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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마음편한 사람하나 없거든

by Casey,Riley 2023.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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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에게 마음편한 사람하나 없거든
유현민

  

  삼천리 넓은 땅 위에 발 뻗을 자리 없구나
  겨울이 왔다. 방랑길에 나선 김 삿갓에게는 어떻게  한 겨울을 넘길 것인가 하
는 것이 막막하기만 했다.
  옷도 여름철에 입던 그대로다. 그리고 차가운  인정은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하
는 데도 무척이나 인색했다.
  (하룻밤 잠자리와 술 한 잔 밥 한 술을 얻을 수 있다면, 과거에 장원 급제하는 
것보다도 기쁘겠다)
  태평양 김 삿갓도 이번에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이었다.
  오늘도 해가 저문다. 초겨울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닥칠 것이다. 그리고 그 바
람보다 더 차가운 세속의 인정이 매몰차게 그를 냉대할 것이다.
  터벅터벅 맥없이 걸어 한 마을에 당도했을 때,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근처에 글방이 있구나. 그렇다면 거기  가서 술 한 잔, 밥 한술에 시 한  수로 
보답을 해볼까. 행상은 비록 이렇지만, 내 글을 냉대야 하랴)
  이렇게 생각하고 글방 문을 두드려 훈장을 만났다.
  「과객이올시다. 밥 한 술로 시장기를 면하고자 합니다만...」
공손히 이렇게 청했으나, 뜻밖에도 글방 훈장은 비웃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글방에 찾아와서 밥을  달란다면, 응당 밥값이 될 만한 글을  써서 보답해야 
할 게요. 보아하니 글줄이나 읽는 젊은이인 모양인데.」
  말이야 옳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비위에 거슬렸다. 흡
사 네가 글을 알겠느냐, 하고 비웃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이야 어떻든 하룻밤 잠자리를 얻게 된 것만이 기쁜 김삿갓은,
  「재주는 없습니다만, 한번 지어 볼까 합니다.」
   「그래 정히 지어 보겠다는 건가?」
  훈장은 의외란 듯이  이렇게 반문했다. 글이라고 하면 그대로 뺑소니를  칠 줄 
안 모양이다.
  「글방에 와서 글을 사양하겠습니까?」
  「흠, 짓지 못하면 그대로 돌아가는 거야, 알았지?」
  원래 글을 짓고 밥을 얻어  먹는다는 것은 밥이 주요, 글이 주가 아니다. 글이
란 일종의 여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데 이 훈장은 그게 아니었다. 밥 한 그릇  주고 글을 지어 받아 서로 풍류를 
즐기자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라도 밥을 안 주고 쫓아내려고  그 방편으로 
글을 지으라고 하는 것이다.
  (흠, 이  자가 틀림없이 무슨 난운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걸로  번번이 
축객을 하곤 하는 모양이지)
  김 삿갓은 이런  생각이 들자 슬며시 반발심이 머리를 쳐들었다.  그러나 어떤 
운이건 자기가 소화 못 시킬 것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김 삿갓이었다.
  훈장이 말했다.
  「내가 운을 부를 테니, 그것을 달아 한 구절씩 읊어 보게. 먼저 멱자」
  「무슨 멱 자요? 언문으로 풍월을 읊으라는 것입니까?」
  「언문이라니. 자넨 글방에서  겨우 언문밖에 못 배웠나? 그렇다면  벌써 낙방
이야.」
  글 시험도 하기 전에 쫓아내려는 수작이다.
  「그럼 진서로 하겠습니다. 무슨 멱 자요?」
  「찾을 멱 멱자야, 글자나 알고 있나?」
  완전히 무시하는 말투인지라 김 삿갓도 기분이 좋지 않아서 말이 거칠어졌다.
  「허어, 거 참 말도 많구나, 별스런 훈장 다 보겠네. 정말 꼴불견인데」
  「무, 무슨 말 버르장머리야. 모르면 모른다 하고 썩 물러갈 일이지 무슨 잔말
이 많아.」
  「아니, 꼴불견도 모르시오? 불견이면 찾을 멱자  아니오? 글자나 알고 있냐기
에 그렇게 대답한 것뿐이오.」
  「...」
  훈장은 말문이 막혔다. 멱 자의 글자 풀이를  하면서 욕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
던 것이다.
  「좋아, 아무튼 멱 자 운으로 한 구절 읊어 봐.」
  「운이 하고 많은데, 하필이면 벽 자를 부를까.」
  훈장은 움찔 놀랐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멱 자 운을  내보았지만 쩔쩔
매지 않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멱 자는 다루기 힘든 글자인 것이다.
  (그렇지만, 제놈이 한번쯤 어쩌다가 선뜻 대답한 것이겠지)
  훈장은 저 좋을 대로 해석하고 다시 똑같은 운을 부른다.
  「다시, 멱」
  「허허. 먼젓번 멱도 어렵던데, 이번 멱 자는 또 어찌한다.」
  「다시, 멱」
  「하룻밤 잠자리가 바로 이 멱 자에 달렸구나.」
  「이번에도, 멱!」
  「산골 촌구석의 까막눈이 멱 자밖에 모르는구나.」
  「뭐라구!」
  훈장은 불같이 노했다. 십여 명의 코흘리개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까막눈이라
고 모욕을 당했으니 화를 안 낼 도리가 있었겠는가.
  「허허허... 너무 노하지 마시오. 이 김 삿갓은 원래 그런 사람이오.」
  「김 삿갓? 그럼 당신이 그 유명한 방랑객이오?」
  「허허허...」
  훈장은 비로소 글재주를 가지고 겨루려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아, 이거 잘못했구료. 실례가 많았소이다.」
하고 훈장은 사과를  했다. 그러나 김 삿갓은 훈장의 위인을  잘 알아보았는지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찬바람을 쏘이며 길 모퉁이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비
열한 심보를 지닌 이 훈장의 신세는 지고 싶지가 않았다.
  「자, 이만 가겠습니다. 공연히 소란을 피워 죄송하외다.」
  「식사라도 하고 주무시고 가셔야 될 것 아니오.」
  이런 말 한  마디쯤 있을 법했으나, 소갈머리 없은 훈장은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김 삿갓은 학동들 가운데 한 아이의 붓을 빌어 분판에다 써 갈겼다.
  알고 보니 이 글방은 좌중이  모두들 거만하구나 생도는 열도 안 되는데 선생
님이 오셔도 절하고 뵙지 않네.
  훈장은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 글을 읽었다.
  「서당내조지...방중개존물...생도제미십...선생내불알! 에잇, 고약하구나. 이놈 게 
섰거라.」
  우리말의 한자음을 이용한 묘한 욕이었다.
  김 삿갓은 대꾸도 없이  표연히 글방 문 밖을 나섰다. 가는  집마다 냉정한 거
절의 말뿐이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새삼 엷은 베옷 한  자락만 걸친 자신이 초라하고 을씨
년스럽다.
  발 아래는 엄동의 눈이 있건만 몸에 걸친 것은 유월철의 베옷 뿐,
  김 삿갓은 혼자서  넋두리를 하며 어떤 외딴집 뒤꼍으로 들어갔다.  풍찬 노숙 
그대로이다.
  그러나 눈보라가 치고 모진 바람이 불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모두들 잠이 들
었겠다. 그렇다면 이 눈보라를 그대로 견디느니 차라리  이 집 부엌에 숨어 들어
가서 불이나 좀 쬐자) 부끄러운 일이지만 얼어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살금살금 부엌으로 기어  들어갔다. 하지만 눈보라와 비바람은  피할수 있었으
나 부엌 아궁이에도 불이 꺼져 몸을 녹일 수 없었다. 게다가 배가 몹시 고팠다.
  (먹다 만 찬 밥덩어리라도 있었으면)
  체면이 문제가 아니었다. 밥솥  뚜껑을 열어 보니 꽁꽁 얼어 붙은  밥 한 그릇
이 있었다. 얼음을 씹는 듯했지만 그래도 꿀맛같이 달게 먹었다.
  배는 어느 정도 불렀으나 찬  밥이 뱃속으로 들어가니 저절로 몸이 덜덜 떨렸
다. 아궁이 속에 손을 넣어 보았으나 불 꺼진 지 오래인지 차갑기만 했다.
  (그래도 여기가 제일 낫겠지)
  다행히 아궁이가 비교적 넓었다. 그는 배를  깔고 엎드려서 너구리처럼 굴속으
로 기어 들어갔다.
  않을 수도 없고  다리를 쭉 뻗고 누울 수도  없는 좁고 얕은 아궁이 속이었지
만, 그래도 바깥보다는 훈훈해서 몸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궁색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여유를  잃는 법이 없는 김 삿갓
이었다.
  구만리 장천 아래에서도  머리를 들지 못하고 삼천리  넓은 땅 위에서도 발을 
못 뻗겠구나.
  이런 싯귀를 읊으며 불편한 대로 잠드는 김 삿갓이었다.

  노수진어사의 후회
  성종 임금이 재임했던  동안은 유난히 성도덕이 문란해져  나라가 어지러웠다. 
성종도 이것을 깨닫고 백성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던 차에 전라도  장성 땅에 요염하다고 소문난  노화라는 기생이 있어 뭇 
남성들을 홀린다는 상소를 받고 그녀를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누구를 보낼까 하고 고심하던 성종은 신하들 중에서도 가장 여색에 근
엄하다는 노 수신을 파견하기로 했다.
  한편, 노화를  처벌하기 위해 조정에서  어사가 내려온다는 소문이  은연 중에 
퍼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장본인인 노화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흥! 나를 처벌하겠다구? 내가 무슨 역적질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어디, 어떤 
위인인지 오기만 해봐라. 이 노화가 어떤 계집인지  한번 톡톡히 맛을 보여 줄테
니...」
  노화는 노화대로 각오를  단단히 한 다음, 하인 하나를 거느리고  장성 입구의 
주막에 머물면서 어사가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다음, 드디어 어떤 과객이  그 주막에 들러섰는데 그가 바
로 노 어사였다.
  그는 매우 투지가 만만하여 노화를  만나기만 하면 당장에 처벌 할 듯한 기세
였다.
  그가 저녁을 마치고 마루에 나와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눈이 
번쩍 띌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여인은 소복을 하고 그녀 역시  저녁을 마친 후에 잠깐 바람이라도 쐬려는 듯
한 한가한 모습이었다.
  노 어사는 이 이상 더 어떻게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눈에 넋을 잃고 말
았다.
  「얘! 지금 대문으로 나간 소복한 여인이 누구냐?」
  궁금함을 참다 못해 어사는 지나가는 주막 일군에게 물어 보았다.
  그 일군은 매우 의미 있는 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그분은 이 집 주인의 먼 친척이 되는 여인입지요.」
  하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과부가 되어서 지금 이 집에 얹혀  살고 있다고 덧
붙였다.
  노 어사는 그 여인을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엽전 몇 푼을 그 일군에게 
쥐어 주며 은밀히 귀띔을 하자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염려말라는 듯 고개를 끄
덕였다.
  초조한 심정으로  그 여자를 기다리기를 어언  몇 시간, 밤이 이슥해  진 뒤에 
이윽고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노 어사는 반가운  김에 화다닥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밖에는 일하
는 녀석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놈아? 왜 혼자만 왔느냐?」
  「아씨께서 손님의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 한번 더 여쭈어 보고 오라고 하셔
서...」
  노 어사는 입술이 바짝 마를  정도로 몸이 달아 일군을 쫓다시피 되돌려 보낸 
다음, 뒷짐을 지고 안절부절을 못하며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로부터 다시 얼마 후에 조용히 문이 열리며 기다리던 여인이 살며시 들어서
서 큰 절을 한 다음 한쪽 무릎을 세우고 얌전히 앉았다.
  등잔불 밑에서 보니 그녀의 아름다움은  막 그림에서 빠져 나온 선녀인 듯 다
시없이 고왔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가 결심한 듯 얼굴을 쳐들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 시골의 천한 계집을 아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서방님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증거로 제 팔에 서방님  성함을 새겨주세요. 소녀는 그것으
로 한평생 서방님을 따를 것을 맹세하겠어요.」
  노 어사가 싫다 할 리 없어 선뜻 그대로 해주니까 여인은 부끄러운 듯 허리를 
비꼬며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그날 밤, 장성 땅  입구 주막집에서 노 어사는 아름다운 여인을  안은 채 도원
경을 헤매다가 아침 느지막이 길을 나섰다.
  그는 일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를 꼭 데려갈 것을 단단히 약속
한 다음 호기 있게 장성읍에 들어섰다.
  「노화라는 년도 오늘로서 내 손에  처벌된다. 흐음! 뭇 사나이들을 닥치는 대
로 유혹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리라.」
  노 어사는 아주 근엄한 태도로  가슴을 활짝 펴고 장성현 동헌에 들어가 어사 
출두를 했다.
  그런 뒤, 늘어선 육방 관속들에게,
  「당장에 노화를 끌어다 대령시켜라.」
  하고 호령을 했다.  그의 서슬이 시퍼런 태도는 나졸들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
들 정도로 추상 같았다.
  조금 후 사나운 포졸들에게 끌려 노화가 들어왔다.  노 어사는 동헌 높은 마루
에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쉽게 알아 보지 못했다.
  「듣거라! 내 듣자  하니 너는 뭇 사내들을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농락한다 
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도다. 네가 그  동안 항간 백성들에게 끼친  되가 허다할 
것인즉 다 사정 보지 않고 단매에 처벌 하겠다.」
  노화는 이 말을 듣고 싸늘하게  웃으며 붓과 종이를 달라 하더니 무엇인가 몇 
자 적어 어사에게 바쳤다.
  <아직도 내 팔목에 님의 이름 선명한데 님은 벌써 나를 잊으셨나요?>
  종이를 펴  본 어사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어제 그  소복한 여인이 다름아닌 노화였단 말인가. 어찌하면 이 
일을 무사히 해결할 수 있을까... 노 어사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것을 
크게 뉘우쳤으나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풀어 주라 이르고는 더 머무르기가 난처
해서 총총히 서울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여색을 멀리하는 근엄한 선비로서 명성을 떨쳤던 그는 여자의 요기 앞에 어처
구니없이 넘어가 버린 것을 후회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즉시 관직을 내 놓고  평생을 글과 벗하며 자연에 
파묻혀 자기 수양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김삿갓과 시기 춘매
  방랑길을 떠나 팔도 강산을 유랑하던 중 부여  땅에 이른 김 삿갓은, 그곳에서 
색다른 소문을 들었다.
  춘매라는 처녀 기생이 있어서 그녀가 글로써  내기하기를 즐긴다는 것인데, 내
기도 보통 내기가 아니라 하룻밤 잠자리를 약속하는 내기라 하는 것이었다.
  (시 한 수로 처녀 기생을 품을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귀가  솔깃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부여땅의 한량이란 
한량치고 그녀를 찾아가 한번쯤 수작을 걸어 보지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라
는 것인데, 이제껏 수십  명이 찾아 갔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이겨  본 사람이 없
다 했다.
  (그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다면, 필시 인물도 박색은 아닐 게다. 그럼  어디 내가 
가 볼까)
  김 삿갓은 이런 생각을 하고  춘매의 집을 물어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마침  며칠 전 어느 부잣집에서  시 한 수 지어지고  노잣돈이며 옷가지며 
푸짐히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이날 그는  신수가 훤한 것이 풍류  남아의 모습 
그대로였다.
  춘매의 집에 닿았을 때, 그는 점잖게 자기 이름을 밝혔다.
  「이 몸은 김 삿갓이란 사람이오. 댁의 아씨와  하루 저녁 풍류를 즐기려고 찾
아왔소.」
  이 말을 전해 들은 춘매는 반색을 하며 뛰어나와 김 삿갓을 맞아 들였다.
  「그렇잖아도 당신을 한번  만나 운을 맞춰 보려고 하던 참이에요.  잘 오셨습
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미소를 짓는 모습이  과연 남자의 마음을 녹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허허허... 실은 나도 오늘 운을 겨뤄 볼까 해서 왔소이다만... 우선 술이나 한
잔 마시고 봅시다.」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  권커니 잣커니 하다 보니 김 삿갓은  시흥이 도도해졌
다.
  「자, 그럼 한 수 해봅시다. 어디 시기 춘매의 솜씨를 들어볼까.」
  「아니에요, 글 자랑  하러 오신 분이 먼저  부르셔야죠. 한 수씩 주고 받아서 
합작으로 하나 지어 볼까요?」
  「오오, 그것도 좋지. 그러나 합작을 하는 데는 상대의 솜씨가 좋아야 멋진 시
가 되는 법인데, 어디 부여 시기 춘매의 솜씨를 한번 보세.」
  「글쎄요, 제가 삿갓 어른의 마음에 드는  구절을 지을 수 있을는지요. 그리고, 
삿갓 어른께서 지시면 어떻게 하죠? 무얼 거시겠어요?」
  「허허허... 춘매가 지면  하룻밤 잠자리를 허락한다 했지? 그럼 내가  지게 되
면 나도 몸을 허락하지.」
  「아이구, 능청맞으시긴, 들러치나  엎어치나 마찬가지군요. 아무튼 좋아요. 우
선 한 구절 읊어 보세요.」
  하면서 춘매는 살짝 눈을 흘겼다. 이를 보고  김 삿갓은 벌써 그녀가 자기에게 
반은 몸을 허락하기로 결심했으리라고 짐작했다.
  「자, 그럼 먼저  부르겠소. 내가 부르거든 곧 따라서 부르는  거요, 너무 늦으
면 지는 것으로 합시다.」
  「좋아요, 부르세요.」
  「백마강 어귀의 누런 송아지가 울면, 자, 춘매가 받아서 부르시오.」
  「노인산 아래 소년이 간다.」
  「좋군. 정초에 집을 떠났는데 벌써 춘삼월인가,」
  「초저녁에 손님을 맞았는데, 어느덧 밤도 깊었네.」
  「아, 그것도 썩 좋았소. 그럼... 못 속의 부용꽃은 깊어서 보이지 않고,」
  「뜰 안의 도리화는 웃어도 소리가 없네.」
  「도도한 밤의 흥취를 어디에 비길 건가,」
  「자우산 위에 걸린 달이 밝기도 해라.」
  이로써 한 수의 시가 완성되었다. 서로 비긴 셈이었다.
  「호호호... 제 솜씨가 삿갓 어른의 귀를 거슬리지나 않았을까요?」
  「웬걸, 썩 훌륭한 솜씨였소. 감탄했소이다. 자, 한 잔 더 듭시다. 허허허...」
  「노래는 서투르지만  권주가라도 한 곡 불러  드릴까요? 오늘은 기분이 정말 
유쾌하군요.」
  하고 춘매가 정겨운 시선을 던졌다.
  「허허, 권주가까지 부르겠다! 좋지. 좋구말구.」
  이래서 춘매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때 대문이 삐걱 열리더니,
  「춘매 있느냐. 네 서방님이 오셨다.」
  하고 수선을 부리며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구, 원 생원님,  서 진사님, 그리고 문  첨지님과 조 석사님도 오셨군요. 
어서들 올라오세요.」
  춘매는 옷깃을 여미며 그들을 맞아들였다. 아마도  하찮은 벼슬을 하고 있음을 
기화로 쓸데없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제법 내노라하고  뽐내는 인물들인 모양이
다.
  그들은 아니꼬운 듯이  김 삿갓의 턱 버티고 앉은 모습을  일제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미 취흥이 도도해진 김 삿갓이다. 짐짓  그들의 시선을 피하는 척 고개
를 돌리더니, 한쪽 구석에 놓인 붓을 들고 멋들어지게 써 내려갔다.
  청산에 봉황이 날아드니 뭇 새들이 모두 숲으로 숨었거라
  벽해에 용이 나타나니 잡고기들아 어서 물속으로 사라지거라.
  이것을 본 네 사람은 가소롭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참 기가 막힐  일이군. 그럼 제가 봉이요,  용이고, 우리는 잡새요, 물고기란 
말인가. 흥, 아니꼬와서 어디 앉았겠나.」
  「저런 못된 글 쓰는 손모가지는 그저 뚝 분질러 버리는 게 상수야.」
  「고얀 놈이로고. 아가리에 쇠똥을 갖다 처넣어 버릴까 보다!」
  험악한 소리들을  지껄이고 있었지만 김 삿갓은  그들의 욕지거리는 아랑곳도 
않고 다시 붓을 놀렸다.
  해가 뜨면 언덕 위에 원숭이  나타나고 고양이 지나는 길에 쥐가 깡그리 없어
진다
  황혼녘 처마 끝에 모기떼가 꾀고 밤만 되면 벼룩이 잠자리를 괴롭힌다.
  이 시는 한자를  우리말 발음으로 읽으면 각 행의  아래 석 자가 묘하게도 원 
생원, 서 진사, 문 첨지,  조 석사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꼼짝없이 앉은 채로 각
기 원숭이, 쥐, 모기, 벼룩이 된 네 사람이다.
  「에잇, 고약하다. 오늘 술맛 다 잡쳤는걸.」
  「녀석, 어디 두고 보자.」
  그들은 투덜거리며 우르르 문 밖으로 몰려 나갔다.
  「허허허... 두고 보면 제깐  놈들이 어쩔 텐가. 방랑하는 김 삿갓을 따라 삼천
리를 헤맬 건가.」
  김 삿갓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춘매도 따라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삿갓 어른, 정말 통쾌하군요. 그렇잖아도 저 사람들이 와서 매일같이 어찌나 
귀찮게 굴던지...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양반인데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허허... 그 일은 이만 잊고 우리 다시 술이나 마십시다.」
  또 술잔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어느덧 밤도  깊었으므로, 김 삿갓은 두 번째 
시합을 하자고 제의했다.
  「천번 시합은 비겼고, 새로 승부를 가려 봅시다.」
  「아, 아니에요. 오늘밤은 벌써 취했어요. 내기는 내일로 연기해요.」
  「그럼 이 몸은  어찌 한다? 방랑하는 나그네, 어디 따로  가서 잘데도 없으니 
오늘 밤은 여기 앉아 밤새도록 글이나 읊어 볼까.」
  농담처럼 말한 것이었으나, 실은 진담이었다.
  「그런 걱정은 안해도 돼요. 아까 선비들을 곯려 주시는 것을 보고, 저는 벌써 
글로써는 삿갓 어른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내기는 벌써 제
가 진 것이지요.」
  [그럼?...」
  춘매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가서 몸이나 닦고 오세요. 많이 취하셨지요? 세수를  하시면 정신이 날 거예
요.」
  「음, 흐음... 많이 취했는걸.」
  김 삿갓은 웬지 거북해서 헛기침을 연발하면서 몸을 씻기 위해 뒤꼍으로 돌아
갔다. 처녀  기생과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으니,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웬일인지 모르게 못내 수줍어 지는 것이었다.
  목욕을 하고 들어가니 어느새 춘매는 새옷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자, 옷을 갈아 입으세요.」
  「아니, 이거...」
  「남자분이 뭘 그렇게  겸연쩍어 하십니까? 어서 갈아 입으세요.  저쪽으로 돌
아서서.」
  하면서 춘매는 술상을 웃목으로 밀어 치우고, 비단 금침을 깔기 시작했다.
  김 삿갓은 옷을 갈아입고 창밖의 희미한 달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직이 읊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대와의 사이 못내 어색하기만 하더니 자리를 함께 하자 이내 친해졌
구나.
  이 몸 주선이  숨은 선비를 즐겨 사귀다가  드디어 여영웅의 문장을 만났도다 
이불을 펴고 기다리는 이 순간에 글.달.술의 세 가지 뜻이 더욱 아름답도다 달님 
같은 그대와 함께 얼싸안고 매화꽃 지는 봄날 취해서 쓰러져 볼까나.
  「어머나, 제 이름자도 들어 있군요.」
  「그럼, 오늘 밤엔 매화가 지는 거요.」
  「부끄러워요.」
  불을 끄고 나니 교교한 달빛이 밀물처럼 들창문으로 밀려 들어온다.
  「춘매!」
  「예...」
  김 삿갓은 춘매를  넌즈시 끌었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다
시 싯귀를 읊었다.
  왕소군의 옥 같은 뼈도 썩어서  오랑캐 땅의 흙이 되었고 양귀비의 꽃다운 모
습도 마수의 티끌로 사라졌다.
  인간이란 원래 무정한 것이 아닐러니  그대는 오늘 밤 나를 위해 옷을 벗기를 
주저하지 말라.
  김 삿갓은  이렇게 속삭이면서 그녀의  옷고름을 풀었다. 그리고  살며시 끌어 
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여자에 대해서는  경험이 결코 적지  않은 김 삿갓이었다.  이번에는 처녀와의 
잠자리로 해서 더욱 흥분의 열도가 강렬했다.
  「아이, 그만... 이러시면...」
  마지막 순간에 춘매는  부끄러움으로 해서 몸을 비비 틀었다. 그러나  김 삿갓
은 솜씨있게 그녀의 마지막 산장에 깃발을 올렸다.  하지만 몸을 일으켰을 때 김 
삿갓은 적지 아니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처녀 기생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지. 아니면 내가  공연히 기대를 크게 
했던 탓일까)
  알쏭달쏭한 일이었다. 그러나 직접 묻기도 곤란한 일이었으므로,
  털이 많고 안이 넓으니 필시 누군가가 먼저 지나간 모양이다.
  이런 싯귀를 적어  그녀에게 주었다. 이것을 본 춘매는 자못  억울하다는 듯이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김 삿갓을 바라보더니,
  「어쩐지 서방님의 거동이 거북스러운 듯이 느껴지더니,  그런 오해를 하고 계
셨군요.」
  이렇게 말하고는 김  삿갓에게서 붓을 받아 쥐고  담담한 표정으로 답시를 써 
내려갔다.
  뒤뜰의 누런 밤송이는 벌이  없어도 저절로 벌어지고 시냇가의 수양버들은 비
가 오지 않아도 잘 자랍니다.
  이 글을 받아 쥐고 읽어 본 김 삿갓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허허... 역시 춘매는 여중 호걸이야. 내가 잠시  공연한 오해를 했나 보오. 내 
사과하리다. 어서 다시 불을 끕시다.」
  불을 끄니 여전히  방안 가득히 달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김  삿갓은 춘매를 
안아, 여전히 두  사람 체온이 남아 있는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먼 데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 도적과 안의 도적
  신안땅에 이름난 부자 늙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그 많은 돈을 쌓아 놓고도 돈 
한 푼에 벌벌 떠는 인색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늙은이를 찾아가 부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 댈라치면 
늙은이는 간단히,
  「부자되는 방법이야 아주 단순한 것이지. 그런데  단지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
어 그 일을 그대로 행하지 못하니 걱정이지.」
하고 지껄이면서도 자세한 말을 해주기를 꺼려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때였다.  낯선 젊은 사람 일곱명이 찾아와 늙은이  앞에 공
손히 절을 하고는,
  「저희들이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부자되는  방법을 알기 위함입니다. 엎드려 
청하오니 물리치지 마시고 제발 가르쳐 주시옵소서.」
  늙은이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나는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그 비결을 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자네들이 그
렇게 간곡히 배우고 싶다면  한 사람이 백냥씩 갖고 오게나. 그러면  내가 그 비
결을 얘기해 주지.」
  「정말 백냥만 가지고 오면 가르쳐 주시는 거지요? 그럼 당장 가서 가져 오겠
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날 밤중으로 각각 백냥씩을 꾸려 왔다.
  「그만 하면  정성들이 무던한 걸. 그럼  내 비결을 말하겠네.  에헴, 부자되는 
길이란 뭐 어려울 게  없다네. 먼저 바깥의 도적을 몰아낸 다음  안의 도적을 없
애 버리면 되는 것이야.」
  「밖의 도적이란 뭔가요?」
  「알고 보면  그지없이 간단한 거야.  바깥 도적은 다섯인데,  뭔고 하면 눈과 
귀, 코와 혓바닥 그리고  몸뚱아릴세. 다시 설명을 해보면 눈이란 항상 아름다운 
것만 찾게 마련이지.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란 게 한이 없고 끝이 없거든. 천금을 
던져 미녀를 사도  더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엔 또 있는 법이지. 나는  불과 몇 
냥 안되는  돈으로, 눈의 만족을 버리고  못난 여자를 데려왔지만 아들  딸 낳고 
살림 알뜰히 하니 그만 아닌가. 귀도 코도 혓바닥도 모두 마찬가지야. 좋은 것을 
택하자면 하루에 몇  만냥을 써도 모자라는 게 당연하다네. 옛날에  석승이란 사
람은 대단한 미식가여서 하루  만냥어치씩을 차려놓고도 오히려 젓가락 갈 데가 
없다고 투정을 부렸다지  않은가. 나는 그런 것에는  일체 돈을 쓰지 않네.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야 얼마든지 있지. 바람소리, 새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코를 즐
겁게 하는 마굿간의  말똥냄새도 코에 배면 구수하다네. 먹는 것이야  더욱 간사
스럽지. 그렇지만 죽  한 그릇이나 고기 한 대접이나 먹어서  배부르긴 마찬가지
가 아닌가?」
  「그럼 안의 도적은 무엇인가요?」
  「바깥 도적을 깨끗이  물리치자면 우선 안의 도적부터 없애 버려야  하지. 안
의 도적도 다섯인데 말하자면 인의예지신이라 이거야.」
  「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잘 모르겠는데요.」
  「에헴! 첫재 인이란  아주 고약한 것일세. 나는  맹세하기를 남들이 착하다고 
하는 일은  아예 안하기로 했다네. 그랬더니  세상에 정말 돈 쓸  일이란 없더군 
그래. 의라는 것도 그렇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의리를 앞세웁네 떠들며 재산
과 살림을 망치는 것을 보았는가? 또 예라는  것도 귀찮기 짝이 없지, 주고 받고 
오고 가고 한없이 번거롭기만 하지 않나. 오는  것은 받아들이고 가는 것은 잊어
버려야 하네. 지혜라는 것도  마찬가지, 그저 속으로 알면서도 겉으론 모른 체하
고 있는 것이  살기에 편하다네. 그리고 신이라는  것, 그건 아예 내동댕이 치는 
게 좋아.  저놈은 믿을 수 없는  놈이라는 소리쯤 들어놔야 성가시게  손 벌리고 
오는 사람이 없어지지.  이렇게 다섯가지를 썩 물리쳐 놓으면 돈을  절로 모이게 
마련이거든. 자 이제 비결을 다 가르쳐 주었네. 자네들도 당장 내 말을 시행하면 
몇 해 안 가서 떵떵거리는 부자 소리를 듣게 될걸세.」
  젊은이들은 돈 꾸러미를 밀어 놓고 일어섰다.  그런데 늙은이가 돈꾸러미를 받
아본즉 그것은 종이로 만든 가짜가 아닌가.
  그러자 인색한 늙은이는 당장 눈에 쌍심지를 세우고 버럭 성을 내었다.
  「자네들 대체 이게  뭔가? 나는 진심으로 말해 줬는데... 그래  젊은것들이 이 
늙은이를 놀리긴가?」
  「영강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만  그 비결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할것이 못되
니 귀신들에게나 가르쳐 드리시죠.」
  젊은이들은 금시에 괴상망칙한  귀신의 모습으로 변하여 늙은이를  둘러 쌌다. 
늙은이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하며 도망을 가려니까,
 「지옥의 축생도에 굻주린 4만 8천의 귀신에게 빨리가서 부자되는 비결을 말해 
주게나. 정말 그들은 몹시 굶주리고 있으니까. 자 어서 갑시다.」
  귀신들이 잡아끄니 꼼짝없이 마지막  황천길이었다. 늙은이는 귀신들의 발밑에 
꿇어 엎드려 애원하기를,
  「갈 때 가더라도 집안 살림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집의 방방을 뒤졌으나 어인 일인지 고린 동전 한푼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귀신들에게 끌려가며 늙은이는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한 세상 부자란 소리를 들으며 떵떵거리고 살아왔는데 이게 웬
일인고.」

  욕심이 원수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말이 인간의 욕심이 한정 없음을 가리킨 것이거
니와 터무니 없는 욕심은 종종 인간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곤 한다. 그러
나 전혀 무욕의 상태라고 하는  것도 반드시 환영 받을 일은 아니니 이는 곧 무
사 안일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결국 양자의 조화와 한계를 어떻게  잡느냐 하는 
중용의 문제가 어렵다 할 것이며, 이에 인간의 한계가 있다고도 하겠다.
  인간의 욕심을 풍자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어리석음과 욕심이 합쳐질 때 얼
마나 큰 넌센스가 빚어지는가를 나타낸 인도의 우화가 있다.
  베를 짜는 것으로 업을 삼는  한 사나이가 탐욕스럽기 짝이 없고 언제나 불만
이 많았다.
  「하나님은 왜 손을 두 개만 만들어 주셨을까.  처자식 먹여 살리는데 힘도 무
던히 드는데 손이 두 개만  더 있었던들 일도 두 배로 더하고 수입도 그만큼 많
아지니 걱정이 없을 게 아냐.」
  노상 이렇게 투덜거리던 중, 어느 날도 옷감을  짜고 있는데 갑자기 덜컥 하는 
소리가 나며 베틀이 부러지고 말았다. 사나이는 짜증을 내며,
  「제기랄 한번도 그런  일이 없더니 오늘은 이것마저 왜 말썽이야.  일은 바빠 
죽겠는데.」
  이리저리 살펴보니 베틀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부러진 것이었다.
  「들여다 보면 뭘 하나. 어서 나무를 해다가 고치기나 해야지.」
하고, 그는 도끼를 메고 산으로 올라갔다.
  이곳저곳 기웃거린 끝에 마침 적당한  나무가 한 그루 있어 도끼를 갖다 대었
다.
  그러자, 나무는 서럽게 울먹이면서 사나이에게 호소했다.
  「나는 아직 어린  나무에 불과합니다. 가지 하나라도 부러지면 곧  죽고 말아
요. 더 큰 나무도 얼마든지 있잖아요.」
  「아니, 우리 집 베틀을 고치려면  네가 꼭 적당해. 더 큰 나무는 손질을 많이 
해야 된단 말이야.」
하고 그는 사정없이 도끼를 내리쳐 나무를 찍었다.
  「아저씨, 잠깐만 기다려 줘요.」
하고 나무는 비명을 질렀다.
  「뭐야, 귀찮게시리.」
  「아저씨, 저를 찍어  넘기지 않으시면 아저씨가 바라는 것을 한가지  해 드리
겠어요.」
  「흥, 네까짓게 뭘.」
  「아녜요, 정말이에요. 시험해 보면 아실 것 아녜요?」
  욕심 많은 사나이는 슬그머니 마음이 움직였다.
  「그럼, 너 내 손을 네 개로 만들어 줄 수 있겠니?」
  「그럼요, 할 수 있다마다요. 그것 쯤은 당장에 되지요.」
  이 말을 듣고 사나이는 크게 기뻤다.
  「자, 그럼 부탁한다. 손이 네 개만  되면 베 같은 건 짜지 않아도 더 좋은 일
을 얼마든지 많이 할 수 있으니까 나무를 찍지 않아도 돼. 흥, 그래서 돈이 많아
지면 나를 업신여기던 놈들을 되려 업신여겨 줘야지.」
  사나이는 이윽고  소원대로 손이 네 개가  되었다. 이제는 돈도 두갑절  더 벌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는 저절로 신이 나서 껑충껑충 뛰다시피  집으로 돌아갔
다.
  그러나 결과는 딴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픽픽 웃으며,
  「저 병신 좀봐.」
  「음, 손이 네  개나 되는군. 그래도 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온통 싱글벙글이
군.」
  「아니, 저런건 병신이라기보다도 오히려 도깨비야.」
  이렇게 비웃기만 할  뿐이었으며 심지어 집에 가니, 아내가 나와서  반색을 하
며 맞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오히려 몽둥이를 들고 나와서,
  「이 도깨비야, 내  남편하고 얼굴은 몹시 닮았지만 흥, 내가  속을 줄알고, 손
이 네 개 달린 것만 봐도 네가 도깨비라는 건 곧 알 수 있어!」
하며 심한 욕을 했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변명해도 도깨비의 교활한 수작으로 몰릴 뿐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사내는 눈물을 머금고 올라가 나무에게 애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손을  도로 두 개로 만들어  달라구요? 그건 좀처럼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이군요.」
  나무는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으려 했으나 사나이가 열심히 간청하자 이윽고 
마지못한 듯이,
  「그럼 좋아요. 내 말 밑에 잡초가 많이 자라서  내가 먹는 걸 많이 빼앗기 때
문에 빨리 자랄 수가 없는데 매일 여기 와서 그 잡초들을 정성껏 뽑아 주겠다고 
약속하면 아저씨의 손을 전처럼 두 개로 만들어 드리지요.」
  사나이는 할 수 없이 응낙했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셈
이었다. 나무는 그의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도로 손이 두 개가 되었다고 안심해선 안 돼요. 약속을 안지키면 언
제든지 나는 손을 네 개로 만들 수 있으니까.」
  그 말을 들은 사나이는 다시 속으로 생각하기를 (쳇, 나무앞에 안 나타나면 되
겠지) 그러자 다시 나무는,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이 말을 듣고는 사나이는 그만 겁이 나서 진심으로 약속을 지켜야겠다고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도로 손이  두 개가 되자 그는 집으로 돌아갔으나  그날부터 하루에 
얼마씩 시간을 따로 내어 산에  가서 잡초를 뽑아야 했으므로 거기에 시간을 뺏
긴 결과 베짜는 일도 그전의 절반 밖에 할수 없었고 따라서 수입도 절반으로 줄
어들고 말았다.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았지. 모든 게 욕심이 원수다.」
라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청산을 바라고 가는데
  금강산 유람에 나선 김삿갓,  그는 실은 중이 되려는 심산이었다. 속세와의 인
연을 끊고 불도를 닦으며 여생을 보내리라 결심한 것이다.
  나는 청산을 바라고 가는데, 녹수야, 너는 어디서 오느냐.
  이런 싯귀가 절로  입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야말로 인간 세상이  아닌 절경이
었다. 산과, 나무와, 물과... 정녕 그가 가야 할 길이 열린듯 싶었다.
  머지 않은 곳에서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아, 근처에 절이 있구나)
  조금 가니까, 과연 난생  처음 보는 웅장하고 찬란한 한 채의  큰 사원이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아, 마치 선궁에 온 듯 싶구나. 과연 얼마나 불심 깊은 선승이  자리잡고 있는 
곳일까)
  법당 마루 위에 엄숙한  낯빛을 한 주지승이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먼 눈으
로 주지승을 발견한  김삿갓은 움찔 걸음이 멈추어지는 듯 싶었다.  일종의 위압
감이 엄습해 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하룻밤 잠자리를 구하고 시장한 배도 채우고 하려면 직접 주지승을 찾
는 것보다 빠른 길이  없다. 그래서 그는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당 앞으로 성
큼성큼 다가갔다.
  꽤나 가까이 다가선  순간 김 삿갓은 웬지 모르게  알 수 없는 실망감을 느꼈
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주지승의 곁에는  큰 관을 쓴 선비가 한 사람 앉아 있었
다. 무엇인가 얘기를 주고 받고 있는데, 간간이 떠뜨리는 두 사람의 웃음 소리에
는 알지 못할 야비함이 서려 있었다.
  (무슨 음담 패설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구나)
  더구나 가까이 가서 보니 주지승이란 자는 꼭 늙은 호박같이 흐물흐물하게 생
겨서, 먼 데서 볼  땐 어떻게 그렇게 위엄있게 보였을까 하는  의문조차 생길 지
경이었다.
  섬돌 계단을 걸어  오르는 김 삿갓의 얼굴엔 희미하게 경멸의  웃음이 번졌다. 
그는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법당 마루 끝 한쪽에 털썩 주저앉았다.
  「산중의 지나가는 길손이외다.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합니다만...」
  그러나 주지승은 그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몹시  비위가 상한다는 듯이 상을 
찌푸렸다.
  「젊은 친구, 무엄하구나.  법당 앞에 삿갓을 쓴 채 떡  버티고 앉다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 따위 버릇없는 수작인가. 썩 내려가지 못할까?」
  「시장도 하고 다리도 아프니, 좀 쉬었다 가려는 것인데...」
  「뭣이? 내 말이 귀에 안 들려? 배가 고프면 부엌에 가서 구걸을 해야 마땅할 
일이지, 그래 여기가 어딘 줄도 모르나!」
  「여기가 금강산이지 어딘 어딥니까.」
  「고얀지고, 네 눈엔 산만 보이고 부처님도 스님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흥, 스님도 부처님도 다 보이지요.  한데 스님 옆에는 관 쓴 속인이 앉아 있
는데, 어찌하여 갓 쓴 소인만 나무라십니까?」
  김 삿갓은 주지승 곁에 앉아서  자기를 노려 보고 있는 선비의 시선이 아니꼬
워 슬쩍 비꼬아 주었다.
  「쯧쯧... 배우질 못해서... 젊은 사람이 딱하구먼.」
  선비는 혀를 찼다.
  「배우지 못했다니요, 무슨 말씀을.  나도 이 신성한 산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
로 스님에게 시주를  하고 또 지체 있고 체통  있는 선비에겐 어른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소.」
  「이 미친 녀석!」
  주지승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신성한 산에 부끄럽지 않은  스님이 아니
므로 스님 대접을 못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니 어찌 화가 안 날 수 있으랴.
  「이 엉터리 같은 녀석, 경치기 전에 썩 물러 가거라!」
  주지승은 불같이 노해서 소리를 질렀지만 김  삿갓은 여전히 태연자약, 빙글빙
글 웃기까지 했다.
  그때 선비가 비로소 한마디 했다.
  「젊은이, 말이 너무 거칠구먼.」
  「흥, 당신은 뭐요? 불법은 만물에 차별을  두지 않고 공평하게 대자대비를 베
푼다 하던데, 이 절에선  글하는 선비는 관 쓰고 법당에 앉았어도  대접만 잘 받
고 나같이 무식한 사람은 갓  쓰고 앉았으니 하는 핑계로 잘도 푸대접을 하시는 
구료.」
  「허, 거 무슨 소리. 원래 옹졸한 승려라면 유학을 속학이라 하여 거들떠 보지
도 않는 법이지만,  여기 계신 이 스님은  그렇게 옹졸하신 분이 아닐세. 도량이 
넓으셔서 선비로서 대접하고 있을  뿐이지. 방금도 서로 시를 짓고 있던 참일세. 
참 젊은이,  자네도 보아하니 글줄이나  읽었음직한데, 어때, 그런가  안 그런가? 
내 짐작이 틀렸나?」
  「선비님이 관상도 볼 줄 아시는 모양이구료. 내가  글을 읽었든 안 읽었든 그
게 무슨 상관이오.」
  「자꾸 그렇게 핏대를 올리지 말게. 기왕에 유람을 나섰다면, 여기서 풍월이나 
한 수 읊고 가도 좋지 않겠나?」
  김 삿갓은 선비의  능청맞은 속셈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필경 김  삿갓으로 하
여금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도록 하여 제 발로  달아나도록 하려는 수작인 것이
다.
  「풍월이라면 장난을 좀 재 보았지요. 그럼 어디 운을 불러 보시오.」
  일순 선비는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청년이 제  발로 달아나기는커녕 오히려 어
딘가 자신 만만한 빛을 드러내며 즉각 운을 청하므로 다소 켕기는 느낌이 든 것
이다.
  이때 주지승이 무슨 묘안이  떠올랐는지 선비에게 눈을 껌뻑여 신호를 보내고 
자기가 나서서 말했다.
  「자네가 진서를 읽어 봤어야 얼마나 읽었겠나.  오히려 언문 풍월이격에 맞을 
듯하군. 내가 운자를 부를 테니 언문으로 칠언 풍월을 한 수 읊어 볼 텐가?」
  얕보는 태도요, 얄미운 간계였다. 이렇게 갑자기 읊어 대자면 오히려 언문으로 
짓기가 더 힘드는 법이다. 그러나 사양할 김 삿갓이 아니었다.
  「절간에 온 처녀가 중이 하자는 대로 욕을 볼 수밖에, 언문도 좋소이다. 운이
나 불러 보시오.」
  「저, 저, 저놈이 끝내...」
  「스님, 미친 소리엔 괘념 마시고 운이나 부르시지요.」
  선비가 이렇게 주지승의 발작을 제지했다.
  주지승은 잠시 생각하더니,
  「타!」
하고 운을 불렀다.
  (오냐, 좋다. 천천히 뜸을 들이면서 놀려 보자)
  김 삿갓은 이렇게 작정하고 우선 부드럽게 응수했다.
  「나무아미타불!」
  주지승과 선비는 의외로 빨리 대꾸가 나옴으로  순간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러
나 여기서 진 것을 인정했다가는 꼼짝없이 상대를 선비로 대접해야 할 판이므로 
주지승은 다시 운을 불렀다.
  「이번에도 타」
  「극락 열반 썩 좋다(조타)!」
  「으음, 좋아. 다시 타」
  「절간 기둥 벌겋다(벌거타)!」
  「또, 타!」
  「석양 행객 시장타」
  김 삿갓은 차츰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지승은 다시  타자를 부르는 
것이었다.
  (이젠, 슬슬 골려 주기 시작할까)
  김 삿갓은 이렇게 생각한 뒤,
  「큰 절 기둥 붉게 타!」
  「뭣이! 기둥이 타? 무슨 망측한 소리냐?」
  「풍월입니다. 다시 불러 보시오.」
  「그럼, 다시 타」
  「네 절 인심 고약타!」
  「정말 몹쓸 젊은이로군. 너무 무례하지 않은가?」
  「어떤 내용으로 짓건 그건 내 자유 아니외까.  나는 운에 맞춰 부르기만 했을 
뿐이니, 그런 운을 부른 스님이 잘못이오. 허허...」
  「에잇, 이젠 그만 집어 치워라!」
  「아니,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소이다.」
  김 삿갓은 고집을 부리듯이 소리쳤다.
  「지옥 가기 합당타!」
  「저, 저놈 보게! 이놈아, 어디서 그 따위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거냐?」
  주지승의 분노가 극에  달해 펄펄 뛰며 야단을 치는데, 곁에서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선비가 나서면서,
  「여보게, 그만하면 자네  언문 풍월 솜씨는 잘  알았네. 이번엔 진서로 한 번 
지어 보겠나?」
하고 새로운 제의를 했다. 제 녀석이 언문풍월이나  알았지 진서야 알랴 하고 얕
보는 생각에서이다.
  「진서로 지으라구요. 그것도 좋습니다. 들어 보시구료.」
  둥글둥글한 중의 머리,  땀난 말 불알 같고,  뾰족뾰족한 관 쓴 선비  머리, 축 
늘어진 개X같구나.
  중과 선비를 동시에 몰아쳐서 이렇게 지독한 욕설을 퍼부었다.
  늙은 중과 중년 선비는  얼굴이 푸르락 붉으락, 어쩔 줄 몰라  쩔쩔 매며 동시
에 벌떡 일어섰다.
  「누구 없느냐. 모두들 나와서 저 고약한 놈을 쫓아 내버려라!」
  말로 안 도므로 이젠 폭력을 쓰자는 것이다.
  김 삿갓은 이것은 견딜 수 없는 노릇이므로,
  「부처님 앞에서 살계를 범하려는 가련한 중의 죄를 구하려면 내가 이곳을 떠
나는 수밖에 없겠군. 에잇, 퉤! 퉤!」
하고 침을 탁탁 뱉으면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산문을 나섰다.
  (아, 이러한 선경의 대사찰  속에도 무자비한 괴승이 존재하고 있다니! 양반도 
썩고 중도 썩었으니, 이 김 삿갓이 갈 곳은 어디냐)
  이로서 김 삿갓은 중이 되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것은 김 삿갓의 인
생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차가운 산바람이 불면서  빗줄기가 후두둑거렸다. 옷이 축축히 젖어 들어왔다. 
질퍽한 땅을  밟아 가는 짚신발도 흥건히  물기가 베어 온다. 김  삿갓의 발길은 
무겁기만 했다.

  강아지의 먹이는 꼭 꿀이어야
  옛날 어느 마을에  짓궂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아니 짓궂다기  보다는 오히려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1년 내내 빈둥빈둥  놀고만 지내는 처지였다. 곧 농사를 
지으려 해도 농토가 없었으며, 장사를 하려 해도 그 밑천이 없었다.
  그래서 늘 방안에 드러누워 살 길을 궁리했다.  아니 일확 천금을 꿈꾸고 있었
다 해야 옳을 것이다.
  「여보! 당신은 마냥 구들장만  지고 누워서 무슨 꿈을 꾸고 있어요?  오늘 저
녁에는 정말 끼니 거리가 떨어졌어요!」
  아내의 표독스러운 목소리에 그는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아니 그대로 누워 
있다가는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몰랐으므로 미리 일어나서 엉거주춤 앉아 있
는 것이다.
  그는 곰방대에 담배를 재어 물며,
  「건너 마을 차돌이네 집에 가서 좁쌀 한 되만 더 꾸어 오구려.」
  그는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한 마디 했다.
  「꾸어 오는 것도 분수가 있지. 마냥 꾸어  오기만 하고 갚지는 않았으니 무슨 
염치로 또 좁쌀을 꾸러 간단 말이에요?」
  「하지만 한번만  더 갔다 오구려. 내  다음 장날에는 틀림없이 가도록  할 테
니...」
  「듣기 싫어요. 빈둥빈둥 놀고 있는 주제에 무슨  재주로 꾸어 온 곡식을 갚는
단 말이에요?」
  남편은 슬쩍 담뱃대를  물고 아내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럴때는 아내를 
구슬러 놓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보. 이리 좀 가까이 와요! 내 은밀히 할 얘기가 있소.」
  그러자 아내도 대강 눈치를 알아차리고 남편의  손을. 뿌리치는 척하면서 남편
에게로 다가왔다.
  「얘기가 있으면 거기서 할 일이지, 꼴  사납게 치맛자락은 왜 당기세요? 아이
들이 보면 어떻게 하시려구.」
  그러나 다행히도 아이들은  집에 없었다. 남편은 아내를 바싹 끌어  자기의 무
릎 위에 앉힌 다음 그녀의 등을 슬슬 어루만져 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순간 아내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정말 그렇게 될까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반문했다.
  「되다 뿐인가?  며칠 후면 우리도  부자가 되는 거야. 자아,  그런 뜻에서 한
번...」
  그들 부부는 문고릴 걸어 잠갔다.
  이윽고 장날이 다가왔다. 남편은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왔다. 그는 아내가 맏
아들의 혼수감으로 준비해 두었던 무명베 한 필을 짊어지고 터벅터벅 장으로 향
해 걸어갔다.
  남편은 해질 무렵에야 돌아왔다. 그는 무명베를 팔아서  꿀 한 단지와 예쁜 강
아지 한 마리를 사 왔다.
  그리고는 그날부터 강아지에게  꿀을 먹였다. 강아지는 며칠 만에 꿀  한 단지
를 다 먹어 치웠다.
  그럭저럭 다음 장날이  닥쳐왔다. 그는 이 강아지를 짊어지고 다시  장으로 갔
다.
  「꿀 강아지 사려! 꿀 강아지」
  그는 강아지를 짊어지고  장거리를 오르내렸다. 그러나 강아지를  사려는 사람
은 한 사람도 없었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 그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네거리에 강아지를 내려 
놓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일확천금을  할 수 있는 길이  있소. 벼락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다 
모이시오.」
  그러나 사람들은 모이지 않았다. 그는 약간 당황했다.
  (이러다가는 강아지를 팔지 못하겠군. 좋은 수가 없을까?)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다 이리 모이시오. 지금부터 꿀을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이 꿀 강아
지의 꽁무니에서는  꿀이 무진장으로 나옵니다.  아무리 짜 먹어도  꿀은 샘솟듯 
흘러 나옵니다. 오늘 시장에 온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도 남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는 강아지의 배를 
눌러 꿀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물려 든 사람에게 조금씩 맛을 보였다. 과연 
단 꿀이었다.
  (강아지의 똥구멍에서 꿀이 나오다니?)
  모두들 신기해서 두 눈을 번쩍 떴다. 이때 그는 다시 외쳤다.
  「이 강아지는 하늘의  옥황상제가 내려준 강아지올시다. 그러므로  인연이 맞
지 않는 사람은 이 강아지를 가질 수 없어요.  곧 하늘이 점지해 준 분이 아니면 
일확천금을 할 수 없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나 아주  담이 큰 사람은 그런 운명을 
극복하고 벼락부자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 누구든지  자신 있는 사람은 이리 나
오십시오. 그런 분에게 강아지를 넘겨 드리겠습니다.」
  이때 아주 욕심 많은 부자  영감이 공짜 꿀을 얻어 먹기 위해서 그곳에 와 있
었다.
  그는 꿀 강아지를 보자 단번에 갖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 그래서 선뜻 앞으
로 나섰다.
  「여보시오. 그 강아지를 얼마에 팔겠소?」
  「이 강아지는 내가 얼마라고 값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다만 사가실 분의 베
짱에 맡길 따름입니다. 곧  십만 냥을 내고 사 가는 사람은  백만 냥어치의 꿀을 
짜 먹을 수가 있고 백만  냥을 내고 사가는 사람은 천만 냥어치의 꿀을 짜낼 수
가 있다는 거지요. 하늘이 그렇게 점지해 두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욕심 많은 부자 영감은  대뜸 50만 냥을 내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진장으로 돈이 나오는 강아지를 그처럼 싸게 팔  수는 없소. 다시 한번 생
각해 보시구려.」
  이리하여 강아지는 결국 70만 냥에 매매가 되었다.  그는 강아지 값을 받은 다
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잡한 장거리를 빠져 나왔다.
  한편 강아지를 산 욕심 많은  부자 영감은 멀지 않아 큰 부자가 될 것이라 기
뻐하며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들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모두 기뻐할 뿐만 아니라 다투어서 강아지의 배
를 눌러 꿀을 짜 먹었다.
  욕심 많은 부자 영감은 가족들이  강아지의 꿀을 짜 먹는 것이 아까와서 야단
을 친 다음 강아지를 자기의 방에다 들여 놓았다.
  이윽고 다음 장날이 돌아왔다. 욕심 많은 부자  영감은 잔뜩 부푼 가슴을 가까
스로 억제하며 강아지를 안고 시장으로 갔다.
  (오늘 장에 가서 천만 냥쯤 받고  팔아야지. 아니 강아지를 사 갈 사람이 없으
면 꿀이라도 짜서 팔고...)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강아지를 네거리 모퉁이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외쳤
다.
  「꿀 강아지 사려! 꿀 강아지」
  전날 장에 이미 꿀 강아지에 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으므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다.
  드디어 욕심 많은  부자 영감은 꿀을 짜서 모여든 사람에게  시식시켰다. 그러
나 이게 웬일일까? 강아지의  똥구멍에서 나온 꿀을 맛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눈
쌀을 찌푸리며 도리질을 했다.
  「이크! 냄새야! 바로 개똥 냄새로군. 아니 그대로 개똥이야!」
  그러자 욕심 많은 부자 영감은 눈을 부라렸다.
  「주착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구! 남의 꿀을 얻어 먹었으면  고맙다고나 해야 옳
을 일이지 그게 무슨 버릇이람!」
  그리고는 또 꿀을 짜서 다른 사람에게 맛보였다. 이번에는 점잖은 양반이었다. 
그러나 그 양반은 맛을 보자마자 욕심 많은 부자 영감의 뺨을 후려쳤다.
  「네가 바로 장돌뱅이 사기꾼이군! 개 똥을 꿀로 속여 팔다니! 이 놈을 잡아가
야 하겠구나!」
  욕심 많은 부자 영감은 그 말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껴 오던 꿀을 손가락으
로 조금 찍어 맛보았다.
  그리고는 강아지도 버려 둔 채 사람들 틈을 헤치고 뺑소니를 쳐버렸다.
  이때 강아지를 판 사나이는 오막살이에 앉아서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참! 내가 강아지를 팔면서 깜박 잊은 게 있군. 강아지의 먹이는 꼭 꿀이어
야 한다는 말을 했어야 하는 건데...」

  단결력
  인도의 어느 고승이 일생을 두고 불도에 몸바쳤으나 끝내 진리를 깨닫지 못하
여,
  「역시 나는 중생을 제도할  그릇이 아닌 모양이다. 아아...내생에는 차라리 참
새의 우두머리가 되어 참새를 제도하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수없이 중얼거리더니 드디어 죽어서 참새가  되어 환생했다. 그리고 소
원대로 수많은 참새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수천 마리의  참새를 거느리고 우두머리  참새는 걱정 없은  나날을 보냈었다. 
곡식이 풍성하였고 참새의 사회는  인간의 그것과 달라 그리 복잡하지도 않아서 
골치 썩일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큰 변이 생겼다.
  인근에 참새 우는 소리를 잘  흉내 내는 사냥꾼이 있어 하루는 참새들이 떼지
어 노는 들판에 나타나 몸을 숨기고
  「짹짹! 짹짹!」
하고 흉내를 내자, 참새들이 이 소리를 듣고  새로운 동료가 나타났다 하고 그쪽
으로 몰려 간 순간 잽싸게 큰 그물에 씌워 참새들을 몽땅 잡고 말았다.
  보고를 받은 참새 우두머리이자 전생의 고승이기도 한 그는,
  (아아, 내가 전생에 사람들을 잘 지도하여 살생을 삼가도록 하였던들...)
하고 생각했으나, 그런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았자 소용이 없었다.그날 이후 참
새들은 점점 줄어갔다. 우두머리 참새가 몇번이고  가짜 울음소리에 속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그 흉내가  하도 교묘해서 어린 참새들이  번번히 속아 넘어가곤 했
다.
  그리하여 참새 우두머리는 궁리 끝에 부하 참새들을 모조리 불러 모으고,
  「이러다간 오래지 않아 모두 잡혀가고 나혼자  달랑 남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 명심하고 들어 꼭 그대로 하여라.」
  「예...」
  참새들의 대답 소리가 들판을 흔드는 듯싶었다.
  「이번에 또 그 사냥꾼의 그물에 걸리거든  하나,둘,셋, 하고 소리친 다음에 힘
을 합해서 힘껏 날아가란 말이다.」
  「날아가다니요? 그물을 쓴 채 날아갈 수가 있을까요? 꽤 무거울 텐데.」
  한 참새가 물었다.
  「물론 날아갈 수 있지.  그러니까 일제히 날아가란 말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
고 셋, 하는 구령이 떨어지자마자 단번에 날아가지 않으면 안 되지. 제각기 마음
대로 날면 그물에 날개가 걸리고 목이 졸려서 날수가 없을 게야.」
  「예...」
  「그런 다음에 멀리 날아가서 그물을 쓴 채 큰 나무 위에 올라가 제각기 아래
로 빠져 나오면 안전할 것이다. 알았나! 힘을 합해서 단번에 날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예!」
  「됐어, 그럼 가서 놀아라」
  다음날 사냥꾼은 또 그물을 씌웠다. 그러나, 웬일인지 전날과는 사정이 판이했
다. 참새들은 귀가 찢어질 듯이 한꺼번에 뭐라고 세 마디를 외치더니, 일제히 날
아가서 보기 좋게 그물을 빠져나간 것이다.
  「이...이럴 수가... 어디 다시 한번」
  사냥꾼은 기가 막혀 혀를 차면서  몇 번 더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실패로 돌아
가기는 전과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틀렸구나. 그대로 돌아가야겠어.」
하고, 사냥꾼은 돌아갔다. 그러나 참새잡이를 아예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사냥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참새들의 단결심도 
해이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참새들은 들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사소한 일로 싸움을 벌였
다.
  「이봐, 그건 내가 먼저 본 거야.」
  「아무리 먼저 봤으면 뭘 해. 먼저 먹는 게 임자지.」
  이렇게 옥신각신하노라니 어느새 완전히 두 패로 갈라져서 걷잡을 수 없는 싸
움이 되어 갔다.
  그런데 그 곁 숲속에서 사냥꾼이  몸을 숨긴 채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
던 것이다.
  「흐음, 이녀석들, 힘도  없는 것들이 뭉쳐 살지 않고 흩어져.  이 기회를 놓칠
소냐.」
하고 싱긋 웃으며 사냥꾼은 재빨리 그물을 씌웠다.
  한참 격렬하게 싸우던 터라 참색들은 단박 힘을  합칠 수가 없었다. 제각기 저
만 살겠다고 바둥거리니 좀처럼 위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모조리 잡히고 말았다.
  참새 우두머리는 이 보고를 듣고 땅을 치면서 통탄해 마지 않았다.
  「그렇게도 타일렀거늘 또 싸움을 했단 말이냐. 아아, 참새도 이해관계에 따라
서 단결을 못하다니! 인간 세상이나 다를 바가 없구나.」

  견자
  송도 즉 지금의  개성은 장사 고을로서 뿐  아니라 인심 사나운 고장으로서도 
유명했다. 모두들 깔끔하고 경우바른 것은 좋았으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인색하
고 관용성이 없는지도 모른다.
  구월산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던 김 삿갓이 개성에  다다랐을 때 날이 저물어 
어둡고, 시장기마저 엄습해 온다.
  마침 큰 대문이 솟은 집이 눈에 띄었다. 김 삿갓은 그 집 문을 두드렸다.
  「지나가는 길손이오. 하룻밤 자고 갈 것을 청합니다.」
  주인은 김 삿갓의 초라한 행색을 훑어 보더니,
  「땔 나무가 없어 재워 드릴 수가 없으니 딴 집으로 가 보시오.」
하고는 문을 쾅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허...」
  김 삿갓은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을 이름은 성문을 연다는데 무슨  일로 문을 닫으며 산 이름은 소나무 산이
라면서 어찌 땔 나무가 없다는고 어두운 밤길에 길손을 내쫓음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니 동방 예의지국에 있어 너 홀로 진나라(오랑캐) 놈이로구나.
  김 삿갓은 한 수 읊고 나서, 언제든지 정  잘 곳이 없으면 찾아가기 마련인 마
을의 글방으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 가면  동호자들이 있으며, 일이 잘만  되면 높은 선생 대우를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노자까지 얻어 한결 마음 편한 방랑을 계속할 수 있다.
  마을 한가운데서 머뭇거리는 김 삿갓의 귀에 마침  글 읽는 소리가 들려 왔다. 
김 삿갓은 그곳으로 갔다.
  대문 안으로 한 발 옮기려  하는 찰나 문득 봉창문이 열리고 헛기침하는 소리
가 들린다.
  머리를 들고 보니  글방 선생이 손을 내젓고 있었다. 나그네를  거절한다는 시
늉임에 틀림없다.
  김 삿갓은 허무하고 쓸쓸했다.
  또 한편으로 괘씸하기도 해서 서당 뒷벽에 다시 한 수를 써 내렸다.
  하늘 천 자가  관을 벗고 점 하나를 얻었으며  이에 내자가 작대기를 잃고 한 
띠를 매셨도다.
  한마디로 개새끼라는 것이다.

  아홉은 죽고 하나는 살지 못했다.
  경상도 어느  곳 정씨 가문에 한  꼽추가 지독한 노랭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독한 노랭이였는지 장가 든 후인 데도 사람들은 정꼽추라고 놀려 대기 
일쑤였다.
  곳간마다 쌀섬이 그득했으나 어쩌다 밥상에 새우젓이라도 놓일라치면,
  「날 병자 취급하지 마라! 나는 아직 생생해. 이렇게 성한 몸인데 생선을 먹으
라구?」
하면서 호통이 대단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딸을 위해 장인이  하루는 북어 한 마리를 보내왔다. 
이것을 그대로 아내에게 먹일 정  꼽추라면 아마도 그리 놀림을 받지 않았을 것
이다.
  그는 북어를 벽에 걸어  놓고 밥 한 술 떠 먹고 그것 한번  쳐다보고 했다. 어
쩌다 아이들이 두 번이라도 쳐다보면, 머리를 때리며 야단을 쳤다.
  게다가 해가 저물면 기름을 아낀답시고 일찌감치  자리에 든다. 그러면서 부부
간의 그것마저도 싫다 하는  그였다. 왜 아까운 밥 먹고 그런  곳에 힘을 쓰느냐
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쯤의 위인이니 어느 얌전한 부인이라도 견뎌내겠는가.  참고 참던 부인은 어
느 봇짐장수와 눈이 맞아 밤에 도망쳐 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정 꼽추에게 손가락질하며 침까지 뱉었다.
  어느해 홍수가 져서 온 마을을 휩쓴 불상사가 일어났다.
  정 꼽추의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른 식구들은 제 발로 뛰쳐나와 재앙을 면
했으나 정 꼽추의 아버지는 미처 물결을 헤어나지 못하고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
다. 그래도 자식된 도리는 아는 모양, 정 꼽추는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여러분, 제발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시오. 얼마든지 원하는대로 돈을 드리겠
소.」
  그의 아버지도 아들 못지 않게 구두쇠였던  모양이다. 둥둥 떠내려가면서도 이 
소리를 듣고,
  「이놈아, 얼마든지 주겠다니 돈은 어디서 거저 생기느냐? 닷 냥만 걸어라. 닷 
냥에 날 건지겠다면 허락하고 그렇지 않거든 그만 두어라.」
하는 것이었다.
  정 꼽추는 코웃음치는 동네 사람들에게 닷 냥으로 흥정을 하는 사이 아버지는 
자맥질을 치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곳 저곳 자연을 음미하며  유람하던 정만서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게 되었을 
때는 마침 이런 일이  있은 직후여서, 마을 사람들이 일어나 이  아비 죽인 노랭
이를 치죄하고자 하는 참이었다.
  마을이 떠들썩하니 호기심 많은 정만서가 어찌  그곳을 그냥 지나치겠는가. 듣
고 보니 과연 고약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혼벼락을 내주고자 작정했다.
  우선 그는 꼽추의 집 골목  어귀에 서성거리고 있다가 정 꼽추를 보자 머리를 
주억거리며 혀를 찼다.
  이런 정만서의 속셈을 알  리 없는 정 꼽추는, 낯선 사람이  지나가다 말고 자
기를 유심히  쳐다보며 안됐다는 듯 혀를  차는 걸 보고 심히  의아했다. 그리고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시비도 걸 수 없고  해서 그냥 지나가려는 참에 정
만서가 그를 불러 세웠다.
  「나의 일이긴 하오나 하도 딱하고 아까운 생각이 들어 차마 그냥가지 못하겠
구료. 댁은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라 천하를 호령할 기상입니다만...」
  정 꼽추는 귀가 번쩍 띄었으나 그 끝말이 어쩐지 미진했다.
  보아 하니 행식도 괜찮고, 또 실없는 농담을 할  사람 같지도 않아 그 말이 미
덥기는 했으나 <만...>이라는 끝말에 신경이 거슬린 것이다.
  「어디 사시는 누구시오니까?」
  정 꼽추는 아주 공손하게 절을 하며 물었다.
  「한양 북촌에 사는  정이라는 의원이외다. 이 산 중에 희귀한  약초가 있다기
에 듣고 찾아오는 길입니다.」
  사방을 둘러  보며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한양  북촌이라면 장안에서도 
쩡쩡 울리는 재상들이 사는 곳이라는 것쯤은 정 꼽추도 알고 있었다.
  그의 속셈을 헤아리기라도 했는지, 정만서는 한 술 더 떴다.
  「내 이미 오래 전부터 영의정 이 대감, 우의정 김 대감, 이조판서 송 대감 등
등 여러 댁을 드나들며 치료해  드렸으나 댁처럼 비범한 인물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약간이나마 관상을 볼  줄 아온데, 댁은 재상의 지위를 타고 나셨습
니다. 허나 다만...」
  정신을 홀랑 빼앗긴 정 꼽추,
  「다만 이 등뼈가...?」
하고는 정 만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소이다...」
  그는 말 끝을 흐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이날 밤, 오래도록 잠을  못 이루다가 잠깐 잠이 든 사이  재상이 되어 고대광
실 높은 집에서 팔선녀를 데리고 노니는 꿈을 꾸었다.
  잠이 깬 정  꼽추는 생각할수록 툭 불거진 등이 미웠다.  그렇게 고분고분하던 
아내가 도망쳐 버린 것도 다  등 탓이려니 생각하니 자기 팔자가 한없이 원통스
러웠다.
  (꼽추만 고친다면!)
  이렇게 결심을 한 그는 어저께 만난 사람이 명의임에 틀림없었으니 자기의 몸
도 고쳐 줄 좋은 방도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정만서가 
묵고 있는 곳을 수소문하여 그 앞에 엎드려 자기 집에 있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정만서는 회심의 미소를  띠운 채, 이제 곧 목욕한 후  약초를 캐러 가
야 한다고 점잖게 거절했다.
  그러나 영의정을 눈앞에 보는 듯한 정 꼽추가 이만 일에 물러설까.
  「제발 사람 한 목숨  살려 주십시오. 부디 제 집으로 가셔서  저를 고쳐 주십
시오.」
  못 이기는 척 정만서는 정 꼽추의 집으로 처소를 옮겼다. 그리고는 매일 소다, 
닭이다 하고 모두 잡아 그 피를 꼽추에게 먹으로 한 다음 살코기는 동네 사람들
에게 나누어 주었다.
  정 꼽추는 아깝고 분하기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영의정 꿈에 
참고 말았다.
  잘 먹고 한 덕에 부옇게 살이 오른 정 꼽추는 슬그머니 의아심이 일었다.
  침이라고는 한 대도 놔주질 않고 자꾸만 세월만 보내고 있으므로 초조해진 정 
꼽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원님, 몸에 기름기가 많이 배면 치료하기에 나쁘지 않을까요?」
  그때서야 정만서는,
  「이제 그쯤하면 몸은 충분히 보했으니 어디 치료를 해봅시다.」
하고는 떡판과 떡메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정 꼽추, 별 이상스런 치료법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시키는 대로 그것들을 가져왔다.
  정만서는 떡판 위에 그를 눕게 한 다음 떡메를 높이 쳐들었다.
  「아니, 떡메로 무얼 하시려구요?」
  「치라는 떡멘데 치지 않고 뭘하겠나?」
  깜짝 놀란 정 꼽추는 벌떡 일어났다.
  「그걸로 쳐서 병을 고치다니, 도대체 몇 명이나 치셨습니까?」
  「한 열 명은 쳐 봤지.」
  「병들은 다 나았나요?」
  「아홉은 죽고 하는 살지 못했네.」
얼이 빠진 정 꼽추,
  「그럼 나는 살 수 있을까요?」
  「두고 봐야 알지, 죽지 않으면 살지 못하겠지.  자아, 시작할까? 이 노랭이 녀
석아!」
  그러면서 정만서는 떡메를 이리저리 휘들러 댔다.

  내 모습이 어떠하오?
  제나라 때의 재상 추기는 6척이 넘은 장신인데다 용모 또한 만인을 굽어볼 만
큼 준수했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는 관복을 입고 거울을 들여다 보다가  아내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내 모습이 어떠하오? 성북의 서공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미남일까?」
  아내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당신의 준수함이란 서공 따위가 쫓아오지 못할 것인 줄로 압니다.」
  그런데, 서공 역시  당시 제 나라에서 일세의 호남아로서 세상을  덮는 명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추기는 아내가 비록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대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첩에게 물어보았다.
  「나와 서공을 놓고 볼 때 누가 더 미남일까?」
  「서공하고 비교를 하다니요. 말할 것도 없이 서방님이 나으시죠.」
하고 첩도 똑같은 대답을 하였다.
  「음... 그런가」
  추기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다.
  며칠 후 추기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추기는 장난삼아 아내와  첩에게 묻던 
말을 그 손님에게도 물어보았다.
  「나와 서공 중 어느 쪽이 더 미남이오?」
  「하하하... 말씀드릴 것도 없이 나리의 풍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하고 손님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바로  다음 날 서공이 추기의 집엘 놀러  왔다. 추기는 거울을 
통하여 서공과  자기를 비교해 보았다.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자기가 서공만 못하다는 결론이었다.
  (음, 그럼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어떻게 된 걸까)
  그날 밤 잠자리에서 추기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아내가 자기를 멋지다고 한 것은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기 때문이었을 것이
고, 손님의 말도 그러했던 것은 자기에게  무엇인가 요구하려는 속셈에서였을 것
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조리 아첨이란 말인가. 아첨을 아첨으로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터무니 없는 수렁에 빠지는 제 일보라 아니 할 수 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추기는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도  아첨이란 병폐는 
이를 결코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튿날 왕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소신이 스스로 생각건대, 소신은 서공의 호남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데, 소신의 처는 소신을 두둔하고  첩은 두려워하며, 손님은 필시 소
신에게 청탁이 있는듯  모두가 한결같이 소신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폐하께서도 시사를 받을실  점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 우
리 나라는 현재 사방 6천리의 넓이와 120성을  가진 큰 나라로서, 궁녀와 시종들
은 한결같이 폐하를 두둔하고, 신하들은 모두 폐하를 두려워하며, 여기저기 우리
의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는 객들이  한둘 아니어서 그들 모두가 여러 가지 방법
으로 폐하의 눈을 가리고 있을 것입니다.」
  「경의 말이 정녕 옳도다.」
하고 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관원과 백성들은 다음의 말을 명심할지어다.  짐의 잘못을 면전에서 일
깨워 주는 자는 가장 높은  상을 주고, 글로써 간언하는 자는 보통의 상을, 또한 
군중들 앞에서 여론을 일으켜 내 귀에 들어오게 하는 자는 가장 낮은 상을 내리
겠노라.」

  인간에게 보태진 수명
  천지창조 이후, 하나님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한 수명을  정하려고 각
처의 동물들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맨 먼저 당도한 것은 당나귀였다.
  「너에게는 30년의 수명을 내리겠노라.」
  하나님의 말씀에 당나귀는 펄쩍 뛰며 비명을 질렀다.
  「아이구, 그렇게 길어서야 어디 견디겠습니까?  저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죽
도록 일만 할 뿐이며 그래도 사람들은 내가 말을 안듣느니 뭐니 하면서 발로 차
거나 몽둥이로 때리기 일쑤입니다. 그뿐입니까, 먹는  것은 또 어떻고요, 노상 푸
성귀나 먹어야  하니 배가 고프고 기운도  안 납니다. 세상을 사는  재미란 전혀 
없고 사람에게 이용만  당하니 오래 산들 무엇하겠습니까. 제발 수명을  줄여 주
십시오.」
  「으음... 정녕 네 사정이 그렇다면 20년을 감해 주마.」
  그리하여 당나귀는 10년의  수명을 받고 돌아 갔으며, 뒤를 이어  개가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
  「너도 30년의 수명을 내리노라.」
  「아이구, 하나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는 일생 동안 하는 일이라곤 실컷 뛰
어 다니며 바락바락  짖어 대는 일밖엔 없습니다. 하지만 30년씩이나  뛰어 다니
는 것은 무리입니다. 처음 10년쯤은 몰라도 그  뒤에는 기운이 지쳐서 짖지도 뛰
어 다니지도 못할테니  사람들이 얼마나 저를 푸대접하겠습니까.  그렇게 눈치밥
을 먹느니 아예 나중 20년의 목숨은 없는 것으로 해 주십시오.」
  「정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마. 너의 수명도 10년이다.」
  개가 가고 나자 원숭이가 왔다.
  「너는 30년쯤 살아도 무방하겠지? 하는 일도 없이 놀기만 하니까.」
  「원, 하나님도  그것이 겉보기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싫으나 좋으나 
언제든지 사람을 웃겨야 한다니 정말 지치는  노릇입니다. 슬퍼도 명랑한 것처럼 
해야 하니 그런 못 견딜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원컨대 저도 수명을 감해 주십
시오.」
  「그럼 너도 10년의 수명만 가져라.」
  이렇게 여러 동물들의 수명을 일일이 정해 주고 나자 이윽고 마지막으로 사람
이 왔다.
  「너의 수명도 30년이니라.」
한즉, 사람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수명을 늘려 달라고 하였다.
  「30년 가지고서야  어찌 그 많은  일들을 다 하겠습니까.  인간이란 모름지기 
짐승들과 달라서 너무나도 할 일이 많습니다. 30년  동안에 집을 짓고 밭을 가려 
아이들을 키우라니, 너무나 무리한 말씀입니다.」
  「그럼 당나귀가 남긴 것이 있으니, 20년을 더해 주지」
  「아니옵니다. 그것을 가지곤 아직도 부족합니다.」
  「음, 그럼 개가 남긴 20년도 역시 너에게 주마.」
  「아직도 조금 더 필요합니다.」
  「허허, 욕심도 많구나. 그럼 마지막으로 원숭이가  남긴 20년도 마저 주지. 그
러나 이제는 남은 것이 없다. 더 달라고 고집해도 나로서는 도리가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60년의 수명을 더 받아 90세의 수명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30년 동안은 자기  자신의 목숨이며 이때는 건강하고 즐겁게 활동하면서 
보람 있는 삶을 보내지만 30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만다.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당나귀의 목숨 20년이다. 어깨의 무거운 짐을  지고 힘
껏 일하며 부양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여자라고 해서 그  짐을 덜 지는 
것은 아니다. 따져보면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고달픈 시절이 지나면 개의 목숨 20년이  찾아온다. 한 구석에 멍하니 앉은 
채 허공을 응시하며 쓸쓸하게 지내기가 십상이다.  이것을 넘기고 나면 원숭이의 
20년이다. 머리가 둔해지고,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기가 예사요 그리하여 어린아
이들도,
  「저 할아버지 망령들었어.」
하고 놀려 대는 일도 생긴다.
  오래 산다고  꼭 좋은 일은 아니다.  오래 살자고만 든다면 언제나  짐승 같은 
삶을 겪기 마련이다.  모름지기 개같이 돈을 버는 인간이나 당나귀같이  일만 죽
도록 하며  보내는 인간이나, 원숭이같이  허송세월만 보내는 인간들은  새겨 둘 
일이다.
  그러니 사람이란 열심히 일을 해야  되고 또 돈을 벌어야만 자기의 생계를 유
지하게 되고 따라서 자기에게 딸린  가족을 거느릴 수 있는 것이니 이 이야기가 
주는 뜻은 묘한 데가 있는 것이다.

  우물 속의 사자
  인도의 우화 한 토막-
  어느 평화로운 숲에  난폭한 사자가 한 마리  나타나서 짐승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였다.
  뜻하지 않게 공포의 나날을 맞이하게 된  짐승들은,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사자의 횡포를 저지할 수  없음을 깨닫자, 모두들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의논을 한 끝에 하나의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다. 곧, 사자의 무차별 살육
행각을 막기 위해서는 사자에게 매일 먹이를 스스로 제공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
라는 것이었다.
  「스스로 먹이를 제공하자니,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짐승 중의 하나가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들끼리 제비를  뽑아서 하루에 한 마리씩 사자의 밥이  될 짐
승을 고르자는 것이야. 현재로선 그것이 피해를  최소한도로 줄이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 아닐 수 없거든.」
  이 말에, 그 어느 짐승도 더 나은 대안을 말하지 못했으므로, 짐승들은 이러한 
취지를 서면으로 적어 사자에게 전달했다.
  편지를 받은 사자는,
  「음, 백수의 대왕이신  사자님이여... 좋은 말이야. 매일 짐승을  한 마리씩 먹
이로 바치겠다구? 그것도  좋구나. 나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  스스로 제물을 
하나씩 바친다니 고마울 수밖에. 좋다, 허락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짐승들은 다시 회의를  열고 제비를 뽑아 첫번째 제
물이 될 짐승을 뽑았다.  그리고 그 첫번째 불행을 감당하게 된  것은 한 마리의 
삐쩍 마른 토끼였다.
  모든 짐승들은 그 토끼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지만, 실인즉, 오히려 자신들의 
불운을 면하게 되었음을 무한히 기쁘게 생각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토끼는 별반 슬프지도  않은 듯 천진난만하게 뛰놀고만 
있었다. 어느덧 식사 시간도 훨씬 지나 버렸다.
  「이봐라, 토끼야. 어서 사자한테로 가거라. 사자가 무척 화를 내지 않겠니?」
  다른 짐승 하나가 말했다.
  「이제 곧 갑니다. 좀 늦게 가야 사자님도 밥맛이 더 날 게 아녜요?」
  이렇게 대답하는 토끼의 모습은 여전히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토끼가 사자 앞
에 다다르자, 사자는 과연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 채로 으르렁거렸다.
  「무엄한 놈, 왜 시간을 지키지 않는 거냐?」
  「백수의 대왕이신 사자님, 제 말씀도 들어보십시오. 제가 공연히 시간을 지체
했을 까닭이 있겠사옵니까.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늦은 것이옵니다.」
  「이유라니, 무슨 이유야?」
  「예, 시간에  대느라고 급히 이곳으로 오는  도중, 길에서 대왕님의 동족이신 
다른 사자분을 만나지  않았겠습니까.그리고 그 사자분은 불문곡직하고  저를 잡
아 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대왕님의 존함을 대옵고, 완
강히 잡아먹히길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자는  대왕님의 존함을 듣고도 겁을 
내기는커녕 대왕님께 대하여 갖은 욕설을 다 퍼부으며 심한 행패를 부리는 것이
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력을 다하여 그곳에서 달아나 이 사실을  이처럼 아뢰
게 된 것이옵니다.」
  이제까지 단 한번도 권위를 의심받은 적이 없는  사자는, 이 말을 듣자 노하는 
모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떤 발칙한 놈이 그따위  겁없는 수작을! 자, 네가 앞장서라! 내가서 그  놈
을 발기발기 찢어 없애고 말테다!」
  토끼는 깡충깡충 뛰면서 깊숙이 물이 괴어 있는 우물께로 안내하였다.
  「대왕님, 그 사자는 바로 이 우물 속에 숨어 있습니다.」
  사자는 당장에 물고를 낼 기세로  우물 앞에 다가서 고개를 숙이고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로 물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저놈이로구나!」
  사자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우물 위에서 토끼는 깡충깡충 뛰며 박수를 쳤다.
  이리하여 숲은 원래대로의 평화를 되찾았던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어느 정신신경과 전문의사가 지하철을 탔는데, 그의  맞은편 좌석에 한 초췌한 
몰골의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그  사나이는 눈을 치켜뜨고  광고판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어딘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대머리군...」
   의사는 그 사나이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때  옆에 앉
은 노파가 대뜸 말참견을 했다.
  「난 대머리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다우. 우리 집안은 죄다 대머리였으니까요. 
남편은 스물 두살에 이마가 벗겨졌는데, 말하자면 청춘 대머리죠. 또 남편 형 되
는 사람도 옛날부터  토마토에 크리임을 발라 놓은 것 같았다니까요.  그런데 저 
사람은 대머리가 아니라우. 약간 이마가 준수하게 생겼을 뿐이지...」
  그러나 의사는 노파의 말에는 아랑곳 없이 그 사나이 앞으로 다가가며 청진기
를 꺼냈다.
  「선생님 지금 몹시 고민하고 있는 모양인데,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내가 보
기에는 신경쇠약 같은데, 그러나  대단한 증세는 아닌 것 같소. 선생도 아시다시
피 지금 미국은 온통 신경쇠약에 걸려  있죠. 재즈와, 히피와, 그리고 배금주의에 
인종폭동, 또한 환각제가 있고 월남전쟁... 아무튼 우린 너무 신경을 쓰고 있으니
까요. 그런데 선생께서 신경쇠약이 되도록 고민하고 있는 건 대체 뭡니까?」
  의사의 물음에 그 사나이는 턱으로 맞은편  광고판을 가리켰다. 그것은 와이샤
쓰 칼라의 광고였다.
  「상하지 않고, 줄어들지 않고, 부러지지 않고, 구겨지지 않는   칼라!」
  이러한 캐치프레이즈가 적혀 있는 광고판이었다.
  「저놈에게 홀려...」
   사나이는 나직이 신음하더니,
  「내가 웬일일까? 저 광고판의  글귀를 소리 내어 외려고 해도 말이 나오지를 
않는군요... 아까부터 몇  번이나 입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혀는 더욱 굳어질 
뿐이니 이 일을 어찌해야 좋겠소?」
  「자, 진정하십쇼. 선생은  얼마든지 소리내어 욀 수가 있습니다.  다만 선생의 
증세는 가벼운  신경쇠약증에 불과하니까요. 일종의 공포증이죠.  규칙적인 운동, 
영양분이 많고 자극성  없는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매일 여덟  시간의 수명을 
취하면 거뜬히 낫는답니다. 자, 어디 진찰 좀 해 볼까요?」
  「소용없어요! 난 이제 폐인이 되고 말았으니까...」
  「어허, 이러지 말고 내 말을 들어요! 자,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
라 말해야 합니다. 첫째는 돈, 둘째는 배짱, 셋째는 준비...」
  「첫째는 돈, 둘째는 배짱, 셋째는 준비...」
  「말을 잘하시는데 뭘 그리 고민하세요? 자,  그럼 다음은... 상하지 않고, 줄어
들지 않고, 부러지지 않고, 구겨지지 않는...」
   「상하지 않고, 줄어들...고, 부러지...구지지...아아...」
  사나이는 말하다 말고 그만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말았다.
  의사는 그리 흔하지 않은 증세라고 속으로  진단을 내리며, 사나이에게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느냐고 물었다. 사나이는 잠을 통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꿈을 꿀 
수 없었노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의사는  그가 병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 챘
다.
  그래서 의사는  먼저 자신이 시범을  해보이고 어떤 암시를  주려고 생각했다. 
암시란 것은, 정신 신경과에서는 바로 전가 보도와 같은 것이다.
  「만사는 극히 간단한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선생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
는 불안감을 가라앉히십쇼.  자 다시 한번 시작해  볼까요. 상.하.지.않.고... 줄.어.
들.지.않.고... 부.지.안...  실례, 내가 틀렸군요. 다시 시작합시다... 상하지  않고 줄
어들지 않고, 부러지지 말고... 제기랄 내가 또 틀렸군!」
  이것은 물론 암시를 위해, 저쪽의 히스테리를 이쪽으로 옮기는 방법이다.
  이렇게 몇 차례를 되풀이하는 동안 사나이의 핏기 없는 얼굴에 혈색이 감돌기 
시작했고, 맥박도  좋아졌다. 또한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땀이 배어 나오는 
것도 습도 330쯤으로 쑥 내려갔다.
  사나이는 갑자기 시장하다고 말했다.
  「증세가 나아진  증후입니다. 그럼  다시 해봅시다.  이번에는 더 좋아질테니
까...」
  의사는 자신있게 말하고  광고판의 캐치프레이즈를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
상도 하다. 이번에는 암시를 위한 것도 아닌데  자신의 혀가 굳어져서 제대로 되
지를 않았다. 의사의 이마에 땀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환자는 유쾌히 웃고 있었
다. 자못  기분이 좋은 모양, 환경부적의  증세도 사라진 모양이다.  그는 어깨를 
펴며,
  「그 정신  뭐라나 하는 증세만 없으면  간단하군요. 그냥 글을 읽는거니까요. 
자 보세요. 내  다시 읽을 테니까... 상하지 않고, 줄어들지  않고, 부러지지 않고, 
구겨지지 않고...」
  아, 드디어 이 사나이는 완쾌된 것이다.
  이 광경을 본 승객들이 주위에서 우르르 몰려들어 의사에게 악수를 청하며 그 
놀라운 의술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의사는 흐뭇했지만 자신의 증세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속으로 글귀를 연신 
뇌어 본다.
  「상하지 않고 줄지지지고...아!」
  의사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사나이를 암시  요법으로 치료하다보니 자기 자
신도 그 모양이 되고 만 것이다.
  땀에 흠뻑 젖어 지하철에서 내린 의사는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했다. 그를 칭
찬하면서 악수의 공세를 퍼붓던 승객 중 어느  한 녀석의 짓이 분명하겠지만, 그
의 시계, 주일학교 메달, 그리고 1주일치 용돈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다.
  이 정신 신경과 의사로서는 이날의 경험이 그의 개업 중 가장 큰 승리임에 틀
림없지만 반대로 급부적인 피해 또한 큰 것이었다.
  꿈 속에서 주공을 만나거든
  이조 중종때 의정부의 녹사로 있던 윤 처관은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며칠을 두
고 새벽마다 정승 박원정을 찾아가곤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청지기들은,
  「아직 기침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고 들여보내 주지를  않았다. 사실 박원정은 중종 반정의 공신으로서  당시 세
도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으므로 의정부의 녹사 벼슬을 하는 윤 처관으로서는 만
나보기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해도 저물고  배도 고파 할 수 없이 집으로 발걸음
을 돌리기를 며칠 계속한 끝에  하루는 너무나 분해서 어린 아들 효손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아비는 못나서 이런 모욕을 받거니와, 너는  부지런히 공부해서 네 아비같이 
못난 인간이 되지 말아라.」
  이 말을 듣고,  아들 효손은 부친 몰래  부친의 명함 뒤에다 뭔가 몇  줄 적어 
놓았다.
  이튿날, 부친 윤 처관은  그런 줄도 모르고 그 명함을 가지고  다시 박 정승댁
에 가서 명함을 들여 보냈다.
  (오늘도 면담이 안 되면, 이젠 단념하는 수밖에 없지.)
  이런 생각을 하며  절반쯤 체념한 채 처량한 생각에 잠겨  있노라니, 뜻밖에도 
안으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윤 처관은 희색 만면하여 사랑으로 들어가 박 정승을 뵈었다.
  「대감, 다름이 아니오라 긴히 여쭐 말씀이 있어서...」
  용건을 말하려 하니, 박 정승은 손을 흔들면서,
  「아니오, 그것보다  이것이 뉘 글씨인지,  그것부터 좀  압시다.」하고 명함을 
도로 내준다.
  「이건 제 명함 올습니다만...」
  「아니, 그 뒷면을 보시라는 말씀이외다.」
  과연 그 뒤에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상공은 대낮이 되도록 낮잠만  주무시고 계시니 문전에서 기다리던 사람의 명
함에는 털이 났소이다.  만약 꿈속에서 주공을 만나 뵈옵거든 그때  토포하고 악
발하던 수고나 물어 보시오.
  주공은 손님이 오면  만사를 제폐하고 맞아들였다고 한다. 한 번  밥먹는 동안
에 세 번씩이나  입에 들었던 밥을 상  위에 뱉으면서까지, 또 머리 한  번 감을 
동안에도 세 차례씩이나 감던 머리채를 쥐어잡고 쫓아 나와 객을 맞이했다는 위
인이었다.
  명함 뒤에 적힌 이  글을 보고 윤 처관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주공에 빗대
어서 은근히 박 정승의 거만 무례함을 비꼰  것이니, 실례도 이만저만 실례가 아
니다.
  「아, 이거...  틀림없이 제 자식놈의  필적이군요. 정말 죄송스러운  말씀 이루 
다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고 윤 처관은 엎드려 사죄를 했다.
  그러나 박 정승 역시 도량이 큰 대기였다.
  「어서, 일어나시오. 오히려 자제의  글공부를 칭찬하고 싶소이다. 자, 그래 용
건은 무엇이었지요?」
  박 정승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곧 효손을 불러  극구 칭찬을 하
고, 얼마 후에는 아주 자기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그후, 윤효손은 과거에 급
제하여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고 한다.
  물 속엔 무엇 하러 들어갔느냐?
  남계 표연말은 이조 연산군때의 이름 높은 문관이었다.
  알다시피 연산군은 정무를 돌보지 않고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주지 육림에
서 헤어나지 못하던  임금이었다. 그러한 연산군이 즐기는 것 중에  한 가지로서 
한강에 배를 띄우고  일 없이 용산까지 왕래하는 것이었다. 표연말은  언제나 이
것을 위험한 일이라고 간하곤 했으나 연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느날 인가는,
  「육로로 행차하시면 편안하고  안전하온데, 하필 이 위험한  수로를 택하십니
까?」
하고 뱃머리를 붙잡고 간곡히 말리자,
  「무엇이?」
  연산군은 단박에 불끈 화를 내고  사공을 시켜 그를 물속에 떠밀어 버리게 하
고 말았다.
  표연말은 물속에 빠져 정시없이 허우적거렸다.
  이 꼴을 유쾌하게  바라보고 있던 연산군은 한참  만에야 사공을 시켜서 그를 
건져 올렸다. 그리고는 엉뚱하게,
  「이놈, 무엇 하러 물속엔 들어갔다 왔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자신이 떠밀라 해놓고,  왜 들어갔다 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표연말은 이런 일쯤에 당황할 사람이  아니었다. 일세의 풍자가답게 태연
히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소신은 초회왕의 신하 굴원을 만나러 갔다 왔사옵니다.」
  글원이라고 하면, 초회왕에게 충간을 했으나 듣지를  않으므로 양자강 중류 멱
라수에 투신하여 자살한 충신의 본보기 같은 사람이다.
  이 말을 듣고 연산군은 자신을 그 못난 초회왕에 비한 것에 불같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무엇이라구? 정말 네가 굴원을 만났단 말이냐? 허튼소리 하면 그냥 두지 않
으리라.」
  「네, 방금 만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까지 한 구절 얻어 온 것입니다.」
  「시라구, 시는 무슨 시냐? 어디 한번 읽어 보아라.」
  「예...」
  나는 어리석은 임금을 만나 끝내  몸을 강에 던져 죽고 말았으나 너는 어질고 
밝은 임금을 만났는데 무슨 까닭으로 여기로 왔는가.
  화가 났던 연산군은 어질고 밝은 임금이라는 대목에 풀어져 그를 죽이지는 않
았다.
  그러나 표연말은 그뒤 무오사화때  김족직의 행장을 미작하였다 해서 화를 입
고 경원으로 귀양하던 도중 은계역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내시의 싸움닭
  옛날 궁중에는 내시들의  횡포가 대단했다. 무슨 일을 하건 이들을  통하지 않
으면 성사되는 법이 없었다.
  가난한 한 선비가  궁중의 내시장에게 우연한 일로  굉장한 모욕을 받고 분한 
나머지 복수를 해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으나 그 묘한 방법이 생각나질 않
았다.
  「분하다, 그러나 세상이란 힘없는 자의 세상이 아니구나.」
  선비는 한탄해 마지않으며 치욕을 속으로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갔으므로  그때의 지독히도 밉던 심정이 다소 없어지고 
말았는데 어느 날  선비는 색다른 소문을 들었다. 궁중의 내시장이  새로운 취미
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내시장이 닭싸움 구경에 취미를 붙였다구.」
  「아무렴, 싸움 구경만 아니고 직접 자기가 싸움닭을 기른다던데. 그리고 여기
저기서 도전해 오는 닭들을 상대로 싸움을 시키는 거지.」
  「오, 그럼 돈도 걸고?」
  「그렇지, 돈을  걸어도 여간한 돈을 거는게  아니야. 막대한 돈을  걸지.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리 싸움 잘하는  닭이 있어도 돈이 없어서 싸움시킬 수가 없을 
거야.」
  선비는 친구와 더불어 이렇게 말을 주고 받노라니 문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
다. 그래서 물었다.
  「여보게, 싸움 잘하는 닭이 있으면 우선 싸움을  하면 되는 것이지 돈을 먼저 
걸어야 한단 말인가?」
  「아니지. 돈을  먼저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질 경우엔 아무튼  돈을 내 
놓아야 할 것 아닌가. 공연히 밑천도 없이 대들었다가 또 망신을 당하려나.」
  친구는 은근히 선비를 비꼬았다. 전자에 당한 망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끼 이 사람. 어쨌든 돈이  있거나 말거나 이기기만 하면 될 게 아닌가. 안 
그런가?」
  「그야 물론이지. 한데, 자네  말하는 것이 필경 무슨 굉장한 싸움닭이라도 갖
고 있다는 듯하군 그래?」
  사실 선비에겐 싸움닭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내시장을 곯려 줄만한 꾀가 생
각났으므로,
  「응, 내가 남몰래 키워  온 수탉이 한마리 있는데 이놈이 굉장하거든. 하지만 
나야 세상에 닭 싸움이 있다는 걸 알기나 했나. 자네한테 처음 들었어.」
  「그래, 자네가 닭을 기르고 있었다니 정말 나도 몰랐는 걸. 선비 체면이 말이 
아닐세 그려, 허허허...」
  친구는 갔다. 그리고  이로써 선비가 훌륭한 싸움닭을 갖고 있다는  소식이 내
시장 귀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내시장이 찾아왔다.
  「당신 굉장한 닭을 가지고  있다지요? 내 닭하고 싸움을 한번 시켜 보았으면 
싶은데...」
하고 내시장은 말했다.  몹시 강압적이었다. 선비가 몇번 사양했지만 막무가내로 
한번 싸움을 시켜야겠다는 것이었다.
  선비는 하는 수 없이 응낙을 하는 체하면서 속으로 남몰래 웃었다.
  「그럼 내일이라도!」
  과연 다음날 내시장은 무지무지한 싸움닭을 데리고 왔다.
  선비는 이미 몸집 큰  수탉 한 마리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보기에는 그럴 듯
했다.
  「허허, 큰 돈이 걸려 있다는  걸 알아야 하오. 자칫 잘못되면 거지 신세가 되
오. 자, 붙읍시다.」
  내시장이 닭을 풀어 놓았으므로 선비도 닭을 풀어 놓았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싸움은 시작되기가 바쁘게 끝났다. 선비의 수탉이 
참담한 패배였다.
  「으하핫, 그 따위 형편없는  물건으로 이런 큰내기를 하다니, 당신 담보에 탄
복했소.」
하고 내시장은 상처 입은 수탉을 품에 안고 이렇게 빈정거렸다.
  「가엾은 나의 거세된  닭아, 너는 나의 그러한 치욕을 드러내지  말았어야 하
는 것을, 거세하면 이렇게도 맥이 없게 되기 마련인가...」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내시장은 한참만에야 사정이 어떻
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돈을 받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우물쭈물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멋지게 복수한 선비는,
  「이렇게 이기는 법도 있다네. 돈이야 무슨 필욘가.」
하고 자기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말없이 웃고 있었다.
  재앙이란 스스로 만든 화근
  한 장사꾼이 있었는데  그는 굉장한 구두쇠였다. 그렇게 노랭이 짓을  해서 돈
을 모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제법  먹고 마시는 데는 곤란이 없을 정도로 재산이 
불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엇에거나  돈이 드는 것이라면 치를 떨면서 싫
어했다.
  어느 날  장사꾼은 도시로 여행을  갔다. 시장 거리를  지나가려니까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코를  간지르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하고 주위를 둘러  보니 한쪽 
모퉁이에서 한 노파가 쭈그리고 앉았는데  그 앞에는 방금 구워 낸 듯한 맛있게 
보이는 빵과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장사꾼은 군침을  삼키면서 한동안 망설였다.  아무리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선뜻 돈을 내고 사먹는 법이 없는 터였다.
  그러나 이번의 빵과자는 보기만 해도 침이 저절로 넘어가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장사꾼은 큰마음 먹고 노파 앞으로 다가섰다.
  「그것 팔거요?」
  「그렇습니다.」
  「그럼 얼마요?」
하고 값을 물으니 노파가 빙긋 웃으며 값을 말하는데 먹음직스러운데 비하여 퍽 
싼 편이었다.
  그러나 장사꾼은 값을 깍고 또 깍아서 아마도 이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싼 빵
과자는 없을 그런 싼 값에  그것을 사 가지고 숙소로 돌아가 누구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고 혼자서 말끔히 먹어 치웠다.
  그 맛이  너무 좋아서 다음날에도 그  시장으로 갔다. 과연 노파는  또 빵과자 
두 개를 구워 가지고 나와 앉아 있었다.
  「어제 샀던 그 값으로 또 사겠소.」
하고 장사꾼은 그것을 두 개  사 가지고 숙소로 돌아와 어제와 마찬가지로 혼자
서 맛있게 먹어 치웠다.
  이렇게 해서 장사꾼은 그 이후로  스무 닷새 동안을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매일 
그것을 샀는데 어느 날은 여느  때와 같은 시각에 시장에 갔으나 노파가 보이지 
않았다. 옆집 가게  사람들에게 물어도 어찌된 일인지를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
다.
  이리해서 그날부터 맛있고 값싼 빵과자를  먹을 수 없게 되어 몹시 애석한 느
낌이었는데 며칠 후 우연히 다른 거리에서 그 노파의 모습을 발견했다.
  「안녕하시오? 그런데 할머니 요즘엔 왜 시장엘 나오지 않습니까?」하고 장사
꾼이 물었다. 그러나 노파는 웬일인지 대답을 안하려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빵과자를 구워서 재미를 못 보셨습니까? 그렇게 맛있는 것이라면 제가 돈을 
좀더 내어도 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내일부터라도  다시 구워다 파시겠습니까?

  「...」
  「그럼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노파는 장사꾼이 자꾸 캐어묻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정 그 이유를 알고 싶으시다면 말씀드리지요. 실은  나는 등에 아주 몹쓸 종
기가 나서 고생을  하는 사람의 병간호를 맡고 있었어요. 한데  의사 선생님께서 
<밀가루에 버터를 섞어서 잘  반죽을 해 가지고 환부에 붙이시오. 그 반죽이 고
약 구실을 해서 고름을 빨아 들일 테니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소. 나는 그대
로 했소. 아침이 되면  그것을 갈아 붙여야 했는데 새로 반죽을  해서 붙이고 나
면 헌 반죽은 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그것으로 빵과자를 두 개씩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판것이라오. 그런데  며칠 전에 환자가 죽고 말았으므로 빵과자를  만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오, 신이여!」
  장사꾼은 까무러칠 듯이 놀라서  이렇게 부르짖기도 했으나 이미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날로 장사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밤낮없이 구역
질을 하면서 끝내는 병이 들어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이런 웃지 못할 희극이 일어난 것도 모두가 그의 지나친 인색함이 원인이라고 
한다면 모름지기,
<재앙이란 스스로 만들어 놓은 화근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명심하라!>

  아내와 일을 바꾸어 보았더니
  자기 일에 불만을 느낀 어느 농부가 어느 날 생각하기를,
  「나는 매일같이 뙤약볕에 나가 곡식을 가꾸고  야채를 손질하며, 과수원도 돌
봐야 하고, 그뿐인가? 읍으로 그런 것들을  내어다 팔아야 하고 마을의 회합에도 
참석해야 하며 관청에  세금을 바치러도 가야하고 이런  모든 것을 나는 혼자서 
뼛골 빠지게 하고 있는데  마누라장이는 매일 집에 들어앉아 아이들이나 기르고 
가축이나 돌볼 뿐 과히  힘도 들이지 않고 살고 있단 말야.  공연히 나만 힘드는 
일을 할 게 아니라 한번 마누라와 일을 바꿔서 해보기로 하자!」
  이렇게 생각한 농부는 마침내  아내와 의논 끝에 그녀를 보리밭으로 내보내서 
밭일을 하게 하고 자기는 집안에서 아내의 일을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아내의 일을 수월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쉴새 없이 장난질이  심했고 청소를 해놓아도 곧 집안이 어수선해졌
다.
  빨래를 하다가도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잠깐만 등안히 해
도 강아지나 고양이가 새로  짜놓은 우유통에 고개를 처박고 할짝할짝 핥아먹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우유통을 등에 짊어지고 집 안팎으로 다니며 일을 보아야 했
던 것이다.
  대강 일이 끝난 다음 외양간에서  젖소를 데려다가 뒤뜰에 매어 놓고 그 끈의 
한 쪽을 자기 몸에 감았다.
  이렇게 하면 소가 먼곳으로 가도 곧 자기가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그는 잠
시 휴식을 즐기려고 담배를 피워 문 찰나 소가 먼곳으로 가는듯이 그의 몸을 질
질 끌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우유통을  짊어진 채 끌려가다 그만 좁은 뒷문에 걸리
고 말았다.
  급히 끈을 풀려고  했으나 끈이 꼭 동여져서 쉽사리 풀리지  않았으며, 우유는 
출렁거리는 바람에 쏟아지고 허리는 점점  졸려서 그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 없
었다.
  결사적으로 허우적거리는  아버지를 본 꼬마 아이들은  놀라서 울부짖었고 이 
소리에 달려온 개도 주인의 앞을 우왕좌왕하며 요란하게 짖어댔다.
  그러자 집오리들로 일제히 울어대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큰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때 마침 보리밭을 매던 아내가 오전 중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그녀는 오랜만에 들판에 나가  신선한 공기와 태양을 쪼이며 일을 하였으므로 
기분이 매우 상쾌해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집에 들어서자마자 뒤뜰에서  소동이 벌어진 것을 본 그녀는 허겁지겁 
달려 가서 눈을 멀뚱거리며 허우적거리는 남편을 속박에서 풀려나게 해 주었다.
  농부는 겨우 제정신을 되찾고 휴우 산숨을 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
내에게 말했다.
  「어휴 큰일날 뻔했소!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허리가  졸려서 죽었을 거
야.」
  그는 이렇게 말한 다음 멋적은 듯 웃으며,
  「여보, 내가 잘못했소! 앞으론 절대로 당신의 일을  부러워하지 않을 테요. 내
가 오늘 잠깐 겪어 보았는데  당신이 하는 집안 일이야말로 참으로 힘드는 것임
을 깨달았소. 내가 하는 밖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거든. 나는 밖에서 일하고 당
신은 집안에서 일하는 것이 당연해! 우리 서로 사이좋게 일을 해 나갑시다.」
하고 항복하는  것이었다. 이 농부의  경험이야말로 평등과 차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의 불만에만  충실했던, 그리하여 실패를 씹은 한가지 좋은  예라고 생
각된다.
  김삿갓의 놀라운 붓 끝
  김 삿갓은 어느  추운 날 오정 무렵 거지같은  형색으로 양양 근처의 어떤 큰 
마을에 이르렀다.
  (아직껏 아침조차 먹지 못했으니 배에서  천둥 번개를 치며 야단이 났구나. 옳
지, 저기 보이는  큰 기와집이 그럴 듯하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들끓고 있는 걸 
보면 필시 무슨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렷다)
  알고 보니 그  큰 기와집의 영감님이 오늘 환갑을 맞이했다는  것이었다. 그러
므로, 김 삿갓에게는 안성맞춤 격이었다. 환갑 날이라면 으레 원근의 거지떼들이 
모여들기 마련인데,  그래도 명색이  선비인 김삿갓에게는 거지에게보다야  나은 
대접이 돌아오지 않겠는가.
  과연 마당에는 거지들이 모여 앉아서 각자 바가지에 담아 내온 음식들을 퍼먹
고 있었다.
  행색이야 그 거지들과는  다를 바 없지만, 김 삿갓은 선비라는  긍지와 문장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터라 거지들의  좌석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곧장 큰 사랑
을 향해서 성큼성큼 올라가더니 급기야 마루턱에 턱 걸터앉았다.
  이것을 보고, 주인도 아닌 손님 중의 한 사람이 소리쳤다.
  「어딜 올라오는 거야. 저 아래로 썩 내려가지 못해?」
  「허어, 경사스러운 날 찾아오는  손님을 쫓아내는 법도 있소? 당신들도 손님, 
나도 손님, 피차 다투어 무엇하겠소.」
  김 삿갓은 이렇게 받아넘기고 필낭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 글 두줄을 써서, 마
침 이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알고 황급히 달려온 이집 영감의 아들에게 건
네주었다.
  사람이 사람 집에 왔으나 사람  대접을 아니하니 주인의 사람 대하는 것이 사
람답지 못하구나.
  아들은 이 글을 보고  다소 당황하는 눈치였다. 경사스러운 날, 이런 비웃음을 
받는다는 것은 아들된 입장에서 꽤 민망스러운 일이다.
  청년은 원래 마음씨가 착한지라, 불쾌한 글을  받아 보았으면서도 그런 내색을 
않고 정중히 주인으로서의 인사를 했다.
  「선비께서 객지에 나와 고생을 하시는 모양이군요.  너무 허물치 마시고 마루
로 올라 오십시오.」
  김 삿갓은 청년의 예의 바르고 인정있는 말투에  퍽 호감을 느꼈다. 글의 내용
이 좋지 않았으니 자연 그의  기분도 좋지 않았을 텐데도 이렇게 공손히 응대하
는 것을 보면, 그의 부친에 대한 효성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맙소이다.」
  김 삿갓은 짚신을 벗고 마루에 오르더니,  사랑방으로 들어가서 점잖게 좌정했
다.
  「아니, 어떻게 저런 거지가...」
  좌중이 소연해졌다. 마루에  앉히는 것만 해도 과분한 대접인데 한술  더 떠서 
김 삿갓은 한다 하는 양반들이 앉아 있는 사랑방에까지 침입한 것이다.
  「에잇, 더러워서 이거 원...」
   냄새가 나는지, 코들을 막아 쥐고 옆으로 비켜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일까. 아무래도 선비는  커녕 거지 중에  서도 거지 
대장인가 보다.」
  이렇게 소곤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김 삿갓은 너털웃음을 쳤다.
  「하하하... 오나가나 푸대접은 김 삿갓이 맡아 놓은 바라.」
  「응? 김 삿갓? 오라, 어쩐지 시건방진 문장을  쓰곤 하더니 바로 김 삿갓이었
군.」
  모두들 웅성웅성 귓속말들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의 행적에 대한 저
마다의 들은 바를 얘기하는 것이리라.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하더니, 내 이름이 나보다 먼저 와 있었군.」
  행색은 거지를  무색케 하지만, 말하는 것은  당당하고 우렁찼다. 주인 아들은 
따로 상을 봐 왔다. 그리고 손수 술을 한 잔 부어 주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문명은 벌써부터 듣고 있었소. 그 이름난  글로써 아버님의 환갑을 축하하는 
시나 한 구절 지어 주시구료.」
  「그거야 어렵지 않소. 당신 효성이 참으로  지극하구료. 한데, 형제가 몇 분이
나 되지요?」
  「예, 7형제올시다. 제가 둘째지요. 그런 것도 시 짓는 데 필요합니까?」
  「그런 셈이지요. 이렇게  후한 대접을 받고서 어찌 수연시 한  수쯤 사양하리
오.」
  김 삿갓은 붓을 들고 잠시 생각했다.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도 저마다 흥미
를 느끼고  김 삿갓의 붓끝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김 삿갓은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기 앉은 노인은 사람 같지 않고, 슬하의 칠형제는 모두 도둑일러라
  여러 가지 썼을 때 좌중은 분분히 들끓기  시작했다. 주인 영감은 담뱃대로 재
떨이를 탁 치며 저쪽으로 돌아앉아 버렸다.
  「에잇, 고얀지고.」
  그는 몹시 분한 듯 턱수염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김 삿갓에게 시를 써 달라고  청했던 둘째 아들은 얼굴빛이 창백하다 못해 시
퍼러 죽죽하게 질려 곧 졸도라도 할 지경이었다.
  장남도 노한 나머지 벼루를 차 팽개칠 기세로 펄펄 뛰면서 소리쳤다.
  「미친 녀석이로군. 처음에 다소 대접을 소홀히  했기로소니 이 경사스러운 자
리에서 무엄하게 그게 무슨 벼락 맞을 짖이냐!」
  환갑 노인의 친구들은 저마다 들고 일어났다.
  「이놈을 당장 몰아내라!」
  「그냥 보낼 수 없어. 당장 관가로 끌고 가라!」
  하지만 김 삿갓은 차분히 붓을 잡은 채 시종일관 태연자약했다.
  「진정들 하시오. 다 짓지도 않아서 왜 미리부터  야단을 치시오? 이대로 중단
해서 정말 주인 노인의 환갑을 욕되게 하실 거요?」
  이 말에 모두들 흥분을 가라 앉히고 조용해졌다.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다음 
구절이 어떻게 써지는가를 지켜 보았다.
  김 삿갓은 다시 천천히 붓끝을 이어 놀렸다.
  어느날 어느때련가, 신선이  내려 왔으니 천도 복숭아를 훔쳐서 꽤고  잘 부친
을 봉양했구나.
  과연 절묘한 붓끝 재주였다.  김 삿갓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이렇게  단 두 줄
의 글로써 사람들을 웃고 울게 할 수 있으랴.
  「자, 저리로 갑시다. 조금 아까는 공연히  몹쓸 소리를 했소이다. 널리 용서하
시오.」
  장남이 김 삿갓을 큰 환갑상  머리, 곧 주인 영감의 맞은 편에 데려가 앉혔다. 
순식간에 잔칫집의 가장 귀중한 주빈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환갑 노인도  기분이 좋아 아들 나이  또래인 김 삿갓에게 손수  잔을 권했다. 
김 삿갓은 두 손으로 잔을 받고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린 채 공손하게 마셨다.
  「김 삿갓이 오니,  잔칫집이 더욱 흥청거리는 것  같구나. 여보게, 젊은 친구, 
글재주가 어찌 그리 놀랍소.  거 듣자니 언문풍월 솜씨가 또 굉장하다는데, 그것
도 좀 들어 봅시다.」
  노인의 친구 중의 한 사람이  이렇게 부탁해 왔으므로 김 삿갓은 빙그레 웃으
며 말을 받았다.
  「이 잔치상을 보니까 문득  생각나는게 있어서 오늘은 새로운 글자 새김놀이
를 한번 해볼까 합니다. 언문풍월과 시를 한데 겹친 것이지요.」
  모두들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김 삿갓은  잔치상의 이것저것을 가리키며 중얼
거렸다.
  「천정에는 거미집이  있고, 화로에선 겻불 내가  나는데, 국수가 한사발 있고 
지령(간장)은 반종지라. 강정, 빈 사과, 대추, 복숭아가 높이 괴어져 있구나. 한데 
마당에선 버릇 없는 사냥개놈이 구린내를 피우고 지나가도다.」
  「그런 것도 언문 풍월인가?」
  「아니, 아직  좀 기다리십시오. 지금 말씀드린  것을 한문시로 읊어 보겠습니
다.」
  하늘은 멀고 멀어 가도가도 잡을  수 없고 꽃도 시들면 나비가 찾아오지 않는 
법 차가운 모래 위에 국화꽃 피어오르고 그 가지는 땅에 닿을 것처럼 늘어져 있
다.
  가난한 선비가 강가의  정자를 지나가다가 몹시 취한  몸을 소나무 아래 눕힌
다.
  어느덧 달이 기울어서 산  그림자도 옮겨 갔는데 장사꾼들은 돈벌이하러 가기
에 여념이 없구나.
  이 시는 한문을  우리 음으로 발음해서 읽을 때는  먼저 김 삿갓이 말한 잔치 
풍경이 된다.
  천장 거무집(천장의 거미집) 화로접불래(화로의 겻불대) 국수 한 사발 지영(지
령)반 종지 강정 빈 사과 대취(대추)  복송하(복숭아) 월이(개 부르는 소리) 산영
개(사냥개) 통시(뒷간) 구리래(구린내)
  이 시로 말미암아 이 날의 회갑 잔치는 뜻하지 않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김 삿갓은  사례도 톡톡히 받았다. 좋은  솜옷이며 충분한 노잣돈까지 받았다. 
그리고 며칠 편히 묵어 노독을 풀고 가라는 권유도 받았다.
  그래서, 그 집에서 며칠 유하게  되었는데, 그 며칠 동안도 거저 밥만 얻어 먹
을 김 삿갓은 아니었으므로, 그 집 7형제의 글 동무가 되어 충분히 보답을 했다. 
그러니 식구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며 떠나지 못하게 하고, 주인  영감도 겨울만
이라도 넘기로 가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그럼... 이렇게 후히 대접해 주시니 한 겨울 신세를 져 볼까요.」
  김 삿갓은 이렇게 해서 그  지긋지긋한 추위를 면하고 그 집에서 겨울을 보내
고는 얼음이 녹을 무렵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토정 이지함의 소원
  토정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에 대답을 못할 사람은 아마 드무리라.
  이 토정비결을 지으신 이가  바로 이토정이란 별호를 가지신 이지함 선생이시
다.
  선생은 이조 중종  12년에, 고려 때 학자로 이름난 목은  이색의 6대손으로 태
어났다. 그는  명문의 집에서 태어났으나  토굴 같은 집에서  한평생을 사셨다고 
전한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그릇이 컸다.
  하루는 형 지번을 따라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홍제교를 지나다 세 거
지 아이들이 쭈그리고 앉아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도포 자락을 쭉쭉 셋으로 나눠  찢은 뒤 세 아이들 어깨에 
하나씩 하나씩 걸쳐 주고 자신은 홑적삼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의 자당이 의아롭게 생각하며 물으니 토정은 천연스럽게 대답하기를,
  「그거야 제가 안 입었으니 저 대신 다른  사람이 입었겠지요. 너무 염려 마십
시오.」
  또 한가지, 선생의 인품됨을 잘 표현해 주는 일화가 있다.
  토정 선생이 조부를  장사 지내기 위해 지관에게 그 장지  자리를 의뢰했는데, 
한 곳에 머문 지관이,
  「이곳이 참 좋긴 합니다만, 이곳을 장지로  택한다면 당신의 자손들에게는 좋
지 못하겠고 다른 친척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 같군요.」
하고는 아깝다는 표정을 했다.
  「그래! 그렇다면 이곳으로 정하겠다. 자, 어서 서둘러라. 내 자손들이 화를 당
할지라도 친척들이 잘 된다면야 그야 더 바랄 것이 뭐겠느냐!」
  지관의 말은 용케 들어맞아  그의 후손들은 영달치 못했으나 이산해를 비롯한 
그의 친척들은 꽤 많이 등용되었다.
  또한 그가  대하던 사람들은 자기와는  전혀 신분이 다른  하층 계급들이었다. 
그는 언제나 남들로부터  상놈이라든지, 못난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을 
동정하고 할 수 있는 한 성의껏 도와 주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양반집에서 아침부터 아이구 나  죽네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신음 소
리가 담장 밖에까지 들렸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토정이 매를 맞고  있는 그 집 
종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아플까! 그러나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야  그 아픔을 짐작이나 하랴. 
나도 한번 맞아 그들의 심경을 이해해 보고 싶구나)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매 한번 맞아 보기가 소원이었다.
  어느날 토정은, 어느 양반집 대문을 지나다가 마침  뜰에 그 댁 안주인으로 보
이는 한 여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느닷없이 뛰어들어가 그 여인에게 수작을 걸
었다. 어느 틈에 알았는지 집 주인과 하인이  몽둥이를 쳐들고 미친 놈이라고 야
단이었다.
  한데, 주인이 그의  행색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실성한 사람 같지는  않고 하여 
행여 암행어사라도 아닌가 생각하고 정중히 대했다.
  (매맞기도 힘들군!)

  양사언의 현명한 어머니
  진사벼슬을 얻은 양희수가 전라남도 영암군수로 가게 되었을 때 이미 그의 나
이는 50이 넘어 있었다.
  영암으로 떠나는 그에겐  가족이 딸리지 않았다. 가족은 서울에 남겨둔  채 떠
난 것이다.
  본시 마음이 맑은  양희수였다. 부임하는 즉시 모든 정사를 밝고  깨끗하게 처
리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는 부임한 지 1년 만에 겨우 감사의  허락을 얻어 서울에 왔다. 그리고 돌아
가는 길에 장성이라는 어느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때는 녹음방초가 무르녹는 5월이었다.
  나지막한 산 밑에 벼랑이 있었고, 벼랑 위에 푸른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맑은 시내가 벼랑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경치를 바라보던 양군수는 시냇물에 발을 담근  채 떠날 줄을 몰랐다. 그
러다 보니 어느덧 점심 때가 되었다.
  「이리 오너라!」
  「네이.」
  「점심 때도 되었으니, 근방 어디 주막을 찾아 점심을 먹을 수 있게 하여라!」
  「네이, 거행하겠습니다.」
  그러나 한참만에 돌아온 하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아뢰었다.
  「지금은 농사에 힘쓰는 계절이오라  사람들이 모두 들에 나가고 주막까지 문
이 닫혀 있는 줄로 아옵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시장기를 느끼며 돗자리에 누웠다.
  50이 넘은 나이에 겨우 시골 군수라니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사실 벼슬길에 뜻이 있는 양군수는 아니었다.
  성품이 너무도 밝고  너그러운 양군수였다.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나 벼슬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를 짓고  바둑을 두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그
의 부모가 여러 번 과거를  보라고 권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응시하여 단번에 진
사에 뽑혔던 것이다. 그 후  그는 대과를 보지 않았다. 명산을 살피고 경치를 구
경하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가야금과 바둑으로 세월을 보내는 신선 같은 생
활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약 오백 년 전인 성종임금 때의 이 나라는 벼슬길이 질서가 바로 잡혀 
있었다.
  진사를 한 사람은 나이 30에 첫임무를 맡긴다 하여 나라에서는 본인이야 원하
건 말건 벼슬 자리를 마련하여 놓고 나서기를 권했다.
  양희수는 나가려 하지 않았으나 그를 아는 이조에서 여러 번 권해 왔다.
  나중에 친구들까지도,
  「선비가 구구하게 벼슬길을 구하는 것도 치사한  일이나, 조정에서 자네의 재
주를 알고 지성으로 부르는데 아니 가는 것도 너무 고집을 부리는 거야.」
  양희수는 출사했으나 조금도 승진을  하려 애쓰지 않았으므로 영암 군수가 되
었을 때는 그의 나이 50이 넘어 머리가 희끗희끗할 때였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 내 본시 능관 아니면 조그만  고을의 수령이
나 지내면서, 여가에 산천 경개나 구경하려던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시냇가에 있는 조그만 초가집에서  열 대여섯이나 
되어 보이는 처녀가 양군수 곁으로 다가와서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시는 행차신지 모르오나  시골에 주막이 없어 점심을 낭패하고 계
신 듯하오니 저희집이 누추하오나 잠시 쉬었다 가시기 바랍니다.」
  옥을 굴리는 듯한 고운 목소리였다. 누워 있는  양군수는 이 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일어나 앉았다.
  씻지 않은 복숭아처럼  아직 솜털을 벗지 못한 애송이 처녀였다.  그러나 새까
맣게 빛나는 눈이며 오똑 선 콧날이 인상적이었다.
  기특하게 생각한 양군수는  일어나서 처녀를 따라갔다. 앞서서  인도하는 처녀
의 몽당치마가 바람결에 펄럭거렸다.
  처녀가 안내하는 집으로 일행이 들어서니 방  안은 겉보기와 달랐다. 깨끗하게 
청소하여 마루와 방에는  티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벽에는 거문고까지  걸려 있
었다.
  일행에게 앉기를 권한 다음 처녀가 공손하게 말했다.
  「어른의 진지상은 저희집에서 내겠습니다만  넉넉지 못한 가세이옵니다. 일행
의 쌀을 내려주십시오.」
  똑똑하고 분별 있는 말이었다. 양군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얼마 안 있어 처녀는 밥상을 군수 앞에 올렸다.  산골에 별 반찬이 있을 리 없
었다. 음식들이 모두 소담하고 깨끗하여 먹음직스러웠다.
  처녀는 다시 하인들을 부엌으로 청해서 따로 대접하였는데 윗사람과 아랫사람
을 대하는 품이 절도가 있었다.
  밥상을 물린 다음 양군수가 처녀를 불렀다.
  「네 나이 몇 살이며, 아버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네, 저 나이는 열여섯이옵고, 아비는 본읍 포교인데 부모님은 농사철이라 밭
을 매러 나갔습니다.」
  「음, 어린 처녀가 참으로 기특하고 똑똑하다.」
  양군수는 진심으로 치하했다.
  「황송하오나, 행차는 어디서 오시어 어디로 가는 것이오니까?」
  앳된 처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양군수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음, 궁금한 일을 주저치 않고 또박또박 묻는  것을 보니 몹시 영리하고 똑똑
한 처녀로다. 나는 영암군수다. 우리 행차가  너에게 뜻밖의 신세를 지게 했구나.

  그는 하인을 시켜 후하게 밥값을 내리게 했다.
  이 말에 처녀는 깜짝 놀랐다.
  「사람의 집에서 손님을  대접함은 예절이옵고, 저희 집은 주막이 아니옵니다. 
예를 아시는 사또어른께서 어찌 저를 욕되게 대하시려 하십니까?」
  그녀의 영특함을 몸으로 느낄수록 그의 마음은  기뻤다. 그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양군수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그러하냐.」
  그는 손에 쥔 부채에서  문득 한중고향을 떼고, 또 푸르고 붉은  두 개의 부채
를 내주면서,
  「이것은 밥값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주는 신물이니 사양 말고 받으라.」
했다. 신물이니 받으라는 양군수의 말에 처녀는 잠시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곧 방 안으로 들어가서  붉은 보자기를 가지고 나오더니 소반 위에 펼
쳐놓았다. 
  「저 같은 사람에게 어른께서  내리는 신물이오니 어찌 손으로 받아 들이겠습
니까?」
하며 붉은 보자기에 신물을 놓아주길 기다렸다.
  군수가 보자기에  물건을 놓아주자, 머리를  숙이고 있던 처녀는  그것을 장롱 
속에 넣고 다시 나왔다.
  일행이 그  길로 떠날 때, 처녀는  사립문 밖에서 일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영암에 당도한 일행은 며칠을 두고 처녀의 영특함을 칭찬하여 마지 많았다.
  이런 일이 있은 지도 이럭저럭 3년이 지났다.
  어느날 관문을 지키던 포교가 양군수에게 들어와 아뢰었다.
  「장성 어느 초네 산다는 이씨라는 포교가 사또를 뵙겠다고 합니다.」
  군수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을 보았다. 전혀 안면이 없는 포교였다.
  「네가 장성 사는 포교로 나를 찾았다니 무슨 공사가 있어 왔는고?」
  「황송합니다.」
  부복했던 포교가 머리를 들었다.
  구수하게 생긴 50이 가까운 얼굴이었으나, 이마엔 진땀이 맺혀 있었다.
  「공사가 아니올시다.」
  「그럼 무슨 연유로 왔는지 말을 해라.」
  포교가 다시 허리를 굽혔다.
  「소인은 장성 사는 포교이온데, 3년 전  어른께서 서울 다녀오시는 길에 개천
가 조그마한 계집이 하나 있는 집에서 점심을 하신 일이 계시옵니까?」
  양군수는 영특한 처녀 때문에 그때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암 있구말구, 네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처자가  하도 영특했던 것을 잊지 않
고 있느니라.」
  구수하게 생긴 포교는 이 말에 용기를 얻는 듯했다.
  「그때 진지를 접대한 계집이 바로 소인의 딸이올시다.」
  「아, 그렇던가. 참  얌전하고 영특한 처자이더라. 그런데 지금쯤  출가할 나이
가 되었을걸?」
  양군수는 그 애가 이미 아기라도 낳았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찾아
온 포교의 말은 뜻밖이었다.
  「네, 나이가  차서 금년에 열 아홉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출가시키려 했던 
딸년의 말이, 자기는  영암사또 어른의 신물을 받은 사람이라서 다른  데로 시집
갈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소생이 그것이 사실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이렇게 온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양군수는 처음엔 크게  놀랐다. 그러나 곧 낯빛을  고치고 크게 
웃었다.
  「핫핫핫, 그때 우리  행차를 접대하는 너의 딸이 하도 영특하고  갸륵해서 사
랑스러운 마을을 금할 수 없었느니라. 그래서 상을 내리려했더니, 예의에 벗어난
다고 안받으려 했었지. 더욱 사랑스러운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내가 아끼고 아끼
던 부채의 한중고향과 색부채를 준 것이다. 그래도  아니 받을까 해서 내가 주는 
신물이라 한 마디 한  것이다. 내 나이 이제 50이 넘어  백발이 희끗희끗한 터인
데 내가 그 묘령의 처녀를 데려온다면 그 처녀의 청춘이 아깝지 아니하냐?」
  양군수의 양심바른 말에 처녀의 아버지는 동감인 듯 머리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는 돌아가는  길로 딸에게 일러라. 내가 신물이라 말하면서  준 것
은 무엇을  약속하자는 신물이 아니고  단지 정표로 내린  특상이었으니, 그러지 
말고 어서 시집가서 잘  살기나 하라고.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내 진
정한 마음이니라.」
  「예.」
  포교는 양군수의 말을 듣고 돌아갔다.
  그러나 나흘 만에 돌아갔던 포교가 또 찾아왔다.
  「소인이 돌아가는  길로 어른의 말씀을 딸애에게  잘 전했사오나, 딸의 말이, 
농담이건 진담이건 그런 것은 어떻든  여자의 도리에 남의 신물을 일단 받은 이
상엔 다른 데로 시집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에 양군수는 당황했다. 처녀의 행동이  사랑스럽게 귀엽게 생각되어서 무
심코 내뱉은 「신물」이란 한 마디의 말이 이런 결과를 빚으리라고는 짐작도 못
한 일이었다. 하긴 정표라든가 특상이라고 말하면서  주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
한 양군수에게도 잘못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이 50이 넘은  사또가 솜털도 
못벗은 어린 계집에게 「신물」이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꼭 남녀간의 무슨 약속
으로만 생각해야 될 것인가! 젊은 남녀간에 주고받은  물건이라면 그런 뜻으로도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긴 하다. 그런데 포교가 하는 말은 갈수록 태산이 있다.
  「어른께서 만약 허락을  안하신다면 죽어버리겠다고 어제부터 식음을 전폐하
고 누워 있습니다. 그러니 답답한 마음을 어쩔  수 없어 이렇게 찾아뵈온 것입니
다.」
  부귀와 영화에 담담했던 양군수는 여자관계도 지극히 담담했다.
  40이 넘어 상처했으나 재취도 않고 소실조차 두지 않았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한 것이 잘못이다. 어리건  말건 네 딸은 여자임이 분명
하다. 또 늙었다고는 해도  이렇게 말하는 나도 남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것을 
생각지도 않고 신물이라  했으니 나의 부주의한 실수라 하겠다. 내가  그 실수에 
대한 책임으로 시집갈 때의 혼수는 모두 댈 것인즉 그리 알고 다시 타일러 시집
보내도록 해라.」
  도리어 양군수 편에서 빌다시피 하여 포교를 내려보냈다.
  그러나 포교는 수일  후에 또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입을 삐죽거
리며 울기까지 했다.
  「소인의 딸이 말하기를 어른께서  허락을 아니하시면 죽는 길밖에 없다고 합
니다. 어른의 말을 전해 듣자 누가 혼수를  얻으려고 어른에게 떼를 쓰는 것이냐
고 더욱 울면서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지가 5,6일이나 되었습니다. 오늘이 지
나면 가엾은 딸이 그만 저승길에 들어설 것입니다.」
  순하디 순하게 생긴 얼굴엔 눈물이 비오듯 했다.
  이 정경을 본  양군수도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성격은  깔끔했으나 본시 
인정에 약한 양군수였다.  눈을 지긋이 감고 한참 생각하던 양군수는  입을 열었
다.
  「정말 낭패한 일이로다. 곧 택일을 잡도록 해라.」
  드디어 택일한 날이 되었다. 양군수는 할 수  없이 처녀를 소실로 삼아 관사에 
기거케 했으나,  처음 오는 날 한  번 처녀의 방에 들어가  오느라고 수고했다는 
한 마디 말을 한 후로는 전과 같이 동헌에서 혼자 지냈다.
  양군수라고 여자의 재미를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애송이였던 처녀
는 그동안에 꽃같이 피어올라 뛰어나게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양군수의 성미는 만사에 지나치게 청렴하였다. 백발이  희끗희끗한 늙은 것이 주
착 없이 젊은 소실방에 드나든다는 말이 날까  조심을 했던 것이다. 군수의 성미
에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은 일이었다.
  이렇게 반 년이 지났으나, 장성에서 온 소실은 군수가 자기를 돌보건 말건, 얼
굴 한 번 찌푸리는 법이 없었다. 조석으로  양군수의 식사와 의복을 정성껏 받들
고 알뜰하게 살림을 보살펴 갔다.
  소실이 시집온 지도 1년이 지났다.
  본시 벼슬길에 뜻이 없었던  양군수는 몸이 늙어 공무를 처리하기가 괴롭다는 
이유를 들어 군수자리를 내놓았다.
  그리고 만류하는 감사와 군민들의 청을 뿌리치고 서울로 왔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안채 별당을  수리해서 소실을 들이고 그 전과 같이 시를 
읊고 가야금을 뜯으며 한적하게 세월을 보냈다.
  서울 온 지도 몇 달이 지난 어느날이었다.
  조상의 산소를 돌보느라 며칠  동안 집을 비웠던 양희수가 돌아와보니 그동안
에 집안  가구를 옮겨놓았는지, 모든  살림이 제자리에 놓이고  집안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안방에 앉아 점심상을 받으니 깨끗한 그릇에 담긴 조촐한 음식들이 모두 감칠
맛이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혼자 궁금히  여기던 양군수는 생각하다  못해 며느리를 
불러들였다.
  「며늘아 듣거라! 그동안 조석 끼니에 고기반찬이 떠나지  않았던 것은 청관을 
지낸 나에게 나왔던 약간의 관행비 덕분이었는데 이제 그것도 없어진 지 오래되
었거늘 그런데도 네가 만든 음식들은 하나같이 구미에 맞으니 모든 일이 뜻밖이
고 신통하구나.」
  상 앞에서 두 손을 맞쥐고 공손하게 듣던 맏며느리가 공손히 아뢰었다.
  「그런 것이  아니올시다. 제 솜씨야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사옵니다. 다만 
집안 일을 알뜰히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서모님의 덕인 줄 아뢰옵니다.」
  「...」
  그제서야 양군수는 소실의 일을 생각했다.
  며느리의 말은 계속되었다.
  「서모께서는 서울 오신  후 낮에는 절구질을 하고  밤이면 무명을 짜고 하여 
돈을 벌어서 살림을  넉넉하게 꾸려나가고 계십니다. 물론 이것은 여자가  할 일
이라 하겠사오나, 그  외에 하인을 부리는 일에도 법도가 있어  은혜를 내리시는
가 하면, 호되게  꾸짖기도 하시는 품이 가히 남자로서도 따라가기  힘든 분이라 
느꼈사옵니다. 서모님이야말로  보통 여자분이  아니오라 하늘이 저희집에  복을 
내리시려고 보내신 분이옵니다.」
  (그랬던가?)
  양군수는 그제서야 번쩍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하냐. 이제 너는 나가 보아라.」
  사랑채에 나온 양군수는 곰곰이 소실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을에 있을 때는 관속들의 눈에  늙은 것이 어린 여자와 접근하는 것이 채신
머리 없어 보일까봐 조심했고 집에 와서는 며느리 보기에 머리털이 흰 시아비가 
젊은 소실방에 드나드는 것이 안되어서 찾지 못했던 것이다.
  소실이 손수 집안 일을 법도  있게 꾸려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오늘 처음 듣
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놀라웠고 미안했다. 그러나 그보다  그는 며느리가 소실을 추켜세우
며 칭찬하는 말이 고마웠다.
  며느리는 소실을 돌보지 않고 있는 자기를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은근히 원망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꼭 그렇게 들리는 말투라 생각했다.
  이제 꺼릴 것이  없다는 마음이 생겼다. 양군수는 갑자기 소실이  귀엽고 사랑
스러워졌다. 오늘은  처음으로 소실을 찾아보리라 생각했다.  그 젊고 젊은 것이 
아까운 청춘을  말없이 일만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 하였으랴.  기특하고 영특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밤이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던 양군수다.  한편 별당에 거처하고 있는 
소실은 겉보기에는 늘 웃는 낯이었으나, 그도 여자였고, 더구나 불타는 청춘이었
다. 어찌 잠시나마 마음이 편했으랴. 남몰래  눈물 지으며 살았고, 땅이 꺼지도록 
한숨 쉬며 세월을 보냈다.
  그날밤은 달도 유난히  밝았다. 깜박이는 등잔 밑에서 바느질을 하다  말고 활
짝 창문을 열어 젖혔다.
  이른 봄 밤이었다. 춥기는 했으나 노릇노릇한  개나리꽃이 움트고 있는 시절이
었다. 쟁반 같은 달이  오동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고, 달빛에 비치는 나뭇가지들
도 잠이 든 듯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아.」
  저도 모르게 또  한숨이 나왔다. 고운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심회를 참을 수 
없던 소실이 마당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뜰 앞에서 인기척이 났다.
  깜짝 놀란 그녀가 도로 주저앉아서 내다보니 지팡이를 짚고 정자관을 쓴 그림
자가 달빛 아래에  불쑥 나타났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남편이라고 부
르기엔 너무도 거리가 멀었으나 그러나 분명히 남편인 양희수의 모습이었다.
  아마 집안을  돌아보시는 것이려니 했다.  오늘밤은 달도 밝으니  산책 삼아서 
그러시겠지 했다. 그러나 영감은  자기 앞에 나타났던 것이었다. 전에 없었던 일
이었다. 아니 기적 같은 일이었다.
  왈칵 달려가서 안기고 싶었다.
  이런 마음을 억제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 똑바로 별당 앞으로  걸어온 영감이 
소실댁을 쳐다보며 웃는 것이었다. 꿈 같은 일이었다.
  소실댁은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밤도 깊으온데 어른께서 어인 일이시옵니까?」
  먼저 절하고 난 뒤 두 손 모으며 공손히 말했다.
  「음, 그런데 임자는 왜 여태 자지 않고 있었나?」
  「여편네가 어찌  일찍 잠을 자겠습니까.  바느질을 하다가 하도  달이 밝기에 
나왔습니다.」
  「그러하냐.」
  영감은 씁쓸하게 웃었다.
  「연로하신 터에 추위에 촉상하시기 쉽사오니 일찍 주무시지요.」
  소실댁은 생각과는 다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니다. 오늘은 네가 보고 싶어 찾아온 것이다.」
  「...」
  등잔불이 돋우어졌다. 곧 그 조용한 소실댁의  자태를 바라다보던 양희수는 가
슴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늦다면 너무도 늦었던 이들의 사랑이었다.
  이날부터 양희수는 매일 별당에서 잤다. 그리고  삼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옥동자 둘이 태어났다.
  곱게 키운 두 아이는 자랄수록 얼굴이 단정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어느날 장성댁이 영감에게 말을 건넸다.
  「여보, 제 뜻은 본시  늙도록 큰댁에서 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생
겨나 자라고 보니, 저가 속에 묻힌 이 집에서  아이들이 보고 배울 것이 없을 뿐
더러 집안도 복잡해서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 듯합니다. 그래서 자하문  밖 한적
한 곳에 집을 짓고 나가 살까 합니다.」
  영감은 소실의 말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 말이 합당하나 집을 지을 만한 재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허락만 해주신다면 그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이들이 생길 때부터 
지금까지 8, 9년 동안  푼푼이 모아둔 것이 이제는 집 하나쯤  넉넉히 지을 만합
니다.」
  이튿날 소실은 자하골에 경치 좋은 조용한 곳을  찾아 집을 짓기 시작했다. 큰 
집을 짓는 것이 아니고 그저 얌전하게 꾸미는 집이었지만 그녀는 사랑채와 대문 
꾸미는 데엔 유별나게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특히  대문을 크고 높게 하여 길가
는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그때의 임금은 성종이었다.
  임금은 틈만 있으면 자하골로 산책을 즐기던 분이었다.
  어느해 봄 자하골에 나와 꽃을 구경하고  돌아가시던 임금이 소나기를 만났다. 
두루 살펴도 근처에 집 한 채 없었다.  모시던 종관들이 당황하여 뛰어다니며 찾
아보니 깨끗하게 지은 솟을대문집이 눈에 띄었다.  찾아가서 안을 살펴보니 깨끗
한 품이 오랫동안이라도 쉴 만했다.
  「저 집은 비록 민가이오나 깨끗하여 잠시 쉴 만하오니 그곳으로 가심이 어떠
하올지...」
  성종이 종관을 따라 들어가보니 뜰에는 희고 붉은 꽃이 만발하여 꽃향기가 코
를 찔렀고 집 뒤곁으로 보이는 바위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비를 맞아 깨끗하게 
씻겨져 산뜻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말끔히 정리된 조그마한 책상 위에는 황정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벽에는 
거문고가 걸려 있었다.
  두루 살피던 임금은 별천지에 온 것 같았다.
  「내가 비를 피하려다 신선이 사는 동부에 들어온  것 같구나. 이 집이 누구의 
집인고?」
  「...」
  종관들은 미처 이것을 알아두지  못했다.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열살과 여덟 
살쯤으로 보이는 두 아이가 도포에 복건을 쓰고 나와 절했다.
  「전 영암군수 신 양희수의 산장으로 아뢰오.」
  큰 아이가 아뢰는 말이었다.
  「호, 그러하냐. 신통한 아이들이구나, 무관히 허리를 펴라!」
  임금은 일어선 아이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모두 맑고 깨끗한 얼굴들이었다.
  「너는 금년에 몇 살인고?」
  「네이, 저는 열한 살이올시다.」
  「그럼 작은 아이는?」
  「네이, 여덟 살이 되옵니다.」
  임금은 웃으며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인고?」
  두 아이가 모두 부복했다.
  「신 양희수의 아들이올시다.」
  「글은 배웠느냐?」
  「사서는 배우고 삼경은 아니 배웠습니다.」
  「그러하냐. 그 나이에 사서를 읽었다는 것만도 대견하다. 너희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똑똑한 아이들이 못견디게 귀여우셨던지  임금의 용안은 가득 차 웃음으로 활
짝 피었다.
  「너희들, 운을 내어줄 것인즉 시를 지어보겠느냐?」
  임금이 운을 내어주자  토실토실한 손에 붓을 거머쥔  형제가 글을 지어 올렸
다. 시는 동심에 차 있었고 글씨에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글 끝에는,
  동자 신 양사언 시제진이라 써 있었다.
  임금이 탄복해서 말했다.
  「선풍도골을 지닌  아이들이오. 내가 오늘  이런 아이들을 만난  것은 하늘이 
주시는 상서로운 연고로다.」
  이때 한끝에 모여 있던 종신들이 수군거렸다.
  「왜들 그러고 있느냐?」
  성종이 까닭을 묻자 한 종신이 허리를 굽혔다.
  「이 집에서 찬을 올리고 싶사오나 감히 황송하다 하옵니다.」
  임금님은 다시 활짝 웃었다.
  「허허... 짐이 신선동부에 들어가서 옥액금장을 맛보려나 보다.」
  찬이 올려졌다. 차려올린 음식은 불과 대 여섯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먹음직했고, 구미에 맞았다. 종신들은 따로 접대되었다.
  졸지에, 구미에 맞는 음식을 보게 된 임금은  더욱 탄복하여 후하게 상을 내렸
다. 그리고 아기들을  잠시 궁중에 데리고 가겠다는 뜻을 전하고  궁중에 데려다
가 태자와 대면시켰다.
  「내가 이번 길에 두 신동을 얻었다. 너의 보필이 될 것인즉 잘 살피어라!」
  그 길로 임금은 아이들에게 춘방가어사를 내리고  동궁에 무시로 출입케 했다. 
한편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되어 소실은 자하골 집을 팔고 큰 집으로 돌아
왔는데 그것은 마치 이러한 아들들의 출세의 길을 기대하거나 예기한 행동 같았
다.
  소실의 맏아들 사언의 나이 열다섯 되는 해 양군수는 세상을 떠났다.
  소실은 하늘이 무너진 듯이 슬퍼했다.
  맏상제가 서모에게 장사 의논을 해도,
  「내가 첩으로서 무슨 말을 하겠소. 그저 좋도록 처리하시오.」
하고 울기만 했다.
  성복날이 되어 종족이 다 모인  것을 보자 울고만 있던 소실이 정색하고 나섰
다.
  영감이 돌아간 것도  슬펐지만 그런 소실 태생인  두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니 
더욱 슬퍼지는 그녀의 마음이었다.
  「지금 종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내가 상제님께 한 가지 청이 있으니 허락 하
시겠소?」
  적자인 맏상제는 놀랐다.
  「아니, 서모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현숙하시고 우리  집안에 은혜를 내려
주신 서모님의 말씀을 안 듣고 누구 말을 듣겠습니까?」
  소실은 다시 종족들에게 물었다.
  「종중에서도 상제의 말과 같이 허락하시겠소?」
  본시 현숙한 소실댁을 존경해 오던 종중이었다. 허락 여부가 없었다.
  승낙이 떨어지자 소실댁은 또 한 번 섧게  울었다. 그러나 비오듯 하는 눈물을 
닦고 난 소실댁은 목메인 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제가 이 댁에  들어와서 공을 세운 것은 별로 없으나마,  돌아가신 영감님의 
덕을 흐린 일은 없었고, 상제님도 나를 극진하게  대해 주어서 유감된 일이 없었
소. 또 나의 소생으로 자식  둘이 있는데 과히 미욱한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
리나라 습관으로 소실태생은 천생이라 하여 등용을 아니합니다.」
  「...」
  「그러고 보면 제아무리 이태백의 문장과 공명 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은들 무
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상제님이 그 아우를 친동생같이 여기고 있는  것을 모르
고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다음에 제가 죽고 나면  서모복을 입고 장사 
지낼 것이니 상주님이 아무리 싸고 돌아도 그 애들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아이들
이 될 것이오. 참으로 절통한 일이니 내가 죽을  때 그런 줄 알고서는 차마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까?」
   말하는 소실댁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였고 듣고 있던 종족들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울며 말하던 소실댁이 엉뚱한 말을 했다.
  「그러나 별도리가 없는  세상입니다. 단지 방법이 한 가지 있다면  지금 영감
의 상중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죽으면 우물쭈물 넘기게 되어 다들 두 아이가 
서모출생인 줄 모르게 될 것입니다.」
  머리 숙이고 듣기만  하던 종족들이 놀라 소실댁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머
리 푼 소실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계속했다.
  「여러분은 죽는 사람의 정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땅속에서라도 한을 품지 않
게 해주시오.」
  상제를 비롯한 종족들이 모두 놀랐다.
  상제가 급히 일어나서 서모를 붙잡았다.
  「서모님! 서모님, 우리 집안의 은인이시며 없어서는  아니되실 분입니다. 우리
가 좋은 방법을 생각할 것이니 서모님은 참아주십시오.」
  「...」
  상제와 종족들이 자기 뜻대로 일을 처리하리라 믿은 소실댁은 이제 조금은 안
심한 낯빛이었다.
  한참 동안 영감의  영구 앞에 엎드려 울던  소실댁은 남몰래 간직했던 비수를 
품속에서 꺼냈다. 그리고 똑바로 제 목을 찔렀다.
  너무도 짧은 시간에 간 여인의 목숨이었다.  상주는 본시 서모를 존경하기까지 
하던 터였다.
  「우리 서모님은 현숙하심이  옛날의 여사에 타당했다. 허나  생전에 소실대접
을 받았다. 그런 속에서도  집안을 붙들어 일으키신 여장부이시다. 내가 어찌 서
모님의 은혜를 잊으며, 뜻을 저버리겠는가.」
  곧 그는 종족들과 합의한 후 서자 형제들에게  상복을 입혔다. 장사가 끝난 후 
또 의논하기를 사언형제르 정실태생으로 하여 족보에 올리자고 했다.
  「그 현숙하신 분이  자결하며 부탁하신 뜻을 우리가 어찌 저버릴  수 있으랴.

  종족은 입을 모아 찬성했다.
  소실댁의 맏아들 양사언은 그 후 안변부사까지  지내고,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
다.

  금패령
  이조중엽, 다 떨어진 옷에 낡은 관을 쓴  나그네가 휘적휘적 함경도 풍산의 험
준한 재를 넘고 있었다.
  그가 넘고 있는 재는  함경도에서도 이름 있는 험산으로 누구든지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그만 지쳐 쓰러진다는 곳이었다. 이 나그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있는 힘을 다하여 고갯마루를 넘기는 했으나 허기진 몸이 지칠대로 지쳐서 풀
밭에 푹 쓰러진 채 깊은 잠에 빠졌다.
  때는 따스한 봄이었다.
  바구니를 들고 나물캐러 나왔던 여자들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발견했다.
  「에그머니!」
  앞섰던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 왜 그래?」
  「저것 좀 봐요! 사람이 죽었어!」
  「어디, 어디.」
  여자들이 모여들었다.
  과연, 산기슭에 한 나그네가 쓰러져 죽은 듯 넘어져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인줄만 알고 멀찌감치서 구경만  하고 있었
다.
  이때 한 여인이 나섰다.
  「우리 이럴것이 아니라, 다같이  가까이 가서 누군지 알아 보자구. 혹시 우리 
동네 사람인지도 모를 일 아냐.」
하고 말했다.
  「그래, 다같이 가봐.」
  여자들이 조심스럽게 한발한발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죽은 줄 알았던 나그네는 가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죽지 않았다.」
  「숨을 쉬는 걸.」
  「어떡하지?」
  「글쎄--」
  이러고 있을 때, 한 여자가 쓰러져 있는 나그네를 만져 보더니,
  「지쳐 쓰러진 사람인데 어떻게 살려내지?」
  하고 말하자,
  「거지가 아닐까?」
  「가엾어라!」
하며 혀를 찼으나,  여자들끼리라서 어떻게하면 좋을지를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
다.
  그중에는 거지가 쓰러져  죽은것이 대수로운 일이냐고, 돌아서는  여자도 있었
으나, 인정이 두텁기로 소문난 박서방댁은 그럴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쓰러진 사람의 가슴을 헤치고 살피더니 결심한 듯 자기의 젖가슴을 
헤치고 통통 불은 젓을 꺼내어 나그네의 입에 넣고 짜는 것이었다.
  「어머나!」
  「아이 망측해라!」
  이것을 보던 여자들이 저마다 얼굴을 가렸다.
  「아이 박서방댁이 어쩔려구 저러지.」
  「글쎄, 박서방이 알면 뭐라고 할까.」
  한참동안 빈정거리던 여자들이 자기네끼리  쑥덕공론을 펴더니, 박서방댁을 남
겨 놓고 뿔뿔이 사라졌는데 그 중 몇 명은 곧장 마을로 내려갔다.
  허나 박서방댁은 나그네를  살려 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한쪽 젖을  다 짜서 
입에 넣어 주고는,  또 한쪽 젖을 끄집어내서  물리고 열심히 짜 넣었다. 그리고 
나서 몸을 주물러  주는가 하면, 찬물을 떠다가  흘려넣는 등, 갖은 정성을 다했
다.
  드디어 나그네가 부시시 눈을 떴다.
  「어머나! 눈을 뜨셨네!」
  박서방댁은 기쁜 듯 말했다.
  나그네는 한참 동안 몸을 꿈틀거리고 나더니, 제  정신이 나는 듯 자기를 간호
하는 박서방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댁은 누구신데 이처럼  친절을 베풀어 주십니까? 감사합니다. 댁  같은 인정 
있는 분이 안 계셨으면 이 산골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나그네의 말은 정중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지나가다가 쓰러진 나그네를 보고 간호한 것인데, 그
대로 지나치는 것이 어찌 사람의 도리라 하겠습니까.」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아직 앞가슴을 벌린 채로 있는 자기의 채신이 부
끄러워져서 앞가슴을 여미며 뒷걸음질을 쳤다.
  나그네는 거듭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정말 오늘의 은혜는 평생을 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런 욕을  보시게 되셨습니까?

  박서방댁의 물음에 나그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산고개를 넘어오는데  시장해서 허기졌으나, 어디 주막을 찾아 볼  수 없
었던 것이오. 아무 요기도  못하고 산마루를 넘으니, 그만 기진해서 정신없이 쓰
러지고 말았던 것이오. 아마 댁을 만나지 못하고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대로 죽
고 말았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나그네의 인품은 차림새와는 달리 몹시 점잖고 의젓했다.
  나그네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참, 큰일날뻔했습니다. 그런데 우선 시장하실 테니 요기를 하셔야 하지 않겠
습니까. 저와 함께 동네로 내려 갑시다. 우선 저희집에 들러서 요기를 하셔야 할 
테니...」
  박서방댁의 말에 나그네는 더욱 감격했다.
  「참 무어라고 고마운 인사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발을 옮겨 놓으려 했다.
  허나 지금껏 지쳐  쓰러져 있었던 나그네가 어떻게  온전하게 걸을 수가 있으
랴. 금시 휘청하고 쓰러지려 했다.
  「애그머니.」
  박서방댁은 기겁을 하고  곁에 가서 부축을 했다. 그리고 부착한  채로 동네를 
향해 걸어 내려갔다.
  한편 박서방댁을 버려두고, 먼저 동네로 내려간  여자들의 가벼운 입은 그대로 
있지 않았다.
  박서방댁이 낯선 거지의 입에  선뜻 젖꼭지를 물렸다는 소문이 조그만 동네에 
쫙 퍼졌다.
  「애그머니, 저 일을 어째.」
  「망측해라. 아니 박서방이 알면 어떡하려고 그런 짓을 한담.」
  허나 박서방이 소문을 듣기 전에  이 일을 미리 박서방에게 일러 바친 여자가 
있었다.
  「아니 뭐! 그년이!」
  박서방의 눈에서 금세 불이 났다.
  그는 미친사람처럼 산으로 달려갔다.
  얼마 안가서 산에서 내려오는 아내와 부축당한 나그네를 만났다.
  박서방은 대뜸 아내에게 달려들었다.
  「이 화냥년아!」
  불이 나도록 따귀를 때렸다.
  「아니 당신 왜 이러세요?」
  박서방댁이 뺨을 감싸며 물었다.
  「뭐야 이년! 환한 대낮에 화냥질을 하고도 왜 때리는지 모르겠단 말이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박서방은 아내를 발로 차고 때렸다.
  별안간 변을 당한 나그네는 어쩔 줄을 몰랐다.
  「저, 어르신네 잠깐만 고정하시고, 제 이야기를 좀 들어 보세요.」
  나그네는 박서방을 붙들고  만류하려 했다. 그러자 박서방은  나그네에게 달려
들었다.
  「뭐야! 이 뻔뻔한 놈아! 대관절 너는 누군데 대낮에 남의 계집을 끼고 다니는 
게냐!」
  박서방은 나그네의 멱살을 움켜잡더니, 따귀를 후려갈겼다. 걸을 힘도 없이 부
축받았던 나그네는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박서방댁은 나그네를 부축하여 일의켰다.
  「여보! 이분에게 아무 죄도 없어요. 때리려거든 저를 때리세요!」
  끝내 나그네를 감싸주는 아내의 태도에 박서방은 더욱 화가 났다.
박서방이 다시 아내에게 달려들 때,
  「아, 여보세요. 잠깐만 진정하시고, 내 말을 들으시오.」
하며, 쓰러졌던 나그네가 박서방에게 매달렸다.
  「뭣이! 이놈아 뒈지고 싶은 모양이구나. 에잇!」
  농부의 억센 주먹에 힘 없는 나그네는 저만치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디, 어디. 나그네의 행색이 거지 같더라며.」
  우르르 모여들어 구경하는 것이었으나, 누구하나 나서서  뜯어 말리려 하지 않
았다.
  아내의 머리채를 움켜쥔 박서방의 서슬은 더욱 더 시퍼랬다.
  「이년아! 대체 저놈이 누구냐, 응. 너의 기둥서방이라도 된단 말이냐. 어서 바
른대로 말해!」
  아내의 머리채를 움켜쥔 박서방의 서슬은 당장 아내를 때려 죽일것 같았다.
  그때 쓰러졌던 나그네가 다시 비실거리며 일어나서 말했다.
  「여보시오, 제발 내  말 좀 들으시오. 이 부인에게는 아무  죄도 없소이다. 죄
가 있다면 내가 기진해서 쓰러진 것 뿐인데...」
  나그네가 변명하려 하자,  박서방은 옷소매를 걷어 붙이면서  다시 나그네에게 
대들었다.
  「듣기 싫다. 이 고얀놈 같으니, 대낮에 남의 계집을 끼고 다니고도 그래 죄가 
없다고 주둥이를 놀리는 거냐! 너 이놈의 자식! 정말 죽어야 말이 없어질 놈이구
나.」
  형세는 험악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꼭 누가 맞아  죽는 변이라도 생길 것 같았
다. 나그네는 무엇을 결심하는 듯했다.
  그리고 비실비실 몇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주머니에서 둥그렇게 생긴 물건을 
꺼내 번쩍 쳐들었다.
  「네 이놈, 이 패를 보고도 경거망동하겠느냐. 꼼짝 말고 내 말을 듣거라!」
하고 호령했다. 지금까지 비실비실 얻어맞던 때와는  달리 호통을 치는 나그네에
게는 위엄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그 위엄에 눌렸다. 박서방도 나그네의 위엄에 
눌려, 쳐들었던 주먹을 슬그머니 내렸다.
  「마패다!」
  이때 그를 에워싸고 구경하던 사람들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그네는 팔도강산을  두루 살피는 
암행어사였다. 농부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식한 그들이 아는 바로는 암행어사가 나타나면,  산천초목이 덜덜 떤다고 했
다. 바로 그 암행어사가 자기들  앞에 마패를 쳐들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
은 저도 모르게 나그네 앞에 부복했다.
  「소인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먼저 박서방이 머리를 조아렸다. 나그네는 지그시 박서방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위엄 있게 말했다.
  「너 이놈, 듣거라.」
  「네이.」
  「내가 이 고개를 넘어 오느라고 지친데다가 아무것도 먹지 못해 쓰러져 있는 
것을 너의 처가 인정을  베풀어 내가 다시 살아 난 것이다.  너는 남편된 몸으로
서 아내의 그  갸륵함을 칭찬은 못해줄망정, 어찌하여 아내를 죄인  다루듯 때리
고 치는 따위의 무모한  짓을 한단 말이냐. 이런 네 죄를  무엇으로 다스려야 옳
단 말이냐.」
  박서방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한참 동안을 대답 못하고 있다가  겨우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했다.
  「배우지 못한 무모한 백성이,  그만 어사또님이신 줄도 모르고, 죽을 죄를 졌
습니다. 그저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어사또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이놈! 배우지 못한  백성이라도, 천성은 착해서 인정이 있는  법이다. 너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  주었다고 그 아내를 때렸으니, 인정도 없고  눈물도 없는 
놈이다!」
  박서방은 그만 질려서 말을 못했다.
  이때 박서방의 아내가 어사또 앞으로 기어나갔다.
  「사또님! 오늘의 죄는  제가 저지른 것이오니, 죄를 내리시려거든,  저를 벌해 
주십시오!」
  박서방댁의 말에 어사는 비로소 웃는 낯이 되었다.
  「부인은 고개를 드시오.」
하고 나서 박서방을 향해 타일렀다.
  「너는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로되, 이번  내가 너의 처의 은혜로 살아
났으니 용서하겠다. 그러나  다음부터 부인을 함부로 때린다든가, 지나가는 사람
에게 행패를 하는  따위의 행실을 각별히 조심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너의 처는 
인정이 많은 훌륭한  여자이니, 함께 마을로 내려가서 네 잘못을  빌고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
  박서방의 내외는 절하고 일어났다.
  「사또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어사는 이어서 엎드려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많고 갸륵한 박서방댁을 본
받아서 착한 사람이 되라고 훈계하고, 훌쩍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해서 마을로  돌아온 박서방이었으나, 암행어사를 때렸다는  일이 마음
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다.
  「여보! 아무래도 어사또가 가만 있지 않을 거야.」
  「용서한다고 했는데 뭐 무슨 일 있을라구요.」
  「글쎄, 어사또야 점잖은 사람이니  일단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신걸 어쩌시지 
않겠지만, 관가에 소문이  퍼지면, 관가에서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란 말이야.

  「...」
  「이거 어떡하지? 아무래도 불려가서 곤장을 맞을 것만 같단 말이야.」
  「글쎄요!」
  이러한 나날을 보내는 어느날  정말로 관가에서 박서방 내외를 호출했던 것이
다.
  「이제 죽었구나.」
  박서방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아내까지 불안해졌다.  뿐만 아니었다. 싸움을 말
리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마을 사람들도  내심 불안해 했다. 아무래도 암행
어사가 매맞는 것을 뜯어 말리지 않고 구경만 했다는 것이 죄가 될 것 같았다.
  잔뜩 겁을 먹은 박서방 내외가 관가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과연  관가의 높은 대청마루에 어사또가  정좌하고 있었으
며, 그 옆에 이 고을 원님이 서 있었다.
  박서방 내외가 그 앞에 가서 부복하자, 먼저 이 고을 원님이 소리를 질렀다.
  「이놈! 네가 바로 어사또님께 행패를 부렸다는 박서방이냐?」
  박서방은 그만 사색이 되었다. 그래서 겨우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대답했다.
  「네, 소인이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이올시다.」
  「너 이놈, 잘 들으렷다. 감히 어사또님을  몰라보고 행패를 부렸으니, 그 죄를 
무엇으로 다스릴 것인가? 너는 죽을 죄를 지었으니, 죽어야 마땅하렷다!」
  원님의 호령은 쩌렁쩌렁 대청을 울렸다. 그러나  빙글빙글 웃으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어사또가 손을 들었다.
  「아아, 뭐 그만 해둡시다.」
  말리고 난 어사또가 박서방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늘 너희들을 부른 것은 벌을 주거나  꾸짖으려 한 것이 아니다. 나는 
너의 처에게 막대한  은혜를 입었으니, 그 갸륵한 마음씨에 보답하려  하는 것이
다. 참으로 박서방의 처는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여자이니라!」
  참으로 뜻밖이었다. 꼭 죽는 줄만 알고 있었던 박서방은,
  「황송합니다.」
  대답하고, 그저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어사또는 말을 이었다.
  「머리를 들라. 내  이곳에 와서 듣자니, 너희들  살림이 매우 궁색한 것 같아 
살림을 좀 도와주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 네  소원이 무엇인지 서슴치 말고 말해 
보아라!」
  이 말에 박서방은 더욱 황송해 했다.
  「소인의 아내가 조그만  인정을 베풀었기로 그것이 어찌  은혜가 되겠습니까. 
더구나 소인은 어사또님께 죽을  죄를 지었은즉 이대로 돌려 보내주시기만 하면 
그것이 소원입니다.」
  「아니다. 나라에서도 착한 사람을  골라 상을 내리는 것이거늘, 어찌 너의 처 
같은 갸륵한 사람을 보고 표창치 않겠느냐. 조금도 사양치 말고 말해라!」
  이 말에 박서방은 더욱 황송해 했다.
  「소인의 아내가 조그만  인정을 베풀었기로 그것이 어찌  은혜가 되겠습니까. 
더구나 소인은 어사또님께 죽을  죄를 지었은즉 이대로 돌려 보내주시기만 하면 
그것이 소원입니다.」
  「아니다. 나라에서도 착한 사람을  골라 상을 내리는 것이거늘, 어찌 너의 처 
같은 갸륵한 사람을 보고 표창치 않겠느냐. 조금도 사양치 말고 말해라!」
  어사의 거듭하는 재촉에 박서방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어사또님께서 소인에게 굳이 상을  내리시겠다니, 소인의 청을 말씀드리겠습
니다. 소인의  마을 앞에 큰 연못이  있사온데, 그 연못을  소인에게 내려주시면, 
그곳에 잉어를 길러서 잘 살 수 있겠습니다.」
  듣고 난 어사또가 빙긋이 웃었다.
  「네 소원이 그것뿐이냐?」
  「네이, 그것이면 평생을 잘 지낼 수 있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어사는 원님을 보고,
  「사또는 저 착한 백성에게  연못과, 그 마을 앞에 있는 전답  백 마지기를 주
기로 하오.」
하고 명했다.
  이리하여 박서방 내외는 많은 상을 받은 고마움에 눈물까지 흘리며 돌아왔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라에서는 마패를 가진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은 이 고개
를 넘지 말라고 금패의 푯대를 만들어 세웠다.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들이 멋모
르고 이 고개를 넘다가 또 쓰러질 것을  걱정해서 만들어 세운 푯대이었는데, 이
후 이 고개를 금패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내자식이라면 의당히
  경상도 안동에  권진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본시 안동 땅에는  권씨와 김씨가 
대성이며 또 거기서 인물도 많이 태어났다.
  권진사도 학식이 높고 가도를 엄히 다스려 법도가 높은 집안으로 고을에 이름
이 나 있었다.
  그러나 늦게까지  자식을 못얻고 애태우다가 사십이  가까워서야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런데 이 아들도 아버지 못지 않게  인물이 뛰어나서 고을 사람들의 칭
송을 받고 있었다.
  그의 집은 손이  귀했으므로, 그를 일찍이 장가를 가게 하여  색시를 맞아들였
다. 색시는  집안도 좋고 인물도  뛰어난 미인이었으나 성질이  고약해서 고집이 
센 것이 흠이었다.
  하루는 그 아들이 이웃 마을에  볼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
나게 되어 하는 수 없이 주막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비는 점점 세차게 왔다. 비에 젖은 몸이 으시시 떨려왔다. 이러고 있는데 주막
집 주인이 나오더니,
  「들어와서 비를 피해 가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선뜻 주막  안으로 들어서자, 헛간 안에 사인교가 놓여  있고 그 옆에 
준마가 한 필 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어느 양반댁의  행차가 있는 모양
이었다.
  그 젊은 선비가 들어서니 대청마루에서 술상을 대하고 있는 자기 또래의 젊은 
나그네가 일어서며 함께 합석을 하자고 말을 건네왔다.
  그는 사람도  점잖게 생겼거니와 몸가짐도 의젓한지라  특별히 사양할 이유도 
없고 해서 그들과 한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
는 사이에 두 사람은 아주 옛날 친구처럼 마음이 통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 나그네는 행장 속에 숨겨 두었던 술병을 꺼내며,
  「이 술은 백년 묵은 국화주로 제가 굉장히  아끼는 술인데, 손님을 대하니 아
주 옛날 친구처럼  느껴져 특별히 대접하는 것이니  우리가 자축하는 뜻으로 한 
잔씩 듭시다.」
하는 것이었다.
  선비는 술잔을  받아 입에 대보았다.  혀끝에 감도는 맛이  이만저만 향기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몸이  둥둥 구름 위를 날으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는 금방 정신을 잃고 말았다.
  목이 타는 듯 갈증이 나서 눈을 떠 보니,  아주 낯선 곳에 그것도 깨끗하고 호
화로운 이부자리 위에 누워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머리 맡에는 아름다
운 젊은 여인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것이었다.
  (웬일일까? 자기는 분명히 젊은 나그네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비는 이미 멎고 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
아 있었다. 그런데 헛간에 매어 있던 말이 간 곳이 없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도깨비한테 홀린 것일까?)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때,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이 입을 여는 것이었다.
  「서방님께서는 누구를 찾으십니까? 오라버님께서는 이미 길을 떠난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찾으셔도 아마 허사일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하면서 여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서울에 있는  모대신의 딸인데, 정혼하고 결혼식도  올리기전에 신랑이 
갑자기 죽어 버려서 불쌍한 처녀과부의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
을 안타깝게  여기던 오라버님이 저를  데리고 집을 나왔는데,  본가에서는 죽은 
것처럼 장사를  지내서 체면치레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두  남매는 동생을 
맡길만한 선비를 찾아 이렇게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던 중이었는데, 오라버님께서 
나를 보더니 자기를 맡길 만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남겨 둔 채 이미 말을 
달려 떠났다는 것이다. 이제 혼자 남은 몸이  갈 곳도 없사온즉 불쌍히 여기시고 
자기를 거두어 달라고 여인은 두 어깨를 들먹이며 슬피 우는 것이었다.
  젊은 선비는  정말로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뿌리치고  가자니 여인이 
목숨을 끊을 것이요,  또 받아 들이자니 아버지의 노여움과 마누라의  성질이 두
려웠다. 그러나 아름다운  여인이 애처롭게 우는 모습은 그의 가슴을  마구 흔들
었다. 그는 마음을  결심하고 여인의 손을 잡아 끌면서 백년해로의  가약을 맺었
다.
  이튿날 눈을 뜨고  생각하니 수습할 길이 막연하였다. 그러나 우선  집으로 돌
아가서 좋은 방도를  구하리라 생각하고 여인과 작별을 하였다. 그는  멀지 않는 
장래에 다시 데리러 올 것을 굳게 맹세하고 또 여관 주인에게 아씨를 잘 보호해 
줄 것을 당부하고는 그 여관을 나왔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뒤 밤낮 좋은 대책을  강구했다. 그리 좋은 생각이 떠오르
지 않았다.  결국 생각하던 끝에 꾀가  제갈양 못지 않은 친구에게  가서 상의를 
했다.
  「일이 중대하니 단시일 안으로는 해결이 어렵겠고,  우리가 시회를 열어 자네
를 초청할 테니 그때 틀림없이 오게나. 곧 서신을 띄울 걸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사랑에서 아버님이 부르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너에게 초청장이 왔는데, 글도 잘 지었거니와 글솜씨도 매우 훌륭하더라. 황
진사가 아들을 잘 두었더구나. 그러니 너도 가서 글을 잘배워 오너라.」
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는 친구 집에  도착하여 하루종일 글도 짓고 술도 마셨으나,  마음은 공중의 
구름같이 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친구가 말했다.
  「오늘 지은 시들을 모두 줄줄 외워서 아버님 앞에서 한 번 낭독을 하도록 하
게. 틀림없이 아버님이  좋아하실 테니, 그때 이렇게 말씀을  드려보게나. 친구들
이 우리집에서도 한  번 시회를 열었으면 하는데  아버님이 무서워 엄두가 나지 
않는가 보더라고  이렇게 슬쩍 말을 던져  보란 말이네. 그러면 꼭  좋은 결과가 
있을 걸세.」
  그는 친구의 말대로 집으로 돌아와서 열 몇 수의 시를 줄줄 외우며 그날에 있
었던 일을 아버님께  낱낱이 말씀 드리자, 이진사도 기분이 매우  좋아서 너털웃
음을 웃는 것이었다. 그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친구들이 저희 집에 와서 한  번 시회를 가지고 싶으나 아버님이 무서워 어
렵다고들 합니다.」
하였다. 권진사는,
  「허허, 그럴  리가 있나. 젊은이들이 모여서  뜻있게 시를 짓겠다는데 싫어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데는 나도 같이 끼었으면 좋겠구나.」
하고 시회를 열어도 좋다고 승낙했다.
  이튿날 통지를 받은  젊은이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모두가  쟁쟁한 재사들이었
다. 그들이 권진사에게 절을 올리자 그도 몹시 기분이 명랑해서,
  「모두들 나를 무서워한다지만 이런 일에는 나도 한몫 끼고 싶다네.」
하고 제의를 하는 것이었다. 좋다고 찬성했다.
  그날 하루 그들은 모두 흥겹게 시를 짓고  시조도 읊으며 재미있게 보냈다. 술
상이 들어오고 여흥으로 접어들었을 때, 권진사도  시조 한가락을 멋들어지게 뽑
아서 젊은이들의 갈채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사회를 보던 친구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노래를 못하니 이야기 
한 가지를 하겠다고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것 참 좋지!」
  좌중의 허락을 받은  그는 이야기했다. 그것은 바로 권진사의 아들이  겪은 이
야기였다. 입담이 좋은 그는 재치 있게 이야기 하였다. 듣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
신의 이야기처럼 안타깝게 가슴죄며 듣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만일 여기 계신 여러분께서  이러한 경우에 처하게 됐다면 어떻게 하시겠습
니까? 대장부로서 그  여인을 뿌리치고 돌아와야 할까요. 진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하고 친구는 공손히 여쭙는 것이었다.
  「그야 그럴 수가 있나? 사내 자식이라면 의당히 데리고 살아야지.」
  진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친구의 함정에 빠져 들어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로 자제님이 당하신 문제인데, 자제님은 지금 문틈에 끼
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사오니 진사님께서 선처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권진사는 내가  언제 그렇게 말을 했느냐는 듯이 노기가 등등해
서,
  「썩들 물러가라. 그리고 이놈을 대령시켜라.」
하고 호령하며 손님을  내쫓고 아들을 꿇어 앉혔다. 잔치 분위기는  금방 사라지
고 집안을 바로 형장과 같이 서늘하게 변했다.
  「이놈, 학업을 닦는  젊은 놈이 부모님 승낙도 없이 작첩을  해? 이고이얀 놈 
같으니라구. 이놈 너 같은  놈을 두었다가는 집안을 망치게 할 테니  네 놈을 살
려둘 수가 없다. 여봐라. 돌쇠야 이놈을 작두에 넣고 밟아 죽여라.」
  권진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
럴 수가 있겠는가.
  「나으리마님, 고정하십시오.  나으리마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빈대놈 죽이려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 댁의 후사를 어
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제발 진정하시고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돌쇠가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부탁을 했다.
  「듣기 싫다, 썩 놓고 밟지 못할까?」
  마님이 나오고 새댁이 버선발로 달려나왔다.
  「영감, 이게 웬 일이오. 하나 있는 아들을 어쩌자고 대를 끊으려 합니까?」
  마님이 옷소매를 붙들고 늘어지자,
  「듣기 싫다. 이따위 집안 망치는 자식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아이구, 아버님 왜 이러십니까?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십시오. 남편이 죽고 제
가 과부로 살아 남을 바에야 차라리 제가 죽고 말겠습니다.」
하면서 며느리는 미친 여자처럼 머리를 기둥에다  박았다. 머리가 깨어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제야 권진사는 화를 풀고 며느리를 향해서,
  「네 남편 지은 죄는 죽어  마땅하나 너의 정성을 보아 이번만은 용서하여 주
겠다. 그러나 너는 네 남편이 작첩을 해도 그것을 받아줄 수 있겠느냐?」
라고 물었다.
  「예, 죽음을 각오한  몸이 무언들 못하겠습니까? 남편은 이미 한  번 죽고 되
살아난 몸, 그리 생각하옵고 무슨 짓인들 용납 못하겠습니까?」
  며느리는 울면서 맹세하는 것이었다.
  권진사는 아들에게
  「이놈, 며느리 얼굴을  보아 너를 용서하는 것이니 가도를 엄하게  세워 편중
됨이 없게 하라.」
하고 단단히 꾸짖고 돌쇠를 불러,
  「사인교를 가지고 주막에 가서 아씨를 모셔 오도록 해라.」
하고 분부를 내리셨다.
  그 후로 젊은이는  학업을 닦아 대과에 급제했으며, 본부인과 소실을  잘 거느
렸다. 본부인도 못된  성질을 버리고 남편을 잘 받들며 소실에게  후히 대하여서 
집안에 화목한 기운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염씨부인의 정절
  염씨부인은 이조 영조때, 경상도 초계군 약면리서 태어난 미인이었다.
  남달리 뛰어난 미모를 타고 났을 뿐만 아니라 언행이 얌전하여 동네 사람들의 
칭찬 속에서 자라는  동안 어느덧 열 여덟이라는 꽃다운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은 저마다 며느리 삼기가 소원이었으나,  결국은 그녀의 고모되는 분
의 중매로 같은 마을의 송씨댁 며느리로 들어갔다.
  시댁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러나 남편에게 첫정을  바친 염씨 부인은 아무말 
없이 가난한 살림을 잘 꾸려 나갔다.
  그러던 중에 송씨의 노모가 모진 병에 눕게 되어 몇 마지기 안되는 전답이 모
두 노모의 약값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후 노모는 죽었는데, 이때부터 송씨 집은 
무서운 가난에 쪼들리기 시작했다.
  끼니를 굶는 그들 내외에게, 빚을 갚으라는 빚장이의 성화가 불같았다.
  이때 염씨에게 은근한 생각을 품고  있던 건너 마을의 부자 윤씨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송서방 집에 있나!」
  「뉘신지요?」
  방안에서 새끼를 꼬던 염씨 내외는 방문을 열었다.  싸리문 앞에 서 있는 윤부
자를 보자 송씨는 반색을 하며 맞았다.
  「아니, 윤서방께서 이게 웬일입니까? 이 누추한 곳엘 다 오시다니, 어서 들어 
오십시오.」
  방안에 자리잡은 윤부자가 내외간을 번갈아 보면서 점잖게 말을 시작했다.
  「뭐 내가 못  올 곳을 찾아왔습니까, 허허허. 놀라시기는...  사실 내가 이렇게 
찾아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니 누가 못오실 델 왔다고 했나요, 하도 뜻밖의 일이라서... 그런데 말씀을 
계속하시지요.」
  송씨는 깍듯이 예의를 차리면서 은근하게 대했다.
  「글쎄, 동네서 소문을 듣자하니 송서방이 몹시 곤란한 것 같습디다. 옛말에도 
이웃 사촌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한 
번 들러 형편이나 좀 알아보려고 찾아온 것인데...」
  이 말을 들은 송씨 내외는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가난이 원수라고 송씨는 
미처 윤씨의 속을 헤아려볼 여유를 잃고 말았다.
  「고맙습니다. 원 동네  어른에게까지 걱정을 끼쳐드려 그저  송구스럽기만 합
니다.」
  「원 천만에 말을 다 하누만. 뭐 송서방이  노름을 하다가 그렇게 된것도 아니
고, 모두가 효성이 지극해서,  논팔아 부모의 병을 고치려다가 그만 빚에 쪼들리
는 것 아니겠오. 그래서 말인데...」
  「네.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어서 말씀하세요.」」
  「다름이 아니고, 내가 웬만한 장사밑천은 대어드리지요.」
  윤부자는 슬쩍 송서방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이 뜻하지 않은  행운에 얼떨
떨해 있던 송씨는 윤부자의 뱃심을 알 리 없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야, 부지런히  장사해서 밑천도 갚을 
뿐더러 돌봐주신 은혜에 크게 보답할 것입니다.」
  송서방은 일어나서 절까지 했다.
  「아, 이 사람, 절은  무슨 절이오. 그럼 내일이라도 밑천을 대줄 것이니, 떠날 
차비나 하시오.」
  윤부자는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돌아갔다. 그날밤, 윤부자를 찾아가 두둑히 밑
천을 받아 쥔 송서방은 염씨를 재촉해가며 서울갈 차비를 꾸렸다.
  「여보!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가  보구료. 윤부자 하면 구두쇠로 소문난 양
반인데, 아 그이가  제발로 찾아와 밑천을 대어주다니,  참 희한한 일이 아니오? 
그러나 저러나 우리도 이제 남과 같이 살게 되는 가 보오.」
  염씨 부인도 무척 기뻐했다. 그녀 역시 윤부자의 뱃심을 알 까닭이 없었다.
  「여보! 내일 떠나시면  며칠이나 걸리겠소? 아무쪼록 먼 길에 몸조심  하셔야
죠.」
  다음날 새벽, 송서방은 서울길을  떠났고, 염씨 부인은 남편 생각을 하면서 새
끼를 꼬고 있었다.
  저녁이 다 되자, 윤부자가 또 찾아왔다. 그리고 쌀이 떨어졌다고 걱정해주면서 
쌀 한 섬을  보냈고, 다음날 또 찾아와서는 나무가 떨어졌으니  어쩌냐고 하면서 
나무를 보내주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계속 찾아온 윤부자는, 모든 호의를 다 베풀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해도 순진한 농부의  아내답게 윤부자의 검은 뱃속을 알지 못
했다.
  송서방이 서울로 떠난  지도 닷새가 되었다. 이날 일찌감치 저녁을  지어 먹은 
염씨 부인을 뜰에 나와 달을 보고 있었다.
  (지금쯤 그이는 무엇을 하고 계실까?)
  한없이 달을 쳐다보고 있는데, 싸리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굴까? 이 밤중에...)
  들어선 사람은 윤부자였다. 어디서 한 잔 했는지 술기운이 얼큰했다.
  술을 마시고 찾아온 그가 좀 못마땅하기는 했으나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푸대
접을 할 수는 없었다.  망설이고 있는 염씨를 보는 둥 마는  둥 윤부자는 방으로 
들어가 털썩 앉았다. 그리고 염씨 부인을 불렀다.
  「참, 염씨 부인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단 말이야.」
  「아이, 어른께서 그 무슨 실없는 말씀입니까.」
  마주 앉았던 염씨 부인은 윤부자의 말에 경계의 기색을 보였다.
  「아니오. 부인만큼 뛰어난  미인은 이 고을은 물론 경상도 바닥을  다 뒤져도 
없을 것인데, 그런  미색을 지니고도 이런 곳에서  많은 고생을 하는 것을 보니, 
내 가슴이 아프단 말이오.」
  「어른께서는 망측스럽게 우스운 말씀도  잘하십니다. 그런 말씀하시러 일부러 
오셨습니까!」
  염씨는 도사리고 앉아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망측하다니... 아니, 그럼 염씨 부인이 미인이 아닌 것을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요? 정말 나는 송서방 고생하는 것보다,  염씨 부인 고생하는 것이 애처로
워 장사 밑천을 대준 것이라오.」
  윤부자는 염씨에게 조금씩 다가앉았다. 도사리고 앉은  염씨 부인은 당장 그자
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치미는 화를 꾹 참고 
윤부자를 좋게 상대해 주었다.
  밤이 깊어도, 윤부자는 돌아갈 줄을 모르고 나중에는 음탕한 말까지 지껄였다. 
이윽고 그는 꼭 술 생각이 나서 그러니, 술 한 잔만 받아다 달라 했다.
  「내 꼭 한 잔 생각이 나서 그러오. 한  잔만 먹고 돌아갈 것이니 한병 받아다 
주구려.」
  가난이 원수가 되어, 큰 신세를 지고 있는 염씨 부인의 처지였다. 아무리 도사
린 마음이었으나, 이것마저 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염씨 부인은 술을 받아다가 
술상을 보아 바쳤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윤부자가 가기만 기다렸다.
  「아 염씨 부인, 염씨 부인!」
  혼자서 술을 따라 먹던 윤부자가 찾았다.
  「네, 왜 그러세요.」
  「다른 게 아니고, 내 부인이  받아다 준 술을 한 잔 먹었으니 이제 가야겠소. 
허나 나만 먹고 부인께 한 잔 대접을 못했으니, 이대로 갈수야 있소?」
  「아이, 전 술을 입에도 못댄답니다.」
  「그야 누가 부인이  술 잘하신다고 대접하는 겝니까, 내 마음이  섭섭하니 꼭 
이거 한 잔만 드시오. 이제 밤도 깊었으니 내 부인  한 잔 드시는 걸 보면 곧 일
어나리다.」
  음흉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하는 윤부자였으나, 염씨 부인은 순진했다. 귀찮아
서라도 한 잔 먹고 빨리 돌려 보내리라 생각했다.
  염씨는 술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여봐라는 듯 한숨에 들이키고 말했다.
  「이제 제가 마시는 걸  보셨으니, 일어나시지요. 야심한데 남이 보면 뭐라 생
각할지...」
  말꼬리를 흐리는 염씨에게 회심의 미소를 흘리는 윤부자가 능글맞게 말했다.
  「아, 가구말구 여부가 있겠습니까, 내  이제 부인이 그렇게 한 잔 드는 걸 보
니 속이 다 시원하외다.」
  말하면서 윤부자는 힐끔힐끔 염씨 부인의 기색을 살폈다.
  그런데 이상한 노릇이었다. 술을 먹고 난 염씨  부인은 갑자기 밀어 닥치는 졸
음을 가눌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럴까, 이렇게도 졸릴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염씨 부인은 그자리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염씨 부인은 
윤부자가 술에 약을 탄 줄도 모르고 들이마셨던  것이다. 그리고 함빡 약에 취했
던 염씨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윤부자에게 욕을 보고 만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정신을  차린 염씨 부인은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리고 그대로 자결해  버릴까 생각했으나, 좌우간 남편이 
돌아온 다음, 모든 것을 자세히 고하고 나서 목숨을 끊으리라 생각했다.
  또 닷새가 지났다.
  송서방은 떠난 지 열 하루만에 돌아왔다.
  염씨 부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윤부자와의 일을 상세히 일러 바쳤다.
  말을 듣고 난 송서방은 처음엔 치를 떨었다.  그러나 곧 무엇을 생각했는지 이
렇게 말하며 염씨 부인을 위로했다.
  「분한 마음이야 낸들 얼마나 많겠소? 허나 모든 것이 다 내가 가난한 탓이구
려. 그러나 이제 물건을 사왔으니, 당장 그 돈을 갚고 나서 원수를 갚을 수도 있
는 노릇  아니겠소. 차라리 이왕 저질러진  일이니 이제 와서 떠들어  망신할 것 
없이 꾹 참고 장사나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가지고, 돈으로 윤부자의 원수를 갚
읍시다.」
  염씨는 하는 수 없이 남편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윤부자의 욕심은 땅보
다도 두터웠다. 그는 아주 염씨 부인을 데려다가 소실로 삼을 생각을 했다. 그래
서 하루는 송씨를 불러다가 감언이설로 꼬여가면서, 염씨를 자기에게 주고, 대신 
새로 장가를 든다면  모든 비용은 자기가 대겠다고 말했다. 꾸어준  돈 말고 3백
냥을 더 주마고 꾀었다. 그런 자기 말을  안들으면 이왕 꾸어주었던 3백 냥도 거
두어 들이겠다고 위협했다.
  송서방은 원래 마음이 약한데다가 돈에 눈이  어두워진 때였다. 그래서 그자리
에서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한다는 소리가,
  「집에 가서 아내와 상의해서 대답하겠습니다.」
라고 한 것이다.
  집에 온  송서방은 아내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윤부자의 뜻을  말했다. 그리고 
자기로서는 아내의 마음에 따르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야기를 듣고 난 염씨 부인이 펄쩍 뛰었다.
  「아니 여보! 당신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오?」
  그녀는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잔뜩  핀잔을 받은 송서방이  윤부자에게 갔다. 그리고  아내가 말을 
듣지 않으니, 그 일은 단념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러니 제가 꾸어간 3백 냥은 물건을 파는 대로 갚아드리겠습니다.」
  윤부자는 송서방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했다. 저놈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으
면서도, 참고 있는  것이 돈 때문인데, 만약  자기가 그 돈을 거두어 드렸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리라 생각했다.
  「아, 송서방, 그럴  것까지 없소. 그야 내가 송서방 잘  살아보라고 꾸어준 밑
천인데, 장사하는 사람에게서 밑천을 거두어서야  쓰겠소? 그러니 안심하고 장사
나 하시오.」
  송서방을 돌려보낸 윤부자는 딴 궁리를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천하절색 염씨 
부인을 소실로 삼으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다음날  동네에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
했다.
  「염씨 부인은 본시 윤부자와 좋아하던 사이로서  깊은 관계가 있는터에, 이제
는 송서방을 버리고 윤부자와 살고 싶어 한다더라.」
  헛소문이 온 동네에 퍼져나갔다.
  이 소문을 들은 염씨 부인은 이제 더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 길로 관가에 
뛰어가 소송을 했다. 그러나 평소부터 윤부자에게  많은 뇌물을 얻어먹은 관가에
서 염씨 부인의  소송을 똑똑하게 가려줄 리가 만무했다. 아니  오히려 윤부자의 
말이 옳다는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이 판결 앞에 염씨 부인은 당연히 항소했다.
  「자고로 일부종사는 여자의  제일가는 미덕이라 했습니다. 이제  모든 어려움
을 무릅쓰고, 일부종사하려는  여자를 관속으로 앉아서 권장하지는  못할망정 도
리어 헛된  소문에 욕보이려 하심이 웬일입니까?  만약 제게 두  마음이 있다면, 
어찌하여 이토록 관가에 송사하였겠습니까. 이것만 가지고도 자명한 이치이거늘, 
관가는 어찌 그렇게 어두운 판결을 하시오니까!」
  관속들은 조리 있는 염씨말에 그만 기가 찼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나온 소
리는 고작 염씨 부인의 무례한 볼기를 치라는 것뿐이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염씨 부인은 열 대의 볼기까지 얻어맞고 나왔다.
  분하고 억울했다. 방금 볼기를 맞고 나서는  몸이랑 옷매무시가 흐트러져 있었
다.
  이때 지나가던 관노 한놈이 그녀를 조롱했다.
  「세상에 못 믿을 건 여자의 마음이라더니, 너는  얼굴 값을 하려고 두 서방을 
섬기려고 했구나.」
  독이 오른 염씨 부인인 관노를 쏘아볼 때,  관노는 쏜살같이 염씨 부인에게 달
려들더니, 젖을 주물렀다.
  그리고 도망치면서 지껄였다.
  「금테를 둘렀던가, 은테를 둘렀던가, 송서방은 어떻고 윤부자는 어떻드냐?」
  이 말에 더욱 독이  오른 염씨 부인은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그리고 그 자
리에서 관노가 만졌던 젖을 싹 잘라버리고 쓰러졌다.
  얼마 후, 염씨 부인은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이것을 본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정절에 눈물을 흘렸다.

  무관 이주국
  이조 영조초, 구선복이라는  무관이 있었는데 상감의 총애를  독차지해서 그의 
집 문전에는  날마다 드나드는 남촌의  무관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주고 받는 
아첨과 교언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엽관운동이 아닌 것이 없었다.
  당시 구씨의 내외종관에  이주국이라는 무사가 있었다. 그는  사람됨됨이 훌륭
할 뿐 아니라  궁술에도 남달리 뛰어난 인물이었다. 또한 병서를  통달해서 남촌
에서는 능히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주국은 구씨가  권세를 부리는 것을 못마땅하
게 생각하여 서로 통하는 점이라곤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해마다 단 한 번의 세배만은 빠뜨린 일이 없었다. 어느해 정월, 이주국
이 구씨에게 세배를 드리러  갔다. 구가 앉아 있는 자리 곁에  큼직한 궤가 놓여 
있었다. 이주국은 구씨에게 저것이  무슨 궤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구씨는 잔
뜩 오만스러운 어조로,
  「너는 꿈에도 만져볼 수 없는 궤야. 이것은 훈련대감이 들어 있는 궤이다. 네
가 아무리 이름난 무사라도 문별이 얕아 차례가 안가는 벼슬이지.」
하면서 그 궤를 열었다.  그리고 큼직한 도장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이주국은 서
슴치 않고 그 도장을 어루만지며,
  「과연 큰 도장입니다. 이 도장은 제가 형님으로부터 받아갈 걸...」
  이어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내실에서 여종이 나왔다.
  「대감마님, 점심 진지 잡수시라고 여쭈옵니다.」
  여종이 전갈하는 바람에 구씨는 이주국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구씨는 하
인을 부르더니,
  「술상부터 먼저 들여오되 아기 안주를 놓아 오너라.」
하고 분부하였다.
  이주국은 마음속으로,
  (도대체 아기 안주란 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궁금히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술상이 들어왔다. 큰 접시에  파란 저고
리에 붉은 치마를 입힌 예쁜 인형이 상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구씨는 젓가락을 
들고는 인형의 눈깔을 쏙 빼먹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이주국은 하도 어이가 없
어 구씨에게 말했다.
  「형님, 아기 안주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더니 바로 이것이로구려! 비록 찬으
로 만든 것일지언정 어찌  사람이 사람을 먹겠소. 사람으로서는 못할 일이오. 저
는 먹지 않겠소.」
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씨는 가난뱅이 이주국에게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곤 없다는 호화
로운 일면을 자랑하려고 그 따위 짓을 한  것이요, 결코 이주국을 우대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인데,  이주국이 부러워하기는커녕 젓가락도 대지  않고 일어서 
버리는데 매우 무안하고 불쾌했다.
  그 다음날 구씨가 입궐했더니 승지가 상소장 한 장을 보이며,
  「대감, 이주국과 내외종간이오? 상감께서 이 상소를 보시고 미친놈이로군! 하
시며 승정원에 등록해 두랍신 것이오.」
라고 말했다. 그 상소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한량신 이주국은 상감에게 아뢰옵니다.  신이 훈련대감 구선복과 내외종간이
온데 선복의 행실이  좋지 못하여 지금부터 의리를  끊사오니 후일 선복이가 큰 
죄를 범할지라도 사촌간이라 해서 신에게 연좌를 주시지 마시옵소서.」
  이 상소문을 본 구선복은,
  「괘씸한 놈! 내 생전엔 호사 한 자리 안줄 걸!」
하고 이를 갈며 퇴궐했다. 그때만해도 구선복이와  인천간이 되는 무반은 도저히 
출세할 수 없었고, 그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는 사람이라야 벼슬 나부랑이라도 
얻어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주국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세상 사
람들은 이주국을 실성한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이주국은 그 뒤로부터,  출세를 아예 단념하고 날마다 활과 전동을  메고 남촌 
청룡정이나 새문 밖 모화관 사정으로  가서 여러 한량들 틈에 기어 활이나 쏘고 
남의 점심이나 얻어먹곤 했다.
  소년 시절에 함께  활을 쏘던 사람들은 모두  벼슬아치가 되고 보니 이주국이 
상대로 하는 사람은 자연 나이 열 살 아래인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 열 살 아래
인 사람들마저 벼슬로 나간 뒤에는  친구의 자제들과 패를 지어 활을 같이 쏘기
도 하고  점심을 얻어 먹기도 하기를  마흔이 넘도록 했다. 그때  남촌의 공론은 
그런 훌륭한 재간이  있으면서도 썩는 것이 아깝다고들 했다. 그리하여  어느 대
장의 추천으로 무과에는 뽑혔으나  벼슬할 도리가 없어 어린 한량들의 놀림감이 
되고, 소년들 사이에서도 이선달이라고 하면 진저리를 치게끔 되었다.
  어느날 이주국은 젊은이들과 함께 활을 쏘고 있었다.
  그때 어느 소년이 이주국에게,
  「어르신네 식성이 그렇게 좋으신데 혹 못잡수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이주국은 선뜻,
  「개장에 흰밥은 먹질 않아...」
하고 대답했다.
  그 이튿날 소년들이 서로 의논해서  이주국 몰래 청룡정 아래 술집에다 개 한 
마리를 잡아서 개장을  끓이게 했다. 이주국은 개장을 끓이는 눈치를  챘으나 모
르는 척하고 전과 같이 활을  쏘다가 점심 때도 채 못돼서 화살을 전동 속에 집
어넣으면서 혼잣말로,
  「오늘은 머리가 아파 활이 잘 맞지 않는걸.」
하면서 산기슭 술집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여보, 주인장! 개장 다 끓었소? 저 위 사정에서 다 끓었나 보고 오랍디다.」
  이주국이 이렇게 말하자, 술집 여주인은 행주치마에 손을 씻으면서 대답했다.
  「벌써 다 끓었습니다.」
  「그러면 맛좀 보게 이리 가져오시오.」
  「선달님, 맛보실 것 없이 아예 점심으로 먼저 잡수시지요.」
  주인은 개장과 흰밥을 가져오며 말했다. 이주국은  숟가락을 들어 맛보는 체하
다가 국물이 싱거우니  간장을 가져오라고 해서 간장을  친 다음에는 너무 짜니 
국물을 더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밥  한 함지와 끓인 국을  다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그 꼴을 보던 주인이 깜짝 놀라서,
  「한 분이 다 자시면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발을 동동 굴렀다.
  이주국은 천연스럽게,
  「먹는 죄는 종지 굽으로 하나라는 말이 있지  않소. 한량들이 와서 묻거든 필
동 이선달이 와서 다 먹고 갔다고 하오.」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사정에 있던 젊은 한량들이  점심을 먹으로 술집으로 내려왔다가 이사연을 듣
고 속은 것을 분하게 생각하기도 했으나 이미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날 사정에서 한 소년이 이선달에게,
  「어르신네 시장하실 텐데 활만 쏘시지 말고 점심을 잡수셔야지요.」
라고 했다. 이주국은 시무룩한 얼굴로,
  「어디 날마다 점심을 먹을 수 있나! 시장기가 들면 집으로나 가야지!」
  소년은 시치미를 떼고,
  「오늘은 호동 박병사장  생신이랍니다. 그 어른이 북병사를  다녀왔다고 해서 
올해는 생일잔치를 크게 차린다 합니다. 저희들까지  청해서 저녁때에는 작은 사
랑으로 가려고 합니다.」
라고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또 속이는구나.」
  이주국이 말하자 젊은이들은,
  「천만에 말씀입니다. 어르신네가 가보시면 알 것이 아니오! 만일 저희들이 속
였다면 내일 종아리를 때리시오.」
  소년들은 속임이 아니라고 했다.
  이선달이 그 말을 곧이 듣고 박병사댁으로 가보니  과연 빈객이 가득 왔고, 진
수성찬을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 차렸다.
  이죽구은 활과 전동을 마루에  놓고 사랑으로 들어가서 주인에게는 인사를 하
는 둥 마는  둥 하고 마루끈에 놓인 상으로 달려들었다.  얼마동안이나 먹었던지 
대 여섯 상의 음식을 혼자서 다 먹어버렸다. 이  모양을 본 주인 병사는 매우 못
마땅하다는 듯이 불쾌한 얼굴로 하인을 불렀다.
  「안주가 있어야 술을 마시지 않느냐. 이 상은  다 치우고 육회나 육포로 해서 
다시 차려 내오너라.」
  이주국은 또다시 그 주안상으로 덤벼들었다. 주인은 어이가 없어,
  「먹는 것도 염치가 있어야지!」
하고 화를 내며 육회 그릇을 땅바닥에 내던지는 것이었다.
  이주국은 태연한 태도로,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은  한번 양을 마음껏 채워보려는 것이지 친구를 찾아
온 것이 아니오!」
라고 말한 다음 방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육회를 모조리 집어먹고 나서 주인에게
는 인사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러한 일이 알려져서 남촌 사람들은,
  「친구가 아무리 염치  없는 짓을 했다 하더라도  어찌 주인이 손님에게 여러 
사람 앞에서 나무랄 수 있느냐? 그것은 주인이 잘못이야.」
라고들 했다. 박병사는  이 일로 말미암아 벼슬 승진후보 명단에  오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영조 말년 어느해의 일이었다. 이주국은  사정에 가자니 젊은 사람들
이 싫어하고, 집에 있자니  지붕이 새어 방 안이 물천지가 되어  집에 있을 수도 
없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삼청동 뒷산에 가서 활쏘기를 하고  있었다. 한창 신나
게 활쏘기를 하고 있을  때 마침 꿩 한마리가 앞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이
주국은 활을 쏘아 꿩을 맞혔다. 꿩은 화살이 꽂힌  채 어느 대가집 큰 후원 담장
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이주국은 꿩보다 화살이 아까워 그 집  앞문으로 찾아
갔다. 그집은 바로 영조의  사돈이요, 장현 세자의 장인인 정승 홍봉환의 집이었
다. 정승  집에 발을 들여놓기가  싫었으나 화살을 찾으려는  생각으로 문간으로 
들어가서 하인에게,
  「여보시오, 매우 어려운 청이  하나 있소. 다름 아니라 내가 뒷산에서 활쏘기
를 하다가 꿩을 쏘았는데 꿩이 화살에 꽃힌 채  이 댁 뒷담으로 넘어 왔소. 꿩은 
댁에서 갖고 화살이나 찾아주오.」
라고 말했다.  하인은 은근히 꿩에  구미가 당겨서 그러겠노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꿩이 없다고 말했다. 이주국이 다시 하인에게 간청해 
보았으나, 정승집 하인이기 때문에 말씨가 거칠었다.
  「여보시오, 없는 화살을 나더러 만들어  내놓으란 말이오? 문간에서 쓸데없이 
떠들다가 대감께서 아시면 큰일이 나오. 어서 바삐 믈러가시오.」
  이에 이주국도 화를 내면서,
  「아무리 대감집 하인이기로서니 이만한 청도 안듣느냐!」
  그 하인을 번쩍 들어 내동댕이쳤다.
  하인은 별로 다치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죽어가는  소리로 엄살을 부렸다. 왁자
지껄하는 통에 마침내 홍정승이 녹사를 불러,
  「문간이 왜 저렇게 소란스러우냐? 알아 들어오도록 하라.」
하고 분부를 내렸다.
  녹사가 문간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도망을 칠까하고 생각했으나 이주국은 다
시 생각을 돌려서,
  (대장부가 어찌 이까짓 일로 달아날 수 있으랴.)
하고 죽으나  사나 하회나 기다려 보자고  버티고 서 있을 때  녹사가 나타났다. 
그는 까닭을 묻기도 전에,
  「댁 하인에게 화살을  찾아달라고 여러 번 청했으나, 찾아 주지  않기에 행패
를 부린 것이 대감께까지 아시게 되었으니 대단히 황송하오.」하고 사과를 했다. 
녹사가 이 말을  그대로 대감께 전했더니 사연을  듣고 난 주인대감은 녹사에게 
명령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대감집 하인들의 뻣뻣한  행동을 매우 싫어했는데,  내 집 
하인도 역시 같은 모양이군. 다시 들어가 찾아보도록 해라!」
  하인은 엄살도 채 못부리고 할 수 없이  안으로 찾으러 들어갔다. 이주국이 문 
밖에 그대로 서  있자, 정승이 다시 녹사에게 비록 활장난질하는  사나일망정 말
씨가 점잖은데 오랫동안 문간에 세워둘 수  없으니 불러들이라고 분부했다. 이주
국은 녹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서 장지 밖에서 절을 했다.  홍정승은 이주국에
게,
  「자네는 누구이며, 망건을 쓰고 있으니 무슨 벼슬을 지냈는가?」
하고 물었다.
  대감이 묻는 말에 이주국은 공손히,
  「소인은 출신 이주국이올시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자네 집 계보를 좀 말해보게.」
  「소인의 조부는       올시다.」
  「알았네. 자네가 바로  훈련대감의 연좌를 안받으려고 상소하여  초사 한자리
도 못한 이주국이란  말이지. 자네같이 좋은 품행에 나이 오십이  넘도록 가난한 
무사로 있다니 딱한  노릇이로군. 내가 요새 며칠 앓느라고 벼슬도  내놓고 들어
앉아 있는 터인데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심심한  처지에 자네가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한담이나 하고 가게.」
  그동안 하인은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꿩을 찾다가  찬광에 숨어 있는 산꿩을 
잡아가지고 사랑  마루에 놓았다. 이주국은  화살을 빼어 전동에  넣고 대문으로 
나오며 녹사에게,
  「화살을 찾았으니 이 꿩은 대감에게 한끼 반찬으로나 올리게 하오.」
하고는 다시 주인 대감에게 절을 하며,
  「소인은 물러갑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다. 대감은 깜짝 놀랐다.
  「여보게, 자네가 호의로 주는 꿩을 어찌 나혼자 먹을 수 있나. 그것을 안주로 
해서 술이나 한 잔 마시면서 세상 얘기나 더 하세.」
  이주국은 하는  수 없이 도로 주인대감  방으로 들어 갔다. 얼마  후 꿩고기로 
만든 안주를 비롯해서 진수성찬의 술상이 들어왔다.  주인과 이주국은 대작을 하
게 되었다.
  주법에 따라 주거니 받거니 해서  이주국은 주인대감이 주는 잔을 열 서너 잔 
마셨고, 주인 대감도 여덟 잔 쯤을 마셨다. 그때 주인대감이 별안간 이주국에게,
  「자네 내 아우를 알고 있나?」
라고 묻는 것이었다.
  이주국은 대답했다.
  「소위 무사가 되어 어찌 병조판서 대감의 함자를  모르겠습니까! 아직까지 얼
굴을 뵌 일은 없기는 하오나...」
  「지금이 섣달이고 벼슬  후보자 명단을 꾸며 올리는  중이니 이 기회에 자네 
초시 하나 하면 어떤가?」
  「황송한 분부올시다.」
  이주국은 고개를 조아렸다.
  「내가 당장 아우에게 편지를 함세.」
  대감은 문서계에 일러 즉시 단찰로 써 보내게 하였다.
  「오늘 자네를 보니 속히 돌려보내고  싶지 않네만 다음에 자네가 다시 올 수 
있겠나, 술 한 잔 더 마시면서 답장 오기를 기다리는게 어떨까 하네.」
  이주국은 술 생각보다는 편지 일에 더 마음이 쏠려 답장오기만을 기다리고 있
었다.
  주인대감과 이주국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녹사가 편지 한 장을  올렸다. 주인 
대감은 그 편지를 받아보더니 조금 실망한 얼굴로,
  「여보게 자넨 관운이  없구먼. 이번 후보 명단에는 벌써 배정이  다 끝났다는
군. 내년 유월이나 기다릴 수밖에 없네.」
라고 하며 쓴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이주국은 벌떡 일어나면서,
  「소인은 물러갑니다. 헌데 아까 드린 꿩값을 주시오.」
라고 말했다.
  주인 대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버럭 화를 내면서,
  「여보게 자네가 호의로  줘놓고 지금와서 값을 내라니 말이 되나!」  하고 말
하며 대감은 청지기를 불러서,
  「요새 시장에서 꿩 한 마리에  얼마 하느냐? 이 사나이에게 한 마리 값을 주
어서 내보내라.」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청지기는 엽전  석 냥을 가져다  이주국에게 주면서 당장  나가라고 재촉했다. 
이주국은 돈 받을 생각은 안하고 청지기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장에서 파는 꿩은 죽은  꿩이지만, 내 꿩은 산 꿩이었으니 열  냥은 내야 한
다.」
  이것을 본 대감은 한층 화가  더 나서 석냥이건 열냥이건 보기도 싫으니 주어 
보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주국은 돈 열 냥을 받아 꽁무니에 차고 나오며 혼잣말로,
  「벼슬은 다 틀렸고, 이것만 가지면 설은 잘 지낼 수 있겠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홍정승댁을 나왔다. 이주국이 물러간 뒤 주인대감은,
  「그 자가 풍체도 좋고 말씨도 공손하기에 하루종일 함께 소일하려 했더니 그
런 인사불성한 놈이 있단 말인고.」
  분을 터뜨리면서 동생 정승에게 차후에 기회가 있더라도 벼슬 후보에 넣지 말
라고 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이주국은 그 길로 집에 돌아와서 부인에게,
  「내가 오늘 밤에 처음으로 벼슬을 하게 되었소. 천리를 지어 놓도록 하오.」
라고 했다. 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오십 평생 처음 듣는 소리오. 아침까지도 아무  말씀도 없더니 이게 무슨 소
리오. 벼슬을 못하더니 이젠  실성까지 하게 됐는가 보오.」 라고 말하며 말대꾸
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만 두오, 내일 하루는 빌려 입어야지.」
  이주국은 어느덧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그  이튿날 관보에 「가을 파보진 무
관에 이주국을 명함」이라고  실려 있음을 본 이주국은, 즉시 천리를  빌려다 입
고 삼청동 홍정승댁 허술청에 가서 정승에게 문안을 드리려고 했다.
  하인들이 보니 어저께 꿩값을 받아가던 사나이가 오늘은 웬 천리를 입고 문안
드리기를 청하기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간신히 녹사를 청해서  대감께서 기
어코 만나주시지 아니한다면 문간에서 자결하겠노라고 하며 칼을 뽑아들었다.
  홍정승은 이 말을 듣고 마지못해 불러 들였지만 못마땅한 얼굴로,
  「어제 꿩값은 다 주었는데 왜 또 왔나?」
하고 물었다. 이주국은 엎드려 소리 내어 우는 것이었다.
  「소인이 아무리 변모 실성하였기로서니 대감으로부터 꿩값을 받겠나이까? 어
제 대감께서 약주김에  계씨 대감한테 소인을 초사케 하라고 하셨으나,  계씨 대
감께서 듣지 않으셨으니  소인으로서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얻어 볼 수도 
없고, 대감도 약주가 깨시면 다시는 소인 생각  따위는 하지 않으실 것이 아닙니
까. 그래서 임시응변책으로 대감의 분노를 돋구면  화가나서 계씨 대감께 초사를 
시키지 말라는 분부를  내리실 것이고, 계씨대감은 백씨대감의  분부를 거역하신
것이 꺼림직해서 초사시키지 말라는 편지를 하신  줄로 믿으시고, 반드시 초사를 
시키실 줄로 짐작하고  일부러 대감의 화를 돋운 것이옵니다. 죽을  죄를 졌으니 
죽여 주십사 하고 찾아온 것이올시다.」
  이주국은 꽁무니에서 돈 열냥을 꺼내어 놓았다. 홍정승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도 그럴 듯한 일이로군!」
하고 말하며,
  「오늘 다시 술 한 잔 더 나누어보세.」
하면서 안으로 불러들였다.
  이때부터 이주국은 홍정승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아예 홍정승댁 식구처럼 되
었으니 꿩 한 마리가 이주국을 출세의 실마리로 만든 셈이었다.
  그 뒤 십년  동안에 이주국은 벼슬이 이품까지 올라갔고, 구선복은  정조 때까
지 훈련대감으로 있다가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마침내  이주국이 훈련대감의 
인궤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그저 우연한 일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구선복이 죽음을 당했을 때 이주국 대장은 그 사형장으로 가서 굴건과 상제복
을 입고 통곡했다. 정조가 그 까닭을 물으셨다.
  「생전에는 의리를 끊고 지금 사후에 상복을 입는 것은 웬일이냐?」
  「예, 생전에는 오늘 이 일을  당할 줄 알았으므로 끊은 것이옵고, 죽은 뒤 상
복을 함은 지친이기 때문이옵니다.」
  이 말을  들은 정조는 그 의기에  탄복했다. 그 후 어느  어전회의에 박병사가 
입궐했을 때, 정조가
  「지금도 이주국이 음식염치가 없으면 면박할 터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박병사는 서슴지 않고,
  「지금이라도 그런 짓을 한다면 면박하겠나이다.」
하고 대답했다. 정조는,
  「참으로 기개 높은 무관이로군!」
하고 칭찬하면서 박병사를 다시 기용했다고 한다.




  지혜로도 못 고치는 병
  어느 고장에 돈이  무척 많은 바보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난한 학자가 살고 
있었는데 항상 서로 잘났다고 다투며 지냈다.
  「돈만 많으면 제일이냐? 무식한 바보의 천한 돈보다는 가난해도 존경받는 학
자의 지혜가 낫다.」
  학자는 이렇게 주장을 했고 바보는 돈이면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다고 학자를 
업신여겼다.
  「뱃속에 육조를 차려  놓았어도 사흘만 굶어 보라지, 쪼르륵 소리를  내고 굶
어 죽는다. 거지학자야 필요하면  돈으로 종같이 부려 먹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혜보다는 돈이 더 낫다.」
하고 서로 싸웠다. 어느날은 그렇게 다투다,
  「네가 가지고 있는  지혜가 돈보다 소중하다는 증거를 보여라. 그  증거를 가
지고 나를 항복시키면 내 재산의 반을 주겠다.」
하고 돈 많은 바보가 장담했다.
  「그럼 너와 내가 우선 왕에게 가서 재판을  해보자. 돈이 나은지 지혜가 나은
지 왕의 심판에 따르기로 하자.」
  「좋다.」
  그들은 왕에게로 가서 돈과 지혜의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고 
힘이 있느냐고 물었다.
  왕은 이 소송이  아주 난처하고 까다롭다고 생각했다. 지혜가 낫다고  하면 돈 
있는 부자들이 왕에게  협력을 않을 것이요, 돈이 낫다고 하면  학자들이 왕에게 
협력을 않을 것이니 여러 가지로 막대한 지장과 파쟁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관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나보다는 더 공정한 심판을 할 적임지가  있으니, 그
에게 가서 물어보라.」
하고 이웃나라 왕에게 편지를 써서 주었다.
  두 사람은  그 편지를 가지고 이웃  나라의 왕을 찾아가서 그  편지를 바쳤다. 
을국의 왕은 감국의 왕이 보낸 친서가 무슨 중대한 내용인가 하고 봉을 떼고 본
즉 뜻밖에도,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두 사람은 귀국을  해칠 우려가 있으니, 가는대로 곧 
잡아서 사형에 처하시오.」
하는 글이었다. 을국의 왕은  갑국의 왕의 호의를 고맙게 생각하고, 부자와 학자 
두 명을 묶어서 사형장으로 보내어 곧 목을  자르라고 명령했다. 그제야 두 명은 
자기들이 공연한 소송을  일으켜서 둘이 함께 죽게 되는 것을  후회했다. 부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많은 재산을 아끼지  않고 왕과 대신과 형리들을 
매수하려고 많은 뇌물을  보내며 운동을 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왕과 관리들은 
원래 청렴했던지  아니면 음모의 중죄를 돈으로  용서했다가는 나중에 약점으로 
잡히게 될것을 두려워 했던지, 좌우간 뇌물을 받지  않고 더욱  노해서 사형집행
을 서둘렀다.
  「여보 학자, 내 돈의 힘으론 도저히 우리 두 목숨을 구할 수 없게 됐네. 어디 
자네 지혜로 살아날 수 없겠나? 성공만 하면 내 재산의 반을 주겠네.」
하고 애원했다. 돈만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고 학
자의 지혜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네. 처음부터 지혜가  돈보다는 낫다고 나를 존경
했으면 이런 일은 당하지  않을 걸. 그래 인제 와서야 내  지혜로 살려달라는 건
가? 그러기에 바보의 생각은 할 수 없다는 거지.」
  학자가 이렇게 심한 모욕을 했다. 그전 같으면 부자인 바보도,
  (이 맹꽁이 같은 학자야. 네가  정말로 지혜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돈이 낫다고 
했으면 이런 사형당할 재판은  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하고 같은 항변을  했겠
지만, 지금 와서는 이미 돈의 무력함을 알았으므로  학자의 기분을 상하게 할 용
기는 없었다. 학자의 지혜로 목숨을 구제받고 싶어서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학자는 태연한 태도로 단두대 앞까지 걸어가더니 갑자기,
  「하하하, 하하하.」
하고 크게 웃어대자 왕이 그 당돌한 행동을  보고, 사형 직전에 미친것이 아닌가 
하고 비웃는 투로 말했다.
  「너, 천국에 가는 것이 그렇게도 기쁘냐?」
  「그게 아니옵고 실은 남의 나라 왕의 불행을 대신 받으시려는 폐하의 어리석
음이 우스워서 그럽니다.」
하고 학자가 천연스럽게 대답한 다음, 또 껄껄 웃었다.
  「이놈! 발칙한 놈, 말을 삼가라. 내가 어리석다고?」
  「적국의 모략에  빠져서 스스로 나라를 멸망시키려는  폐하가 어찌 어리석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을국의 왕도 이 말엔 정색을 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가 말하는 뜻이 무슨 내용인지 자세히  말하라. 정직하게 말하면 용서할
지도 모른다.」
  「사실은 이 친구가  저의 나라에서는 아주 큰 부자입니다. 저희들  나라의 왕
이 탐욕이 많아서  이 친구의 재산을 압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친구의 
딱한 사정을 보고 분개한 너머지 왕에게 항의  상서를 올렸더니, 왕이 저희들 둘
을 잡아다가 이와  같은 단두대에서 목을 베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늘도 저희
들의 억울한 죽음을 가엾이  여기셨는지 홀연히 하늘로부터 백발의 신선이 나타
났습니다. 그 신선이 왕에게  저희들을 죽이면 나라가 멸망할 것이니, 죽여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형장에 참가했던 꾀  있는 대신이 저희들을 죽이는 
동시에 폐하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일석이조의 묘안이  있다고 왕을 충동했습니
다. 그러자 저희들을  이 나라에 보내서 사형시키고 겸해서 폐하의  나라를 멸망
시킨 뒤에 통합하려고, 무조건 죽이라는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학자의 말을 들은  을국의 왕은 깜짝 놀라서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도 상
의한 뒤에,
  「자기 나라 백성을 하필  우리나라로 보내서 사형에 처해달라는 이웃나라 왕
의 수작부터 이상했습니다.  첫째 이자들이 우리 백성도 아닌 일개  부호와 학자
에 지나지  않은데, 어떻게 우리나라의  역적질을 꿈꾸었겠습니까?  이자들을 곧 
자기 나라로 추방해 보내고, 그 간악한 이웃나라의 왕을 토벌해야 합니다.」
  왕도 신하들의 말을 옳게  생각하고, 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그 두 명이 
채 국경을  넘어오기도 전에 을국은  갑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동원했다. 
갑국의 왕은 적군의 침입을 방어하는 한편 부자와 학자 두 명을 잡아서 또 사형
장으로 끌고 갔다.
  그러자 학자가  또 단두대 앞에서 큰  소리로 웃었다. 왕은 그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났다.
  「이 무례한 놈 같으니라구! 네가 나를 조롱하는 거냐? 웃기는 왜 웃느냐!」
  「황송한 말씀이오나 폐하의 어리석음이  아직도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
문에 웃었습니다.」
  「너희들을 죽이면  나라가 소란해질까봐 이웃 나라로  보내어 죽이라고 했더
니, 너희들이 그 앙심으로 적국의 왕을  충동질해서 우리나라로 쳐들어오게 했으
니 비록 나중엔 나라가 망할지라도 너희들의 죄부터 먼저 다스리겠다.!」
  「핫핫핫, 나라가 흥망의 기로에 서 있는데, 일시의 오해와 흥분으로 저희들을 
죽이고 이후 나라가 망하면 무엇이 시원하겠습니까? 그런 폐하의 어리석음이 어
찌 우습지 않겠습니까?」
  「너희들을 살려봤자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이냐?」
  「저희들은 이나라 백성입니다.  폐하께 아무런 공분도 사원도 없습니다. 저희
들을 살려주시면 군대 한명  동원하지 않고 적국의 왕을 충동질해서 우리나라로 
쳐들어오게 했으니 비록 나중엔  나라가 망할지라도 너희들의 죄부터 먼저 다스
리겠다!」
  「핫핫핫, 나라가 흥망의 기로에 서 있는데, 일시의 오해와 흥분으로 저희들을 
죽이고 이후 나라가 망하면 무엇이 시원하겠습니까? 그런 폐하의 어리석음이 어
찌 우습지 않겠습니까?」
  「너희들을 살려봤자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이냐?」
  「저희들은 이나라 백성입니다.  폐하께 아무런 공분도 사원도 없습니다. 저희
들을 살려주시면 군대 한명 동원하지 않고 적국의 대군을 물리쳐서 저희들의 능
력과 충성을 증명하겠습니다. 그런 유능한 저희들을  공연한 오해로 죽이고 나라
를 영영 구하지 못하고 빼앗긴다면 그런 어리석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왕은 또 학자의 말을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대신들에게 물었다.
  「아마 학자가 말한대로,  자기 나라의 사소한 죄인을 처벌 못하고  남의 나라
로 보낸 것이  본국으로 말하면 무력한 증거요. 그렇다면 어떤  모략이라고 적국
이 오해했다는 것이 사실일까 합니다.」
  한 신하의 말을 들은 왕은,
  「그럼 너희들의 충성과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잠시 연기한다. 그러나 실패
한다면 국왕을 속인 죄로  사형에 처하고, 다행히 성공하면 큰 훈상을 내리겠다.

하고 그들에게  엄중한 감시병을 붙여서  적진으로 보냈다. 학자는  칼하나 들지 
않은 맨손으로 을국의 군대를 지휘하고 쳐들어오는 왕 앞으로 나서며 껄껄 웃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을국의 왕은  학자와 부자가 적군의 앞장을  서서 오는 것을 보고,  더구나 그 
대담한 웃음을 띄우며 손을 흔드는 대담하고도 자신만만한 태도에 놀랐다.
  「앗! 저놈들이 또 나타났다. 활을 쏘지 마라! 저놈들을 죽이면  나라가 멸망할 
테니 빨리 군대를 돌려서 본국으로 가자.」
하고 싸움을 그만두고 후퇴해버렸다.
  「핫핫핫, 내 지혜의 혀끝 하나로 백만대군을 물리쳤다!」
  학자는 통쾌히  웃었다. 이렇게 적군을  돌아가게 했기 때문에  왕은 약속대로 
그들에게 큰 훈상을 내렸다.
  「여보게, 돈이 최고라고 자랑하던  친구, 내 지혜가 자네 돈보다 위대한 힘을 
발휘했어. 그뿐 아니라 나는 자네 생명을 세 번이나 구해준 은인이다. 이래도 돈
이 낫다는 생각을 하겠나?」
  이 말에 대해서 부자는 머리만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이젠 자네가 내게 항복했지?」
  「내가 왜 자네에게 항복했단 말인가?」
  「뭐? 아직까지도 고집이야? 너는 약속을 어길  배신자가 될 테냐, 배은망덕을 
할 작정이냐?」
  「내가 자네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라, 돈이 지혜에 진 것이지.」
  「하하하, 허긴 그래.  그럼 진 돈이 이긴  지혜에게 약속한 재산의 반을 바쳐
라. 하하하.」
  학자가 또 통쾌하게  웃었다. 바보 부자는 가난한 학자에게 재산의  반을 갈라
주었다.
  「이젠 나도 너와 같은  부자다. 다시는 가난한 학자라고 업신여기지 마라. 그
리고 너보다  얼마든지 지혜가 더 있는  나다. 바보는 네 돈으로도  내 지혜로도 
못고치는 네 병이다.」
하고 학자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태조 이성계의 궁술
  이씨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전설이 많다.
  손님과 같이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천정에 기어가는 쥐를 활로 쏘았더니 쥐와 
화살이 한꺼번에 떨어졌는데, 쥐는 다친 데  없이 그대로 기어가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 타고난 소질도  있었겠지만, 언제나 틈만 있으면 빈 활을  당겼다간 놓고 
당겼다간 놓곤  했다. 그런데 하루  저녁은 그냥 당기느니보다  무엇이든 목표를 
정하고 당기고 싶었다.
  마침 사랑 앞 멀리 보이는  농가의 창문에서 불빛이 반짝반짝 새어 나오고 있
었다. 이성계는 불빛을 겨냥해서 빈 활을 당겼다.
  「바람도 없는데 왜 불이 꺼질까?」
  의아해 하는 식구들의 말소리가 나더니 곧 불을 다시 켰다.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설마 빈 활로 쏘아서 꺼진 것은 아니겠지.)
  그러자 이성계는 또 활을 당겼다. 또 불이 꺼졌다.
  세번째 또 활을 당겼다.
  「웬일이야? 자꾸 불이 꺼지는 게.」
  그제서야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성계는 은근히 자랑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그는 사냥을 갔다. 날이 저물어 어느 산가에서 쉬
게 되었는데, 그 집 주인이 이성계의 활과 살을 보더니 말했다.
  「대단한 활이외다. 내일은 우리 일찍이 일어나 활이나 한 번씩 쏩시다.」
  이성계는 속으로 노인의 말이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주인 영감과 이성계는 활을 들고  집 뒤 언덕으로 올라갔다. 풀밭 
저쪽에는 주인 할머니가 보자기를 펴서  양 발가락 새에 끼우고 두 손으로 벌려 
펴들고 서 있었다. 그것이 과녁이었다.
  「제가 먼저 쏘지요.」
  「아닙니다. 제가 먼저 쏘겠습니다.」
  활에서는 나중 쏘는 게 예의이다. 나이 차례도  있고 해서 이성계가 먼저 쏘았
다.
  위! 소리를 내며  시위를 떠난 화살은 할머니가 잡은 보자기를  약간 건드리고 
떨어졌다.
  「허 대단한 솜씨입니다.!」
  영감이 칭찬을 하는데 할머니가 소리를 치며 야단이었다.
  「삼대째 내려오는  남의 소포(헝겊과녁)를 한  방에 흠집을 냈으니  이러다간 
보자기가 안남아나겠수다.」
  「여보, 그만 둬요. 그까짓 소포를 가지고 뭘 그러오. 자, 임자는 어서 다시 과
녁이나 잡아요. 이번엔 내가 쏠테니...」
하고 영감은 마누라를  나무랐다. 마누라는 시무룩한 채 다시 소포를  펄쳐 들었
다.
  이번엔 주인 영감이 쏘았다. 무서운 기세로  날아가던 화살이 과녁을 머리카락
만큼 남기고 톡 떨어졌다. 실로 귀신 같은 솜씨였다.
  이성계는 그만 노인 앞에 넙죽 엎드렸다.
  「몰라뵈었습니다.」
  「아니 뭐, 별 것도 아닙니다. 장군이야말로 앞으로 하실 일도 많고 하니 부디 
보중하셔서 대업을 이루십시오.」
  그런 일이 있은 후 이성계는  더욱 조심성 있게 자기 힘을 길러 포부를 펼 기
틀을 닦았다.
  별것 아닌데 행하기는 어려워
  옛날 어느 시골에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의 삼대가  모두 한 집에 살고 있었
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마지기는 손바닥만한데 비해 식구는  많아서 해마
다 양식을 걱정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더구나  그해는 가뭄이 들어 농사가 흉년
이었으므로 정월을 넘기기 전에 벌써 양식이  딸리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올해는 벌써 양식이  다 떨어져가니 어찌했으면 좋을지  정말 큰일이로구나. 
내 평생 술이나 마시고 노름이나  해서 허랑 방탕하게 지낸것도 아니거늘 단 한 
번도 허리 펴고  살아보지 못했으니 이 무슨 팔자인지 모르겠구나.  우리 아버지
도 또 할아버지도 모두가 그렇게 살다가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언제 한번 배불리 
먹으며 살아볼런지, 내가 요모양 요꼴로 가난을  물려주게 되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구나. 언제쯤이면 이런 신세를 면하게 될지...」
하고 한탄을 하는 것이었다. 아들이 생각해보아도 지당한 말씀이다. 땅이 적으니 
소득이 적고 곡식이 딸리다보니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어렵다. 그러나 먹
고 살기도 어려운 형편에 땅을 살 수가 있겠는가.
  해가 아침에 뜨고  저녁에 서산으로 넘어가듯 가난을  헤어날 길 없는 팔자였
다.
  「오늘 모자라면 내일  역시 또 모자라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생활하니 가난
을 대대로 못 면하는 거예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도 뾰족한 수가 없어 골치를 앓고 
있으니 열 두살 난  손자놈이 불쑥 하는 소리였다. 그 손자  녀석은 머리가 영리
해서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혼자 서당 마당에서 한 두자 얻어 들
은 글이 지금은  제법 글줄이나 읽었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른스럽고 점잖
았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러나 옳긴 하지만 양식이 모자라는 것은 사실인데 달
리 도리가 있어야지.」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항상  도리가 없다 하시는데, 그것이 안된단 말입니다. 
하면 되지 해서  안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낡은 생각이 있기 때문에 
될 것도 안되는 거예요. 제가 살림을 한다면 그렇게는 안 할 거예요.」
  「그럼 어디 말 좀 해보아라.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한번 들어나 보자.」
  그러나 아들 녀석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알면 무얼해요.  그대로 행하지 않는데  제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고치지 
못할 거예요.」
  「그럼 어디 한 번 고쳐 보아라.」
  「고치는 것도 좋지만 누가 저의 말을  들어주나요? 우선 할아버지, 어머니 여
러 어른들이 계시는데,  제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소용
이 없잖아요? 만약 할아버지  아버지가 정말로 가난을 물리치고 부자가 되고 싶
다면 제게 모든  살림을 맡기시겠다고 조상님 앞에, 또 천지신령께  맹세를 하세
요. 그렇다면 제가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하고 아주 맹랑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지만 달리 도
리가 없을 뿐 아니라 어디 이놈이 어떻게 하는가 두고 보자 하는 호기심도 있었
기 때문에 살림을 맡겨 보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책력을 펴고 길일을 잡자, 어머니가 마당을  깨끗이 쓸고 난 후 냉
수를 한 그릇 떠왔다. 그들은 엄숙히 조상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모년 모월 모일 모시,  현손 아무개는 조상님 영전에 고하나이다. 저의 힘이 
부족하였던지 아니면 저의 사주팔자가 기박했던지 살림살이가 이토록 어려워 먹
고 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조상님 제사마저  궐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득이 
효손으로 하여금 살림을 대행시키게 되었사온즉 조상님께서는 저의 딱한 사정을 
굽어 살피시어 부디 저승에서나마  도와주시옵고 집안 살림을 다시 이루고 가정
을 바로 잡게 하여주시옵소서.」
  먼저 할아버지가 사죄를 하고 물러나니 손자가 새옷을 갈아 입고 분향하며 말
하기를,
  「어린 제가 할아버지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장의 자리에 서게 됨을 용서해 주
옵소서. 제가 자신의 무능을  돌보지 않고 이 무거운 짐을 맡게  됨은 오직 우리 
집안을 다시 일으켜 보려는  성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오니 부디 조상님께서는 가
문의 장래를 생각하여 많은 힘과 도움을 주시옵소서.」
하는 말소리와 태도가 의젓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말을 마친  어린 가장은 온 가족 수십  명을 서열에 따라 한줄로 서게 
하고 엄숙하게 가훈을 선언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첫째  조석 식사는 일정한 시간을 정
해서 그 시간에  먹기로 합니다. 그때 그자리에  없는 사람은 밥을 굶게 됩니다. 
이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정을 두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둘째, 밖에 나갔
던 사람은 절대 빈손으로 집에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벼이삭, 수수이삭, 하다 못
해 없으면 나뭇가지, 풀잎사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다만 무엇이라도 들고 와야
지 빈손으로 오는 사람은 집에 들이지 않겠습니다. 셋째, 밤에 잠자리에 들면 어
떻게 하면 우리 집안이 잘 살 수  있을까 여러분들께서는 연구를 해주십시오. 그
리고 내가 우리 집안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주십시오.」
  별것이 아니다. 부자가 되는데 별난 방법이 있을 줄 알고 잔뜩 기대했으나, 얘
기를 듣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까짓  것쯤이야 무엇이 대수로운 일이야. 
아이 녀석이 하는 일이 뭐가 별 수 있을라고.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 쉬운 일을 막상  하려고 하니 쉽지가 않았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
고 싶으면 먹고, 제  마음대로 하다가 갑자기 시가을 지켜 밥을  먹어야 하니 자
연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야 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젖은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처음  얼마동안 식구 가운데 몇 사람은 자주 끼
니를 굶었다.
  그러나 그것도 습관이  되니 식사 시간이 되면  일제히 밥을 먹어치우게 되었
다. 그리고 하나같이 모두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또 손이 남아 돌아가면 남의 일
을 거들고 품삯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여인네들은  전 같으면 하루 종일 부엌에
서 밥치닥거리  하느라고 매달려 있어야만  했는데, 시간이 남아  돌아가니 노는 
입에 염불이라고 그 시간에 길쌈을 메고 누에고치를 길렀다.
  할아버지도 마을 나들이 갔다  돌아올 때면 길가에 떨어진 막대기라든가 돌멩
이, 지푸라기 하나라도 갖고  들어왔다. 할머니도 작은 삽을 들고 다니면서 들에
서 나물을 캐고 나물이 없으면 길가의 풀이라도 뽑아오고 하다 못해 개똥이라도 
담아오게 되었다.
  곳간에 쥐드나들 듯 들락날락 하던 아이들도  봄이면 보리이삭을 줍고, 가을이
면 벼이삭을  주워온다. 또 냇가에서 피라미도  잡아오고, 메뚜기도 잡아오고 또 
그것도 없으면 담배꽁초라도 줍고,  죽은 쥐꼬리라도 들고 온다. 이렇게 되니 차
츰 목적의식이 생겨서 나무토막은  토막대로 모아 연료로 쓰게 되고 지푸라기와 
풀잎사귀, 개똥과  죽은 쥐꼬리등은 밑거름으로 사용했다.  또 돌은 돌대로 쌓아 
작은 산을 이루니 그 해 가을에는 곳간에  벼이삭이 가득차고, 뒤뜰에는 땔 나무
가 쌓였다. 또 다락에는 명주와  삼베가 필로 가득 쌓였다. 큰 돌은 골라서 울타
리를 뜯어 돌담을 쌓고 작은  돌은 낮은 땅을 메우니 집안팎이 깨끗하고 보기가 
한결 좋았다. 이렇게  하자 온 집안이 부지런하고 알뜰하고 씩씩한  협동의 정신
으로 가득찼다.
  섣달 그믐날 일년의 결산을 하니  한 해의 살림을 꾸려나가고도 남을 만큼 양
식과 옷감이 풍족했다.
  그들은 비로소 한 사람 한 사람 조금씩 더 일하고 아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가를 깨닫게 되어 다음 해는 더욱 기쁜 마음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기를 몇  년, 그 동안 모은 돈으로 논도  사고 밭도 살 만큼 되었다. 
그 어린 가장은 다시 가족회의를 열어서,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여러  어른과 아우들, 이제 이만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는 기틀을 잡았습니다. 이제 말하지 않아도 모두 일하게 되었고, 서로 아끼
며 도와가면서 살게 되어 이젠 우리 집안  살림에도 틀이 잡혔습니다. 이 돈으로 
논과 밭을 사십시오. 또 종이와 붓을 사서 어린 아이들은 공부를 시킵시다. 저도 
이제 가장 노릇은 그만하고 공부를 해야겠어요.  그러니 늙으신 할아버지는 그만 
쉬시고 아버지께서 살림을 맡아 하십시오. 그동안  보아서 많이 배우셨을 테니까
요.」
하고 가장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할일 없는 녀석
  옛날에 인천항이 제물포라는 이름으로  개항되었을 때 날마다 새벽만 되면 거
리를 샅샅이 누비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
다고 볼일이 있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는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빠지
지 않고 계속하여 거리를  누비고 다녔으므로 어느날 누군가가 그에게 물어보았
다.
  「보아하니 당신은 무슨  볼일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매일  하루도 빠짐없
이 거리를 쏘다니니 대체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예, 이 넓은 바닥에  돈이라도 떨어져 있을까 하고 다니지요. 하루에도 이렇
게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또  많은 돈이 거래되니 혹시 누가 돈이라도 빠뜨릴지 
알겠오? 그러나 여태까지는 재수가  없어서 그런지 아직 한 번도 주워보지는 못
했오.」
하고 대답하였다.
  이 이야기가 한 입  두입 건너 온 거리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리고 이 사나이
는 시내의 명물이 되어 그가 지나갈 때면 으레,
  「저기 그 녀석이 지나가는 구먼. 멀쩡한 녀석이  할일 없이 돈이나 주우러 다
니다니!」
하며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고 킬킬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지 안
듣는지 그는 매일을 하루같이 이 길거리를 해메고 다니는 것이었다.
  어느 일본인 상점의 회계원이 그 꼴을 보고 슬그머니 골려 줄 생각을 했다.
  그는 신문지를 돈처럼 오려서 돈 크기로 잘랐다.  그것을 한 뭉치 묶어 신문지
에 싸놓고보니 영락 없는 돈 뭉치 같았다.
  그는 그것을 금고 속에 넣고 자물쇠로 잠그었다.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서 그는 그 사나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같은 시각에 사나이가 그자리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얼른 금고  속에서 신문지 뭉치를 꺼내서 던졌다. 사나이는  사방을 두리
번거리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는 얼른 그  돈뭉치를 주워 바지가랑이 속에 
감추는 것이었다.
  (저놈이 돈인가 하고 주워갔다가 돈이 아닌 것을 알고 놀라는 꼴좀 보고  싶구
나.)
  그는 신이 나서 아침 밥을 한 그릇  얼른 비우고 사무를 시작했다. 장부정리도 
하고 주판도 놓고 하다가 돈을 쓸 일이 생겨서 금고 문을 열었다.
  어제 하루 들어온  돈을 싸둔 신문지를 펼쳐  보았더니 그것은 신문지 뭉치였
다.
  (아이구, 이 일을 어쩌나, 내가 바꿔 던졌구나!)
  그는 얼굴이 샛노랗게  되어 정신 없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찾아 다녔지만 
이미 그 사나이의 그림자는 볼 수가 없었다.
  기우
  기나라는 주시대에 지금의 하남성 근처에 있던 나라이다.
  그 기나라에 한 사내가 있었다.
  이 사내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그 걱정이란 다름 아니라,
  (만일 내가 살고 있는 이 천지가 무너진다면, 나는 갈 곳이 없다.)
는 것이었다.
  그는 그 걱정 때문에 밤에는  잠도 못자고 먹은 게 넘어가지도 않는 형편이었
다.
  한편 이 사내가 이렇듯 걱정하여  밥도 못먹고 잠도 못자는 것을 걱정하는 다
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그 사내에게 가서 알아듣게 설명하려고 했다.
  「이 사람아,  이 천지는 허물어진다거나 하는  곳이 아닐세. 하늘에는 공기가 
가득차 있는데 말일세. 이 세상에 공기가 없는 곳이란 없어요. 자네가 자고 먹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다  공기 속에서 하는 거야. 그러니까 하늘  속에서 하는 것
이나 마찬가지지. 그런데 그 하늘이 왜 붕괴된다거나 한단 말인가.」
  「거짓말 마라.  하늘이 다 공기라면 해와  달과 별 따위가 왜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떠 있단 말이지?」
  「이 사람아, 해나 달이나 별도 역시 자네나 나처럼 하늘 속에 있는거야. 혹시 
떨어진다 해도 자네를 해치지는 않을 테니 걱정일랑 말게.」
  「그럼 왜 그런 속에서 땅덩어리는 무너지지 않지?」
  「이 사람아. 대지란  말일세. 흙이 쌓여 이루어진 것일세.  그것이 사면팔방에 
꽉 차서 땅 없는  곳이란 없어. 자네가 뛰거나 달리거나 무슨  짓을 한다해도 역
시 땅 위에 있는 거야. 어째서 그런 땅이 무너질 걱정을 하는 건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걱정이 풀린 사내는 가벼운 기분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뻐했고, 그에게 설명해준 사람도 즐거웠다.
  열자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천지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설명한 사람도 역시 틀렸다.  무너질지 무너지지 
않을지는 우리가 모르는  일일 뿐이다. 그런데 무너진다는 걱정을 한  사람도 일
리가 있고,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므로 삶은 죽음을 모르
며 죽음도 삶을  알 수 없다. 지난날은 앞으로 올  미래를 점칠 수 없는 것이다. 
천지가 붕괴한다 안한다를 우리가 어찌 알아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라고 한 말에서 기우 또는 기인우천이란 말은 여기서 비롯된 말이다.
  실패를 한 토정이  하루는 원님 행차길에 그 앞으로 뛰어들었다.  과연 원님은 
노발대발하여 그를 꽁꽁 포박하여 동헌으로 끌고  가서 형틀에 올렸다. 옳다구나 
이제 됐구나,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던 토정이었지만, 원님이 그의 풍채
를 보고 예사 사람이  아님을 알았던지 다만 몇 마디 꾸짖고는  풀어 주었다. 두 
번씩이나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처럼 어려운 일은 내 생전 
처음 보겠군, 하면서 매맞기를 단념했다.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문전 걸실을 하며 팔도 강산을 두루 유랑하던 김 삿갓은 어느해 늦은 봄 함경
도 길주땅에 다다랐다
  어느곳이건 거지 꼴을 한 방랑 시인을 반겨  줄 곳은 없겠지만, 길주라는 곳은 
더욱 더 풍속이 아름답지 못해서, 옛날부터  지나가는 길손에게 잠자리를 제공하
지 않는 것을 무슨 전통처럼 여기고 있었다.
  「모두 허씨뿐이구나. 허씨 일족이 모여 사는 곳인 줄은 몰랐구나. 어디서든지 
잠자리를 구하고, 밥 한 술이라도 얻어 먹어야 할 텐데...」
  그러나 온 고을을 다 뒤지고 다녔어도 한 집도 허락하는 집이 없었다.
  「아무리 과객을 꺼리는  인심이라고 해도, 열 집에 한 집쯤은  마지못해 하면
서라도 재워 주는 수가 있는 법인데, 정말 이렇게 철저한 지방은 처음 보겠구나.

  김 삿갓은 이렇게 혼잣말을 지껄이면서 밤을 도와 북으로 북으로 자꾸 올라갔
다.
  이름은 길주,  길주 하지만 결코 길한  고을은 못 되며 성은  모두 허가이지만 
허가하는 법이 없구나.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이런 풍자시를  읊은 김 삿갓은 일로 북상하여 이윽고 명
천땅에 이르렀다.
  이 지방은 옛날부터  명태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여기 역시 
길주 못지 않게 인심이 고약해서 그 흔한 북어 꽁지 하나 주는 사람이 없었다.
  「흥, 이름이 너무 좋은 탓인가...」
  명천, 명천 하고 부르지만  사람들은 밝음이 없고 어전, 어전하고 자랑을 하지
만 밥상에는 북어 꽁지 하나 없구나.
  더 위로 올라가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그래서 단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 봄은 다 가고, 초여름의 숨막히는 더위가 땀을 뻘뻘 흘리게 했다.
  「아, 강이 보이는 구나. 가서 멱이라도 감고 가자.」
  김 삿갓은 강변에 이르러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물 속으로 들어가 한바탕 몸
을 닦고 씻고 했다. 몇 달 만에 목욕을 하는 것이던가.
  물에서 나오자, 이번에는 한쪽에 팽개쳐 놓았던  옷을 집어다가 손으로 주물러 
때를 빼고, 바윗돌에 비벼 문질러서 맑은 물에서 행구었다. 빨래를 하는 것이다.
  워낙 찌들어서 잘 빨아지지 않았으나, 겉에 묻은  때와 땀내는 어느 정도 가셨
으므로, 옷을 햇볕 쬐는 바위 위에 널어 놓고, 그는 희 모래밭에 앉아서 두 다리
를 쭉 뻗었다. 머리에 삿갓을 쓰고 있으므로  지나가다 누가 보아도 고기라도 잡
고 있는 줄 알지 벌거벗고 앉아 있는것인 줄은 모를 것이었다.
  머리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여름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올라기기 묘묘한 
산봉우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허운다기봉이라」
  김 삿갓은 옛 시의 한 구절을 중얼거리며 스스로도 한 수 읊어 보았다.
  한 봉우리, 두 봉우리, 서너 봉우리. 다섯 봉우리, 여섯 봉우리, 일곱 여덟 봉우
리.
  잠깐 사이에 다시 생기는 천만 개의 봉우리 구만리 장천이 모두 구름 봉우리.
  옷이 다 말랐다. 그는  옷을 주워 입고 언덕 위의 깍아지른  듯한 절벽 밑으로 
갔다. 필낭에서 붓과 먹을 꺼내고 넓적한 돌을 주워다가 먹을 듬뿍 갈았다. 그리
고 조금 전에 읊은 시를 그 절벽에다 써 내려갔다.
  다 쓰고 나서 김 삿갓은 혼자서 흥에 겨워,
  「됐다, 됐어! 비에 씻겨 없어지기  전에 누군가 나같이 할 일 없는 석공이 지
나가게 되면 혹시 새겨 줄는지도 모르지.」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글이 참으로 좋구료. 내가 석공이 아닌 게 못내 섭섭하외다.」
  김 삿갓은 후다닥 뒤를 돌아보았다. 점잖게 생긴  중년 선비가 절벽에 쓰인 글
을 보면서 감탄을 하고 있었다.
  「구름이 하도 기괴하길래, 하운다기봉을 읊어 본 즉경입니다.」
  김 삿갓은 자랑도 아니요, 겸손도 아닌 이런 말로 대꾸를 했다.
  「산수에는 하긴 즉경이 으뜸입니다. 나 역시 풍류깨나 즐기는데요.」
  「그럼 선생님께서도 산수를 한 수 읊어 보시지요. 붓은 여기 있고, 절벽엔 아
직도 여백이 많습니다.」
  서로 인사도 없는 사이였으나, 김 삿갓은 이렇게 권해 보았다.
  「아이구, 아니올시다. 저야, 어디 저런 글과 견줄 수나 있겠소.」
  중년 선비는 이렇게 겸손을 부리며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이 근처에 사는 최백담이란 사람이외다. 존명을 알 수 없을까요?」
  「백담이라면 필시 아호이겠군요. 저는 이름도 호도 없는 사람입니다. 성은 김
가인데, 삿갓을 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김 삿갓이니 김립이니  하는 말
을 듣고 있습니다.」
  「오라. 바로 선생께서 그  유명한 김 삿갓이시구료. 이거 정말 일부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기회를 우연히 만났소이다.  선생의 존명은 익히 듣고 있소이
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김 삿갓도 진심으로  자기를 반겨 주는 사람을  만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
다. 이래서 단박에 두 사람은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이렇게 되니 피차 풍류객으로서 그냥 첫인사만 주고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자, 어떻습니까? 삿갓 양반, 한 수 부탁드립니다.」
  「글쎄요, 그럼 운을 부르시지요.」
  「흐를 류, 경치를 소재로 하지요.」
  「좋습니다. 한번 불러 보지요.」
  산을 칼 같은  기상으로 하늘 위로 치솟으며  물은 병정들의 아우성 소리처럼 
땅을 흔들고 흐르도다.
  「음, 과연 삿갓 양반의 시풍의 그대로 드러나는군요.」
  최백담은 진심으로 탄복하여 마지 않는 것이었다.
  「자, 이번엔 최선생 차례입니다. 제가 드리는 운은 돌아올 회자입니다.」
  서로 한 구씩  지으면 그것이 대구가 되는 것이다. 최백담은  한동안 생각하더
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산은 강을 건너가려고 강 어귀에 서 있고 물은 돌을 뚫으려고 돌 머리를 돌고 
있도다.
  「역시 좋군요.」
  김 삿갓은 무릎을 치며 칭찬을 했다.
  「대단치 않습니다.」
하고 최백담은 겸손의  말을 했으나, 내심으로 스스로 생각해도 잘  지었다고 느
껴지는 모양이었다.
  김 삿갓이 한 마디 했다.
  「하지만 선생,  그 욕자를 불자로 갈고,  장자를 나자로 바꿔  보면 어떨가요. 
그것이 더욱 자연의 마음에 가깝지 않을까요?」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해 강  어귀에 서 있고 물은 독을 뚫기 어려워 돌 머리를 
돌아가는구나.」
  「암, 그렇군요. 정말  꼭 들어맞습니다, 그려. 글자  한 자씩 바꾼것이 이렇게 
큰 효과를 낸다는 것은, 실로 새삼 놀랄 일인데요.」
  최백담은 진심으로 기꺼운 모양이었다. 김 삿갓도  그의 겸허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보통 자기가  지은 시를 수정받으면 고맙게 생각하기에 앞서  고깝게 여
기기가 일쑤인 것이다.  그러나 최백담은 솔직하게 자기의 시가 김  삿갓이 고쳐 
부른 것보다 못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삿갓 선생,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갑시다. 가서  한잔 들면서 좋은 말씀 듣고 
싶습니다.」
  김 삿갓도 마치  지기를 얻은 듯하여 쾌히 승낙했다. 그래서,  길주, 명천 이래 
계속 헐벗고 굶주리기만  했던 그에게도 이날부터 푸짐한 식사와 술,  그리고 편
안한 잠자리가 마련되었다.
  백정 박치수와 어사 어유룡
  영남 지방의 대읍, 진주에 박치수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조상 때부터 백정 노
릇을 해온 그인지라 돈은 무진장 많지만 죽기 전에 한번 벼슬을 하고 죽는 것이 
그의 평생 소원이었다.
  마침 진주 감영의 어떤 이방이  나라돈을 횡령한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자 박
치수가 대신 그 돈을 물어 주었다.
  이방은 그야말로 꿈만 같은 일이었다.
  (이제 나도 양반이 되었구나! 어흠,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조상 때부터 양
반놈들한테 천대를 받아 왔는데 내가 그 양반이 되었으니 나도 이제부터 행세를 
해봐야지...)
  그러나 그 진주  내에 행세깨나 한다는 양반들이  백정이 좌수를 했다고 하여 
모두 들고 일어났다.
  박치수는 가산을  정리해서 충남 서산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곳에서는 아무도 
박치수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좌수 행세를 하기가 편했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이번에 삼남 지방으로 내려오는 어유룡 어사가 자기와 이
종간이라고 말했다.
  웬 낯선 나그네가 마을에  들어섰는데 옷차림이 허름하고 터덜터덜 걷는 꼴이 
먼길에 무척 지친 듯하였다.
  그는 지나가는 농부에게 박좌수의 집을 물어 그 집을 찾아갔다.
  저녁이 되어 다른 손님들이 다 흩어져 간 뒤에 이 나그네와 주인은 사랑에 마
주 않았다. 손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인장께서는 복도 많으십니다  그려. 좌수도 하시면서 또  어유룡 어사하고
도 친척이시라니...」
  이 손님이야말로  장본인 어유룡 어사였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  그런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왔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주인 박 좌수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점잖게 말했다.
  「뭐, 변변치 않습니다.」
  어유룡 어사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허리춤에서 마패를 끄집어 
내보였다.
  박 좌수는 얼른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무심코  손님의 거동을 따라 살펴 
보니 마패가 아닌가?
  「아니?」
  그는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더니 온 몸을 사
시나무 떨듯 떨며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백 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소인을 죽여 주십시오.」
  그는 새파랗게 질려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리고 띄엄띄엄 그  사유를 밝히는 
것이었다.
  어사는 빙그레 웃으며 양반 행세가 그처럼 소원이라면 한번쯤 시켜 주마고 약
속하고는 이튿날 서산읍으로  들어갔다. 어사 출두를 한 뒤에 그는  동헌에서 호
령을 했다.
  「이 마을에 내 친척  어른이 계시니 들른 김에 인사를 가야겠소.  길 좀 안내
해 주시오.」
  「그리하십시오. 박 좌수님이 친척이시라더니 과연 그러시군요. 저희들이 모시
겠습니다.」
  원은 즉각 채비를 차리게 한 다음에 온 육방 관속들이 다 따라 나섰다.
  박 좌수의 집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소문대로 어유룡 어사가  인사를 하
러 온다니 이 얼마나 큰 구경거리이겠는가?
  서산 읍내의 모든 유지들을 비롯해서 동네 조무래기, 아낙네, 떠꺼머리 총각들
까지 아침부터 박좌수네 넓은 집을 찾아왔다.
  정작 본인인 박 좌수는 사랑에  들어 앉아 가슴을 조이며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일이 무사히 잘 끝나야 할 텐데...  공연히 어사님의 이름을 팔고 다녀서 어떤 
벌을 내리지나 않을는지)
  한편 밖에서는 하인들까지도 괜히  신이 나서 바지 가랑이에 바람을 일으키며 
설치고 다니는가 하면 계집종들은 음식을 장만하기에 부산했다.
  손님들은 안마당, 바깥마당에  꽉꽉 넘치게 모여서서 조금 후에 나타날  이 집 
어른의 치척, 암행어사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권력이 좋긴 좋은 것이여!」
  「이 사람들 좀  보게, 어사가 친척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구경하러들 오겠
나 말여?」
  밖에서 발돋음을 하며 들여다보던  한 늙수그레한 농부가 부러움에 찬 표정으
로 내뱉은 말이었다.
  「에라, 우라질놈의 이 내  팔자에는 그런 친척도 없네 그려. 못생긴 마누라라
도 팔아서 벼슬을 사든지 해야겠어.」
  「누가 아니랬나?  이미 우린 늙었으니  자식새끼들이나 부지런히 공부시켜서 
아들 덕이나 봐야지.」
  또 안마당과 사랑의 동네 유지들은 서로 체면을 차리느라고 고개만 넌즈시 끄
덕이며 수군거렸다.
  「과연 박좌수댁이 양반이여!」
  「아암! 말에 무엇하나. 나도 평소에 그런 생각을 했지.」
  이럭저럭 한낮이 지나자 과연 동구 밖에서부터 풍악이 울리며 어사 일행이 도
착하는 것이었다.
  원님과 관속들이 배행을 하는데 그위풍이 호화롭고  당당했다. 박 좌수는 사랑
방에 정좌한 채 그들을 맞았다. 어사는 아주 태연하게,
  「그 동안 가내 별고 없으시고 존체 금안하셨습니까?」
하며 넙죽 절을 하니 뒤따르던 관리들도 모두 황망히 머리를 조아렸다.
  박 좌수는 잔뜩 몸을  뒤로 젖힌 채 으젓하게 인사를 받았다.  밖에서 보고 있
던 사람들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하게 서서 이 굉장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여러가지 부산스럽고 거창한 대접이 끝난 다음 어사 일행이 물러가니 제일 살 
것 같은 사람은 박 좌수 본인이었다.
  그는 어유룡 어사가  어찌나 고마운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도량이 
큰 인물이라고 박 좌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에 서울로 갈 일이 생겼을 때 박 좌수는 새 집을 한 채 사서 어유룡 어사에
게 선물로 바치고 돌아왔다.
  이 어사도 이 일을 두고두고  우스갯 소리로 다른 사람에게 들려 주었다고 한
다.

  길가 나무에 옹이가 많은 까닭은
  산동지방에 사는 총각 장사방은  대대로 물려오는 선비 집안 출신으로 글공부
는 남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하였으나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장가들 엄두도 내
지 못하고 아까운 나이만 자꾸 먹어 가는 판이었다.
  그러던 중 만주지방에 행상을 하여  크게 부자가 된 한 집안에서 장사방의 총
명함을 소문으로 듣고  청혼하여 오니 신랑 집에서는  워낙 가난한 살림이라 한 
입 더는 것도 어디랴 싶어  통혼을 허락하고 그 즉시 처가집의 데릴사위로 장사
방을 들여보냈다.
  유식한 체하기를 좋아하는 장인 어른은 선비 집안의 사위를 맞은 것이 그지없
이 기뻤다.
  마침내 장사방이 만주에 도착하여 처가 식구들을  만나본즉 놀랍게도 장인, 장
모, 처남 할 것 없이 모두  혹이 하나씩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중에서도 장
모의 혹은 크고 보기 흉하도록 검으며 색시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어서인지 괴상
한 혹이 달려 있었다.
  (매양 굶어 쪼르륵거리던  배가 제때에 기름진 음식을  맘껏 먹는것은 좋으나, 
처가 식구들의 혹을 보면 저절로 밥맛이 떨어지는군)
  이렇게 속으로 중얼대며,  이틀 사흘이 지나도록 시무룩이 앉아 있을  뿐 집안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입을 열지 않으므로, 그 속을 모르는 장인은 또 장인대로,
  (저놈이 글을 읽는 선비 양반이라  하지만 전혀 무식한 놈이 아닌가 모르겠다. 
하긴 그럴 것이 밥술도 제대로 못 먹었을 놈이 무슨 공부를 얼마나 하였을 것인
가)
하고 사위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어떤 날 장인은 사위를 시험해 볼 양으로,
  「자네가 산동 태생으로  으레 글이란 글은 많이  읽었을 테니 세상물정을 잘 
알겠지?」
  「뭘요...」
  흥이 안 난 사위는 우물쭈물하였다.
  「그럼 내가 몇 가지 물을 테니 대답해 보겠나?」
  「예.」
  「기러기나 학이 소리내어 잘 우는 것은 무슨 까닭인고?」
  「그거야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 아닙니까?」
  장인 영감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나무가 겨울에도 푸른 까닭은?」
  「하늘이 그렇게 만들었지요.」
  유식한 체 나서기를 좋아하는 장인 영감은 큰 실망을 느끼며,
  「그럼 길가의 나무들에 큰 옹이가  많이 박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으로 그런 
것인가?」
  「하늘이 그렇게 만들었다니깐요.」
  사위의 대답이 한결같자 장인 영감은 장이 못마땅한 듯 사위를 흘겨보았다.
  「자넨 산동 양반이란 허울뿐이지 아는게 통 없군.  그래 글은 뭣 때문에 읽었
는가?」
  「...」
  「내가 가르쳐 주지. 잘  듣게. 에헴! 학이나 기러기가 울기를 잘하는  것은 목
이 길기 때문이요, 소나무가  겨울에도 푸르른 것은 속이 굳기 때문이며, 길가의 
나무가 옹이가 많은 까닭은 수레에 받쳐서 그런 것일세. 알아 듣겠나?」
  사위를 꾸짖으며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제서야 사위가 입을 열었다.
  「만일 이치가  그러하다면 개구리가 잘  우는 것도 목이  길기 때문이겠지요. 
대나무가 겨울에 푸르른  것은 속이 굳센 탓이며  더구나 장모님 뒷덜미에 붙은 
혹덩어리는 수레에 받친 탓이겠습니다 그려.」

  장가 밑천
  강령지방의 어느 고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고을의 수령은 퍽  현명한 사람
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옷을 갈아입고 미행을 하는데, 어느 집 처마끝에 이르렀을 때, 
집안에서 들려 나오는 소리가 적잖이 귀에 거슬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모두들 수령님을 훌륭한 분이라고 칭송하지만, 나한테야  무슨 혜택을 준 일
이나 있나.  나처럼 가난한 백성도 장가를  들 수 있는 정치를  베출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돈이 없어 장가를 못 든 노총각인 모양이었다.
  수령은 그날은 그냥 관가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튿날  부하를 시켜 그 집의 총
각을 불러 오도록 했다.
  수령은 총각이 무릎 꿇고 인사하기가 무섭게 큰소리로 꾸짖었다.
  「이녀석, 함부로  못된 소리를 지껄인 것은  무슨 배짱에서냐. 그렇게 장가를 
들고 싶으면 평소에  열심히 일하여 돈을 모았어야 옳거늘, 무슨  까닭으로 나를 
비방하는가. 괘씸하구나, 필시 일정한  작업도 없이 못된 짓이나 하고 다닐 것임
에 틀림없으렷다!」
  「아, 아니옵니다. 나리, 백번 죽을 죄를 지었사오나, 결코 나리님을 원망한 것
이 아니라 혼자 신세 한탄을 하다가...」
  「듣기 싫다! 신세  한탄이면 신세 한탄이지, 뭣 때문에  나까지 들먹거렸더냐. 
옳거니, 네놈이 그렇게 장가를 들고 싶어하는 것도  모두 음탕한 버릇이 있기 때
문일 게다. 그렇다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버릇없는 네 양물을  잘라 버려
야겠다. 여봐라, 이놈을 옥에 가두어라! 내일은 이놈의  야울을 자를 것이니 준비
를 하여 두어라!」
  수령은 이렇게 소리치고는, 가만히  부하를 불러, 온 고을에 이 소문을 퍼뜨리
도록 했다.
  다음날, 총각은 온 몸을 발가벗긴 채로 결박을  당한 뒤에 마당 한가운데로 끌
려 나왔다. 이때, 소문을 듣고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담 밖에 빙 둘러서서 
서로 똑똑히 구경하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어허, 왜들 그렇게 시끄러운고. 그렇게 구경들을 하고 싶다면 안으로 들어와
서 보도록 하여라. 이 기회에 음탕한 자의  말로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
도 좋겠지.」
  이를테면 일벌백계를  시행하겠다는 것인지,  수령은 이렇게 소리치고  부하를 
시켜 대문을 활짝 열도록 했다.
  이윽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와서 마당을 빽빽이 메우자,
  「자, 저 음탕한 놈의 양물을 벨 준비는 다 되었느냐?」
하고 수령이 외쳤다.
  「예이...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진 것으로 아뢰오.」
  「그럼 어서 시작하렷다.」
  「예이...」
  부하 하나가 길게 대답하고는 큰 칼을 휘두르면서 춤추듯이 달려나갔다.
  부하는 청년의 물건을 꽉 움켜 잡고 칼을 내리칠 자세를 취하다가,
  「어렵소. 이놈 봐라. 이  판국에도 네가 커지겠다는 것이냐?」하고 청년의 물
건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거의 추주검이 되어  벌벌 떨고만 있던 청년의 그것
이 불뚝불뚝 성을 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보고,  긴장해서 숨을 죽인 채  손에 땀을 쥐고 있던  여러 구경꾼들은 
일제히 웃음보를 떠뜨렸다.
  「으하하하...」
  「히히히힛...」
  웃음은 그치질 않고,  물건을 움켜잡은 그 부하는 잠시 어쩔  바를 모르겠다는 
듯 수령을 쳐다보았다.
  수령은 마당의 웃음 바다를 굽어보면서,
  「이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짓들인고! 여봐라, 어서 저 대문을 잠그고 한 사람
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여라.」
  「네이...」
  부하들이 달려가 대문을  닫아 걸었다. 수령은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찬 구
경꾼들을 내려다 보며 추상같은 호통을 내렸다.
  「무슨 버릇 없는  짓들이냐! 관가에서 벌을 주는 것을 보고  웃음보를 터뜨린
다는 것은 나라의 법을  비웃는 것이다. 엄중히 벌을 주고 있는  이 마당에 웃는
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에잇, 몹쓸 놈들, 저놈들을 모조리  곤장을 치거나 벌금
을 물리도록 하여라!」
  구경꾼들은 웃다가 울게 된 판국이라 저마다 벌금을 물겠다고 했다.
  「그러면 모두들 일률적으로  한 냥씩 내놓아라. 돈이 없는 자는  이름을 적어 
놓고 집으로 가서 돈을 가지고 와야 하느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돈을 내고 대문을 빠져 나갔다.  한쪽에서는 돈을 안 
가진 자가 옆 사람에게 한  냥만 빌리라느니 못 빌리겠다느니 시비를 벌이는 축
들도 있었다.
  하나씩 둘씩 빠져 나가 이윽고  벌거벗은 총각 하나만 그 큰 마당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고, 부하 한 사람 앞에는  벌금으로 징수한 여러 백냥은 족히 
들었음직한 돈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수령은 친히 마당을 내려와 그 돈 보따리를 청년에게 던져 주었다.
  「자, 이만하면 장가들 밑천은 되겠지?」
  이렇게 말하는 수령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거짓말도 머리가 둔하면 못한다
  호남성에 사는 한 젊은이는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으로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만큼 언제나 거짓말을 일삼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거리에서 이웃  노인을 만나자 그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젊은이
를 향해,
  「자네는 거짓말을 그럴 듯하게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 어떤가, 나에게
도 한번 거짓말을 해보게나.」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노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는 지금 볼  일이 바쁜데요, 나중에 한가할 때 재미있는  거짓말을 해드리
겠습니다.」
하고 급히 노인의 곁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그의 웃소매를 붙잡고,
  「여보게 뭇이 그리 급한가? 새털같이  많은 날에 볼 일은 좀 나중에 보고 한
마디만 해보게나.」
하고 졸랐다. 그러자 젊은이는 난처하다는 듯 노인을 바라보며,
  「정말 노인장도 딱하십니다. 나는  지금 급한 볼 일이 있단 말씀이에요. 조금 
전에 성 밖의  동호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바닥을 쳐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모두 그 호수에  유명한 자리를 잡으러 간다고  눈이 새빨개서 달려갔단 말입니
다. 저도 자라를 한 마리라도 잡으려고 지금  이렇게 뛰어가는 중인데 어느 하시
에 노인장과 거짓말을 즐길 여유가 있습니까? 제가 자라를 잡아온 후에 다시 찾
아 뵙기로 하죠. 그럼 빨리 가야 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고 노인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갔다.
  그러자 그 노인은 급히 그의 뒤를 쫓으면서,
  「나 좀 보게, 이왕이면 나도 함께  가세. 자라 요리야말로 천하일미거든. 나도 
가서 한 마리 잡아 오겠네.」
하고 숨이 턱에 차서 젊은이를 따라 갔다.  그러나 젊은이는 힘센다리로 어느 틈
에 노인의 눈앞에서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노인은 늦으면 한  마리도 차례가 오지 않을까봐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리며 
멀리 성 밖에 있는 동호까지 달려갔다.
  그러자 호수에는 멀리 저쪽 기슭까지 시퍼런 물이 넘실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호수 밑바닥을 말끔히 쳐내서  자라가 우글거린다는 젊은이의 말이 그제야 거
짓이었다는 것을 노인은  뒤늦게 깨닫고 갑자기 다리의  힘이 빠져 길가에 풀썩 
주저 앉아버렸다.
  이 젊은이의 머리는  매우 교묘했다. 거짓말도 머리가 둔해서야 어찌  남을 속
일 수 있겠는가?
  그가 거리를  지나고 있을 때 어느  집 위층에서 그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젊은이가 올려다 보니 그는 그 고을의 높은 벼슬아치였는데 젊은이를 불러 새우
더니 빙그레 웃으며,
  「너는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기를  밥 먹듯 잘한다는데 나를 속여서 아래층으
로 내려가게 할  자신이 있는가? 그럼 내 후한 상을  주리라.」하고 거드름을 피
웠다. 그러자 젊은이는 시치미를 떼며,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 같은 비천한 놈이 어찌  높으신 어른을 속일 수 있사
옵니까?」
하고 자신이 없는 듯 사양을 했다. 위층의 벼슬아치는 더욱 자신 만만하여,
  「자, 이것을 받아라. 네가 만일  나를 속일 수 있으면 그 은전을 가질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대신 매를 석대 맞아야 한다.」
하고 은전을 내던졌다. 젊은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위층을 쳐다보며,
  「그럼 분부대로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위층에 계신  나리를 속여서 아래로 내
려오시게 하는 재주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나리께서 아래층에 계실 경우에는 
얼마든지 나리를 속여서 감쪽같이 위층으로 오르시게 할 수는 있습지요.」
하고 말했다. 벼슬아치는 그  말에 서슴지 않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젊은이
와 마주 서며,
  「자 이제 내려왔다. 어디 네가 어떻게 나를  위층으로 올라 가게 하나 솜씨를 
보자꾸나.」
하고 말하자 젊은이는 천천히 몸을  굽혀 땅바닥에 떨어진 은전을 주워 들며 공
손히 절을 하더니,
  「나리, 그럼 이것을 감사히  받아 넣겠습니다. 나리와의 승부는 제가 이긴 것
입니다.」
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벼슬아치는 급히 그를 불러 세우며,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아직 너는 나를 속여서 위층으로  올려 보내지 못
했는데...」
하고 나무랐다. 그러나 젊은이는 태연히 그를 돌아보며,
  「무슨 말씀을! 저는 현재 나리를 감쪽같이 속여서  아래층으로 내려오게 하지 
않았습니까? 속여서 아래오 내려오게 하기 위해 그런  말씀을 올린 게지요. 이제 
또 무슨 수단이 필요하겠습니까?」
하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여유있게 사라져갔다.  위층에서 내려온 벼슬아치는 곧 
자기의 경솔함을 깨닫고 혀를 찼으며,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젊은이의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서문장의 기지
  옛날 중국의 서문장이란 사람은 꾀가 많고 장난을 잘하기로 유명한 이였다.
  그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여기 두어 가지 적어본다.
  어느날 서문장에게 계랸장수가 왔다.
  「한 개에 얼마씩이오?」
  「예, 보시다시피 알이 굵은 것이, 물건은 아주  상품입죠. 한 개에 3전씩 내십
시오.」
  계란 장수는 집안에 여자가 없음을 기회로 터무니  없는 값을 불렀다. 계란 하
나에 1전씩이면 족했던 것이다.
  「무슨 엉뚱한 소리야. 한 푼에 세 개씩은 줘야지.」
  소행이 괘씸해서 서문장도  덩달아 터무니 없는 말을 했다. 그러자  계란 장수
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는,
  「계란 껍질이나 사구려.」
  이렇게 화를 버럭 내었다.  돌아서 가버리려고 하는 계란 장수를, 서문장은 다
시 불러 세웠다.
  「아니, 여보 흥정을 하다 말고 그냥 가는 사람이 어디 있소.」
  「터무니 없는 말을 하니 그렇잖소.」
  「허, 이사람, 농담은 생전 못하겠군. 자, 달라는 대로 모두 드릴 테니 어서 파
슈.」
하고는 서문장은 계란을 하나씩 꺼내어 책상 위에 놓으며 헤아리기 시작했다.
  책상이 미끄러워서 계란을 놓으면 그대로 굴러내리니 서문장은,
  「여보, 두팔을 이렇게  동그랗게 깍지 끼어 가지고 계란이 굴러  내려가지 못
하게 막고 있으시오.」
  이렇게 이르고 그 안에 계란을 세어 넣었다.
  계란을 그 안에 다 세어  넣은 후 서문장은 그릇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란 장수는  꼼짝도 못하고 두 팔로  계란이 흘러 내리지 않게  막고 있었다. 
한참 지나도 주인이 나오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는데, 갑자기 사나운  개 한 마
리가 사납게 짖어대며 밖으로 뛰어 나왔다.
  계란 장수는 깜짝 놀라  팔을 떼고 몸을 피했다. 그 통에  책상위의 계란은 그
냥 굴러 내려 모두 깨어져 버렸다.
  그러자 안에서 서문장이 나왔다.
  「어디, 그 껍질을 1전에 셋씩 사볼까.」
  이렇게 빈정거리는 것이었다.
  어느날, 친구들이 서문장을 보고,
  「자네 말이야, 저기 저 두부집 색시가 제  손으로 자네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무엇이든 먹을 것을 사 먹게 하면 우리가 크게 한턱내지.」하고 내기를 걸었다.
  「그거 뭐 어려울 것 없지.」
  서문장은 즉석에서 응낙하고 두부집으로 갔다.
  「두부 네모만 주시오.」
하고 말하니, 두부집 색시는,
  「어떻게 가지고 가시겠어요?」
하고 묻는다.
  「자, 이 손바닥에 각기 두 개씩 얹어 주시오.」
  서문장은 두 손을  벌렸다. 색시는 그의 말대로 두부를 서문장의  두손에 나누
어 얹어 주었다.
  그러자 서문장은,
  「아차, 돈 꺼낼 것을 잊었군. 미안하지만 내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시오.」
  이렇게 말하는지라 두부집 색시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지갑을 꺼내어 돈을 헤
아려 가졌다.
  그때 마침 배 장수가 그 앞을 지나갔다. 서문장은 색시에게 다시,
  「미안하지만 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배를 두 개만 사  주시오.」하고 청했
다. 두부집 색시는 마지못해 돈을 꺼내 배 두개를 샀다.
  서문장은 다시 말했다.
  「배는 가지고 갈수 없으니 여기다 좀 맡겨 두겠소.」
  이렇게 해놓고 두부집을 나서니, 친구들은 꼼짝  못하고 한턱을 낼수밖에 없었
다.
  이렇게 지혜가  출중하므로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신모라고 하여 두려워하고 
존경했는데, 하루는 그가  퍽 이름 있는 한  절을 찾아갔더니, 중은 반색을 하며 
그를 맞이하며 포시장을 내놓고 사주를 해달라고 청했다.
  책을 받아 들고 펼쳐  보니 여러 명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모두 수십 냥
에서 수백 냥까지 적어  놓았으며, 아무리 적게 적은 것이라도 몇  냥 정도는 다 
적었다.
  그는 붓을 달라고 해서 시주 금액을 쓰기 시작했다.
  「일만」
이라고 단 두 자만 써 놓고는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붓을 내던지고 뒷간으로 달
음박질을 쳤다.
  중은 그가 일만이라고 쓰다 만  것을 보고 큰 돈을 시주하려는가 보다고 생각
하여 곧 아래 중들을 시켜 음식을 많이  차리도록 했다. 그리고는 서문장이 돌아
오기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도대체 돌아오질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뒷
간으로 가  보는 것도 실례이고 해서  그냥 내처 기다리고 있는데,  비로소 그는 
대접할 진수성찬이 다 준비되어 상에 오르자 그때서야 돌아왔다.
  「변변치 못하나마 맛이나 좀 보십시오.」
  중의 권유에 따라 서문장은 잘 차린 음식을 배가 터져라고 포식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서 잠시 쉬다가 배를  쓰다듬으며 돌아가려 하니, 중은 아까 
쓰다 만 것을 써 달라고 책을 내놓았다.
  「아차, 그만 깜박 잊었었군.」
하고, 서문장은 다시 붓을 들어 일만이라고 쓴 아래에 홀자를 하나 첨가했다.
  「일만 홀」
  홀이라 함은 분,  리, 호, 사 아랫자였으니, 일만  홀이라 해봐야 결국 한 분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장부는 대장부를 알아본다
  우암 송시열이 효종조의 재상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일이 생겨 평복 차림으로  경기도 장단 고을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
는데,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억수  같은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바쁜 걸음을 멈추고 길가의 작은 주막을 찾아 들어 사랑방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있자니, 문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곧 이어 웬 무관한 사람이 
주막집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한 방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
리게 되었다.
  한참 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던 무관이 문득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장기라도  꽤 둠직한 첨지일세 그려.  어디, 무료한데 한관 늘어놔 
볼까?」
  「예, 둬 보십시다.」
  송시열은 될수록 공손히 대꾸했다.
  「그래? 영감, 무슨 감투라도 쓴 모양인데, 대관절 무슨 벼슬이오? 보릿섬이나 
꽤 없앤 모양이군. 보리동지  했나? 이런 궁벽한 산골에서 보리둥지도 과분하지.

  상놈이 보리쌀을 팔아서 첩지 한 장 받아 가지고 면천운동을 했느냐는 뜻이었
다.
  송시열은 속으로 우습기만 했으나 끝내 꾹 참고 시치미를 떼었다.
  「예, 뭐 벼슬이랬자 대수로울 게 있겠습니까.」
  여전히 공손히  대답했지만, 그 음성이  우렁찬 데에는 무관도  역시 놀랐는지 
장기 두던 손길을 멈추고 송시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흠, 성명은 무엇인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물음이었다. 그래도 송시열은 다시금 공손히, 
  「예, 저의 성은 송나라 송 자이옵고 이름은 때 시 자에 매울 열자, 송 시열이
라고 합니다.」
  「엇?」
  무관은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당대의 세
도 재상을 몰라 본  죄는 어떤 가혹한 형벌로 다스려질까. 순간  그 무관의 얼굴
에는 천만 가지 후회의 빛이 스쳐 갔다.
  우암 송시열이  그 급변하는 안색을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무관의 
얼굴이 갑자기 다시 변색을 하더니 다짜고짜로 송시열의 따귀를 보기 좋게 후려
친다.
  「이 고약한 첨지  놈아! 네놈이 감히 네  멋대로 우암 송시열 대감의  존명을 
자칭할 수 있느냐? 우암  대감으로 말하자면 문장, 도덕, 식견이 지금 일세를 뒤
흔들고 계신  분인데, 네깟 영감장이가 송시열  대감이라니, 도무지 말이나 되는 
소리냐! 몹쓸 첨지놈 같으니라고. 당장 그 외람된 칭명을 취소하지 못할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문을 박차고 나가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빗속으로 말
을 달려 북쪽을 향하여 달음질을 치고 말았다.
  우암은 쏟아지는 빗줄기 속을 뚫고 산 모퉁이로 사라지는 젊은 무인의 기지를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실로 대장부의 기지로다. 천변 만화의 기지야. 능히 일을 맡길만한걸.」
  그는 주막집 주인으로부터 그  무관이 안주병사로 부임해 가는 아무개라는 것
을 알았다.
  우암은 일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오자, 그 즉시  사람을 시켜 그 무관을 불러들
였다.
  무관은 얼굴도 들지  못하고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몰라 했지만,  송시열은 오히
려 그를 칭찬하고 그의 벼슬을 높여 평안 병사에 임명했다.
  연애에 목말랐을 때와 돈에 궁했을 때
  한 가난한 선비가, 당장 누군가에게서라도 돈을  변통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기막힌 곤경에 처했다.
  이리저리 헤아려  본 끝에 한 친구에게  부탁을 해 볼 마음이  생겼으나, 차마 
마주 대하고 돈 부탁을 하기는 거북해서,
  (편지로 부탁을 해볼까)
하고 편지지를 펴 놓고 먹을 갈아 붓을 들었다.
  한데, 또 뭐라고 해야 덜 거북스럽게 들릴지 막막했다.
  (어떡한다? 내가 이렇게 글재주가 없을 줄이야)
  이렇게 자탄도 해보다가  우선 앞머리에 인사말을 몇 줄 적었다.  그런데 정작 
본론은 생각이  나질 않아 궁리 끝에,  인사말 다음은 허옇게 백지로  그대로 나 
두고, 다시 끝을 마무르는  인사말을 적었다. 그리고는 날짜를 쓰고 서명을 해서 
인편에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친구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면을 검토하던 후에 싱긋 
웃으며 돈을 넉넉히 보내 주었다.
  선비는 이 돈을  받아 아주 요긴하게 썼으며, 친구의 통찰력과  너그러움에 감
탄하여 여러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이 소문을 듣고 다른 한 친구가 그를 찾아가서,
  「용하기도 하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야 사정은 딱하고 또 직접  말하기 거북
하니까 백지를 써  보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받아  가지고 그자리에
서 상대의 의도를 포착한 자네도 보통이 아닐세 그려.」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설명하기를,
  「대저 백지 위임장이란 삶아 먹든지 볶아 먹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닌
가. 이 세상에 그렇게  자포 자기가 되는 경우란 연애에 목말랐을  때와 돈에 궁
했을 때 밖에 없는 것이거든.」
  「그렇지.」
  「그러니 그  사람이 나에게 구애를 할  리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남은 것은 
돈을 융통하자는 것밖에 없지.」
  누구든지 직접 만나서 말하기 거북한 경우에는  서신 등을 이용하기 일쑤인데, 
이런 경우 이심전심이라든가 불언이통이라든가  하는 것도 서로 호흡이 맞지 않
으면 기대하기 어려운 법임에 틀림없다 할 것이다.
  안단대의 굳은 절개
  이조 중종때의 안 단대라는  사람은 원래부터 성질이 순박하고 근실하여 평생 
남과 다투거나 시비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딸 하나 있던 것이  궁녀로 뽑혀 후궁이 되고 이윽고 창빈으로 봉해지매 
더욱더 매사에 조심을 했다. 설령 어린 아이가  와서 집안에다 대고 욕을 퍼부어
도 나무라는 일이 없이 오히려 그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할 뿐으로, 결코 큰소리 
한번 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딸 창빈이  왕자를 낳자 아예 문을  닫고 일체의 바깥출입을 삼가였
다. 아는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나다니질 않느냐고 묻자,
  「공연히 왕자의 외조라 해서 이상스럽게 볼까 봐, 그것이 꺼려져서 그렇다오.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 창빈의  둘째 왕자 덕흥대군이 아들을 낳아, 그로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니, 그가 바로  선조였으며, 이로써 안공은 선조의  외증조부가 되었다. 이렇게 
되어 안공의 지위와  신분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으나, 그는 조금도  마음이 변
치 않아 비단 옷이라곤 몸에 걸치지도 않을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어느날인가 선조는  나라의 의복을 통할하는 상방에서  올려온 수달피 조끼를 
외조부인 안공에게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안공의 청렴 결백한 굳은  절개를 익히 아는 터라 선조는 미리 사람을 
시켜 그의 뜻을 알아오도록 하였다.
  「어떻습니까, 지금 나랏님껫 공에게 보낼 수달피  조끼를 만들고 계신데 그것
을 내리시면 부득이 입어야 하시겠지요?」
  심부름 온 사람이 이렇게 묻자, 안공은 대답하기를,
  「나는 본시 천한 사람이오.  비단옷이 가당이나 하오. 하물며 수달피 조끼 같
은 것을 입는다는 것은 죽을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라의 상감께서 내리신 것을 입지 아니한다는  것도 죽을 죄를 범하는 것, 
기왕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내 뜻대로 하고 죽는 것이 옳을까 
하오.」
라고 거침 없이 거절할 뜻을 밝혔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선조는 크게 감탄을 하면서,
  「그분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다면 어차피 그 뜻을  굽히게 할수는 없는 일, 
그러니...」
하고 집안 사람들을  시켜서 그것은 수달피 조끼가  아니라 어린 개의 가죽으로 
지은 것이라고  일부러 속이도록 일렀다.
  이에 집안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상감 마마께서 수달피 조끼를 내리시려다가 개가죽 조끼로 바꾸어 보내셨습
니다. 개가죽쯤이야 못 입으실 게 뭐 있습니까. 상감 마마의 따뜻한 정의를 저버
리지 마십시오.」
하고 권한즉, 이미 노쇠하여 눈이 어두워진 안공은, 보아서는 구별이 잘 안 되므
로 손으로 몇 번 문질러 보더니,
  「개가죽이라면야 입어도 무방하겠지만,  한데 상방에는 아주 별다른  개가 있
는 모양이구나.  개가죽 치고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 있었던가」  하고는 몸에다 
걸치고 북쪽의 상감 계신 쪽을 향하여 네 번 절을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 이렇게 사주까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일생 동안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부자 하나가 외동딸을 두었는데 혼기에 임박했다.
  한데 이 사람은 돈 벌 걱정이 없으므로 노상 재미있는 일만 찾아 헤매는데 한
가한 취미가 있어, 귀중한 딸의 혼처를 놓고도 또 그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흠 흠, 한번 멋지게 속아 봤으면 좋겠다니까... 이거 원  맹숭맹숭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이렇게 생각한 그 사람은,
  「누구든지 거짓말 세 마디를 멋지게 하는 놈이면 내 딸을 주겠노라.」
하고 소문을 내었다.
  거짓말 세 마디만 하면(그게  뭐 어려운 일인가? 왕년에 누가 거짓말 한번 안
해 본 사람 있더라고?)부자집  사위 되고 싱싱한 숫처녀에게 장가도 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위감 자격은 별달리  없고 단 거짓말 세 마디뿐이므로 사방의  노총각, 홀아
비, 사기꾼, 노름꾼들이 일확 천금과 처녀를 꿈꾸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주인 영감이 여간  만만치 않으므로 후보자들은 금세 영감에게 말꼬리
를 잡혀 이리저리 몰리다가 그만 들통이 나 쫓겨나는게 보통이었다.
  거짓말 세 마디 다하고 쫓겨나는 사람은 그래도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고 나머
지는 첫 마디부터 실격이었다.
  그 이웃  마을의 노총각 하나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그  집을 찾아갔다. 
시일이 오래 지나선지 온  마당 가득히 득시글거리던 사위감 후보자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때마침 이 집에서는 일꾼을 얻어다 타작을 하느라고 분주하였다.
  총각은 곧 바로 사랑방으로 가서 주인 영감에게 넙죽 인사를 한후에,
  「저는 웃 마을에  사는 칠복이 놈인데요, 사위감 없으시면 이  몸이 어떠실까 
해서 왔습니다.」
  「그래, 거짓말을 세 마디 해야 한다는 것쯤은 미리 들었겠지?」
  「예, 물론입지요. 그런데 이 많은 벼를 언제  다 타작을 합니까? 그래, 여기선 
이렇게 옛날 방법으로 벼 타작을 하십니까?」
  「그럼, 어떻게 하나?」
  「우리 동네에선 요샌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 옛날에야 꼭  이렇게 했습죠
만... 아직까지 이렇게 하다니요. 이렇게 하면 힘이 곱쟁이로 듭죠.」
  「그래, 자네들은 그럼 어떤 식으로 하는데?」
  「우린 우선  논두렁을 이만큼이나 높게  쌓습니다. 그래 가지고  벼가 누렇게 
익으면 논에  물을 가득하게 대지요. 그러면  이삭만 물위로 나올  게 아닙니까? 
그러다가 날이 추워 꽁꽁 얼게  되면 도리깨를 들고나가 후들겨 패서 거둬 들입
니다. 그러면 벼에 돌이 썩여 들기나 하겠습니까?  마당을 맥질할 필요가 있습니
까? 아주 십상이죠?」
  「이놈아 그렇게 하면 되나? 순 거짓말이구나.」
  「그렇습니까? 그럼 첫째 고비는 넘겼습니다.」
  「음, 뭐? 음... 음... 그렇구나.」
  만만치 않은 놈이  왔다고 주인 양반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총각은 이번에도 
매우 염려하는 표정으로,
  「여기서는 매 끼니마다 고기를 못 잡수시죠?」
  「그럼! 그 비싼 고기를 어떻게 매번 먹겠나?」
  「그렇지만 머리를 쓰면 언제나 먹을 수 있지요.  저희 집에선 밥상 위에 고기
가 떠날 때가 없습니다.」
  「호! 어떻게 해서?」
  「이만한 궤짝을 하나 튼튼하게 짜 놓고는 그 속에다 송아지를 넣어서 기릅니
다. 날짜가 가면 송아지가 커서 궤짝에 가득  찰 것 아닙니까? 그럴 때 소궁둥이 
부분이 닿는 데다 이만한  구멍을 하나 뚫어 놓지요. 그리고는 소를  아주 잘 먹
이지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놈이 먹고  어디로 자라겠습니까? 궤짝이 
꽉 찼으니 뚫어 놓은 구명으로 자꾸 살이 비어져 나올 것 아닙니까? 그래 그 놈
을 베어다 먹고, 자라면 또 베어다 먹고, 이렇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얘 이놈아, 그런 거짓말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그렇습니까? 그럼 인제 한 마디 남았습니다.」
  주인 영감은 긴장하여 자리를 고쳐 앉으며,
  「그래, 어서 계속해 보게나.」
  총각은 호주머니에서 꼬기꼬기 접혀진 문서 조각을 하나 꺼내며 말하였다.
  「저의 집 마당에 굉장히  큰 배나무가 하나 있어요. 그런데 글쎄  어느 날 까
마귀 한 마리가  와서는 우리 배 하나를 따  가지고 날아 가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저놈의 까마귀  남의 배 따 가지고 도망간다>고 소리치며 따라갔
었지요. 전 도둑놈은 그냥  못 보는 성미니까요. 그랬더니 이놈이 은진미륵 머리 
위에 턱억 앉더니 우리 배를 다 먹어 버리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몇 해만에 가 
보니 은진미륵 머리위에 배나무가 하나 났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나무가 어찌나 
우람한지 그 한 나무에서 배가 너댓 접이나 열린답니다. 그런데 영감님, 그배 임
자는 틀림없이 제가 아니겠습니까?」
  「암, 그거야 당연하지.」
  「그러나 그 높은  배나무 위를 무슨 수로 올라갑니까?  또 설사 올라 간다고 
해도 부처님 몸뚱이를  밟고 가야 할 테니 그런  망극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 한 궁리를 냈지요.  긴 장대 하나를 가지고 가서 미륵님  콧구멍을 찔러 냅
다 간질러 댔지요.」
  「그랬더니?」
  「보나마나가 아닙니까? 이 부처님이 연거푸 재채기를 서너 번하는 바람에 배
나무에서 배가 쏟아져 떨어지는데 아휴  너댓 접 대충쳤던 배가 글쎄 나중에 쓸
어 담고 보니까 모두 열  접이나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배 한개가 모두 이만큼
씩 큽니다.」
  「자네, 큰 돈 벌었겠네 그랴.」
  「뭘요. 그런데 그때  배 사가신 분이 댁의 할아버지신데 마침  현금이 없으셔
서 이렇게 증서까지 써 주시고 가셨는데 그냥 못 갚으신 채 영영 돌아가시고 말
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느라고 글쎄 난  현금 한번 쥐어 보지도  못하고 배만 
잃어버린 셈이었죠. 원  그때 배값이 천5백 냥이니까 이자까지 따지면  꼭 만 냥
이 됩니다. 그렇지만 저도 인정 있고 분별 있는 놈이라, 돌아가신 분과의 정리도 
있고 하니 아주 절반 때려서  5천 냥만 주시면 그걸로 깨끗이 셈을 끝내 드리겠
습니다. 자, 여기 증서가 있으니 계산을 해 주십시오.」
  주인 영감은 한동안 입술만 달싹달싹 안절부절을  못했다. 사위로 앉히기 싫어
서 <그것 정말이다> 했다가는 돈을 물어 줄 판이었기 때문이다.
  영감은 하는 수 없이,
  「예끼 임마,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해도 분수가 있지. 쯧쯧...」
  「그렇습니까? 그럼 세  마디 다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댁의  따님은 이제 
제 아내입니다. 자 여기 이렇게 사주까지 써 왔습니다. 장인어른, 절 받으십시오.

  애당초 누가 먼저 놀렸는데
  비록 시골 출신이긴 하지만 글줄깨나  읽어 속에 식자가 제법 들은 구변 좋은 
사나이 하나가 구리개(약국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지금의 을지로 입구) 네거리
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를 만났다.
  사나이는 곧 어떤  약국집 처마 밑에 들어가 비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다행히
도 오래지 않아  쏟아지던 빗발이 점점 약해지며 볕이  나더니 이제 곧 개일 듯 
푸른 하늘이 찌푸린 구름 사이를 내다보았다.
  「개건 가지.」
  비가 개거든 가란 말도 되지만, 개이거든 가라  하는 뜻도 되니 한 발자국이라
도 움직였다간 천생 개라는 소리를 듣게 생겼다.  시골 사나이는 약국 안을 들여
다 보며,
  「헷! 다 개니 가야겠군!」
  (뭐라구? 다 개니까 간다구? 그럼 약국 안에 있는 사람들도 전부 개란 소리지. 
야 이놈 보통놈이 아니구나)
  내심 놀라며 약국 주인은 사나이를 불러들였다.
  「여보시오. 과히 바쁘지 않걸랑 잠시 들어와 담배나 한 대 태우시구료.」
  사나이는 마침 다리도 아프던 참이라 사양 않고 냉큼 들어섰다.
약국 주인은 담배를 권하며,
  「허, 놀랐습니다. 댁의 입심이 보통을 넘습니다, 그려.」
  「뭐 전엔 엔간했지만  내가 한 열흘 전에 앓던  끝에 죽었다 살아난 후론 영 
형편 없어졌어요.」
  「옛? 아니 그럼 염라국 구경도 하셨겠구랴?」
  시골 사나이는 약국 주인을 곯려 먹을 궁리를 하며,
  「그럼요.」
  「아이구, 그 얘기 좀 들어 봅시다.」
  어렵지 않소이다. 내  자세히 얘기하지요. 처음에 한참 가노라니 명부전이라는 
현판이 붙은 으리으리한 전각이 나타납디다. 그래서 난,
  (옳지! 내가 죽은 거로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자가 가까이 오라고 하더니 거주 성명과 생년월일 사주
를 묻습디다.
  어차피 죽은 몸이라 겁날 것  하나도 없어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
겠소? 그랬더니 문부를  이것저것 한참 대조해 봅디다. 그러더니  갑자기 가운데 
앉았던 염라대왕이 주먹으로 책상을 탕 치며,
  「이놈들아, 요새  일이 많이 바빠 고되긴  하지만 또 바꿔서 잡아  왔단 말이
냐? 근무 태만한 놈들!」
하고 호통을 칩디다. 그러니까  곁의 사자들이 벌벌 떨며 그 중  하나가 나를 정
중히 데리고 나옵디다.
  「당신은 인간으로 곧  돌아가게 될 거요. 앞으로 수명이 30년이나  남은 분을 
공연히 놀라게 하였구료. 이따 사자 나가는 길에  데려다 줄터이니 잠깐 이 의자
에 앉아 기다리시오.」
  시키는 대로 의자에  잠시 앉아 구경을 하고  있으려니까 어떻게나 많이 잡혀 
들어오는지 망령들이 줄로 늘어서서  기다리고, 또 극락, 지옥으로 갈 곳이 정해
진 영혼들도 인도해 주기를 기다리며  줄로 서 있어 나같이 애매한 사람도 잘못 
엇갈려 잡혀 올 만하구나 하고 염라국 사정이  이해가 갑디다. 거기 앉아서 저승 
구경을 실컷 했지요.
  맨 먼저 들어온 사람은 맨발에 메투리를 끌고 삿갓을 들었는데 몸에서 비린내
가 몹시 나더구먼.
  염라대왕이 문초를 시작합디다.
  「네 생전 한 일이 무엇이더냐?」
  「예! 소 잡고 양, 돼지 같은 짐승을 잡는 것이 저의 업이었습니다.」
  「허, 고얀놈이로군. 그렇게 많이 살생을 하고도 그래 네가 극락가기를 바라겠
느냐?」
  「아니올시다. 대왕님은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에서는 봄 가을마다 소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대왕님께서도  같이 잡수셨겠지요?  그런데 대왕님, 
제사 지내는  임금님이나 지위 높은 양반  나리들이 손수 짐승을 잡았겠습니까? 
천만에요! 다 저희 같은 무리들이 있어 그런 구질구질한  일을 맡아 하였기 때문
에 하늘 제사도 올릴 수  있었음인즉 대왕님께서도 여러 10년 고기 제사를 잡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저희들의 힘이지  임금님이나 대감들의 공은 아니옵니다.

  염라대왕은 곧 미소 지으며,
  「오, 듣고 보니 네 말이 옳은 것 같구나.  여봐라! 저 망인을 극락세계 연화대
로 받들어 모셔라.」
  곧 그 사람은 덩그랗게 연꽃  위에 올라 앞뒤에서 풍악을 울리며 극락으로 올
라갑디다.
  그 다음으론 간드러지고 교태 어린 여인네 차례,
  「네 생전에 한 일이 무언고?」
  「예, 풍류와  춤을 배워 잔치에 나아가  흥을 돋구고 술을 따르고  뭇 남성의 
노리개 노릇을 하였나이다.」
  「에이 고약한 년이로고.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얼마
나 많은 선량한 여자가 울었겠느냐.」
  「그러하오나 대왕님, 저흰들 그 짓이 좋아서  하였겠습니까? 먹고 살 길이 없
어 그랬사온데,  만일 비관하여 자살이라도  덜컹 해버린다면 이  우주의 질서는 
얼마나 어지러워질 것이며  얼마나 많은 원귀들이 공중을 헤매겠습니까? 그래서 
웃긴 웃어도 좋아 웃는  웃음이 아니었고, 애교를 띤 것도 좋아서  그런 것이 아
니라 어디까지나 이 사회의 기름이 되어 세상을 순조롭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저의 눈물 겨운 희생이었습니다.」
  구슬 같은 눈물을 흘려 가며 가련하게 우니 염라대왕도 붉어지는 눈시울을 가
리며,
  「네 얘기를 들으니  세상에서 가엾은 것이 바로 너로구나. 여봐라  이 망인을 
후세에는 대가집의 외딸로 태어나 대관집으로 시집가 일부종사하며 해로할 자리
를 하나 점지해 주어라.」
  그 다음으로 혈색이 좋고 수염이  허옇게 센 풍신 좋은 영감이 하나 들어섰습
니다.
  「네 생전에 한 일이 무언고?」
  「예, 저는 신농씨 만든  법을 따라 초근 목피로 약을 만들어  앓는 사람 병을 
낫게 하여 주고 죽는 사람 살려 주었으며...」
  얘기를 듣던 염라대왕은 노하여 벌떡 일어나더니,
  「여봐라! 저 건방진  놈 주둥이 좀 쥐어 질러라.  이놈아 사람의 수명 장단이 
너의 손에  달려 있다니 혹세 무민하는  놈이로고. 요새 가끔 사자를  보내도 빈 
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종종 있길래  이상하게 생각하였더니 바로 너 같은 놈 짓
이었구나. 여봐라, 저런 놈은 지옥의 맨 밑바닥에 거꾸로 집어 처넣어라.」
  그만 그 가련한 늙은이는 풀이 죽어 지옥에  갈 순서를 기다리고 서 있었지요. 
그러다가 나를 보고 하는 말이,
  「당신이 인간으로 돌아간다니  부탁을 드리겠소. 당신도 아시다시피  여기 재
판은 인간 세상에서  생각하던 것과는 생판 틀리는구려. 내 자식놈이  구리개 모
퉁이에서 내  대를 이어 약방을 차리고  있으니, 나야 이왕 이렇게  되었지만 내 
아들 놈에게 부다  좀 전해주구려. 아들은 전부 백정을 시키고  딸년들은 모조리 
기생을 시키라고...」
  그래 내가,
  「꼭 전하겠으니 염려 마세요. 그런데 아드님 약방이 구리개 몇째집이오?」
하고 묻고 있는데 무섭게 생긴 사자가 덜미를 잡아 끌고 가며,
  「임마 얘긴 누가 하랬어?」
  호통을 치니 그 노인은 잡혀  가면서도 내 쪽을 자꾸 돌아보며 손짓을 하더이
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그런데 지금 보아하니 주인이 건을 쓰고 계신데 혹시 그 노인이 바로?」
  넋없이 듣던 주인은 어이가 없어,
  「아니 당신 날 놀리기요?」
  「애당초 놀리긴 누가 먼저 놀렸는데?」

  하늘에서 가장 큰 것
  어느 시골의 아전 한 사람이 눈치 빠르고 민첩하기 비할 데 없어서 그 고을에 
내려오는 원님을 모조리 제 소매 속에 넣고 마음대로 농락하는 터였다.
  그러던 중, 신임 사또가 부임을  했다. 아전은 새로 온 원님을 곯려 주려고 무
슨 트집거리가 없을까 유심히 살피는데, 신임 사또  역시 부임 전부터 이 아전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은 터라, 그에게 휘둘리지 않을 셈으로 미리 조처를 취했다.
  원님은 아전을 불러 가로되,
  「내가 조정을 하직하고 돌아올 때에 부탁받은 게  몇 가지 있는데, 이것을 구
할 사람은 너밖에 없을 듯해서 이렇게 특별히  부탁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 있더
라도 사흘 안으로 이것을 구하여 바치도록 하여라.」
하고는, 쪽지 한 장을 내 주었다.
  쪽지를 받아 펼쳐 본 아전, 금시에 풀 죽은 얼굴이 되었다. 거기에는 하늘에서 
가장 큰 것과, 십리탕과 백  가지 채소와, 자가웃 반찬을 구해 오라고 씌어 있었
다.
  「이거 참 야단났구나.」
  아전은 집에 돌아와서는 사또가 명한 심부름 때문에 걱정이 되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누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아버지, 무슨 일로 그렇게 걱정을 몹시 하세요?」
  보다 못해서 그의 열 살 먹은 아들이 까닭을 묻는다.
  「네가 알 일이 아니다.」
  「무슨 일인데요. 말씀이나 해보세요. 혹시 제가 도움이 될지 알아요?」
  아들이 자꾸 조르는 까닭에, 아전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그거라면 아무 걱정도 없어요. 아버지, 제가 하라는 대로 해보세요.」
  아들은 열심히 무엇인가를 설명했다.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아전은 무릎을 탁 치면서 기뻐했다.
  「과연 그렇구나. 네가 말 안 해 줬더라면 큰일 날 뻔했구나.」
  아전은 그 길로  장에 나가서, 하눌타리(박과에 속하는 다년생 감초)  한 개와, 
오리 두 마리와, 흰 가지 하나를 사 왔다.
  그리하여 분부가 내린 지 사흘째 되는 날 하눌타리는 접시에 담고 오리 두 마
리는 솥에 한데 넣어 국을 끓이고, 흰 가지로는 나물을 무쳤으며, 거기에다 콩자
반을 졸여 가지고 동헌에 나아가 원님에게 바쳤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원님이 묻자, 아전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예,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라면 하늘의  울타리라고도 불리는 하눌타리 이상 
가는 것이 없을 터이오며, 오리 두 마리씩 국을 끓였으니 바로 십리탕이 되옵고, 
흰 가지로 나물을 무쳤으니 백가지 채소가  분명하옵니다. 도한 콩자반은 자가웃 
반찬이 아니겠사옵니까?」
  일자와 월자를 따서
  어떤 마을에 정씨와 명씨가 이웃해서 살고  있었다. 이들은 순박한 농민들로서 
다정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서로 욕친구가 되었다.
  「여보게! 당나귀,  어딜 그렇게 달랑거리며  돌아다니는가, 요즘 재미는  좋은
가?」
  명씨가 정씨를  놀리는 말이었다. 예로부터  사람의 성에 짐승의  이름을 붙여 
놀리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가란 성은 희성이어서 거기 알맞는 짐승의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시는 명씨에게  놀림만 당할 뿐 앙갚음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므
로 정씨는 늘 명씨를 곯려 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주막에서 또 명씨가 정씨를 이렇게 놀렸다.
  「여봐! 당나귀, 나 좀 타고 가자구, 다리가 아파서 죽겠어. 조랑말이지만 아쉬
운 대로 타고 가야겠어.」
  「이런 빌어먹을 자식 보게나, 형님을 몰라보고  버릇 없이 주둥아리를 놀리다
니, 경칠 녀석 같으니라구...」
  정씨는 고작 명씨를 놀린다는 것이 이런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허허... 그 친구, 입버릇 한번 고약하군. 그것도  모두 고약한 성을 가진 때문
인가?」
  정씨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명씨를  놀려 줄 수 있는  말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던 어느날 정씨 집에 한 동냥 중이 찾아왔다.
  「나무 관세음보살, 시주 좀  하십시오. 부처님의 덕이 이 집에 가득찰 것이옵
니다.」
  정씨는 시주를 후하게 한 다음, 중에게 자기의  사정을 털어 놓고 도움을 청했
다.
  「대사님, 아무튼 명씨를 곯려 줄 수 있는 방법만 가르쳐 주십시오.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은 수가 있소.」
  「좋은 수가 있다구요?」
  정씨는 눈에 광채를 띠었다.
  「그렇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지금 곧  나보다 먼저 명씨 집에 가서 
기다리십시오. 그 다음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정씨는 뛸 듯이  기뻐하며 숨을 헉헉대면서 명씨 집으로 달려갔다.  마침 명씨
는 집에 있었다.
  「이 사람 당나귀 아닌가. 갑자기 웬일인지?」
  정씨는 빙그레 웃으며 적당히 대답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복수할 결심을 단단
히 했다.
  (어디 두고 봐라, 오늘 단단히 골탕 좀 먹어 봐라...)
  이윽고 동냥중이 대문  앞에 이르렀다. 명가는 심심하던 차에 오히려  잘 되었
다는 듯 동냥중을 불러들였다.
  그래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다가 정가가 슬그머니,
  「대사님의 성은 뉘시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동냥중은 짐짓 대답을 망설이더니,
  「출가한 탁발승에게 속간에서  쓰던 성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만, 소승의 
성은 말씀드리기에 좀 부끄러운 성입니다.」
  「아니 무슨 성인데 말씀하기가 난처하다는 거요? 혹시 쌍놈의 성이라도...」
  「그런 게 아니오라 성의 내력이 좀 고약해서...」
  「어디 그 내력 좀 들어 봅시다.」
  명씨는 자못 호기심이  동한다는 듯 무릎걸음으로 다가 앉았다. 중은  짐짓 난
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실은 저의 어머니가 행실이 좋지 못해서 불공을 드린다고 절에 가서는 일정
사의 스님과 월정사의  스님을 번갈아 가며 관계를 맺었답니다. 그래서  저를 낳
게 되었다 하더군요. 그런데  어머니 자신도 내가 누구의 자식인지 잘  알 수 없
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일정사의  일자와 월정사의 월자를 따서 한데 어울려 명
가라는 성을 만들어 소승의 성으로 정했다고 하더이다.」
  중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명씨는 점점 얼굴이 창백해졌다. 뿐만  아니라 숨소
리마저 씨근거렸다.
  그후 명씨는 주막에서나 길에서 정씨를 만나도 결코 놀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
다.




  입구는 이곳입니다.
  어느 번화한 뒷골목에 요리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골목은 마침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또 언제부턴가 음식 맛이 좋다는 평판
이 자자한 골목이었으므로 우후죽순처럼 자꾸만 늘어나는 것이 요리집뿐이었다.
  「얘야! 옆집에  또 무슨 요리집이  생기는 모양인데 이번에는 무슨  음식점이
냐?」
  「중국 요리집이랍니다.」
  「뭐, 중국집? 아니 그럼 우리 집과  같지 않아? 야 이거 큰일났군! 지난 달에
도 이쪽 집에 중화요리가 생겨서 경쟁이 붙어 혼났는데 또 중국집이야? 이거 정
말 큰일이다.  요렇게 좁은 골목에 중국집만  나란히 세 집이  붙었으니 어쩌지? 
복판에 틀어 박힌 우리집은 이제 꼼짝없이 망했구나. 무슨 수를 써야겠다.」
하고 가운데 파묻힌 중국집 주인이 머리를 싸매고 신음을 했다.
  왼쪽에 있는 집에서  <원조 북경식 중국요리>라고 선전간판을 내걸면 오른쪽 
집에서도 이에 지지않고 <진미 홍콩식 남방 중화요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래도 안심이 안되는지  왼쪽 집에서 <아시아 제일의 맛>이라는 네온사인을 
달자 오른쪽 집에서도 이에  지지 않고 <세계 제일의 맛>이라는 네온사인을 달
았다.
  두 집 사이에 폭 파묻힌 옛날부터 있던 중국집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도리없
이 왼쪽에건  오른쪽에건 들어오는 손님을 모조리  뺏기게될 것이 분명했으므로 
이에 대처하기 위한 결사적인 방법을 강구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기발한 생각을 해내어  가게 문 앞에 커다란 간판을 하나 세웠
다.
  왼쪽이 아시아  제일이고 오른쪽이 세계 제일이라고  선전했으므로 작히 세계 
보다도 더 큰 지구라든가 우주라고 쓴 게 아닌가 상상하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게끔  세워 놓은 그 간판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입구는 이곳입니다!>
  마흔 가지 거짓말
  옛날 몽고 부족의  임금님은 아주 어여쁜 딸을 가지고 있었다.  공주의 나이가 
열 여덟이 되자 임금은 사윗감을 고르기 시작했다.
  워낙 애지중지 귀엽게 자란  공주라서 사위를 고르는데 조건이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이럭저럭 세월은 가는데 마땅한  사위가 없어서 몹시 초조해진 임금은 다급한 
김에 어떤 결정을  내렸는데 그것은 거짓말 마흔  가지를 그자리에서 쉬지 않고 
하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포고문을 읽고 양반이 아닌 상민들도 모두 구름같이 모여들어 거짓말을 했
으나 마흔 개가 되지는 못했다.
  제일 많이 한 사람이 열 다섯 가지인데 그 이상은 하는 사람이 없어서 공주는 
또 다시 세월만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젊은이가  왕궁을 찾아와서는 자기가 거짓말을 해 보겠다고 
하였다.
  신하들의 안내를 받고  왕 앞에 나아간 젊은이는  씩씩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장담을 했다.
  「임금님이시여! 제가 지금부터 마흔 개의 거짓말을 할  터이니 공주님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만일 마흔 개가 못되면 제 목숨을 빼앗으셔도 좋습니다.」
  왕은 젊은이가 당돌한 것이 마음에 들어서 옆에 시위하고 있던 대신을 돌아보
며,
  「자, 이 젊은이가 하는 거짓말의 수를 단단히 세어 두게. 하나라도 틀리지 않
게 말이야.」
하였다.
  이윽고 젊은이는 의자에 앉아 편안한 자세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저의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에 태어나서 저의 할아버지가 타고 다니시
는 개를 돌보기도 하고 때로는 낮잠을 자면서  할아버지의 귀를 세어 보고, 잠을 
깨서는 발을 세어 보곤 했습니다.」
  「잠깐, 좀 천천히 하시오.」
  대신이 옆에서 주의를 주니까 젊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지요. 그런데 어느  눈보라치는 캄캄한 달밤에 문득 보니까, 할아버지
의 그림자에 발이 하나 밖에 없더군요. 저는  깜짝 놀라서 그길로 할아버지의 발
을 찾아 나섰답니다.  어느덧 물없는 강가에 이르게 되었는데 다리가  없어서 건
너지를 못하고 망설이는데 상류에서 조그만 바위섬이 떠내려 오지 않겠어요? 그
래서 그섬에 뛰어 건너가  섬을 가로질러 얼마쯤 가노라니까, 사흘째 되는날, 높
은 산이 가로막기에 그 꼭대기로  허덕이며 올라가 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더
군요.」
  젊은이가 숨이 찬지 잠깐 말을 끊고 물을 달래서 벌컥벌컥 들이 마신다.
  임금은 그의 일거 일동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아,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한 나는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 위에서  맑은 강물
에 눈을 씻고 바라보니 바다  건너에 암소 한 마리가 다섯마리의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 보였어요. 그것을 보고 저는  배가 고파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길을 떠난 지 달반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안  먹은 것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칼을 
뽑아 칼집은 배로 삼고 칼날로  물을 저어서 바다를 건너가 암소와 새끼소를 붙
잡아 등에 지고 돌아오는데 아, 글쎄 뿌리 없는  나무 밑에 비늘 없는 잉어가 낮
잠을 자고 있지 않겠어요?」
  「허허허... 그것 정말 지독한 거짓말이구나. 어서 계속해라.」
  듣고 있던 왕이 호탕하게 껄껄  웃으면서 그의 말을 끊자 대신들도 따라 웃고 
말았다.
  젊은이는 잠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고는 조용해지기를  기다려 말을 계속했
다.
  「그래서 신난다 하고 저는 그  잉어를 붙잡아서 집어 타고 바다를 건너 깊은 
산 속으로 가려니까 잉어가 발이  아파서 못 걸어가겠다고 하며 물집이 생긴 발
을 보여 주더군요. 나는  화가 나서 잉어 허파를 콱 찍어  죽이고 나서 굳기름을 
열근이나 떼어다가 왼쪽장화에 일곱근, 오른쪽 장화에 다섯 근을 발랐어요. 그리
고 조금 걸어가니까 웬 오두막집이  하나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가 자려는데 시끄
러워서 잘 수가 없었지요. 나는 시끄러워서 눈을  감고 보니 벗어 놓은 장화들이 
서로 싸움을 하는 거예요.」
  「오! 우선 중간 계산이 어떻게 되었나  알아 보자. 이봐! 대신, 지금까지 모두 
몇갠가?」
  장부에 일일이 표시하고 있던 대신은 한번 쭈욱 훑어보고 나더니 고개를 갸우
뚱거리며,
  「이제 반이 조금 넘었습니다. 더 계속하게 하십시오.」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님은 알았다는 듯 계속하라는  표시로 젊은이에게 손을 쳐
들어 보였다.
  「왼쪽 장화에게 오른쪽 장화가  욕을 하는 거예요. 임마, 너는 일곱근이나 굳
기름을 발랐는데 내게는  세 근 밖에 안 발라  주니 이건 참 불공평하다는 거예
요. 그래서 그럼 내가  일곱 근 바로 오른쪽 장화 속에 들어가 자면  될 것 아니
냐, 그 동안 너는 쉬라고 왼쪽 장화를 달래고 그  속에 들어가 잔 후 그 전날 일
어나 신을 신으려니까 한짝 장화가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 갔는가 하고 
한짝 장화에게 물었더니 당신이  기름을 아끼기 때문에 분해서 도망갔어요 하고 
그놈이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하는 수 없이 남은 한짝  장화만을 두 발에 
신고 도망친 장화를 찾으러 길을 나섰습니다.」
  듣고 있는 임금이나 대신들은 완전히  그 이야기에 취한 듯 멍하니 그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이가 또 물을 들이키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마침 하늘에서  눈이 막 쏟아지는데 도망친  장화의 발자국이 눈 위에 
찍혀 있길래  얼마를 뒤따라 가니까  어떤 유목민의 천막이  하나 나타나더군요. 
제가 그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은 하나님의 침실이었는데 내 장화가 거기서 
하나님의 아내 노릇을 하고 있지 뭡니까? 나는 치가 떨려서 이 간통한 여편네를 
거미줄로 목매어 죽이고 그곳을 떠나려니까 나머지 한짝 장화가 제 짝의 장례를 
치르고 가겠다고 버티더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장화를 벗어 던지고, 지고 오던 
암소와 새끼 소의 등에 타고  오는데 제가 탄 암소가 또 들쥐 구멍에 발이 빠져 
앞다리가 부러졌다는 소식이 왔길래 저는 소의 가죽을 벗겨 치료비에 보태게 했
습니다. 자, 이제 한 마흔 가지 됐지요?」
  임금은 감탄해서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적고 있던 대신이 손을 홰홰 내저으며 
펄쩍 뛰었다.
  「천만에, 모두 서른아홉  가지요.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다오.  나머지 한 가
지를 마저 하지 않으면 당신은 약속대로 죽어야 하오.」
  엄숙한 대신의 말을 듣자 젊은이는 껄껄 웃으면서,
  「지금 막 마흔 가지를 다 했다고 한 그말도 거짓말이니 이렇게 되면 꼭 마흔 
개가 되지요? 어떻습니까? 임금님!」
하였다. 임금은 젊은이의 말이 옳은지라 그를 가까이  오게 한 다음 그의 총명함
을 칭찬했다.
  그리고는 약속대로 공주와의 결혼을  허락하여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받게 되
었다.

  빗이 빚이 되어
  어느 거리의 건달  넷이 일제히 개심을 하여  새로운 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했
다. 어느날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앉아 의논에  의논을 거듭한 결과 공동으로 자
본을 투자하여 장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각자 호주머니를 털기도 하고  빚도 얻
어서 근근이 금화 백닢을 모았다.
  「자, 그럼 무슨 장사를 할까?」
하고 한 건달이  말하자, 저마다 한 마디씩  의견을 말하여, 갑론을박을 한 끝에 
이웃 도시로 가서 비단을 떼어다가 팔아 보자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금화 백 닢을 한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그 길로 비단을 사러 이
웃 도시로 떠났다.
  「이젠 우리도 남을 속이지 말고 깨끗하게  살아보자구. 더구나 우리끼리 속여
서는 말이 안 되지. 이건 공동으로 출자해서 공동으로 장사를 하는 것이니까, 절
대로 혼자서 몽땅 먹겠다는 시커먼 배짱을 가져선 안 돼.」
하고 건달 중의 붉은 수염을 한 사나이가 말했다.
  「그거야 말할 것도 없지. 그리고 우리가 항상  붙어 다니는데 서로 속이고 말
고 할 것도 없잖아. 돈이나 물건을 관리할 때 언제나 넷이 함께 하는 거야. 그렇
게만 하면 아무런 잡음도 생길 리가 없지.」
하고 이번에는 비쩍 마른 사나이가 말했다.
  「맞았어, 돈이고 물건이고 항상  같이 갖고 다니면 말썽이 날게 없어. 끊임없
는 우정만 있으면 돼.」
  「그렇구 말구. 언제나 우리는 함께 먹고 함께 쓸 테니까.」
하고 나머지 두 건달도 맞장구를 쳐 대었다.
  이렇게 길을 가는 도중에 한 아름다운 사원이 나타났다.
  「목도 마르고 다리도 아프니 저기 들어가서 좀 쉬었다 가세.」
하고 붉은 수염의 건달이 말을 꺼내자 모두들 이의를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사원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리고 문지기 처녀에게  황금 백 닢이 든 주머니를 
맡기면서,
  「아가씨, 이 돈주머니는 우리 넷이 함께 오든가, 또는 나머지 셋이 한 사람에
게 주라고 승낙하든가 하기 전에는 결코 내  주어선 안돼. 알았지? 이 말을 명심
해 둬요.」
하고 다짐을 했다.
  그런 뒤에 그들은  잠시 사원을 거닐면서 먹고 마시고 놀았다.  활짝핀 꽃밭이 
있고 그 옆에는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윽고 붉은 수염의 건달이 입을 
열었다.
  「냄새가 기막히게 좋은  가루 비누를 가져 왔는데, 저 냇물에서  머리나 감을
까?」
  그러자 다른 한 건달이,
  「그런데 빗이 없는 걸.」
하고 말했다. 또 다른 건달이,
  「그럼 그 문지기 아가씨한테서 빌려오는 게 어때?」
했으므로, 붉은 수염의 건달은,
  「내가 갔다 오지.」
하고 문께로 달려 갔다.
  그런데 그는 여자에게 빗을 빌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가씨, 아까 맡겨 놓았던 돈 보따리를 주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가씨가 대답했다.
  「여러분이 함께 오시든가,  다른 분들이 당신에게 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는 
드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붉은 수염의  사나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자기 동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게들, 이 아가씨가 좀처럼 내주질 않는군!」
  그러자 냇가의 건달들은 빗을 말하는 것인 줄만 알고,
  「아가씨가 의심도 많군. 까짓 빗하나 떼어 먹을까 봐서 그러나?」
하고 중얼거리더니, 그 중의 하나가 큰소리로,
  「아가씨 내줘요!」
하고 소리쳤고, 나머지 두 건달도 이구동성으로,
  「아가씨, 걱정말고 내줘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이리하여 아가씨가 돈주머니를 내어주자 붉은 수염의 사나이는 그것을 움켜쥐
고 뒤도 안 돌아보고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남은 세 건달은 아무리 기다려도 붉은 수염의 건달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아가
씨한테로 가서 물었다.
  「왜 빗을 안 내주는 거야?」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큰 소리로 반문했다.
  「빗이라뇨?」
  「우리 친구가 와서 빗을 빌려 달라고 했을 거 아냐?」
  「무슨 말씀이세요. 그  양반은 빗 얘기는 한 마디도 않고  돈주머니를 달라고 
하셨어요. 여러분의 승낙이 있기까지는 내주지 않았죠. 하지만 세 분이 내주라고 
소리를 치셨잖아요. 그래서 두말  않고 내 드렸죠. 그랬더니 그 양반은 어디론지 
막 달려가시더군요. 바쁜 일이라도 있었어요?」
  「터무니 없는 소리! 언제 우리가 돈주머니를 내주라고 했단  말이냐? 다만 빗
을 내주라고 했을 뿐이야!」
하고 세 사람은 분격하여 아가씨를 잡아 흔들었다.
  「그건 난 몰라요.  언제 빗을 내주라고 하셨어요? 난 그런  말을 한마디도 듣
질 못했어요.」
  아가씨도 지지 않고 대들었으므로, 마침내 세  사나이는 그녀를 거리의 재판관
에게로 끌고 가서 고소를 했다.
  재판의 결과는  명백했다. 그녀에게 금화 백  닢의 배상을 명령하는 것이었다. 
재판관은 엄숙하게,
  「내일 아침에 금화 백 닢을 가지고 출두하도록!」
하고는 그녀를 돌려보냈다.
  이리해서 그녀는 아득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와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는데, 
마친 놀러 왔던 이웃집 아이가,
  「아줌마,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얼굴 빛이 왜 그래요?」
하고 물었다.
  그녀는 상대가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아이였으므로 처음에는 아무 대꾸
도 하지 않았으나,  아이가 두번 세번 되풀이해서 묻는 바람에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는 손바닥을 내밀면서,
  「아줌마, 은화 한  닢만 주세요. 과자 사  먹게요. 그럼 제가 좋은  꾀를 하나 
가르쳐 드리지요.」
  「아이구, 애두. 네가  무슨 꾀가 있다구 그래. 자,  은화 한 닢 줄테니 집으로 
돌아가서 놀아라. 아줌마는 골치가 아파서 지금 너를 상대 할 수가 없어요.」
하고 그녀는 아이에게 은화 한 닢을 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줌마, 내일  재판관한테 가시거든  이렇게 말씀하세요.  <저는 저분들에게 
네 분이 함께  오시지 않는 한 돈주머니를 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어요. 그러
니 네 분이 함께  오실 때까지는 돈주머니를 드릴 수 없지 않습니까>라고요. 그
럼 재판관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죠.」
  뜻밖의 좋은 꾀를  얻은 그녀는 다음날 아침  일찍 재판관에게로 가서 아이가 
가르쳐 준 대로 말했다.
  이윽고 재판관은 세 건달을 소환하여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은 분명히 이 여자에게 네 사람이 함께 오기 전에는 돈주머니를 주지 
말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아주 신신당부를 했었습니다.」
하고 세 사나이는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재판관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세 
사람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그  동료를 데려오기 전에는 이  여자로부터 돈주머니를 
찾아갈 수 없다.」
  이리해서 문지기 아가씨는 뜻하지 않게 재난을  벗어났으며, 세 사나이는 돈주
머니를 찾기 위해 달아난 동료를 찾아 나섰다.
  위급할 때 도와주지 않는 친구
  친한 친구 두 사람이  먼 길을 가게 되었다. 험한 산길을  걸어가야 하는 여행
이므로 두 사람은 서로 같이 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둘은 위급한 일이 생기면 서로  도와 줄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위
급할 때 서로 돕는 게 친구라 했다.
  산길이라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은 친구와 같이 가는 것이 퍽 마음 든든하게 
생각되었다.
  이때 아닌 게 아니라 큰 곰이 나그네 앞에  불쑥 나타났다. 두 사람은 놀라 어
쩔 줄 모르다가  그 중의 한 사람이 혼자  재빨리 나무위로 올라갔고 그를 보지 
못한 다른 한 친구는 곰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으므로 그 자리에 푹 쓰러져 버렸
다. 무섭고 달아날 수도 없고  해서 기절을 해 쓰러진 것이다. 곰은 죽은 사람은 
잘 건드리지 않는 짐승이므로 나그네의 얼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다가 죽었는 
줄 알고 그냥 가 버렸다.
  나무 위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  본 사람이 내려와서 엎드려 있는 친구를 일으
키며 물었다.
  「그 참  이상한 일도 있지. 곰이  자네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대체 뭐라든가?」
  누워 있던 친구가 정신을 차려 일어나 앉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곰이 내게 말하는 것을 자네는 못들었는가? 위급할 때 도와 주지는 않고 혼
자 나무 위로 올라가는 친구하고는 같이 다니지 말라고 그러네.」
  이 말을 듣고 나무에 먼저 올라갔던 친구는 혼자 나무로 몸을 피한 것이 부끄
러워 얼굴을 붉혔다.

  법정스님과 청년의 성불
  이른 여름의  산골이었다. 휘영청 보름달이 높이  걸렸고, 다투어 피어난 온갖 
꽃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가끔 벌레가 울었다. 그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
지 않는 괴괴한 밤이었다.
  이런 곳에서 법정스님은 마침내 찾아다니던 처녀를 만난 것이다.
  아, 얼마나 그리며 애타게 찾던 처녀였던가.
  눈썹은 반달이었다. 입술은 꽃잎이었다.
  허리는 바람결의 버들가지라 할까.
  부드러운 희 살결, 정말 미인 중의 미인이었다.
  이토록 환한 달빛 아래서 석  달을 두고 찾아다니던 처녀를 뜻밖에 만난 법정
스님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와락 달려들어 처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손을 잡힌 처녀도 이를  뿌리치지는 않았다. 잡힌 손을 내 맡긴  채 환하게 빛
나는 눈으로 법정스님을 마주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나도 스님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진정 잊을 수가 없었어요.」
하며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처녀의 마음을 읽은 듯, 법정스님은 와락 처녀를 껴안았다.
  처녀는 머리를 숙인 채 법정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이것을 내려다보는 달은 말이 없었다. 이따금 풀벌레가 울었다. 새로운 비밀을 
빚어내는 소리가 풀 속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사랑의 속삭임은 밤새 계속되었다.
  「내가 처자를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처자는 아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오.

  「저두요! 제가 스님을 한번 뵌 후, 얼마나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처녀도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법정스님이 이  처녀를 만난 것은  살구꽃 피는 봄날이었다.  스님이 산허리를 
넘어 조그마한 마을에  들어섰을 때, 물동이를 이고 걸어가는 처녀를  만난 것이
다.
  날렵한 몸매, 솟아오른 앞가슴, 눈부신 아름다움.
  스님의 눈에 비친 처녀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정신이 아찔했다.
  세상에 저토록 아름다운 여자도 있단 말인가...  법정은 저도 모르게 처녀의 뒤
를 따랐다. 처녀도  스님을 흘깃흘깃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부지런히  걸어, 어느 
골목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후 법정스님의  마음은 불공에 있을  수가 없었다. 자나깨나  처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스님은 불상 앞에  엎드려 자기의 마음을 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불상 앞에 서도 처녀의 눈이 떠올랐고, 꽃잎 같은 입술이 떠올랐
다.
  드디어 스님은 절간을 등졌다.  그리고 처녀를 찾아 나섰다. 아니 절을 등지고 
처녀를 찾아나섰다기보다 처녀의 환상에  끌려 허둥지둥 저도 모르게 절을 벗어
났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에 가봐도 그리운 처녀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그는 허
둥거렸다. 글고 발닿는 대로  여기저기 석 달을 찾아다니다가, 마을 근처의 산으
로 되돌아왔을 때는, 날도  저문 달밤이었다. 바위위에 올라 앉아서 마을을 내려
다보았다. 그때 처녀가 달빛에 끌려 산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래 마을을 떠난 다음 어리도 갔던 것이오?」
  「스님은 안 보이고, 하도 심란해서 외가집에 갔었지요.」
  「그럼 또 집에 가야 하오?」
  「...」
  「집에 간들 절간 벗어난 중하고 혼인하라 하지는 않을 거고.」
  「...」
  「이대로 마을을 벗어납시다. 그리고 아주 깊은  산골에 들어가 살림을 차립시
다.」
  「...」
  입으로 대답은 안했지만 처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깊은 산골에 보금자리가 꾸며졌다.
  사랑을 위해 파계한 법정스님은 부지런히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렸다.
  그러는 사이에 이웃에 사는 청년과도 다정하게 사귀었다.
  그럭저럭 4년의  세월이 흘렀다. 4년을 농사짓는  동안, 법정은 옛날의 스님이 
아니었다. 희던 손은 갈퀴같이  억세어졌다. 의젓이 수염을 기른 얼굴은 볕에 타
서 구릿빛이 되었다. 
  어느날, 법정은 아내를 데리고 이웃 청년과 함께 장을 보러 나섰다. 보름에 한 
번 열리는 장을 보려면, 으례  고을로 가야 했다. 그리고 고을에 가려면 그가 수
도하던 법주사를 지나야 했다.
  지나가는 길에 법주사의  웅장한 모습이 보였다. 이것을 보는 순간  법정의 마
음이 흔들렸다. 웬지 꼭 절에 들러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법정은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대웅전의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힘이 법정의 마음을 절간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여보! 당신 잠깐 여기서 기다려주오.」
  「아니, 왜 그러세요?」
  「나 잠깐 절에 들러보구 싶어 그러는데...」
  「그러세요.」
  「친구도 우리집 사람과 함께 좀 기다려주오.」
  법정은 휘적휘적 대웅전으로 걸어갔다.
  남아 있는 두  사람, 법정의 아내와 친구는 걸어가는 법정을  멀거니 바라보았
다.
  그러나 웬일인지 절에 들어간 법정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초조해졌다.
  「어떻게 된 일이죠?」
  「글쎄올시다. 원 사람이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리다 못한 청년이 법정의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들어가보고 올 테니 아주머니는 여기서 좀 기다려 주세요.」
  「그러세요. 어서 다녀오세요.」
  이렇게 해서 청년도 들어갔다.  그러나 이게 웬 일이랴. 찾아간 청년도 돌아오
지 않는 것이었다.
  법정의 아내는 임신중이었다.
  3, 4년을 지나면서도 처음 가진 아기라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돌 위에 앉아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사랑하는 법정과,  찾으러 간 청년은 이각을 더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
다.
  「이상하다.」
  그녀는 그만 이상한 예감에 와들와들 떨었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대웅전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웅전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안에서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문을 잡아당겼다.
  「아!」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기절을 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대웅전에 들어간 법정은 불상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일각이 지나도 그는  일어설 줄을 몰랐다. 그리고 줄줄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나간 온갖 일들이 법정의 머리에 떠올랐다.  불문에 들어선 몸으로서 속세의 
처녀에게 눈이 어두워 불문을  등졌던 일, 그리고 양가의 처녀를 꾀어내어, 부모
의 승낙도 없이  살면서 아기까지 배게 한  일, 이 모든 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법정은 부르짖어 보았으나, 그를 내려다보는 부처님은 말이 없었다.
  참회하던 법정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속죄하리라 결심했다.  죽음으로써 버
림받은 영혼을 구해보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칼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모든 잡념을 떨어버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다가 자기 목을 찔렀다.
  기다리던 청년이 법정을 찾았을 때는 법당 안이 온통 피바다였다.
  법정은 불상 앞에 엎어진 채 죽어 있었다.
  이것을 본 순간 청년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자기에게 미칠 화가 두려웠다.
  「누가 알랴. 이런 사정을...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내가 법정스님을 죽였다고 
할 것이다. 그의 아름다운 아내가 탐나서 내가 죽인 줄로 알 것이다. 백 마디 말
을 해야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공연히 곤장을 맞고 목매달려 죽을 것이 뻔하다. 
차라리 이런 변을 당하기 전에 나도 죽어버리자.」
  이렇게 생각하고 난  청년은 법정의 칼을 집어들더니, 자기 목을  찌르고 말았
다. 청년이 스스로 목을 찌르고 죽어가자, 청년의 목과 그리고 법정의 목이 절로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누가  잘라낸 것도 아니었건만, 몸에서 떨어져나간 목들이 
웃는 낯으로 부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법당 안은 피의 바다였고, 두 개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법정의 아내가 기절을 하여 쓰러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일어났으나, 주위
를 살펴보니 그저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배 안에는 새생명이 꿈
틀거리고 있었다.
  애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남편 없이 살고 싶지도 않
은 마음이었다.
  마침내 그녀도 불상 앞에 꿇어 앉았다.
  「부처님! 저는  어찌하면 좋사오리까?  스님을 사랑한 것이  잘못이었나이까? 
저는 애기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이 없이는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부처님! 
저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녀는 합장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진심으로 부처님의 구원을 청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부처님도 그녀
의 진심에 감동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르침을 내린 것이다.
  그녀의 귓전에 분명한 말소리가 들렸다.
  「지금으로부터 한참 동안을  지나면 내 손바닥에 땀이 고일 것이다.  너는 이 
땀을 묻혀다가 저 사람들의 목에 바르고, 다시 목을 붙여 보아라.」
  그녀는 한참 있다가 부처님의 손바닥을 살폈다.  그곳에는 과연 부처님의 말대
로 땀이 괴어 있었다.
  그녀는 부처님의 말대로 두 사람의 목에 땀을 바르고 머리를 갖다 붙였다.
  떨어진 사람들의 목은  말끔하게 붙여졌고, 죽었던 사람들이 되살아났다. 그것
은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목을 붙일 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남편과 
청년의 머리를 바꾸어 붙인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녀는 한편을 버리고 택한다 할 수가 없었다.
  몸은 청년의 몸이었으나, 그 몸에는 남편의 목이 붙어 있었다. 한편 머리는 청
년이었으나 그 머리에는 사랑하는 법정의 몸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당혹했다.
  그녀는 또 부처님께 빌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부처님도 아무말을 내려주지 않
았다.
  결국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두 분을 다 남편으로 모실 것인가,  아니면 두 분을 다 같이 불가에 귀의시킬 
것인가...)
  그녀는 다음  길을 택했다. 그래서  법정스님과 청년은 그녀의  은혜에 무릎을 
꿇고,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속리산 법주사의 이야기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
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술
  옛날에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열 다섯  살에 장가를 들었다. 장가를 들었으면 어엿한  어른이므로 아침 
저녁 밥상에  반주가 오르기 마련이었다.  밥상을 받고 있을때  간혹 손님이라도 
찾아오는 날이면,  그 상에 그냥 술이나  좀더 가져 오래서 손님대접을  하는 게 
흉될 것도 없었으므로 한  잔이 두 잔 되고, 석 잔이 여섯 잔  되어 얼큰히 취해 
곤드레가 되어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술에 취해 한 잠 푹  자고 나면 속이 컬컬해서 북어국이라도 끓이게하여 해장 
한 잔 한다는 것이 또 곤드레가 되도록 마셨다.
  겨우 나이 이십에 술에 묻혀 하 오 년을 살다보니 한참 때라 느는것은 술뿐이
었다.
  아들 장가들여 며느리보고 사윗감 골라 놓으니 부러울  게 없었다. 먹을 건 넉
넉하고 할 일이라곤 없어 그저 허구 많은 날을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노
랫가락이나 흥얼거리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덧 환갑을 맞
이하게 되었다. 그러니 평생 술만 퍼마시다가 세월을 보냈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영감이 갑자기 병이 나더니 모든  약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며, 병
세가 더욱 심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는 죽을  날이 왔나 보다 하고 온가족이 
머리맡에 모여 운명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병자가  간신히 일어나 앉더니 속이 
메스껍고 답답하여 못견디겠다고 야단이었다.
  음식을 먹어본 지 벌써 여러 날인데 뭐 토할 게 있으랴 싶었으나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마누라, 아들, 며느리, 모두  달려들어 등을 문지르고 두드리고 하였
다. 그러자 마치 민어  부레 같은 길쭉한 고깃 덩어리 하나를  고생 끝에 토해내
고는 축 늘어져 자리에 눕고 말았다.
  징그럽기는 했지만 사람의 몸에서  나온 것을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뭣해서 벽
에 걸어 내버려 두었더니 뻣뻣하게 말라 무슨 나무꼬챙이처럼 되어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병자는 그럭저럭  병이 나아 다시 기동을  하게 되었으나, 
아주 폐인이 되어 피부나 살갗이 뼛속까지  들여다보일 정도로 말라버렸고, 눈망
울도 광채를 잃고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멀뚱해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냄새조차 맡기 싫어했으며,  간신히 미음으로 연명을 하
는 게 산 송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 사신 하나가 왔다. 이 사람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멀리서도 능히 서기를 보고 명당과 보물을 귀신같이 가려내는 재주가 있었다.
  하루는 밤중에 뜰을 거니는데 남산골에서 굉장한 서기가 하늘로 뻗고 있는 것
을 보았다.
  (이번 길에 좋은 보물을 얻게 되었군.)
하고 부랴부랴 통뼈를 앞세우고 서기를 찾아 나섰다.
  그는 골목을 돌고  돌아 큼직한 기와집을 찾아냈다. 밤중에 좀  미안하긴 했지
만 주인을 만나자고  청했다. 깊은 밤중에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외국의 사
신이라 우선 사랑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통변을 통해서 하는 말이,
  「당신 집에 있는 보물을 갖고 싶은데 파시오.」
라는 것이었다.
  (내집에 뭐 그리 값나가는 보물이 있다고 팔라고 하노?)
하고 생각하면서 조상때부터 전해오는 몇 가지  보물을 내다보였다. 그러나 이것
을 본 사신은 모두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그러면서 사신 자신이 벌떡 일어나
더니 벽에 걸린 예의 그 고기 말린 것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입이 함박만큼 벌어져서 손가락 둘을 펴보였다.
  「뭐? 두 냥에 팔라고? 원 별 걸 다 팔라는구먼.」
  주인이 손을 저으니까 사신은 다시 다섯 손가락을 펴보였다.
  「다섯 냥을 받으라고?  돈은 무슨 돈이야. 그까짓 거 갖고  싶으면 그냥 가져
가라구.」
  손짓으로 대답했더니 이번에는 그걸  땅바닥에 내려 놓고 양손을 활짝 펴보이
면서, 그래도 안 되는냐는 듯이 쳐다봤다.
  「아니 이거 값을 자꾸 올리는구나. 그렇담 나도 생각이 있지.」
  주인은 엉큼한 생각이 들어서 또 손을 저어 완강히 거절의 뜻을 표했다.
  통변도 영문을 몰라서  두 사람의 얼굴만 번갈아  쳐다보는데 사신이 두 손을 
쥐었다간 다시  펴보였다. 그제야 주인도 고개를  끄덕여 승낙의 뜻을 표했는데, 
사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사신은 만면에  웃음을 띄면서 
매우 만족한 듯이 무어라고 지껄이는 폼이 팔아줘서 고맙다는 눈치였다.
  팔아줘서 고맙고 뭐고 간에 별난 사람 다  보겠군, 하고 생각하는데 사신이 지
필묵을 꺼내어 무어라 쓰는 것이었다.
  「금 이십만 냥  정」이 아닌가... 주인은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안
이 벙벙해서 말도 못하고 있는데  통변은 내일 어디로 오면 전액을 현금으로 지
불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대금 이십만 냥이  생기기는 생길 모양인데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스무 냥이라는 줄 알고 승낙했던 건데...)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통변을 통해서 중국 사신에게 물어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엇인데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사는 거요?」
하고 물었다.
  「이것은 술의 정이라고  하는데, 이것 하나 만들기에 한 사람의  귀중한 일생
이 허비되었단 말이오.  사람의 생명처럼 귀중한 게 어디 있겠오?  그 귀중한 일
생의 모든 정력과 정기가 이 하나 속에 굳어 있는 것이오.」
하면서 옆의 생수 그룻을 당겨서 그걸로 두어 번 저어 가지고,
  「자 먹어 보시오.」
하며 내밀었다. 궁금히 여기며  마셔보았더니 아주 훌륭한 술이었다. 다시 한 번 
저으니까 너무 독해서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주인 영감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기의 일생이 
온통 술에 젖어 술 속에서 살았다는 걸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멍청해 있는 영감을 남겨두고 중국 사신은  의기양양해서 돌아갔다. 그 후부터 
중국 사신이 참석하는  연회석에는 술을 준비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금으로 된 
갑속에 넣어 비단 주머니에 찬  그 물건을 꺼내어 맑은 물을 두 서너 번 젓기만 
하면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훌륭한 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사 김여준과 봉림대군(효종)
  이조 중엽, 인조  14년 12월에 청태조 누르하치는 조선의 반신  한명련 정명수
를 앞세우고 10만  대병을 몰아 서울까지 쳐들어왔다. 불시에 난을  당한 인조대
왕은 고려 때 고종이 강화도로 들어가 몽고병에 항거하던 것을 생각하고 강화도
로 나섰다.  그러나 그 길조차 청나라  군대가 차단하므로 할 수  없이 서울에서 
50리 떨어진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두 달 동안을 대항하다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어 인조는  삼전도에 있는 청나라 군중으로 나와 치욕적인 서
약을 체결한 결과 그들의 요구대로 세자와 대군을 볼모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의 처참한 꼴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인조는 구인후, 박배원, 조양, 장
애성, 신진익, 오효성,  김지웅, 박기성, 장사민 등 여덟  장사를 추천하여 세자와 
뒤에 효종 임금이 되었던 봉림대군을 엄하게 호위하도록 명령했다.
  세자와 봉림대군이 말을 타고 청나라 군사의 뒤를 따라 눈물을 흘리며 무학재
를 넘어섰다.  그런데 고개 마루에 이르자,  울창한 숲속에서 눈이 부리부리하게 
생기고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동여맨 어떤 사나이가 나타나서는 호위하고 가는 
장애성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너희들만 모시고 가느냐? 나도 세자님과 대군을 같이 모시고 가겠다.」
하며 행렬의 가운데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장애성은 붙잡힌 소맷자락을 휙 뿌리치며 화가 난 얼굴로,
  「여봐라, 어떤 무례한 놈이기에 그래 세자님의  행차에 이다지 소란을 피우느
냐?」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사나이는 다시 장애성의 팔을 꼭 잡으며,
  「뭐라구? 내가 무슨 소란을 피운단 말이냐? 소란이 아니라 나도 세자님을 정
성껏 모시겠다는 그말이야.」
하며 맞서는 것이었다.
  이렇게 소란 아닌 소란이 일어나자 다른 장사들이 같이 합세하여 그 사나이에
게 대들었다. 날으는 범도 장애성의 앞에서는 꼼짝도  못한다 할 만큼 기운이 세
고 간담이 큰 장애성이긴 했지만, 그 사나이의 손에  잡힌 팔은 힘을 쓸 수도 없
이 기진맥진해지는 것이었다. 여덟 장손에 잡힌 팔은  힘을 쓸 수도 없이 기진맥
진해지는 것이었다. 여덟 장사가 모두 함께 달려들어  그 사나이의 팔을 잡고 떠
밀었으나 꿈쩍도 않고 버티고 있었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밀치고 닥치고 하는 바람에 세자가 그 꼴을 지켜보다가 대군을 돌아보며,
  「그 사람의 신분이 누군지 한 번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여라.」
하고 명하였다.
  대군은 스스로 말에서 내리어 그  사나이 앞으로 다가가서 기침을 한 번 크게 
했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그제야 장애성의 팔을  놓고 봉림대군의 앞에 꿇어 앉
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도대체 너는 어떠한 놈이기에  이 나라의 세자께서 행차하시는 길에 무엄하
게도 행패를 부리는 거냐?」
  대군의 말을 듣고 있던 그 사나이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절을 하더니 비통
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황송하옵니다. 소인은 이 나라의 한 백성으로서  다른 재주는 없지만 기운이 
센 것이  소인의 자랑이오매, 이제  국운이 불길하여 이렇게  세자와 대군께옵서 
이역만리 먼 청나라로 떠나심에  소인이 뒤를 따라가며 모시고 싶어 견마지성을 
다할까 하고 굳게  결심을 했사오나, 끝내 저의 청을 조정에서  들어주지 않음에 
지엄하옵신 행차 길에나마 이렇게 소인의 청을 들어주시옵사 하고 소란 아닌 소
란을 피웠나이다. 소인 백 번 죽어 마땅하오나  오로지 저의 힘으로 세자와 대군
을 보필할 수 있을 듯하온 바 데리고 가 주시옵소서.」
  대군은 그의 말에 조금도 악의가  없음을 깨닫고 그에게 자세히 물어 우선 그
의 신분부터 확인하려 하였다.
  「음, 그래. 그렇다면 네  이름이 무엇이며 지금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던 사람
인가?」
  그러자 그 사나이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더욱 공손히 자기의 신분과 조상
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예! 소인의 이름은 김여준이라  하옵고, 할아버지 때부터 소인에 이르기까지 
무과출신이옵니다. 하오나 이번,  나라의 변란에는 조금도 도움을 드리지 못하였
습니다. 워낙  지위가 없어서 국나에  대비코저 하는 마음은  간절하였사오나 한 
사람의 군졸도 없었던 탓으로 국난의 안타까움을 지켜만 보았을 뿐 나라에 충성
을 다하지 못하였사와 평생에 원이 되옵기에 소인은 한 몸으로나마 세자와 대군
을 보필코저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김여준은 이렇게 아뢰며, 나라의 비운을 통탄하면서  자기의 이마로 땅을 치면
서 비분을 참지 못하고 통곡을 했다. 시뻘건 선지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 내렸다.
  「그 사람의 소행이 범상치 않으니 소원대로 따라오게 하여라.」
하고 김여준이 행차를 보필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었다.
  이마에 피가 흐르도록 땅을  치면서 나라의 슬픈 운명을 서러워하는 김여준의 
충성에 다른 여덟 장사는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세자가 타고 
가는 말의 고삐마저 김여준이 잡고 청나라로 향하기 시작했다.
  세자가 김여준에게,
  「대군을 보필토록 하여라.」
하고 명하자 김여준은  다시 대군의 말고삐를 잡고  한순간도 다른 곳에 정신을 
팔지 않고 따르는 것이었다.
  지루한 행차가 계속되었다.
  평소에 말타기가 서투른 대군은 김여준의 보필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김여준은 성대가 여간 좋지  않아서 지루하게 이어지는 행차에서 대군께서 불
편한 듯 싶을 때는 즐겁게 노래를 불러서  마음을 위로하였고, 가는 도중 산천의 
경치가 좋은 곳에 이르면 그  경치를 배경 삼아 시도 짓고 노래도 불러 흥을 돋
구었다. 간혹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여 끝내  불안해하는 대군의 얼굴에 웃음까지 
자아내게 했다.
  대군은 김여준의 그러한 행동이 무척 고마왔고 잠시나마 괴로움을 잊을 수 있
었다. 그럴수록 김여준이 더욱 믿음직했다.
  그 후로 대군은 자기의 몸과 마음을 온통 김여준에게 맡기고 도중에서 머무를 
때에도 잠시 동안이라도 자기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했으며, 심지어는 밤에 
잠을 잘 때에도 바로 옆방에서 자도록 했다.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땅에 당도하자, 오고가는 청나라  사람들에게 김여준은 
농담을 걸고 장난을 치기도 하여 조금도 청나라 사람들에게 굴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행차 도중에 간혹 청나라에서 힘이 세다는 사람을 만나면, 한 손으로 마
치 막대기를 넘어뜨리듯 슬그머니 다리를 걸어  자빠뜨리기도 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몸뚱이만한 나무를 손으로  부러뜨리는 짓을 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도 하였다. 김여준의 그런 모습을 본 다른  장사들은 꼼짝도 못하고 그를 무서워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여준은 원래부터 총명하기가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 어떤 것에라도 다른 사람
이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청나라 땅에 들어선 지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아 청나라의 어려운 말을 모두 알
아듣고는 대군이 의견을 전하지 못할 때에는 대신  통역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문에 대군은 청나라의 통역관이 필요치 않았다.  대군은 그 후로 모든 일을 
명하고 의견을 전달하는데는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다만 여준의 입을 통하여 
전하고 들었다. 여준의 기운과 총명이 그 정도니  자연 대군의 총애는 여준이 혼
자서 독차지했고, 대군은 모든 일에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윽고 청나라의 서울인 지금의 봉천에 당도하자,  청나라 병사들이 관문을 지
키고 서 있었다. 여준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썩 물러나거라. 이제부터  여기는 조선의 세자님과 대군이  계실 조선관이니 
너희들은 모두 물러가도록 하라. 문은 우리가 지킬 것이니 썩 물러가라!」
하며 고함을 지르고 팔을 휘두르자, 청나라  병졸들은 모욕적인 행동이라 생각하
고 그러한 김여준의 태도에 화를 내며,
  「이런 미친놈 봤나, 어디서 함부로 큰 소리야! 무슨 주제넘은 행동이냐!」
하고 호령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김여준은 아무말도 않고 우선 그들  가운데서 제일 힘이 센 듯해 보이는 병사 
한 놈을 잡아서는  어깨 위에다 올려메고 10여  미터 밖으로 집어던지고는 다시 
한 놈을 잡아  팔을 꺾어버리자, 병졸들은 순식간에 뒤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도
망쳐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얼마  후에 그 소문이 온 청나라에 퍼졌다.  그 후로 청나라의 
어느 장사도 그 조선관 앞으로  지나갈 때는 고개를 숙이고 죽은 듯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앞을 지나면서 서로가,
  「얘, 여기가  조선관이야. 조심해서 지나가야지  만일에 김장사한테만 걸리는 
날이면, 이유도 필요 없고 변명할 여지도 없이  꼼짝 못하고 개죽음을 당하지 않
으면 병신이 되고 만단 말이야.」
하며 벌벌 떨면서 그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김여준의 이름은 점차 널리  퍼져 청나라의 여러 장군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마침내는 청나라 황제까지 김여준이라는 조선 장사를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해, 청나라 황제는 다시 명나라를  침략하려고 야심을 품은 나머지 
대군을 진군시키기로 했다.
  황제는 친히 대신을 보내어 조선관의 대군을 같이 출동하게 하라고 명을 내렸
다. 대군은 황제의  그런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청나라  군사들과 동행하여 
명나라로 향했다.
  여덟 장수가 대군의 오른쪽에서 말을 호위하며  따랐고, 김여준은 말의 고삐를 
잡고 길을 나섰다. 수십만의  청나라 군사와, 대군을 위시한 조선의 장수들이 명
나라로 행군해갔다.
  요주를 다시 지나고  명나라를 향하여 일로 전진할 즈음, 직접  싸움에 참여한 
청나라 황제는 군중에 따르는 대군이 탄 말이 아무래도 시원찮게 보였다.
  그는 곧 명령하여 대군의 말을 바꾸어드리라고  명령했다. 대군은 황제가 내려
준 거대한 준마 한 필을 얻긴 했으나, 워낙  말이 거세어서 도저히 그 말을 타고 
갈 만한 장사가 없었다.
  여준은 당장에 억센 팔로 말의  목덜미를 꽉 잡고 입에다 자갈을 물리고 다리
를 꽉 잡아 꼼짝도 못하게 세우고는 고삐를  채우고 안장을 올려놓았다. 그 모습
을 지켜보던  청나라 군사들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청나라 황제도  여준의 그런 
기운에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리하여 여준은 그렇게 억센  준마를 다시 조심스럽게 몰아 대군을 안전하게 
모시는 것이었다.
  황제는 다음날 아침에 대군을 불렀다.
  「오늘은 좀 빨리 행군을 할  것인즉 말타기에 익숙한 대군은 특히 마음에 준
비를 단단히 하되,  만약 행군에서 낙오하는 자는 고하를 막론하고  군법에 의하
여 엄하게 다스릴 것이니라.」
  황제의 이 한 마디에 대군은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
금까지 다만 한두 번의  말을 타기는 했지만, 그는 천천히 걷는  말을 탔기 때문
에 말이 뛰기 시작하는  날이면 잠시도 말 위에서 견디어 낼  자신이 없었고, 더
구나 그 전의  말보다 어제 새로 황제가 내려준  준마는 더욱 거세고 잘 달리는 
말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앞에서 대답은  했을망정 온 몸의 맥이 풀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대군은 황제의 분부를 받고 나와 여준의 앞에 다가서면서,
  「얘 여준아,  내가 도저히 말을 타고  급행군을 할 수 없으니  아무래도 나는 
내일 아침에 이 벌판에서 고스란히  국번에 처단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하며 탄식을 했다.
  대군의 처량하고 수심에 찬 얼굴을 본 여준은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과 불쌍한 
대군의 모습으로 금방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나 잠시 후에  그는 대군
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자기의 힘을 과시해보였다.
  「소인이 살아  있는 이상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소인의  목숨이 있는 
그 시간까지는 대군의 신변에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조금도 해를 입지 않게 할 
것입니다.」
  여준의 이 말에  대군은 다소 안심이 되었으나  그래도 마음에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날밤은 근심과 슬픔으로 몸부림치며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과연 황제는 모든 장교들을  모아놓고 자기가 생각한 전투지까지 
약 2백 리 길을 단숨에 달리도록 명령하는 것이었다.
  질풍 같은 먼지를  일으키며 수 백 마리의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봉림대군
이 이끄는  군졸들도 안간힘을 다하여  행군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대군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준은 준마의 고삐를 단단히  잡고는 조
심스럽게 그리고 빠른 속력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말을 몰아 달렸다.
  대군은 안장 위에서 몸을 엎드린 채 말등에  찰싹 달라 붙었고, 여준은 드디어 
행군의 선두를 무섭게 달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목적지까지 2백 리 길을 달려온 
다른 모든  군사들은 무사했지만 봉림대군은 말에서  내리자 지금까지의 긴장을 
풀었던지 땅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대군은  물론 그가 이끄는 병졸 가운
데는 한 사람도 낙오자가 없이 무사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다시 행군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넓은 벌판에 
울렸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앉으며, 
  「오늘은 내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더 이상 말을 못타겠다.」
하며 서글프게 탄식을 하는 것이었다.
  대군의 이런 말을 들은 여준과 여덟 장사는 대군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비록 오늘이  고달프시더라도 대군의 아래에는 수십만의  군사의 눈이 있지 
않사옵니까? 하오니 이는  오로지 하늘이 대군을 단련시키는 것이온즉 괴로우시
더라도 이 순간을 참고 이겨내셔야 하옵니다.」
하며 억지로 양 팔을 잡고 말 위에다 모시고 행군을 시작했다.
  행군은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그러나 어제처럼 급행군은 아니어서  조금 견디
기가 수월했다. 그런데 20여 리쯤 지나자, 대군이 말 위에서 현기증을 일으켜 의
식을 잃고 떨어지려는  순간, 여준이 재빠르게 대군을 붙들어 나무  그늘 밑으로 
모시고 가 잠시 동안 안정을 시켰다.
  얼마 후에 대군의  의식이 약간 회복되자, 여준은 대군을 자기의  등에다 가볍
게 업고, 나는 범처럼 말위에 올라 앉아 거센 준마를 채찍으로 때려 몰았다.
  그러나 얼마쯤 달리자,  다시 황제는 모든 군사에게 어제와 같은  급행군을 하
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자 어제의 행군은 약과인  듯 더욱 빠른 급행군이 시작되
었다. 여덟  장사들은 모두 지쳐서 벌판에  쓰러졌다가 일어나곤 하였다. 그러나 
여준은 봉림대군을 업은 채 달리면서도 조금도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급행군을 연  3일을 계속한 다음날, 황제는 그제야  행군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천천히 말을 몰고 행군을 하던 황제는 봉림대군의 옆으로 다가와서,
  「이제 천천히 따르도록 하라!」
하고 넌즈시 알려주었다. 대군은 그제야 약간의 마음이 놓였다.
  벌판의 회오리바람은 금방이라도 사람을 집어 삼킬  듯 세차게 일고 있었으며, 
추위는 살을 애는  듯했다. 7백리 가량 펼쳐진 벌판의 황야는  정말 쓸쓸하기 그
지 없었다.
  해가 벌판 멀리  사라지고 어둠이 깔리자, 군사들은 저마다 천막을  치고 밤을 
샐 준비를 했고, 여준도 천막을 치고 봉림대군을 모실 준비에 바빴다.
  대군은 천막 안에서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 내 몸을 감당할  기력도 없는 몸으로, 천자로 태어나 적국을 방어하지 못
하고 오늘날 이렇게 한 나라의 대군의 몸으로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다니...」
  이렇게 서글픈  생각을 하는 봉림대군의 귀에는  얼음사이로 흐르는 물소리와 
바람에 휘날리는 가랑잎 소리조차 서글프고 처량하게 들려왔다.
  대군은 이것저것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분함을 참지 못하여 주먹을 불끈 쥐었
다가는 칼을 잡아빼어 천막을 내리쳐서 찢기도 했다.
  찢어진 천막 사이로  둥근 달이 차가운 구름을 끼고 서산으로  향하고 있었고, 
하늘에는 외로운 외기러기 한  마리가 울음조차 구슬프게 울면서 남쪽으로 날아
가고 있었다.
  천막을 지키는 보초들은 지리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발이 시려서 동동 구르
며, 향수에  젖은 듯 보초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사이의 
달에만 눈을 돌리고 있었다. 삼경이 될 때까지  대군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공상
과 울분에 젖어 몸부림치고 있었다.
  대군은 보초를 불렀다.
  「지금 여기가 어디 땅이냐?」
  보초는 대군의 곁으로 다가와서,
  「예, 여기는 옥하관이옵니다.」
하고 지명을 가르쳐 주었다.
  내일의 행군을  위하여 대군은 천막을  내리고 다시 잠을  청하였으나, 여전히 
하늘의 기러기 울음소리만 귓전에  들려오며 갖가지 잡념이 머리를 복잡하게 하
므로 사경이  될 무렵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울분과 수심은  더욱 대군의 
심증을 괴롭혔다.
  대군은 잠을 청하려고 안간힘을 다  쓰다가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일
어나며 바로 옆 천막에 있는 여준을 불렀다.
  「얘, 여준아!」
  언제나 대군의 거동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피고 있었
던 여준이었기  때문에, 한 번 부르는  소리에 여준은 옆 천막에서  눈을 비비며 
대군의 천막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부르셨나이까?」
  「음 그래, 거기  앉거라. 내 아무리 잠을  청하려 해도 도무지 이룰수가 없구
나!」
  대군은 다시 긴 한숨을 내쉬고는,
  「거기 행군 보자기에 붓과 벼루를 내놓아라.」
하고 여준에게 글을 쓰겠다고 말했다. 여준이 먹을  갈아 대군의 앞에 놓자 대군
은 일필의 시를 지었다.
  옥하관 벌판에 밤은  깊어 삼경인데, 밝은 달빛 아래에는 기러기만  날며 서글
피 노래를 하는구나」
  대군은 이렇게 쓰고는 다시 여준에게 시를 전해주면서,
  「내 마음 울적하기 이를 데 없으니 네가 이것으로 노래나 불러보아라.」
하였다.
  여준은 우렁차고 낭랑한 음성으로 그  시에다 음을 붙여 노래를 불러 잠을 이
루지 못하는 대군의 심경을 달래며 하룻밤을 지새웠다.
  날이 훤하게 밝아오자 다시 급행군은 시작되었다.
  여준이 정성껏 모신  덕에 대군은 무사히 북경까지 도착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야 다시 청나라의 조선관으로  돌아온 대군은 세자에게 경과를 알리고 여준
에게 벼슬을 주라하니 선략장군으로 봉하여 6품 대우의 벼슬에 오르게 했다.
  어느날 청제가 만주 지방의 관료들과 몽고 지방의 왕들을 모아놓은 자리가 있
었다. 그 자리에는 대군과 세자도 초청을 받아 참석하게 되었다.
  황제 앞에 모인  각 지방의 용사들은 저마다  특기를 자청하고 힘자랑을 하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넓은 궁정에서 팔씨름으로부터  씨름에 이르기까
지 번져 끝내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주먹질까지 오가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기운이 황소보다 더 센 장사도 많았고, 묘한  재주를 부리어 사람의 눈을 속이는 
자들도 많았다. 좌중에  모인 사람들은 웃다가는 놀라기도 하며 흥겨워  야단 법
석을 떨고 있었으며, 황제도 그 광경을 지켜보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더구나 우
스운 것은 몽고인들의  야만적인 몸짓과 춤이 더욱  좌중의 폭소를 자아내게 했
다.
  황제가 그런 광경을  한참 지켜보고 있었으나, 웬지 조선 사람의  재주군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음에 세자를 돌아보며,
  「귀국에서도 좌중에 나와서 자랑을 할 만한 사람을 나오도록 하여라!」
하고 용안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세자는 곧 대군에게 명하여 여덟 장사를 나오게 했다.
  여덟 장사가 마당으로 나와 다시 다른 지방의 장사들과 서로 자랑을 비교하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이때 황제 앞에 어느 사나이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황제가 그 사나이를 바라보니 생긴  모습인즉 키가 무려 여덟 척이 넘은 거구
에다 마치 얼굴 생김은 범같이 흉악하게 생겼고,  얼굴 전체에는 코 하나가 거의 
차지 하다시피 우뚝 솟아 있고, 두 개의  콧구멍은 마치 주먹이라도 쉽게 들어갈 
만했으며, 손발의 크기는 또한 보통사람의 손발 세 개는 넘을 듯해 보였다.
  그 사나이는 황제 앞에서 허리를 굽신거리며,
  「폐하! 소인도 저 장소에 나가서 대겨토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같이 겨루기를 청했다.
  황제는 우선 거대하게 생긴 마치  짐승 같은 사나이의 신분부터 먼저 알고 싶
었다.
  「너는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그 사나이는 무섭게 생긴 눈을 아래로 내리뜨며,
  「예, 소인은 만주의 흑룡강 지방에 사는 우거라 하옵는 자입니다.」
  황제는 그  사나이에게 궁정으로 나가서 장수들과  대결해보라고 허락해 주었
다. 그런데 사실 그 모임은,  황제가 자기 슬하에 둘 만한 장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밀리에 그러한 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우거는 곧 궁정으로 내려가더니 그 가운데 가장 힘세다고 자처하는 한 장사를 
한 팔로 들어서 수 십미터 밖으로 던지고는 다시 한 장수를 손으로 가볍게 눌러 
땅에다 납작하게 쓰러뜨려 죽이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만 기겁을 하여 놀라고는 
곧 그 우거를 대위무관으로 임명하여 자기의 부하로 삼았다.
  그 사나이는 거동은 비록 몸집은 크고  둔해보였지만 재빠르기가 비호 같았고, 
용맹은 비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느 촌락의 한  자객이 황제를 해치려고 궁중으로 뛰어들
어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우거가 육감으로 짐작하고는 단숨에 범처럼 뛰어
나가서 자객을 들어서  담 밖에까지 집어던져버린 적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는 황제는 우거를  심복 부하로 삼아 잠시도  자기의 곁을 떠나지 않도록 
했다. 즉 대군을 보필하는 여준과 같은 입장에 놓인 것이다.
  다시 얼마 후에 그런 잔치가 또 벌어졌다.  역시 그전처럼 갖가지 재주와 용맹
을 부려 저마다 황제의 눈에 들려고 있는 힘을 다하여 겨루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우거가 황제에게,
  「폐하! 오늘 또 저런 놈들을 한 번 골려주고 싶은데 어찌 하오리까?」
하고 겨루기를 청하자, 황제는 웃음을 띠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해주는 것이
었다.
  우거는 곧 한참 벌어지고  있는 궁정으로 내려가서 이번에는 수십명의 장사들
을 한꺼번에 모조리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몰아넣고는 발로 밟아서 고스란히 처
치해 버리는 것이었다.
  이때 문 앞에서  말고삐를 잡고 있던 여준이 그  꼴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는 
우거를 노려보았다. 황제가 여준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거기 문 앞에서 말 고삐를 잡고 있는 자가 누구냐?」
하고 호령했다.
  그러자 대군이 황제의 귀에다 입을 갖다대고는,
  「예, 저자는 저의 말을 몰고 다니는 마부이옵니다. 김장사라는 사람이지요.」
하고 넌즈시 조선에도 장사가 있다는 것을 자랑했다.
  「음, 그래. 바로 저자가 조선관에서 이름 있는 김장사란 말이지?」
  우거가 황제와 대군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다시 황제 앞으로 다가서
며,
  「폐하, 저자가 아까부터 소인의 행동을 일일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저놈이 얼
마나 센 놈인지 한 번 대결을 해보겠사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다시 청을 하는 것이었다.
  황제가 대군에게 뜻을 묻자 대군도  쉬이 허락을 하고는 여준을 불러 뜻을 전
했다.
  여준은 의젓한 태도로써 황제 앞으로 나서면서,
  「폐하! 인간의 힘과  묘기에는 신을 따르지 못하는 한계가 있사옴에  우리 두 
사람이 서로 기운으로 대결을 할 것임에 필경 어느 한 사람은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온데 그렇게 되면 어찌 하오리까?」
하고 약속을 청했다.
  황제는 다시 너털 웃음을 웃으면서,
  「오늘의 이 모임은  나의 명령과 군법에 의한  것으로써 일단 전쟁과 다름이 
없으니 전쟁에는 반드시  어느 한쪽이 죽음을 당한  후에야 판결이 나는 법이라 
누구 하나가 죽는다 하더라도 벌하지 않을 것이다. 재주껏 대결이나 해보아라.」
하고 대결에 대한 뒷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드디어 대결이 벌어졌다.
  궁정에 나온  두 사람의 모습은  실로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좌중에서 구경을 
하던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두 사람의 거동만 살필 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먼저 우거가 팔을 걷어올리더니  금방이라도 여준을 때려눕힐 듯한 기세로 덤
벼들었다. 몸집이 좀 작은 여준은 우거가 덥썩  누르려는 순간 재빨리 옆으로 빠
져나오며 다섯 손가락을 우거의  벌렁거리는 콧구멍 속에다 집어놓고는 위로 치
켜올렸다. 우거는 그만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려 했다. 그때 여준은 느닷없이 우
거의 면상을 오른손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리고는 콧구멍에서 손가락을 빼고는, 
다시 우거의 가슴팍에다  거센 주먹을 몇 번 내리갈겼다. 그순간  우거는 입에서 
피와 거품을 뿜으며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숨을 몰아쉬며 뻗어버리는 것이었
다. 8척 장사 우거가 죽어버린 것이었다.
  여준은 손바닥을 툭툭 털고 자기의 옷에다 우거의 콧구멍에서 묻은 피를 말끔
히 닦고 정중한 태도로 황제 앞에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다가와서,
  「장난이 너무 지나쳐서  저 사람을 죽였습니다. 대단히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만 약속대로 한 것뿐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하며 황제의 심복을 죽인데 대한 인사를 했다.
  황제는 부하를 죽인 여준이  미웠으나, 이미 약속을 한 이상 벌을  내릴 수 없
어서 한탄만 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가 지난 어느날, 다시 황제는 모든  신하와 몽고 제왕
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역시 세자와 대군도 같이 초청되었다.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술을 주고 받으며  흥청거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여준만
은 술을 마시지 않고 안주만 집어먹고 있었다.
  황제가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여준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술을 마시지 않느냐?」
  여준은 대답하기를,
  「예, 본래 저는 술을 잘 마시는 체질이옵지만  술을 마시고 나면 실수하는 버
릇이 있어서 그러하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 황제는,
  「오늘은 좋은 날이라 아무리 실수가  많아도 내 용서를 하여 벌을 주지 않을 
테니 아무 걱정 말고 마셔라.」
하며 웃음을 띠었다.
  황제의 이러한 일단락의  허락이 내리자, 술상으로 가서 두 말의  술을 단숨에 
마시고는 안주로서 고기 열 근을 한 입에 쑤셔넣은 다음 다시 땅을 치면서 노래
를 부르다가 다시 술잔을 하나 집어들고는 황제 앞으로 집어던지면서,
  「이 여진족 오랑캐놈아! 우리나라는  너희 조국이요, 예의지방인데 네놈이 이
토록 능멸하느냐! 더러운 오랑캐놈아! 내가  오늘 안주로 네놈의 고기를 내 입으
로 씹지 못함이 천추의 한이다. 무지한 짐승보다 더 못한 오랑캐놈아.」
하고 황제 앞으로 다가서며 주먹으로 황제의 면상을 칠 듯했다.
  그러자 무사들이 달려들어 여준을  끌어내려 그날의 잔치는 황제 얼굴에 똥칠
만 한 셈이었다.
  황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에게 그런 행패를 부린 
여준이 괘씸했다.  그러나 일국의 황제의  입으로 벌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마음속으로만 분함을 누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
다. 그 뒤로 간혹 잔치가 벌어져도 여준에게는 절대로 술을 주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을유년이 되자, 세자와 대군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여준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여 그에게 우림장군이란 벼슬을 내리고 
조정의 병사를 돌보게 했다.
  그러나 몇 달 후에는 그  벼슬마저 사직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
고 살았다. 그 이유로는 오로지 중국 놈들의  행패 속에서는 아무런 벼슬도 하기 
싫다는 그의 고집에서 온 것이었다.
  그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지 않음에 이웃 사람들은 그를 두고,
  「영감이 서울로 다시 올라가면, 아마도 임금에게  공헌한 것이 있으니까 벼슬
도 할 것인데 왜 고생을 하고 있을까?」
하고들 수군거렸다.
  어느날 동네 사람이 그에게 서울에 가서 벼슬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그는,
  「임금님은 부모와 마찬가지인데  자식이 부모에게 조그마한 효도를 했다하여 
어찌 그 대가를 바라며 벼슬을 얻으려 하겠오?」
하며 점잖게 말했다.
  그는 옛날의 여느때와 달리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이웃 어른들과 함께 같이 
술과 이야기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간혹 혼자서 스스로의 과거를 회상하며,
  (중국 오랑캐놈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다음에는  내 조정에 들어가  임금님을 
다시 보필하리다.)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세월이 흘러 소현세자가 죽고  여준이 모시던 봉림대군이 다시 세자로 책봉되
자 봉림세자는 여준의 거처를 알기 위해 각 지방마다 수소문을 폈다.
  그런데 그때에 여준은 고향을  떠나서 어디론지 정처없는 떠돌이 세월을 보내
고 있어 아무도 그의 거처를 아는 이가 없어 조정에서는 찾을 도리가 없었다.
  봉림세자는 갖은 방법을 다한 끝에 마지막에는 여덟 장사를 시켜 전국을 수색
케 했다. 그러나 영영 그의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 후 인조가 승하하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효종이었다.
  효종은 끝내 여준을 잊지  못하여 팔도감사에게 하명하시어 여준을 찾도록 했
다.
  영을 내린 몇  달 뒤에 전라도 감사가 효종  앞으로 상서를 올린 것이 효종의 
귀에 들렸다. 그 상서에 의하면, 수소문 끝에 여준이라는 자가 전라도 영암에 산
다는 것이었다.
  효종은 여덟 장사 가운데서 옛날에 여준과 가장 친했던 김지웅을 즉시 영암으
로 내려보냈다.
  영암에 도착한 김지웅은 심심 산골 촌락에서 여준의 이름을 대자 여준이 세상
을 떠난 지가 벌써 두 달이 넘었다는 것이었다.
  김지웅의 이러한 보고를  들은 효종은 마음에 슬픔을 금하지 못하고,  몇 달을 
두고 눈시울을 적시며 옛날을 생각하며 지내다가 신하에게 명하였다.
  「여준이 비록 세상에  살아 있지 못하지만 그를 병조판서로 봉하고,  그의 후
손을 불러 조정의 인물로 등용시키도록 하여라!」
  그 후 여준의 아들은 다시  조정에 등용되어 벼슬을 지냈고 효종은 옥하관 전
투에서 그가 지었던 노래를 생각하시어 그 시에다 다시 구절을 바꾸어,
  「월명 비야에 억 김장사」라 고쳐 부르며 끝내 여준을 잊지 못했다.
  토정 이지함의 소원
  토정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에 대답을 못할 사람은 아마 드무리라.
  이 토정비결을 지으신 이가  바로 이토정이란 별호를 가지신 이지함 선생이시
다.
  선생은 이조 중종  12년에, 고려 때 학자로 이름난 목은  이색의 6대손으로 태
어났다. 그는  명문의 집에서 태어났으나  토굴 같은 집에서  한평생을 사셨다고 
전한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그릇이 컸다.
  하루는 형 지번을 따라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홍제교를 지나다 세 거
지 아이들이 쭈그리고 앉아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도포 자락을 쭉쭉 셋으로 나눠  찢은 뒤 세 아이들 어깨에 
하나씩 하나씩 걸쳐 주고 자신은 홑적삼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의 자당이 의아롭게 생각하며 물으니 토정은 천연스럽게 대답하기를,
  「그거야 제가 안 입었으니 저 대신 다른  사람이 입었겠지요. 너무 염려 마십
시오.」
  또 한가지, 선생의 인품됨을 잘 표현해 주는 일화가 있다.
  토정 선생이 조부를  장사 지내기 위해 지관에게 그 장지  자리를 의뢰했는데, 
한 곳에 머문 지관이,
  「이곳이 참 좋긴 합니다만, 이곳을 장지로  택한다면 당신의 자손들에게는 좋
지 못하겠고 다른 친척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 같군요.」
하고는 아깝다는 표정을 했다.
  「그래! 그렇다면 이곳으로 정하겠다. 자, 어서 서둘러라. 내 자손들이 화를 당
할지라도 친척들이 잘 된다면야 그야 더 바랄 것이 뭐겠느냐!」
  지관의 말은 용케 들어맞아  그의 후손들은 영달치 못했으나 이산해를 비롯한 
그의 친척들은 꽤 많이 등용되었다.
  또한 그가  대하던 사람들은 자기와는  전혀 신분이 다른  하층 계급들이었다. 
그는 언제나 남들로부터  상놈이라든지, 못난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을 
동정하고 할 수 있는 한 성의껏 도와 주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양반집에서 아침부터 아이구 나  죽네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신음 소
리가 담장 밖에까지 들렸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토정이 매를 맞고  있는 그 집 
종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아플까! 그러나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야  그 아픔을 짐작이나 하랴. 
나도 한번 맞아 그들의 심경을 이해해 보고 싶구나)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매 한번 맞아 보기가 소원이었다.
  어느날 토정은, 어느 양반집 대문을 지나다가 마침  뜰에 그 댁 안주인으로 보
이는 한 여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느닷없이 뛰어들어가 그 여인에게 수작을 걸
었다. 어느 틈에 알았는지 집 주인과 하인이  몽둥이를 쳐들고 미친 놈이라고 야
단이었다.
  한데, 주인이 그의  행색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실성한 사람 같지는  않고 하여 
행여 암행어사라도 아닌가 생각하고 정중히 대했다.
  (매맞기도 힘들군!)
  실패를 한 토정이  하루는 원님 행차길에 그 앞으로 뛰어들었다.  과연 원님은 
노발대발하여 그를 꽁꽁 포박하여 동헌으로 끌고  가서 형틀에 올렸다. 옳다구나 
이제 됐구나,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던 토정이었지만, 원님이 그의 풍채
를 보고 예사 사람이  아님을 알았던지 다만 몇 마디 꾸짖고는  풀어 주었다. 두 
번씩이나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처럼 어려운 일은 내 생전 
처음 보겠군, 하면서 매맞기를 단념했다.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문전 걸실을 하며 팔도 강산을 두루 유랑하던 김 삿갓은 어느해 늦은 봄 함경
도 길주땅에 다다랐다
  어느곳이건 거지 꼴을 한 방랑 시인을 반겨  줄 곳은 없겠지만, 길주라는 곳은 
더욱 더 풍속이 아름답지 못해서, 옛날부터  지나가는 길손에게 잠자리를 제공하
지 않는 것을 무슨 전통처럼 여기고 있었다.
  「모두 허씨뿐이구나. 허씨 일족이 모여 사는 곳인 줄은 몰랐구나. 어디서든지 
잠자리를 구하고, 밥 한 술이라도 얻어 먹어야 할 텐데...」
  그러나 온 고을을 다 뒤지고 다녔어도 한 집도 허락하는 집이 없었다.
  「아무리 과객을 꺼리는  인심이라고 해도, 열 집에 한 집쯤은  마지못해 하면
서라도 재워 주는 수가 있는 법인데, 정말 이렇게 철저한 지방은 처음 보겠구나.

  김 삿갓은 이렇게 혼잣말을 지껄이면서 밤을 도와 북으로 북으로 자꾸 올라갔
다.
  이름은 길주,  길주 하지만 결코 길한  고을은 못 되며 성은  모두 허가이지만 
허가하는 법이 없구나.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이런 풍자시를  읊은 김 삿갓은 일로 북상하여 이윽고 명
천땅에 이르렀다.
  이 지방은 옛날부터  명태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여기 역시 
길주 못지 않게 인심이 고약해서 그 흔한 북어 꽁지 하나 주는 사람이 없었다.
  「흥, 이름이 너무 좋은 탓인가...」
  명천, 명천 하고 부르지만  사람들은 밝음이 없고 어전, 어전하고 자랑을 하지
만 밥상에는 북어 꽁지 하나 없구나.
  더 위로 올라가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그래서 단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 봄은 다 가고, 초여름의 숨막히는 더위가 땀을 뻘뻘 흘리게 했다.
  「아, 강이 보이는 구나. 가서 멱이라도 감고 가자.」
  김 삿갓은 강변에 이르러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물 속으로 들어가 한바탕 몸
을 닦고 씻고 했다. 몇 달 만에 목욕을 하는 것이던가.
  물에서 나오자, 이번에는 한쪽에 팽개쳐 놓았던  옷을 집어다가 손으로 주물러 
때를 빼고, 바윗돌에 비벼 문질러서 맑은 물에서 행구었다. 빨래를 하는 것이다.
  워낙 찌들어서 잘 빨아지지 않았으나, 겉에 묻은  때와 땀내는 어느 정도 가셨
으므로, 옷을 햇볕 쬐는 바위 위에 널어 놓고, 그는 희 모래밭에 앉아서 두 다리
를 쭉 뻗었다. 머리에 삿갓을 쓰고 있으므로  지나가다 누가 보아도 고기라도 잡
고 있는 줄 알지 벌거벗고 앉아 있는것인 줄은 모를 것이었다.
  머리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여름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올라기기 묘묘한 
산봉우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허운다기봉이라」
  김 삿갓은 옛 시의 한 구절을 중얼거리며 스스로도 한 수 읊어 보았다.
  한 봉우리, 두 봉우리, 서너 봉우리. 다섯 봉우리, 여섯 봉우리, 일곱 여덟 봉우
리.
  잠깐 사이에 다시 생기는 천만 개의 봉우리 구만리 장천이 모두 구름 봉우리.
  옷이 다 말랐다. 그는  옷을 주워 입고 언덕 위의 깍아지른  듯한 절벽 밑으로 
갔다. 필낭에서 붓과 먹을 꺼내고 넓적한 돌을 주워다가 먹을 듬뿍 갈았다. 그리
고 조금 전에 읊은 시를 그 절벽에다 써 내려갔다.
  다 쓰고 나서 김 삿갓은 혼자서 흥에 겨워,
  「됐다, 됐어! 비에 씻겨 없어지기  전에 누군가 나같이 할 일 없는 석공이 지
나가게 되면 혹시 새겨 줄는지도 모르지.」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글이 참으로 좋구료. 내가 석공이 아닌 게 못내 섭섭하외다.」
  김 삿갓은 후다닥 뒤를 돌아보았다. 점잖게 생긴  중년 선비가 절벽에 쓰인 글
을 보면서 감탄을 하고 있었다.
  「구름이 하도 기괴하길래, 하운다기봉을 읊어 본 즉경입니다.」
  김 삿갓은 자랑도 아니요, 겸손도 아닌 이런 말로 대꾸를 했다.
  「산수에는 하긴 즉경이 으뜸입니다. 나 역시 풍류깨나 즐기는데요.」
  「그럼 선생님께서도 산수를 한 수 읊어 보시지요. 붓은 여기 있고, 절벽엔 아
직도 여백이 많습니다.」
  서로 인사도 없는 사이였으나, 김 삿갓은 이렇게 권해 보았다.
  「아이구, 아니올시다. 저야, 어디 저런 글과 견줄 수나 있겠소.」
  중년 선비는 이렇게 겸손을 부리며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이 근처에 사는 최백담이란 사람이외다. 존명을 알 수 없을까요?」
  「백담이라면 필시 아호이겠군요. 저는 이름도 호도 없는 사람입니다. 성은 김
가인데, 삿갓을 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김 삿갓이니 김립이니  하는 말
을 듣고 있습니다.」
  「오라. 바로 선생께서 그  유명한 김 삿갓이시구료. 이거 정말 일부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기회를 우연히 만났소이다.  선생의 존명은 익히 듣고 있소이
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김 삿갓도 진심으로  자기를 반겨 주는 사람을  만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
다. 이래서 단박에 두 사람은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이렇게 되니 피차 풍류객으로서 그냥 첫인사만 주고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자, 어떻습니까? 삿갓 양반, 한 수 부탁드립니다.」
  「글쎄요, 그럼 운을 부르시지요.」
  「흐를 류, 경치를 소재로 하지요.」
  「좋습니다. 한번 불러 보지요.」
  산을 칼 같은  기상으로 하늘 위로 치솟으며  물은 병정들의 아우성 소리처럼 
땅을 흔들고 흐르도다.
  「음, 과연 삿갓 양반의 시풍의 그대로 드러나는군요.」
  최백담은 진심으로 탄복하여 마지 않는 것이었다.
  「자, 이번엔 최선생 차례입니다. 제가 드리는 운은 돌아올 회자입니다.」
  서로 한 구씩  지으면 그것이 대구가 되는 것이다. 최백담은  한동안 생각하더
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산은 강을 건너가려고 강 어귀에 서 있고 물은 돌을 뚫으려고 돌 머리를 돌고 
있도다.
  「역시 좋군요.」
  김 삿갓은 무릎을 치며 칭찬을 했다.
  「대단치 않습니다.」
하고 최백담은 겸손의  말을 했으나, 내심으로 스스로 생각해도 잘  지었다고 느
껴지는 모양이었다.
  김 삿갓이 한 마디 했다.
  「하지만 선생,  그 욕자를 불자로 갈고,  장자를 나자로 바꿔  보면 어떨가요. 
그것이 더욱 자연의 마음에 가깝지 않을까요?」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해 강  어귀에 서 있고 물은 독을 뚫기 어려워 돌 머리를 
돌아가는구나.」
  「암, 그렇군요. 정말  꼭 들어맞습니다, 그려. 글자  한 자씩 바꾼것이 이렇게 
큰 효과를 낸다는 것은, 실로 새삼 놀랄 일인데요.」
  최백담은 진심으로 기꺼운 모양이었다. 김 삿갓도  그의 겸허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보통 자기가  지은 시를 수정받으면 고맙게 생각하기에 앞서  고깝게 여
기기가 일쑤인 것이다.  그러나 최백담은 솔직하게 자기의 시가 김  삿갓이 고쳐 
부른 것보다 못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삿갓 선생,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갑시다. 가서  한잔 들면서 좋은 말씀 듣고 
싶습니다.」
  김 삿갓도 마치  지기를 얻은 듯하여 쾌히 승낙했다. 그래서,  길주, 명천 이래 
계속 헐벗고 굶주리기만  했던 그에게도 이날부터 푸짐한 식사와 술,  그리고 편
안한 잠자리가 마련되었다.
  백정 박치수와 어사 어유룡
  영남 지방의 대읍, 진주에 박치수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조상 때부터 백정 노
릇을 해온 그인지라 돈은 무진장 많지만 죽기 전에 한번 벼슬을 하고 죽는 것이 
그의 평생 소원이었다.
  마침 진주 감영의 어떤 이방이  나라돈을 횡령한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자 박
치수가 대신 그 돈을 물어 주었다.
  이방은 그야말로 꿈만 같은 일이었다.
  (이제 나도 양반이 되었구나! 어흠,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조상 때부터 양
반놈들한테 천대를 받아 왔는데 내가 그 양반이 되었으니 나도 이제부터 행세를 
해봐야지...)
  그러나 그 진주  내에 행세깨나 한다는 양반들이  백정이 좌수를 했다고 하여 
모두 들고 일어났다.
  박치수는 가산을  정리해서 충남 서산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곳에서는 아무도 
박치수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좌수 행세를 하기가 편했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이번에 삼남 지방으로 내려오는 어유룡 어사가 자기와 이
종간이라고 말했다.
  웬 낯선 나그네가 마을에  들어섰는데 옷차림이 허름하고 터덜터덜 걷는 꼴이 
먼길에 무척 지친 듯하였다.
  그는 지나가는 농부에게 박좌수의 집을 물어 그 집을 찾아갔다.
  저녁이 되어 다른 손님들이 다 흩어져 간 뒤에 이 나그네와 주인은 사랑에 마
주 않았다. 손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인장께서는 복도 많으십니다  그려. 좌수도 하시면서 또  어유룡 어사하고
도 친척이시라니...」
  이 손님이야말로  장본인 어유룡 어사였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  그런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왔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주인 박 좌수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점잖게 말했다.
  「뭐, 변변치 않습니다.」
  어유룡 어사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허리춤에서 마패를 끄집어 
내보였다.
  박 좌수는 얼른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무심코  손님의 거동을 따라 살펴 
보니 마패가 아닌가?
  「아니?」
  그는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더니 온 몸을 사
시나무 떨듯 떨며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백 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소인을 죽여 주십시오.」
  그는 새파랗게 질려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리고 띄엄띄엄 그  사유를 밝히는 
것이었다.
  어사는 빙그레 웃으며 양반 행세가 그처럼 소원이라면 한번쯤 시켜 주마고 약
속하고는 이튿날 서산읍으로  들어갔다. 어사 출두를 한 뒤에 그는  동헌에서 호
령을 했다.
  「이 마을에 내 친척  어른이 계시니 들른 김에 인사를 가야겠소.  길 좀 안내
해 주시오.」
  「그리하십시오. 박 좌수님이 친척이시라더니 과연 그러시군요. 저희들이 모시
겠습니다.」
  원은 즉각 채비를 차리게 한 다음에 온 육방 관속들이 다 따라 나섰다.
  박 좌수의 집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소문대로 어유룡 어사가  인사를 하
러 온다니 이 얼마나 큰 구경거리이겠는가?
  서산 읍내의 모든 유지들을 비롯해서 동네 조무래기, 아낙네, 떠꺼머리 총각들
까지 아침부터 박좌수네 넓은 집을 찾아왔다.
  정작 본인인 박 좌수는 사랑에  들어 앉아 가슴을 조이며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일이 무사히 잘 끝나야 할 텐데...  공연히 어사님의 이름을 팔고 다녀서 어떤 
벌을 내리지나 않을는지)
  한편 밖에서는 하인들까지도 괜히  신이 나서 바지 가랑이에 바람을 일으키며 
설치고 다니는가 하면 계집종들은 음식을 장만하기에 부산했다.
  손님들은 안마당, 바깥마당에  꽉꽉 넘치게 모여서서 조금 후에 나타날  이 집 
어른의 치척, 암행어사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권력이 좋긴 좋은 것이여!」
  「이 사람들 좀  보게, 어사가 친척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구경하러들 오겠
나 말여?」
  밖에서 발돋음을 하며 들여다보던  한 늙수그레한 농부가 부러움에 찬 표정으
로 내뱉은 말이었다.
  「에라, 우라질놈의 이 내  팔자에는 그런 친척도 없네 그려. 못생긴 마누라라
도 팔아서 벼슬을 사든지 해야겠어.」
  「누가 아니랬나?  이미 우린 늙었으니  자식새끼들이나 부지런히 공부시켜서 
아들 덕이나 봐야지.」
  또 안마당과 사랑의 동네 유지들은 서로 체면을 차리느라고 고개만 넌즈시 끄
덕이며 수군거렸다.
  「과연 박좌수댁이 양반이여!」
  「아암! 말에 무엇하나. 나도 평소에 그런 생각을 했지.」
  이럭저럭 한낮이 지나자 과연 동구 밖에서부터 풍악이 울리며 어사 일행이 도
착하는 것이었다.
  원님과 관속들이 배행을 하는데 그위풍이 호화롭고  당당했다. 박 좌수는 사랑
방에 정좌한 채 그들을 맞았다. 어사는 아주 태연하게,
  「그 동안 가내 별고 없으시고 존체 금안하셨습니까?」
하며 넙죽 절을 하니 뒤따르던 관리들도 모두 황망히 머리를 조아렸다.
  박 좌수는 잔뜩 몸을  뒤로 젖힌 채 으젓하게 인사를 받았다.  밖에서 보고 있
던 사람들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하게 서서 이 굉장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여러가지 부산스럽고 거창한 대접이 끝난 다음 어사 일행이 물러가니 제일 살 
것 같은 사람은 박 좌수 본인이었다.
  그는 어유룡 어사가  어찌나 고마운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도량이 
큰 인물이라고 박 좌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에 서울로 갈 일이 생겼을 때 박 좌수는 새 집을 한 채 사서 어유룡 어사에
게 선물로 바치고 돌아왔다.
  이 어사도 이 일을 두고두고  우스갯 소리로 다른 사람에게 들려 주었다고 한
다.



  백정 박치수와 어사 어유룡
  영남 지방의 대읍, 진주에 박치수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조상 때부터 백정 노
릇을 해온 그인지라 돈은 무진장 많지만 죽기 전에 한번 벼슬을 하고 죽는 것이 
그의 평생 소원이었다.
  마침 진주 감영의 어떤 이방이  나라돈을 횡령한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자 박
치수가 대신 그 돈을 물어 주었다.
  이방은 그야말로 꿈만 같은 일이었다.
  (이제 나도 양반이 되었구나! 어흠,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조상 때부터 양
반놈들한테 천대를 받아 왔는데 내가 그 양반이 되었으니 나도 이제부터 행세를 
해봐야지...)
  그러나 그 진주  내에 행세깨나 한다는 양반들이  백정이 좌수를 했다고 하여 
모두 들고 일어났다.
  박치수는 가산을  정리해서 충남 서산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곳에서는 아무도 
박치수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좌수 행세를 하기가 편했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이번에 삼남 지방으로 내려오는 어유룡 어사가 자기와 이
종간이라고 말했다.
  웬 낯선 나그네가 마을에  들어섰는데 옷차림이 허름하고 터덜터덜 걷는 꼴이 
먼길에 무척 지친 듯하였다.
  그는 지나가는 농부에게 박좌수의 집을 물어 그 집을 찾아갔다.
  저녁이 되어 다른 손님들이 다 흩어져 간 뒤에 이 나그네와 주인은 사랑에 마
주 않았다. 손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인장께서는 복도 많으십니다  그려. 좌수도 하시면서 또  어유룡 어사하고
도 친척이시라니...」
  이 손님이야말로  장본인 어유룡 어사였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  그런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왔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주인 박 좌수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점잖게 말했다.
  「뭐, 변변치 않습니다.」
  어유룡 어사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허리춤에서 마패를 끄집어 
내보였다.
  박 좌수는 얼른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무심코  손님의 거동을 따라 살펴 
보니 마패가 아닌가?
  「아니?」
  그는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더니 온 몸을 사
시나무 떨듯 떨며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백 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소인을 죽여 주십시오.」
  그는 새파랗게 질려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리고 띄엄띄엄 그  사유를 밝히는 
것이었다.
  어사는 빙그레 웃으며 양반 행세가 그처럼 소원이라면 한번쯤 시켜 주마고 약
속하고는 이튿날 서산읍으로  들어갔다. 어사 출두를 한 뒤에 그는  동헌에서 호
령을 했다.
  「이 마을에 내 친척  어른이 계시니 들른 김에 인사를 가야겠소.  길 좀 안내
해 주시오.」
  「그리하십시오. 박 좌수님이 친척이시라더니 과연 그러시군요. 저희들이 모시
겠습니다.」
  원은 즉각 채비를 차리게 한 다음에 온 육방 관속들이 다 따라 나섰다.
  박 좌수의 집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소문대로 어유룡 어사가  인사를 하
러 온다니 이 얼마나 큰 구경거리이겠는가?
  서산 읍내의 모든 유지들을 비롯해서 동네 조무래기, 아낙네, 떠꺼머리 총각들
까지 아침부터 박좌수네 넓은 집을 찾아왔다.
  정작 본인인 박 좌수는 사랑에  들어 앉아 가슴을 조이며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일이 무사히 잘 끝나야 할 텐데...  공연히 어사님의 이름을 팔고 다녀서 어떤 
벌을 내리지나 않을는지)
  한편 밖에서는 하인들까지도 괜히  신이 나서 바지 가랑이에 바람을 일으키며 
설치고 다니는가 하면 계집종들은 음식을 장만하기에 부산했다.
  손님들은 안마당, 바깥마당에  꽉꽉 넘치게 모여서서 조금 후에 나타날  이 집 
어른의 치척, 암행어사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권력이 좋긴 좋은 것이여!」
  「이 사람들 좀  보게, 어사가 친척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구경하러들 오겠
나 말여?」
  밖에서 발돋음을 하며 들여다보던  한 늙수그레한 농부가 부러움에 찬 표정으
로 내뱉은 말이었다.
  「에라, 우라질놈의 이 내  팔자에는 그런 친척도 없네 그려. 못생긴 마누라라
도 팔아서 벼슬을 사든지 해야겠어.」
  「누가 아니랬나?  이미 우린 늙었으니  자식새끼들이나 부지런히 공부시켜서 
아들 덕이나 봐야지.」
  또 안마당과 사랑의 동네 유지들은 서로 체면을 차리느라고 고개만 넌즈시 끄
덕이며 수군거렸다.
  「과연 박좌수댁이 양반이여!」
  「아암! 말에 무엇하나. 나도 평소에 그런 생각을 했지.」
  이럭저럭 한낮이 지나자 과연 동구 밖에서부터 풍악이 울리며 어사 일행이 도
착하는 것이었다.
  원님과 관속들이 배행을 하는데 그위풍이 호화롭고  당당했다. 박 좌수는 사랑
방에 정좌한 채 그들을 맞았다. 어사는 아주 태연하게,
  「그 동안 가내 별고 없으시고 존체 금안하셨습니까?」
하며 넙죽 절을 하니 뒤따르던 관리들도 모두 황망히 머리를 조아렸다.
  박 좌수는 잔뜩 몸을  뒤로 젖힌 채 으젓하게 인사를 받았다.  밖에서 보고 있
던 사람들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하게 서서 이 굉장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여러가지 부산스럽고 거창한 대접이 끝난 다음 어사 일행이 물러가니 제일 살 
것 같은 사람은 박 좌수 본인이었다.
  그는 어유룡 어사가  어찌나 고마운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도량이 
큰 인물이라고 박 좌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에 서울로 갈 일이 생겼을 때 박 좌수는 새 집을 한 채 사서 어유룡 어사에
게 선물로 바치고 돌아왔다.
  이 어사도 이 일을 두고두고  우스갯 소리로 다른 사람에게 들려 주었다고 한
다.

  장가 밑천
  강령지방의 어느 고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고을의 수령은 퍽  현명한 사람
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옷을 갈아입고 미행을 하는데, 어느 집 처마끝에 이르렀을 때, 
집안에서 들려 나오는 소리가 적잖이 귀에 거슬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모두들 수령님을 훌륭한 분이라고 칭송하지만, 나한테야  무슨 혜택을 준 일
이나 있나.  나처럼 가난한 백성도 장가를  들 수 있는 정치를  베출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돈이 없어 장가를 못 든 노총각인 모양이었다.
  수령은 그날은 그냥 관가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튿날  부하를 시켜 그 집의 총
각을 불러 오도록 했다.
  수령은 총각이 무릎 꿇고 인사하기가 무섭게 큰소리로 꾸짖었다.
  「이녀석, 함부로  못된 소리를 지껄인 것은  무슨 배짱에서냐. 그렇게 장가를 
들고 싶으면 평소에  열심히 일하여 돈을 모았어야 옳거늘, 무슨  까닭으로 나를 
비방하는가. 괘씸하구나, 필시 일정한  작업도 없이 못된 짓이나 하고 다닐 것임
에 틀림없으렷다!」
  「아, 아니옵니다. 나리, 백번 죽을 죄를 지었사오나, 결코 나리님을 원망한 것
이 아니라 혼자 신세 한탄을 하다가...」
  「듣기 싫다! 신세  한탄이면 신세 한탄이지, 뭣 때문에  나까지 들먹거렸더냐. 
옳거니, 네놈이 그렇게 장가를 들고 싶어하는 것도  모두 음탕한 버릇이 있기 때
문일 게다. 그렇다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버릇없는 네 양물을  잘라 버려
야겠다. 여봐라, 이놈을 옥에 가두어라! 내일은 이놈의  야울을 자를 것이니 준비
를 하여 두어라!」
  수령은 이렇게 소리치고는, 가만히  부하를 불러, 온 고을에 이 소문을 퍼뜨리
도록 했다.
  다음날, 총각은 온 몸을 발가벗긴 채로 결박을  당한 뒤에 마당 한가운데로 끌
려 나왔다. 이때, 소문을 듣고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담 밖에 빙 둘러서서 
서로 똑똑히 구경하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어허, 왜들 그렇게 시끄러운고. 그렇게 구경들을 하고 싶다면 안으로 들어와
서 보도록 하여라. 이 기회에 음탕한 자의  말로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
도 좋겠지.」
  이를테면 일벌백계를  시행하겠다는 것인지,  수령은 이렇게 소리치고  부하를 
시켜 대문을 활짝 열도록 했다.
  이윽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와서 마당을 빽빽이 메우자,
  「자, 저 음탕한 놈의 양물을 벨 준비는 다 되었느냐?」
하고 수령이 외쳤다.
  「예이...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진 것으로 아뢰오.」
  「그럼 어서 시작하렷다.」
  「예이...」
  부하 하나가 길게 대답하고는 큰 칼을 휘두르면서 춤추듯이 달려나갔다.
  부하는 청년의 물건을 꽉 움켜 잡고 칼을 내리칠 자세를 취하다가,
  「어렵소. 이놈 봐라. 이  판국에도 네가 커지겠다는 것이냐?」하고 청년의 물
건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거의 추주검이 되어  벌벌 떨고만 있던 청년의 그것
이 불뚝불뚝 성을 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보고,  긴장해서 숨을 죽인 채  손에 땀을 쥐고 있던  여러 구경꾼들은 
일제히 웃음보를 떠뜨렸다.
  「으하하하...」
  「히히히힛...」
  웃음은 그치질 않고,  물건을 움켜잡은 그 부하는 잠시 어쩔  바를 모르겠다는 
듯 수령을 쳐다보았다.
  수령은 마당의 웃음 바다를 굽어보면서,
  「이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짓들인고! 여봐라, 어서 저 대문을 잠그고 한 사람
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여라.」
  「네이...」
  부하들이 달려가 대문을  닫아 걸었다. 수령은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찬 구
경꾼들을 내려다 보며 추상같은 호통을 내렸다.
  「무슨 버릇 없는  짓들이냐! 관가에서 벌을 주는 것을 보고  웃음보를 터뜨린
다는 것은 나라의 법을  비웃는 것이다. 엄중히 벌을 주고 있는  이 마당에 웃는
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에잇, 몹쓸 놈들, 저놈들을 모조리  곤장을 치거나 벌금
을 물리도록 하여라!」
  구경꾼들은 웃다가 울게 된 판국이라 저마다 벌금을 물겠다고 했다.
  「그러면 모두들 일률적으로  한 냥씩 내놓아라. 돈이 없는 자는  이름을 적어 
놓고 집으로 가서 돈을 가지고 와야 하느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돈을 내고 대문을 빠져 나갔다.  한쪽에서는 돈을 안 
가진 자가 옆 사람에게 한  냥만 빌리라느니 못 빌리겠다느니 시비를 벌이는 축
들도 있었다.
  하나씩 둘씩 빠져 나가 이윽고  벌거벗은 총각 하나만 그 큰 마당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고, 부하 한 사람 앞에는  벌금으로 징수한 여러 백냥은 족히 
들었음직한 돈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수령은 친히 마당을 내려와 그 돈 보따리를 청년에게 던져 주었다.
  「자, 이만하면 장가들 밑천은 되겠지?」
  이렇게 말하는 수령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거짓말도 머리가 둔하면 못한다
  호남성에 사는 한 젊은이는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으로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만큼 언제나 거짓말을 일삼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거리에서 이웃  노인을 만나자 그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젊은이
를 향해,
  「자네는 거짓말을 그럴 듯하게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 어떤가, 나에게
도 한번 거짓말을 해보게나.」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노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는 지금 볼  일이 바쁜데요, 나중에 한가할 때 재미있는  거짓말을 해드리
겠습니다.」
하고 급히 노인의 곁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그의 웃소매를 붙잡고,
  「여보게 뭇이 그리 급한가? 새털같이  많은 날에 볼 일은 좀 나중에 보고 한
마디만 해보게나.」
하고 졸랐다. 그러자 젊은이는 난처하다는 듯 노인을 바라보며,
  「정말 노인장도 딱하십니다. 나는  지금 급한 볼 일이 있단 말씀이에요. 조금 
전에 성 밖의  동호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바닥을 쳐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모두 그 호수에  유명한 자리를 잡으러 간다고  눈이 새빨개서 달려갔단 말입니
다. 저도 자라를 한 마리라도 잡으려고 지금  이렇게 뛰어가는 중인데 어느 하시
에 노인장과 거짓말을 즐길 여유가 있습니까? 제가 자라를 잡아온 후에 다시 찾
아 뵙기로 하죠. 그럼 빨리 가야 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고 노인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갔다.
  그러자 그 노인은 급히 그의 뒤를 쫓으면서,
  「나 좀 보게, 이왕이면 나도 함께  가세. 자라 요리야말로 천하일미거든. 나도 
가서 한 마리 잡아 오겠네.」
하고 숨이 턱에 차서 젊은이를 따라 갔다.  그러나 젊은이는 힘센다리로 어느 틈
에 노인의 눈앞에서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노인은 늦으면 한  마리도 차례가 오지 않을까봐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리며 
멀리 성 밖에 있는 동호까지 달려갔다.
  그러자 호수에는 멀리 저쪽 기슭까지 시퍼런 물이 넘실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호수 밑바닥을 말끔히 쳐내서  자라가 우글거린다는 젊은이의 말이 그제야 거
짓이었다는 것을 노인은  뒤늦게 깨닫고 갑자기 다리의  힘이 빠져 길가에 풀썩 
주저 앉아버렸다.
  이 젊은이의 머리는  매우 교묘했다. 거짓말도 머리가 둔해서야 어찌  남을 속
일 수 있겠는가?
  그가 거리를  지나고 있을 때 어느  집 위층에서 그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젊은이가 올려다 보니 그는 그 고을의 높은 벼슬아치였는데 젊은이를 불러 새우
더니 빙그레 웃으며,
  「너는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기를  밥 먹듯 잘한다는데 나를 속여서 아래층으
로 내려가게 할  자신이 있는가? 그럼 내 후한 상을  주리라.」하고 거드름을 피
웠다. 그러자 젊은이는 시치미를 떼며,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 같은 비천한 놈이 어찌  높으신 어른을 속일 수 있사
옵니까?」
하고 자신이 없는 듯 사양을 했다. 위층의 벼슬아치는 더욱 자신 만만하여,
  「자, 이것을 받아라. 네가 만일  나를 속일 수 있으면 그 은전을 가질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대신 매를 석대 맞아야 한다.」
하고 은전을 내던졌다. 젊은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위층을 쳐다보며,
  「그럼 분부대로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위층에 계신  나리를 속여서 아래로 내
려오시게 하는 재주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나리께서 아래층에 계실 경우에는 
얼마든지 나리를 속여서 감쪽같이 위층으로 오르시게 할 수는 있습지요.」
하고 말했다. 벼슬아치는 그  말에 서슴지 않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젊은이
와 마주 서며,
  「자 이제 내려왔다. 어디 네가 어떻게 나를  위층으로 올라 가게 하나 솜씨를 
보자꾸나.」
하고 말하자 젊은이는 천천히 몸을  굽혀 땅바닥에 떨어진 은전을 주워 들며 공
손히 절을 하더니,
  「나리, 그럼 이것을 감사히  받아 넣겠습니다. 나리와의 승부는 제가 이긴 것
입니다.」
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벼슬아치는 급히 그를 불러 세우며,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아직 너는 나를 속여서 위층으로  올려 보내지 못
했는데...」
하고 나무랐다. 그러나 젊은이는 태연히 그를 돌아보며,
  「무슨 말씀을! 저는 현재 나리를 감쪽같이 속여서  아래층으로 내려오게 하지 
않았습니까? 속여서 아래오 내려오게 하기 위해 그런  말씀을 올린 게지요. 이제 
또 무슨 수단이 필요하겠습니까?」
하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여유있게 사라져갔다.  위층에서 내려온 벼슬아치는 곧 
자기의 경솔함을 깨닫고 혀를 찼으며,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젊은이의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서문장의 기지
  옛날 중국의 서문장이란 사람은 꾀가 많고 장난을 잘하기로 유명한 이였다.
  그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여기 두어 가지 적어본다.
  어느날 서문장에게 계랸장수가 왔다.
  「한 개에 얼마씩이오?」
  「예, 보시다시피 알이 굵은 것이, 물건은 아주  상품입죠. 한 개에 3전씩 내십
시오.」
  계란 장수는 집안에 여자가 없음을 기회로 터무니  없는 값을 불렀다. 계란 하
나에 1전씩이면 족했던 것이다.
  「무슨 엉뚱한 소리야. 한 푼에 세 개씩은 줘야지.」
  소행이 괘씸해서 서문장도  덩달아 터무니 없는 말을 했다. 그러자  계란 장수
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는,
  「계란 껍질이나 사구려.」
  이렇게 화를 버럭 내었다.  돌아서 가버리려고 하는 계란 장수를, 서문장은 다
시 불러 세웠다.
  「아니, 여보 흥정을 하다 말고 그냥 가는 사람이 어디 있소.」
  「터무니 없는 말을 하니 그렇잖소.」
  「허, 이사람, 농담은 생전 못하겠군. 자, 달라는 대로 모두 드릴 테니 어서 파
슈.」
하고는 서문장은 계란을 하나씩 꺼내어 책상 위에 놓으며 헤아리기 시작했다.
  책상이 미끄러워서 계란을 놓으면 그대로 굴러내리니 서문장은,
  「여보, 두팔을 이렇게  동그랗게 깍지 끼어 가지고 계란이 굴러  내려가지 못
하게 막고 있으시오.」
  이렇게 이르고 그 안에 계란을 세어 넣었다.
  계란을 그 안에 다 세어  넣은 후 서문장은 그릇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란 장수는  꼼짝도 못하고 두 팔로  계란이 흘러 내리지 않게  막고 있었다. 
한참 지나도 주인이 나오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는데, 갑자기 사나운  개 한 마
리가 사납게 짖어대며 밖으로 뛰어 나왔다.
  계란 장수는 깜짝 놀라  팔을 떼고 몸을 피했다. 그 통에  책상위의 계란은 그
냥 굴러 내려 모두 깨어져 버렸다.
  그러자 안에서 서문장이 나왔다.
  「어디, 그 껍질을 1전에 셋씩 사볼까.」
  이렇게 빈정거리는 것이었다.
  어느날, 친구들이 서문장을 보고,
  「자네 말이야, 저기 저 두부집 색시가 제  손으로 자네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무엇이든 먹을 것을 사 먹게 하면 우리가 크게 한턱내지.」하고 내기를 걸었다.
  「그거 뭐 어려울 것 없지.」
  서문장은 즉석에서 응낙하고 두부집으로 갔다.
  「두부 네모만 주시오.」
하고 말하니, 두부집 색시는,
  「어떻게 가지고 가시겠어요?」
하고 묻는다.
  「자, 이 손바닥에 각기 두 개씩 얹어 주시오.」
  서문장은 두 손을  벌렸다. 색시는 그의 말대로 두부를 서문장의  두손에 나누
어 얹어 주었다.
  그러자 서문장은,
  「아차, 돈 꺼낼 것을 잊었군. 미안하지만 내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시오.」
  이렇게 말하는지라 두부집 색시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지갑을 꺼내어 돈을 헤
아려 가졌다.
  그때 마침 배 장수가 그 앞을 지나갔다. 서문장은 색시에게 다시,
  「미안하지만 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배를 두 개만 사  주시오.」하고 청했
다. 두부집 색시는 마지못해 돈을 꺼내 배 두개를 샀다.
  서문장은 다시 말했다.
  「배는 가지고 갈수 없으니 여기다 좀 맡겨 두겠소.」
  이렇게 해놓고 두부집을 나서니, 친구들은 꼼짝  못하고 한턱을 낼수밖에 없었
다.
  이렇게 지혜가  출중하므로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신모라고 하여 두려워하고 
존경했는데, 하루는 그가  퍽 이름 있는 한  절을 찾아갔더니, 중은 반색을 하며 
그를 맞이하며 포시장을 내놓고 사주를 해달라고 청했다.
  책을 받아 들고 펼쳐  보니 여러 명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모두 수십 냥
에서 수백 냥까지 적어  놓았으며, 아무리 적게 적은 것이라도 몇  냥 정도는 다 
적었다.
  그는 붓을 달라고 해서 시주 금액을 쓰기 시작했다.
  「일만」
이라고 단 두 자만 써 놓고는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붓을 내던지고 뒷간으로 달
음박질을 쳤다.
  중은 그가 일만이라고 쓰다 만  것을 보고 큰 돈을 시주하려는가 보다고 생각
하여 곧 아래 중들을 시켜 음식을 많이  차리도록 했다. 그리고는 서문장이 돌아
오기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도대체 돌아오질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뒷
간으로 가  보는 것도 실례이고 해서  그냥 내처 기다리고 있는데,  비로소 그는 
대접할 진수성찬이 다 준비되어 상에 오르자 그때서야 돌아왔다.
  「변변치 못하나마 맛이나 좀 보십시오.」
  중의 권유에 따라 서문장은 잘 차린 음식을 배가 터져라고 포식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서 잠시 쉬다가 배를  쓰다듬으며 돌아가려 하니, 중은 아까 
쓰다 만 것을 써 달라고 책을 내놓았다.
  「아차, 그만 깜박 잊었었군.」
하고, 서문장은 다시 붓을 들어 일만이라고 쓴 아래에 홀자를 하나 첨가했다.
  「일만 홀」
  홀이라 함은 분,  리, 호, 사 아랫자였으니, 일만  홀이라 해봐야 결국 한 분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장부는 대장부를 알아본다
  우암 송시열이 효종조의 재상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일이 생겨 평복 차림으로  경기도 장단 고을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
는데,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억수  같은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바쁜 걸음을 멈추고 길가의 작은 주막을 찾아 들어 사랑방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있자니, 문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곧 이어 웬 무관한 사람이 
주막집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한 방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
리게 되었다.
  한참 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던 무관이 문득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장기라도  꽤 둠직한 첨지일세 그려.  어디, 무료한데 한관 늘어놔 
볼까?」
  「예, 둬 보십시다.」
  송시열은 될수록 공손히 대꾸했다.
  「그래? 영감, 무슨 감투라도 쓴 모양인데, 대관절 무슨 벼슬이오? 보릿섬이나 
꽤 없앤 모양이군. 보리동지  했나? 이런 궁벽한 산골에서 보리둥지도 과분하지.

  상놈이 보리쌀을 팔아서 첩지 한 장 받아 가지고 면천운동을 했느냐는 뜻이었
다.
  송시열은 속으로 우습기만 했으나 끝내 꾹 참고 시치미를 떼었다.
  「예, 뭐 벼슬이랬자 대수로울 게 있겠습니까.」
  여전히 공손히  대답했지만, 그 음성이  우렁찬 데에는 무관도  역시 놀랐는지 
장기 두던 손길을 멈추고 송시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흠, 성명은 무엇인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물음이었다. 그래도 송시열은 다시금 공손히, 
  「예, 저의 성은 송나라 송 자이옵고 이름은 때 시 자에 매울 열자, 송 시열이
라고 합니다.」
  「엇?」
  무관은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당대의 세
도 재상을 몰라 본  죄는 어떤 가혹한 형벌로 다스려질까. 순간  그 무관의 얼굴
에는 천만 가지 후회의 빛이 스쳐 갔다.
  우암 송시열이  그 급변하는 안색을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무관의 
얼굴이 갑자기 다시 변색을 하더니 다짜고짜로 송시열의 따귀를 보기 좋게 후려
친다.
  「이 고약한 첨지  놈아! 네놈이 감히 네  멋대로 우암 송시열 대감의  존명을 
자칭할 수 있느냐? 우암  대감으로 말하자면 문장, 도덕, 식견이 지금 일세를 뒤
흔들고 계신  분인데, 네깟 영감장이가 송시열  대감이라니, 도무지 말이나 되는 
소리냐! 몹쓸 첨지놈 같으니라고. 당장 그 외람된 칭명을 취소하지 못할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문을 박차고 나가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빗속으로 말
을 달려 북쪽을 향하여 달음질을 치고 말았다.
  우암은 쏟아지는 빗줄기 속을 뚫고 산 모퉁이로 사라지는 젊은 무인의 기지를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실로 대장부의 기지로다. 천변 만화의 기지야. 능히 일을 맡길만한걸.」
  그는 주막집 주인으로부터 그  무관이 안주병사로 부임해 가는 아무개라는 것
을 알았다.
  우암은 일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오자, 그 즉시  사람을 시켜 그 무관을 불러들
였다.
  무관은 얼굴도 들지  못하고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몰라 했지만,  송시열은 오히
려 그를 칭찬하고 그의 벼슬을 높여 평안 병사에 임명했다.
  연애에 목말랐을 때와 돈에 궁했을 때
  한 가난한 선비가, 당장 누군가에게서라도 돈을  변통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기막힌 곤경에 처했다.
  이리저리 헤아려  본 끝에 한 친구에게  부탁을 해 볼 마음이  생겼으나, 차마 
마주 대하고 돈 부탁을 하기는 거북해서,
  (편지로 부탁을 해볼까)
하고 편지지를 펴 놓고 먹을 갈아 붓을 들었다.
  한데, 또 뭐라고 해야 덜 거북스럽게 들릴지 막막했다.
  (어떡한다? 내가 이렇게 글재주가 없을 줄이야)
  이렇게 자탄도 해보다가  우선 앞머리에 인사말을 몇 줄 적었다.  그런데 정작 
본론은 생각이  나질 않아 궁리 끝에,  인사말 다음은 허옇게 백지로  그대로 나 
두고, 다시 끝을 마무르는  인사말을 적었다. 그리고는 날짜를 쓰고 서명을 해서 
인편에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친구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면을 검토하던 후에 싱긋 
웃으며 돈을 넉넉히 보내 주었다.
  선비는 이 돈을  받아 아주 요긴하게 썼으며, 친구의 통찰력과  너그러움에 감
탄하여 여러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이 소문을 듣고 다른 한 친구가 그를 찾아가서,
  「용하기도 하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야 사정은 딱하고 또 직접  말하기 거북
하니까 백지를 써  보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받아  가지고 그자리에
서 상대의 의도를 포착한 자네도 보통이 아닐세 그려.」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설명하기를,
  「대저 백지 위임장이란 삶아 먹든지 볶아 먹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닌
가. 이 세상에 그렇게  자포 자기가 되는 경우란 연애에 목말랐을  때와 돈에 궁
했을 때 밖에 없는 것이거든.」
  「그렇지.」
  「그러니 그  사람이 나에게 구애를 할  리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남은 것은 
돈을 융통하자는 것밖에 없지.」
  누구든지 직접 만나서 말하기 거북한 경우에는  서신 등을 이용하기 일쑤인데, 
이런 경우 이심전심이라든가 불언이통이라든가  하는 것도 서로 호흡이 맞지 않
으면 기대하기 어려운 법임에 틀림없다 할 것이다.
  안단대의 굳은 절개
  이조 중종때의 안 단대라는  사람은 원래부터 성질이 순박하고 근실하여 평생 
남과 다투거나 시비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딸 하나 있던 것이  궁녀로 뽑혀 후궁이 되고 이윽고 창빈으로 봉해지매 
더욱더 매사에 조심을 했다. 설령 어린 아이가  와서 집안에다 대고 욕을 퍼부어
도 나무라는 일이 없이 오히려 그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할 뿐으로, 결코 큰소리 
한번 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딸 창빈이  왕자를 낳자 아예 문을  닫고 일체의 바깥출입을 삼가였
다. 아는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나다니질 않느냐고 묻자,
  「공연히 왕자의 외조라 해서 이상스럽게 볼까 봐, 그것이 꺼려져서 그렇다오.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 창빈의  둘째 왕자 덕흥대군이 아들을 낳아, 그로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니, 그가 바로  선조였으며, 이로써 안공은 선조의  외증조부가 되었다. 이렇게 
되어 안공의 지위와  신분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으나, 그는 조금도  마음이 변
치 않아 비단 옷이라곤 몸에 걸치지도 않을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어느날인가 선조는  나라의 의복을 통할하는 상방에서  올려온 수달피 조끼를 
외조부인 안공에게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안공의 청렴 결백한 굳은  절개를 익히 아는 터라 선조는 미리 사람을 
시켜 그의 뜻을 알아오도록 하였다.
  「어떻습니까, 지금 나랏님껫 공에게 보낼 수달피  조끼를 만들고 계신데 그것
을 내리시면 부득이 입어야 하시겠지요?」
  심부름 온 사람이 이렇게 묻자, 안공은 대답하기를,
  「나는 본시 천한 사람이오.  비단옷이 가당이나 하오. 하물며 수달피 조끼 같
은 것을 입는다는 것은 죽을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라의 상감께서 내리신 것을 입지 아니한다는  것도 죽을 죄를 범하는 것, 
기왕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내 뜻대로 하고 죽는 것이 옳을까 
하오.」
라고 거침 없이 거절할 뜻을 밝혔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선조는 크게 감탄을 하면서,
  「그분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다면 어차피 그 뜻을  굽히게 할수는 없는 일, 
그러니...」
하고 집안 사람들을  시켜서 그것은 수달피 조끼가  아니라 어린 개의 가죽으로 
지은 것이라고  일부러 속이도록 일렀다.
  이에 집안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상감 마마께서 수달피 조끼를 내리시려다가 개가죽 조끼로 바꾸어 보내셨습
니다. 개가죽쯤이야 못 입으실 게 뭐 있습니까. 상감 마마의 따뜻한 정의를 저버
리지 마십시오.」
하고 권한즉, 이미 노쇠하여 눈이 어두워진 안공은, 보아서는 구별이 잘 안 되므
로 손으로 몇 번 문질러 보더니,
  「개가죽이라면야 입어도 무방하겠지만,  한데 상방에는 아주 별다른  개가 있
는 모양이구나.  개가죽 치고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 있었던가」  하고는 몸에다 
걸치고 북쪽의 상감 계신 쪽을 향하여 네 번 절을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 이렇게 사주까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일생 동안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부자 하나가 외동딸을 두었는데 혼기에 임박했다.
  한데 이 사람은 돈 벌 걱정이 없으므로 노상 재미있는 일만 찾아 헤매는데 한
가한 취미가 있어, 귀중한 딸의 혼처를 놓고도 또 그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흠 흠, 한번 멋지게 속아 봤으면 좋겠다니까... 이거 원  맹숭맹숭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이렇게 생각한 그 사람은,
  「누구든지 거짓말 세 마디를 멋지게 하는 놈이면 내 딸을 주겠노라.」
하고 소문을 내었다.
  거짓말 세 마디만 하면(그게  뭐 어려운 일인가? 왕년에 누가 거짓말 한번 안
해 본 사람 있더라고?)부자집  사위 되고 싱싱한 숫처녀에게 장가도 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위감 자격은 별달리  없고 단 거짓말 세 마디뿐이므로 사방의  노총각, 홀아
비, 사기꾼, 노름꾼들이 일확 천금과 처녀를 꿈꾸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주인 영감이 여간  만만치 않으므로 후보자들은 금세 영감에게 말꼬리
를 잡혀 이리저리 몰리다가 그만 들통이 나 쫓겨나는게 보통이었다.
  거짓말 세 마디 다하고 쫓겨나는 사람은 그래도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고 나머
지는 첫 마디부터 실격이었다.
  그 이웃  마을의 노총각 하나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그  집을 찾아갔다. 
시일이 오래 지나선지 온  마당 가득히 득시글거리던 사위감 후보자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때마침 이 집에서는 일꾼을 얻어다 타작을 하느라고 분주하였다.
  총각은 곧 바로 사랑방으로 가서 주인 영감에게 넙죽 인사를 한후에,
  「저는 웃 마을에  사는 칠복이 놈인데요, 사위감 없으시면 이  몸이 어떠실까 
해서 왔습니다.」
  「그래, 거짓말을 세 마디 해야 한다는 것쯤은 미리 들었겠지?」
  「예, 물론입지요. 그런데 이 많은 벼를 언제  다 타작을 합니까? 그래, 여기선 
이렇게 옛날 방법으로 벼 타작을 하십니까?」
  「그럼, 어떻게 하나?」
  「우리 동네에선 요샌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 옛날에야 꼭  이렇게 했습죠
만... 아직까지 이렇게 하다니요. 이렇게 하면 힘이 곱쟁이로 듭죠.」
  「그래, 자네들은 그럼 어떤 식으로 하는데?」
  「우린 우선  논두렁을 이만큼이나 높게  쌓습니다. 그래 가지고  벼가 누렇게 
익으면 논에  물을 가득하게 대지요. 그러면  이삭만 물위로 나올  게 아닙니까? 
그러다가 날이 추워 꽁꽁 얼게  되면 도리깨를 들고나가 후들겨 패서 거둬 들입
니다. 그러면 벼에 돌이 썩여 들기나 하겠습니까?  마당을 맥질할 필요가 있습니
까? 아주 십상이죠?」
  「이놈아 그렇게 하면 되나? 순 거짓말이구나.」
  「그렇습니까? 그럼 첫째 고비는 넘겼습니다.」
  「음, 뭐? 음... 음... 그렇구나.」
  만만치 않은 놈이  왔다고 주인 양반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총각은 이번에도 
매우 염려하는 표정으로,
  「여기서는 매 끼니마다 고기를 못 잡수시죠?」
  「그럼! 그 비싼 고기를 어떻게 매번 먹겠나?」
  「그렇지만 머리를 쓰면 언제나 먹을 수 있지요.  저희 집에선 밥상 위에 고기
가 떠날 때가 없습니다.」
  「호! 어떻게 해서?」
  「이만한 궤짝을 하나 튼튼하게 짜 놓고는 그 속에다 송아지를 넣어서 기릅니
다. 날짜가 가면 송아지가 커서 궤짝에 가득  찰 것 아닙니까? 그럴 때 소궁둥이 
부분이 닿는 데다 이만한  구멍을 하나 뚫어 놓지요. 그리고는 소를  아주 잘 먹
이지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놈이 먹고  어디로 자라겠습니까? 궤짝이 
꽉 찼으니 뚫어 놓은 구명으로 자꾸 살이 비어져 나올 것 아닙니까? 그래 그 놈
을 베어다 먹고, 자라면 또 베어다 먹고, 이렇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얘 이놈아, 그런 거짓말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그렇습니까? 그럼 인제 한 마디 남았습니다.」
  주인 영감은 긴장하여 자리를 고쳐 앉으며,
  「그래, 어서 계속해 보게나.」
  총각은 호주머니에서 꼬기꼬기 접혀진 문서 조각을 하나 꺼내며 말하였다.
  「저의 집 마당에 굉장히  큰 배나무가 하나 있어요. 그런데 글쎄  어느 날 까
마귀 한 마리가  와서는 우리 배 하나를 따  가지고 날아 가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저놈의 까마귀  남의 배 따 가지고 도망간다>고 소리치며 따라갔
었지요. 전 도둑놈은 그냥  못 보는 성미니까요. 그랬더니 이놈이 은진미륵 머리 
위에 턱억 앉더니 우리 배를 다 먹어 버리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몇 해만에 가 
보니 은진미륵 머리위에 배나무가 하나 났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나무가 어찌나 
우람한지 그 한 나무에서 배가 너댓 접이나 열린답니다. 그런데 영감님, 그배 임
자는 틀림없이 제가 아니겠습니까?」
  「암, 그거야 당연하지.」
  「그러나 그 높은  배나무 위를 무슨 수로 올라갑니까?  또 설사 올라 간다고 
해도 부처님 몸뚱이를  밟고 가야 할 테니 그런  망극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 한 궁리를 냈지요.  긴 장대 하나를 가지고 가서 미륵님  콧구멍을 찔러 냅
다 간질러 댔지요.」
  「그랬더니?」
  「보나마나가 아닙니까? 이 부처님이 연거푸 재채기를 서너 번하는 바람에 배
나무에서 배가 쏟아져 떨어지는데 아휴  너댓 접 대충쳤던 배가 글쎄 나중에 쓸
어 담고 보니까 모두 열  접이나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배 한개가 모두 이만큼
씩 큽니다.」
  「자네, 큰 돈 벌었겠네 그랴.」
  「뭘요. 그런데 그때  배 사가신 분이 댁의 할아버지신데 마침  현금이 없으셔
서 이렇게 증서까지 써 주시고 가셨는데 그냥 못 갚으신 채 영영 돌아가시고 말
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느라고 글쎄 난  현금 한번 쥐어 보지도  못하고 배만 
잃어버린 셈이었죠. 원  그때 배값이 천5백 냥이니까 이자까지 따지면  꼭 만 냥
이 됩니다. 그렇지만 저도 인정 있고 분별 있는 놈이라, 돌아가신 분과의 정리도 
있고 하니 아주 절반 때려서  5천 냥만 주시면 그걸로 깨끗이 셈을 끝내 드리겠
습니다. 자, 여기 증서가 있으니 계산을 해 주십시오.」
  주인 영감은 한동안 입술만 달싹달싹 안절부절을  못했다. 사위로 앉히기 싫어
서 <그것 정말이다> 했다가는 돈을 물어 줄 판이었기 때문이다.
  영감은 하는 수 없이,
  「예끼 임마,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해도 분수가 있지. 쯧쯧...」
  「그렇습니까? 그럼 세  마디 다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댁의  따님은 이제 
제 아내입니다. 자 여기 이렇게 사주까지 써 왔습니다. 장인어른, 절 받으십시오.

  애당초 누가 먼저 놀렸는데
  비록 시골 출신이긴 하지만 글줄깨나  읽어 속에 식자가 제법 들은 구변 좋은 
사나이 하나가 구리개(약국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지금의 을지로 입구) 네거리
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를 만났다.
  사나이는 곧 어떤  약국집 처마 밑에 들어가 비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다행히
도 오래지 않아  쏟아지던 빗발이 점점 약해지며 볕이  나더니 이제 곧 개일 듯 
푸른 하늘이 찌푸린 구름 사이를 내다보았다.
  「개건 가지.」
  비가 개거든 가란 말도 되지만, 개이거든 가라  하는 뜻도 되니 한 발자국이라
도 움직였다간 천생 개라는 소리를 듣게 생겼다.  시골 사나이는 약국 안을 들여
다 보며,
  「헷! 다 개니 가야겠군!」
  (뭐라구? 다 개니까 간다구? 그럼 약국 안에 있는 사람들도 전부 개란 소리지. 
야 이놈 보통놈이 아니구나)
  내심 놀라며 약국 주인은 사나이를 불러들였다.
  「여보시오. 과히 바쁘지 않걸랑 잠시 들어와 담배나 한 대 태우시구료.」
  사나이는 마침 다리도 아프던 참이라 사양 않고 냉큼 들어섰다.
약국 주인은 담배를 권하며,
  「허, 놀랐습니다. 댁의 입심이 보통을 넘습니다, 그려.」
  「뭐 전엔 엔간했지만  내가 한 열흘 전에 앓던  끝에 죽었다 살아난 후론 영 
형편 없어졌어요.」
  「옛? 아니 그럼 염라국 구경도 하셨겠구랴?」
  시골 사나이는 약국 주인을 곯려 먹을 궁리를 하며,
  「그럼요.」
  「아이구, 그 얘기 좀 들어 봅시다.」
  어렵지 않소이다. 내  자세히 얘기하지요. 처음에 한참 가노라니 명부전이라는 
현판이 붙은 으리으리한 전각이 나타납디다. 그래서 난,
  (옳지! 내가 죽은 거로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자가 가까이 오라고 하더니 거주 성명과 생년월일 사주
를 묻습디다.
  어차피 죽은 몸이라 겁날 것  하나도 없어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
겠소? 그랬더니 문부를  이것저것 한참 대조해 봅디다. 그러더니  갑자기 가운데 
앉았던 염라대왕이 주먹으로 책상을 탕 치며,
  「이놈들아, 요새  일이 많이 바빠 고되긴  하지만 또 바꿔서 잡아  왔단 말이
냐? 근무 태만한 놈들!」
하고 호통을 칩디다. 그러니까  곁의 사자들이 벌벌 떨며 그 중  하나가 나를 정
중히 데리고 나옵디다.
  「당신은 인간으로 곧  돌아가게 될 거요. 앞으로 수명이 30년이나  남은 분을 
공연히 놀라게 하였구료. 이따 사자 나가는 길에  데려다 줄터이니 잠깐 이 의자
에 앉아 기다리시오.」
  시키는 대로 의자에  잠시 앉아 구경을 하고  있으려니까 어떻게나 많이 잡혀 
들어오는지 망령들이 줄로 늘어서서  기다리고, 또 극락, 지옥으로 갈 곳이 정해
진 영혼들도 인도해 주기를 기다리며  줄로 서 있어 나같이 애매한 사람도 잘못 
엇갈려 잡혀 올 만하구나 하고 염라국 사정이  이해가 갑디다. 거기 앉아서 저승 
구경을 실컷 했지요.
  맨 먼저 들어온 사람은 맨발에 메투리를 끌고 삿갓을 들었는데 몸에서 비린내
가 몹시 나더구먼.
  염라대왕이 문초를 시작합디다.
  「네 생전 한 일이 무엇이더냐?」
  「예! 소 잡고 양, 돼지 같은 짐승을 잡는 것이 저의 업이었습니다.」
  「허, 고얀놈이로군. 그렇게 많이 살생을 하고도 그래 네가 극락가기를 바라겠
느냐?」
  「아니올시다. 대왕님은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에서는 봄 가을마다 소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대왕님께서도  같이 잡수셨겠지요?  그런데 대왕님, 
제사 지내는  임금님이나 지위 높은 양반  나리들이 손수 짐승을 잡았겠습니까? 
천만에요! 다 저희 같은 무리들이 있어 그런 구질구질한  일을 맡아 하였기 때문
에 하늘 제사도 올릴 수  있었음인즉 대왕님께서도 여러 10년 고기 제사를 잡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저희들의 힘이지  임금님이나 대감들의 공은 아니옵니다.

  염라대왕은 곧 미소 지으며,
  「오, 듣고 보니 네 말이 옳은 것 같구나.  여봐라! 저 망인을 극락세계 연화대
로 받들어 모셔라.」
  곧 그 사람은 덩그랗게 연꽃  위에 올라 앞뒤에서 풍악을 울리며 극락으로 올
라갑디다.
  그 다음으론 간드러지고 교태 어린 여인네 차례,
  「네 생전에 한 일이 무언고?」
  「예, 풍류와  춤을 배워 잔치에 나아가  흥을 돋구고 술을 따르고  뭇 남성의 
노리개 노릇을 하였나이다.」
  「에이 고약한 년이로고.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얼마
나 많은 선량한 여자가 울었겠느냐.」
  「그러하오나 대왕님, 저흰들 그 짓이 좋아서  하였겠습니까? 먹고 살 길이 없
어 그랬사온데,  만일 비관하여 자살이라도  덜컹 해버린다면 이  우주의 질서는 
얼마나 어지러워질 것이며  얼마나 많은 원귀들이 공중을 헤매겠습니까? 그래서 
웃긴 웃어도 좋아 웃는  웃음이 아니었고, 애교를 띤 것도 좋아서  그런 것이 아
니라 어디까지나 이 사회의 기름이 되어 세상을 순조롭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저의 눈물 겨운 희생이었습니다.」
  구슬 같은 눈물을 흘려 가며 가련하게 우니 염라대왕도 붉어지는 눈시울을 가
리며,
  「네 얘기를 들으니  세상에서 가엾은 것이 바로 너로구나. 여봐라  이 망인을 
후세에는 대가집의 외딸로 태어나 대관집으로 시집가 일부종사하며 해로할 자리
를 하나 점지해 주어라.」
  그 다음으로 혈색이 좋고 수염이  허옇게 센 풍신 좋은 영감이 하나 들어섰습
니다.
  「네 생전에 한 일이 무언고?」
  「예, 저는 신농씨 만든  법을 따라 초근 목피로 약을 만들어  앓는 사람 병을 
낫게 하여 주고 죽는 사람 살려 주었으며...」
  얘기를 듣던 염라대왕은 노하여 벌떡 일어나더니,
  「여봐라! 저 건방진  놈 주둥이 좀 쥐어 질러라.  이놈아 사람의 수명 장단이 
너의 손에  달려 있다니 혹세 무민하는  놈이로고. 요새 가끔 사자를  보내도 빈 
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종종 있길래  이상하게 생각하였더니 바로 너 같은 놈 짓
이었구나. 여봐라, 저런 놈은 지옥의 맨 밑바닥에 거꾸로 집어 처넣어라.」
  그만 그 가련한 늙은이는 풀이 죽어 지옥에  갈 순서를 기다리고 서 있었지요. 
그러다가 나를 보고 하는 말이,
  「당신이 인간으로 돌아간다니  부탁을 드리겠소. 당신도 아시다시피  여기 재
판은 인간 세상에서  생각하던 것과는 생판 틀리는구려. 내 자식놈이  구리개 모
퉁이에서 내  대를 이어 약방을 차리고  있으니, 나야 이왕 이렇게  되었지만 내 
아들 놈에게 부다  좀 전해주구려. 아들은 전부 백정을 시키고  딸년들은 모조리 
기생을 시키라고...」
  그래 내가,
  「꼭 전하겠으니 염려 마세요. 그런데 아드님 약방이 구리개 몇째집이오?」
하고 묻고 있는데 무섭게 생긴 사자가 덜미를 잡아 끌고 가며,
  「임마 얘긴 누가 하랬어?」
  호통을 치니 그 노인은 잡혀  가면서도 내 쪽을 자꾸 돌아보며 손짓을 하더이
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그런데 지금 보아하니 주인이 건을 쓰고 계신데 혹시 그 노인이 바로?」
  넋없이 듣던 주인은 어이가 없어,
  「아니 당신 날 놀리기요?」
  「애당초 놀리긴 누가 먼저 놀렸는데?」

  하늘에서 가장 큰 것
  어느 시골의 아전 한 사람이 눈치 빠르고 민첩하기 비할 데 없어서 그 고을에 
내려오는 원님을 모조리 제 소매 속에 넣고 마음대로 농락하는 터였다.
  그러던 중, 신임 사또가 부임을  했다. 아전은 새로 온 원님을 곯려 주려고 무
슨 트집거리가 없을까 유심히 살피는데, 신임 사또  역시 부임 전부터 이 아전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은 터라, 그에게 휘둘리지 않을 셈으로 미리 조처를 취했다.
  원님은 아전을 불러 가로되,
  「내가 조정을 하직하고 돌아올 때에 부탁받은 게  몇 가지 있는데, 이것을 구
할 사람은 너밖에 없을 듯해서 이렇게 특별히  부탁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 있더
라도 사흘 안으로 이것을 구하여 바치도록 하여라.」
하고는, 쪽지 한 장을 내 주었다.
  쪽지를 받아 펼쳐 본 아전, 금시에 풀 죽은 얼굴이 되었다. 거기에는 하늘에서 
가장 큰 것과, 십리탕과 백  가지 채소와, 자가웃 반찬을 구해 오라고 씌어 있었
다.
  「이거 참 야단났구나.」
  아전은 집에 돌아와서는 사또가 명한 심부름 때문에 걱정이 되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누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아버지, 무슨 일로 그렇게 걱정을 몹시 하세요?」
  보다 못해서 그의 열 살 먹은 아들이 까닭을 묻는다.
  「네가 알 일이 아니다.」
  「무슨 일인데요. 말씀이나 해보세요. 혹시 제가 도움이 될지 알아요?」
  아들이 자꾸 조르는 까닭에, 아전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그거라면 아무 걱정도 없어요. 아버지, 제가 하라는 대로 해보세요.」
  아들은 열심히 무엇인가를 설명했다.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아전은 무릎을 탁 치면서 기뻐했다.
  「과연 그렇구나. 네가 말 안 해 줬더라면 큰일 날 뻔했구나.」
  아전은 그 길로  장에 나가서, 하눌타리(박과에 속하는 다년생 감초)  한 개와, 
오리 두 마리와, 흰 가지 하나를 사 왔다.
  그리하여 분부가 내린 지 사흘째 되는 날 하눌타리는 접시에 담고 오리 두 마
리는 솥에 한데 넣어 국을 끓이고, 흰 가지로는 나물을 무쳤으며, 거기에다 콩자
반을 졸여 가지고 동헌에 나아가 원님에게 바쳤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원님이 묻자, 아전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예,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라면 하늘의  울타리라고도 불리는 하눌타리 이상 
가는 것이 없을 터이오며, 오리 두 마리씩 국을 끓였으니 바로 십리탕이 되옵고, 
흰 가지로 나물을 무쳤으니 백가지 채소가  분명하옵니다. 도한 콩자반은 자가웃 
반찬이 아니겠사옵니까?」
  일자와 월자를 따서
  어떤 마을에 정씨와 명씨가 이웃해서 살고  있었다. 이들은 순박한 농민들로서 
다정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서로 욕친구가 되었다.
  「여보게! 당나귀,  어딜 그렇게 달랑거리며  돌아다니는가, 요즘 재미는  좋은
가?」
  명씨가 정씨를  놀리는 말이었다. 예로부터  사람의 성에 짐승의  이름을 붙여 
놀리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가란 성은 희성이어서 거기 알맞는 짐승의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시는 명씨에게  놀림만 당할 뿐 앙갚음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므
로 정씨는 늘 명씨를 곯려 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주막에서 또 명씨가 정씨를 이렇게 놀렸다.
  「여봐! 당나귀, 나 좀 타고 가자구, 다리가 아파서 죽겠어. 조랑말이지만 아쉬
운 대로 타고 가야겠어.」
  「이런 빌어먹을 자식 보게나, 형님을 몰라보고  버릇 없이 주둥아리를 놀리다
니, 경칠 녀석 같으니라구...」
  정씨는 고작 명씨를 놀린다는 것이 이런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허허... 그 친구, 입버릇 한번 고약하군. 그것도  모두 고약한 성을 가진 때문
인가?」
  정씨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명씨를  놀려 줄 수 있는  말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던 어느날 정씨 집에 한 동냥 중이 찾아왔다.
  「나무 관세음보살, 시주 좀  하십시오. 부처님의 덕이 이 집에 가득찰 것이옵
니다.」
  정씨는 시주를 후하게 한 다음, 중에게 자기의  사정을 털어 놓고 도움을 청했
다.
  「대사님, 아무튼 명씨를 곯려 줄 수 있는 방법만 가르쳐 주십시오.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은 수가 있소.」
  「좋은 수가 있다구요?」
  정씨는 눈에 광채를 띠었다.
  「그렇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지금 곧  나보다 먼저 명씨 집에 가서 
기다리십시오. 그 다음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정씨는 뛸 듯이  기뻐하며 숨을 헉헉대면서 명씨 집으로 달려갔다.  마침 명씨
는 집에 있었다.
  「이 사람 당나귀 아닌가. 갑자기 웬일인지?」
  정씨는 빙그레 웃으며 적당히 대답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복수할 결심을 단단
히 했다.
  (어디 두고 봐라, 오늘 단단히 골탕 좀 먹어 봐라...)
  이윽고 동냥중이 대문  앞에 이르렀다. 명가는 심심하던 차에 오히려  잘 되었
다는 듯 동냥중을 불러들였다.
  그래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다가 정가가 슬그머니,
  「대사님의 성은 뉘시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동냥중은 짐짓 대답을 망설이더니,
  「출가한 탁발승에게 속간에서  쓰던 성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만, 소승의 
성은 말씀드리기에 좀 부끄러운 성입니다.」
  「아니 무슨 성인데 말씀하기가 난처하다는 거요? 혹시 쌍놈의 성이라도...」
  「그런 게 아니오라 성의 내력이 좀 고약해서...」
  「어디 그 내력 좀 들어 봅시다.」
  명씨는 자못 호기심이  동한다는 듯 무릎걸음으로 다가 앉았다. 중은  짐짓 난
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실은 저의 어머니가 행실이 좋지 못해서 불공을 드린다고 절에 가서는 일정
사의 스님과 월정사의  스님을 번갈아 가며 관계를 맺었답니다. 그래서  저를 낳
게 되었다 하더군요. 그런데  어머니 자신도 내가 누구의 자식인지 잘  알 수 없
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일정사의  일자와 월정사의 월자를 따서 한데 어울려 명
가라는 성을 만들어 소승의 성으로 정했다고 하더이다.」
  중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명씨는 점점 얼굴이 창백해졌다. 뿐만  아니라 숨소
리마저 씨근거렸다.
  그후 명씨는 주막에서나 길에서 정씨를 만나도 결코 놀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
다.

  소동파의 해학
  중국 고대의  대시인이며 대문장인 소동파의 천재성의  매력은 후세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그는 무엇보다도 중국어로 재자라고 하는 제일의 천재였다.
  소동파의 기지는 천하가 아는 일품이다. 그  일화는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이 
적지 않다.
  그는 응수가 제  마음대로이며, 재빠르게 해학이 튀어나오며, 상대에게 양보함
이 없었다. 그가  풍자하는 붓대는 당시 재상 왕안석을 야유하여  세번이나 귀양
죄를 얻었던 것이다. 한 번은 황주, 다음은 혜주 마지막은 해남도로 갔다.
  가장 재미있는 일화는, 귀양살이를 하면서 남을  야유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기 
자신을 야유하는 방법을 발견한 일이다.
  그는 외딴 섬에서 의사도 약도 없는데 지쳐서,  수도에서 의사의 손에 죽은 인
간의 수를 세어봄으로써 스스로 답답함을 면했다는 것이다.
  어느날, 곽이라는 성의 문인이 항주로 소동파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자작의 시 
한편을 꺼내어 소리 높이 읽어보이는 것이었다. 다  읽고 나서 곽은 어떠냐고 물
었다. 동파는,
  「백점이외다.」
하고 대답하였다. 곽은 자못  만열하여 다시 상세한 비평을 원했다. 그런즉 동파
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대의 좋은 목소리에 70점을 줍니다. 시는 30점이오. 그러니까 백점이 
되는 셈이지요.」
  어느날, 소동파는 천자에 배알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사를 마친 후 한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방 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다가, 이윽고  그 첩들에
게,
  「내 뱃속에 무엇이 들었다고 생각하는가?」
하고 물었다.
  젊은 첩 중의 하나는, 영감의 배에는 좋은 글이 가득 들었다고 대답하였다. 또 
한 사람의 첩은  좋은 사상이 가득차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소동파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조운이라는 첩의 차례가 오니까, 이렇게 말했다.
  「영감의 배에는 깨끗지 못한 생각이 하나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동파는 자기 배를 다시 한 번 어루만지더니 가가대소 하였다.
  전이란 성을 가진 동파의 친구가 동파를  골려주고자 생각하였다. 언젠가 저녁
에 「   」이란 것을 먹으러 오라는  초대를 했다. 백자를 셋을 합친  이 글자는 
옥편에도 없는 글자이기 때문에 동파는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만찬에 가 본즉 전씨는 「흰 것」만  세 가지를 내어놓았다. 한 주발
의 백밥, 한 접시의  백삼, 그리고 흰 국 한 그릇이었다. 동파는  그에게 골탕 먹
었음을 알았다.
  그 후 2,3일이  지나서 이번에는 동파로부터 전씨에게 무를 먹으러  오라는 청
첩이 도달되었다. 전이 동파의 집에 갔다. 낮부터 저녁때까지 기다렸으나 아무런 
음식이 나오지 않으므로  전은 배가 고파 못견딜 지경이었다. 그런즉  동파는 말
하였다.
  「사실은 자네를 오라고  한 것은 (밥 없는 주발)  (인삼 없는 접시) (국 없는 
국그룻)을 대접하려던 거네.」
  소동파는 이렇게 하여 복수를 하였다.
  어느때 소동파는 누라는  성을 가진 몹시 뚱뚱한 사람을 찾아갔다.  누는 마침 
낮잠을 자고 있는 중이었는데, 동파는 너무 오래 기다려서 화가 났다.
  가까스로 누씨가 잠을  깨어 동파를 대접하였다. 동파는 거기 질그릇  속에 거
북 한 마리가 있고, 거북 잔등에 푸른 이끼가 끼어 있는 것을 보았다.
  「녹구는 진기하지 못합니다.  찾아내기 어려운 건 아무래도  육안의 거북이겠
지요.」
  이 말을 들은  누씨는 「육안의 거북」이란 대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
니까 소동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의 장종시대의 어느날, 임금은 신하로부터 눈이  여섯 달린 거북의 진상을 
받으셨습니다.」
  「눈이 여섯 있는 거북에겐 어떤 별다른  성질이 있는가」하고 물으셨더니, 그 
대답이 「거북은 보통  눈이 한쌍인데 이 거북은 세쌍입니다. 그러므로  눈 여섯 
달린 거북이 낮잠을 자면,  그 낮잠은 세 마리의 거북이 낮잠  자는 시간을 합친 
것만큼 긴 동안을 잡니다.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소동파가 봉상부 첨판이란 벼슬에 있을때에, 우인의  문인 장호가 동파의 집에 
묵은 일이 있었다.  이 장호는 굉장한 호인이었다. 어느날, 두  사람이 산으로 산
책을 나간즉 이윽고 어느 낭떠러지 앞에 다다랐다.  그곳은 깊은 연못에 가로 막
혀서, 한 개의 나무를 걸쳐놓은 좁은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대안으로 당도할 수
가 없었다. 장은  대안의 암벽에다 큰 글씨로 휘호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동파에
게 권하였으나, 동파는 건너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은 혼자서 대안으로 가
서, 가장 굵은 붓으로 「소동파와 장호 여기에 오다」라는 뜻의 글씨를 썼다. 장
호가 다시 건너오니까 동파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자네는 나를 죽였군. 자네가 살기 싫다 한들 나까지 그렇게는 안돼.」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하는가, 라고 타이르면서,  남이 보면 자기도 그런 짓에 
목숨을 던졌다는 인상을 남에게 준다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소동파에게 둘도 없는 양붕은 황산곡이었다. 어느때  두 사람의 화제는 우연히 
왕희지에 미쳤다. 왕희지는 글씨로  첫 손가락을 꼽는 명필이다. 그의 작품은 붕
우지기 사이에 몹시 귀하게 여겨졌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양의 고기가 몹시  좋았으나 주머니는 항상 비어서, 친구
인 왕희지의 편지를 받을 적마다  이것을 고위현관에게 바치고 그 대신 양의 고
기 한두 근씩을 받았다.
  소동파의 글씨도 또한 세상의 평판이 매우 좋아서 우인들은 그 편지나 필적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날의 일인데, 소동파는 임금곁에 있어서 궁정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여러 장이나  편지를 받았으나 답장은 아무데도 내지 않았다. 마침
내 하인을 시켜서, 즉시 자필의 답장을 보내달라고 한 사람이 있었다. 동파는 하
는 수 없이 그 하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인어른께 말씀드려라. 오늘은 양고기 장수가 쉬는 날이라고.」
  소동파는 그의  친구 황산곡을 놀려주는  것이 큰 재미였다.  동파가 광동으로 
귀양을 갔을 당시, 병들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날 동파는 귀양살이가 풀
려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어떤 벼슬아치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역시 살아계셨습니다 그려.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동파는 파안일소하며, 대답하였다.
  「음, 죽었던 것은  참말이었지만요, 나는 지옥에 가다가 중도에서 황산곡이란 
친구를 만났으므로 거기는 있을 데가 못된다고 하여 되돌아 오기로 결심을 했지
요.」
  소동파는 그 친구인  불인화상과 농담을 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조라는 말
은 한문에서는 야비한 의미가 있고, 남을 야유할 경우에 흔히 쓴다.
  그래서 송동파는 어느 때 불인에게 말했다.
  「옛날 사람 시 속에 중승자와 새조자라는 말을  갖다대는 것이 나는 좋아. 이
를테면 이런 시가 있지.」
  새는 묵노니 연못가의 나무요
  중은 두드리노니 달 아래 문이로다.
  「나는 이 시를 무척 좋아하네.」
  그런즉 불인이 서슴지 않고 얼른 대답하였다.
  「그야 그렇지, 나 같은  중이 시재인 자네와 얼굴을 대하고 있으니까 말일세.

  소동파는 누워서 침뱉는 격이 되고 말았다. 중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말하면 동
파 자신이 새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오서방의 짚신을 산 여종
  경상도 양산 땅에  오서방이란 사람이 있었다. 하도 성미가 느려서  짚신을 삼
아 겨우 먹고 살아갔다.
  그가 삼은 짚신은  어찌나 못생기고 묘한 꼴을 하고 있었던지,  서울에서 놀러
온 한 소년이 그것을 보고,
  「이 짚신을 서울로 가지고 가면 한 냥은 문제 없이 받을 수 있겠소.」
하고 말했다.
  오서방은 소년의 말이 정말인 줄 알고 짚신을 70켤레나 만들어 가지고 서울로 
갔다. 오서방은 짚신을  길가에 늘어놓고 지나가는 사람이 물으면 한  켤레에 한 
냥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오서방이 못생긴 짚신을 한 켤레에 한 냥이라고 말하면 물어본 사람은 
코웃음을 치고 가버렸다.
  오서방은 길가에서 팔리지  않자, 장터로 가지고 가 보았으나 역시  짚신을 한 
켤레도 팔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오서방  앞에 나타난 처녀가 있었다. 이 처녀는  재상집의 여종
으로서 용모가  단정하고 매우 영리했다. 나이가  겨우 열 여섯 살인  이 여종은 
항시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나는 내가 마음에 맞는 사람을 골라 시집을 갈란다.」
  같은 여종들끼리 시집 이야기가 나오면 하는 말이 바로 이러했다.
  이 여종이 오서방 앞에 나타난 것은 벌써  이번이 세번째다. 팔리지도 않는 짚
신을 늘어놓고 값을 비싸게 부르는 오서방이 남달리 보였기 때문에 여종은 말을 
걸어 보았다.
  「이 짚신 얼마요?」
  「한 냥이오.」
  「그럼 여기 있는 짚신이 모두 몇 켤레요?」
  「그건 왜 묻소. 한 켤레도 비싸다고 못 사가는데!」
  너 같은 여자가 짚신을 사가겠느냔 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다 사갈 테니 얼마요?」
  「일흔 켤레니 칠십 냥이요.」
  「그럼 나를 따라 오시오. 돈을 드릴 테니!」
  어떠냐, 내가 못사갈 것 같았지, 놀랐을 거다, 하는 투로 앙칼지게 말했다.
  오서방이 그제야 눈이 휘둥그레지며,
  「네!」
하고 일흔 켤레의 짚신을 짊어지고 따라갔다.
  한참 동안 가더니  커다란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서방도 따라  들어가자 여
종은 짚신 값을 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오서방은 두리번거
리며 방문 앞에 짚신을 부려놓고 방에 들어가 앉자마자 짚신 값을 달라고 했다.
  「내일 드릴 테니 마음놓고 오늘밤은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오.」
하고 말한 후 맛좋은 술과 안주를 올리고  저녁밥을 잘 차려 들여갔다. 그릇들은 
모두 깨끗하고 음식  또한 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시골에서 된장에  겨우 김치
쪽을 먹던 오서방인지라 눈깜짝할 사이에 거뜬히 해치웠다.
  이튿날 아침 여종은 채 밝기도  전에 일어나서 농을 뒤져 새옷을 꺼내 목욕을 
하게 한 다음  새옷을 입혔다. 오서방이 씩씩한 멋쟁이 사나이가  되었다고 여종
은 생각했다.
  「소녀는 이댁의  여종올시다. 서방님은  이젠 저하고 정혼하였으니  재상에게 
절을 올리면 되오. 헌데 땅바닥에 앉아서 절을 해서는 안되오.」
  이렇게 말한 다음 여종은 안방으로 들어가 재상에게 말했다.
  「어제 저녁 소녀는 신랑감을 맞았나이다. 대감 어른께 절을 올리겠나이다.」
  「아아, 그래? 어서 데려오너라.」
  오서방은 곧 대청으로 들어가서 대감께 절을  올렸다. 무반들이 오서방을 대청 
아래로 내려서라고 했으나 오서방은 그냥 버티고 서서 꼼짝도 안 했다.
  「나는 향족이오.  비록 여종의 남편이  됐기로서니 땅바닥에 내려서  절을 할 
수 없소.」
  재상은 웃으면서,
  「음, 좋거니,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이렇게 재상에게 절을 올린 일이 있은 후,  오서방은 그대로 여종이 사는 방에 
머무르게 되었다.
  어느날 여종이 말했다.
  「서방님은 너무 성미가  느려요. 돈을 써보면 반드시 눈이 트이고  머리도 영
리해질 줄로 아오.」
하면서 돈꾸러미 한 줄을 내놓았다.
  「이 돈을 가지고 나가서 모두 써버린 다음 돌아오시오.」
  저녁때 오서방은 돌아와서 말했다.
  「별로 배도 고프지 않고, 술도 떡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온종일 이리저리 
빈들빈들 돌아만 다니다가 한 푼도 쓰지 않고 돌아왔소.」
  「아니 서방님,  그게 무슨 말씀이오. 길가에는  거지들이 우글거리고 있을 텐
데, 왜 돈을 주지 않았소?」
  「아 참, 그 생각을 못했었군!」
  이튿날 다시  돈꾸러미 하나를 들고  나가서 거지들을 모아놓고  돈을 뿌렸다. 
거지들은 앞을 다투어 흩어진 돈을 주웠다. 그  모양이 꽤 재미있었기 때문에 날
마다 그 일을  되풀이했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너무 많은 돈을  낭비했다는 생각
이 들 뿐만 아니라,  거지들이란 은혜를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궁터로 
나가 활쏘기 패들과 어울려 매일  술과 안주를 사서 나누어주는 동안 그들과 아
주 사이가 좋아졌다.
  그 다음으로 오서방이 사귄 사람들은 가난한  선비들이었다. 오서방은 매일 아
침 저녁으로 먹을 것을 대주고 필묵을 사주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 오서방은 요즘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위인이라고 평판이 자자
했다. 여종은 오서방에게 <사기삼략>과 <손자병법>을 공부하게 했다.  오서방은 
가난한 선비들과 어울려 사기삼략과 손자병법을 거의 모두 통달했다.
  그렇게 해서 철촉도  침촉도 잘 쏘아 과녁을  맞히게 되었고, 무술책 <무경칠
서>를 통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과 시험을 보아 장원급제해서 합격증을 받았
으나 감추어 두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날 아내는 오서방에게 말했다.
  「내가 모아둔 돈은  천 냥밖에 없었소. 서방님이 여태까지 벌써  칠백 냥이나 
써버렸으므로 남은 것이라곤 삼백 냥밖에 없소. 이것으로 장사를 시작하시오.」
  「헌데 무슨 장사를 했으면 좋을지 나는 모르겠군.」
  「올해는 배추가 대흉작이오. 그런데 충청도 어느  고을만이 배추가 잘 되었다
고 하니 충청도에 가서 그것을 몽땅 사 놓으시오.」
  오서방은 시키는 대로  그 고을로 갔으나, 흉년으로 곡식이 안되어  많은 백성
들이 굶어 쓰러져 있는  모양을 보고 가엾기 짝이 없어, 가는  곳마다 돈을 나누
어주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다.
  이렇게 돌아온 오서방을 보고 아내가 아내가 말했다.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내가 모아둔 돈은  이제 거의 
다 써버린 셈입니다. 어떻게 사라 가면 좋을는지!」
  근심을 하면서도 다시 백 냥을 내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목화도 팔도강산 모두  흉년이라 하오. 겨우 황해도 땅의 한두  고을이 어지
간하게 되었다고 들었으니 황해도에 가서 목화를 사 거두시오.」
  오서방은 황해도로 갔으나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제 백 냥밖엔 남지 않았소. 남은 것을  모두 드릴테니 이걸로 헌옷을 사서 
함경도 땅에 가서 인삼과 바꾸어 오시오. 제발 먼젓번처럼 헛되게 쓰지 마시고...

  오서방은 시장에 가서 헌옷가지를 몇 벌 사가지고 황해도를 향해 떠났다.
  북쪽에서는 목화가 나지  않아 값이 비싸서 백성들은  옷을 살 수 없었으므로 
과히 춥지 않은 겨울 날씬데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오서방은 돈쓰는 솜씨는 좋으나  장사는 서툴러서 함경도 안변 고을로부터 시
작해서 여섯 개의 고을을 돌아다니는 동안에 지고  간 옷을, 옷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니 남은 것이라곤 치마 한벌과 속옷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천 냥이라는 큰 돈을 없애버렸다. 빈 손으로 돌아가자니 집사람을 볼 면
목이 없다. 차라리 호랑이나 늑대에게 물려 죽어버리는 편이 낫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밤중에 산 속 깊숙이 들어가서 벼랑을 기어올라 산길을 따라 
걷고 있노라니 마침내 산골짜기가 나타났다.
  울창한 숲 속에 등불이 깜빡깜빡 비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불빛을 따라  가보니 집이 나타났다.  대문을 두들겨 하룻밤을  묵게 해달라고 
청했다.
  늙은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
  「이런 한밤중에 이런 깊은 산 속으로 어찌하여 왔소?」
하면서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밥상을 차려 대접해 주었다.
  오서방은 겨우 남아 있는 치마와 속옷을 노파에게 주었다.
  노파는 몹시 기뻐하면서 선 자리에서 입고는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했다.
  오서방은 밥을 먹으면서 찻잔을 들여다보니 인삼이 들어 있었다.
  「이 인삼은 어디서 캐어 왔소?」
하고 물은즉 노파는,
  「이 근처에 도라지 밭이 있소.  늘 그 밭에서 캐다가 차를 달여 마시고 있소.

하고 대답했다.
  「캐다 둔 것이 아직도 남아 있소?」
하고 물은즉 노파는  여러 묶음을 꺼내다 보여주었다. 모두 인삼인데  작은 것은 
손가락 크기만 하고 큰 것은 허벅다리만큼이나 했다.
  그때 문 밖에서 짐을 내리는 소리가 났다.
  「아아 참! 아들놈이 돌아왔소.  저 애는 이상한 아이로, 태어날 때  양쪽 겨드
랑이 밑에 작은 날개가  있어서 높은 곳으로 날아 올라갈 수  있지요. 애 아버지
가 쇠를  달구어서 그 날개를  태워버렸으나 다시 생겨나왔지요.  커가면서 힘이 
장사라오. 아무일도 없으면 괜찮겠으나 생각도 못할  불의의 재난이 있을까봐 이
렇게 깊은 산속에 숨어서 사냥을 해서 먹고  살아가고 있답니다. 지금은 애기 아
버지도 돌아가고 나만 혼자 남았소.」
  그리고 밖의 아들에게 말했다.
  「귀한 손님이 오셨다.  들어와 인사를 드려라. 내게  옷 한 벌을 주셔서 지금 
입고 있다. 큰 은인이다.」
  아들이 들어와 절을 했다.
  이튿날 아침 오서방은 노파에게 말했다.
  「도라지밭을 잠깐 구경할 수 있을까요?」
  노파는 오서방을 데리고 재 하나 넘어서 어떤 곳으로 데리고 갔다.
  온 산이 모두 인삼 투성이였다.
  오서방은 온종일 인삼을 캤다.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캤다. 동자삼이 많
이 섞여 있었다. 모두 대여섯 개나 되었다.
  「산중에는 말이 없으니 어떻게 운반해 내려가면 좋을까?」
하고 걱정을 하자 노파의 아들은,
  「내가 원산까지 져다 드리겠소. 거기서 말에 실으면 되지 않겠소.」
라고 말하므로 그가 하자는 대로 해서 말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말한즉 아내는 기뻐했다.
  「서방님이 착한 일을  여러 번 했으므로 하늘이 보물을 내린  것이오. 이렇게 
해서 돌아온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오. 다행히  내일은 재상의 환갑 잔치가 있으
니 조정의 여러  대감들이 모두 모이게 되오. 서방님이 여러  대감들을 만나시면 
곧 친분이 생겨서 벼슬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이튿날 여종은 인삼 속에서 큼직한 것을 다섯 개 꺼내 재상에게 바쳤다.
  「소녀의 남편이 행상으로 갔을 때 이것을 얻어 왔나이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재상은 몹시 기뻐하면서 오서방을 불러들였다. 아내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예
복과 관대를 입혀주었다.
  재상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옷차림은 어찌된 영문인고?」
  오서방이 대답했다.
  「소인은 앞서 무과에  장원급제했으나 장사꾼이 되었으므로 합격증을 감추어 
두고 대감께 여태껏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하! 그랬던가? 몸도 건장하군.」
  그러고 있자니까 여러 대감들이 한 둘 몰려 들어와서 인삼을 보더니,
  「이렇게 보기도 드문  진품을 대감 혼자 드시면  안되겠는데요. 소인들에게도 
한 개씩 나누어 주오.」
하고 말했다.
  「헌데 이것밖에 없군, 그래. 나누어 드릴 수는 없소.」
  오서방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소인의 보따리 속에는 인삼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 대감들에게 나누어 드리
고 절을 올리겠습니다.」
하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대감 한 사람에게 인삼 세 뿌리씩 주었다.
  여러 대감들도 크게 기뻐했다.
  「도대체 저 사나이는 누구요?」
  재상이 대답했다.
  「내 집 여종의 신랑인데 신분은 호족이고 무과에도 장원급제했소.」
  「대감댁의 여종의  남편이 그런 훌륭한 무인이었거늘  어찌해서 아직 벼슬을 
주지 않고 있소. 그건 대감의 실책이오.」
  「아니, 나도 그가 무과에 장원급제했다는 것을 오늘 처음 들었다오.」
  이미 해는 저물어 여러 대감은 아주 좋은 기분으로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오서방은 인삼을 팔아서 몇 천 냥을 벌었다.  그리고 여러 대감들의 힘을 입어 
목관 벼슬을 받아 선전관을 겸했다. 차츰  승진을 거듭해서 마침내는 수군절도사
에까지 승진하고 아내에게도 충분한 보답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훌륭한 부부가 
되었다.

  아내들의 숨은 힘
  어떤 시골에 삼형제가 의좋게 살고 있었는데,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
다. 아침에 논밭으로 갈  때도 나란히 함께 가며 또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도 사
이 좋게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아이들에게도 서로 한결같이  따뜻하게 대해서 
아이들도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를 아버지 대하듯  따랐다. 그러므로 동네에서도 
그들 일가의 칭찬이 자자하고, 집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그들을 본받아라 하며 
동네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았다.
  어느날 남자 형제들은 들로  나가고 삼동서들이 모여 송편을 빚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네의 사람들이 모두 삼형제분이 우애가 대단하다고 칭찬을 하는데 아우님
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남자분들이 우애가 좋아서 그런가, 아니면 우리 삼동서가 
우애가 좋아서 그런가 말 좀 해봐요.」
  그러자 아우 동서가,
  「그야 물론 우리 삼동서의 사이가 좋다보니 남자분들도 우애가 좋은 것 아니
겠어요? 우리 사이가 나쁘면 곧 남자분들도 사이가 좋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에
요.」
  그 소리를 듣고 있던 가운데 동서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우리 삼동서는 젖혀놓고 남자분들만 우애가 좋다고들 
칭찬하니 우리 어디 한 번 시험해 봅시다.  우리가 다투어도 과연 형제분들 사이
의 우애가 두터운가 어떤가.」
  그리하여 그들은 석 달 기한을 정하고 연극을 꾸며 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먼저 큰집에서 닭을  자방 백숙을 고았다. 기름기가 졸졸 흐르는  뽀얀 닭국물
이 여간 구미를 돋우는 게 아니었다.
  형님이 아우들 생각이 나서,
  「왜 아우들을 청하지 않았소? 한 그릇씩 보내 주었소?」
  「흥! 그런걸 누가 몰라서 안 하우. 저쪽에서 그렇게 나오니 안하는 거지.」
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쪽에서 그렇게 나오다니 무슨 말이오?」
  「그저께 작은 집에서  떡을 했다나봐요. 당신 잡수어 보라고 한  접시 보내기
나 했어요. 혹 모자라서 안 보낼 수는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아이들이 그 집 마
당에서 놀면서 먹고 싶어 손가락을  빨고 있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자기네 아이
들만 주었다지 뭡니까. 세상에 그럴 수가 있어요?」
  부인이 핏대를 올렸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당신이 뭔가 잘 모르고 있는 거겠지?」
  남편은 그렇게 대답했으나 뭔가 기분이 석연치 않은 듯 입맛을 다셨다.
  다음날 작은집에서,  햇곡식으로 술을 만들었는데도  형님들을 청하질 않았다. 
이유는 똑같다. 술상 앞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도무지 술맛이 나지 않았지만 그
러나 형님들을 청하고  싶어도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또 가운데  집에서도 마찬
가지였다. 밤, 대추를  잔뜩 따놓고도 감추어두고 저희 식구만  먹었다. 아이들이 
놀러와도 그 흔한 햇밤 한톨 주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자연히 형제들도 함께  들로 나가지 않게 되었고 어쩌다가 밭에서 
만나도 서로 시무룩하니 통 말이 없었다. 지난  날 그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던 분
위기는 간 곳이 없었다. 또 아이들도 서로가 함께  잘 놀지도 않게 되고 설혹 사
촌이 다른 동네 아이들에게 매를 맞아도 보고도 못본 척 말리려 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서끼리는 낮에 남편들이 밭일을 하러 나가면 서로 모여서 그날의 성
과 보고와 내일의  전략을 꾸미기에 바빴다. 그리고 여자들의 숨은  힘이 얼마나 
큰가를 서로 웃고 자랑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석 달이 지났다.
  둘째와 셋째 집에서 부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큰집으로 모이자고 하니 남편
들이 하는 소리가,
  「지나다가 보니 고기  굽는 냄새가 나고 맛있는  음식을 잔뜩 준비하고 있는 
모양인데, 거기는 뭣하러  가. 구질구질하게 자식새끼 데리고 얻어먹으러 왔다는 
소릴 들으려고?」
라고 코웃음을 치며 가려 하지 않았다. 억지로  부인들이 끌고 가서 세집이 오랜
만에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상에 둘러앉아서 그동안의 동
서끼리의 연극을 털어놓았다.
  그제서야 부인들의  농락에 말려든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알고 한바탕 웃었으
나, 안사람들의 힘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어제는 오늘의 원인
  옛날 남창 출신의 서생 하나는 벼슬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날 저녁, 책가게에서  보던 책을 덮고 머리를 식히고 있는데  우연히 땅에 
떨어진 동전 한닢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떤 소년 하나가 책을 한 질 사고 값을 치르다가 떨어뜨린 돈이었다.
  소년은 돈  떨어뜨린 것을 모르는  듯했으므로, 누가 볼세라  힐끔힐끔 사방을 
살피면서 슬그머니 다가가서  동전을 발밑에 깔고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마침내 
소년이 골목을 꺾어 돌아 안 보이게 되자,
  「하하 요건 이젠 내거로구나.」
  서생은 얼른 동전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히히 돼지 꿈도 안 꿨는데 이 무슨 횡재냐?)
  희색이 만면하여 책 가게를 지나쳐 꽁무니를 빼려는데
  「이보게」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서생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니 웬 텁수룩한 늙은이 
하나가 옆으로 다가서며,
  「너의 이름이 무엇이지?」
하고 묻는데, 그  목소리가 매우 부드러운데다가 얼굴 또한 자비롭게  보여 서생
은 비로소 마음을 놓고 자기의 이름을 말한 후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아휴 진땀 뺐다. 그런데  난 또 뭐라구, 야단 치려고 부른게 아니었는데  말이
야)
  몇 해가 흘렀다.  그동안 서생은 불철주야 책과 씨름하더니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그리고 곧 그에게 벼슬이 주어졌으니 상숙현의  원님자리였다. 꿈에 부푼 서생
은 곧 행장을 꾸려 원님으로 부임하려고 길을 떠나기에 앞서 강소순무에게 인사
를 올리러 찾아갔다. 당시 탕잠암이 순무 자리에 있었다.
  서생은 순무 처소의 문간에서,
  「소생은 이번에 과거에  급제하여 상숙현의 원으로 발령받은  사람입니다. 청
컨대 순무님을 만나 뵙고 인사나 올리려 하니 면회를 허락하여 주소서.」
  이같은 전갈을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안에서는 아무 기별도 없이 오래도록 기
다리게 한 다음 한나절이 지난 후에야 아전이 나와서,
  「상숙현으로 부임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씀이 계시오.」
  벼슬길에 오르게 되어 마치  하늘의 별이라도 딴 것처럼 기뻐하던 서생으로서
는 너무 의외의 말이었으므로 곧 아전을 붙들고
  「수고스럽겠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된 것인가 다시 한번 알아봐 주시
오. 방금 발령장을 받았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시 들어갔다 나온 아전은 더욱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는 것이었다.
  「상숙현의 원은 그 자리에서  파면토록 순무님이 즉각 조정에 아뢰었다 하십
니다.」
  「아니, 세상에 그럴 수가 있소? 벼슬자리를  얻어 부임도 하기 전에 파면이라
니 도대체 그 이유가 뭐요? 우선 알고나 봅시다.」
  「순무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대가 몇해  전에 동전 한 닢을 탐내어 남의 눈을 
속였으니 이제 그런 사람이 한 고을의 원님으로 앉으면 백성들의 고혈을 얼마나 
갉아 먹을 것이냐  하십니다. 그리고 저더러 전하라는 말씀인즉-그런  도적이 되
어 폐가망신하지 말고 돌아가 마음을 바로잡도록 하라는 분부십니다.」
  이 말을 들은 서생은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렸다.
  곧은 성품 앞에서는 그 누구도
  초나라에 기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천성이 곧아 한 번 약속한 일은 무슨 일이 있든지 해내는 것으로 유명해
진 사람이었다.
  뒤에 초패왕 항우가 한나라 유방과 천하를 놓고  싸울 때, 초나라의 한 장수로
서 유방을 괴롭혔다.
  항우가 깨지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자,  항우 아래에서 벼슬을  하던 사람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기포의 목에는 수많은 상금을 걸었다.
  「이 사람을 잡는 사람에게는 많은 상을 내리리라.」
  방방곡곡에 그런 방이  붙었지만, 평소 곧은 성품으로 만인의 신임을  얻고 있
는 기포를, 아무도 잡는 사람이 없었고 관가에 고자질하는 사람도 없었다.
  상금을 노리고 고자질을 안했을 뿐만 아니라 여느때 그를 믿던 백성들이 중간
에 나서서 한고조 유방의 벼슬자리까지 얻어주었다.
  처음에는 낭중(중앙의 과장격)의  벼슬을 하더니 나중 혜제 때에  와서는 중랑
장에까지 승급했다. 중랑장은 오늘날의 근위여단장쯤 되는 장군의 자리다.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궁정의 사람이 되고서도,  그러나 기포는 시비를 틀림없
이 가려 주장하는 선심을 잃은 일이 없고,  그래서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다음은 그러한 곧은 인간 기포의 에피소드 한 토막이다.
  흉노의 추장이 그 시대의 권력을 한 손에 쥐고 뒤흔들던 여태후를 들먹이면서 
오만불손한 편지를 조정에 보낸 일이 있었다.
  「이 야만인들을 어떻게 할까!」
  화가 난 여태후는 즉시 장군들을 소집하여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서며 말한 것이 상장 번쾌였다.
  「저에게 십 만의  군사를 주십시오. 당장 쫓아가서 흉노의 목을  베어 바치겠
습니다.」
  때는 여씨 일족이 아니면  밤과 낮도 없다 할 만큼 그  세력이 당당했고, 번쾌
는 더구나 그 여씨 가문의 딸과 결혼한 장군이었다.
  여태후의 눈치만 슬슬 살피던 다른 장군들이,
  「상장의 말이 옳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하고 맞장구를 친 것도 따지고 보면 무리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상장 번쾌의 목을 쳐야 합니다!」
라고 큰 소리로 떠나갈 듯 외친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눈을 부릅뜬 기포가 아닌가.
  「고조 황제께서도 사십 만의  큰 군사를 거느리고 평성땅에서 그네들에게 포
위된 일이 있지 않던가요. 큰소리  치는 것도 정도 문제지요. 여기 있는 다른 사
람들을 모두 바보로 아는 거요. 번쾌는 윗사람의 환심을 사는 데만 마음이 있어, 
지금 천하를 어지럽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얼굴빛이 변했다.
  기포의 목숨도 이제 다했구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태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어전회의를 끝내고 나서, 그 뒤 다시는 흉노에 대한 말을 끄집어내지 않
았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그토록 영화를 누리던 진나라의 시황제도, 수명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불로장생하는 영약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죽었다.
  죽을 때 유언으로 태자 부소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라고 했는데, 승상 이사와 
측근 조고가 그 유언을 숨기고 어린호해를 세워 황제의 뒤를 잇게 하였다.
  왜냐하면 태자 부소는 아주  영리한데 비해 호해는 어리고 어리석었기 때문이
다. 이리하여 진나라의 2대 황제가 탄생했다.
  그 밑에서 눈깜짝할 사이에 지위가 높아지고 진나라의 실권을 잡은 것은 조고
였다. 조고는 환관이었다. 거세한 사람이다.
  호해란 어떤 인물인가 하면, 황제의 자리에 앉자마자 하는 첫 마디가,
  「짐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맛보며 평생을 살고 싶다.」
고 했을 정도였다.
  조고는 이 말을 듣고 옳다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폐하, 그것 참으로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폐하의 법이 얼
마나 두렵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백성들에게 본때를 보이는 것입니다. 다
음은 우선 선제이래 내려오는 낡은 신하들을 다 내쫓고 폐하가 좋아하는 새사람
으로 갈아치워야  합니다. 그러면 그  새사람들은 분골쇄신하여 정치에  힘을 쓸 
것입니다. 그래야만 폐하는 마음을 푹 놓고 쾌락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 참 반가운 소리오!」
라고 호해는 대답했다.
  이렇게 하여 조고는  그 경쟁자인 이사까지 죽이고, 옛부터 있어온  재상 장군
은 물론 왕자까지 참살하면서 자신은 승상이 되고 모든 권력을 한손에 잡았다.
  그리하여 조고는 끝내 황제 호해마저 없애고 그 자리를 탐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궁정의 여러 신하가  황제편인가 혹은 자기편인가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자기를 따르지  않으면 해롭다는 것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 목적을 위해 조고는 참으로 기발한 생각을 했다.
  그는 어느날 2세 황제에게 사슴을 끌어다주면서,
  「폐하, 말 한 필 바치겠습니다.」
라고 했던 것이다.
  황제는 깔깔대고 웃으며,
  「승상은 농담도 잘하는구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니. 어디 너희들 눈에는 뭘
로 보이느냐. 이게 말이냐, 사슴이냐?」
하고 백관을 둘러보았다.
  신하 중에는 머리를 숙이고 말이 없는 자도 있었다.
  「승상의 말이 옳습니다. 그것은 말인가 합니다.」
하는 승상 아부파도 있고,
  「그것은 말이 아니라 사슴이옵니다.」
하고 바른 말을 하는 신하도 있었다.
  어리석은 황제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조고는 눈을 번뜩이며, 사슴이라고  바른 말을 한 사람을 점찍어 두었다가, 그 
뒤 없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 씌워 죽여버렸다.
  그뒤부터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신하가 궁중에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진나라가  아주 죽은 것은  아니었다. 각자에서 그의  악정에 항거하는 
반란군이 일어났다.
  항우, 유방 등이  그 속에 있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조고는 끝내 2세 황제를 
죽이고 부소의 갓난아이를  세워 새 황제로 만들었지만, 결국은 자기가  세운 그 
황제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억지를 쓰는 것을  가리켜 「사슴을 말이라 우긴다」고 하는데, 이  말은 고사
에서 나온 말이다.
  세 치 혀만 있다면야
  위나라에 장의라는 가난뱅이가 있었다.
  그러나 가난하긴  했지만, 남보다 뭔가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던가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기회가 찾아와  출세하게 되는 시대였다. 왜냐하
면 천하 여러 나라에서는 인물을  찾아 나라를 부강하게 일구어 이웃 나라를 무
릎 꿇게 하려고들 했기 때문이었다.
  가난뱅이 장의도 입신출세의 야망을 안고 있었다.
  그는 귀곡이라는 권모술수에 능한 선생을 찾아가  공부를 했는데, 장의의 머리
는 남보다 뛰어나 다른 제자들이 혀를 내두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윽고 수업을 마치자 여러 나라를 순방하다가 남쪽의 초나라 재상 소양의 집 
식객 노릇을 하게  되었다. 식객이란 장차 해먹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고
관 또는 제왕들이 미리 기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장의가 식객을 하는 재상 소양이 어느날 왕이 내려준 보석을 다른 신하들에게 
구경시키는 연회를 열었다.
  연회장에는 많은 고관대작들이 모였는데, 정작 구경하려는 보석이 없어졌다.
  그러자 그자리에 나와 있던 장의가 의심을 받게 되었다.
  「장의란 자는 가난뱅이고 또 행실도 시원치 않은 놈이니 틀림없이 보석은 그
놈이 훔친 것이오.」
  모두들 그에게 죄를  덮어 씌웠고, 주인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를 잡아들
였다.
  「네놈이 훔쳤지!」
  「난 모르오.」
  결국 매를  맞기에 이르렀으나 장의는  굽히지 않았다.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매를 더 맞아 주인도 할 수 없이 풀어주었을 때는 겨우 기어갈 정도로 반죽음이 
되었다.
  죽을 지경이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온 장의를 보고, 그 아내가,
  「그러게 뭐랬어요.  쓸데없는 책만 읽고  유세인지 뭔지 쓸데없는  말만 하고 
다니다가 욕만 보는구려.」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거의 정신을 잃고 있던 장의는 그때 혀를 쑥 내밀면서,
  「여보, 내 혀가 있소? 없소?」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혀를 내미는 남편을 보고 어리둥절하면서,
  「혀는 있어요.」
하고 아내가 대답하자,
  「그럼 됐다! 혀만 성하면 문제 없어!」
라고 장의는 말했다 한다.
  몸의 다른 부분은 다 망가져도  혀만 건재하면 장차 충분히 살아갈수 있을 뿐 
아니라 천하도 움직일 수 있다고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그는 뒤에  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재상으로까지 출세했고, 그의  말처럼 그 
짧은 혀로 펼치는 그의 지혜는 여러 나라를 마음대로 움직였다.



  제깐 놈도 굶겠지
  어떤 3류급 선비 한 사람이 책장사를 하면 재미를 본다는 소문을 듣고는 자기
도 책장사를 하려고 논밭을 다 팔아 책을  사서 짊어지고 장사길로 나섰다. 그런
데 그 선비는  책을 읽기보다는 고물이나 골동품을  모으는데 더 취미가 있었던 
사람이다.
  하루는 책을 한짐 짊어지고  어느 산길을 걷고 있을때, 웬 선비  한 사람이 나
무 그늘에서 그를 불렀다.
  「여보시오, 그게 뭐요?」
  책장사는 선비 한 사람을 만났으니  어떻게 책 한 권 팔 수 없을까 하고 초면
이지만 그에게 다가가서 아주 다정스럽게 말했다.
  「예, 선비님께서 꼭 필요하신 서적이올시다.」
하면서 지고 있던 책 보따리를 풀었다.
  그 선비는 책을 이리저리 뒤지면서,
  「오! 모두 좋은 서적이로군.」
하고 감탄했다.
  「선비님께옵서 이 책을 사서 보시면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책장사도 장사인지라 자기 물건에 대하여 선전을 아끼지 않았다.
  선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길게 쉬면서,
  「그것 참 욕심은 나는데...」
  「그래, 돈이 없단 말씀이시군요!」
  「여보시오, 책장수! 이 책을 내가 몽땅 살 것이니까 우리집으로 갑시다.」
  책장사는 횡재나 한 듯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집에는 돈은 없지만 옛부터 간직해온 골동품 몇 점이 있는데 그것과 바
꿀 수 없겠소?」
  책장사는 귀가 솔깃했다.
  「예, 그래요? 그렇다면 더욱 잘 됐습니다. 자 어서 가십시다.」
  책장사는 선비 뒤를 따라서 그 선비의 집으로  들어갔다. 선비는 곧 하인을 시
켜 광속에 깊숙이 감추어둔 동기를 꺼내라 했다.
  이윽고 하인이  동기를 꺼내어 책장사에게  보이자, 그는 너무  반가워서 입을 
딱 벌리고 말을 하지 못했다.
  책장사는 책 대신 동기를 한 자루 메고 끙끙대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한편 집에서는 마누라가 남편이 재산까지 팔아서 책장사를 하러 나간 것에 대
하여 크게 기대를 걸고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집을 떠난 지 불과  사흘도 못되어 남편이 돌아왔으니 마누라 역시 깜
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여보, 그 사이에 벌써 그 많은 책을 다 팔았어요?」
  아내의 물음에  그는 자랑이나 하듯 무거운  자루를 마룻바닥에다 내려놓으면
서,
  「누가 나에게 책과 돈과 골동품  중에 어느 것이 좋으냐고 물으면 나는 바로 
이것을 택할 것이오.」
하고 크게 기뻐했다.
  아내는 자루 안에 든 것이  혹시 금은 보화가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자루를 
풀고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아내의 눈에는 무서운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아니, 여보! 집안  살림을 모조리 팔아서 책장사를  한다더니 그래 어쩌자고 
이런 골동품으로 바꾸어 왔소? 앞으로 밥을 어떻게 먹을 거요?」
  아내가 바가지를 긁자 그는 태연하게,
  「허허... 내가 굶으면 그놈도 굶겠지. 책 속에서 쌀이 나오나?」
하고 능청을 떨었다.

  인연이 있어 같은 지붕에서 살았을 뿐
  조주의 남화산은  꽤 깊은 산골이다.  인가를 떠난 산기슭에는  둥근 흙만두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이것은 중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인데 그 흙만두는 
다름아닌 인간의 무덤인 것이다.
  햇볕이 따뜻한 봄날이었다.  장자는 목적도 없이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다가 생
긴 지 얼마 안돼 보이는 무덤 옆을 지나게  되었다. 흙도 채 마르지 않은 새로운 
무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광경이 그의 눈에 띈것이다. 흰 상복을 입은 젊은 여
인이 등을 돌린 채 부채로 열심히 그 흙무덤을 부치고 있는 것이었다.
  (인생의 허무함이여! 이 흙 아래 묻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늙음도 젊음도 지혜
로움도 어리석음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분간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만물이 
흙으로 돌아가 적적멸멸한 오호라, 허무하기도 한 천지여!)
  이런 철학적인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장자는 이윽고 현실로  돌아왔다. 여인
은 장자가 가까이 다가와도  부채질에 열중한 까닭인지 전혀 인기척을 못느끼는 
모양이다. 무슨 말인지 입속에서 열심히 중얼거리며 기도를 드리고 있는 듯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빨리 마르게 해주십시오, 부처님.  마르지 않아서야 어떻게 시집을 갈 수 있
사오리까.」
  그런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뜻을 알 수가 없었다. 흥미
를 느낀 장자는 그녀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부인,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 거요? 이 무덤에는 어떤  분이 묻혀 있는지
요?」
  「...」
  그러나 그녀는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름은 아직도  멀었는데 왜 부채 바람을  보내고 있습니까? 혹 열병이라도 
앓다가 돌아가신 분의 무덤입니까?」
  그제야 여인은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기도  소리를 그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무덤은 제 남편의 무덤이랍니다.」
  꾀꼬리 울음소리 같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불행히도 이세상을 하직하셔서  이곳에 묻혔습니다마는 남편이 살아계실 때
엔 서로 굉장히  사랑하던 사이였지요. 그런 까닭인지 죽은 후에도  저를 놓아주
지 않는 거예요.  그이가 유언하기를 만약 제가 재혼하려 한다면  장례식이 끝나
고 흙무덤의 흙이 완전히 마른 후에 하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묻은 지 며칠 
안되어서 좀처럼 잘 마르지  않는군요. 그래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매일 이
렇게 부채질을 하고 있답니다.」
  듣고 있던 장자는  너무나 놀랐다. 이 여인의  정신이 좀 어떻게 된건 아닐까. 
그렇지 않더라도  참으로 성급한 여자가  아닌가. 서로 사랑했던  사이라는 것이 
이 정도이니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예 방에 모셔둔 남편의 관 앞에서 사랑
놀이를 하겠구나.
  장자의 마음속엔 잠시  차가운 바람이 지나갔다. 여자란 참으로 제  멋대로 된 
생물이로구나, 하고 그는 지난날 버린 두 번째의 처와 지금의 처를 생각했다. 그
러는 동안에 어떤  생각이 떠올라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  한 번 놀려줄까, 
장자는 생각했다.
  「부인, 부채를  이리 주십시오. 보기에 부인의  가냘픈 팔로는 며칠을 부쳐도 
마를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려. 제가 도와드리지요.」
  여인은 처음으로 고개를 뒤로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뺨이 포동포동한 얼굴
에 상당히 애교 있는  웃음을 입가에 띠고 있었다. 눈끝이 약간  처진 눈과 뽀얀 
살결을 가진 그녀는 어떤 점에서  보나 정욕을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은 그런 얼
굴이었다.
  내미는 부채를 받아 든 장자는 무덤을 향해  천천히 바람을 보냈다. 그러자 이
상하게도 흙 무덤은 보는 앞에서 하얗게 말라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부인은 마음놓고 재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려.」
  「네, 덕택에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저는 남편에게 의무를 다하고 제가 좋아하
는 분과 오늘밤부터 즐길  수 있게 되었군요. 인사를 드릴래야 뭐  드릴 만한 것
도 없고...」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머리에 손을 가져가더니 은비녀를  뽑는다. 그리고는 
그것과 비단 부채를 장자 앞에 공손히 바치는 것이었다.
  「뭐, 대단한 공도 없지만 주는 것이니 부채라도 기념으로 받아 둘까요?」
  장자는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여인은 흰 상복 치맛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가벼운 걸음걸이로 사라졌다.
  「저 엉덩이가 오늘밤 맞아드릴 사나이는 어디에  사는 행운아인고. 과부는 남
편이 죽은 초이레까지 유혹하는 것이 상책이라더니 참 희한한 말을 다했구먼.」
  여인을 바라보던 장자는 어두운 마음으로 턱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여기 이 장자라는 사람은 중국 주의 시대에 송나라의 몽이라는 곳에서 태어났
다. 이름은 주,  자를 자휴라고 한 대 철학가였다. 그는  처음에 주나라에서 옻나
무 밭의 관리인으로 있을때, 성인 노자를 만나 그의 제자로 들어갔다. 도교의 심
오한 진리에  통달하여 분신술을 비롯한  수둔술 화둔술 등,  무엇이든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덤을 말리는 것쯤은  그에게는 문제도 안 된다. 눈깜짝할 사이의  일인 것이
다. 스승인 노자와  헤어지고 옻나무 밭의 관리인직도 그만둔 그는  작년에 고향
인 남화산 기슭으로 은퇴했던 것이다.
  도교라는 것은 일본의 인술과  같은 법력을 쓰지만 그 근본정신은 청정무위한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맑게 가지고 부귀영화를 허무한 것으로 보아  멀리 하고 
대자연의 조화의 세계로 돌아가라는 교리를 가진 심오한 사상이다.
  그런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부부생활만은 남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최
초의 처는 병사했고, 두 번째는 간통한 죄로 쫓아냈으며, 지금은 세 번째로 맞이
한 전씨와 다정하게 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무덤에서 만난 과부보다도 몇 배 
더 아름다운 미인으로 그 근방에서는  선녀와 같다고 할 정도로 평판이 높은 여
자였다.
  영인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받은 부채를 들고 그가 집에 돌아오자,
  「어서 들어오세요. 어머니, 그게 뭐예요? 여자가 갖는 부채가 아닙니까?」
  전씨는 가느다란 붓으로 그린 듯한 눈썹을 찡그렸다.
  「그렇지, 여인이 갖는 부채지. 허나 여기에는  깊은 사연이 있어. 남자와 여자
는   와  이 겹치는 정도에 따라  천상 만상이 되지. 그걸 생각하면 역시 세상은 
꿈인가 환상인가 모르겠거든.」
  좀 전에 만났던 과부의  영향인지, 장자는 이상한 말을 한다. 전씨는 어리둥절
하여,
  「무슨 말씀인지... 대체 무엇이 어떻게 됐다는 거예요?」
  가신 님 불쌍해라
  진정 사랑한 당신이지만
  빨리 말라다오 무덤의 흙,
  뜨거운 나의 순정 젖어 있구나.
  장자는 이렇게 노래를  부른 다음 지금 보고  온 이야기를 전씨에게 말해주었
다.
  「이것이 바로 그 부채야.  여자의 집념이 괴어 있는 것 같아  별로 기분이 좋
지 않은걸.」
  그녀는 부채를 받으려고도 않고,
  「어리석고도 박정한 년이군요. 그 미친년.」
  「그렇게 말할 것도 아니야. 여자란 누구나 박정하니까.」
  전씨의 새하얀  얼굴에 붉은 빛이 감돌았다.  노했을 때의 표정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장자의 얼굴에 침을 뱉고 나서 말했다.
  「아무리 여자라 한들 모든 여자가 다 그럴까? 당신의 말씀대로라면 이세상에 
정숙한 여자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군요.」
  장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화내지 말아.  예쁜 얼굴이 쪼그랑 바가지가 되잖아?  당신도 지금이 
한창 때라 물이  넘쳐 홍수 같은데 만일 지금  내가 죽는다면 삼 년을 수절하기 
힘들거야, 아마.」
  「너무 하시는군요. 예로부터 정숙한 여인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고 했습
니다. 나는 그런 정숙한 여인이에요. 아니면 열녀가 될지도 모르지요. 3년, 5년이 
아니라 일생 동안이라도  그런 부정한 짓은 못해요. 꿈에서 당신  이외의 사람과 
만나는 것도 거절할 정도거든요.」
  「정말인가? 그 말이...」
  놀림을 받은 전씨는 점점 엄숙한 얼굴이 되었다.
  「당신은 그런 말할  계제가 못된다고 생각되는군요. 처음 부인이 죽자  곧 다
음 사람을 얻고 그 사람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자 내쫓고는 바로 나를 아내로 
삼은 것 아녜요? 어차피  남자란 그런 동물이니까 여자도 자기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나는 일단 시집을 온 이상 평생  단 한 사람, 남편을 위해서 수절하겠
어요. 재수 없게끔, 그런 말을 꺼내서 사람을 놀리지 마세요.」
  그녀는 부채를 빼앗더니 원망스러운 듯 그것을 산산조각으로 찢어 버렸다.
  「그렇다면 고마운 일인데.  흥분한 여인의 육체는 불이 붙어 있어  아주 감칠
맛이 있다는군. 화해 겸 대낮의 정사나 즐겨보지 않겠나?」
  아이들이 없는 그들은 다정하게 침실로 들어갔다.
  며칠 후의 일이었다.
  「여보, 정신 차려요,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싫어요.」
  전씨의 울음섞인 소리가 온  집안에 퍼졌다. 뜻밖의 일이 생긴 것이다. 장자가 
급환으로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워낙 수양을 쌓은 대 철학자여서, 조금도 
놀라는 기색도 없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머지않아 곧 이세상을 하직하게 될 거야.  그런데 한 가지 유감은 당신
이 찢어버린 그 부채지.  그것을 그냥 두었더라면 임자도 내 무덤을  부칠 수 있
을 텐데.」하고 죽음에 임해서까지 희극적인 언사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은 
진정으로,
  「당신에게 맹세해요. 설혹  당신이 돌아가시더라도 저는 당신을  위해 절개를 
지킬 테니 염려 마세요.」
  「그래?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말을 믿고 안심하고 자연으로 돌아갈수 있겠구
려. 당신을 믿고 말이야...」
  그리고는 숨이 끊어졌다. 부인은 남편의 시체를 얼싸안고 울었다.
  (그래, 그런 좋지 않은 말을 했을 때 이미, 그는 무슨 예감이 있었던 모양이야.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간담.)
  정숙한 전씨 부인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이고  아이고 하며 눈물만 비오듯 
흘렸다.
  남화산은 장자의 고향이라고는 해도 친지가 없었다.  그녀는 인근 동네 사람들
을 불러 입관을 했고, 그녀  자신은 흰 상복을 입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로부
터 7일 후, 소위 불가에서 말하는 초이레 되던 저녁 무렵이었다.
  「여기가 장주선생님 댁이신지요?」
하는 말소리에, 그날도  슬픔에 잠겨 물도 목구멍에 넘기지 못하던  전씨는 피로
한 모습으로 문전에  나갔다. 거기에는 보면 볼수록 잘생긴 청년이  허리를 굽히
고 서  있었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입술엔 연지를 바른 것처럼  그렇게 잘생긴 
멋쟁이였다. 보랏빛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 검은  관을 썼으며 값비싼 명주 허
리끈을 감고 빨간 신을 신은 훌륭한 차림이었다.  뒤에는 따라온 노복이 서 있었
다.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동안 며칠을  굶어 속이 빈 전씨의  머리는 안개가 
쫙 퍼지듯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었다.
  자기 소개에 의하면 청년은 초나라의 왕손으로 장자 생전에 사제의 언약을 맺
어 지금 문하생이  되기 위해 멀리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전씨가  장자의 죽음을 
전하자,
  「뭐라구요? 아아, 애석한 일입니다.」
  한 마디 한 후,  곧 화려한 의복을 벗고 노복에게 말하여  흰옷으로 바꿔 입고 
영전에 배례했다.
  「장선생님, 어찌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신단 말씀입니까? 선생님을 뵈옵고 
가르침을 받지 못한 마음 철천지 한이 되옵니다.  선생님을 위해 백일 동안 상복
을 입고 제자의 예를 다하고자 합니다.」
  눈물로 배례를 끝낸 청년은 잠시 후 전씨를 향해서,
  「선생님 영전에 약속드린 대로 백일  동안 방을 빌려 상을 입고자 하니 용납
해주시겠습니까?」
  젊은이의 모습에 넋을 잃고 있던 전씨는,
  「네, 좋고 말고요. 사제지간이라 하면 친척과도 같은데 조금도 어려워하실 필
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두근거리는 젖가슴을 두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이리하여 초이레 되는 밤부터 노복을  함친 세 사람의 남녀가 한 지붕 밑에서 
지내게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전씨 스스로가  큰소리치던 대로 
그녀는 열녀의 거울이 될 것이었다.
  「사모님, 매일  이처럼 진수성찬을 베출어주시니  참으로 죄송 천만이올시다. 
그러나 사을 입는 동안 술은 삼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청년의 붉은 입술에서 맑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도련님. 주인께서는 도통하신 분이라 사소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
셨답니다.」
  「하지만 아직 관도 집안에 모시고 있는 터이온데...」
  「그런 말씀 마시고 내 정성을 받아주세요. 이 눈치도 없는 양반.」
  전씨 부인은 긴  눈꼬리에 수심을 가득 띄운 채 은근히  젊은이를 흘겨보았다. 
그는 연상의 여인의 정다운 시선에 몸둘 바를 모른다.
  「귀엽기도 해라. 저 수줍어하시는 모습.」
  그녀는 일어서면서 슬쩍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서는 청년의 손등을 꼬집는
다. 달콤한 분향기가 그의 코끝을 간지럽힌다.
  「상식을 올리고 또 올게요, 네. 많이 들어요.」
  젊은이의 방은 사랑방 옆에  있었다. 물론 사랑방에는 영구가 놓여 있다. 전씨
는 사랑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젊은이의 귀에 익은 울음소리였다. 그녀는 하루 세 번, 상식을 올릴 때마다 곡
을 하는 것이다.  곡은 중국의 풍습인데 그 곡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울음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우는 여인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 매장할 때는 「곡녀」라
는 여자들이 관 뒤를 따라 울며 가는데 이것은 우는 여자로서 일종의 직업에 속
하는 것이다.
  젊은이에게는 은근한 눈짓을 보내며  죽은 남편의 영구 앞에서는 거짓 울음을 
울어야 하는 전씨의 일과도 꽤나 바빠졌다. 용  가는 곳에 물 따르기 마련이라고 
보름도 채 가기 전에 젊은이에게도 상당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도 부드럽게 대해주시는  부인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선생님 
상중이라...」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참 답답한 도련님이시군.」
  이렇게 말하면서 전씨는 젊은이를 껴안으려고 했으나 아직도 도련님은 조심스
럽기만 했다. 슬쩍 몸을  피한다. 남자는 그다지 적극적이 아닌데 여인이 진심으
로 홀딱 반했다면 이만저만 처치곤란한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콧소리를 내면서,
  「나의 애간장을 너무 태우니 이젠 일어설 수도 없게 됐잖아. 이것봐요, 좀 만
져봐요.」
  그녀는 대담하게도 무릎을 벌리고 옷을 젖혔다.  젊은이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
를 돌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전씨는 술상을 차려놓고 노복을 조용히 안으로 불렀다.
  「할아범, 많이 자시오.」
  「고맙수다. 사모님, 고맙수다.」
  「한 마디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는데, 서방님은 장가가셨수?」
  「아니, 아직도 도련님이십니다.」
  「그래요. 어떤 상대면 결혼하시겠대요?」
  노복은 술이 들어가자 말이 많아졌다.
  「우리집 도련님께선 사모님 같은 미인이 좋다고 늘 말씀하시는 걸입쇼.」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그런 거짓말은 아무도 곧이 듣지 않을걸, 자 많이 드시우.」
  「네, 네, 늙은이는 거짓말 안하는 걸입쇼. 이제 얼마나 더 살다 가겠다굽쇼.」
  「그렇다면 할아범이 중간에 들어서  도련님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지 않
겠수? 첩이 아니고 정식으로 혼인하는 부인으로 말이야.」
  「전번에도 언젠가 우리  도련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모님이 정답게 대해주시니 
결혼을 했으면 좋겠는데,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할까봐 그게  두렵다고 말씀하
시던 걸입쇼.」
  「그까짓 것쯤이야 상관 없어요. 스승님이다, 제자다 하지만 어디서 한 헛약속
인지 알게 뭐냔 말예요. 세상  사람들이 알 바가 아니라구요. 더구나 이런 산 속
에 파묻혀 사는데  누가 소문을 낸답디까. 상관  없어요. 제발 할아범이 중신 좀 
잘 해봐요. 일이 잘 되면 내가 인사 톡톡히 할게.」
  전씨는 술을 고주망태가 되도록  먹이고 나서야 간신히 할아범의 승낙을 받았
다.
  「회답을 기다리고 있을  테야. 밤중이 되어도 좋으니 오늘밤 안으로  기쁜 소
식을 알려 주구려.」
하면서 전씨는 돈뭉치를 한 줌 안겨보냈다.
  「힘드는 일이야. 하지만  그이만 끌어올 수 있다면 발에 밧줄을  묶어 끌어들
이고 꽉 눌렀으면 싶은 심정이야. 과부가 되니 더 흥분이 돼서 못 참겠는걸.」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며 뜨거운 입김을 훅 뿜었다. 그녀는 안방에 들어갔다가, 
영구실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갔다가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해 온종일 쩔
쩔매고 있었다.
  드디어 해는 저물고 밤은  깊어졌다. 그러나 늙은 하인은 나타날 기색이 없다. 
홀로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서 가슴을 태우고 있는데 영구실 근처에서,
  「달가닥, 달가닥.」
하고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전씨는 촛대를  켜들고 떨리는 
발을 간신히  떼어 마루로 나갔다. 남편이  죽고 아직 삼칠은 이십  일의 삼일도 
되기 전에 생긴 이 음탕한  마음을 질투한 나머지 남편이 유령이 되어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영구실에 들어가자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노복이 술에 곤드레가 된  채 영구 
앞에 놓인  탁자 위에서 잠이 든  것이 아닌가. 입에서는 술냄새를  푹푹 뿜으며 
발은 연신 탁자 바닥을 달가닥달가닥 하고 치고  있는 것이었다. 전씨는 목이 빠
지게 기다리고 있어도 회답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화가 치밀어오른 전씨는 장소도 생각지 않고 침을 탁 뱉었다.
  「사모님, 도저히 안되겠던 걸입쇼.」
  이튿날, 노복은 미안한 듯이  말을 하는 것이었다. 손과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하는 것을 보면 교섭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런데 할아범은 어젯밤 고주망태가 된 채  영구실에서 자고 있던 걸. 
내가 얘기한 말을 전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천만의 말씀.  말씀을 안 드릴 리가  있습니까요. 말씀을 드렸더니 도련님은 
자기도 사모님 생각이  간절하나 세가지 일이 있기  때문에 도저히 좋은 회답을 
드릴 수가 없노라 하는 말씀이었습죠.」
  「사랑방에 영구가 놓여 있으니 도저히 결혼식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 첫째이
고, 둘째는 돌아가신 선생님과 사모님과는 서로 열렬히 사랑하던 사이였다는 것, 
더구나 선생님은 훌륭한 분이셨고  자기는 보잘것 없으니 부부가 되면 사모님이 
낙심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세번째는 자기는 오랜 여행으로 아직도  짐과 돈
상자가 도착하지 않아서  식을 올릴 비용도 없다고 하던 걸입쇼.  도련님의 말씀
도 이치에 닿는 소리니  이야기가 없었던 것으로 돌리고 단념하시라는 분부였습
죠.」
  전씨는 그 말을 듣더니 생긋 웃으며,
  「그런 일로 그러시는  거야? 참으로 귀여운 도련님이시군. 그래서  나는 도련
님이 좋아지는 거야. 첫번째 일은 간단해요. 관에 뿌리가 박혀 움직이지 않는 것
도 아니고 지금 당장 곳간으로 들어내면 그만이지.  또 죽은 남편은 도련님이 생
각한 만큼 훌륭한 분이 아니셔.  가정 관리가 나빠서 부인은 내가 세 번째야. 전
번에도 산기슭에서 무덤에  부채질하는 여인을 실컷 놀려주고,  대신 부채질해주
고는 그 부채를 가져왔었지. 내가  막 찢어버렸어. 점잖은 분이 그런 짓을 할까? 
식에 드는 돈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도련님에겐 걱정 마시라고 일러요. 자, 여
기 스무 냥이 있으니 이것을 갖고 가서  새옷을 만들어 입으시라고 해요. 서방님
은 초나라의 왕손이시고 나도 유서  깊은 지주의 딸. 꼭 알맞는 배필이 될 거야. 
손 위의 아내라는 것도 맛이 괜찮은 거구.  생각난 김에 오늘밤에 결혼식을 올리
기로 하자고 전해요.」
  서방님 기운을 북돋우는데  쓰라고 술 한 병까지  노복에게 안겨서 보낸 그녀
는,
  (어떻게 된 일일까, 서방님만 생각하면  몸이 이렇게 사족을 못쓰니 참으로 여
자의 몸뚱아리는 자기 자신도 알 수가 없는 건가봐.)
  눈은 달아올라 가고  입에서는 붉은 입김을 뿜는  그 꼬락서니는 바로 욕정에 
굶주린 여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전씨는 수건을 머리에  덮어 쓰고 침실을 깨끗이 청소하기도 하고,  긴 구봉침
을 준비하는 등 결혼준비에 바빴다.
  드디어 밤이 되었다.  젊은 서방님의 갓끈과 비단 저고리는 환한  불빛에 비쳐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상견례가  끝나자, 두 사람은 가슴에 넘치는 사랑을 주
체하지 못하고 곧바로 침실로 들어갔다.
  「여보.」
  전씨가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젊은이의 가슴에 몸을 던졌다.
  「사모님.」
  젊은이가 양손으로 껴안았다.
  「여보!」
  「그래요, 여보. 우리 빨리 합환주를 마시고 자도록 해요.」
  그런데 그들이 합환주를 마시고 자리옷으로 갑아 입은 뒤 침대에 올라간 순간
이었다.
  「어이쿠 아파, 아파서 죽겠군.」
  젊은이가 화려한 첫날밤 갑자기  잠자리 안에서 가슴을 쥐어 뜯으며 괴로워한
다.
  「당신, 웬일이세요?」
  전씨는 잠옷자락이 크게 벌어지는 것도 잊고 그를 안아 일으키더니 등을 쓰다
듬다가 쓸어올렸다가, 어찌 할 줄을 모른다.
  「여보,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젊은이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서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숨이 끊어질 듯이 
헐떡였다.
  노복이 뛰어왔다.
  「또 시작이군. 중요한 첫날밤인데...」
  「언제나 이렇수?」
  「서방님은 흥분을 하시면 이렇습죠.」
  「큰일이군. 어쩌면 좋을까?」
  「약 같은 건 소용이 없습죠.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는 걸입쇼.」
  전씨는 울고 싶었다.  그제야 깨닫고 보니 아랫도리가 환히 보여서  얼른 치마
를 걸쳤다.
  「한가지 묘약이 있습죠만 그런 건 여기서는 구할 수 없겠습죠.」
  「그거라니 대체 그거란 게 뭔데?」
  「산 사람의 뇌수를 뜨거운 술에 타서 마시면  거짓말 같이 그치지요. 이 병이 
일어나면 대감께선 상감님께 부탁드려서  사형수의 것을 얻어 와서는 제가 골을 
빠개고 물을 마시게 했습죠. 이 산중에서는 그런  묘약을 얻을 길이 없으니 서방
님의 목숨도 이제 다 된것 같습니다요.」
  「죽은 사람의 것은 안 된다던가?」
  「의사 선생님 말은 죽은  사람이라도 49일까지는 아직도 마르지 않았으니 쓸 
수 있다고 했습죠.」
  「마침 잘 됐군. 죽은 남편의 골통이 있잖아. 아직 스무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
으니까.」
  「그만두십쇼. 그런 일하면 벌을 받습니다요.」
  「무슨 소리야. 나는  말이야, 썩은 송장에게는 볼 일이 없어요.  지금 내게 소
중한 것은 이  젊은 서방님의 싱싱한 몸뿐이야.  내게 맡겨요. 할아범은 이 사람 
곁에 붙어 있어요.」
  옷을 바꿔 입은  전씨는 도끼를 찾아 들고 한  손에 촛불을 켜든 채 곳간으로 
들어갔다. 어두침침한 곳간  한 모퉁이에 영구를 담은 관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
게 했다. 그녀는 손에 든 촛불을 관뚜껑 위에 놓고,
  「얏!」
  소리와 함께 도끼를 내리쳤다.
  최초의 일격으로 나무에  금이 가고 몇 번  거듭하는 사이에 관뚜껑이 갈라졌
다. 사랑하는  남자를 생각하는 일념이  엉키고 엉켜서 여자의  손으로 관뚜껑을 
여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아, 잘 잤구나.」
  큰 하품을 하며 장자가 관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뜻밖의 일에 
전씨는 도끼를 곳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손 좀 빌리자, 좀 일으켜 다오.」
  하는 수 없이  전씨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를 부축했다. 장자는  손수 촛대를 
들고,
  「발 밑을 주의해. 어두운 밤이군.」
  그녀의 손을 잡고 침실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전씨는 애가 바싹바싹 탔다.
  침실에는 보여서는 안될  사람이 두 사람 있는 것이다. 다리는  떨리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방이 참으로 아름다워졌군. 첫날밤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것이, 그만...」
  말하면서 둘러보니 젊은이와 노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천
만 다행이로군. 그녀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 나서 뱃심 좋게,
  「돌아가신 조석으로 당신 생각만 간절했답니다. 그런데  지금 관 속에서 소리
가 나기에 옛날에 읽었던 환생하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혹시나 하고 도끼로 열었
지요. 정말 다행이군요. 당신이 살아나시다니 나는 너무 너무 기뻐서...」
  「고마운 이야기로군. 그런데 당신의 고운 옷은?」
  「당신이 행여  살아나신다면 매일 입고  있던 상복으로는 불길할  것 같아서, 
그래서 반가운 표시로 이 옷을....」
하고는 말끝을 흐린다.
  「점점 고마운  말이군. 한 마디 더  묻겠는데 영구가 든 관을  곳간에 버리는 
것도 역시 기쁨의 표시인가, 핫하하.」
  장자는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여기 마침 술이 있군.」
  그는 술을 죽 들이켰다. 이것을 본 전씨가 아양을 떨며 말했다.
  「나를 안아줘요.」
  「아니, 나는 사랑보다는 술이 좋아. 그러니 술을 더 가지고 와.」
  이렇게 말한 장자는 또 노래를 부른다.
  참으로 세상은 무서운 세상
  남편이 죽는 것을 기다리다가
  무덤을 부채질한 여자가 있고
  죽은 남편 관 뚜껑을
  도끼로 찍어대는 여자도 있다.
  참으로 여자는 무서운 동물
  아무리 낯가죽이 두꺼운 전씨도 부끄러워 그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너에게 아까 그 두 사람을 보여줄까?」
  이렇게 말하며 장자는 방 바깥을 가리켰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초나라의 왕
손과 노복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나타나더니 이곳으로 가까이 오는 것
이었다. 웬일인가, 하고 장자를 돌아보니 장자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전씨는 
다시 눈을 밖으로 돌렸는데  그러나 그곳에 있던 두 사람도 간  곳이 없다. 단지 
어둠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장자의 특기인 분신술에 걸려든 것이다.
  「아이구 부끄러워.」
  그녀는 비단을 찢는  듯한 고함소리를 지른 후  풀어둔 허리끈을 목에 감고는 
그대로 목매어 죽고 말았다.
  차가운 눈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장자는 자기가 들어 있던 관에 그녀를 넣
고,
  「나는 너의 남편이  아니다. 너도 내 아내가  아니다. 인연이 있어 서로 만나 
같은 지붕 밑에 살고 있었을 따름이지. 인생 만사가 이와 같구나.」
  술병을 두들기며 중얼거리던 장자는 집에 불을 지른 뒤 어디론가 표연히 사라
져갔다.

  소동파의 해학
  중국 고대의  대시인이며 대문장인 소동파의 천재성의  매력은 후세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그는 무엇보다도 중국어로 재자라고 하는 제일의 천재였다.
  소동파의 기지는 천하가 아는 일품이다. 그  일화는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이 
적지 않다.
  그는 응수가 제  마음대로이며, 재빠르게 해학이 튀어나오며, 상대에게 양보함
이 없었다. 그가  풍자하는 붓대는 당시 재상 왕안석을 야유하여  세번이나 귀양
죄를 얻었던 것이다. 한 번은 황주, 다음은 혜주 마지막은 해남도로 갔다.
  가장 재미있는 일화는, 귀양살이를 하면서 남을  야유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기 
자신을 야유하는 방법을 발견한 일이다.
  그는 외딴 섬에서 의사도 약도 없는데 지쳐서,  수도에서 의사의 손에 죽은 인
간의 수를 세어봄으로써 스스로 답답함을 면했다는 것이다.
  어느날, 곽이라는 성의 문인이 항주로 소동파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자작의 시 
한편을 꺼내어 소리 높이 읽어보이는 것이었다. 다  읽고 나서 곽은 어떠냐고 물
었다. 동파는,
  「백점이외다.」
하고 대답하였다. 곽은 자못  만열하여 다시 상세한 비평을 원했다. 그런즉 동파
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대의 좋은 목소리에 70점을 줍니다. 시는 30점이오. 그러니까 백점이 
되는 셈이지요.」
  어느날, 소동파는 천자에 배알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사를 마친 후 한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방 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다가, 이윽고  그 첩들에
게,
  「내 뱃속에 무엇이 들었다고 생각하는가?」
하고 물었다.
  젊은 첩 중의 하나는, 영감의 배에는 좋은 글이 가득 들었다고 대답하였다. 또 
한 사람의 첩은  좋은 사상이 가득차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소동파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조운이라는 첩의 차례가 오니까, 이렇게 말했다.
  「영감의 배에는 깨끗지 못한 생각이 하나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동파는 자기 배를 다시 한 번 어루만지더니 가가대소 하였다.
  전이란 성을 가진 동파의 친구가 동파를  골려주고자 생각하였다. 언젠가 저녁
에 ()이란 것을 먹으러 오라는 초대를 했다. 백자를 셋을 합친 이 글자는 옥편에
도 없는 글자이기 때문에 동파는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만찬에 가 본즉 전씨는 「흰 것」만  세 가지를 내어놓았다. 한 주발
의 백밥, 한 접시의  백삼, 그리고 흰 국 한 그릇이었다. 동파는  그에게 골탕 먹
었음을 알았다.
  그 후 2,3일이  지나서 이번에는 동파로부터 전씨에게 무를 먹으러  오라는 청
첩이 도달되었다. 전이 동파의 집에 갔다. 낮부터 저녁때까지 기다렸으나 아무런 
음식이 나오지 않으므로  전은 배가 고파 못견딜 지경이었다. 그런즉  동파는 말
하였다.
  「사실은 자네를 오라고  한 것은 (밥 없는 주발)  (인삼 없는 접시) (국 없는 
국그룻)을 대접하려던 거네.」
  소동파는 이렇게 하여 복수를 하였다.
  어느때 소동파는 누라는  성을 가진 몹시 뚱뚱한 사람을 찾아갔다.  누는 마침 
낮잠을 자고 있는 중이었는데, 동파는 너무 오래 기다려서 화가 났다.
  가까스로 누씨가 잠을  깨어 동파를 대접하였다. 동파는 거기 질그릇  속에 거
북 한 마리가 있고, 거북 잔등에 푸른 이끼가 끼어 있는 것을 보았다.
  「녹구는 진기하지 못합니다.  찾아내기 어려운 건 아무래도  육안의 거북이겠
지요.」
  이 말을 들은  누씨는 「육안의 거북」이란 대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
니까 소동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의 장종시대의 어느날, 임금은 신하로부터 눈이  여섯 달린 거북의 진상을 
받으셨습니다.」
  「눈이 여섯 있는 거북에겐 어떤 별다른  성질이 있는가」하고 물으셨더니, 그 
대답이 「거북은 보통  눈이 한쌍인데 이 거북은 세쌍입니다. 그러므로  눈 여섯 
달린 거북이 낮잠을 자면,  그 낮잠은 세 마리의 거북이 낮잠  자는 시간을 합친 
것만큼 긴 동안을 잡니다.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소동파가 봉상부 첨판이란 벼슬에 있을때에, 우인의  문인 장호가 동파의 집에 
묵은 일이 있었다.  이 장호는 굉장한 호인이었다. 어느날, 두  사람이 산으로 산
책을 나간즉 이윽고 어느 낭떠러지 앞에 다다랐다.  그곳은 깊은 연못에 가로 막
혀서, 한 개의 나무를 걸쳐놓은 좁은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대안으로 당도할 수
가 없었다. 장은  대안의 암벽에다 큰 글씨로 휘호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동파에
게 권하였으나, 동파는 건너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은 혼자서 대안으로 가
서, 가장 굵은 붓으로 「소동파와 장호 여기에 오다」라는 뜻의 글씨를 썼다. 장
호가 다시 건너오니까 동파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자네는 나를 죽였군. 자네가 살기 싫다 한들 나까지 그렇게는 안돼.」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하는가, 라고 타이르면서,  남이 보면 자기도 그런 짓에 
목숨을 던졌다는 인상을 남에게 준다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소동파에게 둘도 없는 양붕은 황산곡이었다. 어느때  두 사람의 화제는 우연히 
왕희지에 미쳤다. 왕희지는 글씨로  첫 손가락을 꼽는 명필이다. 그의 작품은 붕
우지기 사이에 몹시 귀하게 여겨졌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양의 고기가 몹시  좋았으나 주머니는 항상 비어서, 친구
인 왕희지의 편지를 받을 적마다  이것을 고위현관에게 바치고 그 대신 양의 고
기 한두 근씩을 받았다.
  소동파의 글씨도 또한 세상의 평판이 매우 좋아서 우인들은 그 편지나 필적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날의 일인데, 소동파는 임금곁에 있어서 궁정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여러 장이나  편지를 받았으나 답장은 아무데도 내지 않았다. 마침
내 하인을 시켜서, 즉시 자필의 답장을 보내달라고 한 사람이 있었다. 동파는 하
는 수 없이 그 하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인어른께 말씀드려라. 오늘은 양고기 장수가 쉬는 날이라고.」
  소동파는 그의  친구 황산곡을 놀려주는  것이 큰 재미였다.  동파가 광동으로 
귀양을 갔을 당시, 병들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날 동파는 귀양살이가 풀
려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어떤 벼슬아치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역시 살아계셨습니다 그려.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동파는 파안일소하며, 대답하였다.
  「음, 죽었던 것은  참말이었지만요, 나는 지옥에 가다가 중도에서 황산곡이란 
친구를 만났으므로 거기는 있을 데가 못된다고 하여 되돌아 오기로 결심을 했지
요.」
  소동파는 그 친구인  불인화상과 농담을 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조라는 말
은 한문에서는 야비한 의미가 있고, 남을 야유할 경우에 흔히 쓴다.
  그래서 송동파는 어느 때 불인에게 말했다.
  「옛날 사람 시 속에 중승자와 새조자라는 말을  갖다대는 것이 나는 좋아. 이
를테면 이런 시가 있지.」
  새는 묵노니 연못가의 나무요
  중은 두드리노니 달 아래 문이로다.
  「나는 이 시를 무척 좋아하네.」
  그런즉 불인이 서슴지 않고 얼른 대답하였다.
  「그야 그렇지, 나 같은  중이 시재인 자네와 얼굴을 대하고 있으니까 말일세.

  소동파는 누워서 침뱉는 격이 되고 말았다. 중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말하면 동
파 자신이 새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오서방의 짚신을 산 여종
  경상도 양산 땅에  오서방이란 사람이 있었다. 하도 성미가 느려서  짚신을 삼
아 겨우 먹고 살아갔다.
  그가 삼은 짚신은  어찌나 못생기고 묘한 꼴을 하고 있었던지,  서울에서 놀러
온 한 소년이 그것을 보고,
  「이 짚신을 서울로 가지고 가면 한 냥은 문제 없이 받을 수 있겠소.」
하고 말했다.
  오서방은 소년의 말이 정말인 줄 알고 짚신을 70켤레나 만들어 가지고 서울로 
갔다. 오서방은 짚신을  길가에 늘어놓고 지나가는 사람이 물으면 한  켤레에 한 
냥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오서방이 못생긴 짚신을 한 켤레에 한 냥이라고 말하면 물어본 사람은 
코웃음을 치고 가버렸다.
  오서방은 길가에서 팔리지  않자, 장터로 가지고 가 보았으나 역시  짚신을 한 
켤레도 팔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오서방  앞에 나타난 처녀가 있었다. 이 처녀는  재상집의 여종
으로서 용모가  단정하고 매우 영리했다. 나이가  겨우 열 여섯 살인  이 여종은 
항시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나는 내가 마음에 맞는 사람을 골라 시집을 갈란다.」
  같은 여종들끼리 시집 이야기가 나오면 하는 말이 바로 이러했다.
  이 여종이 오서방 앞에 나타난 것은 벌써  이번이 세번째다. 팔리지도 않는 짚
신을 늘어놓고 값을 비싸게 부르는 오서방이 남달리 보였기 때문에 여종은 말을 
걸어 보았다.
  「이 짚신 얼마요?」
  「한 냥이오.」
  「그럼 여기 있는 짚신이 모두 몇 켤레요?」
  「그건 왜 묻소. 한 켤레도 비싸다고 못 사가는데!」
  너 같은 여자가 짚신을 사가겠느냔 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다 사갈 테니 얼마요?」
  「일흔 켤레니 칠십 냥이요.」
  「그럼 나를 따라 오시오. 돈을 드릴 테니!」
  어떠냐, 내가 못사갈 것 같았지, 놀랐을 거다, 하는 투로 앙칼지게 말했다.
  오서방이 그제야 눈이 휘둥그레지며,
  「네!」
하고 일흔 켤레의 짚신을 짊어지고 따라갔다.
  한참 동안 가더니  커다란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서방도 따라  들어가자 여
종은 짚신 값을 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오서방은 두리번거
리며 방문 앞에 짚신을 부려놓고 방에 들어가 앉자마자 짚신 값을 달라고 했다.
  「내일 드릴 테니 마음놓고 오늘밤은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오.」
하고 말한 후 맛좋은 술과 안주를 올리고  저녁밥을 잘 차려 들여갔다. 그릇들은 
모두 깨끗하고 음식  또한 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시골에서 된장에  겨우 김치
쪽을 먹던 오서방인지라 눈깜짝할 사이에 거뜬히 해치웠다.
  이튿날 아침 여종은 채 밝기도  전에 일어나서 농을 뒤져 새옷을 꺼내 목욕을 
하게 한 다음  새옷을 입혔다. 오서방이 씩씩한 멋쟁이 사나이가  되었다고 여종
은 생각했다.
  「소녀는 이댁의  여종올시다. 서방님은  이젠 저하고 정혼하였으니  재상에게 
절을 올리면 되오. 헌데 땅바닥에 앉아서 절을 해서는 안되오.」
  이렇게 말한 다음 여종은 안방으로 들어가 재상에게 말했다.
  「어제 저녁 소녀는 신랑감을 맞았나이다. 대감 어른께 절을 올리겠나이다.」
  「아아, 그래? 어서 데려오너라.」
  오서방은 곧 대청으로 들어가서 대감께 절을  올렸다. 무반들이 오서방을 대청 
아래로 내려서라고 했으나 오서방은 그냥 버티고 서서 꼼짝도 안 했다.
  「나는 향족이오.  비록 여종의 남편이  됐기로서니 땅바닥에 내려서  절을 할 
수 없소.」
  재상은 웃으면서,
  「음, 좋거니,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이렇게 재상에게 절을 올린 일이 있은 후,  오서방은 그대로 여종이 사는 방에 
머무르게 되었다.
  어느날 여종이 말했다.
  「서방님은 너무 성미가  느려요. 돈을 써보면 반드시 눈이 트이고  머리도 영
리해질 줄로 아오.」
하면서 돈꾸러미 한 줄을 내놓았다.
  「이 돈을 가지고 나가서 모두 써버린 다음 돌아오시오.」
  저녁때 오서방은 돌아와서 말했다.
  「별로 배도 고프지 않고, 술도 떡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온종일 이리저리 
빈들빈들 돌아만 다니다가 한 푼도 쓰지 않고 돌아왔소.」
  「아니 서방님,  그게 무슨 말씀이오. 길가에는  거지들이 우글거리고 있을 텐
데, 왜 돈을 주지 않았소?」
  「아 참, 그 생각을 못했었군!」
  이튿날 다시  돈꾸러미 하나를 들고  나가서 거지들을 모아놓고  돈을 뿌렸다. 
거지들은 앞을 다투어 흩어진 돈을 주웠다. 그  모양이 꽤 재미있었기 때문에 날
마다 그 일을  되풀이했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너무 많은 돈을  낭비했다는 생각
이 들 뿐만 아니라,  거지들이란 은혜를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궁터로 
나가 활쏘기 패들과 어울려 매일  술과 안주를 사서 나누어주는 동안 그들과 아
주 사이가 좋아졌다.
  그 다음으로 오서방이 사귄 사람들은 가난한  선비들이었다. 오서방은 매일 아
침 저녁으로 먹을 것을 대주고 필묵을 사주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 오서방은 요즘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위인이라고 평판이 자자
했다. 여종은 오서방에게 <사기삼략>과 <손자병법>을 공부하게 했다.  오서방은 
가난한 선비들과 어울려 사기삼략과 손자병법을 거의 모두 통달했다.
  그렇게 해서 철촉도  침촉도 잘 쏘아 과녁을  맞히게 되었고, 무술책 <무경칠
서>를 통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과 시험을 보아 장원급제해서 합격증을 받았
으나 감추어 두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날 아내는 오서방에게 말했다.
  「내가 모아둔 돈은  천 냥밖에 없었소. 서방님이 여태까지 벌써  칠백 냥이나 
써버렸으므로 남은 것이라곤 삼백 냥밖에 없소. 이것으로 장사를 시작하시오.」
  「헌데 무슨 장사를 했으면 좋을지 나는 모르겠군.」
  「올해는 배추가 대흉작이오. 그런데 충청도 어느  고을만이 배추가 잘 되었다
고 하니 충청도에 가서 그것을 몽땅 사 놓으시오.」
  오서방은 시키는 대로  그 고을로 갔으나, 흉년으로 곡식이 안되어  많은 백성
들이 굶어 쓰러져 있는  모양을 보고 가엾기 짝이 없어, 가는  곳마다 돈을 나누
어주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다.
  이렇게 돌아온 오서방을 보고 아내가 아내가 말했다.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내가 모아둔 돈은  이제 거의 
다 써버린 셈입니다. 어떻게 사라 가면 좋을는지!」
  근심을 하면서도 다시 백 냥을 내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목화도 팔도강산 모두  흉년이라 하오. 겨우 황해도 땅의 한두  고을이 어지
간하게 되었다고 들었으니 황해도에 가서 목화를 사 거두시오.」
  오서방은 황해도로 갔으나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제 백 냥밖엔 남지 않았소. 남은 것을  모두 드릴테니 이걸로 헌옷을 사서 
함경도 땅에 가서 인삼과 바꾸어 오시오. 제발 먼젓번처럼 헛되게 쓰지 마시고...

  오서방은 시장에 가서 헌옷가지를 몇 벌 사가지고 황해도를 향해 떠났다.
  북쪽에서는 목화가 나지  않아 값이 비싸서 백성들은  옷을 살 수 없었으므로 
과히 춥지 않은 겨울 날씬데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오서방은 돈쓰는 솜씨는 좋으나  장사는 서툴러서 함경도 안변 고을로부터 시
작해서 여섯 개의 고을을 돌아다니는 동안에 지고  간 옷을, 옷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니 남은 것이라곤 치마 한벌과 속옷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천 냥이라는 큰 돈을 없애버렸다. 빈 손으로 돌아가자니 집사람을 볼 면
목이 없다. 차라리 호랑이나 늑대에게 물려 죽어버리는 편이 낫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밤중에 산 속 깊숙이 들어가서 벼랑을 기어올라 산길을 따라 
걷고 있노라니 마침내 산골짜기가 나타났다.
  울창한 숲 속에 등불이 깜빡깜빡 비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불빛을 따라  가보니 집이 나타났다.  대문을 두들겨 하룻밤을  묵게 해달라고 
청했다.
  늙은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
  「이런 한밤중에 이런 깊은 산 속으로 어찌하여 왔소?」
하면서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밥상을 차려 대접해 주었다.
  오서방은 겨우 남아 있는 치마와 속옷을 노파에게 주었다.
  노파는 몹시 기뻐하면서 선 자리에서 입고는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했다.
  오서방은 밥을 먹으면서 찻잔을 들여다보니 인삼이 들어 있었다.
  「이 인삼은 어디서 캐어 왔소?」
하고 물은즉 노파는,
  「이 근처에 도라지 밭이 있소.  늘 그 밭에서 캐다가 차를 달여 마시고 있소.

하고 대답했다.
  「캐다 둔 것이 아직도 남아 있소?」
하고 물은즉 노파는  여러 묶음을 꺼내다 보여주었다. 모두 인삼인데  작은 것은 
손가락 크기만 하고 큰 것은 허벅다리만큼이나 했다.
  그때 문 밖에서 짐을 내리는 소리가 났다.
  「아아 참! 아들놈이 돌아왔소.  저 애는 이상한 아이로, 태어날 때  양쪽 겨드
랑이 밑에 작은 날개가  있어서 높은 곳으로 날아 올라갈 수  있지요. 애 아버지
가 쇠를  달구어서 그 날개를  태워버렸으나 다시 생겨나왔지요.  커가면서 힘이 
장사라오. 아무일도 없으면 괜찮겠으나 생각도 못할  불의의 재난이 있을까봐 이
렇게 깊은 산속에 숨어서 사냥을 해서 먹고  살아가고 있답니다. 지금은 애기 아
버지도 돌아가고 나만 혼자 남았소.」
  그리고 밖의 아들에게 말했다.
  「귀한 손님이 오셨다.  들어와 인사를 드려라. 내게  옷 한 벌을 주셔서 지금 
입고 있다. 큰 은인이다.」
  아들이 들어와 절을 했다.
  이튿날 아침 오서방은 노파에게 말했다.
  「도라지밭을 잠깐 구경할 수 있을까요?」
  노파는 오서방을 데리고 재 하나 넘어서 어떤 곳으로 데리고 갔다.
  온 산이 모두 인삼 투성이였다.
  오서방은 온종일 인삼을 캤다.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캤다. 동자삼이 많
이 섞여 있었다. 모두 대여섯 개나 되었다.
  「산중에는 말이 없으니 어떻게 운반해 내려가면 좋을까?」
하고 걱정을 하자 노파의 아들은,
  「내가 원산까지 져다 드리겠소. 거기서 말에 실으면 되지 않겠소.」
라고 말하므로 그가 하자는 대로 해서 말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말한즉 아내는 기뻐했다.
  「서방님이 착한 일을  여러 번 했으므로 하늘이 보물을 내린  것이오. 이렇게 
해서 돌아온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오. 다행히  내일은 재상의 환갑 잔치가 있으
니 조정의 여러  대감들이 모두 모이게 되오. 서방님이 여러  대감들을 만나시면 
곧 친분이 생겨서 벼슬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이튿날 여종은 인삼 속에서 큼직한 것을 다섯 개 꺼내 재상에게 바쳤다.
  「소녀의 남편이 행상으로 갔을 때 이것을 얻어 왔나이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재상은 몹시 기뻐하면서 오서방을 불러들였다. 아내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예
복과 관대를 입혀주었다.
  재상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옷차림은 어찌된 영문인고?」
  오서방이 대답했다.
  「소인은 앞서 무과에  장원급제했으나 장사꾼이 되었으므로 합격증을 감추어 
두고 대감께 여태껏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하! 그랬던가? 몸도 건장하군.」
  그러고 있자니까 여러 대감들이 한 둘 몰려 들어와서 인삼을 보더니,
  「이렇게 보기도 드문  진품을 대감 혼자 드시면  안되겠는데요. 소인들에게도 
한 개씩 나누어 주오.」
하고 말했다.
  「헌데 이것밖에 없군, 그래. 나누어 드릴 수는 없소.」
  오서방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소인의 보따리 속에는 인삼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 대감들에게 나누어 드리
고 절을 올리겠습니다.」
하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대감 한 사람에게 인삼 세 뿌리씩 주었다.
  여러 대감들도 크게 기뻐했다.
  「도대체 저 사나이는 누구요?」
  재상이 대답했다.
  「내 집 여종의 신랑인데 신분은 호족이고 무과에도 장원급제했소.」
  「대감댁의 여종의  남편이 그런 훌륭한 무인이었거늘  어찌해서 아직 벼슬을 
주지 않고 있소. 그건 대감의 실책이오.」
  「아니, 나도 그가 무과에 장원급제했다는 것을 오늘 처음 들었다오.」
  이미 해는 저물어 여러 대감은 아주 좋은 기분으로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오서방은 인삼을 팔아서 몇 천 냥을 벌었다.  그리고 여러 대감들의 힘을 입어 
목관 벼슬을 받아 선전관을 겸했다. 차츰  승진을 거듭해서 마침내는 수군절도사
에까지 승진하고 아내에게도 충분한 보답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훌륭한 부부가 
되었다.

  아내들의 숨은 힘
  어떤 시골에 삼형제가 의좋게 살고 있었는데,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
다. 아침에 논밭으로 갈  때도 나란히 함께 가며 또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도 사
이 좋게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아이들에게도 서로 한결같이  따뜻하게 대해서 
아이들도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를 아버지 대하듯  따랐다. 그러므로 동네에서도 
그들 일가의 칭찬이 자자하고, 집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그들을 본받아라 하며 
동네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았다.
  어느날 남자 형제들은 들로  나가고 삼동서들이 모여 송편을 빚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네의 사람들이 모두 삼형제분이 우애가 대단하다고 칭찬을 하는데 아우님
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남자분들이 우애가 좋아서 그런가, 아니면 우리 삼동서가 
우애가 좋아서 그런가 말 좀 해봐요.」
  그러자 아우 동서가,
  「그야 물론 우리 삼동서의 사이가 좋다보니 남자분들도 우애가 좋은 것 아니
겠어요? 우리 사이가 나쁘면 곧 남자분들도 사이가 좋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에
요.」
  그 소리를 듣고 있던 가운데 동서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우리 삼동서는 젖혀놓고 남자분들만 우애가 좋다고들 
칭찬하니 우리 어디 한 번 시험해 봅시다.  우리가 다투어도 과연 형제분들 사이
의 우애가 두터운가 어떤가.」
  그리하여 그들은 석 달 기한을 정하고 연극을 꾸며 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먼저 큰집에서 닭을  자방 백숙을 고았다. 기름기가 졸졸 흐르는  뽀얀 닭국물
이 여간 구미를 돋우는 게 아니었다.
  형님이 아우들 생각이 나서,
  「왜 아우들을 청하지 않았소? 한 그릇씩 보내 주었소?」
  「흥! 그런걸 누가 몰라서 안 하우. 저쪽에서 그렇게 나오니 안하는 거지.」
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쪽에서 그렇게 나오다니 무슨 말이오?」
  「그저께 작은 집에서  떡을 했다나봐요. 당신 잡수어 보라고 한  접시 보내기
나 했어요. 혹 모자라서 안 보낼 수는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아이들이 그 집 마
당에서 놀면서 먹고 싶어 손가락을  빨고 있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자기네 아이
들만 주었다지 뭡니까. 세상에 그럴 수가 있어요?」
  부인이 핏대를 올렸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당신이 뭔가 잘 모르고 있는 거겠지?」
  남편은 그렇게 대답했으나 뭔가 기분이 석연치 않은 듯 입맛을 다셨다.
  다음날 작은집에서,  햇곡식으로 술을 만들었는데도  형님들을 청하질 않았다. 
이유는 똑같다. 술상 앞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도무지 술맛이 나지 않았지만 그
러나 형님들을 청하고  싶어도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또 가운데  집에서도 마찬
가지였다. 밤, 대추를  잔뜩 따놓고도 감추어두고 저희 식구만  먹었다. 아이들이 
놀러와도 그 흔한 햇밤 한톨 주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자연히 형제들도 함께  들로 나가지 않게 되었고 어쩌다가 밭에서 
만나도 서로 시무룩하니 통 말이 없었다. 지난  날 그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던 분
위기는 간 곳이 없었다. 또 아이들도 서로가 함께  잘 놀지도 않게 되고 설혹 사
촌이 다른 동네 아이들에게 매를 맞아도 보고도 못본 척 말리려 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서끼리는 낮에 남편들이 밭일을 하러 나가면 서로 모여서 그날의 성
과 보고와 내일의  전략을 꾸미기에 바빴다. 그리고 여자들의 숨은  힘이 얼마나 
큰가를 서로 웃고 자랑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석 달이 지났다.
  둘째와 셋째 집에서 부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큰집으로 모이자고 하니 남편
들이 하는 소리가,
  「지나다가 보니 고기  굽는 냄새가 나고 맛있는  음식을 잔뜩 준비하고 있는 
모양인데, 거기는 뭣하러  가. 구질구질하게 자식새끼 데리고 얻어먹으러 왔다는 
소릴 들으려고?」
라고 코웃음을 치며 가려 하지 않았다. 억지로  부인들이 끌고 가서 세집이 오랜
만에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상에 둘러앉아서 그동안의 동
서끼리의 연극을 털어놓았다.
  그제서야 부인들의  농락에 말려든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알고 한바탕 웃었으
나, 안사람들의 힘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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