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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

by Casey,Riley 2023.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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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왕을 죽였는가
이덕일


 
    1장 제12대 인종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
  야사는 어김없이 대비 문정왕후(1501-1565)윤씨의 인종독살설을  전하고 있다. 야사가 전
하는 내용은 이렇다. "언제 우리 모자를 죽일  거냐?"고 인종을 핍박하던 대비가 하루는 만
면에 웃음을 띄면서 맞아주더니 다과를 내놓았다. 인종은 계모 윤씨가 난생 처음 자신을 반
겨주는 것에 감격해 맛있게 다과를 먹었는데, 그 후 앓기 시작하더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
다. 
  인종이 죽은 후에는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재위:1545-1546)이 즉위하였고, 이어 곧바로 궁
중 내 인종의 지지세력들이 축출되고 죽어갔다. 그 죽어간 세력 중에는 인종의 친척뿐만 아
니라 사회의 희생자인 사림파도 있었다. 이 사실은 당시 사대부들이 인종 독살설을 널리 믿
게 되는 구실이 되었다. 인종 독살설은 이렇듯 인종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고 죽어간 세력들
이 제기한 의혹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문정왕후가  조선의 국가이념인 성리학을 무시하며 
불교를 숭상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명종때 편찬된 <인종실록>은 물론 인종 독살설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인종실록>은 인
종의 사인을 중종의 장례때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러나 <인종실록>의 기록을 세밀히 검토해보면 이 기록도 인종 독살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인종은 정말 독살되었을까? 그 죽음의 상황에 접근해 보자.

    페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인종의 아버지 중종은 맏아들이 아니었으므로 왕이 될 수 없었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
들이었고 성종의 맏아들은 폐주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조선의 역대 임금 중,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 유일한 임금이었다.  탁월한 
시인이었던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거부했다. 그는 공자를 모신 성균관을 기생들의 유원지로 삼음으로써,  조선에
서 그 누구도 거부하지 못했던 공자마저 무시했다. 성균관에 모셨던 공자 이하 모든 선현들
의 위패는 고산암으로 내쳐졌다가 다시 음악을 맡아보는 관청인 장악원에 방치되었다. 이렇
듯 사대부들리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공자의  위패를 방치하고 제사까지 페지한 것은  큰 
사건이었다. 이는 조선의 지배이념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서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아랑곳하지않고 국립 관료 양성소인 태학의 선비들을 쫓아내고 무당을  불
러모아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만약 연산군이 자신의 쾌락과 유흥을 위해석가 아니라 성리학에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이
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런 행위를 했다면 그는 오늘날 새로운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
나 연산군은 기조의 이념과 가치 체계를 우숩게 여겼을 뿐,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정치이념
이난 가치 체계를 수립하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연산군이 성균관과 태학을 폐하자 사대부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선은  임금 개인의 
나라가 아니라 전체 사대부들의 나라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결국 사대부둘은 1506년 
쿠데타를 일으며 연산군을 쫓아낸다.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조선 개국 이래 최초로 신하들이 
임금을 끌어내린 이 사건은, 중종의 이름을 따 '중종반정'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중종은 반정
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정 달일 반정군이 사저을 에워싸자 진성대군은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오해
해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부인 신씨의 만류로 하인을 시켜  집 주변을 살펴보니 말 머리가 
집 밖으로 향해 있어, 자신을 죽이려는  군사가 아님을 알고 자살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을 
에워싼 군사가 자신을 죽이려는 연산군의 군사인지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반정군인지도 몰랐
던 진성대군이 반정 초에 힘을 가질 수 없음은 분명했다.
  즉위 초에 중종이 어떤 처지였는지는 부인 신씨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중종의 장인
은 연산군 때 좌의정 신수근이었는데, 그는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했다. 즉 연산군의 부인 신
씨가 신수근의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결정한 반정세력에게 신수근은 
어떻게는 처리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반정세력의 핵심 인물인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
아가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소중합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곧 연산군을 선택하겠는가 아
니면 진성대군을 선택하겠는가 하는 물음이었고, 동시에  누이를 포기하고 딸을 선택하라는 
권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수근은 연산군을 선택했다.
  "임금은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신수근은 반정군의 제
의를 거부해, 결국 반정 당일 반정세력에게 처형되고 만다. 이렇게 되니 중종의 부인 신씨가 
문제가 되었다. 반정세력으로서는 자신들이 추살한 인물의 딸을 왕비로 받들 수 없었다.  중
종은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반정공신들이 신씨  폐출을 주청하자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고 주저했으나 이들은 강경했다. "사사로운 정 때문에 종사의 대사를 거스를 수는 없습
니다. 빨리 결단하십시오." 권력과 사랑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중종은 권력을 선택했
다. 
  이렇게 해서 신씨는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정 7일 만에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해 숙의로 있던 윤여필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니, 그녀가 바로 장경왕
후 윤씨였다. 윤씨는 중종 10년인 1515년 아들을 낳았지만 산후조리를 잘못해 7일만에 세상
을 떠나고 만다. 이때 낳은 아들이 인종이다.
  장경왕후 윤씨가 죽은 지 2년이 지나 새로운 왕비 책봉 문제가 대두되면서 조정은 소용돌
이에 휩싸인다. 신진 정치세력인 사림파가 새왕비를 책봉하지 말고  반정 직후 사저로 쫓겨
난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자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먼저  사림파인 순창 군수 김정과 
담양 부사 박상이 중종의 구언을 이용해 문제의 상소를  올렸다. "원자가 강보 속에 있는데 
친아들 복성군이 있는 숙의 박씨같은 후궁을 왕비로 책봉하면 원자의 처지가 어려워질것"이
라는 주장이었다. 이들의 언사는 명분과 의리에 목숨을 거는 사림파답게 거침이 없었다. 
  "신씨를 폐한 것은 무슨 명분이 있습니까? 반정 때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신수근을 
죽이고 나서 훗날 환난이 미칠  것을 두려워해 보전책으로 폐비시킨 것이니,  이 일은 본래 
무고하고 또 명분도 없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반정공신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왕비
를 페위시켰다는 주장이었다.
  이때는 반정공신들이 세상을 떠난 뒤였으므로 이런 상소를 올릴  수 있었지만, 이는 반정
의 정당성 자체를 부인하는 발언이었다. 상소 내용에 놀란  중종은 파문을 우려해 상소문을 
승정원에 두어 공론화시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반정이념 자체를 부인하는 엄청난 내용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사실 신씨가 복위되어도 문제였다. 대사간  이행이 대사헌 권민수에게 물은  내용은 이런 
문제를 말해준다. 
  "만약 신씨를 왕위로 세웠다가 왕자가 태어나 가례의 순서를 따지게 되면  전하께서 잠저
에 계실 때 혼인한 신씨가 먼저가 되니 이 경우 원자의 처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씨는 중종과 연산군 5년인 1499년에 가례를 올렸고,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 2년인 1507
년에 가례를 올렸으니 신씨가 8년 먼저였다. 만약 신씨가  복위된 후 아들을 낳으면 신씨의 
아들이 원자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신씨 복위를 주장한 
김정과 박상의 상소는 사론으로 몰렸고, 중종도 비망기를 내려 이들을 질책했다. 반정세력은 
이들의 상소를 옥사로 확대시키려 했으나 사림파인 정언 조광조가 무마하는 바람에  귀양으
로 일단락되었다. 
  사림파의 신씨 복위 주장은 결국 무위로 돌아갔고, 중종  재위12년인 1517년 윤지임의 딸
이 계비로 간택되었다. 당시 중종의 나이 서른살이었으나 윤씨는  이팔청춘을 갓 지난 열일
곱 살이었다. 이처럼 앳된 나이에 조선의 국모가 된 문정왕후 윤씨가 훗날 조선 사대부들의 
표적이 될 줄을 가례 당시만 해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윤씨는 심지어 사대부들로부터 '여
왕'이란 비난을 받았으며, 이보다 더한 소문, 즉 인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에 휩싸이게 된다.

    서른 다섯 중년 왕비의 출산
  문정왕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중종이 장경왕후 윤씨
의 뒷자리를 이를 계비를 간택하려고 간택령을 내렸을 때,  윤지임의 딸 윤씨는 와병중이었
다. 그녀의 병세는 거의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때 용하다는 시골 점쟁이 한 명이 서울에 와 있었는데,  그는 스스로 점을 쳐보고는 이
렇게 말했다. 
  "오늘은 귀한 손님이 맨 먼저 오겠구나."
  첫새벽에 찾아온 인물은 윤지임이었다. 하인이 점쟁이에게 물었다.
  "겨우 종 한 명만을 데리고 왔을 뿐인데 무슨 귀한 손님입니까?"
  "아니다. 이분은 귀인이다."
  윤지임은 점쟁이에게 사주를 내보였다. 위독한 딸 윤씨의 사주였다. 
  "병이 매우 위독하기에 살 수 있는지 보러왔소."
  "이 사주는 국모의 사주입니다. 나리는 임금의 장인이 될 것이오."
  과연 얼마후 윤씨는 회복되었고 그 해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열일곱 한창 나이의 윤씨가 왕비로 간택되자 궁중 한  구석에서는 우려가 일었다. 그녀가 
왕자를 낳을 것에 대한 우려였다. 윤씨가 왕자를 낳을 경우 궁중의 역학관계는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다. 문정왕후 소생의 왕자가 장경왕후 소생의 원자 호를 대신새 중종의 뒤를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문정왕후는 왕비로  책봉된후 10면이 지나도록 왕자를 낳지 못했
다. 그러던 윤씨가 비로소 꿈에도 바라던 아들을 낳은 것은 중종 29년, 왕비로 책봉된지  무
려 17년 만의 일이었다. 그때 문정왕후 윤씨도 서른다섯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윤씨 소생의 
왕자는 태어나자마나 경원대군에 봉해졌다.
  경원대군이 태어났을 때 세자의 나이 이미 스무 살이었다. 강보에 싸인 아이와 왕권을 다
툴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면 왕위를 이을 인물은 성년의  세자였다. 
누가 보더라도 성인인 세자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집념이 강한 문정왕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보에 싸인 경원대군을 임금으
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윤씨는 경원대군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세력을 길렀다. 그리하여 
경원대군이 열 살이 될무렵 문정왕후는 자신을 지지하는 당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당을 소
윤이라하는데,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당수였다. 이들을 소윤이라 칭한 것은 윤자를 뜨는 
또다른 당, 즉 대윤이라 불리던 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윤의 영수는 세자 호를 낳다가  사
망한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이었다. 장경왕후 윤씨가 문정왕후 윤씨보다 먼저 왕비가 되었으
므로 장경왕후 계열의 당을 대윤, 문정왕후 계열의 당을 소윤이라 부른 것이다. 윤임은 장경
왕후 소생의 왕자이자 자신의 외조카인 세자를 지지했다.
  문정왕후의 후원을 받는 소윤은 차차 강성해지면서 대윤과 소윤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
다. 세자를 지지하는 대윤과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소윤의 다툼은  차기 왕권을 둘러싼 당쟁
이었다. 왕권을 둘러싼 두외척간의 당쟁은 중종이 참석한 경연에서 공공연히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치열했다. 중종 38년 대사간 구수담이 조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풍문에 의하면 간사한 의논이 비등하여 '윤임을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을 소윤이라 하는
데 각각 당여를 세웠다'고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있어 어찌 붕우와 족류가  없겠습
니까만 하필 왕실의 친척이라는 것을 지목하여 당여라는 의논이 비등하니 매우 음험한 사론
입니다.

    "백돌아! 백돌아!"
  대윤과 소윤 간의 당쟁의 동기는 소윤에게 있었다. 소ㅇ윤이  이미 책봉된 세자를 끌어내
고 경원대군을 세우려 했던 것이 당쟁 발생의 시초였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세자를 갈아치우려했기 때문에 세자는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문정왕후가 세자
를 불에 태워 죽이려 했다고 전하는 야사는, 당시 세자가  당한 핍박의 강도를 말해주고 있
다. 
  야사는 어느 날 밤 세자가 잠을 잘 때 갑자기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에서 불이 났다고  전
하고 있다. 세자빈이 불길에 놀라 탈출하려 했으나 문이 밖에서 잠겨 있었다. 세자가 세자빈
에게 말했다. 
  "내 전날에 죽음을 피한 것은 부모님에게 악한 소문이 돌아갈까 두려워서였는데, 이제 밤
중에 깊은 잠을 자다가 불에 타 죽었으면 그런 소문은 퍼지지 않을 것이니 나는 피하지  않
겠소, 빈궁이나 피해 나가시오."
  지아비가 불에 타 죽겠다는데 세자빈이 홀로 살겠다고 나갈  수는 없었다. 놀란 시종들이 
피하려고 권해도 세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자가 불길을 빠져  나가려 하지 않자 시종들은 
중종에게 달겨가 고했다. 중종이 급히 달려와보니 둥궁이 불바다였다. 
  "백돌아! 백돌아!"
  다급해진 중종은 세자의 아호를 불렀다. 세자는 그제서야 아버지가 부르는데 나가지 않고 
타 죽는 것 또한 불효라는 생각에 불길을 헤쳐 나왔다고 한다. 이 사건을 '작서의 변'이라고 
한다 .문정왕후가 쥐꼬리에 불을 붙여 동궁에 들여보내 불이 났다는 뜻이다. 
  작서의 변은 이보다 훨씬 전인 중종 22년에도 있었다. 세자의 열두번째 생일날 사지와 꼬
리가 잘리고 입과 귀, 눈을 불로 지진 쥐 한 마리가  동궁의 북쪽 정원 은행나무에 걸린 것
이다. 이때는 문정왕후가 아직 아들은 낳기 전으로,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가 범인으로 지목
되어 아들 복성군과 함께 서인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그러나  사건 발생 5년 후에 범인이 
권신 김안로의 아들 김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거듭되는 작서의  변은 어머니가 없는 세자
의 지위가 얼마나 위태로왔는지를 잘 말해준다.
  불분은 쥐를 동궁에 들여보낸 장본인이 문정왕후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것은, 세자 
핍박의 한가운에 문정왕후가 있다는 증거였다. 중종은  세자를 사랑했으나 문정왕후도 총애
했기 때문에, 문정왕후를 추궁하기 보다는 감싸안으려 했다. 동궁에 불이 났을 때도  중종은 
이 불이 방화가 아니라 한 궁녀의 실화라고 주장에 파문을 가라앉히려 했다.
  "전에 동궁에 불이 난 사건을 끝까지 추문하려 했으나 일이 분명하지 못해서 추문하지 않
았다. 불이 처음 났을 때 내게 고한 자들이 무수비의 방에서 불이 났다고 하기에 내가 직접
가서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세자가 불을 피해 앉아 있기에  데리고 대내로 왔는데 그 불은 
당초 밖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환관들에게 들어보니 한 방  안에 네 명의 잡물을 두었는데 
덕지라는 여종의 제 집의 목면을 그 방에 보관해두고는 밤에 살펴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등
불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 여종이 열쇠를 쥐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나 문을 열 줄 몰랐다. 
문을 바로 열지 못했으므로 불을 즉시 끄지 못하여 불길이 매우 치열해졌다고 한다. 따라서 
그 불은 처음 잠긴 방에서부터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중종은 문정왕후를 두고 떠도는 항간의 소문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중
종은 항간의 소문처럼 불이 밖에서 난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났으며, 문이 밖에서 잠겨 있었
던 것이 아니라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 말했지만, 덕지가 문을  열 줄 몰랐다면 어떻게 잠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기초적 의문도 해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말은 설득력이 
없다. 
  중종마저 세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으니 세자의 지위는 점점더 위태로워질 수  밖에 
없었다. 조정 신하들은 대윤과 소윤으로 갈려, 차기 임금을 미는 불안한 게임에 자신들의 운
명을 걸었다. 
  중종이 사망하기 두달전인 재위39년 9월에도 이 문제가  다시 논란이되었다. 영사 홍언필
은 대윤,소윤에 대해 중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대윤 당이라는 것은 동궁을 부호하고 소윤 당이라는 것은 대군에게  마음을 두었
다 하는데, 위에 주상이 계신데도  사사로이 동궁을 부호하는 자는 간사한  꾀를 형용할 수 
없는 소인일 것이고 대군에게 마음을 두는 자라면 패역의 정상을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
다. 무릇 이런 말이 도는 것은 동궁에게 후사가 없이  때문인데 동궁에게 조만간 후사가 있
게 되면 종사와 신민의 복이겠고, 불행히 후사가 없으면 종사의 만세를 위한 계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대군이 많지 않고 한 사람이 있을  뿐이므로 형제 사이에 조금도 의심
이 없는데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홍언필의 말처럼 문제는 세자에게 후사가 없다는 데 있었다. 당시 세자의 나이 이미 서른
이었으나 불행히 후사가 없었다. 만약  세자에게 후사가 있었다면 소윤은  발호하지 못했을 
것이며, 설혹 세자에게 이상이 있더라도 세손이 뒤를 이를  것이므로 세자를 흔들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나 세자는 정비 인성왕후 박씨와 후궁 귀인 정씨를 두었음에도 끝내 후순을 생산하지 
못했고, 그 공백을 문정왕후의 소윤이 파고들었다. 세지만 없으면 홍언필의  말대로 "대군이 
많지 않고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으므로 유일한 대군인 경원대군이 뒤를 이을 것이었다. 
  이즈음에는 중종도 훗날 두 당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질 것을 염려할 정도로 중종의 후사
를 둘러싼 당쟁은 심각하였다.
  "소인이 군자를 해칠  때에는 반드시 붕당이라  지칭하여 일망타진하니 지극히  염려스럽
다."
  중종의 이 우려는 정확한 예언이었다. 그러나 당쟁에 대한 중종의 한계는 뚜렸했다.  중종
은 과거 조광조 중심의 사림파는 명분도 신의도 저버린 체 과감하게 제거했으나, 세자의 지
위를 흔드는 당파의 제거에는 소극적이었다. 그 소극성 때문에  세자는 혼란스런 조정을 고
스란히 물려받게 되었다. 중종이 재위 39년 11월 사망함으로써 세자 인종이 즉위했으나,  그
는 모든 백성의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고 더욱이  소윤에게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었다. 
인종의 즉위로, 소윤과 인종의 정면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홀로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존하겠소
  중종이 사망할 무렵 궐 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중종이 폐비 신씨를 궁에 들였다는 
소문이었다. 중종의 병세가 악화되자 폐문 시간이 지났는데도 통화문을 열어놓았던 것이 빌
미가 되어, 중종이 폐비 신씨가 보고  싶어 입궐시켰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통화문을  열어 
놓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는 폐비 신씨를 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승을 불러다 중종의 
쾌유를 비는 불사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이런 소문이  돈 것은 반정세력의 압력에 
밀려 신씨를 폐위시켰던 중종이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업보였다.
  중종이 소윤을 제거한 상태에서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면 폐비 신씨 문제는  사림파
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그들과 굳건한 유대를 맺을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갓 즉위한 인종은 하늘이 낸 대효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효자였으며, 또한 선천적으로 학
문을 좋아하고 선비를 자처한 호학애사의 군주이기도 했다. 그 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선연중에 세자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궁관에서 독서를 그치게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나와 "벌이 소매 속에 들어가서 몹시 쏘기로 이제  겨우 잡아냈노라"라고 말했
다. 
  또한 인종이 즉위한 후에는 중국 사신이 접대하는 관원에게, "당신의  임금은 성인이오.그
런데 당신의 나라는 조그마한 나라라 성인과 맞지 않으니 오랫동안 당신에의 임금이 될 수 
없을 것이오, 당신들은 복이 없소"라고 했다는 말이 <아성잡기>에 실려있다. 여기에서 성인
이란 공자나 주자같은 유학자를 뜻한다.
  이런 인종에게 사림파는 많은 기대를 걸었다. 호학의 인종이 사림파를 지지한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 사림파의 가장 큰 현안은 기묘사화 때 피화당한 조광조 등 사람파
의 신원이었다. 인종은 조광조, 김식 같은 기묘사화 피화자들이 훈구파에 의해 억울한  죽음
을 당했다고 믿었고, 세자 때부터 즉위하면 때를 보아 사림파를 신원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말하자면 인종은 사림파와 같은 세계관,역사관을 공유한 정치가였다.
  거듭된 사화에 시달리던 사림파는 인종의 즉위를 쌍수 들어  환호했다. 반면 훈구파는 인
종의 역사관이 자신들과 다름을 알고 있었다. 인종을 지지한 사림파는 당연히 또 다른 인종
의 지지세력인 대윤과 가까워졌고 그에  비례해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문정왕후와  소윤과는 
멀어졌다. 
  인종이 즉위하자 세를 얻은 것은 장경왕후의 오빠이자 대윤의 영수인 윤임이었다. 그러나 
인종이 인자하기는 했으나 그리 만만한 군주는 아니어서 윤임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인종 행차 때 있었던 한 사건이 이를 말해준다 .
  인종이 거동할 때 한 사람이 어가 앞을 막아서며 원통함을 호소하자 인종이 억울한 사연
을 적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판서 윤임이 말리고 나섰다. 
  "예로부터 송사하는 사람에게 글을 지어 올리라고 한 예가 없습니다." 이에 인종은 "인군
이 친히 글을 보고서 그 원통하을 가리고자 하는데 송사를 맡은 관원이 임금의 명을 어기고 
드리지 않은 예는 있었던가?"라고 반문했다.
  인종은 이처럼 온화하면서도 자기 주관이  뚜렸한 임금이었다. 만약 인종이  그처림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그 어느 임금보다 화려한 문화정치를 펼쳤을지도 모른다.
  인종은 문정왕후가 세자 시절부터 자신을 박해하고 정적으로 대했음에도 그녀를 어머니로 
깍듯이 모셨다. 그리하여 즉위하자마자 지아비  중종을 잃은 계모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을 공조참판으로 임명했다. 대간이 즉각 이를 반박하고 나선 것은 
윤원형의 참판 임명이 얼마나 파격적인 조치인가를 말해준다. 
  "윤원형은 사신을 따라가며 장사꾼을 데리고 가 중국에서 모욕을 받았으니 너무 비루합니
다. 척리는 어질고 재능이 있어도 특별히 제수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적격자가 아닌 사람
이겠습니까?"
  이런 논박에도 인종은 윤원형의 관직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인종의 이런 
특은에도 감격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아들 경원대군을  즉위시키는 
것이었다. 인종이 동생을 참판으로  임명했음에도 문정왕후는 인종을 압박했다.  문정왕후는 
문안 온 인종을 위협했다. 
  "홀로 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전하겠소."
  홀로 된 첩이란 대비 자신을 가리키며, 약한 아들은 경원대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종은 
이말을 듣고 미안함을 이기지 못하여, 아침부터 더원 햇빛이  쪼이는 땅바닥에 오랫동안 엎
드려 있었다. 임금이 석고대죄하는 셈이었다. 

    문제의 '주다례'
  이런 일들은 부왕 중종의 장례를 치르느라  몸이 소약해진 인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
다. 인종의 병세가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승하하기 한 달  전쯤인 재위 1년 6월 4일인
데, 이날 인종은 최초로 약방 제조들의 문안을 받는다. 그때 인종의 대답은 심상했다. 
  "더위 증세가 조금 있을 뿐이니  문안하지 말라." 그리고 첫문안  이틀 후인 6월6일 약방 
제조들이 문안했을 때 인종의 답은 한층 환해진다.
  "이제는 기후가 덜하니 문안하지 말라. 이렇게 몹시 더운데 문안하니 도리어 미안하다."
  이후 약 보름 동안 <인종실록>에는 약방의 문안 기록은 보이지 않고 정상적으로  집무를 
본 기사만 나온다. 그러다 6월17일 문제의 '주다례'기록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인종이 문
정왕후가 내놓은 다과를 먹고 독살당했다는 야사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이다. 
  6월 17일 영의정 등 삼공이 인종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내일 경사전의 주다례를 지낸 뒤에 대비전에 문안하시겠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지금 전하
의 옥체가 강녕하시지 못한 데다 날씨는 매우 덥습니다. 이런 때에 노동하시면 혹시 중병이 
생길까 염려되오니 멈추소서."
  "내 기후가 이제 매우 좋아졌으니, 무더위를  당했더라도 편안히 앉아서 오래도록 제례를 
그만둘 수 없다."
  이렇듯 삼공이 주다례와 대비전 문안을 그칠 것을 아뢰는 판국에도 대비 문정왕후는 이에 
관해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는 곧 주다례와 문안을 강행하라는 뜻이었다. 다음날 인종은 예
정대로 주다례를 지내고 대비에게 문안하였다. 
  이날 대비는 어가를 따른 시종고 제장에게 술을 먹이고, 또  시종에게 호초를 넣은 흰 주
머니를 내리는 등 일행을 극히 환대했다. 그 동안 인종은 대비전의 내전에서 문정왕후의 다
과를 나누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인종은 갑자기  약방에 명하여 약을 지어 들이게  하였다. 인종의 병은 
이질, 즉 심한 설사였다. 주다례 직후부터 설사가 나더니 그 이틀 후인 20일 무렵부터  증세
가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은 것이다.
  "이질 증세가 잇달아 음식을 먹지 못하니, 권제를 따르는 것이 무슨 보탬이 있곘는가? 의
원은 별다른 증세가 없다 한다."
  닷새 후인 6월25일 승지 박한종은 인종이 "설사를 많이 하기 때문에 기운이 매우 지쳐 있
고 구역 증세도 있어서 그저께부터 통 수라를 들지 못한다"고 말했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인종의 증세가 갑자기 위급해졌다. 눈동자가 술취한 사람처럼 흐릿해
지고 손바닥이 매우 더워졌다. 그러다가  기운이 가라앉아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헛소리하는 증세가 나타났다. 인종의 병이 위급해지자 의원들은 별각의 고요한 곳으로 옮겨 
조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따라 인종은 경복궁 안 한복판에  있는 아마산 동쪽의 청연
루로 옮겼는데, 이 조치가 조금 효험이 있었는지 스스로 일어날 정도로 기운을 점점 회복했
으며 열도 잠시 내려 미음을 들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문정왕후가 소동을 일으킨다. 갑자기 궁을 나가  의혜공주 집에 머물러 쉬면
서 청연루로 가 인종의 병세를 살펴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미안해서  못 견디겠다."는 명분
이었다. 인종의 증세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가주서 안명세, 검열 윤결등은 한결 같
이 문정왕후의 이 의외의 거조를 만류하고 나섰다. 
  "상의 옥체가 위급하시더라도 대비께서 친히 문안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
만 경동만 더할 뿐입니다. 인심이 의구하고 경동하여 위  아래가 황급하면 변고가 일어나는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정왕후가 벌인 거동 소동은 의혜공주의 집이 궐 밖 여염에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
다. 평소에도 대비는 밖에 나갈 수 없었다.  한번 왕비가 되면 죽을때까지 궐 밖 구경을  할 
수 없었는데 심지어 과부인 대비가 궐 밖에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인종이 병환중인 상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하들의 만류로 일단주저 앉은  문정왕후는 다음날 다시 의헤공주의 집으로 거동하겠다면 
소동을 일으켰다. 이는 분명 의도적인 것이었다. 
왕비가 된 날부터 인종을 핍박했던 그녀가 인종의 병세를 걱정해 소동을 일으킬리는 만무했
다. 문정왕후가 이런 소동을 벌이는 이유는 분명했다. 
모든 백성들에게 인종이 와병중임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사실 대궐밖의 일반백성들은 그중 
궁궐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을 잘 알수 없었다.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인자하다고 소문이 자
자했으므로, 그가즉위 한지 1년이 채 안돼 급서할 겨우  그죽음을 둘러싸고 의혹이 일 것은 
분명했다.
  문정왕후가 이런 소동을 벌이는 동안 임금의 병석을 지킨 사람은 인종의 외숙인 대윤 영
수 윤임 이었다. 윤임은 병석에 있는 인종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
으므로 그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18일 주다례 후 대비전을 문안했을 때의 일을 의심하고 있었다. 인종이 다과를 들고 
며칠 만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대비전에서 마련한 다과에  의혹의 눈길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증거도 없는 그 일을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인종이 사망하기 이틀 전인 6월 28일 어의 박세거는 드디어 소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한다. 
  "애통하여 수척한 것이 극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장부가 매우 손상되어 병이  뿌리가 있는 
듯합니다."
  손상된 장기는 비위였다. 그러나 부왕의 사망에 지나치게 애를 태워 비위가 손상되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비장과 위는 음식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장기로, 음식물에 의해 
손상되는 장기이지 슬픔 때문에 손상되는 장기는 아니다 .또한 비위는 독극물이 투입되었을 
경우 가장 먼저 반응을 일으키는 장기이기도 하다.
  내외의 이런 의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정황후는 세 번째  거동 소동을 일으킨다. 인종
이 사망하기 하루 전이었다. 거동 장소는 여전히 딸인 의혜공주 집이었다. 대비의 소동은 병
구완에 정신이 없는 대신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영의정 윤인경이 만류하며 타협안을 제시했다. 
  "공주의 집은 여염에 있으므로 결코 옮겨서는  안 되니, 마지못하면 승정원으로 옮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승정원은 경복궁에 있으므로 임금이 투병하는 청연루와  가까웠다. 그러나 승정원이 비록 
궐 내에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었다. 대비가 승정원을 차지하고 있으면 승정원이 
집무를 볼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간단하게 말해 문정왕후가 인종을 도와주는 거조는 
그냥 대비전에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양사와 홍문관에서 대비의 승정원 이어를  반대했고, 
문정왕후도 승정원을 "불편"하다며 의헤공주의 집으로 거동하겠다고 계속 고집하다가, 대신
과 대간에서 거듭 만류하자 겨우 소동을 멈추었다.
  문정왕후는 이런식으로 인종의 병 치료에  바쁜 신료들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이런 소동 
속에서 인종은 어의 박세거가 올린 소시호탕을 들기를 거부하고 나선다. 
  "내 병이 어찌 이 약을 마시고 곧 낫겠는가?"
  인종은 생애 대한 미련을 포기한 듯 윤임 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광조의 복직과 현량과의 복설은 내가 늘 마음속으로 잊지 않았으나 미처 용기 있게 결
단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평생의 큰 한이다."
  윤임이 만류했다.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잡언을 많이 하십니까? 병환만 빨리 나으면 무엇이든지  어찌 수행
하지 못하겠습니까?"
  인종은 혀를 차면서 탄식할 뿐이었다.  죽음을 앞둔 인종에게 가장 큰  한은 조광조 같을 
사림파를 신원하지 못한 것이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느낀 인종은 대신들에게 유교를 
내린다. 
  "조광조 등의 일은 내가 마음속으로 늘 잊지 않았으나 선왕께서 전에  하락하지 않으셨으
므로 내가 감히 가벼히 고칠 수  없어 천천히 하려 하였다. 이제는 내  병이 위독하여 다시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으므로 비로소 유언하여 민심을 위로하려  한다. 조광조 드의 벼슬을 
일체 전일처럼 회복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현량과도 전에  아뢴대로 회복하여 인재를 등
용하도록 하라."
  그리고는 이어 전위 교서를 내렸다. 
  "경원대군 이환에게 전위한다. 경들은 더욱 힘쓰고 도와서 내 뜻에 부응하라."
  결국 인종은 투병하던 청연루 아래 소침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7월 1일, 재위에 있은 
지 불과 여덟 달 만이었다. 
  그날 밤 서울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서울 사람들이  스스로 놀라 움직이며 뭇사람이 
요사한 말을 퍼뜨리기를 "괴물이 밤에 다니는데 지나가는 곳에는 검은 기운이  캄캄하고 뭇 
수레가 지나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하였다. 서로 이런 소문을 전해 미친 듯이 현혹되어 떼
를 지어서 모여서 함께 떠들고, 궐하로부터  네거리까지 징을 치며 쫓으니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소동이 3-4일 계속된 후에야 그쳤다.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문정황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했을 때의 나이는 열  두 살이었다. 아직 미
성년이었으므로 성종 때의 고사에 따라 대비가 섭정을 해야 했다.  당시 섭정할 수 있는 사
람은 중종비인 대왕대비 문정왕후와 인종비인 왕대비 인성왕후 두 명이었다. 그러나 대비가 
스스로 섭정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고, 대신들이 결정해 주청해야 했으므로 조정은 회의를 
열었다. 
  영의정 윤인경이 누가 섭정해야 하는가를 물었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때 소신
을 밝히고 나선 인물이 사림파 이적이었다. 
  "송나라 철종때 태황태후가 정치를 대리한 전례가 있습니다.  어떻게 형수와 시숙이 함께 
궁전에 나앉을 수 있겠소."
  다른 사람도 아닌 사림파 이언적이 문정황후의 대리를 주청하고 나섰으므로 아무도  반대
하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이처럼 모순되게도 사림파 이언적의 지지를 받아 대리청정하게 되
었다. 훗날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이언적이 을사사화때  사림파의 기개를 지키지 못
했다며 비판했는데, 율곡의 속마음은 사림파의 기개를 지키지 못한 데 있다기 보다는,  문정
왕후의 섭정을 주장함으로써 사림파의 집권이  그만큼 늦어진 데 대한  비판인지도 모른다. 
사림파 이언적의 이순진한 주청은 입술의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사림파에 대한  탄압으로 
돌아왔다.
  인종이 위독할 때 "미안해서 못 견디겠다"며 소동을 벌였던  문정왕후흔 정권을 잡자마자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녀의 속마음을 인종의  장례 절차에서 먼저 드러난다. 윤원형과  함께 
소윤을 이끌던 이기가 인종의 장례 절차에 대해 색다른 주장을 했다.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루를 모셔도 임금이건만, 인종은 임금이 아니니 대왕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를 수 없다
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같으면 대역죄로 몰릴 주청이었다. 그러나 결국  인
종의 장례는 임시로 빨리 치르는 약식 장례인 갈장으로 치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종의 장
례일이 승하한지 다섯 달이 채 못 되는 10월 27일로 정해졌는데, 문정왕후와 소윤은 여기에
서 20여일을 다시 앞당긴 10월 15일로 장례일을 수정했다.  홍문관 부제학 나숙이 부당하다
고 상소한 것은 당연했다. 
  "대행대왕의 장례일을 10월 27일로 정한 것도 이미 5개월의 상기에 어긋나 미안하게 생각
하고 있는데 지금 또 15일로 당기니 놀라고 의혹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예에 따라 장례일
을 늘려 잡으소서."
  교리 정황도 갈장은 안 된다고 상소하고, 사헌부에서도 그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문정왕후
는 허락하지 않았다. 
  야사인 <영남야언>에는 윤원형이 불공을 올려 임금의 수명을 짧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고 적혀 있다 .윤원형이 깊은 밤  남산에서 들불과 초를 켜놓은 채 손수  향을 피우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하였으며, 궁중에서는 나무로 만든 사람을 묻어 인종을 저주했다는 것이
다. 
  상복을 입는 날 윤원로, 윤원형, 이기 등 소윤이 갓을 털고 서로 하례하며 의기양양해하는 
것을 보고 정황이 분노했다. 
  "이 역적놈들의 기색을 보기 원통함이 더욱 심하다."

    곤장이 다리보다 더 굵으니
  사림파를 신원하려던 인종의 시신이 궐 내에 있던 그 해 8월, 사림파들은 '을사사화'로 대
거 화를 입게 된다. 
  대비 윤씨는 인종이 죽은 다음달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려, 원형의 형 원로를 공박해 귀양 
보낸 대윤 영수 윤임과 유관등를  치죄하라고 명령했다. 윤원형은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 등을 배후에서 움직여 윤임과 유관 등을 공격하게 하였다. 
  윤원형은 대윤을 제거하기 위해 윤임이 인종비 인성왕후에게 보내는 편지를 위조해  실수
인 척 대궐에 떨어뜨렸다. 
  "근래에 나라 일이 점점 수상해지니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몰라서 밤낮으로 울고 있습니다. 
판서 유인숙, 정승 유관과 함께 왕위를 봉성군에게 옮기려고 합니다. 전번 윤원로를 귀양 보
낼 때 원형마저 치죄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윤임이 인성왕후와 모의해 왕위를 중종의 여섯째 아들 봉성군에게 옮기려 했다는  조작이
었다. 이 사건으로 봉성군은 귀양을 가고, 윤임과 유관숙,  유관은 모두 귀양들을 당하게 된
다. 인종의 시신이 싸늘해지기도 전에 대윤이 몰락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이 완전한 조작이라는 것은 이들을  처벌하는 전지에 죄명을 명시하지 못한  데서 
드러난다. 적시할 죄명이 없었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전지에 사연을 언급하지  않으면 아무 
까닭없이 죄 준 것 같을  것이니, 윤임은 종묘사직과 크게 관련된  말을 만들어냈고 유관과 
유인숙은 권간과 결탁했다고 적으면  어떻헸는가?"라고 제의했으나,  인심이 동요할 것이라
며 반대하자 죄목도 없이 치죄했던 것이다 .
  결국 윤임은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리고 유관과 유인숙은 "무슨 행적
이 있다"는 이유로 치죄되었으니 이는 이들이 무죄임을 말해주는 좋은 증거라 하겠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소윤은 자신들에게 불만을 가진 사림파들을 마저 제거하
려 하였다. 그리하여 사화가 다시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를 을사년에 벌어졌다 하여  을사사
화라고 부른다. 
  소윤은 홍문관과 대간 등에 자리잡은 사림파가 윤임 등의 치죄에 반대하자 이들마저 윤임
과 유관 일파로 몰아 공격했다. 이 일로 수찬 이휘, 장령 정희등, 박광우 등 젊은 사림파 관
료들이 잡혀 와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장형을 받던 박광우가 울부짖었다.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는가? 곤장이 다립다 더 굵으니 어찌 감당하란 말이냐?"
  정희등은 울부짖는 박광우를 타일렀다. 
  "죽고 사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곤장의 굵고 얇은 것을 비교해 무슨  소용이 있겠는
가? 돌아가신 임금의 관이 가까운 곳에 있으니 고통 소리가 안에 들리지 않게 하자."
  이들은 심문받을 적마다 인종의 관이 있는 곳을 향해 부복해, 형을 집행하던 사령들도 감
동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기는 눈을 부릅뜨며 꾸짖었다.
  "그렇게 하면 구제를 받을 듯하여 쓸데없이 애를 쓰느냐?"
  이처럼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인종을 지지했던  대윤과 사림파는 급전직하 몰락했다. 
윤임, 유관, 유인숙, 이휘 등은 참형에 처해졌고 많은 사림파가 귀양 또는 파직당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은 아니었다. 을사사화  2년 후인 1547년에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 
다시 옥사가 벌어졌다. 양재역 객사에 "여왕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
서 권력을 농락하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격이다"라는 내용의  벽서가 붙은 것이다. 
이로 인해 봉성군과 송인수, 이약해 등이 사형에 처해지고, "형수와 시숙이 한  궁전에 나앉
을 수 없다"며 문정왕후의 섭정을 제안한 이언적도 먼 변방으로 쫓겨나 위리안치당했다.
  그러나 문정왕후와 소윤의  공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양재역벽서  사건 다음해인 
1548년 무신년에는 전 사관 안명세의 사초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관 안명세가 사초에 윤임 
등을 옹호하고 이기가 사건을 조작했다고 비난하면서,  "중종의 소상도 지나지 않았고 인종
의 발인도 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빈전 옆에서 대신 세 사람을 죽였다"고 개탄했던 것이다 .
춘추필법을 지향한 안명세는 혹독한 고문 끝에 "부디 자식들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마시오"
라는 유언을 남긴 채 사형당했다.
  그 후 명종4년에는 이홍윤 사건이 일어나 또 한  차례 피비린내가 일어났다.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약빙의 아들이자 윤임의 사위였던 이홍윤이 "연산군도 사람을 많이 죽
이더니 중종반정을 당했는데, 지금 임금인들 사람을 많이 죽이나  어찌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겠느냐?"라고 불평하곤 했는데, 그 아우 이홍남이  조정에 고발함으로써 옥사가 재연된 
것이다. 이 사건은 충주 지역에 사는 이약빙의 문인들을  초토와시켜 무려 3백여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또한 명종이 쫓겨날 것이라는 이홍윤의 발언에 분노한 문정왕후는 충청도
의 도명을 청홍도로 바꾸어버렸다. 원래 대읍인 충주와 청주의  첫음을 따서 충청도의 도명
으로 삼았는데 사건 발생지인 충주대신 지금의 홍성인 홍주를 넣은 것이다.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이처럼 문정왕후 섭정 기간은 옥사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문정왕후는 성리한 갓회 조선에
서 보우라는 승려를 중용하고 불교를 중흥시키는 등 사대부들과는 정치적으로만 아니라  사
상적으로도 첨예하게 대립했다. 문정왕후는  앙재역에 붙은 벽서의  내용처럼 '여왕' 노릇을 
한 조선의 유일한 여인이었으나, 사망한 후 두고두고 조선 사대부들의 표적이 되었다.
  훗날 숙조의 모후 명성왕후가 국정에 관여해 논란이 되었을 때 윤휴가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라고 비난한 것은, 문정왕후에 대한 사대부들의 감정을 잘 표현한  것이었다. 문정
왕후는 이렇듯 유림들에게는 극도의 저주를  받았으나 불자들에게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
다. 김영해는 <한국불교사>하에서 이렇게 썼다.
  "성종,연산,중종때 불교는 다시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다가 명종이 즉위한 후 그 모후 문
정왕후가 섭정을 하면서부터 다시 부흥의 기운을 보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중흥불사의 대임
을 맡을수 있는 고승을 물색하여  설악산 백담사의 보우를 맞아들었다.  이처럼 문정왕후가 
보우와 같이 불교를 중흥시키려고 함에, 조금이라도 불승을 우대하는 기색이 보이기만 하면 
들고일어나는 조정 대신들과 유생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처럼 문정왕후가 사림파의 이념인 성리학이 아니라 불교를 중흥시키려 하자 사대부들은 
격하게 반발했다. 게다가 그녀는 집권후  동생 윤원형으로 하여금 사림파를 탄압하게  했다. 
당시의 시대적 과제는 세조의 집권이래 계속되어온  훈구파의 비정을 청산하는 것이었는데, 
문정왕후의 섭정은 오히려 훈구파의 집권 연장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뜻 있는 식자들의 비
판거리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문정왕후의 섭정 기간은 사림파들에게는 암흑의 나날  이었다. 그리고 그 어
두운 세월 동안 "인종이 독살당했다"는 은밀한 소문은 계속 횡행하였다. 

    2장 제14대 선조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조선조 전체를 통틀어 선조만큼 다사다난했던 임금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선왕의 적장자
가 아니면서 왕위에 오른 방계  승통부터가 비상한 재위 기간을 암시하는  것이다. 선조 때 
있었던 동서 분당과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미 이전의 방식으로는 통치할 수 없는 단계에 이
르렀음을 의미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간 임금, 명나라로 도망가려다  압록강가에
서 겨우 멈춘 치욕의 군주가 바로 선조였다. 뿐만 아니라  선조는 무려 40년이상 재위에 있
었으면서도 죽은 뒤 독살설에까지 휘말리게 된다. 
  선조는 과연 독살당했을까? 선조 독살설은  인조반정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끈질기게 
떠돌았고, 심지어 현대에 와서도 그의 독살을 다룬 책이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주제이다. 독살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의 죽음의 현장으로 가보는 것이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는 지름길일 것이다 .먼저 선조 독살의 혐의를  받고 있는 광해군과 북인측의 
기록인 <선조실록>을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재위 40년 가을 선조는 병세가 위독해져  기가막히면서 갑자기 넘어졌다. 의
식을 잃고 쓰러진 선조는 기후가 조금 안정되자 "이 어찌된 일인가"라면  불안한 소리를 지
르기도 했다. 어의는 추운 아침에 일찍 기동하여 한기가  밖에서 엄습한 탓이라며 인삼순기
산을 권했다. 그러나 며칠 후 다시 호흡이 가빠지며  가래가 끓었다 .의약청에서는 풍기, 즉 
중풍에 가까운 증세라고 진단했다. 
  그러던 선조의 병이 조금 차도를 보였다. 병세가 차도를 보이자 선조는 또 세자 광해군을 
꾸짖기 시작했다.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을 때  선조의 병이 다시 위독해졌
다. 세상을 떠나는 해인 재위 41년 1월부터 선조는 병세가 다시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았
다. 그해 2월 1일 약방의 문안을 받고 "어제밤엔 편히 잠을 잤다"고 말했던 선조는 그날 오
후부터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  약방에서 강즙, 죽력, 도담탕,  용뇌소합원, 개관산 등을 
들였으나 효력이 없었다. 세자가 어의에게 진찰하게 하자 어의가 말했다. 
  "일이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날 인목왕후가 선조의 병상을 지키고 있었는데 유영경 등 여러 대신들이  "고례에 부인
의 손에서 임종하지 않는다"며 왕비에게 밖으로  나와달라고 요청하는 와중에, 안에서 곡성
이 들려 비로소 선조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모두 통곡하였다.
  이처럼 <선조실록>은 선조가 병으로 죽었으며 마지막 임종을 지민 여인이 부인 인목대비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서인측의 기록인 <광해군일기>에는 선조 독살설에 대한 서인측의 유일한  근거이
기도 한 찹쌀방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선조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에 찹쌀밥을 올렸는데 
상이 갑자기 기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남계집>을 인용해 선조 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전하는데, 그
에 따르면 입시했던 선지 의원 성협이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 검푸르니 바깥 소문이 헛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고 이 말을 들은 조익과 권득기근 광해군 때  벼슬을 거버했다는 
내용이다. 
  과연 선조는 북인측의 기록처럼 병사한 것일까, 서인측의 기록처럼 독살당한 것일까?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문정왕후는 인종 독살설을 무릅쓰고 아들을 명종으로 즉위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더  이상 
자신의 핏줄에게 왕위를 잇게 하지는 못했다. 문정왕후의 유일한 손자이자 명종의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요절했기 때문이다. 명종은 재위 18년 열세살의 외아들  순회세자를 잃은 후 탄
식했다. 
  "내 울어 무엇 하랴. 을사년에 충량한 신하들이 죄 없이 떼죽음을 당해도 내가 임금이 되
어 말리지 못했으니, 내 집에서 어찌 대대로 군왕이 이어질 수 있겠는가?"
  순회세자 외에 다른 아들을 두지 못했던 명종은, 그 2년 후인 재위 20년에 문정왕후가 사
망함으로써 친정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명종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문정왕후의 죽음에 
대해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라고 했다 . 뿐만 아니라 문정왕후가 명종에
게 "내가 아니면 네가 어떻게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으랴"라며 횡포를 부려 명종이 심열증
을 얻었다면서 "윤비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쓸 정도였다. 조선의 왕비  중 죽는 당일 이런 
혹평을 들은 인물은 문정왕후가 유일할 것이다. 
  문정왕후의 몰락과 함께 20년 동안 권세를 누려오던 소윤 윤원형도 몰락해 죽고 말았다 .
그러나 그동안 문정왕후의 기세에 눌려 있던 세월이 병이  되었는지, 명종도 문정왕후 사망 
2년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재위  22년 6월 27일 시약청을 설치한  이튿날 새벽에 세상을 
등졌으니 급서였다.
  명종이 사망했을 당시 가장 큰 문제는 후사가 없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왕위가 비는 비상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2년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이 사태 해결에 도움
이 되었다. 문정왕후가 사망한 직후 명종도 덩달아 위독해 저승 문턱을 넘나든 적이 있었다. 
그때 가망없다고 여긴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심통원 등이  명종에게 후사를 정해달라고 청
했으나, 명종의 증세는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위독했다. 대신들은 할 수 없이 명종비 인순왕
후 심씨에게 후사를 결정해달라고 요청하여 답을 받았는데, 이를 '을축년의 하서'라 한다. 
  이때 명종의 뒤를 이을 뻔했던 종친이 덕흥군의 셋째 아들 이균이다. 덕흥군은 중종이 창
빈 안씨에게서 난 아홉 번째 아들이었다 중종의 아홉 번째 서자의 세 번째 아들이니 선원보
대로라면 이균은 왕위를 꿈꿀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인순왕후가 이균을 후사로 정하는 하서를 내렸던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
다. 명종도 평소 이균을 볼 때마다 "덕흥은 복이 있다"며 아꼈다. 한 번은 명종이 종친 자제
들을 궁중으로 불러 머리 크기를  알려고 한다며 익선관을 써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여러왕손들은 익선관을 머리에 써보며 희희낙락했는데 제일 어린 이균만은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갖다 놓고 머리를 숙여 사양하며 말했다.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쓰는 것이오이까."
  이런 행동이 명조와 인순왕후의 뜻에  꼭 맞았다. 이런 경로로 을축년  명종이 위독할 때 
이균을 후사로 결정했던 것이다. 
  재위 22년 6월 영의정 이준경 등이 문안했으나 명종은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위독했다. 
이렇게 되니 다시 후사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인순왕후의 뜻은 2년전과 같았다 .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균 이균에게 다시 하교가 내린 것이다. 
  이런 경로를 거쳐 도승지 이양원과 동부승지 박소립 등이 새 임금을 모셔 오기 위해 덕흥
군의 집으로 떠났다. 그런데 이때 덕흥군의 집에 도착한  이양원이 어느 아들이라고 분명히 
말하지 못했던 데서, 선조의 즉위가 얼마나 유동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양원은  다
만 이균의 외숙 정창서에게 뵙자고만 청했다. 함께 갔던  주서 황대서가 "누구를 뵙자는 것
이오. 이같은 큰일을 그렇게 모호하게 할 수 있소?"라고 항의했으나 이양원은 듣지 않고 정
창서에게 물었다. 
  "어느 군이 치장을 차리고 있습니까?"
  "을축년에 하교받았던 하성군입니다."
  이양원이 끝내 자기 입으로 하성군의 작호를 말하지 않은 것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였
다. 즉 하성군 아닌 다른 인물이 임금으로 추대될 가능성도 있었고, 그 경우 하성군을  모시
러 갔던 인물은 죽게 되어 있었으므로 이양원은 끝내 이름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이날 박소
립은, 하성군을 호종한 인물들은 공신이 될 거라는 궁인들의 말만 득고, 호종한 인물들의 명
단을 받았다가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은 다시 말해  하성군의 승통이 그만큼 
정통성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성군 또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대궐에 들어와서도 상차에서 나오지 않고 사양했
다. 대신들이 청하고 인순왕후도 청하자 마지못해 나왔으나 용상에 오르지 못하고 머뭇거렸
다. 물론 의례저인 거조이기는 했지만 하성군은 한참을 사양한  후에야 용상에 올라 백관의 
하례를 받고 임금이 되었다. 그리고는  곧 인순왕후를 왕대비로 높여 수렴청정하기로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방계 승통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즉위한 하성군이 임진왜란
을 겪고 이러저리 피난 다니는 수난의 군주 선조였다.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가장 큰 콤플렉스는 방계 승통에 있었다. 왕위에는 올랐으나 선왕 명종이 직접 전
교를 내린 것도 아니었으니 다른 종친이 왕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인순왕후와 영의정 
이준경, 그리고 우의정이자 인순왕후의 아버지인 심통원이  다른 종친을 선택했다면 선조는 
즉위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즉위 당시 선조는 가례를 올리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재위 2년 12월에 박응순의 딸을 간택
해 국혼을 치러싿. 그녀가 선조의 첫 번째 부인인 의인왕후 박씨이다. 그러나 의인왕후 박씨
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선조는 방계 승통이라는 콤
플렉스를 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비 소생의 원자에게 후사를 넘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
런데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선조는 여섯 명위 후궁에게서만 왕자 열세 명과 옹주 열 명을 낳았는데, 이 열세 명의 아
들 중에서 누가 선조의 뒤를 잇느냐 하는 문제가 민감한 정국 현안이 되었다. 이 많은 왕자
들의 어머니가 각각 달랐으므로 문제는 복잡하게 돌아갔다.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과 둘째 아들 광해군은 공빈 김씨  소생이었고, 셋째 아들 의안군과 
넷째 아들 신성군은 인빈 김씨 소생이었다. 이외에도 순빈 김씨 소생의 순화군과 정빈 민씨 
소생의 인성군 등 수많은 왕자들이 각축하고 있었다. 
  이럴 경우 누가 대신들의 지지를 받느냐 하는 점은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는데, 세자 책
봉 이전에 대신들의 중망을 받은 왕자는 공빈 김씨  소생의 광해군이었다. 맏아들 임해군은 
성격이 과격해서 대신들이 꺼려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선조 24년 세자 책봉 문제는 정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재위 24녕
이 되도록 세자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걱정한 우의정 유성룡이 좌의정 정철을 찾아가 논의
했다. 이들이 마음에 둔 왕자는 둘째 광해군이었다.
  "우리가 국가의 중책을 맡았으니 마땅히 큰일을 해야 할  것이오. 지금 후궁 소생의 왕자
가 많이 있는데 세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세자를 세울  계책을 논의해야 할 것이오. 우
리가 힘써 청해봅시다."
  "영상이 우리말을 듣겠소?"
  당시 영의정은 북인 이산해였고 유성룡은  남인, 정철은 서인이었다. 영의정과 같은  당인 
유성룡이 대답했다.
  "우리 두 사람이 하자고 하면 영상이 어찌 듣지 않겠소."
  이렇게 하여 영의정 이산해를 포함하여 세자를 세우는 데 동의한 세 정승은 대궐에서 모
여 주청하기로 했으나, 막상 약속 장소에 이산해가 나오지 않아 무산되었다. 다시 약속 날짜
를 잡아 아렸으나 이번에도 이산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산해는 당시 선조가 인빈 김씨를  총애하여 그 아들 신성군에게 뜻이  있는 것을 알고, 
광해군에게 뜻이 있는 두 정승과 신성군에게 뜻이 있는 선조 사이에 공백을 이용해 두 정승
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했다.
  이산해는 극적인 반전을 노리는 계획을 짰다. 인빈 김씨의  오라비 김공량과 주연을 나누
기로 약속한 이산해는 먼저 아들 이경전을 김공량의 집으로  보냈다. 한참 후에도 이산해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이산해의 종이 급히 달려와 이경전에게 고했다. 
  "대감께서 오시려고 하다가 어떤 말을 듣더니 문을 닫고서 눈물만 흘리고 계십니다"
  이경전이 놀라서 집으로 갔다가 곧 돌아와 김공량에게 설명했다.
  "부친께서 '좌상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후 신성군 모자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말을 
들으신 까닭에 어찌 할 줄 모르고 계십니다."
  김공량은 즉시 인빈 김씨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고했고 인빈은 선조에게 울면서 호소했
다.
  "무슨 까닭으로 좌상 정철이 너희 모자를 죽이려 한다더냐?"
  "먼저 제자 세우기를 청한 뒤에 죽이려 한답니다.'
  선조는 일축했다. 
  "뜬소문이지 정철이 그럴 리 있나."
   그 다음날 세 정승이 함께 세자  책봉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는데 이산해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아서 유성룡과 정철만 선조를 청대하였다. 정철이 세자  책봉 문제임을 말하자 선
조는 "누가 적당한가"라고 물었다.
  "광해군이 그 중 가장 중망이 있습니다."
  신성군이 아닌 광해군의 작호가 나오자 선조가 화를 벌컥 냈다.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 되었는데 경은 무슨 말을 하는가?"
  유성룡은 한 마디도 거들지 못했고 정철은 땀을 뻘뻘 흘리다가 물러나왔다. 이 사건은 거
칠 것 없이 뻗어가던 정철을 거꾸러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산해의 계략이 성공한  것이다. 
양사에서 즉각 탄핵에 들어갔다. 
  "영돈녕 정철은 조저의 기강을 마음대로  하여 그 위헤가 세상을 뒤덮었으니  파직시키소
서."
  구체적인 혐의도 없이 대신을 탄핵하면 대간이 추궁을 받은 법인데도, "위세가 세상을 덮
었다"는 모호한 혐의를 선조가 받아들임에 따라 정철은 머나먼 강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
다. 이처럼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조정이 한바탕 소동을 겪은 그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했
다.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정확하게 개국 2백년 만인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은 조선의 모든 체제를 송두리째 뒤엎
었다. 조선통신사의 정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이 침략할 것 같다"고 했던 황윤길의 보
고는, "침략의 조짐이 없다"는 부사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에 묻혀버렸다.  황윤길을 야당인 
서인인 반면 김성일은 집권당인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적군은 서인만을 골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공격한다는 기본적인 안조법칙마저  당리당략에 묻혀버린 것이다. 적군
이 침입할 가능성이 1퍼센트만 있어도 만반의 준비를 다해야 하는 것이 국방의 기본 원칙이
란 점에서, 당시 조선은 이미 정상적인 국가 시스템이 붕괴된 상태였다.
  동래 부사 송상현을 전사시킨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해 오자,  놀란 선조는 신립에게 모
든 희망을 걸고 삼도순변사로 제숫했다. 그러나 선조로부터 보검과 전권을 하사받은 신립은 
새재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자는 장수들의 요청을 무시한 채 허허벌판인 탄금대에  배수진
을쳤다 대패하고 충주는 왜적에게 떨어지고 말았다.
  상대당을 거꾸러뜨릴 게략을 세우느라  정신 없던 조정 신료들은,  막상 거꾸러뜨려야 할 
왜군이 쳐들어 오자 도망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선조도 마찬가지 였다. 선조는 군부로서  왜
적을 물리치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 자세보다는  일신을 보존하는 일에만 골몰해, 
왜적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울을 버리고 달아나기로 했다.
  사실 조정은 선조가 도망가기 전부터 이미 조정이 아니었다.  아직은 어였한 국왕인 선조
가 젊은 내시들과 판방에 앉아 있는데도, 백성들이 대궐로  난입해 값나가는 물건들을 마음
대로 들고 갔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제지할 생각을 못했다. 또한  도망가는 선조의 행렬이 
돈의문을 지날때는 평소 '군신의 의리'를 밥 먹듯이 읊조리던 배관들이 모두 도망가  따르는 
자가 1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국왕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대궐에 난입해 노비들을  관리하
던 관청인 장예원에 불을 질렀다. 왜군이 서울에 들어오기도 전에 대궐은 양반 사대부의 침
학에 분노한 백성들의 손에 불타고 만 것이다. 선조의 행차가 개성에 이르렀을 때는 백성들
이 어가를 가로막고 선조를 비난했다. 
  "상감은 그 동안 민생은 뒷전이고 수많은 후궁들 부자 만들기에만 열중하고  후궁의 오라
비 김공량 사랑하는 것만 제일의 계책으로 여기다가 오늘 이 일을 당했는데 어찌 김공량을 
시켜 왜적을 토벌하지 않으시오."
  그 중에는 선조에게 돌을 던진 사람도 있었으니 백성들에게 선조는 더 이상 임금이 아니
었다. 국왕을 정점으로 한 사대부가 농민을 지배하던 조선의 국가 체제는 완전히 붕괴된 것
이다. 
  광해군은 이처럼 국가 체제가 붕괴된  폐허 상태에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 되었다"며 정철을 치죄하던 선조는 세자를 세워야 인심이 안정될  것이라는 조정
의 중의에 부랴부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으로서는 나라가 오늘  망할자 내일 
망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니, 앞으로 임금이 될지 왜적의 손에 죽을지
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어렵사리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살리는 고난이었다.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의 임무를 맡은  광해군은, 
맹산, 곡산, 이천 등지를 순회하며 왜군을 교란시키고  백성들을 의무했다. 선조도 광해군의 
이런 활약에 고무되어 개평역에 있던 광해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살아서는 망국의 임금이요, 죽어서는 이역의 귀신이 될 것이다. 부자가 서로 헤어졌
으나 다시 볼 날이 없을 듯하다. 오직 바라는 바는 세자가 옛 판도를 다시 회복하여 위로는 
조종의 영을 위로하고, 아래로 부모의 돌아옴을 맞이하라. 종이를 대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노라."
  광해군은 이 편지를 읽고 목놓아 통곡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돌을 맞는 수모를 당한 
선조는, 해전에서 이순신의 활약과 육전에서 의병과 명나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한 고비 넘
기자 광해군에 대한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주상의 뜻
  선조는 왜란이 막바지에 다다른 1596년 명나라가 자신을 폐하고 광해군을 국왕으로  책봉
할지 모른다는 의구심에서 전위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광해군과  대신들이 무려 아홉 번이
나 청한 후에야 뜻을 거두었을 정도로 선조는 의심 많은 부왕이었다.
  정유재란이 끝난후인 1600년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그2년  뒤 쉰한 살 
되던 해 김제남의 열아홉 살짜리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바로 인목왕후이
다. 그런데 국혼4년 후에 인목왕후가 왕자를 낳으면서 조정엔 세자를 둘러싼 새로운 움직임
이 일었다. 이때 태어난 영창대군은 선조가 바라 마지않던 정비 소생이었던 것이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영의정 유영경은 백관이 하례한다고 주장했다.좌의정 허욱과 우의정 
한응인이 "대군 한 명을 낳았다고 반드시 하례할 것까지야 있겠소?"라고  반대해 하례는 중
지되었으나 유영경의 이 행위는 많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갓 태어난  대군에게 백관이 
하례하는 것은 광해군의 지위를 흔드는 행위였다. 유영경은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과 임영대
군이 태어났을 때 백관들이 하례한 전례를 근거로 들었지만,  세종 때는 세자나 광평대군이 
모두 정비 심씨의 소생이었으므로 후궁 소생의 광해군이 세자로 있는 지금과는 경우가 달랐
다.
  "유영경이 주상의 뜻에 따라 대군의 지위를 튼튼히 하려고 한 것이다."
  시중에 이런 소문이 떠돌았다. 갓  태어난 대군과 이미 성인인 세자  사이에 갈들이 싹틀 
때 관건은 '주상의 뜻'에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백척간두에 놓였을  때 "오직 바라는 바는 
세자가 옛 판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면 "종이를 대하닌 눈물이 앞을 가려 말할 바를 아
지 못하겠다"던 선조의 마음은, '도루목'이란 신조어를 만들었던 그 입맛처럼 평화를 만나니 
다시 바뀌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끝난후 선조가 광해군을 흔든 표면적인 명분은 명나라가 세자 책봉을  거부한
다는 것이었다. 서울로 환도한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청하는 사신
을 보냈으나 명나라는 번번이 거부했다. 그 이유는 임해군을  제치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
하는 것은 차례를 뛰어넘은 예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진짜 이유는 명나라 내
부의 권력 투쟁에 있었다. 명의 신종(재위 1572-1620)이  둘째 아들 복왕 상에게 뜻을 두고 
맏아들인 광종을 세우려 하지 않자, 명의 예부에서 신종의 맏아들 광종을 위해 광해군의 세
자 책봉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선조의 속마음은 맏아들 임해군이 아니라 갓 태어난 영창대군에 있다는 점에서 명
나라의 책봉 거부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예관이 다시 사신을 보내 
세자 책봉을 청하자고 주청하자, 선조는 "왕비 책봉은 청하지  않고 세자 책봉만 청하는 것
은 무슨 까닭이냐?"며 벌컥 화를  냈다. 이를 본 신료들은 선조의  마음이 광해군에게 떠난 
것을 알았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광해군측에서 마음이 급해진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만약 광해
군이 폐세자되고 정비의 아들이 세자가 되면 광해군은 목숨을 부지할 방법이 없었다.
  인목왕후측에서 기록한 <계축일기>는 이때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이 인목왕후를 낙태시키
기위해 대궐 안에 돌팔매질도 하고 나인측간에 구멍을 뚫고 나무로 쑤시는 등 수많은 방해
공작을 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방해 공작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쨋든  이처럼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선조
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만일 영창대군이 장성할 때까지 선조가 생존했다면 
비극의 주인공은 광해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젯밤에 편히 잤다
  재위 40년 가을 들어 선조의 병세가 갑자기 심해졌다. 약방의 온작 처방에도 효험이 없자 
가망이 없음을 알아차린 선조는 전위 전교를 내리기 위해 세 정승을 불렀다. 그때 영창대군
의 나이 겨우 두 살이었다. 서른네 살의 장성한 세자를 폐하고 강보에 싸인 두 살의 아이에
게 왕위를 넘길 수는 없었다. 결국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영창대군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영의정 유영경의 소북세력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유영경은 선조가 세 정승 모두가 아니라 자신만 불렀다며 선조와 독대했다. 이 자리
에서 선조는 비망기를 내린다. 
  "지금 병에 걸린 지 1년이 다되어가는데 차도는  없고 더욱 침중하다. 세자가 장성했으니 
고사에 의해 전위해야 할 것이다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도 가하다. 군국의 중대사는 이
처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속히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장성한 세자', 즉 광해군에게 전위나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비망기였다. 죽음을  눈앞에 
둔 손조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유영경은 이 전교를 받기를 거부
했다. 
  "오늘의 전교는 실로 여러 사람의 뜻 밖에 나왔으니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영경은 같은 소북인  병조판서 박승종과 공모해 대궐을  에워싸기도 했다. 
그런데 같은 날 뜻밖에도 중전 인목왕후가 한글로 내지를 내려 저위를 지지하고 나선다.
  "상께서 병중에 계신 지 거의 1년이 되어가니 심기 불편함이 배나더하다. 지금 이 전교를 
따르지 않는다면 심기가 더욱 손상되어 환후가 더욱 위중하실까  염려된다. 대신은 상의 명
을 순순히 따르라 이것을 바랄 뿐이다."
  유영경, 허욱, 한응인 등 세 정승은 전교 받기를  거부하고 나섰다. 광해군과 대신 사이에 
전운이 감돌았으나 세자가 명을 받겠다고 스스로 나설 수는 없었다. 이때 대북에서 소북 유
영경을 공력하고 나선 인물은 전 공조참판 정인홍이었다.
  "신이 삼가 길에서 듣건대 지난 10월 상께서 전섭한다는 전교를 내리자  영의정 유영경이 
원임대신을 다 내쫓아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유독 시임대신과 공모하였으며, 중전께서 언서
의 전지를 내리자 '금일 전교는 실로 여러 사람의 뜻 밖에 나온 거사이니 명령을 받지 못하
겠다'고 즉시 회계하여 대간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유영경은 무슨 음모와  흉계
가 있어서 이토록 중대한 일을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세자를 동요시키고 종사
를 위태롭게 한 영경의 죄를 빨리 정당한 형벌로 다스리소서."
  그러나 선조는 오히려 정인홍을 꾸짖었다.
"정인홍이 세자로 하여금 속히 전위를 받게 하려고 하였으니 그 스스로 모의한 것이 세자에
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여겼겠지만 실은 불충함이 극심하다.  제후의 세자는 반드시 천
자의 명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세자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세자는 책명을 받지 못했으니 이
는 천자도 허락하지 않은 것이고 천하도 알지 못한다. 지금  인홍의 상소 때문에 위로는 내 
마음이 불안하여 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고 낮에는 밥을 먹지 못한다."
 병세가 조금 낭아지자 선조의 마음이 또다시 변한 것이다.  정인홍은 이 일로 귀양길에 오
르게 되었다.
 이것이 선조의 성격이자 통치술이었다. 선조는 동.서인은 물론이고 아들 광해군도 믿지  못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에 발생한 정여립 옥사사건(기축옥사)을 살펴보면  선조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기축옥사는 흔히 반란 사건으로 불리지만 사실 그 증거도 불분명한 사
건이었다. 허목은 이 사건으로 무려 1천여명의 호남사대부들이  화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
는데, 16세기 중반의 조선 인구가 채 5백만이 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어머어마한 규모였
다.
  이렇게 많은 사대부들을 명확한 증거도 없이 죽인 선조는 훗날 이런 말로써 자기 부정을 
한다. 
  "내가 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에게 속어 어진  신하들을 죽였구나." 그러나 선조는 이른
바 흉혼독철에게 속아 무고한 신하들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선조는 이이의 제자로서 서인
이었다가 동인으로 당적을 옮긴 정여립의 전력을 이용해 당시의 집권당인 동인을  약화시키
려고 의도적으로 옥사를 확대한 것이었다. 정여립 사건때 화를 입은 사람들은 선조를 "시기
심이 많고 고집이 세며 모질어서 같이 일을 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거나 "과팍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선조는 이렇듯 남이 예측할 수 없는 괴팍성을 왕권 강화에 기용한 인물이었다.
  정인홍의 상소 이후 선조는 광해군이 문안할 때마다 "명의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왜 세자
라고 칭하는가? 너는 권봉한 것일 뿐이니 앞으로는 문안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꾸중을 들은 광해군은 땅에 엎드려 피를 토하고 정신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을 쫓
아내기에는 선조의 병세가 너무 깊었다. 드디어 재위 41년 1월 선조의 병세는 돌이킬 수 없
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해 2월1일에는 "어젯밤엔 편히  잠을 잤다"고 말해 병세가 호전되
는 줄 알았으나 오후부터 갑자기 악화되어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중
요한 것은 이날 선조의 임종을 지민 유일한 인물이 인목왕후라는 점이다. 그녀는 영의정 유
영경등이 "전례에 따르면 부인은 임종을 볼 수 없다"고 말하는 데도 선조 곁을 떠나지 않았
다. 왕비와 대신이 한 자리에 있을 수 없으므로 대신들이 밖에서 기다리는데, 잠시 후  곡성
이 밖에까지 들렸다. 다사다난하고 파란만장했던 선조 시대는 이처럼  후계 문제를 두고 오
락가락하는 가운데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서른다섯 살의 세자 광해군이 즉위했다.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세자에게 전위하겠다는 선조의 교서까지 거부한 세력에게 광해군의 즉위는 두려운  일이었
다. 왕조국가에서 신하가 왕위를 두고 세자와 다투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었다. 선조와 인목왕후의 전위 교서를 거부한 유영경으로서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다른 인물을 임금으로 택한 신하와, 그로부터 배척받았던 임금은 같은 하늘 아
래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선조가 죽었다고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유영
경이 영의정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세자의 장인 유희분은  전한 최유원을 시켜 선조 사망 당일  세자가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하였다. 하지만  유영경이 세자의 당일 즉위를 반대하고  나섰다. 
유영경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씩이나 반대하고 나섰다. 이는 유영경으로서는 목숨을 
건 반대였지만 이미 대세는 세자 광해군에게 기울었다. 광해군은  이튿날 백관이 모여 천세
를 부르는 가운데 즉위식을 거행하고 드디어 왕이 되었다.
  유영경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다음달 유영경을 중도부처시켰다
가 같은 해 9월 유배지에서 사사했다. 영수 유영경의 몰락과 함께 소북도 역시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졌다. 광해군이 이처럼 소북을 처단하고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에게 정권을 넘겼으
나 이로써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의 존재가 남아 있었다. 
  만약 임해군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처럼 현명하다면 골육상쟁의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
다. 동생을 임금으로 둔 형은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의도적으로 정치를 멀리하는 것이 현명
한 처사였다. 임해군은 명나라가 광해군의 책봉을 거부하는 상황에 희망을 걸었을지 모르지
만, 명이 책봉을 거부한 것은 자국의 광종을 위해서지  임해군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임해군은 동생 광해군이 자신을 절도로 유배 보내라는 대신들의 청을 거부하며 군사를 동
원해 자택 연금을 시켰을 때 근신하고 있어야했다. 그러나  임해군은 부인 차림으로 변장해 
다른 사람에게 업혀 도망가다가 발각됨으로써 스스로를 궁지로 몰았다. 신료들의 거듭된 요
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광해군은, 임해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 보내고 말았다. <광해군
일기>에 따르면 그 다음해 수장  이정표가 독을 들고 찾아갔으나  임해군이 독약 마시기를 
거부해 이정표가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임해군의 비참한 죽음은 권력은 형제 사이에도 나눌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경위야 어찌 됐것 이 사건은  광해군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광해군과 대북세력에게 임해군 이상의 위협적인 존재는  영창대군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
리지만 영창대군은 어엿한 선왕의 적자였으며 그의 생모 인목왕후는 엄연한 대비였다. 영창
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은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미련을 버리
지 못했다. 김제남과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지지함으로써 광해군과  대북세력이 영창대군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야 했다. 그러나 김제남은  영창대군이 성장함에 따라 더욱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대북정권이 그를 의심하게 되면서 사태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광해군 5년에 발생한 박응서의 옥사는 김제남을 물론  영창대군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이 사건은 전 서인 정승 박순의 서자인 박응서가  주범이라 해서 '박응서의 옥사'라 불린다. 
박응서는 전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등 7명의  서자들과 사생계를 조직하고, 소양강 위에 
같이 살면서 스스로를 강변칠우, 또는 죽림칠현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새재를 지나던 은상을 살해했다가 포도청에  체포됨으
로써 계획이 발각되었다. 서인측 기록인 <광해군 일기>에는 대북 영수 이이첨이 이 사건을 
김제남의 사주를 받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 반역 사건으로  조작했다고 비난했다. 그 진
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사건은 영창대군  추대 사건으로 인정되어, 배후 인물인 
김제남은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다. 김제남이 사사된 다음해
인 광해군 6년 강화부사 정항은  음식물 공급을 중단하는 등  영창대군을 핍박하다가, 방에 
가두고 심하게 불을 때 비참하게 죽였다고 한다. 더구나 김제남의  세 아들이 모두 화를 입
는 등 인목대비 집안은 사실상 멸문의 화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사건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인 것으로  끝날 수 없었다. 김제남의 
딸이자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만일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영창
대군 살해라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최소한 목숨은  부지시켜주는 온건한 방법을 
택했다면 서인들의 쿠데타 명분은 궁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미 그 친아버지와 친아들을 
죽여버린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더 이상 인목왕후를 대비로 모실 수 없었다. 두 지친을 죽여
버림으로써 형식적인 아들과 형식적인 어머니로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어지마저  없애버
린 이 사건은,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큰 실책이었다. 
  이들은 3년후에 드디어 폐모론을 주창하였다. 광해군  9년부터 주창되기 시작한 폐모론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여버린 대북정권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  있지만, 성리학 
사회 조선에서 '모자관계'는 권력으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하수였다. 제 
아무리 현세의 권력이 강고해도 아들이 어머니를 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폐모론은 
내외의 엄청난 저항을 받았다. 심지어 평생 당색이 없었던  이항복마저 이에 반대하다가 귀
양 가면서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랄 비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
중신처에 뿌려본들 어떠리"라고 원한을  가질 정도로, 어머니를  폐한다는 비윤리적 행위는 
광해군과 대북정권을 고립시켰다. 
  그러나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었던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드디어 광해군 10년 인목대비
를 폐하고 존호를 깍아 서궁으로 칭하면서 유폐시켰다. 비록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현
실적인 외교정책을 수행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민새을 위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어
머니를 폐한 사태는 반대파에게 이런  모든 업적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아
들이 어머니를 폐한 사태는 처음이었고, 일반 사가에서 이런 일을 했다면 당연히 사형이 었
다.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정권에서 완전히 멀어진 서인들은  폐모론을 명분삼아 세력을 모
았다. 그리고 드디어 광해군 15년 3월, 서인들이 광해군의 보카뻘인 능양군을 임금으로 추대
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문제의 찹쌀밥
  선조는 죽기 직전 인목왕후를 통해 유서를 세자 광해군에게 전했다. 
  "형제를 내가 있을 때처럼 사랑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이를 너에게 
부탁하니 너는 모름지기 내 뜻을 받아라."
  선조는 어린 영창대군의 보호를 맡길 인물은 세자 광해군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
었다. 그러나 광해군으로 하여금 영창대군의 존재를 두려워하게 만든 인물은 다름아닌 선조 
자신이었다. 선조는 끝없이 병을 달고 다녔으면서도 약간의 기력만 있으면 세자를 흔들었다. 
또한 신하로서 임금의 전위 교서  받기를 거부한 유영경 대신, 그를  탄핵한 정인홍을 귀양 
보낸 인물도 선조 자신이었다. 따라서 선조가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상태에서 급서
하다보니 독살의 의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유력한 물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성협이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 검푸르니 바깥 소문이 헛말이 아니다"라고 말했
다는 <남계집>의 기록이 있으나, 이 역시 광해군이 폐출된 뒤의 기록이다. 광해군측에서 편
찬한 <선조실록>에 선조 독살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조반정 후 서인들
이 편찬한<광해군일기>에도 선조 독살설이 언급되지 않은 점은 시사적이다. 다만<광해군일
기>에는 선조 독살설에 대해 서인측이 유일한  근거로 삼은 찹쌀밥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선조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에 찹쌀밥을 올렸는데 상이 갑자기 기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라는 내용이다. 바로 이 찹쌀밥을 세자가 들였다는 것이 서인들의 주
장이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광해군을 쫓아낸 당사자 인조의 찹쌀밥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시 선조께서 위독하실 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상세히 
알고 있다 .선왕께서 병 후에 맛있는 음식이 생각날 즈음  동구의 약밥이 마침 왔기에 과하
게 잡수시고 기가 막혀 이내 돌아갔을뿐 중간에 어떤 농간이 있었다는 말은 실로 밝히기 어
렵다."
  선조의 기를 막히게 한 약밥,  즉 찹쌀밥을 들인 인물이 광해군인  것은 맞지만 찹쌀밥에 
독이 들었는지를 밝히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을 입증하는 인물로 개시라는 궁녀가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말로 '개
똥이'라는 뜻의 이름를 가진 개시가 ,  세자를 교체하려는 선조의 뜻을 알고 광해군과  몰래 
접촉해 뒷날을 도모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개시가 선조
를 독살했는데 실상 광해군은 이런 사실을 몰랐다고 하고 있다.
  선조 때부터의 궁녀였던 개시는 광해군이 즉위한 후 이이첨과 한편이 되어 마음대로 권력
을 휘둘렀다고 한다.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파는 것은 물론이고,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광해군
을 모시려면 개시의 허락을 얻어야 했기 때문에 광해군과 동침하고자 하는 궁녀는 그녀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광해군에게도 마음에 안 들면, "나의 큰 덕을 감히 
잊는단 말이오. 내 입에서 말이 나올 것 같으면 임금이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오"라고 성
를 내니 광해군이 당황하고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서인측에서 과장한 소문일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개시가  정몽필이란 자를 
사랑해서 음란한 짓을 하면서 광해군의 후궁인 소의 윤씨를 중매해 음행하게 했다는 데 이
르면 그 신빙성은 더욱 떨어진다. 
  선조 독살설은 인조반정 후에 조직적으로 유포됟었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미약하다. 반정 
일등공신 원두표는 집권 후 광해군이  선조를 시역했다고 상소하려다 그만둔  적이 있었다. 
이때 왜 상소를 그만두었냐는 박세채의 질문에 대한 원두표의 대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처음 장유가 지은 왕대비(인목대비)의 교서 외에 언문으로  된 교서에는 광해의 작은 죄
상도 다 주워 모았는데 다만  약밥에 중독되었다는 말은 없었소, 이를  가지고 봐도 경솔히 
들추기는 어려워서 그만둔 것이오."
  즉 서인들이 아무리 물증을 찾으려 해도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 없었기에 상소하지 못했
다는 것이다 .만약 미약한 근거라도 있었다면 이는 인조반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에 그만두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광해군의 선도 독살설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인물을  인목대비였다.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
과 반정군이 경운궁의 인목대비를 찾아가자 대비는 맨 처음 이렇게 물었다. 
  "역괴 부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두 궐하에 있습니다."
  "그는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다 .내가 친히 그들의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
사하고 싶다. 10여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 같은 날을 
기다린 것이다. 쾌히 원수를 갚고 싶다."
  이는 폐모가 되어 서궁에 유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친정아버지와 형제들은 물론이고  선왕
의 유일한 적자인 아들 영창대군을 잃은 한 여인의 한이  표출된 것이었다. 이때 그녀의 나
이 만 서른아홉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반정의 주역들은 대비의 복수에 동의하지 않았다. 
  "무도한 임금으로는 걸의 주왕만한 이가 없었으나 탕의  무왕은 이를 추방했을 뿐입니다. 
지금 내리신 하교는 신들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목대비도 물러서지 않았다.
  "부모의 원수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는 한 나라에 같이 살 수  없
다. 역괴가 스스로 모자의 도리를 끊었으니 내게는 반드시  갚아야할 원수만이 있고 용서해
야 할 도리는 없다."
  이때 만류하고 나선 인물이 이덕형이다.
  "옛날에 중종께서 반정하시고 폐왕을 우대하여 천수를 마치게 하였는데 이것은 본받을 만
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목대비에게 광해군은 철천지원수였다. 반정 주역들이 광해군의 주륙에 동의하지 
않자 인모대비는 드디어 광해군이 선조를 시해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경의 말이 옳다. 역괴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
를 죽였으며, 그 적모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를 다 하였다.  어찌 연산에 비교할 수  있겠는
가."
  인목대비는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다. 동부승지 민성징이 그 내용을 되물었다.
  "지금 하신 하교는 외간에서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시해하였다는  말은 더욱 듲지 
못한 사실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데 몽둥이로 하든  칼로 하든 무엇이 다르겠는가.  선왕께서 병들어 크게 
위독하였는데 고의로 충격을 주어 끝내 동아가시게 하였으니 이것이 시해한 것과 무엇이 다
르겠는가."
  여기에서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은 큰 혼선을 겪는다. 지금껏  서인들이 퍼뜨린 선조 독살
설의 줄기는 찹쌀밥에 의한 독살이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엉뚱하게도 "고의로 충격을 주
었다"는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이처럼 선조의 독살 여부에 대해 가장 잘 알 만한 위치애 있었던 인목대비가 '찹쌀밥'  대
신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은 선조 독살설이 두서  없이 전개되었다는 한 반증이다. 선조
의 임종 현장에는 약방 도제조 등 어의들이 입시해 있었으므로 '고의적인 충격'등은  상상할 
수 없는 일로 복수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아 하겠다.  그러나 광해군이 선조를 시해했다는 
인목대비의 이 말은 서인들러서는 호재였다. 서인들은 대비의 이 말을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중요한 명분의 하나로 삼아 전파시켰고, 때론 <남계집>에서처럼 문집에도 남겼다. 

    사실처럼 굳어진 독살설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숙종 때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는 서인이 계속 집권함에 따라, 
선조 독살설은 하나의 사실처럼 굳어졌다.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정권은 자신들이 왜 광해군
을 폐출했는지를 내외에 설명해야 했다. 당시 명나라는 중립외교를 취했던 광해군이 폐출된 
것을 환영했으므로 명나라의 책봉을 받는 것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국내 사정은 달랐
다. 시대착오적인 중화사상을 가지고 반정의 정당성르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  물
증이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제기하지는 못하고,  비공식적이나마 조직저으로 선조 독살
설을 유포했던 것이다. 만약 선조 독살설이 사실이라면 서인정권이 반정후에도 이를 공식화
시키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3장 소현세자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잊을 만하면 출연자만 바꿔 재탕 삼탕을 하는 우리나라 텔레비젼 역사드라마의 단골 주제
는 연산군과 장희빈이다. 그러나 이들의 삶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의미도 있으며 무대도 드
넓은 주제가 소현세자이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그리고 삼전도 치욕에 대해 잘 아는  사람
들도, 그 뒤에 존재하는 소현세자와 그 일가의 비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만큼 소현세자
는 잊혀진 인물이다. 
  그가 만약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면 이후 조선의 운명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는데, 소현세자는  이런 국제 정세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다.
  소현세자는 삼전도 치욕의 이후 이조를 대신해  청나랑오끌려가, 초기청의 수도였던 만조
의 심양에서 9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볼모로 보냈다. 조선의 세자가 볼모가 된 것 은 조선의 
마지막 세자 영치노가 소현세뿐이다.
  소현세자를 독살한 혐의자가 부왕  인조라는 점은, 그의 심산한  일생을 한마디로 축약해 
보여준다.
<인조실록>에따라 그의 죽음의 현장에 가보면, 9년여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세자가 
병에 걸린 것은 귀국한 두 달 후인 인조 23년 4월23일  이었다. 어의 박군이 진단한 세자의 
증세는 학질이었다. 그런대 장년의 세자에게 그다지 중병이라고 볼  수 없는 학질을 치료한 
인물이 문제의 의관 이형익이다. 
  약방에서는 다음날 새벽 인조에게 이형익을 시켜 침을 놓앙서 학질의 열을 oflrp 해야 한
다고 주청했고 인조는 그 말에 따랐다. 그날 <인조실록>은 화성이 적시성을 범했다고 기록
하고 있다. 이형익은 인조의 명에 따라 세자가 발병한 다음날인 34일부터 침을 놓았다. 다음
날인 25일에도 세자는 침을 맞았는데  그 다음날일  26일에 그만 덜컥 세상를 떠나고 말았
다. 
  세자의 갑작스럽고 허무한 죽음은 당연히 수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어린아니도 아니
고 풍토가 다른 이역에서도 9년을 너끈이 버틴 세자가 학질 따위에 쓰러질 리는 없다는  것
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학질에 침을 맞다 죽은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었으
므로 당연히 세자가 독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근런데 소현세자가 독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는 정사인 <인조실록>23년 6월27일자에
도 나온다. 소현세자의 졸곡제기사중 세자의 시신 상태를 설명해 놓은 부분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 나오므
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는 것이다. 김종직의 조의제문 파문이 실록
을 편찬하기 위한 기본 자료인 사초에서 비롯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실록은 함부로 적을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게다가 종실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라고 목격담의 출처까지 적어놓았으
니, 실록의 이 내용은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현세자는 정말 독살된 것일까? 또한 그렇다면 왜 볼모 생활 중의 심양에서가 아니라 볼
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고국에서 독살당해야 했을까? 그 의문을 추적해보자.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인조 15년 1월30일 50여명의 사람들이 통곡을 하면서 남한산성을 나왔다. 의장도 없는 신
하의 행렬속에, 신하를 뜻하는 푸른 남염의 차림으로 백마에  올라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
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였다. 그 초라하고 굴욕적인 행렬  속
에는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도 있었다.
  산성을 내려온 인조는 죄인임을 나타내기 위해 가시 박힌 자리를 펴고 앉아 대죄했다. 인
조와 소현세자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의 인도에 다라 삼전도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청 태종이 황제를 나타내는 황옥을  펼치고 않아 있었고, 주위에는 활과  칼로 무장한 갑옷 
차림의 장수들이 진을 치고 좌우에 옹립한 가운데 장엄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인조가 손수 걸어 지 앞에 이르자 용골대가 나와 진문 동쪽에서 머물러 기다리게 하였다. 
용골대가 진 안에 들어갔다가 나와 청 태종의 말을 대신 전했다.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인조가 답했다.
  "천은이 망극합니다."
  용골대가 단 아래 북면하는 쪽에 자리를 마련했다. 북쪽을  바라보는 곳은 신하의 자리이
고 남쪽을 바라보는 곳은 임금의 자리이다. 인조는 그 자리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
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삼배구고두례가 끝나자 인조를 단 위에 오르게 
하였는데 청 태종은 남면하고 인조는 동북 모퉁이에서 서쪽을 향해 앉았다. 또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서쪽을 향해 나란히  앉고 소현세자는 그 아래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조선의 두 대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은 그아래에 앉았
다.
  청 태종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무력으로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이에 맞서  청의 콧대를 꺽을 무
사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위솔 정이중이 나서서 다섯 번을 쏘았는데 활과 화살
이 조선과 다르므로 모두 맞지 않았다. 이에 만족한 청에서는 떠들썩한 술판을 벌였다. 잠시 
후 인조가 완전한 항복의 표시로 도승지를 통해 국보를 받들어 올렸다. 당사자인 인조는 물
론 소현세자, 봉림대군 모두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으니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치욕이다 .
    
    볼모로 가는 두 형제
  삼전도의 치욕은 병자호란때 패전의 결과였으나 사실 그 뿌리는 인조반정에 있었다. 인조
반정은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와  폐모론에 대한 반대를 명분으로  일으킨 
것인데, 성격상 연산군의 학정에 항거해 일으킨 중종반정과는 달랐다. 연산군과 달리 광해군
의 정사는 국가나 백성들의 자리에서 볼 때는 탁월한  것이었다. 인목대비와 서인의 처지에
서는 광해군의 정사가 패륜이었을지 몰라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늘상  벌어지는 일 중의 하
나에 불과했다. 따라서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에게는 인조반정이 희소식이 었겠지만,  광해
군의 치세에 만족하고 있던 일반 백성들에게는  임진왜란의 참화 극복에 전력을 바쳐야  할 
시기에 벌어진 지배층 내부의 불필요한 정치적 소요에 지나지  않았다. 반정 직후 일등공신
의 한사람인 이서의 회고를 보자.
  "갑자기 광해군을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새 임금이 성
덕이 있는 줄 알지 못했으므로 상하가 놀라 어쩔 줄  몰랐다.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써 진압할 수 도  없어서 말하기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오리 이원익이 
적왕조 때의 원로로서 영상에 제수되어 여주로부터 입조하자 백성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
되었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으로서는 인심을 수습할 명분과 사람이 없어,  남인 정승 이원익이 명
망을 빌려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서인 정권이 겨우 위기를 수습한 반정 다음해인 인
조 2년에는 내부 분열인 이괄의 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괄은 반정의 주역이면서도 평안병
사 겸 부원수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는데,  이 안은 만주에서 여진족의 통
일 기운이 높아져 국경 수비에  치중해야 할 시점에 발생해 북방  국경을 크게 약화시켰고, 
더욱이 정묘, 병자 양 호란때 조선군이 무력하게 무너지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반정 후 서인 정책의 핵심 방향은 광해군 정권의 모든  거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 중요한 
것이 바로 외교정책의 변화였다. 광해군의 명,청 중립외교에 대한 반정정권의 인식은 인조의 
즉위를 허락하는 인목대비의 즉위 교서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년으로,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임진년에 재조해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어  선왕께서는 40년 동안 재위하시면
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
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
려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삼한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그 통분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반정정권이 급격하게 반청정책을 전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반정 당시 
중국대륙은 후금, 즉 청나라와 명나라가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 대치하고 있었다. 이런  긴
장 상태에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평북 철산의 가도에 주둔하면서 요동 정벌을 계획한 것
이 청의 심기를 건드렸다. 후금은 조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중원을 정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묘호란은 양국이 형제관계를 맺는 정묘조약으로 종결되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당시 청은 명과 조선 모두를 상대로 전면정을 벌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수습
책으로 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정묘조약 9년후인 인조  14년에 청이 형제관계를 군신관계
로 바꾸자고 나선 것은 조선과의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인조와 서인정
권이 이를 거부하려면 정묘조약 이후 9년동안 그만한 힘을 길었어야 했다. 하지만 서인정권
은 국방력 대신 명분만 쌓았고, 그 명분에 의하면 청을 천자국으로 모실 수 없었다. 청을 천
자국으로 받드는 것은 반정 명분 자체를 부인하는 자기  모순이었다. 인조는 8도에 선전 교
서를 내렸다 조선 백성보다도 '명나라를  향한 큰 의리"를 더 큰  목소리로 주창한 이 선전 
교서는,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후금과 화를 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목청뿐인  허
세에 대한 청의 대답은 군사 공격이었고 그 결과는 삼전도의 치욕이었다.
 그러나 삼전도의 치욕은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끝나지 않았다 . 이후 조선은 군사력을 
가지 수 없으며, 소현세자 부부를 비롯해 봉림대군 등 왕자들을 볼모로 끌고 가겠다는 구체
적인 내용이 화의 조건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삼전도의 항복 5일 후 볼모로 잡혀 있던 소
현세자는 청나라로 잡혀 가기 전 하직 인사를 하러 대궐로 돌아왔다. 이때 배웅하던 신하들
이 모두 길가에 엎드려 통곡하였는데, 한 신하가 말의 재갈을 당기며 울부짖자 세자는 말을 
멈추고 함참 동안 그대로 있기도 하였다.
  청과의 화의조약 중 가장 논란이 된 것이 세자의 볼모 문제였다. 척화파는 모두 전사하는 
일이 있더라도 세자를 청나라에 내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강화파라 해도 세자가 볼모로 
가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 문제의 해결은 실로 난감했다. 이때 이 난제를  해결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소현세자 자신이었다.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
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에서  나가겠
다는 뜻을 전하라."
  볼모 문제는 소현세자가 이처럼 스스로 청  진영에 나아가기를 자청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운명을 내던진 이 결정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조선 지배층 대다
수는 국가의 안전보다 일신의 안전을 더 중시했다. 청이 세자와 대군 이외에도 판서의 아들
을 인질로 원하자, 평소에는 아귀처럼 관직에 달려들던 관료들이 서로판서를 맡지 않으려고 
다투었다. 실제로 호조판서 김신국이 내외의  비판을 모른 체하면서 병을  핑계대고 사직을 
청해 이경직이 대신 임명되기도 했다. 세자가  끌려가는 판국인데도 고위관료들은 나라보다
는 집안을 더 생각했던 것이다. 
  드디어 2월 8일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과  대군부인 장씨는 청 태조의 
열네 번째 아들인 구왕과 함께 멀고 먼 북방길을 떠났다.  인조가 지금의 경기도 고양의 창
릉(昌陵: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 서쪽까지 거동해 전송하자 구왕이 말했다. 
  "멀리 오셔서 전송하니 실로 감사합니다."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따라가니 대왕꼐서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세자의 연세가 저보다 많고, 일에 대처하는 것을 보면 제가 감히 가르칠 입장이 못 됩니
다. 더구나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시니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세자와 봉림대군이 절을 하자 인조는 눈물을 흘리며 당부했다.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
  엎드려 분부를 받은 세자는 신하들이 옷자락을 당기며 통곡하자 만류하며 말했다. 
  "주상이 여기에 계신데 어찌 감히 이렇게들 하오. 각자 진중하도록 하시오."
  마침내 소현세자는 언제 돌아올지는 물론  살아 돌아올 기약고 할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봉림대군의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명,청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소현세자에게 북방길은 분명 위기였으나, 조선으로서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중국에서
조차 이미 끝나가는 성리학을 금지옥엽 모시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사고방식을 깨트리고, 
또한 국제 정세는 명분이 아니라 힘에 의해 좌우된다는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
다.
  판서 남이웅, 좌부빈객 박황, 우부빈객 박노,  보덕 이명웅, 필서 민응협 등의  수행원들과 
북방길에 오른 세자는, 당시 청나라의 수도였던 만주의 심양에 자리를 잡았다. 세자  일행은 
심양에 새로운 숙소를 지어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는데 이를 심양관(瀋陽館)이라 했다. 소현
세자는 이 심양관을 중심으로 청과 조선 사이의 모든 일을 처리했다. 즉 소현세자는 사실상 
주청(駐 ) 조선 대사였고 심양관은 조선 대사관이었던 셈이다. 청은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관한 일들을 처리하려 하였고, 인조 또한 청과 직접 상대하는 것이 껄끄러워 심양관의 소현
세자에게 청에 관한 일들을 미루었다. 
  소현세자가 처리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곤혹스러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에 
응하는 것이었다. 청은 당시 명과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명과의 전투에 투입할 
조정군 파견을 요구했다. 이는 숭명대의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정권에게 
심각한 자기 부정이었으나, 전쟁에서 패배한 이상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는 청의 요구에 쫓겨 재위 18년 4월에 임경업과 이완이 이끄는 조선수군 6천 명을 파
병했다. 하지만 임경업은 병자호란 때  청군이 서울을 점령한 틈을 타서  역으로 청의 수도 
심양을 점령하겠다는 작전을 제안할 정도의 반청인사였으니,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대
로 싸울 리가 없었다. 임경업의 수군은 전진하라고 해도 전진하지 않고 명의 전선을 만나도 
발포하지 않았다. 발포하더라도 엉뚱한 곳을 향해 쏘고 배를 일부러 부수고 일부 군사를 투
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사보타주를 일으켜 청나라의 분노를 샀다.
  분노한 청나라는 이를 조선의 배신 행위로 규정짓고 청나라 장수용골대 등을  조사단으로 
삼아 의주에 파견했다. 조서은 병자호란 때 용골대에게 회되게  당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형편이되었다. 이때 세자는 용골대의 동향을 미리 조선 조정에  알려주고, 
용골대에게는 조선의 처지를 설득하는 등 양자의 충돌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한 번은 용골대가 "청과 다른 의논을 하는 자가 누구냐"며 세자를 협박한 적이 있
었다. 이때 세자는 벌컥 화를 내며, "내가 비록 이역에 와 있지만 한 나라의 세자이다. 네가 
어찌 감히 이토록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그 따위로 나를 협박하
지 말라"고 호통쳤다. 이에 용골대가 웃으면서 사과했을 정도로 소현제자는 담도 있는 인물
이었다.
  인조 20년에은 부사 이계가 감사 정태화의 명을 받아 조선 해안에 출몰한 명나라 배에 몰
래 쌀과 음식을 제공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때  용골대가 이계 등을 만주의 봉황성으
로 불러 세자와 함께 심문했는데, 세자는 시종일관 조선 관리들을 옹오했다. 이에  용골대가 
세자를 힐난했다.
  "세자가 감사를 이처럼 비호해주니 그와 한마음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자가 웃으면서 답했다.
  "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세자는 청과 조선 사이에 분쟁이 생길 때마다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
고 이런 관저을 통해 중요한 것은 성리학이 제공하는 명분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현실 인
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자는 심양에 오기 전부터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이미 병자호란 5년 전인 인조9년
에 견명사 정두원이 가져온 서양의 화포와 망원경, 자명종 등을 보고 서양문물에 깊은 인상
을 받았던 세자는, 심양에 와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성리학이 아니라 변화하는 
문물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소현세자가  보기에 중원의 
대세는 이미 청으로 기울고 있었다. 만주에서 흥기한  청이 아니더라도 명나라는 이미 종말
로 치닫고 있었다.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 즉위 후 가뭄과 흉년이 계속되자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각지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 중 비교적 큰 세력은 도적이 되어 떠돌아다니며서 명을 위
협했다. 사실상 명을 망하게 한 것은 청이라기보다는 이들 농민  반란군 중 가장 세력이 컸
던 역졸 출신의 이자성이었다.
  출신에 상관없이 세력만 있으면 황제를 자칭하는 것이 중국  역사의 한 특징인데, 이자성 
또한 세력이 커지다 스스로를 대순황제라 칭하고 명의 수도  북경을 공략해 함락시켰다. 북
경이 함락되던 날 황제의 외척과 귀족, 재상들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유적의 흙발에 차이면
서도, 농민 출신 이자성을 성천자로 받들고, 자결한 의종 숭정제를 저주하면서 목숨을  구걸
했다. 이렇듯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이 받들어 모시던 명나라는 이미 명나라의 황손들도 버린 
나라였다.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명의 유일한 정예군은 오삼계가 이끄는  부대였다. 청군을 치기 위
해 요동으로 진격하여 산해관을 돌파하던 오삼계는,  북경이 이자성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
을 듣자 국사를 돌리기로 결심하고 청나라 진영에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황제는 유적 이자성에게 돌아가셨다. 지금부터 나는 황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급
히 북경으로 향하는 바, 차제에 귀국의 병력을 빌렸으면 좋겠다."
  청과 연합전선을 결성해 북경으로 가자는 제안이었으나, 적군에게 군사를 빌려 달라는 이
말은 사실상 항복선언이었다. 소현세자를 볼모로 데려왔던 청의 구왕  다이곤은 즉각 이 제
의를 받아들였다. 다이곤은 당시 태종의 뒤를 이은 어린 청 세조를 대신해 섭정하고 있었다.
  "인의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 이자성을 멸하고, 중국 백성을 구원한다."
  명목은 명,청연합군이었으나 사실상 청군이  명군을 흡수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잡혀 온지 7년째 되던 해인 1644년4월이 일이었다. 이때 구왕 다이곤은 자국의 왕과 장수뿐
만 아니라 소현세자를 대동하고 남정길에 올랐다 소현세자를 대동한 것은 구왕의  의도적인 
행위했다. 남정군을 따라간 소현세자는 명나라의 마지작  정예군인 오삼계 군단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명은 도처에서 무너지고 있었던 반면 청은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이미 중원의 정세가 청으로  기울었음을 알고 있었던 소현세자는  오삼계 군단의 
항복 장면을 목격한 후, 조선이 취할 외교정책이 승명대의가  아니라 청나라 중심의 현실외
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청군은 남진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북경에 입성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점령해 
간 것이다. 청의 대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자성은  항전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망
갔고, 이로써 청은 명의수도였던 북경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자성은 청에 갖다  바치기 
위해 애써 북경을 함락한 셈이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북경에서는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
  "주씨네 떡가루로 이씨가 쪄낸 빵을, 이웃 조서방에게 고스란히 바쳤다.'
  이는 주씨의 명 왕조를 멸망시킨 이자성이, 결국 조씨를  국성으로쓰는 만주의 청에게 고
스란히 빼앗긴 것을 풍자한 노래였다.
  이를 지켜본 소현세자의 심정은 담담했다.  소현세자는 이미 7년 간의  볼모 생활을 통해 
이런 사태를 예견할 수 있었다. 인조 18녕 임경업이 명과 싸우지 않고 사실상 투항했을  때, 
세자가 놀랐던 것도 이때문이었다. 세자가 보았을 때 이런 행위는 오히려 조선을 위험에 빠
뜨리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처럼 세자는 볼모 생활을 통해 현실적인 국제 정세 인식을 갖
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  인식은 조선의 인조와 서인정권에게는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비춰졌다.



    부정아닌 부정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 온지 3년째 되던 해인 인조18년, 부사 이경헌과 서장관 신익전이 
인조의 병환이 심각하니 세자를 일시 귀국시켜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과 세자를 바꾸자고  요청했는데, 청은 이 제의에  대해 세자의 장남인 
원손 석철도 인평대군과 함께 보내라고 요청했다. 원손 석철을  심양으로 부른 후에야 소현
세자를 일시 귀국시킬 수 있었을 정도로, 청은 세자의 귀국을 두려워했다. 청은  구체적으로 
인평대군과 원손을 만주의 봉황성에서 맞바꾸자고  제의했는데 조선은 이를 거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청의 구왕 다이곤과 질가왕은 소현세자를 위로하기 위한 송별연을 열어주었고, 인조 18년 
2월 12일에는 청 황제 태종도 직접 송별연을 열어주었다.  이 자리에는 봉림대군도 함께 하
였다. 그런데 태종을 만나기 전 뜰 안에서 용골대가 세자에게 안장을 한 말과 대흥망룡의를 
주면서 입르라고 했다. 이를 본 세자는 깜짝 놀라 사양했다. 
  "이것은 국왕이 입는 장복입니다."
  용골대가 세자의 사양하는 뜻을 전하자 태종이 이를 받아들여 대흥망룡의를 입지 않게 되
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파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조선으로 연결되었다. 세자 빈객 신득
연이 이 상황을 자세히 적어 인조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인조는,  임진왜란때 
선조가 명이 자신을 폐하고 광해군을 세우지 않을까 의심했던  것처럼, 청이 자신을 폐하고 
소현세자를 세우지 않을까 의심하게 되었다. 세자는 청 태종의  송별연 다음날 심양을 떠나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 인조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뛰
었으나, 인조의 마음은 싸늘히 식어 있었다.
  인조는 노정밖에서 세자를 마중하겠다는  세자시강원 관원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어의를 보내자는 내의원의 주청도 거부했다. 인조는 세자를 맞이하는 모든 의식을 폐지시켜
버렸다. 심지어 "4년 만에 돌아오는 세자의 행차가 어떤 일인데 이렇게 간략하게 한단 말입
니까"라고 호소하는 대간들의 청마저 거부했다.
  다만 인조 18년 3월 7일 서울에  도착한 세자가 부복하여  눈물을 흘리자, 인조도 눈물을 
흘리며 맞은 것이 유일한 환영이었다. 세자의 눈물이 기폭제가  되어 인조는 물론이고 대신
들도 눈물을 흘려 조정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세자를 감시하러 따라온 처의 오목도 이를 저
지하자 인조가 설명했다.  "다시 볼 줄은 생각도 못했으므로  저절로 슬퍼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들의 눈물을 직접 대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의심이 부정에 녹은 것일까?
  세자는 그해 4월 2일 다시 청나라도 떠나게 되었다. 심양에는 꿈에도 그리워했던 원손 석
철이 있다는 사실이 한 가닥 위안이 되었다. 심양에 도착한 세자에게 청의 범문장이 그해 6
월말 봉림대군이 귀국할 때 원손도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자. 세자가 "날씨가 몹시 덥고 아
이가 병이 있으니 서늘한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출발시키려고  합니다."라고 말렸던 것은 부
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범문정은 황제께서 이미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으니 시기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러나 비운의 세자와 원손은 이국의 수도 심양에서 부자간의 정을 나눌 사이
도 없었다. 청에서 조선에 군사 징발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해 1월에는 전 판서 김
상헌과 전 지평 조한영 등이 목에 철쇄를 매고 두 손이 결박된 채 심양에 끌려와 심문을 받
게 되어 세자는 쉴 틈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인조 21년에는 전 정승 이경여와 선조의 부마
인 동양위 신익성, 그리고 전 판서 이명한등이 심양에 끌려와 목에 칼을 차고 두 손이 결박
된 채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세자는  조선 편에 서서 최선을 다했
다. 그러나 볼모 신분인 세자의  역할은 한계가 있어서 조선인이 주어갈  때마다 세자 또한 
한탄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세자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왕 인조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인조 21년 10
월 역관 정명수가 청이 세자를 귀국시키려 한다고 전하자, 인조는 처와 세자가 결탁하지 않
았는가 의심한다. 인조가 세자 귀국 문제를 비변사 당사에게 논의하자, 정태화는 "청에서 먼
저 말을 꺼냈는데 우리가 청하지 않으면 저들이 우리를 의심할 것"이라면서  받아들일 것을 
주청한다. 이처럼 세자의 귀국을 두고 근심하는 데서 이미 세자를 보는 인조와 조신들의 마
음이 달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주청에 대한 인조의 대답은 이렇다. 
  "청인이 내게 입조를 요구한 것은 전한때부터였으나 내가 병이 있다고 이해시켰기 때문에 
저들이 강요하지 못하였다. 이제 듣건대 구왕은 나이가 젊고 강퍅하다고 하니 그 뜻을 어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전일에는 세자를  지나치게 박하게 대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지나치게 
후하게 대하닌 나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그랬다. 인조는 구왕 다이곤과 세자가  결탁해 자신을 볼모로 불러들이고  세자를 조선의 
국왕으로 봉할 것을 우려했는지도 모른다.  인조의 이런 의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신하들이 
아니었다. 심열이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니 신하가 어찌 감히 우러러 세자의 귀국을 청하겠
습니까?"라고 대답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다음달 심양에서 온 중관을 만난 뒤 인조의 의혹
은 더욱 커진다. 
  "세자가 아무리 빨리 돌아오고 싶어도 우리의 인마가 들어간후에야 나올 수  있을 것인데 
역관 정명수의 말을 전해 들으니 세자가 돌아올 시기가 가까운 듯하다. 명수의 말이 이처럼 
쉽게 나오는 것은 내 추측이 허망한 소리가 아니라면 반드시 예측하지 못할 내막이 있을 것
이다."
  인조가 염려하는 "예측하지 못할 내막"이란 자신을 폐위시키고 세자가  즉위하는 것을 뜻
하는 것이다."
  인조가 염려하는 "예측하지 못할 내막"이란 자신을 폐위시키고 세자가  즉위하는 것을 뜻
하는 것이다. 이런 뜻을 알아차린 감자점이 답했다 .
  "성상은 항상 이를 염려하시는데 신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세자께서  나온 뒤에 마약 
뜻밖의 변이 있다면 군신 상하가 어찌 손을 묶어 두고 그들이 하는 대로 놓아둘 수  있겠습
니까?"
  청에서 인조을 폐위하고 세자를 세우고자 한다면 군신 상하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으니, 이조의 불안감을 정확히 읽은 것이었다. 그러나 청이 인조를 폐하고 세자를  세
우려 한다는 생각은,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의 의심일 뿐이었다. 청은 원손을 비롯해  세자의 
여러 아들들을 청으로 부른 후 만주의 봉황성에서 세자와  맞박꾸자고 제안했다. 이번의 귀
국은 세자반 강씨의 부친인 영중추부사 강석기가 인조 21년 6월 사망했는데도 세자빈이 아
직 곡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청한 것이었으므로 세자  부부가 동행했다. 세자와 세자빈은 
인조22년1월 초하루 자신들 대신 볼모로 들어온 원손과  아들들을 봉황성에서 만났다. 아들
들을 볼모로 잡고 곡을 하러 떠하는 상황이니 눈물의 상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의 만남
을 감시하던 청나라 사람들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볼모 생활 중에서 부친이 사망하여, 곡도  하지 못한 세자빈의 한은 컸다. 그러나  원손과 
다른 아들들을 볼모로 잡히고 귀국한 세자빈은 부친의 빈소에 곡을 할 수가 없었다. 인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조는 곡을 하기 위해 수천  리 길을 달려온 며느리의 빈
소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왕의 이 가혹한 조치에 삼공이 모두 "세자빈의 돌아갈 기일은 임박했는데  어버이를 살
표보았다는 말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라며 세자빈 강씨의 빈소행를  허락해달라고 청했으
나 인조는 거부했다. 삼공은 거듭 청했다.
  "세자께서 귀국을 청할 때 세자빈의 부친은 죽고 모친은 병중에 있다는 것을 아울러 이유
로 삼았는데 이제 찾아가 곡하고 모친을 살표보는 절차가 없으면 저쪽 나라가 그 말을 들으
때 반드시 의하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자빈 강씨는 끝내 빈소에  곡도 하지 못하고, 병중인 모친을  만나지도 못한 채 
심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인조 22년 2월 초순이 었다.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상
  인조의 이런 소견 좁은 처사는 많은 사대부들의 불만을 낳았다. 광해군이 법적인 모후 인
목대비에게 불효했다는 것을 반정 명분으로 삼은 인조가, 며느리  강씨의 왕곡을 막은 것은 
심각한 자기 부정 이었다.
  며느리 강빈의 왕곡을 끝내 허락하지 않은 인조의 처사로 인해 급기야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추대하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주모자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청원부원군 
심기원이란 데서 인조에 대한 당시 사대부들의 감정을 알 수 있다. 
  끝내 세자빈의 왕곡을 허락하지 않은 인조는 세자와 세자빈의 심양으로 되돌아갈 때 환관 
김언겸을 딸려 보냈다. 김언겸은 인조가 세자부루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간자, 측  첩보원이
었다. 친아버지 인조는 이처럼 세자 부부를 의심해 간자까지 딸려 보냈으나, 세자는 배웅 나
온 심기원과 김류, 홍서봉, 조창원 등 여러 부원군들에게 인조의 병을 옆에서 보살피지 못하
는 심정과 이역에서 나그네로 머물러 있는 고통을 이야기하여 듣는 이의 눈물을 훔치게 하
였다. 
  바로 그 이틀 후인 인조22년  3월21일 부사직 황익과 오국별장  이원로 등이, 청원부원군 
심기원, 전지사 이일원, 광주 부윤 권억 등이 모반하려  한단고 고변했다. 고변자 황익이 전
하는 심기원의 말은 이렇다.
  "주상이 반정한 뒤로 잘못하는 일이 많아,  주상을 상황으로 추존하고 세자에게 전위하게 
하고 싶아 내 집의 재산을 털어 온 수천냥을 마련하고 역사를 모집하여 지성으로 대접했는
데, 내 소원은 오로지 강상을 부식하는데  있는 것이다. 지난번 세자가 심양에서 나왔을  때 
전위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아무리 세자를 받들어 세운더라도 별다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실행하지 않고 회은군을 추대하려 한다."
  또 심기원과 함께 정형당한 초판 정형은 심기원과 종질 권두형 형제의 말을 전했다.
  "숙주께서 명선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그들과  합세해 심양과 끊으려고 하지만, 세자는 
본디 원대한 계획이 없고 주상도  원수를 갚을 길이 없으니 한탄스럽다.  22일 거사한 후에 
상에게 왕자 중에 합당한 자에가 자리를 물려주게 하고 상왕으로 높인 다음 정예포수 5만명
을 거느리고 심양을 쓸어버린다면 어찌 남자의 사업이 아니겠는가."
  즉 이들은 세자가 귀국했을 때 거사를 일으며 인조를 상왕으로 내쫓은 후 북벌을 단행하
려 했으나, 소현세자를 추대하는 것이 여의치 앉자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하는 것으로 방향
을 바꾸었다가 발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인조의 처사는 의외이다. 인조는 여러 신사들이 다 심기원을 정형
하라고 청하는데도 사사를 고집하다가 허락하였으며, 그 시신은 팔도에 돌리지 말고 가족에
게 내주어 장사 지내게 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이덕인은 정형하지 않고 사사하고 재산도 적
몰하지 않았다. 역모 사건의 주범에  대한 처사치고는 매우 온건했다.  또한 심기원과 권억, 
정형, 이일원, 이지룡, 이권, 김즙, 권두창등 관련다들을 정형한 후, 그해 4월 1일 명정전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대적인  사면 조치를 내린다. 이 또한  이례적인 거조가 아닐 
수 없다.
  인조로서는 반정 일등공신인 자신을 폐하고 세자나 회은군을 옹립하려 한 사건을  확대해 
좋을 것이 없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이 경우 그렇지  않아도 인심을 잃은 인조의 위상은 
땅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자신을 추대하려는 사건으로 옥사가 벌어지는  동안 조선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의 이런 움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자는 심양에 도착하자마자 청의 구왕을 
따라 북경에 가야했다. 그해 4월 이자성 군대를 산해관에거 격파함으로서 중원 정복의 결정
적 계기를 마련한 청은, 중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목적으로 소현세자를 데려간 것
이다. 
  세자는 이렇듯 동아시아 정세를 놓고 자웅이 일철을 겨루는 역사적현자의 한가운데  있었
으므로, 국내의 추대 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추대니 모반이니  하는 
소모적 정쟁은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세자는 북경에서 전혀 새로운 세
상을 만나고 있었다.

    아담 샬과의 만남
  그 해 5월, 하루 평균120-30리 길을 달리는 청군과 함께 북경으로 향한 세자는 구왕이 이
끄는 청군이 파죽지세로 북경을 손에 넣는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청이 북경을 차지한 
것은 대세가 이미 청에게 기울었음을  의미했다. 북경에 도착한 세자는  문연각이라 불리던 
명 목종의 부마 후씨 집에 가서 거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량이 극도로 부족해 20여 일 만
에 심양으로 되돌아왔다가, 그해 9월 청나라 황제를 따라 다시 북경에 들어가 약 70일 동안 
머물렀다.
  이때 소현세자는 아주 중요한 인물을 만나 새로운 사상과 문물의 셀례를 받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다.1628년 32번째 예수회 신부로서 북경  옹안문 내에 거주한 아담 
tif은 해박한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역서와 대포를 제작하는 일을 맡아 명나라 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청 세조는 북경 점령후 그의 과학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지금의  천문대장격인 
흠천감정으로 삼고 대청시헌력을 짓게 하였다. 아담 tif은  북경 남문인 선무눈 내에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세운 남천주당에 자주 머물렀는데, 소현세자는 아담 tif의 거주지와 남천주당
을 자주 찾아 이 벽안의 선교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세자의 북경 숙소인 문연각
은 아담 tif의 숙소와 가까운 동화문 안에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오가면서 우정을  쌓았다. 아담 tif에게 소현세자와의  만남은 조선에 천주교을 
전교할 수 있는 호기였고, 소현세자에게 아담 tif은 서양 문명과  천주교 사상을 접할 수 있
는 절호의 기회였다.머나먼 이국 따으로 자청해서  온 푸른 눈의 선교사와, 불모로 잡혀  온 
불행한 세자의 남다른 처지가 이색적인 감화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 만남을 지켜봤던 당시 남천주당의 신부 황비묵은 <정교봉포>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순치 원년에 조선 국왕 인조의 세자는 북경에 볼모로 와서 아담 tif 신부의  명성을 듣고 
때때로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에  대해서 살펴 물었다. tif 신부도  자주 세자 관사를 
찾아가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깊이 사귀었다. tif  신부는 거듭 천주교가 정도임을 말하였는
데 제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며  자세히 물었다. 세자가 귀국하자 tif  신부는 자신이 지은 
천문, 산학, 성교정도서적 여러 가지와 여지구, 천주상을 선물로 보냈다."
  선물을 받은 소현세자는 곧 아담 tif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귀하가 주신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적은 정말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 중 몇 권의 책
을 보았는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
여 널리 읽히고자 합니다. 이것들은 조선인이 서구 과학을 습득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
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 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해왔으니 하늘이 우리를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인조가 세자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을 때. 세자는 이렇듯 왕조가 교체되는 도시 북경에
서 "하늘이 이끌어준 만남"에 감사하고 있었다. 세자가 아담 tif과 교류한 때는 서기 1644년 
조선이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개국하가 232년 전으로 일본이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개국한 
때보다도 211년 앞섰다. 소현세자의 이  개방적인 사고는 그야말로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운명을 뒤바꿔놓을 수도 있는 만남이었던 것이다. 9년간 볼모 생활을 소현세자의 사고를 이
처럼 개방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세자는 아담 tif이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자, 신부를 대동하고 귀국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아담 tif을  놀라게 했을 정도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도 신부가 부족한 형편이어서  아담 tif은 신부 대신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들을 데려가라고 제의했다. 이방송, 장삼외, 유중림, 곡풍 등 중국
인 환관들과 궁녀들이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마 임
진왜란때 천주교 신자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 땅을 밟은 이래 최초로 천주교 신자들일 것이
다. 
  1644년 11월 1일 청 세조는 북경의 첫단에 제사하고  등극을 선포했다. 자신이 천하의 주
인임을 선포한 것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이행사에 따라가 참예했다. 그 달 11일  구왕
은 용골대를 시켜 세자가 꿈에도 그리던 말을 전했다. 
  "북경을 얻어 이전에는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의심하여  꺼리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지
금은 대사가 이미 정해졌으니 피차가 서로를 신의로써 믿어야 할 것이다. 또 세자는 동국의 
왕세자로서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의당 본국으로 영원히 보낼 것이다."
  
    비운의 귀국길
  드디어 길고 긴 볼모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청에서  세자를 귀국시키는 이유는 구왕
의 말대로 "북경을 얻어 대사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세자를 붙잡아둘 필요
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기쁨에  앞서 다음과 같이 우려하며 대신
들에게 물었다.
  "청이 세자를 돌려보내는 이 조치가 참으로 좋은 뜻에서 나왔고 딴마음은 없는 것인가?"
  대신들은 모두 다른 염려는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인조의 생각은 달랐다. 인조에게  세
자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귀국하는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였
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인조의 이런 마음을 모르는 채 장장 9년 간 품어왔던 가슴 벅찬  기대
를 안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번 귀국은 이전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돌아오는 것이
었다. 인조 23년2월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심양에 잡혀 갔던 세자는 삼십대 중반의 연부 연
강한 나이로 귀국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타국에서 볼모로 보낸 34세의 비운의  왕세자였다. 
세자는 이제 자시의 비운이 끝나는줄 알았으나, 귀국은 비운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 비운은 9년간의 볼모 생활을 지혜롭게 보낸 데서  시작되었다. 세자는 치욕의 볼모 기
간을 새로운 국제 정세와 사상, 그리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체화시키는 기간으로 삼았
다. 명나라를 죽도록 사모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깨달았고, 성리학 이념 체계가 얼
마나 덧없는 것인지도 깨달았다. 세상에는 성리학뿐 아니라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이 있다
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리학은 덜대 진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사상 중의 하나에 지
나지 않음을 느낀 것이다. 
  수많은 서양 물품을 가지고 귀국하는 소현세자의 머리 속은,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
려는 이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조선은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상상 못할 비극의 현장이었다.
  비극의 조짐은 인조가, 귀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를 막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부
왕 인조는 명나라가 멸망했기에 더 이상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아둘 필요가 없어졌다는 합리
적 사고를 멀리한 채, 그저 세자의 귀국 자체를 의혹의 눈초리로만 바라보았다. 세자가 휴대
한 수많은 서양 서저과 물품들도 새로룬  세상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몸짓이  아니라 
오랑캐에게 정신을 팔아먹은 증거물로 보았다. 소현세자가 귀국 두 달 만에 병석에 누운 이
유는 확실하지 않다. 인조의 냉담한 방응에  깊이 상심한 것이, 병으로 연결될 개연성은  있
다. 그러나 그 이외에 인조나 후궁 조씨의 외부적 작용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귀국한 해 4월 23일 세자가 병석에 누윤 이유는  학질이었다. 이미 장성한 세자에게 학질
을 그다지 큰 병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세자의 학질을  치료하기 위해 등장하는 어의 이
형익이 바로 세자 독살설의 한가운데 위치한 인물이다. 이형익이  열을 내리게 한다며 발병 
다음날부터 침을 놓았는데, 침을 맞은 세자가 3일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한  나라의 
세자가 학질에 걸렸는데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침만 맞다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귀국한 해 
4월 26일 일이다. 
 
    인조에게 쏠린 몇가지 의혹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당연히 수많은 의홀을 불러일으켰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풍토가 
다른 이역에서 9년을 살다가 귀국한 세자가 학질에 쓰러질 리는 없다는 것이 식자들의 생각
이었다. 당연히 세자가 독살되었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의혹은 세자에게 침을 놓은 의관 이형익에게 집중되었다. 이형익이 어의로 특채된 배경에
도 의혹의 눈길이 모아졌다. 이형익이 원래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사가에 출입하던 의원
이었는데, 소용 조씨의 추천으로 어의가 되었다. 그가 어의로 특채된 것은 불과 3개월  전이
었다. 그의 특채 시점이 세자의 귀국 시점과 일치하고, 그의 특채 결정적 역할을 한 소용 조
씨가 세자 및 세자빈과 알력 관계에 있다는 점을 모르는 궁중 사람은 없엇다 .특히 소용 조
씨와 세자빈 강씨와의 알력관계는 외부에  알려질 정도로 심각했다 .당연히  이형익과 소용 
조씨가 세자를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런데 인조는 시종일관 이형익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러자 사람들은 인조가 세자 독살에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품게  됐다. 왕이나 세자가 승하하면  시의들은 잘못의 
유무를 더나 국문하는 것이 관례였다. 소현세자같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의혹이 있는 경우
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양사에서 이형익을 탄핵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
다.
  "왕세자의 증후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악화되어 끝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뭇사람이 모두 
의원들의 진찰이 밝지 못했고 침 놓고 약 쓴 것이  적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
의원 이형익은 사람됨이 망령되어 허탄한 의술을 스스로 믿어서 세자의 증세도 판단하지 못
하고 날마나 침만 놓았으니 그를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양사의 이런 당연한 주청에 인조는 "의원들은 신중하지 않은 일이 별로 없으니 국문할 것 
없다"고 답했다. 양사에서 재차 국문을 청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시종일관 
이형익을 옹호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인조가 관련되었다는 유럭한 증거의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양사는 물론 산림의 송준길까지 나서서 이형익을 처형하라고 주청했으나 인조는 요
지부동 이형익 편만 들었다.
  심지어 <인조실록>23년 6월 27일자에 세자가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
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조
실록>에 적힌 세자의 시신상태, 즉 시신이 까맣게 변하거나 얼굴의 눈, 코, 귀  등에서 피가 
나오는 것은 독약을 먹고 죽은 사람의 시신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이 목격담은 
소현세자의 생모인 인열왕후의 서제인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내척의 자격으로 세자의 염
습에 참여했다가 세자의 시신 상태에 의혹을 품고 한 말이었다.
  심지어 인조은 이형익을 옹호하기 위해 승정원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는 상소를 받아들
이면 처벌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당시 이형익의 처형을 가장  강도 높게 주장했던 김광
현은 척화파 김상용의 아들이자, "가노라 삼각산아/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를 지으며 청
에 끌려갔던 김상헌의 조카였다. 그러니 그의 집안에서는 당연히  모든 문서에 청나라 연소
를 쓰지 않았고 인조도 이를당언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김광현이 이형익을 처형하라고 
극력 논박하자, 인조는 세자빈 강씨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판단하고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
다. 세자빈 강씨, 즉 강빈의 오라비 강문명의 장인이기도 했던 김광현은 훗날 강빈의 옥사가 
발생하자 아무 죄도 없이 이조참판에서 순천 부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인조가 세자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은  장례절차에서도 나타난다. 인조는 세자의 
시신을 담은 관의 명칭에 임금의 관을 뜻하는 재궁이란 호칭을  못 쓰게 하고, 댓니 대부나 
일반 사서들이 쓰던 널 구자를 쓰도록  했다. 세자시강원이 보덕 서상리, 필선 안시현  등이 
반발하고 나선 것처럼, 세자는 살아서는 동궁, 죽어서는 빈궁이 되므로 재궁이라 쓰는  것이 
예법에 맞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조는 무덤의 이름에도 원자 대신에 묘자를 쓰도록 했
다. 원자는 태자묘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태자만 쓸 수 있다는 논리였으나, 황제의 
무덤을 일컫는 능자를 역대 임금의 무덤에 써왔다는 점에서 이 또한 명분 없는 억지였다.
  상복 착용 기간도 마찬가지였다. 고례에 따르면 장자의 상에는 부모가 참최복, 즉 3년복을 
입는 것이 예법에 맞았다. 그러나 영의정 김류, 좌의정 홍서봉 등 서인 중신들은 인조와  왕
비의 복제를 기년복, 즉 1년복으로 의정해  올렸다. 그 자체로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인조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한 달을 하루로 계산하는 역월법을 적용해 12일 만에 복제를 마칠
고 하다가 한 등급 더 감해  7일만에 마쳤다. 1년을 입어야할 복데를  1주일 만에 벗어버린 
것이다. 
  또한 인조는 재최1년복을 입어야 할  배관의 복제를 3개월 단상으로  결정했다. 옥당에서 
부당하다는 차자를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지평 송준길이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며 이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나섰다. 송준길은 인조와 강빈, 그리고  원
손은 참최3년복을 입고 중전은 재최 3년복을 입어야 하며 신하들은 기년복으로 따라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는 유신이  사직하면 만류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송준길의  상소에 
아물런 답도 없이 그를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인조는 이처럼  소현세자의 장례 절차마저 야
박하게 대우했다.
  인조는 이미 소현세자를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
  그러나 이보다 결정적인 문젠즌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였다. 당시 언손으로  불리고 있던 
석철이 소현세자의 뒤를 이을 것인가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소현세자를 모셨던 세자시강원
의 관료인 필선 안시현은 "원손을 세손으로 세우자"는  상소를 올리면서, 세자의 상에 사부
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강빈에게 조문하여 위로하지 않은 사실을 비판했다. 세자의 사부 즉,
영의정과 좌의정은 인조의 마음이 강빈에게서 떠난 것을 알고  위문을 생략한 것이다. 이런 
위태로운 정황 때문에 세자궁의 관원들이 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의혹을 갖고, 서둘러 원손을 
세손으로 책봉하자고 주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안시현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다시 상소를 올료 세손으로 정하자고 거듭 주장했다.
  이조참의 조석윤도 안시현과 송준길의 상소는  나라를 걱정하는 강직한 언론인데도  모두 
배척하였으니 뭇사람의 마음에 어찌 의심이 없겠냐고 비판할 정도로 소현세자와 강빈, 그리
고 원손에 대한 인조의 대접은 법도에 어긋난 것이었다.
  원손에게 뒤를 잇게 하지 않으려는 인조의 속셈은 소현제자가 급서하고 석 달 후인 재위 
23년 윤 6월2일에 드러난다. 인조는 대신 및 정부의 당상, 육경, 판윤과 양사의 장관 16명을 
인접한 자리에서 폭탄 선언을 한다.
  "내게 오래 묵은 병이 있는데 원손이 저렇게 미약하니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경들
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는 원손이 아닌 다른 인물, 즉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는 충격적인 발언이자, 훗날 조정을 
흔들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처신법은 법과 원칙에 따르는 것이었
다. 법과 원칙에 다르면 원손이 세조가 되어야 했으므로 당연히 반대가 잇달았다. 좌의정 홍
서봉이 나섰다.
  "옛 역사를 상고해보면 태자가 없으면 태손이 뒤를 이었으니 이것이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상도를 어기도 권도를 행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닐 듯합니다.
  영중부추사 심열, 판중추부사 이경여 등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인조의 영의정 김류를 
끌어들였다.
  "이 일은 오로지 영상에게 달려 있으니, 경이 결단하라."
  후사를 정하는 일은 영의정의 권한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인조와 반정 주역 김류 사아
에 밀약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류는 미리 계획한 대로 세조의 둘째 아들로서 보위
를 이은 예종과, 덕종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를 이은 예를 들었다. 둘째 아들이 보위를 이
은 예를 듦으로써 원손을 폐하고 대군을 세우려는 인조의 의중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우찬성 이덕형, 병조판서 구인후, 공조판서 이시백, 이조판서 이경석 등 양심적 관
료들은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고, 부제학 이목과  대사간 여이징도 "상도를 지켜야 한다"
며 가세했다. 김류를 끌어들였음에도 대다수 신하들이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자 인조가 화
를 벌컥 냈다.
  "이 일은 반드시 대신이 결단해야겠다. 경들이 이렇게 평범한  말만 하고 있으니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는다면 경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낙흥부원군 김자점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성상의 깊고 원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의당 속히 결정해야 할 일인데, 어찌 
우물쭈물 미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조가 기뻐하며 말했다.
  "그말이 옳다.'
  이어 김류가 김자점과 한편임을 실토했다.
  "지금 신민들의 기대가 모두 원손에게 있는데도 전하께서 이러시는 것은 반드시  바깥 사
람이 알 수 없는 궁금한 일입니다. 그러니 성상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다른 말
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경의 뜻이 완전히 나와 부합된다."
  그러나 실학의 시조인 원손의 사부 김육이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원손이 아직 어려서 덕망을 잃은 것이 없습니다."
  잘못이 없는 원손을 어떻게 폐할 수 있느냐는 당연한 항변이었다. 그러자 김류가 나선다.
  "상께서 만일 분명한 전교를 내리신다면 당장 결단할  수 있습니다." 빨리 결심하라는 재
촉에 인조가 화답했다.
  "원손이 자질이 밝지 못하여 결코 나라를 감당할 만한 재목이 아니다." 원손 사부 이식이 
반대했다.
  "진강할 때 보니 원손의 재기가 뛰어났습니다."
  사부가 원손의 자질이 뛰어나다고 반박하  인조는 엉뚱한 이야기를 꺼낸다.
  "한갓 재질의 현망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좌의정 홍서봉이 공을 인조에게 떠넘겼다.
  "신이 계달하는 것도 상도입니다. 권도를 쓰는 것은 성상께 달려 있습니다."
  종법이나 예법에 어긋나는 권도, 즉 원손을 폐하고 대군을  후사로 삼으려면 자신들을 끌
어들이지 말고 스스로 결정하라는 말이었다. 이말을 들은 인조는  매우 분노해 얼굴이 불쾌
해졌다. 
  이경여가 다시 나섰다. "지금 성상의 하교는 원소의 현명함을 언급하지 않고 나이만을 언
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덕을  성휘하고 나라를 보전한 사
람 또한 한둘이 아닌데, 어찌 나이 어린 것 때문에 원손을 함부로 폐립할 수 있겠습니까. 그
러나 상도를 뒤엎고 권도를 행해야 종사가 보존된다면 신 또한 상도만을 고수해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열이 아뢰었다.
  "세자가 이미 졸하였으면 뒤를 이를 사람은 원손인데, 국본을  바꾸는 일을 어찌 말 한마
디에 당장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찬성 이덕형이 강력하게 반대하지 못하는 여러 신하들을 비판하고 나섰다.
  "오늘 성상께서 비록 종사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시지만 아루아침에 갑자기  이미 바로잡힌 
원손의 명호를 바꾸려고 하시는데, 뭇신하들이 모두 바람에 쏠리듯이 따라버린다면 당차 저
런 신하들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인조가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물었다.
  "대신들의 뜻이 모두 일치하였는가?"
  김류가 대답했다.
  "이의가 없는 듯합니다."
  원손을 폐하고 대군을 세우자는 말이었다. 인조가 물었다. 
  "자식이 둘이 남아 있으니 대신이 그 중에 나은 사람을 결정하라."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중에서 고르라는 말이었다. 신하들보고  다음왕이 될 사람을 고르라
는 하교에 홍서봉이 아뢰었다.
  "대군은 조신들과 접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그 우열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상의 
간택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다 용렬하니 취하고 버릴것도 없다. 나는 그 중에 장자를 세우고자 하는데 어
떤가?"
  김류가 맞장구쳤다.
  "장자로 적통을 세우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노라."
  이에 원손 석철이 폐위되고 봉림대군이  세자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원손의 
자리를 대군으로 바꾸는 데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나라 사람들이 후사로 믿고 있
던 원손을 폐한다면, 그 다음으로 원손의 목숨까지 빼았을 것이 분명했다. 
  효종과 현종 연간에 벌어졌던 예송논쟁이 단순히  상복 착용 기간을 둘러싼 이론  논쟁이 
아니라 정권의 정통성을 묻는 예각의 정치 논쟁이었던 이유도, 바로 이 종법을 무시한 인조
의 후사 책봉에 있었다. 소현세자의 뒤를 이를 적통은 봉림대군이 아니라 원손  석철이었다. 
소현세자처럼 성인이 된 후 죽었을 경우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인조가 무리해가며 
봉림대군을 후사로 결정했기 때문에,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은  효종의 승통이 정당한 것
이냐는 극도로 민감한 정치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세자 일가의 비극
  원손의 지위를 빼앗은 것으로도 세자 일가에 대한 인조의  분노는 끝나지 않았다. 인조의 
화살은 이제 남편을 잃고 상심해 있는 며느리 강빈에게 향해졌다. 인조는 강빈이 처와 결탁
해 자신을 몰아내고 세자를 즉위시킬 했다고 의심했다. 뿐만 아니라 세자가 죽은 후에도 강
빈이 청과 결탁해 자신을 내몰고 원손을 즉위시킬수 있다고 의심했다.
  인조는 저주 사건을 이용해 강빈을 제거하려 했다. 원손이 폐립된지  약 두 달 후인 인조 
23년 8월말, 궁중에서 저주 사건이 발가되어 두  명의 궁녀가 하옥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원손의 보모 최상궁이었다. 인형과 조수따위를 마당이나  베갯속 등에 묻어두고 상대방에게 
화가 내릴 것을 비는 저주 사건은, 그 성격상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다. 고문에 의한  자백
을 인정하는 관례를 이용해 강빈을 얽어넣으려고 두 궁녀를  심하게 고문했으나, 두 궁녀는 
조작된 혐의를 시인하는 대신 죽음을  택함으로써 강빈을 보호했다. 그러자  이조는 강빈의 
오라비를 귀양 보내는 등 강빈의 친정을 치죄하여 손발을 묶은후 다시 저주 사건을 일으켰
다. 이번에도 강비의 궁녀 두 명이 연루되었으나, 이들 역시 조작된 자백을 거부하고 죽어갔
다.
  그러나 며느리에 대한 인조의 분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인조 24년 정월에는 이조
의 수라상에 독이 든 전복구이가 오른 사건이 발생했다.  인조는 이번에도 강빈에게 혐의를 
돌려 궁인들을 하옥해 국문하고 강빈은 후언 별당에 감금했다. 인조의 수하들이 일거수일투
족을 감시하는 상황에서 강빈이 독을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조가 이미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는 엄명을 내려 강빈의 수족을 완전히  묶어놓은 상태였다
는 점에서, 이 사건도 인조의 자작극이 분명하다.
  이번에도 강빈의 궁녀인 정렬과 유덕이 하옥되어 압슬과 낙형같은 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들도 조작된 시나리오를 승인하지 않고 고문 속에 죽어갔다 이렇듯 연일 무고한 궁녀들이 
죽어감에도 인조는 며느리의 목숨을 끊으려는 집요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언복구이에 독
을 넣은 사건도 오리무중에 빠진  후 인조는 비망기를 내린다. 그런데  그 비망기의 내용은 
인조 자신이 소현세자를 죽인 범인이며 저주 사건과 독약 사건을 자작했음을 자백하는 것이
나 다름없었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밍리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홍금 적의를  만들어 놓
고 내전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하였다.  지난해 가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와서 분한 마음 
때문에 시끄럽게 성내는가 하면 사람을 보내 문안하는 예까지 폐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
었다. 이런 짓도 하느데 어떤 짓인들 못하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헤아려본다면 흉한  물건
을 파놓아 저주하고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옛부터 난신
적자가 어느시대나 없었겠는가만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를 해
치고자 하는 자는 천지에서 할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로 항금 품의해 
처리하게 하라."
  강빈이 역적이라는 이 비망기는 그러나 인조 자신이 모든 비극의 주범임을 실토하는 자백
서나 마찬가지였다. 인조는 자신의 죄가 비망기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도 잊은 것이다. 
  신하들은 물론 강빈이 무죄라고 생각했으므로, 역적죄로 품의해 올리라는 인조의 명을 거
부했다. 그러자 인조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기의식을 조장했다. 병조판서를 궁중에 머무
르게 하고 김자점을 호위청에 입직시켰으며  포도대장에게 궁궐을 엄중히 경비하라고  명했
다. 인조는 이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강빈을 처형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많은 신하들이 반
대하고 나섰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대사헌 홍무적이 강경히 반대했다.
  "강빈을 폐위시킬 수는 있으나 결코 죽일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강빈을 죽이고자 하신
다면 먼저 신을 죽인 다음에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 강비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요구하는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인조는 요지부동이
었다. 드디어 재위 24년 2월 인조는 강빈을 폐출하고 사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명을 거두
어달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인조는 끝내 자신에 의해 과부가 된 며느리에 대한 분노를 거
두지 않았다. 강빈을 결국 사저로 쫓겨난 후 사약을 마셨고 교명, 죽책 등은 거두어  불태워
졌다. 인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강빈의 형제들에게도 죄를 쯰어 장살시켰다.
  소현세자에 이어 강빈마저 세상을 떠났으나,  세자 일가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강빈을 죽인 후 인조는 이전의 저주 사건을 재심했다. 모진 고통속에서도 끝까지 강빈을 지
키던 궁녀들은 이제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강빈의 죽음으로  희망을 잃은 궁녀들은 결
국 고문자의 의도에 굴복하고 강빈의 이름을 댔다. 
  인조는 이를 명분으로 이 사건을 강빈의 친정어머나와 강빈의  세아들, 즉 소현세자의 아
들이자 자신의 친손자이기도 한 어린 아이들에게  확대시켰다. 인조는 안사돈이었던 강빈의 
어머니를 처형하고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에 유배 보냈다.  이들의 유배지를 정하라는 인
조의 명을 받은 의금부는 석출은 제주에, 둘째 석린은 정의에, 그리고 석견은 대정에 유배하
자고 청했다. 그러나 인조는 이를 거부했다. 
  "한 곳에 정배하여 서로 의지해서 살도록 하되 내관과 별장 등을 교대로 지정해  보내 외
부인들이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 세 고을에 정배된 사대부는 모두 다른 섬으로 옮겨 정배하
라."
  당시 제주에는 "강빈을 죽이려면 나를 먼저 죽이라"로 격렬하게 반발했던 전 대사헌 홍무
적이 유배되어 있었으므로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홍무적은 이에  남해현으로 옮겨졌으며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해 귀양갔던 이경여도 북쪽 변경으로 옮겨졌다.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조선의 임금이 되어야 했던 석철은  인조25년 7월, 12세의 어린 나
이에 죄수의 몸으로 제줃에 도착했다. 이날 사관은 인조의 이런 처사를 개탄하는 글을  <인
조실록>에 덧붙였다.
  "지금 석철 등이 국법으로 따지면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만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를 독한 안개와 풍토병이 있는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면 소현세자의 영혼이 깜깜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석철은 과연 다음해 9월 제주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인조는 그 소식을 듣고 "석철의 일
은 내가 매우 놀라고 슬프게 여기도 있다. 중관을 내려보내  그의 시신을 호송해 아비 곁에 
자사지내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날의 사관은 인조를 직법 비난하고 있다.
  "석철이 역강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손자가  아닌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
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풍토병이 있는  제주도에 귀양 보내 결국 죽게  하였으
니, 그 유골을 아버지의 묘 곁에 장사지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인조실록>은 석철의 죽음을 풍토병 때문이라고 기록했으나 당시 지각 있는 사람들은 인
조가 석철을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석
철을 데려다 기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인조가  청에서 석철을 키운 후 자
신을 폐위시키고 석철에게 왕위를 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의 사신들이 돌아
갈 때 소현세자의 묘에 들어 참배하는  등 소현세자의 죽음을 슬퍼했으므로 인조는  석철을 
더욱 두려워했다. 비록 석철이 독살이 아닌 풍토병으로 죽었다 해도, 이는 어린 손자를 사지
로 몰아넣은 인조에 의한 타살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소현세자의 둘째 아들 석린도 석 달후 형을따라 세상을 버
렸다. 친손자를 줄줄이 죽인다는 세상의 비난이 두려워진 인조는, 그 책임을 나인  옥진에게 
돌려 여러 차례 고문해 죽여버렸다. 석철과 석린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옥진은 두 
아이가 죽은 것은 토질 탓이지 보양을 잘못한 탓이  아니라고 반발했으나, 인조에게 필요한 
것은 두 손자의 죽음에 쏠린 내외의 의혹을 돌일 희생양이었지 진실이 아니었다. 강빈은 억
울하게 죽은 지8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숙종 44녕에 이르러서야 복위 선시되었다.

    조선의 좌절, 세자의 좌절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은 그야말로 조선의 꿈과  좌절이었다. 소현세자가 순조롭게 즉위하
여 청국에서 익힌 세계 정세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정사를 펼쳤다면, 인조의 쿠데타로 야
기된 그 모든 국난들은 긍정되고 오히려 옥동자를 낳기 위한 사고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그
러나 인조와 반저의 주역들이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원손마저 제거함으로써 소현세자의 꿈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조선을 개혁의 나라, 개방의 나라로  만드려던 선진적인 꿈은, 소현세자
와 강빈, 그리고 석철과 함께 차디찬  지하에 묻히고 만 것이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데려온 
천주교 신자인 청나라 환관들은 청나라 사신과 함께 돌아갔다. 천주고리라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 이들 청나라 환관들이 돌아감으로써  조선은 세계에서 유일한 주자학  유일사상의 
나라로 남게 되었다. 그밀폐된 공간과 정지된 시간을 채운  것은 인조반정의 후예들인 소중
화주의자들의 사대주의와 예학이었다.

    4장
    제 17대효종
    사라진 북벌의 꿈
  소현세자가 삼전도의치욕을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맞추어 조선을 바꾸는 것으로  승화시키
려 한 인물이라면, 동생 효종은 그 치욕을 북벌로 씻으려 한 인물이다. 효종은 문치의  나라 
조선에서 무치를 하려 한 특이한 임금이었다. 그러나 무치는  당연히 사대부들의 격렬한 반
발을 낳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효종은  송시열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북벌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다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만다.
  독살설에 휘말린 임금들이 대개 그렇듯이 효종의 죽음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었다. 효종은 
죽기 두 달전 송시열과 독대한 자리에서  강력한 어조로 북벌을 주장하며 최소한  10년은살 
자신이 있다고 호언했다. 그때 만 40세의 장년이었던 효종은 두  달 후 허무하게 세상을 버
리고 말았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당연히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효종의  증세가 아주 사소한 것
이었다는 점에서 의혹은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효종실록>에 처음 병세가 기록된 날은 재
위 10년 4월 27일이다. 머리 위에 난 작은 종기의 독이 점점 퍼져 얼굴까지 번졌는데,  당시 
이런 증세는 그리 심한 것이 아니었다. 의원이 문안했을 때 효종이 한 말이 이를 말해준다.
  "종기의 증후가 날로 심해가는 것이 이와 같은데도 의원들은 그저 심상한  처방만 일삼고 
있는데 경들은 그렇게 여기지 말라."
  효종의 증세는 이렇듯 어의들이 심상히 여길 정도로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종기를 
진단한 어의의 처방은 산침이었는데, 이를  통해 독기를 배설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효종은 계속 산침을 맞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문제의 어의 신가
귀이다. 당시 병으로 집에 있었던 신가귀는 효종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궐문밖에 나아가 입
궐을 청했다. 효종이 그를 입시시켜 물었다.
  "침을 맞아야 하겠는가?"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농증을 이루려고 하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
아낸 뒤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다른 어의 유후성이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며 말리고 나섰다. 세자
(현종)가 일단 수리를 든 후에 침을 맞을지 여부를 논의하자고 중재에 나섰으나, 효종은 이
를 물리치고 침을 놓으라고 명했다. 신가귀가 침을 놓은 후  침 구멍으로 피가 나오자 안도
한 효종이 말했다.
  "가귀가 아니었으면 병이 위태로울 뻔했다."
  그러나 침 구멍으로 피가 나온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솟구친 
것이다. <효종실록>에는 침이 혈락을 범한 탓이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문제는 침을 놓은 신
가귀가 손이 떨리는 증세, 즉 수전증 상태였다는 점이다. 수전증의 의원이 국왕에게 침을 놓
은 것은 조선조 초유의 일이었다.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범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전증의 어의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가 그치지 않자 
약방에서 급히 청심환과 독삼탕을 올렸다.
  정신이 혼미해진 효종이 삼공과 송시열, 송준길, 그리고 약방 제조를 부르라고 명했다. 그
러나 이들이 달려가 어상 아래 부복했을 때 효종은 이미  승하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손 한 
번 못 써보고 북벌군주 효종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허무한 노릇이다.
    소현세자의 유산
  장남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왕좌를 지키고자 했던 인조도 자연의 순리를 
거역할 수 는 없었다. 인조는 소현세자 사후 4년 만인 1649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정변과 
호란 그리고 음모와 독살로 점철된 27년 간의 재위 기간을  마감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이 
바로 효종, 즉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다. 그러나 인조의 뒤를 이은 조선의 17대  국
왕 자리는 원래 봉림대군의 것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것이자 원손 석철의 것이었다.
  효종도 물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자로 결정된 이틀 후 상소를 올려 사양한 것은 
이런 사실에 대한 부담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상소는 "세자의 자리는 천만 뜻밖이며 원손
의 칭호는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이므로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지극히 간략한 내용이었
다. 정승 등 고위직에 제수되면 상소를 올려 극력 사양하는 당시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봉
림대군의 이 상소는 의례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전날  이미 병조의 군사 50여 명이 
봉림대군의 저택에 파견되어 호위를 시작했던 데서, 그의 세자 책봉은 기정사실었다.
  봉림대군은 1차 상소 사흘 후인 인조 23년 윤 6월  7일 재차 상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이
번 상소에는 1차 상소에서 언급했던 원손에 대한 말조차 빠져 있었다. 2차 상소를 마지막으
로 봉림대군의 사양 상소는 다시 없었다. 적어도 세 번의  사양 상소가 기본 예의였던 당시 
관례로 봐서 봉림대군의 이런 거조는  세자 수락 성명이나 다름없었다.  봉림대군은 세자로 
책봉된 이 조치에 만족했던 것이다.
  심양 시절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의 자리를 가로채려 했다는 물증은 찾기 힘들다. 봉림대군
의 세자 책봉은 그의 정치 공작의 결과라기보다는 소현세자의 정치관이 친청적으로  변한데 
대한 반대급부의 성격이 짙다. 물론 이런 결과를 계산하고  그가 반청적인 자세를 견지했을 
수는 있지만 이는 추측일 뿐이다. 소현세자가 유고일 경우 조선의 종법에 따른 후사는 원손 
석철이란 점에서, 봉림대군이 왕위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반청 자세를 견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의 종법은 국왕이라 해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봉림대군이 즉위하자 소현세자의 원손 석철은 금기가 되었다. 소현세자오 원손 석철을 거
론하는 것 자체가 효종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의사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석
철을 비롯한 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에서 죽었을지라도 세자의 3남 석견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세자의 두 아들이 미성년으로 죽었으므로 소현세자의 후사는 3남 석견
이 이어야 했다.
  소현세자의 유산은 효종이 즉위했다 해서 그냥  묻어버리기에는 너무 많았다. 소현세자의 
급서를 책임져야 함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의관 이형익의 처리문제도 그 중 하나였다. 효
종이 즉위하자 양사는 다시 이형익의 처형을 요청했다. 그러나  효종은 인조가 그랬던 것처
럼 단호하게 반대했다.
  "어찌 당사의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갑자기 사형을 논하는가. 지금  만약 그를 죽인다면 
산조의 뜻을 거스를 염려가 있다."
  이형익은 인조의 공신이자 효종 즉위의 일등공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유산은 이형익뿐만이 아니었다.
    용상에 가려진 효종의 아킬레스건
  강빈 일가의 억울한 죽음도 소현세자가 남긴 유산의 하나였다.  강빈은 누가 보더라도 시
아버지 인조에 의해 누명을 쓰고  죽은 불쌍한 며느리였고, 그 식구는  사돈에 의해 멸문된 
불쌍한 가문이었다. 의리를 명분으로 삼은 산림은 역적으로 묠려  죽은 강빈의 신원 문제를
당론으로 삼기도 했다. 이렇듯 불씨를 안은 채 잠복해 있던 강빈  신원 문제는 효종 5년 공
식적으로 거론되었다. 가뭄이 계속되자 효종이 사대부들의 의견을 구했는데, 이때 황해 감사 
김흥욱이 이에 응하는 응지 상소를 올려 정면에서 강빈의  신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흥욱
은 강빈 옥사의 의혹을 조목조목 들어 강빈이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는 강빈이 저주 사건을 
일으키고 인조의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모두 부정하면서,  모든 책임을 이미 역적으
로 몰려 처형된 인조의 후궁 소용 김씨와 김자점의 공작으로 돌렸다.
  "역적 조(소용 조씨)는 안에서 날조하고,  역적 자점은 밖에서 조작해 견강부회로  옥사를 
일으켜 끝내는 사사에 이르게 하고 강빈의 온 가문을 남김없이  주륙하였으니 아! 참혹합니
다. 소현의 두 자식의 죽음도  자점이 빚어낸 것입니다. "청장(용골대)이  운운했다."는 말은 
은밀한 일로서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인데도 자점이  연좌를 주장했고, 또 후환을 막아
야 한다며 어린아이들을 외방에 멀리 유배시키기를 청했습니다. 나이 어린 연약한 아이들이 
고생스레 방황하면서 서로 이끌고 한꺼번에 남쪽 유배지로 옮겨 가게 되자 길에서 보는 사
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유배지에도 도착한 후  얼마 안 되어 죽게 되니 
자점의 사주라 여기는 사람들의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김홍욱은 현재의 재변은 억울하게 죽은 강빈 일가의 원한 때문이라며 신원해줄 것을 요청
했다. 그러나 효종은 이 상소에 격렬하게 분노했다. 김홍욱은 강빈 옥사를 소용 조씨와 김자
점의 책임으로 돌렸지만, 효종은 이를 자신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김홍욱의 상소 내용을 보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즉시 사람을 보내 홍욱을 대신하게 
하고 금부도사로 하여금 홍욱을 잡아 오게하라."
  그러나 효종의 이 명은 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임금의  구언에 응한 응지상소는 오늘날 
국회의원의 의정발언처럼 면책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로를 그만큼 중히 여긴 것이다. 효
종은 구언하면서 "모든 일을 숨김없이  다 말하라. 말이 비록  거칠거나 참람하더라도 죄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막상  김홍욱이 강빈 옥사를 거론하자  자신의 구언 하교를 
무효화시켜버렸다. 그만큼 강빈 문제는 효종의 아킬레스건이었다. 효종은 어떤 대가를  치르
더라도 김홍욱을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김홍욱의 상소대로 강빈 옥사를 재조사한 결과 사건  자체가 조작임이 밝혀질 경우, 
그 파장에 대해서는 효종도 손을 쓸 수 가 없었다.  강빈이 무죄라면 강빈의 자식이란 이유
로 유배형에 처해져 제주에서 죽어간 두 아들도 당연히 신원되어야 했으며, 나아가 셋째 아
들 석견이 생존해 있었으므로 종통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다.  또한 소현세자가 이형익에 의
해 독살당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효종의  정통성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효종이 관련되었다는 소문이 퍼질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효종으로서는 김
홍욱을 그냥 둘 수 없었다.
  효종이 김홍욱을 국문하려 하자 거의  모든 대신들이 반대했다. 강빈의  억울함에 동감한 
까닭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응지상소 처벌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대신들은 응지상소 처
벌을 사대부 중심의 통치 체제에 대한  국왕의 월권으로 여겼다. 영의정 김육, 좌의정  이시
백, 우의정 심지원 등이 김홍욱을 두둔하자 분노한 효종은 이렇게 말했다.
  "후세에 악명이 있더라도 내가 책임질 것이니 경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김홍욱은 혹심한 고문에 시달렸으나 그는 확신범이었다. 국문을 받던 김홍욱은 오히려 삼
사를 꾸짖으며 부르짖었다.
  "왜 말하지 않는가? 왜 말하지 않는가? 예로부터 말하는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
가 있었는가? 내가 죽으면 내 눈을 빼내어 도성문에 걸어두라.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겠노
라."
  계속되는 국문에도 굴하지 않던 김홍욱은 결국 장사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산림을 주
임으로 한 사대부들은 크게 반발했다. 나라는 국왕과 사대부가 함께 통치해야 하는  것이지, 
국왕이 마음대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볼 때, 효종의 행
위는 절대왕권을 행사하려는 위험한 짓이었다. 그러나 효종의 생각은 달랐다. 효종은 조선을 
군주국가라고 생각했고, 군주국가에서 국왕은 나라의 주인이자  어른이며 사대부나 일반 백
성은 모두 신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 두 생각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즉 이는  조선
의 지배자가 국왕과 사대부냐 아니면  국왕뿐이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였떤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효종 재위 10년 간 국왕과  사대분 사이에서 벌어진 충돌의 근본 원인이 된
다.
    모든 것은 북벌로
  효종 시대의 화두는 북벌이었다. 효종은  북벌에 매달렸다. 북벌만이 자신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시켜준다고 믿은 효종은, 북벌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자학이 아니라 군사력이라
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의 배경에는 8년 간에 걸친 심양에서의 불모 생활이 있었다. 효종 또
한 소현세자와 함께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흥기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두 사람 모두 청
이 승리한 이유가 학문이 아닌 군사력의 우위에 있음을 보았으나, 청에 대한 입장은 완전히 
달랐다.
  소현세자는 청이 대륙을 장악한 이상 분쟁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현실을 인정하고 청
과 선린관계를 구축한 후 국가 발전에 매진하는 것이 조선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처럼 어차피 사대의 예를 취할 바에야 그 대상이 명이면 어떻고 청이면 어떻냐고 생각했던 
소현세자의 실리적 사고는, 심양에서 주자학의 상대성을 알게 된 데서 기인했다. 소현세자는 
지구 반대편에 주자학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신봉하는 또 다른 문명국가가 있
음을 알게 되었고, 벽안의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 이들과 교류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달랐다. 그에게 청은 선린관계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의 대상이었다. 소
현세자가 심양 생활을 통해 현실적인 청의  모습을 이해하는 동안 봉림대군은 청의  약점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봉림대군이라고 앞뒤가 막힌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봉림대군도 
심양 시절에 소현세자처럼 주자학의 상대성에 대해 알게 되었고 주자학을 절대 가치로 생각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소현세자처럼 천주교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주자학이나 천주교가 아니라 북벌이었다. 그 북벌을 위해서는 군사력을 갖
추어야 했고,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주권이 필요했다. 청나라 임금은  주자학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자학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봉림대군은 바로 그것이 
실질적인 군주권이라고 생각했다.
  청과 싸우려면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효종은, 강력한 승무정책을  추진했다. 
효종은 그의 현손인 정조와 함께 조선 후기 승무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군주였다. 그에
게 승무정책은 북벌의 전제조건이자  절대조건이었으며, 북벌에 필요한 것은  지식 많고 말 
잘하는 문관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힘을 발휘할 무관이었다. 그는 조선의 문.무관에 대해  이
렇게 말했다.
  "문관은 문을 숭상해야 하고, 무관은 무를 숭상해야 하는 법인데, 오늘날은 그렇지 못하여 
문관이 무관처럼 생기면 경멸을 받지만  서생처럼 생긴 무관은 세상에서  용납하게 되었다. 
만일 무관이 말 달리기를 좋아하면  광패하다고 지목하니 참으로 부끄럽다.  지금의 무관은 
선비와 같으니 어찌 싸움터에서 힘을 쓸 수 있겠는가."
  무신을 문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유일한 군주이기도 했던 효종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
다.
  "전시에 일개 서생들이 군사를 지휘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큰 폐단이다."
  당시 조선은 문신이 군사 지휘관을 가진 특이한 나라였다.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 유성룡
이 문신이었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바로 이런 점이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시킨 원인의 
하나였다. 이에 대해 효종은 문무의 엄격한 구분이 군사력 강화의 첫걸음이라고 판단했으나, 
당시 상황으로는 무신을 병조판서에 제수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효종은 차선책으로 
박무를 병조판서에 임명했다. 모든 문서들이 군비 확장에 반대하는 판국에 박무가 홀로 <수
륙군환정사목> 등 군정 개혁 5개 조를 내놓아 군비 확장을 찬성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효종
과 박무는 뜻이 잘 맞는 짝이었다. 박무는 효종의 뜻에  따라 청의 감시와 문신들의 의혹의 
눈초리를 감내해가면서 군비를 확장했다. 그러나 술을  절제하지 못했던 박무는 병조판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과음에 의한 쇼크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러나 효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군비 확장에 찬성하는 드문 문신인 원두표를 병조판서에 
임명해, 군비 확장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원두표는 김자점의 낙당과 대립되는 원당의  영수
였으므로 김자점이 거세된 이후 정국을 이끌 적임자이기도 했다.  이어 효종은 뭇힌 이완을 
어영대장에 임명했다. 이느 문무를 조화시키기 위한 조치로,  원두표에게는 국방 정책을, 이
완에게는 그 실행을 맡긴 인사였따. 실로 원두표와 이완 두  사람은 효종의 북벌 계획과 실
행을 뒷받침한 문무 신하이자 효종의 동지였다.
  효종은 이 두 신하를 중심으로 강력한 군비 확장 정책을  펼쳤는데, 그 중 하나가 관무재
를 다시 실시한 것이다. 관무재는 국왕이 친히 군사들의 기예를  시험해 본 후 우수자를 서
용하는 일종의 무과시험이었다. 그런데 효종이 재위 3년 8월  다시 관무재를 실시하려 하자 
대사헌 민응형, 봉교 이단상 등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봉교 이단상이 든 반대 이유가  그
날이 자전(자의대비 조씨)의 목욕일이라는 궁색한  것이었으니. 이들이 얼마나 군비 확장을 
반대했는지 알 수 있다.
  효종은 관무재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인물들을 지방 수령으로 임명해 무신들의  사
기도 높이는 한편 지방 군비도 확충하려 했다. 그러나 무신을 수령으로 임명하려는 이 조치
에 많은 문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영의정 정태화가 "수령은 상으로 내리는 벼슬이 아닙니
다."라고 반대하고 나선 것은 문신들의 이런 반대를 집약한 것이었다. 결국 문신들의 집요한 
반대로 관무재 합격자를 지방 수령으로 발령하려던 효종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효종은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재위 5년째 되던 해에 영장제도를 부활시켰다. 영장들을 지방
에 보내 군비 확장 사업을 전개하게 한 것이다. 
  또한 효종은 무신 출신 유혁연을 승지로 임명하였다. 물론 이 역시 문신들의 격렬한 반대
에 부딪혔다. 대간에서는 무관 출신 승지는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그
러나 효종은 수령을 파견할 때 군사관계는 병조판서에게 직보하고 병조판서는 무관 승지 유
혁연에게 전달하게 했다. 그리고 유혁연이 이를 효종에게 보고하게 되었으니, 말하자면 유혁
연은 요즈음의 안보수석인 셈이었다.
  이런 다각도의 노력 끝에 효종은 재위 6년 가을,  장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량진
에서 조선 군사의 위용을 자랑하는  열무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때  승무원이 제사를 지낸 
직후 군사 퍼레이드를 갖는 것은 부당하다며 반대하고 나섰으나,  효종은 이런 반발을 무시
하고 그 해 9월 29일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펼치는 열무식을 강행했다. 이때의 열무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심신의 상처를 입은 조선 민중들을 위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효
종은 세자와 문무백관을 열무식에 다 모이게 했는데, 이들  외에도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대부가의 여인들까지 대거 몰려들어 구경했다.
  하지만 이런 열무식에 대해서도 문신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심지어  청과 분쟁거리가 
된다며 말리는 신하들도 있었다. 효종은  문신들이 무찔러야 할 적군이  청과의 분쟁거리가 
된다며 군비 확장을 말리자 분개했다.
  "지금 명색이 관리란 인물이 열병식이 청나라와 분쟁거리가 된다고 말하면 내  마음이 움
직일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것이 어찌 북쪽 오랑캐의 주구가 아니겠는가?"
  효종의 결심은 확고했다.
  효종은 기병을 양성하기 위해 창덕궁 후원의 담장을 열어  기사장을 만들기도 했다. 산악
이 험준한 조선에서 기병이 그다지 유용한 군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위군인 금군
과 기병을 양성한 효종의 속마음은 물론 북벌에 있었다.
  효종의 군비 확장 의지는 제주도에 표로해 온 네덜란드의 하멜에 대한 처리에서도 나타난
다. 효종은 하멜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서  그들의 조총을 모방한 새로운  조총을 제작하게 
했다.
  그러나 군비 확장에 따르는 어려움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 하나가 군사로 충당할 
인원이 부족한 것이었다. 일반 농민들은 연이은 전란으로 황폐화된 농토를 복구하기에 여념
이 없었다. 효종은 일반 농민들의 징발이 어렵자 실제 납공에서 누락된 노비들을 추쇄해 군
사로 추당하려고 했다. 당시 노비대장에 등재된 노비의 수는  19만여 명이었으나 실제 납공 
노비는 2만 7천여 명뿐인 데 착안해, 나머지 16만여 명을 잡아 군사로 충군하려 한  것이다. 
효종은 누락 노비들을 잡는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해 남부 5도에 추쇄어사를 파견해 내려보냈
다.
  그러나 당시의 노비 누락은 역사 발전에 의한 신분제 붕괴의 결과로, 이들의 상당수는 농
업에 종사하는 일반 양인이었다. 결국 이들의 추쇄는 농님  추쇄와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오
게 되어 노비 추쇄는 중단되고 말았다.
  이처럼 군비 확장에 따르는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
은 군비 확장과 북벌에 대한 문신들의 반발이었다.
    효종의 딜레마
  효종의 군비 확장과 북벌 의지에 대한 문신들의 반발은  거셌다. 군비 확장의 전제조건은 
강력한 왕권이었다. 그러나 군비 확장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려는  효종의 의지가 강하면 강
할수록 사대부들과의 마찰도 강해졌다. 조선은  청과는 다른 나라였다. 비록 국왕이라  해도 
사대부의 지지 없이는 강력한 정책을 펼 수 없는 나라가 조선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말로는 춘추대의를 외쳤으나 속으로는 현상 유지를 바라고 있었다. 구
조화된 문치주의 아래서 지배계급의 지위나 계속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이들은 두 번에 걸
친 국가적 전란을 겪으면서도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지배세력이었다. 이것이 바로 효종
의 딜레마였다.
  즉 이들을 배제하고는 북벌도 군비 확장도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효종은 
문신들의 반발을 억누르며 군비 확장을 강행했는데, 재위 8년째가 되자 문신들이 효종의 승
무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군비 확장에 반대하는 명목상의 이유는 백성
들의 민생을 먼저 생각하라는 이른바 안민책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농사를 짓는 한편 군사훈련,  성 쌓기, 병장기 제조 등의 부역에  동원되어 
이중의 곤란을 겪고 있었으므로 안민책은 명분있는  반대였다. 당연히 농민들로부터 불평의 
소리가 터져 나왔고 문신들은 이를 구실 삼아 군비 확장에 반대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피폐
한 생활을 구실로 한 군비 확장 반대는 일견 명분이 있어 보이지만 그 속사정을 알고  보면 
이 또한 말뿐이었다. 당시 농민 생활을 피탄에 빠뜨린 주범은 군비 확장이 아니라 불평등한 
세금체계였다. 농민들을 짓누르던 군역을 양반 사대부들은  면제받고 일반 백성들만 부담하
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또한 수천 석의 소출을 올리는 전주인 사대부의 공납액과, 송곳 꼿을 
땅 한 평 없는 전호인 농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공납액도 같거나 오히려 농민들이 더 무거운 
경우가 많았다.
  양반 사대부들은 이런 불균등한  조세체계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에는  극력 반대하면서도, 
말로는 농민 생활의 피폐를 구실로 군비 확장에 반대했다.  물론 대동법의 경세가 김육이나 
이경석처럼 농민들의 고초를 진심으로 걱정한 문신들도 있었지만, 나머지 대다수 북벌에 반
대하는 문신들은 군비 확장이나 북벌로 인한 기득권 상실을 두려워 했다.
  효종 8년 사대부들이 효종의 군비 확장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서자 효종은 진퇴
양난에 빠졌다. 사대부들이 더 이상 효종의 정책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나서자 더 이상 군
비 확장 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효종 8년(정유년) 산림의 영수 송시열이 올린 <정유봉사>였다.  봉사란 
남이 볼 수 없게 밀봉한 상소문을 말한다. 그만큼 비밀스런 내용이 많음을 암시한 것이지만, 
실상은 남송의 주희가 효종에게 올린 봉사를 본뜬 것이었다.
  송시열은 <정유봉사>에서 효종의 재위 8년을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
  "전하께서 재위에 계신 8년 동안은 그럭저럭 지나갔을  뿐 한자 한치의 실효도 없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
찌 오늘에 이를 수 있습니까? 백성들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해, 안에서 떠들고 밖에서 공갈
하여 망할 위기가 조석에 다다랐습니다."
  송시열은 <정유봉사>에서 총 19개 항목에 걸쳐 국정의 모든 문제에 대해 진언했다. 송시
열은 오늘날까지 효종 북벌 이론의  제공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그의  사후 노론의 문인 
제자들이 자가 발전시킨 것이고 실사은 북벌의 반대자였다. 이 <정유봉사>에서도 송시열은 
사실상 북벌 중지를 요청한다. 북벌 중지의 논리 역시 주희에게서 빌려왔다.
  "주자가 처음에는 효종(남송의 효종)에게 금나라를 쳐서 북벌하는 의리에 대해 극진히 말
했으나, 20년 뒤에는 다시 북벌에 관해 말하지 않고 다만 '오직 폐하께서 먼저 동남쪽의  태
평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시어 마음을 바르게 하시고 한 몸의 사용을 이기셔서 조정을 바르
게 하시면 진실한 업적을 얻을 수 있어서 별다른 근심이 생기지 않아 원대한 계획이 방해받
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때 효종이 편안한 데 빠져서 근본이 염려되는 것
을 이길 수 없을까 염려한 것입니다."
  남송의 주희가 처음에는 북벌의 의리를 논하다가 나중에는 북벌이 아니라 '수신'을 권고했
는데, 이는 남송의 효종이 편아난 데 빠졌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는 남송의 효종
에게는 해당될지 몰라도 조선의 효종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조선의  효종은 직접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군사들과 어울리는 임금이었으나 근본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진정 
염려해야 할 것은 말로는 '북벌'과 '춘추대의'를 외치면서도 정작 북벌에는 딴죽을 거는 송시
열 같은 문신 사대부들의 이중적인 처신이었다.
  청나라가 알면 오히려 좋아할 이런 내용의 상소를 굳이 봉사라는 비밀 상소의 형식을 빌
려 위기를 과장한 그 진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당시 민생을  살리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구체적으로 양반 사대부들의 봉건적인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양반들도 
일반 백성들처럼 국역의 의무를 지는 것이 민생 안정의 첩경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정유
봉사>에서 효종이 사대부를 우대하지 않는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사대부를 우대하라
는 것. 이것이 바로 송시열이 효종에게 분개한 가장 큰 이유였다.
  "전하께서 대신을 공경하여 예법으로 부리는 도리를 아시지 못함은 아니지만 지난번에 심
하게 대신을 꾸짖으시고 돼지처럼 여러 관원을  꾸짖었다 하는데 그것은 주자가 매우  놀라 
탄식한 바입니다."
  이는 얼마 전 효종이 홍문관 부제학 윤강에게 태형을 가한 것에 대한 일종의 항의였다.
  "윤강은 홍문관 부제학으로서 경연을 이끄니 전하와 가까운 자인데 비록 실수한  바가 있
다 하여도 어찌 졸지에 끌어내어 볼기를 때려서 여러 백관에게 보이셨습니까."
  송시열은 노골적으로 효종이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부터는 깊이 성의를 여기에  두시어 반성하시고 살피시는  공부를 더하셔서, 희노에 
의해서 움직이지 마시고 신민들을 햇볕처럼 사랑하고 하늘처럼 두려워하십시오."
  송시열 같은 조선 사대부들에게 나라는 임금의 것이 아니고  천하의 것이었다. 물론 여기
서 '전하'는 만백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대부'를 뜻하는 것으로, 나라는 임금 개인의 것
이 아니라 사대부의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관작은 전하의 관직이 아니고 천하의 관작이오나,  폐하가 그렇지 못한 자를 벼슬시키면
서 하늘이 기뻐하고 백성이 기뻐하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에게 사대부는 곧 모든 것이었다. 그는 임금이 사대부들  초월한 위치에 있다고 인
정하지 않았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사대부이고 임금은 다만 사대부 중에서 가장 높은 제
1사대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효종은 이처럼 8년의 재위 기간 전체를 부정하고 나선 송시열의 <정유봉사>에 분명 분노
했을 것이다. 그러나 효종은 윤강에게 그랬던 것처럼 송시열을  붙잡아 볼기를 치지는 못했
다. <정유봉사>는 송시열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조선 사대부, 특히 서인 산당의  의견을 대
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효종의 군비 확장 정책은 여기저기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었고, 사대부들은 집단적으로 저
항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송시열과 송준길의 산당이 위치해 있었다.
  결국 효종은 자신의 처세를 전면 부정한 송시열을 처벌하기는커녕 상당한 정치적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효종은, 송준길과 함께 '양송'으로 불리며 사대부들의 여론을 주도하던 산
림의 영수 송시열과 군비 확장에 비판적인 산당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대부들
의 집단 저항으로 비롯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산당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벼슬을 제수하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다. 이는 효종에게 정면으로 대항
한 송시열의 승리이자 효종의 패배였다. 송시열은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는 것으로 자신
의 정치적 주가를 한층 높인 후, 효종 9년 7월  행호군을 받아들임으로써 드디어 조정에 들
어왔다. 얼마 후 산당의 또 다른  지도자인 부호군 송준길도 조정에 나왔다. 은거와  출사를 
거듭했던 산림이 효종 재위 9년여 만에 드디어 집단적으로 출사한 것이다.
    북벌 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북벌을 둘러싸고 효종이 사대부들과 마찰하면서 정정이  불안해졌다. 사대부들의 집단 반
발은 또 다른 인조반정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효종은 하나뿐인 동생 인평대군을 잃
은 직후라 마음이 나약해져 있었고, 여기에 말을 타다가 낙마하여 부상까지 당해 글자 그대
로 심신이 고달픈 처지였다.
  이런 처지에서 효종은 송시열과 송준길의 산당을 끌어들임으로써 정치적 난국을 타개하려 
했다. 하지만 산당은 군주가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오는 정당이 아니었다. 이들은  살아 
있는 조선의 군주보다 이미 죽은 남송의 주희를 더 떠받들었다. 효종이 주희의 수신론을 비
판했다는 말을 듣고, 송시열이 효종에게 따진 것은 이들이 누구를 더 섬기는가를 보여준 일
례이다.
  "신이 듣기에 지난번 경연에서 '오늘날 씻기 어려운 치욕을 당했는데 여러 신하들은 이런 
생각은 하지 않고 매번 나에게 수신하라고만 권하고 있으니 이런 치욕을 씻지 못한 채 수신
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는데, 과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신은  전하께
서 성학이 미진한 데가 있는 것임을 두려워합니다." 
  효종에게 중요한 것은 북벌이었으나, 송시열의 산당에게  중요한 것은 춘추대의와 수신이
었지 실제의 북벌이 아니었다. 군사를 일으켜 북진하는 것이  효종의 북벌이라면 산당의 북
벌은 말로만 춘추대의를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니 군비 확장에  대한 효종과 양송의 의견이 
틀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효종에게 군비 확장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였지만, 양송은 훈련도감 군사를 늘리는 것도, 군량을 늘리는 것도 반대하고  나
섰다. 물론 이들은 흉년이니 백성을 진휼하자는 것을 명분으로  내걸었으나 그 속마음이 군
비 확장 반대에 있음은 분명했다.
  이들을 설득하지 않고서는 군비 확장이고 북벌이고 모두 소용없음을 안 효종은 특단의 조
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자신이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것을 북벌을  강력히 추진하는 계기로 
삼기로 한 것이다. 효조은 자신이 뒤로 물러서고 산당에게 정권을 내주기로 결심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북벌을 적극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 송준길
을 병조판서로 삼아, 인사와 군사에 대한  전권을 주면서 북벌 추진의 대임도 함께  넘겼다. 
이것은 보기 드문 군주와 신하 사이의 대타협이었다.
  송시열과 송준길, 이른반 양송은 효종이 자신들에게 정권을 맡긴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효종이 한 발 물러서고 산당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는 북벌이었다. 산당정
권은 적극적으로 북벌을 추진할 때에만 유지될 수 있었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반대하던 
군비확장을 적극 추진해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비밀 서신을 보내 북벌을 다그치기도 했다.  이러한 효종의 비밀 서신
에 대한 송시열의 답신이 <상영릉문>이다. 하지만 <상영릉문>의 내용은  대단히 모호했다. 
북벌을 하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지 본심을 알 수 없었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분명한 북벌 
의지를 재천명하고 또한 북벌에 대한 산당의 분명한 당론을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효종이 전례를 깨고 송시열과 독대한 것은 바로 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에서 독
대는 금지되어 있었다. 국왕은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입회한  자리에서 정사를 처리하게 되
어 있었다. 따라서 국왕과 신하의 독대는 매우 이례적인 행위였다.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는 
효종 10년 기해년에 있었다고 해서 기해독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독대이다. 그 해 3월 
11일이었다.
  이날 효종은 이조판서 송시열을  제외한 나머지 신하들은 물론  승지와 사관, 내관까지도 
내보냈다. 흥정당에 단 둘이 남은 효종과 송시열 사이엔 긴장이 흘렀다. 효종이 독대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분명했다. 북벌을 채근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현재의 대사(북벌)를 논의하기 위함이오."
  송시열도 이 자리가 북벌을 논의하는 자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효종의 북벌론은 계
속된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소, 정예 포병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할 때 
곧장 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
소.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붙잡혀 간 수만 명의 포로가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니, 어찌 내응하
는 자가 없겠소."
  효종의 북벌 전략은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청의 지배층은  소수민족인 만주족인 반면 피
지배층은 다수민족인 한족이었다. 만주족은 한족의 10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중화사상을 지
닌 피지배자층 한족이 만주족에 대해 민족감정이 없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북
벌군이 기세를 올리면 청은 급속히 분열될 수 있었으며, 효종의  말대로 조선 포로 수만 명
은 물론이고 한족도 궐기할 수 있었다. 조선과 한족의  연합전선을 구축해 만주족에 대응할
는 효종의 전략은 탁월한 것이었다. 효종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오늘의 대사는 과감하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걱정할 필요는 없소."
  효종은 이어 다른 신하들이 북벌에 무관심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질타했다.
  "내가 만수전을 지을 때 몇 명을 만나 은밀히  시험해보았는데, 모두 무관심하여 깊이 생
각하는 자가 없으니, 이처럼 통탄할 일이 어디 있겠소. 신하들이 모두 눈앞의 부귀만을 도모
하면서 북벌을 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듯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말하면 모두 
간담이 서늘해서 놀라니, 나 혼자 부질없이 탄식할 뿐이오. 저들이 모두 자기 자손들을 위한 
계획만 세우고 나를 도우려 하지 않고 있소."
  그랬다. 당시의 조선 사대부는 나라는 뒷전이고 식구만 생각했다. 병자호란 때 판서의  자
제를 인질로 데려간다 하자 앞다투어 사직서를 내고 서로 그 자리를 맡지 않으려 했던 지배
층이 그대로 이어져왔으니, "자기 자손들을 위한 계획만  세우고" 있었던 상황은 차라리 당
연했다. 그러나 효종의 이런 질타를 송시열은 정면에서 반박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수신제가한 후 법도와 기강을 세웠으니  이것이 일의 순서입니다. 지
금 전하께서는 혼잡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떨쳐버리지 못하시니 지기가 있는 선비들의  마
음이 게을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으며, 뭇 신하들이 제 집안을 살찌우는 
데에만 힘쓰는 것도 전하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는 진실로 심신을 깨끗이 하시어 잡다한 모든 일들을 일체 제거하시고 마음과 생각에 한결
같이 이 일만을 위주로 하신다면, 신하들도 어찌 감히 나라를 위해 제 몸을 바치려 하지 않
겠습니까?"
  송시열은 지배층인 사대부들의 부패와 안일을 효종의  책임으로 돌렸다. 자나깨나 북벌만 
생각하는 효종에게 이는 모욕이있다. 그러나 효종은 송시열의 이런 말까지도 받아들였다. 북
벌을 위해서는 송시열의 지지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경의 말이 옳소."
  효종이 이렇게까지 양보한 이유는 물론 송시열을 북벌로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효
종의 이런 양보에 대한 송시열의 답변은  공허했다. 처자의 근본 도리는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뜻의 '수기형가'인데 이것이 북벌의 선결조건이라는 허무한  메아리였던 것이다. 
훗날 송시열이 반대 당파로부터 '수기형가'란 네 글자로 북벌의 책임을 때우려 했다는  비난
을 받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송시열의 북벌관은 이미 효종 즉위년의 <기축봉사>에서 다  드러났다. 송시열은 그때 이
렇게 피력했다.
  "이렇게 우리 힘의 강약을 살피고 저 오랑캐 세력의  성하고 쇠함을 엿본다면, 비록 창을 
들고 저들의 죄를 따지면서 중원을 깨끗이 쓸어 신종황제(임진왜란 당시의 명 황제)의 망극
하신 은혜를 갚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혹시 오랑캐와 국교를 끊고 이름을 바르게 하여 이치
를 밝게함으로써 우리의 의리를 지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즉 송시열의 북벌관은 실제로  만주와 중원을 점령하는 군사적  정벌이 아니라, 청나라가 
약해지면 국교를 단절해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자는 시대착오적이고 사대주의의 극치인 명
분론에 불과했던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이 앞으로 10년을 기한으로  북벌을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나서자  다급해졌
다. 효종은 독대에서, 조만간 송시열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직하게 
한다고 말했다. "큰 임무"란 두말 할 것도 없이 북벌이었다. 만약 송시열이  큰 임무를 저절
하면 효종은 현재의 이조판서직마저 박탈해버릴 것이었다.  그러니 송시열은 권력을 유지하
고 확대하려면 북벌을 적극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북벌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주자학자 송
시열에게 '춘추대의'란, 명분을 제공해주는 도구일 뿐 군사를 일으키는 명분은 아니었다.
  기해독대 이후 송시열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북벌을 추진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상황이
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송시열은 영의정 정태화를 끌어드이려 했다. 정태화를  찾아
간 송시열은 곧 군사를 이끌고 북벌에  나설 것처럼 호언장담하면서 정태화의 의견을  물었
다. 하지만 거의 평생을 조정에서 보낸 정태화는 산림에  있었던 송시열보다 노련한 정치가
였다. 자신들 끌어들여 북벌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송시열의 의도를 간파한 정태화는 이렇
게 답했다.
  "공의 지략이 성상의 위임을  받아 천하의 대의인 대사(북벌)를  경영하시니 무슨 일인들 
못하겠소. 나는 이미 늙고 무능하여  아무것도 도와드리지 못하지만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대감이 비상한 공을 세우고 천하에 대의를 펴는 것을 한 번 보고 죽는 것이 소원
이오."
  "나는 이미 늙고 무능하여 아무것도 도와드리지  못한다"는 거절이었다. 송시열이 실망한 
낯빛이 되어 돌아가자 정태화의 아들이 물었다.
  "아버님은 지금 국제 정세가 어떤데 북벌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정태화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북벌한다고 말했더냐. 송  대감은 지금 북벌을 임무로  삼아 성상에게 무한한 
위임을 받았으나, 시간이 흘러도 성공할 묘책이 없으니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그의  생각
에 내가 북벌이 가망없다고 하면 그 한마디를 구실 삼아 나에게 죄를 돌리고 발을 빼려  하
는 것인데, 내가 왜 남에게 팔린단 말인가. 그가 나에게 권모술수로 대하니 나 또한  권모술
수로 답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하지 않더냐."
  이들의 대화는 북벌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북벌을 효종 혼자
만의 꿈이라고 생각했다. 청을 건국한  만주족이 조선보다 인구가 적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으며, 효종처럼 청의 취약한 구조에 대해 분석하지도 않았다. 그저 북벌은 안 된다는 것
이 이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송시열도 정태화와 같은 생각이었으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
다. 효종의 전폭적 신임을 바탕으로 북벌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조선의 국력으로 북벌은 불
가능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벌이 불가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효종
과 맺은 암묵적 연합전선은 깨질 것이고 산당은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협곡이었다. 이때 송시열을 구해주는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효종이 급서한 것
이다.
    손을 떠는 어의 신가귀
  송시열과 독대한 두 달 후 효종은 머리 위에 난 작은 종기가 원인이 되어 어의  신가귀에
게 침을 맞다가 세상을 떠났다. <효종실록>은 침이 혈락을 범한 탓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신가귀가 손을 떠는 수전증 상태에 있었다는 점에서 의혹이 급속히 퍼져 나갔다. 수전
증의 의사가 옥체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침이 혈락을 범했
다고 해서 사망할 수 있느냐는 점도 의혹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런 의혹을 끝까지  추적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조정을  잡고 있는 산림과 
서인들에게 북벌군주 효종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이들은 효종 사망의 모
든 원인을 야강 도제조 원두표와 신가귀 등 약방에만 돌렸다.  현종 즉위년 5월 9일 대사헌 
이응시와 행 대사간 이상진은, 원두표를 중도부처하고  어의 신가귀.휴후성.조징규를 사형시
키라고 청했다. 결국 신가귀는 교수형을 당하고 다른 어의들은 중도부처되었으며,  원두표는 
불문에 부침으로써 파문은 마무리지어졌다.
  그러나 효종은 그냥 이렇게 이승을 떠날 수 없었는지, 그의 시신과 장지를 둘러싸고 계속 
문제가 발생한다.
  효종 사망 당일부터 시신을 둘러싸고  문제가 발생했다. 효종이 사망하자  왕비는 사람을 
피해 어탑의 서북편에 병풍을 치고 들어가 가슴을 두드리며 발을 굴렀고, 여러 신하들은 어
탑 주변에 둘러서서 곡하다가, 왕비가 있는 곳과 너무 가까워 물러났다. 훈련대장 이완이 훈
련도감의 군병을 거느리고 궁성을 호위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왕비가 송시열을 불러 전교했다.
  "옥체에 부기가 있으니 어찌 하리오."
  송시열이 대답했다.
  "이는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보통 초상에 부기가 극도로 되면 도로 빠집니다.  이제 대렴
할 날이 아직 멀었으니 그 전에 반드시 바로 될 것입니다."
  과연 다음날 저녁에 부기는 빠졌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관의 폭이 염
한 시신보다 작았던 것이다. 송시열이 내시를 불러 말했다.
  "이 관에는 옥체가 들어가지 않을 듯하니 가는 댓조각을 가지고 시신을 재어 오라."
  내시가 재어 온 바로는 과연 시신이 관턱을 걸치고도 남았다. 임금의 관이 시신보다 작은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송시열이 영의정  정태화에게 알리니 여러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랐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염한 옷이 너무 두터운 때문인지 모른다고 생각해 손으로  만져보았으나 아주 얇았다. 시
신이 썩기 쉬운 한여름에 두터운  옷을 입힐 까닭이 없었다. 확실히  시신의 어깨가 관보다 
넓었다. 정태화가 세자에게 말했다.
  "망극한 가운데 더욱 망극할 일이 생겼습니다."
  "망극 망극하오. 장차 어찌 하겠소."
  "넓은 널판을 구해봤으나 구하지 못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널판을 잇는 것 외에 다른 계
책이 없는 듯합니다."
  국왕의 관은 그 자체가 하나의 궁이라 하여 재궁이라고  표시한다. 이런 재궁을 성리학과 
예학의 나라 조선에서 너덜너덜 잇게 된 것이다. 또한 그러고도  그 책임 소재는 가리지 않
은 채 그저 '망극'이란 한마디 말로 끝내고 말았다.
  그러나 효종의 죽음과 관련된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장지가 문제가 되
었다. 이 세상에서 못다 한 일이 많은 효종의 한이 거듭 문제를 일으킨 것일까?
  당시 군신들 중에 풍수지리에 가장 능한 인물은  <어부사시사>의 윤선도였다. 그런 그가 
효종의 장지로 수원부 청사 뒷산등성을 주장했고, 지관들도 그곳이 길지라고  호응했으므로, 
세자는 이곳을 장지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대신과 삼사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장지를 결정하는 데  풍수설을 쫓을 필요는 없
고 다만 그 땅이 길이 되거나 집터가 되거나 수해가 있는 등의 문제를 뜻하는 5환만 없으면 
된다는 이유였다. 5환은 송나라 사마광의 이론이었다. 이들은 수원의 지세가 평탄하고  넓으
며 농토가 비옥하고 사방으로 통한 곳이어서 5환에 해당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송시열도 차자를 올려 수원을 반대했다.
  "대행왕(효종)께서는 수원을 7천 병력의 주둔지로 만들었고 장수와  수령을 보낼 때 가장 
나은 사람을 뽑아 보내어 긴급할 때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는 터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데 이제 그 고을을 철거하고 농토와 가산을 파괴하여 그곳 사람들을 슬프게 함은 결코 대행
왕의 뜻이 아닙니다."
  이들은 효종의 군비 확장에  안민론으로 맞섰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백성들의 생활을 
명분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공교롭게도 1백여  년 후 효종의 원손인 사
도세자의 헌륭원이 세워진다. 정조가 헌륭원을 세우기 위해 주민을  이주시킬 당시 가구 수
는 약 250여 호였는데, 내탕금으로 이주 비용을 마련해주니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이는 시행 의지의 문제이지 민생의 문제는 아니었다. 더구나 정조가 헌륭원을 이곳으
로 옮긴 후 수원이 더욱 행정.군사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볼 때, 군사를 내세운 반대론도  근
거가 없다. 손을 떠는 어의가 옥안에 침을 놓는 것 하나 막지 못하고, 임금의 관  하나 제대
로 마련 못한 신하들이 반대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들은 효종 독살설을 전국에 퍼지게 했다. 실제로 효종이 죽기 직전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괴상한 일이 속출했다. 한 거사의 예언도 그 중 하나였다. 효종이 송시열과 독대할 
무렵 한 거사가 돈화문 밖에서 외쳤다.
  "금년 5월 궁중에 변고가 발생할 것이오. 이를  면하려면 전하께서 지금의 거처를 옮겨야 
하오."
  그러나 성리학 사회인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를 믿을 리가 없었다.  사대부들은 한마디로 
요망하다고 일축해버렸다. 그런데 이어 해인사의 8만대장경 판목과, 속리사, 공산사 등 주요 
사찰의 불상과 석탑 등이 여러 날 땀을 흘리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효종은 이런 변고로 
뒤숭숭한 상황에서 승하했다.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현재 남겨진 자료로는 효종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다시 조사하기는 힘들지만 여러 의혹
을 제기할 수는 있다.
  정말 효종은 침이 혈락을 범해 사망한  것일까? 효종의 시신에 부기가 있었던 것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을까? 송시열의 말대로 시신에 부기가 있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일까? 또한 재궁이 시신보다 작은 것이 그저 '망극'이란 한마디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일
까? 재궁이 왜 시신보다 작았을까?
  효종 사망 다음달에 의관 이기선이  갑자기 엄형을 받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현종 
즉위년 6월 현종은 어의 이기선 문제를 제기한다.
  "지난달 초3일 밤 입진 때, 의관 이기선이 많이 부어 있는 것을 보고는 감히 꽁무니를 뺄 
생각으로 진맥할 줄 모른다고 아뢰었는데,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작년 편찮으셨을 때는 어
떻게 맥을 논했다는 말인가? 그의 정상이 매우 흉측 교묘하여 엄히 징벌하지 않을 수 없으
니, 그를 잡아들여 국문 처리하라.
  지난달 초3일이면 효종이 세상을 뜨기 전날로 그때부터 효종의 몸에 부기가 있었다는 말
이다. 현종은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이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효종비 인선왕후도  마
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의 이기선이 갑자기 발을 뺀 것이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현종은, 이기선이 국문에서 원래 맥 짚는 법을 모른다고 말하자 화
를 냈다.
  "맥 짚는 방법을 모른다면 어떻게 의원이 되었는냐?"
  현종은 엄형을 가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한의사가 맥을 짚을  줄 모른다는 말은 양의사가 
주사를 놓을 줄 모른다는 말과  같았다. 게다가 어의들은 왕비나 후궁을  진찰할 때 손목에 
맨 긴 실만 잡고서도 맥을 짚을 줄 아는 실력이 있어야만 채용될 수 있었다.
  현종은 분명 이기선에게 문제가 있음을 감지하고 엄형을 가해 정상을 알아내도록 한 것이
다. 원래 현종은 어의에게 관대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신하들이 효종의 죽음과 관련해 세 어
의를 사형에 처하자고 주청했을 때 신가귀를 제외한 두  어의를 살려주었고, 또한 신가귀도 
교형으로 한 등급 낮추어 목이 시신에 붙어 있게 배려해주었다. 그런 현종이 어의 이기선을 
추궁한 것은 적지 않은 의혹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이기선을 옹호하고 나선 세력이 있었다. 바로 송시열 등의 산당이다. 현종 즈
위년 6월 7일 송준길이 신가귀 등 어의의 형을 빨리  윤허하라고 청했는데, 같은 당인 송시
열과 정유성은 "이기선은 사실 맥 짚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며 옹호하고 나섰다. 결국 이
기선은 송시열의 이 주청으로 사지에서 구원되었다.
  어쩌면 이기선은 송시열의 말대로 정말 맥을 짚을 줄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면 현종의 말대로 짚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의원, 그것도 어의 되었는지 의문이다.  그
리고 산당세력이 신가귀 등은 굳이 빨리 형을 윤허할 것을 청하면서, 이기선은 왜 옹호하고 
나섰는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혹들을 남긴 채  효종은 세상을 떠났고 조선은 다
시 극심한 문치의 나라로 돌아갔다.

    5장
    제 18대 현종
    예송 시대에 가려진 죽음
  현종은 그다지 낯익은 임금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치세 15년은  '현종'이란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흔히 예송논쟁은 '쓸데없는 정쟁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특히 일인 학자들
이 이런 논리를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유포시켰지만 사실 예송논쟁은 그렇게 쓸데없는  정
쟁은 아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은 그 결과에 따라 당시의 집권세력이 교체될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특히 현종 15년에 발생한 2차 예송논쟁은 1623년의  인조반정 이래 50년 간 집
권한 서인 지배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현종은 실제로 그런 의도를 가지
고 2차 예송논쟁을 이끌었다.
  현종은 2차 예송논쟁 당시 국왕보다 더한  권력을 지니고 있던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그 
추종세력을 정연한 논리로 몰아붙였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현종의 정연하고 단호한 
공세에 당황했다. 그리고 결국 이 논쟁으로 사실상 국왕의 위에 있던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
인들이 등용되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갑작스런 사건이 발생한다. 2차 예송논쟁  와중인 재위 15년 8월 8일에 
갑자기 현종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현종의 병명은 복통이었다. 현종이 최초로 치료를 받은 것은 7월 24일로, 남인들이 편찬한 
<현종실록>에는 침을 맞았다고 되어 있으나, 서인들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에는 뜸 치
료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현종은 계속 뜸 치료를 받는데, 8월 7일에는 복부가  당
기고 아픈 증세는 조금 덜 했으나 극심한 피곤을  느꼈다. 인삼차를 계속들었으나 대신들을 
인견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해졌다. 같은 날 오후에는 맥박이 빨라지고 살갗이 뜨겁게 
달아오른 데다가 요통 증세까지 있어, 약방에서  해표제를 올렸다. 그 후 8월 9일에는  열이 
나는 증세가 학질 같다 하여 치미을 맞고,다음날인 10일에는 열이 계속 나는 데다가 헛배가 
부어 오르고 대변이 묽고 잦으며 소변이 안좋아 약방에서 분리제를 썼으나 열과 설사 등의 
증세는 차도가 없었다. 이후 인삼차만 가끔 들 뿐 종일 혼수상태가 계속되었다. 약방에서 시
령탕을 올렸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현종은 조금만 기운을 차리면 영의정으로 제수한 허적이 언제 충주에서 오
는지를 물었다. 현종은 2차 예송논쟁 와중에 서인 영의정  김수홍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남
인 허적을 임명할 만큼 집권세력 교체에 집요한 관심을 보였다. 드디어 8월 16일 허적이 서
울에 올라오자 현종은 거의 혼수상태에서도  관복을 입고 예의를 갖춰  만났다. 그때가 8월 
17일, 현종이 부왕 효종처럼 못다 한 일을 남기고 승하하기 하루 전이었다.
  허적이 설사 증세가 좀 덜하냐고 묻자 현종은 덜한 것  같지 않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날 
약방에서 시약청을 개설하자고 청하자, 현종은 약방이 가까운 곳으로 옮겨 왔으니 시약청까
지 개설할 필요는 없다며 거절하다가 재차 아뢰자 허락했다.  이때 허적이 영의정으로서 약
방 도제조를 겸하자마자 승지를 시켜 왕비에게 전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상의 병세가 저런 데도 곁에서 모시는  자가 환관뿐이어서 증세의 경중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청풍부원군 김우명,예조판서 장선징, 청평위 심익현이 오늘부터 좌우에서 모시게 하
소서."
  즉 현종의 병상을 지키는 환관들을  믿을 수 없으니 장인 김우명과  매제 심익현, 그리고 
남인 장선징으로 하여금 병실을 지키게 하자는 요청이었다. 허적은 현종의 급작스런 병세에 
분명 서인들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현종을 알현한 다음날 이런 주청을 한 것이다. 하
지만 이미 때는 늦어 현종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백회설에 뜸을 떴으나  효력이 없어 오후 
서너시경이 되자 병세가 매우 위독해졌다.
  현종은 하얀 겹모자에 하얀 옷차림으로 하얀 평상에 부들자리를 깔고 하얀 요에 하얀 요
에 이불을 덮은 채 머리를 북으로 하고 누워 있었다.
  영의정 허적이 평상 앞에 꿇어앉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인삼차를 드시옵소서."
  눈을 뜬 현종이 허적임을 알고 일어나 앉으려 하자 손으로 부축해 일으켰다. 현종은 인삼
차를 손수 들어 마셨다. 허적이 물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별로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숨이 차서 목소리가 분명하지  못하였다. 현종은 심익현이 인삼차를  냉약에 타서 
올리자 조금 들더니 대신들은 물리쳤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날 밤 열시경  창덕궁 
재려에서 현종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재위 15년 34세의 한창 나이로 
부왕 효종처럼 큰일을 추진하는 와중에 한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효종위 모후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복제
  현종의 부왕 효종은 죽어서도 편안히 저숭에 가지 못했다. 시신보다 작은 관과 장지 논란
의 파문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재위 10년보다 더 긴  15년 간 예송논쟁이 지리하게 전개된 
것이다.
  효종이 승하했을 때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살아 있었던 것이 1차 예
송논쟁의 원인이 되었다. 논쟁의 발단은 효종의 국상 때 자의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
야 하느냐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국상의 복제는 <국조오례의>에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국왕이 승하했을 때 어머니인 모후가 입는 복제에 대해서는 규정된 바가 
없었기 때문에 1차 예송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인조는 첫 부인 인렬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3년 후 영돈녕부사 양주 조씨 창원의  딸
과 재혼했는데, 그녀가 바로 장렬왕후(자의대비)조씨다. 국혼 당시 인조는 만 43세였고, 조씨
는 아들 효종보다도 다섯 살이나 어린 만 14세였다. 그런데  효종이 만 40세의 나이로 사망
했을 때 법적인 어머니 조씨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효종이 사망한 1659년이 
기해년이라 해서 이를 기해예송이라 부르기도 하고, 상복 문제로 논쟁했다 하여 기해복제라 
하기도 한다.
  식민지 시대 일본인 학자들은 이 예송논쟁을 당파싸움 망국론의 중요한 근거로 이용해 우
리의 민족성을 비판했다. 실생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형식적인 문제만도 아니었고, 실생
활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제도 아니었다.
  예송논쟁은 '효종의 승통이 정당한가'라는 지극히 민감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
에, 장장 15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왕위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였으니, 이는 일본으로 따지면 
일왕 다이쇼가 메이지의 뒤를 이은 것이 정당한가에 관한 논쟁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어찌 형식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예송논쟁이 격화된 데에는 조선 후기 들어 조선 성리학의 주류가 예학으로 수구화한 사상
사적 배경도 한몫을 했다. 조선 중기까지는 동인의 정치이념인 이기이원론과 서인의 이념인 
이기일원론의 대립에서 보여지듯이 사상의 흐름이 사회의 발전 방향과 보조를 같이 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신분제 해체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이 강해지자, 신분질서를 강화해 기득
권을 유지하려는 지배층의 의지가 예학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불교이념
을 극복하고 조선을 개창한 조선 성리학 사상의 자기 부정이기도 했다.
  신분제 강화를 복적으로 하는 조선 예학을 집대성한 인물이 노비로 전락한 송익필이란 점
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후 조선 예학은  그의 제자 김장생과 장생의 아들 김집,  그리고 
송시열, 송준길 등이 주도하는 산당의 이념이 되어 양송 때에 와서는 조선 성리학의 주류가 
된다.
  이처럼 예학이 중시된 조선 사상사의 흐름 속에서 효종의 죽음으로 야기된 1차 예송논쟁
이 핵심은, 효종을 맏아들로 대우할 것이냐 아니면 둘째 아들로 대우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
다.
  조선의 예법은 조선의 <경국대전> 과 <국조오례의>, 그리고 중국의 <주례>,<주자가례>
등을 복합해 만들어졌다. 이에 따르면 상복에는 다섯 종류가 있는데 3년복인 참최와 3년 또
는 1년복인 재최, 9개월복인 대공, 5월복인 소공, 그리고 3개월복인 시마가 그것이다.
  부모상에 자녀가 3년복을 입는 것은 당연했지만, 반대로 자식이 죽었을 경우 부모의 상복
은 장자냐중자냐에 따라 달랐던 것이 논쟁의 시작이었다.  맏아들인 장자상에는 부모도 3년
복을 입게 되어 있었으나 차자 이하는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다. 가부장제 사회인 조선에
서는 후사를 잇는 장남을 그만큼 우대한 것이다. 며느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장자부의 상
에는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으나 중자부의 상에는 9개월복을 입는 것이 예법이었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승하했을 때 자의대비가 장자의 예를 따라 3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아니면 차자의 예를 따라 1년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었고, 15년 후의 2차 예송논
쟁은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했을 때 장자부의 예에 따라 1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차자부의 
예에 따라 9개월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었다.
    부모가 자식상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네 가지 이유
  효종이 승하했을 때 장례를 주관했던 예조판서  윤강이 자의대비의 복제에 대해 물은  것
이, 장장 15년 간에 걸친 예송논쟁의 사발이 될줄은 윤강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자의대비께서 상복을 입으셔야 하는데 <국조오례의>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지 않습니
다. 혹은 3년복이라 하고 혹은 1년복이라 하는데, 결정할 만한 예문이 없으니 대신과 유신들
에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당시의 현종의 나이 만 열여덟이었다. 현종은 갑작스런 부왕의 사망에 경황이 없었고,  또 
자기 주장을 내세울 만큼 예론에 대한 식견도 없었으므로,  대신과 유신들에게 의논해 아뢰
라고 명했다. 이에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영돈녕부사 이경석  등의 대신들이 복제 
문제를 논의한 후 현종에게 헌의했다.
  " 신 등이 옛 예법에 능통하지는 못하지만 시왕의 제도로 상고해보니 대왕대비께서는 1년
복을 입으시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자의대비의 복제는 3년이 아니라 1년복이 맞다는 주장이었다. 현종은 3년복이 아니라 1년
복이라는 데 내심 불만을 품었으나 반박할 만한 이론이 부족했기 때문에 송시열과 송준길에
게도 의논하게 했다.
  양송의 견해는 과거로 등과한 신하들보다 우대받았던 터였다. 그러나 이들 유신들도 " 효
종이 비록 왕통을 이었으나 다음 적자 서열이니 이번 국상에 대왕대비께서 입으실 복제는 1
년을 넘을 수 없다."며 1년설을 지지하고 나섰다. 효종이 왕통을 이었더라도 장자가 아닌 차
자이므로 자의대비는 3년복이 아닌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렇듯 대신들과 유신들이 모두 1년복을  주장하고 나서자 자의대비의 복제는  1년복으로 
굳어졌다. 이때 남인 윤휴가 1년설을 비판하며 3년설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파란의 예송논
쟁이 시작되었다. 1년설을 주장한 대신과 유신들은 대부분 서인이었는데, 남인 윤휴가  이를 
비판하고 나서면서 예송논쟁은 당파간 논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윤휴는 1년설을 찬성한 서인 이시백에게 편지를 보내 1년설에 반대하는 자신의 견해를 밝
혔다.
  " <의례주소>가씨 주에 '장자가 죽으면 적처소생의 둘째  아들을 대신 세워 역시 장자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대왕대비께서는 당연히 3년복을 입으셔야 마땅합니다."
  장자 소현세자의 뒤를 이은 효종은 차자가 아니라 장자가  된다는 주장이었다. 효종이 장
자가 되면 자의대비의 복제는 당연히 3년복이 되어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의정 정태화는 예론의 대가로 인정받던 이조판서 송시열에게 의논했다. 
이 자리에서 송시열은 놀라울 정도로 과감한 견해인  문제의 '사종지설'을 거론한다. 사종지
설은 부모가 자식상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네 가지  경우를 뜻하는데, 그 중에는 신하로서 
발설할 수 없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 네 가지 경우란 첫째, 장자가 병이 있어  제사를 받
들 수 없는 경우, 둘째 서손이 후사를 이은 경우, 셋째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은 경우, 넷째 
적손이 후사를 이은 경우를 말한다.  이 중에서 문제가 된 것은  셋째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은 경우였다.
  이를 체이부정이라 하는데 비록 후사는 이었지만 서자이므로 정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태
화는 송시열이 '체이부정'이란 말을 입에 담자 몰골이 송연함을 느꼈다. 국왕에게 서자 운운
하는 것은 왕조국가에서 목이 열 개라도 살아 남기 힘든 발언이었다. 정태화가 놀라자 송시
열은 여기세서 말하는 '서자'란 첩의 아들이 아나라 맏아들 이외이 여러 아들, 즉 중자를 뜻
한다고 설명했으나, 겨위야 어쨌든 신하로서 국왕에게 '서자', '부정'운운한 것 자체가 자져올 
파장은 심각했다.
  가슴이 서늘해진 정태화는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 예로부터 왕가의 일은 처음에는 아주  작은 데서 비롯되더라도 나중에는 큰 화를  이룬 
것이 한둘이 아니오. 만일 훗날에  간사한 자가 나타나 '체이부정'이란  말을 가지고 화단을 
만든다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가 화를 당한 후에도 나라  일이 어디에 이를지 
알 수 없소."
  정태화의 다음 말은 그의 두려움의 근저에 소현세자가 있음을 보여 준다.
  " 예법이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데 어찌  감히 체이부정으로 
예를 논하겠소. <국제>에는 모든 아들의 상사에 부모가  다 1년복을 입었으니 이를 근거로 
1년복으로 의논해 결정하는 것이 좋겠소."
   굳이 장자냐 차자냐 따질 필요 없이 모든 아들의 상사에 1년복을 입기로 되어 있는 <경
국대전>을 근거로 1년복으로 결정하자는 절충안이었다. 이 주장에 대해 송시열은 <대명률>
에는 1년복으로 되었으니 <경국대전>과 <대명률>을 인용해 1년복으로  결정하자고 동의했
다. 송시열은 '체이부정'을 내세우다가는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한다는  공격을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경국대전>과 <대명률>을 인용해 1년복을  주장하는 편법으로 한 발 후퇴
한 것이다. 체이부정을 근거로 하든 <경국대전>을 근거로 하든 자의대비의 복제는 1년복이 
되는 것이니 그 효과는 같았다.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정태화와 송시열의 합의는 집권당인 서인의 당론으로 확정되었고 당시 만 열여덟에  지나
지 않았던 현종으로서는 다른 의견을 낼  만한 확고한 이론이 없었기 때문에 1년복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했던 윤휴는 1년복에 동의하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의
례주소>의 "내종은 외종과 같다"는 소를 인용해 송시열의 1년설을 반박했다.
  " 내종은 다 참최복(3년복)을 입으니 대비의 복은 마땅히 3년복이어야 합니다."
  이제는 송시열도 물러설 수 없었다. 
  " 내종의 부녀는 모두 신하다. 따라서 임금에게 감히 촌수를 계산하지 못하고 모두 3년복
을 입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왕대비는 선대왕(효종)께서 신하로서 섬기던 분이다. 어찌 
신하인 내종의 다른 부녀들처럼 참최복을 입는단 말인가? 당연히 1년복을 입어야 한다."
  윤휴도 물러서지 않았다.
  " 주나라 무왕은 어머니이자 문왕의 비인 문모를 신하로 삼았다."
  주 무왕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은 예가 있다는 말이었다. 윤휴가 무왕의 예를 들자 송시열
은 주자의 말은 인용했다.
  " 주자께서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의리는 없다'고 말했다."
  윤휴 또한 지지 않았다.
  "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국왕의 예는 일반 사대부가와  다르므로 자의대비의 복제는 3년이란  주장이었다. 논란이 
계속되자 현종은 우선 <경국대전>에  의거해 1년복으로 결정했고,  현종이 서인의 1년설을 
지지함으로써 1차 예송논쟁은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에 대한 현종과 서인의 속마음은 서로 달랐다. 현종은 <경국대전>에 장자와 차
자의 구별이 없으므로 효종이 적통과 종통을 모두 이었다는 전제하에 1년복을 입는 것이라
고 여겼다. 즉 적통에 따라 1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자위했던 것이니, 내심으로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이 차자이기 때문에 1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여겼다. 즉,현종
과 달리 서인은 겉으로는 <경국대전>을 인용했으나 실제로는 차자의 복인 고례를 적용했다
고 생각한 것이다. 같은 1년복을 놓고 이렇듯 서로 다른 생각을 한  것이 15년 후 2차 예송
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예론을 금하노라
  자의대비의 복제가 1년복으로 결정될 무렵 남인 논객 허목이 또다시 3년설을 주장하고 나
서면서 파란이 재연된다. 게다가 윤휴와 허목에 이어 3년설에 가세한 남인 윤선도가 송시열
을 역적으로 모는 상소를 올리면서 정계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
  " 차장자가 왕위를 이었다 해서 어찌 별도로 적통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차장자가 아버지의 명과 하늘의 명을 받아 왕위를 계승했는데도 적통이 다른 사람(소현세
자)에게 있다면, 이는 가짜 세자란 말입니까? 섭정황제란 말입니까? 또 왕위에 오른 차장자
는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석견)에게는 임금 노릇을 못하며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 역시 왕
위에 오른 차장자에게 신하 노릇을 못한다는 말입니까?"
  윤선도의 논리대로라면 송시열의 1년설은 효종의 종통과 정통성을 부인한 역적의  의논이
었다. 효종을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 즉 소현세자의 
살아 있는 3남 석견을 적통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이는 서인들이 효종이 
아니라 석견을 임금으로 여기고 있다는 주장이었으니 서인들이 역적이라는 말과 마찬가지였
다.
  " 송시열이 종통은 종묘사직을 계승한 임금(효종)에게 돌리고, 적통은  이미 죽은 장자(소
현세자)에게 돌리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종통과 적통이 갈라져서 둘이 되는  것이니 천하
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지금 나라의 권력은 위의 임금에게 있지  않고 신하(송시
열)에 게 있습니다."
  윤선도의 이 과격한 주장에 송시열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서인 전체가 크게 놀랐다. 이는 
송시열을 역적으로 처단하라는 상소와 마찬가지였으므로, 그와 같은 당으로 1년설을 주장한 
유신들 모두를 역적으로 모는 것이었다.
  이 상소로 서인들은 남인들의 거듭된 문제제기가  단순한 예론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
라, 이를 이용해 정권을 잡으려는 정치 공세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밀리면 정원
을 잃을 판이었다. 서인들은 당력을 집중해 윤선도를 공격했다. 당시의 집권당이었던 서인의 
집요한 공세에 결국 윤선도는 머나먼 삼수로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고, 이것으로 파문은 일
단락되었으나 사건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2년 후  심한 가뭄이 들자 현종이 내외에 
널리 구언했는데, 이때 전 판중추부사 조경이 응지상소를 올려 이를 재론하고 나섰다. 
그는 " 윤선도의 죄라는 것은 적통,종통 논의에 있어 효종대왕을 드둔한 것뿐" 이라며 윤선
도를 옹호하고 나섰다. 복제 문제가 또다시 시끄러워지자 현종은 비로소 단안을 내렸다.
  " 차후에 다시 예론을 논하는 상소가  있으면 비록 많은 선비들의 상소라 해도  용서하지 
않고 중형으로 다스리겠다. 이 뜻을 널리 중외에 반포하라."
  현종은 예론 자체를 재론할 수 없는 금법으로 만들었다.  현종으로서는 효종의 종통 문제
가 재론되는 것 자체가 불편한 일이었다. 효종이 적통이 아니면  현종도 적통이 될 수 없었
다. 현종은 예론 자체를 금법으로 만듦으로써 이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예송논
쟁은 현종이 금지했다고 해서 금법이 될 수가 없었다. 다만  현종의 명에 따라 땅속에 묻혀
졌을 뿐 엄청난 폭발성을 지닌 채 잠복해 있었으며, 누구든지 불씨만 붙이면 언제든지 다시 
터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자의대비보다 여섯 살 많은 현종의 모후이자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생존해 있는 상
황이었다. 자연적으로 보더라도 며느리 인선왕후보다 자의대비가 더 오래 살 가능성이 많았
으므로 이 경우 1차 예송논쟁 때와 똑같은 상황, 즉 효종비인 장자부냐 아니면 차자부냐 하
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1차 예송논쟁 15년 후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며느리상에 시어머니가 입어야 할 복제
  1674년(현종 15)효종비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났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왕대비
가 된 장씨는, 자신보다 여섯 살 어린 시어머니 자의대비 조씨를 모시다가 쉰여섯의 나이로 
세상를 떠난 것이다.
  그때 쉰한 살의 자의대비 조씨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예송논쟁이 재연될 수밖에  없었
다.
  1차 예송논쟁이 아들 효종이 승하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에 관한 논란이었다
면, 2차 예송논쟁은 며느리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시어머니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착
용 기간에 관한 논란이었다.
  이는 15년전에 벌어졌던 1차 예송논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즉 효종을 장자로 보면 인선왕후도  장자부이므로 1년복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을 차자, 즉 
중자로 보면 중자부이므로 9개월복을 입어야 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1년복으로 의정해 올
렸고 현종도 이의가 없어서 그대로 시행하게 되었는데, 예조에서  다시 당초의 결정이 잘못
되었다고 자인하고 나섬으로써 2차 예송논쟁이 불붙게 되었다.
  예조판서 조형과 참판 김익경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의정한 다음날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 신 등이 어제 상복에 관한 절목 중에서  대왕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올렸으나 <가례복
도>와 명나라 제도를 보니 큰며느리의 상복은 기년(1년)이고,  그 외 며느리의 복은 대공(9
개월)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효종대왕 국상 때  대왕대비께서 이미 중자의 상복인 기년복
을 입으셨으니 지금의 복제는 9개월이 맞는데 경황이 없어 경솔하게 1년으로 아뢰었으니 황
공합니다."
  예조는 9개월복으로 절목을 고쳐 바쳤다. 현종이 대답했다.
  " 알았다. 성복때에도 이런 잘못이 있을지 염려되니  담당자인 예조정랑을 잡아다가 죄를 
정하라."
  고증을 잘못한 탓으로 돌려진 이 사건은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날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
인들은 이를 단순한 사건으로 여기지 않았다.
  남인들에게 이는 효종의 장례 때와 마찬가지로, 서인들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으
로 받아들여졌다. 남인들은 자의대비의 복제가 장자부의  1년복이 아닌 차자부의 9개월복이 
된 데 분개했다. 그러나 현종 2년의 금법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
지 못했고 자의대비는 9개월복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대구의 한 유생이 이 금법을 깨고 9개월복의 부당성을 제기하고 나섬으로써 예론
이 재연되었다. 인선왕후 사후 5개월 만인 그 해 7월, 대구의 유생 도신징은 상소를 올려 서
인들의 9개월복을 통렬히 비판하고 나섰다.
  " 대왕대비이 복제를 기년(1년)으로 정했다가 다시 대공(9개월)으로 고친 것은 무슨  전례
에 의한 것입니까? 효종대왕 국상때 자의대비께서  입으신 1년복은 <국제(경국대전)>에 따
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국제>에도 없는 대공이란 복제가 갑자기 나왔습니다. 15
년전에는 효종대왕을 장자로 여겨 1년복을 입었다면서 지금은 인선왕대비를 차자부로  여겨 
대공복을 입으니 어찌 그 전후가 다릅니까."
   효종 상사 때 '체이부정'의 위험성 때문에 장자나 중자 모두 1년복으로 되어 있는 <경국
대전>을 인용해 1년복으로 정한 편법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그때는 효종을 장자로 대우
해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왜  효종비를 차자부로 대우해 9개월
복을 입느냐는 반론이었다. 현종의 금법을 깨면서 집권당인 서인의  이론에 정면 도전한 이 
상소는 일개 유생인 도신징으로서는 목숨을  건 상소였다. 만약 15년  전에 1년복을 의정한 
서인의 이론과 9개월복을 의정한 서인의 이론이 같았다면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신징의 주장은 서인의 이론적 모순을 정확히 지적하였고 현종도 이 점을 의문스
러워했으므로, 금법은 자연히 사문화되고 논란이 재연되었다. 현종도 이제 서른네 살의 장년
이었고 그 동안 예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스스로의 의견을 갖게  되었다. 현종의 생각에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정했다가 다시  9개월복으로 고친 것은 문제가  있었다. 이는 
효종비를 차자부로 여기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으며, 나아가 15년  전에도 서인들이 부왕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것인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했다.
  현종은 좌부승지 김석주를 불렀다. 김석주는 현종의 장인 김우명의 조카로 현종과는 외사
촌인 외척이었으며, 또한 효종 때 대동법 실시를 놓고 송시열, 송준길과 치열하게 다툰 김육
의 손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김육을 장사지낼 때 왕가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는 수도를 썼다고, 송시열이 김석
주의 부친 김좌명과 김우명을 공격한  일이 있어 두 집안은 구원이  있는 사이이기도 했다. 
이런 사연 때문에 김석주는 서인이면서도 남인과 가깝게 지냈다.
   현종은 김석주에게 1차 예송 당시의 각  의논에 대해 물었는데 김석주는 허목의  상소와 
윤휴가 3년설의 근거로 삼은 <의례주조>의 <참최장>등을  정리해 보고했다. 이는 모두 남
인들의 주장이었으므로 사실상 1차 예송 때 남인들이 주장한 3년설이 맞다고 보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왕 효종을 장자로 규정한 남인들의 주장이 현종의 마음에 든 것은 당연했다.
  현종은 서인들이 부왕 효종을 장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굳혔다. 현종으로서는 서
인들의 내심대로 효종을 중자 자리에 두면 그 자신의 정통성도 불분명해질 뿐 아니라 만약
의 경우 이들이 소현세자의 아들 석견을 추대해 쿠데타를 감행할 수도 있었으므로 이르 방
치해둘 수 없었다.
  현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의대비의 복제를 바꿔놓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집권당인 서
인과 한판 승부가 불가피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어찌 앞뒤가 서로 틀린가?
  현종은 침착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그가 대신들을 불러 복제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것은 도
신징이 상소한 1주일 후였다. 현종은 먼저 영의정 김수홍에게 물었다.
  " 대왕대비의 복제를 1년복에서 갑자기 9개월복으로 바꾼 것은 무슨 곡절 때문인가?"
  " 기해년 선대왕 국상때에 이미 1년복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 그때 이야기를 다 기억은 못하지만 고례가 아닌 <국제>를 써서 1년복으로 정했다고 기
억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9개월복도 또한 <국제>에 따라 정한 것인가?"
  김수홍이 대답했다.
  " 그때 송시열의 의견은 '고례는 마땅히 이렇지만 당시는 <국제>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
습니다."
  현종은 김수홍의 대답이 지닌 모순을 놓치지 않았다. 고례의  기년복은 장자가 아니라 중
자의 복이었다. 반면 <국제>는 장자와 중자의 구분 없이 기년복으로 되어 있었다. 즉  중자
의 복이었던 것이다.
  " 기해년에 영상 정태화가 '마땅히 <국제>를 써야 한다'고 하여  판중추부사 송시열과 의
논해 1년복으로 결정했었다.  이번 국상에 고례를  쓰면 대왕대비의 복제는  무엇이 되겠는
가?"
  답변이 궁색해진 김수홍이 겨우 대답했다.
  " 고례로 하면 9개월복입니다."
  " 기해년에는 <국제>를 쓰고 지금은 고례를 쓰니 어찌 앞뒤가 서로 틀린가?"
  " 기새년에도 고금의 예법을 참조했고 지금도 그렇게 했습니다."
  " 그럴지 않다. 그때는 <국제>를 썼는데 그 뒤  문제가 되어 다툰 것은 고례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현종은 단호히 말했다. 더 이상 15년 전 경황 없던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민유중이 김수홍을 지원하는 발언을 했다.
  " 기해년에는 고례와 <국제>를 참고해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민유중의 발언을 무시하고 김수홍에게 다시 물었다.
  " 이번 복제를 <국제>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가?"
  김수홍의 답변은 궁색했다.
  " <국제>에 장자부의 복은 기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종의 추궁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 그렇다면 오늘의 복제가 <국제>와는 어떤 관계에 있단 말인가? 이는 놀라운 일이다.
기해년에 대비께서 1년복을 입은 것은 <국제>이지 고례가 아니었다. 그대들은  기해년에 <
국제>를 인용했다고 주장하지만 <국제>에서 무엇을 인용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서인들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국제>에  따르면 장자부의 복은 기년복이
라고 말해놓고, 지금의 대공복이 <국제>라고 말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민유중이 나서서 김수홍을 구원하고자 했다.
  " <국제>가 우연히 그러했습니다. 기해년에 대신들이 의논할 때도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
나 그 때 시행한 것은 고례였을 뿐입니다."
  막중한 국사가 '우연히'결정되었다는 민유중의 대답은 자기  모순이었다. 이들은 1차 예송 
때 내부적으로는 고례의 '체이부정'에 따라 1년복을 주장했으나, 그 파장을 우려해 공식적으
로는 <국제>에 따른다면서 1년복으로  정한 것이었다. 현종은 이제  이 모순을 인식하기에 
충분한 연륜을 쌓은 국왕이었다.
  " 기해년에 조정에서 결정한 것은 <국제>를 좇은 것이다."
  김수홍도 모순된 의견에 가세했다.
  " 그렇지 않습니다. 고례로 결정했으므로 다투는 사람이 저렇게 많았습니다."
  김수홍이 1차 예송논쟁 때 고례를 썼다고 주장하자 현종은 그 주장을 역습의 재료로 사용
했다.
  " 고례대로 한다면 장자의 복은 어떠한가."
  영의정 김수홍은 헤어나기 어려운 늪에  빠졌음을 알았으나 국왕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답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참최 3년복입니다."
  서인 영의정 자신의 입으로 효종을 장자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실토한 셈이다. 이는 곧 1
차 예송 당시 서인들이 겉으로는 <국제>의 장자복인 기년복을 적용해 효종을 장자  대접한 
듯해놓고, 속으로는 고례의 중자복인 기년복을 적용했음을 자인한 것이었다. 현종은  도신징
의 상소를 대신들에게 보여주지 않고 있다가, 서인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스스로 모순을 자
백한 후에야 김수홍에게 내보였다. 김수홍은 집권당을 궁지에 빠뜨린  한 시골 유생의 상소
를 상기된 모습으로 받아 읽었다. 김수홍이 다 읽고 나자 현종이 물었다.
  " 기해년에 과연 차자로 의논해 정했는가?"
  이때 비로소 좌부승지 김석주가 나섰다. 그는 처음부터 송시열을 직접 겨냥했다.
  " 송시열의 수의에 '효종대왕은 이조대왕의 서자로 보아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허목이 논쟁한 것입니다."
  현종은 예조판서 조형을 꾸짖었다.
  " 예조는 기해년의 일을 자세히 상고한 다음 증거를 대고 고쳤어야 하는데 함부로 대공복
으로 고쳤다.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조형이 대답했다.
  " 바빠서일 뿐만 아니라 며느리의 상에는 대공복을 입기 때문에 이렇게 고쳐서 들인 것입
니다. 기해년에 왜 1년복으로 정했는지는 망각하고 상고하지 못했습니다."
  김수홍은 일단 시간을 벌기로 했다.
  " 기해년의 일을 자셋히 상고한 다음에 여쭈어 처리하는 것이 옳은 듯합니다."
  현종은 서인들이 배후의 송시열과 논의해 당론을 정한 다음 공동대처하려는 것이라고  판
단해 시간을 재촉했다.
  " 사채가 중대하므로 예조만 단독으로 의논해서는 않된다. 육경이 반드시 오늘 안으로 모
여 의논해야 할 것이다."
  민유중이 너무 급한 것 같다며 시간의 촉박함을 말했으나, 현종은 " 지연되면 안 되니 빨
리 하라"고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영의정 김수홍, 판중추 김수항, 이조판서 홍처량, 병조판서 김만기,  호조판서 민
유중 등이 긴급히 모여 의논한 후 그날 밤 현종을  찾았다. 선왕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의 문
제였으니 그만큼 민감하고도 중대한 사안이었다.
  " 기해년 복제를 정할 때 대신들이 전후  순서를 <실록>에서 상고해 보았더니, 정희왕후
(세조의 비)는 덕종과 예종에게 모두 기년복을  입었고 문정왕후(중종의 비)는 기록이 없었
습니다.
  <국제>에는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 않고 '기년복'으로 되어 있으며 기해년에  처음 복제
를 의논할 때도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후 3년복이란 반론이 나오면서 논
의가 분분해졌으나 여러 번 회의한 끝에 <국제>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장자와 중자를 구별해 장자에게는 최참복(3년복)을 입고 중자에게는  기년복을 입는 것은 
우리나라의 <국제>입니다. 기해년에 처음부터 <국제>를 쓰기로  했는데 후에 고례를 주장
하는 신하들이 있었지만 역시 <국제>대로 기년복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계사의 설명은 길었지만 정작 현종이 알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하는 내용은 빠져 있었다. 
현종이 알고 싶은 것은 자의대비의 이번 복제가 기년복인가  대공복인가였다. 물론 듣고 싶
은 대답은 "장자부의 복인 기년복을 입으셔야 합니다"라는 말이었다.
  서인들도 현종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15년 전 기년복으로 정한 원죄 때문에 이번
에 기년복이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면, 15년 전의 기년복은  잘못
된 것이 되고 3년복이 옳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서인 중신들이 진퇴양난에 빠진 가운데 현종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 대왕대비께서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지 한가지로 분명히 정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김수홍등 서인 대신들의 답변은 궁색했다.
  " 신들은 다만 기해년 복제를 정할 때 어떤 전거를 썼는지 알아보라는 분부만 받았으므로 
지금 대왕대비의 복제에 대해서는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현종은 가장 중요한 지금의 복제를 빼놓은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 대왕대비께서 대공복을 입으시는 것이 미안하여 의논하라고  하교한 것이다. 기해년 복
제에 관한 것만 물을 것 같으면 예방승지에게  시켜 기록을 찾으면 될 것을 왜 대신들에게 
의논했겠는가."
  현종은 소신을 정리했으므로 뚜렷한 논리가 서 있었다. 반면  영의정 김수홍을 비롯한 서
인들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처음 하교받을 때, 그 뜻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다만 기해년 복제만 상고해 아뢰었던 
것인데 거듭 하교를 받으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 내가 처음 하교 했을 때는 내 뜻을 명확히  몰랐다 할지라도 지금은 알았 터인데, 아직
도 명백히 아뢰지 않는 뜻을 모르겠다. <국제>대로 한다면 대왕대비께서는 무슨 복을 입어
야 한다는 말인가?"
  " 지금 하교를 받았으나 너무 중한 예라 감히 입으로 아뢸 수 없으므로 글로 써서 아뢰겠
습니다."
  김수홍은 일단 자리를 모면해 서인들과 논의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현종이 
자의대비의 복제를 9개월복이 아닌 1년복으로  바꾸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인의 당론은 대공복이었고, 당시는 임금의 명령보다 당론이  더 중했던 당재의 시
대였다.
  현종은 김석주를 불렀다.
  " 내 의견으로는 기해년에 <국제>를 사용했으니 이번 회의 때는  이러이러하므로 대공복
을 입어야 한다고 논의하든지, 아니면 저러저러하므로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논의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재차 올린 계사를 보면 몇 마디  말로 그럭저럭 책임을 때우고 말았으니 
매우 부당한 일이다. 대공복을 입어야 될 듯하다는 말을 또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매우 
이상스럽다. 예조에서 한 일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죄 주기를 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도리어 비호하려고 하니, 빈청이 하는 짓도 놀랍다."
  현종의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서인들은 현종의 분노가 두려웠으나 물러설 수 없었다.  물
러서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는지도 모른다.
  영의정 김수홍과 민유중 등 서인 대신들은 빈청에 모여 현종에게 말했다.
  " <국제>를 상고해보니 아들  밑에는 다만 '1년'이라고 썼을뿐,  장자와 중자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래 장자부에는 '1년'이라 쓰고 중자부에는 '9개월'이라고 썼을 뿐이며 승중
여부는 적지 않았으니 대왕대비의 복제는 9개월로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
극히 중한 예를 함부로 단정할 수 없으니 춘추관으로 하여금 <실록>에서 예전의 경우를 고
증하게 하십시오."
  서인들은 여전히 대공복이란 당론을 변경하지 않았다.
  " <국제>에 장자부와 중자부의 구분은 있으나 '중자부 9개월복'이란 말 이외에 따로 승중
했으면 기년복을 입는다는 말은 없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대왕대비의 복제가 9개월복이란 
것이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니
  결국 서인들은 " 대왕대비께서 9개월복을 입으시는 것이 미안하다"는 현종의 바람을 무시
했다. 이는 현종과 맞서보자는 말에 다름 아니었으니 현종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 기해년 복제 때는 장자와 중자의 구별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감히 중
자부이기 때문에 9개월복이 마땅하다고 하는 구나. <국제>에 '승중'에 대한 조목이 없는 것
은 제도의 미비함인데 <예경>을 참조해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이를 빌미로 9개월복을  주
장한다면 이런 회의는 무엇 하러 하겠는가? 다시 살펴 아뢰도록 하라."
  현종은 분노했고 서인들은 기로에 섰다. 현종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기년복으로 수정하든
지, 아니면 기해년에 송시열이 제기했던 '체이부정'을 거론해 정면 승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
었다. 서인들은 결국 현종과 정면 대결하기로 결정했다. 서인 대신들은 15년 전 송시열이 거
론했다가 정태화의 만류로 우회했던 문제의 사종지설을 거론했다.
  " 신들은 <국제>만 참고하고 고례는 참고하지 않았지만 이제 고례를  참고해 말씀드리겠
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사종지설이 나오는데 그 세 번째가 '체이부정'으로서 서자를 세워 가
계를 잇게 한 경우입니다. 여기에 '서'자를  쓴 것은 장자와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서자는 첩의 아들이요,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은 중자인데 여기에서 둘을 함께 서자
라고 이름한 것은 장자와 구별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또 며느리에 관한 조항을 보면 '무릇 부모가 아들에게,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적통을  전중
할수 없는 것이니 전중한 자는 적통이 아니어서 복제를 모두 서자,서부와 같이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여러 조목을 상고해본다면 지금 대왕대비께서 9개월복을 입는 것이 고례의 뜻
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사오나 그 정밀한  뜻은 신들의 짧은 견식으로는 감히 정할 바가 
아닙니다.
  " 부모가 아들에게,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적통을 전중할수 없다."는 말은, 적통 계승의 권
한이 종법에 있는 것이지 부모나 시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는 결국 인조
가 효종을 선택해 적통을 물려준 것은 천하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효종이나 인선왕
후는 장자,장부의 복을 입을 수 없으니 자의대비의 복제는 대공이 맞는다는 말이다.  고례로 
따져봐도 효종과 인선왕후는 적통을 물려받을 수 없다는 이 말은 곧 효종과 현종의 정통성
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이 계사에 현종이 격분한 것은 당연했다.
  " 이 계사를 보고 나도 모르게 무상한 점에 매우 놀랐다. 경들은 모두 선왕(효종)의  은혜
를 입었거늘, 지금에 와서 감히 '체이부정'이란 말로써 오늘의 예법을  결정짓는다는 말인가. 
<의례>에는 '장자가 죽으면 적처가 낳은 차자를 세워 장자라 한다.'고 했다. 경들은 이 조항
은 무시하고 다른 조항을 꺼내어  이치에 맞지 않는 어그러진  말로써 예법을 정해 선왕을 
'체이부정'이라고 지목하는구나.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고 어느  누구에게 후하게 한단 
말인가."
  " 임금에게 박하고 어느 누구에게 후하게 한단 말인가"란 힐난에는, 충성을 바쳐야 할 임
금에게는 박하면서 대신인 송시열에게 후한 불충분한 신하들이라는 꾸짖음이 함축되어 있었
다.
  현종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 내 이를 심히 못마땅히 여긴다. 막중한 예법을 자기 당의 영수(송시열)에게 붙은 의논으
로 정할 수 없으니 이번 복제는 처음 결정한 대로 <국제>에 있는 기년복으로 정하라."
  신중하고 온화한 성격의 현종으로서는 이례적인 단안이었다. 현종은 조선의 임금 중 드물
게 명성왕후 김씨 외에 한 명의 후궁도 두지 않았고,  재위 기간 동안에도 대신들과 싸우며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그만큼 힘겨운 싸움이기도 했다. 
    현종의 이례적인 조치
  현종은 서인들이 의정한 9개월복을 1년복으로 바꾸는  단안을 내렸지만, 집권당인 서인은 
1년복으로 바꾸려는 현종의 의사에 맞서 끝까지 싸웠다.
  현종으누 서인들이 임금이 아니라 자기 당의 영수인 송시열을 더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
었기에, 신속한 후속 초치를 취했다. 먼저 예론의 주무  부서인 예조의 판서, 참판, 참의, 정
랑 모두를 하옥하고, 9개월설을 주장한 영의정 김수홍을 춘천으로 귀양 보냈다.
  신중한 현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신속한 조치였으나 그렇다고 물러날 서인들이 아니었다. 
서인들은 근 50여 년 이상을 집권한 정당이었다.
  먼저 서인 승지 이단석과 교리 조근이 입대를 청했다. 그러나 입대를 청한 이유를 직감한 
현종은 이들을 꾸짖었다.
  " 내 심기가 매우 불편한데 대면을 청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대신을 위해서가 아닌가. 
군신의 의리가 매우 엄한 것인데 너희들은 이점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단 말인가."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승정원의 승지와 홍문관 교리가 국왕이 아닌 자당을  위해 
국왕을 압박하는 지경이었다. 현종이 입대를  거부하는 데도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차지를 
올려 노론 영수 김수홍을 구하고 현종을 비난했다.
  " 장자와 중자에 관한 의논은 오늘 처음 나온 말이  아니고, 또 이말이 옳지 않으면 채용
하지 않으시면 그만인데 이로써 대신을 귀양 보내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자신을 보좌해야 할 승지와 교리가 임금보다 당론을 추종하자 현종은 분노했다.
  " 차자의 말은 내가 매우 놀랍게 여긴다. 기해년에 갑과 을이 다투어 변론할 때 조정에서 
<국제>를 사용하였으나 장자와 중자의  구별이 없으므로 그렇게  처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해년에 갑과을이 변론한 것들을 주워 모아 대왕대비의 복제를 강등하려고  꾀하였
다."
  승지와 교리의 차자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번에는 양사가 나서서  현종을 압박했다. 
장령 이광적과 지평 유지발이 예조에 대한 심문과 김수홍의 중도부처를 취소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에 현종은 분노하며 말했다.
  "너희들의 계사에 내가 심히 놀랐다. 양사의 대간은 마땅히  엄한 말로 예론을 그릇 이끈 
자들을 죄 주기를 청해야 하는데도 도리어 죄인을 구하려고  하는구나. 지금의 양사는 직책
을 다하지 못한 자들인데 어찌 낯을 들고 길거리를 다닐  수 있겠느냐. 이들을 함께 삭직해
서 내쫓으라."
  현종이이처럼 강력히 나가는 데도 서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승정원과 삼사의 주청이 받
아들여지지 않자 이번에는 좌의정 정지화가 직접 나서 김수홍을 옹호했다. 지금껏 배후에서 
젊은 서인들을 조종하던 중진이 직접 나선 것이다. 현종이  정지화의 청마저 거부하자 판중
추 민유중, 좌참찬 이상진, 김만기등 서인 중진들이 줄줄이 나서서 김수홍을 옹호했다.
  "임금에게 박하고 어느 누구에게 후하게 한단 말인가"란 현종의 힐난이 이유 있는 비난임
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와중에서 서인 대사간 남이성이 현종에게 직접 
도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예론에 있어 을의 설(1년설)을 주장하는 자가 모두나라에 충성스러운 것도  아니고, 갑의 
설(9개월설)을 주장하는 자가 모두 임금에게  박한 것도 아닙니다. 만일 전하께서  노여움을 
잊고 용서하신다면 지금 대신들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남이성은 '사종지설'을 인용하여 자의대비는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
다. 효종과 인선왕후의 적통을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듯 조정을 장악한 서인들이  모두
당론을 따르면서 현종은 고립되었다. 왕권에 도전한 대신들을 탄핵해야 할 대간의 장관이,대
신들을 편들고 국왕에게 대드는 판이었다. 현종이나 서인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지경이 되었
다. 현종은 대사간 남이성이 올린 상소의 맹점을 공격했다.
  " 갑과 을의 설이 절충되지  못했을 때에는 그 후한 의논(1년복)을  좇는 것이 옳겠는가? 
박한 의논(9개월복)을 좇는 것이 옳겠는가? 감히 박한  의논을 좇아 대신에게 아부하였으니 
이는 임금이 없는 자의 말이다. 멀리 절도로 귀양 보내라."
  현종이 남이성을 진도로 귀양 보내자  삼사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나  남이성을 옹호했다. 
15년 전 윤선도가 "나라의 권력은 위의  임금에게 있지 않고 신하(송시열)에게 있습니다"라
고 주장한 것이 현실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현종은 서인들을 데리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깨닫고, 서인의  빈 자리를 남인들로 채
우기로 결심했다. 현종이 당시 향리인 충주에  있던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은 것은,  곧 
집권당을 교체하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남인을 영의정으로 삼은 이 조치에  서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자리도 아닌 
영의정 자리를 남인이 차지한 것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현종이  서인에게 극도의 반감을 품
은 데다가 남인들이 정권마저 차지한다면 서인들의 처지는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현종의 복통과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이런 와중에 이변이 발생한다. 서인들을 다그치던 현종이 갑자기 병석에 누운 것이다.  현
종의 병명은 음식에 의한 독살의 혐의가 있을 때 흔히 나타나는 복통이었다. 재위 15년 7월 
24일 이후 현종은 침과 뜸을 맞았는데 8월 7일부터는 극심한 피로까지 느끼게 되었다. 현종
은 기운이 없어 대신들의 접견을 연기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으나.  그 와중에도 영의정 허
적이 언제 오는지를 물었다.
  현종이 사망하기 이틀 전 서울에  도착해 약방 도제조를 겸하게 된  허적이, 승지를 시켜 
왕비에게 전한 말은 현종의 증세에 대한 남인측의 의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허적은 현종의 
곁에 있는 사람이 환관들 뿐이어서 증세를 알 수 없다며 현종의 장인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남인 예조판서 장선징, 그리고 같은 남인이자 왕실의 외척인  청평위 심익현에게 병상을 지
키도록 했다.
  허적은 현종 곁의 환관들이 선인들에게 매수당했을 가능성을 의심하여 이런 주청을 한 것
이다. 복통이나 극심한 피로 등은 독약이나 몽혼약에 의한 증세일 가능성이 높았다. 만 33세
의 건장한 청년이 갑자기 피로를 느낀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허적의 이런 주청은 적절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현종은 심익현이 냉약에 타서 올린 인
삼차를 조금 드는 듯하더니 그날 밤 열시경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런 갑작스런 사태로 현종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이후 조선의 정세는 달라졌을  것이다. 
현종같이 온건한 성격의 인물이 단호한 조치를 취할 때는  분명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확신은 더 이상 조선이 '서인들의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은 국
왕과 백성들의 나라지 서인이란 특정 당파의 나라가 아니라는 확신이었다.
  혼수상태 속에서도 거듭 허적이 언제 오느냐고 물었던 것은, 현종의 이런 확신이 뇌수 깊
숙이 뿌리박힌 하나의 사상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현종 역시 부왕 효종처럼 큰일을 추진하던 와중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
나고 말았다. 조선은 아직도 '서인의 나라'였던 것이다.

    6장
    제 20대 경종
    이복형제의 비극
  경종이 재위에 있는 기간은 불과 4년 2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4년 세월은 격동
의 시대였다. 부왕 숙종대를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더욱 심해졌고, 그 정쟁의 결과 
서인이 승리하였다. 또 1백여 년을 집권한 서인이, 몸집이 비대해져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으로 자체 분열한 시기도 숙종 때였다.
  같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 후 서로 대립했듯이, 노론과 소론도 대립했다.  심지어 
노론과 소론은 옷차림도 틀려서 멀리서 봐도 당색을 알 수  있었다. 노론은 저고리 깃과 섶
을 둥글게 접었으나 소론은 모나게 접었고, 노론 아녀자의 치마  주름은 굵고 접은 수가 적
었으나 소론 아녀자의 치마 주름은 가늘면서 접은 수가 많았다.
  남인과 싸울 때는 다같이 서인이었으나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서 싸울 때는 오히려 소론
이 남인 편을 들 정도로, 한 번 가라지면서 적이었고  적의 적은 동지라는 등식이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무려 45년 10개월 동안 재위에 있었던 숙종은 이런 당쟁을 왕권 강화의 기반으로 이용했
고, 이를 통해 스물일곱 명에 이르러 조선의 어느 임금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
었다. 그러나 그의 강력한 왕권은 제도적인 틀로서 마련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적절
히 이용하는 정치력에 의한 것이란  한계가 있었다. 숙종이 당쟁을 이용해  각 당파를 때에 
따라 올려치고 내려치는 동안 각 당파는 서로를 저주하게 되었다. 숙종의 이런 당쟁 이용과 
당파간의 싸움은 끝내 한때 왕비였던 희빈 장씨를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바로 그 장씨
의 아들이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었으니 비극은 이미 싹튼 셈이었다.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아이
  15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무려 15년 동안이나 후사를 보지 못했다. 숙종은 외아
들인 데다가 몸도 건강하지 못했으므로 자칫하면 대가 끊길  판이었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
도 숙종이 46년이란 기나긴 기간 동안 재위에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외아들인 숙종
의 몸이 약하니 궁 내에서는 종친 복창군  형제와 궁녀와의 스캔들인 홍수의 변 등 숙종의 
후사를 둘러싼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숙종의 가장 큰 바람은 후사를 낳는 것이었다. 숙종은 열 살때인 1670년 세자의 신분으로 
서인 김만기의 딸을 맞아들였으나, 김씨는 딸만 셋을 낳았을 뿐 아들을 낳지 못했다. 게다가 
그 딸들은 모두 어릴 때  죽어버렸고, 인경왕후 김씨마저 1680년 스무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숙종은 다음해 역시 서인 민유중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으나, 민씨는 혼인한 지  7년
이 지나도록 아들은커녕 딸도 낳지 못했다.
  그녀가 인현왕후 민씨다.
  후사가 없자 숙종은 불안했다. 이 불안감을  파고든 여인이 그 유명한 궁녀 장옥정,  바로 
희빈 장씨다. 그러나 자의대비 조씨의 시종으로 있으며 숙종과  교제하던 희빈 장씨는 숙종
의 모후인 명성왕후의 미움을 받아  궁 밖으로 쫓겨났다. 장씨는 숙종  9년(1683)명성왕후가 
사망한 후에야 다시 궁에 들어와 후궁이 될 수 있었다. 흔히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 사
이의 싸움을 숙종을 차지하기 위한 애정  다툼으로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 감추어진  면면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는 단순히 애정 문제로 싸운 것이  아니라, 
한 정치가로서 권력을 다툰 정적 사이였다.
  인현왕후 민씨가 속한 정당은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이었고, 
희빈 장씨가 속한 정당은 권력 장악을 위해 절치부심하던  야당인 남인이었다. 그런데 인현
왕후가 7년째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희빈 장씨의 배가 불러오자 서인들은 긴장했다.
  숙종 14년(1688)10월에 있었던 한 사건은, 희빈  장씨 뱃속에 든 아이를 서인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궁중 안에 8인이 메는 옥교가 들어왔는데 그 옥교를 탄 여인은 지체 높은 왕가나  사대부
가의 여인이 아니라 천인이었다. 이르 본 사헌부 지평 이익수와 이언기가 사헌부 금리를 불
러, 감히 천인이 탄 옥교를 궁중에 출입시켰다고 호통을 쳤다. 꾸중을 들은 사헌부 금리들은 
여인을 끌어내린 후 옥교를  메고 온 노비들을 치죄하고  옥교마저 빼앗아버렸으며, 나아가 
옥교를 탄 여인을 꾸짖었다.
  그런데 모욕을 당한 그 천인은 바로  장옥정의 모친, 즉 귀인 장씨의 모친이었다.  그녀는 
딸 장옥정이 왕자를 낳자 친정어머니로서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입궁하던 중이었다. 귀인은 
내명부 종1품의 품계로, 후궁 중에서는 대개 왕자의 어머니가 받는 빈 다음의 품계였다.  따
라서 장씨의 모친은 일개 천인의 신분으로 옥교를 탄 것이 아니라, 종 1품 후궁의 어머니로
서 국왕의 외아들을 생산한 딸의 산후 수발을  위해 옥교를 타고 입궁하던 중 이런 수모를 
당한 것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이는 국왕의 장모가 수모를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이 소
식을 들은 숙종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귀인의 모친이 전교를 받고 궁중에 들어올 때 사헌부에서 이처럼 모욕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귀인의 내외 족당이 요직에 웅거한 집안이어서  그들의 세력이 두렵다면 사헌부
에서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입궁은 귀인의 본가에서  잠시 와서 귀인을 보게 한 
것과는 다르다. 또 후궁에 산실을 설치하는  것은 궁중의 관례일 뿐 아니라, 본가에서  와서 
간호할 수 있게 옥교를 타고 출입하는 것은 내가 허락한 바이며 이 또한 전부터 있어온  관
례이다. 더구나 천인이 궁녀들도 상궁이 되면 옥교를 타는데  하물며 왕자의 외가에서 전교
를 받고 출입하다가 이 같은 모욕을 당했는데도 대간의 상소는 혹은 천인이라하고 혹은 걸
어다니라고 하니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숙종의 말대로 옥교를 탄 여인은 비록 천인이지만 한  명뿐인 왕자의 외할머니였다. 숙종
은 왕자의 외할머니에 대한 사헌부의 이런  처사를 왕권에 대한 신하들의 도전으로  생각했
다. "귀인의 내외 족당이 요직에 웅거한 집안이어서 그들의 세력이 두렵다면 사헌부에서 이
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란 숙종의 말은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다. 전 영의정 김수항의 증손
녀인 귀인 김씨의 모친 또한 예사로 옥교를 타고 궁궐에 출입했던 것이다.
  숙종은 이 사건을 갓 태어난 왕자에 대한 서인들의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이 무렵 숙종은 
자신을 도와주던 쟁쟁한 척신들이 잇달아 사망하는 바람에 외로운  처지에 빠져 있었다. 현
종과 숙종의 대표적인 외척이었던 청성부원군 김석주는 4년  전인 숙종 10년에 사망했으며, 
첫 번째 장인 김만기도 한 해 전 사망했다. 김석주의 사망은 척신과 서인의 연합정권이었던 
조정을 서인의 단독 조정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숙종은  이렇듯 거대 서인에게 둘러싸
여 있었다. 그런 숙종의 첫 왕자를 생산한 귀인 장씨의 친정어머니를, 서인 사헌부 관리들이 
모욕했던 것이다.
  서인들이 장씨의 친정어머니를 모욕한 이유는 분명했다. 서인들은 귀인 장씨를 남인 당인
으로 보았다. 장옥정이 한창 숙종의 총애를 받던 재위 12년에 부교리 이징명이 올린 상소는 
이를 잘 보여준다.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는 궁인 중의 한 사람이 역관 장현의 친척이라 하는데  현 부자는 
허견의 옥사 때 사사당한 복창군 정에게 붙었던 자이옵니다.  이제 그 친족을 가까이하다가
는 차후 말할 수 없는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장녀를 추방하소서."
  장옥정의 종숙 장현이, 남인과 가까이 지내다 서인의 음모에  걸려 사사당한 복창군과 가
까웠으니 장옥정도 남인이라는 논리였다. 서인들은 장옥정이  왕자를 생산하게 될까 두려워
했는데 바로 그런 사태가 벌어졌으므로 왕자의 외조모를 끌어내리는 과잉 반응을 보인 것이
다.
  비록 후궁 소생이지만 다른 왕자가 없는 상황이었으니, 자칫하다가는 이 아이에게 보위가 
돌아갈 수 있었다. 서인으로서 이는 당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어떻게든 막아야 할  사태였
다. 만약 이 아이가 장씨가 아닌 인현왕후 민씨 소생이라면 서인들은 경하하면서 투옥된 죄
수들을 사면하자고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민씨 소생이 아니라 장씨  소생이었고, 
그렇다면 이 아이 역시 남인일 것이었다.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아이에게 당적이 붙는 상황
이었다. 이렇듯 태어나자마자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이 아이가 바로 조선의 20대 임금 경종
이다.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그토록 고대하던 왕자가 태어났는데도 진하는켜녕 왕자의 외할머니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 
숙종은 비상한 조치를 취해놓지 않으면 태어난 왕자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숙종은 일단 결심이 서면 과감하게 실천하는 임금이었다.
  숙종은 왕자가 태어난 지 3개월이 채 안 된 재위 15년(1689)1월 초 갑자기 시,원임대신과 
6조 및 3사이 장관을 불렀다. 정오까지 오지 않는 신하가  있으면 담당 승지를 엄벌에 처하
겠다는 단서까지 단 명령이었다. 대신들이 모이자 숙종은 단호하게 말했다.
  "국본(세자)이 정해지지 않아 민심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계책은 다른 데 있
는 것이 아니라 신생 원자의  명호를 정하는 데 있다. 만약  이에 머뭇거리거나 관망하거나 
감히 이의를 제기하려는 자가 있다면 관직을 내놓고 물러가라."
  이는 곧 장희빈 소생의 아이를 원자로 책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조선이 후사는 왕자,  원
자, 세자, 국왕의 순서를 밟게 되어 있었으므로 원자로 책봉되면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즉
위까지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숙종은 집권당인 서인들이  당연히 반대할  것이라 생각하고 
"반대하려면 물러가라"는 뱃진을 쳤다. 예상대로 서인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이조판서 남용익의 반대 이유는 "지금 중궁(왕비)의 춘추가 한창"이라는 것이었다. 인현왕
후의 나이가 아직 젊기 때문에 후사를 낳을 수도 있다는 논리였다. 호조판서 유상운, 공조판
서 심재도 인현왕후를 거론하며 반대했다. 즉위 14년 만에  낳은 왕자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신하는 한 명도 없었다. 이는 숙종의 위기감을 더하게 했다.
  "내 나이 서른에 겨우 아들을 얻었는데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국세가 위태롭고 옆에는 
강한 이웃이 있으니 종사의 중대한 계획을 늦출 수 없다."
  숙종의 결심은 확고했으나 반대하는 서인의 당론도 확고했다. 숙종은 재차 반대하는 이조
판서 남용익을 중죄로 다스린 후에야 원자 책봉을 강행할 수  있었다. 숙종은 이 문제를 처
음 거론한 지 닷새 만에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했다. 실로 전광
석화 같은 조치였다. 조선시대에 종묘에  고묘하면 사태는 종결된 것이었다. 숙종의  의지가 
워낙 강경하자 서인들도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미 끝난 원자 정호를 정면에서 비판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바로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향리인 충청도 회덕에 은거해 있었으나, 영의정 김수홍이 사사건
건 그의 지시를 받아 일을 처리할 정도로 원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당시 그의 지위가 어떠
했는가는 대로라는 경칭이 잘 말해준다. 그런 대로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숙종의 원자 정호
를 정면에서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송나라 철종은 10세가 되도록 번왕으로 있다가 신종이 병이 난 뒤에야 비로소 태자에 봉
해졌습니다. 당시 가왕과 기왕의 핍박이 있었는데도 이처럼 천천히  태자로 봉한 것은 제왕
은 큰일을 할 때 항상 여유 있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핍박
의 염려가 없지 않습니까?"
  송시열은 이처럼 중국 송나라의 예를 들어, 원자 정호가  성급한 조치였다고 비판하고 나
섰다. 송나라 철종은 신종의 아들이었다. 신종은 28세의 늦은 나이에 철종을 얻었으나  후궁 
소생이었기 때문에 원자가 아닌 번왕으로만 책봉하였다가, 정비가 끝내 왕자를 생산하지 못
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했다. 송시열은 이 고사를  빗대 인현왕후가 끝내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면,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라고 주장했다. 당시 인현황후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으므로, 송시열이나 서인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후사를 낳을 수 있는 나이였다.
송시열의 상소 소식을 들은 서인들은  대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이 
상소는 송시열 자신과 서인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상소를 계기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이 일어난  것이다. 서인들이 경신확국으로 정권을 
잡은지 9년 만이었다.
  이 상소를 본 숙종은 격노했다. 설령 그의 말이 맞더라도  이미 종묘에 고묘한 사안을 재
거론하는 것은 왕권을 능멸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었다. 상소를  받은 날 이미 날이 어두
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승지 이현기와 교리 남치훈, 수찬 이익수 등을 불렀다.
  "명나라 황제도 왕자 탄생 넉 달 만에 봉호한 일이 있다. 송시열의 주장은 이와 상반되지 
않는가? 송시열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그대들에게 물어보려 부른 것이다."
  숙종의 말대로 원자 정호 문제는 송시열의 주장과 다른 예도 얼마든지 있었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그렇게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가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다름 아닌 송시열이었다. 현종이 일찍이  "임금에게 박하고 누구에게 후할 
것이냐"면서 신하들이 임금이 아닌 송시열에게 충성한다고 꾸짖었던 그 인물이었다. 숙종의 
물음을 받은 승지, 교리중에서 오직 남인 승지 이현기만  송시열이 틀렸다고 발언했던 데서 
당시 당인들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숙종은 송시열을 끝까지 옹호하는 서인 수찬 이익수를 
파직한 후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시켰다. 그리고  송시열을 구하는 상소는 받지도 
말라고 승정원에 명했다.
  숙종은 송시열의 상소에 대한 대처 여부에 원자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믿었다. 서인이 집
권한 상황에서는 원자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한  숙종은, 집권당인 서인을 축출하
고 반대당인 남인을 등용하는 것만이 원자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숙종은 정권을 남
인에게 주기로 결심하고 서인 영의정 김수홍을 파직한 후  남인인 목래선, 김덕원을 좌의정
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이것이 남인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이다.
  그러나 숙종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숙종은 서인가 여인인 인현왕후 민씨가 왕비로 
있는 한 원자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민씨를 내쫓기로 결심했다. 결국 인현왕
후 민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사저로 쫓겨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서인들에게 정치 보복을 단행했다. 그간 서인들로부터 받은 정치탄
압을 그대로 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남인들의 보복의 칼끝은 당연히 서인 영수 송시열과 김
수항에게 향했다.
  남인들이 계속해서 송시열을 공격하자 숙종은 일단 그를 제주도로 유배보냈다가 위리안치
시켰다. 그러나 송시열이 살아 있다는 사실자체를 불안해한 남인들은 그를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여든세 살이었던 송시열에게는 국문 자체가 죽음의 길이었다. 숙종이 송시열
의 국문을 허락함에 따라 송시열이 뭍으로 올라오자 수많은  문도들이 그를 맞았다. 서인들
에게 그는 죄인이 아니라 정치범이자 확신범이었다. 송시열이 국문받을 경우 벌어질 소동이 
두려워진 숙종과 남인은 그를 서울까지  끌어올리지 않고 정읍에서 사사시켰다.  전 영의정 
김수항은 이미 사시된 뒤였다.
  송시열이 죽은 현장을 수많은 서인 문도들이 눈물로 지켜보았다.  그 눈물은 남인을 향한 
복수의 눈물이었고, 새로 왕비가 된 장옥정과 그녀 소생인 원자에 대한 증오의  눈물이었다. 
장옥정 소생의 원자와 서인 사이의 군신관계는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후 남인이 계속 집권했거나 서인과 화해정책을 실시했으면,  희빈 장씨와 원자의 운
명은 그다지 비참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죽고 죽이는 살육전  또한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
나 남인과 서인은 서로를 적당으로 규정하고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해 방법을 가리지 않았
다. 남인들은 집권 초반 송시열과 김수항, 이사명, 홍치상 등  무려 1백여 명의 서인들을 사
형, 유배, 삭탈관직시키는 정치 보복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후인 숙종 20년 상황
은 반전되었다.
  두 모자의 운명
  왕자 연잉군(훗날의 영조)를 낳아 새로  숙종의 총애를 얻기 시작한  숙원 최씨의 도움을 
받아 서인들이 남인들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이로
써 영의정 권대운, 우의정 민암, 판의금부사 유명헌 등 20여 명의 남인 중신들이 대거  삭탈
관직,문외출송되고 그 자리는 서인들로 채워졌다. 서인 남구만이 영의정이 된 데 이어  서문
중이 병조판서, 신여철이 훈련대장을 차지해 의정부와 군사권을 서인들이 모두  차지했으며, 
인사권을 지닌 이조판서도 서인 유상운이 차지했다.
  갑술환국은 두 가지 점에서 이후 정치 향방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나는 남인들을 완
전히 몰락케 해 재기할 수 없게 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숙원 최씨 소생의 왕자와 서인
들이 결합한 것이다. 즉 서인들도 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에 맞서 지지할 왕자을 갖게 된 것
이다.
  서인들은 5년 전에 당한 정치 보복을 잊지 않고  있었다. 먼저 서인들에게 강경책을 폈던 
우의정 민암과 그아들 민장도를 사형시키고 훈련대장 이의징과 전 판사 조사기 등 남인 중
진들을 대거 사형시켰다. 조사기는 과거 송시열을 공격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했으니,  그야
말로 집권이 정의가 되고 실권이 불의가 되는 당쟁의 시대였다. 갑술환국 후 1년 동안 사형, 
유배, 삭탈관직된 남인 인사는 무려 130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공격은 왕비 장씨에 대한 공세였다. 먼저 왕비 장씨의 친신궁녀 
정숙이 간독하다는 모호한 죄명으로 사형당했는데, 이는 왕비에게 공경의 화살이 날아올 것
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권을 서인으로 바꾼 숙종은, 이제 서인으로 강등된 민씨를  복위시키기 위한 준비에 착
수했다. 숙종은 첫 조치로 민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켜 별당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서인들은 민비를 다시 세우려는 숙종의 뜻을 간파하고 왕비 장씨의 오빠 장희재에게 시선
을 돌렸다. 왕비 장씨를 직접  공격할 수는 없었으므로 대신 오빠  장희재를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공격의 명분은 장희재가 포도대장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이었
다.
  장희재는 이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끝내 국문에 처해지게 되었다.
  과거 폐위된 민씨가 복위를 도모하려 한다는 편지를 보내 국모를 모해했다는 죄목이었다. 
장희재는 이 죄목으로 사형을 당할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서인들의 입장이 둘로 갈라선다. 영의정  남구만과 일부 서인들은 장희
재가 세자의 외숙이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온건론을 펼친  반면, 대다수의 서인들은 사형
시켜야 한다고 나섰다. 이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장희
재의 사형을 주장한 노론과 장희재의 처형을  반대한 소론의 차이는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소론은 어쨌든 장씨의 아들인  세자가 다음 왕위에 오를 인물임
을 인정했으나 노론은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 노론은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했다. 즉 소론이 대 남인 온건파라면 노론은 대 남인 강경파였던 것이다.
  왕비 장씨는 끝내 쫓겨나 다시 후궁인 희빈으로 떨어졌다.  여러 의미에서 세자의 운명은 
모친 장씨의 운명과 동전의 양면이었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이상 남인인 희빈 장씨의 운
명은 순탄할 수 없었다.
  장희재는 상황을 반전시키려고 부친 장형의 묘갈을 파괴하고 봉분 속에 흉물을 묻는 사건
을 조작했다가 들통이 나 다시 사형당할 뻔했으나 소론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 남았다. 장씨
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2년 후였다.
  그런데 쫓겨난 장씨가 별당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인 숙종 27년 8월, 인현왕
후 민씨가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민씨는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장희
빈과 남인이 복귀를 꿈 꿀 수 있는 단서가 열린 셈이었다. 그러나 대 남인 강경파인 노론은 
이를 방관하지 않았다. 노론은 조정에서  장희재의 구명을 주장했던 소론을  공격하는 한편 
연잉군의 어머니 최씨와 결탁해   희빈 장씨를 압박했다. 숙빈 최씨는  민비가 요절한 것은 
희빈 장씨가 민비를 무고했기 때문이라고 숙종에게 밀고했고 이에 격분한 숙종은  비망기를 
내렸다.
  "중전이 병든 지 2년이나 되었으나 희빈 장씨는 한  번도 문병하지 않았다. 또 중전을 중
궁전이라 부르지고 않고 반드시 민씨라 칭하였으며 민씨를 요망하다고 하였다. 희빈 장씨는 
남몰래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매일 두세 종년과  더불어 중전을 저주했으니, 이를 
누가 참을 수 있르랴? 우선 제주에 위리안치되어 있는 장희재를 빨리 처단하라."
  민비의 죽음이 장희재에게는 재기의 시작이  아니라 더 깊은 몰락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틀 후 숙종은 또다시 비망기를 내려 장희빈에게 자진할 것을 명령했다. 소론 영의정 최석
정이 명을 환수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결국 장씨는 사약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중인가의 서
녀로 태어나 국모의 자리까지 올랐던 한 여인의 운명이 비극으로 마감된 것이다.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게 되자 세자는 대신들을 봍잡고 호소했다.
  "어머니를 살려주오."
  열네 살 어린 세자의 이 호소에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눈물을 흘리면서 답했다.
  "신이 감히 죽기로써 저하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
  그러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하면서 피해버렸다. 
노론에게 세자는 남인이자 소론 당원일 뿐이었다.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이 당시만 해도 숙종은 세자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숙빈  최씨 송생의 연잉군은 이제 여
덟 살이었고 명빈 박씨 소생의 연령군은 세 살의 어린아이였다. 숙종이 인현왕후 민씨의 빈 
자리를 노론이 아닌 소론 김주신의 딸로 채운 것은 이런 숙종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노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노론에게 세자는 정적일 뿐이었다. 2백여 년  전 
연산군이 생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으킨  갑자사화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노론은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기위해 전력을 다했다.
  노론이 연잉군을 지지하는 이상 세자의 운명은 유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재위 43
년(1717)숙종과 노론 영수 이이명은 독대 자리를 마련했다. 이  해가 정유년이기 때문에 '정
유독대'라고 불린다. 이 자리에서 숙종은 이이명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세자를 부탁한다는 말은 없었다. 이는 사실상 세자를 바꾸라는 말이었다. 연잉군과  연령
군이 성장하자 숙종은 노골적으로 세자를 싫어해 조금만 잘못해도 크게 꾸짖었다.
  "누구의 자식인데 그렇지 않겠는가?"
  생모를 죽인 아버지의 꾸짖음에 세자는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야사에는 사약
을 받은 장씨가 세자의 하초를 잡아당겨,  세자가 병을 얻게 되었다고 했으나, 사실  세자의 
병은 열네 살에 목도한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과 이후 계속된 숙종과 노론의 공격이 초래한 
것이었다.
  숙종과 이이명은 일단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후 꼬투리를 잡아 쫓아내는 세자  축출 
프로그램을 세웠다. 보통 국왕이 대리청정을  명하면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하는 것이 
관례이자 국왕에 대한 예의임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대리청정 명에 노론 대신들이 환영하고 
나선 것만 보아도 사전 모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리청정이 세자를 제거하려는 음모의 소산임을 안 소론은 대리청정에 반발했다. 심지어 향
리에 은거중이던 소론 영수 영중추부사 윤지완은 세자 대리청정을 듣자 82세의 노구로 병든 
몸을 이끌고 널을 짊어지고 와서 상소를 올렸다.
  "동궁께서 총명한 성품을 타고나셨고, 또 효성이  지극하셔서 생모의 변을 당하시고도 인
현왕후를 섬기는 데 조그만 기미도  얼굴에 나타낸 적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덕을 쌓은 지 
30년에 온 나라 백성들이 세자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날 세자께 대리
청정을 시킨다 하오니 이는 반드시 음흉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사이에 끼여 나라를 망치려는 
것인데 전하는 어찌 하여 이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말이 이에 미치니 온몸이 뼛속까
지 떨립니다. 독대한 일은 상하가 모두 잘못한 일이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신을  사사로
운 사람으로 삼을 수 있으며, 상신  역시 어찌 감히 임금의 사사로운 신하가  될 수 있습니
까?"
  그러나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당은 노론이었기에 결국 숙종 43년 8월부터 세
자는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노론은 세자 대리청정을 찬성하면서도 막상 대리청정을 종묘
에 고묘하는 것은 반대했다. 종묘에 고묘하면 대리청정한 세자를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숙종과 노론은 일단 대리청정을 시킨 후 실책을 유도해 '즉위할 자격이 없다.'고 폐출시킬 
생각이었으나, 숙종의 건강 악화와 소론의  반발, 그리고 세간의 의혹  때문에 쉽지 않았다. 
만약 숙종이 건강했다면 세자 폐출은 실현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종은 병석에 있었고 
약방의 입진에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드디어 1720년 장장 46년을 집권한 숙종은 예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환국
과 재환국, 폐출과 복위로 점철된 한 시대가 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어머니 장씨가 
비명에 가는 것을 목격한 세자가 즉위했다. 파란의 경종시대의 서막이었다.
 
  왕세제를 책봉하소서
  노론이 쫓아내려던 경종이 즉위했으나 그간 탄압받던 소론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경
종이 즉위하자마자 소론계 유학 조중우는 사사당한 희빈 장씨를 숭보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그러나 아직 집권당은 노론이었다. 노론은 당력을 경주해 조중우를 장살해버렸다. 심지어 노
론계 태학생 윤지술은 숙종이 희빈 장씨를 사사시킨 사실을 숙종의 행장에 써서 그 옳음을 
증거하자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선왕의 행적에 신사년 처분(희빈  장씨를 사사한 것)이 애매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예전 역사에도 드문 옳음 행적이니 행장에 기재하여 만고불변의 조처로 삼아야 합니다."
  이렇듯 현왕의 모후를 사사한 것을 "역사에 드문 옳은 행적"이라고 주장하는 신하들이 노
론이었다. 그러나 경종은 자신의 생모를  죽인 것이 잘한 일이라며 도전한  태학생 한 명도 
처벌할 수 없었다. 김창집같은 노론  대신들과 삼사에서 "선비들의 사기를  꺽을 것이 아니
다"라며 윤지술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국왕의 생모를  숭보하자고 주장한 사람은 장
하의 귀신으로 만들고, 잘  죽였다는 주장은 선비의 사기라고  옹호하는 노론에게 둘러싸인 
임금이 경종이었다. 이와 같이 경종 즉위 초 권력의 중심은 경종이 아니라 노론이었다.
  하지만 노론은 불안했다. 바록 허수아비 같은 임금이지만 살아만  있으면 훗날 힘을 지닐 
수 있었다. 장희빈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노론으로서느 경종의 존재 자체가 불안했다.  경종
을 몰아내지 않는 한 언젠가는 자신들이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노론은, 이런 사태를 방
지하기 위해 몇 가지 정치 일정을 세웠다.
  그 중 첫 번째 일정이 '왕세제'를 책봉하는 것이었다.  왕세제는 임금의 아들이 아닌 동생
을 후사로 삼는 것으로, 비상한 정치 상황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
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형인 정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이 왕세제로 있다가 즉위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정치 일정이 경종 축출을 향한 노론의 제일보였
다. 노론 지도부는 당인인 사간원 정언 이정소에게 왕세제  책봉 문제를 공론화하는 역할을 
맡겼다.
  "전하의 춘추가 한창이신데도 후사가 없어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인심이 흩어져 있습니
다. 이를 수습하려면 후사를 빨리 정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경종 원년 8월이었다. 왕위를 이을 후사를 빨리 정하라는 상소였으니 말인즉 옳았지만, 문
제는 경종에게 아들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들없는 국왕에게 후사를  정하라는 것은 만약 숙
종때였다면 삼족이 멸족당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정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노론이 당력을 
기울여 후사로 미는 의중의 인물, 즉 경종의 이복동생이자 숙빈 최씨 소생인 연잉군이 있었
던 것이다.
  당시 경종의 나이 서른셋,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열여섯의 어린 나이였다.  장희빈
이 아들을 낳았을 때 "중전의 춘추 한창"이라며 원자 정호에 반대하던  마음이 남아 있었다
면 노론은 이런 주청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론이 이런 주청을 한 이유는 경종과 선의왕후가 양자를 들이려했기 때문이었다. 후사가 
없을 경우 동생이 아니라 양자가 뒤를 잇는 것이  조선의 상속법이었으므로, 선의왕후가 양
자를 들이면 노론은 끝장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다급해진 노론은 선의왕후가 양자
를 들이기 전에 연잉군을 세제로 만들려고 왕세제 책봉을 주청한 것이다.
  이정소가 상소한 바로 그날 밤 노론 소속의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이 입대를 요
청했다. 밤 늦은 시간의 청대는 국가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이례적인 
일이란 점에서 이정소의 상소와 노론 대신들의 한밤 입대는 잘 짜여진 정치 각본이었다. 드
디어 새벽 두시 경종과 댄신들이  만나게 되었는데, 이때 참여한 대신들은  앞의 두 정승과 
판부사 조태채, 호조판서 민진원, 병조판서 이만성, 형조판서 이의현, 공조판서 이찬명, 판윤 
이홍술, 대사헌 홍계적, 대사간 홍적보, 승지 조영복등 노론 일색이었다. 이들이 한밤에 청대
한 이유는 소론 우의정 조태구를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명분 없는 일을 강행하려다 보니 소
론 정승을 재체한 채 자당끼리만 일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의정 김창집이 경종에게 말했다.
  "후사를 정하는 일은 한시도 늦출 수 없으니 빨리 허락해주시옵소서."
  아들 없는 임금에게 빨리 후사를 정하라는 희한한 요청이었다.  병권을 쥔 병조판서 이만
성까지 가세해 재가를 요정한 이 행위는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국본을 정하는 문제는,  일개 
정언이 요청하고 그날 밤 대신들이 임금을 윽발질러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들이 그날 밤 우르르 몰려와 재가를 요청한 것은 소론  몰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이 
엄청난 요구에 경종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판부사 조태채가 다시 다그쳤다.
  "이는 종사의 대계를 위한 것이니 허락해주십시오."
  경종인들 이 주청이 종사의 대계가  아니라 노론의 대계를 위한 것임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노론은 집권당이었다. 경종은 물러섰다.
  "그렇게 하라."
  드디어 노론은 하루 만에 후사 책봉이란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그러나 노론은 국왕의 윤
허만으로 끝낼 수 없었다.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은 이 행위가 자칫 잘못되면 자신
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대비 인현왕후 김씨를 거론했다.
  "이 일은 너무 중요한 일이니 자전의 수결을 받은 뒤에야 봉행할 수 있겠사옵니다.
  국왕이 미성년이 아닌 한 대비의 수결은 필요 없었다. 그럼에도 노론이 대비의 수결을 요
구한 것은 이 일이 대비와도 사전 합의한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노론은 대비와 
연잉군을 임금으로 추대하기로 밀약하고 이 사실을  연잉군에게도 통보했다. 연잉군에게 그 
사실을 통보한 인물은 연잉군의 부인 서씨 조카 서덕수였다.  이때 연잉군은 국왕을 시켜주
겠다는 노론의 제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이것은 훗날 두고두고 연잉군의  발목을 잡으면서 
경종 독살설과 사도세자의 죽음등 조선 왕가의 비극의 씨앗이 된다.
  경종이 대비의 수결을 받으러 대비전에 들어간 후, 노론  대신들은 합문밖에서 대비의 윤
허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대비는 자신이  미리 노론과 합의했음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그런데 수결이 늦어지자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든  민진원이 전정에 나가 대
비를 만나려고 했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역적으로 몰리는 고공외줄타기였다. 민진원은  조
태채의 만류도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으나 그만큼 마음은  다급해졌다. 그때 대비전에서 부
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다."
  김창지봐 이건명이 읽었다. 한글교서 한 장과 한문교서 한 장이 있었는데, 한글  교서에는 
연잉군이 책봉되어야 하는 이유가 적혀 있었다.
  "효종의 혈맥과 선왕(숙종)의 골욕은 금상과 연잉군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사람이 있
겠는가/"
  한문 교서에는 "연잉군'이라고 쓰여 있었다. 노론의 의도대로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된 것
이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쿠데타였다. 그러나 이런 비상한 쿠데타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왕세제가 책봉되었음을 안 소론은  물론이고 온 나라가 경악
했다. 별 흉흉한 소문이 다 돌았다. 소론 강경파인 사직 유봉휘는 상소를 올려 노론을  규탄
했다.
  "건저(세자 책봉)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시임정승들이 듣지도 못하고 여러 신하들
이 참여치 못한 채 깊숙한 집 속에서 한밤중에  결정하였다니 놀랍습니다. 이미 결정되었으
니 다시 의논할 수는 없지만 임금을 농락하고  협박한 대신들의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
다."
  노론은 여기에서 밀리면 끝장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임금을 협박한 죄목으로 논죄
되면 사형 이외에 다른 형벌이 있을 수 없었다.
 노론은 모두 들고일어나 반박했다.
  "저군(세자)을 논박하는 일이 어디 있는가?"
  노론의 입으로 전락한 삼사의 대사헌 홍계적 등은 오히려 유봉휘를 국문하자고 청하였다. 
연잉군은 상소를 올려 자신의 tlarud을 표현했다.
  "유봉휘의 상소에 쓰여 있는 말이 너무 위험해 심장이 떨립니다."
  소론 우의정 조태구가 유봉휘를 옹호하자 삼사는 조태구마저 공격했다. 노론은 건저 문제
를 논박한 유봉휘를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이 문제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역모로 몰
릴 개연성이 충분했으므로 강경하게 나간 것이다. 그러나 유봉휘를 사형시키면 노론이 연잉
군을 임금으로 삼기위해 임금을 윽발질렀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질수도 있었다. 연잉군이 다
사 상소를 올려 중재에 나섰다.
  "유봉휘를 너무 심히 다루면 신의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결국 유봉휘는 청으로부터 왕세제를 책봉받는 과정이 문제가 되었다. 부자상속이 아닌 형
제상속은 드문 예이기 때문에 구구한 설명이 필요했다. 청의 사신이 왕자가 몇 명인지 묻자, 
노론 영의정 김창집은 연잉군의 작호와 그 부인의 성관을 자세히 써서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를 본 청 사신이 연잉군을 만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소론 우의정 조태
구가 상소를 올려 반발했다.
  "청국에서 열국의 임금을 보면 그만이지 배신인 동생까지 보자는 것은 예에  없는 것입니
다. 청국에서 행하는 것도 실례요 배신이 이를 받는 것도 혐의스러운 일이옵니다. 예에 없는 
것을 왜 써서 보여줍니까?"
  김창집의 변명은 궁색했다.
  "나는 다만 사신이 연잉군에 대해 써 보여달라고 간청하기에 그리 했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왕세제 책봉을 요청하러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이건명은 청의 대신들이 경종
의 병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위입니다."
  중국어로 양위 또는 음위는 발기불능을 뜻한다. 이는 남자로서 치욕스러운 일이었고 확인
된 사실이 아님에도, 노론은 이처럼  국왕 경종을 모욕하면서까지 연잉군을 추대하려  했다. 
어쨌든 노론의 이런 기도는 성공해 연잉군은 세제가 외었다.

  경종의 진심
  그러나 노론은 연잉군이 왕세제를 책봉된 것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경종을 권좌에서 끌어내려야만 안심할 수 있었던 노론 수뇌부는, 두 번째 정치 일정을 실
행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두 번째 정치  일정은 왕세제 연잉군을 정사에 참여시키는 것,  즉   
경종을 사실상 상왕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노론 수뇌부는 종  3품 사헌부 집의 
조성복으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게 해 왕세제의 정사  참여를 주청했다.
 "세자가 정사에 참여해야 하옵니다."
  이는 사실상 정사에서 손을 떼라는 요구였으며 동시에 신하가 국왕에게 권력을  나누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태종 때 같았으면 당장 국청 뜰에 피비린내가 진동할  주장이었지만, 
경종은 화내지 않고 선선히 받아들였다.
 "내가 병이 있어 회복의 기미가 없고 만기를 친람하기 어려우니 모든 정무를  세자가 처리
토록 하라."
  이는 노론이 주장한 세제 참정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 어쩌면 경종은 이런 일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론의 임금은 자신이 아니라 연잉군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승지 이기익이 명의 환수를 요청했으나 경종은 거절했다.
  이는 사실상의 양위 선언이었다.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생각한  소론은 노론과 정면 
승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소론 거두 최석정의 아우인 참찬 최석항이 한밤에 급히 입대를 청
했다. 밤중에는 임금의 특명이 아니면 입궐할 수 없었으나, 소론계 포도대장 이삼이  총부에
서 숙직하고 있다가 문을 열어주어  입궐할 수 있었다. 최석항은 승지  이기익이 밤이 늦어 
입대할 수 없다고 거절했으나 물러나지  않고 청대를 간청하였다. 경종은  최석항의 입대를 
승낙하고 문을 자물쇠로 채우라고 명령했다. 경종은 한밤의 이  입대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고 있었으며, 또한 노론이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소론 영수 최석항은 엎드려 울면서  명의 환수를 청했다. 최석항의 눈물을  본 경종이 한 
발 물러났다.
  "내 다시 생각해보겠다"
  하지만 최석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금 명을 거두지 않으면 내일 노론이 다른 수
를 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날중으로 명을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최석항은 계속 명
을 환수해달라고 요청했다.
  시간은 흘러 새벽이 되었다. 경종은 드디어 결심했다.
 "환수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노론이라고 가만 있지는 않았다. 자체 정보망을 통해  최석항의 입궐 소식을 들은 
노론의 이건명과 병참 김재로가 궐하로 달려왔다. 하지만 경종은 이미 명을 환수한  뒤였다. 
이건명은 승지 이기익을 힐난했다.
  "한 재신에 지나지 않는 최석항이 한밤중에 입대하기를 청하였으면 승지가 들이자 말았어
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뜻밖의 일
이 벌어진다. 명을 환수한 지 3일 후 경종이 시,원임대신과 2품 이상 고위관료, 그리고 삼사 
장관을 소집해 다시 세제 대리청정을  명한 것이다. 이 이외의 명령에  소론은 소론은 물론 
노론도 혼란에 빠졌다. 경종의 진정한 진중한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경종은 그대로 왕위에 있다가 목숨이 위험하겠다고 생각해 차라리 왕위를 내놓으려고  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의 명은 노론이라 해도 그대로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노론도 명의 철회를 요
청하는 정청에 참여했으나 경종은 명을 철회하지 않았다. 3일 동안 정청하면서 명의 철회를 
요청해도 경종이 허락하지 않자, 노론은 대리청정 명이 경종의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김창집 등 노론 수뇌부는 구수회의를 통해 정청을 중지하고 세제 대리청정을 받아들
이기로 결정했다. 김창집, 이건명 등 노론 4대신은, 숙종 때의 고사에 따라 세제에게 대리청
정케 하라고 요청하는 연명 차자를 올렸다. 숙종 때  경종이 왕세자로서 용인, 용병, 형인을 
제외하고 대리청정한 전례에 따라 세제 연잉군에게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었다.
  숙종 때의 대리청정이 세자 경종을 내쫓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번의 대리청정은 국왕 경종
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세제 연잉군과 집권당 노론이 손을 잡고 경종
을 권좌에서 내모는 것과 같았다.
  소론 최석항은 즉각 이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태좌 등 다른 소론대신들과 만나 대
책을 협의하였다. 또한 당시 대간들의 탄핵을 받은 소론 우의정 조태구도 즉각 입대를 요청
했다. 승정원에서는 탄핵 중인 신하는 청대할 수 없다며 면담 주선을 거부했으나,  조태구는 
물러서지 않고 승정원과 옥신각신하며 다투었다. 그러던 차에 경종의 전교가 내려왔다.
  "우상이 들어왔다 하니 곧 인견케 하라."
  관례를 무시하고 조태구를 만나겠다는 말이었다.
  노론은 당황했다. 이는 곧 세제 대리청정 명령이 경종의  진심이 아니란 뜻이었기 때문이
다. 경종이 조태구를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노론 대신들은 서둘러 대궐로 달려갔다. 영
의정 김창집, 영부사 이이명, 좌의정 이건명 등이 지름길로 내달려 청대했으나 이미 때는 늦
었다. 소론 조태구가 대리청정 명을 철회하라고 요청하고 있는데, 노론 김창집이라고 세제에
게 정권을 주라고 청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나는 역적입니다."라고 자인하는 것과 같았다. 
결국 대리청정 명은 다시 환수되었다.
  이에 분노한 노론은 경종에게 따지가까지 했다. 대간 홍석보는  "오늘 우상이 온 것을 어
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사전에 조태구와 교감이 있지 않았느냐는 비난이었다.
승지 홍계적은 할 술 더  떴다.
  "승정원의 법이 이렇게 무시되니 더 이상 승정원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주선 없이 마음대로 대신을 만나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반발이었으니, 이 무렵
의 승정원은 임금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속 정당을 위해  존재하는 셈이었다. 양사 대간들의 
장계는 이보다 더했다.
  "조태구가 내관과 사귀어 임금을 가만히  만나기를 꾀하였으니 이는 중종대왕 때  남곤이 
밤중에 북문을 몰래 연 일과 같습니다. 여러 내관중에 조태구와 내통한 자를 잡아서 심문해
야 합니다."
  탄핵을 맡은 대간들이 국왕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대리청정 명에는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대리청정 명을 환수하라는 요청에 분개하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경종은 이에 대해 변명해야 
할 정도로 고립된 임금이었다.
  "내가 진수당에 앉아 있는데 합분 밖의  길 인도하는 소리를 듣고 우상이 들어오는  것을 
알았다. 내관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이 역적놈들아"하고 분개할 일에 오히려 변명을 해야 했으니 국왕이란 이름이 무색한 지
경이었다.
  세제 대리청정을 둘러싸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이 소동은 소론에게 좋은 공격의 명분이 
되었다. 이 소동을 통해 노론이 경종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
이다.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한 노론의 이의 제기는, 소론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
게 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분개한 소론 강경파는 경종 1년(1721)거듭된 천재지변으로 구언한 
것을 기회로 여겼다. 이들은 이 구언을 이용해 김일경을  소두로 삼고 서종하, 박필몽, 이명
의, 이진유, 윤성시, 정해 등 7인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노론을 역적으로 규탄하고 나섰다. 
대반격의 시작이었다.
  "삼강 중에 군위신강이 으뜸이며 오륜의 첫머리는 군신유의인데 이것들이  오늘날같이 무
너진 적이 없었습니다. 주상(경종)의 형세는날로 어려워지고 흉한 무리는 점점 성하여 군신
을 나누는 구분과 의리가 없어졌습니다. 공자는 <춘추>를 지어 임금을 섬기는 의를 엄하게 
하고 신하의 분수를 한결같이 지키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가 목숨을 걸고 대리청
정이 명을 중지시켜야 했는데 정청으로 책임이나 회피하고 3일  만에 연명 차자를 올려 '유
사로 하여금 절목을 정하여 세제 대리청정을 거행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조성복이 상소로 시험하고 차자로  끝을 
맺었습니다. 엄한 법과 형벌이 어찌 가난하고 천한 자에게만 엄하고 권세 있는 자에게는 시
행되지 않는 것입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세제 참정을 주장한 적신 조성복과 4흉을 모두 법
으로 처단하여 용서하지 마소서. 임금을 업신여기고 무엄했던 승정원과 삼사의 죄를 징토하
소서."
  노론 4대신들을 4흉으로 지목하는 대다한  상소였다. 이 상소에 노론은 경악했다.  자당의 
영수들을 흉이라  지칭하였으니 경악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노론은 경종이 이 상소를 내
치리라고는 예상했다. 그러나 경종의 비답은 노론의 예상을 완전히 비웃는 것이었다.
  "응지하여 진언한 것을 내가 깊이 가납한다."
  노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당의 영수들을 '4흉', '적신'으로 공격한 상소를 가나한다
는 것은, 경종이 자신들을 역적으로 여긴다는 뜻이었다. 노론계 승지 신사철, 이교악, 조영복
등이 김일경을 처벌하라고 요청했다. 이 상소에 경종은 "나의 속마음을 떠본다'며 화를 내고 
승지와 삼사 전원을 파직시켰다.
  경종은 상소 당일 김일경을 이조참판으로 제수하는, 그로서는 아주 드문 전격적이고 파격
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병조판서 이만성, 예조판서 이의현, 호조판서  민진원, 형조판서 
홍치중 등 노론 판서들을 대거 경질하고, 소론 최석항을 병조판서, 이광좌를 예조판서, 이조
를 형조판서,김연을 호조판서로 임명했다.
  대전환이 시작이었다. 이로써 내내 노론에게  밀리던 소론이 일거에 정권을 장악했다.  이 
해가 신축년(1721)이라 하여 김일경 등의 상소를 신축소라 하고 이 정권 교체를 신축환국이
라 부른다.
  이에 대한 사신의 평을 보자
  "주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과묵하고 방관하는 듯하다가 하룻밤 사이에 건단을 크게 휘둘러 
군흉을 물리치고 사류를 올려 쓰니, 천둥이 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
는 듯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비로소 주상이 재덕을 숨기어 감추고 있었음을 알았다."
 
  목호룡의 고변
  노론은 경종을 만만하게 보다가 전격적으로 당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신축환국 다음해인 1722년(임인년), 목호룡이 노론을 역모라고 몰면서 엄청난 파문이 발생했
다. 목호룡은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고 고변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자객을 
보내 살해하는 대급수, 궁녀에게 어선에 독약을 넣게 하는 소급수, 숙종의 유조를 위해 경종
을 폐출하는 평지수를 쓰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3급수라 하는데 그 중 가장 온건한 방
법인 평지수의 예를 들면, 노론이  숙종의 국상 때 상궁 지씨와  환관 장세상을 시켜 "세자
(경종)을 폐위시켜 덕양군으로 삼는다."는 내용의 위조된 유조를  내리려 했다는 것이다. 말
하자면 평지수는 숙종 43년(정유년)숙종과 이이명 사이의  밀약인 '정유독대'의 내용을 실현
하려 했던 셈이다.
  이 사건에는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 이사명의 아들 이회지,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 김춘택
의 종제 김용택, 정발의 손자 정인중 등 노론 4대신들의 자제들이 대부분 관련되었다. 이 사
건은 정국에 엄청난 충격과 여파를 가져왔다. 노론에서는 이  사건이 소론의 정치 공작이라
고 주장했고 목호룡의 출신 성분을 문제 삼기도 했다.
  남인가의 천얼로서 종친 청릉군의 가노였던 목호룡은, 뛰어난 머리로  풍수를 익힌 후 지
관으로 이름을 날려 세제 연잉군 사친의 장지를 정해주고, 그 대가로 속신되어, 왕실 소유의 
장토를 관리하는 궁치사까지 올라 부를 축적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고변 자체가 목호룡의 완전한 창작품은 아니었다. 노론 일각에서 경종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목호룡의 고변으로 시작된 임인옥사는, 노론일부의 행
동이 노론 전체의 행위로 확대된 것이었다. 목호룡이 김용택,  이천기, 이회지 등을 통해 역
모를 알았다고 고변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즉 목호룡이  노론이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연잉
군 사친의 장지를 정해준 인물이므로 이들이 믿고 발설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역모로 몰린 노론 명문가의 자제들은 자칫 말 한마디에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음을 알았
으므로, 자백을 거부하고 고문 속에서 죽어갔다.
  김용택, 이천기, 이기지, 이회지, 백망, 장세상, 홍의인,  홍철인 등 20여 명이 심한 고문에
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하다 죽었다. 이처럼 중요 혐의자  대부분이 장하의 귀신이 되었으
나 소론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소론의 목표는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아니라 노론 4
대신이었다. 대사간 이사상, 헌납 윤회, 장령 이경열 등 대간 등은  합계하여, "4흉의 자제들
이 역모에 얼키설키 관련되었으니 이들을 처형"하라고 주청하고 나섰다. 노론 4대신은 궁지
에 몰렸다.
  심지어 노론 4대신 중 이사명의 동생 이이명은 이들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
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깊숙이 관련된 김성행의 조부 김창집은 숙종 때 세자 대
리청정을 종묘에 고묘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 역심이란 혐의를 받았고, 그 아들 김제겸은 목
호룡을 죽이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한 이건명은 대리청정  철회를 청한 최석항을 비판
했던 일이 죄목으로 지적되었으며, 조태채는 세제 대리청정을 받아들이는 연명 차자에 서명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 중 이이명이 임금이 되려  했다는 것은 조작의 의혹이 짙지만,  이미 정권은 소론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 노론 4대신은 끝내 이 공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사형당하고 말았
다. 그나마 참형에서 사사로 감형되어 시체에 목이 붙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
국이었다.
  목호룡의 고변, 즉 임인옥사로 인한  노론의 피해는 극심했다. 사형당한  인물이 20여 명, 
국문을 받다 장살된 이가 30여 명, 그 밖에 이들의  가족이거나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교살
된 이가 13명, 유배된 이가 114명이었다. 여기에 집안의 몰락을 보다못해 목숨을 끊은  부녀
자가 9명이었고 연좌된 인물이 173명이었다. 역모로 연좌되면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노비로 
삼는데,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한 명문가의 부녀자들이 자진의 길을 택한 것이다.
  장희빈 사사에서 임인옥사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은,  상대당을 소멸시켜야 할 정적으로 
보게 할 정도로 노론과 소론 모두에게 뼛속 깊은 원한을 갖게 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
한 문제는 노론은 국왕 경종에게, 소론은 세제 연잉군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다. 정조 때 노론 윤구종이 경종이 묻힌 의릉 앞을 지나가다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
가 없다"며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사건은 경종에 대한 노론의 깊은 불신을 말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임인옥사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사건 판결문인 <임인옥사>에 세제 연
잉군의 이름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이다. 국문 과정에서 연잉군이 서덕수와 김
만기의 손자 김복택을 통해 노론이 자신을 임금으로 선택한 사실을 통보받았다는 내용이 서
덕수의 입을 통해 나옴으로써 공초에까지 기록된 것이다. 연잉군이  그 제의를 거부하지 않
은 것은 곧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을 수락한  것이었다. 이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
였다. 만약 경종이 보호하지 않았다면 연잉군은 사형당했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세제 연잉군의 처지는 급박해졌다. 김일경 같은 소론 강경파는 연잉군을 더 
이상 세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소론 강경파는 예전에 노론이  그랬던 것처럼 연잉군을 세제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게다가 정권을  소론이 지니고 있었으니 연잉군의  처지는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적발하여 정법하라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양자 영입 움직임에 놀란 노론은 세제 책봉을 성공시켜 이를 저
지하고 대리청정까지 나갔으나 왕조국가에서 이는 무리수였다.  그 무리수가 김일경을 중심
으로 한 소론 강경파의 극단적 반발을 낳았고, 그 반발은 목호룡의 고변으로까지 이어져 결
국 노론 4대신이 사형당하고 말았다.
  소론은 임인옥사로 노론을 몰락시켰으나 문제는 살아 남은 연잉군이었다. 정권을 잡은 소
론 강경파로서는 연잉군을 세제로 놔둘 수 없었다. 훗날  연잉군이 즉위하면 자신들이 죽을 
것은 불문가지였다. 더구나 연잉군은 옥사의 공초에 이름이 거론된 인물이었다. 조선의 종친 
중 역안에 이름이 거론되고도 살아 남은 예는 극히  드물었다. 역모에 관련되면 혐의만으로
도 죽게 마련이었으니 연잉군처럼 구체적인 증거가 드러난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임인옥안>에 역적의 수괴로 등재된 세제 연잉군의 처지는  아주 궁색해졌다. 소론 강경
파는 연잉군을 폐위시키려 했고, 소론 강경파의 권유를 받아들인  선의왕후 어씨는 다시 양
자를 들이려 했다. 양자를 들일 경우 연잉군은 보위는커녕 목숨조차 보존할 수 없었다.
  선의왕후 어씨가 보기에 연잉군은 얼굴로는 복종하는 척하지만 뱃속으론 배신하는 두  마
음을 가진 음흉한 시동생이자 경종을 몰아내려한 역적일 뿐이었다.
  김일경은 박상검, 석열, 필정, 문유도 등 세자궁의 궁인들을  시켜 연잉군 제거 작전을 개
시했다. 이들은 대궐 곳곳에서 연잉군을 압박했다. 심지어 대궐 안의 여우를 잡는다는  구실
로 덫을 놓아 연잉군이 경종을 만나러 가는 길을 차단하기도 했다.
  위기감을 느낀 연잉군은 대비 인원왕후 김씨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으나 정권이  소론
에게 있는 이상 대비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비가 경종에게 가서 고하라고 물러서자, 연잉
군은 경종에게 자신이 겪은 박해를 설명하며 도움을 청했다.  비록 이복형이긴 했지만 경종
은 지상에 단 둘뿐인 숙종의 아들이자 형제였다.
  그런데 연잉군의 호소를 들은 경종은 아주 뜻밖의 거조를 보인다.
  경종은 박상검 등을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다가 돌아서자마자 이 명령을  거두어버렸
다. 이는 경종의 속마음이 세제 폐위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연잉군에게 있어 세제 자리
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곧 목숨을 잃는 것을 뜻했다. 왕비  어씨가 들인 양자가 즉위하면 한
때 세제였던 그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세제 연잉군이 다시 환관 박상검 등을 처벌할 것을 주청하자 경종은 벌컥 화를 
내며 연잉군을 꾸짖었다. <경종실록>에 "갑자기 감히 듣지 못한  하교를 내리셨다."고 기록
할 정도로 심한 꾸짖음이었다. 경종은 연잉군을 버린 것이었고  따라서 연잉군의 폐위는 기
정사실이었다. 두려움에 휩싸인 연잉군은 마지막 수단으로 세제궁의 궁관 김동필 등을 통해 
세제 사부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소론이 노론인 연잉군을 도와줄리는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론 온건파가 연잉군의 편을 들고 나섰다. 소론  온건파인 영의정 조태구는 경종
에게 박상검 등을 처벌하라고 주청했다.
  "예사람은 환관을 집안의 종에 비유하였으니 박상검 등을 시험 삼아 사가의  예로 말한다
면 지금의 형세는 종의 말을 듣고 형제가 화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그 집안이 흥
하겠습니까, 망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 집안의 종을 아끼셔서 동궁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으십니까?"
  역시 소론 온건파인 최석항도 이에 가세했다.
  "선왕의 골육은 단지 전하와 동궁만이 계십니다. 이제  세제를 세워 국본이 안정되었는데 
한두 환관이 감히 이간하여 동궁을 불안하게 했습니다. 종사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가 호흡 
사이에 달려 있으니 빨리 국청을 설치하여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지만 경종은 이들의 주청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  지난 후에야 무슨 말을 했
는데 입 속에서만 중얼거렸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조태구가 다시 나섰다.
  "잘 듣지 못했으니 옥음을 자세히 듣기를 원합니다."
  경종이 조금 크게 말했다.
  "적발하여 정법하라."
  연잉군이 던진 승부수가 효과를 발휘해 폐위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론 강경파는 여전히 연잉군을 인정하지 않았고, 기
회만 생기면 언제라도 내쫓으려고 시도할 것이었다. 김일경과 소론 강경파는 여전히 강성했
다.
  이제 연잉군이 믿는 바는 소론 온건파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종 3년 소론 강경파인 김일
경과 온곤파인 이광좌, 조태억 사이에 내홍이 발생했다. 대제학 자리를 둘러싼 싸움  때문이
었다. 문형이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대제학은  당대 제일의 학자가 맡는  것이 관려였으므로 
문신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당시 후임자 추천의 임무를 맡은 전 대제학 강현이 김
일경을 으뜸 후보인 수망으로 추천하자 부교리 정수기가 강현을  탄핵하고 나섰고, 이에 김
일경이 이사상에게 정수기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문제가  되어 이광좌, 조태억과도 
사이가 벌어진 것이다. 정수기가 김일경이 자신을 무함한다며 상소를 올리자 김일경도 상소
를 올려 대응했다.
  "신은 어리석어 자신을 위한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망령되게 임금의 원수는  꼭 토죄하고 
나라의 역적은 반드시 죽여 종사를 안정시킬 것을 기약했습니다.  한편 명문가에 죄를 얻을 
것을 염려하지 않은 것이 오늘의 화가 생긴 원인이 되었습니다."
  김일경은 이렇듯 자신이 공격당하는 원인이  역적을 강하게 토죄한것과 명문가와  부딪친 
것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사직을 청했다.  그러나 경종은 김일경의 사직을 허용하지  않았다. 
김일경은 재차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위에 고립되어 계시고 국세는 아직도 위태로운 지역에 처해 
있는데 흉역의 남은 무리들은 아직도 위세가 왕성합니다. 아! 4흉을 주토한 것은 모두 전하
의 위단이 아닌 것이 없는데, 나라 안에서는 신이 한 것이라 하여 거실의 미움을 사고 원수
처럼 여겨 덫을 만들고 함정을 파 신을 기다린 것을 하나 둘로 세기가 어렵습니다."
  노론 4대신을 사형시킨 것은 경종인데 사람들이 자신을  지목한다며 사직을 청한 것이다. 
그러나 경종은 이 상소에도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두  달 후인 재위 3년6월에 그를 
도승지로 삼아 최측근에 두었다. 그리고 이어 유봉휘를  이조판서, 김연을 호조판서, 김일경
을 형조판서로 삼고, 김일경과 같이 상소했던 이진유를 대사헌으로 삼음으로써 소론 강경파
를 전진배치했다.
  이런 공방이 계속되던 와중인 경종  4년4월,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이  임금의 어선에 독을 
탔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삼사에서 입대하여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자 하였으나 경
종은 "원래 그런 일이 없었다"며 조사 자체를 거부했다.  임금의 어선에 독을 탄 사건은 자
칫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경종이 조사  자체를 거부한 이유는 대비 인
원왕후 김씨가 무마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대비 김씨는 숙명공주의 며느리인 이진유이 고모
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
  "김성궁인이 정말 의심스럽다면 주상께서 어찌 윤허하지 안겠는가? 나 역시  분명히 조사
해내고 싶지 않으랴만 궁중에 실제  그런 인물이 없기 때문에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다."
  목호룡의 고변에서 소급수로 분류된 어선에 독을  넣은 사건은 철저히 조사해 그  진위를 
가려내야만 했다. 그러나 대비는 오히려 조사 자체를 중지시키려고 했다. 대비 김씨가  이진
유의 고모를 부른 것은 사건조사의 책임을 지고 있던 대사헌 이진유를 움직여 조사를 무마
시키려는 의도였다. 이진유는 고모의 설명을 듣고 다시 이 논의를 주장하지 않았으나,  김일
경, 신치운, 박필몽 같은 다른  소론 강경파는 사건을 계속 확대하려  하였다. 사건 3개월이 
지난 경종 4년7월에는 삼사에서 재이가 발생하는 것은 김성 궁녀를 사형시키지 않는 탓이라
고 주청하기도 했으나 경종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게장, 생감, 그리고 인삼차
  경종은 이렇듯 어선에 독을 넣은 사건에 관한 조사 여부로 공방이 계속되는 와중에 병석
에 눕게 되었다. 그의 병환에 실제로 독약 등의 외력이 작용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우
위정 이광좌는 내의원의 입진으로 계언을 올리면서  다시 김성 궁인에 대한 조사를  주장했
다.
  "독약을 쓰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데 전하를 모해한 사람이 궁중에 있는데도 조사해 법
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어찌 이런 신자가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계집종에 불과한데 전하
께서는 무엇이 어려워 이렇게 해이하고 완만하게 하십니까?"
  그러나 이때도 경종은 "그런 일이 없다"고만 대답했다.  물론 이는 대비를 의식한 행동이
었다. 이런 공방이 계속되는 와중인 재위 4년 8월 2일 경종의 병이 갑자기 위급해졌다. 한열
의 징후가 심해진 것이다. 경종의 병환이 심해지자 왕세제가  전면에 나서 병구완을 총지휘
했다.
  약방에서 시진탕과 우황육일산, 곤담환등 약제를 올리고, 어의 이공윤이 도인승기탕을  올
렸지만 모두 효험이 없었다.
  경종은 8월 6일 창경궁 환취정으로 옮겨 몸조리를 했는데, 다음날 설사 기운이 있는 데다 
한열까지 겹쳐 약방에서 시호백호탕을 지어 올리고 약방 제조가 본원에서 숙직하였다. 그런
데도 견종이 한열 때문에 수라를 거의 들지 못하자 우선 시령탕과 육군자탕을 올렸으나 환
후가 허하고 피로가 중첩되었다.
  이런 와중에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바라생한다. 8월 20일 대비전에서 게
장과 생감을 보낸 것이다. 어의 이공윤은 물론이고 다른 어의들 모두가 게장과 생감은 의가
에서 꺼리는 음식이라며 올리지 말라고 권유했으나, 세제 연잉군은 어의들의 반발을 누르고 
이를 진언했다. 경종은 연잉군이 올린 게장 덕택에 입맛을 조금 되찾아 평소보다 많은 수라
를 들었다. 그러자 세제는 어의들의 반발을 부릅쓰고 다시 생감을 권했다.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가슴과 배가 조이는 듯 아파왔다. 어의들은 낮의 게장과 생감이 
원인이라며 두시탕과 곽향정기산을 처방했다.그러나 복통과 설사가 더욱 심해졌고, 약방에서
는 황금탕을 지어 올렸으나 설사 증후가 그치지 않아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의원에서는 탕
약을 정지하고 인삼과 좁쌀로 끓인 죽을 올렸다.
  이런 혼돈 속에서 다음날 또다시 연잉군과 어의들이 경종에 대한 처방을 놓고 심하게 대
립한다. 경종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세제 연잉군이  "인삼과 부자를 급히 쓰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이 처방에 이의 이공윤은 강하게 반발했다.
  "삼다를 쓰면 안 됩니다. 제가 처방한 약을 지어하고 다시 삼다를 올리면 능히 기를 돌리
지 못할것"이란 말은 세상을 떠날 것이란 극언으로, 함부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제 연잉군은 도리어 이공윤을 꾸짖고 나섰다.
  "사람이란 본래 자기 의견을 세울  곳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  어느때라고 자기 의견을 
내세우느라고 인삼을 못 쓰게 하는가?"
  세제는 결국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  조금후 경조의 눈동자가 조
금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따뜻해졌다. 그러자 세제 연잉군이 말했다.
  "내가 의약의 이치는 알지 못하나 인삼이 양기를 회복시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의약의 이치'를 모르면 전문가의 말을 따라야  했다. 경종의 눈동자가 조금 안정
되고 콧등이 따뜻해진 것은 꺼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산화였을  뿐이다. 결국 경종은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새벽 3시경 환취정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재위 4년 8개월, 만 36세의 한창 나
이였다.
  대비가 극구 조사를 막았던 김성 궁인의 독약 사건, 대비전에서 나온 게장과 생감, 그리고 
어의와 다투어가며 올린 삼다, 이 세 가지 사건은 모두 경조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대비
와 연잉군이 경종을 살리기 위행 게장과 생감, 인삼차를  올렸는지 아니면 죽이려고 올렸는
지는 그들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경종의 병환을 둘러싼 대비와 연잉군의 이런 행적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당대 제일의 의사였던 이공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올린 게장과 생감,  그리고 
자신의 처방과 상극이라고 진단한 의원을 윽박질러가며 올린 인삼차는, 대비와 연잉군의 과
거와 관련되어 무수한 뒷말을 낳기에 충분한 소재들이었다.
  노론과 결탁해 경종을 죽이려 한 혐의로 <임인옥안>에  이름이 올라있던 연잉군은, 처방
을 가지고 어의와 다툴 처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공윤은 강한 처방을 주로 사용해 명성을 
얻은 의사였다. 졸지에 임금을 잃은 소론이 대비와 연잉군을 의심할 것은 분명했다. 특히 소
론 강경파는 경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했다.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
  이런 의심 속에서 세제 연잉군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
  노론에 의해 세제로 추대된 전력이 있던 그가 소론 임금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이다, 소
론 강경파는 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영조 4년  선왕 경종을 독살한 역적들에 대
한 복수를 외치며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이런 
의혹의 소산이었다. 또한 영조 31년 나주 벽서 사건때  신치운이 국문을 당하면서 "나는 갑
신년(경종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말한 것은 경종  독살설이 얼마나 뿌리깊은 의
혹인지를 보여준다. 시치운은 경종이 죽은  갑신년에 숙종의 계비 정순왕후와  세제 영조가 
공모해 경종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직접 따진 것이었다. 영조는  신치운과 그 가족을 이괄의 
예에 의거해 처리할 정도로 이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신치운이 삼족이 멸문당할 것을 알
면서도 영조의 면전에서 사실상 "당신이 선왕을 죽인  것이 아니냐"고 토해낼 정도로, 남인
과 소론에선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경종 독살설은 나주 벽서 사건에서 끝나지 않고 나아가 조선 왕실 사상 최대의 참변인 사
도세자의 비극과도 연결된다. 그야말로 비극이 비극을 낳고 죄가  죄를 낳은 악순환의 고리
가 경종 독살설이었다.

    7장
    제 22대 정조
    개혁군주의 좌절
  경종시대부터 조선의 당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전의 당쟁은 신하들 사이의 투
쟁이었을 뿐 적어도 임금 자체를 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임금은 신하들 사이의 분쟁에서 최
종적인 판결자였다. 그러나 경종때부터 신하들은  임금에게 당적을 붙이고 당이  틀릴 경우 
적으로 돌렸다. 임금도 당색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경종이 소론 군주였다면 영조는 노론 군주였다. 그리고 그런 영조밑에서 반노론의 기치를 
들었던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와 노론에  의해 비참하게 뒤주 속에서  죽어갔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그가 영조의 외아들이란 점에서  극대화된다. 만약 영조에게 다른  아들이 있었다면 
그가 영조의 후사를 이으면 되었다. 그러나 영조의 핏줄은 사도세자가 낳은 네 아들밖에 없
었고, 따라서 아버지가 비참하게 뒤주 속에서 죽는 것을 목격한  아들이 즉위할 수 밖에 없
었다. 사도세자의 네 아들중 세손인  산(정조)만이 세자빈 혜경궁 홍씨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세자의 후궁인 양제가 낳은 아들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는 세손을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세손을 
법적으로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 만듦으로써 세손의 지위를 보장해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노론 강경파의 생각은 달랐다.  노론 강경파는 세자의 아
들이 보위에 오르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또한 불가피하게 사도세자의 아들이 보위에 오른다 해도 그  대상이 세손일 수는 없었다. 
사도세자가 죽을 때 영조에게 살려달라고 울면서 호소했던 그 비참한 유년의 기억을 고스란
히 지니고 있을 세손이 즉위한다면, 세자를 죽음으로 몬 노론 강경파에게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반드시 삼종의 혈맥을  이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즉위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세손이 아니라 양제 박씨의 아들인 은전군이어야 했다. 나인 시절 방애라고 불렀던 양제 박
씨가 사도세자에게 죽임을 당했으므로,  그 아들 은전군은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을 한 노론 강경파는  세손 제거에 나섰다. 사도세자가 죽었을  때 세손의 나이 
겨우 열한 살이었다. 10년 이상  대리청정한 스물 여덟 살의 세자를  멀쩡한 대낮에 뒤주에 
가두어 죽였던 노론의 공세를 겨우 열한 살의 세손이 막기는 쉽지는 않았다.
  만약 세손의 처리를 놓고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집안이 분열되지 않았다면 세손은 
즉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자의 장인이자 세손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은 세자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는 이처럼 장인이 사위를 죽음으로 몰 만큼 당론
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3개월 후 사헌부 집의 박치륭은 홍봉한이 세자를 죽음으로 몬 장본인이
라고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영조는 이 상소에 분노해 박치륭을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귀
양 보냈다. 이때 박치륭의 공격에 반박하여 올린 홍봉한의 상소는, 사도세자 비극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과 세손에 대한 그의 속생각을 잘 말해준다.
  "기사년의 여당과 무신년의 여당(소론 강경파)들이 훗날 '생부를 위한다'는 말로  (세손을)
부추긴다면 그 추세를 막기 어려울  것이고 그 말에 마음이 쏠려들기  쉬울 것이니, 오늘날 
전하의 신하들은 일망타진당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외할아버지가 외손자가 즉위했을 경우  '일망타진'당할 것을 걱정하는  이 상소는, 당시의 
비정상적인 왕조국가 체제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런 홍봉한이 세손의 즉위를 반대했을 것
은 불문가지다. 홍봉한이 동생 홍인한도 마찬가지였다.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가 부친과 숙부의 이런 정치관을 극력 반대하고 나섬에 따라 정치 일
정에 차질이 생겼다.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아들인 세손이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혜경
궁 홍씨 덕분에 정승의 지위에 오른 홍봉한은 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세손
의 처지에서 볼 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혜경궁 홍씨의 반대로 홍씨 가문이 분열되었고, 홍
씨 형제의 분열은 곧 노론의 분열이었기 때문이다. 홍봉한은  세손에 대해 표면상 침묵했으
나 동생 홍인한은 적극적으로 세손의 즉위를 반대하고 나섰다.
  홍인한의 세손 제거 방침은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는 논리에 집약되어 있다. 
재위 51년(1775) 11월 영조는 시,원임대신을 불러모았다.  세손에게 대리청정시킬 것을 결심
한 후 대신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였다.
  "신기가 피곤하니 공사를 펼치기가 어렵다. 내가 국사를 생각하느라 밤에 잠을 설친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 소론, 남인, 소북을 알겠는가? 국사와 조살를 알겠는가?  병
조판서와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 알겠는가? 나는 세손에게 '전서'하고자 하나 어린 세손
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우므로 대신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영조는  82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언제 세
상을 떠날지 알 수 없었다. 국왕이 사망하면 대리청정하던 세자나 세손이 즉위하는 것이 조
선의 국법이었으니, 만일 세손이 대리청정하고 있을 때 영조가  급서한다면 노론은 그의 즉
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대리청정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하교로 세손을 폐위시키고 은전군이나  다른 종친을 즉위시킬 수도  있었다. 15세의 
나이로 66세의 영조와 혼인한 정순왕후는 노론 김한구의 딸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세손의 즉위를 반대했다.
  노론으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아야 했다.
 이때 좌의정 홍인한이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며  내세운 논리가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국사나 조사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세손은 정사를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때 세손의 나이 스물네 살, 숙종이 
즉위할 당시보다 무려 아홉 살이나 많은 나이였으니, 홍인한의 이 말은 곧 세손을 제거하겠
다는 노골적인 선포나 다름없었다.
  만일 영조와 세손이 적대적인 관계였다면 이때 세손은 제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손은 
현명했다. 그는 절대로 영조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았고 영조는  이런 세손을 흡족하게 여겼
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후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담은 <금등비서>를 작성했
다. 
  금등이란 쇠줄로 단단히 봉하여  비서를 넣어두는 상자를 말하는데,  이는 주공이 무왕의 
병을 낫게 해주고 대신 자신을 데려가라고 하늘에 빌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신하가 임금
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즉 신하인  사도세자 사건에 대한 일종의 후회
인 셈이다. 이 후회가, 영조에 대한 세손의 효도와 맞물리면서 영조와 세손의 대립을 막아주
었다. 영조는 시종일관 세손을 옹호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홍인한의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는 발언이 있은 며칠 후  영조는 세손과 춘방관원들
을 입시케 해 말했다.
  "요즈음 돌아가는 것을 보니 대신을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심법을 손자에게만 전하고 싶
어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영조는 세손에게 보위를 넘기기로 결심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지 13년이나  지났으니 더 
이상 권력에 미련을 가질 나이도 아니었다. 어쩌면 13년  세월의 무상함이 세손에게 권력을 
넘기기로 결심하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열흘 후인 11월 30일, 영조는 갓을 쓰고  세손에
게 기대어 앉아 상참을 행했다. 영조는 통례원 관원이 왕과  신하가 만나는 의식을 다 행하
기도 전에 돌아가 침상에 누웠다.
  "조정일이니 나라일이니 하는 것이 오히려 하찮다.  지금 이후에도 대신들이 다투겠는가? 
나의 기력이 이와 같으니 전례가 있던 일을 나는 생각한다."
  영조가 익선관이 아닌 갓을 쓰고 나온 것은 임금 노릇을  그만 하겠다는 뜻이었다. 즉 숙
종때 전례가 있는 대리청정과 정종 때 전례가 있는 선양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반대의 선봉에 선 인물은 홍인한이었다.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가 받들 수 있는 일입니까? 이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하들이 받
들 수 있는 하교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만기를 돌보셨지만 조금도 지체됨이 없었습니다.  신
은 차마 들을 수 없습니다."
  홍인한뿐 아니라 여러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영조는 이미 결심한 일이었다.
  "급하지 않은 공사는 동궁에게 들여보내고 상소에 대한 비답이나 시급한 공사는  내가 세
손과 상의하여 처리하겠다. 며칠 기다려  세손의 일처리 솜씨가 익숙해지면  마땅히 여기에 
추가하는 하교가 있을 것이다."
  대리청정에 "추가하는 하교"는 선위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홍인한으로서는 묵과할 수 없
는 일이었다. 세손의 즉위는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영조가 승지 이명빈을 불
러 전교를 쓰게 하자 홍인한은 승지를 가로막고 앉아, 영조의 하교를 쓰지 못하게 방해하면
서 하교를 들을 수 없게 하였다.
  신하가 임금의 전교를 못 쓰게 방해하는 행위는 임금의 권위, 나아가 임금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것으로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위였다. 어차피  세손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영조는  승지에게 써놓은 전교를 읽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 하교에 대답한 인물은 승지가 아니라 홍인한이었다.
  "감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신하된 자가 누가 감히 읽겠습니까?"
  이미 성년이 된 세손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였다. 세손은  홍인한이 자신의 즉위를 저지하
는 데 목숨을 걸었음을 알고 있었다. 세손은 일단 홍인한에게 타협책을 제시했다.
  "이 일은 내가 간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사세가 급박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상소하여 
사양하려 합니다. 그러나 문적이 있어야 상소를 올릴 수 있으니 두서너 글자라도 전교를 받
아 내가 사양 상소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오."
  대리청정을 사양하는 상소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달라는 타협책이었다. 영조의 하교
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리청정과  "추가하는 하교"는 곧 세손에게 보위를 
주겠다는 선언이었으므로 세손으로서는 이를 반드시 문서로 만들어두어야 영조가  급서했을 
때 즉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홍인한은 세손의 말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고 승지를 돌아보며 손을 저어 중지
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미 영조의 신하가 아니었다. 영조도 물론 홍인한의 이런 의중을 알고 
있었으나 80줄에 들은 영조로서는 더  이상 옥사를 일으킬 기력이 없었다.  그 대신 영조는 
세손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조치를 취해주었다. 바로 그날 세손에게 수감군을 수점하도록 한 
것이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세손에게도 이제 군사가 생겼다. 이 조치에 놀란 노론 대신
들이 대거 입궐해 일제히 반대했다. 그러나 영조는 한 발 더 나아가는 조치를 취했다.
  "순감군을 동궁이 수점하는 것은 3백 년 된  고사이다. 상군과 협련을 대령시켰다가 정시
가 되면 들어오게 하라."
  호위군을 동원하겠다는 말을 들은 대신들은 두려움에 싸여 한  발씩 물러났다. 영부사 김
상복은 "신 등은 전연 몰랐습니다. 지금 분명히 전례가 있음을 삼가 들었으니 어찌 감히 다
시 진달하겠습니까?"라며 물러섰고, 홍인한과 영돈녕 김양택, 그리고 판부사  김상철도 전례
가 있는 것을 몰랐다고 물러섰다.
  아무리 늙었어도 영조는 51년 동안 왕 노릇을 한 노련한 임금이었다. 영조는 순감군 수점
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다만 순감군을 수점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릇 공사도 모두 궐내에서 세손에게  대신하게 
하려 한다."
  뒤에 호위무사가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조가 명령만 내리면 상군과 협련이 들어와 
대신들을 주륙낼 수도 있었다. 홍인한의 다음말은 상군과 협련을 동원하겠다는 영조의 위협
에 대신들이 느낀 두려움을 말해준다.
  "성교가 이와 같고 이미 궐 내에서 하도록 하교하셨으니, 이는 신등이 알 만한 것이 아닙
니다. 조금 전 거동하겠다고 하교한 후 군병이 반드시 대령하고 있을 터이니, 삼가 하념하여
주소서."
  영조가 대답했다.
  "지금 시,원임대신들이 타협하였으니 거동을 그만두게 한다."
  홍인한이 말했다.
  "거동을 그만두게 하신다는 허락을 받고 신 등은 기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대신들은 천세를 부르고 차례로 물러나왔다. 세손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노론 강경파의 공세는 그치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모함했던 방법이 다시 동원되었다. 이들은 세손이 몰래 민간에 돌아다니며 금
주령 중에 술을 마셨다는 소문을 조직적으로 퍼뜨리고, 김중득에게  시켜 한문과 한글로 세
손을 모함하는 익명서를 써 존현각에 투서하기도 했다.
  어차피 세손은 노론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다. 그러나 노론에 비해 세손은 너무 약했다.
세손에게는 홍국영, 정민시등 소수의 동궁 소속 관원들밖에 없었다. 이때 한 강직한  인물이 
상소를 올려 세손을 편들고 나섬으로써 전기를 마련한다. 스물일곱의  젊은 해 부사직 서명
선이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지난달 대신이 입시했을 때 좌의정 홍인한이 감히 '동궁이 알게 할 필
요가 없다'는 말을 함부로 진달했다고 합니다. 그 무엄하고 방자함이 매우 심합니다. 그리고 
상참 때에 전 영상 한익모의 '좌우(신하)는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은 또 무슨 망말입니까? 수
상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 내시들이나 할 맹세의 말을 한 것이니 옛날의 대신 가운데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삼가 비옵건대 성상의 밝으신 지혜를 떨쳐 펴시어 빨리 대신의 죄를 바로
잡아 국가의 대사가 존중되는 지경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영조는 원임대신들과 양사, 그리고 상소문의 장본인인 서명선을 부른 후, 서명선에게 상소
문을 읽으라고 명했다. 서명선은 임금과  원임대신들, 그리고 자신을 탄핵할지도 모를  양사 
앞에서 상소문을 읽었다.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구절에 이르자 영조가 물었다.
  "무슨 말인가?"
  "신이 듣건대 성상께서 '누구든 무슨  당이고 어떤 사람은 무슨  관직에 맞는가를 마땅히 
세손에게 알게 하여 조정의 일을 익숙히 알게 해야한다'고 하교하셨는데, 홍인한이 대답하기
를 '이런 일들은 동궁께서 알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말
이나 되며 아랫사람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맞다. 내가 들을 때도 의아했었다."
  영조는 서명선이 상소를 읽어 내려가자 꼬치꼬치 캐물었다.  한익모가 했다는 "좌우는 걱
정할 것이 없다"는 말은 신하들이 잘 보필하고 있으니 굳이 대리청정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는데, 이는 얼핏보면 정상적인 말 같지만 세손과 신하들을  일 대 일로 대칭시켰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은 말이었다. 서명선은 이 말도 강하게 비판했다. 읽기를 마친 서명선이 일
어났다가 다시 엎드려 말했다.
  "이 일은 관계된 바가 큰데 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거실(명문대가)의 미움을 받으며 
솔선하여 진달하겠습니까? 신이 이러한 줄을 알면서도 눈치를 보고 진달하지 않는다면 이는 
전하와 동궁을 저버리는 것이니 그렇ㄷ면 어떻게 죽어서 신의 아비를 뵐 수 있겠습니까? 일
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서 진달한  것은 어리석은 충심이 터져 나온  것인데, 특별히 남은 
생각을 다 진달하게 하시니 비록 물러가 골짜기에 빠져 죽더라도 여한이 없게 되었습니다."
  서명선은 소리 내어 눈물을 흘렸다. 영조가 말했다.
  "우는 소리를 들으니 강개함이 마음속에 맺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 상소문에 대한 영조의 물음에 모두  모호하게 대답했다. 답답해진 영
조가 "옳은지 틀린지"양단간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했으나 대신들은 계속 모호하게  말을 
돌리며 시비 여부를 판정하지 않았다. 대신들은 영조가 서명선의  상소를 들으며 몇 번이나 
"옳다"를 반복했으므로 이 상소를 옳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끝내 모호한 말
로 이 자리를 모면하려고 했다. 이에 영조가 분노했다.
  "서명선은 내가 안 지 오래인데 털끝만큼도 남을 해치는  마음이 없었다. 이번의 일도 나
는 결단코 한결같은 혈충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여러  원임대신들과 대사헌은 
'모른다'며 흐지부지하려 하고 있다."
  분노한 영조는 김상복과 판부사 이은, 김양택을 해임하고 대사헌은 삭직시켰다. 그리고 한
익모와 홍인한은 사판에서 이름을 지우도록  했다. 한 부사직이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 한 
장이 정국을 뒤바꾼 것이다. 영조는 동궁을 모해하려는 대신들의 행위를 한탄했다.
  "아! 세도가 이러한데 83세의 임금이 어느 때에 강개한  직언을 듣겠는가? 굽어보고 우러
러보며 길게 탄식하는 이 마음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내 마음을 아는 것은 오직 저 높고 
높은 하늘 뿐이다."
  영조의 이런 조처는 매우 시의적절했다. 영조는 이런 조처를  내린지 3개월 만인 재위 52
년 3월 세상을 떠났는데, 만일 세손의  대리청정과 대신에 대한 문책을 하지  않은 채 그냥 
세상을 떠났으면 세손의 즉위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세손은  영조가 적절한 시기에 대리청
정과 순감군 수점을 지시하고 대신들을 문책했기 때문에 즉위할 수  있었다. 열한 살 때 아
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한 소년이 스물다섯의 장년이 되어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가 바
로 조선 후기의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당일 빈전 문 밖
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3대 모역사건
  노론 대신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영조에 의해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된 정조가, 즉위  당
일 그 사실을 부인하며 스스로를 사도세자의 아들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영조 40년 이후 장장 12년 간을 가슴속에 묻어둔  한마디였다. 정조의 이 즉위 일성
은 무덤 속의 사도세자를 다시  살려내는 말이자, 14년 전의 비극적  사건이 잠복한 불씨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한 선언이기도 했다.
  정조는 열흘 후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 묘호를 '영우원',  그리고 사당은 '경모궁'으로 
높이는 숭모사업을 단행했다.
  그리고 자신을 축출하려 했거나 사도세자이 죽음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에 대한  전격적인 
숙청작업을 개시했다. 먼저 홍인한과 결탁해 자신을  내쫓으려던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을 
경원으로 귀양 보내고 뒤이어 화완옹주를 서녀로 강등시켰다. 화완옹주는 이후 정치달의 부
인이란 뜻의 정처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어 즉위 다음달 정조는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며 자신을 제거하려 한 홍인
한을 여산으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대간에서 거듭 치죄를 처한 홍봉한의 경우는 혜경궁 홍
씨가 단식까지 하면서 반대했기 때문에 처벌에 어려움이 있었다. 즉위년 8월 형조판서 이계
성과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홍봉한의  처형을 주장했으니, 만일 혜경
궁 홍씨의 이런 적극적인 항의가 없었다면 홍봉한은 거듭된 공세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궁궐에는 혜경궁 홍씨 이외도 단식을  하며 친정가의 치죄에 항의하는 여인이  또 
한 명 있었다. 바로 정순왕후 김씨였다.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는 이미 영조 45년 세상을  떠
났으나, 당시 오라비 김귀주가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정조보다 일곱 살 위인 대비 김씨는  법
적으로는 정조의 할머니였으나 피가 섞인 사이는 아니었다. 따라서 정조는 별 부담 없이 김
귀주를 흑산도로 유배 보냈다가 위리안치시켰다.
  또한 정조는 김상로와 결탁해 사도세자를 죽음에 모는 데 일조한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
의 작호를 박탈해 사저로 내쫓고, 그의 오라비 문성국을  사형시켰으며 그 가족도 연좌시켜 
어미를 제주도로 보내 여종으로 삼았다. 사저로 내쫓긴 숙의  문씨는 삼사의 거듭된 주청으
로 결국 사약을 마시고 말았다.
이렇듯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노론 강경파와 외척들을 공격하자 노론도 반격에 나섰다. 이들
은 경종때 목호룡이 고변했던 '3급수 사건'과 비슷한  방법으로 정조를 살해하려 했는데, 이
를 3대 모역사건이라 한다. 정조 살해 계획에 앞장선 가문도 사도세자 죽음의 주범 중 한명
인 홍계희 집안이었다. 홍계희는 정조가  즉위하기 전인 영조 47년(1771)에  죽었지만, 정조 
즉위 후 숙청을 당한 그의 아들들이 정조 암살의 길로 나선 것이다. 이 사건의 주모이자 홍
계희의 아들 홍지해는 홍인한과 스승, 제자 사이이기도 했다.
  그 첫 번째 사건은 홍계희의 손자인 홍상범이 암살단을 궁중에 난입시켜 정조를 살해하려 
한 엄청난 것이었다. 조선 개국 이래 대궐에 암살단을 난입시켜 국왕을 살해하려 한 사건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는 조선의 국가 체제가 갈 데까지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국왕 암살
에 대한 명분도 없었다.
  홍상범은 천민 출신 장사 전홍문을 돈과 여자로 포섭해 행동책으로 삼은 후, 궁성 호위군
관 강용휘를 포섭하고 그를 통해 20여명의 동조자를 규합했다. 이들은 정조 즉위년 7월,  칼
과 철편을 들고 대궐 담을 넘어 정조가 머무는 경희궁 존현각 지붕까지 올라가 정조의 목숨
을 노렸으나 한 호위무사에게 발각되어 도주했다. 이들은 대담하게도 다음달 경계가 강화된 
대궐 담을 재차 넘다가 포군에게 체포되었다. 국왕 암살단이  대궐에까지 난입한 이 사건의 
충격은 매우 컸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홍계희의 조카인 홍술해의 아
내 효임이 주술을 이용해 정조와 홍국영을 살해하려 한 사건이 또 일어났다. 홍술해는 이전
에 무려 돈 4만 냥과 조 2천5백석, 소나무 260그루를  도둑질했다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것
을 정조가 한 등급 감해 유배시킨 인물이었다. 효임은 영험하다고 소문난 무당 점방과 함께 
정조와 홍국영을 저주하여 죽이려 했다가 검거되었다.
 세 번째 사건은 정조를 쫓아내고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을 추대하려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홍계희의 8촌 홍계농과 홍상범의 4촌 홍상길이 주도하고 혜경궁 홍씨의 오빠인 홍낙
임도 참여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결국 정조를 살해하려는 기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 왕조국가 조선에서는 국왕에 
대한 충성이란 기본 원칙은 간  곳 없고 당론만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상황이었다. 국왕은 
전 조선의 국왕의 아니라 한 당파의 당인으로만 인정되었으며,  특히 노론은 자파의 국왕이 
아닐 경우 국왕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정조와 노론은 이미  군신 관계가 아니라 정적관계
였다. 이런 정치 체제를 혁명적으로 개혁하지 않는 한 정조의 미래, 아니 조선의 미래는  없
었다. 정조는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규장각과 장용영, 그리고 화성
  이 사건을 겪은 정조는 당시의 정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백주 
대낮에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대궐에 난입해 국왕을 살해하려는  이들
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정조가 홍술해를 유배 보내며,  "기강이 땅을 
쓸어버린 듯 없어지고 백성들은 거꾸로 매달린 듯한 고통이 하루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
다"고 말한 대로, 국가 기강과 백성들의 생활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정조는 새로운 세력을 육성해 이들 세력을 대체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정조가 즉위년 9월
에 '규장각'을 설립한 것은 이런 인식의 소산이었다. 설립  당시 규장각은 왕실 도서관을 표
방했으나 이는 새 조직에 대한 노론의 의혹을 완화시키려는  수사였고, 실제로는 당론에 물
들지 않은 문신들을 양성해 개혁정치 세력을 형성하려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규장각에 소속된 사람은 각신 6명과 각신을 보좌하는 잡직인 각감 2명, 검서관 4명 등 35
명의 관리와 이속 70여 명을  포함해 모두 105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홍문관의 84명보다도 
많은 수였다. 이 중 검서관은 각신 못지않은 중요한  직책이었는데 정조는 여기에 서얼들을 
등용했다. 능력 있는 서얼들을 등용함으로써  경직된 신분제에 경종을 울리고  보다 개방된 
사회로 나아가려 한 것이다.
  규장각은 왕실 도서관의 기능과 각종 서적의 수집, 편찬 등을 기본임무로 하였으나, 그 외
에도 관료들의 재교육과 원자의 강학도 담당했다. 심지어 지방에  흉년이 들면 각신이 진휼
사로 파견될 정도로 규장각은 정조 개혁정치의 상징적인 기구였다.
  규장각이 이렇듯 왕권 강화와 개혁적 문신을 양성하기 위한 조직이었다면, 장용영은 왕권 
강화와 개혁적 무신을 양성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정조는 재위 9년(1785)장용위를 만들어 국
왕을 호위하게 했는데, 이 조직을 재위 17년 하나의 군영으로 확대시킨 것이 장용영이었다.
  장용영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나누어지는데 내영은 서울이 중심이었고 외영은 수원  화
성이 중심이었다. 장용외영의 중심이 수원 화성인 것은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와 관련이 있
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세자로 바꾸고 위패를 창의궁으로 옮겨 봉안한 것에서  만
족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고 느낀 정조는 사도세자묘의 이장과 이와 연계된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계획했다. 서울은 
이미 80여 년 이상을 집권한 노론의 수도였던 것이다.
  재위 13년 정조는 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 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곳은 백성들이 꽃산이라  부르던 수원 용복면의 '화산'이었
다. 정조는 화산에 사는 백성들을 팔달산 아래의 현  수원으로 이주시키고 사도세자의 시신
을 이장한 후, 그곳을 현륭원이라 불렀다.
  바로 그 현륭원과 관계 있는  군사가 장용외영이었다. 장용외영은 정조  22년 모두 2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사도세자와 현륭원, 그리고 장용영을 하나로 묶는 행사가 바로 정조의 능행이었다. 정조는 
틈만 나면 현륭원을 찾았다. 백성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정조의 능행 때  어가
를 따르는 인원이 6천여 명이 넘었고 동원된 말만도 1천 4배여 필이나 되었으니, 별다른 구
경거리가 없던 전통시대의 백성들에게 국왕의 행차는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백성들은 정조
의 능행 때면 구름같이 몰려나와 행차를 구경하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임
금의 행차 때 직접 징을 쳐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격쟁이라고 하는데, 정조 19년 능행 때
는 창원의 한 여인이 부사 이여절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편 정준의 사연을 호소해 이여
절을 유배 보내기도 했다.
  정조는 이처럼 규장각과 장용영, 사도세자와 현륭원, 그리고 능행을 적절히 한 고리에  묶
음으로써 노론 강경파를 무력시키려 했다.

    새로운 정치세력을 찾아서
  정조는 노론도 등용하긴 했으나,  노론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대신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찾았다. 그들이 바로 남인이었다. 사대부들만 놓고 보았을 때 조
선 후기에 차별받은 지역은 영남이었다. 남인들의 근거지가 영남이었던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숙종 20년(1694)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들은,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 때 영남 지역 전체가 반역향으로 낙인찍히면서  출사길 자체를 봉쇄당했다. 이
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 영조와 노론은 대구 입구에 '영남을 평정한 비'란  뜻의 '평영남비'를 
세워 영남 전체를 반역향으로 규정했고, 그 이후로는 사실상 노론의 일당독재가 계속되었다. 
노론 집권이 계속되는 한 남인이 조정 진출은 요원했다. 영남 남인은 비노론 국왕이 등장해
야 자신들이 조정에 진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기대를 걸었던 사도세자가 비참한 죽
음을 당하자 실망했던 영남 남인들은 그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환호했다. 그들의 기대대로 
정조는 재위 12년에 체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했다. 80여 년 만에 남인이  정승 자리에 오른 
것이다.
  남인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인들은 정조와 하나가 되기를 희망했는데 그 연결고리가 바로 사도세자였다.
  채제공이 우의정이 된 그 해 이진동을 대표로 하는 영남 유생들은 <무신창의록>과  상소
문을 갖고 상경했다. <무신창의록>은 무신난, 즉 이인좌의 난 때 이인좌 군에  저항한 영남 
사대부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었다. 이 책은 영남 사대부들  모두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
지는 않았고 안동 등 13개 고을의 사대부들은 서로 편지와 격문을 주고받으며 이인좌 군에 
맞서 싸웠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영조 4년(1728)에서  꼭 한 간지가 되는 정조 12년(1788)이 
책자를 올려, 영남이 반역향이 아니란 판정을 받고 자신들을 신원하려 했다.
  그러나 그 해 8월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승정원에서 봉입하기를 거부해 상소문과 책자를 
올리지 못했다. 이들은 계속 기회를 보다가 그해 11월, 경희궁으로 거동하던 정조가 종로 상
인들을 만나는 틈을 타 이 책자와 상소문을 올렸다. 예조에서는 이를 받지 말도록 권했으나 
정조는 오히려 밤을 세워 이 책자를 다 보았다.
  정조는 채제공에게 <무신창의록>간행과 대상자 포상을 명한 다음, 유생의 상소로는 이례
적인 소두 이진동 등을 친히 접견해 돈유했다.
  "당이 한 번 생긴 후 취미가 각기 달라져 근래에는 조정에서 영남을 거의 다른 나라 사람
처럼 보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인재가 부족한 이때에 영남 사람들 중에도 반드시 등용할 만
한 사람이 많을 터이니 함께 등용해 조정에 늘어서게 한다면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하는 
도에 부합할 것이다."
  정조의 이런 돈유에 영남 남인들은 환호했으나 승지 이민채는 <무신창의록>을 반포할 수 
없다며 명령을 거부했다. <무신창의록>에 노론 대신 김창집을  논박하다 죽은 조덕린과 황
학재 등이 뒤섞여 기록되어 있는 것이 지극한 협잡이란 이유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들의 반발을 무시하면서 조덕린과 황학재를 모두 사면시키고 이진동에게 
교서를 내려주며 격려했다. 나아가 정조는 재위 16년 3월 남인의 종주 퇴계 이황을 모신 도
산서원에서 별시를 실시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는 영남 사대부들을 끌여들이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조치였다.
  도산서원 별시는 오랜 세월 노론의 일당 전횡에 눌려왔던  영남 사대부들의 잔치였다. 이
날 별시장에 입장한 유생은 7천 2백여명이 넘었고, 거둔 시험답안지만 3천 6백여 장이 넘었
다. 구경꾼을 합쳐 1만여 명 이상이 운집해 인산인해를 이루어, 이때 "영남에 유생이 만 인"
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정조는 직접 채점에 나서 강세백과 김희락을 합격시켰다.  이
렇듯 도산서원 별시는 정조와 영남 남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행사였다.
  또한 그 직후 발생한 '영남 만인소' 사건도 이 도산서원 별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 명 
이상이 연명한 상소문이라 하여 만인소라 불리는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별시 다음달
인 정조 16년 4월 노론 유성한의 상소에서  비롯되었다. 유성한은 정조가 "경연은 참석하지 
않고 유흥만 즐겨 여악들이 금원에까지 들어오고 광대가 대가앞에 외람되이 접근했다"고 공
격했다.
  유성한은 이런 사건들이 별시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 발생했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도산서
원 별시에 대한 노론측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성한의 상소는 명분
이 약했다. 당시 국왕의 행차는 백성들의 잔치였다. 국왕이 행차하면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
려들어 구경했으며 그 뒤를 광대들이 따르며 흥을 돋우었다. 조선국왕중에서도 특히 정조는 
이런 행차를 즐겼고 이를 통해 백성과 일체가 되기를 원했다. 게다가 여악을 불러들인 것은 
정조가 아니라 궁중 건너편의 방마원이란 점에서 유성한의 상소는 사실 관계를 왜곡한 것이
었다.
  유성한의 이 상소는, 경종의 능 앞을 지나며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며 말
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윤구종 사건과 맞물려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이 유성
한의 상소에 대한 영남 사대부들의 조직적 대응이 영남 만인소였다. 실제로 만 명이 넘는 1
만 57명이 이 상소에 서명했다.
  그러나 영남 만인소는 정조에게 전달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관료가 아닌 
유학의 상소는 성균관 장의로부터 찬동을 받는 '근실'이란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노론인 성
균관 장의가 이 상소 내용에 놀라 근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남 남인들은 좌절하
지 않았다. 이들은 전현직 관료들의 상소인 진신소는 근실 과정이 필요 없다는 점을 이용해 
전 교리 김한동에게 상소케 하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영남 만인소'는 정조의 손에 닿을 
수 있었다.
  노론에서 영남 만인소의 봉입 자체를 막으려 한 것은 그 내용이 노론의 아킬레스건인 사
도세자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기 때문이었다.
  "아! 신들은 하나의 의리(사도세자의 신원)를 마음속에 간직한 지 30여 년이 되었으나 감
히 입을 열지 못해 가슴을 치면서 죽고만  싶다가 감히 발을 싸매고 문경새재를 넘어 피를 
쏟는 정성으로 대궐문에 부르짖으니 전하께서는 굽어살펴주소서."
  이어서 이들은 사도세자가 영명한 것을 우려한 "조정의 권력을 잡은 당여"들이 세자를 무
함했다고 주장했다.
  "무인년(영조 34) 이후 5년동안 그들은 각종  재주와 수단을 부려, 심지어 상소로  세자를 
욕하는 자도 있었고 급서로 고자질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세자께서 수심에 차고 우울하면서 
이를 이야깃거리로 삼아 안팎에서 선동하고 교묘하게 참언하고 소문을 퍼뜨려 끝내 차마 말
할 수 없는 변고를 일으켰습니다."
  또한 이들은 영조 말 세손을 제거하려 했던 일도 비판했다.
  "세자께서 변을 당하신 후 이제 전하의 영명함을 걱정하여 이미 사용했던  기술로 병신년
(홍인한이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고 한 영조 52)에 다시 추악하게 뭉쳤으니, 동방 
사람들 중 누가 이 무리와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전하께
서 영남을 돌보아주시고 예로 대우해주시니 영남인들은 모두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쳐 보답
하겠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선세자(사도세자)를 신원함이 제일의 의리이니 신들은 한 번 죽
을 각오로 이르 진달합니다. 선세자에게 불충한 자(유성한)가 위로 경종에게까지 그 불충이 
미친 것(윤구종)은 그 형세상 필연적인 것이니 이는 참으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
나입니다. 빨리 노적의 율을 사용해 귀신과 사람들의 분을 풀어주시기를 빕니다."
  이때는 정조가 어느 정도 왕권을  강화시킨 뒤였다. 정조는 즉위 직  후 사도세자 문제를 
과격하게 거론한 이덕사와 조재한을 사형에 처한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사도세자의  신원까
지 나갈 수가 없었다. 이는 영조의 처사를 부인하는 것으로  노론의 격한 반발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영남 만인소를 올린 소두 이우와 소하 유생들을 불렀다.
  "너희들이 천 리 먼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부른 것이니, 소두는 올라와 읽어보라."
  이우가 상소문을 읽는 도중 정조는 감정을 억제하느라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이런 
목메임을 여러 차례 되풀이한 뒤에야 정조는 겨우 입을 열었다.
  "만약 한 마디 말도 없다면 너희들이 억울해할 뿐 만 아니라 영남 몇만 명의 인사들이 장
차 그 의혹을 풀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을 졉견하는 것이다."
정조에게 사도세자 사건은 진퇴양난의 협곡이었다. 그 비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 
정조 자신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부인 영조, 생모인 홍씨, 외조부인 
홍봉한, 고모인 화원옹주, 이들이 없었다면 정조의 존재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정조는 유생들에게 김상로와 문녀(숙의 문씨), 홍인한과 홍계희 등을 사도세자 죽음
과 관련해 치죄한 내용을 설명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영남 남인들이 원하는 
것은 이런 설명이 아니라 노론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하는 것이었지만이는 당시의 정치 구조
상 불가능했다. 정조의 왕권이 노론을 제거할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영남 사대부가  1만여 
명이지만 벼슬아치라고는 기껏해야 정5품 교리  한 두명 정도였으니 정조의 왕권과  합친다 
해도 노론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정조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위로의 
말이었다.
  "영남은 바로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으로서 위급할 때에  믿는 곳이니, 내가 영남에 바
라는 것은 다른 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의 본뜻이  이와 같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나의 
본뜻을 가지고 돌아가 영남 인사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옳겠다."
  정조의 이 말은 아직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는 뜻이었다. 대신 정조는 음직 제수 대상자가 
아닌 소두 이우를 의릉 참봉으로 삼았다. 참봉은 종  9품 말단직이지만 의릉은 경종이 묻힌 
곳이므로 대단한 상징성이 있었다. 당시는 노론 윤구종이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며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사건이 벌어진 직후였으므로, 이는 직급을 떠나 영남 만인
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영남 사대부들은 열흘 후 1차 상소보다 311명이 더 많은 1만 368명이 연명한 2차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신들이 한 도가 같은 소리로 1만 명이 서로 호응하여 친릿길을 발을 싸맨 채  생사를 무
릅쓰고 달려온 것은 반드시 30년 동안 맺혀온 선세자의 무함을 분별하고자 한 것입니다. 흉
적을 주토하는 일은 분별한 다음에 할 일입니다. 선세자의 영혼이 신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
리며 전하 앞에서 일제히 호소하게 하였습니다."
 정조는 "만여 유학자의 의론은 곧 국가의 공론이다."라는 비답을 내렸을 뿐 재조사를 명하
지는 않았다. 그러자 영남 사대부들은 2차 상소 때보다 687명이 더 많은 1만 1,055명의 연명 
상소를 준비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정조가  귀향을 종용하자 영남 유생
들도 임금의 교서를 갖고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영남 만인소는 직접적으로 정국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으나, 상당한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특히 노론은 영남 만인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정조와 영남 남인이 하나임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 매개체가 사도세자였
으니 이는 상황에 따라 정국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영남 만
인소는 사도세자 사건을 공론화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다음해 정조는 2품 이상 
신하들을 불러 영조가 남긴 <금등비서>가운데 두 구절을 베껴 보여주었다.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동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
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절절한 심정이 표현된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절절
함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분노를 가슴 속에 고스란히 간직한 채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길
렀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신진관료를 키워냈고 수원 화성을 건설했으며 장용영을 기르고  영
남 남인들과 사도세자를 매개로 결합했다. 
  노론이 볼 때는 어느 하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조는 남인들이 성장하기를 기다렸다. 정조가 남인들을 중용하려는 뜻을 밝힌 것은 재위 
24년(1800) 5월 30일의 연석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시대 상황에 따라 의리가 달라지는 것과 인물을 등용하는 문제에 대
해 말했는데, 바로 이 말 속에 남인을 정승으로 등용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  자리에
서 정조는 판부사 채제공, 봉조하 김종수, 우의정 윤시동을 거론하며, 이들을 등용하고 내보
낸 주기가 모두 8년이었음을 밝혔다. 8년의 시련기를 주어  당사자들로 하여금 신망을 기르
게 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등용하고 물리치는 기준이 없었던 선왕들과 달리 자신은 이런 기
준을 두고 재상을 등용했음을 밝혔다.
  이 기준에 따르면 다음 번 재상 후보는 남인  이가환이나 정약용이었다. 그러나 남인들의 
이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이 연석이 있는 불과 20여 일 후에 정조가 급서하기 때문이다.

    나의 가슴 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회연교라고 부리는 정조의 이 발언은 의리의 개념과 인재 등용의 원칙을 밝혔다는 점에
서 조목을 받았다. 그 5일 후인 11일에는 훗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실학 4대
가로 불리는 이서구가 상소를 올려 연석 발언을 칭송하기도 했다. 혼납 오한원은 이를 조보
로 반포하자고까지 건의했는데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무렵인 초열흘 저부터 정조가 종기가 나서 붙이는 약을 사용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
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14일 내의원 제조 서용보 등을 편전으로 불러 진찰을 받았다.  정
조가 무슨 약을 붙이는 것이 좋겠냐고 묻자 지방 의관 정윤교는 여지고가 고름을 빨아내는 
데 가장 좋다고 대답했다. 이에 다시 정조가 상처를 침으로  찢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니 정
윤교는 이미 고름이 터졌으므로 다시 침을 쓸 필요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조는 종기
와는 다른 증상을 이야기했다.
  "두통이 많이 있을 때는 등 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
다."
  그렇다. 정조는 가슴에 화기가 있었다. 대리청정하던 생부를 뒤주속에서 죽게 만든 정당과 
정사를 논의할 수밖에 없었으니 어찌 홧병이 없으랴.
  반년 전인 1월 17일, 수원 화산의 현륭원에 행차해 두루 돌아보던 정조는 엎드려 땅을 치
며 목메어 흐느꼈다. 대신과 각신(규장각 관료)이  재실로 돌아갈 것을 청하자 정조는 말했
다.
  "금년의 경사를 당하여 선대를 추모하는 중에 크나큰 아픔이 북받쳐 올라  그러는데 어찌 
나더러 진정하란 말인가."
  금년의 경사란 세자가 가례를 올린 일을 말한다. 노론  강경파 영수 심환지가 부축하겠다
고 청하자 정조는 "혼자 일어서겠다"며 일어나 겨우 한두 발자국을 걷고는  또 울며 엎드려 
흐느꼈는데, 이런 일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이처럼 정조에게 사도세자는 씻을 수 없는 한
이며 홧병의 근원이었다.
  정조는 6월 14일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체직했다. 종기가 머리뿐만  아니라 등 쪽으로도 
퍼졌으며 열기까지 올라와 후끈후끈했다. 이때 정조는  국왕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처방과 약 
조제를 직접 관장했다.
  이사수가 소요산이나 백호탕이 지나치게 찬 약이라고 염려하자 정조는 "이것이 맞는 약이
므로 어쩔 수 없이 쓴다"고  대답했다. 정조는 소요산에다 황금과  황련등을 추가해 사용할 
정도로 어느 어의 못지않은 해박한 의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
  정조는 자신의 열 증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대개 이 증세는 가슴의 해묵은 홧병 때문에 생긴  것인데, 요즘에는 더 심한데도 그것을 
풀어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조정에서는 두려울 외자가 있는지  알지 못하니 나의 가슴 
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는 두려울 외자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은  심상한 말이 아니었다. 이는 곧 
대숙청과 정계개편을 뜻사는 말이었다.
  "오늘날처럼 살피고 엿보기를 잘하는 습속을로 혹시 나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안다면 
또한 어찌 얼굴을 바꾸고 마음을 고치는 길이 없겠는가. 숨어 있는 음침한 장소와 악인들과 
교제를 갖는 작태를 내가 어찌 모를 것인가. 만일 내가 입을 열면 상처를 받을 자가 몇이나 
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참고 있는데 지금까지 귀 기울이고 있어도 하나도 자수하는 자가 
없으니 그들이 무엇을 믿고 이런단 말인가?
  이른바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도 한 군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비밀히 내통
하는데 이것이 사대부들이 할 짓인가. 내가 그들을 사대부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 우선 방
치하고 있으나 내가 한 번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결판이 날 판인데 그들은 오히려 무서운 
줄을 모른단 말인가."
  이사수가 "과격한 어조는 몸에 해롭다"며 만류했으나 정조의 어조는 한층 격해진다.
  "경들이 하는 일이 한탄스럽다. 이런 하교를 듣고서도 어찌 그 이름을 지적해달라고 말하
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그들이  종기처럼 스스로 터지기를 기다리고 싶으나  끝내 고칠 줄 
모른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앞서 남인 중용을 시사한 연석 발언과 대숙청을 예고한 이  말은 서로 연관이 있었다. 남
인 등용과 대숙청! 집권당인 노론에게 이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연훈방 처방
  그로부터 이틀 후인 6월 16일  약원에서는 사순청량음 두 첩과  금련차, 그리고 우황고를 
올렸다. 그러나 진찰을 받으라는 내약원의 두 번에 걸친 주청을 거부할 정도로 정조의 상태
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같은 날 정조는 서용보를 체직한  지 이틀만에 이병정을 내의원 제
조로 삼고 그 다음날에는 가감소요산  세첩과 금련차 한 첩을 달여  오라고 명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18일 약원의 진찰을 거부하고, 그 다음날에도 직숙하겠다는 약원 제신들의 청
을 거절할 정도로 상태가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 6월 20일에는 가감소요산을 중지하고 
유분탁리산 한 첩과 삼인전라고 및 메밀밥을 지어 오라고 명했다. 메밀밥은 종기에 붙여 고
름을 빼는 데 사용하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정조는 약원의 제신과 대신,  각
신들을 불러 고통을 호소했다.
  "종기가 높이 부어 올라 당기고 아파 고통스러우며 한열도 있어서 정신이  흐려져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어의 강명길 등은 진찰한 후  "맥의 도수는 일정하여 기운이 부족한 징후는  없고 
보편적으로 빠르고 센 것 같으나 특별한 종기의  열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정조는 "대
체로 한열이 일어날 때 가슴의 기운이 올라와 식히기 때문에 열은 조금 줄어든  것 같다"고 
처방했다. 즉 종기의 차가운 한열을 가슴 속의 화기가 식히기 때문에 열이 줄어들었다는 말
이다. 그러나 정조는 자신의 종기르  대신들은 물론 의관들에게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내의원 도제조 이사수의 건의가 이를 말해준다.
  "종기의 부위를 진찰해본 뒤에야 붙일 처방을 의논할 수 있는데 의관들이 다 진찰하지 못
했다 합니다. 그들에게 자주 진찰하도록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상의 병환이 이러한
데도 신들이 아직 종기가 난 부위를 진찰해보지 못했으니 더욱 초조하고 답답합니다."
  정조는 왜 자신의 종기 부위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이는 내의원 제조를 자주 교체한 것과 
관련이 있다. 정조는 그만큼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기 부위를 보자는  이시수의 
건의에 정조는 저녁 무렵 조금  쉰 후에 보여주겠다고 대답했으나,  다음날인 6월 22일에야 
의원의 진찰을 허용했다. 정조는 이때 어의 피재길에게 지방 의관 김한주, 백동규와 함께 들
어와 진찰하라고 명했다. 어의는 매수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다음
날인 23일 정조는 도제조 이시수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고름이 나오는 곳 이외에 왼쪽과  오른쪽이 당기고 뻣뻣하며 등골뼈 아래쪽에서부터  목 
뒤 머리가 난 곳까지 여기저기 부어 올랐는데 그 크기가 어떤 것은 연적만큼이나 크다."
  이날 노론 벽파 이시수는 어의 강명길의 말을 인용해  경옥고를 쓰자고 주청했다. 이시수
는 인삼이 들어가긴 했으나 온제와는  달라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정조는 처음 열 
증세의 원인이 5푼의 인삼이 들어 있는 육화탕에 있는 것  같다며 거부했다. 6월 24일 이시
수가 밤 사이의 열 증세에 대해 묻자 정조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젯밤 같은 무더위 속에 어찌 잠이 오겠는가마는 그제 밤에 비해서는 나은 것 같다. 일
어나 앉아보고 싶어 경들을 불러 접견했지만 이또한 힘이 든다."
  이날 정조는 서정수가 사용해 효과를 본 이른바 민간요법인 연훈방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
다. 그런데 이 연훈방 요법은 정조 사후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연훈방을 건의한 심인
이 노론 강경파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란 점에서 남인들의 의심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어
쨌든 성전고와 연훈방을 사용한 6월  25일 정조의 증세는 한결  좋아졌다. 연훈방을 사용한 
후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속적삼과 요자리에 번질 정도로 피고름이  흘러나왔다. 정조는 몇 
되가 넘을 정도의 피고름이 나왔다고 말했다.
  약원 제신들이 지켜본 후 "반갑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다"며 기뻐하
였고, 정조가 새벽 연석에 들어오지 않은 각신들에게 고름에  젖은 이부자리를 살펴보게 하
자 이들 역시 서로 돌아보고 기뻐했다.
  "피고름이 다 나왔으니 근이 녹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사스럽고 다행하기 그지없습니
다."
  정조는 심혈을 기울여 키운  규장각 신하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때 
"피고름이 많이 나온 뒤라 뱃속이 필시 허약할 것인데 먹지 않아도 배가 불러  무엇을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니 이상한 일"이라면서 의문을 표시했다. 이 역시 가슴의 화기때문이
라고 자가 진단했다. 6월 26일 이시수가 다시 경옥고를  권유하자 정조는 한 번 먹어보겠다
고 답했다가 곧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의논하자고 물러섰다.  그런데도 이시수가 계속 권하
자 정조는 이렇게 답변한다.
  "경들이 나의 체질을 몰라서 그러는데 나는 원래 온제를 복용하지 못하는데  음산하고 궂
은 날에는 그와 같은 약들을 더윽 먹지 못하니 그 해로움이 반드시 일어난다. 여러 해 궁중
에 출입한 각신들은 나의 체질을 알 것이다. 체질과 사리를  따져볼 대 오늘은 결코 복용할 
수 없다."
  그러나 이날 연훈방을 다시 사용한 정조는 이시수와 여러 의관들이 종기 부위가 눈에 띄
게 좋아져 며칠 가지 않아 나머지 독도 없어질 것이라고  하자 드디어 경옥고를 들었다. 그
러나 경옥고를 든 후 정조는 잠자는 듯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계속되어 밤잠을 제대로 이루
지 못했다.
  6월 27일, 정조는 이렇듯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정사를 걱정하였다. 그만큼 정조는 강
인한 자기 제어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다.
  "도목정사(매년 두 차례 관리들의 고과평점을 심사하는 것)를 치를 때가 되었는데 이조판
서의 사정이 딱하게 되었구나. 혹시 백성들의 일에 관한 사항이 있으면 비록 이런 상황이라
도 자주 여쭈어 조치하도록 하라."
  이날 정조는 계속 정신없이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28일 드디어 운
명의 날이 밝았다. 정조는 지방 의관 김기순 등이 대령했다는 말에 "오늘날 세상에 병을 제
대로 아는 의원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불러들여라"라고 냉소적로 대답하였다.  그리고 창
경궁 영춘헌에 거동해 새로 임명한 좌부승지 김조순등을 접견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정조는 위독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유일한 목격자, 정순왕후
  이런 정조의 병세 진행 상황을 볼 때 정조 독살설과 관련해 문제가 되는 것은, 노론 강경
파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한 경옥고와 정조가 세상을 떠나는 28일 동안 등장한 한 여인, 바
로 정순왕후 김씨이다.
  "이번 병세는 선왕의 병술년(영조 42)증세와 비슷하오. 그 당시 성향정기산을 드시고 효과
를 보셨으니 의관에게 논의해 올리게 하시오."
  이때 혜경궁 홍씨도 등장하였다.
  "동궁(순조)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시려 
하니 제신은 잠시 물러나 기다리도록 하시오."
  이 말에 심환지 등이 문 밖으로 물러났다. 혜경궁이 돌아간  후 부제조 조윤대가 들여 온 
성향정기산을 이시수가 숟가락으로 떠 올렸으나   넘기기도 하고 토해내기도 하였다.  다시 
인삼차와 청심혼을 올렸으나 마시지 못하자 제신이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비상 사태에 대비해 궁성을 호위하는 가운데 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다시 등장하였다. 도
제조 이시수가 "인삼차에 청심환을 개어서  끓여 들여보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드실  길이 
없으니 천지가 망극할 따름입니다"라고 말하자. 김씨가 의외의 명을 내렸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이에 심환지 등이 명을 받고 담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는데 잠시 후 방안에서 곡하는 소리
가 터져 나왔다.
  노론 벽파 심환지가 같은 당파 이시수가 문 밖에서 말했다.
  "지금 4백 년의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신들이 우러러 믿는 곳이라고는 왕대비 전
하와 자궁저하(정조비 효의왕후 김씨)뿐입니다.
  동궁저하께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감싸고 보호하는  책임이 두분께 있는데 어찌 그  점을 
생각지 않고 이처럼 감정대로 행동하십니까.  게다가 국가의 예법도 지극히  엄중하니 즉시 
대내로 돌아가소서."
  여기에서 말하는 "지극히 엄중한 국가의 예법"이란, 비록 대비나 왕비라 하더라도 국왕의 
임종을 지킬 수 없게 한 조선의 예법을 말한다.
  즉 이순간 정순왕후가 다른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정조의 병석을 지킨 것은 예법에 어
긋나는 일이었다. <정조실록>에 정조의 임종 장면과 시간을 상세히 기록하지 못하고, "이날 
유시에 상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했다"고 두루뭉실하게  기록한 것은, 정조의 임종을 지
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왕후 김씨였기 때문일 것이다.
영조이 계비였던 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의  병세가 심각하다 해서 목놓아 통곡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영조 35년(1759) 15세의 나이로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린 김씨는 아버지
김한구와 함께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다. 정조 또한 이런  사실을 잘 알았기에 즉위하자마
자 김씨의 동생 김귀주를 유배 보냈는데, 그는 10년 후 귀양지 나주에서 병사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그랬던 것처럼 영조 말년 권력을 누리던 김씨의 친정 역시 정조가 즉위하자
마자 급전직하 몰락의 길을 걸었으니 정조에게 원한이 없을 수 없었다.
  따라서 대비 정순왕후 김씨와 정조는 법적으로 따지면 모자지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원수
였다. 또한 정조 24년인 이 해 세자(순조)의 나이 열한 살로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정조
가 세상을 떠나면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순왕후의 집안이 섭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정순왕후의 친정이 다시 살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정순왕후가 
정조를 살리기 위해 성향정기산을 올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정순왕후가 김씨는 계획대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이는 
몰락했던 친정의 부활로 나타났다. 정조 때 귀양갔다가 사망한 김귀주는 이조판서로 추증되
고 살아 있는 그 일족은 다시 기용되었다. 그리고 다시 노론의 세상이 되었다.

    정순왕후의 세상
  정조가 세상을 떠나던 날에는 삼각산도 울었다. 뿐만 아니라 그 며칠 전에는 양주와 장단 
드의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갑자기 하얗게 죽기도  했다. 이를 본 노인들이 슬
퍼하며 "이는 상복을 입는 벼"라고 말했는데 그 얼마  후 대상이 났다. 시골 노인들이 벼가 
상복을 입었다고 전할 정도로 백성들을 사랑했던 개혁군주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조선은 
점차 나락으로 떨어졌다.
  먼저 사상적으로 유일 사상 체계가 강화되었다. 당시 성리학에 도전한 사상은 천주교였다. 
정조 15년(1791)경 천주교를 둘러싼 견해 차이로 정파가 분열되는데 남인과 일부 노론 시파
는 이를 받아들여 신서파를 형성했고, 집권당인 노론 강경파  대부분은 이를 공격하는 공서
파를 형성했다. 정조는 노론 강경파를 의식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윤지층과 권상연 등을 
사형시켰지만 대체적으로 천주교에 관대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천주교에 대한 극단
적 탄압은 없었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한 후 정권을 잡은  정순왕후는 노론 강경파와 함께 1801년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사옥을 일으킨다. 명목은 사학인 천주교를 금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신
서파인 남인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 후에는 정권을 장악한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조순이 안동 김씨 일당전제를 여는 세도정치를 시작하였다. 노론 일당전제라는 폐
쇄적 사회에서 보다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 오히려 한 가문이 정권을 잡는 일
족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농업과 상업의 발달에 의한 신분제의 해체라는 시대적 요청을 받고 있었
다. 즉 아래로부터의 변화에 의해, 사대부라는 소수 지배층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전근대
적 사회 체제의 개혁을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이런 변화를  적절히 수용하려 한 
군주였다. 그러나 그의 사망과 함께 전개된 세도정치는 이런  변화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수
구정치 체제였다. 당시 조선뿐 아니라  전세계적 추세였던 개혁과 개방을  외면하고 오히려 
보수와 폐쇄로 전환한 세도정치는, 역사의 반동이자 후퇴였으며 사실상 조선의 멸망이었다.

    8장
    제 26대 고종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군주
  서기 1863년 12월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이 창덕궁에서 사망했다.
  철종은 14년 간 재위에 있었지만 강화도령이라는 그의 별명처럼 재위기간 동안  사실상의 
임금은 그가 아니라 '도령'을 '임금'으로 만들어 준 외척 안동 김씨였다. 그런데 철종이 서른
셋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후사가 없었으므로 그의 뒷자리에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대체적
인 예상은 당시 세도를 잡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에서 강화도령 같은 한미한 종친을 내세워 
후사로 삼으리라는 것이었으나, 안동 김씨는 철종의 급서를 예상하지  못한 듯 준비된 정치 
일정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 왕실의 웃어른은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빈  신정왕후 조씨였다. 조씨는 중희당에 
중신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나 같은 미망인이 이런 망극한 일을  당하니 원통하지만 이제 국세의 안위를 살펴볼  때 
시각이 급하니 여러 대신들은 종사의 대계를 빨리 의정하라."
  "종사의 대계"란 후임 임금을 결정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이 종사의 대계를 정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세도정치라지만 신하의 입으로 누가 임금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
다가는 자칫 역적으로 몰릴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신정왕후 조씨만이 거론할 수 있
었다. 안동 김씨는 미리 후사를 정해놓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원
로인 영중추부사 정원용이 "자성(신정왕후)이 교지를 내리셔서 책봉하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안동 김씨를 누르고 친정 풍양 조씨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흥선군의 아들 명복
  "그렇다면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케 하라."
  이 전교는 조대비와 흥선군  이하응이 결탁한 결과였다. "흥선군의  아들 명복"이란 말에 
안동 김씨는 놀랐으나 안된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드디어 흥선군이 조선 역사상 처음 살아 
있는 임금의 생부로 정국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나 인
조의 아버지 능양대원군, 그리고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처럼 사후에 추존된 예는 있으나, 
생전에 아들이 임금이 되어 대원군이 된 예는 없었다.
  독일인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잘 알려진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
신군의 후사였으나, 이는 양자로 들어간 때문이고 실제 남연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
군의 5세손 병원의 아들이었다.
  즉위 당시 고종은 열두 살의 미성년이었으므로 대왕대비 조씨나 생부 대원군의 섭정을 받
아야 했다. 그런데 대왕대비 조씨가 섭정을 양보함으로써  드디어 안동 김씨에게 '궁도령'이
라고 무시당하던 몰락 왕족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앞
에 놓인 과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대내적으로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나라 구석구석에 끼
친 폐해를 타파하고 정상적인 왕조 통치체제를 회복해야 했고, 대외적으로는 밀려오는 서양
과 일본 세력에 맞서 국체를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했다.  한마디로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했
는데 여기에서 왕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주역인 안동 김씨를 제거하고 그간 왕권을 견제해오던 비변사를  축
소, 폐지했으며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고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또한 백성들의 원성의 표적
이었던 서원을 철폐해 민중들의 환호를 받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은 고종 3년(1866)프랑스 선교사 처형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에 침략한 
프랑스 함대를 격퇴하고, 고종 8년(1871)에는 제너럴 셔먼 호 소각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에 
침략한 미국함대를 격퇴하는 전과를 올리는 등 대내외적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대원군의 개혁은 '왕권강화'를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당시 조선 왕
조가 처한 사황은 왕권강화라는 한 가지 목표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그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려고 원납전을 주조하
는 등 수많은 무리수를 두어 백성들의 지지를 원성으로 돌렸으며, 서원 철폐와 호포제 실시
로 양반 사대부들의 불만을 유발시켰다. 그런데 무엇보다 대원군의  가장 큰 실수는 민씨를 
며느리로 뽑은 것이었다. 대원군은 외척의  발호를 염려해 부인 민씨의  친정에서 며느리를 
뽑았다. 그러나 대원군에 의해 왕비가 된 명성왕후 민씨는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인 면암 최
익현으로 하여금 대원군의 10년 치세를 실정의 연속이라고 공격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해 대
원군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 상소를 놓고 대원군과 최익현이 맞붙었을 때, 고종은  훗날 여러 번 반복해 보
여지는 전형적인 방관과 기습의 태도를 취했다.
10년동안 대원군의 정치에 수수방관 끌려가기만 했던 고종은, 일단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오
자 대원군을 버리고 그를 지지하면서 호조참판에 제수했다. 고종은 대원군측이 격렬히 반발
하는 와중에 최익현이 대원군의 국정 간여 금지를 주장하는 2차 상소를 올리자, 할 수 없이 
최익현을 제주도로 유배보내긴 했으나, 이는 최익현이 백성들로부터 '최충신'이란 찬양을 받
아가며 귀양길에 올랐다는 일화가 보여주듯 대원군측의 공격으로부터 최익현을 보호하기 위
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운현궁을 떠나 충청도 덕산의 남연군 묘소에 성묘한 후 양주군 직
곡산장으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재위 10년(1873) 11월,  드디어 고종의 친정이 시
작되었다.

    고종과 일본의 악연
  고종이 아버지 대원군과 최익현의 대결에서, 최익현의 손을 들어준 것은, 유리하다는 판단
이 설때만 심증의 의사를 나타내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고종은 보통 아버지 대원군의 
도포자락과 명성왕후의 치맛자락에 싸여 있다가 나라를 빼앗긴 용렬한 군주로 알려져  있지
만, 사실상 그렇게 용렬한 군주는 아니었다.  고종을 직접 만났던 거의 모든 외국인은  그를 
대단히 해박한 지식과 폭넓은 정치력을 지닌 군주로 회상했다.  그러나 대원군 출출 장면에
서 보여지듯이 고종의 정치력은 적극적으로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력이 조성
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수동적인 정치력이란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고종은 아버지가 치세할 때 적극적으로 제어하지 않은 것처럼,  부인의 친정이 치세할 때
도 적극적으로 제어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물결이 밀려오던 조선 후기의 혼란기에 이러한 
고종의 정치 태도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수동적인 고종의 정치 태도는  대외 관계에서 보다  심각한 위기를 드러낸다.  고종 12년
(1875) 9월에 있었던 일본 군함 운양호의  강화도 침입 사건은, 앞으로 밀려올 외세에  대한 
그의 외교능력을 가늠하는 시금석이었다. 대원군이라면 이 도발 행위에 대해 병인양요나 신
미양요 때처럼 군사적으로 맞섰을 것이다. 이때 일본은 미국의  군사 위협에 굴복해 개국한 
지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정한론이 기승을 부리기는 했으나 국력을 기울여 조
선 침략에 나설 상황은 아니었고 그럴 실력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개국에 뜻을 두었더라도, 일단 운양호를  격퇴한 후 대등한 위치에
서 주체적으로 개국을 단행해야 했다. 그러나 고종은 군사적  대응보다는 부산 등 3개 항구
의 개방과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내용의 불평등조약인 강화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순응의 길을 택했다. 한 번 열린 불평등조약의 문은 닫을 수가 없어서, 이후 미국과는 '조미
통상수호조약'을, 청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었으며, 영국및 독일,  그리고 러시아와
도 예외 없이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었다.
  고종은 이를 소중화 사상에 입각한 이이제이정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이제이는 오랑캐를 
제압할 힘이 있을 때 가능한 정책이다. 이들 대부분이  조선을 하나의 침략대상으로 여기는 
상황에서 이이제이는 패자의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종은 결정적으로 유리한 
순간이 오리라 믿으면서 기다렸다.

    국내의 혼란과 일본의 내정간섭
  개화파인 민씨 세력이 주도한 잇달은 불평등조약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의  심
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고종 19년(1882)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특별 대우에 분노한 구식 군
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불태우고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를 타살했으며,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경기 감사 김보현 등 민씨 일파
를 살해하고 나아가 민비까지 찾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민비는 이미 궐 밖으로 도망친 뒤였
다.
  군사 위협에 놀란 고종이 구식 군인들의 지지를 받는 대원군에게 전권을 위임한 것은, 두 
세력이 다툴 때 대세에 따르던 그의 정치 방식을 잘  보여준다. 일단 대세에 따르다가 기회
를 엿보아 반격하는 것이 고종의 정치 방식이었다.
  대원군은 임오군란으로 10년 만에 다시  집권하게 되었으나, 재집권은 그리 길지  못했다. 
청이 세 척의 군함과 4천여 명의 군사를 몰고 와 대원군을 청의 천진으로 납치해 갔기 때문
이다. 이때도 고종은 대원군의 납치를 반대하지 않았으며, 다시 나타난 민비가 친청  정권을 
수립하는 데도 반대하지 않았다.
  친청 사대파로 변신한 민씨 일파가 조정을 장악하자, 일본은 친일정권을 수립하고자 김옥
균, 박영효 등 개화파를 이용해 임오군란 2년 후인 고종 21년(1884)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하
였다. 갑신정변이 성공하자 또다시 대세에 순응한 고종은 개화파에 동조해 거주지를 창덕궁
에서 경우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개화파가 패배하자 이번에는 개
화파를 역적으로 몰았다. 140여 명에 불과한 일본군을 믿고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 개화
파의 무모한 시도는 결국 실패했고, 일본도 서울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일본
은  이 정변으로 조선과 1885년 한성조약을 맺어 불탄 공시관 건축비와 배상금 지불을 약속
받았으며, 청과는 천진조약을 체결하였다. 청,일 양군의 조선 철수와 향후 조선 파병시 서로 
통고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 천진요약으로, 일본은 유사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다.
  고종 31년(1894)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접주 전봉준의 지도로 시작된 동학혁명은, 천진조
약에 의거해 일본군과 청군의 충돌을 부른 계기가 되었다.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고
종이 청에 파병을 요청함으로써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충돌하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에
서 승리한 일본은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대원군을 다시 영입해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
일내각을 구성했다.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을 끌여들였던 고종은, 이  때문에 오히려 정권을 일본
에 빼앗기게 된 것이다.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어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대만, 요
동반도를 할양받았다. 그런데 요동반도의 할양은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를 자극해 러
시아, 독일, 프랑스 세 나라의 3국간섭을 초랬다.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하라는 이들의 요
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러시아가 일본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
와 결탁해 친일파 박영효를 몰아내고 이범진등이  주도하는 친러내각을 출범시켰다. 청나라
를 이용해 대원군을 몰아냈던  고종이, 이번에는 러시아를 끌여들여  다시 대원군을 쫓아낸 
셈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그 열매를 러시아에게 빼앗긴 일본은 이노우에공사 후임으로 부
임한 미우라 고로우공사에게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도록 했다. 1895년 10월 미우라 공사는 
일본 보병 18대대 병력으로 대궐을 점령하여 명성왕후를 참살한 후, 그 시신을 영사관 경부 
오기하라 슈지로로 하여금 소나무 숲속에 옮겨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을미
사변이다.
  이로써 조정은 다시 친일파 김홍집  내각이 장악하게 되었다. 고종은  명성왕후가 일본에 
살해되었음을 알고 야만적인 처사에 분개하였으나, 모든 실권을 일본과 친일내각이 갖고 있
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 일국의 왕후를 참살한 일본이, 자신을 참살하지 않는다는 보장
이 없다고 여긴 고종은 은인자중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을미사변 발생 약 4개월 후인 고종 33년(1896) 2월, 고종은 일본군이 의병 진압을 위해 지
방에 내려간 틈을 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독립국의 군주가 
외국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은 민족적 수치였지만, 일본으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고
종은 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거는 결단력은 없었지만,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는 허를 찌르는
데는 능숙했다. 이후 일본과 고종의 관계는 대부분 이런 형태로 전개된다. 일본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고종을 압박하면 고종은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다가 기회를 보아 의외의  반격을 
시도하였다.
  아관파천을 단행한 지 1년 만인 1897년, 지금의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그 해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면서 황제로 등극했다. 이때  반포한 
대한국제에서 고종은 황제가 입법, 사법, 행정을 장악함은 물론 황제의 통치권이 무한하다고 
규정지었다. 이는 입헌군주제를 추구한 독립협회의 구상과는 달랐지만 고종 자신은 이를 당
연시했다.
  한편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지 않으면 한반도 병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본은, 1904년 
2월 선전포고 없이 인천과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급습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러일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고종은 국외 중립을 선언하여 전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하
였다. 그러나 일본이 다른 곳도 아닌 인천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전쟁
에서 대한제국이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일본은 전쟁 직전 한국에 군대를 보내 서울과 전국
의 군사요지를 점령하고, 필요한 경우 일본이 한국 영토를 군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내
용의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사실상 한국 병탄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았다. 1905년 9
월 포츠머스강화조약 체결 한 달 전에 일본은 자국이 추천하는 고문을 한국 정부가 받아들
인다는 내용의 1차 한일의정서를 체결했었다. 이로써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는데, 재정과 외교
에만 고문을 채용하기로 한 협약과  달리 궁내부, 군부, 내부,  학부에까지 일본인 고문들이 
들어옴으로써 대한제국의 자주권은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또한 일본은 한일의정서 체결 한 달 전에 이미 미국과 이른바 가쓰라, 태프트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해주는 대가로 한국에대한  지배를 인정받았고, 다음달에는 영구
과 2차 영일동맹을 맺어 고립되었음을 뜻한다. 그런데도 고종은 그런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
지 못했다. 고종은 40여 넌 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처럼 이를 이이제이 정책의 일
환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고종은 일본이 많은 것을 빼앗아  갈 때 투쟁으로 저지하기보
다는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방식을  택했으며, 목숨을 걸고 지신을  위해 싸워줄 백성들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치력에 의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은  고문정치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일본의 병탄과 고종의 대응
  1905년 10월 말 일본 각의는 한국을  이른바 보호국화 한다는 명목으로 강제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한국에 파견된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이다. 그 해 11월 9일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날 경운궁으로 고종을 방문해 한국을 보호국화 하겠다는 소위  천항의 
친서를 전달했다. 고종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취해온 여러  조치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
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대답은 적반하장이었다.
  "폐하께 한마디 묻고 싶은데 한국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까지  생존 할 수 있었으며, 한국
의 독립은 누가 준 것입니까. 폐하께서 이를 아시면서도 불만을 말할 수 있습니까?"
  이토 히로부미의 말은 서구 열강이 먹으려던 한국이란 음식을 일본이 대신 먹어주니 고마
워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계속 고종을 위협했다.
  "이는 일본 정부의 확고한 방침으로서 결코 움직일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승낙하시든 자
유이지만, 만약 거부하실 경우 일본정부는 이미 결심한 바 있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
지 생각하셔야 합니다. 짐작컨대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 이상으로 곤란한 경
우에 이를 것이며 더 불리한 결과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는 완전한 협박이었다. 고종은 재위 42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고종은 독립국을 유
지하고 싶은 자신의 희망을 일본 황실과 정부에 전해주기 바란다고 간청했으나 이토 히로부
미의 반응은 싸늘했다.
  고종은 대신들과 회의를 해 결정하겠다고 일단 결정을 미루었다.  당시 일본 공사였던 하
야시가 이 회의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에 따르면 일본은  회의에 참석할 한국 
대신들의 회유와 일본군 대장을 통한 군사 위협, 그리고 옥쇄를 미리 확보하는 것등의 대책
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런 준비 끝에 열린 회의에 대한 하야시의 회상기를 보자.
  "나는 미리 이러한 회의 중에도 국왕이  궁궐 깊은 곳에서 어떠한 기도를 꾸미고  있는지 
시시각각 알 필요가 있어 꼼꼼하게 밀사를  배치해두었는데 그 밀사가 저녁 어스름  무렵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보내왔다.
 '지금 임금께서 궁 대신을 이토 공의 숙소로 보내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 목적은  지
금 대궐에서 협의하고 있는 문제를  2,3일간 연기해줄 수 있는가 하는  국왕의 희망을 이토 
공에게 전하려는 것 같습니다.'"
  일제의 간자인 '그 밀사'가 바로 고종 독살설과 관련  있는 문제의 핵심 인물이다. 그로부
터 7년 전인 고종 34년(1897)에 일어난 순종의 '독차사건'도 이런 일제의 간자들이 짓이었다. 
당시 고종과 황태자가즐겨 마시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은  독차 사건은, 친러파가 일으
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친일파가 개입했을 개연성도 농후하다.  하나 그 어느쪽이든 간에 
궁 내의 간자가 개입한 것은 분명하다. 이때 커피 맛에  익숙한 고종은 곧 뱉어냈으나 다량
을 마신 세자는 그 탓인지 지적 장애를 일으켜 판단 능력을 잃게 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 보병 1개 대대,포병중대, 기병연대가 대궐 앞과 종로에서 군사  시
위를 벌이고 일본 병사가 서울 시가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협하고 있는 동안, 대궐 안
에서는 이른바 을사조약(2차 한일협약)이 고종의 서명 날인 없이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
제순, 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찬성만으로강제 조인되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장악한다는 내용의 을사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의  외교권
을 대표하는 최초의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게 되었다.  외교권이 없는 나라가 정
상적인 독립국가일 수는 없으므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이때 망한  것이었다. 전 참정 민영환
과 전 특진관 조병세 등이 음독 자살하고  전 참판 민종식과 최익현 등이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도 을사조약을 사실상의 망국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을사조약부터 고종과 일본의 싸움은 본격화된다. 고종은  결코 을사조약을 인정하지 않
았다. 그러나 고종은 을사조약을 폐기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무력보다는 외국, 특히 미국의 
중재에 의해 해결하려는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고종은 친한적인  교육가인 미국인 
헐버트에게 친서를 주어 미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헐벌트는 루스벨트대통령과의 회견을 거
부당하고 어렵사리 만난 루트 국무장관에게도 냉담한 반응만 받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약 3개월 전인 1905년 7월 31일 루스벨트는 국무장관과  태프트에게 
"귀하가 가쓰라에게 말한 것은 모두  옳다. 귀하의 말이 곧 나의  말이라는 것을 지체 없이 
가쓰라에게 전하라"는 훈령을 보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바 있었다. 이 사실을 몰랐
던 고종은 주불 공사 민영찬을 다시 미국으로 파견했으나 그 역시 루트 국무장관에게 냉담
한 반응만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고종은 좌절하지 않고 비밀리에 런던 <트리뷴>지기자인 스토리에게 옥쇄가  찍힌 
국서를 주어 영국에 전하게 했다. 고종은 이 국서에서  황제인 자신은 을사조약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주권의 일부도 일본에 양도하지 않았음을 역설하고, 이후 세계 열강이 5년동안 한
국을 공동으로 보호하기 바란다고 했다. 이 국서는  1906년 12월 6일자 <트리뷴>지에 게재
되었고, 1907년 1월 16에는 영국인 베젤과 양기탁이 함께 운영하던 한국의 <대한매일신보>
에도 게제되었으며, 중국 주재 영국 총영사 지부에게 전달되었다. 몇 년 전 같았으면 각  열
강은 "5년 동안 한국을 보호하기 바란다"는 이 매력적인 제안에  다투어 달려들었겠지만 이
미 각 열강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한 터였으므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고종은 포기하지 않았다. 고종은 1907년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 검사 이
준, 그리고전 주러 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을 6월~7월  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
그로 파견했다. 고종은 이들에게 위임장을 주며 을사조ㅓ약의 불법,무효성을 역설했다. 러시
아는 이미 지난해 주한 러시아의 넬리도프를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어느 열강 대표
도 이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이미 지난해  주한 러시아 총영사에 대한 인
가장을 고종이 아닌 일본의 메이지 천황에게 받음으로써 을사조약을 인정한 상태였다.
  헤이그에 고종의 밀사가 나타나자 일본은 한순간 당황했으나 곧 이 사건을 이용해 고종을 
몰아내기로 방침을 정했다.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는 정보를 들은 이토 히로부미는 
그 해 7월 3일 하야시외상에게 전보를 보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에 대한 국면 전환의 행동을 할  호기라고 믿는다. 즉, 병권, 재판권을 
우리 수중에 넣을 호기라고 생각된다."
  이토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킬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고종의 퇴위를 합의했다. 이완용은 7월 16,17일 두 차례에 걸쳐 양위를 주청했지만 
고종은 격노하면서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고종에게 아무런 힘도 없었다. 고종은 결국  그달 
19일 새벽 3시에 "지금까지 선양의 예에 따라 군국의 대사를 황태자에게 대리케 한다"는 조
칙을 발표하는 데까지 양보했다.
  이 조칙의 속뜻은 황태 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 동안 '대리'하게한다
는 데 있었다. 즉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기회를 보아 다시 복위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일
본의 뜻은 '대리'가아니라 '선위'에 있었기 때문에 조칙을 거부했다. 이토와 이완용은 다음날 
아침 고종이 거부하는 데도 경운궁  중화전에서 황제 양위식을 강행했다.  양위하는 고종과 
양위받는 순종 모두 참석하지 않은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양위식이었
다. 그 후 일본은 순종과 황태자인 영친왕 은을 덕수궁(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주시킴으
로써 고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다.
  독차 사건 이후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잃은 순종이 즉위했으니 이제 모든 것은 일본의 뜻
대로였다. 고종을 무력화시킨 일본은 한국을 완전히 점령하기로 하고  그 해 8월 1일 6천여 
명에 달하는 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고종의 양위에 반대하는 유생과 농민들,  그리고 
해산된 군대의 일부가 가담한 정미의병(1907)이 일어났으나 우수한 화력을 가진 일본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2년 후인 1909년 9월부터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 와타나베 소장이 이끄는 일본
군은, 의병운동을 뿌리뽑기 위해 두 달 동안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이 토벌 
작전으로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여러  지역에서 살육, 방화 등의 
방법으로 위병장 심남일을 포함한 2천여 명 이상의  의병이 살해되거나 체포되었다. 이로써 
전라도 의병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일본이 이 토벌 작전을 전개한  이유는 저항할 수 
있는 무력을 미리 제거해 한국을 완전히 병합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결국 그 다음해인 1910년 8월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확보하기 위해서 한국을 일본제국에
합병함이 가장 좋은 길임을 확신"한다는  내용의 소위 한일합방조약이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고종은 물론 순종도 여기
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일본에겐 이미 이들의 동의가 필요 없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다시 조선으로 희귀시키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데라우치 통
감을 조선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한국의 모든 권력은 고종이나 순종의 것이 아니라 총
독의 것이었고 그가 사실상 한국의 국왕이었다.
  그러나 이완용 같은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한국 민중 그 누구도 데라우치  총독을 
임금으로 생각하지않았다. 그들은 침략자이자 식민지 지배자일 뿐이며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일 뿐이었다. 조선 민중들의 가슴 속에 자리잡은 임금은 여전히 고종이었다. 그
것이 일본에겐 골칫거리였다.
  한국을 강제로 침탈한 후 일본은 고종 황제를 이왕으로,  황태자 순종을 세자로 격하시켰
다. 비록 왕이란 칭호는 남아 있었으나  이름뿐이었고, 1871년 3부 72현으로 재편된  일본의 
지방관제에 한국이란 한 부가 추가된 형국이었다.

    언젠가는 기회가오리라
  고종이 자신의 재위 기간 중에 5백 년 사직이 망한 것에 자괴감을 느꼈으나 포기하지  않
았다. 고종은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고  믿는 인물이었다. 광무 2년(1898)대
원군이 세상을 떴을 때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고종은 만약 이대로 세상을 뜬다면 저
승에가서 대원군을 볼 면목이 없었다. 더욱이 스물다섯 명의 역대 선왕들을 볼 면목은 더더
욱 없었다. 그래서 고종은 포기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이 헌병통치로 표현되는 무단통치로 한국을  옥죄고 있을 때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
다. 일본은 한국을 병탄한 후 '조선귀족령'에 따라서 75명의 전,현직  고위관료들에게 작위를 
주었다.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1명과 남작 45명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완용이나 송
병준 같은 친일파였으나, 일부 일제의 회유에 못 이겨 작위를 받은 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망했을 때 조선의 지배층  인사는 목숨걸고 일제와 투쟁한 인물은  드물었
다. 이들은 왜 투쟁에 나서지 않았을까? 이들이 투쟁에 나서지 않은 데는 나름의 논리가 있
었다. 바로 고종의 존재였다.
  
    고종의 해외 망명작전
  일본은 한일합방이 일본 황실과 한국 황실의 자유로운 의사와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서 이
루어졌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즉 한일합방이 고종과 순종의 동의에 따른 조약이라는 것이었
다. 대한제국의 옛 지배층들은 바로 이 고종과 순종의 동의에서 투쟁에 나서지 않아도 좋은 
파난처를 찾았다.
  물론 한국의 식자 중 한일합방이 한국 황실의 자의에 의해 체결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그러나 고종의 존재  자체가 격렬한 항일투쟁을 자제시키는  완충지대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자의든 타의든 한국  황실이 한일합방이란 운명을 받아
들인 것만은 사실이라 생각하고, 황실의 결정에 따른다는 명분으로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합방 후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인물들은 모두 하층민들이
고 조선의 지배층은 합방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선전해왔던 터였다.
  만약 고종이 합방이란 운명을 거부하고 항일투쟁의  전면에 나선다면, 대한제국의 지배층
이 현실에 안주할 수 있는 명분은 송두리째 사라질 것이며, 그때까지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전,현직 벼슬아치들도 침묵만 하고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농민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은 급속히 와해될 수 있었다.
  또한 고종이 해외로 망명이라도 해서 항일 개전의 조서를 내린다면 틀림없이 전국적 봉기
가일어났을 것이다. 해외로 망명한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고종의  망명을 적극 추진한 의
도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현존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들 중  고종의 해외 망명을 가장 먼저  추진한 세력은, 1914년 
이상설을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였다. 이상
설은 1915년 3월 상해 영국 조계 내의 배달학원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화, 유동열, 이춘일 
등 주요 국립운동가들과 회동해, 신한혁명단을 조직하고  광복군을 무장시켜 국내외에서 강
력하고 조직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북경에 본부를 둔 신한혁명단 본부의 본부장 이상설은 외교부장에 성낙형을 선임하고  고
종의 해외 망명 작전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성낙형은 이 지시에 따라 국내에 잠입해 고종의 망명을 추진했다. 성낙형은 고종을 신한혁
명단 당수로 받들고 중국 정부와 중한의방조약을 체결하려 했다.
  신한혁명단 간부들이 1914년 7월 26일  내관 염덕인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관련 서류를 제출하자, 고종은 외교부장 성낙형을 알현하겠다고 허락했다. 이들은  고종뿐만 
아니라 왕실 인물 중 항일 의지가 가장 높았던 고종의 왕자 의친왕 이강까지 연결하려 했으
나 고종 알현 직전에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 김사홍, 김승현 등 다수의 관련자들이 검거됨
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일제는 이 사건을 '보안법 위반 사건'이라고 불렀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은 고종을 더욱 철저히 감시했다. 만약 고종이 해외로 망명한다면 식민
지 통치 체제 전반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한일합방이  고종의 자의로 체결되었다는 주장의 
허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은 물론, 이전의 의병 투쟁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독립운동
의 거센 물결이 국내외에서 일 것이 분명했다.
  이상설과 성낙형의 고종 망명 기도 사건이 무위로 끝난 후,  1918몀 다시 고종의 해외 망
명이 추진되었다.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창은 회고록 <운명의  여진>에서 1917년경부터 이 
일을 추진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의 계획에는 이회영, 시영형제와  이득영, 홍증식, 민영달, 
조완구 등이 가담했는데, 그 중에서 이회영 가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종의  생질이
자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친족인 조계진이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의 부인이었으므로 고종
과 비밀리에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회영이 고종의 시종 이교영을 통해 의사를 타진하자고 고종은 선뜻 해외 망명계획을 승
낙했다. 고종이 해외 망명계획을 쾌히 승낙한 것은, 당시 일본이 세자이자 순종의 동생인 영
친왕을 일본의 왕족 이방자와 혼인시키려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종은  한국의 왕세자가 
한국 여인이 아닌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였다.
  그러나 이 국혼에대한 모든 결정권은 고종의 손을 떠나 일본에게 있었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왕세자 영친왕이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면 조선 왕실의  맥이 
완전히 끊길 거라고 판단한 고종은, 자신이 직접 해외로  망명해 독립투쟁을 전개하기로 하
였다.
  고종은 측근인 민영달에게 망명 결심을 알렸다. 호조판서 좌참  등을 지낸 후, 일본이 명
성왕후를 시해하자 항의 사직하고 일본이 내린 남작 작위도 거부했던 민영달은, "황제의 뜻
이 그렇다면 분골쇄신 하더라도 뒤를 따르겠다"며 거금 5만 원을 내놓았다. 5만원은 북경에 
고종이 거처할 행궁을 마련할 자금이었다.  북경 행궁은 이회영이 물색히가로  역할 분담이 
되어 있었다.
  만약 이 계획이 실행되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커다란 파문이 일 것은 분명했다. 고
종이 망명해 정부를 구성하면 이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적어도 군주제를 채
택하고 있는 영국, 독일, 스페인 같은 나라는 고종의 망명정부를 인정했을 것이다.
  고종이 해외 망명을 결심하던 1919년에는, 10년에 걸친 일본의 무단통치가 한계에 봉착한 
때였다. 어떤 계기만 생긴다면 백성들은 기꺼이 들고일어날 자세가 되어 있었으므로, 고종이 
망명해 개전 조칙을 내린다면 전국 각제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바야흐로 일본
과의 한판 결전의 날이 무르익고 있었다.

    마지막 군주의 최후
  이렇듯 자금이 준비되고 행궁 마련 계획까지 세워져 구체화되어가던 고종의 망명 계획은, 
그러나 의외의 사태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당사자인 고종이 예기치 못하게 급서한 것이다.
  고종의 급서에는 여러가지로 의문점이 많다. 당시 고종의 망명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망명 정보가 누설되어 일본이 독살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의 기록에도 의혹의 여지가  많다. <순종실록>의 부록에 태왕
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고종의 병명도 없이 
그저 태왕의 병이 깊어 그날 동경에 있는 왕세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되어 있다.
  문제는 그날 밤 고종의 병세가 깊어 숙직한 인물이 바로 일본으로 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
은 친일파 이완용과 이기용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묘시(오전6시)에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그러므로  고종의 
임종을 지켜본 인물은 헤이그 밀사 사건 때 고종에게 "일본에 가 일황에게 사죄하든 퇴위하
라"고 윽박질렀던 이완용과 일제에게 작위를 받은 친일파뿐이었다.
  고종이 1월 20일에 사망했는지 아니면 <고종실록>의 기록대로 21일에 사망했는지도 불분
명하며, 그 사이 이완용과 이기용이 고종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 수없다. 더구나  일본은 
고종의 사망 사실을 하루 숨겼다가 발표했는데, 발표 방식도  신문 호외를 통한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고종의 병명은 급서의 경우 흔히 갖다 붙이는 뇌일혈이었다. 고종의 사망  사실을 
은폐하는 동안 일제가 무슨 일을 꾸몄는지 알 수 없다.
  게다가 일제가 조선총독부 칙령 제9호로 "이태왕이 돌아가셨으므로 오늘부터 3일 간 가무
음곡을 중지한다"고 결정한 것은 1월 27일이었다. 1주일이 지난 뒤에야 "이태왕이 돌아셨으
므로" 가무음곡을 중지한다는 칙령을 내려 뒷북을 치고  있는 것이다. 1주일 동안 조선총독
부와 일본 정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독립운동가들은 고종을 독살한 장본인으로 두 인물을  지목했다. 이왕직 장시국장이자 남
작 작위를 받은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이 일제의 하수인으로 고종을  독살했다는 걱이다. 
이증복은 1958년 12월 16~19일자 <연합신문>에 1918년  12월 19일 밤에 두 한씨가  독약이 
들어 있는 식혜를 올려 독살했다고 적었다.
  성신여대의 구양근 교수가 일본 외부성 외교관료에서 찾아낸 국민대회 명의의 성명서에는 
이 설을 지지하는 기록이 나온다. 고종이 사망한 그 달에 열린 국민대회의 성명서가 그것인
데, 그 내용 중에 "그들(이완용, 송병준등 친일파)은 출로가 막히자 후일을 두려워하여 간신
배를 사서 시해하기로 하였다. 윤덕영, 한상학 두 역적을 시켜 식사 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려"시해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종 독살설은 단순한 설이 아니라  고종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이완용과  이기
용, 그리고 독살의 혐의를 받고 있는 한창수, 윤덕영,  한상학 등의 이름이 실명으로 거론될 
만큼 구체성을 띄고 있다. 고종  독살설이 시중에 널리 유포되고 이를  사실로 확신하게 된 
것은 이런 구체적인 정황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제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두 궁녀를 살해
했다는 사실에 이르면 믿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독살설은 일반과 궁중 모두에 널리 퍼졌다. 앞서  말한 이회영의 며느리이자 고종의 
생질인 조계진이 고종이 승하한 닷새 후 운형궁에 다녀와서 시부에게 이런 사실을 전한 데
서도 이를 알 수 있다.
  고종 독살설은 당시 여러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병장 곽종석과 교류하였던 
송상도는, 명나라가 망한 뒤 기려도사가 명말 충신의 사적을 수집한 예에 따라 전국 방방곡
곡을 돌아다니며 사적을 수립해 <기려수필>을 남겼는데, 이  책의 유신영 편에 "역신 윤덕
영, 한상학, 이완용이 태황을 독살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충북 보은에 살던 유신영은 "경술년(1910)에 자결코자 했으나 군왕이 생존해 계시므
로 참았다. 인산날 군왕을 지하에서  만나 불충위 죄를 씻겠다"며 자결하였고,  곡성에 살던 
김기순도 "이제 우리 군왕마저 승하하셨으니 가망이 없다"며 할복 자살했으며, 무과 출신으
로 선전관을 지낸 백성흠은 고종의 독살설을 듣고 대성통곡하다가 수일 후 숨을 거두는 등 
자살이 잇달았다. 당시의 기록인 김윤식의 <속음청사>에는 고종이 갑자기 승하해서 아들들
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종이 해외로 망명했다면
  고종의 급서는 한일합방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 만약 고종의 해외망명이 성공하여 망명정
부를 수립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면, 한반도 전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휩싸여 아
무리 강고한 무단통치라 해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외교 관계로 보더라도 황제가 직접 망명해 정부를 수립한다면 자발적으로  합병했다
는 일본 주장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차원을 넘어, 최소한  영국, 독일, 스페인 같은 군주국가
들의 승인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새로운 정세를 조성할 수 있었다.  일본과 
이완용 같은 친일파들은 이를 막기 위해 고종 독살설을 결심했을 것이며, 일본이 독살을 결
심했다면 적에게 둘러싸인 고종으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고종의 치세는 결코 훌륭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조선 백성들의 임금이
었다. 그는 사대부들이 앞장선 의병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는 조선의 임금이었
다. 그의 죽음이 전민족적 항거인 3,1운동을 유발시킨 것만 보아도 그가 당시  백승들에게어
떤 존대였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조선 백성들은 일본의 히로이토가 아니라 고종을 임
금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고종이 사망하자 그 인산일에 전 국민적으로 항거했다.
  그의 부인 명성왕후 민씨가 살해됨으로서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고종의 독살로  3,1운동이 
발발했으니, 아마도 고종 부부는 죽음으로써만 일본에게 복수할 수  있는 비극적 운명을 타
고난 것인지도 모른다.
  518년 간 존속했던 조선의 마지막  군주의 인산을 애도시위로 보낸 것은,  5백 년 왕업에 
대한 이 당 소박한 백성들의 마지막 의리와 예우인지도 모른다.

     조선엔 왜 독살설이 많을까
     조선, 중국, 일본 왕조의 특성
  조선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왕조의 역사가  유달리 장구했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조선은 1392년 건국되어 1910년 일제에 점령당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란 긴 시간동안 존
속했던 왕조다. 왕조의 역사가 장구하다는 점은 우리 역사에  존재했던 왕조의 공통된 특성
이기도 하다. 실제 조선 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왕실이 모두 5백~8백여 년 존속
했다. 이처럼 왕조의 생명이 긴 사례를  다른 나라 역사에서는 찾기 어렵다. 정확한  분류는 
아니자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개의 왕조는 2백~3백여 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
다.
  일본은 자국의 천황가가 만세일계의 혈통이라고  자랑한다. 하지만 1천 5백여  년의 존속 
기간 중 일본 천황가가 실권을 쥐었던 때는, 백제계가 원주민을 점령해 천황가를 세워 통치
했던 고대의 일부 기간뿐이었다. 그 기간을 제외하면 일본 천황은 국왕이라기보다는 제사장
에 가까웠다. 하늘과 조상들에게 제사지내는 것이 일본 천황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던 것
이다.
  중세 이후 천황은 일본 정치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천황이 얼마나 정치에서 소외된 존재인가는, 1467년 오닌의 난에서 시작해 토요토미 히데
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기까지 약 1백여 년간 계속되었던 전국시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동
안 천황은 103대 고쓰치미카도 천왕부터 107대 고요제이 천황까지  무려 다섯 명이 갈렸다. 
그러나 이들 다섯 천황의 사망과 즉위는 전국시대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천황의 퇴
위와 즉위는 단지 제사상 가문의 세습에 지나지 않았을 뿐 전국시대의 향배와는 아무런 상
관이 없었다. 심지어 천황가의 영지가 소재지의 다이묘에게 병합되어버리는 상황이었다.
 일본열도의 패군을 다투던 그 어느 다이묘도 천황의 퇴위와 즉위에 신경쓰지 않았다. 심지
어 104대 천황 고카시와바라는 즉위식을 거행할 자금이 없어 왕위에 오른 지 21년이 지나서
야 즉위식을 올릴 수 있었다.
  전쟁에 나선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 누구도 천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
다. 그들은 명분이 필요할 때만 천황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용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천황 영
지의 조세를 대신 징수해주고 천황의 거주처를 수리해준 것은 다른 다이묘들과 싸움에서 유
리한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천황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우대신이란 칭호를 줌으로써 이에 
보답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마찬가지였다. 천민 출신으로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
요시는 1588년 새로 지은 경도의 취락제에 천황을 초정하고 각 다이묘들을 불렀다. 그는 천
황에게 간파쿠란 직위를 받았는데 이것은  사실상 일본 국왕의 이름이었다.  토요토미는 각 
다이묘들에게 천황과 간파쿠에게 복종을 약속하는  서약을 하게 했다. 그러나  천왕에 대한 
서약은 형식에 불과했고 사실상 간파쿠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였다.  막부의 장군은 
이처럼 가파쿠의 지위로 다이묘들을 다스렸다.
  일본 역사의 대부분 기간 동안 일몬을  실질적으로 다스린 존재는 천황이 아니라  막부의 
장군(쇼군)들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왕위를 세습한 것처럼 막부의 장군도 한 가문에서 세습했
다. 이때 장군은 사실상의 국왕이었고 막부는 사실상의 왕조였다. 그러나 한 가문이  막부를 
지배하는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미나모토 요리토모 가문은 1185년에 정권을 잡아 가마쿠라  막부
를 열었다가 1333년 멸망했으므로 약 150여 년을 집권한  셈이다. 가마쿠라 막부에 이어 정
권을 잡은 무로마치 막부는 1338년에서 1578년까지 240여  년을 집권하였고, 전국시대와 임
진왜란을 거쳐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는 1603년부터 1867년까지 260여 
년 간 집권하였다.
  가마쿠라, 무로마치, 에도 막부의 교체는 우리나라 고려,  조선 왕조의 교체와 마찬가지이
다. 그러나 그 집권은 기간은 길어야 260여년을 넘지 못했다.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는 원나라가 집권한  기간은 
1206년부터 1368년까지 160여 년에 불과했다.
  그 뒤를 이는 명은 1368년 건립되어 1662년에 멸망했으니 약 3백 년을 존속한 것이며, 만
주족이 세운 청은 명과 각축하는 기간까지 포함해 1616년에 건립되어 1911년  신해혁명으로 
멸항했으니 역시 3백 여년 동안 존속한 것이 된다.
  조선은 명과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어 청과 비슷한 시기에 멸망했으니 얼마나 장구한 기간 
동안 존속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조의 존속 기간이 중요한 것은, 왕조나 국가의 생명 싸이클이 비슷한 경로를 거치기 때
문이다. 국가나 왕조는 창업기, 성장기,  발전기, 쇠퇴기, 소멸기라는 생명 싸이클을  지닌다. 
사이클의 각 과정은 상황에 따라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만약 발전기가 길다면 그 왕조의 
국력은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한없이 뻗어 나가는 것이다. 발전기가 끝나면 정체기 또는 쇠
퇴기라는 시련이 찾아오는데, 그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면 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
운 왕조와 국가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쇠퇴기, 멸망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
였다. 이런 기록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피지배계급인 농민을 위해 군림했던 조선의 사회 체제는 임진왜한
으로 사실상 종말을 고한 셈이었다. 일본이 침략했을 때 지배층들이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
간, 조선 지배 체제는 붕괴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국왕 선조가 떠난 궁궐에 난입해 노비  문
서를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을 질렀다. 이는 사배부, 일반백성, 노비로 이어지는 조선의 신분
제 자체를 부인하는 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선조의  어가를 가로막고 강계에 귀양 
가 있는 정철의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그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하던 행위로 
당장 물고를 낼 죄였지만 선조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국왕을 정
점으로 사대부들이 다스리는 조선의 국가통치 체제는 임진왜란으로 종말을 맞았다.
  개국 초에 조선은 사대부, 일반백성 할 것 없이 모두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의 국
가였다. 물론 양반 사대부들은 이런 저런 명목으로 이름만 걸어놓았으나 어쨌든 법제상으는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방군수포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 때 군적수포제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면제되었다. 개국 후 
2백여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이때 이미  생명 싸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사대부들은 무려 3백 년이란 세월을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것은 비정상
적인 생명의 연장이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
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조선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속에서 생명을 유지
하였는데, '국왕 독살설'도 그 하나이다. 국왕 독살설이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6세기 말부터 
유포되기 시작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국왕 독살설은 왕조국가의 대표적인 비정상적인 정치  행태이다. 다시말하면 이미 생명력
이 다한 왕조국가가 물리적이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수명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
로 국왕 독살설인 것이다.

    조선, 중국, 일본 국왕의 차이
  조선, 중국의 임금과 일본의 장군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크기가 달랐다.
  실질적인 일본 국왕인 막부 장군의 권한은 막강했다. 그들은  무력으로 정복한 지역 영지
의 여탈권을 자악했다. 장군은 심지어 다이묘들에게 항복을 명할 수도 있었다. 할복을  거부
하면 군사를 일으켜 더욱 가혹하게 보복했다. 그러나 이는 장군에게 힘이 있을 경우였다. 전
국을 장악한 토요토미가 불과 13년 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에게 망해버렸듯이 장군의 힘
이 약화된는 순간 반란은 싹텄고 그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하면 그 막부는 망했다.
  중국의 황제권은 여타 국가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평민  출신으로 명조를 개창한 주원장
은 중서성을 자체를 폐지시켜버렸다. 중서성의 승상이 황제권을 견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였다. 또 6부를 황제에게 직속시키고 대도독부를  5군도독부로 고쳤으며 어사대를 도찰원으
로 고쳐 황제에게 직속시켰다. 그야말로 국가의 모든 권력이  황제의 손아귀에 있었던 것이
다. 신하들이 권력을 두고 황제와 다툰다는 것은 감히 꿈도 꾸기 어려웠다. 중국이 대신들보
다는 주로 환관들의 전홍이 문제가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황제의 권한이 절대적이다보
니 황제와 지근거리에 있는 환관들이 힘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왕조국가인 조선의 국왕은 일본의 천황처럼 허수아비는  아니었고, 
중국의 황제처럼 절대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이론상의  절대권이었을 뿐 실제 조선
의 국왕은 신하들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중국의 황제는 신하들에게 무조건적인 숭배와 충성의  대상이었으나, 조선의 국왕은 무조
건적인 숭배나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조거부 충성의 대상일 때도 많았다.
  조선의 국왕은 의중의 인물을 정승으로 임명하기 위해 신하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예를 들어보자. 조선의 19대 임금 숙종 때의 일이다.
  재위 13년에 좌의정 남구만을 면직시킨 후 그 후임으로 우의정 이단하를 승진 발령한 숙
종은 공석이 된 우의정을 임명하기 위해 영의정 김수항과 좌의정 이단하를 불러 적당한 인
물을 추천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김수항과 이단하가 이숙을 추천했으나 숙종은 낙점을 거부했다.  숙종은 이어 두 대
신이 추천한 이민서, 신정, 여성제도 차례로 모두 거부했다.
  국왕이 네 번씩이나 추천을 거부하는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두 대신은 숙종이 마음속에 담고 있는 특정 인물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입대를 청했다. 
예상대로 숙종의 입에서 한 인물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조판서 조사석이 국가 일에 마음을 다했음을 내가 알고 있다. 경들의 의견은 어떤가?"
  숙종이 의중에 두고 있던 인물은 이조판서 조사석이었다. 신하들은  국왕이 네 명을 거부
한 끝에 직접 추천한 인물을 거절할 수 없었다.
  "선조 경자년(1600)에도 심희수, 한응인, 윤승후, 김명원이 추천받았다가  김명원이 성상의 
분부에 따라 먼저 정승이 된 일이 있는데 오늘의 일이  그때와 유사합니다. 신들이 어찌 다
른 의논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우여곡절 끝에 조사석이 우의정이 되었지만 이 인사는 항간에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대신들이 추천한 인물을 국왕이  연거푸 거부한 전례도 없거니와  숙종이 의중에 
둔 인물이 조사석인 데 대해 흥미로운 소문이 떠돌았다. 그  소문은 다름 아닌 조사석과 장
희빈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본명이  장옥정인 장희빈의 어머니는 원래  조사석 처가의 
여종이었는데, 그녀가 장옥정을 낳은 후에도 옛 주인인 조사석의  처가를 왕래했던 게 소문
의 진원지였다. 또한 조사석은 당시 대궐의 웃어른인 자의대비 조씨의 재종제였는, 당시  숙
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가 장희빈을 미워한 반면 대비  조씨는 장희빈을 총애했다. 그리하
여 장옥정은 대궐에서 쫓겨났을 때 대비의 명의로 옥정을 돌보아준 동평군 이항과 함께 대
비 조씨를 자주 찾아 보았다.
  이렇듯 얽히고 설킨 사연 때문에 조사석이 장희빈 덕택에 우의정이 되었다는 소문이 떠돌
게 되었다.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지 못한 조사석은 거듭 차지를 올려 사직을 요청했으
나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문제는 계속 확대되어 경연 자리에서까지 논란이 되
었다. 숙종이 조사석에 대해 묻자 지경연사 김만중이 이렇게 대답했다.
  "후궁 장씨의 어미가 평소 조사석의 집과 친밀했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조사석이 우의
정이 된 것은 이 연줄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유독 전하께서만 듣지 못하고 계십니다."
  "조사석이 연줄을 대어 정승이 되었다면 내가 금을 받았다는 말이냐, 은을 받았다는 말이
냐? 그 말의 근거를 분명히 대라.결코 가만 두지 않겠다."
  김만중도 항의했다.
  "전하께서는 신에게 말을 하도록 해놓고 또한 그 말의  근거를 물으십니다. 신이 비록 불
초하기는 하지만 어찌  의 근거를 들어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주륙을 받더라도 달
게 여기겠습니다만 이는 전하께서 신을 형륙에 빠뜨려시려는 것입니다."
  임금이 신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는 이 말은 더욱 숙종의 분노를 샀다. 분기가 탱천해 
음성과 안색이 엄해진 숙종이 계속 다그쳐 물었으나 김만중은 굴복하지 않았다.
  "신이 감히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달려나가 의금부에서 대명하겠습니다."
  숙종이 승정원에 전교를 내렸다.
  "즉시 김만중을 잡아다가 문초하라는 전지를 써서 올리고 의금부에서 문초하게 하라."
  하지만 승정원에서는 숙종의 명령이 부당하다며 전지  쓰기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임금이 
직접 친필로 전지를 내릴 수도 없었다. 숙종은 분개했다.
  "여러 신하들이 군부 보기를 일개 시종하는 신하만도 못하게 여긴다."
  김만중을 처벌하려던 승정원의 전지가 꼭 필요했으므로 숙종은 승지를 꾸짖기도하고 달래
기도 하면서 봉입하라고 재촉했다.
  승지 유명일이 붓이 없어 전지를 못 쓰겠다고 핑계를 대자, 숙종이 사관 송상기에게 붓을 
주라고 명했는데, 그는 "사필을 줄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또 다른 승지 윤성준이 살
필도 중요하지만 국왕의 명도 중요하다며 붓을 내어 겨우 전지를 쓸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의 국왕은 때로는 전지 한 장을 쓰기 위해서도 수많은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중국의 황제나 일본의 장군 같았으면 승지와 사관은 물론이고 김만중의 목도 당장 달아났을 
것이다.
  문제는 숙종의 왕권이 조선 스물일곱 임금중에 그 누구와 비교해도 약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다. 그런 숙종이 의중의 신하 한 명을 정승으로 임명하기  위해 이런 소동을 겪었다는 것
은 조선 국왕의 권한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조선의 국왕은 전지전능한 권력자가 아니었다. 전지전능하기는 커년 전지 한장을 쓰기 위
해서 신하들을 위협하고 달래야 했던 나약한 존재였다. 왕조국가  조선에서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임금의 신하이기보다는 소속당의 당인인 신하들
  조선에서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론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니라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
해지면서 신하들은 왕명이 아니라 당명을 따랐다. 당쟁이 치열하던  시절 조선의 왕권이 약
하다는 사실은 외국인의 눈에도 감지되었다. 이 때문에 숙종은  청나라 예부시랑 오합이 했
다는 말을 듣고 분통을 터뜨린 일도 있었다.
  오합이 청 황제 성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여 만약 우리 조정에서 보호하지 않는다면 몇 번이나 왕
위 찬탈이 있을지 알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숙종은 분노하여 이렇게 꾸짖었다.
"너희들이 이처럼 방자하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들이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는 강하다고 
말하지 않느냐."
흔히 숙종을 민비나 장희빈의 치마폭에 감싸여 서인에서 남인으로 그리고 또다시  서인으로 
정권을 바꾸며 무수한 신하들의 목숨을 빼앗은 변덕스런 임금이라 평가한다. 하지만 숙종은 
잦은 정권 교체가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라고 믿었고,  실제로 당재을 통해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심지어 숙종은 왕비와 후궁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왕비에 대한 각 당의 
당론까지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남인가 여인인 장희빈을 총애할  때는 남인들을 
집권시키며 서인들을 내쳤고, 서인가 여인인 인현왕후 민씨를 총애할  땐 남인을 내치고 서
인들을 중용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각 당파 사이에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런 잦
은 정권 교체 결과 숙종  후반기에는 신하들이 감히 왕권을 넘보지  못했고, 재위 39년에는 
신하들이 살아 있는 숙종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겠다고 간청하고  나설 정도로 왕권이 강화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까지 왕권 강화의 도구로 이용해야  했다는 사실은 조선 국왕의 
왕권이 얼마나 미약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숙종의 할아버지 효종과 아버지 현종, 그리고 숙종의 아들 경종은 모두 독살설에  휘말렸다. 
이런 상황이니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하
나가 왕비와 후궁을 둘러싼 사랑이었다.  어쩌면 이런 냉혹함이 그를  독살설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인지도 모른다.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적인 특색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 그 임금
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하며,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한다는 것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되었을 경우 임금
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는 임금이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음을 뜻하
는 동시에, 신하들이 특정 임금을 배척할 수도 있었음을 뜻한다.
  이를 신하가 임금을 선택했다는 뜻의 '택군'이라  하는데, 국왕 독살설은 그야말로 이  '택
군'의 결과이다. 택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다. 다른 하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것이다.  왕을 갈아치우는 것을 반정
아라 한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
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로 돌아가다"라는 뜻의 반정은 신하
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
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독살'이다. '반정'과 '독살'은 둘  다 신하들이 임금
을 선택한 결과라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이다. 반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상당한 정치
적 부담이 있는 데 비해 독살은 은밀히 이루어지므로 정치적 부담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택군의 논리야말로 조선시대 국왕 독살설을 만들어낸 정치 용어이자 왕조국가 조선이 말
기까지 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의 국왕 중 독살설에  휘말린 인물은 소현세자와 사도
세자를 폿함해 9명이나 된다. 여기에 일각에서 주장사는  예종까지 포함시키면 무려 10명이
나 되는 셈이다. 
  2 명의 세자를 제외하더라도 8 명의 임금이 독살설에 휘말렸다는 것은 조선이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에 대해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증건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히 '조선`이
란 과거의 왕조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한국을 연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비록 36년 
간의 식민지 통치 기간이 중간에 개재되어 있다 해도 한국은 조선을 계승한 나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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