「그런 것은 아니오. 형님은 박정희 소장을 깊이 있게 관찰하셨다고 했소. 그의 행적,
사상 등을 철두철미하게 좇으셨지. 형님은 태평양사령부에 창원을 내 아예 주한 미군
사령부로 자리를 옮기셨소. 형님으로서는 박정희 소장의 우국충정에 조금이라도 문제
가 있으면 즉각 그를 도태시킨다는 복안을 가지고 관찰하셨지만, 형님이 보시기에 박
정희 소장은 신념을 가진 애국자였소.」
「그래요?」
「형님이 그를 찾아가셨지. 형님은 5·16 직후 박정희소장과 직접 맞대면하셨소. 비밀
리에 관찰하던 입장에서 벗어나 이제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미국 정보 담당자의 입장
에서 박정희 소장이 어떤 인물인가를 심사하고 평가하기 위해 만나셨던 거요.」
「대단한 위치에서 한국의 1인자를 만나실 수 있었군요.」
「그렇소. 항상 비상시에는 정보와 공작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가장 무서운 법이요. 당
시 미국에서는 형님에게 한 장의 서류를 보냈소. 그 서류는 박정희 소장의 신상 명세
서였는데 거기에는 박정희 소장이 적색 분자로 기록되어 있었지. 쿠데타를 일으킨 박
정희 소장의 사상. 특히 그가 공산주의자인가 아닌가를 엄밀히 판단하여 즉각 보고하
라는 지시가 내려왔던 것이오.」
「그 신상 명세서는 누가 작성했던 것입니까?」
「형님은 그것이 CIA 본부에 있던 서류라고 하셨소.」
「박정희 소장은 그 서류에 대하여 현 선생님에게 해명했습니까?」
「아니오. 미육군의 대위 계급장을 달고 나타난 형님을 대하는 박정희 소장의 태도는
당당해소. 그래서 형님이 상당히 힘드셨지.」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던 박정희 소장으로서는 마냥 당당하게
만 나올 수는 없었을 텐데요.」
「거기에 박정희 소장의 풍모가 있어소.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일본인 밑에서 머리
숙이고 살아야 했던 그는 자기 일생일대의 혁명이 성공하는 순간 또다시 미군 계급장
을 달고 나타난 사나이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러나 상대의 기분
을 거스를 수도 없었을 테고, 박정희 소장이 어떻게 했는지 아시오?」
「.....」
「형님은 박정희 소장과 사흘 간 마주앉으셨소.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내야겠다는 투지
로. 당시 형님은 진정 그가 공산주의자인지 어떤지를 알아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절
실히 느끼셨던 것 같소. 그 상황에서는 공산주의자에게 정권을 넘길 수는 없다는것이
형님의 신념이었으니까」
「그랬군요.」
「박정희 소장이 너무 당당하게 나오는 터라 형님은 몹시 화가나셨소. 그런 태도가 자
신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막혁명에 성공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미국에 고개 숙이며 권력을 구걸할 수 없다는 박정희 소장의 신념 때문임을 깨닫기에
는 당시 형님의 나이가 너무 어렸던 것이오.」
「그렇겠군요. 현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일찍 거세할 수도 있었지만 그동안 봐주고 있
던 박정희 소장이 딱딱거리는 것이 곱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이미 혁명을 일으키기 전부터 미군 당국은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박정
희 소장을 거세할 것을 종용했소. 그런데 형님이 약간 보류를 시키셨지. 형님은 그 키
작은 장군에게서 신념 같은 것을 느끼셨기 때문이오. 그러던 터에 혁명이 일어났고,
명색이 미군 정보 담당관인데다가 혁명을 추인해 주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권한조차 가
지신 형님이었으니 박정희 소장의 태도를 불손하게 보신 것은 당연했지」
「두 사람이 심하게 충돌했겠군요.」
「아니오. 형님은 결국 박정희 소장에게 머리를 숙이시고 말았소.」
「무슨일이 있었습니까?」
「마치 미국의 사냥개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다는 듯 끝까지 당당하게 나오던 박정희
소장이 마지막 순간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일어나시려는 형님을 부르더니 말없이
손을 꼬옥 쥐었소.」
「현 선생님은 당혹스러우셨겠군요.」
「그랬겠지. 그러나 박정희 소장은 손을 밭잡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형님의 눈을 지그
시 들여다보았소. 한참이나 눈 속 깊숙이 응시하던 박정희 소장의 눈에서는 이윽고 눈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소. 형님은 그때 느끼셨던 거요. 마치 순간적으로 해탈에 이르듯
이 그 눈물의 의미를 일순간에 깨달아버리셨지. 형님도 억장이 무너지는 듯해 그만 눈
물을 흐리셨소. 박정희 소장의 눈물은, 지난 1백 년 간 강대국의 간섭과 지배 속에서
쌓여온 한과 분노를 안고 혁명을 일으켰건만, 또다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에 빠진 한 민족주의자가 흘리는 눈물이었던 것이오. 형님은 후에 박정희 소장의 눈물
과 티우의 웃음을 곧잘 비교하시곤 했소.」
「티우라면?」
「미국의 쿠데타 공작에 의해 월남의 육군 중령에서 일약 대통령이 된 사람 말이오.
그는 대통령이 되자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미국 대사는 물론 미군의 정보 담당관 앞에
서까지 자진해서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했소. 잘 부탁한다고 거듭거듭 고개를 숙이
면서. 그러나 박정희 소장은 혁명이 성공하는냐 실패하느냐의 결정적 순간에도 비굴하
지 않았소. 미군 정보관으로 한국의 쿠테타를 심사하러 나타난 형님 앞에서 끝까지 당
당하게 처신했던 것이오. 하지만 그 가슴속은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겠소. 형님은 그
의 눈물에서 약소국을 이끌어 진정 민족의 미래를 밝혀보겠다는 투지를 불태우는 한
인간의 진실을 보셨던 거요. 그러면서 혁명의 성공을 위해 한민족의 자존심까지 내팽
개칠 수는 없다는 한 한국인의 고뇌도 읽으셨던 게지. 협잡꾼의 가벼운 웃음이 아닌,
영웅의 진정한 눈물이 형님의 가슴을 적셨던 것이오.」
오세희의 눈에는 어느새 물기가 어려 있었다.
「형님은 그 길로 물러나와서는 본국에 타전했던 거요. 박정희 소장은 한국을 이끌 확
실한 지도자이며 투철한 반공주의자라고 말이오.」
정훈은 가슴이 뭉클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군요.」
「형님은 이렇게 한국사의 전면에 등장하시게 되었소.」
「그렇다면 현 선생님은 박정희 정부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셨겠군요?」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 같소. 형님에게는 세상일을 냉정하게 보실 수 있는 눈이
있었지. 박 대통령이 잘하는 것은 지원하고 못하는 것은 과감하게 철퇴를 가하셨소.
그것이 바로 형님의 임무였으니까」
「잘하고 못하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셨던 겁니까?」
「음. 그것은 미국의 기준이었소」
「그러면 그분도 역시 어쩔 수 없는 미국의 허수아비였군요.」
「형님은 기본적으로 미국 정부의 공무원이셨소. 다만 그분의 가슴속에 민족에 대한
끓는 피가 있었던 거지.」
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혁명 직후 박정희와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경훈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저는 지금 10·26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현 선생님이 마지막 순간에 저와
통화하시면서 10·26에는 비밀이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형님의 유언이 그것이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저는 우연찮게 고인의 유언을 듣게 된 셈입니다.」
오세희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 자세히 듣고 싶소」
경훈은 인남의 이야기며 그로 인해 자신이 전화를 받게 된 이야기, 그리고 10·26에
비밀이 있다는 마지막 말까지 오세희에게 들려주었다.
「그렇게 된 것이군. 그래 형님의 장례는?」
「예. 조금 전 말씀드린 인남이란 친구가 장례를 치렀습니다.」
「고마운 일이군」
「슬픔이 크시겠지만……마지막에 하우스라는 말도 하셨는데 혹시 짐작 가는 일이 없
습니까?」
「하우스라……글쎄, 청와댄가?」
오세희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참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하오.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소.」
그러나 경훈은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제럴드 현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에게서 뭔가 얘기를 끌어내야 했다.
공작
「기이하게도 현 선생님은 1979년 10월 18일에 8군병원에 입원했다가 10월 27일에
퇴원했습니다. 27일에 퇴원하신 것은 틀림없이 박 대통령의 서거 때문입니다. 막중한
책임을 지고 계시던 분이 그런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침대에 누워 계실 수는 없었겠
지요. 그런데 그분은 왜 18일에 입원하셨을까요?」
오세희는 경훈의 말을 듣자 다시 한 번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10·26을 피하려고 하신 듯하군」
「그렇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병명도 무슨 급성 질환이 아니라 조울증입니다.」
오세희도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를 일이군.」
「혹시 그분은 사전에 10·26을 알고 계시지 않았을까요?」
잠시 생각하던 오세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는 없소. 형님은 박 대통령을 매우 존경하셨소. 뿐만 아니라 대통령가의 사
람들과도 친하셨지. 당신이 대통령의 영애 근혜 씨를 사모한다고 나에게 고백하신 적
도 있으니까」
「네?」
「놀랄 것은 없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형님이 혼자 사모
하셨을 뿐이오. 사실 그 당시 한국인치고 근혜 씨의 조용하고 사려 깊은 모습을 흠모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경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형님한테는 낭만적인 가질이 있었소. 늘 바바리 코트 차림으로 기분이 나면 가끔 영
시 한 편쯤 읊조리기도 하셨고, 비 오는 날이면 대낮부터 스탠드바에 앉아 스카치를
홀짝거리기도 하셨소. 그럴 때면 내가 대작을 해드렸지.」
「기는 크신 편이었습니까?」
「아니오. 키는 그리 크시지 않았지. 중키에 어깨를 약간 꾸부정하게 굽히시고 다녔소.
선량한 눈빛에 늘 점잖은 어휘를 구하셨고.」
그랬을 것이다. 그 시절에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다니다 워싱턴대학으로 유학 갔다면
그 정도의 낭만은 구가하던 인텔리였을 것이다.
「형님이 10·26을 미리 아셨을 리는 없소. 하지만 이 변호사말데로 형님이 10월 18
일에 입원했다가 27일에 퇴원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소.」
「네? 그 이유를 물어볼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오세희는 경훈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렇소. 아주 적격한 사람이 있소.」
「누굽니까?」
「언젠가 형님이 내게 의사 한 사람을 추적하여 연락이 닿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셨소.
알아보니 그 의사는 캐나다의 몬트리올에 있는 한 병원에서 연구원으로 오래 근무했더
군」
「그래서 오 선생님께 부탁을 하신 모양이군요.」
「그렇지는 않소. 그때까지도 형님은 그 사람이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알지 못하셨승니
까. 사람을 찾는 일은 내가 전문이었소. 또 나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기도 했겠
지.」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가 누구기에 현 선생님이 연락이 닿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셨을까요?」
「그 의사는 한동안 용산 미8군병원에서 재직했던 사람이오.」
「8군병원에요? 그렇다면 현 선생님이 입원해 계셨던 당시의 의사기 쉽겠군요.」
「바로 맞혔소. 그는 형님의 주치의였소.」
「그랬군요. 그래서 연락이 닿았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소.」
「왜 그렇습니까?」
「그 의사를 찾고 나서 기쁜 마음으로 연락을 드렸지만 당시 형님은 병세가 매우 악화
되신 상태였소. 누구를 만나기는커녕 하루 종일 말씀도 한마디 안 하실 때였지. 그후
로는 나와도 거의 연락을 끊으셨소.」
「현 선생님은 왜 그 의사를 찾으셨을까요?」
「보시고 싶었겠지. 형님은 그에 대해 무척 좋은 인상을 가지고 계셨소. 전역하실 때
에도 그가 형님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서류를 작성해 주었다고 하셨소.」
「서류를 유리하게 작성해 주었다는 것은 무슨 얘깁니까?」
「형님이 공직 수행을 하다가 업무상 스트레스를 너무 심하게 받아 평생 낫기 힘든 병
을 얻었다고 적어주었소. 상당한 연금을 받으실 수 있게 해주었던 거지.」
「그랬군요. 그래서 현 선생님은 그 의사에게 애정을 느끼고 계셨고, 조울증 환자에게
흔히 나타나듯이 그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믿으시고는 오 선생님께 그
와의 연락을 부탁하셨던 거군요.」
「그랬던 것 같소.」
「어쨌든 두 분을 만나게 해들릴 수 있지 않았나요?」
「그런데 그 의사는 당시 매우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었소. 개업을 했다가 환자가 사
망하는 의료 사고가 생겼지. 처방해서는 안 되는 약을, 그것도 약사를 통하지 않고 직
접 환자에게 주었다가 환자가 사망하고 만 거요. 그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는 복역중
이었소.」
「현 선생님이나 주치의나 모두 불행하게 되고 말았군요.」
오세희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비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변호사, 분명히 강일이 형님이 10·26에 어떤 비밀이 있다고 하셨소?」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돌아가시던 바로 그 순간에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변호사의 일이기 이전에 나의 일이기도 하오. 나는 평소에도 형
님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 없었소. 내가 캐나다로 몸을 뺄 수 있었던 것도 형님이
도와주셨기 때문이오.」
「무슨어려운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나는 정치 권력 사이의 희생양이 될 뻔했소. 당시 정민역이라는 실력자가 있었지.
그는 정부의 고간이면서도 자녀들을 모두 외국인학교에 보내는 등 애국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했소. 또 장충동에 기가 막히게 예쁜 마담이 있었는데, 몇 사람의 고위 관리와
사랑싸움을 벌여가며 그곳에 수시로 드나들었소. 나는 그런 자들을 박 대통령께 직보
했는데, 대통령께서는 다른 사람은 다쳐도 정민혁만은 놔두시더군. 그가 국회의장에
연임되자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지. 그런데 일촉즉발의 순간에 형님이 전화를 걸어오
셨소. 즉시 출국하라는 얘기였지.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가족이고 집이고 다 내
팽개친 채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랐소. 아슬아슬했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사무실에
들어가면 그대로 연행되어 구속될 참이었더군.」
「그런 인연도 있었군요.」
오세희는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10·26에 어떤 비밀이 있다는 얘기는 박 대통령의 죽음이 세간에 알려
진 것과는 다르다는 얘기가 아니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형님의 일이기 전에 나의 일인 셈이옹. 남들은 박 대통령을 비난하
고 매도하지만, 내가 봬온 박 대통령은 그런 분이 아니셨지. 그러나 도대체 거기에 어
떤 비밀이 있는지, 나도 궁금하오.」
경훈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확실치 않은 일에 오세희를 끌어들이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모든 것은 불확실합니다. 저도 실제 어떻게 되었다는 확신이 있는게 아니라……」
경훈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니오.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분명한 일이오.」
「오 선생님이 도와주신다면 한결 수월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같이합시다. 아마 그것이 형님의 희망이었을 거요. 일단 이렇게 합시다. 나는 형님
을 치료했던 그 주치의를 다시 찾아 형님이 10·26을 전후에 입·퇴원하신 경위를 알
아보겠소. 결과가 나오는 대로 이 변호사에게 통보하리다. 그리고 형님과 나누었던 예
전의 통화 기록 같은 것도 꼼꼼히 살펴봐야겠소.」
「통화 기록이 남아 있습니까?」
「나는 정보 계통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나눈 대화는 꼭 녹음해 두곤 하오. 직업
때문에 몸에 밴 버릇이지.」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외에도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연락을 해주시오. 그 당시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내가 이 변화사보다 좀더 아는 편이니까.」
오세희는 의외로 여러 면에서 경훈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오세희가 마리 예약해 둔 호텔에 자동차가 닿을 즈음에는 할이야기가 거의 끝나 있었
다.
「저는 내일 돌아가는 비행기를 예약해야겠습니다.」
「짧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너무도 먼 거리를 온 것 같소. 부근의 재스퍼에 가서 로키
산맥이라도 둘러보고 가는 게 어떻겠소?」
잠시 생각하던 경훈은 그것도 괜찮겠다고 결론 내렸다. 이 사람 오세희에게서 제럴드
현에 대해 들어두면 틀림없이 도움이 될 것이다.
저녁 식사 후 경훈은 호텔 방에서 오세희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참고해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경과를 정리했다.
아직까지 특별히 밝혀진 것은 없었지만 제럴드 현이 한국에서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를
알게 된 것만 해도 결코 작은 소득은 아니었다.
경훈은 지금껏 인남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보스턴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인남은 집에 있었다.
「잘 있었어?」
「어, 경훈이구나. 지금 거기 한국이야?」
「아니, 여기 캐나다야.」
경훈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인남에게 대략 설명해 주었다.
「그랬구나. 그런데 경훈이 네 속에 그렇게 무서운 집념이 있을 줄은 몰랐어. 나는 네
가 가고 나서는 별로 한 일이 없는데…….
단지 인간 이경훈만 생각나더라」
「아무래도 내가 한국에 있었으니까 열심히 다녔던 거지. 거기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니?」
「그래도 아주 없지만은 않았어.」
「그래?」
「내가 뭐 부탁해 놓은 일이 있는데, 그 결과가 나오면 너에게 연락할게. 그때 적어준
그 번호로 하면 되지?」
「그래」
「그리고 아무때나 보고 싶을 때 전화해도 돼?」
「그럼.」
인남은 밝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경훈은 전화기 속에서 잘게 부서지는 인남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한국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오세희는 지프를 몰고 경훈이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왔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나오? 예순둘이오.」
경훈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이제 겨우 사십대 후반이나 기껏해야 오십대 초반의 얼
굴로 보였기 때문이다. 오세희는 재스퍼까지 왕복 열네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조금도
피곤한 기색 없이 차를 몰았다.
「요즘 한국의 상황은 어떻소?」
「IMF가 터졌을 때보다는 다소 경기가 회복된 듯하나, 실업 문제는 어젼히 심각합니
다.」
「대통령이 고민이 많겠군. 원래도 일 욕심이 많은 양반이 IMF를 떠안았으니 오죽하
겠소.」
「한국의 정치인들을 잘 아십니까?」
「강일이 형님과 나누던 대회가 거의 그런 것들이오. 우리는 한국의 모든 정치인들에
대해 정보를 교환했소. 그러면서 우리 나름대로 진짜와 가짜를 판단하곤 했지. 형님은
워낙 힘이 있는 분이라 정치인들이 형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곤 했소.
형님에게 잘 보인다는 것은 곧 미국에게 잘 보이는 것이었으니까.」
「그랬겠군요.」
「언젠가 형님은 김영삼. 김대중 씨와 같이 서명한 문건을 내게 보여준 적이 있었소.
세 사람이 민주화를 위해 같이 노력한다는 내용이었는데, 형님의 괴짜로서의 면모를
한눈에 보여주는 문건이었지. 미국의 정치 공작 전문가가 야당의 두 대표와 공동으로
서명한다는 건 당시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지.」
「심각한 외교적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형님은 그런 것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두 야당의 투사를 보호하려 했던 거요.
정치 테러로부터 말이오. 그런 점에서 형님은 이후락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소. 그
러다 기회를 잡으셨지. 바로 요금호 사건이오.」
「용금호 사건이라면 김대중 납치 사건이 아닙니까?」
「그렇소. 그 사건 때야말로 형님과 내가 일사불란하게 함께 움직였지.」
「그 내막은 어떤 것입니까? 과연 김대중 대통령 말대로 미국 비행기가 나타났습니
까?」
「어땠을 것 같소?」
「저는 늘 그 부분이 의심스러웠습니다. 온몸이 묶이고 눈까지 가려진 상태에서 감대
중 대통령이 비행기 소리를 들었다는 것도 그렇고, 더군다나 그 비행기가 미국에서 자
신의 위기를 알고 보낸 것이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음. 사실 김대중 씨 이야기가 틀린 건 아니오. 분명히 그것은 미국 비행기었고, 그
분은 비행기 소리를 들었소. 그것도 오랫동안 말이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오세희는 담배를 꺼내 한 대 피워물더니 차창 밖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그는 아침
의 서늘한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이야
기를 이어나갔다.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일본에서 김대중 씨를 납치한 중앙정보부원들은 그분을 용금
호에 싣고 한국으로 향했소. 도중에 그들은 김대중 씨를 갑판에 끌어냈다가 바로 위에
서 비행기 소리가 들리자 혼비백산했지. 비행기는 미국 공군의 마크를 선명히 드러낸
채 한순간도 용금호를 떠나지 않았소.」
「미국은 김대중 납치를 어떻게 알고 비행기를 즉각 보냈을 까요?」
「그것은 전적으로 김대중 씨의 운이 좋았기 때문이오. 사실 그 비행기는 미국이 납치
사실을 알고 보낸 것은 아니었소. 당시 어선을 가장한 북한의 간첩선이 자주 해상에
출몰했기 때문에 늘 바다를 경계했던 주한 미공군의 경찰기가 일본에서 곧장 한국으로
달려가는 그 배를 주목했던 것이지. 속도가 빠르고 어구가 시원치 않은 그 배를 집중
감청한 결과 김대중 씨를 납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본부에 보고했던 거요. 그 보
고는 즉각 강일이 형님에게 올라갔고, 형님은 정찰기로 하여금 단 한순간도 그 배를
떠나지 않도록 하셨소.」
「그렇게 됐던 것이군요.」
「형님은 즉시 나에게 그 고급 정보를 주셨소.」
「왜 그러셨을까요?」
「경찰로 하여금 증인의 역할을 맡도록 하신 거지. 즉 중앙정보부의 범행을 제3자인
경찰에게 확인시켜, 꼼짝못하고 김대중 씨를 댁까지 모셔다 드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
던 거요.」
「이후락 씨는요?」
「그 배의 행적이 모두 카메라에 담기고 중앙정보부의 공작이란 사실이 밝혀진 이상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소. 형님은 이후락을 지목하셨던 거요. 형님이 청와대로 들어
가셨지. 이후락은 즉각 해임됐소. 다만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해 모든 것은 비공식적으
로 진행되었지. 나는 일본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다시 한번 특수 작전을 펼쳐야 했
소.」
「특수 작전이라면?」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학생들의 회합이 있었고, 학생들은 그 전단을 한 일본인 강사
를 통해 외국으로 내보내려 했소. 그런데 일본인 강사가 그 사실을 자신의 애인인 술
집 마담에게 털어놓았지. 마침 그 마담은 약점이 있어 치안본부의 정보원 노릇을 할때
였소. 나는 그 일본인을 일본 정부와 연결시키려 했지. 결국 김대중 납치 사건과 그
사건을 맞바꾸었소.
정보원들의 명암이 교차하는 사건들이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자동차는
어느새 해발 3천 미터 이상의 로키 산맥에 올라가 있었다. 한여름인데도 머리에 눈을
이고 있는 웅대한 산들과 콸콸 소리를 내며 흘러 내려가는 로키 산맥의 눈 녹은 물들
이 경훈의 가슴에 시원하게 흘러들었다.
웅장한 자연이 숨쉬는 땅, 언제 봐도 부러운 나라였다. 경훈은 한국인의 상층부 30퍼
센트를 이민 보내야 한다는 오세희의 말이 실감났다.
「이 변호사, 조심하시오. 어젯밤 많은 생각을 했소. 형님의 유언을 전해듣고 보니 이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소. 사실 나도 박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서는 석연
치 않았소. 내 경험에 따르면, 이런 일은 물밑에 숨겨져 있을 때는 아무런 일도 벌어
지지 않지만 막상 그 중심에 끼여들게 되면 소용돌이치게 되어 있소. 어쩌면 이제부터,
아니 그 유언을 든는 순간부터 이 변호사의 신변엔 많은 변화가 생겨났을 거요. 괜한
걱정인지 모르지만 이 변호사는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 수도 있소.」
「잘 알겠습니다.」
경훈은 숙연해졌다. 그만큼 책임감도 무거워졌다.
「정말 김재규는 의도적인 살인을 행한 것일까요?」
「우발적 범행이라고 보기에는 시대 상황이 너무나 절묘했지. 시대는 박 대통령의 죽
음을 요구했소.」
「시대가 그분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었다구요?」
「그렇소. 어차피 그분은 아무에게도 권력을 넘겨주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었소. 차지
철 같은 충복을 데리고 끝까지 권력을 쥐고 있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얘기
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박 대통령은 어려서부터 군을 동경했던 분이오. 대구사범을 나와 교사 노릇을 꽤 오
래 하다가 가장 나이 많은 생도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던 걸 보면 그분의 군에 대한
남다른 집착을 할 수 있잖소. 그분은 애국심이란 군인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지. 민
간인을 믿지 ㅇ못했던 거요. 이승만 정부를 못 믿었고 4·19후의 민주당 정부를 못
믿었소. 김대중이나 김영삼 같은 민간 지도자에게도 권력을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했
지.」
「그럴 법하군요. 그러니 정권 이양이라는 것은 박 대통령의 죽음이 전제되어야 가능
했다는 말씀이군요. 현 선생님은 한국의 정치인들과는 어떤 관계셨습니까?」
「모두가 강일이 형님을 추종했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형님은 미국을 대리하여 한
국에 나와 있는 분이었으니까. 물론 대사가 있고 CIA 지부장이 있었지만, 실제로 한국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하는 이는 바로 그분이었소. 20여 년을 한국에서 순전히 정
보·공작요원으로 근무하셨으니 오죽했겠소.」
「재야와의 관계는 어떠셨습니까?」
「물론 형님은 재야와도 은밀한 관계를 맺고 계셨소. 공작이란 모든것을 다 고려해야
하는 일 아니오.」
「그랬겠군요.」
경훈은 박정희의 죽음에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면 정치인이나 재야 운동가들도 혐의에
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됐든 그들의 목표가 정권 이양과 유신
철폐였다면 박정희를 제거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김재규 역시 중앙정보부
장으로서 숱한 정치인 및 재야 인사와 은밀한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
가 충심으로 김재규를 설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경훈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추리로는 제럴드현과10·26의 관계를 설
명하지 못한다.
「저기 좀 보시오.」
머리에 화려한 뿔을 단 사슴 한 마리가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건너고 있었다. 오
세희는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더니 사슴앞에 가서는 완전히 정지시켰다.
「이들이 자연을 보호하는 것을 보면 소름 끼칠 정도요. 야생동물이 다니는 지역이면
어떤 개발도 허용하지 않지. 1년에 나들이 몇 번하는 야생 동물들 때문에 땅 사놓고
헛된 세월만 보내는 사람들도 많소. 교회에서 야생 동물들이 제발 다른 길로 다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
「우리에게도 그럴 정도의 땅이 있으면 좋겠네요.」
두 사람은 수많은 호수와 강을 구경하면서 로키 산맥의 산길을 상쾌하게 달렸다. 이윽
고 돌아올 무렵에는 오세희도 약간 피로해 보였다. 그러나 경훈은 오세희가 휴게소에
서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이내 피로를 회복하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저는 바로 공항으로 데려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시계를 들여다본 오세희는 곧장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그 의사에게서 무슨 이야기라도 들으시면 꼭 연락해 주십시오.」
「알겠소. 여기 일은 걱정 말고 몸조심하시오. 특히 사고를 조심하시오.」
「오 선생님도요.」
두 사람은 게이트 앞에서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질투
경훈은 귀국 후 한나절 동안 사우나에서 피로를 풀고는 사무실로 나갔다. 사무실에는
언젠가 같이 일한 적이 있던 손 형사로 부터 전화 메모가 남아 있었다.
이틀간의 캐나다 방문이었지만 경훈은 큰 수확을 얻었다. 경훈은 처음 제럴드 현의 전
화를 받았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얻게 된 정보를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아직
은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대통령 시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일사불란하
게 군 기관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치명적이었다.
수사에 미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간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다. 10·26이
후의 소용돌이치는 역사 속에서 그 수사의 책임자였던 전두환, 노태우가 10여 년간
집권했으니 그 사건에 대해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당
시 김재규 본인의 자유로운 진술이 확보되지 못한데다. 이제와서는 증언할 사람도 모
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설사 거기에 어떤 비밀이 있다. 하더라도 밝힐 수 있는 성질의
사건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훈은 투지가 샘솟았다.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는 덮을 수 없는
역사다. 경훈은 그 역사의 한가운데 서게된 셈이다.
「때르르릉.」
생각에 잠겨 있던 경훈은 전화벨 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벌써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각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없었다.
「네. 이경훈입니다.」
그러나 수화기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말씀하세용.」
「…….」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경훈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늦은 밤에 혹시 여자가 전
화를 받으면 농지거리라도 하려는 장난 전화일 거라고 애써 치부했다.
「때르르릉.」
5분이나 지났을까. 다시 걸려온 전화에 경훈은 불쾌한 기분으로 전화기를 낚아채듯이
들었다.
「도대체 누구요?」
경훈의 거친 말투에 저족에서는 조금 멈칫하는 듯싶더니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훈아, 나 인남이야.」
「어! 인남이.」
「그래. 그런데 무슨 전화를 그렇게 무섭게 받아?」
「아니. 아냐. 방금 네가 전화했었니?」
「아니, 이번이 처음인데. 무슨일 있어?」
「별일 아니야. 장난 전화같은게 왔었거든.」
「그래? 네게도 그런게 오니?」
「네게도라니? 그럼 너도?」
「글쎄. 장난 전화인지 뭔진 몰라도 예전에 없던 일들이 자꾸 벌어져.」
「어떤 일인데?」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누군가가 엿보
고 있는것 같단 말이야. 전화도 엿든지 않나 싶어 불안해.」
「변호사하고는 상의했어?」
「응, 그런데 별 방법은 없어. 변호사는 보디가드를 붙이라고 하는데 그런게 어디 내
체질에 맞겠니?」
「그래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럴바에야 차라리 한국으로 나가겠다.」
「여기로?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정말?」
「이리와.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아.」
「나도 사실 좀 불안하거든.」
「이것저것 정리한다고 시간 끌지 말고 바로 출발해.」
「그래. 그럴게. 네가 발가워할 것이 있어.」
「뭔데?」
「전에 얘기했던 건데 가서 보여줄게.」
경훈은 결정적이 순간에는 오히려 인남이 자신보다 더 생각이 깊다고 느꼈다. 그녀는
누군가 도청이라도 하고 있을까 봐 염려 하는 것이다.
「떠나기 전에 비행기 시간 알려줘.」
「공항에 마중 나오겠다는 뜻이니?」
「그래.」
「어머, 경훈이 너 사람 됐구나.」
「…….」
인남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졌다.
「조심해서 와.」
전화를 끊고 난 경훈은 문득 인남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자신과 인남이 이 일에 빠져들게 된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인남과의 통화
에서 새삼스럽게 느꼈기 때문이다. 오세희도 염려했던 바지만 지금 상황에서 인남을
혼자 미국에 둔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걸려왔던 장난 전
화로 인해 경훈의 공포심이 더 커졌는지 모른다.
며칠후, 인남은 출발한 대항항공의 점보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여느 때보다 성숙해 보였다.
인남은 수많은 출영객들을 눈으로 살피다가 경훈을 발견하자 반가운 가운데도 한 줄기
부끄러움이 뒤섞인 미소를 지었다. 경훈은 케임브리지 광장에서 판소리를 열창하던 인
남의 어디에 저런 면이 있었을까 싶어 웃음을 머금었다.
「어서 와. 힘들진 않았어?」
「전혀. 네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야릇한 기대감조차 생기던걸.」
「엉뚱한기는. 누구 다른 사람은 마중 안 나왔어?」
「얘기 안했어. 사실 이번에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있을까 해.」
「거부의 상속녀답게 말이지.」
「놀리는 거니?」
「놀리긴. 어쨌거나 잘 왔어. 곧장 집으로 갈 거니?」
「아냐, 집에도 연락 안했어.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걸 뭐. 마침 오피스텔을 관리하는
친구가 있는데. 작은 걸로 한 달 간 빌려주겠대 그래서 거기에서 묵기로 했어.」
「잘됐구나.」
「뭔데?」
「선물이야.」
인남은 정성 들여 은박지로 포장한 작은 상자를 내놓았다.
「지금 여기서 풀어봐야 해?」
경훈이 혼잡한 공항 청사를 의식하면서 물었다.
「아니, 이따가 밤에 봐. 혼자서.」
「그래, 고맙다.」
「지금 그 오피스텔로 갈 거니?」
「응,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
「저녘은 어떻게 하지?」
「사먹어야 할 것 같아.」
「그럼 같이 먹자.」
「호호, 서울에 온 보람이 있네.」
경훈은 인남이 반가원하는 모습을 보자 즐거웠다. 인남은 사람이 꾸밈없이 솔직해야
하는 이유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이제 인남에게는 괜찮은 상대만 있으면 아무것도 모자랄게 없어 보였다. 다만 그녀가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국의 고루한 풍토에서 어떻게 평가받을지 몰랐다.
그녀 역시 돈에만 관심 있는 잘생기고 속 빈 남자에게 빠질지도 모른다. 애정도 책임
감도 없이 돈만 탐하는 남자가 득시글거리는 세상이 아닌가.
바로 그 순간 경훈의 뇔에 미국을 떠나기 직전 재즈 클럽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인남은 키스를 거절했다. 사실 그것은 경훈에게 뜻밖이었다. 그는 인남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그날 밤에 인남에게 그런 행동을 한데는 술기
운과 외로움, 또 미국이라는 땅이 주는 자유로움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훈은
인남이 자신을 갑자기 밀쳐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곰곰 생각하던 경훈의 뇌리에 인남이 언젠가 주말 밤을 미국인 친구 집에서 보낸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관계를 천연덕스럽게 털어놓은 것은 인남이 미국에서 어
떻게 생활해 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셰인이라는 미국 친구와 아직도 가까이 지내고 있을까?’
경훈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인남이 다소 부담스러워졌다.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인남이 트렁크를 열려고 하자 경훈이 눈에 띄는 식당을 가리키
며 말했다.
「밥부터 먹자.」
「왜 바쁘니? 잠시 올라갔다 오면 안돼?」
「응, 어디 갈 데가 있어서.」
「그래. 그럼 식사부터 해.」
경훈은 차를 식당 앞에 대고 앞장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종업원이 갖다 준 메뉴판을
말없이 인남의 앞으로 밀어놓는 경훈의 손실에는 싸늘함이 배어 있었다.
「뭐 먹을래? 공항까지 나와주었으니 저녁은 내가 살게.」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니 얼마든지 살 수 있겠지.」
인남은 놀란 표정으로 경훈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인남의 서글서글한 눈동자에 불안
감이 배었다.
「셰인, 네남자 친구 말이야.」
경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인남은 가늘게 웃었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할 듯 입술을 달싹러리다가 간단하게 대
답했다.
「그래, 잘 있어.」
「…….」
종업원이 다가오자 경훈은 손가락에 짚이는 대로 아무거나 시켰다.
「같은걸로 주세요.」
두 사람은 식사 도중 내내 말이 없었다. 경훈은 몇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하고는 먼
저 일어나 계산을 하고 왔다.
「내가 산다니까.」
인남이 공항에서의 유쾌함을 모두 상실한 채 그녀답지 않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
훈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일어섰다.
「경훈아, 이제 우리 일에 대해 얘기하자.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경비는 물론
내가 댈 거구.」
「아냐. 필요없어.」
「그런데 갑자기 왜 그래?」
「뭐가? 아무 일도없어.」
냉랭한 분위기는 자동차 트렁크에서 인남의 짐을 꺼낼 때까지 이어졌다. 인남은 웃으
면서 짐을 받아들었다.
「너, 내가 부담되는가 보구나. 참, 여긴 미국이 아니라 한국 땅이지. 내가 까빡했
어.」
인남의 말에 경훈은 약간 과장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약속이 있어서 그래.」
「내가 괜히 시간을 뺏은 거 아니니? 그래, 너는 바쁜 사람인데 내가 또 깜빡했네.」
인남은 민망함을 없애려는지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경훈은 웃어 보였으나
아미 그것은 어색했다.
「미안해. 어서 가봐. 연락할게.」
「그래.」
경훈은 인남을 뒤로하고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면서 무거운 가방을 든 채 종종걸
음으로 오피스텔에 들어가는 인남의 모습이 백미러에서 사라 질때까지 지켜보았다.
왜 그랬을까, 왜 그 가식없고 선량한 인남에게 그렇듯 용렬한 태도를 보이고 말았을까
하는 후회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결국 경훈은 운전조차 못할 지경이 되어 길가에 차를
세웠다.
경훈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처음 자
신은 인남의 투명한 인간성에 감동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갑자기 인남에게 그렇게
차갑게 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 생각하던 경훈은 쓴 웃음을 지었다.
질투하고 있는 건가. 언젠가 인남이 얘기했던 셰인이라는 친구. 인남은 그 친구와 같
이 밤을 보낼 작정이라면서 자신에게 전화를 받아달라고 했다. 경훈은 ‘셰인’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자 감정이 복잡해졌다.
이남, 경훈은 그녀를 여자로 생각하지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단
지 고등학교 동창에 불과했다.
학창 시절, 경훈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인남은 공부에 관심 없는 여학생들이 흔히 그렇
듯 떠들고 웃고 노는 데에만 열중했다. 유치한 액세서리로 머리며 교복이며 여기저기
를 장식했고, 수업시간에는 교과서 대신 연예인의 사생활을 다룬 책이나 읽었으며, 선
생님과 학교에 대해 남에게 뒤질세라 별별 한심한 고투리를 다 잡아내는 우스운 여자
애였다.
그런 여자라면 단신으로 미국에 가서 어떤 생활을 했을지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 우연
히 미국에서 인남을 보게 되자 그저 아무런 부담 없이 만났던 것이고, 제럴드 현의 사
건을 계기로 가까워진 것 뿐이다.
그렇다. 그것뿐이다. 어찌되었건 인남은 열심히 공부해야만하는 고등학교 시절을 소홀
히 보낸 낙오자였다. 그후 그녀의 인생이 어떻게 변했다 해도 이미 출발이 한껏 부실
해져 버린 이류 혹은 삼류 인간이다. 아마 셰인이라는 이름의 그 애인인지 친구인지
모를 미국인도 보나마나 사회의 중심부에 자리할 기회는 평생 한 번도 얻지 못할 것이
다.
경훈은 인남의 모든 것을 무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제럴드 현이란 특수한 사건이 업었
다면 어차피 잊혀질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가라앉았다.
경훈은 거울을 한 번 흘끗 보고는 자동차의 키를 돌린 다음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
다. 그러나 자동차는 여느 때처럼 경쾌하게 출발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액셀러
레이터를 힘주어 깊이 밟았다.
낡은수첩
집에 돌아온 경훈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썩 맑지 않은 기분도 전환하고
깨끗한 머리로 앞으로 할 일을 정리해 보기 위해서였다.
눈을 막 감으려던 경훈은 문득 인남이 준 선물을 떠올렸다. 일어나 끌러볼까 하다가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궁금중이 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러 일어나 끌러보기에는
자존심이 많이 상해 있었다.
경훈은 그냥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인남아!」
「어, 누구십니까. 어떻게 들어오셨죠?」
경훈은 소리 없이 들어와 현관에 서 있는 그림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야, 나, 제리 현.」
「제리 현, 그럼 현 선생님?」
「그래, 저분을 봐.」
제럴드 현은 손을 들어 한 사람을 가리켰다. 키가 작은 그 남자가 경훈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 박대통령.」
키가 작은 박 대통령의 어두은 형체는 한동안 아무 말없이 경훈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의 옆을 지나쳐 사라졌다.
「저분을 지켜드리려고 그렇게나 애를 썼건만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어. 하지만 인남
아. 구분 죽음의 배후는 곡 밝혀야 해. 그래야만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거야.
그러지 못하면 또 우리 대통령이 죽거든. 알겠어? 또 죽는단 말이야.」
「아니. 독재는 끝났는데 왜 대통령이 죽는단 말씀입니까?」
「인남아, 그게 아니야. 박 대통령은 독재 때문에 죽은게 아니야 더 깊이 생각해 봐.
10.26에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답겨 있어. 나는 할 만큼 했어. 이제 모든 것은
인남이에게 달려 있어. 이제 나는 가야 해. 저분을 구천에서나마 보호해야 하거든. 저
분은 얼마나 야속하게 생각하실까. 대통령을 누가 죽였는지도 모르는 국민들을…….」
「현 선생님! 현 선생님!」
꿈이었다. 하지만 생시와 조금도 다름없이 생생한 꿈이었다. 경훈의 꿈속에서 제럴드
현은 인남을 찾아 일을 맡기고 있었다.
경훈은 인남 대신 그의 전화를 받았던 것처럼 꿈속에서도 인남을 대신해 뭔가 계시를
받았다. 경훈은 제럴드 현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썼지만 형상이 잡히지 않았다. 단지
키가 작은 박 대통령의 얼굴만 또렷하게 떠올랐다.
꿈은 경훈의 뇌리에 강한 직관을 불러일으켰다. 20년이나 묻혀 있던 거대한 미스터리
가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경훈은 생각을 가다듬고 제럴드 현의 전화를 받은 후
부터 이제껏 진행된 상황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았다.
1. 제럴드 현은 죽음 직전의 순간에 전화를 걸어와 10·26에는 비밀이 있다고 했다.
2. 전화를 건 시점이나 그의 신분으로 보아, 그 전화는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3. 합수부 발표는 김재규 행위의 의미를 축소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통령 시
해가 우발적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한 것이 단적인 증거다.
4. 그러나 실제 군검찰의 기소시 적용 죄목은 내락 목적 살인죄였다. 합수부는 김재규
를 신속히 죽이기 위하여 재판 일정까지 잡아놓고 서둘렀다. 따라서 합수부의 수사 및
발표는 신뢰하기 힘들다.
5. 그동안 국내 언론의 10·26을 전후하여 입·퇴원했고, 몇 달 후에는 아예 전역해
버렸다.
경훈은 마지막 6번 항에 주목했다. 역시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제럴드 현이 10·26을
전후하여 입·퇴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미8군병원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모
든 정보는 고작 입·퇴원일에 불과했다.
지금으로서는 역시 오세희의 말대로 당시 제럴드 현을 치료한 의사로부터 실마리를 풀
어나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경훈은 캐나다로 전화를 넣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며
칠 간 겪어본 오세희의 성품으로 미루어 무언가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전화를 주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경훈은 인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다. 인남은 직접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자동 응답기를 통해 을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경훈아,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 연락하려고 했는데 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구나. 먼저 다른 일부터 보고 나서 전화할게.」
경훈은 생기 없는 인남의 목소리를 귓전에 남겨둔 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저녁에 전
화가 오면 어떤 어조로 대할까 생각하며 그는 치워두었던 인남의 선물을 꺼냈다.
사실 인남에게 셰인이라는 친구가 있든 그 친구와 어떤 관계든 경훈 자신이 상관할 일
은 아니었다. 경훈은 자신이 인남의 사생활을 심각하게 생각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어제 인남의 단점을 발견하기 위해 생각
에 잠겼던 것이 어처구니없었다.
인남이 준 선물을 풀어보는 경훈의 손길이 담담했다. 상자 안에는 인남이 미국에서 산
텍타이나 전자수첩 같은 것이 들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너무도 예쁘게 싼 선물 상자 안에는 포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낡은 수첩이
들어 있었다. 경훈은 손을 천천히 뻗어 수첩을 집어들었다. 이렇게 낡은 수첩을 정성
스럽게 포장해서 준 이유가 뭘까. 어쩌면 인남 자신의 일기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경훈은 수첩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모두 한글로 씌어 있었다. 단어나 필체로 보아 인
남이 쓴 것은 아니었다. 수첩의 앞뒤를 살피던 경훈이 눈썹을 꿈틀했다. 기대하지 않
았던 이름이 낡은 글씨 사이에서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제럴드 현.
수첩은 제럴드 현의 것이었다. 그제야 경훈은 인남이 상상외로 치밀했다는 것을 깨달
았다. 선물이란 형태는 일종의 안전 장치였다. 인남은 무언가 매우 중요한 자료를 자
신에게 전해준 것이다. 이것에는 틀림없이 10·26의 비밀이 담겨 있으리라. 기대감을
잔뜩 담은 그의 눈길이 번개처럼 수첩의 내용을 훑었다.
수첩에는 제럴드 현이 겪은 정신 장애가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낡을 대로 낡아 빛바랜 연륜만 담고 있는 수첩에는 제럴드 현이 수없는 단상을
썼다가 펜으로 지우고 또 지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수첩의 대부분은 케네디에 대한 것이었다. 약 여덟 페이지 분량의 얇은 수첩은 대체로
깨끗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나 마지막 페이지는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하얀 여백하나 없
이 전체가 검정 볼펜의 잉크로 두껍게 칠해져 있기도 하고, 네댓줄의 문장위로는 마구
황칠이 되어 있어 알아볼 수 없었다. 경훈은 노트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제럴드 현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 되살아 났다.
경훈은 수첩을 덮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인남은 변호사로부터 제럴드 현의 유품을 넘
겨받았을 것이다. 그중에서 이 수첩은 제럴드 현이 글로 무언가르 ㄹ써둔 유일한 자료
인 셈이었다.
경훈은 다시 한 번 차분히 수첩의 내용을 처음부터 훑었다. 역시 마지막 페이지는 도
저히 읽어낼 수 없었다. 검게 덧칠이 되어 있는 글자들은 한 자도 알아볼 수 없었다.
수첩을 덮는 경훈의 머릿속에 케네디와 관련된 한 문장이 자리르 ㄹ잡았다.
케네디의 동서 화해와 박정희의 자주 국방, 이들은 출신 성분은 달라도 너무나 닮은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죽음조차도…….
경훈은 이 문장과 제럴드 현, 그리고 10·26과 박정희, 김재규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
어보았다. 저녁때가 되도록 인남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제럴드 현의 수첩과 씨름하던 경훈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나설 채비를 했다. 오
늘은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10·26에 관한 자료를 읽고 또 읽으
면서 찾아낸 사람. 10·26 당시의 상황을 검증하기에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술잔이 테이블에 꽂히듯 떨어졌다.
「싱거운 양반.」
노인은 눈을 감은 채 독백을 계속했다. 안주엔 젓가락도 대지않고 벌써 몇 잔째 소주
잔만 거푸 기울이고 있는 그의 미간이 몇 번이나 찌푸려졌다가 다시 펴지곤 했다.
「이해가 되질 않아…….」
우람한 몸집에 강직하게 생긴 그의 얼굴은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같은 표정으로 휘감
겨 있었다. 그 복잡함 위로 진한 감정이 솟는 듯 얼굴 근육이 가끔 씰룩거렸다.
「망할 놈의 영감.」
그의 입가에서 급기야는 원망에 찬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듣기에
따라서는 단순한 원망이라기보다는 어딘지 애타는 안타까움 같기도 했다.
「손님, 오늘은 술이 좀 과하신 것 같네요.이제 그만하세요.」
사십대 후반의 나이지만 아직도 매력이 얼굴에 가득한 여주인이 노인을 지켜보다가 걱
정스럽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내가 술이 과하다고? 아니야, 오늘은 좀 마시고 싶어.」
노인은 다시 술잔을 채웠다.
「아유, 안되겠어요. 저라도 술을 따라드려야지, 이러다간 폭음하시겠는걸요. 이제 나
이를 좀 생각하셔야죠.」
여주인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노인의 앞자리에 앉았다.
「나이를 생각하라고……그래, 이제 나도 내일이면 칠십이구먼.」
그러나 잡티 하나 없는 얼굴과 우렁찬 목소리의 그는 이제 겨우 육십이 넘어 보일 뿐
이었다.
「어머, 벌써 그렇게나 되셨어요? 저는 이제껏 모시면서도 그러신 줄을 몰랐네요. 그
렇다면 더욱 조심하셔야죠.」
여주인의 이 말에 갑자기 노인이 언성을 높였다.
「조심해? 이 나이에 무엇을 조심하란 말이야!」
대단한 기력이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결코 칠십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느닷
없이 노인의 목소리가 노기를 띠자 여주인은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평소에 늘
점잖던 노인이었기에 놀라움은 더했다.
「어머, 왜 그러세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갑갑한 양반! 당신은 머저리야, 머저리!」
술이 오른 노인의 눈에서 광포한 빛이 뻗쳐나왔다.
「도대체 아까부터 누구를 그렇게 머저리라고 하시는 거예요?」
「김재규.」
「네?」
「김재규, 김재규 몰라? 그 천하의 얼간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몰라?」
「알다마다요.그런데 왜 그렇게 하염없이 그분을 욕하고 계세요?」
「망할 놈의 영감.」
노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가고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 원망하시는 걸 보면 각별한 관계셨던 모양이죠?」
「각별한 관계? 각별해도 너무 각별했지. 그 망할 놈의 영감하고는 말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원망하시느냐구요.」
「영감이 그럴 줄이야…….」
「대통령을 시해한 것이 못마땅하신 거로군요.」
노인은 고개를 들어 여주인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그게 아니야.」
「그럼요?」
「당신은 몰라도 돼.」
노인은 한 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잠시 기우뚱했지만 이내 균
형을 잡았다. 나이는 들었어도 오랜 세월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었다.
「나는 안 죽어. 절대로 죽지 않아!」
노인은 취중에도 잔돈까지 꺼내 셈을 정확히 치르고는 밖으로 나섰다. 여주인의 걱정
섞인 배웅을 받으면서 집을 향하여 걸어 가던 그의 눈에 달빛이 반사되면서 반짝했다.
눈물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고인 눈물을 닦으려 하지 않고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걷지 않아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 내렸다. 노인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피와 땀이 서려 있는
이 고지 저 능선에
쏟아지는 별빛은
어머님의 고운 눈길
전우야 이 몸바쳐
통일이 된다면
사나이 한 목숨
무엇이 두려우랴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입가에서 자신도 모르게 군가가 흘러 나왔다. 감상에 젖은 노
인의 몸이 비틀거렸다.
「내가 이젠 요만한 술에도 비틀거리다니…….」
노인은 몸을 꼿꼿이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만취한 몸은 한쪽으로 기울어
지다 또 반때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손을 이마에 갖다 댔다. 집까지는 가파른 언덕
이었다. 심장이 쉴새없이 벌렁거렸지만 노인은 가뿐 숨을 몰아쉬며 쉬지 않고 언덕을
올랐다. 그러나 지나치게 취한 탓인지 평소 같으면 금세 다올랐을 언덕 중간에서 발을
헛디뎌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는 오기 섞인 소리가 튀어나왔다.
「난 안 죽어. 절대로 안 죽어.」
노인은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대로 드러 누워버리고 싶었다. 일
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노인의 귀에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왔다.
「장군님,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순간 노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노인은 고개를 돌려 소리의 주인공을 날카롭게 쏘아봤
다.
「누구냐, 네 놈은?」
「먼저 일어나시지요.」
노인은 거짓말처럼 날쌘 동작으로 일어났다.
「저는 이경훈이라고 합니다.」
「누가 네 놈의 이름을 듣자 그랬어? 뭐하는 놈이냔 말이야?」
경훈은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술집에서부터 따라왔지만 그토록 취해서 비틀거리던 노
인이 자신이 나타나자 몸을 꼿꼿이 세우고 날카로운 눈매로 쏘아볼 줄이야. 역시 한평
생을 군에서 보낸 장군의 정신력은 보통 사람의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변호삽니다.」
「뭐야? 변호사라. 이놈 거짓말 한번 엉뚱하게 해대는구나. 이 밤에 변호사란 족속이
취한 노인을 일으켜준단 말이야? 이 나라가 그렇게나 된 나라야? 거짓말하지 마라, 이
놈. 솔직하게 취객털이라고 해. 먹고 살기 힘들어 나왔으니까 한푼 달라고 왜 솔직히
말 못하나? 내가 한 번이라도 그런 사람들을 모른 체한 적이 있나?」
「장군님, 저는 정말 변호삽니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불안? 하하하. 이놈아, 내가 이 천하의 김정호가 취객털이에게 불안해한단 말이야?
이놈 참 웃기는군.」
김정호는 경훈의 차림새나 말씨로 보아서 취객털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음성에서
냉기를 거두었다. 경훈 역시 김정호의 기백으로 보아서 취객털이 따위를 불안해할 사
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아까 술집에서부터 장군님을 지켜보았습니다.」
「나를 지켜봐? 이놈 봐라, 너 스파이냐?」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변호삽니다.」
김정호는 그제야 진지한 눈길로 경훈을 바라보았다.
「변호사? 변호사가 무슨 이유로 나를 지켜본단 말이야?」
「뭘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하하.요놈, 너 기자지? 기자란 놈들이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이젠 변호사라고 거
짓말까지 하는구나. 안 돼. 아무것도 얘기할 수없어.」
「기자가 아닙니다.」
「그래? 그럼 신분증을 내놔봐.」
경훈은 신분증을 꺼내 김정호에게 주었다. 김정호는 신분증을 한참 뚫어지게 보더니
말투가 약간 부드러워지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변호사가 내게 웬일이야? 뭘 물어보겠다는 거지?」
「길거리에서 드릴 말씀은 아닙니다. 어디로 좀 들어가시죠?」
「무얼 물어보려는지 알아야 어디 가서 앉든 서든 할 것 아냐.」
「몸도 불편하시니까 어디 편한 데 앉는 게 낫겠습니다.」
김정호는 경훈의 예의바르고 진지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집을 꺾었다.
「그래, 요 위에 작은 맥주집이 하나 있는데 거기 가서 자네가 도대체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 한번 들어보지.」
주택가가 시작되는 어귀에 있는 작은 카페를 찾아 들어가 자리를 잡자 젊은 아가씨가
메뉴를 들고 왔다. 경훈은 맥주를 시켜 김정호의 잔에 따랐다. 김정호는 목이 컬컬했
는지 단숨에 잔을 쭉 비웠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늘 보던 사람들하고는 분위기가 좀 다르구먼. 그런데 왜 나를
만나러 온 거지?」
「저는 일부러 오늘을 택해서 찾아뵈었습니다.」
「오늘을 택해서라고? 그럼 자네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안단 말이야?」
「네. 장군님도 그래서 이렇게 취하시지 않았습니까?」
「오늘이 무슨 날인데?」
「정보부장이 돌아간 날 아닙니까?」
「아는구먼. 자네는 그래도 보기보단 예의가 있는 모양이군. 아무때고 전화질이나 삑
삑 해대는 기자놈들과는 무어가 달라도 한참 달라.」
김정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내 눈을 부릅뜨고 화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무슨 잡지던가 최 아무래라는 기자놈이 있는데, 그 새끼는 새벽 1시만 되면 꼭 내
집에 전화를 걸어서 뜬금 없이 한번 만나자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야, 이 쌍놈의 새
끼야. 너는 가정도 없냐? 기자란 놈들은 이 한밤중에 남의 집에 전화를 걸어도 되는
무슨 특권이라도 있냐?” 그랬더니, 그 새끼가 “역사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 자꾸 안
만나주니까 이러는 거 아니오” 하길래, 내가 “네가 날 보자고 하면 나는 무조건 너
를 만나야 되냐?”했더니 “만나줄 때까지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이러겠다”고 하더
구먼. 새끼, 진짜 독종이야. 정말 매일 밤 전화가 오는데 번호를 바꿔도 소용이 없더
라구. 그 새끼 때문에 한 달 동안 잠 못 잔 거 생각하면 잡아 죽이고 싶어. 세상에 어
째 그런 새끼가 다 있는지.」
김정호는 기자 기피증이 있는 모앙이었다.
「그래, 하필 오늘을 택해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 그것도 내가 한참 취하기를 기다
렸다 말이야.」
김정호는 경훈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안다고 하자 뜻밖에도 동지적 유대감을 느끼는
듯했다.
「김재규 부장의 박 대통령 시해에 대해서는 당시 합수부에서 조사한 것이 결론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온 세계 사람들이 합수부의 수사를 그대로 믿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지. 당시 합수부말고 어느 누가 감히 나설 수나 있었나?」
「합수부의 결론에 따르면, 김 부장은 박 대통령의 총애를 받기 위해 차지철 경호실장
과 벌인 충성 경쟁에서 몰리고 중앙정보부의 정치 공작도 번번이 실패한데다, 김 부장
의 유약한 스타일을 대통령이 나무라고 그것을 옆에 있는 차지철이 부추기자 순간적으
로 격분하여 차지철을 해치우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똑똑한
놈으로 셋만 준비해”라고 말하며 부하들을 대기시킨 후 총을 들고 들어와 먼저 차지
철을 쏘고, 차지철이 화장실로 숨자 대통령을 쏜 다음, 다시 차지철을 쏘아 죽인 후
대통령을 확인 사살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김정호는 경훈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김재규의 사형 집행일에 찾아온 이 정
체 불명의 변호사가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김 부장의 행위에 대해 합수부와는 다른 시각에서 범행을 재구성하고 싶습니
다.」
「어떻게?」
김정호의 눈이 번쩍 광채를 발했다.
「우선 결론부터가 다릅니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것이 아니라 미리
범의를 갖고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저는 법정에서 소송 사건을 많이 다룹니다. 따라서 실제 일어났던 사실과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진실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음, 좀 혼란스럽군. 지금 술을 마셔 머리가 썩 명쾌하지 않으니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나?」
김정호는 40년 세월을 정보 계통에서 살아온 거물답게 경훈이 꺼내는 이야기의 수준
이 그간 다른 사람들이 운위하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이야기를 술에 취한 상태에서 들어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의식이 고개를 들었던 것
이다.
「내일 어디서 뵙지요?」
「내 집으로 와주겠나?」
「몇 시가 좋으십니까?」
「아침 10시가 좋을 것 같군.」
「알겠습니다.」
역사의 증인
다음날 아침, 김정호와 마주앉은 경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의 다소 감상적
이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노장군의 무게만이 묵직하게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어제는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것 같소. 나는 김정호요.」
김정호가 웃음을 띠며 손을 내밀었다.
「이경훈입니다.」
「그래, 이 변호사는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소?」
「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그런데 내 눈에는 이 변호사가 상당히 깊숙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군.」
「저는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이 일의 수수께끼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수수께끼라? 무엇이 수수께끼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전체가 제게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렇소?」
김정호는 날카로운 눈길로 경훈의 얼굴을 훑었다.
「그런데 그게 설혹 수수께끼라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풀어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물론 나도 흥미는 있지만 말이오.」
「일단은 제 얘기를 들어만 주셔도 좋습니다. 사실 김 장군님은 그 당시 김재규 부장
의 대통령 시해 사건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판단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분이 아니십
니까?」
김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는 얘기였다. 사실 김재규의 그 일이 우발적인 범행
인지 준비된 거사인지 김재규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가고 없다. 그렇다면 김재규 다음으로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김정호 자신이 그
런 질문을 받았어도 스스로 “김정호요”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김정호는 젊은 변호사
가 의외로 사건 주변의 사람을 정확히 짚고 있다고 생각했다.
「김재규 부장이 수사 기관에서 뭐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수사 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의의도에 따라 묻히거나 변질되어 버리고 맙니다. 당시 상황에서 감히 누가
김재규의 신문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건 그렇소.」
「당시 김 장군님은 현역 소장 계급으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이라는 직위에 계셨습니
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앙정보부의 제2인자셨지요. 김재규 부장은 모든 일, 그야말로
모든 일을 김 장군님과 의논했기 때문입니다.」
김정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부장은 보안사령관 시절부터 당시 참모장이던 김 장군님을 신뢰하여, 중앙정보부
로 옮길 때에 특별히 장군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김정호에겐 좋았던 시절이다. 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기백이 살아 있었던 시
절이다. 당시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윤필용 사령관에게 단신으로 찾아가서 “당신
똑바로 하시오. 천하가 당신을 두려워해도 나 김정호는 추호도 두렵지 않소”하고 일
갈했던 적도 있지 않은가.
「박 대통령도 복잡하고 긴급한 사항에 대해서는 김 장군님이 직접 들어와서 브리핑하
시도록 했습니다.」
김정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박정희는 이따금씩 김재규에게 “그 뚱땡이 보고
들어와서 직접 설명하도록 해”하고 지시하곤 했다.
박정희는 김정호의 단도직입적이고 간결한 브리핑을 좋아했다. 지나치게 유약했던 김
재규 부장이 대통령의 눈치를 봐가며 브리핑하던 것에 반해 김정호는 번뜩이는 안광을
내쏘며 마음에 있는 말을 거리낌없이 내뱉곤 했다. 배석한 부장은 몇 번이나 안색이
바뀌었지만 대통령은 시원하는 표정으로 “뚱땡이가 성격 하나는 화끈하군”하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럴 때면 김정호는 왜소한 대통령에 비해 체구가 너무 큰 게 죄송스럽
기까지 했다.
부장도 쩔쩔맸던 차지철이지만 김정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청와대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제압하고 통제했던 차지철도 김정호 자신과 눈이 마주
치면 먼저 미소부터 지으며 “김 장군 들어오셨소”하며 비위를 맞추지 않았던가.
김정호는 순간 분노가 울컥 치밀었다. 그런 작자가 경호실장이 되어 각하의 눈과 귀를
막음으로써 역사가 이렇게 비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인물은 대통령이
총격을 당하는 순간 대통령을 버려두고 자기만 살자고 화장실에 숨지 않았던가. 대통
령이 죽어가는데도 화장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각하, 괜찮습니까”했던 차지철.
김정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개새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패죽여 버렸을 텐데.」
경훈은 뜻밖이었다. 수사와 정보 계통에서 40년 세월을 보낸 사람의 성격이 이렇게나
직설적이라니. 자신도 공군 검찰관으로 근무해서 익히 아는 바지만 수사나 정보 계통
에 오래 근무한 사람들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경훈은 김정호의 성격이 이러니 신군
부가 권력을 잡고 여러 가지로 회유했어도 권력 한 줄기에 유혹되지 않았구나 싶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대통령과 정보부장에 대한 김정호의 의리였을 것이다.
「김재규 부장은 자신의 병이 심해질수록 점점 더 김 장군님을 의지하게 됐을 겁니다.
대통령도 좋아하고 차지철도 두려워하는 김정호, 게다가 이 김정호는 내가 보안사 시
절부터 가장 예뻐하던 인물이 아닌가, 아마 이것이 김 장군님에 대한 김 부장의 생각
이었을 겁니다.」
김정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그랬다. 김정호는 나이 어린 변호사가 신통했
다. 그러나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경훈이 결론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
직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인사인 삼군 참모총장을 임명하는 데에도 김 장군님의
영향력이 가장 컸습니다. 이미 보안사, 아니 그 이전 방첩대 시절부터 전국의 장성이
란 장성은 모두 꿰고 있던 김 장군님의 복수 혹은 세 배수로 정보부에서 청와대로 추
천하던 서류에 자신이 가장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대통령이 선택하도록 하실 수
있었습니다. 즉 대통령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던 거죠. 추천서를 대통령이 좋
아하는 스타일로 써올리면 되었으니까요.」
「자네 뭐하는 사람인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지?」
김정호가 느끼기에 경훈은 누구에게 당시 상황을 전해들어 그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의 마음 저 깊숙이 묻혀 있는 사실을 이 세상의 누가 안단 말
인가. 경훈은 김정호가 질문한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얘기를 계속했다.
「마지막 군 인사에서 정승화 장군이 육군 참모총장이 되도록 하신 것은 참 잘하였다
고 생각합니다. 당시 고위 장군들이 권력자에 빌붙어 출세를 하려는 어지러운 판에,
평생을 야전으로만 돌던 강직하고 합리적인 장군을 총장으로 앉힌 것은 군과 나라의
안보를 위해서 잘된 인사였으니까요.」
그랬다. 당시의 어지럽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군이라도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서 김정호는 참군인이었던 정승화를 필사적으로 밀지 않았던가.
「본시 간이 좋지 않았던 김 부장은 쉬이 피로를 느끼고 어떤 때에는 매사를 귀찮아했
습니다. 중앙정보부의 그 방대한 업무를 정력적으로 수행해 나가기가 어려웠던 것이죠.
그 상황에서 부장 역할의 상당 부분은 다른 사람이 대신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 사람
이 누구였을까요?」
「…….」
「바로 김 장군님이었습니다.」
「맞소, 바로 나였소. 그런데 그것이 자네가 얘기하는 수수께끼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말이지?」
「틀림없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김 장군님의 증언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방금 말
씀드린 대로 김 장군님은 반쯤은, 아니 그 이상으로 정보부장의 역할을 수행하셨기 때
문입니다.」
「글쎄, 그건 이제 그 정도 하면 됐고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거냐구?」
「10.26 당일에도 김재규 부장은 김 장군님을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
김정호는 그날 오후 늦게 받았던 전화를 떠올렸다. 어쩌면 당시 정승화를 만나러 갔던
김정섭 차장보 대신 자신이 궁정동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김정호, 저녁에 무슨 일 있나?
- 네, 각하께서 조사하라시던 일을 오늘 밤 안으로 마무리지어야 됩니다. 내일 보고해
야 합니다.
- 참, 그렇지. 그 일이 있지.
-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응, 육군 총장을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오라 그랬는데 각하와 행사가 겹치게 됐어.
자네가 나가서 총장하고 대신 식사를 하면 했거든. 어쨌거나 자네가 만나던 사람이니
까 실례도 안 되고.
- 저도 그러고 싶지만 보고서 때문에 어렵겠습니다.
- 할 수 없지. 안면은 없지만 김정섭 차장보를 보내야겠군.
- 예의를 다하라 그러십시오. 정 총장 그 양반, 사람은 점잖아도 보기보다 예의에 민
감합니다.
- 알았어, 자네는 보고서나 잘 만들어. 각하께서 요즘 들어 부쩍 “뚱땡이는 잘 있
나”하고 자네를 보고 싶어하시던데.
도상훈련
「아마 합수부에 가서도 고생깨나 하셨을 겁니다. 김재규 부장 행위의 의미를 확산시
키려던 그들이 제2의 부장인 김 장군님으로부터 내부 모의 혐의를 캐보려고 온갖 수
단을 동원했을테니까요.」
김정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신문을 견뎌낼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것입니다. 아는 사실은 모조리 불게 되어 있
죠. 김 장군님도 예외는 아니셨을 겁니다.」
김정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때의 기억들이 스쳐갔다.
「거기서도 장군님은 같은 대답을 하셨겠죠. 왜냐하면 그것이 장군님의 진실이니까
요.」
「그래, 자네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하군. 그런데 뭘 그리 길게 얘기하는 건가? 도
대체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가?」
「김 장군님은 그 당시 숨기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역사를 진실되게 증언하셨죠.
하지만 저는 그 진실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무슨 의문?」
「장군님은 왜 그것이 김 부장의 단독 번행이라고 결론을 내리신 겁니까? 장군님을 대
통령 시해 현장에 참석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김정호는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때의 정황을 검증해 보려는 듯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누가 뭐래도 나는 그 사건이 김재규 부장의 우발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소. 한국에서 누가 나보다 더 김 부장의 의중을 잘 알고 있었겠소?」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김정호는 잠시 망설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바깥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우리만의 방법이 있었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김 부장은 보안사령관 출신, 나는 보안사 보안처장 및 참모장 출신이오. 우리는 보
안사령부의 모든 것을 아는 상태에서 중앙정보부를 장악했지. 즉 한국의 모든 기밀을
망라했던 거요. 거기에 비하면 청와대 경호실은 차지철이가 까불긴 했어도 각하 주위
를 맴도는 강아지 격이었지.」
이번에는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 부장과 나는 수십 번이나 도상 훈련을 했소. 만약의 경우……만약의 경우에 대한
민국을 장악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이오.」
「만약의 경우라면……?」
「아, 그것을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소.」
김정호는 손을 내저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한국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이라는 뜻이오. 어떤 이유에서건. 즉 순
수하게 안보적 측면에서 그런 도상 훈련을 했던 거요.」
「그 훈련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전쟁이 아닌 상태에서 한국을 장악하려면 열두 시간이내에 연행해야 할 사람
들의 명단과 거처, 움직임 따위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었소. 모두 합쳐 1백 명이 좀
안 되었지. 무슨 뜻인지 알겠소? 그들만 연행하면 대한민국은 당분간 공백 상태가 되
고 마는 거였소. 누가 무슨 짓을 해도 나설 사람이 없었던 거지.」
「그러나 대중(大衆)이 있지 않습니까?」
「대중? 김대중은 있을지 몰라도 그냥 대중은 없는 거요. 대중이란 늘 선전과 공작에
당하는 존재들 아니오.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김정호의 얼굴에 비웃음이 일었다.
「첩보란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이오. 그리고 그 희생자는 언제나 대중이지.」
40년을 수사와 정보로 살아온 김정호의 대중관은 철저하게 냉소적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날 밤, 부장이 나에게 한마디만 했으면 상황은 끝이었소. 단
한마디 말이오.」
김정호의 눈빛이 갑자기 살기를 띠었다. 이 세상 무엇이라도 집어삼킬 듯 살벌했다.
그러나 이내 그 눈빛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하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후회와
아쉬움으로, 그리고 또 하나는 원망으로 서서히 바뀌어갔다.
「"김정호, 시작해"라고 한마디만 했으면 세상은 모두 끝나는 것이었소.」
김정호의 가슴이 점점 벌렁거렸다.
「우리는 혁명을 할 수 있었던 거요. 당시 부장이나 나나 부마사태를 보면서, 그 절규
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지. 김재규 부장이, 그리고 이
김정호가 차지철처럼 아양만 떠는 애완견이었을 것 같소? 우리의 가슴에는 뜨거운 것
이 있었지. 조국을 위해 한평생 일해 왔다는 신념이었소. 나 김정호, 40년을 방첩대
·보안대·정보부의 최고 핵심직으로만 돌았지만 부정하지 않았소. 축재하지도 않았소.
아무 놈 모가지만 비틀어도 하룻밤에 몇 억은 나오던 시절이었지만, 이 김정호 그런
짓 한 번도 안 했소. 나는 평생 동안 죽일 놈 죽이고 살릴 놈 살렸소. 그런데 유신 독
재가 이대로 더 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던 거요. 그 도
상 훈련에는 어쩌면 우리의 이런 신념이 깃들여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요?」
「그런데, 그런데 나는 끝끝내 그 한마디를 못 들었던 거요. 그 한마디, "김정호, 시
작해"라는 한마디를 말이오.」
경훈은 이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김정호가 왜 김재규 부장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날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망할 놈의 영감'이라며 아쉬움과 그리움에 가슴 저
몄는지, 그리고 어째서 김재규 부장의 행위를 우발적 단독 행동이라고 확신하는지도…
….
「지시가 떨어졌다면 그날 밤으로 애들을 풀어 모두 다 잡아들였을 거요. 그리고 설득
하는 거지. 이대로면 온 나라 학생이 다 죽는다, 지금 봉기는 학생이 아닌 중산층이
일어나는 시민 봉기다, 민란이다, 어차피 대통령은 죽었다, 우리가 일어나 나라를 바
로잡아야 한다고. 그리고 밤사이에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김재규 부장은 다음날 아침
혁명위원장이 되어 있는 거요. 바로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양심수를 전원 석방하며,
신문사·방송국을 장악해서 '부장이 구국의 일념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이제 전
국민이 진정한 민주 조국의 길로 나가자'고 공포하는 거지. 남산에서 말이오.」
경훈의 머리가 번개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그랬을 경우 혁명의 성공 가능성은 어떠했
을까.
「아마 성공했을 거요. 하고도 남았겠지. 부마사태에서도 보이듯 모든 국민이 유신의
폭압 정치에 절망하고 있었으니까.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라는 이유 하나로도 모두가
우리의 편이 되었을 거요.」
「군부는요?」
「부장이나 나나 군 출신이오. 그리고 정승화 총장은 신중한 인물이었지. 차지철처럼
독재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강아지는 아니었소. 그런 순간에는 아무도 못 나서
는 거요. 일단은 눈치를 보게 돼 있지. 모르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는 인간이 있겠
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른다는 거지. 권력이 돌아가는 그 무서운 속도를 아무도 따라
잡을 수 없다는 거요.」
「김 부장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나 수없이 도상 훈련을 해놓고도?」
「수수께끼요, 수수께끼. 나도 도무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소.」
「당황해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모든 언론이 그렇게 얘기했지, 우발적 범행이었기 때문에 김재규의 머리에는 박정희
시해 후의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고. 그것은 바로 합수부의 수사 결과기도 하고. 하지
만 나는 그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소. 그토록 훈련을 했는데 아무리 창졸간이라지만
남산을 코앞에 두고 용산으로 간단 말이오? 그럴 리는 없소. 이해가 안 돼. "김정호,
시작해"라고 하면 모두 끝나는 일이었는데…….」
「흑시 김 부장이 정 총장으로부터 협박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을까요?」
「무슨 협박?」
「육본으로 가지 않으면 부하들이 정보부로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든지 말입니다.
말은 완곡하게 하더라도 그 정도면 김 부장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게 아닙니까?」
「천만에, 오히려 그 반대지. 정보부로 들어가기만 하면 10·26은 부장과 총장이 공
모한 쿠데타가 되고 마는 거요. 누가 총장이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
리는 거지. 총장이 부장을 협박해? 어떤 총장이라도 그럴 순 없소. 운전사든 박흥주든
김정섭 차장보든 김 부장이든 정 총장이든 합수부에서 그렇게 진술한 사람도 없고. 아
직도 모르겠소? 합수부 조사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그렇군요.」
「나는 그 수수께끼를 두고두고 생각했소. 도대체 왜, 도대체 왜 김 부장은 남산을 그
냥 지나쳐 용산으로 갔을까? 자기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낯선 곳으로 말이오.」
「김재규 부장이 혼자말처럼 어디로 가지? 남산? 육본? 했을때 박흥주가 육본이 낫겠
다고 했고 이어서 정 총장이 육본으로 가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즉 그 당시 김 부장은
당황해서 옆사람들의 말을 들었던 게 아닐까요?」
「결코 아니오. 김 부장은 유약했지만 어떤 때에는 황소 같은 고집이 있었지. 한번 생
각해 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밀고 나갔소. 그가 그 황망 중에 김계원 부장
에게 "형님, 저는 한번 한다면 하는 놈입니다'라고 얘기한 것도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 주지. 나는 합수부의 발표나 언론의 추측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그렇게 도상
훈련을 많이 했던 사람이 남산을 지나칠 무렵 흔들려서 박흥주에게 물었고 그의 얘기
에 따라 육본으로 갔다는 것 말이오. 즉 김재규는 천하의 바보라는 결론 말이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정호의 말은 경험 법칙에 비추어 봐도 틀림없었다. 사람은
당황할수록 자신이 익숙한 것, 안전한 것을 따라가게 마련인 법이다.
경훈은 10·26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넘어야 할 첫 번째 관문은 김재규 부장이 왜 남
산을 지나쳐 용산으로 갔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푸는 것임을 깨달았다.
남산과 용산
「남산으로 가면 살고 용산으로 가면 죽게 되지. 그러나 김재규 부장은 철저한 도상
훈련 시나리오를 버리고 용산으로 갔소. 죽을 곳으로 말이오. 나는 끝내 그 수수께끼
를 풀지 못했소.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부장은 그날 밤 절대로 혁명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오. 혁명을 하려고 했다면 틀림없이 나에게 "김정호, 시작해"라고 말했
을 테니까.」
이 부분에 대한 김정호의 결론은 단호했다. 경훈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김
재규를 대리했던 사람 김정호, 이 사람의 결론이 그대로 10·26의 결론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경훈의 뇌리 한편에서 강하게 치고 올라오는 또 한 갈래의 생각이 있었다. 만
약 김재규가 김정호에게도 밝히지 못할 그 어떤 사정이 있었다면? 그렇다면 김정호의
결론에 안주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언가가 잡힐 듯 말 듯했다. 그러나 경훈의 깊은
사색은 투박한 김정호의 목소리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그런데 어제 자네가 얘기하던 골자는 뭐지? 법정에서 뭐가 어쩌고 했었는데‥‥
‥.」 경훈은 잡힐 듯 말 듯하던 생각의 단초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잔잔한 목
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건이란 일어난 그대로가 가장 상식적이란 얘깁니다. 법정에서 다툼을 하다 보면
사건이 사실과는 아주 어긋나 버리는 경우가 많지요. 변호사가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검사나 판사도 나름대로 사건을 비트는 데 일조를 하게 됩니다.」
「모두 사건을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사건 속에 자신을 실으려 하겠지.」
김정호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상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10·26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은 몇 가지 모순점을 가
지고 있습니다.」
김정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경훈의 입가를 주시했다.
「그 첫 번째는 대통령 시해 행위를 김재규 부장의 우발적 범행으로 몰고 가려는 일관
된 시도입니다.」
김정호는 자신이 단호하게 결론 내렸던 부분을 경훈이 다시 거론하자 이맛살을 찌푸렸
다. 경훈이 어떤 말을 해도 이 부분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경훈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법정에서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당사자 혹은 참고
인의 진술입니다. 진술이란 터무니없이 당사자의 일방적 입장만을 대변할 수도 있고
혹은 당사자에게 불리하기 쉽습니다. 펜을 주고 마음대로 쓰라고 하면 전자의 경우가
발생하고, 수사 기관에서 고문을 하면 후자의 경우대로 됩니다.」
김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첩대 시절부터 수십 년을 수사통으로 지내온 그는 이런
상황을 너무도 잘 알았다. 죄 없는 사람도 닦달하면 살인범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지
않은가.
「지금껏 합수부, 또 합수부의 결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언론은 언제나
사람들의 진술을 판단 근거로 삼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김재규 부장은 합수부의 진술
에서는 충성 경쟁에서 밀린 소외감으로 우발적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고, 재판에서는
민주화의 열망으로 오랜 준비 끝에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했습니다. 그중 어떤 것이
진실입니까. 그중의 하나를 믿는 것만큼 잘못되기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김 부장의 행위가 우발적이 아니란 것을 말해 주는 무슨 단서라도 있단 말
이오?」
경훈은 잘 들으라는 듯이 김정호의 눈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대부분의 일은 상식적으로 볼 때 쉽게 이해가 됩니다. 김재규 부장은 당일 오후 4
시 10분쯤 남산에 있는 부장실에서 차지철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녁 6시에 각하를
모신 대행사가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김정호는 당시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날 김재규는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궁정동으로
갔다.
「김재규 부장은 전화를 받고는 곧 궁정동으로 출발했습니다. 짧은 거리라 불과 10분
정도 걸려 궁정동에 도착했지요. 4시 40분쯤 김 부장은 궁정동의 집무실에서 인터폰
으로 아래층에 있던 박흥주 대령에게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한테 전화를 걸라고 지시했
습니다. 그러자 박흥주 옆에 있던 윤병서 비서가 즉각 총장실로 전화를 했지요.」
김정호는 순간 당혹스러웠다.
「아시겠습니까? 김 부장은 대통령과의 대행사에 참석하러 궁정동으로 와서 정 총장에
게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조용히 얘기나 나누자구요. 너무도
잘 아시겠지만 '대행사'란 대통령과 비서실장, 경호실장, 그리고 정보부장이 같이 저
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노는 것입니다. 노래부르는 여자와 대통령을 모실 여자까지 불
러서요. 행사 장소는 궁정동의 정보부 안가고 주최자는 정보부장입니다. 경호실 직원
들도 여기까지 와서는 대통령의 경호를 정보부에 넘깁니다.」
김정호는 경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정보부장은 대통령이 자리를 떠나는 밤늦은 시간까지 만찬장을 떠날 수 없습니다.
즉 정승화 총장하고 저녁을 먹으면서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김정호의 숨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명색이 육군 참모총장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라의 제1인자기도 하지요. 그런
사람을 6시 30분에 저녁 먹자고 불러놓고 자신은 9시가 넘어야 끝나는 다른 만찬에
가 있겠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김정호의 눈언저리가 파르르 떨렸다.
「오후 4시에 이미 남산에서 김재규 부장을 만났던 김정섭 차장보는 5시에 다시 전화
를 받습니다. 6시 30분까지 궁정동으로 와서 정승화 총장과 같이 식사를 하라는 것이
었습니다. 김 부장은 정 총장과는 식사를 할 뜻이 아예 없었던 것이지요」
경훈의 논리에도 "김정호, 시작해" 못지않은 힘이 있었다.
「김 부장이 총장을 엿먹이려고 오라고 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겠지만…….」
김정호는 뒤를 흐렸다.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십시오. 합수부니 언론이니 하는 장막을 다 걷어내고 말입니다.
그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래야만 그 다음 수수께끼가 해결됩니다.」
김정호의 눈길이 경훈의 얼굴에 화살처럼 박혔다.
「그 다음 수수께끼라니 ?」
「바로 김 장군님의 수수께끼. 왜 김 부장은 남산을 지나쳐 용산으로 갔나 하는 의문
말입니다.」
「으음. 자네 얘기는 정 총장이 김 부장과 공모했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경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냐, 절대 그럴 수는 없어. 만약에 그랬다면 합수부 수사에서 나오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것은 방첩대로부터 정보부까지 수십 년을 수사와 정보 계통에서 살아온 김정호의 신
념이었다.
「장군님, "김정호, 시작해"를 버리십시오. 주관을 버리고 객관으로 보십시오. 김재규
부장의 행위는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닙니다. 합수부는 김 부장을 왜소하게 만드는 데
총력을 다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행위를 우발적인 것으로, 그가 박정희에게
총애를 받지 못한 반발심에서, 인사에서 밀릴 것을 염려한 용렬한 심리에서, 차지철에
대한 콤플렉스와 스트레스에서 일을 저지른 것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부분은 나도 생각해 본 적이 있소.」
「만약 10·26을 김재규 부장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 아니고 치밀하게 준비해서
시행한 거사라고 발표하면 세상은 뒤집어집니다. 김재규 개인이 명분을 얻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민중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주게 되지요. 최측근의 정보부장
조차 유신 폭압에 저항하는데 우리가 그냥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구호가 터져나왔을 겁
니다. 김재규 살려라를 외치며 학생, 지식인, 일반 시민 할 것 없이 모두가 뛰쳐나왔
을 겁니다. 그런데 전두환, 그의 보안사는 치밀했습니다. 그들은 김 부장의 행위와 민
중의 염원이 이어지는것을 차단했던 겁니다.」
「우발적이 아니란 얘기는 바로 유신을 결딴내겠다는 얘기가 되니까 말이지.」
「그렇지요. 하지만 합수부 발표의 허구는 이내 밝혀지고 맙니다. 그들은 10·26을
김재규 부장의 우발적 범행으로 규정하고 발표했지만, 김 부장을 기소할 때의 죄목은
내란 목적 살인죄였습니다. 우발적이 아닌, 치밀하게 계획하여 대통령 및 경호실장을
살해한 범행이라고 기소한 것입니다.」
「둘 중 하나는 조작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군.」
「역사는 아무리 조작해도 결국은 밝혀지게 마련입니다. 만약 그 당시 계엄이 실시되
지 않았다면, 즉 정 총장이 무소불위의 계엄사령관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사건의 초기
에 연행되었을 테고 김 부장과 공범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
입니다. 계엄이 정 총장을 살리고 10·26을 김 부장만의 우발적 범행으로 규정짓게
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 총장도 나중에 결국 12·12로 추락하지 않았나?」
「그때는 이미 상황이 달라진 후입니다. 그때 상황 역시 복잡했죠. 여하튼 10·26 직
후 합수부는 김 부장을 왜소하게 만드는 일에 전력을 다했고, 대중은 결국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정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중은 속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자신이 강변했던 사실
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의 수수께끼는 어떻게 해석할 건가?」
경훈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아직 추리 중입니다. 확실한 추론이 갖추어지면 다시 찾아뵙지요. 다만 이런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제 장군님이 술집에서 하시던 독백을 듣고 느낀 것인
데 10·26은 김재규 부장을 천하의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비웃었지
요. 어제 장군님의 독백도 그런 뜻이었지 않습니까. 아니 김 장군님뿐 아니라 어린아
이들도 김 부장을 비웃었을 겁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과연 김 부장이 그렇게 맹
추였을까요? 중학생만도 못한 지능을 가진 사람이었을까요?」
경훈은 김정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김정호는 이 괴이한
변호사가 과연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그를 주시했다. 이제 경훈의 한마디 한마디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의미로 다가왔다.
「혹시…… 혹시 이랬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경훈은 목소리를 낮추며 김정호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의아해하는 김정호의 귓전
에 경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어와 박혔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김 부장만이 아는 어떤 비밀은 없었을까요?」
「김 부장만이 아는 비밀이라구?」
「그렇습니다. 그만이 아는 비밀 말입니다.」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김재규 부장이 우발적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거사 후에
는 갈팡질팡하여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모든 이의 비웃음을 사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논리는 너무나 허술합니다.」
「어째서?」
「거사에 앞서 정승화 총장을 불러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부장은 시해 전후의 상
황과 대책에 대하여 생각을 해두었을 겁니다. 정 총장을 불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까요? 정 총장의 힘, 즉 군의 힘을 이용한다는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 군을 배후에 업지 않고선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까.」
「김재규 부장은 두 가지 복안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는 정승화 총장
을 데리고 남산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 경우 김 부장은 정 총장에게 얘기해서 수
경사라든지 군을 동원하여 정보부를 호위하게 했을 겁니다. 나머지 하나는 실제 그랬
던 것처럼 아예 육군 본부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단 이때에는 확실한 보장이 필요합니
다. 군이 확실히 자기 편이라는 보장 말입니다. 그러나 정 총장은 사전에 김 부장으로
부터 어떤 말도 듣지 못했고 군의 누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외견상 군이 김재규의
편이라는 아무런 징후도 없었죠. 게다가 대통령 유고로 김부장 자신이 주장하던 계엄
령이 선포되면 정 총장이 1인자가 될것이 뻔하고, 육본에서라면 총장은 김 부장을 구
속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것을 다 알면서도 용산으로 갈 이유는 절대로 없었을 것입니
다.」
「그런데 왜 용산으로 간 거요?」
「김 부장은 군이 자기 편이라는 확신이 없었으면 절대로 용산으로 안 갔을 겁니다.
군이 틀림없이 자기 편이라는 신념이 있었기에 정 총장만을 불러두고 그와 행동을 같
이했던 겁니다.」
「그러나 정 총장과는 사전 모의가 전혀 없었잖소?」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저는 한참 애를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기 때문에 김재규를 얼간이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거구요. 하지만 저는 깊은 사
색 끝에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결론이오?」
「중간에 누군가 있었다는 겁니다. 김재규 부장으로 하여금 군이 자기 편이라고 믿도
록 한 사람이 말입니다.」
「그게 누구요?」
「그게 누구인가가 10·26 최대의 수수께끼입니다. 김 부장이 남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용산으로 간 것, 즉 "김정호, 시작해"라는 카드를 쓰지 않은 데에는 엄청난 음모가 있
을지도 모릅니다.」
「음모? 엄청난 음모라? 그게 뭐지?」
「그것은 지금 추론 중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완전한 추론이 서면 다시 찾아뵙
겠습니다.」
경훈은 고개를 숙였다. 엉거주춤 인사를 받는 김정호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
했다.
케네디와 박정희
사무실에 돌아온 경훈은 커피 한잔을 앞에 놓고 앉았다. 자신의 추론을 반추하면서 과
연 어떤 인물이 김재규와 군을 이어줄 수 있을지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10·
26을 분석한 어떤 자료에도 그런 인물의 존재를 떠올릴 만한 단서는 없었다.
경훈은 김재규가 보안사에 연행되어 최초로 작성한 자필 진술서를 꺼내 읽었다. 경력
및 범행 동기부터 사후 처리 계획까지 번호를 매겨 작성한 진술서는 읽기가 역겨웠다.
비록 김재규의 손에 의해서 씌어지기는 했지만 말이 자필 진술서지 사실은 고문 기록
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8. 사후 처리 상황은 다음과 같이 하려고 하였습니다.
궁정동에서 육군 총장과 김정섭 차장보를 대동, 육본에 도착(차후 행동을 망설임)하여
혁명으로 유도하느냐, 총장을 협박할 것인가 사살할 것인가 망설였고 벙커에서 김계원
비서실장을 전화로 유도, 보안 유지를 당부시키고 육본 벙커, 총장실에 각군 수뇌와
각료가 소집되면 출입구를 잠그고 위협, 연금 조치하여 혁명으로 유도할까 망설였습니
다. 이상 진술은 사실 그대로 명확하게 진술하였습니다.
1979년 10월 28일 진술인 김재규
1∼7항까지의 진술서가 합수부의 의지대로 된 것이라면 8항은 좀 특이했다. 8항에
있는 김재규의 진술은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정보부가 아닌 육
군 본부에 가서 육군 총장을 협박할지 사살할지 망설였다는 진술에는 웃음이 나올 지
경이었다.
진술서 전체가 이렇듯이 우스꽝스러운 내용들로 꽉 차 있었다. 합수부나 언론이나 모
두 이 웃기는 진술서에 기초해서 10·26의 성격을 규정지었지만, 엄청난 고문 끝에
나온 이 진술서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역사의 날조에 동참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었다.
경훈의 눈빚은 8항에서 예사롭지 않게 번득였다. 이 잠꼬대와도 같은 진술에 김재규
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가 정승화에 대해 '협박', '
사살'이라는 표현을 쓴 데는 간단치 않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 표현에서는 정승화를 보호하려는 목적이 엿보였다. 엄청난 고문 끝에 작성한 이 진
술서에서조차 정승화를 보호하려는 김재규의 의지는 애절하기까지 했다. 거사에 대한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었던 정승화를 이토록 보호하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김재
규는 끝까지 육군 총장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얘기다.
김재규가 이처럼 육군 총장 정승화에게 기대를 걸었다면 그와 정승화로 대표되는 군을
연결시키는 어떤 사람이 있었을 거라는 추리가 굳어졌다. 김재규는 측근 중의 측근인
김정호에게조차 그 존재를 숨겼지만, "김정호, 시작해"까지 보류하면서 용산으로 간
것을 보면 그 제3의 인물의 존재가 더욱 분명해졌다.
「음…….」
경훈은 다 식어버린 커피를 입가로 가져갔다. 마치 커피에 알갱이라도 떠 있는 양 어
금니로 천천히 씹으며 한 모금을 넘길 때였다.
「때르르릉.」
경훈은 손을 뻗어 전화기를 들었다.
「나 인남이야.」
「전화 기다렸어. 마음 상했지?」
「무슨, 오히려 내가 바쁜 너를 괜히 귀찮게 하는 것 같아 잠도 못 잤어.」
경훈은 어색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선물 얘기를 꺼냈다.
「내게 선물이라고 준 것 말이야.」
「응.」
「그게 도대체 뭐지? 케네디에 대한 몇 마디 기록밖에 없던데.」
「내용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경훈아, 현 선생님이 유일하게 남기신 기록이라면 뭔
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좀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래?」
「그래, 알았어. 글자 사이사이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지 눈크게 뜨고 살펴볼게.」
「그래. 참, 그리고 수첩 마지막 페이지의 안 보이는 문장은 내가 전문가한테 부탁해
두었어.」
「어, 그래? 그런 걸 해독해 주는 전문가도 있니?」
「응, 미국을 떠나기 전 보스턴에서 맡겼어. 나도 현 선생님이 케네디 말고 무엇을 써
두셨는지 궁금증이 나서 못 견디겠더라구.」
「잘했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 며칠 간 지방에 좀 다녀올 거야.」
「왜, 무슨 일 있었어?」
「그냥 다음에 기회되면 이야기해 줄게.」
「그래, 올라오면 연락 줘.」
전화를 끊고 난 경훈은 제럴드 현의 수첩을 다시 첫 페이지부터 샅샅이 살폈다. 우선
글자 사이사이에 무슨 암호라도 없는지 면밀히 검토했다. 그런 다음 촛불을 켜고 수첩
을 서서히 그을려 보았다. 혹시 불기를 받으면 나타나는 특수한 잉크로 무언가를 써놓
았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방법들이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참 생각하던 경훈은 수첩을 다시 첫 페이지부터 차분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어쩌
면 수첩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다 보면 제럴드 현이 말하려는 바를 깨닫게 될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수첩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존슨의 행정 명령 88호는 나를 분노하게 만든다. 어째서 케네디 암살의 수사 결과를
2039년까지 공개하지 못하게 했는가. 그때에는 사건에 관계된 사람은 모두 이 세상을
떠나고 없다. 결국 존슨의 명령은 사건을 묻어두자는 것이 아닌가.
오즈월드는 결코 총을 쏘지 않았다. 이 세상의 누구라도 그 위치에서 총을 쏘아 케네
디를 죽일 수는 없다.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지은 것은 결국 케네디 암살이 아닌가. 흰 것과 검은 것의
대결에서 결국 검은 것이 이겨버리지 않았는가.
케네디의 가두 행진 경로를 바꾼 장본인인 댈러스 시장이 찰스 카벨의 친동생이란 사
실을 우리는 우연으로만 받아들여야 하나.
피그만 사건. 일단 케네디의 승리로 보였지만 결국 그들은 대통령에게 죽음을 선물하
지 않았는가.
케네디의 최대 실수는 동생 로버트를 법무장관에 임명한 것이다. 그가 로버트를 CIA
국장으로 임명했던들 이 패기만만한 두 이상주의자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케네디의 죽음 직후 떨어진 존슨의 월맹 폭격 명령. 이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케
네디는 윌맹 폭격을 그리도 완강하게 거부하지 않았던가.
케네디의 동서 화해와 박정희의 자주 국방. 이들은 출신 성분은 달라도 너무나 닮은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죽음조차도…….
수첩의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고 난 경훈은 다시 수첩을 촛불에 비춰보았다. 그러나 아
무런 변화도 없었다. 결국 드러난 내용속에서 정보를 캐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
첩은 단순한 유품에 불과할 것이다. 곰곰이 내용을 생각하니 경훈의 뇌리에 남는 것은
역시 그 문장이었다.
케네디와 박정희. 이 두 사람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닮았다는 것인가.
한 사람은 대부호의 아들로 하버드를 거친 엘리트, 또 한 사람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피지배 국민으로서 고독과 슬픔을 가슴 깊이 품은 군인 출신이 아닌가. 둘 다
대통령이란 직위에 을랐었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닮은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음…….」
경훈은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심하게 지나친 메모였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럴드 현이 유일하게 남긴 수첩이라면 인남의 말처
럼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경훈은 이 마지막 구절을 몇 번이나 되뇌면서 정신을 집중하여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두 사람이 닮았을까를 생각했다.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하면서 머릿속에서 아물거렸
다.
「아!」
불현듯 경훈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제럴드 현은 두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케네디도 박정희도 현직 대통령의 신분으로 죽음을 당했다.
암살, 이것이 두 사람의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제럴드 현이 굳이 이 구절을 메모까지 했다면 그것은
단순히 암살이라는 공통적 현상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으리라.
그렇다면 제럴드 현은 이 구절을 통해 두 사람의 암살 동기를 나타냈을 가능성이 있었
다. 두 사람의 암살 동기가 같다는 관점을 채택한다면, '너무나 닮은 이상주의자'라는
얘기는 이들을 암살한 세력이 결국 기득권을 가진 보수 세력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
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경훈은 일전에 만났던 전직 수사관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
리고 그 얘기는 경훈이 신문사 자료실에서 찾아낸 김재규가 재판에서 한 진술과도 일
치하는 것이었다. 경훈은 서류를 뒤져 재판 기록을 꺼냈다.
박 대통령의 자주 국방은 엄청난 혼란과 불안을 야기시켰습니다.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본인은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명백한 판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주 국
방은 잠꼬대 같은 것이었습니다.
기묘한 일치였다. 제럴드 현은 케네디가 살해당한 이유로는 동서 화해를, 박정희가 살
해당한 이유로는 자주국방을 꼽았다. 그리고 암살의 실행자인 김재규의 진술에서 자주
국방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경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제럴드 현은 이 단어를 꼽고
있을까.
도청
김재규, 그는 과연 혼자서 암살을 감행했던 것인가.
경훈은 일단 합수부의 결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생각을 전개해 보기로 했다.
이것은 재판에서 흔히 쓰이는 방법이다. 재판 당사자들은 거짓말을 하게 마련이라, 재
판관은 당사자들의 진술을 일단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라가 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것이 상식에 어긋나지 않고 자연스러우면 진실성을 인정해 준다. 그러나 무언가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한다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것이다. 재판관은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추궁한다.
합수부는 김재규의 암살 동기가 순전히 우발적인 것이었다고 발표했다. 술자리에서 격
분한 김재규가 차지철을 쏘고 나서 흥분 상태에서 다시 박정희를 쏘았다는 것이다.
경훈은 그 결론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노력하면 할수록 반감이 더욱 강하
게 치밀어올랐다. 합수부의 결론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모순이 도저히 덮어지지 않
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정승화의 대기였다. 김재규가 주빈이 되어 오랜 시간이 걸
리는 만찬을 치르면서 정승화에게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해놓은 다음 김정섭 차장보를
불러 대신 접대를 시킬 정도로 꼼꼼하게 준비한 사실을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인과 관계,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인과 관계를 따지는 일이다. 즉 원인
과 결과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느냐 아니면 우연에 불과하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인과관계로 볼 때, 김재규가 전적으로 우연히 정승화와 같이 자동차를 타고 육군본부
로 갔다는 결론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김재규는 자신이 못 나갈 것을 뻔히 알면서
정승화를 불렀고 사람을 시켜 접대를 하게 했다. 즉 모든 것은 김재규의 머릿속에 들
어 있었고, 결국 김재규는 준비한 대로 정승화와 같이 차를 타고 육군 본부로 가게 되
었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김재규의 범의가 우연이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
어떤 재판관이라도 이 중대한 인과 관계를 그냥 넘기지는 않으리라.
경훈은 김재규가 틀림없이 사전에 범의를 가졌다는 확고한 결론을 내렸다. 그는 다음
으로 제럴드 현의 메모와 김재규의 진술을 떠올렸다. 그러자 또다시‘자주 국방’이라
는 단어로 돌아가게 되었다. 기묘하게도 두 사람은 마치 의논이나 한 듯이 자주 국방
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는 케네디의 동서
화해.
경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벽에 부딪힌 것이다. 돌아가야 할 길이다. 일단 케네디의
죽음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경훈은 순간 하버드에서 같이 공부했던 스테파니를 떠올렸다. 그녀가 근무하는 로펌에
서 케네디와 관련된 여러 건의 소송을 진행해 왔던 것이다. 경훈과 동갑인 스테파니는
조를 짜서 토론을 할 때 매력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고 상
대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언제나 자기의 주장을 결론으로 가져갈 줄 아는 능력의 소
유자였다. 스테파니는 날씬한 몸매에 금발이었고, 언제나 상냥했으며, 아직 미혼이었
다.
스테파니는 다른 변호사들과는 어딘가 다른 경훈에게 상당한 호감을 보였다. 다른 변
호사들이 말의 화려함을 추구하는 데 반해 경훈은 언제나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경훈은 스테파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일류를 구가하는 변호사였
지만 의외로 순진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경훈과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자리에서와인을 마시고는 동양의 신비를 가진 남자와 사귀어보고 싶다면서 수줍게 웃
었다.
경훈을 시계를 보고는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교환과 비서를 거친 다음에 나온 스테파
니의 목소리는 반가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머, 경훈 씨. 어디예요?」
「한국이예요.」
「언제 그리로 갔어요? 나는 보스턴에 있는 줄 알고 몇번이나 전화했는데…….」
「어쨌거나 잘 지내죠?」
「그럼요. 경훈 씨 보고 싶은 것 빼고는.」
스테파니의 농담은 경쾌했다.
「그렇게 연락하기 어렵더니 웬일이에요?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스테파니 회사에서 케네디 관련 소송을 몇 건 맡았죠?」
「네, 주로 우리 팀에서 맡았어요.」
스테파니의 목소리에서는 금방 호기심이 묻어나왔다.
「케네디의 죽음에 대해 스테파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내 생각이라면요?」
「누가 어떤 동기로 죽였는가 하는 거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건 왜 묻죠?」
약간의 경계심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냥…….」
경훈은 무의미한 대답을 던져놓고는 뭐라고 덧붙여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개인적인 호기심이에요, 아니면 일과 관련된 거예요?」
스테파니는 혹시 경훈이 케네디와 관련된 소송을 진행하는가 싶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았다.
「하하, 스테파니. 나는 더 이상 에이펙스로펌에서 일하지 않아요. 지금 한국에서 잠
시 쉬고 있어요. 순전히 개인적 호기심에서 알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 일은 너무도 복잡해요. 경훈 씨도 잘 알다시피, 우리는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은
털어놓을 수 없잖아요.」
「비밀까지 알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다만 나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들을 정리해 보고
싶을 따름이에요.」
「호호, 몇가지 알려주고 싶은 일이 있긴 하지만 그냥은 안 되죠. 나를 책임진다면 몰
라도.」
스테파니는 경훈에게 뭔가 호의를 베풀고 싶기는 한데 여의지 않은 모양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한국에 와서 국제 변호사를 하면 돼요. 능력있는 사람이 남자에게 의
지하면 안 되죠.」
「그럼 정말 가요. 지금 전화상으로 아는 것 다 말해 주고 즉시 쫓겨나면 제일 빠르잖
아요.」
「마음에 없는 말은 그만 하고 방법이나 강구해 봐요. 제3자를 통한다든가.」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나도 그런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테리, 알죠? 하버드
에서 같이 스터디하던 홀쭉한 샌님 말이에요. 테리가 팀장이거든요. 같이 의논해 볼게
요. 어쨌거나 미국에 한번 와요.」
「거기까지요?」
「물론이죠. 귀하의 소중한 호기심을 위해서 말이에요.」
「알았어요. 며칠 내로 출발할게요.」
「경훈 씨가 많이 급한가 보죠? 아무튼 기다릴게요.」
수화기를 내려놓는 경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역시 스테파니는 기분을 좋게 해주
는 여자였다. 또 한편으로는 하버드 로스쿨의 잠재력이 느껴졌다. 하버드 출신끼리의
돈독한 의리는 미국 사회에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막 자리에 누웠던 경훈은 머리맡에서 울리는 날카로운 전화 벨 소리
에 놀라 일어났다.
「여보세요?」
그러나 저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인남이 전화를 걸어오던 그날과 똑같았다. 경훈은
전화를 끊으려다가 잠시 들고 있었다. 그냥 끊어버리기에는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
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장난 전화가 아닌 것 같았다.
「이 변호사, 안녕하시오.」
수화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어였다. 경훈은 흠칫 놀랐다. 지
극히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목소리에 인간의 감정이라곤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듯했다.
「누구요?」
경훈은 목소리가 떨렸다.
「알려줄 것이 있어서 전화했소.」
경훈은 상대방의 목소리가 왜 이럴까 생각하다가 짚이는 게 있었다.
「음성 변조기를 쓰고 있군요.」
「그렇소. 미안하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미안하지만 밝힐 수 없소.」
「그런데 이 늦은 밤에 웬 전화요?」
「이 변호사, 지금 휴대폰 가지고 있소?」
「있긴 하지만…….」
「번호를 말해 주시오. 위험에 대해 알려줄 일이 있어서 그렇소.」
「위험이라뇨?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휴대폰으로 통화합시다.」
경훈이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자 잠시 뒤에 신호가 울렸다.
경훈은 상대방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는 없었지만 구사하는 어휘로 보아서 막된 사람
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닥칠 위험에 대해 알려준다는 데야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휴대폰은 안전할까요?」
「점검해 봤소. 아직까지는 문제가 없소.」
「알려줄 일이란 뭡니까?」
「뉴욕에 갈 계획이 있소?」
「네, 뭐라구요?」
경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시오.」
「예.」
「그렇다면 존에프케네디 공항에는 내리지 마시오. 뉴어크든 라과디아든 어디든 다른
곳에 내리시오.」
「그러나 한국에서 가는 비행기는 존에프케네디 공항에 내리는데요.」
「그래서 하는 얘기 아니오.」
「도대체 어떤 위험이 있다는 겁니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소. 하지만 뭔가 상서롭지 못한 일이 준비되어 있을지 모르
오,」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뇨?」
「글쎄, 납치나 사고 같은 것이겠지요.」
「누가 무슨 이유로 내게 그런 일을 한다는 겁니까?」
「아직은 얘기할 수 없소. 그러나 이 변호사를 위한 우리 측의 방어 기제도 동원될 테
니 너무 두려워하진 마시오. 위축되면 끝이 없으니 당당하게 행동하시오.」
「그런데 왜 당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거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소, 다만 당신의 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오.」
「그런데 도대체 내가 뉴욕에 갈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 변호사의 전화는 도청되고 있소.」
「뭐라구요? 도청되고 있다구요?」
「그렇소.」
「누가 내 전화를 도청한다는 얘깁니까?」
「짐작은 가지만 아직 말할 순 없소.」
「도대체 이해할 수 없군요. 뭐가 뭔진 하나도 모르겠어요. 당신의 정체도 내게는 수
수께끼고. 당신도 나를 도청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 나는 아니오. 나는 당신을 도청하는 자들을 도청하고 있소. 그러다가 당신이
뉴욕에 간다고 그들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지금 전화를 거는 거요.」
「일전에 전화를 한 사람도 당신입니까?」
「밤에 말이오? 그래요, 내가 했소.」
「그런데 그때는 왜 끊었습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했소. 도청당하고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소.」
「아까 방어 기제가 동원된다고 했는데 그건 무슨 얘깁니까?」
「이 변호사, 지금은 얘기하기 어렵지만 나중에 다 알게 될 거요. 이제 그만 끊읍시
다.」
경훈은 뭐가 뭔지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 일단 전화를 걸어와 도청 사실을 알려준
상대는 자신에게 해로울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경훈은 머리를 가로 저으며 전화기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별다른 점은 발견할 수 없
었지만 경훈이 뉴욕에 가겠다고 하자마자 사나이로부터 연락이 온 것으로 보아 도청되
고 있음은 분명했다.
경훈은 기분이 나빠 전화기의 선을 뽑아버리려다가 일단 신고를 해서 도청하는 상대방
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번 전화 메모를 남겨 두었던
손 형사를 떠올렸다.
콤비
다음날 손 형사가 보낸 기술자들이 경훈의 전화선을 정밀히 조사한 끝에 도청 장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성능이군요. 외부 전화선에 붙여만 놓아도 도청이 되는 장치입니다.」
기술자는 신기한 듯 도청 장치를 들어 보였다.
「그런데 뭘 하시는 분 입니까?」
「그런 것도 밝혀야 합니까?」
경훈은 도청으로 기분이 찜찜하던 참이라 약간 과민하게 반응했다.
「수사에 도움이 된다 아입니꺼.」
등뒤에서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던 경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
졌다.
「어, 손 형사님」
「안녕하셨는교? 이 변호사님」
「반갑습니다. 여전하시군요.」
「지는 아직까지도 변호사님 덕택에 이 짓을 하고 있십니더.」
「제 덕택이라뇨?」
「와 그때 그 검찰청에서 마약 수사할 때 끄나풀 감시하다 놓쳐서 모가지 될 뻔했던…
….」
경훈은 가볍게 웃었다. 그때 손 형사가 큰 실수를 한 것을 자신이 조용히 덮어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무슨 사건이든 당장 해결해 줄 듯이 달려들던 손 형사는 경훈으로부터 대강의 자초지
종을 듣고 나자 그저 두툼한 손등으로 목덜미만 쓱 문지를 뿐이었다.
「지문도 없어졌을 끼고 딱히 의심가는 사람도 없다면 수사로 밝혀내기는 쫌 어려운…
….」
경훈도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기술자들을 보내고 나서 손 형사와 자리에 앉
았다. 경훈이 차를 타오자 손 형사는 황송해했다.
「그래. 지난번에는 무슨 일로 전화를 걸었던 거예요?」
경훈의 질문에 손 형사는 이것저것 주워대다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지가 얼마 전에 뺑소니 사건을 맡았는데 안 있십니꺼, 틀림없이 뺑소니를 가장한 살
인 사건이라예. 근데 그걸 채 익기도 전에 그만 터자부따 아입니꺼.」
경훈는 미소를 지으며 손 형사로부터 그 사건 진행의 전말을 자세히 들었다.
「그래서 그 검찰에서도 마, 종결시키 뿌라 했다 아입니꺼. 지로서는 살인 사건 한 건
놓친 기라예.」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 모양이군요.」
「여부가 있십니꺼. 사실 그때 지가 전화드린 것도 이 시보님, 아니 이 변호사님께 도
움을 쫌 받을 수 없을까 해서였십니더.」
「그 외국인은 나가기 전에 이미 술에 제법 취해 있던 상태라고 했죠. 그런데 어디서
술을 마셨답니까?」
「그 근처에서 마신 것 같지는 않십니더. 그런 사람에게 술을 팔았다는 가게가 없으이
까예. 지가 짐작하기로는 딴 데서 술을 잔뜩 마시고 호텔로 돌아와 방에서 쉬다가 다
시 전화를 받고 나가서 변을 당한 것 같십니더.」
「그 사람이 명함 한 장도 없이 한국으로 왔고 유일하게 미국에서부터 적어온 전화 번
호의 소유자는 피해자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면 뭔가 이상하긴 하군요. 속단할 수
는 없지만 한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으니까 이따가 사무실로 나오시죠.」
「아이고, 고맙십니더.」
손 형사가 돌아간 뒤 경훈은 지방에 다녀오겠다던 인남이 걱정되어 전화를 걸었다. 역
시 예상대로 인남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훈은 전화가 도청되었다는 것과 자신이 곧
미국으로 떠난다는 것,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면 전화 번호를 바꾸고 조심하라는 것 등
을 음성메시지로 남겼다.
경훈이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나가니 손 형사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카스 한 통을 팔에 낀 채 대기실에 앉아 있는 손 형사를 보자 경훈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일찍 오셨군요.」
「아이구, 이 변호사님. 바쁘신데 방해나 하는 게 아인지 모르겠십니더.」
「방해라뇨. 자주 오세요.」
「그럴 수가 있는교.」
손 형사는 경훈의 방을 휘휘 둘러보더니 탄성을 내질렀다.
「캬, 대단하네예. 세상에 무신 책을 이렇게나 마이 보십니꺼? 지는 제목을 보고도 무
신 책인지 모르겠십니더.」
경훈은 웃었다.
「차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아무거나 주이소.」
경훈이 인터폰으로 차를 주문하고 나자, 손 형사는 경훈이 아침에 자신이 품었던 의문
점을 인정해 준 게 생각났는지 재차 물어왔다.
「그러니까 지가 머 잘못한 것은 없지 않십니꺼?」
「네, 당연히 의심스러운 부분을 짚은 겁니다.」
「그런데 와 그 시점에서 수사 종결을 해야 했던 겁니꺼?」
「압력을 받았던 거지요.」
「그라믄 그 회사가 더 수상한 거 아입니꺼?」
「수상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의심받는 것을 싫어하지요. 더군다나 피해자의 주머니
속에서 전화 번호가 나왔다고 마구 조사하는 식은 곤란합니다. 또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구요. 누가 전화 전호 메모 하나 있다고 자신의 범행을 순순
히 시인하겠습니까?」
「그렇네예. 그럼 이 사건은 포기해야 합니꺼?」
「아닙니다. 문제점은 정확하게 포착했어요. 다만 방법이 잘못된 거죠. 일단 피해자가
그 회사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입증해
야 하는 책임이 수사관에게 있지요. 이렇게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피해자가 미국인이
고 그 회사는 무기 거래를 한다고 했으니, 우선 미국제 무기의 판매에 관여한 적이 있
는지 어떤지부터 알아보세요. 그것은 아마 관할세무서를 찾아가 확인하면 될 겁니다.
일단 그 회사가 미국제 무기의 판매에 관여되었다면 다음으로는 대사관을 통해 피해자
의 신원을 알아 연고자에게 연락을 취하세요. 그리고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
지를 알아보는 거죠. 만약 피해자가 한국과 무기 거래가 있는 회사에 근무했다면 그
회사와의 연관성이 입증되는 겁니다. 그럴 때에 그 회사를 방문해서 조사를 할 수 있
는 것이지요.」
경훈이 수사의 절차를 차근차근 설명해 가는 동안 손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풀
이 죽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지 능력 밖의 일이네예.」
「서에서는 사건을 종결했나요?」
「네. 검찰에서도 끝냈십니더.」
경훈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을 써볼 수 있겠군요.」
「어떤 방법입니꺼?」
경훈은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동아일보》의 윤민기 기자한테 전화 연결시켜 줘요.」
곧 벨이 다시 울리자 경훈은 수화기를 들었다.
「응, 나 경훈이다. 부탁이 있어. 리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가 미국의 어떤 회사들을
대행하는지 여부와 그 회사들의 팩스 번호를 좀 알아봐 줘.」
「이 친구, 오랜만에 전화해서 고작 그런거나 부탁하는 거야?」
「친구 좋다는 게 뭐야.」
「하긴 그래. 그나마 일이라도 없으면 전화라도 하지 않겠지. 이놈의 서울 생활이란.
자네 팩스 몇번이야?」
경훈은 팩스 번호를 불러 주었다.
「고마워. 다음에 술 한잔하자구.」
늘 하는 빈말 같은 인사에 두 사람은 웃었다. 필경 다음에 술을 한잔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그런 인사였다.
윤 기자는 그냥 전화를 끊을 것처럼 하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달에 고등학교 동창 몇몇 불러서 네 귀국 모임이라도 가져야겠다. 내가 연락할
테니 그땐 꼭 나와.」
「그래. 고맙다.」
얼마 후 경훈의 비서가 윤 기자에게서 들어온 팩스를 가지고 왔다. 이런 일련의 과정
을 손 형사는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자, 이게 리엔지니어링과 거래하는 미국 회사들의 명단입니다. 그 피해자가 이 회사
들 중 한 곳에 근무했다면 최소한 리엔지니어링에 가서 피해자의 행적과 관련한 질문
을 해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회사들한테 어떻게 물어봅니꺼?」
「제가 하죠.」
경훈은 비서를 불러 내용을 일러주며 타이프를 쳐서 팩스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회신이 오기를 기다려야죠.」
「이거 참 미안합니더. 번거롭게 해드렸십니더.」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손 형사님께 감동했습니다.」
「부끄럽십니더. 언제 연락할까예?」
「번호를 알려주세요. 소득이 있으면 제가 연락드리죠.」
「고맙십니더.」
「참, 그리고 도청 방지 장치를 좀 해야겠는데요.」
「그라지예. 지가 도와드리겠십니더.」
경훈은 손 형사와 같이 시내에 가서 도청 방지 장치를 파는 업자를 만났다. 형사가 소
개해서 그런지 업자는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도청 방지 장치를 끝낸 경훈은 바로 캐나
다의 오세희에게 전화를 했다.
「예상했던 일이오. 어떤 놈들인지 정체가 드러날 때까지는 조심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소.」
「그 의사는 추적해 보셨습니까?」
「아직 소득이 없소. 그때 이후로 그 사람은 종적을 감춘 것 같소. 어려서 살던 고향
에서부터 마지막 근무하던 병원까지 샅샅이 찾고 있지만 어떤 근거 있는 연락처는 없
소. 그러나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좀더 기다려봅시다.」
다음날 사무실로 나간 경훈은 한장의 팩스도 와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실망했다. 손 형
사는 경훈이 연락도 안 했는데 일찍 찾아왔다.
「인자 우짜지예?」
손 형사는 끈질겼다. 비록 팩스는 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손 형사가 포착한 혐의점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외국에 나온 사람이 아무 관련도 없는 회사의 전화 번호를 가
지고 왔을 리는 없으니까.
「정리를 한번 해봅시다. 피해자는 미국에서부터 리엔지니어링의 전화 번호를 적어 가
지고 왔습니다. 명함 따위나 서류가 없는 걸 보면 그는 비즈니스로 온 것은 아니지요.
미국에서부터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가지고 왔다면 그는 틀림없이 리엔지니어링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그가 리엔지니어링에 전화를 걸지 않았을 리
가 없죠. 그러나 리엔지니어링에서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대답한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런 경우는 통화기록을 조사해 봐야죠. 관할 전화국에 가서 알아보세요. 그리고 피해
자가 묵었던 호텔에 가서도 통화 기록을 조사하시구요.」
「피해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갔다 카데예.」
「그렇다면 그 전화가 어디서 온 것인지 확인하세요. 그 전화를 걸었던 사람이 현재로
서는 노출된 용의자입니다.」
「알겠십니더. 변호사님이 도와주시니까 머리가 홱홱 돌아가는데예.」
「…….」
「사건이 끝날 때까지 부디 쫌 도와주이소.」
「그러죠.」
손 형사는 경훈에게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나서 나갔다. 경훈은 그런 손형사가 부러
웠다. 손 형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모르는 것은 도움을 청할 사
람도 있었다. 그러나 경훈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오직 추리에
의해서만 문제를 풀어가야 했다. 그나마 지금까지의 추리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지
만 앞으로는 약도 한 장 없는 상황에서 목적지를 찾아가야 했다.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는 사실에서 역사를 조합해 내야 하는 것이다.
오후가 되자 손 형사가 다시 경훈을 찾아왔다. 그는 이제 아예 경훈을 수사반장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쁜 놈들, 그 피해자는 리엔지니어링에 다섯 차례나 전화를 했던데예. 그런데도 그
런 사람을 모른다고 했다면 이건 뭐가 있어도 단단히 있을 것 같십니더.」
손 형사는 흥분했다.
「꼭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차분히 생각하세요. 그가 누군가를 찾았다가 그냥
끊었을 수도 있고, 이럴 경우 회사에서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 있으니까요. 사건 당일
피해자가 묵던 호텔로 전화를 한 사람은 있던가요?」
「네. 있었십니더.」
「그 사람이 유력한 용의자예요. 누구였죠?」
「그런데, 그게…… 그 전화는 미국에서 걸려왔십니더.」
「미국에서?」
「네.」
「그렇다면 일이 어려워지는군요.」
「웬만한 놈들이라면 칵 조지삐리겠는데……. 이거야 말단 사원이 서장에게 전화를 거
는 상황이니 옴치고 뛸 수가 없다 아입니꺼.」
「그럴 것은 아니고…… 좀 생각해 봅시다.」
경훈은 손 형사가 건네준 자료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음, 이상한 점이 있군요.」
「먼데예?」
「피해자의 통화 기록을 보세요.」
손 형사는 통화 기록을 유심히 살폈으나 별다른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글쎄, 지는 잘 모르겠십니더.」
「그는 첫 번째 전화를 하고 나서 3일 간은 아무 연락도 없다가 4일째부터 하루에 한
차례씩 통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전화의 통화 시간이 다른 네 개에 비해 현저
히 길잖아요?」
「아, 그렇네예. 그런데 그게 무신 의미가 있십니꺼?」
「다른 네 번의 전화는 모두 20초 안에 끝났죠. 그런데 처음의 전화는 무려 7분이 넘
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은가요?」
「그렇십니더. 이상하네예. 하지만 우째 해석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십니더.」
「20초라는 시간은 용건을 얘기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즉 누가 있느냐고 묻
는 정도의 간단한 전화죠. 물론 그가 찾는 상대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 정도에 걸리
는 시간이 20초예요. 하지만 처음의 7분이라는 시간은 제대로 통화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통화 시간을 통해서 처음에 피해자와 대화를 나눈 사람이 그 다음부터는 전
화를 피했거나계속 부재중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에 있으면서 걸려
오는 전화를 계속 피하기만 한다는 것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도움은커녕 손해만 될
겁니다. 따라서 첫 번째 전화를 받은 사람이 그후로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죠.」
「아, 변호사님은 진짜 억수로 머리가 좋십니더. 우째 그런 걸 다 생각해 낼 수 있십
니꺼?」
경훈을 바라보는 손 형사의 눈에 감탄과 존경의 빛이 역력했다.
「공식적으로 회사에 안 나올 수 있는 이유는 휴가나 출장입니다. 리엔지니어링에서
첫 번째 전화와 두 번째 전화 사이에 휴가나 출장을 간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면 되겠
군요.」
「알아보고 오겠십니더.」
「다른 사건 때문에도 바쁘실 텐데. 수고가 많으시군요.」
「수고라꼬예? 지가 변호사님만큼 머리는 안 돌아가지만 발로 뛰는 것만큼은 자신 있
십니더.」
손 형사는 자기 말처럼 자신감이 실린 힘찬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돌아
온 것은 경훈이 퇴근하려고 막 일어설 때였다.
「어이쿠, 변호사님. 이거 지가 너무 괴롭혀드립니더.」
「아니 괜찮습니다. 이젠 저도 재미있는데요.」
「헤헤, 이러다가 허탕치면 미안해서 우짜지예?」
「출장을 간 사람이 있던가요?」
「변호사님은 귀신이데예. 우째 통화 기록 하나 가지고 그렇게나 섬뜩한 추리를 해냈
는지, 지는 아무리 해도 따라갈 수가 없십니더.」
「…….」
「출장을 간 사람은 그 회사의 사장이었십니더.」
「그렇군요.」
경훈은 짐작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전화가 오후 5시에 회사로 걸려왔는데 그날 아침 사장은 해외 출장을 갔던
데예.」
「그 피해자는 사장이 돌아올 때까지 하루 한차례씩 전화를 걸며 기다렸던 거군요.」
「지도 그렇게 생각했십니더.」
「그런데 사장은 어디로 출장을 갔습니까?」
「해외출장입니더. 미국이던데예.」
「음, 미국이라구요.」
경훈은 예사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미국이라는 지역이 어떤 의미가 있십니꺼?」
「이상한 예감이 드는군요. 피해자를 밤늦게 불러낸 전화도 미국에서 왔다고 했죠?」
「네.」
「그 전화를 조사해 보세요. 미국의 어디서 걸려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네. 또다른 것은 없십니꺼?」
「그게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그 전화가…….」
「만약……?」
「하여튼 일단 조사부터 해보세요.」
「알겠십니더.」
손 형사는 그날 밤 아예 경훈의 집으로 찾아왔다. 경훈은 사건을 뒤쫓는 그의 열의에
탄복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옥스퍼드팰리스호텔, 로스앤젤레스에 있십니더.」
「역시 그랬군요. 사장의 이름이 뭡니까?」
「해리 제임스라는 이름이던데예.」
「제임스? 그럼 사장이 외국인인가요?」
「네. 알아보니 많은 무기 거래상이 외국인과 합작하거나 사장은 이름만 빌려주고 실
제 주
인은 외국인이던데예.」
경훈은 잠시 생각하더니 바로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국제 전화 접수죠? 로스앤젤레스의 옥스퍼드팰리스호텔 부탁합니다. 안, 프런트 데
스크면
됩니다.」
상대가 나오자 경훈은 사장의 이름을 댔다.
「체크아웃하셨다구요. 언제, 벌써 한참이나 되었다구요? 아, 여기는 회사 경리 담당
자인데
요, 숙박 비용 명세서를 팩스로 좀 보내주세요. 네? 사장님께 드렸다구요? 하지만 사
장님은
늘 그런 걸 버리고 안 갖다 주세요. 그래서 우리는 사장님이 출장 가실 때마다 호텔에
전화
를 걸어야 한답니다.」
손 형사는 어안이벙벙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알 수 없었다. 경훈은 손 형
사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자신의 팩스 번호를 수화기에 대고 불러줬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얼
마 되
지 않아 옥스퍼드팰리스호텔에서는 바로 팩스를 보내왔다.
「지는 봐도 모르겠는데요.」
손 형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경훈의 어깨 너머로 대충 영어로 인쇄된 팩스를 훑었다.
「역시 제 짐작이 많았군요. 이 전화 번호를 보세요. 그 사장은 피해자에게 전화를 하
고 바
로 다른 누군가에게도 전화를 했잖아요. 시간대를 확인해 봅시다. 보자…… 한국 시간
으로
11시가 좀 넘었군요. 사고가 났던 시간대입니다. 이 전화 번호를 메모하세요.」
손 형사는 얼른 수첩을 꺼내 경훈이 부르는 번호를 받아적었다. 휴대폰 번호였다.
「이 휴대폰의 소지자를 추적해 보세요.」
「이자가 하수인이란 뜻입니꺼?」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검거해도 됩니꺼?」
「안 됩니다. 아직 떠오른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물증이 없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우찌 돌아가고 있는지 설명 쫌 해주이소.」
「로버트 숀이라는 이름의 이 미국인 피해자는 리엔지니어링과 모종의 관계가 있습니
다. 미
국의 무기 회사들이 팩스를 보내지 않은 것을 보면 정당한 무기 거래를 둘러싼 일 같
지는
않군요. 좌우간 숀은 한국에 와서 리엔지니어링의 사장 제임스와 통화를 했습니다. 그
리고
두 사람은 만났겠죠. 제임스는 숀과 만난 후 무슨 이유에선가 그를 살해할 필요를 느
꼈습니
다. 그러고는 미국으로 간 거지요.」
「와 숀은 살해하겠다고 마음먹은 후 미국으로 갔십니꺼?」
「알리바이 때문이죠. 제임스 사장은 교묘하게 머리를 썼습니다. 그는 하수인을 대기
시켜 놓
고는 미국에서 숀에게 전화를 한 겁니다. 일부러 늦은 밤에요. 자동차로 치어 죽이기
위해서
말이죠. 숀에게는 길 건너편에 있으니 바로 나오라고 얘기했던 겁니다. 아마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툭 털어놓고 의논하자는 투로 말했겠죠. 숀은 아무런 의심 없이 호텔을 나와
길을
건넜을 겁니다.」
「세상에. 그렇게 머리를 쓰는 인간이 다 있십니꺼? 누가 미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의
심하겠
십니꺼? 참으로 약하빠졌네예.」
「거의 완벽하죠. 제임스라는 사람의 범행을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겠군요.」
손 형사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일단 제임스 사장의 이력을 알아봐 주세요. 숀이 무기 판매 쪽으로 연결이 안 된다
면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가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권도 복사해서 주세요. 저도
개인적
으로 알아볼 테니까요.」
「아이고마, 고맙십니더. 변호사님은 진짜 천잽니더. 지는 아직도 머가 우찌 돌아가는
지 하
나도 모르겠십니더.」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손 형사는 다시 경훈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손 형사는 어느새
제임스
의 이력을 손에 넣고 있었다.
「어떻게 이리 쉽게 알아냈습니까?」
「다 수가 있십니더.」
손 형사는 자랑스럽게 턱을 내밀면서 뻐기는 눈치였다.
「다시 봐야겠는데요.」
경훈이 웃으며 칭찬하자 손 형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같이 순경에서 출발했는데 지금은 경정까지 올라간 동기가 있십니더. 부탁을 쫌 했
다 아
입니꺼.」
「그랬군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계급 차이가 납니까?」
「가는 공부로, 지는 주먹으로 세상을 살았다 아입니꺼.」
「이해가 가는군요.」
경훈은 웃으며 제임스의 이력을 살펴보았다.
「이 사람은 주한 미군에 오래 있었군요.」
「네, 그 경력으로 먹고 살 깁니다.」
「무슨 얘기죠?」
「무기 거래라는 게 모두 로비에 의해 좌우된다 카데예.」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과 숀의 이력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겠군요.」
「참, 여기 숀의 여권 사본이 있십니더.」
「숀의 행적을 수사해 보세요. 한국에 6일 간이나 있었다면 어디엔가 흔적이 있을 겁
니다.」
「알겠습니더.」
「어쩌면 숀이 제임스에게는 무시무시한 방문자였을지도 몰라요. 사소한 약점 따위가
아니
라 모든 것을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핵폭탄을 가기고 온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
장같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 죽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보통 일은 아
니었겠
죠.」
「그렇십니꺼?」
손 형사는 마치 언젠가처럼 검찰청에서 경훈과 같이 일하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경훈
은 예
나 지금이나 일 처리에 빈틈이 없었다.
「참, 그리고 저는 내일 미국에 갑니다. 갔다 와서 전화를 하겠습니다.」
「알겠십니더. 잘 다녀오이소.」
해독
손 형사가 나가자 경훈은 바로 지미의 사무실로 내려갔다.
「지미, 부탁 좀 들어줘.」
「뭔데?」
지미는 하던 일을 멈추고 경훈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왜 그렇게 겁내?」
「시간 걸리는 일은 안 돼.」
「세상에 시간 안 걸리는 부탁도 있어?」
「팀워크 때문에 정신이 없어. 당신 나라 수재들하고 보조 맞추려니까 시간이 너무 모
자라.
하여튼 말해 봐. 뭔데?」
「변사한 미국인이 있거든. 그 신원 좀 알아봐 줘.」
「여기서 죽었어?」
「그래, 교통 사고로.」
「그럼 간단하겠네. 영사한테 물어보면 알 것 아냐?」
「신원 조사까지 했을까?」
「물론. 미국 영사관에서는 한국 정부 측과는 별도로 사고를 조사하니까 신원 파악이
다 돼
있을 꺼야. 어디 그 사람 여권 줘봐.」
경훈이 내민 로버트 숀의 여권 사본을 유심히 살펴보던 지미는 뭔가 기억해 내려는 듯
한 표
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이름 어디서 들은 적 있는데…….」
「그래?」
경훈이 귀를 곤두세웠다.
「어디서였더라?」
「잘 생각해 봐.」
한참 기억을 더듬던 지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기억이 안 나.」
「하여튼 신원을 파악해 줘.」
「알았어.」
지미는 여권 사본을 받아들고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시간 축내지 말고 사라져달라
는 의
미였다.
다음날 경훈은 집을 나서기 전에 인남에게 몇 차례나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인남은
아직도
지방에서 올라오지 않았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훈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음성
메세지
를 남기고는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경훈은 늘 타는 비행기지만 사나이로부터 경고 전화를 받은 후라 마음이 썩 편치 않았
다.
사나이의 경고를 무시하고 뉴욕 직행 비행기를 예약하려다가 혹시나 해서 디트로이트
에 기
착하는 항공권을 끊었다. 디트로이트에서 갈아타고 뉴욕으로 가는 편이 안전할 것이라
는 생
각에서였다. 국내선을 타면 라과디아 공항에 내리게 될 것이다.
디트로이트에 내린 경훈은 공항에서 기다리는 동안 집으로 전화를 걸어 메시지를 확인
해 보
았다. 인남의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세상에, 전화가 도정되고 있었다고. 끔찍하구나. 현 선생님 일이겠지. 위기가 있을
걸로 생
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닥치니 몸이 떨려. 미국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거니? 얘기라도
해주
었으면 불안하지 않을 텐데. 참, 그리고 그 때 현 선생님 수첩의 안 보이던 글자가 해
독됐는
데 지금 불러줄께. 미국에 잘 도착하면 연락해 줘.」
인남이 불러준 메모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이제 노벰버를 스터디하는 것이 대세다. 그리고 그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모두가 등
을 돌
리고 있다. (79. 3. 26)
- 하문, 이놈은 왜 나를 슬슬 피하는 걸까? 나 모르게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아는 녀석이 왜 그러지?(79. 10. 11)
-제리,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해줄게라고? 하문, 네가, 네가 그럴 수 있는 거야? 그
자식은
이미 빼돌리고. (79. 10. 27)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인남의 목소리는 경훈의 불안감을 한결 가시게 해주었다. 그러나
인남
이 남겨놓은 수첩의 내용은 경훈이 디트로이트에서 뉴욕까지 가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떠나
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 글자들이 씌어진 날짜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10·26을 중간에 두고 기
록된
날짜와 문장의 내용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히 맨 마지막 문장이 씌어진
10·26
바로 다음날이었다. 하지만 ‘노벰버’니 ‘하문’이니 하는 말들의 뜻을 모르고는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경훈은 오랜 시간을 곰곰 생각하다가 일단 이 말들을 머릿속에 접
어두
었다.
비행기가 라과디아 공항에 도착하자 경훈은 주변을 살폈으나 별 이상한 점은 없었다.
심장
병 어린이들을 위해 모금을 하는 자원 봉사자 한 명이 다가와 잠시 긴장하기는 했지만
별다
른 일은 아니었다. 경훈은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잡아탄 뒤 일단 호텔로 향했다.
호텔 방에 짐을 푼 경훈은 오세희에게 인사차 전화를 했다. 그러자 오세희는 뉴욕에
오겠다
는 뜻을 밝혔다.
「옛날 녹음해 둔 테이프를 듣다 보니 아주 중요한 일이 생각났소. 마침 뉴욕의 거래
회사
에 볼일도 있으니 내일 출발하리다.」
경훈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스테파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반색을
했다.
「어머, 정말 왔어요?
「얼른 나와요. 퇴근 시간 됐잖아요.」
「그럼요, 누구 명령이라구. 저녁은 뭘 먹을까요?」
「그건 스테파니가 알아서 해요.」
「그럼 뉴욕 스테이크 전문점에 갈까요?」
「좋죠.」
「호텔 로비에서 기다려요.」
잠시 후,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스테파니가 온 얼굴에 웃음을 띤 채 호텔 로비로 들어
섰다.
「눈부시게 아름답군요.」
「경훈씨도 여전하네요.」
스테파니는 악수로는 부족했는지 경훈을 잠시 껴안았다. 두 사람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은 뉴욕 스테이크와 시푸드를 전문으로 하는 분위기 있는 식당이었다.
「와인 한잔 나눌까요?」
「연인들처럼 말이죠.」
「맞아요. 연인이라고 못할 것도 없죠 뭐. 가끔 경훈 씨 생각을 하니까요.」
「농담도 늘었네요.」
스테파니는 식사를 하는 동안 줄곧 경훈에게 정감 있는 눈길을 보냈다.
「여기서 같이 일하지 않을래요?」
「스테파니 회사에서?」
「그래요. 경훈 씨가 온다면 최고의 대우를 해줄걸요. 최고급 아파트에 캐딜락, 특별
보너스
만 해도 연봉보다 많을 거예요.」
「스테파니는 어떤 대우를 받고 있나요?」
「나는 한 10년 있어도 그런 대접 받을까말까요.」
「이거 왜 이래요, 하버드 최고의 토론꾼이.」
「그게 우습더라구요. 토론은 어떨지 몰라도 소송은 힘에 부쳐요. 번번이 상대의 술수
에 넘
어가고 말거든요.」
「착해서 그래요. 상대를 너무 신뢰하니까 그런 거죠.」
「그건 좀 모순되는 예기 같은데요. 언젠가 경훈 씨가 말하길,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
착한
거라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두 번째 큰 힘이 뭐라 그랬더라……?」
「무식한 거라 그랬죠.」
「맞아, 호호. 무식한 게 그렇게나 큰 힘이에요?」
「그런 게 있어요.」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어요. 나는 유식한 힘을 갖고 싶단 말이에요. 어쨌거나 그 착
한 힘이
란 건 언제 나오는 거죠?」
「쌓아야죠. 지금은 그렇게 착하게 해서 지는 게 좋은 거예요.」
「그게 운명의 힘이란 건가요? 어쨌든 경훈 씨는 이해하긴 힘들어요. 그 엉뚱함이 매
력이긴
하지만.」
스테파니는 경훈의 말을 반쯤은 이해하는 눈치였다.
「참, 그리고 경훈 씨가 얘기했던 일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 부탁을 해두었어요. 내일
그 사
람 사무실로 가서 만나면 돼요.」
「뭐하는 사람인테요?」
「케네디 연구가라고나 할까요. 일전에 우리가 도와준 적이 있었거든요.」
「저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녜요?」
「언젠가 경훈 씨도 날 도와주면 되잖아요.」
「그야 물론이죠.」
스테파니아 헤어져 호텔 방으로 돌아온 경훈은 테라스의 커튼을 걷고 시내를 내려다보
았다.
멀리 자유의 여신상에서 비치는 불빛이 짙은 밤안개를 뚫고 어슴푸레하게 눈에 들어왔
다.
경훈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누가 뭐래도 미국은 세계를 이끌어가
는 초
일류 국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들의 대통령을 죽인 배후도 분명히 밝혀내지 못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 불가해한 측면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불안정성을
드러
내는 게 아닐까.
피그만 사건
다음날 경훈은 스테파니가 일러준 38번가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스테파니가 시간 약
속까지
해둔 덕분에, 그는 편안하게 케네디 연구가와 마주앉을 수 있었다.
「앉으시오. 난 빌이라고 하오. 무얼 마시겠소?」
상대는 경훈이 누구든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인사부터 음료수까지 한번에 물어왔다.
경훈은 케렌스키가 생각났다. 케렌스키는 기분 좋은 손님을 만날 때면 아침부터 스카
치를
마시곤 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중요한 사람을 만나면 그날 하루는 더 일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아침부터 마셔도 되다는 것이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특별한 습관을
고집
하는 경향이 있다. 경훈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음료수를 부탁했다.
「괜찮으면 스카치 한잔합시다. 이 빌어먹을 케네디 얘기를 하려면 한잔 마시지 않고
는 못
배긴단 말이오.」
「좋습니다.」
마침 경훈도 케렌스키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을 떠올리던 참이었다. 그날 케렌스키도
스카
치를 권했었다. 빌은 얼음 채운 스카치 두 잔을 가지고 와 경훈의 앞에 놓고는 자신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스테파니으 부탁도 있었지만 당신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는 구면. 그 진지한 자세가
마음
에 든단 말이오.」
빌은 오십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선물이라도 준비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당신은 자꾸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구먼. 그 깔끔한 모습하고 점잖은 말씨가 케네디
를 생
각나게 한단 말이야. 당신들은 닮았소.」
「케네디는 미남이었잖습니까.」
「하하, 당신은 그 이상이야. 어디, 한국에서 왔다고 했소?」
「네.」
「그런데 당신은 케네디의 무엇을 알고 싶은 거요?」
「누가 죽였는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렇겠지.」
빌은 다시 잔을 입에 갖다 댔다. 한참을 홀짝거리는 것으로 보아 이야기를 어디에서부
터 시
작해야 할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빌은 경훈이 만난 보통의 미국인들과 달리 얼음을
입에
넣어 와자작 소리가 나도록 깨물어 먹었다. 그런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빌은 일단 이
야기를
시작하자 거칠어 보이던 태도와는 달리 목소리를 낮췄다.
「케네디 사건은 의외의 곳에서 그 본모습이 드러났소.」
「의외의 곳이라면?」
「워터게이트요.」
「네?」
경훈은 뜻밖의 얘기에 놀았다.
「워터게이트, 민주당사 말이오.」
「…….」
「민주당사에 침입했던 세 놈 중 하나가 닉슨을 협박했소. 현직 대통령인 닉슨을 말이
오. 이
친구는 일단 현행범으로 붙들리자 앞날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오. 그 통화 내용이
연방
수사국에 감청당했지.」
「어떤 내용이었는데요?」
「백만 달러를 내놓으라는 것이었소.」
「큰돈이군요.」
「그렇지, 비상식적으로 큰돈이지. 그 돈을 주면 입을 열지 않겠다는 거였소.」
「닉슨이 워터게이트 침입을 직접 지시했던 모양이군요.」
「아니, 그게 아니오.」
「워터게이트 사건이란 닉슨이 민주당사 침입을 은폐하려다 들켜 대통령직을 사임한
것 아
닙니까?」
「그 일은 그렇지. 그러나 이 친구가 닉슨을 협박한 것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소. 이미
그때
워터게이트와 관련한 닉슨의 추행이 드러났을 때라 그 일은 협박 거리가 되지 못했
지.」
「그러면 협박 내용이 뭐였습니까?」
「옛날의 그 일을 털어놓겠다는 것이었소.」
「옛날의 그 일이라구요?」
「그렇소, 옛날의 그 일.」
「그게 뭐죠?」
「그럴 알려면 먼저 이 친구가 무엇을 하던 자인지부터 알아야 하오.」
빌은 다시 스카치을 입에 갖다 댔다.
「옛날, 그러니까 이 친구가 말하던 그 옛날이지. CIA와 군부가 쿠바 망명인들로 조
직한 부
대로 하여금 쿠바를 공격하게 했던 일이 있었소. 소위 얘기는 피그만 사건이오.」
「네. 알고 있습니다.」
「이 친구는 그때 활약했던 CIA 대원이었소.」
「그렇다면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오.」
「케네디 암살은 그 피그만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지. 당시 미국은 CIA와 군부가 지배
하고
있었다고 보면 돼요. 냉전이 한창일때였으니까. 모든 정보를 그들이 수집하고 분석하
며 허수
아비 대통령에게 들이밀기만 하면 됐소.」
미국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그때의 일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지금도
누가
CIA와 군부에서 분석하는 정보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가.
「그러나 케네디는 달랐소. 그는 철두철미하게 검증하려 들었지. CIA든 군부든 무턱
대고 믿
으려 하지는 않았소. 케네디는 피그만 사건 직전에 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하는 소련
함대
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CIA와 군부가 엄청나게 상황을 과장하고 극단으로만 몰고 가려
한다
는 것을 알게 됐소. 그래서 피그만 사건 때는 절대로 미국 공군의 비행기가 직접 출격
할 수
없도록 엄명을 내렸지. CIA는 일단 미국의 공군기가 절대 출격하지 않는다는 조건하
에 케
네디한테서 작전 승인을 얻었지만 원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니었소. 공군기를 출격시키
는 거
였지. 그래서 그들은 상황을 과장하여 케네디한테 조르고 또 졸랐소. 심지어는 새벽 3
시에
잠자리에 있는 케네디한테까지 전화를 걸어 공군기의 출격을 졸라댔소. 물론 케네디는
단호
하게 거부했지. 미국의 공군기가 나타나지 않자 피그만을 공격했던 쿠바 망명 부대는
전멸
하고 말았고. 그때부터 카스트로는 안정된 정부를 구축할 수 있었지.」
「케네디는 미움을 많이 받았겠군요.」
「피그만 사건은 CIA와 케네디에게 모두 엄청난 상처를 입혔소. 케네디는 군사 모험
주의자
들이 언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지. 그
래서
CIA의 간부들을 대폭 물갈이해 버렸소. 한편 군부나 CIA는 케네디야말로 자신들의 적
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지. 케네디가 있는 한은 무슨 일도 그들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공감대
가 형
성된 거요.」
「그후로 CIA 및 군부와 케네디는 반목하게 된 것이군요.」
「그들뿐만이 아니라 케네디에게는 더욱 큰 적이 생겼소.」
「더욱 큰 적이라면?」
「군수 산업체들이지.」
「그들이 어떻게 케네디와 적이 되었을까요」
「음. 케네디의 세계 정책 원칙은 평화 공존이었소. 그는 쿠바의 미사일 위기도 후루
시초프
와 대화를 통하여 풀어냈지. CIA와 군부의 대결 논리를 무시하고 끝까지 대화를 추구
하여
결국 성공한 거요. 그후 케네디는 세계적 군축을 시도했소. 그는 지구적 차원에서 생
각할 줄
알았지.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군수 산업체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던 거요. 존폐를
좌우하
는 문제로 떠올랐지. 군수 산업이라 하면 직접 무기를 만들어내는 업체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오. 군복을 만든다든지 식량을 공급한다든지, 그 개념은 매우 넓소. 줄잡아 약 2
만여 개
의 대기업들이 있지. 그들은 케네디를 반대한 거요. 게다가 거기에는 수천 개의 별들
이 들어
가 있었소.」
「별들이라뇨?」
「국방성에서 그만둔 자들이 모조리 그리로 들어간다는 뜻이오. 즉 군수 산업체란 군
부와
마찬가지지.」
「알 만합니다.」
「결국 국수 산업체가 냉전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지. 그들은 소련과의 대화를 완강
히 반
대했소. 그리고 소련으로 하여금 군비 증강에 모든 힘을 쏟도록 유도했지.」
「그랬군요.」
「그들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쟁을 공산주의와의 대결로 규정지었소. 피그
만 사
건 이후 그들은 케네디에게 월맹 폭격을 졸라댔소. 그러나 케네디는 완강하게 거부했
지. 생
각해보시오. CIA와 군부, 그리고 막강한 군수 산업체가 케네디를 어떻게 생각했겠는
가를.」
「결국 그들이 케네디를 죽였나요?」
「아니오, 더 있소.」
「그 정도로는 충분할 텐데 적이 더 있습니까?」
「암살을 직접 실행한 것은 CIA지만 그 뒤처리에는 마피아가 개입했소.」
「아니, 어떻게 CIA와 마피아가 연할할 수 있죠?」
「CIA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소. 일단 하수인인 오즈월드를 범인으로 가장하여 댈
러스
경찰서에 넣어두고는 마피아의 킬러가 그를 죽이러 간 것이오. 붙들려도 아무런 연관
이 드
러나지 않는 자들이지.」
「그 킬러가 경찰서에서 오즈월드를 죽였나요?」
「그렇지. 그러고는 그 킬러 역시 누군가에 의해 죽음을 당했소.」
「굉장하네요. FBI의 엄청난 수사가 이루어졌겠군요.」
「아니오, 사건은 갑자기 미궁에 빠져버렸지. 법무장관이던 로버트 케네디는 힘을 잃
었고,
FBI와 댈러스 경찰은 관할권 논쟁으로 티격태격했소. 결국 의회의 진상조사위원회,
즉 워렌
위원회가 구성되었지. 그러나 그들이 기껏 한 일이라곤 엉터리 범인 오즈월드를 진범
으로
확정지은 것뿐이오. 그들은 어떤 진정한 증인도 부르지 않았지. 더욱 가관인 것은 존
슨 대통
령의 행정 명령이었소. 케네디 암살에 대한 수사 기록을 2039년까지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
경훈은 제럴드 현의 메모에서도 같은 내용을 본 기억이 났다.
2039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행정 명령이 가능했을까요? 2039년이 되
면 모든
관련자들이 죽고 없을 텐데, 도대체 존슨 대통령의 명령은 범인을 잡자는 겁니까, 말
자는 겁
니까.」
「워렌위원회의 엉터리 조사나 그 행정 명령이나 모두 배후를 짐작하게 해주는 일이지.
닉
슨, 그자가 그 모든 현상의 배후에 있었던 것이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닉슨을 앞
세운
그들이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암살 동기를 정리하면 세계 평화와 군축을 이상으로 삼았던 케네디가 강경
일변
도로 치닫던 CIA와 군부, 그리고 군사 산업체를 견제하고 압박하자 그들이 케네디를
제거
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군요. 여기에 쿠바에 이권을 둔 마피아, 아울러 로버트 케네
디의 철
저한 범죄와의 전쟁에서 생존 위기를 느낀 마피아들까지 합세했구요.」
「바로 그렇소.」
「암살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됐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카 퍼레이드 경로였지. 원래의 경로에서는 케네디를 저격하기 위
한 적절한 지점을 찾을 수가 없었소. 길은 넓고 직진 코스인데다가 주변의 건물들은
모두 비스듬히 서 있어서, 자동차가 충분히 안전 속도를 유지하면서 달릴 수 있었지.
그러나 그 경로는 갑자기 변경되었소.」
「저런, 누가 그렇게 함부로 경로를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카 퍼레이드의 경로를 결정하는 권한은 댈러스 시장에게 있었소. 그가 경로를 바꾼
것이지. 바꾼 경로는 저격에 적절한 여러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소.」
「시장은 어떤 이유로 경로를 바꾸었습니까?」
「당시 시장은 대로를 통행하는 많은 자동차들에게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경로를
바꾸었다고 했지만 그 얼마나 터무니없는 대답이오? 퍼레이드의 본질이란 게 원래 대
로에서 행해지는 것 아니오? 케네디는 그 퍼레이드를 마치고 바로 공항으로 달려가 비
행기를 탈 예정이었소. 공항으로 가는 직진 코스가 원래의 길이었지.」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군요.」
「아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댈러스 시장이 누군가만 상기한다면.」
「네? 그가 누구인가요?」
「마이클 카벨, 찰스 카벨의 친동생이지.」
「찰스 카벨은 누굽니까?」
「그가 바로 피그만 사건 때 케네디에게 쫓겨난 CIA차장이오. 그는 쫓겨나면서 케네
디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공언했소.」
경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떻게 그런?」
빌의 눈에도 핏발이 섰다. 우연이라면 너무나 이상한 우연이었다. 케네디를 살해한 자
들은 바뀐 카 퍼레이드 경로의 한 지점에서 그를 기다렸고, 경로를 바꾸도록 지시한
시장은 케네디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공언한 사람의 친동생이라니. 경훈은 그들의 관계
가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것에 대해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전혀!」
빌의 대답은 단호했다.
「다음은요?」
「그들은 일단 오즈월드를 희생양으로 삼았소. 그에게 카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거리의
한 빌딩 6층에 총을 들고 숨어 있으라고 지시했지. 케네디가 지나갈 동안 말이오. 그
러고 나선 시내의 한 극장에 권총을 소지한 채 돈을 내지 말고 들어가 앉아 있으라고
지시했소. 이 정도면 알 만하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케네디를 막 암살한 사람의 처신으로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
었다. 총기를 모두 버리고 나서 자동차를 타고 댈러스를 빠져 나가는 편이 가장 안전
하고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했습니까? 시키는 대로 했나요?」
「그렇소.」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즉각 체포될 것이 명백한데. 대통령의 암살로 모
두가 법석일 때 돈을 내지 않고 극장에 들어간다면 당장 거동 수상자로 체포될 텐
데?」
「그러나 오즈월드로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소. 그는 바로 옆에서 일어난 대통령
의 죽음과 자신이 무슨 관계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아니, 그
는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매우 크오.」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수사가 제대로 될 턱이 있나? 아무것도 모르는 자에게 대통령이 암살자라고 몰아붙
여 봐야 나올 것이 있겠소? 더군다나 경찰은 그에게 질문도 몇 번 던져보지 않고 킬러
의 손에 죽도록 방치했는데.」
「오즈월드란 사람은 월래 무슨 일을 하던 사람입니까?」
「CIA의 하수인이었지. CIA는 그를 그런저런 하찮은 일에 써먹었소. 소련에 망명을
시켰다가 다시 미국으로 빼오기도 하고 뉴올리언스에서 혼자 삐라를 뿌리며 반정부 데
모를 하게도 했소. 케네디 암살 얼마 전에는 전직 CIA간부가 댈러스의 한 회사에 직
장을 알선해 주었지.」
「오즈월드 혼자 삐라를 뿌리며 데모를 하도록 한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반케네디주의자를 것을 일부러 나타낸 것이지. 즉 잡힌 후를 대비한 것이오. 물론
그는 제거될 운명이었지만.」
「오즈월드는 극장에서 체포되었습니까?」
「물론이오. 체포된 직후 그가 한 건물의 6층에서 총을 들고 서성대던 것이 신고되었
고, 즉각 범인으로 단정지어졌지. 오즈월드 혼자만 사람들이 왜 부산을 떠는지 원인을
몰랐던 거요. CIA는 평소에도 오즈월드에게 그처럼 이상한 훈련을 시켰기에 그는 스
파이 훈련이란 늘 이런 것인가 보다고 생각해 왔으니 하등 이상할 게 없었지.」
「그리고 오즈월드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살해됐나요?」
「그렇소. 케네디를 존경한다는 인물이 나타나 신문지에 싸갖고 온 총을 꺼내 그를 즉
사시켜 버렸소.」
「저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대통령 암살범에 대한 관리가 그렇게
허술할 수 있나요?」
「그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한 일투성이요.」
「오즈월드를 수사한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지시한 자의 인적사항을 알아냈나
요?」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소. 그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지. 설사 입을 열었다 하더라
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요. 그 자신도 누가 자기를 시켰는지 몰랐을 테니까.」
경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전 케냐에서 일어났던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사건 때 보았던 장면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케냐 경찰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연방수사국 직원들까지 FBI라는 문자가 생생히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철두철미하게 현장 조사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국의 대통령이 암살된 사건을 그
처럼 허술하게 처리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결국 암살의 실행자들을 마피아가 공급했다고 보시는 겁니까?」
「그렇소. CIA든 뭐든 공무원이 암살의 실행에까지 가담하는 것은 나중이 위험하니
까.」
「나중이라면?」
「누구 하나라도 양심선언하고 나오든지 협박하든지 하는 문제가 대두될 수 있잖소.
그러나 마피아라면 그걸로 끝이오. 아마 하수인들 중 대통령 암살과 보스가 관계된다
는 것을 안 자들은 모두 죽었을 거요. 그들의 목숨은 바로 파리 목숨이니까.」
「케네디 암살과 연관시켜 볼 만한 마피아의 죽음이 있었습니까?」
「날카로운 질문이오. 플로리다 마피아의 소두목 셋이 의회의 케네디 암살 관련 참고
인으로 소환된 적이 있었소. 그들은 바로 죽고 말았지. 그후 사람들은 의회의 소환장
을 받으면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혔소.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케
네디 암살과 관련하여 16명의 증인들이 죽음을 당했소. 모든 조사는 끝이 났지. 결국
아무도 무엇인가를 증언하지 못했소.」
「나라가 그 증인들을 지켜주지 못했나요?」
빌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미국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 희대의 사건이 그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고도 가만있었다는 말입니까?」
「케네디 암살은 미국에게, 그리고 온 세계에 뼈아픈 상처를 남겼소.」
빌은 스카치를 단숨에 털어넣었다. 그의 얼굴이 분노와 슬픔으로 씰룩거렸다.
「먼저 케네디 암살이 처리되는 과정은 미국인에게 끝없는 패배 의식을 안겨주었소.
국민들은 가장 인기가 있던 대통령의 암살이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이 얼
마나 멀리서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아야 하는가를 깨달았소. 또한 자신들이 사랑하는
조국이 때에 따라서는 매우 폭력적인 수단으로 경영된다는 사실도 절감해야 했소. 정
말 중요한 순간에는 합법이니 뭐니 하는 단어들이 처참하게 유린당한다는 것을 말이
오.」
경훈은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미국인들이 얼마나 폭력과 가까운 거리에서 살아가
는가 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대통령까지 폭력앞에서 그처럼 완벽하게 사라지
고 말았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다음으로 케네디의 암살은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심각한 불안
을 야기시켰소. 케네디는 세계평화와 모든 민족의 공존을 부르짖었지. 다양한 문화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미국과 각국 간의 동등한 관계를 천명했소. 그러나 국제사회는
그런 케네디가 결국은 죽고야 마는 미국의 현실을 생생하게 지켜본 것이오. 미국을 끌
어가는 힘은 평등한 공존이 아니라 미국의 국가 이기주의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지.
이후 미국은 세계 정책에 있어 미국의 국익을 맨 앞에 내세우게 되었소. 생각해 보시
오. 세계 최강의 국가가 타국과의 관계에서 항상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할 때 세
계에 안정과 평화가 올지, 아니면 분란과 불안에 휩싸일지.」
「가치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의 이기주의는 지도적 위치에 큰 결함을 야기시키
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소. 미국은 이미 정의를 잃은 거요. 가치관을 상실한 힘은 폭력으로 나타나지.
약소 국가들을 상대로 휘두르는 폭력적 자본주의가 결국은 세계적 경제 불안을 가져오
는 거요. 이 모든게 케네디의 죽음 때 이미 예상되었던 일이오.」
빌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경훈은 빌이 케네디 죽음의 미스터리를 파헤칠 뿐 아니라
그 죽음의 의미와 세계사적 파장까지도 갈파하는 것에 놀랐다.
「케네디 암살 후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한마디로 군사적 모험주의, 아니 모험은 아니지. 미국의 군사작전이 모험이 될 수는
없지. 어쨌든 미국은 강력한 군사 위선주의 정책을 채택했소. 어떤 문제든지 일단은
군사적 관점에서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것이었지. 존슨은 당장 월맹 폭격을 허락했소.
그리고 베트남전을 벌였지. 지금에 와서야 미국인들은 그것이 얼마나 민족의 자주권을
짓밟은 잘못된 전쟁이었는지 반성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두들 환호했소. 미국인들은 군
사 행동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전통이 있지 않소.」
빌은 쓴웃음을 지었다. 경훈은 케네디를 좋아했던 것이 분명한 이 도전적 정치 비평가
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빌의 눈에서는 슬픔과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경훈은 자리에
서 일어났다.
「고마웠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도움이 되었소?」
「물론입니다.」
두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경훈은 손에 약간 힘을 주어 빌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빌의 사무실을 나오는 경훈의 머리에는 제럴드 현이 그리고 있던 큰 그림이 떠오를 듯
말 듯했다.
제럴드 현은 케네디와 박정희가 너무나 닮은 이상주의자라고 하지 않았는가. 케네디의
이상이 동서 화해라면 박정희의 이상은 자주 국방이라고 했다 이 부분은 언뜻 연결시
키기 어려웠지만, 제럴드 현은 그 이상을 구체화하는 방법이 무엇이었든 두 사람의 암
살 동기는 동일한 고리에 꿰어져 있다는 사실을 얘기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암살 동기, 믿을 만한 케네디 전문가 빌의 생각에 따르면, 케네디 암살이란 군사 대결
로 가지 않으려던 젊은 이상주의자 케네디와 군사주의로 이끌고 가려던 CIA·군부·군
산 복합체, 그리고 쿠바에 막대한 재산과 이권을 가지고 있던 마피아의 닉슨을 비롯한
정치가들의 대결이었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자주 국방은 도대체 어떤 관점에서 케네디의 암살 동기와 연관된다
는 얘긴가.
김재규의 배후
경훈이 택시를 잡아타고 시계를 보니 오세희와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약속 장소인 46번가의 우래옥에 도착했을 때 오세희는 한갓진 자리에 앉아 이미 맥주
한잔을 기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 변호사, 어서 오시오.」
「오선생님, 제가 늦었습니다.」
「아니오.」
두사람은 먼저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했다. 같은 이름의 식당이 한국에도 있지만 역시
육류의 나라 미국이어서 그런지 고기가 푸짐하게 나왔다. 더군다나 꼬리곰탕이나 족탕
이니 하는 것은 미국 사람들이 아예 먹지를 않는 분위기 때문에 제공되는 양이 상상을
불허했다.
「그 의사를 찾으셨습니까?」
경훈이 본론을 꺼내자 오세희는 주변을 힐끔 살폈다. 오랜 정보원 생활을 거쳐서 그런
지 그에게는 본능적으로 조심하는 태도가 배어 있었다.
「사라져 버렸소. 그후로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사는지 모르겠네. 흔적을 찾을 수 없
소.」
경훈은 그렇다면 오세희가 무슨 일로 자신을 만나러 뉴욕까지 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
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오세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언젠가 강일이 형님의 사무실 직원들을 소개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중에 브루스라는
자가 있었소.」
「그런데요?」
「미남인데다가 인상이 좋길래 형님에게 그자가 어떤 임무에 종사하는지 물어보았
소.」
「대답해 주시던가요?」
「아니, 형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소.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같이 스탠드바에서 술을 한
잔하다가 형님이 불쑥 내뱉으시는 거였소. “그 잘생긴 젊은 친구 말이야. 그래봐도
아주 중요한 친구야”라고. 그래서 내가 궁금증이 일어 일부러 놀라는 척하며 “그 기
생오라비 같은 친구 말입니까”했더니, 형님이 껄껄 웃으시며 “김재규를 조정하는 게
바로 그 친구야. 우리 사무실에서 김재규를 전담하는 친구지. 카터의 주한 미군 철수
가 왜 중단됐는데”라고 하셨소.」
「그래서요?」
「나는 더욱 궁금증이 일어 다시 변죽을 울렸지. 참, 이 변호사, 싱글 러브라는 사람
기억하오? 그 당시 주한 미군 참모장이었는데…….」
「네, 기억합니다. 주한 미군 철수를 반대하다 카터 대통령에 의해 예편당한 사람이
죠?」
「그렇소. 내가 “싱글 러브 같은 사람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니 카터가 안 되겠다 싶
어 그런 게 아닙니까?”했더니 형님이 배를 잡고 웃으시더구먼. 중요한 정보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 정보를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쭐해지는 심리가 있지. 한편으로 추
켜주면서 한편으로 의심스런 듯한 태도를 보이면 정보가 나오는 법이오.」
경훈이 웃음을 터뜨리자 오세희도 비로서 잔뜩 긴장했던 얼굴을 펴면서 잔을 들었다.
「형님은 “미국놈들이 그렇게 김재규를 키운다니까”하시고 말더군. 나는 지금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소.」
경훈은 오세희가 왜 갑자기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 친구 말이오. 브루스라는. 김재규를 전담한다던 바로 그자를 찾았소.」
「네?」
「형님과 전화상으로 옛날이야기를 했던 테이프를 듣다 보니 기생 오라비라는 말이 나
오지 않겠소. 이 친구다 싶어 즉각 추적했소. 물론 돈을 좀 썼지, 한국과 미국에서.」
경훈은 역시 돈과 경험이 합치면 안되는 일이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브루스라는 친구를 한번 회유해 볼 참이오.」
「어떻게요?」
「그자는 은퇴하고 나서 그랜드캐니언에서 모텔을 경영하고 있었소. 그런대로 살아왔
던 모양인데 최근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조사됐소.」
「무슨 문젭니까?」
「모텔이 넘어가게 됐소. 아니 모텔뿐만 아니라 인생이 거덜나게 생겼지.」
「왜요?」
「그랜드캐니언은 바로 라스베이거스 옆에 있잖소. 거의 붙어있는 셈이지. 그런데 그
자가 최근에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서 엄청난 돈을 잃었소. 모텔을 잡혀 급전을 구
한 것까지 몽땅 잃고 말았지.」
「위기로군요.」
「그렇소. 그자의 위기는 곧 우리의 찬기라고 말할 수 있겠지.」
「돈으로 회유하실 생각인가요?」
「아니, 돈으로 회유하는 것은 실패할 공산이 크오. 상대는 욕심을 부릴 테고 그러다
보면 우리 쪽이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소. 상대가 우리를 간첩 혐의로 넘기면서 자신
의 어려움을 해결하겠다는 계산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오세희로서는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미 큰 성공을 거둔 그로서는 책 잡힐 행
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자면 큰돈이 들 거요. 브루스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분
명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그렇다면?」
「도박판에서 그자를 추궁하는 것이오. 우리의 정체는 숨기고. 다만 이것을 위해서 우
리는 한 사람을 사야 할 필요가 있소.」
「무슨 뜻입니까?」
「일단 도박판에서 돈을 잃은 사람은 별짓을 다 하게 되어 있소. 도박꾼은 마누라도
잡힌다고 하지 않소? 브루스는 지금 정신적 평정을 잃었기 때문에 하면 할수록 지게
되어 있지.」
당연한 말이었다. 설사 정신적 평정을 잃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느 누가 카지노에서 돈
을 그리 쉽게 딸 수 있단 말인가.
「브루스가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가 약간의 돈, 그자에게는 매우
큰돈이겠지만, 하여튼 돈을 주는 것이오.」
「정보의 대가로 말이죠?」
「그렇소.」
현실성이 있는 방법이었다. 도박에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에게 주는 돈은 온전한 정신
을 가졌을 때의 금액보다 수십배 이상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또 너무 급작스럽고
낯설지 않을까요? 틀림없이 의심을 살텐데요.」
「그래서 한 사람을 사야 한다는 말이오. 거기에는 늘 도박을 하던 사람을 구해야 한
다는 뜻이지. 그것도 괴짜로.」
「괴짜라구요?」
「그렇소. 카지노에는 왕왕 괴짜가 있소. 아주 희한한 괴짜들 말이오.」
「어떤 괴짜들인데요?」
「돈을 우습게 쓰는 자들이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받을 기약도 없이 만 달러를 그냥
준다든지 말이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러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선
행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소. 어떤 이상한 종교관, 혹은 신관에 의해 선행을 해
야만 도박에서 계속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지. 또는 상대를 돈 앞에 철두
철미하게 굴복시키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소. 어쨌든 모두 괴짜들이지.」
「그러면 그 괴짜는 브루스에게 돈을 주는 대신 무엇을 요구합니까?」
「브루스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되겠지. 브루스는 처음엔 적당히 얘기할
거요. 그러나 괴짜가 별로 관심없는 듯이 하품을 하면서 겨우 몇 푼 집어줄 듯한 태도
를 취하면 브루스의 얘기는 점차 깊어지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럴듯하군요.」
「그런데 그 괴짜를 구하는 일이 그렇게 쉬울 듯싶지는 않소.」
경훈은 필립 최를 떠올렸다. 이미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사로 이름난 필립 최라면 이
런 일에 적격일 듯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한데…… 제가 한번 연락해 볼까요?」
「이 변호사가? 원, 세상에! 어떻게 그런 사람을 다 알고 있소?」
경훈이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는 별 이상한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고, 이상한 일도 이
루어지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두사람은 경훈이 묵고 있는 호텔로 자리를 옮겨 밤새 술잔을 나누었다. 비록 만난 지
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큰일을 같이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서로가 아주 가깝게 느껴졌
다.
깊은 밤 뉴욕 거리에서 왱왱거리는 경찰차의 경보음이 묘하게도 분위기를 돋우어주었
다. 경훈은 오랜만에 마음놓고 술잔을 비웠다.
오세희는 참으로 부지런했다. 경훈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벌써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로
날아가고 있었다. 경훈의 음성 메시지에는 오세희의 말짱한 목소리가 남겨져 있었다.
「이 변호사, 일이 진행되는 상황에 따라 우리 자주 연락합시다. 브루스가 라스베이거
스로 가면 내가 연락을 하겠소. 한 2~3일 후에 가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요. 그리
고 무엇보다 몸조심하시오.」
경훈은 룸 서비스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스테파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쩌면 그렇게 연락이 없었어요? 빌이 잘해 주던가요?」
「당신 덕분에.」
「잘됐군요. 저녁에 만날까요?」
「아니, 호우에 떠나야 해요.」
「벌써요? 그럼 점심은 어때요?」
「그럽시다. 이번에는 내가 사죠.」
「누가 사든.」
점심때 만난 스테파니는 한결 싱그러운 젊음을 발산했다. 햇빛을 받아 일렁이는 금발
이 새하얀 얼굴과 조화되어 더욱 아름다웠다.
「오늘은 유난히 더 아름다운데요.」
「고마워요.」
「결혼하자는 사람 없어요?」
스테파니는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긴 남자들이 겁내겠지. 날카로운 변호사에 눈부신 미녀라 함부로 말이나 붙이겠어
요?」
「사실 회사에서 좀 문제가 있어요.」
경훈은 스테파니의 약간 어두운 듯한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두세 명의 간부가 사건 배당과 관련하여 시간을 내달라고 해요. 늘 거절해 왔지만
눈에 띄게 그러는 것도 아니어서 대처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요.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사건에 뒤지는 것같기도 하고…….」
문제는 어디에서는 누구에게나 있다.
「경훈씨, 이렇게 하면 어때요?」
「……?」
「같이 사무실을 차리는 거예요. 혼자라면 엄두가 안 나지만 경훈씨와 같이한다면 얼
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경훈은 깜짝 놀랐다. 경훈은 스테파니의 제안이 가벼운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경훈은 그 제안이 갖는 의미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스테파니, 고마워요.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니. 하지만 나는 지금 사실 매우 중
요한 일에 연루되어 있어요. 한국에서는 회사 일도 제쳐놓고 이 일에만 매달리고 있죠.
그래서 뉴욕에 온 지 이틀만에 떠나야 하는 거구요. 스테파니, 이 일이 끝날 때까지
나에게 시간을 줘요. 그때까지 깊이 생각해 보고 나서 대답할게요.」
스테파니는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훈은 그런 스테파니가 좋았다. 자신에
게 지금 아무런 일도 없다면 스테파니의 제안에 ‘예스’라고 대답을 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처럼 인간관계가 애증으로 끈끈하게 얽힌 사회를 떠나, 모든 것이 깔끔하고 합리
적인 미국 사회로 옮겨와 스테파니같이 아름답고 능력있는 여성을 직장 동료로, 아니
인생의 동반자로 삼는다는 것은 정말 마음 끌리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경훈
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선민, 선민이 있었다. 비록 선민이 결혼은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고 획을 긋고 떠났지
만 자신과 그녀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경훈의
마음 한구석에서 인남의 모습도 조그맣게 떠올랐다.
변사체의 정체
「아니, 무슨 미국 여행을 그렇게나 급히 갔다 오셨십니꺼. 본전도 안 나오겠십니
더.」
「본전이라뇨?」
「비행기값 말입니더.」
「하하하.」
「그런데 미안해서 우짜지예?」
「왜요?」
「변호사님 지시대로 조사를 했는데, 하수인으로 보이는 자의 휴대폰은 신규로 가입한
것이었십니더. 기재한 인적 사항도 모두 가짜였십니더. 아예 범죄를 위해 준비를 했더
라니까예.」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로버트 숀의 행적도 지 혼자서는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다 아입니꺼. 호텔
직원이 숀이 8군 클럽하우스에 가는 교통편을 물어본 적이 있다고 진술해 줘서 그쪽
을 쫌 탐문해 볼라꼬 했는데 그기 참, 잘 안되더라고예. 지는 출입증도 없고…… 사실
그거야 용산서에 있는 동료에게 부탁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영어가 안 되
니……. 학창 시절에 공부 안 한 기 두고두고 후회가 됩니더.」
경훈은 쓴 웃음을 지으며 지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기 내 조국이야?」
「아니 내 조국이야.」
「뭐? 벌써 왔어?」
「그래.」
「원, 표값 아까워 죽겠네. 아, 간 김에 우리 집에 가서 내 안부도 좀 전하고 오지 그
랬어?」
경훈은 지미가 농담을 길게 늘어놓는 것으로 보아 전에 부탁했던 일에 성과가 있는 모
양이라고 생각했다.
「좀 알아봤어?」
「그럼. 그런데 건방지군. 내가 힘들게 구한 정보를 전화로 듣겠다는 거야?」
「알았어. 내려갈게.」
지미는 경훈에게 서류를 내놓았다.
〈신원확인서〉
성명 : 로버트 숀
주소 : ……
사회보장 카드 번호 : ……
운전 면허 번호 : ……
직업 : 의사
특이점 : ……
「의사? 이 사람이 의사야?」
「낸들 어떻게 알겠어? 서류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 그런 줄 알아야지.」
「의사가 왜 무기 거래상에게 죽어?」
경훈은 지미가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지미
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경훈, 실토해. 무슨 큰 건을 하나 잡은 거지?」
「무슨 말이야?」
「잡아떼도 소용없어. 큰 건이면 같이하자구.」
「도대체 무슨 얘기야?」
「정말 이러기야? 이러면 난 섭섭해져.」
「…….」
지미의 표정으로 보아 그가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사람 말이야, 로버트 숀.」
「그래.」
「이 사람 누군지 알아?」
「몰라.」
「잡아떼기는. 이 사람, 내가 어디선가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그랬지.」
「이 사람이 얼마 전에 나에게 알아봐 달라고 했던 그 군인, 조울증으로 예편했던 제
럴드 현인가 하는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의 주치의였어. 혈액 대장에 이 사람이 기명하
고 사인했더라구.」
「뭐? 그게 정말이야?」
「그래.」
경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런데도 잡아뗄 거야?」
경훈은 키들거리는 지미의 웃음을 뒤로한 채 자신의 사무실로 급히 돌아와 수화기를
들었다.
「오 선생님, 그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 사람이라니?」
「제럴드 현의 주치의 말입니다.」
「뭐라구? 그게 정말이오?」
「혹시 그의 이름이 로버트 숀인가요?
「로버트 숀, 그렇소! 바로 그 이름이오.」
「맞군요. 그는 최근 서울에서 살해당했습니다.」
「허, 저런! 그런데 무슨 이유로?」
「그것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심상찮은 예감이 드는군요.」
오세희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튼 대단한 사실을 알아냈군. 나도 여기서 브루스를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소.
그는 지금 어떻게든 라스베이거스로 갈 자금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오. 오늘 내일 사이
에 떠날 것 같소. 내가 곧 전화하리다.」
「알겠습니다.」
손 형사는 영문을 몰라 입을 꾹 다문 채로 경훈만 쳐다보고 있었다. 경훈이 전화를 끊
은 뒤 손 형사에게 말했다.
「역시 증거가 없어 어렵겠어요.」
「그럼 우짜면 좋십니꺼?」
「일단 철저히 보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상대가 보통이 아닌 자이기 때문에 이 얘기가
새어나가면 모든 게 허탕이 되고 말아요. 자칫하면, 이미 종결된 사건에 너무 깊이 관
여했다가 손 형사님의 목까지 위태로워지구요.」
「뭐 여부가 있겠십니꺼?」
「구체적인 것은 생각을 좀 해보도록 하죠. 일단 미국에 갔다와서요.」
「미국엔 이제 막 갔다 오시지 않았십니꺼?」
「바로 또 갈 일이 생겼어요.」
「저런, 쯧쯧 …….」
손 형사는 비행기값이 아까워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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