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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동하 문 앞에서

by Casey,Riley 2023.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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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앞에서
이동하



    지붕 위의 산책
  남편 성문의  모습이 분명했다. 상당한 거리  저쪽이긴 해도, 마르고 꺼부정한 
그의 모습은 주희의 눈에 금방 띄었다. 그는, 회전식 유리문이 건물 밖으로 이제 
막 토해놓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건물 출입
객들은 물론, 보도 위의 행인들도, 그리고 6차선을 뒤덮은 차량들도 죄다 경황없
이 바쁘게 달아나고  있었다. 그중에서 유독 남편 성문의 태도만  한가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다 두 손을 깊숙이  찔러넣은 채 바깥 계단 중간쯤에 
잠시 서 있었다. 무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단지 눈이 부신 탓인 듯도 싶었
다. 그는 몸을  반쯤 틀어 고개를 젖히고  위쪽을 쳐다보았다. 회사 건물을 보는 
건지 아니면, 20층  높이에 걸려 있는 정오의 하늘을 우러르는  것인지 그녀로서
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혹은, 그 뿌연 공간에서 이상한 비행물체라도 찾아낸 것
인지, 그가  고개를 잔뜩 젖히고 너무  열심히 눈길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행인 
몇이 그를  흉내내기까지 하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 비로소 그는 첫발을 내딛었다.  평균치보다 한 뼘쯤 큰 키 탓일까. 꼭 그만
한 비례로 팔이 더 길어서일까. 그의 걸음걸이는 별스럽게 여유작작해 보였다.
  "정신챙겨 이 계집애야"라고 미애는 공박했다. "네 남편,  알고 보니 문제 많은 
사내더라..."
  남편의 움직임을  따라 첫걸음을 내딛고  보니 오히려 갈등은  사라졌다. 남은 
문제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뿐. 주희는 행인들 속으로 묻어들며  문득 지
난밤의 꿈에 생각이 미쳤다. 내가 무슨 꿈을  꾸었던가? 분명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다 안개 속에 묻힌 것처럼 몽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
로 이상한 것은 꿈속에서 느꼈던  그 고압의 정서가 아직도 깊숙한 울림으로 살
아 있다는 점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그랬다. 문득 그 꿈에 생각이 미치
면 저 울림은 더없이 절실한 느낌으로 되살아나면서도 그러나 분명한 기억은 단 
한 가닥도 집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남편과 관계되는 꿈이었다는 것만 어
렴풋하게 짐작될  뿐. "세상에 믿을 놈  하나두 없다 너? 맹하게  그러구 앉았을 
일이 아니라구. 나까지 열불나게 하지 말고 제꺽 내 말 새겨들어 이 계집애야!"
  남편 성문과는 10년 넘은  세월을, 날마다 서로의 살을 비비대며 살아왔다. 그
런데도 분명한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는 듯한 심정이었다. 그와, 그가 속해 있는 
세상이 온통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미애는 그 점을 강조하였다. "어떤 세상인 줄
이나 아니? 한눈  파는 새 남의 서방 잽싸게 채간다구.  그런 잡년들로 시글시글
한 세상이야."
  그래선가? 주희는 남편의 뒷모습을 좇으면서 다시 한  번 자문했다. 집을 나서
기 전부터 던져보던 물음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단순히 남편을 의심해서라기 보다, 최근 그의 행적에서 느낄 수 있
는 어떤  불가해한 감정이 자신을  이런 식으로 내몰았다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발단은 전화였다. 그것은 남편의 회사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정과장님 댁이죠? 사모님이세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이쪽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금세  뒷말을 줄줄 
이었다. "여긴 회사예요. 과장님이 혹  편찮으신가 하구 전화드렸어요. 지금 댁에 
계시죠?"
  "무슨 얘기예요? 진작  출근하셨는데..." 그러면서 주희는 시간을 확인했다.  열
한시가 이미 지난 때였다. "아직 안 나오셨단 얘기예요? 무슨 연락도 없고?"
  "네, 아마 그러신가 봐요."
  저쪽도 뜻박이었던지  잠시 말이  없다가 "틀림없이  출근하셨어요? 몇시쯤에
요?"라고, 하나마나 한 물음을 한 번 더 던져왔다.
  "그럼요, 틀림없이 나서신걸요. 일곱시 삼십분, 언제나 같은 시간에요."
  덩달아 어줍잖은 대꾸를 하고 보니 그제서야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회사가 먼 
거리에 있다고는 해도 벌써 서너 차례는 오갈  수 있을 만한 시간이었다. 방정맞
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전화 속의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중간에 어디 들르시는가 부죠? 종종 그러시니깐요. 걱정 마세요, 사모님. 출근
하시는 대로 전화드리도록 말씀 드릴게요."
  하지만 남편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퇴근시간을 넘어서고도  감감하더니 그날
따라 귀가가 유독 늦었다.  그가 손발을 대강 씻고 그녀의 옆에  와 누웠을 때는 
이미 자정을 지난 시간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술냄새는 전혀 풍기지 않았다. 전화
건을 주희는 말하지  않았다. 늦은 귀가에 대해 남편이 먼저  <처리해야 할 일>
이 많았다고  불쑥 한마디 내뱉은 다음  곧 등을 돌려 잠을  청했기 때문이었다. 
늦은 귀가에 대한 남편의  해명은 오히려 의혹의 눈을 뜨게 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꼭 직장일임을  분명히 한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의  어투는 그런 뜻이
었다. 그렇다면 남편은 아직  전화건을 모르고 있는 셈이고, 따라서 그의 말에는 
어딘가 거짓의 혐의가  짙었다. 다음날 아침도 그녀는 사실을 말해줄  기회를 얻
지 못했다. 늦잠에서 깨어난 그는 식사도 거른 채 집을 나섰기 때문이었다. 도무
지 양감이 늦껴지지  않는, 이불빨래 안에 지른 간짓대처럼 어깨  쭉이 삐죽하게 
솟고 상의 등판이 헐렁하게 처진 남편의 뒷모습을 잠자코 배웅하고 섰으려니 한 
번 눈뜬  의혹이 점점 자라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늦게나마  출근을 했는가? 
그랬다면 그 이유는?  끝내 출근하지 않았다면, 하루종일 - 그것도  늦은 귀가까
지의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  라고 그는 말했다. 만약에  그 일들이 가정이나 직장 양쪽에  다 
감추어야 할 성질의  것이라면,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의문이  집요하게 꼬리를 
물더니 급기야는, 이런  일이 이번만 아니고 전에도 있었을 법하다는  데까지 발
전하였다. 전화 속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였다. 중간에 어디 들
르시는가 보다고, 종종 그러신다고. 그 여자가 말하지 않던가. 그래, 기왕에도 종
종...
  그러자 엉뚱한 기억이  한 가지 불쑥 떠올랐다. 언제던가? 꽤나  여러 달 전의 
일이었다고 기억되었다. 집  앞에 있는 은행에서 주희는 참으로 천만  뜻밖의 인
물과 조우했는데 그게 바로 남편  성문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승 밖의 사람을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저녁장을  보러 나선 참이니까 오후 
네댓시쯤 될까. 남편  성문으로서는 퇴근을 꿈꾸기조차 이른 시간이었다. 뿐더러 
은행은, 그의 직장과는  도무지 상관없는, 변두리의 동네  은행인 것이다. 그러므
로 그 시간과  장소는 그녀에겐 일상적일 수  있지만 남편에게는 너무나 엉뚱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한동안은 눈을 의심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 
무리의 동네 여자들 속에 끼여 있는 사내는  남편 성문임이 분명하였다. 그는 통
장이 돌아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편안히 앉아 비치용 주간지를 뒤적
뒤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 성문이 먼저 자기를 발견해주기를 바라면서  일단 못본 척하였다. 그러나 
예금인출이 끝났을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똑같은 상태였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가가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부러 옆구리가 닿을 정도
로 바짝 다가앉았는데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조금 물러났을 뿐이
었다. 그가 한사코 코  빠뜨리고 있는 주간지를 기어이 그녀는 잡아챘다. 비로소 
남편 성문의 얼굴을, 그 놀란 눈을 그녀는 정면으로 마주하였다. "당신..." 힘겹게 
그녀는 말을 뱉었다. "뭐하는 거예요 여기서?"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이, 따라서 입이 점점 크게 열리더니 갑자기 벌떡 일
어섰다. 눈에 띄게 당황한 것은 그 순간부터였다. 그의 시선이 -나중에사 깨달은 
것이지만, 꽤나 불안정하고 탁한 느낌을 주는 -그녀의  눈을 피해 주위 여기저기
로 방황하였다. 변명일 듯싶은, 무슨 소린가를  흘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언행은 온통 모호하기만 하여 그녀로서는 거의  아무것도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왠지 다른 말을 더  뱉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남편이  황망히 돌아서서 가버리
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 쪽에서 먼저 돌아섰을 판이었다.
  그날, 남편 성문은 정시에 귀가했었다. 그러나 엉뚱하게 왜 그 시간 그곳에 있
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해명한 바가 없었다. 주희 쪽에서 묻지  않았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선뜻 물을 수가 없었다. 그것의 의외성이 크게 
느껴질수록 오히려, 캐묻기가  주저됐던 것이다. 결국, 불가해하면  한 대로 일상 
속에 묻어 버리고 지나왔음을 그녀는 기억해냈다.  그럴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
다. 남편 성문은 그 시간, 그 자리에 왜 있었던가? 일쑤 푸념했듯이 직장에서 처
리해야 할 많은 일 속에 묻혀 있어야  마땅할 그가 말이다. 직장일과 관계있다고
는-그때나 이제나-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불가해해진다. 
혼자만의 비밀통장이라도  가졌다는 얘긴가?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그런 낌새, 
그럴 사람도 아닐뿐더러, 혹 그런 것을 가졌다면  동네 은행보다 회사 곁에 있는 
은행을 이용하는 쪽이  훨씬 현명한 처사가 아닐 것인가. 그러면  왜? 남편 성문
이 무언가 수상쩍은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 것은 벌써 그때부터였다는 사실을 그
녀는 새삼 깨닫는 것이었다.
  남편 성문의 걸음걸이는  많이 변해 있었다. 호주머니에 두 손을  다 집어넣는 
것부터가 전에 없던  버릇이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긴장감을  거의 완
전히 잃고 있다는 점이었다. 뒤를 좇으면서 잠시  관찰하나 바로도 그 점이 분명
하였다. 워낙  겅중한 키 탓도 있겠지만,  그의 걸음새는 느슨하기  짝이 없었다. 
사지의 고리들이 죄 풀려서 위태위태한 느낌을 주는데다 가만히 본즉 구두 뒷전
을 꺽어서 꿴 채였다. 한 발짝씩 느직느직  내딛을 때마다 가랑이 사이가 허전하
게 벌어지면서 들어올린 다리가 허공에서 잠깐씩 방향을 잃고 머뭇거리는 것 같
았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주희가  기억하고 있는 남편의 걸음걸이는 
매사 서두는 그의 성격 때문에 오히려 긴장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탁 풀어져서 
흐느적거리는 걸음새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노릇이다. 길을 나란히  걷다 보면 
어느새 혼자서 저만치 앞서가곤  하던 그였다. 늘 마음이 바쁜 사람, 산책길에서
도 연방 채근하고  서둘기 잘하는 조급증의 소유자, 조간지 배달이  10분만 늦어
져도 문밖에 나가  서성거리며, 크고 작은 일거리를 거의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
나 들고 있는 사람...  남편 성문은 실상 그런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걸음걸이
에는 성급함과 어떤 경직성 때문에 항용 긴장감이 짙게 배어 있곤 했던 것이다.
  남편 성문이  횡단보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침 신호가 열린  참이어서 잠시 
발이 묶였던  행인들이 무리를 지어  밀려가고 밀려왔다. 다투듯  서두는 발길들 
속에서 오직  남편의 그것만이 한가하였다. 근접한  덕분에 그를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창은 뒤쪽에서 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주
희에게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남편 성문의 모습이 잘 드러나 보이는 것 같은 기
분이 들었다. 빈약한 어깨  때문에 그의 목은 길고 그 위에  얹힌 머리통은 너무 
무거워 보였다. 비로소 발견한  점이지만, 뒤꼭지 부분이 아주 훤할 정도로 탈모
증이 심한 데다 자라는 대로  내버려둔 거칠고 곱슬이 진 뒷머리칼은 어쩐지 초
라하고 곤비한 인상마저 풍겼다.  주희는 문득 그의 나이를 헤아렸다. 마흔을 이
미 두어 해나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이 불현  듯 깨달아졌다. 횡단보도의 저 끝에
서 인도로 막 올라서고  있는 그의 뒷모습에 눈 주며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런 꼴로 이런 대낮에 은밀히 찾아나서곤 하는 것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별의별 소리가  다 나돌더라고 미애는 말했다.  자기네 가게에 드나드는, 남편 
회사 사람들을  상대로 탐문한 결과라면서  그녀는 마구 떠별려댔던  것이다. 고 
별스런 우정 뒤에 숨어 있을 법한 고약한 심보. "말두 마라 얘. 입 안 달린 작자
만 빼고 죄다 한  말씀씩 하시더구나. 그러니 난들 감잡기가 어디 쉬워야지... 시
시겁절한 소릴랑 빼고 대강  간추리면 말이다. 첫째는, 무슨 딴전을 보고 있다는 
거야. 얘, 니네 남편, 직장일말구  가외로다 뭐 벌여논 거 있니? 부업 말이다. 없
지? 없구말구. 내가 아는 사실인데 뭐. 그담엔  뭐라고는 하면 말이야, 뭘로 호박
씨 까고 있는 중이란 소리야. 홀딱  빠져가지구 도무지 인사불성이라고 지랄들이
라니깐. 회사 옆에  다 신접살림을 차려놓고 점심시간에 살짝살짝  들른다나? 귀
담아 들어둬. 사내치고 그런 거 꿈꾸지 않는 작자란 없다. 요즈막엔 그런 스타일
의 혼외정사가 유행이랜다.  내친김에 내 생각두 밝혀두겠는데-참고하고  말고는 
니 소관에 일단 맡기고-내  심증도 이거야. 뭐, 딴거 없어. 무슨 가망  없는 병을 
가졌대나? 왜, 암 같은 거 있잖니? 시한부  생명이란 선고를 받은 게 틀림없다는 
거야. 그래가지구설랑 혼자서  저러구 다닌다는 소리라구. 가정에도 직장에도 알
리지 않고 말이야. 참 웃기는  소리 아니니? 이거야 원, 테레비 연속극같은 얘기
지 뭐..."
  미애는 말을 잘못했다.  기와 연속극에 견주자면 지금의 이 행위야말로  썩 적
절한 것이 되리라고  주희는 자조하듯 풀썩 웃었다. 한결같은 사랑과  신뢰의 바
탕 위에서-라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보통사람들이 그렇듯이  그저 그만그만한 마
음 하나로  별 기복없이 이어온 부부  사이였다. 그런데 지금의 이  장면은 어떤
가? 웃음이 자꾸 흘러나왔다. 지난밤의 꿈이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하고 
그녀는 잠시 기억의 곳간을 헤집어보았다. 역시  잡혀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저 여운만 살아났다.
  회사로부터 남편 성문을  찾는 전화는 그후 다시 없었다. 출근길에  엉뚱한 곳
에서 장시간  지체하는 어리석음을 그가  스스로 자제한 결과인지  아니면, 회사 
쪽에서 오히려,  집으로 전화질하는 경솔함을  자제하고 있는 탓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쨋거나,  이번에는 주희 편에서 몇  차례 전화를 넣어  보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혹은, 다행히도) 그때마다 그는 부재중이었다.(만약 남편 성문의 목소
리가 불쑥 튀어나왔다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작정이었던가?). 먼저의 그 목소리
가 저쪽에서 말하였다. 과장님은  지금 안 계시는데요, 어디세요? 물론 대답하지 
않았다. 혹은,  아마 식사하러 나가셨나봐요  자릴 비우셨어요.  어디라고 전할까
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희는 잠자코 통화를 닫았다. 그의 부재가 마
음을 무겁게  눌렀다. 근무시간중에 차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한 번은,  점심시간에 나갔다는 사람이 퇴근 무렵
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저러다 혹 권고사직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고 그녀는 염려하였다. 혹은,  남편 성문이 의원사직을 꿈꾸고 있는 건 아
닌지?
  최근 들어 남편 성문은 말수가 부쩍  줄어든 편이었다. 식탁에서나 잠자리에서
나 거의 늘 입을 봉한 채였다. 원래가  떠벌리는 성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
히 과묵한 사람도 아니었다.  어떤 편인가 하면, 식탁 앞에서는 아이들이 꺼내놓
는 화제에 곧잘 끼여들고, 잠자리에서는 또 부부들만의, 장난스럽고 외설스런 얘
기로 곧잘 그녀를 웃기곤 하던 터였다. 이제는  아이들도 말없이 먹는 일에만 열
중하거나 더러 저희끼리 잠깐씩  종알대다가는 슬쩍 아빠의 눈치를 살피는 판이
었다. 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을  끄고 자리에 들고 보면 그는 어느새 등
을 돌려댄 채 잠을 청하고 있는 자세였다. 대화를 기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등에 얼굴을  비비대며 그녀는 나름대로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말문은 트이지 
않았다. 한 두 마디 대꾸가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런 남편이 때론 불쑥 입을 열
어 무슨 엄청난  말을 뱉어낼 것 같은 기분이  갑자기 드는 때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선언 중의  하나가 말하자면 의원사직이었다. "나, 
회사 그만 나가기로 했어!"또는, "나 오늘 사표 냈어."
  사표를 내야겠다, 그만  집어치워야겠다, 운운하는 타령은 남편 성문에게도 없
지 않았다. 월급쟁이치고 그런 푸념 그런 투정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것은 어
떤 의미에서는 자기과시며 자기확인일테니까  말이다. 비록 월급쟁이일망정 아주 
죽어 사는  건 아니라는 소리다. 여차직하면  둘러엎을 수도 있다는 자기과시다. 
겁 안 나, 개코도 겁 안 난다구 아무렴!  씨월씨월하다 보면 체증이 쑤욱 뚫리고, 
그래서 다음날 출근 기분이 한결 가뜬해지는  이치라고나 할까. 그것만도 아니었
다. 그녀에게는 남편  성문에 대한 각별한 믿음이 또 있었다.  그 믿음이란, 그의 
성장환경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전후사회인  저 50년대의 궁핍  속에서 생을 
출발한 사람이었다. 그  어두운 시기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쓰라린 기
억들을 한두 가지쯤 간직하고 있을  테지만 그의 경우엔 그것이 유독 깊은 상흔
으로 남아 있는  듯싶었다. 어언 40대, 불혹의  나이로 접어든 지금도 그는 종종 
그 시절의 삶을 되작되작해보며  종이 위에다 무언가를 골똘히 끄적거리곤 했던 
것이다. 헐벗음, 굶주림, 질병, 죽음, 헤어짐... 그것은 결국 뼈저린 가난의 기억들
이었다. 누가 그보다 가난을 잘 안다고 하랴.
  결혼 초만 해도  직장문제로 고전했었다. 그는 원래가 외로운 사람인  데다 어
찌 보면 직장복도  억세게 없는 편이었다. 그 무렵의 사회형편이  상승작용을 했
을 게다. 1년이 멀다  하고 그는 직장을 옮겨다녔던 것이다. 그 시절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떠올려주는 것은  무엇보다, 잦은 이사의 기억들이었다. 시내버스 종점
에서 가까운 변두리 마을들을 찾아  동에서 서로 또는 남에서 북으로 이놈의 거
대한 도시를 몇 차례나 긋고 다녔던가. 지긋지긋한 기억들이었다. 그때마다 긁히
고 찍히고 부서져서  한 귀가 떨어져나가곤 하던, 결국은 혼수채비로  갖췄던 가
구들의 대부분을 몇 해 쓰지도  못한 채 버려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끔찍스럽기
까지 한 것이다. 그가  지금의 직장을 얻고 나서 대여섯 해나  지난 후부터 비로
소 안정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고 다시 대여섯 해, 그는 비교적 자기 자리를 
잘 지내왔던 셈이다. 언젠가 승진대열에서 탈락했을  때와 그리고 갑작스런 전출
명령- 그것도 지방으로-을 받았을 때 그는 좀 심각한 갈 등을 치르긴 했지만 직
장을 버리는 경솔은 끝까지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  남편 성문이-그때 이상의 어
떤 갈 등에 빠져 있는지는 모를 일이나-결코 쉽게 직장을 포기하는 따위의 어리
석은 짓은 않으리라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는  터였다. 그러므로 만일 남편 성문
이 지금의 직장을 떠나면 된다는 그것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 되리라. 
그것은 결국 쫓겨남을 뜻한다. 이제 와서 말이다. 마흔을 넘은 나이에...
  미애년의 수다와 부추김이 설득력을  얻은 것은 아무래도 이 부분이 아니었을
까. 남편 성문이 저러다가는 조만간 회사에서  내쫓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공공
연해진 상태라면(미애년은 확실히 그렇다고 단정했다)  여전히 모른 척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게 주희의 결론이었다. "어쨌거나 나와. 나와서 직접 캐보란 말이
야. 어쩔텨?"
  미애의 가게에서 만난  미스터 김(그녀가 그렇게 소개했다)은 생판  낯선 사람
은 아니었다. 어딘가 낯익다고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그쪽에서 먼저 "절 기억하
시겠습니까? 정과장님과는 대학후배 되는 김기인입니다"하고 나왔던 것이다. "오
래되긴 합니다만, 몇 차례 불시방문한 적이 있는..."
  그랬다. 그의  말대로 언제던가, 불시 내방을  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늦은 
시간에, 그것도 흠씬  젖어서, 말끝마다 우리 선배님을  읊으면서도 정작, 선배이
자 상전인 남편 성문보다 더 몸을 주체하지  못하던 일을 주희는 기억해냈다. 그
나마 위안이 되었다. 손수 차를 날라온 미애가 옆을 찰싹 달라붙었다.
  "초면이 나리라니 잘됐네. 이봐요  미스터 김, 요 맹한 여자한테 그 엉뚱한 선
배얘기 잘 좀 해줘. 사정 두지 말고 죄다 쏟아버려. 병신들 챙기게."
  "허 참 큰일날  소리 하네. 날더러 무슨  얘길 하라는겨? 아, 무슨 얘깃거리가 
있으면 마담이 한 번 해봐요. 나두 귀동냥 좀 하게."
  "내 요럴 줄  알았다구. 가죽망태기 찬 족속들은  하나같이 요렇게 엉큼하다니
까. 끝까지 오리발 내밀 거야?"
  미애가 사내의 어디를 어떻게 했는지 미스터 김은  냅다 비명을 질렀다. 홀 안
의 시선들이 몰렸다.  주희는 얼굴을 붉히며, 조금은 후회스런  감정을 맛보았다. 
미애년은 또 그렇다  치자. 그녀가 떠벌이고 있는 일이나 지나간  삶이 이해하게 
했다. 그러나 남편의 후배이며 수하사람임이 분명한  미스터 김의 태도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부터가 이미 어떤 대답을 하고 있는 거라고 주희에게는 느껴졌
다. 그러자 부끄러움인지 노여움인지 모를 어떤 감정이 끓어올랐다. 이쪽의 기분
을 눈치챈  듯 그는 좀 어정쩡한  웃음을 문 채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
요?"라고, 그제서야 말문을 텄다.
  "실은 별 얘깃거리도 아닙니다만 따로 드릴 말씀도 없고 또... 그래도 선배님이
시고 직속상사이신데 뭐라  나불대기도 그렇고... 저두 사낸데요.  그래서 얘긴데, 
이건 그저 사실이 그렇단 얘길 뿐이니까 그냥  가볍게 들으시면 됩니다. 뭔가 하
면 말예요, 우리 선배님 아니 과장님한테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어요. 아마 지난 
봄부터 생긴 버릇 같구먼요. 근무시간중에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겁니다. 그리고
는 종적이 묘연해져요.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고, 때로는 한나절 내내 나
타나지 않는 겁니다. 물론 전화 한 통 없죠. 생각해보세요, 업무가 어떻게 되나... 
우리끼리긴 합니다만, 조그만  소동이 일어나요. 그때마다 한바탕씩...  그런데 말
예요, 거의 매일 되풀이되고 있단 말입니다. 최근 들면서는. 참 난처해요. 쉬쉬하
고 감추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깐요. 놀라운 건  우리 선배님 아니 과장님 태도예
요. 여전하시단 말입니다. 물론 여러 차례  말씀을 드리곤 했었지요. 우리 졸개들
의 고충이 이만저만하다고 엄살을 핏기도 하고  또, 윗분이 찾으셨다느니 드디어 
대발노발하셨다느니 온통 공갈을  쳐도 매한가지더라구요. 피식 웃고 말아요. 오
불관언이랄지, 그래도 할 수 없다는 건지 원, 도무지 판단할 재간이 없어요."
  미애년이 간을 쳤다.  "홀딱, 아여 홀딱 혼쭐이 빠졌구나. 저를  어째? 꼭 어떤 
눔 생각나게 하는구먼."
  개의치 않고 그는 계속하였다. 어느새 저 웃음기가 걷히고 없었다.
  "출근이 늦으신 날은  그럭저럭 자리를 지키시기도 해요.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드물고, 열두시 전후해서 자리를 뜨는 겁니다 매일이다시피... 한창 일을 하
다가 미심쩍은 느낌이 들어서 얼른 고개를 쳐들고  보면 벌써 없어요. 과장님 자
리가 비어 있게 마련이죠. 참 깜쪽같이 사라진단 말에요. 자리가 출입구 곁에 있
는 것두 아닌데...  우리들의 눈은 또 좀  많아요? 개중에는 일은 뒷전이고, 숫제 
과장님 거동만 작정하고 지켜본 적도 있다는데, 허탕을 쳤대요. 어느새 사라지고 
없더라는 겁니다. 오전 내내  기회만 노리고 계신다는 얘긴지 원... 그에 비해 되
돌아오는 모습은 거의 매번  눈에 띄곤 합니다. 전혀 조심성 없는 거동이거든요. 
좀 당황해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쑥스러워한달지  또는 자포자기적
인 태도랄지... 글세, 난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어쨋든 그런 식으로 자리를 돌아
오는 겁니다. 일단 자리를 떴다 하면 빨라야 두어 시간, 늦을 땐 서너 시간쯤 후
에 말입니다. 아예 귀사하지 않으시는 경우도 없지 않구요."
  "뒤를 좀 밟아보지 그래?" 미애의 거침없는 소리였다. "그 시간에 도대체 어딜 
가서 뭘 하는지, 미스터 김은 궁금하지두 않아?"
  "그런 소리들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라고, 그가 풀썩 웃으면서  대꾸하였다. 
"서툴게 나섰다가 덜미 잡히지 말고 아예 전문가를 붙여보자는 소리까지  나누긴 
했죠."
  "그래서, 왜 관뒀지?"
  "왜는 무슨 놈의  왜야"라고, 이번에는 느닷없이 소리를 내어  웃으며 그가 또 
대꾸하였다."잠깨요 잠깨!  우리가 무슨 테레비 연속극에라도  출연하고 있는 줄 
아시오?"
  아, 이 사람도 텔레비전 연속극 얘기를  하는구나, 하고 주희는 탄식했다. 미스
터 김과 미애  사이에는 잠시 설전이 오갔다.  승부는 나지 않았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그 주인공의 아내만이 만신창이가 되고 만 느낌이었다. 그때 미애년이 
지껄여대고 있었다. "알았다구. 샘을 파도 답답한 년이 파라, 우린 입방아나 찧고 
앉아서 구경이나 할  테다 그런 심뽀 아냐? 아무렴,  목마른 년이 샘 파는 거여. 
못할 것 같애?"
  남편 성문의 발걸음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음을 그녀가 깨닫기까지 그리 긴 시
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발은 흡사 물이 낮은 곳을 따라  방향을 거듭거듭 바
꾸면서 계속 흘러가듯이 그렇게  지향이 없었다. 전진이 막히면 방향을 틀고, 신
호가 때맞게 열리면 길을 건너며, 한발 늦어  신호가 닫히면 건너려던 길도 포기
했다. 또 길을  가다가도 구경거리가 눈에 띄면 곧잘 발길을  세우고 기웃기웃했
고, 버스나 택시정류소 같은 데서는 차들이 꼬리를  물 듯 달려와 멎었다가 선착
순으로 다시  굴러가곤 하는 광경을 넋  놓고 한동안씩 바라보며 서  있곤 했다. 
혹시 미행을 눈치챈 것이나 아닐까 싶어  그때마다 그녀는 조심스러워졌다. 그런 
자신에 비해 그의 거동은 얼마나 유유자적하고  자유분방한가. 진열창 안의 물건 
꼼꼼히 들여다보기, 지나가는 행인들의 차림새며 표정 뜯어보기, 높은 건물의 층
수 세기, 별난 간판이며 눈길을 끄는 포스터  앞에서는 한참씩 서 있기도 예사였
다. 그것만도 아니다. 어느새 큰길을 버리고 뒷골목으로 스적스적 기어들더니 초
라한 행상들의 좌판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아이들의 놀이판을  들여다보며 무어
라고 한두 마디 참견도 하고,  필경엔 무얼 사서 쩝쩝 먹기도 하였다. 그가 만약 
교활하게 딴전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글세, 그녀의 눈에는  흡사 산책이
라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때와 장소가 문제이긴 하지만, 어쨋든 남들이 
다 제 일에 열중하고 있을 한낮의, 그리고  매연에 찌들고 시끌시끌한 도심의 거
리들을 그런 식으로 마냥 지척거리고 다녔다.  그에게 절대적인 행선지가 있으리
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경우를 예상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지 상상만이 아니라 이미 한두  차례 뒤쫓아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기억의 어떤 층이 가려워졌다.
  그의 발길이 다시 멎었다. 전자오락실 간판이  내걸리고 아이들의 출입이 잦은 
곳이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간판의, 현란한 장식들을 한참 쳐다보고 난 그는 
이번에는 반대로  고개를 아래로 꺽어 안쪽을  기웃기웃하였다. 저 양반이 설마, 
하고 주희는 고소지었다. 저 애들 속에 끼여들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나 더 이상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마침  성급하게 뛰어드는, 고작해야 중2짜리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한 패거리의 학동들에게 등을 떼밀려가며 불혹의 사내는 오락실 안
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는  우두망찰하여 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떤 세
찬 감정이 가슴을 꽉 채우는  듯 싶었지만 의식은 오히려 허전하게 비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행인들이 앞뒤에서 좌우에서 그
녀와 부단히 작은  충돌을 일으키면서 지나갔다. 그때마다  그녀는 이쪽저쪽으로 
떼밀렸지만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락실 안은 어두컴컴했고, 밖에서 보기에도 엄청 넓은 평수였다. 조심스레 안
을 기웃거리는  순가, 단박 그녀를 질리게  만든 것은 후끈한 결기로  와닿는 땀 
냄새였다. 창고처럼 어둡고  차단된 그 홀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비적거
리고 있는지 족히  실감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의  기를 꺽어놓은 
것은, 많은 기계들이 한꺼번에 내지르고 있는,  그 온갖 살벌한 음향들이었다. 그
것은 파괴와 해체의  하모니였다. 시장바닥처럼 복대기치는 한  무리의 조무래기
들 속에서  남편 성문의 모습을 찾아낸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는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 뒤켠에 엉성한 폼으로 서서 상황을 지켜보느라 아예 정신
을 홀딱 놓아버린 채였다.
  "현장을 잡아야 해"라고 미애년이 열을  냈었다. 자신의 실패담을 들어 거울을 
삼으라고도 하였다. "저 족속들은 말이야, 오리발 선수들이다 너? 증거고  나발이
고 다 쓸데없어 얘.  적반하장이란 말 알지 너? 똥을 싸서 뭉개고  앉은 쪽이 되
레 눈알을 부라리고  악을 쓴다니깐. 막판에 몰리면 야비하게 시리  폭력으로 나
온다 너? 못 당해,  정말 못 당한다니까. 그저 현장을 덮쳐야  돼. 그래야만 아얏 
소리도 못하고 콱 꺾어지는 거야. 그럼 맘대로 요리할 수가 있다구. 회쳐 먹든지 
삶아 먹든지, 이쪽이 유리한 대로 조건을 내걸 수가 있단 말이야."
  열을 내고 부추기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여차직하면 응원꾼으로 따
라나설 기세였다. 그런 친구를 주희는 애써 주저앉혔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생
각이 있었던 것이다.  미애의 확신에 찬 단정에도 불구하고 주희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남편 성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믿음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혹은 그
렇게 말하는 미애에게서 강하게 도사리고 있는 피해의식 같은 게 역겨웠던 탓인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편에 대한 구구한 추측들 중에서 주희로서는 차라리 <테
레비 연속극 운운>하던 쪽에 더 많은 공감이 갔던 터였다. 남편 성문의 저 불가
해한 행위의 원인은 어쩌면 그것인지 모른다는 의혹이 이제 점점 깊어짐을 느끼
는 것이었다. 평소 그의 성품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었다. 어디, 
텔레비전 연속극만이던가. 주변을  둘러보노라면 그런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다
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남편 성문과는  비교적 가까운 사이였던  동갑내기 친구 
한 사람이 바로 그런 죽음을 한 것도 멀지 않은 지난 겨울의 일이었음을 그녀는 
또 기억해냈다. 그 친구처럼  남편 성문이 만약 가망 없는 어떤  질병을 안고 있
다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사실을 감추려고 안간힘할 것이 분명하다고 믿
어졌다. 아,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나? 아직도 어린  두 아이의 어머니이고,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는? 가정은?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 불길한 상념을 여기
서 끊었다. 미애 그녀의 판단이  옳았음을, 두 눈 크게 뜨고 확인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뜨겁게 가슴이 탔다.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머물렀으리라, 남편 성문이 오락실을 나왔을  때는 하
오 두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정오 못미처 회사를 나섰으므로 벌써 두 시간 이상
을 배회한 셈이었다.  이젠 그만 식당 같은 곳이나 찾아들었으면  좋겠다고 주희
는 바랐다. 그러면  더 이상 좇기를 단념하고  그의 앞자리에 가 앉으리라. 언젠
가, 동네 은행에서 조우했을 때처럼 놀랄까?  어쩌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리라 싶었다. 그러고 보니 시장기가 느껴졌다. 내키지 않는다면 스스로 말문
을 틀 때까지 더  기다리마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오늘은 다만, 이쯤에서-여기가 
어딘가?-마주앉아 맛있는  점심이라도 함께하고  싶어졌다. 설사 배신을  꿈꾸고 
있더라도. 그러나 그에게는 전혀 그럴 의사가 없음이 분명했다. 오락실을 나섰을 
때 그는 약간  지친 모습이었다. 허리도 좀더  꺼부정해 보였다. 그는 눈이 부신 
듯 주위를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곧 방향을 잡아 걷기 시작했다.  조금도 변함없
는 걸음걸이였다. 여전히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신호가 열리면 길을 건너고 신호
가 닫히면 방향을 바꾸면서 도무지 하릴없는 사람의 무위한 산책처럼 도시의 잡
답 속을 스적스적 걸어갔다.  돌아서서 회사로 향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몹시 지친 기분이  들었다. 결단이 가능한 쪽은 자신이 아닐까하고  그녀는 곰곰 
생각했다. 이대로 돌아서든가, 아니면 뛰어가서 그의 등을 치든가...
  깜빡 무슨 상념에  빠져들었던 건지 혹은, 지친 나머지 잠시  주의력이 흐트러
졌던 건지 그것은 분명치 않다. 그야 어느쪽이든, 한순간 그녀는 남편 성문의 모
습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거센  낭패감! 아주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그것은 거의 절망적인 느낌이었다. 무릎을  꺾고 길바닥에 털푸덕 주저앉
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놓쳐버린 지점까지 경황없이 달려갔다. 그리
고는, 길 잃은  어린애처럼 목을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말고  갑자기 뻣뻣하
게 굳어버렸다. 소름끼치도록  써늘한 충격으로 지난밤의 꿈이  선명하게 떠올랐
던 것이다. 깨고 나면 안타까운 느낌뿐, 무어 한 가지도 기억나지 않던 그 꿈-그
것이 어쩌자고 그렇게 생생하게  눈에 보이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낮,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남편 성문은 진작  출근했고,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안팎 청소를  말끔히 끝내고 난 그녀는 한가한 마음으로  뜨락을 내다보
고 있었다. 막 정오를  넘어선 시각이다. 햇빛이 환하게 쏟아져내리는 좁은 뜨락 
저쪽에, 최근 페인트 칠을 해서 빛깔이 선명한  녹색 철대문이 반쯤 열린 상태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 두어 시간쯤 전에 작은 녀석을 유치원에 내보내면서 
분명해 대문을 닫아걸었는데-라고 의아해하면서 그러나 그녀는 뜨락으로 내려섰
다. 대문을 닫고 걸림쇠를  꼭 채운 다음 무심히 돌아서다 말고  어떤 육감 때문
에 그녀는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이상했다. 남편이 거기 있었다. 아침에 출근한, 
그러므로 당연히 직장에 나앉아 있어야 할 남편  성문이 거기, 경사진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
  "당신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곧바로 대꾸를 못하고 우
물쭈물하던 그가 한참 만에야 어눌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냥... 바람이나 좀 쐴려고..."
  그가 발을 옮겨딛을 때마다 기왓장이 파싹파싹 부서져서 경사진 골을 타고 뜨
락으로 좌르르 좌르르 흘러내렸다.
  그랬다. 지난밤의 꿈은 분명 그런 것이었다.

    낯선 바다
  곤하게 잠들어 있는  사람을 마구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는 한다는  소리가 생
판 엉뚱하였다.
  "좀 일어나 앉아요. 당신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성희로서는, 그러나 성가신 마음이  앞섰다. 둘째애 소풍을 따라 갔다 온 날이
어서 몹시 지쳐 있던  참이었다. 거기다가 이미 자정을 넘은 시간이었다. 남편의 
귀가가 이처럼 늦는 일은, 특히 최근 들어 빈번하게 있어 왔다고 해도, 이날따라 
남편은 도무지  잠자리에 들 생각이  없는 듯싶었다. 때늦은  귀가에도 불구하고 
매사 꾸물대며 늑장만 부렸던 것이다. 욕실에서  후적후적 물소리를 내며 필요이
상으로 시간을 끌더니 나중엔 응접실  쪽 소파에서 오랜 시간 담배를 물고 있는 
눈치였다. 오밤중에...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런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그녀는 
결국 먼저 잠자리에 들었었다. 한데, 무슨 심술로 이제는 남의 곤한 잠을 깨우려
드는 것이다.
  "아서요 아서, 제발 잠 좀 잡시다 여보..."
  그녀는 앙탈하며 등돌아누웠다.  그리고는 이불을 얼굴 위에까지  끌어올린 다
음 조그맣게  몸을 옹그려 붙였다.  등뒤에서 남편이 마지못해  드러눕는 기척을 
그녀는 느꼈다. 잠시 부시럭대더니 라이터 켜는 소리를 냈다. 또 담배를 문 모양
이다. 곧 담배연기가  후각을 부드럽게 자극하며 넘어왔다. 그다지  싫지 않았다. 
이런 때 그것은 남편의 체취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코 끝
에 와 부드러이 감기는  담배연기를 아련하게 의식하면서 잠속으로 다시 가물가
물 가라앉았다.
  잠의 수렁은 깊고 거기 고인 물은 달았다.  뭐라 형언키 어려운 감미로움 때문
에 그녀는 잠결에도 티없이  환한 웃음 한 자락을 입 꼬리에  물고 있었다. 그랬
다. 이런 순간마다 그녀의 마음은 항용 넉넉한 행복감 속에 잠기는 것이었다. 이
보다 달고 아늑한  순간이 있을까. 그런 잠  끝의 아침은 또 얼마나 신선하던가. 
잠이 비교적 적은 편인 남편은 등뒤에서 그렇게  좀더 혼자 남아 있으리라. 그러
면서 아내와 두  아이와의 단란한 가정을 흐뭇해하며  새삼스레 그녀의 등과 어
깨, 더러는 보다 깊은 곳까지 애무의 손길을 뻗어올 것이 분명하였다. 언제나 그
래 왔듯 성희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렇게 기대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남편  기주는 이날따라 별나게  굴었다. 잠투정하는 그녀를 기어이 
깨워놓고 말았던 것이다.
  "아구, 나 정말 못 살아! 남 잠 와서 죽겠는데 왜 귀찮게 굴어요, 당신."
  성희는 왈칵 짜증을  쏟아놓으면서도 그러나 마지못해 부시시  일어나 앉았다. 
남편이 이럴  때면 무슨 사연이  있을 법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머리맡의 
시계를 보았다. 한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녀는 잠을 미처 떨어내지 못한 몽
롱하고 뜨악한 눈빛으로 남편 기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말 왜 그래요, 당신?"
  정작 그는 쉬 말을 뱉지 못하였다. 아직  내의바람인 채로 요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꼿꼿이 앉은 채  담배만 뻑뻑 빨아 당겼다. 웬 셈인지  딱딱하게 굳은 자세
였다. 그러고  보니 담배연기가 스물스물  기어오르고 있는 남편의  얼굴은 깜짝 
놀랄 만큼 어둡고 초조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부지중에 잠옷자락을 여미었다. 게
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목소리였다. 그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을 남편
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잘 들어요..."라고 운을 뗀 다음 한참 있다가 그는 불쑥 말하였다. "나 말이야, 
당신하고 헤어져야겠어."
  남편 기주가 내ㅂ으 말이 그것이었다. 거두절미하고  그는 그렇게 선언했던 것
이다. 아주 냉랭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러나 모호한 구석 없이 분명하게...
  그녀는 멍해졌다. 너무  엉뚱하다기보다, 너무 간단명료한 말이어서 오히려 아
무런 느낌도 오지  않았다. 헤어져야겠다고? 이제 막 남편이 뱉은  말을 입 안에
서 두어 번 되풀이해본 후에야 그녀는 비로소 어눌진 투로 되물었다.
  "헤어져야겠다구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편의 대답은  선언보다 더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입을 꾹 다문  채 꽁초를 
비벼 끄는가 싶더니 금방 새 개비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를 켜대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몇 모금을 거푸  뻑뻑 빨아 당기더니, 이번 역시 짤막하게 툭 내뱉
었다.
  "이혼하자는 소리요..."
  성희는 비로소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하지만 멍한 느낌은 마찬가지였다. 이
혼하자고? 또 입 속으로  뇌어보았으나 당장엔 거의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오지 
않았다. 그나마 느낌이나 생각이  있다면, 아 이런 경우를 두고 아닌밤중에 홍두
깨라고들 하는가 보다 싶은,  아주 막연한 생각과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
편은 지금전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오히려 다른 어느 때보다 정색
을 하고 진지한 태도임이 분명하다는, 그런 의식 정도였다.
  한참 동안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녀도 더 묻지 않았고  남편 쪽에서도 자청
하여 더 해명하지 않았다. 어느새 한시를 넘어서 있었다.
  "잠부터 자요 우선..."
  침묵 끝에  그녀가 말하였다. 부지중에  자신의 음성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베개를 고르며 그녀는 덧붙였다. "꼭 할 말이면 내일 아침에 다시 말
하세요."
  "아니야."
  남편 기주가 고집하였다. "이런 말 다시 꺼내기가 쉽지 않아요. 당신은 뜻밖이
겠지만 나로선, 그래요,  여간 고민하지 않았소. 결단하기까지는  무진 힘이 들었
어요. 내친김에 해야 할 말을 마저 쏟아  놔야겠소. 여자가 있었소. 내 직장 사람
인데... 우린 오래됐소. 그래서..."
  낯선 얼굴을 보듯 그녀는 남편의 얼굴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미안하오. 당신한테는  정말 면목이  없소. 참 많이  고민하고 그리고  생각했
소..."
  "..."
  "모든 걸 각오한 바요. 어떤 비난, 어떤 조건이라도 감수하겠소. 당신이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그뿐이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봇!"
  성희는 베개를 집어 남편을 향해 내던지며 마구 소리쳤다.
  "그만두지 못해요? 당신, 정말 이렇게 모욕 주기에요? 난 잠자고 싶단 말에요. 
할 얘기가 있으면 내일 아침에 하라구요. 낼 아침에 하란 말예요!
  그녀는 뜨겁고 된 숨을 색색 내쉬면서 남편을  노려보았다. 그는 대꾸 없이 담
배만 뻑뻑 빨아대고 있었다.  얼굴을 아래로 잔뜩 수그린 자세여서, 아직도 젖은 
채 헝클어져 있는 머리만 볼 수 있었다.  갑자기 적막감을 드러내고 있는 공간에 
뭉덩뭉덩 피어오르는 담배연기에다 그녀는 시선을 한참 못박고 있었지만 그러나 
시야가 곧 몽롱하게  흐려져버렸다. 적어도 15년 이상의 세월을 한  이부자리 속
에서 살을 비벼대며 살아온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베개를 
집어 들고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는 아이들 방으로 건너갔다.
  다음날 아침, 남편 기주는  평소와 같이 출근하였다. 그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
로 때가 되자  식탁 앞에 와 앉았고, 말 한마디  없이 식사를 끝냈다. 그 표정이 
어둡고 굳어 있었다. 성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침식사를 차리기만 했을 뿐 그
녀는 단 한 숟갈도  뜨지 않았다. 두 애 중에서 큰 쪽인  중3짜리 계집애는 이상
기류를 눈치챘지만,  덜렁이인 초등학교 5학년짜리  사내애는 끝까지  감을 잡지 
못한 듯 엉뚱한  화제들을 평소처럼 불쑥불쑥 꺼내놓곤 하였다. 물론  누구 하나 
대꾸해주는 식구가 없었다. 그때마다 제 누나로부터 은밀한 제지를 당하거나, 도
무지 이해할 수  없는 눈총을 받거나 했을 따름이었다. 결국  녀석도 시무룩해지
고 말았었다.
  남편과 큰애가 나란히 먼저 집을 나서고, 그리고 반 시간쯤 위에 덜렁이가, 언
제나처럼 덜렁거리며 나갔다.  마침내 혼자가 되자 성희는 식탁을 치운  다음 청
소를 시작했다. 그녀만의 하루는  늘 그렇게 시작되게 마련이었다. 서른 평 남짓
한 아파트 공간은  그녀의 꿈을 수용하기에 꽤 적당한 크기였다.  적어도 현재로
서는 그랬다. 방  셋 중에서 큰방은 부부가, 중간방은 피아노를  가진 딸애가, 그
리고 작은방은 아들이  각각 차지하였다. 장차 아이들의 덩치가 엄청  커지고 또 
세간이 늘어나면 모를  일이로되 지금으로서는 전혀 협소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주변 환경도 썩 괜찮은 편이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점이 매일 출퇴근
해야 하는 남편에게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닐테지만,  그 대신 공기 맑고 조용
하고, 교통편도 꽤  좋은 곳이었다. 네 해 전 이사를  올 때만 해도 다소 무리를 
했었다. 그 가계 주름살을 말끔히  펼 수 있었던 게 고작 지난해의 일이다. 그리
고는 올 들어 몇  가지 가구들을 들였다. 그 동안 오래  별러왔던 것들이어서 그
녀로서는 얼마나 흐뭇했던지... 정말이지 서른 평  남짓한 그 공간에서 그녀의 귀
중한 꿈들이 영글고 있었다.
  엊그제 대청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이란 문은  죄다 활짝 열어젖혔다. 방충
망이 붙은  덧문들까지 떼내었다. 창너머로는  이제 여름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산등성이가 내다보였다.  그처럼 눈부시던 녹음이  한결 빛을 잃고  지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구석구석의  먼지를 철저히  털어냈다. 진공청소기를 두고도  거실이며 
방바닥을 물걸레질을 하였다.  어항의 물도 갈고 몇 점의 난분들도  촉촉하게 물
을 뿌렸다. 다음으로는 빨래였다. 전자동세탁기는 최근에 새 모델로 개비한 것이
어서 여간만 편리하지  않았다. 온갖 세탁물들을 있는 대로 쓸어넣은  다음 원터
치만으로 세탁의 전과정을 끝내주는 그 앙증맞은 기게 앞에 서면 현대 산업문명
이라는 것이 세상 여자들을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가를 매번 실감하는 것이었고, 
그러면 조금은 남편의 노동을 생각하게도 되었다.  세탁기를 작동시킨 다음 그녀
는 면내의며  타월들을 따로 비누칠을  하여 가스불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빨래가 삶아지기까지 FM방송에 다이얼을  맞춰놓고 비로소 흔들의자에 등을 기
대고 편안히 앉았다. 맑은 햇빛이 베란다 쪽에서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루중 이 시간을  그녀는 가장 좋아하였다. 작은애가  학교에서 돌아오기까지
는 온전히  혼자였다. 훼방꾼은 없었다. 간혹  차임벨이 딩동딩동 올리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대로  내버려두노라면 곧 조용해지게 마
련이었던 것이다. 의자를  흔들흔들하면서 조간신문을 뒤적이고, 거기 방송 프로
그램을 차근차근 점검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빨래가 삶아지는 그 부드러운 비누
냄새가 주위를 가득히 떠돌곤 하는 것이었다.  후각은 감각기관들 중에서도 가장 
민감하게 향수를 일깨워준다던가. 멀고 아득한, 그러나 가슴에 꽤나 깊숙이 와닿
는 회상들을 좇다 보면 그만  깜빡 잠이 드는 경우도 있어서 그런 때면 더러 빨
래를 태우기도 하였다.
  세상 사는 일이란  자신의 믿음을 쌓아올리거나 또는, 일껏 쌓아  올린 믿음을 
하나씩 허물거나 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녀는 문득 품었다. 결혼생
활 열다섯 해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것만도 아니다. 첫만남에서 결혼에 이르기까
지는 또 4년 여의 예비과정이 필요했었다. 복학생  남기주를 처음 만났던 대학 3
학년 시절부터 계산한다면 스무 해 가까운 세월이었다.  그 동안 갈등이 전혀 없
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단  한 번도 위기가 없었다고 할 수도 없으리라. 그렇다
고는 해도 결정적인 파탄은 없이 여기까지는 호흡을 맞추어 잘 달려온 이인삼각
이 아니랴. 그 점은 남편 기주도 인정하리라.  그런데 이제 풀자고 한다. 남은 도
정을 함께 뛰고 싶은 상대가 따로 있다지 않는가.  셋을 함께 묶을 만한 길은 없
으므로, 미안하지만 이쪽을 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지난밤의 일을 그녀는  생각했다. 작은애 방으로 건너간 그녀는 곧  잠이 들었
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불가해한 노릇이었다. 잠을  설친 쪽은 오히려 남편이었
다. 재떨이가 넘치게 쌓여 있는 꽁초들과 구겨 던진 담뱃갑, 타액을 닦은 휴지뭉
치 등이 그의 불면을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문득 잠을 깨고  보니 평소보다 한 
시간쯤 이른 시각이었다. 그제서야, 작은녀석의 등뒤에 옹송거리고 껴붙은 채 옹
색한 잠을 탐했던  자신의 모습이 가슴 아팠었다. 남편의 말을  하나하나 떠올렸
지만, 배반감이나 분노의 감정은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의 등짝에다 얼굴을 묻은 채 그 이른  시간만큼 그녀는 깨어 있었다. 비로소 
눈물이 아이의 등을 적셨다.
  비누 냄새가 고 끝에  감겨왔다. 빨래가 한창 끓고 있는 모양이었다. 돌아보니 
솥뚜껑이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며 김을 뿜고 있었다. 그녀는 상념을  털고 일
어섰다. 가스불을 끈 다음  솥을 조심스레 안고 다용도실로 나갔다. 그리고는 삶
아진 빨랫감을 헹구기  시작하였다. 타월 몇 장 외에는 내의와  양말짝이 대부분
이었다. 이른 바 핵가족-네  식구의 빨랫감이었다. 물이 찰랑찰랑 넘쳐나도록 수
도를 열어놓고 그것들을 한 점씩 헹구어낼 때마다 그녀의 머리에는 식구들의 얼
굴이 언뜻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딸애의 흰 커버 양말, 덜렁이 녀석
의 팬티, 남편의  러닝셔츠... 그것들은 이미 단순한 제품이  아니었다. 거기엔 주
인의 혼이 담겨  있어서 그녀는 종종 그것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것이었다. 
일테면 아들 녀석의 팬티를 집어들고 그녀는 말하였다.
  "넌 어째 아직도 오줌을 지리고 다니니 글세? 이거 봐, 푹푹 삶아도 잘 지워지
지 안찮아. 엄마가 네 녀석 잠지를 그만 꿰매버릴까부다..."
  그러면 녀석은 조금은 무렴해하면서도 해죽해죽 웃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난 아무래도 저장탱크가 작은가 봐요. 늘상 급하단 말예요."
  막 손에 잡힌  것이 남편의 팬티였다. 아들의 그것과 비슷한  흠결이 거기에도 
있었다. 조금은 오줌을 지리는 버릇은  부전자전인가 보다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전에는 그 사실이 곧잘 웃음을 자아내게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발견과 확인
이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았다. 그것은 무의미하고 오히려 불결하기조차 하였다. 
그러자, 너무나 소중한 것들을 이미 잃어버렸다는  깨달음이 통절하게 가슴을 쳤
다. 빨래는 끝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손을 씻었다. 젖은 손을 앞치마에 묻으며 허
리를 펴자 심한 어지럼증이 그녀를 흔들어놓았다. 지난 생애가 온통 모호해졌다.
  아침을 걸렀는데도  점심밥이 받아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커피에 비스킷 
조각을 씹으며 혼자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남편이 아
닐까 했는데  받고 보니 언니였다.  전화로나마 자주 오가는  처지여서 의례적인 
말들은 생략하고 첫마디부터가 "너네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니?"였다.
  성희는 가슴이 뜨끔했다. 벌써 밖으로 얘기가  나돌았는가 싶어 마음이 움츠러
졌다. 간신히 그녀는 반문하였다.
  "왜요? 무슨 말이라도 들은게 있수, 언니?"
  "그럼 괜한 걸 묻겠니?"
  언니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니 형부가 그러더라, 남서방이 자릴 놓을 모양
이라구... 어제 들어오는 길로 느닷없이 불쑥  그러는구나 글쎄. 무슨 일이니? 뭐, 
따루 계획하는 거라두 있니?
  예상밖의 화제여서 성희는 우선 안심을 하였다.  기운을 내어 그녀는 대꾸하였
다.
  "몰라. 난 모르는 얘기예요, 언니..."
  "뭐라구? 모른다구?"
  한 옥타브 높은 음성이 꾸짖듯  말했다. "얘 좀 봐. 넌 뭐 하는 애니? 니 형부 
말투로 보아 그냥 지나가질 일이  아닐 것 같던데두 넌 어찌 그리 깜깜이냐? 제 
서방이 무슨 생각을 가족 사는지, 무얼 꾸미고  있는지 그런 것엔 도무지 관심없
이 그저 조석이나 끓이고 빨래 수발이나 하고  앉았으면 다 되는 거니? 원, 애두 
답답허긴..."
  딸 부잣집 맏이답게  쯧쯧 혀를 차고 있는 얼굴이 선히  떠올랐다. 눈꼬리짬이 
간지러웠다.
  "형부는 뭐래요?"
  "네가 모르는 일을 그 양반이 어떻게 아니?" 언니는 그렇게 오금부터 박은  다
음 "별말이 없더라. 네가 한 번 만나보렴"하고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내가 형부를 만나서 뭘 허우 그 사람 맘인데..."라고 성희는 말하고 전화를 끊
으려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독거리는 투로 언니가 한차례 더 보태었다.
  "아니 얘, 암만해도 그대로  버려둘 일은 못되는 것 같구나. 가서 분위기를 한 
번 보렴. 혹시 마음 상할  일이나 없었는지... 남서방, 그거 전문 아니냐. 꼬인 데
가 있으면 풀어줄  궁릴 해야지. 어쩌겠니? 그 나이에 자리  덜렁 내놓고 나와버
리면 어쩔래 이것아? 니 형부 체면은 또 뭐고? 내 말 알아들었니?"
  남편이 큰형부의 사업체에  몸을 담은 지는 벌써 10년 넘은  세월이었다. 결혼 
초기 4,5년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근속해왔던 것이다. 그 동안 고비가 없지는 않
았다. 큰동서 그늘에서의  직장생활이 남편에게는 나름대로 어려운  점이 있었으
리라. 그러나 어느 직장엔들 그만한 문젯거리야 없으랴. 이따금씩 투덜거리고 때
로는 나이답지  않게 토라지기는 했어도  지금껏 잘 배겨온  남편이었다. 그녀는 
둘째애가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야 작정이 섰다.  그러나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갈등이 적지 않았다. 성희에게  있어서 언니의 조바심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 점이 우
선 선명치 않았다.
  큰형부는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라고 해도 거의 빈
주먹으로 사업체 하나를 일으킨 창업주답게 관록을 풍기는 인상을 하고 그는 말
했다.
  "웬 바람일까? 윌 처제께서 내 방을 다 찾아오구?"
  자리를 권한 다음 볼이 닿을  정도로 입을 바짝 가져다 대며 나지막한 음성으
로 그는 또, 속삭였다.
  "실인즉슨 낭군을  찾아온 거지? 뒷말 들을까  봐 내 방엔  들른 거구? 안 그
래?"
  막내처제라고 처녀 때부터 유독 정을 보이던  형부였다. 성희는 잠자코 웃기만 
하였다. 막상 마주하고 보니  왜 걸음했던가가 더 모호해졌다. 인터폰을 집어 들
며 그가 말하였다.
  "남서방, 부를까?"
  "아녜요."
  급하게 대꾸하고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집어  들었던 인터폰을 그는 제자리에 
놓았다.
  "왜 그래 처제? 간밤에 부부싸움이라도 했나?"
  그는 느물느물 웃고  있었다. "그런 문제라면야 나로서도  별 대책이 없겠는데 
그래..."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기 때문에 성희는 고개를  떨구었다.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입을 다물었다.
  "걱정하지마, 처제"라고,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내가 
잘 처리할 테니 처젤랑 걱정하지 말라구. 남서방, 내 밑에 와 일한 지 10년이 넘
은 사람이야. 그  사람이 남인가, 아니면 이해 못할  게 있는가... 안 그래, 처제? 
이래저래 언짢은 일들이 쌓이다 보면 한차례씩 그래  보는 거야. 사표 써 던지는 
짓이 이번 처음인가 어디? 내 어련히 알아서 할 일을 처제가 뭣 땜에 지레 눈물
바람을 하고 이럴꼬?"
  그녀는 아직도 울음 끝자락에  잡혀 있었다. 연신 코를 훌적이면서, 젖은 손수
건을 무릎 위에서  꼬깃꼬깃 접으면서 그녀는 여전히  얼굴을 떨군 채 대구하였
다.
  "그게 아녜요, 형부..."
  "아니라고? 그럼 뭐여?"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말했다, 아주 짤막하게. "헤어져야겠대요..."
  형부의 주름 많은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헤어지다니, 누구와?"
  "저하구요... 이혼하겠대요"
  무릎 위에서 꼬깃꼬깃 접었던 손수건을 그녀는  하르르 폈다. 그리고는 눈꼬리
짬을 두어 번 훔치었다.
  "큰일낼 위인이로구먼!"
  등받이 위로 훌쭉 상반신을 실으며 허공을 향해  그가 말하였다. 입이 반쯤 벌
려진 채였다.
  "여자가 있대요. 누구예요?"
  성희는 그제서야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여기 근무하는 여자이고 벌서 
오랜 관계라고 했어요. 설마, 전혀 모르는 일은 아닐테죠?"
  "그래서 이혼하겠다는 게야? 그래서 사표도  써 던지고?"라고, 그는 대답 대신 
오히려 반문하였다. 노기가 섞인 음성이었다.
  "내 이 위인을..." 그가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당장 결판을 내든가 해야지, 참
고 보자니 갈수록 더 맹랑해진단 말이야..."
  "아녜요!"
  성희는 이번에도 가로막고  나섰다. 그녀는 빼앗듯이 인터폰을  받아 제자리에 
놓았다. 이미 눈물이나 쿨적거리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다시 그녀는 묻고 있
었다.
  "얘기해주세요. 어떤 여자죠?  지금도 근무하고 있나요? 차라리  그 여자를 불
러주세요.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어요..."
  "진정해요, 처제"
  먼저 격정을 가라앉힌 그가 성희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 괜한 소리야. 그 철딱서니없는 위인이 나한테 할 화풀이를 처제한테 한 거
구먼 그래. 다 쓰잘데없는 소리라구."
  "전 그 사람을 잘 알아요. 속에 없는 소리를 함부로 뱉을 사람은 결코 아녜요. 
아주 정색을 하고 한 말이에요."
  "다 지나간 얘긴데 어째 그럴까?"
  탄식하듯 무거운 한숨을 훅 하고 토해내더니 그는 뒤를 이었다.
  "그런 소문이 있긴 했지. 다 지나간 얘기지만... 그런 소문이야 대체로 근거  없
이 맹랑한 것이기 쉽고 도 어쩌다 실수해서 그리된 경우도 있고 하는 거라 나야 
대수롭잖은 구설수  정도로 생각했었지. 허나  사내 기강문제도 있고  해서 여자 
쪽을 그 즉시 내보내는 것으로 결말지었던 기억이 나는구먼."
  "그게 언제예요?"
  "글쎄, 벌써 두어 달쯤되나?"
  그녀의 신상에 관해서도 묻고 싶었지만 성희는  그만두기로 했다. 자신이 문제
삼아야 할 사람은 남편이지 그녀 쪽이 아니란  의식 때문이었다. 집을 나설 때는 
그 여자를 어찌  됐든 만나보자 하는 욕망이 강했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겠다
는 것인가? 실상  그 점이 모호했던 것이다.  좀전까지만 해도 그랬었다. 당신이 
바라는 것도  그의 생각과 같은가? 최소한  그것만이라도 만나서 확인하고 싶었
다. 그러나 그 일 또한 부질없기로는 마찬가지라고 성희는 생각하였다.
  "신경 쓸 게 못돼.  그거 다 지나간 일이라구. 내가 판단하기에 별일도 아니었
다. 남서방 그 위인,  괜히 심통 부리는 거뿐이야. 내가 장담해도 좋아. 내버려두
면 금시 말짱해질 위인인 게야..."
  늙은 형부는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말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았지만  성희의 마음엔 정작  아무 말도 와닿지  않았다. 남편을 
불러줄 테니 오랜만에 바람이나  쐬고 들어가라는 권유를 마다하고 그녀는 일어
섰다. 올 대보다 마음이 더 무거웠다. 그 방을 물러나오기 전에 그녀는 마지막으
로 한 가지 더 물었다.
  "그 여자, 어느 부서에서 일했나요?"
  "그건 또 왜 묻나?"
  성희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려놓은 채 문밖으로 따라나오며 그가 머리를 절레절
레 저어 보였다.
  "그냥 궁금해서요. 어느 파트에서 근무했지요, 그 여자?"
  "내 비서실에서 일했다. 왜?"
  "얼마나요?"
  "글세, 서너 해쯤 되지 아마?"
  큰형부가 내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성희는 문득 한 가지 사
실을 깨달았다. 남편의 직장생활이, 그녀가 안방에서 막연히 생각하던 것보다 훨
씬 더 갈등의 농도가  심했으리라는 깨달음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또, 큰형부 쪽
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 남편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갈등임이 틀림없으리라는 사
실이었다. 하필이면 상대가  비서실의 여자였다는 점이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주
었다. 그 일은  일테면, 형부의, 면전에서 외치는  자기선언일 법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지금가지  거의 한번도 자기주장을 고집해  본 적이 없던 남편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큰형부의 그늘에  붙잡혀 있었던 그였다. 직장생활
만도 아니다. 가정에서조차도 그런 상태의 연장으로  느꼈을 법하다고 그녀는 생
각하였다. 그 자기의  영토에서 살겠노라는 선언인 것이다... 낯선  세계, 낯선 바
다 하나를 남편에게서 비로소 발견한 느낌이었다.
  와야 할 사람들이 대충 모인 것은  아홉시경이었다. 고향에서 시부모님이 상경
하셨고, 서울에서  사는 시동생 부부와 대학생인  막내 시동생. 거기다가 그녀의 
네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앉은 가족회의였다.
  이 모임을 주선한  사람은 물론 성희였다. 남편 기주만 떨더름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을  뿐, 오랜만의 만남이어서  다들 웃고 떠들며  유쾌하게 저녁식사를 
마쳤다. 본론을 꺼낸 것은 차와 과일을 내  온 후였다. 그녀는, 남편 기주가 이혼
을 제기한 사실을 말하고, 그 이유란 다른  여자가 생긴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설
명하였다. 한때  같은 직장 여자로서 두어  달 전에 여자 쪽이  먼저 권고사직을 
당했으며, 이제는 남편 기주  쪽도 사직서를 내놓은 상태라는 것까지 밝혔다. 화
기애애하던 분위기가 급전직하로 냉각되었다. 아무도 쉬 입을 열지 못하였다.
  침묵을 깨뜨리고 맨  처음 입을 뗀 사람은 시어머니였다. 그러나  간신히 뱉어
놓은 말은 간단했다.
  "애비야, 그 말이 다 사실이냐?"
  남편이, 그나마 한참 만에야 머리를 주억거렸다. 경악과 술렁거림이 잠시 지나
갔다. 두 번째는 시아버지였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어디 네 녀석 말 좀 들어보자."
  어떤 격정 때문에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여기저기서 말문이 터졌
다.
  "전 무슨 얘긴지... 너무너무 엉뚱해서..."
  "그래요 형님 말 한번 들어봅시다. 이거 뭐가 어떻게 된 얘깁니까?"
  "암만... 속시원히 얘기라도 해야지."
  남편 기주가 그제서야 번쩍 얼굴을 치켜 들었다.  스스로는 이미 결단이 선 모
양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어눌진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
한 어조로 말하였다.
  "죄송합니다. 먼저 부모님께 면목이 없구먼요.  못난 놈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
리고 또, 동생들과 애들 앞에 부끄럽기도  합니다. 제 결심만 밝혀두겠습니다. 어
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릴 생
각일랑 마십시오. 그뿐입니다..."
  남편의 태도는 오히려 당당하였다. 면목없고 부끄러운 것도 진심이지만, 또 자
기주장도 멋지않게 진실이라는, 말하자면 확신에 차 있는 듯한 태도였다. 성희에
게 그것은 참으로 낯선 모습이었다. 근 20년  가까운 세월 중에 그처럼 자기주장
이 분명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되었다. 매사  소극적이고 그 순응주의적이던 그에
게서 진작 저런 모습을 찾아냈어야 옳았다고, 그녀는 아프게 자성하였다.
  "에미야, 이 일을 어쩌면 좋을꼬?"
  시어머니가 치맛귀를 싸잡으며 며느리  앞에서 전전긍긍하였다. 시아버지는 목
을 외로 꼰 채 담배만 빨았다. 아들들은  둘씩이나 장가들이고도 여전히 시골 살
림에 절어 있는 두 노인네가  이날따라 한정 없이 초라해보여 성희는 마음이 아
팠다. 지금까지 그저 오직 내  식구 사는 것만 생각의 전부였다. 이제 무슨 염치
로 이분들을 끌어들였는가...
  "저야말로 면목이 없어요"라고,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다. 니가 무슨 잘
못이냐고, 시어머니가 기어이  치맛귀를 눈으로 가져갔다. 담담한 어조로 그녀는 
말하였다.
  "제 가정 하나 지키지 못하고 보니  정말 부끄럽고 죄송스러워요. 저로선 따로 
드릴 말씀이 없구요, 다만 저이 원대로 하되,  절대로 이 가정을 갤 수는 없어요, 
원하면 그 여자한테로 조용히 가세요, 말리지 않겠어요..."
  옳거니, 하고 제일 먼저 찬성하고 나선 사람도 시어머니였다. 그러기로 한다면
야 당신의 입장에서는  잃어버릴 것이 하나도 없기도 하였다. 덤으로  며느리 하
나를 더 얻은 꼴이랄까... 대체  그런 수가 있었더냐는 듯이, 목을 외로 꼰 채 담
배만 빨아당기던 시아버지도 흰머리를 주억주억 하였다.
  "그럴 순  없어요"라고, 단단히 반대하고 나선  이는 동서였다. 그녀는  바람난 
아주버니도 그렇지만  그렇게 슬쩍 묵인하고 넘어가려는  시부모가 더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차마 그쪽으로 대들 수는 없으니까 성희에게 다잡아 말하였다.
  "형님, 지금 무슨 말씀 하는 거예요? 난 가정을 붙들고 있을 테니 그 여자한테
로 가라고요? 아니, 지금이 무슨 세상인데 그래요? 아니, 형님이 뭐가 못나서 그
러고 살아요. 글세? 안될  일이에요. 절대루! 양보할 일 따로 있고 눈감고  살 게 
따로 있지. 어찌 가당키나 해요, 그런 짓이?"
  여기에 두 시동생이 가세하고 나서서 장형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특히 성희
가 평소  다독거려주기를 좋아했던 막내 시동생은  대학생답게 형의 부도덕성을 
인격에 걸어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그 여자와의 관계는 당장 청산하세요. 외람되게 말씀드립니다만, 형님은  이제 
모든 것에 대해  책임감을 가장 소중히 해야  할 나이세요. 가정에 대해, 가문에 
대해, 이웃과  직장과 사회에 대해 닥  부러지게 지키고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단 
말이에요. 자기를  주장할 때는 이미 지난  거예요. 20대 아니,  30대이기만 해도 
이해하겠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어쩌자는 거예요? 지각 있는  분이라면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라구요. 당장 청산하세요..."
  남편 기주는 그 준열한  논고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입을  국 다문 그는 
눈마저 감은 채 끝까지 대꾸 한마디 없었다. 분위기가 숙연하였다. 단지 그 때문
이었는지 모른다. 지금가지 말 한마디 없이  뒷전에 앉아 쿨적거리기만 하던 중3
짜리 딸애가 돌연 외치듯이 선언하였다.
  "아빨 너무 욕하지 마세요.  그게 왜 나빠요? 그 여잘 더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전 생각해요."
  그렇게 선언한 다음 그 애는 제 어미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성희로서는 가
장 가슴 뭉클했던 순간이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 기주는 보통때처럼 집을  나섰다. 역시 딸애와 함께였다. 그
러나 그의 손에는, 전에  없이 커다란 가방이 하나 들려 있어  좀 긴 출장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성희는 베란다 창 너머로  그들 부녀
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선 급한 대로  구린 가방의 품목을 그녀는 곰곰 
헤아려보는 중이었다.

    빈 강
  긴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는  한동안 이부자리 속에  뭉기적거리고 있었다. 
훼방꾼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물론 아내의 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방 둘
에 부엌  겸용의 거실 하나가 거의  전부인, 열다섯 평짜리 아파트  안에는 지금 
혼자뿐임이 분명하였다.
  몇시나 된  건가? 그게 좀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나 굳이  확인하는 수고가지 
치르고 싶진 않았다. 열시나 열한시-대충 그쯤일 테지 뭐, 하고 그는 치부해두었
다. 그보다는 조금 이르거나 혹은  더 늦다고 해서 문제될 게 뭔가. 오늘은 휴일
인 것이다. 게다가 식구들마저  출타하고 없지 않는가. 만판 게으름을 부려도 좋
을, 최근들어 드물게  가져보는 기회라고 그는 느긋해하였다.  여섯시에 기상, 일
곱시면 5층 아파트  계단을 허둥거리며 내려가야 하는 일상이었다.  도무지 변함
없는 봄,여름,가을,겨울... 아니다. 변함이 없는 건 계절 쪽이 아니라 내 쪽인 것이
다, 하고 그는  생각을 수정하였다. 휴일 도한 그다지 예외가  못되었다. 그런 날 
아침이면 아이녀석들이 유독  부산을 떨었고, 그것을 다스려야  마땅한 아내마저 
은근히 녀석들을 방조 내지 사주하곤 했던 것이다.
  그는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토한 다음 다시  모로 돌아누웠다. 골이 좀 흔들리
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과음했던 것  같다. 이러다가는 정말 초상나
지, 누군가 뼈드러지는 꼴 보구야  말아, 어쩌구 해가면서 3찬지 4찬지 간 게 이
미 자정을 훌쩍  넘은 때였으니 그곳을 거쳐  집으로 기어든 시간이야 따져보나 
마나다. 하루종일이라도-만약에  저 훼방꾼들만 나타나지 않는다면-이부자리  속
에서 뭉개고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원  없이 한번 푸짐하게 늘어져 있어보
자. 가랑이 사이에다 가볍고 부드러운 캐시밀론  이불을 푹신하게 끼워넣은 다음 
가장 편안한 자세로 사지를 내던지고 누운 그는 다시 아득해지는 졸음기 속에서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어디로들 갔지? 몽롱하게  그는 생각했
다. 기왕이면 좀 먼 곳으로 출타했기를, 그래서 되도록이면 늦게늦게 돌아오기를 
그는 소망하고 웃었다. 거의 행복감에 가까운 그런  기분으로 그는 한차례 더 잠
에 빠져들었다.
  두번째의 잠에서 그가  개어난 것은 오직 배고픔 때문이었다. 그의  잠을 방해
할 만한 다른 이유란 없었다.  식구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몇시쯤 됐나? 꽤
나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음이 분명하였다. 허기가  잠속으로 틈입하여 한바탕 과
식하는 꿈을 꾸게 하더니 필경엔 그 푸짐하고 달콤하던 잠들을 말짱 쫓아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래저래 서운한 마음이었다. 잠은 더 이상 이룰 수 없으리라 판단
되었다. 몇  끼를 거른 건가. 공복감이  지나쳐서 위가 숫제  쓰리기까지 하였다. 
그놈의 탐욕스런 위가 드디어는 제 속살을  소화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밥통에 구멍이 날지도 모를 노릇이다. 이젠 슬슬 일어나서, 그
놈의 게걸스런 주머니에다 아무거나 좀 채워넣자, 하고 그는 작정하였다.
  동서남북 아무렇게나  내던져두었던 사지들을 대강 추슬러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너무 오랫동안  드러누워 있었던 탓이리라. 관절들이 죄다 삐걱거
리는 소리들을 내고, 그리고 현기증이 흥분처럼  그를 잠시 사로잡기까지 하였다 
최초로 직립보행을 시도했던 치는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그 방정맞은 원시인 덕
분에 짊어지게 된 문명의 무게 같은 걸 우선 힘겹게 의식하면서 그는 안경을 찾
아 쓰고  거실로 나갔다.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았다. 우유팩이 눈에 띄었으므로 
우선 그것부터 꺼내 들었다.  야채통에서 당근 한 개를 집어냈다. 그리고는 빨대
로 천천히 우유를 마시고 또  당근을 와작와작 씹으면서 그는 아주 한가로운 마
음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아파트 건물들, 줄줄이 
세워둔 자동차들, 누렇게  마른 잔디와 여기저기 헐벗은 모습으로 서  있는 나무
들, 그리고 무엇보다, 맑고  투명한 하늘... 약간 춥고 쓸쓸하게 느껴지기는 해도, 
그러나 햇빛 밝은 오후의,  더없이 평화로운 풍경이 거기 있었다. 번쇄한 일상중
에서도 어쩌다  이런 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고, 그는 
새삼 감동스럽기조차 하였다.  열심히 우유를 들이키고 아싹아싹  당근을 씹어대
면서 그는  인생이란 이래서 그럭저럭  살아지는 거여, 라고  내심 중얼대기까지 
하였다.
  그런 어느 순간의 일이었다. 돌연 일체의 동작을 그는 딱 멈추고 말았다. 스스
로 멈추었다기보다, 어느 순간에 그만 얼어붙어버린 것이었다. 일직이 경험한 적
이 없는, 무섭고 엄청난 어떤 예감 대문이었다. 흡사 고압의 전류에 닿은 것처럼 
그는 한동안 뻣뻣이 굳어있었다.
  한참 만에야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이 또렷하게 지각되었다. 정지- 그랬다. 세상
이 온통 죽은 듯이 정지해 있음을 그는  깨달은 것이었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눈
에 띄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안은 물론이고, 그 바깥  큰길 쪽도 마찬가지였다. 
밤낮없이 꼬리를 있곤 하던 차량의 행렬이 둑 끊어진 채였다. 어인 셈인지, 한참
을 눈 주고 있었지만 차는  고사하고 자전거 한 대 굴러가는 꼴을 볼 수가 없었
다. 그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단지 안 이 구석 저 구석을 둘러보았다. 역시 
동일한 상태였다. 놀랍게도 단 한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보도 위
에서도, 잔디 위나 나무  아래 벤치에서도, 심지어는 언제나 아이들이 꼬이곤 하
던 어린이 놀이터에서도...  그랬다. 정지만이 아닌, 세상이 온통  비어 있다는 사
실을 그는 또 깨달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람? 기이한 사실 앞에서  그는 멍해졌다. 민방공 훈련날
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 것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달력  쪽으로 눈을 주
다 말고, 휴일에도 그런 걸 하나 하고 자문하였다. 그런 적은 없었다고 생각되었
다. 그러나  혹시 하는 생각에서 텔레비전을  켜보았다. 잠시 기다렸지만 화면엔 
아무 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채널을 좌우로 바꿔보았다.  마찬가지였다. 화
면엔 메마른  눈송이들만 온통 부얼부얼했다. 볼륨을  높였다. 저 귀익은 목소리 
대신, 신경을 긁는 잡음만  홍수처럼 쏟아져나왔다. 텔레비전을 끈 다음 그는 그 
앞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은 채 곰곰 생각에  잠겼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게 분명해, 하고 그는 중얼댔다. 세상  쪽이든지, 아니면 내 쪽이든지... 가만있자, 
오늘은, 그래 2월 첫주야. 틀림없어. 그는  차근차근 따져나갔다. 그리고 휴일, 그
래 일요일이지, 그게 아니라면 진작 출근했어야지. 어찌 게으름을 필 수 있단 말
인가? 그렇다면 텔레비전을 왜 이래?
  그는 또 한번  스위치를 넣어보았다. 마찬가지였다. 그림은 없이,  화면 가득히 
백설만 분분할 따름이었다. 고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하기사 들
인 지  이미 대여섯 해가 넘는  구닥다리였다. 최근에는 상이 잘  잡히지 않거나 
더러 뒤틀리기도  했었다. 제꺽 갈아치우지  못한 가계 사정을  새삼 아쉬워하며 
그는 이번에는 카세트라디오를  켜보았다. 어쩌자고 그쪽도 똑같은  조화 속이었
다. 기계가, 그나마 보이지 않는 기계들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내는 듯한 저 이상
한 바람소리만 쉬익쉬익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조그마한 다이얼을 열심히 작
동해보았다. 허망했다.  FM, AM 어느쪽으로든, 질서  있는 소리를 잡아낼  수가 
없었다. 방송국 쪽에 특별한  사정이 생긴 게 아니라면, 이놈의 라디오가 문제임
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지상의 모든 방송국들이 죄다 침묵을 지켜야 
할 만큼 별난 사정이 생긴 것이라고 믿기보다는,  이 라디오 내부의 복잡한 회로 
중 한 가닥이 툭 끊어진 결과라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현명하지 않을까? 그러므
로, 이놈의 라디오도 때맞춰  고장이 난 것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그러자 그만 
맥이 풀렸다. 엄청난 무기력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허물어지듯이 벌렁 드러
누워버렸다.
  텔레비전이 고장이다. 정말  고장인가? 카세트라디오도 고장이다. 하필이면 동
시에, 정말 그것도  고장인가? 좀 낡긴 했지만 둘  다 그럭저럭 쓸 만은 했었다. 
그랬는데 어째 갑자기 고장인가? 그나마 약속이나 한 덧이 동시에 말이다.
  낡은 천장이 거기 있었다. 눈에 익은 일상의 한구석이다. 사면벽을 그는 또 둘
러보았다. 거기 벽지도 꽤나 낡았다. 올 봄엔 아무래도 새로 도배를 해얄까 보다
고 하던 아내의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눈에 익은 몇 점의 가구들, 장식품 
서너 가지, 캘린더의 그림까지도 일상의 모습, 일상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무엇을 의심하랴? 세상은 견고하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문제가 발생했다
면 그것은 내 쪽일 확률이 높다. 애꿎게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따위를 탓할 일이 
아닌 것이다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튕기듯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옷을 
대강 꿰기가 바쁘게 아파트를 나섰다.
  그는 단지 안을  한바탕 기웃거리고 다녔다.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눈에 띄
지 않았다. 서민 아파트 단지여서 아이들이 지겹게 많았었다. 밤낮없이 극성스럽
게 소란을 피우며 몰려다니던 그 많은 아이들이 죄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가
까운 공터며 놀이터들이 텅텅 빈 체였다.  어린이용 자전거들이 여기저기 나뒹굴
고 있었다. 상가나 슈퍼마켓은 문은 열어둔 채  정작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갑작스런 사태 대문에 모두 잠시 대피한 것 같은 광경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곧 나타날지도 모르리란  기대를 가지고 그는 상가 안을 서성거리고  다녔다. 아
내와 함께 도는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이따금씩 드나들던 곳에 서서 낯익은 가
게주인들도 없지 않았다. 예컨대  문방구의 작고 똥똥한 대머리 사내, 일란성 쌍
둥이처럼 똑닮은 제과점 자매, 거의 언제나 술  냄새를 풍기는 입에 담배가 물려 
있지 않을 대가 없는 생선가게  주인 등이 말하자면 그가 기억하고 있는 얼굴들
이었다. 그래서 특히  그 가게들 앞에서는 한참씩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장보러 
나온 사람처럼  이것저것 만져보기도 하였다.  반드시 지키고 있어야  할 주인이 
부재중이라는 점 외에  이상은 없었다. 문방구의 진열장은  질서정연하고 유리는 
잘 닦여져서  주인의 머리보다 더  반들거렸다. 제과점의 옥수수식빵은  이제 막 
구워낸 것처럼 부드러웠고, 생선가게 좌판 위의  고기들도 때갈이 그런대로 좋았
다. 그는 자신이 썩 영리한 사람이라고 자처한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정도 이하
로 우둔하다고 비관한 적 또한 없었다. 자신이  믿는 바 평균치의 머리로는 도무
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임이 분명하였다.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을-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머물렀는지도 모른다-얼쩡거리며  기다려보았지만 누구 한 사람 제자리
고 돌아오지 않았다.
  이놈의 세상이 정말  어떻게 되기라도 했나? 상가를 등지고  선 채 그는 잠깐 
심각해졌다. 혹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는 자신의  볼을 슬쩍 꼬집어보
았다. 감각은 에누리가 없었다.  그는 낯선 세상에 온 이방인처럼 주위를 뚤레뚤
레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모든 물상이 다  익숙한 저 일상의 그것들임이 분명하
였다. 이거 참  환장할 노릇이군, 하고 그는 투덜거렸다. 그때  불쑥 친구의 가정
이 생각났다. 그는 방향을 정하고, 그러나 그다지 서둘 것은 없다는 듯이 스적스
적 걸어갔다.
  친구네는 5층에 살았다.  계단을 한 층씩 오를 때마다 그는  잠깐씩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보곤 했지만  닫힌 도어 너머에서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하기야 
그놈의 두터운 철문은 언제나 모든  것을 차단한 채 견고하게 닫혀 있게 마련이
었다. 그 너머에서 살인이 난들 누가 알랴. 5층 도어 앞에서 그는 잠시 긴장하였
다. 이런 날이면 대체로 제 구멍 안에 박혀 있곤 하던 친구였다. 어쩌면 그 친구
가 부스스한 낯짝을 불쑥 내밀 것 같은 기대로 차임벨을 누르는 그의 손이 떨리
기까지 하였다.
  딩동... 딩동... 기대와는  달리 반응은 없었다. 안으로부터  몹시 공허한 울림이 
들려올 따름이었다. 그는  도어의 손잡이를 가만히 비틀어보았다. 뜻밖에도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제집처럼 스스럼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고는 소리쳤다. 신형, 신형 없어? 짬을 두었다는  그는 또 외쳤다. 얘, 철희야, 경
아야, 아무도 없니?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는 마루로  성큼 올라섰다. 거실과 주방이 
한눈에 들어왔으나 어느쪽에도 그들 가족의 모습은  없었다. 안방과 작은방 문에 
반쯤씩 열려 있었는데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화장실과 다용도실, 그리고 베란다
까지 그는 기웃거렸다. 친구는 물론,  그 가족 중 누구도 집 안에서는 찾아낼 수
가 없었다.  여주인의 수더분한 성품대로  적당히 정돈되고 똑  적당히 어질러진 
실내를 그는 찬찬히  점검해보았다. 거실 바닥엔 몇 개의 플라스틱  장난감과 함
께 읽다가  엎어놓은 듯한 잡지책이 있었다.  제호를 금박으로 찍은 여성지였다. 
베란다에는 잘 세탁된  빨래감들이 만국기처럼 걸려 있었다.  실내구조가 똑같은 
서민 아파트다. 일상과 다른 낌새는커녕 남의  집이라는 느낌조차 희미할 지경이
었다.
  그곳을 나서기 전에 그는 거실의 텔레비전을  켜보았다. 16인치자리인 그 수상
기는-그도 잘 알고 있듯이-들인 지 불과 서너달밖에 안되는  신품이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화면상태는  마찬가지였다. 채널을 이리저리 바꿔보았지만  상은 전
혀 잡히지 않았다.  이거 참 웃기는 일이구먼, 하고 그는  중얼댔다. 그러나 웃음
은 없었다. 5층 계단을 천천히 내려온 그는,  상가 앞에서 그랬듯이, 현관을 등지
고 한동안을 멍청하게 서 있었다.
  방향 없이  지척지척 걷다가  이번에는 공중전화부스를 발견했다.  시외통화를 
할 대 간혹 이용하던 곳이었다. 아내의 산술에  의하면 안방 전화보다 훨씬 싸게 
먹힌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그 극성 덕분에 얼마나  부자가 된 건가를 문득 자문
해보며 그는 호주머니를 뒤져 동전들을 있는 대로  죄다 끄집어냈다. 몇 종의 주
화들이, 버스  토큰까지 뒤섞인 채 집혀나왔다.  그는 전화통에다 동전을 투입한 
다음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숫자들을 또박또박 눌렀다. 곧  발신음이 보이지 
않는 저쪽에서 따르릉  따르릉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귀를 기울인  채 긴장하였
다.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목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대 때문이었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그러나 마냥 기다려도 응답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
다. 그만 포기하고,  그는 다른 숫자들을 눌렀다.  좀 서둘렀던 모양이다. 번호가 
헷갈렸으므로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곧 호출음이  울려오기 시작하였
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무한정 귀기울이고 있노라니 그 소리는 무척이나 삭
막하고 적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따르릉 하고 울리는, 그 소리의 한 사이클을 
인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충분할 만큼씩  참고 기다린 다음 다시 다
른 숫자들을 누르곤 하였다.
  단 한 군데도  통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필경엔 전화안내 번호며  화재나 범
죄신고 번호까지 시도했지만  소득은 전혀 없었다. 이로 미루어 아파트  밖의 세
계도 동일한 상황임이  확실해졌음을 따름이었다. 어디에도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는 맥이 좀 빠진 채 전화부스에서 물러났다.
  거리는 여전히 텅  빈 채였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도무지  구경할 수가 
없었다. 명백히 이해를 넘어선 어떤 사태 앞에  직면해 있음을 부인할 여지가 없
었다. 그는  길가에 털썩 퍼질러 앉았다.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 
엄청난 변을, 그것도 혼자서 당하다니...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끔찍한 
노릇이었다.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지금까니는 곁에 늘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이
거나 친구거나 친척이거나 하다못해 낯선  구경꾼이라도... 누군가가 언제나 곁에 
있다는 사실의 무게를 그는 비로소 실감하였다.  인간이니 사해동포니 인류니 하
는 따위의 추상적인 말들조차도 그 순간만은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가슴에 다가
오는 듯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인 것이다. 이 엄청난 세계의 변모 앞에 혈혈단
신으로 서 있는 게  아닌가. 이거야말로 서서히 미칠 일이라고 그는 투덜거렸다. 
그러자 까마득한 기억 한 가지가 떠올랐다.
  아마 열 살  미만의 어린 시절이었을 게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던 중이었
다. 놀이에 너무 열중했던 탓으로 해가 지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마침 술래
가 된 그가  한참만에 눈을 떴을 때  갑자기 어둡고 텅 빈 세계가  거기 있었다. 
골목길은 그  끝간데까지 붉은 어둠이 내려  깔리고 있고, 늘 보던  그 산천이며 
하늘은 전혀 낯선  모습을 박모의 허공 속에 슬며시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디에 숨었을까?  알 수 없는 무섬증이  돌연 그를 사로잡았다.  그들이 가까운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는  사실이 갑자기 의심스러워졌다. 나만  남겨놓고 다들 
집으로 가버린 건 아닐까? 그는 아이들의 이름을  번갈아 불러보았다. 대답이 있
을 리가 없었다. 의심만 더 커지고, 그럴수록 세계가 더 낯설어졌다. 나, 술래 안
해, 그만할 거야. 다들  나와, 너네들 빨리 나오란 말야. 그는  마구 소리쳤다. 그
래도 마찬가지였다. 텅 빈 하늘 아래 겁에  질린 목소리만 터무니없이 커다란 울
림을 남겼을  따름이었다. 마침내 그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때서야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 하나씩 나타났었다.
  어쩌면 지금의 이 상황, 이 기분이 그때와  흡사하지 않을까 하고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건 속임수야.  멀쩡하게 속고 있는 거라구... 그는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말하자면 오버 센스구  착각인 게지. 무단히 헛것을 보는 거란 말이
야... 그랬다. 꼭 그 때의 그 기분처럼,  두려움과 소외감과 어떤 배반감이 자꾸만 
무겁게 쌓이는 듯하였다.  이러다가는, 저 어린 시절처럼,  필경 울음보를 터뜨리
지나 않을까 은근히 염려스러웠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팽개쳐둔  자전거를 그는 다시 보았다. 처음 본  상태 그대
로였다. 두 대가 다  어린이용이긴 해도 그중 하나는 그런대로 성인이  탈 수 있
을 만큼 크고 튼튼하였다. 자전거를 타본지가 참  오래란 생각을 하면서 그는 그
쪽을 일으켜세웠다. 조금은 장난스런 기분인 채 올라앉았다. 약간 불편하긴 해도 
굴러갈 수는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는 꽤나 우스꽝스런 자세로 그것을  타고 단
지 안을 비틀비틀 돌아다녔다.
  새로운 발견은  없었다. 단지 중앙의 관리사무소,  그 옆의 경로당,  몇 군데의 
학원, 단지 외곽의  방범초소 등도 빈 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지 사람만 눈
에 띄지 않을 뿐 일상적 풍경 그대로였다. 일테면, 경로당에선 무슨 잔치를 가졌
던 양, 할머니  방과 할아버지 방 사이의 간이주방이 빈  그릇이며 음식찌꺼기들
로 괘나  지저분하였다. 사구려 비닐장판이 깔린  방바닥 여기저기엔 목침, 화투
장, 장기알과 바둑판  등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어서 그곳 주인들의  일상을 족히 
연상하게 했다. 언젠가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무슨 잔치 끝이었던 듯 거나
하게 술 취한 할아버지 할머니  몇 분이 어울려 기묘한 가락의 노래판을 벌이고 
있었다. 무슨 가락을 담았으므로  분명 노래이기는 할 텐데, 그러나 아무리 분별
해보려고 해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창인가 싶으면 유행가 같고, 유행가인가 보
다 싶으면 시조 같은 그런 것을, 그나마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이쪽저쪽에서 중
구난방으로 불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분별하자면  동요에 가깝다는 것이 그
때의 결론이었다. 어쨌든, 그 소리들은 정체가 모호한 대신 실로 묘한 감동을 자
아내게 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제  어디로들 가신 
건가? 피아노학원이 들어 있는  건물 외벽에는 원생 모집 현수막이 길게 늘어져
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최근에 그것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기억해
냈다. 뿐만 아니라, 첫째아이 녀석을 올 봄부터 거기 들여보내야 할까 보다던 아
내의 말도 기억난다.  하지만 이젠 틀려버린 게 아닌가고 그는  조금 아쉬워하였
다. 이놈의 세상이  탈이 나도 몹시 나버린  듯싶단 말이야, 하고 그는 중얼거렸
다.
  아내와 두  아이들의 얼굴을 그려보자 마음이  울적해졌다. 잘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하고 그는 후회하였다-깨끗이 낮잠을  포기하고 공원이나 산이라도 찾
아나설걸... 그들이 얼마나 신바람 나 했을 것인가.
  단지 입구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선 채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용기를 
내어 페달을 밟았다. 가는  데까지 갔다가 돌아올 작정이었다. 차도로 나서자 뭔
가 후련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움직이는 아무 물체도 없었다. 그 큰길은 텅 빈 
채였다. 그 길이 그처럼 넓고 반듯하게 뚫어진  대로라는 사실을 그는 비로소 실
감하였다. 평소엔 차량의 홍수를  이루던 그 길을, 그는 조그마한 어린이용 자전
거에 억지로 체중을  실은 채 그나마 서툰 솜씨로 삐뚤삐뚤  전진하였다. 그러나 
형언키 어려운 어떤  감정이 잠시 그의 마음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것은 모호하
고 불투명한 대로, 어쩌면  회한 같고 도 어쩌면 해방감 같은  그런 것이라고 그
는 생각하였다.
  거리 풍경도 아파트의 그것과 흡사하였다. 셔터를  내린 건물들도 없지 않으나 
대부분의 가게들은  개점 상태였다. 문을 열어둔  채인 금은방도 눈에 띄었지만, 
그러나 그 사실이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신문 가판대에는 조간지가  버젓이 기
여 있었다. 자전거에 올라 앉은 채 한 부를 뽑아 들고 대충 넘겨 보았다. 새로운 
뉴스란 별 게 없었다. 특히 정치면과 사회면의  주요 기사들은 어제 석간에서 이
미 읽은 내용이었다. 허위에  가득 찬 정객들의 말잔치와, 엊그제 발생했던 어처
구니없는 대형사고의 뒷얘기,  게다가 강력사건 몇 건-대충 그런  것으로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신문지를  내던지고 다시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뉴스의 시
각으로 말한다면,  적어도 저 조간신문이  제작,배포되던 시각까지는  이상 없음, 
이 세상은 여전히  결정적인 파탄 없이 잘 굴러가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안팎의 
온갖 말세적  증후군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세계는 아직도  견고하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네거리의 신호등들은 대부분  작동중이었다. 하등 그럴 필요야  없었지만 그는 
별 의식  없이 지시에 따랐다. 그편이  자연스러웠다. 얼마나 달려왔는지 다리가 
팍팍하였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확인하였다. 글세, 버스노선으로 따져  몇 정거
장쯤이나 될까? 고작  대여섯 정거장쯤 왔다고 생각되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의 
출퇴근 코스를 따라온 셈이었다.  기왕이면 그 코스의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거
기, 최근 대여섯 해 동안  끈기 있게 매달려온 직장이 있을 것이었다. 오늘이 휴
일이고, 게다가  어제 일직당번을 확인한  대로라면 총무과 김씨가  빈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도대체 몇  정거장이나 된단 말인가? 헤
아려보기조차도 아득하였다.
  다시 한참을 가다  보니 자전거가 거추장스러웠다. 그는 미련 없이  그것을 내
던져버리고 이번에는 두 발로 스적스적 걷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편이 홀가분하
였다. 그러나 정말 직장이 있는 곳까지-저 도시  한복판가지 걸어갈 수 있을는지
는 미지수였다. 러시아워의  혼잡 속에서는 버스로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리
곤 하던 거리였다.  그쪽의 풍경은 어떨까? 인간이 떠나버린 도시-미상불  그 꼴
이 몹시 궁금하기는 했다. 일과중 정 따분하고  심란할 때면 숫제 의자를 돌려놓
고 한참씩 내다보곤  하던 그 고층빌딩들, 무수히 많은 창마다  어른거리던 사람
들, 저 아래 좁은 길바닥을  뒤덮은 채 물줄기를 이루고 있는, 흡사 갑충들 같은 
차량의 이동, 보도 위에 형형색색의 점으로 고물거리는 행인들의 모습... 그런 광
경들을 그는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비서실의 미스 차가 어느 날  근무중에 느닷
없이 뛰어내린 것도  어쩌면 그런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 앞에서는  우리의 감
각기관들이 왜 그렇게 속절없이 멍청해지고 마는지,  도 그놈의 무력감은 근거도 
구체성도 없이 우리의 마음을  여지없이 짜부라뜨리고 영 비참한 기분만 남기는
지 도무지 알 재간이 없다고 그는 머리를  내저었다. 실인즉 가시적인 게 문제가 
아니라 전혀 비가시적인 데에  원인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새삼스레 그는 생각하
였다. 비유컨대 더러운 공기 같은 어떤 것 말이다. 우리의 도시가 뿜어내는 온갖 
독가스 같은 것들이 그 공기중에  희석돼 있다가 때로는 그 같은 반응을 일으키
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어쨌든 가는 데까지 가보는 거지 뭐. 그는 스스로에게 일러두었다. 구멍가게가 
눈에 띄었다. 그러자 갈증이 느껴졌다.  그는 음료수와 빵 한 개를 고른 다음 동
전을 몇 개 꺼내놓았다.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는 마시고 씹고 하면서 다시 스
적스적 걸어갔다.
  긴 다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다리는, 도시의 외곽을 감사고 돌며 폭넓게 흐
르고 있는 강 위를 남북으로 가로지른, 최소한  스무개도 넘는 대교들 중의 하나
였다. 출퇴근 때마다 차창 너머로 내다보곤 하던  그 다리 위를 혼자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다리 상태를 점검하러 나오기
라도 한 것처럼 우정 걸음을 늦추고 이모저모  유심히 살폈다. 폭이 우선 대단하
였다. 그가 대충 헤아려본 바로는 마흔 걸음이 넘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는 너무 아득하여 단숨에 주파하자면 꽤나 숨이  찰 듯싶었고, 난간을 이루고 있
는 석질은 여인의  살결처럼 희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실
감나는 것은 그 거대한 기하하적 구조이며, 발바닥을  통해 거역할 수 없는 강한 
힘으로 전해져오는  그것의 견고성이었다. 비로소  다리의 실체를 보고  느낀 것 
같았다. 일상의 의식은  얼마나 모호했던가. 날마다 지나다니면서도 다리에 대해 
각별한 의식은 없었다. 특히 만원버스에 실려 이  지점을 지나갈 때면 유독 다리
가 길고, 그래서 지겹게만 느껴지곤 했음을  그는 기억하였다. 길다, 그래서 지겨
운 곳이다-그밖에, 이 다리는 무엇이었던가? 어쩌면 자신의  일상적 세계란 온통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난간으로 다가갔다. 홍수 때나 한겨울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언제나 
변함없이 넉넉하던  흐름을 내려다볼 작정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리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한동안-그랬다, 참으로 한참 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두 눈만 꺼벅거리고 있었다.  눈앞의 현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강은,  비어 있었다. 빈 강... 강바닥엔 단 한 방울의 
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상류에서부터 저 아래쪽  하루까지 시선이 닿는 한 마찬
가지였다. 그런 상태가 얼마나 오랜 기간 지속  되어온 건지 모래와 먼지가 하상
을 두텁게 뒤덮고 있어 여린 바람에도 흙먼지를  결 따라 피워올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무슨  기억인가가 떠오를 것만 같아서였다.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경험을 
이미 가진  적 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 견고한  일상 속에서 
말이다... 마침내 분명한  기억 한 컷을 그는  찾아냈다. 그것은 인공위성이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중동의  사막지방을 잡은 것이라는 그 사진은 끝간데  없이 펼
쳐진 모래벌판뿐이었다. 그러나  아래쪽의 사진 설명대로 차근차근  뜯어보면 거
기, 이제는 두터운 모래층  아래에 깊이 매몰되어버린, 저 태고의 거대한 강줄기
가 흡사 인체의  대동맥처럼 도렷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한 대는  양안에 울창한 
원시림을 거느린 채 도도하면서도 유장한 흐름을 이루었을 그 강들...
  언제 어디서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까맣게  잊어버렸던 그대의 그 모호
했던 감정이 이제 빈 강  앞에서 엄청난 충격으로 되살아남을 그는 가슴 벅차게 
느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이해할  수조차 없지만, 그러나 그  세계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부인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조용히 그는 난간을 물러났
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짚어  천천히 발걸음을 옳겨놓기 시작하였
다. 어쩌면 모든 것-세계의 돌연한 변모를 이해할 것도 같고 도, 아주 오래 전서
부터 이런 사태를-설사  막연하게나마-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였다.  그가 
타고 왔던 예의  자전거는 버린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는  그것을 올라타기도 
하고 끌기도 하면서 아파트로 돌아왔다.
  몹시 지쳤던 모양이다.  내처 잠에 떨어졌던 그는 다음날 아침에야  간신히 온
전한 의식을 되찾았다. 누운  채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긴 잠의  중간에 단 한
번 개어난 적이 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그때의 느낌으로 오밤중이었음이 틀림
없었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  잠이 깬 것도 그 소리 
탓인 듯싶었다. 그는 잔뜩  귀를 기울였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들려오고 있
음이 분명한 그  소리는, 무슨 길짐승의,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가 
무리를 지어 다니며  내는 울음소리 같았다. 그러나 그 짐승의  종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난생 처음 들어보는, 저 원시림 속을 누비던 
종 미상의 짐승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흡사 먹이를 찾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작을 구하는  것 같기도 한 그 울음소리들은 단지  내 구석구석을 헤매
며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이불을 머리꼭대기가지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다시 잠을 청했던 것이다.
  평소보다 오히려 약간 이른 시각이었다. 침묵의 도시와  텅 빈 아파트 단지 위
로 붉은 햇살이 길게  퍼지고 있었다. 2월의 쌀쌀한 아침 날씨였다. 대충 식사를 
끝낸 그는 우선 단지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쓸 만한 성인용 자전거를 한 대 찾
아냈다. 그것은 요행히  2단 기어가 달린, 게다가  차체가 가볍고 날씬한 경주용 
사이클이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그는 판단하였다. 꽤나 멀리까지 나가볼 수 
있으리라. 그는 천천히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어쨌든 출근시간에 맞춰 직장까지 
가볼 작정이었다.

    성가신 죽음
  "김씨가 죽었어요"라고 아내가 말하였다. 그 말 한 마디를 내뱉기 위해 한나절 
내내 나의 귀가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어투는 다급하였다.
  나는 등뒤로 현관문을 닫았다.  아마도 내 몸무게의 서너 배는 될  법한 그 투
박한 문짝은 제 중량만큼의  소리를 내며 견고하게 닫혔다. 나는 돌아서서, 보조
용으로 부착한 것까지, 두  개의 자물쇠를 채우고 쇠줄걸이를 하였다. 무슨 엉뚱
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내일 아침  출근때까지는 여닫을 필요가 없으리라. 오늘
도 무사귀환, 바깥세계와의 통로는  당분간 폐쇄... 다시 돌아와서 느릿느릿 구두
를 벗어던지며 그제서야 나는 대꾸하였다.
  "김씨라니... 누구 얘기야?"
  "그 있잖아요, 수찬이네 아빠."
  아내의 음성은 약간 소프라노였다. "아, 우리 아래층 말예요."
  "응, 그 남자..."
  아내의 말이 비로소  나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우리 아래층이라면  204호를 가
리킨다. 그 집 사내가 마침내 죽었다는 소리다.
  "언제 죽었대"라고, 흡사 이웃집 강아지의 생사에 대해 묻고 있기라도 하듯 무
심하고 냉랭한 말투에 스스로 흠칫 놀랐다. 재빨리 나는 말을 바꾸었다.
  "그래, 운명한 건 언제래?"
  "아마 오후 두시나 세시쯤이었나 봐요. 해거름에 수찬이 엄말 은행에서 만났거
든요. 첫눈에도 몹시  심란한 얼굴이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죠.  그냥반 죽었어요, 
그러더라구요."
  아내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수다스러워지고 있었다. 음색조차도  약간 이상
하게 느껴졌다.
  "그 말이 어쩜 그렇게 쉽게 나올까요?  수찬이 엄마, 오늘 보니깐 확실히 머리
가 좀 이상한 여자더라구요. 언제 운명하신 거냐니까, 두어 시간쯤 됐다나요? 그
냥반이야 편하게 됐지  뭐, 어쩌구 하면서 혼자서 괜한  소릴 지껄여대더니-무슨 
변명이라도 하듯이 말예요-나중엔 뭐랬는지 아세요? 그 여자,  아주 심상한 얼굴
로 이러잖아요 글쎄. 사람 하나 내다 묻는 데도 비용이 꽤나 들 테지요?라고..."
  "그래"
  왠지 짜증스런 기분이  돌연 울컥 치밀었기 때문에  나의 대꾸는 은연중 곱지 
못하였다. "그럴 수도  있는 거니 뭐. 이미 죽은 사람이야  어쩔 도리 없는 거고, 
당장 장례비가 걱정인가 보지 뭐."
  "어머 당신두!"
  도무지 말 같잖은 소리라고 힐난하고 싶었으리라.  아내는 눈을 하얗게 치떠서 
흘겨보더니 팩 돌아서버렸다. 그제서야 이쪽의 기분을 눈치챈 것이다.
  아마 나는  좀 피곤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김씨의 죽음에  대해 유독 
신경질적인 반응을 드러낼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김씨란 누군가?  아파트촌 풍
속이 대체로 그렇듯이, 한  건물 한 구멍 안에 웅크리고 살면서도  백날 가야 피
차 인사 한번 제대로 닦을 기회가 없었던,  말하자면 김씨는 그런 이웃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뿐인가 그의 죽음  또한 조금도 놀랄 일이 못되는 게, 그는 이
미 여러 달째 위암과  씨름해온 시한부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들은 바로는, 
대학병원에서 한차례 수술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위를 열고 들여다본즉 
이미 손을 쓰고 자시고 할  여지가 없는 상태라 하릴없이 그대로 닫고 말았다는 
소문이었다. 고작 두 달 정도 살 수  있으리라던 병원측 선고에도 불구하고 환자
는 정작 그 세 배에 해당하는 여섯 달 가까이 연명했으니 사실인즉 엔간히 버티
어낸 셈이라고 해야 옳았다.
  그 이웃사촌 김씨가 드디어 눈을  감았다는 게 아내의 그토록 안달을 하며 나
에게 전하고자 하는 요지인지, 아니면 그 죽음  앞에서 보인 김씨 부인의 태도가 
도무지 맹랑하더라는 점을  내게 말하려는 건지 나로서는  요령부득이었다. 그야 
어쨌거나, 백번  생각해도 내가 상관할 바  아님은 분명하였다. 그런데도 짜증을 
내고 말이 곱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단지 나의 피곤에 있었을 게다. 사실 말이
지, 더 이상 서 있기가 힘겨울 정도로 무척 지쳐 있던 날이었다. 향용 그런 상태
이긴 하지만, 그날은 별스럽게 피로를 짙게 탔었던 모양이다.
  지쳐서 돌아온 날은 식탁  앞에서의 즐거움도 없다. 먹는 일에도, 대화에도 흥
미를 잃은  채 묵묵히 밥알을 씹다  말고 나는 문득 혼자서  머리를 주억거렸다. 
왜냐고 아내의 눈이 묻고 있었지만 나는 묵살하였다.  굳이 해명하고 말고 할 거
리가 못되었던 까닭이다. 실토하자면, 좀전에 계단을 올라오면서 나는 뭔가 이상
스런 냄새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게 바로 2층 상가에서 흘러
나온 향내란 사실을, 엉뚱하게도 그 순간에서야 문득 깨달아졌던 것이다. 그만큼 
둔한 탓인지 모른다. 아니면, 무관심인가? 밥알을  씹으며 나는 곰곰 따져보았다. 
글쎄, 그것만도  아닐 듯싶었다. 새삼스레 기억들을  떠올려보았다. 만원버스에서
의 하차, 대규모 아파트 단지, 잘 포장된 길들과 빨간 보도블록-천천히 어린이보
호구역, 627동  좌에서 두번째 구멍, 껌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는  계단들, 204호 
그리고 304호... 그랬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풍경, 똑같은 분위기였다. 일테면, 변
함없이 질서정연한 세계였으므로 새삼  나의 주의를 일깨울 여지가 없었던 것이
다.
  우리 627동 하나에도  40세대가 들어 있다. 이따금씩 고향마을을  떠올리고 나
는 야릇한 기분에 빠지곤  한다. 그럴 수밖에. 내가 태어나서 코흘리개 학동시절
을 보낸 그 마을은 가구수가 통틀어 결코 마흔을 넘지 못했었다. 거기 견주자면, 
우리 아파트 동 하나가  곧 마을인 셈이다. 그나마 이 정도는  우리가 사는 저층
의 경우고, 이웃한 고층아파트 쪽은 훨씬 더 엄청난 대비가 되리라. 어쩌면 웬만
한 동  하나에다 일개 면을 몽땅  소개시킬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에 
잠기다 보면,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숨통 막히도록 한곳에 몰려  더께더께 얼크
러져 살고 있는지  실감되는 것이다. 사람 사는 동네라면 으레  빚어지게 마련인 
온갖 세상잡사들이 여기라고  어찌 예외일 것인가. 엄청난 군서인 만큼  그에 값
할 정도로  온통 요란하고 시끌벅적하여 밤낮없이  구경거리가 벌어져야 옳으리
라. 하지만 외관상으로는 늘 평온무사한 일상의  연속임은 참으로 놀랍다고 하겠
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나는 항용, 아파트 단지 특유의 기하학적 공간을 떠올
리곤 한다. 환경조건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내면의식을 잘 상징
하고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마당도 울타리도 없이  껴붙어 살수
록 자신의 삶이  자칫 남의 영역으로 넘나드는 실수를 피차  경계함이 마땅하다. 
다시 말해 누구든  개인적인 삶의 결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 
일은 교양 부족이며, 촌스럽기조차  하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삶은 모두 닫힌 문 
안에서 이루어진다. 벽  한 겹 살짝 너머에는  이웃의 삶이 있는 것이다. 소리도 
냄새도 기분까지도 그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할 것-아마도 이것이 우리
의 절대적인 규범일 터이다.
  아파트 촌 풍속은 나름대로  근거하는 바가 있으므로 주민이라면 누구든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평소의 내 생각이다. 예컨대, 주방에서는 이웃
의 코를 무단히 자극할 정도로 냄새를 피우는  요리는 삼갈 것, 안방 텔레비전의 
볼륨은 거실에 있는 귀까지 어지럽혀선 안되며,  또 아이들의 생일파티에도 다섯 
명 이상을 한꺼번에 초대하는 짓은 자제할 것  등등... 나는 식구들에게 곧 잘 그
런 점들을 주의시키곤  하는 편이다. 그러나 사람이 살다 보면  더러 만부득이한 
경우가 없을 수 없는데 나의  소견으로는 아마도 이사와 장례가 그 대표적인 예
일 듯싶다. 이때만은 도리없는 노릇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결조차도 누구나 
속적없이 드러내놓을 수밖에...
  이사는 대개 주말이다  휴일을 택해 이루어졌다. 때로 그런 날은  들어오고 나
가는 이삿짐  때문에 바깥출입이 짜증스러울  지경이었다. 3층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노라면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시멘트 골짜기가 온통 중고품 가구전시
장 같은 풍경을  이루곤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고가품일지라도 그런  식으로 길
바닥에 꺼내놓고 보면  초라하게 마련이다. 세간살이의 초라함은  그 주인에게로 
옮겨지고, 그  주인의 초라함은 그의 삶의  초라함으로 연장되어 급기야는, 우리 
모두의 삶의 초라함으로까지 확대되곤 하였다. 아파트  주민들의 일반적 속성 중 
하나인 바지런함도 한몫을 했다.  도무지 이사철이라는 게 따로 없는 것이다. 무
던히 한자리에 눌러앉았지 못하고 너나없이 왜  그리도 돌아쳐야 하는지, 여름이
고 겨울이고 가릴 바 없이 주말이나 휴일이면  거의 언제나 이삿짐 홍수였다. 말
하자면,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 풍경 중의 하나인 셈이었다.
  그에 비해 이웃의 장례행사를 목격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아파트를 들고나
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승을 들고나는 숫자도 결코 
적지는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출산은 또 그렇다 치고-장례를 볼  기회가 
드물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선택적으로 행해지는  이사에 비해, 죽음이라는 것의 
저 느닷없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서 이웃의  죽음은 늘 소문에 지나지 않았다. 전언자는  물론 아내
다. 요 앞동에서 초상이 났대요, 혹은, 경로당에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대요, 하
고 그녀는  일쑤 전해주곤 하는 것이다.  그런 화제를 입에 올리는  자리란 으레 
저녁상 앞에거나 아니면,  일일연속극이 끝난 뒤의 잠자리이기가  십상이어서 나
에게는 죽음조차도 그녀의 자질구레한 일상사 중 하나쯤으로 느껴지게 마련이었
다. 글쎄 말예요, 오이  한 개에 2백원이래요 고것두 내 엄지만한  걸, 어쩌구 하
며 놀라워하던 어투 그대로, 또는, 이사간대요  405호요, 라고 말한 그 뒤를 이어 
아내는 바로,  이웃의 죽음을 화제삼는 것이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그저 잠자코 듣기만  하거나, 한두 마디 심상한 물음을 던져보는  것으로 관심을 
다하였다. 나이는  어떻게 되고? 자녀들은? 그러면  아내는, 망자나 유족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내가 금세 그 죽음을 느낄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망자에 대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란 여전히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파트를 드나들면서  우리는 자주 얼굴을 부딪쳤는
지 모른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 날  저녁이나 밤늦은 귀가때 우리는  또 어쩌면 
나란히 택시 합승을  하여 돌아온 적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그렇다고
는 해도, 내게 낯익은, 그러나  온통 익명인 그 많은 얼굴들 중에서 망자는 누구
란 말인가? 누가 우리로부터  영원히 떨어져나갔단 말인가? 그러므로 나에게 있
어서 이웃의 죽음이란 고작 하나의 소문, 하나의 추상,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
았다. 나중에 문득 생각나서 물어보면 아내의 대답은 늘 이런 식이었다. 무슨 얘
기예요? 벌써 2주  전 일인데. 또는, 엊그제 출상했다구요.  화장했다는 소문이던
데요...
  김씨의 죽음은 경우가  좀 다를 법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바로  아래층에 사
는 이웃이었다.  콘크리트 구조물 한  겹만 살짝 들어내버린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까운 이웃인가. 이따금씩, 특히  밤중에 아내와의 그 일을 치르다 문득 거기에 
생각이 미치면 나는  경황중에도 매번 웃음이 쿡쿡 비어져나오곤 했었다.  뉘 집
인들 늘 금욕만  하겠는가. 비슷한 시간, 비슷한  구조물 안에서-단지 상하 또는 
좌우만 다른 공간에서-우리는 실상  너나없이 어슷비슷한 짓거리들을 하면서 살
고 있는 것이다. 벽 한 겹  정도로 피차 체면치레만 했을 뿐, 실상 감출 수 있는 
것이라곤 거의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나에게 있어서 김씨는 그나마  어느 정도 
실체를 가지고 있는, 드문 이웃이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우리는 그래도 얼굴
을 부딪칠 기회가 더러 있었고, 그런 때면  어색한 대로나마 목례를 나누기도 했
던, 그런 처지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나는 또, 최근에 본 그의 모습을 또렷
이 기억하고 있기도 하였다. 서너 주일 전쯤의 일이었던 듯하다. 아마도 그는 산
책을 나섰던  모양으로 어린 수찬이를  앞세운 채였다. 마침  산책에서 돌아오던 
나는 그들 부자를  지나 보내고도 한동안 뒷모습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목전의 
분명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와 이제 여섯 살짜리 아들... 또는, 주저하며 
조심스레 내어딛는 걸음걸이와 천방지축  여기 질퍽 저기 질퍽 아무렇게나 내딛
는 발걸음... 그것은 볼수록 너무  기이한 대조였다. 추억하자면, 나에게는 그것이 
김씨에 대한 마지막 기억인 셈이다.
  식탁에서 물러나는 길로 나는 베란다로 나갔다.  그곳에는 낡은 흔들의자가 하
나 놓여  있어 나는 흔히 식후의  끽연을 거기서 즐기곤 했다.  아파트 건물들이 
시야를 대부분 가리기는 해도  그런대로, 재단된 하늘이 올려다보이고, 3층 높이 
저 아래로는 좁은 공터에 다닥다닥 등을 붙이고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자동차들
이 잘  내려다보였다. 나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거대한 궤짝 틈서리에 끼여앉은 
것처럼 어깨며 가슴이 옥죄이는 기분이기는 해도  그러나, 나에게는 하루의 마감
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저 바깥세상으로부터 이제 돌아왔다는 기분, 
비록 협소한 공간일망정 나를 가장 편안하게 담아둘  수 있는, 그나마 이 지상에
서 내가 확보할 수 있었던 나의 동굴임을,  때로는 콧날이 아주 시큰하도록 느끼
는 것이었다.
  부엌 쪽에서 아내가 찻잔을 들고 건너왔다.  그녀는 강아지처럼 코를 쫑긋거리
더니 이내  얼굴을 구겼다. 아래층에서 향을  태우는 냄새가 창으로 흘러들었다. 
"저 냄샌 너무너무 싫더라"라고 말하며  아내가 내게 잔을 건냈다. "사람 마음을 
괜히 우울하게 만드는 냄새라니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향을 느낄 수가 있었다.
  "며칠간 두통나게 생겼어요, 다들... 장례가 끝난 뒤에도 쉬 없어지지  않는다구
요, 저 기분 나쁜 냄새는... 두어 주일은 갈 걸?"
  "하는 수 없는 거지"라고 나는 대꾸했다. "상을 당한 마당에야..."
  "이 계단 열 집이 죄다 상가 같은 기분이 드니까 문제지. 다들 못마땅해한다구
요. 옛날처럼 넓은 데서 서로  뚝 떨어져 사는 것도 아니고, 요렇게 좁아터진 공
간에서 며칠 동안 계속 태워댈 거 아녜요? 뉘 집이든 한 집이 상을 당하기만 하
면 나머지 아홉 집도 죄다 상가집 분위기에  젖어야 한다는 건 고역이라구요. 저
놈의 냄새 땜에..."
  그렇기도 하리라. 벽 한 겹 너머 이웃의  가정에선 마침 돌잔치상을 챙기고 있
는지도 모른다. 바로 머리 위나 또는 발  아래쪽에서는 이제 막 신행에서 돌아온 
새 부부가  첫살림을 시작했을는지도 모르고,  또 부모 회갑연에  귀한 손님들을 
두로 청해두고 있는 가정도 있을 법한 일이다. 거기에 이 향내와, 그것이 빚어내
는 특유한 분위기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으리라. 시쳇말로, 신경쓰일 노릇이다. 
그 냄새를  혐오함은 결코 아내의  경우만은 아니리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평소 
묵은 김칫독을 부시거나  된장 항아리를 열어두는 일, 또는 간장을  달이거나 하
다못해 생선 한 토막 굽는 일에까지 이웃의 코를 의식하고 조심스러워하던 것이 
결코 아내만의 신경과민이 아니듯이 말이다. 아내가  그처럼 싫어하는 향내 너머
에는 또 다른,  참으로 타기할 만한 냄새가  감추어져 있음을, 그러나 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어째 곡소리는 없구먼."
  그나마 다행이 아니냐는 투로 나는 말하였다. 아내의 말대답이 역시 그랬다.
  "그럴 사람이 없나  봐요. 수찬이 이제 여섯  살밖에 안되잖아요. 수찬이 엄만 
말한 대로 영 심상한 낯짝이구요... 일가붙이두 별룬가 봐요. 원래 옹색한 집안이
래요. 곡소리 듣지 않는 것만두 다행이에요."
  "무슨 소리..." 기어이 나는 한마디했다. "상가에선  당연히 호곡하는 소리가 있
어야지. 문상객도 되도록 많이 꾀고..."
  "그럼 좋기두 하겠수"라고 아내는  입을 삐죽거렸다. "문상한답시고 밤새워 술 
마시고, 화투 치고, 아무데나 오줌 싸고... 생각만 해도 지겹다구요."
  사실인즉 그렇기는  하였다. 지난 여름이던가, 우리  앞동에서 상을 당했을 때 
우리 동 사람들끼리 덩달아 고통을 겪은 게  바로 그 점이었다. 밤샘하는 문상객
들을 위해  아파트 앞 공터에다 차일을  친 것과, 거기서 몇  패거리고 나뉘어져 
화투를 치느라 온밤내 시끌  덤벙했던 일까지는 그런대로 참을 만했으나 이웃들
이 도저히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그놈의  오줌냄새였던 것이다. 
마을이 바쁜 꾼들과 분별없이 취해버린  작자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다 대고 아
무렇게나 깔겨댄 그놈의 오줌 때문에 상가는 필경 이웃들의 노골적인 비난을 면
치 못하였다. 장례를 치르고 난 한참 뒤까지도  상주가 이웃들 앞에서 도무지 얼
굴을 제대로 쳐들지  못했던 것은, 망자에 대한 슬픔 때문이라기보다  이웃에 대
한 면목없음 때문으로  비쳤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때 나온 공론들  중에는 장의
식장안 같은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내의 전언에 의하면, 아파트 주민은 누구
나 상을  당하는 즉시 시신을 그쪽으로  옮기고, 장례에 관한 일체의  일을 모두 
거기서  치르도록-필요하다면 강제규정이라도  두어서-한다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의  일상의 평화를 더  어둡고 번거로운 죽음의  문제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으리라는 소리였다.  아파트가 좋다는 게 뭔가. 살기가 편하다는 점
일 것이다. 그러나 상을  당하고 보면 아파트처럼 불편한 곳도 달리 없으리라고, 
다들 입을 모으더라는  얘기였다. 심지어는-이거야말로 명백히 유언비어일  테지
만-저쪽 고층아파트에서는 관을 이삿짐처럼  창 밖으로 달아내리다가 그만 실수
하여 10층높이에서 떨어뜨린 적도 있다더라고, 누군가 열을 냈다고 했다. 결혼예
식장이야 없으면 어떠냐, 그 흔한 교회당을 잠시  빌려 써도 되고 날씨만 좋다면 
옥외도 무방하다. 그러나  장례만을 이러지도 못하는 것이니만치  임종 순간부터 
매장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절차를 간편하고 효율적으로 치러낼 수 있는 전문 식
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  아파트 주민에게 그것은 슈퍼마
켓만큼이나 필수적인 운운,  대충 그런 소리였다는 것이었다. 하긴  그럴 법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웃에 폐 끼치는 일 없이-예컨대 기분 나쁜 냄새나 곡하는 소
리 또는 번거로움  따위를 주는 일 없이 망자를, 필요하다면  이웃들이 눈치마저 
채지 못하게 살짝 처리하고는 다시  저 일상의 평화 속으로 감쪽같이 돌아올 수
도 있으리라.
  나는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한층  아래 상가
는 조용했다. 예의 분향 냄새만 아니라면 어제와  다를 바 없이 고요한 분위기였
다. 수찬이 녀석의  말짓도 없는 듯싶었다. 더 아래쪽, 계단입구  한 귀퉁이에 조
등이 내걸려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유일하게 상중임을 알리는 표시였다.
  "어찌 불도 안 넣고 저러지?"
  가등에는 이미 불이 들어와 있었다. 엷은 어둠  속에 무슨 속 빈자루처럼 추레
한 꼴로 늘어져  있는 조등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중얼댔다. 여전한  피로 탓이리
라. 기분이 영 저조하였다.
  "도무지 상가  같지가 않구먼, 이웃인들  알까? 문상객들은 또  어떻게 찾아오
고..."
  나의 귀밑으로 덩달아 얼굴을 비죽이 내밀며 아내가 대꾸하였다.
  "관심이나 있구요? 통반은 있어도  이웃은 없다는 말, 당신은 모르나 봐..."  잠
시 사이를 두었다가 덧붙였다. "찾아올 사람두 별룬가 봐요, 문상객 걱정은 안해
도 된다면서, 수찬이네 엄만 되레 홀가분해하던데요, 뭐"
  사정이 그렇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허술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망자를 
눕혀놓고서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얼려 시끌덤벙해야할 까닭은  없으리라. 그나
마 이웃의 눈총을 받아가면서까지야.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래도 한 사내의 
죽음 아닌가. 젖내나는 어린애의  죽음도 아닌, 지금까지 어엿하게 한 가정을 짊
어지고 있던 가장의 죽음인데도 말이다.
  "수찬이 엄만 참 안됐어요." 라고 아내가 중얼댔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갑자
기 풀죽은 목소리였다. "은행에서 함께 왔는데요, 몹시 지쳐빠진 모습이더라구요. 
굉장히 무거운 짐을-목이 짜부라지도록 말예요-이고 있다가 막 내려놓은 아낙네
처럼... 넋이 좀 나간  것 같기두 하구요. 뭐래더라... 사람 맘을 아프게  할 건 뭐
람 어쩌구 하면서 혼자 자꾸 중얼중얼하더라구요."
  서른넷의 죽음은 아무래도 심상한 것일 수야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수찬이 
엄마에게 있어서는 발병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김씨는-내 아내에 의하면-착실한 
생활인이었다. 그는 꽤 규모  있는 회사의 초급간부였고, 특히 일 자체를 좋아하
여 늘 부지런히 움직이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위에 이상이 왔을 때도 단
지 과로  탓이거니 여겼다는 것이다.  이따금씩 약방에나 드나드는  것으로 그는 
상당기간 동안 이를  방치했던 모양이었다. 상태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서-게
다가 당장 고통스러웠기 때문에-필경 병원을 찾아나서면서도 <까짓 것> 했다는 
것이다. 심각한 경우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 그에게 최초
의 진단결과는  얼마나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인가?  그의 아내의 표현에 의하면 
그날부터 드러눕더니 다음날은  벌써 <10년쯤 앓아온 중병환자꼴>이 되어 최소
한의 거동조차 힘겨워지더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고작 대여섯 달, 그는 식구-라
고 해봤자 아내와 아들 하나-들 곁에 머물다 떠난 것이다.
  김씨가 투병생활을 해온, 그 여섯 달 가까운  기간 자체는 그다지 긴 세월이라
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도무지 가망 없는 싸움이었기 때문에 지겹도록 
긴 세월일 수도 있으리라.  그의 아내의 경우가 바로 그랬던 모양이었다. 둘이서 
서로 멀거니  쳐다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들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그녀는 
자주 하소연했다고 한다.  무슨 일거리 같은 걸 손에 잡아보면  어떻겠느냐고 내 
아내가 권했더니 그녀의  대답인즉, 수찬이 아빠의 투정 때문에 그나마  할 짓이 
못된다더라는 것이다. 일도  말고 외출도 말고 그저 자기만 쳐다보고  앉아 있으
란 소리였다. 그러니 얼마나 속이 폭폭할  노릇이냐고, 내 아내는 동정했었다. 두 
사람 사이를 눈치 없이 휘젓고 다니는 수찬이 녀석만 없다면 그 여자 아마 미쳐
도 진작에 미쳐버렸을 거라고  아내는 말하였다. 십분 공감할 수 있는 얘기였다. 
하지만, 김씨를 너무 탓할  일만도 아니란 생각이 나로선 없지 않았다. 한쪽에는 
죽음과의 가망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판에 다른 쪽은 바로 그 코빼기 앞에서 
가령 뜨개질 같은  것에 정신을 팔고 있다는 것  역시 잘하는 짓이랄 수야 없는 
일이므로.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굴비 이야기도 예컨대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된다. 하
필이면 다른 곳도 아닌 위  속에 저 딱딱한 죽음의 조각을 담고 있던 김씨라 무
엇보다 커다란 고통은  음식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데 있었다.  그나마 두
어 달 전서부터는 극히 적은 양밖에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한 것은 그
의 식탐이었다. 김씨는  잠들어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하루종일  먹는 타령
만 해댄다는 것이었다. 머지않아  이승을 하직할 사람, 무슨 청인들 거절할까 보
냐고, 그의 아내는 열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의 식탐은 단지 마음뿐, 
정작 한입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였다. 즐기기는커녕, 매번 절망하는 모습을 지켜
보기가 마음 아팠다고 한다. 그녀는 이래저래, 남편의 저 허망한 식탐에 대해 조
금씩 소홀해졌는지도 모른다.
  점심상 앞에서였다고 한다. 여섯  살짜리 아이와 위암을 앓고 있는 환자와, 그
리고 혼자라면 점심상 따위야 굳이  챙기고 싶지도 않는 그녀-이렇게 세 식구다 
보니 너무  소홀하기도 했으리라. 초라한  밥상을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잠자코 
내려다보고 있던  김씨가 굴비 접시를  집어 들었다. 거기엔  모양만은 그럭저럭 
굴비꼴을 갖춘, 크기가 수찬이 녀석 손바닥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건어 두 마리가, 
한쪽은 젓가락으로 두어 번 헤집다  만 듯 그런대로 성한 채이고 나머지는 대가
리 쪽으로 반 토막인  채 얹혀 있었다고 한다. 아침상에서 물린  걸 그대로 올려
놓았던 것이다.
  "이거 다시  좀 데워"라고 김씨는  투정하였다. "식어빠진 걸  무슨 맛으로 먹
나..."
  아침상에서도 몇 번 헤집다  만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두말 않고 주문대
로 따랐으면 좋았을 일을 부지중 그녀는  그만 쫑알대고 말았다는 것이다. "먹지
두 않을 양반이 대낮에 괜시리 냄새만 풍기게 한다니깐!"
  혀를 깨물고 싶을 만치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이었다. 김씨는 말없
이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제야말로 부질없는 짓거리임이 분명해졌지
만 그러나 그녀는 가스불 위에다 예의 굴비토막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그것들
이 까맣게 타서 마침내  숯덩이가 되기까지 하염없이 되작거리고만 있었는데 그
러자니 더욱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줄줄 흘러내리더라는  것이었다. 주방
과 거실을 가득 채운 연기 때문에 수찬이가  캐액캐액 기침을 토하고, 위층의 내 
아내가 놀라 뛰어내려갈 때까지 그녀는 내내 그러고만 있더라는 얘기였다.
  그 김씨는 이제 운명하였다. 서른넷의, 생각하면  짧은 생애다. 죽는다는 건 무
엇인가? 김씨의 경우, 그것은 부질없는  식탐으로부터의 놓여남을 의미하는 것처
럼 보인다. 그것은 또,  제 여자의 관심을 한사코 자신의 고통에다 붙잡아매두고 
싶어하던, 저  부질없는 안간힘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경우 죽음은 무엇이  될 것인가? 날마다의 출근으로부터의 놓여남? 날마다
의 피곤한 귀가로부터의 해방? 그럴 법도 하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야 어쨌든, 
어린애와도 같은 그의 투정 때문에 그의 아내가 얼마나 시달리고 지쳐빠졌을 것
인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김씨의 죽음은, 그녀에게 있어
서는 그와의 영원한  화해일 수도 있겠다고 나는 또 생각하였다.  그제야말로 참
으로 허전한 느낌이 흡사 식후의 위무력증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이제사 불이 들어왔네요."
  아내는 내 겨드랑이  밑으로 해서 어느새 가슴 앞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가 언뜻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그러나 의식했을 때는  이미 분향
내뿐이었다.
  "저 사람들 좀 봐요."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아내가 말하였다. "문상객들인가 봐요. 우리 아파트  사
람들은 아니에요. 낯설어요 모두..."
  아내의 머리꼭지 위로 목을 빼고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젊은 사내 네댓
이 조등을 가리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친구들인가 싶구먼. 아니면 옛 직장동료들이거나..."
  그새 밖은 어두웠다. 어둠  덕분에 조등의 불빛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흡
사 이웃의 눈치를 보듯 그렇게 소심한 모습으로.
  김씨의 장례는 통상 3일장으로 치러졌다.  출상날은 마침 주말이자 공휴일이어
서 나는 모처럼 이웃의 장례식을 구경하였다.  뜻밖에도 장례는 기독교식으로 치
르어졌다. 수찬이 엄마가 최근에  드나들기 시작한, 아파트 단지 밖의 어느 조그
만 개척교회가 장례를  떠맡고 나온 것이라 하였다. 교회이름을 두른  봉고차 한 
대가 우리  동 앞에 와닿은 것은  열시가 넘어서였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남자 
둘에 여자가-대부분 나이 먹은-7,8명쯤 되었다. 이들이 중심이 된 영결식 예배에
는, 그밖에  유족측에서 그저 그만도  못한 머릿수가 참례했을  뿐이어서 보기에 
좀 민망스럽고 초라한  느낌을 주었다. 예배를 집전한 사람은 봉고에서  내린 두 
남자 중 젊은 쪽이었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서른에서 고작 한둘쯤  더 보탤 수 
있을까, 그는 이날의  의식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듯싶은 가운을  걸쳤음에도 불
구하고 여전히 영결식 분위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었다. 그의 신분
-교회의-이 무엇인지 나로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는 영결식 예배 따위는  아무래도, 옆에 서 있는 나이든 쪽-적어도  예순은 넉
넉히 지났을 법한, 조그마한 키에 여자처럼 섬약한  체수였다-에 맡기고 그 자신
은 다른 일-그 나이에  걸맞은, 좀 발랄하고 신명나는 어떤 일-에나  뛰어들었으
면 훨씬  좋을 성싶었다. 이 점이  기왕의 저 민망스러움과 초라함에다  또 다른 
느낌-다분히 서툴고 어설픈 어떤 느낌을, 장례 분위기에 더해주고 있었다.
  유독 이날은 아침부터  들고나는 이삿짐으로 온통 붐볐다.  주말이자 공휴일임
을 감안하면 당연한 현상일 터였다. 우리 동과 앞동 사이의, 그다지 넉넉지 못한 
공간을 우선 스무 대 가량의 승용차들이 점거한  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었다. 
그들도 아침부터 서둘러 움직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고 남은 공간을, 아
파트의 이 구멍 저 구멍에서  끄집어낸 가구들이 통로조차 남기지 않고 온통 메
워버렸다. 이삿짐센터의 타이탄들이 한꺼번에 몇 대씩  몰려와 서로 경쟁이나 하
듯이 열심히  짐을 짜 올렸지만,  여기저기서 새로 들어내고  달아내리는 것들을 
미처 다 감당하지 못하였다.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대체로 서너 명이 고작인 한 
집단의 생활에 어쩌면  그렇게나 많은 도구들이 필요한 것인지, 나는  새삼 찬탄
하기에 이르렀다. 매일  끼니때마다 챙겨 쥐는 숟가락에서부터 1년  가야 한두번 
찾을까말까 한 연모들까지,  몇백만 원-개중에는 천대도?-짜리 옷장에서부터  플
라스틱 쓰레기통까지, 또는  장정 네댓이 달라붙어 몸살을 해야 하는  무거운 물
건에서부터 자칫 망가뜨리기 쉬운  난분 하나에 이르기까지 계속 꾸역꾸역 흘러
나오는 광경을 보면서  나는, 그런 것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일상적 삶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는 기분이었다. 에누리없는, 일정한 공간 안에 지금껏 틀어박
혀 있었던 그 가구들도, 비록 난장판이  되어버린 길바닥에서나마 비로소 움츠렸
던 가슴들을 펴고 오구구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다.
  주변이 이런 사정이고 보면 장례  분위기란 어차피 기대할 바 못 된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영결식 예배는 우리 계단 출입구  앞에서 거행되었는데 분위기는 그
만두고라도, 자리가 여간 옹색하지 않았다. 자동차들과 잡다한 이삿짐 사이를 비
집고 간신히 영구차를 끌어들인 다음, 모두 스무  명이 못되는 숫자가 그 옆구리
에 웅기중기 모여 서서 예배를 보았다. 찬송과  성경읽기와 짤막한 설교 등-그다
지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정작 영결식에 소요된 시간은  고작 10여 분 
남짓?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경꾼인 나로서는 꽤나 더디고 조마조마한 느낌이었
다. 사방에서 온통 난리복대기를 쳐대는 이사꾼들  등쌀에 그나마 제대로 끝나질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수찬이 녀석까지 나의 마음을 죄게 만
들었다. 여섯살짜리 상주 수찬이는-내 아내에 의하면, 평소에도 걸핏하면 자전거
를 사내라고 졸라대곤  했다는데-이날 아침부터 어찌어찌 친구의  것을 빌려 탄 
모양이었다. 만판 신이 난  녀석은, 아버지의 영결식이 치러지고 있는 그 시간에
도 그놈을 타고  이삿짐 사이를 곡예하듯 씽씽 내달리고 있었다.  저러다가는 아
무래도 말썽을 일으키고 말지 싶어 나는 여간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그의 어머
니인 미망인은 물론이고 친척들까지도 녀석에게 신경을 쓸 여유란 없는 게 뻔한 
노릇. 그렇다고 내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녀석에게 주의를 줄 도리도 없는 
일이어서 나는 그저 마음을 조리며  잠시도 쉬는 법 없이 이삿짐들 사이로 휭하
니 모습을 감추었다가는  영구차 앞에까지 불쑥 달려들고, 그런가 하면  다시 달
아나고 하기를 거듭하였다.
  막상 사단이 난 것은-녀석이  아니고-어른들 쪽이었다. 짐 싣는 일을 끝낸  이
삿짐센터 타이탄 한 대가 그  새를 참지 못해 클랙슨을 빵빵거리기 시작했던 것
이다. 이 북새통에 영결식 예배가  뭐냐, 산 사람들이나 좀 살게 대강 끝내고 영
구차를 어서 빼달라는  주문인 듯싶었다. 교회 쪽 사람들-이미  말했듯이 대부분 
여자들이다-과 이삿짐센터 사람들 사이에 가벼운 시비가  붙었다. 유족이나 이삿
짐 주인은  오히려 잠잠하였다. 특히 수찬이  엄마의 태도가 몹시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무슨, 감추어야 할 부끄러움이라도 지닌 듯, 남편의 관이 실려 있는 영구
차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조그맣게 웅크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시비는 곧 끝났지
만 정말이지, 들고나는 일의 번거로움을 실감할 수 있었던 광경이었다.
  영결식 예배는 이래저래  서둘러 끝났다. 봉고차의 선도로  영구차가 난전같이 
어지러운 길을 헤치며 조심조심 우리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고 나자 이내 이삿
짐을 가득가득  실은 짐차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꾸역꾸역  기어들었다. 그렇게 
온종일, 그날은 우리의  곁을 떠나가고 또 오는 사람들로 시끌시끌하여  세상 사
는 일이 온통 귀찮고 지겹게만 생각되었다.

    땀
  장마 끝이었다. 싸리비로 싹싹 쓸어낸 듯싶은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투명하였
다. 오랜 장마 때문에  곰팡내가 날 정도로 잔뜩 찌들어 있던  의식이 단번에 맑
아진 느낌이었다. 대지는 물을  흠뻑 머금은 채 가라앉아 있었다. 그새 무성해진 
숲에선 푸른 물이 뚝뚝  듣고, 귀익은 새들의 지저귐이 싱그러웠다. 장마와 더불
어 더위도 한물한  듯 환하게 쏟아져내리는 아침 햇빛이 지겹지  않았다. 그래서
이리라. 다른  때보다 산책객들의 모습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아침나절인지라 
노인네들이 대부분이었다.  물통을 둘러멘 할아버지,  배드민턴 채를  든 할머니, 
더러는 불편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새삼  걸음마를 익히는 노인들도 있었
다. 인생도정의 끝머리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간에  대해 너그러워질 수 있다
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조금도 서둘 것이 없었다. 가장 넉넉하게 소유
하고 있는 게 바로 시간이기나 하듯이 그들은 지극히 한가한 걸음걸이로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짙푸른 여름하늘과 온통 눈부시게 쏟아져내리는 햇빛, 그리고 한
껏 물먹은 대지와 풋풋한 숲을  배경으로 그것은 참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느긋
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문제의 포인터가 우리  눈에 띈 것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였다.  원산지가 영국
이래서가 아니라, 축 처진 귀와 별스레 겅중한  다리 때문에 늘 중후한 중년신사
의 풍모를 연상케 하는 견공이었다. 한번 겨냥한  사냥감은 절대로 놓치는 법 없
이 끝까지 추적해내고야  마는, 그래서 사냥개의 대명사격인  종자라는 사실마저
도 매양 잊게 할  만큼 유순한 느낌을 주는 그 개는,  아침나절의 산책길에선 거
의 예외없이 마주치게  되는 낯익은 얼굴들 중의 하나였다. 물론  혼자가 아니고 
장노인과 함께였다.
  "저, 저거 좀 보세요."
  아내가 예의 포인터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녀  쪽을 돌
아보았다. 갑자기 긴장감을 띤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포인터 얘기야?"
  "그래요, 저 개..."
  아내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그러더니 평소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꽤나 이상
야릇한 눈빛을 하며 불쑥 말하였다. "죽었어요. 그 할아버지..."
  "뭐라구? 그 할아버지가 죽어?"
  나는, 말인즉  그렇게 되묻고는 있었느냐 기실  조금도 놀라지는 않았다. 물론 
심상한 노릇일  수야 없었다. 그저  산책길에서 얼굴을 익힌  사이일 뿐이라고는 
해도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어찌  무심할 수가 있으랴. 일흔을  채운 연세라고 
했었다. 게다가 평소 건강상태가 그다지 좋은 편이 못되었다. 그러므로 장노인의 
죽음이 전혀 뜻밖이란 느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내의 다음말 때문이었다.
  "그것두 여러 날 지나서야 발견됐대요."
  입을 다문 채 나는 아내의 얼굴만 멀거니  보고 있었다. 갑자기 멍한 느낌이었
다. 한참 뒤에야 나는 가까스로 입을 뗐다.
  "어디서 그랬대?"
  "어딘 어디예요? 자기 집 안방에서죠."
  "안방이라구?"
  "혼자서 사시던 할아버지래요.  저쪽, 2단진가봐요? 왜, 열세 평짜리  있잖아요. 
게서 혼자 기거하신 지 오래되나  봐요. 전혀 다른 식구가 없대요. 저 포인터 외
엔... 이렇다 하게 드나드는 사람도 없고... 결국 당신 혼자 운명허신 거죠 뭐."
  아내의 눈길이 개를  좇고 있었다. 포인터가 산책로를 따라 언덕진  곳을 겅중
겅중 올라오고 있었다. 뺨을 가리고 있는 두 개의 크고 유순한 귀가 너풀거렸다. 
네모나게 각진 주둥이를  약간 치켜든 채 녀석은 우리 앞을  지나갔다. 미끈하게 
잘생긴 몸매와 갈색의 커다란 반점들을 나는  찬탄하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아내
가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연민의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때 포인터가 다시 우리 쪽으로 겅중겅중 되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직감할 수가 있었다. 녀석은 아직도 자신이 당한 일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우리 앞을 지나 한참을  뛰어가다 말고 우뚝멈춰서서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
다가 또다시 되돌아 겅중겅중 달려왔던 것이다.  녀석이 그렇게 서성거리며 찾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가를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녀석은, 날마다 오르내
리던 이 산책로에서 지금 제 주인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열세 평짜리 아파트에서  혼자 살던 노인네가 어느 날 운명한다.  임종을 지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여러 날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외로운 주검
이 발견된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사연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미국인지 프랑스인지 어쨋건  다른 나라 얘기였다. 처음 그 기사를 대
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던가? 흡사 어느 먼 나라의 기속에나 접한 듯한 느낌이어
서 혼자 끼들끼들 웃었던 것이다.
  재를 한입 삼킨  기분이었다. 우리 사회, 아니  바로 내 이웃에서 조차 마침내 
그 기이한 풍속이 드러나고 있는 셈이었다. 아내가 전하는 바로는 그랬다. 단 하
나의 식솔이며 유일하게 노인의 임종을  지켰을 그 개마저 도무지 이렇다 할 반
응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가스 검침원이 아니었다면 그의 주검은  좀더 오
래 은폐되었으리라는 것이었다.  서너 차례나 거푸 헛걸음질을 한 그  사내는 문
득 끓어오르는 짜증 끝에 화풀이라도  하는 그런 기분으로 좀 맹랑한 상상을 하
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그게 자꾸만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더라는 
식이었다. 견고하게 닫아걸린 문짝 너머가 어쩐지 심상찮은 예감이 들고, 그러고 
보니 또 안에서부터 혹종의 기분 나쁜 냄새 같은 게 쏠쏠 흘러나오는 듯도 싶더
라고 했다. 그는 필경  관리사무소에 연락을 했고, 뒤늦게 합세한 이웃들과 함께 
문을 따고 들어갔고...
  그런 과정을 거쳐 그 노인의  외로운 죽음은 이제 아파트 전체의 화제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점은 그 개의 반응이었다. 검시관의 판단
으로는 사후 최소한 닷새는 경과한 상태라고 하였다.  그 기간 내내 포인터는 주
인의 주검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도 그 머리맡을 떠난 적이 없이 말이다. 
그들이 들어갔을 대 녀석은 그 부패한 주검 옆에서 더할 나위 없이 지치고 슬픈 
모습으로 묵묵히 웅크리고 앉아 있더라는 얘기였다. 충분히 그럴 법한 일이라고, 
나는 혼자서 머리를 주억거렸다. 언젠가 장노인에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났던 것
이다.
  역시 산책길에서였다. 장노인의 말대로라면, 포인터는 이미 3대째 그와 인연을 
맺어오고 있었다.  말하자면 녀석의 조부  때부터 장노인 곁에서  대물림을 하며 
고락을 함께해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끈끈한 정을  나누었던 쪽
은 역시  제1대의 경우였던 모양으로 장노인은  그날, 우리 부부의  발길을 거의 
한 시간 가까이나 묶어둔  채 그 개를 추억했던 것이다. 누가  한 인간의 마음속
에 그처럼 선연한 흔적을 오래도록 남길 수  있으랴. 예컨대 장노인의 온갖 감회
어린 추억담 중  다음 얘기 같은 건 족히  우리 내외의 마음까지도 울린 만하였
다.
  40대 중반, 그러니까 그가  세상 사는 일보다 사냥 다니는 쪽에  더 많이 정신
을 팔고 다니던 무렵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때만  해도 서울 종로통을 꿰고 전차
가 느릿느릿 굴러다니던  판이었다. 의정부쪽으로 꿩사냥을 나갔던  그는 귀로에 
그만 포인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늘  그랬듯이 같은 패거리들이 얼려 
버스 편으로 종로 5가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온 건 분명한데 거기서 전차로 
바꿔타고 한참을 무사히  오다 본즉 어쩐 셈인지  그놈의 개가 보이지 않더라고 
하였다. 동네 정거장에서 그는 혼자 내렸다. 어쩌면 녀석이 먼저 집에 돌아와 있
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결코 멍청한 녀석이 아닐 뿐더러, 언젠가도 그와 
비슷한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귀가해본즉 그러나 포인터는 와  있지 않았
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곧 제 발로 기
어들리란 믿은 같은 게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도무지 그렇지  못하였다. 그날은 물론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
음날도 포인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심 적지않게  애가 쓰였지만 그렇다고 무슨 
대책이 서는 것도  아니었다. 녀석이 된통 바람이 나서 엉뚱한  곳을 큼큼거리고 
쏘다니는 중이라면 그도  다행일 터이지만, 아무래도 다른 무슨 사정이  생긴 게 
확실하였다. 그는 밤에도 대문을 열어둔 채로 잠을 설치곤 하였다.
  그렇게 한  주일쯤 지난 뒤였다. 사냥친구  하나가 전화를 걸어왔다. 사연인즉 
방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소린데, 종로 5가  시외버스 터미널에 임자 없는 포인
터가 한  마리 1주일 전서부터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바 아무래도 
당신 개 같으니 어서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비로소 펀뜻 스치
는 기억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소변이 다급했던 터라  그는 녀석에게 
그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 엄명을 하고는 화장실로 달려갔던 것인데 그만 
그 사실을 깜빡한 채 패거리에 휩쓸려 혼자서 전차에 오르고 말았던 것이다.
  한달음에 그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틀림없었다. 정류장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
간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흡사 고압의 전류에 감전된  것 같았노라고 
그는 말하였다. 대포알같이 시커먼 물체가 하나  바람을 가르며 그의 가슴팍으로 
세차게 뛰어들었다. 포인터였다. 충격 대문에 그는 뒤로 벌렁 나동그라질 뻔하였
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해후의 기쁨 때문에 녀석은 미친 듯 길길
이 날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머리 위를 키보다고 훨씬 더 높게, 앞에서 뒤
로 또 뒤에서 앞으로 훌쩍훌쩍 타넘는 것이었다. 숫제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녀
석이 이러다가 정말 미쳐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  겁이 더럭 났다. 달래고 꾸짖고 
얼르고 해보았지만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나중에는 아무거나  손에 닿는 대로 사
정없이 두들겨 패기까지  하였다. 그런 식으로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야  그는 가
까스로 녀석의 흥분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새 구경꾼들이 진을 
쳤다.
  그곳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근 1주일 동안  녀석은 줄기차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쫓아버리려고도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더라고 했다. 한사코 
그 자리에만 엎디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뿐더러, 아무것도 먹지 않더라고도 하였
다. 운전기사들이며  여사무원들이 더러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지만  간혹 입만 
축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단식농성이라도 하듯 꼼짝않고  엎디어 있다가도 
그러나 녀석은, 시외버스가  들어오기만 하면 벌떡 일어선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는 곧장 달려가서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누구보다 먼저 뛰어올라 차 안을 한차
례 휘둘러보고, 그런 다음 잔뜩 맥이 풀린 채  내려와 다시 예의 그 자리로 돌아
가서는 코를 빠뜨리고 엎디어 있곤 했다는 얘기였다.  더 이상 내버려둘 수가 없
어 궁리 끝에 방송국으로 연락을 취하게 된  것이라고, 요즘 세상에는 아마도 저 
개만한 인간도 없을 거리며 그곳 사람들은 새삼 혀를 차더라고 그는 말하였다.
  어쨌거나, 녀석은 집에 돌아오자  마자 땅바닥에 배를 깔고 쭉 뻗어버렸다. 완
전히 탈진해버린 것이었다.  이후 여러 날이 걸려서야 녀석은 간신히  기력을 회
복하긴 했지만 도무지 전만 못하더라고, 눈에 띄게  활력이 떨어져서 늘 집 안에
만 웅크리고 있으려 했고,  그것도 그의 방 앞에서 그가 벗어놓은  두 짝의 신발 
위에다 주둥이를 얌전히 올려놓은 채 꿈꾸듯  구물구물 졸고 있기가 일쑤였다고, 
장노인은 추연한 눈빛을 한 채 흡사 옛  여인을 추억하듯 했던 것이다. 새삼스레 
그날의 눈빛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
  문제의 포인터가 다시 우리 앞을 지나 샘터  쪽을 향해 겅중겅중 달려갔다. 그
렇게 보아서인지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 날렵하게  잘생긴 모습에
도 불구하고 어딘가 추레하고 꾸적꾸적한 인상을  풍겼다. 갑작스럽게 몰락한 인
간의 모습과 흡사하였다. 개도 인간 못지않게  감정표현이 풍부하다는 사실 또한 
내게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포인터가 우리 앞을  겅중거리며 지나가는 순간에 나
는 참으로 짙고 무거운 슬픔 같은 것을 그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스
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감정이기  대문에 더 절실하고 처연하게 보였는지도 모른
다. 우리 내외는 더 이상 나누는 얘기도 없이 산책로를 스적스적 올라갔다. 앞서
간 포인터는 벌써 보이지 않았다.
  샘터 못미쳐 공터에선 몇 그룹의 노인네들이  어울려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로 한 조를 이룬, 일테면 혼성복식게임이었다. 늘 느끼는 바이지
만, 어린아이와도 같은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몸놀림은 매양 한  박자쯤 느
려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은연중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실수연발의 게임이어서 
그때마다 그  과장된 제스처 때문에  폭소가 터져나왔다. 몸이  굳어가는 대신에 
마음은 더 어려지는 것일까. 중구난방 내뱉는  말들로 골짜기가 온통 시끌짝하였
다.
  잠시 걸음을 멈춘 채 나는 또 장노인을  생각하였다. 예순을 넘어서고 보면 그
때부터 나이를 한살씩 더 먹을  때마다 마음은 오히려 점점 더 어려진다고들 흔
히 말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장노인에게선 그런 유의 천진스러움 같은  것을 거
의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것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어떤  것, 일테면 
심술이랄지 또는 불만기 같은 것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세상일이
나 사람들에 대한 뿌리깊고 무차별적인 어떤 감정 같은 것을 찐득이도 간직하고 
있는 듯싶었다. 매사가  도무지 못마땅하다는 투였다. 산책로에서 무시로 얼굴을 
부딪치면서도 인사  한번 제대로 하는 법없이  데면데면한 젊은것들이 못마땅하
고, 나이  핑계로 남녀 가림없이  함부로 어우러지기 잘하는  늙은이들의 주책이 
못마땅하고, 신문이다  텔레비전이다 허구헌  날 오르내리는 그놈의  정치얘기가 
정말 못마땅하고 대체로 늘 그런 기분인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날씨에 대해서조
차도 예외가 아니어서, 더워야 할 대 덥지 않고  추워야 할 때 춥지 않아도 그는 
영 못마땅해하였다. 마음속에 심술과 불만을 가득  담고 있는 사람은 이웃들로부
터 항상 기피당하게 마련이다. 대문에 그는 공원을  찾는 그 많은 노인네들 중에
서도 특히나 외로워 보였다. 쉽게 잘 어울리는 상대가 없음은 물로, 어쩌다 무리
에 끼여들 경우에도 눈에 띄게 겉도는 형국이었다. 그러면 그는 매번, 모난 소리
를 한두  마디 툭툭 내뱉고 나서  으레 훌쩍 돌아서기 일쑤였던  것이다. 언제나 
그리고 유일하게 그와 행동을 같이하는 짝꿍이란 결국 예의 포인터밖에 없는 셈
이었다.
  그랬다. 포인터는 장노인의 둘도 없는 친구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가
장 만만한 상대였다. 주인의 온갖 심술과 불만으로부터  그 개는 늘 시달리고 있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도 주인의 곁을 떠나는 법이 없는, 그 동물 특유의 
충직성이 새삼 놀라웠다. 평생을 해로해온 내외간이라고  해도 그처럼 진득할 수
야 없으리라. 매양 함께 산책로를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확실히 마음 흐
뭇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사랑이 깊은 부부라고 해도  그만한 세월 
동안 마주 쳐다보면 왜 지겨움인들 없겠는가. 하물며 그들에게 있어서랴. 당연히 
세상사람들에게 돌려져야  할 온갖 심술과 불평불만을  장노인이 무시로 그리고 
거침없이 포인터에게 쏟아붓고 있는 광경을 자주  목격하는 일도, 그러므로 우리
에게는 산책의 즐거움을 더하는 것일지언정 결코 언짢은 기분은 아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장노인은 평소에도  가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고 깨달
아졌다. 단지 한두 번, 그것도 다른 얘기 끝에 무심히 몇 마디 스쳐 지나가는 식
의 말이 있었을 뿐이었다. 늙은이들이란 제 자식  자랑 아니면 도무지 할말이 없
는 작자들이란  식으로 누군가를 빈정대고  나서는, 나라고 자식자랑  없어서 입 
닫고 있는 줄 아느냐,  나한테도 깜짝 놀랄 만큼 높은 자리에  있는 아들이 있고 
엘에이 이민 가서  삐까뻔쩍하게 잘 사는 딸두 있다, 못  믿겠다고들 허시겠지만 
내 하늘 두고 맹세컨대 손톱만치라도 거짓이 들어 있다면 따자식 베때기에서 나
온 놈이다 운운... 그러면서  심히 비아냥대는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두기도, 그렇다고 온통 허세라고 치부해버리기도 무엇하던,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던  기억이 이제 새로웠다. 더군다나, 그처럼 외로운 죽음
을 했다지 않는가. 아내의 말로는 2단지  노인회와 동사무소가 중심이 되어 때늦
은 장례를 치렀는데 막판까지도 망자의 아들딸은 고사하고 촌수 먼 일가붙이 하
나 나타난 바 없다는 소문이라고 하였다.
  하기사 그런 경우가 장노인만도 아니었다.

    네 개의 배역
  운전수 김씨는  남편과 군대 동기라고  하였다. 사내들 세계란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이 경우도 말하자면 그런 셈이었다. 그놈의 군대라는 게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거기서 두어 해남짓 어울린 인연만 가지고도 매양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로서는 이해는 고사하고, 이제는  목구멍에서 영 
신물이 넘어오는 판이었다.
  남편이 귀가한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그것도 김씨가 힘겹게 떠메고  온 상
태였다. 보아한즉, 남편은 아주 꼭대기까지 술에 전 형편이어서 제멋대로 흐느적
거리는 몸뚱어리를 대강  쥐어짜기만 해도 두어 됫박 술은 무난할  듯싶었다. 하
지만, 그녀의 심기를 몹시  언짢게 만든 쪽은 남편이 아니었다. 남편이란 작자야 
원래부터 그런 위인인지라 허구헌  날 그래왔으므로 조금도 새삼스러울 게 없었
다. 문제는 김씨 쪽에 있었던 것이다.
  "사모님, 아니 형수님, 아니 제수씨..."
  그는 이쪽의 기분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기고만장하여 넉살을 떨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은 좀 그럴 사연이-짐작허시겠지만-있어서  우리 사장께서 약줄 좀 과하
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또 늦어지기두 했구요. 하지만 내가 이렇게 잘 
모셔왔으니깐 용서해주십시오. 내  얘기가 아니라 이 사람, 우리  사장 말입니다. 
오늘만은 요강 들고 벌쓰는 것 면하게 해주십시오..."
  그러고는 아주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뭐야?  <이 사람, 우리 사장>이라
니? 그럼, 전 뭐야? 그녀가 결정적으로 기분이 상한 대목이었다. 도저히 그냥 지
나칠 일이 아니다 싶었다.
  운전수 김씨는-적어도 그녀가 평소 보고 느끼는 바로는-도무지 주제파악을 잘 
못하는 위인이었다. 그의 가당찮은 넉살이나, 아무에게든 쉽게 엉기려고 하는 근
성이나, 또는 터무니없는 기대나 욕심  같은 것은 또 그렇다 치자. 세상에 흠 없
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자기의 위치를 일쑤 착각하
고 있는  점만은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누군가? 남편에게서 
월급을 받아먹고 사는 입장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거기엔 엄연히 위계의 질서가 
있어 마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친구일  뿐더러, 때로는 동업자
라도 되는 양 행세하는 꼴만은 도무지 못 봐주겠던 것이다.
  남편이 김씨를 만난 것은 군에서였다고 이미  말하였다. 남편이 나중에 실토한 
바에 의하면, 군복을  벗는 날부터 그의 잊어버리다 시피 했던  김씨를 길거리에
서 우연히 만나고 본즉  그는 영업용 택시기사더라고 하였다. 참 오랜만의, 불시
의 만남이었다. 따라서  그냥 헤어질 수야 없는 노릇이기에 둘이는  곧바로 술판
을 벌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술판을 일단 벌이고 본즉  자연히 그놈의, 짠밥 
먹던 시절의  오만 가지 추억담이 술술  풀려나왔고, 그래서 꽤나 긴  시간 동안 
이런저런 감회에  젖어 있다 본즉 새삼  옛 전우애 같은 게  발동하게끔 되었고, 
때문에 피차 세상 사는 형편들에까지  두루 두루 이야기가 미친 끝에 결국은 속
이 무른 남편이 어느  순간엔가 불쑥, 야 그놈의 택시 걷어치우고  차라리 내 차
나 모는 게 어떠냐, 우리 같이 벌어먹고 살자꾸나, 어쩌구... 그렇게, 그렇게 되어 
이루어진 일이라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남편의 사업은 여유가  있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 
같진 않았던 것이다.  물려받은 몫도 적지않은 데다 사업도 짭짤하게  재미를 보
던 참이었다. 그만하면 체면 때문에라도 운전수를 두자고 권유하고 싶던 차였다. 
김씨로 말하자면 물때가  잘 맞았던 셈이었다. 기왕지사 월급 주는  운전수를 둘 
바에야 한 지붕 아래 두는  게 부리기에 편하다는 생각에서 비어 있던 지하방에
다 그의 식솔들까지 나서서 불러들인 건 오히려 그녀 자신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경솔한 처사였던가. 부리기에  편리한 점이 한 가지라면 
성가시고 화나게 하는 점은 열 가지도 넘었기 때문에 그녀는 두고두고 후회해온 
터였다. 아무렴,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그녀는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이봐요 김씨!"
  차갑게 불러놓고 나서 그녀는 김씨의 낯짝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좁고 뺀질
뺀질한 이마와 여자처럼 얄팍한  입술 언저리로 술기운이 발그스레 번져나는 중
이었다.
  "김씨까지 이래도 되는 건가요?"
  "네?"
  "술 먹고 운전대 잡아도 되는 거냐구요?"
  넉살좋은 김씨도 그 당장에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갑자기 취기가 한꺼번에 오
르기라도 한 듯 얼굴이 온통 붉어졌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한 옥타브 더 높였다.
  "대답해보세요. 저  양반이 그런다구  김씨까지 같이 동무하자는  거예요 뭐예
요?"
  "온, 천만에요 사모님, 나는 단지..."
  발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녀는 말을  가로채버렸다. 그리고는 가차없이 일갈
하였다.
  "주제파악을 하시라구요, 제발 좀 주제파악을!"
  불시에 살을 맞은 짐승처럼 김씨가 꿈틀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친김에 그
녀는 다음 말까지 쏟아버렸다.
  "김씨는 뭣 하는 사람이죠? 운전수라구요, 운전수! 저 양반을 안전하게 모셔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란 말예요. 하물며 음주운전을 해요? 아니, 술동무 하자고 
봉급 주는 줄 아세요?"
  잠시 무르춤해 있던 김씨가 그제서야 입을 뗐다.
  "아무렴요 사모님, 아니..."
  입맛을 쩝쩝 다시는가 싶더니, 그놈의 타고난 넉살이  어디 갔냐 싶게 다시 떠
벌리기 시작하였다.
  "아다마다요 사모님,  맞습니다. 내가 누구겠습니까  운전숩니다. 운전수죠.  그 
점만은 골수에 꽉 박히도록 주제파악을 잘하고  있습니다. 믿고 안심하십시오 사
모님, 아니..."
  "아니는 또 뭐예요?"
  한 번 더 말을 잡아챘다. "아니 형수님, 아니 제수씨는 왜 맨날 읊어대는 거예
요?"
  여전히 제대로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 거라고  그녀는 닦달하였다. 백번을 양
보해서, 남편과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  양반이야 워낙 물 같은 위인인지라 
그런 따위엔 아예 무신경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그녀는 앙앙불락하는 심사로 
따지고 들었다-내가 왜, 고작 운전수의 입에서  사모님이다가 형수님으로 격하되
고, 형수님에서 다시 제수씨로, 그렇게 제 기분대로 들까불려야 한단 말인가.
  "이봐요 김씨!"
  그녀는 또 한번 차갑게 내뱉었다.
  "내친김에 단단히 일러두는 말인데,  그런 식으루다 어물쩡하게 사람 걸터넘을 
생각일랑 버리라구요.  난 그런 거, 취미  없어요. 아예 사모님이라고  하질 말든
지... 내가  어째서 형수님이 되고 또  제수씨가 되죠? 세상에 그런  경우도 있나
요? 난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단 말이에요..."
  다시 김씨가 꿈틀하였다. 이번에는  보다 더 깊은 곳에 살이 박힌  듯 한 순간
일망정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럴 수밖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
다지 않는가. 그 넉살 뒤에 감추어둔 자존심이  상처를 입고 마침내 피를 흘리기 
시작한 증거였다. 오랜만에, 그러니까 김씨가 어느날 느닷없이 옛 전우 운운하며 
당당하게 나타난  이래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 후련함을 그녀는  맛보고 있었다. 
흡사 박하향이라도 한입 물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술청의 걸레처럼 축 늘어져 있던  남편이 그녀를 가로막고 불쑥 나선 게 그때
였다. 채신머리도 없이, 자기가 부리는 사람의 어깻죽지에 매달린 채 해롱거리던 
그가 갑자기 정신을 채기기라도 한 것처럼 의젓한 투로 말하였던 것이다.
  "주제파악이라구? 좋지, 암, 좋은  말이라구. ...야야, 이리 앉어! 앉아서 주제파
악 그거, 우리두 한번 해보자구!"
  그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김씨를  끌어다가 마주앉은 다음,  주정꾼 특유의 
고집스런 태도로 또 말하였다.
  "그러구, 당신 말이야, 우리  사내들끼리 툭 터놓고 하고 싶은 얘기가 좀 있어
서 그러는데 말이야,  그 뭐 좀 내오라구. 있지  왜? 아무거나 양주 하나 내주구 
당신은 썩 꺼지라구..."
  칵 내뱉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그녀는 잘  참아냈다. 그 대신 쌀쌀맞게 돌아섰
다. 그리고는 안방으로  건너와버렸다. 에이, 저놈의 벤댕이 속만도  못한 여편네 
운운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그의  십팔번이다. 그리고는,  먹다 남은 
술병을 꺼내고 잔을  챙기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쪽으로 열린 귀가  계속 성가
셨다.
  "저 여편네는 말씀이야, 다  좋은데 딱 한가지, 사내 기분을 몰라주는 게 흠이
라구.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하는 수 없지 뭐. 무력하다구  내가... 자, 잔 
받어. 신경쓰지 말구...  그러구보니까 이렇게 마주앉은 것두  꽤 오랜만인 거 같
군. 한지붕 아래 살면서두 말이야. 안 그런가 친구?"
  얼쑤! 친구 좋아하네. 이부자리 위에 엎으러진 채  그녀는 쫑알댔다. 밴댕이 속
만도 못한 계집은 빠져줄 테니 그놈의 잘난 군대친구들끼리나 원 없이 얼크러져 
보시라구요...
  "너무 과음하는 거 같은데?"
  별스럽게 착 가라앉은 김씨의 목소리였다. 좀전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
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쉬 잠을 이루기는  틀린 노릇이라고, 그녀는 체념하였
다. 꼬마전구의 엷은 불빛  아래 철이 녀석이 네 활개를 펴고  깊이 잠든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녀석의 보등보등한 손등을 두어  차례 쓸어본 다음, 만사를 내던
지는 그런 기분으로 억지잠을 청하였다.
  석이와 철이는 동갑내기로 둘 다 유치원생이다.  한지붕 아래서 사느니만치 두 
녀석은 거의 온종일 붙어사는 꼴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내 의좋게 어우러지다가
도 자주 티격태격하게  마련이었고, 그게 때로는 조그마한  주먹들을 주거니받거
니 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아마 지금 상황이  그런 모양이었다. 아침나절부터 점심때가  겹도록 앞뜨락에
서 무엇을 하는지 고만고만한 머리통 두 개를 맞대고 한데 고부라져 있던 두 녀
석이 어쩌다 잠시  언쟁을 벌이는 듯하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다툼이  끝난 게 
아니라 그만 육박전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급기야는 둘  중 한 녀석이 으앙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철이의 울음소리가 분명하였다.
  드문 일이었다. 덩치나  뭐나 그저 어슷비슷한 녀석들이라고는  해도 지금까지 
승률은 철이 쪽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정작 주먹다짐의 결정적인  대목에 와서
는 석이 쪽이  그만 슬그머니 전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녀석의  심성이 워
낙 고운 탓이기도 하지만, 여기엔 도 나름대로의 까닭이 없지 않았다. 석이 녀석
은, 철이를 울렸을 때 필경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엄마의 매가 무서웠던 것이다.
  석이 엄마와 철이  엄마-두 여자가 다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울음보를 터뜨린 
쪽이 철이였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경우였다면 두  엄마 중의 한쪽이 잠깐 내다
보았거나 아니면 아예 두 사람 다 못  들은 척해두었으리라. 석이 엄마는 낮에도 
어둑어둑한 지하방에서, 그런가 하면 철이 엄마는  전망이 썩 좋은 2층 베란다에
서 달려 나왔는데도 현장에 닿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너 이 녀석, 또 못되기 굴었구나!"
  댓바람에 터져나온 석이 엄마의 질책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나만 잘못한 거 아니다 정말..."
  석이 녀석은 슬슬 뒤꽁무니를  빼면서 제깐엔 얼마든지 할말이 있노라는 투였
다. 하지만 어차피 귀기울여줄  상대들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터라  그 또한 금
세 앙 하고 울음보를 터뜨리고 만다.
  "얘들 좀 봐, 무슨 때아닌 쌍나팔이니?"
  철이 엄마였다.  그녀는 앙앙대고 있는 두  녀석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똑같은 
울음이라고는 해도 내용은  전혀 달라서, 한쪽은 응원꾼이  나타났으므로 의기양
양해하는 투라면 다른 쪽은 억울하게 당하는 자의 슬픔 또는 체념 같은 것이 서
려 있는 울음이었다. 곧 신경질적인 외침이 터져나왔다.
  "썩 그치지 못하겠니? 때린 놈이나 맞은  놈이나 똑같은 악을 쓰니, 그럼 어떻
게 하자는 수작들이냐? 걸핏하면  다투고 쌈박질이나 하면서 뭣 땜에 같이 붙어
다니니, 붙어다니긴? 하루도 빤한 날이 없으니, 내가 너네들 대문에 아주 미치고 
폴짝 뛰겠다구 정말!"
  지극히 사소하다면 사소하달 수 있는 유의 사태 앞에서 매번 전전긍긍하는 사
람은 석이 엄마뿐이었다. 그녀는 계속 앙앙거리는  두 철부지와 거침없이 신경질
을 터뜨리는 한 여자 사이에서  몹시 곤혹스러워하다가 만만한 건 역시 제 새끼
뿐인지라 우선 석이  녀석의 고 작은 등짝부터 한차례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리
고는 다잡아 닦달하였다.
  "너 이 녀석, 냉큼 말해봐!  뭘 잘못했는지 어서 사실대로 말하고 사과하란 말
이야! 어서!"
  엄마의 말뜻을 석이는  익히 잘 알고 있다. 결단코 잘잘못을  가리자는 얘기가 
아닌 것이다.  무조건 사과하고 무조건  양보하라는 소리인  것이다. 억울하다고, 
사실은 이러저러하다고 뻗대보았자 소용없는 노릇이다. 괜히 매만 더 늘어날 뿐. 
이런 때만은 엄마의 회초리가  어찌나 매운지, 석이는 우선 울음부터 뚝 그쳤다. 
그리고는, 고 얄미운 철이 녀석  쪽을 향하여, 미처 삭이지 못한 분함 때문에 토
막토막 끊어지는 어투로 간신히 말하였다.
  "좋아, 그래... 내가 또 도둑놈 할게. 그럼 됐지, 시..."
  철이 녀석이 기다렸노라는  듯 울음을 딱 멈추었다. 상대의 제의를  이의 없이 
흔쾌히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였다. 철이 녀석은, 조금은 계면쩍은 표정을 지은 채 
냉큼 대꾸하였다.
  "나두 좋아. 진작 내가 그러자고 말했잖니? 좋아, 그럼 내가 형사고 넌 도둑놈
이다아? 그렇지? 너, 약속했다 응?"
  석이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리고  또 철이가 어색한 웃음을 씨익 흘림으로
써 두 녀석 사이의 분쟁은 어설프게나마 화해에 이르렀다.
  한데, 철이 엄마로서는 그런  식으로 돌아서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두 녀석
이 주고받은 말에서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두  꼬마 녀석을 
한참이나 꼬나보며 서 있던 그녀는 평소의 그 쌀쌀맞은 어조로 캐물었다.
  "너네들,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니? 도둑놈은 뭐고 형사는 또 무슨 소리
니?"
  대답을 선뜻 자청하고 나선 건 철이였다. 녀석은 신바람나게 설명하였다.
  "응, 그건 말이야 엄마, 석이가 도둑놈이고 나는 형사라구. 우린 지금 도둑잡기
를 하는 거야. 이제 알았어 엄마?"
  "그런데?"
  그런데 뭣 땜에 다투었냐는 물음이었다. 그렇다면 으레 석이가 도둑놈, 철이가 
형사인 거지 왜 새삼스럽게 시비가 붙었느냐는 것이었다.
  하긴 석이  엄마 쪽에서도 그 점이  다소 궁금하기는 하였다. 전쟁  놀이를 할 
때나 간첩잡기를 할 때나 간에  배역은 늘 그런 식으로 정해져왔을 뿐더러 석이 
또한 당연하다는 듯이 으레 후진 역만 떠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녀석이 갑
자기 제가 주역을 하겠다고  고집을 해? 이거야말로 새삼스러운 바가 없지 않다
고 생각되었다.
  이번에도 씩씩하게  답변을 하고 나선  쪽은 철이 녀석이었다.  녀석의 명쾌한 
해명인즉 이랬다.
  "내가 도둑놈을 해야 된다고 자꾸자꾸 우기잖아, 석이가 말야. 쟤네 아빠가 그
랬대. 거짓말하는 거냐 도둑질하는  거나 똑같이 나쁜 거라고, 우리 아빤 거짓말
만 하는 아주 나쁜 사람이래.  아니지 엄마? 우리 아빠, 나쁜 사람 아니지 그치? 
그러니깐 내가  도둑놈을 해야 되는  거라고 석이가 자꾸자꾸  우기잖아. 아니지 
엄마? 쑨 엉터리지 그치?"
  세상에!
  가위 메가톤급의  폭탄을, 그것도 바로  턱밑에서 불시에 터뜨려  놓고도 정작 
두 아이 녀석들은 태연하였다.  철이 녀석은 만사 재미나 죽겠다는 낯짝이고, 또 
석이 녀석은 조금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사실 시인을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두 어른들의 놀라움이라니!  대경실색이라는 말 따위로는 태부족이랄  밖에 없었
다. 특히 석이 엄마로서는 간이 철푸덕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를 어쩌나, 정말 
이를 어째... 심장이  깡깡 얼어붙는 듯한 충격 속에서 도무지  옴쭉달싹도 할 수
가 없었다.
  ...남편이 지하방으로 내려온 것은  세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술 취한 사장님을 
떠메고 위층으로 올라간  시각이 자정을 넘어 한  시 좀 못미처였으니까 줄잡아 
두 시간 이상  심야대작을 한 셈이었다. 그동안  그녀는 잠들 수가 없었다. 잠은 
고사하고, 내내 전전긍긍하는 마음이었다. 최근 들어 부쩍 불평이 잦던 남편이었
다. 혹  술자리 끝에 고약스러운  주정으로 터져나오지나 않을까  영 조마조마한 
심경이었던 것이다.
  남편은 걱정했던 만큼은 흐트러져  있지 않았다. 워낙 술이 센 사람이었다. 단
지 눈알이 좀 붉게 충혈되어 있을 뿐, 얌전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여느때
와는 달리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엎치락뒤치락하며 몇 번인가  담배를 찾
아 물곤 하였을 뿐, 그답지 않게 입조차  무거웠다. 머리 위, 지상으로 반쯤만 드
러나 있는 창으로  새벽빛이 푸르게 젖어드는 시각쯤이었다. 엎어진 채  끙끙 앓
는 시늉을 하던  그가 갑자기 천장을 향해 휘익 돌아눕더니,  도저히 뱉어버리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겠다 싶었던지,  만사를 죄 작파하듯 하는  그런 어투로 
딱 한차례 푸념했던 것이다.
  "웃기는 친구야 아주... 입만  뻥긋하면 흰소리라니깐. 내가 뭐 한두 번  속아줬
나? 뻔한 거짓말을 왜 해? 아주 상습적이고 지능적인 친구야. 아니, 사기꾼 따로 
있고 도둑놈이 따로 있는  건가. 다 똑같은 치들이지... 그러구두 사장이라고? 그
런 사장, 나두 하겠다 씨팔!"
  남편의 입을 그녀는 틀어막는 시늉을 하였다. 잠든  줄 알았던 석이 녀석이 그
때 부스스 일어나 앉았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니?"
  그녀는 얼른 다가갔다. 조그만 얼굴을 온통 구기며 녀석이 어눌하게 말하였다.
  "나 오줌 마려..."
  재빨리 요강을 대령하였다.  지체없이 오줌발이 터져나왔다. 녀석은 다시 드러
눕자마자 금세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쟤네 아빤 우리집 운전수니깐 머슴이나 같은 거지?"
  철이 녀석이 또 종알대고 있었다.
  "엄마가 그랬잖아? 그러니깐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 거지. 그치 어마?"
  진작부터 얼굴빛이 새파랗게 죽은 채  경련하듯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 말 한 
마디 뱉지 못하고 서 있던  철이 엄마가 갑자기 팔을 쳐들더니 철썩철썩 소리나
게 뺨을 후려쳤다. 제 자식  남의 자식 가림없이 공평하게 닥 한 대씩이었다. 그
런 다음, 다시 더  어떻게 해야할 바를 잊어버린 듯 망연자실하여  한참을 서 있
더니 돌연 철이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며  계단을 올라가버렸다. 현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번에는 석이 엄마 쪽이 넋을 놓아버렸다.  너무나 엄청난 충격이어서 오히려 
무덤덤한 기분이 들었다. 철이  녀석의, 금방 요절이라도 날 듯 자지러지는 비명
이 머리 위에서부터 터져나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얼마든지 그렇게 더 넋을 놓고 
있었을 터였다. 한바탕 매타작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기겁하듯, 깨어난 
석이 엄마는  서둘러 아이 녀석의  손을 잡고,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지하계단을 
정신없이 내려왔다. 그리고는,  무엇에 쫓기듯 허둥대며 석이 녀석의 종아리에다 
매타작을 시작하였다.
  "요 녀석! 이 못된 녀석! 내가 뭐랬니? 친구한테는 뭐든 양보하고 절대로 다투
어선 안된다고 가르쳤잖니? 그래도 또 싸워? 요 못된 녀석! 요 못된 녀석!"
  못지않게 이쪽에서도  요란스런 울음소리가  터져나갔다. 뽀뽀라도 하고  싶을 
만큼 예쁘기만 한 종아리에 맷자국이 실뱀처럼 금세 또아리를 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어느 새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가고 나서 1시간이나 채  지났을까. 여전히 햇빛 밝은 뜨락
에서는 석이와 철이 두 녀석이  고 조그만 이마들을 비비대며 마주앉아 무슨 짓
을 하는지 온통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두 여자들은-한쪽은 대낮에도 어둑
어둑한 지하방에서, 또 다른 쪽은 전망 좋은 2층  베란다에서-짐짓 모른 체 내다
보려 하지 않았다.

    문 앞에서
  아파트의 문은 잠겨  있었다. 그 철제 현관문은 견고하게 닫아걸린  채 주인의 
귀가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새 페인트칠을 다시  한 모양이
다. 한 달하고도  닷새 만에 돌아온 그의  눈에는 그것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몹시 지친  상태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자그마치  천리길을 왔던 것이다. 
얼른 문을 따고  들어가 방바닥에 길게 드러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는-부질
없는 짓일 줄 알면서도-한 번 더 초인종을 눌러보았다. 이미  열 번도 넘게 해본 
짓이다. 닫힌 문 너머에서 아주 맑고 고운  울림이 딩동딩동 몇 차례인가 울려퍼
졌다. 그러나 그뿐, 안으로부터는 역시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한껏 맥이 풀린  그는 그제서야 단념을 하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는 그놈
의 철제문에 등을 기댄 채  대책 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자니 영 난감하고, 
그리고 약간 계면쩍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출발하기 전에 전화라
도 해둘 걸 그랬다고, 그는 설핏 후회하는  마음이 되었다. 하지만, 남의 집을 방
문하는 것도 아니잖는가.  귀가할 적마다 매번 전화질을 한다는 것도  영 객쩍은 
노릇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때문에  그는 종종 이런 낭패를 당하곤 하였다. 특
히 귀가날짜가 불규칙한 경우에 그랬다. 통상 그의  귀가는-별스런 일이 없는 한
-매달 마지막 주말로 정해져 있었다. 어언 10년  가까운 세월을 되풀이하다 보니 
이제는 식구들까지도  그렇게 길들여져버렸다. 그런데  이번은 그렇질 못하였다. 
지난 주말엔 별스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물  건너 제주도를 3박 4일간 다녀온 
졸업여행이 그것이었다.  그는 물론 인솔자의  입장으로서였는데, 똑같은 코스를 
동일한 자격으로 여행한 게 이번으로 여섯번 째였다.
  어쨌거나, 직장과 가정  사이에는 천리길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어느쪽에서 
출발하든 넌덜머리나는  여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오르내렸으면 이제는 
그럭저럭 내성이 붙을 법도 하건만 사정은 전혀  그렇지 못하였다. 그는 거의 언
제나 대중교통-그러니까 주로 고속버스 편-을 이용해왔는데,  종점에 닿기까지는 
매번 이를 갈 만큼 된통 몸살을 치르곤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귀가행
위는 고행에 해당하는 셈이었다. 가정이란, 밖에서 얻은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고 
삶의 의욕과 활력을  재충전받는 공간 어쩌구 하는 말은, 적어도  그에게는 지극
히 공허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되레, 그 먼길을 오가는 것만으로도 더 지쳐빠
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집을 찾아야 하는  까닭은 무엇
인가? 글쎄다. 그 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는 채 그는 어쨌든  한 달에 대충 
한 번꼴로 집을 향하여 천리길을 나서곤 해왔던  터이다. 특별히 발목 잡힐 일이 
없는 한 매월 마지막 주의 금요일 오후에 나서서 일요일 오후에 되돌아가는 - 2
박 3일의, 지겹고 몸살나는 순례였다.
  닫힌 문 앞을 떠나기 전에 그는, 무겁게  들고 있던 가방을 철제문의 손잡이에
다 걸어두었다. 그의 손때가  반질반질하게 묻어 있는, 그래서 훈장 관록이 만만
치 않게 느껴질 법도 한 그런 가방이다. 하지만 속사정을 달라서, 책이라고는 찻
간에서 뒤져보던 주간지가 고작으로, 온통 빨랫감만  꾸깃꾸깃 들어앉아 있을 따
름이었다. 그나마, 도무지  함부로 내놓기가 민망스러운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었
다. 그런데도 매번 지겹도록  무겁게 느껴지는 까닭을 잘 모르겠다고, 그는 새삼
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잔뜩 꺾은 채, 그 어둠침침한 아파트 계
단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의 아파트는 5층짜리  저층아파트의 맨 위층이었다. 더 위로는  나름대로 멋
을 낸 붉은 기와지붕이 있고, 그리고 도 그 위는 탁 트인 하늘이었다. 그 하늘과 
지붕 위엔 거의  언제나 새들이 있었다. 특히 까치나 비둘기떼가  언제나 무리지
어 내려앉곤 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이 유일한 위층의 주민인 셈이었다. 그 사실
은 썩 기분좋은 일이었고, 그래서 꼭대기층까지  걸어서 오르내리는 수고를 그는 
조금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긴 도무지 달갑지 않은, 또 다른 부류의 주민이 있기
는 하였다. 지붕의 기왓골이나 천장의 잡다한  내장재 틈서리마다에 자리를 잡고 
무섭게 번식하고 있는 바퀴벌레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 족속들이 화장실 벽이
나 부엌의 조리대  위 같은 곳을 유유자적  나돌아다니는 꼴을 목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는데  그럴 때 보면 개중에는,  어찌나 크고 살이 올라  있는지 흡사 
기름에 잘 튀겨놓은 번데기  같은 놈도 종종 눈에 띄었다. 그의  기분 좋은 이웃
인 새들이 지붕 위에다 무시로  깔겨놓은 오물 탓이라고 아내는 곧잘 불평을 늘
어놓곤 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1층까지 내려오는 사이에 아내와 마주치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그는 천천히, 
근력이 시원찮은 노인네처럼 아주 느릿느릿 걸어서  계단을 다 내려왔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역시 헛된 것이었다. 대신 그의 눈에  띈 것은 현관 벽에 나란히 붙어 
있는 편지함이었다. 열 개의 함 중 유독 503호에 우편물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
는 그것들을 몽땅 뽑아내어 가지고 선 채로 하나하나 점검해보았다. <번지내 투
입>이라 찍힌 홍보지가 몇 종-요즘 들어 특히 이런  종류의 우편물이 부쩍 늘어
가는 추세다.  최근에 창간된 지역신문 한장-비매품이다.  전화요금 고지서-얼핏 
보아 이달에도 적지않은 액수다. 아파트관리비 통지서, 뉴스위크지, 대입 수험지, 
그리고 모 사회봉사단체와 증권사 두어 군데서  보내온 유인물 등등... 가정의 일
상사를 잠시 들여다본 기분이어서 그로서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였다. 그런 것
들은 아마도 아내나 아이들의 삶과 더 많이  관계 되리라. 하지만 자신에게는 대
체로 생소한 것이었으므로 그는 그것들을 다시 제자리에다 아무렇게나 쑤셔박아
두었다. 그리고는 손을  털고 나서 1층 현관을  나섰다. 흘낏 시계를 들여다보았
다. 오후 다섯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아내가 슈퍼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도시 사람, 특히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은  생필품의 거의 대부분을 그런 곳
에서 공급받고 있으므로 그 생각은 썩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주부들은 
이제 저녁상을 걱정해야 할 시간이다. 언젠가도 이런  낭패 끝에 단지 안 슈퍼에
서 아내와 극적으로(?)  조우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아내는,  두 팔이 늘어
지게 들고 나오던  비닐꾸러미 중 하나를 그에게 넘겨주면서 불평을  했었다. 돈 
쓰는 일도 힘들다구요. 맨날 식구들 거둬 멕이는 것만도 중노동이에요...
  평소 아내가 드나들던  슈퍼는 세 곳이었다. 그들이  속해 있는 7단지 슈퍼와, 
그리고 이웃한 6, 8단지 슈퍼가 그것이었다. 그는 대단한 기대를 걸고 세 군데를 
차례로 순방하였다. 하지만  극적인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허전한 노릇이었
다. 그 허전함 때문에 그는 내처 5, 6단지 사이의 굴다리시장까지 좇아가 기웃거
렸다. 집에 머물 때면  더러, 아내의 장바구니를 들어주기 위해 따라나오곤 하던 
곳-어물전 앞에서는  생고등어를 사라고 아내의  옆구리를 집적거렸다가 무안을 
당하기도 하고, 또 옛날  생각 때문에 잠시 나이며 주제를 잊은  채 풀빵을 쩝쩝 
사먹기도 하던 곳이었다.  때가 때이니만치 그 좁은 거리는 장보러  나온 아낙네
들로 한창 복작대는  판이었다. 그들 사이를 헤치고 다니기가 좀  민망스러울 지
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끝에서 저쪽 끝까지 막무가내로  뚫고 간 
다음, 거기서 다시 온 길을 되짚어 샅샅이 뒤졌지만 결과는 역시 허무하였다. 너
무 일방적인  기대였음을, 그는 비로소 깨닫는  기분이 되었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다리가 꽤나 팍팍하였다. 이럭저럭  한 시간 가까이 헤매고 다닌 꼴이었다. 등
때기가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스적스적 걸어갔다. 
허리를 꺼부정하게 굽힌  채 팔다리를 앞뒤로 흐느적거리는  그런 걸음걸이였다. 
아내가 곁에  있었다면 또한 소리  얻어들었으리라. 그 걸음걸이는  아내가 몹시 
싫어하는, 그의 나쁜 버릇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당신 걸음걸이가 그게 뭐예요? 
아예 날더러 업고 가자고 하세요. 그 편이 남보기에도 좋을 것 같수... 하지만 지
금은 아내의 지청구가 아쉬웠다. 그러자 문득, 그새 아내가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대  수준을 넘어서 어느새 확신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 7단지로  들어서자 저만치 뒤편으로 그의 아파트  베란다가 비
스듬히 보였다. 하지만 결코 서두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4층과 5층의 중간지점에서 그는 일단  발을 멈
추고 서서 고개를 쳐들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가방이었다. 그 물건이 손잡이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아내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분명한 징표였다. 실망이 클 법
한데도 별로였다. 어쩌면 이번 역시 그닥 기대를  두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를 노
릇이었다. 단지 그의 어깨가 좀더 처졌을 따름이었다.
  굳이 꼭대기까지 올라갈 이유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돌아서려다가 그
는 문득 엉뚱한 환영을  보았다. 무척 낯익은 얼굴 하나가 머리  위 허공에서 불
쑥 나타나더니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던 것이다.  아주 순간적으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던 까닭은 무엇보다, 그것이 바로 자기자신의 모습이란 자각 때문이었다. 동
남향으로 앉은 건물이어서 저녁 무렵엔 계단실이  다소 어둡다고는 해도, 그러나 
사람의 얼굴조차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바로 코앞에서 맞바라고  있는 그 
얼굴은 좀더 늙고 조금 더 초췌해보이기는 해도 영락없는 자신의 몰골이던 것이
다. 몹시 귀에 익은, 탁하고 어눌하고 기어드는  듯한, 그 특유의 목소리가 그 순
간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기절해  나자빠졌거나 아니면 혼비백산하여 
층계를 굴러 내렸을 것이었다.
  "보래이... 냄이 니... 아이가?"
  그 한 마디로 족하였다.  단번에 상대를 알아본 그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역시 그랬다.  천만뜻밖에도 아버지가 거기, 잠긴  문앞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
다. "아버님이 어쩐 일이세요?"
  "올라오능 거 보이꺼네 냄이 니지 싶으더라."
  종남이의 <남>이를 아버지는 늘 <냄>이라고 발음하였다. 그의 기억이 미치는 
한 아득한  옛날부터 그래왔다. 그 탓일까.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불리기만 하면 
그는 금세  마음이 어려지는 것이었다. 냄이-그것은  때로 깊은 울림 갚은  것을 
불러일으키는 소리였다.
  "어쩐 일이세요 아버지?"
  그는 같은 물음을 되풀이하였다.  그밖에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이 뜻밖
의 해후가 조금은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기냥 바람이나 쐴라고 안 나섰디나. 니 안사람, 안에 없능갑제?"
  "예, 잠시 집을 비운 모양입니다. 아부지는 언제 오신 거지요?"
  "아까 안 왔더나."
  여전히 손잡이에 걸려 있는 가방을 가리키며 노인이 말하였다.
  "아까 참에 왔을 때는 없디 요분에 와보이꺼네 저 물건이 딱 안 걸ㄹ나. 그래, 
이기 우예 된 기고 싶어서 내 한참 궁리하던 중이다..."
  노인은 그러면서 허허 웃었다. 목젖이 보일 만큼  입을 벌리고 소리를 크게 내
어 웃는, 특유의 웃음이었다. 그도 맥없이  따라 웃었다. 부전자전이라며 그의 아
내가, 어쩌면 그렇게나 속없는  웃음들일까 하고 곧잘 흉보곤 하던, 족보에 있는 
바로 그 웃음이었다. 그로서는 참 오랜만에 마음이 즐거워졌다.
  "그래서요?"
  "니한테도 열쇠가 없능 기 분명타 싶더라."
  노인은 또 한차례 예의  웃음을 보인 다음 덧붙였다. "니, 안사람  찾아갔지러? 
어데 마실 간 기가?"
  "마실요?"
  되묻고 나서 그도 또  웃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아내의 외출을 예스럽게 말하
자면 마실 간  꼴일 것이다. 아마도, 일상의  울타리를 벗어나 아주 먼 나들이를 
한 것은 아닐 터이므로. 하지만 이 거대한  아파트촌에도 마실 갈 만한 이웃들이 
있었던가? 새삼스레 아내의 일상이 그는 궁금해졌다.
  그러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옳거니! 그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올렸
다. 아내가 어쩌면 가 있을  법한 또 다른 장소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것은 슈퍼
도 시장바닥도  아닌 제삼의 장소-바로 교회였다.  철제 문짝 위 눈높이쯤  되는 
곳에 그 교회의  명패가 붙어 있었다. 그것은 얇은 알루미늄판에  특수인쇄 처리
를 한 것으로 교회 이름 담임목사 이름 그리고 주소와 몇 개의 전화번호 따위가 
박혀 있었다. 평소  무심히 보아오던 것이었다. 그래,  전화를 해보자, 하고 그는 
작정하였다.
  공중전화는 단지 진입로 쪽에  있었다. 그는 잠시 주저하였다. 옆집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집도 비었을까?  그거야 벨을 눌러보면 알 일이다. 하지만 전화 
빌리는 일을 그는 포기하였다.  몇 달이 가도 서로 얼굴 한번  부딪칠 기회가 드
문 이웃들이었다.
  "이대로 잠깐 기대리세요. 요  앞에 가서 전화 한 통 해보게요. 잠깐이면 됩니
다."
  그는 노인을 그  자리에 세워둔 채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그리고는 공중전
화가 있는 단지 입구  쪽을 향하여 열나게 뛰어갔다. 공팔사칠 공팔사칠... 입 속
으로는 연방  전화번호를 뇌면서. 다행히  국번은 같았으므로 외는  수고가 한결 
덜어졌다. 그러자 참 요상하게도 또다시 낙관적인 기분이 들었다. 아내가 틀림없
이 교회에 있으리라고  믿어지는 것이었다. 아내의 행동반경이야 빤하지 않은가. 
그야말로 뛰어봤자지 뭐! 그는 생각에 열중하였다. 평소에도 시장보다 교회 출입
이 더 잦았던 아내였다.  주일날이야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출입이 뻔질났던 
것이다. 삼일예배, 구역예배, 전도훈련, 제자훈련, 구역장 모임, 여전도회 모임, 새
벽기도회, 금요철야기도회, 전도대회, 봉사활동,  교우 경조사 참례 등등... 그래서 
아내는 늘 바쁘고, 그리고 늘 조금씩 지쳐 있게 마련이던 것이다. 그것을 극성스
럽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
신은 꼭이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게으른 사람은 천당 가는 
꿈조차 꿀  일이 못된다고만 여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자기자신은 누구 
못지않게 게으른 사람이라고 진작에  단정한 바 있었다. 당신, 믿는 일을 그렇게 
게을리 해가지고 나중에 어쩔려구  그래요? 언젠가 아내가 하던 말을 불쑥 떠올
리고 경황중에도 그는 히물히물 웃었다. 누군 하늘나라에 가서 그랬답디다. 천성
문 앞을 기웃기웃하면서,  나 아무개 집사 좀  만나게 해주시오, 그 여자가 바로 
내 아내요, 라고...
  아내는, 그러나 교회에도 없었다. 거의 확신에 가까웠던 기대가 허물어지고 말
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는,  이 또한 요상하게도 이번 역시 심상한 느낌이
었다. 아내가  이런 시간에 꼭이 거기에  있어야만 당연하달 수야  없지. 아무렴. 
그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왔다.
  다시 5층까지의 계단을 오르자니 숨이 찼다.  이게 몇번째인가? 그는 코너마다 
발길을 멈추고 잠깐씩 서 있었다. 어차피, 아내가 제 스스로 나타나줄 때까지 시
간을 뭉개야 한다. 서둘  이유란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5층 맨 윗계
단을 밟고 올라서려니 역시 숨이  찼다. 내일이면 쉰이다. 그리고 그 쉰 살의 나
이가 헛것이 아니다-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러자 고희를 엊그제 넘긴 
아버지의 모습이 그제서야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우예 됐노?"
  닫힌 문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노인이  물었다. "그래, 몬 찾았나? 딴 
데 해볼 데도 없고? 나간 김에 대강 다 해볼 꺼로..."
  그는 풀썩 웃고 나서 대답하였다. "곧 오겠지요 뭐. 멀리 나간 건 아닐 거예요. 
그 사람, 갈 데도 별루 없어요.  안방 미장원 같은 데서 머리나 볶고 있는 건 아
닌지 모르겠네요.  그러자면 시간께나  걸리기두 하겠지요. 예편네들이란...  젤루 
흔한 게 시간이니까... 아까운 줄을 알아야지요."
  "하모, 그래야제." 노인도 웃고 있었다.
  "어데 마실 안  갔겠나. 그라이 결국에는 올 꺼 아이가.  내는 개안타. 쪼매 더 
기다리보자."
  "어디 나가서 앉을자리라도 찾아보십시다."
  아들이 먼저 돌아섰고,  그 뒤를 줄레줄레 따르면서 그의 늙은  아버지가 맞장
구를 치고 있었다. "오야오야. 그라자카이."
  그러면서 두 부자는 의좋게 1층 현관을 나섰다.
  어린이놀이터를 앞에 하고 벤치가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대여섯 살짜리 사내
아이 하나가 그네에 매달려  있을 뿐 그 일대는 조용하였다. 두  부자는 벤치 하
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머리  위로는 등넝쿨이 제법 어우러지고 있었다. 마침 바
람기도 있어서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그놈의 을씨년스런 5층 계단과, 닫아걸
린 철제문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그깐놈의 것, 영원히 열리지 않는대도 아쉬울 
거 없다, 굳이 따고 들어간다고  해서 무슨 대수냐! 오히려 이쪽이 한결 마음 편
한 것을... 마치, 아주 먼 길을 걷다가 잠시 다리를 뻗고 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었다. 아파트 건물의 터진 짬으로 1단지 너머  우뚝 솟아 있는 관악산 저녁 풍광
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넉넉한 느낌을  주었다. 기상대와 송신탑이 있는 꼭
대기 위로 붉은 일몰을 헤치며 여객기 한 대가 천천히 사라져갔다.
  "아까도 내 여게 안 있었더나."
  노인이 먼저 입을 뗐고, 그가 놀라 되물었다.
  "그러세요? 그럼 진작에 오신 거군요?"
  "얼추 서너 시간은 되지 싶으다."
  "아니, 한낮에 오신 거네요. 그러면, 점심은요?"
  "오다 찻간에서 묵었다."
  "기차 말입니까?"
  "하모, 통일호 타고 안 왔나."
  아들은 입을 다물었다. 대구서 서울까지-그 먼길을  통일호로 왔노라는 얘기였
다. 이름만은  썩 그럴싸한 그놈의  통일호란 왕년의 완행열차를  뜻하고 있음을 
그는 너무나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남대문시장 뒷골목처럼  붐비고 냄새나는 
속에서 점심까지 잘 자셨노라는 얘기였던 것이다.  그의 말투는 좀 퉁명스러워졌
다.
  "아부지는 어째서 매양  그놈의 통일홉니까? 새마을이나 무궁화는 없구요? 아
부지는 아직도 달구에 사신다니까..."
  달구란 대구의 옛이름이다. 노인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예의 속 좋은 웃음이
었다.
  "내사 머 천하에 바쁠 일이 있나 어데, 완행 타고 천천히 오면서 이런 사람 저
런 사람하고 시상 얘기도 하고 그라이꺼네 좋더마는... 하낫도 안 불편타카이."
  "아부지도 참...  그것도 근력 좋으실 때  얘기라구요. 그러다가 찻간에서  무슨 
탈이라도 나보세요. 어떡헐 거예요? 꼼짝없이 생고생하시지 뭐."
  "탈은 무슨 탈! 내사 안죽 끄떡없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노인의 목소리엔 기력이 없었다.
  "담에 오실 때는 미리 연락 주세요. 안방에 매인 전화, 번호만 돌리면 될 텐데 
그게 어려우세요? 그러면 새마을표 끊어서  부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세요."
  "머로 그래! 개안타. 신경쓰지 마라."
 노인은 머리를  완강하게 내젓기까지 하였다.  그는 새삼스레  아버지의 행색을 
살펴보는 마음이 되었다.
  그랬다. 아버지는 여전한 모습이셨다. 꺼부정하게 굽고 비쩍 마른 체격이 우선 
그랬고, 다듬지 않아 지저분한 턱수염과 한 모숨도 체 남지 않은 백발이 그랬고, 
또 무엇보다 초라한  그 입성이 그랬다. 헐렁하게 걸치고 있는  남방은 노인네에
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문양으로 온통 어지러웠는데 그나마 물이 바래고 천이 
날긋날긋 해보였다. 바지는 여기저기 얼굴이 지고, 무릎께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
다. 게다가 아랫단을 두어 번 걷어올린 것으로  보아 바짓가랑이가 턱없이 긴 모
양이었다. 요컨대, 아무리 철이 그렇다고는 해도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치고는 도
무지 걸맞지 않는 차림새인 것만은 분명하였다. 흡사, 의지가지없는 떠돌이 노인
네 행색이라고나 해야 할 판이었다.
  그는 은연중에 한숨을 내뱉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지적하고 간곡히 당부드렸
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늘 그런 모습이셨다.  당신은 그게 편타는 주장이었다. 
뿐더러, 굳이 체면이나  위신 같은 것을 새삼스럽게 챙겨야 할  신분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되는 대로 게오밥이나 끓이고 살아온 한평생인데 인자 와가주고 네꾸
다이 양복 걸친들 머할 끼고.  내사 마 벨볼일 없는 늙인잉 기라. 우리끼리 하는 
말로,옛고짜 고물이요 갈거짜  거물 아이가." 그러고는 저 속좋은 웃음으로  얼버
무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들 체면이라는  게 있단 말입니다. 하고 때로는 강변하고  싶은 그였
다. 아버님은 그게  편하실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이웃들 대하기가 민망하다구요. 
그래도 명색이 선생 아닙니까. 남을 가르치는  신분 아니냐구요. 그러나, 그는 물
론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매번 마음속으로만 끙끙 앓고 마는 것이었다. 언젠
가 한번은 노인이 그런  모습을 한 채 그의 직장으로 불쑥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도 속으로만 앓고 말았었다.  천성이 그렇게 타고난 분이었다. 
아니, 평생을 가난 속에서 그렇게 살아온 분이기도 하였다. 남루는 곧 당신의 생
리였다. 속된 말로 하자면, 이제  와서 억지로 때 빼고 광내려고 하는 쪽이 오히
려 속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인 곁에는 비닐백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것은  노인이 항용 끼고 다니는 물
건으로서, 그 낡은 정도며 속이  빈 듯 쭈그러져 있는 모양 하며, 한눈에도 주인
을 아주  잘 닮아 있었다.  쓰레기통에 내던져둔들 아무도  집어가지 않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눈을  들어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비로소, 이마의 
상처가 눈에 띄었다.
  "아니, 이마는 왜 이래요?"그는 놀라 소리쳤다.
  "아이다. 벨꺼 아이다."노인이 손을 내저었다.
  "가만계세요."
  그는 바싹  다가앉아 상처자리를 들여다보았다.  무슨 막대기 같은  것에 긁힌 
듯싶었다. 이마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훤히 벗어진 머리라  상처가 유독 드러나 보
였다. 이마 정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비켜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길이로 죽 
그어진 생채기가 노인의 인상을 한층 더 초라하게 만들어서 그로 하여금 불현듯 
연민의 감정에 빠져들게 하였다.  아마도 다친 지 몇 시간 되지  않는 듯 상처에
선 아직도 피가  삐죽이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안경알도  온전치 못하였
다. 무엇에다 된통 얼굴을 들이받은 게 분명하였다.
  "어쩌다가 이랬지요? 안경 깨진 거 보니까  아주 큰일날 뻔하셨구만요! 어디서 
이랬지요?"
  거푸 물으면서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게 낙심이 될 수가 없었다.
  "어데! 앵경은 그전에 뿌사진 기다."
  노인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날빛을 붉혔다. "저으게 나무 밑을 지나
오다 보이꺼네 머가 이마에 턱 안 걸리나. 솔가지  하나가 축 처진 거를 보고 내 
딴에는 피한닥고 피한 기 고마 이래 된 기라. 요새 내 잘 당한대이. 눈이 침침한 
기 당최 짐작이 없다카이. 아무데나 허연 대가리 잘 디받고 산다 마."
  단순한 시력감퇴만  아니라, 그만한 나이에  이르면 일종의 공간감각  같은 게 
둔해지기도 하는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우야겠노, 그기 다 늙은  탓 아이겠나. 걸어댕기는 일도 전만은 몬한 거 같더
라. 이노무 발이 자꼬 헛디딜락  해서 차 타고 할 적마다 애묵는다카이. 잘 자빠
지기도 한대이. 옛말에, 그래서 늙으마 섧다 안카더니."
  노인은, 이번에는 소리를 내지 않고 웃는다. 그는 왠지 맥이 탁 풀리고 말아서 
아무런 대꾸도 못하였다.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관악산 위 하늘을 불게 물들
였던 놀이 잿빛으로  식어가고 있었다. 또 한대의 비행기가 산  너머로 미그러져
내렸다.
  "약이라도 좀 발라야지요?"
  한참 만에 그는 말하였다. "그래야 빠리 아물지요."
  "개안타 마, 나도라!"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이까짓 거 가주고 남사시럽거로 약은 무슨 약이고! 나
도라 고마."
  하긴 그렇기도 하다고, 그는  맥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마 한 가운데라 빨
간약을 바르기도 그렇고, 반창고 같은 것을  붙여두기에는 더 요란스럽기만 하리
라고 생각하였다. 이따  집에 들어가는 길로 연고 같은 거나  찾아봐야겠다고 그
는 작정하였다.
  "그 안경 좀 보십시다."
  한참 뒤에 그는 말하였다.
  "앵경도 개안타카이."
  노인은 그러면서 안경을  벗어 건네주었다. 그는 찬찬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이 또한, 참 그럴 수  없다 싶게 주인을 쏙 빼어닮은 물건이었다. 검정 뿔테안경
으로 너무나 무겁고 투박한 구닥다리였다. 그 역시  줄잡아 30년 이상 안경을 써
온 사람이지만, 그 같은 물건은 아마도, 이제는 골동품 가게에나 가야 구경할 수 
있으리라고 짐작되었다. 그나마  다리 한쪽은 색깔이나 굵기가 생판 엉뚱하였다. 
원래 제짝이 아닌 거다. 게다가 또, 불에  태운 자국까지 나 있었다. 아마 당신이 
손수 모양을 바로잡아보려고 연탄불 같은 데다 올려놓았다가 그 지경을 만든 게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거 맞춘 지 얼마나 됩니까?"
  혀를 차고 싶은 마음으로 그는 물었다.
  "하마 5,6년은 됐을 꺼로?"
  보기보다는 오래지 않다고 생각되었으므로 무심중에 그는 말하였다.
  "그런데 어째 이래 험하지요?  제 것도 그 정도 썼지만 아직 이처럼 말짱한대
요?"
  "테는 원래 쓰던  거 아이가. 알만 새거고  테는 중고품으로 안했나. 씰데없이 
테값을 너무 달락 해서... 그래도 끄떡없이 잘마 ㅂ더라."
  그는 깨진 알을 다시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졸보기와는 반대로 가운데가 볼록
한 게 꽤나 무게가 느껴졌다. 엉뚱하게도 그  중량감이 기억 한 가닥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랬다. 그  무렵에 당신은 눈수술을 하셨지. 한동안  눈이 침침해지더니 
끝내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었다. 노인네들에게 흔히 있는 녹내장이었다. 수
술은 그다지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당신 경우에는 혈압이 다소  장애요소가 되
긴 하지만 그것도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게 담당의사의 소견이었다.  과연 수
술은 성공적이었고, 뒤도 깨끗하였다. 당신은 다시 평소의 시력-시원치는 못하나 
그럭저럭 견딜만은 한-을 되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만사가 잘 끝났다고는 해도, 
수술중에나 그 직후에나 얼굴 한번 다밀지 못하고 지나버린 일이 그로서는 오랫
동안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바로 그 기막힌  안경이 그때 맞춘 것이라는 얘기
였다. 수술비에 충당하십사고 약간 액을 온라인구좌로 송금했을 뿐, 이런저런 사
정을 스스로 핑계하고  끝내 가보지 못하였던 부끄러움이, 이제 그  만신창이 구
닥다리 안경으로 하여 새삼스레 목덜미를 불게 만들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안경알을 정성껏 닦았다. 당신은 한 달이  가도 제대로 
한번 닦아 쓰는 법이  없는 듯 먼지로 절어 있었다. 렌즈와  테가 맞물린 부분에
는 기름때가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어서 수건 따위로 닦아내기란 아예 불가능하
였다. 간신히 렌즈의 가운데 부분만  공들여 닦은 다음, 그는 제 것을 벗고 대신 
써보았다. 아무것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 사물의 상들이 온통  뿌옇게 뭉개지고, 
이상한 꼴로 뒤틀리고, 몽롱하게 멀어져 보였다.  그는 얼른 안경을 벗었다. 어쩌
면 그 탁하고  왜곡된 풍경이야말로 항시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적 세계의 
진면목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졌다.  그는 안경을 
그 주인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리고는 맥빠진 소리로 중얼댔다.
  "자주 닦아 쓰세요. 먼지나  때가 젤로 잘 타는 물건이 이겁니다. 이거 쓰시고
도 잘 보인다니 아버지는 참 무던두 하십니다."
  노인이 소리내어 웃었다. "내사  개안타. 시상 돌아가는 일 머 할라꼬 눈에 불
키고 디리다볼 끼고. 마 대강대강 보고 사는 기지... 내사 하낫도 안 불편타."
  "에, 그 말씀도 맞네요."그도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기는 해도  이 안경은 너무하네요. 오신  김에 짬 봐서  새걸로 바꾸십시
다."
  "어데, 내는 개안타카이!"
  노인이 마구 손사래를 쳤다. "내가 살마 얼매나 더 살겠노. 이런 데다 벡죄 돈 
들일 꺼 없다. 내사 이거 기냥 쓸란다. 당최 돈 쓸 생각 마래이."
  "그대로 남 보기 답답해요."
  "벨시럽은 데 신경쓴다.  차말이라 안카나. 내가 개안타카는데 너거가 와  그캐
쌓노?"
  "예예, 알았습니다." 그는 손을 들고 만다. "그럼  아버지 편한 대로 허세요. 언
제 저희들 말 따르셨습니까."
  그의 대꾸가 좀  퉁명스럽게 들렸던 모양이다. 노인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시
선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땅바닥을 무연히 내려다보며 소리없이  어설픈 웃음
을 짓고 있었다. 왠지  노인의 귓불이 한순간 붉어지는 듯싶었다. 마른 잡초처럼 
귀 언저리에 초라하게 남아 있는 머리카락들이 그의 눈에 알알하게 와 박혔다.
  며칠 전 일이었다. 그가 4교시 수업을 막  끝내고 나와보니 동료 선생 여러 명
이 교무실 앞 복도에 웅성거리고 서 있었다.
  "뭣들 하자는 짓거리여?"
  예사스럽게 그는 농을  던졌다. 마침 점심시간을 앞둔 때였다.  보나마나. 작당
하여 밖으로 나가자는 수작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손금 보러 가자는 야그지 시방?"
  손금보기란 두말할 것도 없이  섰다를 가리킨다. 특별한 건수가 없는 한, 그들
은 으레 그런 식으로 밥값을 해결해왔던 것이다. 그 방법의 장점은, 이유없이 어
느 한 사람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더치페이라고 하는  저 삭
막한 새 풍속을  연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
의 불과 10, 20분동안에  지나지 않지만, 왁자지껄한 웃음과 승부수에 따른 긴장
감 따위는 가외의 덤이랄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저쪽의 반응이 수상쩍었다. 전에 없이 어정쩡한 태도들이던 것
이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며  우물쭈물하고들 있더니 
마침내 그중 한 사람이 불쑥 말한다는 게 이런 식이었다.
  "어이, 서형. 시골집에 전화 한번 넣어보지 그래?"
  "무슨 뜬금없는 소리여 그게?"
  그는 뜨악하게 물었다. "시골집이라니? 서울집이 아니고?"
  "당신 본가 말이야, 대구!"
  "근 왜?"
  "아, 문안전화 같은 거  할 수 있는 거잖어? 당신 말이야, 아버님과 통화한  지
도 오래되지 아마?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고. 그것두 훈장질하는 위인이 말야. 애
들 보기 부끄럽지두 않어? 그러니까 지금이락두 후딱 문안인사드리라구, 어서!"
  그는 그제서야 가슴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충격을  받았다. 머릿속이 갑자기 텅 
비어버려서 그는  한참을 우두망찰 서 있기만  하였다. 누군가가 등을 떼밀었다. 
비로소 그는 황망히 전화기 앞으로 달려갔고, 그리고 장거리 전화를 시도하였다. 
지역번호를 돌리고,  국번을 돌리고, 그리고...  당황한 나머지 마지막  네 자리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송수화기를 팽개치고 나서  호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져 수
첩을 꺼내들었다. 누군가가 다가와 주의를 주었다.  그 순간, 신통하게도 네 자리 
숫자가 나란히  떠올랐다. 그는, 수첩을 팽개치고  나서 다시 전화통에 달라붙었
다. 옆에서 누군가가 또 말하였다. 천천히 하라구. 그래, 천천히...
  그때 신호음이 끊어지면서 누군가의 기척이 저쪽에서 나왔다.
  "대구지요?"
  댓바람에 그는 소리쳤다. "거기, 고성동 아닙니까?"
  못지않게 긴장되고 어눌진 목소리가 저쪽에서 대꾸하고 있었다.
  "예, 대구 맞심더. 고성동 맞으예. 누구 찾심니꺼?"
  대답에 앞서  그는 잠긴 한숨부터 후루룩  토해냈다. 약간 쉬고,  낮고, 떨리는 
듯한 목소리-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버지의 음성이  분명하였던 것이다. 그는 
악을 쓰듯이 마구 외쳐댔다.
  "아버님, 접니다. 학굡니다. 예, 별고 없으시고요? 건강은요? 예, 예,  다들 별일 
없으시지요?"
  저쪽에서 되돌아오는 말인즉슨 언제나  다를 것이 없었다. 별고 없다, 무슨 일
이 있겠느냐, 건강도 좋다, 모다  탈없이 잘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말하자면 그
런 식이었다. 그러고 나서 내처 이쪽의 안부를 되물어왔다.
  "너거는 어떠노?  앗들은 핵교 잘 댕기고?  니는? 요새도 왔다갔다하나? 욕본
다. 너거 안 사람도 건강하제?"
  이번에는 그가  한차례, 익숙하게 답변하였다.  이쪽도 무사하며,  애들도 학교 
잘 다니고 있고, 자신은  물론 변함없이 원거리 통근중이며, 집사람도 건강에 이
상 없다-대충 그런 사연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식이었다.
  어떻게 보면  매번 숨이 차는  느낌이었다. 쫓기듯이 한바탕  의례적인 말들을 
주고받고 나면 대화는 금세  바닥이 나버렸다. 더 이상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이었다. 장거리 전화를  통해 매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부자간에도 별로 
나눌 만한 얘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서로 떨어져 산다는 것, 그래서 도무지 살
을 비비댈 기회가 없다는 것-그것의  삭막한 의미를 새삼 확인받는 느낌이곤 하
였다.
  이럴 때 항용 서둘러 통화를 끝내는 쪽은  아버지였다. 이번 역시 예외가 아니
었다. 문안인사가 한차례 오가고 나자 곧 "다른 용건이 있능 거는 아이제?" 하고 
저쪽에서 물어왔고, 그렇다고  그가 답변하기가 무섭게 "그라마 전화 끊자,  백죄 
요금 올릴 거 있나. 고마 들어가거라." 그리고는, 이쪽에서 뭐라 더 말을 붙일 짬
도 없이 통화는 끊어지고 말았다.
  그는 무너지듯 풀썩 주저앉았다.  전신의 맥이 죄 풀려버린 것 같았다. 송수화
기를 잡았던 자리가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목  뒷골이 꽝꽝 패고 빳빳해지는 느
낌이었다. 간신히 고개를 쳐들자 동료들이 헐겁게들 웃고 있었다.
  "뭐 하자는 짓들이야 이거?"
  그는 냅다 고함을 질렀다. "누구 졸도하는 꼴 보구 싶은 거야"
  "아, 미안미안! 진정하라구!"
  그들의 해명인즉 이러하였다. "좀전에, 당신 나오기 한 30분 전에 말이야, 요상
한 전활 받았었다구. 저기, 총무과 김양이 말이야. 누군가 당신을 찾으면서, 부친
상을 입었으니 빨리  오라고 하더라는 거야. 김양이 얼굴이 하얗게  돼가지고 와
서 그러잖아 글쎄. 아, 그러니 우리도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안 그래?"
  "그래서?"
  그는 다잡아 물었다. "대구서 왔대?"
  "한데 말이야, 바로 고 대목이 좀 모호하더라구. 대구가 아니라 엉뚱하게 순천 
어디라나? 그래서 전활 해보란 거지. 김양이 잘못  들었을 수도 있잖어? 쇼크 먹
구서 말이야."
  남들은 피식피식 웃고들 있었지만 그로서는 그럴 만한 기력이 도무지 남아 있
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몹시 짙은 피로감 속에 빠져 들었다. 시들하게 그는 묻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얘기야?"
  "어딘선가 초상이 난  건 확실해. 장난일 수야  없지. 누군가가 정말 부친상을 
당한 거라구."
  그는 또 물었다. "그럼 그게 누구야?"
  "글쎄, 우선 서형하고 이름자가 비슷한 사람이겠지. 직업도  그렇고, 근무지도... 
단지 고향만  다른 거야. 가까운 이웃동네서  근무하고 있는 사내일는지도 몰라. 
어때, 그렇지 않을까?"
  그럴듯한 추리야. 그거, 말  되네, 말이 된다구. 다들 머리를 주억 거리면서 밖
으로 몰려나갔다.  그날만은 손금보기를 하지 않았다.  이런 유의 일을 당할수록 
당사자의 명은 더  길어진다는, 도무지 근거는 없으나 그렇다고 기분  나쁠 것까
지는 없는 주장을 펴면서 동료들이 한턱을 은근히 강요했으므로 그가 쾌히 밥값
을 떠안았던 것이다.
  엉뚱한 전화 때문에  그가 받은 충격은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그날 밤에도 또  한번 상을 당하는 소동을 치렀던 것이다.  이번에는 꿈속에서의 
일이었다.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얼마나 격렬하게  통곡했던지 옆방의 하숙 동료
가 그를 깨우러 건너왔을 정도였다.
  "무슨 꿈이게 그래?" 동료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친상당하는 꿈이야." 떫뜰하게 그는 대꾸하였다.
  "아따 그 양반, 참 오래 사실랑가 보요."
  자성 성가시다는 듯이, 동료는 투덜대며 건너가버렸다. 곧 코고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그는 오래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저 꿈속의 울음 한 자락이 여전
히 목구멍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면서 그는 새삼
스레 낮의 일을 되새김질하였다.
  연전에 고희를  넘겼으니 올해 일흔둘이시다.  평균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해도, 
그 연세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비교적  건강한 편이기는 
해도, 노인의 건강은 아무도 자신할  수 없는 법, 언제 화급한 일을 당하게 될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새삼 두려움을  느꼈다. 창졸지간에 
상을 당한다-그러면 어떻게 되나? 그는 두려움에 짓눌린 채로 골똘히 생각에 잠
겼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장례문제였다. 당연히 자신이 떠맡아야할, 맏상주로서
의 역할이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무엇 하나  준비돼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
다. 정작  어느쪽에서 치러야 할지도  막연한 노릇이었다.  대구바닥은, 그로서는 
객지와 다름없는 곳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50, 60년대
의 대구를 회상하면 그의 마음의  눈에는 언제나 역전 공회당 건물 벽에 내걸린 
군인극장 간판이  보이고, 밤낮없이  장사치들이 아글바글하던 양키시장  골목과 
자갈마당, 그리고 어느  해던가 야당 선거유세장이던 수성천변의  똥구덩이들 따
위가 선하게  떠오르곤 하였다. 하지만  오늘의 대구직할시에 그런  모습은 이미 
남아 있지 않다. 그것처럼 대구는 이제 그에게는 낯선 도시 중 하나일 뿐이었다. 
물론 일가붙이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러 있다고는 해도  낯설기는 마
찬가지였다. 언제 상면할 기회가  있었던가. 피차 얼굴을 잊고 산 지가 기억조차 
아득한 처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상주 편하자고 서울 쪽을 일방적으로 고집할 일도 못된다고 그
는 생각하였다. 서울 쪽이라고  사정이 나을 것 역시 없는 까닭에서였다. 무엇보
다, 서민 아파트라고 하는, 옹색한 공간이  당장 문제였다. 사람 사는 마을이라면 
당연히 송장 치는 일도 있게 마련이어서 평소  듣기도 하고 더러 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일에 아파트처럼  불편하고 민망스러운 환경은 달리 없다고 생각
되었다. 사실인즉 평수의  문제가 이미 아닌 것이었다. 그것  한가지만으로도, 흔
히 말하는 아파트생활의 편리함을  깡그리 상쇄시킬 만하다고 그는 늘 생각해오
던 터였다. 그런  점에서라면 비록 간신히 바라크를 면할 정도의  초라한 집이기
는 할지언정 대구 쪽이 한결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도 아니다.  장례의식도 문제가 되었다.  아내의 강권  탓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그는 명색이 기독교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물론, 다른 형제들도 종교
와는 무관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재래의 전통적 의식을 당연히 선호할 게 분명
하였다. 어쩌면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한바탕 분란이 빚어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신앙과는  상관없이, 전통의례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것은 상상만 
해도 지겹고 구차스럽게 느껴졌다. 상복에서부터 제상에 이르기까지, 초혼에서부
터 삼우제에 이르기까지  소도구 한점, 절차 한 매듭 지긋지긋하지  않은 대목이 
없었다. 그렇다고  기독교식이 썩 좋게 생각되느냐  하면 그도 아니었다. 그쪽도 
마음에 내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아직 치러본 적이 없긴 하지만, 아마도 어
딘가 좀 싱겁고  맹숭맹숭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참으로 중요
한 미덕이 한 가지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문장에 비유한다면, 전통적인 장의절
차가 만연체라고 할 때 기독교식은 간결체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그
리고 그 점만으로도 그에게는 대단한 매력이 되었다. 아무러면 어떤가, 어느쪽이
든 무방하다-라고 대범하게 치부했다가도, 그게 또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닌 듯
싶어 그는 생각을 자꾸만 되작이곤 하였다.
  그러나 이날 밤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  것은, 다른 무엇보다 불효의 감정이
었다. 장남이면서도 아버지를 끝내  모셔보지 못한 채 사별하고 말았다는, 그 돌
이킬 수 없는 불효의 감정이 강렬하게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낮에 있었던 저 
전화소동의 충격이나 꿈속에서의 그  격렬한 울음도 바로 거기에다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이러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상을 당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조차 두렵
고 난감한 노릇이지만, 그러나 또 실상인즉 그럴  공산이 더 크다는 예감 앞에서 
그는 정말 오랜 시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갑자기 놀이터가 시끌덤벙해졌다.  아이들 한 떼거리가 몰려든 것이다. 계집애
들이 재빨리 그네를 차지해버리자 사내아이들은 미끄럼틀 쪽으로 우르르 밀려갔
다. 지금까지  혼자서 그네에 매달려  있던 꼬마가 여자애들에게  슬며시 자리를 
내주고는 그 옆의  시소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는,  약간 겁먹은 것 같은 눈으로 
주의를 두리번거렸다. 그  표정 하며 인상이 조금은 낯익은 기분이어서  그는 은
연중에 미소를 띠었다. 노인도  그 모양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불쑥 웃음
을 터뜨리며 말하였다.
  "니, 저 아 좀 보래이. 머스마가 우예 저렇게 숫기가 없을꼬? 맴 여린 거 하고, 
꼭 니 어릴 때 겉다카이!"
  "제가 말입니까?" 그도 소리 내어 웃었다.
  "하모, 영판 저랬다 아이가.  동네 앗들한테 치이가주고 삽짝 밖을 잘 안 나갈
라캤디라. 죽은 니 할매가 마실 갈 때마둥 억지로 데불꼬 댕기고 그랬다카이. 소
핵교 당기면서부텀 쪼매씩 나아지던 거로."
  할머니와 어머니의 치맛자락만 맴돌면서 살았던 어린시절은 그는 잠시 회상하
였다. 하지만 또렷하게 잡혀나오는 기억은 없었다. 여름 장마철이면 잡풀이 무성
하게 돋아나던 안마당이  잠시 떠올랐다. 가을이면 그곳은  타작마당이 되어버렸
다. 새벽부터 기세 좋게 돌아가곤 하던 탈곡기소리를, 그는 어렴풋하게 환청으로 
들었다. 언제쯤이던가, 아침에 일어나 뒤란으로  돌아가보면, 감꽃이 지천으로 떨
어져 땅바닥을 하얗게 뒤덮고 있던 때가?  여름 한철, 높다란 대청마루에 누워서 
마음이 흠씬 젖도록 귀기울이곤 하던 소나기소리,  매양 코끝에 알싸하게 감겨들
던 흙냄새... 일테면, 삽짝 밖을 벗어나지 않고도  결코 지겹지 않았던 세계다. 그
러나 지금은, 문  밖에서 나는 좀 피곤하다, 짜증스럽다 하고,  그는 속으로 투덜
댔다.
  아내는 돌아왔을까? 잠긴 문에 비로소 생각이 미쳤다.  두 세계를 견고하게 차
단하고 있는 저  철제의 문-그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난감하였다. 아버지만 아니라면  온 길을 되돌아가버리고 싶어졌다. 그놈의 문을 
따고 들어간다고 해서 무슨 신통방통할 게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는  일어섰다. 어쨌거나 다시 한번  확인해볼 일이었다. 그는 맥풀린 
걸음걸이로 공중전화부스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별반 기대도 없이  집으로 전화
를 걸었다. 따르릉 따르릉,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또 그놈의 엉뚱
한 기대감이 울컥 가슴을  치받았다. 굳이 따지자면, 상당한 시간을 죽인 셈이기
는 하였다. 그새  아내가 귀가했을 수도 있다. 아니, 거의  확실히 귀가했을 것이
다, 하고 그는 성급하게 단정하는 마음이 되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신호음
만 계속 울리고 있었다.
  공중전화부스에서 나온  그는 깊은 곤혹감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방향을 잡아 휘적휘적  걷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집전화가  고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도 그런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는 5층까
지의 계단을 단숨에 올랐다.  그리고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한참을 서 있었다. 문
은 잠긴 그대로였다. 손잡이에 걸어둔 가방  역시 변함이 없었다. 주인의 부재를, 
그것은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어의 손잡이를 쥐
고 가만히 비틀어보았다. 완강한 저항감이 손바닥에 또렷이 전해져왔다. 그는 얼
른 손을 뺐다. 왠지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우스꽝스런 꼬락서니
를 누군가가 훔쳐 보고 있는 것만 같아  그는 황망히 돌아섰다. 1층 현관까지 그
는 뛰다시피 굴러내렸고,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놀이터를 향해  잰 발걸
음을 놓았다.
  "집에 갔더나?" 노인이 고개를 빼고 물었다.
  "예."
  짧게 대답하고 그는 노인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주보이는 관악산 발치로 
어스름이 고이고 있었다. 기다린다는  것도 참 막연한 짓이군, 하고 그는 중얼거
렸다. 아내 쪽에서야 굳이  귀가시간에 신경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두 아
이녀석은 으레 귀가가 늦다. 이른바 수도권의 분교에  적을 두고 있는 큰놈은 평
소 빨라야 아홉시  열시다. 또 고3짜리 둘째는 보충수업에다  자율학습까지 있어 
자정 가까운 시간에나 돌아오곤 하였다. 아내의  귀가시간을 간섭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점에 관한 한 그녀는 제왕처럼 자유롭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열쇠가 하나밖에 없더나? 몇 개 더 맹글지 그랬노."
  노인의 핀잔이었다. "열쇠  맹그는 데 가마 직석에서 똑같응 거  맹글어준데이. 
그느마들, 재주 참 희한하니라."
  "예, 한 개 더 만들어야겠네요."
  그는 고작 맥풀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실인즉 열쇠를 두 개나 더 복제했었다. 
그래서 식구들이 죄 하나씩 가지고 다닌다. 단지 자기만 예외인 것이다. 집을 찾
는 일이 한 달에 고작 한 번이라고 해도 역시 열쇠는 지니고 있어야겠다고 그는 
마음먹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실제 사용 여부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는 생각이 들었다. 한줌씩이나 되는 열쇠꾸러미를  허리춤에다 흔히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그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처럼 완전한 소유의 징표
가 어디 있으랴. 아내는 물론,  내 아이들까지 가지고 다니는 것을 나는 갖고 있
지 못하다. 나의 가정이란 생각은 어쩌면 착각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가정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늘 잠긴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는 느
낌이 들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온 이래 지금  이 후줄근한 나이에 이르도록 말
이다... 그 깨달음은 몹시 씁쓸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한동안 말을 잃어버렸다.
  놀이터의 아이들이 하나둘  흩어지고 있었다. 어스름이 사방에서  묻어오고 있
었다. 머잖아 가등이 들어올 판이었다. 한 떼거리의 새들이 머리 위 하늘을 가로
질러 공원 쪽으로 날아갔다. 그러고 나자 갑자기 주위가 적막해졌다. 텅 빈 놀이
터를 앞에 하고 그들  두 부자-진작 칠십 고희를 넘어선 아버지와  그리고, 오십 
지천명을 코  앞에 둔 아들-만 처량하게  남겨진 꼴이었다. 노인이 피워문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서서히  풀려나가는 것을 그는 무연한  눈길로 지켜 보고 있었
다. 그러자 무언가 좀 색다른 감정이 천천히 가슴에 고여들었다. 어쩐지 마음 편
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존재를 이처럼  가깝게 느껴본 적이 이전에도 
있었던가? 그는 문득  자문해 보는 마음이 되었다. 금세 한  가닥 기억이 눈부시
게 떠올랐다.
  그랬다. 아주 어렸을 적 추억이다. 어디서였던가? 아마도 마을 앞 그 개울이었
을 것이다. 갯가엔 조그만 모래톱이 있고 또  둔덕에는 키 큰 미루나무들이 늘어
서서 여름 한철 내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던  거기 말이다. 우리는 멱을 감고 
있었다. 그래, 나는  아버지의 가슴에 안긴 채 겁에 잔뜩  질려 있었지. 아버지가 
깊은 물 속에다 나를 자꾸만 내려놓으려 했던  거다. 그럴수록 나는 한사코 당신 
목에 매달리며 싫다고 앙탈했었지. 그러던 어느  순간, 그랬다, 나는 누군가의 비
명을 들었고, 그리고 물 속으로  사정없이 처박혔다. 아, 그 순간의 느낌이란! 그 
아뜩한 절망감...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필사적으로 바둥거리던 내 발길질에 당신
이 그만 불두덩을 걷어채였던 거다, 후후...
  그때를 생각하고 그는 혼자서 히죽히죽 웃었다.  물 속에서 한차례 허우적거린 
다음 그는  다시 아버지의 가슴에 안겼었다.  그리고는, 물 밖으로 나와서까지도 
한동안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가슴에 매달려 
있을 수야 없는  노릇이어서 결국은 불안스레 땅바닥 위로 내려섰던  것이다. 그
로부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아버지를 
그만치 가깝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무작정 목을 늘이고 있을  일이 아니었
다.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모처럼 두 부자만의 오붓한 시간을 허락받
은 셈이다. 그러자 곧 희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십시다 아버지!"
  그는, 노인의 그 낡은 비닐백을 집어 들며 말하였다. "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데로 가자구요."
  어느새 그는 몇 발짝 앞서 휘적휘적 길을 열고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목욕탕은 한가하였다. 평일에는 늘 그랬던 것이다. 주말이나 공
휴일 같은  때나 한바탕 붐비곤 하는  게 아파트 단지의 목욕탕  사정이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값싸게 시간을 죽일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목욕탕이라는 사실을 그는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또, 길바닥
에다 버리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터득하고 있는 지혜이기도 하였
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지방에 있는 직장과  서울 변두리에 있는 가정 사이를 기
와에만도 10년 가까운 세월을 줄기차게 오르내려야  했던 그였다. 오며가며 어쩔 
수 없이 버려지는 그 자투리  시간들을 그는 대체로 목욕탕에서 보내곤 했던 것
이다. 그가 늘 드나드는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  주변의 목욕탕들에 대해서는 속
사정을 죄다 꿰고  있는 판이었다. 요즘 서울 쪽에서는 대형  목욕탕들이 늘어나
고 있는 추세다. 그런 곳은 내부시설도 엄청난데, 그에 비해 사용료는 싼 편이었
다. 비좁고 냄새  나는 구닥다리 대중탕의 그것보다 기천원 정도  차이여서 적자
운영은 아닐까 싶어  괜시리 눈치보이는 때도 없지 않는 것이다.  목욕문화가 사
치스럽고 난만해진다는 것은,  어쩌면 정신문화의 퇴영을 뜻하는  건지도 모른다
고 그는 생각한다. 자신을 포함하여, 그런 곳에서 마냥 세월을 죽이고 있는 사람
들을 보노라면 불현듯 그런 느낌에 붙잡히기도 하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한 가지 유감인 것은, 노인네가  이른바 목욕문화에 익숙하지 못하다
는 점이었다.  노인은, 그를 따라 어영부영  목욕탕까지 오기는 했지만 이제부터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옷을 벗고  어쩌고 할 일이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꾸 주위만 뚤레뚤레 둘러보며 엉거주춤 서 있을 따름이었다. 노인
네의 잔약한 콧등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검정 뿔테안경이 더 뿌옇게 흐려보였
다. 그쪽을 짐짓 외면한 채 그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노인을 향해 돌아서기  전에 맨 마지막으로 안경을 벗었다.  나안으로는 0콤마
로 시작되는 시력이다. 그 사실이 아버지에  대한 면구스러움을 얼마쯤 덜어주었
다. 이윽고 그는 돌아섰다.  노인이 마지못해 남방의 단추들을 벗기느라 애를 쓰
고 있었다. 그 손놀림이 몹시도 아둔하였다.
  "가만 계세요, 지가 해드리께." 그는 다가섰다.
  그러자 노인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황망히 말하였다. "아이다, 개안타. 나
도라."
  그는 웃음을  문 채 잠시 기다렸다.  노인의 손이 아까보다 더  허둥거리는 것 
같았다. 그나마 헐렁하게 끼워져 있는 단추들을 자꾸  더듬거리기만 할 뿐 별 진
척이 없었다. 그는 다시 다가섰다.
  "그거 보세요. 아버지도 인제 비서 하나 데리고 다녀야겠습니다."
  그는 말하고 나서 씁쓸하게 웃었다.
  "노인네들 비서라카마 우선에  짝대기 아이가. 난도 인자  짝대기 짚고 댕기야 
되지 싶으다."
  그러면서 노인도 덩달아 웃었다. "걷능 거는  개안타마는 멋보담도 차 타고 내
리능 기 힘든다카이. 그늠어  빠스가 더 그렇데이. 운전수는 퍼뜩 내리락고 빵빵 
깝쳐쌓제, 무르팍은 떨리고 머리는  어지럽제, 아이고 내사 마 한분 타고 내릴라
카마 등때기서 진땀이 다 난다 아이가."
  "될 수 있는 대로 버스 같은 거 타지 마세요. 노인들한테는 위험해요."
  "그라마 멀 타노?"
  "택시 타야지요 뭐."
  "뭐라카노? 돈도 돈이다마는 택시가 잘 있더나 어데?"
  하긴 그렇기도 하리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모처럼 발걸음을 한 경우에도 노인은  그의 곁에서 두 밤을 묵는 때가 드물었
다. 하룻밤 새기가 무섭게 부진부진 나서곤 했던 것이다. 그가 때로는 역정을 섞
어 만류해보지만 매양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이다, 어서 가봐야 된다. 약속도 있고, 멋보담도 내가 없으마 집안 돌아가능 
기 잘 안된다 아이가.  여게 더 있으마 머 할 끼고. 내사  까깝시럽기만 하제. 너
거 얼굴 봤으마 됐다. 나는 그마 가볼란다."
  그리고는 기어이 일어서버리곤 하던 노인네였다.
  "구들묵에 꿀단지 묻어놓고 오신 모양이지." 그는 일쑤  그렇게 투덜댔고, 아내
는 또 아내대로  "자식 사랑은 내리사랑이란 말  있잖아요. 아버님은 막내도련님 
걱정 땜에 그러시는 거라구요." 하는 식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아내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막내는 그의 큰아이보다 오히려 세  살이 아래였
다. 그의 쪽에서 보자면, 계모에게서 얻은 동생이었다. 그런데, 고2짜리 녀석인데
도 아버지가 집을  비우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노인으로 말하
자면, 원래는  자식들에게 데면데면하던 성품이었다. 장남인  그부터도, 당신에게
서 각별히  사랑받은 기억 같은 건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사실과 견주어본다면 
막내녀석에 관한 한 아내의 지적이  썩 옳을 수도 있겠다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
곤 했었다.
  모든 생명체는 더 많은 자기 개체를 만들기 위해 대부분의 에너지를 탕진한다
고 누가 그랬던가? 그가  아내와 자주 하는 농담이 있다. 당신과  내가 만나서 1
남1녀를 두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본전치기 인생은 되는 것 아니냐는 게 그것이었
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톡톡히 흑자인생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두 여자에게서 자
그마치 8남매를 두었으니까 말이다.
  "내 지금 죽어도 벨로 한시럽을 끼 없다."
  언젠가 당신이 하시던 말이다. "그저 쟈  하나가 쪼매 마음에 걸리기는 한다만
서도..."
  그때도 당신은 역시 막내를 걱정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녀석도 이제는 어린애
가 아니다. 덩치는 오히려, 날로 쪼그라들고  있는 아버지보다 더 크고 튼실하다. 
노인네가 아들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녀석이 되레  늙은 아버지를 걱정해야 할 
판인 것이다. 이제는 그 점을 당신도 좀  깨달아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늘상 안
타까워하였다. 그래야 이쪽저쪽을  자유롭게 오가며 만년을 보낼 수 있을  게 아
닌가. 일흔 고개를 넘어선 지금에서 그런 것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 그를 때로는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적어도 임종만은 내 집에서 맞았으면 하고  그는 소
망하였다.
  노인네의 마음을 붙잡아매는 것이 어찌 막내뿐이랴. 그와 동복의 형제들은, 어
쩌다 보니 죄다  서울로 올라와 있었다. 서로 기댈만하다거나 또는  그러자고 죽
이 맞아 돌아간 것도 아닌데 어느새 그렇게  돼 있었던 것이다. 결국 대구바닥에
는 시집간 누나들과 그리고, 계모 소생의 동생들만 남았다. 여자야 출가외인이랬
으니 논외로 하고 보면, 참 공교롭게도 편을 가른 꼴이었다. 노인의 나들이는 그
러므로 그 두 쪽을 넘나드는  일이어서 항용 껄쩍지근한 분위기 같은 것을 묻어
들이고 또 묻혀가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기도 하였다.
  사실이 그랬다. 노인의 상경은 언제나 느닷없고 예사롭지 못하였다. 나중에 드
러나게 마련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갈등이 숨어  있곤 하였는데 그것은 대개의 
경우 계모와의 사이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노인의  나들이는 결국 가출에 해당하
는 셈이었다. 말하자면  계모에 대한, 나약한 노인네의 시위였다.  계모는 아버지
에 비해  젊고 성품도 괄괄한 편이었다.  두 분 사이에는 이래저래  마찰이 잦은 
모양이었다. 노인네는, 참을 만큼 참고 속으로 삭이다가 정 못 견딜 정도가 되면 
저 낡은 비닐백에다 옷가지  몇 점 챙겨 들고 훌쩍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여기 
아니라도 의탁할 데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점에서라면 효과 만점의  제스처이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항복신호가 시외
전화를 통해 그 즉시로 날아들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노인은 또, 날이 새기가 
바쁘게 귀가길에 오르곤 하였다.  상경할 때의 그 풀죽은 모습과는 달리, 이번에
는 아주 활기에 차서 말이다.
  남방을 벗고 나자 이번에는 바지의 혁대가  말썽을 부리는 눈치였다. 골마리가 
삐죽이 빠져나올 정도로 느슨히 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노인은 그것과 한참이나 
실랑이를 하였다. 결국 그의 도움을 받아서야 간신히 풀었다.
  "오다가 길에서 하나 사맸디마는 억시게  빡빡하네. 소가죽이라 카디마는 차말
로 그렁갑제?"
  노인은 뽑아든 혁대를 새삼스레 들여다보며 감탄하였다.
  "진짜 소가죽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허리띠가 이렇게 억세어서야  쓰
겠어요 어디. 부드러운 걸로 이따 바꿉시다."
  그는 대꾸하고 고소지었다.
  "세월이 가마 부드럽으진다 아이가."
  노인이,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는 듯이 강변하였다.  "4천원이나 주고 산  긴데 
그라마 기양 냅비릴  끼가? 좀 뻑시기는 해도 얼매나 찔기겠노.  내 죽을 때꺼정 
허리띠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아이가."
  이쪽을 기웃거리는 시선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대단한 쇠가죽 허리띠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을  자제하였다. 그는, 노인이 내의를 마저 벗기를 잠자
코 기다렸다가 맨 마지막으로 양말을 벗겨드렸다.  마침내 완전히 알몸들이 되었
다. 두 부자는 잠시 마주 서서 서로의 모습을 건네보았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뭉
클해지는 순간을 그는 경험하였다.
  그는 노인의 한쪽 팔을 잡고 탕으로 들어갔다.
  "조심하세요. 바닥이 미끄러워요."
  자욱한 수증기 속을 헤치고 들어가면서 그는  노인에게 주의를 드렸다. 마르고 
굽은 두 다리가 마치 얼음판 위를 가듯 불안하게 더듬고 있었다.
  부모 자식간에는  어딘가 반드시 닮게 마련이라는  사실은 매우 당연하면서도 
새삼스럽게 희한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더러 있는  법이다. 그들 부자를 두고 주
변 사람들이 자주 그런  걸 느끼는 모양이었다. 참 어쩌면 싶게  서로 닮은 점이 
많다는 지적들이었다. 속없는 웃음이 그렇고, 시력이  나쁜 게 그렇고, 마르고 거
부정한 체격이 그렇고,  허청허청 걷는 걸음걸이가 그렇고, 무엇엔가 몰두하거나 
잠깐 방심하고  있을 때의 그 멍한  표정이 또 그렇다는 식이었다.  그의 아내는 
때문에 곧잘 웃음을  터뜨리고는 하였다. 두 부자를 앞세우고 길을  나서다 말고 
뒤에서 혼자 끼들끼들 웃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그럴 때 핀잔을 주면 대꾸가 이
랬다.
  "두 분 뒷모습이 너무너무 같아요. 꺼부정하게  굽은 허리 하며 힘없는 걸음걸
이, 게다가 뒷머리 곱슬거리는 것까지요. 어떻게 웃지 않고 배길 수가 있나요?"
  그리고는 한바탕 깔깔댄 다음 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절대루 제 잘못이 아니라구여. 이웃  여자들도 다 그런다구요, 정말. 아버님이
랑 당신이랑 석이랑 그렇게  3대가 나란히 길을 나설 때면 동네사람들이 뭐래는
지 아세요? 저건 작품이다 작품! 그런다구요 글쎄..."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는 모를 노릇이나 흔히 전하는  말로, 호랑
이는 특히 고양이를  싫어한다고들 한다. 이유인즉슨 자기 모습을 너무  많이 닮
았기 대문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들 석이에 대한 자신의  심리 저변에도 
혹 그런 요소가 있는지 모를 일이라고 그는  가끔 생각해온 터였다. 일테면 녀석
에게서 심약하거나 소극적인 태도 같은  것이 눈에 띌 때 그는 매번 불 같은 노
여움을 드러내고는 하였는데, 그런 결함이야말로 바로  자신의 것이면서 또 아버
지의 것이라고 믿어지는  까닭에서였다. 그가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이것만은 
결단코 아버지를 닮지 말아야겠다고 이를 악물어온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아버
지의 저 겁 많고 소극적인 인생태도였던 것이다.
  물론 당신이 살아온 세월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3,1만세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 기미생이다. 따라서 암흑의 일제말을 거
쳐 20대 중반에 해방을 맞았지만  곧 동족상잔의 저 끔찍한 전쟁의 폭풍 속으로 
말려들고 만다. 그리고 휴전-저  50년대의 궁핍한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
가 그나마 굶지 않고 밥술이라도  뜰 수 있게 된 것이 언제부터이던가? 흔히 말
하듯이 지난 70년대부터라고 한다면  그때는 이미 당신의 생애는 파장에 이르고 
있었던 셈이다. 어언, 환갑을 눈앞에 둔 신세였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로서는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그래서  불쑥불쑥 떠오
를 때마다 아직도  당신을 바라보는 눈이 결코 순해지지 못하는,  참으로 아프고 
어두운 기억들이 남아 있었다. 어느 해던가의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전후의 궁핍 
속에서도 명절은 역시  명절이었다. 이웃들은 가난하나마 그래도  오곡밥을 서로 
나누었고, 아이들은  공터로 몰려다니며 쥐불을  놓느라고 떠들썩하였다. 그러나 
그의 식구들만은 예외였다. 고향을 버리고 이웃 도시  대구로 옮겨 앉은 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다. 단칸 셋방에서 문을 닫아건  채 그의 식구들은 하루종일 꼼짝
달싹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주인댁이 아침결에 슬며시 디
밀어준 잡곡밥 한 그릇이  머리맡에서 줄기차게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만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시체들처럼 내처 이불을  들쓰고 해종일 드러누워  있기만 했던 
것이다. 차라리 배고픔은  참을 만하였다. 난처한 것은 요의였다.  화장실에 가자
면 만부득이 문 밖을  나서야만 하였고, 또 줄줄이 늘어서 있는  여러 개의 방문 
앞을 지나가야만 하였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그 일이 그날만은  왜 그렇
게나 끔찍할 만큼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되었는지! 참다참다  못해 기어이 문을 
열고 나섰을 때는  너무나 분한 나머지 눈물을 질금거렸던 것이다.  뒤꼭지에 따
갑게 와닿는 이웃들의 시선을 헤치고 그 굴욕스러운 장소에서 돌아온 그는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기 전에 아버지 쪽을  잔뜩 꼬누어 내려다보았었다. 그때처럼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던 적은  다시 없었다. 당신은 벽을 향해 길게  드러누운 채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식구들을 기아와 치욕 속에다  팽개쳐둔 채 
당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오직  그것뿐인 듯 줄기차게-단 한번도 문 밖 출입을 
하지 않은 채 참으로 줄기차게-드러누워 있기만 했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침
을 뱉고 싶었었다고 그는 또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또, 그 몇 해  뒤다. 그의 가정은 변함없이 가난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
다. 어쩌자고 이번에는 그의 몸이  병을 얻었다. 감기거니 했던 것이 한 달 여나 
끌더니 마침내는 의식이 수시로 가물가물 해지기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피골이 
상접해진 그를  끌어안고 식구들은  아타까워했지만 그러나 대책은  전무하였다. 
보다못한 이웃들이,  어떡하든 아이는 살려놓고 봐야  할 게 아니냐고, 그러자면 
무작정 병원으로  떠메고 들어가 입원부터 시켜놓고  볼 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충고하였다. 그러나 그때도  아버지는 그런 식이었다. 떠메고 들어간다고 받아준
다더냐, 혹 입원은 했다 쳐도 그 뒷감당은 누가 할 거냐고, 당신은 시종 쓴 입만 
다셨던 것이다.  자주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그는 아버지에  대한 혐오감을 
참을 길이 없었다. 나중에야  누나가 전해준 얘기지만, 마침내 그는 고열 속에서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림 채 아버지를 향해 마구 욕설을 퍼대기까지 했다는 것이
었다. 지금도 그때의 이야기만 나오면 누님은 곧잘 웃고는 한다.
  "야, 니 그때  차말로 무섭더래이. 아부지한테 막 퍼대는데  아이고, 누가 그기 
어린아라카겠더노. 너거마 살라카나,  나는 죽어도 갠찮나 어짜고 그카는데 앗다 
마 내가 다 씩껍묵었다카이!"
  매사에 겁이 많고 그리고 소극적인 태도-그것은 확실히 족보에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런 성품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이를 악물고 안감힘해
왔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저 얼굴이 붉어지기만  할 따름인 것이다. 아들녀석
인 석이에게서 그런 요소를 발견함을 차라리  당연하다고 해야 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불같이  치미는 화증을 스스로 억제하기가  어려운 것은 또 어찌 
된 노릇인가? 그에  비긴다면 외모가 닮는 거야 무슨 상관이랴.  그런 따위야 아
무래도 무관하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참 희한해요. 당신하고  석이는 손톱 발톱 모양까지 흡사하다구요. 난  헛건가 
봐, 두 애들한테 한 군데도 닮은 구석을 찾을 수가 없으니 원."
  언젠가 아내가 하던  말을 그는 또 기억해냈다. 정말 그럴까?  노인은 탕 속에
서 나와 타일바닥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열탕에서  한동안 익힌 터라 피부가 검
붉게 익어 있었다. 노인네들의 벗은 몸을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무엇보
다 눈에  띄는 것은 균형감의 상실이었다.  몸이 비대한 사람은 비대한  대로 또 
마른 사람은 마른  대로 한결같이 어딘가 균형이 무너져 있게  마련이던 것이다. 
당신은 비쩍 마르고  긴 사지에 비해 아랫배가 별나게 튀어나온  편이었다. 게다
가 왼쪽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앉은 상태였다.  당신은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아
왔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막노동을 한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속절없이 균형을 잃고,  허무하게 무너지고, 그리고 무참히  짜부라져 있었다. 그
는 한동안 말없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무형의,  갈퀴 같은 손이 보이는 듯싶었
다. 그 손이, 당신의  육체가 끝까지 쇠잔하기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마른 검불처
럼 쓸어가리라. 눈 속에 모래를 집어넣은 것처럼 깔깔하였다.
  그는 때밀이타월을 집어 들고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검붉게 익어 있는 
노인의 등을 밀기 시작하였다. 뼈 마디마디가 손바닥에 아프게 느껴졌다. 놀랍도
록 잔약한 느낌이어서 도대체  그 험한 세월을 어떻게 버티어왔는지가 의심스러
울 지경이었다.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타일바닥 위에 마른 나무토막처럼 방
치되어 있었다.  그는 얼른 자신의 발과  대조해보았다. 그리고는 혼자 고소하였
다. 엄지와 검지의  생긴 모양이며 구부러진 형태가 참 어쩌면  싶게 흡사하였던 
것이다.
  "대강 해라 그마."
  성가신 듯 노인이 말하였다. 가느다란 두 다리를  꺾어 가슴 앞에 끌어안고 등
을 활처럼 휘게 웅크린 채였다. 너무 작고  가벼운 느낌이어서 그는 등뒤에서 두 
팔로 노인을  싸안고 가만히 들어올려보았다. 허무할  만큼 체중이 없었다. 그때 
노인이 또 말하였다.
  "남들은 몸이 자꼬 뿔어서 걱정이라카더라마는 내사 맨날 그기 그거라. 노인네
가 너무 말라도 초라해 ㅂ다꼬 할마시는 덜 좋아한다카이."
  할마시란 계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뭘요, 고령자일수록 체중이 덜 나가는 게 좋답니다. 몸이 나는 것보다는 마르
고 또 변동이 없어야 된대요. 그래야 장수한답니다."
  노인은 잠시 헛웃음을 웃었다. "씰데없이 오래 살마 머 할 끼고, 백죄 지 고롭
고 남 귀찮구로!"
  그리고는, 다시 예의 웃음을  길게 이었다. 결코 빈말 같지만은 않은 느낌이었
다.
  상상외로 노인의 몸에서는 때가  많이 나왔다. 하긴 당연한 노릇이다, 하고 그
는 생각하였다. 당신에게 목욕탕은 여전히 별난 장소일 테니까 말이다. 화장실만
큼이나 무시로 출입하는 일상공간은 못되는 것이다.  도대체 1년에 몇 번 정도나 
발길을 들여놓을까. 아직도  당신의 의식 속에는 설대목이나 무슨 특별한  때 찾
는 곳쯤으로 굳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을 다
닌 기억들을 떠올렸다. 주로 노동회관에 있는 목욕탕을 다녔었다. 일반 목욕탕보
다는 요금이 훨씬 쌌기 때문에 시설이 그만큼  후지고, 그리고 또 언제나 만원이
었다. 전쟁이 끝난 지도 대여섯 해가 지난 50년대 후반, 세상살이가 여전히 각박
하던 무렵이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몸을 씻는 일도 전쟁이란 기분이 실감 
날 정도로  거기서는 일쑤 아귀다툼을  벌여야만 하였다. 누구나  일단 들어갔다 
하면 단단히 밑천을 뽑은 후에야 나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씻고 씻고 
또 씻고, 나중에는 손이며 발등 같은 데서  피가 나도록 껍질을 벗겨낸 다음에야 
비로소 그 연옥과도 같은 욕탕에서 시뻘건  몸뚱어리를 빼내가는 것이었다. 하지
만 당신은 거기서도 별로 악착스럽지 못하였다고  그는 기억한다. 뒷전으로 내몰
린 채 잠시 어물거리다가  그만 나가버리곤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세상
을 사는 당신의 자세였다.
  "목욕탕 좀 자주 다니세요."
  등을 밀다가 내친김에  그는 불쑥 말하였다. "노인네들은  특히나 자주 다녀야 
됩니다. 요새 목욕비 얼마나 쌉니까. 천원짜리  한 장이면 되잖아요. 일과처럼 매
일 다니는 노인도 많아요."
  사실이 그랬다. 특히 동네 목욕탕은 평일엔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새삼
스레 고개를 쳐들고 주위를 둘러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계
속하였다.
  "보세요, 전부 그런  노인네들이지요? 거의가 날마다 소일삼아  오는 분들입니
다. 요즘 천원짜리 한 장 가지고 어디 간들  여기보다 더 편하게 시간 보낼 데가 
있나요. 저쪽 휴게실에는  테레비도 있고 장기 바둑판 같은 것도  있어 소일하게 
그만입니다. 아버진 장기  두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이제부턴 목욕탕  자주 드다
드는 습관 붙이세요.  나이 드실수록 깨끗하게 하고 다니셔야지 안  그러면 젊은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처음 하는 소리가  아니다. 서울 나들이를 오실 때마다 그가  짜증스럽게 되풀
이했던 소리였다. 때로는 남보기 민망할 정도로 초라한 모습이곤 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노인 특유의  냄새 같은 게 있어 심할  땐 그의 아이들조차 슬슬 피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노인네는 도무지  귀담아듣지 않았다. 당신 말인즉 
그게 편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역정을 내도  마찬가지였다. 저 속좋은 웃음만 
흘릴 따름이던 것이다.
  그러던 분이  어쩐 셈인지 이번에는 대꾸가  좀 달랐다. "그라기는  해야 되겠
제? 할마시도 이래 나서는 거 보마 질색하는 기라. 말이사 맞제. 그기 마이 옳다
카이. 늙은이한테는 와, 안  좋은 냄새 같응 기 안 있나. 열차칸  같은 데서도 노
인들 옆자리는 사람들이  잘 안 앉을라카대. 팽상 우리 겉은  늙다리끼리 몰키앉
는 기라. 그기  우리덜도 핀코... 말 마래이.  늙으마 차말로 섧다카이. 식당 같은 
데서는 더 그렇다 아이가.  똥을 옆에 놓고 묵으마 묵었지. 늙은이들하고는 같이 
몬 묵겠다카는 기라."
  노인네는 오히려 유쾌하다는 듯이 소리내어 한참을  웃었다. 그도 가만히 따라 
웃었다. 열탕 속에 몸을  푹 담근 채 시조가락 같은 것을  흥얼흥얼 읊조리고 있
던 노인과, 타일바닥에다  타월을 깔고 반듯하게 드러누워 있던 다른  노인이 잠
시 이쪽을 기웃거렸다. 말귀를 대충을 알아들은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화제가 도
무지 달갑지 않은 듯 짐짓 외면들을 하였다.  탕 속의 노인은 기분이 언짢아지기
라도 한 모양이었다. 시조가락을 멈추고는 아주 과장되게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얼굴을 붉혔다. 묵묵히 고개를 떨군  채 이번에는 노인의 팔을 끌어
다 정성들여  밀기 시작하였다. 왼쪽  겨드랑이 바로 아래켠에  길쭉하게 드러나 
있는 흉터가 눈에 띄었다.  이게 바로 그거구나! 그는 혼자 중얼댔다.  아주 까맣
게 잊어버렸던 어릴 적 친구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것 같은, 흡사 그런 
감회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총상자국이었다. 자칫하면 치명적인 
것이 될 법했던, 그리하여  한 사내의 생애를 일찌감치 끝장내게 했을지도 모를, 
바로 그 작고 당돌한 쇠붙이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당신의 몸에 기록
된 한 시대의 부호이기도  하다고, 그는 새삼스러운 감개에 젖었다. 전쟁 막바지
에, 그것도 길거리에서 끌려간  지 불과 석 달하고 닷새 만에  당한 일이라고 했
었다. 상처가 제대로  아물기도 전에 귀가하였던 그해 여름만 해도  보기가 끔찍
스러울 정도로  큰 상처였었다. 그러나  청사에 기록된 문자도  세월에 바래듯이 
이제는 흡사 곶감  꼭지처럼 오므라든 채 찌들고  메마르고 오종종한 꼴로 거기 
남아 있었다.
  그는 그 흉터를 때밀이타월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세상사에 대해 당신이 지나
치게 겁이 많고 소심해진 것도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그는 문
득 품었다. 살아생전 어머니의 푸념도 그랬었다고 기억되었다. 저 냥반은 몸뚱이
만 빤하게 돌아온  거지 넋은 전쟁터에 빼놓고 왔다카이. 맨날  구들묵만 젊어지
고 있으마 우짜자는 소린지...  말하자면, 세상 사는 일에 도무지 뜻도 욕심도 없
는 양반이라는 비난이었다. 정말 그렇게  불성실한 삶이었던가? 그의 기억으로는 
꼭이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고향을 버리고 이웃 도시 대구로  나앉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무언가  새로운 일을 벌여보려고 열심이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면소재지 마을에다 지방신문  지국을 냈던 일이나 또는, 느닷없이 갓방  두 개를 
터서 메리야스 직기를  들여온 일 따위는 지금도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당신은 그때만 해도, 40여  가호쯤 되던 고향 마을에서 식자에 속했음직하다. 그
러니까 남들이 변함없이  우직하게 흙과 씨름할 대도  유독 그런 엉뚱한 일들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은 확실히  별스런 능력이었을 법도 한 것이
다. 당신이 세상 사는  일에 뜻도 욕심도 잃어버린 채 매사에  겁이 많고 소심해
졌으며, 마침내는 대책 없이 무능력한 사람으로  전락해버린 것을 필경 빈손으로 
식솔을 끌고 이웃  도시 대구로 옮겨앉은 이후부터라고 해야 옳으리라.  그날 이
래 당신이 제대로 생업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도시에서의 삶에서 당신은 그
처럼 무능력했었고 그리고 무능력한 만큼 매사  불운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가족의 호구지책은 늘 여자들  손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처음엔 어머
니에게, 다음엔 누나들에게,  그리고 지금은 계모의 손에  늘 기대온 생애였다고, 
그에게는 생각되었다.
  노인의 아랫도리를  씻기다가 그는 또  다른 흉터를 찾아냈다.  그것은 오른쪽 
넓적다리 바깥쪽에 있었다. 겨드랑이께의 그것보다는 작다고  해도 그 정도 흉터
가 남았다면 상처 자체는 상당히 심각했으리라고  짐작되었다. 심하게 노화된 피
부임에도 불구하고 터진 자리가 허옇게 드러나 보였다.
  "여기 이 상처는 언제 생긴 거지요?"
  때밀이타월로 그곳을 문지르며 그가 물었다.
  "상처라꼬?"
  노인이 새삼 고개를 외로 꼬고 내려다보았다. "어데, 그런 기 있나?"
  "여기요. 제법 큰 흉턴데요?"
  "아, 이거 말이야?"
  노인이 손으로 더듬더듬  흉터를 확인하더니 대꾸하였다. "총  맞은 자국 아이
가. 육니오사변때..."
  "이거가요?"
  그는 반문하였다. "전쟁때 입은 상처는 이쪽 거잖아요?"
  "어데?"
  "여기요."
  그는 노인의 손을 끌어다가 겨드랑이께의 흉터를 만져보게 하였다.
  "이게 바루 그 총상자국이잖아요. 눈으로 봐도 알겠는데요, 스쳐지나간  자리가 
말입니다. 안 그래요?"
  "그러나? 그래 ㅂ냐?"
  노인의 대답이 어눌해졌다.  갑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목소리였다. 기억을 더듬
듯이 노인의 아둔한 손이 흉터를 의심스럽게  더듬어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비뚜름히 고개를  꼬고 한참 생각해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역시 자신없는 말투였다.
  "니 말이 맞능 거  겉다. 까딱했으마 갈빗대가 몽창 나갈 뿐했닥고, 니 생모가 
늘 그랬디라. 그늠어 불콩이 쪼매마 더 우예 됐으마 내사 지금 없지러... 말도 마
라, 그늠어 육니오..."
  "그래두 영감님은 괜찮시다."
  갑자기 옆에서  참견해왔다. 타일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노인이었다. 아까부터 
이쪽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달갑지  않은 화제 때문에 짐짓 외
면해왔으나 이제 비로소 구미가 당기는 얘깃거리를  만났다는 식이었다. 탕 속의 
노인네까지 참견할 눈치였다.
  "동란때 그만큼도 안  당한 사람이야 이 대한민국에 있겠소?  날 보시오. 사지
육신이야 멀쩡하지. 비록 쭈그렁바가지가  되긴 했두가만... 흉측한 상처 같은 거
야 없지. 그거야 뭬 대단할 거 있소? 내 말은, 겉으로 뵈지 않는 상처가 더 크고 
아푸다 그거지요."
  냉큼 말을 받은 쪽은 탕 속의 노인이었다.  시조가락을 뽑던 그 걸걸한 목소리
가 되묻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댁은 그래,  무슨 상처가 있다는 거요? 어디, 그 뵈지 않는  상
처얘기 한번 들어봅시다."
  상대는 물론 사양하지 않았다.
  "그거야 못할 바 없지만서두, 말허자면 또  길지. 그럴 수밖에, 우리 같은 삼팔
따라지들은 몸만  멀쩡했지 속이야 진작에  멍든 인생이니깐. 흉터가  문제겠소? 
왼통 만신창이가 된 것을..."
  얘기는 이제 그쪽으로 흘러갈 모양이었다. 빌미만  제공했을 뿐 금세 소외되어
버린 두  부자는 어쩔 수 없이  가만히 귀기울이고 있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에게 여전히 등을 내맡긴 노인네는 그나마  관심을 보였지만 그러나, 그로서는 
도무지 그럴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그는 두 개의 흉터를  번갈아 들여다보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다시 물었다.
  "그럼 이쪽 상처는 어쩌다 생긴 거지요?"
  노인의 대답은 건성이었다.
  "머라꼬?"
  "이쪽 흉터 말입니다. 이건 언제 생긴 거냐구요?"
  "글씨 말이다. 그러니꺼네 거기... 언제쩍  일이꼬? 깜깜하다 아이가. 도통 기억
에 없다카이."
  잠시 그를 돌아보는 듯하더니 금방 주의가  흩어졌다. 그리고는 화제에 끼여들
었다.
  "그라이꺼네 나이 서른둘에 삼팔선을 넘었구마는.  그것도 홀홀 단신이다 아입
니꺼?"
  나이가 지닌  친화력에 그는 새삼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노인에게서 떨어져 
그는 사우나실로 들어갔다. 거기서도 고물인지 거물인지  몇 사람이 죽치고 앉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목욕탕에서 나왔을 때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아파트의 창들도 드문드문 불이 
켜졌다.
  그는 집과는 반대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전화질도 그만두기로 하였다. 우선 비
어 있는 속을 착실히 채우기로 하였다. 아주 좋은 기회다. 모처럼 아버지께 식사
를 대접해드리기로  하자. 생각만으로 기분이  좋아진 그는 상가가  밀집해 있는 
거리로 진출하였다. 이른바  먹자골목에는 손님들이 한 패거리씩  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대여섯 개나  되는 돼지불고기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식탁들을 죄
다 길바닥으로 끌어내놓았다.  말하자면 노천식당을 흉내내고 있는 셈이다. 추운 
겨울이나 여름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늘 그랬다. 저녁 무렵, 거기서 식구들과 둘
러앉아 돼지갈비라고  뒤적거리고 있노라면  그런대로 기분이 괜찮았다.  그래도 
이만큼은 하고  산다는 자부심 같은  게 스멀스멀 허파를  간지럽히는 것이었다. 
비록 서민 아파트지만-서른 평 마흔 평짜리라면 더 말할 것 없고-서울을 자척에 
둔 곳,  그것도 관악산과 청계산을 좌우에  거느린 천혜의 주거환경에다 그리고, 
구질구질한 뒷골목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는,  1백 프로 계획도시인 이곳에 자
리를 잡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새삼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지난 4,5년 동안 
아파트 시세가 엄청나게 올랐다. 스물다섯 평짜리가  억대를 넘어선 지 오래라고 
한다. 자칫했더라면 영영 기회를  놓칠 뻔하지 않았는가. 모두 억대 부자가 되어
버린 이 작은 도시의 주민들은 그래서 근년  들어 씀씀이도 더 푼푼해졌다. 주말
이면 외식 나온 가족들로 하여 이 식당가가 으레 붐비곤 했던 것이다.
  주문한 것이 그저 갈비 3인분과  소주 한 병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두 가지 
음식이 다 조금씩 남았다. 술이야 원래 그렇다 치고, 노인네의 식사량이 눈에 띄
게 줄어 있었다. 먹성 한  가지는 타고난 양반인데, 라고 생각하자 그는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져왔다.
  "그래도 밥 묵능 거 하나는 끄떡없다 아이가."
  상에서 물러나 앉으며  노인이 말하였다. "하루 삼세  끼, 꼬박꼬박 한 그릇씩 
비워낸다카이. 요새  젊은 앗들, 까딱하마 밥맛  없다카더라마는 내사 그기 무신 
말인동 안죽 모르고 산다 아이가."
  "국수 좋아하셨잖아요. 한 근짜리는 혼자 자시곤 하셨는데..."
  "하모! 그거 가주고는 한이 안 차디라. 근 반은 삶어야..."
  "고기두요. 특히 기름 많은 걸 좋아하셨지요."
  "하모! 돼지비계 같은 거 좋더마는. 꾸시한 기... 시장바닥에서 와, 그거마 볶아 
파는 데 안 있나. 돼지껍디하고 말이다. 남들은 쪼매마 묵으도 설사한다카더라마
는 어데, 내사 백날 가도 탈 한분 안 나더라. 한창 묵을 때는 대접으로 수북하이 
달락 해서 묵고 안했나. 그래도 탈은 무신 탈. 끄떡없더라카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신 말처럼 불과 한 두  해 전만 
해도 석이녀석과 막상막하였는데  싶어 그는 또 마음이 허전해졌다.  갈비 3인분
이라면 녀석 혼자 해치울 양이었다.
  그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안경가게였다. 노인의  고집을 막무가내로 꺾고 그는 
기어이 새  안경을 맞추었다. 기왕이면 고급으로  해달랬더니, 이미 거래가 있어 
낯이 익은 주인이 익살스럽게 대꾸하였다.
  "고급이구말구요. 이 정도면 국회의장급입니다."
  전혀 익살만은 아닐 터인데도 불구하고 노인의 얼굴에서 그것은 어쩐지 제 값
을 못하는 것 같았다.  이마의 상처도 거슬리지만, 그보다 노인의 꾀죄죄한 입성 
탓일 법하였다. 그는 옆의  쇼핑센터로 노인을 안내하였다. 지하 2층 지상 6층의 
그 건물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었다. 5층 남성복 매장에서 양복  한 벌을 골랐
고, 3층에서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그리고 2층 매장에서 쥐색의 중절모자를 찾아
냈다. 구두는 굳이  바꿀 이유가 없었다. 그만큼 새것이었다. 처음에는  몇 번 사
양하다가 결국은 그가 하자는 대로 수굿이 따라오던 노인네도 이 대목에 이르러
서는 완강하였다.
  "야가 와 이카노? 니 시방  누구한테 돈자랑 하자카나 머 하노? 그 카든가 먼
가는 안 갚어도 되는 기가?"
  노인은 역정을 내기까지 하였다. "니 한분 봐라 이거. 새거 아이가? 그동안 안 
신고 나돗다가 인자 살마 얼매나 살꼬 싶어서  요새 들어 신는다카이. 내한테 새 
구두가 머 하로 필요하겠노?"
  그의 기분 같아서는 내친김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일습을 새로 갖춰드리
고 싶었지만 더 이상 고집할  도리가 없었다 대신에 문제의 혁대만은 기어이 바
꾸어 매게 하였다.  마침내 쇼핑센터를 나섰을 때 노인의 모습은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헌옷꾸러미를  한 손에 들고, 또  한 손으로는 노인의 팔을 부축한 
채 가등이 하얗게  깔린 밤거리를 걸어갔다. 젊은 남녀 한  패거리가 왁자지껄하
며 지나갔다. 두 부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아파트의 창문들은 이제 거의 다 환하게  불켜진 상태였다. 승용차들이 하나씩 
와닿고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차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저녁 아홉시만 지나면 
더 이상 주차할 자리가 없다고 한다. 아내가 불평하던 말을 그는 문득 떠올렸다. 
같은 계단을 쓰는 우리  10가구 중에 차가 없는 집은 딱  세 집뿐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정작 한심한  것은, 그 세 집이  다 훈장댁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혼자서 
히죽이 웃었다. 낯선 이웃들이 서둘러 제 구멍을 찾아 기어들고 있었다. 그는 한 
발 앞서  아파트의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아내의 귀가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를 맞아준 것은 그의 책가방이었다. 그 손때  묻은 물건이 철제 손잡이에 변
함없이 걸려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아내의 귀가를  추호도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그는 조금 당황하였다. 아니, 좀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 여자가 어떻게 된 거
지? 가출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픽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 웃음이,  당황스럽고 황당하기까지 한 기분으로부터  그를 구해주었다. 가출? 
그는 한 번 더  벌쭉 웃었다. 그런 충동을 느껴본 적은  있느냐고 물어보기는 해
야지, 하고 그는  작정하였다. 집을 찾는 일을, 내가 자주  성가시게 느끼듯이 말
이야.
  "와 그라고 있노? 니 안사람, 안죽 안 왔나?"
  뒤따라 올라온 노인이 더 놀라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무신 일 생긴 거 아
이가? 이래 개양 있어도 되는 기가? 어데 이부제라도 좀 물어보능 기 안 좋겠나 
싶구마는..."
  "무슨 일 있을라구요. 괜한 걱정 마세요. 시내라도 나간 모양이지요 뭐."
  여기서 시내란 서울 쪽을  뜻한다. 그쪽으로 나들이해야 할 일인들 왜 없으랴. 
그쪽은 1천만이 넘는 인구가  아글바글 모여 사느니 만치 아내라고 하여 사고무
친일 턱은 없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안엔 친구도 있고 일가붙이도  당연히 있
으리라. 오랜만에 어울리다 본즉 늦어지고 있겠지. 애초부터 이럴 생각이야 아니
었을 테지. 어쩌면 찻길이 막혔는지도 모른다.  아, 그놈의 서울 쪽 교통사정이라
니! 그는 열심히 궁리하면서 스스로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노인이 
또 참견하였다.
  "시상이 워낙 험해놔서... 요새 젊은 여자들 밤길 댕기겠더나 어데."
  "걱정 마시라니깐요. 그렇게 젊은 여자도 아닙니다."
  그는 좀 짜증스럽게  대꾸한 다음 거의 충동적으로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그
리고는 스스로도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다행이 반응이 없었다. 이 집도 비었
는가 보다고  생각하고 등을 돌려세우는데 그때서야  여자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문은 닫힌 채였다. 아마도  렌즈구멍으로 내다보고 있을 테지. 그는 상대가 이
쪽을 잘 확인할 수 있도록 얼굴을 쳐들고 커다란 소리로 대꾸하였다.
  "옆집인데요, 503홉니다만..."
  "그래서요? 무슨 일이신데요?"
  문이 열릴 기미는 없었다.  그는 잠시 주저하였다. 언젠가 아내에게 들은 바로
는, 젊은 맞벌이 부부가  산다고 하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그 부인은 
아닌 듯 나이와  촌스러움이 느껴졌다. 나이 든 가정부이거나 또는  시골서 올라
온 노모인 모양이라고 짐작되었다. 별 기대 없이 그는 물었다.
  "혹시 우리 집사람 어디 간다는 얘기 없었습니까?"
  "글쎄요, 암말 없었구만요. 안에 안 계시우?"
  "네, 어딜 갔는지 없구만요. 실례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닫힌  문에다 대고 두어 번  머리를 숙였다. 저쪽에서는 더  이상 대꾸가 
없었다. 하지만 이쪽의 거동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듯 은밀한 기척이 느껴졌다.
  두 부자는 다시 아파트 계단을  내려왔다. 더 이상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단
지 안길을 조금  걷다가 필경엔 어린이놀이터로 되돌아왔다. 아까 그  벤치에 누
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들을 잡았다.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그네도, 미끄럼틀도, 시소도  한결같이 허전한 모습
이었다. 철봉대며 회전그네며  정글 같은 철근 구조물들이 가등 아래  차갑게 보
였다. 모래바닥에는 아이들이  남긴 무수한 발자국들이 무슨  상형문자이기나 하
듯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과자 포장지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그리고 세발 
자전거 한대가, 아마도 윗도리일 법싶은 옷가지 한  점과 함께 가쪽에 버려져 있
었다.
  "저거 보래이." 노인이 그쪽으로 눈을 주며 입을 뗐다.
  "자전거고 머고 말캉 냇삐리고  갔대이. 요새 앗들, 머 하나 기롭은 기 없다카
이."
  그는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핵교 댕기는 앗들도 똑같닥 하더마는. 머든지  살 줄말 알지 지물건 간수하는 
거는 도통 관심 밖이라카이. 너거 때하고는 마이 다르다 아이가."
  그는 잠자코  웃기만 하였다. 대구에서 다니던  초등학교 시절, 어쩌다 필통을 
통째로 잃어먹고는 엉엉  울었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을 더 깊게  하였다. 노인은 
말을 좀더 계속할  듯하더니 그만두었다. 새삼스럽게 주위를  한차례 두리번거렸
다. 그리고는 앉은 키를  낮추어 윗몸을 등받이에다 기대었다. 쥐색 중절모 아래
에서 국회의장급 안경이 가등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그렇게 한동안 허공에다 무
연히 눈길을 주고 있다가 노인이 불쑥 말하였다.
  "그느마를 우야마 좋겠노?"
  피곤과 졸음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예? 누구요?"
  대답이 없더니 한참 만에 노인은 또  중얼댔다. "차말로 그느마를 우야마 좋겠
노?"
  그리고는 한숨을 후우 하고 내쉬었다.  그는 두 번 다시 묻지 않았다. 저쪽 아
이들 중에 어느 녀석이 또  당신 속썩일 짓을 저질렀나 보다고 생각했을 뿐이었
다. 그 동생들을 두고 생각하노라면 그로서는, 배가 다르다기보다 세대가 다르다
는 느낌이  더 앞서곤 하였다. 하긴  그들과 최소한 20년 이상의  틈이 가로놓여 
있지 않는가. 세대가  다른 만큼 의식이나 정서가  다르고, 그런 것이 다른 만큼 
당연히 생활양태가 달랐던 것이다.
  "너거들하고는 우째 그래 다르꼬..."
  노인은 또 한차례 깊은 한숨을 토해놓았다.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가 없어 그
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해보세요. 무슨 일이 있는 거군요?"
  그러나 노인의 대꾸는 정작 가벼웠다. "아이다.  일은 무슨 일, 기양 쪼매 속상
한 기 있어 그카는 기지 머..."
  그 조매 속상한 것이 뭐냐고 그는 묻지  않았다. 캐묻는다고 해서 대답할 노인
네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서로를 위해  어떤 선은 필요
하다고 그도 수긍하는 바였다.  더 이상 헤쳐놓는 일은 두 쪽을  다 성가시고 피
곤하게 만들 것이었다.  대화가 끊긴 채 두  부자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하루의 
피곤이, 이제야말로 더 이상  감당해내기 어려운 무게로 짙게 느껴져왔다. 두 사
람은 어느새 꾸벅꾸벅 좁기 시작하였다.
  그는 밤길을  가고 있었다. 숲이 무성한  산길이었다. 달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 길은 어둡고 험하고 그리고, 너무 멀고  멀었다. 산 두 개를 넘어야 이
모집이었다. 아버지는 늘 그를 데리고 나섰다. 비록 열 살 남짓한 때였지만 그래
도 밤중 산길에서는 마음 든든한 짝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자주 
이모댁을 찾곤 했었다. 그의 가족이 고향을  떠나 대구바닥으로 나앉은 직후였고 
몹시 궁하게 살 때였으므로 방문의 이유는  자명하였다. 차편이라고는 단지 그것
밖에 없었다. 벽촌  간이역인 남성현역에는 자정이 넘어서야 닿았다. 거기서부터 
큰 산봉우리 둘을 걸어서 넘어야 했던 것이다.  이모댁에 닿고 보면 온몸이 땀으
로 흠씬 젖어 있곤 하였다. 어린 그에게는 힘겨운 길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무엇
보다 무서움 때문이었다. 인가도 없는 험한 산길을  오밤중에 넘는 일은 늘 오금
을 저리게 했던 것이다. 무섬기를 쫓기 위해 아버지는 자꾸 말을 시켰다. 때로는 
노래를 부르게도 하였다. 그가 굳이 입을 다물고 있을라치면 당신이 대신하였다. 
어린 그를 상대로  온갖 얘기들을 늘어놓고 했던 것이다. 이제는  거의 아무것도 
기억해낼 수가  없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말도 있다. 언제던가,  당신이 불쑥 
꺼냈던 수수께끼가 그것이었다.
  "시상에서 젤로 무섭은 기 먼지 아나?"
  그는 열심히 궁리한 끝에 답변했었다. "호랑이요."
  "호랑이가 머가 무섭노."
  아버지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호랑이라카는  짐승은 영물이라 함부로 사
람을 해꼬지하는 일이 없다 아이가. 지 배 부르마  퇴끼새끼 한 마리 손 안 댄다
카이."
  "그라마 구신요 구신, 도깨비 같은..."
  "차말로 구신  낮밥 묵는 소리 하네.  시상에 구신이 어딨고  도깨비가 어딨더
노? 그런 거를 미신이라 안카나. 핵교 댕기는 아가 우예 그런 소리를 하노?"
  "아부지는요? 그라마 아부지는 머가 젤로 무섭어예?"
  "사람 아이가. 세상에서 젤로 무섭은 기 바로 사람인 기라. 이런 데서 생판 낯
선 사람하고 턱 마주쳐봐라. 얼매나 간이 오구라붙을 일이겠노. 차라리 호랭이가 
낫지. 도깨비고 구신이 어데 따로 있나, 인간이 바로 그기라카이."
  그는 물론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었다. 유독 이때
의 얘기만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하고 
그는 곰곰  생각에 잠겼다. 무엇일까... 무엇일까...  까닭은... 그러던 어느 순간에 
그는 흠칫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깜박 졸았던 모양이다.  턱 언저리에 무언가 스멀거리는  느낌이어서 손등으로 
훔치고 본즉 침이었다. 그는 삐딱하게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쓴 다음 주위를 뚤
레뚜레 둘러보았다.  텅 빈 놀이터, 어두운  하늘, 가지런히 불켜진  창들 따위가 
몽롱한 시선에 잡혀들었다.  바로 옆자리에서 잠이 든 노인의 모습을  발견한 것
은 되레 나중의 일이었다. 어쨌거나, 노인은 머리를 가슴팍에다 잔뜩 꺾은 채 잠
이 들어 있었다. 예의 쥐색 중절모는 땅바닥에  굴러떨어진 지 아마도 오래인 듯 
민둥한 정수리를 그대로 드러낸 채였다.
  노인이 느닷없이  고개를 불쑥 쳐들더니  뭐라고 외쳐댔다. 두  손을 내저으며 
무언가를 내쫓는  시늉까지 하였다. 꿈을 꾸고  있는가 보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가위눌린 사람의 몸짓이었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아버지!"
  그는 노인을 흔들어  깨웠다. 그러자 노인은 냅다 비명을 지르며  그를 거칠게 
떼밀어냈다. 칠순  노인의 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세찬  것이어서 자칫 
뒤로 벌렁 나가떨어질  뻔하였다. 그는 망연자실한 채 멀거니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발치께에 나뒹굴고 있는 모
자를 집어 들었다. 왠지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노인은 잠시 의식을  챙기는 듯싶었다. 들숨날숨을 한차례씩  길고 요란스럽게 
하고는 내처 빈 입을 쩝쩝  다시고 나더니 비로소 부스스 얼굴을 쳐들었던 것이
다. 안경이 코끝에 걸려 있었다.
  "가마이 보자... 여가 어데고?"
  잠긴 목소리였다. 장거리 전화를 통해 듣던 바로 그 음성이었다.
  "내가 깝북 했던갑제?"
  "저두요..."
  그는 웃으며 대꾸하였다.  "당연하시죠 뭐. 먼길 오셨겠다, 목욕하셨겠다,  그리
고 또, 막 식사하셨지요."
  "하모, 그라고 보이까네 쪼매  곤하구마는... 늙으마 잠이 없닥하는 거도 다  빈
말 같더라. 내사 아무데서나 꿉벅꿉벅 잘 존다카이."
  "무슨 꿈 꾸셨어요? 뭐라고 소리치시던데요?"
  "개가, 껌둥 강새이가  항꾼에 시 마라나 나타나가주고  나한테 막 안 덤비나. 
어찌나 씩껍묵었는지 등때기가 다 척척하다카이."
  노인은 그러면서 등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요새 꿈자리가 좀 시끄럽다 아이
가. 눈만 붙였닥 하마 벨 꿈을 다 꾼대이."
  "자리가 불편해서 그러겠지요 뭐."
  그는 우정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는 일어났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공중전화부스에서 나온 그는 아파트로 갔다. 계단
을 오르면서, 이게 몇 번째인가 셈해보았지만 자꾸 헷갈리기만 하여 그만두었다. 
5층까지 올라갔을 때 변함없이  그를 맞아준 것은 자신의 손때 묻은 가방뿐이었
다. 이런  상항을 진작부터 예측해왔던 것처럼,  또는 기왕에 잘 길들여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담담하였다. 돌아서 층계를  다시 되짚어 내려오다가 석이녀석을 
떠올리고는 한 마디 투덜댔다. 그 녀석이 제 집구석을 기억하고는 있는 건가?
  놀이터로 돌아와보니 노인은 다시 잠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벤치 위에 모잽이
로 드러누운 채였다.  옹색한 자리가 잔뜩 움츠린 자세여서 노인의  몸뚱이가 더 
작고 잔약하게  느껴졌다. 머리맡에 모자와 안경이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고는 그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젖히고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하
현달이 떠올라 있었다. 오늘이 며칠이던가?  잠시 더듬어보았지만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꺾고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깊은 잠에 떨어진 듯싶었다. 멀
고 먼 길을 훌쩍  떠나버린 것처럼 몹시 적막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
와 동무하여 밤의 산길을  걷던 때가 불쑥 떠올랐다. 그러나 그  회상은 금방 차
단되었다. 갑자기 앙칼진  여자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
를 쳐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켜진 창마다  똑같은 소리들이 쏟아져나오고 있
었다. 목하 인기 절정의 텔레비전 연속극이 방영중인 모양이었다.

    짧은 황혼
  주방 앞에서 강여사는  주춤하고 발길을 세웠다. 안에서  뭐라고들 소곤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참  이상한 노릇이다. 평소 같으면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이렇게 내뱉었을 그녀였다.
  "문 쳐닫아놓고 머 하노? 늙은 것들이 우세할라카나?"
  그러나 이날만은  어쩐 셈인지 스스로  제동이 걸렸다. 강여사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 징한 놈이  과연 내 새낀지 몰러. 시방도  외눈 한짝 껌뻑하지 않는 거여! 
허지만 쪼께만  더 두고 보더라고. 애비가  이러고 나오는디 지도 영  내 몰라라 
할 수야 없는 일 아니겠어?"
  "자기가 너무  안돼보인다니가 그래. 괜시리 되지도  않을 일 벌이는  거 아닐
까?"
  "무슨 소릴 하구  있는겨 시방? 아, 그라면 손들고 말자는  거여 뭣이여? 자기
는 그래도 무관허다 그런 쪼여 시방?"
  "괜한 어깃장 놓지 말아요. 나두 자기랑 얼마나 같이 살고 싶은데..."
  이쯤에서 돌아서는 게  옳을 듯싶었다. 안에 있는 두 사람이  누구인가를 금세 
알아챘고,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빤한 까닭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도무지 발길을 돌려세우지 못하는 자신이 참 이상도 하다고 강여사는 생각하
였다. 오히려 귀가 더 크게 열렸다.
  "나한테 한 육백  있는데 그거 가지고 안될까?  저쪽 이주단지 마을에 지하방 
하나쯤은 얻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자기 생각은 어때?"
  "또 씨잘데 없는 소리!"
  "왜 씨잘데 없수?"
  "아, 생각 좀  혀보더라고! 방은 그렇다고 혀. 그걸루 다여?  허다 못해 숟가락 
냄비는 있어얄 꺼 아녀?"
  "각자 쓰던 거 들고 나오면 되지 뭘  그래요. 누구 와보란 듯이 신접살림 차릴 
것도 아닌데..."
  "무슨 소리? 어째 아녀 그것이? 내는  그렇게 못혀. 웬만치는 챙겨가지고 나갈 
거여. 아니믄, 나중 도 손 내밀 것인가?"
  강여사는 비로소 발길을  돌린다. 입이 좀 심심하던 터라 커피나  좀 끓여볼까 
하던 것을 일단  포기하였다. 뒤늦게 인기척을 하고 주방 안으로  들어서기가 어
쩐지 민망스런 기분이 든 탓이었다.
  "아이고 시상에..."
  강여사는 돌아서며 혀를 찼다.  요즘 시속이라는 게 도대체 어떤 판속인지, ㅈ
은것들이나 늙은것들이나 남녀가 어울렸다 하면 그저 짝짓기하느라 체면이고 푼
수고 죄다 팽개치고  돌아가는 꼴 아닌가 말이다. 할머니 방으로  되돌아온 강여
사는 혼자서 얼굴을 붉히기까지 하였다.
  "차말로 남세시럽어서..."
  강여사는 방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았다. 괜시리 속이 상하였다. 혼자서 패를 떼
던 할망구가 잠시  손을 멈추고 돋보기 쓴 얼굴을 쳐들었다.  쪼글쪼글한 주름살
들이 칼자국처럼  이마에 선명하다. 하지만 말은  없다. 홀쪽한 볼따구니를 두어 
번 홈싯거렸을 뿐, 다시 화투장 뒤집는 일로 되돌아갔다. 눈보다 귀가 먼저 깜깜
해진 터라 웬만해서는 입을 여는 일부터 삼가고  있었다. 입 속이 아무리 구리다
고 해도 그런 할망구를 상대할  수야 없는 노릇이라 강여사는 속이 더 폭폭해졌
다.
  8단지 노인회  안에는 공인 비공인 짝꿍들이  기왕에도 여러 쌍  있었다. 등록 
회원수만도 남녀 합해  백 명이 넘는데다 소위 싱글이 많은  까닭이었다. 게다가 
배운 사람 많고  비교적 여유들도 있었다. 자칭 거물이니 고물이니  해도 기분만
은 젊은 세대 못지않은 것이다.
  황씨와 여주댁도 말하자면 그런 쌍들 중  하나였다. 황씨노인은-어디가지나 본
인의 말인즉슨-젊어 한 대는 목포 어판장에서도  알아주던 거간꾼이었다고 한다. 
슬하에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 징헌 놈들-이것도 물론 그의 말이다-을 
대학까지 다 공부시키고 나서 각각  짝을 메워 내보내고 나니 그 수월찮던 재산
도 우습게 거덜나고  말더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중고등학교 교사인  큰아들과 7
단지의, 방  경우 세 개자리 서민  아파트에 살고 있는 처지에  툭하면 아들더러 
딴살림 차려나갈 터인즉  최소한 열세 평짜리 아파트  하나는 마련해줘야 할 게 
아니냐고 막무가내로 생떼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여주댁은 딸 내외와 함께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딸 둘을 키워 출가시킨 
후에도 혼자 되기  전까지는 아들 귀한 줄을 별로 모르고  살아왔노라고 하였다. 
그만큼 금슬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바깥양반을  잃고 나니 사정이 달라졌다. 
두 해쯤 혼자 살다가  딸네 집으로 기어든 게 불과 지난해  겨울의 일이었다. 하
지만 그 세월만으로도 족하다고 여주댁은 자주  푸념했었다. 처음에는 사위 눈치
가 보이더니 이제는 딸 눈치까지 봐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짝
을 잃은 외로움은  외로움대로, 또 딸 내외에 대한 서운함은  그것대로 쌓아가며 
사느니보다 움막일망정 서로 등 기댈  수 있는 사람과 편안하게 사는 날까지 살
고 싶다는 소리였다.
  알려진 바로는 황씨가 예순여섯, 여주댁이 예순둘 드는 나이였다. 누가 나서서 
말릴 일도 아닌 것이다.  지난 봄에는 두 쪽 다 일흔이 넘은 한  쌍이 양가 자손
들로부터 마침내 공인을 받아낸  적도 있었다. 적어도 두 분 중  어느 한쪽이 먼
저 세상을 뜨는 날까지는  양가를 오며가며 사시도록 피차 공평하게 모시기로 2
세들끼리 합의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오랜 짝꿍이면서도 여전히 비공
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도 물론 많았다.  일흔이 넘은 김교장과 그보다 여섯이
나 아래인 남녀사의 경우가 그랬다. 교장선생의 인품에 반한 남여사 쪽은, 한 재
산 미리 떼어달라고는 않는 대신에 최소한 파출부 사례금 정도만 다달이 적금으
로 부어주겠다는 약속이라면 기꺼이 들어가 노인네  수발을 맡겠다고 했지만, 은
행에 나간다는 교장 아들이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순수하지 못하다
는 게 이유였다. 딴은 그렇기도 하였다. 그렇잖아도 늙은이들의 주책이요 망령으
로 비칠 판에 무슨  놈의 적금 타령인가 말이다. 하지만 남여사  쪽 처지를 보면 
굳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그 할망구는 의지가지없는 신세로  여기저기 경
로당으로나 떠돌며 살고 있는 처지라 나중 일도 생각 않을 수 없는 노릇이던 것
이다. 요즈막 세상 인심이 그렇지 않던가. 교장선생 살아생전에야 아무려면 어떠
랴만, 이미 칠십 고령이다. 어느 날 덜컥  눈감아봐라, 그 자손들 중에 누가 자기
를 거들떠보기나  할 것이냐고, 그 할망구는  ㄴ두리하였던 것이다. 옳은 말이었
다. 파출부 어쩌구 하는 식으로 너무 솔직하게  까발리긴 했어도 경우에 그른 말
은 한마디도  없지 않나 싶었다. 그걸  두고 순수하네 못하네 하는  쪽이 오히려 
속뵈는 짓이란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는 강여사였다.
  황씨노인과 여주댁의 사랑놀음도  영구 비공인으로 끝날 공신이  컸다. 황씨의 
요구가 너무 넘치기도  할뿐더러, 그 아들 내외의 태도로 보아  도무지 가망성이 
없어보이던 것이다. 이대로 살아내기에도 팍팍한 처지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
냐, 한 재산 물려준 것도 아니면서 늘그막에 웬 혹까지 만들어 달겠다는 거냐고, 
특히 그 며느리가 이집 저집  반상회가 열리는 자리마다 시아버지 흉을 보고 다
닌다지 않던가 말이다. 천상 남자그들이 아니면  살아가지 못할 것같이 유별나게 
구는 여주댁 행동거지도  못지않게 흉잡히고 있을 건 뻔한 이치겠다.  그러고 보
면 두 노인네가 신접살림  차리고 나설 가망성이라고는 도무지 감감한 노릇임이 
분명한데도 저렇게 몸들이  달아 있으니 황차 이를  어찌할꼬 싶은 걱정도 없지 
않았다. 강여사는 명색이 8단지 노인회 여총무이기도 한 까닭이었다.
  화투점을 떼고 있던  쭈그렁바가지가 헤뜩헤뜩 웃기 시작하였다.  바닥을 내려
다본즉 팔공산 스무끗에 매화 열끗이 떨어져 있다.  참 가관이다 싶은 차에 등뒤
에서 불쑥 참견하는 소리가 있다.
  "아따, 달밤에 님 만날 운세네!"
  여주댁이다. 손에 과일접시가 하나 들려 있다.
  "이 사과 자시고 그 팰랑 나한테  팔아요. 성님이야 얻다 쓰시겠수? 달밤에 나
가봤자 괜시리 감기만 얻지, 안 그래요?"
  쭈그렁바가지는 웃을 때도 역시  쭈그렁바가지이다. 잇몸뿐인 입속을 허전하게 
드러낸 채로 오물오물 대꾸하는 말이 천천히 새기고 본즉 이랬다.
  "헛것이기는 사과도  마찬가지구먼. 내가  한쪽이라두 씹을 수가  있어야 말이
지... 팔공산에 이매조가 그래도  눈요기엔 더 좋을 성불러. 아우님 생각은 안 그
런가?"
  강여사더러 동의를 구하는 얼굴이었다.
  "말해 뭐 합니꺼. 성님 말씸이 백번 옳다 아입니까."
  강여사는 여주댁 쪽을 향해 눈을 잔뜩 흘기며 핀잔을 주었다.
  "이늠으 에펜네는 지가 ㅁ살 덜  묵었다꼬 세상 연애는 지 호분차 다 특허 낸 
거맨치로 착각하고 산다  아입니꺼. 카지만은 그거 어데 말이나  됩니까? 맴이사 
언제나 청춘인데 성님이라꼬  기분 몬 낼 꺼 뭐 있어요?  오늘 운수 댓낄이네요. 
성님도 기분 팍팍 내소 마!"
  좀 과장되기는 했지만 진심이었다. 여주댁보다 강여사는  두 살이 위였던 것이
다. 그렇다고  도매금으로 거물시(?)당하는 것  같아 부아가 치밀기까지  하였다. 
지는 무슨 10대 소년 줄 아는가. 아무리  둘끼리만 나누던 대화라고는 해도 좀전
에 엿들었던 말들이 자꾸만  간지럽게 되살아나 강여사의 심사를 꼬이게 만들었
다. 기어이 한마디 더 내뱉고 말았다.
  "국수 언제 줄 끼고?"
  여주댁이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요즈막 애들 투로 반문하였다.
  "웬 국수?"
  눈 가장자리로 잔잔조롬하게 주름살이  몰려 있다고는 해도 아직은 여간 예뻐
보이지 않는 눈이다. 남편  귀염을 꽤나 받았겠다 싶고, 그런 여편네일수록 혼자
서는 못 산다던 말도 생각났다. 황씨노인과 사귄  지 불과 1년 미만에 벌써 설악
산이다 부곡온천이다 둘이서만 신명나게  돌아친 적이 여러 차례로 소문이 있었
다.
  "이주단지 쪽에 방을  얻기로 했다며? 신방 차릴라면  국수부터 말아야 될 꺼 
아이가? 야박시럽기 그것도 안할라꼬?"
  여주댁 눈빛이 더 살가워진다.
  "성님은 또 웬 이주단지유? 어디서 방귀 냄샐 맡긴 했는가 뵈?"
  "마, 방구 냄새 정도가  아니다. 내겉이 짝궁이 없는 사람은 서럽어서 어데 살
겠더나. 냄새 고만 피우고 얼른 퍼떡 시집갔부라그마!"
  "성님 보소, 남의 말이라고  그래 쉽게 하들 마소. 내가 마 애간장이 뽀작뽀작 
탄다 아입니꺼!"
  강여사를 흉내내고 나서 여주댁은 헤낙낙하게 웃었다.
  볕이 들 동안은 웃옷을 벗어 걸 정도로 따뜻하더니 해가 기울고 나자 금방 써
늘해졌다. 8단지 노인회 부회장인 서노인은 윗도리를  걸친 다음에 다시 붓을 잡
았다. 그리고는 흙 토자  길 영자 구할 구자 등 낱자들을  책받침만큼씩 자른 화
선지 위에다 한 자씩 정성들여 써나갔다. 오후  내내 헌 신문지들을 적셔냈던 글
자들로서 서로에 입문하는 회원들에게 체본으로 줄 작정이다.
  숟가락질하기에도 손이 떨리는 판에  이제 와서 무슨 붓을 잡느냐고 회원들은 
으레 고개부터 내젓기 일쑤였다. 굳이 배워서 어디다 써먹겠느냐고도 하였다. 단
지 시간 죽이기에 뜻이 있는  것이랴면 보다 손쉬운 놀이가 얼마든지 있니 않느
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경로당 방에는 화투니 바둑이니  마작 같
은 놀이가 늘상 전을 벌이게 마련이던 것이다.
  서노인은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따분해보
일지 몰라도 조금은 해보면 그런대로 재미를 붙일  수도 있을 거라며, 그저 잔잔
히 웃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어영부영 붓을 잡는 회원들이 하나둘  늘어가는 추
세이기는 하였다. 가을  들면서부터 단풍놀이다 뭐다 몰려다니느라  그나마 손들
을 놓아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합천해인사 부곡온천 창원공업
단지 등을 돌아오는 3박4일  일정의 관광길에 떼거지로 나선 참이어서 경로당이 
온통 썰렁해진 것이었다.
  저녁답이 가을볕처럼 허무한 것도 없다. 기울었다. 싶었는데 방안이 금세 어둑
어둑해져버렸다. 서노인은 붓대를  내려놓고 무연히 창 밖으로 눈길을 내보냈다. 
보이느니 겹겹이 막아선  아파트 건물들뿐이다. 앉아 있는 자리가  1층인지라 하
늘은 끝자락도 구경할 수가 없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다. 앞뒤좌우 할 것 없이 
시멘트 벽들로 각지게 차단된 눈앞의 좁은 공간이 묽은 주황빛으로 일순 환하게 
타오르고 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저 위쪽에다  거대한 장명등이라도 막 내건 것 
같았다. 뒤돌아보니 방안이 온통 주황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일몰의 순간은  허무하리만큼 짧았다. 다시 창 밖을 내다  보았을 때는 
이미 꺼멓게 죽어가는 빛깔이었다. 눈앞의 공간이 상자 속처럼 음험해졌다. 서노
인은 망연자실한 채 꼼짝않고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자주 경험하는 일이지만, 
더할 수 없이  안타깝고 서운한 순간이던 것이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어디에다 
놓아버린 듯한  기분이기도 하고, 혹은  모호하지만 그러나 가슴을  쥐어짜는 것 
같은 회한의 맛이기도  하였다. 하여간 진하게 아쉽고 막연한 가슴  미어지는 그
런 상태였다. 60여  평생이 단지 한나절 소꿉놀이처럼 빤히 뒤돌아보일  듯도 싶
은 것이었다.
  갑자기 불이 확 켜지면서 사내처럼 걸걸한 목소리가 뛰어들었다.
  "시상에... 이래 어둡은 데서 불도 안 키고 혼자 머 하고 있어예?"
  여총무 강여사다. 목소리만큼이나 실팍한 몸집이 문틀을 꽉 채우고 있다.
  "부회장님도 관광 가지 와 혼자 남았십니꺼?"
  툭 내던지듯이 한  마디를 더 물은 다음  강여사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경비원 복장이 따라 들어왔다. 축  늘어진 늙은이 하나를 들쳐없는 채였
다.
  "고생했심더. 그 물건, 인자 아무데나 내리놓으소."
  보아한즉 그 물건이 바로 황씨다. 서노인은  경비원들 거들어 황씨를 방바닥에
다 뉘었다. 고주망태가 되어 정신을 놓아버린 몰골이다. 이게 벌써 몇 번짼가?
  8단지와 7단지 사잇길  벤치 위에 널브러져 있더라고 하였다. 고개가  뒤로 잔
뜩 꺾인 채  시뻘건 낯빛에 흰창을 반쯤  드러낸 얼굴이라 지나가던 아녀자들이 
질겁을 하고 신고했다는 사연이었다.
  "노인네가 약주를 얼매나  과허게 자셨으면 이 지경으루다 정신을 놓아버렸을
까유? 눈에 잘 띄는 곳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구유.  해는 떨어졌는디 사람 발길 
닿지 않는 외진 곳에서 그러고 기셨다면 워쩔 뿐했어유?"
  경비원이 손을 털며 떨구고 돌아선 말이었다. 강여사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이고, 저 순진한 양반 보소.  이 영감탱이가 지 죽을 자리 살 자리도 안 가
리고 이라는  줄 아나? 얼마나 쑹악한  영감인데? 요새 앗들 말로  하자카마, 다 
통박 재보고 하는 짓이라카이!"
  말하자면, 의도적인 주정이라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술을 좋아하는 데다 술버
릇도 점잖은 편은 못되던 황씨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폭
음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사람이 요즘 들어 툭하면 인사불성이  되게 퍼마시고
는 아무데나 뻗어버리는 소행인즉 그 속이 반한  것 아니냐는 소리였다. 아들 며
느리를 상대로 한 늙은이의 추한 투정이라고,  강여사는 진작부터 사정없이 비난
해 마지않던 것이다.
  "강여사는 젊은 사람들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소."
  서노인이 은근히 나무랐다. "아무려면, 그렇게나 생각이 없을라고? 술 먹던  버
릇은 여전한데 몸이 이젠 못 이기는 걸 가지구..."
  "아따, 우리 부회장님도  억시기 답답시럽은 말씸만 해쌓네. 저 영감탱이가  얼
매나 쑹악한 맴을  묵고 있는지 도통 머를 알고 기시야지...  내 다 이바구해보까
요?"
  "또 여주댁 얘기?"
  "머라꼬요?"
  강여사는 돌연 입을  야무지게 다물더니 서노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적지않게 위압감을 느낀  서노인은 슬그머니 눈길을 비켜버렸다.  그리고는 두리
번거리며 전화통을 찾았다.  줄을 기다랗게 늘인 전화기가 방 한족  구석지에 쓰
레기통 빗자로 재떨이 등속과 함께 밀쳐져 있었다.
  "가만있자... 회원명부는 또 어디다 처박아뒀더라?"
  우정 중얼대며 이  구석 저 구석 기웃거리는 시늉을 하였다.  어쩐지 강여사의 
존재가 갑자기 버겁게 느껴진 때문이었다. 거침없는  말투며 툼박한 어깨와 허리
통, 그리고 왈각달각하는 성깔 등이 말이다. 그것은 좀 두렵기도 하고 또 정답기
도 한 그런 무엇이었다.
  "이 냥반은 남 입에 쟉꾸 채우는 도사라카이. 아이고, 열불 나서 내 몬 살겠다 
마!"
  강여사는 푸르딩딩한 낯짝을 하고는 찬바람 나게  휭하니 나가버렸다. 그 꼴을 
보며 서노인이 잠시 혼자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회원명부를 찾아내 황씨 댁으
로 전화를 걸었다.
  잔뜩 부어터진 얼굴로 휭하니 나가버렸던 강여사가  잠시 후에 되돌아왔다. 무
슨 심산에선지, 서노인이 좋아하는 커피까지 두 잔 타가지고서였다. 좀처럼 없던 
일이다.
  "연락은 됐어예?"
  종이컵을 건네주는 강여사의 두터운  손이 서노인의 눈에는 색시 것 못지않게 
복수러워보인다.
  "그 집구석에서는 뭐라캐예?"
  "아들이 귀가하는 대로 보낸다고 하더만."
  "며눌아가요? 그라믄 지 아들 말잉가 저 영감탱이 아들 말잉가?"
  강여사의 어투는 여전히 꼬부라져 있다. 재갈  물린 얘기를 어떻게든 풀어놔야 
개운해질 모양이었다.
  "그야 남편 얘길 테지 뭐. 차가 있어야지, 어떻게 떠메고 가누?"
  강여사는 입을 비죽비죽하면서도 머리만은  끄덕인다. 서노인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늙은 씨름꾼 같은 이 할망구가 어쩌자고 이러누 싶었다.
  서노인의 커피잔이 비자 강여사가 자기 것을 더 부어준다.
  "우리 부회장님은 차말로  커피 하나 억시기 좋아한다카이! 이거  마이 묵으마 
ha에 안 좋다카던데..."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서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눈길을  옆으로 비킨
다. 황씨가 뭐라고 시부렁대면서  벽 쪽으로 돌아눕는다. 술 취해 널브러진 사람
들은 흔히 몸집이  실제보다 더 커보이는 법인데도  황씨는 전혀 그렇지 못하였
다. 잔뜩 투정을 부리다가 제풀에 지쳐 잠이  든 악동처럼 아주 조그맣게 똬리를 
튼 몰골이 애처롭기조차 하다. 아직도 술기에 부대끼는 듯 숨결이 거칠고, 입 가
생이에는 침이 허옇게 말라붙은 채다.
  서노인은 무심결에 혀를 찼다.  늘그막에 이 무슨 투정들인가 싶던 것이다. 마
치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철부지  아이들처럼 말이다. 늙은이라고 짝짓기하
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이 저무는 시간에 혼자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 어떤 것
인가는 물론 잘 안다. 그래서 늘그막에는 효자  열보다 등 긁어주는 악처가 낫다
는 말도 있지 않던가. 나이가 들면 뼛속에서도 찬바람이 이는 법이다. 마르고 거
친 손바닥일망정 서로 쓸어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야 동병상
련일 터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처럼 막무가내로  몸을 축내고 체면을 깎아가며 
투정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탐탁하게 여겨지지 않는 서노인이었다.
  이 나이를 살아오면서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고 서
노인은 생각하였다. 이제는  훌훌 털어버려도 그만일 듯싶은  것들에까지 오히려 
더 완강하게 집착하는 심리가 있다고도 생각되었다. 비단 황씨만이 아닐 것이다. 
세상만사가 온통 불만스러운 나머지  아무때 아무나 붙잡고 시비걸기 잘하는 퇴
역대령 장시나,  걸핏하면 토라져서 사나흘씩  발길을 끊곤 하는  사법서사 출신 
임씨, 그리고 이제는 누구 하나 귀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허황된 
소리들을 끝없이 늘어놓기  좋아하는 복덕방 구사장 등이 다 그랬다.  하긴 그런 
사람들 덕분에 노인회가 그나마 활력을 잃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도 생각
되었다.
  "저 영감탱이가 무신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알아예?"
  강여사가 낮에 주방에서 엿들은 얘기를 하였다.  아까부터 꺼내고 싶어하던 화
제가 그것이었나 생각하며  서노인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강여사야말로 무슨 
꿍꿍이속인지, 늙은 왈순이답지 않게 허둥거리는 어투였다. 특히 6백짜리 지하방
이니 숟가락 냄비 운운하는 대목에서는 공연히 얼굴을 붉히기까지 하였다.
  "떠꺼머리 총각이 과부한테 훌ㄹ다캐도 그래 뜨겁지는 몬할 꺼로요? 부회장은 
장차 저 둘을 우짤랍니꺼?"
  서노인은 그제서야 빙그레 웃고 나서 대꾸하였다.
  "어쩌기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는 거지요 뭐."
  "아따, 얻어묵을 떡이나 있으마 누가 시비하노!"
  강여사가 눈을 곱게  흘겨 뜨며 나무랐다. "까딱하마  송장치게 생겼으니 그라
지, 내가 시집갈 것도 아인데 와 백죄 몸달아 할끼고, 부회장님은 귀경하는 재미
가 갠찮은 모양이구마는..."
  서노인이 고개부터 먼저 끄덕인 다음에 또 대꾸하였다.
  "구경거리고 치면야 웬만한 활동사진보다 웃질 아니오? 로맨스 그레이라 해도 
이만만 할라고 어디..."
  "하믄요. 연속극 맹글어도 좋을 꺼라카이!"
  어인 속인지 강여사도 맞장구를 쳤다.
  "어째 생각하면 저 양반이 행복한 투정을 하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하믄요. 저래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우예 불쌍타 할 끼요..."
  "저처럼 내놓고 투정하는 용기도 가상허고..."
  "하믄요. 우리 부회장님은 늘상 옳으신 말씸만 한다카이!"
  두 노인네는  마주 쳐다보며 한바탕  웃었다. 무슨 내통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마음들이 훈훈해졌다.
  황씨 손자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고 2짜린데, 학교에서 막 돌아온 참이라고 
하였다. 얼굴은  앳되어보였지만 덩치나 키는  헌헌장부티가 완연한 녀석이었다. 
할아버지를 모시러 왔다면서  그는, 조그맣게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황씨를 내
려다보며 싱글싱글 웃기부터 하였다.
  "아버지랑 같이 왔는가?"
  되레 민망스런 기분을 누기며 서노인이 물었다.
  "아뇨."
  "그럼 차는?"
  "무슨 차요?"
  "모시고 갈려면 차가 있어야지 않겠나?"
  그러자 여전히 싱글거리며 녀석은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제가 업고 가지요 뭐!"
  서노인은 더 묻지 못하였다. 왠지 모를 일이다. 그 말을 듣자 느닷없이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이던 것이다.
  황씨를 들쳐업은 녀석은 절까지  꿉벅 하고 나서 가뿐한 걸음걸이로 경로당을 
나섰다. 가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아파트의 그 많은 창들은 
거의가 환하게 불을  밝힌 채였고, 단지 안길은 귀가하는 사람과  차들로 어수선
하였다. 그런 속을  청대같이 멀쑥한 녀석이 껍질만 남은 늙은이를  가볍게 들쳐
업은 채로 후적후적 휘저어가고 있었다.
  "아따 황씨영감, 손자 하나는 기차다 마!"
  목을 늘이고 내다보던 강여사가 탄복하였다. "나  겉은 년한테도 저런 놈 하나
마 있어마 얼매나 좋겠노! 저래 한분 턱 업히봤으모 한이 없겠다 아이가..."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으나  어쩌자고 그 밑으로는 가스나마 쪼라니 셋이라고 
하였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아들과 며느리들의 심드렁한 태도라고 했다. 아직
도 팔팔한 것들이 어떻게  하나 만들어 볼 생각은 않고서, 요즘  세상에 무슨 아
들딸 구별하냐며 되레  타박할 때는 속이 훌렁 뒤집어진다고 하였다.  그렇게 푸
념하는 강여사의 말 끝자락이 눅눅해지는가 싶었다.  서노인은 허연 머리만 말없
이 주억거렸다. 그러면서, 지난 봄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자녀석이 저만큼 장성하
여 업어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를, 강여사 몰래 속으로 헤아려보고 있었다.

    가을볕 속 잠자리떼
  그 조그마한 창은 불이 꺼진 채 여전히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치형으
로 반쯤 드리워져 있는 커튼과 창유리에 오려붙인 판박이 그림 등 변한 것은 아
무것도 없었다. 그날 이후 벌써 두 달 넘게 그런 상태였다.
  내일이면 이  동네를 떠난다. 김선생  내외는 저녁식사를 마치자  마자 산책을 
나섰다. 말하자면,  이 동네 사람으로서는  마지막 산책길인  셈이었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7단지를  나선 그들은 이웃한 6단지와  5단지 사이의 시장골목을 거쳐 
중앙공원을 한바퀴  돌아올 작정이었다. 공원  벤치에서 잠시 머문다고  해도 한 
시간이면 넉넉한 코스였다.
  김선생네가 처음 이사를 온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경기도 과천의 이 아파트 
단지는 무척이나 조용하고 깨끗한 도시였다. 새벽  잠자리 속에서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하루종일  창문을 열어놓고 살아도 마루나 방바닥을 훔친  걸레가 더
럽지 않았다. 남태령 너머 저쪽 거대도시  서울의 베드타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
을 정도로 쾌적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동으로는 청계산 줄기, 서로는 관악산 줄
기를 거느린  데다 지척에 서울대공원을  둔, 말하자면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산간도시였다. 게다가 상주인구 불과  7만의 미니도시, 전신주 없고 뒷골목 없는 
1백프로 계획도시였다.
  그러나  지난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우리의 도시들이 
다 그렇듯 이곳 또한 예외없이  달갑지 않는 변모를 여러모로 드러내고 있는 것
이다. 이를테면, 단지  옆구리를 꿰뚫고 산업도로가 열리면서부터 조용하던 분위
기는 깨뜨려졌다. 새벽잠을  깨우던 새소리를 뭉개며 대형트럭들이  마구 질주하
고, 끔찍한 굉음이  심야에는 더 무섭게 잠자리를  뒤흔들곤 하였다. 안양, 평촌, 
의왕, 군포, 안산 등  배후도시들이 급속히 커지면서 엄청난 차량들이 무시로 이 
작은 도시를 가로질러 다녔다. 덕분에, 기름을 때던 중앙집중식 난방시설을 폐쇄
하고 새로, 폐열을  이용하여 지역난방체제로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게 
공기가 오염되고 말았다. 오염된 것은 비단 공기만이 아니었다. 지하수도 문제였
다. 단지 안팎 곳곳에 있는 샘터들 중 상당수가 폐쇄되고 말았다. 주민들이 수돗
물은 허드렛물로나 쓰게 할 만큼 거의 무한량의 청정생수를 공급해주던 그 샘터
들은 이제 다시는 사용할 수 없으리라고 한다.
  물론 다른 도시,  특히 서울의 그것에 견준다면 여전히 과천은  아직도 조용하
고 깨끗한 도시이기는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처음의  자긍을 잃은 지는 이미 오
래인 터였다.
  하지만 모든 사정이 다 나빠진 것만은 아니다.  단지 안의 나무들은 그새 등치
가 굵어지고 키도 훌쩍 자라서 개중의 어떤 수종들은 5층 베란다를 기웃거릴 정
도가 되었다. 등치 큰 나무들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왠지 자신의 삶
조차도 튼실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뿐더러, 무성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들이 곳
곳에 싱그러운 터널을 만들고 있어  산책은 한결 풍요하고 운치 있는 것이 되었
다. 김선생 내외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이곳을 떠나기가 서운하였다.
  두 사람은 이주단지로  가는 길을 건너 6단지로 들어섰다. 가등에  막 불이 켜
진 시간이었다. 미등만을 밝힌 승용차들이 연이어 단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홉시 저녁뉴스가 시작될  때쯤이면 주차 공간은 거의 메워질 것이다.  지난 10
년 동안의 변모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차량의 엄청난 증가였다. 김선생
네가 이사를 오던  무렵까지만 해도 아침에 베란다로  나가 밖을 내려다보면 집 
앞 주차장에는 고작  열 대 남짓한 차들이  한가롭게 서 있곤 하였다. 말하자면, 
열 세대쯤 건너 차  한 대꼴이던 것이다. 그런 것이 단지마다  차가 넘쳐나게 된 
것은 불과 대여섯  해 안쪽의 일인 듯싶다.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급속
히 늘어났던 것이다. 이제는 집집마다  차를 가진 건 물론이고, 더러 두 대씩 보
유한 세대도 없지 않다고 들었다.
  김선생이 차를  가진 것도 다분히  그런 분위기 탓이라고나  해야할 것이었다. 
한번은 식구들끼리 둘러앉아 이웃집 차 이야기를 하다가 희한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계단에 속한 열 집  중에서 차가 없는 집은 자신들을 
포함하여 단 두 집밖에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두 집들이 다 훈장댁이라는 사
실이 그것이었다. 김선생은 중학교 국어선생이었고, 다른 한 집은 초등학교 교감
선생댁이었다. 이 우연한 발견은 약간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지 않
아도 분위기에 떼밀리고 있던 처지였다. 하필이면 차  없는 두 집이 다 훈장댁이
란 말인가. 선생이란  직업이 우리 사회에서 천직이 아니라 천직시된  지도 진작
부터라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기죽어  살아야 한단 말인가 하고 식구들은 한결같
이 감상적인 기분에  빠져들었다. 말하자면 마침 울고 싶은 때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한바탕  가족회의 끝에 성급하게 결론이 내려졌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라고 말하기가 뭣하다면, 최소한의  체면유지를 위해-우리
도 부득불 차를 살  수밖에 없다는 요지였다. 결혼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씀
씀이가 헤퍼본 적이 없던 아내까지도 이 엉뚱하고 엄청난 구매에는 쉽게 찬동하
는 것을 보고 김선생은 내심 찔끔하였다. 허나 그 놀라움은 금세 슬픔이 되었다. 
아내조차도 그토록 차갖기를 열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속칭 굴다리시장 또는  도깨비시장은 6단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어 쇼핑
센터가 있는 4단지 끝까지 이어지는, 전장 백  미터 남짓의 좁다란 샛길 위에 저
절로 형성된  재래식 시장이었다. 신도시의  체모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노점거리는 원근에서 모여든 영세상인들이 백화점식 쇼핑센터나 각 단지내 상가 
사람들과의 생존을 건 싸움 끝에 억세게  살아남은 케이스였다. 질척한 비린내를 
풍기는 생선좌판서부터 인근 텃밭에서  나온 각종 푸성귀에 이르기까지 흔히 식
탁에 오르는 먹거리는 골고루 갖추어져 있어서 알뜰 주부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
었다. 김선생네 식구들이 특히 좋아하는 과일류도 주로 여기서 조달되었다.
  그러나 이 재래식  시장은 최근 들어 조금씩 활기를 잃어가는  추세였다. 농산
물을 값싸게 공급하는 농협직판장과 특정 품목을 정책적으로 덤핑판매하는 대형
판매점 체인이 생기면서, 게다가 또, 주된 고객인 주부층이 젊어지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점점 줄어든  탓이었다. 생선 한 마리,  두부 한 모를 사면서조차도 값을 
깎자고 드는 손님은  이제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게 되레 장사꾼들의 푸념이었
다. 모를 일이긴 하나, 이런 추세대로라면 언젠가는 결국 저절로 사라지고 말 시
장골목인 셈이었다. 그 대신 24시간 편의점 같은 것이 갈수록 성업을 하리라. 이
미 단지마다 하나씩 그런 가게가 생겨나고 있는 중이었다.
  주부들의 저녁 찬거리 준비가 끝날 때쯤이면  굴다리시장은 벌써 파장이다. 생
선좌판에서 흘러나온 비릿한 물과  푸성귀 장수가 버린 쓰레기들로 질척하고 어
지러운 시장골목은  가등불빛 아래  스산한 풍경이었다. 과일장수들이  드문드문 
남아 떨이를 외치고 있었다. 김선생 내외는 그  골목을 곧장 빠져 쇼핑센터 쪽으
로 나왔다.
  과천사람들이 흔히 다운타운이라고 부르는  쇼핑센터 일대는 한적하였다. 백화
점과 은행과  증권회사들은 진작에 문을  닫아걸었고, 그 대신  음식점들이 한길 
쪽으로 탁자들을 꺼내놓았다. 선선한 가을저녁이자 주말이었다. 여기저기 가족단
위로 둘러앉아 외식을  즐기고 있었다. 흡사 노천카페를 연상케 하는  이것 또한 
이 도시만의 풍경일  법하다고 김선생은 생각하였다. 어른들이  돼지갈비에 소주
잔을 기울일 동안 아이들은 또 이웃한 피자 가게며 아이스크림 가게로 달려가곤 
하였다.
  한 대는 김선생 일가도 곧잘 그들 속에  끼여들곤 했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주
말의 외식처럼 즐거운 일도 흔치 않는 법이다.  그런 때면 아내조차도 마음이 푼
푼해져서 가계부 걱정 따위는 저만치 덮어  두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
가 주말의 그 작은 축제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 재미
가 이제는  시들해졌기 때문도 아니다. 굳이  캐자면, 아마도 아이들  탓일 게다. 
더 이상  그런 일로 곁에 잡아두기에는  어려울 만큼 두 애들이  커버린 것이다. 
녀석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가족이 함께하는 그  오붓한 시간을 좀처럼 
얻어내기가 힘들어졌다.  생각하면 쓸쓸한 노릇이다. 더러  두 내외만 그들 속에 
끼여 앉아보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쓸쓸한  일이긴 매한가지였다. 자식도 품안에 
있을 때가  더 사랑스러운 법이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여  제멋대로 바깥세상을 
쏘다니기 전에 더 자주 끼고 다니지 못한 것만 못내 아쉬워지는 것이었다.
  김선생 내외는 공원  중간쯤에서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충혼탑을  지나고 시립
도서관 옆을 돌아 7단지로 되돌아왔다. 그새 귀가한 차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단지 안길이 형형색색의 승용차들로 가득하다. 앞 뒤  없이 참 대단하다 싶은 느
낌이다. 뭐가 왜 대단하다는 건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김선생은 
매번 그런 느낌에  눌리고는 하는 것이었다. 이날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줄줄
이 늘어서 있는 차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무심히 발걸음을 옮겨놓다 말고 
어느 지점에선가 문득 멈추어 섰다. 715동 201호, 바로 그 조그마한 창앞이었다.
  그는 발길을 멈춘 채 그 2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아치형 커튼이 앙증스럽게 
드리워진 작은  창이 거기 있었다. 그  아이들의 방이었다. 해님이와 달님이라고 
고운 이름들을 가진 오누이였다. 누나인 해님이는 다섯 살, 동생 달님이는 세 살
이라고 하였다. 그 애들은 곧잘 창 밖으로  상반신을 내민 채 길가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걸기를  좋아하여 어른들을  질급하게 만들곤 하던  개구쟁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어둠 속에  여전히 굳게 닫혀
진 채, 오누이가 서툴게 오려붙인 판박이 그림  해님과 달님만 변함없이 웃는 얼
굴을 하고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
  "엊그제 장롱이랑 실어갔어요."
  그의 아내가 속삭이듯이 말하였다.
  "이사를 간 건가?"
  그가 물었다.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장롱하고 소파만 달랑 실어가던데요?"
  "다른 세간은 다 놔두고?"
  "그럼요. 중고가구상에서 온 사람들 같았어요."
  더 이상 대꾸가 없자 그의 아내가 덧붙였다.
  "집은 복덕방에 진작 내놓은 모양인데 소문이 돌아선지 팔리지 않았대요. 하긴 
요즈막에는 도통 거래도 없기는 하지만..."
  그리고는 그의 등을 가만히 떠밀었다.
  "날씨가 꽤나 차졌어요. 추석이 이제 꼭 보름이 남았지요?"
  단지 안을 들쑤시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지난 세월이 결코 무심하지 않
음을 실감한다. 예컨대 이런 경우가 그렇다. 김선생네가 처음 이사를 올 무렵 이
웃의 한 젊은 부인이  만삭의 몸이었다. 유독 큰 배를 앞세운  채 일요일이면 열
심히 교회를  오가곤 하였다. 그 얼마  후 몸을 풀었는데 뜻밖에도  예쁜 쌍둥이 
딸이었다. 그로부터 한동안  그 젊은 부부가 주말마다 강보에 싸인  아기를 하나
씩 안고 교회를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어느새 
그 아기들은 걸음마를  하는가 싶더니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골목 아이들 속에 
섞여 있었다. 지난해던가,  쌍둥이 공주님은 입학을 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아주 
작고 깜찍한 소녀가 되어 학교길을 나란히 오가곤 한다.
  또, 같은 무렵에 아버지를 잃은 형제가 있었다.  그때 형의 나이가 일곱 살, 동
생은 그보다 두 살인가 아래였다. 얼마나 세상 모르는 철부지들이었던지, 아버지
의 장례식날 이웃이 빌려준 자전거를 서로  타겠다고 다투던 아이들이었다. 보다 
못한 다른 이웃이  자기애 것도 내주자 두 형제는  그날 해 떨어지는 것도 잊은 
채 하루종일  단지 안을 신명나게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  형제들조차도 이제는 
여드름투성이에다 수염자리가 꺼뭇한 사내들로 성장하였다.
  남의 아이들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다. 김선생의 두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를 올 때 큰녀석이 중2, 그 아래  딸애가 초등학교 5학년짜리였는데 지금은 둘 
다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에 비하면 어른들의  변모란 차라
리 미미한 것이었다. 지난 10년 세월조차도 이렇달  만한 흔적을 남기고 있지 못
한 것이다. 하루가 무섭게 변화해가는 세상에서  자신들만 옛모습을 고수하고 있
다는 것도  쓸쓸한 노릇이라고, 그는 종종  그런 생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글세, 
그런 것도 소외감의 일종일는지... 골목 아이들에  대한 유별난 관심도 어쩌면 그
런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들 속에서 그  오누이를 처음 발견한 때를  김선생은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주말 오후의 귀가길에서였다. 단지 안 놀이터를 시끌짝하게 분탕질
하고 있는 한 떼거리의 아이들  속에서 먼저 눈에 띈 것은 저 작고 깜찍한 쌍둥
이 자매였다. 이런 때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게 그의 성격이어서  이날도 그 앞
에서 잠시  발길을 세우고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러자 쌍둥이 자매  중 하나가 
갑자기 그네에 올라앉아 있는 조그만 사내애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얘 이름이요오, 달림이래요오."
  꼬리를 유독  길게 잡아빼는 귀여운  말투였다. 그러자 또  하나가 경쟁이라도 
하듯 냉큼 그 말을 흉내냈다.
  "그리구 얘 이름은요오, 해님이래요오."
  그네를 밀고 있는,  쌍갈래머리를 한 작은 계집애의 등을 밀며  킥킥거리고 웃
었다. 그러고 보니 두 아이의 얼굴이 낯설었다.
  "해님이 달님이라, 이름들이 너무 이쁘구나."
  그는 두 애의 머리를 한차례씩 쓸어주며 물었다.
  "너희들은 어디 사는 아이들이니?"
  쌍둥이 자매가 동시에 대꾸하고 나섰다.
  "715동 201호에 산대요."
  "어제 이사왔대요. 해님이가 그랬어요."
  해님이가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두 가닥으로 야무지게  잡아메어진 머리
칼이 인형의 그것처럼 빛나는 갈색이었다. 그네  위에 올라앉은 달님이는 엄지손
가락을 뿌리까지 입 안에 틀어넣은 채 크고 가만 눈을 들어 그를 말끄러미 쳐다
보기만 하였다.  배냇털이 아직도 보송보송한  귓불을 한 번씩  꼬집어주고 싶을 
만큼 앙증스런 얼굴들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오누이의  아버지는 젊은 개업의라고  하였다. 하지만 
얼굴을 대할 기회는 없었다. 어머니 쪽도 마찬가지로, 지난 봄 이사를 왔으니 벌
써 계절이 세 번째 바뀌고 있었지만 도시  그리고 아파트촌의, 삶의 풍속이 대체
로 그렇듯이 단  한번도 오누이의 부모들과는 마주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주
말이나 휴일같은 때 더러 산책길에서  마주칠 법도 하건만 어쩐 일인지 두 오누
이의 모습만 종종 눈에 띄곤 했을 뿐이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이 아이들의 얼굴이라고 했던가. 김선생은 단지  안 어
디서건 그리고 어느 때건 그  오누이의 모습을 발견하기만 하면 그 앞에서 한참
씩 걸음을 멈추곤  하였다. 그러면 어둡고 외로웠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문득문
득 되돌아보이는 것이었다. 해방둥이의 어린 시절이  대체로 그랬듯이 그것은 매
양 가슴이 저리는  회상이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와 그 후유증 속에서  얼마나 가
혹하게 휘둘렀던 성장기였던가. 그 안에는 불가해한 공포가 있었고, 가까운 사람
들의 죽음이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굶주림이 있었던 것이다. 세
상은 온통 악과 적의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고, 그 속에서의 삶이란 온통 고통
과 결핍의 연속처럼 느껴졌었다. 이제 그때를 되돌아보며, 어둡고 외로웠던 시절
이라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음은 오직 인고의 긴 세월  덕분이리라. 그렇다고는 
해도 매양 가슴 저리는 감회를 떨쳐버릴 수 없음도 또한 사실이었다. 아마도, 결
코 지울 수 없는 상처  같은 것이 어딘가 깊은 곳에 남아 있는 탓이리라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을 보라.  얼마나 티없이 맑고 아름다운 모
습들인가. 그들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저 불행했던 시절이 비로소 
보상받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가슴이 따뜻하게  차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두어 달쯤 전  어느 늦은 귀가날이었다. 텔레비전의 마지막 뉴스도  끝난 시간
이어서 아파트 단지는 어둠 속에 깊이 잠겨  있었다. 그맘때면 늘 그랬듯이 단지 
안길은 양편으로 줄줄이  늘어선 차들로 가득할 뿐 인적은 끊어져  있었다. 적당
히 술기에 젖었던  터라 김선생은, 단지 앞  편의점에서 사 든, 아이스크림이 든 
비닐봉지를 흔들면서, 또 입 속에 고인  유행가 가락까지 흥얼거리면서 느적느적 
여유 있는 걸음을  옮겨놓던 중이었다. 김선생네의 아파트 건물은  7단지 안에서
도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다. 그는  무심히 길을 꺾어돌다 말고  갑자기 발길을 
세웠다. 뜻밖의 광경과 맞닥뜨린 것이었다.
 715동 앞이었다. 자정을 넘어선 그 시간에  이웃사람들이 길로 쏟아져나와 있었
다. 게다가 경찰차도 두 대나,  길을 막고 선 채 경계등을 분주하게 깜빡이고 있
었다. 아파트 경비원들과 방범대원들의  모습도 보였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
하였다. 단번에 가슴이  싸늘해진 김선생은 마저 뱉어내지 못한 유행가  한 소절
을 입에 문 채로 천천히  다가갔다. 한 젊은 사내가, 넋이 온전히 빠져 달아나버
린 그런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금세  주저앉을 듯 몹시 허청거리는 걸
음걸이였다. 왠지 모른다.  김선생은, 그때가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사내
가 직감적으로, 저 오누이의 아버지가 분명하다고 단정하였다. 정장을 한 경찰관
이 둘,  사내를 바싹 따르고 있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그는 
또, 해님이와 달님이가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울음소리는 공포감에 
잔뜩 짓눌린 채 금세 멎었다. 침묵 속에  얼어붙어 있던 이웃들이 그쪽을 쳐다보
며 뭐라고 두런댔다.
  젊은 의사를 태운  경찰차가 떠나고, 무리를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재빨리 흩
어졌다. 상황이 끝난 것이었다. 문제의 201호는 불이 켜진 채 무섭도록 조용하였
다.
  김선생이 사건의  내용을 들은 것은  아내로부터였다. 그 젊은  의사의 부인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살이었다. 대충  일려진 대로라면, 사내가 아이들과 
함께 응접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동안 그녀가 안방문을 걸어잠근 채 천장
의 등에  목을 매달았다고 하였다.  올가미로 사용된 것은  남편의 넥타이더라고 
했다. 하지만 타살의 여지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경찰이 남자를 일단 연행
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 사건의 충격과 의문은 이웃들의 마음을  한차례 휘저어놓았다. 일상의 평화
를 느닷없이  뒤집어놓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을 매단 
여자는 친정부모 앞으로 단 한 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자신의 불효에 대해 용서
를 빈다는 내용이  전부였다고 한다. 경찰의 수사와 사체부검 결과도  자살로 판
정되었다. 그렇다면  의사인 남편과 귀여운  오누이를 팽개친 채  그녀로 하여금 
어느날 갑자기 스스로  목을 매달게 한 덫은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해 김선생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여인은 외견상 건강한 모습과는 달
리 진작부터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었다거나, 또는 말못할 과거사를  지니고 있
어 늘 괴로워했다거니 하는  식으로 이웃들 간에는 이런저런 얘기들이 나돌고는 
있지만 그러나 정작  사실로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노라는 게 아내의 전언이었
다.
  그러고 보면 그간에도 여러  차례나 그와 유사한 소동들이 있었음을 김선생은 
기억해냈다. 그랬다. 일상의  평화를 느닷없이 뒤집어놓는 죽음들이 이 도시에는 
종종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겨울이던가, 이웃한 8단지의 고층아파트에서는 이제 
겨우 중3자리인 한 소녀가 투신자살하는 소동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서너 달 
전에는 2단지  쪽에서 일가족 동반자살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또 두 해  전에는 김선생네의 바로 위층  사내가 안방에서 음독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비단 그것만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밖에도 비슷한 죽음들이 자주 있었
다고 회상되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그러나 인구 7만의  도시다. 무시로 태어나는 생명이 있듯 
죽음인들 왜 없으랴만,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런  식의 죽음들은 너무나 돌발적이
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죽음만이 갖는 저  경건성 대신 거칠고 삭막한 감
정과 의식만 독가스처럼 퍼뜨려놓곤 했던 것이다.  필경에는 우리의 삶이 그처럼 
가볍고 비천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이웃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한동안씩 허둥거리게  마련이었다. 말하자면, 그때마다  혹심한 정서적 황폐감에 
시달리곤 했던 것이다.  갖가지 근거 없는 소문들이 무성해지는 것도  그런 때이
고, 사람들의 말투나 눈빛조차 어딘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그런 때였다. 저 일
상의 평화가 온통 의심스러워지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715동 201호는 그날부터 문이 닫아걸린 채였다. 밤에도 불이 켜지지 
않았다. 그 젊은 의사는 아내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그 즉시 아이들을 데리고 남
태령 너머 서울  어딘가에 있다는 본가로 거처를 옮겨버린 것이다.  이웃들은 두 
번 다시 그 집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대신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어김
없이 그날 밤의 소동을 기억해냈고, 그러면 고요하게  닫혀 있는 창문을 잠시 올
려다보게 되었고, 그러면 도 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었다.
  "흉가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아지곤 해요."
  김선생의 등을 은근히  떼밀며 아내가 한 말이었다. 하긴 그렇기도  하다고 생
각하며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복덕방에 내놓은 건 확실한가?"
  "그렇다나 봐요. 하루라도 빨리 사람이 들어야지, 저 집 때문에 단지 분위기가 
영 말이 아녜요. 무겁고 칙칙한 게... 영 을씨년스럽다구요."
  "해님이네가 다시 들어와 살진 않겠지?"
  "그럼요. 아, 그런 식으로 사람이 죽어나갔는데 얻다 맘붙이고 살아요?  오만정
이 다 떨어졌을 텐데."
  하긴 그러리라고, 김선생은 또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전히 발길을 떼놓지 못하
고 있는 그를 잡아끌며 아내가 덧붙여 말하였다.
  "처음엔 그렇게 좋아했대요, 이 동네로 이사온 걸... 너무너무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라고, 특히 그 여자가 좋아하더래요.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그렇게
죽어버릴 사람이..."
  혀 차는 소리가 말 끝에 묻어나왔다. 연민보다는 비난이 더 짙게 느껴졌다.
  김선생네는 다음날 과천을 떠났다. 일요일이어서 현과  앞이고 길이고 간에 단
지 안은 차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 사이에 간신히 틈을 비집고 2.5톤 트럭 
두 대와 사다리차를 동원하여 이삿짐을 꺼내 싣고 비좁은 길을 빠져나오는 데에 
자그마치 한나절이 걸렸다.  10년쯤 전 이사를 올 때와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었
다. 거친 인부들이 혹 언짢은 시비라도 만들까 봐 내내 마음을 졸여야만 하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날씨였다. 추석을 보름 앞둔  하늘을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서 전형적인 가을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이삿짐  뒤를 조심스레 따르던 김선
생은 예의 715동 앞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밀어 201호를 올
려다보았다. 길 쪽으로 난 그 작은 창이 저만치 보였다. 아치형의 커튼이 앙증스
럽게 드리워진 그 조그마한 창은  여전히 닫혀진 채 가을햇살 아래 눈부시게 반
짝이고 있었다.  김선생은 눈을 썸뻑거렸다. 해님과  달님이 판박이 그림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 뭐 하구 있수?"
  아내가 채근하였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길을 메우고  촘촘히 늘어선 
차들 위로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내리고, 한  무리의 잠자리떼가 가을볕 속을 
어지럽게 날아올랐다. 그리고 앞쪽에서 자전거를 탄  아이들 한 패가 시끌짝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눈가에 주름을 잔뜩 잡은 채 천천히 단지를 빠져나왔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사내녀석 하나가 슬그머니  들어섰다. 낯익은 얼굴이 아니다. 아마도 교양과목
을 수강하는 타과생이거니 어림하며  나교수는 웬 녀석이냐는 투의 눈길을 보냈
다.
  "...?"
  그러나 녀석은 대꾸가 없었다. 나교수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입을 꾸욱 
다문 채 연구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흡사 동네  구멍가게에라도 들어
선 듯한 태도였다.
  요 녀석 봐라?
  나교수는 두 눈을 허옇게 치떴다. 어딘가 좀  맹랑한 데가 있다고 느껴진 탓이
다. 하지만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요즘 애들 중에는  더러, 객쩍은 짓거리
를 불쑥불쑥 해 보이는 녀석들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녀석은 덩치가  보통 이상이었다. 특히 상체가  우람한데다 목이 굵고 짧았다. 
그러나, 옆댕이를 허옇게  치올려 깎은 머리통은 상대 적으로 작은  편이어서 몹
시 아둔하고 억센 인상을 주었다.
  "뭐야, 자넨?"
  나교사가 물었다. 으레 그랬듯이 꽤나 퉁명스런 어투다.
  "왜 왔어?"
  "..."
  "뭣하러 왔냐구?"
  "..."
  그러나 녀석은 여전히  대꾸가 없다. 단지 나교수의 얼굴만 무심한  눈길로 돌
아다보았을 따름이다. 텅 빈 눈이었다. 그리고, 몹시 지쳐 있는 눈이기도 하였다.
  그는 나교수가 앉아  있는 책상 옆을 지나 맞은편 창가로  다가갔다. 흐느적거
리는 걸음걸이다. 형광빛이  번들거리는 검은 잠바 등판에  수레바퀴만한 마크가 
찍혀 있다. 언뜻 보아 미국 어느 대학의 것이다.
  창 밖의 햇빛이 맑다.  늦가을 햇살이 한 뼘쯤 기어든 창가에  낡은 소파가 마
주보고 놓여 있다. 그중  한쪽을 차지하고 그는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
고는 탁자 위로 두 발을  올려놓았다. 청바지 차림에, 요즘 애들이 흔히 신고 다
니는, 검고 투박한 운동화다. 어디를 얼마나 헤매고  다닌 것인지, 그 두 짝의 운
동화가 온통 흙투성이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느닷없이 당하는 봉변인 것만은  분명한데, 이 참에
서 발끈 화를 터뜨려야 할지 아니면 그냥  웃고 넘어가야 할지, 나교수로서는 얼
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요즘 애들의 버릇없음이라고  해도 이건 확실히 도가 넘
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자 슬며시 부아가 끓어올랐다.
  "이봐! 자네 말이야, 도대체 뭐 하는 작잔가?"
  담배를 찾아 무는 나교수의 손끝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말이야, 지
금 도대체 뭐 하자는 수작인가?"
  자제에도 불구하고 언성이 높아졌다. 녀석은 흠칫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갑자
기 엉뚱한 질문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갈피를 못잡는 표정이기도  하였다. 그는 
뒤로 젖혔던 머리를 엉거주춤 쳐들고서 뜨악한  얼굴로 나교수 쪽을 바라보았다. 
공허한 눈빛이었다.
  "나 말입니까?"
  비로소 입을 열었다. 꽉 잠긴 음성이다.
  "그럼, 자네말고 누가 또 있나?"
  나교수의 냉랭한 반문이다. 더 혼란스러운 얼굴로  녀석은 등뒤를 힐끔 돌아보
기까지 하였다. 벽을 메운 책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자 그의 눈길은 다시 나교수
에로 향하였다. 역시  텅 빈 눈이었다. 거기, 피곤과 졸음기  같은 것이 는적는적 
묻어났다.
  "무슨 과인가?"
  "무슨 꽈요?"
  "우리 학생 아닌가?"
  "우리 학생이오?"
  나교수는 마침내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이거 뭐 하는 수작이야! 자네 말이
야, 지금 나하고 농담하자는 거야 뭐야?"
  "농담요?"
  그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닌데요... 전혀..."
  "그럼 뭐야?"
  나교수가 뻑 소리쳤다. "뭣 땜에 나를 찾아왔는지, 용건을 말해얄 거 아냐?"
 "용건요?"
  그가 되묻고 나서 어눌지게  답변하였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들어왔을  뿐
입니다. 좀 피곤하고, 그래서..."
  "그냥 들어와? 이 친구, 사람 웃기구 있네!"
  나교수가 다그쳤다. "이거  보라구! 자네 말이야, 좀도둑 아냐?  그렇지 않고서
야 하릴없이 왜 남의 방을 드나드나?"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몹시  짜증스럽다는 투로, 머리를 다시 뒤로 벌렁 젖힌 
채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더 이상 성가시게 하지 말라는 태도임이 분명하였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두 다리를 길게 내뻗고 아주 축 늘어져버렸다.
  나교수는 발끈하여 일어섰다. 그러나 금방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피가 머리꼭
지로 활 몰리면서 눈앞이 노래진 때문이었다.  혈압강하제를 복용하기 시작한 게 
지난 학기초부터의  일이다. 이러다간 기어이 쓰러지는  꼴을 당하지 아마, 하는 
위기의식이 설핏 머리를 스쳤다. 나교수는 입을  다문 채 숨을 골랐다. 그러면서, 
끓어오르는 화증을 꾹꾹 눌렀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울 때까지  나교수는 곤혹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코고는 소리를 들었다. 맹랑한  녀석이 그새 잠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녀석은 흡사  부려놓은 짐짝처럼 퍼질러앉은  채로 숫제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반쯤 열린 입술이  미련스럽게 두터웠다. 그러고 본즉 
상체 못지않게 살이 띵띵 오른 얼굴이다. 하지만 조금도 행복해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구정물처럼 탈한 어둠이 그 얼굴을 온통 뒤발질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개떡 같은 일이 있나!
  환갑이 머지않은, 나교수의 풀기 없는 얼굴이 그만 씁쓸해졌다. 무참한 기분이
다. 담배 한  대를 꺼내 문다. 손끝이 스스로도 민망스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다. 
엎어두었던 강의노트를 펼쳐 든다. 하지만 단 한 줄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 그렇지! 나교수는 돋보기를  낀다. 그래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다. 머릿속처럼 시야가  온통 아득한 가운데 명료한 것이라곤 오직  녀석의 코
고는 소리뿐이다. 그랬다.  그것은 잠에 깊이 중독된, 커다란  짐승을 연상시키는 
소리였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연구실로 되돌아왔을 때도 녀석은 여전히 같은 
상태였다. 탁한 잠의  수렁 속으로 더 깊이  침몰해 있었다. 녀석은 아마도 한달 
또는 그 이상으로 잠을 못 잔 것  같았다. 그랬다면 그 사정은 무엇일까? 하필이
면 내 연구실을 잠자리고  선택한 까닭은 또 무엇일까? 난감한 심정으로 나교수
는 그런 부질없는 생각들을 하며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내처 버려둘 것인지 아
니면 두들겨 깨워서 내쫓아버릴 것인지가 역시 가늠되지 않았다.
  식당 밥은 늘 그랬듯이  맛이 없었다. 성의도 솜씨도, 게다가 선택의 여지조차
도 없는 그  식사는 나교수를 매번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두
시 땡 치기가 무섭게 달려가  줄을 서는 까닭인즉 식후에 탐할 즐거움 때문이었
다. 햇볕 바름 창가에서 잠시 빠져들 수  있는 낮잠이 그것이었다. 2,30분이면 족
하다.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듯 잠속으로 혼곤히 가라앉았다가  다시 깨어날 
때면 세상이 한결  맑고 환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교수에게 그것은  일과중 거
의 유일한 낙이었으므로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참으로  엉뚱한 녀석이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서  늘어지게 잠
들어 있지 않는가!
  나교수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녀석을 마주보고 앉았다.
  햇살이 오전보다 한결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래설까, 잠든 녀석의 낯짝이 
박제된 짐승의  그것처럼 건조하게 느껴졌다.  짙은 눈썹 아래  두텁게 쌍꺼풀진 
눈두덩이 수술자국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벌어진 입 속이  지저분하게 들여다보
였다. 하나도  온전치 못한 이빨들이  그의 무절제한 성장과정과  이후의 방종한 
삶을 어림하게 하였다.
  갑자기 그가 심하게  헐떡거리기 시작하였다. 심장의 중심부에  있는 수레바퀴 
중 몇 개가 톱날을  벗어나 제멋대로 겉도는 것 같았다. 여전히  잠에 짓눌린 채
로 그는 고통스럽게 사지를 뒤틀며 거친 숨결을 한참 토해내더니 비명인지 욕설
인지 분명치 않은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어린애처럼 훌쩍훌쩍 우는 시늉을 
하였고, 이어 몸서리치게 이빨  가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도 녀석은 깨어나지 않
았다. 죽은 듯 한동안 씩 가라앉아 있다가는  다시 비슷한 짓을 되풀이하는 것이
었다.
  찬물을 뒤집어씌워서라도 녀석을  냉큼 깨워놓고 싶은 욕지기를,  나교수는 지
그시 참아냈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언젠가 과천대공원에서 본 
오랑우탄이 그것이다. 암수  두 마리의 그 유인원은 아프리카관의 한  철책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모르지만, 그 두마리 중 유독 덩
치가 큰 쪽이 몹시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이빨을 허옇게 드러내고 요란한 괴성
을 내지르면서, 마치  프로레슬러처럼, 털북숭이의 그 우람한 몸뚱이를 차단벽에
다 텅텅  부딪치곤 하였다. 그 흉포한  야성이 순식간에 구경꾼들을 불러모았다. 
그러나 나교수는 슬그머니  그곳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공포
감이 심장을 써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교수는 그날 이후에도 몇 차례 더 그곳을  찾았다. 하지만 다시는 그런 광경
을 볼 수 없었다. 그 두 마리의 오랑우탄은  매번 얌전히 우리 속에 웅크리고 앉
아 있었다. 그  특유의, 아주 우울한 낯짝을 하고서 말이다.  커다란 넝마뭉치 같
은 몸뚱어리 속에 저 엄청난 흉포성이 감추어져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
을 지경이었다. 구경꾼들이  더러 녀석들을 충돌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만사가 도통 시들하다는 듯이 아주  어둡고 우울한 
눈길만 멍청하게 보내올 따름이었다.
  어쩌면 이 맹랑한 인간 속에도 그 흉포한 짐승이 한 마리 들어앉아 있는 건지
도 모른다고, 나교수는 생각하였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잔뜩 
화가 난 짐승이 지금 그의  잠속을 뛰쳐 나오려고 맹렬히 으르렁대고 있는 것처
럼 느껴졌다.  그로 하여금 갑자기 된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게 하고, 고통으로 
사지를 꼬게 만들며,  속 깊은 울음을 토하게  하고, 또 끔찍스럽게 이빨을 갈아 
붙이게 만드는 식으로 말이다.
  그의 잠은 이미 안식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의식을 잃은 채 당하
는 가혹한 고문처럼 느껴졌다.
  "이봐요, 이봐!"
  나교수는 그의 팔을 잡아  흔들며 소리쳤다. "그만 깨어나라구! 여기가 여관방
은 아니잖나 말이야. 안 그래?"
  두 어깨를 잡아쥐고  한참을 거칠게 흔들어대자 녀석의  두 눈이 비로소 반쯤 
열렸다. 초점이 풀어진,  탁하게 충혈된 눈이었다. 거의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
는, 텅 빈 짐승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나교수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잠이 깼으면 냉큼 일어나라구, 이 한심한 친구야!"
  나교수는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생각보다 유순하게 그가 일어섰다. 관절들이 
죄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것처럼 둔중한  움직임이었다. 그나마 동작은 거기서 
굳어버렸다.
  "자리를 비워달라는 얘기야, 내 말은!"
  나교수가 그를 옆으로 밀어냈다.  넋이 빠진 탓일까, 그 커다란 덩치가 맥없이 
밀려났다.
  "이제부터는 내가 잠을 좀 자야겠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며 나교수는 그를  쳐다보고 말하였다. "자넨 그만 가
보라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듯싶으니까 말이야. 그렇지 않나?"
  장승처럼 우뚝 서서  나교수를 내려다볼 뿐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별다른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더 이상  상대하지 말기로 작정하고 나서 나교
수는 눈을  감아버렸다. 때를 놓친  탓에 눈알이 뻑뻑하고  머릿속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두면  그가 슬그머니 사라져주리라고 기대하였다. 녀석의 머
릿속에 들어앉아  있는 기계는 어차피 해독불능이고  예측불능이어서 그 이상의 
기대란 도시 부질없는 짓이기도 하였다.
  보다 절박한  문제는 잠을 자는  일이었다. 오랜 습관에도  불구하고 이날만은 
나교수로서도 잠에 드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당연한 노릇이다. 바로 코앞에다 녀
석을 세워두고서 어찌 쉬  잠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한참을  장승처럼 서 있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방안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여전히  잠에 취한 
듯 아둔한 걸음걸이였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외에는 조용하였다. 울부짖지도 이
빨을 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교수는  흡사 오랑우탄의 우리 안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다! 우리 밖으로 뛰쳐나온 그 짐승이 우울
한 낯짝을 하고 연구실로 기어든 기분이기도 하였다.
  설핏 잠에 빠졌던가 보다. 우리 안의, 우리 밖의 수많은 오랑우탄들 속에서 헤
매다가 나교수는 문득 눈을 떴다. 마주치는 시선이  있었다. 녀석의 것이다! 그는 
나교수의 책상을 차지하고 천연덕스럽게  버티고 앉은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
다. 아마도 꽤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아주 거칠고 메마른  눈빛이었다. 나교수는 왠지 쇠꼬챙이에 찔린 듯 뜨끔
한 통증이 가슴에 와 박힘을 느꼈다.
  "자네 게서 뭐 하는 건가?"
  벌떡 일어서며 나교수가  물었다. 순간 그의 눈빛이  꺼졌다. 그는 다시 텅 빈 
초점 없는 시선을 느릿느릿 거두어들였다. 그러고는  책상 위를 멀거니 내려다보
았다.
  "이런 빌어먹을!"
  나교수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뭐 하는 짓거리야 이게?"
  그가 쥐고 있던 빨간 사인펜을 나교수가  거칠게 낚아챘다. 그러나 강의노트는 
이미 붉은  낙서로 어지러웠다. 그것만이 아니다.  책상 위에는 노트에서 뜯어낸 
낱장들이 구겨진 채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훼손이었다.
  나교수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말았다. 녀석의  얼굴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그러고는 전신을 후들후들 떨면서 소리쳤다.
  "나가! 나가, 임마! 당장 꺼지지 못해?"
  녀석은 얻어맞은 뺨을  쓸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
다. 두터운 입술에  오히려 웃음기 같은 것을  잠시 내비쳤다. 그는 다시 창가의 
그 자리로 가서 앉았다.
  "유서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탁한 목소리로, 그러나  태연스럽게 그가 말하였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되더
라구요."
  그는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이고 나서  씨익 웃
기까지 하였다.
  "난 그래요. 늘 그랬단 말입니다. 읽고  쓰고... 그런 것과는 영 맞지 않는단 말
입니다... 참 한심한 얘기 아닙니까?"
  나교수는 대거리할 기분이 아니었다. 송수화기를 집어  들며 녀석을 향해 선언
하였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사람을 부르겠어. 어쩔 테야?"
  그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그러나 
서서히 그 아둔한 표정이 지워지면서 전혀 다른 감정의 동요가 드러나기 시작하
였다. 띵띵하게 살오른 뺨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나교수 앞으로 다가오더니 송수화기를  앗아 제자리에
다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창가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유서를 쓰려니가 정작 쓸 말도 없더라구요. 그것두 참 웃기는 거 아닙니까?"
  나교수는 다시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정말 사람을 부를 작정이었다. 하지만 
어디로 도움을 청할 것인가가 얼른 짚이지 않았다. 학생과?
  막 숫자판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털북숭이의 투박한 손이  그것을 사정없이 
낚아채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화기가 박살이 났다.
  "신고하면 죽일 거야! 누구든 죽여버릴 거란 말이야!"
  주먹으로 계속 전화기를 내리치며 그가 소리질렀다. "나두, 안다구, 알아! 그러
니까 날 좀 내버려두란 말이오! 제발  그냥 좀 놔두란 말이오! 그러면 알아서 할 
거라구!"
  털북숭이의 주먹이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눈빛이 광기를 띄고 번들거렸다. 
그는 돌아서더니 그  주먹으로 벽을 쳤다. 책장 없이 쌓아두었던  책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것들 중 몇 권을 집어 팽개쳤다. 그러고도 미진한 듯 바닥으로 쏟아진 
책들을 운동홧발로 마구 짓이겨댔다.  그런 다음, 창가의 그 자리에다 우람한 몸
을 내던지더니 상처 입은 짐승처럼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고통스럽게 울기 시
작하였다.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교수는 온전히 넋이 빠진 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전혀 대응할 여유가 없었다. 스무 해가 넘는 훈장 이력에도 불구하고 도
무지 속수무책이었다. 너무나 돌발적이고 또 너무나 기이한 행태였다. 한 아둔한 
인간의 파탄을 목격하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아니,  우리 안의 한 마리 짐승이 
사납게 울부짖는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자  철저한 무력감과 알수 없는 두
려움이 번갈아 가슴을 미어지게 하였다. 망연자실한  채 나교수는 눈을 감아버렸
다. 머리꼭지가 맹렬히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오후 강의를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나교수는, 혈압강하제를 삼키고 들어갔음
에도 불구하고 시간중 내내 머리가 휘둘렸다.  게다가 강의노트는 심하게 훼손되
어 있었고, 가슴은 예의 충격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말하자면, 일찍
이 경험해보지 못한 최악의 상태가 아닐 수  없었다. 나교수의 강의는 시종 횡설
수설이었고, 학생들은 드러내놓고 잡담을 벌였다.
  그랬거나 말거나!  강의시간 내내 나교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문제의 
인물이었다. 조교가 연구실 문을 두들길 때까지도 녀석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정신을 챙기고 본즉 5교시가 시작되고도 20분 가까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알았어. 곧 간다고 전해."
  나교수는 문전에서 조교를 황망히 돌려세운 다음,  난감한 심정으로 녀석을 돌
아보았다. 그제서야 그는 징징거리던 울음을 그쳤다. 나교수를 쳐다보는 눈이 큰 
짐승의 그것처럼 순하게  느껴졌다. 눈물이 탁함을 걸러냈는지도  모른다고 나교
수는 생각하였다. 모호한  슬픔, 갈등, 그리고 약간의 불안기 같은  것을 그 눈은 
담고 있었다.  나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낙서투성이의 강의노트를 챙겨 
들고 조용히 연구실을 나섰을 따름이었다.
  그가 지금도 내 방에 남아 있을까?
  나교수로서는 그것이 최대  관심사였다. 그밖의 문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녀석
이 연구실을 온통 분탕질한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았다. 좀도둑처럼 무엇을 집어
간다고 한들 개의치 않았다. 굳이 챙겨야 할  만큼 소중한 것이 있다고도 생각되
지 않았다. 문제는  그 별종 같은 녀석이었다.  그를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안에서 점점 강하게 차오름을 나교수는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연구실을 비어  있었다. 서둘러 강의를 끝내고  종종걸음으로 되돌아온 
나교수는 그만 맥이 탁  풀렸다. 창가의 비어 있는 그 자리를  보자 그렇게 허망
한 기분일 수가 없었다.  방안은 어질러진 그대로일 뿐, 어디에서도 녀석의 모습
을 찾아낼 수  없었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쩌면 우리를  뛰쳐나왔던 그 짐승
은 스스로 제 우리를 되찾아갔는지도 모른다고 나교수는 생각하였다.
  해가 떨어지기까지  오랜 시간 나교수는  망연자실한 채 앉아  있었다. 간신히 
가방을 챙겨 들고 연구실을  나서자 돌연 가슴이 미어지게 뜨거워지면서 뒷덜미
가 뻣뻣해졌다. 상처 입은 짐승이 따로  없었다. 자신이야말로 오늘, 다시는 치유
할 길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물풍선 던지기
  한 무리의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인 채 입심 좋게 떠벌리고 있는 사내는 장씨가 
분명하였다. 우스꽝스러운 어릿광대  분장으로 진짜 얼굴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
러나, 나는 한눈에 그가 자칭 <인간과녁> 장씨임을 족히 알아볼 수 있었다.
  "... 벤데기  뭣만도 못한 이녀러 세상,  으째 속만 끓이고 살게라?  ...그라제잉, 
기분을 활 풀어뻔져야 건강에  좋은 벱이여. 아믄! 근디 말이시, 아  그란다고 무
담시 사람 팰 거여? 아무거나 깨부시기를 할  거여? 그라믄 안되제라. 애믄 사람 
상하고, 속아지만  베릿뿌는 거여. 그라믄? 그라믄  으째야 쓸게라? 그렁게 여그 
나가 앴재. 안 그러요 여러분? 나가 시방 틀린 말 혔소? 자아, 일금 백원이믄 야
그 끝나는 겨. 효과 직방! 스트레스 확 풀어준당께 시방..."
  나는 구경꾼들의 등뒤에 바짝 붙어섰다. 장씨의  걸쭉한 사투리 재담이 귓맛을 
당기게 했던 것이다.
  "아제, 그 말 학씰하지라?"
  사파리 차림의 청년 하나가 수작을 하며 나섰다.  싱겁게 웃고 있는 낯짝이 꽤
나 불쾌하였다. 낮술을 좀 과하게 걸친 모양이다. 낮술을 좀 과하게 걸친 모양이
다. 그는 내처, 어떤 양반의 말투를 흉내내어 다짐하였다.
  "학씰하요 어쩌요? 1백냥으믄 적은 돈이 아녀라..."
  청년은, 말이사 그렇게 눙치면서도 천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건네주는 손길은 
정작 가볍다. 장씨는 그것을 받아 걸찍하게 침을  바르더니 제 이마에다 척 갖다 
붙인다. 그리고는 대거리가 또 가관이다.
  "학씰하지 않고 지가 으째? 이 사람 장 아무개, 정직 하나는 믿어줘도 쓸 것이
고만, 나가 일찍이 정치 같은 거 헌다고 깝죽댄 것은 없응게로 말이여. 앞으로도 
죽장 그럴 것이고만, 저  아무개 썽님 말씸대로라믄 머잖어 그 뭐시냐, 지방자친
지 집안 잔친지  머 그란 시대가 온답디다만,  나야 당최 취미 없는 야그더라고. 
그늠어 정치가  머인지, 나가봉께로 멀쩡한 사람들  죄 베레놓더만. 쬐께라도 그 
물 먹었다 허면  그만 사람이 실성실성해져서 사기치기를 방구 뛰듯  하덜 않나, 
입만 뻥긋허면 오만  헷소리에 무단히 남 욕허고,  이 갈고, 작덩허고, 흩어지고, 
껄떡거리고, 생사람 잡고...  싸잡아 말허자면, 인종지말짜들이나 허능  거 아니더
냐 싶더란 말이시. 그래서 허는 말인데 나야  그런 거하고는 애시당초 인연이 먼 
인사더라고. 그렁게 믿어줘. 이 사람 장 아무개, 죽어도 정직 하나는 학씰하당께. 
의심일랑 이따  집에들 가서 찬찬히 허고,  우선 화끈하게 투자부텀 해보더라고. 
나 말이 맞나 안 맞나..."
  와자하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청년은 플라스틱 양동이 속에서 빨간 풍선 한  개를 집어 들었다. 보통 모과만
한 그것은 공기 대신 물이  들어 있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불안스러워 보였
다. 사파리 청년은  손바닥으로 감싸듯이 그것을 꼬나쥔 자세로 투척선  앞에 가 
섰다. 그리고는 약간 긴장된 얼굴로 앞쪽을 응시하였다.
  고작 10여 미터나 될까, 앞쪽에 그만한 거리를  두고 입간판이 하나 세워져 있
었다. 그런데 그게 꽤나  요상한 물건이다 싶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람의 형
상 하나가 실물  크기로 그려져 있었는게 그게 또 적잖이  희화적이었던 것이다. 
풀어헤친 넥타이, 배꼽이 불쑥 튀어나온 뱃구레,  한 손에는 양주잔, 다른 손에는 
돈다발... 요컨대 이를 데 없이 치졸하기는 해도 작의만은 너무나 명명백백한, 그
래서 오히려 싱거운 느낌을  주는, 그런 그림이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머리 하나 드나들 만하게 동그란 구멍만 뚫려 있었다.
  청년이 최초의  투척을 감행하였다. 퍽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고, 
동시에 한바탕 웃음이 일었다.  청년은 열쩍게 웃고 있었다. 목표를 겨냥하고 내
던진다는 게 악력을 적절히 가늠하지 못한 탓으로 그만 물주머니가 손안에서 터
지고 만 모양이었다.
  "나가 옳게 당해부렀소잉."
  청년이 투덜댔다. "아제가 사기쳤당게. 보더라고.  이녀러 것도 내 속을 쌕이잖
어 시방..."
  그때 그림의 사내가 혓바닥을  쏘옥 내밀었다. 말하자면, 용용 죽겠지 하고 약
을 올리는 수작이다. 그제서야  나는 그 혀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았다. 장씨였
다. 입간판 뒤에 몸을 감춘  그가, 동그랗게 파진 구멍 속으로 저 어릿광대의 얼
굴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은 두번째도 실패였다. 이번에는  조심하느라고 물주머니를 너무 느슨하게 
쥐었던 모양이다. 청년이 팔을 쳐드는 순간에  그 요령부득의 물건이 손아귀로부
터 슬쩍 빠져나가 그의  농구화 한 짝만 흠씬 적셔놓고 말았던  것이다. 또 한바
탕 폭소가 터져나왔다.
  내가 장씨를 첫대면한  것은 이보다 두어 주일 앞서의 일이었다.  나는 그날도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의 내 방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열시가 넘어 하숙집으로 돌
아가던 깃이었다.
  한가한 걸음걸이로도 고작 10분 남짓 걸리는 그 귀로의 중간쯤에 로터리가 하
나 있다. 작은 분수대와 조각 몇 점이  전부인 그곳을 사람들은 광장이라고 불렀
다. 낮 동안은  자동차 경적과 매연과 먼지 때문에 지나다니기조차  지겨운 곳이
건만 밤 깊은 시간에는 고작 포장마차 두어 개가 길가에 불을 밝힌 채 바닷바람
을 맞고 있기 일쑤였다.
  그 무렵, 나는 귀로에 곧잘  그 포장마차 신세를 지곤 하였다. 80년대 초 느닷
없이 남도 끝동네로 직장을 옮겨온 지 두 해째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어느것 하나  제대로 마음붙일 자리가  없었던 탓이리라. 목포는  나에게 그만큼 
낯선 고장이었다. 일테면 그 한  해 전 어느 봄날, 나는 하숙집을 정하고 가방을 
내려놓기가 바쁘게 목포의 유서 깊은 산 유달산부터 찾아나섰는데 산을 오를 때
까지는, 목포는  거의 아무데서나 바다가 보여서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가파른 층계를 숨차게  올라 이윽고 해발 2백여 미터 남짓한  정상에 올랐을 때, 
바로 발 아래서  출렁거리고 있는 청록빛 바다가 언뜻 무섬기를  느끼게 하였다. 
큰 산이나 강 또는 바다 같은 대자연의 이미지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나의 일상적 공간은 닫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혹의 세월 중 앞쪽 반은 
분지 대구에서 그리고 나머지  반은 서울바닥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항구도시 목
포는 전혀 낯선 세계가 아닐 수 없던 것이다.
  그랬다. 목포가 나에게 심어준 최초의 낯선 이미지는 바람이었다. 이 도시에서 
처음 맞은 봄 내내  나는 이 바람 때문에 도무지 정신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바
람 없는 날은 거의 하루도 없었다. 오전중에 없으면 오후에 있고, 오후에도 없으
면 밤중에라도 부는 식으로, 기어이 그날치를 치르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풍향도 
일정하지 않았다. 금방 동쪽에서 불었다가 그새  서쪽에서 불어오는 식이어서 사
람의 혼을  숫제 빼놓게 마련이었다. 그야말로  미친년 널뛰듯 하는 바람이었다. 
목포는 항구이며  또 풍항이던 것이다. 극성스러운  바람 속에서 나는  5월이 다 
가도록 내의를 벗지  못하였고, 성긴 머리칼을 잡초처럼 흐트러뜨린 채  길을 가
다 보면 그 머릿속 생각들조차도  소금기 눅눅한 해풍과 굵은 모래가 섞인 흙먼
지를 잔뜩 들이켠 나머지 탁하고 몽롱해져버리게 마련이던 것이다.
  남도 방언의 낯설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같은 방
송매체들 덕분에 이제는 팔도 방언들이  어느 정도는 죄다 귀에 익어 있다고 하
더라도 현지에서 직접  듣는 맛은 또 달랐다.  어느 날, 환한 대낮인데도 꼭지가 
빠질 만큼 취해버린 낯선 친구 하나가 갑자기 내 길을 가로막고 이렇게 불쑥 말
했을 때 나는 이 고장 사투리의 속 깊은  맛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그 친구가 
뱉은 말은 이랬다.
  "나 말이시, 오늘 겁나게 기분 나빠부러!"
  내 직장에는 방언 연구에 열심인 선생이 몇  분 있었다. 그분들로부터 나는 이
따금씩 경상도 방언에 관한 질문을  받곤 했는데 매번 제대로 자신 있는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20년 가까운 서울생활에서 어느새  내 고향 말씨까지도 팔아먹어
버린 탓이었다. 때로는  나보다 오히려 그분들이 경상도 방언을 더  정확하고 풍
부하게 알고 있음을 보고 속으로  부끄러움과 또 다소간의 억울함 같은 것을 느
끼기도 하였다.  내 고향 사투리를  잊어버렸다는 사실만큼 명백한  고향 상실의 
증거가 어디 있으랴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러는, 전라도 방언과 경상도 방언의 비교연구(?)에 감히 끼여들어 내 
나름의 몽둥이식 논리를 내밀기도 하였다. 일테면, 표준말 <그러니까>에 해당하
는 두 지방 사투리의 비교연구가 그것이다.
  경상도 : 그러이꺼네-다섯 음절
  전라도 : 그렁게-세 음절(보통 때)
  긍게-두 음절(급할 때)
  고로, 경상도 방언에 비해 전라도 방언이 훨씬 음악적이고 경제적임 운운.
  흔히 말하듯 인연이란  소중한 것이다. 이 바닥 말로 비록  <뜬금 없이> 와닿
은 고장이라고 하더라도 나로서는  결코 아무렇게나 흘려보내도 좋을 그런 세월
은 아닐 터였다. 나는  틈나는 대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다녔다. 딴에는 이런
저런 사람들과도 낯을 익히는 노력을 기울였다.  길바닥만치나 오가는 말이 질척
한 선창을 헤집으며 낙지 멍게  해삼 등속이 그득그득 담겨 있는 플라스틱 함지
박들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뒷개를 돌아 대방동 달동네길을 넘어오기도 하였다. 
거렁뱅이꼴을 한 낭인들이 늘  서넛씩은 어정거리고 있는 목포역 대합실이나 대
낮에도 지나가기가 조금은  쑥스러워지는 삼학도 옐로하우스 부근을 기웃거리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밤늦어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예의 로터리 주변 포장마차 앞에서 종
종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사정 역시 그런 것이었다. 물론  하숙방의 을씨년스러
움도 이유가 되었다. 나이  마흔을 넘어서면 벌써 객지 잡이 우울해진다. 카바이
드 불빛에 퍼렇게 젖은 채  밤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휘장을 들치고 들어서면 대
체로 주인 혼자  전 걷을 준비를 하고 있거나  혹은 알코올 중독자 같은 술꾼이 
하나쯤 외롭게 앉아 있거나 하였다.
  술과 외로움만큼  사람들을 쉽게 친숙하게  만드는 것도 흔치  않으리라. 나는 
포장마차에서, 그것도  밤늦은 시간의 우연한  만남에서 오히려 이  낯선 도시와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장씨는 물론, 그보다 앞서 소망원 원
장 같은 사람과의 만남 역시 그러하였다.
  지난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고 기억된다.  거의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
각이었다. 막차들이  이따금씩 요란스럽게  치달리는 대로를 내다보던  포장마차 
주인 김씨는  이윽고 전 걷을 채비를  하였다. 그때 때절은 희장을  들치고 낯선 
얼굴이 하나 불쑥 나타났다.
  "요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몸뚱이는 포장 밖에  둔 채로 그 얼굴이 말하였다. 학교서  배운 표준말씨여서 
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몹시 지치고 허기진 몰골이었다. "국수나 뭐, 아무거라
도 좋습니다만..."
  마지막 잔을 들어올리다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돌아보던 나는 주인보다 먼
저 대꾸하였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뭣간에 요기할 거야 있을 테지요..."
  그리고는 얼른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빨리 들어가 쉬고 싶은  욕심에서 그가 
혹 박절하게 거절하지 않을까 괜시리 조바심쳐졌던  때문이었다. 어쩌다 본즉 남
도 끝동네까지 흘러들었다는 주인 김씨는 평소의 그 물러뵈는 성품 그대로 웃는 
낯을 하고 말하였다.
  "있구말구요. 마침 국수 한 다발이 남아 있군요. 내 얼른 말아드리지요."
  김씨는 꽂이가 몇  개 남아 있는 냄비를 탄불  위에서 막 집어 들었다가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오뎅 국물에 따끈하게 말아드릴 테니 잠시만 앉
아 계십시오."
  "아, 그러면 족하지요. 정말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사내는 그제서야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바짝  마르고 검게 
그을은 얼굴과는 달리  체구만은 꽤나 듬직하였다. 여위긴 해도 뼈대가  굵은 사
람이었다. 그 체구에 걸맞게 아주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다. 쪽걸상을 타고 앉
은 그는 좌판 위에 늘어놓은 안줏거리들을 탐욕스럽게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야 이거, 없는 것이 없구먼요. 나랏님 수랏상인들 이처럼 풍성할 수가..."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진열장의 안줏감들을  챙겨보았다. 사내의 탄성과는 달
리 정작 팔고 남은  안줏거리라고는 고작 꼼장어 두어 마리에 닭발  몇 개, 그리
고 벌겋게 양념을  바른 돼지갈비 서너점에 지나지 않았다. 장사를  마감할 무렵
에 보면 늘 그 정도는 남게 마련이던 것이다.
  "나랏님 수라상은 커녕 똥강아지 한 끼 먹이도 모자라겠수."
  김씨는 데워진  오뎅 국물에 국수다발을  풀며 푼푼하게 눙쳤다.  그러고 본즉 
광대뼈가 두드러진 데다 두 눈자위가  움푹 꺼진 사내의 얼굴 어딘가에 오랜 허
기의 빛이 깊게 드리워져 있음을 나는 문득 느낄 수 있었다.
  사내는 잠시 성호를 긋는 시늉을 하더니 과연 국수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먹
어치웠다. 젓가락질을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마치 뚜껑을 열고 달팍 쏟아부
은 듯 순식간에 말갛게  비어버린 사발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다소 무
안을 느낀 듯 건트림을 두어 차례 끄윽꺽 하였다.
  "앗다, 속이 훈훈한  게 이제야 허리를 펴겠구먼요. 정신없이 쏘다니느라  그만 
끼니를 놓쳤더니 허기가 져서..."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사내의 허기는  아무래도 더 뿌리깊은 것으로 느껴
진 때문이었다. 김씨의 생각도 그런 모양이었다. 생선 묵 꽂이 하나를 빈 국수그
릇에다 담아주며 불쑥 내뱉었다.
  "엣다 이거 잡수시오. 금강산도 식후경이요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살더라고, 
아 하루 세 번 끼니 챙기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이 무에 있다고 맨날 그렇게 굶고 
다니시오? 원장님은 그것이 병이라니까..."
  "아무렴요. 하루 세 끼 밥이 기중 중하구말구요."
  사내는 꽂이를 뽑아물며 맞장구를 쳤다. "배가 부르면 흉포한 짐승도 순해진다
고 하지요."
  게걸스럽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사내는 꽂이  하나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다음 꽤나 흡족한  얼굴로 국수값을 치르었다. 그가 휘장 밖에서  사라지고 나자 
김씨가 서둘러 좌판을 걷으며 말하였다.
  "소망원 원장이라고들 하더구먼요. 저쪽 갯가에다  천막 치고 장애자들과 함께 
산다고들 합디다..."
  지난 가을부터 이따금씩 들른다고 하였다. 그것도  매번 파장쯤에 불쑥 나타나
서는 으레 국수  한 그릇을 청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소망원에서  만든 조잡한 
상품들을 울러메고  광주며 순천 등지를 한바퀴씩  휘돌아오는 듯하다고 김씨는 
말하였다. 한번은 그가 국수 값  대신 손수건 몇 장을, 그 훌쭉한 배낭에서 꺼내
준 적도 있다고 하였다. 어쨌거나 늘 지치고  허기진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는 것
이었다.
  "여기 말로 하자면 좀 짠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 인물이지요. 명색이 장교 출신
이라는데... 지난 80년도에 옷을 벗었답니다. 그길로 곧장 소망원을 시작했다더군
요. 여기가 끝동네가 돼서 별나게 낭인들이 많거든요... 한번은 술을 한잔 권해보
았지요. 손님들이 남긴 것이었지만... 꽤  추운 밤이었습니다. 비도 추적추적 내리
고, 여전히 허기진  얼굴로 몹시 떨고 있더라구요.  난 어한이 되라고 권한 거지
요..."
  그런데 결과가 엉뚱해졌다는  것이었다. 처음 한동안은 그가  술잔을 만지작거
리고만 있길래  왜 그러느냐, 한잔하면  몸이 더워질 거라고  김씨는 채근했다고 
하였다. 그제서야 작심을 한 듯 그가 잔을 홀짝 비웠고, 그리고 나서 말하였다.
  "하두 오랫동안 마셔보지 않아서요..."
  김씨가 내처 한 잔을  더 따르었더니 그는 사양 않고 잔을  비웠다. 그의 태도
가 눈에 띄게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는 것이다. 그의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욕망을 마치 김씨가  흔들어 깨우기라도 한 듯 그는 이것저것 요구
하기 시작했다는 얘기였다.
  "기왕이면 보배 새걸로 하나 따시오. 저  꼼장어랑 돼지갈비도 몇 점 구워주시
고... 닭발도 있군요. 그것두 하나..."
  눈빛조차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듯싶어 오히려 김씨 자신이 뜨악한 기분이더라
고 하였다. 그는 주량도 주량이지만, 꽤나  대식가였다. 그날 팔고 남은 안줏감이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는데도 그는 혼자서 거의 바닥을 내버렸다.  그것도 짧은 
시간에. 2홉들이 소주 두  병을 곁들여서였다. 장삿속으로만 따지자면 말끔히 떨
이를 해준 그가 고마울 판인데도 어쩐지 마음은 즐겁지가 않더라고 김씨는 말하
였다. 까닭 모를 슬픔  같은 것이 자꾸만 가슴을 메이게 하여  내내 입을 다물고
만 있었노라는 것이다.
  "계산합시다. 모두 얼마지요?"
  마침내 그가 엉거주춤  일어서더니 아주 퉁명스럽게 물었고,  호주머니에서 구
겨진 지폐를 꺼내 훌렁  내던진 다음 거스름돈도 챙기지 않고 돌아서버리더라고 
김씨는 말하였다.  그의 등판에 척 달라붙어  있는 그 낡고 훌쭉한  배낭이 문득 
소망원 사람들을  연상케 하여 김씨는  휘장을 젖히고 그의  뒷모습을, 머리통을 
깊이 떨군 채 적막한 밤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우울하게 지켜보았노
라고 하였다.
  장씨도 포장마차에서 만난  사람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좀  취한 상태였는
데 자신을 풍선장수라고  소개하였다. 나는 그 말에서 꽤나 한가한  상상을 했었
다. 유원지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색의 풍선을 한아름씩 안고 다니는, 
솜사탕장수와 더불어  낭만적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풍선장수를 연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듣고 본즉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미 술에  푹 젖은 목소
리로 장씨가 마구 떠벌려대는 소린즉 대강 이런 식이던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자 하면 정신 말짱하게 챙기고 사는 것 같은 사람
은 참말로 만나보기 힘들다. 이놈의 세상이 어쩌다가  이렇게 한도 많고 원도 많
은 세상이 되었는지, 천지사방에 두루 이빨가는 소리뿐 아닌가. 이놈 저년 할 것 
없이 그저 두들겨  부수고, 인정사정없이 때려잡고, 게거품  물며 욕하고, 무작정 
시비 걸고, 서로  짓밟고, 으스러뜨리고, 능욕하고, 깝대기  벗기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매사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리고, 남의 살을 질겅질겅 씹어야 살맛이 난
다는 쌍통들 아니냐?
  말하자면 남북간에, 동서간에,  그리고 위아래, 너와 나  사이에 얽히고설킨 응
어리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온통 집단 히스테리증상을 드러내고 있노라는 주장
이었다. 자신의 사업적  아이디어는 바로 그 점에 착안하고 있다고  장씨는 역설
하였다.
  "나가 누구냐? 나가 바로 인간과녁이여. 그란 사람들한테 밥이 돼주는  거랑게. 
좋다, 억울하면 나를 쳐라! 나란 사람을 웬쑤로  생각튼지, 콧대 높은 벼슬아치로 
생각튼지, 일등  협잡꾼 국회의원 나리로 생각튼지,  엽전이란 엽전은 죄다 줏어 
먹고도 황금똥만 싼다는 무슨무슨  재벌 총수쯤으로나 생각튼지 고거야 손님 맴
인게 나가 시비허지 않겠다 흠씬  받아주고 푼돈 좀 챙길랑게 싸게싸게 와서 스
트레스들 푸시라 그란 말이제. 그라믄 신명들이 나서 쌔빼물고 뎀비더란말시. 그
렁게 으째 돈벌이가 안되겄소야?"
  장씨는 또 이렇게도 말하였다.
  "차말로 사람 맴이랑 게 요상헙디다.  막말로, 깨지는 기분도 있더랑게요. 말하
자믄 이런 거여. 나가 누구냐? 누군 누구여. 세상이 다 아는 아무개 아무갠디 나
가 시방 저 잡초 겉은  인간말짜들헌티 한심허게 당하고 있는 거다-고로크럼 생
각혀보는 겨. 그라믄 맴이 요상해짐시로, 나가 진짜로 시상 사람이 다 아는 아무
개 아무개 선상이 아닌가 쩌으기 의심이 가더란 말이시..."
  어쨌거나 장씨는 기고만장  열변을 토했었다. 정말 살맛나는  세상이라고 하였
다. 세상에는 이를 가는 사람,  악에 받쳐 끙끙 앓는 사람들이 죄다 사라지지 않
는 한 자기 영업은 번창하리란 주장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꼴로 보아 어차피 좋
은 시절이 오리란 기대는 전혀  무망하므로 오히려 자기 사업은 전망이 밝다 못
해 눈부시기조차 하다고 그는 말하였다.
  나는 술을 몇 잔 권한 다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의 식솔들은 그 작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생각허고 자시고가  있겄소?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직업엔  귀천이 없다는디... 
내 마무라쟁이는 오히려 호수워항게."
  "자제분들은요?"
  "둘이어라, 큰것이 가시낸디, 진작 서울로 가부렀소. 전자회산가 뭔가 그란디서 
착실허게 돈벌이하고 있응게 걱정  없으라. 고 아랫 것이 사낸디, 고놈은 재수생
이고... 공부도 쏠찮이 하던 앤디 운이 없었던 게비여. 허나 요즈막도 별 보고 나
가서 별 보고 들어옴시로 코피 나게 공부헝게  이번에는 꼭 붙겄지라. 나는 걱정 
안허요. 가사 걱정한다고 수나는 거  아닝게... 하여간에 아그들이야 모르제. 애비 
직업까정 알아서 써먹을 데도 없겠고... 안 그러요? 그란디... 선상은 직업이 뭐다
요?"
  갑자기 역습을  당한 기분이어서 나는  잠시 허둥거려야만 하였다.  굳이 감출 
까닭도 없으련만, 나는 엉겁결에 <교육>이란 말은 살짝 빼던지고 <공무원>이라
고만 대답해놓고 나서 혼자  곤혹감에 빠졌다. 그럴 수밖에! 옳지, 너  잘 만났다
는 듯이 장씨가 또 한바탕 떠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무원은 관에서 허가한 공갈꾼입디다잉? 일전에 테레비 봉께로, 교통순경 아
자씨들이 백주노상에서 내놓고  툴어묵습디다. 내 장사보다 훨씬 더 점잖더라고. 
물도 안 뒤집어쓰고 말이어...  내 나서 첨으로, 공무원 한번 부럽단 생각을 혔고
만이어라. 교통순경 아자씨 재미가 고 정도라면 앗다  생각 좀 혀보씨시오잉? 그
보다 높은 양반들  재미사 월매나 오지겠능가? 두고 보씨요, 내  아들놈 법대 보
내가지골랑 기어이 고  반듯한 공무원 맹글어놀랑게... 선상은  무슨 공무원이오? 
이름 석자나 챙겨두고 싶으요잉."
  쓴웃음 끝에 나는 단지 이렇게 대꾸했을 따름이었다.
  "내가 보기엔 선생 쪽이 훨씬 살맛날 것 같소이다."
  다행히 장씨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었다. 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건지, 
아니면 그것을 분별하기에는 이미 너무 취해버린 건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
다. 한데, 바로 그 장씨의 영업현장을 나는 보고 있는 것이었다.
  주말 오후여서 공원을 찾는 사람들과 또 그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치들로 하여 
해송 그늘 시원한  입구 도로는 그런대로 유원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장씨
는 그런 속에 끼여 신바람나게 영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수입
이 짭짤하다 싶었다.  잠시 지켜보는 동안에도 예의 청년에 이어  천원권 지폐를 
훌렁훌렁 던져 주고 간 손님이 대여섯은 금방 되었던 것이다. 장씨는, 아니 어릿
광대는 매번 물을  뒤집어쓰기는 했지만 적잖은 수입에  견준다면 그 정도 수고
(?)야 마다할 게 없노라는 투였다. 그는 오히려,  물벼락을 맞을수록 더욱 기고만
장하였다. 게임이  한차례씩 끝날 때마다  저 우스꽝스런 그림  뒤에서 튀어나와 
얼쑤얼쑤 네 활갯짓을 치며 희희낙락하였던 것이다.
  "아암 그라제에! 지렁이도  밟으면 시언타 허고 처자가 애를  배도 재미진다는 
세상인디 으째 우리 민초들이라고  암시렇지두 않는 척 참고만 살 거여? 똥이사 
참으믄 약이 되제만 홧증은 참으믄 뱅이 되는  벱이여. 그렁게 여그서 말짱 풀고 
가더라고. 날마다  장마다 꼴뚜기는 아닝게 시방이  기회여. 아주 죤  기회다, 내 
말은 그거랑게. 나가 누구여? 인간과녁이제 누군 누구여!  폭탄은 개당 1백냥, 누
구든 원없이 던져보시라! 내 말은 그거더라고, 아믄..."
  장씨의 신바람은, 그러나 그닥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아마도 재수생 패거리
일 듯싶은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휩쓸고 지나간 뒤부터였다. 마치  한바탕 격전
을 치른 뒤처럼 난장판이 되어버린 그 한가운데 그는 넋을 놓고 우두망찰 서 있
었다. 막 타이틀을 빼앗긴 권투선수처럼 만신창이가 된 몰골이었다. 저 요란스럽
던 어릿광대의 분장이 물에 흠씬 젖어 자못  슬퍼보였다. 저 입간판의 그림도 마
찬가지 꼴이었다. 그래서 배불뚝이 사내의 탐욕이 더한층 추하게 느껴졌다.
  한참 만에야 장씨는 제정신을 챙긴 듯  미적미적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허리를 
잔뜩 굽힌 채  말없이 전을 걷더니 초라한  뒷모습을 보이며 어딘가로 사라져갔
다. 어떤 처연한 느낌 때문에 나로서는 끝내 알은체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장씨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여러 날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역시 
밤늦은 시간이었고 또  예의 포장마차에서였다. 내가 인사를 건네자 그는  곧 알
은체를 하였다. 하지만 몹시 풀이 죽은 상태여서  저 기고만장하던 때의 그가 이
미 아니었다.  소주잔을 앞에 하고 앉은  채 무언가 골똘히 잠겨  있던 상념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그는 어딘가 뚱하고 어릿어릿해보였다. 때문에 몇  순배 술
잔이 오간 다음에야 나는 비로소 전날의 일을 입에 올릴 수 있었다.
  "장사가 한창 잘되고 있는  판에 왜 갑자기 전을 걷었소? 어디 탈이라도 났던
가요?"
  나의 물음이 솔직했던  만큼 그의 답변도 솔직했다고 나는 믿는다.  도무지 그
답지 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장씨는 말했던 것이다.
  "선생도 보셨지라? 그 재수생 패거리들 말이오... 그놈들 하는 짓거리 허며, 노
는 뽄새 허며...  말짱 베렸습디다. 안 그렇습디여?  고놈들, 뻔하지라. 부모들 눈 
속일라고 새벽같이 나와서는 무단히 그라고 해종일  날치고 다니는 거여. 공부허
는 놈, 나가 눈  씻고 봐도 한 놈 없습디다. 그란디... 그 속에  내 새끼도 착실허
게 끼여  있더랑게! 있기만  혀? 고놈이 더  그악허게 물주머닐  던지더라고. 허
허..."
  나는 아무 대거리도 하지 못했다. 헛웃음을 그친  장씨가 쓴 술을 목구멍 깊이 
탁 털어넣더니 내뱉듯 불쑥 말하였다.
  "고놈이 날 알아본 거여. 암만 분장을 했다  쳐도 새끼가 지 애비를 몰라볼 거
여? 고놈이 빤히 알고서도 역부러 그랬단마시. 허허...  허허... 나가 어디 왕창 모
잘라서 무단히 그라고 다닐랍디어? 자식이 웬수여 웬수! 허허... 허허..."
  뭐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여  곤혹감에 빠진 나는 열심히 술을 권하는 것으
로 소임을 하였다. 그 결과로  장씨는 더 흠뻑 취해버렸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
니어서, 우리가 마침내  그 포장마차의 휘장 밖으로 나섰을 때  둘은 어깨동무로 
서로를 의지하고서야 간신히 다리를 지탱할 수가 있었다.
  "어때요? 걸을 만해요?"
  나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물었고, 장씨는 씩씩하게 대꾸하였다.
  "앗다, 놈 꺽정허고 있네. 나가 누구여? 인간과녁이제. 그랑게 나 걱정은 마소. 
아무데나 드러누울 못난이는 절대로 아닝게..."
  우리 앞에 커다란 사내가  서 있었다. 취중에도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소망원 
원장이었다.
  "한잔들 하셨군요. 좋은 밤 되십시오."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그는 우리 곁을 지나쳤다. 곧 이어, 주인 김씨와 
주고받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요기 좀 할 수 있겠소?"
  "그럼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우리 둘은 한덩어리가 되어 비틀거리며 어둠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엇 길
  친구 한의 사무실은  볕이 잘 드는 남향이었다. 게다가 20층이  넘는 높이여서 
도심임에도 불구하고 전망이 확 트여 있었다. 늦가을의  한껏 기운 햇살 아래 끝
도 없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는  수도 서울의 장관을 나는 막막한 심정으로 내다
보았다. 참으로  엄청난 시멘트의 정글이었다.  아니, 콘크리트의 사막이었다. 그 
질펀한 정글 또는 메마른  사막의 여기저기에 낯선 고층건물들이 우뚝우뚝 솟아 
오른 채 흡사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견고하고 거대한 기둥들처럼  빛나고 있었
다.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문득 먼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그랬다. 벌써 스무 해쯤 
저쪽의 인생사가 된다. 대학 합격증을 받아쥐고 교문을  나선 나는 그 길고 곧장 
남산을 찾아갔었다. 이제부터 생판 낯선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어떤 식으로든 
살아내야 할 이놈의  서울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무엇보다 먼저  그 전
체적인 조망부터 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초행이었으므로 길을 묻고 더듬어 
그럭저럭 꼭대기까지 찾아  오를 수 있었다. 거기서 둘러본 서울의  첫인상은 한
마디로, 가슴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온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커다란 도시였던 것이다.  도마뱀을 쫓다가 공룡과 맞닥뜨
린 어린아이의  충격이 그런 것일까.  밤차를 타고 예닐곱  시간이나 흔들리다가 
신새벽의 서울역 플랫폼을 밟던  순간부터 내내 움츠러든 채이던 가슴께가 급기
야 뻣뻣하게  굳어지면서 금방 겨드랑이에서  식은땀이 뚝뚝 듣고  있었다. 목이 
꽉 잠긴 채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비로소 심한 멀미를 앓았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일을 이따금씩 떠올리곤 했던 것 같다. 더러는 그것으로써 
자신의 나태함을 일깨우기도 하였으리라.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일상의 의식에서 
지원진 채 그동안 아주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이날 친구의 사무실 창 앞에서 불
현듯 생생한 기억으로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고 본즉, 나는 그날의 일을 결
코 잊었던 게 아니었다. 그로부터 자그마치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이 흘러간 뒤인
데도 내 마음 깊은 바닥에서는  여전히 변함없는 충격으로 남아 있음을 나는 실
감하였다. 이놈의 서울은 늘 낯설고 정이 붙지 않는 것이나, 어떤 기대감으로 왔
다가 거의 매번 내쫓기듯 씁쓸한  기분으로 돌아서게 되는 것도 아마 거기에 감
정의 뿌리를 두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나는 창에서 돌아섰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도 끝의 한 작은  도시가 망막에 겹쳐 떠올랐다. 그곳은 직장을  좇아 나와 내 
가족이 최근 10년  가까이나 몸담아 살고 있는 곳이었다. 불과  5층짜리 내 아파
트의 창틀 하나만한 공간으로도 그  도시의 절반은 넉넉하게 담아낼 수 있을 만
큼 조그만 항구도시다.  빈 시간에 산책삼아 내가  자주 오르곤 하는, 학교 뒷산 
마루에 올라서면 인구 30만 미만의  오종종한 도시가 마치 손바닥을 펼친 듯 훤
히 내려다보이는 것이다. 버스터미널에서 기차역으로 뻗은  도로 정도가 고작 길
다운 꼴을 하고 있을 뿐, 나지막한 한식  기와집들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 엎디어 
있는 뒷길들은  한결같이 좁고, 꼬불꼬불하고,  그리고 거의가  비포장이다. 손을 
내밀면 잡힐 것만 같은  거리 저쪽에 부두가 보이고, 얕은 바위산  하나가 그 앞
에 얌전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다.  또, 바다 위에는 검은 선체의 화물선 몇 척이 
덩그렇게 떠 있고...
  그뿐, 바람 많은 철에도 대낮에는 늘 졸음기를 몰아다 주는 풍경인 것이다. 거
대도시 서울을 다시 마주할 때마다 항용 남도 끝의 그 작은 항구도시가 새삼 떠
오르곤 하는 것을 나는 어쩌지 못한다.
  "양길웅이라고, 박교수 혹 기억하나?"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내  쪽을 향해 돌아앉은 친구가 갑자기 물었다.  한은 우
리 동기들 중에서도, 그것도 전공과는 상관없이,  꽤 성공한 축에 드는 인물이다. 
그만큼 오늘의 그에게서 옛 학창시절의 모습을 찾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이
다. 친구의 두툼한 입술 위에 다소 요령부득의  애매한 웃음기가 어려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멀미를 느끼고 있었다.
  "아다마다..."
  나는 한의 앞에 얌전히 주저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친구는 왜?"
  그는 예의 애매한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대답하였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
고, 마침 그 친구가 나타나셨거든."
  한은 인터폰을 누른 다음 들여보내라는 지시를  하고 나서 뒤를 이었다. "이따
금씩 날 찾곤 하지, 길웅이 그  친구 말이야, 그러고 보니 때가 된 것 같기두 하
구먼."
  그는 비로소 요령부득의  웃음을 지운 다음 천천히 담배를 뽑아  물었다. 아주 
세련되고 여유 있는 몸짓이었다.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었다. 후학기가 거지반 끝나가고 있던  무렵이니까 11
월 하순쯤의 일이었을 터이다. 그날 마지막  강의를 끝내고 연구실로 돌아와보니 
뜻밖의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바로 양길웅이었다.  그러나, 대학동기인 
그를 나는 첫눈에 알아보지 못하였다. 피차 얼굴을  대하지 못한 채 보낸 세월도 
물론 짧지 않았지만 그보다도, 내 연구실 문짝에  기대어 서서 구물구물 졸고 있
는 그의 행색이  너무나 초라했던 까닭에서였다. 환절기라고는 해도 아직  철 이
른 오리털 파카며 두껍게  누빈 바지, 그리고 귀 밑까지 푹  눌러쓴 모자 따위가 
말하자면, 아무데서나  먹고 자며 떠도는 낭인의  꼴이 분명하던 것이다. 원래가 
그런 편이었다고는  해도 옛학우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숯검정을 칠한 것처럼  짙은 눈썹 아래 어둡고 우울한  빛을 띤 두 눈이 간신히 
옛 기억을 되살리게 해주었다.
  "아니 이거, 양형 아니야? 양길웅이 맞지?"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멍한 눈을 쳐들어 내 쪽을  잠깐 살피는 듯하
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그리고는 소리없이 히물히물 웃기만 하였다.
  나는 그의 손을 와락 끌어쥐었다. 그 순간, 왠지 울컥 치밀어오르는 어떤 격정 
같은 것에 나는 분명 떠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피차 마흔을 넘어
선 나이라는 사실조차 깜박 잊은 채 나는 불쑥 말하였다.
  "너 임마, 어쩐 일이냐? 좌우간 반갑다야!"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잡았던 손을 슬며시 놓아버렸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
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가 없었고, 이렇다 할 표정마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다. 나 역시 대처할 바를  잃은 채 그만 서먹해지고 말았다. 학생들의 눈이 우리
를 흘낏거리고 있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우리의 만남이 꽤나  기이하게 비
쳤던 모양이다.
  양길웅이 그나마 입을  연 것은 소주를 서너 잔 들이켜고  나서부터였다. 내가 
더러 드나들곤 하던, 부두의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앉고도 한동안 서먹서먹해
하던 끝이었다. 바다 쪽으로  나 있는 뒤 창으로는 탁한 물위에  가득 정박해 있
는 크고 작은 배들과, 그리고 나지막하게 날아오르는 갈매기들이 잘 내다보였다. 
어쩌다 이곳을 찾은 여행객들에게는 낭만을 느끼게  하는 풍경일는지 모른다. 하
긴 나 역시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다분히 그런  정취에 젖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일상적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그  낯익은 풍경들-일테면 
뻘겋게 녹물을 흘리고 있는  낡은 배들이라거나 또는 누더기처럼 더러운 깃털을 
퍼덕거리는 갈매기들, 또는 주변을 떠돌고 있는  비릿한 생선냄새며 간기로 절은 
젓갈냄새 등-은 그저 그런  모습으로 거기에 흩어져 있을 뿐, 나로  하여금 새삼 
별다른 감흥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따분하고 적
적할 때 더러 그 자리에  앉아 혼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노라면 눈앞의 그런 
풍경 그런 사물들보다는  오히려 서울의 낯익은 거리들이  선연하게 떠오르면서, 
무언가 더없이 멀고 아득한 느낌이 가슴을 먹먹하게 채워들기 일쑤였던 것이다.
  나는 그런 감정이 단순한 외로움에서 오는  것이려니 하였다. 직장을 벗어나면 
그곳은 나로서는 사고무친인 고장인 까닭에서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 이유의 전
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은연중 깨달아가던  때였다.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다는, 말하자면 어쩔 수  없는 변방의식 탓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
들로부터, 아니 모든 낯익은 세계로부터 나의  존재가 속절없이 잊혀져가고 있다
는 감정이 한정 없이 나른한 무력감 속으로 나를 자꾸만 밀어넣는 것이었다.
  "배가 뜰 수 있을까?"
  몹시 어눌한 목소리로 양길웅이 불쑥 물어왔다.  오후 들면서부터 바람이 다소 
거칠어지고 있었고, 때문에  간헐적으로 창을 두드리는 물보라가  제법 거세어지
고 있었다.
  "왜? 어딜 가려는데 그러나?"
  그의 대답은 몹시 더디었다. 시선을 거두어  코앞의 술잔을 잠자코 내려다보던 
끝에 간신히 그는 대꾸하였다.
  "그냥 아무 섬에나 가려고... 배가 들어가기만 하면 어디든 괜찮을 거야."
  그는 스스로 머리를  주억거리기까지 하였다. "길동무를 하나 만났거든. 좀  오
래 전 얘기지만... 비금도라든가,  이쪽 어디 섬에서 살았다더라구. 그 사람 말이, 
섬에는 일자리가 많이 있대. 사람들이 자꾸만 뭍으로 나가버리기 때문이래. 작고 
외딴 섬일수록 그렇다던데?"
  그는 비로소 활기 있게 중얼거렸다.
  "그런 데 가서 뭐 할 건가?"
  "그냥... 일하며 사는 거지  뭐. 난 말이야, 어떻게 사는가에는 관심 없다구.  그
딴 거야 아무려믄 어때?"
  "그러면 관심 있는 건 뭔가?"
  그는 대답에 앞서 흘낏 내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리고는 금세 시선을 창 밖으
로 던지며 빠르게, 소곤거리듯 말하였다.
  "시를 쓰려고 해. 내 관심은 그것뿐이라구!"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가 다시 덧붙여 말하였다. "그래도 박형은 기억해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내 관심은 진작부터  시에 있었잖나? 지금도 마찬가지라
구. 그밖엔 관심 없어. 없다구!"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몹시  서운해하는 기색까지 담고  있었다. 시를 
쓰겠다고? 그밖에 세상 사는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고? 가슴이 갑자기 메어
지는 뭉클한 충동을 느끼며 나는 속으로 거듭 자문하고 있었다.
  복학을 하고  나서 양길웅이 한  말이 그것이었다. 엉뚱하게도  시를 쓰겠다는 
것이었다. 그림은 물론이고 취업에도 도통 흥미가 없노라는 것이었다. 국전과 양
대 민전에 목을 매달고  있던 우리 동기들 대다수는,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
가 하고 다들 괴물을 보듯 그를 대하였다. 그럴  수밖에! 그전에는 단 한번도, 시
를 씁네 어쩌네 하는 소리를  그로부터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자식, 괜히 더
듬수 부리는 거 아냐? 혹은  영악한 자기 변명이거나?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한동
안 입방아들을 찧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어느 새 우리는 고학년들이 되
어 있었다.막상 졸업을  코앞에 두고 보니 더  이상 낭만 운운할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작업파와 취업파로  자연스레 나누어졌다. 작업파들은 창고  같은 작업실
에 틀어박혀 먹고  자면서 사생결단하듯 작업에 몰두하였고,  취업파들은 일찌감
치 먹고 살  궁리들을 하느라 재주껏 분주해지고 있던 때였다.  작업이나 취업이
나 간에 그것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가혹한 시련임에 분명하였다. 특별히 우
수한 재능이나 우월한 배경을 지니고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다들 그것의 중압
감에 납짝하게  짓눌린 채 갈등하고 있던  시기였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능력과 
한계에 대해 가장 치열하게 고뇌하고  절망했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 아닌가 싶
다. 이도저도 아닌,  아주 엉뚱한 쪽으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 자가 어찌 
그뿐이랴. 그렇다고는  해도 하필 시를  쓰겠노라는 선언은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었다. 시에 대한 우리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던 까닭에
서였다. 시가  절대로 돈벌이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여기에다 한 
가지를 더 덧붙이자면,  그의 처지가 그같이 허망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어도 좋
을 그런 형편이 못된다는 점이었다. 천만에!
  우리 동기들  사이에 양길웅이라는 인물이 화젯거리로  떠오른 구체적 동기도 
생각해보면 바로 그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입학하고 나서 한  학기도 다 
지나기 전에 그는 이미 캠퍼스의 낭인으로 호가  난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슨 소린고 하면, 그의  입성부터가 우선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 한여름철만 빼
고 그는 1년 사계절 중  적어도 세 철은 늘 후줄근한 바바리에 무릎이 사정없이 
튀어나온 골덴바지를 입고 다녔다. 누른 바바리야  그 무렵 유행하던 것이었다고
는 해도, 거기에다  뒤축이 뭉턱 닳아빠진 쎄무구두에 대체로 맨발인  사정은 아
무래도 정상일 수 없었다. 다행히 타고난 용모나  체격이 꽤 준수한 편이라 그런
대로 보아줄 만은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적지않게 혐오감을 유발했을 차림새
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점이 그의  천의무봉한 성품을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고도 생각되는데, 그는 그런  행색을 하고 거침없이 캠퍼스
를 휘젓고 다니면서 아무한테나 툭하면 손을 내밀곤  했던 것이다. 물론 큰 돈을 
요구하는 건  아니었다. 고작 1,2백원 하던  시장바닥의 국수값 정도이거나 또는 
버스표 한두장이 고작이라고는 해도  어쨋건 상대를 알건 모르건 남자건 여자건 
도무지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구걸한다는 점에서 역시 그다운 바가 있었던 것이
다. 미처 그를 알아보지 못한 학생들 경우  처음에는 다소 놀라기도 하고 당황도 
하게 마련이었지만, 그러다 대다수 학생들은 기꺼이  그의 요구를 받아주었을 뿐
더러 특히 몇몇  여학생들은 우정 그를 찾아다니기까지 하는 눈치였다.  아예 도
시락을 두 개씩  싸들고 등교하는 여학생도 없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와 관련하
여 이런저런 뒷얘기를 남긴 바  있는 문화자 같은 음악과생도 일테면 그중 하나
였던 셈이다. 그러니까,  양길웅의 당당한 구걸행각(?)은 오히려 그의  주가를 높
여준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던 게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어쨋거나 양길웅은 우리 미술학도들을 포함하여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 이
른바 예술학도들만으로 이루어진, 그래서 특성상 별스러울  수밖에 없는 우리 대
학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물  중 하나로 군림하였고, 이를 근
거로 마침내 학생회장 감투까지 쓰기에 이르렀다.
  비록 규모가 작은 특수 칼리지였다고는 해도 그 구성원들이 좋게 보면 개성들
이 강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하나같이 괴팍스런 기질의 소유자들이어서 결국 오
만 괴짜들이 다 모여 있는  꼴임에도 불구하고 양길웅이 같은 친구가 감히 학생
회장 후보로 나섰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소간 해명이 필요할 듯싶다.  말할 것
도 없이, 전적으로 우리들의  부추김에 고무된 때문이었다. 그가 썩 어울리는 후
보라고는 우리도 물론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약간의 장난기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고 해야 하리라. 그는 어쨌든  우리 학과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
었고, 타과생들에게도 두루 얼굴이 팔려 있는 위인이었던 것이다. 술자리에서 우
리는 그를 설득하였다. 그래도 우리 학과의 자존심이  있지 어찌 후보도 못 내서
야 되겠느냐고 우리는  그룰 구슬렸고, 또 그게 우리들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
였다. 선거자금도  우리가 마련할 것이고  득표전략도 우리가 알아서  짤 것인즉 
너는 단지 얼굴만 내밀고 있으면 된다 하고 거듭 세뇌하였다.
  "좋아, 한 1년 학생회 공금이나 뜯어먹고 살기로 하지 뭐. 벼룩도 낯짝이  있다
고, 아무한테나 손 내밀기도 다소 지겨워졌으니깐 말이야."
  말하자면 이것이 그의 출사표였다. 우리는 이  또한 그답다고 느껴졌으므로 박
수로써 환영하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노라고,  연간 총예산이 얼만지나 아느냐
고, 그중 5프로, 아니 1프로만 삥땅 쳐도  네 하나 생활비는 너끈할 것이라고, 우
리는 무작정 그를 부추겼음은 물론이다.
  꼭이 승산 있는 싸움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결과는 양길웅의 압도적 당선
이었다. 우리 대학  특유의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도무지 해명할  길 없는 
대목이다. 어쨌거나, 호가 난  캠퍼스의 낭인은 이제 당당한 우리의 대표가 되었
다. 당연히 그의 외양도  변하였다. 그 유명한 바바리와 골덴바지를 벗어던진 그
는 비록 남대문 시장의 싸구려 기성복일망정  정장 차림이 일상화되었고, 문제의 
쎄무구두 대신 반짝반짝 광이 나게  잘 닦은 쇠가죽 구두를 신고 캠퍼스를 누볐
다. 참으로 눈부신  변모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한테나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
는 곧잘  아이들을 떼거리로 몰고 다니면서  점심도 사고 술도 사곤  하였다. 저 
친구, 학생회 몽땅 들어먹는 거 아녀?  우리는 그렇게 시시덕거리면서도 함께 얼
려 다니기를  마지 않았다. 적잖은  선거자금을 댄 공로로  총무부장직을 맡았던 
친구만 직책 탓이었는지 오직 혼자서만 자주 고개를 내젓곤 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양길웅은 임기 1년 동안 대과  없이 회장직무를 수행하였다. 다른 해에 
비해 학생회 활동이 유독 돋보였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표나게 저조했다는 
평가도 아니었다. 그만하면 기대 이상이었다고 해야 하리라.
  임기를 마치자마자 그는 휴학을 하고 입대해버렸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
이었다. 그의 기질이나  평소 지론대로라면, 제 발로  자청해서, 그것도 갑작스럽
게 입대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이상하게도 그답지 않게 그 점
에 대해서만은 굳게 입을  다물었으므로 우리는 나름대로 이런저런 사정들을 멋
대로 헤아려보았을 따름이었다.  때마침 학원가에 위수령이라는 게  발동되던 무
렵이었다. 아무리 작은 대학이라고 하더라도 시국상황과  무관할 수야 없던 때였
다. 당연히 우리도 한두 차례 갈등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바 더러는, 그의 돌연한 
입대는 그런 사정과 관련하여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그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전혀 다른 해석도 없지 않았다. 그의 참모 중
에 문화자라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처음엔 이름과 잘 어울린다고 해서 문화부장
을 시켰다가 필경엔 마음에  멍이 들었다는 얘기가 그것이었다. 그 시절, 문화자
라는 그 음악과 여학생의 화사한 용모가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잡초 속
의 쑥대궁 같은 양길웅의 풍모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던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
녀가 더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낭인시절의 양길웅
을, 말 그대로 도시락을  싸들고 좇아다녔던 그녀인 까닭에서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바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입대한 그는 남들이 곧잘 적응하는 군대생활을 몹시 힘
겹게 치렀던 것 같다.  무슨 비명 같은 언어들로 가득한 편지를  두어 번 받았는
가 싶었는데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캠퍼스로 되돌아왔다. 건강상  이유로 의병제
대를 했다면서  복학수속을 밟았고, 학교 앞에  하숙도 정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생활은 그러나 예전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과묵하고 점잖아졌
다. 남에게 결코  손을 내미는 일이 없었으며,  입성도 수수하여 굳이 시선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드러진  차이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작업을 열심히 하는  것도, 하다못해 취업문제를 걱
정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말하면 매사에 의욕과  활기를 잃은 채 남의 뒷전으로
나 비실비실 배돌고  있는 생활이었다. 우리는 물론 안타깝게 생각하여  그를 다
시 옛날의 양길웅으로  끌어내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는 우리들의 
그런 관심을 오히려 짐스러워하였고, 그럴수록 점점더  자기 안으로 깊숙이 도망
가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결국 복학하고 한  학기를 끝내지 못한 채 그는 학
교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도 그를 조금씩 잊어갔던 것이다. 졸업 후
의 가혹한 현실에 우리들도 무던히 휘둘렀던 탓이라고 해두자.
  거의 잊혀졌던 양길웅의 존재가  우리들에게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은 5공이 막
을 내리던 그 와중의 일이었다. 어떤 경위였는지  모르나 어쨌든 그가 친상을 입
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  그 양길웅이! 우리는 새삼스러운 
어떤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비교적 마음이 여린 몇몇이 모여  상가를 찾아갔었
다. 경북 청송의  한 작은 마을이었다. 비로소 알게 된  바 그는 편모 슬하의 단 
하나 혈육이었는데  이제 그 모친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었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상가 분위기가 너무  어둡고 칙칙한 것이어서 망자의 한스러운 
생애가 족히 상상되었던 까닭에서다. 하나뿐인 상주는  오히려 우리 앞에서 히죽
히죽 웃기만 하였다. 돌아오는 차중에서 우리는 한도끝도없이 맥주병을 깠다. 그
러나 나눈 이야기는 몇 마디 되지 않았다. 그런 중에, 문화자 그년 지금 뭐 하나 
하고 누가 물었고, 이태리 유학에서 돌아왔다니깐  지금쯤은 뉘집 부엌데기가 돼 
있을 테지 뭐 하고 누군가가 대꾸했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잠시 음흉한 웃음
들을 날렸다.
  그 일을 계기로 양길웅 돕기 운동이 잠시  있었고, 그리고 얼마간의 돈이 모아
졌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가 직장을 주선해주마고 제안했던  것 같
은데 그가 완곡히  사양했다고 기억된다. 우리가 다시 그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어 있었던  것이다. 그 준수하던 용모가 눈에 띄게  망가진 뒤여서 우
리를 비감스럽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사실은, 거의 황폐해져버린 그의 
정신상태였다. 그에게서는 이미 왕년의 양길웅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
이다. 그림도 시도 우리는 본 것이 없었다.
  고작 한 주일에 한두  번씩 배가 뜨는 먼 외딴섬, 그러니까  명령 항로를 따라 
아무 섬에나 들어가서 살겠다던 양길웅에게서 소식이 온 것은 그로부터 두어 달 
뒤의 일이었다.  수신자란에다 내가 속한 대학이름  넉 자와 그리고 내  이름 석 
자밖에는 더 이상 적힌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나에게 전달된 엽서를 
받고 나는 잠시 신통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나에게 그런 걸  보낸 것도 그렇지
만, 그처럼 어수룩한  방법으로도 전혀 착오 없이 전달된 사실이  신통했던 것이
다.
  내용은, 일자리는 없지  않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제대로 취업을  못하고 있다
는 사연이었다. 수신인의 그것에 비하여 발신인의  주소는 더없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일테면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포도  추엽 2리 24번지 노령슈퍼 김삼돌 
전교 양길웅 식이었다. 나는 곧바로 소액환 몇 장을 끊어 등기로 부쳤다. 그러나 
답신은 없었다. 나는  왠지 좀이 쑤시는 기분이어서 필경엔 주말을  타서 그곳을 
찾아나섰다. 뱃길로 서너 시간,  1백여 가구가 산다는 그 섬의 유일한 포구에 노
령슈퍼가 있었다. 말이 슈퍼지  실상은 작은 주막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곳
을 떠나고  없었다. 물질 외에는 이렇다  하게 일거리가 없고 또  배를 타기에는 
그의 몸이 성치 못해  포구에서 그냥저냥 빈둥거리며 허드렛일로 소일하다가 한 
달쯤 전에 불현듯  배를 타고 떠났다고, 주점  아낙이 말하였다. 무슨 도를 닦고 
다니는 사람이냐고 물어서 나는  순간 당황하다가 그렇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아닌, 애매한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 다음해로 기억된다.  여름방학 때 안좌도로 학술답사를  나갔던 학생들로부
터 뜻밖에 그의 소식을 들었다. 답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배 위에서 그를 만났다
는 것이었다. 몹시 초라한 행색의 사내가 다가와  대학을 묻더니 박 아무개 교수
의 안부를 묻더라는 것이다. 걸인과 진배없이  남루한 차림의 낭인이더라고 그들
은 말하였다. 부두터미널에서 헤어졌다는 그를 나는  여러 날 기다리는 심정이었
다. 이 바닥에  떠돌고 있다면 전화 한  통쯤 할지도 모르리란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는 아무런 신호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은 흘렀고, 나는 다
시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한 달에 대충 한 번꼴로 찾아오지."
  친구 한의 말이었다.
  "다른 동기들한테도 그런가  봐. 서너 사람, 나름대로 순번을 정해두고  찾아다
니는 모양이야."
  한은 나를 쳐다보며 다시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문제의 인물이 우리 앞에 나
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출입문이 열리더니 단정한 차림의 젊은  사내가 그를 
안내해왔다.
  "오랜만이군. 이리 와서 안지 그래."
  앉은 자세 그대로  눈길을 주며 한이 말하였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반쯤 일어
선 자세였다.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양길웅은 문을 등지고 꺼부정하게 선 
채 일견 천진스럽고 또 일견 넋이 빠진 듯한 그런 눈길로 방안 이 구석 저 구석
을 기웃기웃하였다. 눈이 부시기라도 한지 얼굴을 잔뜩 찡그려붙이고 있었다. 여
러 해 전 나를 찾아왔을 때와도 또 엄청나게 다른 모습이어서 나는 충격을 받았
다. 그때만 해도  어떤 낭만적인 분위기 같은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영락없는 걸인배의 몰골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서
려다 말고 다시  주질러 앉고 말았다. 그리고는  탁자 위의 권련을 집어 들었다. 
10년 가까이 끊었던 담배였다.
  "이리 와서 좀 앉으라니까."
  한이 다시 말하였다. 하지만 그는 히죽히죽 웃기만 할 뿐, 문 앞에서 한걸음도 
더 발길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식의 완강한 
사양이었다.
  "이 친구,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한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에게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리고는  숫제 강압적으
로 그를 내 옆자리에 끌어다 앉혔다.
  "자, 잘 좀 보라구. 어때? 알 만한 사람 아녀?"
  그제서야 양길웅은 내 쪽을 조심스레 돌아다보았다.  탁한 안개같은 것을 헤치
고 아주 천천히 그의 눈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 초조하고 안타까운 마음
이 되어 그의 눈길을 마주보았다. 그의 눈이 반짝 빛나는 듯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허망하게 닫혀버리고  말았다. 나에게는 그것이, 이  세상을 온통 거부하는, 
몹시 완강한 몸짓처럼  느껴졌다. 누구에게도 다시는 자신의  내면을 열어보이지 
않으리라는 서글픈 확신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나는 검게 찌든 그의 손에 내가 뽑아  물었던 담배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라이터불을 켜대었다. 의외로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가 아끼듯이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뱉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흡사 사
레들린 듯이 그는  격렬한 기침을 토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얼굴이  온통 시뻘
게진 채 그는  격한 기침에 시달렸다. 우리는 당황했지만 그러나  속수무책 구경
만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예 사무실 바닥에 나뒹굴지 않는  게 용하다 싶
을 정돌 혹심한 고통 속에  빠졌다가 간신히 진정되었을 때 그의 초췌한 얼굴은 
끈끈한 땀으로 흠씬 젖어 있었다.
  한참을 탈진해  있던 양길웅이 흡사  산송장 같은 모습으로  부스스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문쪽을 향해 지척지척  걸어나갔다. 한도 더는 붙잡지 않
았다. 그 젊은 비서에게 봉투 하나를 주어 배웅하게 했을 따름이었다.
  "저 친구, 얼마 못 가겠구먼!"
  한마디 툭 내뱉은 다음 한은 혀를 끌끌 찼다. "대책 없는 작자야. 일종의 정신
황폐증이라구. 빌어먹을! 우리 나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구."
  15층 그의 집무실을 나서기 전에 나는 다시 한번 창 밖 서울의 전경을 내다보
았다. 질펀한 시멘트의 정글,  아니 메마른 사막 여기 저기에 우뚝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기둥들이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동창들을  몇 더 불러내어 밤늦도록 술타령을 벌였고, 그래
서 나는 다음날 새벽차에야 간신히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는 남도 끝 종착역에 
닿을 때까지 내처 잠에 곯아떨어졌었다.
  집에는 친구 한의 전화가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양길웅이 간밤에 객사한 모
양이니 연락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런 식의 종말을 
족히 예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즉시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한참 신호음이 울린 다음에 한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잠이 부족한 음성이었다.
  "박교수? 이제 막 도착한  모양이구먼. 거두절미하고, 어떡헐래? 신발 벗지 말
고 곧장 되돌아설 건가 말 건가? 아무래도 우리들 손으로 장사지내야 할 형편인
데 말야, 영 성가시지? 정 뭣하믄 모르는 걸루 하고 말든지..."
  나는 잠시 대꾸를 못하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어디서 운명했나? 사인은 뭐래?"
  한의 말이 쏟아져나왔다. 조금은 심상한 조이기도 하였다. "개나리백화점  있지 
왜? 강남에... 녀석이 하필이면 그 백화점 쓰레기  통 옆에서 죽어 자빠져 있더라
지 뭐야. 사인은  복합적이라나... 하긴 워낙 폐가 나쁘기두  하지만, 시립병원 영
안실에 끌어다 놨는데 거기 말로는, 행려병자들에게 흔한 죽음이라더구먼..."
  나는 한참을 멍해져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거기까지 갔을까?  자네 사무실에서 그곳까지는 꽤나 먼 거리
잖나, 안 그래?"
  "발 달린 짐승이 어딘들 못 가겠냐만 굳이 이유를 찾자면 없는 것두 아니지..." 
한은 쉽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 백화점도 우리가 알 만한 친구가 하는 거라구. 길웅이 학생회장 시절에 문
화자랑 같이 무슨 부장  하던 친구 있어. 영화과 출신이지 아마... 그러니까 길웅
이한테는 내 다음 순번쯤 되었던가 보지 뭐..."
  나는 더  이상 물을 말이 없었다.  다만 양길웅이 그 생애의  어느 대목쯤에서 
엇길로 빠져들었고, 그것은  또 어떤 사정에서였는지가 새삼  궁금해졌을 따름이
었다. 하지만 이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한때 그렇게도 살갑게 가슴을 비비대
며 살았었던 한  친구를 우리는 영영 놓쳐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의 곁에서 
그가 언제 그리고 무슨 연유로 혼자 속으로  피 흘리며 괴로워했는지, 그래서 오
랜 세월 동안 우리들 사이를 떠돌며 얼마나 절망하고 외로워했는지에 대해 우리
는 거의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나는 그의, 마지막 임종의 순간은 어떠했을
까를 상상하며, 그 시간에 우리는 어디에 있었던가를 가만히 따져보았다.

    젖은 옷을 말리다
  읍내를 빠져나온  택시는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달렸
다. 다행히 길은 내내 텅 비어 있었다. 짐을 잔뜩 실은 트럭이 두어 대 맞은편에
서 굴러왔을 뿐  차량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좁은 도로는 
산허리를 돌아들며  우불꾸불 뻗어 있었고,  게다가 전날부터 내리고  있는 비로 
상당히 미끄러웠다. 빗물에  씻겨 검게 번들거리는 아스팔트  한가운데를 종으로 
가른 주황색의 띠가 흡사 길고 긴 뱀처럼 눈앞으로 휘익휙 다가들었다.
  갈수록 좁아지는 골짜기를  줄기차게 파고들기 20분 남짓, 개울 건너  작은 들
판 저쪽으로 낯익은  마을이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났다. 조수석에  돌덩이처럼 굳
어 있던 사내가  왼손을 엉거주춤 쳐들었다. 정작 차를 세워달라는  말을 뱉어낸 
것은 그러고도 조금  지나서였는데, 긴장 탓에 아주 꽉 잠긴  목소리여서 운전기
사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기사는 눈치 빠르게 급브레이크를  밟아 차
를 세웠다.  웬만큼 굴린 듯싶은 고물  스텔라가 왕창 분해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길가에 멈추어 섰다.
  "와요? 여서 내릴라꼬요?"
  운전기사가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기 아이라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텅 빈 도로가 산발치를  돌아 뿌연 빗속으로 머리를 감
추어버렸다.
  빗발은 가늘고  성기었지만 바람이 꽤나  성가실 것 같았다.  조수석의 사내는 
서둘러 요금을 치른 다음 차에서  내렸다. 큰 키에 비쩍 마른 체구였다. 숱 적은 
반백의 머리가 금세 갈기갈기 흐트러졌다. 못지않게  마르고 길쭉한 얼굴은 만성
적인 불면증과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처럼  꺼칠하고 활기가 없었다. 얼굴
이 금방 젖었지만 우산을 펼쳐 들 생각은 않고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택시가 중앙선을 넘어 거침없이 훽 방향을 바꾸더니 읍내를 향하여 꽁지 빠지
게 달아났다. 마치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다 그를 유기하고 도망이라도 치듯이. 
사내의 멍한 시선이  그것을 좇고 있었다. 꽁무니로 하얀 물보라를  안개처럼 피
워올리면서 차는 금방 산모롱이를 돌아 사라지고 말았다.
  비로소 사내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비에  젖어서 더 검고 말끔해보이는 
도로는 여전히 휑하니 빈  채였다. 중앙선이 한결 선명하였다. 도로 위쪽은 산이
었다. 경사가 완만한 산등성이는 여름산답게 숲이 무성하였고, 전날부터 줄곧 께
질거리고 있는 비로 온통  습기 차게 느껴졌다. 도로 아래쪽은 개울이었다. 강이
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꽤나 폭이 넓은 그 개울은 그간의 가뭄 탓으로 바닥을 
거의 드러낸 채였다. 그나마 좁다랗게 흐르는 냇물이 황톳빛을 띠어가고 있었다. 
상류 쪽으로는 제법  비가 내린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비록  빗속을 내팽
개쳐진 기분이기는 해도  눈에 띄는 사물들이 그닥 낯설지는 않았다.  너무 일찍 
떠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향산천이던 까닭이었다.
  그가 태어나서 열 살 남짓 되기까지 살았던  마을은 개울 건너, 그리고 좁장한 
들판 저 안자락에 숨고 싶은 듯 주저앉아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들을 
죄다 챙겨보아도 고작 30가호 남짓이었다. 먼빛으로  보아 양철지붕이 더 많아진 
것 외에는 별로 달라진  데가 없는 듯싶었다. 동구 앞 길에 차가 두  대 비에 젖
고 있었다.  하나는 소형 짐차가 분명하고,  다른 하나는 아마도  승용차 같았다. 
그 어름에  고목이 한 그루 서  있었던 것을 그는 기억해냈다.  서너해 전까지만 
해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잘려 나간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까, 마을이 어쩐지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사내는 우산을  펼쳐 들었다. 비가 많이 숙졌다고는 해도  하늘은 잔
뜩 흐린 채였다.  음울한 날씨에 습기 찬 바람까지 거칠어서  초여름치고는 적잖
게 썰렁한 느낌이었다. 골짜기를 타내리는 바람을  맞받아 우산살이 금방 꺾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휘어졌다. 손잡이를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쥔 채 그는 잠시 갈
등에 빠졌다. 이제부터 부딪칠 일들이 몹시 곤혹스럽게 느껴진 때문이었다. 어쩌
다 고향에 발길을  들여놓을 때마다 매번 치르곤 하는 감정이었다.  때로는 그것
이 너무나 끔찍스러운 나머지  만사를 포기하고 되돌아서버린 적도 없지 않았었
다.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거칠게 할퀴고  드는 바람을 우산으로 힘겹게 
버티면서 그는 담배를  뽑아 물었고, 여러 차례  실패 끝에 간신히 불을 댕겼다. 
마침내 깊이 한  모금을 빨아들인 다음 고개를  쳐드는 순간 묵중한 무엇인가가 
코끝을 스치듯 세차게 지나갔다.  그는 반사적으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고, 우
산이 뒤로 훌렁 뒤집어져버렸다. 대형 유조차 한  대가 거센 돌풍을 일으키며 도
로가 꽉차게 치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얼이 빠진 채 한참을 멍청하게 서 있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조차 얼른 짚이지 않았다.
  자동차의 긴 행렬이다.  무개 지프도 있고, 위장망을 둘러친  스리쿼터도 있다. 
그러나 역시 트럭들이 더 많다.  짐이 잔뜩 실린 트럭도 있고, 이국 병사들이 두 
줄로 마주보고 앉아 졸고 있는 트럭들도 있다.  트러일러 위에 실려 있는 대포들
도 보인다. 색깔이 죄다 녹색이고 하나같이 새것들뿐이다. 먼지가 구름처럼 뭉글
뭉글 피어오르는 산허리길,  꼬리를 물고 꾸물꾸물 한도끝도없이 지나가고 있다. 
물위로 대가리만 달랑  내놓은 채로 지켜보고 있자니 자꾸만 숨이  차오른다. 머
리 위 무한천공은  여름 땡볕이 지글지글 끓고 있는데도 괜시리  소름이 돋는다. 
아이들은 어덜어덜 떨며 물에서 기어나와 뜨거운 모래 속에 가만히 알몸을 묻는
다. 흰둥이는 우예 저래 하얗고 감둥이는 우예  저래 까말꼬? 저느마들은 차말로 
희안타 그자? 누군가 꽉 눌린 음성으로 키익킥  웃는다. 그래도 자동차의 기나긴 
행렬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사내는 담배를 힘주어  뻑뻑 빨아댔다. 하지만 도무지 입 안이  허전할 뿐이었
다. 그제서야 불이 꺼진 사실을 그는 깨닫고 혼자 계면 쩍어졌다. 담배개비의 중
동이 부러진 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다시 새것을 뽑아 물고  몇 번씩이나 라
이터를 켜대다 말고 그는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길 건너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
오고 있는 사람을  그는 알아보았던 것이다. 누른 비옷을 뒤집어쓰고  무릎 위까
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은 사람은 외가 쪽으로  아우뻘 되는, 그러니까 아직 고향
에 뿌리를 박고 사는, 그의 몇 안되는 인척 중 하나였다. 이미 10년 넘게 이장직
을 맡고 있어 신물이 나지만 그렇다고 노인네들한테야 떠맡길 도리가 없지 않느
냐고, 언젠가 푸념하던 소리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앗들이 어데 남아 있어야
지 뭐. 요새  앗들은 지 어메 젖만  뗐다카마 그 길로 서울이다 어데다  하고 안 
내빼뿌리나. 그라이꺼네, 동네일  할 늠이 있어야제... 그 이장도  이제 마흔 줄로 
들어선 참이었다.
  "와 이래 늦심니꺼?"
  이장의 얼굴은 날씨보다  궂었다. 검게 그을은 이마에 일찌감치 골을  파고 자
리를 잡은 여러  가닥의 주름살이며, 광대뼈 아래 우묵하게 거진  볼따구니의 그
늘 따위가 간단하게 열 살 정도는 더 얹어  보게 만들었다. 그 이장의 기분이 바
닥인 것은 적지않게 날씨 탓일 터였다. 오늘의 일을 자청하여 떠안은 것도, 웬만
하면 궂은 날씨를 피해보자던 제의를  묵살하고 굳이 이 날짜를 고집한 것도 이
장 자신이었던 것이다. 맘 내키는 대로 아무때나 곡괭이를 댈 일이 아니라고, 이
런 일에는  다 시가 있고 때가  있는 법이라고 요지부동 완강했던  터였다. 햇볕 
짱짱한 날이라고 해도  내키지 않는 노릇이었다. 불평을 하고 짜증을  내기로 들
자면 오히려 내 쪽일 법하다고, 사내는 생각하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반드시! 
꼭!-참례해야 한다고 윽박지르다시피 한 자도  이장이었다. 이 성가시기 짝이 없
는 작자만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대체로 그래왔듯이, 적당한 핑곗거리를 둘러대
고 외면해버릴 수도 있었으리라.
  "자네 욕보네."
  두 사람은 잠시 손을 맞잡았다. 정작 얼굴을  마주한 것은 꽤나 오랜만의 일임
에도 불구하고 살뜰하게  나누어가질 말은 별로 없었다. 사내는 건성으로  몇 마
디 날씨 걱정을 했고,  이장은 입을 꽉 다문 채로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따름이었다. 잿빛  구름장들이 층층히 내려앉은 하늘은  더없이 음울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사내도 고개를  쳐들었다. 어두운 허공을 가득히 채우면 푸설푸
설 떨어져내리는  비가 그의 의식  속으로도 눅눅하게 스며들었다.  빛이라곤 한 
점도 찾아볼 데가 없고, 천지간에 젖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에서 벗어나 산길을  조금 오르자 누른 차일이 하나 보였다.  비를 가려보
자고 동원한 모양이었다. 널따란 텃밭은 비 맞은 푸성귀들이 싱싱하고, 가편으로
는 복숭아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나무들은 밑둥이  거의 썩어
버린 고목들이어서 5월임에도 불구하고 꽃이 별로  붙지 않은 상태였다. 더러 복
숭아를 따먹곤했던 기억을  사내는 얼핏 떠올렸다. 그 텃밭은 외가  쪽 소유였으
므로 간혹 어머니도 이른 아침 푸성귀와 함께 이슬에 젖은 복숭아를 몇 알씩 따
오기도 하였다. 그때만 해도 이 나무들은 얼마나 왜소했던가. 소득을 기대하기에
는 이제 너무 늙어버린, 거의 고사목이  되어버린 복숭아나무들을 사내의 무연한 
눈길이 더듬고 있었다.
  차일 아래에는  세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 한가하게 담배들을  태우고 있었다. 
셋 다 진작 환갑을 지났을 노인네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나이가 제일 많은 쪽은 
꽤 낯이 익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다가갔다.
  "먼길 오니라고 니 욕봤제?"
  노인이 먼저 엉거주춤 허리를 펴며 말하였다.  옛날 도롱이처럼 이상스럽게 생
긴 우의 속에서 마른 사과처럼 쪼글쪼글 늙은  얼굴이 웃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
에게는 역시 모호한 상대였다.  그저 외가쪽 어른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뿐. 하
기야 다른 피붙이라곤  있지도 않았다. 사내는 여전히 모호하고 막연한  채로 그
러나 어쨌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아마도  칠순은 넘었을 법한 노인은 고
무신 꿴 발을 비닐조각으로 덧씌워 감발하듯 친친 동여매고 있었다.
  "서울서 나섰더나?" 헤벌쭉이 웃으며  노인이 정 많게 물었다. "그라마 요기는 
하고?"
  "오다가 국수 한 그릇 했습니다." 사내는 머뭇거리다가 호칭은 생략한 채로 인
사치레삼아 대꾸하였다. "괜한 일로 고생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기 와 괜한 일이고?  고생은 또 무신 고생?" 뜻밖에도 노인이 완강한 투로 
반문하였다. 사내는 대꾸하지 못하였다.
  "우리가 의당 해야 할 일 하는 거 아이겠나. 장조카는 그래 생각 안하나?"
  촌로다운 완강함에 질린 사내가 이번에는 황망히 대꾸하였다. "아무렴요.  옳으
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아저씨뻘이 되는 어른이시
다 하고.  노인의 얼굴에서 낯익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을 새삼  뜯어보았지만 더 
이상 짚이는 기억은 없었다.
  다른 두 사람은 작업을 위해 동원된 인부들임이 분명하였다. 둘 다 늙고, 여위
고, 그리고 궁기로 찌들린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들
답게 아주  편안한 표정들이었다. 나이가  좀더 많아보이는 쪽은  한눈에도 관록 
있는 술꾼이란 판단이  섰다. 주독이 들어 약간 부풀어오른 코에다  눈꼬리가 짐
짐하게 짓무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다른 쪽은 무척 왜소하고 잔약한 
인상이었는데 유독 누른 이빨들만 강하고 억센  느낌을 주었다. 뒷골목 돌팔이들
이 무지막지하게 금붙이를 덧씌워놓은 게 분명하였다.
  "한참 늦기는 했지마는 인자부터 살살 올라가보입시더." 이장이 일행을 둘러보
며 말하였다.
  "그런데 성님은 우예 그라고 왔어요? 어데 선보러 가는 사람 같네요?"
  양복바지에 단화를 신은 사내의 아랫도리를 닥하다는 듯이 한참을 내려다보던 
이장이 혀를 끌끌 차고 나서 여벌의 우의 하나를 꺼내 사내 앞으로 내밀며 다시 
말하였다. "이거 좀 험하기는 하지마는 그  우산보담사 백번 낫을 거이끼네 대강 
뒤집어쓰소."
  사내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제는 그만 내다버려도  아까울 게 없을 만치 느
덜느덜한 비닐우의였다. 하지만 이장의 판단이 썩 옳을 것이었다. 이제부터 올라
야 할  산을 그는 쳐다보았다. 비에  흠씬 젖은 숲이 산등성이를  두텁게 뒤덮고 
있었다. 박쥐우산을 펴들고 산책할  수 있는 코스는 전혀 아니었다. 사내는 이미 
망가진 우산을 미련  없이 내던지고 나서 잠자코 우의를 껴입었다.  겨드랑이 께
가 허전하고, 두엄내 같은 것이 폴폴 났다.
  사내는 그 순간 갑작스럽게 터져나오는 굉음을  들었다. 지척지간에서 쇠의 이
빨들을 맹렬히 갈아대는  소리였다. 사내는 놀란 눈을 치켜들었다.  바로 코앞에, 
귀때기 옆에 포크레인 하나가 시동이  걸린 채 이제 막 움찔움찔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사내는  잠시 멍청한 상태로 떨어졌다.  하도 느닷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어째서 지금까지 그  물건을 보지 못했는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 괴물
이 땅속에서 불쑥  나타난 것도 또는, 무엇으로 엄폐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라면 
더군다나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눈에는 어쨌거나, 갑작스러운 굉음과 더
불어 홀연히 거기 쨘 하고 나타난 것만 같아 거의 신비롭기까지 하였다.
  포크레인은, 작업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 저런 것도 
있구나 싶을  만치 앙증스럽게 조그맣고 깜찍이도  귀엽성스러운 그런 모습이었
다. 출고한 지  며칠 안된 것 같았다.  그런 종류의 도구들이라면 으레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게 마련인 거친 흠집들을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말쑥하였
다. 몸뚱이는 전반적으로  밝은 오렌지색이었고, 앞으로 당당하게 치켜든 외팔에
서는 쇠붙이의 저  강인한 은빛이 넘쳐나고 있었다. 아마도 그런  인상 때문이었
으리라. 그 물건은  실제 작업과는 도무지 상관없는 어떤 것,  그랬다, 덩치가 다
소간 크기는 하지만, 그러나 영락없는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운전석에는 당연히, 운전기사가  올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것도 나중
에야 발견하였다. 스물네댓쯤이나 될까? 지저분하게  붙이고 있는 구레나룻과 턱
수염만 밀어버린다면 계집애처럼  곱상하게 보일 얼굴을 가진  청년이었다. 숫제 
그 자리에 붙박인 인형이기나 하듯 포크레인 기사는 무심히 기계조작만 하고 있
을 뿐 달리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으므로  일견 기이한 느낌까지 들었다. 노동을 
하고 있다기보다 연기를 하고 있거나  혹은 무슨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처럼 느
껴지는 것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포크레인의 위력을 실감한 것은 
금방이었다. 텃밭을 벗어나자마자  거기서부터는 아예 길다운 길이 없었다. 허리
가지 차는 풀숲 사이로 산짐승들이나 다녔을 법한 길 같은 게 있는 듯도 싶었으
나 그것마저 칡넝쿨이며 갈퀴풀들이 온통 뒤덥고 있어서 어디로건 감히 발을 들
여놓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산은 무성한 계절을 향하여 끝없이  깊어지고 있
었던 것이다. 포크레인을  앞세우지 않고서는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숫제 불가
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크레인은, 그 작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흡사 거인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쇠의 외팔을 앞으로 쭉 내밀어  좌우로 두어 번 흔들기만 해도 넝쿵들로 잔뜩 
얽혀 있던 숲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길이 났다. 엔간한 나무들은  뿌리째 뽑아던
졌고, 제법 밑둥이 굵은 것들가지도 중동을 쳐서  쓰러뜨린 다음 그 위를 유유히 
타넘었다. 바윗돌들은 옆으로 밀어냈다.  골이 패인 곳은 주변의 흙을 퍼다가 메
우고 돌출한 곳을 윗부분을 깎아내는 식으로 차근차근 평토작업을 한 후에 우릉
우릉 전진하였다. 흡사  거대한 생물체의 등줄기를 가르며  무지막지하게 기어오
르는 괴물처럼 그 작은 포크레인은 지독히 고집스럽고 무자비하였다.
  일행은 대여섯 걸음쯤 거리를  두고 천천히 뒤따랐다. 이장이 앞장을 섰고, 삽
을 들고 작은 관을  멘 인부 두 사람이 그 뒤를 좇았다. 사내는  노인과 맨 후미
에서 좇아가고 있었는데 칠순의 노인보다 더 헐떡거렸다. 굉음이 숲을 뒤흔들고, 
그러면 소나기처럼 물방울이 쏟아졌다. 발 밑은 미끄럽고 질척거렸으며, 방금 파
뒤집은 곳은 발목까지 푹푹 잠기게 빠져들기도  하였다. 더러 민달팽이가 쇠바퀴
에 씹혀 뭉개져 있기도 하고, 다람쥐와 청설모가  기겁을 하고 내빼는 꼴을 보기
도 하였다. 포크레인이 뱉어내는 매연에도 불구하고  풀내와 송진내가 짙게 풍겼
다. 쇳덩이 밑에 깔아뭉개지고 쇠스랑에 찍혀  무참하게 꺾여진 것들로부터 고통
스러운 신음이 낭자하게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거인
의 뒤를 왜소한 졸개들이 숨죽인 채 좇아가듯  다들 조금씩 헐떡거리고 있을 뿐, 
신령한 어떤 것을 훼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식에 목을 짓눌리고 있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철쭉이며 애송들이 쇠바퀴 밑에서 납작해지고, 10년 넘게 자란 밤
나무 상수리나무들이  뿌리째 뽑혀나갔고, 청청한  솔이 흰 뼈를  드러내며 툭툭 
분질러지고 있었다.
  목표지점에 이르기 전에  사내는 딱 한번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산
을 오르기 시작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직선거리로 친다면 백여 미터 
가량 올라온  상태였다. 꽤나 긴 장정이었던  것 같은데 고작 이건가  싶어 그는 
적잖게 맥이 풀렸다.  마치 산등성이를 따라 커다란 바리깡을 밀고  올라온 것처
럼 지나온 흔적이 뚜렷하였다. 썰렁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왠지 웃음이 비어져나
왔다. 저 아래쪽으로 검게  젖어 번들거리는 도로가 있고, 돌투성이 바닥을 드러
낸 시내가 환히 내려다보였다.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조금 들자 뿌
연 안개비 속에  마을이 어렴풋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나  조용한 풍경
이어서 사람들이  몽땅 소개해버린 마을  같았다. 무슨 기억인가가  떠오를 듯도 
싶었으나 굳이 캐보고 싶은 추억이 없었으므로  그는 금세 돌아섰다. 포크레인은 
지치지도 않고 산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정상을 정복하고서야 전진을 멈
출 것 같았다.
  마침내 목표지점에 이르렀을 때 사내는 갑자기 이 모든 일들이 진저리나게 느
껴졌다. 우의를 뒤집어썼음에도  불구하고 옷은 물걸레처럼 젖어 있었고, 아랫도
리가 온통 흙장아찌였다. 구두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역겹고 진저리쳐지는 감정은 일상을 통해 이미  매우 낯
익은 것이었다.  어찌 낯익은 것이기만 하랴.  타액처럼 뱉어내고 또 뱉어내어도 
언제나 다시 고여들곤  하던 그런 것이었다. 사내는 황망히 담배를  더듬어 찾다
가 노인을 의식하고서 포기하였다. 아저씨뻘이라면 어쨌거나 집안어른이 아니냐. 
면전에서 굳이 담배를  꼬나물고 싶지는 않았다. 독충에 쏘인 듯  목덜미가 가려
워지더니 손이 가자마자 점점 더 쓰리고 화끈거리기 시작하였다.
  산 중턱쯤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다. 아카시아숲이 울타리처럼 둘러쳐진  그 안
에 잡초만 무성한 빈터가 나타나고, 거기에 얼른  보아 대여섯 기의 무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비문도 상석도 없는 그 무덤들은 하나같이  잡초더미 속에 
묻혀 있어서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조상 없는 후손 없듯이 임자 없는 무덤이 어딨더노." 이장이 못마땅하다는 투
로 말하였다. "그런데도 이  꼴로 보라카이. 조상 무덤 하나 돌볼 줄 모른다카는 
그기, 우예 말이나 됩니꺼? 요새 인간들은 짐승이나 다를기 하낫도 없다카이."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무렴, 짐승이나 다를 바 없지 않고!  사내는 그
러나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지금 그렇게 말하는 이장을  앞세우고 모처럼 
이곳을 찾았던 게 어느  해 일이었던가? 추석도 한참이 지난 때였는데도 땀께나 
좋이 흘렸던 기억뿐이었다. 숲을 헤치며 없는  길을 더듬어 오르내리느라고 넌더
리나게 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때도 이장은 똑같은  말을 했고, 그 또한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굳이 대꾸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한 해에 한 번 낫질을 해주는 유일한 일가붙이가 이장이던 까닭이었다.
  "이 산에 흩어져 있는 묘가 조사된 것만도 50기가 넘는데 그중에 자진해서 이
장하겠다고 신고한 거는 불과  스물 남짓이라 안합니까. 두고 보이소. 임자가 안 
나타나는 거는 결국 도자로 밀어뿌릴 꺼구마는."
  이장은 쯧쯧 혀를  찼다. 공고시한인 이 달 말까지 기다렸다가  곧바로 공병대
가 투입된다더라고 덧붙였다.  갑자기 이 산 일대가 군에 수용되면서  벌어진 소
동이었다. 제때  신고하여 이장비 몇 푼을  타낼 수 있었던 것도  이장 덕분이랄 
수 있었고, 그래서 일을 도맡고 나선 것도 이장 스스로 작정한 노릇이었다. 고맙
게 생각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감사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으므
로 사내는 이장에게 다소간 미안스러운 감정이 없지 않았다.
  이장은 대여섯 기의 무덤 중  하나를 용하게 가려내어 그 앞에다 한지를 깔고 
간략하게 제상을 차렸다.  북어 두 마리와 사과 배 각  한 개씩, 그리고 대추 한 
줌이 다였다. 술은 한 되들이 막소주였다. 바닥이 질척하여 무릎을 꿇을 수 없었
기 때문에 사내는  이장이 하는 대로 어설프게 시늉만의  절을 두 번 올린 다음 
종이컵에 따랐던 술을 세 번에 나누어 봉분 위에다 끼얹었다.
  "나라 멩이라 우짤 수 없이 집을 헐라카이 조상님은 놀래지 마시라꼬 잘 고하
소." 늙은 인부가 말하였다. "어명임더 하고 삼시분고하소."
  이장이 목청을 높여  외쳤다. "아제요, 놀래지 마소. 어명임더!  어명임더! 어명
임더!"
  어명이라고? 사내는 입을  다문 채 늙은 인부의 얼굴을  머쓱하게 쳐다보았다. 
짓무른 눈꼬리가 고물고물 웃고 있었다.
  이장은 다시 삽질하는  시늉을 세 번 하였다. 그때까지 뒷전에  조용히 물러서 
있던 포크레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부릉부릉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그 커다란 삽
으로 가볍게  흙을 한 삽 퍼올렸다.  길길이 자란 잡초와 촘촘하게  절은 뗏장이 
뭉턱 뜯겨나자 땅속에 얼기설기 벌었던 나무뿌리들이 허옇게 뽑혀나왔다.
  "아이고 무섭아라, 저기 다  아카시아 뿌리 아이가!" 그때까지 별로 말이 없던 
노인이 기가 막히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차라리 거랑가에 묻더라도 까시낭구 
밑에는 묻지 마라 안카나. 저것들 따문에 우예 잠인들 편했겠노."
  노인은 주름투성이의 얼굴을 쥐어짜듯이  잔뜩 구긴 채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
었다.
  봉분은 너무나 쉽게, 너무나 싱겁게 헐리고 말았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굳게 잠겨 있던  세계치고는 너무 허망하다는 생각을 사내는 하고  있었다. 덩치
가 작은 인부가 나서서 파여진 상태를 주의깊게 점검해보더니 누른 금이빨을 번
쩍이며 포크레인 기사를 향하여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이쪽 안 있나, 발치께를 한 분만 살짝 떠봐라. 아조 사알살."
  마치 기계가 스스로  그 말을 새겨듣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주춤주춤 다가섰
고, 곧 지시받은 지점을  겨냥하여 아주 신중하게 외팔을 뻗었다. 은빛의 커다란 
삽날이 정확하게 그곳에 닿자 주문대로 가볍게 살짝 흙을 걷어올렸다.
  "마, 됐다! 됐다카이!"
  손으로 포크레인을  밀어내기다로 할 듯이 황금이빨이  재빨리 가로막고 나섰
다. 철커덕철커덕 소리를 내며 포크레인이 양순하게 물러섰고, 그러자 삽과 호미
와 몽당빗자루를 챙겨 든 인부들이 파젖혀진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흙은 검은빛이었다. 일대가 모두 사석층인 듯싶다고, 나이 많은 인부가 말하였
다. 묏자리로는 별로  좋은 땅이 못된다고, 작은 인부쪽이  덧붙였다. 나무껍질처
럼 자잘하게 부서진  암청색 자갈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인부들이  호미와 손을 
사용하여 조심스레  검은 흙을 긁어내자  그 아래로 황토층이  조금씩 드러났다. 
역시 객토를 한 모양이라고 나이 많은 인부가  또 중얼댔고, 맞장구를 치듯 작은 
인부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인부들의  손이 한결 더 곰살맞고 진중해졌다. 결 고
운 황토 속에서 유골의 형태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자 냉기 같은 침묵이 잠
시 떠돌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내는 그  분위기가 무척 당혹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자꾸 느껴졌다.
  좌남우녀의 합장묘라고 하였다.  40여 년 세월 동안 고인들은 그렇게  황토 속
에 따뜻하고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고 그렇게 믿어졌다. 물론 온전한  형태는 못
되었다. 세월은 나무뿌리들보다 더 억센 것이어서  고인들은 이미 많은 부분들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늙은 인부 둘이 구덩이 속에  웅크리고 앉은 채 호미로 조심
스레 흙을 긁어내고 비질을 해가면서 두  개골이며 뼛조각 하나하나를 집어냈고, 
또 그것들을 칠성판 위에다 원래 모양대로 조각조각 맞추어가고 있었다.
  "유골이 성치 몬하네요." 짓무른 눈으로 등뒤를 힐끗 돌아보며 나이 많은 쪽이 
말하였다. "시신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구마는. 안 그렇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인은  목을 외로 꼬았고  이장은 헛기침을 
하였다. 사내는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특히나 남자분이 심하구마는..."
  그제서야 노인이 젖은 얼굴을  굳은 손바닥으로 훔치면서 혼자말처럼 두어 마
디 중얼거렸다. "우리가 그만치 험한 시상 지내온 거 아이가. 그래 알고 마 하던 
일이나 야물게 하소."
  네댓 자 될락말락 형색만의  칠성판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인 유골들을 내려다
보자니 사람의 몸뚱어리라는 게  무척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구조란 느낌이 불쑥 
들었다. 세월이 많은 것들을 걸러낸 탓이리라. 이 정도라면 내 손바닥 위에다 늘
어놓을 수도 있겠다고, 사내는 은밀히 상상해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
찌 그렇게 무거운 혼을  담고 살아야 하는 건지, 새삼 감탄스러워졌다. 먼지처럼 
미세한 안개비가 그 위로 푸설푸설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칠성판 
위에 누런 뼛조각들을 비비대며 나란히 누워 있는  두 분의 모습이, 지금까지 지
레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불행하거나 끔찍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인부
들이 그것을 창호지로 싸고 삼베끈으로  일곱 매듭을 지어 묶는 것을 그는 무연
히 지켜보고 있었다. 여위고 옹이진 그들의 손길이 제의를 치르듯 엄숙하였다.
  텃밭 한 귀에 쳐진 차일이 혼자서 비에  젖고 있었다. 날씨는 여전해서 좀처럼 
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안개비가 자욱하게 흩날리는 하늘은 아침보다  더 음
울해지고 있었다. 젖은 차일 자락 한 쪽이  무겁게 펄럭이고 있는 텃밭까지 그들
은 묵묵히 하산하였다. 이번에도 일행의 앞장을 선 것은 포크레인이었다. 아까보
다는 덜 전투적인  대신 개선장군 같은 당당함이 있었다. 거인의  걸음걸이로 성
큼성큼 산을 내려온 포크레인은 텃밭을 지나 곧장  그 아래 도로로 내려섰다. 그
곳에는 언제 왔는지  4톤짜리 트럭이 한 대, 적재함의 맨  뒤쪽 가림판을 내려놓
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포크레인이 트럭 꽁무니로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는 외
팔을 내려 땅바닥을 단단히  짚은 다음, 상체를 천천히 쳐들기 시작하였다. 흡사 
교미를 하려는 자세처럼  보였다. 캐터필러의 앞부분이 적재함  상판에 걸쳐지자 
돌연 격한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부릉부릉 기어올랐다.  그것은 꽤나 힘겹고 격렬
한 동작이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아주 익숙한 몸짓이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포크레인은 마침내 트럭의 적재함 위로 난짝 올라앉았고, 앳된 얼굴
의 포크레인 기사가 지금까지  붙박여 있던 운전석에서 침착한 거동으로 기어나
와 적재함 가림판의  운두를 밟고 길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곧장 트럭 
뒤쪽으로 돌아가더니 가림판을 세워 철컥철컥 고정시켰다.
  이장에게서 품삯을 셈해 받은 사람은, 그러나 포크레인 기사가 아니었다. 그때
서야 트럭 운전석에서  낯선 사내 하나가 천천히 몸을 드러냈는데,  뜻밖에도 넥
타이 정장 차림이었고 나이도 진작 오십 줄에  들어선 듯싶었다. 머리가 꽤 벗겨
지고 몸피도 괜찮은  편이어서 지방관공서 같은 데서  한나절 내내 졸다가 이제 
막 퇴근길에 오른 만년  서기 같은 인상이었다. 셈을 하기 전에  두 사람은 악수
를 나누면서 잠시 웃고 떠들었다. 그러나 셈이  끝나자마자 다시 한번 손을 잡는
가 싶더니 금세 등을  돌렸다. 트럭은 1분도 더 지체하지 않고 출발했다. 무성한 
숲을 거침없이 짓뭉개며 산등성이를 기어오르던 그 괴물은 이제 정력을 다 쏟고 
나서 고요히 휴식에  든 듯 한 마리 커다란  갑충처럼 트럭 위에 납작하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뿌연 안개비 속으로 금방 묻혀들고 말았다.
  "저 사람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카이!" 이장이 말이었다. "손 없는 달이
라꼬, 이 달  들어 맨날 두 탕씩 뛰는  거라. 난도 마, 천날만날 적자  보는 농사 
고만 치았뿌리고  읍내 나가서 장의사나  채ㄹ으마 시푸다 아이가.  요새 시골서 
되는 사업은 그거뿐이다 안카나."
  "돈벌기로 하마 거기 열번  더 쉽지러. 하모!" 노인의 대꾸였고, "어데요,  도둑
질 빼고는 시상에 숩은 돈벌이는 없다 아입니꺼." 인부 중 한 사람의 대꾸였다.
  젊은 이장이 또 말하였다. "돈만 벌 수 있으마 머를 해도 개안타카이. 요새 양
반 상놈 따로  있는 거 아이라카는 거는  돌 지난 아도 다 아는  기고. 종가재실 
개수한다꼬 관자다 얼매씩  걷어내란 소리들은 지 한  해가 넘지마는 누구 하나 
귀담아듣기나 하나, 내사 마  그쪽 사람들 보기 부끄러바서... 지난 가실 모사 때
도 지대로 얼굴을 몬 들겠더라카이."
  인부들이 텃밭 가장자리의 좀 움퍽한 곳을 택하여 새끼 네 타래를 두 개씩 나
란히 쌓아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다, 수습해온 유골이 담긴 관을 올려놓고 
두어 됫박의 석유를 끼얹었다. 그들은  다시 술을 치우고 두 번씩 절을 했고, 늙
은 인부들의 조언대로 노잣돈 몇 푼을 올려놓고 나서 이번에는 이렇게 외쳤다.
  "아제요, 불났심더 얼른  나오소! 아제요, 불났심더 퍼뜩 나오소!  아제요, 불났
심더 얼른 퍼뜩 나오소!"
  사내는 입을 헤벌린 채로 웃고 있었다.
  체구가 작은  인부가 노잣돈을 챙긴  다음 라이터를 켜댔다.  순간적으로 불이 
확 타올랐고, 그들은 반사적으로  뒤로 주춤 물러섰다. 시커먼 연기가 뭉클 솟으
면서 석유냄새가 코를 쿡 찔렀다. 시뻘건 불꽃이  금세 관을 에워싸고 무섭게 웅
웅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잠시 침묵하였다.
  "얼추 두어 시간은 태워야 됩니더."
  썩은 나무등걸들을 주워다가 불길  속으로 한참 던져넣고 나서 인부들이 술잔
을 돌렸다. 한 되들이 막소주는 이때를 위해 준비된 모양이었다. 나이 많은 인부
가 어디서 북어를 꺼내더니 삽날 위에다 놓고 호미자루로 자근자근 두들기며 중
얼댔다.
  "상가에는 늘 술이  있어야 되능기라. 안주는 이거마 됐고,  자아, 한잔씩 하이
소. 우예 맹숭맹숭한 얼굴로 기달리고 있겠심니꺼. 날씨도 썰렁하고."
  그랬다. 여전히  께질거리고 있는 날씨도 날씨지만,  무엇보다 흠뻑 젖은 옷이 
문제였다. 우의들을  챙겨 입었다고 해도 결국은  내의까지 젖어 있었다. 권하는 
대로 막소주를 목구멍으로  털어넣으면서 사내는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살갗에 
눅눅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몹시 지겨워졌던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불 앞
으로 조금씩 다가섰다. 기름냄새는  더 이상 없었다. 새끼타래가 돌돌 말린 채로 
줄줄이 불꽃을 피워올리고 있었고,  젖은 나무등걸이며 청솔가지들이 푸지직푸지
직 소리를 내며 검은 연기를 몽글몽글 토해냈다.  위에 올려놓은 관은 뜨거운 열
기를 받아 누렇게  그을리면서 조금씩조금씩 뒤틀렸다. 마침내  모서리마다 작은 
불꽃들이 촘촘하게 달라붙기 시작하였다.
  그들을 불을  둘러싸고 둥그렇게 선  채 다시 술잔들을  주고받았다. 얼굴들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무릎과 앞섶이 김을 내며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적당히 돌아서거나 비스듬히 자세를  바꾸어가며 젖은 옷을 고르게 말리려고 노
력하였다. 노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닫힌 공간처럼 아늑하고  따뜻한 기분이었
다.
  아이들 서넛이 개울바닥을 뒤지고 있다. 고동이며  가재를 잡느라고 오후 한나
절 내내 그러고 있는 중이다. 투명한 수면  위에서 난반사하는 햇빛 때문에 눈앞
이 자꾸만 어룽어룽해진다. 그래도 신눈을 두릿거리면서  한사코 물 속을 들여다
본다. 바위 틈서리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검은 고동들이  혀를 길게 빼어문 채 움
씰거리는게 보이고 또  간혹 가다 돌팍 밑을 설설  기어 다니는 가재도 눈에 띈
다. 하지만 그것들을 집어내는 일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특히 가재는 손
이 닫기도 전에  뒷걸음질로 재빨리 달아나버린다. 자칫하다가는  집게발에 호되
게 물어뜯기기도 한다. 하도 열심히 코를 빠뜨리고  헤매는 통에 머리가 다 어찔
어찔하다. 갑작스레 머리를 쳐들다가  그만 물 속에 픽 고꾸라지기도 한다. 얕은 
곳을 골라 다닌다고는  해도 어차피 옷은 젖어 있게 마련,  아이들은 낄낄거리고 
웃다 말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물탕을 끼얹는다.
  아이들이 모래톱 위로 줄줄이 기어나온다. 젖은 옷들을 일제히 벗어던진다. 하
지만 계집애는 그럴 수가 없다. 거리낌없이  잠지들을 달랑 드러내놓은 사내애들
이 짓궂게 장난질을  건다. 기어이 계집애의 울음보를  터뜨려놓고서야 얌전해진
다. 햇볕은 온누리를 가득가득  채우며 넘쳐나고 있다. 그렇듯 밝고 따뜻한 빛의 
무리 저쪽에  마을이 동두렷에 떠올라보인다. 한껏  기운 오후의, 너무나 고요한 
평화가 거기에 있다.
  "저승이라카는 기 정말로  있기는 있는 건가?" 문득  노인의 물음이다. 칠순의 
노인이 술기와 불기운으로 연시처럼 붉게 익어 있었다.
  "그거를 누가 알겠는기요?" 인부 중  나이 많은 쪽의 대꾸. "달나라 갔다가 왔
다는 사람은 있어도 저승  댕기온다카는 사람은 테레비에도 안 나오이꺼네 말임
더."
  "아이라카이!" 금이빨의 인부가  강하게 부인하고 나섰다. "삼천갑자  동방삭이
도 진작에  갔다왔고, 우리 마실  김면장도 저승꺼지 불리갔다가  게우 돌아왔다 
안카등강?"
  "메전면 김면장 말인교?" 이장의 물음이다.
  "하모. 기냥반, 재작년 가실인가, 읍내 누구 환갑잔치에 갔다오다가 마실 앞 개
골창에 꼬라박ㅎ다 아입니까. 과음해갖고 그래된기라. 거지반 죽은 죽은 거를 마
침 마실 청년이 보고 업어다놨더니 꼬박 사흘 밤낮을 인사불성타가 우예 살아난 
거라요. 월매나 반갑겠노. 식구들이 울며불며 붙잡고  물었더니 아 기 냥반이, 실
성한 사람맨치로  한참을 실실 웃어쌌더니마는 실토하는  말인즉 이랬단 안합니
꺼. 저승사자한테 붙잡히갖고 염라대왕 앞에 끌리갔더라 안카나, 아이고 내가 고
마 저승 문턱을 넘었뿌ㄹ구나 생각하이 눈앞이  깡깜해지더라고, 내 이래 불귀의 
객이 될 줄만 알았더면 집 나설 때 고 귀엽은 손주새깨 꼬추라도 한 분 더 만져
볼 거를 생각하이 억장이 무너지더라 안카요. 그래  무신 수가 없나 싶어 가마이 
보이꺼네 나, 염라대왕 쉬미가  관운장 그거매로 닷 발이나 되더라고, 옳지 싶어 
고만 그거를 잡고 죽자사자 매달ㄹ다.  안카나. 인간세상으로 다시 돌리보내고도, 
안 그러마 이 느무 쉬미 몽주리 뽑아뿌릴  끼다 그캄시로 말이재. 그라이꺼네 염
라대왕도 영 몬해보겠던지, 이늠아,  도로 보내줄 테니 지발 수염이나 놔라 그카
더라꼬. 그라자마자 마 눈이 번쩍 떠지더라 안합니꺼."
  "그 어른, 헛소리할 양반은 아이러지." 이장의 맞장구다.
  노인이 뒤를 이었다. "하모! 그런 이바구가 있고말구!"
  "없는 말이 우예 시상에 나돌겠심니꺼? 저승이라카는 말이 있능 거만 봐도 저
승은 확씰하게 있능 기라예. 이치가 안 그렇심니꺼?"
  "하모! 하모!" 노인이 연신 머리를 주억거렸다.
  노린내 비슷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 것을  진작부터였다. 불길이 절정을 넘어 
조금씩 숙져가고 있었다. 새끼타래가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숯덩이처럼 빨갛
게 달아 있었다. 인부가 쑤석거리자 빨간 불티들이  점점 떠올라 뿌연 안개비 속
으로 묻혀들었다. 맨 위에  놓여 있던 그 작고 초라하던 관은  이미 형체가 없어
졌다. 타고 남은 몇 토막의 뼈들이 불구덩이  속 여기저기에 흩어진 채 파르스름
한 불꽃을 내며 타고  있었다. 눈가가 짓무른 나이 많은 인부가  술과 화기 때문
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나무꼬챙이로 한 도막을 꺼내어 톡톡 두들겨
보더니 다시 불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붉은 숯덩이며 덜  탄 나뭇가지들
을 끌어모아 불길을 다시 살려놓았다.
  척척하던 옷이 대충  말라 있었다. 약골의 인부가 흙투성이 장화를  벗더니 질
척한 발을 내밀어 말리기 시작하였다. 이장이 좀  언짢은 표정을 지었을 뿐 다른 
사람들의 눈길은 변함없이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구둣발을 잠
자코 내려다보았다. 형체는 물론이거니와 색깔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
인 상태였다.  자신도 젖어 있는  발을 뽑아내어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하였다. 이유는 없었다.  옷이 눋는 듯한 예의 냄새가 콧속으로 언뜻
언뜻 스며들곤 하였다. 그러나 그다지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불길이 다시 사그라들기까지 그들은 한참을 더  기다렸다. 조금씩 지친 탓인지 
이번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바람소리가  젖은 풀잎
들을 흔들며 이따금 쏴아쏴아 지나갔고, 불 속에서  간혹 무엇이 탁탁 튀는 소리
가 났을 뿐이었다.  드물게 뻐꾸기 울음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꾸우꾹  하다가 말
았다. 비가 그칠 모양이라고 무심중에 사내는 생각하였다. 이번에도 이유는 없었
다. 그로서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을 포함하여 인부 둘, 그렇게 늙은
이들은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깨어 있는  두 사람은 왠지 눈길을 마주치
기가 어색하였다. 골똘히  궁리해보았지만 별로 나눌 말이  없었으므로 오랜만에 
담배를 한 개비씩 나누어 물었다.
  "형님은 아직도 혼잡니꺼?"
  문득 이장이 물었고, 사내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와 내등 그라고 삽니꺼? 나중 생각해서 웬만한 사람 하나 들어 앉히소 그마."
  이번에도 사내는 잠자코 웃기만 하였다.
  "니 사는 거는 괜찮나?" 한참  만에 사내가 문득 물었다. "우루과이 어쩌고 해
서 갈수록 힘든다며? 애들은 몇이라고 했나?"
  "서이 아입니꺼." 시무룩한 대답이다. "언제 신바람나서  농사지은 적 있심니꺼 
어데. 땅 파묵는  재주밖에 배운 기 있어야지요  뭐. 앗들 키아서 내보낼 때꺼정 
기냥저냥 버티야지 우얄낍니꺼."
  "그래야지. 어쨌거나 자네 참 장하다."
  "몬난 기지요 머."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다시는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텃밭  여기저기에 서 
있는 복숭아나무들을 향해 사내의 무심한 눈길이  열려 있었다. 진작 베어냈어야 
할 그 늙은 나무들이 아직은 풋내나는 열매들을 엉성하게 매달고 있었다.
  붉은 숯덩이와 짚을 태운 잿불 속을 샅샅이 헤집어가며 타고 남은 뼛조각들을 
죄 골라내고 보니  제법 많은 양이었다. 하기야  두 분의 것이 아닌가. 인부들이 
삽 위에다  그것을 담더니 빈 소주병으로  드윽득 갈았다. 그렇게 두  번에 걸쳐 
잘게 바수어진 다음 어디서 났는지, 두터운 요소비료 푸대에 쓸어담아졌다.
  "저 개울로 가서 한 줌씩 뿌려주소."
  인부가 사내에게 내밀었다. 그는  얼른 손을 내밀지 못하였다. 대신 이장이 받
아들고 앞장을 섰다. 두  사람은 도로를 가로질러 묵묵히 개울로 내려갔다. 그새 
냇물이 조금 더 불어났고, 당연히 황톳빛도 더 짙어져 있었다.
  "자 한 줌 집어소." 이장이 말하였다. 그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굳이 거부할 
것도 없다 싶었다. 그는 비료푸대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심상하게 한 줌을 움켜
쥐었다. 손바닥에 닿는 느낌이 의외로 부드럽고 따뜻하였다. 그는 물위를 향하여 
그것을 내던졌다. 잿빛 먼지가 조금 일었다.
  "한 번 더요!"
  사내는 주문대로 한 번 더 그렇게 하였다.
  "한 분만 더 하소!"
  사내는 한 번을  더 그렇게 하였다. 그러자 이장이 나머지를  한꺼번에 쏟아부
어버렸다.
  사내는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손을 씻었다. 물은 탁하고 차가웠다. 새벽 일찍 
고향을 떠난 고인이 몇 날 며칠을 걸어서 해질녘에 닿은 곳은 이 마을이라고 했
던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분은 아마도 이쯤에서  주저앉아 지친 발을 물에 담
그고 지는 노을을 망연히 바라보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그러자 문득 등
허리가 한정없이 허전해지면서 으스스 오한이 일었다.
  내가 복숭아 두 알을 외가네  밭에서 따왔고 선이 고 기집애가 그것을 냇물에 
씻고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맹세코!  그랬었는데, 그랬었는데... 갑자기  그 
사내가 내 따귀를  때렸었다. 거친 욕설과 함께.  그가 뭐라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다!  절대로! 왁살스럽게 눈물 그릉그릉한 눈으로 
바라보던 기억만 잊히지 않고 또렷이 남아 있다. 화인처럼 또렷이...
  사내는 진저리를 치면서 허리를 폈다. 그새 날이 좀 들기는 한 모양이었다. 안
개비처럼 뿌연 허공  저 너머에 고향마을이 어룽어룽 또 보였다.  지독한 오한과 
허기가 몰려들었다.
  "이제 읍내로 나가서 따끈하게 요기나 허세."
  사내는 서둘러 앞장섰다. 이가 소리를 내며 딱딱 마주칠 정도의 오한이었다.

    그는 화가 났던가?
  그 버스가 터미널을 출발한 것을 자정이  지나서였고, 도시의 미로를 빠져나오
는 데도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였다. 그래서 정작 고속도로를  타기 시작한 
대는 밤 한시가 가까웠을 무렵이었다. 심야버스였던 것이다.
  승객은 모두 해야  스무 명이 못되는 숫자였다. 좌석은 출입구가  있는 오른쪽 
창가로 나란히 여섯 개,  그리고 통로를 사이에 두고 왼쪽 창가로  두 개씩 일곱 
줄, 도합 서른 개였다. 자리가 남아돌았으므로  뒤쪽은 거의 비어 있었다. 승객들
은 등받이를 적당히 젖혀 상체를  편안하게 누인 자세로 대부분 눈을 지그시 감
은 채였다. 종점까지는 고단한  밤이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비디오는 아예 켜지 
않았고, 조명등도 낮추었다. 잠을 청해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
다. 진작부터 코를 고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머리 위에서 흐미하게 내비치는 불
빛이 승객들의 피곤한  이마를 푸르스름한 색조로 물들이고  있어 차 안이 마치 
커다란 수족관 같았다.
  고속도로는 어둠 속으로 끝간데없이 뻗어나갔다.  낮 동안, 때로는 밤중까지도, 
그렇게 자주  몸살을 앓곤 하던 길이  썰렁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상하행선 
모두 오가는 차량이 드물었다.  이따금씩 전방 어둠 속 저 멀리서  한두 점 불빛
이 작은 연꽃송이처럼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리고는  물결을 타듯 한동안 조용히 
흐르다가 점점 속도를 더하며 다가와  어느 순간 강렬한 빛을 확 내뿜으며 금세 
아득히 멀어져가곤 할 뿐이었다.
  가느다란 빗발이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저 을씨년스럽던  터미널에서 
출발시간을 기다리던 때는  물론, 시멘트 정글 같은 도시를 더듬어  나올 무렵까
지만 해도 공기는 건조했었다. 게다가, 바람  많은 환절기였다. 가뭄 대문에 고통
을 겪고 있는  사람은 비단 천식환자만은 아니던 것이다. 어쨌거나  가랑비가 시
나브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그것은  곧 하루살이떼처럼 전조등  불빛 속으로 
자우룩히 엉겨들었다. 길바닥이 이내  검게 젖었다. 바퀴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
렸다.
  1번 좌석, 그러니까 출입구  곁자리를 차지한 승객은 얼굴이 앳된 아가씨였다. 
그녀는 요란한 화장술과 얄궂은  헤어스타일 등으로 한껏 위장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10대를 채 벗어나지 못한 나이가 분명하였다. 밤차를 탄 탓일까, 조금은 얼
뜨고 또 조금은 긴장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그녀는 아직 잠들지 못
한 채였다. 지금  그녀의 불안정한 시선은 바로 옆 통로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군모 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일병 계급장이  붙은 그 모자의 주인은 통
로 건너 2번 좌석에서 고개를 잔뜩 꺾고  잠들어 있었다. 무 밑동처럼 허옇고 맨
숭맨숭한 머리통에다 동그랗게  테를 씌운 듯 모자자국이  선명하였다. 술냄새가 
났다. 얼굴을 처박은 가슴팍 언저리가 걸쭉한 침으로 젖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앞쪽으로 향하였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는 지금, 검푸른  어둠이 질펀하게 고인 들판 한가운데를 달려가고 있
는 중이었다. 두 개의 거대한 팔처럼 어둠을 휘젓고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두 
개의 거대한 팔처럼  어둠을 휘젓고 있는 전조등  불빛 아래 기다랗게 드러누운 
왕복 4차선  고속도로가 한사코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이마께가 
써늘해지는 느낌이어서  그녀는 새삼스레  벨트를 조였다. 이번에는  운전석으로 
눈길을 보냈다. 운전에  열중하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대각으로  비스듬히 잡
혀들었다.
  운전수는 묵묵히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머리통이 엄청 커보이고, 구레나룻을 
시커멓게 길렀고, 뭉턱한  콧잔등에는 적갈색의 보안경이 걸려 있었다. 옆모습만
으로는 사내의 표정을 제대로 읽어내기가 어려웠지만,  그러나 어딘가 타인의 시
선을 강하게 거부하는 분위기 같은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이마께가 
써늘해지는 것을 그녀는  느꼈고, 그러자 어떤 막막하고 무거운 감정에  잔뜩 짓
눌리고 있는  자신을 새삼 의식하였다. 밤기운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버스는 
지금 밤의 한복판을 가로질러가는 중이었다. 눈까풀이  자꾸만 처지는 것을 느끼
며 마침내 그녀도 조금씩 잠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승객들은 이제 모두  잠이 든 것 같았다.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
던 그 아가씨도 이어폰을  낀 채로 막 선잠이 든 모습이었다.  한 뭉텅이의 구릿
빛 코일같이 풍성하게 헝클어진 머릿단이 잠든  얼굴을 반이나 가리웠다. 그녀와 
통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은  군복의 청년은 일병 계급장이 달린 모자를 통
로바닥에다 버려둔 채로 열심히 코를 골아댔다.  여기저기서 코고는 소리가 서로 
다른 음색과 가락으로  제법 낭자하게 어우러졌다. 그러고 보면 깨어  있는 사람
이라고는 오직 한 사람-운전수뿐이었다. 그는 모든 승객들을  등지고 앉은 채 묵
묵히 앞만 내다보고 있었다.
  승객들 중 한  사람이 잠을 깬 것은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
다. 통로 왼쪽으로 세 번째줄 안쪽 좌석에  남편과 나란히 앉아 있던 노부인이었
다. 아마도 환갑 나이는  진작 넘어섰을 법한 그 부인은 온화한  인상과 함께 꽤
나 화사한 차림새여서,  바쁘고 고단하게 사는 사람들이나 신세 질  이런 심야버
스에는 도무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었
던 게 분명하였다.
  몇 차례  눈을 떴다 감았다 하던  그녀는 무심히 창 밖으로  시선을 내보냈다. 
때마침 눈부신 빛 한 덩어리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불쑥 나타나 벼락치듯 턱밑
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귀
때기가 잘려나간 듯 얼얼해졌다. 반대편 차선으로 이제 막, 덩치 큰 짐차가 하나 
엇갈려 지나간 것이었다.
  "왜 그러나?" 옆자리의 노신사가 부시시  깨어나며 물었다. 그 역시 말끔한 정
장 차림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집안 혼사에  다녀오는 길인 듯싶었다. 은백의 머
리칼 하며 두텁고 축 처진 귀 등으로 보아 유복한 말년을 보내고 있음이 분명한 
그 노신사는 창 쪽으로 앉은 아내를 향해 은근한 정을 담을 목소리로 묻고 있었
다. "어째서 소리를 지르고 그러는가? 혹  발 밑에서 쥐새끼라도 두어 마리 기어
나왔남?"
  그러자 옆구리를 가볍게 쥐어박는 시늉을 하며 부인이 되물었다. "이 버스, 당
신은 좀 이상하지 않수?"
  "뭐가?"
  "너무 과속하는 거 같지 않느냐 말이우?"
  그때서야 노신사는 차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깊은 물 속처럼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 눈에  띄느니 잠에 빠져 온통 느슨하게 풀어져  있는 모습들뿐이었다. 
그는 이마를 창에다  바짝 붙이고는 바깥을 한참 내다보았다. 검푸른  어둠이 들
판 하나 가득히  출렁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엉덩이를  약간 쳐들
고 고개를 잔뜩  뽑아올린 자세로 앞쪽을 살폈다. 운전석과 객석  사이의 칸막이 
때문에 운전수의 커다란 뒤통수와 각진 어깻죽지만 드러나 보였다.
  "그런 것 같구먼." 노신사의  미적지근한 대꾸였다. "하지만, 뭐가 보여야 말이
지... 꼭 굴속을 가고 있는 거 같애. 임자는 안 그런가?"
  사실이 그랬다. 버스는  길고 긴 터널 속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다 
먼 불빛이 잠깐씩 떠올랐다 사라질 뿐, 끝없는 어둠의 터널이었다. 눈에 띌 만한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전조등에서 쏟아져나온  두 개의 강렬한 빛기
둥만 바다 같은 어둠을 해집고 있었다.
  "암만해도 과속하는 거 같아 불안해요." 노부인은, 방금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엉덩이를 쳐들고 목을 한껏 늘여  세 자리 앞의 운전석으로 불안한 눈길을 던졌
다. 운전수의  앙바틈한 어깨근육에서 그녀는  단박 팽팽한 긴장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당신은 젊은애들  마냥 잘두 잡디다만 난  내낸 깨어 있었다우.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저 사람, 조심성이 없는 거 같애요. 무지무지 겁없이 달리고 있
다구요 지금..."
  "밤이라서 속도감이 더 느껴지는 건지두 모르지." 남자의 시퉁한 대꾸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여자가 발끈하였다. "마구잡이로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다니깐요. 저 사람, 혹시 넋을 빼놓구 앉아 있는 거나 아닌지 몰라."
  "설마..." 노신사의  떨떨한 대꾸다. "심야버스 기산데,  야간운전 한두 번 해본 
것두 아닐 테구... 내사 보기에는 기사 양반 뒤판이 아주 듬직한데 그래?"
 "뭐가 그래요? 저 뒤통수 하며, 겁없이 된통 미련스런 사내 같구만 뭘!"
  늙은이들답게 콩닥콩닥 입씨름을 하던 중이었다. 거칠  것 없이 내달리던 버스
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주춤주춤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급제동이  걸렸다. 승객들
로서는 방심한 채  잠들어 있다가 불시에 당한 일이었다. 끔찍한  소동이 벌어졌
다. 벨트를 채우지 않았던 사람들은 앞좌석  등받이에다 호되게 이마들을 짓찧거
나 혹은 위로 튕겨올라 선반 아래쪽을 정수리로 들이받았다. 또 더러는, 선반 위
에 올려놓았던 짐이며 가방들과 함께 통로바닥으로 털푸덕털푸덕 떨어져 나뒹굴
었다. 운전석 바로 뒤 2번 좌석에 축  늘어져 있던 일병은 벨트가 느슨했던 탓인
지 통로바닥의 그 모자 위에다 사정없이 얼굴을  처박고 깨어났고, 그 옆 1번 좌
석의 아가씨는 반대로,  부츠를 꿴 두 다리를 허공으로 벌렁  쳐들었다가 내려놓
았다. 한바탕  우스꽝스럽기도 한 일대소동이었지만  물론 누구도 웃을  수 있는 
상황은 못되었다.
  웃다니! 사실을 말하자면, 아비규환의 순간이었다. 특히  승객들이 한꺼번에 내
지른 비명소리가 실로  끔찍스러웠다. 그것은, 여러 부위의 쇳덩이들이 갑작스럽
게 서로 곁고 뒤틀리면서  일으키는 살벌한 금속성들과 뒤섞여 승객들의 공포심
을 한층 상승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그 서슬에, 그동안은 뒷자리에 박혀 보이지 
않던 대여섯 살짜리 계집애 하나가  마치 뱀에 물린 듯 날카로운 울음을 터뜨렸
고, 그러자 아이의 어머니도 덩달아 발작적으로 무슨 소린가를 마구 외쳐댔다.
  한마디로, 지옥 같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한때 제어력
을 잃고 비틀거리던  버스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되찾았다는  사실이었다. 덕분
에 더 이상  고약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랬다. 그들은 실은 버스는 자칫 
치명적인 운명에 처할  뻔했으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관성
과의 저 힘겨운  대결을 가까스로 버텨냈던 것이다. 운좋게 덫을  빠져나온 짐승
처럼 버스는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다시 어둠 속을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악몽의 순간이  지나고 나자 승객들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안도감과, 그리고 
허탈감 때문이었다. 한결같이  넋이 빠진 얼굴들을 한 채 다들  멍청하게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제 막 끔찍한 비극을 모면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나자 그들은 비로소 수런대기  시작하였고, 그러자 하나둘 화
를 터뜨렸다. 화살은 당연히 운전수에게로 날아갔다.
  "무슨 놈의 운전을 이 따위로 하는 거요?" 곤색 잠바때기를 걸친 남자  하나가 
중간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앞가슴께에 무슨 전자회사라는  글씨가 
주황색 수실로 박혀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  하나는 울
림이 썩 좋았다. "어떻게 된 거요? 당신 말이야, 방금 졸았지? 졸음운전한 거 아
니오? 이런 식으로 차를 모니깐 밤차 타기가 무섭단 말이야!"
  그러자, 그보다 두어  줄 앞쪽에서 몸집이 부대한 중년 여인이  잔뜩 부어터진 
목소리로 볼멘소리를 하였다.  어디다 호되게 부딪힌 듯 그녀의 얼굴  한쪽이 온
통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이거 봐요, 운전수 양반! 우릴  숫제 떼죽음시킬 
작정이라두 했수? 어째 요렇게 베라먹게스리 차를 몰아요 글세?"
  운전수에게 화를 내고 힐난하는  소리들이 잠시 더 이어지기는 했지만 그러나 
분위기는 곧 누그러졌다. 점잖은 충고가 뒤를 이었던 것이다.
  "잠자다가 고스란히 황천길 갈 뻔했잖나 말이야.  이보슈, 기사 양반! 지금부터
라두 사알살 좀 몰아요. 어차피  밤새우며 가기로 작정한 거, 괜시리 서둘 거 없
잖수? 안 그렇소?" 등산모에  카키색 파카 차림의 사내였다. 4번 좌석, 그러니까 
오른쪽 창가 두 번째 자리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던 그는 급제동의 순간에 상체
가 앞쪽으로 튀어나간 나머지 자칫 1번  좌석의 아가씨 위에 엎으러질 뻔했었다. 
생각하면 참으로  묘한 자세를 연출할 뻔하였으므로  지금도 귀뿌리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판이었다. 말을 내뱉고 나서도 그는  연신 민망스런 속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 참 낭패볼 뻔했소." 충격  때문에 약간 쉰 듯한 음성으로 노신
사가 말하였다. "이보시게, 기사  양반! 제발 과속허지 말고 천천히 가세. 길바닥
도 미끄러운 거 같은데  혹 실수허면 어쩌겠나? 뭣보담 안전운행 제일주의로 가
자구요."
  이런 상황이라면 마땅히 사과나 변명 한마디쯤은  있어야 할 운전수는, 그러나 
시종 묵묵부답이었다. 승객들은 굳었던 입을 풀어  저마다 한두 마디씩 내뱉었지
만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내는  도무지 이렇다 할 반응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승객들은 그 점을 시비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가려서 따질 만큼 
차분한 마음일 수가 없었다. 얼마나  끔직한 일을 당할 뻔했는가! 지옥의 벼랑끝
으로 내몰렸던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등골에서  살얼음이 서걱거리는 기분이었
다. 승객들은 운전수를 상대로 잠시 화를  내고, 심야운행의 위험을 지적하고, 안
전운행을 간곡히 당부했을 뿐, 그리고는 이윽고 잠잠해졌다. 한바탕 소동이 가라
앉고 나자 맨  마지막에 남은 것은, 그러나 어쨌든 살아남았다는  사실의 소중함
이었다. 승객들은 그제서야 안도감 속에서 그것을 오롯이 깨달았고, 그래서 각자 
조용히 침잠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사실이 그랬다. 어쨌거나, 살아남았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자질구
레한 사건사고들은 그만두고라도,  툭하면 대형참사가 터지곤 하는  세상 아니더
냐. 믿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제 하나도 없다. 세상은 지금 대란중인 것
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발  둥개고 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게 또한 사람 
사는 형편이다. 그날  운수에 맡기고 쏘다닐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결국, 어
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자신만은 억세게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저 행운만 바랄 
뿐. 그런데 지금 막 그  행운을 확인한 게 아닌가! 승객들 사이에는 은연중 감사
감동의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저  노부인의 얼굴은 어느새 온
화함을 되찾았고, 노신사의 표정에는 자기 운명에 대한 깊은 신뢰감이 내비쳤다. 
저 중년 여인은 앞가슴에다 두 손을 경건히 모아쥐고 있었다.
  이처럼 변해버린 분위기 탓에  승객들은 지극히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그들은 실은  버스가 여전히 과속중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랬다. 운전석을  차지하고 앉은 사내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단 한 마디 
사과의 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점이 더 중요한데, 그 이후에도 전혀 조심
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는 등뒤의 승객들을 단 한번도 돌아본 적이 없었다. 백
미러 쪽으로 눈길을 던지는 일도 역시 없었다.  짐꾼처럼 튼실한 두 팔로 핸들을 
감싸듯 움켜잡은 채, 전조등 불빛이 긴 터널을  만들고 있는 전방의 어둠만 묵묵
히 내다보며 속도를 점점 더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여전히 가랑비가 뿌리고  있었고, 길은 미끄러웠다. 그리고,  굽이 굽이 오르막
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마도 들판을 가로막고 우뚝 솟은 산줄기  하나를 버스
가 이제부터 타넘을 모양이었다. 우람하게 뻗어나간  겹겹의 능선들이 어둠 속에
서 어렴풋하게  드러나 보였다. 버스는 겉보기만큼은  새차가 못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거칠게 몰아세우는 주인  때문에 늙은 짐승처럼 금방 헐떡거리기 시작하
였다. 오를수록 골은 깊고 영은 높았다. 버스는 진한 물개똥 같은 매연을 뒤꽁무
니로 줄줄 흘리면서 가파른 길을 힘겹게 기어올랐다.  골짜기를 몇 굽이 돌아 산
중턱쯤 다다랐을 무렵에는 차의 진동과 소음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계속 무리하
게 밟아댄다면 머지않아 덜컥 멎어버리거나 아니면,  과열로 폭발해버릴 것 같았
다. 하지만 운전수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헐떡거리는 차를 상대로 그는 가
학증 환자처럼 점점 더 난폭하게 가속페달을 밟아대고 있었다.
  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 써늘하게 가라앉았다. 잠들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단 한 사람 예외가 있다면, 맨 뒷자리에 커다란 포대자루처럼 구겨박힌 채 
맹렬히 코를 골고  있는 사내 정도였다. 덩치가 보통 이상인데다  만삭의 임산부
처럼 배가 튀어나온  그 사내는 애초부터 고주망태가 된 상태였었다.  버스가 터
미널을 출발하기 직전 아마도 그의  친구들일 법싶은 다른 두 사내가 힘겹게 떠
메다가 그 뒷자리에 처박아두고 가버린 처지였으므로 설사 차가 천길 벼랑 아래
로 굴러떨어진다고 해도 쉽사리 깨어날 가망은  없어보였다. 그를 제외한 승객들
은 모두 깨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젖어들었던  그 감미로운 감정도 말짱 사라지
고 없었다. 그 대신,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싶은 불길한 예감이 다시 그들 모두
의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하였다. 버스가 깊숙하게  휘어진 산굽이를 돌아들 때마
다 다들 심장이 오그라붙었다. 확실히  저 운전수는 문제가 있다! 승객들 사이에
는 그런 의식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뭐라고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
은 없었다. 한결같이 뻣뻣하게 긴장된 시선들을  운전사의 뒤꼭지에다 꽂아둔 채 
말없이 흔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 운전수 말이우." 긴장과 침묵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무거워지자 노부인이 
가냘프게 떨리는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제 정신 아닌 게 확실해요. 절대루 제정
신 가진 사람이 아녜요."
  "제정신이 아니라면?" 노신사가 어눌하게  반문하였다. 그도 잔뜩 짓눌린 음성
이었다.
  부인이 잠시 주저하다가 선언하듯  재빨리 내뱉었다. "약 먹었다구요! 마약 같
은 걸  처먹은 게 틀림없어요!" 그리고는 스스로 두려운 듯 입술을 떨었다.
  "설마하니... 그럴 나이는 지난 거 같구만." 신사의 자신 없는 대꾸였다.
  "나이하고 무슨 상관이람!" 부인은 여전히 단호하였다. "잠을  쫓느라고 흔히들 
약 같은 걸  먹는다지 않수. 맨정신으로야 왜 저러겠수? 죽고  싶어서 환장한 사
람이래두 그렇지, 저  혼자두 아닌데 어째 이처럼 무지막지하게 차를  몬대요 글
세?"
  "버릇인 게지 뭐..."
  "버릇이라구요?" 부인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무슨 버릇? 다른 사람들 목숨
은 아무래도 좋구?"
  노신사의 목소리는 쥐어박힌  듯이 더 기어들었다. "아니면, 무슨 화나는  일이
라두 있었나?"
  "화가 나요?" 주변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만큼  노기를 담은 항변이었다. 
"우리가 왜 저 사람한테 화풀이를 당해야 하는 거죠?"
  노신사는 그쯤에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대꾸를 한 사람은 저 뚱뚱한  중년 여
자였다. 노부부의 뒷줄에  앉아 있던 그녀는 주저없이 커다란 목소리로  불쑥 대
꾸하고 나섰던 것이다.  "댁 말씀이 옳아요. 약을  처먹었거나 미쳤거나 둘 중에 
하나라구요!"
  버스가 출렁하는  느낌이었다. 승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모아졌다. 
두려움과 비난이 가득 담긴, 한결같이 차가운 눈빛들이었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
를 덧붙이려다 말고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살얼음이 잡히는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운전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사내
는 그런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단지 핸들조작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승객
들은 점점 더 심하게 헐떡거리는  엔진 소리를 들으며 차가운 침묵 속으로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긴 오르막길의 거의 꼭대기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휴게소를 알리는 전광판 
기둥이 저 앞쪽 어둠 속에서 불쑥 떠올랐다.  그러자 침묵을 깨고 갑자기 노신사
가 소리쳤다. "기사 양반! 우리 저기 들러서 좀 쉬어가세나!"
  그는 앞쪽을 향해 오른팔을 엉거주춤 쳐든  채로 거듭 말하였다. "잠시 허리도 
펴고 화장실도 다녀올 겸  말이오. 얼추 두어 시간은 온 것  같으니까 기사 양반
도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렇지 않소?"
  그는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둘러보며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밤차 타기가 이
래서 쉽지 않는 거라. 원, 이렇게 고단허고 땀나고 숨이 차서야 어디 더 배길 도
리가 있어야지..."
  "그래요. 제발 천천히  쉬어가면서 가십시다. 나는 가슴이 할딱거려서 죽을  지
경이라구요. 두 말 말구 쉬어서 가십시다..." 노부인의 맞장구였다.
  뒤를 이어 여기저기서  찬성 발언들이 쏟아져나왔다. 분위기는  금세 쉬어가는 
쪽으로 기울었다. 사실 상당한  시간을 달려왔고 또, 긴장했던 탓으로 요의가 느
껴지기도 하였다. 갑자기  원두커피가 마시고 싶어졌고, 더러는 따끈한 가락국수
가 생각났다. 벌써부터 철그덕거리며 여기저기서 벨트를 푸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을 태운 버스는 눈곱만치도 주저하거나 망설임 없이 그
대로 휴게소를 통과하고 말았다.
  승객들은 벌어진 입들을 다물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
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승객들의 요구가 이렇게 깨끗이  묵살당하다니! 더
욱더 놀라운 것은, 그러고도 운전기사는 가타부타 말 한마디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말문을 트지 못하였다. 급기야는 저  중년 여자가 또 발끈하고 일
어섰다.
  "이봐요, 운전하는  양반! 귀가 먹었어요? 다들  쉬어가자는데 왜 아무런 말이 
없는 거예요?"
  그러자 저 잠바를  입은 사내도 거들고 나섰다.  "저 냥반, 너무 시건방지구만 
그래!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사람이길래 손님 알기를 뭣같이 아는  태도냐구 지
금?"
  "입에다가 지퍼를 채웠나 보구먼.  그러니까 검다 쓰다 말 한도막 없지."  누군
가가 끌끌 혀를 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승객들은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고갯마루를 막 넘어선 
버스가 그때부터  내리막길을 사정없이  굴러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능적인 
공포감이 순식간에 그들의 분노와 비난을 삼켜버렸다.  당장의 위험이 더 다급해
졌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과 시비할 계제가 결코 아니던 것이다. 시비는커
녕, 그를 자극할 만한  일체의 언행을 삼가야 할 판이었다. 승객들은 치밀어오르
는 화증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철저히  자제해야 할 때라고  판단하였고, 그래서 
다들 긴장된 침묵 속에서 운전수의 거동만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버스는 점점 더  가속도가 붙었다. 흡사 제어장치가 고장난 차처럼  컴컴한 골
짜기를 향하여 거침없이  쏟아져내렸다. 전조등의 강렬한 불빛이  핥아대는 길바
닥은 빗물에 젖어 번들거렸다.  어둠 속에 텅 빈 채로 드러누운  그 길은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자주 꺾어졌다. 그러면  승객들의 상체가 반사적으로  좌측 또는 
우측으로 일제히  기울어지곤 하였다. 더러는  도로가 갑자기 사라지고  두 줄기 
불기둥만 허공중에 둥싯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재갈 물린 차가  온통 진
저리를 치면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었고, 승객들은 한꺼번에  요란한 비명들을 
토해내곤 하였다. 맨 앞자리의  아가씨와 그리고, 뒤쪽의 그 어린 계집아이가 특
히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은 더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피를 말리는 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승객들은 대부분 눈을 감은 채였다. 다
들 벨트를 단단히  조였고, 팔걸이나 등받이 같은 것을 단단히  부여잡은 자세였
다. 그리고는, 버스가 급경사진 코너를 돌 때마다 갈대처럼 이쪽저쪽으로 맥없이 
쏠리면서 온통 낭자한  비명들을 거푸 토해놓았다. 여자아이가  다시 까무러치듯 
울어젖혔고, 1번 좌석의 아가씨도 마침내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갖가지 끔찍한 환상들이 눈앞에  떠올라 심장
과 더불어 목구멍이 온통 얼어붙어버린 상태였다.  나중에는 비명조차 끙끙 앓는 
소리로 변하였다. 2번 좌석의  일병 역시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그는 통로바닥
에 떨어뜨렸던 모자를  집어 꾹 눌러썼는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땀으로 흠
뻑 젖어 있었다.  뒤통수를 번갈아 지켜보면서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불끈불끈 
쥐어 보고는 하였다.  저 중년 여인의 낯빛은  온통 퍼렇게 죽어 있었다. 의자를 
꽉 메운 채 출렁거리고 있는 몸뚱어리가 금세 바닥으로 쏟아질 것처럼 위태위태
해보였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쥐고서 아예  통로바닥으로 내려앉은 사람들도 여
럿이었다.
  어쨌거나, 그 지옥의 골짜기를 다 내려오기까지  승객들은 엄청난 공포감에 짓
눌린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산골짜기를 벗어나자마자 도로는  곧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널따란 들판을 두 
쪽으로 가르면서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나갔다. 가속과 급제동  사이에서 몸살을 
앓던 버스는  재갈 풀린 말처럼  다시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승객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은 그때부터였다. 얼어붙었던  입이 하나 둘 풀리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금방 험악해졌다.
  "야 이 개새끼야, 차 세워! 당장 세우지 못해?" 맨 먼저 울분을 터뜨린 사람은 
저 잠바  차림의 사내였다. 체구와는 달리  워낙 목청이 큰 사람이라  그의 노한 
외침은 다른 온갖 소리들을 일순 덮어버렸다.  그는 오만불손하고 방약무인한 운
전수를 당장 끌어내어 요절이라도 낼 듯이  살기등등하게 통로로 나섰다. 그러나 
어디에고 항상 더 성급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어서,  그보다 조금 더 앞자리에 앉
아 있던 저 중년 여인에게 기회를 선점당하고  말았다. 그녀가 한발 앞서 통로를 
가로막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비대한 몸통에  비해 통로공간은 너무 좁았다. 게다가 차는  또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는 상태였다. 통로를 꽉  메우다시피 하며 비척거리는 걸음걸이
로 운전석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이봐요, 아저씨! 지금 제정신 가지고 운전하는 거욧?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으
로 이러는 거요?  우릴 몽땅 떼죽임시킬 작정이 아니라면  뭣 땜에 이런 식으로 
차를 몰아? 대답해봐욧,  당장!" 여차직하면 머리끄덩이라도 틀어쥘 듯이 그녀는 
삿대질을 해대며 매섭게 추궁하였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은  사내는 묵묵부답이었다. 대답은커녕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여자는 더 발끈하였다.
  "이거 봐!  당신 귀머거리야? 사람 말이  말같잖나 왜 대답이  없어? 귓구멍이 
처막히기라두 한 거냐구?"
  그래도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운전수는 여전히 묵묵부답, 고집스럽게 앞만 내
다보고 있을 뿐 낯빛  한 점 변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장착된 로봇이
기나 하듯 사내의 옆모습은 냉담함을 넘어 오히려 무덤덤해보였다.
  "이 시건방진 사내  좀 보소. 내가 시방  지를 히야까시하는 중 아네!" 여자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더 이상 어찌해볼 여지란 없어보였다. 
그녀는 몹시  낭패한 눈빛을 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응원꾼을  찾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승객들은 그녀의 거동만을 지켜볼  뿐, 갑자기 무력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바마저 입을 다문  채 통로 중간에 엉거주춤 서 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곤혹감에  빠졌다. 당장 빰따귀를  올려붙이고 머리칼을 쥐어  뜯고 싶은 
충동으로 격렬하게 앓고  있었지만 그러나,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사
실도 그녀는 역시 알고 있었다. 뜨거운 충동과  차가운 이성 사이에서 심하게 갈
등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승객들은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뿐, 속
수무책이었다. 그녀의, 분노  대문에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몸뚱어리가 진땀을 흘
리고 있었다.
  그런 벼랑끝  상황 속에서도 버스는  여전히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계기판의 속도계를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거의 광란에 가까운 속도임을 족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운전수는 얼마든지  더 밟아댈 기세였다. 가랑비가 
이제는 제법 굵은  빗줄기로 변하여 앞 유리창을 두들겼고, 곧게  뻗어나간 아스
팔트 위로 물보라가  허옇게 피었다. 다른 차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더 짙어진 
어둠 속에서 세찬  빗소리만 가득하게 차올랐다. 예의 잠바 차림의  사내는 슬그
머니 제자리로 기어들었다. 넋이 빠진 표정이었다.
  "아주머니, 그만 제자리로 돌아가시지요." 노신사가 그녀를 달랬다. "그렇게 서 
있는 게 매우 위험해보입니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보세요, 점점  더 무섭게 달리고 있잖아요." 노부인의 말
이었다. 그녀의 저 온화하던 얼굴은 잿빛으로 굳어버렸고, 목소리도 갑자기 10년
은 더 늙어버린 노파의  것이었다. "우리 말을 들어먹을 사람이 아니에요. 저 사
람, 기어이 큰일을 내고  말걸요? 아마 거의 틀림없이... 첨부터 우릴 떼죽음시키
기로 작정을 한 거라구요! 오, 하느님 아버지!"
  노부인은 남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쿨쩍거렸다.  노신사가 아내의 어깨를 가
만히 감싸안았다.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운전석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통로바닥 
위로 무참하게 나동그라졌다. 버스에 또 한번 급제동이 걸린 때문이었다. 무거운 
푸대자루처럼, 비좁은 공간에 메다꽂힌 탓에 여자는  사지를 버둥거리기만 할 뿐 
일어나지 못하였다. 운이 좋았다고  해도 뼈 한두 군데는 상했을 법하였다. 주변 
사람들이 여럿 거들고 나서자 그녀는 연신 앓는  소리를 냈다. 어딘가 몹시 상한 
게 틀림없었다. 부축을  받아 간신히 제자리로 돌아간 그녀는 울분과  고통과 수
치심 때문에 종당에는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예의 일병이 
갑자기 결연한 태도로 모자를 벗어 통로바닥에다  팽개치며 벌떡 일어섰고, 그러
나 4번 좌석의  등사모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힌 것도 
그때였다.
  "우리 냉정합시다!" 등산모의 사내가 엉거주춤 일어서서 말하였다.  "흥분은 절
대 금물입니다. 잘못하면 커다란 불행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옳은 지적이었다. 승객들은  모두 몸서리를 쳤다. 이제 모든 게 분명해
졌다. 지금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자신들의 생명을 움
켜쥐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승객들은 가슴  섬뜩하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랬
다. 생사여탈의 권한을 틀어쥐고  있는 자는 하느님도 악마도 아니었다. 저 운전
석을 차지한 채 이쪽으로  뒤통수만 보이고 앉아 있는 바로 그  사내, 차를 타면
서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바로 그  사내였다. 승객들은 두려움에 가득 질린 
눈으로 새삼스레  그를 지켜보았다. 여전히 얼굴은  없었다. 하나의 견고한 벽처
럼, 그들로부터 등을 돌려댄  채로 무심히 앉아 있는 뒷모습만 볼  수 있을 따름
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앞자리에 계신 분들은 가급적 뒷좌석으로 옮겨  앉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통로에 선 채 등산모가 말하였다. "중간 이후가 그래도  안
전할 듯싶습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런  속도에서 사고가 발생한다면 어느  자리인들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랴마는, 그래도 앞자리  승객들이 치명적일 확률이  훨씬 높다고 
생각되었다. 맨 먼저  움직인 사람은 1번 좌석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재빨리, 잠
바 입은 사내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세 번째  줄에 있던 노부부는 서너 줄 더 
뒤쪽으로 옮겨가서 통로를  사이에 두고 따로 떨어져 앉았다. 나란히  비어 있는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몇 사람이 더 자리를 바꾸었고, 2번 좌석의 일
병은 마지막까지 주저하다가  결국 맨 뒷자리, 저 술푸대처럼 처박힌  채 잠들어 
있는 사내 곁으로 옮겨갔다. 몹시 자존심 상해하는 표정이었다.
  창밖 어둠 속에서는  굵어진 빗발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멀리서 이따금
씩 떠오르곤 하던 마을의 불빛들마저 이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모든 그것을  지워버린 때문이었다. 버스는 어둡고 습기 찬  공간을 꿰
뚫으며 계속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였다. 바퀴소리와  엔진소리가 활주로를 막 이
륙한 비행기처럼 한결  날렵하고 매끄럽게 어우러졌고, 그럴수록  파멸의 공포감
은 걷잡을 수 없이 점점 더 커졌다.  끔찍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남자들의 토막난 
신음과 여자들의 짓눌린 울음소리가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등산모의 사내가 통로를 따라 천천히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좌우의 빈자리
들을 지나 운전석  곁에까지 다가선 다음, 왼손으로는 운전석 뒤의  쇠기둥을 잡
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무릎
을 짚고  허리를 낮춘 다음  차분하게 계기판을 들여다보았다.  운전수의 콧김이 
느껴질 정도로 지근거렸다. 속도계의 엄청난 수치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내색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호흡이 잘 맞는 조수이기나 하듯 운전수와 똑같은 투
로 전방에다 눈길을 박은 채 다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전조등 불빛은 이제 두  개의 거창한 물기둥으로 변해 있었다. 저  앞 어둠 속
으로부터 물보라가 한가득 끓어넘치고  있는 고속도로가 마치 머리도 고리도 보
이지 않는 한 마리 거대한  뱀처럼 무수히 반짝이는 금비늘들을 털며 곧추 일어
서고 또 일어서곤 하는 것을  그는 보고 있었다. 그것은 또, 모든 것을 빨아들이
고 있는 거대한 수렁  같았다. 예외는 있을 수 없었다. 자신도, 운전수도, 그리고 
어쩌다 운명을 함께하게 된 다른 모든 승객들과 버스까지도 깡그리 그속으로 빨
려들고 있는 느낌에 그는 온통 압도당하였다. 절체절명의 느낌이었다. 그는 시선
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운전수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것은 참으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운전
수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혹 착각이었던가? 갈색  보안경 너머에 음험하게 숨어 
있는 눈빛은 잘 읽을 수 없었다고 쳐도  그러나, 돼지털 같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돋아나 있는, 그 검푸른 빛깔의, 입 언저리에는 분명 음습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
고 그는 확신하였다. 허리를 편 그는 아무 말 없이 1번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어느 순간부터  차의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한 
사람, 그 운전수를 제외하고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승객들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 죽음의 공포와 사
투를 벌이고 있던 그들은, 한순간일망정,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차리
지 못하였다. 절체절명의, 피를 말리는 상황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었기 때문
이다. 하지만, 결코  환청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참으로  한가하고 태평스
럽게 코를 골아대는 소리였다. 승객들은 그대서야 비로소, 저 뒷자리에 구겨박힌 
채 잠들어 있는 술꾼을 기억해냈다. 그 덩치  큰 사내야말로 참으로 대단한 술꾼
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간 승객들이 겪었던  그 끔찍스러운 상황과는 철저히 무관
하게 그는 여전히 기세좋게 드르릉드르릉 코를 골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왜 갑자기 그 소리가 승객들의  귀를 새삼스레 파고들었던가? 그것은 분
명 기이한 노릇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곧 사정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째는 세
차게 쏟아지던 비가 어느새  멎어 있었고, 그리고 둘째는, 이거야말로 기적 같은 
사실인바, 그처럼 고집스럽게 미친 듯이 내달리던  버스가 어느결에 순한 나귀처
럼 얌전해져 있었던 것이다. 승객들 중에는 문득, 그렇다면 악몽을 꾸었던 건 아
닌가 하고 주위를 뚤레뚤레 둘러보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단지, 일진이 나빴던 것이다.  하필이면 지랄 같은 버스에 걸려든 게 불운이었
다. 30분 앞서  출발한 차를 탔더라면, 혹은  30분 뒤에 출발하는 차를 탔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직은 무사하며, 머
지않아 목적지에 닿을 것이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승객들은 차의 무리  없는 주행 속에서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긴
장과 노여움이  누그러지면서 낯익은 평화-저 일상  중에서 종종 경험해왔던-가 
그들의 마음을 푸근히 가라앉게 만들었다.
  위험한 순간은 더 이상 없었다. 버스는 쾌적한  속도로 남은 여정을 끝내고 마
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터미널로 진입한 차가 동체를 한두 번  가볍게 출렁
거리고 나서 점잖게 멎었고 이어 출구가 매끄럽게 열렸을 때, 그랬다, 일부 승객
들은 운전수에게 보여준  그 감사의 표시는, 그러므로 거짓 없는  감정의 표현이
었던 것이다. 일테면, 저 노부인이 그랬다. 남편보다  한 발 앞서 출구로 나온 그
녀는 운전수의 등을 토닥이며 거듭거듭 말하고 있었다.
  "운전사 양반,  정말 수고가 많았수. 얼마나  피곤허우? 정말이지 난  너무너무 
감사해..." 그녀의 얼굴은 무사귀환의 기쁨 때문에 평소의 온화함을 넘어 거의 눈
부시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노신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꽤나  지치고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천천히 차에서  내려섰는데 그 거동  하며 뒷모습이 노인티가  완연하였다. 말이 
없기로는 저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지나간 시간을 이미  마음에 담고 
있지 않았다 통로에서부터 열심히  밖을 기웃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마중꾼
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운전석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차에서 내
렸다. 그런가 하면,  저 일병은 좀 색다른 태도였다. 차에서  내려가기 전에 그는 
운전수의 정수리에다 꼬챙이 같은 시선을 박은 채  잠시 뻣뻣하게 서 있었다. 구
겨진 자존심 때문에, 일병 계급장이 달린 군모를  푹 눌러쓴 그의 얼굴은 도무지 
편하지가 못하였다.
  더러는 한두 마디씩 감정이 담긴  말들을 뱉기도 했는데 저 대여섯 살짜리 계
집아이를 데리고 탔던 젊은 어머니가 말하자면 그런 쪽에 속했다.
  "당신은 애들도 없어요? 운전이라도 해먹고 살려거든 맘뽀부터 곱게 가지라구
요!" 말은 순했지만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그녀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가장 험한 말들을 뱉은 사람은 저 뚱뚱한  중년 여자였다. 한바탕 걸쭉한 욕설
을 퍼부은 다음 그녀는,  온몸이 쑤시고 저린다면서, 진단서를 떼어 기필코 니놈
을 고발하고 말겠노라고  거품을 물었다. 하지만 종당에는 저 잠바  차림의 사내
로부터 위로와 부축을 받으며 그다지 어렵지 않게 승강대를 내려갔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그런 식으로  뿔뿌리 흩어져간 후에도 마지막까지 차 안에 
남은 사람은 둘, 아니 셋이었다. 운전수와  등산모의 사내, 그리고 맨 뒷자리에서 
여전히 코를 골고 있는 그 덩치 큰 사내.
  등산모의 사내가 운전석을 향해 진작부터 던져두었던 시선을 마침내 거두어들
이고 나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통로를 거슬러 맨 뒷자리까지 갔고, 
거기서 한동안 실랑이를 치른  끝에 아름드리 술푸대처럼 출렁거리는 사내를 떠
메다시피 하여 다시 출구  쪽으로 나왔다. 그동안 운전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팔은 여전히 핸들을 감싸쥐고 고개를 약간 꺾을 채로 그는 묵묵히 앉아 있었
다.
  덩치 큰 취객을 떠메고 차에서 내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등산모의 사내는 그 
힘겨운 노력중에도 운전수의 거동을 놓치지 않았다.  비좁은 출구를 간신히 빠져
나온 다음 그가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 운전수의 얼굴이 비로소 이쪽을 향해 
정면으로 열려 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 보안경을  벗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그저 맥빠지고 꾸적꾸적한 얼굴이 하나 거기 있었다.

    <해설>
    문밖에 선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연민의 시선
    -이동하론
    정호웅

    1. 국어 문장의 한 전범
  이동하의 소설은 솜씨 좋은 소목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정교한 가구와 같은 
느낌을 준다. 빈틈없는  구성, 적확한 어휘 선택, 그 어휘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외따로 놀지 않게 제자리를 찾아 앉히는 정확한  문장 등의 요인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장인이다.
  비문과 오문이 범람하는 작금의 소설계를, 국어  글쓰기의 전범으로 내세울 수 
있는 문장이 아직도 정립되어 있지 않은 한심한 현실을 굽어보며 이동하의 소설
은 이 점에서 우뚝하다.  모든 글쓰기의 출발점이며, 글쓰는 이라면 언제나 거듭
거듭 되돌아보아야 할  바로 그곳에 이동하의 문학은  몇몇 다른 문장들과 함께 
외롭게 놓여 있다.

    2. 대화적 독서
  단정하고 깔끔한  이동하의 문장 안쪽에는 그러나  자신의 존재성을 회의하는 
영혼의 짓눌린 독백이 우울하게 울리고 있다. [지붕위의 산책]을 보자.
  이상했다. 남편이 거기  있었다. 아침에 출근한, 그러므로 당연히  직장에 나앉
아 있어야 할 남편 성문이 거기, 경사진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
  "당신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라고 그녀가 물었다. 곧바로 대꾸를 못하고 우
물쭈물하던 그가 한참 만에야 어눌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냥... 바람이나 좀 쐴려고..."
  그가 발을 옮겨딛을 때마다  기왓장들이 파싹파싹 부서져서 경사진 골을 타고 
뜨락으로 좌르르 좌르르 흘러내렸다.
  그랬다. 지난밤의 꿈은 본명 그런 것이었다.
  -[지붕 위의 산책]

  아내의 꿈속에 파싹파싹 부서져  흘러내리는 기왓장을 딛고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 그 사내의 혼은 공중에 떠  지향점도 없이 헤매다닌다. 그는 엄
연히 아버지이고 남편이며  또 무엇무엇이다. 그러나 또한 그는 그  아무것도 아
니기도 하다.  이런저런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누구이면서도 동시에  그 관계의 
틀밖에 외따로 선 존재이기도 한 그는 말하자면 경계인이다.
  경계인이라는 점에서 그는  자기가 주인이 되어 꾸려가는  세계, 곧 <낯선 바
다>에 대한 꿈을  품고 사는 [낯선 바다]의 남편이며, 어느날  갑자기 세상의 텅 
비어 있음에 맞닥뜨려 당혹해하는  [빈 강]의 사내이며, 유서에 적어넣을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 세상에 대한  적의 폭발시키고야 마는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
니]의 청년이며 그런 그를 깊이 이해하는 화자인 교수이다.
  무엇이 그들을 경계선상에 세웠을까. 그 폭력의  실체를 작가는 보여주지 않는
다. 뿐만 아니라 그들  경계인의 내면에 대해 직접적으로 탐구하지도 않는다. 경
계 지점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할  뿐인데, 이 점에서 이들 작품
의 세계는  끝이 열려 있는 성격의  것이라 할 터이다. 독자의  독서는 그러므로 
이 작품들의 마지막에서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참된 의미에서의 대화적 독서
를 향해 열려 있는 작품들인 것이다.

    3. 폭력성의 탐구
  이동하는 [폭력 연구] 연작을 통해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상처 입히는 폭력에 
대한 탐구를 깊이 수행한 바  있다. [성가신 죽음], [땀], [네 개의 배역], [가을볕 
속 잠자리떼], [그는 화가 났던가?]등은 [폭력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작가의 날카로운 투시력이 아니었다면 주변에서 우연히 마주친 일을 이야기하
듯 들려주는 평범한  신변소설에 머물렀을 터인데, 이들 작품은 이를  훨씬 넘어
서서 우리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깊은 탐구로 나아간다.
  [성가신 죽음]은 현대인의 파편화된 삶의  질서가 어째서 폭력인가를 깨우치는 
작품이다. 장례는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 이승을  떠나는 혼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위무하고 다스리는 의식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 이승을  떠나 죽
는다는 것은  생명의 소멸이며 이 세상으로부터의  사라짐이며 이승에서는 모든 
관계로부터의 단절이니  지극히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죽는다는 것은  또한 한 
생명의 완결이니  그 삶의 내용과  과정이 어떠하든 엄숙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육친이 아니라 하더라도 함께  슬퍼하는 것이 인간의 예의이고, 경건하게, 온 정
성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산 자들의 도리임은 물론이다.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것은 다른 한편 한  인간의 생애를 기억속에 저장하는 
것이다. 장례는 죽은 자의 일생을 역사화하는 출발이기도 한 것이다.
  단자화된 개인과 가족만의 편리와 이기를 좇아갈수록 파편화되는 현대인의 삶
의 질서는 죽음과 장례의식의 그 같은 의미를 돌아보지 않게 하며 산 자의 도리
를 저버리게 만든다. 장례의식은 물론이고 죽음  자체를 성가신 것으로 받아들이
는 삶의 질서는 현대인을  과거로부터 절연시켜 현재에 고착되게 이끌며 죽음으
로 비로소 완결되는 인간의 엄숙한 존재성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그리하여 
모두가 아파트의  네모진 칸에 가두고 마는데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사정을 꿰뚫어보는 눈을 지닌 주인공이 <세상  사는 일이 온통 귀찮고 지겹게만 
생각되었다>([성가신 죽음])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렇게 본다면 [성가신 죽음]은 우리 시대의  근본적 삶이 질서에 대한 통찰로 
깊은 작품이라 할 것이다. 생활 주변의 사소한  일상사 하나를 끌어올려 이 같은 
깊이를 여는 작가의 솜씨는 놀랍다.
  [그는 화가 났던가?]는 일종의 우화이다. 심야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이른바 심
야고속 안에서 생긴  일이다. 버스는 비가 내려 미끄럽기조차 한  어두운 밤길을 
무서운 속도로 질주한다. 길이 굽은 곳에서는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도로 밖 캄
캄한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칠 위기를 넘기기도 하면서  미친 듯 내달리니 스무 
명이 채 안되는 승객들은 생사의 경계에 놓인  셈이다. 아우성을 치고 거친 운전
을 비난하지만 운전수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는 폭군이다.
  그랬다. 운전석을 차지하고 앉은 사내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단 한 마디 사과
의 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점이 더 중요한데, 그 이후에도 전혀 조심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는 등뒤의  승객들을 단 한번도 돌아본 적이 없었다. 백미러 
쪽으로 눈길을 던지는 일도 역시 없었다. 짐꾼처럼  튼실한 두 팔로 핸들을 감싸
듯 움켜잡은  채, 전조등 불빛이 긴  터널을 만들고 있는 전방의  어둠만 묵묵히 
내다보며 속도를 점점 더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화가 났던가?]
  그는 승객들의 안전이라든가 그들의 아우성이라든가 비난 등등에 대해서 아무
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자기 방식의 운전에만 몰두했을 뿐이다. 왜 그랬
을까? 그는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일까? 작가는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는다. 다
만 그의 무뚝뚝한  어깨와 무표정, 그리고 운전을 다  마치고 난 그의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그저 맥빠지고 꾸적꾸적한  얼굴>을 작품 마지막에 보여줄 뿐
이다.
  이동하 특유의 열린  구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인  셈이다. 당연하게도 
독자는 마지막에서 다시 출발해야만  한다. 대화적 독서, 작품에 그려진 것에 대
한 이해가 아니라 작품에 그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구축의 독서로 나아가야 하
는 것이다.
  운전의 폭력에 대한 승객들의 반응은 갖가지다.  그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것도 
독서의 재미이겠는데, 그중에서 나는 한 사내의 반응을 특히 주목한다.
  덩치 큰 취객을 떠메고 차에서 내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등산모의 사내는 그 
힘겨운 노력중에도 운전수의 거동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났던가?]

  그 사내는 다른 승객들과  달리 큰소리로 울부짖거나 운전수를 비난하거나 그
에게 호소하거나 하지 않았으며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도 운전수에게 감사하거나 
적의를 드러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내 다만 운전수의 거동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 사내는 이 
지리멸렬의 인간 삶과 세계를 깊이  통찰해 열린 구성의 소설세계 속에 담아 보
여줄 뿐 자기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작가의 분신일지도 모른다.
  한편 [땀]은 분단으로 인한 이산 현실의 폭력성을, [네 개의 배역]은 계층적 억
압질서의 폭력성을, [가을 볕  속 잠자리떼]는 느닷없이 들이닥쳐 스스로의 생명
을 끊도록 충동하는  어떤 무엇(그것이 무엇인지 작품은 드러내지  않지만)에 내
재한 폭력성을 각각 우울한 어조로 보여준다.

    4. <말없음>의 소설미학
  이동하의 문학  뒤쪽에는 언제나 어두운  과거가 드리워 있다.  대체로는 숨어 
있지만 어느 순간 시간의 장막을 뚫고 느닷없이 튀어나와 현재화하는 그 과거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6, 25체험이다. 작가의 초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우울한 귀향]이 정면에서 다루었던 그  아픈 과거를 [문 앞에서], [젖은 옷을 말
리다] 등에서 우리는 새롭게 만난다.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의 기억을  중심으로 여전히 핏빛으로 음산한 그 과거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정직하다. 이데올로기나 사회학적 분석틀을  앞세워 관념
화하거나 용서니 화해니 하는 허울좋은 말로 사실 자체를 무화시키고자 하는 일
반적 경향과는 달리 그는 그 과거를 기억하고 정직하게 아파한다.
  사내는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손을 씻었다. 물은 탁하고 차가웠다. 새벽 일찍 
고향을 떠난 고인이 몇 날 며칠을 걸어서 해질녘에 닿은 곳은 이 마을이라고 했
던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분은 아마도 이쯤에서  주저앉아 지친 발을 물에 담
그고 지는 노을을 망연히 바라보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그러자 문득 등
허리가 한정없이 허전해지면서 으스스 오한이 일었다.
  -[젖은 옷을 말리다]

  한 사내가 육친의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왔다. 그는 면례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인부들과  함께 유골을 태우는 불에  젖은 옷을 말리며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이 <말없음>이야말로 이 작품의 숨은 주제이다. 그 말없음은 
과거를 떠올리고 나름의 생각을 이어가지만 그것을 선/악, 미/추, 진실/허위 등의 
가치항으로써 규정하지 않는 태도, 3인칭 시점(이동하의 최근 소설 대부분은 3인
칭 시점을 취하고 있다)로 인해 더욱 뚜렷이 부각된다.
  묘한 것은 아무런 말도 없는데 오히려 그  과거의 참혹함, 상처가 더 뚜렷하고 
강렬한 것으로 살아난다는 사실이다. 묘사와 구성의  힘 때문인데 이는 의미심장
하다. 오랜 세월 한국소설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갇혀 있었다. 독자를  계몽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지나
치게 앞섰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묘사와 구성을 홀시하고 말을 앞세우는 소설미
학이 지배하게 되었다. 묘사와 구성을 홀시하고  말을 앞세우는 소설미학은 이분
법적 대립구조의 설정으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이분법적 대립구조는  복잡한 대
상을 효율적으로 파악하고 드러내는  데 대단히 효과적이지만 동시에 대상의 단
순화, 유형화란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동하의 소설을 우리 소설의 이 
같은 한 문제점에 대한 근본적 반성의 촉구이다.
  중편 [문 앞에서] 또한 6, 25의 기억과 연관된 작품이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갔다. 어린  시절 이후 <문 밖>에서 떠돌았다는 자각에  이르는 한 사내
의 쓸쓸한 자기인식,  <진작 칠십 고희를 넘어선 아버지와  그리고, 오십 지천명
을 코앞에 둔 아들>([문  앞에서]) 두 사람의 육친애,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를 
공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이, 문밖에 선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의 거리 등을 중요한 내용소로 포함하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
은 마지막 두 내용소이다.
  그는 헌옷꾸러미를 한 손에  들고, 또 한 손으로는 노인의 팔을  부축한 채 가
등이 하얗게 깔린  밤거리를 걸어갔다. 젊은 남녀 한 패거리가  왁자지껄하며 지
나갔다. 두 부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문 앞에서]

  마지막 두 문장  사이의 날카로운 단절이 핵심이다. 한 패거리의  젊은 남녀와 
두 부자 사이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심연을 사이에 두고 단절되어 있
다. 그 단절은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것이면서 
동시에 문밖에 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것이다.  주인공은 아버지를 
두고 <남루가 당신의 생리>라 말하고 유년 이후 자신의 반평생은 문 밖을 떠돈 
것이었다고 말하는데 두 부자는 과거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 남루한 문 밖 인생
을 살아왔다는 점에서 하나이다.
  그렇다면 문 밖을 떠돈다는 것에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문 안에 들
어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작품은 이에 대해 아무런 답
도 제시하지 않는다.  아쉽다. 이동하의 소설이 이분법적 대립구조와 무관하다는 
것은 유의미한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그 속에는  관계에 대한 탐구가 충분하지 
않다는 문제점이 들어  있다. 그의 소설 대부분이 짧은 단편이라는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문 밖으로 밀려나 남루한  몰골로 변두리를 서성대는 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깊은 연민으로 가득 차 읽는 사람을  위무한다. 그 연민의 마음이 수작인 
[물풍선 던지기]의 인물들을 한 덩어리로 묶었다.
  뭐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여  곤혹감에 빠진 나는 열심히 술을 권하는 것으
로 소임을 하였다. 그 결과로  장씨는 더 흠뻑 취해버렸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
니어서, 우리가 마침내  그 포장마차의 휘장 밖으로 나섰을 때  둘은 어깨동무로 
서로를 의지하고서야 간신히 다리를 지탱할 수가 있었다.
  ...(중략)...
  우리 둘은 한덩어리가 되어 비틀거리며 어둠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물풍선 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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