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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경자 사랑과 상처 1

by Casey,Riley 2023.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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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상처1권
 이경자 

    작가의 말
  어느 날 나는  내가 성장이 멈춘 걸 깨달았다. 자그마치  나이가 마흔여덟이나 
되어서였다.
  성장이 멈춘 상태의 증세는 비참했다. 우선 무엇에 갇힌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앞을 향해 걸어왔는데  문득 앞이 막혀버린 것이었다. 불현듯 두려워서  뒤를 돌
아보았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저 길은 놀랍게도 길이 아니었다. 앞이 
막힌 걸  알게 되었을 때의 두려움보다  더 끔찍한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래서 
처음엔 죽어버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죽지  못했다. 그리고 살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막힌 길을 뚫고 
잘못 걸어온 길의 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먼저 내가 살아온 인생을 내 손으로 부수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가 먼지가 된 벌판에 섰을 때 나는 내 성장을 가로막은 것의 정체를 
찾아냈다. 그것은 너무도  단단해서 금강석 같기도 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불가
사리 같기도 하였다.  금강석이나 불가사리 같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존과 여
비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내 외부에서 보았던 벽이나 잘못  걸어온 길이라
고 여겼던 건 놀랍게도 착각이었다. 남존여비는 내  생명 속에 뒤섞여 있어서 쌀
의 뉘처럼 골라내지거나 암처럼 도려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무서운 사실도 깨
달았다.

  남존여비, 그  금강석 혹은 불가사리는 오랜  세월 동안 그 시대에  맞는 옷을 
갈아입었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노래를 부르는  능력을 보여왔다. 그것은 전쟁과 
혁명의 시대에도 그랬고 산업 사회에서도 그랬다.

  소설 `사랑과 상처`는 우리들 남자와 여자들 생명에  뒤섞여 유구한 세월을 진
화하면서 견뎌온 남존여비에 대한 실상을 형상화한  것이다. 주인공 준태는 화전
민의 아들이지만 어느 왕손의 상속자나 다름없이 길러졌고 정옥은 딸이었으므로 
그 출생의  순간부터 비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극단적인 원체험을  가진 두 
주인공의 비극적인 혼인이 두 사람의 삶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지, 그리고 사랑
이 어떤 모습으로 두 사람을 얽어매는지 그리려고 했다.

  소설가인 나는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것은 내  나이가 내게 
준 귀한 선물이었다. 인생살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관계살이에 다름 
아니며 그것은 결국 `사랑과  상처`라는 형태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은 `사랑과 상처`가 우리들의 삶에 `자유2를 확장시킬 수 있게 되
는 것이다. 부디 그래만 준다면, 더 무엇을 기대하랴.

  `사랑과 상처`를 쓰는  동안 많은 분들의 깊은  애정과 격려를 받았다. 발문을 
써주신 박완서 선생님, 제자를 써주신 신영복 선생님껜  고마움을 말로 다 할 수
가 없다. 선배와 동료, 후배와  피붙이들은 물론 내가 자라난 양양 땅 고향 까마
귀들의 격려와 기대는  눈물이 날 지경이다. 육이오 동란 이후의  최대 위기라는 
이 을씨년스러운 시절에 책을  내야 하는 실천문학사기라는 이 을씨년스러운 시
절에 책을 내야 하는 실천문학사에 감사드린다.  독자 여러분께도 사랑의 인사를 
드린다.

  수유리 집필실에서 이 경자

    1
    어머니와 딸

  “난 죄가 없어! 이만큼 살었으문 나두 성공 못했다구 할 수 없구!”
  내가 낮게 소리쳤다. 귀  뒤로 흐르는 진땀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머리는 벌써
부터 무겁고 뜨거웠다. 큰딸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기어이 내 입에서 제 아
버지가 어떻게 집을 나가게  되었는지, 악착같이 물어내고 나서부터 우는 게, 끝
이 없었다. 지겨웠다. 내일 오전 비행기로 떠날 년이 일흔도 넘은 어미를 새벽이 
되도록 잡아 앉혀놓고 결국 이 꼴을 보다니,  남편덕 못본 년은 자식덕도 없다는 
옛말은 하나 그르지 않다.
  “니가 앞으루 다시  아부지 말을 내 앞에서 끄내문 나,  다신 널 안 봐! 약속 
지케라!”
  내가 말했다. 딸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이제 자자.  그만했으문 됐다! 그리구 아부진  이제 그만 생각해!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아니너. 생각한다구  무슨 소용이 있어. 죽은 사람을 너머너머 생각
하는 건 니 신상에도 안 좋워!”
  내가 말했다. 딸은 탁자  끝에 놓인 티슈를 몇 번이나 헛손질  끝에 뽑아서 코
를 풀었다.
  “죄송해요 엄마.”
  그 애가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부어 보이는 눈이 붉었다. 나를 제 아버지 죽
인 죄인으로 여기는 거 같아 화가 끓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딸이 안쓰러웠다.
  “죄송할 건 뭐이 있너. 낼 떠날 니가 피곤할 게 걱정이래서 그렇지.”
  “엄마, 그렇지만요. 저는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요. 정말 외로우셨어요. 자식들
이 그걸 아무도 몰랐어요.”
  딸이 말하면서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느 아부지가 뭐이 그렇게  불쌍하다구 그러너? 그 사람 절대루 불쌍하지 않
어! 사람이 어떻게 그보다 더  자기 맘대루 살겠너 니두 생각해 봐라. 사람이 혼
저 사는 세상두 아닌데 부모형재 처자식 두구두  자기 맘대루 살었으문 됐어. 그
기 닌 뭐이 그렇게  불쌍하너? 자기가 쬐끔이래두 자식을 생각했다문 그렇게 갔
겠어? 니두 자식을 키우니 잘 알 거다.  자식 가진 부모는 절대루 함부로 죽지두 
못하는 거... 나는 자기한테 그런 구박 다  받구두 참았는데 그 하찮은 일루 처자
식 가슴에 못을 박구 가너? 그렇게 가문 팬해! 나두 알어! 그렇지만 인생을 어떻
게 나 하나 팬하게만 사너? 인간으로 태여선 그렇게 살문 못 써!”
  내가 말했다. 딸의 어깨가 파도치듯 들먹였다. 아무렴. 넌 출가외인 딸이지. 아
들은 나를 이렇게 쥐 몰듯 하진 않더라. 나는 딸을 바라보며 속으로 말했다.
  “... 일흔이 딱 되니까 내가 어떻게 일흔까지 살었너, 내가 증말루 살았너? 이
런 생각이 들더라. 난 이제 훨훨 날아갈  거다. 누구한테두 걸리는 기 없으니. 한
평생을 이 속 적 속  안 쌕인 속 없이 다 쌕였으니 앞으룬 밝은  세월만 남었다!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말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집안은 고요하다 
못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방금 일어난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다. 벽에 붙은 뻐꾸기  시계가 뻐꾸기 
울음소리를 냈다. 몇 번이나 울었는지 잘  듣지 못했다. 시계를 쳐다봤다. 시계바
늘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 니는 울어라. 울 수 있는 건 아직 참을 만한 거니.”
  나는 어두운 천장을 쳐다보며 그 애가 듣거나 말거나 중얼거렸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나더니 집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서  사라졌다. 가슴에 
멍이 드는 게 느껴졌다. 아주 날카롭고 불길하게 들리는 소리.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나는 저 소리 때문에 한동안 밤잠을 설쳤었다. 구급차라고 아이들은 말해 줬
지만 내겐 급히 누가 죽어나가는 것으로만 들렸다.
  이제 바늘구멍만큼 남은 내 목숨. 좁쌀보다 더 적게 남은 인생. 이떡하면 가슴 
아프지 않게 살까.
  “엄마, 이제 자요”
  윤이가 말했다. 젖은 눈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고맙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침대를 비우고  바닥에 담요를 깔자 그  애도 곁에 
와 누웠다. 드러눕자마자 벽시계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울렸다. 네 번을 그렇게 
했다. 한두 시간 눈 붙이고 일어나 아침밥을 해야 할 것이다. 며느리는 언제부턴
가 출근 준비만 하고  아침은 내게 맡겼다. 딸들은 이 나이  되도록 부엌일을 하
는 나를 제 올케 탓으로 돌려 미워하지만 나는 내 손으로 만든 더운밥을 아들에
게 먹여야 맘이 놓였다.
  다음에 태어날 땐 꼭 남자로 태어나야지. 열심히 일하고 보란 듯이 대접받게.
  머리가 어지러운데 잠은  오지 않고 엉뚱한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이러면 안 
되지. 잠을 자자.
  나는 엉뚱한 상상을 하는  나를 꾸짖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오래도록 잊고 산 
내 인생이 한꺼번에 미어지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1932년. 그 해에 나는 일곱 살이었다. 그  한 해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 나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오래도록  침묵에 사로잡히고 결국은 아무도 모르게 흐
느껴 울어야 한다.  마치 오래오래 묵었으되, 아물지 못하는 깊은  상처 같은 것. 
사람에겐 그런 것이 있다.
  그 해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쉬지 않고 일어났다. 물론 가장  끔찍한 것은 오
빠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1932년 한 해는 정월부터 특별한 일들로 바빴다.  그때 열아홉 살이 된 오빠가 
정월에 혼인을 했다. 나의 올케가 될 오빠의 색시는 간성 처녀였다. 양양 사람들
은 간성이나 고성 쪽과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오랜 내력이 있었지만 왜 집에
서 그런 금기를 무시했었는지 모르겠다. 간성  쪽에서 양양으로 오자면 물치개울 
도문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거기 `쇠귀신`이 있어 건너지 못하기  때문에 혼인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오빠는 간성의 색시집에 가서 혼인을  하고 처가
에서 첫날 밤을 치렀다. 그곳 청년이나 젊은 패들이 신랑을 다룬다고, 공중에 매
달아놓고 발바닥을 때리는  놀이를 했을지 모른다. 그러다가  신방으로 들어갔을 
거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신랑을 앞질
러 어떤 젊은 아낙네가 방으로 들어와 신랑,  신부의 이부자리 밑으로 손을 넣어
보고 나가더란다. 그 여자는 머리에 흰 댕기를 드린 상주더라고.
  오빠는 뭔가 섬뜩하고  꺼림칙했는데, 그런 느낌은 신부의 집안에서도 느껴서, 
그 방정맞고  해괴한 짖을 한 아낙네를  붙잡아 혼쭐을 냈다고...  오빠의 혼인과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연결지으려는 얘기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오빠가 탄 가마
의 채가 부러졌다는  얘기도 있어, 우리는 오래도록 그 말끝에는  오싹함을 느끼
곤 했다.
  그러나 오빠는 오랜 금기인 쇠귀신의 부정도 내리누를 만큼 간성 색시를 맘에 
들어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오빠는 죽기 전에도 여러 번  간성 색시를 만나
러 갔다왔고, 그 여자가  보고 싶을 때면 안산 두리봉 앞  동두불에 나가 오래도
록 피리를 불곤 했는데, 달  밝은 밤이면 그 소리가 동네, 인군골 바깥말 봉전말 
충성골 안말로 희한하게  퍼져나가서 모두 귀를 기울이게 했다. 오빠의  서당 친
구나 그때 함께 어울렸던  또래들 사이에선 오빠의 발병이 `그리움` 때문이었고, 
결국은 상사병으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그래선 시신이 새파랬다고, 그렇게 말하
곤 하였다.
  간성 색시가 우리집으로 일찍 오지 못했던  건 우렛날이 받아지지 않아서였다. 
거기다 그때까지 동두불에 있던  우리집은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안말 큰집으로 
이사를 갈 작정이었다. 큰닙  옆에 집터도 났고, 그걸 때맞추어 외가에서 사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동두불에서 안말 큰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 집터가 났기 때문
만은 아니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가만히 살펴보면  우연찮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
나며 신기하게 아귀를 맞추는 게 보통이다. 집을 옮기던 그때도 그랬다. 우선 큰
댁의 큰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살림을 할 여자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때  일곱 살
이었던 내 밑으로 아이를 둘이나  더 낳았지만 둘 다 죽고 그때 다시 아이를 밴 
때였는데, 아이만 가지면 어머니는 먹지를 못해서 대꼬챙이처럼 말랐다. 그런 몸
으로 어머니는 안말에 가서 큰집  살림을 살고 동두불에 나와 우리집 살림을 사
느라 눈코  뜰 새없이 바빴다. 그래서  큰아버지는 우리가 큰집 곁에  집을 짓고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거디다 동두불의 집터는  조산집터였는데 그 집에선 딸을 
오빠에게 주려고 여러 번 말을 넣었으나 오빠가  싫다고 해서 혼사가 깨진 터라, 
그 터를 계속 쓰고 사는  게 불편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밖에 없는 외며느리
를 새 집으로 맞아들이고 싶은, 그런 욕망도 있었을 것이다.
  큰집 어머니, 우리가 뱀복이 큰어머니라고 불렀던  그분의 얘기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까지 그 마을 노인들에게 전설처럼 오르내렸다.
  나는 큰어머니를 본 적이 없지만 큰언니나  작은언니는 보았다고 했다. 나보다 
세살 더 먹은 작은언니  정섭은 그때 열 살, 다섯 살 더 먹은  큰언니 정화는 열
두 살이었고, 큰어머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마 세 살 때라고 했던가? 그때 
갑자기 돌아가셔서 내겐 아무런 기억도 없다. 그러나  나는 수도 없이 이런 얘길 
들었다. “서당집은 뱀복이가 죽고 운이 빠지기 시작했어...”

  뱀복이, 나의 큰어머니.
  조금 모자라는 여자였다고 한다.  어려운 사람 보면 아까운 것 모르고 퍼주고, 
눈대중이 야물지 못해 다섯  사람 밥을 해야 할 때 열 사람  밥을 하고... 그래서 
손아래 동서인 어머니가  늘 고방을 관리했다. 그런데 그 큰어머니가  시집을 오
고부터 집안에 크고 작은 뱀이며 구렁이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집 안팎 여기저기
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 특히 일 년  농사에선 모심기를 중히 여기는데, 모심기 
밥을 할  땐 꼭 저녁밥까지 었다.  그리곤 먼저 커다란 함지에  저녁밥부터 퍼서 
김이 설렁설렁 오르는 밥을  고방의 쌀 퍼낸 독 위에 올려놓곤  하였다. 그걸 저
녁에 식구들이 먹으면 좋다고 해서.
  어머니가 저녁에 고방으로 들어가보면  커다란 구렁이가 밥 함지 위에 또아리
를 틀고 앉아 있었다.  해마다 그랬다. 어머니가 훠이훠이 손짓을 하면 구렁이가 
선량하게 몸을 풀며 스르르 내려가 모습을  감추는데, 밥함지에는 구렁이가 또아
리 틀고  앉았던 자리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식구들은 그걸 걷어  내지 않고 
그냥 먹었다.
  그런 것이  동네에 소문이 나고,  큰어머니가 시집온 뒤로는  해마다 논밭이나 
가산을 사게 되어  재산을 불렸다. 그러자 누군가 큰어머니를 큰  서당집 큰며느
리라고 하지 않고, `뱀복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 별명은 우리집을 기억하는 
모든 어른 아이들이 그저 “뱀복이, 뱀복이...”하게 되면서 유명해졌다.
  뱀복이 큰어머니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고 죽을 때는  마삭의 몸이었다. 
마당에서 보린가 조를  털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둥이 쳤다. 마당에  있던 큰어머
니는 그 소리에  놀라 뒤로 휘딱 넘어갔는데 더이상 일어나질  못했다. 만삭이라 
시신에, 옷만  입히고 묶지도 않고 관에는  못질도 하지 않은 채  어물버물 흙을 
덮어 묻었다. 태아가 시신에서 태어나면 다시 묘를 잘 써야 했기 때문이다.
  한두 달 지나  묻었던 관을 여니 아들을 낳아 발치에  밀어두었더라고. 그래서 
그 아이를 꺼내고 어머니와 아들의 묘를 따로 잘 썼다.
  뱀복이 큰어머니의 전설은 초상 마지막날 절정을  이룬다. 큰어머니의 관을 실
은 상여가 상두꾼들에 들려 마당을  나서자마자 집 안에서 믿기지 않는 일이 벌
어졌다. 그때, 장지로는 갈 수 없는 신분이었던 여자들은 모두 집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놀라운  일을 모두 보았다. 상여가 마당을 나가자마자  집안팎에서 스
석스석 하는 소리가  나면서 크고 작은 뱀들이 한꺼번에 기어나왔다.  그 뱀들은 
모두 머리를 집  바깥쪽으로 두고 마당을 지나 텃밭으로 들어갔는데,  한동안 텃
밭의 깻섶이며 고추섶이며  콩섶이 들썩거렸다... 어느 누구도 한꺼번에  그 많은 
뱀들을 본 적이 없었으며,  그후 큰집에서는 더 이상 뱀을 구경할  수 없게 되었
다. 그뿐만이 아니라 계속 흉년이 들거나,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정말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거디다  아내를 잃은 중년의 큰아버지는 재혼을 하지  않고 투
전판에 마음을  들여놓고 지냈다. 엎친  데 덮친다고 동네에선  물론이거니와 읍 
전체에서도 똑똑한 패에 들던 큰집 오빠들은 `이상한 조직`에 가담해서 `비밀`로 
활동한다고 했는데,  그 조직이며 비밀도  은밀하게 소문이 돌아  웬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큰집 오빠뿐이 아니라  우리 오빠도 `물이 들어` 집안이 발칵 뒤집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다섯 살 때였을 것이다. 그때 오빠는 열입곱 살
이나 되었을 텐데 아버지는  그 오빠를 발가벗겨놓고 물푸레작대기로 얼마나 때
렸었는지. 우린 다  숨죽여 울었고 어머니는 얼굴이 하얗게 되어  혼절을 거듭거
듭했다. 내 아들  죽이려거든 나부터 죽이라고 아버지한테  귀신처럼 달라붙었으
나 어림도 없었다.
  오빠는 그 해 1932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나는 그후 해방이 되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그때 오빠가 왜 매를  맞았고 큰집 오빠들의 조직과 비밀 활동이 무었
이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큰집 오빠들은 농민조합 운동을 했고, 해방이 되었을 
때 그들은 공산당원이 되었다. 양양은 삼팔선 북쪽이었으며, 모두들 공산 치하에
서 한 자리씩을 해먹다가 결국 휴전선 이북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큰집 오빠들.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모르 지도 마흔네  해가 지났다. 그
들을 못 본 건 오십 년도  넘었다. 나는 해방 한 해 전에 시집을 갔으니까. 동네
에선 바보 뱀복이 배에서 나온 자식들이 어떻게 저리 똑똑한지 모르겠다고들 입 
가진 사람들은 다 말했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 그건  우리 오빠였다. 우리 식구들이 죽음으로 오빠를 잃
었을 때, 사람들은 모두 `아까운 사람 놓쳤다`고 슬퍼했다.
  사람들... 그렇다. 우리  세 자매와 어머니, 아버지를 뺀  나머지 사람들에겐 오
빠의 죽음이 `슬픔`이었지만 우리에겐 `환난`이었다.
  내가 이 나이 되도록, 아직 내 인생에 대해 너그러워지지  못하는 것, `이젠 괜
찮다`고, 내 생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끌어안지 못하는 것, 그런 품을  가지지 못
하는 것... 그게 다 `환난` 때문이며 그 환난의 상처가 도무지 세월이나 생사로도 
낫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해 정이월, 바람님의 달이다. 바람님을 잘 모셔야 한 해 농사도 잘되고 어촌
에서 풍랑을 피하게 되며 집집에선  딸과 며느리들이 바람 타지 않고 곱게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장독대 있는 뒤란에 붉은 팥 넣은  밥과 왁저지 같은 
것을 해놓고 바람님이  응감하시게 하였다. 형편이 나은 집은 삼색  나물에 북어
를 쪄놓기도 했다.
  그 이월 어느 날이었다. 아직 우리집은 이사하기로  작정만 한 채 동두불에 살
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난, 땅거미가  지던 무렵이었다. 오빠는 늘 그랬듯이 서당으로 갔
고 아버지는 사랑에서 대버전을 절거나 소쿠리 같은  걸 절었을 것이다. 하도 행
동이 재빨라서  `고약쥐`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아, 약간의 
밭뙈기와 천수답 한 때미 가지고 세간 나와서도 우리를 배곯리지 않고 키웠다.
  어머니는 언니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어머니는  우리 딸들을 곱게  대한 적이 
거의 없었다. 늘 욕을  달았다. 단 하루도 푹, 피로가 풀리게 잠 한  번 잘 수 없
이 살아야  하는 고달픈 생활 때문에,  그 속풀이를 다 우리  딸들에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개가 강아지를 낳은 집에 개밥을 두 번 쑤어다주면 새끼 한 마리를 받
는 게 풍습이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큰언니한테  개죽을 쒀서 큰집에 가져다주라
고 했다. 열두  살 된 큰어니 정화 혼자 들고  갈 수 있는 자배기였다. 그런데도 
작은언니가 따라가려고 했고,  큰언니는 따라붙는 작은언니를 발길로  차면서 떼
어놓으려고 했다.  언제나 두 사람은 이랬다.  그러다가 어머니에게 그런 모습을 
들키면 욕을 먹거나 매를 맞는 건 큰언니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우리 딸들 모두
가 그랬지만 큰언니는 더더욱 `학대` 받았다. 큰언니에겐 세상에 있는 욕이 모자
랐고, 시간이  없어 매질을 못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나중에 시집가 과부가  된 
큰언니의 집에서 임종을 했다.)
  동두불에서 큰집이 잇는 안말로 가자면 바깥말로 들어가는 길을 가로 건너 인
군골 어귀를 지나야  했다. 논과 밭 사이로  난 길은 좁았다. 여름이면 길섶에서 
산딸기, 오디를 따먹고, 길을 가로막고 있는 뱀을 작대기로 겁을 줘서 쫓으며 걷
곤 하였다.
  언니들이 안말의 우물가를 지나 큰집으로 다가갔을  때, 작은언니가 먼저 건넛
집 아저씨가 큰집 마당가의  대추나무 밑에 엎드려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수
상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저씨는 자기를 지켜보는 눈길을 느끼자마자 허리를 
피고 일어나서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발끝으로 대추나무 밑둥의 흙을 
쓱쓱 문대고 헛기침을  하며 위쪽으로 갔다. 아저씨는 빈 싸리소쿠리가  얹힌 지
게를 지고 있었다.
  “성아.”
  눈치 빠르고 꾀 많은 작은언니가 큰언니에게  눈치를 줬다. 큰언니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작은언니는 호기심 때문에 대추나무  밑으로 갔다. 아직 응달짝의 
흙에는 얼음이 박혀  잇을 때였으나 양지 바른 그곳은 흙이  푸실푸실했다. 작은
언니는 대추나무 밑둥  한쪽의 흙이 파헤쳐졌다가 다시 덮힌 자국을,  왠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서 맨손으로 다시 흙을 헤쳐보았다. 이때 건넛집 아저씨는 
안말 둔덕 쪽에서 이렇게 하는 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구 성아야!”
  흙을 파헤치던  작은언니가 비명을 지르며  큰언니를 불렀다. 언니는  그 사이 
개밥을 큰집 쇠마구 앞의 개집 밥그릇에 쏟아 주고 있었다.
  “성아! 큰일났다! 큰일났어!”
  작은언니가 세상 모르는 태평이 큰언니에게 달려와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왜서 이리너. 이 간나가.”
  큰언니가 작은언니의 호들갑을  나무라며 작은언니한테 끌려 대추나무 밑으로 
갔다.
  “성아! 봐라! 봤너?”
  작은언니가 큰언니 등뒤에 숨어 서서  자기가 본 그 무서운 형상을 두고 물었
다. 큰언니는  어머니한테 늘 덜퉁맞다고 욕을  먹듯이, 맘은 컸으나 우둔하기도 
했다. 그래서 겁 없이 작은언니가 무서워하는 그 형상을 집어들었다. 그 짧은 사
이,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큰언니는 손바닥만한 길이의  나무토막을 집어들고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아이
구머니! 하면서  그걸 밭 가운데로 내던졌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  그건 
사람 모양으로 깎인 나무토막인데 시체를 염하듯 짚으로 일곱 마디를 묶은 흉측
스런 허재비였던 것이다.
  언니들은 이미 어두워진  논둑길을 무슨 정신으로 걸어왔는지  몰랐다. 안말에
서 바깥말 나가는  길엔, 밤이고 낮이고 짖궂은 사내아이들이 숨어  있다가 여자
를 못살게  굴었는데 예시가들한텐, 호랑이보다 무서운  게 그 패거리였다. 특히 
인골의 `납작코`는 큰언니와 한동갑인데 그 짓궂은 건  정도를 넘어 패륜에 가까
웠다. 여자만 보면 밤이고  낮이고 그 자리에 쓰러뜨리고 깔고 탄다는 것이었다. 
그는 둘째아들인데, 형하고는 달랐다. 형은 우리 오빠와 동갑이고 서당 동무였지
만 납작코는 일자무식이었다.  그땐 어느 집에서나 큰아들만  공부시키고 둘째부
터는 머슴처럼 일만 시키는 게 보통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둘째아들이어서 달리 
배우지 못하고 세간살이도 보잘것없이 떼어받아 가난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타고난 손재주 때문에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언니들이 뛰어들어오기  무섭게 욕을 퍼대기 시작했다.  언니들을 심
부름 보낼 때부터 한눈  팔지 말고 날래 오라고 했던 것이다.  안말에 가면 친구
들이 많아서 큰언니는 어머니가 욕을  하든 때리든 개의치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같았다.
  “개가 뜯어먹다 죽어두 시원치 않을 이 간나들아...”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하는 욕은 대개 무슨무슨  간나로 시작되었는데, 간나 앞
에 붙일 수 있는 모욕적이고 절망적인 말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붙였다. 그래서 
우리는 천 가지 만 가지 간나가 다  되어봤다. 이때도 언니들은 숨을 할딱거리며 
자기네가 본 그 흉측스러운 허재비에 대해 얘기해야 했지만 어머니의 욕타령 때
문에 시간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시키는  일-눈 덮인 나뭇가리에서 나
무를 끌어다 부엌에 쌓는 일,  요강을 부셔 방에 들여놓는 일, 아침밥에 넣을 감
자를 한남박이나 깍아놓는 일들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때, 일곱 살의 나는 필경  있는지 마는지 한 존재였다. 그래서 할 일도 주어
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니들과 맞잡아 욕을 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나
는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바보`였다.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까
지 내 별명은 `벙치`였다. 벙어리를 고향에선 벙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밑이 빠져내리는, 그 볼썽사나운  탈항증세로 불쌍한 꼴을 하고 
자랐던 것이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다. 거의 한 뼘이나 빠져나온 그것 때
문에 잘 걷지도 못했고 앉지도 못하면서 늘  그게 쓰라려 울면서 지냈다고 한다. 
말을 못하니 아픈 걸 설명이나 했을까, 하루는  그런 나를 아버지가 뒤란으로 내
던졌단다. 그때,  가난한 집에서는 자식이  애물단지여서, 딸이면  제풀에 죽기를 
바라는 부모가 많았다.
  그렇게 내던져져서  까무러치듯 울던 나를  오빠가 살려냈다. 반  뼘이나 되게 
빠져나온, 미끈거리는 그것엔 흙모래가 붙어 몹시 쓰라리고 아팠다. 그러면 오빠
가 피마자 잎사귀를 뜯어다  방구석에 세우고 나를 그 앞에 서게  한 다음, 정수
리에 피마자 잎사귀를 붙이고 있다가 밑이 들어가면 재빨리 피마자 나무를 밖으
로 내가기도 하였다.
  나는 탈항 때문에 행동이 말할  수 없이 굼떠서 언니들이나 이웃 사람들이 오
래도록 `들팽이`라고 불렀다. 느리게  움직이는 달팽이 같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었다.
  다섯 살이 되던  해 어느 날이었다. 그때도 꾀바리 작은언니가  나를 모욕적으
로 `벙치` `들팽이`하면서 괴롭혔다. 그때, 아주 갑자기 내가 이랬다.
  “니가 벙치지 내가 벙치너!”
  이렇게 소리치고 나서부터 나는 말문이 트여서 차츰 말을 하기 시작했고 달팽
이 같이 느리던 동작도 조금씩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날 밤, 언니들은  식구들이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야 자기들이  저녁 어스름
녘에 본 허재비에 대해 얘기했다.
  “어머니, 큰집 밭에 도깨비가 있어!”
  작은언니 정섭이가 말했다.
  “귀신이여 어머이! 우린 무수워 죽을 뻔했어!”
  큰언니가 말했다.
  “씨끄루워! 간나들이 자빠져 자진 않구 뭔 개코 같은 소리여!”
  어머니가 이렇게 윽박질렀다.
  “큰집 밭에 뭐가 있더?”
  이때 아버지가 물었다.
  “아부지, 큰집 마당에  대추낭구 있잖어유? 그 밑에다 건넛집  아저씨가 귀신
을 묻었어유.”
  “도깨비여!”
  큰언니가 말하는데 작은언니가 끼여들었다.
  “저년어 간나들 거짓불하는 거 봐! 귀신이나 도깨비를  어떻게 땅에다 묻는다
구 지랄이여?”
  어머니가 욕했다.
  “어머이, 거짓불이 아니여. 가봐! 낭구를 이만하게  깎어서 지푸라기루 요렇게 
요렇게 묶은 걸 동상이랑 내가 다 봤어!”
  큰언니가 왼손을 펴들고 오른손으로 손목을 잡아 보이며 열심히 말했다.
  “아부지. 형아 말이 진짜래유. 못 믿겠으문  밭에 가봐유. 언니가 밭에다 내꼰
잤으니깐유.”
  작은언니가 말했다. 말에 어머니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뭐가 어쨌다구?”
  어머니는 이렇게 다시  물었다. 큰언니는 개밥 주러 갔을 때부터  허재비를 아
무렇게나 내던진 일까지 자세히 얘기했다.
  “큰년이 니가 건넛집 아저씨를 똑땍이 봤너?”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봤어유 아부지.”
  작은언니가 대답했다.
  그때, 건넛집이라면... 충분히 짚이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큰아버지가 그 집
에서 투전을 하다가  건넛집 아주머니를 때린 적이 있었다. 거기에  앙심을 품었
을지 몰랐다.
  아버지는 언니들을 앞세워, 우선  큰집 텃밭에 가서 그 허재비를 찾자고 했다. 
오빠는 꼭두새벽에나 서당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기  때문에 집에 없었다. 우리는 
관솔불을 해들고 안말로 갔다. 큰언니가 정신없이 내던진 곳, 허재비가 떨어졌을 
만한 곳을 찾아 여기저기 살폈지만 좀체 눈에 띄지 않았다.
  “저년어 간나들 말을 질레 믿구 나선 게 빙신이지...”
  성질 급한 어머니가 이렇게 궁시렁댔다. 그래도  아버지는 밭을 샅샅이 살펴보
았다. 안말 둔덕에서 언니들의 짓을 바라보던  건넛집 아저씨가 말썽을 지우려고 
치운 게 분명했다.
  그래도 대추나무 밑둥을  파헤친 흙자국 때문에 언니들은 어머니한테  `살아남
았다.`

  농사일이 제철을 맞기 전에 우리집은 안말  큰집으로 더부살이를 들어갔다. 동
두불 집을 헌 제목을 큰집  옆의 집터 한쪽에 쌓아두어서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
가 되었다. 나는 두번이나 대못에 발바닥을 찔렸는데  나 같은 곤욕을 치른 아이
들이 여럿 되었다.
  큰집살이는 우리 식구 모두에게 힘이 들었다.  어머니는 물론 우리 딸들에게도 
일이 두 배씩 늘어난  셈이었지만 떨어져 살 때보다 주눅은 더  들었다. 물론 오
빠는 사랑방 한 칸에서 큰오빠들과 함께 지냈지만 우린 도장방에서 비좁게 모여 
칼잠을 자며 살았다. 동두불에 살 땐 잘 모르던 차별이, 우리 생활 속에 더 가까
이 들어오게 된 셈이었다. 우리는  우선 큰집의 모든 일을 다 해야 했다. 언니드
은 많은 방들과, 마루를 쓸고 닦아야 했고  설거지할 것, 치울 것, 잔심부름 거리
들이 아주 많아졌다. 부엌도 커서,  하루에 한 번씩 아침 설거지 끝에 하는 부뚜
막 흙 바르기도 힘이 들었고 아궁이 불때기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큰집은 외양
간에 황소와 암소를 길러 늘  여물을 끓였고 뒤뜰엔 발방아가 있어서 절구질 말
고도 자주 방아를 찧었다.  일이라는 건 해도 해도 끝이 없어  궁둥이 붙이고 앉
을 짬이 나지 않았다. 입덧을 심하게 해서, 어머니의 곰보 얼굴은 주근깨까지 덧
끼어 볼썽사나웠고 짜증은  모두 우리에게 쏟아졌다. 어머니는 열 살도  되기 전
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그때 얼굴의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긁어 딱지 떨어진 자
국이 엄청 많았다. 그래서 동네에선 어머니를 `얼금뱅이`라고 불렀다.
  얼금뱅이 어머니는 자기 속으로  낳은 우리 딸들에겐 원수처럼 모질게 대해지
만 동네 여자들한텐 인기가 좋았다.
  우리한텐 입만 열면 욕을  하던 어머니가 다른 여자들한텐 친절하고 자상했다
니... 나는 어머니의,  여자로서, 인간으로서의 다양한 면을 이해할  여유 없이 어
머니와 헤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육친인 부모와 자식, 특히 같은 여자인 
어머니와 딸의 관계란... 정말 알 수가 없다.
  어머니가 어떻게 친절하고 자상했으며  재미있었는가는,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
이 흐른 다음에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안말엔 스무 집 가까이 살았다. 큰집이  제일 잘살았고 나머진 대부분 가
난했으며 대개가 소작농이었다.  그때 안말 산비탈에 살았던,  올해, 여든을 넘기
도록 살고  있는 포월집 아주머니는 바깥말로  나가 살고, 포월집보다 한  살 더 
먹은 저짝집 아주머니는 복골로 이사 가서 산다.  그리고 지금 안말은 사람이 살
지 않고 밭만 있는 골짜기로 바뀌어 있다.  낮은 산기슭으로 잔대숲이 남아 있어
서, 여기저기가 집터였으리라는 짐작만  간다. 물론 스무 남짓한 집들이 다 퍼다
먹어도 마를 줄  모르던 안말 어귀의 샘물도  언젠가 메워버려 지금은 웅덩이가 
된 채 봄 여름 가을 내내 물풀들만 무성히 덮여 있다.
  안말이 사라진 건, 전쟁  때문이었다. 가난한 소작농들은 큰 오빠가 은밀히 주
동했던 농민조합에 점조직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농민조합의 중심  활동은 반일
이었지만 실제로는 소작쟁의로  민심을 모았던 것이다. 지주계급은 그때, 일본인
이거나 일본 관리였고 친일파가 대부분이었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해방이 되었을 때, 그들은 소작농민을  해방시키고 토지를 나눠준 쪽으
로 쏠렸다. 더군다나 그곳이 삼팔선 이북땅이었으므로  모두들 빨갱이 사상과 그 
정치의 물을 먹은 셈이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 휴전이 되기 전에 죽거나 이북으로 올라가서 안말은 쭉정
이같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남은 집을은, 젊은이들이 도회지로 가버려서 안말 같
은 동네가 사라지는 건, 산사태에 막사리 씻겨 내려가기보다 쉬웠을 것이다.
  복골 아주머니는 우리가 서로 환갑을 넘긴  다음 어느 해, 우연히 만났을 때 `
얼금뱅이 성님`을 그리워하며  내가 알지 못했던 어머니  얘기를 많이 해주었다. 
복골 아주머니는 문짝조차 달지 못해 거적을 치고 사는 집의 딸이었는데 안말에 
남의 집 머슴을 사는 가난한 총각한테 시집을  왔다. 그 총각은 색시를 얻어다놓
고도 거의 십 년 가까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 작은 서당집 막내아제야. 얼금뱅이 성님이 우스갯소릴 여북 잘했너? 웅굴
에 가서 성님만 나타나면 그저 웃음바가지가  됐잖너. 외개골집은 오줌까지 재랬
잖너?”
  “... 우리가 그땐 어둑어둑할 때 벌써 웅굴루 갔지 뭐. 쌀남박에 보리 담아 물
동우 위에 얹어서 모여들면 말이 좀 많너? 지난밤 누구네 집 양반이 어쨌다저쨌
다... 흉두 보구 말두 내구  그랬지 뭐. 그 성님 한 가지 좋은 기,  남 흉 안 보구 
남의 말 안 하는 거. 난 기중 좋대 아제야.”
  “... 하루는 커다란 남박에  밤새 불쿤 보리쌀을 이구 와서, 웅굴 으가리에 앉
더니만 냅다 이리지  않더? 임자 손바닥을 요렁저렁 들애다보면서 `아이구야  희
한하네야, 지난밤에 응감님 좆자루를 쥐구 잤더니, 아이구 자리에 싹 났네야!` 임
자는 웃지두 않구 천옌덕시룹게 그리잖너. 그  말끝에 우리가 배꼽을 잡으민서두 
다 자기 손바닥을  패봤나비여. 그랬디만 성님 하시는  말이, `이년들 보게. 인두 
자룬 안 잡아봤어두 서방님 좆자루는 다 잡아봤잖너!` 이리지 않겠너.”
  “... 요새야 시상이 을매나 까졌너. 우리야 그 어두운 시상 살아온 거 어따 대
겠너. 경도두 안하는 어린 걸 시집이라구 사모관대해서 남의 집에 보내니... 사모
관대가 뭐여. 그것두 있는 집 얘기구 나 같은  거야 헐쯤한 우티 한두 벌 싸가지
구, 국시나 눌러  먹은 기 잔치였지 뭘. 먹는 입  하나 덜자구 이마빡에 피두 들 
마른 기 시집이  뭐너? 그리니 시집 와서 몇 해씩  있다가 그 눔의 경도를 하는 
기 보통이지 뭐. 한번은 폴집이 경도가 비치니  겁이 나서 성님한테 의논을 했잖
너. 다들 먹구  사는 기 바쁘니 새박에  웅굴에서나 만내니 거기서 얘기가 났네. 
성님, 내가  아무래두 죽을 빙이 났나비유.  폴집이 이랬다. 성님이  예간 눈치가 
빠르너. 대박 알구 폴집을  놀리키지 뭐. 얼금뱅이 성님이 남자에 대자면 대한량
이네. 못하는 소리 없구, 모르는 기 없구...  성님두 시집와서 살다가 경도를 했는
데, 밤에 자다 말구 요강에 오줌을 누니 오줌이 서커멓더라잖너. 그래두 그냥 자
리에 누웠는데 밑에서  뭐이 질질질 흐르는거 같애서  손으루 찍어 코에 대보니 
비리더래. 그래서 불에 비쳤더니  피래서, 아이구 내가 죽을 빙이 들었구나 하구 
놀래, 서방님한텐 말두 못  하구 우선 그 피나 막아볼라구 시집올  때 해온 이불 
한쪽을 트구 솜을 끄내 밑을  막으니 금방 푹 젖구, 또 뜯어 막으니 이내 젖구... 
밤새도록 잠두 못 자구 솜만  뜯어 피를 막아봐두 점점 더 나와 나중엔 광목 수
건을 찼다잖너, 그 얘기가 난 안죽두 안 잊어먹어져...”
  “... 그 사람좋던 성님이 외아들 앞세워 임자  가슴에 묻구 그 고생한 거 생각
하문 남의 일 같지가 않잖너...”

  그 해 봄까지는 오빠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우리는 하루빨리 집을 지
어 `내집살이`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간성  색시를 맞을 우렛날을 잡는 
것도 덜 초조해졌다. 새 집을 짓고, 하여튼  그 해 안에는 `새사람`을 데려오기로 
어른들이 작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  날이 잡혀도, 사실  정신이 없었다. 
농번기가 시작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농번기가  아니라도 바
쁘긴 마찬가지였다. 춘궁기, 그 보릿고개를 부황기 없이 넘길 수 있는 집이 몇이
나 되었을까. 봄이 오기 전에도 아이들은 처마  밑에서 잠든 참새를 잡아 구워먹
었고 나무에 올라가 새집을  헐어오기도 했다. 칡뿌리도 캐서 씹어먹고, 멀리 십
여 리 떨어진 바다에 나가 미역을 줍고 파도에 밀려온 황어를 잡으면 그날은 횡
재였다. 겨우내 낮에는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고, 밤이면 남자들은 새끼 꼬고 가
마니를 짜고 여자들은 길쌈을 했다.
  큰언니는 사내처럼 새를  잘 잡았다. 나무에도 잘 올라갔고 살진  개구리를 잡
아 구워서 나한테도  뒷다리를 찢어주었다. 우리 자매들 중에 큰언니는  참 불쌍
하게 자랐다. 어머니가 특히  큰언니를 붙잡고 못살게 했다. 우리 눈에도 언니가 
미운 털이 박힌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이상한  것은, 우리 세 자매가 모여, 옛날
이야길 할라치면, 큰언니는 자신이 겪은 고초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늙어서만은 아닐 텐데...
  어머니는 화가 나면 무조건 언니를 잡고  욕하고 때렸다. 작은언니는 자기에게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재빨리 큰언니 탓으로 돌려놓고 살살 어른들 비위를 
맞추고 빠져나갔다.
  큰언니가 집에 붙어  있길 싫어했던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우린 
굶주리진 않았는데도 언니는 땟거리가 없는 가난한 집 동무들과 들로 산으로 바
다로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녔다. 언 땅이 풀리기 시작하고 볕  바른 쪽에 풀이 
파릇파릇 돋기 시작하면 언니는 온종일 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언젠가 어머니는 
언니가 해온 한 자루나  되는 지누아리, 파래, 미역 같은 바닷나물을 쇠오줌통에 
집어넣은 적이 있었다. 잿물을 우려내서 도문개울로 겨울 빨래를 하러 가자는데, 
언니가 사라졌다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땐 비누가 없어 메밀 짚을  때서 잿물
을 내 광목 빨래를 했다. 잿물이 없을 땐  흐르는 물에 손으로 문질러 때를 없애
야 했으니, 빨래 한 함지를 빨고 나면 내 손이 아닌 것처럼 얼얼했다.
  삼월이 가고 사월이 갔다. 감자밭에는 흰빛이나  보랏빛이 도는 감자꽃이 피었
고 밭두렁이나 길가의 월동추는 장다리꽃을 노랗게  피워 벌, 나비들이 분주하게 
얼씬대곤 하였다. 가뭄에도 물 걱정 없는 상답들은  이미 모내기를 끝내 날이 저
물기만 하면 맹꽁이와  개구리들이 시집 장가 가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천
수답은 논바닥이 메마른 채 쩍쩍 갈라져서, 보기만 해도 배가 고팠다. 그런 논일
수록 임자는 가난뱅이 농부거나 힘없는 소작농들이었다.
  이제 겨우 새알만큼이나 자란 감자 섶을 젖히고  감자 알을 따서, 차마 껍질도 
못 까고 쓸어서,  쑥이며 질겅이, 취, 밀기울에 섞어 부황기를  면하고 사는 사람
들이 안말에도 여러 집이나 되었다.
  그맘땐, 가난뱅이는 도저히 그 가난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소작농들은 농사를 
지어 7할을  지주에게 주고 3할은 자신이  가졌는데, 그 3할에는  농사짓는 모든 
비용과 농작물의 운반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일 년 내  농사를 지어봤
자 겨울을 나기도  전에 곡식이 떨어지는 게 너무도 당연했다.  이런 형편인데도 
소작농들은 지주에게 소작권을 빼앗길까  봐 가을걷이가 끝나면 떡을 한 고리씩 
해서 지주에게 인사를  챙겼다. 두부도 한 짝씩  하고 술을 담궈 가기도 하였다. 
그런 걸 소달구지나 소등에 부려 갔는데 소가 없는 집에선 지게에 지고 갔다.
  가난한 집 남자들은 `새털바지`라는 걸 입었다. 바지가 해지면 다른 천을 대고 
깁고 또 떨어진  데에 다른 천을 대고 깁기를  계속해서 기운 자국이 새털 같아 
새털바지라고 불렀다.  성한 옷은 집안에  보물처럼 한 벌  간직했다가 아버지와 
아들이 번갈아 입기도 하였다.
  우리들 사는 형편이  이럴 때, 그러니까 1932년 모심기 끝낸  양력 6월 초나흗
날, 마을에 사건이 터졌다. 이날은 내 친구 금전이의 두 돌 지난 남자 동생이 개
한테 불알을 뜯기고 죽어서 더더욱 생생하다.
  초여름 햇살은 따갑고 눈이 부셨다. 부지런한 어른들은  동틀 때 한축 들에 나
갔다와서 이른  아침을 먹고 다시  논밭으로 나간 뒤라서,  아침결이라도 동네가 
고요했다. 그래도 우리집엔 여자들이 다 있었다. 어머니는 취를 삶아 내다널었고 
언니들은 머위  껍데기를 벗기면서 싸우고  있었다. 큰언니가 껍질을  길게 늘여 
벗기다가 팔로 작은언니의 눈퉁이를 때렸고 작은언니는 시커멓게 머위독 우러난 
물을 큰언니한테  끼얹었던 것이다.  큰언니는 우악스럽게 작은언니의  머리채를 
뿌리뽑을 듯 잡아챘다.  작은언니는 `개간나가 사람 죽인다`고  소리치며 울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부지깽이를 들고 험악하게 달려나와 뜰팡에서 엉켜붙은 딸들
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언니들은 콩알처럼  튀어 달아났고, 어머니는 늘 
입에 달고 사는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 저년어 억세빠진 간나들 때문에 집안이 안 된다! 귀신은 뭘 먹구 살어 저
년어 간나들을 안 잡아가너?”
  언니들은 어딘가로 도망갔고  어머니의 욕을 듣는 건, 뜰팡 끝에  서서 두려움
에 가슴 조이는 들팽이 나 혼자뿐이었다.
  “저런 간나종자들 쌔빠지게 키워놔 봤자 남의 집 좋은 일 시키는 거여...”
  그때 어머니는 이런 욕도 잘했다.
  나는 특히 어머니가 하던 욕  중에 이 욕만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이해하게 
되었는데, 내가 시집을 가서였다. 친정 어머니가 별별 악담을 다 해도 그리고 아
무리 험한 일을 시켜도 시집가서  뼈 빠지게 일하는 것의 반인들 처녀 때 할 수 
있었을까? 친정과 시집은 그렇게 달랐다. 친정에선 키워만 놓았지, 정작 일은 시
집에서 부려먹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집 마당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시간이 얼마 자니지 않아서 였
다. 밭뙈기 하난  건너에 사는 금전이네는 택호가 `세간난 집`인데,  그쪽에서 처
음엔 길게, 곧 짧게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나는 이내 그 비명이 금전이의 목
소리라는 걸 알았다. 얼른  마당 끝으로 나가보았다. 우리보다 높게 둔덕진 금전
이네 마당가에 주저앉은 금전이를 봤던가? 그 애가  강중강중 뛰었던가? 어머이! 
어머이!하고 소리쳤던가?
  곧 금전이 곁에  둘째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지적
지적 걷기 시작했다.  상황을 잣히 알지는 못했지만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가 느
껴져서 그랬을 것이다.
  “저, 들팽이 이년어 간나야... 날래 성아들 찾어와!”
  어머니가 나를 보고 소리쳤다. 어머니는 나를 아직도 들팽이라고 불렀다. 밑이 
빠져 겨우겨우  걸어다닐 때, 말을 못해  벙치라고 놀림받을 때 붙여진  내 다른 
이름으로, 그러나 이때쯤  나는, 작은언니처럼 약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큰언니처
럼 사내같이 놀지는  못했지만 달팽이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자주  앓던 이질배
도 일곱 살 접어들고는 앓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작은언니가 달려왔다. 내가  찾으러 나서기도 전에 언니는  금전이네 마당에서 
팔랑개비처럼 달려왔다. 숨을  할딱거리며 부엌 문턱에 서더니  숨넘어가는 소리
로 말했다.
  “어머이 어머니, 큰일났네!”
  “니 애비가 뒈졌너 에미가 뒈졌너, 왜서 방정을 떨구 지랄이너, 하란 일은 안 
하구 지즈바년이 되잖게...”
  “어머이, 나와봐! 금전이 사내동상이 죽었다니깐!”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금에 간나가 뭔 재간을  쳤너? 하고 혼잣
말을 했다. 금애는  금전이의 다섯 살나 여자 동생인데 한번은  똥통에 기어들어
가 죽을  뻔한 걸 살려내 놓은  적이 있었다. 둘째언니는 서두르지  않는 어머니 
앞에서 불에 댄 강아지처럼 왔다갔다하였다.
  “어머이, 개가 금전이 동상 불알을  깨물었어! 피 흘리구 까무라쳤어! 죽었어!

  언니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정신없이 소리쳤다.
  어머니와 우리가 다시  금전이네 집에 갔을 때  콩밭을 매다 흙투성이 맨발로 
달려온 금전이 어머니는 이미 숨이  끊어진 어린 아들을 끌어 안고 정신이 나가 
얼굴이 새까매져 있었다.
  나중에 동네 사람들이  사람 죽인 개를 때려죽였다. 금전이네 개는  아이들 똥
을 먹고 컸는데, 그날도 금전이의 동생이 자다  깨서 마당에 나와 똥을 누었는데 
그 똥을 먹다가 불알까지 뜯어먹은 것이었다.
  이 일로, 어머니는 한참이다 `쓰잘데없는 간나종자들은 질기게 사는데 귀한 아
들만 헛되어 죽었다`고  넋두리하고 욕했다. 우리는 모두 주눅이 들었다.  우리가 
죽어야 했을 걸 죽지  못하고 사는 게 죄 같았고, 또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갇
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날  우리를 두려움으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죄악
감을 가지게 하는 일이 다시 일어났던 것이다.
  이 일은 나중에 사람들이  `7인당 사건`이라고도 불렀던 큰 사건이었다. 발 밑
에 밟히던 그림자가 동쪽으로 커지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충성골에서 교흥이 양반과 최 서방이 오랏줄에  묶여 잡혀가는 걸, 방아다릿집 
며느리가 남 먼저 보았다. 방아다릿댁은 안말 둔덕에 사는데, 먹을 게 없어 여물
지 않은 보리 이삭을 따다가  가마솥에 볶아서는 망으로 갈아 죽을 쑤어먹고 지
냈다. 방아다릿집 며느리는 충성골 보리밭에 있다가 그들을 보았던 것이다. 기다
란 일본 칼을  늘여 찬 일본 순사와 조선  순사가 와서 그들을 잡아갔다고 하였
다.
  우리 동네에서 이날  잡혀간 사람은 교흥이 양반과 최 서방만은  아니었다. 양
양장에 나갔던 오빠와 큰집 큰오빠가 붙잡혀갔다는  것, 그리고 바깥말의 추씨네 
형제가 함께 붙들려갔다는  것, 기정리와 조산에선 열아홉 살이 넘은  남자는 씨
도 없이 잡혀갔다는  것... 이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
지 않았다. 양양장에 나무를 팔러 갔다온 사람이 말을 전해 줬기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전라도와 함경도 어디에서, 배고픈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
다더라...`는 소문과 관계가 있었을까? 우리 오빠가 자기와 우리를 차별하는 어머
니 앞에서, `여자가 없으면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나유?`하면서 우리를 귀하고 따
뜻하게 대해 주던 것과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조선 땅의 임자는 조선 백성들`
이라고 오빠는 그랬는데, 그 말하고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어두워져도 돌아오지 않는 오빠 때문에 우리는  모두 울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우리를 울지 못하게 했다.
  “간나종자들이 집구석에서 울면 집안에 무슨 좋은 일이 있너!”
  어머니는 우리의 등짝을  주먹으로 패다가, 도망가면 달려와  머리채를 잡아흔
들며 혼쭐을 냈다.
  우리가 울지 않으면, 어머니는 또 가만있지를 못했다.
  “간나종자들이 되잖아빠져서 하나밖에 없는 금쪽 같은 오래비가 잡혀가두 눈
구녕에 눈물 한  방울... 쓰잘데기 하나 없는 저런 지즈바들은  호랭이두 안 물어
가는데...”
  우리는 어머니의  등쌀에 배겨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슬픔이나 울화 
같은 걸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없었고 이런  종류의 억눌림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학대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자라났다. 사실 우리도 모두 `
하나밖에 없는 오빠`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의지하고 사랑했다. 오빠는 우리에게 
가끔 서당에서  배운 천자문을 가르쳤고, 예법이나  관혼상제, 촌수 따지기 같은 
걸 써서 책으로  만들어 우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동네에서 이런  공부를 하는 
여자아이들은 우리뿐이었다.
  오빠가 우리를 가르치려고 만든, 그 한자로 만든  책은 아직도 우리의 사촌 쪽
에서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
  이날 어머니는 양양에  나갔던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한테
도 마구 대들었다. `큰집이 우릴 망군다`고 악을 썼던 것이다. 오빠가 `나쁜 생각
`을 하게 된 것은 큰오빠가 끝없이 꼬드겨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빨리 막사리라
도 꾸려서 따로 나가 살자고,  그까짓 다된 혼사, 생기 맞지 않으면 어때서 우렛
날을 받지 않는냐고, 색시 들여 자식 보면 맘 접고 잘살 아들을... 주재소에서 사
람 죽어나가는 게 어디 하나둘 이더냐고, 일본  놈들이 사람 생피도 벗기고 가마
솥에 물 끓여 생사람 삶아도 죽인다는데, 내 아들 죽이고 난 못산다!고...
  어머니는 이날 밤을  꼬박 샜을 것이다. 큰아버지 아침밥 짓는  일이 없었다면 
어머니는 양양읍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오빠는 다음날 점심때쯤, 약간 풀죽은, 어쩐지 슬퍼보이는 얼굴을 하고 돌아왔
다. 우리는 모두, 오빠가 배를 곯아 기운이  없고, 큰오빠를 두고 혼자 와서 맘이 
찡할 것으로, 그렇게만 짐작을 하였다. 이때 함께 잡혀간 사람 중에 교흥이 양반
은 해방이 될  때까지 몇 번이나 더  잡혀갔다가 결국은 해방되던 해  8월 12일, 
그날 감옥에서 옥사했다. 한여름, 고문당한 상처에서 고름이 끓고 구더기가 버글
버글했더라는 소문이 돌았다.  교흥이 양반은 우리동네 머슴의 아들인데, 머슴이
던 아버지가 워낙 인물이 좋아 아들을 두지  모한 주인집과 사돈을 맺게 되었다. 
그러니까 머슴의 아들과  주인의 딸이 혼인을 해서 교흥이 양반을  두었었다. 동
네에선 무슨 연유에선지  그를 `교흥이 양반`이라고 불러 아이들까지  그 아저씨
를 그렇게 불렀다.  오빠보다는 나이가 많았는데, 우리집에 와서 오바가  `읍에서 
두 손꼽히는 천재`라고 해서, 우리 식구는 특별히 정을  느끼던 사이였다. 오빠가 
자상하고 행실 바르고 부지런하고 머리가 비상하다는  건 누구나 하는 소리였다. 
서당 선생님도 오빠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동네사람
들은 다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사람을  똑같이 대할 때의` 오빠가 아주 좋았다. 오
빠는 `지즈바가 왜 그래!` 하고 여자를 아래에 두는 말은 한 적이  없다. 늘 병치
레를 하던 나를 따뜻하게 보살펴준 사람은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고 오빠였다.
  오빠의 따뜻한 사람됨은, 가족에게만 쏠린 건 아니었다. 안말을 등뒤에서 병풍
저럼 가리운 야트막한 산인 큰서당재의 끝머리에  문둥이네가 살고 있었다. 우리
는 그 집의 늙도록  장가도 못 가고 사는 아저씨 문둥이가 `아이들만 잡아서  간
을 빼 먹는다`고 해, 그  집 앞은 얼씬도 하지 못했다. 봄이면 산으로 참꽃을  따
먹으로 다녔는데, 큰서당재만은 갈 수 없었다. 문둥이는 우리가 싫어해서 그랬는
지. 자기 집 비좁은 마당가를 결코,  살아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썩어들어가는 손
가락을 작두에 올려놓고 자기 형한테 자르라고 했다는  그 아저씨. 그가 자기 집
을 벗어나지 못했듯, 그  집을 떠나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갔다  문둥병이 도져 쫓
겨난 아저씨의 여동생은  결코 살아서는 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여자는 
시집을 가서 첫딸을 낳고 문둥병을 앓기 시작했는데 다섯 손가락 첫마디가 짓물
러 썩어들 때, 더  이상 시집살이를 하지 못하고 친정으로 쫓겨왔다. 하지만  `출
가외인 문둥이`는 친정집  마당도 밟지 못하고 충성골  외진 데 움막을 엮고  두 
돌 접어드는 딸고 함께 살았다. 그 여자는  벼그루터기가 빳빳하게 얼 때에도 빈 
논을 핥듯이 돌아다니며  이삭을 주웠다. 그 여자의 굽은 등이  느릿느릿 움직이
던 모습이 잘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여자의 남편이 가끔  한밤중에 그 움
막의 거적문을 들치고 들어가 잠을  자곤 동틀 때 돌아가던 모습을 동네 사람들
한테 들켰다. 그리고 문둥이는 배가 불렀는데, 아이  밴 배가 꽤 불렀을 때, 잠을 
자다 말고 죽었다. 그  여자의 올케가 굴암밥에 무짠지 해서 들고  갔더니 그 여
자는 반듯이  누워 뜬눈으로 죽어 있었고,  딸아이는 어미 죽은 것도  모르고 그 
차가운 젖꼭지를 빨며 배 위에 올라가 놀고  있었다. 죽은 몸에서 이가 새카맣게 
빠져나와도 어린 건 아무것도 모르더라고.
  오빠는 안말로 들어올 때, 문둥이가 마당에 나와  있으면 꼭 가서 인사를 건네
곤 했다는데, 오빠가 죽어 상여가 떠날 때, 그 문둥이 아저씨가 자기 집 마당 끝
에 나와 몽당손으로 눈물을 씻더라는 얘길 어른들이 했다.

  그 해, 한여름,  초복 중복 말복이 지나고  입추 처서가 지나 계절이 바뀌었을 
때, 안말에서는 우스운 일이  벌어졌다. 처서 무렵에도 한낮의 볕은 이마가 벗겨
지게 따가웠다. 밤이 되면  귀뚜라미 여치가 울어대고 바람결은 서늘해도, 낮 날
씨는 좋았다. 그래서, 허연 벼꽃이 이밥  먹게 한다고 모두들 흐뭇해했다. 휘영청 
달이 밝은 밤이면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이 천연 눈밭으로 보였다.
  그 일을 처음엔 동네에서 아무도 몰랐다. 모르는  건 물론 어느 누구도 눈치조
차 채지  못했다. 서당 훈장이던 허  영감님은 워낙 인물이 음전해서  그런 일을 
내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허 영감님은  일찍 부인을 여의고 외동아들하고 
살았는데, 아들이 일본 군대에 뽑혀가고 나서,  갓 시집온 며느리하고 지냈다. 그
런 어느 날 밤  며느리가 친정으로 도망을 갔다. 그 밤이  새기도 전에 며느리네 
집 남정들이 떼지어 와 서당 훈장 허  영감님을 몰매쳐 마을에서 내쫓았다. 우리
가 내막을 알게 된 건, 몰매치고 내쫓기는 와중이었다. 시아버지 허 영감님이 밤
이면 며느리를 불러  배가 아프다고 하여 아랫배를 손으로 쓸게  하다가, 마침내
는 시커멓게 독이 오른 자기의 물건을 붙잡게  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배만 쓸다
가 다음날은 밑을 보이고 그 다음엔 벌떡  선 그것을 쥐어줬더니, 새며느리가 기
절을 하고 친정으로 달아나 `못살겠다`고 하소연을 했던 것이다. 
  허 영감은 경상도  쪽에서 살다온 뜨내기인데, 그래서 그 다음부터  마을 어른
들은 동네를 위해서는 외지 사람을 절대로 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초가을이 지나, 들의 곡식이 익기 시작했다. 우리는 밭에 가 강낭콩을 뽑고 그
걸 목이 빠지게 마당으로  여날랐다. 풋 것은 까서 감자밥에 섞어  먹고 여문 것
은 마당에 널어  말렸다. 멍석을 펴놓고 강낭콩  꼬투리를 따서 너는데, 그 일을 
하다보면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김장 씨를 뿌리고  삼을 삼고 붉은 고추를 따고 
논에 피를 뽑고  논섶을 깎고 벌초를 다니고... 그래서 낮이면  안말의 어느 집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저 집은 지키는 건 시도  때도 없이 우는 닭과 심심
해도 짖는 개,  그리고 나 같은 아이뿐이었다. 그러나 나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큰언니는 벌써 집안 일이 싫어  어머니가 밭으로 나가면 콩꼬투리 따는 일을 우
리에게 맡기고 산으로 내뺐다. 물론 언니는 저녁이면  굴암을 한 자루씩 주워 씨
근덕대며 돌아왔다. 그래도 언니는  좋은 소릴 듣지 못했다. 큰집 식구까지 함께 
먹는 저녁밥에 섞어넣을 감자를 족히  한 말이나 되게 갉아야 할 언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집의 감자 갉는 놋수저는 끝이  닳고 닳아서 속이 패인 초
닷새날 달 모양이었다. 
  “귀신도 안 잡아먹는 이년어 간나 썩 나가 뒈져!”
  우리는 부지깽이를  들고 큰언니를 후려치러 나오는  어머니를 피해 천리만리 
도망을 쳤다. 사실 그때 우리는  강낭콩을 따다 말고 한눈 파는 게 예사였다. 씹 
붙어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잡고 감자를 구워먹고 메뚜기를 잡는 게 더 재미있어
서 어머니가 시키는 일을 깜박깜박 잊기 일쑤였다.
  실컷 일하고도 늘 욕만 먹는 언니는 그래서 성질이 사나워졌을까? 작은언니는 
화가 난 큰언니의 밥이었고 나는 작은언니가  맘놓고 패는 맷방석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우리는 어머니를  원망하거나 서러움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우린 태어
나면서 이미 그런  대우에 익숙해 있어서, 어쩌다 칭찬이라도 들으면  괜히 부끄
러워 어디론가 숨기 바빴다. 부끄러울 뿐 아니라 그런 칭찬이 싫었다. 도무지 소
화를 해낼 수 없는 낯선 느낌이었던 것이다.
  밥만 축내는 저런 지즈바 간난 나가 뒈져야 한다.
  귀한 밥 멕여 키워봤자 남 좋은 일 시킨다.
  귀신은 뭘 먹길래 저런년어 간나를 안 잡아가느냐.
  우린 그때 이런 욕  속에 묻혀서 살았다. 그리고 그 욕이  우리 형제의 삶이었
고, 마음의  고향이었다. 어쩌다 욕을 먹지  않는 날이면 어색해졌다.  욕을 하지 
않는 어머니를 불안한  마음으로 살피게 되고 뭔가  따돌려지는 것 같아 두려웠
다.

  가을 거둠이가 시작되면 정말 농촌은 정신없이  바빴다. 여북하면 죽은 송장도 
꿈틀한달까.
  마당엔 가을 내내 볕에 말리는 고추며 굴암이  널렸고 나는 멍석 한쪽에 앉아, 
이웃집 개며 닭, 쥐와 다람쥐  새를 쪼아야 했다. 그렇지만 늘 나도 모르게 졸다
가 폭 엎어져 잠들곤 했다. 그런 꼴을  어머니한테 들키는 날이면 싸릿대로 사정
없이 맞았다. 밥값도 못 하는 거 나가 죽으라고... 큰언니와 작은 언니는 밭에 가
서 콩포기라도 뽑지 않으면 어머니를 따라 산으로  굴암을 주우러 갔다. 그때 굴
암은 아주 귀한  잡곡이었다. 주워온 굴암을 말려 겉껍질을 벗긴  다음 가마솥에 
넣고 푹 삶아서 다시 볕에  바짝 말린다. 마른 굴암을 방앗간에 가서 쓸어, 가마
에 물을 붓고 끓이는데, 이때 물을 열두 축은 갈아줘야 떫은맛이 없어졌다. 떫은
맛이 없어진 굴암에 소금을 넣어  쟁여 두었다가 쌀밥 해서 섞어먹기도 하고 겨
우내 그 길고  긴 동지 섣달 밤,  길쌈할 때 동치미 퍼다 굴암을  배랭이째 놓고 
간식으로 먹었다. 요새는  굴암묵을 도토리묵이라고 해서 건강식이니  별미니 하
고 먹지만 굴암밥만 생각하면 반가운 게 아니라 진절머리가 난다.
  팔월 한가위를 지내고 가을 거둠이도 거의 끝낸  9월. 그 달엔 생기 보는 사람
에게 날을 받아 서낭님한테 제를 올렸다. 포와  술에 삼실과를 놓고 한지를 서낭
에 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집도 터를 다졌다.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대궐
같이 지은 큰집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팔 칸 집이었다. 위사랑  아랫사랑 안방 
윗방 도장방 대청에 넓은 두 칸짜리 부엌을  들였다. 어머니는 새집 지어 며느리 
볼 생각으로 얼마나 뿌듯해 했는지 모른다. 물론  우리 식구 모두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었다. 어린 나도 큰집에서 묻혀 사는 게 싫었으니까. 
  큰아버지는 자기네 낡은 정낭을 헐고  우리집 서까래 올릴 때 새로 정낭을 지
었다.

  오빠가 몸이 아프다고 하던  날, 그날을 우리는 아무도 잊지 못한다. 상량식을 
하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성주님께 잔을 드리고 떡을 해 돌려먹었으니까. 쇠풍골 
복술이 아저씨 `씨불택이`가 와서 경을 읽고 소지도 올렸던 것이다.
  이날, 오빠는 집짓는 데 있어야 했다. 무슨 일로 큰집 고방에 들어갔는지 모르
겠다. 우리는 큰집 넓은 뒤란의 발방앗간에  있었고 큰언니는 고방으로 굴암쌀을 
가지러 갔다고  했다. 그때 오빠가 고방에  들어왔다가, 굴암쌀 자루가 무겁다고 
큰 언니  대신 들었는데 누가  등뒤에서 오른쪽 어깨를  잡아당기더라고. 기분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아무도 없었다고... 오빠는 앓는 중에 그 순간을 `
살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살을 맞아 아프다는 오빠의 병세를 모
두 대단찮게 생각했다.  오빠는 우리집의 하나뿐인 아들이어서  대단한 사람이었
고, 행실이 바르고  마음씨가 곱고 생김새도 나무랄 데 없었고  인근동의 소문난 
천재였으므로, 그가 쉽사리  죽을병에 걸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에 오빠는 그저 몸이 으슬으슬 춥고 떨린다고만  했다. 그래서 두어 파수 전
에 고금을 앓고 일어난 큰언니가 어머니한테  어찌나 미움을 받았던지. 되잖아빠
진 게 고금을 오라버니한테 옮겼다고. 알고 보면  오빠가 고금을 앓다 죽은 것도 
아닌데 어머니는 큰언니가 오빠를 죽였다고 생살이라도 쥐어뜯을 것처럼 큰언니
를 미워했다. 고금에 걸릴 때 큰언니는 얼마나 불상했는지 모른다. 그날 마당 한
쪽에서 우리 세 자매는 커다란  함지에 담긴 콩에서 썩은 콩, 돌멩이, 짜개난 것
들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큰언니가 뒤가  마렵다며 정낭으로 갔다. 정낭으로 
가기 전에 일손이 느려터졌다고 몇 차례 어머니한테  욕을 먹고 난 뒤였다. 그때 
우리는 다른 누구에게 맘을  써줄, 그런 여유들이 없었다. 다만 오빠만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았고 그런 오빠가  우리들을 애틋이 보살폈을 뿐, 
우리는 그저 서로 고달퍼서  마음을 써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어머니처럼, 
큰언니가 콩 고르는 일이 지켜워 늦장을  부린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큰언니
가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을 때, 어머니가 큰언니를 동네에 가서  찾아보라고 했
을 때, 저짝 집에도 가보고 동두불 쪽에도 갔으니까.
  물론 큰언니는 어느  집에도 가지 않았다. 그날 큰언니를 찾아낸  건 어머니였
다. 배가 뽈록하게  튀어나오고 얽은 얼굴이 더욱 새까맣게 기미까지  낀 어머니
가 정낭에 갔다가, 한 발을 문짝 안으로 딛다  말고 발에 닿는 물크덩한 것에 놀
라, 내려다보니 웅크린 큰언니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큰언니를 보자마자 악
을 악을 썼다. 여북 일이 하기 싫으면  지즈바 간나가 정낭에서 자빠져 자겠느냐
고 때리고 밝고 욕하고.
  그런데 그날 큰언니는  다른 때처럼 튀어 달아나지 않았다.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짐승 새끼처럼 그저 맞기만 했다. 
  어머니도 큰언니가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다. 때리다 말고 큰언니를 살폈다. 온
몽이 땀에  젖었는데 와들와들 떨었다. 큰언니는  고금에 걸렸던 것이다. 고금에 
걸리면 삼잎을 삶아 먹이고 정낭 똥통확에 한지를 올려놓고 혓바닥 끝을 대면서 
`오늘 고금을  며칠째 앓았습니다`라고 말하거나  부뚜막 위에 똥가래를  거꾸로 
세워놓고, 고금 떨어지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큰언니는 나았다.
  큰언니는 마구간 바깥의 쇠오줌 통에도 처넣어졌고,  머리를 박박 깎이기도 했
고, 임질을 너무  어려서부터 맣이 해서 키도  크지 못했고, 세상에 있는 매라는 
매는 다 맞고  자랐다. 우리가 어른이 되고, 중년의 자식을  가진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었을 때, 어쩌다 모처럼 만나 이맘때  얘길 하고 큰언니를 슬프게 추
억하면, 되레 큰언니는 자기가 키가  작은 건 `첫 문열이는 모두 작기 때문`이라
며 덤덤하게 옷어넘겼다.

  사람이라는 짐승은, 이래서살기 마련일까? 감당하지 못한 고통은 잊는 것... 마
치 너무 큰 소리는 우리가 듣지 못하고 너무 밝은 빛은 볼 수 없다듯이...
  오빠는 그렇게 우습게  병이 들어 꼭 이레를 앓다가 죽었는데,  우리는 오빠가 
자기 입으로, `나는  죽는다`고 말하기 전까지, 정말 아무도 오빠가  죽으리란 상
상을 하지 못했다.  오빠는 그저 오한기 때문에 몸을 떨었고  식은땀을 흘렸으며 
잠도 자지 않았고 밥도  잘 먹지 않았다. 나는 내 밑으로  태어난 동생들이 걷기
도 전에 죽는 것만  보았기 때문에 어른이 죽는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우리
는 큰집에서 하나같이 기를  펴지 못하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서  집이 다 되
어, 따로 나가  살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집이  하루하루 모습을 갖춰가는 게 기
뻐, 모두들 들떠 지내던 중이었다.
  발병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오빠는 사자들이 붙잡아드니 날 때려달라. 눈앞이 
자꾸만 캄캄해진다고 말했다. 
  오빠는 자기를 때리되,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를 꺾어다 때리라는 것
이었다. 이때, 어머니는 외아들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오빠가 밥을 먹지 않으면 
어머니도 굶었다. 오빠가 잠을  자지 않으면 어머니도 밤을 지샜다. 어머니는 저
승사자가 달려든다는 바람에  복숭아나무 가지로 오빠의 등허리를  때렸다. 하지
만 오빠는 어머니의 매가 성이  차지 않는다고 영광정에 사는 육촌 형에게 때리
도록 부탁했다.
  닷새째 되던 날. 오빠는 이제 병이 다 나은 사람처럼 일어나 앉았다. 사랑방에 
똑바로 앉아서 책상을 앞에 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잠도 자지 않고 
읽었다. 우물로 물을 길러 가던 안말의 아낙네들은  오빠의 글 읽는 소리가 듣기 
좋아 큰집 사랑방 앞에 잠시 섰다 가기도 하였다.
  다음날, 오빠는 자기가 더  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는 다시 태어난
다고... 그랬지만 그말은 어느 누구에게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오빠는 자
신의 병문안을 온, 오랜 서당 동무들, 마을의 손위아래 친지들께 작별 인사를 빼
놓지 않고 하였다.  자기가 내일 어느 때  세상을 뜬다고, 이미 미쳐서 제정신이 
아닌 어머니에게도 하직 인사를  했다. 우리는 아무런 경황도 없었다. 오빠는 자
기가 예견한 그날 그맘때 읽던 주역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숨을 거뒀다. 흔치 
않은 죽음의 장면이어서 우리 집안엔 두고두고 얘기가 전해진다.
  어머니는 초상 사흘 동안 정신을 잃었다. 우리는 어머니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초상은 슬픔과 상실이 큰 것만큼 성대히 처렀지만 동생들인 우리는 슬픔도 지닐 
수가 없었다. 어쩌다 내가 쓰러져 있는 어머니  곁에 가 살며서 누워보면 어머니
가 갑자기 눈을 뜨곤 나를 쥐어뜯었다.
  “이년! 오래비 잡아먹은 이년! 니년이 죽어라!”
  어머니는 놀란  어른들이 뜯어말리고 나를  그 광란에서 빼내놓을  때까지, 그 
발광을 그치지 않았다. 어머닌  내게만 그러는게 아니었다. 눈앞에 딸 셋이 얼씬
대기만 하면, 그런 원수가 따로 없었다.  특히 큰언니한테는, 전생의 원수를 만난 
것같이 그랬다.
  “저 찢어죽여도 성이 차지 않을 저년! 저년어 간나가  드세 빠져서 지 오래비 
잡아먹었지! 저년을 잡어 저승사자한테 보내야 해!”
  우리의 슬픔, 박탈감,  공포 이런 것들은 그  나이의 우리로선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살고 죽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한 본능적인 애착... 그런 성정을 
마비, 혹은 고상당한  채, 그저 물체처럼 있어야 했다.  사흘장 내내. 고아들처럼. 
가난한 집 아이가  부잣집 잔치 마당을 비굴하게 기웃거리듯, 우리는  오빠의 장
례 사흘 동안 그렇게 지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들의 이런 참혹한 버림
받음에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우리 자신도 우리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우
리는 이미 `비관 그 자체`였으므로. 비관의 감정을 따로 가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죽은 오빠보다  어머니를 더 걱정했다. 기절을 했다 정신이  들면 내 
아들 살려내라고 울부짖고 다시 정신을  잃고 기진해 죽은 듯 잠이 들고 깨어나
서 탕란을 쳤다. 그래서 저러다 어머니가 죽지 않을까 모두들 큰 걱정이었다. 어
떤 사람은 뱃속에 든 아이가  아들일 거라고, 틀림이 없다고, 생때 같은 아들 잃
었으니, 조상님이  들을 주 않겠느냐고...  이렇게 어머니를 달래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빠의 죽음이  어머니의 생활을 없애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정붙였던 사람들의 위로나 애틋한  보살핌도 어머니에겐 저 세상 일만 같았으리
라.
  그러나 장례식 사흘 동안은 그래도 괜찮았다.  문상객으로 집안이 북적댔고 무
엇보다 아직 주검으로나마  오빠가 한지붕 밑에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보태고 
뺄 것도 없는 불행, 고통, 고달픔, 서러움은  오빠가 상여에 실려 집을 아주 떠난 
다음에 찾아들었다. 물론 오빠를 상여에 실어 떠나보내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어머니가 관을  잡고 떨어지지 않아서였다. 나는  그때의 정경을 생각하면, 내가 
느꼈던 공포감 때문에  아직도 가슴이 쿵덕거린다. 산 사람의 혼이  죽은 사람을 
따라 떠나는 것을,  그때 내가 보았다고 말하면  누구나 거짓말이라고 할 테지... 
어머니가 딸들을 버리고 죽은 아들을 따라 떠나던 그 환영을 나는 잊을 수가 없
다.
  혼이 떠난  어머니의 육신, 그 껍데기가  기절해 땅바닥으로 폭삭 가라앉았다. 
그때 여자들은 어느 누구라도 장지엔 따라 갈 수 없다는 게 `법`이었다. 산 사람
이 한동안 정신을 잃는 상태, 기절.기함.혼수상태, 이런 게 절망한 목숨의 살아남
는 꾀라는 걸 그후 나는 그와 같은 경험을  하며 살 수밖에 없을 때, 절망적으로 
깨달았다.
  그날 아침 나절, 의뭉스러울 정도로 고요하던  날씨가 오후 들며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땅에 떨어진 마른 잎들과 짚더미의  검불들이 사방으로 휩쓸리며 날아
다니고 집 뒤의  마른 대숲이 쏴아쏴아 소리내며 울었다. 하늘엔  검은 먹장구름
이 뒤숭숭하게  떠다니고 까막까지들도 분주히 울며  어디론가 떠났다 돌아오곤 
하였다. 음력 시월 열나흗날이었다.  오후 들어, 북적대던 부엌이 한산해졌다. 부
엌과 고방 일을  보던 먼 일가붙이들, 동네 아주머니들도 크고  작은 장례설거지
를 끝내고 주춤주춤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그날, 우리 세 자매는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어둡고 추운 빈 방앗간에 앉아
서 공연히 서로 트집을 잡아선 꼬집거나 할뀌며  싸우다 울곤 했던 기억이 난다. 
떡이며 부침개며 과일들이 난생 처음 지천으로 널렸건만 우리 제대로 먹지 못했
다. 장례식 사흘 내내 그랬다.  배가 고프면 부엌문 뒤에 숨어 얼굴만 슬며시 어
른들 쪽으로 내밀어보다가 재수가 좋으면 국밥 한 그릇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어머야, 이게  누구너? 이집 셋째딸 벙치잖너.  야보게, 눈이 퀭 들어갔네야. 
밥두 못 얻어먹었구만 뭐.  야, 벙치야, 성들은 어디 갔어, 델구  와라 어여. 이러
다간 산 지즈바새끼들 다 굶게 죽일라.”
  우리는 이렇게 어렵사리 눈에 띄어  급하게 밥을 먹고 새까맣게 때가 낀 손에 
떡과 부침개를 집어들고  쭈르르 굴뚝 쪽으로 가서 동냥 얻은  거지처럼 먹었다. 
온종일 불을  때서 굴뚝가에 앉으면 몸이  따스해졌다. 거기서도 우리는 싸웠다. 
툭하면 그랬다.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고 멸시하고  자신을 괴롭히면서 자기 자신
을 느끼는 데 길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저녁에, 산에 갔던  남자들이 돌아왔다. 꽃상여와 만장으로 화려하고 엄숙하게 
떠났던 그들은 모든 걸 다 묻고 불태운 뒤 빈손으로 돌아들 왔다. 
  사람들의 발소릴 들은 걸까?  누워 자는 줄 알았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맨발로 컹컹 마당으로  달려나가는 것이었다. 오빠가 앓을 때부터 같이  밥을 제
대로 먹지 않은 어머니의 몸은 벌써 오래 전에 거미 같아서 치마 말기가 흘러내
려 발치에 끌리고 머리는 풀어헤쳐져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우리 아들 어딨대유?”
  “범설인 안 오너? 우리 범설인 왜서 안 오지유?”
  어머니가 큰아버지, 아버지, 큰집 오빠들을 붙들고 이렇게 물었다.
  “작은 어머이, 그만 들어가세요.”
  육촌 오빠가 어머니의 좁다란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우리는 뜨락 모서리
에 웅크리고 슬픔 때문이 아니라 무서워서 울었다.
  흐린 날, 환절기의 저녁은 아주 짧았다. 사촌 오빠가 기운을 잃고 늘어진 어머
니를 안고 방에 들여다 눕혔다. 굵은 빗날이 후두둑거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두 날씨가 잘 참아줬네.”
  “효자가 어디 가너.”
  바깥을 내다보고 어른들이 말했다. 오빠들은 마당에  깔았던 멍석을 들어 광에 
넣고 서둘러  비설거지를 했다. 그래도  빗날이 워낙 굵어서  뛰어다닌 오빠들이 
흠뻑 젖어 가마솥 아궁이 앞에서 몸을 말렸다. 
  사람들은 어머니부터 살릴  궁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렇게 안  먹다가 뱃
속에 든 아이가 성해 남을지 모르겟다고 걱정들을  했다. 뱃모양이 앞으로 톡 튀
어나왔으니 아들일 거라고, 두고보라고,  사람 사는 데 눈물 있으면 웃음도 있다
고, 그러니 기운을 내라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 혼자 무신 밥을 대구 먹으라는 기너. 아들이 오면 같이 먹을라는데.”
  어머니는 천연덕스럽게도 이렇게 말했다.
  제정신이 아니었겠지. 그러니 갑자기,
  “저렇게 문을 꽉 닫아놓으니 내 아들이 못  들어오잖너!”하고 앙칼지게 소리 
지르는데 엉덩이가 들썩  올라갔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턱뼈가 
빠져내렸다.
  집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어머니에게 뜨거운 간장물을 먹이고  동네 장정
들이 어머니의 정수리를 누르고 턱을 올려쳤다.  그래서 어렵사리 턱뼈를 맞췄지
만 그 밤에 턱뼈는  세 번이나 더 내려앉아서, 결국 장정들이  어머니의 턱을 올
려붙인 채 날을 새워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날, 첫추위가 갑작스레 몰아닥친 
그 밤부터 밤마다 어머니와 숨바꼭질을 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문을 닫아놓으면 
오빠가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잠들면 추위를 참다 못한 
우리가 살며시 문을 닫았고, 우리보다 먼저 눈을  뜬 어머니에게 그걸 들키면 우
린 초죽음이 되게 얻어맞았다.  얻어맞는 건 그래도 나았다. 우리는 나가 뒈지라
는 소리, 오라비 잡아먹었다는 소리 때문에 집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동짓달. 우리는 초벽만 한 집으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더 무서워졌다. 자기가  낳아놓은, 자기를 닮은 같은 여자인 세 딸에
겐, 정말 어머니가  그렇게 심하게 할 수  없었다. 밥을 퍼놓고 둘러앉아 우리가 
수저를 들고 밥을 퍼먹을라치면 갑자기 놋수저로 우리들 이마를 마구 때렸다. 
  “오래비 잡아먹구두 밥이  아가리루 들어가너? 이년어 간나 종자들,  나가 뒈
지지두 않구!”
  우린 그 해 겨울, 편히 앉아 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숟가락 국자 주걱 국그
릇, 아무거나 어머니는 손에 닿는 대로 우리를 찌르고 던지고 팼으니까.
  그래도 밥투가리 앞에서  쫓겨나면 사정없이 배가 고팠다. 우린 큰  집에 가서 
설거지를 하며  설거지 물에 가라앉은  밥티도 깡그리 건져먹곤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옷도 갈아입지 못했고 이불도  덮지 못했다. 사방치기 줄넘기 
같은 놀이도 어머니 보는 데서는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잠깐씩 우리를 한꺼번
에 끌어안고 울기도 했지만, 그러다 말고 우리를 발작적으로 미워하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빨래를 널다  말고, 오라비 잡아먹은 년들이라면서, 빨래 꽁지를 들고 
우리를 팼다. 우리는 콩 튀듯 사방으로 도망갔고  동네 사람들 눈에 뛰면 동정의 
눈길을 받곤 하였다.
  오빠가 아픈 데 없이 급사를  한 게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사람들이 입을 모으
기 사작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아주 미치지 않게  하려면 굿을 해서 ‘한’을 풀
어줘야 한다는 말들도 했다.  그래서 굿을 했다. 큰아버지나 사촌 오빠들은 미신
에 놀아난다고 몹시 화를 냈다. 먹을 양식도  넉넉지 않은데 무당한테 퍼줄 쌀이 
어디있느냐고 야단을 쳤다.  어머니는 열에 뜬 번쩍이는 눈을 똑바로  뜨고 큰아
버지한테 말대답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도 큰아버지한테는 그러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오빠가 큰집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죽었다고  억지를 썼다. 아무도 어
머니를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굿날을 받고 굿을 했다.
  어머니가 대를 잡았다.
  대를 잡은 어머니가 큰집 새로 지은 정낭에  가서 마구 정낭문을 때렸다. 그리
고 큰집 댓돌을 쳤다. 무당이  댓돌 옆을 팠다. 거기서 나무로 깎아 만든 허재비
가 나왔다. 언니들이 큰집에 개죽을 가져다줄 때, 대추나무 밑에서 파낸 것과 같
은 것이었다.
  무당은 큰집이  삼살방에 정낭을 지어  동티가 났다고, 그래서  오빠가 급살을 
맞았다고, 큰집의  모든 액을 착한 범설이가  젊어지고 갔다고, 흐느끼면서 말했
다.
  오빠의 혼령이 실린 무당을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라고 굳게 믿었다.
  무당은 가엾은 어머니  두고 먼저 간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어머니를 끌어안
고 울면서 말했다.
  “어여, 내 새끼, 그저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잘 지내라...”
  어머니는 무당의 머리 어깨 얼굴을 더듬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머이. 자식 도리 못  하구 먼저 간 건 다 제 명이 짧아  그러니 누구 원망 
마세유...”
  무당이 말하고, 자기 몸에  잠긴 어머니의 팔을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자 어머
니는 바짝 긴장하면서, 
  “이 어머일 두구 혼자 가문 되너?”
하고 비굴하고 간사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억누를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혀 모두들 흐느꼈다.
  어머니는 이날부터 큰아버지한테  정낭을 헐어내리고 악을 썼다.  어머니는 감
히 장손인 시아주버니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었다.
  큰아버지는 한동안 무시하고 지내다가 어머니가 미쳐 날뛰는 걸 어쩔 수 없어 
정낭을 헐어냈다. 어머니는 정낭을 헐어내지 않으면서  사촌 오빠를 귀신이 잡아
갈 거라고, 악담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일로, 어머니는 큰집 눈밖에 났다. 가문에서 어머니를 보호하지 않았다.
  겨울에도 놀 틈 없이 바쁘게 살아야 봄 여름 배곯지 않고 지낼 것을 아버지는 
버전 저는 일을 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삼을  삼지 않았다. 어머니가 해산을 하고 
난 후, 우리집은 더 이상  일으켜 세울 수 없는 폐가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식
구들 마음과 생활이 그렇게 되었다.
  섣달 하순에 어머니는 몸을 풀었다. 나는 그날 밤 어머니 곁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 나를  아버지가 안아서 큰집에  갖다놓은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아이 낳는 
걸 부끄러워해서, 꼭  `인을 지워야` 몸을 풀었던 것이다. 지금은  의사 간호사가 
아이를 받고 심지어는 남편이 그  옆에 있기도 하지만 옛날엔 혼자서 아이를 낳
은 여자들이 많았다. 새파랗게 날을  간 낫으로, 갓 애 낳은 어멈이 스스로 태를 
자르는 게 보통이었다. 포월집 아주머니는 애를 만들  때 남이 볼까 몰래 가망둥
이로 만드니, 낳는 것도 몰래 낳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여자가 남자와 다른게 
아이 낳는 일인데,  여자라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목숨이니, 그 큰 일도 죄짓는 
것 같았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어쩌면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들`을 기다렸을지  모른다. 잔칫날 
앞둔 생때 같은 아들 잃은 어머니가 미쳐  죽을까 봐 그랬기도 했겠지만, 누구든 
어머니가 아들을 낳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장담했던 것이다.  설피밭집 막내아
들이 쉰둥이라느니, 논골집  아저씨는 환갑에 아들을 보았다느니 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을 거라고 하였다. 작은  서당집 두 양주는 법이 없
어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나 동네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았던 얼금뱅이 우리 어머니는 하늘의 도움
도 받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제풀에 눈을 떴다. 방 안이 이상했다. 큰 집이었다.
  왜서 내가 여기 와 자너?
  나는 혼자 이렇게  생각하며 큰집을 나왔다. 쥐집같이 헝클어진 내  머리는 그
저 가려웠다. 이는 밤낮이 따로 없었다. 머리를 긁으면 손톱 밑으로 새카만 이가 
까맣게 끼여 나왔다.
  집에 가니 작은언니가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고 있었다. 뭔가 불안하고 침
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나는 무턱대고 겁부터 났다.
  “성아.”
  나는 작은언니를 우는  목소리로 부르며 다가갔다. 작은언니는  코를 훌쩍거리
기만 할 뿐,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성아, 성아.”
  나는 작은언니 등뒤에 가서 무릎으로 언니의 등을 치며 자꾸만 불렀다.
  “이 간나가!”
  작은언니는 나를 무조건 욕하면서 떼밀었고 나는  헐겁게 뒤로 나자빠졌다. 뒤
통수가 장작개비의 옹이에  찧어 피가 났다. 나는 소리내 울고  작은언니는 때리
고... 이럴 때 물동이를 인 큰언니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이 쌍년어 간나들아 아침부터 할 지랄이 없어서 쌈박질이너?”
  큰 언니는  물동이를 내려놓자마자 작은언니부터 때리고  밟고 머리 끄덩이를 
잡았다.
  “지즈바야, 눈치가 있으면 야... 쌍년어 간나가 나일 얼루 처먹어서...”
  큰언니가 울먹이며 말했다. 이날은  웬일인지 작은언니가 큰언니한테 대들지를 
않았다. 우리는, 아니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마주보기만 하면 언제나  싸웠다. 특
히 작은언니를 닦달할  때의 큰언니는 꼭 어머니가  자기한테 그럴 때와 똑같았
다.
  작은언니가 울었다. 큰언니도  울었다. 나도 울었다. 나는 아직  영문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곧 방  안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울음소리 때문에, 나는 우리집
에 또 하나의 슬픔이 찾아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다...  딸...이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내 작은 
몸이 갑자기 너무도 시려와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오빠를 잃었을 때의 울음소리와 뭔지 다른  데가 있었다. 울음소리의 깊이에서 
다른 느낌이 느껴졌다. 나는 아궁이 앞에 바짝 다가가 앉아, 자구만 얼어드는 몸
을 녹이려 했다.
  “비케! 간나야, 타 죽구 싶너?”
  훌쩍거리면서도 작은언니는 나를  욕했다. 큰언니가 없을 때, 나는 작은언니의 
밥이었다. 작은언니의  매정함이 싫어서, 나는  무섭기만 한  어머니에게로 갔다. 
어쩌면 어머니가 불쌍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비린내
가 확 다가왔다. 생피내...  어머니는 내 밑으로 동생을 셋이나 더 낳았었기 때문
에 나는 그 생피내를 맡을 줄 았았다.
  이날 새벽, 인  지우고 혼자 애를 낳은  어머니는 딸인 걸 알자마자 절망해서, 
차마 서러움도 내비치지  못하고 고요하게 울었다. 아버지는 방 안의  깊고 무거
운 침묵 때문에 모든 걸 알았다. 태도  가르치 않고 발길로 내밀어버린 핏덩이를 
태갈라 더운물에 씻겨 어머니  곁에 뉘었다. 순간 어머니는 미쳐서, 제대로 손에 
쥐어지지도 않는 핏덩이를 윗목에 내던졌다. 어버지는 말없이 사랑으로 나갔다.
  아침 나절, 아버지는 `죄가 무서워서` 작은 서낭재에 올라가 솔가지를 찍어 문 
아래쪽으로 매달았다. 아들을 낳으면 보드기를 찍어다  문 위쪽으로 송침을 하고 
붉은 고추 달아  금줄도 치지만 딸은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때까지도 윗목에 던져져  있는 아이를 보고 기겁을 했다. 저렇게  아이를 죽였다
가 더 큰 죄를 지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예시가 났는데 아들 못 날라너? 어여 아 햇젖이나 물리게.”
  아버지가 말했다.
  아이의 살갗은 벌써 새파랬고, 숨도 쉬지 않았다. 몇 시간이나 엎어져 있던 아
이는, 어머니 곁에 뉘여놓자 한참 있더니 놀랍게도 피득피득 살아났다.
  아이는 딸일망정 살아나서 어머니는 살인죄를 면했지만,  그 처참한 처지는 말
로 다할 수가  없었다. `외아들 꺾고 딸까지  낳은 죄인`이라고 어머니는 햇볕을 
보려 하지 않았다. 국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 적은 말라붙었다. 배가 고파우는 핏
덩이를 안고 큰언니가 엄마 몰래 동냥젓을  먹이러 다녔다. 남편이 머슴살이하느
라 몇 달에 한 번  도둑질하듯 잠자리를 함께하던 복골집 아주머니가 아이를 낳
아 다행이었다. 그래도 결코 흔하지 않은 젖을 가끔 나눠줬던 것이다. 복골집 아
주머니는 밤에도 우리집에 와서 잠  못 자는 어머니 머리맡에 앉아 이를 잡아주
었고, 어머니는 그제야 시원하다면서 모처럼 깊은 잠에 들곤 하였다.
  
  섣달이 어떻게  가고 정월 명절을 어떻게  쇠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  우리 딸 
형제는 오래도록 말로 다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밥을 먹을 때, 배가  고
파 허겁지겁 숟가락질  하는 우리들 밥그릇을 뺏던 어머니. 오라비  잡아먹은 년
들이 어디로 밥이 넘어가느냐고  욕을 하던 어머니. 우리를 웃지도 못하게, 놀지
도 못하게, 이웃  나들이도 못하게... 못하게 하던 어머니.  밤이면 오라비가 들어
와 한다고 문을 닫지 못하게 해서 우리를  꽁꽁 얼게 하던 어머니... 우리는 어머
니의 미친 병이  제풀에 나을 때까지 밥 한 끼  편히 먹지 못하고 잠 한번 편히 
자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만둬! 그만하라구! 누구 속은 임자만 못해서 이리구 있너?
  먹구름장처럼 침묵만 하고 있던  아버지는 가끔 이렇게 어머니를 나무라곤 했
다. 그런 아버지도  울화가 치밀련 담뱃대로 놋재떨이 운두를 사납게  때리곤 했
는데 결국 그 해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북간도나  갔다온다`는 말 한 마디 삐죽 
남기고 집을 떠났다. 동네에서 손재주 좋고 붙임성 좋고 말 잘하고 부지런해서 `
고약쥐`라고 불리던 아버지는 오빠를 잃은 다음, 그 별명 같은 행동을 다시는 하
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집은 서너 달  사이에 집안의 두 기둥이  빠져나가고 여자들만 남게 되었
다. 큰집 제삿날 시집간 고모가 오면 우리를 보고 욕했다.
  “쓸데없는 지즈바 간나들만 수두룩하니... 저것들  때문에 우리 오라버니가 뼛
골 빠지잖너... 저런 거 키워서 뭘하너!”
  오빠가 죽고 어머니가  딸을 낳은 다음부터 외가 쪽에서도 발길을  끊었다. 시
집간 딸이  아들을 낳지 못했거나 낳은  아들을 끝내 기르지 못하고  꺾었을 때, 
왜 친정어머니까지 한꺼번에 죄인이 되는지,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 형제와 어머니는 아주  오래도록 그러니까 운명에 대해 자포자기할 때까
지, `짐승`처럼 살았다. 옷을  빨아입지도 않고 몸은 씻지도 않았다. 우리에겐 사
람 사는 것 같은 습관이라는 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를 어떻게  헤쳐나와 이 나이 되도록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 목숨이 한낱 날파리 같은가 하면, 더없이 모질기도 하다.
 
  북간도로 떠났던  아버지는 그 해 한겨울,  한밤중에 눈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며칠이나 퍼붓던 눈으로 벌판이며 길이 다 흰  눈으로 덮여버린 때였다. 나는 진
미 버덩에 와, 눈에 홀려 한없이 헤매다 겨우 집을 찾아들어왔다. 아버지가 돌아
왔지만, 반가움과 기대는  잠깐 만에 사라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일손을 놓았고, 
해동이 되어도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 넉넉한 살림도 아닌  둘째아들네, 작은 서당집은, 짚이 너덜너덜, 수수대
가 허옇게 드러나보이는, 맞벽을 치지  않은 집에서 삼 년을 살았다. 그 동안 동
생은 배곯아 죽고  아버지는 투전판에 발을 빠뜨렸다. 어머니는 다시  애를 낳아
보려 애를 썼겠지만 죽은 동생을 낳고는 월경이 끊어졌다. 한달 두달, 한해 두해 
기다려봤지만 아주 폐경이 된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누군가로부터 나오기 사작했는지, `씨받이 첩`을 들이자는 말이 돌
았다. 대를 아주 끊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아들 낳아주러 시집을 가는  여자들은 대개 청상의 과부들이거나 밑빠지게 가
난한 아낙네였다. 그 중에서 젖먹이 아이를 가진  여자는 애가 잘 들어선다고 해
서, 그런 여자를 원하는 집도 있었다.
  어머니가 `첩`을 데려왔다.  본남편의 자식이 둘이나 딸린,  그러나 어머니보다 
한참 젊은 여자였다. 그 여자는 우리집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안주인 행세를 
시작했다.우리 세  자매를 드러내놓고 구박하고  우리가 밥 먹을  때마다 눈총을 
주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멸시했다. 어머니는 그 여자의 멸시보다 남편을 눈앞에
서 빼앗기고 사는  그 지긋지긋한 투기 때문에 메말라갔다. 불면증에  걸려 아침
이면 눈알이  새빨간 토끼눈이 되었고,  몸과 마음이 점점  더 볼썽사나워졌으며 
우리 딸들도 그렇게 되었다.
  어머니도 아들을 가슴에 묻은 채 더 이상  발작은 하지 않고 살아갔다. 하지만 
세상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홧덩어리`가 가슴에서 돌아다니는 병에 걸려, 
어머니는 가슴이 아플  때면 담배를 거푸 태웠다.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푸
우 하고 내뱉으면, 그래도 터질 것 같은 복장이 덜하다고...
  이렇게 자란 우리들은 큰언니가  열일곱에 시집을 가는 걸로 시작해서 차례차
례 `남의 좋은 일 시키러`  떠났다. `출가외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전혀 새로운 
인생살이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같이 시집을 `낮춰서`  갔다. 시집가서 고생하고 살면 목숨은 길어
진다고... 이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큰언니는 열일곱에 작은언니는 열여덟에 나는 열아홉에,  우리는 나서 자란 그
곳, 그 정든  땅과 부모님을 두고 영원히  삼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속세를 등지고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고 절로  들어가는 스님의 `출가`처럼 우리 
세 자매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고향을 등지고  부모와 일가친척 이웃의 오랜 정과
도 인연을 끊고 시집을 살러 `출가`했다. 집안 형색은 어려워도 며느리에겐 위아
래 하나같이 대접받으려는 집안으로 시집을  간 큰언니는 어느 날 밤 오빠 꿈을 
꾸었다고 했다. 오빠가  친정집 산등성이에 올라 큰언니 집 쪽을  바라보고 서서 
말하더란다. `정화야 정화야 내가 살았으면 널 그런데 시집 보냈겠니...`
  
  오빠와 얼금뱅이 어머니. 이미 죽은 지 오래된 그 두 사람은... 그러나 죽지 않
았다. 천국과 지옥으로 내 가슴에 아직도 살아 있으니... 마치 남자 신과 여자 신
처럼... 내 일평생을... 소름이 끼친다. 두렵다. 이 두려운 감정이 무엇인지...

    2
    물겁에서 송애로

  “야, 너 남 주기루 했다!”
  그날, 저녁, 밥상머리에서였다. 어머니가 숭늉를  퍼들고 들어와 상머리에 앉자
마자 말했다. 두리반에 아버지,  어머니, 나 셋이 둘러앉았는데, 어머니의 목소리
는 터무니없이 컸다.
  “야, 널 남 주기루 했단다!”
  다시 어머니가 말했다.  화가 난 목소리였다. 순간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 채 밥만 먹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도 배춧국에 밥 한 숟가락을 떠넣고 아직 젓기만 하였다.
  “들었다놨다 해봤자 하나 남은 자식, 곡식이 없으니 굶길까 걱정이너, 어디가 
빙신이니 처녀귀신 만들까 걱정이너...”
  어머니는 대꾸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싸움을 거는 것이 분명했다.
  “쯧쯧, 사람아...”
  드디어 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듣다보니 이상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내 얘기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울 
기세였다.
  “나, 시집 안가유!”
  그래서 이렇게 소리쳤다.
  “아부지가 입 떼줬는데, 어떻게 안 가!”
  어머니가 꽥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손이 떨려서 
수저를 들 수가 없었다. 몸에서 맥이 풀리는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대로 앉아 있
을 수도  없었다. 겨우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여태 이런  일은 없었다. 어디서 중신이 들어왔는데 어떤 자
리라더라, 하고 내 의견을 묻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번은 나보다 나이가 아홉 살
이나 많은 남자여서 말 꺼낸 어머니한테 마구  신경질을 부린 적이 있었다. 지난 
초여름엔 나보다  어머니가 더 좋아한  혼처도 나섰었다. 원산에  사는 남자인데 
장사꾼이었더. 양양은 물론  멀리 강릉 원주까지 다니며 장사를 해서  돈을 아주 
잘 번다는 것이었다. 그때도  나는 어머니한테 버럭버럭 화를 냈다. 특히 그날은 
중신어미가 집에까지 왔다. 아침 나절에 잘 차려  입은 아주머니 한 분이 오신것
이었다. 그 때 나는 마당가의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고 있었다.
  `누가 시집가나 봐라.`
  나는 속으로 어머니와 그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올 들어  부쩍 나를 시집 보내려고  하는 어머니가 미웠다. 딸만  셋이 크다가 
벌써 언니들은 차례로 시집을 가고, 겨우 자식이라곤 나 하나 남은게 아닌가. 정
작 시집가야 할 나는 무심한데...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어머니가 미워졌다.
  뽕잎을 따며  이렇게 어머니를 미워하고  있을 때, 아주머니와  어머니가 함께 
나왔다. 어머니는 외출 차림이었다.
  “누가 시집간다너? 안 가! 안 가!”
  나는 뽕나무 가지를  마구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뽕잎을 따서  담은 싸리광주
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내가 밥 먹으면 공밥  먹너? 딸 하나 남은 거 내쫓구  싶어서... 어릴 때부터 
그렇게 미워하더니! 저러니 새끼들이 제명에 못살구 다 쌔가 빠졌지!”
  화가 난 나는 앞뒤 가리지도 못하고 어머니를 욕했다.
  “나 하난 밥 먹는  기 그렇게 아꿉너? 그럼 내가 나가 죽으면 될  거 아니너! 
나 죽구 얼매나 잘사나 두구 보자! 새끼 잡아먹구 잘두 살겄네!”
  내가 악을 악을 쓰고 악담을 퍼대서 그랬을까? 벌써 큰집을 지나 문등이네 집 
마당 앞으로 가던 어머니가 아주머니만 돌려보내고 혼자서 돌아왔다.
  자식을 열하나나 낳아  여덟을 죽인 어머니에게 정말 못할 말을  했던 것이다. 
아직도 오빠 제삿날이면 눈물을  뿌리며 당신 스스로 제수를 장만하는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았으니. 그래도 어머니는 나를 예전처럼 욕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어느 때부턴가 더 이상 딸들을 욕하지 않았다.  어쩌면 큰언니가 시집을 가고 난 
다음부터였는지, 작은 언니가  시집가서 나혼자 남은 다음부터인지  하여튼 욕을 
먹지 않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를 시집 보내려는  기미만 느껴지
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꼭 나를  내 쫓으려는 것만 같아 분하기까지 했
다. 그래서 원수처럼 달려 들었던  것이다. 더 이상 딸을 미워하지 못하게 된 어
머니의 마음은 헤아리지도 못했고 나이 열아홉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은 딸은 
나 하나뿐이라는 것도 생각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까지 철이 들지 않았다.  물론 내 나름대로 생각은 있었
다. 어머니 아버지 세  식구 달랑 살다가 나마저 시집을 가버리고  나면 남은 부
모님이 너무 쓸쓸하다고 어쩌면 이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딸이라고 서둘러 시집
보내려는 어머니가 미웠다. 그래서 예전에 미움  받았던 것까지 송두리째 들추어 
어머니의 가슴을 후벼팠던 것이다. 그날 저녁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이 다음에 너두 딸을 낳아서 키워봐. 그때 가서 내 생각 할거여...”
  그랬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서였다. 내 딸이 나와 똑같이  하였다. 나도 그
때 한숨 쉬며 딸에게 말했다.
  “니두 어머니가 돼봐. 딸이 시집가지 않는다고 할 때 얼매나 속이 썩는지를...

  그리고 이때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
니를 붙들고 울면서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
을 떠나고 없었다. 어머니를 붙잡고 용서를 빌 수 있는 자식은, 그러므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여름 가을  지나도록 ‘시집가라’는 얘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
전처럼 시집 안 가겠다고 떼를 쓰지 못했을까.
‘야, 너 남 주기로 했다.’는  한마디에 왜 모든 것이 이미 결정 되었다고 생각
했을까. 한 사람의 인생, 그 커다란 줄기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있어서, 그것
이 작용하는지 모르겠다.
  부엌 아궁이엔 아직도 타고 있는 나무가 있어 따뜻한데도 몸이 속부터 허전해 
왔다. 방에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무어라고 자꾸만  따지고 있었지만 무슨 말인
지 잘  들리지도 않았고 나도 듣고  싶지 않아 뒤란으로 나갔다.  시월 보름달은 
벌써 떠서 천지가 훤했다. 뒤란에  붙은 대숲, 대숲 위의 큰 서낭제 등허리의 소
나무, 맨 가지만 남은  아카시아, 큰집의 용마루, 햇짚내가 나는 김치 헛간, 큰집
의 방앗간... 나는  달빛에 비치는 풍경들이 갑자기 멀리 달아나는  것만 같은 환
상 때문에 그 자리에 사그러들 듯 주저앉았다. 왜 그다지도 서럽던지.
  언제 나왔는지 어머니가 부엌문을 열었다.
  “햇아 거기 있너?”
  어머니가 나를 찾았다. 딸들 중의 막내인  나를 어머니 아버지는 ‘햇아’라고 
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야가 어딜 갔너’하면서 추워지기 시
작한 바람을 막으려 부엌문을 닫았다. 나는 뒤란으로 해서 큰집으로 갔다.
  사촌 올케는 아직 부엌에 있었다.
  “아기씨너? 지약 먹었너?”
  사촌 올케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코를 훌쩍였다.
  “아기씨야..... 왜서 ...  얼굴이가....”
  쇠여물 가마를  씻던 올케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더듬었다. 나는 
그 말에 그만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삼태기에 고질을 가득 담아 들고 작은오빠가 들어오다 나를 봤다.
  “야가 뚝멀구 아니너? 우는 거 보니 시집가구 싶은 기다야.”
  오빠가 무턱대고 나를 놀렸다. 그러자 올케가  남편한테 뭐라고 눈치를 줬는지 
오빠는 가마에 고질을 쏟아붓고 말없이 나갔다. 두  삼태기나 더 갖다 붓도록 오
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랑하지 않다고 들팽이에서 뚝멀구로 별
명이 바뀐 나는 올해를 넘기면 스무 살이  되었다. 뚝멀구는 덜익은 머루의 떫은 
맛 같다는 뜻이고 스무 살 나이는 혼기를 놓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날 밤, 나는  큰집 골방에서 잤다. 올케가 먼저 자고  가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집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은 시월 상달, 동지 섣달이 지나면 나는 스무 살... 시집을 간다..... 남의 집
으로 간다... 한번 남의 집으로 가면  다시는 친정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죽어서
도 남의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 수도 없이 들었던 그말. ‘남의 식구 될거 키
워 놓으면 무얼 하느냐’던 그 말. 그래서  언젠가는 정든집, 정든 고향, 나를 낳
아준 부모님을 떠나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내 인생이 결정되다
니.
  이미 집을 떠난 언니들. 아버지가 큰년이라고  불렀던 큰언니는 열일곱 살이던 
7년 전에, 중간이라고 불렀던 작은언니는 4년전에 ‘남의 집’으로 갔다. 성품이 
남자 같은  큰언니는 시집살이가 엄하고 고되서  대꼬챙이처럼 말랐고 약아빠진 
작은언니도 선량한  신랑을 만났다고 하는데,  둘다 집에만 오면  우선 한바탕씩 
서럽게들 울지 않던가.
  이렇게 하염없이 떠오르는 생각들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올케가 골방
으로 슬며시 들어왔다.
  “아기씨야 자너?”
  올케는 내 요 밑으로 손을 디밀면서 물었다.
  “춥지 않너? 불을 대느라구 뗐는데 미적지근하네야.”
  올케가 미안해서 하는 기색으로 말을 했다.  나는 언제부턴가 입이 붙어버려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올케는 잠시  말없이 앉아 있다가 괜한  마른 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설거지하구 나서 내가 작은댁에 갔잖너,  두 분이 다퉜는지, 여엉... 작은어머
니는 우시구... 작은아버니가 아기씰 어디다 입 떼줬다구 그러는 거 같재, 증말루 
그렀너?”
  올케가 물었다. 나는 다시 쿨쩍거렸다.
  “아기씨야, 아기씨두 여잔데  여자란 기 다 때가 있는 기  아니너? 이해 넹기
문 스무살이 되지 않너. 아기씨  나이두 생각해야지 뭐. 이 세상에 친정 부모 떨
어져 남의 집  가구 싶은 딸이 어디 있을라구... 우리가  여자루 태어났으니 어찌
겠너. 억울해도 할 수 없잖너. 아기씨 듣기에 매 말이 틀렸너?”
  올케는 천천히 내  기색을 살펴가며 말했지만, 붙어버린 내입은 떨어질  줄 몰
랐다. 물론 올케의 말은  그른 말이 아니었지만 나는 올케가 야속했다. 식구들이 
모두 나를 내쫓으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사실은 무엇보다 두려웠다. 남의 집
에 가야 한다는 걸 피할 수 없어서.
  다음날 아침 나절에 올케가  감을 다서 한 반탱이(나무로 만든 세숫대야  크기
의 용기)나 주며  집에 가져가라고 했다. 집 뒤와  마당가에 둘러 있는 감나무의 
감을 식전에 오빠들이 다 땄다고 했다.  감나무엔 상수리에만 까치밥거리로 샛노
란 감이 여남은 개씩 남아 있었다. 올케는 내가 집으로 들어가기 멋쩍어할까, 슬
쩍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다.
  감 반탱이를 들고 마당에 들어서는데 방 안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다투는 소
리가 들렸다.
  “.... 집안을 봐야지  그래 참나무 장작 대구  이밥만 먹으면 뭘하너! 그  집안 
성질 나쁜거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
  “임잔 모르는 소리 하지두 말게. 임자한테 귀한 자식 나한테두 귀할세!”
  “그래두 그렇지 요새같이 훤한 세상에  딸을 어디다 못 줘 해필 산골루 보내
너! 영감탱이가 그저 술이라면.... 그래 술 얻어 먹구 술김에...”
  어머니는 아직도 확  풀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애가 방으로  들어가자 입
을 다물었다.
  나는 방 안에 들어가 온종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아버지하고 
곶감을 깎았을 것이었다.
  나는 이날 온종일 이불보에 수를 놓았다. 마음이  어수선해서 다른 일은 할 수
가 없었다. 이럴 땐  수틀을 자고 거기에 빠지면 모든 걸 잊게  되었다. 이날 밤, 
동무들은 언년이네 집에 모여 밥 추렴을 하기로  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당시 
우리들 은 어머니  몰래 쌀을 한 줌씩 움쳐서  동무네 집에 모여 이밥을 해먹고 
밤늦도록 삼을 삼거나 수를 놓으면서 유행가도 배우고 신파극 얘기도 하는게 큰 
즐거움이었다.
  다음날이엇다. 이날도 나는 수틀만 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온종일 큰집에 가서 
메주를 쑤었다. 세간 난 큰집 형제들의 메주를 한거번에 쑤자니 일이 많았다. 그
런데 저녁밥을 먹고 났을  때였다. 마당에서 뭔가 어수선한 기미가 일었다. 이상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떨리기 시작했으니.
  “왔어!”
  “하마 왔너?”
  “하나이 왔너?”
  “둘이 왔는데.”
  ‘왔다...’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 그 말소리. 누구의 것인지는 잊었지만 그 말
만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사촌 오빠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획 돌아 앉았다.
  “야, 니 신랑자리가 왔다야.”
  오빠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정신이  아찔하고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
했다. 손이 떨려서 수틀을 떨어뜨렸다.
  “닐 선보러 왔다잖너.”
  오빠가 다시 말했다.
  이젠 몸 속까지 시려 온몸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손발이 얼어들었다.
  “뚝멀구야, 이젠 할 수 없다. 아버지가 허락한 이상 한번 봐라야.”
  오빤 대책없이 떨고 있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처음 방 안에 들어올 때와
는 달리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얼어드는 손가락을 비틀고 발을 치
마폭에 감싸서 발가락을 주물렀다.  ‘시집가기 싫다.’‘나는 시집가기 싫다...’ 
속으로 자구만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미  내 마음 같은 건  소용이 없었다. 시집을 가고  시집살이를 해야 
하는 건 나였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이
라는게 있었으니....
  마음이 급해진 오빠가 사랑방을 들락거리다가 다시 내게로 왔다.
  “야, 정옥아, 신랑자리가 정종 한 병을 사왔잖너야.”
  오빠는 일본 술 정종 한 병이 어찌나 기뻤던지 내 별명 뚝멀구 대신 ‘정옥’
이란 이름까지 불렀다.
  결국 나는 내  마음만큼 오래도록 버텨보지도 못하고, 선을 보러  와서 기다리
고 있다는 신랑감에게로 갔다.  그들 -총각과 그의 큰아버지- 는 볏가마니가  가
득 쌓여 있는 사랑방에 앉아 있었다.
  그 방에 들어가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남자가 뭐라고 말할 때, 목소리가  좋게 들리던 것, 그리고 들어가고 나갈 때 언
뜻 눙에 들어온 그  남자의 얼굴이며 몸집이 좋아 보이던 것... 이상하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거, 어머니조차 울면서  반대하던 그 남자가 홰 싫지 않았던지. 그토
록 서럽고 두렵던 내  마음은 이상스럽게도 정리가 되었다. ‘시집을 간다. 새로
운 인생이 시작된다.  잘살아야지....’여자는 딸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집을 떠나
게 길러지니까. 놀랍게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선을 본 다음날, 이른  아침에 파일리에서 큰언니가 달려왔다. 언니는 문 구멍
으로 사랑방을 들여다보고는, 정신 빠진 나 한테 와서 말했다.
  “야, 니 두구 봐라.  속 같이 썩지! 저 남자 인상을 보니 눈자위두  그렇구 미
간이 붙었잖너? 남자 상이 저렇게 생기면 속이  넉넉질 못하단다. 하여간에 니는 
큰일이다. 큰일이여. 어머이 아버이가 왜서 저런 데루 닐 보낼란지 모르겠네.”
  이런 큰언니의 말에 겁이 덜컥 났다. 겨우  달랜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불만도 혼삿날까지 가라앉지 않았다. 틈만 나면 아버지에
게 화를 내고 싸움을  걸었다. 하나밖에 안 남은 딸 뭐가  아쉬워 그런 산골짜기
로 보내느냐. 중매쟁이  하는 말, 그걸 믿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영감 같은 술꾼 
바보 아니고 어디  또 있겠느냐... 중매쟁이는 그  남자가 철광에 다니는데, 전기 
기술자라 그가 없으면 기계가  안돌아가고 국민병 징용도 면제되며 부자라서 참
나무 때고 이밥만  먹는다. 지금은 식구들이 산골에 살지만 곧  ‘웃드루’로 나
와 살 것이다. 대대로 아들만 많이 낳는 집안이라  자식 못 볼 걱정도 없다는 말
들을 아버지에게 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무슨 근거로 그랬는지 이런 조건들이  다 거짓말이라는 것이었다. 그
러나 아버지가 한번 말을 떼어놓았기 때문에‘파혼’이라는  걸 할 수도 없었다.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  불안한 마음을 고쳐먹으려 애썼다. 걱정
은 되도록 하지 않고  시집가서 잘 살 생각만 하였다. 하지만  이런 결심은 어제
나 순간이었다. 곧 다시  불안에 휩싸였다. 도대체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모르는 남자와 한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불안
은 끝이 없었다.
  그런데도 일은 아주  성급하게 진행되었다. 신랑이 나를 선보고 간  이틀 후였
다. 중신아비가 우리집에  사주단자라는 걸 ‘던져놓고’갔다. 세상 어디에 그런 
사주단자가 있으리. 네 귀퉁이 맞춰 찢은 무명 보자기에 둘둘 만것. 보자기 속엔 
신부 옷감 한 벌과 사주를  쓰고 택일한 한지가 들어 있었다. 기가 막혔다. 어머
니가 흐느껴 울었다.
  “한 가질 보문 열 가질  안다더니, 거 봐라. 언제 산골에서 제대루 사람 사는 
거 한번 봤겐.”
  어머니가 불길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잔칫날은 꼭 보름 후였다.
  보름 동안, 우리집에선 잔치 준비 때문에 누구나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지
냈다. 아버지는 대물릴 장농을  짜야 한다고 양양을 몇번씩 다녔다. 그래도 보름 
만에 농을 짤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듬해  시집으로 장농을 보낼 때가지 양양을 
열일곱 번이나 오갔다고 했다. 오가는 길은 먼 육십리였다.
  동네 동무들, 일가의 여자 형제들이 꽃수를  놓은 베개 마구리, 골무, 주머니에 
달 고추 같은 것을 추렴해 주었다. 그리고 밤이면 자주 우리집에 모였다. 하루해
가 그때처럼 빨리 간다면 사람살이가 아주 달라질지 모른다.
  이렇게 정신없이 바쁜 어느 저녁때, 중신아비가 우리집으로 왔다.
  “저어... 그거 뭐 크게 신경 쓸게 없을 거 같네만, 궁합이....”
  그는 사주도 보고, 택일도 하는 사람이었다.
  “... 아무래두  궁합이 좀 그래서.  내 생각엔 액맥이를 하구  가는 게 좋겠어
서....”
  그가 말했다.
  “아니 우리가  아저씨네 하구 무슨 원수진  일 있대유? 아저씨! 다른  양반도 
아니구 아저씨가  직접 나서서 한 중신을  그래, 궁합두 안 보구  사주단자 먼저 
보냈단 기 말이나  돼유? 조선 팔도에 그런 법  이 있단 말 난 못  들어 봤네유. 
혼사가 인륜지 대산데 안헐 말루 이랬다 무슨 일이래두 생긴다문 아저씨가 책임
지겠어유. 사람 일이라는 기  너나 없이 한 치 앞을 모르니까  사주두 보구 궁합
두 보는 기 아니래유? 아저씨넨  어떤지 몰러두 우리집 딸덜 남의 집 아들 못잖
게 키웠어유! 아무렇게나 입 하난 덜라구 시집보내구 그리진 않어유!”
  그날 어머니는 무서웠다.  오래도록 벼르고 벼르던 말을 봇물 터진  듯 쏟아냈
다.
  “임자, 왜서 그리너. 다 좋자구 하는 일인데. 그만 해두게.”
  아버지가 어머니를 말렸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린 딸만 키워두 남들 아들같이 키웠어유.  딸이라구 설움주지 않구 키웠다
구유!”
  그때 어머닌, 아마 당신의 한  때문에 더 화를 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
은 끝난 뒤였다. 어머니의  한이 어느 것도 뒤바꾸지 못했다. 중신아비는 ‘액맥
이’방법을 가르쳐주고 돌아갔다. 그는 적삼을 따로  만들어 하룻밤 입었다가 시
집가는날 가마에 넣고 가  파일리 ‘뫼맥이’ 서낭나무 가지에 걸어두라는 것이
었다. 뫼맥이는 파일리와  물갑리 사이를 가로막은 산등성이의 이름이었다. 원래
는 양쪽 산이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산세가  인물을 낳게 한다고, 그걸 막으려고 
나라에서 흙으로 메워 산을 붙였다 해서 뫼맥이라고 했단다.
  잔칫날은 동짓달 초닷새였다. 동짓달로 접어들면서 사흘 내내 눈이 내렸다. 눈
이 그친 초나흗날은 거렁뱅이 빨래하라고, 해가 반짝나고 따뜻했다. 그래서 쌓인 
눈이 녹아 사방이  질척거렸다. 친척들은 눈도 그치고 날씨도 풀려서  ‘날이 잘
한다’고 일기를 칭찬했다.
  신랑은 이날 우리집으로 왔다.
  그러나 정작 잔칫날인 다음날, 밤사이 추위가  몰아쳐서 천지사방이 꽁꽁 얼어
붙었다. 바람이  매섭게 불었으며 눈발도  흩날렸다. 무섭도록  매정한 날씨였다. 
전안시가 꼭두새벽으로 나서,  우리는 새벽 찬바람속에서 잔치를 했다. 추운것도 
그랬지만 차일 펄럭이는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어제 녹았던 길은  얼어붙어 발
을 디딜 수 없이 미끄러웠지만 가마는 시집으로  떠나야 했다. 그날 어머니와 어
떻게 이별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도망치듯 그렇
게 서로를 피했을지도  모른다. 언니들 올케들이 눈물을 감추며 ‘가서  부디 잘
살라’고 울먹이며 하던 말밖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가마는 뫼맥이 서낭  고개에 잠서 섰다. 사촌 오빠가 적삼을  서낭에 걸어두고 
왔다. 그래도 얼어붙은 길은 물갑리 화일리 물웃구미 웃드루가지 괜찮았다. 여기
까진 아직 판판한  길이었다. 짚신발에 가마를 메고 얼음판을 걷는  길이니 가마
꾼들은 힘이 들고  걸음은 더디기도 했다. 내 마음은 이래저래  불안하기 그지없
었다. 그래서 좋은  생각을 해보려고 애를 썼다.  시집은 일생에 한 번  가는 것. 
시부모님 공경하고 남편한테 잘하고... 시집살이를 잘하자. 남편은 맏이니 책임이 
클것이다. 어떻게든지 집안을 일으켜, 친정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가마 속은  말이 가마지 한데나  다름없이 추웠다. 산골이라는  시집은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있는지.  하염없이 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마을이란 마을
은 다 지난 것 같고 짧은 동짓달 해는  어디 있는지, 산 속으로 들어가면 어둑해
졌다가 한참 있어야  다시 훤해지곤 했다. 잘 살아서 부모님께  효도하자고 입술
을 깨물고 다짐을 해보건만  산그늘이 느껴지고 산바람 소리가 무섭게 들릴수록 
내 마음은 어느  결에 서러움으로, 눈물 속에  잠겨 들었다. 어느 산,  깊은 골에 
들어가, 다시는 부모님 만나지도 못하고 살 것만 같아서 울고 울고 울었다. 산길
이라 그랬는지 가마는 갈수록 더운 더 출렁거렸다.
  신부가 똥이 마려우면 안  된다고 먹지도 않은데다 가마까지 출렁거려 어지러
웠다. 가마멀미에 서러움이 겹쳐 내 꼬락서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는 그래도 나았다. 산그늘을 벗어나는가 했더니  드디어 가마꾼들이 입씨름을 하
기 시작했다. 누군가 먼저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했다. 신부가 내려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걸어가라고? 나는  신부였다. 그럴수는 
없었다. 도대체 나를 뭐로 봐서 걸어가라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일은 논고릿재에서  있었다. 그 험한 것이 발딱 자빠진  형상이라고 ‘빨딱
고개’라 부르는 데였다.  육촌 동생은 발이 미끄러워 올라갈 수  없으니 신부를 
걸려야 한다거니, 사촌오빠는  신부를 걷게 한다는 건 하늘 아래  어디에도 없는 
법이라거니 서로 다퉜다. 결국 오빠의 법이 통해서  나는 가마에서 내려 걷는 수
모만은 면했지만  수도 없이 가마가  땅바닥에 곤두박이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앞서 가던 동생이  미끄러지며 가마채를 떨어뜨렸던 것이다.  논고릿재를 올라가
는 동안 가마가 몇번이나 자빠지고 곤두박였는지 셀  수도 없다. 그리고 나는 얼
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어쩌면 평생 흘릴  눈물은 그때 다 흘렸는지도 모른
다. 논고릿재. 그 빨딱고개를 넘어서도 가마는  자꾸만 갔다. 다람쥐나 토끼가 다
닐 것 같은 길로 오르락 내리락 하염없이 갔다. 얼어붙은 개울도 건넜다. 그래도 
시집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  사는 동네를 지난 게 언제였던가. 오래도록 마을
조차 지나치지  않았다. 산나물을 뜯으러  이산 저산 다녔어도  이렇게 먼데까지 
와본 적은 없었다. 도대체  어디 평평한 데가 있어 사람 살  집이 들어앉아 있을
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산 속이니 나무가  많아 참나무야 떼겠지만 어디 산비탈
에 논이 있어 이밥을 먹으랴.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훤한 세상을 볼 수 없을 것
만 같은 깊고 깊은 산중으로 가마는 자꾸만 들어갔다.
  이른 아침 길을  잡아든 가마는 해진 저녁에야 마침내 시집마당에  닿았다. 달
아맨 듯한 산,  허리를 쳐내어 집터를 닦은  이상한 집. 지붕에 짚이엉을 올리지 
않고 나무껍질로 덮은  집. 화전민들은 논농사가 많지 안하 짚이  귀하고 그래서 
굴피를 올리고 산다는 걸 그땐 몰랐다. 하여튼  캄캄한 밤중이 아닌것 만도 안심
이 되고 사람 사는 집에 왔다는게 기뻤다.
  가마에서 나온 나를  젊은 여자들이 인접들어 방으로 데려갔다. 나는  눈을 내
려뜨고 있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방 안을  들여다보곤 한마디씩 
했다.
  “신랑만 못하잖너.”
  “신부 인물이 글렀네야.”
  “인물이 매렌두 없어.”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내겐 그런 말이 나를 두고 하는  것 같지 않
았다. 나는 이미  논고릿재를 넘을 때 정신을  잃은, 사람도 아닌 허깨비나 다름 
없었다. 방은 위풍이 세고  바닥만 뜨거웠다. 그래서 내가 앉은자리도 요를 포개
어 두텁게 깔았다.
  누군가 메밀국수를 뜨겁게 말아서 가져왔다.
  “이거 좀 먹세. 너른 버덩에서 여기까지 오느라니 죄련했겠너. 보나마나 뻔하
지. 이 추운 날 쏙었네. 뜨거운 국시 국물이래두 마세 보게너.”
  나는 아이처럼 떠넣어 주는 국수 국물로, 그러나 입술만 적셨다.
  “하여간에 오늘이 젤루 힘든 날이라구만 예기게나.  여자가 시집가는 날이 본
시 이렇잖너.”
  인접 드는 여자가 말했다.  친절한 여자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여자는 재작
년에 시집온 먼 동서뻘 되는 여자였다. 그래도  인기척만 나면 나는 지체없이 자
리에서 일어섰다. 신부를 보러, 좁은방 안으로 쉴세없이 사람들이 드나들어서 나
는 앉았다  하면 곧 다시 일어서고  다시 앉았다 일어서기를 되풀이  했다. 힘든 
시간이었다. 잔칫날은 그렇게  힘든 날이라고 어른들도 와서 인사말처럼 하였다. 
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힘든 시집살이,  새로운 삶, 고단하고 서러운 인
생의 날들은 아직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얼었던 몸이 녹아서일까? 입을 적신 메밀국수  국물 탓일까. 나는 오
줌이 마려운 걸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인접드는 여자에게 말했다.  그 여자가 바
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캄캄했다. 그러나 그 캄캄한 것보다 더 새까만 산이 주위
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었다. 가슴이 콱  막혔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쯤인가. 아
무리 얼음길이라 해도  장정들이 온종일 걸음으로 겨우 닿은 여기,  친정에서 삼
십 리 길이라던 여기가 어디쯤인가. 한번 막힌  앙가슴은 깊은 숨을 몰아 쉬어도 
터지질 않고 쓰라렸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푸르게 빛나는 
샛별이 보였다. 친정 마당에서도 보았던  별, 북두칠성도 보였다. 어머니, 아버지, 
사촌들, 동네 동무들  생각이 솟구첬다. 이제 영영 언니들과도  이별인가. 설거지
하다 말고도 달려올 수 있는데 사는 언니들인데 나는 왜 이런 외딴 산골가지 와
야하나... 마음은 을씨년스럽고 몸은 와들와들 떨렸다.
  폐백을 드리고 나서  골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뒤란 장독대 맞은편에  있는 방
이었다. 그런데 이 방은  냉골이었다. 아궁이가 내서 도무지 불길이 들지 않는다
고 누군가 말했다.
  사람들이 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았다. 나도 오래 전에 사촌  육촌 형제들
이 결혼을 하면 어른들  툼에 끼여 구경을 했던 문 구멍으로,  이제 내가 구경거
리가 되어 있었다.
  신랑은.... 수줍어서 그랬을  거라고.... 나는 나중에야 이해하게  되었는데, 그날 
밤, 신랑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겨우 족두리만 벗겨놓고서, 그래,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문  구멍 바깥의 사람들도 좀체 떠나지를 않았다.  그때, 왜 그
랬을까. 왜 나는 참지 못했을까. 무엇이 그렇게  견딜 수 없었을까. 나는 한삼 자
락으로 불을 훅 꺼버렸으니....
  “신부가 불을 껐어!”
  “희한하네야.”
  이런 말소리가 쑤근덕쑤근덕 들려왔다.
  불 꺼진 방은 어두웠다. 그래도 신랑은 담배만 태우고 앉아 있었다. 한동안 장
승처럼 앉아 있던 나는 이번에도 펴놓은 이불  속으로 먼저 들어갔다. 긴장 때문
인지 지친 탓인지 나는 잠들지 못했다. 남편이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그가 이불 
속에서 내 속옷을 벗겼다. 먼저 시집간 동무들이  친정에 왔을 때 호기심으로 물
으면 얼굴 붉히며 말하던  ‘그 일’을 신랑이 내게 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
았다. 뼈가 뜯기는 것 같은  아픔으로 나는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어른 여자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서로  부끄러워 얼굴을 피했다. 뒷잔칫날인 이날 내내 그
랬다. 어제 인사를  나누지 못한 가까운 일가붙이들에게 절을 하고  덕담을 들었
다. 시할머니들도 많고 삼촌, 사촌, 육촌,  팔촌에... 손아래 일가 동서, 시동생, 시
누이들까지 대가족이었다. 특히  넷이나 되는 친시동생들의 입성은  나를 놀라게 
했다. 아무 헝겊이난 대고 누덕누덕 기운 옷들을 입고 있었다.
  “... 니가 식구 없는 데 살다가 식구 많은 데 와서 여북 고생스럽겐...”
  문안 인사를 드릴 때,  시할머니가 말했다. 어제 폐백을 드렸겠지만 그땐 정신
이 없어 제대로 볼 수 없었던 할머니였다.  목소리는 맑고 가볍지 않았으며 말과 
행동이 음전하셨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시할머니는 읍내의 양반 집안에서 시집
을 온 분이었다. 화전골의 둘째아들한테 시집을  와 사남매를 두었지만 서른넷에 
과부가 되어, 그 과부 설움 딛고 사느라  호랑이 같이 살아서 ‘호랑 과부’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다.
  “시동생들 많은 데 와서 니가 고생이 많겠다.”
  시아버지가 문안 인사를  하는 내게 말했다. 시할머니의  둘째아들이고 신랑은 
시아버지의 큰아들이었다.
  나를 보러 온 많은 사람들은 모두들 나를  반기는 게 분명했다. 특히 시할머니
의 따뜻함과 시아버지의 너그러움이 느껴져  아직 정신이 쏙 나간 내게 큰 위안
이 되었다.
  “우리 준태야 다  괜찮지... 인정도 많고 인물도 저만하면 다  괜찮아 그저 ‘
뿔뚝밸’만 아니문..”
  시할머니가 말했다. 준태는 신랑의 이름이었고 그는 정말 인물이 좋았다. 이목
구비, 체격, 목소리,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의 그런 외양에 반했던 것 같다. 얼굴 잘생기고 힘센 신랑. 그와 함께 있을 때면 
호랑이가 나온대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후 그가 돌이
킬 수 없게 망가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그는 부드럽고 연약했다.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런 걸 느꼈다. 나보다 나이는 한  살이 많지만 그
리고 몸은 나의  두 배는 되겠지만 그는 내게 ‘웅크리고  파고드는’게 있었다.
이런 걸 내가  그때 이미 알아챘는지 이제 와서 회상하자니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핏줄인 그의 동생들에게서 보이는 가난의 때가 그에게는 없었다.
  다음날, 시집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이침잠이 없는 나는 창호지가 
푸르스름할 때 벌써 눈을 뜨고 있다가 부엌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일어났
다. 살그머니 일어났는데도  남편이 치맛자락을 잡았다. 더 자라는  것이었다. 그
렇지만 나는 부엌으로 나갔다.
  부엌은 너무도 을씨년스러웠다. 추운 건 한데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잔치 뒤끝
이라 그런지 흙 부뚜막 여기저기가 떨어져 나갔고 흙칠은 며칠이나 하지 않았는
지 아궁이는 그을러 새까맸다. 부엌 바닥도 고르지 않아 울퉁불퉁했다.
  부엌의 궁색함에 마음을 다쳐  망연히 서 있는데 시어머니가 무청시래기를 들
고 들어왔다.
  “어머님 뱀새 펜안하셌어유?”
  나는 얼른 이렇게 인사했다.
  “벌써 일어났너? 씨래기 삶게 보강지에 불이나 땔란?”
  시어머니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도 서운했다. 시어
머니의 말이니  거역할 수는 없어서  관솔가지에 밑불을 붙여  장작불을 피웠다. 
마른 장작은 탁탁 소리내며 잘 탔고 불 기운에 부엌의 냉기도 가셔졌지만 내 가
슴엔 이상하게 눅눅한  기운이 짙게 어렸다. 초라하고 격식 없던  사주단자 생각
이 났다. 어머니가 왜 아버지를 그토록 원망했는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이때 시할머니가 부엌으로 들어오다 아궁이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기겁을 
했다.
  “어멈아, 숭악하게 이기 뭔  일이너? 새각시가 부엌에 나오구... 아예 이런 법
은 없다!  어영 큰아 있는 데루  들어가거라. 어여! 어멈은 새애기를  들여보내지 
않구....”
  “어니구 저년어 할멈쟁이 말따구 좀 봐. 누군 잔칫날 저녁부터 부려먹구선에!

  시어머니는 시할머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렇게 내쏘았다.
  “지 에미 씹구녕에서 나올 때, 사람은 다 한가지여!....”
  시어머니는 마치 이때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이  마구 시할머니를 욕했다. 시
할머니는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불화로  같이 되었다. 나도  시할머니나 다름이 
없었다. `...그 집안 성질 나쁜거 모르는 사람이 없다`던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수치심에 말문이 막혀 우두커니  서 있던 시할머니는 그림자처럼 부엌 문턱에서 
사라졌다. 시어머니는 시할머니가  없는데도 한동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욕을 
했다. 하지만 이날의 이런 정황은 하찮다고 해야 하리라.
  수십년 전, 흉년이 거푸  들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늘어나던 때, 시어미는 굶겨 
죽이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  당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홉 살 나
이에 민며느리로 이곳에 ‘팔려’왔다. 먹는 입 하나  덜자고 어린 딸을 남의 집
에 ‘푼돈’받고 보낼 형편이니 그 나이까지 보고  들을 게 뭐 있었을까. 이곳에 
온 첫날. 아홉 살  여자아이는 방안에 홀로 낮아 푸른 눈을  뜨고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더란다. 이른  심부름하기 싫어하고  이골 저골 다람쥐처럼  돌아다니기만 
밝혀, 매도  많이 맞았단다. 집안 식구들에게만  맞은 게 아니라,  한동네에 사는 
일가붇이들에게도 숱한 매를 맞았다고.
  그렇게 살다가 나이 열다섯이 되었을 때 집안의 머슴처럼 일만 하던 유복자인 
둘째아들과 혼인을 했다.  그러나 아내와 며느리가 되고도 시집의 여러  어른 들
한테 매맞으며 살았다. 내 남편은 그 시어머니의 첫재아들이었다. 하지만 시어머
니는 당신이 낳은 첫아들의 유모 노릇만 해야  했다. 그때까지 장가를 열두 번이
나 가고도 자식을 두지 못한 시아주버니에게 아들을 넘겨줘야 했기 대문이다.
  동생의 첫아들을 데려다 기른 남편의 큰아버지,  나의 큰시아버지는 내가 시집
을 갔을 때도 자식이 없었다. 한 번도 손에  흙을 묻혀보지 않았을 것 같은 인상
의 그는 이미 쉰 살이 훨씬 넘은  나이였다. 남편은 자기 아버지보다 큰아버지를 
더 닮았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속도 닮았는데, 그것이 바로 시할머니가 말하
던 ‘뿔뚝밸’이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 열두  번이나 얻었다는 여자들에게서 아
들 둘을 보았지만 하나는 서너살 먹어 죽고 하나는 귀하다고 너무 싸서 어린 살
이 물러서 죽었단다.
  홀아비로 살고 있는 그에게 가끔 일곱번째 아내였던 수동댁이 와서 한둘 달씩 
살다 가곤 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이미 인연이 끝난 아내여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다른 여자를  물색중이었다. 그는 수완이 좋아 산판도 하고  숯가마를 열어 
돈을 잘벌었다. 그렇게  번 돈을 싸들고 한참씩이나 외지로 다니다  송어리로 돌
아올 때면 양복에 중절모 쓰고 화류게 여자  달고 자전거를 타고 왔단다. 그렇게 
그를 따라온  여자들은 애게 한두달, 길어봤자  한두 해 살다 가버렸다.  `영감이 
성질이 나쁘고 잘 때려서 살 수가 없다`며.
  신랑은 직장인  철광으로 갔다. 시할머니가 밥을  해주러 함께 갔다. 결혼하기 
전에 이미 두 사람은 철광  동네 `얼롱골`에서 함께 살았다. 나는 송어리에 남아 
낮설고 정 붙지 않은  시집 식구들을 위해 일했다. 처음 며칠은  팥을 삶아 조밥
을 해서 먹었지만 곧, 콩나물을 놓아길러 죽을 끓여 먹어야 했다. 식구가 많으니 
빨래도 많고 헝겊쪼가리를  대고 기울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일은  겁나지 않았
다. 무서운 건  가난이었다. 아침부터 죽을 먹는 형편을 아고  나니 기가 막혔다. 
나는 친정에서  먹는 걸 걱정하고  살아보진 않았던 것이다.  큰시동생은 우차를 
몰아 품을 팔았고  다른 동생들도 열심히 일했다. 둘째 시동생은  온종일 숯가마
에서 일을 하다 새까만  얼굴로 늦어야 돌아왔다. 식구들은 아무도 놀지 않았다. 
누구도 놀 수가 없었다.  가마니, 숯가마니, 숯, 칡가루 등 공출댈 것이 한두가지
가 아니었다. 식구들은  공출에 눌려 정작 식구들이 먹을 칡가루조차  남기기 어
려웠다. 물론 나는 칡은  간식으로 들고 다니며 씹어먹는 줄이나 알았다. 그런데 
시집에선 그것이  끼니를 때우는 식량이었다. 기가  막혔다. 그래도 아직 굶지는 
않았다.
  어느 날엔 이런  일도 있었다. 목너매 고개에 큰 시동생이  옹노를 놓아두었는
데 거기에 새끼  산돼지가 맞았던 것이다. 밥상머리에서 돌아서면 이내  속이 허
전하던 때, 이런 행운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산골 생활은 농촌하고 이런 게 다
른가 보았다. 식구들은 모두들 연한 돼지고기를 실컷 먹었다. 시아버지는 옛말에 
시절이 수상하거나 흉년이  들면 산에 가야 굶어  죽지 않는다고 했다면서 산골 
생활이 불편하지 않은 듯이 말했다. 산이나 골짜기  개울 어디에도 사람 먹을 것
이 있다는 것이었다.
  시집에서 스무 날쯤  지내고 얼롱골 철광으로 내려갔다.  시할머니는 송어리로 
돌아가고 남편과 둘이서 신접 살림을 시작했다.
  남편이 기술자라  그가 없으면 기계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중매쟁이가 허풍을 
떤 그곳. 장승백이 탄광은 일본인 회사였다. 1941년에 채광을 시작했으니 그때가 
문을 연지  삼년째였다. 남편처럼 기술자로  채용된 현지인도 있었지만  저 남쪽 
지방 곳곳에서 강제 징용되어 위험한 굴 속에 들어가 철을 캐는 일을 하는 조선
인이 많았다.  철광 노동자가 이천 명  안팎이었다니까. 거기다 이곳에서 나오는 
철은 자철 성분이 아주 많이  들어 있어 `노다지` 광산이라고 남편이 말해 줬다. 
여기서 캔 철은 모두 일본으로 실려갔다.  당연했다. 이때, 우리땅에서 우리가 만
든 것 치고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은 게 어디 있었을까. 우리는  일본을 위해 이
하고 일본을 위해 살아가는 신세였다. 모든  신작로는 일본으로 가져가는 조선의 
물산을 운반하기 위해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  졌다. 철광석을 항구가지 운반하
기 위한 화물 철도도 그래서 닦였다.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질곡을 나
는 어렸을 때부터 친오빠나 사촌 오빠들에 들어  알고 있었다. 주인이 자기 땅에
서 노예로 살아야 하는 치욕의 삶...
  그런데 남편은 일본인 관리의 사택에 가서도 일을  했다. 그는 자기가 다른 조
선인 노동자와 달리 결코 업신 여기게 일하지  않는다고 늘 강조했다. 자기가 맡
은 일을 빈틈없이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는 
자기가 맡은 일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그것은 일에서나 사람에  대해서나 마
찬가지였다.
  이즈음의 남편 그러니까 내가 미나미 사택으로 와서 한 두 달 지날 때까지 그
는 정말 거의 빈틈없이  내게 잘했다. 더욱이 그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
에 퇴근을 하면 곧장 집으로 왔다. 어떤  날 일본인이 모찌떡이나 오꼬시를 주면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와 내게 주었다. 이제 회상해 보니 내 인생에도 `달콤했
던` 한때가 있었다.  사람의 한평생을 괴로움의 바다라고도 하는데, 사노라면  한
때 이런 달콤한 때도 살게 되나 보다...  더욱이 알지도 못하던 남자와 여자가 만
나서.... 그랬다. 그때 그는 내게  아주 잘해 주었다. 내가 밥을 하고 있는 부엌에 
나와 앉아서 마늘 파를 다듬어 주고 멀리 떨어진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 주었
다. 관사에 사는 모든  여자들이 나늘 부러워했다. 다림질을 하면 맞은편에 앉아 
빨래를 잡아 주었다. 그땐 무쇠다리미가 사발같이 생겨  그 속에 숯불을 넣어 다
림질을 했다. 풀 먹여  발로 밟아야 하는 빨래 손질도 언제나  그 사람이 해주었
다. 힘이 센 그가 밟은 빨래는 다림질 한 것처럼 잔주름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 내 남편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들어본 사람은 다 안다. 그
는 노래자랑에도 여러 번  나가 상을 타왔다. 흥이 나면 그  흥이 가라앉을 때가
지 그는 혼자서도 유행가를 불렀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김정구보다 더 잘 부
르는 것 같았다. 휘파람도 잘 불었다. 잘  생긴 얼굴, 듬직한 몸에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다녀서 나는 그를 남들에게 내보이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때 왜 그렇
게 남편이 자랑스럽던지, 발목 손목이 어찌나 굵은지, 보기만 해도 믿음직스럽고 
의지가 되었는데....
  송어리 집에서는 시할머니가  거의 너더댓새 꼴로 한  번씩 이곳 사택으로 왔
다. 보자기를 열면 반 되는  될 그것을 행여 식을까 얼마나 폭폭 쌌던지, 한참이
나 보자기를  풀었으니까. 남편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 대신  군것질을 아이보다 
더 좋아했다. 시할머니는  핏덩이로 손자를 받은 이래 그 손자  아끼고 보살피는 
낙으로 평생을 산 여자였다. 그래서 손자가 스물  나이에 장가들어 제 색시와 사
는데도 그 마음씀이  여전하였다. 이때쯤이면 우리 준태가 무얼 먹고  싶어할 것
인지 너무도 잘알았다. 정말 두사람의 마음 통하는 걸 보면 놀라울 때가 많았다. 
그가 무엇이 먹고 싶다고 말하면 언제나 바로  그것을 가지고 할머니가 왔다. 그
러나 내겐 그것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내가 송어리에  있을 때 아침부터 죽을 먹
었는데 무슨 돈이 있어 쌀을 떡을 한단 말인가.
  얼롱골에서의 `신혼 생활`,  그 달콤한 시간이 서너 달쯤 지났다.  그리고 봄이
었다. 남편이 어느  날인가부터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는 걸 나는  재빨리 알았어
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무조건 의지하고 있어서 내 쪽에서  먼저 그의 기
분을 살필 줄  몰랐다. 그저 몸이 좀  찌뿌드드해서 잘 눕겠거니, 그렇게만 여겼
다. 그는 남자, 여자인 나의  `주인`이었다. 도대체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알 수 있
을까. 자기 자신도  제대로 모르는 게 사람이  아닌가. 어쩌면 사람은 자기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  거기다 천지만물까지...그 알지 못하는 것들  사이를 눈뜬장님
의 형상으로 평생 헤매다 죽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날, 아마 남편은 몸이  불편하다고 출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기분이 
언짢아도 일을 나가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곳에  맘이 맞지 않는 사람이 생기면 
그는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다른 날이나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일어나  그의 출
근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등을 흔들어 깨웠더니 그
는 한동안 꿈적도 하지  않다가 `어디 아퍼유?` 하고 묻자 `날 근드리지 마!`  하
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쇳소리 나는  목청에 질려 아무 말도 더는 하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갑자기 그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밥을 먹지 않
고 있으니 나  혼자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잠을 자는지 그저 누워만  있는 건지 
몰라 한동안 부뚜막에도 쭈그러  앉았다가 아궁이 앞에도 앉았다 하면서 종잡을 
수 없는 불안에 시달렸다.
  혹시 나도 모르게 내가 무얼 잘못 한 게 있나?
  나는 우선 내 탓부터 찾아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잡히는 게 없었다. 이렇
게 한참이나 있자니 슬며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남편을 전혀 모르고 있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노래를 잘 부르고  힘이 장사이고 맡은 일은 빈틈없이 
꼼꼼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 이게 그의 전부일까? 나는 불기  사그라진 지 오
래인 아궁이 앞에 앉아 하염없이 생각했다. 집  사랑방에서 그를 선보던 날 싫지 
않던 느낌, 그리고 시집은 맘에  들지 않아도 그는 특별해서 좋던 것, 그의 자상
하고 따뜻한 마음씨...  그런 것에 덮여 달콤하기까지 했는데 이제  그가 나와 좀 
떨어진 데 있는 다른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이엇다.
  그러나 언제까지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침밥을 먹지  못했지만 일
거리를 찾았다. 이때 옆집에서 굴암 묵을 쑤었다고 가져왔다. 나는 아침 일을 끝
내면 그 집에 자주 놀러갔다. 한계령 넘어  인제가 고향인 사람들인데 아이 둘이 
딸린 그 여자는 나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여자가 
나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술을 좋아해 늘 걱
정이었다. 술만 마시면 딴 사람이 되어서 얼마  되지 않은 집안 살림을 때려부수
는가 하면 아내를 마구  패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늘 나를 부러워
했다. 자기도 술  마실 줄 모르는 남편과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그 
남자는 술을 먹지 않았을 땐 먼지처럼 조용했다.  그렇지만 내 남편처럼 짐안 일
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이날 내가 잔칫날 입은 옷을  빤 건 순전히 따로 할 일도 없고 가만히 있기도 
불안해서였다. 그 옷은 시집에서 감을 떠보내 마련한 것이었다.
  빨래라는 게 참 묘한 데가 있다. 때묻은 것을  비벼서 맑은 물에 여러 차례 행
궈 햇볕에 널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개운해지는 것이다. 요새야 세탁기에 건조기
까지 있으니 개울에 나가 빨래방망이로 탁
탁 두들겨가며 빨래하던 풍경은 낡은 사진이나 다름없다.  물론 이날 빤 옷은 두
들겨빠는 옷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수선하던 마음은  한결 가라앉았다. 나는 쉬 
마른 옷을  손질하려고 방에 들어갔다. 여섯  자 방은 좁기 그지없어  남편 혼자 
누운 자리가 반이나 차지했다.
  `상구두 주무세유?`
  나는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가 아직 자고 있는 것 같아  말없이 앉았다. 그
때 옷은 한번 입었다 빨 때면 바느질한 것을 뜯어 처음부터 다시 바느질을 해야 
했다. 그런데 바느질을 하려고 천을 들어보니  도련이 버졌다.
  `차암 희한두 해라... 한번 입구 빤 옷이 도련이 다 벼졌으니...`
  나는 다만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자는 줄만 알고 있었던 남편이 벌떡 일어
나 앉았다. 그는 흡사  매처럼 내 손에서 저고리를 획 잡아빼  갈기갈기 찢기 시
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무서
움도 느끼지 못한 채  뒤로 물러앉으려 애를 썼다. 그의 손에서  옷감을 뺏을 수
는 있었을까? 아니면 무작정 잘못했다고 빌었어야 했을까? 그러나 누가 내게 그
렇게 했어야  한다고 충고한다면, 나는 그를  미워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남들은 
내 남편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성질이 급하고 날쌘가를.
  “아니구, 그저 나는 도련이 좀 버졌...”
  나는 미처 다 중얼거리지도 못했다. 그가 주먹과  발길로 나를 마구 때리기 시
작했으므로.
  “너 돈 많으면 고급으루 해입어, 이년아!”
  그가 이런 말을 뱉었다.
  “니년 집 잘살잖어?”
  그가 경멸을 거품처럼 입안 가득 물고 중얼거렸다.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른 채 매를  맞아야 할 때, 거기에 저
항도 할 수 없고 도망도  칠 수 없을 때,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그래서 그건 다
만 육체적 고통에  그치지 않고 정신까지도 능멸하는 폭력 행위라고  믿는다. 물
론 이런 생각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달은 것이다.  그때 나는 너무
도 무섭고 정신이 홀랑 빠져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게 무슨 뜻인지,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의 기분이 도대체 어떤지... 하나도 되짚어볼 수가 없었
다. 더군다나 그는  나를 힘껏 때리고 나서  휙, 바람처럼 집을 나가버렸던 것이
다.
  방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올리 풀린 교직법단 치마저고리 한  벌은 순식간에 
아무렇게나 찢겨 헝겊쪼가리로도 쓸 수 없게 되었다.  내 몸과 마음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오래도록 방구석,  더 이상 도망갈 수도 없는 그 모서리에 못
질이라도 된 듯이 붙박여 있었다.
  그때 까맣게 잊고 있던 `궁합` 생각이 났다. 남편은 `소`띠, 나는 한 살 아래인 
`호랑이`띤데, 궁합이 좋지 않아 액막이를 하자던  중신아비의 말이, 하지만 뫼맥
이 서낭에 걸어둔 내 적삼이 벌써 모든
 액을 받아가지 않았을까? 아... 혹시 시할머니가  하던 그 말, 그 `불뚝밸`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큰 시아버지도 그런 것이 있어서  여자들이 오래 살지 못하고 
가벼려 장가를 열두번이나  들었다지 않은가. 세상 사람들 다 안다는  이 집안의 
나쁜 성질... 어머니가 하던 말도 떠올랐다. 불현듯 겁이 났다.
  예전에 어머니한테 매맞고 오빠가  죽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를 주워온 자식
이라고 해서, 참다참다 못해  친어머니를 찾아나섰을 때... 그때의 무서움과는 아
주 달랐다. 내가 여태 느낀 어떤 무서움도  이때 내가 느꼈던 무서움처럼 비정하
진 않았다. 아주 먼  시간으로부터 느리되 분명하게 다가오는 느낌, 그리고 그것
이 가혹한 무서움이라는 걸 알면서도 피할 수도  없다는 것까지 아는 무서움, 그
래서... 비정했다.

 나는 울다가, 을씨년스런 방 안을 새삼 보고는 그것을 부리나케 치웠다. 웬일인
지 남편이 들어오기 전에  흔적을 없애야 할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
럼. 나는 쓰레기가 된  치마저고리를 아궁이에 넣어 불살랐다. 그러나 그것이 탈 
때, 비로소 내 질려서 굳었던 눈에서 눈물이 쏟아붓듯 흘러내렸다. 저 못쓰게 된 
옷, 이제 타서 재가 되는  저 옷은 나의 혼인잔치에 입었던 것이 아닌가. 어쩌면 
그렇게도 눈물이 쏟아지던지, 꺼이꺼이 소리내면서.
  눈물이 흐르자 얼굴 여기저기가 쓰라리고 따가웠다.  세수를 하는데 얼굴이 얼
얼하고 내 살 같지가 않았다. 거울을 보았더니 내 얼굴은 어디 간 데 없고, 귀신
이 비쳤다. 나는 얼른 거울을 돌려놓았다.
  아침 점심 다  거르고 나가버린 남편은 저녁때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갑
자기 겁이 났다. 아내를 때린 게 부끄러워서,  아내한데 미안해서... 그가 나갈 때 
무조건 매달리고  붙잡았어야 할걸, 그가 계면쩍지  않도록.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밖에 나가 찾아보려니 이웃  사람들이 매맞은 걸 알게 될 것 같고, 무작
정 기다리고 있자니 답답한 건 물론이거니와 쓸데없는 누더기 같은 생각들이 떠
올라 괴로웠다. 그러나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땅거미가 지며,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돌아올까 문틈
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발소리는 아주 크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어서 귀
도 기울였다. 그러나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바깥이 어두워졌을 때 나는 
방을 살며시 나갔다. 기다란 노무자 사택의 비좁은 부엌, 방들에서는
여러 가지의 사람 말소리가 들리고 된장, 김치 냄새도 풍겼다. 어느 집에서는 젖 
떨어졌을 성싶은 아이의 꼬집힌 듯 우는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밤이라서 그런지 산에서 내려미는 바람은 매섭게  싸늘했다. 버덩은 이미 풀이 
파랗고 논밭엔 파종 준비로 바쁜 때지만 아직 높은 대청봉은 허연 눈을 쓰고 있
었다. 찬바람이 상처난  살에 닿으면 꼭 물에  넣은 것처럼 쓰라렸다. 허리 다리 
어깨, 그의 주먹과 발길이  닿은 데는 다 아파서 매맞은 기억을  잊지 못하게 하
였다. 그래도 나는  아직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난 아무렇지  않으니, 어서 그가 
내 앞으로 넙죽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나는 그가 올 만한 쪽으로 천천
히 걸어가 봤다. 한참 걸어가다가 다시 온 길을 되짚어 걷기를 되풀이했다. 그러
다가 사택 건너편 개울가 둔덕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순
간 그가 어찌나 반갑던지... 콧마루는 또 왜 그렇게 맵던지. 그리고 그 순간 얼굴
이며 몸 여기저기의 통증도 사라졌다, 아주 잊었다, 살 것 같았다.
  “이봐유! 춥지도 않어유?”
  나는 흡사 구르듯  그의 등뒤로 가서 그의 벌판  같은 등에 업히듯 하고 말했
다. 목이 메인 건지 내 목소리는 벌룽거렸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피우던 담배
를 물이 마른 개울로 휙 내던졌다. 그러나 나는  그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무엇
인지, 한꺼번에, 너무도 선연히  느꼈다. 그가 아주 크게 한번 숨을 쉬었다. 아직 
그의 등에 얹힌 내 손등  위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그가 느리게 일어섰다. 나
를 알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보다  앞장서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
는, 기뼜다. 사는  동안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결코 많지 않다는 걸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집에 가서 부지런히 저녁상을 차렸다. 그는 말없이  밥을 먹었고 나는 그의 기
분을 풀어보려고,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유감도 없다는 걸 넌지시  알리려고 그
에게 필요도 없는 말을  해봤다. “장이 짜너유?” “오늘은 누룽지가 없는데유.
” 그러나 그는 콧김도 내지 않았다. 그는  떡은 물론이거니와 누룽지도 아주 좋
아했다. 밥을 눌게  해서 누룽지를 긁어주면 그는 아이처럼 아작아작  씹어 맛있
게 먹었다.  아까운 쌀로 누룽지까지 만드는  게 이상해서, 시할머니에게 물었더
니, `준태가 좋아하니  해줘야 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적이  있다. 적어
도 집안에선 남편이 원해,  이루어지지 않는 건 없었다. 특히 시할머니는 손자인 
남편이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도 잘 알아서 입  안의 혀처럼 해주었다. 그러나 나
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오래도록 알지 못했다.
  얼굴의 맷자국은 빨리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래서  동네 여자들이 찾아오면 몸
이 아프다는 핑계로 사람을 만나지 않고 지냈다.
  아직 이렇게 사람을 피해야 하던 때, 또 하나의 일이 터졌다.
  퇴근한 남편의 통다비(운동화)를 빨아서,  잘 마르라고 저녁밥 하고 난 아궁이 
속에 넣어뒀다. 그런데 아침에 그만 깜박 잊고  불을 지펴 통다비를 태웠던 것이
다. 다행히 남편한덴  다른 여벌의 신이 있어  그걸 신고 출근했지만, 그가 알게 
될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래서 아침 설거지를  부리나케 하고 친정으로 날아서 
갔다.
  여자에게 `친정`이란 무엇일까.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딸로 낳아서 길러준 곳, 
그리고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 그러니까 친정은 `딸의 고향`인  것이다. 그러나 
딸은 그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없고 돌아가는  건 부모님에 대한 불효이다. 이 나
이 되도록 친정을 생각하면 목이 메이는 건 영원히 돌아가선 안 되는 곳이기 때
문일 것이다. 물론 내 딸들,  손녀들 자라는 걸보면 내가 살던 시절과는 아주 다
르다. 그러나 그 슬픔의 씨앗이 아주 사라진 것 같지는 않다.
  거마리 어귀, 향교 길로  접어들어도 벌써 냄새가 달리 맡아졌다. 화일리를 지
나고  뫼맥이  고개도 넘고... 봉전말, 바깥말을  감싸며 내려온 산, 작은 서낭재. 
뱀이 머리를 들고  내달리는 형상의 동두불, 두리봉 밑에서 오빠가  피리를 불었
다지. 충성골 움막에서 죽었다는  문둥이, 자기 집에서 내쫓은 문둥병 든 아내가 
그리워 남 몰래 움막을 드나들었다는 그 여자의  남편, 나는 알지도 못하지만 들
은 기억은  있는 그런 인생들이 어제  본 것처럼 선연히 떠올랐다.  인골을 지날 
때, 양지쪽에서 달래를  캐던 저짝집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반가워  몸이 저절로 
일어서는 것 같았다.
  “이기 뉘기너? 작은 서당집  집난이가 아니너. 웬일루 친정엘 다 오구... 요새 
신랑 따라 얼롱골 광산에 산단 소식은 들었구만.”
  아주머니가 어찌나 반가워하시는지,  속이 다 울컥거렸다. 고향에선 시집간 여
자를 `집난이`라고 불렀다.
  “어여 가봐. 어머이가  여북 반굽겠너. 반구워 매렌이 웁쓸긴데  뭐. 막내까지 
보내구 두 양주 지내자니...  그래두 요 접때 보니 얼굴이가 좀 나아지셌더라만...

  나는 아주머니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안말로 달렸다. 눈물이 그저  제 맘대로 
주르륵 흘렀다. 아들이든 딸이든 똑같은 자식인데 딸은  키워서 남의 집에 다 보
내고 두 분 노인네만 남았으니 그 마음이 어떨까.
  어머니는 햇볕이 노랗게 쪼이는 뜰팡에서 상에 팥을 펴놓고 뉘를 고르로 있다
가 내가 `어머이!`하고 소리 지르자,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어머니가 손을 휘
저으며 무어라고 말했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벙치 니가 기벨두 읍시 이기 뭔 일이제? 이 서방은 잘 지내너?”
  우리가 손을 마주잡고  서로의 마음과 몸 속으로  들어가 한참을 마구 헤집은 
다음에야 어머니가 이렇게 물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안죽 밥 안 먹었제? 날래 더운밥 해서 니주아리 장아찌 해서 밥 먹자.”
  어머니가 내 손을 놓으며 말했다.
  “어머이, 시방 가야 돼.”
  “하루두 안 묵구 그냥 가너?”
  “어머이, 내가 일을 쳤다네...”
  나는 신발 태운  얘길 했다. 어머니는 내  얘기를 들으면서, 말끔히 삭지 않은 
얼굴의 맷자국도 보고 말았다.
  “니 얼굴이가 왜서...”
  “어머이, 빨래 씨러 갔다  미끄러져 자갈에 찧어. 첨엔 매렌두 읍더니 그래두 
시방 양반 됐네 어머이.”
  나는 능청을 떨어  넘기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속지 않았다는  걸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얼굴에 먹구름 같은 화가 끼는 것이었다.
  “어머이, 이 서방이 자상해서 물은 다 져다 줘.”
  어머니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한참이나 있더니 `쌀 떠줄게 야양 장거리  가봐
라` 하면서 고방으로 들
어갔다. 딸이 부모에게 효하는  것은 `시집가서 잘살아주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
를, 나는 이 일을 겪고도 깨닫지 못했다.
  “날래 가봐라. 이 서방 오기 전에 들어가야잖너.”
  어머니는 쌀자루를 옷보따리처럼 만들어서  당신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서며 말
했다. 내가 이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땐 단속이 심해서 쌀을 마음대로 팔 
수 없었다. 관에서 아무리 단속을 엄하게 해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어느 
때든지 있었다. 어머니는  임을 이고 물갑리를 지나 싸근다리를 거의  반이나 가
서야 내개 임을 맡겼다.
  “뒤돌아보지 말어.”
  어머니가 말하고 돌아섰다.  어머니는 흡사 바람에라도 떠밀리는  것처럼 달음
박질로 돌아갔다. 나는  어머니가 산모롱이를 지나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 잔치하고  가마에 오를 때도 이때처럼 슬프지
는 않았다. 나는 비로소 내가 `출가외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울면서 양양 읍내 장거리로 갔다. 쌀을 주고 신을 바꿨다.
  저녁에, 내가 새 신을 꺼내  보이자 남편은 웃었다. 웃을 때보면 그는 아이 같
았다. 환갑  아니 되도록 이 아이  같은 마음 하나는 그에게서  `크지를 않았다`. 
내가 얼마나 겁을 먹었으며 얼금뱅이 장모는 또  얼마나 가슴 아팠을지, 그런 걸 
그가 짐작인들 했을까? 하루 종일 수십 리 길을 왔다갔다한 아내는 생각지도 못
하고 그저, 새 신이 생긴 것만 좋아하는  것 같았다. 신을 자기 발바닥에 대보고, 
들어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하는 그는 두말 할 것 없이 천진난만한 아이였다. 
  나는 얼굴이 붉어졌어요오 아리켜 드릴까요오 열일곱 살이어요오 가만히 가만
히 오세요오... 그는 너무  기뻐 내가 좋아하는 박단마의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
를 흥얼거렸다. 웬일이었을까.  내 콧날이 시큰거렸으니. 그가 이  노래를 흥얼거
리는 것은 필경 나 때문일 테니까.
  시집오기 전 나는 동네 동무들과 밤이면  몰려다니면서 유행가를 배웠다. 우리
들 또래 모두가 한결같이 좋아한 노래는 그것이었다.  그땐 그저 나이 열두 살만 
되어도 혼수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열세 살부터 내 옷을 내  손으로 만들어 입
었다.
  골방에 모이면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았었는지.  누군 어떤 동네 아무개 총
각한테 편지를 받았다더라. 누구하고 누구하고 좋아한다더라. 보리개떡이나 굴암
밥에 동치미 떠다 놓고  까물거리는 등잔불 가에 모여 앉으면, 참  웃을 일도 많
았다. 그러나 웃음소리가 문 밖으로 나가면 큰일이었다.  물론 `바람났다.``연예건
다.`하는 소문도  절대 나면 안 되었다.  처녀 총각이 저희들끼리 좋아하면  양쪽 
집에서는 결혼을 시키지 않고 내쫓아 자기들끼리 `붙어살아`야 했고, 그 일은 두
고두고 집안의 큰 망신이었다.
  그때 이런 일도 있었다. 방축골 정씨네 집 둘째아들이 진미버덩 솔밭, 그네 매
던 적송에다 목을 매 죽었다. 점잖고 인물 좋다고 입에 오르내리던 총각이었다...
  내가 시집오기 한 해  전에 있었던, 이웃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 일은 이
랬다. 처음엔 그저 확인할  수 없는 채, 어느 집 처녀가  애를 뱄다는 `뜬소문`이 
돌았다. 그 다음엔 그 처녀가 아무개네 손녀딸이라고 했다. 누구는 배가 부른 걸 
봤다고 했고 누구는 아이 아버지가 유부남이라느니 물치 장거리의 일본놈이라느
니... 이상하게도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막연했다.
  어느 날, 문제의 그  처녀가 마을에서 사라졌다. 처녀의 어머니와 단둘이 없어
졌는데, 누구는 둘이 낙산사 절벽에서 바다로 떨어져  죽는 걸 봤다느니 송암 역
전에서 원산 가는  기차를 타더라느니... 하는 얘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 소문이 
꼬리를 찾지 못해 스러지는가 싶을 때,  방축골 정씨네 둘째아들이 진미버덩에서 
목맨 시체로 발견된 것이었다.
  그들은 처녀네  집에서 같이 가마니를  짜다가 배가 맞았더라고,  그래서 그후 
어느 집에서나 가마니를 칠 때면 처녀 총각이 짝지을까 경계를 심하게 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는  연애, 집안과 부모님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불행만 안겨
주는 연애를 왜 하는지, 때가 되면 배필 만나 살 살텐데, 그걸 못 참는 사람들이 
내겐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음력 삼월, 감자 심을 철이 돌아온 때였다.
  빨래를 해 널고 곰취를 삶고  있는데 둘째시동생 준호가 벌겋게 단 얼굴로 찾
아왔다. 어찌나 급히 왔는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준호는 형제들 가운데 가
장 인상이  선량해서 내가 특히  좋아했다. 결혼하고 송어리에서  신랑과 떨어져 
스무여남은 날 시집살이를 할 때, 준호는 고염도  따서 슬그머니 주고 밤도 구워 
속껍질 까서 건네주곤  했다. 고염은 늦가을에 따서 단지에 담아두면  겨우내 단
엿처럼 떠다 먹는데 더러 나무에서 시들며 얼며  매달려 있는 게 있었다. 한뱃속
에서 나온 형제들이 생긴 거 다르고 맘씨 다른 거 보면 참 희한하다.
  나는 준호에게 우선 물부터 한 사발 떠주고  숨을 돌리라고 했다. 틀림없이 급
한 일이 있어 보였지만 내겐 그를 보는 것이 더 기뻤다.
  “형수님, 집에 상이 났네유.”
  준호가 말했다.
  “상...이유? 누구유?”
  나는 겁이 나서 이렇게 물었다.
  “큰할아버지가 돌아가셌어유.”
  큰할아버지... 나는 그분을 금방 떠올리지 못했다.
  “아랫집 큰할아버지유...”
  시동생이 내  눈치를 알아채고, 이렇게 말해  줘서야 나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니겐 큰시할아버지인 그분... 그가 아침 나절에 화전불을 놓다가 불에 타
죽었다...고, 시동생이 말했다. 투덕투덕 기운  투덕바지에 불이 붙어 팔십 노인네
가 불길을 잡지  못해 그 지경이 되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화전을 하다 타 
죽다니. 친정에서는 화전민이라고 하면  아주 딴 세상 사람들 취급을 하였다. 제 
땅뙈기 하나 가진 것 없어, 깊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아무 데나 불을 해놓고 밭
농사를 지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글을 배우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람 
사는 도리나 격식 하나 없이 그냥 생긴 대로 사는 사람들이라지 않던가.
  화전은, 물론 아무  데나 하지는 않는다. 우선 돌이 없고  빛깔이 검은 흙으로, 
푸실푸실해서 발이  푹푹 빠지는 데라야  화전에 안성맞춤이다. 그런  땅을 골라 
잎이 무성한 때 풀과 나무를 메어 쓰러뜨려  한겨울을 넘긴 이듬해 봄, 파종시기
에 불을 해 놓는다. 마른 나무와 풀이 타고 재가 남으면, 그 재를 거름으로 땅을 
갈아 옥수수,조,감자,메밀 같은 곡식을  부쳐 먹는다. 화전으로 일군 밭은 땅힘이 
약해 두어 해 부쳐 먹고는 다시 한두 해 묵혀야 한다.
  큰 시할아버지의 장례는 그분 연세로 보면  여든을 넘겼으므로 호상이었다. 비
록, 불에 타 죽었으니 객사이긴 하여도 오래 앓아  누워 온갖 정 다 떼고 돌아가
시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그 호상의 상여행렬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보통 그 연세라면 손자에 
증손까지 두고도 남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분이 남긴 초췌한 인생의  흔적 때문
에, 시집와서 몇  번 얼굴만 보았을 뿐인  나는 얼마나 슬피울었는지 모른다. 왜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토록 아들을 원했는지, 아들자식 많은 게 왜 자랑인지... 그
래서 친정에  남아 있는 두 분  부모님의 처지가 가슴을 에어서,  나는 친딸보다 
더 처절하게 울었다.
  예순다섯에 처녀 장가를 든 사람. 시집갔다 소박  맞고 돌아온 딸보다 어린 마
누라와 살았던  큰시할아버지. 그 여자가 첫  아이로 쌍둥이를 배었을 때였단다. 
만삭이던 어느 날, 자기보다 나이 어린 계모가  미워 막무가내로 어린 계모를 부
려먹던 큰딸의 구박에 사산을 하고 말았다. 겨우  난쟁이만 면한 체구인 그 여자
에게 딸이 무거운 짐을 이게 해서 엎어졌던 것이다.
  물론 그 나이  때의 큰시할아버지에겐 사별한 전처에게서  난 딸 말고도 아들 
둘이 더 있었다.  사지육신 장대하고 인상이 타고난 정승 판서  같았다는 큰아들
은 열일곱에 집을 나가 수십년이  지나도록 일자 소식이 끊겼다. 딱 한 번, 그러
니까 십여년 전 만주 안도현  땅에서 독립군으로 있는 걸 봤다는 얘기가 풍문에 
들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  자식, 마흔이 넘었어도 장가를 못 가는 벙어리 아
들이 있었다. 큰시할아버지가 노망난 것처럼 장가를 든  건 아마 자식을 얻고 싶
어서였을지 모른다.  어찌되었든 어린 아내에게서 칠순  되던 해에 아들을 얻어, 
지금 열 살이었다.
  여든 넘은  나이에 돌아가신  큰시할아버지는 괜찮았다. 자기할아버지뻘  되는 
남편을 잃은 큰시할머니가 걱정이었다. 그여자는 집안에  아무 쓸모가 없이 되었
던 것이다. 1945년이던 이 해엔 큰 흉년이 들었다. 결국 큰시할머니는 시집 동네
보다 더  깊은 산골로 첩살이를 떠났다.  벙어리 아들과 열 살짜리  아들은 나의 
시아버지가 돌보는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첩살이를 떠났던 큰시할머니는 거기서도 몇 년  살지 못했다. 전쟁중에 남편이 
죽어서 다시 우리집으로 왔다. 얼마나 구박받고 일만  했는지 나이보다 십 년 이
십 년은 늙어서 왔더란다. 하지만 늙은 것보다 더  나빴던 건 평생 오욕 같은 병
을 얻은 것이었다.  거기 영서의 신랑은 색탐이 무서웠던 남자인데  자지가 황소 
같아, 그 물건으로 밤마다  짓찧어서 오줌을 지리는 병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그
래서 그이는 제 몸 간수할 수 있을 땐 기저귀를 차고 살았지만 늙어 몸져누웠을 
땐 지린 오줌으로 궁둥이  살이 무를 지경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도  밥 먹여 준
다는 데가 나서면 간성의  아야진이나 강현면의 대포리 같은 나릿가로도 시집을 
가곤 하였다.

  큰시아버지는 송어리  삼곳등지에 여덟 칸 반짜리  기와집을 짓고 웃드루에서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새  여자를 얻었다. 열세번째 여자였다. 잔치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큰시아버지는 그때 쉰여섯 살이었는데 아내  될 여자는 
이미 딸  둘을 가진 스물다섯 살의  과부였다. 그 여자에게는 젖  떨어진 아이가 
있는데 그런 여자의 몸에 아이가 잘 들어선다는  말이 있어서 데려왔다. 한쪽 눈
에 허연 태가 낀 눈병신이라 인상은 험했으나 성질이 좋았다. 집안에선 그이를 `
히뜩이`라고 불렀다. 얼롱골에서  살다 왔으니 택호가 으레 `얼롱골집`이어야  했
음에도 불구하고 촌수 높은 그이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히뜩이라고 낮춰 불렀
다.
  그이, 큰시어머니는 자기가  속아서 시집을 왔다고 팔십 넘어 세상을  버릴 때
까지 줄기차게 말했다.
  “... 신랑자리가 갓마흔으루 상처했다잖너. 밑으루  딸린 아두 없구... 일본으루 
만주루, 흩두루 댕겨서 견문이  넓다잖너. 여덟 칸 반짜리 기와집 날아가게 지어
서 쓰는 장손인데 동네 부자라는 기여...”
  물론 큰 시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갓마흔이라는 나이 한 가지만 빼고는 다 사
실이었다. 하지만 막일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 번듯한 인물에  마흔 나이라고 
하면 누구나 곧이들었다.
  얼롱골 큰시어머니의  전남편은 철광에서  일하던 막노동자였다. 케이블  카에 
페인트 칠을  하다 떨어져 죽을 때  나이 서른이었다. 가난해서 굶지만  않는 게 
소원이었던 얼롱골 큰시어머니는 우리집에 와서, 깨끗한  남편을 보고 아주 기뼜
단다. 시집 살러  온 첫날, 붉은 팥 넣은 보리밥을  주는데 배불리 실컷 먹은 게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인물 좋고 견문  넓다는 신랑은 알고 보니 나이
가 자기보다 서른한  살이 위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힘든 건  따로 있었다. 포악
한 성질머리였다. 거기다 `자기 한몸`만 생각하는 게 아주 고약했다.
  “... 사람이  이상두 해야아. 객지를 댕기문  속이 다 풀린단데...  무슨 첨지가 
때리는거만 아녀... 한번은  날더러 이러데. 임자가 일본에  가서 사람 하날 때려 
죽였당기여. 그 말듣구부텀은  왠걸 첨지가 무서워 벌벌기었잖너. 평생!  평생 제
버릇 개 주겠너? 그눔의 밸을 빼다가 한번 저 남대천 물에 휘휘 둘러 다시 느문 
안 됐겠너?... 한밤중  자다 말구 일어나, 메밀국수 먹구 싶다아-하문,  세상 읍서
두 일어나 냉큼  해다 바쳐야지 꾸물댔다간... 먹고  싶은 건 애 서는  년보다 더
해...”
  히뜩이 큰시어머니와 나는 성질이 비슷한 남편과  살아서 서로 위안이 되었다. 
시동생의 아내, 그러니까  나의 시어머니보다 어린 큰시어머니, 그러나 중년과부
가 되고는 삶의 응어리가 가슴에 깊이 박혀
 술 마시고 소리하고 장구를 쳐서 자식 며느리에게 천대받다 세상을 떴다.

  음력 사월이 되었다. 중요한 기술자라서 징병이  면제된다고 하던 남편은 신체
검사를 받았다. 갑종 합격이었다. 그는 딴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 부모 형제와 
고향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올지 죽어 못 돌아올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
론 그랬다. 나는 그의 처지보다 내 팔자가 더 걱정되었다.
  남편은 납종 합격을 받은 다음부터 일을 나가지  않았다. 징집 날짜가 잡힐 때
까지는 일을 하는 게 좋겠건만, 내 입으로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온종일 
방에 누워 천장에 담재 연기를 뿜어댔다.  그러다가 유행가를 구슬프게 흥얼대고 
잠깐 토끼잠을 자고 군것질을 했다. 감자 부침개다, 가락엿이다, 수수 부꾸미다... 
시할머니가 떡을 해서  이고 왔다가 징병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저 어른이 저렇게 돌아가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
각이 들었다.
  남편이 자기 몸의 반이나 될까  싶은 할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
다. 어른의  울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흐느꼈다.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 까닭 
모르는 사람도 덩달아 울고 싶을 정도였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다  큰 손자의 흔들리는 등을 주름진 손으로 쓰다듬었
다.
  지금도 그런 그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웬지 낯설지 않은 모습. 언제 어
디서 저와 같은 모습을 보았던가. 내 어린날 어느 때에...
  이날 이후, 그러니까  일제의 강제징용이 무효가 된8월 15일  이전까지 할머니
는 내  남편을 갓난아이처럼 보살폈다.  먼데서도 아이 울음소리를  남보다 먼저 
들을 수 있는  어미의 사랑, 울음소리만으로도 아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간
하고 해결해 주는  어미의 사랑으로 그래서 정작  남편을 낳은 시어머니나 그의 
신혼 아내인 나는 `남`이었고 생사가 불분명한 이별을 앞두고도 할 일이 없었다. 
아무런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사람에게는,  만약 주어진 수명이 있다
면, 사랑도 그것처럼 베풀  수 있는 사랑이나 받을 수 있는  사랑의 양이 있을지
도 모른다.
  이즈음 그는 신경이  아주 날카로워져서 화를 잘 냈다. 어떻게  비위를 맞춰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신경이 날카롭기로 치면 나도 그랬다. 초조하고 불안
해서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이때 이미 나는 임신이 돼  있었는데도 그걸 알지 
못했던 것이다. 시할머니는 사흘돌이로 와서 며칠씩 묵어 갔다. 시할머니가 오면 
남편이 화를 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갑자기 말수가 줄어들거
나 노래를 흥얼거리지 않으면 시할머니가 오길 기다렸다.
  이런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군대 나가는 날까지 송어리 집에 가서 쉬겠다고 
했다. 나는 그곳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송어리로 가
는 날 시동생들이 와서 이삿짐을 날랐다. 나는  내 일용품을 담은 작은 보따리를 
들고 걸었다. 자꾸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남편 하난  바라고 온 시집. 
징병 가면 살아서 돌아올지 죽어  영영 못 돌아올지 알 수 없는데 나 혼자 산골
에 갇혀  어떻게 사나... 화전밭을 일구다  큰시할아버지처럼 타 죽지나 않을까... 
언니들은 멀쩡한데 시집가서 다들 잘사는데 나만 왜 이렇게 깊은 산골까지 들어
가 살아야 하나. 무지막지한  사람들, 아무 희망도 없이 세상물정 모르고 살아야 
하다니... 눈물이 앞을  가려 발길이 헛디뎌지니 자꾸만 넘어지고  엎어지고 그러
다가 우는 꼴을 남편에게 들켰다.
  “그렇게 오기 싫으면 따라오지 말어 이년아!”
  남편은 왜 우느냐고묻지도  않고 나를 욕하면서 발길로 찼다. 나는  망령골 산 
속, 좁은 우찻길 바닥에 이리저리 차이는대로 나뒹굴었다.
  그래... 임자 맘대로 해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번 죽는 거... 차라리 이
렇게 정이라도 떼고 가라...
  나는 이를 악물고 이런  생각을 했다. 그가 발길질을 할 때  그의 동생들도 보
았지만 눈길을 피하고 앞서서  갔다. 어느 누가 그에게 무슨 말인들  할 수 있으
리.
  팔다리가 시큰거려 걷기가  힘겨웠다. 나는 더 이상 울지도 않고  이를 악물고 
걸었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니까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송어리 시집 형편은 내 상상을 넘어섰다. 지난해  농사 지은 쌀은 우리 잔치에 
다 쓰고 보릿고개를 넘기는  데 굶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하루  두 끼 먹는 
끼니조차 여전히  아침부터 죽으로 시작했다.  하루는 좁쌀에 배추를  넣고 죽을 
쑤고 다음날은 배추  넣은 메밀죽을 쑤었다. 철광 미나미 사택으로  떡을 해오길
래 형편이 이지경인 줄은 정말 몰랐다.
  남편은 아침에  나가면 저녁때가 되어야  돌아왔다. 보통 낮에는  큰집에 가서 
지내고 어떤 날은 어른들이 그냥 놀라고 말려도  온종일 밭을 맸다. 큰집에는 유
성기가 있어서 그는 그곳에서 새로 나온 유행가를  배워 왔다. 어떤 날은 밤늦도
록 가사를 흥얼대며 외워대서, 실성한 것처럼도 보였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
동 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남편이 즐겨 부르는 건 이 한 곡만은 아니었다. 처량하고 청승맞은 목소리.
  거기다 나는 입덧을 심하게  했다. 메밀죽은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났다. 그
러니 굶는  게 일이었다. 허기증이 나면  겨우 햇감자를 아궁이에 구워  한두 톨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한잠  자곤 배가 고파 깰 때가 많았다. 먹으면 쓴
물까지 토하고 굶기를 밥먹듯 해도 죽지 않는 건 입덧뿐일 것이다.
  이렇게 배를 주리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니 내 꼴이라는 것이 말이 아니
었다. 식구들은 내 속을
 아무도 몰라주는 것같았다. 이런 어느 날 골짜기  개울 건너에 사는 먼 일가 형
님이 시집의 비밀  하나를 가르쳐주었다. 시할머니에겐 시집가 사는 딸  말고 딸
이 또 하나 있었는데, 시집갔다 친정나들이 와서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여
기보다 더 깊은  산중으로 시집을 갔는데, 다시 돌아가기 싫다고  큰물께에 짚신
을 벗어놓고 물귀신이 되었다.  그러니까 남편의 고모가 자살을 한 것이었다. 안 
들으니만 못한 얘기였다. 집안에  그런 귀신이 있으면 좋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어느 집이건 그런 귀신은  굿을 해서 한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  일은 다시 입
에 올리지 않고 영원히 묻었다.
  남편은 일을  갔다 오든 놀다 오든  자기가 배고플 때, 제때  밥상을 차려내지 
않으면 큰 소동을 피웠다. 얼롱골에서는 그가 퇴근을  하는 시간이 한결 같아 늘 
때맞춰 밥상을 차렸었다. 그런데 여기 와선 
식구도 많고 바느질은 한번 잡으면  꼭 실매듭을 지을 마침한 때가 있어서 그렇
게 하다 보면 저절로 밥이 늦어지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는 내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걸 보곤 그저 다짜고짜  나무더미에서 장작개비를 빼 엎드린 내 등을 후
려팼다. 배곯고 일에 치인 나 같은 거,  나가떨어지는 건 쉬웠다. 물론 어느 식구
도 나를 보호하지 못했다. 성질난 그를 뜯어말리거나  끼여들면 그는 더 화를 내
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태풍 같은 한때가 지나고 나면  그제야 시어머니는 
내게 와서, “애미야, 아주 좆 같은 놈이다아, 그렇게만 예게라, 생게먹길 그런데 
어뜩하겠너? 종자가 아주 디릅잖너...”라고 위로했다.
  밉고도 불쌍한 시어머니, 자기가 낳은 아들인데도  자기 자식이라는 생각을 하
지 못했던 시어머니, 민며느리 신세라는게 얼마나 고달프고 치욕스런 것인지, 당
신 생전에 깨달았을까. 제 밥값으로 나뭇단이나 일  수 있고 나물이라도 뜯을 수 
있고 빨래라도 할 수 있을 만큼 자란 딸을,  돈푼이나 쌀말 받고 남의 집에 팔아
넘기는 것이라는 걸.
  나의 시할머니인 당신의 시어머니와 다툴  땐 늘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대
들었다. 언제  어느 때 무엇으로 때렸다,  머리를 얼만큼이나 뽑았다,  밥을 주지 
않았다, 먹는  걸 아까워했다, 온종일 일만  시켰다... 는 것들이었다. 시어머니를 
때린 사람은, 물론 시할머니만은 아니었다. 자기보다 나이 많은 모든 사람들에게 
매맞고 업신여김을 당했지만 그 쌓인 분노는 오직  한 사람, 같은 여자이며 이젠 
늙어 힘이 없는 권력자인 당신의 시어머니에게로 모여서 거침없이 쏟아졌다.
  그들 두 여자 사이에 내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시집온 지 한 해도 지나지 않
은 스무  살의 새색시였다. 더군다나 산골  화전 살림은 농촌 살림과는  다른 게 
많았다. 그래서  그들 두 여자 사이의  골 깊은 원한의 내력을  나는 티끌만큼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끝없는 불화에 밑빠진 가난, 남편의 포악한 성정 때문에 
넌더리만 났다. 아니다.  넌더리를 낼 수는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그런 걸 고민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집안 이외엔 달리 
돌아갈 데가 없기 때문에, 친정으로 돌아가는 건  자살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고 여겼기 때문에.
  어느 날 내가 싸움을 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제발 싸우지 좀  마세유. 싸워서 생기는 게 뭐가 있나유?  제발 저를 봐서두 
그만들 하세유...”
  그러자 시할머니가 한숨을 깊이 내쉬고 말했다.
  “그래 니 말이 맞다. 미워해서 되는 일이 어디 있너. 할미가 니 볼 낯이 없구
나... 니두 살아보면 알게 되겠다만, 고생이라는 기... 서로 하는 게 아인.”
  나는 시할머니의 이 말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남편이 밥이 늦다고 나를 때리거나, 밥이  질다고 밥 그릇을 부엌 바닥
으로 내던질 때... 그런 일이 되풀이되던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새애기야, 니가 퍽 힘든 줄은 안다만 상구두 아범 속을 모르겠너?”
  그때 나는 시할머니의 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속을 알게 하는 게 
`사랑의 힘`이라는 걸 내가 언제 깨닫게 되었지?
  “우리 준태가 인물 좋구 인정 많구 그만하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지, 그눔
으 뿔뚝밸만 아니면...”
  따뜻하고 너그러운 목소리로 하던 이 말도 나는 깊이 새겨 듣지 못했다.
  여름이 되자, 사는 게  좀 나아졌다. 큰시동생은 일삼아 송어리 어귀 큰개울에 
나가 송어를 잡았다.  우리가 큰물께라고 부르는 큰 개울은 한계령  남쪽 설악산 
골짜기에서 모여 양양  남대천으로 흘러 바다로 가는 물이었다. 남편도  자주 고
기를 잡으러 나갔다. 송어를 몇 마리 만족스럽게  잡은 날이면 그는 기분이 좋아
져서 송어가 얼마나 성질이 사납고 힘이 센  고기인지, 그리고 그것을 잡을 때의 
짜릿한 재미가 무엇인지 한참씩  얘기해 주었다. 그때 알 밴 송어  한 마리는 하
루품과 맞바꿀 수 있었다. 첫아이를 임신해 입덧을  시작한 내겐 주황 색깔의 송
어 고기가 별미였다. 굵은 소금을 슬쩍 뿌려  참나무 숯불에 구워 먹으면 감자밥
이 저절로 넘어갔다. 이렇게  큰 개울에서 두어 달 잡은 송어는  단지에 소금 쳐 
재웠다가 제삿상에도 올렸고 알도 간해 뒀다가 `좋은  날`이면 무쇠솥에 쪄서 먹
었다. 밥을 뜸들일때  찌면 맛있는 게 어디 송어알뿐이랴.  애호박, 가지, 콩나물, 
풋고추는 물론 고등어 자반도 밥솥에 쪄야 제맛이 났다.

  그해 양력 8월 15일. 점심때나 되었던가?
  “아이구 여긴 깜깜 나라잖너! 우리 조선이 해방이 됐어!”
  양양 떡장거리 딸네 집에 다녀온 시당고모가 흥분해서 말했다.
  “야양은 시방 사람들이 춤추구 난리가 났잖너. 조산에선 농악대가 몰려오구... 
장거리에 얼매나 사람들이 모여드는지 백지알 같지 뭐.”
  당고모의 이 놀라운 소식은 작은 송어리 골짜기에 삽시간에 퍼졌다.
  남편에겐 내가 이 소식을 알렸다. 그는 이제 군대엔 가지 않을 것이었다. 내겐 
해방보다 그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워 무턱대고 눈물이 
줄줄 쏟아져 내렸다.
  “일본이 망했다구...”
  남편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그가 허깨비처럼 나
를 끌어안았다.
  “이거 봐. 내가 시방 읍으루 날래 나가 봐야겠어!”
  그는 외출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내게 큰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내겐, 내 
몸 속 어딘가에서 어떤 두터운 꺼풀이 벗겨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달려나간 뒤, 나는  그 여름 햇살 부서지는 마당 가운데  나도 모르게 주
저 앉았다. 그때 왜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오빠가 떠올랐었는지. 마음의 빗장이 
툭툭열리고 열리는 느낌,  맑고 서러운 그리움이 엄동설한  흙구덩이의 움파처럼 
솟아오르는 느낌...  이런 것도 `해방`이었을까? 나는  너무도 오랜만에 괴로움과 
서러움에서가 아닌, 그리움 때문에 울어보았다.
  화전골 송어리 사람들에게도 해방은 축복이었다. 먹는  일보다 더 급한 공출대
기, 끝나지 않던 부역으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송어리 사람들 생활에 주어진 해
방의 첫번째 선물이었다.
  길고 긴 여름날,  해가 져서야 읍에 갔던  남편이 돌아왔다. 동네 가운데 작은 
개울까지 손자를  마중 나간 할머니는, 스물한  살의 황소 같은 손자  등에 업혀 
춤을 추며  돌아왔다. 징용에 가면  남양(동남아)에 갈지 뙤놈땅(만주)으로  갈지 
알 수 없고,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도 할 수 없는데, 이제 그 지옥과 죽음의 신세
를 벗어던진  것이니, 누군들 기쁘지 않았으랴.   무엇보다 나는 ‘청상과부’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남편은 아침밥만  먹으면 읍으로 내려갔다.  어떤 날은  밤이 늦어
서 돌아왔고 자고 오는 때도 있었다.
  “봐라, 세상이 확 뒤집어졌어.  이제야 제대루 돌아가는 거여.”
  어느 날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힘차고 생기 넘치는 목소리. 표정도 그랬
다.
  “쥐뿔두 모르는 것들이  책상 앞에 앉아서 사람 깔보는 시대는  끝장이 났네!  
나 같은 화전민 출신의 노동자가 대접받는 세상이 온다고 안 그랜?  출신성분이
야 날 따라올 사람 없어.”
  무엇에 사로잡혀, 달떠 보이던 눈빛, 맨 쌀알처럼 드러난 미움.  그리고 희망....  
그 한때, 남편은 그랬다.
  소학교 졸업반 때,  야비한 일본인 교장을 혼내주려고 학교 유리창을  다 때려
부쉈다는 무용담도 여러 차례 말했다.
  양양읍엔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나도 그곳이  궁금했지만 내려갈 짬을 낼 수
가 없었다.  집 안에서 여자가 일을 하지  않으면 식구들이 당장 입고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친일파 아무개가  몰매를 맞고 죽었다,  일본 경창 앞잡이  아무개가 도망가다 
자살했다, 일본인 관리, 장사꾼, 기업가들이 신발도  제대로 못 찾아 신고 쫓겨났
다, 농민조합 하던  사람들이 다 한 자리씩  차지했다, 적색농조의 간부 몇 명은 
이미 몇 달  전부터 해당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더라,  그래서 지난 4월부터 
행정을 인수받을 계획을  비밀리에 짜 놓았다더라, 벌써 소련 붉은  군대가 송암
리에 와서 진을 쳤다, 소련군은 처음에 삼팔선  경계를 몰라 더 남쪽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하였다, 양양군  인민위원회를 도우려고 소련의 중령이  왔는데 군
청 옆에 산다, 그를 코미사르라고 부른다더라....
  새로운 세상, 새 정치에 반해 버린 남편 덕분에 나는, 부르기도 까다로운 이름 
- 치스차코프 대장의 포고문을 미리 들었다.

  ...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일제의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기억하라...  당신들은 누구
를 위하여 일하였는가?...   왜놈들이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 사람들을 
멸시하고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모욕한 것을 당신들은 잘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저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원히 
없어져버렸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
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당신들에게 달렸다.  붉은 군대
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작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의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1945년 8월
은 조선 인민사에 새  기원의 시초로 기입될  것이다.  1945년  8월에 붉은 군대
는 조선 인민을 일본 침략가들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그에게 자유와 독립을 찾
아주었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유력하고 정직한  친우
인 소련이  있습니다.  당신들의 해방군인  붉은 군대에 백방으로 방조하십시오.   
도시와 농촌에서는 안전한 생활을 계속하며 붉은 군대가 들어오기 전에 하던 그
곳에서 그대로 사업을 계속하십시오.   조선의 자유와 독립 만세! 조선의 발흥을 
담보하는 조선과 소련 친선 만세!

  희망과 기쁨으로 들뜬 남편.   그가 줄줄 외다시피 하는 이  길고 긴 포고문의 
의미를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놈이 가구 로스케가 왔구만유.”
  나는 남편이 몇 차례나 그 연설문을 읽고 났을 때 무심결에 이렇게 말했다.
  “저런 무식한 거!  겨우 그렇게밖에 생각을 못하니  턱주가리에 수염이 나너?

  남편은 내 무식을 이렇게 욕했다.
  “내가 듣기엔 그렇네유.”
  “야!  일본놈덜은 우릴 식민지  백성으루 만들어 지눔덜 배때길 채웠구, 소련 
인민은 우리와 형제로 지내자는데, 그래 그게 같단  말이여?  저런 건 당장 붙들
어다 사상교육두  시킬 필요 없이 숙청을  시켜삐레야 되는 건데, 니가  신랑 잘 
만낸 줄이나 알구 있어.”
  그는 해방이 된 후 웬일인지 화를 잘 내지 않았다.
  “이거 봐.  그런데 당신  집안두 죄다 시뻘게!  물겁에서 사촌 처남들이 세상 
만났다던데.  죄다 적색농조  출신들이란데.  하여간 이래저래 세상은 잘 뒤집어
졌어.”
  남편이 말했다.
  “그렇지만두 않어유.  우리 아부진 예날부터 그런 건 질색을 했어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제 할일을  몫몫이 가지고 난다구....  땅만 파던 사람이 하루아침
에 무슨 관청일을 봐유?  그전에 우리 오라버니가 빨갱이 사상을 좋아하다 아부
지한테 죽두룩 맞는 걸 봤는데유....”
  나는 이렇게 말했다.
  “무식한 거 하구 말을 하는 내가 잘못이지.”
  남편은 더 이상 나를 상대하지 않았다.
  어쨌든 세상이 달라진 건 사실이었다.   말이나마, 핍박받던 가난한 사람들, 근
로 대중인 노동자 농민과 마찬가지로, 남자로부터  모진 학대, 멸시, 차별을 받던 
여자들도 해방되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여튼 듣기 
좋은 말이었다.   인간은 평등하다, 부자  가난뱅이 따로 없이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갖는다`니.
  우리 동네의 여성위원장은  히뜩이 큰시어머니가 맡았다.   세포와 인민위원회
가 조직되어 저녁만  먹고 나면 방이 큰  집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자아 비판`도 
하였다.
  만일, 우리가 양양읍에만 살았다 하여도, 아니  나의 친정 동네만 같았어도, 큰
시아버지는, 숙청까지는 몰라도 상당한  자아 비판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
는 일제의 덕에 부자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숯  굽는 걸 청부 맡았고 목상도 해
서 돈을 벌었으며 한창 땐 옆구리에 총도 차고 다녔다지 않던가.
  하지만 화전골은 같은  성씨끼리 모여 사는 작은  동네여서 그런 모진 바람을 
피해 나갈 수 있었다.  타성받이는 한 집도 없었으니까.
  더 우스운 것은, 해방된 조선의 일꾼, 여성위원장으로 일하는 큰시어머니의 처
지였다.   그는 위원장이어서 동네 대표로  다른 동네까지 나가 회의를  할 때도 
많았다.   어떤 땐 밤늦게 돌아올  때도 있고 온종일  나가 있을 경우도 생겼다.   
그러면 히뜩이 여성위원장은 남편에게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렇게 멍든 몸, 맞
아서 아픈 몸으로 `남녀 평등 사회`에 대해 `교육`했다.
  이해, 여름 농사는 흉년이었다.  보리  이삭은 쭉정이어서, 흉년엔 산골에 가야 
배곯지 않는다던 말도  효험이 없었다.  어느 동네에선 허기진  사람들이 옥수수 
대궁을 씹어먹어 허옇게 부서지는 가루똥만 누더라는 얘기도 돌았다.
  그래도 우리는 밤이면 `독보회`에서  사회발달 단계를 배웠다.  인류는 원시공
산사회를 거쳐 노예제사회를 지나 봉건사회를 살고 자본주의를 거쳐서 사회주의
를 사는데, 사회주의는 해방사회인 공산사회로 가는 다리 같은 단계라고,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남편은 이 모든 이론과 사상을 좋아했다.
  그가 이런  것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는 아침에은 무슨 죽을  쑤어서 끼니를 
때워야 할까 고민했다.  시아버지, 시동생,  시어머니, 나는 그랬다.  일하지 않고 
`사상`만 좋아하는 남편은, 겉보기엔 `놀고 먹는`사람이었다.
  이미 소련의 붉은 군대가  양양쪽 삼팔선을 지키기 시작했고 부락자치대인 민
청대원들도 지켰다.
  소련군이나 성난 민청대에게  들킬까 일본인 여자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남장을 하고 떠났다.   이때, 소련 군인은 송어리 어귀 큰물께에 와  있었다.  큰
시동생은 그들과 손짓 발짓으로 얘기하며  친해져서 그들이 먹던 `흘레바리`라는 
빵도 얻어오고 집에서 감자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이  먹는 빵은 꼭 우리들 베개
처럼 생겼는데, 그걸 가지고  다니다가 잠을 잘 땐 실제로 베개  삼아 베기도 했
다.  시커멓고 누르스름한 것이 먹으면 시큼한 맛이 났다.  그걸 칼로 썰어서 불
에 구우면 한결 맛이 좋았다.
  남편은 삼팔선 경비대 부소대장이 되었다.  그는  소련 사람들과 잘 지냈고 그
들은 남편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남편은 자기  직책에 충실치 
못했다.  그는  이미 광산에서 알고 지내던 일본인들이 피난을  도와달라고 하면 
한 번도 거절하지 못하고  삼팔선을 넘겨주었다.  그분만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매며 월남을 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남쪽에 가족이 있는 사람, 몰래 남
쪽 물건을 들여다 팔려는 사람(남쪽의  미제 약 `다이아찡`은 그때 만병통치약으
로 통해서 이북에  가져오면 금값이었다), 이북 정치가  싫어서 무작정 떠나려는 
사람....  남편은 그런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건 그의 천성이었다.  
그에게 부탁하는 사람들은 물론 여러 가지 안면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때는 십
촌도 가까운 친척이었고 사돈의 팔촌으로 얽히다 보면  양양 땅에 `남`인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송어리는  지형상 삼팔선을 넘기가 쉬운 곳이었다.  송어리에서 
북암령을 넘어 설피밭으로 해서 산길을  사십 리쯤 가면 삼팔선을 넘을 수 있었
다.
  그러나 해방된 이 해  가을 농사는 흉년이었다.  냉해를 입은  벼는 반 타작도 
하지 못했다.  쭉정이가 반인 벼를 개울가 통방아  확에 가득 넣어 두면 밤새 방
아 혼자 쿵덕쿵덕 벼를  찧었다.  통방아는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무게로 
방아공이가 올라갔다 떨어지면서  곡식을 빻는 방아다.  그렇게 빤  벼를 아침에 
나가 키로 까불면 쌀이 반 싸라기가  반이었다.  나는 겁이 났다.  내가 지은 농
사도 아니고,  날씨가 차서 벼가 여물지  못한 것인데 공연히 내가  복을 지니지 
못해 쌀농사까지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뱀복이 큰어머니는  복을 지닌 
여자여서 시집에 풍년 재복을 가져왔다지 않던가.

  이해 동짓달, 서울서 시당고모가 왔다.  시집에 일이 있어 왔다가 친정에도 들
린 것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울 사는 사람`을 본  셈이었다.  첫눈
에 당고모는 `우리`와는  달라 보였다.  왠지  자유롭고 윤택하다는 느낌이 들었
다.
  “당고모님, 서울은  어때유?  거기선  사람들이 여기같이 안산다데유?   사는 
기 영판 다르다데유.”
  “이거 봐 질부.  조선 팔도에 이런 송애 골짜기 같은 데가 없다는 것만 알게.  
이만하면 내 말뜻  알겐?  난 이런  데선 금싸라기루 밥을 해먹인  데두 못사네.  
이 골짜기 좋아 여기 떠나면 못사는 줄 아는 오빠가 들으면 나 미워할 기여.”
  “고모님 말씀이 옳구말구유.  이 골짜구니에 무슨 희망이 있어유....”
  나는 겁없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다 제각금 자기  생긴 대루 살기 매렌이네.  골고루  다 똑같이 사는 
세상 맹글겠다니, 그게 아덜 같은 생각이지 안그렇너?   인간이 생겨날 때 다 제
각금 몫을 따로 가지구 났는데, 어떻게 ‘평등”하자는 긴지 몰러!“
  당고모의 말이었다.  이런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말을 듣고  `비
판`하지 않는 나도 이미 `반동분자`였다.  그러나 나는 모처럼 숨통이 트이는  느
낌이었다.  그리고 시집에 당고모  같은 어른이 있다는 게 좋았다.  나는 당고모
와 헤어져 있을 때도  당고모 생각만 했다.  저녁에 범부집  큰방에 모여앉아 회
의를 하고 비판을 할 때도 나는 당고모와 `서울`생각을 했다.
  결국 나는 밑져야 본전이지 생각하고 당고모에게 내 맘을 열어 보였다.
  “우리가 서울 가면 살 수 있을까유?”
  이 말을 듣자마자 당고모는 반색을 했다.
  “질부, 이번에 날  따라 서울 갈라너?  질부가  생긴 대루 똑똑하네.  사람이 
발전을 해야지 이기 뭐너.  사람은 그저 대처에서 살아야 해.  큰물에 노는 고기
가 어디가 달라두 달르지 않구!”
  당고모가 말했다.  나는 결구 ‘서울바람’이 들었다.  날이 갈수록 그 바람은 
거세졌고, 내 마음은 점점 이 골짜기에서 멀어졌다.  그래서 당고모와 짜고 남편
과 시집 어른들을 설득하기로 꾀를 냈다.
  “준태야!  닌 서울 가서 사는  기 좋워.  어차피 통일될 긴데 여기 살아서 뭐 
하겐.  너만한 인물이 여기서 썩는 건 아깝구말구....”
  당고모는 남편이  기술을 써먹어야 한다고,  서울엔 큰 공장도  많고 일자리도 
널렸으니 건강만 하면 삼 년  안에 제 집 마련해서 기반 딱부러지게 잡을 수 있
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그를 설득했다.  `당신은 맏아들이다, 동생과 
어른들이 얼마나 많으냐, 동생들 크면  장가 보내 세간 내줘야 할 거 아니냐, 무
슨 토지가 있어서  세간을 내놓겠느냐, 내가 보니까 어떤 집이든  맏이가 잘살아
야 하겠더라, 그래서 예전부터  맏이는 굶어도 공부시키는 게 아니냐, 우리가 서
울 가서 둘이 열심히 일을 하자, 몇 년  일해 기반이 잡히면 동생들을 차례로 부
르자, 그리고 돈 모아  고향에 돌아와 남부럽지 않게 살 수도 있지 않느냐...`  남
편은 나의 이런 간곡한 설득을, 일단 불쾌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설득되지도 
않았다.  내가 무조건 서울에 반했듯이 남편은 `김일성 장군님`에게 사로잡혀 있
었던 것이다.  자기는 소학교 때 이미  김일성 장군이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
고 일본 군인들도 김일성  장군이라면 놀라서 도망간다는 얘길 들었다는 것이었
다.  심지어는 김일성이 자기와  잘 아는 사이기라도 한 듯이, 그런 착각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일성 장군님을 입에 달고  지냈다.  거기다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한 그의 연설문도 읽고 읽어서 줄줄 외웠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조선 인민은 지난날의 생활  체험을 통하여 식민지 
노예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민
은 절대로 식민지 노예의 길을 다시 걸을 수 없으며 망국노의 쓰라린 생활을 되
풀이할 수 없습니다.  해방된  조선의 주인은 바로 우리 조선 인민입니다.  지난
날 일제의 식민지 통치 밑에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살아온 노동자, 농
민을 비롯한 근로 대중이 새  조선의 참다운 주인으로 되어야 하며 그들에 의하
여 나라의 모든 문제가  해결돼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전체  인민이 정치에 참
여하며 근로  대중이 잘살 수 있는  참다운 인민의 나라, 부강한  새 민주조선을 
건설하여야 합니다...   전체 조선 인민은 휘황한 앞날에 대한  커다란 포부와 승
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가지고  새 민주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모두 다 힘을 
합쳐 용감하게  싸워 나아갑시다.   조선독립만세! 조선인민의  동일단결만세!`로 
끝나는 그 연설문을.
  그럴 때의 그는,  그가 번듯이 눕거나 문 앞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며 `나그네 
설움`,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를 때와 비슷했다.
  그런데 이즈음, 내  열망과는 상관없이 남편의 월남을 설득한 사람이  따로 생
겼다.  그의 보호자나 다름없었던 큰아버지,  나의 큰시아버지였다.  그가 남편에
게, 일단 서울에 가보고 오라는 지시를 했던 것이다.
  일제 앞잡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하여튼 그 시절을 잘  만났던 큰시아버
지는 `뒤집어진 세상`이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시방은 초기래서 여기가 좀 물러보인다만 두구봐라.  심상찮을 테니....”
  큰시아버지는 불안한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대한 애정이나  사회주의적 성향도 가지지 않은 사람
이, 송어리 여성위원장의 남편, 나의 큰시아버지였다.
  물론 나도 남편이 결코  사회주의와는 맞지 않는 성향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  기분대로 사는 데 길이 들었고 생활 
자체가 자기 한 사람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거의 발작상태에 빠지는 사람이
었다.  나는  그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니 사회주의니 만인평등이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면, 화가  나다 못해 우스웠다.   나는 그가 일본인이나 아는 사람들의 
월남을 도우면서도  자기가 하는 행위가 `반동`이라는  걸 깨닫지 못할  때 이미 
알아차렸던 것이다.   나는 사회주의에서 살아도 남편은 끝내 살지  못할 것이었
다.  레닌과 스탈린이 훌륭하면 무얼 한단 말인가.  아침에 끓일 좁쌀 한 됫박도 
없어 걱정인데.
  물론 나는 남편보다 무식했다.  그리고 나는 시집의 노동자였다.  그렇지만 노
동자의 천국에서 살지 못했다.  훌륭한 사상, 아마 사람 사는 데는 그런 것도 중
요하고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농사가  잘되는 게 가장 중요하고 그
리고 가정이 화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고 형이 동생을 때
리는데 가정이 화목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사상만 좋아하는 남편이 때로 
시시하게 생각되었다.
  다행히 큰시아버지는 남편을 꾸준하게 설득했다.
  “준태 니두 맘놓긴 일러.  니가 삼팔선을  넹게준 사람덜 중에 반동으루 몰렌 
사람덜이 어디 한둘이너?  안죽은 인민위원회 초기라 물러서 그렇지 질레 안 가 
찬바람이 불잖너 봐라.  사과 빨갱이들 말캉 잡아들이구 말지.”
  그때 고향에선, 사람들을 사과 빨갱이와 수박  빨갱이로 은밀히 분리해서 불렀
다.  겉은 공산주의자지만 속은 이남 자본주의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과`라고 겉
은 푸르러도 속이 붉은 진짜 빨갱이는 `수박`이라고 불렀다.
  남편은 큰아버지의 말을 듣고, 일단 서울에 가보기로 하였다.  나는 마음이 초
초해서, 떠날 준비를 하는 남편에게 우리가 송어리에서  살 수 없는 가지가지 이
유, 당신 같은 사람은 `자유`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설
득했다.
  남편이 서울로 간 사이 집에 작은 사건이 생겼다.  어느 날 밤, 우차 품팔이를 
하러 읍내 송암리  역전으로 다니던 큰시동생이, 올 때가 넘었는데  돌아오지 않
는 것이었다.   큰시동생은 형이  부탁받은 삼팔선 안내역을  도맡아했기 때문에 
우리 식구들은 모두들 제 발이 저려 걱정이  태산이었다.  소련 붉은 군대들한테 
잡혀갔는지, 서면의 골수 자치대들한테  잡혔는지...  큰시동생 말로는 자기가 소
련군들과 인간적으로 친하다고 했지만 식구들의 제 발 저린 증세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시집식구들은 누구를 멀리까지 나가 마중하지  않는 게 친정 풍습과 달
랐다.  친정에선 사람이  돌아올 때쯤 되면 영광정이나 싸근다리, 화일리 어귀까
지 반드시 마중을 나갔다.
  그러나 이날 밤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무던한 성품의 시아버지가  몇 번이나 
마당을 나갔다 들어오곤 하였다.   그러더니 그 어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주 캄캄한 그믐밥이었다.
  “아무래두 큰물께루 내레가 봐야겠다.”
  이렇게 말하고 시아버지가 밖으로 나갔다.
  “아버니 지두 갈까유?”
  내가 따라 나가려고 했더니 시아버지가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시아버지가 
당신 혼자 관솔불을  해들고 어두운 길을 나섰다.  시어머니는  아들이 잘못됐으
면 어쩌느냐고 넋두리하며 울다가 시할머니한테 꾸중을 들었다.
  “저년어 초라니 방정 때문에 참 큰일일세.”
  시할머니는 혀를 차며 말했다.
  “큰아(준태)가 안 왔어봐 할미가 저리구 있너!”
  시어머니가 말대답을 했다.  나는 시어머니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눈치를 주
었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치마 끝을 뒤집어  코를 풀고는 한참이나 더 지껄이고
야 입을 다물었다.
  “어디메 큰 짐승이 나와 앉었너?”
  이제 시어머니도 훌쩍이는  걸 멈춰 방 안이 무겁게 고요해졌을  때, 시할머니
가 말했다.
  “큰 짐승이라니 유?”
  내가 물었다.
  “큰 짐승이 호랭이 말구 또 있너!”
  시어머니가 내쏘았다.
  “본래가 `소`라는 짐승은 호랑이 앞에선 꿈쩍을 못한단다.”
  시할머니가 말했다.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가 한적한 고개에 나앉는
다거나 사람을 물어갔다거나 하는 얘긴 들었지만 내가 호랑이 걱정을 하는 산골
에 와 사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역시 시할머니의  짐작대로였다.  우리가  초조하게 얼마를 더  기다린 뒤에야 
돌아온 시아버지와 시동생이 그런 얘길 했다. 
  큰물께 건너 구애다리에서 사방골로  오르는데 갑자기 소가 딱 멈춰서서 움직
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때려도 보고 잡아 끌어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더란다.  
소가 움직이지 않으니 겁은 나고, 전 재산인 소를  그곳에 두고 혼자 올 수도 없
어 진땀을 흘렸단다.
  그때 큰시동생을 마중 나갔던 시아버지는 산등성이에서 번쩍이는 호랑이 불을 
보았다.  호랑이는 불을  무서워하므로 관솔불을 들고 내려갔다.  그제야 호랑이
가 피해 갔고, 소도 움직였다.

  남편이 돌아올  때쯤 되자, 나는 불안증이  생겨 잠도 잘 자지  못하고 어디서 
큰소리만 나도  화들짝 놀라곤  하였다.  남편이  서울에 실망을 하고  돌아온다
면....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나를 싫어하지 않는 
것 같은 시집 식구들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큰 되렌님, 성님이 서울 가는 기 좋겠지유?”
  “그럼유, 그래야 되구말구유.   대관절 성님이 여기서 뭘해 먹구  살어유.  농
사를 할 줄 아나....  그저 딱 전기기술 배운 거 가지구 벌어 먹어야 하는데 그리
자문 천상 대처루  나가야지 벨 수가 없잖어유.   낼이구 모레구 성님 돌아오문, 
그저 나가자구 그리세유.  그렇게밖에는 살 도리가 없는 걸유.”
  “그 양반이 지 말을 듣나유?”
  “그래두 지보담은 형수님 말쓰이 낫지유.”
  “되렌님.  성님이 인공 정치 좋아하는 거, 지는 왜서 그리는지 알다가두 모르
겠네유.  내  맘성엔 성님하구 이북하군 아무래두  안 맞겠는데, 그거 참 벨나지
유?”
  “그기 본시 말이 안 되는 기, 거설라므네, 특히 성님은....”
  큰시동생은 흥분해서 말이 제때 나오지 않으면 `거설라므네...`를 입에 달았다.
  “... 거설라므네, 그기 말이 안 되는  기 형수님은 지랑 생각이 같으신데, 성님
이 대관절 누구 간섭받는 거 딱 질색인 사람이 그저 `내 맘대로 살아야 되는  사
람`이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사회주의가 하두  좋다니, 기가 맥헤서, 두구보세
유, 지 말이 어디  한 모텡이 틀린 게 있너.  우리 성님  여기 질레 못살구 말지.  
그 양반은 애당최, 사회주의하군 바닥부터 맞질 않는 사람이니깐....”
  그는 신고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말을 익힐 때까지 살아, 자기도  모르게 함
경도 사투리를 썼다.  `성님은 아버지 맞잡이`라고 해서 동생들은 형님에게 무조
건 기죽어 지냈다.  나는 어느 곁에  얼굴까지 벌겋게 되고 목소리마저 거칠어진 
큰시동생이 너무도 고맙고 반가웠다.  그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그렇게 `힘`이 될 수가 없었다.
  “큰되렌님두 여길 떠나세유.   당고모님 말씀은 너른 서울 땅에선  무얼 하든 
먹고 살 기  있다잖어유?  다 지 할  탓이라니, 남자루 한 번 세상에  태어난 거 
활개치구 살어봐야지  않어유?  되렌님이  맘속으루 지를 나물군진  모르겠네유.  
그래두 여기 송애 골짜기엔 아무 희망이 없어유.   옛날 할아부지가 무슨 사연이 
있어 `피난곳`으로 여길 오셔서  씨를 퍼뜨리셌는진 몰러두, 이제 자손들은 너른 
세상에 나가 터를 잡고 살아야지유.  지는  그기 조상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예게
지네유.”
  큰시동생은 내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 화롯불
에 넘어져 화상으로  귓바퀴가 망가지고 손가락이 붙어 `조막손`이  된 안타까운 
사람.  같은 형제이면서도 형과는  달리 머슴처럼 일만 해야 하는 사람.  물웃구
미 처녀네에 말을 넣었다가  손이 병신이라고 퇴짜를 맞은 사람....  그러나 내겐 
그가 더 현명하고 집안에 필요한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마침내 남편이 돌아왔다.  나는  겁이 났다.  그의 속마음이 궁금해 가슴이 졸
아들 지경이었지만 먼저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뭔가 긴장감 같은 게 어려 있었다.
  “서울이, 좋워유?”
  첫날, 내가 이렇게 물었더니, 그는 흘깃  곁눈질을 하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래도 나는 ‘서울 갈 거냐“는 
가장 알고 싶은 질문은 참았다.
  시어머니도 갑갑한지 내게 물었다.
  “야, 어멈아, 아범이 서울루 간다더?”
  “말을 안하네유 어머니.”
  “씨알머리라구.  그럴 땐 꼭 미련곰텡이 같은 지 애빌 닮었지!”
  시어머니가 말했다.   우리는 나이가 다르고 신분이 달랐지만 서로  아내의 입
장에 놓이면 마음이 한데 어울렸다.
  큰집에 갔던 남편이 내려왔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두, 가는 기 낫겠어!”
  남편이 무겁지만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무 기뻤다.  그러나 그 기쁨
을 속으로 꾹꾹 눌렀다.
  “제분공장에 이력서를 내놓구 왔어.  취직 자린 많더라.”
  남편이 말했다.  아, 이렇게 일이 수월하게 풀리다니!
  그러나 남편에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큰 슬픔이 있었다.   그의 할머니
와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하는 것 때문이었다.
  “어디 가서 살든 니  한몸 펜하문 이 할미가 뭘 더 바래겐.   여기 걱정은 하
나두 할 기 없다.  그저 니 안식구나  잘 보살피구 살거라.  절대루 때리지 말구.  
그 뿔뚝밸두 좀 죽에야잖겐?   아범, 생각해 보게나.  타관살이란 말이 오죽해서 
생겼겠너.  돈 싸들구 살러  가는 것두 아니구, 그저 맨몸뚱아리 하나 믿구 가는 
거 `맘 맞춰`가며  부디 잘살게.  아예 이  할미 걱정은 눈곱재기만큼두 하지 말
어.  아범이 펜하문 내가 펜한 거여.”
  남편은 자신의 반동적 월남행을 당이나 민청대에서 알게 될까 봐 겁을 먹었을
지 모른다.  그는 마음의  결정을 보자 나보다 더 서둘렀다.  시아버지는 집안의 
큰 재산인 황소를 팔았다.
  친정에 가서 작별인사를 해야 했지만, 우리는  도망치듯 송어리를 떠나야 해서 
물갑리도 가지 못했다.
  준비는 아주 간단했다.   시집올 때 해온 이부자리, 옷가지가 타향살이 이삿짐
의 전부였다.   거기다 춘천까지 걸어서  가야 하는데 세간살이를 이고  지고 갈 
형편도 못 되었다.   더군다나 나는 왠지 가족을 나 몰라라  두고 도망가는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시할머니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아끼고  정을 준 큰손자가 떠나는 걸 차마 배
웅하지 못했다.   남편은 떠나기도 전에 울어서  눈이 벌갰다.  남자가 그렇게도 
잘 울다니, 나는 전에도 후에도 남편만큼 잘 우는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시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떠났다.  캄캄한 밤중이었다.  길 안내자가 따로 필요
치 않았다.   엄동설한이었지만 추위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한밤중 산길 사십 
리를 걸어 삼팔선을 넘었다.
  “삼팔선을 넘었어!”
  어디쯤에서 남편이 내게 말해 줬다.
  “여보, 그럼 여기부터 이남이래유?”
  나는 감격해서 마구 떨며 말했다.
  물론 춥기도 했다.
  이남 땅이라고 생각하니 내  마음속에 너무도 많은 감정들이 파도치기 시작했
다.  나의 고향, 친정의 부모님이 갑자기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한번 시집간 출
가외인은 이웃사촌보다 멀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고 어머니가 말했지만, 이제 이
렇게 영영 멀어져야  하는가 생각하니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마음만 먹었다
면 한나절에 닿을 친정.  거기 가서 어머니 아버지께 큰절이라도 올리고, 오래오
래 사시라고, 벙치  들팽이 뚝멀구가 꼭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그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았어야 했을걸.  오빠  산소에 가서 절이라도 하고 올 걸.  물갑리에
서 고개 한나씩  넘으면 되는 곳에 시집가 사는 언니들  만나 `잘살라`는 말이나 
한번 하고 올걸.   인공 정치에 앞장섰다는, 수박 빨갱이들이라는 사촌 오빠들....   
세상은 돌고 돈다니,  남의 가슴에 못박는 일 하지 말라고  말해 줄 걸.  공산당 
싫어하는 큰아버지가 골수 빨갱이 되어 일하는  자식들과 한집에 사시니, 괴로움
은 얼마나 클까.
  동이 트고 세상이 희끄무레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는 산길
을 걸으며 고향 바다를 머리 속에 그렸다.   그랬다.  나는 바다를 보았다.  고향 
바다.  미역도 줍고 지누아리 돌김을 따고 양미리 황어도 줍던 바다.  어제 다시 
볼까.  친정집 뒷동산,  큰서낭재 마루에 올라서면 너른 진미버덩 건너편으로 하
늘과 맞닿은 물치  앞바다가 보였다.  나는 목구멍으로 물컹거리는  것이 올라오
는 것 같아 목젖을 있는 힘을 다해 조이고  조이고 그랬다.  그리고 바다를 외면
했다.  그리워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성공`해서 돌아오면, 그때 실컷 원 
없이 바라보리라, 성공하기 전엔 못 온다....
  우리 세식구는 해가 있을 때  걷고, 해가 지면 민박을 했다.  우리처럼 피난짐 
같은 것을 지고 이고 걷는 사람들 사이에 진짜  피난민이 섞여 있었다.  여태 돌
아가지 못한 그들,  맨발에 거지 같은 차림으로 가는 피난민들은  쫓겨가는 일본
인들이었다.  동상에 걸린 발이  아파, 걷지 못해 주저앉아 울어도 누구 하나 거
들떠보지 않았다.  거들떠보기는커녕,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손가락질하고 때리기
도 했다.  그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한 짓은 골백번 죽어도 그 죄를  다 가릴 수
는 없을 것이었다.  양양에서만도 독립운동 하다 붙들려 죽은 사람, 매맞아 골병 
든 사람, 항복하지 않는다고 팔뚝을 무 허리  치듯 잘린 사람....  일일이 다 꼽을 
수도 없었다.  친정 오빠들만  해도 고생들을 했었다.  하지만 가련한 몰골로 피
난 가는 그들을 보니 불쌍했다.  사람들이  남을 자기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
할 수 있으면 사람 사는 세상에 피눈물날 일만은 없을 것이다.
  집 떠난 지 사흘 만에 춘천에 닿았다.   그 동안은 걸었지만 여기서는 차를 탈 
수 있었다.  버스라는 것이  군용 트럭을 개조한 것이었다.  그래도 자동차가 빨
라서 하루 만에 서울에 닿았다.
  드디어 서울로 온 것이었다.   `자유`가 있다고 하던 서울.   맘만 먹으면 누구
나 잘살 수  있다던 서울.  그러나  첫인상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겨울이어서 
그랬겠지만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었다.  따뜻하고  윤택하고 자유로운 기운은 어
디에서도 느껴 볼 수  없었다.  전봇대와 벽에는 여러 가지의  벽보가 붙어 있었
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표정엔 살기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나를 가슴 아프게 한 
풍경도 있었다.   내 나이로 보이는데 나와  다른 인생을 사는 처녀들, 책가방을 
들고 공부하러 다니는  여학생들의 모습이었다.  여자는 학교 가면  바람이 나고 
배우면 팔자가 사나워진다고 믿고 있던 고향과는  딴판이었다.  도대체 처녀들이 
저렇게 책가방을 들고 대낮에  활보할 수 있다니.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것만
은 아니었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이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사는 것이었다.  이
상하고도 놀라웠다.  아버지  밑에서 조신하게 있다가 시집을 가, 남편 그늘에서
만 사는 게 여자의 팔자라고  알았는데, 서울에는 `여자의 다른 인생`도 있지 않
은가.
  문득 까막눈으로 살아온 내가 후회되었다.   너무도 촌구석에서 세상물정 모르
고 살았다는 게 원통했다.  세상은 내가 알고 본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세상
은 아주 넓고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할 게 많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가기 시작했
다.
  우리는 당고모가 살고  있는 영등포 도림동에 터를 잡았다.   논밭 군데군데에 
판잣집 같은 것들이 드문드문 있는 곳이었다.  토박이는 거의 없고 우리같이, 어
떻게든 살아보려고 조선팔도에서 모여든 `촌뜨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돈
을 아끼려고  구들을 놓지 않은 집을  얻었다.  주인집 구들까지  놓아주고 대신 
방세 몇 달칠 면제받았다.
  구들을 놓고 간단한 부엌살림을 샀다.  시아버지는  우리에게 쌀 세 말과 단지 
하나, 배추 여덟 포기를 사줬다.  물론 당장 끓이고 떠 먹을 냄비, 그릇, 수저 두 
벌도 장만해 줬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살라`고 당부하고 다시 고향으로 갔다.
  나는 남편을 믿었다.   좋은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취직이 될 거라고, 그러나 
이력서를 냈던  제분회사엔 취직이 되지 않았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보았지만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남편은 스물두 살 황소 같은 장정이고  나는 배불리 먹
어도 돌아서면 배가 고픈 임산부였다.  세  말들이 쌀자루는 하루가 지나면 훌쭉
훌쭉 줄어들었다.  나는 남편마저 나처럼 줄어드는  쌀자루에 신경을 쓸까 봐 그
가 볼 수 없게 뒀다.   그는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열심히 쫓아다녔다.  태산같이 
믿었던 당고모네 식구들, 정작 알고 보니 그들조차  우리보다 일찍 와서 서울 땅
에 빌붙어 사는 피난민에 지나지 않았다.
  남편의 실망은  나보다 더 컸다.   하루 온종일 점심도 먹지  못하고 일자리를 
찾아다니다 올아오는  그의 얼굴은 가여워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잘 
부르던 유행가도  그이 입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농담을 즐기던  그의 입은 
바위처럼 굳어 묻는 말에 대답도 잘 하지 않았다.   이력서를 넣고 될 것처럼 희
망이 보이면 그는 기뻐서, 나를 더 잘 도와주었다.  관악산에 가서 생오리나무아
치를 쳐오는가 하면 불도  잘 때주었다.  아직 길이 나지  않은 아궁이에 생나무
를 때자니 불길은 들지 않고 매운 연기만 났다.   우리는 도무지 불길이 들지 않
는 냉방에서 하루 두 끼씩만 먹고 연기내만 맡으며 싫은 내색 감추고 겨울을 났
다.
  나는 놀지  않았다.  그저 도적질만  아니라면 송장 주무르는 일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러나 1946년의  서울은, 비록 대림동이 피난민 촌이긴 했지만 너무도 
어수선했다.  사람들은 너나 없이  뭔가 헤매는 것 같았다.  대부분 당장 끼니가 
걱정인 사람들이 입만 열면 ‘신탁통치’를 하는  게 그리다, 김일성이냐 이승만
이냐, 김구냐 박헌영이냐,  무슨 민주당이다 무슨 진보당이다,  ‘미 제국주의 타
도’니 ‘빨갱이 몰살’이니,  어느 패가 어느 패를 습격했다느니....   참 지긋지
긋한 시절의 시작이었다.
  남편이 일자리를 구하러  집을 나가거나 그의 `삼팔 따라지`친구들이  집에 오
면 나는 이웃집으로  나갔다.  누구네 집이든  일이 있으면 거들었다.  일거리가 
없으면 시키지 않아도  마루를 닦거나 설거지를 해주었다.  그러다  보면 수제비
를 얻어먹는 날도 있고 배추 시래기라도 한 줌  얻었다.  우리는 깡통을 차지 않
은 거지였다.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우리 같은 거지가 더 많았으니까.
  “비지가 다 팔렸어유?”
  이렇게 살던 어느날 누가,  두부 공장에 가면 비지를 싸게 살  수 있다고 알려
줬다.  모랫말 성당 밑에 두부 공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그곳
으로 갔다.  그러나 벌써 비지는 다 팔리고 빈 그릇을 들고 돌아서는, 얼굴에 부
황기 도는 사람들만 보였다.
  “비지가 다 팔렸어유?”
  내가 누군가 붙잡고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대꾸해 주지 않았다.  입 
뗄 기운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음날은 꼭두새벽에 집을 나섰다.   내겐 새벽잠이 없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두부 공장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나보다 더 다급하고 부지런한 몇 사람이 줄
을 서 있었다.  다행히 나는 이날 비지를 샀다.  다음날부터는 내가 늘 일등으로 
줄을 섰다.  그러나 두부 공장은 콩이 없어서 때때로 예고 없이 문을 닫았다.
  비지는 꽤 도움이 되었다.   밥을 조금씩 해서, 소금으로 간을 해 볶은 비지에 
비벼 먹었다.  밥 한 숟가락에 비지는 다섯 숟가락씩 먹는 꼴이었다.  그러나 이
런 비지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때까지는 행복했다.  이런  행복도 오래 
가지 않았다.  집 안에 쌀이라곤 한 톨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
은 돈으로 비지를  사서 먹고 살아야 했다.  남편은  소금에 볶은 비지 한 사발, 
나는 그이 빈 밥그릇을 씻은 물에 조금을 타서  마시고 목숨을 이어 나갔다.  벌
써 만삭인 뱃속의 아이가 무얼 먹고 자랄지, 그런 걱정을 할 여유가 없었다.
  아침에, 남편을 외상 차려 방에 들여놔 주고, 행여나 그가 눈치챌까 소화가 안 
되는 시늉을 했다.
  “속이 트직해서 아무것두 못 먹겠네유.”
  이런 내 말을 그가 곧이들었을까?
  이때나 그때나 살림이 가난하면  집 안에 할 일이 없었다.   물을 길어오는 게 
제일 힘이 들어서 배고프기  전에 그 일부터 했다.  그리고  나서 임신 때문인지 
부황기 때문인지, 부석부석 부은 몸으로 마실을 다녔다.  내가 일을 잘한다고 소
문이 나서 일을 시키는 집들이 있었다.   하루 일 해주고 한 끼 얻어먹었다.  형
편이 나은 집에선 김칫국에 수제비를 하거나 잡곡이라도 점심을 먹었으니까.
  남편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지고  그의 몸이 축이 지는 게 눈에  보였다.  물론 
모든 게 일자리를 얻지 못해서였다.  그는  이남으로 넘어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
했다.  ‘이남은 개판’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겁이 났다.  그가  오로지 나 때
문에 월남을 한 것은  아니지만, 화풀이를 할 데라곤 나밖에 없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맺힌 마음을 풀어볼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두 여기가 더 낫지 않어유?   여기선 저녁마다 모이자구 하지두 않지유, 
누가 자아  비판 하라길 하나, 난  지레 그 자아  비판이란 거에 진력이 나대유.   
여기선 자유가 있으니 자기 하구 싶은 대루 살 수 있잖어유.”
  “저런 무식한 거!  굶어 죽는 것두 자유나?”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 무지막지한  가난 때문인지 그는 나를 때리
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가난할 때 행복하게 지냈다.
  이런 어느 날 한낮에 나는 첫아이를 낳았다.   배가 뒤틀리고 엉치가 빠개지는 
듯 아프더니 아래로 무언가 커다란 덩어리가 물컹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신이 가물가물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 여자가  아이를 낳다는 건 이렇게  아프다가 정신이 사그라드는 모양이다... 
나는 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도 잊은 채, 이런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무슨 쥐새끼  우는 소리 같은 게 들리다말다 
했고 여자가  무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다말곤 하였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어떤 콩알만한 빛이 보이다가 사라지길 몇 번, 방 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당고모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핏덩이 아이를  씻기는 물소리도 들렸다.  그래, 
내가 애기를 낳았지,  이때야 비로소 나는 흐린 정신으로 들었던  소리들을 이해
했다.
  “고모유.”
  “이제 살었너?”
  시당고모가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햇아가 뭐여유?”
  그러나 나는 내가 낳은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했다.
  “정신 차렸으면 됐지, 뭘 그런 거부터 묻너!”
  “고모유, 햇아가 뭐래유?”
  나는 고래를 억지로 추켜들고 보챘다.
  “살림 밑천 하라구 딸이 태였네.”
  당고모가 말했다.   순간 내  가슴은 천길만길 떨어졌다.   `아들을 못  낳았구
나...`  이런  생각에 눈앞이 다시 캄캄해졌다.   시어머니가 아들을 많이  낳아서 
나도 아들을 쉽게 낳을  줄 알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중매쟁이도  아들 흔한 집
안이라는 얘길 하지 않았던가.  그랬는데, 딸을 낳다니... 나는 절망했다.  맏며느
리인 내가  아들을 낳지 못했으니 시어른을  무슨 낯으로 볼 것인가.   언니들은 
다 첫아들을 낳아 얼마나 친정어머니를 기쁘게 했던가.  당장 남편이 들어오면... 
나를 괄시하겠지,  나는 거정에 쌓여  진통보다 더 아프다는  훗배앓이도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처럼 아들 없는 인생을 살게 될까 봐 지레 너무도 무서웠다.
  “햇아라는 기, 이기 눈코 달렸으니 사람이라구 하지 뭐가 이렇너.  이기 사람 
구실 하라너 모르겠네야.”
  당고모가 말하면서  아기를 천에 둘둘 말아  내 옆에 뉘여놓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에미가 맹물에 소금  타서 먹구 살었으니 니가  요만큼 생긴 거만두 다행이
다.”
  당고모가 제 어미한테 괄시받는 갓난아기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머야라, 이거 보게, 야가 배가 고프너?   입술을 아주 오물딱거리네.  희한
하네.”
  아이를 들여다보고 당고모가 중얼거렸다.   나도 이때 아이를 보았다.  너무도 
작고 새까맸다.  몸에 털만 보이는데 손으로  만지면 뼈에 붙은 살가죽이 이리저
리 쓸렸다.  그저  쥐새끼 같았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죽어버렸으
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나는 또다시  정신을 잃고 죽은 듯 잠에 빠
졌다.
  저녁에 지친 남편이 돌아왔다.
  “딸이래유.”
  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아기를 들여다보는 남편에게 말했다.
  “수고했어.”
  남편이 아기한테 얼굴을 박고 말은 이렇게 했다.  이상했다.  아이가 딸이라는
데도 저렇게 들여다보니 ‘섭섭’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햇아가 딸이래유.”
  나는 그가 혹시 잘못 들었나 해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이걸 언제 커서 업어주너?  시방은 안아보지두 못하지?”
  남편이 좋아서 불그무레해진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나는 엉엉 소리내 울다가 흑흑 느껴 울었다.
  “왜서 우너?”
  남편이 물었다. 물론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 우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
다.
  고향으로 가는 인편이 있어 첫딸 낳은 걸  시집에 기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아버지가 아이 포대기와 미역을 싸 가지고 서울로 왔다. 나는 너무 놀랐다. 이
상했다. 손녀 본 걸 시아버지까지 기뻐한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시집 식구들
은 시할머니의 말대로 ‘뿔뚝밸’만 빼면 인정 많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아이가 복이 있어서인지 남편이 취직을 했다. 김포 비행장 미군부대였다. 여기
선 일 주일에 한  번 주급으로 돈을 받았다. 급료라야 하루 두 끼  겨우 먹을 만
큼 받았지만 우선 그런 일자리나마 얻은 게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그리고 부수
입이 있었다. 남편이  쓰레기통을 뒤져 미군 잡지도 건지고 양은  조각도 주워온 
것이었다. 그걸 팔면 요긴히 쓸 수 있었다. 거기다 미군들이 피우다 버린 꽁초를 
주워서 피우니 담뱃값도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업고 이집  저집 다니며 
일을 해서  끼니를 때웠다. 이렇게 알뜰히  살고 돈을 모았더니 두세달  만에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
  쌀가마니를 방에 들여놓던 날의 그 감격을 어떻게 말로 할까.
  “이거 봐유, 우린 이제 부자래유!”
  내가 이렇게 말하자 남편도 눈물이 도는지 눈이 젖었다.
  “이걸 굶기지 말아야 할 텐데.”
  남편이 아기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마음도 흐뭇하고 미역구에 밥도 배불리 먹어서인지 잘 돌지 않던 젖이 흔해졌
다. 아기는 백 일쯤 지나자 방긋방긋 웃었다. 남편은 아이가 보고 싶어 줄달음쳐 
집에 오곤 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가정의 행복이라는 것을 눈물겹게 느꼈다.
  그 다음, 돈을  모아 밀린 방세를 갚았다. 주인이 깜짝  놀랐다. 자기네는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가마니 쌀을 들여놓은  부자가 되었지만 쌀을 아꼈다. 보리와 옥수수  간 것을 
사다 보태 먹었다. 그나마 밥은 남편만 주고 나는  젖도 잘 나는 국물을 먹을 셈
치고 밀가루를 사다 하루 두끼는 눌은 국을 끓여 먹었다.
  몇달 , 이렇게 배부르고 행복한 생활을 했다.
  그런 어느날 이웃집에서 일을 해주고 있는데 누가 달려와서 말했다.
  “집에 가봐, 애 아부지가 왔어!”
  순간, 가슴이 까닭없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유?”
  나는 되지도 않는 말을 물으며 집으로 달려갔다. 그가 집으로 왔다고 했을 때, 
문득 떠오른 첫번째 생각은 사고였다. 전봇대라도 올라가다 떨어졌나, 아니면 해
고라도 당한 걸까. 짧은  순간 너무도 무서운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겉보기
엔 멀쩡한 남편이 송장처럼 방에 누워 있었다.  무어라고 말을 붙여볼 여지가 없
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등에 업었던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부지다아.”
  나는 말도 못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때 같으면 자는 아이도 깨웠
을 남편이 등을 돌렸다. 나는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도시락을 들어보았다. 
묵직했다.
  “어디 아퍼유?”
  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예뻐하던 아
이가 기어서 다가가도 모른 척하였다.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데 그는 돌덩이처럼 말이  없었다. 저녁도 먹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여느 때처럼 새벽밥을 했다. 그는 일어나지 않았고 열 시나 되어서 
모래 씹듯  밥을 먹더니 잠들어  뉘어놓은 아이를 말없이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슬프고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집을 나갔다. 어디 간다는 말도 없었다.
  다시, 실업자가 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신경질이 더 늘었고  말투는 아주 거칠어졌다.  하지만 사귀는 
사람들이 늘어가는게 이상했다.  나는 얼마남지 않은 쌀이 바닥이 날까  겁이 나
서 궁리 끝에 장사를  시작했다. 아이를 업고 밥을 해서 식지  않게 상자에 담아 
이고 다니며 파는  것이었다. 영등포역 구내에 들어가 있다가 기차가  와서 사람
들이 내리면 “따끈한 밥 사세유!”하고 소리쳤다. 손님이 생기면 부리나케 상을 
펴놓고 벼락치기 밥상을 차렸다.  김치에 나물 무친 것과 간장이 반찬이었다. 쌀 
한되 퍼서 밥을 해  이고 나가 다 팔고 들어오면 쌀 한 되가  남는, 그런 장사였
다. 하지만 어려운 건, 우리  같은 보따리 밥장사를 닥치는 대로 쫓는 경찰의 몰
인정이었다. 밥상을 펴놓고  있다가도 경찰이 활개치고 막대리를  휘두르며 다가
오면 아무렇게나 보따리를  싸서 도망을 가야했다. 그러다 보면 어떤  날은 아이
에게 간장이 쏟아져, 죽을 듯이  울어대곤 했다. 그래도 이 골목 저 골목 숨었다
가 다시 나와 장사를  하곤 했다. 하지만 결국 그 쌀을  아끼지 못하고 빈털터리
가 되고 말았다.
  나라에서 밀가루 배급을 주었다. 우리는  한 말 한 되를 탔다. 다시 새벽에 줄
을 섰다가 비지를 사왔다. 비지에 밀가루 한 말  한 되로 세식구가 아껴 먹어 봤
자 보름을 넘기기는 어려웠다. 어떤  날은 비지를 살 수 없었다. 나는 다시 굶으
며 소화불량에 걸린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젖이 말라붙고 아이도  울음이 많아
졌다. 어떤 집에서 옥수수 가루가 썩었다고 버리면 가져다 물에 우려 먹었다. 고
향에선 썩은 감자도 물에 우렸다가 가루를 내서 떡을 해먹었고, 쓴 굴암, 칡뿌리
도 우려서 먹었기 때문에 그런 상한 곡식이라도 물에 우려 끼니를 때우는 건 너
무도 쉬웠다.
  그런데 실업자 남편은  바빴다. 어떤 날은 꼭 건달같은 패거리를  끌고 집으로 
와서 무슨 얘기에 몰두하곤 하였다. 나느 괜히  걱정이 되고 그들의 표정이며 차
림이 마땅치 않아 들락거리면서 얘기를 엿들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다, 남북통일을 가로막는 건 다 반역자다, 노동자가 노
예 취급을 받는 세상은 엎어야  된다. 우리 노동자는 `전평`의 깃발 아래 뭉쳐야 
산다, 일제 앞잡이들은 여전히 잘살고 모든 식량은  한 줌 취새끼 같은 모리배들
이 매점매석을 해서 값을 저들 마음대로  조작한다. 경성전기 노동자가 전봇대에
서 떨어져 죽은  게 뭐냐, 다 허기져  기운이 없어서였다, 우리 전평의 노동자가 
뭉쳐 일어서면 영등포는 아침 해장거리도 안된다....
  나는 그저 기가 막혔다. 영등포라면 공장 지대이고, 거기 방직 공장은 문을 닫
았는데, 무얼  가지고 `해장거리`라는 걸까. 나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만을 하는 건 아니었다.  노동자를 인간으로 생각한다면 기본 
생계비도 되지 않는 임금으로 부리겠느냐, 개,돼지만도 못하게 살다가 결국 굶어
죽을 것인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투쟁할 것이가. 그들은 길에서 주운 꽁초를 피
우며 울분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편은 내게도 드러내놓고 `이북이 좋다`고 말했다. `이북 정치가  인민을 위하
고 조국통일을 위한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그가 화를 낼까 봐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불안해서 초조한  날들을 보냇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표정은 밝고 씩씩했다.
  이런 어느 날이었다. 각목을 든 젊은 남자 여남은 명이 집으로 쳐들어왓다. 그
때 나느 빨래를  하다 말고 등에 업혀 자는  아이를 내려놓으러 방에 막 들어온 
때였다. 방문 앞이 왁작왁작하는 것 같더니 주인도 찾지 않고 문이 확 열렸다.
  “빨갱이 새끼 당장 나와!”
  “누구신데 이러세유?”
  나는 겁에 질려 이렇게 물었다.
  “여기서 빨갱이 준태가 산다는 거 다 알구 왔어!”
  “빨갱이 이놈 당장 나와! 처자식 몰살당해 볼래?”
  끔찍한 순간이었다. 내가 무어라고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무어라고 했
을 것이다.
  “이 여자두 새빨간 물이 들었구만!”
  한 남자가  무서운 얼굴로 이렇게 소리쳤다.  그리고 두어 명이 신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와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뒤진다는게 차라리 장남이었다. 방엔 
도대체 장정의 몸을 숨길데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부엌도 위졌다. 그들은 남편
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내게 겁을 주고 행패를 부리는게 목적이었을 것이
다. 곤하게 잠들었던 아이가 북새통에 깨어 울기 시작했다.
  “이북이 싫어서 넘어와 사는 사람이 무슨 빨갱이라구 그래유!”
  울기 시작한 아이를 달래며 내가 소리쳤다.
  “이 여자가 말 함부로 하네! 대한 청년단 무서운 걸 모르는구만!”
  남자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물론 나는 그때  그들 `청년단`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몰랐다. 시장으로 나가다 보면 `대한청년단`이라는 간판을 단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과 길을 사이에  두고 무슨 `민주당`인가 하는 간판을 단 건물이 
있었는데, 양쪽 패들이 각목을 들고 나와 무섭게 싸우는 일이 잦았다. 경찰은 말
을 타고 와서 구경꾼처럼 빙빙 돌기만 하였다.  우리같은 여자들은 피 흘리고 쓰
러지는 사람들이 무서워 벌벌 떨건만 경찰은 정말 태평했다.
  “경찰이 왜 잡아가지 않지유?”
  “다 한패거린 걸요.”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집으로 쳐들어오다니!
  “우리가 오늘은 그냥 가는데 준태 오면  아주머니가 자수시키슈. 그래야 산다
구!”
  이런 말을 남기고 그들은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고도 한동안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다.
  `전평`의 노동자들이 하던 얘기가 잊혀지지 않고  떠올랐다. 그들 `청년단`들이 
경찰보다 힘이 세다던, 사람을 죽이고도 `빨갱이를 죽였다`면 무사통과라던 얘기
를 했었지....
  그때, 지긋지긋하던 게 둘이었다. 하나는 `가난`, 또 하나는 `사상`이었다. 그러
나 둘은 달랐다.  가난엔 사람 냄새가 났지만  사상에는 피 냄새가 났다. 가난은 
내 힘으로 피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상은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 그 사상이라는  게 뭘까. 나는 그게 `사과`나 `수박`두가지만  있지 말고 
아주 여러 개가 되어서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가지듯이 그렇게 마음대로 
가지게 했으면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남편은 그들이 잡으러 다니는 바람에 집으로 들어오질 못했다. `수박 패`에 들
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난리통에 아이가 배앓이를 하기 시작했다.  설사를 하더니 토하기까지 했
다. 아이가 빵을  좋아해 그걸 사다 먹였는데, 거기에 탈이  났는지 몰랐다. 병원
은 멀고 또한 돈도 없었다. 대한청년단 때문에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어느 날, 집 밖에서 돌던 남편이  어깨뼈가 사그라든 사람의 모습으로 돌
아왔다. `청년단`에 가서 `자수`했다고 힘없이 말했다. 그 순간 남편이 너무도 가
엾게 느껴졌다. 그 동안 나는 그에게 무조건  자수하고 편하게 살자고 수도 없이 
졸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까지 본 적이 없는  그 절망적인 남편을 보았을 때, 
나는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어디라도 대고 
마구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아빠가, 니가 보고 싶어 자수했다.”
  남편은 말도  못 알아듣는 아기에게  말하고 아이를 혀끝으로  얼렀다. 여느때 
같으면 까득까득  웃을 아이가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내 품에  안겨 겨우 
숨만 쉬었다. 나는 아이가 좋아하는 빵을  뜯어 들고, 아이에게 보여줬다. 아이는 
분명히 빵을 보는데  표정은 없었다. 나는 바보처럼 자꾸만 빵을  흔들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한참 있으려니 아이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빵을 잡으려는 
게 분명했다. 남편도 아이  이름을 부르며 빵을 먹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의 
손은 중간쯤에서 다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이때 이웃에 있던 고향 아저씨  한분이 놀러왔다가 우리 세 식구의 모습을 보
았다.
  “아주머이.”
  아저씨가 나를 숨죽였으나 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내가 그를 쳐다보았다.
  “아기 내려놓으시우.”
  그가 내 눈길을 피하며 나직이 말했다. 그 순간  내 몸에 너무도 차고 매운 기
운이 휘익  감겨들었다. 무서웠다. 아이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죽은 
줄도 모르고 안고 있던 내 아이를 버리듯이 바닥에 떨구었다.
  시당고모 내외가 왔다. 아이의 태를 갈랐던  당고모가 죽은 아이를 들여다보았
다.
  “니가 요만큼 살다 가려구 왔너?”
  당고모가 혼잣말을 했다.
  죽은 아이는 말할 수 없이 작았다. 베보자기를 귀맞춰 아이를 쌌다. 집의 부엌 
문턱이 높아 받쳐놓고 쓰는 못통이 있었는데 그걸 비우고 아이를 거리에 넣으니 
꼭 맞았다.
  남편은 우느라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당고모부가 아이를 담은  못통을 들고 집을 나섰다.  을씨년스러운 늦겨울이었
다. 아직도 전신이 울음으로 젖은 남편은 삽을 들고 따라나섰다. 어디로 가야 하
느냐고, 너무도 바보처럼 묻는 남편에게 고모부는 도림동 공동묘지로 가자고, 그
렇게 대답했다.  도림동 공동묘지. 나는 거기가  어디쯤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도림동을  떠날 때까지 그쪽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죽은  아이가 그
리워질까봐?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다만 너무도 무서웠던 것이다. 왜, 왜 
제 몸으로 낳은 첫딸을  잃고 슬퍼하거나 그리워하지 못하고 `무서워`했을까. 일
흔이 넘게 산 지금,  그 아이 죽은 지 오십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내겐 의문이
다. 물론 그 후에 나는 또 한번 딸자식의  목숨 때문에 그때 같은 무서움을 경험
하긴 했다.
  어쨌든 우리는 첫아이를 이렇게 영원히 잃었다.
  남편은 점점  더 이남을 싫어했다.  그는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하더니 결국은 
서울을 떠나겠다고 했다.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전평`활동을 하
던 사람들은 무슨 삼월 총파업인가 하는 데  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쪽 
집회에 참여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는 협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예전의 
동표들에겐 벌써 `배신자`였다.
  한동안 수염도 깎지 않고 방  안 귀신처럼 들어앉아 있던 남편은 혼자 고향으
로 갔다.
  그래도 나는 결국  남편이 다시 월남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맞
지 않았다. 그가  가고 한 달이 채 못되었을 때  큰 시동생이 나를 데리러 왔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혼자 온 시동생을 붙잡고 울었다. 그 
동안 한두번 서울에  온적이 있는 큰시동생도 죽은  아이를 생각하며 함께 울었
다. 아이를 제대로 기르지 못하고 죽인 것이 모두  내 잘못만 같아 얼굴을 들 수
가 없었다.
  “형수님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어유. 사람이 지 목숨은 날 때부터  다 타고난
다잖어유.”
  눈시울이 젖은 시동생이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내 참담함, 상실감, 절망 같은 
것은 씻길  수 없었다. 그리고 시동생이  나를 데리러는 왔지만 다장  떠날 수는 
없었다. 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결코 이렇게
는 아니었다. 이웃에는 우리같은  처지의 사람들 천지였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다. 임자 없는 나라땅에 말뚝 박고  허름한 판자나마 
집을 지으면 고래등  같은 셋방살이보다 나을 것이었다. 모든 타관  사람들이 그
렇게 자기집을 장만하고  있었다. 나는 울면서 시동생에게 이런 장래를  다 버리
고 굳이 그 가난한 산골로 가야만 하느냐고 물었다.
  “성님이 백번 천번 틀렸지유.”
  시동생이 말했다.
  “되렌님두 그렇게  생각하지유? 우리끼리 얘기지만 그이는  너무 어리석어유.

  시동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이는 거기서 뭘 한데유?”
  “뭘 하긴유. 할 기 뭐가 있어유. 그저 담배나 피우구 들앉아 있기나 하지.”
  그럴 것이었다. 보나마나 뻔했다.
  “그런데 왜서 날 오라구 한데유?”
  “누가 아나유. 성님  하는 일 누가 이래라저래라  해유? 그래서 내 생각인데, 
형수님 맘이 정 그러시문 가세서 델구 나오든가, 그 수밖엔 없겠네유.”
  “지 말은 듣나유.”
  그랬다. 우리집에서는 아무도 그의  결점을 말해 줄 사람이 없었다. 남편이 팥
으로 메주를 쑨 대도 맞다고 해야 했다. 나도 그래야 한다고 배웠다.
  나는 `성공하지 못한 몸으로 고향에 가야 한다는 게 부끄러웠다. 번 돈도 없이 
그 가난한 고향 식구들에게 무슨 낯으로 인사를  할 것인가. 손녀딸 보고도 실망
하지 않던 시아버지에겐 무슨  말을 할까. 나는 돌아갈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남편을 쫓아  살아야 하는게 여자의 타고난 팔자`이기  때문에 초라하기 
그지없는 이삿짐을 쌌다.
  몰래 이남으로 넘어갔다 온 반동분자. `자아비판`을  하게 될지 몰랐다. 실망과 
두려움 때문에  내 걸음은 무쇠를 매단  꼴이었다. 그런 꼴로 나는  나올 때보다 
경계가 강화된 삼팔선을 넘어 이북으로 올라갔다.

    3
    삼팔선

  “형수님, 어디가 펜찮으세유?”
  정낭에 갔다가 마당으로 올라서는데 시동생 준호가 물었다.
  “아니유, 되렌님.”
  나는 민망해서 진저리치듯  대답했다. 남편의 둘째동생인 준호는  내가 시집오
던 때부터 이것저것 챙겨주고 말도 잘 붙이는 시동생이었다.
  “안색이 안 좋으세유.”
  준호는 삼태기에 넘치도록 관솔을 담아들고 나를  바라보고 섰다. 식전부터 장
작을 패더니, 그새 윳가락만큼씩 관솔을 쪼갠 모양이었다.
  “큰되렌님 잔치음식 먹구 속이 놀랬나봐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큰시동생 잔치를 치렀던 것이다.
  준호도 내 웃는 걸 보더니 싱긋 웃고 내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왔다.
  동서가 설거지를 끝내고 부엌을 쓸다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새 다했너? 내가 꼭 꾀부리러 나갔다온 거 같네야.”
  나는 미안해서 동서에게 말했다. 준호는 부엌  한쪽 나뭇가리 옆에 관솔가지를 
쏟아놓고 나갔다.
  “괜찮으세유?”
  동서가 물었다.
  “난 원래 클  때부터 속이 마땅찮아 삐끗하면 체하구 그랬다네.  그래두 지끔
은 용 됐지 뭐. 어머니는 어디 가셌너?”
  “몰러유.”
  “동세는 이제 방에 들어가 좀 쉬게너. 새벽부터 나와서 쉬지두 못했잖너.”
  “쉴 게 뭐이 있어유? 놀어봐야 심심하기나 하지유.”
  동서는 부엌 빗자루를 치워놓고 나만 쳐다봤다. 시집온 지 꼭 이레가 된 동서. 
나보다 다섯살이나 어렸다.  가난한 집에서 어렵게 자랐다는데 몸집은 튼실했다. 
나는 고방에 들어가 닷 말들이 함지를 내와싸ㄷ.  집에서 쓰는 모든 그릇은 옹기
나 사기,  놋그릇 말고는 시아버지가 직접  만든 것들이었다. 요새도 시아버지는 
두가리를 팠다.  그런 아버지 솜씨를 닮았는지  이제 여섯 살 난  막내 시동생도 
팽이를 깎는다고 하루종일  앉아 있었다. 내가 알기로도 벌써 세번이나  손을 베
었다. 그때마다 어른들한테 꾸중을 듣고도 막내는 무언가를 만들려고 몰두했다.
  나는 잘게 토막치고  쪼개서 말린 칡을 함지에 담아서 메로  두들겼다. 동서도 
내앞에 앉아 메질을 했다.  가볍게 메를 들었다 놓는 동서에 비해  내 일손은 느
리고 떴다. 우선 기운이 달려서 오래 버티지를 못하고 자주 쉬어야 했다. 입덧에 
먹지를 못한 데다 송어리 살림에 맘을 붙이지 못해 더했다.
  “성님유, 서울이란 데가 좋워유?”
  한동안 말없이 메질을 하던  동서가 불쑥 물었다.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못 들은 척하고 일만 했다.
  서울에서 돌아온 이후, 나는 여러사람으로부터 서울에  대해 얘기해 달라는 말
을 들었다. 처음엔  내가 느낀 대로 경험한  대로 얘기했다. 그런데 얘기를 듣고 
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반응에 도리어  내가 놀랐
다. 서울은 어쨌거나 이  송어리 골짜기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레  넌더리를 냈다. 우스웠다. 언제나 사람 무서운 건 
우물 안 개구리나 선무당일 것이다.  사람  사는 고장이라고는 야양군의 몇 군밖
에는 가본 적이  없을 그들이 되레 나를  업신여길 땐, 기가 막혔다. 생겐양지의 
웃말집 형님은 숫제 이랬다.
  “날래 잘 왔네. 이남은  생지옥이란데 뭐. 깡패만 득시글대구 도둑 강도가 무
수워서 어떻게 사너? 사람이 나서 삼시 세끼 먹구 살긴  매일반이여! 안 그렇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송어리에 와서 처음 마을  회의에 나갔다가 나는 그 회
의 광경에  정나미를 떨군 처지였다. 그들은  무조건 이남에 살러 갔다  못 살고 
온 나를 적이 멸시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송어리 사람들의 순진한 마음
을 경멸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나 혼자 속마음으로만이었다.
 그런데 시집온 지  이레째인 동서가 ‘서울살이’에 대해 물었다.  여전히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거긴 사람 살 데가 못 된다구덜 하대유.”
  다시 동서가 물었다.
  “조선 팔도에서 인총이  젤루 많이 모인 데가 서울일세. 왜서  그렇게 모여들
겠너 하구 동세가 생각해 볼란?”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보다 다섯 살 아래인 동서는 성품이  서글서글해 동
서 사이로 지내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동서는 홀어머니 밑에서 위로 오빠  하나에 밑으로 남자 동생 두고 외롭게 자
랐다며 시집온 다음날부터 나를 친언니 대하듯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씩씩하고 
착한 동서에게조차 내  마음이 개운하게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거기다  나는 이
번에도 입덧이 유난스러워 잘  먹지 못했다. 이마와 눈가, 볼에 기미가 새까맣게 
슬어서 주접이 들어도 보통이 아니었다.  힘센 동서가 떡메를 두세 번 칠 때, 나
는 겨우 한  번 치고, 때때로 함지 바같으로 튀어나가는  칡부스러기를 주워담으
며 쉬었다. 동서가 와서 집안일을 거드니 기왓장  맞드는 것처럼 수월한 건 말로
는 다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북 이남 얘기를 하면 마음이 갈렸다. 하지만 어린 
동서는 내 마음을 읽지 못해 호기심을 감춰두지 않았다.
  “거긴 상구두 일제 앞잡이들이  득시글댄다니 뭐이 해방됐다구 못하겠구만유. 
야양에서 월남한 사람들두 다 농민들 피 빨어먹던 악질 지주분자들하구 민족 반
역자들이잖어유.”
  나는 떡메를 함지 턱에  세웠다. 칡냄새 때문이니지 잔기침이 났다. 기침을 하
고 나서 고개를 드니 머리가 핑 돌며 눈앞에 별이 우수수 쏟아졌다.
  “동세야, 자넨 어디메서 그런 말을 들었너?”
  정신을 가다듬고 내가 물었다.
  “아이구 성님두, 여기서 그런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유?”
  나는 다시  메로 칡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손바닥만한 밭뙈기조차  없어 남의 
토지 부치고 목숨이나  잇던 동서네. 초가삼간에 거적으로 문을 가리고  살던 집
이 해방되고 토지개혁으로 농토를 무상 분배  받았으니, 동서네의 ‘해방’은 그
야말로 해방이었다. 거기다 동서는 시집오기 전, 친정 동네에서 ‘야학’에 다니
며 국문도 깨치고 사회주의 학습도 해서 아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남은 안죽두 부잔 배터져 죽구 가난뱅인  배곯어 죽는다니, 왜서 그리구덜 
살까유?”
  동서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다시 
잔기침을 했다.
  “성님두 서울서 낳은 햇아를 배곯려 죽이구 왔다구....”
  “아니, 시방 동세, 그 말 어디서 들었너? 누가 동세한테 그리던?”
  내가 눈을 번쩍  뜨고 물었다.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며 불이  붙는 느낌이었
다.
  “성님유, 이 송애골에서 그거 모르는 사람이 있어유?”
  동서가 눈을 반짝 뜨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그 크고 씩씩해보이는 눈
이 무서워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속이 상했다. 동네에서 우리를 따돌리는 게 
분명했다.
  내가 돌아온 이후 한두 번 회의에 나가고  다시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냥 내
버려두는 것도 사실은 수상쩍은 일이었다.
  “동세, 남 첨 듣네, 누가 그리던? 어디서 들었너?”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었다.
  “차암, 성님두! 아주버니가 자아 비판을 하셌다던데유 뭘.”
  동서가 큰소리로 말했다. 시집온  지 이레밖에 되지 않은 사람. 동서가 나보다 
동네 돌아가는 물정을 더 잘 알다니.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나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무언가  알 것 같았다. 남편의  기가 꺾여 보이는 것,  그가 전에 
없이 식구들이나 이웃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던 느낌. 알 것 같았다. 그  `
자아 비판`때문이었다. 분명했다. 동네에서 자아 비판을 한두 번  하게 되면 자연
히 기를 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여길 떠나려 하지 않다니!
  “성님 걱정 마세유. 이 송애골에서 누가 성님한테....”
 동서는 무슨 뜻인지 이렇게 말했다.
 동서가 무어라고 하든 나는 남편이 미웠다.  그의 어리석음에 화가 나서 속으로 
욕을 하다가 그만 입 밖에 내고 말았다.
  “머저리두 머저리두.... 하는  일마다 어떻게 그렇게두 답답하너!  남자라면 자
존심이 있어야지... 밸은 어따  쑥 빼놓구 사는지, 지 여편네 퍽퍽  팩, 소리나 벅
벅 지를 줄 알었지 간두 쓸개두 없는 인간이여!”
  나는 화가 뻗쳐 갓 시집온 손아래 동서를 앞에 놓고 할말 안할말 마구 지껄였
다.
  “난 솔직한 말이네만 나 혼자  몸땡이만 돼두 여기 안 사네! 난, 여기 오구싶
어 온 게 아니여! 서방님두   알기네, 뭐가 달러두 서울이 다르겠지 이런 산골에 
대?”
  나는 아주 씩씩거리기까지 하면서 말했다. 맘 내키는 대로 라면 내친 김에, 그 
토지개혁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한마디하고 싶었다. 사람이 그만한  토지 지니려
고 힘들게 일했을 텐데  하루아침에 빼앗아 이리저리 쪼개주는게 ‘도적질’ 아
니냐고.
  “동세, 날 찔러늘라문 찔러놓게!”
  “아이구 성님두 벨소릴 다 듣겠네유.”
  “고맙네! 나두 동세가 미워서 어깃장 놓겠너? 그저  여기서 살라니.... 식군 많
구 먹을 건 없구, 그리니 짜증이 나서 그랬네. 딴 맘은 먹지 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사실은 우리 내외가 서울에 다녀온 뒤로
는 집안 식구들의 대접이  다르더라는, 섭섭한 마음을 비추고 싶었다. 남편은 예
전과 달리  농사일도 열심히 하고, 가마니치기  새끼꼬기 사냥하고 칡 파오고...., 
하여튼 놀지를 않았다. 꼭 머슴 같았다. 나는 빈둥빈둥 노는 남편도 싫었지만 머
슴처럼 일만 하는 그도 싫었다. 그래도 해방되기  전처럼 그를 상전 위하듯 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시할머니만이 예전과 다름없이 남편에게 입 안의 
혀처럼 하였다. 남편은  시할머니에게 그날 있었던 얘기도 하고 속상한  일도 얘
기했다. 시할머니는  언제 어느때나 남편의 얘길  다 들어주었다. 그런 두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보는 나조차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상한 관계였다.
  “여긴 우리 친정 동네하군  다르데유. 다 한집안간이니, 그래두 우리 동넨 부
모자식이 틀어지구 형제가 틀어져 원수처럼 지내는 집두 있어유.”
  동서가 말했다. 나는 듣기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칡만 빻았다. 
  칡을 두 함지나  가루처럼 빻았다. 칡은 그렇게 부드러워질 때까지  작은 떡메
로 빻아서  발이 고운 채에 물을  부어가며 거른다. 가루는 밑으로  빠지고 채에 
남는 무거리는 버린다.  물에 가라앉은 녹말을 맑은 물이 우러나도록  갈아준 다
음에 물을 조심스럽게 따라낸다.  그 위에 천을 덮고 나무 땐  재를 퍼담아 놓으
면 재가 녹말의 물기를 싹 빨아먹는다. 이렇게  해서 얻은 칡녹말은 위로는 빛깔
이 검고 아래는 흰빛의 가루로  나뉘는데 위의 검은 가루는 땟물이라고 해서 반
데기로 빚어 물에  삶아서 콩가루에 무쳐먹는다. 흰 가루는 증가루라고  해서 국
수를 눌러먹거나 적을 부쳐먹는데 질겨서 물어뜯기지도 않는다.
  칡을 다루면 손이  새까맣게 물드는 건 물론이고  손이 갈라지고 터져서 피가 
났다. 그때는 손에  바를 것이 따로 없었으니 오소리나 산돼지  기름을 끓여두었
다가 잠자기 전, 듬뿍 튼 손에 발랐다.
  이날 오후, 우리  두 사람은 다시 마주앉아야 했다. 소여물때  되기 전, 가마솥
에 무청을 잔뜩 삶았는데 거센 껍질을 벗겨야 했다.
  “동세, 내가 한마디 해주란?”
  내가 이렇게 말문을 텄다.
  “예!”
  동서가 대답했다.
  “동세야, 자네는 태어나서  시집오기 전까지 타관에 나가 살아본  적 있었너?

  “아니유.”
  동서가 이렇게 말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동세가 언니 동상 없이 컸다구 안 그랬너? 나두 위루 언니는 둘이 있었어두 
동상은 없어놔서 동세가 친동상 같다네. 그래서 아무 말이구 다 하게 되잖너.”
  “성님만 그렇너유? 지두 그래유.”
  동서가 반기는 얼굴로 말했다.
  “난 말이여, 이상하게두 `자유`가 젤루 좋잖너.... 이남엔 자유가 있다네.”
  나는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북에 온 이후, 나는 정말  `이남`에 대해 
누군가와 툭 터놓고 `아무렇게나`  얘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동서는 아무런 대꾸
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흠칫 불안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이젠 엎질러진 물이
었다.
  “거리선 누가 누굴 비평하지 않어. 그저 사는  기 다 지 할탓이 아니너? 열심
히 노력하면 잘살구 남 일할  때 놀면 가난하게 살구.... 사람 사는 기 다 그래야
지 이건 누가 찔러늘까 무수워서 말두 못하구  툭 하문 자아비판이나 하라니, 사
람이 숨이 맥헤 살 수가 있너? 난 질레 자유가 없어서 못살겠네야.”
  동서는 여전히 듣기만  했다. 큰시동생 준기와 결혼한 동서는 이제  열일곱 살
이었다. 시동생의 결혼도  우리처럼 급하게 성사되었다. 내가 서울에서 내려오고 
얼마 안있어 말이 났어는데 그쪽에서도  이쪽을 탈잡지 않아 입 떼고 두달 만에 
잔치를 했던 것이다.  시어머니는 둘째며느리 얻는데 당신 의견을 낼  처지는 아
니었지만 짬만 나면 ‘애비 없이 큰 후레자식’이라고 흉을 잡았다.
  “성님유, 그래두 진, 평등해진 게 젤루 좋네유.” 
  한동안 가만히 있던 동서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동서의 말을 듣고 보니 갑자
기 사람이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의 생각은  때로 물과 불처럼 틀려서 물
이 아무리 어떤 얘기를 해도 불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게 있었다. 동서는 나의 `자
유`를 못알아들었고 나는 동서의 `계급해방`을 알아듣지 못했다.
  “서울에는 부자두 있구 가난뱅이두 있어! 동세두 보게나. 술타령이나 하구 돈 
무수운거 모르구 살면 가난해질 수밖에 더있너? 옛날 부자래두 자식농사 잘못해
서 재산 털어먹구 거지루 나앉은  집안이 있잖너. 사람은 다 지할 탓인 기여. 난 
생각이 그렇게 한날  한시에 태인 쌍둥이두 다른  기 사람인데 똑같아지자니 난 
말이 안 된다구 예기네.”
  “성님, 그래두 우리  북조선은 인민이 다 평등해졌어유. 토지개혁해서 소작농
민이 해방됐구유. 경작하지  않구 남의 노동에 기생해서 사는 봉건  작풍두 없앴
잖어유. 그 동안 세상이 뒤집어진 걸, 성님이 여기 안 기세서 모르시네유.”
  우리는 서로 자기 생각에 빠져서 남의 말을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야
기를 하면 할수록 서로의 간격만  벌릴 것 같고 그런 걸 확인해야 하는 것이 두
려워졌다. 차라리 상대방의  생각을 모른 채, 막연히 잘지내는게  좋을지 몰랐다. 
한 지붕 밑에서 맘을 섞지 않고 산다는 건 죄라고 생각됐지만 너무도 생각이 다
른 동서와 어떻게 맘을 섞어 정을 들일 것인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동서는  자기가 야학을 다닐 때, 원산에
서 온  역사선생님이 어쨌다느니 하며  계속 이야기했다. 얼굴에  주근깨가 하도 
많아 깨보숭이라고 불리던 할머니가  글자를 깨치고는 하도 좋아서 손자뻘 되는 
야학 선생님 앞에서 큰절을 했다는 얘기....
  “동세, 우리 이제 그런 얘긴 그만하세.”
  나는 동서의 말바람을 막았다. 순진한 동서는 내  속 깊은 갈등은 눈치도 못채
고 아위워서 멀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동세, 우리가 서루 나구 자란 데가 달르니  맘두 달를 기 아니너? 우리가 이
렇게 만내서  한평생 성님 동세하구 살어야지  맘이 다르다구 미워하문 쓰겠너? 
그리니 아예 이런 얘긴 앞으로래두 하지 마세.”
  나의 이 말에  동서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하지 않는 동서가  은근히 걱정되
었다. 이상한 세상이었다. 우리가 같은 여자로 남의 집 남자 형제를 남편으로 삼
아 이 집에  왔으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통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가 아니었던
가.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진 것  때문에 불안감을 느껴야 하고  남을 의심해야 
하는, 이런 고민과 걱정을 주는 이상한 세상이 나는 싫었다.
  이렇게 싫어지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했다. 아무리 일거리를  찾아내 쉬지 
않고 일을  해도 보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평생 화전밭이나  일궈먹다 짐승처럼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 혼자서도 눈물이 폭 쏟아졌다.  거기다 더 견
딜 수 없는 것은 `바보`처럼 변해 가는 남편이었다. 내가 남편을 선보고 그가 맘
에 들었던 건 절대로 화전농군이어서가 아니었다.
  “여보, 난 여기선 희망이 없어 질레 못살겠네유.”
  남편이 기분 좋아 보이는 날 밤, 나는 이렇게 불평을 시작했다.
  “지금은 이래두 이남보다 잘살 테니 두구봐.”
  그러나 남편의 대답은 여느때처럼 이랬다.
  “당신 참 시시하네유,  그 잘난 당신이 그래 이 골짜구니에서  잎담배나 말아
피우니!”
  나는 속이 상해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양담배 피우던 당신이 왜서 이렇게 됐어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어! 그짝은 생각두 하기 싫어!”
  그가 소리 질렀다. 역시 긁는 데는 호랑이도 배겨내질 못했다. 그래도 나는 긁
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이 당신을  옛날처럼 그렇게 보는 줄  알어유? 왜서 무시당하구 살어
유?”
  “누가 무시했너!”
  “보문 몰러유? 어머니 아버니 동생들 다 안그래유? 옛날엔 당신 말이라문 꿈
쩍두 못했는데 지금은 대우가 달르잖어유!”
  “다르긴 뭐이 들러! 니가 썩어빠진 자유주의 경향을  언제까지 청산하지 않구 
살래? 글찌나마 여기가 송애니 베기지! 그런 개인주의 사상  가지구 있다간 질레 
니가... 숙청당하문 어뜩게 되는지나 알어? 나두 맥 못춰.”
  남편이 경계의  빛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 사람은 남편이었다. 
동서에게서 느껴지던 두려움이나 불안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은 나보구 그런 말 못해유! 서방님이 요새두 삼팔선 안내해 주는 거, 그
기 반동 아니래유?”
  “저년이 어디다 대구 아가릴 함부로  놀래? 반동이 어째? 니가 뭘 안다구 무
턱대구 반동이래!”
  “난 뭐 등신인 줄  알어유? 서방님이나 당신이 아는 사람 부탁이라구 야박하
게 거절하지 못하는 거, 그런 기 다 ‘원만주의’라구 비판 받대유.”
  내가 이렇게 말하자 갑자기 남편이 피식피식 웃었다.
  “야, 꽤나 유식하신데. 은제 그런 거 다 배웠습니까?”
  “저 양반 줌 봐. 날 무슨 까막눈으루 아네. 내가 회의엔 안 나가두 당신이 보
는 저거 다 읽어유.”
  나는 방  한쪽에 놓인 `민주청년신문`과 무슨무슨  문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편도 그걸 돌아보았다. 그는 다시 히죽 웃었다.
  “낼 당장 당에 가입해두 되겠다야. 그렇지만 세포위원장이 받아줄라너.”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당신을 나물굴라는  건 아닌데유. 어떤 때 보문 당신은  너무너무 속이 
없어유. 꼭 아덜 맘 같애유, 왜서 세상 사람덜 맘성이 다 당신 같다구만 예게유?

  “내가 어째서!”
  남편이 소리쳤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이북 정치하군 안 맞는데... 식구덜 두  당신을 누가 옛
날처럼 위해 줘유?”
  남편은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봉건적 작풍이 나쁘다는 걸 모르는구만?”
  그러다가 그가 이렇게 내뱉었다. 물론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몰랐다. 하지만 나
는 말이 짧아 대거릴 할  수 없었을 뿐, 속에선 화가 부글거렸다. 내가 서울에서 
이곳으로 왔을 때, 남편은 이곳 정치가 진짜 인민을 위하는 정치라고 말했다. 그
러나 나는 실망스럽기만 했다.
  “사람들이 속으루 우릴 어뜩게  예기는 지 당신이 알어유? 내맘엔 여기 송애
가 물러서 그렇지 우리 친정 동네만 같애두 당신을 사과 빨갱이라구...”
  “너 말조심해!”
  남편이 내 얘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다.
  “하여튼 난 여기가 좋워!”
  바람벽이 다 쩡쩡 울릴 지경이었다.
  “아이구우, 여보. 어른들이 놀래시겠어유.”
  나는 목소리를  낮춰 짐짓 웃기까지  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뿔뚝밸’이 
치솟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멀쩡하다가 어느 순간 왈칵 솟구치는  울화의 감
정이 바로 시할머니가 말한 뿔뚝밸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이럴 땐 
피하는 게 수였다.
  “야! 너 그렇게 이남이 좋으문 당장 가! 알었지? 그리구 앞으루 내 앞에서 절
대루 이남 얘기 꺼내지두 말어! 한 번만 더 그런  아갈질 놀렸다간 죽을 줄만 알
어!”
  그가 두 주먹을 들고 흔들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나는 단숨에 얼어버렸다.
  이날 남편은 정말 대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밤에 그는 바위처럼 몸을 굳히
고 내게 들을 보인채  잤다. 여러 가지 생각과 두려움과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 
없던 나는, 잠결인 것처럼 그의  다리 위에 내 다리도 올려놓아 보고, 몸을 뒤채
면서 슬쩍 그의 허리에 팔을 걸쳐도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남편이 이남 얘기를  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남’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웬일인지 남편도 속 깊은 데
선 이남에 가고 싶어할 것이란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내 마음의 방향이  이러니 점점 생활에 재미를 잃어갔다. 나를  친언니처럼 여
기려 하던 동서는  나보다 큰시어머니와 더 가깝게 지냈다. 히뜩이   큰시어머니
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 집안은 물론  송어리 전체를 기쁘게 하였다. 그때 
큰시아버지의 나이는 쉰일곱이 넘었을 것이다.

  같은 양양군인데도  이곳은 친정보다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내리면, 그렇지 
않아도 고요한 동네가  더없이 숨을 죽여 눈내리는 소리로만 천지가  가득 찼다. 
겨우내, 눈은 이미 내려서 쌓인 위에 또다시 덮이곤 했다. 산과 산 사이로 난 작
은 토끼길조차 눈이 덮여,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길인지, 심지어는 논이며 밭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눈세상이 되고 말았다. 눈이 계속 내리면  낮은 지붕에 눈
이 덮여서 멀리 보이는 오두막집은  거기 지이 있다는 걸 짐작도 할 수 없게 되
었다. 오래된 소나무도 가지에 쌓인 눈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쩍쩍 소리를 내
며 갈라졌다. 한밤중에 그런 소리를 들으면 무서웠다.
  나는 이렇게 눈 때문에 세상이 막히는 때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산기슭의 우
찻길을 바라보면, 저 길 따라  읍내가 나올 거란 상상도 하는데, 눈이 쌓이면 영
락없는 감옥이었다. 그저 샘터로 물 길러 가는  길을 뚫고 감자구덩이와 김치 엇
간, 정낭으로만 길을 내고 먼 이웃으로 가는 길도 뚫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때, 동네 남자들은 신이 났다. 무리를 지어 사냥을 나가는 것이었
다. 재수가 좋아 곰을 잡으면 돈이 꽤 되었다.
  이 해  겨울에도 남편과 시동생들,  그리고 시아버지까지 함께  어울려 사냥을 
나섰다.
  한번은 남편이 선창을  해서 산돼지 뒷다리와 갈비 한 짝을  받아왔다. 사냥을 
할 땐 창으로 짐승을 찌르는데 남 먼저 짐승을 찔러 상처를 입힌 사람은 ‘선창
을 했다’고 몫이  컸다. 거기다 이번 돼지는  커서 고기가 많았다. 남편은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처가에 가자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고마워 콧날이 
시큰했다. 산돼지는  집돼지와 달라 비계가 얇고  살코기가 아주 연했다. 화덕에 
참나무 숯 피워 무쇠솥뚜껑을  뒤집어놓고 볶아서도 먹고 소금을 뿌려가며 석쇠
에 구워도 맛이 그만이었다.
 그때가 섣달 초순경이었다.  시아버지는 가을걷이 끝내고 벌써 여러  죽이나 그
릇을 팠는데, 우리는 보기 좋은 남박(나무로 파서 만든 그릇)에 돼지고기와 송이
장아찌 한 사발을 싸가지고 친정나들이로 송어리를  벗어났다. 오색에서 흘러 양
양 남대천으로 해서  바다로 빠지는 개울물은 위아래가 다 얼어붙었다.  이럴 때 
남자들은 얼음을  타고 양양까지 간다고  했다. 이날 우리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큰물께 얼음을 미끄럼으로 건넜다. 이미  아이아버지가 되고도 남을 남
편은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많아 얼음 위에서 나를 이리저리  미끄럼태웠다. 미
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으면 아이를  지울지 모른다고 내가 질겁해도 그는 막무가
내였다. 사람이 그리워지면  왜 이런 하찮은 것들이 가슴을 메이게  하는지 모르
겠다.
  꼭 이때 전 내가 울면서 오른 논고릿재,  그 빨딱고개를 나는 어렵사리 남편의 
손을 잡고 내려왔다. 고개만  내려와도 속이 훤히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
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평고개 구비를 돌면  양양이 보였다. 버덩말 양짓말 
거마리... 누렇게 흙빛이  된 벼 그루터기 사이에  얼음이 얼었다. 해맑은 햇살도 
송어리 골짜기 햇살과는  달라 보였다. 그사이 양양장에도 몇 번  다녔건만 감회
가 이렇지는 않았었다. 출가외인이  되어, 다시는 한가족으로 살 수 없는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 곳, 부모님과 함께 살던 시절은 살과 핏속에나 스며 있을까. 과거
가 되어버린 딸의 고향, 친정.
  화일리 어귀에서 나는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엉엉 울고 말았다. 남편은 그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흐느끼면서 뫼맥
이 서낭재를 넘었다.
  어느 결에 나는 남편을 앞질러  걷고 있었다. 그 후로도 친정으로 갈 때면, 나
도 모르게 다리 긴 남편의 걸음보다 더 빨리 걷곤 하였다.
  동두불이 보였다. 가슴이 빠개질 것 같아 나는 제자리에 섰다. 작년 겨울 삼팔
선을 넘을 때, 아주  오래도록  와볼 수 없을 줄 알았던 물갑리. 서낭재 뒤로 가
슴을 떡하니 펼친 것 같은 설악산이 보였다.
  남편이 곁에 와서 서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왜서 갑자기 이리지유? 숨을 못 쉬겠네유.”
  내가 가슴을 웅크리고 말했다. 그러나 남편은 네  속을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띄었다.
  “내 얼굴 어때유?”
  나는 뭔가 숨기도 싶은 기분이어서 얼결에 이런 말을 했다. 
  “뭐가 어때.”
  남편이 무심하게 뱉었다.
  “눈물은, 왜서 시두 때두 없이 나오너 몰러유.”
   나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걸었다.
  큰서낭재 끝 문턱에서  황소가 느린 울음을 울었다. 안말 어귀  우물가에 겨울
해가 비쳐 반짝거렸다. 아이 둘이 맨발에 짚신을  신고 고드름을 따서 먹으며 인
군골 쪽으로 가고 있었다.
  “니네가 누구너? 누구네 아덜이제?”
  반가워서 내가 이렇게 물었지만  아이들은 누런 코를 훌쩍 들이마시며 달아났
다. 그 애들은 사내아이들인데도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아덜 적엔 추운 줄도 모르고 저렇게 댕기니, 희한하지유?”
  내가 말했다.
  “난 야,  평생을 저렇게 살었으문 좋겠다야.  세상 걱정 하나  모르구. 얼매나 
좋워.”
  남편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눈 내린 뒤라 서낭재 대숲은  고요하고 가끔씩 눈이 털썩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큰집도 조용했다. 너른  타작마당 한쪽에 아이들이 만든  눈미끄럼틀이 반질반
질 자리가 난 채  있었다. 내린 눈을 마당가에 쌓아두면 아이들이  그 위에 올라
가 미끄럼을 탔고, 그러다보면 저절로 저렇게 반들거리는 미끄럼틀이 되었다. 그
런데도 조타애들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자아이들은 양지바른  볏짚더미에 모여
앉아 이를 잡으며 이야기꽃을 피울 것이고 사내아이들은 팽이를깎거나 자치기를 
할 것이었다. 어쩌면 어디서 말타기를 하고 있을 지 몰랐다.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가슴속에서 어머이! 아부지이! 하는 소리가 태풍치듯 일
었다. 그래도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이때, 빈집처럼 닫혔던 문이 활
짝 열렸다.
  “아이구야. 이기 뉘기여! 시상에라, 이기 뉘기너? 이기 뉘기여!”
  어머니가 우리를 보더니 이렇게 목 메인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왔다.
  “어머이! 어머이! 어머이!”
  나는 어머니를 마구 부르며 달려나오는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식전에 까치가 울더니, 우리 햇아가 왔네야. 햇아가 왔어!”
  어머니는 기뻐서 나를 끌어안고 울먹이며 말했다.
  아버지가 사랑문을 열었다.
  “아부지!”
  내가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는 무어라고 입을  우물거리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
았다. 아버지는 문지방을 넘어 뜰팡으로 내려섰다. 남편이 아버지 쪽으로 다가가
며 인사했다.
  우리는 곧 안방에 들어가 우선 큰절을 했다.
  “요새 야가 자꾸만 꿈에 보여 답답하더니...”
  어머니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래두 고향이 살기가 낫던?”
  아버지가 남편에게 물었다.
  “이남이 상구두 안정이 안 돼서유.”
  남편이 대답했다. 어머니는  내 손을 만지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쓰다듬어보고 
어깨며 등도 만져보며 젖은 눈을 그런 게다 샅샅이 박았다.
  “니가 꼴이 어뜩게... 야, 니가 먹는기 마땅찮너?”
  어머니가 사위 듣기 민망한 말을 했다.
  “내가 시방 아 가졌잖너, 어머이.”
  내가 대답했다.
  “그랬너? 아이구 반구워라. 여잔 뭐니뭐니 해두 시집을  가면 그집 손을 퍼뜨
려 놔줘야 하는 기 첫째 봉사여.”
  어머니는 딸이 임신했다는 게 여간 기쁜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릴 때 죽을 고생하던 니가  이렇게 어른 될 줄 누가 알었겠너? 그저 여자
는 아 잘 낳아야 제 할일 하는 기란다. 입 댕길 때 퍽퍽 먹구...”
  “어머이! 난 먹구 수운 기 아주 많어유!”
  나는 흡사 어린 말내 딸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남편 앞에서 뻐기기 
시작했다.
  “야, 뭐가 젤루 먹구 싶디?  말만 해라. 우리 햇아가 먹구 싶다는데 뭘 못 해
줘!”
  어머니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내  기분은 붕붕 떴다. 그러나 정작 나는 먹고 싶
은 걸 하나도 생각해 내지  못하고 얼굴만 벌개서 이방 저방 돌아다니다 돌아오
고 잠시 낮았다가 다시 나가 부엌 고방 뒤란 을 둘러보고는 들어왔다.
  “야 에미야, 뭘 먹구 싶은지 말만 해라!”
  어머니가 재촉했다.
  “많어 어머이! 하두 많어서 생각이 안 아네! 송애서 못 먹는 거 다 먹구 싶지 
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예의 바르게 그윽히  앉아 있는 남편을 의식하며 이렇
게 말했다.
  “물겁서 못 먹는 기 송애에 더 많겠지!”
  아버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긴 그래유. 우리가 가주온  거 저거 보따리 풀어봐 어머이. 산돼지 고기
하구 송이 장아찌가 있어유.”
  “시상에라. 송이 장아찌  그기 예간 귀물이 아닌데...  이 서방이 사냥을 갔었
너?”
  “예. 동네에서 다 갔습니다.”
  “아부지, 이 서방이 선창을 해서 뒷다리하구 갈비 한 짝 받었어유.”
  내가 말했다.
  “아버지하구 동상들까지 가서 우리 몫이 젤루 많었어유.”
  남편이 대답했다.
  우리는 송애, 물겁, 서울을 이리저리 건너뛰며  한참동안 이야기를 했다. 그 동
안 나의 여물지 않은 흥분도 많이 가라앉았다.
  어머니는 저녁  먹기 전에 사위 대접한다고  술상을 봤다. 술 한잔  못 마시는 
사위를 앞에 두고 아버지만 신이 났다.
  나는 어머니가 상 차리는 부엌으로  나가 처음엔 보지 못한 쓸쓸함을 봐야 했
다. 한때 비좁게 들썩했던 부엌.
  자식이 셋이나 있으면  무엇 하는가. 나는 어둡고 쓸쓸하고 초췌한  부엌 한가
운데 우두커니 서서 부모님을 생각했다. 왜  어머니가 딸자식은 자식이 아니라고 
했는지, 오빠를 잃고 왜 집안의 기둥 뿌리가 빠졌다고 혼절했는지... 한꺼번에 이
해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인생을 송두리째 이해하기엔 
어림도 없었다. 아직도 나는 어머니의 삶,  그 언저리에도 다다르지 못한, 반편인 
겨자에 지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났을 때, 큰집에서 회를 한다고 모이게 했다. 손님인 우리는 빠진
다고 했지만 오빠는 막무가내였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를 것이 뻔한 머슴 아무
개 아저씨가 무슨 ‘장’자 붙은 자리를 차지했는데 이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
다.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었거나 소작을 주었던 부잣집들은 토지개혁  때 자경
하지 않는다고 토지를 몰수당했다. 어떤 집에선  부리던 머슴한테 매맞은 주인이 
이남으로 도주해서,  남아 있는 식솔들은  반동가족으로 분류되어 사는  게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집은 득세했다고 할까? 세포위원장이 된 작은  사촌 오빠. 그는 표
정도 무서웠다.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그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야, 들팽이 동무 잘 왔네!”
  오빠의 인사는 이랬다.
  “이남 갔다 못살구 도루 왔단 소식은 들었다!”
  오빠의 경직된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이럴 때까지도 오빠의 속셈을 
몰랐다.
  “오늘밤에 할 일이 있다. 회의할  때 매부하구 니가 나와서 비판 줌 해라. 미
제 앞잡이 이남에 대해  낱낱이 폭로하고 비판 해 봐. 임님의  조국 품으로 돌아
왔으니.”
  너무도 느닷없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오빠의 말은 완강해서 거부할 수 없었다. 
남편도 당황하는 것 같았다.
  “이 서방은 손님에다 정옥인 출가외인인데 그런 델 왜서 나오란?”
  어머니가 사촌 오빠한테 마땅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어머인 그 썩어빠진 개인주의 생각이 들렸대두 또 그리시네!”
  사촌 오빠는 어머니한테 이렇게  말하고는 나와 남편을 믿는다는 표정으로 쳐
다보고 나갔다.
  “어이구우 저눔으 종자. 무선 끝을  보지 못해 환장해서 저 지랄하구 댕기너! 
증말로 큰일이지 큰일이여!”
  어머니가 혼잣말을 하고 혀를 찼다.
  “여보, 어뜩해유?”
  내가 남편에게 귀엣말로 물었다. 남편은 쓰다 달다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날 밤  오빠네 집에서 열린 부락회의에 참석했다. 오빠가  우리를 자
기의 의도대로 소개하자 윗사랑 아랫사랑과 마루 안방 윗방까지 가득 찬 사람들
은 득의와 조롱에 가득  찬 웃음을 지으며 우뢰 같은 박수를  쳤다. 소름이 끼쳤
다. 송어리와는 딴판이었다.  나를 중매한, 술 좋아하는 박수  아저씨는 미신타파
에 걸려 표정이 폐인 같았다.  예전, 내가 시집가기 전의 그 다정했던 이웃이 아
니었다. 뭔가 새로운 기운이 거칠게 느껴졌다.
  “이거 봐유! 날래 나오슈!”
  누군가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남편의 허벅지를 한 손으로  누르며 일어
섰다.
  “이남에 넘어갔다가 살 수 없어 다시 왔어유.”
  나는 이렇게 말하고  그냥 주저앉았다. 여기저기서 야유조의  웅성거림이 들렸
다. 사촌 오빠의 혀 차는 소리도 거기 섞여 들렸다.
  “시시하잖너?”
  누군가 소리쳤다.
  이때 남편이 일어섰다. 갑자기 집안이 고요해졌다.
  “이남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입니다. 경찰은 미족해방과  민주주의 건설사업에 
뭉치는 노동자 농민을 때려잡는 우익 깡패도당의 한낱 앞잡이에...”
  남편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어떻게 실업자로 고통받
았는지 얘기했다.  이남의 자유라는 것이  알고 보면 ‘굶어  죽을 자유’라고도 
말했다. 노동자들은 살인적인  기아임금에 시달리지만 그나마 일자리가  없고 간
상모리배의 매점매석으로 물가는 한  해에 수십 배가 올랐다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은 남이 버린  공초를 길바닥에서 주워 피웠으며, 병들고 배곯는 아
이를 약 한 첩 먹여보지 못하고 죽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고 비통하게 말했
다.
  “... 그 아이는 저의 첫아이였습니다...”
  여자들 몇이 울었다. 누군가 여기는 천국이고 거기는 지옥이라고 말했다. 어떤 
남자는 김일성 장군님 만세를 불렀다.
  친정 동네 사람들은 남편의 입을 통해 이남의 비참한 실상을 들은 것만으로도 
남편을 신뢰했다. 하지만 나는 이날 밤 회의가  끝나고도 오래도록 이해할 수 없
는 두려움으로 가슴을  졸여야 했다. 더군다나 사촌 오빠의 발언은  차라리 공포
였다.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를 죽입시다!”
  그날 오빠의  발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남편의 자아 비판에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 자기도 모르게 김일성 만세를 부른 사람들  모두 일순 찬물을 끼얹은 것
처럼 고요 속에 묻혔다.  그래도 오빠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는 살부회를 만들어 
자기들의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봉건성의 
타파 없이는 혁명적 작풍도 불가능하며 사회주이 건설도 한낱 모래성 쌓기와 같
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모든 반동적 근성이 뿌리뽑힌다고 했다.
일제 식민지에선 적색  농조원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인민위원장과 세포위원장을 
맡아 일하는 두 아들을 둔 큰아버지는 불행했다.   큰아버지는 다음날 남편과 내
가 인사를 갔을 때, 자신의 불행을 감추지 않았다.
  “이 정치가 질레 못 살 걸세,  두구 보면 알겠네만, 난 자식을 버린 셈 친 지 
오랠세!”
  큰아버지는 병색이 도는 얼굴이었다.
  “돌다리두 두들겨가며 건너야 되는 법익  십 리 길두 한 걸음씩 내디뎌야 갈 
기 아니너? 시상을 이렇게 모질구  독하게 맹글구야 질레 가겠너? 시상 일이 다 
이치대루 굴러야 하는 긴데,  조케사우, 내 말이 글렀너? 밥을 먹재두 모를 심궈 
몇 번이나 논짐을 매너  생각해 보게, 맘성에야 모심구구 돌어서 민  눌러 볘 비 
먹구 싶지만 그기 말이 안 되잖어. 내 말이 그른 데가 있너?”
  남편은 무슨 맘인지 큰장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옳다` 고 했다.
  나는 송어리와 서울살이를 해보았지만 `세상이  뒤집어졌다`는 말을 친정 동네
에서 비로서 실감했다. 어머니는 물갑리의 부자  아무개가 인민재판을 받던 정경
을 얘기해 주었다.  변호사가 있지만 허울뿐이어서 거기 모인 인민  중에 누군가
가 악질이라고 한마디하면 그저  그 자리에서 한동네 사람한테 몰매를 맞는다는 
것이었다. 송어리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읍내에서 인민재판이 있어 
누가 어떻게 되었단 얘기는 들었어도  뻔히 아는 친정 동네에서의 일은 그냥 지
나쳐지지 않았다. 나는  이날 밤 인민재판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을 똑바로 보았다.
  전날 밤 동네에서 한 가족이 야반도주를 한  사건이 생겼다. 가장인 정씨의 친
형은 이미 해방되던  해 월남을 해서, 그들은 이남가족으로 찍혀  지내는 처지였
다. 그런데 바로 그가  엊그제 술을 마시고 세포위원장을 찔러 죽이겠다고 했다. 
이날 정보원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그의 죄와에 대한 수많은 지적을  받았다. 그
가 언제 누구네 밭에서 무를 뽑아간 것, 이남에 대해 한 번도 비판하지 않은 것, 
서울의 오촌이 잘산다고  은근히 내비친 것, 회의에 자주 늦었고  아프다는 핑계
를 대고 참석하지 않았던 것... 정씨는 고개를  들지 못했을 뿐 아니라 회의가 끝
날 때쯤엔 바보가 다 된 얼굴이었다. 이날은  그 외에 문맹퇴치사업의 성과가 낮
은 현상에 대한 비판과 반성, 여자관계가 나쁜 아무개에 대한 비판, 그리고 북조
선의 새로운 화폐 발행과 구화폐 교환,  북조선 인민회의 제3차 회의에서의 조선
임시헌법제정에 대한 ` 교양`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우리를 불렀다.  아버지는 먼저 
바깥에 인기척이 있나 없나  그것부터 살피고도 맘이 놓이지 않는지 모기소리로 
말했다.
  “이남으루 가게.”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버지는 긴 담뱃대에 엽연초를  넣어 엄지로 꼭꼭 눌렀
다. 나는 아버지의 낮고 무거운 말을 듣는 수간 남편의 얼굴을 쳐다봤다. 남편은 
입을 꽉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두구 볼란? 여기 사람덜은 다 죽어두 이남으루 간 느덜만은 살 테니...”
  다시 아버지가 말했다. 갑자기 가슴이 미어졌다.
  “아부지이.”
  내가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담뱃대를 입에 물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검
게 그을고  주름진 아버지의 얼굴. 나는  여태 저렇게 늙은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없었다.
  “사람 명은 하늘에 달랜 거, 우리가 살문 어제 봐두 안 보겠너.”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뭔 그런 말씀을 하세유.”
  남편이 말했다. 이때, 나는  아직 정세에 대한 아버지의 불길한 예감을 이해하
지 못했다. 다만 이북이 싫었을 뿐이다.
  “엣말에, 선한 끝은 없어두 악한 끝은 있다구 했어.‘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가 홍시를 담아들고 들어왔다.
  “아부지, 왜서 그런 말을 대구 해유?”
  내가 아버지한테 물었다.
  “두구 봐라. 내 말이 옳너 그르너.”
  아버지가 말했다.
  “하여간에 큰집 아범덜이 너무 설쳐대서 큰일이여.”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가 낮게 헛기침을 했다.
  “저렇게 나가다가 질레 뭔 끝을 볼라구 그리는지  몰러. 시방은 그 앞에서 다 
옳다옳다 하지만 두구봐.  그저 한 가지만 옳다구,  세게 나가는 건 언제나 안좋
워. 요새 아범덜  눈빛이 보통이너? 그기 어디 사람눈이여? 누가  잘못하는 기없
너 하구 살쾡이모양  두리번대니 얼굴 대기두 무수워 야. 시상에  털어서 문데기 
안 날 사람 어디 있겐.”
  어머니가 말해다. 나는 여하튼  좋았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
았다.
  “니 몸 풀 달이 언젠?”
  어머니가 얘기를 바꿨다. 나는 정이월이나 삼월이 될 거라고 말했다.
  “지난번에 실패본 기 예시가래서 큰 다행인 줄 알게.”
  어머니가 남편에게 말했다. 그는 손톱 끝을 만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번엔 꼭 아들  낳아라. 남의 집 맏며누린데,  불알 달랜 아들 낳아야 니가 
옳게 그 집안 식구가 되는거여.”
  어머니가 말했다.
  “딸 낳았으문 아들도 낳겠지!”
  아버지가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지가 아들 날 테니  걱정 말어유. 이 양반 집안은 딸이  귀한 집이래서 아들 
못 날까 걱정 안 하니 괜찮어유.”
  나는 이렇게 부모님을 안심시켰다.
  다음날 우리는 친정나들이 사흘 만에 송어리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내 몫으로 
짜준 베필을 이고 떡짐은 남편이 등짐으로 졌다.
  어머니는 시집간 딸들을 위해 예전부터 장리쌀을 놓거나 길쌈을 해선 몫 지었
다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큰물께까지 왔다. 키 크고 걸음  빠른 남편은 가
물가물하게 앞서서 갔다.  논고릿재에선 손만 잡아줘도 올라가기가  수월했을 것
이다. 하지만 내가 그의  그림자나마 밟게 된 건 사방골에 이르러서였다. 남편이 
길가에 서서 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밉너?”
  하여튼 나를 기다려준  그가 반갑고 고마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대꾸하
지 않고 쌓인 눈을 한줌 집어 꽁꽁 뭉쳐서 나를 때릴 것처럼 하더니 건너편으로 
던졌다. 새들이 놀라 한꺼번에 푸드덕 날아오르느라 법석을 떨었다. 새가 날아간 
나뭇가지에서 눈이 후드득 덜어져 내렸다.
  “호랭이 물어 갈까  봐 무수워 혼났네. 나야 죽어두 그만이지만  뱃속에 씨는 
안 아꿉너?”
  내가 그 사람 앞에 서서 말했다.
  “야.”
  그런데 그가 나를 불렀다.
  “왜서 그래유”
  “이남 가구 싶어?”
  “아이구, 그걸 시방 말이라구 물어유?”
  나는 말만 들어도 좋아서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얘기하
지 않고 또다시 앞장서서 걸어갔다.
  하지만 이날 밤, 잠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거, 작은처남. 야, 무숩더라.”
  “무숩긴 뭐이 무수워유, 그  오빠가 이남에 있었어 봐유. 빨갱이 잡는데 눈이 
벌개서 돌아칠 사람인데!”
  “하긴. 사람이란 기... 그 양반은 그럴지 몰라...”
  “그렇다니깐유. 그저 나서는 게 좋워서...”
  내가 말했따. 남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그에게 등을 돌려
대고 눈을 붙이려는데, 그가 말을 걸었다.
  “니, 증말 가구 싶너?”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얼른 그에게로 돌아누웠다.
  “난 증말이지 여기선 못살겠네유!”
  내가 말했다. 남편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리고 신음하듯 뱉었다.
  우리의 두번째 월남은 이날 밤 잠자리에서  이렇게 결정되었다. 어쩌면 남편은 
친정에 가서,  세포위원장인 작은오빠의  극단적인 태도에 정나미가  떨어졌을지 
모른다.
  성질 급한 남편은 월남을  결심하자 이내 서둘렀다. 우리는 나흘 후, 시할머니
가 쪄주는 팥시루떡만  싸들고 밤중에 송어리를 떠났다. 내 수중엔  아무도 모르
게 감춰두고 있던 이남 돈이 조금 있었다.
  나는 배가 불렀는데도 힘든 줄을 모르고 눈  쌓인 산길을 정신없이 걸었다. 새
로운 생활을 시작할  생각을 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아무래도 초행  때와는 마음
가짐이 달라졌다. 웬일인지 잘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내 걱정이라면 곧 낳
을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 아닐까 봐, 그것 한 가지뿐이었다.
   동틀 때 떠난 우리는 아침 나절에 인제 땅에 닿았다.
  “야, 이남으로 넘어왔다.”
  남편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유? 시상에! 여기버텀 이남 땅이란 말이지유?”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치 징역살이에서 풀려난 것처
럼 내 기분은 활개를 칠 것 같았다.
  “여보, 당신 배고프면 그거 떡 자세유.”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그는 우선 오줌부터 누었다.  나도 흰 눈 위에 오줌을 
누었다. 모든 것이 시원했다.
  남편은 호주머니에서 가위로 오린 신문지 조각을 꺼내 엽연초를 말아 불을 붙
였다. 그도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를 바라보며 편안한 웃음을 띄었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이남 경비
대가 우리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조건 총을 겨누었다. 
  “우린 이남 사람이래유!”
  나는 재빨리 커다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거 보세유.  증명서두 있어유. 이남  돈두 있구유. 당신은  뭐하구 있어유? 
빨리 경비대 아저씨한테 증명 보여드리지유.”
  나는 도림동  사무소에서 받은 증명서를  꺼내며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냄새를 맡은 것인지 수선 피는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남편에게 말했다.
  “이 새끼야! 곰배팡이여? 더 들어! 뻐쩍 들어!”
  남편보다 키가 작고 얼굴은 독사 같은 생김새의 이남 경비대가 남편의 따귀를 
철썩 때렸다.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경비대가 거푸 몇 차례 따귀를 
갈겼다. 순간 남편의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그가 눈을 꽉 감고 이를 
악무는 걸 보았다. 나는 등뼈가 물러내리는 것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생
명의 호랑이며  나의 모든 것인 남편,  나의 지아비가 내 앞에서  억울하게 매를 
맞는다는 현실...  이것은 내게 이해할 수도  소화할 수도 없게  복잡하고 지겨운 
현상이었다.
  나는 남보다 약한 `지아비` 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수를 쓰던 이 수치스
런 상황을 눌러 없애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 그렇게 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러나 그는 모욕을 당해도 매를 맞아도 참기만 하는 것이었다. 답답했다.
  “이 양반은 아무 죄두 없어유! 이남 사람을 왜서 그래유!”
  나는 남편을  때리는 경비대원의 팔을  잡아당기며 크게 소리쳤다.  그 남자는 
팔을 휘둘렀고 나는 단지 그 바람에 저만큼  뒤로 나자빠졌다. 약이 오르고 화가 
났다. 잘난 남편이라면 지금 당장 자기도 살고 나도 살려내야 하지 않은가. 약한 
내 앞에서만 잘난 남자. 그러나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경비대 아저씨! 이거 좀 보세유. 우린 이남 사람이라구유!”
  나는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증명서를 흔들었
다. 한 남자가 나를 벌레 떼어내듯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남편을 때렸던 안자
는 그의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불안해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우린 아무
것도 걸릴 것이 없었으므로.  그저 겁이 나는 것은 그 동안  너무 많이 놀라서일 
거였다.
  경비대가 남편의  윗저고리 주머니에서 담배말이  종이를 한줄 거  냈다. 그는 
그걸 잠간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들고  있던 총으로 아무 데나 퍽 소리나게 찌르
고 내리쳤다. 남편이 휘청거리는 듯하다가 고꾸라졌다.
  “이 양반이 무신 죄가 있다구 이래유!”
  내가 경비대원의 팔을 잡고 늘어지며 소리쳤다.
  “이 여자두 매 좀 맞아봐야 알겠나?”
  옆에 섰던 다른  경비대원이 이렇게 말하며 나를 잡아제쳤다. 남편은  땅에 널
부러진 채 걷어채는 대로 뒹굴고 꿈틀댔다.
  “아이구, 사람 죽이겠네!... 제발 자세히 알아보구... 저 양반은 아무 죄두 없어
유. 죄 줄게 있으면 조사해 보구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마주 대고 싹싹 빌면서 말했다.
  “...경비대원님, 이걸 보세유. 이걸 보시면 다 아실 수 있잖어유. 우린 이남 사
람이라구유. 이남에서 살다  집안에 일이 있어 잠깐 댕겨가는데 우리가  무신 죄
가 있다구...”
  나는 경비대원에게 매달리고 하소연하고 빌며... 더  이상 비굴해질 수 없는 데
까지 갔다.
  그들은 남편이 간첩이라는  것이었다. 이남 증명서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었
다. 내 비굴한 하소연은  더더욱 가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조사받는 남편 
곁에서 나를 떼어놓았다.
  나는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 남편이 행여나 이남에서 무슨  단체에 가입했던 
것을 불까 봐 걱정이었다. 혹시 송어리에서 나 몰래 당에 가입한 건 아닌지... 사
정을 모르니 더욱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무턱대고 초소로 들어가  높아 보이는 
사람 앞에 섰다.
  “저 양반은 대한청년단 단원이래유. 도림동에서 가입해었어유.”
  이렇게 큰소리로  말했다. 그 남자가 나를  훑어 보았다. 한족에서는 남편에게 
자백하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자기가 간첩이 아니라는 말만 되풀
이하는 모양이었다.
  “아주머니. 이걸 봐유.”
  그 남자는 책상 위에 놓인 이북 신문 조각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아이구 이거유, 저 양반이 담배 말어  피운다구... 조우 짱(종이)이 귀하니 그
래서 가져온 거래유. 보세유,  이게 이렇게 담배를 말아 피우는 조우짱이지 이걸 
어따 쓰겠어유.”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에게 담배 마는 시늉까지 해가며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경비대원이  다른 사람에게로 갔다. 그들이 한동안 무슨  말인가를 나
누었다. 그들은 말하면서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는 풀려나게 되었다.
  “우리가 아주머이 때문에 당신을 풀어주는 거여! 어리석게  이런 걸 넣어가지
구 어딜 넘어다녀?”
  한 남자가 남편에게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순간, 나는 남편에게 왠지 민망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걷기만  하였다. 말이 없는 그  사람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짧은  한겨울 해는 기우는 듯하다가 이내 속절없이  져버리고 바
람결도 어느새 차디차졌다.
  “그눔덜이 아주 나뻐유.”
  나는 남편에게  바짝 붙어서서 이런 말을  해봤다. 입을 굳게 다문  그는 앞만 
보고 걸었다.
  “어디 아무 데서나 하루 묵어야지유?”
  남편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남편은 여전히 무표정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시
늉만 했다.
  다행히 산속에 드문드문 민가가 있어서 우리는 맨  처음 눈에 띈 집으로 갔다. 
초가삼간인데 댓돌에 고무신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게 눈에 확  들어왔다. 너무도 
반가웠다. 이북에서는 언제 저런  고무신을 마음놓고 신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
러나 서울에 가면 어느 누구도 짚신을 신지 않았다.
  “여보! 저거 고무신 봐유!”
  내가 반가운 김에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우리는 주인을 찾아 민박을  부탁했다. 주인은, 빈방은 없고 같이 자려면 하루 
묵어가라고 했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주인  내외가 우리들의 모습을 살폈
다.
  “초소에서 생사람들 많이 잡어.”
  주인 남자가 중얼거렸다. 남편은 그 말에도 대구하지  않고 벽에 겨우 기대 앉
았다.
  “장사꾼들은 좀 뻔질나게 드나드너?”
  “그것들이 다 짜구하는데 뭐.”
  주인 내외가 우리를 위로하려는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저녁밥을 부탁했다.  주인 여자는 급하게 잡곡 넣은 밥을  해서 김치짠
지 사발을 곁들어  상을 차려왔다. 남편은 부은 입이 불편해  얼굴을 찡그렸지만 
고봉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하기야 우린  진종일 굶은데다 공포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허기가 풀려서인지, 더운 숭늉을 마시고 나자 몸이 까부라졌다. 남편은 윗방으
로 가서 주인 남자와 자고 나는 아랫방에 누웠다.
  주인 여자가 요새  이남 사정을 얘기하기 시작하는데 나는 그만  잠이 들었다. 
언뜻 눈을 뜨니 여자가  등잔불 밑에서 이를 자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잠
이 들어 다음날 아침에야 깨어났다. 우리는 다른 때보다 하루를 더 걸었다. 그래
서 닷새 만에 춘천에 닿았다.  거기서 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전차 정류장엔 새
까만 교복을 입고 머리를 땋아내린 여자들이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처음 서울
에 왔을 때도  그런 모습이 제일 먼저 나를 괴롭혔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울이 반가웠다. 이젠 섣불리 고향 갈  생각도 못할 테니 자리잡아 잘살
아야지... 나는 집도 절도 없는 타관 땅  서울이지만 그래도 한번 살아본 경험 덕
에 불안보다는 솟구치는 희망으로 가슴이 벅찼다.
  우선 영등포 시당고모네로 들어갔다. 우리는 고향  형편과 삼팔선 이남 경비대
에서 겪은 고초를 얘기했다.
  “여기저기 다 귀찮네유. 사람 사는 기 어디 이래서야...”
  남편이 말했다. 그에게는 어수선한 세월이 두렵고 귀찮았지만, 나는 삶의 의지
가 약해져 가는 남편이 세월보다 더 걱정이었다.
  “당고모님, 어디 가서 뭘 해먹기루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칠라구유.”
  나는 서둘러 남편의  마음을 어루만지려고 이렇게 말했다.  “준태야  니 살걱
정은 말어라야. 에미가 약어서 느넨 어디 가두 굶어죽진 않을 거니!”
  당고모가 말했따. 그래도 남편의 우울한 심사는 오래도록 펴지질 않았따. 우리
는 시당고모네서 며칠 지내다가  이웃에 방 한 칸을 세 얻어  나갔다. 예전에 알
고 지내던 사람들이  있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막막하진  않았다. 일자리를 
알아보겠다고 말하며 반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내
가 아이를 시골뜨기 만들지 않으려고 꼭 몸풀  때면 서울에 온다고 놀렸다. 나는 
벌써 배가 꽤 불러서  남 보기에도 힘들어 보일 때였다. 그러나  나 자신은 아무
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예전처럼 이집 저집 다니면서  시키지 않은 일도 찾아 했
다.
  그런데 또다시 끔찍한 일이 생겼다.  서울 온 지 열흘, 방 얻어든 지 사나흘이
나 되었을까 해서였다.  그런 어느 날 밤이었다. 바깥이 소란했다.  떼 지은 남자
들의 발걸음 소리. 웅성거림. 개 짖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코를 골고 자던 남
편이 갑자기 용수철처럼 일어났다.
  “뉘기네 집에 뭔 일이 났나 봐유.”
  내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남편은 급하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
  “여보, 왜서 그래유? 어디 갈라구유?”
  내가 놀라서 이렇게 물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깥의 소란스러
움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 집이야!”
  “저 집이다!”
  “잡아라!”
  “나와!”
  나는 바깥에서 들리는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머리끝이 쭈뼛 섰다.
  남편의 긴장이 무엇 때문인지 한꺼번에 느껴졌다. 가슴이 아렸다.
  남편이 방문턱에 바짝  섰다가, 방바닥으로 허물어지듯 까부라졌다. 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이때 둘  다 바깥에서 빨갱이 잡아라!는 고함소리를 들었
던 것이다.
  “결국...”
  남편이 나직하나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니 때문에 난 죽는다...”
  “여보, 아니래유. 당신이 왜서 죽어유?”
  나는 너무도 절박하게 말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아주 가혹한 시간이 우리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고함과 비명이 뒤섞
여서 들여왔다...만약에 저 사람이  죄두 없이 개죽음을 당한다면... 나두 죽고 말
아야지.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고문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이윽고 바깥은 조용해졌고, 개도 더 이상 짖
지 않았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남편에게로 갔다. 그의 드넓던 등판이 어찌  그리도 시
리게 느껴지던지.
  “여보, 당신은 괜찮아유.  떳떳하게 가서 자수해유. 우리가 이북이  싫어 내려
왔는데, 그기 죄래유?”
  나는 눈물을 삼키며 겨우 이렇게 말했다.
  “이북에 부모 형제  있어서 갔다왔구, 아무리 거기 형제가 있어두  이북이 싫
어 다 버리구 나왔다구 그렇게 자수해유.”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문턱에 
옷을 입은 채 앉아 있었다.
  “야! 너 앞으루, 날 보구 자수하란 그따구 말하지 말어! 알었지? 너나  자수할 
게 있으면 자수해!”
  남편이 아주 갑자기  너무도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나를 외
면한 채 자리에 누웠다.
  이상했다. 그가 나를 때리지도 않았는데 나는  모멸감 때문에 한동안 괴로워해
야 했다. 혹시, 저 사람이 날 버리지는 않을까, 이런 가당찮은 생각도 했다.
  어쨌든 이날 밤, 남편을  참혹하게 만들었던 불시검거는 피해 갔다. 하지만 이
후로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이렌 소리나 ` 간첩` ,` 빨갱이` ,` 공산당` ,`  김일성
` 같은 소리만 들으면 꼭 이날 밤같이 공연히 주눅이 들어야 했다.
  나는 남편이 그후 내 말대로 청년단 사무실에 찾아가 자수를 했는지 어땠는지 
모른다. 하여튼  남편은 이때로부터  이태동안, 그러니까 6.25사변이  나기까지는 
이런 문제로 불안에 떨어야 하는 일은 겪지  않았다. 거기다 다행하게도 그는 서
울에서 중학을 다닌  사촌 매형을 만나 일자리도 얻었다. 부평에  있는 미군부대
의 조병창에서 보일러  일을 첨부 맡았는데 그곳에 자리를 얻은  것이었다. 역시 
모든 것이 지난번보다 수월했다. 나는 이럭저럭  해산달이 가까웠고 남편은 부평
으로 살 집을 옮기자고 했다.
  이런 어느 날,  그러니까 아직 도림동에 있을 때 송어리의  큰시아버지 식솔이 
서울로 왔다.  이제 아홈 달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어찌나 실한지  돌잡이 같아 
보였다. 그래도 피난길에 아이가  설사를 만나 야위었다는 게 그랬다. 하지만 히
뜩이 큰시어머니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우리가 혼이 났던 바로  그곳 초소에
서 우리와  똑같은 곤욕을 치렀는데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큰시어머니는 
무릎 사이에 몽둥이를 끼우고 무릎 끓린 다음,  허벅지를 무수히 맞아 살이 터진 
건 물론이거니와 무명 속바지가  터진 살에 붙고 흐른 피가 엉긴  채 말라서, 대
충 생살이 굳은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울기만 했다.
  큰시어머니는 송어리에서 자기가 맡았던 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였
다. 나는 정치에  대해 싫고 좋은 감정이라도 있었지만 큰서어미니에겐  그런 감
정조차도 없었다. 동네에서 무언가 일을 시켜주니까  했고 남편이 월남을 하자니 
따라나선 사람이었다. 바로 그런 큰시어머니는 내  남편처럼 집에 있던 신문이며 
교양교제며 문건들을 잔뜩 싸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아이가 똥을 싸면 닦는 데 
쓰려는 것이었다. 나뭇잎이나  짚북데기로 밑을 닦던 사람들에게  종이라는 것은 
거의 돈을 갖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다  큰시아버지는 이북 경계를 넘자마
자 이젠 살았다며  일부러 이남의 삼팔선 경비대가 있는 인제면  초소로 갔단다. 
그러나 허술한 피난 보따리에서 그런 문건을 본 경비대는 다짜고짜 문초를 시작
했다. 그들은 두  중늙은이를 간첩이라고 부르면서 자백하라고  때리고 쥐어뜯고 
걷어차고 우는 아이를 따로 떼어놓고 젖도 주지  못하게 했다. 부부가 입을 맞춘
다고 따로 떼어서  취조했는데, 대질 신문 때  한 번 얼굴 보고 나흘  후 풀려날 
때야 만났단다.
  고문으로 입은 큰시어머니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더 심했졌고, 보름이나 지나
셔야 가라앉기 시작했다.  무릎 사이에 장작을 끼우고 얻어맞은 허벅지  살은 속
이 썩어드는 것처럼 검붉게 변색되더니 차차  누렇게 삭아들었다. 처음엔 걸음은
커녕 움직이지도  못해 요강에 앉아  대소변을 가렸다. 그런  큰시어머니는 아직 
다 낫지 않은 몸으로 서울을 떠나야 했다.  도무지 뒤숭숭하고 인심 험한 서울에 
정을 붙일 수 없다는 큰시아버지의 고집으로 다시  원주 치악산 쪽으로 갔다. 일
제식민지 시절,  산판을 하며 돌아다니다 보아둔,  그러니까 강원도 산골을 찾아 
떠난 것이었다.

  해산달이 다  되었을 때 나는 부른  배를 안고 부평으로 이사를  했다. 남편은 
그곳 미군부대  조병창 보일러실에서 일했고 그곳엔  조선인 노무자들의 사택이 
있었다. 작은 방  하나에 부엌이 딸린 집이었다.  마치 양양 철광의 미나미 사택 
같았다. 이번에도 남편은 주급을 받았다.  그 돈으로 일 주일 먹을 쌀과 나무 한 
단, 무 두 개를 사면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장작 한 단으로는 잘게 쪼개서 풍로
에 지펴 밥을 끓이는  데 썼으니 방에 불을 땐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남
편은 여전히 쓰레기를 뒤져 미군  잡지를 주워왔고 나는 부평 시장에 나가 그것
을 팔았지만 방에 불을 땔 나무를 살 수는  없었다. 곧 아이를 나을텐데 여러 가
지로 걱정이었다. 산후바람이  여자에겐 무서운 병이라지만 방법이 없었다. 거기
다 판자로 지은 사택은 위풍이 세서 방에 물을 떠다놓고 하룻밤 자고 나면 그릇
의 물이 꽁꽁 얼었다.
  남편은 일과를 끝내고도 쉬지  않았다. 그는 어디 가서 무슨 일을  맡든 늘 있
는 힘껏 일을 해서  좋은 평판을 들었다. 일단 일자리를 얻으면  같은 시간에 거
의 남들 두 몫의  일을 해놓아 어떤 고용주든 그를 좋아했다.  그 태도만은 평생 
한가지였다. 그래서 그가 원하면  일거리는 언제든지 얻을 수 있었다. 이때도 그
는 퇴근 후에 빨래방에  가서 세탁이나 다림질 같은 가욋일을 더  했다. 그는 일
에만 몰두해서  살았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아끼고  모을 수 있는 방법은 다 찾
아가며 살았다. 그래도 방에 불을 마음대로 지필 형편은 못 되었다. 하지만 우리 
내외는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건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살아남는 것이  목표였으며 이번에 낳는 아이는  죽이지 않고 제대로 길러 
이 바닥에 가정의  뿌리를 제대로 내리고 울타리를  쳐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인 
희망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 장작  다발이나마 마련하려는 계획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나
는 진통을 시작했다. 출산 날짜를 계산할 줄 몰라  그저 막연히 이 달에 몸을 풀
겠거니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후 들어 허리가 뒤틀리고  아랫배가 쏟
아질 듯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되는 대로 아궁이에 탈 것을 넣고 물도 데웠다. 
오후 근무인 남편은 빨래를  하러 아침에 출근했는데 한밤중이나 되어야 퇴근을 
할 것이었다.
  나는 혼자  아이 낳을 준비를  했다. 진통이 밭아질수록  이번에야말로 아들을 
낳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통을 가볍게 하고 수월하게 아이를  낳는 여자
도 있지만 나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진통이  심했다. 그렇게 진통이 소나기처럼 
지나가고 나면  나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그 사이에 파란  고추를 꿈꿨다. 
배가 아파 눈을 떠서도 고추 꿈을 떠올리면 황홀해졌다. 이 아인 아들일 것이다. 
틀림없이 아들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이렇게 생각했다.  아들. 내가 드디어 아들
을 낳는다니! 아픔  때문에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는데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
래, 괜찮다 내 아들아. 이까짓  진통쯤이야. 내가 널 보려는데! 나는 뱃속의 아들
에게 말했다. 진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몸이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그리
고 미끄럽고 둥글고 더운 것을 쑥 낳았다!
  아이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나는 어디서  아이가 운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낳은 아들의 고추를  보려고 몸을 일으켰다. 검붉고 작고 미끈거리는 아이, 
몸퉁에 매달린 네 개의  손발이 바들거렸다. 검붉은 다리 사이를 헤쳐보았다. 아
무것도 없었다. 밋밋하고  납작하고 불그죽죽하고 쪼글거리는 것이  손끝에 만져
지는 순간 나는 그 흉물스런 느낌 때문에 마구  손을 털었다. 내가 지은 죄의 실
체를 누가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결코  보고 싶지 않는 내 죄를  보는 순간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였다. 남편한테 매맞고 그가  다른 여자를 사귀어도 나는 
할말이 없게 되었다. 내 인생은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뼈빠지게 일해도 더 나아
질 수 없을 것이다. 아들 낳아 큰소리치고 한번 살아보고 싶었는데---.
  오래도록 나는 절망감 때문에 갓  태어난 딸의 목숨에 대한 배려를 하지 못했
다. 그 생명이 핏덩이에 지나지 않다는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
의 자궁에서 지내다 세상으로 뚝 떨어져 아무렇게나  방치될 뿐 아니라, 저의 몸
체였던 어미로부터 절망의 기운으로  세례되는 경험이 딸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줄지, 나는 헤아리지  못했다. 더군다나 방은 겨우 냉기만 면한  것이었다. 그 아
이가 살든 죽든  아마 내겐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나는  얼금뱅이 어머니가 
나를 윗목에 뒤집어  엎어놓았어도 살아난 목숨이다. 혹시 나는 절망  속으로 도
망가서 딸아이가 스스로 슬그머니 죽어버리기를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딸은 죽지 않았다. 나는 혼자 속으로 태를 잘랐다.
  이 보잘것 없는 거.  네가 대우받고 살려거든 밑에 불알 하나  덜렁 달고 나오
지! 나는 속으로 아이에게 말했다.
  아들로 태어났으면 이 어미도 한층 올라가고 너도 떳떳하게 살 걸. 불쌍한 것. 
무슨 죄를 져서 넌 여자로 태였니...
  떳떳하지 못해서 나는  아이를 차갑지 않은 물에 대충 씻겼다.  산후바람 간수 
잘해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  손으로 직접 자식의 목숨을 끊을 
수 없어 모래집물 핏물 묻은 것을 씻겨  이불에 말아놓았다. 아이는 추운지 파리
하고 쪼그라붙은 입으로 쉰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첫국밥도 하지 않았다. 배고
픈 것도 느끼지  못했다. 보란 듯이 아들 낳아서 남편한테  뻐기고 친정부모님한
테 효도하고 싶었는데 모든 것이 허사가 된 것이었다.

  남편의 발 소리가 문턱에서 멎었다. 그가 크흠, 하고 인기척을 내며 문을 열었
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가 강아지  새끼처럼 울었다. 나는 억지로 일어
나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지러웠다.
  “당신 몸 풀었너?”
  남편이 감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그가  응애응애 우는 아이를 들여다보
았다.
  “여보, 또 딸을...”
  나는 이렇게 말하다가  그만 터져나오는 울음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느끼어서 가슴이 빠개지는 듯이 아팠다.
  “이거 햇아가 춥지 않겐? 불 좀 때. 햇아가 바짝 오그렛네.”
  남편은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아이를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더
니 그는 자신의 솥뚜껑 같은  손을 호호 불고 마주 비벼서 덥게 한 뒤에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채웠다.
  “똥이 새파랗다야. 괜찮너? 아이구 요것 보게. 고것두 입이라구 야 막 오물거
린다. 젖 좀 줬너?”
  나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딸을 낳아도 섭섭한 줄 모르는 저 남자. 벌써 두번째
인데도 여전히 제 새끼라고 저렇게 좋아하다니. 차라리 남편이 신기해 보였다.
  “저까짓 걸 뭐할라구 젖을 줘유. 죽으라구 내뀐지구 말지.”
  나는 남편의 기뻐하는  모습에 한결 여유를 얻어서  진심이 아닌 말을 해보았
다.
  “딸이 어째서!”
  남편이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키워봤자 남의 자식 되잖어유!”
  내가 말했다.
  “어이 이거 봐! 햇아가 날 닮은 거 아녀?”
  남편이 말했다.
  “그 씨가 어디  갈라구유. 그래두 겉만 닮아야지 속까정 닮었단  큰일나구 말
지.”
  내가 말했다. 남편은 내 뼈 있는 농담을 알아듣고 쿡쿡 웃었다. 그러더니 그는 
부엌으로 나가 미역국을 끓였다.
  남편은 아이를 사랑했다.  그는 일이 끝나면 아이를 한시 바삐  보려고 달려서 
왔다. 아이가 추울세라 자기의  입김으로 호호 불다시피 했다. 아이를 억지로 안
아보고 무슨 노래도  불러주고 하여튼 좋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이에게 사로
잡힌 남편을 보는 것이 얼마나 마음 뿌듯한지, 아내들은 알 것이다. 그리고 딸을 
낳은 절망감이나 서러움도 잊게 된다는 것을.
  어느 날 남편은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 유명하다는 작명가를 찾아가 딸아이의 
이름을 지어왔다.
  “햇아야, 아부지가 니 이름 지 왔어! 니 이름이 ‘윤’이다! 좋은 이름이여.”
  남편은 자기도 못 알아보는 딸을 들여다보고 이렇게 말했따.
  “이름 지 왔수?”
  내가 밥상을 내려놓으며 묻자 그는 좋아서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래!”
  “원주 큰아버님이 짓슈?”
  “큰아버진 무슨? 작명가가 짓어! 야가 사주가 좋단다. 그래서  이름이 윤이여!

  “작명가라문 돈 주구 짓겠네유!”
  “돈 줘야지 그럼!”
  “아니 당신두 맥이 다 쑥 빠졌네. 뭘  딸아 이름을 돈 주구 작명가한테 지유?

  나는 돈이 아까워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눈을 치떴다. 더이상 궁시렁댈 수 없
어 입은 다물었지만 시집가면 남의 자식 되는 딸을 위해 돈을 쓴 남편의 `  낭비
` 가 내내 아까웠다.
  어쨌든 윤이는 무럭무럭  잘 자랐다. 정을 둠뿍 받아서 그런지  천성이 그래서
인지 윤이는 무척 순했다.  아이가 있어도 문밖에 울음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아
파도 울기보다는 가만히 누워 꽁꽁 앓는 소리만  냈다. 젖을 잔뜩 먹여만 놓으면 
몇 시간씩 혼자 놀고 자고  깨곤 해서 나는 아이어멈 같지 않게 바깥일을 할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늘  땔감이 부족해서 애를 먹었다. 여자들은 철길에  나가 기차에
서 떨어진 조개탄을  주었다. 기차가 지나가며 흘린 것인데 생탄도  떨어지고 타
다 만  것도 떨어져 있었다. 그걸  주워다 풍로에 지피면 아침  저녁밤은 충분히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까운 산에 가서 나무 뿌리를 캐다 말려서도 땠다.
  초여름이 되었다. 우리는 미역국을 끓여 가까운 사람  몇을 불러 아이 백일 기
념을 했다. 이날 초대받은 사람 중에 보일러  청부업자가 있었는데 우리 사는 걸 
보고 가서는 남편의 일자리를 옮겨주었다. 그는  우리의 사는 형편이 이렇게까지 
어려운 줄은 몰랐다고  했단다. 남편은 딸아이 때문에 운이 트인다며  윤이를 한
껏 치받들었다. 이상한 남자였다.
  그런데 정말 딸 때문인지  나도 짬짬이 할 수 있는 일을  얻었다. 빨래와 다림
질하는 일을 맡은  것이었다. 우리는 수입이 배로 늘었지만 지출은  결코 늘리지 
않았따. 몇  달 지나지 않아 우리는  노동자 사택에서 가장 윤택한  사림을 하게 
되었다. 모두들 우리를  부러워했다. 방 안에 옷장도 사다놓았다.  빈털터리 삼팔 
따라지 신세였던 우리는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해서 그 동네의  ` 부자` 가 된 것
이었다. 사람들은  우리 부부를 부러워했다. 남편은  여러 가지로 다른 남자들과 
달랐다. 그는 아이를  예뻐해서 아이와 노는 것을 즐거워하니 자연히  아이는 남
편이 보는 셈이었다. 거기다 그는 부엌일도 잘 거들었다. 물지게로 물을 져 나르
는 것이나 아궁이에 불을 때주는 것, 커다란 빨래 치대 빠는 것, 방 청소하는 것 
등등이 그랬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었다. 그는 시간이 나면 이웃집의 물까지 져
다줬고 비가 오는 날이라도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가 손을 봐주었다. 그러고는 아
무런 대가도 받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큰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절대로 남의 집
에 가서 밥을 얻어먹지 않았다.
  윤이가 우리 얼굴을 알아보고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혀로 엄마 아부지 어쩌고 
할 때부터 우리는 아이를  안고 영화를 보러 다녔다. 영화를 보는  것이 그의 유
일한 취미가 되었고  나도 좋았다. 옷을 멋들어지게 입기 좋아하는  남편과 아이
를 달에 안고 나란히 극장에 가면 얼마나 으스대는  기분이 되던지! 아주 인기를 
끌었던 ‘검사와 여선생’을 볼 때는 함께 울었다.
  이맘때, 나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함부로 사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특히 번 돈
을 술집에다 버리는 남편 때문에  고생에 찌들어 사는 여자의 천한 팔자를 비웃
었다.
  그러나 내 교만의 시간은 결코 길게 가지 못했다.
  가을이었다. 그날, 잊히지도 않는  그날 남편은 퇴근을 하고 와서는 씻고 외출 
채비를 했다. 이런 일은 없었다.
  “지약밥 안 먹어유? 상 채리는데.”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그는  원래 옷을 잘 입으려는 탐
심이 많은 남자였다.
  “시간 없어!”
  그가 허둥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가게유?”
  “구두 맞춰논 거 찾아올게.”
  “그럼 밥이나 잣구 나가유. 다 채렛어유.”
  “나가 먹을 거여.”
  “누구랑유?”
  “매형이 좀 보재.”
  “어이구 당신 맥이 쑥 빠졌네유. 그런 지저분한  인간을 이런 저녁에 왜서 만
내유?”
  “금방 온대두 그러네!”
  그는 짜증이 나서 이렇게 말했다.
  “금방 오지유?”
  나는 본 적 없는 그의 저녁 외출이 허전해서 달음질로 나가는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알았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를 믿었다.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남편이 술을 입에 댈  줄 모르니 술집에는 안 갈 것이
고, 그러니 달리 의심할 것은  사실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집 앞에 서서 오래도
록 그가  돌아간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마 처음  있는 일이어서 
그랬을지 모른다. 그 동안 우리는 이웃집에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가거나 그저 같
이 다녔던 것이다.  ` 내가 맘을 이렇게  줍게 먹으면 안 되지. 구두  찾어온다는 
사람을.` 나는 편치 않은  내 심사를 이렇게 달랬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아
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었다. 밥솥의  미지근한 물을 퍼서 찬밥을 말아 
김치쪽 한 가지로 후루룩  때웠다. 저녁을 먹고 방으로 들어왔다. 초저녁부터 잠
이 든 아이는 아직도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아이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일거
리를 찾았다. 뒤축이 떨어진  양말에 헝겊을 대고 기웠다. 친정아버지 생각이 났
다. 요새 들어 느닷없이  아버지가 자꾸만 생각나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달 
들얼 벌써  몇 번이나 아버지 어머니  꿈을 꾸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상한 건 
꿈속에서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어머니  아버지가 화롯가
에서 불을 쬐고 있는데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지워지기라도 한것처럼 희미했다. 
혹시... 그러나 나는 방정맞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머리를 흔들었다.
  양말을 깁고 나니 또 할 일이 없어졌다.  아이 옆에 누워보았지만 시계에만 신
경이 갔다. 아홉 시가 지나자  슬며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구두를 찾아도 열 번
은 더 찾았을  것이고 저녁을 먹는다 해도 몇  번을 먹고도 남을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가. 품행이  나쁜, 촌수가 먼 시누이의  남편, 그 사람의  매형만 아니라도 
이렇게 불안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미군부대  근처의 양색시들을 데리고 다니
며 노는 걸 시누이에게 들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술바람 색시바람으로 시
누이가 속썩는 건이  동네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머리엔 기름을  미끄러지게 바
르고 건들거리며 걷는 꼴이라니.  그런 행실 나쁜 사람이 복을 받아  돈을 잘 번
다니, 세상은 옳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아주 먼데에 아버지로 보이는 남
자가 희미하게 보이다 사라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려나... 나는 꿈속에서도 안타
까워 속을 태웠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깨었다.  옆이 허전했다. 방 안이 텅 비어 
보였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시간은 통행금지가 넘었다. 아이는 제풀에 깨어
서 저 혼자 옹아리도 하고  이리저리 뒤채기도 하면서 놀고 있었지만 아이가 눈
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순한 아이는 늘 그랬고, 너무도 가정적이고 멋스러
워 남들이 부러워하는 남편의 이런 외박은 처음이었으니까.
  머리가 팽 돌았다. 가슴에서 활활 불이 탔다. 너무도 불길한 느낌들이 무슨 찐
득거리는 안개처럼 내게 달라붙었다. 미칠것만  같았다. 큰시아버지 생각이 났다. 
남편은 외모만이 아니라 기질도 자기의 큰아버지를 빼닮았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아이를 보았다. 아직  혼자서 놀고 있었다. 제거... 딸이라서 문제였다. 저
게 아들만 되었어도 날 괄시할 수 없을 텐데.  아들 낳은 나를 이 집안에서 누가 
괄시한단 말인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어슴푸레 동이 트고  날이 밝았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새벽일을 가는 노동자, 한데 잠을  잔 거지, 누더기를 끌고 다니는 늙은 미친 여
자가 보였다. 그리고 건넛집의 여자가 물통을 들고 걸어갔다. 나는 행여 그 여자
의 눈에  띌 새로 쫓기는 생쥐처럼  부엌으로 숨었다. 남편이 외박을  한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다. 내가  불행한 여자로 보이게 될 걸 생각하면  속이 뒤집어졌
다. 외박을 했으면 남이 볼까  새벽엔 들어와야지. 나는 젖을 먹고 잠이 든 아이 
옆에 쓰러져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 앞에서 발소리가 났다.  틀림없는 남편이었다. 방금 욕을 하던 맘은 사라지
고 반가움만 솟구쳤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온 것 같
은 기분이었다. 언제 내가 그를 원망하고 미워했던가.
  “안 죽구 왔네유.”
  내가 말했다. 목이 메어 말소리가  본때 없이 떨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나를 바로 보지도 않았다.  그저 자고 있는 아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한
참이나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어디서 잤어유?”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태도 때문에 답답해서 그의 곁에 바짝 다가
앉아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거 봐유. 사람이 밤새두룩 잠 한숨 못  자구 기달렸는데 그렇게 말두 안해 
주면 속이 안  터저유? 대관절 어디서 잤는지 속시원히 말이나  해봐유. 그럼 누
가 뭐란대유?”
  그래도 그는 입을 봉한 것처럼 말이 없었다.
  “생각해 봐유. 구두 찾어 날래 온다구 나간  사람이 기벨두없이 안 오니 무슨 
일이 생겠나 벨벨 숭악한 생각만 나서 얼매나 조마조마하게 지냈는지 알기나 해
유?”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남편이 우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그가 
이런 말을 해주니까 마음이 풀리고 고맙기까지 하였다.
  “윤이두 아부지가 없어서 그런지 밤새두룩 안  자데유. 그런데 구둔 찾아왔어
유?”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남편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어디다 두고 왔다고 말했
다.
  “어디다 구둘 두구 와유?”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물었다. 남편은 자기의 코끝에 닿을 듯한  내 얼굴
을 피하며 입맛을 다셨다.
  “아이구 여보, 구두 찾으러 나간 양반이 구둘  엇다 두구 와유? 설마 당신 잃
어버린 건 아니지유?”
  잃어버렸다면, 구두 값이 얼마냐.
  “여보, 정말 구두 잃어버렸수?”
  내가 다그쳤다.
  “피곤해! 잠이나 잘래!”
  그러나 남편은 몸을 눕히며 이렇게 말을 피했다.
  “여보, 말만 해유. 당신 자는 동안 내가 찾어볼 테니까유.”
  “내가 낼 찾어온단데 그러네!”
  남편이 소리쳤다. 나는  여전히 구두 때문에 맘이 풀리지 않았지만  일단 입을 
닫아야 했다.
  “밥 먹구 자유. 날래 채레 올게유.”
  나는 이렇게  말하고 부엌으로 나갔다.  국을 데우면서 상을  차리는데 기분이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다. 뭔가 느낌이 수상했다.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니 남편은  벌써 아이 곁에 새우처럼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도 밥상을 내려놓지  마지못해 일어나 앉았다. 그는 냉수에 밥을 몇 
숟갈 떠넣어 마시듯이  먹었다. 나도 수저를 드는데 갑자기 서러운  생각이 치밀
어 후드득 흐느끼게 되었다.
  “왜서 기래?”
  남편이 말했다.
  “여보, 난  당신 한 사람 바래구  시집와서 죽으나 사나 당신만  믿구 사는데 
당신이 날 가슴 아프게 하면 내구 누굴 믿구 살어유?”
  나는 다시 훌쩍거렸다.
  “미안해. 다신 안 그런다! 이렇게 약속할게!”
  남편이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거기에 내 손가락
을 걸었다. 나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웃었다.
  “그런데 어제 어디 있었대유? 매형네서 잤어유?”
  “매형 단골집에서 잤어.”
  “매형 단골이라면 기린 데가 술집이 아니래유?”
  내가 물었다. 남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거기가 어디래유!”
  “어디라문 당신이 알겐?”
  “그래두 말해 봐유.”
  “부산집이라구, 매형이 단골루 다니는 집이여.”
  남편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산집이 색시집 아니래유?”
  그러나 나는 긴장해서 소리쳤다.
  “성님이 부산집 색시 때문에 얼매나 속을 썩였다구.  그 양반이 맥이 쑥 빠져
두 분수가 있지  술 한방울 못 마시는 사람을  어쩌자구 색시집엘 델구 간대유? 
남의 가정 절단나는 거 보구 싶어 환장했너?”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마구 지껄여댔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다시 
아이 옆에 누웠다. 내가 화를 내는데도 잠이 오는지, 이내 코를 골았다.
  그는 두어 시간  세상 모르게 자고 출근을  했다. 아이는 아침부터 보챘다. 왜 
우는지 알 수가 없어서  업어만 주었다. 그래도 여전히 울어댔다. 내려놓고 살펴
보니 사타구니가 벌겋게  성이 났다. 지난밤에 아기 기저귀를 제때  갈아주지 않
았던 게 생각났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이내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고 엉덩이와 
사타구니에 땀띠 분을 발라줬다. 남편과 친한 미군이 준 선물이었다.
  몸이 시원해진 아이는 자리에 누워서 제 주먹을 빨며 옹아리를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를 들여다보는데 느닷없이 부산집 생각이 났다.
  햇아 자는 동안 부산집에 가서 구두나 찾아다  놓을까. 생각끝에 나는 잠든 아
이만 두고 집을 나섰다.

  부산집은 서울병원 건너편에  있었다. 생각보다 허름한 한옥이었다. 낡은 나무 
대문이 닫다 만 것처럼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 앞에 서니 가슴이 마구 뛰었다. 
무슨 큰일을 저지르는 것만 같았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빈집처럼 아주 
고요했다. 이상했다. 색시  있는 술집이라고 온종일 시끌벅적한게 아닌 모양이었
다.
  “누구세요!”
  이때 등뒤에서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화장이 지워지다만 얼굴이긴 해도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아가씨가 성깔 돋운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도 모르게 얼른 비켜섰다. 입이 붙어 말은 나오지 않
았다.
  “아침부터 남의 집을 왜 들여다봐유?”
  아가씨가 나를 흘려보고 문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미쳤나? 이상한 여자 다봐!”
  아가씨가 중얼거리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나는 여보세유! 하고 그 
여자를 불러세웠다. 아가씨가 팩 돌아 보았다.
  “우리집 양반이 여기다 구두를 맡겼대유. 구두가 있너 하구유.”
  내가 말했다.
  “누가 구둘 맡겨요?”
  “우리집 양반이유.”
  “준태 씨요?”
  “예! 맞어유.”
  “어머 그 사람이 언제 결혼했나? 총각이랬는데!”
  아가씨가 마치 나를 비웃듯이 입을 삐쭉거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다시 위아래
를 보았다.  나는 아가씨의 눈길이 나를  훌어내릴 때 비로소 내  초로한 입성을 
낯뜨겁게 깨달았다. 
  “누가 그 양반을 총각이래유? 처자식이 눈 시퍼렇게 뜨구 있는데!”
  나는 기죽을까 조바심치며 허겁지겁 말했다.
  “언니! 나와 봐요! 어떤 여자가 준태씨 아내라구 왔네요!”
  아까시는 내가 들으라는  건지 안에 대고 하는 소린지 커다랗게  소리쳤다. 그
러나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아줌마가 그럼 준태씨 부인이란 말이에요?”
  아가씨가 아주 짜증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 이년아! 내  목구멍에선 이
런 말을 하는데 좀체  그 말이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가씨도  나도 잠깐 아
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아무리 그래두 구둔요, 본인이 와야 줘요!”
  그러더니 아가씨가 갑자기 이렇게 내뱉고 집 안으로 달려들어가 버렸다.
  오래도록 마당은 고요하고 방문을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얼 기대하
는 건지 내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를 더  그곳에 서 있었는지 모른다. 아주 아득하고  어두운 시간이 
지나간 뒤였을 것이다. 마침내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누군가가 내다보았고, 
어머머 아직두 서  있어!라고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고 곧 다른  여자가 고무신을 
끌며 내게로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줌마! 남의 영업집 앞에서 그렇게 서 있으면 어떡해요? 비켜요. 구둔 임자
가 오면 준다니까 걱정 말고 돌아가요. 대문을 닫아야겠어요.”
  여자가 말했다. 그래도 내 몸이 움직이지 않자 그 여자가 나를 떠다밀었다. 나
는 헐겁게 밀려났다. 여자가 재수없게 남의 영업집에 와서... 이런 말소리와 함께 
대문이 닫혔다. 그리고 신발 끌리는 소리, 방문 여닫기는 소리 따위가 들렸다.
  이날 내가 무슨  정신으로 집을 찾아왔을까. 도대체 어떤 길을  어떻게 헤매어 
집으로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화가 났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집에 와서 방문을 열었을 때, 딸아이가 나를  쳐다보며 공포에 질린 울음을 터
뜨렸다.
  아 그래, 네가 있었구나!
  나는 아이를 보는 순간 비로소 내 현실을  찾았다. 딸을 부둥켜안고 젖을 물렸
다. 아이는 울음에 지쳐서 젖을  제대로 물지 못했다. 한 손으로 아이의 훔씬 젖
은 기저귀를 갈아  채웠다. 아이는 그제서 마음이 풀렸는지 나를  말끄러미 쳐다
보고 저 혼자만 아는 말을 웅얼웅얼 지껄였다.  혼자서 무서웠다구? 엄마가 어디 
멀리 갔을까 봐? 엄마가 와서 좋다구? 나는 아이의 옹아리에 이렇게 대꾸하면서 
눈을 맞췄다.  하지만 문득문득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달아났다. 부산집 대문 
앞에서 당한 수모가 자꾸만 떠올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 때문에 그런 모
욕을 당했다는 게 괴로웠다. 하지만 남편을 미워하는 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멀쩡한 처자식을 두고 뭐가 어째? 총각이라고?
  아니야, 그년들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거짓말을 했겠지. 아무렇게나 함부로 사
는 것들이니---. 남편을  욕하는 것보다 여자들을 멸시하는  게 쉽고 맘이 편했
다. 자기 몸을 팔고 웃음을 팔아서 먹고 사니 경멸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마음을 어떻게 먹든 이날 하루는  지옥이었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누굴 만나고도 싶지 않았다. 기운이 빠져 하루
종일 누워 지내는데 딸아이는 나를 놀이터 삼아 얼굴도 만지고 콧구멍도 후비고 
몸통을 넘어다니곤 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내가 달라졌다. 밉고 의심스럽던 남편에 대한  생각은 싹 
없어졌다. 나는  구멍가게에 가서 콩나물과 두부를  사다가 반찬을 했다. 남편이 
집으로 올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저녁 준비를 다  해놓고는 아이를 
들쳐업고 마중을  나갔다. 온종일 방구석에  있다가 엄마 등에  업혀 바깥바람을 
쐬니 아이는 신바람이  나는 모양이었다. 등에 업혀 방아를 찧고  사뭇 까불어댔
다.
  남편은 제  시간에 돌아오지 않았다. 부산집에  들르는 모양이었다. 만약 내가 
그곳에 갔던 걸 아가씨가 나쁘게 말했다면, 남편은  돌아와 틀림없이 화를 낼 것
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불안해졌다. 하지만  아가씨보다야 내가 더 자기한테 
소중한 사람일 테니,  설마 그 일로 화를  내랴.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되질하며 
불안을 달래고  서성거릴 때, 어스름한  저녁 기운이 내려앉은  골목으로 남편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그의 눈치부터 살폈다. 밝지 않아 제대로 살필 수
가 없었지만 그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부지 오셨다!”
  내 기분은 이내  비굴해졌다. 그래서 자신 없는 목소리로 남편이  듣게끔 커다
랗게 아이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는 흡사  나를 보지 못한 사람처럼, 보았더라도 상대하고  싶지 않은 
존재에 대한 무시에 찬 태도로 나를 지나쳐 가바렸다.
  아무래도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이 순간을 모면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나는  더 늦기 전에, 내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 모르는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발을 떼어놓는데 한량없이  묵직했다. 남에게 자랑스러운 그의  장대한 기골이 
폭력의 수단으로 변할 때면 나는 공포감 때문에 미리 죽곤 했다.
  “윤이야, 아부지 좋으니?”
  나는 겁먹은 마음을  달래려고 이렇게 아이에게 말해 보았다. 아이는  무슨 눈
치를 채었는지 언제부턴가 엉덩방아도 찧지 않고 가만히 업혀 있었다.
  남편은 방문을 닫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 한쪽에는  밥보자기를 덮
은 작은 두리반이 놓여 있었다.
  “빨리 들어와!”
  나를 보자  남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태어나서 처
음, 나는 남편에게  공소스러운 매잘을 당하는 경험을 했으므로 성난  그가 무서
웠다. 오늘 늦었네유.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 도리고 입을 꽉 다물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내려놓으려고 포대기 끈의 한쪽을 풀었다. 그러나 남편은 아이
를 내려놓을 틈도 없이 내 멱살을 잡아  휘둘러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미쳐 넘어
지기도 전에  발길질을 했다. 나가떨어진  나를 들어올려 때리고  쓰러지면 다시 
그렇게 하고---. 그  와중에 딸아이가 어떻게 내  등에서 떨어져 나갔는지 모른
다. 아이는 방구석에서 기가 넘어가게 울었다.
  “너 왜 거기 갔너!”
  한참이나 분풀이를  하고 나서야 남편이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니가 뭔데 남 뒷조사나 하러 댕겨! 남편 얼굴에 똥칠이나 하구!”
  남편이 다시  소리쳤다. 나는 할말이 없었다.  입안으로 찝찔한 것이 흘러들었
다. 손으로 문질러 보았더니 피가 묻어났다. 
  손에 묻은 피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갑자기 남편의 폭력이  시시하게 여겨
졌다고 해야 할까? 나는 치마폭을 뒤집에 코를 풀었다.
  아이가 내게로 기어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딸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한동안 말없이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남편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딸아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떨이를 가져다  아버지 앞에 
놓았다. 남편이 딸을 와락 끌어안았다. 딸은 남편의 무릎을 의자 삼아 앉아서 나
를 바라보았다.
  딸을 안고 있는 아버지. 남편과 내 딸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시
울이 뜨거워졌다. 서러움이 아닌 슬픔. 그랬다. 슬픔이 나를 울렸다.
  “앞으로 내가 뭘 하건 간섭하지 말어! 한 번만 더 그랬다간 골로 갈 테니!”
  남편이 한껏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도  기분이 언짢다는 
걸, 그의 목소리에서 느꼈다. 그는, 결코 강하거나 잔인한 남자는 못되었다.
  “우리 어머이 아버이가  날 기를 때 이렇게 매맞구 살라구  키우지 않었어유.

  살아날 구멍을 보았으므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한숨쉬듯 담배연기를 
뱉었다.
  “당신이나 나나 다 같은 인생인데... 어뜻게 이렇게  날 무시할 수 있대유? 내
가 아무리  못났기루 억지루 결혼한 것두  아니구 다 선보구  좋다구 데려와서... 
집에서 기르는 짐승두 이렇게는 취급하지 않을 거래유.”
  나는 콧물을 치마폭에 닦으며 말했다. 부모님이  힘들게 낳아 남부럽잖게 길러 
남의 집에 보낼 땐  대접받고 살길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매를 맞고 사
니 나는 부모님께 죄인이었다.
  나는 울면서  다시 밥상을 차려다 남편  앞에 놓았다. 그는 잠시  겸연쩍은 듯 
모른 척하다가 아이에게 밥을 떠먹이고 자기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남편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아픈 입을  실룩거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당신 참 바보래유.  그래 내가 누구래유? 난 당신하구 평생  같이 살다 죽을 
여자 아니래유? 날 때려서  이렇게 사지육신 골병 들여놓으면 결국 당신 손해인 
거 왜 생각하지 못해유?”
  내가 말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뜻게 고생하구 여기까지 왔너 생각해  봐유. 난 한푼이라두 애께가
며 남 보란 듯 살 날 맹글라구 이를  악물구 이날까정 왔어유. 그런데 당신은 내 
맘두 몰러주구 술집에  가서 총각행세를 했네유. 그리구두 날 이렇게  때리니 내
가 뭘 바래구 더 살어유? 내가 싫으문 그냥 버레유. 이렇게 패지는 말구유. 윤이
는 당신 새끼니 당신이  좋워하는 여자 데레다 키우문 될 기  아니래유. 나 같은 
건 이제 아무 값어치두 없는 인생이 됐어유.”
  내가 흐느끼며 이렇게  말했다. 남편한테 버림받고 나면 내 인생은  얼마나 보
잘것없게 될 것인가. 당장 갈 데도 없었다. 친정에도 갈 수 없고 시집에도 갈 수 
없는, 죽은 거나 다름없는 몸이었다. 생각할수록 내 신세가 비참했다.
  윤이가 제 아버지 무릎에서 내게로 기어왔다. 나는  그 애를 빤히 바라만 보았
다. 자식과 정을  떼는 일이 이리 쉬운가.  아이가 내게서 어떤 기미를 느꼈는지 
무섭게 울기  시작했다.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던 남편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불렀다.  윤이가 나와 제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줄을 몰랐
다. 남편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가 자기 행실에 대해 후회하고 내게 미
안해한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내 서러운 마음이 이내 풀리지는 않았다.
  이날 밤 남편은 뼈가  다 녹아나도록 내게 정을 쏟았다. 우리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다 잊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나보다 먼저 일어나 밥을 했다. 그리고  점심밥도 스스로 
싸서 출근했다.
  
  잠이 들면  자주 친정 꿈을 꾸었다.  예전처럼 친정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했다. 꿈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어머니 혼자 화롯가에 앉아 부젓가락으로 화
롯불을 뒤적이거나 뜰팡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줄곧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아버지 나이를  꼽아보았다. 쉰 줄에 들어선 지 겨우 다섯 해
였다. `어서 이남 가라. 여기 사람덜은 다  죽어두 이남으루 간 느덜만은 살`거라
던 아버지의 말이 자꾸만 걸렸다.
  “여보, 요새 이상해유. 꿈에 아부지가 안 보이네유. 무슨 조화지유?”
  하루는 밥상머리에서 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그기 어째서.”
  남편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혹시 알어유? 아부지가 우리 나올 때 한 말 생각 안 나유? 이북 사람 다 죽
는다구.”
  “이북 사람이 죽긴 왜 죽어!”
  “몰러유. 자꾸 내 맘이 이상하네유. 아무래두 아부지가 잘못 된 거 같네유.”
  “쓸데없는 걱정 말어. 거기 사람 다 죽어두 그  `고약쥐` 영감은 멀쩡할 테니!

  남편은 무얼 믿고  그러는지 이렇게 장담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남편
의 예감이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다.
  그날,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그때 나는 방 안에 있었다.
  “성님! 형수님! 계세유?”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여서, 나는 누구일까  생각하느라 대답을 못하고 있었
다.
  “형수님!”
  다시 바깥에서 불렀다. 퍼뜩, 생각이 났다. 나는 벼락치듯 방문을 열었다. 누워
서 아이 젖을 물리고 있던 때라, 적삼 앞섶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채 손으로 가
슴을 감싸고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열아홉 살 총각, 내가 좋아하는 둘째시동생이 서 있었다.
  “아이구 되렌님. 어떻게 알구 왔어유?”
  나는 맨발로 나가서 시동생을 붙잡았다. 너무도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소용
돌이쳐서 앙가슴이 빠개질 것 같았다.
  “벨일 없으시지유? 성님은 일 나가셌나유?”
  “예 되렌님. 어서 들어와유. 너무두 반굽네유. 잘 오셌어유, 잘 오셌어유.”
  우린 방에 들어가 서로 성급한 맞절을 하고 다시 어른들 안부를 물었다.
  “송앤 다 펜해유. 할머니두 건강하시구유. 올핸  농사두 잘 됐어유. 야가 윤이
구만유.”
  시동생은 졸다 깨어 내게로 기어오는 윤이를 보고 말했다.
  “예. 윤이래유. 야가 되렌님 많이 닮었지유?”
  “그래유?”
  시동생은 자기를 닮았다고  하는 조카를 안았다. 딸아이는  피붙이를 알아보는
지 낯도 가리지 않고 삼촌의 품에 안겼다.
  “셋째되렌님두 델구  오시지 그랬어유. 거기 있어봤자  뭐 좋은 일 있겠다구. 
농사꾼밖에 더 돼유? 여기 오면 그래두 이 일 저  일 할 기 많지유. 젊은 사람은 
이런 데서 살어야 해유. 그래야 앞날을 바래봐유.”
  나는 셋째시동생에 대해 말했다.
  “갼, 거기메가 좋은  기래유. 같이 가지구 말은 해봤는데  따라나서지 않데유.

  “서방님이랑 동세두 잘 있구유?”
  “예. 잘 기시긴 하는데 뭔 일이 줌 있어 놔서유.”
  시동생이 내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삼팔선이 탈이 
난 것 같았다.
  “서방님이 그거하다가 걸렌 기 아니래유?”
  “맞어유. 재수가 없었어유.”
  “그런 걸 질레하문 안 되지유. 되레 잘됐네유. 이제버텀 안하문 되지유 뭐.”
  “사실은 작은성님이 원산  형무소로 갔어유. 재판까정 갔다가 2년  언도를 받
었어유.”
  큰시동생 준기가, 농민조합  돈을 횡령해서 월남하는 사람에게  길안내를 해줬
다는 것이다.
  “늘 서방님 하는 일이 걱정되더니만... 집에 뭔 피해는 없을까유?”
  “안죽은 그래두... 거기서 고개 들구 살긴 영 글렀지유.”
  “그렇겠네유.”
  “사실은 작은성님두 월남할 생각을 하구 기셌는데,  어른들만 누구 떠나기 그
렇다구 그리다가 그만...”
  “다 우리가 맏이 노릇을 제대루 못해서 이렇게 됐네유.”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맏이가 잘되어서 집안을  부유하게 일으켜 세워야 한다
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되렌님 일자리는  금방 나설 거래유. 몸만  성하문 여기선 얼매든지 살어유. 
돈이야 복이 있으문 따르는 거구유.”
  내가 말했다.
  둘째시동생은 내게 언제나 자상하고 따뜻했다. 그는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우
리와 같이 지내면서  윤이를 돌보았다. 짬이나면 근처 산으로 가서  썩은 그루터
기라도 파다 땔감을 쌓아두었다.
  이때까지는, 친정아버지 소식을 알지 못했다. 시동생은 물갑리 윤이 외가도 다 
잘 계신다더라고만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먹고 잘 수  있는 일자리를 
얻어 집을 떠나던 날이었다.
  “형수님, 절 나물구진 마세유. 차마 입이  안 떨어져서 그랬는데유, 윤이 외할
아버님이 세상 베리셌어유.”
  시동생이 말했다. 나는 처음엔 그를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한참이나 그랬다.
  “뵐 낯이 없네유.”
  시동생이 말했다.
  “... 괜찮어유 되렌님.  지가 이상한 꿈이 대구만  꿔져서 짐작은 하구 있었어
유. 다 이 못난 지를 생각해서 말을 못해 줬는데... 괜찮어유.”
  나는 도리어 시동생을  위로했다. 그러나 너무 큰 슬픔은 천천히  느껴지기 마
련이었다. 시동생이 억지로 윤이를  떼어놓고 떠난 다음, 나는 머리를 풀고 고향 
쪽을 향해 절을 했다. 흰 광목 조각으로 댕기를 접어 머리에 꽂았다.
  아버지. 나는 세상에 한  분뿐인 아버지를 잃은 출가외인 딸이 되었다. 아버지
가 돌아가신 다음에야 비로소 친정부모가 시집간 딸의 인생살이에 얼마나 큰 울
타리인가를 깨달았다.
  
  1948년, 이 한  해 동안 이남과 이북이  아주 다른 나라로 갈라졌다. 이북에선 
여태 쓰던 태극기를 버리고 인공기를 따로 만들었다.  서로 자기 쪽 군대도 만들
었고 선거도 따로따로  해서 대통령도 뽑았다. 가을에는 전라도 여수  순천 땅에
서 반란사건이 터졌다.  유엔에서는 남한을 합법정부로 승인하였다. 월남한 사람
들에겐 이런 변화가 즐겁지 않았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넘어갈 수 있던 삼팔
선은 이제 넘을 수 업는 경계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핑계만 있으면 고향이 그리워 우울해지던 남편은 아주 실의에 빠
졌다. 그는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았다. `세상 만사를 윗대가리 몇 놈이  다 결정
하는` 세상을 살아봤자 그게 그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그건 순전히 핑계였다. 타향살이에 실증이 난 게 
분명했다. 그는 거리낌없이 타락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만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사는 게  무슨 유행병처럼 돌았다. 사람들은 틈만 나면  모여서 화투
를 치고  핑계만 생기면 술을  마셨다. 더군다나 남편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포마드로 머리를 뒤로 넘기고 양복을 뽑아 입고 다녔다.
  “젊은 놈이 돈이나 알어서 뭐 해!”
  남편은 그의 낭비와 사치, 타락을 염려하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희망
을 버린다는 게 이렇게  무서울 줄은 정말 몰랐다. 그와 어울려  다니는 젊은 남
자들, 다들 가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썩은 냄새를 풍
기는 건달들이었다. 남자들은  술을 마시고 이슥한 밤이 되면 노래를  부르며 거
리를 배회했다.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련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 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탄한다
  
  아 꽃이 필 때나 오시려느냐
  아 눈 올 때나 오시려느냐
  보따리 등에 메고 넘는 고갯길
  산새도 나와 함께 울고 넘었지
  자유여 너를 위해 자유여 너를 위해
  이 목숨을 바친다
  
  어른들이 너무 불러 말 배우는 어린아이도 뜻  모르고 흥얼거리게 된 노래. 어
린 윤이도 제 아버지 품에서 `가거라 삼팔선`을 제법 흥얼거렸다.
  그리고 동네는 유흥가로 변해서 여기저기 크고  작은 술집이 번창했다. 미군부
대를 근거로 해서 돈을 버는  노무자와 그들의 돈을 뜯는 술집과 양색시들 천지
였다. 여기 모여사는 사람들은 우리처럼 시골 출신의 농사꾼이 대부분이었다. 그
리고 피난민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에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사람도 있었지만 
남편처럼 희망을 버리고 사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맘때, 남편이  평소에 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무슨 청년단  간부인 원산 
사람이 길 건너에 제법  큰 술집을 차렸다. 그 남자는 `반민특위`가  떴을 때, 게
거품을 물고 국회를  성토했다. 이북 빨갱이 반대해서 월남한 사람들을  다시 몰
아내려는 국회에 틀림없이 빨갱이가 들어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반민특위가 구
성된 초기, 서북청년단이나  대한청년단원으로 활동하던 이북 사람들  중에 다시 
월북한 사람도 있었다.
  그 남자의 술집은 `니나노`집이었다. 주택가에서 술집을 하니 밤마다 노랫소리
가 그치지 않았다. 남편은 그 집의 단골 손님이었다. 술 한 모금 제대로 마실 줄 
모르는 남자가 술집 색시들한테 인기를 독차지하다니, 놀라웠다. 그는 자신의 퇴
폐적인 생활태도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처음엔 내 눈치를  보고 무언가 
열심히 변명하고 속이기도 했으나 머지않아 그는  뻔뻔스러워졌다. 나는 그런 그
가 밉다기보다 두려웠다. 몸뚱이 하나가 달랑  밑천인 사람이 일하기를 싫어하고 
타락한 여자들과 엉겨붙어 사니, 너무도 딱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래유. 사람이 앞날을 생각하구 살어야지유.”
  어느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남편에게 밥상을 차려다놓고 말했다.  이제 숟가
락질을 시작한 딸이 먼저  밥상 앞에 앉았다. 아이는 제 수저는  두고 아버지 것
을 잡고 밥을 뜨다 바닥에 흘렸다.
  “오늘두 모르구 사는 하루살이  인생인데 제기랄 내일은 무슨 얼어죽을 내일
이여?”
  그는 딸에게 밥을 떠먹이며 거침없이 이렇게 말했다.
  “자식을 기르는 사람이  그런 말 하면 못 써유. 자식을  어뜩하든지 책임져야
지유.”
  “어라? 이년 보게. 누구한테 훈계여?”
  남편이 나를 멸시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군부대두 철수한다구  하는데, 우리가 무슨  집이 있어유,  농토가 있어유, 
저거 윤이 우리같이 천한 팔자 안 만들라면 남들같이 먹이구 입히지는 못할망정 
가르치긴 해야잖어유.”
  그러나 남편은  내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상을 뒤집어  엎어버렸다. 품에 
안고 있던  자식도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개 패듯이 
마구 팼다.  놀라서 숨이 넘어갈 듯  울던 윤이는 방구석으로 가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런 난리가  벌어지지 이웃에서 알고 달려와 남편을 말렸다. 그
는 듣지 않았다. 그 여자는 질린 윤이를 안고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니년 잘난 체 하는데 진절머리가 난다! 나, 못난 놈이어서 너 같은 년 못 모
시구 사니 나가! 당장 나가!”
  남편이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쳤다. 나는 우선 남편의 눈에서  사라져야 했기 
때문에 이웃집으로 피했다.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남자의  완력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이제 나는  알았다. 한동안은 남편에게 매를 맞고도 그걸  내 실수로 
돌리는 여유를 부리며 살아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자상하고 잘생긴 남편과 
산다고 여자들의 부러움을 샀던 나는  이제 가장 못난 여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
다.
  이날 나는 남편이 외출한  다음에 집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발  한 짝 들여놓
을 수  없이 난장판이었다. 밥이며  국에 반찬들이 아무렇게나  쏟아져서 더럽고 
지저분했다. 남편이  갈아입은 옷을 아무 데나  던져놓아서 더 어지러웠다. 나는 
그 어지럽고 더러운 것을 하나씩 걷어 치우고  쓸고 닦았다. 그리고 세수를 하고 
아이를 데려왔다.
  이날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가 집을  나가라고 했지만 나갈 수가 없
었다. 나 자신만 생각하면 어딜 간들 못살까. 하지만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생
각하면 결코 마음대로  살 수 없었다. 어차피 여자로 태어나  부모님을 죄인으로 
만든 자식이니 제대로 사는 걸 보여서 효도해야  했다. 게다가 내겐 자식이 있었
다. 사람이 제  부모와 자식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잊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쁜 
인생을 살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남편은 나를 보더니 히쭉 웃
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 웃음 하나로 나는 그를 미워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기는 잦아들지 않았다.  그는 노래를 잘 부른다는 여자와 `사
랑`에 빠진 것이었다.  딸아이의 돌잔치를 하겠다던 계획은  남편도 나도 까맣게 
잊었다.
  “나두 양심은 있는 놈이여. 조강지처는 버리지 못해! 그런 줄 알구 날 간섭하
지 말어. 그땐 내가 어떻게 나오게 될지 나두 몰러!”
  제발 정신 차리라고 하는 내게 남편은 이렇게  협박했다. 나는 질투와 절망 때
문에 나 자신을 팽개치기 시작했다. 나처럼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들이 모여서 
신세 한탄도 하고  남편 욕도 하면서 화투를  쳤다. 나는 그것에 정신을 잃었다. 
하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걸 잊을 수가 있어서 자꾸만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내외가  다투어 인생의 고삐를 놓아버리자  피해를 입은 건 아직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잘 걷지도  못하는 딸아이였다. 길고 긴 봄날, 나는 딸을 아
무렇게나 놓아두고  화투만 치러 다녔다. 타락의  썩는 재미도 저절로 익혀졌다. 
딸아이가 보채면 나는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리고 욕했다.
  “지 애비 닮은 게, 그 소가지 어디 갈라구?”
  나는 딸이 남편의 자식이어서 이렇게 괄시했다.
  타락을 하는 데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나도 화투에 미쳐 지
내니 좋았다. 좌절감에 빠져서 맑은 정신이  나가면, 남편의 핏줄인 딸이 싫었다. 
아들도 아닌 저런 거. 키워놓으면  남의 자식되는 거. 저거 하나 때문에 내가 하
고 싶은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귀찮고 미웠다.
  내 마음이 이렇게 뻔뻔스러워지니 딸은 고아보다  더 못하게 내굴려졌다. 아이
는 누런 코를  줄줄 흘리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에게나 
업어달라고 팔을 벌렸다. 물론 윤이가 집 밖에 나가 기다리는 건 제 삼촌이었다. 
어쩌다 노는 날이면  거르지 않고 집에 들러 윤이와 놀아주었다.  한번도 빈손으
로 오지 않았다. 빵떡이나 얼음과자 같은 것을 사다주었다. 그가 일은 한다곤 해
도 제 한입 먹고 자는 것도 벅찬 때, 윤이의 주전부리를 챙기는 건 무리였다.
  시동생을 만나면  나는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남편에게 매를 맞고  누워 있을 
때 그가 오면 나는 참았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되렌님. 진 어떻게 살어유! 난 이제 더 못 살어유.”
  나는 떼를 쓰듯 말했다.
  “형수님, 형님이 형수님 싫어서 그리는 게 아니잖어유.”
  시동생은 목이 메인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밥을 차려주고 
빨래도 해놓고 돌아갔다.
  아직 어린 시동생이지만 가까운 하늘 아래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되었다. 나는 
바람난 남편 대신 그를 의지했다.
  부평 미군부대를 근거로 살아가는 뜨내기 인생들의 방탕살이도 오래가지 못했
다. 이 해 여름 미군부대가 완전히 철수를  하면서 모두들 서리맞은 푸성귀가 되
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반민특위는 벌써  흐지부지된 지 
오래였고 백범 김구는 대낮에 총에 맞아 죽었다.
  한꺼번에 실업자만 서성거리게  된 을씨년스러운 부평지역. 우리는  우리의 생
활이 그러했던 결과로 남  먼저 거지가 되었다. 나는 이런 상황이  차리리 맘 편
했다. 우리같이 함부로 사는  인생은 일찌감치 망하는 게 나았다. 더군다나 가난
은 우리에게 익숙해진 생활이었다.  실업자가 된 남편은 매일 늦잠을 잤다. 나는 
돈을 준 대도 늦잠을 자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러니 언제나처럼 이른 아침에 일
어나 아침밥을 해놓고  남편이 깨기를 기다렸다.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마당
은 물론 집 앞의 길까지 쓸어도 남편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홉 시 열 시가 지나
면 내 속에서 천불이 났다.
  “여보 일어나유.”
  “아무리 논다구 해두 이렇게 제때 일어나지 않으문 사람이 곯어 못 써유.”
  나는 그가 성질을 부릴까 마구  깨우지도 못하고 옆에 가서 이렇게 말해 보았
다.
  “이년아! 곯어두 내가 곯을 테니 상관말어!”
  남편은 소리를 빽 질렀다. 이럴  때가 대개 열 시가 넘어서였다. 어떤 때는 밥
상을 걷어차기도 했다. 나는 그가 일어나면 밥을  주어야 해서 어디로 나갈 수도 
없었다. 속으로 그를 미워하면서  일거리를 만들어 시간을 죽였다. 옷을 뜯어 다
시 만들어보고 모양을  바꿔보기도 했다. 시간을 보내기엔 바느질이 그  중 나았
다.
  실컷 자고 일어난 남편은 밥을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어쩌다 내가 좀 늦
으면 그는 골이 난  채 빈속으로 집을 휙 나가버렸다. 한강으로  낚시를 가는 것
이었다.
  이런 생활이 몇 달이나 계속되었다. 가끔 시동생이  와도 나는 그를 반기지 못
했다. 두부 한 모 사다 따끈한 밥 한 그릇 먹여보낼 수가 없었다. 내겐 쌀 살 돈
이 떨어졌고 남편에겐 담배 살 돈이 떨어졌다.
  알거지가 되었을 때, 그제야 남편은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며칠 
지나서였다.
  “제천에 가 살래?”
  하루 저녁, 먼지 묻은 것처럼 뿌연 얼굴로 돌아온 남편이 말했다.
  “제천에서 누가 오래유?”
  “가구 싶지 않으시구만!”
  “왜서 당신은 꼭 말을 그렇게 해유?”
  “내가 뭘 어째서!”
  남편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밝았다. 밥을 모처럼 맛있게 먹었다.
  “철길을 닦는다는데 우선  막노동이래두 하다 보문 내 할 일이  생길지 몰러!

  밥상을 물린 다음에 윤이를 안고 그가 말했다. 나도 속으로 웃었다.
  “윤아, 아부지 보구 싶으문 어떻할래?”
  남편은 딸의  뺨을 자기의 턱으로  비비며 말했다. 윤이는  아버지의 턱수염이 
아프다고 얼굴을 돌렸다.
  이틀 후에 그는  내가 이웃에서 빌려다준 여비를 들고 제천으로  떠났다. 아이
와 둘이 남은 나는 당장 먹고 살 일이  아득했다. 궁리 끝에 콩나물 장사를 시작
했다. 집안에 콩나물 시루를 놓아두고 물을 줘  기르는 거라 밑천이 콩값밖에 들
지 않았다. 먹기 좋게 자란  콩나물을 한 움큼씩 단을 지어 짚으로 묶었다. 함지
에 차곡차곡 담아 햇볕이 스며들지 못하게 여러  겹으로 덮어야 했다. 그걸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파는 것이었다. 장사 시작한 지  보름쯤 지나자 단골
이 생겼다. 그래도 돈은 모이지 않고 겨우 먹고 살 수만 있었다.
  이런 어느  날이었다. 콩나물을 팔고 돌아오니  집이 고요했다. 여느때 같으면 
문을 열어놓고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을 윤이가  보이지 않았다. 언뜻 스치는 느
낌이 불길했다.  아이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었다.  윤이가 방 
한가운데 쓰러져 신임하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후닥닥 들어가 아이
를 들여다보았다. 입술이 퉁퉁 부어올랐는데 속살이 벌겋게 다 뒤집어져 나왔다.
  “윤아! 왜 이랬어? 어따 이랬너?”
  내가 기겁을 해 물었지만 아이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를 쳐다보는 눈에 기운
이 하나도 없었다.
  “윤아, 왜서 이랬너? 누가 이랜? 입술이가 왜서 이래?”
  그러나 입이 부어 말을 못하는 아이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나는 아
이가 덮고 있는 이불을 벗겨내고 팔다리며 배를 살펴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잘 넘어지는  아이이긴 하지만 다른 덴 멀쩡한데 
입만 뒤집어질 리 없었다. 넘어진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내가 이렇게 안타까워하고  있을때, 아이의 입이 우물거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물을 달라는 소리였다.  물을 뜨러 부엌에 나갔다가 부뚜막에 놓인  빈 양은대접
을 보았다. 빨래 삶을 때  쓰려고 양잿물을 넣어두었는데, 그 그릇이 텅 비어 있
는 것이었다.
  “윤아! 너 이거 먹었너?”
  내가 딸아이에게 양잿물 그릇을 들어 보이고  물었다. 아이가 그렇다는 시늉을 
했다. 양잿물을 마시다니! 나는  아이를 들쳐업고 서울병원으로 정신없이 달려갔
다. 의사는 아이의 식도에 고무 호수를 넣고 위세척을 했다.
  “아이가 명이 깁니다. 양잿물이 위 속으로는 조금밖에 들어가지 않았네요.”
  “우리 딸이 죽진 않겠어유?”
  “식도만 조금 상했는데 괜찮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나는 의사에게 고맙다고 여러 번 머리를 조아렸다.
  병원에서 나오자  아이가 구멍가게를 가리키며 얼음과자가  먹고 싶다고 말했
다. 그걸 사서 손에 쥐어줬다. 기뻐서 히쭉 웃었지만 이내 입술이 아프고 입안이 
헐어서 빨지를 못하자  울기만 했다. 이빨로 얼음을 갉아서 윤이의  입에 넣어주
었다.
  다음날은 장사를 나가지 않고 아이만 보살피고  있었다. 웬일인지 아이 아버지
가 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전화도 없는 때여서 인편에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남편은 벌써 제천으로 떠난 지 두 달이 넘었던 것이다.
  내 예감은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것은 하루도 비껴가지를 않았다. 남편이 저녁
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는  방문턱에서 윤이부터 불렀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
려앉았다. 그때 이웃에 사는 양양 아주머니가 놀러와 있었다. 큰시어머니와 같은 
얼롱골에서 살았다고 우리를 친정식구 보듯 반기는 처지였다.
  “윤아 니 얼굴이 왜 그렇니?”
  남편이 아이를  번쩍 들어올리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가  부은 입으로 
킁킁 소리내며 울기 시작했다.
  “윤이가 애 이래!”
  남편이 부엌으로 나간 내게  소리쳤다. 어떻게 피해 볼까. 나는 매맞는게 무서
웠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집구석에서 애 하나 똑바루 보지 않구! 입이 이  지경일 때야 얼마나 아팠겠
너!”
  남편이 화가 나서 말했다.
  “뭘 아 어멈이 그랬너? 지가 혼자 놀다 양잿물을 마셌으니 그렇지!”
  얼롱골 아주머니가 내 편을 든답시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큰 실수였다.
  “저년이 내가 미우니까 윤일 죽일려구 양잿물을 먹였구만!”
  남편은 거침없이 말했다.
  “당신 무슨 말을 그렇게 해유?”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남편은 의심을  풀지 않
는 것 같았다. 아무리  아비의 정이 크더라도 제 속에 가졌다가  배아파 낳은 자
식 둔 어미의 정에 비할 수 있을까.
  “윤아, 아부지 없을 때 엄마가 때리디?”
  남편이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윤이한테 잘못하는 거 아부지한테 다 일러라. 알았지?”
  남편이 다시 딸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품을 의자  삼아 앉는 버릇이 있는 딸은 
그날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 애는 다만  당황과 두려움을 감춘 무표정에 가까
운 얼굴을, 엉뚱한 데다 돌리고 있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2년쯤 된 한  생명에게, 우리는 부모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행패를 부렸는지. 물론 나는 그때  이런 무서운 사실을 깨닫지 못하
고 있었다.
  
  두 해 전, 내 칠순잔치를 한다고 자식들이 다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나를 둘러
싸고 앉아서 예전, 한집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던 때를 회상하며 웃고 떠들었다. 
그때, 큰딸이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난 이런 생각을 해요.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선
물은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거라고. 내가 아이를 길러보니까 그래요.”
  순간, 나는 딸이 무서웠다. 내 늙고 기운 떨어진 가슴속에서 매케한 연기가 피
어오르는, 가혹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랬다. 그때 우리  부부는 스물너댓 살 정도의 미숙한 젊은이에  지나지 않았
다. 부모가 된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짐승처럼 새끼를 낳고 먹을 것을 
주는 데 그쳤다.  더군다나 우리는 서로를 학대하고 멸시하고 불안해  하고 미워
함으로써 어린아이에게 공포와 적개심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그래도 남편에게는 내가 필요했다.
  “은제 올 거여!”
  제천으로 떠나기 전에 그가 말했다. 이상하게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낼은 그렇구, 모렌 오겠지?”
  나는 기가 막혀 그를 뻔히 쳐다보았다. 어디  나들이 가는 것도 아니고 한동안 
살던 살림을 정리해 다른 곳으로 살러 가는데 혼자서 이틀에 할 순 없었다.
  “되렌님한테두 알구구 가야지유.”
  내가 시동생 말을 꺼냈다.
  “알구긴 뭘 알궈! 차차 알게 될 걸!”
  그가 말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낼모레 기차 정거장으루 나갈 테니 그리 알어!”
  그가 말했다. 그리고 제천으로 돌아갔다.
  남편이 떠나고, 나는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잘 사는 건지 알 수
가 없어졌다. 차라리 일찌감치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혼란 때문에 맥을 놓고  있을 때, 다행이도 시동생이 찾아왔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통곡을 했다. 걷잡을 수가 없었다.
  “형님이 또 어떻게 했어유?”
  시동생이 물었다.
  “되렌님두 없는 데서  지 혼처 어떻게 살어유. 형님이 지를  낼모레 제천으루 
오라니 진 이제 어떻게  살어유. 그 동안 되렌님이 질 붙들어줘서  그 힘으루 살
었는데 어뜩해유.”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시동생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시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형님이 내쫓어두 날 거둬줄 사람이 없어유. 외롭구 무수워서 어떻게 살어유.

  내가 말했다. 그랬다. 시부모  형제 아무도 없는 타관에서 남편이 나를 내쫓는
다면 나는 천한 소박데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형님이 장창 그리시겠어유? 맘 펜히 가지세유.”
  시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돌아가겠다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형수님, 앞으루 잘 못 뵐 것 같네유. 징병검사를 받었어유.”
  “뭔 말이래유?”
  나는 정말 어안이  벙벙해서 무슨 말인지 새겨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
기 목이 탔다. 부엌에 나가 물을 마신다면서  나도 모르게 식초병을 집어 들이마
셨다. 내가  나뒹굴자 시동생이 놀라서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위세척을 하는 
난리를 피우고 나는 제정신을 차렸다.
  “형수님, 그저 몸 건강히 계세유. 지가  첫 휴가 나오면 제천으루 찾어뵐게유.

  시동생은 이런 말을 하고 뒤도 못 돌아보고 떠났다.
  둘째시동생. 내 인생에서 어렵고 막막하던 때 울타리가 되어주었던 사람. 그가 
이 세상에서 내게 한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그는 첫 휴가도  나오기 전에 전
쟁터로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인생에서의 허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사를 오라면
서 빈몸으로 혼자  떠난 남편. 마음으로 의지하던 시동생과의 이별  앞에 속수무
책일 수밖에 없는 나. 내가 낳은 딸에게 계모가 되어 가는 어미... 나는 살림살이
를 정리했다. 아이를 업고 내 손으로 들 수  있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버
렸다. 살림살이라는 건 사소하고 시시한 것이었다. 나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을 잃은 여자였으므로.

    4
    전쟁

  “엄마, 큰언니는 좀 이상하지 않아?”
  막내딸이 불쑥 말했다.
  “이상하다니? 난 모르겠다.”
  “언닌 미친 거 같애. 큰일났어!”
  호들갑스런 목소리다.
  “보통 문제가 아니야. 엄만 몰라?”
  “모른다. 니가 뭘 가지구 그리는지.”
  “언니가 말이야, 아버지가 쓰던 칫솔 시계 도장  다 자기 옷장 서랍에 간직하
구 있대!”
  막내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었다. 나는 할말이 없다.
  “엄만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상하너?”
  “아버지 돌아가신 지가 벌써 얼마나  됐어? 그런데 왜 아직두 그래? 그런 거 
가지구 있다가 귀신 붙으면 어떡할라구.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
  나는 한숨만 쉰다. 아버지 귀신 붙을까 봐  겁내는 딸이나 아직두 제 아버지를 
잊지 못해 눈물 짜는 딸이나 내겐 마찬가지 같으니.
  “엄마가 언니한테 좀 뭐라구  그래. 온 집안이 뒤숭숭해지기 전에. 꼭이야 엄
마!”
  “알았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내 이 생각을  잊는다. 우리들, 
그러니까 남편의 `죽음`, 그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와 다른 자식
들은 아직 편안치 않다. 언제나 큰딸이 아버지를  입에 올리기만 하면 서로 가슴 
졸이는 걸 느낀다.  한부모 밑에서 난 자식이건만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 
내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나이 마흔이 넘은 큰딸,  그 애가 아직도 정신적 이별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내 
남편, 이준태는 1950년 정월 충청도의 제천군  송학면에서 마루보시 십장으로 일
했다. 부평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할 때 나는  무게가 나가는 살림살이를 모두 헐
값에 처분하고  왔으므로 우리 세 식구가  사는 건 우스웠다. 당장  밥 끓여먹는 
데 필요한 솥과  냄비, 수저 몇 개로 사는 살림에  나는 이력이 나 있었다. 처음 
한두 달은 달랑 방 한 칸에서 살았는데 우리 부부는 이내 그곳에서 평이 좋아져 
이집 저집에서 방세 안 받겠으니 와서 살라고  했다. 우리는 동네에서 그중 좋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남편은 십장이 된 다음부터는  직접 노동을 하지는 않게 되
었다. 더군다나 마루보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나무를  해다 전부 도끼로 패서 
마당가에 쌓아 놓아  그것만 보고 있어도 훈훈했다. 나는 그곳에서도  놀지 않았
다. 어느 집에 큰일이 생기면 부르지 않아도  가서 거들고 주인집의 일은 언제나 
한식구처럼 도와주었다. 그래서 배추, 무, 고추, 마늘, 파 어느 것 하나 돈을 주고 
사먹을 것이 없으니 남편의  월급을 크게 잘라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었다. 그리
고 무엇보다 남편이 다시 새사람으로 돌아와 내게  고통 주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건달  같던 기미도 씻기고 다시  건실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남편은 짬이  나면 딸의 손을 잡고  산책을 다녔다. 그에게 어린 애인이 
생긴 셈이었다. 딸은 나보다 아버지를 더 기다려  그가 퇴근할 때쯤 되면 시께도 
볼 줄 모르는 아이가 집  앞에 나가 기다렸고 남편은 먼데서 딸을 보면 성큼 달
려와 아이를 번쩍 들어올려 사정없이 입을 맞췄다.  남편은 딸 재미에 흠뻑 빠져
서 지냈다.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이 해 초순 나는 임신이 되어 다시 입덧에 시달리고 있어서 꼴이 말이 아니었
다. 임신이 되어도 기쁘지 않았다. 딸을 이미 둘이나 낳았기 때문에 또다시 딸을 
낳게 될까 두려웠다. 그런데도 입덧이 심해 남편이나 이웃이 이내 알아챘다.
  이런 내 은근한  걱정을 알고 있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하루는 아침부터 우리 
방으로 왔다.
  “야가 아직두 자네.”
  아주머니가 늦잠 자는 딸아이를 보면서 말했다.
  “야가 아침잠이 질게유.”
내가 말했다.
“저게 터를 잘 팔어야 될 텐데.”
아주머니가 말했다.
“기래기다 말이래유. 불안하네유. 우리가 맏인데. 이번에두 딸을 나문, 어뜩하지
유?”
  “야 아부진 아들 안 바라재?”
  “속으루야 모르지유.”
  “그래서 내가 왔어. 어제 읍에 나갔다가 들었네. 아들인지 딸인지 아는 건 저
런 아가 족집게란다.”
  “그래유?”
  은근히 자나깨나 걱정이었는데 귀가 번쩍 띄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알아온  비방은 간단했다. 쇠여물통에 밥주걱과  낫을 넣어놓
고 딸아이에게 집어보라고 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의기 투합해서 자는 아이를 
깨웠다. 실컷 자지 못해 쀼루퉁한 아이를 억지로 쇠여물통 앞에 세웠다.
  “여기서 니 맘에 드는 거 집어다 엄마 줘라.”
  아주머니가 딸에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멀찍이 서서 아이가 `만족스런` 선
택을 해오길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  곧 딸은 낫을 들어다 내게 주었다. 순간 가
슴이 뭉클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영문 몰라 눈이  둥그런 아이에게서 
낫을 받아 한곳에 치워놓고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나
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됐재!”
  아주머니도 기뻐하며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고 있었다.
  “엄마 아퍼요?”
  딸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니 어머이 여기에 동생 들었어.”
  아주머니가 내 배를 짚어 보이며 딸아이에게 말했다.
  “엄마, 동생 좋아요.”
  딸아이가 말했다.
  저녁에 돌아온 남편에게 이 얘기를 했다.
  “그럼 야가 터를 어련히 잘 팔려구!”
  남편은 마치 어린  딸이 아이를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딸을  추켜세웠다. 말이
야 어찌 되었든 신이 났다. 늘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날 이후로 개운해졌다. 이날 
이후로도 아들 딸 알아보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지만 나는 딸의 선택 하
나만 믿기로 했다. 이제 태어난 지 두 해, 햇수로 세 살이 된 여자아이가 무서운 
것도 모르고 잡은  `낫`이니 더 의심할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내 입덧만은 
여전했다. 도무지 잘 먹지를  못해서 한 발 내딛으면 두 발  뒤로 밀려나는 형편
이었다. 그래도 아이는 다달이 커서 입덧으로 먹지 못한 배 안에서도 잘 자랐다. 
아직도 여자 몸에서 아이가 생기고 자라는 게  내겐 신기하다. 아이는 여름에 접
어들고부터 손인지 발인지 그런 것으로 내 배를  툭툭 찼다. 그럴 때면 뱃가죽이 
풀을 쑬 때 풀떡풀떡 끓어오르는 모양으로  부풀었다. 이럴라치면 나는 아들이라 
노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런 어느 일요일,  남편은 아이를 안고 마실을 갔다가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
로 돌아왔다.
  “큰일났어야.”
  그는 거의 까부라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왜서유?”
나는 아이가 오줌을 싼 이불을 헹구다 말고 물었다.
  “이북에서 쳐내려 온다는데...”
  남편은 왔다갔다하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그런 그를 뻔히 쳐다보고
만 있었다.
  “전쟁이 났어! 이북에서 막 밀구 내려오는 모양인데... 난 기어코 이렇게 죽구 
마는 거다.”
  남편은 이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쉬고 쉴새없이 담배를 피웠다. 곧  소식이 온
동네, 온 세상에  퍼져서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난리`에 대해  얘기했다. 특히 
이북에서 나온 `삼팔 따라지`들이  더 불안해 했다. 아직 이곳까지는 인민군대가 
오지 않아서 불안하게 말은 해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아
무도 뾰족한 의견을  내지 못했다. 이남 사람들인 우리 이웃들은  우리집으로 와
서 `인민군`이나 `빨갱이`에 대해 물었다.
  라디오가 있는 집에 사람들이  모여 정세에 귀를 기울였다. 유월 이십오일, 서
울 시민은 동요하지 않는다던 방송은 다음날 서울 하늘에 나타난 소련의 비행기
인 이북의 야크기 공격을 보도했다. 그러자  어디서 퍼졌는지 인민군은 이북사투
리를 쓰는  사람은 다 잡아죽인다고 했다.  동네에 같이 살던 평안도  사람이 그 
밤으로 소리소문 없이 떠났다.  물론 피난을 생각지 않는 이북사람도 있었다. 그
런데 남편은  불안해서 견디지를 못했다.  그는 이북에서 내려온  다음 부평에서 
대한청년단에 가입했던 것을 겁내는 게 뻔했다.
  “괜찮어유. 그게 다 죽지 않으려구  한 걸 누가 뭐래유. 사람이 형편 따라 사
는 거 아니래유? 당신이 누굴  때렸어유? 누굴 죽었어유? 난 겁이 하나두 안 나
네유.”
  나는 남편을 위로하려고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생각이었다.
  “내 신센 니 년이 다 조져놨어!”
  남편은 줄담배를  피우면서 나를 욕했다.  언제나 이북이 좋다고  하던 사람을 
꼬드긴 건 나였지만 그건 다 잘살기 위해서였다.
  “이형 걱정하지 말게.  이형은 사투리두 안 쓰구 어디서 이북사람  같은 데가 
없으니 맘 놓구 있어두 될 걸세.”
  그의 동료나 이웃에선 한결같이 이런 말을 했다. 그러나 그의 `흰 패 붉은 패` 
공포는 말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공포가 시시하게  느껴져서 짜
증이 났지만 그에겐  내가 모르는 경험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살이  칠십 년
을 훌쩍 넘긴  이 마당에 와서 돌이켜보면  `사람은 정말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누군가를 잘 아다고  생각할 때, 그때 나는 여러 종류의 실수나 상처
를 만들었던 것 같다. 상대가 부모든 자식이든 남편이든 상관없이. 정말 그랬다.
  “아무래두 여긴 위험하니 원주루 피난을 가자. 거기 큰아버지한테 가면...”
  잠꼬대처럼 이렇게  말하던 남편. 그는 아내와  딸을 떠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는 외로움을 즐기는  사람이 못 됐다. 그러나  나는 피난을 떠날 수가 없었다. 
오랜 입덧으로 먼길은커녕 가까운 데도 걷는 게 불가능했다.
  하루 이틀... 그는 보는 내가 두려울  정도로 불안정하게 지냈다. `인민군`이 어
디까지 왔는지,  그는 나에게 수시로 전황을  알아오도록 들볶았다. 한시도 편히 
앉아 있질 못했다. 그는 추위에 떠는 사람이  화로를 끌어안고 지내듯이 흡사 그
렇게 딸을 품거나 업고 지냈다. 언뜻 보면  그건 아버지가 딸을 돌보는 형상이었
지만 내겐 그가 어린 딸아이에게 죽기 살기로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
쟁이 뭔지 이북  이남이 뭔지 모르는 딸은  아버지에게 배운 유행가를 흥얼거렸
다. 그는 딸의 손을 잡고 개천 둑길을 걷거나  집 앞 툇마루에 나와 앉아 유행가
를 불러서 아이는 저절로 가사를 외고 있었다.  딸아이는 그걸 그저 생각나는 대
로 한 소절씩 흥얼거렸다. 아이가 그렇게 하면 남편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이때의 남편은 딸아이가  아무리 유행가를 엉터리 가사로 흥얼거려도 기
뻐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미친 사람처럼 원주로 혼자 `피난`을  떠났다. 서
울에서 온다는 피난민들이 제천으로 들이닥치자 그는 눈이 뒤집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닷새 만에 다시 돌아왔다.
  7월이 되었다. 먼데서  꽈르르르 쾅 하는 대포  소리가 났다. 그래도 제천이나 
송학 쪽은 `안전`했다. 다만 피난민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 전쟁을 실감하게 했
다. 연고를 이곳에  둔 피난민들은 더러 송학에 머물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더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한여름 장마까지 져서 사는 게  누구에게나 을씨년
스러웠다.
  이런 어느 날 인민군이 송학으로 왔다.
  “인민군이 왔다!”
  “빨갱이가 왔대유!”
  어린아이들은 세상천지 모르고 이렇게 소리 지르며 다녔다.
  인민군대는 야산에  진을 쳤다. 남자들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구덩이도 파고 
짐지 져 날랐다. 남편도 그렇게 했다. 어느 날은 인민군이 주었다며 설탕을 가져
오기도 했다. 나도 놀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인민군이 지레 무서워 피난을 간 
군인 경찰  가족 빼고는 모두들 적어도  `겉으로만은`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
다. 더군다나 남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호감을 샀다. 그는 무슨 일이든 
맡으면 최선을  다했고 사람을 좋아해서  그랬을지 모른다. 인민군이  나와서 맨 
먼저 한 일은  인민위원장을 뽑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민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
했다.
  “... 고생을 제일 많이 한 동무가 누구요?”
  그래서 송학면의  인민위원장은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이  사람은 불과 
서너 달 후에  밀어닥친 국군에게 총살되었다. 그가 인민위원장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채 깨닫기  전이었을 것이다. 송학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었
던 시간은 두 달 남짓이었으나 그 짧은 동안 인민군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남
자와 여자들에게 여러 가지 지위를 씌워놓았다.  그러나 인민군은 그들에게 생애 
최고의 `영광`을 경험케 했지만 그 짧디짧은 영광과  그들의 목숨을 바꿔야 하는 
것에는 책임지지 못했다. 그들은 두 달 동안  `반동`을 `찔러`주었고 공정한 공출
을 위해 논이나 밭에서 나는 모든 작물의 낱알을 센다는  방침에 충실함으로써 `
이남의 평범한 인민`들을 질리게 하였다.
  그들이 찌른 반동들 중엔  평안도나 함경도 출신의 `삼팔 따라지`들이 있었다. 
인민군은 그들을 불러 일단  밥을 든든히 먹인 다음 이내 총으로  쏴 죽였다. 그
러나 남편을 찔러넣은 사람은 없었다.
  그들 인민군은 대개 어렸다. 나이가 많아야 겨우 스물두어살이었다. 어린 인민
군들은 동네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처음엔  무조건 빨갱이라고 무서워하던 아
이들도 군인아저씨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아저씨 빨갱이래유?”
  “빨갱이두 조선 사람인.”
  “빨갱이가 하나두 안 빨갛네.”
  아이들은 인민군을 만나면 이렇게 신기해 하였다.
  “이게 빨갱이다!”
  인민군은 아이들에게 붉은 줄무늬를 넣어 만든 바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그들은 우리 여자들에게 북조선의 해방된 여성동무들이 얼마나 희망차게 살고 
있는지 선전했다. 집집마다  재봉틀이 있고, 남녀가 펴등해서  `멸시`없이 산다고 
했다.
  내가 부엌에서 밥을 하고 있는데 어리게 보이는 인민군 하나가 부엌으로 들어
왔다.
  “아주머이유, 보강지에 불때 디릴게유.”
  순간 내 귀가 번쩍  띄었다. 언제 들어본 고향 말인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원
산 사람 말씨도 양양 같지만 억양은 달랐다. 이 사람은 틀림없는 양양 사람이다!
  “배곯지는 않나요?”
  나는 이남물 먹은 지 몇 해 되었다고  서울 말씨로 물었다. 지금은 억지로라도 
서울 티를 내고 살아야 했다.
  “안죽은 지낼만 하네유. 앞으루 일이야 두구봐야 아는 거구유.”
  그가 말했다. 골수 빨갱이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배고프면 밤에라도 찾아오
라고 말한 다음 결국 궁금한 걸 물었다.
  “어디가 고향이지요?”
  “강원도 야양이라구, 잘 모르실 거래유.”
  그가 말했다. 역시! 내 가슴이 속절없이 뛰었다.  이제 여기쯤에서 이야기를 멈
추는 게 현명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향 사람`을 믿기로 했다.
  “야양 어디세요?”
  하지만 나는 아차 실수를 했다. 고향 사람만이 양양을 `야양`이라고 하는데 내
가 그렇게 하고 만 것이었다.
  “물치라구유. 가현면(강현면)에 속한 동넨데유. 바닷가래유.”
  “아아, 그렇군유.”
  나는 절로 이렇게 말했다.
  “물치를 아시너유?”
  “아니유! 난 여기 출신이에요.”  
  나는 앙큼하고 비겁했다. 몸속이 활활 달았다. 달아오르는 것은 몸속만이 아니
었다. 뼛속까지  ㅂ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도  괜찮았다. 부끄러움
보다 나를 더 들볶는 것은 고향 소식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물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처녀 때,  물겁에서 언니들 따라 미역 줍고 
지누아리 따러 다니던 바닷가.  그 푸르디푸른 물이 눈에 선했다. 뒷산 큰서낭재
에 오르면 그 너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어떤 시름도 하찮게 느끼도록 해주지 
않았던가.
  나는 몇 번이나  나도 거기가 고향이라고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솟아서 몰래 
이를 물곤 하였다. 물치도  이골 저골 이름이 많으니 더 자세히  물으면 고향 식
구들 소식도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우선 작은 언니의 큰집이  거기에 있고 친
하게 지내던 봉순이도 물치 `댁말`로 시집가지 않았던가. 나는 걷잡기 어려운 고
향 생각 때문에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남편 때문에 엉뚱한 벙어리 신세
여야 했다.
  “이북에는 집집마다 재봉틀이 있다는데 정말 그래요?”
  나는 한사코 고향 말씨가 듣고 싶어서 물치가 고향인 인민군에게 자꾸만 말을 
시켰다.
  “앞으로 그리겠다는 기래유.”
  “남조선을 다 해방시키나요?”
  “지금, 말은 기래두 어뜩케 될는지 몰러유. 두구 봐야지유.”
  “그럼 전쟁에서 질 수도 있단 말이래유?”
  나는 이제 말씨 감추는 건 잊었다.
  “언제 올라갈지 모르는 기래유.”
  그가 말했다. 양양 사람들은  솔직한 게 너나 없이 병이었다. 그가 이렇게  `반
동적` 언동을 해서 나는 그에게 똑같이 솔직해졌다.
  “사실은 나두  거기가 고향이래유. 물겁이구, 아시너?  강선에서 쭉 올러가는
데...”
  “아다마다유!”
  그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이민군이 내려오면 이북 사람 다 죽인다구 그래서 속였네유.”
  내가 말했다.
  “반굽네유. 왠지 아주머이가  펜하게 느껴지더니, 한고향 사람이래서 뭔가 달
렀군유.”
  나는 눈물을 훔쳤다. 그도 반가워했다.
  “죽지 말구 꼭 고향에 가세서 우리집에 안부  줌 전해 줘유. 물겁에서 작은서
당집 막내딸이라구 하민  다 알 거래유. 우리 사촌 오래비가  둘인데 큰오래비는 
인민위원장이구 작은오래비는 세포위원장이래유... 작년에  친정 아부지가 돌어가
셌어두 못  가봤잖어유... 기벨 다민(기별 닿으면)  그저 내가 잘하구 살더라구만 
얘기해 줘유.”
  “하루 빨리 남북이 통일이  돼야지유. 그래서 아주머니 동무두 지벵 가보구...

  “말이 다 뭐래유. 고향 사람 만내서두 이렇게 맘을 못 열구 살어야 하니.”
  “지가 살어 돌어가기만  하문 꼭 아주머이 소식 전해 드리지유.  해방될 때까
지 잘 계세유.”
  “꼭 그래야지유.”
  이날 그와  나는 이런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그가 다시  내게로 오지 
않자 조금씩 불안해졌다. 혹시 남편과 나의 `정체`를  `찌르지` 않을까 걱정이 되
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믿었다. 그는 이북에서 온 인민군이 확실했지만 적어도 
`빨갱이`는 아닐 것 같았다. 물론 이북에 산다고  다 빨갱이인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남편이  나보다 이북을 좋아하지만  그가 빨갱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느 누구나 고향에서 살 수 있다면, 누구나 고향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중엔 삶의 터전을 바꾸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우리같이 
그저 자식 낳고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다 죽고 싶은 사람들에겐 이북이든 이남이
든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물치 댁말에서 온  인민군은 틀림없이 나와 같은 사람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고향에서 살았기 때문에 인민군이 되었을 테니까.
  우리 시집만  해도 그랬다. 나의 두  시동생-둘째는 우리를 따라 이남에  와서 
지금 `아군`이 되었고, 세째 시동생은 고향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인민군`이 되
었다. 그러나 그들은  흰 패도 아니고 붉은 패도 아니었다(이들  두 사람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다가 결국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송학의 야산에서 두어  달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들은 `남`으로  이동하기 시작
했다. 이때까지  우리에겐 아무런 위험도 닥치지  않았다. 고향 사람을 한때나마 
의심한 나는 이 일만 떠오르면 부끄러워진다.

  그해, 12월이 되었다.
  전투가 송학 가까운 데서 벌어진 것 같았다.  인민군이 주둔 했던 곳으로 집중 
폭격이 계속됐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격 소리에 놀란 딸아이는 하루종일  내 치
마폭에 달라붙어서 아무리  뜯어내려도 떨어지지 않았다. 여태  전쟁이라곤 했어
도 피난민을 보거나 먼데서 들리는  대포 소리만 듣다가 사정이 이렇게 되니 이
게 진짜 전쟁인가 싶어  기가 막혔다. 그때 우리는 하늘에 뜬  비행기가 이북 것
인지 이남  것인지 분간도 하지 못했다.  처음엔 인공기라고 믿었는데, 인민군이 
도망치듯 떠나는 걸 보고야  사태를 제대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국군이 왔다. 우
리들은 들어오는  국군을 맞으러 나가서  반긴다는 뜻으로 마구  손을 흔들었다. 
물론 그 전에 인민군이 올 때도 우린 다 같이 나가서 손을 흔든 적이 있다.
  국군은 인민군이 그러했듯이 새로운 행정기구를 짜고 `뭐가 뭔지  몰라 도망가
지 않은` 빨갱이들을  `처단`했다. 그리고 어딘가에 숨었던 부역자들도  누군가의 
`찌르기`로 잡혀서 총살되었다. 남편과 나는 그저 이쪽저쪽  다 겁이 났다. 늘 불
안하고 그 불안에  떳떳치 못해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지냈다. 
더군다나 나는 만삭의 몸이었다. 이런 와중에 아이를  낳아 제대로 기를 수나 있
을지 걱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국민방위군으로 뽑혔다.
  이듬해 1월 1일, 아침 나절에  나는 진통을 시작했다. 남편이 있을 때 몸을 풀
기를 바랐는데 다행이었다. 그러나 아들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딸을 낳으면 어떻
게 될지 걱정도 되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처음으로  남편과 내가 둘이서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
가 내 머리맡에서 팔을 잡아주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았다. 무엇이 밑
에서 확 빠져나오는 느낌은  여전했다. 이내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들인가? 
나는 머리 속을 스치는  번개 같은 생각을 붙들었다. 남편이 태를  자를 낫을 가
지러 나갔다. 아이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몸이 무거워 일어나지 못했다.
  “아들이지요?”
  바깥에서 주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남편의 대답 소리는 들리
지 않았다. 겁이 났다. 나는 죽고 싶었다. 딸을 내리 셋이나 낳다니...
  남편은 내게  태를 자르라고 낫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자기는 아이를 잡았다. 
그때, 바로 그 순간 아이의 다리 사이로 허연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아이구! 불알이네!”
  내가 소리쳤다. 그래, 이젠 됐다.  남편이 나가 살든 바람이 나든, 난 살 수 있
다. 아들이 있으니! 몸  어디에 그런 생에 대한 자신감이 숨어  있었을까. 이제까
지 내가 겪어온 온갖 서러움이 한꺼번에 가셨다.
  어미의 진통이  무서워 주인집에 피해  있던 딸아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딸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음속 깊이 그 아이가 고마웠다. 아들 동생 
보도록 터를 잘 팔았으니!
  “이거 봐라. 고치 달랬잖니?”
  동생이 생긴 것이 신기하고  좋아서 얼굴에 흥분의 기색이 번들거리는 딸에게 
아들의 작다작은 자지와  불알을 손으로 추키며 말했다. 아들 이외엔  눈에 보이
는 것이 없었다.
  “만져 볼래? 고치(고추)지? 이쁘지? 귀하지? 니한텐 없지?  니가 복이 많어서 
고치 달랜 동상 봤다. 착하기두 해라.”
  나는 생각할수록 딸이  기특했다. 딸이 태어난 이후 내가 딸에게  진심으로 내 
마음을 쏟은 것이 아마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딸아이는 내가 저를 예뻐하니
까 갓난아이처럼 내 품으로 파고  들었다간 눈도 못 뜨는 아이를 들여다보고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도대체 세상 누가 그때의 내 그  깊고 질긴 감격을 
이해할 수 있으리.
  “아기야. 눈떠! 아기야. 눈떠!”
  딸아이는 눈을 뜨지 않는 동생 곁에 앉아서  자꾸만 이렇게 말했다. 눈을 뜨라
고 아이 배에 손을 얹고 마구 흔들었다.
  “야! 야가 햇아 잡겠네! 비켜! 이리 나앉어!”
  나는 기겁을  해서 딸에게 소리 질렀다.  딸은 내가 왜 그렇게  놀라는지 알지 
못해 눈이 휘둥그래졌다.
  “니 혼자 뒀다 큰일나겠다. 나가 놀어!”
  내가 소리쳤다. 딸은 울상을 지었다. 나는 아들을 싼 포대기를 내 곁으로 바짝 
붙여놓고 딸이 손댈 수 없게 했다.
  “여보!”
  나는 심통 부리고 동생 곁에 앉아 있는 딸을 내보내려고 남편을 불렀다.
  “뭐야!”
  남편이 부엌에서 문을 열고 방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야가 눈뜨라구 아를 흔들구 난리니 델구 나가유.”
  내가 말했다. 그러자 딸아이가 겁에 질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이리 온. 아부지가 업어줄라.”
  남편이 우는 아이를 이렇게 불렀다. 아이는 다른  때 같으면 이내 제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갔을 텐데, 이날은 이상했다.
  “심통이 났네!”
  내가 소리쳤다.
  “야가 뭘 알어? 지딴에 동생 보구 좋워서 그리는 걸.”
  남편이 말했다. 그러자  딸은 더 서러운 울음소릴 내며 남편에게로  가서 돌려
댄 등판에 업혔다. 남편은 딸에게 옛날얘기를  해주면서 첫국밥 끓이는 아궁이에 
`태`를 태웠다. 예전에는  아이의 태를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태를  싸서 바깥에 
놓았다가 삼이 나가는 사흘  후에 태우는데, 꼭 마당 앞 텃밭에  내다 놓고 왕겨
를 피워 하루종일 태웠다. 다 타서  구멍 숭숭 난 탯 재는, 식은 후에 부셔서 강
물에 띄워 보냈다.
  나는 잠깐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무슨 기억  나지 않는 꿈에서 깨어 눈을 뜨
니 남편이 첫국밥을 차려다놓았다. 나는 앓는  소릴 냈다. 남편이 부축해 주었다. 
마음이 뿌듯했다. 아버지를 따라 들어온 윤이는 지금도  눈을 뜨지 못한 아들 곁
에 바짝 붙어 앉았다.
  “여봐유. 윤이 줌  뭐라구 나물궈유. 저리다가 햇아 눈이래두  찔러봐유, 큰일
이지유.”
  나는 수저를 집어들며 남편에게 말했다.
  “지두 이쁘다구 그리는 걸 뭘.”
  남편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윤이가 걱정되었다. 밥 한 술 떠넣고 
그 애를 보고 또 보았다.
  “아들을 나문 더 힘드는 모양이래유. 정신없이 잤네유.”
  내가 말했다. 남편은 대꾸하지 않았다.
  “나 자는 동안 햇아가 울진 않었어유?”
  “뭘 울어.”
  남편은 대답했다.
  “아들은 첨버텀 순하너?  예시가들은 낳아 놓으문 그저 킹킹킹  울던데. 아들
은 어디가 달러두 다르네유.”
  내가 말했다.
  “이번에두 딸일까 봐 얼매나 가슴을 죄랬던지.  이제 송애 아버지 어머니께두 
낯이 섰구... 아버니가  원체 즘찮으시니 그렇지 그  동안 꽤 섭섭하셌을 기래유. 
난 이제 시집에 할 일 했지유!”
  내가 말했다.  남편은 나를 우숩다는 얼굴로  건너다보았다. 하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하건 상관없었다.
  “참 태는 어쨌어유?”
  “보강지에 처넣었지 뭐.”
  남편이 말했다. 나는 입에 넣은  밥을 씹지 못했다. 그래도 남편은 내 맘을 모
르는 것 같았다.
  “옛날 우리 클  때두 우리 아부진 태를 함부루 다루지  않으셌어유. 마당에다 
왕겨 불을 해놓구 하루종일 태웠는데.”
  “그래서?”
  남편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갑자기 입맛이 싹 가셨다. 처
음엔 한꺼번에 두 그릇은 먹을 성싶었는데 한 그릇을 비우고 수저를 놓았다.
이때 조용하다  싶던 햇아가 으앵으앵 울음소릴  냈다. 제 편을 드는  아버지 힘 
믿고 아직 갓난아이 곁에 붙어  앉아 있던 윤이가 겁먹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
다.
  나는 아직 돌지 않는 젖가슴을 두 손으로  문지른 뒤 갓난아이를 안았다. 사람
이라고 얼굴도 찡그리고 할 짓은  다 했다. 젖꼭지를 아이 입에 댔다. 그런데 아
이 입에 삐죽이 뭔가 비어져  나왔다. 잘못된 아이를 낳았나 겁이 왈칵 났다. 그
런데 자세히 보니 콩낱이 박혀 있었다.
  “아이구머니야! 시상에 야가 햇아 잡겠다야! 큰일났네!”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 우선  아이의 입 안에 든 콩낱을 빼내 놓고 제 아버지 
무릎에 앉아 느긋이  이쪽을 바라보는 윤이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정말  그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저런 쓰잘데기 없는게  언제 무슨 엉뚱한 짓을 저질러 
천금 같은 아들을 잡지나 않을까... 딸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내 울었다. 무
조건 제 편만 들어줘 버릇한 아버지가 있다고 보란 듯이 청승스럽게 울었다.
  “니까진 거 열이면 이 아들  하나만 해? 개코 같은 게 뭐에다 쓰겠다구 울구 
지랄이너?”
  “왜 이래!”
  남편이 소리치며 눈을 부라렸다.
  “야두 동상이 생게 좋다구 그런 걸 뭘 그걸 가지구  때리구 그래! 남덜 다 낳
은 아들 하나 낳구 눈에 뵈는 기 없너?”
  남편이 되레 나를 나무랐다. 화가 나선지 나는  이날 꼭 체해서 밤새도록 일곱 
번이나 변소에 들락거렸다. 한겨울 밤바람은 모질게도 찼다.
  윤이가 동생을  귀여워하는 것은 그  후에도 여전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 
장난감이나 옷, 먹을 것들을 전부 끌어다 아이 곁에 놓았다.
  “엄마, 이거 다 애기 줄래요.  엄마, 이건 안 줘요. 애기가 이거 못 가지게 하
세요. 이건 애기 안 줄 거에요.”
  딸이 동생에게 뺏길세라 지레 겁내는 건 다름 아니라 `처네 포대기`였다. 그리
고 평소와는 달리 툭하면 처네 포대기를 끌고 와서 업어달라고 칭얼거렸다.
  내가 이렇게 내 인생을 바꿔놓을 아들을 낳은  지 사흘 후, 남편은 논산훈련소
로 떠나야 했다.
  “윤아. 니,  어떡하든지 살어가지구 아부지 꼭  만내야지? 아부지 잊지 말어? 
아부지 얼굴 안 까져먹지?”
  남편은 자기 딸과 울면서 이런 작별인사를 하였다. 아내인 나나, 새로 생긴 아
들에겐 거짓말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윤이는  이별이라는 게 무엇인지 몰라 
그저 겁먹은 표정으로 아버지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런 딸을 몇 차
례나 안고 나가 과자를  사주고 다시 안고 나가 사탕을 사주고 `엄마말 잘  듣고 
밥 잘 먹고  어떡하든지 살아서 아버지 꼭  만나자`고 약속하고 또 약속한  뒤에 
젖은 눈으로 떠났다.
  다음날부터 영월 쪽에서 피난민이 밀려왔다.
  “그쪽은 다 죽어유.”
  “우린 죽은 사람 밟구 넘어왔어유.”
  피난민들이 말했다.  그쪽은 전쟁 마당이니  미처 피난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 죽는다고  했다. 피난민들은 들판의  짚가리에서도 자고 남의  집 헛간에서도 
하루씩 묵어갔다.
  다음날, 드디어 정찰기가 제천 하늘에도 떴다.  사람만 보이면 폭격을 했다. 그
날 낮이었다. 마당에서 아이 기저귀를 널고 있는데 정찰기 소리가 났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집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러고서야  딸을 혼자 마당에 둔 생각
이 나서  돌아보았다. 비행기 소리에  이미 질려버린 아이가  오그라붙은 것처럼 
서 있었다.
  “윤아! 빨리 빨리 들어와! 빨리!”
  나는 그래도 딸을  데리러 마당으로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 아이를 불러들였
다. 후에 이때의 나를  생각나면 혼자서도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급하면 아
이고 뭐고 없었다. 어머니라고  누구나 자식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건 아닐 것이
다.
  1월 5일. 이웃에선 피난을  떠난다고 부산했다. 그 동안 인민군 들어온다고 손
들고 아군 들어온다고 손을 들고 살아온 나에게,  지금 무서운 건 사람보다 하늘
의 정찰기였다. 아이 낳고 나흘째인 내게 와서  차마 피난을 가자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들을 낳아  기쁨이 하늘에 닿았지만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고  나는 밥
을 제대로 먹지 못해 사람 꼴이 아니었다.  한바탕씩 콩볶듯 하던 폭격이 지나가
면 나는 핏덩이 아들을 들여다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니가 죽어야 버리구 가지, 
니가 죽어야...
  이웃에 열두  살 먹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딸아이를 예뻐해서  자주 놀러오는 
아이였다. 이 아이가 아침부터 집으로 들락거리며 피난을 가자고 졸랐다.
  “너 혼자 가라.  아줌만 못 가. 아이  둘을 어떻게 업구 가니.  우리 걱정하지 
말구 너나 식구들 따라가라.”
  내가 이래도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그 애의  아버지도 국방군에 가고 없었다. 
동네에 젊은 남자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애가 나를 안타깝게 보고 있
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줌마, 내가 윤이 업구 가면 되잖어유.”
  귀가 번쩍 띄었다.
  “니가 그래두 되겠니?”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얘! 할 수 있어유!”
  아이가 힘차게 대답했다.
  “싫어! 엄마랑 갈래!”
  딸아이가 적개심이 그득한 눈을 번들거리며 소리쳤다. 그애는 비행기 소리, 폭
격 소리에 놀란 뒤부터 눈이 병적으로 번들거렸고 잠도 깊이 자지 못했다.
  “윤이 너 그럼 여기서 죽어두 좋재?”
  여자아이가 소리쳤다. 나는 그래도  아이에게 몇 번 더 사양을 했다. 그러다가 
아이의 어머니까지 그렇게 하자고 하는 바람에 열두 살짜리의 등에 신세를 지기
로 했다.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아들을 수건에 둘둘 말아  처네 포대기 덮
어 아이등에 업혔다. 포대기 끈을 졸라매 주는데 아이가 휘청거렸다.
  “이거, 차라리 버리구 가자. 핏덩이야 또 낳으면 되잖니...”
  내가 말했다. 결국 우리 세 식구는 죽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줌마, 애기를 어떻게 버려유. 죄 받어유. 이렇게 업구 가면 돼유.”
  “그래, 고맙다. 니가 가다 힘들면 아줌마한테 말해라.”
  그리고 나는 딸을  업고 머리에는 간단한 피난짐을  이었다. 쌀 몇 됫박, 기저
귀, 덮을 것이 전부였다.
  집을 나서서 걷기 시작하고, 십 분이나 지났을까. 아이를 업은 여자가 총에 맞
아 고꾸라져 있었다. 순간 그게 꼭 나 자신 같아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
직 어머니에게선 피가 꿀럭꿀럭 나오고  솜 모자를 씌운 아이는 저 홀로 살아서 
앙앙 숨 넘어가게 울었다.  그 아이도 피범벅이었다. 표정이 없어진 노인과 여자 
피난민들은 그 옆을 무심히 지나갔다.
  나는 어디쯤에서 저렇게 되나...
  내가 아무 대책 없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여자가 와서 피묻은 아
이를 죽은 어미의 등에서 빼내 갔다.
  이날, 우리는 늦은 아침을 먹고 떠났는데  한나절쯤 지나서 `깜둥이`를 만났다. 
총을 든 그들은 우리를 더 이상 가지  못하게 하고 우리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새까맣고 커다란 외국인이 우리들 앞에 가시철망을  쳤다. 우
리는 밀려오는 쓰레기처럼  거기에서 모두들 멈춰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
조망 안쪽으로 피난민들이 가득했다.  우리는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
리가 무서운 건  우리보다 숫자가 적은 외국인이 아니라 그들의  손에 들린 `총`
과 같은 무기였다. 해가 있을 땐 그래도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땅에 서 있을 수 
있는데, 저녁이 되자  바람도 차지고 눈이 얼기 시작해, 몹시  추워졌다. 내 등에 
업힌 딸은 벌써부터  잠꼬대하듯 배가 고프다고 했고, 애꿎은 열두  살짜리 누이
에게 업힌 아들아이는  울지도 않았다. 떠나올 때, 수건에 둘둘  말았는데, 그 사
이 숨이 막혀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아이를 들쳐보고 싶지 않았다.
  흑인 병사들은 어두워지자 철조망을 걷고 우리를  풀어주었다. 우리는 언 몸을 
무감각하게 움직여 앞으로 앞으로 걸어나갔다. 캄캄하게  날이 저물었을 때 어느 
마을에 닿았다. 피난을 떠난  빈집뿐이었다. 동네 사람들을 따라 어느 집으로 들
어갔다. 그런데 업었던  아이를 내려놓고 앉으려는데 허리뼈가  굳었는지 물러앉
았는지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입에서 저절로 아이구구, 하는  비명이 나왔다. 그
러자 아는 사람이 손을  잡아주었다. 겨우겨우 다리를 뻗고 앉았다. 사람들은 누
가 의견을 냈는지 쌀을  걷어 가마솥에 밥을 하자고 했다. 젊은  나는 이제 일어
서지 못해 앉아 있어야 했다.  열두 살짜리 등에 업혀온 아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젖꼭지를 입에  대니, 아이는 빨지를  못했다. 가슴이 
후벼패이는 거 같았다.  딸아이는 좋아한다던 동생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배고프
다는 말만 했다. 철딱서니 없는 아이긴 하지만 딱했다.
  “야, 밥 냄새 나제? 쬐끔만 기다리자, 응? 여기 있는 사람덜 다 배고퍼.”
  나는 아이에게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말했다. 잠시 참는 듯 하던  윤이가 이번
에는 내 등쪽을 보고 `고깜  고깜`했다. 돌아보니 할머니가 윤이보다 조금 더 나
이 먹어 보이는 사내아이에게 곶감을 뜯어먹이고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돌아보
자 고개를 숙였다. 딸아이는 꼴각 소리가 들리게 침을 삼켰다.
  “할머니, 미안하지만, 우리 아이가 그게 먹구 싶은가 봐요.”
  나는 염치  불구하고 말했다. 할머니는 들은  체를 하지 않았다.  끝내 그랬다. 
윤이가 무슨 눈치를 차렸는지 내 발치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 할머니와 사내아이가 무슨 의미 없는 풍경 같았다.
  이윽고 가마솥  밥이 다 되어 모두들  식구 수대로 그릇에 밥을  퍼왔다. 나는 
움직이지 못하니  밥그릇만 내주고 밥 한  주발을 받았다. 더운 김  오르는 밥을 
받자마자 우선 내  입에 두어 숟갈을 퍼넣었다. 딸아이가 손으로  밥그릇의 밥을 
집었다. 나는  부끄러워 아이에게 밥을 떠먹였다.  딸아이가 배가 부르다고 말할 
때까지 먹였더니 그릇이 비었다.  나는 억지로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 보았다. 가
마솥은 텅 비어 있었다. 맥이 풀렸다. 물을 한 대접 퍼먹고 들어왔다.
  우리는 밤에도 불을 켜지  못했다. 방 안 가득 사람이 차서  겨우 모로 누워도 
다리는 펴지  못했다. 이 지경에도 한밤중에  정찰기가 떠서 야광탄을 퍼부었다. 
사람들은 집에 폭격을 할지 모른다고 모두들  바깥으로 나갔다. 산기슭이나 소나
무 숲에 숨으려는 것이었다. 나는 꼼짝하기 싫었다.
  “윤이네가 왜 저러고 있지? 빨리  나오지 않고! 집에다 폭탄 떨어뜨린다는데!

  이웃집 여자들이 맥을 놓고 있는 나를 재촉했다.
  “난 여기서 죽을래유. 내 걱정 마시구 어서 피하세유.”
  나는 여기서 죽으나 길바닥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저 우리 세 
식구 한꺼번에만 죽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 비좁던 방은 텅 비었
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젖도 제대로 빨지 못하던 핏덩이는 그래도 쌕쌕 숨을 쉬
며 잠이 들어 있었다. 사는  것, 죽는 것이 이렇게 손바닥 손등처럼 가까이 붙어 
있는 것 같다니! 살고 죽는 게 너무 가벼웠다. 나는  일어나 앉았다. 누워서는 한
꺼번에 죽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양쪽 무릎에 내  속으로 낳은 아이 둘을 놓고 꼭 
품었다. 죽어서도 한군데로 가자. 이 가여운 것들.
  멀고 가까운 데서 폭격이  시작되었다. 하늘과 땅을 찢는 소리였다. 나는 우리
의 죽음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수선스런 발소리들이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윤이 엄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 여기 있어요. 나는 내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윤이 엄마!”
  다시 그 목소리였다.
  “난 여기서 죽었어유.”
  내가 대답했다.
  “그 무서운 데 혼자 있었수?”
  “왜서 혼자래유? 우린 세 식군데.”
  내가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독종`이라고 말했다. 독종... 우스웠다.
  다음날 아침, 밥을 먹고 나서 이내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더 이상 이웃아이에
게 신세를 질 수  없어 내가 핏덩이를 업고 딸은 걸렸다. 아이  기저귀, 쌀, 이불
을 싼 보따리만도 앞이 안보일 지경이었다.
  아침부터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기도 쉽지 않으리라. 
나는 걸음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제 맘성에도 동네 사람들과  떨어지기가 두려
운 모양인지 종종걸음을 치던 딸아이의 걸음이 느려졌기 때문이었다.
  “엄마, 빨리 가. 언니들이 저기 가잖아.”
  처음에 딸은 마치 산보라도  가는 것처럼 이랬었다. 하지만 이제 세  살 된 그 
아이의 힘은 너무 작아 안쓰러웠다.
  곧, 우리는 일행과 아주 멀어졌다. 눈을 잔뜩 뒤집어쓴 딸은 자꾸만 걸음을 멈
췄다.
  “엄마. 다리 아파.”
  딸이 말했다. 발이 얼까  봐 양말을 겹으로 신겼더니 되레 쉬  발이 아픈 모양
이었다.
  “엄마, 다리 아파.”
  나는 그래도 모질게 걸었다.
  “여기서 쉬면 죽어. 비행기 알지?”
  나는 아이에게 이런 겁도  주었다. 딸아이는 정이 견딜 수 없으면  내 손을 놓
고 뒤에  처졌다. 죽는다, 비행기다, 이래도  걷지를 못하는 그  아이에게도 이미 
살기를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뒤
에 처진 딸에게  신경을 쓰며 걸었다. 어느 만큼 갔을  때, 딸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걸음을 멈췄다. 먼데서 아이의 작은 몸이 사람들 사이에 끼
어 나타났다. 나는 세 살짜리  딸애가 지금, 자신의 삶 자체와 어미에 대한 증오
를 저 본능의 골  깊은 데로부터 느끼고 있다는 걸 생각지  못했다. 동네 피난민
들과도 떨어지고, 언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조차도  이미 삶과 
냉담해져 있었으므로. 어쩌면 함께 죽어야 할  저 생명, 딸이 지겨웠을지 모른다. 
딸의 존재는  나를 삶에서도 죽음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게  했으므로. 더군다나 
나는 이미 등에 업힌 아들마저 저절로 죽어지길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공포와 원망에 사로잡힌 어린 딸이 올 때까지 나는 서서 기다렸다.
  “어멈이 있구만.”
  흐느끼는 딸의 손을 잡고 내 곁까지 온 어느 할머니가 나를 괘씸해 하는 눈초
리로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 
위의 임을 겨우 눈  위에 떨어뜨리고, 쓰러지듯 퍼질러 앉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이 쉬고 꺽꺽 느끼는  딸아이도 내 곁에 앉았다. 등의 아이를  앞으로 돌려 젖
을 물렸다. 핏덩이는 추워서  바짝 오그라붙은 입을 벌리지도 못했다. 침을 손가
락에 찍어 아이 입을  적셔 보았다. 아이는 울지도 못하고 젖을  빠는 힘도 아주 
약해서 이대로는 며칠 못 살 것 같았다.  피난민들이 지나가면서 뭐라고 동정 어
린 말을 한마디씩 했다. 산다는 게 슬픈 노릇이었다. 어느 결엔가 딸아이가 내게 
기대어 졸기 시작했다.  나도 졸렸다. 불현듯 큰일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우리 세 식구 모두 살아있다는 사실이 깨우쳐졌다. 나는 딸을 깨웠다. 아이는 어
쩐 일인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할 수 없어 아이의 살을 꼬집어 비틀었다. 
아이가 비쭉비쭉 울었다.
  “눈에서 자면 죽어!”
  “너 여기서 얼어죽을래?”
  나는 정신 차리지  못하는 아이에게 협박을 했다. 아이는 죽는다는  말을 이해
했을까? 그래도 꾸물꾸물 일어섰다.  그러나 이번엔 내 차례였다. 도무지 아무리 
힘을 써봐도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내 딱한 꼴을 알아
차리고 부축해 주었다. 겨우  일어나 임을 머리에 이었다. 그래도 살았다고 이불 
보따리 해서 이고 가는 나 자신이 차라리 신기하였다.
  느릿느릿 걸어서 한  마을에 닿았다. 저녁이었다. 나는 어떤  집으로 들어갔다. 
늙은 할머니 한 분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애기 엄마, 더 가야지 여긴 안 되유!"
  어떤 여자가 머물려고 하는 나를 보고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다들 가세요. 난 여기 할머니 하구 있겠어요."
  내가 말했다.  여긴 아직 맘놓을  데가 아니라고 피난민들은  어떡하든지 같이 
가보자고 했지만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곧  어두워질 텐데 어디 가다 쓰러져 
다른 사람까지 고생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기 엄마! 여기  김장독두 묻혔어유! 이거 먹구  있어봐유. 이런 땐 이런  거 
먹어두 죄가 아니니."
  나를 딱하게 여기던 중년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유. 어서 가세유. 죽지 않구 있으면 만나겠지유."
  "꼭 만나야제!"
  다른 이가 말했다.
  "잘 가세요."
  "아가야, 잘 있어."
  사람들은 저물어가기  시작하는 하연 눈길로  멀어져 갔다. 언제  우리가 다시 
만나랴. 나는 사라지는 피난민들의 꼬리를 바라보며,  `난 여기서 끝내겠다`고 생
각했다.
  늙은 할머니 한 분만이 계신 집은 아늑했다.  추녀 끝으로 돌려가며 장작이 가
지런히 쌓여 있었다. 장롱 속에는 가져가려고 싸놓고 그냥 떠난 것이 분명한, 피
난쌀이 서너 말 되게 있었다. 할머니는 혼자 있다가 우리가 드니 반가워했다. 아
이를 내려놓았다. 아이가 온종일 등허리에서 오줌똥을  싸서 내 등판은 물론이거
니와 아이도 가슴까지 똥오줌이 질펀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하고 된장국을 끓여 저녁을 모처럼  배불리 먹었다.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흘렀다. 더운 방에 고꾸라져 잤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목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  수도 아래로 내릴 수도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
다. 허리도 펴지지 않았다.  늙은이의 굽은 허리 모양으로 구부리고 급한 기저귀
부터 빨아 널었다. 그저 하루하루  세월 가는 것도 느끼지 않고 지냈다. 아픈 허
리는 며칠 지나고부터, 자고 나면 다르게 좋아졌다.
  몸이 풀리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우선 남편이 걱정되었다. 언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살았으면 우리를 찾을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으
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안달이 나서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송학면 무도리는 
여기에서 한나절  반 거리였다. 그래서 한  달이 되던 날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딸아이도 배불리 먹이고  할머니와 작별을 했다. 그 사이 정이  들었다고 할머니
를 두고 떠나는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다음날, 길을 가다 날이  저물어 아무 데나 들어가 하루 자고  다음날 다시 걸
었다. 가는 길은 나설 때와 달랐다. 딸을 하루 종일 걸려야 하니 가는 걸음이 더
디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도 이틀째 되는  날은 꼭 무도리에 다다르려고 다리가 
아파 징징 우는 아이를 때리고 욕하면서 기를  쓰고 걸었다. 그래도 저녁이 되어
서야 무도리에  닿았다. 동네가 눈앞에 보이자  큰숨이 쉬어졌다.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발에서  꿀꺽꿀꺽 소리가 났다. 땀이  났나, 나도 모르게  진창을 밟았나,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은 여러 집이 불에  타서 을씨년스러웠
다. 우리가 세들어 살던  주인집은 무도리에서 가장 큰 집인데 거의  다 타서 들
어가 살 수가 없었다. 수십 가마니나 쌓아 두었던  쌀도 다 타고 남은 것이 없었
다. 할 수 없이 나는  개울 건너편으로 가서 타지 않은 집을 얻어들었다. 쪽마루
에 보따리를 내려놓고 앉아보니 땀인 줄 알았던  신발 속의 것이 피였다. 종아리
가 언제 어디서 무엇에  찢어졌는지 살이 다 벌겋게 버져 있었다.  그런 것도 모
르고 짖삶고 온 것이었다.  마을에는 피난을  가지 않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그
리고 나처럼 피난을  포기했거나 일찍 돌아온 사람들만 있었다. 많은  집이 불에 
타서 한 방에 여러  가구가 모여 살았다. 이곳으로 피난을 와  돌아가지 않은 외
지 사람도 많았다. 아군이  서울을 완전히 차지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래도 남
쪽에선 이북으로 도망갈 길이 끊긴 인민군들이 산으로 들어가 난리가 났는데 대
단하다는 소문도 바람결에 묻어왔다. 이제 도리어  38선 쪽은 싸움이 잠잠해졌다
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남편의 생사를 알 수가 없었고 소문도 듣지 못했다.
  이런 어느 날 밤이었다. 잠을 자는데 꿈속으로 남편이 나타났다. 그는 딸을 끌
어안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다 사라졌다.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그래, 죽었구
나... 나는 아직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일어나 속으로 말했다. 오늘이 며칠인가 
날짜를 생각했다. 그래도 자기  가는 날을 이렇게 알려주다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와 살아온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날들이 마치  생살을 보는 것처럼 
비릿하게 떠올랐다.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다면... 그토록 아득바득 하지 않았을 
걸. 따뜻하고 인정 많은 사람. 죽었다 깨도  그런 남자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마
음은 한없이 어린아이 같고,  남도 자기 같다고만 여기는 어리석은 사람. 사람이 
좋아지면 자기 살도 배어 먹이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 조선에 없다고 하던 딸이 
밟혀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그러니 마지막 가는 길에도 딸을  그렇게 안아줬겠
지.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나는 입술을 피터지게 깨물었다. 눈물이 고랑져 흘러
내렸다. 그 흉악하던 잔칫날, 가도가도 끝나지  않던 산길, 가난하기 그지없던 화
전민 시집 살림, 너그럽고 점잖은 시할머니, 시아버지,  가여운 시어머니, `반동분
자`로 낙인 찍혀 원산 형무소에  갇혔다는 큰시동생, 이남 군인으로 나간 둘째와 
인민군으로 나간 셋째 시동생들, 이북 정치가 좋다던 동서... 부평의 부산집 아가
씨... 그가 남긴 모든 흔적들이 낱낱이 되살아났다.
  다음날, 나는 남편의 사진을  꺼내 어제 날짜를 적어놓았다. 고향에 돌아갈 날
이 생기면 그날을 알려야  했고, 제사를 지내야 해서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겐 어느 누구에게도 꿈 얘길 하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시늉
을 일부러 더 했다.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와  남편이 죽은 아내의 처지는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가 났다.
  이런 와중에 우리 여자들에게 엉뚱한 난리가 터졌다. 부대를 이탈했는지, 부대
를 잃었는지 알 수 없는  미군들이 돌아다니며 여자를 보았다 하면 강간을 한다
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돌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무도리에도  그런 일이 벌어
졌다. 서른 살쯤 된 아이엄마가 혼자 디딜방아를  찧고 있는데 미군 병사가 와서 
끌고 가더니 그날로  그 여자는 `실성`해 버렸다.  벙어리가 된 데다가 밤낮으로 
먼데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바로, 할아버지와 손을 
잡고 가던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가 미군에게  붙들려갔다. 벌건 대낮이어서 여러 
사람들이 그걸 보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저희  나라 말
로 뭔가 떠들고 손가락질을 하고 총으로 위협하는  시늉을 했다. 젊고 덩치 크고 
무기를 든 그 이방인들에게,  우리는 쫓기는 병아리 신세만도 못하게 되었다. 우
리는 밤이면 일찍 불을 끄고 방 안에 틀어박혔고 나 같은 여자는 얼굴에 검댕을 
칠하고 더러운 몸빼를 입고 머리엔  얼굴을 다 가리게 수건을 쓰고 늙디늙은 할
머니 행세를 했다.  거기다가 대낮에는 마을의 할아버지들이  무도리로 들어오는 
길가에 나가 보초를  섰다. 그러다가 미군이 나타나면 `떴다!` 하고  소리쳐 여자
들이 모두 `미군피난`을 하도록  하였다. 떴다는 고함소리만 들리면 개울에서 빨
래를 하던 나 같은 가짜 할머니들, 아이를 업고 마당에서 놀던 여자아이들, 밭에
서 냉이를 캐던 처녀들 모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쥐처럼 몸을 숨기고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렇게 민국  사람끼리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는 대, 무도리에서는  또 하나의 
비참한 일이 터졌다.  자신은 늙어서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무심히  길을 가
던 할머니를 백인 병사 셋이 길바닥에 자빠뜨린 것이었다...
  그들은 영월 제천 쪽을 지나가면서 며칠 사이에 이런 일을 저질렀다.
  이레쯤 지나자  미군은 더 이상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래도  할아버지 손에서 
빼앗아간 열세 살 짜리는 영영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고 할머니는 아래가 피투성
이가 되어 총에 맞은 모습으로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서른 살의 아이 어
머니는 실어증에 미쳐서 동네  여기저기를 헤메고 다니다가 어딘가에 서서는 죽
은 나무처럼 하염없이 붙박여 있곤 하였다. 그  불쌍한 여자의 원통한 인생 때문
에 무도리에선 그 짧은 `미군피난`의 시기를 어느 누구도 잊지 못할 것이다.
  봄이 완연해졌다.  산에선 분홍 색깔의 참꽃이  여기저기 피었다. 이제 눈이나 
얼음 기운이라곤 기억조차  못하게 개울물은 저 잘난 듯이 흘렀다.  개울가의 버
들가지엔 허연  털북숭이 버들꽃이 피어 딸아이는  그걸 뜯어다가 `강아지`라고, 
시들도록 가지고 놀았다.  배가 고픈 어른들은 들이나 야산에 다니며  풀을 뜯었
다. 아직 어린  풀은 다 먹을 수  있는 나물이었다. 거기다 피난지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자고 나면  늘어 무도리의 얼마 남지  않은 방들은 미어터질 지경이었
다. 어쩌다 방에 늦게 들어가면  다리 뻗고 모로 누울 자리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때에  아이들에겐 홍역이 돌았다. 딸아이도 홍역을 해서  자고 나면 
눈이 찰범벅이 되어 있었다.  밤에 자다보면 누군가 쿨쩍쿨쩍 우는 소리가 났다. 
왜 우느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아침이면 죽은  아이의 시체를 묻으러 아이 어머
니가 산으로 가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피난길에  홍역으로 자식 둘을 다 죽이
고 어른 둘만 달랑 돌아오기도 했다.
  돌림병은 홍역뿐이 아니었다. 우리들이  염병이라고 부르던 장질부사까지 기승
을 부렸다. 무서운  염병 환자와 한방에서 지내면서도 우리는 저마다  조심을 했
다.
  “아이구 나 죽는다. 목이 타 죽겠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에헹에헹 아이구 추워 못살겠네.”
  환자는 자기의  앙가슴을 찌르고 마구 떨었다.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환자와 살 대지 않고 얼굴  마주보지 않고 지내면 자기는 돌림병에서 무사할 것
으로 믿는 게, 그 시절의 우리였다.
  이런 날들도 저절로 구르듯이 지나갔다. 무도리에는  군인 나갔던 남자들이 하
나둘씩 돌아왔다. 어느  집 아이 아버지가 살아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그만 
놀라서 가슴이 졸아들었다. 이미 죽었다고 그의  사진에 죽은 날짜까지 적어놓고
도 남들이 살아 돌아오면 견디기 어려운 혼란에 빠지곤 하였다.
  “저기, 우리  아이 아버지 못 보셨는지요.  이름이 이준태라고 얼굴이 이렇게 
생기고 키는 이만한데요...”
  나는 돌아온 사람네 집으로 쫓아가서 남편  소식을 물었다. 한결같이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우리같이 국방군으로 나간  사람은 굶어죽지 않았으면 살아  돌아옵니다. 기
다려 보슈.”
  “훈련받을 때 본 거 같은데 그 후론 모르겠어유.”
  “이형이 포항 쪽으로 갔지 싶어요.”
  이런 대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면에서 공출벼를 풀었다. 가구당  벼를 두 가마니씩 주었다. 나는 허리는 어지
간히 펴는데 아직 목은 병신이었다. 고개를 돌리려면 윗몸을 다 돌려야 했다. 이
런 때, 벼 두 가마니는 너무 많았다. 게다가 나는 남들은 이제 다 나아가는 염병
에 뒤늦게  붙들려서 산 목숨이  아니었다. 그래도 구호양곡을  무상 배급한다니 
기다시피 나갔다. 벼 한  가마니를 네 번에 나르고 나서 아직  헐지 않은 볏가마
니 옆에 쓰러졌다.
  “아무나 이거 가져가세유.”
  내가 기진맥진해서 겨우 말했다.
  “이 귀한 벼를 왜 남 주려고 해요?”
  누가 물었다.
  “저는 베 한 가마니두 못다 먹구 죽을 거래유.”
  내가 말했다. 그러자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달려와 볏가마니를 서로 차지하려
고 싸웠다. 나는 허우적허우적  걸어 겨우 집으로 왔다. 달아오른 봄볕이 가득한 
마당 한가운데,  딸아이가 동생을 안고 나와  앉아 있었다. 가여운  두 새끼였다. 
그 어려운 때 죽지도 않고 고물고물 살아난 아들! 목숨은 신기하기도 했다. 저걸 
두고 내가 죽다니! 미처 크지도 못한 자식을 두고 죽는  건 세상의 죄 중에 첫째 
가는 죄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살자! 어떻게든 살아보자!
  나는 새끼들을 위한  목숨이지 나를 위한 목숨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서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오는 남자들을 보면 남편이  그립고 한편
으로는 괘씸해서 화가 났다. 그가 살아 있다  해도 화가 나고 죽었대도 마찬가지
로 화가 났다. 자식을 가진 사람은 자기 목숨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그래서 그
는 여전히 나쁜 사람이었다.
  이렇게 생각해도 미운  마음은 잠깐. 그가 살아서 돌아오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하든 눈감아줄 것  같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런 바람은  물거품으로 사라졌
다.
  봄이 다 갈  무렵이었다. 염병은 어느 사이  사라져, 나는 개울로 달래도 하러 
다니고 남의 일도  도우며 푸성귀라도 얻어 먹었다. 이런 어느  날 마루보시에서 
사무를 보던 사람의 아내 되는 여자가 찾아왔다.
  “윤이 어머니. 여기가 불편할 테니 역장네 사택에서 우리하고 같이 삽시다.”
  “말만 들어두 고맙네유.”
  “우리 아이 아버지가 그렇게 하자고 하네요.”
  “댁의 쥔 양반은 돌아오셌네유.”
  “예.”
  “얼매나 기쁘세유.”
  “꼴이 말이 아니지요. 굶어서 기어왔던 걸요.”
  나는 남편이 살아 돌아와서 한결  여유 있어 보이는 그 여자의 친절을 받기가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방 두 칸짜리 사택이 비었고 그걸 한 칸씩 나눈다구 하니, 
이것도 남편이 생전에  남에게 베푼 인정의 덕이거니 여겨 이사를  했다. 큰방은 
그 집이 쓰고 가운데 마루를 사이에 두고 떨어진 작은방에 내가 들었다.
  이제 내게 남은 희망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남편도 없는 타관살이는 
지긋지긋했다. 전쟁을 겪고 과부가 된 나는 그  동안 저승에라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여비를 만들지 그것이 한걱정이었다.
  철도경찰이 우리가 들어 있는 관사 마루에  사무실을 냈다. 사무실이라야 낡은 
책상 하나 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들 중에 남편이 알고 지내던 `차석`이 있었는
데, 그가 나에게  밥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품삯은  없고 대신 거기서 밥은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부당한 조건이라도 나는 반가웠다. 우선 끼니는 그
렇게 해결이 되니 배급받은  쌀은 모아 팔아 고향 갈 여비를  하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남의 밥 얻어먹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아직 서른도 안 된 나. 마음
은 한없이 늙었어도 남자들은 나를 버려진 여자 대하듯 멸시하길 망설이지 않았
다.
  “밤에 적적하지 않우?”
  점심밥을 차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혼자 살긴 너무 외로울 거요.”
  “처녀도 아니고.”
  “뭐 다 아는 처지에 우리가...”
  나는 모욕감 때문에 밥그릇을  그들의 상판대기에 던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
다. 어떤 놈은 돌아서는 내  엉덩이를 툭 치곤, `쓸만해!`했고 사내들은 키들키들 
웃었다. 여자의  인생살이에 아버지와 남편,  아들의 그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나는 평생 뼈저리게 체험한 여자다.
  그들은 내게 담배  심부름도 시켰다. 나는 그  일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하루종일 어디 누구네 집에서 무엇을 얻어다 먹을까 만을 궁리하는 더러운 성품
의 남자들이었다.
  내 기분이 이렇게 엉망이던  날, 딸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일어났다. 점심 
설거지를 하고 들어왔더니 딸이 동생을 옆에 두고 반듯이 앉아 제 아버지에게서 
귀동냥한 유행가를 흥얼거리는  것이었다. 목소리는 처량하게 들렸고  한쪽 다리
를 꼬아올린 모습은 천연 제  아버지였다. 이상했다. 왜 그 순간 딸이 그렇게 보
기 싫던지. 이제 세 살  된 아이. 아버지 사랑을 무던히 받았으니 딴에 아버지가 
보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그런데 나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구 때렸
다. 때리다 보니 화가 더  나서 나는 다른 기분의 매질까지 보태서 했을 것이다. 
놀란 아들까지 자지러들게 울었다. 나도 분해서 씩씩거리며 울었다. 그러나 이런 
처량한 과부티, 남에게 소문날까 봐 나는 머리를 이불에 싸고 울었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시집식구들도  보고 싶었다. 
드높은 설악산, 푸르른 바다, 언니와 동무들이  보고 싶었다. 이제 삼팔선은 사라
지고 대신 휴전선이 생겼다고. 양양에서 더 북으로 올라가는 고성쯤이라지.
  이날 이런 어지러운  그리움에 잠겨 잠이 들어서인지 고향 꿈을  꾸었다. 꿈에
라도 고향을 가본 날은 아침이 개운했다.
  “계십니까?”
  아침 나절에 누가  찾아왔다. 모르는 남자였다. 허름한 차림의  노동자 같았다.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았다. `전사통지서`라는  게 반드시 올 거라는 소리는 들은 
적이 있었다.
  “여기가 이준태 형넨가유?”
  내가 대답을 못하고 서 있자 그 남자가 다시 물었다.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예.”
  나는 덜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겨우 말했다.
  “아침에 지가 이형을 봤어유. 하두 반가워서 알려드릴려구 왔습니다.”
  순간 나는 그 남자의 손을 잡았다.
  “우리집 양반을 증말루 보셌어유?”
  “예! 지가  이형!하구 부르니까 들어보던데유.  바싹 말러서 긴가민가  하다가 
돌아보는데 그 얼굴입디다. 송학가지 왔으니 오늘내루 올 겁니다. 이제 맘 푹 놓
구 맛있는 거나 준비하세유.”
  “아저씨, 고맙습니다.”
  나는 그에게 여러 번 인사했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애인 기다리슈?”
  철도경찰 차석이 다가오면서  이렇게 건달 같은 말투로 물었다. 순간  그 남자
가 너무도 비루하게 보였다. 너 같은 거...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그가 내 곁
을 지나가도록 비켜서지 않았다. 그는 여느 때  같으면 내 몸 어딘가를 건드리기
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내게서 무엇을  느꼈는지 마치 겁먹은 듯 몸을 
도사리고 비켜갔다.
  “엄마아.”
  늦잠을 자고 이제 깬 딸아이가 게으른 소리로 나를 부르며 나왔다.
  “윤아, 아부지 보고 싶너?”
  “응.”
  “얼만큼이나 보구 싶너?”
  나는 손을 들어 넓게 원을 그려 보이며  물었다. 윤이가 이내 입을 삐죽거리더
니 눈이 젖었다.
  “우리 윤이 보고 싶어서 아부지가 오시잖. 얼매나 기뻐?”
  나는 딸을 한 번 안아주었다.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윤이는 방으로 들어가 제 동생에게 자랑했다.
  “아버지 오신다, 아버지 오신다.”
  가락을 넣어 노래했다.  그리고 점심 같은 아침을 먹고 바깥에  나가서 들어오
지 않았다. 보는  사람마다 아버지가 온다고 자랑해서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남
편의 귀향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다.
  그러나 그는 해가 지고 어두워져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했다. 그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아버지이 아버지 왜 안 와아.”
  윤이가 칭얼댔다.
  “지즈바가 왜서 청승이래!”
  나는 이런 일로도  윤이를 쥐어박았다. 윤이는 동생의 작은 이불  귀퉁이에 발
을 디밀고 누워 숨죽여 우는 시늉을 했다.
  이때, 밖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누군가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퍼뜩 문을 
열었다. 남편이었다. 만약 남편이  돌아온다는 걸 몰랐다면 나는 그를 왠 거지라
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윤아!”
  남편이 딸의 이름을 불렀다. 윤이가 잠깐 뒷걸음을 치더니 아버지에게 안겼다.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의 몸은 반으로  줄어 있었다. 황소 같던 그의 
손목과 발목은 가늘어서 부러질 것  같았다. 털 많던 그의 몸, 뼈가 드러난 팔뚝
에선 털만 이러저리 쓸렸다. 그 우람하던 사내. 남자들도 그가 눈을 부릅뜨면 두
려움을 느끼게 하던 사내. 창을 빗맞아  날뛰는 산돼지를 발길질해서 쓰러뜨리던 
남자. 그는 겨우 목숨만 붙은  마른 나뭇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불과 다섯 달 반 
사이에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건 국민방위군의 예산 50억을 착복한 범
법자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남편이 거지가 되어 돌아온  지 두어 달 후 사형당했
다.
  사나흘쯤 지나자 새  모가지처럼 건들거리던 그의 목에 힘이 돌았다.  그는 집
에서 하루에 몇 끼씩 아이들 밥먹듯 조금씩 자주 밥을 먹고 잠만 잤다.
  “여보 이게 다 뭐너?”
  남편이 여유가 생기자 방 안에 있던 쌀자루를 만지며 물었다.
  “다 쌀이래유.”
  “야! 당신 부자로구나!”
  남편이 탄성을 질렀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얼마나 배를 곯았으면 저 
장정의 마음이 저렇게 되었을까.
  “당신 안 오문 저거 팔어서 고향 갈 여비 헐라구 모았어유.”
  나는 그의 `사망날짜`를 적어놓은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는 사진을 보더
니 울먹였다.
  “앞으루 당신 속 썩이문 내가 개아들 눔이다! 당신한테 맹세할게!”
  나는 그의 이런 결심이 기뻤다.  그는 `계집질`만 하지 않는다면 나무랄 게 없
는 남자였다.
  일 주일쯤 지났을 때, 철도관사 맞은편에 미군부대가 주둔했다.
  윤이는 자고 나면  마당에 나가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을 구경했고 들어올 땐 
치마폭 가득 먹을 것을 얻어왔다. 캔디, 초콜릿, 추잉검, 비스킷... 어떤 날은 빵도 
받아왔다. 이렇게 외인 병사의 눈에 띄인 딸을  따라 마당에 나간 남편은 그들에
게 영어로 `땡큐 베리 마치`를 한 덕에 그곳에 그날로 취직이 되었다. 남편은 부
평에서 미군부대에 있었던 경력으로 아주 짧은 영어를 터득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미군부대의 풍족한  물자로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곧 양구
로 이동을 했다. 남편도 따라갔다. 그곳에 자리잡으면 이사를 할 작정이었다.
  양구로 갔던 남편이 스무 날쯤 되어서 미군 트럭을 타고 제천으로 왔다.
  “강원도루 갈 것 같애.”
  남편이 말했다.
  “양구는 위험하다구 날 원주루 보내준대. 늦어두 일  주일 안에 차를 보낼 테
니 준비해!”
  남편이 돌아가고 다시  열흘쯤 지나 미군들이 차를 가지고 왔다.  간단한 이삿
짐을 꾸려 나는 제천을 떠났다.
  원주의 동화역 근처. 강원도 땅이라 우선 좋았다. 이곳엔 제천보다 미군부대의 
규모가 컸으며 제천에는 없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미군부대와 길을 사이에 
두고 사는 양색시들이었다.
  어느 날 내가 자는  딸아이를 두고 아들만 업고 원주 시내로  나갔다 왔다. 자
다 깨면 방에 차려놓은 밥을 먹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울면서 나를 찾아 돌
아다닌 모양이었다.  그런 딸을 돌보아준 양갈보.  그 여자의 이름은 `영자`였다. 
검고 긴 머리를 곱슬곱슬 볶아서 늘어뜨린 여자.  작지 않은 입술을 새빨갛게 칠
하고 눈이 늘 울음을 울 것같이 젖어 있는  여자. 자기도 고향에 어린 아들이 있
다면서 남편과 사별하고  어쩌다 `이 길`로 들어선  팔자를 자주 비관하는 여자.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 포목점이라도 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음력 동짓달 그믐날, 양력으로는 일월 초순이었다.  남편이 `근`이라고 아름 지
은 아들 첫돌 잔치를 아주 성대하게 했다. 미역국을 가마솥으로 하나 끓였다. 날
씨가 좋아 볕이 드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돌상을 차렸다. 딸아이는 동생이 주인
공이 되는 자리에 심술이 나서  누런 코를 쉴새없이 흘리고 돌상을 제가 차지하
려고 심통을 부렸다.

  어느 날엔가 나는 딸아이가 제 사타구니를 들여다보면서 소음순의 그 작은 돌
기를 잡아늘리곤 하는 망칙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눔의 지즈바야! 부끄루운 줄 모르구 어디다 디룹게!”
  나는 윤이를 후려갈기고 도망치듯 그 애 곁을 피했다.
  딸아이가 치마나  바지를 훌렁훌렁 벗기  좋아하던 게, 생각해  보면 ‘때’가 
있었다. 정확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원주로 온 다음일  것이다. 원주는, 
그래도 강원도라고 일가친척들이  자주 다녀갔다. 특히 치악산에서  사시는 큰시
아버지 내외분이 자주 오셨다. 두 시어른은 내가 아들 본 것을 아주 기뻐했다.
  “이눔 둥치는 작어두 고치두 크네!”
  큰시아버지는 손자를 무릎에 안고 근이의 자지며  불알을 보고 말했다. 윤이는 
인사를 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 애는  큰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제나
저제나 불러줄까 마음을 쓰며 주변을 빙빙 돌아았다.
  큰시어머니도 집에 오면 우선 근이부터 찾았다.
  “근이 고치 줌 따먹어보자!”
  큰할머니가 이러면 근이는 도망을 쳤다. 그러나  윤이는 그런 근이를 부러워했
다.

  1952년. 원주로 이사온 지 일 년이 넘은 봄날. 남편에게 불길한 변화가 나타났
다. 그는 지난 겨울 한두 달을 `투전`에 미쳐 지내더니 스스로 손을 떼고 엉뚱한 
데 정신을 팔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부쩍 슬픈 유행가를 불렀다. `고향설`, `비 내리는 고모령`, `꿈에 본 
내 고향`같은 노래였다.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일세
  깊은밤 날러오는 눈송이 속에
  고향을 불러보는 고향을 불러보는
  젊은 푸념아

  소매에 떠러지는 눈도 고향 눈
  빰우에 흐터지는 눈도 고향 눈
  타관은 낯설어도 눈은 낮익어
  고향을 외여보는 고향을 외여보는
  젊은 한숨아

  이놈을 붙잡어도 고향 냄새요
  저놈을 붙잡어도 고향 냄셀세
  나리고 녹아가는 모란 눈 속에
  고향을 적셔보는 고향을 적셔보는
  젊은 가슴아

  먼 눈을 뜨고 유행가를 불기 시작하면 그의 마음이 뜨고 있다는 징조였다.
  이런 어느 날이었다. 벗어놓은 남편의 옷을  걸려고 들어올리다가 우연찮게 저
고리 안주머니를  보게 되었다. 뭔가 흰  것이 주머니 끝으로 삐죽  나와 있어서 
그것을 꺼내 보았다. 영자의 사진이었다.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나는 얼른 사진을  있던 대로 찔러넣었다.  영자. 비록 
양갈보이기는 하지만 우리와 가까이 지내는 여자였다.
  “윤이 엄마, 내는 윤이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부럽데이.”
  “영자, 괜찮어. 독한 맘 먹구 알뜰하게 돈 뫄서 여길 뜨문 누가 아너? 아들두 
있겠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남편이 돌아왔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당신이 영자하구 좋아지낸다구 하대유.”
  한동안 망설이다가 발을 씻고 난 그에게 말했다.
  “누가 그래!”
  남편이 벌컥 화부터 냈다.
  “윗모탱이 가니 다덜 그리대유.”
  나는 막연하게 둘러댔다.  동네 윗모퉁이에는 강릉과 주문진에서  내려온 사람
들이 많이 살았다.
  “진짜 영자하구 그런 사이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헛소문을 내유? 남의 가정 
파탄 내구 싶어 환장했너?”
  나는 남편의 반응을 보려고 말했다. 고개를  돌려댄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그는 밥을 먹더니 옷을 차려 입고 나갔다.
  잠깐 나간다던 남편은 밤이 이슥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 옆에 가만히 
누워 잠을 청했다.  새끼가 둘이나 있는데, 아들 바라고 살지.  설마 내가 양갈보
만 못할까.
  아들은 잠이 들어도  젖꼭지를 입에 물고 놓지를 않았다. 살그머니  빼면 푸드
득 진저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선잠이 들었다  깨길 되
풀이하고 있는데 남편이 들어왔다.
  “어딜 갔다 와유?”
  내가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다.
  “어디로 갔었냐구유!”
  “니가 알어 뭐할래?”
  남편이 퉁명스레 뱉었다.
  “옷두 입구 자유?”
  “신경 쓰지 말어.”
  “어떻게 신경을 쓰지 말래유? 내가 남이래유?”
  그러나 그는 돌아누웠다. 차돌처럼 몸을 굳히고.
  “누가... 모를 줄 알구. 나두 바보가 아니라구유.”
  그가 듣거나 말거나 말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 더 많았다.
  ... 당신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날 이렇게 멸시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친정
에서 세상 모르고 살다가 당신네 집으로 시집간 건 오직 당신이란 남자 하나 믿
고 간 것이다. 그런데 나를 이렇게 가슴 아프게 할 수 있느냐. 당신이 날 조금만
이라도 인간으로 여긴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올 때 어떻게 살아왔나 생각해 
봐라. 나는 당신 자식 거두며, 이날 이때까지 살도록 엉뚱한 생각을 품어본 적이 
없다. 늘 당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나두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남편이 혼잣말처럼 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말이래유?”
  내가 숨가쁘게 물었다.
  “나... 그 여잘 좋워해.  그래두 당신을 버리진 않어. 걱정말어. 조강지처 버리
는 나쁜 놈은 아니여.”
  남편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떨려서 아무 말도 못했다.
  다음날.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나자 비로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웃집 여자와 머리를  자르기로 약속하고 원주로 갔다.  아이들 치다꺼리하고 
돈 한 푼 더 모으려고 입지 않고 살아봤자, 나만 처량했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양갈보  머리`를 했다. 빠글빠글 볶은  것이다. 
거울을 보자  도리어 내가 처량했다. 하지만  내친 김에 시장에 들어가  한복 한 
벌, 양장 한 벌도 샀다.
  “이래두 죄 받지 않을까유?”
  같이 간 여자한테 물었다.
  “근이 엄마 같은 여자가  어딨다구 그래. 괜찮어. 그만큼 열심히 살구 벤벤한 
옷 한 벌 해입어 봤어?”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듣고 보니 옳은 소리였다. 고마워서 국밥을 한 그릇 대
접했다. 이러고 돌아치는 동안 저녁이 다 되었다. 늦은 것도 늦은 것이지만 젖이 
불어 띵띵하고 마침내는 앞섶이 다 젖었다. 배곯고  있을 근이 생각에 정신이 아
찔했다. 아이 어미가 제 분수를 저버리니 당장 이런 벌을 받는구나 싶었다. 그런
데 엎친 데 덮친다고 차편까지 놓쳤다. 걷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시내를 벗어나자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구름 가득  낀 날이라 더 빨리 어두워
졌다. 아무 차나 방향만 같으면 잡아타려고 차  소리만 나면 길가로 비켜서서 마
구 손을 흔들었다.
  “지는유, 앞으룬 절대루 자식 두고 이런 짓은 알할래유. 여자란 기 자식 보구 
사는 거지...” 헐떡 거리며 이런 말을 했다.
  차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았다. 미군 지프였다.  미군 차니 우리  동네로 가는 
거, 잘됐다 싶어  길 가운데 나가 손을  들었다. 차가 우리 옆에  섰다. 검둥이가 
영어로 쑤알라대며 내 팔을  붙잡아 태웠다. 그런데 같이 간 여자가  내 손을 잡
고 발을 올리는데, 그 검둥이가 잡아주긴 커녕  그 여자를 떼어서 길바닥으로 떨
어뜨렸다. 순식간이었다.
  “일행이래유!”
  내가 소리 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차는 속력을 냈고, 떨어진 여자의 모습은 
이내 보이지  않았다. 운전병과 내 옆에  앉은 검둥이는 뭐라고 저희  나라 말로 
지껄이며 킬킬대는데,  느낌이 더러웠다. 겁이  났다. 제천에서  미군 병사들에게 
강간당한 여자들 일이 생각났다. 가슴속이 얼어들었다. 녀석이 나를 보고 뭐라고 
말했다. 물론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자꾸만 지껄이며 내 얼굴을 바
라봤다. 무얼 묻는 모양인데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답답한 건 저나 나나 마찬
가지였다. 어쨌든 나는  최악의 상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얼음  덩어리나 다름
없이 앉아 있었다.
  깜둥이가 내 앞에다 대고 손짓을  했다. 나는 여전히 언 채, 그 손가락 놀림을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는 동그라미를 만들고, 다른 손의 검지를 펴서 그 구멍 속
으로 집어넣다 뺐다를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씨비 씨비...”
  “오케이!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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