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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경자 사랑과 상처 2권

by Casey,Riley 2023.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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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상처 2
이경자

    5
  수복지구
  그 해, 1952년. 전쟁은 주춤한 상태였다.  삼팔선을 경계로 싸우던 이남과 이북
은 이즈음 동쪽과 서쪽의 땅을 서로 뺏고  빼앗긴 채, 전선에서만 총질들을 해댔
다. 삼팔선 위쪽 북한 땅이었던 양양은 고성  쪽으로 올라간 전선덕에 남한 땅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해방된 뒤 도망쳐 양양을 떠나던 때와는 달랐다.
  기다리던 남편이 오지  않아 결국 나는 또다시 이삿짐을 쌌다.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물건들, 양양에 가져가면 돈이 될 것 같은 것, 시집 어른들과 친정어머니
에게 줄 선물 같은 것을 꾸렸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내겐 벅찬 짐이었다. 하지만 
미군 부대에서 나온 질 좋은 베니어로 짠 두리반과 나무 궤짝은 욕심 때문에 기
어이 가져가고 싶었다. 이곳에서  양양으로 가자면 우선 강릉까지 가야 했다. 강
릉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번 밖에 없었다. 그것도 첫새벽에  떠나는 것이라 정
류장 근처의 여관에서 잠을 자야 했다.
  허름한 여관을 잡고  방에 들어가 업힌 아이를 내려놓았다. 근이가  오줌이 마
려워 사타구니에 손을 대고  다리를 꼬고 어쩔 줄을 몰랐다. 우선  방문 앞 쪽마
루에 나가서 아이의 바지를 벌렸다. 그 사이 아이가 오줌을 바지에 지렸다.
  “이눔으 새끼야! 오줌이 매루면 날래 말하래두 노상 이렇게 애를 말굴란?”
  길 떠나는  데 아이가 바지를 적셨으니  짜증이 났다. 꾸짖으면서 등을  한 번 
때렸더니 이내 입을 삐죽대며 누나 누나하고 제 누이를 찾았다.
  “야, 누으가 어디루 갔제?”
  깜박 잊고 있던 윤이  생각이 났다. 근이는 제자리에 서서 두리번거렸다. 숨거
나 감출 데 없이 손바닥만한 방 안을 살피며  제 누이를 찾는 꼴이 우스웠다. 우
선 아이를  들쳐업고 바깥으로 나가봤다.  여관방 앞으로 우물과  작은 흙마당이 
있었다. 꼭 거기에  앉아 흙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긴 아무도 
없었다.
  여관을 잡고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옆에 분명히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말
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이 지즈바가 질레 또 속을 썩이네!”
  화가 나서 윤이를 욕했다. 근이는 등에 업힌 채 누나 누나하며 징징거렸다.
  “윤이야! 윤아!”
  여관 앞은 비좁은  골목만 빠져 나가면 복잡했다. 휘발유 냄새가  나는 정류장
과 시장바닥을 헤집고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래도 아이를 찾지 못했다. 초겨울 
짧은 저녁 해는  벌써 기울어서 이내 어두워질 참이었다. 정신이  아찔해서 아무 
데나 잠깐씩 서 있으면 의족에 목발을 하거나 낡은 군복 윗저고리 소매 끝에 쇠
꼬챙이 의수를 빼놓고 다니는  상이 군인들, 양갈보들, 깡통을 들었거나 허연 살
이 비치는 누더기를 입은 거지 아이들만 보였다.  이제 깜깜해 지면 윤이는 도저
히 찾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고향 가는 마당에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윤이를 잃어버리고  가면 남편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온
갖 억지를 다 써서 나를 의심하고 때릴게 뻔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어디서 나를  찾아 헤매며 울고 다닐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절망에 빠져  더 이상 걷지도 못하고  길가에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길 건너 
고갯길이 난 저편은  이곳과 다른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 고갯마루에  달랑 올라
선 윤이가 보였다. 설마 저 먼데까지 갔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데였다.
  “아이구 저기 있네! 윤이야! 윤아!”
  나는 어떻게 뛰어서 그곳까지 갔는지 모른다.
  “누나야, 누나야.”
  등에 업힌 근이도 윤이를 불렀다.
  “윤아!”
  벌써 고개를 내려간  윤이의 뒤에 가서 이름을 불렀다. 윤이가  뒤를 돌아보았
다. 나는 아이를 부둥켜안았다. 얼굴은 눈물 콧물로 더럽기 그지없었다.
  “이눔으 지즈바야. 니가 엄마를 잃어봐라. 어떻게 살래?”
  나는 아이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넋이 나간  윤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고 근이는 등에서 빠져 나오려고  요동을 쳤다. 나는 오줌이 마
려워 그러려니 하고  포대기 끈을 풀었다. 근이는 내리자마자 제  누이를 끌어안
았다. 윤이가 제 등에 동생을 업었다. 곧 우리 세 식구는 난리를 치르고 난 뒤의 
후련함에 젖어 천천히 고갯길을 내려왔다. 이건 고향 가는 길의 액땜이었다.
  윤이 때문에 흥분한 탓도 있겠지만 여관 잠은  어설펐다. 버스 시간에 맞춰 일
어나니 아직  하늘에는 새벽별이 파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찬물에  세수를 하고 
세상 모르게 잠이 든  아이들을 깨웠다. 잠귀가 질긴 윤이는 결국  한 대 맞고서
야 일어났지만 오래도록 입을 닷 발이나 빼물고 있었다.
  버스가 흔들리며 달리기  시작하자 졸음이 악귀같이 덤벼들었다.  아무리 정신
을 차리려 해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어  입천장이 까지도록 거친 설탕을 바른 
개눈깔사탕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주고 나는 작정하고 졸았다.
  얼마나 졸았는지 몰랐다. 그 사이 몇 번이나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
내 다시 비몽사몽 정신을 놓곤 했다.
  어느 결에 버스는  대관령을 넘고 있었다. 같은 강원도 땅에  살다왔건만 영을 
넘으니 진짜 강원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직 고향은 멀었다. 더군다나 
양양까지 가려면 버스를 두어 번은 더 갈아타야  했다. 강릉에서 주문진 가는 버
스를 갈아타고 그곳에서 다시 양양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야
하지만 그  버스도 기사문리 삼팔선  검문소까지만 갔다. 버스를  갈아탈 때마다 
많은 짐을 이리저리 옮겨싣는데 염치없이 남의 신세를 있는 대로 졌다.
  주문진에서 기사문리 삼팔선까지 가는  버스는 말이 버스지 트럭에 군인 천막
으로 지붕을 씌운 것이었다.
  하지만 주문진에서 갈아탄  트럭버스가 양양으로 가까이 가자,  그리고 고향의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자 가슴이 뭉클하며  온갖 그리움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한밤중, 목숨걸고  남모르게 넘나들던 저 삼팔선. 언제나  고향으로 돌
아갈지 기약도 못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였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옛날  생각에 빠져 있는데 윤이가  자꾸만 내 팔을 꼬집었
다. 짜증이 나서 아이의 등을 후려쳤다.
  “지즈바가 말은 안 하구 왜서 이래!”
  그리고 이렇게 화를 냈다.  윤이의 얼굴이 금방 일그러졌다. 눈에 이슬이 맺혔
다. 눈물이 헤픈 것도 보기 싫어 눈을 하얗게 흘겨주었다.
  “아주머이두 왜서 아를 때리너? 예시가가 대구만 어머이를 부르던데.”
  뒷자리에 앉은 중년부인이 말했다. 뒤를 돌아보았다.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지즈바가 바다를 첨 보는  기네야. 아까버텀 바다만 바라보는 기 그런데 뭘.

  그 옆에 앉은 다른 여자가 끼여들었다. 내 성질  거친 꼴을 들킨 것 같아 무안
스러워졌다.
  “우리 아덜은 도회지서만 살았으니 바다를 첨 보는 택이지유.”
  나는 이렇게 변명하고 고개를 돌렸다. 윤이는  지금도 유리창에 얼굴을 붙이고 
있었다.
  “신기하너? 저기 바다란 기여! 바다!”
  윤이의 두 갈래로 땋은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바다가 뭐예요?”
  윤이가 기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고기가 사는 데여.”
  “저기에서?”
  “그래!”
  “저기 어디에?”
  “바다에 산다니까.”
  윤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  애는 내 대답이 성에 차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애를 만족스럽게 하지 못했다.
  “야가 바다를 첨 보는 기네! 어디서 살다 오너?”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서울하구 원주에서만 살었어유.”
  나는 양껏 뻐기며  말했다. 자투리 명주실로 짠 스웨터를 저고리  위에 덧입은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인 야양 사세유?”
  내가 물었다.
  “친정은 원산인데 야양으루 시집을 와서 산 지 수십 년 됐으니 나두 야양 사
람이 아이너?”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주머이를 어디서 본 듯하네유.”
  “조선 사람덜이 뭐이  중뿔나게 틀리게 생겼을라구유. 얼굴이가  다 비슷하겠
지. 그래 이 아덜 델구 야양 들어가는 거유?”
  “고향으루 아주 살러 가유. 해방 되구 월남해서  살다가 객지서 난리두 다 겪
었어유. 이제 야양이 수복됐으니 고향에서 살라구유.”
  “말해 뭐한. 고대광실 이밥이문 뭐해. 객짓밥이 다 그렇구 그렇지!”
  할머니가 말했다. 나는 먼 바다로 눈길을 돌렸다.
  “아덜이 둘 다 양순하네.”
  “저맘땐 한시두 가만있질 않을 걸.”
  뒷자리의 부인 둘이 얘기를 주고받았다. 윤이는  아직도 바다가 보이는 차창에 
벌레처럼 붙어 있었다.
  “저기가 삼팔교가 아니래유?”
  “삼팔교래유.”
  할머니가 대답하며 보따리를  챙겼다. 벌써 차 안은 내릴 준비를  하는 사람들
로 부산했다. 주문진에서부터 줄곧 서 있던 남자  차장이 맘이 바쁜 승객들을 뻔
히 바라보았다.  맨 뒤에 앉았던  중년의 아저씨는 앞으로  걸어나오느라 통로에 
가득 놓인 크고 작은  짐을 밟았다. 할머니 한 분이 바가지  깨진다고 소리를 질
렀다. 그 사이 차가 검문소에 섰다. 차장이  훌쩍 뛰어내렸다. 길가에 총을 맨 헌
병, 제복을 입은  경찰, 기관 사람같은 남자들이  서성거렸다. 은근히 겁이 났다. 
그렇지만 도민증이 있으니 걱정할 게 없었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한 줄로 서서 검문을  받았다. 검문을 받은 사람들은 짐
을 이고 지고 떠났다.
  “할아버진 어디루 가세유?”
  내가 앞에  선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포월리 아랫말에 산다며  내게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지는 야양 읍내까지 가유. 같이 가시면 되겠네유.”
  반가워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길섶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 아
이들과 그 옆에 한 짐 넘게 놓인 내  이삿짐을 돌아보고 다시 내 얼굴을 보았다. 
나는 무턱대고 웃었다. 하여튼  길동무가 생긴 게 좋았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윤
이 손목을 잡아줄는지도 몰랐다.  이곳에서 양양까지는 먼 삼십 리 길이었다. 짐
이야 짐꾼을 산다 하더라도 근이는 업어야 하고 머리에 목이 들어가도록 이어야 
할 임이 있었다. 걸음 더디고  질긴 윤이를 걸려서 데려갈 게 한 걱정이었다. 그
러나 생각지도 않은  걱정이 나섰다. 내가 내민 도민증을 들여다보던  헌병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닌 못 갑니다!”
  나는 그 말을 못 알아들어 그를 쳐다봤다.
  “도루 나가세요!”
  헌병이 말하곤 뒷사람을 불렀다. 옆에서 나를  기다리던 할아버지가 난처한 표
정을 짓더니 말없이 혼자 떠났다. 나는 잠시  할아버지의 멜빵을 멘 뒷모습을 바
라보았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이가 없었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돌멩
이를 던져 올리고 모래흙을 파서 무덤을 만들며 놀았다.
  이날 검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헌병은  검문이 끝나자 
후련하다는 얼굴로 저쪽으로 갔다. 나는 부리나케 헌병 뒤를 따라갔다.
  “나 줌 봐유, 왜서 날 나가래유?”
  그 사이 몇  번이나 들여보내달라고 내가 사정을 했던 헌병이었다.  그 때마다 
헌병은 눈을 가린  모자 속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귀찮다는 표정만  지었었다. 지
금도 그랬다.
  “내가 뭔 잘못이 있어유? 고향으루 살러 간다구 저 어린것들 업구 걸레서 여
기 온 나래유!”
  나는 다시 헌병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양양이 특수지역인 거  모르세요? 거긴 아무나 못 들어갑니다! 군
민증을 가져오세요.”
  헌병이 얼굴까지 붉히며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엉겁결에  아이들을 돌아보았
다. 애들도 무엇을 느꼈는지 불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울컥 상한 속이 끓
어올랐다.
  “난 야양이 수복된 줄 알구 왔는데 야양이 상구두 이북이잖?”
  나는 화가 나서 이렇게 비꼬았다. 그래도 헌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궤짝과 두리반, 이불 보따리와  옷 보따리가 지겨웠다. 그래도 세상 모르는 윤이
와 근이는 그 옆에서 땅바닥에 금을 긋고  흙에다 손을 파묻으며 놀았다. 점심때
가 훌쩍 지나서  그런지 바람결이 싸늘하게 느껴졌다. 오래지 않아  늦가을 짧은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버릴 것이다.
  내가 너무도 막막해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맥을 놓고 있으려니 근이가 다가와
서 무조건 다리를  내 가슴팍으로 집어넣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근이를  안아 한
쪽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윤이가 근이와 똑같이 했다. 성가시고 귀찮았
다.
  “햇아두 아닌 지즈바가 왜서 치대! 보면 몰라? 그리잖어두  맥이 빠져 죽겠는
데!”
  나는 이렇게 화를 내면서 윤이를 손으로 밀었다.  윤이는 마치 내가 힘껏 떠다
밀기라도 한 듯이 나가떨어졌다. 그 순간 윤이의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러나 나는 그렇게  힘없이 군드러지는 그 애의  꼬락서니도 보기 싫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윤이는 엉엉 소리내며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를 들으니 복장 밑에
서 부글대던 화가 뻗쳐올랐다. 나는 근이를 한  팔에 안고 윤이에게 가서 주먹으
로 마구 후려갈겼다. 윤이는  매를 피하지도 않고 싸워보자는 듯이 울기만 했다. 
누런 코는 양쪽에서  가락국수처럼 빠져나왔고, 고향 간다고 새로 사  입힌 옷은 
흙이 묻어 벌써  더러웠다. 나는 무서운 눈을  뜨고 그 애를 흘겨보았다. 윤이는 
울면서도 힐끔힐끔 고개를 돌려 내 눈치를 살폈다.
  “지겨운 거. 키워놔 봤자 남 좋은 일만 시키지!”
  나는 저절로 이렇게 뱉었다.
  “지즈바가 지 아부지  닮아 아무짝에두 못 쓸 고집팍이나 세지!  지즈바가 그
래 봤자 누가 알아나 줘? 지 신관이나 고달프지!”
  나는 윤이가 이제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라는 걸 전혀  생각지 못했다. 윤이
의 울음소리는 서러워졌고  나는 점점 더 화가 났다. 그래서  아주 잡아놓으려고 
일어나서 몽둥이를 찾았다. 길가에  잎이 마른 나뭇가지 하나가 보였다. 얼른 그
걸 들고 때리기 좋게  분질렀다. 그러자 윤이가 일어나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근
이가 나와 제 누이를 번갈아보더니 누나 누나 하면서 윤이 쪽으로 달려갔다.
  “대관절 귀신은 뭘 먹거러 저런 걸 안 잡아가너 몰러!”
  나는 나뭇가지를 구덩이에 내던지고 다시 길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해라! 나는 속으로 딱히 누구에게 랄  것도 없이 
이렇게 말을  하고 독을 쓰며 앉아  있었다. 윤이와 근이는 저만큼  떨어진 데서 
둘이 손을 잡고 앉아 무언가  얘기를 하는 게 보였다. 우스웠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건만 오누이가 오리 새끼들처럼 서로 위하고 애틋해 하는 걸 보면 눈시울
이 다 뜨거워졌다. 서로 싸울 때도 있지만  내가 누이를 나무라거나 때리면 금방 
나를 따돌리고 둘이  저렇게 뭉쳤다. 어쨌든 저런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하고 
위안도 되었다. 태산 같던 걱정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주머이! 나 줌 봐유.”
  이때 사복을 한 남자가 나를 불렀다. 반가웠다. 얼른 일어나 그쪽으로 갔다.
  “아주머이 보기가 딱하네유.”
  그가 말했다. 나는 듣기만 했다.
  “저기 산이 보이지유?  거기 오솔길루 올라가 봐유. 질깡이  하나뿐이니 대구
만 걸어가면 현북  면사무소가 나설 거래유. 거기서 누가 물어봐두  여기서 이렇
게 가르쳐줬단 말은  말어유. 아주머이가 어린아덜을 둘이나 델구 그리는  기 하
두 딱해서 내가 알쿼주니 그리 알어유. 짐꾼이 필요하면 불러주구유.”
  물론 짐꾼이  필요했다. 그 남자는 어디로  가더니 이내 지게를 진  짐꾼 둘을 
데려왔다. 어쨌든 어둡기 전에 양양 집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니 금방 몸이 가뿐
해지고 맘이 훨훨  날았다. 시가문리 삼팔선에서 양양까지 삼십 리  길이라는 게 
코앞같이 여겨졌다.
  짐꾼들의 걸음은 아주 나는 듯했다. 아무리 뛰듯이 따라가도 어림없었다. 더군
다나 윤이는 잘 걷지 못했다. 산 중턱에서 짐꾼들을 붙잡았다.
  “아저씨덜유! 좀 쉬었다 가세유!”
  내가 소리치자 그들이 길섶에 지게를 벗어놓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래유?”
  한 사람이 물었다.
  “원주서 살다가 와유. 야양을  못 들어가게 해서 애가 말렀어유. 왜시 그러니 
몰러유.”
  “그것덜이 괜우 그리지유.  증명  없이두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어디 하나둘
이너?”
  “장사꾼덜이 좀 많너? 우리가 그 숱한 장꾼 물건 다 져나르는데.”
  기사문리 텃골 사람이라는 짐꾼이 말했다. 그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장사는 맘대루 하게 해유?”
  “아이구우, 장사꾼덜은 우리 같은  농군덜 하곤 애최 종자가 다릅디다. 그 무
수운 빨갱이 시상에서두  요리조리 피해서 해 먹을 거 다  해먹었는데, 시방같이 
물러터진 세월 만나 뭘 못해 먹겠수.”
  “엔간했으문 그래 장사치를 사람 말종으루다 쳤겠너?”
  손양 사람이라는 짐꾼이 거들었다.
  “야양은 시방 군정 치하라던데유?”
  내가 물었다.
  “군대덜이 푹  썩었어유. 나야 내 눈깔루  직접 못 봐나서 모르긴  해두 높은 
양반이 그 좋은 솔을 다 비서 차루  배루 실어갔다구 하대유. 뭐라더라? 무슨 장
군이라던가 하는 사람의  장인이 인천에서 목재소를 해서  글루다 그 좋은 솔을 
싹 실어갔다구 소문이  파다해유. 예전에두 야양 솔을 황목이라구 임금님  관 짤 
때 썼다잖어유.”
  “야양 사람덜이 인공시상에  산 죄루 입이나 짹 해유?  파리 목숨 붙어 있는 
건만두 다행으루 예기는 판에.”
  “앰한 여자덜 결딴나는  건..., 드루워서. 과부가 좀 많너? 인민  군대 안 나간 
집이 어딨어.”
  손양 짐꾼이 말했다. 그들 말을 듣기만 했다. 남자들은 다 그렇고 그런 짐승이
니까. 또한 군인들의 부정 축제 같은 것도 남의 얘기였다. 다만 장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데만 솔깃해졌다.
  “대관절 뭘 팔지유? 먹지 못해 다덜 부황기 도는 얼굴이라던데유.”
  “그래두 왜정  말년보담은 나은 줄루만  알어유. 구호물자 배급두  있구 해서 
배곯는단 말은 못할 기래유.”
  “약아빠진 장사꾼덜 눈깔에는 보이는 기 다 팔아먹을 기라던데?”
  턱골 짐꾼이 말하면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야덜아! 그만 가자!”
  손양 짐꾼도 일어나 지게를 지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나는 또다시 뒤처졌다. 고무신을 신은 윤이는 툭  하면 신발이 벗겨져 다시 신
느라고 시간을 버렸다. 빨리  따라오라고 소리치면 몇 걸음 걷지 못해 넘어졌다. 
애물단지가 따로 없었다.  그 야산을 꼴깍 넘도록 내가 얼마나  윤이를 잡았는지 
셀 수도 없었다. 하여튼  목이 쉬도록 욕을 하며 그 애를  걸려서 현북면까지 왔
다. 그곳엔 나처럼 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몇 되었다. 곧 군인 차가 지나갈 것이
어서 모두들 그것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등에 업었던 근이를 내려  오줌을 뉘고 
나도 오줌을 누고 나니  이내 트리쿼터 한 대가 왔다. 군인들  부식을 실으러 다
니는 차였다. 그걸 얻어 타고 양양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어두워지기 직전의 양
양은 너무 초라하고 조용했다. 1.4후퇴 때 불에 타고 아무렇게나 지은 지붕 낮은 
집들에서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가 없었다면 아마 사람이 살지 않는 곳처럼 보였
을 것이다. 그래도 가슴은 울렁거렸다. 지친 윤이는 내 발치에 쪼그리고 앉아 그
새 끄덕끄덕  졸았다. 등에 업힌 근이도  잠이 들어 자꾸만 고개가  허리로 처져 
내렸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선뜻 맘이 내키지를 않았다. 그저 감개만 무량해
서 하늘을 쳐다보고 먼 허공을 휘둘러보고 코로 킁킁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 살아 계신다는  시할머니가 울컥 보고 싶었다. 임종도 못한  아버지 생각
도 났다. 동서는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언제 눈물이 고였는지 눈앞이 어두
워 자꾸만 눈을 비볐다.
  한동안 이러고 있는데  누덕누덕 기운 바지를 입은  지게꾼이 빈 지게를 지고 
다가왔다.
  “이 짐, 실을 기 아니래유?”
  그가 내 앞에 와서 말을  했다. 이상하게 금방 대답을 못하고, 혹시 우리 서방
님 아세유?  우리 서방님두 우차 끈다구  하던데유. 나는 속으로  엉뚱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안 갈 거래유?”
  지게꾼이 다시 물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저씨 성내리 알어유?”
  “성내린 여기서 얼매 안 돼유. 면소 저치래유.”
  “걸어두 가겠지만 짐이 많어놔서유.”
  “성내리 뉘 집이래유.”
  지게꾼이 짐을 실으며 물었다. 시집은 사변 통에 읍으로 이사와 살고 있었다.
  “이준태라구 우리 쥔양반인데 아세유?”
  “글쎄유. 들어본 것두 같은데. 택호가 뭐래유?”
  “송에서 이사 왔으니  송애집이라구 할 기래유. 우리 서방님이 우차  끄는 사
람인데.”
  “아, 준기 그 사람, 알다마다유. 죽을 고빌 같이 적었어유.”
  “원산 형무소에서유?”
  “잘 아네유.  그럼 아주머이가 그러니까  월남해 나가 산다던  형수님 되시는 
구만유.”
  지게에 짐을 싣고 밧줄로 매면서 반가운 얼굴로 짐꾼이 말했다.
  “예! 그렇게 돼유! 난리에 벨일 없으셌어유?”
  나도 반가워서 큰소리로 인사했다.
  “여기 기세유. 내가 가서 기벨 할 게유. 그나저나 아덜 델구
오시느라 쏙었겠네유.”
  지게꾼은 이렇게 말하고 앞이 안 보이게 실은  짐을 지고, 지게 작대기에 힘을 
불끈 주고 일어섰다. 그러나  나는 두 몫의 짐을 한군데 지고  가는 짐꾼의 뒤를 
따라갔다.
  “아버지한테 가요?”
  윤이가 물었다.
  “그래!”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는데 벌써 기분이  좋아진 윤이는 내 앞에서 두 팔을 벌
리고 나푸나출 춤을 추며 걸었다. 문득 맘이 켕겼다. 윤이가 남편에게 무슨 고자
질을 할 것만 같았다.
  “나는 아버지한테 간다. 나는 아버지한테 간다. 아버지한테....”
  윤이는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깡충깡충 뛰어갔다.
  “뛰지 말어! 자빠질라!”
  내가 소리쳐도 그 애는 듣지 않았다.
  짐꾼이 길가에서 나를 기다렸다.
  “이 집이래유.”
  그가 말했다. 한길가의 여덟 칸 집이었다.  내가 상상하던 집보다는 넓고 컸다. 
그러나 조용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붉은 진흙을 깐 타작 마당엔  짚가리가 있었
고 한쪽엔 낡은 드럼통이 놓여 있었다. 짐꾼은 내가 앞서도록 뒤에 처졌다.
  “아버니! 어머니!”
  나는 마당에 서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창호지 문이 화들짝 열렸다.
  “뉘기너?”
  문을 연 사람은 시할머니였다.
  “저래유, 할머니!”
  내가 반가워서 소리쳤다. 할머니는 아주 잠깐  그윽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더
니 이내 맨발로 튀어나왔다.
  “아이구우 이기 어멈 아니너? 시상에 어멈이 어뜨ㅎ게 왔너? 얼찐 봐선 모르
겠네. 시상에라. 어멈이 그 먼 길을 혼자서 용케 왔네야."
  할머니가 내 손을 잡으며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햇다. 그러자 방에서 야윈 얼
굴의 남편이  엽연초를 말면서 나왔다. 그는  반가운 얼굴이 아니었다. 나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안이 벙벙한 윤이를 말없이 번쩍 들어 안았다.
  "저 예시가가 아범이 보구 싶어하던 윤이너?"
  할머니가 물었다. 우물에 갔던 동서가 물동이를 이고 돌아왔다. 옆구리에 보리
쌀 남박을 끼고 있었다.
  "성님이래유?"
  "동세, 잘 있언?"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서로  목이 메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산
한 날씨에도  동서의 입성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산달이  가까운지 아랫배가 
보기만도 숨이 가빴다.  할머니는 내 등허리에서 근이를 잡아 빼서  방으로 데려
갔다.
  곧 우리는 방에 모두  모였다. 일을 나갔던 시아버지 시동생들, 동사에서 군인
들 밥을 해준다는  시어머니도 기별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내가  왔다는 소
리를 듣고 미리부터 울어 눈이 벌겋게 된 시어머니는 다시 나를 붙들고 잠깐 엉
엉울었다. 
  "아이구, 어멈아. 그 난리를 겪구 어떻게  살아왔너. 하루한 날 내가 어멈을 잊
은 날이 있었는 줄 아너? 이기 꿈이너  생시너. 산 사람은 이렇게라두 오는데 내 
새끼덜은 왜서 못 오너."
  시어머니는 이미 남편을  총해 우리가 잘 있다는  걸 알았겠건만 남과 북에서 
군대를 가 생사를 알지 못하는  셋째 넷째 아들이 그리워 이렇게 울면서 넋두리
를 했다. 물론 이맘때의 우리들은 누구나 처음  만나서는 한참씩 슬피 울어야 맑
은 정신이 되곤 하였다.
  울음을 그친 시어머니는 낡고 누런 광목 앞치마 주머니에서 누룽지를 꺼내 아
버지의 무릎에 앉아 으스대는  표정인 윤이에게 주었다. 그 애는 언제나 그랬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으면 아주 세상이  제 것인 듯한 거만한 표정이 되곤 하는데 
나는 그런 딸이  꼴같잖고 얄미웠다. 어린아이에 대해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나는 모른다. 시어머니는 윤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더니 자기 앞에 앉혔다.
  "아이구, 요년어  간나. 이쁜 간나. 할미가  요렇게 깨물어 먹어야지.  아이구우 
아이구우. 이쁜 간나."
  감정을 마음 깊이 가둬놓을 줄  모르는 시어머니는 난생 처음 보는 맏손자 손
녀가 귀여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윤이를 붙잡고  아이의 뺨을 앞 이빨로 잘근잘
근 깨물었다. 윤이는 놀라서 울까 말까 제 아버지 눈치를 살폈다.
  "할미라는 기 애살이 많아 아덜을 질레 볶잖?"
  작은 시할머니가 말했다.
  "요눔으 종자. 요눔으 새끼 어디 고추 좀 따 먹어보자. 맛이 얼매나 좋너!"
  시어머니는 근이를 바라보며 당신 손가락을 입에  넣고 후루룩거렸다. 처음 온 
윤이와 근이가  어른들에 둘러싸여 이렇게  귀여움을 받고 있을  때, 할머니들과 
함께 살아온 조카는  뒷전에 처져 손가락을 입에 넣고, 부러움이  그득하게 쳐다
보았다.
  우리가 이렇게 아이들을 데리고 웃는 동안  꾸역꾸역 식구들이 모여들었다. 여
러 개의 밥상에  둘러앉았을 땐, 자그마치 열  일곱 명이나 되었다. 시할머니 세 
분. 시아버지와 사촌형제가 둘. 시어머니에 시동생 둘. 시누이 하나. 동서와 조카 
딸 하나. 그리고  우리 식구 넷. 안방과 사랑이 그득했다.  전쟁통에 가장을 잃은 
가까운 피붙이들은 우리집에  다 모여 살았던 것이다. 입성은 하나  같이 남루했
다. 여기저기 기운 데가 없는 옷을 입은  사람은 집안의 어른인 시할머니와 남편
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식구들은  아무도 양말을 신지 않았다. 머리도 언제 감
았는지 먼지 때가  절어 머리카락이 엉겨붙은 모습이었다. 윤이보다 한  살이 적
은 조카딸은 좁쌀과 보리가 섞인 밥을 보더니 죽이 아니라고 좋아 어쩔 줄을 몰
라했다. 그러나 윤이는 공기에 담긴 좁쌀을 구경만  하다가 한두 번 떠먹더니 숟
가락을 놓았다.
  “야가 조밥이 망했는기래유. 깨적기리기만 하구 먹질 못하네유.”
  동서가 윤이를 보고 말했다.
  “배가 불러 그리니 놔둬 동세.”
  내가 윤이에게 눈을 흘기고 말했다.
  “이건 밥이 아니야!”
  윤이가 볼 부은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어른들의 민망한 눈길이  윤이 쪽으로 
쏠렸다 사라졌다.  순간 나는 윤이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근이가 놀란 
눈으로 나와 제 누이를 바라보았다.
  “지즈바가 뭐이 잘났다구 밥이  아니래? 지가 무슨 고대광실에 태어난 줄 알
어? 돼먹지두 않은 기 꼴값하구 지랄이래!”
  내가 낮은 소리로 욕했다. 윤이에 대한  반응이 지나치다는게 느껴졌지만 나는 
아이 핑계로 쌓인 울화를 내뿜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내 맘도 편치 않았다.
  “윤아. 아부지한테 와!”
  남편이었다. 윤이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벌떡 일어나 사랑방으로 올라갔다. 
보나마나 그는 쌀이 많이 섞인 자기 밥을 윤이에게 먹일 것이었다.
  “지까짓 게 뭐라구 조밥 이밥을 가레? 안죽 배가 덜  고파서 그렇지! 배가 고
파 봐유. 좋구 나쁜 기 어딨너! 썩은 개 다리는 못 먹어유? 저 지즈반 즈 아부지
가 다 망궈놨어유.”
  내친 김에  나는 이렇게 남편까지  싸잡아 욕을 했다.  시어머니가 그만하라는 
표시로 내 팔을 꼬집었다.
  “지즈반 오냐오냐 해서 키우면 팔자가 안 좋다잖?”
  “아무리 받들어 키워봐야 남의  집에 가면 벨라너?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가 
어디루 안 가.”
  시할머니들이 작은 소리로 한마디씩 했다.
  “그런데 저 아범이 딸에게 하는 기 꼭  할머이가 아범 어릴때 해주듯 하네야.

  “어머니가 시방은 안 그래유?  아범이야 클 때두 우리하고 다르게 먹구 컸지
유.”
  “그 생각 안 나너? 아범 어릴  때 산삼을 먹여서 그 실하던 몸이 다섯 달 반
을 앓구 반쪽이 되잖었너.”
  “우리 큰아범 밸은 어머니가 키운 기래유.”
  시할머니들 말에 시어머니가  받았다. 남편이 자손 못 보는 집에서  태어나 할
머니 손에 옥이야 금이야 하게  컸다는 소리는 이미 들어 알았지만 손가락 만한 
산삼을 먹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이날 저녁을 먹고  나서도 우리는 밤늦도록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밤이 이슥
해지자 남편이 막국수 타령을 했다. 바로 우리  집 앞에 사는 맹서방네가 부엌에 
국수틀을 걸어놓고 메밀국수를 눌러  판다고 했다. 우리는 `어멈 들어온 기념`이
라고 식구수 대로 국수를 눌러다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었다.
  “그래두 코앞에 국시집이 있어놔서 잘됐어유.”
  동서가 뼈 있는 농담을 했다. 여자들이 킥킥 웃었다.
  “우리 시숙님  요새두 그 버릇 남  줬을라구. 죽은 것처럼 자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굽굽하다구  인절미 해라, 두부 해라,  국수 눌러라, 어느  영인데 안하구 
배긴?”
  시어머니가 남편의 큰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속이 아덜과 한가진 기 뭘.”
  우리들은 남자들  흉 한 가지씩 봤다.  모두들 다른 마을 다른  성씨네서 나고 
자라다 이 집으로 시집을 와 이 집 식구가 된 여자들이었다.
  국수를 입에 대지 않던 윤이가  내 옆에 와서 붙어앉더니 고개를 꼴딱꼴딱 꺾
으며 졸기 시작했다. 위방에 자리를 해놨다
고 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불노랑 색인 조카딸은 눈이 양키 
인형보다 더  커서 얼굴에 커다란 구멍이  패인 것처럼 보였다. 그  애는 자기와 
말씨가 다르고  입은 옷도 다른 윤이  옆에 앉아 윤이의 옷깃을  훔치듯이, 불에 
데일 듯이 만지작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제 어머니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
다.
  “어머이 배 터지면 동상이 그 안에서 죽어!”
  작은 시할머니가 느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잠탱이가 눈이 기름 반대기  같은 걸 보니 못 보던 성이 와서 좋은 기래
유.”
  동서가 딸의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가려주다가 손톱에 박힌 이를 꺼내 손톱 
사이에 넣고  죽였다. 피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여기두  이네, 하면서 
쉴새없이 이를 잡았다.
  “동세, 내가 미군부대서  나온 이 잡는 약을 가져왔으니 내일  아주 벗겨놓구 
약을 뿌려주게.”
  “이 지즈반 이가 벨락시룹게 많어유. 난 안 그랬단데.”
  동서가 말했다.
  “야덜은 이가 없을 기여?”
  시어머니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보며 말했다.
  “시상에 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대유?”
  “벨락시룹게 피가 달달한 사람이 있다잖?”
  “그래기다, 우리 친정 올케는  모기두 안 파먹잖우. 피가 사람마다 다 다른가 
봐유.”
  해방되고 헤어져 거의 7년 만에 다시 만난 우리 여자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
다. 시어머니는 머리를  긁다가 손톱에 끼어 나온 이를 잡았고  큰집 시할머니는 
치마를 걷고  속바지까지 뒤집어 이를  잡았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석유 
등잔 불은 쉬지 않고 흔들리는데 노인들은 눈도 밝았다.
  “이제 그만 자게! 어멈두 어덜두  진종일 오느라니 여북 되겠너. 그만하구 재
우잖구, 오늘만 날이겠너?”
  건넌방에 누워 있던 시할머니가 말했다.
  “푸우푸우 푸레질을 하구 자더니 언제 일너나셌너?”
  시어머니가 혀를 낼름  내놓고 일어서며 우리들에게 말했다.  시어머니는 너무 
허리를 굽히고 살아서 허리를 굽히는 게 버릇이 되었다.
  우리 여자들은 한꺼번에 마당으로  나가 어둡고 넓은 마당 이쪽저쪽에서 아무
렇게나 치마를 걷어올리고 오줌을 누었다. 하늘엔  별이 가득하고 은하수가 강물
처럼 가로질렀다.  달이 없는 그믐이라도  별빛이 어슴푸레 비춰서  장님 시늉은 
면하게 했다.
  “사방에서 좔좔좔 하니 땅  속에서 굼뱅이가 얼매나 놀라겐? 즈덜두 앗 뜨거
워 안하겐?”
  동서가 말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킬킬 웃었다.
  “야, 굼뱅이가 땅 속에 사너? 썩은 지붕에 있지!”
  작은 시할머니가 말했다. 사랑방에서 벙어리 아저씨의 기침 소리가 났다. 시어
머니는 제일 먼저 다람쥐처럼 방으로 들어갔다.
  “성님유, 그럼 들어가 쉬세유.”
  동서가 인사했다.
  “동센 어디메서 자너?”
  내가 물었다.
  “우린 뒷방에서 살어유.”
  동서는 이렇게 부엌으로 해서 고방 옆에 붙은  뒷방으로 갔다. 나는 방문 여닫
기는 소리를 듣고 방으로 들어갔다. 시어머니는  오랜만에 만난 우리를 봐주려는
지 그 사이 잠든 아이들을 당신이 데리고  자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을 
안아서 윗방에다 눕혔다.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도 아이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여자덜은 웬눔으 말이 그렇게 많너?”
  자는 줄  알았던 남편이 이렇게 말하며  곁에 눕는 나를 끌어  당겼다. 억세고 
거칠고 우악스런 손길이 낯설지 않았지만 나는 장지문 저쪽에 신경이 쓰여 그이 
손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래도 남편은 내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맨살을 더
듭기 시작했다. 나는 재체기가 나는 시늉을 하며 일어나 앉았다.
  “여보, 당신이 그래  여기서 살자구 날 오라구 한 거래유?  이 좁아빠진 데에 
식구는 대관절 얼마래유?”
  나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에 생긴 불만을 말했다.
  “누가 들어오랬어?”
  남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울화가 확 치밀어올랐다. 하
지만 기가 막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편도 말이 없었다. 그러나 우
리는 더 이상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당신이 날 보구 뭐라구 하구 왔어유. 내가  들어갔다 보름만에 안 나오면 나
보구 집 팔아서 아주 들어오라구 했잖우.”
  나는 울음이 나올 것만 같은  걸 참고 겨우 말했다. 그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누더기를 입은  식구들, 쌀알은 보이지도 않는  밥, 고춧가루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김치, 너무도 많은 식구들....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걱정만 앞섰다. 언제나, 
우리의 앞날은 당신이 망가뜨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할머이만 보구 돌아설 생각이었지 나두. 할머이가 하두 보구 싶으니. 그렌기 
여기 오는  질루 눌러 앉았어. 고뿔두  아니구 온 삭신이 쑤시구  결리는데 증말 
죽겠더라구. 하루 이틀 그리다 말겠거니 했지 누가 이렇게 못 일어날 줄 알았너. 
이런 몸살은 난생 첨 걸려봤으니.”
  남편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어떤 변명도 다 듣기 싫었다. 거푸 낮은 
한숨을 쉬고 남편은 베개 위에 자기 팔을  끼워 목을 높이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방에서 이상하게 그의 눈이 보였다.
  근이가 몸부림을 치더니  덮어준 이불을 걷어찼다. 근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다 
보니 바지 사이로 바짝 올라선 자지가 만져졌다.  아이를 일으켜 오줌을 뉘고 다
시 눕혔다. 윤이가 잠꼬대로 떼쓰는 소리를 몇 번 내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남편의 옆에 누웠다.  담 타넘듯 숨도 죽이고 끼여
들었다.
  “집은 어떻게 했어?”
  이제 잠이 들었겠거니  여겼는데 남편이 불쑥 말을 해서 깜짝  놀랐다. 목소리
를 들으니 잠을 잔 것은 아닌 듯했다.
  “안죽두 안 잤어유? 내일 고단해서 어찔라구.”
  나는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웬일인지 엊그저께는 맘이 이상해져 그냥 나가구만 싶더니”
  남편이 중얼거렸다.
  “내가 집이 안 팔렸으면 여길 어떻게 와유.”
  나는, 퉁명스럽게 뱉었다. 남편이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내게 등을 보이고 
돌아누웠다. 그의 실망이  찬물처럼 느껴졌다. 불현듯 그가 측은해  보였다. 질이 
나쁜 종이에 엽연초를  말던 남편이 떠올랐다. 자기도 사람인데 설마  여기서 살
고 싶었을까. 숱 많고  검은 머리에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기고  휘파람을 불며 돌
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달 반 사이에 아주 까칠한 촌사람으로  변했다. 그
의 말대로 몸이  아파 못 나왔을 것이다.  어디 가서 터를 잡고 살  만하게 되면 
이렇게 팔아치우게 되는 것도, 정히 ` 우리 맘` 이 아닐지 몰랐다.
  “집을 언제 내놨다고 그새 팔래?”
  더 이상 말할 것 같지 않던 남편이  불쑥 뱉었다. 그가 무엇인가를 의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유, 나 절대루 원망하지 말어유. 난 고향에 성공해서 들어오자구 그랬지 
그냥 살러 가자구는 입두 짹 한적이 없는 사람이래유.”
  나는 그가 내게 원망을  할까 지레 겁이 나서 도장 박듯  말했다. 그러자니 자
연히 목청이 커진 모양이었다. 안방에서 헛기침을 하는 사람은 시아버지 같았다. 
나는 이내 찔끔해서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 덮었다. 매캐한 먼지내가  코로 스며
들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김장 준비한다고 배추를 들여놓았
던 것. 남편이  나오지 않더라도 한겨울을 날까 생각했던 것을  여차하면 말하려
고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렇게 집이 날래 팔렸단 말이여?”
  집안이 고요해졌을 때, 다시  남편이 말했다. 그는 피곤해서 가래가 끓는 목소
리였다.
  “그럼 내가 지금 거짓불 했을까봐 물어봐유?”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이렇게 대꾸했다. 남편이 마른침을 삼켰다.
  “누가 거짓불이란?”
  조금 뒤에 그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똑같이  실망과 원망
의 맘을 품고 등을 대고 잤다.   더 이상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만 화
풀이를 못하는 게 답답한 것이었다.
  우리는 걱정 때문에 아마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어멈은 밤에 잠을 잤너?”
  아침에 부엌으로 나가니 시어머니가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리고 시어머
니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서둘러 동사로 아침밥을 하러 갔다.  마당을 쓸고 난 
오촌 아저씨가  마른 솔가지단을 앞이  안 보이게 들고  부엌으로 들여다놓았다. 
내가 시집왔을 땐 어린아이였던 사람이 그새  꼴머슴으로 컸다. 동서가 우물에서 
보리쌀을 씻어가지고 나를 보고 웃더니 말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릴  간다데이만 그 말이 딱 맞어유. 웅굴에  쌀 씻으로 갔더
니 날 보는 사람마둥 맏동세가 돈을 얼매나 벌어왔더냐고 물어서 혼났어유.”
  나는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마솥에 솔가지로 불을 땠다. 늦잠꾸러기 
윤이가 부엌으로 나와 아궁이 앞에  앉아 탁탁 소리내고 타는 마른 솔가지를 들
여야보았다. 조카도 눈을 비비며 나와서 윤이 옆에 앉았다. 곧 근이가 나와서 누
이들 옆에 쪼그리고 앉아 불구경을 했다.
  “야덜 좀 봐유. 꼭 삥아리 새끼덜 같잖아유? 쪼르라니 앉은게 우스워 죽겠네. 
느덜 뜨겁지두 않너?  비켜라. 갈가쳐서 줄겠네. 야덜이  왜서 하마 깨어나 애를 
말구너?”
  동서가 불길이 바깥으로 나온 아궁이에 나무를  쑤셔넣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한바탕 웃었다. 어젯밤 살아갈  것이 막연해 화가 나던 것
과는 딴판으로 저런  것들 배불리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지 하는 생각이 들자 
기운이 났다. 집안을 둘러보려고  뒤란으로 나가봤다. 새 짚으로 이엉을 이어 두
른 김치헛간이 정겨웠다. 고방도  궁금했다. 가을 농사 추수 끝이니 그래도 풍족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고방에는 커다란 두멍과  드럼통에 살이 들었을 뿐 볏
가마니는 보이지 않았다. 자질구레한 독이 몇 개  놓였지만 몇 말 안되는 잡곡들
이었다.
  “이거 봐 동세, 쌀이 이게 전부너?”
  “그게 전부래유.”
  동서가 대답했다.
  “이걸루 저 많은 식구덜이 일 년을 먹구 살 수 있너?”
  나는 기가 탁 막혀 이렇게 물었다. 
  “그래기다 말이래유.”
  동서가 대답했지만 내겐 왠지 태평하게 들렸다.
  아침을 먹고 났을 때 시할머니가 나를 따로 불러 이런 말을 했다. 
  “니가 없는 집  맏이루 왔으니 당연히 맘이 쓰이겠다만 어찌너.  보다시피 식
솔은 버글버글하구. 햇곡  날 때까지 살 일이 걱정이다만 시방  야양에는 그래두 
우리만한 집두 없는 줄 안다. 세월만 사납지 않으면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칠라구. 
낭구두 부지런히 해다 팔구 작은 아범두 우차를 보니, 맘 놓거라.”
  시할머니가 말했다. 그  사이 동서가 고방을 보고 걱정한 나를  고자질했을 리 
없는데 시할머니가 내 속을 꿰뚫은 것이었다.
  “걱정 하나두 안 해유.”
  대답은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하고 할머니 앞을 물러나왔다.  벙어리 큰시할아
버지는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고 한쪽에선 시아버지가  가마니를 쳤다. 나는 혼자
서 장거리 구경을  나갔다. 찢어질 것처럼 청명한 초겨율 햇살에  드러난 양양의 
정경은 내가 잠을 설치고 걱정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양양읍이라면 서울살이
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늘 부럽기만 하던 ` 읍내` 였다. 그런데 폭격에 무너지고 
부서지고 불에 탄 양양읍이라면 서울살이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늘 부럽기만 하
던 ` 읍내` 였다. 그런데  폭격에 무너지고 부서지고 불에 탄 양양읍은 쑥대밭이
었다. 난리 전의  읍내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 사는 집이라곤 
불탄 자리 부근에 아무렇게나 허둥지둥 지은  막사리 우데기뿐이었다. 거기다 죽
은 사람, 이북으로 올라간 사람, 이남에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으로 인구가 반 이
상 줄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디고 휑한 기운이 돌았다. 우리집처럼 이북 
정치에 가담하지 않고 월남을 했다  돌아온 집엔 기세가 등등한 성한 남자가 있
어서 제대로 된 제목을 들여 집을 지었다.  하지만 남편과 자식이 인민군이나 이
북으로 들어가서 여자만 남고 노인만 남은 집은 보기 민망했다.
  그래도 장은 정겨운 모습이 살아 있었다. 우전  쌀전 어물전 옹기전 떡전 포목
전들. 일정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아졌지만 장은 장이었다.
  장 구경을 다녀와서 시할머니에게 떡장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남새시룹게 뭔 떡장사를 한다구 기리너?”
  “장사는 아무나 하는 기 아니란데?”
  시할머니들이 말했다. 그래도 나는 허락을 받아 장날마다 송편을 빚어 팔았다. 
쌀 한 말 어치를  팔면 곱이 떨어지는 장사였다. 이렇게 해서  우선 동서의 해산
을 위한 미역과 아이 포대기,  기저귀 등을 준비했다. 집을 팔고 장사를 해서 모
아온 돈은 시아버지께 드려  논밭을 사기로 해서, 우리는 있는 돈은  쓰는 게 아
니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밥에는 말린  배추잎과 무잎을 섞어  먹었다. 밀기울을 버무려  밥에 섞어먹고 
남자들이 해온 칡을 먹었다. 오래도록 먹지 않던 굴암쌀도 다시 먹게 되었다. 이
렇게 먹는 것이 어려운  때, 아침 저녁으로 부엌 앞에 거지들이  한둘이 넘게 와
서 동냥을 했다. 밥이 없으면  김치나 장을 주어 보냈다. 난리에 가족을 잃은 아
이와 할머니, 그리고 이북 피난민들이었다. 이웃 속초엔 피난민들이 떼를 이루고 
살았다. 거기다 부둣가에 미군부대가 있어서 양양보다 더 번잡하다고 했다.
  남편은 눈이 내리자 동네 남자들과  사냥을 가고 덫도 놓아 산토끼나 꿩을 잡
아왔다. 이렇게 겨울을 지내는  동안 남편이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속초 미군부
대에서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속초로 면접을 하러 갔던 남편이  아이들 먹일 찐빵을 사들고 기쁜 얼굴로 돌
아왔다.
  “됐지유? 언제부터 나가게 돼유?”
  나는 남편을 마중하며 물었다. 어떻게 됐는지 알아?  이런 얼굴로 나를 쳐다보
던 남편이,
  “속초에 방을 얻어놓구  왔어. 내일버텀 당장 나와 일을 하라는데  하루만 달
라구 했지!”
  하고 말했다. 나는 너무 기뻐서 말도 잊고 남편을 쳐다보기만 했다. 역시 남편
이 인물값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미군부대가 얼마나 좋은 데인가, 
나는 순식간에 무지개 같은 꿈을 상상했다.
  “날보구 통역을 하래서 식당에 넣어달라구 했어.  풀밥이라구 밥 안처먹구 투
정하는 윤이란 년 생각하니... 식당에 있으면 아무래두 먹을 기 흔할 테니.”
  남편이 말했다. 내 생각에도 통역관보다는 식당 일이 나을 것 같았다.
  이날 저녁, 남편이  취직되었다는 소식을 식구들이 모두 알게 되자  집안은 모
처럼 생기가 돌았다.  동사에서 저녁 일을 끝내고 돌아온 시어머니는  부엌에 있
는 나와 동서에게 뻐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범이 어떤 아범이너!”
  나는 가마솥을 씻다 말고 시어머니를 쳐다봤다.  나보다 키가 작은 시어머니가 
어쩌면 그렇게 커 보이던지. 
  “동세! 자네두 야  이번엔 꼭 아들 낳게! 여자는 아들이  있어야 기죽지 않구 
산다네.”
  시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내 귀에조차 차디차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님, 그걸 말해  뭐해유. 그래두 지는 걱정  안해유. 딸은 어머이 닮는데우. 
우리 어머인 아들이 많아 딸 하나 더 낳구 싶어하다가 그만 시상 베리구....”
  동서가, 아들 많고  딸이 귀한 집안 내력을 들추다 공연히  친정어머니만 떠올
려 울컥 치미는 서러움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내겐  동서의 말이 아
들을 기르지 못한 내 친정어머니를 빗대는 것 같아 맘이 상했지만 참았다.
  “어멈아, 장간은 담아놘?”
  시어머니가 부엌문을 펄떡  열어젖뜨리고 큰소리로 물었다. 내가  동서의 얼굴
을 쳐다봤다.
  “얼매나 퍼담그래유?”
  동서가 물었다. 성질 급한  시어머니가 맨발로 나와 신을 신으며, 씨이파알 앓
느니 죽는 기 낫지, 하며  허리를 구부린 채 뒤란으로 나갔다. 내가 놀란 눈으로 
동서를 쳐다보자 동서는 머리를 내두르며 말했다.
  “매렌이나 잇는 줄 알어유? 당신 성질이  저래서유, 같이 있으면 들들 볶아싸
서 질레 말라 죽어유.”
  그건 그랬다. 우리는  설거지 끝내고 천천히 속초에 내갈 간장이며  고추장 된
장을 오갈 단지에  담을 생각이었다. 시어머니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를 쉴새없이  웅얼거리며 장 담은  단지를 부뚜막에 올려다놓았다.  동서는 장이 
묻은 단지 아가리를  담아 부뚜막에 올려다놓았다. 동서는 장이 묻은  단지 아가
리를 담아 뚜껑을 덮었다. 임시로 밥이나  끓여먹을 살림인데오 이것저것 필요한 
걸 싸니 한짐이 넘었다. 제사 때나 쓴다고 귀하게 담아놓은 찹쌀도 덜어냈다. 우
리가 대충 마무리를 할 때쯤 시할머니가 나와서 살펴보았다.

  다음날, 시할머니와 시아버지,  남편과 내가 짐을 나눠들고  속초로 나갔다. 속
초에서 양양으로 다니는  버스는 아침으로만 있었는데 군인  트럭이었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남편이 얻은 집이 있는 부대 근처로 걸어갔다.
  속초는 예전의  모습과 딴판이었다. 거리를  걷다보면 귀에 들리는  말이 이북 
사투리였다.
  “여긴 맨 이북 사람덜 천지잖어유?”
  내가 물었다.
  “함경도 사람덜이 고향 가차운데  있다가 해방되면 눌러 들어간다구 말짱 속
초루 나앉었다네.”
  시할머니가 말했다.
  “말짱 1.4후퇴에  밀려내려완 사람덜이여. 주문진  묵호루 내려갔던 사람덜두 
다 속초루 들어온다니 인총이 늘 수 밖에.  누가 속초 나릿가가 이렇게 번잡스러
워질 줄 알았겠너. 사람 못  살데루 알던 기 이렇게 됐으니, 그래서 옛말에 상전
이 벽해가 된다구 안헨?”
  시아버지가 말했다. 부대가 가까워지자 분위기가 달랐다.
  극장과 다방 간판, 밤일을 한 갈보들이 보였다.
  “즈 아부진 좋겠네유.  극장이 있으니 좋아하는 영화 보구,  다방에두 다니구.

  내가 남편이 듣게 말했다. 남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방 한큰을 세 얻은 집은 불에 타지 않은 조선 기와집이었다. 1.4후퇴에 
타지 않은 것이 궁금해 이유를 알아봤더니 집주인이  경찰이라고 했다. 이 집 부
근엔 미제 깡통을  펴서 조각조각 붙여 지붕을  씌운 판잣집이며 레이션 박스로 
지은 움막들뿐이었다.
  저녁에 시아버지와 나는 다시  양양으로 나오고 시할머니는 남편의 밥을 해주
기 위해 속초에  남았다. 남편은 시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웃드루에서  학교를 다
닐 때나 얼롱골 철광에 다닐 때도 할머니와 함께 살아서 불편한 걸 몰랐다.
  나는 다시 임신이  되었는데 석 달이나 지나서야 알았다. 이번에는  입덧도 늦
게 시작되어 월경이  없어도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속초에서 돌아
와 며칠 지나지  않아 구역질이 심해졌다. 살림이 빠듯한데 아이를  가진다는 게 
뻔뻔하게 느껴져 부끄러웠다.  그래서 누가 있을 땐 구역질을 참고  숨어서 게웠
다. 잠들기 전엔 온통 돈벌 궁리만 머리에 꽉 찼다. 남 보기에 배부른 티가 나기 
전에 한푼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남편은 토요일 저녁에 할머니를 모시고 양양으로  들어왔다. 아이들 준다고 과
일 통조림과 오렌지를  주머니에 넣어왔다. 윤이와 근이는 낮설지 않은  양키 음
식에 입맛을 다시며 좋아했다.
  “이런 거 아무나 못 가져 나와. 헌병덜이  까다롭게 뒤지는데 난 몇번 그리더
니 그냥 내보내 주니 그렇지.”
  남편이 말했다.
  “우리 아범이야 누가 보던 점잖지 않?”
  할머니가 말했다.
  “그기 꾸준해야지유 뭘.”
  내가 웃으며 말하자  알아들을 수 있는 식구들은 빙그레 웃었다.  남편이 오면 
우리집은 그 많은 식구들이 갑자기 활기를 찾았다.  뭔가 긴장을 하게 되는 것이
었다. 우리를 긴장으로 생기  있게 만드는 사람은 남편뿐이었다. 그의 기분이 나
쁘면 움츠러들고 구가 기분이  좋으면 모두들 조금씩 들떴다. 이날도 그랬다. 남
편이 들어오는 토요일  저녁엔 그를 맞이하기 위해 별식을 했다.  인절미나 두부
는 못해도 구호물자로  받은 밀가루에 소다를 넣어 찐빵을 했다.  시어머니는 윤
이와 근이를 쇠여물 솥에 손을 불리게 해서  짚으로 밀어 손의 떼를 벗겨주었다. 
아이들이 아프다고 울면,
  “요년어 종자 간나야.  아부지가 오면 더러운 손모가지 보여줄란?  이렇게 때
가 묻어 쇠똥같이 더러워졌는데 안 닦어? 에이 더럽다 퉤!”
  하고 아이들 손에  침을 뱉고 때리면서 씻겼다. 일주일에 한번씩  우리 아이들
은 임금님을 모시는 행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날 밤, 잠자리에 들어서였다.
  “어이, 부대에 일자리가 있는데 들어와 해볼란?”
  남편이 내게 말했다. 귀가 번쩍 뜨였다.
  “뭔 일이래유?”
  나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미군덜 군복 수선을 해주는 건데 월급두 받구 따루 수선비두 받는대.”
  “여보! 생각할 기 뭐래유? 당장 해야지유.”
  “니가 자방을 돌릴 줄 아너?”
  “그까짓 거 배우지유! 누군 어머이 배에서 배워 나왔어유?”
  “그저 잘난 체 하는 건, 조선팔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거다!”
  남편은 일 욕심 많은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당신 그거 꼭 붙들어유! 이 많은 식구가 보릿고개 날 생각하면, 아이구 자다
가두 벌떡 일어나게 되유!”
  내가 말했다. 남편은 웬일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장만 쳐다보았다.
  “당신 꼭 잡아놔유. 누가 못 들어가게유.”
  내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다음날, 남편은 오후 차로 속초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옷을 입으며 내게 우울
하게 말했다.
  “부대 일은 까져먹는 기 좋워!”
  “왜서유?”
  내가 총알처럼 물었다.
  “거긴 자방틀을 사가주구 들어가야 되는데, 어림있너?”
  남편이 말했다.  그건 그랬다. 나느 이내  풀이 죽었다. 하지만  그가 돌아가고 
난 저녁에 나는 시아버지에게 이런 일을 상의했다.
  “아버니, 아범이 와서 그리는데유. 부대에서  수선하는 일자리가 났대유. 그런
데 자방틀을 가져 들어가야 한다네유.”
  입이 무거은 시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미제 통조림  깡통에서 잎
담배를 집어 손으로 비벼서 누런 종이에 말기만 했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우리
는 서울에서 벌어온 돈을 시아버지에게 맞겼고 그것으로 얼마 전에 토지를 사는
데 썼는데, 지금 얼마나 남았는지 몰랐다.
  “자방틀이 여북 비쌀라.”
  담배를 만 종이 끝에 침을 발라 여미고 나서 시아버지가 중얼거렸다.
  “그걸 새 거루야 살 수 있너유? ‘인장표 싱거’라구 있잖어유? 그거 중고래
두 좋워유. 그걸 사서 부대를 들어가면 돈은 벌 거래유. 아범아고 지는 서울에서 
줄창 미군부대 댕겨 돈을 벌었잖어유.”
  시아버지가 부젓가락으로 뽀얗게 재가  덮인 화로를 뒤적이더니 성냥 끝에 붙
은 황만한 불덩이를 집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곧 담배 냄새가 퍼졌다.
  “부대에 들어만  가면 돈벌 건 쌨어유.  비누만 빼내 팔아두 먹는  건 해결이 
돼유.”
  내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이렇게 말했다.
  “글쎄 어멈 말이 옳겠다만 시방 돈이 될라너  모르겠다. 하여튼 낼 장에 나가 
알아보마.”
  시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나 양양에는 팔겠다는 재봉틀도 없었지만 어떻게 하나나온 인장표 싱거는 
물어본 것이 민망하게 비쌌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헌 
재봉틀을 산다는 소문을 냈다. 이틀 후에 누가  이름 없는 중고 재봉틀을 소개했
다. 그렇지만  시아버지가 준 돈으로는 어림이  없었다. 그래서 비상시에 쓰려고 
꿍쳐두었던 금반지를 한냥 되게 꺼내 금은방에 내다  팔았다. 주인은 돈을 셀 수 
없어 저울로 달아주었다. 집에와서 한참 세어보고  모자라는 액수만큼을 다시 받
아왔다.
  다음날 시아버지와 나는  근이를 데리고 첫차를 타고 속초로 갔다.  방에 재봉
틀을 놓아주고 시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시고 양양으로 들어갔다.  저녁에 부대에
서 나온 남편은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일 들어갈래?”
  남편이 재봉틀을 만져보며 물었다.
  “박을 줄 알아야 들어가지유.”
  “부대선 뭘 하거러  안 들어오냐구 전 성환데 큰일이다 야.  들어올란 사람이 
나래비를 섰는데 그래두 날 봐준다구 기다리는데.”
  남편이 걱정스럼 목소리로 말했다.
  “어뜩하지유? 내가 하루만 어디 가서 배워보면 될  거 같애유. 당신이 어뜩하
든지 하루만 말미를  달라구 해봐유. 자방틀까지 사놓구 일자리 놓쳤다간  큰 낭
패래유. 아버니 가진 돈 아 털어넣었지. 내 반지 팔었지.”
  내가 말했다. 남편이 고개를 갸웃하고 내 말을 듣더니,
  “그기 뭐이 그렇게 어려워서 그리너?”
  이렇게 말하고 재봉틀 앞에 앉아 다리를  밟아보았다. 나는 아랫목에 깔아놓은 
홑이불 속에 발을 집어넣고 찬 발가락을  주무르면서 남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몇 번 움직여보지도 못하고 이내 내려왔다.
  “밥 먹자구 하는 일, 쉬운 기 어디 있어유?”
  내가 말했다. 남편은  마땅찮은 눈길로 흘깃 바라보더니  ‘에이 큰일났는데’ 
하며 혀를 찼다. 걱정이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초저녁잠을 자던 근이가 누
에처럼 고개를 들며 깨어났다.  그 애는 내가 재봉틀에 빠져 있는  게 싫어 한동
안 옆에 와서 치근덕거리다가 소용이 없자 그냥  잠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잠이 
들어버린 그 애를  오래도록 잊고 재봉틀에 매달려 있었는데, 근이가  제 아버지
와 내 눈치를 살피더니  기어서 내게로 왔다. 나는 오줌을 눌  때가 되었나 우선 
고추를 만져보았다.
  “엄마. 쉬이! 쉬이!”
  내가 고추를 만지자마자  근이는 바지 가랑이를 잡고 발을 굴렀다.  나는 마음
이 급해 아이의 오줌 깡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이구 오줌 깡통이 어디루 갔너? 여기메 있었는데."
  하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섯 자 좁은  방 안에 있을 깡통이  도무지 눈에 
띄지 않았다.
  “이 새끼가 늘 이 모양이잖!”
  남편의 고함이 들리며  철썩!하고 아이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에 소름이 
끼쳤다. 머리가 팽 돌았다. 아무리 거둬먹여도 잘 자라지 않아 보이는 어린 아들
을 도대체 어디 때릴데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자기 자식에게. 남의 자식이라도 
차마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나는 정신없이  아이에게 깡통을 들이댔다.  아이는 겁에 질려  울지도 못하고 
오줌을 흘려 앞이 젖은 바지를 붙잡고 있었다.
  “사내새끼가 똑똑치 못하게 오줌 하나 못가리구!”
  남편은 흡사 아이가 스무 살이나 먹은 청년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근아! 그래기 엄마가 뭐래. 오줌이  마려울 것 같으면 미리미리 말하라구 그
리지 않언? 다음부터 엄마 말 꼭 들어. 알았지?”
  나는 화를 삼키며  가여운 아들에게 말했다. 아이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안
으로 말아들였으나 자꾸만 입술이 뿔룩거렸다.
  “알긴 뭘 아너? 저 새낀 사람되긴 싹수가 글렀으니 두구봐!”
  남편은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뭔 말을 그렇게 해유? 남이 들으면 야를 어디서 주워온 자식으루 여
기겠네유!”
  나는 입술을 깨물며 겨우 이렇게 말했다.
  “두구 보면 알 기 아니너. 사람 구실 하너 못하너!”
  “이제 야가  세 살이래유. 아무리 미워두  자식을 놓구 그런 악담을  하면 돼
유? 너무 미워하지  말어유! 내가 미우면 미웠지  야가 뭔 죄가 있다구  그래유? 
야가 외탁을 했다구 시어머이두 미워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유?”
  나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남편은  핑계를 잡은 사람처럼 외출을 했다. 그가 방
을 나가니 살  것 같았다. 아이도 내 맘 같은지  금방 생기가 돌아 밥을 찾았다. 
아랫목에 묻어둔 밥은 아직 미지근했다. 김치쪽 한가지 반찬이지만 상에 담았다.
  “근아, 꼭 출세해야 된다. 알았너? 엄마가 뼈가 가루가 되두록 닐 가르칠테니 
보란 듯이 잘 되거라. 느  외가는 얼매나 잘난 줄 아너? 느 아부지네 하군 달러. 
니 외삼춘은 천재라구 골짝이 다 들먹했다.”
  나는 김치쪽을 이로 잘게 쪼개 밥 위에  얹어 먹이면서 말했다. 아이가 알아듣
거나 말거나 그랬다. 근이는 몇  번 받아먹더니 밥을 뱉었다. 어쩌다 내 맘이 다 
후련하게 먹었다 싶으면 꼭  설사를 했다. 상을 치우고 다시 할  줄 모르는 재봉
틀에 앉았다. 근이는  재봉틀 다리에 얼굴을 대고 움직이는 내  발을 잡아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그 애는 제풀에 앉은  자리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근이가 
잠이 들자 나는 더 열심히 박음직을 했다.
  “큰 기술자 나겠다!”
  보나마나 영화관에 갔었을 남편이  돌아와서 아직도 재봉틀에 매달린 나를 보
고 농담을 했다.
  “안 되겠어요. 피양집 성님네 가서 배워야지.”
  “양양의원 마누라?”
  “아주머니뻘인데 마누라가 뭐래유?”
  “안 듣는 데선 나랏님 욕두 하는 법이여.”
  남편이 말했다. 그는 재봉틀 옆에 웅크린 아들은  그대로 두고 혼자 자리에 누
웠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나는 먼 친척 되는 양양의원 원장 부인에게 
엿을 사들고 찾아갔다. 부잣집이라 집안에 재봉틀이 있었다. 
  원장 부인은 사람이 좋았다. 내가 재봉을 하는  동안 근이가 부산하게 방 안을 
돌아다니며 작폐질을 쳐도  언짢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가서 저녁
이 되도록 기본적인  것을 배우고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커다란  부자기가 박음
질 자국으로 뻣뻣해  질 때까지 연습을 했다. 저녁을 먹으려고  일어서는데 눈앞
으로 별이 비오듯 쏟져  내렸다. 그렇지만 가슴이 뻐근하도록 기뻤다. 나도 기술
자란 생각을 하면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제 밥 굶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나는 여태 혼자 놀고  있던 근이를 가슴에 끌어안고  마구 볼을 
비비고 입을 맞췄다.
  “당신은 하여간에 독종이여!”
  퇴근한 남편에게 자랑을 하자 그가 말했다.
  “지독하게 해야 자식들  가르치지유. 생기는 대루 낳아만 놓으면 그기  뭐 부
모라구 할 수 있대유?”
  그래도 ` 개 돼지나 똑같지유` 라는 말은 입 안에서 삼켰다. 
  다음날, 나는 남편과  함께 출근을 했다. 재봉틀은 남편이  짊어졌다. 첫날이라 
아이를 데려갈 수  없어 근이를 주인집에 맡기는데 맘이 놓이지를  않았다. 그래
도 할 수 없었다.
  바닷가 옆의 넓은 벌에 있는 미군부대는 여러  개의 막사로 되어 있었다. 보기
에도 무서운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는데 입구에는 미군과 한국 사람이 함께 보초
를 서서 들어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익숙한  미군부대였어도 공연
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굿 모닝! 쉬즈 마이 와이프!”
  남편이 보초에게 말했다. 미군이 뭐라고 반가운  목소리로 지껄였지만 나는 알
아듣지 못했다.
  내가 일할 세탁부는 입구에서 첫번째로 있는  막사였다. 그곳에 들어가자 남편
을 아는지 모두들  인사하며 반가워했다. 우선 재봉틀을 제자리에 놓고  높은 사
람한테 인사를 다녀왔다. 남편이  일하는 식당은 깊이 들어가야 했다. 그는 미군
들과 함께 생활했지만  내가 있는 세탁부엔 전원이 한국사람 이었다.  여자는 재
봉을 하는 나  말고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지금은 이북 땅이 된  고성 여자인데 
과부였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이북 피난민들이었다.  인민군에서 이곳에 떨어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름  있는 이북의 중학이나  대학에 다니던 
청년들이었다. 이남엔 연고가 없어서 그들은 세탁부에서  침대롤 놓고 숙식을 했
다.
  첫날 일은 당황해서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계급장을  다는 일이었는
데 흑인 병사였다. 그는 옷을 찾으러 왔다가  내가 내주는 옷을 살펴보더니 엄지
손가락을 추켜들고  ` 나이스 우먼!` 하고  말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갑 꺼내놓고 갔다. 나는 황홀했다. 담배는  돈이었다. 그런데 열 시쯤 되자 일
감이 미어지게 들어왔다. 그  동안 재봉사가 없어서 일이 밀렸다는 것이었다. 나
는 첫 손님한테 칭찬을 들은  것이 보약이 되어 오전 일ㅇ르 거의 실수 없이 해
냈다.
  점심때가 됐다. 아침밥이 불면 호르륵  날아갈 것 같은 ` 알랑미` 밥이어서 겨
우 물에 말아  삼켯는데 점심도 그랬다. 아침엔 배추를 넣은  소금국이었는데 점
심엔 상한 게 분명한 명태국이었다.
  “아주머니, 이거 자시겠어요?”
  다림질을 한다는 한 남자가 밥그릇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내게 말을 걸었다. 
그를 쳐다보았다. 키는 작지만 야물고 선량하게 보이는 청년이었다.
  “사람 먹는 걸 못 먹을 기 있어유?”
  나는 마른 입에 침을 묻히며 말했다.
  “명태가 헤엄쳐서 지나갔네!”
  “주인집에다 아들을 맡기구 와서 정신이 하나 없네유.”
  내가 그저 혼잣말로 했다.
  “몇 살이나 됐는지 델구 댕기지요?”
  누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좋아서 눈을  번쩍 뜨자 다른 남자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거들어줬다. 다음날  나는 근이를 데리고 출근을 했다. 그러나 어디 
붙들어놓고 지낼 수 없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일을 
하는 동안 근이는 바람처럼 막사를 나가 아무 데나 돌아다녀 그 애를 찾느라 애
를 먹었다.
  토요일에 남편이 양양에 나가 시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그리고 우리는 등대  옆에 있는 삽장말룽에 두칸짜리  방을 얻어 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윤이는 양양의 여러 할머니 할아버지의  장난감이어서 차마 데려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쩌다  양양에 나갔다 속초로 돌아올 때면 윤이를  떼어놓는 것
이 큰 일이었다. 같이 가야 한다고 미리 길에  나가 서서 따라오는 걸 억지로 떼
어놓아야 했다.  남편은 그런 윤이를 두고  오면 딸이 보고 싶어  안달을 하다가 
토요일이면 일이 끝나기  무섭게 양양으로 갔다. 차가 없을 땐  걸어서라도 갔다
오곤 하였다. 윤이가 길가에 나와 앉아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일요일 오전, 그는 햇볕이 따사로워지면 윤이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는 모양이
었다. 성내리에서 걸어나와 장거리로 나가 딸에게  과자나 가락엿을 사주었을 것
이고 둘이 남대천  뚝길을 걸어다니면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했을  것이다. 딸이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업어도 주었을 것이고 뚝길에 나란히 앉아 흐르는 개천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윤이는 이때 아버지가 구성지게  불러준 유행가들
은 귀동냥으로 익혀 모르는 노래가 없었다.
  
  나는 부대 생활이  날이 갈수록 재미있었다. 우선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돈이 
벌리는 게 무엇보다  달콤했다. 재봉틀 일은 몇가지만 익히면 되는  단순한 것이
었다. 큰 옷은 줄여주고 무릎같이 잘 헤지는  데에는 다른 천을 덧대고 계급장을 
다는 게 대부분의  일이었다. 내게 일을 맡기는 미군들은 친절하고  인심도 좋았
다. 맡긴 옷을 찾으러 올 때는 그냥 오지 않았다. 담배나 초콜릿 같은 것을 주고 
갔다. 계급이 높은 미군은 동전을 주거나 때로는 일 달러짜리 지폐도 놓고 갔다. 
팁을 주는 건 아주 엄격한 습관 같았다.
  미군부대 노무자들은 하루 세끼를 전부 부대에서  먹었다. 물론 밥은 안남미였
고 반찬은  언제나 한 가지였다. 상해서  검붉은 오징어를 푹 삶아  굵은 소금에 
찍어먹거나 고등어 국을 먹기도 하였다. 우리 세탁부는 바느질과 다림질, 빨래를 
하는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밥은 한데 보여서 먹었다. 나보다  나이가 몇살 
위인 과부 아주머니는 남자들과 잘  어울렸지만 나는 거의 사적인 말은 하지 않
고 지냈다. 처음엔 조각  천에 박음질 연습을 하며 나머지 시간을  보냈고 한 달 
가까이 되어서는 바지나 소매를 줄인 자투리  천을 잇대어 가방을 만들어보았다. 
박음질이 익숙해진 다음엔 재봉으로 양말도 기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어느 날, 다 함께 점심을 먹을 때였다.
  “근이 어머니에 대한 평이 아주 좋습니다.”
  원산에서 농업학교를 다니다 왔다는 청년이 말했다.
  “양키 상병 하나가 아주머니가 쉬고 있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하던데요.”
  그가 말했다. 나는  그의 칭찬이 죄인 것  같아 얼굴이 불화로가 되었다.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밥을 입에 떠넣었는데 그게  꼭 체했다. 체
기가 느껴져 물을  마시고 일어나 재봉틀에 앉아 가슴을 두드려봤다.  하지만 소
용이 없었다. 나이가  더 많아 내가 무조건 형님이라고 부르는  아주머니에게 사
관을 따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아주머니는 내게 묻지도 않고 내게  말을 붙
인 청년을 데려왔다. 죽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재봉틀에 기대고 간신히 `  괜찮
다` 고 말했다. 
  “바늘을 주십시오. 그 전에 전선에서 사관을 따본 적이 있긴한데.”
  그가 말했다. 나는  내 머리가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여전히 고개를 박고 
이를 악물었다. 그가 다른 데로 가는 기미가 느껴졌다. 나는 변소에 가서 손가락
을 넣고 토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다. 진땀이 흘러  앞머리가 축축
했다.
  “이걸 드셔 보세요.”
  다시 그가 와서 내게 말했다. 그는 내게  흰 가루인 소다와 물바가지를 내밀었
다. 더 거절하지 못하고 그걸 마셨다.
  “괜찮아질 겁니다. 소다 가루가 잘 듣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려 했지만 입이 붙어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부대 일을  그만두게 될 때까지 나는 다시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세탁부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  중에 이북에서 내려온 젊은 남자들은 영어공부
를 열심히 했다. 그들 중엔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려는 꿈을 가진 사람도 
여럿이나 되었다. 나는 그런  남자들이 부러웠다. 현재와 전혀 다른 생활을 꿈꾸
고 꾸준히 노력하는  남자. 나는 결혼해서 그때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런 남자들
을 본 적이 없었다.
  그 곳에서의 급여는  월급제가 아니고 격주로 임금을 받았다. 급료를  받을 때 
미군들이 사무를  보는 곳으로 갔다.  미군들은 타원형으로 책상을  놓고 앉아서 
차례로 들어오는 한국인 노무자들에게 돈을 주었는데 우리는 입구에서부터 허리
를 굽히고 들어가 거기 앉은 여러 미군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깍듯이 해야 했다. 
돈을 받는 것이 벅찬 기쁨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들어가 덩치 크고 말이 통하
지 않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  들고 깊이 인사하고 나오는 순간이 언제나 긴장
되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푸르고 커다란 눈에 나란 존재가  얼마나 하찮
은지, 그곳을 빠져나오면 비로소 막힌 숨이 터지곤 하였다.
  우리 노무자들은 청소, 요리,  빨래, 통역까지 하는 일은 서로 달랐다. 받는 급
료나 미군들로부터의 대접도 조금씩 차이가 났다.  세탁 막사에서 한국인 노무자
들끼리 일하는 나  같은 사람이 먹는 음식과  미군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남편이 
먹는 음식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지만 급료를 받을 때, 우리가 미군들에게 몸
과 마음으로 ` 감사함` 을 표현해야 하는 그 야릇한 예절의 엄격함은 똑같았다.
  어느 날, 부대에서 통역을 하는 남자가 우리 막사로 들어왔다. 그는 우리의 일
손이 잠깐 멈추게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꽁초를 줍는 건 이해합니다. 우리가  이땅에 태어날 때부터 꽁초를 
주워야 하는 신세는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하지만 가난하다고  비굴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인간으로는 미군
들과 다를 거 없이  귀합니다. 그러니 자존심을 지킵시다. 우리의 자존심은 우리
로부터 나오지 결코 미군들이 줄 수 없습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꽁초
를 줍더라도 미군들이 보지 않을 때 줍자는  것입니다. 이건 작은 일이지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꼭 실천합시다!”
  그 남자의 말은 다 옳았다. 나는 꽁초를  주워본 적은 없었지만 가슴이 더워졌
다. 그러나 그의 이 옳은  말이 지켜지는 건 아니었다. 미군 장교들의 숙소나 식
당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실어나르는  노무자들은 길을 가다가 미군이 담배를 피
우고 있으면 지켜섰다가 그가 버린 꽁초를 불씨가  채 꺼지기도 전에 주웠다. 그
러면 미군은 걸음을  멈추고 경멸에 찬 눈길로 한국인 노무자를  바라보았다. 이
런 광경은 너무도 흔했다. 한국인을 의심하는  미군들은 음식 스레기를 실어나르
는 드럼통을 휘저어보기도  했다. 어떤 노무자는 그 음식 쓰레기  속에 통조림을 
넣고 나오다가 들켜  해고되는 일도 있었다. 물론 미군들의 음식  쓰레기도 팔렸
다. 그걸 산 장사꾼은 찌꺼기를 마구 끓여  배고픈 사람들에게 팔았고 그건 ‘꿀
꿀이 죽’이라는 이름의  음식이었다. 그걸 먹다 보면 담배에 붙은  필터도 씹히
고 이쑤시개도 씹히고 비닐 조각 종이들오 씹힌다지만 없어서 못 먹었다.
  내가 재봉틀 의자에  앉으면 막사의 네모진 천막 창으로 철조망이  보였다. 오
후가 되면  양갈보들이 두셋씩 철망가로  모여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도 
치마를 젖히고 허연 다리가 다 드러나 보이게  했다. 그러다가 미군이 눈에 띄면 
` 양키!` 하고  불렀다. 재수가 좋으면 그 자리에서  저녁 약속을 받아냈다. 물론 
이런 호객이나 접촉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필요로  하는 만
남은 언제나 법보다 앞섰다. 게다가 이런  여자들은 하루하루가 불안한 갈보살이
를 했다. 그들의  꿈은 정이 많은 미군을 만나  민가에 방 한 칸 얻어 살림을 차
리는 것이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양키들도  많았다. 무조건 우리는 멸시하는 
양키가 있는가 하면 애당초 인종차별을 할 줄  모르는 미군도 있었다. 그래서 어
떤 집은 양갈보된 딸 덕에 온 식구가  뜯어먹기도 했다. 시집가기 전에는 연애만 
해도 혼인을 시키지 않고 심지어는 집안이 모두 이사를 가야하는 풍속도 가난에
는 맥을 추지 못했다. 생각을 조금만 돌리면, 정조라는 게, 참 우스웠다.
  “양갈보 똥갈보야!”
  빨래를 하던 남자 중엔  더러 허리를 펴고 철망가에서 서성거리는 여자들에게 
욕을 했다. 미군을  상대로 벌어먹는 남자와 여자들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서
로 주먹질을 하는 것이었다.
  “저년들 밑구녕이 조선 사람 망신 다 시킨다.”
고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
  “욕하지 말어! 타고난 양갈보가 어디 있다구!”
  이렇게 말하는 남자도 있었다.
  물론 모든 게 다 전쟁과  가난 때문이었다. 음력 정이월, 바람님 달이 되자 속
초는 풍랑이  잦아 가난한 어부들의  생활이 거덜났다. 어디서  일가족이 복어를 
먹고 한꺼번에 죽었다는 소문, 아이들이 바닷가에  밀려나온 복어 알을 주워먹고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속초 나루가  이럴 때, 양양에도  길고 민망하기 그지없는  보릿고개는 봄날이 
되기도 전에 돌아왔다. 설악 대청봉에서 휘몰아쳐  버덩으로 내려오는 인정 없는 
칼바람은 한겨울을 넘긴 간장독도  얼려서 터뜨렸고 웃자란 밀보리를 얼려 줄였
다. 그렇게 추운 날에도 볕바른 흙에는 봄풀이 돋았다. 여자들은 아이 어른 가리
지 않고 눈이 얼기설기 얹힌 밭고랑에서 냉이며  꽃다지를 캤다. 이른 봄에 나온 
어린 풀은 못  먹는 게 없었다. 토요일,  일을 끝내고 양양에 나가보면 보대에서 
맛이 없다고 타박한 고등어국이 생각나 겁이 났다.
  유난히 키가 작은, 작은 시할머니는 아들만  남겨두고 아야진의 홀아비한테 다
시 시집을 갔다. 먹는 입 하나는 덜어버렸지만 아직도 열 식구가 넘었다. 할머니
들과 시어머니, 그리고 시누이는 그때 구호물자를  넉넉히 주는 천주교회의 신자
가 되어서 몫몫이 옥수수 가루나 우유 가루를  배급받아 왔다. 그러나 아직도 윤
이는 우거지나 쑥을  섞은 밥을 잘 먹지 못해  얼굴에 마른 버짐이 먹어 허옇게 
떴다. 아침이면 죽거나 통통한 서캐가 달라붙은  기다란 머리를 우난스레 치장해
서 유치원에 보내고  옥수수 가루에 당원을 섞어 군것질을 시켰다.  이래도 윤이
는 저만 혼자 떨어져 양양에 있는 것을 싫어했다. 
  3월이 되었다. 어느  토요일, 양양 집에 간  할머니가 막연히 머리가 아프다며 
자리에 누웠다.  연세가 여든다섯인 노인이었다. 우리는  몸살이 온 것으로 여겨 
안방에 불을  넉넉히 때고 이불을 푹  덮어드렸다. 그렇게 하루 쉬고  나면 몸이 
풀릴 거라고  할머니도 말했다. 그러나 다음날도  할머니는 일어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근이까지  양양집에 두고 우리 내외만 나왔다. 할머니는  내일이라도 몸
이 나으면  근이를 데리고 속초로  나오시겠다는 것이었다. 워낙  나이가 높아서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지만 어제까지도 근이를 돌보고 밥도 해서 드신 분이라 나
쁜 쪽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속초로 들어오는  버스 속에서 남처럼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우리
는 서로 다른 데를 보았고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집에 와서도 그랬다. 우리
는 제각기 마음이 사무치는 데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집에 왔을 때, 여느때 같으면 발소리만 듣고도 문이 활짝 열릴 것이었다.
  “아범 완?” 이렇게 기뻐하며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럴 때, 근이
는 대게 할머니의 등에 업혔거나 할머니의 발치에서 문지방을 붙잡고 몸을 마구 
흔들며 나를 보고 좋아 어쩔 줄을 몰랐을 것이다.
  ‘아이구, 내 아들. 잘 놀았어유?’  나는 근이를 품에 안고 입을 맞췄을 것이
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빈 방은 어설프고 낯설었다.
  남편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야, 자리 깔어!”
하고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지약 안 먹구 잘래유?”
  내가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리 깔란 말이야!”
  남편이 소리를 질렀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지겨웠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저 신경질!  나는 내키지 않는 손길로 자리를  폈다. 저렇게 잠을 자다가 
배가 고프면 시간도 가리지 않고 먹을 것을 해내라고 보챌 것이었다.
  남편은 겉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져 놓고 이부자리로 들어가려다가 발길로 나
를 휙 걷어찼다.  나는 그를 쳐다봤다. 소름이  끼치는 비웃음이 스치는 게 보였
다. 어쩌면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 느낌이 내 안에  있는 남편에 대한 오래된 미움일 수도 
있었다.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불  속에 들어가 내게 등을  대고 누웠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무릎을 쪼그리고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양에 두고  온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굳세게 살
아야 했다.
  엄마와 헤어질 땐 노는 데 팔려 돌아도 보지  않고 `빠이 빠이`를 했지만 그런 
것은 다 잊고 엄마를  찾으며 울 것이다. 맘이 여린 그  어린것의 애간장이 타겠
지. 윤이가 있어  다행이지만  그걸 어떻게 믿어. 울다가 제때 그치지 않으면 애
살 많은 시어머니는 몽창거리는  싸리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근이의 종아리를 때
릴지도 모른다. 뺨 한 대 안  때리고 기른 내 자식을. 아무리 좋은 걸 찾아 먹여
도 살이 오르지 않는 아이. 그래서 안쓰러움이 더 컸다.
  남편이 황소 같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왜  저런 남자와 혼인을 해서 하나뿐인 
어린 아들도 데리고  있을 수 없을까. 모든게  남편 탓 같았다. 아니,  내 팔자가 
이러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저 등 보이고 누워 있는 남편이 원수 같았다.
  근이가 보고 싶었다. 눈을 아프게 감아도 그  애가 아른거리고 눈을 떠도 마찬
가지였다. 아이가  얼마나 나를 찾으면 내  마음이 이다지도 산란할까. 이제라도 
걸어가면 자정 전에 양양에  닿을 테니 근이를 업고 올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
만 터무니없는 바람이었다.
  주인집에서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볼 수 없는 아들 생
각에 괴로워하느니, 보기 싫은  남편과 한방에 있느니, 거기나 가보고 싶어서 일
어났다.
  “주인네에 뭔 일이 있너?”
  남편의 귀에  들리라고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방문을 열었다.  주인집에 정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잔치하세유?”
  나는 슬프고 서러운 맘을 감추고 이렇게 말하며 들어갔다.
  “아이구 잘 왔네!”
  “어서 들어오라우야.”
  남자와 여자들이 내게  말했다. 그들은 오늘 고기가 많이 잡혀  행복한 날이었
다. 이렇게 만선이 되는  날은 한 방 가득 고향 사람들을  불러다 왁자지껄 먹는 
게 주인집 풍속이었다. 상도 펴지 않고 찌거나  삶은 생선을 함지에 담아놓고 둘
러앉아 뜯어먹으며 얘기를 했다.
  “바깥양반은 어째 아이 오우?”
  주인이 물었다.  나는 싱긋 웃었다. 지금  함지에 든 생선은  청어였다. 입덧이 
심할 때, 참을 수 없이 먹고 싶던 음식이 보리밥과 청어였지 않은가.
  “이거 알백이 하나 먹으라우야.”
  주인은 노란 알이 터져나온 팔뚝만한 청어를 맨손으로 집어들어 내게 주며 말
했다. 물이 좋아 비린내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맛을 몰랐다.

  시할머니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오지  못했다. 우리는 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서로 심심하고 우울했다. 남편은 할머니가  오셨기를 기대하고 나는 할머니
보다 아들이 보고 싶어 설레는  맘으로 집에 가지만 우리는 신발이 놓이지 않은 
빈 문턱을 보곤 똑같이 실망했다. 그러면 남편은  방에 들어와 멍하니 서 있다가 
불안한 얼굴로  말없이 나가버렸다. 그가  그렇게 나가서 밤늦게  돌아와도 나는 
그가 어디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영화를 보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유행가
를 틀어주는 다방에 가서 하염없이 앉아 있었을  테니까. 차라리 내게는 그가 그
렇게 시간을 보내는  게 나았다. 아무리 기분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거나 군것질
을 하라고 떡을 사다줘도 그는 우울한 낯을 펴지 않았다. 이렇게 사흘이 지났다. 
석 달 같은 사흘이었다.
  막사에서도 틈틈이 근이 생각이 났다. 그러면 나는 더 열심히 일을 했다. 그래
도 틈만 나면 혼자 있을 그 애가 맘에 걸려 잠깐씩 먼데를 바라보곤 하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원산에서 온 정씨가 물었다.
  “아니래유.”
  나는 부끄러원 부지런히 재봉틀 발판을 밟았다. 재봉실이 끊어졌다.
  “뭐 나쁜 일이 있으십니까?”
  그는 돌아가지 않고 서서 다시 말을 붙였다.  나는 끊어진 실끝을 찾아 바늘귀
에 댔다.
  “저희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저를 공부시켰습니다.”
  바늘귀에 걸린 실을 잡아  늘리는데 그가 말했다. 나는 문득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가 오던 날부터 친절했다. 수선할 옷을 가져온 
미군과 말이 통하지 않아 곤란할  때 그는 언제 알았는지 다가와 통역을 해주었
다. 나는 이런  그의 친절이 불편했다. 그리고 누가 볼까  두렵기도 했다. “시할
머니가 편찮으세유.”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다시 재봉을 시작하며 말했다.
  “연세가 높으신가요?”
  그 남자가 물었다. `올해 여든다섯이세유. 속초에 와서 애봐주구  살림두 다 하
셌어유.`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이때, 새앙쥐라는 별명이 붙은  김씨가 왔다. 나는 김씨를 쳐다보고 마치 기다
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활짝 웃었다.
  “부탁은 한 거야?”
  새앙쥐 김씨가 말했다. 나는  웃었다.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눈치를 
챘다.
  “영화구경 하세유. 지가 내다드릴게 걱정하지 마시구유.”
  내가 먼저 말했다.
  “그럼 아주머니, 오늘은 석 장인데 괜찮겠어요?”
  김씨가 말했다. 정씨는 그가 말하기 전에 저쪽으로 넘어갔다.
  김씨마저 돌아간 다음 나는 어리석은 나 자신 때문에 한동안 얼굴이 붉어져야 
했다. 정씨는 나와 말하려는 게 아니라, 빨랫비누를 옷 속에 감춰서 부대 밖으로 
내다달라는 부탁을 하려 했던 것이다.
  미군부대에서는 한국인 노무자들이 행여 부대 물건을 빼돌릴까 감시가 대단했
다. 퇴근 때면   일일이 몸수색을 했다.  내게도 처음 며칠은 그랬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냥 내보냈다.  그걸 알고부터 빨래방의 남자들은  세탁비누를 아꼈
다가 내게 숨겨 나가주길  부탁했다. 그걸 팔면 영화를 보는 건  물론 술을 마실 
돈도 나왔다.
  내게 이런 부탁을 하기 전에 그들은 우선  남편의 허락을 받았다. 남편은 물론 
흔쾌히 승낙했다.
  퇴근 무렵  남편이 내게 왔다. 그는  다른 날과는 달리 자기가  왔다는 눈치만 
보이고 막사  바깥에서 나를 기다렸다. 언뜻  본 그의 표정이 어두웠던  게 자꾸 
걸렸다. 나는 부지런히 퇴근  준비를 했다. 하지만 아직 세탁부의 남자들은 일이 
덜 끝났다. 기다리는 걸 질색하는 남편이라 겁이 났다. 비누 심부름을 하자면 그
들과 함께 나가거나, 그렇지 못하면 바깥에서 이내  만날 수 있도록 시차를 둬야 
했다.
  나는 초조하게 막사 안팎을 들락거렸다.
  “저 사람덜이 날 보구 비누를 내다달라구 그리내유.”
  남편에게 말했다.
  “나 오늘 야양 갈 거야!”
  심술난 아이 같은 말투로 남편이 말했다.
  “그럼 같이 가유.”
  나는 이렇게 말하고  김씨에게 서두르라고 말했다. 김씨가 종이에 만  비누 두 
장을 주면서 웃었다. 나는  달이 갈수록 표가 나게 부른 배를  가리려고 보통 때
도 옷섶에 손을 넣고 다녔다. 그래서 그들에게  받은 비누를 옷섶에 감춰 나가도 
언제나 그려려니 여기는 것 같았다.
  부리나케 막사를 나왔다. 남편은 벌써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다. 기다려주지 않
는 그가 미웠지만 양양  가서 식구들 볼 생각을 하니 즐거웠다.  잠깐 집에 들러 
미군들이 준 껌과 초콜릿을 가져가야지, 그럼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남편의 걸음은 천천히  걸어도 내가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날 듯
했다. 내가 뜀박질로 다라가도 잡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일로 기분이 상한 것일까. 저 더러운 성질머리! 마음 같아선 주먹으
로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후려갈기지도 못했고  그를 따라가지
도 못했다. 그는 철망을 지나 낮은 판잣집들이  늘어선 골목을 걸어서 찻길 모퉁
이를 돌아갔다.
  그래, 네까짓 거.
  나는 따라가리를 포기하고, 사라진 남편을 욕했다. 숨이 차서 더 걸을 수도 없
었다. 뱃살이 꼿꼿해서 서  있기도 불편했다. 길가 판잣집 담벼락에 기대서서 숨
을 가누었다.
  “준태 씨가, 무슨 일이 있었나요?”
  누가 옆에 와서  물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정씨라는 걸 금방 알았다. 
괜히 울컥 목이 메었다.
  “아이구 참, 이걸 디려야지유. 깜빡했네유.”
  나는 고개를 떨구고 비누를 그에게 내밀었다.
  “저어, 혹시 준태 씨가 우리 때문에 마음이 언짢은 건 아닐까요?”
  정씨가 말했다.  순간 속이 뜨거워지며 목이  메었다. 세상에는 다른 남자들도 
많았다.
  “이제 이런 심부름은 하지 마세요.”
  “아니래유. 그런 생각은 절대루 하지 마세유.”
  내가 기겁을 했다.
  “안 하셔도 되는 일입니다.  아주머니가 안 하시면 또 다른 방법이 나섭니다.

  그가 말했다.
  “지가 여러 가지루 부족하지유.”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걸 느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가 그런 심부름이나  할 자격이 되나유. 세월이 이래서 지가  아저씨들 같
은 사람을 만나는 거지유. 그런 거 알아유.”
  내가 말했다.
  “누가 뒤에서 보면 연애 건다고 그리겠어!”
  김씨가 이렇게 말하며 다가왔다. 얼굴이 불화로처럼 확확 달았다.
  “김형. 아주머니한테 이런 부탁 이제 드리지 맙시다.”
  정씨가 말했다. 김씨는 무슨  말인가를 입 안에서 우물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걸어서 그들이  보이지 않는 길로 들어섰다. 가
슴이 두렵게 뛰었다. 누군가  따라온 것같이 뒤통수가 켕겼다. 억지로 뒤를 돌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두렵던 마음과는 달리, 텅  빈 골목이 너무도 허전했다. 
불현듯 다시 그들이 있는 데로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뿐. 발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내 속에서는 설움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제발 어디 가서 실컷 울어
나 봤으면.
  얼마나 서 있었을까. 누굴 기다리는 것처럼.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너무
도 당연한데 너무도 외로웠다.
  다시 텅 빈  골목을 바라봤다. 그러나 골목은  텅 비어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레이션 박스를 이어붙인 낮은 추녀 밑에  주름이 자
글자글한 얼굴의 할머니가 진물러  슴벅거리는 눈을 뜨고 나를 맥없이 바라보았
다. 갑자기 슬픔이  솟구쳤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할머니 
앞으로 걸어가서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지고있는 햇살이  할머니의 떨어진 
고무신 위로 기어올라 있었다.
  “할머이유.”
  할머니는 내가 자기 앞에 앉았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이리루 피난 나오셨지유?”
  다시 내가 물었다. 할머니의 눈동자가 거짓말하듯 움직였다. 눈가에는 젖은 눈
곱이 매달렸고 목으로 검은 이가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고향이 어디래유?”
  내가 손으로 이를 집어  땅바닥에 버리며 물었다. 할머니가 나를 보았다. 그러
나 그 눈길은 내게 잠시도 머루르지 않고 흘러갔다.
  누가 깡충깡충 이쪽으로 뛰어왔다. 예닐곱은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그 애
는 내 옆에 서더니  나를 아주 경계하는 눈으로 살폈다. 내가  웃어 보여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러더니  제 입에서 사탕을 꺼내 할머니 입에 넣어주었다. 
여자애의 한 갈래로 땋아 늘어뜨린 머리는 언제 빗었는지 알 수 없게 먼지 때가 
엉겨 있었고  새까만 손은 터서 갈라진  사이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 애는 
할머니의 팔짱을 낀 팔을 풀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듯 할머니 입에 손을 넣고 
사탕을 꺼내 제 입에 넣었다. 머루 알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 애가 
다시 나를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나는 쫓기듯 그 앞을 떠났다.
  이날 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어수선한 생각에 시달리느라 오래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잠이 들어서도 
여러 가지 꿈을 꾼 것 같은데 눈을 뜨자마자 다 사라져버렸다.
  다음날, 남편은 양양에서 곧바로 부대로 출근했다. 다른 날 보다 좀 일찍 출근
을 해서 출입구를  바라보고 있다가 남편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가 
내게로 올 줄  알았는데 그냥 지나쳐갔다. 하지만 출근하는 그를  확인해서 마음
은 놓였다.
  이날 오후였다. 점심을  먹고 바지 단을 줄이는데 그림자가 생겨서  고개를 치
켜드니 남편이었다. 입술을  다물어 안으로 말아넣었는지 표정이 심각했다. 아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냐고 물으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방 야양 들어간다.”
  이윽고 남편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이가...”
  내가 중얼거리자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뚝,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현듯 남편이 걱정되었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당신은 내일 일 끝내구 와. 난 시방 가니.”
  남편이 흡사 말더듬이처럼  말했다. 이토록 가여운 남편의 모습은 여태  본 적
이 없었다.
  다음날, 나는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양양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마당의 차양이 
보였다. 배불리 먹거나 막걸리에 거나해진 사람들이 마당에서 나오고 있었다. 음
식 냄새가 퍼져서 무슨 큰 잔칫집 같았다.  아이들이 마당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
아 떡을 먹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누군가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이 집 큰메누
리 온다”고 소리쳤다. 나는 곡을 하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시할머니의 장례는 오일장으로 성대하게 치렀다. 가마니  쌀로 떡을 하고 돼지
도 잡았다. 여든여섯 나이에 일 주일 몸살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두고 사람들
은 호상이라고 인사했다. 남편은 장례 내내 너무도 침착하고 고요했다. 문상객을 
정중히 맞이하고 그 어려운 때 거지들도 배불리 먹여 보냈다. 초상 내내 그랬다. 
상여가 나갈 땐  너무도 화려했다. 수많은 만장이 상여를 앞섰고  선소리꾼은 신
이 났다. 
그러나 이 비용은 다 빚이었고 그것은 남편과 나의 몫이었다.
  시할머니의 임종은 윤이가  했다. 그 애는 유치원에서 사귄 아이들과  놀고 있
었다. 시어머니는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동사에 가서 밥을 해주고 왔다.
  “이년어 예시가덜이 할머니 정신을 쑥 빼놓네! 돌아치지덜 말어!”
  시어머니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잠자리처럼 돌아치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렀
다.
  “할머니! 노할머니가  눈을 꼭 감았어요!  깨워도 눈을 뜨지않아요.  노할머니 
노할머니 하고 불렀어요. 노할머니가 주무셔요.”
  그러자 윤이가 이렇게 말했다. 시어머니는 윤이  말에 느낌이 이상해서 시할머
니 옆에 가 보았다. 시할머니는 눈만 감은게 아니라 숨도 쉬지 않았다.
  “윤아, 언제 노할머니가 눈을 꼭 감언?”
  시어머니가 물었다.
  “아까요.”
  “아니야, 오래 전이야.”
  아이들은 제가끔 말했다.
  나는 장례만 치르고 속초로 왔다. 재봉 일은  늘 바빠서 하루만 쉬어도 눈치가 
보였다. 눈치가 문제가 아니라 일이 밀려서 내가 견디기 어려웠다.
  남편은 삼우제까지 마치고  속초로 왔다. 그의 얼굴은 깊은 슬픔에  씻긴 듯이 
맑았다. 뿐만 아니라 뿔뚝밸도 없어진 것 같았다. 말도 하지 않고 먼데를 하염없
이 바라보곤 하였다. 밥도 잘  먹지 않고, 자다가도 문득 일어나 앉아 있고는 해
서 나까지 잠을  설쳐야 했다. 그리고 그는  훌쩍이며 울었다. 나는 슬픔 때문에 
우는 남자가 싫었다. 슬퍼서 쿨쩍거리는 건 여자나 할짓이었다.
  “할머니는 잘 가셌어유. 그만큼  사셌으면 수를 못 했다구두 못 해유. 생각해 
봐유. 당신이 아부지 어머이가 없수?  부모 형제두 다 있잖어유. 시방 야양을 말
캉 뒤져봐유. 당신만큼 식구가 제대루 있는 집이 드물 거래유.”
  나는 그에 대한  불만을 감추고 위로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의 발길이 날아와 내  허벅지에 꽂혔다. 다리에서 뜨거운 불기운이 일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것은 시작으로 나에 대한 그의 미움이 시작되었다.  그의 숱 많은 눈썹은 언
제나 여덟 팔자로 굽었고 눈꼬리가  아래로 처진 독사 눈을 떴으며 말도 나누지 
않았다.
  우울하고 불안한 나날이었다.  오랜 입덧이 끝나 밥을 먹긴 했지만  일이 고단
해서 오후가 되면 손이  퉁퉁 붓고 발이 부어 신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부대에 있는 동안은 마음이 편했다. 겁나는 마음을  잊으려고 쉬지 않고 일을 했
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다 부대에서 먹으니 집에선 잠만 잤다. 차라리 일이 
더 많아 밤늦게 퇴근하고 싶었다. 일이 많으면  가욋돈만이 아니라 비누 담배 같
은 부수입이 생겼다.
  남편은 토요일이면 양양으로  나가 할머니 산소에 들렀다. 비가 와도  그는 산
소에 갔다. 하지만 양양 식구들과도 말을 잘  하지 않아서 그곳에서도 그의 눈치
를 살피며 집안 분위기가 무거웠다.
  이런 어느 날, 속초로 들어오려는데 윤이가 팔랑거리며 좋아했다.
  “나도 간다! 나도 간다!”
  그 애가 두 손을  머리 위에서 흔들며 노래를 지어 불렀다.  나는 어이가 없어
서 눈을 흘겨주었다. 그런데 그 애의 말이 맞았다.
  “애덜 다 델구 나가!”
  그가 말했다. 우리가 이제 마당에서 서로 인사를 할 때였다. 윤이는 벌써 마당 
끝에 나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등에 업었던 근이를  내게 넘
겨주었다.
  “윤이는 유치원 댕기는 아인데 어디루 간다구 저래?”
  내가 못마땅해서 말했다.
  “아범이 갸한테 가자구 기리던데.”
  시어머니가 고자질하듯 말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자기 좋아하는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 신경질이 줄겠지.
  우리는 속초에서 네 식구가 함께 살게 되었다.  오랜만에 다시 한군데 모인 것
이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다 보면 윤이와 근이가  골목에 나와 우리를 기다렸다. 
강아지 같고 오리 같고  돼지 새끼 같은 그것들. 근이는 내  몸빼 사이에 들어가 
엉겨붙었다. 남편과 단둘이 지낼  때보다 한결 좋았다. 하지만 내게는 한동안 손
을 놓고  지냈던 집안 일이 부쩍  늘어버렸다. 방에 들어가면 발  들여놓을 틈이 
없게 어지러웠다. 점심 먹으라고 차려놓은 상에는 덮지 않은 김치그릇, 방바닥에
는 일부러  흘린 것 같은 콩나물  가락들이 널려 있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배가 
부르기 시작하면서 몸이 눈에 띄게 부었다. 어떤  날은 손이 부어 주먹이 쥐어지
지 않을 때도  있었다. 몸이 무거워 그냥  드러눕고만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지러운 방을 보고 남편이 신경질을  부릴까 걱정되어 나는 그보다 몇 걸음 빨
리 가서 방을 대충 정돈하곤 하였다.
  여름이 되었다. 부른 배가 부끄러워 웬만하면 자리에서 잘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어느 날 아침이었다.  다리미 판 위에다 식판을 놓고 밥을  먹는데 한 남
자가 말했다.
  “휴전이 될 거 같애.”
  “유엔군은 벌써 많이 빠졌을걸?”
  “미군이 아주 철수하는 거 아냐?”
  “완전 철수야 하겠어?  이북에 소련군이 있는데. 물론 미군을  대폭 감축이야 
하겠지만.”
  “휴전이 되면 결국 나라가 반쪽으로 동강나고 마는 거지.”
  “동해안에선 미8군단이  8240 켈로  부대만 남기고 철수한다는  게 확실한가 
봐.”
  남자들끼리 말했다.  아주 침울한 목소리들이었다.  나는 속초에서 미군부대가 
철수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입에 넣은 밥이 꼭 체했다. 갑자기  배가 아프고 숨
이 가빠졌다.
  “왜 그러세요?”
  맞은쪽 끝에 앉았던 정씨가 물었다. 나는 얼굴을 들었으나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부끄러웠다.
  “물을 마셔보세요.”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물그릇을 집어주었다.  나는 물을 마시는  시늉만 하고 
일어나 재봉틀  의자에 앉았다. 윗배가 뒤틀리게  아팠다. 그래도 일을 하다보면 
낫겠거니 하고 재봉바늘에  국방색 실을 뀄다. 하지만 나는 그것밖에  하지 못하
고 다시 엎드렸다. 이마에 식은땀이 솟았다.
  “왜서 그래?”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다. 남편의 뒤, 저쪽에  걱정하는 얼굴의 
정씨가 보였다. 나는 이내 그가 남편을 데려왔다는 걸 알았다.
  “나두 몰러유. 밥 먹다 말구 그래유.”
  내가 말했다.
  “병원에 가보시지요. 산모신데.”
  정씨가 다가와 말했다.
  “병원을 어디루 가너?”
  남편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부대 병원으로 가야지요.”
  정씨가 말했다. 남편이 일어나라고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못 걸어?”
  남편이 소리쳤다.
  “나 줌 잡아줘유!”
  내가 말했다. 정씨가 내 팔을 붙잡아주었다.
  몇 발짝 옮겼다. 남편은  남처럼 곁에서 어정쩡하게 따라왔다. 나는 불편한 것
처럼 정씨의 손을 뿌리쳤다. 남편의 당당하지 못한 태도에 속이 상했다.
  병원엔 한국 의사가 있었다.  그는 평안도 사투리를 썼다. 그가 남편에게 부대
에서 부인과 함께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남편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행복
한 줄 알라고, 부인한테  잘하라고 말했다. 자기는 이북에 부인과 자식을 둘이나 
두고 혼자 내려와 산다고 했다.  통일이 되기 전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남편이 혼자 어떻게  사느냐, 결혼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그는  아내가 거기 
살아 있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진찰을 받으며 
그런 말을 듣다가 그만 울어버렸다.
  “주사가 아팠어요?”
  의사가 물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지두 몰래 눈물이 나네유.”
  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더 슬퍼졌다. 의사 선생님이 
뭔가 모를 것을 명치 쪽에 올려놓았다. 묵직하고 뜨뜻했다.
  “이렇게 잘생긴 남편과 같이 한군데서 일하는데,  눈물을 보이면 나 약올리자
는 거요?”
  의사 선생님은 돌아서며 말했다.  잘생겨? 겉이 무슨 소용인가. 맘속이 잘생겨
야지. 나는 속으로 말했다.
  5분쯤 찜질을 했을까?  뭉쳤던 가슴이 풀리는 듯했다. 의사는 내  얼굴을 들여
다보더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남편과  나는 의사선생님에겐 정중히  인사했지만 
병원 문 앞에서 냉정하게 갈라서서 자기 막사로 갔다.
  돌아오자마자 곧장 밀린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북에 두고온 아내  때문에 다
른 여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이 머리 속에서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군복 상의 허리를 내리  박다 고개를 드니 앞에 정씨가 서  있었다. 얼굴이 화
끈 달아올랐다.
  “괜찮으십니까? 얼굴색은 제대로 돌아온 거 같습니다.”
  정씨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숙인 채 재봉을 했다. 그가 다른 
데로 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콧날이 시큰거렸다. 나는 쓰레기통에서 천 
쪼가리를 꺼내 콧물을 훔쳐냈다.  다시 재봉틀에 얼굴을 박았다. 곧 이상한 침묵
이 나를 에워쌌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이 아팠다. 천하의 바보.
  나는 속으로 나를 욕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에게 물었어야 할 말이 떠올랐다.
  부대가 없어지면  어디로 갈 거냐... 하지만  나는 정씨가 일하는  쪽으로 행여 
고개를 돌리게 될까 봐  얼마나 조심을 했던지, 앞으로 그가 내게  친절을  보이
면 차라리 욕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점심시간입니다아!”
  칸막이 안쪽에서 누가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내겐 아주 아득하게 들렸다.
  “점심은 먹어가며 일을 하세요!”
  팔소매를 줄여 안감을 박아 뒤집는데 다림질하는 남자가 말했다.
  “하마 점심때가 됐너유?”
  내가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미역이 헤엄쳐 달아나기 전에 오세유!”
  칸막이 쪽에서 여러 사람들이 말했다.
  “지는 왜서 밥 생각이 없네유.”
  나는 이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허리를 뒤로 펴며 말했다. 그래도  끼니를 거르
면 안 됩니다. 어머니야  괜찮지만 속에 아이는 먹어야지요. 남자들이 이런 말을 
했다. 몇 달 함께  일하고 세 끼 밥을 같이 먹어 저절로 정이  든 사람들이 마음
을 써주는 게 한없이 고마웠다. 내키지  않아도 먹어야겠다고 일어서는데 남편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상기된 얼굴이었다.
  “준태씨! 식사합시다.”
  “저 사람은 이런 거 안 먹는 사람이야!”
  남자들이 남편을 두고 말했다.
  “난 집사람하구 먹을라구 벤또를 가져왔습니다.”
  남편이 그들에게 말하고 재봉틀 위에 그가 싸온 도시락을 풀기 시작했다.
  “여보, 우리끼리 이걸 어떻게 먹어유?”
  빵이며 닭다리 생선과 햄에 오렌지까지 들어 있는 도시락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순간 그의  몸이 굳는 것 같았다.  음식을 꺼내던 그의 동작이 얼어붙은 
것이었다. 먹기 싫어? 그가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는 게 느껴졌다. 나도 
화가났다. 남자가 이렇게 옹졸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냄새까지 풍기는 그것
을 혼자는 도저히 먹고 싶지 않았다. 소금물에  먹는 밥이라도 저 사람들과 같이 
먹어야 했다.
  “같이 먹어유.”
  나는 화난 마음을 감추고 나직이 말했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고개
를 숙이고 서서  언짢은 마음을 삭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능청스럽게 도시락
을 들고 칸막이 저쪽으로 갔다.
  “이거 줌 드세유. 많진  않아두 맛만 보세유. 윤이 아부지 당신두  얼른 와유!

  나는 아직 재봉틀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을 남편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사람
들에게 미군들이 먹는 음식을 손으로 떼어 조금씩 맛보였다.
  “맛이야 입에서 녹지만  이거 미안해서.”
  “이거 뱃고래가 놀라서 체하지나 않을지 몰라.”
  남자들이 말했다. 나는 이곳으로 오지 않는 남편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
다. 거기다 벌써 예사롭지 않은 상태를 눈치  챈 사람들의 기분이 느껴져 너무도 
부끄럽고 화가 났다.
  “여보, 당신도 와유!”
  내가 마음을 감추고  남편을 불렀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떨리고  갈리어서 불
안이 감추어지지 않았다.  정씨가 나를 보고있다가 내 시선이 가자  얼른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숨이 막혔다.
  “얼마 안 되는 거, 드세유. 난 가서 먹으면 되니.”
  남편이 이쪽으로  와서 이렇게 말하고  억지 웃음을 지으며  나갔다.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인사말이  그의 발에 밟혀 나갔다. 나는 이미  밥맛이 떨어졌지
만 억지로 국에 말아 마시듯이 반 그릇을 비우고 재봉틀 앞에 앉았다.
  우리 아이 아버지는 어린애 같아요. 나는 정씨에게 고자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후 내내 그가 내게 말을 걸기라도 할까 봐 일에만 미친 듯이 지냈다.
  저녁이 되어도 더위가 가시지를  않았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썩은 생선 냄새
가 마치 시궁창  물처럼 고여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양갈보들이 철조망  앞에 와
서 부대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출입구에선  짬밥을 실어내는 노무자가 미군에게 
수레의 물건을 조사받고  있었다. 애초에는 흰색이었을, 군데군데 떨어진 러닝셔
츠를 입은 중년의 노무자가  비굴한 표정으로 미군에게 무슨 말인가를 되풀이했
다. 한국인 보초가 뭐라고 꾸짖는  것 같았다. 나와 남편은 그들 옆을 목례만 하
고 지나쳤다. 그러나 다른 노무자들은 몸수색을 당했다.
  남편은 부대를 나오자 휘파람을 불었다.
  “노래라군 꼭 청승맞은 거만 해유.”
  내가 투덜거렸다. 남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아도 휘파람을 
부니 숨이 트였다. 그가 입을 붙이고 있으면 어떤 기분인지 몰라 불안했다.
  “휴전이 된다구 하대유.”
  집앞에서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대꾸하지 않았다.
  “휴전이 되면 미군덜이 철수한단데, 그기 맞어유?”
  “몰러!”
  남편이 소리쳤다. 나는 찔끔해서 입을 닫았다. 그렇지만 갑자기 남편이 미워졌
다.
  “당신이야 미군덜한테 아무 얘기라두 주워들었을 기 아니래유.”
  “빨래하는 데 배운 놈덜 많다민? 거기 가 물어봐! 개년아!”
  남편이 돌아보지도 않고 뱉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지나가다 구정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아무리 남편이라지만 어떻게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화가나서 걷지도 못했다. 남편이 가래를 캑 하고 목구멍으로 올
려서 뱉었다. 허연 가래침이 흙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뭐라고 또 다시 나를 욕하
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저절로 발소리도 죽이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이내 분한 마음이 생겼다.
  “내가 뭐, 못할 소리  했어유? 그렇게까지 화를 낼 기 뭐래유?  당신이 나 욕
하면 누워 침 뱉는 기래유.”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이 쌍년, 잘난 체하는 통에 재수가 다 없어!”
  남편이 잡아먹을 것 같은 눈을 하고 소리쳤다. 진저리가 쳐졌다. 내가 언제 잘
난 체했느냐, 부대가 철수한다는 거  아느냐고 물은 게 무슨 죽을 죄를 진 거냐, 
사람을 무시해서 그러는거 아니냐, 나는 속으로 화를 냈다.
  “엄마야!”
  우리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근이가 달려오며 나를 불렀다.
  “새끼야! 옷 입어!”
  남편이 벼락같이 소리 질렀다. 그 애는  바지를 어딘가에 벗어던지고 아랫도리
를 내놓고 있었다. 나를 보고 달려오던 아이가  질려서 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되
었다. 순간 나는 그 애가 저 생각 없는  아버지 때문에 남자 구실을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근이는 아버지가 무서워  울지도 못
하고 자지러져 장작개비같이 꼼짝을 못했다. 근이가 가엽다 못해 처량했다. 이때 
소리 안 나는 총이 있다면, 나도 생각 없이 남편을 쏴 죽였을지 몰랐다. 나는 목
숨을 내던지듯 근이에게 달려가 아이를 품에  감싸안았다. 아이의 콩닥콩닥 뛰는 
심장소리가 마치 못처럼 내 가슴에 박혔다.
  “근이야! 울어라! 울어!”
  내가 근이에게 소리쳤다. 아이가 지금 울지라도 못하면  바보가 되고 말 것 같
아서, 터무니없게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말했지만 정작 운 건 나였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  줄도 모르고 아이의 작은 손을 마구  주물렀다. 그 애
의 어깨, 등, 허리,  다리를 매만지고 쓰다듬었다. 몸 어디에 들어가 있을지 모르
는 미움의 독을 풀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면서 울었다. 그러자 근이가 제 작
은 손, 흙 묻고 때묻은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는 와락 아들의 더러운 
손을 내 입에  넣었다. 그래. 너 하나만 살릴 수  있다면... 난 죽어도 좋다. 나는 
아들의 손을  입에 넣고 그 찝찔한  맛을 느끼며 이렇게 결심했다.  온몸의 피가 
소용돌이 치는 게 느껴졌다.
  이때 방에서  윤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났다. 내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메말랐다. 근이가 바짝 긴장하며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주 미쳤잖.”
  내가 중얼거렸다. 이때 다시 방 안에서 윤이가 `아버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버지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하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
이가 내 가슴을 때리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근이의 걱정  때문에 방문을 열었다. 남편은 난장판인 방 안
에 혼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고 윤이는 공포에 질려서 구석에 무릎을 꿇고 있었
다. 이건 어이가 없다 못해 우수꽝스러운 광경이었다. 사자가 토끼 한 마리 놓고 
힘을 쓰다니. 그러나 나는 비웃지도 못하고 잘못을 꾸짖지도 못했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남편이 도망치듯 휙 나갔다. 그가 나가자  오래 막혔던 
숨이 터졌다. 근이도 살아난 풀처럼 내게서  버둥질쳐 내리더니 누이에게 다가갔
다. 윤이가 근이를  끌어안았다. 두 아이가 소리내어 울었다. 나는  그 애들이 울
도록 내버려두고  방을 치웠다. 아이들을 차례로  씻기고 옷도 갈아입혔다. 상을 
차려 저녁을 먹였다. 아이들이  밥을 먹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 애들은 
언제 무서운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아이들  같았다. 눈시울이 뜨겁도록 예쁘고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깨끗하게 치워진 방,  말끔하고 사이좋은 오누이, 그리고 
내가 있었다.
  “사람은 밥을 잘 먹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사람이 되잖?”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밖으로 나와 아이들이 벗어놓은 옷을 빨았
다. 윤이가 근이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는 소리가 들렸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모래알로 밥해 놓고 조약돌로 소반 지어 엄마아빠 
모셔다가 맛있게도 냠냠.

  나는 밤에 빤 옷을 마당에 내다널 수 없어 부엌이며 방에 여기저기 너느라 방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윤이의 노래를 같이 익혔다.
  아이들은 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낮에 쉬지 않고  논 날은 둘 다 저녁밥을 먹
자마자 병든 병아리처럼  졸기 바쁜데 오늘은 달랐다. 근이는 눈알이  빨갛게 되
고도 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두워지고도 한참이나 지났을 때, 문 밖에서 남편의 발소리가 났다. 아이들이 
긴장하는게 역력했다. 물론 나도 그랬다.
  “야덜아 아부지 오신다! 날래 자라 응?”
  내가 애들한테 말했다. 근이가 펴놓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머리까지 뒤집어썼
다.
  “누나! 빨리 이리 와!”
  근이가 이불을 걷어 빠끔히 눈을 내놓고 제  누이를 불렀다. 윤이가 근이 옆에 
누웠다. 방문이 열렸다. 남편이 들어왔다. 그의  손엔 작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
다.
  “어디 갔다 이제 와유?”
  나는 알 수  없는 배앓이처럼 두려워지는 마음을  억누르고 어설픈 인사를 했
다. 그의 기분이 궁금했다. 그는 내 눈길을 피했으나 얼굴 표정은 순해 보였다.
  “윤이야, 자너?”
  남편이 윤이의 옆에  가서 이불을 들추며 너무도 가녀린 목소리로  물었다. 윤
이가 눈을 뜨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이거 먹구 자. 어여 일어나.”
  남편이 윤이를  일으키더니 덜렁 무릎에  안았다. 그러더니 종이  봉지를 열어 
과자를 꺼내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근이도 일어나게 해서  과자를 주었
다. 근이는 아버지 눈치를 심하게 보면서 과자를 입에 넣지 못했다.
  “윤이야, 아부지가 밉지?”
  남편은 팬티만 입은 윤이의 종아리에 피멍든  맷자국을 보면서 말했다. 윤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딸의 어린  종아리 상처를 쓰다듬으며 울기 시작
했다. 우는 남편은 더 꼴보기 싫었다.
  “윤아, 내가 닐 때린 건 미워서가 아니다. 아버지가 군대 나가 죽을 고비에두 
니가 보구 싶어  이를 악물었는데, 내가 니가 미워 이랬겠니?  아버지 용서해 줄
래? 아버지 미워하지 않지?”
  남편이 울면서  넋두리를 했고 윤이도  아버지를 부르며 울었다.  한밤에 좁은 
방 안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  네 식구는 지옥에서 살아난 사
람들같이 한마음이 되어 늦은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이것이 처
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휴전 회담이 진척을 보일 때였다. 속초에선 자주 데모가 있었다.
  “전진!”
  “전진!”
  사람들은 이렇게 함성을 지르며 걸어갔고 막사의 남자들은 일을 하다 말고 바
깥을 내다보며  웅성거렸다. 남자들은 점심을 먹을  때도 데모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그들의  얘기로 세상 돌아가는  내력을 막연히 짐작했다.  휴전이 성립되면 
우리나라가 영원히 반쪽으로 나뉜다는  것, 언제 통일이 될지 모른다는 것, 천만 
명이나 되는 피난민은 고향을  잃어버리고 헤어진 가족과는 생이별을 하고 만다
는 것.
  나는 대부분 이북이 고향인 그들이 불쌍해서 소식 모르는 시동생들 얘긴 물어
도 볼 수 없었다. 이런 어느  날이었다. 오전 내내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줄여놓
은 점퍼를 찾으러 온  미군이 수선비를 내지 않고 도망을 쳤다.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남자들이 달려가서  붙들어다 돈을 내게  했는데 오늘은 
어찌나 재빨리 튀어 달아나는지 놓치고 말았다. 약이 올랐다.
  남자들은 미군들 중엔 `룸펜`이  많다고 욕을 했다. 심지어는 양색시의 화대도 
떼어먹고 이상한 짓을 하는 것들도 많다고.  한동안 막사에서는 미군들의 비행이 
화제였다. 그러나 나는 흉을 보는 것으로는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일을 하고 돈
을 떼인 게 분했다.
  이때 무슨 일인지 남편이 내게 왔다.
  “좀 진작 오지 그랬어유.”
  내가 이렇게 말하자 남편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미군놈 하나가 아침  나절 쎄 빠지게 줄여놓은  잠바를 거저 가져 달아났잖
우.”
  분이 가라앉지 않아 씩씩거리며 말했다.
  “기래기다 돈버텀 받구 줘얄 거 아냐!”
  남편이 버럭 화를 냈다.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돈부터 받어유? 여직까지 물건 주구 돈 받았는데!”
  나도 큰소리로  대꾸했다. 그 순간  남편이 야전침대의 침목을  잡아빼더니 내 
등을 후려쳤다. 나는 어디가  아픈 줄도 모르고 고꾸라졌다. 너무도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년아, 씹두 달라면 공짜루 줄래? 이 개 같은 년아!”
  남편이 고꾸라진 내게 뱉는 말소리가 아득히 들리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살 가
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나는 일어
나서 물에 풀어놓은 가루비누를 마시려고 그쪽으로 기어가서 바가지로 비눗물을 
펐다. 남편이 다가와 주먹으로 내 손목을 내리쳤다. 바가지가 땅바닥에 떨어지며 
비눗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
다는 사실이 죽음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누가 나를 부축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팔을 뿌리쳤다. 친절이나 동정도 귀찮
았다. 자존심을 빼앗기고 나면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것도  이때 나는 처음으
로 깨달았다.
  나는 제 발로 걸어서 재봉틀 의자에 앉았다.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드디어 여기서까지도 네  미친 꼴을 보였구나. 나는 의자에 앉아서 이를 
악물고 이런 생각을 했다.
  “근이 아버지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조금 후에 정씨가 재봉틀 앞에 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
지 않았다. 그가 남자라는 사실이 싫고 무서웠다.
  “근이 아버지가 맘이 여린 사람이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남자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릅니다! 나는 속으로 완강하게 대답했
다.
  “일을 하다 보면  미군들한테 당하는 분이 오죽 많겠습니까. 우리는  너나 없
이 다 같은 처지  아닙니까. 그거 쌓아뒀던 게 그만 아주머니께  폭발이 된 겁니
다. 아주머니를 미워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근이 아버지를 많이 이해해 주십시
오. 지금, 이 세월이, 남자들을 참 비참하게 합니다.”
  그가 말했다. 갑자기 목구멍이 머어지게 아리기 시작했다. 가슴도 뻐근하게 시
려들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나는 영원히 지금 이런 말을 해주는 정
씨를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 잊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 단 한번 아주 오랜 세월
이 흐른 뒤, 그러니까  내가 양양을 도망치듯 떠나올 즈음 누군가  내게 말해 줬
다. `정씨`가 높은 직급의 공무원이 되어 경기도  수원에서 산다는 걸. 하지만 그
런 소식은 내 인생과 너무 먼데 있는 풍경이었다.
  이 해 여름, 7월 27일.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3년 동안의 전쟁을 끝내는 휴전
회담이 성사된 것이었다.  부대 안은 벌써부터 수런거렸다. 전쟁이 끝나서라기보
다 앞으로 살아갈 일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미군은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가혹
한 전쟁 동안 물자가 그  중 풍부한 미군부대에서 살아온 우리들에겐 휴전이 기
쁨이기보다는 불안한 시련이었다.
  “야, 너 미국 갈래?”
  이런 어느 날 남편이  밑도 끝ㄷ 없이 이렇게 물었다. 나는  그를 뻔히 쳐다보
았다.
  “윌리스가 미국으루 같이 가자는데.”
  남편이 말했다. 윌리스는 남편과 친하게 지내는 미국인 장교였다. 윌리스는 근
이를 예뻐해서 본국에 휴가를 다녀올 때 옷을 사다준 적이 있었다.
  “같은 조선 땅에서두 고향을 못  잊는 당신이 땅끝 남의 나라를 어떻게 간다
구 그래유?”
  나는 남편의 의지를  비웃는 기분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남편이 나를  빤히 쳐
다보았다.
  “김창순인 간단다.”
  남편이 말했다. 남편의 친구인 그는 평양이  고향인 청년인데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북이 싫어 부모 형제 다 내꼰지구 나온 사람하구 당신이 같을라구유.”
  내가 냉정하게 말하자  남편은 짐짓 겁먹은 표정이  되더니 이후로는 더 이상 
미국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나는 몸을 풀기 위해 부대를 휴직했
다. 그리고 미군부대 일은 내 생전에, 다시는, 없었다.

  어느 때부터였는지 몰라도  내게서는 기쁨이 사라졌다. 나는 말할 수  없이 우
울했다. 동서는  아들을 낳으라고 인사했고  시할머니들도 아들 하나는  더 둬야 
한다고 덕담처럼 말했지만  고맙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기름
종이를 내가 보따리에 싸자 도둑맞는 것처럼 질겁했다.
  “야! 어멈아 그 지름조우짱을 어찔라구 싸너?”
  시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며 무지막지하게 빼앗았다.
  “왜서 그래요? 이거 지가 아를 날 때 깔개할라구 부대서 내왔는데유.”
  내가 화가 나서 뾰로통하게  말해도 시어머니는 기름종이를 고방에 감추고 왔
다.
  “아이구, 별난 소릴 다 듣겠네! 뭔  아를 날 때 조우짱을 까너? 우린 다 짚을 
깔구 아 나두 새끼 하나 죽이지 않구 키원데!”
  시어머니가 말했다.  나도 모르는 순간  시어머니를 노려보았다. 친정어머니가 
자식을 많이 죽였다고, 나 들으라고 가시 박힌  소리를 하는 거, 누가 모르랴. 무
지한 산골 사람들. 나는 속으로 시어머니를 경멸하고 기름종이를 포기했다. 그뿐
만이 아니었다. 맏며느리가 아이를 낳으러 친정으로  간다는데 미역꼬리 하나 사
주지 않았다. 사람 사는  도리 모르는 거, 사람 귀한 거 모르는  거, 입으로 나오
는 대로 욕하고, 아무 데서나 개 패듯 때리는 인간들, 아주 쌍스러운 사람들...
  내 기분이 이런데 윤이를 나를 따라가겠다고  울고불고 난장판을 벌였다. 나는 
홧김에 윤이에게 있는 욕 없는 욕 다해, 살기도는 설움을 주었다. 그래도 윤이의 
기가 죽지 않아서  개 패듯 때렸다. 윤이가 나를 원망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는게 
거렸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내  등에서 덩달아 우는 근이도  주먹을 쳐서 
윽박질러 놓았다. 예정대로 몸을 푼다면 스무 날에서  한 달쯤 떨어져 지내는 작
별을, 우리는 이렇게 진저리쳐지게 하고야 말았다.

  물겁은 말할 수 없이 초라했다. 아무렇게나 자란  풀 사이에 얼키설키 지은 우
데기들뿐. 언제 저 불탄  자리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다고 상상인들 하랴. 
해방되고 5년, 난리  3년에 죽은 사람, 북으로  들어간 사람으로 인구가 반 넘어 
줄었다.
  한창 때, 열아홉 집이 붙어살던 안말만 해도 지금은 여섯 집으로 줄었다.
  1951년 1월 4일, 으멱으로는  해가 바꾸지 않은 전 해의 동짓달 스무닷새였다. 
그동안 내린 눈으로 천지가 흰색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어둡기 전에 채 익지 않
은 김장 김치에 동치미와 무국으로 저녁을 먹는 참이었다. 그때, 총을 든 아군과 
면에서 나온 사람이 집집마다 불을 놓았다.  너무 어처구니없어 말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유를 물으면  군인이 위협사격도 했다. 미처 저녁밥을 다  먹지 못한 
집들도 많았다. 나이  서른이 훨씬 넘고 자식을 두었어도 동네에서  사람 대접을 
않던 복녀 아버지는  쌀을 꺼낸다고 방으로 들어가다가  군인이 쏜 총에 다리를 
맞았다. 어찌나 정통으로 맞았는지 살점이 너덜거리고  피가 쏟아지데 사람이 금
방 송장이 되었다. 그런데도  누구나 경황이 없는 때라 어느 한  사람 손을 써주
지 못해 결국 파상풍으로 세상을 버렸다.
  어머니도 한가지였다. 남자들은  이북으로 올라가고 여자와 아이들만  남은 큰
집도 그랬다.
  어머니의 움막, 그 옆에 엇비슷한  움막이 한 채 더 있었다. 빨갱이 짓에 신명
난 아들들과 의가 난 큰아버지가 이북으로 가지  않고 혼자 남아 있었다. 화병에 
실의가 겹친 큰아버지는 바보가 되어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말도 안하고 짐
승처럼 살았다.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에도 내가 들어가자  좋아서 앉아 있지를  못했다. 너른 
텃밭으로 쏘다니고 싶어하는 외손자를 때려가며 업고만 있으려 해서 내가 몇 번
이나 싫은 소리를 하고 얼굴을 붉혔다.
  “외할미가 빡빡 얽어서 무숩너?”
  “일루 안 올란? 고치를 싹 따먹을라!”
  어머니는 짬만 나면 근이를 따라다니며 이렇게  들볶았다. 오래도록 외롭게 지
내다 우리가 와서 기뻤을 것이다. 거기다 내가  나은 아들이 오죽이나 예쁘고 기
특했을까. 하지만 내 마음은 이상했다. 근이를 예뻐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사사건
건 못마땅했다.
  “어머이두 참 딱하네유. 갸가 싫다는 걸 왜서 대구 못살게 굴구 기래유?”
  내가 눈을  독사같이 뜨고 어머니한테  말했다. 그러면 어머니  얼굴에는 담박 
서운함과 노여움이 깔렸다. 어떤 땐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니두 날 괄세하너?”
  입을 삐죽거리며 이렇게 말하면 나는 갑자기 속이 뒤집혀 아이를 업고 움막을 
떠나고 싶었다. 월남을 해서 살 땐 늘 아들도  없이 혼자 된 어머니가 맘에 걸렸
다. 다시 만나면 원 없이 잘해 드리겠다고 혼자 속으로 결심했었다. 딸만 두었어
도 외롭지  않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알도록. 그런데 우리는 만나자마자  알 수 
없는 이유로 서로를 미워하고 할퀴었으며, 이내 후회하고 가슴 아파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선  뱃속에 들었을 때 잘  먹어야 한다며 애호박이나 가지 
오이 같은 것을  싸들고 장에 나가 비린 생선  꼬리로 바꿔다 밥솥에 쪄서 상에 
올려놓았다. 어머니는 근이가  그걸 다 먹을세라 당신이 품에 안고  김치쪽을 얹
어 밥을 먹였다. 그러면 나는 아이의 입에 비린 걸 넣어주었다.
  “야! 닌 왜서 내 말을 안 듣너? 딱해 죽겠잖? 시방은 야가 중하지 않어. 에미
가 그런 걸 먹어야 한대두 말을 안 듣구 기리네?”
  어머니는 섭섭해서 눅눅한 목소리로 화를  니면서 미처 밥도 다 먹지 않은 근
이를 업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낡은  무명옷을 입고 방문을  나서는 어머니가 
갑자기 역겨워져서 나는  입안의 밥을 삼키지도 못했다.  `그 앤 내 아들`이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억누르고 나면 가슴이 뻐근했다.  이런 상태는 내가 아이를 낳
은 뒤, 보름쯤 몸조리를 하고 물갑리를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에미야, 니 멋질집 중간이하과 동무 아닌?”
  바깥말에 나갔다오던 길로  어머니가 물었다. 내가 그렇다는  시늉으로 감자를 
깎다 말고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 집에  아들이 포로가 됐다 완기  몸이 매렌두 없이 페렌데,  기리구두 야 
집을 짓잖? 아들은 어디가 달러두 달르단 말이 맞는 기여.”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입이  저절로 닷 발이나 나왔다. 그러고도 어머니는 여기
서 그치지 않았다.
  “에미두 그저 아들을 여럿 낳아라. 내 껄 되잖을라거덩.”
  어머니가 쓸쓸하고 초라한 목소리로 말했다.
  “멋질네를 누가 사람으루나 예겐  기 그리너? 있으나마나 한 애비란 건 자나
깨나 손버르쟁이 나뻐 남이 누가 한번 눈이나 제대루 주던?”
  나는 어머니가 이렇게  말을 계속할 때 조마조마했다. 어머니가 하고  싶은 말
은 분명히 따로 있었다.
  “우리 범설이 같은 아들을 누구가 나봔? 질러보길 했너. 그렇게두, 워낙이 사
람이 잘되노니...”
  마침내 어머니는 질금질금 질척거리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그랬다. 세상
과 사람에 대한 어머니의 경멸감 밑바닥엔 아직도 떠나보내지 못한 오빠가 있었
다.
  그런데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토요일이면 들어와 잠을 자고  가는 남편
이 월요일 새벽에 떠난 다음이었다. 남편은 오늘내일  하는 나를 두고도 밤을 그
냥 보내지 않아서 나는 그가 다녀가면 녹초가 되는 기분이었다.
  “수대 쌀이 재워 요거  남았으니, 애가 마르네. 뭐가 나올라구 여적지 기밸이 
없너?”
  날이 새서 제법 훤한 부엌에서, 자그마한  쌀독을 들여다보며 어머니가 중얼거
렸다. 어머니는 내가 몸을  풀면 첫국밥을 해준다고 귀한 입쌀을 한  말 되게 독
에 넣어뒀다. 그런데 입이 까다로운 사위가 오면  바가지에 첫국밥 지을 수대 쌀
을 퍼놓고 밑의 쌀을 덜어 밥을 해주곤 하였다.
  “에미야. 증말루 이번엔 아들을 낳야 한다. 아들 하나룬 맘이 늘 불안하잖?”
  부뚝막에 앉아서 하품을  하고 있는 내게 어머니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어머
니는 엊저녁에 깎던 감자구박에서 껍데기를 뒤적거려 감자를 골라냈다.
  “어머인 시방 딸한데 뭐 그런  말을 해유? 그럼 우리 근이가 죽을 팔자란 말
이래유? 세상에 아무리 아머이가  날 미워해두 어떻게 시집간 딸한테 그런 말을 
해유? 내가 어머이 팔자하구 같아야 속이 시원하겠수?”
  나는 어머니에게 아무 생각 없이 마구 말했다.  처음엔 첫마디-어머니 시방 딸
한테 뭔 그런 말을 해유? 까지만 하려던  것이었다. 그걸 나도 모르게 꼬리에 꼬
리를 물고 마구 내뱉고 말았다. 감자를 깎던  섭조개 껍데기가 어머니 손에서 맥
없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무섭고도 짜릿했다.
  “그래, 내 니가 이런 말 할 줄 알았다! 말 잘했다. 내가  죄가 많아 아들 잡아
먹구두 여태 살았단 거, 나두 안다!”
  어머니가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내 마음 한편으
로 시원한 느낌이 끼치는 건 대체 무엇일까.

  토요일에 다시 남편이 왔다.
  “에미가 여기 와 있으니 내가 참 좋잖?”
  빨랫비누를 가져온 남편을 맞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왜서유!”
  남편이 물었다.
  “사우를 대구만 보니 좋구 말구가 아니너.”
  어머니가 말했다. 남편은 웃기만 했다.
  “저 사람은 애 낳는다구 오더니, 알구 보니 일하기 싫어 기짓불핸 기 맞네유.

  남편이 밥상을 받고 말했다.
  “사우 말이 딱 맞네.”
  어머니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집안에  남자 어른이 오면  우리들은 갑자기 
긴장과 활기를 띠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돌아가면 다시 질서가 없어지는  것 같
았다.
  하여튼 그가 돌아간  날 저녁에 나는 거짓말처럼 아이를 낳았다.  아침을 먹은 
것이 속이 틀린다 싶더니 그게 진통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받았다.
  “뭐래유?”
  내가 물었다.
  “알아 뭐한!”
  어머니가 마치 못 볼 걸  보고 난 사람처럼 말했다. 절망적인 느낌이 왔다. 온
몸에서 맥이 빠져나갔다. 그저 튼튼한 아들 하나  더 낳겠다고 속으로 얼마나 남 
모르게 벌렀던가.
  “에이구, 여기 와 난 기 예시가니... 츳츳.”
  어머니가 혀를 찼다. 어머니에게 미안했다. 딸의 불효라는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속에서  뭉클거리는게 한동안 휘졌더니 마구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울지 말어! 안죽두 시퍼런 나인데 아들 못 날란?”
  어머니가 말했다. 우는 목소리였다. 결국 우리는 울음을 감추지 못하고 한동안 
핏덩이를 놔두고 통곡을 했다.

  몸을 푼지 아흐레 만에 추석이 닥쳤다. 장에 가는  사람 편에 딸 낳은 걸 기별
하긴 했다. 그리고 열이틀 만에 떡을 해서 이고 양양으로 나갔다.
  “저걸 어떻게 업구 나가너?”
  어머니가 이제 겨우 눈을 뜨는 핏덩이 외손녀를 징그럽다는 듯이 보며 중얼거
렸다. 나는 할말이 없었다.
  “사둔덜을 뭔 낯짝으로 보너?”
  어머니는 자꾸만 혼자 이런 마을 지껄였다.
  “걸음짝이 걸려야 걷지. 아들을 났으문 훨훨 날아갈 걸.”
  “어미인 내가 떨려날까 봐 그류?”
  나는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어머니가 찔끔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에미두 딸이 여레이니 이담에 딸덜 시집 줘봐. 그때 내 생각 하잖너.”
  어머니가 말했다.  기분이 언짢았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이래저래 
서로 우울해서 말없이 길을 걸었다. 떡함지를 머리에  인 나는 자꾸만 몸이 부었
다. 어머니는 당신이  함지도 이겠다고 화를 냈지만,  내 화를 이기지 못해 나는 
끝끝내 함지를 이고 양양까지 왔다. 읍내가  가까워질수록 어머니의 얼굴을 어두
워졌다. 속이 상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집 어른들과 얼굴을 맞대기 
무섭게 어머니는 기죽은 웃음을 지었다.
  “지가 밴밴치 못해  아들 손주를 업구 들어오지 못했네유. 사둔님덜  낯을 뵐 
수가 없어 다리가  무거워 재워 여기루 왔네유.  지가 딸을 잘못 둬서 이렇지유. 
시집을 가민 여자란 기 시집 손을 대줘야 하는 기 첫째 가는 도린 걸 누가 몰러
유, 당연한 도린 걸유. 그럴 못하구 이래저래 사둔님덜한테 죄가 많네유.”
  어머니가 이렇게 장황히 용서를 빌었다.
  “아들 낳구 딸 낳는 기,  어디 인력으루 된답디까. 딸 낳는 어멈이 아들을 못 
나란 법두 없는 거구유. 걱정하지 마시구 맘편히 가지세유.”
  시아버지가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허리  한번 똑바로 펴지 못하
고 인사 나누기 무섭게 딸네의 부엌일을 했다.  나는 친정에서 마련해 온 미역으
로 국을 가마솥으로 하나 가득 끓여 동네 할머니들을 청해 떡과 함께 대접했다.
  이렇게, 외할머니까지 고개를 들  수 없게 한 나의 둘째딸을, 시아버지는 맑은 
여자가 되라며 `숙`이라는 외자 이름을 붙여 주었다. 숙이는 커서 미국으로 이민 
간 남자와  결혼했고, 나는 숙이 덕에  예순 나이가 되었을 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6
    다른 땅에서

  “저어, 시방 한국 비행기가 도착했너유?”
  나는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느 사람들 뒤에 가서,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남자
의 등에  대고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모니터 화면에 가득한 영어가  내 눈에는 
그저 바글거리는 구더기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대답은 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
았다. 나는 고개를 추켜들고 습관이나 된 것처럼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 남자가 돌아보며 무심하게 말햇다.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순간에 
몸이 얼어붙었다. 내가 그의 말에 무어라고 인사나 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 출영
장은 복잡하고 밝지 않은 탓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제풀에 놀란 사마귀처럼 다른쪽으로 피했다.  그리고 야금야금 방금 나를 
소스라치게 했던 그  남자를 다시 떠올렸다. `낡은  남색의 야구모자`를 눌러 쓴 
키 크고 덩치 좋아보이던 그 중년의 남자에 대해.
  남편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를  화장해서 땅에 뼈를 묻지 않
았다면, 나는 그 남자에게 `여보! 당신 여기 웬일이래유?`하고  말을 걸었을지 모
른다.
  나는 출입구 한쪽에 붙어 서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별일이었다.  세상엔 비슷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필 윤이를 마중나온  지금, 남편이 세상을 버린  뒤로 처음, 이런 일을 당하는 
게 꺼림칙했다. 숨을 몇 번 크게 쉬고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씹었다.
  “야는 뭔 차를 여적지 못 세웠너? 안죽두 못 오게!”
  나는 듣는 사람이라도 있는 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주차장이 꽉 차서 내가 먼
저 올라왔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모니터 쪽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보이지 않
았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곧 내가 도깨비에게  홀린 게 아닌가,  망령이 나려는 
게 아닌가 온갖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더 문
제였다. 모니터를 보고 있었으니 나처럼 배웅을 나왔을 터인데, 그렇다면 마땅히 
여기 어딘가에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내 생각은 여기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점점  불안하고 불길했
다. 혼령이 아니라면 이렇게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에 시달리며 그 남자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 다녔다. 그는 어디
에도 없었다. 갑자기 몸에서 한기가 배어나왔다.
  “익스큐즈 미!”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헤엄치듯 걷는 백인 청년 둘이 나에게 부딪쳤는지 이렇
게 말하고 지나갔는데 그 목소리는 도리어 나를  나무라는 것 같았다. 미국에 처
음 와서는 그런  풍습이 부럽다 못해 존경스러으나  지금은 속으로 미안해 하는 
것은 우리나 저희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 언닌 아직 안 나왔지요?”
  숙이가 옆에 와서 물었다. 아무렴 그렇지,  하는 말투였다. 나는 대답도 못하고 
그 애를  뻔히 쳐다보았다. 내 머리  속은 온통 확인하지 못한  남편의 혼령으로 
가득했다.
  “보나마나 언니가 줄을  잘못 섰을 거야. 이미그레이션 통과할 땐  짧은 줄에 
가서 서라고 그랬는데두!”
  숙이가 여태 들고 있던 자동차 열쇠를 손가방에 넣으며 투덜거렸다.
  “언니는 말은 똑 부러지게 해도 얼마나 바보 같은지  답답해 죽겠어! 꼭 아버
지 같애! 엄마, 껌 씹을래요?”
  숙이가 종이를 벗긴  껌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얼얼한 기분으로  생각없이 껌
을 받아 입에 넣었으나  그저 딱딱한 그것이 싫어 이내 뱉었다.  숙이가 이런 나
를 의아하게 보았으나 이유를 묻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언니가 고춧가루 가져올까? 캔디아빠 속옷을 면으로 열 장씩 사라고 했는데 
샀겠지 엄마?”
  숙이는 윤이가 가져올  선물에 대해 이것저것 신경을  쓰며 좀체 입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나는 어떤 것은 대답하고 어떤 것은 귀로 흘려듣고 그랬다.
  “언니가 아버지 돌아가신 산에 가보겠다고 할까 봐 걱정이네!”
  숙이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 애를 쳐다보았다. 숙이도 뭔가 모를 불안에 
싸여 있음이 분명했다.
  “야 에미야.”
  숙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니는 여기서 이상한 사람 못 봔?”
  나는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숙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애의  표정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그 애를 마주보았다.  그러나 숙이의 
표정은 오래도록 그대로였다. 어쩌면 이런 순간은 잠깐 이었을지도 모른다.
  “야! 내가 느 아부지를 봤따!”
  나는 성급학  말했다.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숙이의 얼굴 색이 어두워졌
다. 눈썹 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언짢을 땐 언제나 그랬다.
  “아버지를 어떻게 봐요!”
  숙이가 무섭게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엉뚱한  곳을 바라
보았다. 배웅 나온 사람을  만나 얼싸안고 좋아하는 사람,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
는 사람, 급한 걸음을 걷는 사람, 초조하게 안 쪽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붐볐다.
  “암만 생각해두 내가 귀신을 봔 기여. 느  아부지가 날 데리구 갈라구 그러는
지두 몰러야.”
  내가 중얼거렸다. 숙이가 비웃듯이 입을 삐죽 내밀고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목이 당기는 느낌이어서 헛기침을 했다.
  “엄마! 이번주부터 나랑 같이 교회 나가요!”
  숙이가 매정하게 말했다. 교회가 사람 마음을  홀려 생돈을 빼앗아간다고 거품
을 물던 숙이가 언젠가 하나님을 믿고 전도사가 되었다.
  “사람이 뭔데.  아무것도 아니면서 잘난 체하니까  자꾸 벌 받는다고요. 맘이 
약하면 마귀밖에 더 덤벼요?”
  “교회 나가문 하나님이 아무나 천당으루 보내주너?”
  나는 켕기는 기분을 감추려고 이렇게 말했다.
  “벌써부터 나가자고 그렇게 말해도 안 나가더니!”
  숙이가 쫑알거렸다. 나는  머리를 사자털처럼 하고 지나가는  여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불안한 건 맘속에 마귀가 드글드글 끓기 때문이라고 내가 그렇게 말해도 엄
마는 뭐가 잘 났다고 교회에 안 가고...”
  숙이가 때를 만났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일부러 안 들리는 척 했지만, 속으로
는 그 애에게 평화를 준다는 하나님에게 의지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 
힘든 일도 아닌 거. 천당 보내준다는 데 못 갈 거 없지.
  그러나 곧 다시 그 남자를 떠올렸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 남편이 즐겨 
썼던 야구모자. 남색이  바랜 것까지 그렇게 똑같을 수  있다니! 집을 나갈 때도 
쓰고 나갔고, 시체로  발견 됐을 때도 있었던  그 모자. 윤이의 꿈에서도 남편은 
그 모자를 쓰고 있더라고 했다.
  “엄마, 어쩌면 언니가 어떤 남자하고 같이 올지 몰라요.”
  내가 아직 그  남자의 모습에 사로잡혀 있는데 숙이가 헬쭉  웃으면서 말했다. 
뭐라구? 나는 그 애를 쳐다보았다.
  “엄마가 놀라실까 봐 미리 알려드리는 거예요.”
  숙이가 다시 웃었다. 화가 치밀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야! 시방 니가 한 말이 뭔?”
  “언니가 애인하고 올지 모른다니까요.”
  숙이가 말했다. 나는 눈을 치켜떠 보이고 고개를 돌렸다. 울컥 치미는 화를 참
고 물었다. 숙이는 대답하지 않고 징그러운 웃음을 계속 웃었다. 나는 눈이 아프
게 흘겨보았다.
  “엄마가 늙었다구 놀리너? 고얀 것!”
  “엄마는 왜 화부터 내고 그래요?”
  숙이는 웃음을 싹  거두고 정색을 했다. 듣고  보니 그랬다.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출구 쪽을 바라보았다.
  “언니가 누구 딸인가 생각해 봐요.”
  부를거리는 화를 누르고 있는데 숙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언닌 아버지 빼닮았잖아요.”
  “그래서! 빼닮았으문 그래  닮을 기 없어서 추잡스런 행실이나 닮아야  한대?

  나는 성을 발칵 냈다.
  윤이란 년. 스물두 살에 열한 살이나 나이  많은 노총각에 미쳐 시집을 가겠다
고 법석을 떨더니 결혼 날짜 잡히자 도망을  갔다. 나중에 돌아오긴 했지만 신랑
집에선 이미 넌더리를 낸뒤였다. 그 후로 그  애는 오랫동안 결혼에 흥미를 잃고 
지냈다. 무조건 혼자 살겠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결혼하면 불행해 진다는 게 이
유였다. `어머니를 보면 모르세요?` 그 애가 하던 말이다.
  맏딸이 결혼을 하지 않으니 밑의 동생들 혼기도  턱에 닿았다. 쇤 풀처럼 늙어
가는 딸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났다. 우선  남부끄럽고 조상에도 죄를 짓는 꼴이
었다. 여자란 건 결국  자식을 낳아 기르기 위해 이 세상에  생겨난 거라고 말해
도 소용이 없었다. 처녀로 살다 죽으면 태어난  보람이 없다고 귀에 더께가 지도
록 말했지만 허사였다.
  그런 윤이가 서른이 되었을 때, 아주 약골로 보이는 총각을 데리고 왔다. 우스
웠다. 하지만 결혼하겠다는 말에  사윗감 되질할 엄두도 못냈다. 탈을 잡았다 이 
기회도 놓칠까 지레 겁이 났던 것이다. 둘이  잘살아주기만 하면 외모야 무슨 상
관이랴.
  다른 아이들이 윤이의 남편을 흠잡으면 나는,  너희들 아버지는 어디가 못생겨
서 그러더냐고  입을 막았다. 그러나 윤이는  행복하지 못했다. 아이가 생기고도 
이혼한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 애보다 불안한 게 나였다. 이혼을 하려고 아이
를 더 낳지도 않았다.  결국 6년 터울로 아이 하나를 더 낳긴  했지만 여전히 아
슬아슬했다. 며느리 대가 세다고 그쪽 시어른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윤이의 나이 몇인가. 한동안  바람이 난 제 서방  때문에 기미가 
새카맣게 슬어 애를 끓이던 게 외간 남자를 달고 미국까지 와? 생각할수록 울화
가 치밀었다.
  “느덜은 나보다 배운 기 많다구  나를 깔볼 줄은 몰라두 날 따라올라문 안죽
두 멀었어!”
  나는 숙이에랄 것도  없이 씹어뱉었다. 남자라는 거야 생겨먹길 그래서  열 계
집 마다하지 않는, 개 같은 성질을 가졌다지만  아이 낳아 기르는 여자가 되어서 
서방질을 한다는 건 자자 손손 욕이 될 것이다.
  “엄마, 언니가 지금  형부하고 살 걸 사는 줄 알아요?  언니가 뭐랬는지 알아
요? 자긴 엄마가 그렇게 사는 걸 보고 자라서 이혼도 못한대요!”
  무심한 줄 알았더니 숙이가 볼 부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느덜한테 뭘 잘못핸?”
  분하고 화가 나서 벌컥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잘못  사셨지요. 아버지한테 매맞고  여자를 집에 데려와도  아무 말 
못하고... 요새 여자들은 그렇게  안 살아요. 엄마는 모르시는데 우리는 엄마한테 
보고 배운 게 나쁜 거만 배운 거라고요.”
  “그래서! 느 언니 행실이 내 탓이란 말이여?”
  나는 이렇게 말했다.  머리가 어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헛구역질까지 났다. 
딸을 길러놓으면 친구가 된다더니 이건 어디에다 비길 데도 없는 원수 같았다.
  “옛말 그른 거 하나 없어! 여자는 늙을수록 아들하구 살아야 해!”
  나는 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그 말을 골라서 뱉었다.
  “엄마는 왜 싸우려고 그러세요?”
  숙이가 말했다.
  “그럼 내가 시방 웃어야 옳너?”
  “우리가 뭐 엄마를 싫다는... 어머! 언니다아!”
  숙이가 갑자기 소리치며 안쪽으로 달려갔다. 윤이가  짐수레를 밀고 웃으며 나
오는 게 보였다. 반가웠다.
  잘 넘어져서 무릎이 성할 때가  없던 저 애. 하루종일이라도 혼자 놀던 저 애. 
근이가 태어나자 동생이 생겼다고  기뻐서 잠도 자려 하지 않던 저  애. 근이 같
은 고추 달아달라고, 울며 때쓰던 저 애. 제 아버지에게 맞아 피멍이 든 나를 붙
잡고, 나가서 같이 죽자고 말했던 저 애. 세월이 그 사이 무슨 조화를 부려서 저 
애가 저렇게 달라졌을까.
  “엄마!”
  윤이가 목이 메인 소리로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닌 안죽두 엄마라구 하너?”
  나를 끌어안는 윤이의 등에 팔을 감으며 나직이 꾸짖었다.
  “그렇게 온다온다 하더니 이제야 왔구나.”
  나는 도무지 팔을 풀려고 하지 않는 윤이에게 말했다.
  “그래도 왔잖아요 엄마.”
  “그래 잘 왔다. 살림하는 여자가 말이 그렇지 집 떠나기가 쉽너?”
  “그만해요. 죽었던 사람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닌데.”
  숙이가 우리 사이를 떼어놓으며 말했다.
  “언니 혼자 왔어?”
  숙이가 제 언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렇지만  내 귀에도 들렸다. 나는 듣지 
못한 것처럼 딴전을 피웠다.
  “엄만 하나도 안 늙으셨어요. 더 좋아 보이세요.”
  윤이가 한껏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닌 몸이 왜서 이렇너?”
  윤이를 살펴보며 내가 말했다.
  “언니가 어때서 엄마. 더 날씬해졌는데, 노처녀 같네 뭐.”
  “날씬은 야. 매렌두  없이 페랬는데, 니가 비행기에서  주는 밥을 영 못 먹언 
기다.”
  나는 윤이의 손목을 만져보며 물었다.
  “엄마, 전 괜찮아요.”
  윤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겨우 대답했다.
  “요새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 주나  봐. 그러니 저렇게 처녀같지! 여기서 얘기
하고 있어 언니. 내가 차를 가지고 이리올게.”
  숙이가 샘을 내듯 말하고 차를 가지러 갔다.
  “상계동 아네두 다 잘 있너?”
  나는 근이의 소식을 물었다.
  “근이네는 모두 잘 지내요.”
  “다덜 잘살어야지. 그래야 되구 말구! 내가 느덜을 어떻게 키웠다구!”
  내가 말했다. 윤이는 내 손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마디마디를 더듬고, 늘어
져 이리저리 밀리는 살가죽을 쓰다듬으며 감회에 젖어들었다.
  “근이가 미국으루 언제 들어오겠단 말은 안하더너?”
  “글쎄, 그런 말은 아직 안했어요.”
  “가두 얼른 들어오는 기 날걸. 내 맘성엔  어멈이 대구 가지말자구 말리는 거 
같잖너.”
  나는 초청장이 떨어졌는데도 들어오지  않는 아들이 며느리 수작만 같아 이렇
게 말했다.
  “엄마는 미국이 좋으세요?”
  윤이가 대답은 않고 어린 자식 안쓰럽게 바라보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
다.
  “좋을 때두 있구 싫을 때두 있구 다 그렇지.  사람 사는 기 어디라구 안 그렇
너? 그래두 여자덜한텐 세상에 여기보다 더 좋은 데가 없을 거여.”
  “그래도 엄마. 여긴 외로울 거 같아요.”
  “외로운 거 느낄 겨를이나 있으문!”
  나는 윤이의 눈을 피하며 자신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데 윤이가 한 말이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아서 생각해 보니 남편이었다. 그가 입에  달고 사는 말 
중에 내가 지겨워했던  것이 `외롭다`는 것과 `그립다`는 말이었다.  순식간에 떠
오른 남편 때문에 언짢아 입을 다물고 있는데 숙이가 우리 앞에 차를 댔다.
  “언니, 요샌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런 무지막지한 이민가방 안 가져 다녀.”
  숙이가 이민가방을 트렁크에 실으며 말했다.
  “어이구, 지가 사오란 기 어디 한두 개연?”
  내가 말했다. 숙이가 민망한지 혀를 낼름 내밀었다.
  “참 언니! 캔디아빠 러닝 팬티 사왔어?”
  “그래, 열 장씩!”
  “남덜은 미제가 더 좋다더구만 자더은 안팎이 벨나기두 해야!”
  내가 중얼거렸다.
  “제 나라 물건 쓰는 게 좋아서 그러겠지요.”
  윤이가 말했다.
  “난 국산 좋은 거 한 가지두 못 봤다. 여기 쌀루다 밥을 해봐. 기름이 자르르 
흐르잖너. 감자는 좀 마숩다구?  감원도 감자보다두 낫더라. 고사리두 산에 개락
이란데. 시간이 있어야 고사릴 꺾으러 가보지!”
  “엄마 같은 사람들  때문에 큰일이야. 미국에선 갈대도 함부로 못  꺾게 하거
든. 그런데 여기서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망신을 당하는지 알아?  산에 가서 도
토리란 도토린 다  주워다 묵 만들지, 고사리  꺾다가 잡히지 않나. 곰사냥 다니
고, 바다낚시 하고, 어디 가서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기 창피하다니까.”
  “야 그런 말 말아라. 우리 나라에선 산이  허옇게 덮이두룩 구람을 줘두 다람
쥐만 쎄구 쌨다. 사람 먹을 거 짐승 먹을 거 다 따루 있기 매렌이여.”
  내가 말했다. 윤이는 차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헛웃음을 웃었다. 갑자기 숙이
와 사는 일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딸이라는  건 아무리 좋아도 어느 순간 결국 `
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위가 잘해 줘도 사위집은 `내  집`이 아니었다. 왜 
이런 맘이 드는지, 나도 이상했다.
  “한국 나가거든 근이보구 하루라두 날래 미국  들어오라구 그래라. 기왕 올라
구 맘 먹은 기문 거기 더 있을 기 뭐너? 근이 가는, 결심이 약해 탈이여.”
  내가 차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윤이나 숙이 어느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내 쪽 창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낮은 목조  건물, 길가에 앉아 있는 흑인 거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백인 처녀, 목 빠지게 쳐다봐야 하는 야자나무 가로수.
  “언니, 요새 시집 식구들은 괜찮아?”
  숙이가 윤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귀가 번쩍 뜨였다. 남의 집 며느리가 되어서
도 좀체 그  집에 맞춰 살지 못하는  윤이 때문에 한동안 내 맘  고생도 심했다. 
몸은 다른 집 자식으로 살면서 마음은 친정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조상 뼈
대 중히 여긴다는 사돈 집안에서  딸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느냐고 멸시 할 걸 
생각하면 오금이 다 저렸다.
  “야 니 들어갈 때 사장어른 보약을 지어  가라. 여기가 한국보다 녹용이 싸단
다.”
  내가 윤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무도 산뜻한 생각 같아서 기분이  다 좋아졌
다.
  “엄마, 그럴 필요 없어요.”
  윤이가 말했다.
  “내가 사둘게. 두 냥 사서 양쪽 어른 한 재씩 드리문 좋워하잖겐?”
  “싫어요. 뭐 그럴 필요 있어요? 그 집에선 엄마한테 무슨 선물했어요?”
  윤이가 싸늘하게 말했다.
  “다 닐 위해서 안 그리너?”
  “괜찮아요. 내가 뭐 병신으로 그 집에 살러갔어요?”
  “니두 참 희한하다. 생각이 안죽두 그렇게밖에 안 돌아가너?”
  내가 말했다.
  “언니 말이 맞아요 엄마. 엄마는  너무 절절 매요! 우리가 뭐 죄졌어요? 나도 
녹용 지어바치는 건 반대야!”
  “야 느덜은 생각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느덜한텐 내가 엄마가 아니여.”
  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이들은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 안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상상치 못할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바보 천치 같
은 것들. 나는  속으로 딸들을 비웃었다. 나이가  한둘이라 여자가 뭔 줄 모른단 
말인가? 여자가 날고 기어봐, 남자  위로 올라갈 수 있나. 딸들만이 아니라 나도 
골이 났다. 나는  쌍것 집안에서 자라지 않았는데 저것들이 나를  쌍것으로 만들
다니.
  갑자기 숙이가 키득대고 웃었다. 나는 백미러에 비친 그 애를 바라보았다.
  “언니, 난 그거 못 잊어. 언니 결혼하고 나서 얼마 안 돼 형부랑 싸우고 집에 
왔었지? 그때 언니가 자고 가려니까 엄마가 여긴 너희 집이 아니라고 해서 언니
가 울고불고 그랬잖아. 엄마는 평생 나를 한 번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그
래서 고아처럼 자랐다고.”
  윤이는 듣기만 했다.
  “그래 내 말이 어디 한 군데나 틀렸너? 느덜이 죽으문 어디메 묻힐라너 생각
해 봐라. 여자란 건 다 그런 기여.”
  내가 말했다.
  “난 싫어요! 죽으면 화장해서 아버지 묘지에 뿌리라고 할 거야!”
  윤이가 소리쳤다. 나는 그 애가 미친 게  아닌가 해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
다.
  “언니, 그건 또 너무하다.”
  숙이가 말했다. 윤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가슴이  싸아하니 아렸다. 저 애가 마
흔이 다 되도록 아직 마음을 잡지 못한  게 가여웠다. 물론 사위에게도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무얼 잘못 가르쳐 저렇게 컸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
었다.
  우리는 다시 반가움과 미움의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엄마, 미국이 좋으세요?”
  얼마나 지났을 때 윤이가 불쑥 물었다.
  “여긴 노인네 천국이여.”
  내 말에 윤이가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먹을 거 흔한 데다가  노인들을 여기처럼 위해 주는 데가 있는  줄 아너. 아
퍼봐라, 병원 공짜루 가지. 노인 아파트 주지.  다달이 월패(wellfaer)타지, 한국처
럼 춥길 하너. 나 살긴 여기가 최고여!”
  내가 말했다.
  “언니, 남의 나라라서 그렇지 캘리포니아는 축복받은 땅이야.”
  숙이가 말했다. 그래? 하는 얼굴로 윤이가 우리를 번갈아보았다.
  “나도 한때 미국을 천국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유치원 다닐 때였어. 엄
마, 천주교 앞에 살던 영희라고, 내 친구 생각 나세요?”
  “언니, 나 생각난다. 얼굴이 동그랗고 복스럽게 새긴 언니지?”
  “그래.”
  “영희 언니 동생이  나하고 동창이잖아. 영미라고. 그 앤  얼굴이 네모났지만.

  “그래, 영미도 생각나네.”
  “참 옛날 얘기덜 하는구나.”
  내가 아이들 말에 끼여들었다. 반가운 얘기들이었다.
  “뭔데 언니?”
  숙이가 물었다. 윤이는 눈을 내리뜨고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고 있었다.
  “그때 영희하고 둘이서 땅을  팠단다. 수녀님들 계신 집 마당에서. 땅을 자꾸 
파면 검은 기왓장이 나온대. 그게 미국  땅의 지붕이라는 거야. 천국이라는 거지. 
영희하고 둘이서 얼마나 땅을 팠던지. 천당 미국을 보려고.”
  윤이가 여기까지 말하고 웃었다. 왠지 그 애의 웃음소리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기왓장이 나왔어?”
  “아니. 어두워지니까 집에 갔지 뭐.”
  “웃겼네.”
  “웃겼지?”
  “그맘때야 누구라두 미국이 천당이라구 다 믿었잖너.  굶어 죽을 판에 구호물
자 갖다주지, 개천에 다리 놔주지 핵교  지어 주지, 그래놓으니, 미국이 없었어봐
라. 우리나라가 다 씨벌겋게 돼서 사람이 살 수나 있었겠너.”
  “그랬어 언니?”
  내 말은 믿지 않고 숙이가 제 언니에게  물었다. 윤이는 대답은 않고 소리내어 
웃었다.
  “언니도 이민 와서 살아라. 애들 교육 때문에 이민 온 사람들 여기 많아.”
  이 말에도 윤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이 차는 한인타운에  닿았고 우리는 
윤이가 원하는  설렁탕 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집인데 
윤이는 깍두기에서 미국 냄새가 난다고 타박했다. 그러나  그 애는 한 그릇을 다 
비워 나를 안심시켰다.
  우리는 이날 윤이를 집에  두고 가게로 다시 나갔다. 그 애가  잠을 자고 싶다
는 것이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가방가게 석규 엄마가 인사했다.
  “좋다마다 말해 뭐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서슴없이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언제 이렇게  좋아본 적
이 있었는지, 걸음이 저절로 걸어졌다.
  “큰따님이 오니까 좋으셔서 입을 못 다무시네요.”
  금은방 하는 최씨도 말했다.
  “기래기다 말이유. 자식이란 기 뭔지 몰러.”
  나는 정말 입을 못  다물고 이렇게 말했다. 윤이를 두고 나온  것이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그 애가 어떻게 있는지 궁금해졌다.  무턱대고 전
화를 걸어 그 애와 아무 말이라도 나눠보고  싶었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눈 한번 
붙여보지 못했다는 그 애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숙이가 오렌지 주스와 인절미를 가져왔다. 같은  교회 다니는 친구가 가져왔다
는 것이었다.
  “엄마 얼굴이 너무 이뻐 보여요.”
  숙이가 장난치듯  말하고 팔랑팔랑 활개걸음을  걸으며 제 가게로  갔다. 나는 
그 애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어느 결엔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말
았다. 그 순간 나는 너무도  놀랐다. 정말 낯은 익었으되 익숙하지 않은 얼굴-볼
이 발그라니 익은, 행복한 미소가 감도는 얼굴이 있었다.
  행복이 사람을 저렇게 다르게 만들다니.
  가슴이 저리는지 떨리는지, 몸이  다 날아갈 것 같았다. 윤이가 괜찮다면 돌아
오는 일요일에 그 애와 함께 내가 묻힐 묘지로 소풍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봐라. 여기에 엄마가 묻힐  거란다. 한국 같지 않지? 여긴 얼마나 아름다운 
공원이니? 난 자유로운 미국에  묻힐 거다. 나 죽은 뒤 딴  생각 말아라, 너희들. 
아버지하고 합장한다면서 나를... 그건 절대로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생각해 보면  그 세월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남편이  돌아온다고 가슴 
설레면서 기다려본 적이 있었던가?  그가 돌아올 때쯤 되면 가슴이 저절로 두근
거리며 싸르르 배가  틀리기 시작했다. 그가 와서 뿔뚝밸을 부리고  사람을 쥐잡
듯 할까봐 늘 겁에 질려 살았다.
  물론, 남편과 내가 불행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1954년 9월 12일. 아무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들의 곡
식은 누릇누릇 익어 벼는 고개를  숙이고 밭곡은 한두 가지씩 거둬다 말리는 때
였다. 깡통을 이어붙인 양철 지붕에선 박이 허옇게 여물고 있었다.
  아무도 비가 그렇게 하늘이 뚫린 듯이 내릴  줄은 몰랐다. 가을 장마라는 것이 
있어도 이럴 수는  없었다. 비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쉬지 않고 퍼부었다. 
물이 불은 개울은 넘치고 개울을 사이에 둔  마을은 길이 끊겼다. 집에서는 논의 
물꼬를 터주고 밭둑도 단속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빗물에 헐거워진 산은 천
둥이 치면 견디지  못하고 진저리치듯 허물어져 내렸다. 1936년 병자년  수해 이
후 이런 물난리는 처음이었다.
  나흘째 되던 날, 거짓말처럼  새파랗게 하늘이 갰다. 붉은 해는 야무지게 떠서 
세상을 비추었지만 하늘 쳐다보고 사는 농사꾼들에겐  차라리 밝은 게 원수였다. 
누런 벼가 익던  벌판은 어디가 논이었고 자갈밭이었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
다. 거기다 산사태로 가족을 한꺼번에 잃거나 집이  흔적 없이 묻힌 사람들은 절
망조차 사치였다. 손발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벌판이 된 논밭에 나가 흙이
나 자갈을 뒤져 낱알을 주워보았다. 그래 봤자 그  해 수확은 여느 해의 4분의 1
에도 못 미쳤다. 긴 겨우살이, 그리고 이듬해의  길고 긴 봄날, 굶어죽지 않고 보
릿고개만 넘길 수 있으면 하늘의 은혜였다. 그러나  이런 희망도 자갈밭이 된 농
토를 개간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집에도 어려움이 닥쳤다. 물난리에 식구를 잃진  않았지만 3천 평 논이 자
취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부대에서  벌어온 돈이 있어 불도저를 
사서 논을 떴다.  겨울만 넘기면, 보릿고개만 넘기면,  굶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미군부대의 이동으로 일자리를 잃고  서툰 농사일을 하던 남편은 도무지 농사에 
맘을 붙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에겐 이미 자식이 셋이나 딸렸다. 윤이는 국민
학교에 들어갔고 근이는  다섯살이었다. 친정에서 외할머리를 울리며  태어난 숙
이는, 사람 말 같은 소리를 웅얼거리고 제법 발도 떼어놓았다.
  늦가을 어느  날, 남편은 훌쩍 서울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가서 막노동이라도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가 떠난 다음 나는 할머니들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동서와 둘이 보따리 장사
를 시작했다.  강릉이나 원주에 나가 포목을  떠다가 시골동네로 다니며 팔았다. 
돈도 받고 잡곡도 받았다. 씩씩하고 거침이 없는  동서는 나를 여전히 친언니 대
하듯 했다.
  장사를 하는 틈틈이 나는 남편을 보러 서울  나들이를 다녀오곤 했다. 그는 작
은 검정색 손지갑  속에 돌아가신 시할머니의 얼굴 사진과 윤이,  근이가 미군부
대 마당에서 손을 잡고  서 있는 사진을 넣고 다녔다. 그러나  아내인 내 사진은 
없었다.
  시할머니의 사진은  그가 남긴 유품에도  들어 있었다. 누렇게  바래서 지워진 
연필 그림 같은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감전되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리
고, 까닭 모르게 무서웠다.
  이듬해 초가을 남편이 양양으로 돌아왔다. 거의 열  달 동안 객짓밥을 먹고 온 
것이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더 견딜 수가 없었다고, 그는 돌아오자마자 윤이
를 부둥켜안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러나 그리움에 겨운  상봉은 잠깐이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우리 식구들
은 또다시 그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저녁때가 되면 시어머니는 허리도 펴
지 못하고 나를 달달 볶았다. 아들에 대한  두려움을 며느리인 내게 푸는 것이었
지만 늘상 당하는 내겐 지옥이었다.
  “에미야, 아범 들어올 때가 거전 됐어. 지약밥이 안죽두 멀었너?”
  시어머니는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둘이나 되는 며느리가 미덥지 않아 참견을 
했다.
  “에미야. 밥물 잘  봔? 좁쌀은 한쪽 으가리다가만 안쳤지? 아범  밥에 섞이문 
개지랄한다.”
  시어머니가 이래도 우리는  귓등으로 들어 넘겼다. 아들에게  멸시받는 어머니
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와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법칙을 나는 몰랐다.
  “어머이는 왜서 때때마둥 그렇게  볶으서유? 지가 워디 밥물을 한두 번 봐와
유?”
  동서가 시어머니에게 짜증을 부렸다.
  “저년은 시에미 알길 쥐좆만치두 안예게! 홀아비 밑에서 커놔 본 게 인?”
  시어머니는 지지 않고 동서를 흉보았다.
  “아이구우. 누가 누굴 나물궈?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물군다는 말 하나
두 안 글러유!”
  동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설마 아들이 어머닐 팰라구유. 그렇게 무수워하지 마세유.”
  이번엔 내가 위로랍시고 말했다.
  “내가 뭘 무수워  그리너? 그눔으 소갈머리가 씹 같애서  그리지. 생기다생기
다 어떻게 그닷타게 생겨먹었너 몰러야.”
  “어머니, 그 사람이 어디서 나온 자식인데 그렇게 말하세유?”
  “에미야, 당최 그런 말은 하지두  말어! 나야 맹글어논 새끼 씹구녘으로 내질
른 죄밖에 없어! 다 니 시할미가 키웠으니 나한텐 눈곱만큼두 원망 말어!”
  “지는 어무니 한 번두 원망준  적 없어유. 다 지 팔자래유. 윤이애비 같은 남
자 만내기가 어디 죄랜하너유? 지  복이 요거밖에 안 돼서 그런 거 누굴 원망해
유.”
  내가 말했다.
  “성님네가 전생에 이 집안에다 뭔 빚을 졌는지 알어유?”
  동서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동서와  시집 흉을 보다 말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이런 집에 시집을 오게  된 것은 전생에 우리 아버지가 이 
집안에 많은 빚을 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 나나 내 말을  들은 동서나 함께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나는 윤이가 궁금해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벨이 세 번만 울리면 수화기
를 내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
다.
  “자는 걸 내가 깨운 기 아이너?”
  “아니요 엄마.”
  윤이가 대답했다.
  “피곤하다더니 왜서 잠두 안 자구 그리너? 몸살나문 어뜩할라구.”
  “엄마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이구야. 생각할 기 없어서 날 생각해?”
  나는 윤이의 말에 쑥스러워 이렇게 물었다.
  “엄마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뭐이 오래 살어? 나 같은 거 날래 죽어야지.”
  “내가 엄마한테 참 나쁜 짓 많이 했어요.”
  “야 그런 소리 하지 말어!”
  나는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딸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갑자기 부끄
러웠다.
  “느덜이 속썩여야 명이 길어진다야.”
  숨소리만 들리는 그쪽에다  내가 다시 말했다. 이때 안젤라가 메이드  인 코리
아 양복바지를 들고  와서 3달러나 깎아달란다고 말했다. 그 애  뒤에서 나를 바
라보던 멕시코 남자가 손가락 세 개를 펴보이며 `뜨레스 뜨레스`하고 소리쳤다.
  “노 뜨레스! 도스 오케이?”
  내가 그에게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안젤라가 멕시코 말로 남
자와 흥정을 다시 시작했다.
  “엄마. 노 뜨레스, 도스 오케이가 뭐예요?”
  윤이가 물었다. 뜨레스는 멕시코  말로 3이고 도스는 2였다. 윤이는 내 설명을 
듣고 놀라워했다.
  “멕시칸덜은 무턱대구 깎기만 해야.  꼴에 메이드 인 코리아 좋은 건 알아서.

  “국산이 인기예요?”
  “이런 데선 최고루 쳐!”
  나는 윤이와 말하며 결국 그 남자가 원하는  값에 바지를 내줬다. “이제 그럭
저럭 두어 시간 있으문 문 닫겠구나. 숙이가 집으루 데리러 갈 거여.”
  “아니요 엄마. 숙이가 콜택시를 보낸댔어요. 다섯 시쯤요.”
  “그래라.”
  나는 전화를 끊고  있는 대로 팔을 들어올리고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마음
이 느긋했다.

  윤이가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던가?
  세간을 나가 따로 산 지  오래된 동서가 시할머내ㅣ 제수를 장만하러 온 날이
었다. 막걸리를 거르려고  아랫목에 덮어놓은 술독을 부엌에  내다놓고 바가지로 
맛을 보고 나서였다.
  “성님유, 윤이 그 지즈바에 대해 뭔 말 못 들었어유?”
  나는 막걸리를 마셨다고 손으로 입술을 문지르고 동서를 쳐다보았다.
  “성님한테 이 말을 해야 옳은지 잘 모르겠네유.”
  다시 동서가 말했다.
  “자넨 뭔 얘길 가지구 그리너? 남 애달구지 말구 날래 해봐어여.”
  내가 말했다.
  “윤이 그년어 지즈바 말이래유. 요새 성님이 보기엔 멀쩡해유?”
  동서가 물었다.
  “멀쩡하다니?”
  동서를 쳐다보았다. 술 지게미는 돼지를 주려고 한군데 모았다.
  “그년어 간나가 보기엔 맹탕 같은기유, 시상에  참 맹랑하대유. 갸가유. 지 동
무덜 앉혀놓구유, 글쎄 지가 의붓어머이 밑에서 서룹게 산다구 그리더래유. 그년
어 간나가 맥이 쑥 빠젼기래유.”
  동서가 말했다.
  “미쳤구만 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뱉었다. 그러나 기분은 쓰디썼다. 동서는 내 기분
을 살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말 없이 술 
거른 뒷설거지를 했다.
  “그 지즈바가 말은 바른  대루 했구만. 동세두 생각해 보게너. 사실이지 우릴 
나준 어머이가 뭔 친어머인? 안 그렀너 동세!”
  내가 말했다. 동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로부터 윤이가 내게 더할 수 없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뜨거워서 만질 수
도 없고 내 속에 든 내장 같은 것이어서 떼어낼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남들보다 몇 년이나 일찍 단산이  된 때였다. 처음엔 내가 아이
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걸 몰랐다. 다달이 있던 월경이  비치지 않았지만 걱
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일이 잦았고 어쩌면 임신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도 입덧이 생기지 않더니 느닷없이 어느 하루 속옷이 푹 젖도록 월
경이 비쳤다. 이때처럼 월경이  반갑고 뿌듯한 적은 없었다. 아주 자랑스러워 광
고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겨우  하루를 하고 그만이었다. 이때부터 
대충 스무여드레  주기가 돌아오면 나는  초조하게 그것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 
번도 이런적이 없었다. 남보다 늦은 초경을 하고도  그것이 어찌나 죄를 짓는 것 
같던지.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못했었다.
  어쨌든 나는 서더 달 후에 다시 찔끔 비치는 월경을 끝으로 영영 다시는 월경
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내 몸은 거죽만 여자로 남은 셈이었다.
  다른 여자들은 어떤가 조심스럽게  물어봤지만 나처럼 이렇게 빨리 폐경이 찾
아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내가 네 번째로 딸을  낳았을 때, 시어머니가 아이를 받았다. 친정어머니는 숙
이를 나은 후로는 몸을 풀러 친정에 오는 걸 마다했다.
  문지방을 붙잡고 이를 악문 끝에 아이가  빠져나오더니 첫울음을 울었다. 울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리고 방 안이  고요해졌다. 갑자기 겁이  더럭 났다. 
혹시 아이가 죽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아가 뭐래유?”
  나는 아이가 죽었느냐고 물으려 했었다. 시어머니가 울기 시작했다. 가슴이 철
렁 내려앉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내 눈에서도 걷잡지 못하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어머니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피범벅인 자리를 걷고 태를 싸서 부엌으로 나
갔다. 나는 눈을  감고 눈물만 흘렸다. 눈을 뜨면 내가  나은 딸을 보게 될 것이 
무서웠다.
  “성님은 아두 쉽게 나유.”
  부엌에서 동서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들을  둘이나 낳은 동서는  지금 만삭의 
몸이었다. 동서를 무슨 낯으로 봐야 할 지, 시어머니가 나를 엄마나 멸시할지 초
조해서 가슴이 타들어 갔다.
  “작은어멈아! 니년두 새끼  장개 들일 때 딸 많은 집구석엔  말두 못내게 해! 
메누리 얻어드릴라문 친정에미 아 난 걸 봐야 한단 말이 꼭 맞어!”
  “성님네두 아주 딸만 있은 기 아니란대유? 오빠가 하나 있은 기 죽었대유”
  “작음어멈아, 죽은 걸  누가 자식으루 친? 그런 걸 자식이라문  난 아들을 한 
죽은 더 났어!”
  시어머니가 말했다. 물론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서덜 그래유! 누군 딸 낳구 싶어 낳아유? 딸을 지 혼처서 맹글었대유?”
  나는 참지 못해  문을 열어젖뜨리고 부엌에다 소리 질렀다. 눈물도  마른 눈이 
아리고 몸은 떨렸다.
  “어이 씨이부랄. 원 똥싼 년이 뭐란다더니 야 드루워서.”
  시어머니가 등을 돌려대며 중얼거렸다. 동서는 내 눈길을 피하려고 절절 맸다. 
두고 봐라. 나도 잘난 아들  낳아서 너희, 같잖은 것들 코를 납작하게 해놓고 말 
테니!
  정말이지 나는 내가  평생 아들을 하나밖에 낳지  못할 거라곤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마흔도 안 되어 천벌 받은 몸이 된 것이었다. 그 동안 아들을 낳
아보려고 영혈사  낙산사에 시주도 하고  용한 무당에게 기도도  부탁했었다. 못 
봐도 아들 하나는 더  있다고 맹세를 한 무당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허사
가 된 것이었다. 거기다가  아들 하나 있는 것이 오빠처럼 될까  봐 너무도 불안
했다.
  나는 아주 오래도록  아무에게도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지냈다. 물론 내가 이런 비밀을 가졌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
는 언제나처럼 일에 미쳐 지냈고  남편은 양양 철광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을 했
다. 그는  여전히 두어 달에 한  번씩 아이들이나 나를 상대로  발작하듯 폭력을 
휘둘렀고 우리들은 남편과 어버지가 없을 때 평화와 행복을 느꼈다.
  이맘때쯤 큰형부가 세상을 떠났다. 한동안 친정  쪽으로는 상사가 없이 지내던 
터라 내겐 충격이 컸다. 더군다나 많지도 않은  우리 형제들 가운데 과부가 생겼
다는 게 `부끄러웠다.` 나는 먹고  사는 일에 치여 지내느라 오래도록 병석에 누
워지내던 형부를 문병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양반이 결국은 포로수용소에서 든 골병으루 세상을 베렸어.”
  내가 쿨적거리며 남편에게 부고를 전하자 그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튿날 절편에 기정 떡을  해서 이고 언니네로 갔다. 작은언니 내  외도 와 있
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궁금해서 언니에게 물었더니 어머니는 어
젯밤에 잠깐  와서 들여다보고 갔다고  하였다. 큰아들 삼아  의지하던 맏사위를 
앞세워, 남의 눈에 나서기 욕되다고 했단다.
  “작은형분 오래 사세야 해 언니!”
  “나까정 과부될까 걱정되너?”
  내 말에 작은언니가  말했다. 이때까지도 우리는 예순 전에 모두  과부가 되리
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발인날, 남자들은 장지로 떠나고  집엔 여자 상주들만 남았다. 우리 세 자매는 
모처럼 한방에 모여 고단한 몸을 아무렇게나 뉘고 쉬었다.
  “성은 안죽까정두 독해야. 형부가 죽었어두 어디 울던?”
  기진한 채 누워  있는 큰언니를 두고 작은언니가 내게 소근거렸다.  나는 작은
언니에게 큰언니를 보라고  눈총을 줬다. 큰언니가 킁!  콧소리를 내며 돌아누웠
다. 작은 언니와 나는 서로 눈을 맞추고 소리 없이 웃었다.
  “형부가 원체 꾀사리가 없어! 느  작은형부 봐라. 인민군대 안 나가구두 얼매
나 잘 지낸.”
  작은언니가 말했다. 벌써 여러 번 들은 말이었다.
  큰형부는 전쟁 막바지에 인민 군대에 나갔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물처럼 포
위해서 좁혀오는 미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 부산으로 해서 거제도로 갔다. 형
부가 골병든 건 그곳에서였다.
  지게를 지는 조선 사람은  등짐을 잘 지고, 손으로 들고 다니길  잘 하는 미군
은 팔 힘이 세다고  했다. 그걸 알게 된 미군은 인민군 포로를 기합  줄 때 엎드
려뻗치게 한 뒤, 무거운  돌을 포로들의 등허리에 얹어놓았다. 그런 다음 포로의 
배가 땅에 닿으면 매질을 하는데  매가 무서우니 배를 땅에 대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쓰고,  이때 몸에서 `기름이  쪽쪽 빠리더라`고, 형부가  언니에게 말했다고 
한다.
  큰딸이 열세 살일 때 인민군에 나간 형부는 그 딸이 시집을 가고도 남을 열일
곱 나이에 돌아왔다. 그때  큰언니네는 오막살이에 살고 있었다. 일사후퇴 때 살
던 집이 불타고 그 자리에  언니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오두막을 지은 것이었
다.
  “정지서 설거지를 하는데 어떤  중늙은이가 뻐래가 서서 집을 들여다보는 기
래유. 나쁜 사람 같애보이진 않더구만 그래두  난리때 하두 남자덜한테 놀래놔서 
무수워 죽겠대유. 솥을 까시는데  손이 다 버덜버덜 떠레유. 어머인 동네 사람덜
하과 두벌 짐 맨다구 논에  갔지, 그나저나 애가 말러 죽겠대유. 놀래 죽으나 애 
말러 죽으나 마찬가지지, 독하게  맘 먹구 나가봤잖우. 뉘기시래유? 나가서 이랬
네유. 어여  들어가거라. 그 아저씨가 이렇게  말하대유. 남으 집을  왜서 삐래기 
바라보구 그리너? 나는  그 사람 귀에 들리라구 쭝얼기리구  정지루 들어왔지유. 
그런데 어머이가 헐떡거리구 마당으루 들어스민서 안들어가구 왜서 그리구 섰어
유! 하더니 부엌으로 들어서며 야, 아부지여. 몰러보겠너? 이리잖어유.”
  내겐 큰 이질인 언니의 큰딸은  인민군에 나갔던 아버지와 다시 만날 때의 일
을 변사처럼 말해서 우리를 웃겼다.
  작은 형부가 인민군에  나가는 걸 피한 건  작은언니의 말처럼 꾀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군에 나갈 날짜가 되기 전에 양양이 국군의 손에 넘어간 것이었다. 그
래서 양양이 군정  치하에 들어갔을 때, 형부가 양양 사람으로는  드물게 부역을 
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작은언니가 자랑하는 건 형부가 군대 가는 걸 피한 운수만은 아니었다.
  몇 달에 한 번씩  인공기와 태극기를 번갈아 흔들며 살아야 되던  때, 군에 나
가지 않는  아내들도 전쟁을 치르는  거나 다름없었다. 처음엔  인민군과 국군의 
군복이 달라 서로를  분간할 수 있었다. 국군이 들어온다고 하면  태극기를 들고 
나가 흔들면 되었고 인민군이 들어온다면 인공기를  흔들면 되었다. 그러나 한두 
번 후퇴와 수복을  반복한 뒤론 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피난민이
나 패잔병들이 밤낮으로 오고가다 배가 고프면 민가로 찾아들었다.
  그때 작은언니의  사촌 시누이는 말을  잘못해 개죽음을 당했다.  국군 복장을 
한 남자  셋이 와서 밥을 부탁했다.  군인들은 젖은 옷을 말린다고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쬐었다.
  “아주머니. 인민군들도 와서 밥을 해달라고 하지요?”
  군인 하나가 서울 말씨로 물었다.
  “인민군대라문유, 망에다가 닥닥 갈아먹어두 속이 시원찮어유!”
  남편이 인민군에 나간 시누이는 이런 마을 했다.  그러자 갑자기 옆에 있던 군
인이 칼을 꺼내  시누이를 찌르고 달아났다. 목숨은 건졌지만 시누이는  그때 놀
라서 바보가 되었다. 물론  인민군에 나간 그 여자의 남편은 생사를  알 수도 없
었다.
  “우리 시아버닌 날  가지구 대구 이리던데 뭐. 원자폭탕이 떨어져두  산 사람
이 이기는 거니 입조심하라구. 나야 입 가지구  뭐라구 그런? 뭘 물으문 그저 난 
아무것두 몰러유. 올망졸망  딸린 아덜 델구 사는 것두 바쁜데  지가 뭘 알어유? 
난 대구 이랬어. 그래서 난리를  겪어두 귀때기 한 대 안 맞어봤잖. 우리 아버니
가 날 약다구 얼매나 추어쥔지 몰러.”
  그러나 이런  작은언니네도 1962년인가 전후해서 집안이  온통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그 해 초여름, 한밤중에 언니의  막내 시삼촌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육
이오 사변 전에 평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후로 소식이 끊겼던 사람이었
다. 인민군인  그를 낙동강에서 보았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확인은 되지 않았다. 
식구들은 집안에서 그 중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해서 기대를 하고 있던 자식이
었다. 죽지 않았다면 이북 어딘가에 살아있겠거니 여겼다.
  언니의 시동생을 만났거나 그가  들렀던 집의 사람들은 줄줄이 경찰서로 잡혀
갔다. 언니네 시집에서 두  달 동안 숨어 지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를 만나보았다. 그 중에는 인척관계는 아니더라도  북한에 올라간 아들이나 아버
지, 남편의 소식을 들으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소식을 들은 사람은 아무
도 언니의 시동생을 고발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언니의 시아주버니가 동생이 가
져온 간첩용 장비를 빼앗아 그도 모르게 산에  파묻어 버렸다. 그렇게만 하면 그
가 더 이상 간첩은 아닐 것이라고 모두들 믿었다.
  그가 잡힌  것은 아주 엉뚱한 곳에서였다.  두어 달이 지난 후  그는 남쪽에서 
첫 외출을 했다.  부산에 만나볼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그곳에서 `접선`
한 사람은 그의 믿음과는 달리 이미 남한에 투항을 한 사람이었다.
  이 사건으로  양양은 한동안 너무도  으시시해졌다. 이북으로 간  피붙이를 둔 
집은 지레 죄인이 되었고, 아무도 그곳에 가지  않은 집안들은 단지 그 이유만으
로 거만해졌다.
  이 일 때문에 우리는  오래도록 작은언니네엔 아이들도 보내지 않고 오가지도 
않았다. 우리만  야박한 건 아니었다. 그땐  누구라도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그건 약도 없고 병원도 필요 없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하모니이!”
  안젤라가 진열대 끝에서  나를 불렀다. 그 애를 쳐다보니 안젤라와  함께 백인 
청년 하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데도 그 양키는  눈빛이 흔들리
는 것 같았다. 제대로 사는  백인은 결코 이런 곳으로 물건을 사러 오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하모니이.”
  안젤라가 내게 와서  동전 한 주머니를 내보였다. 백인 청년은  도둑질하듯 힐
끔힐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잽싸게  피하고 하였다. 
눈빛이 흔들리는 게 아마 주사를 맞는 것  같았다. 어른이 되기 전에 인생살이에
서 낙오가 된 저런 사람이 흔한 게 이곳이었다.
  “저 눔이 어디메서 이걸 훔쳤잖?”
  나는 동전을 대충 세어보며 중얼거렸다. 25센트짜리가 스무개였다.
  “그전에도 한 번 왔었어요.”
  안젤라가 말했다. 나도 본 기억이 났다. 물론 그때도 이런 동전 다발을 가져왔
었다.
  “훔친 건지 한 번 물어보구 안 그렇다문 팔어야지 뭐.”
  내가 말했다. 그렇게 묻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가 덤터기를 쓸 수가 있었다.
  안젤라에게서 셔츠와  바지를 받아든 청년이  내 쪽에다 웃어  보이며 나갔다. 
나는 그 청년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며 사람은 어쨌거나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고 생각했다.
  시간을 보았다. 네 시가 넘었다. 혹시 윤이가 잠이 들었으면 깨워야 한다는 생
각으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다. 좀 잤너? 숙이가 차를 보낸다구 했다민?”
  “엄마, 여기 창 앞에 있는 나무가 뭐예요?”
  윤이는 내 말에 대답은 않고 이렇게 물었다.
  “올리브 나무 아니너?”
  “기름 짜는 올리브요?”
  “느덜 보니 열매루 안주두 하더라? 찝찔한 거 안 있던.”
  “잎사귀가 참 이뻐요.”
  “말두 마라. 난  아침마다 그거 쓸거러 얼매나 애가 마른지  아너? 옆집에 사
는 늙은 독일 여자가 깐깐해서 자기네 집 드루워진다구 소리를 지르구 생지랄을 
해.”
  “아버지는 여기 안 사셨지요?”
  “느 아부지 말인?”
  “예.”
  “느 아부진 그런 좋은 집에 못 살어봤어.”
  순간 윤이가 숨을 멈춘 것 같은 기미가 건너왔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느라 우리는 한동안 수화기만 들고 있었다.
  “니 요번 공일날 나랑 같이 묘지에 가보자.”
  나는 내가 묻힐 묘지를 사뒀다. 윤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좋아 야. 공원 같애. 도시락 싸들구 소풍 가는 데여. 가보자. 니두 맘에 
들 거다. 엄마가 죽으문 갈 덴데 니두 가보는 기 좋아. 기왕 미국에 왔으니.”
  내가 말했다. 윤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숙이가 안 데리구  가두 우리끼리 갈 수  있어. 버스루 가는거 다 알어놨어. 
뭐 택시루 가두 된다. 그 돈 썼다구 우리가 시방 굶겐?”
  “엄마, 난 거긴 안 가요!”
  윤이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이 써늘해졌다.
  “그건, 불효여!”
  내가 단호히 말했다. 이때 숙이가 다가오며 엄마!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언니랑 통화중이지요?”
  나는 말없이 수화기를 그 애에게 건넸다.
  “언니, 집으로 전화하니까  계속 통화중인 거야. 지금 택시  보낼게. 준비하고 
있으라고. 아마 십 분쯤 후에 차가 갈 거야. 내가 벨을 누르라고 했으니까.”
  숙이가 제 언니와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언니가 엄마한테 전화했어요?”
  “내가 걸었다. 묘지 사논 데 가보자구.”
  “간데요?”
  “안 간단다.”
  숙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냥 돌아갔다. 나는 앞치마 속을 뒤져  돈을 세어
보았다. 5백 불이  채 안되었다. 이만큼은 더 팔아야  곗돈 내고 집에 가져갈 게 
남을 텐데 큰일이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장사가 하기 싫지요?”
  간 줄 알았던 숙이가 몸을 비틀며 말했다.
  “야! 닌 뭘 언니가 남자랑 온다구 그랜?”
  그러나 나는 그 애 말에 엉뚱한 걸  물었다. 그러자 숙이가 아랫입술을 비트는 
듯이 얼핏 웃었다. 순간  속이 느믈거렸다. 나를 니가 우습게 보는구나. 나쁜 년. 
나는 벼랑 끝에 매달리는 기분으로 그 애를 속으로 욕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편이 미국으로 오기  전까지 나는 숙이네와  함께 살았다. 
결코 공밥 먹지  않는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라기보단  나 자신이 떳떳하고 싶어 
열심히 일했다.  집안 식구 중에 제일  먼저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고 야채즙이 
몸에 좋다고 해서  아침마다 사위와 딸의 야채즙을 만들었다. 그래도  나는 그거 
한 잔 벌컥 들이키지  못했다. 저녁에는 일이 끝나는 대로 집에  와서 손녀와 함
께 저녁을 먹었다.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를 혼자  집에 두는 건 법에 걸리는 일
이었다.
  딸네살이라는 건 이상했다. 사위가  내게 친절할 때, 딸이 나와 곰살궂게 말이
라도 할 땐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다 집안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사위가 
딸을 업신여기는  빛이라도 보이면 하루아침에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딸자식은 다 소용 없다. 대뜸 이런 맘이 들었다. 오죽하면 남편밥은 누워먹고 아
들밥은 앉아서 먹고  사윗밥은 서서 먹는다는 말이 나왔겠느냐. 나도  아들이 있
다. 악착 같이 돈벌어 노인  아파트 얻어 나가 살면 나도 편하다. 이게 식모살이
지 언제 너희들이 나를 편히 앉혀놓고 밥 먹여줬느냐.
  그러다가 피차 긴장이  폭발하면 나는 숙이네를 나왔다. 혼자 된  할머니와 함
께 살고 싶다는 광고가 한국 신문광고에 자주  났다. 이혼이나 사별을 해서 밤일
을 하며 혼자  아이들을 기르는 여자들에겐 나 같은 할머니가  아주 제격이었다. 
내 밥은 따로 해먹고 방값은 내지 않는  조건이었다. 2년 동안 나는 이런 식으로 
숙이네와 두 번이나 별거를  했다. 하지만 내가 필요해지면, 그리고 내게 미안한 
맘이 생기면 딸과 사위가 와서  같이 살자고 애원을 했다. 어차피 자식인 걸, 아
직은 그래도 내가  필요하다니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처럼 다시 사윗밥 먹으러 딸네로 들어갔다.
  내가 그  사위와 딸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미국에 와서, 일한 만큼  돈을 벌고 
남의 눈치 안 보고  여행도 맘껏 다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랴. 미국에 살면
서,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필요도 없고 가치도 없는 `도리`라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자유를 죽이는지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돌아온 남편은 양양  철광에 취직이 되어 자신의 전공대로 전기실에
서 일했다. 그 동안 여러 분이던 시어른들도 거의 세상을 떠났다. 시아버지와 시
어머니는 복잡한 양양  생활이 싫어 두 어른만 송어리로 들어갔다.  농사도 줄여
서 그동안 둘씩이나 두었던 머슴들을 철광에 채광부로 취직시켰다.
  아이들은 잘 자랐다. 특히 근이는 나무랄 데 없이 쑥쑥 컸다. 학교에 들어가서
도 공부를 잘해, 생각지도  않게 어미인 나를 으쓱하게 만들어주었다. 그저 신경 
쓰이는 건 그 애가 몸이 약골인 것 한  가지 뿐이었다. 나는 아들을 위해 산삼도 
구해 먹였지만 남편이나 시집의 남정네들처럼 우람스러워지지는 않았다.
  “저 새낀 쥐방울 같은 기 천상 지 외할애비여!”
  남편은 아들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였다.
  “외할아버지가 어때서유.  그저 더두덜두 말구  외할아버지만 닮으라구 해유. 
시상에 손재주 좋지,  경우 바르지, 말 잘하지, 우리 아부지  그르다구 하는 사람 
난 못봤네유! 남자가 누구처럼 겉만 번드름하문 뭘 해유? 속이 야물어야 말이지!

  나는 농담처럼 이렇게 받아쳤다. 그래도 남편은 내  말이 자기를 빗대는 줄 알
아서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근이 엄마야 뭐이 걱정이너? 그저 아들이 하나인 기 그래서 그렇지.”
  아는 사람들은 나를  걱정하단다고 이런 말을 했다. 어쨌든 외아들만  가진 건 
사람들에게 얘깃거리였다.
  “지지한 자식 열 둬봐야 속만 썩지 벨 수 있너?”
  나는 지기  싫어 이런 대답을 거침없이  했다. 하지만 나는 몸도  약하고 맘도 
여린 아들 걱정을 한시도 놓지 못했다. 거기다  남편이 달라진 것은 예전처럼 바
람을 피우지 않았을 뿐 주기적으로 뿔뚝밸을 부려 집안을 불안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언제나 발단은 작고 우스운 것이었다.  와이셔츠 단추가 떨어져 있다, 양
복바지를 다림질하지 않았다, 밥이  질다 혹은 되다, 고깃국에 우거지를 넣지 않
고 무를 넣었다, 밥이 늦었다, 말대답을 했다, 여편네가 아는 척 나섰다, 집안 청
소가 안 돼 있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든다, 서로 싸운다, 성적이 떨어졌다. 아
들이 까분다, 딸이 늦게 돌아다닌다... 같은 것들이었다.
  물론 기분이 좋을 땐 자상하고 재미있는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어른이라고 무
조건 아랫사람을 억누르지도  않았다. 우스갯소리도 잘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윤
이 말고는 아무도 그 아버지와 편안하게 터놓고 지내지를 못했다.
  남편이 사랑하는 딸 윤이는, 그러나 개망나니로 자랐다. 그애는 규칙을 지켜야 
하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그 애는  한겨울을 송어리에 들어가서  내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애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아 송어리에 있겠거니 여겼다.  하지만 내
려올 때가 되어도  오지 않았다. 장을 보러 내려온 시어머니에게  윤이가 읍으로 
와야 한다고 기별을 보냈지만 그 애는 오지  않았다. 근이를 누이를 데리러 송어
리로 갔다. 눈이 내려  적막한 산골엔 윤이가 좋아하는 라디오도 없었다. 극장도 
빵집도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있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
는 그 애는 그럴 수 없었다.
  근이는 사흘만에 혼자서 내려왔다. 눈보라가 무섭게  쳐서 대낮에도 사람이 나
다니지 않는 날이었다.
  “누난 어디 가구 니 혼저 오제?”
  얼어서 시퍼런 아들에게 물었다.  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드러누웠다. 이
마가 뜨거웠다. 하루가 지나자 언 귀가 부어 오르기 시작했다.
  송어리에서 윤이와 근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근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말하지 않고 추운 날에 도망치듯 내려온 이유가 있을 것
이다. 나중에 나는 누군가에게 들었다. 그날 윤이는 근이에게 죽이겠다고 말했다
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도 이유를 몰랐다.
  윤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끝내 양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 애
는 입학식이 끝난 다음에야 뒤늦은 입학을 했다.
  이때 그 애에게 사춘기가 찾아왔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학교에 반
항하는 윤이를 남편은 나쁘게 보지 않았다.
  그 애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담임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 왔다. 남편은 그와 
무슨 얘긴가 심각하게  나눈 다음 학교 교장과 교감, 학생주임을  접대하기로 약
속했다.
  “공부두 못하는 지즈바가 말썽만 부리닌 저런 걸 가르쳐서 뭘 해유!”
  나는 남편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남편은  선생님들을 만나 윤이를 돌봐주도록 
당부했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나는 그의 표정부터 살폈다.
  “교장선생님두 나왔지유?”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덜이 뭐래유? 뭔 벌을 줄라구 그리는 기 아니래유?”
  남편은 짧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다리를 폈다.
  “윤이 안 자문 오라구 그래.”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미 열한 시가 넘었다. 남편이 큰소리를 낼까 걱
정이 되었다.
  “자식은 때리는 걸루단 길을 못 들인다구 다덜 그리대유.”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면서  머뭇머뭇 말했다. 남편이 휙 고개를 돌려, 성가시다
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윤이를 불러왔다. 그 애는 무섭도록 차분했다.
  “아부지가 오늘 느덜 학교 선생덜 만내구 왔다.”
  남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윤이가 반항적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나
는 윤이에게 그저  입다물고 있으라고 열심히 눈을 찡긋거렸다. 하지만  그 애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모르는 사람처럼 눈길을 돌려버렸다.
  “내가 단도직업적으로, 내  딸이 잘못하는 기 뭐냐! 선생덜한테  물었다. 우리 
딸이 도둑질을 했냐, 사람을 죽었냐...”
  남편이 말했다. 윤이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아부진, 남덜만큼 많이 배운 건  없어! 느네 학교 선생덜이 나보 다 많이 배
웠지! 그래두 인간적으룬 더 저질들이더라. 니가 선생덜  눈에 나서 그런데, 아부
진 니가 크게  잘못했다구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어른덜한테 반항할  수두 있
는 거여. 나두 일본눔  교장 보기 싫어 학교 유리창 다  때레부수구 만주루 도망
갔던 사람이다...”
  나는 너무 놀랐다. 이건 도대체 뭔가. 때리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아닌가. 그런
데 한마디 말도 하지 않던 윤이가 울기 시작했다.
  “높은 사람한테 무조건 절절 매구, 바른 말  한마디 못하구 그렇게 살문 출세
야 할는지 모른다만  그건 쓰레기 같은 인간이여!  아부진 배운 거 없어도  여태 
그렇게 살아본 적  없다! 아무리 높은 사람이래두 잘못한 건  잘못했다구 떳떳하
게 말하구 살았어! 목에 칼이  들어와두 겁나지 않어. 지저분하게 살바에야 차라
리 죽는 게 백 번 나!”
  갈수록 한심했다.  제 반 아이들을  선동해서 선생님한테 반항하는  걸 꾸짖지 
않고 도리어  부추기는 저런 아버지를  어떻게 할까. 예전부터  직장에서도 자기 
아랫사람들과만 놀고, 불평 불만만 많더니 자식한테까지 그걸 가르치다니.
  하지만 이런 남편이 정작 자기 아들과는 단 한 번도 마주앉아 따뜻한 말을 나
누지 않았다. 그가 아들에게 말을 할 땐  눈에 거슬리는 일로 윽박지를 때뿐이었
다. 특히 밥을  먹을 때 그는 아들을  자주 윽박질렀다. 왜 밥을  급하게 먹느냐, 
느리게 먹느냐, 사내새끼가 밥 먹는 게 왜 그러냐, 숟가락으로 밥그릇을 재수 없
게 박박 긁느냐, 훌쩍거리지 말아라, 똑바로  앉아라, 사람 힐끔힐끔 쳐다보지 말
아라... 일일이 다 주워 섬길 수가 없었다.
  전생에 무슨 원수진 사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저렇게 주눅들일까.
  “당신은 어쩌자구 근이를 그렇게두 미워해유? 근이를 내가 어디서 나온 자식
이래유? 개두 먹을 땐 건드리지 않는다는 데 당신을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한테 그렇게두 모질게 해유? 내가 미우문 차라리 날 나물궈유!”
  너무 화가 나면 나도 참지 못했다.
  윤이는 고등어처럼 살이 올랐다.  하지만 근이는 살이 붙지 않았다. 옛날에 어
머니가 큰언니를 미워하던 생각이 났다. 기가  세서 오라비를 잡아먹었다고 구박
하던 게 언뜻 이해가 되었다. 얼마나 미우면 언니를 쇠오줌통에 처박았을까.
  집안에 기가 센 여자가 있으면 남자가 안 된다는 말은 맞을 지 모른다는 새각
이 들면 갑자기 윤이가 미워졌다. 그런데 근이는 제 누이를 너무도 좋아했다. 심
지어는 누이 방에서 같이  자고 싶어 안달을 했다. 물론 윤이는  근이가 함께 자
는 건 질색이었다. 그런데도 근이는 누이가 잠이  들면 그 옆에 살그머니 누웠고 
자다 깨어 그걸 안 윤이는 근이를 욕하고  때렸다. 그래도 근이는 윤이의 발치에
서 새우잠을 자곤 하였다.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 뒤부터  나는 돈을 버는데 미쳤다. 돈을 벌어 
떵떵거리고 살아보고 싶었다. 근이를 출세 시키자면 돈이 있어야 했다.
  “사람이 돈돈 하지 말어! 돈 좋아하문 사람이 천해지는  거몰러?” 남편은 돈
을 벌려고 눈이 벌건 나를 이렇게 나무랐다. 
  “나라에서두 잘살어보자구 그러는  거 아니래유? 돈이 왜서 나뻐유.  돈이 없
어봐유. 사람이 얼매나 초라해지는데유.”
  나를 경멸하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를 더 멸시했다. 
4.19가 나고  나라에서는 국토를 개발한다고  대학생들이 양양까지  와서 제방을 
쌓고 식량을 증산한다고  아이들에게 퇴비를 비어오게 했다. 이런 것이  다 돈을 
벌어 더 잘살자는 게  아닌가. 5.16이 터지고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고부턴 더 야
단이었다. 경제개발이라는 걸  하고 수출을 해야 돈을 번다고 온  나라가 들썩거
렸다. 시골  쳐녀들도 도회지의 공장으로 떠났다.  어떤 집에서는 딸을 버린다고 
집에 가두었지만 그런 돈바람은 쉬지 않고 솔솔  불었다. 돈을 벌어 잘살려고 하
는 생각은 이제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늘만  쳐다보고 땅을 파서 농사를 짓
는 것으로는 도저히 잘살 수가 없었다. 농사를  지으면 밥은 먹고 살지만 잘사는 
건 아니었다.
  이때 양양에 계  바람이 불어왔다. 일본 사람들이 만든 것이란  얘기가 있었지
만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여자들이 생활비에서 쪼개 모은  푼돈을 다달이 
계돈으로 부어, 일이년 만에  목돈을 만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나는 계주를 해서 
내돈 안 들이고 목돈을 벌었다. 이렇게 생긴  돈을 남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으
면 돈벌이가 좋았다.
  농사를 지어도, 바느질을 하여도, 남편이 철광에서 월급쟁이를 해도 이렇게 쉽
사리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
  계를 하고 이자놀이를 하면서부터  나는 용돈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지 않게 되었다. 남편의 월급에 아등바등하지  않게 된 것도 큰 행복
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계를  타는 날이면 계꾼 여자들이 계를 타는 집에 모여 점심을 
먹었다. 목돈을 타니 그  집에선 맘먹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했다. 다달이 이렇게 
돌아가며 모이다 보면 서로 친해지고 속에 있는 말도 나누게 되었다.
  여자들은 혼자일 땐  약했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모이면 힘이 났다.  그 중에서 
큰 변화는 우리가 남편  흉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남편  흉을 보는 여
자가 천해 보였지만 그것이 거듭되자 도리어 어떤 기쁨을 느끼게까지 되었다.
  계꾼들 중에는 가지가지 재주를 가진 여자들이  많았다.노래를 잘 부르고 술을 
잘 마시고 멋을 잘 부리고 음식을 잘 만들고  춤을 잘 추는 여자들. 그리고 사는 
내력도 가지가지였다. 우리들은  이 년 이상씩 계를 하면서 서로의  은밀한 비밀
들도 알게 되었다. 결국 여자들 사는 것은 비슷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계주 노릇을 도맡아  하면서 내겐 남편에 대한 불만이 줄어들었다.  여자가 살
아가는 데  남편의 힘이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남편보다 
힘이 있는 건 돈이었다.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여러 개의 계를 거느리고 
있어서 누구보다  많은 여자들과 만나고  사귀게 되었다. 우리집은  늘 여자들로 
북적거렸다.
  물론 생활이나  생각이 이렇게 달라지자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소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돈을 벌고 나이를 먹고 생각이 달라지는  동안에도 남편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에 대한 그의 생각은  결혼을 하는 날과 조금도 다
르지 않았다. 그래서  바빠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소홀한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뿔뚝밸이 나면 언제나처럼 나를 사정없이 때렸다.
  한 번은 가죽 혁대로 내 정수리르 쳐서  턱뻐가 빠졌다. 통나무로 허벅지를 패
서 살가죽이 터진 적도 있었다.
  여자들이 와서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을 욕하고  나를 동정했다. 나는 그 여자들
의 얘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것을 하나씩 깨달아갔다.
  남편은 아내인 우리들을  마음대로 부리기만 하지 정작 해주는 건  없다. 그것
이 밥을 먹여주기  때문이었는데 우리도 돈을 벌지 않느냐. 남편밥을  거저 얻어
먹는 것도 아닌데 매까지  맞는 건 너무 억울하다. 알고 보면  여자도 남자와 똑
같은 인간이다. 사람의  생각은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생활도 바뀐다. 옳고 그른 
것도 달라질 수 있다.
  우리들은 누가 선동하지 않아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런 생각이 옳다고 
믿게 되었다.
  “세상은 말세가 다 되었어.”
  “전쟁나구 달라진 건 나이롱하구 여자야.”
  남자들은 이런 얘길 하면 달라지기 시작한 여자들 때문에 세상을 한탄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언제나 지금 있는 것을 깨부수며 나타났다.  아마 우리집
도 그런 보이지 않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을 지 모른다.
  이맘때, 운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우리는 아직 마당이  너른 집에 살고 있었다. 애당초 타작  마당이었으나 이젠 
벼를 털지 않는 지 오래되었다. 세상 돌아가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논
을 부쳤다. 우리는 많지 않은 논을 남에게 주고 밭만 조금 부쳤다.
  타작을 하지 않아도  가을 마당은 화려했다. 앞집 생울타리를 경계로  가꾼 꽃
밭엔 가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이웃집에서도 사진을 찍으러 왔다.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동서가 지난밤에 아이를 낳았다.  나는 해산
기가 있을 때 가서 첫국밥까지 끓여주고 왔다.  집에 와서 자리에 누우려고 보니 
새벽 세 시였다.
  두세 시간 눈을 붙였다 일어났건만 아침이  바뻤다. 연탄 아궁이에 아침밥솥을 
올려놓는데 동서네가 걸려  마음이 어수선했다. 조카딸이 수학여행을  떠나 물에 
손 넣을 여자가 없었다.
  건넌방에서 자고 있는 윤이를  깨웠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문을 잡
아당겨 보았다. 문이 힘겹게 열렸다. 늘 문을 꼭꼭 잠그고 자는 아이인데 이상했
다.
  방 안 공기가 썰렁했다. 윤이는 이부자리를 펴지  않고 방바닥에 웅크린 채 잠
들어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고는 느꼈으나 개의치 않았다.
  “윤이야 일어나. 작은집에 나가봐라. 작은엄마가 애기 낳았어!”
  윤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흔들어 깨워서야 게으르게 일어나 앉았다.
  “작은집에 줌 나가보래두!”
  내가 다그쳤다. 윤이는 여느때처럼 신경질을 부리지 않고 일어났다. 그러나 아
무 말도 하지 않고 작은집으로 갔다. 이때까지도  나는 그애가 저지른 일을 눈치
채지 못했다.
  윤이는 학교 갈 시간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은 벌써 출근을 했고 
근이와 다른 아이들도 학교에 갔다.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윤이가 찬 방
바닥에 얇은 타월 한  장을 깔고 자던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때와는 달리 깨끗
하게 치워진 방, 책상  옆에 놓인 노란 국화 화분들이 왠지  예사롭지 않게 생각
되었다.
  윤이의 방문을 열었다. 자주색 커튼이 창을 가린  서쪽 방은 해가 중천에 떴어
도 밝지 않았다. 나는 불을 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방 안을 살폈다. 창문
이 난 쪽 벽에  붙여 왼쪽엔 책상 오른쪽엔 개켜놓은 이부자리,  책상 의자 옆으
로 노란 국화꽃이 핀 화분 두 개, 아랫목 쪽으로 구겨진 타월이 두 장...
  아직 9월이라곤 해도  새벽은 쌀쌀해서 맨바닥에 누우면 등이  시렸다. 더위는 
잘 견뎌도 추위를 참지 못하는 윤이가 이렇게  잔다는 건 아무래도 수상했다. 그
런데 타월 한쪽에 빈 병 하나가 군드러져 있고 그 옆에 스테인리스 밥그릇이 있
었다. 물이 들었나 했더니 그릇 중턱이 거묻데데하니 죽었다. 불현듯 까마득하니 
잊고 있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정신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병을 집어들었다. 이건 청산가리가 들었던 병이었
다. 무서웠다.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도대체 윤이가 저걸 어디서 찾아냈을까. 남
편이 미군부대 다닐 때  고향에 가서 꿩 잡는 데 쓰겠다고  가져다놓은 것을. 나
도 양양에 온 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저것을.
  아주 까마득한 옛날이나  다름없는 그때, 남편이 바람이 나서 속을  썩일 때였
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청산가리 병을 들고 하염없이 울었었다. 윤이
가 아프면 약을 먹으라고 나를 쳐다보며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윤이의 개켜놓은 이부자리에 걸터앉았다. 인생이 너무 무서웠다.
  이윽고 부엌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윤이가 작은집에서 돌아오는 것이라고, 나
는 생각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아주 까마득히 먼데 있었다.
  윤이가 열린 방문턱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했지만 입이 떨
어지지 않았다. 그 애도 나를 아주 멀거니 바라보곤 그만이었다. 그때 내가 정신
을 차였다면 그 애가 빈 병을 들고 나가는  것에 신경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나
는 그렇게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애는 이때  빈 병을 들고 나가 병에 물
을 부어 흔들어서  다시 마시고 방으로 들어와 제 책상의자에  앉았다. 청산가리
는 십수 년이 지나는 동안  저절로 녹아 병에 잔뜩 붙어 있었는데 나는 그걸 신
경 쓰지 못했다.
  “너두 참 너무한다.”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윤이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는데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니가 왜서 이렇게 지독하게 나가는지 난 모르겠다.”
  내가 말했다. 그  순간 윤이가 마치 낙엽이 떨어지듯 의자에서  방바닥으로 군
드러져내렸다.
  아이구머니야 저 애가 죽는다야!
  나는 내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입이 붙어버린  것이었다. 눈
도 멀어서 보이는 게  없었다. 무서움에 질린 몸은 사시나무같이 흔들렸다. 독살
스런 기운이 방 안에  가득찼다. 숨을 쉬기가 두려웠다. 떨어져 아무렇게나 쓰러
져 있는 저 무서운 딸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든 게 너무도 아득하고 무섭
고 허망했다.
  이때 시동생이 아무 일 없이 왔다. 그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니 저 지즈반 오늘 학교 안 가너? 왜서 저렇게 자빠졌지유.”
  시동생이 태평하게 말했다.  나는 시동생을 바라보기만 했다. 큰일났어요 서방
님. 윤이가 죽으려나 봐요라는 말을 해야 했지만 입이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시동생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방문턱에 걸터앉았다. 내 눈에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울면서 손으로 윤이를 가리켰다. 시동생이 눈
을 흡떴다. 그리고 그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 윤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한꺼
번에 깨달았다.
  그가 방으로 들어왔다. 말없이 모로 쓰러져 있는 윤이를 바로 뉘었다.
  “야! 이눔으 지즈바야! 정신 채레!”
  시동생이 아이의 얼굴을 때리면서 소리쳤다.
  “이기 대관절 어떻게 된 노릇이래유!”
  시동생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아이에게서 손을 떼고 내게 무서운 목소리
로 물었다. 그는  내게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눈도 무섭게  뜨고 노려보았다. 나
는 병을 가리켰다. 시동생이 잽싸게 그것을 집어들었다.
  “이기 뭔 병이래유!”
  시동생이 말하면서 약병을 코에 대보고 입에도  대었다. 그러더니 나를 또다시 
노려보았다.
  “야가 이기.. 청산가리가 아니너?”
  시동생이 중얼거리며 의심스런 눈길로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야가 이걸 어디메서 났대유!”
  시동생은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은 눈으로 물었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못
했다.
  “아꾸운 아 하나 잡았구먼! 다 키운 거.”
  시동생이 참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지 죄래유. 지가 죄가 많어 그래유!”
  내가 말했다. 비로서 내 말 문이 열렸다.
  “죄문! 아가 이렇게 됐으문 날래 나한테라두 나와 알궈야지유! 그래 어머이가 
돼서, 구경만 했단 말이래유? 야를 병원에 델구  갈 생각은 안 하구 앉아 있어야 
옳어유? 야가 어떤 아래유! 성님이 알문 무슨 난리가 날지 몰러유?”
  시동생이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다.
  “나도 같이 죽어야지유.”
  나는 힘없이 말했다.
  “말딱지 같지두 않은 말을!”
  시동생이 고함을 질렀다.
  “오금이 붙어서 안 떨어지니 어뜩해유.”
  내가 말했다. 시동생은  여전히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곤 이미  죽은 것처
럼 보이는 윤이를 들쳐업고 나갔다.
  윤이는 의사의 말대로 기적처럼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의식은 오래도록 되살
아나지 못했다.
  그 애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기별을 받은 남
편은 윤이가 의식을  잃은 상태로 누워 있는  병실에서 하염없이 울기만 한다고 
병원에 다녀온 사람들이 알려주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애는 살아났다. 의식이  돌아오고 미음을 먹을 수  있을 때 
집으로 퇴원을 했지만 한동안 학교에는 가지 못했다.  나는 그 애가 아무 소리도 
없이 혼자 방에 있으면  몰래 기척을 살폈다. 그 애가 또다시  일을 저지를까 봐 
너무도 겁이 났다.

  윤이가 가게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저 앤 그때 살아났
지.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안젤라와 달리가 윤이와 인
사했다. 그저 말이 안 통해도 `하우 두 유 두`하고 웃어보이면 다 통했다.
  윤이는 젊  보이지 않았다. 내 나이  먹는 건 모르겠는데 자식이  먹는 나이는 
문득문득 끔찍했다. 눈도 제대로 못  뜨던 사람 같지 않던 저거. 젖을 빨다가 이
가 났다고 꽉 깨물면  나는 그만 진저리를 쳤었지. 순하고 혼자서도  잘 놀던 저
거. 너무 순해서 멍청이 같았엉. 제 물건 아무 데나 버리길 잘하고 옷도 아두 데
나 벗어두고 그냥 오던  아이. 모르는 사람이 와서 등을 대고  업으라면 그저 의
심없이 매달렸어. 도저히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것  같지 않던 저것이 그래도 가
정을 가지고 자식도 두었으니.
  물론 그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윤이는 오래도록 결혼을  지옥처럼 생각했다. 남자와 잘 지내는 건  애인 관계
일 때뿐이라고 제 동생들에게 서슴없이 말했다.
  “니는 여자가 돼서 그걸 말이라구 하너?”
  나는 행여나 다른 아이들이 윤이의 생각을 본받을까 걱정이 되어 이렇게 나무
랐다. 뿐만 아니라 결혼도 하지 않고 남자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그 애의 행실
이 알려질까 너무도 두려웠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고 나이도 먹어  벌서 중년이 되었다. 인생은 잠
깐이었다. 내 나이 먹는  것은 잊고 지내도 자식이 먹는 나이는  언제나 숨이 가
빴다.
  “여기 참 좋네요 엄마.”
  윤이가 내게 와서 말했다. 나는 길이를  2인치나 줄인 청바지를 봉투에 넣으며 
소리없이 웃었다.
  “니가 좋다니 나두 좋구나.”
  내가 말했다. 윤이는  앉으라고 의자를 내줘도 그냥 서서 뚤래뚤래  가게를 돌
아보았다.
  “언니 잘 찾아왔네.”
  숙이가 소리치며 들어왔다.  둘은 반가워 손을 맞잡더니 이곳 상가에  대한 이
야기를 했다.
  “야! 오늘 홍 서방두 같이 외식하겠지?”
  내가 숙이에게 소리쳤다.
  “그 사람은 대만에서 손님이 와서 아마 같이 식사는 못할거 같아요.”
  “그 뚱뚱한 중국 사람?”
  “예.”
  “우리덜 끼리 먹자!”
  나는 처형이 왔는데도 시간을  내지 못한다는 사위에 대해 섭섭했지만 이렇게 
말했다. 숙이가 윤이에게 제 가게로 가자고 속삭였다.
  “언니가 엄마 일하는 데라구 처음 왔으니 엄마 아는 사람덜한테 인사는 해야 
한다.”
  “그래! 그게 좋겠네요.”
  대답은 숙이가 했다. 곧 우리 세 모녀는 한국인 가게를 돌며 인사했다.
  “인사드려! 엄마한테 늘 잘해 주는 분이다. 우리 큰딸이래유.”
  윤이를 인사기키는데 어깨가  절로 올라갔다. 자식이 그 중 큰  재산이란 말이 
맞았다.
  “할머니가 얼마나 좋으시면 얼굴이 다 저렇게 발그레지셨을까.”
  신발가게 한씨 부인이 말했다.
  “캔디이모는 할아버지 닮았어요.”
  금은방의 최씨가 말했다.
  “딸은 아버질 닮어야 잘 산다민?”
  내가 말했다.
  “그렇대요!”
  맞은편의 가방집  주인이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남편이 이곳에  와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야가 방학 때마둥  온다온다 하다가 이제야 왔네유. 남덜은 제  안방 드나들
듯 하는 미국을!”
  “방학 때마다 오세요. 할머니가 얼마나 한국에  있는 자식들을 보고 싶어하신
다고요.”
  양말 파는 옥이엄마가 윤이에게 말했다. 윤이는 웃기만 하였다.
  한바탕 돌고 건물 바깥의 멕시코 음식점과  슈퍼마켓을 구경했다. 열대 과일들
을 보고 윤이는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 애는 망과 몇 개와 자몽  몇 개를 고르
고 더 사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상가에는 저녁 한때 손님이 끓었다.  윤이는 돕는다고 손님 옆에서 
맴돌았다. 흥정이 끝난 것 같으면 이내 봉투에 넣었다.
  “가서 앉았어! 잠두 못 잤단 기 뭘 한다구 그리너? 쟈덜이 다 해!”
  윤이 곁에 가서 핀잔을 주었다.
  “엄마가 좀 쉬세요.”
  “야 난 괜찮어! 이력이 나두 한참 났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윤이를 재봉틀이 놓인 데로 밀쳤다. 그애는  마지못해 의
자에 앉았다. 나는  재봉 서럽에 넣어둔 돈을  세어보았다. 20불에서 2불이 빠졌
다. 그것을 윤이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윤이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니 가져.”
  “괜찮아요 엄마.”
  “이건 엄마가 오늘 바짓단 줄여주구  번 돈이여. 어여 가져! 물건 판 돈은 여
기 이렇게 있잖? 봐라!”
  나는 앞치마 주머니를 열어 윤이에게 보였다.
  “이건 엄마 목숨 같은 돈이잖아요.”
  윤이가 돈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목숨 같은 돈이니 자식이 써야지.”
  기뻤다. 아직 자식에게 돈을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돈을 줄 자식
이 있다는 건 어느 것에도 견줄 데가 없었다.
  달리가 30불을 들고 왔다. 거스름 돈 8불을 내줬다. 안젤라와 흥정하던 멕시코 
여자는 25불짜리 점퍼를 한사코 터무니없이 깎으려고  했다. 나는 일부러 그쪽으
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안젤라는 하모니이 하모니이 하고  불러 결국 
3불이나 깎아주었다.
  “아버지가 이 가게에서 일하셨나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윤이가 물었다.
  “아니지 여기는. 숙이가 일하는 데 있었지만 얼마 하지두 않았어.”
  대답을 하는데 갑자기 목이 잠겨 가래 끓는 목소리가 되었다.
  “엄마, 힘드시죠?”
  윤이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힘들 기 뭐이 있너? 매일 하는 일이 그기 그건데.”
  “피곤한 목소리예요.”
  “갠찮어. 저녁때가 되면 가끔 이래.”
  나는 다시 몰려든 손님을 보러 옷 진열대  사이로 들어갔다. 옷을 팔면서도 찔
끔찔끔 아버지 말을 하던  윤이 생각이 났다. 그 애는 무슨  생각에 잠긴 얼굴로 
먼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자식인데 어떻게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으리.
  윤이가 흡사 그림자처럼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애와 눈이 마주치도록 기다렸
다.
  “화장실 갈래?”
  내가 물었다.
  “아니요. 그냥 한 바퀴 구경해 보려고요.”
  “나랑 같이 갈래?”
  “괜찮아요, 엄마.”
  윤이가 웃어보였다.
  그 애가 가게를 나간 뒤, 갑자기 공항에서 본 남자가 떠올랐다. 물론 착각이었
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
다.
  정말 내가 잘못 보았을까.  아니면 귀신이 그렇게 조화를 부렸을까. 숙이는 얘
기를 듣는 것만도 싫어했지만 나는 그 기억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윤이는 결혼을  해서도 `출가외인`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시집보다 친정을 
더 생각했다. 다른 딸들은 윤이 같지 않았다.
  “여자가 시집을 가면 친정을 잊어야 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윤이는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분해서  울었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애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 남편보다  근이와 의논했고 
집안에 남자 손이 가야 하는 건 아버지를 불렀다. 이상한 애였다. 그래서 시집을 
보내놓고도 늘 불안했다. 결국  그 애의 시어른이 윤이의 태도를 문제삼았다. 하
지만 사위가 어른들을 설득해서 이혼당하는 일은 면했다.
  윤이가 활짝 웃으면서 돌아왔다.
  “엄마, 멕시칸이지요?”
  윤이가 지나가는 멕시코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쩌면 엉덩이가 저렇게 커요? 그래두 아무렇지 않은 얼굴 이네요.”
  윤이가 말했다.  멕시코 여자들은 한국  사람들이 속옷으로 입는  러닝 셔츠를 
겉옷으로 이기도 하였다. 속치마  같은 것도 겉옷으로 입고 다녔다. 윤이는 다시 
가게 구경을 나갔다.
  남편이 이곳 가게에 나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아마 멕시코 여자들에 대한 음
탕한 관심이었을 것이다. 새카만 머리에 크고 검은 순박한 눈, 터질것 같은 젖가
슴과 빵빵한 엉덩이.
  “엄마. 아버지가 수첩에다 멕시코  말로 숫자를 적고 그 밑에 씹, 젖, 방댕이, 
키스, 이런 것도 적은 거 있지요! 어떡하면 좋아요? 난 도저히 아버지 얼굴을 못 
보겠어요.
  어느 날 숙이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순간 욕지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자식에
게 부끄럽고  미안했다. 남편에게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는 이미 환갑을 넘긴 노인에다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여기에 왔기 때문이
다. 물론 그는 내게 단 한 번도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나
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엄마, 언니 어디 갔어요?”
  숙이가 급하게 와서 물었다.
  “구경한다구 시방 나갔는데.”
  “어떡하지요? 나한테로  전화가 와서 내가  이쪽 번호를 가르쳐줬는데!  금방 
전화 올 텐데.”
  숙이가 낯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말했다.
  “뭔 전환데.”
  “하여튼 언니가 꼭 받아야 해요. 어디 가지 말고 붙어 있으라고 그래요!”
  숙이는 이렇게 말하고  부리나케 돌아갔다. 나는 그 애가 휙  돌아나간 자리를 
한동안 맥 놓고 바라보았다.  무슨 일일까. 어디서 온 전화인데 저토록 흥분해서 
야단일까. 궁리해도 알 수 없었다.
  윤이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때맞춰 돌아왔다.
  “구경할 거너 뭐이 있던?”
  나는 다가온 그 애에게 의자를 내밀며 말했다.
  “니 어디서 전화 올 데 있너?”
  그 애는 의자에 앉으며 나를 쳐다보는데 왠지 표정이 떳떳치 못해 보였다.
  “전화 왔었어요?”
  윤이가 나를 외면한 채 물었다.
  “숙이한테루 왔단다.”
  “그럼 거기 가봐야겠네.”
  윤이가 말하면서 일어섰다.
  “일루 걸라구 했대!”
  내가 말했다. 윤이가  붉어진 얼굴을 숙이는 게  보였다. 이때 전화 벨이 울렸
다. 순간, 나는 어딘가로 피하고 싶었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감정이었다.
  “괜찮아요, 그래요, 좋아요. 아무 때나 편한 데로 하세요. 염려마세요.”
  나는 슬며시 꼬리를  감추듯 일어섰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  애의 목소리
가 내 귓가를 따라 붙었다.
  “누구나?”
  내친 김에 화장실에  다녀와 나는 발그레한 얼굴로  앉아 있는 윤이에게 물었
다. 윤이는 웃기만 했다.
  “아니 어떤 남자가 여길 알구 전화질이래?”
  나는 역정을 냈다. 사실 이렇게까지 말하려는 건 아니었다. 처음엔 모른 척 해
줘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내 속의 어떤  마음이 내게 이런 말을 시켰는
지 나는 모른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윤이가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
  “너라면 걱정 안하겠니?”
  내가 물었다. 윤이는 내 눈길을 피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 저는 잘살게요.”
  그 애가 말했다. 이번엔 내가 그 애의 눈을 피했다.
  `바람`이라면 난 벌써 신물이 날  대로 난 사람이었다. 닮을게 없어서 제 아버
지 바람기를 닮아? 더군다나 여자가!  남편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내 눈
에 흙 들어가기 전엔 내 딸자식이 그런 추잡한 짓 하는 꼴은 못 본다!
  나는 재봉틀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실이며 헝겊 조각을 주우며  생각했다. 윤
이는 점원들과 같이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바깥쪽에 걸린 옷들은  장대로 벗
겨 안에다 옮기고,  진열대위엔 넓은 보자기를 씌웠다. 안젤라는  셔터를 내렸다. 
윤이는 제가 앞으로 가게 일을 도맡기라도 할 것처럼 일일이 따라다니며 눈여겨
보았다.
  숙이가 한 줌도 넘을 열쇠가 달린 물고기 장식을 흔들며 이리로 왔다.
  “나가자, 언니.”
  그 애가 제 언니한테 말했다.
  “빠이 숙!”
  “빠이 하머니이!”
  안젤라와 달리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인사했다. 우리도  그 애들 뒤를 따라 주
차장으로 나갔다.
  “얼루 가니?”
  차를 타고 내가 물었다.
  “언니는 초밥이 좋대요.  그래서 동경식당에 예약했어요. 엄만 초밥 싫으시면 
생선탕도 있으니까요.”
  “그까짓 거 초밥으루 난 같잖은 주먹밥에다 그깟 생선 토막 올려논 건 밥 같
지두 않더라. 갈비가 백 번 낫지!”
  내가 말했다.  숙이가 깔깔대고 웃었다. 나는  그 애에게 눈을  흘겼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인타운에서 제일 잘한다는 일식집에 자리잡고 있었
다. 캔디는  피아노 선생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는 길에 데려갈  거라고 숙이가 
말했다.
  초밥집에선 행복했다. 숙이와 잘 아는 그  집의 요리사는 우리들에게 최고의생
선초밥과 친절을 보여주었다. 윤이는 우리 중에 제일 많이 그것을 먹었다.
  “느덜은 살뺀다구 뭘  작게 먹구 그리지덜 말어. 사람은 나이들수록  그저 건
강이 최고여. 세상에 좋은 기 태산이문 뭘해. 몸이 튼튼해야지.”
  “엄마가 저런 말 하는 건 순전히 나 들으란 소리야 언니!”
  숙이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말끝마다 웃고 얘기도 많이 했다. 집에 돌아왔
을 땐 너무  웃어서 소화가 다 된  것 같았다. 집에 와서도 한국에선  흔치 않은 
과일을 한 접시나 비웠다. 숙이는 언니와 무슨  비밀 얘기가 잇는지 나에게 먼저 
들어가 자라고 보챘다.  졸더라도 아이들 얘기에 끼여 있고 싶었으나  늙은 서러
움이라 여겨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
  “언니 피곤한데 너무 오래두룩 있지 말어! 오늘만 날이니?”
  그래도 이렇게 한마디는 했다.
  방에 들어와 크지 않은 침대에 윤이 베개를 놓아두고 나도 그 옆에 모로 누웠
다. 하지만 아무래도 윤이가 불편해  할 것 같아 방바닥에 따로 자리를 폈다. 윤
이가 온다고 맘이 떠서 요 며칠 제대로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몸이 바닥에 닿
자 물먹은 솜처럼  팍 가라앉는 느낌이다. 눈을  감았다. 잠이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조근조근,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
리, 내가 잘 아는  어디쯤의 시냇물일 것이라고, 거기가 어딘가 하고 생각하다가 
잠이 깨었다.  시냇물 소리라고 들었던  조근조근대는 소리를 찾아  방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에서 아이들이 얘기하고 있었다.
  “언니는 참 이상해.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언니도 많이 맞았잖
아. 또 아버진 엄마를 얼마나 학대했어. 여기와서도 하나 달라진 게 없었어.”
  “내가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넌 아버지가 인간적으로  얼마나 외로웠는
지 아니?”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그래도 사람마다  달라. 아버진 너무  깊고 헌신적인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서 그런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었던 거야.”
  “글쎄.”
  숙이가 말하고 나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애들이 남편에 대해 
얘기한다는 걸 알고부터 그 애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방으로 들어
가기도 싫었다.
  “그런데 언니는 아버지가 싫어서 형부 같은  남자하고 결혼한댔잖아. 난 언니
가 엄마한테 하던 그 말이 잊혀지지 않아.”
  숙이가 말했다. 윤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깊은 고요가 계속되었
다. 저 애들이 그냥 잠이 들었나? 그래서  막 헛기침을 해보려는 때 윤이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야.”
  윤이가 말했다. 숙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원체험이라는  게 있지 않니? 사람은 누구나 그것에서 
잘 놓여나지 못한다고 생각해.”
  “무슨 말이야 언니?”
  숙이가 하품을 하고 나서 물었다.
  “나는 아버지가 노할머니와의 원체험에서 평생 해방되지 못하고 살았다는 생
각을 한단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을 보게 되었어.”
  “무슨 뜻이야 언니. 원체험이란 말은 알겠어. 그런데...”
  숙이가 말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도 따져보면 부모와의 관계에서 배우는 거 아니니? 어
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은 어떠했는지, 부모가  그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그런 게 
그 사람의  사랑의 역량을 결정하는게 아니겠니?  사람은 사랑하는 게  다 달라. 
아마 우리 아버지는 노할머니의 거의 맹목적이고 조건 없는 무한대의 사랑에 익
숙해졌을 거야. 아버지가 사람한테 하는 거  봐라. 희생적이잖아. 자기는 없고 사
랑하는 사람만 있지 않니?  아버지가 여자에게 받고 싶은 사랑은 그런 것이었을 
거야.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진 첩  첫 장에 있는 노할머니  사진을 보고 
알았어. 아버지는 그런 사랑을 찾아 평생 헤맸던 거야.”
  “그래서? 아버지가 엄마 때리고  우리 때리고 쉴새없이 바람 피우고 그런 걸 
이해하라고? 용서하라고?  난 아버지가 그립지 않아  언니. 솔직히 말하면 그래. 
엄마가 돌아가시면 그리울거야. 엄마는 우리를 위해서 희생만 했어.”
  숙이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나는 저 애들이 마침내 싸우고  헤어질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 애들은 또다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숙아. 아버지를 아버지이기 때문에 무작정 용서하라는 게 아니야. 우리 아버
지는 어떤 아버진가, 왜  그런 아버지인가를 자세히 제대로 이해하자는 거야. 왜
냐면 우리가 아버지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거야. 내가 왜 이런 부분에서 이렇게  행동하고 이런 데선 왜 이런 감
정을 가지게 되는지 알 수 없잖아. 내가  누군지 모르니까 혼란스럽고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도 없고 나는 이제 나를 사랑
해 주고 싶단다. 아직 무언지 모르지만 아버지를  알면 나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마음 이해하겠니?”
  윤이는 끝끝내  따뜻하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애의  말을 들으며 
소리나지 않게 무릎을 구부리고 바닥에 앉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내 
가슴속에서 둥둥 떠다녔는데 이제 그것이 저 바닥으로 내려앉은 것을 느꼈다.
  그래, 윤이는 이제 다 컸다. 저 앤 어른이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자식이 어른이 된 걸  느낄 때만큼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숙아, 우리 아버진 분명히  잘못 살았어. 좋은 아버지도 좋은 남편도 아니었
어. 물론 아버지보다 더 나쁜  사람도 많아. 그런데 이런 평가를 하자는 게 아니
야. 다만 내  생각은 아버지가 왜 그런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 이해하자는 거야. 
아버지를 무시하거나 버리지 말자는 거야. 왜냐면  아버지는 이미 우리들 생명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무시하고 버리는 건 불가능하단다. 이게 내 생각이야.”
  윤이가 말했다. 목이 메일 것 같았다. 숙이는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
는 잘못 들어온 도둑처럼 숨죽인 채 앉아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의 상처난 인생이 내  삶의 뿌리라는 걸 알았어. 아버지
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잊거나 무시한다고 내 삶의 뿌리가 달라지겠니?”
  윤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 애의 울음은  너무도 오래 참았고 너무도 깊
이 묻혀 있던 울음이어서 듣는 데도 숨이 막혔다.
  사람이란 도무지 알 수  없는 짐승이었다. 나는 여태 내가 윤이를  잘 알고 있
다고 믿었다. 그런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너무 가엾어서.”
  흐느끼며 윤이가 말했다.
  “언니, 난 언니를 이해할 수 없어.  언니만큼 나이를 먹으면 어떨지 모르지만.

  숙이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윤이가 입을 닫고 있었다.
  “언니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난  아버지가 그저 무섭기만  했어. 평생 
엄마를 때리고 바람 핀 생각만 나.”
  다시 숙이가 말했다. 윤이가 코를 풀었다.
  “물론 엄마한테 그렇게 하셨어.”
  윤이가 먹먹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도 언니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평생 고생한 엄마는 어떡
하고?”
  “나도 엄마를 사랑해. 우리가 어떻게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우린 
같은 딸이고 여자잖아.”
  윤이가 느리고 아픈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갑자기 기침을 했다. 아이들이 내 
기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엄마야.”
  “깨셨나 봐.”
  아이들이 말했다. 나는 오래도록 앉아 있던 데서 일어났다.
  “느덜이 정신이 있니? 시방 몇 신데 안 자구들 이러구 있니?”
  나는 눈을 비비며  그 애들에게로 갔다.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며  소리없이 웃
었다.
  “언니가 시차 때문에 잠을 못 자요 엄마.”
  숙이가 말했다. 나는 눈을  반쯤 감고 잠옷 속으로 손을 넣고  허리를 벅벅 문
질렀다.
  “무슨 할말이 그렇게두 많니?”
  나는 하품을 하고 말했다.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며 한꺼번에 하품을 했다. 그
리고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엄마, 들어가 주무세요. 우리도 곧 잘게요.”
  윤이가 말했다.
  “그래라. 오늘만 날이 아니니.”
  나는 이렇게 말하고 냉수를 마셨다. 물잔을 아이들에게도 건넸다. 숙이는 시계
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네.”
  그 애가 중얼거렸다.
  “어서 자!”
  나는 한마디 더 하고 일어난 김에 화장실에  들렀다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
으려다가 살며시 열어두었다.  바닥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그래도  귀는 바깥소
리르 들으려고 곤두섰다. 그러나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 자
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그러나 윤이는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숙이가 제 방으로  들어가는 기미도 
없었다. 이것들이 거실에서 자려는 건가? 침대에서 편하게 잘 것이지. 깊은 숨을 
쉬고 잠을 청했다.
  죽는다는 건 아마 이런 걸 거야. 감은 눈을 다시 뜨지 못하는 것. 다시는 세상
을 보지 못하고  두 발로 땅을 딛지  못하는 것. 죽고 산다는 게  눈꺼풀 여닫는 
것 차이인데, 나는 잠을 청하고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시 아이들의 말소리
가 시냇물 흐르는 소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희들끼리 할 얘기가 많겠지.
  나는 아이들의  얘기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맘을 먹었다. 하지만 헛일이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이들의 말을  알아듣자면 아무래도 
문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내가 너무 구차스러웠다. 그래서 죽는 
것과 산 것의 차이에 대해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잠이 들었다.
  불현듯 눈을 떴다. 늦잠을 잔 것만 같아  쫓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시간부터 보
았다. 늘 같은  때였다. 윤이는 얼굴까지 이불속에 묻은 채  잠들어 있었다. 부지
런히 야채즙을 냈다. 홍 서방은 인삼즙을 마시고  캔디는 우유를 마시고 함께 집
을 나갔다. 캔디는 이모가 사온 한국 탈을 걸고 학교에 갔다.
  “캔디야. 뭘  그런 걸 하구  가니? 그게 뭔 자랑거리라구.  귀신 도깨비 같은 
걸.”
  내가 문턱에서 캔디에게 말했다.
  “한국 거잖아요 할머니!”
  캔디가 소리치곤 이미 시동이 걸린 아버지의 차로  달려갔다. 그 앤 언제나 출
근하는 홍 서방이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언니, 일어나면  나한테 전화해. 푹 자라고  안 깨우고 나간다.  냉장고에 먹을 
거 많아.
  출근 준비를 끝낸 숙이가 이런 메모지를 윤이의 머리맡에 놓았다.
  “언니랑 뭔 얘길 그렇게 했니?”
  출근길에 숙이에게 물었다. 숙이는 마치 듣지 못한  듯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
았다. 나쁜 년들. 나를  늙었다고 사람 취급을 안하는 군. 속으로 딸들을 욕했다. 
이때 숙이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당신이야? 언제 올 거야? 언니는 신경 쓰지 마.  여행 갈 때 여비나 좀 보태
주던가. 나하고 엄마가  있는 뭐. 알았어. 그리고 리바이스 바지  사이즈 별로 두 
박스 보내요. 미세스 박네가 물건  실으러 갈 거야. 우리 것도 가져다 달라고 했
으니까. 그 여자가  잊어먹을지 모르니까 당신이 지금 안토니오 보고  챙겨 놓으
라고 해요. 내일 모레 와? 가봐야 안다고?  술 많이 마시지 마요. 알았어요. 엄마
한테 전할 게요.”
  숙이는 이렇게 말하고 통화를 끝냈다.
  “홍 서방이 수금 가니?”
  내가 물었다.
  “워싱턴으로 해서 동부  쪽을 한 바퀴 돈대요. 그쪽은 경기가  좋다는데 한국 
사람들 가게는 부도를 내네요.”
  숙이가 중얼거렸다.
  “술이나 마시지 말아야 할 텐데.”
  내가 중얼거렸다.
  “자기 건강 알아서  하겠지요 뭐. 캔디 아빠는 언니가 왔는데  대접도 못하고 
출장을 가니 미안한 모양이에요. 우린 더 좋은데.”
  숙이가 말하고 쿡쿡 소리내 웃었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침 햇살이 창
에 와서 다닥다닥 붙었는지 몸 속까지 따뜻해지며 졸음이 왔다.
  고개가 툭 꺾이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차는 건널목에 서 있었다.
  “기차에 걸렸구나.”
  나는 졸았던 게 민망해서 서둘러 말했다.
  “우리가 오늘 한5분 늦었어요.”
  “저눔으 기차가 얼마나 오래 가겠니.”
  “할 수 없지요 뭐.”
  숙이가 말했다.  나는 이제야 앞이 보이는  기차를 내다보았다. 이곳을 지나는 
화물차인데 미국  땅 덩어리가 커서 그런지  길기도 길었다. 땅이 크면  모든 게 
큰 모양이었다.
  “엄마, 언니가 이혼은 안하겠지요.”
  한참이나 말이 없던 숙이가 불쑥 물었다.
  “왜! 너보구 뭐라던?”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게 아니고요. 언니는 좀, 맘을 못 붙이는  거 같아요. 말하는 거 보면 시집
간 사람 같지가 않아요. 형부가 맘이 좋아  참을 거야. 아니다. 형부가 얼마나 언
니 속을 썩였어. 바람이 안났나, 언니를 때리지 않았나.”
  “그래두 느덜 아부지 같지는 않어!”
  “아버지 같으면 큰일이지요.”
  숙이가 말끝에 있는 대로 입을 벌리고 하품을 했다.
  “니가 잠을 못 자 오늘 어떻게 견딜래?”
  “피곤한 줄은 모르겠어요. 언니가 와서 스트레스가 풀렸나봐요.”
  “나두야 피곤을 모르겠다.”
  “누가 그런 걸 책에 썼어요. 고향 음식  먹거나 형제를 만나면 스트레스가 풀
린다고요.”
  숙이의 말을 들으니 그럴  듯 했다. 뿐만 아니라 애들이 부러웠다. 출가외인이 
된 딸 형제가 쉽사리 만나 정리르 나눌 수  있으니 세상은 참 많이 달라졌다. 잠
을 안  자고도 피곤을 모르게 좋은  그것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친정 한번 가려면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야 하고, 고향 부모형제  보고 싶으
면 동산에 올라가 친정 쪽을 바라보며 남 몰래 우는게 전부였던 때가 어떻게 이
렇게 달라졌을까. 나는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내 예전의 세월 속으로 들
어가 한동안 원망에 빠졌다.
  “느덜, 나한테 잘못한 거 있어!”
  그러다가 불쑥  내가 말을 꺼냈다.  순간 건널목의 차단기가  올라가고 차들이 
지겨움을 떨치듯이 철길로  올라섰다. 나는 내 속에서 움파처럼 돋는  화를 느꼈
다. 마음속으로는 이러면 안 되지, 꾹 눌러놔야지, 다 부질없지, 이렇게 생각하면
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엄마 지금 뭐라고 했어요?”
  숙이는 차가 제 길로 들어서자 나를 흘깃 보고 물었다.
  “느덜이 나한테 잘못했다구 그랬다!”
  나는 게워내듯 말했다.
  “어머머 웃긴다, 엄마.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뭐가 어떻게 됐는데요.”
  숙이가 웃으며 물었다. 나는 그애가 웃으며 하는 말투도 마땅치 않았다.
  “엄마 갑자기 정말 웃긴다. 아직 노망들면 안 돼요!”
  “느덜이야 다 잊어먹었겠지. 느덜  문제가 아니니까. 난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 못 잊어먹는다.”
  “뭔데요, 엄마. 말은 안하고 왜 그래요. 갑자기.”
  “우리 어머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그렇게 가보구 싶어서  그랬더니 느덜이 
뭐라구 그랬니! 밥은 누가 하구  가느냐구, 안그랜? 내가 얼매나 후회가 되는 줄 
아니?”
  “그랬어요 엄마?”
  “즈덜 일이 아니라구 잊었구나. 다  그렇지.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
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설마 우리가 못 가게 해서 안 가셨을라고요.”
  숙이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 내가 왜서 못갔겠니? 이래서 딸자식은 남이라구 그러는 거여.”
  내가 모질게 말했다. 숙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사실 너무 엉뚱한 화풀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정말 아이들이 못 가게 
해서 가지 않았을까? 왜 이런 아무 소용 없는 옛날 일이 떠오르는 것일까.
  어머니는 내가 공향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서울로 올라온 지 몇 달 되지 않아 
세상을 버렸다. 몸져누워 간호할 사람이 없자  큰언니가 모셔갔는데 그곳에서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내 토박이  살림이 풍비박산이 난 것 때문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시집간 딸이 잘못해  한 집안을 거덜냈다는 뒷공론은 오죽 많았을까.  여든 넘은 
어머니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를 깨닫는 데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
했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중 기본은 자식이 잘사는 것이라는  사실도 공짜
로 깨달아지지는 않았다.
  살림이 풍비박산 나던 그 해 나는 마흔일곱 살이었다.
  여전히 뭉칫돈을  만지는 일을 하고  있어서 우리집엔 여자들로  늘 북적였다. 
양양 장날이면 우리집에도  한바탕 장이 섰다. 농촌에 살고 있는  먼 친인척들까
지 돈을 들고  와서 이자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맘때 농촌에는  도회지 공단
으로 나간 딸들 덕에  현금을 만지는 집이 더러 있었다. 처음엔  누구도 딸을 도
회지 공장으로 내보내려 하지 않았다. 다 큰  처녀를 객지로 내보내는 건 팔아먹
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대부분이었다. 케다가 아직도  `돈`은 `땅`
보다 천한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누구네  딸이 독일이라는 머나먼  남의 나라에 
간호원으로 가서 뭉칫돈을  보내 살림이 폈다는 소문이 돌고, 누구네는  딸이 돈
을 벌어 아들 대학 공부를 시켰다는 말들이 돌면서 조금씩 흉이 옅어졌다.
  정월이나 추석 명절에는 도회지에서 일하는 딸들이 선물꾸러미를 들고 돌아왔
다. 모두들 고향을 떠날 때와는 딴판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갈 땐 동
네 친구나  친척의 딸들을 데려갔다.  그래도 도회지에선 여공이  모자라 버스로 
농촌을 한바퀴  돌기도 하였다. 물론 누구나  다 돈을 벌고 집안  살림을 일구는 
건 아니었다. 누구네  딸은 사장의 첩이 되었다,  같은 공장의 사내와 눈이 맞아 
아이를 배었다, 연애를  하다 잘못 되어서 몸파는 데 있다더라는  소문도 떠돌았
다.
  어쨌든 이맘때, 농촌에는  시장에 나가 물건을 팔지 않고도 이렇게  해서 현금
을 만지는 부모들이 많았다. 내 먼 친인척들중에도  그런 집이 있어서 돈을 가져
와 `놀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런 돈을 이자 놓아 계를 들어주었고 일 년 반
이나 이 년 후에 목돈을 태워주었다. 농촌에서  이런 목돈을 만지는 일은 사건이
었다. 제 밭뙈기 하나  없던 집도 이렇게 해서 토지도 사고  아들들 공부도 시켰
다. 공장이 생기기 전에는 기껏해야 부잣집에 식모로  가서 품삯을 미리 받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공장은 식모살이와는 다르게 자유가 있었다.
  이미 서울로 진학한 윤이는 물론  그 밑의 아이들도 서울에 보내 윤이와 함께 
지내게 하느라니 들어가는  돈이란 것이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다. 그래도 
별 걱정은 되지 않았다. 계를 잘 꾸려나가면 돈걱정은 없었다. 계산을 하면 언제
나 돈은 잘 벌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집안을 일으키자면 자식을 가르쳐야 했다. 
자식이 출세해서 나도 한번 떵떵거리고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돈과 번잡한  교제가 마음의 평화를 주지는 못했다. 나는  친구들과 어
울려 양양을 벗어나 속초로 갔다. 속초는 돈을  쓰는 곳이고 타관 뜨내기들이 모
여사는 곳이라서 늘 사람을 들뜨게 했다. 기분이  맞는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춤
도 췄다.
  “이거 죄짓는 일 아니니?”
  대낮에 술을 마시고 걱정이 되어 내가 말했다.
  “남자들은 오입도 할라구!”
  친구가 말했다.
  “첩살림을 차리구두 떳떳하게 사는데 뭐!”
  다른 친구가 말했다.
  “여자하구 남자하구 다를 게 뭐 있어!”
  또 한 친구가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박수를 치고 웃었다.
  “정말 남자 여자가 같애?”
  “다른 거 딱 한 가지 있지!”
  우리는 이런 말을 하고 뒤집어졌다.
  저녁에 돌아올 땐 시장에 들어가 옷을 샀다.  외출을 하면 옷이 필요했고 옷을 
사면 외출이 하고  싶어었다. 매사에 절약하고 살다가 이런 생활을  하니 처음에
는 죄를 짓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옷이 날개란 말이 맞다!”
  “10년은 젊어 보이네!”
  새옷으로 갈아입은  나를 보고 친구들이  칭찬해 주었다. 그러나  얼굴은 이미 
늘어지기 시작했고 허리와 아랫배는 두리뭉수리였다.
  “왜 진작 이렇게 못 살었너?  그저 서방 신다 버린 양말이나 주워 신구 서방
이 버린 내의 기워 입고, 그렇게 산다구 누가 알아나 줘? 나만 서럽구 말지!”
  “동태국 끓여 살점 먹어본 사람 있너? 손들어 봐!”
  누가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또 한바탕 울고 웃었다.
  “남자들은 자기 쓸 돈  다 써! 술 마시구 담배 피우구 다방가서  레지 주무르
면서 커피 마시구  돈 주고 오입해! 그때  우린 뭐하고 있언? 아무리 밥  찌꺼기 
건져 먹으면 뭘해. 집안에 큰 도둑이 있는데.”
  누가 이런  얘기를 하면 우리는  하늘의 별이라도 만져본  것처럼 놀라워했다. 
정말 그랬다. 나는 여름에도 수제비가 쉬면 물에 씻어 먹었다.
  내가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경험을 하고 사는 동안 남편은 내게 무관
심했고 어떤 때는 나를 비웃었다. 하지만 우리는 잘 다투지 않았다. 우선 그에게
서 이상하게도 뿔뚝밸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겐  생각지도 못했던 병이  찾아왔다. 가난할 때조차  느껴보지 못한 
것, 바로 불안감이었다. 어쩌다  혼자 있게 되면 불안해서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
을 끌어모으곤 하였다.  남편은 저녁에도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장거리에 나
가 놀다 늦게 들어왔다. 그러나 혼자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불안한 여자들이 늘어갔고 남편에게 불만이 있는  여자들도 많았다. 처음에 얼
핏 보기에는 누구나  조용하고 편안하고 따뜻한 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조금씩 
속을 털어놓고 안으로  들어가 보면 삭히지 못한 울화나 외로움,  불안들이 있었
다. 여자들은  이런 내막을 서로 알고  나면 이내 친해져서 형님  언니 동생하며 
터놓고 지냈다.
  이즈음 내겐 친척이라며 알지도 못하는 시골  사람들까지 찾아왔다. 그들은 소
를 판 돈이나 자식들이 보내온 돈을 들고  와서 이자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나
는 어느 사이에 그들의 돈을  관리해주고 이자의 얼마를 받아서 쓰는 소규모 고
리대금업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시골의 십촌도 넘는 아주머니의  돈에서부터 시
동생과 언니들의 돈까지 내게 관리를 부탁해 온 돈은 액수도 파악할 수 없게 많
았다. 물론 그것만큼 돈을 빌려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돈이 급한 여자들은 내게 
가면 언제든지 돈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랬다.
  어느 날이었다. 아주 가련하게 생긴 여자가 찾아왔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나쁜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목돈이 필요해 계를 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스무 명이 하
는 계를 두 몫을 드는데 하나는 3번이나 4번 정도로 하고 하나는 16번이나 17번 
정도로 할 수 있게  해주면 살아가는 데 큰 보탬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거절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사람을 의심하지 못하는 탓도  있지만 누구
를 돕는다는 게 나를 얼마나 우쭐하게 하는지 몰랐다.
  이렇게 내 환심을 산 젊은  여자는 빠른 번호의 계를 타고는 다음부터 곗돈을 
잘 내지 않았다. 계주인 나는 계를 잘 끌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이자를 얻어 그 
여자의 곗돈을 물어놓아야 했다.  이런 것이 몇 개나 되고 심지어  돈을 빌려 몇 
달은 이자를 잘 같다가 큰돈을 빌리고 떼어먹는 여자가 생기기도 했다.
  이런 사고가 거듭되고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남편에게도 사고가 생겼
다.
  “어제 윤이아버지 몇 시에 들어왔어?”
  한 친구가 물었다.
  “어디 가서 담배내기 화투 치다가 열두 시두 넘어 왔던데.”
  “요새 윤이아버지 어디 달라진 거 없어?”
  “달라질 게 뭐 있너?”
  “술두 못 마신다는 윤이아버지가 동해옥으루 들어가던데?”
  어느 날 밤 친구들이  와서 내게 말해 주었다. 어떤 경우에도  등잔 밑이 가장 
어두웠다.
  남편은 동해옥이라는  술집의 마흔이 다  된 여자에게 미쳐있었다.  내가 이런 
사실을 앍  된 것은 이미 그가  술집 여자와 깊어진 다음이었다.  남편은 마음을 
주는 여자가 생기면 이내  표시가 났다. 내가 조금만 신경을 써서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잠자리에선 내 살이 닿으면 질겁을 했고  늘 멍청히 딴 세상 사람 같
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몸치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동안 시시하다고 여겼던 남편이지만  그가 다른 여자에 미쳐버린 것을 알자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질투도 질투였거니와 무엇보다 남편을 잃을까 두려웠다.
  언제나 그랬듯이 남편은  내게 들키고 나자 더 자유롭고 뻔뻔해졌다.  아무 거
리낌없이 그  여자를 만나러 다녔다. 나는  나대로 그의 뒤를 밟고  그 여자와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가  여자와 약속을 하고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면 나는 그보다  먼저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그가 극장에 가면  먼저 매표
소에 서 있다가 그  여자와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남편은 나를  죽이고 싶어 바
다로 끌고 갔고 벽돌을 집어들고 내리치려다 말았다.
  남편과 나의 이런  지독한 전쟁은 거의 2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 동안 집
안 일은 물론 계를  꾸리고 이자를 챙기는 데도 소홀했다. 어떤  여자는 돈을 같
지 않고 이사를  가기도 했다. 이상하게 돈이  잘 돌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돈이 
꽉 막혀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돌아온 계를 제 날짜에  태워주지 못했다. 이런 일은 그 
다음 계에도 영향을 미쳤고 나에 대한 신용은 하루아침에 구멍난 제방처럼 물이 
세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동서가 와서 심각하게 말했다.
  “성님유, 희한한 소문이 다 돌대유.”
  “뭔 소문이 돌던?”
  “성님이 돈을 서울루 다 빼돌리구 도망을 갈 거라구 날더러 아느냐구 그리대
유. 얼마나 화가 치미는지 되잖은 말 하는  년덜은 아가리를 확 찢어논다군 했구
만유, 왜서 그런 말이 돌지유?”
  동서의 말을 듣는데  내 몸이 얼음장같이 싸늘하게 식었다. 우리는  그때 부엌
을 사이에 두고  윤이가 쓰던 방문턱과 부뚜막에 마주보고 앉았는데,  갑자기 발
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이 타는 것  같아 물을 먹으려는데 무릎이  펴지지 않아 
일어설 수가 없었다.
  “여보게 나 물 좀 줄란? 발이 안 떨어지네. 살다가  원 벨 숭악한 꼴 다 보겠
네야.”
  “왜서 그런 말을 할까유?”
  물을 사발로 떠주고  동서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나는 오래도
록 물사발을 들고 꾸역꾸역 마시면서 얼굴을 가린  채 대답하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내게서 으스스한  소리를 내면서 어떤 기운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무
서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비쩍 마른 꺼풀만  남은 허깨비가 되어버린 내가 너무
도 선명하게 보였던 것 같다.
  “성님! 성님유!”
  동서가 나를 불렀다. 동서를 바라봤다. 눈앞의 동서가 꼭 그림자같이 보였다.
  “어디가 아퍼유?”
  동서가 물었다. 동서의 얼굴이 물속에 든 것처럼 어른어른 얼비쳤다.
  “아이구우, 우리 성님이 왜서 저리너?”
  동서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서 동세.”
  나는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물었다. 동서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치마 끝
을 뒤집어 코를 풀고 동서를 바라보았다.
  “동세. 괜찮어. 불안해 하지  말어. 사는 데까지 사는 거여. 또,  산다는 기 뭐 
벨기너?”
  이윽고 내가 말했다. 동서가 나 때문에 불않  한다는 생각을 해서 이렇게 말했
지만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로부터 한 달
도 지나지 않아 나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그것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찾아왔다.
  그날 나는 계를 태워주지 못했다. 계를 탈  사람은 불평하지 않고 며칠 기다려
주기로 했다. 계를 태워줘야 하는 날과 겹쳐  이자를 지불해야 하는 데도 있었지
만 그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한꺼번에 많은 돈을  빌려간 친구가 돈을 갚지도 않
고 이자도 주지 않아서 돈이 한군데 막혀  있었던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입에서 무책임하고 불길한  말이 돌았
고 그것이 바람을 탔다.
  “윤이네가 돈이 안 돈다는 건 서울로 빼돌렸기 때문일 거야.”
  “그러니까 애들을 다 서울로 보냈잖!”
  이런 의심이 바람을 타자 불안한 여자들은 무조건 찾아와 돈을 돌려달라고 했
다. 한 사람 두 사람 우리집으로 모여들었다.
  “왜덜 이래유? 내가  당장 죽어유? 논밭전지 다  있구 남편이 직장 다니는데 
뭘 못 믿구 이런데유? 방앗간집에서 돈이 나오면 다 해결할 거래유.”
  오후부터 모여들던 여자들이  내가 이렇게 말하자 하나둘씩 돌아갔다. 동짓달, 
어두워진 저녁,  나는 부뚜막에 망연히 앉아  컴컴한 마당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무서웠다. 난생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남편이  기다려졌다. 그가 오면 다 말하고 
위로를 받고 싶었다. 곧  남편이 돌아오는 소리가 났다. 그는 언제나처럼 자전거
를 타고 오다가 대문 앞에서 내려 자전거를 들고 들어왔다.
  “왜 그래!”
  남편이 도시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는 부뚜막에 앉은 채 그를  멍한 눈으
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무서운 기 사람이라구 아버니가 늘 그리더니 이제 알겠네유.”
  내가 말했다.
  “뭔 소리여?”
  “글쎄 여자들이 우리가 뭐 서울루 돈을 빼돌렸다구 몰려오구 그리대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남편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래서!”
  내가 말을 하지 않자 남편이 물었다.
  “그기 말이나 돼유?”
  “여자덜이 몰려왔다민?”
  “내 말 듣구 다  갔어유. 방앗간집이 돈 줄 날이 되어두 이자 한  푼 안 내놓
으니 나만 빚에 몰려서 그런 거래유.”
  내가 말했다.
  “밥이나 줘!”
  남편이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나는 그가 나를 이해한 것 같아 맘이 놓였다. 
부지런히 저녁상을 차려 들고 들어갔다. 그는 말없이 밥을 먹었다. 숭늉도 한 대
접 다 마셨다. 나는 빈 상을 내다 설거지를 했다.
  “방앗간집에 나갔다 올게유.”
  방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남편은 다리를 펴고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돈이 되느 대로 해준다는  말만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남편이 방으로 들어오는  나를 앉으라고 했다. 때릴까 
봐 무서웠다. 말려줄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앉았을  때 나는 그가 때릴 생각은 없다는  걸 짐작했다. 그
러나 그는 드물게 차분해서  화를 낼 때보다 더 무서웠다. 내가  자기 앞에 앉아
도 한동안 담배만 피우고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신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말어유. 다 잘 해결될 거래유.”
  내가 말했다.
  “내 진작에 이 꼴 날 줄 알았어! 지집년덜이 그렇게 설쳐대니!”
  남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말이  옳지 않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입을 
막고 있어야 했다.
  “니년 때문에 난 양양 바닥에서 낯을 들구 살 수가 없게 됐어!”
  남편이 말했다. 갑자기 그가  너무도 엉뚱한 생각을 한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
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무슨 생각으루 당신이 그래유? 우린 괜찮어유.”
  내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저녁을 먹고 나서 내내 한 가지  생각만 한 것이었
다.
  “아무 걱정하지 말어유.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아무 일두 없을 거래유. 돈
이라는 기 돌다보문 이럴 때두 있는 거래유. 다 사람 하는 일인데유.”
  그러나 이미  남편은 어떤 결심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았고 듣지도 않았다.
  나는 일어나서 잠자리를  폈다. 그러나 그는 옷을 벗기는커녕 입은  채로 바깥
으로 나갔다. 불안하고 겁이 나서 그를 따라 나가보았다. 어두운 밤에 그는 동네 
언덕을 넘어갔다. 그곳엔 공동묘지가 있었고 더  멀리에는 시할머니의 산소가 있
었다.
  남편은 새벽에 돌아왔다. 나는 잠을 못 자고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딜 갔었대유?”
  울어서인지 피로 때문인지 눈알이  빨갛고 부어 보이는 그를 쳐다보고 조심스
레 말을 붙였다.
  “앉어!”
  그가 말했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밤새두룩 죽어볼라구 애쓰다가 결국은 못 죽구 이렇게 다시 왔는데.”
  여기까지 말하고 그가 도살장의 황소처럼 한숨을  토했다. 그러나 한숨 소리가 
걷히기도 전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뚜둑 떨어졌다. 가슴이 미어졌다.
  “할머니한테 어뜩하문 좋으냐구 울면서 애원두 해봤구,  못난 손주 용서해 달
라구두 해봤다.”
  울먹이며 남편이 말했다.
  “내가 너 같은 거 만낸 것두 다 팔자라구  생각하구 미워하진 않는다! 당신이 
이렇게 될라구 시작한  기 아니란 것두 알어!  새끼덜 델구 잘살아 볼라구  하다 
이렇게 된 거 원망두 안해! 내가 못나서 다 이렇게 된 거, 사내자식이 누굴 탓할
거야!”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고 나도 흐느끼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 고향  바닥에선 고갤 들구 못 산다는 거  당신두 알 거여. 
내 성질머리가 드루워 뻔뻔하지도 못하니... 난 새벽차루 서울루 간다!”
  그가 말했다. 그가 콧물을 훌쩍 들여마셨다. 나는 이미 그의 결심이 굳어져 내
가 뭐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다.
  “당신 뜻대루 하세유. 그래두 광산엔 알궈야 하잖어유.”
  “서울 가서 사표 써 부치문 돼!”
  남편이 말했다.
  꿈에도 잊지 못하던 고향. 일찍이, 몇 번이나 좋은 조건도 팽개치고 돌아온 고
향을 그는 결국 이렇게 새벽 찬서리 맞으며 도망쳐야 했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떠난 것은 결국 나를 사기꾼으로 믿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
기가 되었다. 뒤로 돈을 빼돌려 급기야 남편까지 야반도주를 시켰다는 것이었다. 
내게 돈을 빌려준 사람보다 내게  돈을 빌려간 사람이 더 많았고 액수로도 받을 
것이 훨씬 많았다.  그렇지만 사태가 이렇게 되자 돈을 빌려간  사람들은 뻔뻔해
졌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사람 얼굴을  한 짐승으로 변했다. 며칠  전만 해도 
가슴을 털어놓고 내게 의지하던 사람, 별식이라고  들고 오던 사람들이 극악스러
워졌다. 나 혼자는 그 엄청난 오해와 탐욕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떠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종이로 된 재산증명서, 내가  입고 다니던 
가짜 모피코트, 심지어 전화기까지  남의 손에 넘어갔다. 고방 열쇠가 누구 손에 
들어가 곡식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그때의 정
황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누굴  원망하고 누굴 벌 줘야  하는지 누구에게 
고마움을 표ㅎ야 할는지.  내게 결정적인 피해를 입힌 사람이 누구라는  건 알지
만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사람을 미워하는 게 살
인이라고 생각되어서.  이렇게 치명적인 절망에  빠진 내게 따뜻한  마음을 보인 
건 `친정식구`라고 이름 붙여진 내 피붙이뿐이었다.
  맨손으로 나는 다시 서울로 왔다. 해방되던 해 한겨울. 그 어렵던 때도 살아넘
긴 서울이었다. 나는 서울에  와서 일부러 오래도록 걸었다. 금방 집으로 들어갈 
맘이 아니기도 했지만 너무도 달라진 서울을 걸으면서 보고 싶었다. 그래, 살 수 
있다. 도둑질, 서방질만 빼고 무엇이든지 다해서 자식들  굶기지 않겠다! 나는 이
를 악물고  결심했다. 주택가 언덕을 오르면  내리막이 나섰다. 내리막을 지나면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그랬다.  저것이 인생이었다. 오르고 내리는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불행과 행복. 슬픔과  기쁨이 되풀이되는 게  인생이었다. 그래서 
인생에는 절망이 끝이 아니고 불행도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 번도 셋방살이를 해보지 않은 아이들이  단칸방에 오글거리고 살았다. 아이
들은 의외로 더 사이가 좋아졌고 가난의 의미를  모르는 것처럼 잘 지냈다. 남편
은 취직운이 좋아  벌써 새로 시작하는 합섬회사의  창업 노동자로 취직이 되어 
그곳으로 내려가 있었다. 나는 일자리를 얻으려고 동대문 시장으로 나가봤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재봉이었고 그때 동대문에는 등을 펼 수 없는 낮은 공
장에 많은  봉제공들이 일하고 있었다.  나같이 나이든 여공에서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보조공들까지 벌집  같은 공장에서 하루 열두 시간 이상씩  일했다. 그래
도 임금이 싸서 배를 곯을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이렇게는 살 수는 없었다. 나는 
기술을 배울 생각으로  한복 바느질을 배웠다. 운이 좋아 한복집에서  이내 받아
주었다. 열심히 했다. 처음엔 서둘러 치마만  만들었다. 치마는 공전이 싸서 일한 
것에 비하면 수입이  하찮았다. 그래서 치마를 하면서도 저고리 만드는  것을 눈
여겨보아 두었다. 하루 빨리 저고리 만드는 기술을 익히고 싶었다.
  하루종일 재봉을 하다  늦은 밤 버스를 타면 얼마나 춥던지.  동대문에선 아주 
어린 소녀나  소년이 나와 함께 버스를  타는 경우가 많았다. 그  애들도 동대문 
어딘가의 벌집 같은 공장에서  보조로 일을 했을 것이었다. 가슴이 쓰라렸다. 적
어도 저 나이엔 저렇게 살도록 만들지 말아야 했다.
  셋집으로 가려면 시장을 지나야 했다. 파장의  장거리는 쓰레기 더미나 다름없
었다. 그러나  나는 비린 야채를 뒤적여  양배추 푸른 잎을 골라  버려진 비닐에 
담아들고 왔다. 한참 서서 허리 구부리고 살피면 이런 것들이 눈에 띄었다. 그걸 
가져다 살짝 데쳐서  아이들에게 된장과 함께 주면 밥을 맛있게  먹었다. 아이들
은 다 커서 가정을 가지고도 그 얘기를 했다.
  그러나 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처구니없게도 남편이었다.
  남편은 토요일 오후에 집으로  왔다. 그는 빈손으로 오는 적이 없었다. 어쩌다 
빈손으로 오게 되면  구두를 벗기 무섭게 허겁지겁  돈을 꺼내 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걸 마음대로  사오라고 시켰다. 그는 이렇게 인정 많은  남자였지만 아직도 
아이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근이는 아버지와 만나기  싫어 들어오지 않을 때
도 많았다.
  “엄마, 아버지는 왜 토요일마다 오시지? 방도 좁은데.”
  “얘들아, 빨리 방청소 해! 아버지 오신단 말이야.”
  아이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느들은 모르너? 아부지가 옛날 같지 않은 거.”
  내가 민망하고 섭섭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난 아버지가 싫단 말이야.”
  “난 아버지가 눈만 크게 떠도 무섭더라.”
  아이들은 이런  맘이었다. 그래도 남편은  그렇게 즐기던 담배도  끊고 절약을 
해서 월급을 타다 내게  주었다. 하지만 그는 집에 와서 옹색한  방을 보면 죄를 
지은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잠자리가 비좁아 물건을 탑처럼  높게 올려서 
한 사람  이라도 더 자게 틈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넓게 
자리를 차지하도록 저희들은  칼잠을 자는데, 남편은 그걸 볼 수  없어 바깥으로 
나갔다 한참이나 지나서 들어오곤 하였다.
  “나 이제 안 온다. 아덜 돼지 새끼같이 이렇게 사는 거 더는 못 보겠어!”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내겐 핑계로 들렸다.
  “회사두 옮겨야 되겠구.  양양에서 여자덜이 돈을 받으려 왔어. 남새시루워서 
더 못 댕겨! 그런 줄 알어.!”
  남편이 말했다. 나는 모르는  얘기였다. 남편은 그 동안 나를 괴롭히지 않으려
고 참아왔지만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고향에서 돈이나 퍽 떼먹구 도망온 거루 소문나문 거기서 어떻게 일을 하겠
나 생각해 보라구.”
  “누가 거까정 찾아갔습디까?”
  “몰러! 당신 나이짝은  되어 보이는 여자 둘이  왔더라. 월급을 차압하겠다는 
거야.”
  “그래서 뭐라구 그랬어유?”
  “한 번만 더 찾아오면 죽여버리겠다구 그랬지!”
  “화가 나서 배길 수가 있어야지.”
  남편과 내가 빚 문제를 얘기한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우린 숟가락몽댕이 하나 들구 나오지 않았어유. 양심에 걸리는 것두 없어유.

  내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참지를 못하고 결국 그 좋은 직장을 버렸다. 그리고 
그는 남쪽으로 가서 월급쟁이를 면할 때까지 임시직 생활을 했다.

  윤이가 고작 열흘 예정으로 미국에 온 지  나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마당을 
쓸고 들어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서울에서 윤이를 찾거나  아니면 근이에게서 
온 전화려니 여겨 기쁘게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 했다.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서울에서 오신 윤이 씨 계시는지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남자 목소리였다. 우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누구세요! 왜서 그리세요?”
  나는 이렇게 물어보는 내가 우스웠다. 윤이를 찾는  이 남자는 그 애가 공항에 
도착할 때 이미 숙이가 귀뜀해서 알고 있지 않았던가.
  “윤이 씨 어머님이신가요?”
  그 남자가  물었다. 나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아 입을 봉한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제가 너무 일찍 전화를 드려서 언짢으시겠습니다.”
  그쪽에서도 내 기미를 눈치챘는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
다.
  “잠깐 기다리슈!”
  나는 스스로의 귀에도 거슬리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하고 윤이를 빽빽 소리
쳐 불렀다. 윤이가 달려나왔다.
  “저한테 전화 왔지요?”
  나는 눈부터 흘기고 수화기를 그 애에게 건넸다.
  “괜찮아요.”
  윤이가 말했다. 미친 것들. 무턱대고 나는 속으로 둘을 욕했다.
  “잘 지내요. 그럼 일은  이제 다 끝내신 거군요. 전 괜찮아요. 물론 가야지요. 
우리 어머닌 좋아요. 당연히 걱정이 되시겠지요.”
  나는 윤이의 이런 말을 엿듣다가  숙이가 와서 잡아끄는 바람에 더 이상 듣지
를 못했다.
  “저 눔이 윤이가 만낸다는 놈이 아니여?”
  나는 숙이에게 말했다. 숙이가 내 팔을 살짝 꼬집었다. 나는 숙이의 팔을 뿌리
쳤다.
  “엄만 왜 그래요, 언니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예요?”
  “어린애가 아니문 그래 어디 와서 외간 남자를 만나구 그런데?”
  “하여튼 신경 쓰지 마세요.”
  “내눈에 흙 들어가기 전엔 그런 추잡한 꼴은 못 보니 그런 줄이나 알어!”
  내가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데 윤이가 등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아이구 징그룹다. 왜서 이래. 누가 이리문 가만있는데?”
  내가 뿌리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엄마, 아무 걱정 마세요. 제가 잘살면 되잖아요.”
  “나두 모르는 남자가 아침부터 전화를 하구 그리는 게 잘사는 거니?”
  “엄마, 아무 걱정 마세요. 제가 잘살면 되잖아요.”
  윤이는 태연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학교 가는 아이처럼 준비를  했다. 나
는 흡사 닭 쫓던 개 꼴이었다. 그 애는 너무도 천연스러웠다.
  전화를 받고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윤이는 집을 나갔다. 가슴이 마구 떨렸다. 
자식에게 심한 배반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추 물을 들이킨 것처럼 매운 
가슴은 하루 내내  가라앉지를 않았다. 서울에 있는 사위가 마치  거울에 비추듯 
이 사실을 뚫어보고 있을  것 같아 겁이 났다. 저러고도 이혼을  당하지 않을 수
는 없는 일이었다.
  이날은 상가의 정기  휴일이었다. 여는 휴일처럼 나는 아침을 먹고  이웃에 사
는 친구들과 한인타운의 사우나에 갔다.
  일주일에 하루. 나는 사우나에  와서 하루종일 쉬는 것이 큰 낙이었다. 이곳에 
오면 내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많았다. 이나이  되도록 살아온 내력은 다 다르지
만 외로운 것 하나는 같았다. 젊어서는 자식들  가르치는 재미로 살았지만 그 자
식이 출세해도 함께 살지 못하는 어머니들이  많았다. 의사에 변호사에 회계사인 
아들을 둔 여자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나는  아직 일을 할 수 있어서 
그나마 기가 덜 죽은  여자였다. 음료수를 사더라도 내 돈으로 살  수 있으니 떳
떳했다
  한 차례 땀을 빼고  온돌로 된 휴게실에 누웠다. 꿀물 같은  잠이 온몸으로 스
며들었다. 그래, 여기보다  더 좋은 천국이 어디 있으랴. 나는  그 꿀물을 마시듯
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러나 나는 잠들지 못했다. 스며드는 듯하던 잠은  어느 결에 사라지고 내 정
신은 찬바람이 일 듯 꼬들꼬들해졌다.

  남편은 창원에 일자리를 얻고 그곳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
는 다시 내가 아닌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 여자는 바로  남편의 하숙집 주인
이었다. 그  여자의 남편은 주정뱅이에다가  아내 등에 얹혀만  살았는데 남편이 
그곳에 가고 일 년이 채 못 되어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 여자는 남편보다 나
이가 세 살이나 많았고 얼굴에 굵은 주름이 깊이 패여 인상이 거칠었다. 한동안, 
그러니까 남편과 그런 사이가 되기 전에 내가 그곳에 가면 그 여자는 나를 붙들
고 한참씩 신세  한탄을 하며 서러워했다. 자기도 내 남편처럼  자상하고 가족을 
귀하게 여기는 남자와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났다. 그동안 근이는 장가를 들었고 며느리는  결혼한지 일 
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내 기쁨은 천하를 다 얻은 것 같았다. 남편은 손자의 백
일잔치에 왔다갔다. 돌에도 왔다.  며느리는 가끔 내게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빼
앗기고 사는 것이 분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분할 게 따루 있지  난 도리어 좋아! 어멈이 아직 몰라서 그렇지  여자는 그
저 자식이 최고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랬다. 나는 난생  처음 만족스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 남편은 내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내게는 아들 며느리  손자가 다 있
으니 충분했다. 부디  몸이나 오래오래 성해서 돈이나 벌어 아들에게  한몫 쥐어
준다면 더 소원이 없었다.
  나는 아들과  함께 살면서도 마룻방에  한복집을 내어 여전히  돈벌이를 했다. 
단골도 많아졌고 바느질이 꼼꼼하다는 평도 나서 먼데서도 일감을 가져왔다.
  며느리는 손자의 돌이  지나고 얼마 안 되어  처녀시절에 다니던 직장에 다시 
나갔다. 딸들은 내가 돈벌이를 시작한 며느리의  생활력에 대해 자랑하자 웃으면
서 이렇게 말했다.
  “올케는 엄마하고 같이 있기가 싫은 거예요.”
  그러면 나도 가만있지 못했다.
  “에이 드루운 년들! 생각이 겨우 고렇게밖에 안 드니?”
  “엄마는 착각을 해도 보통 착각을 하고 계신 게 아니라고요.”
  “시끄루워! 날 보구 엄마라구 그러지두 말어!”
  나는 딸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며느리가 첫 월급을  탔다고 내복 한 벌을  사 왔다. 기쁘기 그지없었다. 나는 
내복 값보다 더 많은 돈을 며느리에게 주면서 말했다.
  “그래, 젊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라.  버는 족족 저금을 해. 생활비는 내가 
바느질해서 다 대줄 테니.”
  “어머님이 너무 힘드셔서 걱정이지요 뭐. 살림은 파출부를 써도 돼요.”
  “니가 맥이 쑥  빠진 소릴 다 한다.  파출부는 공짜루 쓴대?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 어멈은 직장에나 잘 댕겨!”
  나는 이렇게 말하고 바느질하면서 손자 기르고  집안 살림까지 하였다. 그러자
니 집안은 제대로 치워지지도 않을 뿐더러 손자도 여느 집 아이들처럼 깔끔하게 
차려내 놓지를 못했다. 때가  낀 옷을 입거나 얼굴도 지저분하기 일쑤였다. 놀아
주지도 못하니 아이는 늘 한복 마르고 남은 자투리 천 조가 위에 나뒹굴어서 꼴
이 말이 아니었다. 며느리는 퇴근해서 돌아오면 제 아들 샤워부터 시켰다.
  “어멈아, 귀한 집 자손일수록 험하게 길러야 한다. 그래야 병두 안 걸리구 명
두 길어!”
  “그건 옛날 말이에요.”
  “옛날 말 그른 거 어디 한 가지래두 있는 줄 아니?”
  그래도 며느리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마치 계모에게 설움 받는 아이 만난 생
모처럼 안쓰러운 얼굴로 손자를 씻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기 바빴다.
  나는 속으로 며느리가 고집이 세다고 욕했다. 하지만 미워하지는 않았다. 며느
리를 미워하는 건 결국 내 손해였다. 며느리는 내 자식이고 내 재산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 딸들이  제 올케를 미워하는 것이었다. 그애들은 어쩌다 집에 
오면 올케는 늦잠을 자거나 외출을  하고 내가 온갖 살림에 바느질까지 하고 있
는 것을 보고 아주 못마땅해 하였다.
  “엄마! 며느리 시주들고 사는 게 그렇게 좋아요?”
  “왜 아침을 엄마가 해요?”
  “올케는 출근하잖니.”
  “오늘은 일요일이잖아요.”
  “일요일 하루래두 늦잠을 자야지!”
  “엄마 하루에 열두 시간도 넘게 바느질을 하잔하요!”
  “야! 시끄루워! 느덜은 왜 출가외인이 와서 참견질이너?”
  나는 결국 딸들과 이런 문제로 다투고 섭섭하게  해서 돌려 보냈다. 물론 그랬
다. 시집간 딸 열이 있으면 무얼 할 것인가. 며느리 하나가 내게 훨씬 힘이 되었
다.
  며느리도 시누이들이 자기에게 갖고 있는 불만을 알고 있었다.
  “어머님 때문에 저만 미움받잖아요.”
  “괜찮다. 지까짓 것덜이 미워한다 해도 무슨 수가 있너.”
  나는 이렇게 말했고 며느리는 내 말을 한  마디도 거역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아들 며느리가 사이좋게 지내고 돈을  알뜰히 모아 재산을 늘리게 되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저녁에  생선이나 고기 반찬을 해놓았다가도 아들이 저녁을  먹고 들
어온다고 하면 나는 그 반찬을 내놓지 않았다.
  “아범이 밥 먹구 온다니 우린 김치 한 가지루  때우자. 그럼 지건 낼 하루 때
울 수 있잖니?”
  나는 며느리가 이미  밥상 위에 얹은 생선  토막을 다시 후라이팬에 쏟아놓고 
김치와 된장만 먹게  하였다. 이때 맞벌이를 하는 며느리의 기분이  어떨지 나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아들이 번듯한 아파트 한 채 장만하는  걸 보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앞뒤 보지 않고 일만 했다.

  창원 여자가 불쌍해서  헤어질 수 없다던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놀게 되자 
그 여자와 사이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우선 그 여자의 아들  며느리들이 밥값을 
못하는 어머니의 샛서방을  눈엣가시로 여기기 시작했다. 먼데  떨어져 사는데도 
가끔씩 술을 마시고 와서 모욕을 주고 행패를  부리다 가는 것이었다. 그는 어느 
날 서울에 와서 내가 그 여자의 안부를 묻자 이런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드루워서 못 살겠어! 즈 아비 닮어 아주 천하의 쌍눔덜이여.”
  남편은 그 여자의 자식들을 이렇게 욕했다.
  “제 밥벌이 못하문 누가 좋아해유? 나두 재봉해서 생활비 다 대구 그리니 그
나마 아들 며느리한테떳떳이 붙어사는 거래유. 당신두 그  동안 돈 벌은 거 있으
문 가져와 봐유. 집 넓은 거 사서 같이 살게유.”
  나는 남편이 행여나 이곳에 와서 빌붙을까 두려워 이렇게 모질게 쐐기를 박았
다. 그가 돈을 모으지 못했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았다.
  남편이 다시 창원으로 돌아간 다음 며느리에게 남편 얘기를 했다.
  “어떡해요. 아버님도 여기 와서 같이 사셔야지요.”
  며느리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니 앙 그런  말은 입밖에두 내지 마라. 아범한테두  말하지 말구! 여기 무슨 
방이 있다구 와 살어! 밥이나 축내문 말이나 안 하지. 그 성질 우락부락 해서 집
안 식구덜 불안하게 하는 거 나 더는 못 본다.”
  나는 며느리에게 질겁해서 말했다.
  결국 남편은 창원에서 송어리로 갔다.
  남편이 송어리로  간 다음, 그와 나  사이엔 거의 살기에 가까운  미움만 남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다시 늙은 부모와 함께 산골에  살게 된 것을 모두 내 탓으
로 여겼고  나는 그를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결국 비참하게 된  그의 인생은 
그가 잘못 산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며느리였고 죽어도 이 집안의 귀신이 되어야 할 여자이므로 가끔 
시부모님을 보러 송어리로 갔다. 두 분에겐 아무런 미움이나 원망이 없었다.
  그런데 근이는 내가 송어리에 가서  며느리 노릇도 하고 제 아버지와 함께 살
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 동안 온갖 고생해서 모
처럼 손까지 퍼진 집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그건 내 권리였고 내 피땀으
로 이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근이는 끝없이 내게 말이나 눈치로 압력을 넣었다.
  “송애로 가세요! 어머니가 맏며느리잖아요.”
  “안죽두 할머니가 조석 다  끓여 잡수실 수 있어. 그리구 거기  내가 가서 뭘 
하구 사니? 난 농사두 질 줄 모르구  기껏 이거 바느질하는데, 느덜두 내가 벌어 
보태야 살지 않니?”
  “필요 없어요 어머니. 우리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시고 어머니 
일이나 제대로 하세요.”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럴 때, 나는  아들에게 더없이 서운했다. 아들은 키워
놓으면 남편처럼 된다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아들 장가들여 며느리 
손자 더불어 사는  가정에 안착했는데 나를 다시 그 산골로  가라니. 남편이라고 
무슨 정이 남았다고...
  남편이 송어리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하던 게 다 이런 
일이 생기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차라리 창원에서 그  여자와 사는 게 내겐 속이 
편했다.
  “아버지하구 같이 사세요. 어머니 가시면 사시는  데 불편하지 않게 전자제품 
일습을 장만해 드릴게요.”
  아이들은 한통속으로 나를 몰아내려 했다. 자식들이 꼴도 보기 싫었다. 그렇다
고 그 애들이 나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나는 꾹꾹 참았다. 대신 자주 짬을 내서 
송어리로 가서 시부모님을 보고 왔다.
  그 일이 있던 날은 남편이  창원에서 온 지 두어 달이 지나서였으며 시어머니 
돌아가시기 바로 전  해의 가을이었다. 나는 양양 장거리에 들러  김칫거리와 간
고등어 쇠고기를 사들고 송어리로 올라갔다.
  자동차도 잘 다닐 수 없는 비포장 산판길 옆으로 곱게 단풍이 들어 있었고 연
보라색 국화는 또 어찌  그리 예쁜지 몰랐다. 이제 한목숨 다  산 잠자리는 그걸 
알아서 그런지 날아가는 맵시가 처연했다.
  맨 처음 누가 이런  산골에 살림 터전을 할 생각을 했을까.  아무래도 피난 곳
이 제격인 이런 산골로 들어와 살 작정을  했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자
동차 소리, 라디오나  텔레비전 소리,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곳. 너무 고요
해서 까마귀 울음이  반가운 이곳. 남편은 결국 여기서 인생을  마치자고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어느  결에 마당가의 텃밭에 이르렀다.  고개를 들어 
마당을 쳐다보니  시어머니의 등이 보였다.  밤색 털스웨터를 입고  허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멍석에서 무얼  고르고 있었다. 가슴이 울컥 매었다. 이곳으로 일
곱 살인가 아홉 살인가에 민며느리로 와서 갖은 설움 다 받고 이제 여든을 넘긴 
시어머니.
  “어머니이!”
  내가 소리쳐 불렀다. 시어머니는 깜짝 놀랐는지 엉덩이가 들썩했다. 그리고 부
리나케 뒤를 돌아보았다. 반가움에 정신이 아뜩해졌다. 나는 마치 헤엄이라도 치
듯 허둥지둥 올라갔다.
  “어멈 아이너?”
  시어머니가 내 손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그런데  벌써 눈에 눈물이 고여 흘렀
다.
  “어머니이, 그 동안 잘 기셌어유?”
  나는 울면서  말했다. 시어머니의 손은  아직 가을인데도 터서  피가 쁠긋쁠긋 
배어나왔다.
  “어멈아 니가 어떻게 왔너?  아침에 대구만 까마귀가 울어싸서 욕을 했던 어
멈이 완기네.”
  시어머니는 코를 훌쩍 들이켰다.
  “그래 뭘 하시거러 기리세유?”
  나는 시어머니의 풀어진 앞단추를 여며주며 물었다.
  “옥쎄기를 고른다구 앉았잖너.  그눔으 다램이란 눔덜이 사람만  없으문 나래
비를 사서 지랄 발광이 아이너. 벌거지 먹은 건 줘 내꼰지구.”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옥수수 알 하나를  내던졌다. 벌레먹은 거라고 버
리는 모양인데 멀쩡한 것이었다. 언제부터 인가 눈이 침침하다고 하던 시어머니. 
자식이 여럿이면 무얼하는가.
  “어머니이, 들어가세유. 절 받으세야지유.”
  내가 시어머니를 잡고 일어서며 말했다.
  “아이 뭔 절을 한다구 그래쌌너. 성가시게.”
  시어머니는 말은 이렇게  해도 얼굴에 기쁨이 감돌았다. 우리는 곧  방에 들어
가 마주앉았다. 나는 공손히 애틋한 마음으로 절을 올렸다.
  “어멈이 여간 바쁘너. 뻔히 알민서두 어멈이  왔다가문 그날루 어멈을 지달리
게 되잖너. 사람이 늙을수락이 아 된다던 말이, 안 글러. 안 글르구 말구.”
  시어머니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목매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가 진작버텀 아버니 어머니  모시구 여기서 살아야 되는거 왜서 몰르겠어
유. 아범이 지를 못 오게 하니, 뭔  맘을 먹구 저리는지를 몰르겠네유. 근이두 저
를 일루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라구 야단이래유.”
  “어멈 맘이야 내가 왜서 몰르너?”
  시어머니가 방바닥에서 신문지 조각을 찢어 코를 풀었다.
  “아버닌 산에 가셌어유?”
  “봉양 캔다구 망태기 지구 나간  기, 지낙 때 다 돼가니 올 기여. 영감탱이가 
안죽두 미련해서 밥 먹는 거두 까져먹구 산에만 가문 저물어야 들어오잖너.”
  시어머니가 방문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김칫거리부터 손
질하려고 부엌으로 나갔다. 시어머니는 허리를 구부리고  따라 나와 내가 가져온 
짐을 펴보았다.
  “이기 뭐너? 내복이 아이너?”
  시어머니가 내의 상자를 추켜들고 물었다.
  “아버니 거하구 두 벌 샀어유.”
  “어멈은 맥이 쑥 빠졌잖? 내가  내복이 없을까 봐? 그저 밤낮으루 그년어 바
느질 하느라구 눈알이 빠질 텐데 뭘 하러 이런데 돈을 쓰너?”
  시어머니는 말은 이러면서 내의 상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부지런히 
김치를 소금에 절이고 둔덕 밭에서 무를 뽑아왔다.  흙내가 상큼한 무를 씻어 너
붓너붓 썰어 넣고  쇠고기국을 안쳤다. 물이 좋아 여기선 아무렇게나  해도 맛이 
있었다. 가마솥에 군불을 지폈다. 따로 낸  화덕 아궁이에 숯이 있었다. 간고등어
는 쌀뜨물에 간기를 조금 빼서 석쇠에 구우면  될 것이었다. 냄비며 그릇들은 노
인네 살림이라 어느 것 하나 정갈한 게  없었다. 행주는 애당초 무슨 색깔이었는
지도 모르게 새카맸다. 아직 밥을 하기엔 이른  듯해서 방에 들어가 더러워 보이
는 옷가지를 건둥건둥 지어다 그 사이 데워진  가마솥 물을 퍼서 함지에 불렸다. 
가루비누를 풀어 한 시간쯤 담가두면 때가 저절로 빠졌다.
  산골의 해는 버덩보다 빨리 졌다. 가을 해가  지니 집안이 이내 우중충하고 스
산해졌다. 걸레를 빨아 아래윗방을 닦았다. 걸레를 대지도 못하게 때가 새카맣게 
나왔다. 빨래할 때가  지난 옷을 보아도 더러운 방구석을 문질러도  지저분한 그
릇들을 보아도 다 내  죄 같아서 마음이 무겁고 아팠다. 아들은  내가 이곳에 오
면 세탁기에 텔레비전에 전기밥솥까지 모두 들여놔  준다고 했다. 아들이 아니더
라도 내 돈으로 장만할 수도 있었다. 재봉틀  가져다놓고 양양 장에 다니며 일감 
받아다 장날에  한 번씩 내다주면 공밥은  안 먹어도 될 것이었다.  남편이 나를 
미워하건 바람을 피우건 나는 어디까지나 이 집안으로 시집을 온 어엿한 며느리
였다. 더군다나 조상님 제사를 받들 아들도 낳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 방 청소를 하고 부엌으로 나왔다.
  “어멈!”
  시어머니가 마당에서 불렀다. 어흠, 기침소리가 들렸다. 시아버지였다.
  “아이구우 아버니 오셌잖어유!”
  반가워서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마당으로 나갔다.
  “니가 용케 왔구나.”
  어깨의 망태를 벗으려고 손을 어깨근에 대고 시아버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버니, 이젠 힘드신데 산에는 다니지 마세유.”
  내가 망태를 벗겨드리며 말했다.
  “노니 뭐한? 사람은  다리꼬뱅이에 심 있을 때까정은 움직기래야  하는 기여. 
그래야 내가 살았다, 할 기 아이너. 어멈 내 말이 글런?”
  시아버지는 나를 보고 기분이  좋아진 게 분명했다. 나는 망태기를 뒤졌다. 봉
양이 몇 덩어리 있어서 꺼내놓았다.
  “어멈 거기 버섯은 없던?”
  시아버지가 뜨럭에 앉으며 물었다.
  “뭔 버섯이 있너유?”
  나는 말하면서 망태  속을 들여다보았다. 눈보다 먼저 코로 송이내가  훅 끼쳤
다. 곧 퍼드러진 송이를  하나 꺼냈다. 송이 말고도 능이가 몇 개,  표고가 한 줌 
들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래도 있었다. 나는 갑자기 어린아이가 되어 다래를 
입에 넣었다.
  “흙이 안 묻었너?”
  시아버지가 나를 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다래를 언제 먹어보구 첨이네유!”
  나는 기뻐서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두 어멈 오는 줄 알구 늙은 눈에 버섭이 띤 기 다행이다.”
  “그래기다 말이래유.”
  그리고 나는 버섯을  부엌으로 들고 들어가 반찬을 했다. 송이는  끝물인 호박
을 따다가 같이 볶을 것이고 싸리버섯은 삶아서 하루 우려야 할 것이었다.
  “아범은 안죽 안 왔너?”
  “그년어 종자는 어딜 가두 간다온다 말을 안하니 알어유?”
  “속초로 목간 간 기 아인?”
  마당에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이곳에 와서도 양양에
는 가지 못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싶거나  울화증이 나면 속초로 나가곤 하였
다. 나는 남편은 기다리지 않고  다 된 저녁상을 차렸다. 반찬이 많아 정말 상다
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뱃고래서 회가 놀래잖겠너.”
  시아버지가 밥상머리에 앉으며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어머니는 고방에서 
직접 담은 오가피주를 한 주발 덜어다가 시아버지 앞에 놓았다.
  “안주해서 자세유.”
  시어머니가 애틋하게 말했다.
  “나만 먹너?”
  시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얼른 나가  유리잔을 들고 들어와서  시어머니 앞에 
한 잔 놓았다. 시어머니는 단숨에 들이키고 내게도 주었다.
  “어여 마세! 이기 술이 아이여. 다리고뱅이 쑤시는 데두 좋워!”
  시아버지 눈치를 보는  내게 시어머니가 잔을 들어 입에 대주며  말했다. 시아
버지는 못 본 체하였다.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내가  저녁 설거지를 막 끝냈을 
때 남편이 돌아왔다.
  “어멈! 아범 완기네!”
  나는 일을 하느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부엌문을 열고 
소리쳤다. 나는  남편이 반가워 후다닥 장지문을  열어젖뜨렸다. 방문 뜨럭에 선 
남편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어두워서 그의 표정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
나 남편의 뒤에 서 있는 여자는 너무도  잘 보였다.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데도 
엉거주춤 발을 바깥으로 내딛었다.
  “들어가자구!”
  남편이 내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에 선 여자에게 말했다.  나는 그 여자에
게로 다가갔다. 그 여자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나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아
주 갈라섰다고 하던 창원 여자였다.
  “이기... 뉘기래유? 여기멜 어떻게... 왔지유?”
  나는 바보처럼 더듬더듬 말했다.
  “뭘 우물쭈물해!”
  남편이 그 여자에게  소리쳤다. 그 여자는 뼈가 없는 짐승처럼  웅크리며 남편
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눈에서 불이 났다. 방에서 말소리가 들리는데 무슨 말
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추운 별만 가득 찬  어두운 밤하늘 아래 
서서 시아버지의 고함이 터지기만을 기다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드나드느냐! 냉큼 나가거라!`
  나는 이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말은  커녕 큰소리 한마디 흘러나오지 않
았다. 나는  분한 마음으로 안방 문을  열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아랫목에 
나란히 앉고, 남편과 윗목에 앉은 그 여자가 막 저을 하고 일어서고 있었다.
  “이런 뱁이 어디메 있대유?  시상에 메누리가 눈이 시퍼렇게 살아서 여기 있
어유!”
  나는 그 여자를  밀어제치고 앉으며 가슴을 치고 부르짖었다. 순간  남편의 솥
뚜껑 같은 손바닥이 내  얼굴에 철썩 붙었다 떨어졌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
만 나는 기 죽지 않았다.
  “지는 저 양반은 안 믿어유!  그래두 아버니 어머니는 믿었어유! 그런데 시방 
누구 절을 받으세유? 이 여자가 메누리래유? 그렇게 하실 수 있어유?”
  나는 눈물이 비오듯  하는 얼굴을 들고 마구 대들었다. 내  평생 손위어른에게 
이렇게 대들어본 적은  없었다. 내 인생이 끝나가고 있다는 게  너무도 또렷하게 
느껴졌다.
  “이년이 눈깔이 뒤집혀서!”
  남편이 욕을 하며 나를 걷어찼다. 아프지도 않았다. 통곡만 나왔다.
  이날 밤, 나는 어두운 그믐의  산골길 삼십 리를 걸어 양양 읍내로 나왔다. 남
편이란 끄나풀은 끊겼어도 내가  며느리라는 지위엔 변함이 없다는 자부심이 있
었는데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여자였다. 족보에도 오르지 못하는 여자, 친정
도 시집도 없어진, 사람 축에 끼지 못하는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대낮에도 혼자 걷기가 언짢은 그 길을 어떻게 걸어왔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
다. 처음엔 시동생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거기도 남만 같아서  과부인 친
구네로 들어갔다. 소주 이 홉을 혼자서 마시고 울고불고 난리를 부렸다.
  “야! 시부모두 다 남이더라! 난 이럴 줄은 몰랐다! 그래두 시부모만은 메누리 
편인 줄 알았다구!”
  “메누린 아무리 잘해두 남이라구! 이것두 몰르구 난 헛걸 살았어야!”
  “당신덜 제삿상에 밥 한 그릇이래두 떠다놓을 자식 나아준 내가 눈이 시퍼렇
게 살았는데 그래 나를 두구 생판 아무것두 아닌 첩년의 절을 받어? 난 이제 다 
글렀다. 내 인생은 물거품이 되었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에게 마구 한탄을 늘어놓았다.
  숙이가 미국으로 오라고 했을 때, 마치 쥐구멍을  찾은 것 같던 기분은 어쩌면 
이런 연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쌍것의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
지 못하는 곳에 가서 살고 싶은 기분, 그랬을 것이다.
  물론 나는 소박데기 `쌍것`의 처지는  되지 않았다. 우선 남편이 그 여자와 정
말로 헤어졌고 그  이듬해 시부모님이 차례로 세상을 버렸기 때문이다.  두 분은 
천생연분으로 만나 육십 년 이상을 해로하시고 다섯 달 차이로 떠나셨다.
  시아버지는 시어머니의 상여가 나갈 때 마당 앞에서 상여 뒤에 노자를 꽂으며 
말했다.
  “임자 먼저 가 있게. 내가 뒤미처 따라가지!”
  나는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시아버지를 부축했다. 시아버지가 우는  걸 그때 
처음 보았다. 그 이후로  나는 시아버지를 가슴에서 떠나보낸 적이 없다. 더군다
나 그 어른은 다섯 달 후에 당신이 그랬던 배웅동 받지 못하고 시어머니를 만나
러 세상 밖으로 갔다.  나는 장례식에서 당당히 맏며느리의 도리를 다했다. 그리
고 지금도 내 아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를  정성으로 모신다. 비록 만리 타
향에서이긴 하지만.

  윤이가, 사위가 아닌 남자와 여행을 떠난 다음, 나는 내가 벌을 받는다는 생각
을 했다. 더 무서운 것은 창원 여자의  절을 받았다고 내가 마음으로부터 시부모
를 내친 것이 떠오르자 너무도 괴로웠다.
  그러나 그 애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행복한 딸
의 모습을 보자 나도 기뻤다. 부모 마음은 이상한 것이었다.
  “절대루 김 서방이 모르게 해라. 큰일난다.”
  내가 할  수 있는 방책은 이것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내  딸을 행복하게 
해준 그 남자가 누군지 알고 싶기까지 하였다.
  받아놓은 날도 도둑맞은 것처럼 지나갔다. 윤이가  오면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
고 미리 짜놓았던 계획 중에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벌써 내일이면 그 
애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꼼꼼한 숙이는 올  때보다 더 많아진 윤이의 가방
에 이것저것 자꾸 집어넣었다.
  “뭐 안 가져가는 거 없너 생각해 봐라.”
  나는 아무렇게나 거실  바닥에 누운 그 애들에게 말했다. 땀이  나서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주 내 사림 다 거덜낼 작정이세요?”
  숙이가 짐짓  삐딱하게 말했다. 나는 솔직히  민망해서 히죽 웃어넘겼다. 물론 
나는 한국에 나가면 숙이 생각에 온갖 것을 다 사왔다.
  “엄마, 이제 되었어요. 그만하고 앉으세요.”
  윤이가 말했다.  나는 배가 부른 이민  가방을 한 바퀴 돌아보고  아이들 옆에 
앉았다. 다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그래도 자식이 많이 이렇게 싸보낸다는 게 너
무도 행복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살아온 것 같았다.
  “니가 이제 보니 그래도 늙었다야.”
  나는 윤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내가 마흔셋이에요.”
  “벌써 그렇게 된?”
  내 말에  윤이가 내 손을 잡고  만지작댔다. 그 애는 손등의  늘어진 살가죽을 
잡아당겨 보더니 마구 문질렀다. 그런데 공연히 내 맘이 싸아 하게 아파왔다.
  “고맙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윤이와 숙이가 한꺼번에  나를 쳐
다보았다.
  “느덜이 탈없이 이렇게 커줬으니 고맙구 말구.”
  내가 말했다.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들어가서 자자고 해
야 했다. 우리는 서로 그 말이 다른 입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엄마, 작은아버지가 아버지 산소에 손을 못 대게 하세요.”
  이때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윤이가 말했다. 나는 남편의 산소에  잔디가 부실
해서 벌써 돈을 보내  새로 때를 입히라고 했었다. 숙이는 이내  화가 난 얼굴로 
작은아버지를 욕하고 나도 어이가  없어서 윤이를 시동생이기라도 한 듯이 뻔히 
쳐다봤다.
  “왜서 그런데? 누가 돈을 대달라구 했나? 원 벨소릴 다 듣겠네.”
  내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윤이가 할말을 참는 기색으로 고개를  떨구고 한
동안 침묵했다.
  “작은아버지는요, 나중에 어머니하고 합장한 다음에 하라는 거예요.”
  윤이가 너무 작아서  아프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는  도착하던 날로 
내가 말한, 내 묘지엘 기어이 가지 않은 아이였다.
  “누구 맘대루 합장을 해.”
  내가 소리 질렀다. 숙이가 나와 제 언니를 번갈아보았다.
  “언니, 엄마는 여기 묻히신대. 엄마 좋으실 대로 해야지 않아?”
  숙이가 말했다. 윤이는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묘지 사놓은  덴 나도 가봤고 캔디 아빠도 가봤어.  언니도 가봤으면 
좋아했을 거야. 영화에 나오는 공원 묘지 있지? 그런 데야. 5천 불짜리니까 아주 
좋은 데지!”
  숙이가 차분하게  설명하려는 게 역력히  보였다. 그러나 독한  윤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그만 자자. 우리가 노는 사람덜이 아니잖니.”
  내가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내가 아이들 옆에 앉았다.
  “엄마, 저는 어머니를 땅에  묻는다는 생각만 하면 숨이 막혀요. 제가 어떻게 
어머니 묘지에 가볼 수 있어요? 전 아직 못 가요.”
  윤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는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울고 있
었다. 숙이가 한숨을 쉬었다.
  “제가 아직도 아버지도 보내드리지 못했는데  어떻게 살아계신 어머니를... 전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요. 그래서 묘지엔  가지 못했어요. 어머니가 저를 
이해해 주세요.”
  윤이가 울면서 말했다.
  “근이가 어머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근이네가 미국으로 온대요. 지금 
준비하고 있어요.”
  윤이가 코를 훌쩍거리며 말했다.  뭐라고? 나는 이런 눈으로 윤이를 바라봤다. 
윤이는 내 눈길을  피했지만 나는 이미 다 알아들었다. 근이가  미국으로 들어오
겠다는 얘기였다. 그래! 이제 됐다! 나는  속으로 말하며 무릎을 쳤다. 눈앞에 환
해졌다. 방금 윤이 때문에 상했던  마음 같은 건 아주 시시했다. 나도 모르게 몸
이 일어섰다. 내가 얼마나  이렇게 되기를 기다렸던가. 나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
아가지 않겠다. 여기 낯선 땅에 묻혀도, 걱정이 없다.
  “근이가 니한테 직접 말했너?”
  내가 들뜬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아마 올케가 두어 달 후에 직장을 그만두나 봐요.”
  “근이가 먼저 들어오문 안 되니?”
  내가 거실을 왔다갔다 하며 말했다. 숙이가 입을 틀어막으며 하품을 했다.
  “근이가 회사를 동업하던 제 친구에게 넘기나 봐요.”
  “그래기다 내가 뭐랜.  원체 동업이란 기 안좋다구 처음부터  그리지 않았어?

  내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시방 서울이 몇 시나 됐너? 갸덜한테 전화 줌 해보랴?”
  나는 들뜬 마음을 좀체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제가 떠나 다음에 하세요.”
  그 애가 아주 냉정하게 말했다. 나는 벌에  쏘인 기분으로 그애의 뒷모습을 쳐
다보았다.
  “저런 거. 지 애비 닮어 밴댕이 소가지보다 더 짝 붙었지.”
  나는 윤이 뒤에다 낮은 소리로 말했다.
  “엄마도 이제 자요! 노인네가 잠이 없어요!”
  숙이가 밉지 않게  말했다. 그래도 그 애를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곤 화장실
로 갔다. 윤이가 문을 열어놓고  이를 닦고 있었다. 거울로 그 애를 보면서 변기
에 앉았다. 순간  윤이가 칫솔을 문 채 나갔다. 다른  때 같으면 나를 피하는 것 
같아 섭섭했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몸이 자꾸만 허공으로 뜨려 해서, 그리
고 자꾸만 근이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서 몸도 마음도 근질거렸다.  그러나 딸들
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거니와 심술까지 부리는 것 같아 말을 붙일 수가 없었
다. 저것들 자면 살짝 일어나 서울에 전화해야지. 나는 자리에 누워 이런 생각을 
했다.
  윤이는 나보다  늦게 방으로 들어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그 애가 
과연 잠이 드는가 기다렸다. 한동안을 그랬다. 하지만 자는 것 같지 않았다.
  “자너?”
  나는 참지 못해서  이렇게 개미소리로 말을 해봤다. 차라리 그  애가 대답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니요.”
  윤이가 어둡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근이 올 때 지지한 거 가져올 생각 아예  말라구 그래라. 니 올케 시집올 때 
해온 거 어디 하나 쓸거 있던? 우리끼리 얘기지만.”
  내가 말했다. 윤이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 애의 반응이 어떻든 나는 상관없
었다.
  “올라구 맘 먹었으문 하루래도 날래 들어오는 기 백 번 좋다구 말해 줘라!”
  나는 갑자기 숙이네와  사는 게 지겨워졌다. 하루라도 빨리 아들  며느리와 살
고 싶었다. 그러면 저알 내 집에서 사는 기분이 날 것 같았다.
  “엄마”
  윤이가 불렀다.
  “왜서!”
  “아들이 그렇게 좋으세요?”
  “물을 기 없어 그런 걸 묻너?”
  나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아침이 되었다. 불현듯  눈을 떴을 때, 나는 잠시 동안  정신이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  안은 이미 터질 듯 밝
고 창 밖은 자동차 소리로 시끄러웠다. 윤이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
다. 그 애를 보는 순간  이곳이 한국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내 내가 잠깐 
정신을 잃었던 걸 깨달았다. 아마 나는 기억나지 않는 꿈에서 깼을지 몰랐다. 아
니면 잠을 자는 동안 아주 다른 세상으로 갔다왔을지도.
  “야! 거기 뭐이 있니?”
  나는 지금이 몇 시나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엉뚱한  말을 했다. 윤이가 나를 돌
아보았다.
  “더 주무시기 왜 일어나세요.”
  윤이가 축축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방 몇 시나 됐제?”
  “여섯 시 반이에요.”
  그 애가 웃었다.
  “난 또... 늦잠 잔 건 아니구나.”
  내가 중얼거렸다. 윤이는 다시  창 밖을 내다보고, 나는 그런 모습의 윤이에게
서 안쓰러움과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눈을 뜨고 그  애를 본 순간 이미 내 마음
이 그랬다.
  나는 잠깐 멍한 마음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서울 가면 두루  잘해라. 시집 어른들 자주 찾아뵙구 김  서방한테두 싹싹하
게 하구. 나이들수록 남편밖에 없는 줄 알어라. 그리구 시집간 여자가 친정에 너
무 맘을 쓰는 건 신상에 좋지 않어. 니가  나한테 잘하는 건 시집가서 잘 살아주
는 거라구 내가 골백 번두 더 말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윤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말을 할 때, 
내 마음은 떳떳치 않았다.
  “니가 이리구 있어두 되니?”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서 물었다. 그러자 윤이가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
주치자 그 애가 급하게 다가와 나를 어미닭처럼  감싸 안았다. 갑자기 숨이 쉬어
지지 않았다.
  “엄마, 내 걱정은 마세요.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요.”
  나를 안은 채 윤이가 더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난, 늘 엄마가 걱정이예요.”
  “니가 왜서 날 걱정하니?”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윤이를 밀어냈다. 우리는  언제 얼싸안았나 싶게 떨어져 
서로의 눈길을 피하고 엉거주춤 섰다.
  “엄마는 아직도 불안하시잖아요.”
  “어미라는 건 죽는 날까지 그런 맘이다.”
  “우린 다 괜찮아요.”
  “그럼 고맙다. 말만 들어두.”
  나는 이렇게 비꼬인  말투로 뱉었다. 그리고 다시는 윤이의 얼굴을  보지 않으
려고 고개를 들고  그 애 곁을 지나 방을 나왔다.  나쁜 년. 갑자기 윤이에 대한 
미움이 마구 치솟았다.  그러나 나는 부엌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윤이에게 싸보
낼 물건들을 찾았다. 물론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애에  대한 미움은 그
대로였다.
  “엄마, 뭐해요?”
  이내 윤이가 옆에 와서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그 애를 억지로 쳐다보고 웃었
다.
  “갈빗살 사 논 거 챙겨야지. 지난번에두 사놓구 잊어먹었잖니.”
  나는 냉동칸을 뒤적이며  말했다. 윤이가 냉장고 문을  다았다. 왜 이래? 나는 
그런 눈으로 그  애를 바라보았다. 그 애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었다. 망할 년. 
내 콧날도 속절없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
  “시끄루워! 닌 어디 닳지두 않을 말만 골라서 하더라.”
  나는 코먹은 소리로 말을 하고 몸을 돌렸다.
  “엄마, 난 엄마 없으면 못살아요.”
  윤이가 기어이 크윽크윽 흐느끼며 말했다.
  “니가 나 미워하는 거 다 아는데, 내가 오래 살문 뭐이 좋아!”
  나는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딸자식의 사무치는 정이 느껴지는 게  왠지 무서
웠다.
  “엄마, 이제 엄마 자신도 좀 사랑해 보세요.”
  윤이가 말했다.
  “어머 웃긴다. 왜들 이러세요?”
  이때 숙이가 큰소리로 말하며  다가왔다. 나는 얼른 진물 고인 눈을 문질렀다. 
그리고 천연스레 말했다.
  “야, 뭐 가져갈 거 빠드린 거 없나 잘 생각해 봐라. 꼭 까져 먹는 게 한두 가
지씩 생기더라. 사돈어른들 선물두 다 챙겨넣지?”
  아직 윤이는 넋 나간  듯 서 있고, 거실 한가운데 놓인  윤이의 가방은 보쌈해 
온 여자 같았다. 숙이는 구찌에서 만든 거라며  사무용 가방을 들고 나와 윤이에
게 보였다.
  “언니 가질래? 학교 출근할 때 괜찮겠지?”
  “좋아.”
  그 애들이 말했다. 나는 슬며시 다른 곳으로 피했다.

  우리는 한 시간  남짓 지나서, 공항에 닿았다. 짐을 부치고  자리를 받았다. 시
간이 꽤 남았는데 숙이가 제 언니를 면세구역으로  들어가게 했ㄷ. 보세품 살 게 
없으면 눈요기를 하는 것도 공부라는 것이었다.  윤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아랫입
술을 안으로 잡아물었다. 우리 셋은 서로의 속마음을 보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또 와 언니.”
  숙이가 윤이를 끌어안고 말했다.
  “그래, 늘 건강  조심해라. 그저 니 몸  하나 중히 예기는 기 최고여!  아덜은 
다 즈덜이 커!”
  나도 윤이를 포옹하고 말했다.  그 애의 몸이 들썩거렸다. 그애는 입술을 깨물
고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면서 보세구역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자동문이 닫히면 저긴 아주 먼 딴 세상이었다.
  차를 타고 공항을 떠나는데 깊이  숨어 있던 눈물이 죄를 짓듯 조금씩 조금씩 
밀려 올라왔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아들이 제 처만 감싸고 돈다고 여
겨질 때도 이렇게 가슴이 찢어진 적은 없었다. 아직  단 한 번도 아들 때문에 이
렇게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던 적은 없었다.  딸자식이라는 건, 그래서, 허무한 것
이다.

  윤이가 기어이 이혼을 했다는 사실은 한동안 나만  모르고 있었다. 그 애가 돌
아가고 일 주일이나 지나서였다.
  “엄마, 언니 이혼했어요.”
  숙이가 출근길에 말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느덜은 나를 아주 파리보다 못하게 여기는구나!”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은 딸들이  괘씸해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 언니는 진작  이혼했어야 해요. 엄마 때문에 지금까지  참았어요. 언니
는 결혼이 싫대요. 형부네 집에서 언니를 처음부터 싫어했잖아요.”
  나는 듣기도 싫었다. 상가에 닿도록 분이 풀리지 않아 입을 봉하고 있었다. 그
러는 동안 숙이는  형부가 쓰던 집을 언니에게 주었다느니 아이는  형부가 맡고, 
아이가 언제나 엄마를 볼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화가 났지만  나는 숙이가 하
는 말을 다 새겨들었다. 이혼하면 원수가 되는  줄 알았더니 요새 사람들은 이상
하게도 헤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부한테 들켰대?”
  퇴근길에 숙이에게 물었다.
  “뭘 엄마.”
  숙이가 되물었다.
  “미국 와서 만낸 놈 있잖니.”
  “아니야, 엄마. 언니는 행복하지 않아 이혼했다니까.”
  “세상에. 난 못 알아듣겠다.”
  내가 말했다. 정말  그랬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
르면서 내 마음은 변하기 시작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인데, 어느 순간엔 잃
어버렸던 자식을 다시 찾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땐 후련하기도 했다. 
  얼마 후 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맘 단단히 가져! 니만 좋으면 난 괜찮다!”
  그 애가 `엄마예요?`라고 하자 나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7
    아직도 먼 고향

  스튜어디스가 두 손을 모아 손님 자리는 여기라고 가리킨 데는 복도 안쪽이었
다. 하여튼 고맙다고 인사하는데 스튜어디스는 다시 안  볼 것처럼 이미 옆에 없
고, 복도쪽에 앉은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 남자만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정작 내가  들어가도록 다리를 비켜줄 줄은 몰랐다. 에티켓도  모르는 저런 
사람은 필경 잠깐 다니러 왔다가는 촌노인일 게  뻔했다. 나는 지퍼가 터져라 배
가 부른 손가방을 그 남자의 턱에 닿도록  자리에 던졌다. 그제서야 노인이 다리
를 한쪽으로 모아 틈을 만들었다.
  옹졸하긴. 속 좁은 남잔 다 저렇지.
  나는 노인을 욕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앉으면서도 내심 제 잘난  맛을 누그러
뜨리지 못하고 있는데 문득  치마 속감이 쑥 비어져 나온 게  보였다. 얼굴이 확 
붉어졌다. 얼른 노인의 눈치를 살피고 기어올라간 치마자락을 잡아내렸다.
  “엄마, 옷은 아끼지 말고 입으세요.  시골 가서 기 죽지 말고 실컷 뻐기고 다
녀요. 이옷은 친구들 모임에 입고 가시고요.”
  한국 나간다고  옷을 사주겠다며 숙이가  나를 이태리 옷가게로  데려갔다. 그 
애는 이 옷을 입혀보고 맘에 들어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애나 나나 서로 말
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살아생전  한국에 나가는 일이 앞으로 더 있으리란 생각
을 하지 않았다. 너무 확실한 슬픔은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엄마, 이건 한국 가서 친구들 만날 때 입고  비행기 탈 땐 편한 스판바지 입
어요. 비행기에선 편한 게 최고잖아요.”
  숙이는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를 근이네  집 앞에 내려놓으며 당부했
다. 그러나 나는 숙이의 당부를 듣지 않았다. 공항에 마중 나온 윤이에게 초라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공항으로 나를 데려가느라  아침에 숙이가 집으로 왔다. 그애는 집을  나설 때 
미리 내게 전화를 해서 시간  맞춰 집 앞에 나와 있으라고 했지만 나는 막 샤워
를 끝내고 옷을 차려입은 참이었다.
  “엄마! 아니 지금 어디 저녁 먹으러 가세요? 너무 주책이셔!”
  내가 실크 정장을  입고 2층에서 내려오자 그 애가 소리쳤다.  나는 듣지 못한 
것처럼 엉뚱한 얼굴을 했지만 민망한 마음을 감추려고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하여튼 우리 엄만 못 말려!”
  “어때요, 작은고모. 혹시 비행기에서 근사한 할아버지라도 만나실는지요.”
  숙이의 말에 며느리가  한 수 더 떴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나간다는데 아들놈
은 새벽같이  골프를 치러 나가고  없었다. 언제부턴가 근이가  나로부터 겉돌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애가 어떻게 하든 그 애는 내 맘에  꼭 붙은 목숨 
같은 것이었다.
  이상하게 몸에서 땀이  흘렀다. 본견 실크라는 미색 블라우스 속으로  지금 땀
이 빗줄기처럼 흘러내린다. 아무래도 요 며칠 부쩍  설쳐서 진이 다 빠진 모양이
다. 어젯밤에 배추 여섯 포기에  알타리무 두 단, 열무 석 다발을 따로따로 버무
려놓느라 정신을 홀랑 뺀 게 무리였다. 숙이가  알았다간 나를 잡아먹으려 할 것
이다. 어디 숙이뿐인가. 딸들은  내가 며느리 두고 부엌일은 도맡아 한다고 불만
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물론  며느리도 불만이다. 나 때문에 제 년이 시누이들한
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아들은 내가 만든 김치만 맛
있다는 걸 어째! 며느리 제가 아무리 잘한들 어미인 나만큼  할 수 있어? 하늘이 
두 쪽 나도 어림없지! 내가 한국에서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만큼은 해놓아야 한
두 달은 김치걱정 없이  먹을 게 아닌가. 김치 떨어지면 슈퍼로  가서 삐죽 사다
먹는 것들. 거기에 무얼 넣어 만들었는지 어떻게 알아. 제 마누리를 무슨 보석으
로 알지만 이 어미 죽어 봐. 어디서 따뜻한 밥 품에 묻었다 주는 거 얻어먹겠나. 
다 내가 죽고 나서야 알걸.
  “엄마, 이번에 가선 가고  싶은 데 다 가시고 먹고 싶은 거 다  사먹고 원 없
이 있다 오세요. 오빠네 걱정은 하지도 말고요! 알았지요?”
  숙이가 짐을 부친 다음 짐표가 붙은 비행기 표를 내밀며 말했다.
  “야 줌 봐. 여기 살림은 어뜩하구 내가 맥없이 가 있너?”
  나도 모르게 짜증을 부렸다. 숙이가 무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건 엄마가 잘못  생각하시는 거라니까 그러시네. 올케는  엄마가 없을수록 
좋아해요. 애들도 다 그렇다고요. 자기들끼리 있으면 더 행복하게 살 테니 맘 푹 
놓고 거기 오래 계셔요. 알았지요?”
  숙이가 다짐을 받으려 했다. 제  올케년하고 짰나? 제깐년이 뭘 안다고. 지 오
빠 위하는 게  샘이 나서. 알기나 해?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림이  제대로 될 
줄 알고? 어림도 없다!
  스튜어디스가 음료수를 가져와  무얼 먹겠느냐고 물었다. 오렌지  쥬스를 시켰
다. 옆자리 노인이 나와 같은 걸 시켰다.
  “어디 다녀가십니까?”
  속이 달아 주스를  쉬지 않고 마신 다음 빈  잔을 탁자에 올려놓는데 그 동안 
몇 번이나 눈치를 보던 남자가 급기야 말을 걸었다. 귀찮고 징그러웠다.
  “아니요! 전 미국에서 삽니다.”
  나는 야멸차게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담요를 펴 가슴께부터 내려덮었다. 나도 
모르게 치마 입은 다리가 쩍 벌어져 있곤 해서였다.
  “그럼 이민을 가신 겁니까?”
  다시 그 남자가 물었다.
  “예.”
  나는 짧게 대답하고 등을 의자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저는 아들이 여기서  의사루 있는데 자꾸 오라구 해서 왔다  갑니다. 그런데 
올땐 한 달 예정을 하구 왔지만 도저히  갑갑해서 못 있겠습디다. 그래서 억지루 
스무 날 채우구 갑니다만 아주머니는 미국 생활이 좋으신가 봅니다.”
  남자가 말했다. 나는 그 남자를 업수이여기듯  쳐다보고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
다. 얼빠진 영감탱이. 누가 의사라면  꺼뻑 죽을 줄 알고? 돈 많은 게 최고지 직
업이 대순가? 우리 아들도 장사해서 밥은 먹는다!
  “아주머닌 왜 혼자 나가십니까.”
  한참 속으로 욕을 하는데 남자가 다시 물었다.
  “우리집 양반은 일을 해서 짬이 안 나네유.”
  이런 거짓말을 시큰둥히 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게 옆눈으로 보였다. 과부로 
보여서 내게 이로울  거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는 말하고 나서  담요를 끌어
당겨 얼굴까지 덮었다. 옆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잠을 청하며 발
치에 둔 가방 손잡이에 발을 걸었다. 가방 속엔  금 목걸이만도 열 개가 넘게 들
었다. 친정과 시집의 가까운 피붙이들에게 두루  기념될 것을 하나씩 준비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모른다. 거기다 팬티 안쪽에 커다란 주머니를  달아 달
러도 삼천 불이나 넣어왔다. 마지막으로 원풀이 한 번 해보고 싶어서다.
  서울에서 제일 조은 호텔에 들어가 잠 한 번 자보고 비싼 음식도 먹어보고 양
양 갈 땐 비행기만 타고...  절대로 지하철 버스는 타지 않을 거다. 다 늙어서 지
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면 내 다리나 아프고  말 걸. 나도 나를 호강  한 번 
시켜 봐야지, 이제  쥐꼬리만큼도 남지 않은 목숨. 맘놓고 실컷  자본 적이 없다. 
아직도 다섯 시간 넘게  누워 있으면 허리가 아프다. 생각해 보면  나도 나 자신
이 딱하고 불쌍하다. 무슨 좋은 세상 살아보겠다고 이렇게  맘 한 번 못 놓고 허
둥지둥 사는지. 이렇게 산다고 누가 상을 주나.
  옆자리의 남자가 돌아와 앉으며 인기척을 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남자들이
란... 나같이 다 늙어빠진  것도 여자로 보이는지, 남편이 있다고 하니 기색이 싹 
달라지던 게 우습다. 그래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자니 속이 다 근지럽다.

  남편은 큰형부가 세상을 버린 지  얼마 안 되어 작은형부가 급성 간암으로 사
망하자 갑자기 불안해 하였다.
  “이제 나 혼저 남언데 원제 차례가 올지 모르겠다야.”
  작은형부의 초상을 치르고 돌아온  얼마 후에 남편은 겁먹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금방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나도 그런 불안감을 가졌기 때문이었
다.
  “형부들이 당신하구 같애유?”
  내가 말했다.
  “어디가 달러!”
  남편이 뚝뚝한 소리로 뱉었다.
  “큰형분 미군들이 고문을 하두 해서 골병이  들었었구, 작은형분 농약을 잘못 
알구 마세서 그렇게 됐는데 어따 거기다 비긴대유?”
  “야! 꼴같잖은 소릴 하질 말어! 작은 서당집 딸덜이 보통 센 팔잔 줄 알어?”
  남편이 소리  질렀다. 가슴이 철렁했다. 남편은  잃는다는 것보다 남자와 살지 
못하는 팔자를 확인하게 될까 바 두려웠다. 나마저 과부가 된다면... 어떻게 얼굴
을 들고 살아갈 수 있으리.
  이때부터 나는 누구에게 털어 더놓을 수도 없는 고민을 삭여보려고 이름난 점
쟁이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내 팔자가 사나워 그 액을 때우려면  남편이 다른 
여자를 보도록  내버려둬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외도라면  신물이 날 
만큼 겪어 봤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리고 무슨 이름 단  날이 되면 빠
뜨리지 않고 정한수 떠놓고 흰무리나  붉은 시루떡을 쪄서 북어 놓고 막걸리 따
라올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튜어디스가 점심을 나눠주었다.  나는 닭고기와 쇠고기 중에서  쇠고기로 시
키고 위스키를 한 잔  받았다. 첫번째 식사는 맛있게 먹으니 한  그릇 다 비우고 
독한 술을 마시면 잠이 올지 몰라서였다. 정말  잠이나 푹 들었으면 얼마나 좋을
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낮잠도 못 자는  고약한 성질을 가진 내가 싫었
다. 일에 파묻히지 않으면 불안해서  죽을 것만 같은 나도 싫었다. 정말 이런 내
가 지긋지긋했다. 옆자리의 남자는 나를 흘깃흘깃  곁눈질했지만 나는 모르는 척
했다. 점심이 시작되고 얼마 있으니 화장실 쪽이 분주해졌다. 나는 한 군데 가서 
줄을 섰다가 좁은 변소로 들어가 볼일도 보고 틀니도 빼서 물에 흔들어 다시 끼
웠다. 어쩌다 이가 남달리 약해 일찍 잇병을 앓았다. 남편은 며느리나 사위를 볼 
때면 우선 망치로  이를 두들겨 보겠다고 해서 우리를 웃기기도  하였다. 기분이 
좋을 때는 농담도 잘해서 주위를 한바탕씩 웃기던  사람. 한순간 맘을 바로 쓰지 
못해 나를 마지막까지 골탕 먹이고 간 천하의 바보!
  자리에 와  앉았다. 이번엔 옆자리의 남자가  벌떡 일어나 비켜주었다. 고맙고 
우스웠다. 그러나 우습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만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의자 등받이를 잡고  흔들리는 머리를 가누려고 애를 썼다. 아주 잠
깐이었지만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이러다 쓰러져 영영 못 일어나게  되는 건 아
닌지, 한국에  나가 앓아 눕게 되지는  않을는지. 쓰러지건 앓아눕건 어디까지나 
아들집에서 그래야 했다. 다시 담요를 얼굴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공항에 나올 윤이. 그 애에겐  반지를 준비했다. 내가 죽은 뒤라도 그걸 낄 때
마다 나를 생각하라고. 물론 며느리에겐 더 좋은 걸 주었다. 며느리에게 주는 건 
아무리 비싸더라도 결국은 아들  재산이고 우리집 재산이지만 윤이에게 주는 것
은 남의 집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윤이가 맨 손가락으로 다니는 걸 볼 때마다  마음에 걸렸다. 넉넉지 못한 집에 
시집을 가느라 남 같은  패물 하나 제대로 받지 못했다. 달랑  십팔금 가락지 하
나 끼더니 그것도 어느 날 부턴가 빼버렸다. 잃어버렸느냐고 물었다.
  “결혼 반지 끼고 싶지 않아요 엄마.”
  “그기 뭔 말이너?”
  “결혼했다고 광고하고 싶지 않아요.”
  그 애의 말투는 매정했다.  사위와 사이가 좋지 않은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이었다. 내 맘에도 썩 차지 않았다. 하지만  제가 좋아 한 결혼이었다. 배필을 만
나는 건, 타고난 팔자이다. 맘에 차지 않는다고 이혼을 한다면 이혼하지 않을 부
부가 몇이나 될가. 결혼은 자식을 나으려고 하는  것이고 자식을 나은 다음엔 그 
자식을 사람 만들  때까지 키우는 게 일이다. 그래서 이혼은  쌍것들의 짓이라고 
옛부터 말이 있어온 것이다.

  불현듯 눈을 떴다. 비행기  안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옆자리의 남자는 목을 늘
어뜨리고 잠이 들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영화에 정신이 팔렸다.  시계를 봤
다. 반은 넘게 왔다. 여섯 시간만 더 가면 한국이다!  미국에 있는 동안은 그까짓 
거 한국, 하는 맘이다가도 이렇게 비행기를 타면  마음부터 앞질러 내 나라 땅으
로 달려간다. 언제나 그렇다. 보고 싶은 마음은 해일처럼 밀려오고 뭔가 모를 서
러움도 꾸역꾸역 올라와서 목을 콱 메운다.
  그 해 늦겨울, 남편의 시신을 싣고 돌아올 때  나는 다시는 내 나라로 오는 비
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혀  먹었다. 미국가지 남편을  데려가서 결국은 
잡아먹었다고 속으로 쑤근거릴 사람들, 속으로 원망할  시집 식구들이 눈에 보였
다. 결국 사람 팔자는 속이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이런 나의 드센 팔자가 너무
도 부끄러웠다. 장례만 치르고 나면 이내 미국으로  와서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속으로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 그런데 벌써 몇 번째인가. 어쩌면 이번
이야말로 마지막 일지 모른다. 내 몸이 쇠약해진 걸 내가 느끼겠으니. 내가 살만
큼은 산 것 같으니까.
  그렇다, 살  만큼은 살았다. 그 고생을  하고도. 그러고 보면  고생이라는 것이 
사람의 목숨을 잘라먹지는 않는 모양이다.

  남편은 미국으로 오겠다는 결심을 한 뒤, 서울  윤이네에 와서 내게 전화를 했
다. 물론 그 전에 근이와 윤이에게서 남편의 결심을 들어 알고는 있었다.
  “엄마! 아버지하고 통화해 보세요! 바꿔 드릴게요!”
  윤이는 어린아이같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서울은  밤 10시고 이곳은 새벽 
5시여서 나는 아직 잠결이었다.
  “어이! 난데.”
  남편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도 흥분으로 떠 있었다.
  “언제 오셌어유?”
  나는 여전히 잠결이었다. 아니, 마음은 잠에서 깨길 싫어 했다.
  “내가 인제 당신한테 갈 건데, 괄세하지 않구 잘 해줄 거여?”
  남편은 커다란 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아이  같아서 울컥 
짜증이 솟았다.
  “진짜루 오는 기래유?”
  나는 어슴푸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히 말해 보라구.  오늘 여권 나왔는데, 당신이  날 위해 준다문 가구 안 
그리문 안 갈 테니!”
  그의 들뜬 목소리가 싫었다.
  “미국은 한국하군 영판  달러유. 여기선 여자 남자 다 똑같이  일하구 공평하
게 살어유!”
  나는 이걸 대답이라고 하였다. 남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가는 기 썩 반굽진 않지? 여사님이 솔직히 말해 봐!”
  남편이 빈정거렸다.
  “아니 시방 반굽구 안 바구운 거 따질 때래유?”
  나도 그를 비웃었다. 이때 바꿔달라는 윤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버지가 비자 심사에도  합격했어요. 한 번 가서 됐다고 얼마나 뻐기
시나 몰라요.”
  윤이가 말했다.
  “난 뭐 두 번 갔너?”
  내가 말했다. 윤이는 이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남편의 이민 가방을 채워야 할 
물건에 대해 얘기했다. 물론  이불이 필요했다. 여긴 한국처럼 추운 겨울이 없으
니 두껍지 않은 차렵 이불 정도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전기장판도 필요했다. 양
복은 입을  기회가 거의 없으니  작업복과 내의류를 준비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윤이는 벌써 양복을 두 벌이나 사드렸고 구두도 두 켤레 샀다고 자랑했다.
  “맥이 쑥 빠졌구나!  느덜은 어쩌문 그닷하너? 아부지가 여기 호강하러  오는 
기 아니란 거 몰르너?”
  나는 남편과 윤이가 한꺼번에 지겨워져서 이렇게 싫은 내색을 하고 전화를 끊
었다.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고 그저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는 족속들.
  나는 이날 통화를 한  뒤부터 입맛을 잃었다. 일은 센데 밥을  먹지 못하니 몸
이 눈에 띄게 축이 갔다.
  “아주머니는 영감님 오신다면서 왜 얼굴이 점점 못 쓰게 되세요?”
  공장에선 이렇게 묻는 여자도 있었다.
  “너무 좋아서 잠이 안 오시나 봐요.”
  공장에선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그래도 젊은  사람 못잖게 일을 해서 사장
은 내게 친절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도 훙허물없이 잘 지냈다. 하지만 남편이 
오는 게 두렵다는 말은  차마 어느 누구에게도 할 수가 없었다.  숙이는 내가 몰
라보게 살이 빠지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엄마, 솔직히 아버지 오시는 게 안 좋지요?”
  “느 아부지가 옛날처럼 그리문 어떻게 살재?”
  딸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딸인데도 부끄러워 가슴속이 후끈 달았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그러시겠어요? 이젠 다 늙으셨잖아요. 그리고  이젠 미
안해서도 엄마한테 잘하실 거 같은데요.”
  숙이가 말했다. 듣고 있으니 그럴 듯했다. 그러나 숙이의 위로도 약 기운이 오
래가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잘될 거`라고, 자꾸만 말했다. 그러면서 남편
과 따로 살 아파트를  구하고 이사도 끝냈다. 수십 년 동안  나는 남편을 따라다
녔는데 이번만은 아니었다. 그가 나를 따라 이곳으로 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남편이 비자를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나 오늘 비자 받았어!”
  남편이 땀이 밴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치 소풍가기 전
날, 잠을 못 자는 아이처럼 느껴져서였다.
  “이제 비행기만 타면 오겠네유.”
  내가 말했다.
  “내가 가문 잘해 줄 거너? 어여  말해 봐! 속 썩인다문, 지금 이래두 안 늦었
구!”
  남편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말 잘했네유.  시방 말 나온 김에  약속해유. 당신 나한테 소리 지르구 
신경질 내구 그릴 건지 아닌지!”
  “어랍쇼! 누가 누굴 보구.”
  남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니 두 분이 전화로 사랑싸움하시는 거예요?”
  윤이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윤이가 전화를 가로챘다.
  “엄마, 이제 아버지 가시면  두 분이 신혼생활처럼 잘 살아보세요. 아무도 이
젠 돈 달라구  하지 않을 거니까, 행복하게  사세요. 알았지요? 돈벌어서 아무도 
주지 마시고 두 분이 여행 다니고 맛있는  거 잡숫고 그러세요. 아버지 바꿔드릴
게요.”
  “뭘 바꾼다구 그리너? 전화요금  많이 나오겠다. 할말두 없는데. ...어이 나야. 
뭐 할말 있어? 없으면 끊구!”
  “나두 할말 없어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부산스러워졌다. 
무엇보다 남편의 마음이 거슬렸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 분명했다. 누구한테 
잘해 달라는 건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사람이라면 이제라도 나한
테, 미안하다 앞으로는  잘하겠다, 이래야 했다. 이후  나는 깊은 우울에 빠졌다. 
하루하루 날짜 가는 게 아니라 겁이 났다.
  “엄마, 왜 얼굴이  자꾸 못쓰게 되지요? 아버지 오시면 이쁘게  보여야 할 텐
데.”
  숙이가 걱정했다.
  “그나저나 난 어떻게 살재?  느 아부지가 옛날처럼 그렇게 하문 증말루 못살 
거 같은데.”
  “설마 엄마. 아버지가 엄마한테 미안해서 이젠 잘하실 거예요. 만약에 아버지
가 엄마 때리면 폴리스 부르면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숙이는 경찰을 부르라고 했다. 하기야 이곳에 와서  나를 제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부부싸움을 하면 경찰이 온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면 이웃에서 
고발해도 경찰이  와서 남편을 수갑  채워 데려가는데, 매맞은  아내가 용서해야 
풀려났다. 그것이 내겐  신기했다. 세상에 이런 법도 다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어
떻게 남편을 경찰 손에 넘기랴.
  “그렇지만 안 그럴 거야 엄마.  맘 푹 놓고 밥이나 잘 잡수세요. 엄마 얼굴이 
피난민같이 됐어요. 아버지가 정떨어지겠네.”
  “정 같은 소릴 다 한다 야! 그까짓 정, 붙을 기나 있너?”
  나는 구역질하듯 말했다. 이상했다. 밤에 자리에 누우면 좋았던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무서웠던  생각만 났다. 신혼 시절 얼롱골 미나미  사택에서 잔칫
날 입었던 옷을 종이조각처럼 찢어버리던 것,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후려갈기
던 것, 발로 짓밟던 것, 밥이 늦었다고  장작으로 등짝을 후려치던 것, 밥이 질다
고 밥상을 내던지던 것,  영자에게 미쳐 죽이겠다고 식칼을 갈던 소리... 창원 여
자를 데려와 내가 있는 데서 함께 엎어지던 것.
  그러나 공항으로 그를 마중 나갈  때, 나는 이런 나쁜 기억을 다 잊었다. 그저 
내 남편이 온다는 생각으로 설레었다.
  “엄마, 입술 새로 발라야겠네!”
  숙이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갑자기 쑥스럽고 부끄러워졌다. 얼굴이 후끈 달
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공항으로 나올 때, 나는 숙이 몰래 이옷 저옷으로 갈아입
어 보느라 시간을 없앴다. 세수도 하고 얼굴에  분칠도 하느라 했는데 며칠 밤을 
설친 뒤끝이라  낯색이 검고 까칠했다.  아이들이 루즈로 입술을  칠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빨아먹은 모양이었다.
  “약, 다 늙어서 입술 시뻘겋게 칠하문 남들이 비웃어.”
  나는 숙이가 제 핸드백을 열고 립스틱을 찾는 걸 들여다보며 빈말을 흘렸다.
  “이게 낫겠어요. 이걸 살짝 문질러보세요.”
  숙이가 립스틱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 애가  주는 작은 손거울을 받아 입술
을 칠했다. 그리고 입술을 숙이에게 보였다.
  “어떤?”
  “한결 나아요, 엄마.”
  숙이가 말했다.  나는 어색해지는 마음을  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고 출입구를 바라봤다.
  “난 느 아부지한테 꼭 다짐을 받을란다!”
  숙이에게 말했다. 숙이가 나를 쳐다봤다.
  “나 속 안 썩운단 약속을 하구야 같이 살래!”
  “그래요 엄마.”
  숙이가 말했다. 이런저런  불안 속에서도 어쨌든 내 속엔 저절로  우러난 희망
도 많았다. 여기서야 바람은  피우려야 피울 수도 없고 이제 돈  대줘야 할 자식
도 없으니 늘그막에 복이 터져 두 양주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엄마,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나도 아버지가 엄마 때릴까봐 은근히 걱정이거
든요!”
  숙이가 무슨 생각 끝에 뒤늦은 대답을 했다.  나는 입을 삐죽하게 해서 앞으로 
내밀었다.
  “느 아부진 맘이  아주 약한 사람이여. 여자 치마폭에 싸여서  살구 싶어하는 
남자여. 누가 그걸 내버려둔? 남자가 그늘이 돼야지!”
  내가 말했다. 숙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느덜은 생각 안 나너? 결국 느 아부지가  나한테 돌아온다구. 내가 옛날부터 
느덜한테 안 그랬너?”
  “엄마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내 말에 숙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뻐기듯이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맴을 돌았다. 숙이는 아버지가 너무 늦게  나온다고 투덜거렸
다. 그리고 반  시간이 더 지났을 때, 마침내 남편이  입국장으로 나왔다. 껑충한 
키, 머리숱이 줄어 이마가 훤해 보이는 얼굴, 그래도 송충이 같은 눈썹은 그대로
였다. 그는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두리번거렸다. 순간, 반
가웠다. 그리고 내 몸이 흠칫 뒤로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서 우리가 살아
낸 인생살이의 무게가 한꺼번에 다가오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부지다!”
  내가 낮게 외쳤다.
  “어머! 아버지!”
  숙이가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그래도 남편의 눈길은  벌써 숙이 뒤에 선 나를 
보고 있었다.
  “맨 꼴찌바리루 나왔지유?”
  나는 그의 이민 가방 한 귀퉁이를 만지며 말했다.
  “뭔 사람들이 그렇게 많제?”
  남편은 얼얼한 목소리였다.
  “피곤하시지요? 식사는 하셨어요?”
  숙이가 물었다.
  “야! 난 김치 안 먹구두 살어! 느 어머이하구 난 벌써 옛날에 미국 음식 먹구 
산 사람들이여!”
  남편이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바쁘게 오고가는 숱한  외국인들을 두리번거렸
다.
  “이 양반 좀 봐!  어디다 비길 데가 없어 기래 그까짓 미군부대  식당하구 여
기하구 비교를 하너?”
  나는 남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콱 내쏘았다. 숙이는 주차장에  가서 차
를 빼오겠다며 우리를 기다리게 했다. 남편이  흠칫 켕겨드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남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국의 여러 가지 차들, 
여러 가지로 생긴  사람들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얽히고 설킨 고가  차도며 간판
들을...
  지금 남편은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2년 전의 나는 그런  낯선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태산 같이 눈앞을 가려서. 그런데 남편은 
나와 달랐다.
  “저년 줌  봐. 어느 나라 년인데  저렇게 뚱뚱하너? 엉덩짝이  꼭 도루무깡만 
하잖?”
  남편이 지나가는 멕시코와 흑인 혼혈의 중년여자를  구경하며 말했다. 옆에 서 
있는 아내의 속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남편은 즐거운 모양이었다.
  “아무데구 함부로 욕하지 말어유. 여기선 잘못했다간 총 맞어 죽어유! 여기가 
한국처럼 어수룩한 덴 줄 알어유?”
  나는 점잖지 못한 남편의 말씨가 싫었고 아이처럼 흥분한 것도 싫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예전 같으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가 없었다. 역시  그는 예전 같지 않았다.  풀도 죽고 기도 약해진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그는 들뜬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근이 내외두 공항에 나왔지유?”
  얼얼한 눈으로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 민망해서  한마디 물었다. 그는 듣지 못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삐친 얼굴은 아니었다.
  “뭔 이민 가방을 두 개씩이나 가져왔대유?”
  나는 그의  맘을 풀어보려고 다시 말을  붙였다. 그래도 그는 한일  자로 입을 
짝 붙이고 서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순간 나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이
제 내 자유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으로 살아갈 일
이 큰일이었다. 눈치  보고 비위 맞추고 절절  매고, 오래도록 나를 힘들게 했던 
이런 버릇이 한꺼번에  떠올라 맘이 무거워졌다. 한국에선 남편 없는  것도 흉이 
되고 서러웠지만 이곳에선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
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일하고 싶은 만큼 하면 되었다.
  그 동안 내가 일에 미쳐서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먹어도 살이 뽀얗게 올랐다. 
늘 물에 말아 김치 한 가지만 먹어도 살이  붙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남펀을 위
해 반찬에 신경을  써야하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할일이 있어
도 그가 재봉틀  소릴 시끄러워하면 불 끄고 어두운  방 안에서 오지 않는 잠을 
죽도록 청해야 할 것이다. 내 자유는 사라지고 말았다.
  아니다. 잘해  줘야지. 그래도 세상에 하나뿐인  남편인데. 나 하나  바라고 먼 
미국 땅까지 온 사람. 내가 언제 남편 덕에 호강할 팔자이길 바랐다고.
  나는 이렇게 생각을 바꿔보려고 애를 썼다.
  첫날 저녁을 우리는  한인타운의 중국식당에서 호화판으로 먹었다.  남편은 숙
이와 홍 서방이 요리를 이것저것 시키면 눈을 크게 뜨고 놀라 어쩔 줄을 몰라했
다.
  “야야! 짜장면이나 우동 한 그릇이면 배가 부른데 뭘  그렇게 여러 가질 시키
너? 오늘만 먹구 말란?”
  남편은 흥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사위와  딸을 말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흡족함이 흘렀다. 내가 처음  왔을 때하곤 물론 대접이 달랐다. 둘째사위는 배갈
을 시켜 남편에게도 마시게 하였다. 남편은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마셔서 얼굴
이 붉다못해 검어졌다.
  “여기 자네 장모두 있구  내 딸두 있네만 내가 솔직히 말하네.  난 자네 하나 
믿구 여기 왔네. 내가 아직 힘은 있으니 한 오  년쯤 죽자 하구 일하문 돈 좀 손
에 쥐지 않겐? 무슨 일이든지 할 각오는 돼 있으니 일자리나 알아봐 주게!”
  서툴게 오른 술기운에  겨워진 남편이 굴러가는 목소리로  홍서방에게 말했다. 
나는 속으로 남편을  비웃었다. 여기가 어디 한국 같은 줄  알구? 누가 한가해서 
남의 일자리를 알아본단 말인가. 지나가다 옷깃이 스쳐도 꼭 “소리!”하고 말하
는,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인데.
  “그래야죠!”
  하지만 사위는 큰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나두 옛날에 미군부대에 많이 있어 봐놔서...”
  남편은 거나한 기운에 아무 쓰잘 데 없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얘길 시작
했다. 나는 사위에게  부끄러웠다. 양담배 공짜로 가져다준 깜둥이,  미국에 같이 
가자고 조르던 흰둥이,  윤이를 이뻐해서 본국으로 휴가갔다 오며 윤이  옷을 한
보따리 사다준 장교,  계란을 한 손으로 흰자 노른자 따로따로  가르며 한꺼번에 
백 개를 깼다는, 자랑 같지도 않은 너절한 자랑들이었다.
  “양갈보덜 하군 여북 잘 지내? 그 얘긴 그래두 자랑이 아닌 줄 아네유.”
  내가 비꼬았다. 옆에 앉은 숙이가  나를 툭 쳤다. 식당에서 나올 때 숙이는 내 
곁에 붙어서더니,
  “아버지가 식탁 의자 집어던질까 봐 겁나서 혼났네.”
  하였다.
  “야! 그런 말 말어. 내가 뭐 이 나이 되도록 그런 거 겁낼 거 같으문 살질 않
었다야!”
  바로 한 발짝 뒤에  선 남편을 느끼며 나는 일부러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숙
이가 놀라고 겁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뭐가 대수냐는 눈으로 그 애
를 마주봤다. 그러나 결코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너무도 마땅치 않은 감정이 
내게 무더위처럼 휘감겨 있었다. 화를  내야만 할 것 같고, 아니면 내 기분을 누
군가에게 말하기라도 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아버님도 운전을 배우십시오. 아무래도 여기서 사시자면 운전은 필숩니다.”
  사위가 운전대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  옆자리에 앉은 남편이 운전하는 
사위의 손놀림을 거의 아이 같은 기대와 호기심으로 바라보았다.
  “해야 하문 배워야지! 여기메서두 운전학원에서 배울 기 아이너.”
  남편이 말했다. 멍청이! 여기가 한국인 줄 알고! 나는 속으로 남편을 욕했다.
  “아버지, 우선 일 나가기 전에 운전부터 배워놓으세요!”
  숙이도 거들었다. 저것들, 무책임하긴. 누가 언제 운전을 가르치겠다고. 임시로 
듣기 좋아라 하는  말에 속아서 입이 벌어진 저  사람은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인
가.
  “내가 나이가 이래두 날래 배울 기여!”
  남편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구우. 당신이 원제 운전을 배워? 그런 거두 다 부지런해야 배우는 거지! 
저절루 누워서 밥 멕여주길 바라는 사람이... 내 손에 장을 지질라!”
  내가 이죽거렸다.
  “엄마 왜 아버지를 무시하구 그래요!”
  숙이가 말했다.
  “야 그런 말 말어! 난 평생  느 아부지 무시하구 살어보지 못했어! 그랬단 봐
라. 목숨이 여적지 붙어 있었겠너.”
  내가 말했다. 남편이 민망한지 피식 웃었다.
  이날, 그러니까 남편이 미국으로  온 첫날, 사위가 우리를 아파트 앞에 내려놓
을 때까지 우리는 나의 이런 기분 때문에  어색했다. 그래도 남편은 미국의 밤거
리에 마음을 팔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엄마, 아버지 피곤하게 하지 말아요.”
  숙이가 돌아가기 전에 내 귀에 속삭였다.
  “개코 같은 소리 말어! 느덜이 뭘 알어!”
  나는 흡사 취한  쥐처럼 이렇게 말했다. 이래도 남편은 눈치를  못 챘을까? 그
는 방 한 칸에 작은 거실과 화장실 하나가 달린 아파트에 들어서자 콧노래를 흥
얼거렸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아서  그가 하는 양을 넋을 넣고 
바라보았다. 그는 집안을 한  번 돌아보고 나서 이게 얼마짜리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긴 의자에 앉았다. 엉덩이를 한 번 들썩해서 쿠션을 느끼
더니,
  “난 여기서 자문 되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아마  그를 노려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내가 오래 전부
터 거의 이상한 두려움을 느끼며 기다려온 첫날밤이었다.
  남편이 텔레비전 리모컨을  집어드는 게 보였다. 그는 전원 단추를  읽지 못했
다. 물론 나도 읽지는 못하지만  켤 줄은 알았다. 나는 그가 내게 묻기를 기다렸
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만지작거리다가 리모콘을 방바닥에 놓았다.
  “서울이 시방 몇 시나 됐을라너?”
  남편이 앉은 채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윤이가 궁금해 할 텐데.”
  남편이 다시 말했다.
  “궁금하문 즈덜이 하겠지유.”
  내가 쀼루퉁하니 쏘았다. 남편은 손목시계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화장실에 들어가 이를 닦고 나와 방으로 들어갔다.  곧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나는 그림자처럼 식탁의자에서 일어나 방으로 갔다.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이 삐끔히 열려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남편이 옷을 입은 채 침대에 
엇비슷이 모로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들어가서 바로 누우라고 할까, 이불을 덮어
줄까, 이런 생각을 했지만  나는 방문만 닫고 다시 마루로 나와  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울화인지 슬픔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것이 딱딱한  덩어리로 가슴을 
콱 막았다. 하여튼  이 가슴을 가로막은 이것을 어떻게든 처치해야  하겠는데 방
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이 사람이라면 지금 저렇게 혼자서  옷도 벗지 않고 말없이 누워 잘 수는 
없을 것이었다.  오늘은 이쩌면 첫날밤이었다. 우리는  그 동안 오래도록 헤어져 
살아온 부부였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온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저렇게 
하는 건 옳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 한마디 사과는 해야 할 것이었다.
  미안하다.
  그 동안 당신한테 잘못했다.
  고생 많았다.
  죽을 날이 가까운 우리, 앞으로 잘살아보자.
  어떤 빈말이라도  좋았다. 내 손을  잡고 앞으로 잘살아보자고  한마디만 해도 
가슴의 이 무거운 쇳덩이가 녹아 없어질 것이었다.
  머리가 아파서 타이레놀을  두 알 먹고 남편이  차지하겠다던 긴 의자에 내가 
누웠다. 나는 오래도록 뒤척이다가 아마 새벽녘에 잠이 들었을 것이다.

  잠결에 말소리를 들었다. 처음엔 비오는 소린 줄 알고 잠결에 걱정을 했다. 우
산을 쓰고 나가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는 일은 쉽지 않았다.  흑인이 옆에 앉
기라도 하면 냄새 때문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느나 잘살어!”
  남편의 말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잠이 확 깼다. 그 새를  못참어 전화를 했군. 
나는 속으로 남편을 욕하면서 일어나 오줌부터 누고 나왔다. 아침 여섯 시였다.
  “하아, 걱정 말래두 왜서 니가 대구만 그리너? 알었으니 느 엄마 바꾼다!”
  남편이 말하고 수화기를  든 채 나를 쳐다보았다. 윤이래유?  물으면서 수화기
를 들었다.
  “전화 바꿨다.”
  내가 말했다.
  “엄마, 듣기만  하세요. 아버지는 엄마가 사랑해  주길 바래요 여기서 아버지 
혼자 얼마나 외롭게 살았는지 몰라요. 그러니 엄마!”
  “그런 되잖은 소리 할라거든 전화 끊어!”
  내가 화를 냈다.
  “엄마, 엄마, 그러면  안돼요. 두 분이 행복하게 사는 게  자식을 사랑하는 거
라니까요. 불행한 부모를 두고 자식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어요.”
  “난 무식해서 그런 거 몰러! 다 느 아부지 할 택이여!”
  “엄마, 아버지한테 제발 잘해드리세요.”
  “평생 나만큼만 하라구 그래라. 여기서 뭘 더 하란?”
  “엄마...”
  윤이가 말을 잇지 못했다. 윤이가 괘씸했다. 저도 여자이면서 어머니인 나에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죽어만 살라고 할 수 있단  말이냐. 제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서로 싸울 때  몇 대 맞았다고 사니  안 사니 하던 년이. 나처럼  남편한테 턱이 
빠지게 맞고 시퍼런 칼을 들이대  죽을 문턱에 갔다오고 계집질에 속이 다 타서 
재가 되었으면, 일 년이나 버텨?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나한테 잘해 주라고? 사
랑을 바라? 나는 인간이  아니래? 나쁜 년. 어쩌면 어미를 사람  발가락에 낀 때
만큼도 여기지 않을까.
  “엄마, 또 전화 드릴게요.”
  나는 윤이의 이런 말을 듣고 말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 남편의 독
기 서린 눈길이 내 얼굴을 확 스쳤다. 열이 훅 솟았다.
  그때 윤이가 고대하던 우리의 `늙은 신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밥 한 덩이에 김치나 장을 싸가지고 바느질 공장으로 출근했
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었다. 그것은 하지않아도 되던 집안 일이라는 것이 생겨
난 것이었다. 내가 혼자일  때는 하루나 이틀에 한 번씩 밥을  했고 반찬은 김치
나 지진 된장이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런데  일도 하지 않고 온종일 집에 있는 
남편 때문에 나는  하루에 한 번씩 밥을  하고 반찬도 한두 가지 더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은 무슨 반찬을 해야 하는지 남편의 군것질거리는 무얼 사가야 
하는지 남편이 낮에 심심하면 무얼 하라고 해야 할지, 여하튼 일이 부쩍 늘었다. 
이런 것도 귀찮을  적이 많았다. 더군다나 늘 해버릇하던 일이  아니어서 새삼스
럽고 을씨년스러웠다.
  한 주일이  가고 두 주일이 훌쩍  지났다. 남편에게 기대했던 말을  듣지 못해 
가슴이 미어지던 울화도  어딘가로 슬쩍 피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불면과 불
만을 삭이는 것에 다시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내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남편에겐 나쁜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처음 
며칠은 내가 없는  낮 동안 집 앞으로 나가  멀지 않은 거리를 걸어보기도 했고 
내가 공장에서 집어온 한국 신문을 깡그리 읽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 거기에 
진력을 내기 시작했다.
  “이눔이 거짓불쟁이가 아이너? 일자릴 알어본다구 했으문 가타부타 말이래두 
있어야, 하여튼 사위라는 건.”
  남편은 참댜 못해 홍 서방을 욕했다. 그러나  막상 숙이 내외가 찾아오면 그는 
취직에 대해선 한마디도 내질 못했다.
  “없는 데서 죽일  눔 살릴 눔 하지 말구 있을  때 딱 부러지게 왜서 못 물어
유? 당신두 참 딱하네유.”
  “내가 어떻게 물어! 지가 알어서 말해야지!”
  남편은 내게 벌컥  소리 질렀다. 그러면 나는 언제나처럼 속으로  남편의 나이
값을 못하는 수줍음에 대해 탓했다.
  “당신 홍 서방 너머 믿지 말어유. 그  사람이 같은 계통이라문 오다가다 알아
질진 몰러두 어떻게 영판  따른 데 일을 알어 봐유. 당신이  안죽 몰러서 그리는
데 여기서 살문  다 자기 밥벌이에 바뻐  남 신경 못 써줘유. 내  말대루 신문을 
잘 보문 거기 막노동  하는 사람 구하는 데가 나설 거래유.  그런 델 알어봐야지
유!”
  나는 하다못해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귀를 기울이고 내 말을  들었음이 분명
한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쯤부터 그는 식욕을 잃어 잘 먹지 않았다. 
오래 전에 끊었다는 담배도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처음 한동안 한국 신문의 여
행사 광고를 보고 여행갈 계획을  짜서 나를 속으로 비웃게 하더니 이젠 그나마 
그런 어린아이 같은 신바람도  사라졌다. 필요한 말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커다
란 눈은 움푹 들어갔고 입술은 하얗게 말라갔다.
  “자식새끼덜두 다 소요없어!”
  어느 날 둘이  먹는 밥상머리에서 남편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
다 고개를 돌렸다.
  “구질구질하게 사느니 죽는 게 나!”
  남편은 구겨질 대로 구겨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어유. 우리가 시방 밥을 못 먹어유? 내가 벌잖어유.”
  내가 딱해서 보다 못해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떨구었던 고개를 반쯤 들고 나
를 쳐다보았다.
  “그리구 당신 일자리 사방에 부탁해 놨어유.”
  다시 내가 말했다.
  “니가 뭔 내 일자릴 구해!”
  남편은 반쯤 들었던 고개를 후딱 추켜들며 소리  질렀다. 움푹 들어간 눈을 부
라리고 그랬다. 그는 여전히 나를 멸시하고 있었다.
  그의 기분이  이렇게 곤두박질치는 동안  나는 다시 예전의  내게로 돌아갔다. 
그가 온 무렵에 공장의 일감이 줄었기도 했지만 남편이 잠자는데 재봉틀 굴리는 
소리 내는 걸  피하려고 하지 않았던 홈워크(homework)를 시작했다.  일감을 받
아 집으로 가져와 밤늦도록 일을 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긴 의자에 누워 리모콘
을 돌리다 스르르 잠이 들고  나는 도둑질하듯 희미한 불빛 밑에서 허리 구부리
고 재봉을 했다. 어떤 날은 일을 끝낸 제품을  챙겨서 가방에 넣고 나면 새벽 두
시가 넘을 때도 있었다. 옷 벗을 기운도 아까워  입은 채 침대에 누우면 몸이 물
먹은 솜처럼 가라앉았다.  내 숨소리가 너무 가늘게 들리기 시작하면  불현듯 내
가 내일 아침에 살아서 눈을  뜰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아직 내
가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아직은 더 살아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 근이
가 보란듯이 살게 될 때까지 내가 힘을 써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숨을 크
게 몇 번  쉬다가 죽은 듯 잠을  자고 나면 다시 시간이 빠듯한  아침이 되었다. 
내 밥 먹는 것보다 먼저  늦잠 자는 남편의 아침 점심 준비하고 물에 말은 밥을 
들고 다니며 바지 입고 한 수저,  블라우스 입고 한 수저, 머리 빗고 한 수저 떠
넣어 배를 채우고 버스를 타러 뛰는 걸음으로 나갔다.
  이런 어느 날이었다.  공장의 사장 부인이 내게 남편의 일자리를  얘기해 주었
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전기회사에서 경력있는 기술자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얘
기를 듣자마자 집으로 전화를 했다.
  “당신, 일본사람이 사장이란데 거기서라두 일해 볼래유?”
  “뭔 일!”
  남편은 작대기 같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기공사하는 청부업자래유. 내가 당신이 전공이란 말을 해뒀잖어유.”
  “얼매나 준대!”
  남편은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그건 안 물어봤네유.”
  “월급젠지 일당인지두 안 물어봤단 말이여?”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편도 잠시 침묵했다.
  “하여간 가보지 뭐.”
  그러다가 그는 침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밑도  끝도 없이 전화를 끊었
다. 나는 먹통 수화기를 들고 있다가 슬며시 내려놓았다.
  “어이, 회사가 어디쯤인지 아너?”
  그러나 이날 내가 퇴근하고 집에  갔을 때 남편은 모처럼 기분이 좋아 흥겹기
까지 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당신이 내가 어디메라구 하문 알어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물었다. 그가 씩 웃으며 내 눈길을 피했다.
  “숙이보구 데레다 달라구 해야 돼유.”
  저녁을 먹으며 내가 말했다.
  “야야 관둬! 그것덜 믿구 살라구?”
  남편이 입에 밥을 가득 물고 눈을 치뜨며 말했다.
  “당신은 그럼 가덜을 장장 안 볼 거래유?”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두 할 기 많너?”
  남편은 내가 먹던 김치  그릇의 뚜껑을 덮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놀라서 
그를 뻔히 쳐다봤다.
  “당신이 밤 잠두 제대루 못 자구 그눔으 재봉틀에  매달레 사는 기, 난 뭐 좋
은 줄 아너?”
  그가 말했다.
  “어떤 땐 저눔으 재봉틀을 부새버릴까 벨눔으 생각이 다 들구...”
  그가 고개를 떨구고 이내 축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구 살다가 벨눔으 소릴 다 듣겠네유. 당신이나  그 이마 줌 패구 살었으
문 내가 먹는 기 살루 가겠네유.”
  내가 웃으면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빈  그릇을 들고 일어서자 싱크대로 와
서 내 몸을 밀쳐냈다.
  “이제부터 설거지 빨래는 내가 맡을게! 당신은 집에 와선 푹 쉬라구!”
  남편이 말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콧날이 시큰해졌다.
  “이리지 말어유. 나 같은 기 갑자기 호강에 받치문 날래 죽어유.”
  내가 그의 손에서 그릇을 뺏으며 말했다. 그는 나를 힘차게 밀쳐냈다. 이날 이
후, 그는 가출을 하기 전까지 자신이 스스로 한 약속을 웬만하면 지켰다.
  다음날 인터뷰에 통과된  그는 곧장 일을 하러 다녔다. 첫날은  숙이가 데려다
주었지만 다음부터는 약도를  들고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다. 그는  입에 올려본 
지가 까마득한  옛날인 미군부대 영어에  한껏 의지하는 눈치였다.  일을 다니고 
한 일 주일 동안은 내가 퇴근하길 기다렸다가 그날 있었던 일을 빼놓지 않고 들
려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귀금속 광고지를 얻어다가 들여다보면서 누구에게
는 로렉스 시계,  누구에겐 오메가 시계 하면서  선물 줄 생각에 부풀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잠자리에서  내게 오랜만에 남편 구실도 하였다. 내겐  너무도 생뚱
스런 일이어서 아무도 보지 않건만 부끄럽고 낯뜨거웠다.  하지만 더 힘든 건 그
와 일을 끝내고 나면 내  밑이 고춧가루를 뿌린 것처럼 맵고 화끈거린다는 것이
었다. 하지만 남자  구실을 하고 기뻐하는 그에게 이런 이상한  현상을 말하지는 
못했다.
  첫 월급을 받아온 날, 남편은 이른 아침 서울의 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부터 우리 걱정은  안해두 된다. 엄마 아부진  잘살 거여. 돈을 벌어 그 
동안 내가 느덜한테 잘  못해 준 거 다 해줄란다. 그 동안 못난  아부지 땜에 니
가 애 무던히 쓴거 다 알어!”
  남편은 윤이가 무어라고 그랬는지  코먹은 소리로 말을 하다가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내가 수화기를 뺏었다.
  “윤이너? 나다 엄마. 나 빨래 설거진 안하구 산다! 느 아부지가 다 해주세!”
  무턱대고 이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울렁거렸다.
  “엄마, 너무 고마워요. 이제 정말 살  것 같아요! 끝까지 그렇게 사세요! 엄마 
아버지가 행복하게 사시면 전 소원이 없어요.”
  윤이도 울먹이며 큰소리로 말했다. 남편이 전화를 뺏었다.
  “윤이야! 이제부터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매월 마지막 토요일 밤에 전화한다! 
그러니 느가 거기서 전화하지 말어! 전화는 그렇게 한다? 그래 알었다니까, 그래 
엄마한테 잘해 줄게.  느 엄마 고생한 거 누가 몰르너?  오죽하문 효자보다 악처
가 낫다는 말이 있겐? 아부지가 잘한다니까.”
  남편은 이 말 뒤에도 몇 번 알았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벌겋게 된 얼굴로 수화
기를 내려놓았다. 내 가슴은 언제부턴가 벌렁거렸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일인
지 겁이 났다. 미국  와서 한동안은 버터에 밥을 비벼먹고 빵을  잘 먹던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김치와 고추장에 된장만 찾았다.
  “기껏해봐야 앞으루 5년이여. 우리가  그 동안만 고생하자구. 아덜 다 자리잡
구 사는데 걱정이 뭐 있너.  아둥바둥거레야 얼매 안 남은 인생인데. 우리 둘 몸
뚱이만 성하문 뭘 해먹어두 살기 매렌이니.”
  남편은 가끔 이런 말을  했다. 그는 5년 동안 돈을 벌어 다시  고향으로 가 여
생을 보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내겐 죄 같던, 그래서 하염없이 가슴을  졸이던 행복은 결코 길게 가지 
않았다.
  전기설비회사에 다니기 시작하고 한두 달 지나서부터 가끔, 일본 `쪽바리놈`들
이라고 욕을 하는 소리는 들었다. 하지만 그저  무슨 스트레스라는 거 푸는 것쯤
으로 여기고 지나쳤다. 그런데 급기야 그는 그곳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가 해
고를 당했는지, 언제나 그랬듯이 맘이 맞지 않는다고 `집어치웠는지` 알 수 없었
다.
  우리는 거의 비슷하게  퇴근을 했지만 그가 현장에  나가는 날이 많아 나보다 
늦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흑인 경비가 내게 남편이 왔다고 말해 주었다. 
일이 일찍 끝났으려니 여기고 초인종을 눌렀다.  기척이 없었다. 잠이 들었나, 화
장실에 있어서 듣지 못했나 하고 잠시 기다렸다  다시 초인종을 눌러 보았다. 그
래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좋지 않은 기운이 확 끼쳤다. 열쇠로 문을 여는데 손이 
떨렸다. 하지만 문은 열쇠가  돌아가기 전에 안에서 열렸다. 남편의 얼굴이 보였
다. 재빨리 눈치를 살폈다. 어둡고 우울하고 화가 스민 표정이었다.
  “뭔 일 있어유?”
  묻고 싶은 맘이 굴뚝 같은데 불안해서 침만  꿀꺽 삼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식
탁에 남편의 도시락이  놓였다. 들어보니 묵직했다. 밥이 그대로인  게 분명했다. 
얼굴이 저절로 남편 쪽으로 돌아갔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불길했다.
  “드루워서 거기 그만뒀어!”
  남편이 말했다. 나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 도시락을 풀어 밥은  보온밥솥에 넣
고 빈 것은 설거지통에 넣었다.
  “일거리야 어디 없을라구유.”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 나는 이렇게 한마디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처음엔 아무
렇지 않더니 이런  말을 한 다음부터 화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직장이라는 
데를 화가 난다고 그만 두고 더럽다고 그만두고 맘이 맞지 않는다고 그만둘라치
면 세상 어느 누가  직장을 다닐 것인가. 사람들은 그저 가족  생각하고 자기 자
신 생각해서 참고 이해하고 양보하며 일에 목을  매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평생 
그 버릇 못 고치고 아직도  그렇지 않은가. 어른이 되자면 멀었다. 참을 줄 모르
는 사람이 어디 어른인가.
  이날, 나는  아무리 맘을 좋게 먹으려  해도 오래 묵은 화까지  끓어올라 참을 
수 없었다.
  “당신이 정신 체렸다구유?”
  나는 불쑥 이렇게 뱉고  말았다. 저녁 식탁에서였다. 갈빗국 사발에 수저를 담
그던 남편이 손이  순간 굳는 것 같았다.  나는 극도로 긴장했다. 하지만 무서운 
걸 가리지도 못했다.
  “그거 몇 달  댕겠다구... 당신은 쫓게나진 않대유. 일은  양심껏 하니유. 임자 
몸 생각 안하구 열심히 하지유. 안 봐두 뻔해유. 그거문 다래유? 남덜하과 잘 어
울레서 지내는 기 얼매나 중요해유? 힘들구 맘에  안 맞는 건 누구나 다 같애유. 
사람이란 기  자신두 싫을 때가 있잖어유.  어른하과 아하과 뭐이  달러유? 참구 
가릴 거 가리는 기 아니래유?”
  내가 여기까지 얘기하자 마침내 남편이 수저를  내던졌다. 그리고 밥그릇을 치
켜올렸다.
  “날 그거루 칠래유?  쳐유! 여기가 한국인 줄 알어유? 나  당신한테 맞어죽을
라구 태어나지 않었어유! 매 맞는  거 욕 먹는 거 지긋지긋해유. 그래서 난 다시
는 한국으로 안  가유! 당신이 나 때리문  내가 아니더래두 다른 집에서  폴리스 
불러유. 당신은 수갑 차고 잽혀갔다가 내가 용서해야 나와유. 알어유? 여긴 한국
이 아니래유.  나두 그 동안 당신한테  괄세받을 만큼 받었구유 고생두  할 만큼 
했어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울고 있었다. 눈물이 비오듯 흘렀다. 그 많은 눈물이 
여태 어디 고여  있었나 싶었다. 물론 남편은 들어올렸던 밥그릇을  벌써 내려놓
은 뒤였다. 나는 식탁에  얼굴을 묻었다. 아득한 서러움까지 살아났던가? 목구멍
이 터져라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핏덩이  같았다. 크윽크윽 목이 메었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울었다.  하지만 말은 다 하지  못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는지 
내 속에 깊이  묻혔던 말들이 미처 입으로 가닥  잡아 올라오지 못하는 것 같았
다. 그러나 내 평생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외부의 힘을 믿고 남편에게 할 말
을 다 해본 경험은.
  남편은 다시 방구들 귀신이 되어 집에 갇혀  지내기 시작했다. 말도 하지 않았
다. 나는 낮에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 나가 바람이라도 쏘이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 달  가까이 지냈다. 처음엔 겁나도록 전화를 해대던  서울의 아이들
은 우리가 행복하다고 해서 맘을  아주 놓았는지 그 후로는 어느 누구도 안부전
화 한 번 하지 않았다.
  절기 바뀐다고 큰 표가  나지는 않아도 벌써 가을이 되었다. 봄에  온 그가 어
느 사이 여름을 난 것이었다. 주말에 별일이  없으면 숙이네가 와서 외식을 시켜
주고 근교로 드라이브를  가거나 유니버셜 스튜디오나 디즈니랜드,  말리브 해변 
같은데로 갔다. 그는 처음처럼  환호하지 않았다. 바다에 가면 그는 양양의 조산 
앞바다나 하조대를 얘기하며 이곳 바다를 비웃어버렸다.  물론 영화 좋아하는 그
를 헐리우드 거리로 데려간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그는 그소에서 로버트 테
일러나 존 웨인의 흔적을 느끼며 좋아 어쩔 줄을 몰라했었다.
  하지만 일본인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있기 시작한 가을부터 그는 언제나 기다
리던 주말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홍  서방이 전화를 걸어 외식을 나가자고 
하면 단호히 거절했다. 나가서 먹을 만한 게 없다는 것이었다. 홍 서방은 남편이 
미국에 온 다음 너무도 미국 음식이며 미국 생활에 대해 친숙해 해서 언제나 장
인은 양식이 아니면 중국식당으로 모셔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나는 슈퍼에서 본  도토리 가루를 사다가 묵을 쑤고 잡채를 버무
렸다. 찹쌀을 사다 팥 앙금을  내서 찹쌀떡도 하였다. 남편은 내가 아무 날도 아
닌데 음식을 여러 가지 만들자 반가워했다.   낮부터 숙이네 시국들이 와서 먹고 
마셨다. 남편은  술을 즐길 줄 모르지만  술 마시는 사람을 좋아해서  사위의 술 
상대를 잘 해주었다.
  “아버님 오신 지 벌써 반 년이 다 됐네요.”
  혀가 구르기 시작한 홍  서방이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숙
이가 그런 남편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그까짓 반 년 잠깐이지 뭐.”
  “그래도 처음 오신 분들은 다 그 반  년 고비를 넘기기가 힘들다고 하시잖아. 
당신은 안 그랬어? 집생각 난다고 찔찔 짜고.”
  이때 숙이가 홍 서방에게  한쪽 눈을 질끈 감아 보였다. 홍  서방이 이내 눈치 
채고 입을 다물었다.
  “아버님 다음부턴요, 저랑  바다낚시를 가시지요. 거기 재미붙이면 정말 세월 
가는 거 모르다니까요. 일본인들이 금값 주고 사먹는  도미도 한 번에 열 마리씩 
잡더라고요.”
  “저 사람은 거짓말을 너무 잘해! 어쩌다 그러지 못 잡는 날도 많잖아!”
  숙이가 술 취한 제 남편을 나무랐다.
  “사람은 늙을수락이 제가  난 땅에서 살어야 한다구 난 생각한네.  아무리 돈
이 많으문 뭐  하너. 사람은 다 세 끼  밥 먹구 제 몸 하나 누이고  잠들면 죽은 
거나 같은 목숨인데. 돈은  아무것두 아니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락이 제 고향
에 있어야 해. 난 그렇게 생각하네.”
  거의 말이 없이  듣기만 하던 남편이 사뭇  비장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자넨 한국 국적까지  포기하구 사니 아주 미국  사람이 됐네만 사람이 피는 
못 속이네. 자네두 나만큼 나이 먹어보문 알게 될 걸세.”
  남편은 이렇게 말하고 땅이 꺼지도록 큰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이 좋워. 물론  한국보다 부자여. 그래두 난  내 고향 야양만한 데를 못 
봤네. 설악산만한 데가 어디 있을라구. 시방은 못 가지만 금강산 같은 데가 있는 
줄 아너? 원산 명사십리 해당화를 자넨 봤너?”
  “당신은 시방 어따대구  그런 말을 해유. 홍 서방이 당신  같애유? 이 사람은 
세상에 안 가본 나라 없이 댕게본 사람인데 저 양반은.”
  내가 말했다.
  “아버지, 여유가 생기면  관광을 가보세요. 그럼 마음이 달라질  거예요. 미국
은 엄청난 데가 많아요.”
  숙이가 말했다.
  “그저 여기 엘에이 잠깐 있어놓군 미국이 단 줄 알구.”
  내가 중얼거렸다. 홍 서방이 추천하고 싶은  데라면서 오세 미티니 엘로우스톤
이니 그랜드캐년이니 하는  데를 말했다. 그런 데는 나도 관광버스를  타고 가본 
데라서 어떻게 설악산에 비할 것이냐며 어쩌고저쩌고  끼여 들었다. 하지만 남편
의 우울은 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순간부터  입을 닫고 끝까지 열지 않았
다. 사위가 물으면 그저  입 안의 소리로 우물우물 한마디하고 그만이었다. 이런 
남편 때문에 불편해서인지  홍 서방이 숙이를 보채서  저녁도 먹지 않고 돌아갔
다. 하루종일 먹은  셈이지만 정작 저녁에 먹으려고 끓인 육개장은  솥뚜껑도 열
어보지 못한 꼴이 되었다. 모든게 남편의 옹졸한 속 때문이라 화가 치밀었다. 하
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언제 화통한 남자와 결혼을 했던가,  다 내 팔자다, 
이렇게 생각하고 설거지통이 터지도록  쌓인 그릇을 씻으려고 씽크대 쪽으로 가
는데 등뒤에서 남편이,
  “야 이년아! 니 년이 잘나문 얼매나 잘났너! 개 같은 년!”
  하고 소리 질렀다. 뒷골이  섬뜩했다. 순간 남편이 등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것 
같은 너무도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저절로 돌아갔다. 남편이 주먹을 들
어올리는 게 보였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눈에서 불이 번쩍  튀었다. 나는 비틀
거리며 소파 옆에 쓰러졌다. 그가 발길로 나를 걷어찼다. 나는 경찰을 불러야 된
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소리 지르면 내  비명을 들은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를 
할 것이고 그러면  경찰이 와서 저 남자를 수갑  채워 데려갈 거라는 생각을 했
다. 그러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남편이 제 성질에 못 이겨 입고 있던 셔츠 앞섶을 두 손으로 벌리자 단추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찢긴 옷을  벗어서 다시 찢었다. 남편이 드디어 미쳤다는 생각
이 들었다. 무서웠다.  너무도 안타깝고 서럽고 억울했다.  길지 않은 인생, 이제 
제대로 맘놓고 살아보려 했는데.
  그가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부서져라 닫았다. 새카맣게 타버린 가슴에서 바삭
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내 몸은 아직 소파 옆에 처박혔고, 어딘지도 모
를 데가 몹시 아퍼서 눈 하나 깜짝이기도 힘이 들었다.
  고개를 들었다. 좁은 거실  바닥에 남편의 찢긴 남방셔츠가 널려 있었다. 울컥 
목이 메었다.  나는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일어나 앉아서  흩어진 줄무늬 
남방셔츠를 가랑잎 모으듯 긁었다. 눈물이 비오듯  흘렀다. 이런 바보. 세상에 이
런 바보가 또 있을가. 이렇게 만들어서 누가 좋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이것을 마지막으로 남편의 뿔뚝밸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남편이나 내가 사랑하는데 얼마나 서툰 사람들인지를 깨닫는 데는 더 많은 세월
을 살아야 했다. 물론 그땐 이 세상 어디에도 그 사람은 없었다.
  얼굴에 든 피멍자국은  닷새쯤 지나자 어지간히 가라앉았다. 그 동안  나는 사
흘을 결근했고 그와 나는 서로 눈길을 피하며  침대방 하나인 좁은 데서 살았다. 
서로를 무시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그렇게 지내는 동안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여전히 남보
다 많게  일감을 받아다 밤잠을 설치며  재봉을 했고, 밥은 목에  잘 넘어가도록 
물에 말아서 언제나처럼 서서 먹었다. 일에 파묻히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 좋
고 돈도 벌 수 있으니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었다.
  남편은 하루하루 얼굴이 못쓰게 되었다. 밤에도 깊은  잠을 자기 못하는 게 보
였다. 다 보고 쓰레기통에 버린 신물을 다시 주워다 읽었다.
  이런 어느 날이었다. 그가 나보다 먼저 일어나 외출 채비를 하였다. 무작정 가
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디 가게유?”
  나는 그의 얼굴  앞에 바짝 다가서서 물었다.  남편은 내 얼굴을 슬쩍 피했다. 
그리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애써 감춘 웃음을 보았기 때문
에 나는 숨을 돌렸다. 그가 수저를 꺼냈다.
  “남덜이 보문 밥을 손수 채레 먹었다구 그리겠네.”
  나는 이렇게 큰소리로 말하며 상을 차렸다. 그는  여전히 말없이 밥을 먹고 일
어섰다.
  “대관절 어딜 가는데유?”
  나는 야구 모자를 쓰는 그의 앞을 가로막고 물었다.
  “알거 없어! 죽으러 가는 건 아니니!”
  그가 말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갔다. 더럭 겁이 났다.  숙이네로 전화를 걸
었다. 그 애가 받았다.
  “엄마, 전화 잘 하셨어요. 아버지 계셔요?”
  숙이가 전화를 받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약속헨?”
  내가 급하게 물었다.
  “예?”
  숙이가 되물었다.
  “근데 닌 아부질 왜서 찾너?”
  이렇게 묻는 내 목소리가 저절로 작아졌다.
  “아, 엄마. 우리가  아동복 가게를 하나 더 사려고요. 아버지가  보실 수 있겠
지요?”
  숙이의 이런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부지한테 말했너?”
  금방 기가 살아서  큰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숙이는 남편에게 말한  적이 없었
다.
  “아부지가 시방 혼자서 어디루  나가센데... 그 가겐 거양 꼭 잡어라. 잡을 수 
있거덩. 누가 보무 못 볼라구. 그러찮? 홍서방이 아부지한테 맡기라구 그리더너?

  “캔디아빠두 사실 아버지한테 미안하지요.  자기가 장인영감 들어오시라고 해
놓고 해드린 게 하나 없잔아요.”
  숙이가 말했다. 나는 그 애에게 다시 한  번 가게를 붙잡으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숙이가  한 말에 더욱 매달리게 되었다. 노는  날은 나도 나
가 도와주면 될  것이었다. 정 안 되면  나라도 나가서 팔아주고. 그런데 말없이 
나간 남편이 자꾸만  걸렸다. 죽으러 나가는 건 아니라고 해서  마음은 놓였지만 
그래도 아주  편안해지진 않았다. 나는  서툰 글씨로 남편에게  쪽지를 남겨두고 
출근했다. 그가 돌아오면 식탁 위에 놓인 것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잘 나가따 와써유.
  조은 일이 이써유.
  홍 서방이 당신한테 점빵 하나를 내준대유.
  이제 걱정은 놔유.
  그래도 자식 덕 보자너유.
  찌개 데워 밥 드세유.

  그러나 이날 저녁 이  쪽지를 처음 본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남편은 내가 돌
아왔을 때  집에 없었다. 빈집으로 들어서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앗다. 너무도 
허전해서 몸이 땅속으로  가라앉으려 했다. 나는 이날 공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앞으로 잘살게 될 것 같아 얼마나 개운한  기분으로 일을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파인애플을  사왔던 것이다. 혹시  그가 낮에 
들어왔다 나갔는지 알아보려고  집안을 살폈지만 그런 자취는  없었다. 경비실로 
가서 물어보았다. 드러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만약에, 만약
에 어떤 일이 생긴다면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머리를 흔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좁다고 여겼던 방 안은 너무 넓어서 무서웠다.  한동안 남편이 즐겨 앉던 자리
인 소파에 나도 모르게 앉아  있다가 그래도 먹을 것을 뒤져 반찬을 만들어보려
고 움직였다. 이때 벨소리가 울렸다. 귀가 번쩍 뜨였다.
  “누구래유?”
  하고 달려가는데 방문이 열렸다. 남편이 들어왔다. 내가 문을 걸어놓지 않았다
는 것도 미처 깨닫기 전에 나는 그가 반가웠다.
  “속두 엔간히 엔간히 썩이네.”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는 얼굴에 먼지가  묻어 눈썹이 안 보일 지경이
었다. 내가  눈이 둥그레져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나를 외면하고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 내던졌다. 미국 돈이었다. 그를 쳐다봤다.
  “공밥 먹기 싫어 일당벌이 갔었네!”
  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할말이 없어 그를 뻔히 쳐다봤다. 그는 욕
실 앞에서 옷을 벗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떨어진 돈은 29불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 돈을 들여다 보았다.
  “당신이 하두 괄세해서 집 허는 데 일 갔다왔어!”
  남편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주 딴 사람이 되어 식탁에 앉았을 때 말
했다. 나는 웃었다. 오랜만에 웃어보는 웃음이었다.
  “하여간에 당신은 아덜하과 다른 기 하나 없어유.”
  “아라니, 이젠 말두 함부루 하네.”
  “길을 막구 물어봐유. 오늘  내가 하루종일 어떻게 지냈너, 그래 미리 말하문 
어디가 덧나유?”
  남편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밥 먹구 나서 숙이한테 전화해 봐유.”
  “그것들한테 내가 왜 해!
  그가 골남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내가 가게  얘길 하자 그의 표정은 갑자기 
확 밝아졌다. 숭늉을 마시다 말고 시계를 보았다.
  “시방 왔을라너?”
  그가 중얼거렸다.
  “그거 봐유.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잖어유.”
  나는 이렇게 말하며 일어나  숙이네로 전화를 걸었다. 홍 서방이 받았다. 저녁 
먹었느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 끝에 이내 가게  얘기를 했다. 오늘 계약을 마쳤다
고 하였다. 남편을 바꿔주었다.
  “나야 좋다마다 여부가 있너. 그나저나 경험두 없는  내가 자네 장사 손해 비
킬까 봐 걱정이네”
  남편이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딸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게 된  것은 이렇게 우연찮게 이루어졌
다.
  “난 이제 남의 밑에 가선 일을 못하겠어.  옛날엔 싫은 소릴 들어두 참어넘기
구 그랬는데 이젠  울화부터 치밀구 멸시받는 게 죽기보다 싫으니.  취직은 못할 
거 같애.”
  홍 서방과 숙이하고 오랜 통화를 끝낸 남편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잘게 
썬 파인애플이 담긴 접시를 주었다.
  “하여튼 간에  너무너무 잘됐어유. 숙이가  설마 당신 내보내겠어유?  장사야 
사러온 사람한테 돈  받구 물건 내주문 되겠지유.  또 숙이가 그 옆에 있잖어유. 
당신한테 얼매 준다구 합디까?”
  “얼매는 뭘. 주는데루 받구 말지.”
  “안 그래유.  여기선 우리네덜 같지 않어유.  부모자식두 일전까정 다 셈해서 
줄 건 주구 받을 건 받구 그래유.”
  “난 그런 말 못해. 어떻게 자식한테 얼매 주겠냐구 묻너?”
  남편이 말했다. 나는 그런 그가 못마땅해 눈을 흘겼다. 결국 이 문제는 우리가 
말하기 전에 숙이가 정해서 알려주었다. 그애는  처음엔 8백 불이지만 장사가 잘
되면 올려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출근은 아침마다  숙이가 집으로 와서 아버지
를 데려가기로 하였다.
  숙이가 인수한 아동복 가게의 이름은  `돌스 하우스`였다. 여덟 평이 좀 못 된
다는 크기였다. 개업식은  한국식으로 붉은 팥 시루떡을 해서 돌리는  것으로 대
신했다. 곧 추수감사절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즈음이라 대목을  보려고 모두들 
바빴다.
  남편은 새로운 일에 신명이 나는 모양이었다. 집에 와서도 우노, 도스, 뜨레스, 
꽈뜨로, 씽코, 하면서 멕시코 숫자  1 2 3 4 5를 20까지 세면서 외우려고 노력했
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루  매상을 계산해서 10센트라도 틀리면 그는 잠을 자
지 않고 고민을 했다.
  “당신은 그렇게 걱정할 기 없어유?”
  셈을 하고 또 하며 골머리를 썩이는 남편이 보기 싫어 내가 소리쳤다.
  “뼈 빠지게 일해 주구 의심까지 받기는 싫어!”
  “누가 당신을 의심한대유?”
  “당신이 안죽 숙이를 잘 모르는구만!”
  “우리 아덜 중에 숙이만큼 야문  기 또 있는 줄 알어유? 당신은 윤이를 젤루 
쳐두 숙이한텐 댈 기 아니래유.  숙이 갸는 경우 바르구 할말 다하구 그래유. 할
말 못하구 있다 뒤에  가서 이러니저러니 남 비평하구 그리지 않어유.  그 아 똑 
소리 나는 건 알라메다에서 다 알아줘유.”
  내가 말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혹시 남편이 숙이가  사이가 나빠져서 가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
지, 그렇게 되면 숙이네야 점원을 고용하면 되겠지만  당장 또 놀게 되는 남편이 
큰일이었다. 딸의 가게를 봐주니 고용되었다는 기분은  가지지 않아도 될 터인데 
그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열흘이 가고  스무날이 지났다. 그 동안 일요일이면 나도  나가서 가게
를 보았다. 남편은 그곳 교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어느 집이나 다 남편을 좋아
하는 것 같았다.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가게마다 대목 물건을 들여오
느라 아침이면 주차장이  난리법석이었다. 손수레는 많지 않고  장사꾼들은 서로 
먼저 박스를 나르려고  신경들을 썼다. 그런데 남편은 힘이 장사니  남들이 수레
로 실어나르는 박스를  어깨에 달랑 메서 날랐다. 수레를 쓰느라  순서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캔디 외할아버지는 어쩌면  힘이 그렇게 장사시지요? 우리집 양반은 어림도 
없어요.”
  그곳 한국 사람들이 내게  인사하였다. 나는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어딜 봐도 
생김이나 허우대론 남편을 따라갈 남자가 없었다.
  “숙이 아부지가 시방은 저래두 젊어 한창때는  팔남봉에다 씨름을 안했너, 산
돼지를 안 잡았너,  쌀 한 가마니 버쩍 들어올리구, 그랜  사람이여. 그눔으 힘을 
예펜네 패는 데만 안 썼으문 여북 좋워?”
  나는 입을 가만  놔두지 못하고 남편 자랑에 흉까지 보태서  떠들었다. 그러나 
바로 이것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숙이란 년이 아주 나쁜 년인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말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겼다.  기분 나쁜 일이 있겠지, 그러나 뭐 그리 대
단하랴 싶었던 것이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했다. 그 동안 나는 저녁식탁을 차렸다. 남편은 샤
워를 하고 말끔한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이 조기가 얼맨  줄이나 알우? 이 부자 나라가 서울보다  물건값이 더 싸유. 
우리가 장창 떨구지 않구 먹는 갈비만 해두 서울 같으문 어림이나 있어유? 이만
한 알배기 조기는 한국에서야  고관덜이나 먹는 건데. 이거 들어봐유. 여기서 살
문 당신 좋아하는 반찬은 신경 안 쓰구 먹을  수 있어유. 먹구 사는 기야 서울에
다 댈 기 아니래유.”
  나는 지난 토요일 한국 마켓에서 사다가 심심하게 간을 해서 냉장건조를 시킨 
조기구이를 남편 앞에 놓아주고 말했다. 그러나  남편의 얼굴에선 언짢은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숙이란 년을 한 번 혼찌거을 내던가 해야지, 도대체 안 되겠어!”
  남편이 씹어뱉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그를 쳐다봤다. 시커먼 눈
썹이 여덟 팔자로 내려오고 미간에 내천 자 주름이 패인 것이 심상치 않았다.
  “왜서 그래유? 뭔 일이 있었어유?”
  내가 물었다. 그러나 그는 얼굴만 무섭게 찡그리고 말을 하진 않았다. 그가 말
을 할 때까지 기다렸지만 그는 수저를 놓을 때까지 더 이상 숙이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걱정이 되었다.
  “숙이가 아덜 가운데 속은 젤루 넓게 써유!”
  숭늉 사발을 놓아주며  말했다. 그는 내 얼굴을 흘겨뜬 눈으로  바라보곤 말없
이 숭늉을 마셨다.
  “우리가 다 숙이 덕에 이만큼 사는 거래유.  갸가 아니었으문 우리가 시방 여
길 어떻게 와 살어유. 장사하자문 깍쟁이 같애야 되는 기래유.”
  “그래서!”
  남편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머리끝이 쭈뼛 섰다.
  “우리집에서 쌈하는 줄 알문 어뜩해유.”
  나는 숨죽인 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가 부릅뜬 눈으로 나를 봤다. 무슨 일이 
날 것 같아서 속부터 덜덜 떨렸다. 하지만  나는 맘속으로, 숙이만 혼내 봐라, 하
고 별렀다.
  “숙이가 당신한테  뭘 잘못했는진 몰러두  그 알 미워하문  죄받어유. 우리가 
그 아 덕을 좀 봐유?”
  “뭔 덕을 봐!”
  남편이 소리쳤다.
  “솔직히 말해서 시방 당신을 일하게 해주는 거만 해두 그렇지 않어유?”
  “저게 뭘 안다구. 야! 내가 놀구 돈 받어?”
  “그렇지야 않지만 당신 나이를 생각해 봐유.”
  내가 말하자 남편은  있는 대로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날  밤은 이것으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다음날  공장에 나가서도 불안이 가시지 않아 
숙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공장이에요?”
  숙이의 목소리는 밝았다. 우선 마음이 놓였다.
  “야, 니 아부지하과 뭔 일이 있었너?”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그랬어요?”
  이렇게 되묻는 숙이의 목소리가 금방 가라앉았다.
  “뭐라구나 할 기 있너?”
  나는 천연스레  말했다. 숙이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기미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우울하고 불안한 느낌이  그 애와 나 사이로 흐르는 
걸 아마 우리가 함께  느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 애는 다른  전화를 받아야 한
다고 전화를 끊었다.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마음은 서리 내린 풀숲처럼 
스산했다. 아주 나빴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사는 게 힘들어 차라리 죽기를 바랐
던 때도 많았다. 이제 다  된 인생에 그보다 못한 일이야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자꾸만 나 자신에게 말해 주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일요일엔 나도 가게에 나가 물건을 팔았다. 물
건을 팔지 않아도 좀도둑을 잘 지키면 일당  벌이는 하는 셈이었다. 특히 흑인들
이 도둑질을 잘했다.  12월로 접어들면서는 가게문을 닫는 시간이 한  시간 늦춰
졌다. 숙이네는 우리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돌아갔다. 나는 김치를 해서 숙이네
로 보냈다. 남편은 내가 밤늦게 포기김치를 버무리느라 분주하면 화를 냈다.
  “당신 그런 거까지 해줄 필요가 뭐여. 갸네 식모여?”
  “당신은 말을 왜서  그렇게 해유? 자식 먹이자구  하는 일에 식모가 뭐래유? 
숙이는 당신 자식이 아니래유?”
  화가 나서 한마디했다.
  “당신두 나가 일하다 와봐유. 손두 까딱 하기 싫을 기 아니래유. 장사가 온갖 
사람 상대하는 일인데 여북 힘들어유? 부모라는 건 `거미`와 한가지래유. 자식한
테 다 파먹히구 가문 그기 행복이지유.”
  내가 말했다. 남편이  비웃듯이 혀를 찼다. 그러나  이날 밤 남편은 이런 말을 
했다.
  “나중에 늙어 허리 꼬부라진 담에 자식덜한테 버림받구 나 앉을지 어떻게 알
어?”
  “우리 아덜 중엔 부모 몰라라 할 아는  없어유. 당신 닮어 인정은 좀 많어유? 
다 당신 자신부터 생각하문 돼유.”
  내가 말하자 남편이 한숨을 내쉬었다.
  “못 견디게 되문 팍 개골창에라두 대가리 박구  죽으문 끝나는 거여. 까짓 거 
간단해!”
  남편이 흡사 주정하듯 말했다. 나는 그 어리석은 말을 듣지도 않았다. 다 자기
가 한 일이 있으니 자식들에게 떳떳치 못하고,  그러니 자격지심에 저런 마을 쉽
게 뱉는다고 생각해 버렸다.
  이틀인가 사흘이 지났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잠깐 쉬고 있는데  매니저가 전
화 왔다고 나를 불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장으로 전화가 오는 일은 거
의 없기 때문이었다.
  “어마, 아버진 사람이 어쩌면 그래요?”
  숙이가 울음이  턱에 닿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어라고 말을  해야겠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벌써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벌렁거렸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니까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요. 엄
마 불쌍해서 지금까지  참았어요. 내가 한두 살이에요? 왜 엄마  불안해 하는 거 
눈치 못 챘겠어요? 그런데 엄마, 난 더 못 참겠어요.”
  드디어 숙이가 울었다. 잘  울지 않는 아이였다. 맹장이 터져 복막염이 되도록 
참아서 하마터면 죽을 뻔하도록  참기 잘하는 아이였다. 가슴이 떨렸다. 나는 숨
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뭔 일이 있었너? 말을 해야 내가 알잖?”
  내가 말했다. 숙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애가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삼키는 
게 전해 왔다. 가엾고 안쓰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언니에 치여 새 옷 한 번 얻어
입지 못하고 누가 관심도 가져주지 않았다. 윤이나  근이처럼 학교 성적도 잘 챙
겨주지 않았다.  그래도 제 타고난 복이  많아 결국은 마지막에 그  애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미안한 게 많은 자식이었다. 같은 부모라도 태어난 시
기가 달라 따뜻하게도  춥게도 자라는 것이었다. 이 자식 낳고  딸이라고 얼마나 
서럽게 울었고 어머니는 얼마나 무참해 했던가.
  “엄마, 요새도 일이 많아요?”
  “바쁜 건 다 지났잖. 대목 물건 다 빠져서 요샌 시덕시덕 놀민 일한다.”
  “아버지는 내가 엄마한테 가서 밥 먹는 것도 싫어하시는 거 같애요.”
  “그런 소리  하지두 말어! 아부지가 왜서  그런 생각하겐? 당치두 않으니  늘 
와 먹어. 숟가락 더 올레놓는데 뭐이 힘들어서! 아부지가 속으룬 닐 좋아하는 기 
그 뿔뚝벨이 안죽  안 죽어서 그렇잖? 늙으문 아 된단  말 속에 두구 니가 삭헤
라. 그래두 아부지 아니너?”
  내가 말했다.
  “엄마한테 말했더니 속이  좀 풀려서 시원하네요. 아버지한텐  절대 비밀이에
요.”
  “누가 이런 말 할까 봐 그리너? 니가 맥이 쑥 빠졌지 않언?”
  숙이와 나는  이런 말로 얘기를 끝냈다.  나도 처음 전화를 받을  때보다 한결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이날 퇴근해서 집에 가자마자 보스턴에 사는  막내의 전
화를 받고 나는 다시 놀라야 했다.
  “아버지가 언니를 사람들 보는 데서 때린 거 엄마 아세요?”
  “몰러. 닌 어디서 들었너?”
  “작은언니한테 전화했더니 언니가  울면서 말하더라고요. 처음엔 말을  안 하
려고 해서 내가 꼬치꼬치 캐물었어요. 아버지 어떡하면  좋아요? 도대체 있을 수 
있능 일이예요? 언니는 결혼해서 따로 나가  사는 사람이라고요, 또 장사는 아버
지가 언니 말을 들어야 하지 않아요? 아버진  장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거기다 일도 안하고 되지도 않는 영어로 점원들 데리고 농담하고 지나가는 멕시
칸 처녀들 엉덩이 크고  젖 큰거 눈 빠지게 구경하고, 뭐  가관도 아닌 모양이예
요. 아버지가 사장이고 언니는 점원이나 되는 것처럼 그러신대요.”
  “뭐 그러기야 할라구.”
  나는 이렇게 말은  했지만 막내의 말이 다 맞는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그러고
도 남을 시람이었다.
  “엄마, 아버지가 제정신이라면  그럴 수는 없어요. 아버지가 언제 작은언니를 
사랑해 본 적이 있어요? 우리는 그거 다  알아요. 아버지는 작은언니를 때리지도 
않았어요.”
  “숙이가 맞을 짓을 한 기 있너? 그저 순딩이 같은 기.”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요. 아무도  작은언니한테 관심이 없었던 거
지요.”
  “그런 말은 하지 말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구 자식은 다 
같애. 엄마 한 배서 나온 기 어디가 다르너? 앞으루두 절대루 그런 말은 말어!”
  “엄마는 남편이니까 그러시겠지만  전 아버지 용서 못해요!  아버지가 우리들
한테 어떻게 했나 생각해 보세요. 엄마 때리고  우리 혼내고 우린 아버지를 기다
려본 적이 없어요. 아ㅓ지 오실  때가 되면 우린 다 벌벌 떨었어요. 아버지가 혹
시 기분이 나쁘면 어떡하나 하고요. 그런데 지금도  그런다고요? 그렇게 하면 전 
크리스마스에 안 가요. 아버지 얼굴 못 봐요. 바람은 얼마나 피웠어요? 생각하면 
창피해요! 아버리로서 자식에게 보여준 게 도대체 뭐가 있어요?”
  나는 듣기만 했으나 기분이 언짢았다. 내가  남편을 미워하고 못마땅하게 여기
는 것과 자식이 그렇게 하는 것은 달랐다.
  “다 말했너? 더 할 기 남었너?”
  막내가 숨을 고르는 동안 내가 말했다. 그 애는 씩씩거리기만 했다.
  “엄마가 가만히 있는데 느덜이 왜서 나서너? 니가  와서 봐라. 아부지라구 장
창 젊겠너? 마이 늙었어. 성질이 옛날 같지  않어. 남덜이 뭐래도 느덜 아부지여. 
아예 아부지 욕할 생각 말어!”
  막내는 내 말에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성이 다 풀리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부지가 느덜을  때렸어두 삼백예순닷새를  때리지 않었구, 바람을  피워두 
평생 그런 건  아이여. 아부지두 좋은 점이 좀 많너?  남덜한테 아부지만큼 잘하
는 사람, 난 여적지  못 봤다. 아부지한테 싫은 내색 아예 하질  말어. 자식은 부
모한테 그리문 안 돼!”
  막내는 숨만 거칠게 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시 비행기루  올란? 언니가 공항에 나간다구  그리지? 이번에 와서 니가 
먹구 싶다던 배를 잔뜩 사가라.”
  “비싸잖아요.”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막내가 배 얘기엔 말문을 텄다.
  “엄마가 돈 벌잖. 내가 니 먹을 만큼  사주마. 걱정 말어. 언니가 비행기 시간 
알구 있너?”
  “예.”
  막내는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요번 크리스마스엔 다 모이겠구나. 그럼 끊는다. 잘 잇거라.”
  인사는 내가 먼저  했지만 수화기는 그 애가 먼저 놓았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는 한동안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정신없이  서 있었다. 뭔가 꼬집어낼 수 
없으나 불길하고 불안한 느낌이 다가드는 것이었다.  어둡고 질척한 늪으로 홀린 
듯이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무섭다는 걸 알면서 한사코 발이 그곳으로 내딛어지
는 경우 같은... 그런 것이었다.
  남편은 밥이 뜸들  때쯤 돌아왔다. 나는 문을 열어주면서 그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
  “혼저 와유?”
  “혼저 오잖구, 그럼 여래이 오너?”
  남편이 투정하는 말소리로  뱉었다. 나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웃었지만 마음은 
우울했다. 남편의 목소리에 풀기가  죽어 있어서였다. 그러나 골이 난 것 같지는 
않아 마음이 놓였다.
  “손님은 많어유?”
  “많으문!”
  “어이구 당신두. 좀 고운 말루 하문 조상이 덧난데유?”
  내가 웃었다.
  “손님이 많어야 나한텐 월급 떨어지는 거뿐이네!”
  남편이 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래기다 다덜 사장  할라구 기리지유! 당신두 돈벌어  사장해유. 돈이 돈을 
버는 시상인 거 몰러유?”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그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남편은  저녁을 먹으면서도 
여러 번 고단하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에게 셋째  넷째가 다 올 거라고, 이번 
크리스마스는 사는 거 같겠다고 말했다. 남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숙이는 얼루 갔너? 외식하려 갔겠지유?”
  “내가 어떻게 알어!”
  남편이 말했다. 숙이가  집 앞까지 태워주었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남편이 미
워 한참 바라봤다. 그는 수저를 놓고 일어서며 `어디 관광이나 갔으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저 양반은 아직도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나는 속으로 남편을 흉
보았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다음 가장 마음에  걸리던 것은 그렇게도 원하던 관
광을 가지 못한 것이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불고기를 재어놓았다.  참기름내를 맡았는지 남편이  내게로 
와서 등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그걸 시방 뭐 땜에 하구 그래? 고단한 사람이!”
  남편이 말했다.
  “낼 가게  나가서 먹어야지유. 상추두 씻어놨어유.  이런 거래두 하나씩 입에 
놓구 우물거래 봐유. 속이 든든하구 말구지유. 나두 낼은 나갈 거래유.”
  낼이 뭔 날인데.  남편이 이런 어굴을 하다가 이내 일요일이라는  걸 알았는지 
텔레비전 앞으로 가 앉았다.
  다음날은 여느때보다 출근이  30분이나 일렀다. 숙이는 캔디까지  데려와 밥을 
먹었다.
  “홍 서방은 왜서 안 왔너?”
  남편이 숙이에게 말을 붙였다.
  “그 사람은 아침에 밥 안 먹어요.”
  “살 뺀다구 그리지?”
  숙이 대답에 내가 거들었다.
  “여자가 살뜰하게 챙개줘 봐라. 남자가 왜서 안 먹너. 남자를 집 안으루 끌어
들이는 거두 여자 할 탓이구 내모는 거두 다 여자 할 탓이여!”
  남편이 말했다. 숙이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게  밥이 가득 든 입으로 우물거
리다 말았다. 나는 남편이  말이 못마땅했지만 트집을 잡지 않았다. 숙이는 그냥 
두라는 데도 한사코 밥 먹은 그릇을 서둘러  씻었다. 그리고 모두들 가게로 나갔
다. 캔디에겐 도둑 지키는 일을 맡겼다. 나는 아동복 가게와 남성복 가게를 왔다
갔다 했다.
  “엄마, 이번 달에 전화 요금 얼마나 나왔어요?”
  내가 그 애의 가게로 갔을 때 숙이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
어 그 애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버지 지금 뭘 하세요?”
  “물건 팔잖너?”
  “엄마, 이거 저 안에 들어가서 읽어보세요. 빨리 읽어보고 저 줘요.”
  숙이가 급하게 말하고 내게  여러 번 접은 편지를 주었다. 내가  그 애를 쳐다
보았다. 숙이는 벌써 손님과 얘기중이었다. 편지를  잡은 손이 떨렸다. 숙이가 시
키는 대로  탈의실 안에 들어가 편지를  펼쳤다. 그건 남편에게 온  어떤 여자의 
것이었다.
  사랑하는 당신으로 시작되고, `여보`로  지칭한 편지는 보고 싶다는 애절한 글
귀와 중학생인 딸아이의 등록금을 걱정하는 내용과 통화를 하고 나서 기뻤던 감
정, 헤어질 때 당신이 한 약속이 다  거짓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당신의 전화를 받
고 모든 걸 믿게 되었으며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편지를 다 읽고 났을  때 내 몸은 허물어져서 바닥으로 주저  앉았다. 그 가벼
운 한 장짜리 편지지도 무거워서 손에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눈앞은 어두운지 
아니면 너무 하얀지 하여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 다 봤어요?”
  숙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부끄러움이 나를 휩쌌다. 우선 아무도 보고 싶
지 않았다. 그런데 탈의실의 커튼이 열렸다. 나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아니! 엄마 왜 그렇게 앉아 있어요?”
  숙이가 기겁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애를 쳐다봤다. 그 애의 화장한 얼
굴이 하얗게 바래 보였다. 내가 어째서? 나는 이렇게 말하려고 애를 썼다.
  “엄마. 왜! 엄마! 충격받았잖아! 어떡해!”
  숙이가 소리쳤다. 내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왜서 이렇게 춥너? 몸살이 올라너?”
  나는 그 애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엄마! 화나서 그렇죠?”
  숙이가 말했다.
  “이까짓 거 같구?”
  나는 비웃었다. 그리고 일어나려고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다리에 힘이 주
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아이구구우, 하고  신음을 뱉었다. 숙이가 겁먹은 얼
굴로 나를 부축했다.
  “어여 나가봐라. 손님 놓치잖너?”
  내가 말했다. 숙이가 떨어져 있던 편지를 주워들었다.
  “아버지가 엄마를 이용하는  거라고요. 이 여자가 몇 살인데 중학생  딸이 있
어요?”
  숙이가 편지를 접으며 말했다.
  “그거 어디서 난?”
  내가 물었다. 숙이는 남편이 벗어놓은 점퍼를  걸다가 주머니에서 들어있는 걸 
꺼냈다고 했다. 나는 제자리에 놓아두라고 말했다. 그러나 숙이는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나보다 더 분개했다.
  “아직도 어머니를 불행하게 하면 우리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숙이가 말했다.
  “느덜은 희한하다. 난 가만있는데 느덜이 왜서 그  난리너? 아부지가 시방 여
기 와 있는데 당장 뭐 글루 간다더너?”
  내가 말했다. 그러나 숙이는 아버지에 대한  배반감으로 내가 일일이 기억하기
도 싫은 험담을 하고 다시 물건을 사러온 사람들 사이로 돌아갔다.
  이때 숙이가 그 편지를  보지 못했다면 남편의 운명이 달라졌을까? 숙이가 제 
아버지와 감정이 아주 나빠졌을 때만 아니었더라도 괜찮았을까?
  그 여자는 윤이와 거의 비슷한 나이라고 했다.  행실이 추잡스런 여자일 게 뻔
했다. 색에 받쳐서 아무 남자에게라도 들엎어지는  여자들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도 그 순진한  것이 어린아이 찜쩌먹을  홀아비를 사귀어 
송어리 산골로 드나들며 송이,  토종꿀, 콩, 판에 호두, 감, 밤, 오소리며 꿩  같은 
것을 깡그리  가져갔을 여자라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편이 궁금해 
송어리로 전화를 하면  구장집 여자가 그렇게 내게 낱낱이 고자질을  했었다. 너
무 젊은 여자라서 아주 불길했었는데. 맑은 정신을  다 빼앗길 거 같아 불안하더
니.
  춤바람이 난  남편이 카바레에서 그  여자를 사귀었다고 들었다.  시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나도 미국에 들어온 다음의 일년 동안에 있었던 일이었다.
  윤이는 이맘때의 제 아버지가 얼마나 외롭게 지낸  줄 아느냐고, 그럴 때의 남
편을 떠올리고 하염없이 운 적이 있었다. 사람에게  외로움이 얼마나 나쁜 줄 아
느냐고, 그런 윤이도  그 여자의 편지 사건에  대해선 참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숙이에게 절대 비밀로  하라고 당부했건만 그 애는  단 하루도 묻어두지 못하고 
제 형제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버린 것이었다.
  다음날 새벽이었다. 전화벨이 울려 잠에서 깼다. 남편은 침대를 싫어해서 바닥
에다 매트를 깔고 잤고 나는 침대에서 잤다.  전화벨 소리를 듣고 부지런히 나가 
수화기를 들었다.
  “몇 신데 전화여?”
  남편이 잠결인 목소리로 고개를 빠끔히 들고 말했다.
  “누구너?”
  나는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엄마, 듣기만 하세요.  숙이한테 전화 받았어요. 아버지가 그  여자하고 편지
를 주고받는다면서요?”
  윤이가 피도 눈물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고 받긴  뭘 주고받는
다고 그러느냐고 말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윤이의  목소리가 행여 
남편에게 들릴까  봐 돌아 앉았다. 그는  자기 주머니에서 편지가 없어진  걸 알 
텐데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을 것이었다.
  “엄마, 실망하지 마세요. 제가  아버지한테 말할 게요. 엄마 한테 잘하라고요.

  윤이는 여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다 잘 있으니 느덜은 하나두 걱정하지 말어. 근이네는 더러 만나너?”
  나는 이렇게 말하며 딴청을 부려 보았다.
  “근이네는 아주 잘  있어요. 울케야 걱정거리가 없잖아요. 외며느리라고 시부
모를 모시나, 둘은 깨가 쏟아져요. 근이가 제 아내한테 폭 싸여 사니까요.”
  윤이는 무슨 심통이 났는지 제 하나뿐인 남동생 내외를 이렇게 헐뜯었다.
  “느덜 걱정은 안  해! 어련히 잘산겐? 시방  몇 신데 안죽 안자구 전화를  하
너?”
  “윤이너? 나 줌 바꿔!”
  내가 윤이와 통화를 끝내려는 데 남편이 일어나며 말했다.
  “메칠 전에 통화했잖어유? 전화 요금 많이 나올 텐데.”
  그래도 남편은 내가 든 수화기를 뺏었다.
  “윤이너? 잘 있너? 김 서방 회사 잘 댕기구. 아덜두 공부 잘 하지?”
  그러나 남편의 반가운 음성은 여기서 끝났다. 그는 얼마 동안 듣기만 하더니,
  “그런 거 상관할 기 없어! 느가 뭘 안다구!”
  그러더니 숨 한 번  크게 쉬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편이 재처럼 무너져내리는  게 느껴졌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너무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두려움에 어두워졌다. 뭔가 남편은 막다른  골목에 있는 
것 같은 답답함, 그런 느낌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가 자포자기하는 느낌이
었을지도 모른다.
  “윤이가 뭐래유? 다덜 잘 있다지유?  큰 기 즈네 핵교에서 전체 수석을 했다
구 기리더니 작은  건 어쨌너 안 물어봤네유.  물어본단 기, 정신은 까마구 고길 
먹었너.”
  내가 말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국에 와서도 윤이를 잊지 못해 
틈만 나면 그 애  얘기를 하던 남편이었다. 그 애가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
는지, 이 옷도 저 구두도 다 윤이가 해준 것이라고 자랑하면서. 그토록 고급이라
고 아끼며 자랑하고 꺼내보던 양복은  결국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
났다.
  윤이가 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물론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남편과 
윤이가 얼마나 서로를 아끼고  이해하는 사이였던가는 우리 가족은 물론 친척들
도 다 안다. 그런 윤이가 아버지와 이렇게 작별하게  된 것이 그 애의 남은 인생
에 어떤 슬픔의 병이 되었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한동안 삭은 그루터기 같이 
앉아 있던  남편이 그림자처럼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수돗물  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나는 초조하게 그를 기다렸다. 똥을  누어도 이렇게 
오래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할 때쯤 그가  나왔다. 그를 쳐다봤다. 세수를 한 
얼굴 같은데 눈이 벌겋게 부어올라 보였고 움직이는 모습은 흡사 검불이었다.
  그가 소파에 길게 누웠다.  윤이가 사주었다는 카라반 담요를 덮어썼다. 그 애
는 마치 혼수를 해서 보내듯 아버지의 양복에 이부자리에 속옷까지를 이민 가방
으로 보냈던 것이다.
  조마조마한 날들이 지나갔다.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일
주일 앞두고 이틀 간적으로 셋째딸과 넷째딸이 왔다.  그 애들은 오는 길로 알라
메다의 숙이네 가게에 가서  물건 파는 일을 도왔다. 나는 그  애들에게 편지 얘
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두었다.
  12월23일 이었다.  이날 공장 일은 끝이  났다. 휴가가 시작된  것이었다. 나도 
내일은 가게에 나갈  것이었다. 급료 받은 것을 들고 코리아타운의  한국 마켓에 
들렀다. 아이들도 왔으니 반찬을  푸짐하게 해서 먹이고 싶었다. 비싼 거라면 조
기와 갈비, 안창살이었다.
  집에 와서 반찬을 만드는데 전화가 왔다. 숙이였다.
  “벨일 없지? 장사 잘된?”
  내가 물었다.
  “많이 팔았는데 엄마, 오늘 저녁에 홍 서방이 근사하게 사겠대!”
  숙이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떠 있었다.
  “외식은 뭐하러 하너? 내가 반찬거리 마이 사왔으니 어여 집에서 먹자.”
  “아니에요 엄마. 이쁘게 차리고 계셔요. 끝나고 들릴 테니까요.”
  숙이가 이렇게 말하고 무턱대고 전화를 끊었다.
  그 애의 가게는 이맘때 정말 잘되었다. 우리는  집에 돌아와 그날 수입을 계산
하기도 힘이 들어  돈을 그냥 방바닥에 쏟아놓고 담요를 덮어두었다.  그러니 저
녁이 아니라 세 끼를  산다해도 미안할 건 없었다. 나는 세수남  하려다 내친 김
에 샤워까지 하고  화장을 했다. 남편은 옛날만큼 성질이 급하진  않지만 그래도 
자기를 기다리게  하는 건 아직 못  참았다. 많지 않은 옷에서  그래도 이것저것 
대보고 꿰어보고 하다가 언젠가 한국  나갔을 때 윤이가 사준 정장을 꺼내 입었
다. 이곳  식당에 가면 나처럼 나이  든 여자가 화장을 잘하고  알뜰히 차려입고 
나와앉아 식사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고 좋아  보였다. 그래서 나도 가능하면 
그렇게 하였다.
  구두를 꺼내 검정색  흰색으로 신어보고 굽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신어보고 
있는데 막내가 분명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 애가 맞았다.
  “빨리 나와요!”
  그 애가 무턱대고  급하게 말했다. 좋게 들리지도 않고 즐거운  얼굴도 아니었
다.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무어라고 묻고 싶은 말이 있어 그 애를 쳐다
보았다. 그런데 남편이  들어왔다. 막내가 아버지를 송충이 피하듯  물러섰다. 아
주 싸늘한 분위기였다. 나는  말도 못하고 남편과 딸을 번갈아보았다. 남편은 방
에 들어가 윗저고리를 벗더니 의자에 파묻히듯 앉아 버렸다.
  “아니 여보, 야덜이 지냑 먹으러 가자잖어유.”
  내가 어리더리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만 갔다와. 난 안 가!”
  남편이 앓는 사람같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나가 먹는다구 그래서 지냑두 안 했는데.”
  “누가 뭐란? 당신은 나가 먹으라구.”
  남편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때 사위가 들어왔다.
  “아버님 나가세요! 가셔서 저랑  술 한 잔 하세요~ 기분두 그렇지  않구 하신
데.”
  사위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말투로 말했다.
  “난 안 간대두!”
  남편은 사위에게 등을  보인 채 말했다. 사위를 나를 곤혹스런  표정으로 바라
봤다. 나는 재빨리 사위의 팔을 잡아당기며 한  번 더 졸라보라는 시늉을 해보았
다.
  “다들 기다려요. 아버님 안 가시면 전 무슨 재미겠습니까.”
  사위가 남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남편이 그 팔을 다른 손으로 떼어냈다.
  “난 한 번 안 간다구 하문 하늘이 두 쪽 나두 안 가!”
  남편은 이렇게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떡하지요?”
  사위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사위에게 미안했다. 어른이 되어서 저다지도 속을 
제대로 쓰지 못할까.  기분이 나쁘더라도 자식들 두루 생각해서 양보할  수 있을 
걸. 나는 사위에게 나가자고 눈짓을 했다.
  “자네 이제 날 이해하겠너? 저런 영감하구 사느니 내가 얼매나 속이 썩었겐?

  사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위의 차는 아파트 정문 앞  도로에 시동을 건 채 주차되었고 내가 다가가자 
차에 있던 아이들이 차창으로 내다보았다.
  “아버진 안 오신데요?”
  앞자리에 앉은 숙이가 물었다.
  “안 오거나 말거나 우리끼리 먹으문 됐지!”
  내가 말했다. 이때까지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고, 단순히 남편이 
잘 삐치니 그렇거니 여겼다.
  “그래 작은언니, 신경 쓰지 말자!”
  한 애가 말했다.
  “할 수 없네 뭐.”
  다른 애도 말했다.
  “그래도 아버지 기분을 풀어드리는 게 나은데.”
  먼저 애가 말했다. 숙이가 한숨을 쉬었다.  사위는 운전만 했다. 처제들과 농담
하기 좋아하는 홍 서방이 입을 다물고 있는게 이상했다.
  “느덜... 뭔 일 있었너?”
  나는 아이들을 두루 돌아보며  물었다. 아이들은 내 눈길을 피했다. 순간 이상
한 느낌이 끼쳤다. 옆에 앉은 아이를 툭 쳤다. 그 애는 모른 척했다.
  “엄마, 나하고 싸웠어요.”
  숙이가 한숨을  쉬며 말햇다.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랬다. 너무도 가라앉아 
무섭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잘못했어요!”
  막내가 책을 읽듯 말했다. 이때 숙이가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숙
이의 눈가에 시퍼런 멍 자국이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지은 죄를 
보는 것처럼  정신이 아뜩했다. 무슨 말인가를  꼭 해야 할 것  같은데 두려워서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도망치듯 고개를 차창으로 돌렸다. 창 밖의 풍경은 
호화로웠다. 불 밝힌 뜰에 꼬마전구로 만든 사슴과 산타할아버지, 집의 테두리를 
온통 깜박등으로 밝힌 집.  오색 등불이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 그러나 내겐 
죽은 풍경이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숙이를 미워하더니 결국은 티를 내고 만 것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숙이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숙이가 괜찮아요 엄마, 라고 말하는 얼굴이더니 앞으로 얼굴을 돌렸다.
  “느 아부지가 그랬너?”
  “그럼 누가 그랬겠어요, 때리고 욕하고 말도 못했는데.”
  숙이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막내가 했다.
  “사람덜 다 봤겠잖?”
  “언제 아버지가 그런 거 가려요?”
  셋째였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날 저녁밥을  먹는 일은 모두에게  고역이었다. 우리는 더이상  남편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근심이  컸다. 숙이는 더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애
의 눈두덩은 더 퍼렇게 변했고 표정은 서리맞은  푸성귀 꼴이었다. 홍 서방이 숙
이에게 난폭한  행동을 하면, 차라리  죽이라고 사위에게 어깃장을  치는 남편이 
정작 임자 손으로  저 지경을 만들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바람막이를 할지 몰랐
다.
  그래도 나는 남편을 생각해서 탕수육 하나를  포장시켰다. 숙이 내외는 우리를 
아파트 앞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아버지 보기 싫은데 어떡하지?”
  한 애가 말했다.
  “말 안하면 되지 뭐!”
  다른 애가 말했다.  나는 희끄무레한 어둠속에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아이들이 무서워졌다.
  “아무리 아부지가 숙이한테 그랬어두  맞은 눔이 발페구 잔다구 아부지가 더 
맘이 아픈 기여!”
  내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핀잔을 주었다. 그  애들이 알아들었는지 어땠는지 몰
랐다.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들어서는  우리를 흘깃 돌아보았다.  풀 죽은 
표정이 역력했다. 
  “안 주무셌어유?”
  나는 벨을 누르지 않고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온 변명을 하느라 이렇게 물었
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작정한 대로 아버지와 눈도 마주칠 새라 피
했고 말을 붙이는 건 나 하나뿐이었다. 남편이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은 아주 찬
바람나게 행동했다.  남편의 눈길이 한동안  그 애들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으나 
하서였다. 나는 식탁과  싱크대를 돌아보았다. 밥을 먹은 흔적이  없었다. 마음이 
내키면 부엌일을 잘하는  사람이니 설거지를 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전기밥솥의 
밥은 여전했다.
  “엄마! 나 먼저 자요.”
  “엄마! 굳 나잇.”
  밥을 먹지 않은 남편 때문에  여러 가지로 심란해서 식탁 모소리를 잡고 우두
커니 서 있는데  아이들은 차례로 내게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그 
애들을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당신 좋워하는 탕수육 시케왔어유. 안죽두 따땃하네유.”
  말하고 를 바라보았다. 그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거 자세유. 당신 좋워한다구 아덜이 사가자구 해서 시케 왔는데.”
  “안 먹어!”
  남편은 고단하고 허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두 고될 텐데. 낼은 더 바블 거래유. 까딱 잘못하다간 물 한 모금 못 마시
구 하루 넹길러너 몰러유.”
  “글쎄 안 먹어.”
  남편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화장실에 다
녀오더니 텔레비전도 끄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 다리도  펼 수 없는 거기에 구부
리고 누운 남편이 보기 싫었다. 나는 탕수육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고 
씹다가 뱉었다.  꾸역꾸역 씹고 있는 내가  갑자기 싫어져서였다. 탕수육은 덮고 
간장 종지는 씻지도 않고 싱크대 안에 넣었다.
  소파 옆에 매트를 깔았다.
  “여보! 아래서 자유!”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아직 잠들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짐짓 잠이 취한 것
처럼 입 안으로 우물우물 어떤 소리를 냈다.
  “허리 아프다면서 왜서 그 다리두 못 피는 데서 대구만 자유?”
  내가 짜증을 냈다. 그가 뒹굴듯이 아래로 내려와 누웠다.
  “오늘 뭔 일 있었어유?”
  나는 그가 내가 시키는 대로 하자 맘이 놓여 이렇게 물었다.
  “아이 몰러! 살구 싶지 않으니!”
  남편이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벨일두 다 많네유. 그깐 일루 살기가 싫으니.”
  내가 중얼거렸다. 그가 내게  등을 돌려 누웠다. 나는 한참이나 매트 귀퉁이에 
발을 넣고 있다가  그 옆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남편도 고요했다. 그러나 
그가 잠이 들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숨소리로 잘 알 수 있었다.
  부모 자식 사인데 그래봤자  며칠 지나면 칼로 물 벤 자리가  되겠지.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이날은 나도 가게에 나가는 날이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 김치찌개를 하고 김도 
구웠다. 그리고 잠귀가 질긴 아이들을 억지로 깨웠다. 아직 이불 속에 있는 남편
도 깨웠다.  일어나지 않기로는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가게에 일을 
다니면서부터 깨우지 않아도 일어났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여보, 일어나세유.  아덜이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당신부터  해유. 시간이 
넉넉한 줄 알어유? 어림두 없어유. 조반두 자세야지유.”
  내가 남편의 어깨를  만지며 말하는 그는 목을 자라처럼 웅크렸다.  그의 어깨
에 굳은살이 느껴지는데 뭔가 낌새가 좋지 않았다.
  “난 안 가.”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자식들 일인데 하룻밤을 
자고도 속을 풀어내지 못한 바보 같으니.
  “오늘 같은 날 안 가문 어뜩해유!”
  나는 속을 억지로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골이 아퍼서 그래.”
  남편은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벨일두 아닌 걸로 속을 쌕이니 골이 안 아프구 베게유?”
  남편은 대꾸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남편을 두들겨패서 데려가고 싶었다. 그
가 오늘 같은 날 나가지  않으면 가게에도 지장이 있지만 숙이가 얼마나 상처를 
입을 것인가. 자식을 둔  부모는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다는 걸  그는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할까. 나는 식탁을  차리며 속으로 남편을 벤댕이 속이라고 욕했다. 아
이들은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더니 남편처럼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 
걸 욕을 해서 김에 밥을 둘둘 말아서 먹게 했다. 이럴 때도 남편은 누워 있었다.
  “아버지 왜 저래?”
  막내가 볼 부은 목소리로 가만히 물었다.
  “머리가 아프시단다. 니가 가서 아부지 일어나시라고 해봐라.”
  “싫어!”
  “밤새두룩 한숨 못  주무시구 속을 쌕였을 거다. 그러니 저렇게  머리가 아퍼 
난리가 아니너”
  “하여튼 난 싫어요!”
  “그래두 니가 아부지 속을 풀어디레야잖?”
  “싫다니까 엄마. 난 아버지 같은 사람하고 말하기 싫어요.”
  막내는 매정하게 잘라 말했다. 나는  그 애에게 눈을 흘겼다. 내 말을 안 듣기
론 셋째도 마찬가지였다.
  “느덜 아부지 다신 안 볼란? 뭔 원수졌너?”
  나는 작은 소리로 딸들을 욕하고 두어 숟갈 뜨던 밥이 갑자기 모래알 같아 물
에 말아 퍼먹었다. 막내가 시계를 보더니 셋째를 채근했다.
  “오늘은 삼십 분 일찍 문을 연댔어!”
  “숙이가 어련히 안 올라올까 봐 느덜이 그렇게 설치너?”
  나는 아직도 누워  있는 남편을 의식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갔다.
  “증 못 가겠으문  헐 수 없지유. 집에서  하루 쉬세유. 자덜이 왔으니 당신이 
안 나와두 될 거 같네유. 나두 나가구 그리니. 찌개 데워서 밥 체레 잡숴유.”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그는 이불을 덮은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곰국두 데워 먹구유! 배 곯어봤자 나만 손핸 거래유!”
  나는 현관에서 신발을 찾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이 이불을 눈 아래까지만 
끌어내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신발을 신고 나갈 때까지였다. 나는 이미 밖
으로 나간 아이들과  숙이를 기다리게 할까 걱정되어  그가 바라보든 말든 그냥 
나갓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본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
했다.
  그날 하루는 너무도 장사가  잘 되어 아무도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는 누구도 점심을 먹지  못했다. 숨을 돌리게 된 건 가게문을  닫을 때나 되어서
였다. 의당 저녁은 밖에서 먹게 되겠기에 집에 전화를 했다. 벨은 울리는데 남편
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열 번 이상 신호가 울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한테 준비하고 계시라고 하세요.”
  숙이가 눈치채고 말했다. 그  애의 눈은 오후 들어 많이 풀려  언뜻 보면 몰라
볼 정도가 되었다.  나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갔
다. 그러나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변소에 갔다고 해도 이렇
게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상하다. 아부지가 안 받으니. 어디루 나갔너...”
  수화기를 든 채 내가 중얼거렸다. 여태 나를  뻔히 쳐다보고 섰던 숙이가 눈을 
크게 떴다.
  “니가 한 번 해볼란?”
  숙이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그 애가 말없이  수화기를 건네받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나는 초조하게  그 애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애의 입에서 뭐라고 말이 
나오기를 얼마나 애타게 바랐는지 모른다.
  “안 받아요.”
  숙이가 말했다. 그 애는 내 눈길을 피하고  내가 벗어놓은 앞치마에서 돈을 꺼
내 제 가방에 넣었다.
  “엄마! 왜 그래요?”
  셋째가 막내와 들어오며 물었다. 나는, 내가 왜? 하며 그 애를 바라보앗다.
  “얼빠진 거 같애! 하기야 하루종일 밥도 못 먹고  서서 살았으니 엄마가 얼빠
지게도 생겼어! 우리도 죽을 지경이니까.”
  막내가 말했다. 나는 웃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그건 마음 뿐이고 여전히 정신
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 같았다.
  “야 너희들 먹고 싶은 거 말해! 영양보충 시켜줄 테니까.”
  숙이는 가래가 걸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먹고 싶지도 않아. 너무 피곤해서.”
  셋째가 중얼거렸다. 그 애는 발이 부어 구두를  신지 못해 슬리퍼를 신고 있었
다.
  “그래도 먹고 들어가야지.”
  이번엔 막내가 중얼거렸다.
  “그럼 아버진 어떡하지?”
  셋째가 물었다. 숙이의 눈길이  내게로 오더니 셋째에게 가서 멎었다. 순간 우
리들 사이에 짧은  침묵의 골이 파이는 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생각하
고 내가 남편을 떠올리는 그 순간이었다. 누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어느 
아이는 다문 입술 한쪽으로 쯧쯧, 거푸 바람 빼는 소리를 냈다.
  “집에 가보자.”
  나는 괴어오르는 불분명한  불안을 숨기려 애쓰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이들
이 움직였다. 숙이에게서 보너스를 받은 종업원들이  즐거운 얼굴로 인사하고 먼
저 돌아갔다.
  “다운타운엔 연락했너?”
  차에 타고 내가 물었다. 홍 서방이 일하는 도매가게는 다운타운에 있었다.
  “핸드폰을 하기로 했어요.”
  숙이가 말했다.
  “형부는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고 안 그랬어?”
  셋째가 말했다. 숙이는 지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부는 자기 손님하고 먹으면 되겠네.”
  막내가 말했다.
  “넌 왜 그렇게 형부를 미워하니? 형부가 너한테 뭘 잘못한 게 있니?”
  숙이가 싸늘하게 뱉었다.
  “내가 언제 미워했어!”
  막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질렀다. 얼마나 그  소리가 컸는지 유리창이 깨질 
것 같았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느덜 왜서 이리너?  느덜은 왜서 만나기만 하문  울근불근 그리너? 난 증말 
그런 거 이젠 못 참겠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은 한꺼번에 입을 다문 것 같았다. 그러
나 모두들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기운으로 차 안의 
분위기는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내가 느덜 아부지한테 평생 시달레서 골벵들었는데 느덜까정 안죽 이런다문 
난 더 못 살어.”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우리가 잘못했어요.”
  셋째가 말했다. 숙이와 막내도 따라서 그렇게 말했다.
  “그래, 이제 엄마가 살더라문 얼매너 더  살겠너? 느덜이래두 속을 넓게 쓰구 
서루 애껴가민 사는 거 보구 싶다.”
  옆에 앉은 막내가 내 손을 잡았다. 내 늙은  손의 메마른 살같을 그 애가 만져
주었다. 셋째가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평생 고생만 하고 사셨어!”
  숙이가 말했다.
  “내가 타고난 복이 고것이라서 난 누구 원망  안 한다. 느덜만 잘살문 엄마는 
더 바랠 기 없어!”
  내가 말했다. 차는 그 사이 집 앞에 와서 섰다.
  “엄마가 들어갔다 오실래요?”
  숙이가 말했다. 나는 차문을 열고 나갔다.  어차피 그게 좋았다. 창서 내리기엔 
내 위치가  그 중 나았다. 경비실을  지나가는데 머리가 하얗게 샌  흑인 빌리가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소리쳤다. 한국여자와 사는 남자였다. 나도 그렇게 인사하
고 계단을 올라갔다.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두 번 누르고 세  번 눌렀다. 
방 안으로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그러나 문으로 다가오는 발 소
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벨을 누르려다가 남편이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는 생
각을 하고 열쇠로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어두웠다. 냉기가 훅 콧날을 스치고 지
나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터무니없다고 재빨리 나 자신에게 말
했다. 춥지도 않은데 손이 떨려서 문턱에 붙은 전등 단추를 잘 누르지 못했다.
  형광등이 거물거물거리다가 켜졌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  가물거리는 빛에서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뒷골이  잡아당겨져서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 봐야겠는데 몸이 뒤로만 쏠리는 것이었다.
  “여보!”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인기척이 없었다. 어렵사리 방으로 들어가 보
았다. 좁은 방은 텅 비었고 화장실에도 그는 없었다. 온몸의 살갗이 벗겨져 나가
는 것 같은 찌릿찌릿한 통증이었다.
  “엄마!”
  막내가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와 현관에서  나를 불렀다. 내가 얼마나 오
래도록 소파에 주저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뭐 하고 있어요?”
  그 애가 놀라고, 또한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가서 언니덜 들어오라구 해!”
  나는 억지로 이렇게 말했다. 막내가 집안을 살피는 듯하더니,
  “엄마, 아버지 안 계셔요?”
  하고 막내가 물었다.
  “어여 언니덜 들어오라구 그래! 아이구우 머리가 터질 거 같애라!”
  내가 말했다. 막내가 나가서  딸들을 데려왔다. 그 사이 나는 남편이 텔레비전 
받침 옆에 자신의  소지품을 모두 꺼내놓은 것을 보았다. 불현듯  아침에 이불을 
눈 아래로만  끌어내리고 나를 말없이  바라보던 시선이 떠올랐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껏 나를  동여매고 있던 끈들이 한꺼번에  툭툭툭 끊어져나가는 
소리가, 너무 허망하게 들렸다. 아니다, 나를 비웃듯이 들렸다.
  남편은 이렇게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싫어서 크리스카스 
다음날 다들 돌아가겠다던  아이들이 예정을 미루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어디
서 어떻게 찾을까  궁리하고 불안해 했지만 나는  시간이 갈수록 남편의 소행이 
괘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끝까지 나를  모욕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를 도
저히 동정하거나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무지 찾지 말어! 창피하다!”
  나는 남편을 찾으러 다니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흘째 되던 날 밤이었다. 나는  잠을 자다가 목이 졸리듯이 숨을 쉴 수 없는, 
꿈인지 병인지 모를 순간을 겪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바로 그 순간 남편
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죽음이 이렇게 내게 기별되었다고 믿었다. 아무 내
색 없이 나는 일정을 미룬 아이들을 돌아가라고 했다.
  “큰언니나 오빠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 느덜은 아무 말두 하지  말구. 아부진 
잘못 돼두 말짱 다 자기 책임이여! 아부지 일은 나한테 맡겨.”
  아이들이 떠나기 전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누구도 내말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윤이는 달랐다. 그 애는  지난해 겨울에 와서도 결국 떠나기 전날  밤 내게 그
날의 일들을 캐물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 그 애는 내게 어둡고 을씨년스럽
고 마땅히 잊어야만 하는 저 지옥굴속으로 들어가자고 칼날을 세우는 것이었다.
  “닌 참 이상하다.  그기 뭐가 그렇게 좋은 일이라구 꼬치꼬치  캐너? 다 지나
간 일이 아니너? 느덜 사는 일에나 신경  쓰라머. 아부진 자기 좋워 그렇게 떠난 
사람이여. 나한테두 그랬다구 않헨?  어디 가서 고꾸라져서라두 죽겠다구. 그 사
람은 자기 맘먹은 대루 간 거여.”
  나는 진절머리가 났지만 이렇게 애원했다. 윤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대
답을 포기하는 건 아니었다.
  “엄마, 아버지가 없어졌잖아요. 그걸 알고 어떻게 했어요?”
  윤이가 다시  고개를 들고 물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었다. 그 악착스러운 
건 물귀신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었다.
  “니가 그걸 대구만 묻는 기 난 너무너무 이상하다.”
  나는 절망하고 지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 애가 울고 있지 않다
면 저승사자나 다름 아니었다.
  “찾으러 다녔어요?”
  그 애는 나를 외면한 채 물었다.
  ... 그때 내가 어떻게 했지? 아마 나는 영원히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남편이 집을 나가고 일 주일쯤 지나서 한국에  전화를 했다. 여기 아이들과 약
속한 대로, 아버지가 과일을 사러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말했다. 근이도 
그렇지만 윤이가 받을 충격이 두려웠다.
  먼저 근이네로 전화를 걸었다.
  “난 이제 한국하군 인연을 끊구 살게 됐구나.”
  남편의 소식을 전하고 내가 말했다.
  “그런 엉뚱한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근이가 소리쳤다. 가슴 깊은 데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우선 고마웠다. 
아들이 왜 여자에게 평생 울타리인지, 그 순간 느껴졌다.
  “고맙다.”
  내가 울먹이면서 간신히 말했다.
  “맘 든든히 잡숫고 계세요. 알았지요?”
  근이가 화끈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겐 천둥소리같이  들렸다. 그 애는 볼 
수도 없는 데서 나는 고개를 쉴새없이 끄덕 거렸다.
  “누나는 알아요?”
  “이제 알궈야지.”
  “할 수 없지요 뭐.”
  근이가 흡사 나락으로 떨어지듯 말했다. 그 애가 무엇을 할 수 없다고 하는지, 
왜 갑자기 절망해 버렸는지 궁금했지만 묻지를 못했다.
  근이와 전화를 끊고 한참 있다가 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니 요새 그 친하다는 무당 만내봔?”
  나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이때가 정월 초순이어서  점 보는 것 좋아하는 그 
애가 혹시 무슨 낌새를 차릴 만한 것이 있었나 해서였다.
  “가보려고 그래요, 뭐 궁금한 거 있으셔요?”
  그 애가 물었다.
  “아부지가 나가서 들어오지 않잖?”
  “언제 나가셨는데요?”
  그 애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들어오시겠지요 뭐.”
  그 애가 대단찮게 말했다.
  “하마 일 주일이 넘었다.”
  내가 말했다. 윤이가 침묵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과일을 사러 집 앞 슈퍼루 나간 기  이렇게 안 들어오시잖너. 아무리 밤이래
두 길을 까져먹진 않을 텐데.”
  “거기에 흑인 불량배들이 많아요?”
  윤이가 얼어붙은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 나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
다. 그가 불량배에 납치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남편은 이미 이틀 전 
꿈에 목숨을 끊는다는 걸 내게 알렸다. 그는 그렇게 갈 사람이었다.
  “경찰에 신고하셨어요? 실종신고요.”
  “이런 거 저런 거 다 해봤다. 하여간 더  기달레봐야 알지만 니 맘 단단히 먹
어라.”
  이 전화는  여기서 끝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지만  정신이 전혀 없었다. 내가 
그 애애게 한 말은  물론 모두 거짓말이었다. 나는 그가 가출을  했다는 걸 알았
을 때 그가 나와 자식들에게 보인 마지막 `모욕` 때문에 치를 떨었을 뿐이다. 남
편 없고 아버지  없는 천한 처지를 면하려고  피눈물을 머금고 살아왔는데 결국 
이렇게 된  것이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아무렇게나 내굴리며  살아온 것까지야 
어쩔 수 없었지만 이것만은 결코 용서하지 못한다.
  윤이는 거의 이틀에  한 번씩 전화를 해서  아버지가 돌아왔는지 다른 소식은 
있는지 물었다.
  “길음동 점쟁이가 그러는데 아버질 빨리 찾아야 한대요.”
  “아버질 부지런히 찾지 않으면 아주 못 찾는데요.”
  국제전화 요금 비싸니  여기서 무슨 소식이 있으면  알리겠다고 해도 그 애는 
유명하다는 점쟁이를 찾아다니며  들은 이야기를 해댔다. 지겹고  야속하고 한편 
그 애가 불쌍했다. 퇴근하고 집에가서도 전화벨이  울리면 윤이의 전화일까 걱정
이 되었다. 나는 어서 시간이 쏜살같이 가서  아이들이 모두 남편의 악몽에서 깨
어나길 바랐다.
  이렇게 한 달도 더  지난 어느 날이었다. 윤이가 전화를 해서  꿈에 본 아버지
의 모습을 얘기했다.
  그 애가 미국으로  보이는 어떤 거리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탔단다.  그 버
스가 어느 정류장에 섰는데 아버지가 올라오더란다.  야구모자를 쓰고 목과 허리
와 팔목에 니트를 댄 낡은 남색 점퍼를  입었는데 얼굴은 부어 보이더라고, 물집
이 터진 것 같은 부은 얼굴에 피부가 흐물흐물한  것 같더라고, 그 애와 눈이 마
주쳐도 반가워하지 않았단다.
  “아버지 어디 가셔요?”
  휸이는 반가워서 이렇게 물었단다.
  “워싱턴으로 간다.”
  아무 표정도  없이 이렇게 대답하더란다.  남편은 윤이가 꿈에  보았다는 바로 
그 차림으로 집을 나갔다.
  윤이의 꿈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몸은 여러 차례 진저리를 쳤다.

  비행기는 예정대로 김포공항에  닿았다. 사람들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넣은 선반을 여느라  법석을 피웠다. 스튜어디스가 돌아다니며  자리에 앉으라고 
충고를 해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윤이가 마중을 나왔을까, 안 나왔으면 그까짓 거 택시 타고 들어가지. 나는 쓸
쓴한 상상을 하는 데 이골이 났으므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 나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가슴이 젖었다. 그러나 막상  비행기가 서울
에 닿으면 그  울렁거리던 그리움은 다 어디로 가고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제작
년부터 계획했던 일,  그리고 이번에도 수없이 마음으로 다짐했던  일-나 자신을 
대접 하는 일을 꼭  할 수 있을까. 그저 일만 하느라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못
했으니, 얼마나 가여운  나 자신인가. 그 동안 꾀 한  번 부리지 않고 뼈 빠지게 
돈을 벌었으니 하느님도 이런 나의 계획을 축복해 주실 거다.
  그리고 이번엔 꼭 하고야 말 거야. 내가  살아본 곳, 제천과 원주. 많이 변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혹시 그때 같이 살던  사람을 만나게 될지. 이번엔 정
말 하고 말 거야. 윤이가 안  데리고 다니면 나 혼자 다니지. 버스 기차 택시 타
고 날이 저물어 자야 되는 일이 생기면, 난 절대로 여인숙에선 안 잘 테야. 내가 
나를 대접해야지. 그래야 되고 말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 새끼들은 지
금도 내가 돈을 좀 주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묻는 말에 대답도 잘 안 하지. 
하기야 나도 그랬을 걸. 혼자 된 가여운 어머니를  일 부릴 땐 데려오고 필요 없
을 땐 버리다시피 했으니, 내가 어떻게 자식들에게 대접 받아, 그럼 죄 받지.
  짐을 찾아 밀차에 싣고 보니 너무 초라해  보인다. 바쁜 중에도 이것저것 챙긴
다고 했는데 윤이가 좋아할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세관원도  그냥 나가라고 손
짓을 했다.
  “엄마!”
  문을 나서자마자 이런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방향을 몰라 두리번거리자 윤이
가 와서 털썩 잡았다. 내 새끼였다.  눈물나게 반가웠다. 비행기에서 생각했던 수
많은 어둡고 우울한 것들이 한 순간에 다 날아갔다.
  “어떻게 나왔너? 난 택시 타구 들어갈라구 했는데.”
  “당연히 나와야지요. 어떤 분이 오시는데.”
  윤이가 손수레를 떨며 말했다.
  “작은집덜 이모네 다 밸일 없지?”
  떠나기 전에도 전화를 해서 이미 훤히 잘 알고 있는 안부를 물었다.
  “다 잘 있어요. 엄마는 더 젊어졌어요.”
  “이제 그런 말 들어두 안 속어. 젊다구 그런다구 늙은 기 어디 가너?”
  내가 웃으며 말했다. 윤이도  유쾌하게 웃었다. 웃는데 눈가에 주름이 깊이 잡
혔다. 일 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얼굴에서 만이 아니라 그 애의 행동에 나이가 
더 들었다. 주위를  살피고 자기 행동을 결정하고 나를 철저하게  배려하고 보살
피는 것도 달라진  것이었다. 사람이 남과 자신을 한꺼번에 보려면  역시 세월이 
가르쳐야 하는 모양이다. 정말 무서운 건 세월밖에 없다.
  “내일 야양 가는 거 예약 다 했너?”
  나는 그 애의 승용차에 타자마자 물었다.
  “그렇게 양양에 가고 싶으세요?”
  윤이가 물었다.
  “그걸 시방 말이라구 묻너?”
  “아버지 산소엔 갔다왔는데, 점점 좋아져요.”
  “잔디가 다 죽었다민?”
  “작은아버지가 잔디를 못  심게 하셔요. 어머니가 거기 오신 다음에  뭐 다시 
손을 봐야 한다나요.”
  “누구 맘대루 거길 가!”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튀어나왔다. 윤이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미국 들어가는 거 예약 확인해라. 까져먹을라.”
  나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언제 가시게요.”
  “한 스물 날 있다 가야지!”
  “아니 두 달은 있다 가셔야지 이십 일이 뭐예요?”
  “안 돼. 근이가 멕시코루 간다는데 내가 들어가 봐줘야 돼!”
  “엄만 그게  잘못 생각하시는 거라니까요.  올켄 엄나가 서너  달쯤 있다오길 
바랄 걸요?”
  “시끄루워 야!”
  나는 그 애와 이런 얘길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만나자마자 감정이 엇갈
리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음날, 나는 윤이에게  설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 시간 반이나  빨리 국
내선 공항으로 나왔다. 밤에도  고향생각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누구누구 
하며 한 사람씩 꼽아보면 그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것도 없는데 `고향`은 무조건 
뭉뚱그려서 나를 황홀하게 했다. 하늘, 땅, 바람, 골짜기, 거리, 논, 밭, 집, 사람들
-그래, 샅샅이 다  찾아보고 만나고 가자.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는,  다 
된 인생인데.
  양양에선 시간이 잘도 갔다. 나는 마음먹었던 대로 했다. 맘에 두고 장만한 선
물을 나눠주었다.
  윤이가 주말에 차를  가지고 양양으로 왔다. 그 애는 오자마자  아버지 산소에 
갔었느냐고 물었다.  속이 화끈 달아올랐다.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여태 못 갔잖?”
  나는 그 애에게 부끄럽고 왠지 죄를 들킨 기분이어서 정신없이 변명했다.
  “엄마, 오래간만에 가는 거니까 주과포를 사세요.”
  윤이가 말했다.
  “시방 갈래?”
  “빨리 갔다오는 게 좋잖아요.”
  “그래 말 나온 김에 그리자.”
  나는 길가의 슈퍼에서 소주와 과일과 마른 오징어를 샀다.
  “이 차루 산소까지  가겠너? 차 망가뜨릴라, 큰물께다 차  세워놓구서 걸어가
자.”
  “길이 괜찮아요.”
  윤이가 말했다. 물론 송어리로  가는 길은 아주 오래 전에 좋아졌다. 덤프트럭
이 드나드는 길로 바뀐 것이 벌써 언제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내 마음엔 언제나 
숲이 우거진 가파른 토끼길로만 남아 있었다.

  남편의 시체는 헐리우드 산 중턱에서 등산객에  의해 발견됐다. 검시관은 날이 
추워서 시체가  덜 상했지만 사망한 지는  3주 전쯤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의 
바지 주머니에 든 사위의 명함을 보고 경찰이 홍 서방에게 연락을 해서 나와 숙
이 홍 서방이 함께 갔었다. 시신 확인은 나와 홍 서방만 했다. 숙이가 보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남편의 시신은 윤이가 꿈에 보았다는 모습과 똑 같았다.
  남편의 시신은 한국으로 나가기로 결정됐다. 나는  그를 서울 근교의 공원묘지
에 묻고 싶었다. 그래야  아이들도 가볼 수 있고 나도 한국에  나가면 찾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시동생들의 반대로 남편을 고향땅에 묻기로 했다. 고향으
로 그가 가면, 나는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나를 죄인으로 만
들었는데 내가 고개를 들고  어떻게 고향으로 가랴. 고향도 갈 수  없게 만든 그 
사람을 내가 어떻게 용서하랴.

  윤이는 산소로 오르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  애는 주과포가 든 비닐 봉지를 
들고 앞장을 섰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들꽃들이  핀 길을 걸어 산으로 올라갔
다. 남편은 자기 오촌의 꿈에 나타나서 그의  손을 잡아끌고 가더니 여기에서 멈
춰서더란다. 그런 걸 모르는 지관도 이곳으로 산소자리를 정했다.
  나는 숨이 차는데 윤이는 날 듯이 올라갔다.

  매장을 하던 그날,  양력 삼월 초하룻날은 그렇게  눈이 많이 올 수가 없었다. 
차는 결국 큰물께에 서고 우리들은 모두 눈길을 걸어서 송어리 골짜기로 올라갔
다. 관을 맨 상두꾼들은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여간 애를 쓰지 않았다. 그날 윤이
는 남편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 그가  태어나서 자랐고 내가 시집을  갔던 그 
집, 하지만 남편이 미국으로 떠난 다음엔 빈집이 된 그 집, 눈 쌓인 마당에 올라
가 목터지게 외쳤다.
  “아버지이! 아버지이! 아버지이!”
  그 후 나는 한 번도  그때의 그 모습을 그 애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이곳에 오
면 제풀에 떠올랐다. 언제나 그렇다.
  나보다 먼저 산소에  올라간 윤이는 마치 묘지와  어깨동무를 하듯 팔 하나를 
묘지에 두르고 앉아  있었다. 내가 올라가자 싱긋 웃으며 일어나서  초라하기 그
지없는 상을 차렸다.
  “여보, 영감. 살아생전 그렇게 날 미워하더니 지금두 미워하너?”
  나는 그 애가 주는 종이 술잔을 받아 앞에 놓으며 나직이 말했다.
  우리는 함께 죽은 사람에게  절을 했다. 윤이는 두 번 다  나보다 오래도록 엎
드려 있다가 일어났다.
  “엄마. 아버지 산소가 참 좋지요?  저 앞이 훤히 다 내려다 보이잖아요. 산이 
폭 감싸고, 아버지는  우리가 당신한테 오는 걸, 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여길 
산소 자리로 당신이 잡은 거라고요, 외로운 걸 참지 못하는 분이니까요.”
  그 애의 목소리는 이미  울음에 잠겼으나 따뜻했다. 하지만 나는 편치 않았다. 
그 애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남편이  따라오지 못하는 곳으로 이동하고 싶
었다. 한시바삐 여기서 내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애는 마치 안방에라도 앉은 
자세였다.
  “내레가자. 더 있을 기 뭐 있너?”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더운 날도 아닌데 진땀이  나서 나는 수건
으로 얼굴을 훔쳤다.
  “아버지는 참 바보예요.”
  윤이는 내가 한 말을 전혀  듣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깊은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바보구 말구. 세상에 다시 없는 바보지!”
  내가 말했다. 윤이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게 보였다. 나는 그 애가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야 어여 내레가자.”
  나는 허둥지둥 말했다. 그리고 뿌리치듯 일어섰다.
  “가요, 엄마.“
  그 애가 말했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뒤돌아섰다. 언제나 이곳에 오면 죽은 남
편이, 나를  잡아당기는 무서운 환상에  시달리곤 해서 이번에는  그런 공포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잘 계시라고 인사해야지요.”
  윤이가 말하는 거 같았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  애가 절을 하는 게 보였다. 나
는 벌써 몇 발짝 내딛었던 발길을 돌려 윤이  옆에 섰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절
을 했다. 이제 끝났다. 나는 일어서며 이런 생각을 했고 일어나자마자 발길을 돌
려 내려왔다. 그런데 뒤가  허전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윤이가 보이지 않았다. 울
화가 치밀었다. 다시 몇 걸음 위로 올라갔다. 윤이는 묘지에 파묻히듯 엎드려 두 
팔을 있는 대로 펴서 제 아버지에게 매달리듯  부둥켜안고 있지 않은가. 순간 나
는 내가 무엇인가에 짓밟히는, 그런 느낌에 사로잡혔더,

  이십 일만 있겠다던  예정을 넘겨 나는 한  달이나 지내다가 미국으로 돌아왔
다. 돌아온 지 일 주일 쯤 지났을까? 나는 DHL이라는 항공 우편물을 받았다.
  “누나가 편지를 보냈네요. 그 속에 돈 들었으면 저도 좀 주세요.”
  근이가 뜯지 않은 봉투를 내밀며 농담을 했다.
  “누나가 뭔 편지를 보내? 전화루 말 다 하면 되지.”
  나는 왠지 편지를 보는 게 두려웠다. 다시 아들에게 내밀었다.
  “아범이 뜯어봐라.”
  “싫어요. 어머니한테 온 걸 제가 왜 봐요.”
  아들은 질겁을 했다. 그러자 더 께름칙했다.

  사랑하는 엄마... 이제 그만  아버지를 용서해 주세요. 그래야 엄마가 편안해지
실 거예요. 그만큼 엄마가 자신을 학대했으니, 이젠 됐잖아요? 엄마는 언젠가 저
한테 말했듯이, 잘  사셨어요, 성공하셨어요. 제가 엄마  딸이라는 게 자랑스럽고
요. 누구에게나 우리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오셨는지 말할 수 있어요. 엄마
는 정말 성공하셨어요.  그런데 왜 엄마는 아직도 아버지를  미워하세요? 아버지
를 미워하는 게 엄마  자신을 괴롭히는 거라는 걸 모르세요? 엄마는 아버지한테 
아무 죄도 없어요. 우리는 다 이해해요.
  엄마를 생각하면  저는 언제나 가슴이  아파요. 우리는 언젠가  엄마와 이별을 
하게 될 거예요. 그때 우리가 엄마를 그저 그리워만  할 수 있게 된다는 저는 더 
바랄 게 없어요.  그렇지만 아직은 아니예요. 엄마가  아직 다 풀어내지 못한 게 
있어요. 그게 뭘까요.
  엄마, 아버지는 엄마를 사랑했어요. 물론  엄마도 아버지를 사랑했지요. 그렇지
만 두 분은 너무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서로 엉뚱한 기대와 실망만 하면서 
마침내는 미움으로 이별했어요.
  하지만 엄마, 아버지에 대해  엄마는 아무런 죄도 없어요. 물론 아버지도 그래
요.
  엄마에겐 고통을 드렸지만 저는 이혼을 하고 나서 비로서 결혼이 무엇인지 알
게 되었어요. 만약  내가 더 일찍 엄마와  아버지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어쩌면 슬기롭게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을지 몰라요. 하지만 엄마,  괜찮아요. 이
제 다시 기회가 오면 잘살겠어요. 그럴 자신이 생겼어요.
  엄마, 제발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세요.  겁내지 마세요. 아버지를 용서한다
고 엄마에게 잘못이  돌아오는 건 아니예요. 엄마는 이미 아버지의  인생과 뒤엉
켜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하고 죄인으로 만들면  엄마 자신도 그렇게 되고 
말아요. 물론 우리도 그렇고요.
  엄마는 단 한 번도 엄마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았어요. 제발 우리에게 엄
마가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걸 보여주세요. 그러면 저도 힘이 날 거예요.
  엄마, 이제 다 끝났어요. 엄마가 아버지만  용서하면. 그리고 엄마가 엄마 자신
을 사랑하면...

  윤이의 편지는 길었다.  정신없이 편지를 읽었다. 그러나 `엄마가 엄마  자신을 
사랑하면...`에서 나는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웬일인지 근이는 윤이의 편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읽어보려고도 하
지 않았다. 나로선 다행이었다.
  올해, 남편의 10주기를  맞았다. 나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연락해서 다 모였다.  뿔불이 흩어져 사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모인다는  건 어느 
집에서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고맙고 대견하고 자
랑스러웠다. 이제 모두들 마흔 아팎의 나이가 된  딸들은 여느 대와 달리 제수를 
한 가지씩 맡아서  서로 도왔다. 나는 깨여들지도 못하게 하면서  노마님처럼 멀
리서 감독이나 하랬다.  뿌듯하고 흐뭇했지만 속으로는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이
제 세상에서의 내 일이 다 없어진 것 같아서였다.
  제사는 옛날 식으로 자정에 모셨다. 아이들은  남편의 오래된 영정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웃는다느니 다른 해에 보던 인상하고  달라졌다느니, 이치에 닿지 않는 
말들을 했다. 음복을 할  때 나는 아이들이 주는 대로 아버지  술이라고 받아 마
셨다. 아이들도  거리낄 게 없이 술을  마셔서 모두들 붉어진 얼굴로  상에 앉아 
국수를 먹고 떡도 먹었다.
  “윤이 니는 올해 결혼하란다.”
  나는 술잔을 옆에  앉은 윤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윤이가 술잔을  받으며 얼굴
을 붉혔다.
  “방금 느 아부지가 나한테 말했어. 윤이 결혼하는 거 봐야겠다구!”
  윤이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그러고 나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 애의 몸이 뜨
거웠다.
  “엄마, 죄송해요. 이젠 행복해질 것 같아요.”
  윤이가 내 귀에 속삭였다. 그래, 그래야지.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상에서 
물러나 소파에  파묻히듯 앉았다. 술기운 탓인지  온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눈을 
감았다.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그런데 우리 엄마, 남자 친구 하나 구해드려야 되는 거 아냐?”
  “요새 효도는 그런 거란다!”
  “맞다 맞아!”
  “엄마만 좋다면 많잖아, 흰둥이 누렁둥이 깜둥이 다 있으니까요.”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며 깔깔댔다.
  “그런데 언니, 아주 중요한 얘기가 있어! 내가  생각했는데 우린 말이야, 이제 
아버지를 잊어야 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난 벌써 잊었는데?”
  “니가 뭘 잊었니? 정이가 하는 말은 우리가 죄책감에서 해방되자는 건데.”
  “맞아요, 그래야 해요. 아버님도 분명히 그걸 원하실 거예요.”
  “그래.”
  “아버지도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실 거야.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이 많으
신 분이니.”
  나는 슬며시 일어났다.  그 애들이 부러웠다. 애들이 대견하기도  했다. 나보다 
더 어른인 것처럼도 여겨졌다. 그러나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하게 회오리
쳤다. 나는 아이들과는 달랐다. 나는 남편의  자식이 아니었다. 또한 그 애들처럼 
젊지도 않았다.  나는 울음이 복받쳐서 입술을  깨물고 2층으로 난  계단에 발을 
올렸다.
  “나는 오래도록 아버지한테  매만 맞고 자랐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렇지 
않아! 어떻게 아버지가 365일 나를 때리셨겠니... 아버지는 아들인 내가 당신처럼 
될까 봐 경계하신거야. 세상에 안 계시니 물어볼  수는 없지만 내 생각이 틀림없
을 거야.”
  근이가 말하고 있었다. 나는 서서 그 얘기를 들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내가 지
금 어디 잇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도.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왔다.  2층은 어두웠다. 내 방 문은 삐끔히 열려 있었
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팔을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곁의 창문 커튼
에 올리브 나뭇가지 그림자가  어른어른 비쳤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잎새가 흔
들리는 창문, 나는  그 흔들림을 보고 싶지  않아 홑이불을 끌어 얼굴을 묻었다. 
가슴에서 울음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덩어리가 자꾸만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려고 
했다. 아버지를 잊겠다는 아이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아이들은 그래야만 한다. 현명한 생각들이다.
  하지만 나야, 어떻게 벗을까... 죽어나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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