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유현숙
페루에서 온 편지
몇 년 전 체 게바라를 혁명가와 정치적 지도자로서가 아닌 참된 인간의
감정으로 그의 생애를 소설로 엮어 보겠다는 말을 전해들었을 때 나는 찬
성하지 않았었다. 내용이 어떻든 그 당시만 해도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의
정치현실은 '체 게바라'를 책으로 내놓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번에 '체 게바라'가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한국의 민주화를 실감하게 되었다. 또 체 게바라의 유해를 찾았을 때 한국
의 매스컴들이 보여 준 관심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독자들도 체 게바라와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체 게바라는 높은 도덕심과 독특한 특징을 가진 전례없
는 사람이다. 자신의 사상을 실천으로 옮긴 그는, 인간을 끊임없이 사랑했
다. 그리고 그는 정의의 편에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력과 물질
적 재산에 대한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
벽했다.
유감스럽게도 세월이 흐를수록 체 게바라와 같은 인간은 찾아보기가 어
렵다. 독자들도 '체 게바라'를 통해 진정한 영웅이란 어떤 사람인지,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페루 산 마르코스 대학교 부총장
로베르토 렌돈 바스케스
서문
볼리비아 코차밤바와 산호세 중간에 위치한 산타쿠르스 공항. 인가조차
없는 들판에 서 있는 허름한 2층 콘크리트 건물 공항 청사 앞에는 작은 활
주로가 치마폭처럼 펼쳐 있었다. 활주로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관목들은
흉년든 나뭇잎을 매달고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
루로 떠나는 마지막 비행기가 이륙한지 10여분쯤 지났다. 내일 아침 첫 비
행기가 출발할 때까지 산타쿠르스 공항은 휴식시간이다. 떠나야 할 사람들
이 모두 떠나고 공항은 텅 비어 있어야 하지만 조금전 라파스에서 날아온
사람들 때문에 공항은 비행기 탑승 전처럼 어수선하다.
그들은 매스컴 관계자들과 경찰, 그리고 정부 기관의 사람들이었다. 긴장
된 표정의 사람들은 끼리끼리 몇몇씩 모여 정보를 주고받았다.
"체를 찾았다."
"체가 여기 있다."
사람들이 우르르 공항 활주로로 달려나갔다. 활주로의 아스팔트 한 부분
이 파헤쳐지면서 속살이 드러났다. 숨죽인 그들의 눈빛은 곧 드러날 무언
가를 주시했다. 마지막 삽질이 끝나자 모여든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가 외
쳤다.
"체가 아니다."
그날 전 세계 매스컴들은 해외토픽에 이 작은 해프닝을 밝히며 체에 대
한 기사를 내보냈다.
체 게바라. 그는 왜 죽은지 3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토록 사람들의 기
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가?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쿠바의 깊은 산중
에서도 나는 체를 만났다. 빛바랜 사진 속에 그가 있었다. 체의 사진은 쿠
바의 시에라마에스트라 산자락에 있는 시골 노인의 방 안에 성상처럼 걸려
있었다. 왜 그들은 아직도 그의 사진을 걸어두었을까? 그 뿐만이 아니다.
왜 그토록 많은 지식인들과 혁명가들의 입에서 그는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가? 사르트르는 말하길 '체는 우리 사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다' 라고 했
다. 과연 그는 모든 이들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었을까? 체에 대한 궁금
증이 몇 년 동안 끊임없이 내 뒤를 따라다녔다. 그러다 그에 대한 궁금증
을 풀기 위해 그가 머물렀던 낯선 남미 대륙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가 살았던 궤적을 찾아 남미대륙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을
때 맨 처음 만난 것은 체의 사진이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별 하나 달
린 베레모와 구레나룻 수염, 그리고 조각가의 작품처럼 완벽한 이목구비,
성자와 같이 맑은 눈빛을 담은 얼굴사진. 흑백사진 속의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또 하나 자주 본 사진은 곱슬곱슬한 단발머리의 그가 여러 사람들
에게 둘러싸여 담소하는 모습이었다. 책을 읽던 그에게 사람들이 다가왔는
지 책갈피에 손가락을 끼운 채였다. 그리고 또 한 장은 군중들 사이에서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고 있는 체의 모습이었다. 두 장의 사진과 다른 점은
반항적이고 날카로운 눈빛과 왼손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시가'였다.
여러 사진 속에서 체는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었다. 그에게 군복과 군화
는 일상복처럼 편안하게 보인다. 더구나 그의 멋진 외보 때문인지 밀리터
리 룩은 입은 일류 모델로 착각할 정도다.
이 글이 거의 끝나 갈 무렵, 나는 체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소식과
만났다.
"전설적인 혁명가 체를 찾았다. 볼리비아의 한 공동묘비에서 손목이 잘
려 나간 유골을 발굴해냈다. 법의학자들은 게릴라 전력자들이 증언과 정밀
분석을 통해 분명히 체의 유골임을 확인했다."
세계의 매스컴들이 그의 유골을 찾았다고 보도했고, 며칠 휴 쿠바에서는
쿠바군의 의장행사를 거쳐 아바나 동쪽 3백킬로비터 떨어진 산타클라라의
특별 묘지에 안장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체 게바라라는 한 혁명가의 초상화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
니고 정리하며 혁명가로서의 체보다는 인간 체의 모습에 진정한 매력을 느
꼈다. 그가 지닌 이상 못지 않게 그가 지닌 인간성 그 자체에서 평범한 인
간인 우리로서는 근접하기 힘든 어떤 경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
르트르가 말한 '체는 우리 시대의 완전한 인간이다' 라는 표현을 다소나마
이해할 듯 싶었다. 체는 한 개인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과 인간
이 내면에 갖고 있는 선을 찾기 위해 그의 전 생애를 바쳤던 것이다. 그의
삶은 이데올로기조차 초월했던 것이다.
이 글이 쓰여지기까지는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남미 유학시절부터
꾸준히 자료를 모아주고 '체의 일기'를 번역해 책으로 엮은 내 동생, 페루
국립 산 마르쿠스 대학교 부총장이며 양아버지이신 로베르토 렌돈 바스케
스, 자료수집과 번역을 도와준 체의 큰딸 일디타의 학창시절 친구인 쿠바
의 호세 아리오사 페레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현재는 아르헨티나 대사
관에 근무하는 권윤환 선생, 이밖에 볼리비아와 과테말라, 쿠바, 페루 등에
서 끊임없이 자료와 조언을 보내 준 지면에 밝히지 못한 여러 친구에게 고
마움을 전하고 싶다.
1
1967년 10월 7일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산지대 이게라 마을 위로 검은
구름이 금세 비를 쏟아 낼 듯 밀려들고 있었다. 높은 산 속에 자리잡은 작
은 마을 이게라에 완전 무장한 군인들과 그들을 실은 군용 트럭이 거리 곳
곳을 메우고 있어 마치 마을 전체가 군부대처럼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며칠째 일터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만 있었다. 아이들도
집안에서만 맴돌 뿐밖에 나가지 않았다. 모두 두려움에 가득한 표정들을
하고 마을에서 군인들이 빨리 떠나가기를 기다렸다. 다만 촌장과 몇몇 지
도층만이 분주하게 마을 이곳저곳을 오갈 뿐이었다. 그들은 긴장된 얼굴로
바쁘게 움직였고 영문도 모른 채 마을 사람들은 덩달아 마음을 졸이고 있
었다. 군인들 일부는 이게라 마을을 떠나고 있었는데 오후가 되어서야 사
람들은 이 소동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체가 잡혔대. 혁명대원들도 모두 잡히고 정부군이 이겼다는 거야."
소문은 마을 전체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수군거릴 뿐
사채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긴장된 시
간이 한참 지났을 때 일단의 군용 트럭들이 질주하듯 마을로 들어왔다. 군
인들은 게릴라 요원인 듯한 포로 몇을 내리며 삼엄한 경계태세를 취했다.
그 중에는 구레나룻에 큰 눈이 돋보이는 부상당한 채 끌려온 포로가 한 명
있었다. 군인들은 특히 그를 겹겹이 둘러싸고 황급히 이게라 초등학교 안
으로 들어갔다. 낡은 교실 세 곳과 부속건물이 전부인 초등학교는 며칠 전
부터 군인들이 머물고 있어 학교는 휴교 상태였다. 잠시후 다시 소문은 온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 부상당한 포로가 바로 체라는.
붙잡힌 체와 혁명 대원들이 도착하자 이게라 초등학교는 임시 포로 수용
소가 되어 버렸다. 체를 호송했던 군인들은 맨 끝 교실로 데리고 갔다. 군
인들은 교실 안으로 들어서자 결박지었던 체를 풀어주었다. 체를 교실 안
으로 데려다 놓은 군인들 대다수는 타고 온 군용 트럭에 올라 이게라 마을
을 떠났다. 체를 호송한 군인들 중 지휘를 맞았던 장교들은 학교에 남겨졌
다. 다른 혁명대원들은 체가 감금된 반대편 맨 끝 교실에 감금되었다. 가운
데 교실은 정부군 군인들의 본부로 쓰이고 있었다. 체가 감금된 교실 안과
밖에서는 다섯 명씩 보초를 서고 있었다. 체를 지키는 군인들은 그를 두려
워하는 듯 쳐다보려고 들지도 않았다. 저녁 무렵 술에 취한 한 군관이 체
가 감금되어 있는 교실로 들어왔다. 휘청휘청 걸어 들어온 군관의 눈은 벌
겋게 충혈 되어 마치 어둠속 불빛에 드러난 이리의 눈과 같았다. 체 가까
이로 다가온 군관은 두 손을 허리에 얹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빈정댔다.
"체 게바라, 넌 이제 죽은목숨이야. 겨우 이런 주제에 우리를 그렇게 고
생시켰냐? 그 잘난 입으로 말좀 해 보시지."
빈정대던 군관은 체가 말없이 그를 노려보자 체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체는 부상당한 한쪽 다리를 끌고 일어나 군관에게 다가갔다. 군관은 계속
체를 멸시하려 했다.
"네 주제에 날 어쩌겠다는 거냐?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네 꼴을 좀
보라구."
체는 있는 힘을 다해 군관의 뺨을 때렸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다. 그런 너는 군관이면서 포로에
게 이따위 비열한 행동을 해도 된단 말이냐? 부하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느
냐?"
휘청하며 뺨을 감싸쥐던 군관의 눈빛이 살기를 품었다.
"이 자식이?"
군관이 손을 쳐들어 내리치려는 순간, 밖에 있던 부하들이 들어왔다.
"안됩니다. 상부에서 지시가 있을 때 까지는 손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군관은 화를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체는 군인들에 의
해 다시 밧줄에 묶였다. 아직도 그의 총상을 입은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체가 감금되어 있는 교실 밖에서는 이게라 분교 여선생인 랑파 아르티아
가 땅콩국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곁에 켜 놓은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에서는 계속해서 체와 게릴라들에 대한 보도를 내보내고 있었다.
"정부군은 오늘 게릴라 잔당을 모두 소탕했습니다. 게릴라들을 이끌던
체는 전투중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
라디오 방송이 체의 사망소식을 전하는 그 시각, 볼리비아 정부 당국자
들은 라파스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에 모여 있었다. 바리엔토스 대통령과
국방장관을 비롯한 고위 장성들은 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협의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회의는 그리 오래 끌 필요도 없었다. 이 위험한 혁명
가에게 합법적인 절차란 무의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즉각 처형에
합의했다.
이게라 마을 초등학교 여선생 랑파 아르티아는 듣고있던 라디오를 끄고,
군관들과 군인들이 있는 교실로 땅콩국을 들고 갔다.
"땅콩국을 끓여왔어요."
군관은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손은 깍지끼어 머리
를 받친 채 여선생을 힐끔 올려다보고는 마치 부하에게 말하듯 명령조로
말했다.
"거기 놓고 가시오."
랑파 아르티아는 자신을 부하처럼 취급하려는 군관에게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꾹 참고 있어야 했다. 군관의 허락을 받아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
이다.
"포로들에게도 땅콩국을 나누어 주어야지요?"
"그건 안되오."
군관은 여전히 반쯤 누운 상태로 랑파 아르티아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왜 안된다는 겁니까? 당신들만 인간이 아닙니다. 포로들도 인간입니다.
그들에게도 무언가를 먹여야 하지 않습니까?"
"글세, 안된다니까."
군관은 귀찮다는 투로 말을 내뱉고, 랑파 아르티아쪽으로 몸을 반쯤 돌
려 눈을 똑바로 떴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짐승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
다. 그러나 랑파 아르티아도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들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포로들에게 음식을 주지 못하게 하는 당신들에게도
음식을 줄 수가 없군요. 내가 만든 음식이니 다시 가져가겠어요."
랑파 아르티아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땅콩국이 담긴 통을 들어 올렸다.
군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선생님의 인도주의 정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포로들에게도 땅콩국을 나
누어 주시지요."
군관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제가 직접 가져다줘도 되겠지요?"
군관은 마지못해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랑파 아르티아가 체가 감금된
교실로 들어섰을 때 밧줄에 묶인 체는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그녀는 따라
온 군관에게 음식을 먹을 동안만이라도 밧줄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군관
은 보초병을 시켜 밧줄을 풀어주었다. 랑파 아르티아는 땅콩국 그릇을 체
앞에 놓아주었다.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다른 대원들은 먹었습니까?"
"그럼요. 여기 오기 전에 제가 직접 가져다주고 왔어요. 당신이 체 맞지
요? 조금 전에 라디오 방송을 들었는데, 방송에서는 당신이 전투 중에 죽
었다는 보도를 했어요."
체는 한동안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누구 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왜 제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주십니까?"
"저는 이 학교 선생인데 랑파 아르티아라고 해요. 당신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힘없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싸우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어
요. 그래서 당신을 존경해요."
체는 시선을 창 밖으로 옮기며 울적한 표정을 짓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
다. 그녀는 덫에 걸린 큰 새 콘도르를 보았을 때처럼 안타까웠다.
그러나 체는 곧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우며 랑파 아르티아를 바라보았
다.
"랑파 아르티아, 고맙습니다."
랑파 아르티아는 체가 땅콩국을 모두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빈 그릇을
들고 나오며 나직이 말했다.
"체, 희망을 가지세요."
체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체의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했
음을 보여 주는 듯 평온했다.
10월 9일, 라파스에서는 체를 처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포로가 된 혁
명대원 두 사람이 교실 밖으로 끌려 나왔다. 두 사람중 한 사람은 볼리비
안인 광부출신 윌리였고, 한 사람은 페루 사람 치노였다. 두 사람이 끌려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군인 네 사람이 군관에게 보
고했다.
"끝났습니다."
"확인했나?"
"네. 확인했습니다."
"좋아, 나가봐."
군인들을 밖으로 내보낸 리겔 아요로와 안드레서 세르니치 군관은 마리
오테 하사관을 불렀다.
"마리오테, 명령이다. 네가 체를 사살하라."
마리오테는 입을 꼭 다문 채 움직이지 않고 얼어붙은 사람처럼 서 있었
다.
"마리오테 하사관? 본관의 말이 안 들리나?"
마리오테는 겁이 난 눈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사살할 때 주의할 점은 가슴과 머리에다 절대 쏘지 말라는 것이다. 가
슴과 머리에 총을 쏘지 않아야 전투 중에 죽은 것이 된다. 알겠나? 체는
총격전에서 죽었다. 가슴과 머리는 쏘지 않는다. 명심하라."
마리오테 하사관 역시 다른 군인들처럼 체가 두렵고 무서웠다. 그는 급
하게 술 한 병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술기운을 빌어 체가 있는 교실로 들
어갔다.
체는 밖에서 총성이 울릴 때 이미 죽음을 알아차렸다. 대원들을 먼저 총
살하고 있다고 판단한 체는 대원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마리오테 하사관은 총을 쏘지 못한 채 떨고 있었다.
"총을 쏘시오. 무서워하지 마시오."
체의 음성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엄숙했다. 떨고 있던 마리오테
는 체의 침착한 음성에 놀라 교실을 뛰쳐나갔다. 문밖에 있던 군관은 밖으
로 뛰쳐나온 하사관에게 버럭 화를 내며 다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험악
한 분위기에 놀란 하사관 마리오테는 체가 있는 교실로 뛰어들어가 문을
열자마자 체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다리와 폐에 집중 공격을 받은 체
는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때 술에 취한 인디오 출신 하사관 테란
이 교실로 들어왔다. 그는 다짜고짜 체에게 다가가 체의 가슴을 쏘았다. 체
는 그제야 고통에서 놓여날 수 있게되었다. 두 눈은 부릅뜬 채.
군관은 라파스에 있는 상부기관에 체의 죽음을 알렸다. 라파스에서는 새
로운 지시가 떨어졌다.
"체의 두 손목을 자르고 그 손목을 쿠바에 보내 체의 죽음을 확신시켜
주어야 한다."
군관은 부하들을 시키지 않고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체의 몸에서 손목을
잘랐다. 혁명의 낭만주의자, 게릴라전의 시인이라 불리던 체 게바라는 이렇
게 두 번의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2
로사리오의 6월은 언제나 푸른 빛깔로 휩싸여 있다. 그 6월의 한가운데
인 1928년 6월 14일, 로사리오 북쪽에 있는 한 집에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새로운 탄생을 맞고 있었다. 마을에서
건축가 집으로 불리는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의 집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그의 부인 셀리아 데 라 세르나의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
다. 집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귀를 바짝 세우고 집안을 흘끔거렸다. 몇
시간동안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곤 하던 신음소리는 고통이 최고조에 달한
듯 외마디 외침으로 이어지다가 잠시 후 멎었다. 그와 동시에 자지러질 듯
울어대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집밖으로 흘러 나왔다. 이웃 여자 둘이 달려
나와 집안을 기웃거렸다. 시간이 좀 흐른 후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가 땀
으로 범벅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집안을 기웃거리던 여자들이 담 가까이
로 다가갔다.
"어떻게 됐어요? 순산했나요?"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 담쪽으로 걸어왔다.
"아들이에요. 아주 건강하고 멋진 녀석입니다."
여자들은 축하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갔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
는 담 아래 마을로 통하는 길을 기웃거렸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
든 붙잡고 첫 아들이 태어난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였다. 태어난 아기는 양
친의 이름을 따서 '에르게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라고 이름지었다. 그
아이가 위에 체 게바라로 불리던 바로 그였다. (체란 말은 '친구'라는 뜻의
스페인어로 그의 쿠바인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체의 집안은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귀족집안이다. 체는 아일랜드계 귀족
의 후손인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를 아버지로, 스페인계 군인 집안 출신
셀리아 데 라 세르나를 어머니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체의 가족은 그가 태어난 지 몇 잘 만에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
이레스로 이사를 해야했다. 체의 부친 게바라 린치의 직업이 건축가였으므
로 건축현장을 따라 이동한 것이다.
그런데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한지 1년쯤 지난 어느 날 체는 심한 기
침 감기를 앓았다. 겨우 돌리 지난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심한 병
이었다. 아기는 계속 되는 기침 때문에 울지도 못했다. 저녁 무렵부터 시작
된 체의 기침은 밤이 깊을수록 더 심해져갔다. 체의 부모는 체의 가슴이
팔딱이고 호흡이 어려워 적은 얼굴이 일그러질 때마다 호흡이 멈춰 버릴지
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들은 체를 부둥켜안고 밤을 꼬박 새웠
다. 그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진단결과는
천식이었다. 병원에서 며칠동안 치료하고 나서 체는 차츰 회복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체가 병원에서 돌아온 지 몇 주일이 지나자 부에노스아
이레스의 건축현장도 무리가 되어 집안은 다시 알토 파라나로 이사를 해야
했다.
체의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체가 마음놓고 뛰놀 수 있도록
잔디밭이 넓게 깔린 정원이 있는 집을 구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같은
대도시보다는 이곳이 체의 건강에 좋은 환경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런데 알토 파라나로 이사한 후에야 그곳이 좋은 곳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곳의 기후는 건조하고 바람이 많았다. 이사한지 며칠만에 체의 천식이 고
개를 들기 시작하더니 끝내 위기가 닥쳐왔다. 천식이 처음 발병했을 때처
럼 걷잡을 수 없는 기침이 어린 체를 괴롭혔던 것이다. 마을에 작은 병원
이 있었지만 시설이 좋지 않아 별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천식의 고통을 덜
어줄 수 있는 주사약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부
에노스아이레스까지 나가 직접 주사약을 구해왔다.
알토 파라나로 이사올 때쯤 체는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체가 가장
먼저 배운 말은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아빠! 주사.' 라는 말이었다. 에르네
스토 게바라 린치는 '아빠! 주사.'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안쓰러워 체를 꼭
끌어안고 다독였다. 그러다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체의 천식이 잠잠
해지자 며칠동안 집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체는 며칠만에 만난 아버지의 목에 매달려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에르네
스토 게바라 린치는 체를 안은 채 정원으로 나갔다. 알토 파라나의 체의
집 정원은 그의 놀이터이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축구를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아직 공을 손으로 굴리기에도 벅찬 나이였지만,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체에게 축구공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우리 씩씩한 아들, 그 동안 축구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겨루어
볼까?"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체를 잔디밭에 내려놓고, 정원 구석으로 공을
몰로 갔다. 그런데 공을 잡으려고 옆에서 따라오던 체가 갑자기 자리에 주
저앉아 가슴을 움켜쥐고 기침하기 시작했다. 기침이 계속되고 호흡도 불규
칙해졌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가 기침을 심하게 하는 체를 안고 집안으로 들어
서자, 체의 어머니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지 주사를 준비해놓고 기다리며
화를 냈다.
"정상도 아닌 애를 자꾸 운동을 시켜서 어쩌자는 거예요?"
"천식이 불구라도 된다는 말이오? 이 아이가 왜 정상이 아니라는거요?"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놀이를 왜 자꾸 시켜요?"
"그깟 천식 때문에 아이를 가두어 키울 생각이오? 언제까지 아이를 집안
에만 앉아있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이럴수록 아이가 천식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인내심을 갖도록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이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거요?"
체는 주사를 맞으며 마치 두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부모들이 언쟁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사를 맞고 난 체가 고통에서 벗어나
자 체의 부모들도 안정을 되찾았다.
"우리 이사합시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가 한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또 이사를 하자구요? 여기 이사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게 아니라, 며칠동안밖에 나가서 천식에 좋은 기후를 찾아다녔소. 천
식에는 기후만큼 좋은 약이 없다지 않소."
"천식을 앓는 애한테 좋은 곳을 찾았단 말인가요?"
"그렇소. 코르도바의 알타그라시아가 천식에 아주 좋은 기후를 가진 마
을이었소."
"당신 일은 어떡하구요."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미시오네를 오가며 일을 해야 하지만 괜찮
소."
체의 가족은 다시 짐을 꾸려 코르도바의 알타그라시아로 이사를 했다.
체의 나이 세 살때였다.
코르도바 서남쪽으로 35킬로미터쯤 위치한 알타그라시아는 전원 풍경이
무척 아름답고 평화로운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크
양식의 교회 건물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집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옹기
종기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은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곳이어서 한적하고 조
용했다.
마을 동쪽에 자리잡은, 체의 가족이 살게 될 집은 오래된 아이가보로 나
무들이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고, 오렌지 나무와 사과나무도 몇 그루 서
있는 아담하지만 고풍스러운 집이 있다. 그곳에서 마을은 상당히 떨어져
있었고 집과 마을 사이에는 푸른 잔디 정원들이 여기저기 있는 목가적인
곳이었다. 또 마을을 방 둘러싸고는 과일 농장들이 있었고 경주용 말을 키
우는 목장이 마을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군요. 기후도 좋고 풍경도 아름다워요. 여기서 오
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체의 어머니 셀리아 데 라 세르나는 마을을 둘러보며 소녀처럼 즐거워했
다. 알타그라시아로 이사한 후 체는 천식 때문에 주사를 맞는 횟수가 줄어
들었다. 기침도 잠잠해지고 건강이 좋아지고 있었다. 체의 표정도 눈에 띄
게 밝아졌다. 알타그라시아로 들어온 후 체가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종소리였다. 특히 교회의 둥근 지붕 위에 있는 종탑에서 울리는 석양의 종
소리는 체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였다. 그는 종소리가 울리면 밖으로 나와
종탑을 바라보며 종소리를 흉내냈다.
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체의 관심거리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교회의 종소
리는 이제 체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새로 시작한 관심거리는 아버지 에르
네스토 게바라 린치와 마을 북쪽에 있는 말 목장까지 산책을 나가는 것이
었다. 체는 특히 가우초들이 말을 타고, 푸른 초원 위를 쌩쌩 달리는 것을
바라볼 때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말을 배우고부터 보이는 것은 무엇이
든 묻고 알려는 호기심 많은 아이답게 체는 말이라는 동물에 관심이 많았
다.
"아빠! 말은 왜 기르는 거예요?"
"넌 왜 말을 기른다고 생각하니?"
"사람들이 타고 다니려구요. 하지만 기차나 자동차가 더 빠른데..."
"그렇지만 기차나 자동차가 갈 수 없는 길도 있잖니? 그때는 말을 타고
가는 것이 빠르고 좋지 않겠니? 하지만 저 말들은 사람들이 거리를 이동하
는데 타고 다니는 말이 아니라 경주용 말이란다."
"말이 경주를 한다고요?"
"그래, 말을 타고 달리는 경주도 있고, 말을 타고 공놀이를 하는 폴로 경
기라는 것도 있지."
"폴로경기요?"
"폴로경기는 영국에서 시작되었는데, 귀족들이 하는 경주였지."
"귀족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우리의 조상들도 귀족이었단다. 할아버지는 귀족으로 남기 위해 아일랜
드에서 태어나셨단다. 왜냐하면 귀족의 작위를 받을 수 있었거든. 증조 할
머니는 배를 타고 아일랜드까지 가서 할아버지를 낳으신거야. 그래야만 아
르헨티나에서도 상류층에 속할 수 있단다. 이 이야기는 네가 좀 더 큰 다
음에 자세히 들려주마."
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자신이 귀족의 후예니까 말을 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3
종탑위의 종소리가 울리면 어둠이 찾아왔다. 저녁식사를 마친 체의 가족
은 응접실에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체의 천
식도 잠잠해졌다. 체는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 곁에 앉아 이야기
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던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
는 잔을 내려놓으며 체에게 물었다.
"어제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우리 조상들이 아일랜드에서 왔다고 하셨어요."
"그렇구나. 우리 조상들은 아일랜드에서 왔지. 하지만 엄마 조상들은 스
페인에서 왔단다."
"왜 자기 나라에서 살지 않고 모두 아르헨티나로 왔어요?"
"19세기 초에 가난한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이곳으로 왔고,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려고 넓은 초원을 찾아 이곳으로 오게 됐단다."
"왜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있어요? 열심히 일하면 되지 않아요?"
"에르네스토, 열심히 일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단다."
"그건 왜죠?"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착취하기 때문이란다."
"착취가 뭔데요?"
"그러니까, 열 개만큼 일을 했는데 열 개를 모두 갖지 못하고 주인에게
주인 몫을 주어야함 한단다. 그럴 경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기 몫은
언제나 적으니까 가난할 수밖에 없단다."
체는 아버지 이외에도 할머니와 이모한테서도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
다. 체의 외가와 친가쪽에는 형제, 자매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좌익적 성향이 강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였다. 체의 가족들은 카톨릭 식으로
영세를 받았지만, 아무도 성당에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생활속에
서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체의 가족들은 겉으로 보기에
는 청교도적이고 보수적인 사람들로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진보적이고
활동적이었다. 그래서 고루한 인습과 편견에 빠져있지 않았고 그런 사람들
을 경멸했다.
조상들이 노예장사라 많은 돈을 벌어 귀족 작위를 받은 한 사람이 에르
네스토 게바라 린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조상들의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러 온 사람이었다. 그는 고리대금업을 해서
큰돈을 번 데다가, 볼리비아에도 몇 개의 광산이 있다고 자랑했다.
"당신도 건축가로 사는 것보다 볼리비아에 광산을 해보면 어떻겠소? 임
금이 싸니까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벌 수 있어요. 이번에 박물관만 잘 지어
주면 내가 광산에 손을 댈 수 있도록 도와주겠소."
자신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뻔뻔스레 말하는 그에게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임금을 착취해 돈을 벌고 싶은 생각도 없고, 자랑스럽지 못한 당
신네 조상들을 위한 박물관을 잣는 일 따위는 더더욱 하고 싶지 않소."
"내 평생 돈 싫다는 사람은 처음 보았소. 당신은 바보이거나 문제가 있
는 사람이군."
"어떤 말을 해도 좋소. 하지만 난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싶진 않고, 인간을 착취해 돈 버는 일이 싫은 사람이니 내 집에서 어서 나
가시오."
이렇게 체의 가족들은 정열적인 정의감과 전체주의에 대한 혐오, 그리고
종교적인 금욕과 문학에 대한 애호, 착취와 사기를 통해 돈 버는 것에 대
한 멸시 등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체
는 어려서부터 자기 생각과 사상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틈만 나면 체에게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이 조국 아일랜드를 떠날 때 고생하던 이야기, 망망대해인
대서양에서 멀미에 시달린 이야기등 아버지의 조상 이야기가 나오면 체는
다른 장난을 치다가도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한번도 가 본적 없는 아일랜
드의 이야기와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대서양에 관한 이야기는 체에게 무한
한 상상력과 모험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다섯 살 무렵 체가 책을 읽기 시작하자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
는 제가 읽을 수 있는 책들이란 책은 모두 사들였다. 체는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해 활자로 된 것이면 잡히는대로 읽었다. 특히 어릴 때부터 동화
나 동시를 좋아했던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 문학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이 무렵 체는 뒤마, 스티븐스, 베를렌, 보들레르등에 빠져있었다.
그 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는 보들레르였다.
8세가 되던 해 그는 산 마르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시절 체
는 단짝이며 같은 문학소년이었던 페페 아길라르라는 친구를 사귀게 된다.
둘은 문학소년들로 많은 책을 읽으며 토론하는 사이였는데 다음과 같은 일
화는 이들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14살무렵 체는 의사인 페페 아길라르의 아버지 병원에 자주 찾아갔다.
그 이유는 병원 안에 있는 페페 아길라르의 집에는 체가 아직 접해보지 못
한 책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책들은 페페 아길라르의 아버지 소
유였다. 체는 페페 아길라르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책들 중 특히 프로이
드에 관심이 높았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입문' 같은 책은 체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에 좋은 책이었다. 페페 아길라르가 책장에서 책을
꺼내주자마자 체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틀이키듯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페페 아길라르는 책에 깊이 빠져있는 체의 모습이 너무 엄숙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었다. 진료를 끝낸 페페 아길라르의 아버지가 서재로 들어섰
지만 책을 읽고있는 체는 눈치채지 못했다.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고있지?"
그제야 체가 책갈피에 손가락을 끼운 채 일어섰다.
"너 벌써 프로이드를 읽는거니?"
페페 아길라르의 아버지는 깜짝 놀라 물었지만, 체는 대수롭지 않게 '네'
라고 짧게 대답했다.
체는 이렇게 많은 책을 읽으며 정신적으로 조숙한 소년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친구들에게 그의 지식을 뽐내거나 다른 친구들을 무시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성격도 활달하여 그의 주변에는 많은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매우 검소하고 수수한 소년이었다. 집안으로 보아서는 부유한 편이었지만
그는 돈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옷차림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때로는 미
친 듯이 책에 빠지다가도 때로는 럭비같은 격렬한 운동에 열중하는 그런
소년이었다.
체의 청소년기는 코르도바에서 시작되었다. 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
렵인 1941년 여름 그의 가족은 정든 알타그라시아를 떠나 코르도바로 이사
했다. 고등교육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원생활을 포기해야 했지만 체는 도
시생활이 답답하다고 느끼면 언제고 여행을 떠났다. 이후 그는 수시로 집
을 떠나 도보로든 자전거로든 여기저기를 여행하게 되는데 그의 방랑벽은
여기서 싹튼 것이라 하겠다.
체의 첫 여행은 사촌형 로베르토와 동행했다. 모터가 달린 자전거를 타
고 코르도바에서 가까운 마을들을 돌아다녔다. 자전거로 시작된 여행은 히
치하이크로 트럭을 얻어 타고 먼 곳까지 이어졌다. 그러면서 여행의 범위
는 점점 넓어져 코르도바 곳곳을 돌아다녔다.
체는 여행을 하면서 희망을 발견한 것 같았다.
"로베르토! 난 여행하는 것이 즐거워. 이 다음에 아르헨티나 횡단 여행을
할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남미대륙을 돌아볼 생각이야.
여행을 하면 내 인생의 길도 보일 것 같거든. 형은 어때?"
"난 그냥 돌아다니는 것이 좋을 뿐이야. 너처럼 복잡하게 여행의 의미를
따지진 않아."
"그건 복잡한게 아니야. 형의 인생은 형이 결정해서 살아야 하듯이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거야."
여행을 하면서 걱정이 되는 것은 체의 천식이었다. 그러나 계절이 여름
인 탓도 있지만, 맑은 공기와 적당한 운동이 있었고 늘 기분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여행기간중 천식이 재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 여행중에도
체는 항상 책을 읽고 단상과 일기를 기록했다.
"넌 여행을 하면서도 공부하니?"
"책 읽는것과 여행하는 것은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일이잖아. 게다가 메
모는 그때 그때의 내 감정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니까 혹시 이 기록을 참고
로 훗날 유명한 시를 남기게 될지도 모르잖아?"
이렇게 독서와 여행, 그리고 갖가지 운동을 하며 체의 삶과 사고는 나날
이 발전하여 갔다. 체는 자신의 청소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15세때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었다. 그리고 그
것을 위해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잇는 하나의 이념을 찾게 되면 흔쾌
하게 내 생명을 걸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체가 조숙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체가 어느
정도로 조숙한 소년인지를 확인시켜주는 것은 체의 친구들이었다. 고등학
생인 체가 사귀는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생이었다. 그들보다 어린 나이였지
만 체는 대학생인 친구들과 토론하며 나름대로 자신의 논리를 펴기도 했
다. 그의 대학생 친구들은 당시 아르헨티나가 처한 암울한 정치상황에 불
만을 갖고 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이라면 흔히 가질 수 있는
낭만적인 저항심에 불과했다. 그러나 체는 달랐다. 그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항의나 소극적 저항이 아니라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체에게 지지를 보내는 친구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다소 과격
한 주장에 동조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바로 알베르토 그라나도스같은 친
구였다. 그라나도스는 체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친구라 할 수 있는데 그
는 체의 고등학교 동급생인 토마스 그라나도스의 형이었다. 그라나도스는
체보다 6살 위였고 당시 코르도바 대학의 의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그는 그라나도스와 함께 남미 대륙을 여행하게 되는데
그것을 계기로 체의 인생행로는 완전히 뒤바뀐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사회적 현실은 어둠속에 있었다. 오랫동안 사회 곳곳
의 부패가 만연해있었고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와 그들에 의해 지지받
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
다. 이런 정치적 타락에 분개한 대학생들은 가두로 나가 시위를 벌였다. 그
리고 사회 곳곳에서는 이런 현실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사회전반이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이 무렵이 후안 도밍고와 에비타 페론의 시대가 시
작되기 바로 직전이었다.
체의 대학생 친구들도 시위를 하러 거리로 뛰쳐나가자는 분위기였다. 하
지만 체는 흥분하는 친구들 얼굴을 하나하나 점찍듯 바라보고는 냉정하게
말했다.
"나보고 맨손인 채 거리로 나가라고? 그래서 경찰들한테 몽둥이 세례나
받으란 말야? 그렇게는 못해. 나는 무기가 주어질 때 거리로 나갈거야."
고등학생인 체의 사고가 대학생 친구들의 낭만적 저항의식보다 훨씬 깊
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체가 과연 이 나이에 무장투쟁을 통한 사
회혁명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상당히 과격할 정도의
근본론을 가졌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의 일생을 괴롭힌 천식도 그의 사고와 성격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영향
을 미쳤다.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체는 천식에 굴복하는 나약함을 싫어했다.
천식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자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만든 자극제였다.
체는 이 시절부터 축구선수로, 또 럭비선수로 뛰면서 천식을 극복하려 노
력했다. 럭비 경기 도중에 심한 천식 발작이 시작되면 체는 숨을 가라앉히
기 위해 몇 번씩 운동장을 벗어나야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경기를
마쳤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운동장을 달리는 체를 지켜보던 친구들은 체
가 고통을 즐긴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체에게 나약함은 용납될 수 없는
비겁함이었다. 천식에 대한 투병경험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굴의 정신
으로 혁명투쟁을 했던 극기의 정신을 갖는데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천식과의 싸움은 공부하는 중에도 계속 되었다. 체는 공부를 하면서 밤
을 지새우는 경우가 많았다. 새벽에는 천식이 심해 쓰러지기도 했는데, 체
는 호흡하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심할때는 6개월에 무
려 45번의 심한 천식발작을 일으켰다. 그럴수록 체는 물러서지 않고 공부
에 매달렸다. 그 덕분에 대학시절 6년과정 16개 주요 시험을 3년만에 통과
했다. 이렇게 체는 천식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모든 일에 자신감을 얻
었다. 천식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체는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체에게 천식은 극복할 대상인 그 무엇이었고 도전해야할 가치가 있는 목적
이 됨으로써 그의 강인한 극기력을 길러냈다.
그의 고등학교 시절이 끝나갈 무렵 체의 진로를 결정하는 계기가 찾아왔
다. 체를 가장 귀여워해주시던 할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됐다. 치료
방법이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할머니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의사가
되어 질병을 퇴치하는데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 의학대학에 진학하여 의사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암
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될래요. 기필코 암 치료법을 발
견해내고 말겠어요."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체의 결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
사람들은 암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그는 불가능이란 없
다고 믿었다. 그래서 기필코 불치병이 없는 세상을 열겠다고 말하곤 했다.
1944년 체의 가족은 아버지의 사업상 문제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를
했다. 그래서 코르도바에 혼자 남게 된 체는 1947년 코르도바의 6년제 고
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4
이 무렵 체의 신변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1947년 성격상의 차이
로 부모가 별거에 들어갔고 3년 뒤 1950년 결국 이혼하고 만다. 아버지를
사랑했던 체였지만 그의 선택은 어머니였다. 그 이유는 어머니쪽이 그의
정신적 동지로서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는 사업의
실패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체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아
버지도 체와 그 형제들이 어머니와 사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이 시기
에도 그의 여행벽은 여전했다. 그 해 여름 체는 새 자전거 한 대를 구입하
자마자 여행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막역한 친구가 된 알베르토 그라나도스
를 만나 남미대륙여행을 제의하기로 했다. 그라나도스는 코르도바에서 180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의 나환자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여행은 주로 학기가 끝나는 12월에 시작되어 3월에 끝났는데 그 이유는
여름에 노숙하기가 편해서였다. 1950년 12월 몇 권의 책이 들어있는 배낭
과 비상금 약간만 지니고 체는 힘차게 출발했다.
먼저 체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 마르치키다 호수로 향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 바다가 멀리 떨어져있는 코르도바에서 살았던 체에게는 바다처
럼 넓은 마르치키타 호수에 가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마르치키다
호수로 향하는 여정은 무척 힘겨웠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말에서 땀이 배
어 나와 발가락 사이에 습진이 생기는데다가 물집까지 생겨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출발해 11일째되는 날 한적한 시골마을에 도착했다.
하룻밤 잠자리를 내어 준 집주인은 농부였다. 옥수수밭을 경작하는 늙은
농부는 햇빛에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주름살이 깊게 패인 원주민 인디오였
다. 체는 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해준 집주인에게 감사의 표시로 한나절 일
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집주인은 한사코 사양했지만 체는 옥수수밭으로 따
라나갔다. 옥수수 농장에 도착하자 백인 농장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옥수수 농장의 일은 잠시도 쉴 틈이 없는 고된 노동이었다. 일을 마치고
옥수수 농장을 떠나 자전거페달을 밟는 체의 마음이 무거웠다. 쉴틈없이
일하는 늙은 인디오 농부에게 작업 속도를 더 빠르게 하라고 요구하던 농
장주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몇 시간을 달려 마르치키다 호수에 도착한 체는 바
다처럼 느껴지는 호수와 그 주변에 평화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만났다.
옥수수 농장의 인디오 농부에게서 보았던 그늘진 모습은 그들에게서는 찾
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여전히 갈대배와 의지하는 가난한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호수 주변의 나무그늘에서 쉬며 체는 아름다운 호수
의 모습에 취해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돈 크라잇 포미 아르헨티나..."
에비타 페론이 불러 유명해진 노래다. 에비타는 후안도밍고 페론과 결혼
한 진보적인 가수였고 체가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체는 마르치키타 호수를 떠나 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체가 태어난 로
사리오의 북쪽에 있는 산타페로 가는 길이었다. 마르치키타호수를 떠난 지
둘째날 늦은 오후, 철로가 지나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점심도 먹지못해
배도 고프고 계속 페달을 밟느라 다리가 퉁퉁 부었다. 주머니에 아직 떠나
올 때 가져온 비상금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요기를 할까하고 두리번거렸지
만 아주 작은 시골마을이라 식당이나 모텔이 없었다. 집들은 사람들이 아
직 일터에서 돌아오지 않아서인지 텅 비어 있거나 아이들만 지키고 있었
다. 마을을 한바퀴 돌다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오두막을 발견했다. 인디
오 할머니 혼자 살고있는 집이었다. 체의 사정을 듣고 난 할머니는 마태차
와 감자, 옥수수를 내왔다. 배가 고팠던 체가 맛있게 음식을 먹고 나자 인
디오 할머니는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가족관계, 나이, 이름 등을 묻고
나서는 도시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좋은 세상이 됐다는데 도시는 정말 좋은 세상이 되었어?"
"네. 후안 페론 대통령이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고있습니다. 살기좋
은 나라가 될 겁니다."
"여기서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 어제가 오늘같고, 오늘이 어제같아 변한
게 없어."
"할머니는 자식들이 없으십니까?"
"셋씩이나 있었어. 그런데 큰 아들은 군대가서 쿠데타인가 뭔가 일어났
을 때 죽고, 둘째 셋째는 도시에 나가서 살고있어."
"할머니는 도시로 나가시지 그러세요?"
"난 도시가 싫어. 후안 페론이 대통령 될 때 아들 집에 있었거든. 아주
굉장했어. 하지만 나는 사람들 많고 시끄러운 도시가 싫어."
"학생도 데모했었어?"
"저는 데모 안 했습니다."
"내 아들은 데모도 하고, 후안 페론 대통령 편이었어. 그 사람이 대통령
이 되어야 잘 살 수 있다고 하더구먼."
그 무렵 일어난 정치적 변화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거리였다. 그러나 할
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체는 후안페론의 집권이 막상 이런 산골에는 그다
지 변화를 실감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요구된
다는 점에서 페론정권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아침 일찍 할머니의 오두
막을 나섰다. 햇빛이 뜨거워지기 전에 출발해야 다음 목적지까지 쉽게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산타페로 향하는 길에는 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 위에는 소들이 한
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 군데군데 유럽식으로 지은
집들은 목가적이었다. 체는 이틀만에 늦게서야 산타페에 도착했다. 산타페
는 작은 도시로 모텔과 음식점이 있었다. 시내 동쪽에 있는 싸고 허름한
모텔을 찾아 들어간 체는 피곤에 지쳐 저녁도 거른 채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그는 일어나자마자 자전거 가게에 들러 자전거 타이어를 새것으
로 바꾸었다. 보름 가까이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타이어가 닳아서 곧 펑
크가 날 지경이었다. 게다가 너무 오래 페달을 밟아대는 바람에 다리가 부
어 자전거 타기를 포기하고 히치하이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차를 잡기
위해 주유소를 찾아갔다. 주유소에서 때마침 곡물을 운송하는 트럭을 만났
다. 트럭 운전기사는 순박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행선지를 묻자 운전사는 코리엔테스라고 말했다.
"코리엔테스까지만 태워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체가 자전거와 함께 서 있는 것을 본 트럭 운전기사는 운전석에서 내려
와 곡물이 적재되고 남은 좁은 공간에 자전거를 싣도록 도와주었다. 친절
한 트럭 운전기사는 자신의 이름이 마우로라고 했다. 트럭 히치하이크는
운 좋게도 파나나 강쪽을 따라 동북쪽으로 올라가는 코스였다. 파라나 강
을 끼고 펼쳐진 초원지대를 지날 때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더니 굵은 빗방
울이 쏟아져 내렸다. 여름철이면 간간이 내리는 스콜이었다. 마우로는 시야
가 너무 흐려 운전하기가 어렵다고 투덜댔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동하면 어떨까요?"
마우로는 체의 제안을 받아들여 길옆에 트럭을 세웠다. 산타페를 출발할
때 서로의 이름은 알게 됐지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아서 서먹서먹
했는데 마침 시간이 나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긴 셈이다.
"마우로는 고향이 어디입니까?"
"로사리오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거기 살아요."
"로사리오라고 했습니까?"
"로사리오를 알아요?"
"그럼요. 제가 태어난 곳인데요."
"그래요? 고향사람이군요."
"지금도 로사리오에 살고 있나요?"
"전 어려서 로사리오를 떠나왔습니다. 아버지가 건축가여서 이사를 많이
했답니다. 지금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살고 있습니다."
"게바라, 나이는 몇 살이에요?"
"22세예요. 마우로는 나이가 어떻게 됐습니까?"
"나보다 두 살 아래군요."
마우로는 비가 개일때까지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했고, 트럭 운전기사
일이 얼마나 어려운 직업인지를 얘기했다.
비가 그치자 마우로는 지체한 사간을 보충해야 한다며 속력을 냈다. 차
창 밖으로 스치는 넓고 푸른 들에 점점이 박혀있는 소들이 보였다. 또 드
넓은 해바라기 밭과 옥수수밭이 유화그림을 펼쳐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이 길을 여러 번 반복해서 오갔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마우로는 차창 밖 풍경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앞만 보고 운전하는 마우로는 가끔 콧노래를 흥얼거리거나 하품을 해댔
다. 하지만 체는 단 하나의 풍경도 놓치지 않기 위해 창밖에 눈을 고정시
키다시피 해서 목이 뻣뻣할 지경이었다. 해가 지고 초원 위에서 놀고있던
소떼를 가우초들이 채찍을 휘둘러 한 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창밖의 풍경
이 점점 붉은 빛을 띠더니 이윽고 캄캄해졌다. 어둠 속에서 한참을 달리는
데 체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바늘은 벌써 저녁 9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절대 멈추지 않고 달리기만 할 것 같은 마우로가
체의 배고픔을 눈치챘는지 식사를 하자며 드디어 길가에 트럭을 세웠다.
불빛도 인가도 없는 곳이었다.
마우로가 가져온 음식 바구니에는 고기만이 아니라 양상추와 토마토에
올리브유와 식초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반쯤 익힌 쇠고기 스테이크는 한
조각이 어른 손바닥 두 개쯤 합한 크기에 두께가 4-5cm는 족히 될 것 같
았다.
"배고픈 것 같은데 많이 먹어요. 스테이크는 충분하게 준비했으니까 배
불리 먹어둬요."
구운 스테이크를 체에게 먼저 건네주며 마우로는 웃음을 띠었다. 그 모
습이 너무 선량해보였다.
저녁을 먹고 나자 졸음이 밀려오는지 마우로는 차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
했다. 체가 밤공기의 상쾌함을 느끼기 위해 트럭에서 약간 떨어진 곳까지
산책을 하고오니 마우로는 운전석 뒤쪽 빈 공간에 누워 벌써 골아떨어져
있었다. 체는 마우로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차안으로 들어갔다.
다리를 구부리고 모로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게바라, 뒷자리로 가서 조금 더 자도록 해요."
한창 꿈속을 헤매고 있는데 마우로가 체를 깨웠다. 창밖은 아직도 어둠
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체가 일어나 앉자 마우로가 운전석 쪽으로
건너왔다. 졸음을 쫓기위해 유리창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몇 번을 하품을 연발하던 마우로가 트럭을 출발시켰다.
마우로와 이틀 밤을 함께 보내고 코리엔테스에 도착했다. 코리엔테스까
지 오는 동안 트럭을 태워주고 끼니까지 해결해준 마우로가 남아있던 오렌
지와 사과봉지를 체에게 건네주었다. 체는 한사코 사양했지만 마우로는 선
물이라며 자전거에 실었다. 마우로와 헤어진 체는 살타로 가는 기찻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5
레시스텐시아를 지나 고부터는 사람을 구경할 수 없는 빈 들판이 계속
되었다. 날이 저물어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을 해야했다. 여름밤이라고 해도
밤 공기는 차가웠다. 멀리 숲속에서는 들개 울음소리가 소름을 돋게 했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했지만, 언제 어떻게 들짐승들이 습격해올지 몰
라 잠이 오지 않았다. 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라는 것을 느꼈다.
뜬눈으로 지내다시피한 체는 어슴푸레 날이 밝자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어제 점심과 저녁은 마우로가 준 과일로 때웠지만 밤을 새우자 허기가 졌
다. 오두막이라도 한 채 만나면 허기진 배를 달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
각했으나 정오가 지나도록 인적없는 초원과 멀리 산들이 보일 뿐이었다.
체는 더 이상 자전거 페달을 밟을 힘조차 없어 나무 그늘을 찾아 쉬어가기
로 했다. 10여미터 앞에 나무 몇 그루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코
르도바에서 많이 보았던 아이가로보 나무였다. 아이가로보 열매는 가우초
들이 소몰이 하다가 따먹는데 다행히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허겁지겁 아이가로보 열매를 따먹고 나서 허기가 좀 가시자 졸음이 밀려왔
다. 체는 침낭을 꺼내 나무 그늘에 깔아놓고 낮잠을 잤다. 조금만 자고 일
어나겠다던 생각은, 피곤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오후 4시경에야 눈을 떴다.
체는 아이가로보열매 몇 개를 더 따서 비상식량으로 지니고 다시 길을 재
촉했다.
마을을 발견하지 못하면 또 노숙을 해야되고 굶어야한다는 생각에 자전
거 페달을 밟는 체의 행동이 빨라졌다. 그런데 다행히도 마을이란 건 도무
지 나타나지 않을 것 같던 벌판에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구나 싶은 심정으로 마을을 향해 달렸다. 마을이 가까워오자 옥수
수밭과 사탕수수밭이 나타났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 해는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10여채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작은 마
을이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스무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바
구니에 옥수수를 담아 들고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가씨! 이 마을에 사는 분입니까?"
체가 묻는 말에 여자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중인 사람인데 묵어갈만한 곳이 있습니까?"
체를 한동안 바라보던 여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
에 잠기더니 무엇을 결심한 듯 말했다.
"여기는 숙박시설이 없어요.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으로 오세요."
체는 그녀를 따라 마을 맨 끝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아직 불도 켜지
않고 있는 집안은 얼핏 봐도 넉넉하지 못한 집 같았다.
"엄마! 저 왔어요."
여자는 옥수수 바구니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방안에 불이
켜지고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방인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지난겨울 오빠가
일자리를 찾아 떠난 후 사용한 적이 없어요."
"그럼, 집안에는..."
"앓아누워 계시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어요. 그런데 이름은 뭐예요?"
"에르네스토 게바랍니다. 아가씨 이름은요?"
"미르타예요. 지금 어디서 오시는 길인가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출발해서 여러 곳을 거쳐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어제는 초원에서 야영을 했답니다. 저는 이틀동안 굶어 몹시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있으면 좀 주시겠습니까?"
"어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요. 저녁 준비를 할게요."
미르타가 안내해준 방은 작지만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일인용 침대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저녁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체는 책상에 앉아 어제와 오늘 지나온 곳에
대한 여행일지를 썼다.
미르타가 식당에서 체를 불렀다. 식당으로 들어선 체는 아담한 나무식탁
앞에 앉아있는 중년여인을 발견했다. 체는 중년 여인을 향해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했지만, 중년 여인은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체
가 머쓱한 표정으로 식당 입구에 서 있자니 미르타가 어서 들어오라며 생
긋 웃었다.
"엄마는 몸과 정신이 모두 아프세요. 불편해하지 마세요. 아프시기 전에
는 명랑한 분이셨는데, 지금은 말을 못 하세요."
미르타가 차려놓은 식탁에는 야채수프와 삶은 옥수수, 마른 빵조각이 마
련되어 있었다. 미르타의 어머니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체는 누구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었다. 미르타
가 천천히 먹으라고 말했지만 그 말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미르타가
후식으로 따끈한 마테차를 내왔다. 미르타의 어머니는 뜨거운 마테차를 마
실 때 성급하게 마시다가 입안을 데었는지 깜짝 놀라며 찻잔을 내던졌다.
미르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엄마를 방안으로 모셔다 드려야겠어요."
어머니를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던 미르타가 혼자서 식당으로 돌아왔
다.
"어머님이 어떤 충격을 받으셨나 봅니다. 병원에는 가 보셨습니까?"
"보시다시피 형편이 이래서 병원에도 가지 못했어요. 오빠가 돈을 벌어
오면 병원에 모시고 갈 생각이에요."
"오빠는 어떤 일을 하십니까?"
"여기서 좀 먼 곳에서 가우초일을 해요. 아버지도 가우초일을 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저렇게 되셨
어요."
"그랬군요. 하지만 어머님 병환은 하루빨리 병원에 모시고 가야 나을겁
니다."
"우리 엄마 병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군요."
"글쎄요. 정신적 충격을 받아 실어증에 걸리신 것 같아요..."
"혹시 의사신가요?"
"아직 의사는 아닙니다. 의대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엄마 병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실 것 아녜요? 고칠 수 있는
병인가요?"
"물론이지요. 어떤 병이든지 나을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해요."
미르타는 의사를 만난 것처럼 기쁜 표정이었다.
"선생님이 우리 엄마를 고쳐줄 수는 없나요?"
미르타는 체에 대한 호칭까지 선생님으로 바꾸어 부르며 기대에 찬 눈빛
으로 말했다.
"미르타, 나는 아직 의사도 아니고 , 의료기구나 치료약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체는 미르타의 답답한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
다. 미르타의 간청에 체는 어쩔 수 없이 날이 밝으면 미르타의 어머니와
만나보겠다는 약속을 했다.
방으로 돌아온 체는 자신이 정식의사가 아니라는 사실과 아무런 약품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간절히 자신을 원하는 환자가 있
는데, 속수무책이 아닌가.
모처럼 푹신한 침대에 누웠지만 체는 미르타의 간절한 눈빛 때문에 곧바
로 잠들지 못하고 잠자리를 뒤척였다.
다음날 체는 미르타에게서 어머니의 증상과 그렇게 되기까지의 전후 이
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르타의 이야기를 듣고 난 체는 미르타의 어머니
와 마주 앉았다. 처음에는 체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미르타의 어머니는 그
의 끈질긴 질문에 조금씩 반응을 보였다. 곁에서 지켜보던 미르타는 긴장
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르타의 어머니가 반응을 보였을 때 체는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
다.
"미르타, 희망을 가져요. 어머니는 나을 수 있습니다."
체의 말에 미르타는 뛸 듯이 기뻐했다. 미르타의 어머니가 졸음이 오는
지 자리에 누웠다.
체와 미르타ㅌ 밖으로 나와 마주보며 웃었다.
"우리 엄마가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요? 선생님 정말
고마워요."
"저한테 고마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준 미르타에게
내가 고맙다고 말해야 하지요."
"선생님, 우리 집에 며칠 더 계시면서 우리 엄마를 고쳐주시면 안돼요?"
"미르타, 나는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정식의사가 아니에요. 하지만 의사로
서가 아니라,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말벗으로 며칠 더 머무르겠
습니다."
낮동안 체는 미르타를 따라 옥수수밭에도 나가고, 밀밭에도 따라 나가서
일을 거들었다. 미르타 혼자서 농사를 짓기에는 벅찬 것 같았다. 미르타의
일을 거들어 주며 체는 공동노동의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알게 됐다. 밭일
을 끝내고 돌아오면 미르타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체는 미르타 어머니와
마주 앉아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미르타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노력했다. 며칠동안을 함께 지내는 동안 미르타 어머니의 태도가 변했다.
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미르타의 어머니가 체를 향해 미소를 짓거
나 식탁에서는 먹을 것을 체 앞으로 밀어주기까지 했다. 미르타 어머니가
회복할 기마가 보이자 체는 이제 떠나야 한다고 미르타에게 말했다. 그가
떠날 때 미르타 어머니는 눈물까지 내보였다. 미르타 어머니의 눈물은 희
망의 눈물이었다.
6
체는 다음 행선지를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스가 일하고 있는 코르도바
의 나병환자 병원으로 정했다. 고원지대의 건조한 기후로 천식이 재발해서
더 이상 북부지역을 여행하기가 힘들어서였다.
몇 년만에 찾아간 코르도바는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가구용 목재로 사
용하는 아이가로보 나무가 울창하게 뻗어있고, 과일들은 풍성한 열매를 주
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의 양옆 초원에는 경주용 말을 사
육하는 말 목장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과일 잼을 만드는 공장이 나
타났다. 체는 살타에 머물 때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스에게 여행중인 것
을 알리고 찾아가게 될 것이라는 편지를 띄웠었다. 오후 늦게 병원으로 찾
아가니 그라나도스는 너무나 반가워하며 체를 끌어안았다.
"아니, 이게 누군가?"
"몰골이 말이 아니지. 집 떠나온 지가 너무 오래 되다 보니 이렇게 됐
어."
"하하, 그래도 보기 좋은걸. 역시 자네다워. 나는 에르네스토 자네가 너
무 부럽네."
"그 말 진심인가?"
"그렇다네."
"그럼 말야. 우리 남미대륙을 일주해보면 어떨까? 아르헨티나 곳곳을 돌
아다니면서 내가 살고있는 남미대륙의 현실을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어. 그리고 자네와 함께라면 훨씬 많은 것을 배울 것 같다."
"에르네스토, 그 말 진심이지?"
"그래, 사실은 두 번째 내 여행 계획이었어. 자네가 함께 간다면 나는 대
환영이야."
알베르토 그라나도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성격이 명랑한데다가 체에
대한 신뢰가 깊은 알베르토 그라나도스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좋아. 남미대륙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
을 깨닫게 해 줄 거야. 그러면 언제 떠날까?"
알베르토 그라나도스는 체의 남미 여행에 동행하겠다는 결심을 하더니,
들떠서 오랜만에 체를 만났다는 사실도 잊은 것 같았다.
"떠나는 시간이 중요한 게 아냐. 어디로 어떻게 떠날 것인가를 먼저 생
각해야지."
"맞아. 나는 아마존 상류에 있는 산 파블로 나병 환자 촌을 꼭 한 번 들
러보고 싶어. 먼저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부터 북쪽으로 여행 코스를 잡
으면 좋을 것 같군."
"그래,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나는 잉카 유적지를 꼭 가고 싶었으니까
그 코스가 가장 이상적일 것 같네."
"여행경비는 어떻게 구하지?"
"우리 둘이 벌면서 다녀야지."
"돈을 벌면서 여행을 한다구?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
"우리는 젊고 건강해. 어떤 일이든 우리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체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알베르토 그라나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렇게 해서 둘은 1951년 한해동안 여행준비를 하기로 하고 그해 말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다.
체와 알베르토 그라나도스는 1951년 12월 29일 마침내 대망의 남미대륙
여행길에 올랐다.
두 사람은 여행에 필요한 장비는 물론 사소한 물품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심지어 면도할 때 사용하는 크림까지 챙길 정도로.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자동소총까지 준비했다. 체 혼자서 아르헨티나 횡단여행을
했을 때와 비하면 엄청난 준비를 한 셈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길동무가 되어 줄 중고 오토바이에 올랐다. 그라나도스와 체는 오토바이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남쪽에 있는 네코체아 해변으로 향했다. 네코체아
에는 체의 친구 치치가 살고 있었다. 치치를 만난다는 것은 어떤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행선지를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안데스 산맥
으로 직진하여 곧바로 칠레의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남쪽을
우회하여 가기로 했다.
"소식도 없이 너희들이 여길 오다니? 내가 귀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
지?"
치치는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을 부둥켜안았다.
"잘 지냈지?"
"그래. 에르네스토가 여행을 자주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었어. 그런데
그라나도스는 어떻게 같이 오게 됐니?"
"우리는 남미 대륙을 일주할 예정이야."
"남미대륙 일주라고?"
치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에르네스토! 정말 남미대륙을 다 돌아다닐거야?"
"그래. 내가 살고 있는 대륙의 현실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야."
치치는 체와 그라나도스를 해변으로 데리고 갔다.
"야! 바다로구나. 바다야, 바다!"
그라나도스는 환호성을 지르며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알베르토는 바다 구경을 처음 하는 사람같네. 에르네스토, 바다가 너무
아름답지?"
"해변도 바다도 너무 황홀하게 아름다워. 그런데 저기 있는 저 여자가
더 아름다운 것 같군."
체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흰 피부와 긴 금색 머릿결, 멋진 몸매를
가진 여인이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치치는 금발의 여인과 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체의 시선은 금발 여인에게 박혀있는 듯 보였다.
"에르네스토, 용기를 내봐."
"그럴 생각이야."
체는 여인에게 이끌려서 한발 한발 다가갔다. 치치는 체의 행동을 호기
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에게 다가간 체는 호기심 어린 눈으
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에게 다가간 체는 몇 분 지나지 않아 금발의 여
인과 함께 치치에게로 돌아왔다.
"치치, 인사해."
"잘 아는 사이야, 에르네스토?"
"몇 분전부터 아는 사이지. 사라, 치치와 인사 나누지."
치치와 사라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알베르토 그라나도스가 물에 빠진
생쥐 형상을 하고 나타났다. 옷을 입을 채로 바닷물에 뛰어들었던 탓에 옷
에서는 물이 흘러내렸다.
"어? 이 미녀는 누구신가?"
"내 여자친구."
"에르네스토!..."
"인사나해. 사라야."
"난 알베르토 그라나도스입니다. 에르네스토의 친구이자 여행의 동반자,
그리고 낭만을 사랑하는 남자지요."
"반가워요. 참 재미있는 분이군요."
"그런데 에르네스토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다니 믿어지지 않네요."
치치와 알베르토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미모를 지닌 사라는, 그
들이 짓궂은 장난을 해도 엷은 미소를 띄울 뿐 말이 없었다. 알베르토는
치치를 따라 먼저 치치의 집으로 돌아갔다. 체와 사라는 해변에 남아 바다
를 향해 앉았다.
"사라, 내가 이 해변에 온 것은 행운이에요. 사라를 만났으니까요."
"나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지금부터 알면 되잖아요."
"나는 이곳 출신이 아니에요. 여행 중이에요."
"여행을 좋아하세요?"
"네. 그런데 당신은 나보다 더 여행을 많이 하는 것 같군요. 직업이 뭐예
요?"
"의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당신 직업은 뭐죠?"
"알아맞혀보세요."
"글쎄요. 무용가?"
"오페라 가수 에요."
"오페라가수? 뜻밖이군요."
"실망하셨나요?"
"아닙니다. 저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듣고 즐길 뿐 노래는 못합니
다. 학교 다닐 때 음악 점수가 형편없었습니다. 그래서 노래 잘 부르는 사
람들을 존경합니다."
체와 사라는 밤늦게까지 해변을 떠날 줄 몰랐다. 체는 사라와 함께 있다
는 사실만으로도 황홀한 듯 싶었다. 사라가 불러준 '바다와 연인들' 이라는
노래는 감미로웠고 둘의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사라와 함께 지낸 체는 유쾌한 기분을 안고 치치의 집으로 돌아왔다. 체는
사라의 모습이 아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에르네스토! 그만 일어나."
알베르토와 치치가 번갈아가며 깨웠지만, 체는 꿈을 꾸는지 미소까지 띄
우며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참다 못한 알베르토가 물수건을 체
의 얼굴에 씌우자 그제야 놀라 일어난 체가 두리번거리며 뭘 찾고 있었다.
"에르네스토, 뭘 찾는거야?"
"치치, 사라는 어디갔지?"
알베르토와 치치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킥킥 웃었다.
"첫눈에 반한 것도 모자라 꿈을 현실로 착각하는 모양이군."
알베르토가 빈정댔다. 웃고있던 치치가 거들었다.
"어젯밤 사라하고 우리 집에 왔었어? 그럼 새벽에 갔나?"
그제야 체가 현실로 돌아왔다.
"사라 꿈을 꾸고 있었군. 어젯밤 내내 사라 생각을 하다가 잠들었거든."
"에르네스토가 사랑에 빠지다니 믿어지지 않는군. 사라에게 그토록 이끌
리는 이유가 뭐야? 그 동안 너를 짝사랑했던 수많은 여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라를 연구하려고 몰려들겠다. 여자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네가 온통 사라생각뿐인 이유좀 알자구."
치치는 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라는 신비스럽고 감미로운 여자야. 사라를 보는 순간 난 내 운명의
여인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어."
"사라를 사랑하기 위해 여기서 남미대륙 여행을 끝내겠군, 그래?"
"알베르토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여행은 계속 될거야."
"사라는 어떻게 하고?"
"우리의 사랑은 헤어져 있는 동안 서로의 가슴 깊이 넣어두고 키워갈거
야."
이런 갑작스런 체의 사랑이 못미더웠던 치치와 알베르토는 체와 함께 사
라가 머물고 있다는 모텔을 찾아갔다. 그런데 사라는 그곳에 없었다. 모텔
주인으로부터 사라가 카페에서 탱고춤을 추는 무용수라는 사실을 알게됐
다. 일자리를 구하러 온 떠돌이 무용수라는 말을, 체는 믿으려 하지 않았
다. 해변으로 나가 하루해를 보내며 그녀를 찾던 체는 저녁이 되어 치치의
집으로 돌아왔다.
"알베르토, 우리 내일 떠나자."
"그래도 괜찮겠어?"
"내가 뭘 어땠는데?"
"실연 당했잖아."
"바다가 옛날 이야기로 데려갔어."
체는 자신의 상처를 감추며 명랑하게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런 체
를 위로하기 위해 알베르토는 긴 여행길에 함께 할 오토바이에게도 사람처
럼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며 포데로사2(파워2)라고 이름지었다.
7
체와 그라나도스는 안데스의 고산지대를 피하기 위해 여행코스를 아르헨
티나 남쪽으로 잡았다. 네코체아 해변을 출발한 체와 그라나도스는 바이아
블랑카를 향해 오토바이를 달렸다. 몇 시간을 달려도 끝없이 펼쳐지는 푸
른 초원은, 녹색의 커다란 캔버스 같았다. 풀을 뜯고 있는 소떼와 양떼들은
녹색 캔버스에 무수히 많은 점들을 뿌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뿐 아니라
드넓은 들판 위의 해바라기와 옥수수밭, 군데군데 고여있는 작은 늪 등은
어느 유명화가의 수채화보다도 아름다웠다.
"에르네스토! 우리 저기 냇가에서 좀 쉴까?"
도로 옆으로 흐르는 냇가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흐르는 물에 손을 씻고,
먼지로 얼룩진 얼굴도 씻어냈다.
"에르네스토! 여기는 천국같아. 마음의 평화가 저절로 생기ㅈ아?"
"알베르토, 시인이 된 것 같구나."
"에르네스토, 날 놀리는거야?"
"아니야, 나도 너처럼 느끼고 있어. 내가 태어나고 자란 아르헨티나가 이
렇게 아름답다는걸,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모를거야."
"에르네스토! 나와 함께 와 줘서 정말 고마워. 나 혼자서는 이런 여행을
생각할 수도 없었을 거야."
"지금은 출발이라서 그렇지 어려움이 많을거야. 그때 날 원망하지는 말
라구."
바이아블랑카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운 여행이었다. 이때부터 단조롭고 지
루한 경치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팜파스에 오렌지색과 보랏빛이 뒤섞인 저
녁 노을이 지자 풍경은 완전히 빛깔잔치처럼 화려하게 바뀌었다. 두 사람
은 저녁 노을에 취해 오토바이를 멈추고 잠시 쉬었다. 얼마 더 달리지 못
해서 노을이 사라졌다.
사방이 온통 어두워지니 서둘러 잠자리를 준비했다. 텐트를 치고 침낭
안에 누웠지만, 팜파스의 밤은 기온이 뚝 떨어져 추웠다. 이런 기온의 급격
한 변화로 체는 부쩍 기침이 잦아져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에르네스토, 밤낮의 기온 차이가 너무 심해서 그러니까 옷을 모두 껴입
고 자."
"내 기침 소리에 잠을 설치게 해서 정말 미안해."
"난 그런 뜻으로 말한게 아냐."
"알아, 알베르토. 걱정해줘서 고마워."
다음날 밤도 체는 천식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다가 늦게 잠이 들었다. 알
베르토가 일찍 잠에서 깨어나 버너에 불을 붙이고 물을 끓였다. 체가 일어
나기 전에 아침 준비를 해 놓고,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조그만 주전자에서 물이 끓고 있을 때 체가 텐트 밖으로
나왔다.
"나 때문에 또 잠을 설친 모양이군."
"그렇지 않아. 팜파스의 새벽 공기가 아주 좋은걸."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알베르토, 우리 오늘은 일찍 출발하자."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지."
체는 알베르토가 준비해놓은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고 나서 길을 재촉했
다. '파워2'라는 명명식을 치른 오토바이는 생각보다 잘 달려주었다. 아직
큰 고장 한번 없이 두 사람을 싣고 다녔다. 그런데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
레에 도착해서부터 엔진소리가 부쩍 요란해졌다. 속도도 떨어지고, 시동이
자주 꺼져 고치느라 달리는 시간보다 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다가
파워2는 끝내 달리지 못하고 산티아고에 가까이 갔을 때 완전히 멈추고 말
았다. 두 사람은 정든 오토바이를 버리고 산티아고까지 걸어서 갔다.
"에르네스토! 여기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다를 바가 없군. 남미 대륙에도
유럽같은 곳이 여기 또 있네."
"알베르토 자네는 꼭 유럽을 다녀온 사람처럼 말하는군."
"유럽을 다녀온 사람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유럽과 똑같다고 말했어.
봐, 거리의 사람들도 모두 백인이잖아."
"남미는 본래 백인들이 주인이 아니잖아. 굴러온 돌리 박힌 돌을 빼낸
격이지 뭐."
"그래, 네 말이 맞아. 남미 대륙을 지배하는 자들은 백인 침략자들이야.
하지만 지금 당장 우리한테 필요한 건 변혁이 아니라 한끼의 밥이라구. 목
구멍이 포도청이니 어떻게 방법이나 찾아보자."
"그럼 일자리를 찾으러 가자."
"우리에게 일자리가 주어질까?"
"우리말야, 배를 타자. 선원이 되면 바다를 돌아다닐 수 있잖아. 운이 좋
으면 남극 가까이도 가 볼 수 있을거야."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
"왜?"
"내 생각은 산티아고에서 좀 머물렀다가 떠났으면 해."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그렇다면 이곳에서 일자리를 찾아야지."
"에르네스토, 그 일은 내게 맡겨. 카페에 들어가 차나 한잔하고 있어. 곧
좋은 일자리를 구해서 돌아올 테니까."
알베르토는 체에게 짐을 맡겨두고 카페를 나서 고급 음식점들이 있는 거
리로 사라졌다. 30분도 채 안돼서 돌아온 알베르토의 표정이 밝았다.
"알베르토, 잘 됐구나?"
"응. 일자리가 생겼어. 당장 오라던데?"
"뭐하는 곳이야?"
"음식점 접시 닦는 일인데, 숙식이 제공되고 돈도 벌 수 있게 됐어."
알베르토를 따라 들어간 음식점은 규모가 큰 고급 음식점이었다. 처음에
체와 알베르토는 접시닦는 일이 서툴러 접시를 깨뜨리거나 기름기가 그대
로 남아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며칠 지나자 두 사람은 그 일에 익숙해졌다.
체와 알베르토는 산티아고에서 접시닦이로 여행경비를 마련하며 그곳의 실
정을 파악한 후 배를 타기 위해 항구로 향했다.
8
알베르토는 접시닦이 경력을 식당 요리서 경력으로 둔갑시켜 보조 요리
사로 승선했다.
"에르네스토도 요리사 보조 경력이 있는데요."
선장은 알베르토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하지 않았다.
"우리 배는 요리사가 많이 필요없어. 또 요리사로 승선하더라도 갑판 일
을 거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좋을걸."
체는 선원으로, 알베르토는 요리사 보조로 같은 배에 승선할 수 있었다.
연근해 어업을 하는 어선 중에는 꽤 큰 배였지만, 태평양 바다 멀리까지
나가는 배에 비하면 작은 배였다.
출항 첫날 바다에 익숙하지 않은 알베르토는 심한 뱃멀미를 했다. 배에
오르기 전에 먹었던 물 한방울까지 모두 쏟아내는 것 같았다.
"우리 배가 무슨 환자 수송선인줄 아나?"
선장은 알베르토 주위를 맴돌며 화를 냈다.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안정을 취하고 작업에 차질이 없도록 해."
배가 출항하기 전보다 바다로 나온 후 선장의 태도가 더 고자세로 변했
다. 말씨도 명령어로 대체됐다.
"에르네스토, 당신도 뱃멀미를 하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체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느라 심호흡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내리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이런 곳에서 약
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알베르토는 뱃멀미가 심해서 앉지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 그런 알베르토
가 지쳐서 잠이 들었을 때 갑판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체는 영문을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선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원 전원, 갑판으로!"
체는 서둘러 갑판으로 나갔다. 고기떼를 만나 그물을 끌어올릴 준비를
하느라 갑판 위의 사람들은 모두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체는 선원들 틈에
끼여들었다. 옆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눈치껏 따라서 행동했다. 첫 그물이
끌어올려졌을 때 그물 안에는 펄떡이는 물고기가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
은 소리를 실어날랐다. 선장도 첫수확이 좋은 탓에 흐뭇한 표정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물 모두 가득가득 물고기가 담겨 올라왔다. 갑판위에 올려
진 물고기는 얼음창고로 옮기는데 그 작업도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밤늦도록 계속되는 작업 때문에 저녁식사가 늦어 졌지만, 체는 너무 피곤
해 저녁을 먹을 수가 없었다. 알베르토는 언제 기운을 차렸는지 조리실에
서 음식 만드는 일을 돕고 있었다. 선장은 물고기를 많이 잡아 기분이 좋
은지 알베르토에게도 다정하게 대했다.
"멀미는 그쳤나? 배를 처음 타면 그럴 수도 있지. 곧 익숙해질거야."
50대 초반의 선장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체와 알베르토는 선장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배 안에서의 관례라고 믿기로 했다. 하룻동
안 많은 고기를 잡았지만 얼음창고를 가득 채우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다.
어선은 고기를 쫓아 칠레의 남쪽을 향해 항해했다. 몇 번의 고기떼를 만나
자 마침내 얼음창고에 물고기가 가득 담겼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귀항하
는 선장과 선원들은 들떠있었고 모두들 축제 분위기였다. 체는 술잔을 기
울이는 선원들과 어울리다가 혼자 배의 갑판으로 나와 배가 지나온 바다와
멀리 등뼈처럼 솟아난 안데스산맥을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체에게 선장이 다가왔다.
"에르네스토, 뭘 보고 있나?"
"이렇게 밤에 보니 바다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자네는 훌륭한 뱃사람이 될 수 있거나 아니면 아직 바다를 모르고 있거
나 둘 중 하나겠군."
"선장님은 바다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한동안은 바다가 아름답게 보였었지. 지금은 바다가 지긋지긋해."
"그럼, 배를 그만 타면 되잖습니까?"
"나더러 배를 그만 타라고? 그건 나를 죽으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이
네."
"이해할 수가 없는 말씀이시네요?"
"그래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 바다는 자신에게 순종하는 사람에게조
차 냉정하다네. 자네는 운이 좋은 사람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첫 출항인데 육지 떠난 지 보름도 안돼서 육지로 귀항하고 있지 않은
가. 나는 첫 출항때 물고기떼를 만나지 못해 거의 두달만에 돌아왔거든."
"그런 일이 많습니까?"
"두 달은 보통이지. 그러다보니 아내와 가족들의 불만이 많아. 내 아내도
그래서 결국 떠나버렸지."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언제까지 배를 탈 건가?"
"글쎄요. 다음에는 어느 쪽으로 출항할 계획이십니까?"
"좀 더 남쪽으로 이동할 생각이네."
"그럼 남극 가까이 가실 계획이십니까?"
체의 약간 들뜬 듯한 목소리 때문에 선장이 다시 물었다.
"자네는 여행 중이라고 했지? 자네 때문에라도 꼭 남극 가까이로 가야겠
군. 난 자네같은 모험심 많은 사람들이 부럽네. 우리처럼 늙고 삶에 지치면
모험을 꿈꾸지도 못하지."
선장은 바다 멀리 수평선을 응시하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체는 그물에
걸려 몸부림치던 물고기떼와 그 물고기떼를 잡아올리려고 애를 쓰던 선원
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인생의 부질없음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때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선장이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나 한때는 바다의 제왕을 꿈꾸었네.
하지만 바다는 나를 모른다하네.
바다는 나를 보고 가랑잎이라 하네.
나 바다에 떠 있어 행복하다 말해도
바다는 나를 떠나라 하네.
"선장님! 누구의 시입니까?"
"왜? 나는 시를 지으면 안돼나?"
체는 놀란 눈으로 선장을 바라보았다. 선장은 체를 마주보며 씁쓸한 웃
음을 내보였다.
"선장님, 죄송합니다. 선장님이 시를 지으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
다."
"아니네. 시라고 할 수도 없는 넋두리에 불과하지. 자네야말로 시를 쓸
것 같은데..."
"저는 시를 읽는 것은 좋아하지만 쓸 수 있는 능력이나 소질은 없습니
다."
선장과 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침이 밝아왔다. 아침 햇
살을 받아 바다는 비단결처럼 빛나고 있었다. 선원들은 이곳저곳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그들과 어울린 알베르토는 술에 취해 잠든 상태였다. 저 멀
리 항구가 눈에 들어왔다.
"기상!"
선장의 목소리가 조금 전 시를 읊던 목소리와 달리 갑판 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체도 알베르토를 깨웠다.
"알베르토! 육지야, 일어나."
알베르토는 육지라는 말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뱃멀미에 시달린 알베르
토는 육지에 돌아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정말 육지야?"
잠이 들깬 눈을 비비며 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던 알베르
토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알베르토는 한시바삐 배에서 내리고 싶은 모
양이었다.
항구에 도착한 배는 하역을 마치고 항구에서 3일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
었다. 그 사이 알베르토는 선원들과 어울려 술집에 갔고 체는 선실에 남아
책을 읽었다. 선장이 선실로 들어왔다.
"내 짐작이 맞았군. 그럴 줄 알고 먹을 것과 술을 한병 사 가지고 왔네."
"선장님도 외출을 안하셨군요."
"외출하면 뭐하겠나. 술집에 가서 술 마시는 것도 싫고,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아."
선장은 체가 읽고있는 책의 표지를 살폈다.
"이거 의학서적 아닌가?"
"맞습니다."
"나는 자네가 시집을 읽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시집도 좋아합니다. 이 책은 제 전공분야의 책입니다."
"그럼 학생인가?"
"의학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의사시험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체는 항구에서 머무는 동안 선장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시 바다로
나갔을 때는 선장과 함께 지내는 시간도 많아졌다. 그러는동안 배가 남극
가까운 바다로 진출했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출렁이
고 빙하지역에서 떨어져나온 얼음덩어리는 다이아몬드나 수정같이 영롱했
다. 에메랄드 위에 다이아몬드를 올려놓은 듯 보이는 바다. 그 바다위에 떠
있는 어선은 보석 위에 얹혀진 작은 가랑잎 같았다.
배가 남쪽으로 갈수록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추워졌다. 체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 풍경에 넋을 잃고 서 있는데 선장이 다가왔다.
"너무 오래 서 있지 말게. 건강에 좋지않아."
선장은 항해 내내 체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9
두 번의 항해를 마친 체와 알베르토는 여행 경비도 넉넉히 챙겼고 남극
의 바다도 보았기 때문에 선원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정했다.
"알베르토, 이번에는 사막 여행을 하는 게 어때?"
"사막?"
"아타카마 사막이 있잖아."
"아타카마 사막이라. 그것도 괜찮군. 사막에서 특별히 볼 게 있나?"
"중요한 유적이 있잖아."
"사막에 유적이라고?"
알베르토는 사막에 유적이 있다는 말과 여우가 나온다는 전설을 가진 달
의 골짜기에서 야영을 하자는 이야기를 듣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에르네스토! 달의 골짜기에서 야영을 하면 정말 여우와 귀신이 나타날
까? 정말 스릴이 있을 것 같다. 오늘밤에 떠나는 건 어때?"
알베르토는 하루라도 지체하기 싫다며 짐을 꾸리려고 들었다. 하지만 사
막여행을 둘 만이 하기에는 무리였다. 사흘간 수소문 끝에 아타카마 사막
을 여행하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아르바이트도 겸해서
그들과 동행하기로 했다. 아타카마 사막 여행을 하려는 사람들의 안내인
겸 짐꾼과 요리사역할을 하기로 한 것이다. 산티아고에서 아타카마 사막까
지는 트럭을 타고 꼬박 하루 반나절을 가야했다. 아타카마 사막 초입에 있
는 칼라마 마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사막에 있는 마을 산 페드로로
향했다.
산 페드로 마을로 향하는 동안 풀한포기 발견할 수 없었다. 끝도 없는
사막에 모래산이 울퉁불퉁 솟아있을 뿐이었다. 멀리 보이는 흑갈색의 화산
들은 흰 눈을 이고 사막을 굽어보고 있었다. 산티아고에서부터 함께 온 귀
족행세하는 자들은 체와 알베르토를 하인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체와
알베르토는 여행 경비를 아끼기 위해 부자인 그들에게 채용되었지만 그들
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토, 안내를 맡았으면 설명이 좀 있어야하잖아?"
잠시 휴식하는 동안 일행중 가장 연장자이며 이번 여행에 경비를 지불한
다는 카를로스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체는 기침을 한번하고 일행을
둘러본 후 말문을 열었다.
"지금 보이는 이 아타카마 사막은 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입니다. 그
래서 이 사막에는 미라가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옛날
잉카시대부터 나 있는 길로 곧 오아시스마을 산 페드로에 도착하게 될 것
입니다."
체의 설명이 끝나고 얼마 가지 않아 거짓말처럼 사막 위에 숲이 나타났
다. 사람들은 사막 위의 숲을 보자 몇 년 동안 숲을 보지 못한 사람들처럼
환호성을 질러댔다.
오아시스 산 페드로 마을은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의 집들은 지붕이 낮
고 벽은 흰색이었다. 사막밖에 없는 곳에 마을이 있고 숲이 있는 것도 신
기했지만, 길을 따라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것은 더 신비로워 보였다. 숲이
있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었다. 사람들은 물에 손을 씻기도하고 한 웅큼
움켜쥐기도 했다. 몇몇 성급한 사람들은 발까지 담갔다. 산 페드로 마을의
주민들은 인디오였지만 아직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인답게 외부인들
에게 친절했다. 산 페드로 마을에는 칠레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교회도 있
었다. 스페인식 교회지만 선인장 나무둥치로 지붕이 얹혀있어 사막 가운데
있는 교회다웠다. 일행이 숙소를 정해 여장을 풀려고 할 때 체가 카를로스
를 찾았다.
"카를로스씨, 오늘밤 별다른 여행계획이 있습니까?"
"에르네스토, 그런 건 안내인인 당신 일이 아니야?"
"그렇습니다. 오늘이 마침 보름날이라서 달의 골짜기에서 야영을 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만 어떻겠습니까?"
"야영이라고? 사막에서?"
카를로스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는 말투로 되묻자, 곁에 서 있던 그
의 딸 마리아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찬성을 했다.
"그것 참 재미있겠네요. 그렇게해요 아빠!"
마리아의 애교섞인 응석에 카를로스는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카를로스
가 승낙을 하지 않았다면 체는 알베르토와 둘이서라도 야영을 할 생각이었
다. 카를로스는 체와 알베르토만 믿고 사막에서 야영을 한다는 것이 불안
했던지 현지인 안내원과 짐꾼 두 사람을 재촉했다. 알베르토가 체 곁으로
다가와 투덜댔다.
"돈 좀 있다고 귀족행세하더니, 자신의 목숨은 소중한 모양이지?"
"알베르토, 현지인 채용은 우리에게 더 좋은 일이잖나. 짐을 하나라도 덜
들어서 좋고, 안전하게 안내해주는 사람있어 좋고, 나쁠 거 없잖아."
알베르토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체는 텐트와 음식조리기구, 침낭등을
준비해 달의 계곡으로 향했다. 알베르토는 아르헨티나에서 떠나올 때 가져
온 자동소총까지 챙겨서 왔다.
"알베르토는 야영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막에서 사냥하려나?"
카를로스의 빈정거림에 사람들이 깔깔대고 웃었다. 체가 재빠르게 사람
들을 둘러본 후 한마디했다.
"여러분의 생명을 지켜줄 총입니다. 이곳 사막에 늑대와 야생 여우가 있
다는 얘기는 못 들은 모양이군요."
체의 말에 사람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알베르
토는 특유의 익살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렇게 긴장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여우나 늑대를 잡으면 즉
석 바비큐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인디오인 현지 안내인 마리오가 웃으면서 말을 거들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캠프파이어용 장작도 준비되어있으니 완벽하군요."
알베르토와 마리오의 말에 일행은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달의 계곡은 산 페드로 마을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곳에 있었다. 달의 계곡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질 석양 무렵이었다. 일행은
사막의 일몰을 보기 위해 모래언덕으로 올라갔다. 모래언덕 아래 펼쳐진
사막에는 우윳빛 유리조각을 뿌려놓은 것 같은 소금 모래 벌판이 펼쳐 있
었고, 석양의 빛을 받은 사막은 막 붉은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었다. 안내를
맡게된 마리오는 체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마리오가 나보다 더 잘 알 텐데 얘기해요."
"에르네스토가 나보다 아는 것이 더 많잖아요."
체와 마리오가 서로 미루자 카를로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도 눈은 있으니까 설명 필요없어."
마리오가 체를 향해 계면쩍은 미소를 내보였다. 여행을 출발할 때부터
체의 곁에 맴돌던 카를로스의 딸 마리아가 체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에르네스토! 여기는 사막인데 왜 소금모래가 있어요?"
"아타카마 사막이 먼 옛날에는 바다였기 때문이죠. 저쪽을 좀 보십시오.
모래단층들이 잘 만든 요새같지 않습니까?"
"성을 쌓아놓은 것 같군요. 소금 요정의 성인가봐요."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마리아는 스무살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순수함
이 있었다. 소금단층들 반대편에 있는 거대한 분화구가 바로 야영을 하게
될 달의 골짜기였다. 바람에 씻긴 모래들이 조각가가 만든 작품들처럼 솟
아있는 달의 골짜기는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일
행은 달의 골짜기에 텐트를 치고 야영준비를 서둘렀다. 알베르토와 마리오
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고 현지 안내인과 짐꾼으로 따라온 사람, 그
리고 체가 야영할 준비를 끝낼때까지 카를로스 일행은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있었다.
알베르토가 음식을 만들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인간들, 좀 거들면 손가락이 부러지나."
벌써 알베르토와 친구가 되어버린 마리오가 웃으면서 한마디했다.
"저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잖아."
"그런 그렇지 않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아야해. 누구는 일을 시키고
누구는 손 하나 까딱 않고 사는 사외는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낫지."
"그럼 당신은 왜 요리사를 해?"
"그건 지금 내가 돈이 없어서지. 하지만 같이 거들면 그만큼 시간이 절
약되잖아."
"하긴 그래."
저녁을 먹고 나자 하늘에 노랗고 둥근 달이 떠올랐다. 파란 바다 위에
떠 있는 노란 쟁반 같았다. 사막 곳곳에는 마이카(소금 결정체)가 달빛을
받아 별이 땅 위로 떨어져내린 것처럼 보였다. 또 분화구처럼 보이는 특이
한 모습은 달빛을 받아 달의 골짜기를 더 신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밝은
보름달이 일행의 머리 위에서 서쪽으로 비켜가고 나서야 모두들 잠들었다.
체는 이 날도 메모지와 펜을 꺼내놓고, 오늘 보고 겪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토! 뭘 그렇게 열심히 쓰고있어요?"
카를로스의 딸 마리아가 체의 등뒤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아직까지 깨어있습니까?"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너무 늦었습니다. 마리아, 내일 이야기합시다."
"내일은 안돼요. 지금 난 잠들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럼 이야기해 보세요."
"우리와 언제까지 같이 있을거예요?"
"아타카마 사막 여행이 끝날 때까지입니다."
"칠레에는 언제까지 머물건가요?"
"글쎄요."
"그런 대답이 어딨어요. 체는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요?"
마리아의 당돌한 물음에 체는 당황했다.
"마리아, 마리아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습니까?"
"난 당신의 모든 것이 좋을 뿐인걸요."
"마리아, 당신 아버지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에르네스토, 아버지는 독재자예요. 아버지 때문에 사랑한번 못 해보고
아버지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될 거라구요.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
예요. 에르네스토! 당신을 만나면서부터 아버지한테서 탈출할 용기가 생겼
어요."
마리아의 뜻하지 않은 사랑고백 때문에 체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마리아. 당신 아버지가 알게되면 우리가 함께 있을 시
간은 더 짧아진다는걸 모르십니까?"
"두렵지 않아요. 당신을 해고하면 나도 따라나설 거예요."
마리아와 체의 말은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마리아도 지쳤는
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당신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텐트로 돌아갈 테니까 딱 한번만 안아주
세요."
체는 마리아의 간절한 눈빛을 피할 수 없어 팔을 벌려 마리아를 안았다.
마리아는 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엄마가 살아 계셨더라면 당신 가슴처럼 따뜻할 거예요..."
마리아는 약속대로 체의 품에 안긴 후 텐트로 돌아갔다.
10
아타카마 사막 여행을 끝내고 체와 알베르토 그라나도스는 다음 행선지
를 칠레의 광산지대로 잡았다. 당시 칠레의 주광산품은 구리였는데 이 광
산의 대다수를 미국 회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광산지대에서
취직한 북미광산회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곳의 경비원으로 일하
면서 거대한 미국자본에 의해 낮은 임금과 열악한 환경에 신음하는 광부들
의 참상을 경험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알게 된 트럭 운전기사의 도움으
로 트럭 운송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트럭운전기사로 일하게 된 알베르토와
체는 칠레 곳곳을 둘러보며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취직
해있는 동안 여행경비도 넉넉하게 준비되자, 두 사람은 칠레를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했다.
"알베르토, 이제 칠레를 떠나 페루로 가면 어떨까?"
"좋은 생각이야. 칠레에서 너무 오래 있었어. 페루에 가서 잉카문명도 봐
야겠지?"
알베르토와 체는 칠레 국경을 넘어 페루의 아레키파에 도착했다. 아레키
파는 옛 스페인식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있는 전형적인 식민지 도시였다.
아레키파는 사막 기후에 강렬한 태양이 내리쪼이는 곳이라서 도시 전체가
온통 흰색 건물로 가득차 있었다.
체와 알베르토는 곧장 아레키파를 떠나 옛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
로 향했다. 두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잉카의 유적을 보고 싶었다. 잉카제
국! 한때는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북부까지 길
을 닦고, 그 세력을 뻗쳤던 대제국. 태양력과 피라미드와 2진법을 쓸 정도
로 고도로 발달됐던 고대의 문명국. 그런 나라가 불과 200여명에 지나지않
는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순식간에 멸망한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를 두 사람
은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쿠스쿠는 안데스 산맥의 고원에 건설된 해발 3천4백미터의 공중 도시였
다. 옛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감회에 젖었다.
체와 알베르토는 숙소도 정하지 않고 아르마스광장으로 나갔다. 잉카 최
후의 왕 투팍 아마루가 처형된 곳이었다. 광장에는 콜로니얼풍의 대성당이
위용을 과시하며 서 있다. 또 잉카인들이 믿는 태양신의 집 태양의 신전이
헐리고 그 위에는 산토도밍고 교회가 세워져있다. 이제 침략자들은 잉카인
의 정신마저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 역사의 비극과 아이러니를 보며 두
사람이 착잡한 심정을 나누고 있을 때 잉카인의 후예 토레스라는 청년을
만났다. 토레스는 여행자를 안내해본 경험이 있어서 두 사람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자 토레스는 체와 알베르토가 자신과 피부
색은 다르지만 같은 대륙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토레스에게서 알려지지 않은 보다 많은 이야기를 듣
기 위해 잉카제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기로 작정
했다.
"잉카제국은 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까?"
"잉카제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구요? 당신 앞에 서 있는 잉카의 후예
토레스는 유령으로 보이십니까?"
정통 인디오로 보이는 토레스가 화난 목소리로 되물었다. 체는 당황하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질문을 잘못했군요. 대 잉카제국이 왜 망하게 됐을까요?"
"화를 내서 미안합니다. 비록 잉카제국은 사라졌지만, 잉카인은 의연하게
살아있습니다. 잉카 왕국이 멸망하게 된 것은 스페인의 침략 때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요? 그러니까 1533년 침략자 피사로는 페루 북부의 카하마
르카에서 잉카의 왕인 아타와르파를 사로잡아 몸값으로 방 한 개를 가득
채운 금을 빼앗고, 아타와르파를 풀어주기로 한 약속을 어긴 채 그를 처형
했답니다. 그 다음 이곳 쿠스쿠에 도착해서는 금이 아닌 것은 모조리 파괴
했다는 거에요."
알베르토는 숙연한 표정의 토레스가 안쓰럽게 느껴졌는지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사로는 정말 구제받을 수 없는 못된 인간이군요. 인류역사의 한 부분
을 없애버렸으니, 지금쯤 하늘에서 죗값을 치르고 있겠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체가 산토도밍고 교회건물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토레스! 우리를 잉카의 부활을 위해 싸웠던 삭사이와망 요새와 우루밤
바강, 마추픽추까지 안내를 맡아주시겠습니까? 사례는 하겠습니다."
"당신은 잉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은 것 같은데..."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단편적인 지식뿐입니다. 자세한 내용들을 알려주
시고 길 안내도 부탁드립니다. 만족할 만큼은 못 드릴지 모르지만 사례도
하겠습니다."
체의 정중한 부탁에 토레스가 승낙을 하며 물었다.
"숙소는 정했습니까?"
"아직 정하지 못했답니다."
토레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괜찮으시다면 불편한 점이 있으시더라도 저희 집에서 지내시지요."
"우리는 가이드와 숙박비용을 모두 지불할 만큼 넉넉한 여행객이 아니라
서 텐트를 가지고 다니는 중이었습니다."
알베르토가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될까 걱정되어 말했다. 토레스가 빙그
레 웃으며 알베르토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저는 돈을 받기 위해 그런 말씀을 드
린 게 아닙니다. 모처럼 대화가 통하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아 저희 집에 손
님으로 모시겠다는 생각입니다."
토레스의 말에 알베르토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 실례를 했군요. 제의를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체와 알베르토는 토레스의 집으로 갔다. 토레스의 집은 마
을의 다른 집보다 규모도 크고, 가구나 그 밖의 건물들로 미루어 부잣집인
듯 싶었다. 토레스의 집은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산자락
에 위치해있었다. 멀리 초록의 산들을 배경으로 붉은 밤색의 지붕들과 흰
외벽을 한 마을의 집들이 앙증맞은 예쁜 창이 달고 모여 있었다. 쿠스코의
중앙 종루 위에는 일곱 빛깔 무지개를 그린 잉카제국의 국기가 휘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체와 알베르토는 토레스가 내어 준 방에 짐을 풀고 식사를
마쳤다. 잠시 후 토레스가 마테차를 준비해들고 왔다.
"한잔씩 마시고 한숨 주무십시오. 여기는 고산지대라서 머리가 좀 무거
울 겁니다."
"토레스, 잠깐 들어와 이야기나 나눕시다."
체가 토레스를 붙잡아 앉혔다.
"토레스는 여기서 오래 살았습니까?"
"태어나서 지금껏 쿠스코를 떠나 본 적이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겁니다."
"토레스, 그렇다면 태양제에 대해 잘 알겠군요?"
"태양제요? 태양제를 보려면 6월에 오셔야 합니다. 몇 년전에는 저희 아
버지께서 태양제를 이끄는 왕으로 뽑히셨지요. 그 모습을 보셨어야 하는
데..."
태양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토레스의 표정은 왕으로 뽑혔던 아버지가 자
랑스럽다고 말하고 있었다.
"두 분께서 태양제를 보게되면 잉카인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텐데 아쉽군
요. 태양제기간 동안에는 멀리 흩어져살고있는 잉카인들이 모두 모여 의식
을 치른답니다. 태양제는 잉카인들이 신성한 축제로 여겨 성대하고 화려한
행사를 벌입니다. 이 축제를 위해 주변 고산 속에서 사는 잉카인들은 가족
을 이끌고 며칠씩 걸어서 이곳에 모입니다. 이 태양제를 보면 잉카의 문명
이 아직도 살아있고, 잉카인이 죽지 않았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잉카인은 고대에 이미 2만4천km의 도로와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로를
건설했던 사람들입니다. 또, 수십 톤에 달하는 육중한 돌을 정교하게 절단
하여 석축들을 쌓아 건물들을 완성했습니다. 그런 문명들을 파괴해버린 침
략자들 때문에 잉카인들이 지금은 퇴보된 삶을 살고있지만 우리는 태양제
를 통해 조상들이 위해한 문화를 잊지 않고 계승하려고 노력합니다. 백인
침략자들만 아니었으면 더 찬란한 문명인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지
요."
토레스는 백인인 체와 알베르토에게 항변하듯 많은 말들을 쏟아놓았다.
"토레스! 스페인계 후손의 한 사람으로써 사죄를 해야겠군요. 내가 저지
른 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사실 나 자신도 백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인디
오나 혼혈인들을 무시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당신 말을 들으니 고개
를 들기 힘들군요."
창 밖을 바라보며 토레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알베르토가 갑자기
토레스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알베르토! 나는 사죄를 받고자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에요. 난 우리 조
상들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하는 버릇이 있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들려
준 이야기로는 찬란한 문화유산과 발달된 문명인이었던 잉카인이 침략자들
때문에 오늘날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당신들같은 백인
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항의하듯 말하게 되나봐요. 미안합니다."
알베르토와 토레스는 서로 사과하며 정겹게 웃었다.
다음날 토레스의 안내를 받아 체와 알베르토는 삭사이와망 요새로 갔다.
삭사이와망 요새는 침략자들의 살육과 파괴에 저항하기 위해 망코 잉카가
2만의 병사와 함께 잉카의 부활을 내걸고 싸웠던 곳이라고 토레스가 설명
했다. 알베르토와 체는 고원의 산소부족으로 걷기도 힘들고 말하기도 힘들
었다. 하지만 토레스는 잉카의 후예답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도 잘하고 한
참씩 앞서가서 체와 알베르토를 기다리곤 했다.
"에르네스토, 토레스는 고산지대에서 살아서 폐가 우리보다 두 배는 큰
가봐."
"잉카인들은 통신수단으로 달리기 선수인 차스키를 두었어. 중앙정부와
지방조직 사이에 급히 알려야 할 일이 생기면 잘 훈련된 차스키 한 사람이
5km를 달려 다음 사람에게 연결해주는 방식이었어. 심지어는 작물의 작황
까지도 그렇게 알렸다니 그 피가 어디 가겠어."
"이런 고산지대에서 달리기까지 했다니 놀랍군."
"그렇대나봐. 대단한 잉카인이야. 알베르토! 더 대단한 것은 나라에서 토
지를 식구 수대로 나누어주어 굶주리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야. 또 문자
는 없었지만 키푸라고 부르는 가가 다른 색깔의 실로 셈을 했는데, 놀랍게
도 0이라는 고도의 숫자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해. 이정도면 토레스는 훌
륭한 조상을 두었다고 말해도 되겠지?"
"정말 그렇군. 체, 자네의 해박한 지식도 존경할만 하네."
알베르토는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다고 틈만나면 주저앉아 쉬었다.
그때마다 토레스가 다가와 부축해주었다.
삭사이와망 요새를 나와 우루밤바강을 따라갔다. 망코 잉카가 최후의 저
항을 하였던 올란타이탐보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아침부터 찌푸렸던 하늘
에서는 비가 뚝뚝 떨어져내렸다. 올란타이탐보에서는 침략자들의 접근을
감시하던 전망대와 군량미를 비축했던 창고가 아득히 먼 산허리에 남아있
었다. 산허리를 바라보고 있는 체와 알베르토 곁으로 다가온 토레스가 말
했다.
"잉카의 병사들은 이곳에서 패배한 후 이곳보다 더 오지인 비르카 밤바
로 사라졌다고 전해오고 있어요. 이제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를 보러 가
지요."
알베르토가 토레스의 뒤를 바짝 따르지 토에스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마추픽추에 간다니까 힘이 솟아요?"
"가 보고 싶었던 곳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차스키
가 뛰어다니던 그 길인가요?"
"아, 그래요. 우리가 가고있는 이 길은 차스키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제
왕이 제사를 지내러 오르내리던 길이랍니다."
산악지대의 길이 험해 토레스의 뒤를 따라 알베르토와 체가 한 줄로 늘
어서 걸어야했다. 마추픽추를 찾아가는 잉카의 길은 우루밤바강 건너편에
있기 때문에 강도 건너야했다. 강둑에서 배를 탔다. 배라고 말하기에는 너
무도 원시적인, 배의 모양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뚜껑이 없는 상자 같았다.
강을 건너자 마을이 나타났다. 인디오들이 살고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배가 고파 더 이상 걷지 못하겠어. 점심 좀 해결하고 가자고."
알베르토의 제안에 토레스도 동의했다. 토레스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집
은 토레스가 잘 아는 집이었다. 집주인인 듯한 여자는 옷도 입지 않은 네
살쯤 되는 사내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축 늘어져있어 죽은 듯 보였다.
눈물이 맺혀있는 집주인 여자는 일행을 발견하고, 아이를 안은 채 자리에
서 일어섰다. 토레스가 다가가 잉카인들의 언어인 케추아말로 대화를 나누
었다.
"토레스, 무슨 일입니까?"
알베르토가 다가가며 물었다.
"아이가 아픈가봐요."
알베르토는 아이의 몸을 만져보고, 감겨있는 눈까풀을 열어보았다. 아이
는 아직 죽지 않았고, 고열에 시달려 기운을 잃은 상태였다.
"토레스, 아이를 그늘에다가 편안하게 뉘어놓으라고 말해요. 우리가 진찰
을 하고 치료를 해줄 테니까."
토레스가 눈이 휘둥그래져 알베르토를 바라보았다.
"의사예요?"
"예. 돌팔이긴 해도 의사인건 사실입니다."
토레스는 알베르토가 시킨대로 아이를 그늘진 곳에 뉘었다. 알베르토는
아이의 상태를 진찰한 다음 비상약품 상자를 열어 아이에게 해열제를 먹였
다.
집주인 여자는 케추아말로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이곳
에서는 약국이나 병원이 없어 환자가 생기면 민간요법을 사용하거나 점쟁
이를 찾아가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알베르토가 아이를 다시 진찰했다. 고열로 시달리던
아이의 몸은 해열제덕택에 열이 식어있었다.
"알베르토, 자네 덕분에 점심을 잘 얻어먹었군. 이런 곳에는 의사가 없다
는 현실이 부끄러워."
체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해보인 알베르토는 점심을 먹고나자 기분이 좋
아져 씩씩하게 앞장서 걸었다.
산봉우리 몇 개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걷느라 체는 무척 힘들어했다. 고도
때문에 천식을 앓고있는 체는 더 가뿐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고생고생하며 사흘째 되는 새벽에 잉카 최후의 도시 마추픽추에
도착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황금 추적자들에게 쫓기던 잉카인들이 마지
막으로 은거한 잉카 최후의 도시 마추픽추. 우루밤바 협곡 안쪽 해발 2천4
백미터에 건설한 도시 마추픽추는 4백년동안 묻혀있던 비밀의 도시였다.
마추픽추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1911년) 미라 백여구와 초
목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마추픽추 발아래 우루밤바 강줄기가 실개천처럼 까마득히 내려다보였다.
깍아지른 절벽 위에 도시가 있었다니 체는 믿을 수 없었다. 이 도시를 건
설하면서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스몄을까? 이 마추픽추가 숲이 되지 못하
고 메마른 폐허로 남아있는 것은 원한이 사무쳐서일까?
체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석축으로 남아있는 도시의 잔해들을 둘러보
았다. 공중도시라고 불리는 마추픽추. 비록 지붕도 없고 살고있는 사람도
없이 석축으로만 남은 도시지만, 서민들의 민가와 기술자들의 작업실, 왕의
것으로 보이는 개인용 창고와 곡물저장소, 태양신께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치렀다는 신전, 해시계등이 슬픈 역사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나절동
안 토레스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곳곳을 둘러보았다.
산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면 보이지 않고 공중에서만 볼 수 있게 지었다는
마추픽추를 돌아본 체와 알베르토는 다시 토레스의 집이 있는 쿠스코로 발
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아까 해열제를 먹었던 아이롤 보러 갔다. 아이
는 기운을 차렸는지 힘차게 뛰놀고 있었다. 그래서 마추픽추 여행은 체와
그라나도스에게 더 큰 의미를 주는 소중한 여행이었다.
11
토레스와 작별하고 떠나온지 닷새가 지났다. 작은 오솔길로 이어지는 산
봉우리를 넘자 길은 보이지 않고 더 큰 산이 버티고 서 있다. 알베르토와
체가 산 속을 헤맨 지 벌써 이틀째다. 산중턱을 내려 올 때쯤부터 내리기
시작한 장대비가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내렸다. 체와 알베르토는 길을 찾
아 큰 산을 오르지 않고 계곡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내려갔다. 시
냇물이 흐르는 곳에는 어디나 마을이 하나쯤 있다는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
다. 아직 밤이 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만, 퍼붓는 빗줄기 때문에 주위
가 어두워졌다. 체와 알베르토는 우비를 걸쳤지만 온몸이 비에 흥건하게
젖어 있어 지친 상태였다. 더구나 길을 오면서 비상 식량을 아끼느라 야생
과일로 허기를 달래는 바람에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합주를 한다.
"비가 약해질때까지 나무 밑에서 좀 쉬어가면 어떨까?"
"마을도 못 찾고 어두워지면 빗속에서 야영을 해야하는데 조금만 참고
걷자."
"도저히 못 걷겠어. 이대로 가다가는 고꾸라질 것 같다구."
더 이상 말하기도 어려운지 알베르토는 커다란 나무둥치 밑을 가서 몸을
기대고 앉았다. 체도 알베르토 옆자리로 다가가 나무둥치에 걸터앉았다. 한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알베르토는 지그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난 다음, 장대비로 쏟아지던 빗줄기는 잦
아들고 있었다. 체는 주변을 살피며 있었다.
"알베르토, 조용히 총을 줘."
체가 나직이 말했다. 알베르토도 소곤대듯 되물었다.
"뭐가 있어?"
"토끼..."
알베르토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체에게 총을 내밀었다. 총을 받아든 체
는 나무 넝쿨들 틈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토끼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산
속의 적막을 깨는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맞췄어?"
알베르토가 물었다. 체가 멈추었던 숨을 한숨처럼 내쉬었다.
"그래. 잡았어."
"토끼를 잡았다면서 얼굴 표정은 왜 그래?"
"알베르토, 저 토끼는 비를 피하는 중이거나 새끼와 함께 있었을거야. 그
리고 토끼가 내 쪽에 등을 보이고 있는데 쏘았어."
"에르네스토! 네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 그런 감상은 접어둬. 당장 우리
에게 필요한건 배고픔을 달래는 일이니까..."
알베르토가 일어서서 빠른 걸음으로 나무넝쿨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축 늘어진 토끼 귀를 높이 들어보였다.
"에르네스토, 새끼 돌보는 토끼는 아니니까 안심해."
알베르토는 주머니칼을 꺼내 능숙한 솜씨로 토끼 가죽을 벗겨냈다. 그리
고 나뭇가지를 토끼의 몸에 관통시켰다.
"맛있는 토끼 바비큐를 만들 테니까 기다리라고."
알베르토는 껍질을 벗기고 나무를 모으는 등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양
쪽에 Y자 나뭇가지를 세우고 토끼의 몸통을 꿰어놓은 나무를 얹었다.
"배낭에서 버너 좀 꺼내줘. 마른 나무가 없으니 버너를 쓸 수밖에 없겠
어."
알베르토는 토끼의 몸통이 놓인 아래 흙을 파내며 체에게 버너에 불붙이
는 일을 지시했다. 흙을 파낸 자리에 불을 붙인 버너를 놓고, 토끼 바비큐
를 만들 즈음에 비는 완전히 그친 상태가 되었다.
목적지를 아마존강 상류의 나병환자촌으로 택한 체와 알베르토는, 토끼
바비큐가 고루 익혀지도록 토끼를 끼운 막대기를 돌렸다. 토끼고기 익는
냄새가 배고픈 위장을 자극했다. 서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 마주보고 웃
었다.
"마른 나뭇가지가 있었으면 더 맛있는 바비큐 요리를 만들 수 있을텐
데..."
알베르토는 비가 와서 제대로 된 바비큐 요리를 만들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알베르토, 비가 오지 않았으면 토끼를 잡을 수 없었다는 생각은 왜 안
해?"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쉬어가자고 하지 않았던들 토끼는 발견할 수 없
었을걸."
"그래, 알베르토 덕택에 굶주림을 면하게 된 거야."
체의 말에 알베르토가 계면쩍게 웃었다. 버너를 이용한 토끼 바비큐는
배고픈 두 사람에게는 꿀맛과도 같았다. 토끼 바비큐로 식사를 끝낸 체와
알베르토는 계속해서 시냇물을 따라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시냇물은 자꾸
넓어졌다.
"마을은 보이지않고, 강은 자꾸 넓어지고 있잖아."
"아마존강 지류인 모양이야."
"그렇군. 저 앞은 늪지대인가봐. 에르네스토 저 늪지대에 악어가 우릴 기
다리고 있는 것을 아닐까?"
"악어가 겁나?"
"아니, 악어 큰 놈 한 마리 잡아서 악어백을 만들고, 그래도 남으면 신발
도 하나 만들어야지."
"그래도 남거든 내 신발도 하나 만들어줘."
토끼 바비큐를 먹고나서부터는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여유도 생겼
다. 기분이 좋은 상태라서 강을 따라 내려가는 걸음걸이도 빨라졌다. 강을
따라 걷는 풀숲에는 꽃들이 온갖 색깔로 단장하고 강물과 어우러져 평화로
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비가 개이고나자 습기가 남아서인지 끈적끈적
하고 땀이 배어 나왔다.
"체, 언제쯤 사람사는 곳이 나타날까?"
"강이 있으니까 곧 마을이 나타날거야."
"강이 있다고 사람이 산다는 보장이 있어?"
"어렸을 때 우리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사람은 물을 떠나 살 수 없으므
로 마을은 반드시 물을 끼고 있다고. 세계의 큰 도시들을 생각해봐. 꼭 강
을 끼고 있잖아."
"그 말이 맞다고 하자구. 그런데 이 강이 아마존강이라면 식인종이 살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런 걱정은 놓으시지. 이 지역에 식인종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
거든."
얼마를 가지않아 나뭇가지에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
다. 대머리 검은 독수리는 날아오를 생각도 하지 않고 체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작은 나뭇가지에는 주황색과 푸른 색깔이 조화를 이룬 앵무새 무
리가 새 모양의 열매를 달고있는 나무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작은
풀잎 위에 앉은 잠자리가 체의 발걸음소리에 놀라 날아갔다. 체가 주위의
자연들을 감상하며 걷는 동안 알베르토는 벌써 15미터정도 더 앞서가 버렸
다. 그런데 앞서가던 알베르토가 뒷걸음을 치며 체에게 달려왔다. 그의 얼
굴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알베르토, 정말 식인종이 나타났나보구나?"
숨을 몰아쉬던 알베르토가 어깨에 메고있던 총을 벗어들고 총알을 끼워
넣었다. 체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야?"
"엄청나게 큰 뱀이 있어. 10미터도 넘는 것 같아. 우리 둘을 먹어치우고
도 남겠더라구."
체가 껄걸 웃었다.
"알베르토, 겁먹지마. 그건 아마 구렁이 종류일거야."
체가 앞서 걸어갔다. 체는 몇 미처 못 가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
다. 그리고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알베르토
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알베르토 저기 녹색 뱀이 보여? 저건 뱀을 조심해. 물리면 치명상을 입
을 수 있는 독뱀이야. 네가 보았다는 큰 뱀은 자기에게 위험을 가하지 않
으면 별 위험이 없지."
알베르토가 놀라 도망왔던 자리에는 커다란 보아뱀이 허물을 벗고있는
중이었다.
"새 옷을 갈아입는 중이군."
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몇 시간을 걸었지만 인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주위는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야영을 해야될 것 같군."
"그러면 날이 더 저물기 전에 야영 준비를 하자구."
"그래, 서두르는게 좋겠어. 빨리 텐트도 치고 땔감도 구해야될 것 같군."
그러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모기들이 떼지어 몰려와 체와 알
베르토를 괴롭혔다.
"모기떼가 덤비니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아."
"너무 걱정마, 모깃불을 피우면 돼."
알베르토와 체는 함께 텐트를 치고 야영준비를 했다.
"알베르토, 내가 나무를 구해올테니까 구덩이를 텐트 옆에 하나, 텐트와
좀 떨어진 곳에 파줘."
체가 뗄감을 구하러 가자 알베르토는 작은 삽을 이용해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배낭에서 버너와 냄비를 꺼내 저녁준비를 서둘렀다. 비상 식량으로
지니고 왔던 콩 통조림을 냄비에 부어 데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땔감을 구하러 갔던 체가 마른 나뭇가지와 풀잎을 한 아름 꺾어가지고
돌아왔다. 두 사람은 텐트 옆 구덩이에 모닥불을 피웠다. 모닥불 불빛에 수
없이 몰려든 모기들이 보이자 알베르토가 큰 소리로 말했다.
"살인모기야. 아마존 모기가 다 모였나봐."
"알베르토를 환영하느라 그러는거야."
체는 웃으면서 타오르는 모닥불 위에 꺽어온 풀잎을 던져넣었다. 눈물이
나올 만큼 매운 연기가 텐트 주변을 감쌌다. 도기들은 연기가 피어오르면
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체는 연기구덩이가 완성되자 텐트와 조금 떨어진
곳에 큰 나무를 모아 화톳불을 지폈다. 화톳불은 뱀이나 짐승들을 막기 위
한 것이었다. 알베르토가 피곤한지 하품을 하자 체는 배낭에서 책을 꺼내
들고 모닥불 가까이로 갔다.
"안 잘거야?"
"알베르토, 내가 보초를 설 테니까 안심하고 자."
체는 모닥불에 의지해 밤이 으슥하도록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12
다음날 알베르토가 먼저 일어나보니 텐트밖은 바람이 불고 비가 흩뿌리
고 있었다.
"체, 일어나! 비가와."
체는 알베르토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알베르토는 벌써
텐트 안의 짐들을 챙기고 있다.
"알베르토, 비온다면서 짐은 왜 챙겨."
"빨리 마을을 찾아 떠나야지. 비상 식량도 통조림 하나밖에 없잖아."
"걱정마. 잠이나 좀 더 자야겠어. 비오는 텐트 안에서 잠자는 기분도 좋
은데?"
"에르네스토, 뭘 믿고 이렇게 느긋해?"
"내 자신을 믿으니까."
체는 침낭 은으로 들어가 누워 버렸다. 짐을 챙기던 알베르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를 따라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알베르토와 체는 빗소리를 자
장가삼아 실컷 낮잠을 잤다.
체가 잠에서 깨어나 시계를 들여다보니 시간은 벌써 오전 11시를 넘고
있었다. 곤히 잠든 알베르토가 깨어나지 않도록 살그머니 텐트 밖으로 나
온 체는 근처 숲으로 들어갔다. 숲속에서 먹을 수 있는 야생 열매를 발견
했다. 양 주머니 가득 열매를 따 담은 체가 이번에는 긴 가지를 꺾어 낚싯
대를 만들었다. 숲에서 나온 체는 곧바로 강가로 나갔다. 강물은 빗물로 흙
탕물이 되어 흐르고있었다. 낚싯대 끝에 열매를 미끼로 단 후 물위를 툭툭
내리쳤다. 몇 번의 시도 끝에 30cm 도 넘는 검은 물고기 한 마리가 낚싯
대를 따라 올라왔다. 체는 다시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강물에 화풀이
를 하는 사람처럼 강물을 내리쳤다. 물고기에게 혼란을 주어 미끼를 물게
하는 방법이었다.
알베르토가 잠에서 깨어났을때는, 체가 강에서 건져올린 다섯 마리의 물
고기중 네 마리가 야자 나뭇잎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냄비 안에서 끓고있는 중이었다.
"에르네스토! 어떻게 된거야?"
"어떻게되긴? 강물에 잠수해 들어가 잡아왔지."
"식인 물고기가 있다던데..."
"피라냐?"
"그래. 피라냐."
"내가 잡아왔잖아. 여기 냄비 안에서 끓고있는 물고기가 피라냐야. 맛은
아주 좋다고 하더군. 다 끓었는데 먹자구."
알베르토는 인상을 찌푸린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 먹겠다는거야? 배고프지 않은 모양이군."
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 알베르토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알베르토, 어서 먹어. 이 물고기는 피라냐가 아냐. 그리고 피라냐면 어
때서 그래?"
알베르토는 피라냐의 모양에 대해 묻고, 냄비 안의 물고기를 살펴본 다
음 물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물고기를 끓여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는 숲
속에서 따온 열매를 먹었다. 검푸른 색의 작은 열매는 새콤한 맛이었다.
텐트를 걷고 짐을 챙겨 다시 강을 따라 이동했다. 강은 이제 완전히 넓
어져 배 없이는 절대로 건널 수 없는 큰 강이 되었다. 비 내리는 하늘은
오후가 되면서 어두컴컴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있건 체가 갑자기 발걸
음을 멈추었다.
"에르네스토, 왜 그래."
알베르토가 긴장하며 물었다.
"저 앞에 마을이 있는 것 같지? 강변에 희미하게 보이잖아."
알베르토는 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움막같은 집
들이 보였다.
"마을이 분명해. 알베르토, 빨리 가보자."
체와 알베르토가 마을 가까이 다가가도 비가 내리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빗물을 수건으로 훔치고 다시 마을을 바
라보았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떼의 마을 사람들이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아마존 원주민인 그들은 한쪽 눈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한쪽 팔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코가 없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알베르토! 우리가 찾던 산 파블로 마을이야."
일행의 앞에 서 있던 애꾸눈의 사내가 말했다.
"페프라 식민지 산 파블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
람들이 없다보니 밖의 소식이 궁금하군요. 며칠 머물며 푹 쉬다가 가세요."
알베르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막상 와 보니 그들 대다수는 양성환자인
듯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오지에서 더구나 양성인 환자들이 변변한 약도
하나 없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딱해보였다.
"알베르토, 우리 생각대로 어려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마음
은 정말 착한 것 같아."
체의 말에 알베르토는 나병환자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알베르토와 체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집으로 안내되었다. 나무로
만든 집에 갈대를 엮어 지붕을 얹은 집이었다. 바로 옆에는 지붕 위에 나
무로 만든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교회 건물인 것 같았다.
교회의 부속건물같은 이 집은 비교적 깨끗하고 넓었다. 앞장서서 안내를
맡았던 남자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 체와 알베르토에게 들어오라는 손짓
을 했다. 체가 먼저 들어가고 알베르토도 따라 들어갔다. 집안에는 나무로
된 탁자와 의자, 해먹이 하나 걸려 있었다.
집안을 둘러보던 체가 물었다.
"여기는 누구 집입니까?"
"신부님이 살아 계실 때 사용하셨던 집입니다."
"신부님이 돌아가셨단 말씀입니까?"
"몇 달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부님이 오시겠군요."
"안 오실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선생이 새로 오시는 신부님인줄 알
았습니다."
애꾸눈 남자는 말끝을 흐렸다. 그 동안 알베르토는 해먹을 이리저리 당
겨보더니 해먹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알베르토의 행동을 바라본 애꾸눈
남자가 알베르토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체가 애꾸눈 남자를 향해 물었
다.
"신부님도 안 계시다면 이 마을 촌장을 만나보고 싶군요."
애꾸눈 남자가 체의 맑은 눈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자신이 촌장이라고 밝
혔다.
"촌장님, 저희는 남미 대륙을 여행중인 의사와 의대생입니다. 원래 여러
곳을 돌다가 이곳을 들러 보기로 해서 이렇게 온 것입니다. 저희가 무슨
약을 갖고 오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여러분의 상황 을밖에 알리고 싶었습니
다."
애꾸눈 촌장은 체의 말을 듣고는 너무나 기쁜 표정을 짓더니, 문밖에 몰
려와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 무슨 말인가를 하는 것 같았다. 애꾸눈
촌장의 말을 듣고 난 마을 사람들은 모두 마을 안으로 돌아갔다. 애꾸눈
촌장은 다시 들어와 체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여행중이라고 하셨지요? 어디어디를 다녔습니까?"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바다와 사막, 그리고 광산촌, 잉카의 유적지들과
마추픽추까지 돌아 여기에 왔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겠군요. 여기는 농작물을 거두어가는 시기가 아니
면 사람들이 오지를 않아요."
"농작물을 밖에 내다가 팔기도 합니까?"
"팔 수 있는 농작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땅은 식민지나 마찬가
지랍니다. 땅 주인이 수확한 농작물을 모두 거두어 간답니다. 우리는 주인
이 주는 배급을 받아먹고 살고 있지요. 우리들이 이곳에 옮겨오기 전에는
쓸모없는 황무지였답니다. 저처럼 몸이 불편한 나병환자들이 온몸을 바쳐
개간해서 만든 땅이지만, 땅주인이 따로 있으니 이렇게 가난하게 살 수밖
에 없습니다."
체와 애꾸눈 촌장의 말을 들으며 해먹에 누워있던 알베르토가 일어나 앉
으며 한마디했다.
"왜 착취당하며 삽니까. 땅주인과 맞서 싸우든가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될
것 아닙니까? 이 넓은 땅에서 갈 곳은 얼마든지 있을텐데요."
"우리라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들 몫의 땅은
어느 곳에도 없어요. 사람들은 자기네 땅에 우리같은 문둥병 환자들이 사
는 것을 싫어한답니다. 곡물을 바치더라도 이곳에서 사는 것이 마음은 편
안해요. 우리가 곡물을 바치지 않으면 필요한 약품도 지급받지 못해요."
"촌장님은 여기서 오래 사셨습니까?"
"나병환자가 된 후 이곳에 들어왔으니까 10년쯤 되어가나보군요."
"전에는 어디에서 살았습니까?"
"이곳에서 꽤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살았지요. 가축을 기르고, 농사도 짓
고, 축제때는 멋진 옷을 차려입고 축제에 참가하러 큰 마을로 가기도했지
요. 물건을 사러 큰 마을 장터에 나가 본 지도 15년이 넘었나보군요. 이곳
으로 온 후 바깥구경을 한 번도 못했으니까요."
알베르토는 촌장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해먹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았
다. 나무를 잘라 만든 의자는 낡아 조금만 움직여도 삐거덕 소리를 냈다.
밖에는 내리던 비가 멎어 있었다. 집밖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촌장이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잠시후 촌장이 문 밖에서
체와 알베르토를 불렀다. 체와 알베르토가 밖으로 나가자 교회 마당에는
음식이 놓이고 수십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니 믿을 수 가 없었다.
체와 알베르토가 가까이 다가가자 웅성거림이 멎고 긴장된 표정들을 내
보였다. 애꾸눈 촌장이 체와 알베르토를 소개했다.
"여러분! 아까 들어서 알고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두 분은 우리 마
을에 찾아오신 손님들입니다. 우리에게서 무엇을 빼앗아가기 위해 온 손님
이 아니라 친구가 되기위해 오신 손님입니다. 친구인 이 두 분은 남미대륙
을 여행중이랍니다. 이쪽은 의대생인 에르네스토 게바라씨이고, 이쪽은 의
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스씨입니다. 여기 머무는 동안 우리 모두의 친구이
고 손님이니 여러분이 극진히 모시기 바랍니다."
체와 알베르토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모여있던 사람들이 박수
를 치고 다시 웅성대기 시작했다. 모여있는 사람들 가운데 물고기와 바나
나를 삶은 그릇이 여러개 둥그렇게 놓여있었다. 손님을 환영하며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먹을 음식이었다. 애꾸눈 촌장은 체와 알베르토에게 음식을
먹자고 권했다. 바나나 잎을 잘라 그 위에 삶은 바나나와 삶은 물고기를
얹어 체와 알베르토에게 주었다. 소금으로 간하고 마늘을 넣어 삶은 물고
기였다. 바나나잎을 그릇으로 사용하고 손으로 식사를 해야하는 불편은 있
었지만, 배고픈 체와 알베르토에게 삶은 물고기와 바나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식사였다.
13
알베르토는 음식을 먹고 들어온 후 해먹에 올라가 잠이 들었다. 체는 나
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애꾸눈 촌장이 소년 한 명을 데리고 체
와 알베르토를 찾아왔다. 알베르토는 잠이 깊이 들었는지 일어나지 않았다.
체와 알베르토를 깨우려고하자 애꾸눈 촌장은 그냥 놔두라고 말했다.
"저녁에 주무실 때 필요한 해먹을 가져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침대보다는 해먹이 유용합니다."
애꾸눈 촌장을 따라온 소년은 언뜻 보아서는 나병환자같지 않았다. 체가
해먹을 달아매고 있는 소년을 유심히 바라보자 애꾸눈 촌장이 묻지도 않는
대답을 했다.
"제 아들녀석입니다. 저 아이는 환자가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선생님, 부탁이 있는데 저 아이를 바깥세상으로 데려가주시겠습니까?"
"저 아이의 이름이 뭡니까?"
"마리오라고 합니다."
"마리오, 이리와 앉아볼래?"
체의 말에 마리오는 체의 맞은편 의자에 앉히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
리오는 애꾸눈 촌장의 말처럼 아무런 이상이 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귓볼
과 목부분에 나병환자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었다.
"마리오도 치료를 해야 합니다. 부모 마음은 누구나 당신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면 상태는 더 나빠집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이 아이는 정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정상이라고 해도 이미 병이 시작된 실정입
니다."
"제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드렸나봅니다."
"촌장님이 오해하시는 겁니다. 마리오를 데리고 가든지 안 데리고 가든
지 하는 문제는 나중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오의 목과 귓볼에 증상
이 나타나고있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마리오, 집으로 돌아가자."
실망한 촌장이 돌아가려하자 잠자코 듣고만 있던 마리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과 이야기좀 하다가 가면 안 될까요?"
마리오가 촌장과 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촌장님, 그렇게 하시지요."
체와 마리오를 힘없이 응시하듯 바라본 애꾸눈 촌장은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리오, 네 마음대로 해라. 먼저 가마."
애꾸눈 촌장은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애꾸눈 촌장은 나병환자촌의
아이들은 부모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대를 이어 나병환자촌의 아이들을 부
모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대를 이어 나병환자가 되어간다 말했다. 마리오도
태어나서는 나병환자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님
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체였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리
오는 체가 읽다가 덮어놓은 책을 이리저리 뒤적여보았다.
"마음에 드니?"
"글씨도 모르는걸요."
"그렇구나. 나이는 몇 살이지?"
"열네살입니다."
"열네살, 참 좋은 나이구나. 여기서 태어났니?"
"네."
"이 마을에 책을 읽거나 글씨를 아는 사람이 누구지?"
"이젠 없어요. 어른들이 그러시는데 전에는 신부님이 책도 보시고 글씨
를 알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는데, 앞으로는 약을 바꿀때나 곡식을 거두어
갈 때 문제가 있을거라고 했어요."
"마리오, 기회가 주어지면 글씨를 배우고싶니?"
"물론이지요. 지난번에 신부님께서 병이 나으시면 글을 가르쳐주시기로
했었어요. 그런데 상태가 더 나빠져 글도 가르쳐 주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
나셨어요. 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요. 책을 읽게 되면 여기서 살지 않아
도 되나요?"
"왜, 여기서 사는 것이 싫어?"
"세상 밖으로 나가보고 싶어요. 큰 배도 타 보고 싶고요."
"마리오! 넌 꼭 그렇게 될 수 있을거야."
"글을 가르쳐 줄 사람도 없잖아요."
"왜 없어. 내가 가르쳐줄거야."
"글을 가르쳐 주신다구요?"
"그래."
"여기서 우리하고 함께 살 거예요?"
"그래, 네가 글을 익힐때까지는 머물게."
체가 말하자 마리오는 환호성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후 마리
오는 촌장과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에르네스토, 마리오말이 정말입니까? 여기 머물겠다고 말하셨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체의 대답에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한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기뻐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해먹에서 잠자던 알베르토가 놀라
일어났다.
"무슨 일 있습니까?"
"에르네스토가 여기 머물기로 했습니다."
"에르네스토! 그 말이 정말이야?"
"알베르토, 평생 살겠다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그래? 하긴 우리가 이곳에 온 것도 나환자들의 상황을 살피겠다는 것이
었으니 당분간 머물러도 괜찮겠지. 그럼 우리 함께 우리가 이곳에서 할 일
을 찾아보자."
"좋아, 글 모르는 아이들에게 글도 가르쳐주고, 일도 도와주고, 강에 나
가 물고기도 잡고, 의사로서 환자도 돌보고, 할 일이 정말 많겠네."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종이와 연필 책이 있어야 할 것이고, 진료
를 하려면 약품과 의료 기구가 있어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야."
"그렇지만 우리 나름대로 방도를 찾아낼 수 있을거야. 그게 에르네스토
너의 장기 아니니?"
체와 알베르토는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이곳에서 할 일을 의논했다.
체가 밤늦게까지 혼자서 자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든 사
이 소란한 소리가 들려 깨어났다. 알베르토의 해먹이 비어있어 밖으로 나
와보니 알베르토가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갈대를 엮고 있었다.
"에르네스토, 일어났군. 여기 와서 갈대 좀 날라다줘."
"지금 뭐 하는거야?"
"보시다시피 지붕 얹을 갈대를 엮고 있잖아. 이 마을에 내일 결혼할 사
람이 있다는거야. 그래서 지금 집을 짓는 중이야."
알베르토는 나병환자촌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무척 즐거워했다. 두
사람은 배낭에 지니고 다녔던 비상약품을 이용해 사람들의 가벼운 상처를
치료하고,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비록 종이도 연필도 없었지만, 나
뭇가지와 고르게 만든 땅바닥은 천연의 필기구가 되어 주었다.
때때로 체와 알베르토는 마을 사람들을 따라 고기잡이를 나가기도 했다.
아마존 강의 고기잡이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작살을 이용하거나 그
물을 이용하기도 하고, 낚시로 물고기를 낚아 올리기도 했다. 체는 낚싯대
를 이용한 물고기잡이를 좋아했다. 알베르토는 몇 번 고기잡이를 나갔다
온 후 식인 물고기 피라냐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 알
베르토는 작은 쪽배가 뒤집혀 피라냐에 물릴까 두려워 한동안은 배타고 강
에 나가는 것을 겁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뱃머리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거나 그물을 끌어당기는 일도 거들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잡아온 물고기는 공평하게 함께 나누는 것이 이 마을의
규칙이었다. 알베르토와 체에게도 물고기는 분배되었다. 두 사람은 분배받
은 물고기를 훈제하거나 말려서 보관하는 방법도 익혔다. 낮동안에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노동을 하고, 밤이 되면 아이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들려
주거나 마을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해주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아이를 낳은
여자들이 있으면 아이를 받아주는 산파역할까지 맡아 해냈다. 의사가 없는
이곳에서 두 사람은 소아과, 피부과, 내과, 산부인과에 이르기까지 종합 진
료를 맡아야 했다. 약품과 기구가 없어 치료를 못하는 경우도 자주 발행했
다. 체와 알베르토는 그때마다 약초의 이름과 모양을 꼼꼼히 기록했다. 언
젠가는 이런 약초로 치료약을 개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산 파블로 나환자촌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바빴지만 두 사람에게 이
번 여행중 가장 보람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달 가까이 지내자 어느덧 체
와 알베르토가 떠나기로 작정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알베르토, 내일 떠나야겠지?"
"난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나는 여기 남겠어. 마을 사람들은 아직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 의사로
서의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것 같아."
체는 알베르토의 이런 결심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체가 나
머지 학업을 마치고 의사가 되면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다음날 오후 마을 사람들은 체를 배웅하기 위해 선착장에 모였다. 보슬
비가 내리고 있는 선착장에는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나
병환자들로 발디딜 틈도 없었다. 그들 앞에는 갈대로 만든 나룻배가 하나
있었다. 애꾸눈 촌장이 체에게 배에 타라고 말했다. 체는 촌장의 고맙다는
인사말에 답해 한마디했다.
"그 동안 여러분과 참으로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가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인간과 인간의 유대감이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점입니다. 저는 사랑의 최고 형태는
고독하고 절망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싹튼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살
아있는동안 저는 여러분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언젠가는 여러
분을 만나러 다시 오겠습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내 친구 알베르토가 여
러분과 함께 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사십시
오."
모여있던 사람들은 선착장에 서 있는 알베르토와 배에 타고있는 체를 번
갈아 바라보며 박수를 치고 기뻐했다. 체는 들고있던 책 한 권을 마리오에
게 주었다.
"마리오! 곧 책을 읽게 될 거니까 이 책을 받아두거라. 그리고 글을 읽게
되면 편지를 하도록 해라. 내가 책을 보내주마."
체가 마리오에게 건네준 책은 체가 도착하던 날 마리오가 들쳐보았던 책
이었다. 마리오에게 책을 주고 나자 마을 사람들은 이별의 노래를 불러주
었다. 체가 탄 배는 이슬비를 맞으며 서서히 멀어져갔고, 마을 사람들의 노
랫소리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노랫소리는 작아져도 마을 사람들 모두가
전해주는 그 마음은 체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체는 산 파블로 마을
에서의 경험을 통해 우리라는 낱말이 지닌 공통감정, 인류에 대한 애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1952년 6월 21일의 일이다.
14
체가 아마존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지막 지점에 이를 무렵, 날개를 활짝
펴고 유유하게 비행하는 콘도르를 보았다. 산 파블로 나병환자촌에서 여기
까지 따라온 콘도르일 것이라고 멋대로 단정했다.
해질무렵 체는 볼리비아 산 속에 있는 마을로 들어갔다. 산중턱까지 밭
을 개간하여 농작물을 경작하는 인디오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아이들이 노새의 일종인 라마를 친구삼아 노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머루처럼 맑은 눈망울을 가진 까만머리의 이디오들이었다. 하지
만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과는 달리 씻은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를만큼 얼굴
과 손발에는 때가 덕지덕지 끼여있었다. 문명과는 거리가 먼 이들은 태어
나서 한 번 목욕하고, 결혼전날 한 번 목욕하고, 죽을 때 한 번 목욕한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하지만 비록 이들이 문명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못하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이 넘친다는 것을
체는 이미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외국 사람을 처음 보았는지 아이들이 말
을 붙이기도 전에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바람에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안
으로 들어갔다.
체는 그곳에서 통치마를 겹겹이 입고 모자를 쓴 전형적인 인디오 여인들
을 보았다. 통치마를 많이 껴입는 것은 인디오에게는 부의 상징인데 여간
불편해보이는게 아니었다. 체는 하룻밤 묵어 갈 집을 묻기 위해 그녀들에
게 다가가자 그들도 역시 아이들처럼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난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피하지 마십시오."
체는 스페인어로 말하고 나서 그들의 반응을 보았다. 인디오들 중에는
케추아어 말고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할머니 한 분이 체에게 다가오며 스페인어로 물었다.
"어딜 찾고 있소?"
"할머니, 여행중인 사람인데 하룻밤 묵어갈 곳을 찾고 잇습니다."
"이런 산중에 뭐 볼게 있다고 여행을 하슈? 보다시피 산중 마을이라 우
리가 사는 집이 전부인데 이를 어쩌나."
"빈 방이라도 있는 집이 없으면 침낭이 있으니 헛간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따라오슈."
체가 할머니를 따라 들어간 집은 흙벽돌로 지은 작은 오두막이었다.
"이 방을 쓰시우. 오랫동안 비워 둔 방이지만 헛간보다는 나을거유. 우리
아들이 쓰던 방인데 걔는 지금 광산으로 일하러 갔다우."
할머니는 묻지도 않은 말들을 늘어놓으며, 나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있던 물건들을 치웠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꾀죄죄한 옷가지, 한쪽
귀퉁이에는 말린 옥수수와 감자가 놓여있었다.
"이 집에서 할머니 혼자 사십니까?"
"지금은 그렇지."
"외롭지 않으세요?"
"딸네가 가까이 있어 외롭지는 않다우. 그리고 아들이 곧 광산에서 돈
벌어 돌아오면 함께 살게 된다우."
할머니의 말에는 희망과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그런 희망마저 없다면
이런 생활 속에서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이 마을에는 스페인어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려, 케추아어를 쓰는 사람이 더 많다우. 나는 처녀적에 도시로 나가는
바람에 스페인어를 할 줄 알고."
할머니는 자신이 스페인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모양이
었다.
"할머니, 마을에 들어서면서 아이들과 여자들은 많이 보았는데 남자들은
못 본 것 같습니다."
"당연히 남자 구경하기가 힘들지. 힘 좀 쓰는 남자들은 광산으로 돈벌이
하러 나가고 없다우. 이 마을에서 우리 큰아들이 제일 먼저 광산에 취직해
나갔고, 다음은 둘째, 그리고 사위가 광산에 취직이 되면서 연줄 연줄로 돈
벌이를 나갔다우. 우리 애들은 나한테 배워서 스페인어를 할 줄 알거든."
할머니는 혼자 살고 있지만 곧 돌아올 아들이 있다는 것과 이 마을에서
는 영향력있는 집안이라는 사실을 체에게 알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할머니! 농사짓는 땅은 많으세요?"
"왜 그런걸 묻는거유?"
"궁금해서요. 나라에서 토지분배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요."
"토지분배라는거 하나마나지 뭐. 내가 일군 땅인데 인정만 해준 게 무슨
토지 분배여."
할머니는 토지 분배 정책이 별로 달갑지 않은 것 같았다. 잠시 방을 나
갔던 할머니가 체에게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불렀다. 바로 옆에 있는 할머
니 방은 체가 묵게 된 방보다 규모는 조금 큰 방이었다. 방 한가운데 화덕
이 있고 화덕 위에는 새까맣게 그을린 냄비가 올려져 김이 모락모락 올라
왔다. 화덕 옆에는 까맣게 때가 탄 접시가 몇 개 있고, 한쪽에는 나무로 만
든 침대가 누더기 이불에 덮여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빛바랜 성화가 낡
은 액자 속에 걸려 있어 할머니의 종교를 말해주었다. 할머니가 저녁식사
로 내놓은 것은 삶은 감자와 옥수수죽이었다. 이빨도 변변치 못할 할머니
는 감자보다는 옥수수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할머니 농사지으면 먹을 것은 충분하세요?"
"나 혼자 먹는데, 얼마나 먹겠수. 충분해. 하지만 아이들이 많이 있는 다
른 집들은 농사지은 것만 가지고 먹고살기가 어렵다우."
할머니는 옥수수죽과 감자를 맛있게 먹는 체에게 자기가 먹던 감자를 덜
어주었다. 인정 많은 할머니였다. 저녁을 먹고 나서 10여분쯤 지났을 때 문
밖에서 다급하게 할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웃에 살고 있다는 시
집간 딸이었다. 아직 젖먹이인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아이는 숨을 쉬지 못
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아이가 왜 이렇습니까?"
체가 아이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아기에게 둥근 나무열매를 가지고 놀라고 주었는
데 삼켜버렸어요."
"아기를 이리 주십시오."
체의 말에 아기 엄마는 아기를 꼭 끌어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기를 살려줄테니 걱정말아요. 나는 의사입니다."
"의사선생님이라고 하잖아. 어서 아기를 선생님께 맡겨."
친정 어머니인 할머니의 말에 여인은 아기를 체에게 건네주었다. 체는
아기를 받자마자 아기의 가슴에 깍지낀 손을 바치고, 아기의 상체를 거꾸
로 뒤집어 몇 번 흔들었다. 아기의 목구멍에서 어른 엄지손톱만한 둥글고
검은 열매가 튀어나왔다. 아기는 기도를 막고있던 열매가 튀어나오자 막혔
던 울음을 터뜨렸다. 체는 우는 아기를 엄마에게 안겨주며 아기가 편안하
게 쉬도록 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이엄마는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하
며 집으로 돌아갔다.
"의사 선생님이 요술도 하나보네요."
할머니는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난 일
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외손녀딸이 여차하면 죽을 뻔 했
는데, 생각지도 않은 손님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시간에 약도 없이
손으로 아기를 고쳤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조금 전에 보신 것은 요술이 아닙니다. 응급처치라고 하는 것인
데 할머니도 하실 수 있습니다. 외손녀를 위해서 배워 두시겠습니까?"
체의 말에 할머니는 자기는 그런 것을 배우지 못한다고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권할 수도 없어 체는 내일 날이 밝으면 가르쳐 주겠다고 생각하고
잠을 자러 건넌방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체는 잠이 깨었다. 마을
아낙들이 몰려와 있었다. 대다수가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었다. 할머
니와 시집간 딸은 작은아이, 큰 아이, 어젯밤 소동의 주인공 젖먹이까지 다
섯을 데리고 왔다. 그녀의 손에 닭이 한 마리 들려 있었다.
"아기는 괜찮으세요?"
아기의 안부를 묻자, 할머니의 딸은 수줍어하면서 닭 한 마리를 체에게
내밀었다.
"이런 거 안 주셔도 됩니다. 가져가십시오."
체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여인은 막무가내로 닭을 체에게 안
겨 주었다. 체는 하는 수 없이 닭을 받아 할머니한테 맡겼다. 그러자 여인
은 치마폭에 숨어있던 남자아이를 체 앞으로 내세웠다. 아이의 다리에는
종기가 생겨 고름이 고인 체 썩어가고 있었다. 체는 아무런 비상약도 없어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집으로 몰려온 사람들은 여인에게서 이야기
를 전해듣고 몰려온 환자들이었다. 그러나 체에게는 변변한 의료장비도, 약
품도 없었다.
"여러분중에 약품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어요? 여러분을 치료하려면 약
품이 필요해요."
체의 말에 사람들은 체의 눈빛만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체는
자신의 질문에 대해 곧 후회했다. 물으나마나 한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여인은 젖먹이는 약 없이도 고쳤는데, 왜 그러느냐며 사내아이의 다리를
고쳐달라고 졸랐다. 체는 할머니에게 소독약으로 쓸 수 있는 약초와 수술
후 상처를 아물게 할 약초이름을 알려주고 구해 달라고 말했다. 수실집기
도 없어 등산용칼을 불에 달구어 고름 주머니를 제거했다. 아이는 놀라 기
절했다가 깨어났다. 그리고 산 파블로 나병환자촌에서 썼던 약초를 이용해
상처를 감쌌다. 이 방법은 원시적이긴 하지만 이미 산 파블로에서 성공했
던 치료방법이었다. 며칠 후 다리에 난 종기를 수술했던 할머니 외손자의
다리는 상처에 새 살이 돋아난걸 확인할 수 있었다.
체는 며칠동안 마을에 머무는 동안 아침나절에는 할머니를 돕고 오후에
는 마을 아이들의 질병을 돌보았다. 비탈진 언덕에 있는 감자밭에 올라가
감자도 캐고, 옥수수를 수확하는 일도 했다. 특히 비탈진 밭에서 감자와 옥
수수를 집까지 옮기는 일은 할머니 혼자서 하기에는 힘든 일이었다.
"의사선생 덕택에 내가 호강을 했구먼. 내가 욕심을 너무 부리는지 모르
겠소만, 여기서 아주 살면 안 되겠수? 우리들 병도 고쳐 주면서..."
할머니는 체가 떠날 준비를 하자 눈물을 보이며 떠나지 말라고 했다. 그
동안 친하게 지낸 마을 사람들도 체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할머니 집으로
모여들었다.
"선생님, 가지 마세요."
이 마을을 처음 들어섰을때는 말도 붙이기 전에 도망쳤던 아이들이 이번
에는 체의 옷자락을 붙들고 떠나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저는 아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다시 올 것입니다. 그때는 약
품도 가져오고 의료기구도 가져오겠습니다."
체는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마을 아낙들은 길을 가면서 먹을 수 있도록 감자를 삶아가지
고 온 사람도 있었고, 과일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체를
배웅하기 위해 마을밖에까지 따라나왔다. 할머니도 손을 흔들면서 한 손으
로는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15
산 속 깊은 골짜기에 어둠이 똬리를 틀 시간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체는 인디오 마을을 떠나 이틀도 못 돼 마을 사람들이 준 감자들의 음식이
모두 떨어졌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야생과일만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
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나니 야생과일만으로 끼니를 때우고 노숙을 했
다가는 체력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오랜 여행으로 체력이 약해진 탓도
있지만, 함께 여행하던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스가 곁에 없고 혼자 여행
을 계속 한다는 것 때문에 마음마저 약해졌던 것이다.
산등성이를 넘어 골짜기로 들어서면서 눈앞에는 개간한지 오래되진 않은
목초지가 펼쳐졌다. 체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목초지나 밭이 나타
나면 근처 어디쯤에 민가가 있는 것은 뻔하지 않은가. 그러나 목초지가 있
는 골짜기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가축이나 민가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해 산보퉁이 하나를 돌아서자 신기루처
럼 멀리 짐 한 채가 눈앞에 띄었다. 체는 기력이 약해져 허깨비를 본 것이
아닌지 눈을 비벼 보았다.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기는 사흘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걸으면서 끼
니를 야생과일과 열매로 연명해왔으니 시력인들 정상이겠는가.
발걸음을 서둘러 집을 향해 가니 산자락 끝에 매달리듯 들어앉은 외딴집
의 윤곽이 더욱 뚜렷해졌다. 오두막보다는 조금 규모가 큰 흙벽돌집이었다.
집 주위에는 나무울타리로 양들을 가두어 둔 것으로 미루어 목축을 하며
사는 집 같았다. 체가 외딴집에 다다랐을 때 엷은 어둠이 온 세상을 지배
해버린 뒤였다. 외딴집 문 앞까지 다가간 체가 주인을 찾았다. 나무로 된
문이 열리고 집안에서 깡마른 인디오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
다.
"지나가는 여행객입니다. 하룻밤 묶어 갈 수 있을까요?"
외딴집 남자는 한쪽 팔이 없었다. 그는 재빨리 체의 차림새를 살폈다. 문
을 닫고 밖으로 나온 외딴집 남자는 일행이 있느냐고 물었다.
"저 혼자입니다."
"혼자 이런 오지를 뭐하러 다니십니까?"
"사정이 그렇게 됐습니다."
"광산 찾으러 다니십니까?"
"제가 광산업자처럼 보이십니까?"
"이런 깊은 산 속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그렇지요."
외딴집 남자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빠끔히 문이 열리고, 아이들 셋
과 부인인듯한 여자가 체를 바라보았다.
"보시다시피 집이 작고 외딴 곳이라서 우리 가족이 사용하는 침대밖에
없는데 어쩌지요?"
"밤이슬만 피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제게 침낭이 있습니다."
체의 말에 외딴집 남자는 일단 집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집안은 생각
보다 훨씬 넓고 깨끗했다.
"식사도 아직 못하셨겠군요. 뭐라고 불러야 될까요?"
"에르네스토 게바라라고 합니다."
"내 이름은 미겔입니다."
미겔은 아내와 아이들 셋을 체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 마
이라에게 체가 먹을 저녁식사를 준비시켰다.
"미겔, 이곳에 오래 살았어요?"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 전에는 광산촌에 살았지요. 은광의 광부였거든
요."
"가까운 곳에 광산이 있습니까?"
"여기서 3레구아(135km정도)쯤 떨어진 곳에 광산촌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미겔은 광산에서 돈을 많이 벌었나 봅니다. 밖에 양들이 꽤
많이 있던데요..."
"광산 일을 해서 저만큼의 양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 양들은 제
것이 아닙니다."
미겔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겔의 아내 마이라는 감자
와 옥수수, 그리고 양젖을 내왔다. 체로서는 몇 달만에 보는 양젖이었다.
"마을과 많이 떨어져 있어 먹을 것이라고는 이런 것밖에 없어요. 부족하
더라도 많이 드세요."
부끄러움이 많은지 마이라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구석진 자리로 물러
났다. 체가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돌리자 마이라는 고개를 꺾고 벽
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인! 잘 먹겠습니다. 며칠동안 식사를 못한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식사
입니다."
체가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미겔은 양을 돌아보고 오겠다고 방을 나갔
다. 미겔의 아이들은 자신들과 피부색이 다르고 생김새도 다른 체가 신기
한 듯 바라보았다.
"얘들아, 함께 먹자."
체가 옥수수를 내밀자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낄낄대며 웃었다.
"아이들이 참 귀엽습니다."
미겔의 아내 마이라를 향해 아이들 칭찬을 하자 마이라는 수줍은 미소를
내보였다.
양들을 돌보러 밖으로 나갔던 미겔이 들어왔다. 미겔의 아내가 작은아이
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별일 없지요?"
"아무일 없어. 양을 지키는 개를 한 마리 살 수 있으면 자주 나가 보지
않아도 될텐데.."
체가 음식을 모두 비우고 나서 미겔에게 물었다.
"이런 외딴 곳에도 양을 누가 훔쳐갑니까?"
"깊은 산속이라 야생여우나 들개들이 양들을 잡아먹곤 합니다."
"그렇겠군요. 미겔! 광산에서 팔을 다쳤습니까?"
"예."
"어쩌다가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으셨습니까?"
"이 정도는 심한 것도 아닙니다. 저는 걸을수도 있고 한쪽 팔도 남아있
지만, 함께 일했던 사람들 중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누구 도움 없
이는 움직일 수도 없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정도인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산에서 사고는 흔히 있는 일이지요. 갱이 무너지
거나 다이너마이트가 터질 때 사고가 많이 일어나지요. 제 경우는 다이너
마이트 때문에 이렇게 됐답니다."
"안전사고였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광산에서 일한다는 것은 안전을 보장받
을 수 없어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것이지요. 광산 노동자들
의 생활은 노예와 같아요. 그래서 광부들은 피 한 방울이 은 한푼이라는
말을 하지요."
"미겔, 나도 그 말에는 공감합니다. 여행을 시작한 후 칠레에서 광산 경
비일을 한 적이 있으니까요."
"광산에서의 노동이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요. 하지만 내가 일
했던 광산은 정말 힘들었어요. 게다가 임금이 너무 적어 추위와 배고픔 그
리고 갖가지 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게 된답니다."
"신혁명 정부는 광산들을 국유화시키면서 임금을 인상시켜 줬다고 들었
는데, 사실이 아닙니까?"
"임금을 인상시켜 주면 뭐합니까? 다시 빼앗기는 거나 다름없는데..."
"다시 빼앗기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외형적으로 보면 임금이 인상되었지만, 수입의 4분의 1은 광부 조합비
로 내야하고, 채광에 필요한 다이너마이트, 심지어는 곡괭이, 장화 하나까
지도 광부들이 부담해야하니, 임금인상은 허울뿐이랍니다. 실제로 내 수중
에 들어오는 수입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뿐인줄 아십니까. 먹을 것이 부
족해 먹지도 못한 채 어둡고 공기 탁한 갱속에서 몇 시간씩 지내려면 코카
잎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추위와 배고픔, 육체적 고통을 참아내
기 위해서지요. 더구나 코카잎을 사는 데도 당연히 돈이 필요하지요."
"그럼, 지금의 생활이 미겔에게는 나아진 것이군요."
"운이 좋았다고 말했잖습니까. 팔 하나가 날아간 대가로 주어진 일자리
가 이곳입니다. 밖에 있는 양들은 광산이 국유화되기 전의 사장 소유랍니
다. 그가 나를 이곳으로 보내 주었지요. 나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
니다. 햇빛을 보고 살 수 있고, 가족들과 함께 하루를 보낼 수 있어 행복합
니다."
미겔은 자신의 가족들을 돌아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미겔은 곡식을
넣어두는 작은 방 하나를 체에게 내 주었다. 체는 잠들기 전에 미겔의 이
야기를 여행 메모에 남겼다.
16
다음날 약간의 원기를 되찾은 체는 레티시아까지 힘든 여행을 했다. 그
곳에서 잠시 머물면서 여행경비를 마련해서 그는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로
갔다. 카라카스에는 아버지와 친한 경주마 운송업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겨
우겨우 아버지의 친구를 만난 체는 경주마 수송기를 타고 미국의 마이애미
로 갔다. 수송기가 마이애미의 말을 싣고 다시 카라카스와 부에노스아이레
스로 가기 때문이었다. 남미 대륙을 돌아본 체의 눈에 마이애미는 천국과
도 같았다.
푸른 파도와 눈부신 백사장을 끼고 온갖 유흥업소가 밀집된 마이애미는
부와 환락의 세계였다. 이곳에서 체는 남미대륙의 광부와 어부, 농부를 착
취하여 돈을 번 미국자본의 실상을 목격하게 된다. 약 한 달간 마이애미에
머물며 그는 매일 도서관을 다녔다. 그러나 그의 수중에는 돈이 한푼도 없
었기 때문에 식사는 식당에서 접시닦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해결하고 잠은
텐트에서 잤다.
마이애미에서 기다리던 경주마 수송기가 돌아오자 10개월이 넘는 장기간
의 여행을 마치고 학업을 마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다.
"나는 네가 이렇게 무사히 돌아올 줄 알았다. 이제 네가 선택한 의사의
길을 가야지."
체의 어머니 세르나는 아들이 돌아오자 무척 기뻐했다.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보았니?"
"병들고,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할 일이 무엇인지 더 확실히 알았겠구나."
"네."
"나머지 학점을 따고 이제 정식 의사가 되어야지."
"네."
체는 어머니, 그리고 그라나도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의학공부에 몰
입했다. 그는 산 파블로 나환자촌을 떠나기 전에 그라나도스에게 의사가
되어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체는 고등학교에서도 그랬듯이 밤을
새워 공부를 시작했다. 그에게는 여행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고 12과목 이
상 남은 전공과목을 이수해야했기에 1952년 9월부터 모든 시간을 의학공부
에 몰두했다. 1953년 3월 그는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정식 의사가 되
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알레르기에 관한 연구' 였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의 아르헨티나에서도 의사면허증은 상류사회로
들어가는 통행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사로서의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은 체 게바라와는 처음부터 맞는 옷이 아니었다. 의사가 된 다음 체는
잠시 병원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환자들을 진료하는 바쁜 시간이 지나면,
남미대륙 여행에서 만났던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 모습이 떠올랐
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알베르토를 잊을 수 없었다. 그에게 부에노스아이
레스에서의 의사라는 직업은 답답하고 무기력한 삶을 의미했다. 의사가 된
지 두달만에 체는 의사라는 직업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머니, 제가 할 일은 의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만두고 싶습
니다."
그녀는 의사라는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업을 그만두겠다는 체의 결심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 그 이유가 무엇이냐?"
"어머니, 전 여행을 하면서 가난, 굶주림, 그리고 각종 질병과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병든 아이들을 치료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제게는
충분한 약품과 기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행중에 유명한 학자가 되
는 것이나 의학분야에서 큰 공헌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
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이제 그 시기가 왔습니다. 제게 용기를 주십시오. 저는 억압받고 병들고 가
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그의 확고한 신념을 듣고 그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오히려
격려했다. 이렇게되어 1953년 7월, 체는 아르헨티나를 떠나 기차를 타고 볼
리비아로 갔다. 아르헨티나를 떠날 때 그는 자신이 영원해 아르헨티나를
떠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유명한 재산과
의 딸인 훌레이라와 사랑하는 사이였고 돌아오면 결혼하기로 약속한바 있
었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종종 자신의 의지와는 빗나가기 쉬운 법
이다. 그는 '머지않아' 돌아오리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죽을때까지 단
한 차례 그것도 네 시간동안만 아르헨티나에 돌아왔다. 1963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공식초청을 받아 회의차 들른 것이다.
어쨌든 체가 아르헨티나를 떠나 볼리비아를 선택한 이유는 볼리비아에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개혁을 외치는 새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1952
년 4월 9일, 라파스 대학 경제학 교수였던 빅토르 파스 에스턴소로가 노동
조합 출신의 바리엔테스와 협력하여 혁명에 성공, 정권을 잡았다. 에스텐소
로 대통령은 정권을 잡자, 그는 곧 멕시코 혁명 당시와 비슷한 농지개혁을
단행하고 외국자본이 지배하던 광산을 국유화하였다. 이런 개혁조치로 그
는 남미의 진보적,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고 있
었다.
그러나 체가 당시 정치적 문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볼리비아에 갔던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공부한 의학과 자신이 좋아하는 고고학
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부패한 남미대륙의 역대 정권
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볼리비아의 혁명정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
니다. 원래 그는 산 파블로 나병환자촌의 알베르토를 찾아가기 위해 볼리
비아를 경유할 심산이었으나 라파스에 도착한 다음, 이 새로운 혁명의 실
상을 알고 싶어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고산지대에 자리잡은 라
파스에서 하숙을 하며 그는 라파스의 거리를 살펴보았다. 그러던 와중에
체는 그의 인생행로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로호란 사람을 만났
다. 로호는 아르헨티나에서 망명한 반페론주의자였는데 그도 역시 과테말
라로 가려고 잠시 볼리비아에 들른 사람이었다. 그는 29세의 변호사로 체
보다 5살 연상이었다.
"지금 볼리비아의 신개혁정권은 이 나라 주석광산을 국유화시켰다네. 자
네도 알다시피 세계 최대 규모인 주석광산은 혹독한 노동력 착취로도 세계
최고였지. 그 광산을 국유하시키면서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을 인상시켜 주
었다네."
"그 이야기는 지난번에 내가 의사 시험을 보러 떠나기 전에 들었습니
다."
"그렇다면 고지대의 토지를 인디오 원주민에게 분배해준 이야기도 들었
겠군. 사실 원주민들은 16세기 스페인에 정복된 이래 그들 자신의 토지를
단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네."
"로호, 하지만 이 혁명은 부분적으로 실패한 혁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지?"
"내가 거리에 나가보니 인디오들은 여전히 가난과 질병, 힘든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내가 남미대륙을 여행할 때 광산 노동자들이나
인디오들을 만나봤는데 그들은 이 개혁조치들이 자신들의 삶을 결코 개선
시켜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더군요. 그들의 생활은 그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으니까요."
"그렇다네. 나도 실은 이번 개혁조치가 민중들의 실제적인 생활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네."
두 사람이 볼리비아의 정치, 경제 문제에 대해 토론하며 남미 독립의 아
버지 시몬 볼리바르의 동상이 있는 거리에 이르렀을 때 체가 입을 열었다.
"로호! 중요한 것은 모순의 원인들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거라고 생각
합니다. 이 근본원인을 제거하지 않고 현재와 같은 개혁조치에만 만족한다
면 그것은 종양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고 소독약만 바르는 것과 같습니다.
인디오들을 그들의 경제적, 교육적 소외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해서 그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철저히 자각하지 못하면, 그들이 인간답게 사는 것은 아
직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혁명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제 저는 혁명에서 해야할게 무엇인지 안 것 같습니다."
로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체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와 함께 카타비 광산에 가보지 않겠나?"
"산업상 후안 레친이 볼리비아 혁명이 중국혁명보다 더 많은 성과를 거
두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나는 그들을 믿을 수 없다네."
"우리가 현장을 방문해 직접 확인해 보자는 말이군요."
"그렇다네. 신혁명 정부가 광산을 국유화시키면서 임금을 인상시켰지. 왜
그랬겠나?"
"나도 그 문제 때문에 우울합니다. 기업의 소유자가 바뀔 때 임금을 인
상시키거나 상여금을 주는 것처럼 빵 한 조각으로 자신들의 내적 불안을
달래려는 속샘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빵 한 조각으로 개
혁이 끝났다고 한다면 광부들의 생활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직접 찾아가보세."
체와 로호는 카타비 광산을 방문했다. 광산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각대로
당장의 임금인상에 만족할뿐 그 이상의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더구나 임
금인상으로 자신들의 생활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보지도 않았다. 체의 실망
은 무척 컸다.
"너무 크게 기대할 필요는 없었어."
"로호! 왜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지 못할까요? 자신들의 소외를
왜 운명처럼 받아들이려고 하지요? 왜 인간답게 사는 길을 찾으려는 생각
마저 없는 거지요?"
"그건 오랫동안 노예처럼 살아왔기 때문이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몇 푼의 임금인상으로 자신의 존엄성을 지
키는 일을 포기하다니..."
"시글로 광산이나 카타비 광산에서 보았듯이 자신의 일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과 시내 곳곳에서 시위와 전투를 벌이는 사람들과는 다른 세
상 사람들이야. 같은 농민이고 같은 광부들이지만 모두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지."
그날 밤 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저는 아직 라파스에 있습니다. 더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군요.
이 곳은 아주 흥미로운 곳입니다. 볼리비아는 매우 격동적인 사건들을 겪
고 있습니다. 농지 개혁과 광산 국유화가 선포되었고, 나라 전체는 아직도
각종 시위와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장을 한 사람들이 별일도 아닌
데 총을 쏘아대는 엄청난 짓을 보기도 했습니다. 매일 총소리가 들리고 사
상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를 막고 농민, 광부등 군중들을 해산
하기 위해 거의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현재 이곳에서는 인간의 생명
조차 마구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행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페루로
가서 잠시 머물 예정이니 페루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편지해주세
요."
17
체와 로호는 일단 페루로 가서 과테말라로 들어가기로 했다. 과테말라야
말로 남미에서 가장 혁명적인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페루행 트럭에는
다른 인디오들도 함께 타고 있었다. 마치 짐짝처럼 사람들을 실은 트럭은
험한 산길을 달리느라 덜컹거렸다. 이리저리 부딪치는 것 외에는 끝없는
적막감만이 맴돌았다. 체는 같이 탄 인디오들에게 카타비 광산에서 처럼
혁명에서 해야 할 일들을 설명하려 했지만 곧 입을 다물어야 했다. 오히려
적의에 가까운 눈초리로 체와 로호를 응시하고 있는 인디오들 앞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던 탓이다. 인디오들은 죽은 물체들처럼 입술을 꼭 다물
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인디오들과 어떤 말도 붙이지 못한 채 국경에 도착했
다. 그러나 페루 국경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트럭을 살피던
페루 국경의 경비병들은 체와 로호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거기 두 사람이 지도자입니까?"
인디오들은 겁에 질린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로호가 정색을 하며 되물
었다.
"무슨 말입니까?"
"인디오들에게 농촌혁명 사상을 주입시키고 있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
오?"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소."
로호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경비병들을 향해 말했다.
"인솔자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이번에는 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인디오들을 둘러보았다.
"이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우리가 이끌고 왔는지. 우리는 단순한 여
행객인데, 트럭을 얻어타고 왔을 뿐입니다."
경비병들은 인디오들을 훑어보았다. 입을 꼭 다물고 겁먹은 표정으로 앉
아있는 그들은 어떤 대답도 할 것 같지 않았다. 체는 자신이 그들을 대변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은 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해 이곳까지 오게 된 사람들입니다."
인디오들은 체가 자신들을 대변해주고 있는 동안에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눈빛은 체와 로호에게 향하고 있었다. 국경 경비병들은 체와 로호가
농촌 혁명 사상을 주입시키는 사람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좀처럼
통과시키려 들지 않았다. 성격이 급한 체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게 앉
아있는 인디오들과 경비병들의 의심하는 눈초리를 견딜 수가 없었다. 트럭
에서 뛰어내린 체가 경비병들과 인디오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외치듯이 말
했다.
"좋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여행중인데 이런 오해를 받느니 차라리 걸어
가겠습니다."
"여행중이라고 했소?"
"그래요."
체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인디오들 틈에 앉아있는 로호
를 향해 트럭에서 내려오라는 눈짓을 했다. 로호가 트럭에서 내려오자 체
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힘들게 페루에 도착한 체와 로호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우연히 아르헨
티나 대학생을 만났다. 이들도 페론의 독재정치에 염증을 느껴 국외로 나
온 사람들이었다. 체와 로호는 곧 이들과 뜻이 맞았다.
"에콰도르의 과야킬 지방으로 갈 건데, 함께 갈텐가?"
체의 제안에 대학생들은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그때 로호가 체를
따로 불러냈다.
"에르네스토, 어쩌자고 학생들을 데리고 다녀?"
"로호, 학생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싫으세요?"
"여럿이 다니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나쁠 때도 많아."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책임감이 따르잖아."
"책임감?"
"그래,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
"전 남미대륙, 아니 전 인류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제
가 감당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그래, 그건 대단히 좋은 생각이네만 그렇다고 당장 무슨 일을 할 수있
겠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만드는 원인들을 뿌리뽑는 일에 참여하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 계획을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내 친구 알베르토를 만
나러 가야겠습니다."
로호는 체의 이런 결심에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묵묵히 따랐다. 여행을
함께 하는 대학생들중 하나가 체에게 물었다.
"에르네스토!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단순한 여행이 아닌 것은 알고 있
으니 계획을 말해주십시오."
아르헨티나 대학생들인 이미 볼리비아의 혁명을 지원했던 경험을 갖고있
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목적도 체가 가진 생각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
람들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자네들과 목적이 같다는 것은 출발할 때 이미 이야기했고, 이제 산 파
블로에 있는 내 친구를 만나러 가야해. 그 친구를 만나면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과테말라로 들어가는 것이 계획일세."
대학생들은 체의 계획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산 파블로를 찾아가는 길은 체가 처음 찾아갈때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
동안의 여행경험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체 일행이 산 파블로 나병환자촌
에 도착했을 때 알베르토는 나병환자들과 강으로 낚시를 나가고 없었다.
체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촌장은 오랜만에
만나는 형제를 본 듯 눈물까지 글썽였다. 곁에서 지켜보던 로호와 대학생
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로호와 대학생들은 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묵었던 교회옆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그 집은 지금도 알베르토가 묵고있었다. 집안에는 달라진 것이
라고는 별로 없었지만, 사람이 살고 있어서 그런지 첫 방문때와 달리 포근
한 느낌이었다.
"잠시 쉬고 계십시오. 알베르토를 찾아오겠습니다."
촌장이 밖으로 나가자 대학생 한 사람이 밖에서 기웃거리는 어린 아이들
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도망을 치고 있었다.
촌장이 나가고 30분쯤 시간이 흘렀을 때 문이 열리고 한 소년이 나타났
다. 촌장의 아들 마리오였다.
"마리오! 잘 지냈니?"
마리오는 체를 부둥켜안았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에르네스토! 나 책을 읽을 줄 알아요."
"그래? 벌써 글을 다 배웠단 말이지?"
"편지도 쓰려고 했는데..."
"마리오, 난 네가 해낼 줄 알았다."
체는 그가 대견해 머리를 쓰다듬었다. 산 파블로 나병환자촌에도 하나의
씨앗이 싹텄다는 생각이 그를 기쁘게 했다.
알베르토가 촌장과 함께 들어섰다. 차림새가 산 파블로 사람과 똑같았다.
알베르토는 체를 보자 아무 말 없이 달려와 체를 꼭 끌어안았다.
"알베르토 고생 많았지?"
"..."
알베르토는 말없이 체를 바라보았다. 알베르토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였
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겠어. 나는 알베르토가 내 친구라는 것이 자랑스
러워."
"고마워. 그런데 이렇게 불쑥 왠일이야?"
알베르토가 로호와 대학생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알베르토, 널 필요로 하는 곳이 있어 데리러 왔어."
"나는 이곳에 있어야해. 어디도 갈 수 없어."
"알베르토! 이쪽은 내 친구 로호이고, 이쪽은 아르헨티나에서 온 대학생
들이야. 우리는 과테말라로 갈거야. 남미대륙은 지금 혁명을 원하고 있어.
지금 과테말라는 이 혁명에서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곳이야. 그곳은
지금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있어. 우리는 그곳에서 혁명을 지
켜야해."
"그렇다면 더욱더 내가 갈 곳이 아냐. 나는 의사로서 이들을 버리고 다
른 것으로 떠날 수 없어."
알베르토가 가지 않겠다고 하자 대학생들이 한 마디씩 했다.
"우리는 먼 길을 걸어 이곳까지 왔습니다. 알베르토가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여기까지 뭐하러 왔겠습니까?"
"그래요. 우리와 함께 떠나는 건 이곳에서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건 남미 대륙의 모든 민중을 위한 길입니다."
대학생들까지 나서서 간곡하게 설득하자 곰곰이 생각하던 알베르토도 떠
나는 것을 승낙했다.
18
1953년 12월 체는 알베르토와 로호, 아르헨티나 대학생들과 더불어 중앙
아메리카에 있는 작은 나라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과테말라는 과거 마야문
명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중남미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이 나라도
스페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로 된다. 그리고 독립, 정치적 부패, 미국에
의한 경제적 지배, 끊임없는 쿠데타와 정치적 불안 등이 이어진다. 1921년
독립된 이래 1944년까지 합법적인 정부가 불과 2번밖에 없을 정도로 정치
적 불안정에 시달렸다. 물론 그 이유는 경제적 지배를 원하는 미국과 특권
을 유지하려는 소수 지주들과 군부의 결탁에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 야코보 아르벤즈가 이끄는 과테말라 혁명당이 선거에서
이겨 과테말라 신혁명 정부를 이끌고 있었다. 자유주의적 좌파인 아르벤즈
는 젊은 관리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각종 개혁조치
를 발표했다. 1952년 먼저 농지개혁을 단행한다. 과테말라 토지의 70%를
50개의 주요가문과 하나의 회사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 하나의 회사는 다
름아닌 미국자본인 유나이티드 후르츠(연방곡물 주식회사)였다. 아르벤즈는
먼저 국가소유의 경작지 70만 에이커를 농민에게 분배하고 이어서 지주 소
유의 토지 중 유휴지 50만 에이커를 매입, 국유화시키고, 경작지를 인디오
들과 소작농들에게 분배했다. 그런데 이 50만 에이커의 토지중 23만 에이
커가 연방곡물주식회사 소유였다. 그러니 아르벤즈의 조치는 당연히 반미
적인 것이 되었고 미국은 이에대한 보복으로 공공연하게 아르벤즈 정부의
전복을 꾀하고 있었다.
"인간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에
굶주려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아르벤즈의 이 말은 체가 가지고 있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
다. 체는 아르벤즈 사상에 대해 크게 감동을 받고 그 일생동안 경외심을
갖게 된다.
체는 과테말라 혁명의 수행을 위해 자발적으로 페덴드 순켈에서 의사로
근무하기로 마음먹었다. 의사로서 혁명 수행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체는 보
건성을 찾아갔다. 책상 의자에 앉아있던 보건상이 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지요?"
"의사로 근무하고 싶습니다."
"의사시험은 통과했습니까?"
"물론이지요."
"소속은 어디입니까?"
"소속이요?"
"속해있는 당이 어디냐고 묻는 겁니다."
"저는 과테말라에 온지가 얼마 안돼서..."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네. 아르헨티나에서 왔습니다."
"과테말라 혁명당이 아니면 의료행위 허가를 내줄수가 없습니다."
"혁명에 보탬이 되고자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럴수가 있
지요?"
"그렇다면 과테말라 노동당에 가입하면 될 게 아닙니까?"
보건상은 더 이상 말하기 귀찮다는 듯 성의없이 대답했다.
"제가 과테말라 혁명당에 가입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의
사일 뿐입니다. 지금껏 당에도 가입해본 사실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 할 수 없지요. 이만 돌아가십시오."
"방법을 찾아주십시오."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군요."
보건상은 체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젓고 자리를 떴
다.
체는 끝내 의료행위 허가서를 얻지 못했다.
"잘 안된 모양이구나?"
어깨가 축 처진 채 보건성 건물을 나오는 체에게 알베르토가 다가섰다.
로호와 함께 왔던 대학생들도 체에게 다가왔다.
"우리가 할 일이 어딘가에 있을거에요."
"맞아요.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꼭 있을거라구요."
대학생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때 로호가 제안했다.
"우리 바나나 농장으로 가자. 그곳에서 일하면서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
가를 생각해보자."
모두 로호의 말에 찬성했다.
"과테말라는 바나나 공화국이라고 할만큼 바나나 농장의 규모가 크니까
우리 일행이 일하기에는 좋은 곳이야."
알베르토도 찬성이었다.
보건성 건물을 나온 체 일행은 바나나 농장을 찾아갔다. 바나나 농장 취
직은 의사처럼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곧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끝간데 없이 넓은 바나나 농장은 혁명 전까지는 미국인들 소유였지만 아직
분배되지 않아 혁명정부 소유인 곳이었다. 함께 팀을 이루어 일하게 된 사
람은 마야 인디오들이었다. 그들 중 성격이 괘활하고 붙임성이 좋은 청년
롤란도는 곧 자신의 소유 농장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아르벤즈 정부가 우리같은 사람들에게도 토지를 분배해준다는데 알고
계세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요즘 좀 불안해요. 군인들은 자기네들끼리 권력을 서로 갖
겠다고 싸운다는 말도 있고, 과테말라 사람중 많은 이들이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들려요."
"롤란도는 혁명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같은 사람들이야 당연히 혁명에 찬성이지요. 그래서 농민시위때도
앞장섰는걸요?"
롤란도는 바나나 농장 안에서 소식통으로 통했다. 그러던 중 체에게 페
덴트 순켈에서의 의료행위를 인정한다는 허가가 나왔다. 그래서 체가 농장
을 떠날 준비를 하는데 롤란도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에르네스토, 혁명정부 전복을 위해 미국이 CIA 에게 조직과 자금지원
명령을 내렸대요. 그리고 장군들중 누군가가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해요."
"롤란도!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죠?"
"그건 말할 수 없어요."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요?"
"아르벤즈는 아이젠하워 정부가 정치 망명자들을 동원해 과테말라 침공
을 계획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방송을 했어요."
"나도 그 방송은 들었는데, 롤란도 주위 사람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모두 불안해하고 있어요. 토지분배에 대한 기대도 사라져가고 있고, 앞
으로 더 생활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말들을 해요. 또 미국은 신혁명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고 해요."
"보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 동안 농장들의 실제 소유주가 누구였는가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맞아요. 바나나 농장과 광산들은 거의 미국인 소유였어요. 오래전부터
과테말라 농장들은 미국 텃밭이라는 말이 떠돌았거든요. 농장에서 생산된
과일과 야채는 미국으로 가져갔으니까요."
시국을 걱정하는 롤란도에게서 평상시 밝은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체는 롤란도에게 너무 불안해할 것 없다고 말했지만,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1954년 6월 18일, 미 CIA에 의해 훈련되고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호세
카스틸리오 아르마의 군대가 과테말라를 침공했다. 아르벤즈 정부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전군 동원령을 내렸지만 과테말라 군부는 전군 동원령을 거
부했다. 자신들의 권력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미국 CIA의 공작때문
이었다. 이렇게되자 아르벤즈 정권은 붕괴될 위기에 닥치고 말았다.
자신이 지지하는 아르벤즈 정권이 붕괴되는 것을 체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즉시 결단을 내렸다. 혁명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체는 혁
명의 실천을 위해 방안에 틀어박혀 계획표를 만들고, 전략을 세웠다.
"언제까지 틀어박혀 있을거야?"
며칠동안 바깥 출입도 하지 않고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체에게 로
호와 알베르토가 찾아왔다.
"로호, 알베르토, 나는 실천적인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했네. 날 좀 도와
주게."
"우리는 이미 각오했어. 대학생들도 자네를 따를거야."
체는 일행을 이끌고 반란군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소규모
혁명집단들을 통일시켜 빼앗긴 과테말라시티를 탈환하자는 제의를 하러 여
기저기에 산재한 혁명집단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과테말라시티 탈환을
위한 공격전략계획을 제시했다. 그러나 어떤 집단도 그의 제의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주저앉을 체가 아니었다. 소규모 혁명집단을 방
문할때마다 적극적 투쟁만이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신념을 주
려고 애썼다. 그러나 대다수의 혁명집단들은 체의 의견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체는 그를 환영하거나 반기지 않아도 그들에 끊이지 않고 설득하
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도 체의 말에 귀기울여주지 않았다.
"응당 해야 할 정부가 하려 하지 않는 것을 개인 혼자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과테말라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가 체에게 충고했다.
"아닙니다. 저 사람들이 깨달을 때까지 설득할 것입니다."
체가 눈을 빛내며 강한 의지를 보이자 아르헨티나 대사도 어쩌지 못하고
물러섰다.
아르헨티나 대사의 충고가 있은지 얼마 안 되어 결국 아르벤즈 정권은
무너지고 아르마가 실권을 장악하게 됐다.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빨리 들어가야겠어."
정보수집을 담당했던 로호가 체에게 피신하라는 급보를 가지고 왔다. 체
는 일단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새로 들어선 아르마 정부는 체
를 위험인물로 간주하여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만일 잡힌다면 사형을 각오
해야 했다. 체는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은거하면서 탈출방도를 연구하는 한
편 혁명의 실패원인들을 분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체는 일기에 이
렇게 쓰고 있다.
"나는 패배자다. 그렇지만 내 고통을 통해 과테말라 민중들과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실패라는 것은 단지 다음 승리를 위한 준비를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아르벤즈는 민중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없었다. 민중을 무장
시키고 정치구조를 바꾸기에는 믿음이 부족했다.
나는 인간에 의한 인간착취를 막는 혁명가가 될 것이다. 과테말라 안에
서 나는 똑똑히 보았다. 가난한 나라의 착취로 생기는 이익 때문에 의도적
인 공격을 당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한 생활로 고통받게 되는 것
을 목격했다. 힘센 나라의 치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홉
개 가진 자가 하나 가진 자를 공격해서 열 개를 채우는 인간들의 모습을
이대로 지나칠 수가 없다."
체는 두달동안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은거하다가 멕시코로 망명을 떠났
다.
19
체는 과테말라 혁명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비밀 루트를 통해 멕시코 국
경에 다다랐다. 국경까지 안내를 맡았던 사람들이 떠나자 체는 국경 근처
의 숲속에서 밤을 기다렸다. 몇몇 혁명동지들이 함께 있었지만 그의 절친
한 친구들이 아니었다. 로호와 알베르토 그리고 체를 따라왔던 대학생들은
체가 떠나오기 이틀전 페루로 떠난 상태였다.
체는 그들이 페루, 볼리비아를 거쳐 무사히 귀국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
다. 알베르토는 다시 산 파블로 나병환자촌으로 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체는 알베르토가 산 파블로 마을로 가리라고 믿었다. 국경 숲속에서 밤이
오자 체는 낮게 엎드려 은밀하게 국경을 넘었다. 사형공고가 나붙었던 과
테말라땅을 벗어나 멕시코 땅에 서자 그에게는 새 희망이 솟아났다. 아르
헨티나 대사관에 숨어 지내는 동안 그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었다. 멕시코
시티로의 탈출이었다. 정보에 의하면 멕시코시티에는 중남미 대륙의 많은
혁명적인 도망병들과 망명자들이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과테말라 혁명
현장에서 사귄 친구들도 몇 명 멕시코시티에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체는
멕시코시티로 가서 혁명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는 한편 이들 혁명가
들과 만나 남미혁명을 실현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과테말라 혁명을 겪
으며 그는 혁명이 생각이나 마음먹은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학만으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멕
시코시티로 들어가는 동안 체는 멕시코의 농촌을 볼 수 있었다. 멕시코의
농촌도 다른 남미 국가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땅에 살면서 왜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사는 모습도 아름다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체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
고 한숨지었다. 멕시코 국경을 넘어 도보로 때로는 지나는 트럭을 얻어타
고 힘든 여행 끝에 체는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누구 하나 반겨주는 이
없는 도시에서 그는 맨 먼저 헌법광장 소칼로를 찾아갔다. 멕시코시티의
심장부 소칼로에 서서 체는 이제 어디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우선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형편이니 가장 저렴한 숙식방법을 찾아야 했
다.
멕시코시티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걷던 체의 눈앞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멕시코 대성당이 나타났다. 그 순간 고고학에 관심
이 많던 체는 대성당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대성당은 외관과 내부 모
두 예술적인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내부에 설치된 웅장한 파이프오르간은
금세 장려한 미사곡을 울릴것처럼 느껴졌고 스페인풍의 내부장식은 균형과
조화를 갖춘 성스러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체는 대성당을 둘러보고 나와
싸구려 하숙집을 하나 찾아냈다. 그리고 매일같이 대학 도서관을 찾아갔다.
도서관에서 체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비롯한 사회주의 이론과 혁명사상을
실현시킬 투쟁방법론에 관한 책들을 찾았다. 그 중에는 스페인 민족해방
전쟁의 전술에 관련된 책도 있었다. 책을 즐겨 읽던 체였지만 이 책들은
아직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책들이었다. 그는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당기듯 이 새로운 혁명이론에 빠져들었다.
그렇지만 체의 멕시코시티 생활은 매우 힘겨운 것이기도 했다. 경제적
궁핍은 세 끼 식사 해결도 어려웠다. 하루에 한 끼 또는 두 끼의 싸구려
식사로 때웠지만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책에 빠져 있으면
서도 체는 멕시코시티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중남미의 각지에서 온 망명
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만나 새로운 소식을 듣고 토론하는 것
은 그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일이었다. 때로는 끼니거리가 없어 몇
끼를 굶은 적도 많았다. 그럴때면 그는 짐꾼으로 나섰다. 짐꾼 일은 고되지
만 빵도 해결되고 거리에 굴러 다니는 뉴스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이들
짐꾼들중에는 쿠바에서 바티스타 정권에 항거하다 쫓겨운 망명자들도 있었
다. 체는 그들과 사귀며 그들에게서 쿠바의 현실과 정치상황을 전해들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1953년 7월 26일 쿠바의 몬카타 병영을 공격하다 살아남
은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체는 쿠바의 실정을 배우는 한
편 점차 성숙한 사회주의자로, 혁명가로 변해갔다. 그러나 멕시코시티의
1954년은 체에게 비참한 생활과 굶주림으로 시달린 고난의 한해였다.
1955년 봄이 되었을 때, 체에게도 인생의 봄이 찾아왔다. 체에게 사랑하
는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페루출신의 멕세코인인 일다 가데아였다.
그녀 역시 진보적인 사고를 가졌던 지식인답게 과테말라에 갔다가 멕시코
시티로 귀환한 동지 중 한 사람이었다. 체는 원래 여자에게는 숙맥이었다.
그러나 그를 사모하고 따르는 여인들은 수없이 많았다. 잘생긴 외모에 해
박한 지식, 혁명에의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체는 여성들에게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그가 목숨을 바
칠 혁명의 길이었다. 그런 그에게 일다 가데아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멕시코시티에서의 체의 가난한 생활을 충분하게 이해해주면서 그
와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중 하나였다. 그녀는 혁
명의 방법론을 가지고 토론할 때면 언제나 체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지지했
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는 점점 많아지게 되었고 마침내 연인관
계로 발전한 것이다. 그녀가 그의 마음을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졌을 때
체는 일다 가데아에게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고해성사하듯이 털어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청혼했다.
"일다, 내 처지가 이런데도 나와 결혼해주겠소?"
일다는 그의 청혼에 흔쾌히 승낙하면서 용기를 주었다.
"나는 멕시코 사람이에요. 멕시코 안에서 내가 당신을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어요.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겠어요."
결혼을 약속한 다음 일다는 체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을 찾아주고, 체
가 필요로 하는것들을 챙겨주는 따뜻한 동반자가 되었다. 그해여름 체는
또 하나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1955년 7월 7일, 쿠바인 짐꾼 동료들이 피델 카스트로가 멕시코에 도착
했다고 알려주었다. 풀겐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항거, 몬카타 병영을 공
격하다가 투옥되었던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의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멕
시코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 1926년 8월 13일 쿠바의 오리엔
테주 농장주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바나 법대시절부터 학생운동의 지도자
였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 변호사로 활약하던 그는 1940년부터 군사쿠데타
를 통해 집권한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맞서 저항운동의 선봉에 섰다. 바티
스타의 극심한 탄압에 맞서기 위해 그는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1953년 7월
26일 몬카타 병영을 150명으로 공격한다. 그러나 이 공격이 실패하여 체포
된 그는 19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바티
스타의 사면으로 나왔다. 출옥하자마자 카스트로는 동지들을 규합, 새로운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멕시코로 건너왔다. 그래서 그는 바티스타 정권
을 전복시킬 수 있는 책임감 강한 혁명집단을 찾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
은 게바라는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이 쿠바의 혁명지도자를 꼭 만나고 싶
었다.
멕시코시티의 여름날 밤은 유난히도 별들이 많다.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
보고 있는 체에게 일다가 다가왔다.
"별들이 너무 아름답지요?"
"그래요. 저 별들은 내 고향 아르헨티나에서도 또 남미대륙을 여행하는
동안에도 그리고 과테말라에서 혁명이 실패했을때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요."
"별을 자주 보세요?"
"늘 별을 봤지만 그때마다 표정이 달랐던 것 같군요."
"오늘은 별의 표정이 어때요?"
"함빡 웃고 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세요?"
"일다, 별들도 어디선가 서로 만나고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일다가 싱긋 웃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머릿결이 스칠때마다
상큼한 비누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체는 그녀의 머리결에 입을 맞추었다.
"저 수많은 별들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요.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
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특히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 인생에
있어 아주 특별한 사람을 만나는일 말입니다."
"당신과 나처럼 말이지요?"
"물론 당신과 나의 만남도 특별하지요. 그러나 당신과 나의 만남과는 다
른 특별한 만남이 오늘밤 이루어진답니다."
"당신을 그토록 설레게 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군요. 아주 오랜 친
구?"
체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혁명동지?"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단 한번도 만난적이 없어요."
"아, 알겠어요. 피델 카스트로?"
"하하하, 바로 맞혔군요. 역시 당신은 현명하군요. 바로 그 사람이에요."
체는 일다와 헤어져 멕시코시티 중심가로 향했다. 짐꾼으로 함께 일하던
쿠바인 동지와 만나기로 한 헌법광장 소칼로 북쪽 대성당 앞에 이르렀다.
피델 카스트로에게 안내해줄 짐꾼동료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다시 헌법광장 소칼로를 지나 엠파란가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가파
르게 이어진 골목 깊숙이 들어갈수록 누추한 집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골
목 막다른 길에 이르러 안내자가 앞장서 들어선 집은 골목 끝에서 두 번째
오른쪽 집이었다. 엠파란가 49번지에 있는 바로 마리아 안토니아 곤잘레스
의 집이었다. 마리아는 쿠바출신 여성으로 멕시코인과 결혼했는데 카스트
로와 망명자들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체가 알고 있던 동료들과 처
음보는 사람들이 몇 명 모여있었다. 모여있는 사람들 가운데 약간 곱슬머
리에 수염이 유난히 많은 키가 큰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바로 피델 카스
트로였다. 두 사람의 눈에 허공에서 마주쳤다.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
당기는 강렬한 전류를 느꼈다.
"우리 동지들에게서 당신 이야기를 전해듣고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저 역시 피델 당신의 명성을 듣고 만나보고 싶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
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피델과 체의 만남은 조각났던 거울이 하나로 맞춰진것처럼 보였다. 그들
은 혁명이라는 주제앞에서 하나가 되었다.
"나를 도와주시오. 지금 쿠바는 당신과 같은 열정적인 혁명가의 도움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쿠바로 돌아갑니다. 바티스타를 내쫓고 양키
들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의 목숨을 내놓을 것입니다."
피델의 어조는 강하면서도 열정이 가득찬 것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라도
그의 이 뜨거운 혁명에의 열정을 만나면 그의 뜻에 동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기꺼이 동지가 되겠습니다. 저는 독재에 대항하는 혁명이라
면, 어느 혁명이라도 함께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체와 피델은 그 여름밤 내내 혁명 투쟁을 위한 방법론을 토론하며 굳게
동지가 되기로 맹세했다. 카스트로는 쿠바혁명을 위해 무장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멕시코의 망명자 그룹 사람들은 이런 그의 주장
을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체는 피델의 동생 라울에 이
어 두 번째로 피델의 편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체야말로 피델
의 최초의 동조자인 셈이었다. 라울은 형을 따르기 마련이 아닌가.
하지만 피델과 체 모두 아직은 열정만 있고 전투에는 경험이 없는 아마
추어 혁명가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뜻에 동조하는 보다 많은 동조들
과 그들을 훈련시킬 전략전술의 전문가가 필요했다. 두 삶은 열정적으로
동지들의 규합에 나섰다.
그렇게 분주하게 동지들을 모으던 와중인 1955년 8월 19일, 멕시코시티
가까이에 있는 작은 도시의 시영궁전 안에서는 또 하나의 역사가 만들어지
고 있었다. 드레스를 입은 일다와 턱시도를 입은 체가 서고, 그 옆에는 결
혼식 증인으로 피델 카스트로와 또 한병이 서 있었다. 그 결혼식에는 일다
의 친구들과 베네수엘라 시인 루실라, 그리고 멕시코 의사 두 사람도 있었
다. 체는 쿠바혁명이 끝난 후 일다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두 번째 결혼
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한참 뒤의 일이고 이 무렵 그에게 가장 중요한 동
지이자 동반자였다. 체에게는 안일하게 가정에 안주할 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 혁명이론'을 위해 혼신의 힘을 바치고자 했다.
"고통당하는 인류에 대한 동정과 연민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행동이 필요하다. 전술이 필요하다. 나는 행동하는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혁명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계속적인 혁명이 있을 뿐이다."
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에게 이런 다짐을 했다. 이런 열성적인 피델
과 체의 노력으로 많은 동지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피델은 어느정도 동조
자가 늘어나자 쿠바혁명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한편 체와 동지들을 단련
시킬 전투훈련에 들어갔다. 훈련교관은 스페인 외인부대의 대장으로 게릴
라 전투에 실전경험이 많은 알베르토 베이요 대령이었다. 이 군사훈련은
철저하고 강도높은 것이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체와 대원들에게는 매
우 힘들었다. 그러나 훈련을 끝나고 평가점수를 주었을 때 최우수 점수를
받았다. 그만큼 그의 열성이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체가 멕시코에 머문지도 2년을 넘어섰다. 체에게 이
2년간의 세월은 혁명이론 습득은 물론이고,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실천적
혁명가로 변신했고, 아내와 딸까지 있는 가정도 꾸리게 된 인생의 대전환
기였다.
20
1956년 11월 25일, 멕시코 해안에는 '그란마호'라는 낡은 중고 돛단배가
항해준비를 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소형선박이었다. 그
러나 이 초라한 배가 쿠바의 역사를 바꾸는데 공헌한 배가 되리라고는 아
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동이 틀 무렵 그란마호에는 그 동안
쿠바 침공을 위해 훈련을 받아 온 피델 카스트로와 체, 그리고 혁명 동지
들이 승선했다. 인원은 정식 승선인원 30명을 훨씬 넘어 모두 82명이었다.
그란마호 구입자금은 바티스타 정권에 의해 실각된 전 쿠바 대통령 프리오
소카라스카가 마련해주었다. 항해 처음에는 위풍당당하게 나갔지만 고물인
그란마호의 항해는 출발직후부터 순탄하지 못했다. 속도도 느린데다가 항
해기술을 제대로 알고있는 대원이 한 명도 없는 상황이었다.
"피델! 드디어 출발이군요."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겁니다."
체와 피델은 뱃머리에 서서 그란마호가 멕시코 해안을 벗어날때까지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
황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격침될지 모르는 데다가 모두들 항해에
익숙한 편이 아니었고 배도 안심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우려한대로 멕시코 해안을 벗어났을 때 갑자기 배가 멈추었다.
"무슨일이야?"
피델이 항해를 맡은 대원들을 향해 물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대원들은 어떻게 할지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체는 떠나오기 전에
읽었던 항해술에 관한 책을 꺼냈다.
"여기 쓰여있는 것을 참고해보면 어떨까?"
대원들중 항해술에 관심이 많다던 쿠바인 동지 한 사람이 책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는 그가 선실로 간 다음 바다 가운데 서있던 배가 다시 움
직였다.
"항해요원은 그 책을 자세히 읽고 다른 것을 익히도록."
피델은 한숨 돌리고 나서 엄격하게 명령했다.
"인간이 인간다운 세상에서 살 수 있었던들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었
을까요? 아마도 못 만났을 겁니다."
"좋은 세상을 만났다면 나는 지금쯤 의사로써 암을 정복하는 일에 몰두
해 있었을 겁니다."
"의사로서의 안정되고 편안한 생활을 버리게 만든 것도 결국 이 억압과
착취의 세상이군요."
"그렇지요. 하지만 우리 부모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의사로서 아르헨티나
에 남아 있다고 해도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을겁니다. 나는 남미대륙을
여행하면서 부패한 독재정권들이 빈곤을 하늘 탓으로 돌리면서 파렴치한
착취를 공공연히 행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 가족 내 형제가 고통받
고 있는 것처럼 가슴아팠습니다."
"나 역시 그랬답니다."
"피델, 우리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싸울 각오가 되어있지 않습니
까?"
피델은 결의에 찬 체의 눈을 한참동안 마주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기만 가지고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배가 자주 고
장을 일으키는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82명의 대원들중 절반 이상이 뱃멀미
를 했다. 항해가 계속될수록 뱃멀미를 하는 숫자는 늘어갔다. 항해를 해본
사람들이 없는 탓도 있지만 배를 타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뱃멀미를 가라앉혀줄 의약품도 없는 실정이어서 의사인 체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이제 어떡하지요? 기진맥진해 있는 대원들이 늘어가는데..."
"글세 말입니다. 어찌해볼 도리가 없으니 이러다가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전투도 힘들 것 같습니다."
대원들의 뱃멀미를 돌보던 피델과 체 마저도 뱃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항해술이 서툴러 배가 요동치는 바람에 심지어 항해사 역할을 하는 대원마
저도 뱃멀미를 하니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파도에 떠밀리는 아찔한 경험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피델!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떠나온 것이 후회됩니다."
"하지만 우리 앞길에는 더 험난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
리를 기다리고 있을 동지들과 민중들을 위해 어떻게든 쿠바에 도착해야 합
니다."
체와 피델은 뱃멀미로 고통스러워하는 대원들을 위로할 적당한 말을 찾
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떤 말도 그들의 고통을 달래 줄 수 없었다. 바다
를 향해 토악질을 해대는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더 이상 토해 낼
것도 없고 뱃전에까지 다가갈 힘도 없이 축 늘어진 대원들이 많았다.
멕시코를 출발한지 일주일째 되던 12월 1일,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덮기
시작했다. 갑자기 낮이 밤처럼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심한 비바람이 몰아치
자 배는 더욱 흔들렸고 멀미를 하는 대원들은 하늘을 바라볼 겨를조차 없
었다. 잘 참아왔던 체와 피델도 대원들 틈에서 토악질을 시작했다. 굵은 빗
방울은 뱃전에 나와 앉은 대원들을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모습으로 만들
었다.
"폭풍우다!"
정신을 차린 항해담당 대원이 소리쳤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항해
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다. 그란마호는 폭풍우에 휩쓸려 이리저리 맴돌
다가 엔진마저 꺼져버리고 만 것이다. 하니만 그야말로 새옹지마라던가. 폭
풍우덕택으로 배는 쿠바의 영토 가까이로 접근할 수 있었다. 목표지점인
산티아고데쿠바 근교 코로라다스 해안은 아니었지만 그곳으로부터 2km 떨
어진 벨릭이란 지점이었다. 배가 좌초하는 바람에 대원들은 식량과 장비의
상당수를 갑판위에 남겨둔 채 서둘러 상륙했다. 그러나 해안에는 거대한
망그로브 숲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뿌리를 가진 늪지대의
망그로브 숲을 겨우 빠져나왔을 때 지칠대로 지친 대원들을 마중한 것은
바티스타의 폭격기와 군대였다. 숨돌릴틈도 없이 전투가 시작되자 실전경
험이 없던 대원들이 당황하여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상륙부터 위기일
발이었다.
체와 피델의 쿠바 상륙작전은 그 의욕에서는 당차고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으나 엉성한 작전계획과 준비부족, 그리고 배와 폭풍우라는 변수에
대한 고려부족으로 초반부터 고전을 거듭해야 했다.
21
낮에는 사탕수수밭에 숨고 밤에만 이동하여 쿠바 내륙지방으로 들어가
약속된 1차 집결장소인 시에라마에스트라 산악지대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난의 길이었다. 지리에도 어두울뿐더러 도보로 이동해야 하는 대원들은
새로 신은 군화 때문에 발이 물집투성이었다. 식량도 비상식량정도였다. 실
탄과 전투용 장비를 휴대해야했기 때문이다.
"길 안내인을 구해야겠습니다."
이 지역 출신의 우니베르소 산체스가 길 안내인을 구하자는 제의를 했
다. 대원들도 찬성이었다.
우니베르소 산체스가 인근의 마을로 가서 길 안내인을 구해왔다. 중년의
농부였다. 작은 키에 배가 불룩한 농부는 왠지 혁명군을 탐색하는 듯하여
그다지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이름은 묻지 않겠소. 바티스타 정부군이 어디있는지 아시오?"
"알지요."
"그렇다면 우리 길 안내를 맡아주시오."
"알겠습니다. 이곳 지리에는 저만큼 밝은 사람이 없을겁니다. 정부군이
있는 곳을 피해 길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출발합시다."
대원들은 길 안내인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이동을 시작한지 1시
간도 채 안되어 바티스타 정부군과 마주쳤다. 전투가 시작되자 대원들은
최선을 다해 방어했다.
"뚫고 나가라."
피델의 명령에 멈칫거리며 방어만 하던 대원들은 앞을 다투어 나아갔다.
정부군을 따돌리는 전투를 몇 번 치르고 났을 때 길 안내인이 체에게 다가
왔다.
"이곳이 말씀하셨던 곳입니다. 이제 산등성이를 따라가만 하면 됩니다.
제가 할 일은 끝났지요?"
길 안내인은 숲 속 깊은 곳에 이르자 멈춰서며 자신은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체의 말이 끝나자 대원 한 사람이 체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저자를 돌려보내도 될까요?"
"괜찮아. 농부라고 했잖아. 가족들이 기다릴 것 아닌가."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데요."
"충분한 대가를 지불했잖아."
피델도 길 안내인을 돌려보내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약속한 만큼의 돈을 주고 길 안내인을 돌려보냈다. 길 안내인을 보
내고 대원들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발이 물집투성이가 된 대원들 중에는
군화를 벗어놓고 쉬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대원들은 무기를 옆에 내려놓
고 팔베개를 한 채 풀숲에 눕는 사람까지 있었다. 길 안내원이 돌아간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총탄이 날아왔다. 휴식을 취하던 대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 안내인 녀석 짓이다. 우리를 밀고했어."
"죽여버렸어야 했다구."
대원들이 총을 쏘면서 발악하듯 내뱉은 말이었다.
체와 피델은 그제야 농부를 너무 믿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 훈련된 용
병으로 구성된 바티스타 정부군 1만2천명은 조직적으로 행동하고 무기도
우수했다. 그에비해 피델과 체 그리고 대원들은 아직 전투에서는 아마추어
일 뿐이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 살아남아 모인 사람은 겨우 12명이었다. 나
머지 대원들은 준투중 사살당했거나 흩어졌다. 피델과 체도 서로 다른 방
향으로 헤어졌다. 체는 살아남은 네 명의 대원들과 함께 있었다.
전투태세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를 치르는 일이 게릴라 대원들에
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살아남은 대원들은 뼈저리게 느꼈다. 한 순간의 작
은 실수로 대원 전체를 잃다시피 한 체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체는 자
신 때문에 많은 동지가 죽어갔다는 사실에 무척 괴로웠다. 실수라고 하기
에는 너무 큰 손실이었다.
대원들은 낮에는 사탕수수밭에 숨어있다가 밤에만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머리 위에서는 10여대나 되는 비행기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기록하는
습관이 있는 체는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치열했던 전투상황과 전후
상황을 메모해두었다. 이 메모에는 그가 살아남은 네 명의 대원들과 도망
하면서 의사로서의 직무와 혁명군으로서의 의무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 고민에 빠졌던 상황이 나온다. 즉 쫓기면서 구급낭과 탄약상자 둘
중 어느것을 가지고 가야할지 고민하는 대목이다. 총을 들고 구급낭과 탄
약상자를 한꺼번에 운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체는 결국 구급낭은 남겨
두고 탄약상자를 택했다. 대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상을 치료하는 것
보다 탄약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체가 네 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으로 가는 길은 험
난하고 험난했다. 어떤 때는 방향을 분간할수 없어 북극성을 보며 방향을
결정하기도 했다. 더구나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은 면적이 넓고 지형이 복
잡했다. 대원들은 때로는 험난한 절벽을 타기도 하고 강을 헤엄쳐 건너기
도 했다. 그러나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은 바티스타 정부군의 추적을 피하
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었다. 비상식량마저 떨어진 대원들은 야생과일과 열
매로 배를 채우며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망고와 마메이는 대원들의 주요
식량이 되었다. 특히 껍질은 갈색이고 과육은 붉은 색을 지닌 마메이는 쉽
게 구할 수 있는 열매였다. 과육과 당분이 많아 허기를 채워주기에 적합했
다.
천신만고 끝에 체와 4명의 대원들은 목표하는 지역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곳 역시 아직 바티스타 정부군의 포
위망에 있었다. 체와 대원들은 눈앞에 마을이 나타났을때도 곧바로 들어가
지 않았다. 혹시 정부군의 매복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마을
동정을 살피고 어두워진후 마을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낮에
보아두었던 숲과 가까운 집이었다. 들어가보니 노인 부부가 살고 있는 집
이었다. 무장한 대원들이 들어서자 노부부는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놀라지 마십시오. 저희는 혁명대원들입니다."
체의 말에 노부부는 몸을 일으켰다.
"우리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싸운다는 사람들?"
할아버지는 대원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대원들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에라마스트라에는 소문이 다 퍼졌는데 뭘. 길 안내를 맡은 사람이 정
부군에 고발해서 큰 싸움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있는걸. 누가 피델 카스트
로인가?"
"할아버지 우리는 전투중에 피델과 헤어졌습니다. 피델과 만나기 위해
이동중입니다."
"이 넓은 시에라마스트라에서?"
체는 할아버지의 질문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할아버지, 이 마을에 바티스타 정부군은 없습니까?"
"여기는 없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많이 있다고 들었어. 시에라마에스트
라 여기저기에 정부군이 진을 치고 있다더구만. 그런데 저녁은 어쨌나? 왜
그렇게 서 있어?"
할아버지의 표정과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던 체는 대원들에게 쉬어가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대원들은 안심해도 될 것 같다는 대답을 했다. 대원
들이 쉬어가는 동안 할머니는 저녁을 준비했다.
할아버지는 궁금한 것이 많은 것 같았다.
"댁들이 정말로 이번에 바티스타를 몰아낼 수 있어? 이렇게 몇 안되는
사람들이 그 많은 정부군을 어떻게 대적한다는지 모르겠네."
"지금은 이렇게 숫자가 적지만 곧 많아질 겁니다. 도시, 농촌 어디서든지
기회만 기다리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하지만 바티스타가 천년만년 해먹을것처럼 굴
면서 독재를 하는데 좋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나저나 수고가 많구
먼."
체와 대원들은 멕시코를 떠나온 후 모처럼 제대로된 음식을 먹었다. 할
머니가 차려준 식사를 깨끗이 비우고 난 대원들은 교대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대원들은 노부부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숲속으로 들어
갔다.
22
체와 대원들이 알레그리아 데 피오에 다다랐을 때 정부군 매복조에 걸려
들었다. 수적으로 불리한 대원들은 전투가 시작되자 총을 쏘며 후퇴를 해
서 산중 깊숙이 숨어들었다. 피델과 나머지 대원들을 만날때까지 인명과
탄약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체는 알레그리아 데 피오 전투에서 부상당했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체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죽음을 생각했다. 심한 부상을 입은 채 적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어떻게 하면 가장 품위있게 죽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인간이라면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체는 잭 런던이 쓴 소설 속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차가운 알래스카 설원에
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주인공이 나무에 기대어 의연하게 죽어가기로 결
심한다는 이야기였다. 체는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의연한 죽음을 택하
리라 결심했다.
알레그리아 데 피오 전투에서 대원 중 한 사람이 체보다 더 심한 부상을
당했다. 사실 체의 부상은 총알이 스치는 정도였으나 그 대원은 탄알이 몸
에 박힌 상태였다. 체와 대원들은 정부군들의 추적에서 벗어나자 농가를
찾아 나섰다. 산 속을 헤맨지 1시간쯤 지나 마을과 좀 떨어진 농가 한 채
가 보였다. 주변을 살핀 후 대원들은 농가로 잠입해 들어갔다. 마침 가족들
은 일터에 나가 주인 남자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체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농부인 중년남자는 긴장된 자세로 눈이 휘둥그래져서 대원들을 바라보았
다.
"우리는 혁명군입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농부는 그제야 웃으며 긴장을 풀고 방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했다.
"소문을 들어 알고 있답니다. 농민이 잘 살려면 혁명군을 도와야 한다고
요."
"호의를 베풀어주시니 고맙습니다."
"뭘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부상당한 대원이 있는데, 쉴수 있게 해 주십시오."
체와 대원들을 바라보던 농부가 손가락으로 체의 부상을 가리켰다. 왜
체 본인은 부상자에서 제외하느냐는 뜻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우리는 곧 떠나야 합니다. 부상중인 우리 대원을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총 8정과 탄약, 군복을 두고 갈 것입니다. 우리가 입을
수 있는 옷을 좀 빌려주십시오."
중년의 농부는 체와 세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옷을 내주었다. 농부로 변
장한 체와 대원들은 부상당한 대원을 남겨두고 카스트로를 만나기 위해 떠
났다. 농부는 체와 대원들을 떠나 보낸 후 부상당한 상처를 치료할 약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다. 그러나 약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비상약품을 갖고있는 집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런데 약을 구하러 들
린 집마다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다녔다. 농부는
자신이 혁명가의 한 사람이 된 것처럼 우쭐했다. 그리고 어렵게 구한 약을
가지고 와서 부상당한 대원을 치료하고 음식도 준비해주었다.
그런데 그날 밤 농부의 집에 바티스타 정부군들이 들이닥쳤다.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던 농부는 부상당한 대원을 숨길 틈도 없었다. 부상당한 대
원은 저항도 못하고 바티스타 정부군의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 대원들이
남겨두고 간 총과 탄약, 군복도 모두 빼앗겼다.
농부의 실수였다. 그리고 근본적인 실수는 체와 대원들이 저질렀다. 농부
에게 비밀을 지키도록 부탁했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농부가 자
랑삼아 수다를 떨고 다녔던 것이 화근이었다. 농부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자신처럼 혁명군 편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마을 사람들 중에는 바티스타 정
부군 편인 사람이 있었다. 그의 신고로 혁명군을 찾고있던 정부군은 예기
치 않은 곳에서 손쉽게 혁명군 한 명을 생포한 것이다. 부상당한 대원이
체포된 사건은 순식간에 마을로 퍼져나갔다. 피델 카스트로와 나머지 대원
들이 은신하고 있는 마을에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1956년 12월 25일, 체와 세 명의 대원들은 카스트로를 돕는 농부들에 의
해 카스트로가 머물고 있는 곳까지 무사히 안내되었다. 체를 만난 카스트
로는 만나자마자 몹시 엄중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가 있소? 당신의 능력을 믿었는데, 어떻게 그
럴수 있단 말이오? 우리 대원 한 사람을 잃은 것은 대대 병력을 잃은 것이
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잊었단 말이오? 게릴라로서 무기를 방기하면 지불
해야 할 대가가 생명이라는 인식을 아직껏 못하고 있다는 것이오? 적들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의 유일한 생존수단이 바로 무기인데, 무기를 버리다니
말이나 됩니까? 그건 미련한 짓이고, 처벌받아야 할 군율위반이오. 하지만
이제까지의 실수는 우리 모두가 저지른 것이나 용서하겠지만 앞으로는 엄
중한 처벌을 각오하시오."
체는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카스트로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는 카스트로에게 정중히 실수를 사과했다. 카스트로와 합류한 후 체는
알레그리아 데 피오 전투에서 부상당한 상처가 악화되어 대원들과 함께 행
동할 수가 없었다.
"상처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좀 쉬는 것이 좋겠소."
카스트로는 대원들과 함께 행동하려는 체를 만류했다.
"피델, 나는 남아있을 수 없소. 함께 가겠소."
"안 돼요. 잘못하다가 대원들을 힘들게 할 수도 잇소. 건강을 되찾은 다
음 더 열심히 활동해도 늦지 않소. 당신을 간호하겠다는 농부가 있으니 걱
정 마시오."
체의 간호를 맡은 농부는 체가 머물고 있는 옆집에 살고 있었다. 대원들
이 활동을 나간 동안 농부는 먹을 것을 갖다주고 상처를 치료했다. 체는
지난번 대원을 맡겨두고 떠나오면서 했던 실수가 다시 발생하기 않도록 농
부를 불러앉혔다.
"부탁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않도록 해 주
십시오."
"물론이지요."
"부인도 알아서는 안됩니다. 은인에게 이런 말을 해서 안됐지만 만약에
당신이 누구에게든 나에 대해 말을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 대원
들이 가만 있지 않을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사실 아내도 모르게 드나들면서 여간 조심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농부는 체가 다른 대원들과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체를 보살폈
다. 약속대로 농부는 자신의 아내마저도 모를 만큼 신중한 사람이었다.
체의 몸이 회복되고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있었다. 다섯명의 농민이 자
원하여 대원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건장한 체격에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었다. 그런데 이런 자원자들이 늘어난다고 가정했을 때 게릴라 본부에는
쓸만한 무기들이 많지 않았다. 당시 카스트로 지휘하에 게릴라 부대에는
소총 9정, 반자동 소총 5정, 경기관총 2정, 권총 2정, 카빈총 1정, 그리고
약간의 수류탄이 무기의 전부였다.
57년으로 접어들면서 대원들은 이제 마에스트라의 생활에 익숙해져갔다.
"라 플라타 병영을 습격하는 게 어떨까요? 정보에 의하면 병력도 많지
않고 다른 병영과 많이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피델,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소. 우리에게는 무기가 필요하고 또 우
리의 건재를 전국에 알릴 기회가 될 테니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어떤 세력을 확대할 발판을 만들려면 무기와 탄약도
있어야 합니다."
"도시에 있는 동지들과는 어떤 연락이 되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살길을 열어나가야 합니다. 도시
에서의 봉기를 유도하고 지도하려면 어떤 연결의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사위는 던져졌군요. 라 플라타로 갑시다."
대원들의 결의는 대단했다. 그러나 빈약한 무기를 들고 병영을 습격한다
는 것은 사실 도박과 같았다. 먼저 농민들의 안내를 받아 라 플라타 병영
에 도착했다. 정부군이 방심하고 있을 시각인 새벽 3시경 작전이 개시되었
다. 실탄을 아끼기 위해 먼저 수류탄 공격을 감행했으나 불발로 끝나는 바
람에 불을 질렀다. 적이 당황한 틈을 타 공격하니 적은 정의를 상실하고
도망가거나 항복했다. 전리품으로 기관총 1정, 권총 8정, 실탄 1000발 그리
고 군복들을 챙겼다.
"산체스! 이 모자 어때?"
"분대장 모자인데요."
"이 모자는 내가 써야겠군."
"잘 어울리는데요?"
체는 전리품으로 챙긴 정부군의 분대장 모자를 쑤고 다녔다. 농부한테서
변장용으로 빌려입었던 옷도 보리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런데 이 전리
품이 문제를 일으켰다. 초승달이 떠 있는 밤이었다. 체는 외곽 순찰을 돌고
있었다. 정부군이 정찰을 나왔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서 긴장한채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데, 발부리에 커다란 돌맹이가 걸렸다. 몸이
기우뚱 하는순간 총소리와 함께 총알이 체가 머리에 쓰고있는 정부군 분대
장 모자위를 날아갔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체는 총알이 날아온 쪽을 가
늠해보았다. 대원들이 있는 곳이었다. 총알이 날아온 방향에서 소리가 들렸
다.
"움직이면 쏜다. 넌 포위됐다. 소속을 대라."
체는 대원중 보초를 서고있는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쏘지마라, 체다."
"체?"
"외곽 순찰을 돌고있는 중이다. 내 목소리도 모르나?"
"죄송합니다.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정부군 모자를 써서 오인했습니다. 괜찮습니까?"
"운이 좋았네. 돌멩이에 걸려 앞으로 넘어질뻔해서 각도가 빗나갔지 아
니면 죽었을거야."
체의 전리품 모자가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23
"게릴라전 초기 단계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도박에 걸어서도 낭비해서는
안된다.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인간의 생명은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
다."
체는 혁명대원을 자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일기 겸 메모노트에 이렇
게 적었다.
혁명군의 라 플라타 병영공격 이후 게릴라 자원자가 는 것은 물론이고
도시와도 연락이 되어 산 속과 도시의 통일전선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민들의 자발적인 후원도 점차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일찍 중년을 훨씬 넘긴 깡마른 체격의 농부가 대원
들을 찾아왔다.
"저는 이웃 마을에 사는 농부입니다. 저도 혁명군이 되고싶어 왔습니다."
대원들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체가 그에게 다가갔다.
"나이가 몇입니까?"
"51세입니다."
"이름은?"
"블라디미르입니다."
"블라디미르! 당신의 생각은 고마운데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겠습니
까?"
"무엇을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까?"
"사실 우리는 지원병이 많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나는 안된다는 얘깁니까?"
"왜 혁명군이 되려 하지요?"
"독재자 바티스타를 내쫓고 살기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나서야지요."
"혁명군은 구호나 외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해야합니다."
"나도 그럴 수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당신이 죽고나면 아내와 아이들은 어찌될지도 생각했습니
까?"
"..."
"블라디미르, 당신은 혁명군이 되어 총을 들고 싸우지 않고도 우리를 도
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좋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식량을 주십시오. 그리고 비밀을 지키십시
오."
체와 상담을 했던 블라디미르는 집으로 돌아갔다. 오후에 다시 찾아온
블라디미르는 곡식과 야채를 가져왔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블라디미르, 고맙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우리 대원들을 보내겠습니
다."
블라디미르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소문을 듣고 찾아온 혁명군 지원자들의 숫자가 하나둘 늘어갔다.
도시에서 찾아오는 혁명 지원자도 있었다. 또 혁명군이 머물고있는 동안
지역 주민들은 혁명군에 우호적이었다. 정부군 편을 드는 사람은 지주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농민들은 대원들이 먹을 식량을 가져오기도 하고,
정부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무작정 믿을
수는 없었다. 체는 지원자나 농민들 중 정부군 끄나풀이 있을까 항상 경계
하고 있었다.
한동안 혁명군으로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 지원병 모집에 대한 논의를 하
고 있을 때 정부군이 머물고 있는 곳과 가까운 마을에 산다는 젊은 청년이
찾아왔다. 청년은 건장한 체격에 눈빛이 매서웠다.
"제 이름은 구에라입니다. 우리 마을 뒷산에는 정부군 진지가 있습니다.
요즘은 정부군들이 마을 동정을 살피고 있지요. 혁명군을 자원하는 사람들
이 있다는 정보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도시에 취직을
하러 간다고 말해두고 떠나왔습니다."
대원들은 구에라를 혁명군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일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피델도 그의 능동적
인 행동을 칭찬했다. 그는 혁명군으로 지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량을
구하러 나가기도 하고 주위의 친구나 친지들을 통해 정부군의 움직임을 수
시로 탐색해오기도 하는등 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지도부는 항상 첩자를
우려하여 자원자의 마을 연고자를 통해 확인하는 작업을 하는 철저함이 있
었다.
혁명군이 농부들을 도와 포도를 수확하는 날이었다. 농민 혁명 지원자
한 사람이 체에게 포도 따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척 하면서 작은 소리로 말
했다.
"구에라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왜 묻지?"
"구에라는 농부가 아니에요."
체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구에라가 농부가 아니라고?"
"틀림없어요. 그는 농사일을 몰라요. 이곳 지리에도 어둡더군요.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산 사람이 아니에요."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그 동안 식량을 구하러 나가면서 또 정보수집을 나가면서 저하고 함께
있었잖습니까? 의심나는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어요."
체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피델을 찾았다. 피델은 구에라와 함
께 있었다.
"피델, 포도가 아주 잘 익었지요?"
체는 일부러 태연을 가정하느라 포도 한 알을 꿀꺽 삼키고 피델 곁으로
갔다. 구에라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체를 바라보았다.
"구에라, 올해는 포도가 풍년이지?"
"올해는 포도만이 아니라 모든 농작물이 풍작인걸요."
체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피델에게 사실을 말하고 대책을
세워야 했다.
"피델, 우리는 이만 돌아갑시다. 정보수집 나간 대원들이 돌아올때가 됐
어요."
"그럴까요?"
피델과 체가 포도밭을 나오자 구에라가 따라나왔다. 피델이 구에라를 돌
아보며 포도담은 그릇을 그에게 맡겼다.
"구에라, 나는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아 한 바구니도 못 채웠어. 구에라
가 나머지는 채워가지고 오도록 하지."
구에라는 바구니를 받아들고 다시 포도밭으로 들어갔다. 체는 포도밭을
벗어나자 이야기를 꺼냈다.
"피델,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라구?"
"구에라가 수상쩍어요."
피델은 놀라지도 않았고, 담담한 어조로 되물었다.
"언제 그걸 알았소?"
"조금 전에..."
"나도 오늘 그 사실을 알았소."
피델이 놀라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왜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요?"
"곧 알게 될 겁니다."
마을에 도착하자 정보수집을 나갔던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을 데리고와
피델과 체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델, 구에라가 자기 마을이라고 말했던 곳에 사는 리카르도입니다. 얼
마 전부터 우리 정보원으로 우리를 돕고있습니다."
"그 마을에 구에라가 살지 않았습니까?"
"구에라는 바티스타의 첩자입니다."
리카르도의 입에서 바티스타 정부군의 첩자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피델은
눈을 감아버렸다. 체도 한숨을 내쉬었다.
포도수확을 나갔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그 때까지 구에라의 표정은 밝았
다. 리카르도를 본 구에라는 씩 웃으며 말을 걸었다.
"새로 온 대원인가요?"
구에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보초를 서고 있던 보초병이 구에라의
팔을 뒤로 결박지었다. 구에라는 손을 빼내려고 발버둥쳤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이거 왜 이래."
"구에라, 여기 서 있는 이 친구는 새로 들어온 대원이 아니라, 네가 산다
는 마을에서 널 확인하러 온 사람이다."
구에라는 눈을 부릅뜨고 리카르도를 노려보았다.
"구에라, 네 임무가 무엇이냐?"
"..."
입술을 꼭 다문 구에라는 대원들을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비권을 행사해도 소용없다. 배신자의 최후가 어떤 것이지 확실하게
보여주마."
피델은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체 역시 화가 났다. 신중
하지 않았더라면 또다시 대원들이 큰 위험에 빠질뻔했다.
체는 그날밤 구에라에 관한 기록을 이렇게 썼다.
"구에라, 그는 간첩행위를 하기 위해 우리에게 왔다. 그리고 그의 종말은
죽음으로 마무리되었다. 구에라의 처형은 잘한 선택이다. 첩자 행위가 어떤
보복을 당하는 것인지를 인식시켜야 한다. 앞으로도 바티스타 정부군에 협
력하는 사람들은 냉혹하게 처리되어야 할 것이다."
혁명군들은 간첩행위를 하는 농민들은 냉혹하게 처리했지만, 중립이거나
혁명군에 협조적인 사람들에게는 공손하게 대했고 바티스타 정부군으로부
터 보호해주었다. 그에비해 바티스타군은 농민들을 마구 무시하거나 함부
로 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군에 협력하는 마을이 점차 확산되어갔다.
24
시에라마에스트라의 생활이나 기후가 좋지 않아서인지 체에게 천식이 발
병했다. 때마침 대원들이 이동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피델, 나는 나중에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천식이 심해지면 대원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을겁니다. 나는 여기남아 치료를 하고 뒤따라
가겠습니다. "
"체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체는 마을에 남아 농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대원들이 모두 떠난 뒤 체
혼자 남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체를 찾아왔다. 기침이 심해서 음식도 제대
로 먹지 못한 체는 기진맥진해 누워있었다.
"제가 여기 남아 여러분들을 귀찮게 하는 것 같습니다."
늙은 농부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체의 손을 잡았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오. 우리는 당신 병이 걱정될 뿐이오. 어서 병이
나아서 동지들을 찾아가야지요. 우리가 천식 약을 구하러 젊은이 둘을 도
시에 보냈으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시오."
친절한 늙은 농부의 말에 체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그러는 체에게 내
민 농부의 손은 따뜻했다.
"언제부터 천식을 앓았소?"
"어릴때부터입니다."
"부모님이 힘드셨겠소."
"당신을 보니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오?"
"네."
늙은 농부는 짓무른 눈을 손등으로 비벼댄 후 동정어린 눈빛으로 체를
바라보았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바티스타 정부군과 혁명군 모두를 두려워했소. 그
런데 당신을 보니 혁명군은 정부군과 많이 다른 것 같소."
"왜 혁명군을 두려워했습니까?"
"우리하고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편이고 여러분이 받는 고통을 없애려
고 바티스타와 싸우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똑같이 나약한 인간
일 뿐입니다."
늙은 농부는 체의 기침소리가 거칠어지자 체의 이마에 손을 얹고 어찌할
부를 몰라했다.
체가 천식을 앓고 누워있는 동안 농부들은 극진히 간호했다. 농부들은
체와 함께 지내면서 체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됐다.
다행히 마을의 젊은이가 구해 온 천식 약을 효과가 있었다. 체의 천식을
며칠만에 회복되었다.
체가 대원들과 합류하러 떠날 차비를 하는데, 늙은 농부가 다시 찾아왔
다. 그의 손에는 작은 꾸러미가 손에 들려 있었다.
"이렇게 병이 차도가 있어 좋지만 떠난다니 서운해서 어쩌나..."
"또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늙은 농부는 가지고온 꾸러미를 체에게 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천식에 좋다는 민간 약을 구했소."
체는 늙은 농부의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에 목이 메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해야 갚을지..."
체는 도움을 준 마을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마을사람들은 아직
병색이 완연한 체가 총을 지팡이삼아 걸어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
다. 평소에는 혁명군과 농부들을 돌보는 의사였지만 그 자신의 병에서는
농민들의 간호를 받자 체는 다시한번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결의를 했다. 다시 본대에 합류하니 아바나에서 학생봉기가 있었다는 소식
이 들어왔다.
"체, 이제 시작인 것 같소. 아바나에서 학생 봉기가 일어났다 하오. 그런
데 바티스타 정부군이 잔인하게 진압했다는 것이오. 이제 민중은 더욱 분
노에 차 더 크게 바티스타 독재에 맞설 것이오."
피델 카스트로는 아바나의 봉기에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30명의 대원
들도 외로운 투쟁이 아니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57년 5월, 화창한 날씨에 며칠동안 정부군과의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
들어 긴장이 조금 풀인 상태였다. 카스트로와 체는 다음 작전에 대한 논의
를 하고 있었다.
"피델, 오고 있습니다."
외곽 보초를 서고 있던 보초병이 숨가쁘게 달려왔다.
"바티스타 정부군?"
카스트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곁에 놓여있던 총을 집었다. 곧 뛰어나갈
자세였다.
"아닙니다. 정부군이 아니라, 지원병입니다."
"농민인가?"
"농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장을 하고 배낭까지 메고 있습니다."
"몇명이나 되나?"
"50명이라고 합니다."
카스트로와 보초병이 묻고 대답하는 동안 50명의 혁명 지원군들이 도착
했다. 대원들과 체, 그리고 카스트로는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카스트
로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카스트로의 목소리는 감격해 떨리고 있었다.
"지원병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지만, 이렇게 많이 오리라
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여러분, 환영합니다."
카스트로의 환영인사가 끝나자 지원병들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도시에서 활동하던 작은 그룹입니다. 바티스타 정부군은 혁명군
과 농민들의 고리를 끊기위해 혁명군에 협조하는 농민들에 대한 테러공작
을 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우리는 도시에서의 활동도 중요하지
만 이곳에서의 활동이 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어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
다. 우리를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시에서 온 지원병들은 인원뿐만이 아니라, 많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대원들은 상당수의 기관총, 자동소총, 카빈총, 탄알이 든 6천개의 탄창을
확보하게 됐다.
그란마호를 타고 온 대원들은 시에라마에스트라에 들어온 지 몇 달이 나
나 이제 베테랑이 되었다. 그러나 무기를 갖고 온 신참대원들은 그란마호
를 타고 온 대원들이 겪었던 고통을 다시 겪고 있었다. 시에라마에스트라
에 들어온 첫날부터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었고 하루 한끼만 먹
는 생활을 못 견뎌하는 사람도 있었다. 신경이 예민한 대원들은 음식을 전
혀 먹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도시에서 지니고 온
배낭에는 게릴라 대원으로서는 불필요한 물건들이 가득해서 이동을 하면서
무겁다고 생각하면 소중한 식량을 쉽게 버렸다. 신참들이 버린 식량은 고
참 대원들이 다시 주어 모아야 했다. 신병교육을 맡은 체는 '식량을 버리는
행위는 반역이다.' 라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이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나자 병정놀이에 나온 아이같던 신참대원들은 훈
련을 통해 빨게 적응해 나갔다. 그리고 체가 주축이 된 엘 우베로 전투에
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1957년 5월에 벌어진 시에라마에스트라 남
동해안에 있는 엘 우베로 병영공격으로 80여명의 혁명대원들이 활동할수
있는 영역은 더욱 넓어졌다. 정부군과의 산발적인 전투로 점차 혁명군이
지배하는 구역이 넓어졌다. 그리고 이 무렵까지 혁명군의 전투방법도 보다
대담해졌다. 심지어 대낮에 적을 공격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1957년 7월경
혁명군의 숫자도 200여명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카스트로는 부대를 둘로 나
누고 체를 소령(혁명군의 최고 간부)으로 진급시켜 제2부대장으로 임명했
다. 이후 시에라마에스트라 지역의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정부군은 계
속적인 패배를 하게 되자 결국 부대를 철수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어 당
분간 전투가 없어지자 체에게도 여유가 찾아왔다. 해먹에 누워 책을 읽거
나 사색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 동안 밀려있던 메모 정리도 하고 시
에라마에스트라 지역의 농촌을 수시로 왕래하며 농민들의 진료도 할 수 있
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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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1월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혁명군은 시에라마에스트라에 진지를
세웠다. 병영본부에는 대원들의 숙소가 세워지고 훈련장이 만들어졌다. 빵,
담배, 무기, 제복들의 소규모 제조공장과 라디오 방송국, 병원이 세워지고,
야채 밭과 목장도 생겼다. 전투교육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진지를 만드는 기획에 체의 능력이 발휘되었다. 체는 엘 우베로 전투
이후 '체' 라는 호칭에서 '대장' 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체가 소령이 되어
제2부대장이 된 까닭이다. 그래서 대원들은 카스트로 다음 서열로 받아들
였다. 바티스타 정부도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과 함께 체를 제1급 위
험인물로 지목했다. 진지 안에는 정기 간행 신문 <자유 쿠바인>을 찍어내
는 인쇄소도 들어섰다.
체는 진지가 구축된 이후 새로운 쿠바 건설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밤
늦도록 해먹에 앉아 생각하고 메모했다. 다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때도
그는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대장님, 그토록 열심히 기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며칠을 지켜보던 라파엘 차오가 궁금증을 내보였다.
"왜, 궁금한가?"
"매일 밤잠도 안 주무시고 늦게까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라파엘 차오! 우리가 승리한 후의 쿠바를 생각해 보았소?"
"글쎄요."
"막연한 생각은 실현될 수가 없는 것이지. 실현된다고 해도 문제가 많아
실패할 수 있고."
"그렇다면 승리한 후 쿠바의 앞날을 설계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우리 모두가 생각해야 할 문제야."
"대장님이 설계한 미래의 쿠바는 어떻습니까?"
"먼저 농장소유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점이네. 농장소유제도 때문에
대규모 농장주인으로부터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고통받는 농민들을 구해야
한다네. 즐겁게 노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야. 노동을 즐겁게 할
수 있어야 사는 것도 즐겁지 않겠는가?"
"대장님이 오늘 메모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메모는 곧 발표할 혁명군 수칙이야. 한번 들어보겠나?"
체는 라파엘 차오에게 자신이 작성한 혁명군 수칙을 읽어주었다.
"우리 혁명군은 민중 해방을 위한 십자군으로서 농업개혁가다. 혁명가는
윤리적으로 결점이 없어야 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 혁명군은
금욕자여야 하고, 경제적, 윤리적, 기술적, 문화적으로 끊임없이 농민을 도
와주어야 한다. 또 지역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된다. 혁명군은 배
반자를 처벌하고, 혁명의 적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과 생산수단을 압류하
는 과정에서는 정당한 입법에 의거, 장악한다. 혁명의 적들에게서 몰수된
토지와 가축은 농민들에게 분배한다. 가능한 한 협동적인 제도를 창출한다.
혁명대원들이 갖추어야 할 정신적 육체적 자질은 선견지명, 낙천주의, 통
찰력, 강인함이며, 혁명군은 굶주림, 질병, 갈증, 부상, 고문들을 견디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
혁명대원에게 불필요한 것은 담배, 읽을 책, 메모지..."
라파엘 차오는 체가 읽어 준 혁명군 수칙을 듣다가 체의 말을 중단시켰
다.
"잠깐만요. 혁명대원에게 불필요한 것중 담배는 대장님이 가장 즐기시는
것이고, 책 읽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고, 대장님은 전쟁 중에도 사건
을 기록했는데요."
"라파엘 차오! 잘 지적했어. 지금 읽어준 것들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
이지만, 나 자신부터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있어."
체는 라파엘 차오의 지적에 부끄러운 것을 들켜버렸다고 말했다.
체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은 책과 메모지, 담배였다. 그는 틈만 나면 책을
읽거나 메모를 하는 습관이 배어 있었다. 담배 역시 그에게는 필수품이었
다. 그가 있는 곳에는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었다. 혁명군과 정부군의 무장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시에라마에스트라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의사 지원자부터 방송, 신문편집등 전문가들이 찾아왔다. 이제 진지에는 필
요한 것들이 거의 갖추어져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생활이 안정되어 가자 여자들과 할 일을 찾아 진지로 들어왔다.
그런데 여성 대원들 중에는 체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잘생긴 외모
와 해박한 지식, 그리고 그의 리더십과 신사다운 매너는 그를 흠모하지 않
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부인이 있는 몸인데다가 여자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체는 집 지을 자재들을 운반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
을 때 단추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체는 항상 그랬듯이 실과 바늘
을 구해 단추를 달기 시작했다. 그러나 체의 바느질 솜씨는 서툴렀다. 멀리
서 단추를 달고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여성대원 호세피나가 다가왔다.
"제가 달아드릴께요."
그녀는 뒤늦게 자원해 들어온 여성 전투대원이었다.
"괜찮습니다."
"주세요. 단추 달다가 해 지겠어요."
호세피나는 체가 벗어준 옷에 단추를 달기 시작했다. 단추를 달고있는
그녀의 옆모습이 보랏빛 노을과 어울려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체는 남미
대륙 여행을 시작할 때 해변에서 만났던 사라가 이곳에 와 있는 듯한 착각
을 했다. 체의 눈길을 느낀 호세피나가 고개를 돌려 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닙니다."
체는 계면쩍은 미소로 얼버무렸다. 호세피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호세피
나는 단추달기를 마무리하자 자리를 떴다.
호세피나를 만난 후 체는 그녀에게 마음이 다가서고 있는 것을 느꼈다.
호세피나도 체와 만날 기회가 있을 때면 체를 바라보는 눈빛이 남달랐다.
어느 날부터인지 체의 메모지에 호세피나의 이름이 씌여졌다. 둥근 달이
떠오르는 밤에는 달속에 그녀가 숨어있었다. 그러나 체는 호세피나에게 다
가갈 처지가 못되었다. 그녀는 20대의 미혼이었지만 체에게는 멕시코에 두
고 온 딸 일디타와 아내 일다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운명의 끈은 이미 꿰
어지고 있었다.
체는 사람들과 어울려 노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대원들과 함께 식량을
창고로 옮기는 작업에서부터 대원들의 숙소를 짓는 일도 참여했다.
"대장님, 집 짓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혁명군에 들어오기 전에 목수일을 했다는 대원이 체의 작업모습을 지켜
보다가 한마디 했다.
"아버지가 건축가니까."
"그래도 건축을 배운 것은 아니잖습니까?"
"앞으로 건축일을 좀 적극적으로 배워야겠군. 혁명이 끝나고 집없는 사
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 주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
"그렇지만 대장님이 이런 힘든 일을 하시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런 말 하면 나는 섭섭해. 노동은 신성한 것이야. 사실 나는 대장이라
는 호칭도 마음에 안 들어. 그냥 체라고 불러주면 좋은데..."
체는 일을 하느라 흙투성이가 된 신발과 땀에 젖은 옷을 걸치고 대원들
과 땅바닥에 둘러앉아 휴식을 취할 때도 마냥 즐거워했다. 함께 일을 했던
대원들의 표정이 행복해보일때는 그도 행복했다. 체는 먹는 것, 입는 것,
일하는 것 모두 대원들과 똑같이 했다.
1958년에 들어오면서 혁명군의 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갔다. 그러
나 바티스타 전군을 무너뜨리기에는 아직도 모자라는 편이었다.
"체,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런 상태로 기회만 엿볼수
는 없다는 판단입니다."
"피델,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바티스타에 대항하는 쿠바내의 모든 세력을 연합해야 겠습니다."
카스트로는 쿠바 내의 모든 바티스타 반대세력들에게 연합전선을 구축하
자고 제의했다. 그리고 그해 2월, 산을 내려가 혁명전쟁을 개시할 것을 결
의했다.
1958년 4월, 총파업이 시작되자 카스트로는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총
파업은 바티스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실패했다. 그래서 총파업을 이끌던
바티스타 반대세력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시에라마에스트라와 도시를
이어 주었던 연결통로도 끊겨버려 도시에서 시에라마에스트라로 이어지던
보급루트도 단절되었다. 총파업 실패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바티스타 정부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전해진 급보는 체가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어. 총파업이 실패했을 때 이런 날
이 올 것을 예상했고, 우리는 그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전략대
로 해."
혁명군은 병력규모에서는 압도적으로 적지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5개 부대로 구성된 혁명군 800여명은 만 명이 넘는 바티스타
군을 상대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그 중 제2부대는 체가 지휘를 맡고 있었
다.
호세피나는 체가 이끄는 부대에 속해있었다. 대원들을 둘러보던 체가 호
세피나를 발견했을 때 호세피나의 눈빛도 그를 찾고 있었다. 체는 호세피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기뻤다. 그러나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개인의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에비해 호세피나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 한땀씩 꿰매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호세피나는 이제 자신의 감
정을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생명을 담보로 한 이 전쟁에서 언제 어
떻게 될지 모르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대장님! 저 대장님을 사랑해요."
호세피나는 전투가 없어 쉬고 있는 산 속에서 체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
했다.
"호세피나,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지요?"
"내 생각이 잘못 된 것일까요? 대장님 생각도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고 생각한 것은 잘못인가요?"
"그게 아닙니다. 내 생각도 호세피나와 같지만 내 처지가 입을 다물게
한 것입니다."
"부인때문인가요?"
"알고있었습니까?"
"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 아닌가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어요. 이렇게 쉬고있을 때 따뜻한 당신
의 눈빛을 똑바로 볼 수 있으면 돼요."
호세피나는 체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대장님, 우리가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요?"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나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호세피나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의 얼굴을 땀과 흙으로 뒤엉켜 있었다. 전투가 시작
되기 전까지도 함께 있었던 대원들이 여러명 눈에 띄지 않았다. 한쪽에서
는 부상당한 몇몇 대원들이 치료를 받으면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쏟아
내고 있었다. 체와 호세피나도 조금 전까지 부상자를 돌보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호세피나! 죽는 것이 두렵소?"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옆에서 죽어가는 대원들을 바라볼 때마다 내게도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느껴져요."
"그런 생각은 나약한 생각이오. 당신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오."
체는 대원들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혁명에 대한 다짐을 큰 소리로 외치
게 했다. 그리고 새로운 작전을 펼치기 위해 앞으로 나갔다. 혁명군은 특유
의 기동성을 살려 정부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리고 익숙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약한 정부군을 집중공격하거나 배후에서 급습하여 섬멸시키며 계
속 앞으로 전진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혁명군들은 이 전투에 운명을 걸
었다. 그에비해 바티스타군은 서로 눈치를 보며 목숨을 보전하기에 급급했
다. 전투가 지속될수록 이곳저곳에서 혁명군의 작전에 걸려든 정부군이 조
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티스타 정부군이 총공격을 개시한지 한 달 보
름만에 체의 서부전선 혁명군은 카마콰이 평원을 가로질러 라스빌라스에
도착했다. 피델의 동생 라울이 이끄는 동부전선 혁명군도 산티아고 데 쿠
바 주변을 장악했다.
혁명군이 두 방향으로 전진하며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동안 쿠
바의 이곳저곳에서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민중의 지지를 받는 혁명군은
무기와 숫자에서 점차 늘어나는 반면에 바티스타의 정부군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사기도 떨어졌다. 바티스타 정부군은 총공격 태세에서 점차 방어
태세로 전환했고 급기야는 곳곳에서 패배를 했다. 1958년 12월초, 이제 혁
명군이 총공세를 폈다. 그리고 그해 12월 31일, 체가 이끄는 혁명군이 산타
클라라에서 정부군의 주력부대를 궤멸시켰다. 그러자 그 다음날인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는 몰래 현금과 보석자루를 챙겨 황급하게 미국으로 도
망쳤다.
오리엔테 평원, 카마콰이 평원, 라스빌라스 산악, 그리고 산타클라라등의
주요 도시에서 승리를 거듭한 혁명군은 드디어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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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월 5일, 카스트로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통일전선이 바티스타
정권을 인수했다. 사법관이던 마누엘 우르티아가 대통령에, 호세 미로 카르
도나가 수상에 임명되었다. 혁명이 끝나자 카스트로와 체는 새로운 쿠바를
이끌어가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언제 또다시 미국이 반혁명을 획책할지 모
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맨 먼저 군대를 전면개편하여 반동세력의 반격에
대비했고 이어서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처벌을 시작했다. 이 재판관에 체가
임명되었다. 체는 수만의 민중을 학살하는데 앞장선 이들 반혁명분자들을
엄벌하였다. 다시는 반란을 꾀할수 없도록.
사람들은 체를 쿠바의 혁명지도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체는 혁명가란
'인간적인 존재로 머무는 사람' 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체는 남미 민
중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었고, 멕시코시티에서
혁명 이론가가 되었다가 쿠바에서 혁명지도자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그에
게 어떤 이름보다도 '혁명가'라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는 '혁
명이 있는 한 그곳에 있는다' 라는 철저한 원칙을 삶의 과제로 삼은 사람
이었다.
그해 2월에 수상이 되어 명실상부한 권력의 자리에 오른 카스트로의 집
무실. 혁명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혁명정부를 이끌어갈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한 자리였다. 카스트로는 좌중을 둘러보
며 물었다.
"자네들 가운데 이코노미스트 없나?"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체가 번쩍
손을 들었다.
"아니, 언제부터 자네가 이코노미스트가 됐지?"
카스트로가 깜짝 놀라 물었다. 사람들은 모두 체를 바라보았다. 체 자신
도 당황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코뮤니스트가 없느냐고 묻는줄 알았습니다."
"아닐세. 자네가 지금부터 쿠바 정부의 국립농업개혁국에서 일하게나."
이렇게 되어 체는 농지개혁을 실행하기 위해 설립한 농업개혁국에서 경
제분야의 일을 맡아보게 된다. 5월 17일 혁명정부는 농민들과의 약속을 지
키기 위해 농지개혁을 단행한다. 이 개혁의 핵심은 누구도 995에이커 이상
의 농지를 갖지 못하게 금지시켰다는데 있었다. 이렇게 되면 가장 타격을
입는 것이 미국의 사탕수수 회사들과 대농장주들이었다.
그해 6월 체는 인도, 이집트, 인도네시아, 일본, 유고등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에 친선 사절단장을 돌아다닌다. 쿠바혁명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한
편 통상관계를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체가 이렇게 외유하고 있을때인 7월,
쿠바 국내에서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 일어난다. 농업개혁으로 타격을 입
은 상류계급이 중심이 되어 카스트로 배척 음모를 꾸민 것이다. 이들은 대
통령 우르티아를 설득하여 카스트로의 사임을 촉구했다. 이런 움직임에 우
르티아가 흔들리는 것을 본 카스트로는 7월 18일 수상직을 사임하고 만다.
체는 급히 귀국하려고 라울에게 전화했으나 그는 태연하게 여행을 계속 하
라고 권했다. 체는 사태의 본질을 알아채고 여행을 계속한다.
카스트로의 사임은 쿠바 국민을 분노케했다. 수십만의 군중이 매일같이
혁명광장에 모여 우르티아의 사임과 카스트로의 복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유약한 자유주의자 우르티아는 결국 사임하고
카스트로는 전권을 장악하며 복귀한다.
1959년 10월, 체에게는 다시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다. 쿠바 중앙은행 총
재 겸 산업부흥상에 임명된 것이다. 체는 기꺼이 혁명가에서 행정가로 변
신하는데 동의했다. 체가 혁명정부의 산업부흥상이 되고, 그가 혐오하는 돈
을 다루는 중앙은행 총재까지 겸하게 된 이유는 과테말라 혁명의 실패를
직접 겪었기 때문이었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혁명 이후 보다 근본적인 개
혁이 필요하다는게 그의 신념이었다.
체는 천성적으로 돈을 모으는 걸 싫어했다. 돈 없이 금욕적으로 살아가
는 것을 혁명가의 최고 덕목이라고 여겼다.
체가 산업부흥상 겸 중앙은행 총재가 된 후 각료회의가 열렸다.
"오늘은 국가졍제 회복을 위한 중대한 사안을 논의합시다."
카스트로가 각료회의 안건을 얘기했다.
"우리는 이제 혁명을 끝냈고, 남은 것은 국민들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
것인가를 생각할 때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계획을 실현시키고, 산업을 부흥
시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소련에서 차관 제의가 들어왔습
니다."
카스트로가 소련의 차관 제의에 대해 각료들의 의견을 묻는 중이었다.
시가를 피우고 있던 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무상입니까, 유상입니까?"
"차관이라고 말했으니 물론 유상입니다. 소련은 우리를 돕고싶어 합니
다."
카스트로의 대답이 끝나자 체는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소련이 유상차관을 주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돕는 것입니까? 돕는 것이
라면 당연히 무상증여여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동지들! 소련은 우
리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돈으로 장사를 하자는 속셈 아니고 무엇입니
까?"
체의 흥분된 목소리에 각료들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체가 감정을 누
그러뜨리느라 새 시가에 불을 붙였다. 그때 각료 한 사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장 돈이 필요합니다. 원
자재를 들여와야 하고 기계를 사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나라도 우리
에게 원조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련은 우리에게 돈을 빌
려주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도리어 소련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체는 피우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에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발언을 했던
각료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회주의 종주국이
라고 큰소리 치는 소련이 어떻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돈 장사를 합니까?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나라간의 지원도 무상이어야 한다는 생
각은 안하십니까?"
"그것은 산업부흥상 당신의 도덕적이고 감상적인 이론일 뿐입니다. 그런
이론이 통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룬 혁명을 생각해보십시오. 돈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우리는 바꿔야 합니다."
체는 각료회의에서 끝까지 무상증여를 요구하자고 주장했지만, 현실적으
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체는 당면한 쿠바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
안을 체계화시키려 끊임없이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자주적인 경
제개발계획을 세워 저개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개발이란 괴상한 머리와 잔뜩 부풀어오른 가슴을 하고, 다리와 팔은
짧아 자신의 몸체와 함께 활동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제국주의는 남미
대륙의 경제형태중 공업 및 농업의 잠재력을 제국주의 자신의 복잡한 체계
의 한 보충물로 발전시켜 놓음으로써 남미 경제를 왜곡시켜 놓았다. 이와
같은 왜곡된 저개발은 결과적으로 전국민에게 기아상태를 안겨줄지도 모르
는 위험한 수준까지 특정 원료품의 전문화를 진행시켰다. 저개발국은 단일
품목행산, 단일시장에 얽매여 있으며, 이런 단일시장에 매여 판매기회마저
불확실한 단일품목 생산은 고대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로마제국시대
수법인 분할통치와 유사한 제국주의 지배의 전형적인 형식이다. 쿠바 경제
가 미국의회가 제정한 설탕수입 제한량에 묶여있었다는 사실은 나의 이론
을 입증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쿠바의 현실을 꿰뚫는 체의 이론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사
람들은 이렇게 경제전문가가 된 체의 불가사의함에 대해 궁금해했다. 사람
들로부터 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언제 잠을 자느냐는 것이었다. 그때
마다 체는 웃으며 자신도 똑같은 인간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
실이 아니다. 체는 하루에 4시간도 채 자지 않으며 성실하고 꼼꼼하게 책
을 읽고 문제를 연구하고 그 해결책을 찾았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확실
하게 구분되는 그의 특징이었다.
1960년, 사르트르가 쿠바를 방문했다. 체는 사르트르를 상당히 존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체는 사르트르가 묵고있는 숙소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만
나는 순간 서로의 인간적인 면모에 반하고 말았다.
사르트르의 회고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문이 열리고 반항적인 모습의 한 남자가 들어섰다. 머리는 길고 수염도
덥수룩했다. 그러나 단호한 그의 얼굴에 어린 표정은 아침이슬처럼 맑았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 이름은 체라고 합니다."
"당신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젊다는데 감탄해서 한동안 체를 바라보았다.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젊은 당신이 그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체, 당신은 직업이 몇 개입니까?"
나의 질문에 체가 장난기 있는 미소를 지었다.
"우선 의사고, 그 다음은 병사, 그리고 당신이 알다시피 지금은 은행가입
니다."
체의 사회과학에 관계된 진지한 대화를 하는동안 나는 다시 한번 놀랐
다.
"체! 당신의 지식은 놀랍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엄청난 업무와 많은 연구
과제를 하면서 언제 잠자고 언제 휴식을 취합니까?"
체는 그 질문에 미소로 대답했다. 모처럼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난
다는 듯 체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업무 때문에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
서는 체에게 나는 손을 내밀었다. 체도 나의 손을 마주 잡았다. 우리는 서
로의 손을 통해 오래된 자기의 체온을 느꼈다.
"떠나기 전에 다시 뵙게 되기를 원합니다."
체가 아쉬움을 표했다. 나도 체와 좀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것이 아
쉬웠다.
27
혁명정부가 들어서고 체의 부인 일다와 딸 일디타가 쿠바로 들어왔다.
체가 그란마호에 승선해 멕시코를 떠나온 후 몇 년만에 처음 만나는 가족
이었다. 일디타는 네 살난 예쁜 딸아이였다. 오랜만에 아빠를 만난 일디타
는 처음에는 서먹했지만 곧 아빠를 좋아했다. 체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남
다른 애정을 보였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런 체를 금방 좋아했다.
체는 부인 일다 가데아가 쿠바에 온 후 고민에 빠졌다. 호세피나가 곧
아이를 출산할 예정인데다가 일다 가데아는 쿠바의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
해 힘들어했다. 체는 일다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
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이혼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일다는 체의 이야
기를 듣고 이미 두 사람이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
는 슬펐지만 동지애와 사랑으로 결합된 두 사람에 비해 자신은 쿠바의 생
활 자체에도 적응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녀는 결국 이혼을 선택
하고 멕시코로 떠났다. 딸 일디타는 체와 함께 남았다. 1959년 6월 2일, 체
는 호세피나, 즉 알레이다 마르츠 데 라 토레와 결혼, 부부가 되었다. (호
세피나는 그녀가 혁명대원시절 사용한 가명이었다.) 시에라마에스트라의
진지에서 꿰어진 운명이 부부로 매듭지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
아 호세피나는 튼튼한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카밀로 게바라 마르
츠라고 지었다.
체는 가정이 안정되자 더 의욕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노동자 집회에 나
가 연설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체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몰
려들었다. 사람들은 체의 연설을 듣고싶어했는데 그가 열정적으로 연설하
면서도 시인의 시구절을 적절하게 인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도 태양의 리듬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나의 곡식 이삭을 사랑과 고상함 속에서 수확하고 있지 않았다.
우리 쿠바인은 시인의 말대로 일상생활의 무거운 짐을 의미있는 놀이로
바꾸려는 의지와 요구에 의해 자연으로 돌아가 삶의 태도를 극복했습니다.
새로운 인생관을 창조해냈습니다. 만약 그 시인이 쿠바로 돌아온다면 모든
이들이 소외의 계단을 밟으며, 착취자의 압제아래서 멍에를 지고 짐을 끄
는 짐승으로 간주되었던 시대가 사라지고 노동을 즐거운 놀이로 여기는 것
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쿠바에서 노동은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동은 지극한 행복속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체의 연설은 언제나 힘이 있었고 확신이 있었다.
1960년 체는 산업상이 되었다. 산업부흥상, 중앙은행 총재를 거쳐 산업상
이 된 그는 그 동안 구상해놓았던 산업화정책의 입안을 서둘렀다. 그가 추
진한 정책의 핵심은 자력에 의한 생산시설의 확보였다. 쿠바는 미국자본의
지배아래 사탕수수 재배농업과 설탕산업만이 기형적으로 발달하고 다른 공
산품을 생산하는 시설들은 극히 미약한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원하
지 않아도 미국의 경제적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공동소
유적인 자립경제를 수립하기 위해 산업발전 4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
획의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다.
1)경제유전원칙에 따른 농지개혁 2)사탕수수 경작지의 축소와 식량용 경
작지의 확대 3)신발, 의류, 건축자재등 생활필수품 공업과 기계, 종이, 석탄
등 기간 공업의 급속한 확대 4)1차 상품의 수입제한 5)기간산업의 국유화
6)외화축적 7)임금제도의 개선
그러나 산업화는 의욕만 가지고 성공할 수 없었다. 체가 내세웠던 경제
계획은 실행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중에서 특히 임금문제와
농민들의 소득감소 문제는 그가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가져왔다. 노동자나 농민들은 자신들의 소득이 감소하는 것을 감내하려 들
지 않았다. 또 공장등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투자할 자본금도 턱없이 부족
했다. 그 결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정책도 발생하게 되었다. 쿠바 혼자
만으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다구나 미국은 쿠바의 자립을
방해하기 위해 생활필수품 수출을 금지시키는 등 온갖 책동을 부리고 있었
다.
체는 사회주의권과의 교류확대를 위해 카스트로의 전권대사가 되어 사회
주의 여러 나라들을 순방했다. 그는 먼저 소련을 방문했다. 그의 방문목적
은 소련으로부터의 무상지원이었으나 소련은 체가 요구하는 무상원조를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소련, 불가리아, 중국, 체코등과 통상조약을 체결하
는데는 성공했다. 물론 이들 사회주의 국가들은 체의 방문을 환영하고 쿠
바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한 우정이나 사회주의적
이상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체는 이런 사회
주의권의 민족주의적인 태도에 적잖이 실망했다. 그리고 체는 혁명전쟁을
전 세계로 확대시켜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사회주의권 지도자들에게도 실망했다.
1961년 4월 17일, 쿠바의 자주노선에 화가 난 미국은 그 가면을 벗어던
지고 쿠바를 침공했다. 자국내 미국재산을 국유화시키며 사회주의권과 통
상을 확대하는등 카스트로 정권이 반미노선을 걷자 피그만 해안을 공격한
것이다. 막강한 화력을 가진 군함과 군대로 쳐들어 왔으나 쿠바군과 쿠바
인은 혼연일체가 되어 미국의 침공을 물리쳤다. 이제 쿠바가 나아갈 길은
명확했다. 쿠바는 이 침공직후 사회주의의 일원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그리
고 반미친소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했다. 1962년 미국은 쿠바에 소련 미사
일을 설치한다는 이유로 쿠바 봉쇄령을 내렸다. 결국 소련이 양보하여 이
봉쇄는 풀렸지만 쿠바인들의 반미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체는 쿠바경제의 자립화를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리고 많은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쿠바의 입장을 설명, 다른 나라
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뛰어다녔다. 그렇게 분주하게 뛰어다니다가 1965
년 1월 그는 아프리카로 장기여행을 떠났다. 이 무렵 체는 이미 쿠바를 떠
날 결심을 하고 있었다. 천성적인 혁명가인 체는 쿠바혁명에만 매달려 있
을수 없었다. 시간이 더 가기 전에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남미의
다른 나라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체는 끊임없는 연설과
단순한 회담에도 싫증을 느꼈다. 또 자신의 자주경제이념에 사사건건 반대
하며 소련만을 추종하는 고참 공산주의자들과의 마찰도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해 3월, 아바나로 돌아온 체는 카스트로를 찾아갔다.
"피델, 나는 쿠바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체, 왜 그런 말을 하지?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
을겁니다."
"아닙니다. 나는 정치가로서의 자질이 없습니다. 그 동안 나에게 주어졌
던 직책들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친 것과 같았습니다. "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카스트로는 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체도 카스트로를 마주 보았다. 체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라틴 아메리카 해방투쟁을 하고싶습니다."
"또다시 혁명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내 조국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 그리고 나를 혁명가고 만
든 과테말라에 이르기까지 혁명이 필요한 나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힘들 것입니다. 그만 두십시오. 혼자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
니까?"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쿠바 혁명이 승리하면, 다
른 나라에서 투쟁할 것을 약속한 대원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안됩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봅시다."
카스트로의 반대에 부딪치자 집으로 돌아온 체는 자신의 존재를 다시한
번 돌아봤다. 그러나 역시 그의 생각은 쿠바를 떠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
다. 때마침 그가 수립했던 경제정책 때문에 카스트로가 정치적으로 난처해
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동안 원조를 주었던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쿠바
의 유통질서를 회복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교역문제에서 자국상품과 설탕
을 교환하자난 것과 자국상품의 보다 많은 판매를 위한 프리미엄 제도를
실시하라는 것이다. 체는 결코 그런 압력을 받아들일수 없다고 주장했다.
체의 생각은 쿠바의 자주적 산업발전을 가로막을 이런 요구를 들어주어서
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체는 소련의 제의를 거절하거나 거들떠보지
도 않았다. 그렇게 되자 소련과 쿠바의 친소파들이 카스트로에게 항의했고
쿠바정부를 이끌고있는 카스트로의 입장도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1965년 4월 중순, 이번에는 아무도 모르게 은밀한 여행길에 올랐다. 체는
쿠바를 떠나기 전 카스트로에게 작별편지를 보냈다. 체는 쿠바를 떠나기
전 아르헨티나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 내용은 많은 암시를 담고
있었다.
"쿠바로 가는 모든 길이 어머니께 차단되어 있거나, 어머니께서 경제제
도의 조직에 관해 조언을 해 주시고자 할 때 알제리의 벤 벨라 씨나 가나
의 누크르마 씨에게 말씀해보세요. 그분들이 기꺼이 도와주실 겁니다. 어머
니는 언제나 외국인일 것입니다. 제게는 그것이 어머니의 영원한 운명처럼
여겨집니다."
체는 쿠바를 떠나 혁명이 있는 나라들을 돌아보고 아프리카 콩고로 갔
다.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 전투에 참여했던 대원중 몇 사람이 그와 동행
했다. 그러나 콩고에서 체는 고전하고 있었다.
28
1965년 11월 11일, 카스트로는 체의 아내와 아이들을 중앙위원회 회의석
상으로 초대했다. 회의장은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너무 조용하고 엄
숙하게 느껴졌다. 체의 아내 호세피나가 아이들을 데리고 회의장으로 들어
서자 카스트로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일디타, 아빠가 보고 싶지?"
카스트로는 일디타의 볼을 어루만졌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체의 아내 호세피아와 아이들이 자리에 앉자 텔레비전 카메라가 연단을
비추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평소 잘 웃고 떠들고 장난질 치던 아이
들도 엄숙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카스트로가
연단에 올라가 마이크 앞에 섰을 때에도 장내 분위기는 장례식장 같았다.
호세피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연단에 서 있는 카스
트로의 표정에도 매우 침통해 보였다.
"저는 오늘 아주 중요한 편지를 공개할 생각입니다."
카스트로의 음성이 허공을 나는 것 같았다.
"이 편지를 지난 4월 저에게 배달되었습니다. 이 편지는 나의 사랑하는
친구이며, 쿠바 혁명의 영원한 동지인 체 게바라가 보낸 것입니다. 나는 사
랑하는 내 친구 체의 안전을 염려해 오랫동안 편지공개를 미루어 왔습니
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의 편지를 공개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지금
도 그가 있는 곳을 밝힐 수 없습니다."
카스트로가 있는 쪽을 향해 카메라가 작동되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중
계를 위한 것이었다.
카스트로가 편지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피텔! 지금 나는 많은 것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안토니아의 집에
서 당신을 만났던 일, 나의 동행을 요구한 당신의 제의, 그리고 혁명의 준
비과정에서 수반되었던 모든 긴장들, 그 모든 것을 말입니다.
그러한 긴장들은 죽어야 할 경우가 발생된다면, 누가 그래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했고 현실에서도 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를 사로잡았
습니다. 후에 우리는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어차피 그것이 현실로
있는 것이라면, 혁명 과정 속에서 불가피하게 누군가는 숭리를 하고 누군
가는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동지들이 승리의 길을 추구
하면서 쓰러져 갔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그때처럼 적극적이지는 않습니
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다 원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쿠바 혁명에서 내가 해야 할 내몫의 의무를 소향했
다고 생각하고, 이제 이미 내 자신의 일부분이 된 당신과 동지들 그리고
쿠바 국민들에게 작별인사를 합니다."
호세피나는 카스트로가 첫 문장을 읽을 때부터 눈물이 솟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별인사 부분을 읽어 내려가자 그녀는 더 이
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닦아 냈습니다. 카스트로의 편지 낭송은 계속 되었
다.
"나는 공식적으로 당에서 차지한 나의 위치, 재상으로서의 지위, 고위 실
력자로서의 지위 그리고 쿠바 시민권, 이 모든 것을 사양하고자 합니다. 그
어떤 법적 절차도 나를 쿠바에 묶어 두지 못합니다. 유일한 끈은 약속이
그렇듯 끊어질래야 끊어질 수 없는 또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나간 생활을 돌이켜볼 때 나는 혁명의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충분
한 자부심과 헌신적인 마음을 가지고 일해 왔다고 믿습니다. 나의 유일한
중대 실수는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투쟁을 시작한 이래 보다 더 당신을 신
뢰했어야 했음에도 그렇지 못했다는 것과 지도자와 혁명가로서의 당신의
자질을 충분히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화려한 날들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같이 있으면서 찬란하
지만 아직은 슬픈 카리브해 위기의 날들을 우리의 민중과 더불어 살아왔다
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 당시 그 어떤 정치가도 당신보다 위대하
게 산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는 아무런 주저없이 당신을 따랐다는 점과 위
험과 원칙에 대하여 사고하고 그것을 직시해 평가하는데 있어 당신과 일치
했다는 점에서도 자부심을 갖습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지역 민중들은 나의
보잘것없는 노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쿠바 최고 지도자로서의 책임감 때
문에 당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헤
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당신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기쁨과 슬픔으로 엉클어집니다.
물론 당신도 내 마음을 아시겠지요. 하나의 건설인으로서 내 마음을 여기
두고 갑니다. 그리고 나를 자식처럼 받아 주었던 쿠바 국민들을 두고 떠납
니다. 그런 사실들은 나를 몹시 가슴아프게 합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카스트로는 목이 메어 편지 읽기를 잠시 중단했
다. 잠시 후 편지는 다시 이어졌다.
"나는 당신이 가르쳐 준 신념, 우리 민중의 혁명 정신, 그리고 제국주의
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싸워야 한다는, 가장 성스러운 의무를 사명감,
이런 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전장으로 떠납니다.
다시 한 번 언급해 두고자 하는데 쿠바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생긴 의무
감을 떠나, 보다 다른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쿠바를 자유롭게 하겠다는 것
입니다. 내가 만약 나의 최후의 시간을 그 어떤 다른 하늘 아래서 갖게 된
다 해도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생각하는 것은 쿠바 국민 특히 당신에 대한
생각일 것입니다. 당신의 가르침, 모범적인 행동에 대해 감사드리며, 나는
나의 행동에 따른 최후 결과에 충실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쿠바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그러한 자격으로 행동
할 것입니다.
나는 아내와 자식에게 어떠한 물질적 재산도 남겨놓지 않았으며 또한 그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러한 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쿠바 정부
는 이미 그들의 생활과 교육을 위하여 충분한 것을 제공하는 정책을 폈음
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쿠바 민중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필요하
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을 말로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승리를 향해 끝없는 전진을!
자유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나의 모든 혁명적 열정으로 당신을 포옹합니다. "
편지를 모두 읽은 카스트로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호세피나의
손수건은 이미 눈물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젖어 버렸다. 텔레비전 중계
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린 '민족해방투쟁의 십자군 전사' 체는 콩고에서 다
시 게릴라 훈련을 받으며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그의
영원한 연인, 라틴아메리카였다. 체코가 콩고를 떠날 때 볼리비아에서는
그의 원대한 꿈을 펼 혁명기지가 마련되고 있었다. 볼리비아 게릴라 코코
페느로가 볼리비아남부 낭카와주 강변에 혁명기지로 사용할 농장을 하나
매입했다는 것이다. 소식을 전해들은 체는 현지답사를 위해 쿠바에 갔던
대원들을 볼리비아로 보냈다. 체도 변장을 한 채 콩고를 떠나 비밀리에
쿠바로 돌아왔다. 변장을 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수염도 없었고, 머리모양과 눈썹,안경과 의복까지 바뀌어
완전히 다른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름도 여권도 모두 우루과이
상인 아돌포 매나로 위장했다. 공항을 빠져 나오는 체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체 스스로 볼리비아 입국을 위한 시험을 치르는 중이었다. 공항
을 빠져 나온 체는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 체는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으
로 돌아가기로 했다. 자신의 변장한 모습을 남들은 그냥 지나칠지 모라도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본 가족들은 알아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가족
들도 자신을 몰라본다면 볼리비아 입국도 차질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가
족들과 만날 결심을 하고 나자 그의 소식을 기다렸을 아내와 아들들과 딸
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는 먼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재회의 설렘
에 들떴으나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집앞에
도착했을 때는 그 설렘마저도 긴장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이나 아내가 알
아보면 어쩌지?"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체는
그 동안 자신이 행동할 시나리오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리고 혼자서
첫 대사를 중얼거렸다. "나는 체의 친구입이다. 체가 보고 싶어 가족들이
라도 만나려고 왔습니다." 체가 망설이고 있을 때 등뒤에서 "누구를 찾으
세요?" 라고묻는 여자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하늘
색 원피스를 입은 큰딸 일디타였다. 순간 뒤돌아보면 일디타가 와락 안겨
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자신도 뒤돌아 딸을 안아 올
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다시 자신에게 타이르듯 호흡을 가다듬
고 뒤돌아 일디타를 바라보았다. 일디타는 낯선 사람을 대하는 듯한 표정
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일디타는 알아차리지 못했
다!
"너 이 집에 사니?"
"네."
"이집이 체의 집 맞니?"
"아저씨는 누구신데, 우리 아빠를 찾으세요?"
"체가 네 아빠니? 반갑구나. 나는 아빠 친구란다."
"아빠는 안 계세요. 먼 곳에 계세요."
"그럼, 엄마 좀 만날 수 있겠니?"
"그럼 들어오세요."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일디타는 똑똑한 아이였다. 일디타를 따라 집
으로 들어간 체는 아내 호세피나가 눈치 채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그러
나 호세피나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체의 친구라고 하
던데, 어떤 친구신가요?"
"제 이름은 알베르토 그라나도스입니다. 고향 친구지요."
"그렇다면 아르헨티나에서 오신 겁니까?"
호세피나가 체의 모습을 살폈다.
"아닙니다. 아마존강 유역 산 파블로에서 왔습니다. 체와는 남미대륙을
도보로 여행한 사이지요."
"아, 체로부터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나네요. 어서 와 이리 앉으세요"
호세피나 체를 자리에 앉도록 했다. 일디타와 마르츠,마르틴 그리고 작
은 아이 둘도 맞은 편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커피 드시겠어요?"
호세피나는 방문객의 신분을 확인하고 체를 귀중한 손님처럼 대접했다.
호세피나가 커피를 끓이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가자 아이들과 체는 서로 바
라볼 뿐 말이 없었다. 아이들의 눈빛은 처음 보는 손님에 대한 호기심으
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디타는 달랐다.
"아저씨 목소리가 우리 아빠하고 많니 비슷하네요."
체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넌 참 똑똑한 아이구나. 아빠하고 학교에 다닐 때 사람들이 목소리만
듣고는 우리 둘을 구분하지 못했단다."
일디타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눈빛은 동생들과 달랐다. 마르츠와
동생들은 체의 눈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일디타는 체의 구석구석
을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일디타의 질문에 용기를 얻었는지 껑충하게
큰 둘째 마르츠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물었다.
"아저씨는 뭐하는 분이세요?'
"의사란다."
"우리 아빠도 옛날에는 의사셨데요."
"나와 함께 의학 공부를 했었지."
"산 파블로에서 의사로 일하세요?"
언제 다가왔는지 호세피나가 커피잔을 쟁반에 받쳐들고 선 채 끼어들었
다, 호세피나는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아이들 틈에 앉았다.
"병원을 운영하고 계신가요?"
"병원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보건소쯤 되는 시설입니다. 산 파블로
마을은 나병환자촌이거든요."
"체가 당신에 대해 말씀하신 걸 들었어요. 과테말라에서 헤어지셨다지
요? 그가 여기 있었더라면 무척 반가워했을 텐데..."
아이들은 그 때까지 무릎을 단정히 하고 바른 자세로 어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눈빛만은 여전히 체에게 고정된 채.
"어머 내 정신 좀 봐. 얘들아 인사드려야지. 아빠하고 가장 친하게 지
내시던 분이란다."
아이들은 훈련생도처럼 모두 반듯이 일어나 "안녕하세요" 라고 입을 모았
다. 호세피나는 자신의 커피잔에 설탕을 세 스푼 떠 넣었다. 체는 습관
처럼 블랙커피를 마셨다. 커피 마시 는 것을 지켜보던 아이들 틈에서 일
디타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물었다.
"아저씨는 우리 아빠하고 닳은 점이 참 많네요. 우리 아빠도 블랙커피를
마시는데..."
"일디타, 어른들 중에는 블랙커피를 마시는 분들이 많이 마신단다."
일디타에게 어른들의 대화에 참견하고 것은 실례라는 듯 호세피나가 일
디타의 말을 받아 설명했다.
"저녁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우리하고 저녁식사를 함께 하셔도 괜
찮으시겠지요?"
"고맙습니다."
체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할수 있게 되어 마음속으로
무척 기뻤다. 호 세피나는 저녁식사를 준비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무리한 부탁일지 모르지만 서재를 보고싶군요. 그 친구는 책읽기를
무척 좋아했는 데..."
"맞아요. 체 곁에 책이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없지요."
"저도 그 친구처럼 책을 좋아했답니다."
"그러시면 저녁이 준비될 때까지 서재에서 책을 보시면서 쉬고 계세요.
일디타, 아저씨를 서재로 안내해 드리렴."
일디타를 따라 서재로 들어간 체는 모든 것이 그대로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디타! 아버지 책상 위에 앉아도 되겠니?'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엄마가 일디타라고 부르던걸."
일디타는 계면쩍으면 어깨를 치켜올리고 살짝 미소짓는다. 그 버릇은
여전하다. 체는 일 디타의 그런 모습을 귀여워했다. 책상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체는 책상 위에 놓인 책을 집어들었다. 책을 읽다가 끼워둔
작은 종이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언제 다시 읽을지도 모르는 경제 이
론서였다. 책을 펼쳤다. 이렇게 다시 돌아와 읽던 페이지를 열어 보리라
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일디타가 체의 눈치를 살피며 뒷걸음질로 방
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체는 책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밖에서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 돌아와 있다는 것이 꿈
만 같았다. 눈을 감고도 무엇이든 찾을 수 있는 서재 구석이 서재 구석
구석이 떠올랐다. 책상 서랍에 넣어 둔 완성되지 않은 논문과 책꽂이에 꽂
혀 있는 자신의 저서들, 그리고 밤새워 읽던 책들이 눈을 뜨고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선명하게 나타났다. 곧 이 방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선
명하게 나타났다. 곧 이 방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저려 왔
다. 다시 앉아 보지 못할지도 모를 의자, 합께 밤을 밝힌 낡은 전기 스탠
드, 이 모든 것이 그리워질 것이다 .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체는 눈
을 감은 채 의자에 몸을 얹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
리고, 일디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식사하세요."
체가 눈을 뜨고 조용히 고개를 돌려 일디타를 바라보았다. 크고 반짝이
는 눈, 도톰한 볼 그리고 짙은 눈썹, 더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솟을 곳
같았다.
저녁 식탁은 스테이크와 샐러드, 그리고 빵이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체 옆자리에는 둘째 마르츠와 셋째 마르틴이 앉았다. 맞은편에는 호세피나
와 넷째, 다섯째가 앉고, 체의 정면에는 일디타가 앉았다. 식사가 시작되자
체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일디타가 체에게 물었다.
"아저씨! 와인에 물을 조금 부어 드릴까요?"
일디타의 말에 놀란 체는 하마터면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하지만 곧
태연하게 되물었다.
"나는 와인에 물을 부어 먹지 않는데, 물을 부으면 와인 향이 도망칠
걸?"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호세피나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일디타는 여전
히 체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체는 자신이 평소 와인을 마실 때 꼭 물
을 조금 부어 마시던 것을 일디타가 알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자신
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놀라고 있었다.
체와 일디타는 서로의 눈을 통해 그 사실을 알렸다. 가족들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올 때까지도 체는 자신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체가 집을 떠나올 때 일디타가 따라 나와 체의 볼에 키스를
해주었다. 일디타의 입술이 체의 뺨에 닿았을 때 체의 가슴은 상처에 소
금을 뿌린 것보다 더 쓰리고 아렸다.
"일디타! 고맙다."
체는 일디타를 포옹하며 짧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꼭 말해 주고 싶은
'사랑한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30
체가 비밀리에 쿠바로 되돌아와 있는 동안 쿠바의 혁명대원들 중 제1진
이 볼리비아로 잠입해 볼리비아로 잠입해 들어갔다. 무기와 보급품등이
산타크루스의 비밀진지로 옮겨졌다.
체는 쿠바에 들어와 있는 동안 변장을 한 채 볼리비아로 떠날 준비를 했
다. 그 과정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 변장을 한 그를 아무도 알아보
지 못했다.
"체! 당신의 변장술은 나도 몰라보겠소."
"가족들도 몰라보던데 이만하면 성공한 변장인가요?"
"꼭 이렇게까지 해야되겠소? 여기 남아서도 당신의 할 일이 얼마나 많은
데..."
"아닙니다. 내가 여기 있으면 도움이 되기보다 불편할 것입니다. 그리
고 볼리비아 혁명은 내조국 아르헨티나와 남미대륙 혁명의 시작인 것입니
다. 그곳은 지금 나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곳입니다. 도와주십시오."
피델 카스트로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 사람만이 마주 앉은
방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카르스트로가 입을 열었다.
"좋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체는 피델 카르스트로의 지원 약속을 받고 볼리비아를 남미대륙 혁명을
위해 떠나기로 작정했다. 체가 볼리비아를 남미대륙 혁명의 전진 기지로
선택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볼리비아는 바리엔토스 군사 독재
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여기는 투쟁하는 공산당 등 진보주의 그룹들이 있
었고 저임금과 살인적인 노동에 반항하는 광부들이 있었다. 또한 게릴라
활동에 유리한 산림과 산이 있었다. 그러나 체가 볼리비아를 선택한 무엇
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그 지리적인 이점이었다. 볼리비아는 남미의 한가
운데 자리잡고 있어 아리헨티나,칠레,파라과이,페루,브라질 등과 국경을 맞
대고 있었다. 만일 볼리비아 혁명이 성공한다면 혁명의 불길을 남미전대륙
으로 확산시키는데 볼리비아보다 유리한 곳은 없었다.
1966년 11월 3일, 체는 변장을 한 채 혁명대원 몇 사람을 데리고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 라파스로 잠입해 들어갔다. 볼리비아 잠입때 그의 모습은
앞이마가 정수리 너머까지 벗겨지고, 검른머리에 옆에는 흰머리가 나있는
중년신사였다. 게다가 짙은 눈썹은 거의 없애고, 수염도 깍은 채 검은 안
경을 끼고 있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볼리비아공항 출입국은 미
CIA가 제공한 정보에 다라 이 위험한 사람의 입국을 막기 위해 비상에 들
어 갔다. 입국자들의 신원을 엄격하게 심사하고 일일이 대조하였다.
"당신이름은?"
"아돌포 메나 곤살레스'
체는 공항 관계자의 물음에 태연하게 여권에 적혀 있는 이름을 말했다.
공항직원은 여권의 사진과 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국적이 우르과이가 맞습니까?"
"네"
"생년월일은?"
"1921년 6월25일입니다."
체는 여권을 만들면서 직업을 사업가로, 그리고 그의 나이보다 일곱 살
이 더 많게 꾸몄다. 공항직원은 체의 신상에 관해 꼬치꼬치 물었지만, 단
지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다. 라파스 공항을 빠져 나온 체는 코차밤바를
향해 떠났다. 코차밤바에는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라파스에서
파타카마야, 카라톨요를 거쳐 코차밤바에 도착한 것은 4일째 되는 밤이었
다. 체와 대원들은 코차밤바의 한 농장에 도착해 볼리비아에 미리 와 있
던 쿠바 혁명대원인 파충고와 만날 수 있었다.
"대장님! 이렇게 오실 줄 알았습니다."
"파충고, 다른 대원들은 어떤가?"
"대장님을 기다리고있습니다."
"그럼 출발하자.'
체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원들은 지프차 두 대에 나눠 타고 포장되지 않
은 도로를 이틀동안 계속 달렸다. 목표지점인 농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
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지프차가 멈춰 섰다.
"왜 멈추지?"
체가 물었다.
"농민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먼저 지프차 한 대만 들어가야 합니다. 자칫
농민들이 농장을 코카인 생산하는 곳으로 의심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체는 첫 번째 지프차로 일부 대원들과 파충고를 먼저 들여보내고 두 번
째 지프에 옮겨 탔다. 그런데 운전자인 비고테스가 변장한 이 신사가 체라
는 걸 알고 놀라는 바람에 지프차가 벼랑으로 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절벽
모서리에 걸려 낭떨어지로 떨어지는 참사는 면했다. 그러나 지프차를 당장
끌어 낼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20여 킬로미터를 걸어서 농장에 도착했다.
창고같은 건물이 잇는 농장은 산을 끼고 돌아 들어간 중턱에 폐허처럼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삐걱거리는 나무의자에 사람이 둘러앉아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첫 번째 지프를 타고 온 대원들과 볼리비아 혁명대원들이
었다. 체가 들어가자 모두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중 대표인 듯 한 남자가
체 앞으로 나섰다.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당 비서직을 맡고있는 몽헤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체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체, 당신에 대해서는 쿠바대원들한테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으로도 많이 보았습니다. 정말 변장술이 뛰어나시군요?"
"천만에요. 그럼 우리 앞으로 해야할 투쟁에 대해 토의해 보겠습니까?"
체와 몽헤, 그리고 볼리비아 혁명대원 코코와 로돌프, 비고테스는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의 투쟁계획을 얘기했다. 체가 볼리비아 공산당의 전폭적인
지원과 우손 게릴라 투쟁을 할 충분한 여건의 조성-예를 들어 광부의 파업
투쟁이나 무장대원의 보충등-을 요구하자 몽헤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
으면서 대답했다.
"이번 무장투쟁에 대해서 당의 공식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 지원을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당 중앙위언회
를 거쳐 이 문제를 결정하도록 해보겠습니다."
시작부터 무언가 석연치 않은 예감이 들었으나 체는 예의를 갖추어 한가
지 부탁을 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아직 우리 동료들이 모두 들어오지 않았으니 당분간
제가 들어온 사실을 당에 알리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몽헤는 그것에 대해서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오늘밤은 여기서 주무시고 해가 뜨면 지프차를 꺼낼 때까지 여기서 100
여 미터 떨어진 개울가 숲속에 숨어 있어야 합니다. 농부들이 눈치채지 않
아야 하니까요."
체는 볼리비아 혁명대원들이 마련해 준 침낭에서 밤을 지내고 대원들과
함께 새벽녘이 되자 개울가 숲 속으로 이동, 은신했다. 숲속에서 그들을 맞
이한 것은 작은 모기들이었다. 사람의 냄새를 맡은 모기들은 낮인데도 쉴
새없이 공격해 왔다. 그렇다고 모깃불을 필 상황도 아니었다. 그사이에 비
고테스가 지프를 꺼내려갔다. 그는 이웃해 잇는 농장주인 나카우아스의 도
움을 받아 가까스로 지프를 꺼내왔다.
"손님도 오셨는데 대접할 것이 없어 농장에서 닭과 돼지를 사 왔습니
다."
몽헤는 그를 칭찬했다. 대원들도 닭과 돼지를 보자 군침을 삼켰다. 그날 밤
은 볼리비아대원들이 요리솜씨를 발휘해 닭과 돼지고기로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체와 대원들이 먼저 할 일은 비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어
느덧 볼리비아에 들어온지 열흘이 지나고 있었다. 그 사이 체의 모습에도
변화가 있었다. 변장을 하면서 완전히 밀었던 머리카락도 솟아나오고, 조금
씩 구렛나루도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체와 쿠바인 출신 대원은 4명뿐이었다. 게바라와 폼보,파충고 투마.
이들은 볼리비아출신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이'양철지붕집'(농장의 지붕이
양철로 되어 있어 그렇게 불렀다)을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탐사하고 여러
개의 비트를 마련해 식량과 무기, 무전기 등을 숨겼다. 낮에는 농장에서 모
두 나와 비트로 숨었다. 보초를 세우고, 정찰을 나가고, 연락병을 통해 외
부와 접촉을 해나갔다.
11월에 접어들면서 제2진 대원들이 합류해 들어왔다. 체가 쿠바혁명부터
믿고 지내던 마르코스와 를란도였다. 그 다음에도 연이어 대원들이 속속
합류해 들어왔다.브라울자오,우르바노,화킨,미겔,그리고 볼리비아 출신의
인티와 의학도 에르네스토 등. 이무렵 페루 게릴라 지도자인 치노가 대원
들을 이끌고 합류하겠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체는 이 치노 그룹을 무조건
환영할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필요한 것은 몽헤와 그가 이끄는 볼
리비아 출신 대원들이기 때문이다.
페루출신 대원들이 들어온 후 볼리비아 출신대원들도 12월부터 계속 들
어왔다. 물론 아직 체가 만족할 만한 수는 아니었다. 12월이 되어 진지에는
24명의 대원들이 있었는데 그중 볼리비아 출신은 9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체는 아직 낙관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다 구역을 넓혀 강까지 진지를 구축
을 확대시켰고 신참대원들을 훈련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 사이 쿠바대원들,
특히 파충고가 약간의 말썽을 피웠다. 그는 초기부터 이 게릴라 투쟁에 적
극적이지 않은 데다가 마르코스와의 경쟁의식으로 대원들의 단합을 해쳤
다. 체는 쿠바 출신들의 난조에 대해 공개비판을 하고 사기진작을 위해 엄
격한 규율을 제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난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지형, 모기, 거미, 독벌레, 등의 공격, 그리고 식량의 부족 등이 항상
체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부족한 식량의 확보를 위해 대원들이 노루
와 칠면조 등을 잡아 끼니를 해결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
다. 주변의 농민들과 결합하기까지 우선 쿠바에 지원금을 보내달라고 연락
했다. 카스트로는 이 연락을 즉각 받아 들여 지원금을 보내고 무기와 실탄
들도 보냈다.
대원들 숫자가 늘면서 조직개편도 이루어 졌다. 체는 쿠바혁명의 경험을
살려 병참 장교와 지휘관, 무기를 공급하는 공급담당,제정담당,의료팀 등으
로 조직을 정비했다. 조직정비가 끝나자 체는 진지까지 이어질 길을 위장
하고 샛길을 만들어 강까지 닿게 만들도록 지시를 내렸다. 위장은 성공적
이었다. 외부에 있는 대원들을 만나러 갔던 대원들이 위장된 길을 몰라 새
로난 길을 따라가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 질 정도였다. 체와 대원들이 진
지를 구축한 곳에는 산골 사람들이 덫을 놓거나 덫을 거두러 나타나곤 했
다. 체와 대원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언제 정부군의 끄
나풀이 되어 활동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1066년 12월 체는 양철지붕집의 진지 구축도 어느 정도 끝나 가자 주변
정찰을 겸해 대원 10여명을 이끌고 새 진지구축에 나섰다. 행군은 시작되
었으나 소수인원이라서 많은 짐들을 가지고 험한 정글을 뚫고 가야만 했
다. 체는 다른 대원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자신의 배낭이외에 무거운 발전
기를 지고 갔다. 하지만 길을 잃은 바람에 식량을 직접 해결 할 수밖에 없
었다.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대원들은 점심 무렵에 동굴을 발견하고 잠시 쉬기
로 했다. 동굴 앞으로 강이 흐르고 있어 다행히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바그레라는 이빨이 사나운 큰 물고기를 열일곱 마리나 잡았다. 체가 이끄
는 8명의 대원들이 점심으로 먹기에는 충분했지만 다음 끼니가 문제였다.
"인티! 여기는 비트를 파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이 주변에는 사냥할 짐승
들이 많은 것 같군."
"동굴을 진지로 사용하는 것은 안 됩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비트를 파야겠어."
"저와 모로는 밤에 사냥을 나갈 생각인데요?"
"좋아, 인티는 모로와 사냥을 나가도록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나와 함
께 비트를 파기로 하자."
체는 삽을 들고 비트를 파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이 되어서야
비트는 완성되었다. 사냥을 나갔던 인티와 모로도 돌아왔다. 인티와 모로는
노루와 닮은 큰 안타를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점심과 저녁을 물고기 몇
마리로 해결했던 대원들은 안타요리를 곧 만들었다. 이른 아침을 먹고 나
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밤새 잠을 자지 못한 대원들은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보초병을 제외한 다른 대원들은 동굴 속에 숨어 비쏟아지는 소리
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체는 대원들이 잠든 시간에도 깨어 있었다. 그의
머리속에 많은 생각들이 떠다녔다. 새로운 혁명에 대한 전망이 밝아 보이
지 않았다. 몽헤를 비롯한 볼리비아 혁명세력은 적극적으로 협력할 의사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내부의 단결도 확고한 게 아니다. 그리고 이곳의
험난한 지형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도 걱정이 되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정부군이 습격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34
하루종일 쏟아져 내린 비 때문에 강물이 불어나 있었다. 언덕에 비트를
파고 발전기를 설치하고 나자 선발대 5명이 찾아왔다. 체는 대원들 몇 명
을 남겨 두고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곳까지 정찰을 나갔다. 정부군의 움직
임은 없는 것 같았다. 동굴진지로 돌아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주위 정찰
을 나갔던 대원들이 숨을 할딱거리며 달려 달려왔다.
"대장님 진지에 가까운 길가에 총을 맞아 죽은 노루 한 마리가 있습니
다."
"총 맞은 노루가 우리 진지 가까운 곳에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어디쯤이던가?"
"대장님이 다녀오신 길인데, 여기서 3백미터쯤 떨어진 곳입니다."
"우리가 올 때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대장님 혹시?"
인티의 말에 대원들은 긴장하는 눈빛이었다.
"노루의 상태를 자세히 이야기해봐."
"그렇다고 사냥하는 산고 사람들이 노루를 일부러 두고 간 것은 아닐
까?"
"그럼 사냥꾼이 우리 진지 근처 어딘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인티의 말에 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 뒤에 보초 한 명을 세우고, 두 명은 사냥꾼을 잡아오도록 해.'
체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원들은 명령에 따랐다. 잠시 후 사냥꾼을 잡으
러 갔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왜 벌써 오는 거야?"
"대장님, 그 노루는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죽은 노루에 벌레가 생겨 우글
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발대 대원 중 한 사람이 이 곳에 들어올 때 그
노루를 보았답니다."
사냥꾼을 잡으러 떠나던 대원들은 노루의 상태부터 자세히 살핀 덕택에
헛고생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체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방심은 금물이
었다.
"코코와 로로는 사냥다니는 산골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노루를 보여주고
진상을 파악하도록 한다. 알겠는가?"
체의 명령에 코코와 로로는 사냥꾼이 살고 있는 산골 외딴 집으로 갔다.
사냥꾼은 갑자기 들이닥친 혁명군들을 보고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었다.
"우리하고 잠시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코코가 정중하게 부탁했다.
"어딜 가자는 거요?"
사냥꾼의 얼굴은 두려운 표정이었지만, 말씨는 기분 나쁘다는 투였다.
"노루 한 마리가 죽어 있는데, 한 번 봐 주셨으면 해서 그럽니다."
"노루가 어떻다는 건가요?"
"혹시 아저씨가 잡은 노루가 아닌지 확인해 주십시오."
"덧에 걸렸나요?"
"아닙니다."
"총에 맞았겠군요."
"어떻게 그렇게 단정지으십니까?"
"이 곳에 사냥꾼은 몇 안 되는데, 총을 가지고 사냥을 하는 사람은 나밖
에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총으로 노루를 쏘아 잡았는데 찾지 못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얼마 전에 덫에 걸려 버둥대는 노루를 잡아 다리를 묶어 두었지요. 그
런데 그녀석이 숲으로 도망을 친 겁니다. 하는 수 없이 총을 쏘았는데, 끝
내 찾지 못했지요. 그나저나 한번 가 봅시다."
코코를 따라 노루가 있는 곳까지 온 사냥꾼은 자신의 총을 맞은 노루가
맞다고 대답했다.
진지로 돌아온 다음날 체는 폼보를 데리고 진지 왼쪽을 정찰하러 나갔
다. 지금까지는 진지 오른쪽만 길을 열어 놓았지만, 이제 왼쪽 길도 열어
놓는 작업에 들어가야했다. 정찰결과 별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체가 정찰을 나갔다 온 사이에 로로는 큰 돼지 한 마리를 잡아다
가 놓고, 체를 기다리고 있었다.
"웬 돼지야?"
"제가 밀림에서 잡았습니다."
로로의 말에 체가 돼지를 살폈다.
"이건 멧돼지가 아닌데?"
"근처 농장에서 기르던 돼지가 우리를 뛰쳐나온 듯 합니다."
체는 고민에 빠졌다. 돼지를 주인에게 주어야 할것인가, 아니면 대원들
식사로 제공할 것인가를 결정해야했다. 그러나 돌려주는 것도 문제였다. 자
칫 진지가 노출될 수도 있고, 돼지를 돌려주기 위해 농장마다 찾아다닐 수
도 없는 실정이었다.
"좋아, 이 돼지는 대원들이 먹기로 한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인데 칠면조
대신 돼지고기 요리를 먹도록 한다. 로로 이왕이면 술도 함께 준비할 일이
지, 돼지만 잡아왔나?"
"그럴 줄 알고 저희들이 술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대원들은 며칠 전부터 크리스마스 준비를 해 왔다고 털어놓았다. 돼지고
기와 술이 준비된 크리스마스 이브는 대원들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어떤
대원들은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 너무 많이 먹어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인 크리스마스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일을 해야 했다. 보초병은
보초를 서고 나머지 사람들은 오른쪽 길을 닦으러 나갔다. 닦아 놓은 길옆
에는 비트를 팠다.
체는 인티와 투마를 데리고 무전기를 설치할 비트를 팠다. 돌들이 너무
많아 비트를 파기가 무척 힘든 땅이었다. 무전기를 설치할 비트가 완성되
자, 체는 각자 유사시에 자기가 사용할 비트를 파라고 지시를 내렸다. 체는
비트를 파고 있는 대원들을 찾아다니며 적절한 장소를 택하고 있는지 확인
했다. 체도 자신의 비트를 팠다. 체가 비트를 한참 파는데 머리위 나무에서
서늘한 느낌이 전해졌다. 예감이 좋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뱀이 체
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체는 재빨리 몸을 돌리면서 삽으로 뱀의
머리를 내려쳤다. 목이 부러진 뱀은 몸통과 목이 비트 안으로 떨어졌다. 생
각보다 큰 녀석이었다. 길을 닦으면서도 두 마리의 뱀을 잡았다. 다른 대원
들도 뱀을 죽인 것으로 미루어 뱀이 많은 지역 같았다.
새로 낸 길옆의 비트도 잘 위장되었다. 새로운 비트에 보초를 세우고 체
는 투마와 함께 그가 처음 도착해서 설치한 첫 번째 진지로 향했다. 닦아
놓은 길을 피해 험준한 길을 택해 나아갔다. 위험이 따르기는 했지만 새
길을 개척하고 정찰을 겸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
았다. 길을 잘못 들어 저녘 일곱시가 되어서 도착한 곳은, 첫 번째 진지와
5킬로미터쯤 떨어진 나카우아수 마을이었다. 마르코스가 새로 들어오는 대
원들을 이끌고 와 어젯밤 나카우아수 마을에서 자고 갔다는 것이다. 체와
투마는 밤길을 걸어 첫 번째 진지에 도착하자마자 마르코스 일행을 찾았지
만, 그 곳에 마르코스 일행은 없었다.
"우리처럼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닐까요? 오늘 저녁까지 기다려 보고
찾아 나서지요."
체가 걱정을 하자 투마가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진지밖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밖으로 뛰
쳐 나간 투마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대장님! 마르코스가 왔습니다."
투마를 따라 마르코스가 대원들을 이끌고 진지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된 일이야?"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밤이 되어 진지 가까이에 있는 언덕에서 하루
밤을 지냈습니다."
체는 마르코스와 새로 들어온 대원들에게 편히 쉬도록 지시하고 다른 대
원들은 정찰을 내보내거나 마르코스가 가져온 물건들을 비트로 옮기는 작
업을 시켰다. 대원들이 많아져 화덕도 하나 더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화덕
이 완성되기도 전에 갑자기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강물이 불어
날 정도의 엄청난 소낙비였다. 소낙비는 밤까지 이어져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비는 그쳤지만 화덕을 만드는 일이나 비트를 파기에는 땅
이 너무 젖어 있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966년 12월 31일, 아침 일찍 몽헤가 리카르도와
대원 두명을 이끌고 왔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곧장 회의에 들어갔다.
몽헤는 자신이 게릴라 활동을 하려면 당 서기직을 사퇴해야한다, 투쟁이
볼리비아에서 진행되는 한 자신이 정치, 군사 부문의 지휘권을 가져야한다,
남미의 여러 정당으로부터 지지를 받도록 자신이 조정하겠다는 협상안을
내세웠다. 그는 자신의 제의가 받아들여질 경우에만 다른 당들과 연계해
혁명군을 지지할 수 있다는 잘도 했다. 그러나 체는 몽헤의 제의를 받아들
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 무장투쟁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들어낸 것이다. 체는 가급적이
면 협상을 결렬시키지 않으려고 점잖게 말했다.
"당신이 말한 첫 번째는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닌 것 같고, 군사지휘권
과 정치지희권의 이양문제는 볼리비아 대원들과 토론해 봐야 할 것 같군
요."
이렇게 양자의 회담이 끝난 다음, 체는 새 캠프로 건너가 전체회의를 열
었다. 체는 몽헤의 입장을 설명한 다음, 그와 함께 남던가 아니면 볼리비아
당의 결정에 따르던가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제의했다. 대원들은 모두
머물겠다고 결정했다. 몽헤는 대원들의 이런 결정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
다.
그 날 정오, 이 새로운 투쟁을 위해 모두 모여 축배를 들었는데 몽헤는
이 날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했고 체는 이에 답해 이 순간이야말로 대륙
혁명의 새로운 '함성'이라고 강조하며 혁명 앞에서 우리의 목숨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고 연설했다.
1967년 1월 1일, 몽헤는 체와 상의도 없이 대원들에게 당 서기직을 사임
하겠다고 말하고 떠났다. 체는 동요할지 모르는 볼리비아출신 대원들을 위
해 전체대원들을 모아 놓고 혁명을 원하는 모든 사람과 연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도덕적 번민의 문제가 닥친다면 집단토론으로 해결하자
고 제의 했다.
그리고 타니아에게 아르헨티나로 가서 마우루시오와 로제니오를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갈색머리에 파란 눈, 달걀형의 얼굴을 가진 매력적인 여
성 타니아는 당시 스물일곱 살 정도였는데 체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타마르 비데르인데 아르헨티나인 아버지
와 독일인 어머니를 가진 지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1959년 동독에서 체를 만나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동
독의 국가보안성 소속 첩자였다. 그녀는 체를 돕는 한편 그를 감시해 동독,
그리고 그의 배후에 있는 소련에 보고하는 이중 첩자였다. 그녀는 체의 게
릴라전을 돕기 위해 볼리비아의 라파스에 잠입하여 산 안드레스 약학대학
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체의 연락책으로 활약, 라파스의 200여명의
비밀조직을 결성하는 한편, 산타크루스 방송의 '사랑에 병든 이에게 드리는
충고'란 프로를 맡아 체에게 끊임없이 비밀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보아 그녀가 체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체에게는 도시와 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그녀는 그 후 게릴라전에 참가, 1967년 9월 31일 화킨부대가 전멸될 때 사
망했다.
몽헤가 떠난 날 체는 대원들과 함께 방어벽을 쌓았다. 며칠동안 방어벽
쌓기, 참호 파기, 지도 그리기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틈틈이 암벽타기를 하
고 군사훈련을 했다.
체는 대원들을 훈련시키면서 연락을 책임지고 있는 대원들에게는 혁명을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 접촉을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볼리비아 혁명대원들
과 계속 접촉을 시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직 전투는 한 번도 없었지만
체는 간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방어 훈련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아
직 게릴라전을 치를 만한 훈련된 군사력으로 되기에는 그 숫자나 훈련에서
부족했다. 아직은 체의 진지로 계속해서 혁명대원 지원자들이 들어왔다. 그
리고 새로 들어온 혁명대원들은 정신적으로 강인하고 체력조건도 좋은 사
람들이었다. 이 무렵 체는 인디오들이 사용하는 케추아어를 모르는 몇몇
대원들과 함께 케추아어 공부를 시작했다. 체는 인디오들을 대원으로 끌어
들이거나 지지자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몽헤가 떠나고 며칠 후 체는 그가 배반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는
당으로 돌아가서는 체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를 하고 다닌 것이다. 체는 몽
헤의 일로 기분이 언짢았지만 도시간부들과 연결통로를 다시 열고 전달할
지시사항을 작성했다. 이러는 사이에 진지와 비트숫자도 많이 늘었다. 날마
다 강과 정글, 산골에 이르기까지 정찰구역은 넓어져갔다. 도시와의 연락도
순조로웠고 보급품과 무기반입도 늘어, 이제 중대병력에 가까운 대원들을
거느리게 됐다. 군대로서의 면모가 갖추어지자 체는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진지에서의 방어 훈련은 그다지 부족함이 없지만 후퇴 시에는
기동성이 떨어질 위험이 많았다. 체는 간부들을 모아 놓고 주의를 주었다.
"방어도 좋지만 전투에서는 후퇴할 때 대원들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명
심하도록 한다."
32
1월도 거의 다 지나갈 무렵이었다. 로욜라라는 아르헨티나 출신 여자대
원이 체를 찾아왔다. 그녀는 카미리에 남겨져 자금통제를 맡고 있었다. 흰
피부와 파란 눈을 가진 아주 젊은 미녀인 그녀가 검은 갈색의 긴 머리에
검은 베레모를 쓰고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젊은 시절의 호세피나가 생각
났다. 그녀는 큰 키에 날씬한 몸매에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인상을 지녔다.
로욜라는 그 동안 관심없던 체를 설레게했다.
"무슨일로 찾아왔나요?"
"저는 카미리의 청년동맹에서 활동하며 혁명군의 자금을 책임맡고 있었
습니다. 그런데 청년동맹에서 제명됐지요. 그래서 이곳으로 합류하려고 왔
습니다."
"이곳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생각해 보았나?"
"물론입니다.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얻던 보직을 맡겨도 임무를 완수해
낼 수 있습니다."
"무기를 다룰 줄 아는가?"
"기본입니다."
"여성대원으로서 지켜야될 사항도 알고 있겠지?"
"그 문제는 염려 마십시오."
로욜라의 다부진 태도를 볼 때 혁명대원의 자질을 갖춘 듯 보였다. 그녀
의 대답은 절도 있고 씩씩하게 들렸다.
"좋아.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환영한다."
체가 환영한다는 말을 하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대원들이 그녀를 환영하
는 박수를 쳐주었다.
1967년 1월 말, 어느 정도 부대의 진용이 갖추어지자 체는 부대를 행군
훈련에 동원하기로 했다. 그 목적은 게릴라 부대로서 겪게 될 각종 어려움
을 익히고 지역의 지형을 파악하는 한편 농민들을 혁명군편으로 끌어들이
는 데 있었다.
"흔적은 남기지 말고 깨끗이 처리하라. 그리고 남아 있는 네 명중 두 명
은 항상 무장을 하고 한순간이라도 경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신참자
는 일반규범으로 훈련시키고 개인 용품은 정리하라. 무기는 산 속에 감추
고 위장하라. 남은 사람들은 4일에 한 번씩 접선하라."
체는 뒤에 남게 된 대원들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다.
2월 1일, 체는 대원들을 이끌고 행군에 나섰다. 그러나 게릴라 투쟁의 제
2단계 국면이라고 하게 될 이 행군은 시작부터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
다. 체와 화킨, 모로가 처음부터 앓았고 해군이 시작된 지 사흘째가 되자
몇몇 대원들은 발에 물집이 생겨 맨발로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체는
쿠바 상륙 후 첫 전투를 치르던 생각을 했다. 새 군화를 신었던 대원들의
발에 물집이 생겨 쉬고 있을 때 공격이 퍼부어졌던 그 순간. 대원들은 힘
들고 지친 상태지만 체의 지시에 잘 따라주었다.
2월 4일 오후가 되어 앞서 갔던 선발대에서 소식이 왔다. 말들을 발견했
다는 보고였다. 말이 있다면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판단을 내린 체는
그 곳을 피해 가기로 했다. 아직까지는 사람들과 부딪칠 필요가 없었다.
마을을 피해 가다 보니 리우그란데 강과 만나고 말았다. 넓은 강이어서
선발대가 수영을 해서 건너려다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뗏목을 만들기로
했다.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콘도르가 커다란 날개짓을 하며 머리
위를 맴돌았다. 하늘에는 햇빛이 사라지고 붉은 보랏빛 노을이 한 폭의 천
을 깔아놓은 듯 펼쳐지고 있었다. 뗏목을 만드는 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한편에서는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그렇게 강가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오
후가 되어서야 뗏목을 완성하게 되었다. 뗏목을 하나밖에 만들지 않아 50
명의 대원이 모두 강을 건너는데 세 번을 왕복해야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남은 대원들과 짐을 운반하러 가던 대원이 그만 강
중간쯤에서 뗏목을 놓쳐버렸다. 뗏목을 떠내려보낸 대원은 헤엄쳐 나왔지
만, 나머지 대원들이 문제였다. 남겨진 대원들은 자신들이 타고 건너올 뗏
목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결국 다시 만든 뗏목은 밤 9시가 되서야 완성되
었다.
뒤늦게 건너온 대원들과 합류한 부대는 계속 행진해 나갔다. 뗏목으로
강을 건너온 지 이틀이 지나 농가를 하나 발견했다. 체는 농부를 만나보기
로 했다. 농부에게서 정보를 캐 볼 생각이었다. 체는 인티의 보좌관처럼 꾸
미고 농부에게 다가갔다.
"저희 대장님께서 단신에게 뭘 좀 물어 보시겠답니다."
"음,그...그러니깐 대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뭘 좀 물어 봅시다. 이 마을
에 농가가 몇 채나 있습니까?"
인티의 어색한 물음에 농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체와 인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체는 인티가 당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장님이 말라리아를 앓고 나서 지금 생각과 말이 일치하지 않고 있습
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도와 줄 수 있는가를 묻고 싶어하십니다."
"맞아요."
갑자기 인티가 끼어들었다. 농부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체는 농부의 단
호한 거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대장님 가시지요."
농부에게서 몇 발짝 멀어지자 체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위험한 사람들로 평가해야 돼. 머무는 동안 농부의 행동을 잘 관찰하도
록."
인티도 체가 말하는 위험을 알아차렸다. 농부가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
해 대원들은 마을 귀퉁이에 있는 창고를 숙소로 정하고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의사와 의대생인 대원 두사람은 마을에 머무는 동안 기생충으로 고
생하는 마을 아이들과 말발굽에 차여 상처를 입은 아이 한 명을 치료해 주
었다.
식사를 담당하는 대원은 옥수수로 만든 우민타라는 빵을 저녁식사로 내
놓았다. 저녁을 먹고 나자 체는 밤늦은 시간까지 간부회의를 열었다. 회의
를 끝낸 체는 일기를 썼다.
"2월 11일, 오늘은 아버지의 생일날이다. 오늘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아
버지의 생일을 축하했을 것이다. 축하카드 한 장도 못 띄웠다. 내가 의사가
된 지 두달만에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떠나올 때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그리고 슬퍼하셨다. 아버지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는데, 나는 아버지
께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다. 걱정만 안겨 드렸다. 이곳에서 혁명이 성공
하면 곧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다."
체는 일기를 쓰다말고 밖으로 나왔다.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서쪽으
로 기울어 있었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체의 가슴을 애절한 그리움을 자아
내게 만들었다. 달을 바라보고 있던 체는 시가에 불을 붙여 물었다. 달빛
아래 서 있는 그의 모습은 길 잃은 한 마리 사슴처럼 외로워 보였다.
"대장님! 가족들 생각하시나 봐요?"
로욜라가 건너편 창고벽에 몸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베레모를 벗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는 달빛에 흰 피부가 반사되어 달의 요정처럼 느껴졌
다.
"로욜라, 피곤할 텐데 왜 자지 않고 여기 있지?"
"대장님이 더 피곤하실 텐데 대장님은 왜 여태껏 주무시지 않으세요?"
"하하하, 우리 둘 다 야행성인가? 그런데 로욜라는 언제부터 거기 있었
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대장님을 보고 있었어요."
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로욜라, 이리 와서 얘기나 해요."
로욜라가 다가와서 말했다.
"대장님, 풀벌레 소리가 슬프죠?"
"로욜라에게 슬픈 일이 있나?"
"글쎄요. 저는 대장님이 더 슬퍼 보였는데요 ."
"그렇게 보였다면 로욜라는 심리학자였던 모양이군. 사실 오늘이 우리
아버지 생일날이야. 아버지는 특히 나를 무척 사랑하셨거든."
"저도 아르헨티나 가족들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남쪽하늘을 바라보면 우
리 가족들도 내가 있는 북쪽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거든요. 그렇다면
가족들과 나는 하늘 어디쯤에서 시선이 마주 닿아 있지 않겠어요?"
"로욜라는 가족이 많이 보고 싶은 모양이군."
"..."
로욜라는 남쪽하늘을 응시하다가 눈물이 나올 것 같다며 창고안으로 들
어가 버렸다. 체도 내일을 위해 잠을 자두어 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창고안
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자 로욜라는 명랑한 얼굴로 대원들에
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아침 일찍부터 행군을 시작한 대원들은 마시쿠리 강에 이르렀다. 선발부
대가 정찰을 하면서 미리 물색해 둔 강가 몬타뇨의 집은 찾아갔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인티와 로로가 먼저 그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비어 있었다.
대원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주위를 정찰하며 하룻밤은 묵어 갈 만한 장
소를 물색했다. 체는 집 근처보다 밀림이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였다. 밀림
에서 밤을 보내기로 한 대원들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비상식
량을 제외하고는 식량이 바닥나 있었기 때문이다. 밤늦게 인티와 로로가
몬타뇨 집에 식량을 구하러 갔었지만 빈손으로 돌아왔다.
"대장님, 옥수수마저도 없다는데요. 몬타뇨는 16세로 이 집 아들이었습니
다. 그의 아버지는 외부에 나갔는데 일주일 후에나 집에 돌아온다는군요.
그리고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여기서 1레구아 떨어진 곳에 중농 규모의
농부가 살고 있는데, 그의 딸 애인이 군인이랍니다."
인티는 식량을 구해 오진 못했지만 정보를 얻어왔다. 대원들은 하는 수
없이 저녁을 굶은 채 밀림 속에서 밤을 지새고 아침 일찍 몬타뇨 집에서
가까운 옥수수밭에서 진지를 구축했다. 몬타뇨가 세 번째로 진지를 방문한
날, 모르는 사람이 돼지 몇 마리를 구하기 위해 강을 건너왔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별다른 움직임 없이 하루가 지났다. 체는 몬타뇨가 어
렵게 구해 온 옥수수 값을 치르고, 진지를 구축하느라 옥수수밭에 피해를
준것에 대해 사과한 다음 충분한 돈을 지불했다. 선발대원들은 정찰을 하
고 풀과 나무를 배며 하루 종일 길을 뚫었다. 진지에서부터 6킬로미터까지
길을 만든 대원들은 피곤해 일찍 잠이 들었다. 체는 야영하는 텐트를 나와
옥수수밭 이랑을 거닐다가 쿠바의 가족들을 떠올리고 진지에 들어와 일기
를 썼다.
"2월 15일 일디타의 11번째 생일날이다. 아침 10시, 어제 만든 길 6킬로
미터를 걸어왔다. 길을 만들지 않은 곳부터는 행군이 느렸다. 오후 5시 논
밭을 찾았다."
체는 일기에 돈 많은 부자인 리콜라스의 동생인 농부를 만났다고 적어놓
았다. 농부는 형에게 착취당하고 살고 있고, 그래서 돈이 없다는 것, 농부
가 혁명대원들과 협력하자고 한다는 얘기와 함께. 다음날 체와 대원들은
농부의 형 리콜라스가 근처에 살고 있어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서 강이 바
라다 보이는 언덕에 진지를 마련했다. 사흘동안 진지에 머문 체와 대원들
은 다시 길을 떠났다. 길이 험해 행군은 힘들게 이어졌다. 바위벽을 오르고
울창한 산봉우리를 지나 로시타 강가에 이르렀다. 체는 그곳에 진지를 구
축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진지가 마련되고 대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강물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비가 내
리고 있어 어둠은 빨리 찾아왔다. 저녁을 해결할 식량이라고는 꽁치통조림
과 우유 통조림이 조금 남아 있어 대원들이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그런데
밤 10시가 조금 넘어 선발대로 정찰을 나갔던 인티와 친구가 돼지고기, 빵,
쌀, 커피와 옥수수까지 많은 식량을 마련해 돌아왔다. 대원들은 음식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비내리는 강가 진지 안에서 비를 피해 잠을 잔 체와 대원들은 다음날 아
침 비가 그치자 다기 행군에 들어갔다. 체는 그 날 강 건너는 것을 포기하
고, 대원들에게 강 언덕을 따라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 시간 쯤 강 상류
로 거슬러 올라가자 물살이 잔잔한 곳에 이르렀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
안 체는 쿠바에서 전해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미국인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는 뉴스였다. 뉴스는 친소적인 베네수엘라 공
산자들을 강도 높게 비방하고, 소련의 입장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체는
뉴스를 듣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항상 소련의 입장을 비판했던 피델이
아니라 체 자신이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뗏목이 만들어지자 대원들은 몇 명씩 나뉘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마지막으로 카를로스와 브라울라오가 몇 개의 물품이 든 배낭과 총 6자루,
탄약상자를 싣고 건너오게 됐다. 대원들은 그들이 무사히 건너오기를 빌며
뗏목을 주시했다. 그런데 강 증간쯤 이르렀을 때 뗏목이 중심을 잃고 떠내
려가기 시작했다. 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난 번 행군 때 대원 한
사람이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렸다. 체는 전투도 해 보지 않은
상황에서 대원 한 사람을 잃은 것에 대해 무척 가슴아파했다. 그런데 이번
에는 두사람이 강 하류쪽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떠내려가는 뗏목은 몇
미터 아래로 내려간 후 소용돌이에 휘말려 뒤집혔다. 체는 더 이상 눈을
뜨고 바라볼 수가 없어 눈을 감아 버렸다. 다른 대원들도 안타깝게 바라만
볼 뿐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대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강가로
헤엄쳐 나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헤엄쳐 나오고 있다."
대원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대원
몇 사람이 강 하류로 달려 내려갔다. 강 하류 쪽으로 마중 나갔던 대원들
이 부축해 데려온 사람은 브라울리오였다. 카를로스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
다. 그는 볼리비아 출신 중 혁명에 대해 가장 진지한 열정을 가진 젊은이
였다.
33
무려 48일이나 걸려 3월 19일 혁명군은 마침내 농장이 있는 처음 진지로
돌아왔다. 지칠대로 지친 부대는 대원 두사람을 잃고 많은 어려움을 겪다
가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리우그란데
지방까지 행군해 비트를 만들고 진지를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체와 대
원들이 만든 길과 진지를 구축해 놓은 면적은 하나의 군단위면적을 넘을
것 같았다. 산과 강과 계곡을 잇는 통로룰 만들었으므로 전투를 벌일 때
기동할 수 있는 루트를 확보된 셈이었다. 쿠바 혁명 당시에는 마에스트로
산맥을 혁명 거점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번 전투를 치렀지만, 볼리비
아에서는 단 한 번의 충돌도 없이 비교적 쉽게 거점을 확보한 셈이었다.
그런데 진지로 돌아왔을 때 체를 기다린 것은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대장님! 많이 힘드셨지요?"
"그래. 베닉노.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해봐."
체는 진지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베닉노를 재촉했다.
"식사라도 끝내고 들으시면 안 될까요?"
"베닉노! 식사가 급하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피곤해 보이시길래..."
"내 걱정하지 말고 보고나 해."
베닉노는 머뭇거리다 말문을 열었다.
"의사 선생 엘 네그로와 제가 대원들이 돌아오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경찰들이 농장에 나타났어요. 게바라 그룹(모이세스 게바
라가 이끄는 카미라의 혁명그룹)의 두사람이 배반 한 거예요."
체는 바짝 긴장하는 태도를 보이며 눈빛을 빛냈다.
"베닉노, 상황을 자세히 얘기해 봐."
"3일 전 이었어요. 음식을 장만해서 대장님이 오시는 길로 마중 나가는
데, 리카르도를 만났어요. 리카르도는 이틀째 여기에 머물고 있었는데, 자
그마한 비행기가 3일간 계속 이 지역을 날아다녔다고 말했어요. 저는 혹시
정부군들이 강 주변에 있는지 몰라 이곳을 떠나지 않았어요."
베닉노의 말이 정리되지 않은 것 같아 답답해하던 체는 네그로를 불렀
다.
"엘 네그로, 베닉노의 말이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어. 네가 이야기해
봐."
"제가 직접 목격했습니다. 군인 6명이 우리 농장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
습니다."
"두 사람만 진지에 있었나?"
"네."
"안토니오와 코코는?"
"코코는 게바라 사람들을 만나러 갔고, 안토니오는 코코에게 게바라 사
람들이 우리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알리러 간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
다."
체는 이제 혁명군의 위치가 알려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원들이 각오를
다지도록 현재의 상황을 알리기로 했다. 언제 정부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새벽이 되어 여러 곳으로 흩어졌던 대원들이 모두 모였다. 보초
와 정보를 담당한 대원들만 남고 모두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이동을 시작한다. 이동을 하면서 흔적을 남겨서는 안된다."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린 체는 앞장서서 계곡으로 들어갔다. 계곡 깊숙한
곳에 이르렀을 때 정보를 맡은 대원이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베닉노가
말한 내용을 보충하는 내용이었다.
"경찰 60여 명이 들이닥쳐 게바라 사람인 우리 연락원 살루스티오를 잡
아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맡겨둔 지프차 한 대와 노새 한 마리를 빼앗아
갔습니다."
정보담당 대원의 말을 듣고 있던 체가 뭔가를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계곡안에 들어온 나머지 대원들은
곧 전투가 시작될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행군은 계속 되었다.밤이 되어
서야 다음 진지에 도착했다. 진지에는 페루 사람 엘치노와 프랑스 기자 데
브레, 아르헨티나 출신 카를로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엘치노는 눈매가 동양
인을 닮아 있는 사람이었다. 엘치노는 체를 만나서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가 게릴라 활동을 할 수 있게 10개월 동안 매달 5천 달러를 주십시
오."
"그런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지요?"
"아바나에서 체 당신과 이야기하라던 걸요."
"그래요! 그렇다면 나도 조건이 있소. 당신이 6개월 안으로 게릴라 활동
을 시작하는 것이오."
"좋습니다. 저는 아야쿠초 지역에서 15명을 데리고 시작할 생각입니다.
그곳에서 대원들을 더 받아들이고 훈련을 시킬 작정이오. 무기와 무전기는
이곳과 중간거리까지 보내 주시오. 또 서로 항상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암호를 정합시다."
엘치노는 상당히 흥분된 상태였다. 체는 엘치노와 함께 들어온 프랑스
기자 데브라에게 다가갔다. 데브라는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린 사람처럼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체, 나도 여기 남아 당신과 함께 행동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프랑스로 돌아가서 우리를 도와주는 조직을 만들고,
볼리비아 혁명을 지지하는 모금을 해 주십시오. 내가 샤르트르와 러셀에게
편지를 쓸 테니 전해 주십시오. 당신은 밖으로 나가 우리를 도와주려는 사
람들과 만나고 쿠바에도 들렀으면 합니다."
"저도 쿠바에 가고 싶습니다. 저와 결혼을 약속한 여자와 쿠바로 가서
결혼하고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싶으니까요."
"그 점은 저와 일치하는 것 같소."
체와 데브레는 같은 배를 탄 동지가 되어 대화를 이어갔다. 데브레는
볼리비아 혁명이 끝나면 쿠바에 가서 가정을 꾸리고 잘 살 수 있다는 생각
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데브레와 밤늦도록 이야기했지만 체는 평상시처럼 일찍 잠에서 깨어났
다. 3월 23일 아침 8시 무렵 연락병 코코가 숨가쁘게 진지로 뛰어들었다.
"대장님, 정부군 1개 소대가 우리 매복지역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알았다. 즉시 출동하자."
체는 나머지 부대 원을 이끌고 매복지역으로 출동했다. 적은 혁명군의
매복을 모르고 접근하다가 일제공격을 당하고 궤멸되었다. 7명을 사살하고,
부상자 4명을 포함해 포로는 14명이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직전 계획표
를 빼앗았다. 정부군은 낭가와주의 양끝에서 전진하여 중간지점에서 만나
기로 했다는 계획서 였다. 뿐만 아니라 60미리 곡사포 3문, 모제르 16정,
바추카포 2문, 130연발총 3정, 무전기 2대, 장화 등등을 노획했다.
대원들은 처음 치른 전투에서 승리한 탓인지 무척 흥분된 상태였다. 전
투가 끝나자 체는 선발대원들을 척후지역으로 보내고 다른 곳에도 대원들
을 매복시키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정부군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다음날 인티가 포로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물어 보려고 진
지로 돌아왔다.
"포로들의 상태는?"
"부상자가 네 명 있고, 소령과 대위가 각각 한 사람씩 있습니다."
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체가 결정을 내렸다.
"포로들에게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빼앗고 석방해라. 장
교 두사람은 군복을 입혀 석방해라."
"다른 지시사항은 없습니까?'
인티는 곧은 자세로 서서 씩씩하고 절도있게 물었다.
"소령에게 전하라. 라구니야스 지역에서 계속 활동할 것이면, 27일 12시
까지 시체를 인도할 수 잇도록 휴전을 하겠다고..."
인티는 체의 지시에 따라 포로들을 석방하러 갔다. 마지막으로 소령에게
시체 인수 문제를 꺼내자 소령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저는 이 순간부터 군인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인티가 소령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소령의 눈에는 악의라곤 전혀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슬픈 눈이었다.
"군대 생활을 그만둔다는 말입니다."
"그럼 대위는 어떤가?"
"저는 당의 요구에 따라 1년 전 군대로 복귀한 사람입니다. 저 역시 군
생활을 그만둘 생각입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당신들에게 협력할 의
향이 있는 장교 두 사람을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도울 생각을 했지?"
"사실은 제 남동생이 쿠바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들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인티는 장교들
에게도 복귀하여 혁명군을 돕던지 그만두든지 하라고 말한 다음, 포로들을
석방했다.
그 날 쿠바에서 엘치노를 통해 암호가 들어왔다. 6만 달러를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3월 24일도 아무 문제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그런데 농장에서 도망친 암
소 한 마리를 찾으러 갔던 대원이 진지에서 세 시간 쯤 떨어진 곳에서 군
대가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군인들은 언덕에 보초를 두
었고, 지붕이 빛나는 집안에는 군인 8명이 나오는 것도 보았다는 보고였다.
보고를 듣고 난 체는 정부군이 야키강 주변에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체는 정확한 상황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마르코스에게 그곳 정찰을 다녀오
라고 명령을 내렸다. 몇 시간 후 마르코스는 경비를 서고 있는 40여명의
군인들과 헬리콥터 한 대가 착륙하는 것을 보았다는 보고를 했다.
3월 27일 볼리비아 라디오 방송 뉴스는 독재자 바리엔토스의 기자회견과
혁명군과 정부군의 전투에 대해 전하고 있었다. 정부군의 공식 발표로는 7
명이 아니라 8명이었다. 또 사상자들은 상처를 입고 포로가 된 뒤 혁명군
에게 총살당했다고 왜곡된 보도였다. 또 다른 보도는 정부군이 혁명대원
15명을 사살하고 4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포로 중에는 외국인이 두 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현재 한 명의 외국인 포로가 자살했
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를 듣고 체는 배반자들이나 포로들이 혁명군에 대
한 이야기를 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만일 배반자나 포로들이 정보를 제
공했다면, 누가 무엇을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가 문제였다. 볼리비아 대원
들 중에는 혁명에 대한 의지나 투쟁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
들의 태도는 다른 대원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체는 노출
된 진지로부터 이동을 결심하고 대원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대원들도 라디오 방송을 들어 알고 있겠지만, 정부군은 우리 혁명군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전투는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는 더 어
려울 것이다. 그런데 투쟁할 의지가 없는 대원들이 있는 것같다. 앞으로 투
쟁할 의지력이 약한 사람들은 아무런 제약이나 불이익이 없을테니 혁명군
에서 떠나도록 하라. 나는 떠나는 사람들은 안전하게 떠날 수 있도록 도와
주겠다."
체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떠나겠다고 나서는 대원들은 없었다. 체의 속
마음은 기뻤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초병이 숨가쁘게 달려왔
다.
"무슨 일인가?"
"정부군 정찰기에서 낙하산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지역은?"
"사냥터 쪽입니다."
"안토니오! 두명의 대원을 선발해서 낙하산이 떨어진 지역으로 가라. 그
들을 포로로 잡아오도록 해."
안토니오는 두 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사냥터로 출동했다. 몇 시간 후에
돌아온 안토니오의 보고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라디
오 방송에서는 연일 혁명군에 대한 왜곡 보도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 정부군은 게릴라들이 숨어 있는 위치를 알아내고, 반경 120킬로미
터에 걸쳐 2천여명의 군인들로 포위를 한 상태입니다. 현재 우리 군의 네
이팜탄 폭격으로 게릴라 10-15명이 죽고, 정부군은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
다고 합니다."
체는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브라울리
오에게 9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농장으로 대원들이 먹을 옥수수를 가지러
가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대원들이 오후 4시에 농장어귀에 도착해서 옥수
수를 따고 있을 때 적십자 회원 7명과 의사, 그리고 무기를 갖지 않은 군
인 몇 명이 동굴속의 비트를 조사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원들은 그들
에게 다가가 포로로 잡았다.
"브라울리오, 저 사람을 어떻게 할까요?"
"돌려보내. 그리고 휴전이 끝났다고 알려 주고 떠나라고 해."
대원들이 브라우리오와 포로 처리 문제를 얘기하고 있을 때 군인들을 실
은 트럭 한 대 가 나타났다. 군인들은 차에서 내려 즉시 사격자세를 취했
다. 브라울리오는 포로들에게 일렀다.
"군인들에게 돌아가라고 말해. 너희들이 살고 싶으면 잘 이야기해."
포로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사격중지. 아직 휴전 상태다. 적십자 대원들과 군인들이 여기 있
다. 우리는 포로가 되어 잡혀있다. 당신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
다. 어서 돌아가라."
정부군 포로의 말에 군인들이 돌아갔다.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지난 번
전투에서 죽은 시체를 찾으러 왔다는 것이다. 브라울리오는 대원들을 시켜
적십자 대원들을 이미 썩어 들어 가는 시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도록 했
다. 적십자 대원들은 옮겨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다음날 다시 와서
화장을 하겠다고 했다. 브라울리오와 대원들은 포로들을 돌려보내고, 옥수
수를 잔뜩 따 가비고 진지로 돌아왔다.
옥수수를 분배하고 있을 때 라디오 뉴스에 베닉노가 정찰 나간 골짜기에
서 전투가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혁명대원 두사람을 사살했다는 내용도
흘러 나왔다. 체는 뉴스가 사실이라면 베닉노의 안전이 위협받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베닉노가 돌아 오지않고 있어 대원들 사이에는 불안감마저 맴돌
았다. 체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말 한 마리를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늘 밤 말고기를 실컷 먹고 기운을 내서 안전한 장소로 이동한다. 이
곳은 너무 알려졌다."
대원들은 말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하고 체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새로운 이동장소 문제와 정찰 나간 대원들의 안전 문제, 앞으로 닥
쳐 올 전투 등 그가 해결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아침이 밝았다. 잠을 이루지 못해 기분이 상쾌하지 못했는데, 보초병이
좋은 소식을 알려 왔다.
"대장님, 베닉노가 오고 있습니다."
체는 무사히 돌아와 준 베닉노를 껴안고 기뻐했다. 현재 그에게는 대원
들 한사람 한사람이 너무나 소중했다. 강둑으로 정찰을 나갔던 안토니오와
두 명의 대원들도 돌아왔다.
"병사들의 움직임은 없습니다. 단지 강 주변을 정찰한 흔적을 발견했습
니다. 그리고 강 주변에는 군인들이 참호를 파 놓았습니다. 농장에 들러 말
한 마리도 끌고 왔습니다."
체는 대원들이 말을 잡아 육포를 만드는 일을 하고 나자 보초병을 뺀 나
머지 대원들을 쉬게 했다. 그러면서 계속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라디오 방
송은 계속 혁명군에 대한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방송에서는 혁명군이
머물고 있는 야키강과 나카우아스 강 사이의 혁명군 위치를 아주 정확하게
밝히고 있었다. 체는 정부군이 혁명군을 포위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할 시
점을 예측하고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이동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부대는 선발대와 후방부대, 그리고 본대로 나누고 지휘관과 부지휘관을
지정했다. 손님인 엘 치노 외 3명, 그리고 피난민 한 명을 포함해 인원은
모두 47명이었다. 체는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대원의 숫자를 네 명으로 생
각하고 있었다.
4월 2일, 어두운 새벽녘에 롤란도가 손님 네사람을 데리고 진지를 떠났
다. 그들을 무사히 귀환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나서 체는 곧바로 선
발대를 보내고 간격을 두었다가 본대도 출발시켰다. 체는 후방부대 대원들
과 나카우아스 지역으로 출발했다. 파라보이 골짜기를 무사히 지났을 때
체는 두명의 대원들을 롤란도와 접선하도록 파견했다. 목표지점은 남쪽으
로 15마일 떨어진 무유팜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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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체는 대원들과 나카우아스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후 날이 새
기를 기다려 선발대장을 맡은 미겔에게 정찰을 명령했다. 정찰에서 돌아온
미겔은 현재의 위치가 군인들과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보고를 했다.
아침 8시가 됐을 때 체가 롤란도에게 보냈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윌가 지나온 골짜기에서 군인 12명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롤란도 말
에 의하면 골짜기에 매복하고 있는 군인 수가 1백 명 이상이랍니다."
롤란도에게 다녀온 대원들의 보고를 듣고 난 체는 대원들을 이끌고 강 언
덕의 진지로 올라갔다. 진지와 참호는 몇 달 동안 머물면서 체와 대원들이
파 놓은 것으로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진지에 도착했을 때 선발대원 두사
람이 루비오의 시체를 들것에 뉘어 들고 왔다.
"어떻게 된 일이야?"
체가 슬픔에 잠긴 대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투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매복해 있는데 군인들이 강 주변을 정찰했
습니다. 인티가 군인들의 출현을 알리기 위해 루비오가 있는 쪽으로 갔는
데, 루비오가 있는 곳을 그만 지나쳐버렸습니다. 그 때 갑자기 군인들의 사
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전투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적군은 사망 2명과 부상
2명, 그리고 포로 6명이었습니다. 군인 4명은 도망쳤구요. 전투가 끝나고
정리를 하는데, 부상한 군인 옆에서 죽어 가고 있는 루비오를 발견했습니
다. 루비오의 손에는 총이 불발되어 있고, 옆에는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이
폭발하지 않은 채 놓여 있었습니다. 옆의 상처를 입은 포로에게 말을 시켰
지만 상처가 심해서 아무말도 못하더니 몇 분 후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포로에게 심문을 했나?"
"나머지 포로에게 심문해 알아낸 것은 우리가 전투를 벌였던 군인들은
나카우아수 강 상류 쪽에 있던 중대병력의 일부라고 합니다. 그 중대 병력
은 100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자기들은 오후 5시까지 귀대하라는 명령을
받고 정찰을 하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또 농장에 군대가 많이 주둔하고 있
고, 다른곳에도 있답니다."
체는 선발대 대원의 보고를 들으면서 머릿속으로는 시간을 계산하고 있
었다. 도망간 군인들이 중대와 연락하는 데 걸릴 시간을 계산해 두기 위해
서였다. 체는 중대 가까이에 매복하고 있는 롤란도에게 계속 매복을 하라
는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선발대 대원들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매복하
라고 지시했다.
예상대로 오후 5시가 되어 군인들이 몰려온다는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체는 대원들을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롤란도가 매복해 있는 쪽에서 가끔
총성이 울렸다. 두 시간쯤 지나 선발대 소속 폼보가 체에게 달려왔다. 전투
결과에 대한 보고였다.
"군인들이 분산해서 특별한 경계없이 들어오다가 꼼짝없이 매복작전에
걸려들었습니다. 결과 적군 피해는 사망 7명, 부상 5명 포함 포로 15명, 총
22명입니다. 포로중에는 소령이 한명 있습니다."
보고를 받고난 체는 인티를 파견해 밀림 속에서 숨겨진 무기를 찾고 포
로들을 석방하도록 지시했다. 포로를 석방하러 가던 인티와 두 명의 대원
들은 밀림 속에서 군인 두명을 또 포로로 잡았다. 롤란도가 매복하고 있는
곳에서는 또 한번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체는 롤란도가 전투를 치르는
동안 다른 진지로 이동을 서둘렀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4월 11일 루비오
를 묻고 추도식을 가졌다.
인티가 포로들을 석방하러 도착했을 때는 롤란도와 대원들이 50여명의
포로를 모아 놓고 소령을 따로 불러 심문하는 중이었다. 체가 소령에게 전
하라는 메모지를 건냈다.
"이 메모지는 반드시 기자들에게 전달해야한다. 나는 네 양심을 믿고 너
와 네 부하들을 석방한다."
체는 혁명대원들의 요구와 혁명대원들의 현재 상황을 왜곡되지 않게 보
도하라는 내용의 메모를 보냈던 것이다.
체와 대원들이 아키라 강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체는 대원들을 시켜 마
을 농부들에게 옥수수와 돼지고기, 감자를 사오도록 했다. 하지만 농부들은
물건을 팔면서도 혁명군이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체는 정부군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밤에 요리 할 것을 지시했다. 대원들은 허기져 있어
어둠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강가의 밤은 정글속의 밤보다 느리
게 다가왔다. 대원들은 밤이 깊어서야 돼지고기, 감자, 옥수수를 요리해 배
불리 먹었다. 아침이 되자 농부의 아들 한 사람이 없어졌다는 소식이 전달
되었다. 체는 농부의 아들이 군인들에게 혁명군이 있다는 것을 알리러 떠
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있을지도 모르는 불행한 사태에 대비
하기 위해 화킨과 3명의 대원을 남기고 이동을 시작했다.
4월 19일 오후 1시쯤, 라구니야스에 도착해 체가 대원들과 휴식을 취하
고 있을 때, 보초병이 뜻밖의 선물을 가지고 왔다.
"대장님, 라구니야스 마을 아이들이 '로드'라는 영국기자를 데리고 왔습
니다."
"들여 보내."
체는 로드의 신분증을 확인했다. 그의 직업은 학생에서 기자로 바뀌어
있었다. 자신은 사진 기자라고 말했지만, 체는 그가 의심스러웠다. 그는 푸
에르토리코 비자를 가지고 있었다. 체는 로드를 데리고 온 아이들에게 어
떻게 만났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혁명군이 도착하던 날 밤 모르는 어떤
사람을 통해 로드를 만났다고 했다. 영국인 기자에게 체는 자신이 쓴 보고
서를 건네주고 현재까지의 상황을 들려주었다. 인티는 옆에 있다가 이 모
든 것을 왜곡되지 않게 보도한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체는 영국기자를 돌려보내면서 프랑스 기자 데브라와 카를로스도 임무수
행을 위해 한시 바삐 떠나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데브라와 카를로스가
떠난 지 이틀만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체는 자신의 성급한 행
동을 자책했다. 조금 더 신중했더라면 그들이 무사히 떠났을 것이라는 생
각이 체를 괴롭혔다.
그 날 오전, 마을에서 연락이 왔다. 농부의 아들이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농부의 아들을 심문하여 자백 받은 내용은 자기 형님과 함께 포상금을 타
기 위해 신고를 하러 갔었다는 것이었다. 신고할 경우 포상금액은 5백에서
1천 페소까지 준다는 것이다. 체는 보복조치로 그의 말을 압수하고 그 사
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앞으로 밀고자를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밤이 되자 정찰기들이 혁명군들이 머물고 있는 마을 위 상공을 빙빙 돌
았다. 마을의 개들이 놀라 계속 짖어댔다.
아침이 되자 폼보가 달려왔다. 군인 30여명이 체가 머물고 있는 곳을 향
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체는 대원들에게 전투준비를 시켰다. 대원들의
준비가 완료됐을 때 또 다른 대원이 군인 60여명이 오고 있다고 전하러 왔
다. 체는 진지마다 대원들을 잠복시키고 나머지 대원들을 이끌고 이동을
서둘렀다. 체가 대원들을 이끌고 이동해 간 지역은 마을에서 5백여 미터
떨어진 곳으로 50여미터 떨어진 계곡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였다. 체가 이
동한 지 얼마되지 않아 롤란도가 매복해 있는 쪽에서 간헐적으로 총성이
울렸다. 체는 대원 한 사람을 보내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전하
러 갔던 대원은 다른 대원 한사람과 함께 심한 부상을 당해 축 늘어진 롤
란도를 들것에 들고 들어왔다. 롤란도에게 수혈을 했지만 수혈중에 죽고
말았다. 체는 후퇴하면서 롤란도의 시체를 함께 옮겼다. 롤란도의 시체는
새벽 3시에 매장을 했다. 체는 롤란도의 죽음을 무척 슬퍼했다. 롤란도는
체의 쿠바 혁명 때부터 그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다. 체는 4월 25일자 일
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게릴라 부대의 가장 우수한 사람을, 그 기둥가운데 하나이며 실
제로 아직 어렸던 제4분견대의 전령 시절부터 침공 때와 여기 새로운 혁명
적 모험에 이르기까지 줄곧 같이 했던 나의 동지를 잃었다... 용감한 지휘
자여! 그대의 작은 주검은 무한공간, 그 영원불멸의 상으로 연장되었다!"
체는 롤란도의 죽음을 놓고 슬퍼할 여유도 없이 비교적 위험이 덜하다고
생각되는 산을 택해서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언덕을 몇 개 넘고 가파른
능선을 타고 거의 산꼭대기 근처에 도착했을 때 짙은 어둠이 밀려왔다. 대
원들은 그다지 춥지 않아 산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 잠들기 전에 라디오를
켜자 '라디오 아바나'에서는 칠레 기자가 취재한 이곳 상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혁명군이 용감하게 여러 도시를 공격하고 식료품을 가득 실은 군
인들의 화물트럭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또 독재자 바리엔
토스는 잡지 인터뷰에서 볼리비아 사회 상황으로 인해 게릴라가 발생했다
고 말했다는 내용도 보도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볼리비아 혁명대원들과 체
에 대한 칭찬이 곁들여졌다. 그런데 좋지 않은 뉴스도 있었다. 프랑스 기자
데브라가 군사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볼리비아 정부는 그를
프랑스 기자로 인정하지 않고 혁명대원의 한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5월 2일 날이 밝자 체는 대원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갔다. 원래 이끼리
강을 향해 가다가 화킨과 합류할 예정이었는데 그만 방향을 잃고 산 위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을 내려가는 동안 물이 떨어지고 없어 물을
구할 수 있는 강까지 가기로 했다.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 도착한 곳은 인
티와 베닉도가 진지를 구축해 놓은 콩그리 계곡이었다. 체는 진지와 가까
운 혁명군 눙장에 파견대를 보냈다. 비트를 정찰하던 대원들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농장에서는 군인들이 들어 와 있고, 옥수수를 모두 잘라 버렸다
는 보고였다.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할 무렵 정부군의 공격이 있었다. 전투
는 밤이 어두워질때까지 계속 되었다. 결과는 언제나처럼 혁명군의 승리였
다. 포로 10명과 사망자 3명, 부상자가 2명이었다. 체는 군인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되자 포로 모두를 돌려보냈다. 체는
포로를 보낸 후 대원들을 깨워 이동을 시작했다.
5월 7일, 피리렌다 호수 쪽을 향해 가는 도중이었다. 호수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착해 비축식량용 콩을 따고 있을 때 멀리서 폭격기들의 소리
가 들렸고 계속적인 총성이 울렸다. 체와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2-3킬로미
터 떨어진 곳이었다. 가까운 은닉처에 콩과 옥수수를 감추고 총격이 계속
되는 동안 체는 대원들을 이끌고 언덕을 넘었다. 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언
덕을 넘어서자 저녁 무렵이 되었다. 하룻밤 묵어 갈 곳을 찾던 대원들은
주인 없는 빈집을 발견했다. 그 집에는 물이 있어 대원들은 저녁식사로 닭
요리를 해 먹을 수 있었다. 다음날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5월 16일, 행군을 하던 체가 갑자기 토하고 설사를 시작하더니 정신을
잃었다. 의사인 대원이 체에게 약을 먹이고 해먹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체는 약을 먹고 깨어났지만 이동은 힘든 상태였다. 밤까지 휴식을 취했지
만 물이 없어 온 몸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정찰을 나간 코코가 남북으로
뻗은 도로를 발견하였다. 체는 대원들을 이끌고 다시 밤길을 도와 북쪽으
로 가기 시작했다. 체는 자신의 몸이 아프다고 대원들이 끼니를 거르게 하
고 싶지 않았다. 다음 도착장소인 계곡에는 숨겨둔 식량이 대원들을 기다
리고 있었다. 대원들은 작은 화덕에 빵을 구워 먹으며 즐거워했고 체는
비로소 몸의 악취를 씻을 수 있었다.
체는 날이 밝으면 계곡을 벗어나 마을과 도시쪽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계곡을 떠나 도착한 곳은 계곡 아래 평지가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한 제재
소였다. 체와 대원들이 도착했을 때 텅 비어 있었다. 체와 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제재소 관리인이 17세된 아들과 함께 지프를 타고 나타났
다.
"여기까지 게릴라 활동구역입니까? 수고들이 많군요. 망할 녀석들..."
제재소 관리원은 정부군 선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게릴라들은 자기네가 무슨 영웅이나 된 듯 착각하는 정신나간 사람들
아닐까요?"
"보았다면 당장 신고를 했지요."
"그래요? 이봐. 이들을 체포해."
"왜... 왜 그러십니까?"
"우리가 당신이 말한 정신 나간 사람들이야. 그런데 몰라도 너무 모르는
데, 우리는 정신이 아주 또렷해."
제제소 관리원은 사색이 되었다. 관리원의 아들도 놀라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세요."
체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람을 보호하는 사
람들입니다. 하지만 배반하면 가만있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제재소 관리원을 충분히 심문한 다음 체가 말했다.
"우리에게 식량을 구해다 주시오. 돈은 지불하겠소. 그 대신 우리가 당신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을 테니 헛된 생각은 하지 마시오. 당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떠날 것이오. 당신이 다른 일로 늦어진다면 당신 아버지가
사는 곳에서 아들의 소식을 들을 것이오."
제재소 관리원은 식료품과 식품을 사러 근처 마을로 떠났지만, 온종일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체는 인질로 잡고 있던 관리원 아들을 데리고
제재소를 떠났다. 3시간 동안을 걸어 제재소 관리원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에 도착했다. 그 집에는 일꾼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도 인질로 잡
아 이것저것을 자세히 물어 보았다. 일꾼 두 사람은 관리원의 아버지와 자
신의 누나가 결혼해 매형과 처남 관계라고 했다. 일꾼들과 이야기를 나누
고 있을 때 식료품과 식량을 사러 갔던 제재소 관리원이 돌아왔다. 물론
그는 빈손이었다.
"왜 빈손이요?"
"이피타에서 부탁한 물건은 모두 샀지만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심문했고,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체가 염려했던 일이 일어났던 모양이었다. 많은 물건을 사가지고 오는
것을 정부군 군인들이 이상하게 여기리라는 예상을 했었다.
"바른 대로 말하면 살려줄 테니, 이파타의 상황을 자세히 말하시오."
"이피타에는 30명의 군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좋소. 우리가 여기를 떠난 후에도 이곳을 지나갔다는 말을 하지 마시오.
그리고 다음 월요일까지 떠나지 마시오."
체는 인질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그리고 관리인의 아버지집에서 돼지와
옥수수를 사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산타크루스 쪽으로 향하던 체와 대원
들은 중간에 군인들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매복작전에 걸려든 군인들
과 전투를 치렀다. 역시 승리였다. 선발대는 산타쿠르스 근처에서 원유회사
소속의 지프차와 트럭을 빼앗았다. 이제 걷지 않아도 되었다. 지프차를 타
고 정찰을 나갔다 올 수 있어 먼 거리의 소식도 빨리 알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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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를 치른 본대는 7-8킬로미터를 걸어서 한 농장에 도착했다. 그 농장
은 혁명대원들을 돕고 있는 볼리비아 농부 그레고리오가 안내한 곳이었다.
농장에는 농장 주인과 그의 아들, 그리고 일꾼 두 사람이 있었다. 체는 농
장에서 살찐 돼지 한 마리를 잡도록 했다. 그리고 체는 농장 사람들을 인
질로 잡고 근처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레고리오가 살던 마을에서는 그가
없어졌다는 것이 군인들에게 알려졌을 것이므로 농장에 머무는 것은 위험
할 수 있었다. 농장을 빠져 나온 혁명대원들은 계곡으로 들어가 돼지를 잡
고 요리를 했다.
밤이 되자 체는 인질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인질로 잡혀 온 농장 사람
들을 풀어 주면서 일꾼들에게는 일당으로 10페소씩을 주고, 주인에게는 돼
지값을 지불했다. 그레고리오에게도 안내한 대가로 1백 페소를 지불하고
돌려보내. 그들을 보낼 때 농장 사람들에게는 혁명군에 대해 절대로 말하
지 말 것을 당부했다. 또한 그레고리오의 안전을 위해서 농장 사람들 보는
앞에서도 그도 포로인 것처럼 대했다.
충분한 영양과 휴식을 취한 대원들은 다음날 새벽 계곡에서 밀림으로 들
어갔다. 새벽녘의 밀림은 아직도 어둠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밀림 속을 걸어
간 지 두 시간쯤 지나 강한 바람과 함께 이슬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밀
림의 아래쪽을 향해 가던 대원들은 오후가 되어 리우그란데 강에 도착했
다. 체는 정찰대원들에게 현재 대원들이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외
딴집이 있으면 강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찰을 끝낸 대원들이 집 한 채
를 강점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체가 대원들을 이끌고 들어선 외딴집 역
시 농부의 집이었다. 열 여섯 살된 아들 하나와 그 밑에 딸 하나를 데리고
두 부부가 사는 집이었다. 농부와 아이들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한쪽 구
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체가 도착하자 정찰대원 한 사람이 그 동안
알아낸 정보를 알려 주었다.
"여기서 3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군인 50여 명이 주둔하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밤을 보내고 내일 새벽에 출발한다."
대원들은 계곡에서 잡은 돼지고기를 남기고 왔기 때문에 돼지고기와 볼
리비아 전통요리인 로트로와 함께 이른 저녁식사를 했다. 집주인 가족들에
게도 음식을 나누어주었지만, 그들은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아직 혁명군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주인집 아들의 길 안내를 받아 외딴집을 떠났다.
군인들이 주둔해 있다는 반대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강과 가까이 있는 호
숫가를 걸어 호박, 사탕수수, 콩, 바나나가 있는 밭에 도착했다. 체는 밭이
바라다 보이는 3백여미터 위쪽 언덕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곳에서는 호수
와 밭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밭에는 길이 나 있지 않았다. 진지에 머물면
서 체는 밭 주인은 언제나 보트를 타고 그곳에 오기 때문에 길이 필요 없
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진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도 몇 개의 참호를 파 놓고 대원들은 교대로 매
복에 들어갔지만 정찰기가 가끔 날아가는 것이 목격될 뿐이었다. 라디오
뉴스에서는 인티가 이끄는 전방부대가 전투를 벌여 군인들이 죽고 부상했
다는 내용과 그 부대를 이끌고 있는 것은 인티라는 방송이 있었다.
체는 인티의 승리 소식을 라디오를 통해 들은 이틀 뒤인 6월 14일 생일
을 맞이했다. 체의 생일은 그의 작은딸 셀리타의 생일과 같은 날이었다.
그는 저녁을 먹고 쉬는 시간에 일기를 썼다. 호숫가로 내려온 달빛은 그의
마음을 달래 주고 있었다.
그 날 그의 일기에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나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이다. 세월은 무정하게 흐르는데, 얼마나 더 이
생활을 견딜 수 있을는지... 그러나 나는 아직 강하고 의욕에 차 있다."
그는 끝내 자신의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강하고 의욕에 차있다'는 말로
자위하고 있었다.
체는 선발대인 인티가 이끄는 대원들이 합류하게 되자 한곳에 머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대원들을 이끌고 로시타 강 쪽으로 향했다. 외딴집
의 농부 아들이 여전히 길 안내자로 남았다. 이틀이 지나 도착한 곳은 체
도 아는 길이었다. 게릴라전 준비기간에 행군하면서 이미 체도 익혀 둔 길
이었다. 체는 농부의 아들에게 그 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150페소를
주어 부모에게 돌려 보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체와 대원들이 3킬로미터쯤 더 덜어갔을 때, 선발대원들이 강 가까이 다
가가 정찰하면서 군인들의 군화자국과 흔적들을 발견했다. 주변을 살펴보
았으나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체는 군인들의 매복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선발대원들이 먼저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강물은 생각보다 깊
었다. 강물이 대원들의 허리까지 차 올랐다. 체도 대원들을 이끌고 강물로
들어섰다. 강을 건넌 대원들은 강과 15킬로미터쯤 떨어진 마을로 잠입해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촌장은 체가 사고자
하는 식량이나 그 밖의 물건들을 팔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카릭스토라
는 중년의 농부였다. 고집이 세고 외골수임을 느끼게 하는 날카로운 눈빛
과 불거져 나온 광대뼈에서 체는 그의 인상이 썩 좋지 않음을 느꼈다.
"카릭스토! 당신에게서 뭘 빼앗겠다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왜 그렇게 못
마땅하지요?"
체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들이 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이 싫습니다."
"왜 그러지요?"
"이유는 알 것 없습니다. 불편하니까 마을에서 떠나시오."
마을에서 가장 큰 농장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인색한 구두쇠 영감처럼 굴
었다. 체가 질문을 해도 잘 대답해 주지 않았다. 혁명군과는 이야기하는 것
도 싫다는 태도였다.
체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 생각으로 마을에 보초를 세우고 대원들은
마을 가까이 있는 밭으로 내보냈다. 그런데 밤이 되자 마을에 권총을 들거
나 장총을 멘 장사꾼 세 사람이 돼지를 몰고 와 그들을 잡았다는 보고가
있었다. 안토니오가 무기를 빼앗지 않고 감시하는 동안 다른 대원이 심문
했다는 것이다. 심문을 하자 카릭스토가 달려와 자신이 잘 아는 포스트레
를 발레의 장사꾼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자신의 집
으로 데리고 갔지만, 계속 감시 중이라고 했다.
아침이 되자 밭 주인 파울리노가 체를 찾아왔다.
"말씀 들릴 게 있어서요. 카릭스토는 정부군의 첩자입니다. 한 달 전에
여기 들렀던 군사위원회가 촌장으로 임명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어젯밤에
들어온 장사꾼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정부군 중위랍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눈빛이 선하고 착해 보이는 파울리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수줍은 태도
를 보였다.
"사실, 저는 카릭스토 딸과 애인 사이입니다."
"카릭스토의 딸에게서 정보를 얻었다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나머지 두
사람도 군인입니까?"
"그들은 군인과는 상관없는 사람들 같다고 합니다."
인티는 대원들 몇 명을 선발해 카릭스토 집을 포위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손들고 나와라."
집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고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
다. 인티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나오지 않으면 총공격을 하겠다."
그 때였다. 장사꾼이라고 말한 세 사람이 황급하게 카릭스토의 집에서
나왔다. 인티는 대원들을 시켜 그들의 몸을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머리에 손을 얹은 세 사람을 인티가
심문하기 시작했다.
"다 알고 있으므로 우리를 속일 생각은 마라. 속일 경우 총살이다. 하지
만 바른 대로 말하면 살려 주겠다. 자신의 신분을 한 사람씩 밝혀라."
서로 눈치를 살피던 세 사람 중 키가 가장 큰 사람이 먼저 말문을 열었
다.
"저는 정부군 중위입니다."
"저는 헌병부대 하사관입니다."
"저는 포스트레르 발레에 있는 학교 선생입니다."
그들은 목숨만 살려 주면 어떤 일이든 협조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누가 너희들을 파견했나?"
"저희는 포스트레르 발레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에서 파견되었습니다."
중위가 또렷하게 대답했다. 인티는 선생과 헌병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
았다. 그의 눈빛은 그 말이 맞느냐고 질문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대답했다.
"맞습니다."
"중위, 그곳 군대의 인원은 몇이며 지휘관의 계급은 무엇인가?"
"현재 60명이 있고, 지휘관은 대령입니다."
"너희들의 임무는 무엇이냐?"
"강 주변을 4일간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인티는 심문을 끝내고 체에게 그들을 총살해도 되는가를 물어 오라고 사
람을 보냈다. 체는 포로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전쟁 전례에 대해 엄격
한 경고를 한 후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들을 보낸 후 체는 어떻게 혁
명군이 보초를 서고 있는 마을로 그들이 들어오게 됐는가에 대해 추궁했
다.
"아니세토가 보초를 서다가 훌리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들이 들어왔답
니다. 그리고 아니세토와 루이스가 보초를 서면서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인티가 상황을 정리해 대답했다. 체는 아니세토와 훌리오에게 보조 요리
사로 7일간 봉사하고 하루 동안 아무 음식도 먹지 못하게 하는 처벌을 내
렸다. 다음날 체는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파울리노와 촌장 카릭스토를 길
안내원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카릭스토는 몸이 아파서 갈 수 없
다는 것이었다.
"카릭스토! 당신이 길 안내원을 못하겠다고 하니까 강제로 데려가지는
않겠소. 하지만 허튼 짓을 하면 당신은 무사하지 못해. 당신 집에 왔던 장
사꾼들이 군인이라고 알려 줬다는 것을 정부군이 알게 되면 그 쪽에서도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무조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소."
"정부군이 당신 말을 믿어 줄까? 당신밖에 그 사실을 모를텐데..."
인티는 카릭스토에게 단단히 겁을 주고 경고했다. 그에 비해 파울리노는
적극적이었다. 자신에게 일이 맡겨지는 것에 대해 오히려 즐거워했다. 체는
파울리노에게 쿠바에 보낼 암호정보와 인티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코차
밤바까지 전달하는 일을 시켰다. 파울리노에게 도시와 대원들을 연결하는
일을 맡긴 다음 체는 대원들을 이끌고 두란 산기슭에 진지를 마련했다. 산
에서 흐르는 작은 개울이 옆에 있어 물 걱정이 없는 곳이었다. 식사를 하
고 밤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정찰기 한 대가 머리 위를 날아갔지
만 그들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개울가에서 밤을 보내고 6월 26일 새벽, 체는 파울리노가 가르쳐 준 파
울리노 누나 집으로 향했다. 16시간을 걸어 파울리노 누나가 살고 있는 마
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곳은 마을이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인가는 불과 세 채뿐이었다. 그 중 한 채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였다. 세
채의 집중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이 파울리노의 누나 집이었다. 파울리노의
누나는 아이들 네 명과 함께 살고 있었다. 파울리노 누나를 만나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녀도 혁명군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다.
"여기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파니아구아 딸이 살고 있는 집이 있어
요. 그것으로 가시겠어요? 파니아구아는 제 남편과 함께 플로리다로 일을
찾아 떠난 상태거든요."
체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 집에 머물면서 파니아구아의 딸로부터
송아지 한 마리를 사서 그 동안 행군에 지친 대원들에게 영양을 보충시켰
다.
파니아구아 딸집에 머물게 된 체는 코코와 대원 세 명을 선발해서 플로
리다에 나가 정찰을 하고 식료품을 사 가지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파니
아구아의 딸은 대원들이 플로리다로 간다는 말을 듣고, 몸조심하라는 말을
했다.
"그곳에는 군인들이 있어요."
대원들은 그녀의 말을 참고하겠다고 말하고 길을 떠났다. 체는 5명의 대
원에게 플로리다에서 오는 길에 매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몇 시간 후 체는 플로리다 길에 매복하고 있는 대원들과 교
대할 대원들을 이끌고 매복 장소로 갔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
의 일이 벌어졌다. 매복 장소로 가던 길에 정부군 시체 네 구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대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투도 없었는
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체는 대원들을 풀숲에 매복시
켰다. 미겔이 낮은 포복으로 체에게 다가왔다.
"제가 잠복해 있는 왼쪽에서 나무를 딱딱 자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알았다.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총을 쏘지 말아라."
미겔을 돌려보내고 안토니와 다른 대원들을 그쪽으로 보냈다. 안토니오
와 대원들이 미겔이 잠복한 장소로 가자마자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양쪽이
거의 동시에 시작된 사격이었다. 체는 이길 승산이 불확실하다고 느껴 후
퇴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폼보와 투마가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후퇴는 느
렸다. 체는 두 사람을 빨리 후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투가 끝나 대원들
이 집으로 둘아오자 플로리다에 나갔던 코코와 대원들이 돌아와 있었다.
체는 보고를 받을 틈도 없었다. 파니아구아 딸집으로 돌아온 체는 두 사람
의 상처를 살폈다. 투마의 상처는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심했다. 총알이
가슴을 관통해 간과 창자가 파괴되어 있었다. 의사인 대원과 의대생 그리
고 체는 급히 수술에 들어갔다. 하지만 투마는 수술 도중에 죽고 말았다.
체는 자식을 잃은 것만큼이나 슬퍼했다. 투마가 숨을 거두고 체가 슬퍼하
고 있을 때 안토니오가 체에게 다가왔다.
"이 시계를 받으십시오. 투마가 쓰러질 때 대장님께 드리라며 시계를 저
에게 맡겼습니다."
체는 시계를 어루만지며 이 엄청난 상실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슬퍼
할 수만은 없었다. 체는 투마의 시체를 말에 태우고 서둘러 그 집을 떠났
다. 선발대를 30분 먼저 보내고 중간부대, 후방부대 순으로 떠났다. 행선지
는 그곳에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파니아구아 조카의 집이었다. 체는 파니
아구아 조카집에 도착하기 전 투마의 시체를 매장하고 그 집으로 들어갔
다. 라디오 방송을 켜자 전투가 있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방송은 군인 3명
이 죽고 2명이 부상했으며, 혁명군이 도망쳤다고 보도했다.
방송을 듣고 난 체는 네 명의 시체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었다. 방송이
사실이라면 네 명의 시체 중 한 명은 죽은 체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밖에 풀
이할 수 없다.
파니아구아의 조카네 역시 외딴 집이었다. 빈집이 두 채 있었고, 한 채는
일하는 농부가 임시로 머무는 집이었다. 체와 대원들이 잠시 머무는 동안
외부에서 농부 세 사람이 들어왔다. 체는 그 사람들이 의심스러웠다. 대원
들을 보내 농부들을 붙잡아 왔다. 그들은 정찰을 나온 군인들이었다. 그런
데 그들은 뜻밖에도 혁명군의 부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체는 그들을 완전
히 의심하고 하나하나 캐물었다.
"혁명군은 몇 명인가?"
"24명입니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엘 치노라는 사람으로 눈이 동양인처럼 생겼습니다."
몇 마디를 더 물어 본 체는 그제야 의심을 풀 수 있었다. 엘치노가 약속
대로 게릴라 전투를 게시한 모양이었다. 체는 그들에게 투마의 죽음과 현
재의 상황을 얘기해 주었다. 농부들은 로로가 학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고 했다. 또 체가 광산 폭동을 부추겨 전투와 연결시키려고 한다는 내용도
전했다. 체는 속으로 웃었다. 파울리노에게 가짜 정보를 보낸 것이 효력을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체는 적을 교란시키려고 파울리노에게 가짜 정보를
주어 보냈던 것이다.
36
그 해 7월 초, 폼보의 상처가 났기를 기다려 혁명군은 그 행로를 북쪽의
페냐 콜로라도로 잡고 나아갔다. 그러다 7월 6일 사마이파타를 공격하여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사마이파타는 북부 산악지대의 작은 도시였는데 혁
명군은 이곳으로 들어가는 차량의 검문검색이 심하지 않다는 정보를 들었
다. 그래서 리카르도, 코코 등 6명이 차량을 탈취하여 전격적으로 쳐들어갔
다. 군막사를 점거하고 10명의 군인을 포로로 잡은 뒤 시내에 들어간 게릴
라들은 필요한 물건들을 사왔다. 하지만 이 작전에서도 체에게 필요한 천
식약은 구하지 못했다.
7월 초부터 체의 천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다가 약마저 떨어지
자 급기야는 베닉노 대원 두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천식약을 구하러 가
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전투로 쉴 틈이 없는 탓도 있지만, 정부
군과 게릴라전을 치르고 있는 곳이 대개 고산지대라는 점도 문제였다.
대원들이 약을 구해 올 동안에도 체와 대원들은 한 곳에 머물러 있을 수
가 없었다. 또 약을 구하러 나간 대원들과 만날 장소도 어느 한 곳으로 정
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약을 구하러 간 대원들이나 이동하는 대원들 누
구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어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맞추
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체는 약을 구하러 가는 대원들과 만날
장소를 항상 네 곳씩 지정했다. 네 곳 중 어떤 곳에서든 만날 수 있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7월 30일, 정부군의 습격을 받고 퇴각하던 중 리카르도와 파충고가 부상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공격은 정부군 특수부대인 트리니타드 분견대의
공격이었는데 퇴각하던 리카르도가 부주의하게 강을 정찰하지 않고 건너다
적의 기습을 받은 것이었다. 총상을 입은 리카르도를 들것에 싣고 퇴각했
으나 그는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또다시 중요한 대원 한 사람을 잃고 만
것이다.
8월 8일, 베닉노와 대원 두 사람의 체의 천식약을 구하러 나카우아수로
떠나고, 체는 대원들을 이끌고 산길을 따라 이동을 시작했다. 체는 1킬로미
터도 못 가서 다시 심한 천식 발작을 일으켜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뒤에서
짐을 실은 조랑말 두 마리를 끌고 가던 대원이 조랑말 한 마리의 등에서
짐들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체에게 조랑말의 고삐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걸어서 이동하기는 무리인 것 같습니다. 조랑말을 타십시오."
고통스러워하던 체는 고통이 가시지 않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 등에 올
랐다. 그 동안 천식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대원들과 똑같이 행군하고 절대
말을 타지 않았던 체가 처음으로 말을 타게 된 것이다. 안장도 갖춰지지
않은 조랑말 등에 올라앉은 체는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온몸
이 출렁였다. 체의 심한 천식 발작은 몸부림에 가까웠다. 대원들은 느리게
이동하면서 체의 고통을 안타깝게 지켜볼 뿐 어떤 도움도 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산 중턱을 오르면서 체의 심한 천식 발작은 조랑말마저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었다. 체의 격렬한 몸부림에 놀란 조랑말이 두 앞발을 쳐들
며 버둥대는 바람에 체가 말 등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순간 체는 가
지고 있던 칼을 빼 들어 말을 목을 찔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체의 과격한
행동에 대원들도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표정이 굳어 버렸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은 행동이었다. 이 일로 체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체는
조랑말의 목을 칼로 찌른 다음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인간 쓰레기가 되었다. 내 몸은 피폐해 있다. 암말 사건은 때때로
내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던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것은 개선할 것이지만
지금 상황은 모든 대원들이 함께 어려움을 나눠 짊어져야 하는 그런 상황
이다. 지금 대원들은 대단한 결심을 해야 할 순간이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투쟁은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수준인 혁명가로 될 기회를 주고 또한 최후
를 멋지게 장식할 남자로서의 가능성을 준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단계
에 도달하지 못할 대원들은 투쟁을 그만두겠다고 말해야 한다."
체는 조랑말의 목을 찌른 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비판하고 후회했다. 칼
에 찔린 조랑말의 상처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체는, 그 후 천식
발작 때문에 더 큰 사고는 저지르지 않았다.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인했는
지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전투와 행군을 계속한 후 체가 대원들과 머물게 된 고지의 마을은 커피
를 재배하는 농부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마을이라고 해도 겨우 다섯 가
구가 있는 곳이었다. 농부들은 모두 인척관계라고 했다. 체는 빈 농가 하나
를 진지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들은 혁명군이 머무는 것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응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들은 혁명군을 두려워
하면서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팔 때는 비싸게 팔았다. 체는 그것
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 중 혁명군에 호의를 갖고
있는, 마을에서 가장 젊은 농부가 체와 대원들이 머물고 있는 진지로 찾아
왔다.
"커피를 좀 끓여 왔는데요."
젊은 농부는 체에게 먼저 커피를 따라 주었다. 젊은 농부는 당연히 대장
인 체가 먼저 마셔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체는 그런 것들을 싫
어했다. 대장이기 때문에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은 체가 생각하는 바와 다
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을 할 때나 먹을 때 대원들과 똑같이 하고 있
었다. 그렇지만 농부에게까지 그렇게 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우리 대원들 중 나 혼자만 블랙 커피를 마신다는 것을 알았지
요? 내가 블랙 커피를 마시니까 먼저 떠 주고 여기다가 설탕을 넣어야 한
다는 것을 알고 있다니 놀랍군요."
젊은 농부는 어리둥절해 있었지만, 이를 눈치챈 대원들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체는 혁명군을 두려워하는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농부들의 사
진을 찍도록 했다. 농부들은 아직껏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
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색다른 경험이고 대단한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새 옷을 걸쳐 입고 오랫동안 감지 않은 때 절은 머리에 물
을 발라 곱게 빗고 카메라 앞에 모여 앉았다. 사진을 찍는다는 설렘으로
마을 사람들은 축제에 참석하러 오는 사람들 같았다. 그러나 사진을 현상
해서 그들에게 돌려 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체는 언젠가 이들의 사진을 돌려주리라 마음먹을 수 밖에 도리가 없었
다. 오후가 되자 정찰기 한 대가 마을 위를 맴돌았다. 적군이 혁명군의 위
치를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이제 이 마을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밤에 체는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카우아수로 천식약을 구하러
나간 베닉노와 대원 두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
이 밝으면 그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세 번째 장소인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체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밤이 깊어서 베닉노와 대원
들이 어둠을 뚫고 달려왔다. 그들은 어렵게 천식약을 구해 왔다고 말했다.
체는 천식약을 구한 것보다도 그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산을 내려오자 체의 천식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8월 24일, 안전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대원 몇 사람이 비축할
식량을 구하겠다며 사냥을 나갔다. 사냥해 돌아온 결과는 콘도를 몇 마리
와 고양이 한 마리였다. 대원들은 그것마저 남기지 않고 모두 먹어 치웠다.
대원들을 당장 괴롭히는 것은 적이 아니라 당장 먹을 음식과 물이었다.
밀림에서는 더 이상 물을 구할 수 없어 밀림을 빠져나가 계곡으로 들어
갈 때쯤에는 날씨가 흐려 있었다. 이 무렵의 체의 성격도 점차 날카롭게
변했다. 오랜 병마와 피로에 시달려서 그런지 판단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만이 그런 게 아니었다. 대원들 대다수도 점차 지쳐 가고 있었다. 심지어
나무를 자르고 길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던 선발대원이 정신을 잃고 쓰러
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 와중에 정찰 나온 군인들과 몇 번의 전투까지
치르면서 모두들 지칠 대로 지쳐 갔다. 이런 상황에서 화킨과의 연락은 여
전히 되고 있지 않았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화킨이라는 쿠바인의 게릴라
부대가 전멸했다는 불길한 보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근 20여일 밀림과 계곡과 강을 오가며 전투를 치르고 9월 20일
경 사탕수수 농장이 있는 평지로 나왔다. 밝은 달빛 속에서 사탕수수 농장
을 끼고 행군해 나갔다. 사탕수수 농장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산이 이어졌
다. 산으로 올라가던 대원들은 산 중턱으로 나 있는 길에서 말을 끌고 가
는 마부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에게 목적지인 알토 세코를 물었다. 그들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외딴집을 발견했다. 그곳 사람들은 식량
을 제법 가지고 있어 혁명군은 약간의 식량을 살 수 있었다. 식량을 구한
대원들은 계곡물을 이용해 옥수수 방아를 찧는 물레방앗간을 지나갔다.
본대에 속하게 된 체는 9월 22일 알토 세코에 도착했다. 알토 세코는 50
여 가구로 구성된 꽤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체가 그곳 촌장집에 도착했을
때 촌장은 이미 없었다. 그는 혁명군이 알토 세코를 향해 오고 있다는 소
식을 듣고 신고하러 간 것이었다. 체는 그에 대한 보복조치로 그 집에 있
는 식량을 모두 몰수하라고 지시했다.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혁명군을 맞이하고 있었다. 체
는 우선 옹달샘이 있는 폐가에 진지를 구축하기로 했다. 이곳은 발레 그란
데에서 보급 트럭이 오기로 되어있는 장소였다. 그런데 트럭이 오기로 한
시간이 몇 시간째 지나고 있었다. 체는 촌장의 신고로 무슨 문제가 발생했
다고 판단했다. 밤이 되자 인티는 농부들을 학교 교실 안으로 모으라고 지
시했다. 교실로 들어온 농부들은 두려운 얼굴로 인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티는 왜 혁명을 하고 있는가, 혁명이 무엇인가를 선전했다. 그림 속의 인
물처럼 입을 꼭 다물고 동작도 멈춘 채 앉아 있는 농부들 틈에서 진지한
자세로, 그러나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그
는 인티의 말이 끝나자 질문을 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말투는
시비조였다.
"여러분들은 이 마을에서 투쟁할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인티에게 사회주의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올 때 한 젊은 농부가 밤길이 어두우니까 길 안내를 하겠다고 따라나
섰다.
"아까 질문한 선생을 조심하십시오. 그는 이중인격자라서 어떤 일을 저
지를지 모릅니다."
혁명군은 결국 그곳을 포기하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젊은 농부의 길 안
내를 받으며 대원들은 밤길을 행군했다. 오전 10시쯤 도착한 산타 엘레나
는 경치가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귤밭과 숲이
이어졌다. 귤밭이 시작되는 지점에 마을이 있었다. 체는 대원들을 이끌고
마을과 귤밭을 지나 개울가에 진지를 구축했다. 귤 열매가 많고 물도 충분
해 휴식하기에는 아주 좋은 장소였다. 마을 사람들은 혁명군을 보자 모두
도망가 버렸다. 도망치지 않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늙은 농부가 한 사람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르가스로 돼지를 사육하고 있었다. 인티가 물었다.
"당신은 왜 도망가지 않지요?"
"사람이 사람을 보고 왜 도망칩니까?"
"그럼 다른 사람들은 왜 도망쳤을까요?"
"그것도 모르시오? 정부군이 혁명군에 대해 겁을 주어서지요."
"영감님은 겁나지 않으세요?"
"똑같은 사람인데 뭐가 무서워요. 혁명군이나 정부군이나 총 들고 있기
는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군요. 영감님, 돼지 한 마리만
저희한테 파시겠어요?"
바르가스는 의아한 눈빛으로 인티를 바라보았다.
"왜그러세요? 팔고 싶지 않으세요?"
"그게 아니라 혁명군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고 했는데, 당신들은 공손
하고 무엇을 빼앗아 가지도 않잖아요."
"군인들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저희들은 당신들 편입니다. 왜 남의 소중
한 재산을 빼앗겠습니까?"
인티는 바르가스 영감한테서 돼지 한 마리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체와
대원들은 길 안내를 해 준 젊은 농부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하루종일 휴식
을 취했다. 그러나 보초는 여느때보다 많이 세웠다.
얼마 후 보초를 서고 있던 대원 한 사람이 외쳤다.
"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체와 대원들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진지에서 나왔다. 마을 사람 몇
사람이 정말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음식과 과일을 들고
왔다. 젊은 농부 한 사람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귤 한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옥수수와 감자등을 내려 놓았다. 젊은 농부는 바르
가스 영감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우리가 너무 어리석었나 봐요. 군인들 말만듣고 무서워서 도망쳤어요."
"괜찮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가져온 음식이니 잘 먹
겠습니다."
체는 나눌 줄 아는 그들의 착한 마음이 고마웠다.
37
하루 휴식을 취한 후 9월 20일, 2천미터가 넘는 파카초와 이게라 마을에
도착했을 때, 체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라 마을에는 남자들은 한 사
람도 없고, 여자들만 가끔 눈에 띄었다. 코코는 정보를 얻기위해 우체국으
로 달려갔다. 한 중년 여인이 우체국을 지키고 있다가 코코가 우체국으로
들어서자 손을 위로 치켜들고 바들바들 떨었다.
"아주머니 묻는 말에 대답만 해 주시면 해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거짓
말을 하거나 아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무사할 수 없어요."
"뭐, 뭐든지...말...하...겠...어...요."
"왜 마을이 텅 비었지요?"
"발레 그란데의 부총독이 이게라 촌장한테 이 지역에 혁명군이 출몰할테
니까 위험하다고 말했대요. 남자들은 혁명군이 데려가거나 총살한다고 해
서 모두 숨었어요. 그리고 만약 혁명군을 보면 발레 그란데로 연락해야 한
다고 했어요."
"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아주머니가 전신수입니까?"
"아니에요. 전신수도 도망갔어요."
"그럼, 아주머니가 전신으로 신고하실 겁니까?"
"저는 뭘 어떻게 하는 줄도 몰라요."
"만약에 아주머니가 전신 연결을 갖는다면 우리는 아주머니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아시겠어요?"
"맹세합니다. 신께 맹세합니다."
코코는 우체국에서 나와 체와 대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코코의 보
고를 듣고 난 체는 대원들을 언덕 곳곳에 정찰을 내보냈다. 정찰대가 각자
의 정해진 곳을 향해 떠나고 나자 코카 장사꾼 두 사람이 마을에 들어왔
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인티가 장사꾼의 앞을 가로막고 물었다.
"푸카라에서 오는 길입니다."
"뭘 하는 사람이오?"
"저는 코카 장사꾼입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군인들을 보았소?"
"보지 못했습니다."
코카 장사꾼은 무척 떨고 있었다.
"당신 왜 그렇게 떨고 있는거요?"
인티가 의심하는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는 갑자기 당신들을 만나서 무서워 그럽니다."
체는 그들을 보내 주라고 인티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은 떨고 있었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떠나 보내고 얼마 후 체는 언덕 여기저기에
서 매복에 걸렸다는 신호를 알리는 총소리를 들었다. 체는 살아남은 대원
들을 기다리기 위해 마을에서 방어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퇴각로를 리우
그란데로 가는 길로 택했다. 몇 분 후 부상당한 베닉노가 돌아오고, 조금
지나 아니세토와 발에 부상을 당한 파블리토가 돌아왔다. 이제 후퇴를 서
둘러야 할 긴박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대원들은 어떻게 됐나?"
"미겔과 코코, 훌리오는 매복에 걸려 사망했고, 캄바는 배낭을 버리고 없
어졌습니다."
아니세토의 보고를 들으며, 체는 대원들과 함께 후퇴를 서둘렀다. 부상자
들은 노새에 태웠다. 체는 노새 두 마리를 몰고 뒤따라갔다. 정부군의 추격
도 만만치 않았다. 숲 속으로 들어간 체는 추적해오는 군인들을 따돌리기
위해 계곡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말 두 마리를 풀어주고 말과 다
른 방향으로 도주했다.
체와 대원들은 정찰기에 발각되지 않도록 나무가 많은 높은 산으로 계속
가다가 휴식을 취하며 가까운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니세토가 정찰을
나가겠다고 자원했다. 아니세토는 대원들이 올라온 반대쪽으로 내려갔다.
정찰에서 돌아온 아니세투는 대원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집이 몇 채 있는데, 군인들이 많다고 했다. 체는 라디오를 켰다. 방송에서
는 혁명군과 갈린도 부대 사이에 전투가 있었고 혁명군 3명이 매복에 걸려
사망했다는 보도를 했다. 코코와 미겔과 훌리오의 죽음을 확인시켜주는 슬
픈 소식이었다.
9월 28일, 체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기로 결정했다. 체는 산을 내려오
면서 이곳이 전투의 마지막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체와 대원들은 산 중턱쯤 내려와 산골짜기에 은신처를 마련했다.
은신처는 잘 위장되어 말을 타고 자나가던 농부도 눈치채지 못했다. 농부
가 지나간 후 얼마 자나지 않아 군인 40여명이 대원들 바로 앞을 지나갔지
만 그들도 눈치채지 못했다. 대원들은 초긴장 상태였다. 체는 어떤 결단도
내릴 수 없어 대원들에게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매복해 있으라고 지시했
다. 대원들은 개미가 목덜미를 타고 등줄기로 내려가도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없을 만큼 숨죽이고 있었다. 언제 누가 지나갈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
문이다.
그런데 매복한 지 두 시간쯤 지나 70여명쯤 되는 군인들이 대원들이 매
복해있는 바로 앞에 나타났다. 체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정부군과 혁명군
의 거리는 5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다. 여기서 전투가 시작된다면 꼼짝없이
전멸할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던 군인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총 한 발을
쏘았다. 다행히 총부리는 매복해있는 반대쪽을 향하고 있었다. 체와 대원들
이 숨을 죽인 체 군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때, 장교가 무전연락을
하는 것이 보였다. 무전연락을 마친 장교는 이동 명령을 내렸다.
밤이 되자 이슬비가 내렸다. 체는 길에서 조금 더 떨어진 계곡 안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리고 군인들이 머물고 있던 집을 정찰하고 오도록 지
시를 내렸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대원들은 군인들이 머물렀던 집에 불
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를 했다. 아니세토는 낮동안에 지나가던 군인들
이 모두 베낭을 메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후퇴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
른 대원들도 무전연락을 받은 장교의 흡족해하는 웃음으로 보아 후퇴한 것
이 맞을 거라는 의견이었다. 체는 대원들에게 긴장을 풀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고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 방송은 훌리오와 코코의 신원을 확인했고,
미겔을 아니세토라고 말하면서 아니세토의 쿠바에서의 직위가 무엇이었는
지를 보도했다.
이슬비가 내리고 긴장된 밤이 지났다. 체는 이른 아침부터 라디오를 켰
다. 칠레 라디오 방송이었다. 방송에서는 고위 장성들과 군인들이 밀림 속
에 숨어있는 체를 포위했다는 방송을 했다. 체는 이제 방송을 어느 정도
믿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였다.
체는 대원들을 좀더 안전하며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장소로 이끌
어야 했다. 비까지 맞고 저녁을 굶은 대원들은 패잔병들처럼 힘이 없었다.
새벽녘에 안전한 장소를 물색하고 돌아온 정찰대원을 따라 이동을 시작했
다. 이동을 시작한 지 몇 시간만에 도착한 곳은 울창하지는 않지만 군인들
의 눈에 띄지 않을 숲이 있는 장소였다. 퇴각로도 보장되어 있고, 군인들의
움직임을 주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물이 없었다. 정찰을
했던 대원 말로는 아래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옹달샘이 있는데 물맛
이 쓰다고 했다. 그러나 쓰고 달고 맛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체는 옹달
샘에 가서 물을 구해 오겠다는 대원들을 내려보냈다.
10월 3일, 체는 다시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바리엔테스 대통
령의 말을 믿고 자수한 혁명군 두 사람에 대한 뉴스를 내보내겠다고 했다.
잠시후 안토니오 도밍게스 프로레스(레온)와 캄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들은 자신들이 혁명군이었음을 인정하고, 혁명군에 대한 대통령의 약속을
신뢰하기 때문에 전향했다고 뻔뻔스럽게 이야기했다. 정말 영웅적인 게릴
라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고 체는 생각했다.
"비열한 놈!"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던 아니세토가 입술을 깨물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다른 대원들도 그들을 욕했다. 그때 물을 구하러 갔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오자 식용유를 넣은 옥수수튀김을 만들고, 마테차를 끓였다. 물
맛을 쓰지만 목이 말랐던 대원들은 구해 온 물을 반쯤 먹어버렸다. 체는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전투에서 상처를 입은 대원들의 상처를 돌봤다. 그
들의 상처는 며칠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고름이 생기기도 했다. 다행히
아직 치료약 주사약이 남아있어 부상자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었다.
정찰대원들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정찰을 나갔다가 돌아왔다. 그들은 현재
의 위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이 하나 있고, 집에서 떨어진 곳에는 물이
있는 개천이 있다고 했다. 특히 개천 뒤쪽으로는 숲이 있어 후퇴하는데 유
리하다는 것이었다. 체는 정찰대원이 보고한 장소로 이동을 서둘렀다. 정찰
대원의 보고만큼이나 괜찮은 장소였다. 대원들은 개울 숲 쪽에 진지를 구
축하고 매복에 들어갔다. 10월 6일의 일이었다.
38
10월 7일 점심 무렵이었다. 검은머리를 양갈래로 땋아 내리고 여러 겹의
치마를 껴입은 인디오 전통복장을 한 여인이 염소를 몰고 개울가로 들어섰
다. 개울 건너편에 진지를 마련한 체와 대원들은 잠시나마 평온한 시간을
갖고 있었다. 개울쪽을 살피고 있던 엘 치노가 체에게 다가왔다.
"체! 인디오 여인 한 사람이 염소를 몰고 개울로 들어섰습니다."
"어서 가서 데려와."
체의 명령에 인티가 재빠른 행동으로 인디오 여인에게 다가갔다. 염소를
데리고 개울을 건너오려던 인디오 여인은 인티의 출현에 놀라 도망치려고
했다.
"놀라지 마시오. 해치지 않을테니 잠깐 갑시다."
인디오 여인은 놀라는 바람에 발을 헛디뎌 개울물에 주저앉고 말았다.
인티는 시간을 끌 수 없어 인디오 여인을 번쩍 들어 어깨에 둘러메었다.
여인은 덫에 걸린 동물처럼 신음소리를 내며 두 다리를 내저었다. 여러 겹
의 치마만 입고 아무것도 입지 않은 여인의 하체는 대원들쪽을 향하고 있
어, 대원들은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듯 바라보며 킬킬댔다. 인티는 진지 안
에 들어와 인디오 여인을 내려놓았다. 인티의 어깨에서 발버둥치던 여인은
혁명군이 모여있는 모습을 보고 주눅이 들어 눈만 끔벅였다. 체가 여인에
게 다가갔다.
"아주머니, 뭘 좀 여쭈어 볼 것이 있어서 모셔온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거짓없이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뭐든지 아는 것은 말씀드리지요."
여인은 물에 빠져서 그런지 말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우리가 누군지 아십니까?"
인디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군이 어디 있는지 듣거나 본 일이 있습니까?"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근처에서 정부군들을 보거나 정부군이 있다는 이야기를 정말 못 들
었다는 말입니까?"
체가 다그치듯 묻자 여인은 겁을 내며 대답했다.
"거짓이 아닙니다. 정부군들은 본 적도 없고, 근처에 있다는 얘기도 못
들었습니다. 믿어주세요."
"그럼, 이게라에는 언제 가 보았습니까?"
"거기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인디오 여인에게서 정부군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생각했던 체는 실망
한 표정이었다.
여인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체는 인내를 가지고 더 물어보기로 했
다. 밤에 이동해 왔기 때문에 현재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도 파악하지 못하
는 실정이었다.
"그렇다면 여기는 어디쯤입니까?"
"이게라에서 1레구아(45km 정도) 떨어진 거리이고, 야게이에서 1레구아
떨어진 곳입니다."
"여기서 푸카라까지는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2레구나 떨어진 거리에 있습니다."
체는 인디오 여인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정부군들이 이곳
에 없다고 믿기로 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의심을 두고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주머니! 우리 대원들이 아주머니 집까지 함께 갈 생각인데 아무 일
없겠습니까?"
"우리 집에는 왜 가나요?"
"아주머니께서 거짓말을 하시면 안 되니까요. 아주머니께서 거짓말을 하
시지 않았다면 두려워하실 게 없지 않겠습니까?"
"저를 의심하시는군요. 제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같이 가지
요."
체는 근처의 동향도 살피고 인디오 여인의 말을 확인하려고 인티, 아니
세노, 파브르토를 인디오 여인과 동행시키기로 결정했다. 인티와 일행은 염
소를 몰고 인디오 여인의 뒤쪽에 서서 개울을 따라 10여미터 올라갔다. 실
개천의 물을 끌어 관개수로를 만들어 물을 받는 감자밭이 나타났다. 인티
는 개울가 주변을 살폈다. 진지가 구축되어 있는 개울가 주변에는 다행히
인가가 없었다.
"아주머니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 감자밭 끝에 있어요."
인디오 여인이 가리키는 감자밭 끝은 개울을 5미터쯤 더 올라가 ㄱ자로
꺾어진 20여미터 거리에 있는 외딴집이었다. 염소를 끌고 가던 파블리토가
인디오 여인에게 물었다.
"가족은 몇이나 됩니까?"
"딸 둘하고 저까지 세 식구랍니다."
"남편은 없습니까?"
"없어요."
"저도 딸이 하나 있답니다."
파블리토는 걷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두고 온 딸과 아내 생각
을 했다. 인티와 아니세토는 주변을 경계하며 따라갔다. 일행이 여인의 집
에 도착할때까지 주변이 감자밭에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여인의
집은 흙벽돌로 벽을 쌓고, 갈대를 엮어 지붕을 얹은 오두막이었다. 갈대 지
붕을 오랫동안 방치해서 폐가처럼 보였다.
인디오 여인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자 걷지 못하는 장애인 딸 한명과
난쟁이인 듯한 딸이 인티 일행을 보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인디오 여인이
아이들에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파블리토는 그녀의 딸들을 향해 싱긋 미소를 보냈다.
인티는 인디오 여인과 딸들을 모여 앉도록 한 다음 누구에게도 인티 일
행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특히 인디오 여인에게는 대원들
의 위치나 대원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아주머니, 당신과 당신 딸들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
은 겁니다. 정부군뿐만이 아니라 어떤 누구에게도 말하면 아주머니는 물론
이고, 딸 들과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잘 알아들으셨겠지요."
인티는 인디오 여인에게 50페소를 건네주었다.
"왜 돈을 주시는 거예요?"
"아주머니께서 생활이 어려우신 것 같아서요."
인디오 여인은 처음에는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지만, 인티가 미소 띤 표
정을 보이자 수줍어하며 돈을 받았다. 여인은 인티와 대원들에게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개울가 진지로 돌아온 인티와
대원들은 체에게 인디오 여인 집에 다녀온 일을 보고했다. 조용히 듣고 앉
아있던 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여인이 약속을 지킬 희망은 없다."
"그럼 어떻게 하지요."
인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우리가 흔적을 너무 많이 남겼다. 지금 몇 시지?"
"오후 5시입니다."
"빨리 식사 준비를 하도록 하고 물통에도 물을 채워 놓도록 한다."
체의 지시가 떨어지자 대원들은 물통에 물을 채우고 콩죽을 끓였다. 식
사준비와 식사를 마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대원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자 체는 다시 지시를 내렸다.
"이동준비해."
구축했던 진지에 흔적을 없애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흔적을 없애는 작업
은 시간이 좀 걸렸다.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올랐다.
체와 대원들은 진지의 흔적을 없앤 후 개울을 끼고 숲을 따라 이동했다.
정부군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친 대원들의 발걸음은 조심
스러웠다. 체와 대원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긴장한 채 어두운 숲속을 걸어
가야 하기 때문에 짐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맨 앞에서 대원들을 이끌던 체가 힘들어하는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행군을 잠시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 들여다본 시계는 벌써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체가 볼륨을 낮추어 라디오를 켰다.
"우리 정부군은 게릴라들의 은신처를 파악하고 뒤쫓고 있습니다. 게릴라
들은 아세로 강과 오로 강 사이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게릴라 37
명이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길을 차단했습니다. 현재 세라노에는 정부군 250여명이 게릴라
들의 도주를 막고 있습니다."
라디오를 듣고있던 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이상한 보도내용이야. 예감이 좋지 않아."
체는 그 동안 함께 고난을 겪으며 혁명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친 대
원들의 얼굴 하나 하나를 떠올렸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희망은 남겨 두어
야 했다.
"다시 이동한다."
체의 지시가 떨어지자 선발대가 10분쯤 앞서 출발했다. 대원들의 수가
줄었지만 선발대와 본대, 후방부대는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쿠바에서 보내오는 방송이 끊긴지 며칠이 지났다. 또 라파스와 연결도
끊겨 고립된 지도 여러 날이었다. 그러나 체는 대원들에게 그것을 내색하
지 않았다. 이동 중에 체 가까이 다가온 인티가 물었다.
"쿠바에서 아무 연락도 없지요? 이번 혁명을 포기한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 잡음 때문에 들을 수 가 없을 뿐이다. 전파방해를 하고 있
는 것 같은데 곧 연락이 있을 것이다. 힘을 내자."
체는 인티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지만, 인티의 말처럼 쿠바에서
는 이미 포기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볼리비아 안에서 혁명군을 지
원하던 정당도, 쿠바 정부도 혁명군을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게 명확
했다. 체는 아주 외로운 투쟁이 남아있을 뿐임을 느끼고 묵묵히 걸어갔다.
게릴라 투쟁의 11개월을 되돌아보며 상념에 젖어있던 체는 야간행군에 더
딘 엘 치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야영을 명령했다. 새벽 2시의 일이었다.
10월 8일 아침, 눈을 뜬 대원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산마루마다 부대가
배치된 것을 알았다. 전투는 오후 1시 30분부터 시작되었다. 소나기 퍼붓듯
쏟아지는 총탄세례에 게릴라 부대의 진영은 완전히 무너지고 대원들은 뿔
뿔이 흩어졌다. 체는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퇴로쪽에도 정부군이 막고있었
다. 체는 산 속으로 계속 쫓겨 들어가면서도 응사했다. 그때였다. 정부군이
쏜 총탄 하나가 체의 다리를 뚫고 빠르게 지나갔다. 격렬한 통증이 뒤따랐
을 때, 체는 이제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간힘을 다해 다리를
움직여 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체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
올렸다. 차가운 알레스카의 설원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주인공이 나무
에 기대어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던 그 죽음을.
산 전체를 포위하고 체를 향해 개미떼처럼 전진해오던 정부군은 체의
M2 소총을 망가뜨려 버렸다. 체는 소총을 버리고 권총을 빼들었다. 그리고
정부군을 향해 한알 한알 신중하게 사격을 가했다. 그러다가 엄폐물로 삼
았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 순간 그의 평생을 따라다니던 천식이
맹렬한 기침을 토해냈다. 체는 권총의 실탄을 확인했지만, 권총에는 단 하
나의 총알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정부군이 쏘는 총알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가족들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큰딸 일디타의 수정처럼 맑은 눈이, 그리고 칠흑같던 호
세피나의 미소 띤 눈빛이. 눈을 감은 체가 가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목에
차가운 금속이 닿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체는 눈을 뜨지도 반항을 하지도
않았다.
"누구냐?"
볼리비아군 8사단 B 특공대의 지휘관 가리 프라도 살몬 중위가 물었다.
"나는 체 게바라다."
군인들은 체에게서 총알이 없는 권총과 부러진 소총을 빼앗고, 등에 메
고 있던 배낭도 벗겼다. 그리고 온몸을 수색했다.
"무장 해제됐습니다."
수색을 하던 군인이 무장 해제 보고를 하자 중위는 또 다른 지시를 내렸
다.
"배낭을 조사해봐."
군인은 벗겨낸 배낭에서 물건들을 꺼내놓았다. 책과 노트, 담배, 펜, 라디
오, 천식약, 그리고 컵 하나가 전부였다.
"다른 것은 없어?"
중위가 체와 그의 물건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중위는 책을 들추어보고, 노트를 뒤적였다.
"일기잖아? 어제까지 일기를 쓰다니..."
중위는 더 이상 나올 게 없다고 여겼는지 체를 결박하라고 명령했다. 그
순간까지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감긴 눈에 순간 환한 등꽃처럼 서
른 아홉의 인생이 스치고 지나갔다. 축구공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아버지
와 어린 체가 잔디정원위에서 놀고있는 모습, 정원의 아이가보로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는 소년 체의 모습, 넓은 초원을 가로질러 자전
거페달을 밟으며 달리는 청년의 모습, 그리고 혁명을 위해 신념을 위해 포
효하는 장년의 모습이.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 은 그렇게 갔다. 그래서 그의 서른 아홉
인생은 신화가 되었고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이 항상 그렇게
되고자 했던 것처럼 제3세계 민중의 벗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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