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세계명작산책2(성장과 눈뜸)
스티븐 빈센트 베네 외 9명
제3권 '성장과 눈뜸' 서문
삶이 죽음의 일부이든 죽음이 삶의 일부이든 인간의 성장은 바로 그 어느 쪽
에 대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성장 그 자체의 의미에도 삶
과 죽음이 아울러 포함되어 있다. 어떤계기로 삶의 오의를 포착하는 군간 그 의
식은 이미 그 이전의 의식은 아니다. 크건 작건 삶과 죽음에 관한 눈뜸은 의식
의 새로운 태어남을 뜻하는 동시에 낡은 의식의 눅음을 뜻한다.
따라서 그러한 눈뜸의 과정은 우리에게 언제나 경이인 동시에 고통이다. 삶과
죽음은 때로는 미혹 혹은 신비로 안개를 피워 올리고 때로는 심술궂은 무의미로
위장해 우리의 둔감을 유도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안개는 걷히고 둔감의 굳
은 살이 터지며 우리는 눈길을 찌르는 햇살아래 갓 돋은 살갗으로 그 진상과 대
면하게 된다.
서구 현대소설의 중요한 전통을 이루는 교양소설 혹은 성장소설은 바로 그런
경이와 고통들의 형상화이다. 장편으로는 대개 한 인간의 의식이 눈뜨고 자라나
고 성술하는 전과정을 보여주고 단편으로는 그 중요한 계기가 되는 눈뜸의 한
순간을 포착한다.
그런데 때로는 단편이면서도 한 인간이 자라나고 성숙하는 전과정을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은 그런 성장소설의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큰바위 얼굴'은 중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우리에게 널리 알려
진 탓에 그보다는 덜 정연하지만 훨씬 상상력이 풍부하고 변화가 다양한 빈센트
베네의 '조니 파이와 바보귀신'을 첫머리에 놓는다.
조니 파이와 바보귀신
스티븐 빈센트 베네(Stephen Vincent Benet)지음 강자모 옮김
조니 파이와 바보귀신
요즈음은 바보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 흔히 들을 수 없지만 조니 파이의
어린 시절에는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떠돌았다.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지만 한 가지 점에서만은 일치되 견해를 가지고 있
었다. 그것은 그가 매우 정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조니
파이에게는 그랬다. 당시 방앗간 집의양자였던 조니가 바보귀신 이야기에 그토
록 신경을 쓴 이유는 아마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니의 가족이 모두 죽은 후 방앗간 주인 부부는 그를 키우겠다고 자청했는데
그들의 자세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니의 젖나가 빠지고 대부분의
소년들과 다름없는 행동을 하자 그들은 조니에 대하여 격노하는 등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 나름대로의 기준에서 볼 때 그들의 행위는 정당
한 것이었지만 그 기준 자체는 엄격했다. 그들은 엄격하게 하면 할수록 어린이
가 어욱 훌륭하게 자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방식의 양육법이 잘 맞
는 어린이들도 있겠지만 조니 파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조니는 마틴즈빌에 사는 대부분의 남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총명하고 넉그적
이었다. 그러나 그는 웬일이지 집에 있을 때는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
으며 말에서도 실수가 잦았다. 물론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일 리는 없겠지만 아
이를 바보처럼 취급하면 결국 그아이는 바보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방앗간 주인 부부는 아이를 바보 취급하는 것도 아이를 키우는 좋은 방버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조니 자신도 결국 이를 믿게 되었다.
그는 매 맞는 것에는 이력이 났고 또 사실 잘 견뎌 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
린이들에 비해 조금은 상상력이 풍부한 그에게 견디기 힘든 것은 방앗간 주인의
말버륵이었다. 나는 방앗간 주인이 무슨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말했다고
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니 파이의 기억에 의하면 주인은 자신이 싫어하
는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혀를 차면서 "아, 글세 바보귀신이 아무개
를 데리러 왔다지?" 라고 말하곤 했다. 물론 당신은 가족간에 흔히 오갈 수 있
는 농담 같은 말을 가지고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느냐고 말하고 싶겠지만 커
다랗고 붉은 얼굴을 가진, 기골이 장대한 방앗간 주인의 말은 조니 파이에게 강
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급기야 그는 바보귀신의 모습을 나름대
로 마음 속에 간직하게 되었다. 체크 무의 셔츠와 코르덴 바지를 입은 바보귀신
은 역시 몸집이 컸는데 손에는 끝부분에 납덩이를 매단 히코리 나무로 만든 지
팡이를 들고 손에는 끝부분에 납덩이를 매단 히코리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이세상을 돌아다녔다. 나는 조니 파이가 어떻게 이처럼 구체적으로 바보귀신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바보귀신의 모습은 마
틴즈빌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만큼이나 분명한 것이었다. 그는 또 가끔씩 겁먹은
얼굴로 어른들에게 바보귀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겼는지 물어보곤 했다. 물론 그
들 대부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부터 조니는 방앗간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다 한밤중에 깨어나 바보귀신이 언제 나타날까 불안해 하며 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물론 그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상황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보
통 어린이들이 그러하듯 부주의로 인하여 일을 망쳤다. 굵게 빻아야 할 밀을
그만 잘게 빻아 놓은 것이었다. 조니는 이 일로 방앗간 주인과 그의 아내로부터
한 대씩 모두 두 대의 매를 맞았다. 매를 때린 후 방앗간 주인은 "너는 정말 바
보구나! 이제 바보귀신이 너를 잡으로 오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 같다"고 말했
다. 조니는 방앗간 주인의 아내도 그렇게 믿고 있는지 알기 위하여 그녀를 쳐다
보자 그녀는 머리르 절레절레 흔들면서 심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날 밤 잠
자리에 든 조니는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삐걱거리는 물레방
아 소리를 다가오는 바보귀신읜 발자국 소리로 착각해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
다. 그래서 그는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깨기 전에 일어나 자신의 소지품을 큰
비단 보자기에 싸서 도망쳤다.
그는 바보귀신으로부터 도망쳐 오랫동안 숨어있을 수 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
았다. 누구도 바보귀신으로부터 숨어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러나 그는 적어도 한 번 시도할 가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창한 봄날
아침에 길을 나선 그는 실로 오랜만에 마음의 평온을 느꼈다. 한껏 힘이 솟은
그는 단지 자신이 조니 파이이며 아직도 누군가를 해치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황소개구리를 향하여 돌을 던졌다.
마틴즈빌로부터 대략 3,4마일 정도 벗어날 때 그는 경마차 한 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바보귀신이라면 구태여 사람을 잡기 위해 마차를 타고 올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심하며 한쪽으로 길을 비켰다
그러나 경마차는 지나가지 않고 그의 옆에 멈추었고 그안에서 매우 놓은 실크
모자를 쓴 검은 구레나룻이 난 사람이 밖을 내다 보았다.
"여보게 젊은이, 이 길이 이스트 리버티로 가는 길이 맞나?"그가 물었다.
조니는 공손하게 그러나 똑똑히 말했다.
"제 이름은 조니 파이이고 나이는 열한 살입니다. 이스트 리버티로 가시려면
다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갓비시오. 저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남
들이 그러는데 매우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합니다." 말을 마치면서 그는 바보귀신
이 그를 잡기 전에 세상을 마음껏 보고 싶다는 생각에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음... 너도 이곳은 처음이란 말이지? 도대체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웬일로 이
렇게 이른 아침부터 길거리를 배외하는 거지?"
조니 파이는 숨김없이 속직하게 말했다. "아, 저는 바보귀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중이랍니다. 방앗간 주인은 저를 바보라고 하고 그의 아내도 저를 바보라고 부
릅니다. 사실 어린 수지 마쉬를 빼놓고는 마틴즈빌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저를 바보라고 부르죠. 그리고 방앗간 주인은 바보귀신이 저를 잡으러 올것이라
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그가 오기 전데 미리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검은 구레나룻이 나 사람은 마차에 앉은 채 잠시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잠
시 후 그가 말했다.
"자, 타라. 방앗간 주인은 너를 보고 바보라고 말할지 몰르지만 나는 제가 혼
자 힘으로 바보귀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보니 아주 똑똑한 치구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나는 조그만 시골 마을의 편견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단다. 나는 아주
열리한 아이가 필요해. 그래서 너를 태워주기로 한 거야"
"그러나 아저씨와 함께 있으면 바보귀신으로부터 안전할까요? 만약 그렇지 않
다면 별 의미가 없어요." 조니는 말했다.
"안전하냐고?" 검은 구레나룻이 난 사람은 이럿게 반문한 후 또 가쁜 숨을 몰
아쉬었다.
"오, 너는 아주 안전할 것이다. 아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약초 으사란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바보귀신과 비슷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내가 아주 훌륭한 일
을 가르쳐 주지, 자 어서 타라구, 젊은 친구."
"그럴 듯하게 들리는데요. 그러나 제 이름은 조니 파이예요." 조니는 이러게
말하며 마차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타 마차는 덜컹거리며 이스트 리버
티를 향하여 움직였고 약초 의사는 농담을 섞어가며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조니
는 이 사람이야말로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스트 리버티에서 약 반 마일쯤 떨어진 곳에서 샘물을 발견한 의사
는 마차를 멈추었다.
"왜 서는 겨죠?"
"두고 봐라." 의사는 그에게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마차 뒤에
서 빈 병이 갇그 든 모직 천으로 짠 커다란 여행 가방을 꺼내 조니를 시켜 샘물
로 병들을 가득 채우게 하고 라벨을 붙였다. 그리고 그는 각각의 병에 연붕홍색
가루를 조금씩 넣고 흔든 다음 코르크로 막고 다시 마차에 실었다.
"그건 뭐죠?" 호기심에 가득 찬 조니가 물었다.
"이것은 '노의사 왈도가 조제한 세계 최초의 만병통치약'이란다." 그는 자신이
붙인 라벨을 읽으면서 말했다. "가장 순수한 뱀 기름과 비전의 인디언 약초를 배
합해 만든 이 약은 류머티즘, 비틀거림이 동반되는 현기중, 두통, 말라리아, 다섯
가지 종류의 발작 증세,. 눈 근처에 난 뾰루지 등에 좋단다. 이 약은 또 기름 때
를 제거해 주며 칼과 은제 물건을 닦거나 놋쇠 제품에 광을 내든데 사용되면 강
장제나 혈액 정화제로도 아주 그만이지. 작은 병은 1불이고 가족용인 조금 큰
병은 2불 50센트란다."
"그런데 도데체 뱀 기름이나 비전의 이디언 약초가 어디 있어요? 제겐 안 보
이는데요" 조니는 알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은 네가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바보귀신도 그것을 못볼거야.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볼 수 있단다." 의사는 다시 한 번 끔벅거렸다.
조니가 그 말뜻을 이해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날 밤 이
스트 리버티에 도착한 의사는 좋은 장소를 골라 능숙한 솜씨로 좌판을 벌렸다.
그는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두 개 만들어 마차의 양 옆에 ㄲ았다. 그는 다이아
몬드로 만든 긴 텍타이 핀을 꽂은후 구경꾼들의 눈이 휘둥그래질 때까지 카드
묘기를 보여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조니에게 탬버린을 연
주하도록 했다. 얼마 후 그가 왈도 의사의 만병통치약에 대하여 고새하자 그 약
은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일이 다 끝난 후 조니는 의사를 도와 수북하게
쌓인 돈을 세었다.
"저는 정말이지 이렇게 쉽게 돈 버는 것을 처음 봤어요. 아저씨는 정말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군요" 조니는 말했다.
"재치있고 민첩하게 행동해야지" 의사는 조니의 등을 툭 치면서 말했다. "자,
내말을 잘들어. 바보는 한 고에 머물면서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만족해 하지. 그
러나 바보귀신이 영리한 노점상을 잡았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은 적이 없어."
"아저씨를 만나서 저는 정말 다행이에요. 만일 재치있고 민첩하기만 하면 된다
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기술을 배우겠어요"
이렇게 해서 그는 오랫동안 그 의사와 함께 머물렀다고 마침내는 스스로 약을
만들고 의사와 거의 비슷하게 카드 묘기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조니는 의사
를 존경해ㅛ고 의사도 시키는 대로 일을 잘하는 조니를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들은 한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는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여
느때처럼 구경꾼들은 모였고 의사는 그의묘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
안 내내 조니는 날카로운 얼굴을 가진 한 사람이 구경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속삭이고 잇는 것을 알았다. 의사가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이에 마침내
그 날카로운 얼굴을 가진 사람이 소리쳤다.
"바로 저너모이야. 틀림없어. 저 구레나룻은 어디에서 보아도 알아볼 수 있어."
이 소리를 듣자 구경꾼들은 즉시 저마다 고함을 지르머 가까이에 있는 담장의
판자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조니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와 의사는 마을로부터
쫓겨나 있었는데 비틀거릴 때마다 의사의 긴코트 자락이 펄럭거렸다.
그들은 아직 애송이라는 이유로 조니를 심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
은 조니와 의사에게 다시는 그 마을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경고한 다음 으사
를 번쩍 들어 엉겅퀴 덤불 속으로 던져버리고서 뿔뿔이 흩어졌다.
"어이쿠!"
의사는 소리쳤다. 조니가 그를 엉겅퀴 덤불로부터 꺼내주려고 힘쓰는 동안 그
는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조심해서 살살해. 그리고 왜 내게 암시를 주지 않았어? 이 멍청한 꼬마녀석
아."
"암시라뇨? 무슨 암시요?"
"코가 뾰족한 그놈이 기웃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말이야. 어쩐지 그
빌어먹을 놈의 거리가 낯익어 보이더라. 2년 전에 진찌 금시계를 한 개에 1불씩
받고 이 마을에서 판 적이 잇었어."
"진짜 움직이는 금시계는 1불이 넘을 텐데요."
"움직이지는 않았지." 의사는 끙끙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시계 켸이스 안에
조그만 딱정벌레를 집어넣어 똑딱거리는 소리를 아주 그럴 듯하게내도록 했지."
"그거 정말 기발한 생각이었군요. 저 같으면 그런 생각을 꿈에도 못했을 거예
요."
"기발하다고?" 의사는 말했다. "아, 이제는 망했다. 도대체 어떤 바보 같은 놈
이 2년 동안이나 계속 벼르고 있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어? 이제 약병과 돈은
물론 말과 마차도 빼앗겼으니 이일을 어찌 안담. 그러나 아직도 보여줄 묘기는
많이 있으니 다시 시작해야지."
조니는 의사를 좋아했지만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다. 만을 영리한 의사의 말로
가 마을로부터쫓겨나는 것이라면 그는 그가 생각하던 것만큼 바보귀신으로부터
멀리 도망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
까, 바로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를 향하여 걸어오는 바보귀신의 발자국
소리가 둘리는 듯 하였다. 쿵, 쿵, 쿵. 그는 입고 잇던 웃옷으로 귀를 틀어 막았
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조니는 의사가 다시 장사를 시작하려고 하자 그의
곁을 떠났다. 의사는 조니에게 아무런 악감정도 품지 않았다. 그는 조니와 악수
를 나누며 영리함이 곧 힘이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조니는 계속해서 바
보귀신을 피해 떠돌아 다녔다. 그러던 중 어떤 마을에 도착한 그는 '사환 구함'
이라는 광고가 붙어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고급 모직으로 만든 검은 양복을 입은 가게 주인이 고상한 척 거드
름을 피우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조니는 그에게 바보귀신에 관하여 말하려
고 했으나 그 주인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단지 조니를 살펴보았고 곧
그가 유순하고 나이에 비해 힘이 셀 것 같다고 판단하였다. 그를 고용한 후 가
게 주인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얘야, 빈둥거리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빈둥빈둥 지내지 말라구요?"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조니는 말했다.
"아무렴." 상인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확실히 말해 두지만 바보는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없어! 열심히 일하면 발전
할 수 잇지. 그러니 만일 어리석은 생각이 나면 네 머릿속에서 그 싹을 잘라 버
리고 기억하지 말도록 해라."
조니는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한 후 그 가게에서 1년 반 동
안 일했다. 그는 가게를 청소하고 덧문을 열고 닫았다. 그는 또 심부름을 다니고
물건을 포장하면서 하루에 12시간씩 바쁘게 일하였다. 원래 유순하고 정직ㅎ산
그는 곧 주인의 신임을 얻었다. 주인은 그의 월급을 오려 주었고 직접 손님을
맞데 했으며 장부 일도 배우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조니는 한밤중에 잠
을 깼다. 그는 아직은 멀었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바보귀신의 육중한 발자국 소
리를 들은 것 같았다. 쿵, 쿵.
"주인님, 죄송합니다만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날 그는 주인에
게 가서 말했다.
"조니, 나도 그말을 들으니 섭섭하구나. 열심히 일했는데... 만일 월급 때문에
그렇다면..."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조니는 말했다.
"그러나 주인님. 괘찮으시다면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만일 제가 계
속 이곳에서 일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 참 어려운 질문이군, 나 별로 자화자찬하는 성격
은 아니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잇지. 나는 어렸을 때 가게 청소부터 시작했단다.
야심에 가득 찬 똑똑한 젊은이인 너같은 친구가 여기서 일을 계속한다면 나처럼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니?"
"어떻게 성공하셨는데요?"
상인은 약간 당황하는 듯했으나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말했다.
"글세, 나는 자랑하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네게 이야기해 줄 수 있지.
10년 전 나는 이 마을에서 가장 부자였고ㅛ 5년 전에는 우리 군에서 가장 부자
가 되었지. 이제 5년 후쯤 나는 우리 주에서 가장 부자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
단다."
이 말을 하면서 그의 눈은 약간 빛났으나 조니는 그의 얼굴을 무덤덤하게 바
라보고 있었다. 그의 턱은 바위처럼 단단했으나 얼굴 혈색은 좋지 않았으며 피
부는 축 늘어져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조니는 문득 지난 1년 반 동안 같이 지내
면서 손님과 거래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가 진정으로 스스로를 즐기며 사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러나 그것이 성공이라면 저는 정말로 떠나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바보귀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중인데 만일 제가 여기에 계속
머물면서 주인님과 같이 된다면 그가 곧 저를 잡으러 오고 말 것입니다."
"이 건방진 풋내기 같으니라구! 이 돈 가시고 당장 꺼져버려." 순식간에 얼굴
이 붉어진 상인은 고함쳤다.
조니는 순식간에 다시 길거리로 내몰렸다. 그러나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해진
그는 휘파람을 불며 길을 떠났다.
이 일이 잇은 후 그는 많은 사람들 밑에서 일을 하였으나 여기서 그의 인생역
정 모두를 소개하지는 않겠다. 조니는 잠시 발명가를 위해 일하기도 했으나 어
느 날 그는 우연한 기회에 발명가에게 자동으로 감기면서 영원히 멈추지 않는
그의 발명품이 도대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물어보고는 그와 결별하였다.
그 발명가는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과학의 아름다운 열매라고 목청을 높였
지만 그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날 밤 멀리서 다가오는 바보귀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조니는 아침에 일어나자 곧 길을 떠났다. 그후 그는 사람
좋은 목사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조니는 정말로 오랫동안 그와 지내고 싶어졌
다. 어느 날 우연히 조니는 목사에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 보았다. 다른 일에는 별로 편견이 없던 목사였지만 이 질문에는 한 가지
답만을 내놓았다. 그는 그들은 착한 사람일 수도 잇다고 인정하였으나-그는 또
그그들이 꼭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인정했다-가장 훌륭하고 가장 현
명한 사람까지도 포함하여 그들 중 어떤 사람도 천국에는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교리와 교회가 정한 요건이 있는데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니는 다시금 떠나야만 했다. 그후 그는 잠시 동안 늙은 술주정뱅이
바이올린 연주자를 따라 다녔다. 물론 그 늙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한 가지, 그는 당신의 두 볼에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감동
적인 연주를 할 수 잇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최상의 연주를 할 때 조니
는 바보귀신이 그로부터 대단히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결점과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연주할 때의 그에게는 힘이 있어보였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그는 술에 취한 채 도랑에서 숨졌다. 이때 그는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잇던
조니에게 바이올린을 주었으나 그에게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 불론 조니도 곡을
연주할 수는 있었지만 그 술주정뱅이 여주자처럼 할 수는 없었다. 조니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그후 조니는 우연히 하 무리의 군인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는 아직 너무 어
려 군인이 될 수 없었지만 군인들은 조니를 귀여워하여 자기들과 함께 지내게
해주었고 얼마 동안 시간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대위는 지금까지 조니가 본 사
람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었고 육해군의 조례와 규범들을 환하게 꿰고 있
어 모든 것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엇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이 인디언과 싸
우기 위해 서부로 가면서 다시금 해묵은 갈등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밤 대위는
그에게 말했다.
"조니, 우리는 내일 적과 싸운다. 그러니 너는 이곳에 남아 있거라."
"저도 함께 가면 안되가요."
"기것은 명령이야." 대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조니에게 몇 가
지 지시를 하고 그의 아내게게 보내는 편지를 주었다.
"멍청한 대령 때문에 우리는 복병이 숨어있는 줄 뻔히 알면서 그 곳으로 가야
돼."
"그분에게 말씀드리세요."
"말했지. 하지만 그는 대령 아니냐."
"대령이든 아니든 만일 그가 바보라면 누군가가 그를 말려야지요."
"군대에서 그럴 수 없단다. 명령은 명령이지."
그러나 복병에 대한 대위의 추측은 빗나갔다. 그 다음 날의 전투에서 먼저 공
격을 감행한 인디언들은 참패하였다. 모든 상황이 끝난후 대위는 전문가처럼 말
했다.
"아주 멋진 싸움이었어. 만일 그들이 복병을 배치했었으면 우리를 이겼을 텐
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승산이 없었지."
"그런데 도대체 왜 그들은 복병을 배치하지 않았을까요?"
"글세,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명령을 받았겠지. 자 이제 너도 군인이 되는 것
이 어떻겠니?"
"글세요. 야외에서 생활하는 것은 좋지만 한 번 생각해 보겠어요"
그는 대위도 용감했지만 인디언들도 용감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아
마 이들보다 용감한 사람들은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종합해 생각
하던 조니는 마치 하늘로부터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작전이 끝날 때까지만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대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군대
를 떠났다.
물론 그때 그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젊은이다운 생각과 감덩을 지
닌 청년으로 자라고 있었다. 이즈음 그에게 있어서 바보귀신은 어렸을 때의 꿈
에나 나타나던 존재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거의 잊고 지냈다. 가끔씩은 그런 존
재가 있다고 믿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안에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남아 있었고 그 때문에 그
는 계속해서 방황하였다. 그는 이것을 야심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였다. 체크 무늬 셔츠와 코르덴 바지를 입고 한손에는 히코리 나무로 만든 지팡
이를 들고 세상을 돌아 다니는 몸집이 큰 사람에 관한 악몽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그러한 꿈을 꾼다는 사실에 화가 났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
었다. 어떤 일도 그 악몽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해주지는 못했다. 스무 살쯤 되
었을 때 그는 마침내 두려움에 떨기 시작하였다.
"바보귀신이 실세로 있건 없건 간에 이제는 부딪쳐 봐야겠어. 남자는 자신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각가 있
어야 해. 나는 영리함과 돈, 그리고 그외 몇몇 다른 가치들을 바로 그 무엇으로
생각했었지. 그러나 이것들에게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 이제부터 나는 학
식을 쌓아 보겠어." 그는 혼자 중얼 거렸다.
그래서 그는 그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책을 구해 읽었다. 가끈씩 드려오는 바
보귀신의 발자국 소리르 이겨내면서 그는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그러나 책들마
다 각기 주장하는 것들이 달라 그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읽었고 마침내 그의 머리는 마치 고기가 잔뜩 채워진 소시지처
럼 책에서 얻은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는 혼자 생각하였다.
'책을 읽으면 재미는 있지만 약간은 시대에 뒤떠어진 지식을 주는 것 같단 말
이야. 이제는 워싱텅으로 가서 그곳에 사는 현인을 만자 물어봐야겠어. 미국 같
은 나라를 다시리려면 틀림없이 대단한 지혜가 필요하겠지. 만일 나의질문들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곳에 살고 있을 거야.'
그래서 그는 짐으 ㄹ꾸려 워싱턴으로 갔다. 그는 젊은이치고는 겸손한 사람이
었기 대문에 곧바로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생각은 품지 않았다. 그는 하원의원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원의원을 만났는데 그는 조니에게 미국
의 훌륭한 젊은이로서 지금 해야 할 일은 공화당 지지표를 던지는 것이라고 말
했다. 조니는 이 말에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으나 그가 원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다음 그는 상원의원을 마나러 갔다. 상원의원은 그에게 미국의 훌륭한
젊은이라면 마땅히 민주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 역시 그가 원하던
말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좋은 인상을 주는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웬일인지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바보귀신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먹어야 하기 때문에 조니는 우선 일자리를 찾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처음 만났던 하원의원에게 마음이 끌렸는데
그 이유는 그가 마틴즈빌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그를 처음 찾아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하원의원의 조카딸이 그를 방문하기 위하여 동부로
왔는데 그후로 조니는 자신의 목표와 바보귀신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
녀는 다름아닌 학교 시절 자신의 옆자리에 않았던 수지 마쉬였던 것이다. 어렸
을 때보다 한결 더 예뻐진 그녀를 보자 조니 파이의 심장은 고동쳤다.
삼촌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조니 파이에 대하여 설명하자 그녀는 말했
다. "오, 조니 파이. 마틴즈빌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기억하지요. 내가 집에 편지
를 쓰면 아마 모든 마을 사람들이 기뻐할 거예요. 당신이 인디언들을 죽인 이야
기, 영구히 움직이는 기계를 발명한 것, 유명한 의사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
닌 이야기, 그리고 의류업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 등 당신에 관한 소식은
모두가 알고 있지요 정말로 멋있는 이야기들이에요"
조니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글세요. 일부 이야기는 약간 과장된 것 같군요.
그러나 모두 제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니 감사하군요. 그렇다면 이제 마틴즈빌
사람들은 더 이상 바보로 보지 않겠군요."
"저는 당신을 결코 바보로 생각한 적이 없어요" 수지가 약간 미소를 띠면서
말하자 조니의 가슴은 또 두근 거렸다.
"저는 늘 당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줄
은 정말 몰랐어요. 옛날 이아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방앗간 주인과 그의 아내
는 어떻게 되었나요?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떠났던 것 같아요. 양쪼게 모두 잘
못이 있었겠지만 저도 그분들에게 많은 누를 끼쳤을 겁니다." 조니는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그분들은 모두 돌아가셨지요. 그후에 새주인이 방앗간을 맡았느데 사람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요. 실은 그 사람이 온 후 방앗간은 점점 기울고 있어
요."
"그것 참 안됐군요. 가능성 있는 방앗간이었는데." 그는 계속하여 많은 질문을
했고 수지는 기억을 더듬어 대답해 주었다. 두명의 젊은이가 이런 대화를 할 때
시간 가는 줄 모근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 것이다.
조니 파이는 그 해 겨울 그의 일생 중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의 생각
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바보귀신이 아니라 수지 마쉬였다. 처음에 그는 그녀
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나 곧 이어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할 리가 없
다고 확신했으며 다음 순간에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빠진 채 온통
머리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일이 잘 풀려 그녀와 결혼을 약속하
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껴사. 그런데 그
날 밤 그는 한밤중에 깨어나 바보귀신이 그를 쫓아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쿵, 쿵, 쿵.
잠을 설친 그는 퀭한 눈으로 아침을 먹기 위하여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수지의 삼촌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손을 비비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니, 가장 좋은 넥타이를 매도록 하게. 오늘 대통령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
데 자네도 같이 가세. 자네가 내 조카딸의 약혼자임을 대통령에게 알리고 싶거
든."
"대통령을 만난다구요!" 놀라움에 조니는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 자네도 알다시피 처리해야 할 조그만 법안이 하나 있는데... 이런 이야
기는 그만 두세. 어쨌든 뒷머리를 단정히 하게. 마틴즈빌 사람들이 오늘 우리들
의 모습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될걸세."
조니는 큰 짐을 덜어낸 듯 몸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는 마쉬씨의 손을 움켜
잡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에벤 삼촌!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제 드디어 바보귀신으로부터 안전한 한 사람을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또 만일 한 번이라도 그러한 사람을 마나볼 수만 있다면
그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방황도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대통령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대통령이고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잇다는 점이다. 그는 또 대통령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대문
에 아직은 숭어처럼 활력이 넘쳤고 의회와의 갈등 따위는 전혀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조니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대통령을 바라보며 감격해 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바보귀신이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대통령과
같은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통령과 하원의원 정치에 관해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윽고 조니
가 말할 차레가 되었다.
"자, 젊은이.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왔는가? 내가 보기에 자네는 매우 건실하고
훌륭한 미국의 젊은이인 것 같은데." 대통령은 친절하게 말했다.
조니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하원의원이 재빨리 끼어 들었다.
"그저 한 마디 충고면 됩니다, 대통령 각하. 그저 그에게 도움이 되 말씀 말이
지요. 제가 데리고 온 이 젊은이는 모험적인 삶을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 토카딸과 결혼하여 한 곳에 정착하긱 결정했답니다. 따라서 현재 그에게 가
장 필요한 것은 각하의 지혜로운 충고 한 마디입니다."
대통령은 조닐ㄹ 매우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글세요. 만일 그가 원하는 것이 그것 뿐이라면 별로 어려운 청이 아니군요.
나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만 원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조니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
는 사이에 자신의 과거의 삶에 대해 말하도록 유도하였다.
"아, 자네는 절말로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직업을 가졌었군. 그러나
그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토록 다양한 경험을 해보았으니 이제 정치
를 할 차례 같은데." 대통령은 손뼈을 치며 말했다.
"글세요. 물론 제가 워싱턴에 온 이후로 그것에대하여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
닙니다. 그러나 아직 제가 정치에 적합한 사람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
니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자네는 이미 내 연설문 작성을 도와준 경험이 있으니 연설문을 쓸 수 있을
걸세. 자네는 호감을 주는 친구일 뿐 아니라 자수성가했으며 게다가 전쟁을 수
행한 경험도 있으니 말이야... 끝내주는군. 아이쿠, 제 말투를 용서하십이오, 각
하... 이친구는 가만히 있어도 오백 표의 가치가 있을 것 같군요."
"두 분 모두 과찬의 말씁이십니다. 그러나 제가 정치에 입문한다고 하면 과연
어떤 모습이 될까요?" 겸연쩍어 하면서도 우쭐해진 조니는 말했다.
대통령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국의 대통령직은 미국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되고 싶다는 야망을 가져볼만
한 것이지. 물론 선거를 통해서 당선되어야 하지만 말일세."
멍해진 조니는 간신히 말했다.
"오,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군요. 글세, 정말 근사한 일이군
요. 그러나 책임도 매우 무겁겠지요."
"물론이지." 선거운동용 휘장에 새겨진 그의 사진과 똑같은 모습으로 대통령은
말했다.
"정말 그 책임이 너무도 막중할 것 같습니다." 조니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
떻게 사람이 그리도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
습니다. 각하, 제게 한 가지 대답을 해주시겠습니까?"
"오, 물론이지."
대통령으로서의 긍지와 무거운 책임감에 대한 생각으로 더욱 엄숙해진 대통령
은 점점 더 선거운동용 휘장에 새겨진 그의 사진과 닮은 모습으로 변해 갔다.
"저, 어리석은 질문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지반 제 질문은 바로 이겁니다. 우리
나라는 대단히 크로 그 어느 나라보다도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고 잇습니
다. 대통령께서는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사람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으십
니까?"
잠시동안 대통령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곧 조니 파이르 ㄹ
흘긋 보고서는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하느님의 도움과 위대한 우리 당의 규약에 따라서 나는 ..."
그러나 조니 파이는 대통령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이야기
하는 순간에도 복도 저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
것은 비서나 경호원의 발자국 소리 같지는 않았다. 그는 대통령이 '하나님의 도
움으로'라는 말을 할 대 발자국소리가 약간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어느 정
도 마음이 놓였다.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조니는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 각하. 바로 그 점이 제가 알고 싶어하던 것입니다. 이제
저는 마틴즈빌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마틴즈빌로 돌아간다고?" 대통령은 놀랄 표정으로 말했다.
"예, 각하. 저는 아무래도 정치에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니, 미국의 대통령께 드릴 말씀이 겨우 그것 뿐인가?" 실망한 마쉬 의원은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는 확실히 하원의원보다 이해심
이 많은 사람이었다.
"잠깐 진정하시오. 마쉬 의원. 이 젊은이는 적오도 솔직하지 않고. 나는 그의
용모가 마음에 듭니다. 더욱이 그는 지난 6개월 동안 나를 마나러 온 모든 사람
들 중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오. 물론 백악관 고양이는 예외였
지만요, 아니 고양이도 야옹야옹 울면서 무언가를 요구했지요. 이보게 젊은이,
자네는 대통령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군. 솔직히 나는 자네를 탓할 생
각이 없네. 그러나 혹시 마틴지빌의 우체국장 일을 할 생각은 없나?"
"마틴즈빌의 우체국장이라구요 그러나..."
"오, 물론 그것은 작운 우체국에 불과하지. 그러나 나도 일생에 단 한 번만이
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네. 의회가 아무리 반대해도 말일세. 자, 어떤
가? 할 텐가 안할 텐가?"
조니는 자신이 머물렀던 곳들과 택했던 많은 직업들을 기억해 냈다. 이상하게
도 도랑에서 죽은 술취한 늙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머리에 떠올랐으나 자신은 그
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대부분 마틴즈빌과 수지 마쉬를 생
각했다. 조니는 순간 바보귀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으나 그르 무시했다.
"오,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하. 그렇게 되면 저는 수지와 결혼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것 참 좋은 이유가 되겠는걸. 자, 그럼 내 곧 서류를 작성하도록 지시하겠
네."
그는 약속대로 수지와 결혼하여 마틴즈빌로 돌아갔다. 우체국장의 업무를 익
힌 조니는 그것이 대부분의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할 만한 일이라고 느꼈다. 마
틴즈빌에는 우편물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틈틈이 방앗간을 돌보았
는데 그 일도 재미있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바보귀신과의 셈을 청산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는 수지와의 행복한 생활에 젖어
이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이 별로 없었다. 얼마 후 그들은 아기를 낳았다. 별로
특별한 것이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기라는 의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낳
는다는 것은 젊은 부부에게 매우 경이로운 경험일 것이다.
그의 아들이 한 살쯤 되었을 무렵의 어느날 조니 파이는 강가를 따라 걷고 있
었다. 그 길은 언덕을 따라가는 길보다 약간 멀었으나 때마침 선선한 저녁이었
고 또 남자는 아무리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더라도 가끔씩은 혼자 걷고 싶을 때
가 있는 법인데 그때가 바로 그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회상할 때 그러하듯 조니도 지금까지 자
신의 삶이 매우 놀랍고도 이례적인 경험들로 가득 차있다고 느꼈다. 사실 그는
과거에 대한 생각에 너무도 골몰한 나머지 길가에 숫돌과 다른 연장들을 늘어
놓고 낫을 갈고 잇는 늙은이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 노인의 마차 근처에는
늙고 갈비뼈가 모두 드러날 정도로 여윈 하얀 말이 풀을 뜯고 있었다. 노인은
큰 낫을 가느라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아이쿠, 죄송합니다. 여기 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요. 마침 잘 되
었군요, 내일 저희 집에 좀 들려 주십시오. 제 집사람이 칼을 좀 갈아야겠다고
했습니다."
조니는 여기서 말을 멈췄다. 노인이 조니를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기 땜
문이었다.
"아니, 이게 누군가? 조니 파이 아닌가!" 노인은 말했다.
"그래 잘 있었나?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군. 사실 때때로 나는 자네를 잡아
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네. 그런데 마침내 자네가 나타났군."
조니 파이는 이제 어른이었지만 이 말을 듣고는 떨기 시작하였다.
"설마 당신이..." 그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당신이 그 사람은 아니겠지요! 맙소사, 저는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어요. 그느 체크 무늬 셔츠를 입고 한쪽 끝에 압덩어리가 달린
히코리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다녔는데요"
"오, 그렇지 않아." 노인은 매우 조용하게 말했다.
"자네는 나를 그런 모습으로 생각했겠지만 나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지."
조니 파이는 큰 낫이 숫돌 위에서 썩썩 소리를 내며 갈리는 소리를 들었다.
노인은 그 위에 물을 뿌리고 날을 검사했다. 그런 후 노인은 날이 마음에 안드
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자, 조니, 준비되었나?" 얼마 후 그는 말했다.
"준비가 되었냐구요? 물론 아직 안되었습니다." 조니는 목쉰 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늘 그런 말을 하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는 동안
에도 그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다.
조니는 아마의 땀을 닦으면서 이제는 노인과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제 말을 좀 들어 보세요. 만일 당신이 저를 조금 일찍 혹은 조금 늦게 찾아냈
다면 제가 이렇게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지금 저는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내와 자식들이 있지." 노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노인
은 외전 숫돌의 페달을 밟으며 낫을 갈았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늦은 저녁,
환하고 눈부신 불꽃들이 위로 날아 올랐다.
"오, 제발 그 소리 좀 멈출 수 없습니까?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군요." 조니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소리쳤다.
"분명히 말하지만 저는 당신을 따라갈 수 없어요. 안, 따라가지 않겠어요. 아직
때가 되지 않았거든요. 아직..."
노인은 회전 숫돌을 멈춘 후 큰 낫으로 조니 파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게 그럴 듯한 이유 하나만 말해보게.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긴
있지. 그렇지만 자네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도 되는가? 현명한 이들은 사람들
이 그리워 하겠지만 자네가 과연 현명한가?"
"아니오. 한 번 현명하게 될 기회가 있었지만 포기했었지요." 약초 의사를 쌩
각하면서 그는 말했다.
"첫째," 손을 꼽으면서 노인은 말했다. "부자가 가버리면 누군가가 아쉬워하겠
지. 그란 보아하니 자넨 부자는 아니야."
"그건 맞아요." 상인을 생각하며 조니는 말했다. "또 되고 싶지도 않구요."
"현명화과 부는 됐고, 용감한 군인으로 영웅이 되는 방법도 있지. 만일 자네가
이런 사람들 중 하나라도 괸다면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
조니 파이는 싸움이 끝난 후 인디언들의 시체가 널려 있는 전쟁터의 모습을
생각하고는 가볍게 몸서리쳤다.
"아닙니다. 저는 싸워본 적은 있지만 영웅은 아닙니다."
"자, 그러면 또 있지. 종교와과학 말일세." 노인은 참을성 있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자네가 어떠했는지 나는 다 알고 있
지. 만일 내가 미국의 대통령을 상대해야 한다면 나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
낄 걸세. 그러나..."
"오, 제가 대통령이 아니라는 점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조니는 볼멘 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끝냅시다."
"자네 입장은 지금 그다지 좋지 않아." 노인은 머리를 저으면서 말했다.
"나는 자제르 ㄹ보고 좀 놀랐네. 자네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하여 도망다니느
라 젊은날을 다 보냈지. 그런데 어른이 되었을 때 자네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원
가? 결혼한 후 나제의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하여 자라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있지 않나! 결국에는 자네도 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나!"
"저는 바보일지도 모르지요." 조니 파이는 고통스러워 하며 말했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들 중 바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
까? 어쨌든 저는 아내와 자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직업에 관해서 말인데 누군가
는 우체국장 일을 ㅎ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우편물을 받을 수 없을 것입
니다."
"사람들이 우편물을 받지 못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나?" 큰 낫을 들어 보며
노인은 말했다.
"엽서에 담긴 내용을 볼 때 그것을 못 받아도 무슨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편물을 정리하는 것이 나의 직업인 이상 저는 그 일에 최선
을 다할 것입니다." 조니 파이는 말했다.
노인이 낫을 너무도 힘차게 갈았기 때문에 잔디 위로 불꽃들이 길게 솟구쳐
올랐다.
"글세, 나도 내 일에 충실하겨고 노력하고 있네. 내 계획을 말해주지. 자네는
이미 내 손아ㄱ 아네 들어와 있네. 그것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지. 그런데
자네를 훑어보니 아직 때가 된 것 같지 않구먼. 따라서 내 자네를 잠시 동안 내
버려 두겠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만일 자네가 사람이 어떻게 하면
바보가 아니고 사람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하면 영원히 자네를 놓아줄
수도 잇지. 이런 거래는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지만 말이야. 이따금씩 무언가를
혼자 결정해야만 할 때도 있는 법이지. 자 이제 가보게, 조니 파이."
말을 마치면서 그는 불꽃이 유성의 꼬리처럼 길게 생길 정도로 낫을 힘차게
갈았다. 조니 파이는 들판의 공기가 이때처럼 달콤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느
끼며 길을 걸었다.
조니 파이는 불안감으로부터 약간은 해방되었으나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
다. 때때로 수지는 아버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를 방해하지 말라고 아이들
에게 주의를 주어야만 했다. 세월이 살같이 흘러 어느덧 마흔 살이 되 조니 파
이는 자신의 나이가 스스로도 믿어지지지 않았다. 가끔씩 등을 구부릴때를 제외
하고는 별로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는
마틴즈빌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건실한 주민이자 가장이었으며 사뢰에 대한 깊
은 관심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을 모습을 생각하며 그는 어느 정도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덤덤하게 느껴졌
다.
조니 파이가 노인을 다시 만난 것은 그의 장남이 고기를 잡다가 물에 빠져 죽
은 후였다. 조니으 마음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증오와 고통으로 가득 찼다. 그
는 만일 이번에 노인을 만나면 가만 놔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조니 파이가 노인의 멱살을 잡으려고 아무리 손을 뻗쳐도 그ㅓ의 손은 허공과
안개만을 가를 뿐 노인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는 낫이 갈아지면서 내뿜는 불꽃
을 볼 수 있었지만 회전숫돌에는 손도 댈 수 없었다.
"비겁한 놈! 일어나서 남자답게 싸우자!" 조니 파이는 소리쳤다.
그러나 노인은 고개만 끄덕익뿐 숫돌을 돌리며 계속 낫을 갈고 있었다.
" 차라리 나를 잡아 갔어야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이야! 지금이라도 나를
잡아가란 말이야!" 조니 파이는 힘껏 소리쳤다.
말을 마치자 그는 노인의 손에서 큰 낫을 빼내려고 했으나 꼼짝도 할 수가 없
었다. 그는 잠시 동안 잔디 위에 쓰러져 누웠다.
"시간은 가게 마련이야. 아무렴, 가게 마련이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
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아들을 잃은 슬픔은 결코 치유되지 못해!" 조니 파
이는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은 말했다. "그럴수는 없겠지. 그러나 시간은 흐르게 마
련이야. 자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아내를 과부로 만들고 아이들을 애비 없
는 자식들로 만들 작정인가?"
"아니, 말도 안되는 소리. 그렇게 할 수는 없지. 남자로서 어떻게 그런 무책임
한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조니 파이는 말했다.
"그렇다면 어서 집으로 돌아가게, 조니 파이. " 노인은 말했다. 조니 파이는 집
으로 발걸음을 옮겼으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주름살들이 패여 있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조니 파이의 자식들은 장성하여 분가하였고 아이들을
낳았다. 어느덧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굽은 수지도 그의 곁을 떠났다. 수지
의 장례를 치루는동안 마을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입을 모았으나 조니 파이는 그
렇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의 말이 예전처럼 분명하게 들리지 않았고
태양도 그전처럼 따뜻하게 비추는 것 같지 않았다. 또 때때로 그는 저녁을 먹기
전 의자에서 잠이 드는 경우도 있었다.
수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한 번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 마틴즈빌을 지나가
면서 조니 파이와 악수를 나누게 되었다. 신문은 조니가 50년 전에도 대통령과
악수를 한 적이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조니 파이는 그 신문 기사를 오려 그의
지갑에 따로 보관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대통령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
지만 50년 전 당시의대통령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에 관
한 기사에 매우 만족했다.
그는 더 이상 강을 따라 난 길로 가지 않았다. 너무 멀어서라기보다는 그저
그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
신을 돌보는 손녀 몰래 그 길을 찾았다. 조니 파이는 그 길이 약간 가파른 편이
라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어이쿠, 이게 누군가? 잘 있었는가 조니 파이?" 낫 가는 노인이 말했다.
"좀 크게 이야기해 주시오. 내 귀는 완벽한데 사람들이 종전처럼 분명하게 말
하지 않는 것 같소. 이 말을에 처음이요?" 조니 파이는 말했다.
"아, 일이 그렇게 되었군." 낫 가는 노인은 말했다.
"예, 일이 그렇게 되었다오." 조니 파이는 말했다. 그는 왠지 이 사람을 두려워
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안경을 쓴 조니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
으나 도대체 왜 그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이데... 나는 결코 사람이 얼굴ㅇㄹ 잊어버린 적
이 없는데. 당신의 이름이 입 안에서 뱅뱅 돌 뿐 생각이 나지 않는구려." 그는
약간 초조한 듯이 말했다.
"오,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우리는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지. 수년 전 내
가 자네에게 질문을 하나 했지. 기억나는가?" 낫 가는 노인은 말했다.
"아, 이제 생각이 나는군." 조니 파이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노인다운 큰
소리로 웃었다. "내가 여태까지 받은 질문들 중에서 그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질문
이었지."
"뭐라고?"
"물론이지. 당신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사람이면서 동시에 바보가 아닐 수 있
는거라는 질문을 내게 했지ㅣ. 그 답은 죽4은 후 무덤에 묻혔을 때이지. 그 어떤
바보도 답을 알 수 있을 걸."
"그럴까?"
"물론. 내가 아는 것은 당연하지. 11월이 되면 나도 이제 92살이 된다네. 나는
두명의 대통령과 악수를 한 적이 있는데 내가 처음 악수를 한 대통령은..."
"그 이갸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그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네. 자네 말대로 만일 모든 사람ㄹ들이 다 바보라면 세상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조니 파이는 약간 짜증 섞인 어투로 말했다. "오, 몰론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많이 잇지. 옹감한 사람, 현명한 사람, 그리고 영리한 사람 등이 있는데 세상을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이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겠지. 그러나 이
들은 모두 함께 섞여 있어. 맨 먼저 바다로부터 육지를 향해 기어나왔던, 아니
당신이 좀더 좋아할 표현을 빌리면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했던 피조물은 바보들
뿐이었지. 다른 사람들이 어떻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되고 그들이
한 일을 보고 판단해야지. 나는 누군가에 의해서 바보라고 생각되어 본적이 없
는 사람은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아"
"자, 자네는 나의 질문에 최선으 ㄹ다새 대답했다. 사람에게서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나! 이데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군."
"그것이 뭐였지? 무언가 있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
는지 통 기억이 안나는군."
노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 이늙은 바보야, 이제 너를 놔 주겠다. 마지막
심판날까지 너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위에서 이 사실을 알면 문제가 생길지
도 모르겠으나 가끔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도 좋겠지."
"뭐라구? 그건 생각해볼 문제인데."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왜? 나는 좀처럼 인간에게 연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일이 없어." 약간의 모욕
감을 느끼며 낫 가는 노인은 말했다.
"글세. 나도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문제가 있어." 그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 후 말을 이었다. "안, 당신은 이해못할 거야. 당신 얼굴을 보아하니 아직 70
살도 채 안된 것 같은데 그렇게 젊은 사람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나."
"나를 한 번 이해시켜 보시지."
"글세. 한 번 들어보게." 조니 파이는 머리를 또 다시 긁적이며 말했다. "만일
당신이 이러한 제안을 40년 전뜸, 아니 20년전 쯤에라도 했으면 내가 이러지는
않을 거야. 그라나 글세 이제는... 한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지. 잘 생각해
봐." "글세, 물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나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 텐데."
"나도 알지. 나의 틀니는 그런대로 좋은 것이지만 이제는 덜거덕 거리는 소리
가 지겨워 죽겠어. 그리고 이 안경말이야. 이것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겠지?"
"미안하지만 그렇다네." 낫 가는 노인은 말했다. "나는 시간의 일에 간섭할 수
없어. 아는 바와 같이 그것은 내 권한 밖의 일이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180사
링 된 몸으로 90살이 몸과 같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어. 그래도 어
쨌든 너는 경이로운 존재가 될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보다시피 지금도 나는 이미 늙은 몸이야. 그렇게 늙
게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그것은 사실이지. 수지를 비롯하여 나의 자식과 친구
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웬일인지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젊은이들과 가까
이 지내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야. 주변에 의미있는 말 한 마디 나눌 수 있는
친구도 없는 상태로 최후의 심판까지 살아있어야 한다고? 글세, 제안은 고맙지
만 거절하겠어.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 사실 마틴즈빌에 대해서 미안하제
생각하고 있어. 지도적 위치의 시민이 최후의 심판날까지 살아있으면 이지방과
상공회의소로서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되는 셈이겠지. 그러나 적어도 일생에
한 번 정도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그는 말을 멈추고 노인
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내게 아이크 리비스를 능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그의 얘기
를 듣고 있노라면 지금까지 90살에 가깝게 산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는 것 같
은 생각이 들 정도지. 그러나 내 생각에는..."
"미안하지만 유한 증권을 발행할 수는 없어." 낫 가는 노인은 말했다.
"아니, 뭐 그냥 생각해본 것 뿐이야. 아이크는 괜찮은 친구지."조니 파이는 잠
시 동안 기다리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지. 내세말이야. 그곳에 가면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는 기침을 했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정말
그렇다면..."
"그건 말해줄 수 없어. 이쯤에서 그만 두지."
"그저 한 번 물어본 건데." 조니 파이는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그는 어둠을
응시했다. 큰 낫에서 마지막으로 불꽃이 쏟아져 나오고 이내 회전 숫돌이 머추
었다.
"흠, 낫이 참 잘 갈졌군. 그러나 예전에는 이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갈았지."
조니 파이가 날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무언가 소리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던 조니는 잠시 동안 근심스러운 표정으
지었다.
"오, 맙소사. 저기 헬렌이 나를 찾으러 오고 있군. 그녀가 나를 집으로 데려갈
거야."
"이번은 안될 걸. 그래, 좋은 강철로 만들어진 이 낫의 성능은 매우 좋거든.
자, 이제 가지, 조니 파이."
#작품해설
삶에 대한 눈뜸과 죽음과의 친화
'조니 파이와 바보귀신'은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익살스로우면서도 예리한
관찰과 죽음에의 친화과정을 중심으로 조니 파이라는 고아가 자라나고 성숙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을 점묘법으로 그려놓은 듯한 단편이다. 인간은 무
덤 속으로 들어 가기 전에는 누구도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전제와 함
께 제시되는 여러 어리석음의 양태가 독특한 작가의 인생관을 보여준다.
가짜 약장수(불치 혹은 난치의 분야가 남아있는 한 아직도 의효업은 가짜 약
장수 같은 측면이 있다.), 발명가, 예술가, 군인, 정치가-조니 파이가 그들의어리
석음을 보고 떠난 여러 분야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
들이다. 조니 파이는 특이한 관점에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고 그걸 반복하기
싫어 달아나지만 끝내 바보귀신으로부터 달아나지는 못한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 시골 우체국장으로 자족하면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는 끊임없이 바보귀
신이 자신을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낫 가는 노인으로 형상화된 바보귀신 혹은 죽음의 사신과 정면으로
맞서는 과정으로 전환되면서 조니 파이는 죽음과의 친화로 접어든다. 죽음에 대
한 젊은 날의 격력한 대립 내지 극복의지는 차음 타협적인 태도로 바뀌고, 이어
분노 ㅅ인 무력감에서 체념으로 진행되다가, 마침내는 순응에 이르기까지의 심
리적 과정은 임상의학이 오랜 세월에 결쳐 정리한 죽음의 여러 단계와 크게 다
르지 않다. 삶이란 우리가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존재들과의 관계 때문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며, 비정한 시간이 그 모근 것을 파괴해버린 뒤에는 결국
삶도 무의미해진다는 늙은 조니 파이의 터득도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데가 있
다.
빈세트 베네는 19세기말에 활동했던 미국의 작가로 민담과 전설에서 취재한
단편들로 국민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장편에서 크게 빛으 ㄹ보지
못해서인지 강단평론가들에게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악마와 대니
엘 웹스터'란 단편 외에 우리나라에는 별로 소개된 작품이 없고 그의 업적에 대
해서도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내가 '조니 파이와 바보귀신'을 읽은 곳은 서부전선의 임진강변으로 기억한다.
신산스럽던 군대생활도 막바지로 접어들어 제대까지의 몇 달을 영문판 문고본이
나 읽고 지내던 때였다. 그날 빨래를 핑계로 부대원 몇과 임진강가로 나간 나는
몇 개 안되는 옷가지를 대강 빨아 널고 강둑에서 초봄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현대 미국 단편소설집'이란 표제가 붙은 영문 문고판을 펴들었다가 그 맨 앞에
서 이 작품을 만났다.
내 시원찮은 독해능력이 상상력으로 보충된 탓인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처음
그 작품을 다 읽고난 뒤의 내 느낌은 단순한 감동을 넘어서는 충격적인 그 무엇
이엇다. 단편으로 성장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렇게 재미와 품위를 아울러 지니면서 삶의 오의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게 내게는
경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뒤 제대한 나는 전문가의 정확한 번역을 찾아보았다. 어쩌면 내가 외국어
의 추상겅과 애매상 때문에 작품을 과대평가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 까닭
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심인지 이 작품의 번역을 통 구할 수가 없었다. 몇 년 전
에야 누군가에 의해 '바보 도깨비'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어떤 잡지에 실린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잡지는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번 특강에서 나는 '성장과 눈뜸'이란 주제의 단편 목록 제일 앞에
이 작품을 놓으면서 아울러 연구실을 나란히 쓰고 있는 영문과 강자모 교수에게
특별히 번역을 부탁했다. 이제 번역된 것을 읽어 보니 '조니 파이와 바보귀신'에
대한 내 옛 감동이 반드시 지나쳤던 것 같지는 않다. 그 사이 작품평가의 기준
은 좀 달라졌지만 성장썰의 한 전범으로는 결코 모자람이 없는 명품이란 내 믿
음에는 변함이 없다.
여기서 바보귀신은 fool-killer의 의역이다. fool-killer는 미국 민담에서 바보를
잡아간다는 상상적 존재로 강자모 교수는 원문에 충실하게 '바보 살인자'라고 번
역해 주었으나 아무래도 느낌이 맞지 않아 양해를 구하고 바보귀신이란 조어를
썼다. 자칫 바보가 죽어서 된 귀신으로 선입견을 줄 우려도 있으나 개미를 잡아
먹는 벌레를 개미귀신이라 하는 명명법도 있는 만큼 큰 혼란은 주지 않으리라
본다.
토니오 크뢰거
지은이: 토마스 만 옮긴이: 이 철
1
겨울의 해는 겹겹이 쌓인 구름에 가려, 우유빛의 희미한 빛을 좁은 거리에 던
지고 잇었다. 뾰족지붕의 집들이 늘어선 골목은 눅눅한 바람이 불었고, 때때로
얼음도 눈도 아닌 싸라기 같은 것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교 시간이 되었다. 해방되 아이들의 무리가 포장된 학교 안 마당을 거쳐 격
자 철문 밖으로 쏟아져 나와 종종걸ㅇ을 치며 좌우로 흩어졌다. 큰 아이들은 점
잔을 빼며 책가방을 외쪽 어깨에 높이 추켜올려 메고 오른팔로는 노질하듯 마주
불어오는 바람을 헤치면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꼬마들은 신이 나서 깡충깡총
뛰어 살얼음이 언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고, 물개가죽 가방 속에 든 학용품은 달
그락거렸다. 그러나 종종 위엄있게 걸어오는 상급반 선생님의 보탄 모자와 주피
터 수염을 보면 공손한 눈으로 모두가 다 모자를 벗었다.
"이제 오니, 한스?" 길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토니오 크뢰거는 이렇게
말하면서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친구에게 다가갔다. 한스는 다른 친구들과 이야
기를 주고 받으며 교문을 나와 그들과 같이 가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왜 그러는데?" 이렇게 물으면서 한스는 토니오를 쳐다보았다.
"야아, 참 그렇지. 그럼, 조금만 같이 걷자."
토니오는 입을 다물었고두 눈은 흐려졌다. 호늘 낮에 둘이서 산보를 하기고
한 약속을 한스는 잊어버렸다가, 이제서야 겨우 생각이 났단 말인가? 그런데도
토니오는 그 약속을 하고 나서 줄곧 산보 생각에 즐거웠던 것이다.
"다들 잘가!" 하고 한스 한젠은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는 크뢰거와 산보 좀
할게." 그리고 나서 다른 아이들은 오른쪽으로 가는데, 이 두 아이는 왼쪽 기로
접어 들었다.
한스와 토니오는 방과 후에 산보할 시간이 있었다. 둘 다 네 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점심 식사를 하는 집의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친은 대사업가
들이었으며 여러 개의 공직도 가지고 있는 시의 유력인사들이었다. 한스의 집안
은 벌써 여러 대 전부터 아래쪽 강가에 커다란 목재 적재소를 가지고 있어서,
그곳에서는 강력한 기계톱이 윙윙 쉭쉭 소리를 내면서 통나무를 잘라 내고 있었
다. 그리고 토니오는 크뢰거 영사의 아들이었고, 그 집의 굵고 검은 상호가 찍힌
곡물 자루가 시가를 지나 운반되어 가는 것이 날마다 눈에 띄었다. 또한 토니오
집안이 선조 때부터 살아온 크고 오래된 집은 도시 전체에서 가장 당당한 저택
이었다. 이 두 아이들은 아는 사람이 많아 인사를 하느라고 줄곧 모자를 벗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열네 살밖에 안 되었는데도 이들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먼저
인사를 받기도 했다.
두 아이는 책가방을 ㅇ에 메고 있었으며, 따뜻하고 좋은 옷차림이었다. 한스는
어깨와 등 너머로 폭이 넓고 파란 해군복 칼라가 늘어져 잇는 짧은 해군 자켓을
입고 있었고, 토니오는 허리띠가 달린 회색 코트를 입고 잇었다. 한스는 짧은 리
본이 달린 덴마크 선원모자를 쓰꼬 있었는데, 그 모자 밑에는 옅은 금발의 머리
칼이 한 다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아이는 아주 귀엽고 잘 생겼으며, 어깨는
벌어지고 허리는 날씬했으며 양미간이 널찍하고 날카롭게 쏘아보는 강철색 푸른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둥근 털모자를 쓰고 있는 토니오의 얼굴은 갈색으로
남국적인 윤곽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으며 아주 무겁게 보이는 눈꺼풀과 연
하게 그늘진 검은 눈은 꿈꾸는 듯하고 어딘지 수줍어 하는 듯했다. 또 입과 턱
은 유별나게 부드러운 생김새였다. 토니오의 걸음걸이는 느리고 고르지 못했으
나, 한스는 검은 양말을 신은 날씬한 다리로 경쾌하고 절도있게 걸어갔다.
토니오는 말이 없었다. 그는 괴로워했다. 다소 비스듬히 자라난 눈썹을 짓모으
로 휘파람을 부는 듯이 입을 둥글게 한 채 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먼 곳
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와 얼굴 표정은 토니오 특유의 것이었다.
갑자기 한스는 자기 팔을 토니오의 팔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래서 몇 걸음 가는 동안 토니오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곧 기분
이 꽤 누그러졌다.
"물론 잊어버린 것은 아니댜, 토니오." 한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발밑의 보도를
내려다 보았다. "그저 오늘 날씨가 너무 습기차고 바람이 부니까 아무 일도 되
것 같지 않았어.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리고 네가 나를 기다려
준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네가 벌써 집으로 가 버렸으려니 하고 난
골이 나던 참인데..."
이 말을 듣자 토니오의 마음은 온통 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래, 그러면 우리 둑 너머로 가기로 하자" 하고 토니오는 감동 해서 떠리는
목소리 말했다. "뮐렌 둑과 홀스텐 둑을 넘어서 너의 집까지 데려다 줄게, 한스.
집으로 돌아갈 때는 나 혼자겠지만 조금도 상관없어. 다음 번에는 네가 나를 데
려다 주면 돼."
속으로 토니오는 한스가 말한 것을 꼭 그렇다고 믿은 것은 아니었고, 둘이서
산보하는 것을 한스는 고작해야 자기가 생각하는 것의 반만큼 밖에는 중ㅇㅎ고
있다는 것도 토니오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스가 자신의 건망증
을 뉘우치고 자기를 달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알았다. 더구나 토니오는 한스
의 화해를 거절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 이유는 토니오가 한스 한젠을 사랑했고, 그로 인해서 벌써 여러 번 괴로움
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지독하게 사랑했고, 그로 인해서 벌써 여러 번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이러한 단순하면서도 가혹산 교훈을 열네 살 된 토니오의 영혼은
이미 인생으로부터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토니오의 성품은 이러한 경험을 잘
기억하고 동시에 마음 속에 기록해 두어 어느 정도 그것에서 즐거움까지 느꼈지
만, 그러한 경험에 자신의 행동을 맞추거나 그것에서 실제적인 이득을 끄러내는
일은 없었다. 그는 또한 학교에서 강요하는 지식보다도 그러한 교훈이 한층 더
중요하며 흥미있다고 생각하였고, 고딕식 둥근 천장의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중
에도 이러한 생각들을 속속들이 따지고 샅샅이 생각해 보는데 몰두하는 상태였
다. 이러한 일은 그에게 만족감을 주었으며, 그것은 그가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토니오는 바이올린의 켰다.) 방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자기가 낼 수 있는 가
장 부드러운 소리를 아래쪽 정원의 해묵은 호도나무 가지 밑에서 춤을 추며 솟
아 오르고 있는 분수 물줄기의 찰찰거리는 소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게 할 때 느
끼는 만족감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 분수, 해묵은 호도나무, 바이올린, 그리고 먼 곳에 있는 바다, 여름방학이면
꿈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발트해, 이런 것들이 그가 사랑하던 것이었고, 그는
이것들에 둘러싸여 자신의너면 생활을 추구해갔다. 이런 이미지들은 시를 쓸 때
에 사용해도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어서 실제로 토니오 크뢰거가 이따
금 쓰는 시 속에서 언제나 되풀이해서 울려 나오곤 했다.
그는 자작시를 쓴 노트를 한 권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실이 자신의 부주의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어 동급생들이나 선생들로부터 조롱을 받았다. 그는 한
편으로 크뢰거 영사의 아들로서 이런 일에 대해 격분하는 것은 어리석고 천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대신 동급생들이나 선생들을 멸시했다. 그렇지 않다도 그는
그들의 저속한 태도에 반발심을 느꼈고, 그들 개개인의약점을 남달리 철저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시를 쓴다는 것은 방동한 것이며 원
래 옳지 못한 것이라고 자신도 느끼고 있어서, 이런 행위를 기이한 짓이라고 생
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
나 그렇다고 해서 그는 시쓰기를 중단하지는 않았다.
토니오는 집에서 시간을 허송했고, 수업 중에는 태만하고 정신이 산만했으며,
또한 선생님들에게 잘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딱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를
집으로 가지고 왔다. 이에 대해 그의 아버지-명상적인 푸른 눈을 지니고 늘 들
ㅆ을 단추 구명에 꽂고 다니는 키크고 섬세한 옷차림의 신사인 그의 아버지는
여간 화를 내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엇다. 그러나 토니오으 어머니-검은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그의 어머니는 이름이 '꼰수에로'였는데 옛날에 아버지가 지도상
으로 볼 때 아주 남쪽에 있는 나라에서 데리고 왔기 때문에 시내의 부인들과는
아주 딴판이었다.-그 어머니에게는 성적표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토니오는 피아노와 만돌린을 기막히게 연주하는 검은 머리의 불같은 성격을
가진 어머니를 사랑했고, 그 어머니가 아들의 신통치 못한 평판에 대해서 한탄
을 하지 않는 것도 그는 좋아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분노가 훨씬
더 위엄있고 존경할 만한 것으로 느껴졌고, 설사 야단을 맞더라도 마음 속으로
는 아버지가 옳다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어머니의 명랑한 무관심을 다소 칠칠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토니오는 자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대로 살
면 그만이지. 나를 어떻게 바꾸려고도 생각하지 않는 일에 열중하는 것은 사실
이다. 어른들이 내 입을 맞추고 음악으로 나를 달래어 적당히 넘겨 버리지 않고
꾸짖고 벌 세우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들은 어쨌든 초록색 마차를 타고 다니는
집시 족속이 아니며 예의 바른 사람들이고, 크뢰거 영사의 가족이며 크뢰거 가
문의 사람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도대체 어째
서 이렇게 유별나 만사에 충돌하고 선생님들과는 사이가 나쁘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저 선량한 학생들, 착실하고 평범한 아이들 좀 보라지. 그들은
선생을 우스꽝스럽게 생각지도 않고, 시도 쓰지 않으며, 누구나 생각하고 큰소리
로 말할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할 뿐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상적이며 모든 일에
사람들과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분명 속이 편할 테지... 그
런데 나는 외 이 모양일까? 또 장차 모든 일이 어찌 될 것인가?'
이렇게 자기 자신과 인생에 대한 자기 자신과 인생에 대한 자시의 관계를 관
찰하는 버릇이 한스 한젠에 대한 토니오의 우정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한스 한젠을사랑한 것은 우선 한스가 잘 생겼기 때문이었으나, 또한 한스
가 모든 점에 있어서 자기 자신과 정반대의, 대립되는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
었다. 한스 한젠은 우등생이었고, 그뿐 아니라 씩씩한 아이여서 마치 영웅이나
된 듯 승마를 하며 체조도 하고 수영을 하며, 누구에게나 인기를 얻고 잇었다.
선생들은 그를 아주 귀여워했고, 성을 빼고 이름만 불렀으며, 무슨 일에 있어서
든지 그를 이끌어 주려고 했다. 친구들도 그 아이의 호감을 사려고 열심이었고,
길거리에서는 신사숙녀 할 것 없이 그를 붙잡고선 덴마크식 선원 모자 아래로
내민 그 금발머리를 잡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잘 있었니, 한스 한젠? 참
머리결도 곱구나! 아직도 반에서 일등이지? 아빠 엄마께 인사 말씀 전해라. 참
훌륭한 아이야..."
이런 것이 한스 한젠이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한스를 알게 된 이래로 그를 볼
때마다 동경을 느꼈는데 그것은 어린 가슴 속에 자리 잡고 타오르는 시기심어린
동경이었다. '너처럼 그렇게 눈동자가 파랗고, 또 너처럼 단정하고 누구하고나
잘 어울려 살 수 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너는 항상 ㅎ전하게 누가 보아도
칭찬할 만한 일만 한다. 숙제가 끝나면 승마 수업을 받거나 실톱 세공을 하고,
또 방학이면 바다에서 배를 젓고 요트를 몰고 수영하기에 열중인데, 나는 빈둥
거리며 멍청하게 모래 위에 누워서 수면 우를 재빨리 스쳐가며 신비스럽게 변화
하는 바다의 무언극만 쳐다보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너의 눈은 그렇게도 맑
을 수밖에. 나도 너와 같이 되어 보았으면...'
그는 한스 한젠과 똑같이 되서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바라는 바가 아
니었다. 그러나 토니오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한스가 사랑해 줄 것을 간절하게
열망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대로 찬찬히, 절실하게, 헌신적으로, 우울한 구애를
하였는데, 이 우울은 그의 이채로운 외모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급격한 열정
보다도 한층 더 심각하고 불타는 듯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구애가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한스가 여하튼 간에 토
니오의 어떤 우월한 점, 즉 어려운 일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우러러 보
고, 또 토니오가 자신에 대해 특별히 강렬하고도 부드러운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서 이에 대해 감사의 뜻을 보이고 응대해 줌으로써 토니오
에게 많은 행복감을 준것이다.-그러나 동시에 여러 가지 고통, 즉 질투, 환멸, 그
리고 정신적인 결합을 이루려는 헛되 노력 등에서 오는 고통을 주기도 했다. 토
니오가 한스 한젠을 질투한 것은 한스의 생활 방식을 부러워했기 때문이었는데
도 그가 늘 한스의 생활 방식으로 이끌어 보려고 애쓴 것은 실로 기묘한 일이었
다. 그런 것은 고작해야 순간적으로, 그것도 다만 표면적으로만 성공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나는 요즈음 놀랄 만한 것을 읽었어. 굉장한 것이야" 라고 토니오는 말했다.
두 아이는 뮐렌 가의 이베르젠 가게에서 10페니히를 주고 산 과일 드롭스를 봉
지에서 같이 꺼내 먹으면서 걸었다. "너도 꼭 읽어 봐. 한스 쉴러의 '돈 카를로
스'인데... 보고 싶으면 빌려줄게."
"아니 괜찮아." 한스 한젠이 대답했다. "그냥 둬. 토니오. 그런 것은 내겐 안
맞아. 난 말에 관한 책이나 볼래, 알겠니? 멋진 사진이 들어 있어. 정말이야, 언
젠 한 번 우리집에 오면 보여줄게. 고속도사진이란 말야. 그래서 말의 완보, 속
보, 도약 등 모든 모양을 다볼 수 있는데 이런 것은 실제로는 너무 빨리 움직이
니까 전혀 볼 수가 없는 것이거든."
"모든 모양을 다?" 하고 토니오는 점잖게 물었다. "그것 참 굉장하겠다. 하지
만 '돈 카를로스' 이야긴데 사람이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는 거야. 그속에는 말
이야, 보면 알겠지만,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 있어. 꽝 하고 터질 것 같은 충격을
독자에게 준단 말이야..."
"꽝 하고 터져?" 한스 한센은 되물었다. "어째서?"
"예를 들면 왕이 우는 장면이 있는데 왕은 후작에게 속아서 우는 것이지... 그
런데 후작도 왕자를 위해서 속였을 뿐이야, 알겠니? 후작은 왕자를 위해 희생되
는거지. 그런데 내실에서 왕이 울었다는 이야기가 옆방으로 새어 나왔거든. '우
셨어', '전하께서 우셨어?' 이렇게 온통정의 신하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당황하게
되는데, 그게 말이지 왕이 평소에 지독하게 완고하고 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왕이 왜 울었는지는 잘 이해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왕자와 후작을 합
친 것보다도 왕이 훨씬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왕은 늘 혼자 외롭고 아무
에게서도 사알을 받지 못하다가 이제야 간신히 한 사람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
데, 그 사림이 배반을 하게 되니 말이야..."
한스 한젠은 옆에서 토니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에 나타난 무엇인가
가 한스로 하여금 이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한스는 또 다시 팔을 토니오의 팔에 기고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배반을 하는데, 응, 토니오?" 토니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응, 그것은 이렇지" 하고 그는 시작했다.
"브라반트나 플란데른으로 갈 편지가 모두..."
"저기 에르빈 임메드탈이 온다" 하고 한스가 말했다.
토니오는 입을 다물었다. '저놈의 저 임메르탈 녀석, 땅 속으로 꺼져 없어졌으
면 좋겠군!' 하고 토니오는 생각했다. '왜 하필이면 이런 때 와서 우리를 방해한
단 말인가! 제발 녀석이 같이 따라와 끝까지 승마 이야기나 하지 않아ㅆ면 좋겠
는데...' 에르빈 임메르탈도 역시 승마 연습을 하고 있엇기 때문이다. 그는 은행
장의 아들로서 여기 성문 밖 교외에 사고 잇엇다. 벌써 책가방을 집에 두고 구
부러진 다리와 뱁새 눈을 하고 가로수 길을 따라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잘 있었니, 임메르탈?" 하고 한스가 말했다. "크뢰거하고 산책을 좀 하는 중
이야..."
"난 시내로 가야 돼" 임메르탈이 말했다. "뭣 좀 살 것이 있어. 하지만너희들
과 같이 산보할 시간은 조금있어.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 드롭스 아니야? 아,
고마워,. 한두 개만 줘. 내일 또 연습이 있지, 한스."-연습이라고 하는 것은 승마
연습을 말하는 것이었다.
"신난다!" 하고 한스가 말했다. "요전번 훈련 때에 일 등을 해서 가죽 각반이
생기게 됐어."
"넌 승마 연습을 하지 않는가 보지, 크뢰거?" 하고 임메르탈이 물었다. 그의
눈은 다만 바짝이는 두 줄기 찢어진 틈에 불과했다.
"응," 토니오는 아주 애매한 말투로 대답했다.
"노도 해봐," 한스 한젠이 말했다. "아버지께말씀드려 승마 연습을 해, 크뢰
거."
"그래." 토니오는 재빨리, 무관심한 듯 대잡했으나 잠시 동안 목이 조여오는듯
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한스가 이름 아닌 성을 불렀기 대문이었는데 한스도 그
것을 눈치챈 듯이 변명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너를 크뢰거라고 부근 것은 너의 이름이 하도 이상해서 그런 거야. 미안
해. 하지만 네 이름은 도무지 마땅치 않아. 토니오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름
이 그래? 물론 그게 네 탓은 아니지만!"
"아니야, 그 이름이 좀 이국적으로 들리고 유별나서 그렇게 부르는 거시 뭐..."
하고 임메르탈이 달래는 듯이 말했다.
토니오의입이 실룩거렸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 바보 같은 이
름이지. 나도 제발 하인리히라든지 빌헬름이라고 했으면 좋겠어. 정말이야. 하지
만 우리 어머니 동생 중에 안토니오라는 분이 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내가 영
세를 받아 이렇게 된 거야. 우리 어머니는 저 먼 남쪽에서 오신 분이니까 말이
지만..."
그리고 나서 그는 입을 다물고 두 아이가 말과 가죽 제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
게 내버려 우었다. 그 이야기는 둘에게 익숙한 내용이었으므로 한스는 임메르탈
과 팔짱을 낀 채 재미있다는 듯 지껄였다. '돈 카를로스'에 대해서는 결코 저만
한 흥미를 한스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킬 수 없을지 모른다. 때때로 토니오는 울
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라 코끝이 찌릿함을 트꼈다. 그는 또한 턱이 자꾸 떨
리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한스는 토니오란 이름을 싫어한다. 그렇다고 어떻게 할 것인가? 그의이름은
한스이고 임메르탈의 이름은 에르빈이다. 글로 알려진 이름이고 아무도 이상하
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토니오'라면 어딘지 이국적이고 유별난 이름이다. 사
실 바라건 바라지 않건 간에 나는 모든 면에서 어딘지 유별난 점이 있고 고독
하며, 정상적이고 평ㅂ한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초
록색 마차를 타고 다니는 집시 족속이 아니며, 크뢰거 영사의 아들, 크뢰거 가문
출신이다. 그런데 한스는 둘만 있을 때는 토니오라고 부르다가도 제삼자가 오면
어재서 그것을 부끄러워 할까? 때로는 한스가 나에게 가까이 와서 내 편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떻게 해서 왕을 배반했지,
토니오?" 한스는 이렇게 물으며 내 팔을 끼지 않았던가. 그러나 임메르탈이 왔
을 때에는 잘됐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를 저버리고 거리낌 없이 나의
그 특이한 이름을 바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는 것
은 멀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한스 한젠은 단 둘이만 있을 때면 정말로 얼마쯤
은 나를 좋아한다. 그것은 잘 안다. 그렇지만 제삼자가 오면 그것을 부끄럽게 여
기고 토니오를 필립 왕의 신세를 생각해 보았다. 왕께서 우셨던 것이다.
"아차!" 에르빈 임메르탈이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내로 가야지. 잘들 가.
드롭스 잘 먹었어!"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길가에 있는 벤치 위로 뛰어오르
더니 구부러진 다리로 그 위를 타고 뛰어가버렸다.
"나는 임메르탈이 좋아!" 한스는 힘을 주어 말했다. 그는 이렇게 자기가 좋고
싫은 것을 공표하고 동시에 그것을 자비롭게 나눠주는 응석받이 같은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이왕 내친 김이라 그대로 승마 연습에 대한 이야
기만 했다. 한스 한젠 가의 저택도 이제는 그리 멀지 않았다. 둑을 넘어 가면 별
로 시간이 걸리자 않았던 것이다. 두아이는 모자를 단단히 움켜 쥐고, 앙상한 나
뭇가지에 휘잉 휘잉 하고 신음 같은 소시를 나아내며 불어오는 습기찬 강풍을
거슬러 머리를 수그리고 걸어갔다. 한스 한젠은지껄여 댔고, 대꾸할 뿐, 한스가
이야기에 열중해서 또 다시 팔짱을 까었을 때도 별로 기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만 겉으로의 접근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두 아이는 정거장이 가까운 곳에서 둑길로부터 내려와 기차가 성
습하게 폭폭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심심풀이로 객차 수를 세어 보고,
마지막 칸 지붕에 털옷을 뒤집어 쓰고 ㅇ아 있는 사나이에게 손을 흔들기도 앴
다. 린덴 광장 옆 거상 한젠 가의 저택앞에서 두 아이는 걸음을 멈췄다. 한스는
정원으로 통하는 문짝에 매달려 경첩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도록 이리저리 흔
들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자세히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한스는 작별 인사를
했다.
"자 이제는 들어가야해. 잘 가, 토니오! 이 다음에는 내가 너를 대려다 줄게,
정말이야" 하고 한스가 말했다.
"잘 있어, 한스, 산보 잘했어." 토이오가 대답했다.
마주 쥔 두 아이들의 손은 정원 문을 잡았기 대문에 와전히 젖고 녹이 묻었
다. 그러나 한스가 토니오의 눈을 들여다 보았을 대 그의 귀여운 얼굴에는 무엇
인가 후회하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여하튼 나도 아듬에는 '돈 카를로스'를 읽어 볼게." 한스는 빨르게 말했다.
"내실에 있는 왕 이야기는 정말 재밀날 거야."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앞마당을 지나 뛰어갔다. 집안으로 사라지기 전에 뒤를 돌아보고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하여 토니오는 마음이 아주 상쾌해져서 가벼운 걸음으로 떠나 갔다. 바람
이 토니오의 등 뒤에서 불어왔지만 그가 그렇게 가벼운 걸음걸이로 그곳을 떠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바람 탓만은 아니었다. '한스는 돈 카를로스를 읽을 것이
다. 그러면 우리는 임메르탈이나 그밖의 어떤 사람도 끼어들어 말참견할 수 없
는 것을 서로 공유하게 될 것이다! 둘은 얼마나 서로 잘 이해할 것인가! 누가 알
리-혹 한스로 하여금 시를 쓰도록 만들 수 있을지?... 아니 아니 그래서는 안돼!
한스는토니오같이 되어서는 안돼. 한스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 모두가 사랑하고,
토니오가 사랑하는 것과 같이 명랑하고 씩씩한 사람이어야 해. 그렇지만 돈 카
를로스를 읽는다고ㅗ 해서 해로울 것은 없을 거야.' 토니오는 이렇게 생각하며
육중한 옛 성문을 지나 항구를 따라 걸어가다가 가파르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눅
눅한 뾰족지붕의 집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을 올라가 부모님이 계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 그의 심장은 살아 있었다. 그 속에는 동경과 우울한 선망, 그
리고 ㅎ간의 경멸과 아주 순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
2
금발의 잉에, 잉에보르크 홀름-높고 뾰족하며 가지각색 고딕양식의 분수가 있
는 광장 근처에 살던 홀름 박사의 딸, 그녀는 토니오 크뢰거가 열여섯이 되던
해 사랑했던 여자였다.
어저다 그렇게 되었는가? 그는 수없이 그녀를 보아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저
녁 그는 어느 등불 밑에서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어떤 친구와 이야기 하면
서, 그녀가 몹시 쾌활하게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별로 섬세하지도 않
고 또 특별히 맵시가 있다고도 할 수 없느 어린 처녀다운 손으로 뒷머리를 만
질 때 흰 망사 소매가 팔꿈치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그는 보았고, 또 그녀가 어
떤 말을, 대수롭지도 않은 한 마디 말을 그녀 특유의 억양으로 말할 때, 그 목소
리에서 따뜻한 울림을 들었다. 이런 모든 것은 그의 마음을 활홀감으로 사로잡
았는데, 그것은 이전에 한스 한젠을 쳐다볼 때 종종 느끼던 마음의 떨림, 그가
아직 어리고 어리석은 어린애였던 그 당시에 느끼던 떨림보다 훨씬 더 강렬한
것이었다.
그날 저녁 토니오는 그녀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땋아 내린
풍성한 금발, 미소를 머금은 갸름한 푸른 눈, 연하게 죽ㄴ깨가 난 콧등,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와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한 마디 말
을 했을 때의 억양을 살며시 흉내내 보려고도 했다. 그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
다. 경험은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텨 주었다. 사랑은 많은 고통과 불
행과 굴욕을 가져다 줄 뿐 아니라 평를 깨뜨리고 마음을 감미로운 선율로 가득
채워서, 한 가지 일을 온전하게 계획하고 태연하게 무엇인가 완전하게 해낼 수
있는 침착성을 가질 수 없ㅅ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기
꺼이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에 몸을 내어 맡기며 온갖 정열을 다해서 사랑을
키웠다. 그는 사랑이 인간을 풍성하고 생기있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태연하게 무엇인가 완전하게 해내는 대신 풍성하고 생
기에 가득 차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가 쾌활한 잉에보르크 홀름에게 온통 정신을 빼앗기게 된 것은
후스테데 영사 부인의, 깨끗이 치워진 거실에서였다. 그날 저녁 후스테데 부인이
자기 집에서 댄스 강습회를 열어줄 차례였던 것이다. 그것은 자석인 강습회로서
상류 가정의 자녀들만이 참가해 차례로 돌아가며 아이들 집에 모여서 댄스와 예
법을 교육받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를 우해서 매주 함부르크에서 무용 교사
크나아크씨가 출장을 나왔다.
프랑소와 크나아크가 그의 이름이었는데 아주 굉장한 사람이었다.
"여러분을 뵙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 이름은 크나아크라고 합니
다... 그런데 이런 말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할 때 해서는 안되며 다시 머리를
들었을 때 해야 하는 것입니다.-나지막한 소시로, 그러나 분명하게, 매일 프랑스
말로 자기 소개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로 정확히 흠잡을 데가 없을
만큼 인사를 할 수 있게 되면 독일어로는 더욱 더 잘할 것입니다." 하고 그는말
했다. 비단으로 만든 검은 포록 코트는 어쩌면 그렇게 잘도 그의 살찐 엉덩이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지! 바지는 부드러운 주름이 잡혀 폭넓은 공단 리본으로 장
식되 에나멜 구두 위로 늘어지고, 그의 갈색 눈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취해 ㅈㄴ
듯한 행복감을 띠고 사방을 둘러 보고 있었다.
크나아크씨의 지나치게 자신있고 예의 바른 태도에 누구나 압도당했다. 그는
그 집 주인 여자에게로 걸어가서-아무도 그와 같이 경쾌하게 파도치듯 몸을 흔
들며 당당하게 걷는 이는 없었다-인사를 하고 손을 니밀기르 ㄹ기다렸다. 내민
손을 잡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답례를 하고 사뿐사뿐 물러나더니, 외ㅉ 발을 추
긍로 돌아선 후 발끝으로 디디고 있던 오른쪽 발을 마룻바닥에서 옆으로 밀고는
허리를 흔들며 걸어갔다.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 있다가 나올 때는 몇 번이고 허리를 굽히면서 뒷걸음으
로 문까지 걸어 나와야 하고, 의자를 가져올 때는 의자의 한쪽 다리를 잡거나
마룻바닥 위로 질질 끌면서 가져와서는 안되고 등받이를 가볍게 잡고 들고 와서
소리가 나지 않게 내료놓아야 한다. 서 있을 때는 두 손을 배 위에 겹쳐 놓거나
혀로 입 가장자리를 핥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있
으면 크나아크씨는 똑같이 흉내를 내어 그걸 본 사람이 일생 동안 그러한 태도
를 싫어하도록 만드는 것이, 예의교습 방식이었다.
이런 것이 예의 범절이었다. 그런데 크나아크씨는 댄스에 있어서도 최고급에
속하는 명수라고 할 만했다. 널찍하게 치워 놓은 거실에는 샹들리에의 가스등이
불타고 벽난로 위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마룻바닥에는 활석 가루가 뿌려져
있었고, 학생들은 반원현으로 말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커튼 저편 옆방에서는
어머니, 아주머니들이 비로드 의자에 앉아 자루달린 안경으로 크나아크시를 구
경하고 잇엇다. 그는 허리를 굽힌 자세로 프록 코트의 옷자락을 각각 두 손가락
으로 잡고는가뿐한 다리로 마주르카의스텝을 하나씩 시범해 갑자기 특별한 이유
도 없이 마루에서 펄떡 뛰어올라 공중에서 두 다리를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리
소용돌이치듯 돌리고는 동시에 그 발을 떨다가는, 둔하짐반 온통 밑바닥부터 뒤
집어 엎을 듯한 꽝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되돌아 오는 것이었다...
'저게 무슨 해괴망칙한 원숭이 같은 놈일까?' 하고 토니오 크뢰거는 마음속으
로 생각했다. 그러나 토니오는 잉에 홀름, ㄱ 쾌활한 잉에가 때때로 넋을 잃은
채 미소를 띄우고 크나아크씨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런데 기막히게 자유자재로 몸을 놀린는 크나아크씨의 동작을 보고 토니오가 무
엇인가 감탄에 가까운 것을 느꼈던 것은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크나아크씨의
눈초리는 얼마나 침착하고 동요가 없는지! 그 눈은 사물의 내면을 보려고 하지
않고, 사물의 복잡하고 슬픈 면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 눈은 자신의 눈색깔이
갈색이고 아름답다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까닭에 그의 태
도는 그렇게도 긍지를 품고 있다. 사실 그와 같이 걸을 수 있기 위해서는 바보
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좋아지는데 그
도 그럴 것이 애교가 있기 때문이다. 토니오는 잉에가, 금발의 귀여운 잉에가,
그렇게 크나아크씨를 쳐다보는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토니오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아 주는 소녀가 도대체 하나도 없었던가?
아니, 그러한 소녀가 있기는 했다. 변호사 페르메에렌씨으 딸 막달레나 페르메
에렌이 그랬는데, 그녀는 순한 입 모양과 크고 검게 ㅂ나는 눈을 가진 진지하고
열광적인 소녀엿다. 춤을 출 때는 잘 넘어졌지만 여자 측에서 남자 파트너를 청
하는 순서가 되면 토니오에게로 왔고, 그가 시를 쓴다는 것을 알고 있어 보여
달라고 두 번이나 졸라 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 얼굴을 숙인 채 토니오
를 지그시 쳐다보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러나 토니오에게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토니오는 잉에 홀름을, 금발의 쾌할한 잉에를, 토니오가 시따위를 쓴
다고 해서 틀림없이 멸시하고 있을 잉에 홀름을 사랑하고 있었다. 토니오는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럴 때면 질투가 섞인 동경심이, 그 여자와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영원히 남일 수밖에 없다는 가혹하고도 절박한 고통이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속을 태우는 것이었다.
"제 일조, 앙 나방!(en avant! 앞으로!)" 크나아크씨가 말했다. 이 사내가 얼마
나 기막히게 콧소리를 내는지 형용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까드리유(여덟 명
내지 열두 명의 남녀가 네 개조로 추는 춤)를 연습하는데, 토니오 크뢰거가 깜짝
놀란 것은 자기가 잉에 홀름과 같은 조에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되 수 있는
대로 잉에를 피했으나 그래도 자꾸만 잉에 옆에 가 있게 되었고, 그 쪽을 보지
않르려고 애를 썼지만 항상 그의 시선은 잉에에게로 쏠리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녀가 빨간 머리의 페르디난트 마티이센의 손에 이끌려 미끄러지듯 총총걸음으
로 접2근해 와서 머리를 뒤로 젖히고 숨을 길게 내쉬면서 토니오와 마주 섰다.
피아노 반주를 하는 하이첼만씨는 뼈마디가 굵은 손으로 건반을 내리치고, 크나
아크씨의 호령 하에 까드리유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토니오의 앞에서 좌우로, 앞뒤로 거닐기도 하고 돌기도 하면서 움직였
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인지 옷의 보드라운 흰 천에서인지 풍겨
나온 향기가 자주 그를 스쳐 지나가 토니오의 눈은 점점 흐려져 갔다. '나는 너
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귀여운 잉에'하고 그는 마음 소긍로 말하면서 그 여자가
아주 열심히 재미있게 춤을 추며 자기는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는데 대한 온갖
쓰라린 심정을 이 몇 마디 말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아름답기 그지 없는 휴
토름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잠을 자고 싶은데 그대는 춤을 추자고 한
다.' 이 구절이 내포하고 있는 비굴한 모순, 사랑하는 동안은 춤을 추어야 한다
는 모순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제 일조, 앙 나방!" 크나아크씨가 말했다. 새로운 선회가 시작되었다. "꽁뿔리
망!(절을 하고!) 물리네 데 암므!(숙녀는 선무를!) 뚜르 드멩!(곤을 돌리고!)" 이
때 그가 얼마나 우아하게 de의 무성음 e를 삼켜 버리는가를 아무도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제 이조, 앙 나방!" 토니오 크뢰거와 그 파트너 차례였다. "꽁뿔리망!" 토니오
크뢰거는 고개를 수그렸다. "물리네 데 담므!(숙녀는 선무를!)" 그런데 토니오 크
뢰거는 머리를 숙인 채 눈썹을 침울하게 찌푸리고서는 자기 손을 숙녀 네 사람
의 손 위에, 잉에 홀름의 손 위에 놓고 그만 자기가 선무를 추고 말았다.
사방에서 낄낄거리며 웃어대는 소리가 났다. 크나아키씨는 늘 하던 때로 발레
의 포즈를 취하며 깜짝 놀랐다는 표시를 했다. "아아 이거 큰일났군!" 학 그는
소리쳤다. "중지, 중지! 크뢰거군은 숙녀들축에 끼어 버렸군요! 앙 아리에르(뒤로
물러나요), 크뢰거양 뒤로, 피 동!(아, 이를 어쩐다!) 다른 사람은 모두 아는데 도
련님만 모르시군요, 빨리! 썩 물러서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노란 비단 손수
건을 꺼너내 그것을 휘둘러 토니오 크뢰거를 제자리로 쫓아 보냈다.
모든 사람들이 웃어댔다. 소년들도 , 소녀들도, 그리고 문간의 커튼 저편에 있
던 부인들도 웃었다. 크나아크씨가 이 우발 사건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게 만
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극장에나 온 것처럼 재미있어 했다. 단지 하
이첼만씨만은 무미건조한 사무적인 표정으로 다시 연주할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
었다. 그는 크나아크시의 이러한 수작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져 버렸기 때문이었
다.
그리고 나서 까드리유는 다시 계속되었다. 그 다음이 중간 휴식시간이었다. 시
중을 드는 여자아이들이 포도 젤리가 든 유리잔을 쟁반에 잔뜩 담아 가지고 쨍
그랑거리면서 문간으로 운반해 왔고, 플럼 케이크를 든 가정부가 쫓아 들어왔다.
그러나 토니오 크뢰거는 남모래 살짝 복도로 빠져 나와 뒷짐을 진 채 나무발이
드리워진 창가에 섰다. 나무발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마
치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그렇게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인가를
그는 생각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망과 동경으로 가득 찬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런 곳에 와 있을까? 어째서 내 방 창가에 앉아 슈토름
의 임멘제에나 읽으면서 때때로 눈을 들어 해묵은 호도나무가 침울한 듯 후드득
소리를 내는 저녁 어스름녁의 정원을 내다보지 않았던가? 그곳이야말로 내가 있
을 곳이 아니었던가. 다른 사람들이야 춤을 추건, 신나서 멋들어지게 놀건 내 상
관할 바 아니다. 아니야, 아니야, 역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다. 내비록 홀로 멀리
떠렁져 저쪽 홀 안의 웅성거리며 딸가닥거리는 소리, 웃음소리 가운데서 따뜻하
게 생명이 약동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가려 내려고 애를 쓸 뿐이라고 해도 여기
에서야 나는 잉에 가가이에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웃고 있는 너으 갸름
한 파란 눈, 그대 금발의 잉에여! 너같이 아름답고 명랑할 수 있으려면 임멘제에
를 읽거나 스스로 그런 것을 써 보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슬픈 일
이니까 말이다.'
'그녀는 지금 내가 있는 곳으로 와 봐야 할 것이 아닌가! 내가 없어졌다는 것
을 알아채고 내 심정을 살펴, 설사 동정심에서라도 남몰래 쫓아 나와서 내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우리들 있는 곳으로 가지요, 자. 기분을 내세요. 나는 당신이 좋
아요" 라고 말해 주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래서 토니오는 등 뒤로 귀를 기울
이고 어리석게도 긴장하면서 호시 잉에가 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올 리 없었다. 그런 일은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도 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비웃었을까? 그녀를 위해서나 나를 위
해서나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 그녀는 웃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여자가 옆
에 있는 것을 얼떨떨해져서 그만 여자들이 출 춤을 추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
이 어쨌단 말인가? 사람들도 언젠가는 비웃는 것을 그만두겠지! 요전만 해도 어
느 잡지가 내 시 한 편을 받아 주지 않았던가. 하기야 시가 나오기도 전에 그놈
의 잡지가 폐간되고 말았지만, 언젠가는 내가 유명해져서 내가 쓰는 것은 모두
인쇄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에도 잉에 홀름이 감며 받지 않을는지
두고 볼 일이다. ...아니, 그녀는 아무런 감명도 받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만일 항상 넘어지는 막달레나 페르메에렌이라면, 그녀라면 틀림없이 감명을 받
을 것이다. 그러나 잉에 홀름, 저 파란 눈의 쾌활한 잉에에게 감명을 줄 리는 만
무하다. 그렇게 된다면 유명해지는 것도 소용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니 토니오 크뢰거의 심장은 고통스럽게 오르라드는 것 같았다.
놀랍게 움직이는 우울한 힘의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자
기가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자기와는 달리 마치 쾌활한 별천지에 있는 것처럼 동
떨어져 이러한 내적 힘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실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설사 그가 소외되어 외롭게 희망도 없이 나무발 앞에 서서 괴
로워하며 밖을 내다보는 척하고 있었다 해도 그는 역시 행복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의 심장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따뜻하면서 슬프게 그 심장은, 잉에보
르크 홀름, 그녀를 위해 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황홀한 자기
부정을 하면서까지, 그 금발의 밝고 활달하며 평범한, 조그만 그녀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기된 얼굴로 음악과 꽃향기, 유리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다
지만 어렴풋이 스며드는 고적한 장소에서, 멀리로부터 들리는 연회의 소음 가운
데서 그녀의 초롱초롱한 목소리를 가려내겨고 애쓰며, 그녀 때문에 괴로워하며
서 있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행복했었다. 항상 잘 넘어지
는 막달레나 페르메에렌과는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녀는 자기를 이해해 주고
같이 웃기도 하며 진지하게 대해 주었지만, 금발의 잉에는 옆에 앉아 있어도 그
의 말이 그녀에게 통할 리가 없으므로, 아득하고 낯설며 서먹서먹하기만 했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역시 그는
행복했다. 그것은 그가 '행복이란 사랑을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는 것은 허영심을 위한 메스꺼운 만족감에 불과하
다. 행복이란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사랑하는 대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기회를 노리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이 생각을 마으 ㅁ깊이 새겨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복 뼈저리게 느기고 있었다.
'상실! 이렇게 토니오 크뢰거는 생각했다. 나는 성실해야겠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한 너를, 잉에보르크여, 너만을 사랑하겠노라! 그는 그렇게도 순진했다. 그
러나 한편으로 그의 마음 속에서는, 한스 한젠을 매일 만나면서도 그를 완전히
잊고 있지 않는가 하는 두려움과 슬픔의 소리가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추하고 가련한 일은, 이 나지막하면서도 심술ㄱ게 속삭이는 소리
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고 또 세월이 흘러 토니오 크뢰거도, 자
기대로 이 세상에서 주목할 만한 많은 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욕과 힘을 자기
내부에서 느기고 이제는 옛날과 같이 무조건 그 쾌활한 잉에를 위해서 죽4어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의 순수하고 정결한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는 제단 주위를 조심스럽
게 맴돌다가 그 앞에 무릎 꿇고, 온갖 수단을 다해 사랑의 불꽃을 돋아 일으키
려고 애썼다. 성실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면 그 불꽃이 어느 사
이에 스르르 꺼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토니오 크뢰거는 한참 동안 싸늘해진 사랑의 제단 앞에 서서 성실이란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데 놀라고 환멸을 느꼈지만, 마침내는 어깨를 으
쓱하고 나서 제 갈길을 걸어갔다.
3
그는 다소 태만하게, 고르지 못한 걸음으로 무심코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옆
으로 갸우뚱하고 먼 산을 바라보면서 제 갈길을 걸어갔다. 때로 길을 잘못 들기
도 했으나, 그것은 어떤 소수의 사람에게는 도대체 올바른 길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엇다. 도대체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하고 물으면 그는 그때마다 다른 대
답을 하는것이었다. '내속에는 수만 가지 존재 형식의 가능성이 있지만, 그런 것
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으니
가 말이다(그리고 이미 이 사실을 기록해 놓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이 협소한 고향 도시를 떠나기 직전 그를 고향에 잡아매 두고 있었던 꺾
쇠와 실끈은 이미 소리도 없이 풀려져 있었다. 유서 깊은 크뢰거 가문은 점차로
몰락과 와해 상태에 바지게 되엇고, 세상 사람들은 토니오 크뢰거와 같은 인간
이 나온 것을 역시 그러한 상태의 징조라고 간주하고 있었으니 그것도 일리 있
는 말이었다. 가문최고 연장자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엄마 안되어 그의 아
버지마저, 키가 ㅋ고 명상적이며 섬세한 옷차림을 하고 들꽃을 단추 구명에 꽂
고 다니던 이 신사마저 그 뒤를 따라갓다. 크뢰거 가문의 대저책은 그 존경할
만한 역사와 더불어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상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
나 토니오의 어머니, 피아노와 만돌린을 썩 잘 연주하는 아름답고 정열적인 어
머니에게는 그러한 일은 모두 아무 상관이 없었으며, 일년 후에 재혼해 버렸다.
그것도 상대자가 어느 음악가로서, 이태리 이름을 가진 명인이었는데, 그녀는 그
남자를 따라 저 멀리 푸른 하늘의 남쪽 나라로 가버리고 말았다. 토니오 크뢰거
는 이것을 좀 경솔한 짓이라고 생각했으나 어머니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자
격이 그에게 있었을까? 그 자신이 시 나부랑이나 쓰고 도대체 무엇이 되겠느냐
고 물어도 대답 하나 신통하게 못하는 위인이고 보면...
이렇게 해서 그는 뽀족지붕의 집들이 늘어선 거리에 눅눅한 바람이 휭휭 불어
대는 꼬불꼬불한 고향 도시를 떠났다. 정원의 분수와 해묵은 호도남, 그리고 어
린 시절의 친구들을 버리고 또 그렇게도 사랑하던 바다와도 작별했다. 그러면서
도 그는 조금도 고통을 트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도 이제 성장하여 현명해졌
고 자기의 사정이 어떠한가를 이해했으며, 또 지금가지 오랫동안 자기를 꼭 잡
아 매었던 우매하고 저속한 생화에 대한 조소의 마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는 이 지상에서 가장 숭고하게 여겨지는 힘, 그것에 봉사하는 것이 자기의
천직이라고 느낀 힘, 그에게 고귀함과 영예를 약속한 힘, 즉 무의식적이며 말없
는 인생 위에 미소지으며 군림한는 정신과 언어의 힘에 송두리째 몸을 바쳤다.
그는 젊은 정열을 그 힘에 바쳤고, 그 힘 역시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어 그에
게 보답했으나, 또한 그 대가로서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을 그로부터 가차없이
빼앗아가 버렸다.
그 힘은 그의 시선을 예리하게 했고 인간의 가슴을 부풀게 하는 허황한 언어의
정체를 간파하게 했으며 인간의 영혼과 그 자신의 영혼을 해명하게 해주고 그에
게 투시력을 부여해 세계의 내면과 또 언어와 행위의 배후에 있는 일체의 궁극
적인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그가 본 것은 희극과 비참-그야말로 인생의
희극과 비참이었다.
그러자 인식하려는 데서 오는 고뇌와 오만과 함께 고독이 찾아들었다. 그것은
그가 악의 없고 쾌활하며 우매한 사람들 틈에 길 수가 없고, 또한 그의 이마에
새겨진 낙인이 그들을 당활케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어와 형식에 대한 즐
거움은 점차로 감미로운 맛을 더해갔다. 그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말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기록하기도 했다). 만일 ㅍ현이 주는 여러 가지 만족
감이 우리를 생기발랄하게 하지 못한다면, 영혼의 인식만으로는 우리는 틀림없
이 우울해질 것이라고....
그는 여러 대도시와 남국에서 살면서 그 남국의 태양에 자기 예술의 풍성한
성숙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그를 남쪽으로 유인한 것은 어쩌면 어머니로
부터 물려받은 피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이미 죽어서 사랑
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육욕의 오험에 바져 환락과 뜨거운 죄악의 심연속에 몸
을 던졌고, 그러면서도 말할 는 고뇌 속을 헤매었다. 남국에서 그렇게도 그가 괴
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키가 크고 명상적이며 섬세한 옷차림을 하고 들꽃을
단추구멍에 꽂고 다니던 아버지의 피가 그의 몸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한때는 자기가 가졌던 것이지만, 지금은 어떤 쾌락에서도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영혼의 환희에 대한, 어렴풋하나마 그리운 추억이 때로 밀려오
는 것도 바로 부친의 혈통이었는지 모른다.
관능에 대한 메스꺼움과 증오감, 그리고 순결과 절도있는 평화에 대한 갈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는 예술의 공기를, 훈훈하면서도 감미로
운 향기를 담뿍 담은 상춘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는데, 그 공기 속에서는 남모
를 창조의 환희 속에 모든 것이 태동하고 일렁이며 싹트고 잇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두 개의 극단 사이를, 즉 얼음 같은 지성과 심신을 소모케 하는 관능의 불
꽃 사이를 방황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가며 소모적인 생활을, 전형적으로 방
종하고 비정상적인 생활을 지속해 나갔다. 토니오 크뢰거는 그러한 생활을 마음
밑바닥에서는 싫어하고 있엇다. '이게 무슨 방황인가!' 하고 그는 때때로 생각했
다. '어찌하여 내가 이렇게 터무니 없는 모험에 빠졌단 말인가? 나라는 인간은
근본을 따지면 초록색 마차를 타고 다니는 집시 족속은 아닌데...'
그러나 건강이 약해지는 비례해서 그의 예술 정신은 날카로워져, 까다롭고 정
선되고 희귀하고, 섬세하고, 저속한 것에 대해서 신경질적이고, 예절과 취미의
문제에 관해서는극도로 민감해졌다.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작품을 내었을 때 전
문가들 사이에서는 갈태와 환호성이 높았는데, 그것은 그가 제시한 작품이 유머
와 고뇌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하며 공들여 갈고 다듬은 것이었기 대문이엇ㄷ.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급속히-예날에는 학교 선생들이 꾸짖으면서 불렀던 바로
그 이름이, 호도나무와 분수와 바다를 소재로 한 처녀작 위에 서명한 그 이름이,
나쪽과 북쪽 나라의 억양이 합쳐진 이름이, 이국적인 색채를 띤 이 시민의 이름
이 이제는 걸출한 것을 의미하는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그가 철저하게 맛본 여
러 가지 쓰라린 경험 속에는 보기 드물게 끈기있는 야심만만한 근면성이 함께
하고 있었고, 이것이 그의 취미인 까다로운 신경질과 싸우면서 격심한 고통 아
래에 비범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는 생활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 같이 일하지 않았고, 일 밖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 사람처럼 일했다. 왜냐하면 그는 생활인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창조
자로서 존중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보통 때는 생기도 없이 눈에 띄지 않게 돌
아다니며 그는 마치 무대에서 내려와 화장이워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
는 연극 배우처럼 살았다. 그는 말없이 틀어박힌 채 숨어서 일했다. 또한 그는
재능을 사교상의 장식물로 생각하며 돈이 있든 없든 날뛰고 다니는 사람들, 유
별난 넥타이를 매고 사치를 일삼으며 무엇보다 행복하게 사랑을 받고 예술적으
로 산다고 함ㄴ서도 좋은 작품은 오직 어려운 생활의 입박 하에서 생긴다는 것,
생활을 아는 사람은 창작을 하지 못하며, 창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생활
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소인배들을 전적으로 멸시했던 것이다.
4
"실례 좀 해도 될까요?" 아뜰리에의 문턱에서 토니오 크뢰거가 이렇게 물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와는 모든 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오랜 친구 사이였으
나, 그는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고개까지 약간 숙여가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아니, 토니오 크뢰거씨, 외 그러시죠? 격식 차리지 말고 들어오세요!" 경쾌한
어조로 그녀가 대꾸했다. "당신이 훌륭한 가정 교육을 받았고 예의 바르다는 것
은 누구나 다 알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팔레트를 든 왼손에 붓을
옮기고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작업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요." 그가 말했다. "어디 좀
봅시다. 아, 상당한 진척이 있었군요."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이젤 양쪽 의자 위
에 기대어 놓은 몇점의 채색된 소묘와 사각형으로 올을 엮어 짠 망사천을 덮어
놓은 몇점을 커다란 화폭에 번갈아 가며 눈길을 주었다. 커다란 호폭은 목탄을
사용하여 그린 혼란스럽고 어렴풋한 선들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 사이로 군데군
데 최초의 색상들이 제 모습을 막 드러내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곳은 뮌헨 시의 쉘링 가 뒤쪽에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층계를 따라 몇
층 올라가면 이를 수 있는 방이었다. 북쪽을 향한 커다란 창문 밖에는 푸른 하
늘과 햇빛, 참새들 지저귀는 소리가 가득했으며 열려진 창을 통해 이른 봄의 감
미로운 기운이 넓은 작업실 안으로 흘러들어와서 유화 물감과 정착액이 발산하
는 냄새와 뒤섞이고 있었다. 쾌청한 오후의 황금색 햇빛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뜰리에의 널찍한 공간으로 넘칠 듯 흘러들어와서 약간의 흠집이 있는 마
룻바닥을, 작은 병이나 물감 튜브 또는 붓이 널린 창문 아래의 거친 탁자를, 또
한 도배를 하지 않은 벽 위에 액자에도 끼우지 않은 채 걸려 있는 습작품들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출입문 가까이에는 정취있게 꾸며 놓은 자그마한 거
실 또는 휴식 공간이 있었는데 이를 가리고 있는 해진 비단 장막도 있는 그대로
비춰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젤 위에 놓은 미완성의 작품과 그 앞에 서 있는 화
가와 시인도 환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리자베타는 그와 나이가 비슷한, 서른이 갓 넘은 여자였다. 물감으로 얼굴진
짙푸른 색의 에이프런을 두른 그녀는 낮은 걸상에 앉아서 한 손으로 턱을 괴었
다. 그녀의 다갈색 머리는 깔끔하게 손질이 되어 있었으며, 양쪽 옆으로 벌써 희
끗희끗 빛이 감돌고 있었다. 중아부에서 가리마를 탄 머릿결이 관자놀이 위까지
가볍게 굽이쳐 흘러내리면서 얼굴의 윤곽을 이루고 있었는데 뭉뚝한 코, 날카롭
게 튀어나온 광대뼈, 조그맣고 반짝이는 검은 눈과 함께 스라브인의 모습을 한
그녀의 갈색 얼굴은 무한한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녀는 긴장되고 의혹에 차 있는 듯한 표정으로, 신경이 잔뜩 예민해 진 듯
머리를 갸우뚱한 채 눈을 찡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토니오는 그녀 옆에 서서 오른손을 허리에 얹고 왼손으로 분주하게 갈색의 콧
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음울하고 긴장된 빛이 감도는 비스듬한 눈썹으 ㄹ
움직이면서 그는 평소의 버릇처럼 조용히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그는 유달리
공을 들인 말쑥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조용한 회색빛의 복지를 점
잖게 재단해서 만든 옷이었다. 그러나 더할 나위없이 간소하고 단정하게 가리마
를 타 어두운 갈색 머리 아래쪽 이마에는 노역의 흔적이 역력하였으며, 그 이마
위로 신경 관민성의 경련이 한 번 스쳐 지나갔다. 남방 사람의 골격을 갖춘 뚜
렷한 그의 용모는 너무도 날카로워서, 마치 단단한 석필로 선을 그어서 그 모습
을 더욱 두드러지게 살려 놓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술의 선은 너무
도 온화했으며 턱의 모양도 비할 데 없이 부드러웠다. 잠시 후 그는 한 손으로
눈과 이마를 어루만지고는 몸을 돌렸다.
"오지 말 걸 그랬습니다." 그가 말했다.
"왜 그러세요, 토니오 크뢰거씨?"
"지금 막 일을 하다가 나왔습니다. 리자베타, 현재 제 머리 속의 상태가 이 캔
버스의 상태와 전혀 다르 바가 없군요. 작업을 위해 세운 발판, 스정을 가해서
더럽혀진 희미한 밑그림, 몇 군데 칠한 자국 뿐이지요. 그렇습니다, 여기 와서
똑같은 것을 보게 되는군요. 여기서도 똑같은 갈등과 모순의 기운을 느낄 수 있
어요." 그는 냄새 맡는 시늉을 하며 말을 계속했다. "집에서 저를 괴롭히던 것도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게 되면, 어디
를 가나 그것이 표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심지어 공기에서 조차 그
기운을 느길 수 있어요. 정착액과 봄의 향기에서조차... 안 그래요? 예술과 그리
고 또 뭐라고 할까요? '자연'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리자베타, '자연'은 고갈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아, 차라리 산책이나 하는 편이 나았을 걸 그랬군요. 산책
을 한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졌을 지 의문이 가긴 합니다만 말입니다. 오 분쯤
되었을까,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저의 친구인 소설가 아달베르트를 만났습
니다. 극가 공격적인 말투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젠장맞을 놈의 봄 같으니라고!
언제나 그랬지만 일년중 가장 소름 끼치는 때가 봄이란 말이야! 크뢰거, 자넨 제
대로 된 생각을 하나라도 할 수가 있나?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문제라도 조용히
해결할 수 있는가 말일세. 점잖치 못하게 피가 끓어로르고 당치도 않게 달뜬 기
분에 듬뿍 사로 잡혀 마음이 괴로운데 어지 그게 가능하겠는가? 잘 살펴보면,
이런 기분이란 완전히 하찮은 것이고 전혀 쓰잘 데 없는 것임이 드러나기 마련
이지. 자넨 어딜 가는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 카페로 가는 중이네. 그곳이야말로
중립 지대가 아닌가. 계절이 바귀어도 그곳은 영향을 받지 않거든, 자네도 알겠
지만, 카페란 이름바 문인들의 황홀하고 숭고한 영역을 대표하는 곳이 아닌가?
그곳에 있으면 고상하고 멋진 생각만을 지닐 수 있단 말일세.' 그리고 그는 카페
로 갔는데, 저도 그와 함께 갔었더라면 좋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리자베타는 재미있다는 듯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재미있군요, 토니오 크뢰거씨. 그 '점잖치 못하게 피가 끓어오른다'라는 표현
이 맘에 들어요, 사실 그분의 말씀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요. 봄은 정말로 일
하는 데 어울리지 않는 계절이거든요. 그러나 이제 제 말 좀 들어보세요. 그럼에
도 불구하고 저는 이 자그마한 일을 끝낼 거예요. 아달베르트시의 표현을 빌자
면, 사소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거실'로 옮겨가서 차
를 마십시다. 그 다음엔 마음대로 이야기하세요. 당신이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
가 너무 많다는 것 저는 똑똑히 알 수 있거든요. 그때까지는 아무데서나 마음을
풀고 계셔요. 일테면 저 궤짝 위에라도 ㅇ아 계시지요. 당신의 그 멋진 옷이 구
겨질까보ㅘ 걱정만 되지 않으신다면 말이에요."
"아, 제 옷에 관해서는 상관하지 마십시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남루한 우단
저고리나 빨간 조기를 걸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길 바라는 것 아니겠지요? 도대
체 여ㅖ술가라는 인간의 속을 들여다보면 항상 대단한 협잡꾼이 들어앉아 있어
요. 제발 겉으로나마 제대로 차려 입고 점잖은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시
기 바랍니다. 아니, 제가 뭐 잔뜩 화가 나 있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근 ㄴ팔레트 위에 물감을 섞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론 들으신 바
와 같이 저엑겐 다만 어떤 문제가 하나 있고 그에 따른 갈등이 있을 뿐이지요.
그게 제 마음에 틀어박혀 작업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우리가 무슨 이야
기를 했지요? 아, 그렇지 소설가 아달베르트, 대단히 자부심이 강하고 옹골찬 바
로 그 사나이에 대해 이야기했지! 그는 '일년중 가장 소름 끼치는 때가 봄'이라
고 말하고 카페로 가버렸습니다. 그 친구처럼 사람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
언지 알아야 하지요, 안 그래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 친구만 그런 건 아닙니다.
저도 역시 봄이 되면 신경이 예민해집니다. 봄이 불러일으키는 감미롭지만 하찮
은 추억과 감정은 저를 혼란에 빠뜨리고 말지요. 다만 저한테는 봄을 비난하거
나 멸시할 만큼의 용기가 없다는게 다르다면 다를까요. 사실을 말하자면, 봄이
저에게 봄이 저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지요. 봄이 지닌 완벽한 자연스러움과
의기양양한 젊음 앞에서 저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아달베
르트는 이런 것에는 눈이 떠 있지 안지요. 그런 그를 제가 부러워해야 할지 또
는 멸시해야 할지는 알 수가 없군요.
봄에는 확실히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감정을 갖고 잇
기 때문입니다. 창조자에게는 감정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풋내기에 불과
하지요. 참되고 진정한 예술가라면 누구나 이처럼 서툴고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소박한 사람들을 보고 미소를 머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울한 미소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는 그런 미소를 머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말하는
것 자체는 결코 핵심적인 것이 될 수 없고, 오히려 본질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천연 그대로의 원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조합하여 예술가는
여유있고 침착하게 최상의 재능을 발휘하여 미적 형상을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다신은 비참함을 느끼게 될 것이며 감상적이 될 것입니다. 무언가 답답한 것, 서
추르게 진지한 것, 자제력을 결여하고 있는 것, 반어적이 아닌 것, 정취가 없는
것, 지루한 것, 평범한 것이 당신의 수중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
침내 세상 사람들이 보이는 무관심, 당신 자신이 느끼는 실망과 비참함 이외에
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것입니다. 사정이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리자베타, 감
정이란, 따뜻하고 애정 어린 감정이란 언제나 평범하고 쓸데 없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들의 퇴폐적인 신경 조직, 예술적인 신경 조직에서 비롯
되는 자극과 차가운 망아의 경지만이 예술적인 것이지요. 예술가는 어딘가 초인
간적이고 비인간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것을 재연하
거나 연출하고 그것을 효과적이면서도 청취있게 묘사하녀는 예술가의 노력은 그
러헥 할 때만이 무언가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문체, 형식, 표현 등
에 재능이 있다는 것은 이미 그가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같은 냉정하고도 까다
로운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무언가
인간적인 것이 메말라 있고 황폐화되어 있는 상태야말로 재능의 전제 조건인 것
입니다. 왜냐함변 건강하고 강렬한 감정에는 정취란 스며들 수 없으니가요. 예술
가가 인간이 되어서 무언가 감정을 갖기 시작하면 그는 볼장 다 본 셈이 됩니
다. 아닯베르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카페라는 '초월적 영역'으로 가 버린
것이죠. 암, 그렇고 말고요!"
"그렇다면 참 안됐군요." 이렇게 말하면서 리자베타는 양은 대야에 손을 씻었
다. "당신이 그의 뒤를 따를 필요는 없겠지요"
"그래요, 리자베타. 저는 그의 뒤를 따르지 않을 겁니다. 사실 저야 이따금씩
제 예술이 봄날을 맞이하게 되면 이를 약간이나마 부끄러워할 처지에 있을 뿐이
니까요. 아시다싶, 저는 가끔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편지를 받습니다. 독자
들이 보내 온 찬미나 감사의 편지, 감동한 사람들이 보내 온 경탄에 가득 찬 편
지들 말입니다. 그러한 편지를 읽노라면, 제 예술이 이처럼 따뜻하면서도 어색한
인간적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안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한 줄 한 줄의 열광적인 사연에서 보이는 소박함을 마주하고는 일종의 연민에
사로잡히기도 하지요. 그러나 말입니다. 만일 언젠가 이 고지식한 사람들이 이면
을 들여다보게 되면, 또한 이 순진한 사람들이 정직하고 건간하며 착실한 인간
은 결코 글을 쓰거나 연기를 하거나 작곡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녀,
이들을 사로잡았던 흥은 얼마나 쉽게 깨지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얼굴
이 빨개지곤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끔 제 자신을
고양시키고 자극하기 위해 그들이 저의 재능에 바치는 찬사들을 거리낌없이 이
용하기도 압니다. 또한 그 같은 찬사들을 터무니 없이 진지한 태도로 받아들이
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원숭이처럼 대가 흉내를 얼굴에 꾸며 보기도 하지요. 아,
리자베타. 제말을 가로막지 마십시오, 저에게도 가끔 인간적인 것에 거리를 둔
채 인간적인 것을 소재로 삼아 이야기하는 일이 죽도록 피로하게 느껴지는 수가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도대체 예술가가 남성일 수 있
을까요? 남성이 '여성'에게 이런 질문을 하다니! 제 생각엔 우리들 예술가란 저
교황청의 거세한 남성 가수들과 어느 정도 운명을 같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
다. 우리들 예술가는 아주 감동적으로 아름답게 노래하지요. 그러나..."
"좀 부끄러운 줄 아세요, 토니오 크뢰거씨. 자, 이제 차를 좀 들기로 합시다.
물이 곧 끓을 거예요. 담배는 여기 있어요. 소프라노 이야기를 하다가 중단했지
요? 어서 계속 말씁해 보세요. 그러나 좀 부끄러운 줄 아세요. 당신이 얼마나 득
의만만한 열정을 갖고 자신의 소명을 헌신하고 있는가를 제가 혹시 모르고 있다
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제발 '소명'이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도대체 문학이
라는 것은 오명일 수가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그건 확실히 저주입니다. 언제부터
인간이 지 저주에 눈뜨기 시작했냐고요? 오래 전부터, 끔찍할 만큼 아주 오래
전부터입니다. 인간이 아직은 마땅히 신과 세계와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
야 했던 바로 그때부터입니다. 당신은 자신에게 각인이 찍혀져 있으며 평범하고
정상적인 다른 사람들과는 불가사의한 대립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
합니다. 반어, 불신, 저항, 인식, 감정에 의해 당신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생긴 심연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
니다. 당신은 고독해지고 일단 그렇게 되면 어떤 의사 소통의 통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지요. 이 무슨 운명인가요! 자신으 처지가 두렵게 느껴질 정도
로 당신이 아직까지 삶에 대한 충분한 의욕과 애정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면,
이 무슨 운명이겠습니까! 수천 명의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당신은 자신의 이마
에 찍힌 표지를 감지하고 또한 누구의 눈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는 가닭
에 당신의 자의식은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한때 천재적인 배우 한 사람을
알고 있었는데, 인간으로서의 그는 병적인 소심증과 불안감 대문에 몹시 고통을
겪었지요. 예술가로서는 완벽했지만 인간으로서는 허약했던 그는 자의식이 극도
로 예민한제다가 적절한 극중 배역을 배당받지 못해서 그렇게 되고 말았던 것입
니다. 진정한 예술가란 예술을 생활인으로서의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
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가라는 저주스러운 운명을 숙명적으로 타고난 사람인
데 재중 속에서 그런 사람을 식별해 내는 데 유별나게 예리한 안목이 필요한 것
은 아니지요. 남들과 분리되어 있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 사람에게 인정과
관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느낌, 동시에 어딘가 왕자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
서도 당황하고 있는 듯한 기색이 그런 사람의 얼굴에는 역력히 나타나 있는 법
입니다. 평복을 입은 채 서민들 사이를 걷고 있는 제후의 얼굴에서 그와 비슷한
분위기를 관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평복도 소용이 없습니다. 리자베타!
당신이 변장을 하든, 얼굴을 가리든, 또는 후가 중인 무관이나 부관과 같은 오차
림을 하든, 소용이 없어요. 당신이 눈길을 한 번 주기가 무섭게, 말 한 마디하기
가 무섭게, 누구나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 어딘가 낯설고 껄끄러우며 색다른 그
무엇이라는 사실을 아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예술가란 무엇인가요? 이 질문만큼이나 인간이 안함만을 추구하
고 지적으로 게으르다는 사실을 가차없이 입증해 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예술
의 감화를 받은 덕망있는 사람들은 '그런 재능은 타고나는 거지요'라고 겸손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선의에 넘치는의견에 의하면 밝고 숭고한 감화력은 절
대적으로 밝고 숭고한 근원에서 비롯되는 것임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여기에서 문제되는 '재능'이라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름을 돋게 하는 것이며 극도로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전혀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예술가란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올바른 양심을 지니고 있고 기반이 단단한 자의식을 지닌 사람들에게라면
늘 그렇듯이 이런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누구나 잘 알고 있기는 마찬
가지입니다. 아시다시피 리자베타, 비록 정신적인 의미에서이긴 합니다만 저는
제 영혼 깊이 예술가라고 할 수 잇는 유형의 사람들에 대해 전적인 의혹을 품고
있습니다. 저 북쪽의 협소한 도시에서 살던 저의 고결한 선조들이 한결같이 그
들 집으로 찾아오는 떠돌이 오락사나 진기한 예인같은 사람들에 대해 갖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의 의혹을 저는 그들에 대해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시지요. 창작에 재능이 있습니다. 그는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그
재능을 발휘하지요. 그래서 때때로 대단히 뛰어난 작품을 창작해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숭고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불구하고'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
람이 전혀 흠잡을 데 없는 그런 사람은 아니지요. 반대로 그는 이미 징역형을
디른 적이 있는 그것도 납득할 만한 죄목으로 중형을 치른 적이 있는 사람입니
다. 그래요. 사실 그 사람이 자기 재능을 처음 자각하기 시작했던 것은 다름아
닌 감옥에서였으며 그때의 경험이 그의 모든 작품의근본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 감옥 체험과 같은 것에 정통할
필요가 있다는 투의 과감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의문을 갖지 않
을 수 없는 점도 있긴 합니다. 과연 그 사람의 옥중 체험과 그를 그곳으로 몰아
넣은 원인 가운데 전자가 작가 정신의근원이나 본질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걸까요? 소설을 창작하는 은행가 그런 사람은 드물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러나
범죄자가 아닌 동시에 비난할 여지도 없는 착실한 은행가로서 소설을 창작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네, 웃고 계시군요. 그렇지만 저는
단순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한 건 아닙니다. 어떤 문제도,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도 예술가란 무엇이며 예술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문제
보다 더 골치 아픈 것은 없습니다. 그 어느 것보다도 더 기적적인 예술 작품, 더
할 수 없이 전형적이며 더할 수 없이 힘찬 예술가에 의해 창작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트리스탄과 아졸데'를 예로 들어 보기로 합시다. 지극히 병적이며
의미가 애매한 이 작품이 젊고 건강하며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을 지닌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신을 고양시키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며, 따뜻하고 솔직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필경 자기 자신의 '예술가적'창
작을 해 보고 깊은 감흥도 일깨우는 것을 당신은 목격할 수 있을 겁니다. 선의
의 딜레땅뜨와 만나게 되는 거지요! 우리들 예술가의 눈에 보이는 것과 그들이
'따뜻한 마음'을 지닌 채 '솔직한 감동'에 휩싸여 꿈꾸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저는 예술가들이 여자들과 젊은이들의 환호성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곤 하는데, 그들에 대해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예술가 정신의 근원, 예술가 정
신의 표출 양상 및 그 조건 등과 관련하여 우리는 항상 기묘한 체험을 되풀이하
는 것입니다."
"남을 보니 그렇다는 거지요? 토니오 크뢰씨, 실례지만, 남들에게만 해당하는
걸까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스듬한 눈썹을 찌푸리고는 혼자 웅얼거리듯이 휘파
람을 불 뿐이었다.
"자, 어서 차를 좀 드세요, 토니오. 진하지 않아요. 그리고 담배를 새로 한 대
피우세요. 그건 그렇고 사물을 당신이 보듯 꼭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다는 걸
당신 자신도 잘 알고 계시죠?"
"친애하는 리자베타,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의 대답은 '그렇게 관찰하는 것은
지나치게 엄밀히 관찰하는 것일 수 있다'가 아니었던가요?"
"토니오 크뢰거씨,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거예요. 다른 각도에서 관찰하
더라도 마찬가지로 엄밀한 관찰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저여 어리석은 여류 화
가에 불과하지만, 당신 말씀에 대새 무언가 한마디 대꾸는 할 수 있겠지요? 당
신 견해에 대항하여 당신 자신의 직업을 다소나마 변호하는 말이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제가 꺼내는 이야기는 물론 새로운 것이 아니예요. 당신 자신
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을 환기시키는 것일 뿐이지요. 예를 들어 문학은
무언가가 정화되고 신성화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갖고 있다단가, 문학적 지식과
언어를 통해 열정을 가라앉히게 되었든가, 또는 문학이 이해와 관용과 애정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든가, 문학의 언어는 인간을 구원하는 힘을 갖든다든가, 문학 정
신은 일반적으로 인간정신의 가장 고귀한 구현이라든가, 문학인은 완벽한 인간
이라든가, 이렇게 관찰하는 것도 사물을 엄밀하게 관찰하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에겐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지요,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사실 당신 나라
의 시인들이 남긴 작품, 당신이 말한 바 있는 신성한 문학으로 대접받아 정말로
손색이 없는 그야말로 숭배할 만한 러시아 문학을 문제삼는다면, 당신 말이 옳
지요. 그렇다고 제가 당신의 이의 제기를 소홀히 여기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
신의 생각도 지금 제가 마음 속에 갖고 있는 생각의 일부분에 해당합니다. 저를
좁 보십시오. 지금 제가 극도로 활기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요, 그렇죠? 약간 늙
어 보이고, 피곤하고 지쳐 보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자, 이제 다시 '지식'의 문제
로 되돌아가기로 하지요. 이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천성적으로 상대를 쉽게 믿
어 버리고 유순하며 누구에게나 호의적인 동시에 약간은 감상적이기도 하며 단
순히 심리적으로 투시력 때문에 심신이 지나치게 자극을 받아 파멸에 이르게 되
는 인간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는 또한 이 세상의 비애에 압도되지도 않고, 아
무리 고통스러운 일도 관찰하고 주목하며 이에 자신을 순응시킬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허위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윤리적 우월감을 또렷이 의식하는 가운데 유쾌한 기분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표ㅕ정이 항상 즐거움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로는 다소 다루기 힘든 일도 있기 마련입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것일까요? 저는 이에 대해 결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리
자베타, 세상에는 지식에 대한 염증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런 것이 있습니
다. 어떤 사물을 꿰뚫어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것에 대해 싫증이 나서 죽을 지
경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용서할 기분도 도저히 나지 않게 되
지요. 덴마크의 왕자였던 햄릿의 경우가 그랬고, 전형적인 문인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알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닌데 알아야 할 운명에 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햄릿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눈물로 가리워진
감정으이 베일을 통해서일지라도 명확하게 보아야 하고, 깨달아야 하고, 주목해
야 하고, 관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을 미소를 머금
은 채 덮어 두어야 하지요. 맞잡은 두 손이 비비꼬이고, 양 입술이 앙다물어지
고, 두눈이 감정에 복받쳐 어두워지고 결국 앞이 보이지 않게 되는 바로 그 순
간에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지긋지긋한 일입니다. 리자베타, 이거
야말로 부당하고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격분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역시 마음에 걸리는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면 이
는 물론 ㅁ든 진리에 대해 사람들이 보이는 권태로움, 무관심, 냉소적인 태도 입
니다. 따지고 보면, 온갖 세파에 이미 시달릴 대로 시달린 재사들이 모여 침묵하
고 있는 자리보다 더 절망적인 자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엔 모든 지식이 진부하고 따분한 것이지요. 당신이 어떤 진리를 정복하고
소유하게 되어 무언가 젊은이다운 환희를 느끼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리하여 그
진리를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고 합시다. 그들은 아마도 당신의 눈뜸에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하여 단지 짤막한 코웃음으로 대꾸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리
자베타. 문학에 종사하는 것만큼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일은 없지요! 사실 어떤
사람이 오만하고 용기가 없을 분이어서 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자기 의견을 잘
밝히려 들지 않는다고 합시다. 확신컨대, 인간 사회에서 그는 멍청이 취급을 받
게 될 것입니다... '지식'에 관해서는 그만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이제 '말'에 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할까요? 말이란 감정을 해방시키기 위한 거
ㅛ이라기보다 오히펴 감정을 냉각시켜 얼음처럼 차갑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닐
까요? 솔직하게 말해, 문인이 문학적 언사를 통해 감정을 신속하게 대충대충 처
리해 버리는 데네는 무언가 속셈이 있지 않을까요? 찬바람이 날 정도로 냉정하
고 괘씸할 정도로 뻔뻔한 속셈 말입니다. 당신의 가슴이 너무도 벅찬 감격에 휩
싸일 때가 있지요? 무언가 감미롭거나 숭고한 체험으로 인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만큼 감동에 휩싸여 있을 때가 있지 않은가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지요?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문인을 찾아가십시오. 그러면 만사가 지극히 짧은 시간
안에 정돈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의 문제를 분석하고 공식화한 다음 여기에 이
름을 붙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여 당신에게 전할 것입니다. 결
과적으로 모든 문제가 영원히 처리되어, 당신은 여기에 다시는 관심을 가질 표
요가 없게 되지요. 그리고도 그는 이에 대한 사례를 전혀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
다. 결국 당신은 마음도 가벼워지고 열도 내린 상태에서 맑은 정신으로 집에 돌
아가게 될 것이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제껏 그따위 문제를 놓고 그토록 달콤
한 걱정에 휘말려 있었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
신은 이처럼 냉정하고 자만심에 찬 협작꾼을 진심으로 옹호할 작정이십니까? 일
단 말로 표현된 것은 처리된 것이다, 이게 바로 문인들이 내세우는 신조입니다.
전세계를 말로 표현하면 그것으로 전세계는 처리되고 구원된 것이 되며 따라서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식이지요. 아주 좋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허무주의
자가 아니기에..."
"당신이 허무주의자가 아니락요..." 리자베타가 끼여들었다. 마침 차를 뜬 스푼
을 입에 가져가려던 참이었던 그녀는 그런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빤
히 쳐다보았다.
"자자, 진정하세요. 리자베타, 저는 허무주의자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감정과
관련하여 저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문인이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삶이란 말로 표현되고 '처
리'된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것, 부끄러움 없이 계속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
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제 아무리 문학이
삶을 구우너하더라도 삶은 이와 관계없이 계속해서 죄를 범할 것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볼 때 모든 행동은 그 자체로서 이미 죄이니까요.
이제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리자베타. 제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저는
삶을 사랑합니다. 일종의 고백처럼 저는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을
혼자만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요. 세상 사람들은 제가 인생을 증오한다, 무서워한다, 경멸한다, 혐오한다고들
말하기도 하고, 이에 관한 글을 써서 지상에 발표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 왔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우쭐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렇지
만 그런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삶을 사랑합니다.
웃고 계시군요. 리자베타, 왜 웃고 계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라건대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문학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렇
다고 해서 쎄자레 보르지아(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모델로 삼았던 지략이 뛰
어나고 광포했던 정치가;역주)라든가 또는 그를 주창자로 떠받드는 여하한의 주
정뱅이 철학도 머리에 떠올리지 않기 바랍니다! 쎄자레 보르지아 같은 인간은
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사람을 조금도 탐탁하게 여기
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어째서 그따위 괴상하고 악마적인 존재를
이상적인 인간으로 숭배하려 드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비록
정신과 예술의 연우너한 대립물이긴 하지만 '삶'은 피로 얼룩진 거대한 전쟁터나
광포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또한
'삶'이란 비정산적인 인간의 눈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비정상적인 존재도 아
닙니다. 그와 반대로 '삶'이란 정상적인 것이고 존경할 만한 것인 동시에 사랑스
러운 것으로 우리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세계입니다. 또한 평범하면서도 매력적
인 모습을 띤 것이 바로 '삶'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리자베타. 세련된 것이나 괴
벽스럽고 악마적인 것에 마지막까지, 더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열중하는 사람은
결코 예술가일 수 없습니다. 순결하고 소박하며 살아있는 것에 대한 동경이 무
엇인지 모르는 사람, 약간의 우정, 헌신, 신뢰감,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은 결단코 예술가일 수 없는 것입니다. 리자베
타, 일상적인 것에 담긴 환희를 남몰래 애태우며 동경하는 마음,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린간적인 친구가 하나라도 있다면! 이 세상의 인간들 가운데 단 한
사람괄가도 친구로 지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저는 얼마나 자랑스럽고 행복할까
요! 이 같은 제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가지 저는 다만 악마나
요정, 지하 세계의 괴물이나 지식의 과잉으로 벙어리가 괸 망령들, 이른바 문인
으로 불리는 사람들과 친구로 지냈을 뿐입니다.
때ㄸ로 저는 강당 안의 연단 위에 서서 저의 이야기를 경청하러온 사람들과
마주 대하는 수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저는 청중을 들러보는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수가 있습니다. 오늘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온 사람들은 누구일까, 어떤
사람들한체 박수 갈채와 감사를 받을 것인가, 지금 여기에 있는 누구와 내 예술
이 이상적인 일체를 이룰 것인가? 이 같은 질문을 마음 속으로던지면서 은밀하
게 청중석을 훔쳐보는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리자베
타, 제가 찾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더군요. 저는 다만 제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런 유형의 사람들의 모임,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의 회합에 참석한 사람들과
똑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만을 확인할 뿐입니다. 투박한 몸과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지요. 말하자면, 항상 넘어지는 사람들이죠. 제 말으 이해하시
겠지요? 시란 삶에 대한 일종의 온화한 복수라고 여기는 사람들 말입니다. 언제
나 슬픔에 잠겨 있고 무언가를 동경하는 가난한 사람들 뿐이죠. 리자베타, 정신
을 필요로 하지 않은 파란 눈동자의 소유자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도 즐거워한다면 이는 결국 불행하게도 논리적 일
관성을 잃고 있는 셈이 되지 않을까요? 삶을 사랑함에도 북구하고, 갖은 방법으
ㄹ동언하여 섬세함이니 우울함이니 하는 것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기려고 한다
면, 또는 문학 특유의 그 모든 병적인 고귀함을 획득하고자 한다면,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예술의 영역은 확잗되고 있지만 건강함
과 순결함의 영역은좁아만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가운데 아직도 남
아있는 부분을 지극히 조심스럽게 보존해야만 합니다. 예컨대, 말이 달리는 모습
을 즉석에서 촬영한 사진이 담긴 책을 읽는 데서 한결 더 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시 쪽으로 끌어가려고 해서는 안 되겠지요!
따지고 보면, 예술에 한눈을 파는 삶보다 더 한슴스럽게 보이는 것은 없을 것
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보다 더 한심한 것이 있을까요? 우리 예술가들이 누구
보다도 더 철저하게 경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삶을 영위하면서도 동
시에 기회만 주어지면 언젠가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딜레땅뜨입니다.
정말이지, 제가 이런 종류의 경멸감을 갖게 된 것은 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어, 기분도 흐뭇해지고 주위 사람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도 갖게 되엇다고
합시다. 그런데 갑자기 인상이 좋고 풍채가 당당한 위관급 장교 하나가 자리에
서 일어납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었지요. 아무튼 자신의 명예로운 군복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사람입니
다. 그런데 그가 분명한 어조로 자작시를 낭독하겠으니 허락해 주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사람들은 웃음 띄운 얼굴로 그의청을
들어줍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때까지 상의 옷자락 속에 감추어 두었던 종이 쪽
지를 꺼내 거기에 적힌 자작시를 자신이 의도했던 댈 큰소리로 낭독합니다. 그
의 자작시는 음악과 사랑에 관한 것이며, 한 마디로 말해 북받치는 검정을 담고
있고 그런 만큼이나 감정이 서툴게 처리된 그런 종류의 시라고 합시다. 누구에
게든 묻고 싶습니다. 위관급 장교가,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사람이 과연 그런 짓
을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겁니다! 결과는 뻔하죠. 모두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침묵을 지키다가 약간의 억지 찬사를 모낼 것입니다. 그런 다음 말할 수 없
이 불편한 분위기가 주위에 감돌겠지요. ㅁ엇보다 먼저 제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죄책감일 것입니다. 이 경솔한 젊은이가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데 대해서는 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죄책감을 갖지 않을 수 없
을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의문의 여지없이 사람들은 저에게 조소가 담긴,
경원하는 듯한 시선을 보낼 것입니다. 제 자신의 일에 그가 끼여들어 집적거렷
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위이어 제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갑자기
왜소해 보인다는 그런 느낌일 것입니다. 지금가지만 해도 그의 존재와 본질에
대해 최상의 존경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저의 눈에 자꾸자꾸 왜소해져
보인다는 느김을 갖게 되겠지요. 이어서 자바로운 동정심이 제 마음을 사로잡겠
지요. 그리하여 몇몇 용감하고 호의적인 신사들과 함께 그에게 가서 다음과 같
은 말로 격려를 하게 되겠지요. '축하합니다! 대단히 멋진 재능을 같고 계시군요!
네, 참으로 훌륭합니다! 하마터면 그의 어깨마저 두드리게 될지도 므로지요. 그
렇지만 그 위관급 잔교와 같은 사람에게 보여야 할 감정이 과연 자비심같은 것
일까요? 그는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한쪽에 서서 그는 몹시도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이 범한 커다란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삶을 대가로 희생
하지 않은 채 예술이라는 월계수에서 잎사위 하나를, 단 한의 잎사귀라도 딸 수
있다고 생각하던 것은 잘못이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전과자이다 저의
동료인 은행가와 함께 그런 입장을 고수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리자베타, 오
늘 제가 마치 햄릿이라도 된 것처럼 지나치게 많은 말을 늘어놓는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제 끝나셨나요, 토니오 크뢰거씨?"
"그렇지는 않지만, 더 이상 말을 늘어놓지는ㄴ ㅇ느렵니다."
"게다가 그만하면 충분하기도 하고요. 논평을 기대하시나요?"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토니오 크뢰거씨, 당신이 오늘 하신 말씀은 하나도 배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잘 드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오늘 오후에 말씀하신 것 전
부와 곤련하여 한 마디 온평을 하고 잎어요. 당신의 마음을 그리도 심란하게 만
드는 문제를 풀기 위한 해결의 실마리가 담긴 논평 될 거예요. 자, 들어 보세요.
해결의 실마리란 이겁니다. 당신 자신이, 거기 앉아 계신 당신 자신이 다름아닌
세속인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제가요?" 이렇게 반문하고서 그는 다소 의기소침해졌다.
"안 그래요? 정곡을 질렀지요? 틀림없어요. 이제 판결을 약간 누그러뜨리기로
하지요, 저에게 그만한 재량권이 있으니가요. 당신ㅇ은 길을 잘못 든 세속인입니
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세속인인 셈이지요."
침묵이 감돌았다. 이윽고 그가 결연한 태도로 일어서서 모자와 단장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이제 저는 평온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문제는 이제 처리가 된 셈입니다."
5
가을이 다가올 무렵 토니오 크뢰거는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에게 말했다.
"실은, 리자베타, 여행을 해볼 참입니다. 기분전환을 해야겠어요 달아나는 거지
요. 먼 곳으로."
"아 아, 그렇군요, 작은 신부님! 순례여행 삼아 다시 이태리를 찾아 가시나이
까?"
"제발, 이태리 얘기라면 그만두십시요, 리자베타! 이태리라면 신물이 납니다!
내가 마무를 곳은 이태리가 아닐까 생각했던 것은 오래전 일입니다. 예술은 어
쩔거냐구요? 벨벳처럼 푸른 하늘, 정열적인 포도주, 르리고 달콤한 관능... 간단
히 말씀드ㄹ면, 그런 건 싫습니다. 사양하겠습니다. 그런 종류의 미는 모두 내
신경만 소모시킬 뿐이지요. 동물 같은 까아만 눈을 가진 무서우리만치 생기가
도는 남쪽 지방 사람들을 난 견딜 수가 없어요. 이 라틴족 사람들의 눈에는 영
혼이 깃들어 있지를 않아요... 천만에요, 저는 지금부터 잠시 덴마크로 가볼까 합
니다."
"덴마크라고요?"
"그래요. 좋은 일들이 생길 것 같아요. 묘하게 한 번도 거기까진 가 보질 못했
지요. 젊은 시절 내내 그 국경 가가이 살았으면서 말이지요. 그래도 그 나라를
예전부터 잘 알고 좋아하기는 했어요, 이런 북쪽 취향은 아무래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걸 겁니다. 어머니는 굳이 가린다면, 소위 그 미라는 걸 좋아한 편이엇
으니까요. 그렇지만 리자베타, 그 북쪽 나라에서 나온 책들, 진지하고 순수하면
서도 웃음을 자아내는 그 책들을 생각해 보세요-급다 나은 건 없지요. 저는 그
런 책들이 좋습니다. 그릭 스칸디나비아 음식들을 생각새 보세요.그 견줄 데 없
는 음식을 말이에요, 그것은 소금기 풍기는 억센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먹어야만
소화돌 수 있는 것이지요(그것을 먹고 소화해낼지 난 아직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만). 그런 음식은 저도 전부터 고향에서 좀 알고는 있었지요. 우리 고향에서도
바로 그런 음식을 먹었으니까요. 사람들 이름은 또 어떻습니까. 북쪽 사람들이
치장하듯 붙이는 세례명 말예요. 우리 고향에서는 그런 이름이 많기도 했지요.
잉에보르크 같은 이름의 음향을 좀 보세요. 하프로 연주되는 가장 순수한 시라
고나 할까요. 다음으로는 그 바다-북국의 발틱해가 있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저는 떠나렵니다, 리자베타. 발틱해를 다시 보고, 그 이름들을 다시 듣고, 그 책
들을 그곳에 가서 읽고 싶습니다. 그리고 햄릿에게 망령이 나타나 그 불쌍하고
고귀한 젊은이에게 고난과 죽음을 안겨준, 크론보르그 성의 계단에도 서 있어
볼 작정입니다..."
"어떻게 가실 예정인가요, 토니오? 괜찮다면 말해 주세요. 어떤 길을 경유할
생각이세요?"
"늘상 하던 대로지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그는 분명 낯을 붉혔다. "실은
제가 출발했던 곳을, 리자베타. 십삼년이 지난 지금, 되짚어 가려 합니다. 괘나
우스꽝스럽기는 하겠지만요."
그녀는 웃음을 머금었다.
"제가 듣고 싶었던 게 바로 그거예요, 토니오 크뢰거.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
릭 제게 자주 편지하는 거 잊지 마세요, 아시겠니요? 당신의 덴마크 여행에서
느끼는 경험이 모두 담긴 편지를 고대하고 있겠어요."
6
이리하여 토니오 크뢰거는 북쪽을 향해 떠났다. 그의 여행은 사치스러웠다(보
통 사람들보다 내적인 고뇌를 훨신 더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오적으로 얼마간
안락하게 지내는 건 당연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쉬지 않고 여행을 계
속하여 이윽고 그가 떠나 왔던 그 작은 돗, 회색 하늘에 탑들이 솟아 있는 그곳
에 이르렀다. 여기서는 짧지만 유별난 체류를 하게 된 것이었다...
음울한 오후가 어느덧 저녁으로 기울어질 무렵에, 기차는 비좁고 세월에 찌들
은, 신비로울만치 졍겨운 역 구내로 들어갔다. 짙은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 올
라 지저분한 유리 지붕 밑에서 여기저기 조각조각 길게 흩어지는 것도, 토니오
크뢰거가 경멸감만을 가슴에 품고 이곳을 떠났던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짐을 챙겨 호텔로 가져 가도록 일러 놓고 역을 나섰다.
역 밖에는 예전 그댜로 터무니없이 높고 넓은 시커먼 쌍두마차들이 일렬로 늘
어서 있었다. 그는 마차를 잡지 않고 그저 바라다 보기만 하였다. 다른 것에 대
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폭이 좁은 뾰족지붕들, 이웃집 지붕 너머로 인사를 나누는
첨탑들, 장황하면서도 재빠른 말투를 가진 금발 머리의 둔중하고 태평스런 사람
들도 그저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러자 신경질적인 웃음이 복받쳐 나왔고 그것은
흐느낌에 가까웠다. 그는 끊임없이 불어오는 눅눅한 바람기를 얼굴에 느끼면서,
신화에 나오는 신상들이 난간에 서 있는 다리를 지나 항구를 따라 얼마간 계속
해서 천천히 걸었다.
세상에, 모든 것이 이렇게나 앙증맞고 아기자기해 보이다니! 지난 십삼년간 내
내 뾰족지붕의 이 우습도록 자그만 거리들은 여기서 마을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
갔던 것인가? 일렁이는 강물에는 황혼과 바람 속에 배들의 돛대와 굴뚝이 고요
히 드리워져 있었다. 내친 김에 저쪽 거리를, 내가 머리 속에 새겨둔 그 집으로
이어진 거리를 올라가 볼까? 아니, 내일로 미루자. 지금은 너무 졸ㄹ리운 걸. 여
행에 시달려 그의머리는 무거웠고, 안개처럼 천천히 피어오르는 갖가지 상념이
그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지난 십삼년 동안, 위장병에 시달릴 때 가끔 그는 고향에 돌아가는 꿈을 꾸었
었다. 비탈진 거리에 자리잡은, 메아리 울려 퍼지는 오래된 집으로 그가 돌아가
보니, 아버지께서 아직도 거기 계시어 그의 무분별한 생활 태도를 호되게 꾸짖
으셨고, 그때마다 그는 꾸지람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
황 자체가, 끊임없이 착각을 일으키며 이어지는 꿈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 것
이었다. 그런 꿈 속에서는 곧잘 이것이 꿈인가 현실인가 자문자답해 보지만, 어
쩔 수 없이 이것은 분명 현실이려니 확신을 하게 도고, 깨어나서야 역시 꿈이었
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고개를 수그려 맞바람을 맞으며 그는 인적이
드물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거리를 헤쳐 나갔다. 몽유병자 같은 발걸음은 그가
숙박할, 이 도시에서 으뜸가는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다리가 몹시 구부러진 한
사내가 끝에 불을 붙인 장대를 들고 뱃사람처럼 기우뚱거리는 걸음걸이로 앞서
가면서 가스등에 하나씩 불을 켰다.
그의 심정은 대체 어떤 상태였을까? 잿더미로 변한 피로감 속에서, 맑은 불꽃
이 일어날 기미도 없이, 거뭇거뭇 고통스럽게 타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조
용, 조용히, 말은 그만! 말은 삼가자! 그는 황혼이 진, 꿈결 같은 이 정든 거리를
바람을 맞으며 하염없이 걸어갔으면 싶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그렇
게나 좁고 가까웠다. 어느새 그는 목적지에 와 있었다.
마을 위쪽에 있는 아크등에 불이 막 켜졌다. 그 근처에 호텔이 있었고, 호텔
정문 앞에는 두 마리의 검은 사자상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무서워하기도 했었
다. 지금도 녀석들은 마치 서로를 얕보는 듯이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옛날에 비하면 한결 작아진 듯 보였다. 토니오 크뢰거는 그 사자들 사이를 지나
서 호텔로 들어섰다.
걸어왓기 대문에 신통한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짐꾼과 검은 정장을 쏙 빼입
은 말쑥한 남자가 거기 있었든데, 그 사내는 조그만 손가락으로 삐져 나온 셔츠
소매 끝을 양복 소매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머
리 꼭대기에서 발끝ㄲ$ㅏ지 무슨 검사라도 하듯이 ㅎ어보는 폼이, 그의 사회적
지위를 자리매김해 보고 신분과 계급을 평가해서 어떤 등급으로 영접을 해야 할
지 따져 보려고 애를 쓰는 게 분명했다. 아무리 해도 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이
자 그는 적당히 정중한 태도로 맞이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연한 금발의 구레나
룻을 기른 상냥한 호텔 급사가 낡아서 반들거리는 프록 코트를 입고 장미꽃 장
식이 달린 구두를 사뿐사뿐 옮겨서 삼층으로 올라가 고풍스럽게 꾸며진 깨끗한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창 너머로는 안뜰과 뾰족지붕이 호텔 가까운 데 있는 기
이한 모습의 교회와 어울려 화혼빛에 물들어 있는 게 흡사 중세풍의 그림을 보
는 듯했다. 토니오 크뢰거는 한동안 이 창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팔짱을 끼
고 커다란 소파에 앉아서 눈썹을 끌어 모으고는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었다.
등불을 가져 왔고 짐도 들여 왔다. 아울러 상냥한 종업원이 책상위에 숙박계
를 갖다 놓았고, 토니오 크뢰거는 머리를 갸우뚱한 채로 성명, 신분, 그리고 출
발지라고 여겨질 만한 것을 긁적거려 놓았다. 그리고는 간단한 저녁 식사를 주
문하고, 소파의 한 구석에 앉아서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주문한 식사
가 앞에 놓였을 때에도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다가, 이윽고 한두 입 먹는 둥 마
는 둥 하다가는, 한 시간쯤 방안을 오락가락 서성거리며 가끔 걸음을 멈추기도
하고 눈을 감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천천히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었다.
긴긴 잠을 자면서, 그는 이상하리만치 어수선하면서도 가슴에 사무치는 꿈 속으
로 빠져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방안에는 밝은 햇빛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가 어딘가 하
며 얼떨떨한 가운데서도 그는 황급히 생각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열어 제쳤다. 늦여름의, 조금은 색바랜 빛을 어느새 띠고 있는 푸른 하늘에는 바
람에 풀려 퍼녀 나간 가냘픈 조각 구름들이 띠를 이루고 있었으나 태양은 그의
고향 마을을 샅샅이 비추고 있었다.
그는 평상시보다 공을 들여 몸치장을 했다. 정성껏 세수를 하고 면도를하여,
마치 어느 격조 높은 명문가를 방문하기라도 하는 듯이 산뜻하고 말금하게 꾸몃
ㅆ다. 잘 차려 입었고 흠 잡을 데 없구나, 하는 인상을 심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이. 옷을 입는 데 열중하면서도 그는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의고동소리에 귀
를 기울였다.
바깥 날시는 참으로 맑았다! 어제처럼 거리에 황혼이 물들어 있었더라면 기분
이 한결 좋을 테지만, 그러나 오늘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밝은 햇빛을 헤치
고 걸어야 할 참이엇다. 아는 사람을 만나서 발길을 제지당하여 지난 십삼년 동
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해야 된다면 어떻게 한다? 안, 그럴
리 없지. 여기 사람중에 나를 알아볼 사람은 없어. 설령 누가 날 기억한다 해도
알아보지는 못할 거야. 사실 그는 그 동안에 조금은 변했던 것이다. 그는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그러다가 홀연히 이 얼굴이면, 때 이
르게 세상의 고초를 겪어 나이보다 겉늙은 이 얼굴이면, 안전하겠구나 하는 느
김이 들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방을 나섰다. 짐꾼과 그 검은 옷차림의 말
쑥한 사내가 던지는 뜯어보는 듯한 눈초리를 뒤로 하고 현관을 거쳐 두 마리의
사자상 사이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갈 셈이었던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뾰족지붕의
건물들, 첨탑들, 회랑들, 그리고 분수들이 이상하리만치 위엄있으면서도 다정다
감하게 줄지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느끼고, 또한 아스라이 먼 꿈나라에서 희미
하면서도 강렬한 향기를 가져다 주는 바람, 그 거센 바람이 다시금 얼굴에 밀어
닥치는 것을 느끼자, 곧 마음에는 엷은 바단폭과 안개의 장막이 드리워지는 것
이었다. 얼굴 근육이 이내 풀어지고, 그는 차분해진 눈초리로 사람들과 사물들을
바라보아삳. 혹시나 저 거리 모퉁이, 바로 저기쯤에 이르면 꿈에서 깨어날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는가? 그가 향하는 곳은 서글프고 기이하도록 회한에
찬 어젯밤의 꿈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시청의 아치형 천장을 지나서
그는 장터가 있는 광장으로 올라갔다. 장터 광장에는 겹겹이 뾰족한 창을 세워
놓은 듯 높이 솟은 고딕풍의 분수가 있었고, 고기 장수가 피묻은 손으로 물건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곳 어느 집 앞에 그는 발을 멈췄다. 여느 집처럼 그 집도
폭이 좁고 소박한 집이었으며 활같이 휘고 격자무늬가 있는 뾰족지붕 집이었다.
그는 그 집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문에 붙은 문패를 들여다 보고 한동안 창
문을 하나씩 훑어본 뒤에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는 어디를 향해 갔는가? 고향집을 향해 갔다. 그러나 서두를 이유가 없기에
산책삼아 성문을 나서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뮐렌둑과 홀스텐 둑을 넘어서서,
나무를 스치며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는 바람이 몰아치자 모자를 잔뜩 짓눌러 썼
다. 기차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러 그는 둑을 내려섰다. 기차가 허
둥지둥 볼품없이 연기를 내뿜고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할 일 없이 객차 수
를 헤아려 보고, 마지막 칸 지붕에 않아 있는 한 사내를 쳐다보기도 하였다. 그
러나 린덴 광장에 와서는 거기 죽 늘어선 아담한 집들 중의 어느 집 앞에 걸음
을 멈췄다. 오랫동안 정원 안과 창문 위를 살펴 보다가, 이윽고 격자철문을 이리
저리 흔들어 보았으나, 경첩만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잴 뿐이었다. 그는 잠시 차
갑고 녹이 묻어 있는 손을 들여다 보고는 걸음을 다시 옮겼다. 육중한 옛 성문
지나 항구를 따라 걸어가다가, 가파르고 바람이 위몰아치는 골목을 올라가 부모
님이 계시던 자기집을 향해 갔다.
이웃집들에 둘러싸인 채 뾰족지붕이 그 위로 우뚝 솟아 있는 고향집은 삼백년
쯤이나 지난 것처럼 회색빛을 띠고 의젓하게 서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문 앞
에 반쯤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워진 경건한 글귀를 읽었다. 그런 다음 긴
한숨을 내쉬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가슴은 불안하게 뛰었다. 그가 들어서고 있는 일층 어느 문에선가 아버
지께서 사무복을 입고 펜을 귀에 꽂은 채 걸어 나오셔서 그를 붙압아 세우고는,
무절제한 생활을 엄하게 꾸짖으시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책망을 들어도 마땅하리라 여겼으나, 그는 정작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곳을 지나갔다.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짓눌러 두기만 했는데, 그는 이런
짓을 나무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장애물이 저절로 없어지고
신기할 만큼 축복이 내려, 거침없이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그런 가벼운 꿈을 꾸
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사각형 판석이 깔린 넓은 현관복도가
그의 발자국 소리를 되울렸다. 조용한 부엌 맞은편에는 볼품은 없지만 깔끔하게
라커칠을 한 색다른 목조의 방이 예전처럼 눈에 띌 정도로 솟아오른 채로 벽에
서 쑥 삐져 나와 있었다; 그 방은 하녀들 방이었는데, 현관복도 쪽에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일종의 계단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놓여 있던 커다란 찬장과 조각이 돼있던 상자는 이젠 없어져 버렸다. 이 집 아
들은 위풍당당한 이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재딛을 때마다 그
는 흰 칠을 한 격자무늬의 목재 난간에 손을 놓았다. 떼었다 의지해 보았는데,
마치 이 오래되고 튼튼한 난간에 대해서 예전에 가졌던 정다운 기분이 다시 되
살아날 수 있을까 다시금 시험해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층 입구로 들
어서는 계단의 중간 참에서 발을 멈추었다. 문에는 흰 칠을 한 패가 하나 붙어
잇었고, 거기에는 가만 글씨로 '시민 도서관'이라고 씌어 있었다.
시민 도서관이라니? 토니오 크뢰거는생각했다. 이곳이 시민이건 문학이건 무
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느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하는 소리를 듣고 그
말에 따랐다. 긴장하고 우울한 느낌으로 들여다 보니 방안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게 변해 있었다.
이칭에는 안쪽 깊숙이 이어져 있는 세 개의 방이 있었는데, 그 사이의 문들은
모두 열려 있었다. 벽에는 똑같이 장정된 책들이 검은 서가에 길게 줄을 이어
거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꽉 들어차 있었다. 멀리 있는 두 사람은 그저 고개만
돌려 토니오 크뢰거를 쳐다보아ㅆ나, 맨 앞에 있던 사람이 얼른 일어나 두 손으
로 책상을 짚더니 머리를 쑥 내밀고 입술을 쭈삣거리며, 쉴새없이 껌벅거리는
눈으로 방문객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실례합니다만," 토니오는 수많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 고장
은 낯설은 곳이지요. 도시를 구경하러 다니고 있습니다만. 이곳이 시민 도서관인
가 보뇨? 장서를 좀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아무렴요!" 그 직원은 이렇게 말하고, 더욱 열심히 눈을 껌벅거렸다. "물론이
지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냥 돌아보시겠습니까... 목록을 드릴까
요?"
"괜찮습니다." 하고 토니오 크뢰거는 대답했다. "쉽사리 알게 될겁니다." 그리
고는 책 겉장의 제목을 읽는 것처럼 하면서 벽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갔다. 이윽
고 그는 책 한 권을 꺼내어 펴들고 창가에 가서 섰다.
이곳은 아침 식사를 하던 방이었다. 아침에는여기서 식사를 했다. 푸른 색 벽
에 흰색의 신상들이 나와 있는 위층의 커다란 식당은 아침에 쓰지 않았다... 저
편에 있는 방은 침실로 썼었다. 그의 할머니께서는 고령이었지만 오래도록 심한
고통을 겪던 끝에 그 방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는 사느ㅡ 재미를 만끽하
려 했던 세속적인 여인이었으니 세상 떠나기가 쉽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그후
그의 아버지 역시 그 방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키가 크고 단정하며 약간은
수심에 잠기고 명상적인 그의 아버지, 늘 들꽃을 단추 구명에 꽂고 다니던 그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임종시에, 토니오는 눈시울이 뜨거워진 채 침대 발치에 앉아
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애정과 슬픔의 감정에 잠겨 있었다. 그의 어머
니도, 아름답고 정열적인 그의 어머니도 또한 망연자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후에 어머니는 남쪽 출신의 예술가와 함
께 하늘이 푸른 먼 나라로 떠나가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저기 맨 끝의 조그만
세번째 방은,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책으로 가득 차 있고 초라한 사내가
지키고 있는 저 방은, 여러 해 동안 토니오 자신이 쓰던 방이었다. 수업이 끝나
고 나서 바로 지금과 같이 산책을 한구에 그는 이 방으로 찾아왔다. 저 벽 쪽에
는 책상이 있었고 그 책상 서랍에는 애절하기는 했으나 어색하기만 한 첫 습작
시들이 들어 있었다. 호도나무... 찌르는 듯한 서글픈 감정이 그의 가슴에 사무쳤
다. 그는 옆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정원은 황량해졌으나, 해묵은 호도나무는
늘 있던 그 자리에 서서 바람에 부대껴 둔중하게 흔들거리며 쏴아쏴아 소리르
내고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손에 들고 있던 책에 시선을 떨구었다. 그 작품은
그도 잘 알고 있는 걸작있다. 그는 검은 글씨르 따라 몇 행, 몇 구절을 내리 훑
어보다가, 창조적 정열 속에서 하나의 효과로 고양시킨 뒤 멋지게 결말을 짓는
그 이야기 전개의 절묘한 흐름에 잠시 정신을 빼앗겼다.
"정말 좋은 작품이야!" 하고 말하면서 그는 그 책을 제자리에 갖다 꽂고 돌아
섰다. 도서관 사서는 아직도 꼿꼿이 서 있었는데. 직무에 충실하려는 것인지 못
믿어서 그러는 것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훌륭한 장서로군요." 토니오 크뢰거는 말했다. "대충 살펴 보았습니
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나서 서둘러 문을 나섰으
니, 물러나는 방법치고는 꽤나 서툴렀던 것이었다. 이 수상한 방문에 대해 몹시
불안해진 그 직원이 몇 분간 그대로 서서 눈을 끔버거리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는 더 이상 둘러보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까는 그래도 고향집에 있
었던 셈이었다. 원주가 서 있는 홀 뒤쪽, 위층의 큰 방들에는 낯선 사람들이 살
고 있었다. 계단 꼭대기에 예전에는 없던 유리문이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니 그
런 것 같았다. 무슨 문패 같은 것이 그 문에 붙어 있었다. 그는마침내 계단을 내
려와 발소리가 메아리치는 복도를 지나 그의 생가를 나왔다. 어느 식당 한 구석
에서 그는 생각에 잠긴 채 배가 더부룩해질 정도로 기름진 식사를 들고 나서 호
텔로 돌아왔다.
"볼 일을 다 봤으니, 오늘 오후에 떠나겠소" 그는 검은 옷차림의 말쑥한 남자
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계산서와 코펜하겐행의 기선이 떠나는 항구로 타고
갈 마차를 부탁했다. 그런 두에 방으로 올라가서 책상 앞에 앉고는 턱을 손으
로 괴고 멍한 눈으로 책상 위를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또 꼿꼿이 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 계산을 하고 짐을 챙겼다. 약속했던 시간에 마차가 준비됐다는 전갈
을 받고 토니오 크뢰건ㄴ 여행복차림으로 내려갔다.
아래층 계단 밑에서 검은 옷차림의 말쑥한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고 그는 말하면서 셔츠 소매 끝을 곶그만 손가락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죄송스럽습니다만, 손님, 잠깐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제에하
아제시께서-호텔 주인 되십니다만, 몇 마디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시는군요. 사
무상의 일 같습니다만... 저기 뒤쪽에 계십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호텔 주인이신 제에하이씨 혼자 계십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붙임성있는 태도로 토니오 크뢰거를 호텔 현관 내실 뒤
쪽으로 안내했다. 아니 게 아니라 그곳에는 제네하아제씨가 서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예전에 그를 본적이 있어서 알고 있는 터였다. 토니오 크뢰거는 예전
에 그를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키가 작달만하고 살집이 붙은
데다가 다리는 휜 사내였다. 짧게 깎은 구레나룻은 백발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앞가슴을 넓게 파낸 프록 코트와 녹색으로 수를 놓은 벨벳 모자를 쓴 것은 마찬
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 벽에 붙여 놓은 조그마한 책
상 앞에는 헬멧을 쓴 경관이 서 있었다. 그 경관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뭔지
알아보기 복잡하게 씌어진 서류 위에 장갑을 낀 오른손으로 올려 놓고 있다가
토니오 크뢰거가 들어오자 우직한 병정 같은 낯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기 눈초리를 받고서 토니오 크뢰거가 땅 속으로 기어들어가지 않고는 못배기
리라고 생각하는 성 싶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잠자코 기다렸다.
"뮌헨에서 오셨지요?" 참다 못한 경찰관이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그렇다고 말했다.
"코펜하겐으로 떠나신다고요?"
"네, 덴마크의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해수욕장이라? 뭐, 좋습니다. 증명서를 좀 보여 주시지요." 경관은 보요 주시
지요, 라는 말을 유난히 흡족한 듯 발음했다.
"증명서라..." 그에게 증명서 따위는 없었다. 서류 가방을 꺼내어 들여다 보았
지만, 몇 장의 지폐를 제외하고는 목적지에 가서 끝을 내려고 가지고 온 어떤
단편 소설의 교정지 몇 장 밖에는 없었다. 그는 과닐들과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
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 번도 여권을 교부받아 본 적이 없있다.
"미안합니다만, 증명서는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래요?" 하고 경관은 말했다. "전혀 아무것도 없단 말이요? 이름이 뭐지요?"
토니오 크뢰거는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지요?" 경찰관은 이렇게 물어 보면서 갑자기 허리를 펴고 되
수 있는 대로 크게 콧구멍을 벌리는 것이었다.
"사실이고 말고요." 하고 토니오 크뢰거는 대답했다.
"그럼 직업은 뭡니까?"
토니오 크뢰거는 침을 꿀꺽 삼키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자신의 직업을 말했
다. 제에하아제씨가 고개를 들고 유심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흠!" 하고 경관은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이러이러한 이름을 가신 인물과 동
일인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는 인물이란 말을 하고서는, 그 알아먹기 힘둘 정도
로 복잡하게 씌어진 서류를 보면서 답답하고 괴팍한 이름을 한 자 한 자 읽었
다. 그 이름은 여러 인종의 언어로 이상하게 뒤범벅이 되 것이어서 토니오 크뢰
거는 들은 후 곧 그것을 잊어버렸다. "헌데 이 인물은," 하고 그는 계속했다. "부
모 미상에 신분도 확실치 않은 자로서, 여러 가지 사기와 기타의 범죄를 저질러
뮌헨 경찰이 수배령을 내리자 아마 덴마크로 도피하는 중이라고들 하지?"
"나는 그 사람이 아니 뿐만아니라," 토니오 크뢰거는 이렇게 말하며 어깨를 신
경질적으로 들먹거렸다. -이것이 어떤 인상을 준 듯 하였다.
"뭐라구여? 아, 물론, 그렇겠지여!" 경관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런 증
명서도 제시할 수 없지 않소!"
제에하아제씨 역시 달래는 듯 중간에 나섰다.
"이건 다 형식적인 것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정말 별거 아집니다! 경찰관
도 직무를 수행하 뿐이라는 것을 생각해 주셔야지요. 어쨌거나 신분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면야... 증명이 될 만한 것 말이지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아예 신분을 밝히고, 이 일을 끝장 내버릴까? 내가 신원
미상의 사기꾼도 아니고 날 때부터 푸른 마차를 타고 다니는 집시도 아니라, 크
뢰거 영사의 아들이고크뢰거 가문 사람이라는 것을 제에하아제씨에게 털어 놓아
버릴까? 안,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회적 질서를 ㅈ미려는 이 사람들이
결궁에는 올바른 길을 찾지 않을까? 어느 정도까지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다움어 버렸다.
"거기에 들어 있는 게 뭐요?" 경관이 물었다. "그 서류 가방 속에 있는 것 망
이요."
"여기 든 거 말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정지이지요."토니오 크뢰거는 대
답했다.
"교정지라니? 그게 뭐지요? 어디 좀 봅시다."
그래서 토니오 크뢰거는 그에게 자기 작품을 넘겨 주었다. 경관은 그것을 책
상 위에 펴놓고 읽기 시작했다. 네에하아제씨도 다가오더니 함께 읽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어깨 너머로 보면서 어디쯤인지 살폈다. 그것은 그가 탁월하게 처리하
여 절정의효과를 냈던 멋진 부분이었다. 그는 스스로 만족을 느껴ㅆ.
"보시지요!" 그는 말했다. "거기 내이름이 있지요. 내가 쓴 것인데 출판되 겁니
다."
"그럼, 됐습니다!" 이렇게 제에하아제씨는 잘라서 말하고, 그 교정지를 ㅁ아서
접어 가지고 돌려주었다. "이만하며 충분해요, 페테르젠!" 그는 짧게 되풀이하여
말하면서, 몰래 눈을 감아 보이고 제지하듯이 머리를 젓는 것이었다. "이 신사분
을 더 이상 여기 ㅂ잡아 ㄷㄹ수는 없어요. 마차가 기다리고 있어요. 이렇게 불편
을 끼치게 되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손님. 경찰관도 자기 할 일을 했던 거지요.
제가 진작 잘못 짚은 거라고 말했지만서도..."
정말일까? 하고 토이오 크뢰거는 생각했다.
그 경관은 아직도 석연치 않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인물'이니 '증명서
제시'하면서 토를 달았다. 그러나 제에하아제씨는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늘어 놓
으면서 자신의 손님을 현관 입구로 안내하고 나와, 두 마리의 사자상 사이를 지
나 마차가 있는 곳까지 따라와서는 몇 번이고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 손수 마차
문을 닫았다. 그리하여 우스꽝스럽게 높고 넓은 마차는 쓰러질 듯 덜거덕거리며
요란스럽게 가파른 거리를 내달려서 항구로 향했다.
이처럼 토니오 크뢰거는 그의 고향에서 희한한 체류를 했던 것이었다. 7
7
밤이 되어 달은 이미 솟아올랐고 바다 위에는 은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토니
오 크뢰거가 탄 배는 넓은 바다로 나와 있었다. 점점 세차게 불어 오는 바람 때
문에 외투로 몸을 감싸고서 그는 뱃머리에 서있었다. 그는 거세면서도 유연한
파도가 어스름 속에 밀려 왔다 밀려가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파도는 서로
얽혀 요동을 치다가 철썩거리며 부딪치고는 어뚱한 방향으로 이리지리 흐트러져
별안간 거품이 되어 번쩍거렸다.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며 고요하고도 황홀한 정취가 엄쳐 흘렀다. 고향에서 삿
기꾼으로 체포당할 뻔한 일로 맥이 좀 풀려 있긴 했었다.-어느 정도는 그럴 ㅃ
도 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배에 오른 뒤, 덴마크 말과 독일 말
이 뒤섞여 떠들썩한 가운데 기선 깊숙이 화물을 부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가 기
분이 좋아졌다. 소년시절 그는 아버니돠 함께 여행하면서 이런 장면을 가끔 구
경한 일이 있었다. 짐짝과 궤짝 뿐 아니라 북극곰과 호랑이까지도 창살이 있는
우리에 가두어 실었는데, 아마 함부르크에서 실려 와 덴마크의어느 동물원으로
보내려는가 싶었다. 배가 얕은 강 언덕 사이를 따라서 미끄러져 내려갈 무렵에
는, 페테르젠 경관의 심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 전에 일어
났전 모든 일- 이를테면 전날 밤의달콤하고 구슬프며 후회 섞인 꿈, 산책, 호도
나무 풍경- 이, 모든 것이 다시금 마음 속에 생생하게 살아났다. 이제 바다가
탁 트였고, 그는 멀리서 추억이 서린 해변을 보게 되었다. 소년시절 그는 거기서
한여름 밤의 꿈과도 같던 바닷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등대의 불빛
이며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적이 있는 요양소의 불빛을 바라다 보았다. 동쪽 바
다! 그는 마음대로 거칠 것 없이 불어 오는 거센 바닷바람에 머리를 맡기고 있
었다. 바닷바람이 귓전을 감싸며 몰아 쳐서 가벼운 현기증과 멍멍한 마비 상태
를 자아냈고, 그 멍한 마비 속에서 모든 악덕, 고통과 잘못, 의욕과 수고에 대한
기억이 천천히 감미롭게 사라져 버렷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ㅍ의 울부짖는 소
리, 거품을 일으키고 헐떡거리면서 토애 내는 신음소리 속에서 그는 해묵은 호
도나무가 바람에 쓸리며 후드득거리고, 정원 출입문이 삐걱대는 소리를 분명 들
은 듯했다. 어둠이 점점 더 짙게 깔렸다.
"야! 저 별들이라니! 저 별들을 좀 보십쇼." 별안간 술통 속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둔중하면서도 노래부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드렸다. 그 목소리를 그는 익
히 알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붉은 빛을 띤 금발 머리에 간소한 복장을
한 남자였는데, 그의 눈자위는 불그스레하였고 그의 외모는 금방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축축하고 차갑게 보였ㄷ. 선실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때 그는 토니오 크
뢰거의 옆자리에 앉아서 쭈뼛거리며 다소곳한 동작으로 놀랄 만큼 많은 양의 바
닷가재 오믈렛을 먹어 치웠다. 지금 그는 토니오의 곁에서 난간에 기대어 엄지
와 인지 손가락으로 턱을 괴고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가
로놓인 장벽이 허물어지고, 낯선 이들에게도 마음이 활짝 열려서 평소라면 부끄
러워 입도 벙긋 하지 않을 이야기를 뇌까리게 되는 그런 기분인 듯싶었다.
"선생님, 저 별들 좀 보십쇼. 저기서 조렇게 반짝거리누만요. 정말, 왼통 별천
지구만요. 헌데 이렇게 저 별들을 쳐다보면서, 수많은 별들이 지구보다도 백 배
나 더 큰 것이라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나겠습니까? 우리 인간들은 전보를 발
명했느니, 전화를 발명했는니, 근래에 와서 여러 가지 문명의 이기를 발명했느니
들 압지요. 물론, 그건 그렇지만서두, 저기 하늘을 쳐다보면 우리 인간은 결국
구더기,정말 가련한 구더기에 징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단 말입지요. 선생
님, 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아무럼요, 우리는 구더기이구만요." 이렇게 혼자
서 대답해 버리고, 하늘을 향해 겸허하게 순종하듯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아, 그게 아니었군. 이 사람은 문학이라고는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작자로군!
이렇게 토니오 크뢰거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언뜻 우주론적이고 심리학적인 세
계관에 대해 어느 유명한 프랑스 작가가 쓴 글을 얼마 전에 읽었던 것이 떠올랐
다. 그것은 무척이나 세련되 별볼일 없는 잡담이었다.
그는 그 젊은이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소견에 어정쩡한 대답을 하고
는, 난간에 기댄 채 불안스럽게 밝고 화기 띤 밤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를 나눴다. 그 동행자는 함부르크 출신의 젊은 상인이었으며, 휴가를 받아 이 유
람 여행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잠시," 그는 말했다. "기선을 타고 코펜하겐을 여행해 봐야겠어, 요렇게 생까
했구만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구, 뭐 지금까지는 썩 좋았구만요. 헌데 고놈의 바
닷가재 오믈렛은 아무래도 틀렸구만요. 선장이 직접 하는 말을 듣자니까, 오늘
밤에 폭풍이 칠 거라는데, 두고 보시면 알겄지만서두... 요런 소화도 안될 음식을
뱃속에 처넣고서야 저말 웃을 일이 아니구만요."
토니오 크뢰거는 정답고 치밀한 느낌으로 꾸밈없는 이런 이야기를 모두 귀기
월여 듣고 있었다.
"그렇지요." 그는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부담되는 식사를
합니다. 그것 때문에 행동이 굼뜨고 성격은 우울한 펴이지요."
"우울하다구요?"
그 젊은이는 그 말을 되뇌이며 놀란 듯 그를 살펴 보았다. "선생님은 아마 이곳
사람이 아니구만요?"
하고 그는 문득 물었다.
"그래요, 멀리서 왔니요."토니오 크뢰거는 애매하게 부정하는 듯이 팔을 저으
며 대답했다.
"옳은 말씀이구만요! 나도 거의늘상 우울하지만서두, 오늘처럼 이렇게 하늘에
별들이 총총한 밤에는 더욱 그렇구만요." 그리고는 다시 엄지와 인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괴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분명 시를 쓰고 있는 거다. 토니오 크뢰거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ㅁ
깊은 곳에서 진솔하게 우러나오는, 상인의 시를 쓰고 있는 거다.
밤은 이슥해졌고, 바람이 점점 심하게 불엇,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웠다. 그래
서 잠을 좀 자 두기로 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토니오 크뢰거는 자시 선실 좁다란 침대에 가서 누웠으나 마음이 안정되지 않
았다. 거센 바람과 그 바람이 풍기는 자극적인 냄새가 야릇하게 그르 자극하여,
어떤 즉러운 일을 불안하게 기다리는 듯 심장이 울렁거렸다. 배가 가파른 파도
의언덕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며 스크루가 경련을 이으키듯 물 밖에서 헛 돌아
갈 때 일어나는 동요 역시 심한 메스꺼움을 느끼게 했다. 그는 다시 옷을 모두
걸쳐 입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바다는 춤을 추고 있었다. 둥글고 규칙적인 파도
가 질서정연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멀리 창백하고 가물거리는 빛 속에서
바다는 찢어지고, 채찍질당하고, 뒤흔들리고, 채이고, 뾰족하니 불길 같은 혓바닥
을 날름거리며 뛰어오르기도 하는 것이었다. 거품이 부글거리는 아득한 물구덩
이 옆에서는 뿔이 돋친 생소한 형상이 일어나, 거대한 팔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있는 힘을 다해서 물거품을 사방에 집어 더지는 듯했다. 배는 어렵사리 운항하
고 있었다. 물결에 쿵 부딪치고 흔들리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이북새통을 헤쳐나
가느라고 쩔쩔맸다/. 배 밑바닥에서는 바다 물결에 시달린 북극곰과 호랑이가 괴
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가끔 들려 왔다. 비옷을 입은 한 남자가 다리를 벌려서
가까스레 균형을 잡으며 갑판위를 오르내렸다. 그는 구건ㅇㄹ 머리에 뒤집어 쓰
고 허리에는 등불을 졸라매고 있었다. 그런데 고물에는 함부르크에서 온 그 젊
은이가 뱃전에 깊숙이 몸을 수리리고서, 심한 고초를 겪고 있는 듯했다. "맙소
사"
그는 토니오 크뢰거를 보자 떨리는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귀신이 울부짖으
며 날뛰는 이 꼴을 좀 보십쇼, 선생님."그러나 그는 말을 하다 말고 ㄱ히 돌아서
고 말았다.
토니오 크뢰거는 팽팽하게 쳐놓은 밧줄을 하나 움켜쥐고서 걷잡을 수 없이 오
만방자하게 나대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 환희의 함성이
복받쳐 올라서, 폭풍과 파도를 압도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바다에 대
한 사랑에 도취하여 바다에 부치는 노래 소리가 마음 속에서 울려 나왔다. 그대,
내 청춘 시절의 길들여질 줄 모드던 벗이여,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가 되
었노라... 그러나 시느 거기서 끝이 났다. 그것은 완성이 되지 않았다. 원만하게
형성괴지 못했고, 침착하게 전체적인 그 무엇으로 용해되지 못했다. 그의 감정이
너무나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나서 조타실 곁에 놓인 벤치 위에
드러누워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는 조금 졸기까지 했다. 얼굴에
튀어오르는 차디찬 물거품조차 선잠에 취한 자기를 애무해 주는 것만 같았다.
달빛을 받아 유령처럼 괴기스러운 수직의 흰 절벽이 시야에 들어오더니 점점
다가왔다. 묀이라는 섬이었다. 다시금 졸음이 쏟아졌다. 살을 에이듯 얼둘을 파
고 들며 마비시켜 버리는 소금기 섞인 물보라세례에 깜짝깜짝 정신이 들기도 하
면서... 완전히 잠을 깨었을 때는 벌써 날이 새었고 밝은 회색빛의 상쾌한 아침
이 되었다. 초록색 바다도 잠담해졌다. 아침 식사 때 젊은 상인을 다시 만났는데
그는 낯을 붉혔다. 어둠 속에서 그런 시적인 창피스런 말을 털어 놓은 것이 아
무래도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다섯 손가락을 다 사용하여 붉은 빛이 감도는
짤막한 수염을 쓰다듬어 올리고, 병정처럼 화기 차게 아침 인사를 하고 나서는
애써 그를 피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토니오 크뢰거는 덴마크에 상륙했다. 그는 코펜하겐에 도착하여 호
텔 방을 잡고는, 여행안내서를 펴들고서 호텔을 중심으로 사흘 동안 도시 이것
저곳을 돌아 다녔다. 그는 팁을 받았으면 하는 눈치를 보이는 사람에게는 누구
에게나 돈을 주면서, 견문을 넓히려는 돈많은 외국인처럼 행동했다. 그는 국왕신
광장과 그 가운데 있는 마상도 보았고, 성모 성당의 원주도 경건한 마음으로 올
려다 보았다. 토오르발트젠이 창조해낸 고귀하고도 사랑스러운 조각 앞에서는
오랫동안 서성거렸고, 원형 탑에 올라가 보기도 했고, 여기저기 성곽을 구경하기
도 했다. 티볼리에서는 이틀 밤을 다채롭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
들이 그가 보았던 전부는 아니었다. 이곳의집들도 고향의 낡은 집과 꼭 마찬가
지로 활처럼 휘고 격자무늬가 있는 뾰족지붕으로 되어 있었는데, 집집마다 옛날
부터 익히 알고 있는, 정감어리고, 소중한 그 무엇을 표시하고 있는 듯한 이름들
이 붙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이름들에는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질책과 하소
연과 동경 같은 것이 간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눅눅한 바다 바람을 쐬며 생각에
잠겨 천천히 이곳저곳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고향에서 보냈던 날 밤에 꾸었
던 이상하게도 구슬프고 회한이 섞인 꿈 속에서 본 것과 꼭 같은 푸른 눈, 꼭
같은 금발의 머리카락, 꼭 같은 기질과 형태를 가진 얼굴을 보았다. 어느 한길에
서는 누군가의 눈길, 쟁반에 구르는 듯한 누군가의 말, 누군가의 까르르 웃는 소
리가 그의 가슴 속을 파고드는 일도 있었다...
활기 가득 찬 도시에서 그는 오래 견디지 못했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관광
객 노릇을 그만두고 어느 해변가에라도 가서 조용히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
다. 게다가, 때로는 달콤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리석기 기지 없는 들뜬 기분,
추억과 기대가 반반씩 뒤섞인 불안감이 그를 자극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빼
를 타고 어떤 흐린 날에(바다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제엘란트 해안선을
따라 헬진괴르를 향해 북쪽을 올라갔다. 거기서부터는 바로 마차를 타고서 포장
도로를 따라서 여행을 계속하였다. 해안선을 따라 약간 위쪽에 나 있는 도로를
사십오 분쯤 달려서, 마침내 이번 여행의 당초 목적지이자 마지막 목적지인 온
천 호텔에 도착했다. 그 호텔은 초록색 차양을 창문에달고 흰색으로 칠을 한 아
담한 호텔이었고, 그 주변에는 작은 집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로 지
붕을 얹은, 호텔의 작은 탑은 해협과 스웨덴 해안을 거너다 보고 있었다. 그는
마차에서 내려, 미리 예약해 두었던 밝은 방에 투숙했다. 선반과 옷장 속에 가지
고 온 물건을 챙겨 넣고, 잠시 여기서 살 수 있는 채비를 마쳤다.
8
9월도 곧 깊어 갔고 알스가아트의 휴양객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이곳의
식사는 천장이 높은 커다란 1층 식당 홀에 마련되었는데, 식당에선느 ㄴ높에 난
창문 밖으로 베란다와 바다가 내다보였다. 식사때는 이 집 여중인이 좌중을 이
끌었다. 흰머리에 연한 색 눈을 가진 이 나이든 독신 여인은 핏기 없는 볼에, 끊
임없이 재잘거렸고, 붉은색의 두 손을 예쁠게 보이려고 언제나 식타보 우에 놓
고 있었다. 목이 짧고 나이든 남자도 있었든데 푸른 기운이 도는 얼굴에 잿빛
수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수도에서 온 생선 상인으로 독일어를 썩 잘했다. 그는
코가 꽉 막혀 졸도할 것만 같았기 때문에, 숨을 가쁘게 쉬었고 때로는 검지를
들어 한쪽 콧구멍을 막고 다른 한쪽으로 공기를 통해 보려 애썼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는 아침, 점신, 저녁을 가리지 않고 식사 때마다 자기 앞에 있는 위스
키를 마셔댔다. 이 사람말고 손님이라고는 가정교사를 데리고 온 키가 큰 미국
소년 셋뿐이었다. 가정교사는 말없이 안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의 일이
라곤 소년들과 매일 한는 축구 밖에 없었다. 소년들은 좁고 긴 얼굴에 말수가
적었고, 적황색의머리 한가운데 가리마를 타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거기 소시지
좀 줘!" 하고 한 소년이 영어로 말하면 "저건 소시지가 아니고 햄이야"하고 또
한 소년이 대꾸했다. 이 말 말고는 그저 조용히 앉아서 따뜻한 물을 마셨다.
토니오 크뢰거에게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식사 때의친구였다. 그
는 평온을 즉기면서 생선 상인과 여주인이 때때로 주고 받는 대와중에서 덴ㅁ어
의 목구멍소리와 맑고 흐린 모음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생선 상인과 날씨에 대
해 예기를 나누다가 그는 일어나서 베란다를 지나 해변으로 다시 내려갔다. 이
미 오랫동안 아침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던 터였다.
바닷가는 여전히 고요하고 여름과 같은 날이 많았다. 바다는 별파도 없이 ㅈ
ㄴ했으며, 은빛으로 반짝이는 햇빛과 뒤섞이어, 푸른빛, 유리병 같은 초록빛, 혹
은 붉은빛으로 줄무늬 져 있었다. 해초는 햇볕에 말라 쪼그라들었고, 해파리도
백사장에 깔려 말라가고 있었다. 약간 썩은 냄새가 났고, 토니오 크뢰거가 등을
기대고 있는 어선에서는 콜타르 냄새도 풍겼다. 그의 눈에는 스웨덴의 해안이
아닌 탁 트인 수평선이 보였고, 얼굴에는 부드럽게 호흡하는 바다의 깨끗하고
신선한 입김이 ㅅ갔다.
때로는 짓빛으로 흐려 폭풍우 치는 날도 있었다. 파도는 마치 공격하는 소같
이 머리를 숙이고 해변을 향해 쳐들어왔다. 그때 해변은 안쪽 높은 곳까깆 파도
에 씻기고, 물에 젖어 반짝이는 해초와 조개 그리고 물에 떠내려온 나무 조각으
로 뒤덮였다. 길게 뻗친 파도의 언덕 사이에는 흐린 초록색의거품을 이루며 골
짜기가 구름에 덮여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저 멀리, 구
름 아래 태양이 있는 곳에선, 흰 비단 조각 같은 것이 물 위에 반짝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바다가 포효할 때, 토니오 크뢰거는 귀를 멍하게 하는 끊임없이
무거운 바다 소리에 휩싸인 채 넋을 잃었다. 그는 이 소리를 너무나 좋아했다.,
그가 돌아서면 주위가 온통 갑자기 조용해지고 따뜻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등 뒤에 있는 바다를 늘 의식했다. 바다는 소리쳐 부르고, 유혹하며, 손짓을 보
냈다. 그럴 때 그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는 풀이 나 있는 한적한 길을 따라 육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이 일대에 언덕처럼 널리 퍼져 있는 너도밤나무가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가
게 되었다. 그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이끼 위에 앉아 나무 가지들 사이로 한 폭
의 바다가 보이도록 자리를 잡았다. 때때로 파도 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그
소리는 멀리서 널빤지 더미가 무너져내리는 소리 같았다. 나무 꼭대기에서는 까
마귀들이 쉰 소리로 처량하고 외롭게 울었다. 그의 무릎에는 책이 한 권 있었으
나 단 한 줄도 들여다보지 않았ㄷ. 그는 시간과 공간을 벙어나 떠 있는 듯한 깊
은 망각을 즐겼으나, 그래도 때로는 마음을 흔드는 슬픔을 맛보기도 했다. 그것
은 짧지만 찌르듯이 아픈, 일종의 동경 또는 후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가
편안하게 마음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 느낌이 딱히 무엇이고 또 어디서부터
생긴 것인지는 묻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났다. 하지만 실제로 며칠이 지났는지는 몰랐고 알고 싶
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해가 중천에 떠 있고 사람
들도 있을 때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토니오 크뢰거는 결코 이 일에 크게 놀
란 것은 아니었다.
그날은 시작부터 축제 기분이 들었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했다. 아침 일찍 잠
에서 갑자기 깨어났을 때, 토니오 크뢰거는야릇하고 어렴풋이 놀라움을 느꼈다.
어떤 기적 같은 신비의 불빛을 보는 듯싶었다. 그의 방에는 해협을 향해 난 유
리문과 발코니가 있었고, 엷고 흰 망사 커튼을 사이에 두고 거실과 침실로 나뉘
어져 있었다. 벽지 색깔이 연하고, 가구도 경쾌하고 밝은 색이어서, 언제나 명랑
하고 친밀감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이날 아침, 아직 잠에 취한 그의 눈에는이빙
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변모되어 빛나고 있는 듯했다. 또 현언할 수 없
을 정도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장미빛에 휩싸인 듯했는데, 그 빛으로 해서 벽과
가구는 홍금빛으로 물들고 망사 커튼은 연하고 붉은 빛으로 되었다. 토니오 크
뢰거는 무슨 일일 일어났는지 금방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유리문에 서서 밖을
내답았을 때, 이것이 일출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지난 며칠 동안 날이 흐리고 비가 왔지만, 이날 아침은 하늘이 한폭의 엷은
청색 비단같이 바다와 육지 위에 드리어져 반짝이고 있었고, 구름은 붉고 황금
빛이었다. 반짝이는 바다 물결 위로 두근 태양이 장엄하게 떠올랐다. 바다는 마
치 요동치며 불타고 있는 듯했다. 그날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토니오 크
뢰거는 얼떨떨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옷을 입고 다른 손님들보다 먼저 베란다
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 해변에 있는 목조 오두막집에서부터 해협
을 향해서 어느 정도 헤엄친 후 한 시간 가량 백사장을 걸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호텔 앞에는 습합차 모양의 마차가 여러대 서 있었다. 식당에 들어선 그는
식당 옆 피아노가 놓여 있는 방과 베0란다, 그리고 베란다 앞의 테라스에 중류
계층 차림의남녀4ㅏ 여럿이 원탁을 둘러싸고 활발하게 이야기함ㄴ서 맥주를 마
시며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전 가족이 함게 한 나들이인지 노소가
섞여 있었으며, 아이들도 몇 있었다.
두번째 아침 식사 때에-식탁에는 찬 고기, 훈제 고기, 소금에 절이거나 구운
음식 등이 푸짐하게 쌓여 있었다- 톤오 크뢰거는 무슨 일인지 물어 보았다.
"손님들이죠!" 하고 생선 상인이 대답했다. "헬시뇨르에서 놀러 오거나 춤추러
온 사람들이죠, 맙소사! 오늘밤은 한잠도 못 잘지도 모르죠. 춤과 음악이 있을
겁니다. 상당히 늦게까지 그럴 겁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노는 것인데요, 댄
스파티를 겸한 소풍으로 단체 관ㅅ공같은 것입니다. 하루를 즉겁게 지내자는 거
죠. 배나 마차를 타고 와서 지금 아침을 먹고 있는 중입니다. 식사 후에는 먼 시
골로 마차를 타고 갔다가 저녁에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여기 홀에서 춤ㅇ
르 출겁니다. 빌어먹을! 그 덕에 우리는 눈도 붙여 보지 못할 테죠."
"기분 전환이 되기도 하겠군요"라고 토니오 크뢰거는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여주인은 자기의 붉은색 손가락을
식탁보에 가지헌히 놓기에 바빴고 생선 상인은 공기를 통하게 하려고 오른쪽 콧
구멍으로 바람으 ㄹ불어 댓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따뜻한 물을 마시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항스 한젠과 잉에 보르크 호흘미 그
홀을 지나간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아침 수영 후에 빠른 걸음으로 걸었던 관계로 몸이 기분 좋
게 나른해져서 의자에 기대어 훈제 연어 토스트를 먹으며 베란다와 바다 ㅉ을
향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들어왔다. 금발의잉에 보르크는 크나아크 선생의 댄스 강습 시간에
늘 그랫듯이 밝은 옷차림 이었다. 꽃무늬가 그려진 가벼운 옷자락은 거의발목에
닿을 정도였고, 어깨에는 폭이 넓은 희 망사 레이스가 걸쳐 있었다. 목이 깊숙이
패여져 있어 연악하고 보드라운 목이 미끈하게 나와 보였다. 모자는 양쪽 끈을
잡아매어 팔에 걸치고 있었다. 예전보다 키가 약안 자란 것 같았고, 그 멋지게
땋던 머리를 지금은 감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스 한젠은 예날과 조금도 다
르지 않았다. 폭이 넓은 파란 선원 칼라가 두 어깨와 등을 덮고 있는 금단추 달
린 선원 코트를 입고 짧은 리본으 ㄹ매단 선원 모자를 손에 들고 별 생각없이
돌리고 있었다. 잉에보르크는 실낱 같은 눈을 옆으로 도렷다.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반대로 한스 한젠은 강철같이
푸른 눈으로 식탁에 ㅇ은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빳빳히 들고 무례하게, 도전적
이면서도 다소 경멸하는 시선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그는 붙잡고
있던 잉에보르크의 손마저 놓아버리고 모자를 좀더 세차게 돌리며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려고 했다. 이렇듯 두 사람은 고요하고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토니오 크뢰거의 앞을 지나 홀을 가로질러 반대쪽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사라졌
다.
이때가 오전 열한 시 반이었다. 휴양객들이 아직 아침을 먹고 있는 중에 식당
옆방과 베란다에 있던 소풍객 일행은 아무도 식당으로 가지 않고 옆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마차에 오르는 소리, 마차가 하나씩 떠나는 소리와 함께
웃고 농단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돌아옵니까?" 라고 토니오 크뢰거가 물어 보았다.
"오고 말고요!" 라고 생선 상인이 대답했다. "골치 아픕니다. 저 사람들이 댄스
파티를 예약하고 갔는데, 내방이 바로 홀 위에 있거든요."
"기분 전환이 되 수 도 있겠지요." 토니오 크뢰거는 아까 한 말을 되풀이 했
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나갔다.
토니오 크뢰거는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무릎에 책 한 권을 올려놓고
햇살에 눈부셔 하며 해변과 숲 속에서 지냈다. 그는 단 한가지만을 생각했다. 그
한 가지란 생선 상인이 말한 대로 그들이 다시 돌아와 홀에서 열 댄스파티였다.
하루종일 그가 한 일이라곤 약간 걱정스러우면서도 달콤한 즐거움으로 댄스파티
를 기다리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즐거움은 죽음과도 같았던 지난 오랜 세월 동
안 결코 맛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한 번은 무슨 생각과 연관되어 왠지는 모르지
만 동료 작가인 아달 베프느가 머리에 떠올랐다. 아달베르트는 자기 스스로가
우너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어서 봄바람을 피해 카페로 갔던 것이
다. 토니오 크뢰거는 그를 생각하고 어깨를 춤츠렸다.
점심 식사는 평소보다 일찍 나ㅇ다. 너ㅈ도 마찬가지였는데, 식당에서는 댄스
파티 준비가 하낭이었기 때문에 피아노가 있는 방에 마견되었다. 집안 전체가
저녁에 있을 행사 기분에 들떠 모든 일이 어수선했다. 날이 어느덧 어두워졌고
방에 있던 토니오 크뢰거는 길거리와 집안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잇었다. 소풍 간 이행이 돌아왔을 뿐 아니라 헬시뇨르에서 자전거와 마차로
새 손님들이 도착하고 잇었다. 아래 식당 홀에서 바이올린 조율하는 솔, 콧소리
나는 클라리넷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멋진 댄스파티
가 열릴 것임이 분명했다.
드디어 소규모 오케스트라가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토니오 크뢰거는
작지만 활기에 넘치는 곡조를 들을 수 있었다. 댄스는 폴로네이즈 춤곡으로 시
작되었다. 댄스는 폴로네이즈 춤곡으로 시작되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한참 동안
조용히 앉아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행진곡이 끝나고 와츠가 시작되는 소리
를 들으면서 그는 소리없이 자기 방을 나섰다.
복도 끝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 호텔 옆문을 나가면, 어느 방도 통과하지 않고
유리로 막은 베란다로 갈 수 있었다. 마치 통행이 금지된 길을 지나가듯이 남몰
래 살며시 어둠 속을 손으로 더듬으며 갔다. 희미하지만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음악에 꼼짝없이 이끌려서 와보니, 음악 소리는 더 크고 분명하게 들려왔다.
베란다에는 사람도 없고 어두컴컴했으나 식당 홀로 통하는우리문은 열려 있었
다. 홀에는 눈부신 반사경을 단 커다란 석유등 두 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걸음 소리를 죽이고 베란다로 숨어 들어갔다. 어둠 속에 서서 밝은 불
밑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몰래 여보았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훔쳐
보는 기쁨 때문에 그의피부가 간질거렸다. 그는 자긱가 찾고 있던 두 사람에게
로 급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눈길을 돌렸다.
파티가 시작된 지 반 시간도 채 되기 전에 흥겨움은 이미 고조되었다. 사람들
은 하루종일 모두 함께 편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난 후 이미 상당히 기분이 올라
흥분되어서 돌아왔기 때문에,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토니오 크뢰거가 조
금 몸을 앞으로 내밀면 피아노가 있는 방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나
이 먹은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카드 놀이를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배우자와 함께 홀 앞쪽에 있는 우단 깐 의자에 앉아 있거나 벽에 기댜
고 서서 춤추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벌린 무릎 위에 두 손을 놓
고 배부른 표정으로 두 볼을 부풀렸고, 여자들은 끈 달린 작음 모자를 쓰고 팔
짱을 낀 채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젊은이들이 춤추며 노는 것을 구경했다. 홀
의 기 쪽 벽에 단이 설치되어 그 위에서 악사들이 전력을 다해 연주하고 있었
다. 트럼펫까지 동원되었다. 자신의 소리를 겁내는 듯이 조심스럽게 불었는데도
음악이 중단되거나 악보를 빼먹고 불기가 일쑤였다. 어떤 쌍들은 자기 몸을 돌
리면서 다른 사람들고 번갈아 선회하였고, 또 어떤 쌍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홀
안ㅇㄹ 걸어다녔다. 제대로 무도회 복장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드들 여
름날 일요일에 야외에서나 입는 옷차림이었다. 남자들은 소도시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었는데, 한 주일 동안 아껴 두었던 옷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홀 안의
아이들도 자기들끼리 춤을 추었는데, 아이들은 음악이 끝난 후에도 게속 춤을
추었다. 연미복 모양의 상의를 입은 다리가 긴 사람은 이 지방의 유지로서 안경
을 쓰고 퍼머 머리를 하고 있었다. 우체국장 대리나 그 비슷한 수준의 사람으로
보이는 이 사람은 어느 덴마크 소설에나 나올 법한 우스꽝스러운 인물로서 오늘
파티를 주선하고 이끄는 듯했다. 이곳저곳을 땀을 흐리면서 바삐 다니며 열심히
일을 했고, 도처에 참견을 했다. 재주를 부려 발 끝을 먼저 내디뎠고, 매끄럽고
끝이 뾰족한 군인용 반장화를 긴은 발을 교묘하게 번갈아 움직이며 걸어다녔가.
손을 공중에 휘젓고, 지시르 ㄹ내기로, 악단에게 소리치고, 손뼉을 쳐댔다. 이렇
듯 바쁜 와중에도, 그는 때때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지위를 알리는 표지로 어깨
에 붙어 있는 코고 다채로운 고리 모양의 리본을, 사랑에 넘친 표정으로 돌아보
곤 했다.
오늘 낮에 토니오 크뢰거의ㅊ을 지나간 두 사람도 물론 거기 있을 때, 놀라울
정도로 기뻤다. 한스 한젠은 그와 꽤 가까운 문간에 있었다. 양쪽 다리를 벌리고
서서 몸을 앞으로 조금 굽힌 채 큼직한 카스테라 한 조각을 조심스럽게-떨어지
는 부스러기를 받으려고 손바닥을 동그랗게 해서 턱 아래에 댄채-먹고 있었다.
그리고 저쪽, 벽 옆에는 잉에보르크 홀름, 금발의잉에가 앉아 있었다. 마침, 국장
대리가 점잔을 빼며 그녀 옆으로 가서 안쪽 손은 등에, 다른 손은 우아하게 가
슴에 대고 예의를 차리면서 춤을 청했다. 그러나 잉에가 숨이차서 좀 쉬어야겠
다는 표시로 머리를 가로 젓자, 국장 대리는 하는 수 없이 그녀 옆에 앉았다.
토니오 크뢰거는 그 옛날 사랑의 괴오움을 안겨 준 이들 두 사람-한스 한젠과
잉에 보르크 홀름을 쳐다보았다. 이들이 한스이고 잉에인 것은, 이들이 실제 한
스, 잉에이거나 그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어서가 아니라, 종족이나 유형으로서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즉 새파란 눈과 금발을 한 이종족은, 토니오 크뢰거에게
순수함, 명랑함, 찌들지 않은 삶을 상징하였다. 동시에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자
신만만해서 접근하기 어려운 순결함도 상징하였다. 그는 두 사람을 쳐다 보았다.
한스 한젠은 늘 그렇듯이 선원 복을 입고 있었고, 생기에 넘치고 몸매도 좋아서
어깨는 딱 벌어졌고 엉덩이도 미끈했다. 잉에보르크는 웃고 있었고, 기분이 좋을
때 그렇듯이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잉에보르크가 날씬하지도 가냘프지도 않
은 여학생 같은 손을 뒷머리에 갖다 댈 때 가벼운 소매자락이 팔꿈치에서 미끄
러져 떨어졌다.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토니오 크뢰거는 날카로운 향수의 고퉁으
로 가슴이 울렸고, 자기 얼굴의 경련을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자기도 모르게 어
둠 속으로 한 발 물러셨다.
'내가 나희들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결코 그
런 적은 없다. 너 한스도, 그리고 넝 금발의 잉에도! 내가 소설을 쓴 것은 너희
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박수 갈채를 받을 때마다 혹시 너희들이 근처에 있
는가 하고 남몰개 살펴보았건 것이다. 한스 한젠, 너는 그 옛날 정우너 문간에서
나에게 약속한 대로 돈카를로스를 읽었느냐? 부디 읽지 말아다오! 이제 너에게
읽으라고 요구하지는 않겠다. 고독 때문에 우는 왕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
냐? 너는 음울한 시를 들여다보면서 그 맑은 눈동자를 흐리게 하거나 꿈꾸듯 몽
롱하게 해서는 안된다. 나도 너와 같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시 한 번 시작하
여 너같이 성장해서, 당당하고 유쾌함 순박하고 정규적이고 질서정연하고, 신과
세속과 화합해서 천진난만하고 행복한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으면 좋으련만, 잉
에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너같은 아들을 두었으면, 지식의
저주와 창조의고뇌에서 해방되어 행복한 평범성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찬미할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시작한다? 그러나 소용이 없을 것이다. 역시 마찬가
지일 것이다. 모든 것은 지금 똑같이 되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종류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
음악이 끝났다. 휴식시간이어서 가벼운 음식이 들어왔다. 국장 대리는 몸소 쟁
반에 청어 샐러드를 들고 이리저리 바비 돌아다니면서 부인들에게 권했다. 그러
나 잉에 보르크 홀름 앞에서는 한쪽 무릎을 꿇고서 접시를 내밀었기 때문에 그
녀는 너무 기뻐 그만 얼굴을 붉혔다.
이제는 홀 안의사람들도 유리문 밖에서 그들을 살펴보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의식히게 되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예쁜 얼굴 몇이 토니오 크뢰거 쪽으로 몸을
돌려 의아스러운 듯 살피는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서 있었
다. 잉에보르크와 한스도 거의동시에 그를 바라보았으나, 거의 경멸에 가까울 정
도로 완전히 무관심한 시선이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다른 ㅉ에서 어떤 사람ㅇ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려 있음을 의식했다. 그는 머리를 돌려 자기를 보고 있다고
느꼈던 그 눈과 마주쳤다. 창백하고 갸름하며 섬세한 얼굴의소녀가, 벼로 멀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그전에 이미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던 소녀였다. 그녀는 춤
도 많이 추지 않았고, 같이 춤출 남자도 별로 없었다.그는 그 소녀가 무뚝뚝하게
입을 다물고 쓸쓸하게 벽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것을 눈여겨 보았었다. 그 소녀는
여전히 혼자 있었다. 다른 여다들과 마찬가지로 얇은 옷을 입고 있었으나 비쳐
보이는 천 안으로 말라서 가냘픈 어깨가 드러나 보였고, 가느다란 목은 빈약한
어깨 사이에 깊이 박혀 있어서 이 말없는 소녀가 어쩌면 불구가 아닌가 여겨질
정도였다. 그녀는 얇은 반장갑을 낀 두 손을 밋밋한 가슴에 대고 있었는데 손가
락 끝이 가슴에 거의닿을 정도였다. 고개를 떨구었으나 눈물에 젖은 검은 눈을
토니오 크뢰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돌렸다.
한스와 잉에보르크는 그와아주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한스는 누이 동생인
듯한 여자 옆에 있었다. 그들은 볼이 홍조 띤 사람들에 둘러싸여 먹고 마시며,
지껄여 대면서 흥겨워했고, 울리는 목소리로 서로를 부그고 큰소리로 웃고도 했
다. 왜 조금이라도 이들 곁에 가까이 갈 수 없을까? 왜 한스나 잉에에게 농담이
라도 할 수 없을까? 왜 한스나 잉에에게 농담이라도 할 수 없을까? 그러면 두
사람이 적어도 미소로 그것에 응해 주지 않을까? 그렇게 됨변 나는 얼마나 행복
할 것인가? 토니오는 진심으로 그것을 바랬다. 르렇게 되면 자기가 조금이나마
이 두사람과 친근해졌다는 생각을 하고 더 만족한 채 자기 방으로 돌아갈 것인
데, 그느 그들에게 할 말을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다. 그란 말할 용기가 없었다.
또 설사 그렇게 해보았다. 해도 마찬가지힐 것이다. 항스와 잉에 보르크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가까스로 말한 것을 의아한 표정으로 들을 것이다.
그들의 언어는 그의 언어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 춤이 다시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국장 대리는 여러가지 역할을 했다. 그
는 이리저리 뛰어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상대자를 고르도록 하고, 웨이터들
의 도움을 얻어 의자와 유리잔을 치우고 악사들에게 명령을 하며,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의어깨를 붙잡아 밀어냈다. 무엇울 할 참인가? 남녀 제 쌍이
춤출 조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몸서리쳐지는 추억에 토니오 크뢰거는 얼굴을
붉혔다. 까드리유 춤을 추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이 시작되고 각 쌍이 뒤섞여서 절을 하면서 움직였다. 국장 대리가 지위
했다. 놀랍게도 그는 불얼 지휘했다. 그리고 더없이 뛰어난 솜씨로 불어의 콧소
리를 발성했다. 잉에보르크 홀름은 유리문에서 가장 가까운 조에 끼어 까드리유
를 축 있었다. 그녀는 토니오 바로 앞에서 전후 좌우로 발을 재딛거나 몸으 ㄹ
돌렸다. 머리카락에서 나는지, 얇은 옷에서 풍기는지 모를 향기가 때때로 그의코
를 스쳐갔다. 그때 그는 오래된 익숙한 감정에 사로잡혀 눈을 감았다. 지난 며칠
동안 이 감정에서 생기는 향기와 날카로운 자극을 희미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감정 때문에 지금 또 다시 달콤한 고통을 맛보는 것이 아닌가. 도대
체 어떤 감정일까? 동경? 애정? 질투? 자학?... 국장 대리가 불어로 소리쳤다.
"숙녀는 선무를 추시오!" 그옛날 내가 선무를 추는 바람에 창피를 당했을 때, 금
발의잉에, 너는 웃었지, 조소했지? 그리고 내가 약간 유명한 사람이 된 오늘날에
도 역시 너는 나를 비웃겠지? 그야 물론이겠지. 비웃는네가 옳고 말고! 그리고
나 혼자 베에토벤의교향곡 아홉 개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최후의 심판'
을 모두 완성했다 해도 네가 나를 비웃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잉에를 쳐다보았
을 때 옛날에는 잘 알았으나 까맣게 잊었던 시 한 구절이 불현듯 머리에 떠오
랐다. '나는 잠을 자고 싶은데 그대는 춤을 추자고 한다.' 토니오 크뢰거는 이 시
가 불러일으키는 우울한 북방적 기분-무게 있는 투박함을 잘 알고 있었다. 잠잔
다는 것, 그것은 소박하게 느끼며 살도록 허락받는 것, 억지로 행동하거나 춤추
지 않고 달콤하고 낱하게 자신 속에 휴식하는 것이다. 그래도 춤추어야 한다. 예
술이라는 실로 난해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칼춤을 끝까지 추지 않으면 안된
다.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우울한 모순을 망각해서도 안된다. 사랑을 하면서
억로라도 춤을 추어야 한다.
갑자기 전체가 미친 드시 멋대로 움직이 시작했다. 춤추는 사람들이 짰던 조
가 풀어졌고 까드리유 품이 갤럽 춤으로 이어지면서 쌍쌍이 뛰고 미끄러지듯이
돌았다. 광적으로 급한 음악 템포에 맞춰 사람들이 토니오 크뢰거 앞을 지나갔
다. 그들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서로 교차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또 뒤로 물
러서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한 쌍이 그가 있는 쪽으로 선회하며 달려나왔다.
창백하지만 섬세한 얼굴에 말라서 삐죽한 어깨를 한 소녀가 긴 쌍이었다. 그들
은 바로 그의앞에서 무엇인가에 발이 걸려 미끄러져 넘어졌다. 얼굴이 창백한
소져는 위험할 정도로 심하게 쓰러졌다. 그녀의남자 파트너도 자빠졌다. 자기 여
자 파트너를 잊을 정도였으니 몹시 아픈 모양이었다. 그는 간신히 상반신을 일
으키고 찡그린 얼굴을 한 채, 두 손으로 무릎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한편, 소녀
는 실신했는지 그대로 마루 바닥에 누워 있었다. 뛰며 돌기에 지치고 정신이 혼
미해서 불행하게도 그만 넘어진 것이다. 뛰면서 춤추다 지친 그녀는 멍한 표정
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당황하고 속상한 나머지 갑자기 그 연약한 얼굴ㅇ르 붉
혔다.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그녀는 덴마크어로 말하면서 눈물이 글썽
거리는 검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춤은 그만 추시죠, 아가씨." 토니오는 상냥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서 다
시 한 번 그들을, 즉 한스와 잉에보르크를 쳐다보고는 바끙로 나갔다. 베란다를
지나고 파티장을 벗어나 방으로 올라왔다. 그는 자기가 찹석하지도 않았던 파티
에 도취했었고, 또 질투심 때문에 몸이 피곤했다. 예날과 마찬가지였다. 아주 똑
같았다. 예날에도, 두 볼이 달아오른 채로 어두운 구석에 서서, 그들 때문에, 저
금발의, 생기에 넘치는 행복한 사람들 때문에 고통받다가 자리를 뜨시 않았던가!
누군가 와 주어야만 한다! 이제는 잉에보르크가 와 주어야만 한다. 내가 없는 것
을 깨닫고, 남몰래 뒤를 따라와 어깨에 손을 올려 놓고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
다. '우리들 있는 곳으로 가지요. 자! 기분을 재세요! 나는 당신이 좋아요!" 그러
나 그녀는 결코 오지 않았다. 아니,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모든 것
은 예날과 다름이 없었고, 그래도 그는 여전히 행복했다. 그의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현재의자신이 되기까지 흐른 세월 동안 무
엇이 있었던가? 그것은 엄격함, 황량함, 냉기, 정신! 그리고 예술이었다!
그는 옷을 벗고 자리에 누운 후, 불을 껐다. 그는 베게애 입ㅇㄹ 대고 두 개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가 속삭인 순수한 북방의 음절드은 그가 갖ㄱ 태어난 진정
한 사랑, 동경, 행복의 의미했다. 또 그것은 생명을, 단순하고 절실한 감전, 그릭
고향을 의미했다. 그는 어린 시질 이후 지금까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았다.
그의 모든 감각, 신경, 그리고 정신이 동원되어 체험한 거친 모험을 생각해 보았
다. 그러자, 아이러니와 정신에 잠식되고, 인식 대문에 황ㅍ해지고 마비되, 그리
고 창조의 열과 오한에 반쯤 녹초가 된 자신을 보았다. 극단적인 두 세계 사이
에서, 이따금 솟구치는 신성함과 음탕함 사이에서 양심의가책을 받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자신을 억지로 불러일으킨 차가운 흥분 때문에 지나치게 따지
고, 빈궁해지고, 지쳐 빠진 자신을. 길을 잃은, 황폐해진, 고통받는, 그리고 병든
자기를 본 것이다. 그는 회한과 향수에 젖어 흐느껴 울었다.
방안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그러나 아래층에서는 감미롭고 펴범한 삶의세 박
자 리듬이 마음을 뒤흔들며 은은하게 들려왔다.
9
토니오 크뢰거는 북쪽 나라에 머물면시, 그의 동료인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에
게 약속한 편지를 썼다.
먼 남쪽의 낙원에 있는 리자베타시, 저도 곧 그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여기
편지 같은 것을 써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읽고 정말 실망하실 것입니다. 왜
냐하면 이 편지에서 저는 약간 일반적인 얘기를 할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
다고 해서 이야기 거리가 전혀 없다든지, 이것저것 저대로 경험한 바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저는 태어난 고향에서 결찰에 체포당할 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관해서는 차후에 직접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요즈
음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무엇인가 일반적인 것을 말해 보고 싶은 기분
이 드는 날이 자주 있습니다.
리자베타씨,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당신이 언젠가 저를 세속인, 길을 잘
못 든 세속인이라고 말하셨지요. 제가 그전에 언뜻 해 버린 다른 고백들 끝에
제가 '삶'이락 부르는 것에 대한 애정을 고백했을 때 일입니다. 제가 지금 궁금
한 것은, 그때 당신이 어느 정도 깊이 진실을 파악하고 이 말을 했던 것인지, 즉
저의 시민됨과 저의 '삶'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
셨는지의 여부입니다. 이번 여행이 이문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저의 부친은 북방인의 기질을 갖고 계셨습니다. 생각이 깊
고, 철저하고, 청교도적으로 정활했으며, 좀 우울한 편이셨죠. 그런데 모친은 분
명하지는 않은 외국 혈통이 섞여서 아름답고 관능적이며 순진하고, 멋대로였으
며, 부주의하면서도 정열적이었고, 충동에 따라 분방하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모의 혼합인 저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예사롭지 않은 가능성이자 또
그만한 위험이기도 합니다. 이 혼합에서 생겨 나온 사람이 예술에 길을 잘못 든
바로 이 세속인입니다. 안락했던 소년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은 보헤미안, 거짓된
양심을 갖고 있는 예술가입니다. 저는 시민적인 양심 덕분에 예술성, 비상함, 그
릭 천재성에서 무언가 심각하게 애매하고, 불명예스럽고, 의심스러운 것을 발견
합니다. 또 그 양심 덕분에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 편안할 정도로 정상적인 사
람, 평범하고 점잖은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으로 저의 마음은 가득 차 있습
니다.
저는 두 세계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쪽에서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살기가 좀 힘듭니다. 당신들 예술가는 저를 세속인이라고 부르고 또 세
속인ㅇ느 세속인대로 저를 체포하려고 합니다. 그중에 어느 쪽이 더 마음 상하
게 하는 지는 저도 모릅니다. 세속인들은 우매합니다. 그러나 제가 냉담하고 동
경심이 없다고 말하는 당신 같은 미의 숭배자들은, 예술가의 깆리 가운데에는
너무 뿌리 깊고 애당초부터 운명적으로 지작되어, 평범한 것의 즐거움에 대한
동경보다 더 달콤하고 더 할 만한 가치있는 동경은 없닥 생각할 정도의 예술가
기질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위대하고악마적인 미의좁은 길에서 모험을 하고 '인간'을 멸시하는, 저
교만하고 냉정한 예술가들에게 감탄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
다. 왜냐하면 만약에 문학 애호가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적인 것, 생명있는 것, 그리고 평범한 것에 대한 저의 시민
적 애정, 바로 그것이니까요. 이 애정으로부터 모든 온정, 선의, 유머가 나오는
것이고, 이애정은 성경에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애정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으니라'고 할 때의 그런 애정과 동익ㄹ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아니, 하나도 없다는 편이 맞을 겁니
다. 리자베타씨, 지금부터는 좀더 나은 일을 하겠습니다.-이것은 약속입니다. 지
금 제가 편지를 쓰고 있는 중에도 바다는 제게 속삭이고 저는 눈을 감솝니다.
제 마음 속에는 정리되고 형성될 것을 고대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뭉혀의 것
들이 보입니다. 또 잡다한 군상의 그림자들이 보입니다. 그것들은 제게 손짓하여
제가 자기네들에게 마술을 걸어 구원시켜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것,
희극적인 것, 그리고 양자를 합친듯한 것 등 수많은 영상들이 있는데 저는 이것
들에 끌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의 가장 깊고 은밀한 애정은 금발과 파
란 눈, 아름답고 활발한 사람,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것입
니다.
리자베타씨, 이 애정을 책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선량한 것이고 결실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동경과 우울한 선망, 그리고 약간의경멸과 아주 순수
한 행복감이 섞여 있습니다.
작품해설
길을 잘못 든 속인의 자기성찰
성장소설 중에는 예술적인 인격의 형성과정 혹은 예술가의자기인식을 다룬 것
들이 있다. 분류하는 이에 따라서는 그런 소설을 특히 예술가 소설이라 부르기
도 한다. 성장소설이면서 예술가 소걸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은 토마스 만의 '토
니오 크뢰거'가 아닌가 한다. 거기다. 거기다가 '큰바귀 얼굴'이나 '조니 파이와
바보귀신'이 다분히 고전적인 정형성을 가진데 비해 '토니오 크뢰거'는 인물의
근대성이 반영되어 있어 성장소설의발전된 전범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이 '토니오 크뢰거'는 내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해준 소중한 소설
이다. 스무 살을 전후해 자신도 무엇인지 모를 몽롱한 길을 걷고 있다가 나는
그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를 만났다. 당시 흔하던 세계문학전집에서였는데 만남
의 경위는 좀 특이하다. 그는 '선택된 인간'이라는 토마스 만의 또 다른 거작 뒤
에 부록처럼 숨어있다가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날 나는 그 앞에 산악처럼 버티어선 '선택된 인간'
이 주는 괴이쩍고 불길하면서도 장중한 감동에 압도되어 꼬박 밤을 새우고 새벽
을 맞았다. 중세의오이디푸스가 축가속에 교황으로 등극하는 말미로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성가신 부록처럼 표지에도 없는 제목과 함께 중편 한 편
이 붙어 있지 않은가.
처음 나는 그 대단찮아 보이는 군더더기를 무시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미 책
읽기로 밤을 새워 피곤하기도 하거니와 '선택된 인간'이 준 감동에서 금세 깨어
나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 책을 빌려보고 돌려 줘야 하는 당시으 내 사정과 한
창 승하던 싸구려 교양취미가 싫은 일을 하게 했다. 대충이라도 읽어 이 작품이
무엇에 관한 얘기라는 것만이라도 알아둬야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두 ㅉ도 읽기 전에 나는 또 다른 종류의 관심과 흥므로 '토니오 크뢰
거'에 빠져들었다. 이 사람이 지금 내 얘기를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래, 이런 인간은 어떻게 자라 무엇이 되는가-그런 기분데다 뵤한 불안까지 느끼
며 나는 긴장해 읽어나갔다. 세셰와 인생에 대한 애착 때문에 결쿄 예술지상주
의에는 이를 수 없는, 그러나 예술지향적으로 태어난 영혼, 이 영혼이 이르는 길
은 어딘가.
그러다가 '길을 잘못 든 속인(이 번역에서는 세속인)'이란 구절이 나오자 그뒤
의 장황한 부연을 듣지 않고도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단박 알 수 있었
다. 그는 참으로 가슴 아프게 나와 나의 동족들을 보여주고 정의하였다. 나는 지
금도 자주 자신을 돌아보며 '길을 잘못 든 속인'이란 말을 중얼거린다.
삶의 본질을 '희극과 비참'으로 압축한 것도 내게는 충격적인 경구로 들렸다.
그는 인생이 말로 처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말로 처리하
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지금도 단 두 마디로 인생을 표현하라면 그가 말한 '희
그과 비참' 이상의 더 정확하고 절실한 단어를 찾아내지 못할 듯싶다.
작가인 토마스 만은 독일 현채문학의 큰 봉우리다. '마의 산' '부텐부르그 일가'
'선택된 인간'등 위대한 작품을 남겼으며 정치 사회적으로도 그의 시대에 큰 영
향을 끼쳤다. 그러나 한정된 지면에서 그의생이나 업적을 함부로 건드는 일은
우러러온 선배에 대한 결례일 수도 있어 길게 쓰지 않는다. 관심있는 사람에게
는 따로이 시간을 내라고 권하고 싶다.
약혼녀
지은이: 안톤 체흡
옮긴이: 정명자
1
밤 열 시였다. 뜰에는 보름달이 환하게 비치고 잇었다. 슈민의 집에서는, 마르
파 미하일로브나 할머니의 청으로 시작됐던 저녁 예배가 이제 막 끝났다. 그래
서 지금 나쟈는 잠시 뜰에 나왔는데, 홀에서 저녁 식사를 위해 테이블 보를 덮
는 것과 값비싼 비단옷을 입은 할머니가 서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교회의
부주교인 안드레이 신부는 나쟈의 어머니인 니나 이바노브나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어머니는 저녁 불빛을 받아 어쩐지 퍽 젊게
보였다. 그 옆에는 아드레이 신부의 아들 안드레이 안드레이치가 서서 신둥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정원은 고요하고 서늘했다. 그리고 땅 위에는 검은 그림자가 조용하데 누워
있었다. 어디선가 멀리서, 멀리 떨어진 교외에선지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려왔
다. 오월이 느껴졌다. 정다운 오월의 느낌이 사방에 감돌았다. 그녀는 가슴 깊이
오월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녀는 심약하고 죄 많은 사람은 맛볼 수 없는 신비
하고 아름다운, 거룩하고 풍요한 봄의생명력은 이곳이 아닌 수목이 우거진 저
하늘 밑,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들과 숲 속에서 피어 오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
다. 그러나 왠지 울고 싶어졌다.
나쟈는 이제 스물셋이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 때부터 열심히 결혼에대한 생각
을 해 왔다. 그러다가 마침내 저 창문 안에 서 있는 안드레이 안드레이치와 약
혼을 했다. 그녀는 그가 퍽 마음에 들었다. 결혼식은 칠월 칠일로 정해져 있었
다. 그런데 어찌괸 셈인지 그녀의 마음은 즐겁지가 못했다.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고, 늘 시름에 잠겨 있었다... 부엌이 있는 지하실에서는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발을 동동거리면서 문을 쾅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어쩐지 평
생 동안 변화도 끝도 없이 지금과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리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집 안에서 나오ㅗ 현관에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열흘전데 모스
크바에서 온 알렉산드로 치모페이치라는 손님이었다. 혹은 그를 간단히 사샤라
고도 불렀다. 언젠가 오래 전에, 할머니의 먼 친척인 몰락한 귀족의 미망인 마리
아 페트로브나가 작고 허약한 몸을 이끌고 도움을 청하러 오곤 했었는데, 사샤
는 그녀의 아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훌륭한 화가라고 말했고, 그의 어머니가
죽자, 할머니는 고인의 명복을 비는 뜻으로 그를 모스크바의 카미사로프스키 학
교에 입학시켰다. 한 이년 후에 그는 미술 학교로 옮겼고 여기서 십오년을 보내
다가 간신히 건축과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건축 일은 하지 않고 모스크바의
어떤 석판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거의 매년 여름, 그는 퍽 쇠약해져서 유양
차 할머니를 찾아왔다.
즈금 그는 단추로 채운 프록 코트와 아래가 닳은 낡은 무명 바지를 입고 있었
다. 셔츠에는 구김살이 있었고, 그의 모습 어디서나 산뜻한 데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몹시 야위 데다 눈이 컸으며 손가락은 길고 가늘었다. 수염도 많고
살결도 검었지만, 얼굴만은 잘생긴 얼굴이었다. 슈민 댁의 사람들과는 한 가족처
럼 친숙해져서, 제집처럼 느끼고 있었고, 그가 여기서 머무는 방도 오래 전부터
사샤의 방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는 현관에 섯 나쟈를 보자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기는 좋은 곳이로군요." 사샤가 말했다.
"물론이지요. 조흔 곳이에요. 당신이 여기서 가을까지 머무시면 좋을 텐데."
"네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구월까지 역기서 지낼까 합니다."
사야는 까닭도 없이 웃고는 나쟈와 나란히 앉았다.
"여기 ㅇ아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나쟈가 말했다. "여기서 보니까
어머니가 괴장히 젊어 보이네요. 물론 결점도 있으시지만요" 그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 덧붙였다. "하지만 평범하지는 않은 분이에요"
"네, 좋은 분이지요..." 사샤는 동의를 표했다.
"제 생각에 당신 어머니는 친절하고 온화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무라고 할까
요? 오늘 아침 일찍 저는 부엌에 가 보았어요. 그런데 하녀 넷이 마룻바닥에서
그대로자고 있더군요. 침대는 물론 없엉ㅆ어요. 침대 대신 누더기, 악취, 빈대,
진딧물... 이십년 전과 똑같아요. 변화라곤 없어요. 할머니는 늙으신 분이라서 그
렇다 해도, 어머니는 프랑스어도 좀 하실 줄 알고, 연극에도 참가하실 만큼 교양
이 있으신 분이니잘 아실 것 아니겠습니까?"
사샤는 얘기 도중 나쟈의 앞에 길쭉하게 야위 손가락 두 개를 내밀곤 했다.
"저는 여기 있는 모든 것에 익숙해지질 않아요" 그는 계속 말했다.
"어느 누구도 일을 하지 않더군요. 어머니는 하루종일 공작 부인처럼 산책이나
하시고, 할머니도 아무것도 안 하시고,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당신의 약혼자 안
드레이 안드레이치 역시 일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더군요."
나쟈는 그 말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들었던 것 같았다. 사샤가 달리 이야길
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에는 그 말이 우습게 드렸었지만, 지금은
왠지 짜증이 났다.
"그런 날고 오래된 이야기에는 싫증이 났어요"하며 그녀는 일어섰다. "좀더 새
로운 얘기를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빙그레 웃더니 나쟈를 따라 일어섰다. 두사람은 집 쪽으로 걸음을 얾겼
다. 그녀는 날씬하고 아름다웠으며 균형이 잘 잡혀 있어 사샤와 나란히 서니 그
와는 대조적으로 퍽 건강하고 우아해 보였다. 나쟈는 그 사실을 느끼자 그가 가
여워지고 어쩐지 쑥스러워졌다.
"좀 지나친 말씀을 사신 것 같아요." 나쟈가 말했다. "방금 저의 안드레이에
대해 얘기하셨는데, 당신은 그이를 잘 모르지 않아요?"
"저의안드레이라... 당신의 안드레이에게 신이 함께 하시길! 난 당신의 젊음이
가여워요."
그들이 호로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벌써 저녁 식사를 하려고 식탁에 모여 앉
아 있었다. 할머니-집에서는 그녀를 조모님이라고 불렀다.-는 뚱뚱하고 벼로 예
쁘지도 않은 얼굴에 짙은 눈썹과 코 밑에 옅은 털이 조금 나 있었고 항상 큰소
리로 말을 했는데, 그 목소리나 말하는 태도에는 근가 이집의 가장이라는 것이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시장에 여러 개의 점포와 원주와 정원이 딸린 오래된 집
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신에게 파멸로부터 자기를 구원해 달라
고 기도하며 눈물을 흐리곤 해쑈다. 그녀의 며느리이며 나쟈의 어머니인 니나
이바노브나는 금발에 몸에 꼭 끼는 옷을 입고 코안경을 썼으며 손가락마다 아이
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었다. 이가 다 빠지고 홀쭉하게 야윈 안드레이 신부는 무
엇인가 퍽 우스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신부
의 아들이며 나쟈의 약혼자인 안드레이 안드레이치는 살이 찐 고수머리 미남으
로 예술가 같은 인상을 풍겼다.
"너는 일주일만 있으면 나아질 거야." 할머니가 사샤에게 말을 걸었다. "좀더
많이 먹어라. 저 꼴 좀봐!"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꼴이 말이 아니야! 정말 방탕한 후레자기 같구나."
"아버지 재산을 탕신해 버리고." 안드레이 신부가 눈으로 웃으며 천천히 말했
다. "망나니패들과 어울려 다녔으니까요..."
"저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안드레이 안드레이치가 말하며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엊었다.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세요. 좋은 분이지요"
모두가 말이 없었다. 사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냅킨으로 입을 막았다.
"그럼 부인께서는 최면술을 믿으신다는 말씀이지요?" 안드레이 신부가 니나
이바노브나에게 물었다.
"믿는다고 확언할 수는 없어요." 니나 이반브나는 진지한, 다소 엄숙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자연계에는 비밀스럽고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부인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하지만 종교는 우리에게 신비스러운 영역
을 크게 줄여 주고 있다는 것을 덧붙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식탁에 매우 큰 칠면조 튀김이 나왔다. 안드레이 신부와 니나 이바노브나는
자기들의 대화를 계속했다. 니나 이바노브나의 손가락에서 다이아몬드가 반짝였
고 다음 순간엔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빛났다. 그녀는 흥분했던 것이다.
"저는 신부님과 논쟁을 벌일 수는 없지만." 그녀는 말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수없이 많다는 것만은 인정해주세요."
"확실하게 말씀드래는데,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안드레이 안드레이치는 바이올린을 켜고 니나 이바노브나는 피
아노 반주를 했다. 안드레이는 십년 전에 대학의어문학부를 졸업했지만, 아무 데
도 취직하지 않았고 특정한 직업도 없이 지내면서, 가끔 자선 음ㅇ회에 참가했
다. 그랬기 때문에 마을에서는그를 예술가라고 불렀다.
안드레이 안드레이치는 계속 바이올린을 켰고 다른 사람들은 종ㅇ히 귀를 기
울였다. 탁자 위에서는 사모바르가 끓고 있고, 사샤만이 차를 마셨다. 열두 시를
쳤을 때, 갑자기 바이올린 줄이 끊어져 모두들 한바탕 웃고는 서둘러 작별 인사
를 하기 시작했다.
니쟈는 약혼자를 배웅하고 어머니와 함께 쓰는 이층으로 올라갔다.-아래층은
할머니가 쓰고 있었다. 아래층 홀에서는 불을 끄기 시작했으나 사샤는 그대로
앉아서 차를 마셨다. 그는 모스크바 식으로 오랫동안 사샤는 그댜로 앉아서 차
를 마셨다. 그는 모스크바 식으로 오랫동안 천천히 마셨고, 한꺼번에 일곱 잔씩
이나 마셨다. 나쟈는 옷을 벗고 침대로 가 누웠는데, 아래층에서는 하녀가 움직
이는 소리와 할머니의 성난 목소리가 오랫동안 들려왔다. 마침내 사방이 조용해
지고 아래층 사샤의 방에서 가끔 기침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2
나쟈가 잠으깼을 때는 어느새 두 시나 되었는지 날이 새고 있었고, 어디선가
멀리서 야경꾼의 딱다기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는 부드러웠지만 오히려 그것이
거북스러워 더 잠이 오지 않았다. 나자는 지난 오월 내내 밤마다 그랬듯이 자리
에 일어나 앉아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어젯밤과 똑같은 생각으로 안드레이가
그녀에게 접근해서 청혼했던 일, 그 청혼을 수락하고 그후 점차로 이 선량하고
영민한 청년의좋은 점을 알게 되었던 일 등에 관한, 쓸데없고 성가신 생각이었
다. 결혼식이 한 달 남짓 남은 요즈음 나쟈는 웬일인지 무엇인가 막연하고 답답
한 어떤 일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공포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뚝 딱 뚝 딱...
야경꾼이 느릿느릿 딱다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뚝 딱...
오래된 커다란 창문을 통해 냉기로 축 늘어진, 조는 듯한 라일락이 활짝 핀
꽃더미가 정원 구석에서 보였다. 하얗고 짙은 안개는 조용히 라일락 주위를 떠
다니며 나무를 감싸려는 것처럼 보였고, 저쪽 나무들 위에서는 까마귀가 졸린
목소리로 울어대고 있었다.
'아, 왜 이리 답답할까! 어쩌면 결혼식을 앞둔 모든 약혼녀들이 똑같이 느끼는
생각인지도 몰라. 누가 알아! 혹시 사샤의 영향은 아닐까? 하지만 사샤는 몇 해
전부터 항상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말만 되풀이해 왔어. 그럴 때마다 그저 순
진하고 기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어째서 사샤가 내 뇌리에서 사라
지지 않을까? 어때서?'
이제 딱다기 소리는 나지 않았다. 창 밑과 저원에서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했
고, 안개도 걷혀 봄의 햇살이 환한 미소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잠시 후 정
원 전체는 햇빛의 애무를 받아 따뜻한 활기가 넘쳐 흐르고 잎사귀 위에서는 이
슬 방울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그러자 오늘 아침에는 오랫동안 돌보지 않
았던 정원이 다른 땝다 유달리 싱그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할머니는 벌써부터 잠이 깨어 있었다. 사샤는 걸칠고 낮은 소리로 기침을 하
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는 사모바르를 준비하는 소리와 의자를 움직이는 소리
가 들려왔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나냐는 일찍부터 일어나 꽤 오랫동안 정원으 ㄹ거닐
었는데도 여전히 아침이었다.
니나 이바노브나는 탄산수가 든 컵을 손에 든 채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타났
다. 그녀는 강신술과 동종 요법에 심취해 책도 많이 읽었고, 자기가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의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나쟈는 그런 모든 것은 심
오한 비밀스러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쟈는 어머니에게
입맞추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왜 우셨어요, 어머니?"
"어젯밤에 난 어떤 노인과 딸에 대한 이야기를 쓴 소설을 읽기 시작했어. 노인
은 어떤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딸이 주인과 사랑하게 되었지. 다 읽지는
못했는데, 거기에 눈물을 흘릴 만한 대목이 있었단다"라고 이야기하며 니나 이바
노브나는 탄산수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 아침에 그 생각이 나서 또 눈물을 흘
린 거란다."
"저는 요즘 기분이 좋질 않아요." 잠시 말이 없다가 나쟈는 이야기를 꺼내ㅔ
다. "왜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을까요?"
"글쎄, 모르겠구나. 나는 잠이 안 오면 눈을 꼭 감고, 안나 카레리나가 걸어 다
니는 모습이나 말하는 모습을 그려 본단다. 아니면 어떤 먼 옛날의 역사적인 일
을 상상하든가..."
나쟈는 어머니가 자기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생각은 처음이었으며 두려워지기까지 하여, 달아나고 싶어
졌다. 그래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두 시가 되자, 모두들 점심 식탁에 앉았다. 사순절의 수요일이어서 할머니는
사순절 수프와 묽은 죽을 곁들인 잉어를 준비시켰다.
사샤는 할머니를 놀라게 하려고 자기 몫의 고깃국과 사순절 수프를 다 먹었
다. 그는 식사를 하는 동안 곧잘 농담을 ㄹ했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고, 말
을 하기에 앞서 웃기려는 듯 그의앙상하고 길쭉학 창백한 손가락을 져들 때도
조금도 우습지는 않았다. 그럴 때면 그가 몹시 약해서 그리 오래 못 살 거라는
생각이 들며 눈물이 날 정도로 그가 가엾게 여겨졌다.
식사 후 할머니는 쉬려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니나 이바노브나도 잠깐 피
아노를 치다 나가버렸다.
"아, 사랑스러운 나쟈" 사샤는 식사 후면 항상 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
당신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만약!"
나쟈는 눈을 감고 낡은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고, 사샤는 방 안을 이리저리 왔
다갔다했다.
"당신이 대학에 간다면 좋을 텐데!" 그가 말했다. "사람이랑 고상한 교양을 지
녀야 합니다. 또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땅에
는 신의 왕국이 일찍 옵니다. 당신의 이 거리도 조금씩 변하여, 모든 것이 거꾸
로 뒤집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엔 거대하고 우아한 집들이 들어서고 아
름다운 정원고 훌륭한 분수가 세워지고, 덕망 높은 사람들이 살게 되겠지요... 하
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저속
한 사람들, 즉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저속한 사람들이 그때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
는 잠입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쟈, 떠나세요! 이렇게 숨막힐 듯한 죄에 물든
흐릿한 생활을 당신이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가를,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주도록
하십시오! 자신에게만이라도 보여 주세요!"
"그럴 수는 없어요, 사샤. 저는 결혼해댜 되는 걸요."
"또 그런 말을! 도대체 결혼은 해서 뭘 한다는 말입니까?"
두사람은 정원을 나가 잠시 거닐었다.
"어쨌든 나냐, 당신의 이런 무의미한 생활은 정ㄱ하지 못하고 사악한 것이라는
걸 잘ㄹ 생각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사샤는 말을 계속 했다. "생각해 보십
시오. 당신과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가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하잠ㄴ
누군가 다른 사람들의생활을 착복하는 겁니다. 과연 이것이 깨끗한 일이고 더럽
지 않다는 겁니까?"
나쟈는 '네, 당신 말이 옳아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이 앞을 가려, 잠자코 몸을 움츠리고는 자기 방으로 갔다.
저녁에 안드레에 안드레이치가 와서 늘 그렇듯이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켰다.
대체로 그는 말이 없었는데, 그가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것은 연주하는 동안 조
용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열한시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외투를 입
은 안드레이는 나쟈를 껴안고 그녀의 얼굴과 어깨와 손에 열렬하게 입을 맞추었
다.
"나의 사랑, 당신은 정녕 아름답습니다..." 안드레이가 속삭였다. "오, 저는 지
금 이 순간 너무나 행복합니다! 황홀한 나머지 미쳐 버릴 것만 같습니다!"
나쟈는 언젠가 아주 오래 전에 그런 말으 ㄹ들은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낡
아버려서 오래 전에 던져버린 소설책에서 읽었던 것 같기도 했다.
사샤는 탁자에 앉아서 자기의 길다란 다섯 손가락 우에 작은 찻잔을 올려 놓
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할머니는 혼자 트럼프를 치고, 니나 이바노브나는 책을
일고 있었다. 램프에서는 불꽃이 타오르고, 모든 것이 조용하고 아늑해 보였다.
나쟈는 밤 인사를 하고 위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 자리에 줍자 곧 잠이 들었다.
그러나 지난 밤과 마찬가지로 날이 샐 무렵 잠을 깼다. 잠은 더 오지 않고, 마음
은 불안하고 답답했다. 그녀는 일어나 앉아, 무릎에 머리를 댄 채 약혼자 안드레
이와의 결혼식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녀는 어머니가 죽은 아
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었고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시어머니에게 의지하
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자 지금까지 어머니를 특별하고 뛰어난 사
람이라고만 생각하고, 그저 단순하고 평범하며 불행한 여인이라는 것을 미처 깨
닫지 못한 자신을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사샤도 잠으 ㄹ자지 않는지 아래층에서 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기묘
하고 천진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꿈 속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
훌륭한 분수 따위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의 순진함이나
우스꽝스러운 점까지도 퍽 훌륭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공부하러 떠날까 하는
생각에 이르기만 하면 가슴과 마음이 온통 시원함과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하지 말아야지. 생각 않는게 좋아..."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을 해선 안돼."
똑 딱.
야경꾼이 어딘가 멀리서 딱다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똑 딱... 똑 딱...
3
유월 중순이 되자 사샤는 갑자기 갑갑증을 느껴서 모스크바로 떠날 생각을 했
다. "난 이런 곳에서는 살 수가 없어요." 그는 우울하게 말했다. "수도가 있나 하
수도가 있나! 먹은 것을 죄다 토할 것만 같아요. 더군다나 부엌이 지저분한 것은
견딜 수가 없어요..."
"좀더 기다려 봐. 이 덜된 자식 같으니!" 하며 할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타일렀
다. "칠월엔 결혼식이 있잖아!"
"도저히 그때까지 있을 수 없어요."
"구월까디 머물겠다고 하지 않았니!"
"하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 나는 일을 햐애 하니까요!"
여름은 몹시 습하고 냉기가 설, 나무들은 축축했고 정원의 모든 것이 황량하
게 풀이 죽어 보였다. 이러한 것들이 일할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아래 위층의
방에서는 낯선 여자들의목소리가 들리고 할머니의 재봉틀 소리가 계속 들렸다.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나쟈를 위해 모피 코트 여섯 버을 만들었는데, 그중
에서 가장 값싸다는 것이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삼백 루블이나 되는 것이었다.
사샤는 이런 큰 소동이 귀찮았다. 그는 방 안에 틀어 박혀서 화를 냈다.그러나
모두들 그가 떠나는 것을 말렸기 때문에 십일 이전에는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시간은 빨리 흐렀다. 성베드로의 날 안드레이 안드레이치는 점심식사 후 나쟈
를 데리고 자기들이 살려고 마련한 빈 집을 다시 한 번 돌아보기 위해 모스크바
거리로 갔다. 그 집은 이층 건물이었는데 아직 위층 밖에 정돈이 되어 있지 않
았다. 홀에는 조각으로 세공을 한 마루가 번쩍이고, 구부러진 나무로 만든 의자
들과 피아노, 바이올린의 악보 받침대가 놓여 있었다. 페인트 냄새가 진동했다.
벽에는 커다란 그림이 금빛 사진틀에 넣어져 걸려 있었는데, 나신의 여인과 그
여인 옆에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보라색 꽃병이 그려져 있었다.
"훌륭한 그림입니다." 안드레이 안드레이치가 감탄한 듯이 말하며 한숨을 내쉬
었다. "이건 화가 사시마체프스키의 작품이죠."
더 안쪽에는 짙은 청색 커버가 씌워진 소파와 안락으자가 둥근 탁자와 함께
놓여 있는 응접실이 있었다. 소파 위에는 신부 모자를 쓰고 훈장을 단 안드레이
신부의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 다음에는 찬장이 달린 식당을 둘러보
고 나서 침실로 갔다. 약간 어두운 침실에는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
데, 이곳은항상 쾌적한 인상을 줄 수 있도록 애써 꾸며 놓은 것 같았다. 안드레
이 안드레이치는 이 방 저 방을 둘러 보면서 내내 나쟈의 허리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나쟈는 자기 자신이 악하고 죄를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방이니 침
대니 안락의자니 하는 모든 것이 무었으며, 나체 여인의 그림은 그녀를 불안하
게 만들ㄹ었다. 자기가 안드레이 안드레이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명
백해졌다. 어쩌면 그르 결코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누구에게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는 전혀 알 수 없
었다. 이러한 감정에 대해 매일 밤마다 그처럼 많은 생각을 했건만... 안드레이는
줄곧 나쟈의 허리를 안고 다정스럽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보금자리를 이
리저리 오가며 무척 행복해 했다. 하지만 나쟈느 모든 것에서 오직 비속함만을,
어리석고 순진해 빠지고 참기 어려운 비속함을 볼 수 있을 뿐이었고, 자기의허
리를 휘감은 그손고 마치 굴렁쇠처럼 거칠고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당장 뛰쳐나가 울음을 터뜨리며 창 밖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기분에 줄곧 사로
잡혀 있었다. 안드레이 안드레이치는 그녀를 목욕실로 데리고 가서 벽에 붙어
있는 수도 꼭지를 틀었다. 그러자 마구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떻습니까?" 그는 웃음 물었다. "천이백 리터들이 물탱크를 설치했어요. 우
리는 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두 사람은 마당을 한바퀴 둘러 보고 나서 거리로 나와 마차를 불렀다. 먼지가
짙은 구름처럼 뒤덮이고, 금세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춥지 않아요?"
먼지 때문에 눈을 깜박이면서 안드레이 안드레이치가 물었다.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어제 사샤가 당신이 아무 일도 안 한다고 당신을 비난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
지요?"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하긴 그의 말이 맞습니다! 옳고 말
고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할 수도 없습니다. 나쟈, 그건 무슨 까닭일까
요? 언젠가는 나도 모자에 휘장을 달고 관처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싫으니 웬일일까요? 왜 변호사나 란틴어 교사나 사업가들을 보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요? 아, 어머니인 조국! 아아, 어머니인 러시아는 그 품 안에 얼마
나 많은 공허하고 쓸데없는 자를 안고 있는지! 러시아는 나와 같은 이러한 무용
지물을 수없이 많이 짊어지고, 고민에 차 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를 일반화시켜 거기서 시대의 상징을 찾아냈
다.
"우리가 결혼을 하면," 그는 말을 계속했다. "시골에 가서, 거기서 일을 합시
다! 과수원과 강이 있는 조그마한 토지를 사서 열심히 일하며, 인생을 똑바로 바
라봅시다... 아아, 얼마나 멋있을까요!"
그가 모자를 벗자, 머리결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러나 나쟈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거의집 근처까지
왔을 때 그들은 안드레이 신부와마주치게 되었다.
"아, 저기 아버님이 기시는군!" 안드레이는 무척 기뻐하며 모자를 흔들었다.
"나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사랑한답니다." 마부에게 돈을 지불하면서 그가 말했
다. "좋은 분입니다. 훌륭한 어른이지요."
나쟈는 집을 돌아왔으나 매일 밤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미소를 짓고,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기울이고, 허튼 소리르 듣고, 오직 결혼식에 관한 이야기만 할 것을
생각하니 짜증스럽고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거드름을 부리며 값비
싼 비단옷을 입고, 손님 앞에서는 항상 그러듯이 근엄한 표정으로 사모바르 옆
에 앉아 있었다. 안드레이 신부가 교활한 밋를 지으며 들어왔다.
"여전히 건강하신 모습을 뵈어니, 기쁘고 감사한 마음뿐입 니다."하고 신부가
할머니에게 말했는데, 농담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하는 말이지 분간하
기가 퍽 어려웠다.
4
바람이 창문과 지붕을 두드렸다. 휘파람소리가 들려오고, 난로 속에서는요정이
우울하고 슬프게 노래 부르고 있었다. 자정이 넘었으므로 집안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누워 있기는 했지만 어느 누구도 자고 있지는 않았다. 나쟈는 아래층에
서 누군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쾅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마도 덧분이 떨이진 것이리라. 잠시 후 니나 이바노브나가 잠옷 바람에 촛불
을 들고 들어왔다.
"무엇이 쾅 소리를 냈지. 나쟈." 어머니가 물었다.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리고 수줍은 듯한 미소를 띤 어머니는, 이 폭풍우 치는
밤에는 늙고 밉게 보였으며 키마저 작아 보였다. 나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
머니를 평범하지 않은 여자락 생각하며 어머니의 말을 조심스럽게 듣곤 하던 것
을 머리에 떠올렷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무슨 이야기였었는지 도무지 기억할
수 없었다.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모두가 모호하고 쓸데없는 것들뿐이었다.
나로 속에서 낮은 베이스 소리가 나던 것이 이제는 '아아, 신이여'라는 소리로
들려 왔다. 나쟈는 침애데 일어나 ㅇ아 갑자기 머리카락을 와락 움켜쥐며 흐느
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그녀는 빠르게 마랬다. "제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아
신다면! 제발 절 떠나게 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어디로?"
영문을 모르는 니나 이바노브나는 이렇게 물으며 침대에 앉았다.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나쟈는 오랫동안 움물만 흘리 뿐, 한 마디의 말도 입 밖에 낼수가 없었다.
"이 고장을 떠나게 해 주세요!" 드디어 털어놓기 시작했다. "결혼식으 해서는
안돼요.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사람에 대새서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 얘야, 아니다" 니나 이바노브나는 무척 놀라서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진정해라. 너 기분이 무척 언짢은가 보구나. 곧 나아질 거사. 이런 일은 흔한 거
야. 필시 너느 안드레이와 말다툼을 한것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싸우는
것도 즐거운 일이란다."
"아녜요, 어머니. 나가 주세요, 나가 줘요!"
나쟈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마." 니나 이바노브나는 조용히 말했다.
"지금까지는 네가 언리애였고 소녀였지만, 이제는 벌써 결혼할 여자가 되었다.
세상 일이란 이렇게 쉬지 않고 변하는 거란다. 너도 이세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
가 되고 또 나처럼 말 안 듣는 딸도 갖게 된다는 걸 모르겠니?"
"어머니, 어머니는 현명하신 분이에요. 불행한 분이구요" 하고 나쟈는 말했다.
"어머니는 몹시 불행한 분이에요. 그런데 어째서 그처럼 평범한 말씀을 하시는
거죠? 어째서요?"
니나 이바노브나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으나 한 마디도 할 수 가 없었다.
그녀는 흐느껴 울며 자기 방으로 가 버렸다. 나쟈는 다시금 난ㄹ 속에서 베잇
소리가 윙윙거리자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뛰어 일
어나, 황급히 어머니 방으로 뛰어갔다. 니나 이바노브나는 눈물에 젖어, 푸른색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워 있었든데 양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어먼, 제 말을 들어 보세요!" 하고 나쟈는 말했다. "깊이 생각하고 이해해 주
세요.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편협하고 굴욕적인지 아실 거예요. 저는 이제야 눈
을 뜨고 모든 것을 제대로 보게 되었어요. 안드레이 안드레이치가 도대체 뭐란
말이에요? 그는 전혀 똑똑한 사람이 아니예요! 천만에요! 어머니, 그는 아주 바
보예요."
니나 이바노브나는 감정이 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너와 제 할머니는 항상 나를 괴롭히는구나!" 흐느끼며 말했다. "나도 살고 싶
다! 편히 살고 싶어" 하고 되풀이 하며 그녀는 두어번 손바닥으로 가슴을 쳤다.
"나에게도 자유를 주렴! 나는 아지도 젊어. 살고 싶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낳은
네가 나를 늙은이로 만들었어!"
그녀는 격력하게 울며 침대에 쓰러져 이불로 몸을 감쌌다. 그 모습은 무척 초
라하고 가엾고 어리석어 보였다. 나쟈는 자기 방으로 가서 옷을 입고, 창가에 앉
아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밤새도록 앉아서 생각했다. 밖에서
는누군가가 여전히 덧문으 흔들고 휘파람을 부는 것만 같았다.
아침에 할머니는 지난 밤의바람 때문에 정원의사과가 모두 떨어지고, 늙은 오
얏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다고 불평을 했다.
불을 켜고 싶을 만큼 온통 회색빛으로 싸인 어둠침침한 날씨였다. 모두들 춥
다고 불평을 하는데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나쟈는 차를 마신 후 사
샤의 방으로 건너가, 잠자코 안락의자 옆에 무릎을 꿇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
쌌다.
"무슨 일입나까? 사샤가 물었다.
"살 수가 없어요..." 나쟈가 말했다. "여태까지 여기서 어떻게 살아 왔는지 모
르겠어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는 약혼자를 경멸해요. 나 자신도. 이 무익하고
무위미한 생화 전부를 경멸하고 있어요..."
"뭐라고요?" 무슨 말이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사샤가 말했다. "그건 사실입니
다. 옳은 생각입니다. 옳은 생각이에요."
"이런 생활을 증오한단 말예요" 나쟈는 계속 말했다. "이젠 단 하루도 여기서
견딜 수 없어요! 내일 이곳을 떠나겠어요. 저를 데려 가 주세요. 부탁이에요!"
사샤는 잠시 동안 놀란 누능ㄹ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느 냐쟈의 말을
이해학 마치 어린애같이 기뻐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뻐서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발을 구르며 손뼈을 쳤다.
"훌륭하십니다!" 그는 손을 문지르며 말했다. "오, 얼마나 훌륭한지!"
그러나 나쟈는, 그가 당장 말할 수 없이 중요학 의미 심장한 어떤 말을 수 없
이 중요하고 의미 심장한 어떤 말을 해주기르 ㄹ기다리며 마술에라도 걸린 듯이
커다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샤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져는 전에 알지도 못했던
새롭고 넓은 세계가 펼쳐지는 듯하여 죽음까지 각오하고 기대에 찬 눈으로 사샤
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내일 떠나겠습니다." 잠시 생각하다가 사샤가 말했다. "그러면 당신도 저를
전송한다고 하고 역으로 나오십시오... 당신 여행 가방은 제 트렁크에 넣고 표
도 제가 사 두겠습니다. 세번째 종이 울리면 기차에 오르세요. 우리는 떠나는 겁
니다. 모스크바까지는 같이 가고, 거기서부터 당신은 혼자 페테르스부르크로 가
십시오. 신분증은 가지고 있지요?"
"있어요"
"당신은 결코 누우치거나 휘회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샤는 열의를 띠고 말했
다. "가서 공부를 하세요. 그 다음은 운명에 맡기십시오. 당신의 생활을 뒤집으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중요한 것은 생활을 뒤엎는 일이고, 나머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르러면 내일 떠나는 거죠?"
"오! 그래요. 제발!"
그녀는 퍽 흥분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괴로운 것 같았다. 집
을 뗘나기까지는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눈물 젖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저녁 때까지 곤히 잤다.
5
마차가 왔다. 모자를 쓰고 외투를 입은 나쟈는 다시 한 번 어머니와 자기의
물건들을 보아 두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듯한
자기 방의 침대 옆에 서 있다가 조용히 어머니 방으로 갔다. 니나 이바노브나는
자고 있었고 방 안은 조용했다. 나쟈는 어머니에게 입을 맞추고 머리카락을 가
다듬으며 잠시 동안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밖에서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지붕을 씌운 마차가 흠뻑 젖은 채
현과 옆에 서 있었다.
"사샤와 함께 마차를 타지 말렴, 나쟈." 하녀가 트렁크를 챙겨 넣을 때 할머니
가 말했다. "사냥도 이런 날씨엔 하지 않는 법이야! 집에 있는 게 좋을 텐데, 저
렇게 비가 쏟아지지 않니!"
나쟈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사샤는 나쟈가 마차에 타는
것을 도와 주고 담요로 그녀의 발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자기도 나란히 옆자리
에 올라탔다.
"잘 가거라! 몸 조심하고! 현관에서 할머니가 외쳤다. "사샤, 모스크바에 가서
편해라!"
"네, 할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할머니!"
"성모님이 너를 지켜 주시길!"
"무슨 날씨가 이럴까!" 하고 사샤가 말했다.
나쟈는 그제서야 울기 시작했다.
나쟈는 그제서야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할 때나 어머니를 보았을
때는 믿엊지 않더니 이제 정말 떠난다는 것이 확실해 졌다. '안녕, 고향이여!" 갑
자기 모든 것이 일시에 머리에 떠올랐다. 안드레이와 그의 아버지, 새 집, 꽃병
과 나부의그림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녀를 두렵게 하거나 마음을 무겁게 하
기는커녕, 야비하고 천박하게 느껴지면서 뒤로뒤로 멀어져 갔다. 기차에 올라 차
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처럼 커다랗고 심각했던 지난 과거 전체가 조그맣게
뭉쳐지고, 지금까지 조그맣게 보이던 넓은 미래가 광대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비는 계속 차창을 계속 때리고 있었다. 오직 푸르른 들판과 나는 듯이 스쳐 지
나가는 전주와 전선 우에 앉은 새들만이 보였다. 나쟈는 갑자기 그쁨으로 숨이
막혀 왔다. 그녀는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공부하러 간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옛날의 '코사크로 떠난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 아닌가. 그녀는 웃기도 하고 울기
도 하며,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괜찮아요!" 사샤는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문제 없어요!"
6
가을이 지나고 겨울도 갔다. 나쟈는 고향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날마다 어머
니와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사샤도 그리웠다. 집에서 오는 편지는 부드럽고 다
정했으며, 이제는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잊혀진 것 같았다. 오월에 시험이 끝나
자, 건강하고 명랑한 모습으로 집을 향해 떠났다. 도중에 사샤를 만나러 모스크
바에 들렸다. 그의 모습은 작년과 똑같았다. 수염을 기르고 헝클어진 머리, 프록
코트와 무명 바지,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여전했다. 그러나 병색이 짙었으
며 무척 피로해 보였다. 그는 늙었을 뿐만 아니라 수척한 몸에 기침을 계속학
있었다. 웬일인지 나쟈의 눈에는그가 우울한 시골뜨기 같아 보였다.
"오, 나쟈가 왔군요!" 그는 반기며 명랑하게 웃었다. "사랑스러운 나쟈!"
두 사람은 , 담배 연기로 가득 차고 잉크와 페인트 냄새로 숨이 막히는 석판
인쇄소에 앉아 있다가 사샤의 방으로 갔다. 거기도 담배연기가 자욱하고 침 뱉
은 자국이 있었다. 식어빠진 사모바르 옆에는 검은 종이에 덮인 깨진 접시가 놓
여 있고, 탁자와 마룻바닥에는 죽은 파리 몇 마리가 뒹굴고 있었다. 사샤가 단정
치 못한 생활을 하며, 안락한 생활 따위는 아랑곳않고되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
이 모든 것에서 역력하게 드러났다. 만일 누가 사샤에게 그의 개인적인 행복, 개
인적인 생활, 그의 취미에 대해 얘기한다 해도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웃어 넘기고 말 것이다.
"아무 일 없이, 모든 것이 다 잘 되었어요"하고 나쟈가 빠르게 말했다. "어머
니가 지난 가을에 페테르스부르크로 저를 찾아오셔서, 할머니는 이제 화를 내시
지 않고 자주 제 방으로 가셔서 벽에다 성호를 긋곤 하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사샤는 명할해 보였지만 가끔 기침을 하며 전과 달라진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나쟈는 줄곧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으나, 그가 정말로 많이 아픈 것인지 아니면
자기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샤, 몸이 불편하지 않아요?"
"아니, 괜찮아요. 조금 불편은 하지만..."
"아, 어쩌면... " 나쟈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당신은 치료받지 않는 거
죠? 자신의 건강을 소중히 돌보지 않느냔 말예요, 나의 사랑스런 사샤."
그녀는 눈물이 솟았다. 그리고 웬일인지 안드레이 안드레이치와, 꽃병과 나부
의 그림과, 이제는 아득한 옛날처럼 생각되는 모든 일들이 기억 속에 떠올랐다.
나쟈는 이제는 사샤가 작년처럼 그토록 신선하고 지적이고 흥미있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사샤, 당신은 몹시, 아주 위독해요. 당신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꼭 당신을 돌봐 드려야 해요! 저를 위해 당신
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주셨는지 당신은 미쳐 모르실 거예요! 고마운 사샤, 정마
로 저에게는 당신이 가장 가깝고 소중한 분이에요."
두 사람은 앉아서 잠시 이야기했다.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겨울을 지내고 난 지
금의 나쟈에게는, 사샤의 말고 미소와 그의 모습 전체에서, 이미 낡고 구식스러
우며 오래 전에 시들어버려 무덤 속에 묻혀버린 듯한 그 어떤 것이 느껴졌다.
"나는 모레 볼가로 갑니다." 사샤가 말했다. "쿠미스(타타르 지방에서 제조하
는 마유주를 마시려고요. 그게 먹고 ㅅㅍ습니다. 내 친구가 자기 아내를 데리고
같이 가는데, 그 부인은 훌륭한 분이에요. 그녀에게 공부하라고 설복하고 있는
중입니다. 생활을 바꾸어 주려고요."
잠시 이야기하고 나서 그들은 정거장으로 갔다. 사샤가 차오ㅘ 사과를 사 주
었다. 기차가 움직이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을 흔들었다. 그의 걷는 모습
을 보고 나쟈는 그의 병이 대단히 깊고 어쩌면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했
다.
정오가 되자 고향 마을에 도착했다. 역에서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거
리는 넓게 보였으나 집은 조그맣고 나직하게 보였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없었고,
단지 생강빛 외투를 입은 독일인 피아노 조율사를 만났을 뿐이었다. 집들은 ㅁ
두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할머니는 무척 늙었으며 예전처럼 살이 찌고 못생긴
그댜로였다. 할머니는 나쟈를 두 팔로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ㅇ르 파묻고
오랫동안 울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니나 이바노브나도 퍽 늙어서 초라해지고
야위 것 같았으나 여전히 몸에 꼭 끼는 옷을 입고 손가락에는 다이야몬드가 반
짝이고 있었다.
"귀여운 나쟈!" 그녀는 온몸을 떨면서 말했다. "내 뒤영운 것!"
두 사람은 ㅇ아서 말없이 울었다. 할머니나 어머니는 지나간 과거는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며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는 사회적 지위나 지난 날의 명성이나 손님으 ㄹ초대할 자격도 없었다. 마치 단
란하고 평화로운 가정에, 어느 날 밤 갑자기 경찰대가 들이닥쳐 조사를 하고, 가
장이 공금을 유용하고 위조 지폐를 만들었다는 것이 판명된 것 같은 썰렁함만
남았다. 그렇게 되면 단란하고 평화로운 가정과는 영원히 결별하게 되는 것이다!
나쟈는 위층으로 올라가 옛날과 똑같은 침대, 희고 귀여운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과, 쏟아지는 햇빛으로 밝고 소란드러운 정원을 보았다. 그녀는 책상을 마져
보고 의자에 앉아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점심을 잘 먹고 나서, 맛있고 기름진
크림을 넣은 차를 마셨으나, 무엇인가 하나가 빠진 것처럼 허전하고 방들은 텅
비고 천장은 낮아 보였다. 저녁이 되자 나쟈는 잠을 자러 가 이불을 덮었지만
이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웬일인지 우스웠다.
니나 이바노브나가 들어와서 죄지은 듯 수줍어 하며 조심스럽게 몸을 움츠리
며 앉았다.
"어떠니, 나쟈?" 잠시 말이 없다가 물었다. "만족하니? 아주 행복해?"
"네, 만족해요, 어머니."
ㄴ나 이비노브나는 일어나서 나쟈와 함께 창문을 향해 성호를 그었다.
"난 이처럼 신아심이 두터워졌단다. 요즈음 철학을 공부하면서 늘 생각에 잠기
곤 한단다... 그래서 이젠 모든 것이 햇빛처럼 선명하게 보여. 무엇보다도 인생
전체가 프리즘을 통하는 것처럼 지나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런데 어머니, 할머니의 건강은 어때요?"
"괘찮은 것 같아. 네가 사샤와 함께 떠나고 나서, 네 전보를 받고 할머니는 그
걸 읽잠자 쓰러지셔서 사흘 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 계셨단다. 그후에도 계속
기도를 하시면서 우셨어.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그녀는 일어나서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똑 딱... 야경꾼이 딱다기를 치고 있었다. 똑 딱 똑 딱...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생 전부가 프리즘을 통하는 것처럼 지나간다는 거
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햐면, 일곱가지 기본적인 색채로 분
리되듯이 인식에 있어서의 인생도 가장 간단한 요소로 분할되어, 각 요소는 개
별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단 말이지." 니나 이바노브나가 무슨말을 더 하고 언제
나갔는지 나쟈는 알지 못했다. 곧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오월이 지나가고 유월이 되었다. 나쟈는 이제 집에 익숙해졌다. 할머니는 사모
바르 준비를 재촉하며 깊이 한숨을 쉬곤 햇다. 니나 이바노브나는 저녁마다 자
신의 철학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식객처럼 이 집에 살면서
이십 카페이카 한 장을 쓰는 데도 일일이 할머니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온 집
안에 파리고 들끓고 방안의 천장들은 점점 낮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와
니나 이바노브나는 안드레이 신부와 안드레이 안드레이치를 만나게 될까 두려워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나쟈는 정원과 거리를 걸으면서 집들과 회색 담장을 바
라보곤 했다. 그녀에게는 이 마을의 모든 것은 이미 오래전에 낡고 구식이 되어
오직 그 종말을, 아니면 어떤 젊고 신선한 시대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 그 새롭고 밝은 생활이 빨리 오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자기의운명
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을 정당한 사람으로 인식하여 기쁘고 자유로워질 것이
다! 그러한 생활은 머지않아 올 것이다! 한 넷이 지하층의더러운 방 하나에서 살
지 않을 수 없는 할머니의 집은 없어져 버리고, 모두가 잊고 어느 누구도 기억
을 하지 않는, 그런 날이 오지 않겠는가. 이웃집 아이들만이 나쟈의 신경을 건드
렸다. 근가 정원을 거닐고 있으면 아이들은 담장을 두두리고 웃으면서 놀려댔다.
"약혼녀! 약혼녀!"
사라토프에서 사샤의 편지가 왔다. 볼가 여행은 성공적이었는데, 사라토프에서
건강을 해쳐 말을 못하고 벌써 이주일이나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고, 그의 춤추
는 듯한 우스운 필적으로 쓰여 있었다. 그녀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
닫고, 확신과 같은 예감에 사로 잡혔다. 그리고 사샤에 대한 예감과 생각이 그저
처럼 자기를 흥분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불쾌했다. 살고 싶은 생각, 페테
르스부르크로 가고 싶은 생각만이 절실할 뿐, 사샤와의 만남은 먼 과거처럼 여
겨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밤새도록 자지 않고 있다가 아침이 되자 창가에 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아래층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분한 할머
니가 무엇인가를 빠른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누군가가 울음을 터
뜨렸다... 나쟈가 눈물에 젖어 있었다. 탁자 위에는 전보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나쟈는 할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전보를
들고 읽었다.
어제 아침 사라토프에서 알렉산드르 치모페이치, 간단히 말하면 사샤가 폐결
핵으로 죽었다는 통지였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진혼 미사를 부탁하려 교회에 갔고 나쟈는 여전히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사샤가 원했던 대로 근의 생활은 뒤
바뀌었다는 것, 여기서 근는 고독하며 이질적인 쓸데없는 존재라는 것. 여기 있
는 모든 거싱 부질없고 자기에게서 떨어져 나가 마치 불에 타듯 사라지고 그 재
도 바람에 날려갔다는 것, 이런 것들을 명확이 깨달았다. 그녀는 사샤의 방으로
들어가 담시 서 있었다.
"안녀, 그리운 사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녀의 눈ㅇ에는 새롭
고 광활한 자유로운 생활이 나타나면서, 아직 불분명하고 비밀에 싸인 스 생활
이 마음을 무한히 사로잡으며 매혹시키는 것이었다.
나쟈는 짐을 꾸리러 위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자기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희망에 찬 경쾌한 마음으로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그럿이 영원한 결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작품해설
애처롭고 아름다운 눈뜸의 이야기
무심과 둔감은 우리의시선을 삶의 껍질에만 묶어놓는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때로 날카로운 일섬 혹은 희미한 기미로 우리의 무심과 둔감을 파고든다. 그 일
섬 혹은 기미를 우리의 의식이 포착하게 되는 것이 눈뜸이고 그 눈뜸의 연결이
성장의과정이라 말할 수 도 있다.
'약혼녀'는 변화없고 무위한 일상에 길들여져 의미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시
골 아가씨가 어떤 계기로 눈을 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단편이다. 여주인공 나쟈는 재산에 기대어 일하지 않고 사는 삶, 세속화된
종교, 고착되 세계관, 무위와 침체를 안락과 혼동하고 기성의가치관을 맹신하는
것만이 교양인 줄 아는 집안에서 자랐다. 그리고 무심과 둔감으로 그 세계에 안
주하며 역시 비슷한 부류의 남편감을 골라 약혼하고 현재와 동일한 미래를 반복
하려다가 갑작스런 눈뜸으로 과감히 낡은 알껍질을 깨고 새로운 하늘로 날아오
르게 된다.
나쟈가 박차고 나온 세계는 낡고 부패한 것이지만 또한 안정되고 확실한 세계
이다. 반면 근가 새로 향하고 있는 세계는 기실 미지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점에서 나쟈의 눈뜸은 애처롭다. 인형의 집을 떠나는 노라처럼.
하지만 미지와 불확실성이 반드시 비극적인 예감과 동의어는 아니다. 세계든
인생이든 언제나 가장 아름답고 위한 것은 바로 그 미지의 불활실성의 장막 너
머에 있다. 따라서 용감히 그 장막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은 우리 의식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하나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흔히 '약혼녀'를 체홉의여러 명편들 둥에서도 뛰어난 작품으로 친다.
나 역시 젊을 때는 까닭모르게 가슴저려하며 읽었지만-이제와서 보니 불만이 아
주 없지도 않다. 먼저 불만스러운 것은 그 눈뜸의 성질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앞
에서 나름대로 해석해 두기는 하였지만 눈뜬 것이 그녀의 사회적 의식인지 주관
적 자아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 때문에 그녀가 벗어나려 한 세계와 지향하는 세계역시 애매하다. 그녀가
벗아나려 한 것이 남의 노동을 착취하는 삶과 인간에 대한 부당한 대우 같은 사
회적 부조리인가, 아니면 반복적이고 부패하고 침체된 일상과 거기에 갇힌 자아
인가. 그녀가 지향하는 것 또한 개선되 정의의 사회인가, 아니면 자유롭고 창조
적인 자아인가.
눈뜸의 동기부여도 설명이 충분치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사샤의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반복돼 충동력이 약하다 별로 마음내키지
않은 약혼이 동기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적절하게 강조되어 있지 않다. 혹은
그 둘에 내면의 지각까지 보태져 눈뜸의 계기를 이루었다고 읽어준다 해도 그
셋을 종합하려는 노력의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불만들은 독법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인간의 심리변화가 언
제나 논리정연한 것이 아닌 만큼 체홉이 채택한 서술과 묘사의 방식이 보다 진
실에 근접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작가 체홉은 , 단편의 재능이
없어 오래 고심해온 내게는 중요한 스승, 더 이상의 불만은 불경이 될 것이다.
작가 체홉에 대해서는 간략하고 주관적이나마 앞서 얘기한 것이 있기에 여기
서는 덧붙여 얘기하지 않는다.
나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지은이: 프랭크 오코너
옮긴이: 장경렬
아버니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러니까 제1차 대전 기간 동안 내내 군대에
있었다. 그래서 내 나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으며, 아버지의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새서 속을 태우지도 않았다. 어쩌다
잠에서 깨어나 보면 몸집이 큰 사람이 황갈새의 군복을 입은 채 촛불에 비친 내
못ㅂ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때는이른 아침녘에 집
앞문을 여닫는 쾅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징을 박은 군화가 절그럭거리며 자갈로
뒤덮인 오솔길을 따라 멀어져 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것은 아버지가 왔
다가 가는 신호였다. 마치 산타 클로스 처럼 아버지는 은밀하게 왔다가 가곤 했
던 것이다.
사실 나는 아버지가 오는 것을 좋아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어머니가 있는
방으로 가 커다란 침대로 올라가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불편하게 끼어 있어
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오는 게 좋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담배를 피ㅇ
다. 그래서 그 옆에 가면 고풍스러운 냄새가 기분좋게 났다. 아버지는 면도도 하
곤 했는데, 면도하는 모습이 대단히 재미있어 보엿다. 집에 올 때마다 아버지는
기념품을 한 아름 남기고 갔다. 탱크 모형, 탄창으로 만든 손잡이가 달린 구르카
나이프, 옥일 병사의철모, 모자에 다는 ㅂ, 군복의단추를 닦는 놋쇠 막대, 그밖의
온갖 종류의 군장비들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것들이 필요할 대를
대비해서 옷장의 위쪽에 있는 길다란 상자에 정성껏 담아 놓았다. 아버지에겐
자잘한 것을 모으는 수집벽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필요할
때를 대비해서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기를 바랬다. 아버지가 집을 나
서기만 하면 어머니의묵인아래 나는 의자를 갖다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아버지
의 보물 상자를 뒤지곤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그런 것들을 그다지 대단
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전쟁 기간은 내 일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절이었다. 내가 있는 다락방의 창문
은 동남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창문을 커튼으로 가려 주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항상 아침의 첫 햇살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전날에 느끼던
모든 책임감이 눈 녹듯 사라진 상태에서, 마치 내 자신이 해라도 되 듯한 느낌
으로 환한 빛과 기쁨에 충만한 채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인생이 그때만큼이
나 단순하고 명료하며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던 때도 없었다. 잠
에서 깨어난 다음 이불 바깥쪽으로 발을 뻗어 내놓고는 극적 상황을 연출하곤
했다. 양ㅉ 발을 '레프트 부인'과 '라이트 부인'이라고 명명한 다음 극적 상황에
등장시켜 당일 문제를 토론하게끔 했던 것이다. 적어도 '라이트 부인'만큼은 내
가 시키는 대로 토론에 임했으며 의사 ㅍ시도 분명하게 했다. 그러나 '레프트 부
인'은 '라이트 부인'만큼 멋지게 움직여 주질 않았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고개
를 끄덕거려 동의를 표시하는 선에서 '레프트 부인'이 만족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했다.
이들은 그날 하루 동안 어머니와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디, 산타 클로스가
어떤 아이에게 선물을 가져댜 줄지, 집안 분위기를 좀더 밝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할지 등의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예컨대, 어머니가 아
기 동생을 보는 일과 같은 작은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사실 이 문
제에 관해 어머니와 나 사이의 의견 차이를 전혀 좁힐 수가 없었다. 우리 동네
에서 갓 태어난 아이가 없는 집은 우리집 뿐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전쟁
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시기 전에는 아기를 가질 형편이 못 된다고 했다. 아기를
갖게 되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 어머니가 말하는 이유였다.
이것만으로도 어머니가 얼마나 단순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었다. 길 위쪽에
사는 지니네에도 아기가 있었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었듯이 지니네도 어머니가
말하는 만큼 돈을 쓸 여유가 있는 집안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집 아기는 싸구
려 아기였는 지 모르고, 어머니는 정말로 굉장한 아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어
쨌거나 나에겐 어머니가 따지는 게 너무 많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지니네 아기
정도면 우리한테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루의 일과가 정해지면, 나는 잠자리를 톨고 일어나 다락방 창문 아래쪽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머리를 내밀 만큼 창틀을 위로 올렸다. 창문을
통해 우리집 뒤ㅉ으로 늘어서 있는 집들의 앞마당 정원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으
며, 또한 그 너머로 깊은 계속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언덕의 비탈을 따라 층층
이 늘어서 있는 높직한 붉은 벽돌집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계곡 건너편 언덕
위의 집들은 아직까지 완전히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반면 우리집이 있는 ㅉ 언
덕 우의 집들은 전체가 밝은 햇살을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길다랗게 드리워진
기묘한 그림자 때문에 집들이 낯설어 보이는 동시에 딱딱하고 비현실적으로 보
였던 것도 사실이다.
바깥쪽을 바라본 다음 어머니의 방에 가서 커다란 침대로 올라가곤 했다. 이
윽고 어머니가 잠에서 깨어나면 내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곤 했다. 비록 의
식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잠옷 바람의 내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곤 했다.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다보면 몸이 스르르 녹기 시
작했는데, 몸에 남아있던 마지막 냉기가 다 사라지게 되면 어머니 옆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아래층 부엌에서 아침 식사르 ㄹ준비하는 어머니의 소리
를 듣고는 다시금 잠에서 깨어나곤 했던 것이다.
아침 식사를 하고 어머니와 함께 시내로 나가기도 했다. 성 오거스틴 성당에
서 울려지는 미사에 참석하여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한다음 장을 보러 가는 것
이었다. 오후가 되어 날씨가 화창하면, 야외로 산책을 나가거나 어머니의가장 친
한 친구인 성 도미닉 수녀님을 만나러 수녀원에 가곤 했다. 어머니는 누구나 모
두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게 했고, 저녁 때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도 하나님
께 아버지가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사실 내 기도에
대한 보답이 어떤 것인지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기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있는 침대로 갔더니, 항상 그랬드시 내가 잠든 사이에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산타 클로스처럼 은밀하게 와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
는 잠바리에서 일어나서 군복을 입는 대신에 최고의 멋진 푸른색 양복을 입었
고, 어머니는 더할 나위없이 즐거워했다. 내가 보기엔 즐거워 할게 아무것도 없
어 보였다. 왜냐하면 군복을 입지 않은 아버지의모습에서 전보다 더 흥미로운
것일 전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환하게 미소를 지
을 뿐이었다. 어머니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이 드디어 우리 기도에 답을 해 주
셨다는 것이다. 이윽고 우리는 아버지를 안전하게 집으로 보내주신 아나님께 감
사하기 위해 미사를 드리러 갔다.
그런데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아버지가 온 바로 그날 일이었다. 아버지는 식
사하러 들어와서 신을 벗고 실내와를 신은 다음에 추위를 피하기 위해 집 주변
에서 쓰던 낡은 모자를 쓴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어머니에게 엄숙한 어조로 이야
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는 어머니의 표정이 자못 근심스러워 보였는데, 당
연히 나에겐 근심에 찬 어머니의 표정이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근심에 찬 표정
은 어머니의 예쁜 얼굴을 망가뜨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이야기
하는 중간에 끼어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실망을 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한테 그ㄹ게 찬사를
보내는데, 나는 하나님이 그런 찬사를 받을 자격이 어느 정도 있을까라는 의심
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두껑을 꽉 막아 놓은 샴페인 병이라도 된 듯한 기부느로 평소
에 일어나던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양쪽 발을 이불 바깥으로 내놓고 길다란
대화를 나누도록 했는데, 대화 중에 '라이트 부인'이 자기의 아버지를 '홈'으로 모
셔다 놓기 전까지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홈'이 무엇을 뜻하
는 지 잘 모르긴 했으나, 하여튼 그곳이 아버지한테 적합한 장소인 것처럼 느껴
졌다. 이윽고 의자를 갖다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다락방의 창문 바깥으로 머리
를 내밀었다. 해가 막 뜨려던 참이었는데, 어딘가 껄김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꺼림칙한 일이 저질러지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
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들과 계획들로 꽉 들어차서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들고 비
틀거리며 옆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는어둠이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방안을 가로질러 어머니가 있는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어머니 ㅉ에는 자리가 없
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만 했다. 아버지에 대새선 잠시 잊
고 있었으나, 아버지를 의식하고는 어찌 할 것인가 대책을 세우느ㄹ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얼마 동안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응당히 차지
할 수 있는 몫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한 채 누워 있었기 때문에, 나는 도저히
편하게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몇번이고 걷아찼더니 응얼거리
면서 몸을 바로 항ㅆ다. 어쨌든 내가 누워 있을 수 있는 자리를 만즐어 주었던
것이다. 곧 어머니가 잠에서 깨어나서 내가 옆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엄비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따뜻한 이불 속에서 편안한 자세로 다시 누웠다.
"엄마!" 만족감을 느끼면서 큰소리로 웅얼거리며 어머니를 불렀다.
"쉿! 우리 아기, 착하지." 어머니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빠 깨우면 안돼."
이젠 상황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아빠하고 이야기하기'보다 한
결 더 심각한 쪽으로 나가는 불길한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아침 일찍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삶이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왜요?" 나는 심각한 어조로 이렇게 물었다.
"왜냐하면 가엾은 아빠가 피곤하시거든."
나에게 이런 논리는 대단히 부적절한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가 '아빠가 가엾
다'고 했을 때 그 말에 담긴 감상 때문에 나는 메스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
었다. 나는 그런 식의 지나친 감정 표현을 좋아해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표현이 나에겐 항상 불성실한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 그래요!" 나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대꾸하고, 한껏 승리감에 찬 어조로
이렇게 물었다.
"엄마, 오늘 내가 엄마하고 어디에 각 싶어하는 지 알아요?"
"아니, 모르겠는데." 어머니가 한숨을 지었다.
"골짜기로 내려가서 새 그물로 가시고기를 잡고 싶어요. 그리고나서 여우 사냥
놀이에 간 다음, 그리고 또..."
"아빠 깨울라!" 어머니가 나직하면서도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화난 듯 말하면
서, 내 입을 손으로 두드려 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아버지가 잠에서 깬 것이다. 아니면 거의 잠에
서 깨어난 상태였다. 아버지는 웅얼거리면서 성냥을 찾았다. 그리고는 믿어지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팔목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여보, 차 한 잔 하실래요?" 어머니가 온순하고도 조용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물었는데, 나는 결코 어머니가 그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차라고?" 아버지가 화라도 난 듯이 소리쳤다. "지금 몇 시나 됐지?"
"그런 다음에 래스쿠니 가쪽으로 올라가고 싶어요" 아버지가 그런식으로 끼어
드는 바람에 생각했던 말을 잊어버릴까봐 겁이 나서 큰소리로 말했다.
"래리야, 빨리 가서 자지 못하겠니!" 어머니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말 때문에 주의력을
집중할 수 없었던 거시ㅇ. 게다가 나의이른 아침 계획에 재를 뿌리는 것은 요람
에 있는 아이를 땅 속에다 묻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버지느 아무 말이 없었다. 어머니나 나를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바깥쪽의 그
림자를 내다보면서, 파이프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 아버지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내가 뭐라고 할 때마다 어머니는 과민한 반응을
보이며 내 입을 다물게 했다. 그러니 나는 굴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다. 이건 공평하지가 못했다. 심지어 무언가 악의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어머
니에게 어머니외 내가 한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잘 수 있는데 잠자리를 두 개씩이
나 마련한다는 것은 장비라는 점을 지적했을 때마다, 어머니는 따로 자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아버지라고 하는 낯선 사람이 나
타나서 어머니의 건강을 전혀 염려치 않은 채 어머니와 찬 침대에서 잠으 ㄹ자
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준비했다. 그리고아버지에게 차를 한
잔 가져다 주면서 나에겐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않는 것이었다.
"엄마, 나도 차 한 잔 마실래요." 내가 이렇게 소리쳤다.
"그래, 자, 엄마학 같이 마시자." 어머니는 참을성있게 말했다.
그것으로 결판은 난 것이다. 아버지든 나든 누구 하나가 집을 떠나야 한다. 나
는 어머니 몫의 차를 얻어 마시고 싶지는 않다 나도 재 자신의 집에서 남고 똑
같은 대접을 받길 원한다. 그래서 어머니를 괴롭힐 마음으로 한 방울도 어머니
에게 남겨 주지 않은 채 차를 전부 바셔 버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것도 조용
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날 밤 어머니가 내 잠자리를 봐 주러 와서는 부드러운 어조로 이렇
게 말했다. "얘, 래리야, 엄마하고 약속하나 할 수 있겠니?"
"무슨 약속인데요?" 내가 이렇게 물었다.
"아침에 엄마와 아빠가 있는 방에 와서 가엾은 아빠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
속할 수 있겠지?"
'가엾은 아빠'라는 말이 또다시 나온 것이다! 나는 아빠라는 대단히 불가사의
한 남자와 관련된 모든 일에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왜요?"이렇게 내가 물었다.
"왜냐하면, 가엾은 아빠가 걱정거리가 많으신 데다 피곤하셔서 잠을 잘 주무실
수 없거든."
"엄마, 왜 아빠가 잠을 잘 주무실 수 없어요?"
"글쎄, 너도 알지, 그렇지? 아빠가 군대데 계실 때 엄마가 우체국에 가서 돈으
ㄹ찾아오곤 했지?"
"미스 매카사한테서요?"
"그래. 그런데 말이지, 미스 매카시가 이젠 돈이 더 없대요. 그래서 아빠가 나
가 돈을 벌어와야 한단다. 아빠가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아
니?"
"몰라요. 어떤 일이 생기는데요?" 어머니에게 내가 이렇게 물었다.
"글쎄다. 엄마 생각엔 금요일 마다 밖으로 나가 그 불쌍한 할머니처럼 돈을 구
걸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는 것ㄴ 싫지? 안 그러니?"
"네, 약속할게요."
정말잊, 진심에서 우러나와 한 약속이었다. 돈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난ㄴ
알고 있었고, 금요일마다 밖으로 나가 그 불쌍한 할머니처럼 돈으 ㄹ구걸해야
하는 일에는 조금도 찬송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내 모든 장난감을 갖다가 내
침대 주변을 따라 빙 둘러 놓았다. 그렇게 해서 어떤 쪽으로 일어나든 장난감에
걸려 넘어지도록 일을 꾸민 것이 아닐까.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그
래서 일어나서 방바닥에 앉아 놀았다. 내 생각엔 몇 시간을 그러헤 놀았던 것
같다. 그리고는 놀면서 보낸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의자에 올라서서 다락방 창
문 밖을 내다보았다. 아버지가 잠에서 개어날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차를 한 잔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조금
도 내가 해와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대신 지루하고 너무너무 춥다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그저 큰 침대의깃털로 누빈 따뜻한 이불 속 깊숙이 들어가
고싶은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엇다; 그래서 옆방으로 갔다. 어머니 쪽으로
는여전히 누울 자리가 없었으므로 어머니 위로 넘어갔다. 그때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 잠에거 깨어났다.
"래리야, 너 엄마하고 약속했지?" 어머니가 내팔을 아주 세게 움켜쥐고 속삭이
듯이 말했다.
"엄마, 나 약속 지킨 걸요." 어머니에게 들킨 나는 칭얼거리듯이 말했다. "아주
아주 정말정말 오랫동안 조용히 하고 있었어요."
"아이구. 이런, 얼음장같이 차갑구나!"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어머
니는 내 온몸을 쓰다듬어 주었다. "자, 그럼 엄마가 너 여기 있게 할테니까 조용
히 해야 한다. 약속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엄마, 나 엄마하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는 계속 칭얼거렸다.
"그건 그거고 약속은 약속이야." 어머니의 말에서 나는 전에 없던 완강함을 느
낄 수 있었다. "아빠는 주무시고 싶어하셔. 이젠 내 말 알아듣겠니?"
무슨 말이지 나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데 아버지
는 자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이게 누
구의 집인가?
"엄마, 아빠도 아빠 침대에서 자는 게 건강에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나도 어머니만큼이나 완강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말이 어머니
으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처럼 보였다.
"이제 끝으로 한 번만 더 말하겠는데 쥐죽은 듯이 조용히 하고 있든가 아니면
제 자리로 돌아가든가 해라."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어느쪽을 택하겠니?"
부당한 말로 어머니는 내 무릎을 꿇게 했다. 나는 어머니의 말이 앞뒤가 안
맞느 ㄴ동시에 불합리하다는 점을 어머니 자신의입으로 실토하게 했는데, 어머
니는 아예 내 말에 대꾸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양심을 마음 가득
히 품고 나는 어머니가 눈치채지 않도록 몰래 아버지를 한 번 걷어찼다. 걷어차
인 아버지는 뭐라고 웅얼거리더니 깜짝 놀라 눈을 번ㅉ 떴다.
"지금 몇 시지?" 아버지가 허둥대는 어조로 시간을 물었다. 시간을 물으면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마치 문 앞에 누가 와 있는 양 문 쪽
을 바라보았다.
"아직 일러요>" 어머니가 진정시키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애가 온 것
뿐이에요. 어서 더 주무세요..."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자,
래리야, 너 이젠 아빠를 깨웠으니 네 방으로 돌아가야겠다."
비록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이번에는 어머니가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니라
는 것을 나는 알 수 잇었단. 그리고 나의 기본 권리와 특권을 그 자리에서 주장
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안아 올렸을 때 아버지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나는 무덤 속의 사람이라도
깨 정도로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아버지가 투덜댔다.
"그놈 자식은 잠도 안 자나?"
"어뵤, 버릇일 뿐이에요."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말했지만, 나는 어머니의얼굴
에서 화난 표정을 역력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럼 이젠 그런 버릇은 버릴 때가 됐군."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기 시작하면서
아버지가 소리쳤다. 그리고는 갑자기 이부자리를 끌어모으더니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어서 어깨 너머로 얼굴을 돌렸는데 두 개의 작고 악의에 찬 검은 눈
만을 내놓고 바라보았다. 아버지라고 하는남자가 아주 사악해 보였다.
침실 문을 열기 위해 어머니는 나를 내려 놓아야만 했다. 몸이 자유로워지자
비명을 지르면서 나는 가장 멀리 떨어진 방구석 쪽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가 침
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놈 자식, 주둥이 닥치지 못하겠니?" 아버지가 숨가쁘게 말했다. 나는 너무
나 놀라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맹세컨대, 이제까지 한 번이라도 나에게 그
런 어조로 말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더니, 화가 치민 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그때서야 비로
소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놀리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내 기도를 드
고 이런 괴물같은 사람을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아빠나 주둥이 닥쳐요!" 나는 제정신이 아닌상태가 되어 이렇게 떠들어 댔다.
"뭐라고?" 아버지는 침대에서 거칠게 튀어오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여보, 여보 애가 당신이 낯설어서 그러는 것 모르시겠어요?" 어머니가 애원하
듯 소리쳤다.
"이놈 자식 먹기만 했고 교육은 받지 못했군." 아버지가 거칠게 팔을 내저으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 녀석 볼기를 따끔하게 맞아야 정신 차리지."
나의 인격과 관련하여 이처럼 불유쾌한 표현들을 사용하다니, 이에 비하면 아
버지가 이네까지 고함을 지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표현들이 정말로
나의피를 끓어오로르게 했다.
"아빠 볼기나 치세요!" 발작적으로 나는 소리쳤다. "아빠 볼기나 치란 말예요!
주둥이 다쳐요! 주둥이 닥치란 말예요!"
이 말에 아버지느 참을성을 잃고 낭게 달려들었다. 나에게 달려 들긴 했어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어머니의 겁먹은 눈을 보고 아버지는 기가 꺾인
상태엿다. 그리하여 그저 건드리는 선에서 일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나의순결
한 탄원의 결과로 전쟁에서 돌아와서는 우리집의 커다란 침대를 편취한 낯선 사
람, 전혀 낯선 그사람한테 어떤 형태로든 결국 매를 맞는 엄청난 수모를 당했다
는 사실 때문에 나는 완전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비명
을 질러댔고 맨발로 요동을 쳤다. 군대에서 입는 짤막한 회색 내의밖에 걸치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은 몸의 털을 드러낸 채 어색하게 보였는데, 그런 모습의 아
버지가 나를 죽이기라도 할 듯이 산처럼 서서 나를 쏘아보았다. 내 생각에 아버
지가 질투심까지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때는 틀림없이 발 그때였다; 어머
니는 우리 둘을 놓고 상심한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잠옷 바람을 서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표정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상심해 있기를 바랫다. 내가 보기엔
어머니가 마따히 치워야 할 대가인 것 같았다.
그날 아침부터 내 인생은 지옥과도 같았다. 아버지와 나는 공공연히 터놓고
적대 관계를 유지했는에, 우리는 서로를 치기위한 전투를 끊임없이 계속했다. 아
버지는 어머니와 내가 함께 있는 시간을 몰래 빼앗으려 했고, 나 역시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몰래 빼앗으려 했다. 어머니가 내 침대 머리맡에 ㅇ
아 나에게 이야기라도 하고 있으면, 아버지는 낡은 장화 한 켤레를 전쟁이 시작
될 무렵 남겨두고 갔다고 억지를 쓰면서 그것을 찾느라고 소란을 피웠다. 아버
지가 어머니와 이야기르 ㄹ나눌 때면, 나는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게 전혀 관심
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장난감을 갖고 큰소리로 떠들면서 놀았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가 을을 갔다왔을 때였다. 내가 아버지의 상자를 뒤져 군복에 다는
배지, 구르카 나이프, 군복의 단추를 닦는 놋쇠 막대르 ㄹ꺼내 갖고 노는 것을
보고는 대단한 소동을 벌였다. 어머니가 일어나서 나한테 상자를 빼앗았다.
"래리야, 아빠가 너한테 허락하지 않으면 아빠 장난감 갖고 놀아선 안돼." 어
머니가 엄한 어조로 말했다. "아빠도 네 장난감 갖고 놀지 않잖아."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잘 몰라도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던, 찡그린 얼굴로 돌아섰다.
"그건 장난감들이 아니야." 아버지가 투덜대듯이 말하면서 상자에서 내가 무엇
을 들어냈는가를 보기 위해 상자를 다시 선반에서 내렸다. "이 골동품들 가운데
몇 개는 아주 희귀하고 값나가는 것이야."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아버지가 어떤 수를 써서든 어머니와 나 사이를 가라
놓는 것을 점점 더 자주 목격하게 되었다. 나한테 애를 더 먹이는 것은, 아버지
가 사용하는 술수가 어떤 것인지 담을 잡을 수 없다는 점과 아버지의 어떤 면이
어머니에게 매력적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아버지
보다느 내가 더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느 말할 때의 억양ㄷ 상스러웠고
차를 마시면서 소리를 내기도 하지 않는가. 잠시 동안 이런 생각도 해 보앗다.
어머니가 관심을 갖는 것은아마도 아버지가 읽는 신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나에 관한 소식 몇 가지를 어머니에게 읽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기도 했다.
그리고는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담배를 피우는 거을 보고 어머니가 매력을 느
끼는 것은 아닐까. 내가 개인적으로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는 거셍 매력을 느끼
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파이프를 갖고 나가 집 주변에서 입
에 물고 담배 피는 흉내를 내다 아버지한테 잡히기도 했다. 차르 ㄹ마시며 소리
를 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정나미 떨어진다고 했다.
만사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잠자는 버릇, 건강에 해로운 그놈의 버릇에 의
해 좌우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일삼아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침실에
불쑥 들어가곤 했다. 침실에 들어간 다음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감시하고 있
다느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무언가 낌새를 찾아 보
았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눈치챌 만한 것은 결코 남겨놓은 적이 없
었다. 결국 내가 지고 만 것이었다. 승부는 어른이 되어 반지를 주고 받을 수 있
는가로 결판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나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는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리고 싶었다. 나는 싸움을 포
기한 것이 아니라 다만 때를 기다릴 뿐인 것이다. 아버지가 특히 역겹게 느껴지
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나로서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 난ㄴ 아버지에게 일격을 가했다. "엄마, 이 담에 내
가 어른이 되어 무얼 하고 싶어하는지 아세요?" 이것이 나의 물음이었다.
"모르겠는데. 무얼 하고 싶은데?" 어머니가 이렇게 대꾸하였다.
"나 이 담에 엄마하고 결혼할래요." 나는 침착한 엊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미친 듯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아버지가 나를 속일 수는 없었
다. 아버지의 폭소는 다만 진심을 감추기 위한 허장성세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
는 알고 있었다. 아무튼 간에 어머닌ㄴ 기뿐 표정이었다. 어머니가 언젠가는 아
버지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마음이 놓이는가 보
다.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거 멋지겠는데." 어머니는 미소를 띄
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주 멋질ㄹ 거예요." 자신있게 나는 말했다. "우리는 아기를 아주 아주 많이
갖게 되 거니까요."
"그럼, 그렇고 말고." 평온한 어조로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집에 곧 아
기가 하나 생길 거란다. 그러면 넌 아기하고 아주 많이 놀게 될 거야."
나는 그 말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비록 아버지한테
복종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내 소망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었
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니네 식구들의 콧대를 꺾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일이 그런 식으로 풀리지 않았다. 우선 어머니는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아기를 낳는데 드는 그 많은 돈을어디서 마련할까 하는 것
정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해 보기도 했다. 게다가, 아버지가 저ㅈ 늦게까지 밖에
나가 있곤 했지만, 나한테 특별히 좋은 일이 생기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더 이상
나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지도 않았고, 불꽃처럼 예민해졌으며, 아무것도 아닌일
로 나를 혼내곤 했다. 이따금씩 나는 그놈의 빌어먹을 아기 이야기는 두 번 다
시 꺼너내 않게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재앙을 가져다 주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건 정말로 재앙이었다. 소니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엄청난 난리법석 속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 녀석은 태어나
는 일조차 소동을 피우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애였던 것이다. 첫 순간부터 나
는 그 녀석이 싫었다. 까다로운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항상 까
다오운 녀석으로 느껴졌다. 느기로 그 녀석은 너무 지나치게 주의 집중을 요구
했다.
어머니는 그 녀석한테 완전히 얼이 빠져 있는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그 녀석이 공연한 소란을 피울 뿐이라는 것도 알아 채질 못했던 것이
다. 놀이 상대로서 그 녀석은 쓸모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 져석은 종일 토록
잠만 잤으며, 그 녀석을 깨우지 않도록 집 주위를 다닐 때도 발끝으로 나녀야만
했다. 이젠 더 이상 아버지를 깨우고 말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젠 집안에서
의 구호가 '소니를 깨우지 말 것'으로 바뀐 것이다. 왜 아기들은 자야 할 시간에
ㅈ을 자려 하지 않는지 난ㄴ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녀석을 깨
어있게 하기 위해 꼬집기도 했다. 어느 날 그러는 나를 어머니가 보고는 눈에
불이 날 정도로 아주 따금하게 나를 혼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가 직장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엎마당에서 기차 놀이를
학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못 본채 채 했다. ㄱ리고는 혼자 중얼거리는 척 하면서 큰소리
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망할 놈의 아기가 한 명이라도 더 우리집 식구가 되면
내가 집을 나가고 말테다."
아버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어깨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랄고 했지?" 아버지가 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혼자서 중얼거린 것뿐인데요" 당혹감을 감추려고 애를 쓰면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만의 얘기인 걸요"
아버지는 몸을 돌리고 아무 말도 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잘 알겠지만, 엄중하
게 경고하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호과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나타났
다. 아버지가 나에게 잘해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그게 무얼 뜻하는지 나는
잘 알았다. 어머니가 소니때문에 쩔쩔매는 보습을 보면 신물이 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는 식사도중에 일어나서요람 속에 누워 있는 그 녀석을
바라 보고 멍청한 웃음을 지어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도 똑같은 짓을
상요했다. 아버지는 그 일에 관해서는 항상 정중했다. 그러나 아버지의어리둥절
한 ㅍ정을 보면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무엇에 대해 말하는 지 모르고 있다는 사
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버지는 소니가 밤에 너무 운다고 불평을 했으나, 어
머니는 좋지 않을 얼굴 표정으로 소니는 무언가 문제가 있을 때만 운다고 말했
다. 이건 새깔간 거짓말이었다. 왜냐하면 소니에게 문제가 있었던 적은 단 한 번
도 ㅇ었으며 그 녀석은 다만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울 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얼마나 단순한 사람인가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기란 정말로 고통스러웠
다. 아버지는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아버지는 소니의
으중을 환히 꿰뚫어보고 있었으며, 이제 아버지는 나 여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소니의 의중을 환히 꿰뚫어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나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 위 내 옆에 누군가각 있었
던 것이다. 아주 잠시 동안 나는 내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이 틀림없이 어머니일
것라고 생각했다. 이제 제정신을 차리고 아버니와 영영 이별한 다음에 나에게
온 것이다. 그러나 곧 옆방에서 소니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릭 어
머니가 그 녀석을 달래는 소리도 들렸다. "그래, 그래, 알았어요." 그래서 나는
내 옆사람이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 하면 그는 발 아버지
였다. 아버지가 완전히 잠에거 깬 상태로 숨을 거칠게 쉬며 명백히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채 내 옆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에 나는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그러게 화가 나 있는가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제는 아버지가당할 차례가 된 것이다. 나를 커다란 침대에서 몰아내더
니 드디어 아버지 자신도 내몰리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망할 놈의소니 녀석을
제외하고는 이제 누구한테도 신경ㅇ르 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참으
로 안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자신이 이미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
었다. 비록 나이가 어리긴 했어도 나는 배포가 큰 녀석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다
래면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내가
달래는 것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너도 아직 안 자니?" 아버지가 으르렁거렸다.
"아, 아빠, 마음 달래고 우리 서로 안아 봐요, 네?"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아버지
는 그렇게 하는 시늉을 했다. 내 추측으로는 '신중하게'라는 표현이 알맞아 보였
다. 아버지의 감촉이 딱딱하긴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크리스마스 때 아버지는 태도를 바꿔 나에게 정말로 멋진 모형 기차 장난감을
사 주었다.
작품해설
정신분석의 명쾌하고 재치있는 형상화
부성을 부인하거나 극복하려는 의지는 신화비평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고 다루
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코너의 '나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신화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정신분석적이다.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의 원형을 신화적으로 충실하게 다습한 토마스 만의 '선
택된 인간'은 신비감과 장중함의후광을 두르고 있지만 또한 억압을 느낄 만큼
침울하고 비극적이다. 다분히 그리스의 비극성은 그 패배와 타락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근원적으로 책임 없으면서도 인식해야만 하는 죄와 그 참담한 정화과정,
그리고 궁극적인 승화마저 우리 의식을 억압하는 데가 잇다.
거기에 비해 오코너의 접근은 그 신화적 원형을 의식 밑바닥에 살아 작동하는
정신분석상의 복합심리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나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도 위기가 있고 윤리적인 부정이 있으며 패배와 좌절이 있다. 그러나 그 비극성
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희극으로 우리 가슴에 다가온다.
그릭 어이없을 만큼 간명한 화해의 대단원은 우리 삶이 험상궂은 비극과 가벼운
희극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명찮은 혼재 속에 진행되는 어떤 것
임을 쓴웃음 속에 깨닫게 해준다.
문학이 사회과학이나 역사과학의 중요한 성취에 의지해 세상을 해석하기 시작
한 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대조차도 작가된 자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거기
서 얻어진 관념이나 원형을 문학의 고삐로 얽어 끌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
이다. 거꾸로 그 관념이나 원형에 코가 꿰어 끌려가는 것도 작가로서도 볼썽사
나울 뿐만 아니라 문학의 자기부정이 될 우려가 있다. 소화되지 못한 생경한 관
념들로 작가의 인생관을 대신하거나 한 번 주어진 세계의 원형을 미련스럽게 유
지하는 것만이 사상의 확고함이나 순정성을 드러내는 것인줄 아는 설익은 작가
들에게 '나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틀림없이 좋은 참고가 될 거싱다.
프랭크 오코너는 아일랜드 혁명전쟁의 비참함을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집 '국
민의 손님'으로 유명해진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이다. 미국으로 이주하여 하버드
대 등에서 객원교수를 하며 발표한 작품들은 아일랜드의 소박한 생활을 풍부한
유머와 세련된 필치로 그렸다는 평을 들어ㅕ으며, 예이츠에게서 '체홉이 러시아
에서 해낸 일을 오코너는 아일랜드에서 해냈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애러비
지은이: 제임스 조이스
옮긴이: 장경렬
노스 리치모든 가는 막다른 골목이어서, 크리스천 브라더즈 국민학교가 파아
여 아이들이 길거리로 나올 때를 제외하면 조용한 거리였다. 그 길의 끄트머리
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이층짜리 집이 있었는데, 거리에 있는 다른 집들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단정한 생활 태로를 의식해서 그런지 몰라도 갈색의얼굴
을 침착하게 가다듬은 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신부님 한 분이 한때 세를 들어 사시던 집인데, 그는 집 뒤
쪽에 있는 응접실에서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닫아 놓았던 관계로 방마다 곰팡내
가 배어 있었고, 부엌 뒤쪽의 헛간에는 쓸모없는 오래된 문서들이 어지럽게 쌓
여 있었다. 그 종이더미를 뒤지다가 나는 표지가 종이로 된 몇 권의 책을 찾아
냈다. '비도크의 회고록', '성찬 의식에 참여한 경건한 사람', 월터 스코트의 '승원
장' 같은 책들로, 책장의 귀퉁이가 말리고 습기로 인해 눅눅해져 있었다. 이 가
운데 나는 '비도크의 회고록'을 제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책장이 노란새의 종
이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집 두의 손질을 하지 않은 정원 한복판에는 사과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여기저기 몇 그루의 덤불 나무가 흩어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덤불 나무 밑에서 저네 신부님이 쓰던 녹슨 펌프를 찾아내기도 하
였다. 그 신부님은 매우 자비로운 분이셔서, 유언을 통해 그가 갖고 있던 모든
돈은 공공단체에 기부하고 쓰던 모든가구는 그의 누이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겨울이 되어 해가 짧아지자 우리가 저녁 식사를 끝내기도 전에 어둠이 밀려오
곤 하였다. 우리들이 거리에서 만났을 때는 집들이 벌써 어둠에 잠겨 있을 때였
다. 우리들의머리 위로 보이는하늘은 자줏빛을 띠고 있었는데, 그 색깔이 시시가
각으로 변하였다. 이윽고 그 하늘을 향해 가로등들은 희미한 불빛을 밝히게 된
다. 차가운 공기가 우리들의 살을 에는 듯했지만, 우리는 몸이 달아오를 때까지
뛰놀곤 하였다. 우리들의고함소리가 조용한 골목에서 메아리쳤다. 뛰놀다 보면
우리들은 주택가 뒤쪽의 진흙으로 뒤덮인 어두운 오솔길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
에서 우리는 오두막에 사는 거친 사람들의 호통 소리를 감수해야 했다. 이윽고
우리들은 잿구덩이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어둡고 습기 찬 정원들의 뒷문이
있는 곳까지 가기도 하였고, 마부가 말의 털을 고르게 하거나 갈기를 빗질해 주
기도 하고 조임쇠가 달린 마구를 흔들어 방울소리를 내기도 한ㄴ 어둡고 냄새나
는 마구간에까지 가기고 하였다. 다시 거리로 돌아오면 부엌 창문에서 나온불빛
이 거리를 메워주었다. 만일 나의 삼촌이 길모퉁이를 돌아 이쪽으로 오시는 것
이 보이면, 삼촌니 우리를 못 보고 지나쳐 집안에 들어서실 때까지 우리는 그늘
에 숨어있곤 하였다. 또는 맹간의 누나가 자기 동생에게 차 마실 시간이 되었음
을 알리기 위해 문간으로 나오면, 거리의위아래로 기웃거리며 동생을 찾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그늘에 숨어 지켜보곤 햐였다.
우리들은 그녀가 밖에 남아있을 것인가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
해 기다리다가, 만일 그녀가 남아있게 되면 체념했다는 듯이 그늘에서 빠져 놔
와 맹간의 집 계단 쪽으로 갔다. 우리를 가리던 그녀의 모습은 반쯤 열려진 문
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배경으로 뚜렷하게 드러나곤 하였다. 맹간은 누나의말
을 듣기 전에 항상 근를 못살게 굴었는데, 그러면 나는 층계 난간 옆에 서서 그
녀를 바라보곤 항ㅆ다.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이 나풀거렸고, 부드럽게 땋
아내린 머리채가 좌우로 흔들렸다.
아침마다 나는 집의 앞쪽에 있는 응접실의 마룻바닥에 누워 그녀의 집을 지켜
보았다. 그렇게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응접실 창문을 가리기 위
한 차일을 몇 센티미터만 남겨놓은 채 내려놓곤 하였다. 그녀가 현관 앞으로 나
오면 나의가슴은 뛰었다. 곧 현관으로 달려가서 책가방을 움켜쥐고 그녀를 쫓아
갔다. 그녀의 갈색차림에 조금도 눈을 떼지 않다가, 우리의 길이 갈라지는 지점
에 이르게 되면 걸음을 빨리 하여 그녀를 앞지르곤 하였다. 이런 일이 매일 아
침 계속되었다. 어쩌다 한두 마디 하는 것을 빼고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 본적이
없으나, 그녀의 이름은 아직도 내 온몸의 어리석은 피를 모아들이는 소환장과도
같았다.
낭만적인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장소에까지 근의 영상이 나를 따라다녔다.
토요일 저녁이 ㄷ 아주머니가 장을 보러 가시면, 짐을 얼마간 날라 드리기 위해
나도 따라가야 했다. 우리는 술 취한 남자들과 흥정하는 여자들에게 떠밀리기도
하면서, 또한 노동자들이 주고받는 욕설을 듣기도 하면서, 돼지고기가 담긴 통을
지킥 있던 점원의 소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손님을 부르는 소리도 듣기도 하면
서, 거리의 악사들이 아일랜드의민족주의자 오도노반 롯사에 관한 노래인 '모두
들 오시오'라든가 우리 조국의수난사를 담은 민요풍의 노래를 콧소리로 합창하
는 소리를 듣기도 하면서, 번잡한 거리로 가로질러 니자가곤 하였다. 이 모든 소
음들이 하나로 합쳐져 나에게 단일한 하나의 삶의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상상
속에서 나는 성배를 안전하게 나르기 위해 적의무리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인물
이 되었던 것이다.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기도와 찬양을 되뇌이는 순
간 나의 입가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
만 그러는 가운데 나의눈에는 눈물이 가득 교였고, 때때로 나의 심장에서 무언
가가 홍수처럼 흘러 넘쳐 내 가슴에 가득 고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앞으로 있
을 일에 대새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있을지
또는 그렇게 하지 못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사 이야기를 하게
괴더라도이 혼란스러운 애모의 감정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몸은 하나의하프와도 같았고, 근의말고 몸짓은 하프
타는 손가락과도 같았다.
어느 날 저녁 신부님께서 숨을 거두셨던 집 뒤쪽의 응접실로 들어갔다. 비가
내리는 어두운 저녁이었으며 집에서는 아무런 인기척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깨
어진 창문을 통해 땅바닥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바늘과도 같이 가느다
란 빗줄기가 흠뻑 젖은 화단과 유희를 하는 듯했다. 저 멀리 아래쪽으로 등불인
지 불을 켠 창문인지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모든 게 희미해서 제대로 보이
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감각은 감각
자체를 감춰버리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고, 그런 감각으로부터 내가
막 빠져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두 손바닥을 마주한 채 부들부들 떨릴 때까
지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아, 사랑이여! 아, 사랑이여!" 라는 말을 수
없이 되뇌었다.
드디어 근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그녀가 처음 나에게 말을 건넸을 때 어쩌나
당황했던지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에게 애러비 장 구경을 갈 계
획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 물음에 간다고 했는지 가지 않는다고 했는지 기억
이 나지 않는다. 이윽고 그녀가 "굉장히 멋진 장일 거야"라고 말하면서 한 번 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못가지?" 이렇게 내가 물었다.
말을 하는 동안 근는 팔목에 낀 은팔찌를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장이 열리는 그 주에 그녀가 다니는 수녀원 학교 주최의 묵상회가 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의 동생과 다른 두 아이들이 모자 빼앗기 장난을 하
고 있었고 나만 혼자 층계 난간 쪽에 있었다. 근는 머리를 내 쪽으로 숙인 채
난간 못을 하나 잡고 있었다. 우리집 문 반대편의 가로등에서 나오는 불빛이 그
녀 목덜미의 하얀 곡선을 어루만지고 있었으며, 조금 더 아래쪽으로 내려와 그
녀의옷자락까지 비춰 주고 있었다. 편한 자세로 서 있는 근의 옷 아래쪽으로 속
치마의 하얀 단이 보일 듯 말 듯 드러나 있었는데, 불빛은 그 위에까지 내려와
있었다.
"너 한 번 가 보는 게 좋을 걸." 그녀가 말했다.
"혹시 가게 되면, 너한테 뭐라도 사다 줄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저녁 이후 얼마나 많은어리석은 생각들로 내 머리는 자나깨나 어지러웠
던가! 장 구경을 가는 그날까지 나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 지루한 나날들이
모두 없어지기를 바랬다. 학교 공부에도 짜증이 났다. 압에는 내 방에서, 낮에는
교실에서 책을 펴놓고 읽으려고 애쓸대 펼쳐진 책과 나 사이세 그녀의 영상이
끼여들었다. 애러비라는 단어의 음절 하나하나가 내 영혼이 즐기고 있던 정적을
헤치고 나에게 다가와, 나의 마음에 동방의마력을 흠뻑 뿌려 주었다. 아주머니에
게 토요일 저녁 때 바자에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말에 아주머니느
놀라서 무슨 비밀 결사대 같은 곳에라도 들어간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교실에서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도 잘 하지 못했다. 선생님의 온화한 ㅍ정이
준엄한 표정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살필 수 있었다. 그는내가 게을러지기 시작
하는 것이 아니냔ㄴ 걱정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나 자신의 방황하는 생각들을
한곳으로 ㅁ을 수가 없었으며, 인생을 살아가며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참을 수가 없었다. 이데 그 일들이 나와 내 욕망 사이에 끄여들게 되자 나에게
는 그 일들이 어린애 장난, 그것도 보기 흉하고단조로운 어린애 장난같이 느껴
지게 되었다.
토요일 아침 아저씨에게 저녁 때 바자에 가고 싶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렸
다. 아저씨는 모자를 터는 데 사용하는 솔을 찾으면서 현관 옷걸이 근처에서 법
석을 피우시다가 짤막하게 대답하였다.
"응, 그래. 알았다."
아저씨가 현관에 계셨기 때문에 앞쪽 응접실에 들어가 창가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언짢은 마음으로 집을 나서서 학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공기가 사
정없이 차가웠으며 마음에는 벌써 무언가의불아감이 싹트고 있었다. 저녁을 먹
을 무렵 집에 돌아와 보니 아저씨께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아직
일렀다. 한동안 시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앉아 있다가, 짤깍거리는 시계 소리
에 신경이 곤두서서 방을 나와 버렸다. 층계를 타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공기가
차갑고 천장이 높은 텅 빈 어구컴컴한 방드이 마음을 좀 풀리게 했다. 이 방 저
방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집 앞쪽의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니 친구 아이들
이 거리에서 뛰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희미해서 뭐라
고들 하ㄴ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기댄 채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이 어둠에 잠겨 있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갈색 옷을 입은 그녀의
형상만을 상상 속에 그려 보면서, 아마도 한 시산쯤은 그런 자셀 서 있었던 것
같다. 상상 속에서도 가로등 불빛이 그녀 목덜미의 하양 곡선을, 난간 위의 손
을, 그리고 옷 아래쪽에 살짝 드러난 속치마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다시 아래츠응로 내려와 보니 머서 부인이 난로가에 앉아 있었다. 전당포 주
인이었던 남편과 사셜한 수다스러운 할머니였는데, 무언가 경건한 목적이 있는
지는 몰라도 헌 우표를 수집학 있었다. 나는 그 할머니가 차를 마시면서 늘어놓
는 잡담을 참고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식사 시간이 한 시간 이상 늦추어졌지만
아저씨는 여전힌 돌아오지 않으셨다. 이윽고 머서 부인이 집에 가려고 일어섰다.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해 미안하지만 여덟 시가 넘었고 밤 공기가 그녀의 건강에
좋지 않아서 늦게 다니는 것이 싫다고 머서 부인이 말했다. 그녀가 떠나자, 나느
주먹을 움켜쥔 채 이리저리 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아주머니가 한 마디
하셨다.
"오늘 밤 너 바자에 가는 것 뒤로 미뤄야 하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아홉시가 되자 아저씨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그가 혼자 중
얼걸는 소리가드렸고, 그가 외투를 벗어 것자 그 무게 때문에 옷걸이가 흔들리
는 소리도 들렸다. 이것이 다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엇다. 저녁 식사가 한창
일 때 나는 아저씨에게 바자에 갈 돈을 달라고 하였다. 그는 잊고 있었던 것이
다.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어 지금쯤은 벌써 첫잠을 자고 난 후가 아닐까?" 이렇
게 그가 말했다.
이 말에 나는 웃음이 낭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열이 나서 말씀 하셨다.
"돈으 ㄹ줘서 보내세요. 이렇게 늦도록 기다리게 하셨잖아요."
잊어버리고 있어서 미안하다고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는 속담을 자기는 믿고 있다고도 말씀하셨다. 이어서 아저씨는 어
디에가려고 하야고 물었고, 어디에 가려고 하는지를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 캐
롤라인 노톤의 시 '아랍인이 자신의말에게 전하는 작별인사'라는 시를아느냐고
물으셨디ㅏ. 아저씨가 막 그 시의 첫 구절을 아주머니에게 읊어 드리려고 할 때
나는 부엌을 나왔다.
나는 2실링짜리 동전을 움켜쥐고, 버킹엄 가를 따라 역을 향하여 큰 걸음으로
내겨갔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 법석대고 가스등으로 현한하게 번쩍이는 거
리를 보자 내 영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마음에 떠올랐다. 텅 빈 기차
의 삼등 객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열차는 서서히 역을 떠나 벗아났다. 폐허가 된 집들을 지나고 번득이는 강 위를
지나 열차는 기어가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웨ㅅ츠랜드 로우 정거장에서 한 무리
의 사람들이 열차의문을 밀고 들어어려 했으나, 역무원이 이 열차는 바자로 가
는 특별 열차임을 알리면서 그들을 제지했다. 텅 빈 객실 안에서 나는 혼자 남
아 있었다. 몇 분이 지나자 열차는 임실 만든 목재 플새폼 옆에서 머추었다. 정
거장을 빠져 나와 길거리에서 조명 시계를 보니 열 시 십 분 전이었다. 내 앞에
는그 신비로운 이름을 과시하는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6페니를 주고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없어서, 바자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걱
정 때문에 피곤한 표정의 문지기에게 1실링을 거네 주고 회전문을 통하여 재빨
리 건물 안에 들어섰다 들어가 보니 천장 높이의 반쯤 되는 부분에서 아래까지
회랑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홀이었다. 거의모든 매점의 문이 닫혀져 있었으며, 홀
의상당 부분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예배가 끝난 다음의 교회에서 느끼는것과
비슷한 정적이 감돌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저하는 발걸음으로 바
자의한복판으로 발겅음을 옮겼다. 아직까지 열려있는 매점 앞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장막이 드리워진 곳이 있었고 그 장막 위에는 색색의 등불로 되
'음악 다방'이라는 글자가 걸려 있었는데, 그 앞에서 두 암자가 금속 쟁반에 담
긴 돈으 ㄹ세고 있었다. 동전이 쟁반 우에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내가 왜 여기에 왔던가를 어렵게 기억해 내고는 열려 있는 매점들 가운데 한
곳으로 가서 사기로 되 꽃병과 꽃무늬가 있는 찻잔 세트를 찬찬히 들여다보았
다. 매점의 문 쪽에서 젊은 여자 하나가 두 명의 젊은 남자와 웃으면서 이야기
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영국식 영어의 억양으로 말을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
면서 막연하게나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난 그런 말 한 적이 없느는데!"
"아냐, 그랬어!"
"아니예요, 난 그런 말 한 적이 없어요!"
"너도 들었지?"
"그럼,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지."
"아이 참... 거짓말도."
나를 보고는 젊은 여자가 다가와서 사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다. 목소리의
어조로 보아 물건을 팔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아니었다. 그저 의무감 때문에 나
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였다. 매점으로 들어가는 어두운 입구 양ㅉ에 동방
의수문장 처럼 서 있는 커다란 항아리를 얌전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 젊은 여자는 한쪽 항아리의위치를 바꿔 놓고는 두 점은 남자쪽으로 돌아갔
다. 그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한두 번쯤 그 여자가 어깨 너
머로 나를 흘깃 바랍곤 하였다.
소용없는 일이 줄을 알면서도, 마치 그녀의 가게에 있는 도자기들에 진짜 흥
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매점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돌아서서 매
덤들 사이의길 한가운데로 걸어내려 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6페니짜리 동전
위에 1페니짜리 동전 두 개를 떨어뜨려 보았다. 회랑 끄트머리에서 누군가가 불
이 꺼졌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홀의 윗부분은 이제 완전히 컴컴해져 있었
다.
그 어둠 속을 응시하다가 나는 허영에 몰려 웃음거리가 된 내 자신의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고뇌와 분노로 타오르고 있는 나의 눈도 볼 수 있었다.
작품해설
상처 혹은 고통으로서의 눈뜸
삶의 어떤 국면에 관한 눈뜸은 상처의 형태로 오기도 한다. '애러비'의서사적
원형은 사랑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주인공을 충동질하고 휘몰아가는 감
정은 사랑이다. 하지만 그 사랑이 현실적이 되기에 주인공은 너무 어리고 그 대
상은 멀다. 따라서 무슨 열병처럼 주인공을 애러비 장터(바자회)로 몰아가는 것
은 결국 사랑의 감정을 지향하는 어린아이의 허영일 뿐이다.
자기가 연모하는 소녀의 성의없는 한 마디 물음에 무심코 해버린 양속을 지키
기 위해 광기와도 같은 열중으로 시골 바자외에 집착하는 소년에게서 사람들은
잠시 순결하고도 애틋한 사라을 읽는 느낌에 젖을 것이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
에 목적지에 이르러서도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가망없는 허영에 너무 많을 것을
걸었다는 깨달음 뿐이다. 아무도 아는 이 없고 눈여겨 보지도 않건만 스스로 웃
음거리가 되었다고 믿는 소년의 고뇌와 분노는 고통스럽지만 또한 그대로 소중
한 눈뜸의 체험이 될 것이다.
덜 여물고 섬세하게 상처받기 쉬운 영혼에 새겨진 고통의 흔적은 섬광 같은
각성의 기억보다 오래 남아 그 의식을 지배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애러비'를
사랑이야기로 분류하지 않고 '성장과 눈뜸'의 항목에 넣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그의 대표작 '율리시즈'를 통해 이른바 '의식의 흐름'을 대표하는 작가로 우리에
게 알려져 있다. 특히 후기 그의문학적 성취 중에는 틀림없이 우리가 쉽게 접근
하기 어려운 난해함이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가 누구보다도 단정하면서도
유려한 문장가라는 점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이 '애러비'는 '더블
린 사람들'이란 장편을 구성하는 연작 단편의 하나이다. 얼핏 보아 소품같지만
영문학에서도 스타일리스트로 손꼽히는 조이스의 솜시를 가늠하는데는 조흔 참
고가 되리라 믿는다.
늙은 소년 액슬브롯
지은이: 싱클레어 루이스
옮긴이: 강봉식
양버들은 그 습성이 천하고 지저분한 나무다. 그 희털이 바람에 흩어지면 집
집 잔디밭에 온통 희게 깔려 동네 사람들의 의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 나무
는 큼직하여 좋은 휴식처가 되고 의지가 된다. 높이 퍼진 잎사귀에 햇빛이 반짝
이고 잎사귀 사이에서 우는 매미소리는 먼지 많은 시내의여름 오후를 상쾌하게
해준다. 평야에 우뚝우뚝 솟은 산과 엘로스토운 강 사이에서는 보리밭에서 사
재발쑥 벌판 일데에 걸쳐 땀 흘려 일하는 농사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마련해
주는 것이 이 양버들이다.
조럴레몬 읍에서는 크누트 액슬브롯을 '양버들 영감'이라고 부른다.
성질이 서로 비슷하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었다. 그는 시골 신작로 양 옆에다
예쁘게 죽 이 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그 가로수 아래로 마차를 몰고 가는 일꾼
들은 그 길에서 자기네 개인용 신작로를 달리는 기분을 낼 수 있었다. 올해 65
세의 크누트는 자기네 양버드나무처럼 그 뿌리는 땅 속 깊숙히 박히고 몸뚱이는
비와바람과 8월의 뜨거운 뙤악볕으로고색이 창연했고 그 머리 꼭대기가 낮에는
넓은 지평선으로 퍼졌고 밤에는 대초원의 넓디넓은 하늘을 향해 버텨 있었다.
그는 원래 이민이지만 이제는 말씨까지도 완전한 미국인이 다 되고 말았다. J
자 발음과 W자 발음을 제대로 못할 뿐이자 비음이 많은 미국 북부지방의 영어
를 제법 잘했다. 예전에 자기 고향 스칸디나비아에서 늘 미국을 광명의나라라고
동경하고 있던 까닥에 그는 미국인 티를 더욱 많이 냈다. 환멸과 피로 속에서
늘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정의의 나라, 크고 아름다운 도회지가 많고, 백성들
사이에 진실한 화제만 오고가는 그러한 나라로만 여겼다. 그리고 언제나 그는
미를 대담하게 갈구하는 젊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어렸을 때, 크누트는 유명한 학자가 되어 여러 나라 말을 유창하게 하고,역사
에 능통하고 지혜로운 책들 속의 아름아운 세계를 마음껏 즐겨 보기를 원했었
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그는 어느 제재소에 취직하여 온종일 노동을 하며 밤
에는 꼬빡 공부만 했다. 그는 불과 18세 때, 리나 웨셀려스라는 연약한 처녀를
불쌍히 여긴 나머지 그녀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마차를 몰고 즐겁게 대초원을
거너, 새농토를 찾았으나 곧 가난과 가족이라는 그물에 얽혀 오금을 못 펴게 되
었다. 18세 때부터 58세까지 그는 병든 애를 살려내고 저당 잡힌 농장을 되찾아
내기에 급급하며 세월을 보냈다.
나는 성공 못해도 자기들만 잘 살게 되면 만족이라고 너그럽게 인생을 달관하
고, 그는 틈츰이 시간을 내어 독서를 낙으로 삼았다. 나이를 다 먹은 사람이 혼
자서 공부하자니 그런 책이나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항상 미지의도읍을 그리며,학
문으 ㄹ동경하면서도 그의 몸은 자기 농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빛을 깨끗이
갚고 농장도 하나 장만했다. 곡식이 잘 자라는 밭에다가 가축도 여러 마리 쳤고
시멘트로 헛간한 채에다가 양계장도 한 채 딸리고, 새로 세운 풍차 방앗간도 하
나 딸려 있는 농장이었다. 이렇게 생활이 안정되고 마음이 편해지고 보니 이젠
죽을 날이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나이가 이제는 63세, 자기할 일은 다 한지라,
이제 그는 남에게 소용없는 외톨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내는 이미 죽었다. 아들놈은 멀리 흩어졌다. 한 놈은 파고에서 치과의사 노
릇을 하고 있다. 그는 자기 농장을 딸 내외에게 넘겨 주었다. 딸 내외는 함께 모
시고 살겠다는 것이었으나 크누트는 그것을 거절해 버렸다.
"안된다. 너희들도 자립 자활하는 걸 배워야 해. 내가 농장을 거저 주는 게 아
냐. 지댜로 일년에 사백 달러씩 나한테 내라. 난 그걸로 살면서 내 집에서 구경
이나 하겠다. 너희들 사는 꼴을."
자기 농장의 뭇 나무 가운데서 그가 제일 좋아하던 외나무 양버들 옆 비탈에
다 크누트는 방수지로 지붕을 이어 오두막집을 한 채 짓고, 여기서 홀아비 살림
으 ㄹ했다. 식사도 스스로 지어먹고, 잠자리도 스스로 보았다. 가끔 양지에 나가
앉아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시내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다. 이러고 보니 한평
생 지켜 온 의리의 짐을 이제는 벗어났다는 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오두막 앞의 등 없는 부엌용 걸상에 여러 시간식 꼬빡 앉아 있었다. 어
깨가 떡 벌어지고, 수염은 흰 사나이가 꼼짝을 않고 말이다. 바지는 자루처럼 훌
렁훌렁했고, 깃도 없는 셔츠를 걸친 꼴은 보기에 기묘했으나 생각은 깊었다. 그
는 그루터기만 남은 넓은 밭 저멀리 잭래빗포크스 교회당 첨탑을 바라보며 인생
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몸에 꽉 배어 버린 습관을 처음엔 깨버릴 수가 없었
다. 그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집안을 청소하고 정원을 가꾸다가 정각 열두
시에 점심을 먹고 해가 지면 잠자리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규칙적인 생활을
안해도 그르 잡아갈 사람이 없음을 그는 차차 알게 되었다. 그는 아침 일곱 시,
아니 여덟 시까지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질 않았다. 그는 큼직하고 순한 얼굴 고
양이를 한 마리 구해서 데리고 놀았다. 탁자에서 우유도 핥아 먹게 했다. 그리고
그 고양이를 '공주'라고 불렀고, 사람이 너무 일을 하는 것 어리석은 짓 아니냐
고, 그 고양이한테 은근히 소회를 풀어 보기도 했다. 국물 자국이 묻은 신문지
몇장을 덮어씌운 송판 탁자돠, 구깃구깃한 이불뿐인 오두막집에서 큼직한 웃통
에 셔츠 하나말 걸치고 사는 이 노인의 주위에는, 청춘의 정열적인 포부와 먼
옛날의 아름다움을 더듬는 꿈이 떠돌고 있었다.
그는 밤이면 장시간 산책을 하게 되었다. 여태까지의 궁한 생활에서는 밤이라
면 그저 답답한 방안에서 곤드레 잠만 자는 시간이었는데, 이제 그는 어두운 밤
의 신비를 처음 알게 되었다. 달빛 아래 희미하게 멀리멀리 뻗어 있는 대초원으
ㄹ보았고, 풀과양버들의소리, 그리고 졸음 겨운 새들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여
러 마일을 걸어 다녔다. 구두가 이슬에 젖어 축축해도 아랑곳 없었다. 그는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 슬쩍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잠든 밤의 경치에 경의를 표했다.
이러한 밤마다의 산책을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비밀은 탄로나고
말았다. 이웃 사람들이 읍에 나갔다가 술에 취해서 밤늦게 서로 술병을 휘두르
며 마차를 몰고 돌아오다가 크누트 영감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양버들 영감이 사위한테 농장을 넘겨주고 은퇴하더니 그만 머리가 돌아버렸
군. 야밤에 영감이 들판을 떠돌고 있는 걸 우리가 보았는걸. 잠이 안 오나 보지,
밤에 혼자 싸다니고 참!" 이런 소문이 쫙 퍼졌다.
톳 센티에서 세링거페이텀에 이르는 시골 일대의 마을 사람들은 자기네 관례
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람을 나무라게 마련이요, 누가 조금이라도 미친 짓을
하면 모두가 공연히 신이나서 좋아들 한다. 온 마을 사람들이 크누트 영감의 거
동을 살피기 시작했다. 영감에게 이것저것 묻고 신작로에서 영감의오두막을 노
상 살폈다. 영감은 그 눈치를 알아차렸고, 친구들이 이것저것 묻는 말엔 뚱해서
잘 대답을 안했다. 그의 장도여행은 분명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그의 새 생활은 모든 면에서 방종해졌다. 런젠가는 '공주'에게 이렇게 고함을
질러 놀라게 한 일까지 있었다.-"젠장! 오늘밤엔 이빨을 닦지 않겟다. 난 한평생
매일 이빨을 닦았는데 언제나 한 번은 빼먹고 싶었다" 역시 글공부에 있어서도
그는 시시한 책만 즐겨 일게 되었다. '멕시코 정복사'를 읽다가 제멋대로 내던지
고, 이제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 등속을 즐겨 읽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평
생 원하던 춤과 술의 세계를 재발견했다. 물론 예전처럼 경제학책, 역사책도 더
러 읽기는 했지만 그는 밤마다 물소 뿔 으자에 쭉 몸을 펴고 간이 침대에 발을
올려놓고, 무릎에 '공주'를 안고 제다성 공략의 이야기며 트릴비의 연애 이야기
를 즐겼다.
그런 소설 속에서 그는 우연히 예일대학 생활을 호려하게 그련낸 소설을 한
권 읽게 되었다. 어떤 울륭한 청년이 예일대학에사 고학을 하며 두각을 나타내
어 최우등상을 타고 '담장'에 ㅇ아서 아주 재미나고 유익한 얘기를 친구들과 나
누는 내용이었다.
이 소설을 새벽 세 시까지 읽고 나서 이제 64세의 크투느 액슬브롯은 대학엘
다녀보기로 결심했다. 한평생을 두고 한 번 다녀봤으면 하던 대학이니 꼭 한 번
다녀봐야지.
그러나 찬잠자고 나서 생각하니 아까 잠들기 전과는 생각이 달라졌다. 낫살이
지긋한 놈이 팔팔한 젊은이들 틈에 낄 생각을 하니 은빛 자작나무들 사이에 낀
지저분한 양버들처럼 꼴불견일 것만 같았다. 그래도 여러 달을 두고 그는 그 생
각을 버리지 못했다. 대학을 시신들의 영산으로만 여기던 그는, 그 영지에 한 번
참배해 보고 싶은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대학생이 부자집 놈팽이들 말
고는 모두가 학구욕에 불타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가 머리 속에 그리는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의 대학은 대리석 전당이 들어찬 유서 깊은 숲이요, 고대 그
리스의 청년처럼 아뜰한 청년들이 잔뜩 모여 조용히 천문학이며 정칙학을 SS하
고 있는 곳이었다. 강의를 빼먹는 학생도 없고, 모두가 신선 같은 줄로만 그는알
고 있었다.
음악과 책과 오묘한 미의세계를 어떤 청년 못지 안헤 열렬히 동경하는 이 시
골 농사꾼은 미의 세계에 몸을 바치고,어쩔 수 없이 늙어만 가는 나이와 힘을
겨루려고 했다. 그는 대학 일람과 교고ㅘ서르 ㄹ주문해다 놓고 열심히 입학 준
비 공부를 했다.
라틴어의불규칙 동사와 까다로운 대수가 무척 힘들었다. 이런 것은 여태까지
그가 겪은 생활 현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하루에 뎔두
시간씩 공부아혀 이것을 마스터했다. 그는 예전에 밭에 나가 하루 18시간 일하
던 그 솜씨로 말이다. 역사와 영문학에는 비교적 고생을 안했다. 재미삼아 하던
독서에서 이미 배운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웃에 사는 독일인들한테서 이미
북부 독일얼를 좀 배웠던 억분에 독일어도 수월했다. 45년 전에 학교 선생 노릇
을 좀 해봤던지라, 공부하는 요령도 차차 생각이 났다. 이러고 보니 정말 해낼
자신이 차츰 새겼다. 대학엘 가면 훌륭한 교수들이 열심히 지도해 주실 테니까
이렇게 힘들고 안타깝지는 않을 테지 하고 그는 시종 스스로 타일렀다.
그러나 공부하는 내용이 모두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라 결국 그는 실망을 하
고이 새 놀음에 지쳐 버렸다. 그래도 그가 끝내 계속한 것은 그가 재미라는 것
을 모르고 한평생 힘든 일만 해서 그 애쓰는 버릇이 생일에 젖어 버린 때문이었
다. 이런 괴상한 생활을 시작한 지 2년째 되는 가을께 가서는 그도 이젠 대학에
갈 생각을 집어치우고 말았다.
그럴 무렵 그는 조럴레몬 읍에 나갔다가 어느 바찬가게 주인찬테 당치 않은
소리를 들었다. 몸집이 작은 그 가게 주인이 거리에서 그를 붙잡고 묻기를, 요즈
음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는 것이었다. 호텔 모퉁이에서 늘 빈둥거리는 한가한
친구들이 그 광경을 보고 좋아들했다.
크누트는 아무 말 안했지만 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간신히 화를 참았다. 언
젠가 홧김에 농장 일꾼에게 손을 댔다가 그 일꾼의 어깨뼈를 으스러뜨렸던 일이
생각나서 그는 화를 꾹 참고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갔다. 30리 길을 걸어 돌아가
면서도 그 화는 풀리지 않았다. 그는 '공주'를 안아 어깨 위에 올려놓고 해지는
구경을 하러 다시 밖으로 나갔다.
갈대가 무성한 늪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는 멍하니 떼새를 바라보다가 갑자
기 큰소리를 내질렀다.
"대학에 가야지. 내주부터 시작이지? 시험엔 합격될 거야."
이틀 후, 그는 '공주'와 가구를 사위네 집으로 옮겨놓고 새 모자와 셀룰로이
드 칼라와 검은 양복 한 벌을 사다 놓고, 별이 총총한 밤이 새도록 열심히 기도
를 드리고나서, 미네아폴리스행 열차를 타고 뉴헤이븐으로 떠난 것이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며 크누트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백만장자의 아들 녀석이
이제 나를 놀려댈 테지 그놈들이 어쩌면 내게 구박을 할지도 몰라. 그따위 악마
의 자식들과의 상대를 말고 나같은 서민 학생-고학생들하고만 상종해야지.
시카고에서 그는 번갯불처럼 빨리 지나 다니는 사람들 떼를 보고 겁이 났다.
줄을 지어 덤벼드는 자동차의 요란한 소리에도 겁이 났다. 그는 하느님 날 살립
쇼 하고 기도를 드리며 내달려 가서 뉴욕행 열차를 집어탔다. 마침내 뉴헤이븐
시에 그는 도착했다.
놀려대는 따위 실례의 짓은 안했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라는 듯 눈썹을 찌푸
리면서 예일대학 당국은 그르 맞아들여 시험을 치르게 했다. 펜을 들고 땀을 흘
리며 애를 써서 그는 간신히 그 시험에 합격이 되었고, 대학 당국은 기숙사 한
방을 그에게 내주고 동숙할 학생 한 명을 딸려 주었다. 그 학생은 이마가 넓고
얼굴이 희고 유순해 보였다. 이름은 에리 그리불,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학교 선
생 노릇을 하다 온 작자인데, 그 자가 대학에 온 목적은 주로 월급이 더 많은
선생이 괴려는데 있는 것 같았다. 레이 그리블은 정력적인 활동가였다. 그는 어
떤 제강회사의 바보 아들의 개인교사로 곧 취직을 했고, 식당 일을 거들며 식
비를 벌었다.
이 학생이 크투트의 주된 친구였다. 크누트는 이 자를 좋아해 보려고 애를
썼으나, 사사건건 기분 나쁘게 하는 바람에 도무지 정이 붙질않았다. 역시 학교
선생을 해본 솜씨로 레이는 교묘하게 크누트의 속을 떠보다가, 마침내 크누트의
숨은 소망이 저 화려하고 세견된 문학의 맛을 보려는 데 있음을 알아내쟈,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처럼 늙은 사람은 그따위 쓸모없는 공부보다는 영혼 구제에 관한 문제를
샛강해야 할 거요. 그 따위 시니 뭐니 하는 건 외국학생이나 예술가들한테 맡기
고 영감은 라틴어학 수학학 성경만 공부하세요. 내 말 들어요. 학교 선생 노릇을
해봐서 나는 경험으로 다 알아요."
레이 그리블과 한 방에서 크누트는 형편없이 살았다. 터진 이불, 냄새나는 남
포등, 사전 등속과 대수표, 난로가에서 한가롭게 빈중거리는 생활을 그들은 몰랐
다. 그들이 든 기숙사는 신학서동. 신학고 학생들과 법과의 하층 학생들, 그리고
변덕스러운 천재 한두 명, 그리고 갈 곳 없는 신입생과 2류급 졸업잔 학생들이
득실거리는 기숙사였다.
크누트는 몹시 실망했다. 그러나 자기 방을 늘 떠나지 않았다. 밖에 나가는 것
이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는 괴물 취급을 받았다. 본인도 그것을 알았다. 머리
가 허연 거인 영감이 교실의 좁은 좌석에 끼어앉아 친아들보다 더 젊은 선생의
강의를 듣고 있으니 말이다. 언젠가 한 번 그는 담장 위에 앉아 보려고 했다. 이
제는 담장에 ㅇ아 정담을 벌여 놓는 학생들이 없는지라 영감이 공연히 젊은 채
놀아보려는 꼴을 보고 상급생 두명이 조롱하는 바람에 그는 슬며시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는 레이 그리블이 싫어졌다. 한 반의 말많은 고학생들도 싫어졌다. 민주누의
의 훌륭한 전통을 비웃어서는 안될 노릇이었지만, 대학 미담에 나오는이야기는
현실과 달랐다. 고학하는 대학생들은 난로가에서 잡담이나 하는 놈팽이 학생들
은 난로가에서 잡담이나 하는 놈팽이 학생들보다 강하고 용감하고 성공의 가망
이 더 많다하여 대학마다 그런 훌륭한 학생들을 찬양하는 미담이 많지만 현실은
딴판이었다. 알고 보니 식당 심부름을 하면서 고학하는 놈이나 축구선수나 놈팽
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하나같이 시시한 놈들이었다. 물론 명랑하고 겁이 없는
훌륭한 놈들도 고학생 가운데는 많았다. 돈 많은 학생에게 아첨 않고 일대 일로
떳떳이 대하는 고학생들도 많았다. 그러나 비굴하게 겉체면만 차리는 것을 가장
편리한 자세로 삼는 고학생들 또한 많았다. 이런 학생들은 참으로 세세한 일에
까지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자기가 개인지도하는 동급생한테 알랑거리고, 장학
금 위원교수들에게 숩신거리고, 다이크 홀 예배식에 나가서는 남에게 잘 보이려
고 가장 신앙이 깊은 체하고, 그런가 하면 또 놈팽이 학생들의 손가락직을 받지
않을고 제이크 회관에서 맥주 한 잔을 서슴지 않았다. 자기네한테서 학과 개인
지도를 받는 체육부 학생들이 건방지다고 해서 그 분풀이로 그들은 자기네 끼리
만 모이면, "오늘날 대학엔 민주주의가 없다"고 한바탕씩 울분을 토했다. 그렇다
고 어떤 시정책을 논의해 보자는 것도 아니었다. 약아빠진 이들에겐 낭만적인
반항의정신이 없었다. 크누트는 이들이 하는 얘기를 가만히 듣고 속으로 놀랐다.
추수 때, 우리 농장 헛간 뒤에서 젊은 일꾼들이 떠벌리는 수작하고 어쩌면 저렇
게도 똑같을까?
이들 고학생은 한 반의 풍류파 학생들을 체육부 학생들 못지 않게 미워했다.
신입생으로서는 지나치게 멋을 찾는 풍류객, 길버트 워시번을 그들은 몹시 미워
했는데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예전 같으면 워시번 같은 학생을 사귀고 싶어했을
크누트였건만 그들이 하도 심각함과근면만을 찾는 바람에 크누트는 자기가 사치
한 몹쓸 노인 같기만 해서 창피했다.
겸손하려 애를 썼으나 그는 신묘한 사상도 좋은 친구도 얻질 못하고 말았다.
그는 반의 괴물이 되고 말았다. 그반의 밑 1할에 해당하는 고학생들을 제외한
그의동급생들은, 같은 괴물 취급을 받을까봐 모두 그를 꺼려했다.
크누트는 아직 힘이 세서 한 통들이 돼지고기쯤은 거뜬히 들어올릴 정도라,
체육부 학생들ㄹ과 친구가 돼 보려고 했다. 애학 경기장에서 럭비 예선 대뢰를
구경하면서 그는 후보 선수들과 친해 보려고 했으나, 그들은 물끄러미 그를 바
로볼 뿐 신통한 대답을 안해 주었다. 젊은 선수들은 대놓고 그를 미친 놈 취급
하는 것 같았다.
대학 자체가 이제는 별로 매력이 없어졌다. 이곳은 꿈나라가 아니었다. 현실은
현실., 캐밀롯이든 조럴레몬이든 예일대학교든-아니 하버드대학인들 무엇이 다르
랴-현실은 마찬가지였다. 대학 건물도 이제는 예술의 전당이 아니라 한낱 벽돌
집 혹은 석조건물로만 보였다. 그리고 그 건물 옆을 그가 살그머니 지나치려면
창가에서 빈둥거리던 젊은 녀석들이 그를 재미나게 내다보는 것이었다.
가간턴 학생 식당에서 하루 세 끼 식사를 하기가 죽기보다 더 싫어졌다. 눈치
가 아주 빠른 젊은 학생 두명이 그과 한 탁자에서 식사를 했는데, 이 학생들이
크누트에게 턱수염이 난 것을 알아차리고 용감하게 그 소문을 세상에 퍼뜨렸기
때문이다. 한 녀석의 이름은 애치슨, 부지런하고 공부를 잘하는데 특히 수학 성
적이 좋고 예절에 밝았다. 이 자는 크누트가 명확한 목적도 없이 대학엘 온 것
을 경멸했다. 또 한 녀석은 놈팽이. 길거리에 간판을 훔치며 장난을 잘 치는 참
체요 천하의 익살꾼인데, 이 자가 하루 세 끼 식사 때마다 크누트의수염이 어쩌
구저쩌구 익살을 부리면 왁 웃음이 터지곤 했다. 이 명문집 청년들 때문에 크누
트 영감은 그 학생 식당엘 나가지 못하게 되어 그후부터는 블랙 캣 식당으로 가
서 식사를 했다.
벗이 없기 때문에 크누트는 그 많은 숙제를 공부하는 고통을 이겨내기가 더욱
힘들었다. 고향의 오두막집에서 한 주일을 두고 질겁게 읽던 분량이 여기서는
하루치 숙제가 되었다. 그래도 자기처럼 마음이 젊은 친구 한 명만 있어도 그런
고생쯤은 약과였을 것이다. 모두 속이 무섭게 늙은 놈들뿐이었다. 돈벌이에 급급
한 놈, 죽어라 하고 경기에서 기로만 내려는놈, 일생을 두고 채점표에 성적 기입
할 걱정만 하는 교수들. 모두들 이렇게도 늙었을까.
이렇게 속사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차에 어느 날 크누트는 그야말로 젊은
친구 하나를 만났다.
그 대학에서 우상처럼 존경받고 있는 교수가 브라우닝을 강의하다가 그 반에
서 지나치게 열심인 학생을 오히려 꾸짖으면서 '앨리스 인 원더랜드(Alicd in
W-onderland)를 읽어보라고 했다는 얘기를 듣고, 크누트는 헌 책방을 열심히 뒤
져 그 책을 한 권 사가지고 돌아와 점심삼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읽어 보았다.
황당무계한 가운데 엄숙한 감이 돌아 어쩐지 마음이 끌려 그가 후후 웃으면서
자꾸 읽어 내려가고 있는데 레이 그리블이 들어와 크누트를 힐끔 보더니, 혀를
찼다.
"참 재미나는 좋은 책이야." 크누트가 말했다.
"허! '앨리스 인 원더랜드'라! 낟 책이름은 들었죠. 맹랑한 내용이죠. 왜 '셰익
스피어'나 '실락원'같은 정말 훌륭한 작품을 읽지 않구서?"
"글쎄..." 크누트는 할 말이 없었다.
레이 그리블이 옆에서 힐끔힐끔 보는 바람에 이제는 아까처럼 신나게 읽어 내
려갈 수가 없었다. 내가 절말 밀턴의 그 그릇된 인간관을-그 굉장한 작품을 읽
어야 할까? 그는 기분이 나빠 역사 강의를 들으러 나갔다. 블레빈스 박사의 명
강의를 말이다.
크누트는 블레빈스 박사를 숭배했다. 몸집이 뚱뚱하고 안경을 낀 그 교수는
자신있게 강의를 했다. 그러나 학생들에겐 별로 인기가 없었고 '괴짜' 취급을 받
았다. 그 교수의 시간에는 학생들이 신문을 읽었고 몰래 서로 발길질을 했다.
오붓한 회벽의 교실에서 학생 의장에다 팔을 짚고 크누트는 블레빈스 교수의
강의를 한 마디 빼지 않고 열심히 들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재혼한 날짜는 저
무식한 파두아의 프루타리가 지적한 날짜보다 2년하고 7일 후의 일이라고 유식
하게 떠들어대는 블래빈스의 알쏭달쏭한 강의를 크누트는 감탄하며 열심히 들
었다.
바로 뒤에서 장난꾸러기 학생들이 트럼프를 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벌판에서 훈련된 그의 귀에 '두 장 내라' '두 끗 꿨다.'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
렸다. 크누트는 고개를 돌려 그 수업 방해자들을 노려보았다. 구ㅡ러나 그가 돌
아앉자 그 녀석들은 킥킥 우스면서 그대로 노름을 계속했다. 블레빈스 교수도
심상치 않은 공기를 눈치채고 상을 지푸렸으나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이었다. 크
누트는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역시 어리구나, 참 안됐다, 내가 좁 도와줘야
겠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수업이 끝나자 크누트는 딴 학생들이 다 나가 버릴 때까지 교탁 옆에서 우물
거리고 있다가 굵직한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참 훌륭하십니다. 제게 말해 주세요. 수업에 방해 놓는 녀석이 있거든
체 이름만 좀 불러 주세요. 그런 놈은 내가 한 대 갈겨 줄까요?"
브레빈스 박사는 불쾌했지만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고마운 말이지만 그럴 것까진ㄴ 없어요, 액슬브롯. 나두 학생들 버릇쯤 고쳐
줄 줄 아니까 걱정 말아요. 나가 봐요. 아 잠깐만, 내가 늘 좀 학 싶은 말이 있
었는데, 내가 뭘 물어볼 때 자꾸 너무 아는체 떠들지 말아요. 공연히 답변을 길
게 끄구 내 어디가 우스운지 싱글싱글 웃기만 하니. 그야 뭐 개인적으로 당신이
날 우습게 보는 건 무방하겠지만 역시 수없시간엔 수업시간답게 해줘야겠소."
"아니 교수님! 제가 교수님을 우습게 볼 리가 있어요. 제가 싱극벙글한다는 것
저 자신도 몰랐어요. 싱글벙글하는 건 아마 나처럼 둔한 늙은 녀석이 훌륭한 수
업을 받게 되어 기뻐서 그러는 걸테죠 뭐."
"아아 그건 고마운 말인데. 하여튼 앞으로 좀 조심을 해주면 좋겠어."
블레빈스 박사는 이빨을 드러내며 냉냉하게 한 번 미소짓고는 대학원 학생 집
회소로 가 버렸다. 아마 거기 가서 또 크누트 영감이 어쩌구저쩌구 익살을 피울
것이다. 크누트는 기가 탁 죽어서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앉아 있었다. 따스한
가을 햇빛이 창문으로 흘러들었다. 교정에서 젊은이들이 재미나게 떠드는 소리
가 들렸다. 밖에 나가서 그 좋은 10월의햇볕을 즐겨 볼 생각도 이제는 없었다.
그는 훌렁훌렁한 옷소매의주름을 펴고 물끄러미 흑판만 바라보았다. 먼 고향의
오두막집 둘레의 가을 풍경만 논앞에 떠얼랐다. 학교 사람 모두가 그를 지켜보
며 속으로 그와 그의미소를우습게 요ㅕ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가 차고 창피
스럽고 한편으로 한없이 분했다. 그는 고향집의 그 고양이와 물소 뿔 의자와 양
지바른 현관 계단과 정다운 발이 자꾸만 그리워졌다. 대학에 온 지 한 달 가량
밖에 안되었는데 이 모양이었다.
그 교실을 나가기 전에 그는 교탁 뒤로 돌아가서 선생처럼 방안을 한 번 훑어
보았다.
"내가 좀더 일찍 여길 왔더라면 나도 교수가 돼서 이렇게 서 볼수 있었을지
몰라." 그는 조용히 이렇게 혼자말을 했다.
밖으로 나가 보니 10월의 금빛 햇볕이 따사로워 마음도 약간 진정되었다. 그
는 거리를 지나 휘트니 가로 해서 이스트 록 언덕을 향했다. 고향의 벌판에 외
따로 우뚝 솟은 산과 비슨한 언덕이었다. 가파르게 곤두선 바위에 가을볕이 아
름다웠다.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는 음악과 같고, 맑은 공기 속에는 유서 깊은
뉴잉글랜드의 갖가지 이야기가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럴 때 시가 나오겠는데."
그는 이스트 록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옥스포드의 탑 같은 예일 대학의 건물
들이 전부 내려다 보였다. 지저분한 시골놈 액슬브롯이 지금 대서양의 작은 만
을 넘어 뉴욕 주를 바라보고 있구나, 생각하니 그분이 이상했다. 언덕가의 벤치
에 어떤 신입생이 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길버트 워시번이었다. 속물 풍류객,
언젠가 레이 그리블이 저 학생을 이렇게 평한 일이 있었다.
"그 자식은 우리 반의 수치야. 도무지 열심인 데가 없거든. 학과 성적 올릴 생
각도 않구. 예배식에도 안 나가고, 도무지 아무짝에도 못 쓰겠어. 얼마나 잘났는
지 남하군 상종으 ㄹ않구, 듣자니 문학을 한다는데, 문학하는 친구답게 문인을
쫓아디니지두 않구, 그따위 건달 같은 놈팽이하구 상종할 수가 있겠어? 시간이
아깝지."
하늘을 배경으로 길버트의옆모습은 아름다웠다. 크누트는 길버트를 바라보며
의분 비슷한 것을 느꼈다. 몹시 괘씸한 놈이라 느꼈다. 입은 옷을 무척 훌륭했지
만 마음의 만족은 못 느끼고 있을 것 같았다.
"저 따위 녀석은 농장 이꾼노릇을 좀 해보고 건초 더미 속에서 잠을 자며 한
번 고생을 해봐야 해. 한 번 그래봐야 자기의 지금 팔자가 늘어진 것을 알고 저
런 불만스러운 얼굴을 안하게 될 거야." 못난 자식 같으니! 크누트도 그리블 식
의윤리의식을 발휘하며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길버트 워시번은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다가와서 크누트를 힐끔 보고 같은 벤치에 와 앉더니,
"경치 참 좋죠!" 하며 미소를 지었다. 진심의 미소였다.
그 미소! 크누트가 대학에 온 목족이 바로 저런 미소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니
었던가. 그는 방금 아까까지의 윤리적인 태도를 대뜸 버리고 기분이 흐뭇해서
대답했다. 얼굴의 주름이 미소로 더욱 깊어졌다.
"암, 아크로폴리스의 경치가 꼭 이럴 거요."
"저, 액슬브롯. 난 당신 생각을 늘 했는데요."
"그래서?"
"우린 서로 좀 잘 알아야겠어요. 우리 둘은 학교에서 말썽이 많거든요. 우리는
꿈을 찾아 여길 온 사람인데 기블렛인지 뭔지 당신하구 한 방에 있는 그 자하구
애치슨 같은 좁쌀친구들은 우리를 바보 위급한단 말잉에요. 점수에 욕심을 안
낸다구 말이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처지가 꼭 같다
고 보았어요."
"어째서 나보고 꿈을 찾으러 왔다는 거야?" 크누트는 화를 내보았다.
"그야 내가 학생 식당에서 당신 옆에 앉아 늘 들었거든요, 대학 다니는 이유가
어쩌구저쩌구 애치슨이 떠들면 당신은 늘 딴 얘길 했죠. 시시한 화제지 참! 암
카인과 아벨이 에덴 농과대학에서 그런 문제를 토론하지나 않았을까 몰라. 아벨
은 품행방정하고 점수만 따려는 우등생이구 카인은 시를 일고 싶어하구."
"암, 아마 아담 교수님이 이렇게 말했을 거야-카인, 시를 읽지 말게. 수학공부
에 도움이 안되니까 하고 말야."
"그래요. 그런데 이 뮈세 시집 좀 구경 안하겠어요? 오늘 좀 기분이 나서 이
런 걸 들고 나왔죠. 작년에 외국에 나갔다가 사온거죠."
호주머니에서 길버트는 외극말로 쓴 조그만 책을 한권 꺼냈다. 아름다운 장식
을 한 갖구 제본을 생전 처음 보고 시골 농사꾼은 호사스러운 기쁨에 숨이 가빴
다. 큼직한 손에 쥐고 보니 너무 작아서 책 같지가 않았다. 그는 첫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책 가죽을 만져 보고 책갈피를 쭉 들춰보았다.
"난 읽질 못하겠구먼, 이런 책이 있을 줄은... 나도 늘 생각은 했지" 하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봐요!" 길버트가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밤, 하트포드에서 '이사예'가 공연되는데 우리 구경 갑시다. 전차 타고 함
께 갈 친구가 있으면 했지만, 모두가 날 바보 취급해서..."
'이사예'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크누트 액슬브롯은 기분이 좋아거 "그러
지!"하고 대뜸 응했다.
하트포드까지 가서 보니 둘이 가진 돈을 다 합쳐 저넉값과 3등 좌석 입장료와
그리고 메리든까지 돌아올 찻삯밖엔 없었다. 메리든까지 와서 길버트는 이렇게
제안했다.
"그럼 뉴헤이븐까지 걸어서 돌아갑시다. 갈 수 있죠?"
뉴헤이븐의 학교 기숙사까지 4마일이 되는지 40마일이 되는 지 알지도 못하면
서 크누트는 대뜸 "암, 그러지!"했다. 몇 달 전부터 그는 몸을 아껴야 건강이 지
속되 참이었는데 오늘밤만은 하늘이라도 날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사예의 음악에서 그는 생전 처음 실물 음악가르 구경했는데, 그가 여태까지
읽은 위리엄 모리스의 작품이나 '왕자와 목가'네 나오는 꿈처럼 아름다운 세계를
그 음악에서 보았다. 키 큰 기사와 흰 명주옷을 입은 날씬한 공주님들, 쓸쓸한
도읍의 희미한 성문, 가공의 무사단의 영광-이런 것을 그는 구경한 것이었다.
그들은 10월의 달빛 어린 신작로를 걸어가다가 밭의 사과를 몰래 따먹기도
하고, 은빛 언덕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도 하고, 어린애처럼 강아지를 쫓아가며
기뻐하기도 했다. 길버트가 주로 지껄이고, 크투트는 주로 듣기만 했으나 차차
신이 나서, 개억시대의얘기, 폭풍우 얘기, 추수 때 얘기, 밀밭이 파릇파릇 눈부시
게 빛날 때 애기를 했다. 같은 반의 애치슨이나 그리블 같은 졸장부들을 욕하며
그들은 서로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오래 욕할 나위도 ㅇ었다. 오늘밤은 그야말
로 우와등선한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오늘밤의 그들은 방랑시인, 길버트 종자를
거느리고 떠도는 음유시인이랄까?
학교 구내에 도착한 것은 새벽 다섯 시였다. 크누트는 지금의 감정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여 더듬거리며,
"참 재미났소. 이젠 가서 한잠 푹 잠 꿈이나..." 했다.
"자요? 워! 한창 신이 나는 판인데 이 흥을 깨서야 되겠어요? 이런 기회는 좀
처럼 없어요. 그리고 아직 밤인데 뭘. 게다가 배도 고프고. 그리고 아아 그리고!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요. 내 방에 가서 돈을 갖고 나올게요. 뭘 좀 먹으러 갑시
다. 꼭 기다려요!"
기다리고 말고. 얼마든지 기다릴 크누트엿다. 인생 70년을 살고 고향 떠나 1천
5백마일 길을 찾아와 레이 그리블 같은 놈의 꼴을 보다가 이제야 겨우 길버트
워시번을 반난 게 아니었던가.
학생 옷차림을 한 노인과 부티나게 생긴 처년이 서로 팔을 끼고 채플 가를 떠
도는 꼴을 보고 순경들은 수상히 여겼다. 시인에게 어울릴 식당을 찾고 있는 것
이었다. 그러나 식당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유태인 거리는 지금쯤 다 일어났을 거야. 거기 가서 먹을 걸 좀 사갖구 내방
으로 가서 먹읍시다. 차도 좀 끓여 마시구." 길버트가 말했다.
크누트는 길버트와 나란히 컴컴한 거리를 활보했다. 늘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사람처럼 천연스럽게 그리고 이런 밤에 잠을 잔다는 건 쑥스럽기만 해서, 나지
막한 가게들과 희미한 등불과 골목길이 많이 난 오우크 가까지 내려가 보니 그
곳 빈민가에는 사람들이 벌써 깨어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길버트는 비스킷 몇
갑과 치즈와 고기만두와 그리고 크림 한 병을 샀다. 길버트가 흥정을 하는 사이
에 크누트는 가스등이 깜박거리며 움직임이 환하게 잡히는 길거리를 멍하니 바
라보았다. 러시아 글자로 쓴 식당 간판들. 숄을 두른 여인들과 턱수염을 기른 유
태교 박사들. 이런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마음이 그지 없이 흐뭇해지는 것
이었다. 오늘밤은 외국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길버느 워시번의 방엔 오만가지 재미난 잡동사니가 가득 차 있어 ㅁ두 크누트
의 마음에 들었다. 신입생의 소지품보다도 파리 여행의 기념품이 더 맣았다. 페
르샤 융단, 순은 차 세트, 조각물들, 그리고 갖가지 책. 방수지 지붕의오두막과
지저분한 농가 마당에서 살아온 크누트 액슬브롯은 만족해서 구경했다. 길버트
가 북ㄹ을 지피는 사이에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기분좋게 혀를 차며 감탄만
했다.
성찬을 들면서 그들은 위대한 인물, 그리고 고매한 이상에 관해 얘기했다. 좋
은 얘기가 많이 나왔다. 지금 제자리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을 그리블이나 애치
슨이나 블레빈스 같은 지저분한 족속들의 얘기도 가끔 나왔다. 길버트는 스티븐
슨과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을 몇 줄씩 낭독하더니 마침내 자작시를 낭독했다.
그 시의 좋고 서투르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시를 쓴 사람을 하나 만났
다는 게 크누트에게는 하나의 기적이었다.
얘기의 속도가 차차 느려지고 하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가을의 열띤 기분이
차차 시들어 감을 눈치챈 크누트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작별 인사를 할 때, 그
는 이제 잠깐 눈으 ㄹ붙였다 깨면 다시 이 끝없는 낭만의 밤이 계속될 것 같이
만 느껴졌다.
그러나 기숙사를 나와 보니 밖은 훤했다. 시간은 아침 여섯 시 반. 붉은 별돌
담벽에 조용한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이제부터 자주 그 방을 찾아가자. 벗이 하나 생겼다."
크누트는 이렇게 말했다. 길버트가 굳이 갖고 가라고 들려준 뮈세 시집을 그
는 꼭 쥐었다.
신학서동으로 몇 발작구 걸음을 내디디며 크누트는 피로를 느꼈다. 이렇게 날
이 밝고 보니 간밤의 일은 모두 꿈 같기만 했다.
기숙사의 자기 방을 들어가면서 그는 큰 한숨을 쉬었다.
"늙은이와 젊은이, 이것은 오래 결합되지 못하는 거라." 층층다리를 올라가면
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청년을 다시 만나도 이젠 그 청년이 내게 흥미를 느
끼지 않을 걸. 내가 할 말은 다 들었을 테니까." 그리고 자기 방문을 열면서 또
한 마디했다. "내가 대학에 온 목적은 바로 이거다. 이 하룻밤을 위해 나는 대학
에 왔다. 이 기분을 잡치기 전에 어서 떠나야지."
그는 길버트에게 편지 한 줄을 적어 놓고 가방에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공기
가 탁한 방에서 쿨쿨 코를 고는 레이 그리블을 그는 깨우지도 않았다.
그날 오후 다섯 시 서행 낮 열차에 앉은 어떤 노인이 혼자 미소를 짓고 있었
다. 그의 눈에는 끝없이 만족감이 어리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는 조그만 프랑
스 책이 한 권 쥐어 있었다.
작품해설
엉뚱한 늙은이의 신선한 눈뜸
삶에 대한 눈뜸은 미숙이나 젊은의 전유물은 아니다. 여러 겹의 신비로 싸여
있는 삶은 때로 아주 늦어져서야 그 진상의 편린을 드러내기도 한다. '늙은 소년
액슬브롯'은 바로 그런 늙은이의 때늦은 눈뜸을 씩씩하면서도 애절하게 그려낸
단편이다.
그 또한 많은 다른 사람들 처럼 젊어 한때 학문과 예술에 대해 뜨거운 동경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주인공 액슬브롯의 대학 진학은 발상부터가 엉뚱
하다. 그는 이민 1세로서 산산스럽게 살았고 특히 한 가장으로서 생산과 양육의
의무를 수행하는라 젊은은 물론 장년까지도 날려버린 예순다섯의 노인이기 때문
이다. 그러나 또한 그는 비상하다. 늦게 시작한 공부고 진척도 더뎠지만 근 어쨌
든 몇 년의 준비 끝에 예일대학에 입학을 허락받는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문제
적 인가, 곧 소설의 주인공이 될만한 인물이다
삶에는 시기마다 거기에 걸맞는 단계와 환경이 있다. 대학은 학문의최종적인
성숙을 이루는 곳이기는 하지만 예순다섯의 노인이 무얼 새로 시작하기에는 합
당한 삶의단계도 환경도 아니었다. 액슬브롯은 그걸 어긴 벌을 소외와 고독으로
받는다. 그가 젊은 날에 눈부시게 바라보았던 학문과 예술의 이데아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고 낭만적인 대학생활이나 달콤하면서도 풍성한 우정도 그의 것은
못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하룻밤 무슨 황홀한 꿈처럼 다가온 총족이 그 모근 것을 보상
한다. 손자뻘밖에 안되는 시인지망생을 마나 우정을 나눈 하룻밤이 바로 그랬다.
비록 고급하고 세련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예술과학문의원래적인 가치
와 의미를 맛볼 수 있었던 몇 시간은 울적하고 불만에 차 보냈던 지난 일년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내가 대학에 온 목적은 바로 이거다. 이 하룻밤을 위해 나는 대학에 왔다. 이
기분을 잡치기 전에 어서 떠나야지."
그 엉뚱한 늙은 소년은 그같은 중얼거림과 함께 대학을 떠난다. 어쩌면 그것
은 새로운 눈뜸이 아니라 그의예순다섯 나이가 헛되지 않아 얻게 된 눈썰미의
결과인지도모른다.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생각할 때 그댜로 남아있
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무엇을 자신만만하게 알았다고 외치는 순간도
가장 확실한 것은 그순간 우리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 뿐이다. 늙은 소년 액슬브
롯은 바로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작가인 실클레어 루이스는 흔히 미국 최고의 풍자소설가라는 평을 받으며 노
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작가라는 평도
있는데 그의작품은우리에게 그리 많이 소개되지 않아 나는 솔직히 그 어느 편에
설 입장이 되지 못한다. 다만 이 '늙은 소년 액슬브롯'만으로도 그가 쉬 잊혀질
작가는 아니라는 느낌을 가질 뿐이다.
시인
지은이: 헤르만 헤세
옮긴이: 진형준
중국의 시인 한혹이 젊었을 때에, 시가의 일종이라면 무엇이든지 배우고 그
방면에서는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는 이상한 열망에 들뜨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아직 고향인 황하유역에서 살고 있었던 당시, 물론 그때도
한혹은 배움의 열정에 휩싸여 있었는데, 자신을 아껴주는 양친의 조력으로 어떤
양갓집 규수와 혼약을 맺어 두었다. 길일을 택해서 머지않아 혼례식도 올리게
되었고-한혹의 나이는 그때 20세 정도였다.-훤칠한 청년 인데다 예의도 바르고
대인 관계도 무난하였으며, 학식은 무불통지여서 약관에도 불구하고 벌써 그의
수많은 탁월한 시가로 말미암아 고향의문인들 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부자라
고 꼬집어 말할 처지는 못 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재산을 제법 상속받게 되어 있
었고 여기다가 신부의 지참금까지 보태면 더 불어나게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
라 문제의신부가 절세의 가인인 데다 정숙하기가 여간 아니었으므로 이 처년의
행복에는 이제 아무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어딘지 모르게 허
전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가슴은 완전한 시인이 되려는
야망으로 꽉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밤, 강 위에서 관등놀이가 거행되었을 때, 한혹은 혼자서 강안
저쪽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수면위에 가지를 적시고 있는 나무 줄기에
몸을 기댄 채 강 표면에 무수한 등불이 초롱초롱 매달려 흔들거리는 것을 보았
다. 보트와 뗏목 위에서 남자며 부인이며 어린 소녀들이 서로 인사를 주고 받는
것을, 화려한 차림의 선남선녀들이 아름다운 꽃과 같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불빛에 비친 물결의 가느다란 속삭임 소리도 들렸다. 가희들의 노랫소리, 울려나
는 비파 소리, 달콤한 퉁소 소리...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 위에 성당의 반원형
천장 같은 푸른 밤하늘을 보았다. 고적한 방관자가 되어 마음 내키는 대로 이
모든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청년의 가슴에는 격랑이 일었다. 그의 마음 어느 한
모퉁이에서, 무리들 속으로 건너가 사람들 사이에 끼어 ㅎ혼자와 친구들 가까이
서 놀이를 즐기라는 요구가 일었다. 그에 못지 않게 더 애절할 정도로, 이 일체
의 것을, 즉 밤의 푸르름을, 물결에 더덩실 춤추는 불의 희롱을, 또 놀이 손님들
의 환희를, 강둑 나무 줄기에 기대 선 채 조용한 방관자가 되어 가슴에 받아들
인 다음 완전무결한 시에 담아 보라는 요구가 생생히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느
꼈다. 이 지상에서 어떠한 잔치가 벌어지더라도, 아무리 기쁜 일이 있더라도 ㄱ
의 마음이 편안해지거나 명랑해질 리는 만무할 것이다. 생활의 한복판에 들어
서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고적한 사람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방관자로서 아니
이방인으로서 있게 될 거라고.-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의 영혼이 많은
다른 영혼들 가운데서 오직 하나 이렇게 만들어져 있으므로 그는 이 지상의 아
름다움을 느낄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곳의 사람의 은밀한 욕망도 느끼지
않은 수 없을 거라고-그런 생각을 하니 한혹은 슬펐다. 그리고 이 문제를 곰곰
이 생각해 보았다. 드디어 그가 도달한 결론은 그에게 참다운 행복과 깊은 만족
을 제공하여 줄 수 있는 것은 훗날 그가 세계를 완전히 시 속에 담아내어서 이
영상 속에 그 세계 자체를 정화된 그리고 불멸의 형태로 소유하였을 때에 한한
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던 한혹은 잠깐 몽롱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가벼운
비단결 같은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자색 도포를 입은 백수의 노인이 근엄한 얼
굴로 나무 줄기 옆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한혹은 똑바로 일어나서 연로하신
귀인에게 드리는 예로써 그에게 절하였다. 하지만 그 낯선 귀인은 빙긋이 미소
를 띄우며 두세 시구를 읊었다. 그 시 가운데는 이 젊은이가 지금 막 느끼고 있
었던 일체의 것이 아주 아름답고 완전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들은
위대한 시인들의 규격에 하나 어긋나는 점이 없었다. 한혹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 나머지 심장의고동이 일시에 멎어 버릴 것만 같았다.
"오! 귀인은 누구시오니까?" 하고 그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소리쳤다. "제
영혼의 속속까지 꿰뚫을 수 있사옵고 제가 여지껏 모든 스승으로부터 듣자옵던
것보다 몇 갑절이나 더한 아름다움이 깃든 시구를 읊사옵는 귀인은 누구시오이
까?"
낯선 귀인은 다시 한 번 완전무결한 사람들의미소를 띄우며 이렇게 말으 ㄹ받
았다. "만약에 그대가 시인이 되려는 뜻을 품었거든 나를 따라오게나. 나의초려
를 찾으려거든 이 대하의 서북쪽 산간에 있는 원천으로 오게. 나의 이름은 완전
한 언어의 스승일세"
이 말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연로한 귀인은 가느다란 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서며 이내 연기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를 아무리 찾아 보아도 소용 없었
다. 그의 발자국마저 찾지 못한 한혹은 이 일체의 것들은 지친 데서 온 꿈이었
을 거라고 귿게 믿었다. 그는 황급히 보트가 있는 데로 달려가서 놀이에 참여하
였다.그러나 이야기 솔, 피리 소리 사이사이에도 항상 그의 귀에는 그 낯선 귀인
의 오묘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영혼은 그 귀인과 함께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혹은 연정을 이기지 못하여 들떠 있다고 그를 놀
려 주고 있는 쾌활한 사람들 한가운데 앉아서 서먹서먹하게, 그리고 꿈꾸는 듯
이 눈늘 껌벅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갔다. 한혹의아버지는 혼례일
을 택하기 위하여 친구며 친척들을 불러 들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한혹이 반대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자식된 도리로서 아버지에게 지고 있는 순종의의무에 배
반되는 것 같사옵니다만 용서하옵소서. 하지만 시를 통달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사람이 되려는 소자의소망이 얼마나 간절하온지 아시올 것입니다.그리고 소자의
붕우들 가운데서 몇 사람 정도는 소자의 시를 칭찬하여 주옵니다만, 그래도 소
자는 소자가 아직도 풋내기이오며 아직도 이 길의 첫 계단을 밟고 있는 데 불과
하온 것을 십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청하옵건대, 아무쪼록 소자로 하여
금 잠시만이라도 더 고적한 글을 걷게 하와 면학에 몰두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
무리 보아도 처자 권속을 거느려야 하올 계제가닥치고 보면 그 때문에 소자의
면학에 지장이 있을 것 같사옵니다. 지금 형편으로는 소자는 아직 나이도 어리
옵고 다른 의무도 없는 터이므로 앞으로 얼마 동안은 그 길에서 소자가 기쁨과
명성을 아울러 얻기를 바라옵는 시작을 위하여 생을 바칠까 하옵니다."
이 말은 아버지를 놀라게 하였다. 아버지는 말했다. "그 업이라는 것이 너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기에 혼례식까지 연기시키려 하는 것이야. 혹시 너와 너의
신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냐? 있다면 나에게 말해 보거라! 그 애
와 화해를 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에게 다른 규수를 구해 준다거나 해서 너
를 도와줄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냐?"
그러나 아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약혼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와 그의
약혼녀 사이에 싸움의 그림자조차 비쳐 본 적이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그
는 관등놀이가 있었던 날 꿈결에 스승이 나타난 거라든가 또 그 위인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이 세상의 다른 모든 행복 이상으로 목마르게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알려 드렸다.
"좋다." 아버지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일년간의 말미를 너에게 주마. 그 동안
에 너는 아마 어떤 신이 너에게 보냈을 그 꿈을 좇도록 하려무나."
"이년도 더 걸릴까 생각되옵니다." 이렇게 한혹은 망설이다가 말하였다. "그런
일을 누가 아올리까?"
이리하여 아버지는 아들이 가는 것을 붙들지 못하고 글퍼만 하였다. 젊은이는
그의 약혼자에게 한 통의 긴 편지로써 이별을 고한 다음 그곳으로 뜨고 말았다.
길고 긴 나그네 길이 끝났다. 그는 강의 원천에 도달하여 정말 호젓한 후미진
곳에 대나무로 엮은 한 채의 초려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초려 앞, 엮은
돗자리 위에 그가 강안 나무 줄기 옆에서 보았던 그 연로한 귀인이 앉아 있엇
다. 귀인은 앉아서 비파를 뜯고 있었다. 그리고 방문객이 공손히 읍하며 접근하
는 것을 보고서도 일어서기는커녕 그에게 인사조차도 하지 않았다. 다만 빙긋이
미소만을 던져 줄 뿐 화사한 손가락으로 비파즐을 훑고 있었다. 그러자 신비로
운 음악이 은빛 구름과도 같이 온 골짜기에 울려 퍼졌으므로 젊은이는 가던 걸
음을 멈추고 의아스런 생각과 감미로운 경탄 속에서 다른 일체의 것을 잊어버렸
다. 이윽고 '완전한 언어의 스승은'은 조그마한 비파를 옆에 치우고 초려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혹은 그 귀인을 공손히 따라 들어가 그냥 그
대로 그의 슬하에서 하인 겸 문도로서 머물러 버렸다.
한 달이 지났다. 이때가 되니 그는 그가 전에 지었던 모든 노래들을 하나도
안김없이 천하게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기억에서 그것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리고 수개월이 지나갔다. 이때는 벌써 고향에서 그의 스승들한테 배웠던 노래
들도 기억에서 제거되어 갔다. 스승은 그와 거의 한 마디 말도 교환하지 않았
다. 스승은 비파를 뜯는 기술을 무언으로 가르쳤다. 드디어 이 문도의 한 몸은
완전히 음악으로 관류하게에 이르렀다. 어느 날 한혹은 '가을 하늘에 두 마리 새
가 나는'것을 묘사한 조그마한 시를 지어 보고 스스로도 마음에 들어했다. 그것
을 스승에게 보여드릴 만한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어느 날 저녁 때 그것을 쵸려
한 옆에서 노래로 불렀다. 스승은 확실히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도 스스은 아
무 말이 없었다. 다먼 나지막이 비파를 뜯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공
기는 쌀쌀해지고 저녁 놀을 재촉하더니 아직 한여름임에도 매서운 바람이 일며
회색 빛이 된 하늘에 두 마리의 숫오리가 나그네의 무서운 그리움을 아는 듯 날
아가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 모든 것들은 문도의 시구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고
완전하였기 때문에, 문도는 슬픈 마음이 들어 침묵을 지킨 채 자신의 무가치함
을 통절히 느꼈다. 이후에도 노인의 행동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일년
이란 세월이 흘러갔을 때 한혹은 비파 연주기술을 거의 완전히 습득했으나, 시
의 기술은 점점 어렵고 자꾸자꾸 높아만 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2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젊은이는 일가 친척이며 고향이며 그리고 약혼녀에
대해 격심한 향수를 느꼈다. 그리고 떠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스승에게 빌었
다.
스승은 빙긋이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자유의 몸이니라." 그는 말하였다. "그러나 그대가 원하는 곳이 있으
면 어디든 갈 수 있으리라. 다시 돌아와도 무방할 것이며 돌아오지 않더라도 상
관 없느니라. 만사가 그대의 마음 하나에 달렸느니라."
이리하여 한혹은 여행 길에 올랐다. 그가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던 어느 날
아침 동이 뿌옇게 틀 무렵, 그립던 고향의강가에 서서 반월형 다리 저쪽의 고향
마을을 건너다 보았다. 살그머니 아버지의 정원으로 들어간 한혹은 침실의 창너
머로 아직도 곤히 주무시는 아버지의 숨결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서 약혼녀
의 집 곁에 있는 과수원으로 몰래 기어들어가 배나무에 올라갔다. 그 가지에서
보니 약혼녀가 안방에 선 채로 머리를 빗고 있었다. 그리고 한혹이 제 눈으로
본 이 모든 것들과 그의 향수 어린 마음 속에서 그리고 있엇던 그영상을 비교하
여 보던 도중 문득, 아직도 자기는 시인이 될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문명
해졌다. 시인들의 품 속에는 우리가 현실의 사물 가운데에서 아무리 찾아 보아
도 소용없는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깃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무를 타
고 태려오기가 무섭게 정원에서 도망치듯 달려 나와 다리를 건너 고향 마을을
등지고 첩첩산중 높은 곳에 있는 그 골짜기로 돌아왔다. 거기에는 전과 마찬가
지로 연로하신 스승이 그의 초려 앞 검소한 돗자리 위에 ㅇ은 채 손가락으로 비
파줄을 퉁기고 있었다. 연로하신 스승은 인사 대신에 예술의 은혜에 대한 두 개
의 시구를 읊었다. 그 시의 깊이와 화음을 들었을 때 이 젊은이의 두 눈에는 그
칠 줄 모르는 눈물이 가득히 고여 나왔다.
다시금 한혹은 '완전한 언어의 스승'곁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이제, 비파를 마
음대로 뜯을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가야금을 배웠다. 그리고 또 수개
월이 서풍을 받은 눈처럼 사라져 갔다. 그 후 두 번이나 향수로 애를 태운 일이
있었다. 한 번은 한밤중에 몰래 그곳으로부터 달아났으나 그가 골짜기의 마지막
모퉁이를 채 돌기도 전에 초려의 입구에 걸어 놓은 가야금 위로 밤바람이 스쳐
지나자 그 가락이 그를 뒤쫓아 와 불러 세웠으므로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또
한 번은 이런 꿈을 꾸었다.-그가 자기 집 정원에 초목을 심고 있는 장면인데, 아
내가 옆에 서 있고 아이들이 그 나무에 포도주와 우유를 부어 주고 있는, 그런
꿈이었다. 눈을 떠 보니 달빛이 방 안을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후다닥 몸을 일
으킨 그는 옆에 스승이 잠에 곯아떨어져 드러누워 있는 것과 그의 흰 수염이 가
벼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앗다. 그때 이 인간에 대한 격력한 증오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이 인간으로 인하여 그의 생활이 산산이 부서지고 그의 미래가그에게
속아서 빼앗겨 버린 것 같았다. 그가 막 이 백수 노인에게 달려들어 목졸라 죽
이려고 하였을대, 백수 노인이 두 눈을 번쩍 뜨자마자 우아롭고 슬픈 온정의 미
소가 온 얼굴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 온정이 제자로 하여금 타는 적개심을 꺾어
버리게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아라. 한혹아!" 하고 노인은 나지막이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대는 무엇이든, 그대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데 대하여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네. 그대는 고향에 돌아가서 나무를 심어도 좋고, 나를 미워하든 죽이
든 마음대로 하게. 그것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닐세."
"아, 어찌하여 시생이 대인을 미워할 수 있사오리까?" 시인은 벅4찬 감정을 이
겨내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것이야말로 하늘 그 자체를 미워하려는 거소과 다를
게 무엇이 있사오리까?"
그리고 그는 그냥 주저앉아서 가야금을 뜯는 것을 배운 다음 피리를 배웠다.
그후에는 스승의 지도 아래 시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서히 그 비법을 배
워 나갔다.-얼핏 보기에는 다만 단순한 것과 소박한 것만을 말하면서도 그와 동
시에 바람이 수면을 뒤집어 엎어 놓듯이 듣는 사람의영혼을 파 헤쳐 놓는 , 그
런 비법이었다. 그는 태양이 산등성이를 망설이듯 하며 맴도는 일출을 묘사해
보았다. 그리고 물고기가 그림자처럼 물 속으로 도망쳐 갈 때의 그 소리없는 빠
른 동작을, 혹은 새순으로 파릇파릇 몸단장한 수양버들이 춘풍을 받아 흐느적흐
느적 흔들리는 모양을 시로 그렸다. 사람들이 그 시를 귀에 담아 넣을 때 그것
은 태양이며 물고기의 희롱이며 버들의 속삭임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늘과세계
가 반드시 한 군간 동안 완전한 음악이 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
다. 그리고 그것을 드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것을 들으면서 자신이 사랑하고 있
는 것을, 아니면 미워하고 있는 것을, 유쾌하거나 반대로 괴로운 마음으로서 생
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이를테면 소년은 장난을, 젊은이는 애인을, 노인은 죽
음 같은 것을.
한혹은 그가 대하의 원천에 있는 스승 곁에서 몇 해를 지체하고 있었는지 이
젠 기억에도 희미해졌다. 때로는 바로 어제 저녁에 이 골짜기에 발자국을 들여
놓아 백수 노인의거문고 줄의 환영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대로는 그의 과
거의 모든 세대외 사간이 한꺼번에 허물어져서 형체도 잡을 수 없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는 홀로 초려 안에서 눈을 떴다. 그가 아무리 찾고 소
리 쳐 보아도 스승은 감쪽같이 사라진 다음이었다. 하룻밤 사잉에 갑자기 가을
이 찾아온 것 같았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낡은 초려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산등을 넘어아직 그런 계절이 아닌데도 철새들이 떼지어 날아갔다.
한혹은 조그마한 비파를 손에 들고 고향 땅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무 데서
나 사람을 만나도 그들은 연로하신 귀인들에게 드리는 예로써 한혹에게 절하였
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며 약혼녀며 일가 친척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으며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강에서
관등놀이가 있었다. 시인 한혹은 저편 어두컴컴한 강 기슭에 서서 어떤 고목 나
무 줄기에 기대 앉아 있었다. 그가 조그마한 비파를 뜯기 시작하자 부인들은 한
숨을 쉬며 황홀한 듯이, 가슴 타는 듯이, 밤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젊은 남
자들은 아무 데서도 모습을 볼 수 없는 비파 뜯는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네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런 비파 소리를 생전에 들어 본 일 없노
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한혹은 빙긋이 미소짓고 있었다. 수없는 등불의영
상들이 하느작거리는 강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릭 이제는 도무지 그 영상들과
현실의 차이를 알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영혼이 도사린 한가운데서
는 이 놀이와 또 그가 여기서 한 젊은이로서 우두커니 서서 낯선 다른 곳 스승
의 말을 귀에 담아 듣던 그때 처음 있었던 놀이와의 사이에 어떤 구별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작품해설
추상의 절실함과 아름다움
삶에 대한 눈뜸의 중요한 내용중에 하나는 우리의 일생을 인도할 가치의 별을
찾는 일이다. 어떤 이는 그런 특성을 강조해 성장소설의 일종으로 구도소설이라
는 용어를 따로이 쓰기도 한다.
헤세의 '시인'은 비록 소품이자만 엄밀힌 말하면 구도소설이다. 자신의 삶을
채워주는 가치로 시를 선택한 한 젊은이의 수련과 성취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의 깨달음, 그의 성취의 내용은 지극히 추상적이다. 그가 한 위대한 시인이 되
것은 알겠으나 무엇이 어떻게 위대한지를 독자들은 쉽게 파악할 수 없다. 어쩌
면 헤세 자신도 그 깨달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막연한 느낌밖에 가지지 못했을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아름다우면서도 감동적이다. 시의본질 혹
은 완전한 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별로 듣지 못했으면서도 우리는 한 위대하
고도 완전한 시인을 만나고 완성된 시를 읽은 듯한 감동에 젖는다. 그 이상 진
정한 시가 무엇인지 알 듯한 느낌까지 준다.
무엇이든 구체적이고 명료하지 않으면 못견뎌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종류
의감동이 미덥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때로는 추상적이고 몽롱한 것이 더 절
실한 감동으로 다가드는 수도 있다. 하물며 죽는 날까지도 그 진상을 온전히 알
기는 어려운 우리 삶의 얘기에 있어서랴.
삶은 흔히 길걷기에 비유된다. 또 한바탕 꿈이라 일러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는 세상에 나있는 수많은 길, 우리가 꿀 수 있는 여러 꿈중에 하나일 수 있고
시인으니 눈뜸이란 길 위에서의 길 찾기, 꿈속에서의 꿈꾸기일 수도 있다. 처음
과 끝이 다 바라보이는 길이 어디 있으며 앞과 뒤를 가지런히 꿰일 수 있는 꿈
이 어디 있으랴.
깊고 오묘한 깨달음의 내용을 조리있게 펼쳐보여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진
실의힘이다. 그러나 때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려보이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우리를 감동시킨다. '시인'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아마도 한혹이
시인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넉넉한 살림과 자애로운 부모, 아름다운 약혼녀와 다정한 친구들, 그리고 시인
으로서의명망-그와같이 세속적으로는 별로 모자람이 없는 현재와 제법 많은 것
이 보장된 미래를 내던지고 진정한 시에 자신을 송두리때 내맡긴 그의 일생은
구도소설의 흔해빠진 원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도 어쩔 수 없이 감동적이다.
딜 찾기의 외로움과 고단함 혹은 꿈꾸기의 허망함도 그가 한 시인으로 완성되면
서 애절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끈까지 추상적이고 애
매한 깨달음의 내용까지 절실한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다가들게 한다.
헤르만 헤세는 십대 후반의 나를 매혹시켰던 작가이다. 내가 아름다운 시를
읽는 기분으로 읽은 그의 단편들은 아주 많고 그중에는 객관적으로 보아'시인'보
다 뛰어난 작품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을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이 작품이 그를 일관하는 어떤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출세작 '피터 카멘첸트'로부터 작가적 성가를 높여준 '나르시르와 골드문
트' '싯다르타' '데미안'같은 작품에 이어 만년을 대작 '유리알 유희'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외형상으로는 고양소설, 성장소설의 전통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을 일관한는 것은 추상성과 애매함이다. 틀림없이 주인공들
은 깨달음을 얻고 완성에 이르지만 그 내용은 과정의엄숙함과 진지함에 비해 지
극히 빈약하거나 알듯말듯한 추상의 안개 속에 휩싸여 있다.
어쩌면 그것이 지성과 논리를 앞세우는 강단평론가들이 때로 그를 경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원인일지도 모르나 내 개인적으로는 그런 태도에 전혀 동조하고
싶지 않다. 이미 말했듯 그것은 그가 가슴저리게 그려내는 길찾기의 과정과 추
상적이어서 오히려 더 절ㄹ실하고 아름다운 완성과 해탈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
다. '시인'은 바로 그런 헤세의 특징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단편으로 성장소설의
또 다른 유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제3의 강둑
지은이: 우양 기마랑스 로사
옮긴이: 장경렬
나의 아버지는 책임감이 질서를 존중하는 분인 동시에 솔직한 분이셨다. 그
리고 몇몇 믿을 만한 사람들엑게 알아 본 바에 따르면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아니 심지어 어린 아이일 때부터 그런 성품을 지니셨다고 한다. 기억에 의하면,
그분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명랑한 분이라고 할 수도 없었지
만, 그렇다고 해서 침울한 분이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보다느
좀더 조용한 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집안을 다스리는 사람은 아
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또한 매일 같이 우리들, 나의 형제자매들과 나를 꾸
짖고 타이르는 분도 어머니였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힌 아버지가 배 한 척을
주문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 일에 매우 심각하셨다. 특별히 미모사 나무로 만들어 달라고 부
탁하셨으며, 20-30년은 견딜 수 있도록 견고한 것인 동시에 꼭 한 사람만 탈 수
있도록 낙은 것이어야 한단ㄴ 단서도 다셨다. 어머니는 이 일을 놓고 몹시 화를
내셨다. 갑자기 이 양반이 어부가 되려나? 아니면 사냥꾼이 되려나? 어머니의
질책에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우리집에서 채 1마일도 되지 않은 곳에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강은 우리집 부근에 이르러 수심이 깊고 흐름이 조용
하였으며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이 넓었다.
그 나룻배가 배달되던 날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아버지는 기쁘다는 표시
는 물론 어떤 내색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항상 그렇듯이 그저 모자를 쓰시
고는 우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음식물은 물론 어떤 종류의ㅡ 짐
도 갖고 가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난리법석을 피우실 줄 알았는데, 가만히 계셨
다. 어머니는 매우 창백한 표정으로 입술만 깨불고 계셨다. "떠낙 싶으시면 떠나
세요. 다신ㄴ 돌아올 생각도 말아요." 이것이 어머니가 하신 말씀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아만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시고
는 따라나오라는 손짓을 하살 뿐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화를 내실 것이 두려웠
으나, 기꺼이 아버지르 따라나섰다. 우리는 암게 강으로 갔다. 나는 대담하고 유
쾌한 기분이 되어 이런 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아빠, 저도 아빠와 함께 배를 타
고 가는 거지요?"
아버지는 그저 나를 내려다보시고는 잘 지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손짓
으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손짓에 따라 집에 돌아가는 척하다가,
아버지가 등을 돌리자 어떻게 하시려나 살펴보기 위해 덤불 뒤에 몸을 숨겼다.
아버지께서는 배에 타시더니 노를 저어 가셨다. 마치 한 마리의 악어처럼 아버
지가 타신 배의 그림자는 강을 가로질러 멀리, 그리고 조용하게 미끄러져 나갔
다.
아버지께서는 뒤르 ㄹ돌아보지 않으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정말로 어디로 가
신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강 한가운데로 노를 저어 가서는 주변을 계속 떠도시기
만 할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말문이 막힌 듯 놀랄 뿐이었다. 전에는 결코 있었
던 적이 없는 일이,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집에
친척들이, 이웃들이 그리고 친구둘이 와서는 이 문제를 놓고 상의했다.
어머니는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말도 벼로 하지 않으시고 침착하게
처신하셨다. 겨로가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가 하나님이나
성자에게 약속한 바를 실행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아니면 무언가 무시무시한
질병에 결렸는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것이 문둥병일지도 모든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런 질병에 걸려 가족을 위해 떠나긴 했지만 가능하면 가족과
아주 떨어지고 싶지는 않아서 저렇게 떠 있는 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
었다.
강을 따라 여향하는 사람들이나 이쪽으든 저쪽이든 강둑과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의보고에 의하면, 아버지께서는 밤이든 낮이든 결코 땅위에 발을 대딛은
적이 없으시다는 것이었다. 그저 강물 위를 외롭게 , 목적도 없이 부랑자처럼 떠
도실 뿐이었다. 어머니와 친척들은 틀림없이 아버지가 배 안에 음식을 감추고
계신데 그것이 다 떨어지면 강에서 나오거나어디론가 떠나버리실 거라는 의견을
같이 했다. 떠난느 것이 적어도 다시 돌아오는 것보다는 덜 체면이 깎이는 일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먹을 것이 다 떨어지면 아버지께서 후회하고 집으
로 돌아오실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진실을 모르고 있었던가! 아버지는 은밀한 식량 공급원을 갖
고 계셨는데 그 공급원은 바로 나였다. 매일같이 나는 음식을 집에서 몰래 가져
다가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 아버지께서 떠나신 바로 그날 밤, 우리 모두는 강
가에서 횃불을 피운 다음 아버지에게 애원을 하기도 하고 큰소리고 부르기도 하
였다. 나는 너무도 마음이 아팠고, 무언가 조철ㄹ 취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
각을 했다. 다음 날 나는 옥수수빵 한 덩어리와 바나나 한 송이, 정제되지 않은
갈색 설탕 몇 덩이를 갖고 강가로 나갔다. 아주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아버지
를 기다리느라고 안절부절 못했다. 이윽고 저 멀리 외롭게 홀로 떠 있는 배가
보였다. 배는 잔잔한 강 위를 미끄러지듯 떠다니고 잇엇다. 아버지는 배 밑바닥
에 앉아 계셨다. 아버지는 나를 보았지만 내 쪽으로 배를 정 오지도 않ㅎ으셨고
아무런 손짓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음식물을 아버지에게 보이고느 ㄴ강둑에 있
는 바위 어딘가 움푹 패인 곳에 놓아 두엇다. 거기에 두면 동물들이나 비나 이
슬의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나는 똑같은 일을 매일 같이 걔속해서,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놀랍게도 아는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내가 쉽
게 훔칙 수 있는 곳에 음식물을 놓아두신 다는 것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어머니의 마음속에서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외삼촌을 불러와서 농장 일과 그 밖의 사무적인 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셨다. 어머니는 또한 학교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 우리들을 가르치게하여 학교
에 못가서 낭비한 시간을 벌충하도록 배려 하셨다. 어느 날 어머니의 요청으로
신부님껫 사제복을 입으시고는 강가로 나가 아버지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악
령을 쫓아내려 하셨다. 신부님께서는 아버지에게 불경스러운 짓에 고집을 그만
피우라고 소리쳐 말씀하셨다. 어느 날엔간ㄴ 어머니께서 군인 두 명을 불러와아
버지에게 겁을 주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아버지
께서는 먼 곳에서 떠돌 뿐이셨고, 어떤 때는 너무 멀어 거의 보이지도 않으셨다.
누구에게도 대답하지 않으셨고 눅구도 가까이 가 보지 못했다. 몇몇 신문 기자
들이 와서 사진을 찍으려는 시도를 했을 때 아버지는 강의 반대편 쪽으로 배를
저어간 다음 늪지에 숨어 버리셨다. 아버지는 그 늪지를 손바닥처럼 잘 알고 곗
계셨지만, 다른이는 그곳에 들어가면 곧 길을 잃기 마련이었다. 아버지는 아시는
은밀한 미로가 수마일이나 뻗어 있었고, 무성한 잎으로 덮여 있을 뿐만 아니라
사방이 갈대로 뒤덮여 있어서 아무도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저기 강 위에 떠 계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익숙
해져하 했지만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지 않으시는 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버지
께서 그 많은 어려움을 어떻게 견뎌 내시는가였다. 밤낮 없이, 해가 뜨나 비가
오나, 덥거나 춥거나 상관없이, 낡은 모자를 머리에 쓰시고 옷도 변변히 걸치지
않으신 채 몇 주일이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아버지는 강 위르 떠 다니고 계셨
다. 전혀 개의치 않고 낭비와 공허함 속에서 자신 인생을 흘려 보내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땅 위든 풀 뒤든, 섬이든 육지든 결코 발을 딛지 않으셧
다. 틀림없이 아버지는 어딘가 비밀스러운 장소에 배를 매어놓고는 자깐 동안
잠을 청하실 것이다. 아버지는 불을 지피지도 않으셨고 성냥불조차 켜지 않으셨
다. 그렇다고 회중 전등을 갖고 계신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느 ㄴ바위어딘가 움
푹 패인 곳에 내가 갖다 놓은 얼마 안되는 음식만으로 연명하셨다. 내가 보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의 음식이었다. 건간 상태는 어떠실까? 노젓는 일 때문에 계속
힘을 쓰셔서 탈진하신 것은 아닐까? 해마다 닥치는 홍수는 어떻게 견디실까? 홍
수가 닥치면 물이 불고 나뭇가지라든가 동물의시체와 같은 온갖 위험한 물체들
이 물살에 휩쓸려 내려 오지 않은가. 그런 물체들과 아버지의 작은 배가 눈 깜
짝할 사이에 충돌할 수도 있을 텐데.
아버지는 사름들과 전혀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셨다. 우리도 아버지에 관새서
는 결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마음 속으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아
니, 아버지를 마음 바깥으로 결코 밀어낼 수 없었다. 어쩌다 잠깐 아버지를 잊을
때도 있긴 하였다. 겪고 계신 끔찍한 상황을 떠올리고 그 일시적인 평온 상태에
서 후다닥 깨어나곤 하였다.
누이가 결혼을 하게 되었ㄴㄴ데, 어머니는 결혼 잔치를 원치 않으셨다. 아마도
잔치는 즐거운 것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폭풍우가 치는 차가운 밤 포근한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아버지 생각이 나듯이 말이다. 저기 강 위에 홀로 무방비 상태로
떠돌면서 다만 손과 바가지 하나를 이용해 배에 고인 물을 퍼내고 계실 아버지
를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따금 사람들은 내가 점덤 더 아버지를
닮아간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머리와 수염이 자랄대로 자라 뒤
엉켜 있을 것이고 손톱도 길게 자란 상태여서 아버지가 옛날의 아바지가 아니리
라는 것ㅇ르 나는 알고 있었다. 여위고 병색이 짙은 아버지의모습을, 아무렇게
자란 머리와 햇볕에 그을린 피부 때문에 시커멓게 보일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
았다. 가끔 가다 아버지를 위해 옷을 몇 점 가져다 놓긴 했지만, 알몸이나 다름
없을 아버지의 차림새도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전혀 마음을 쓰시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
에게 애정을 느꼈고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잘해서 사람
들이 나를 칭찬하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
셨어요."
그 말이 꼭 맞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진실이 들어 있는 거짓말
이라고 할 수은 있을 것이다. 아까 말했듯이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전혀 마음
을 쓰시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우리 주변에 머물러 계신 것
일까? 우리르 볼 수도 없고 우리의 눈에 띌 수도 없도록, 왜 강 위쪽으로 올라
가시거나 강 아래쪽으로 내려가시지 않는 것일까? 아버지만이 그 답으 ㄹ알고
계실 것이다.
누이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누이는 아이의 할아버지인 아버지에게 그 아이를
보여드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느 화창한 날 우리 모두는 강둑으로 나갔
다. 결혼식 때 입었던 하얀 예복을 차려 입은 누이가 아이를 높이 쳐들었다. 매
형은 그들에게 내려쪼이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양산을 들고 잇었다. 우리는 아
버지에게 소리치고 아버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버진 모습을 보이
지 않으셨다. 누이가 울음을 터뜨렸고, 이윽고 우리 모두는 서로의 팔에 안겨 울
었다.
누이와 매형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 형도 도시에서 생활하기 위해 떠났다.
늘 그렇듯이 세월은 모르는 사이에 빨리도 흘렀다. 어머니도 마침내 다른 곳으
로 가셨다. 이제 노인이 된 어머니는 딸과 함께 살기 위해 떠나셨던 것이다. 나
만 홀로 남게 되었다. 나는 결혼에 대해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는 다만 내 인생
의 짐과 함께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없었다. 홀로 쓸쓸하게 강 위를 방황
하시던 아버지에게는 내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왜 그렇게 하고 계신지
결코 말씀조차 하신 적이 없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나를 필요호 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난ㄴ 어너 날 불퉁스럽고 고집스럽게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 왜 그러시
는지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한 말은 아버지께서 배를 만든
사람에게 그 이유를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
나 이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무도 무언가를 알거나 기억하지 못하고 잇
었다. 이세상을 떠났고 아무도 무언가를 알거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세상
을 떠났고 아무도 무언가를 알거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이야
기도 있었다. 비가 유난히도 심하게 오랫동안 내리던 때였다. 아버지가 노아처럼
현명한 분이셔서 새로운 대홍수를 예상하시고는 배를 만들게 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던 것이 희미하게 생각나다. 어쨌든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놓고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나의 머리도 희끗희끗
해지기 시작하였다.
나에게는 슬픈 일을 빼놓고는 말할 것이 없다.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으며,
무슨 큰 죄를 저질렀는가? 아버지는 항상 떨어져 계셨지만, 아버지가 떨어뎌 계
시다는 사실은 항상 내 곁에 있었다. 그리고 저 강이, 항상 저 강이 그 사실을
ㄱ임없이 되풀이해서 일깨우고 있었다. 바로 저 강이 항상 일깨워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나이로 인해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것이 단지 정처없
이 헤매는 것이나 다름 없는 그런 나이에 들어섰던 것이다. 병마가 찾아오기도
하고 불안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류머티즘이 끊임없이 괴롭히기도 했다. 아버지
는 어떠실까? 무엇 때문에, 왜 저러고 계신 것일까? 틀림없이 엄청난 고통을 받
고 계실 것이다. 아버지도 이제 너무 늙으셨다. 어느 날 힘이 다 소진되시면, 배
가 전복되어도 어쩌지 못하실지도 모른다. 아니면 물살에 배가 하류 쪽으로 계
속 떠내려가다 마침내 폭포 위에서 떨어져 물보라가 날리는 소용돌이 속에 처박
히게 되어도 어쩌지 못하실 수도 있다. 그런 염려가 내마음을 짓눌렀다. 아버지
께선 저기 강 위에 떠 계시고, 나는 그 사실로 인해 영원히 마음의 평화를 빼앗
기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 때문에 죄책감을 느
끼고 있고, 나의 고통은 터진 상처가 되어 내안에 자리잡고 있다. 사정이 다르다
면 아마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따져
보기 시작했다.
잊자, 잊어! 내가 미쳐 버린 것은 아닌가? 안되지, 그런 말은 쓸수 없지. 우리
집에서는 그런 말이 한 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었다. 그 오랜 세
월 동안 한 번도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었다. 아무도 누구를 미쳤다고 하지 않
았다. 아무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모두가 다 미쳤기 때문이었는지
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강가로 가서 아버지의 눈에 좀더 쉽게
띌 수 있도록 손수건을 흔드는 것뿐이었다. 나는 조금도 자제력을 ㅇ지 않고 있
었다. 기다리고 기다렷다. 드디어 아득히 저 먼 곳에서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내
셨고, 이윽고 배의 뒤편 쪽에 앉아 계신 희미한 아버지의 형상이 저쪽에 보였다.
몇 번이고 아버지를 불렀따. 그리고는 그렇게도 아버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격식을 갖추고 선서를 한다음 말하듯 정색을 하고 아버지에게 드리고 싶
었던 말을 했던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하여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이젠 충분히 오랫동안 그곳에 계셨어요. 이젠 늙은셨잖아요... 돌아오
세요. 더 이상 그러시지 않으서도 돼요... 돌아오세요. 제가 대신 할게요. 원하시
면 지금 당장 그렇게 해요. 어느 때고 좋아요. 제가 대신 배를 탈게요. 아버지
대신 배를 타겠어요."
이렇게 말하고 나자 나의 가슴은 더욱 단호하게 뛰었다.
아버지께서 내 말을 들으셨다.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노를 갖고 배를 교묘하
게 조정하여 나를 향해 뱃머리를 돌리셨다. 아버지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신 것
이었다. 그때 갑자기 나는 마음 속 깊이 떨기 시작했다. 아바지가 팔을 들어 나
를 향해 흔드셨기 때문이다. 그 오래고 오랜 세월만에 처음으로 나에게 손을 흔
드신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우려움에 머리털이 곤두 선 채 나는
달렸다. 미친 듯이 도망쳤던 것이다. 어버지께서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오신 것 같
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용서를 빈다. 용서를, 용서를 해 주시기를 빌 뿐이
다.
나는 죽을 듯한 공포 뒤에 느끼게 되는 무시무시한 오한을 체험하였다. 그리
고 앓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아무도 아버지를 보거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를 듣지 못했다. 그렇게 일을 그러쳐 놓고서 나도 남자락 할 수 있을까? 나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엉뚱한 사람으로 변혀 버렸다. 침묵이라고 할 수밖에 없
는 그런 몰골인 것이다. 이제 너무 늦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사막에,
내 인생의 들판 언딘가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나마도 단축될까 두
렵다. 그러나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면 그에게 요구할 것이다. 나를 데려다 두 강
축 사이로 영원히 흐르는 강물 위의 자그마한 배에 태워달라고. 그러면 나는 강
아래ㅉ으로 흘러가다 강물에 빠져 강물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강물 속으로...
작품해설
외로운 떠돎으로서의 삶
사람은 대지의 한 모퉁이를 골라 돌과 나무로 집을 짓고 머문다. 새처럼 깃을
들이고 나무처럼 뿌리를 내린다. 그러나 머문다는 것, 뿌리를 내리고 깃을 들인
다는 것은 기실 갈망이 빚어낸 우리의 주관적인 환상일 뿐이다. 떠나지 않는 집
영원히 머무믐 땅은 없다. 오히려 헤매임과 떠돎이야말로 우리 존재가 내던져진
본래적 상황이다.
또 사람은 이런 저런 이름으로 무리를 짓고 그 무리 속에 자신을 감춘다. 무
리가 자신의 외로운 존재를 보충하고 확대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역시도
믿고 싶은, 혹은 믿기 위한 미신을 뿐이다. 어떤 이름으로 무리를 짓고 관계를
맺건 인간은 결국 혼자이다. 외롭게 태어나고 외롭게살다가 외롭게 죽는다. 존재
의 단잘들 사이에는 창이 없다.
삶에 눈뜬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한평생 우리를 인도할 가치의 별을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같이 속절없는 우리 삶의진상에 대한
쓰라린 인식이기도 하다. 기마랑스 로사의 '제3의 강축'은 바로 그런 쓰라린 인
식을 변형과 과장의 기법을 통해 가슴 섬뜩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 사람만이 탈 수 있는 조각배와 강물 위에서의 생활은 외로운 떠돎으로서의
우리 삶을 상징한다. 일상 속에 특징없이 살아가던 화자의 아버지는 어느 날 느
닷없이 바로 그런 우리 삶의 진상을 아무런 설명없이 스스로 연출한다. 그런 문
제적 인간의 실재 여부느 이 소설의 리얼리티 획득에 아무런 어려움을 주지 않
는다. 오히려 사징성을 활용한 리얼리티의 변형은 전통적 리얼리즘의 기법보다
더 큰 파괴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특히 작품의 말미에서 자신의 부름에 다가오
는 아버지의 조각배를 보고 머리카락이 비쭉 설 정도의 공포를 느끼며 돔방치는
화자에게서는 상징성과 리얼리티의 절묘한 만남까지 보게 된다.
브라질 출신의 작가 로사는 어린 시절을 두메산골에서 보냈는데 이때의생활이
후에 그의 작품에 큰 형향을 미쳤다. 의학을 전공하고 고향에서 진료에 종사하
다가 괴교관이 되었다. 고고타. 파리 등지에서 근무하다가 시인으로 먼저 데뷔한
후에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독특한 조어와 난해한 문장으로 유명한 로사는
'위대한 두메 산골-미로'로 브라질 문단에서 부동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보트 속의 남자
지은이: 에이빈트 욘손
옮긴이: 김창활
이 이갸기는 내가 아홉 살 나던 해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우리는 부우
루 호숫가에서 살고 있었다. 안에 작은 섬도 있는 그 호수는 아주 넓고 아름다
웠다. 나는 겨우 아ㅎ 살이었고 아칸도 열 살밖에 되지 않았다. 호수 가운데로
강물이 지나갔는데, 호수의 북쪽에서 흘러든 강물은 남ㅉ으로 흘러나가고 있었
다. 강물은 고지대인 랍 지방으로부터 을러오고 있어서 봄철이 되면 그리로 뗏
목이 떠내려오곤 했다. 우리집 창문에서도 호수가 재목으로 쓰인 수목들과 부서
진 얼음장들로 꽉 덮이곤 하는 것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뗏목들은 서서히 암
쪽으로 밀려갔고, 5월이 되면 그것들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아주 말끔하게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간씩은 가장자리로 밀
와 기슭에 걸려 남아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들은 대개 아른 것들보다 물에 잘
뜨는 굵고 좋은 제목감들이었다. 우리는 그것들이 이제 어떻게 처리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일주일쯤 지나면 뗏목꾼들이 와서 장대나 밧줄로 차레차레 잡아
글어내어 흘려보내는 것이다. 뎃목꾼들은 호수 기슭을 따라오거나 보트를 저어
오곤 했는데, 그들은 하루 사이에 호숫가에 남아있는 것을 말끔히 더내려보내곤
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쓸잇군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한 번 다녀가면 그뒤로
호수는 다시금 비워지곤 했다.
그런 까닭으로 하칸과 나는 그들이 나타나기 직전에 재목 세 개를 숨겼다. 우
리가 사는 동네에선 호수까지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이 파여져 있었다. 우리는
재목을 이 도랑으로 20미터 가량 끌어들여 가지고 한쪽가에 한 줄로 나린히 붙
여놓은 다음 풀더미로 덮어 숨겼다. 그러는데 하루가 몽땅 걸렷다. 우리는 그것
이 금지된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칸은 그것을 취급하는 제재소는
엄청난 돈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깐 재목 세 개 없어진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니
상관없다고 했다. 아음 해 뗏목꾼들이 올라올 때까지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
다. 하칸은 그런 일에 아주 환했다.
그후, 쓸잇꾼들이 오는 날, 우리는 숲가에 앉아서 그 뗏목꾼들이 오는 것을 보
고 있었다. 그들중 한 패는 물가를 따라 걸어왔고, 한무리는 뗏목들을 발견하고
물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 보트 위의 사내들이 그것들을 더욱 깊숙히 끌
어갔다. 우리는 그들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뭐라고 하는지는 제대로 알
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뗏묵을 숨겨놓은 도랑 입구까지 와서 한동
안 쉬며 담배들을 피웠다. 나는 그때 하칸이 내뿜던 숨소리와 내 심장의 도동
소리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것은 마치 아직도 쌀쌀한 봄날씨의 대기를
쾅쾅 울려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을 지나쳐갔다. 그 뗏목을 찾아내지 못한채, 이튿날 아침이
되었을 때 호숫가엔 더 이상 남이있는 뗏목이 없었고, 쓸잇꾼도 보이지 않았다.
쓸잇꾼들은 이제 일젼 동안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에게 여
름 내내 마음껏 띄우고 놀 수 있는 놀잇배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우리는 이틀을 더 기다렸다. 나는 그 사흘째 되
던 날을 아직도 이억한다. 그날 이른 아침 나는 누가 창문을 두드려대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하칸이었다. 그는 방화용 사다리로 이층을 내 방 창문께까지 올
라와 있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혀를 쑥 내밀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직도 차갑게 느껴지는 방바닥에 맨발로 내려섰다. 그러
면서 나는 그때 하칸이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내게 내밀어 보이는 것을 보았
다. 그것은 이제 공사를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이제 당장.
나는 서두러 옷을 입었다. 그리고 아침을 번게같이 뚝딱 해치운 뒤 밖으로 다
려나갔다. 하칸은 비 뒤켠에서 담벼락에 등을 기댄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
간 셔츠에 파란 운동화 차림이었다. 바지 색깔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내가
나오는 것을 보더니 씽끗 웃었다. 손에는 망치와 3인치짜리 못을 한줌 가지고
잇엇다. "자, 뛰어가자." 그는 말했다. "이제 우린 공사를 시작하는 거야!"
그날 아침부터 우리는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다. 재목을 다시 호숫가로 끌어낸
뒤, 제일 긴 놈을 가운데로 하고 셋을 가지런히 붙인 후 가름목을 대고 못질을
했다. 맨앞쪽엔 한 장의 널빤지를, 가운데는 석 장의 널빤지를, 맨뒤쪽에 두 장
의 널빤지를 대고 못질했다. 우리는 3인치 짜리 못을 사용했다. 뒤쪽에만 하칸니
가지고 온 6인치짜리 못을 두 개 박았다.
"이제 이 뗏목을 실컷 타서 소용이 없어지면 우린 이 널빤지를 떼어내고 못들
을 깨끗이 뽀아줘야 해. 못을 뽑아주지 않았다간 제재소의 톱이 결딴나거든."
하칸은 입에 못을 잔뜩 물고 있어서 잘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는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못질말 했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만 생각해서는 안되는 거야."
하칸은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세상일에 환했다. 나는 그에게서 배우는 것이
많았다. 나는 내가 아홉 살이었고 하칸니 열 살이었던 그해 여름을 지금도 생생
히 기억한다. 그것은 1910년이었다. 우리는 하루만에 공사를 완전히 끝냈다.
하칸은 몸무게가 38필로그램이었고, 나는 35킬로그램이었다. 우리가 올라타자
뗏목은 거의 대부분이 물 속에 담겼다. 겨우 10분의 1정도가 수면 위로 나왔다.
역시 물을 머금을 대로 머금은 재목들 탓이었는데, 그 편이 우리에겐 더 안심이
됐다. 더 이상 물에 가라ㅇ을 리는 이제 없을 터였으니까, 우리는 중심을 잘 잡
아야 했다. 우리들의 몸무게를 합치면 73킬로그램이었는데, 둘이 한쪽으로 치우
치면 그 쪽이 물에 쑥 잠기곤 했다. 둘이서 균형을 잘 잡아도 바람이 불면 물결
이 널빤지 위로 거침없이 올라왔다. 그리고 뗏목과 뗏목 사이의 고랑에는 언제
나 물이 올라와 있었다. 처음에는 그 물이 꽤 차게 느껴졌다. 최소한 13도나 1도
되었을 텐데도 그래서 우리는 장화를 신기로 했다. 뗏목은 완성되고, 주비도 끝
냈다. 우리는 약 3니터 가량 되는 장대로 꽤 먼 곳까지 뗏목을 밀고 갈 수 있었
다. 노로 사용할 널빤지도 두 개나 준비했지만, 노젓기가 몹시 힘들어 거의 사용
하지 않았다. 1인치짜리 못으로 뒤쪽에 모판에 고정시켜 놓은 나무상자에는 우
리의 식량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물 한 병, 길이가 10센티미터쯤 되는 소시지
한, 빵 반 파운드, 비스킷 여덟 조각, 칼 한 개, 백그램짜리 마가린 한 통, 알사탕
스무 알, 잼 작은 병 하나(그것은 차라리 시럽이라고 해야 알맞을 묽은 것이어서
나는 부엌에 들어갔을 때 가지고 나오려 하지 않았지만 하칸은 그게 더 좋을 거
라면서 가지고 가자기에 그에게 내주었던 것이다.)등등이었다. 그리고 또 뗏목은
든든하게 생긴 석궁 하나와 화살 여섯, 하칸은 낡은 투석기 하나와 탄약으로 쓸
조약돌 열 개 등으로 무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호수의 지배자가 된 것이었다.
내가 지금 얘기해야 할 그날, 모든 사건의지삭과 끝이 되었던 그날, 우리는 꽤
늦어서야 출발을 했다. 저녁 7시가 넘어서야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집에다간 ㄴ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고 나왔는데 6월이 되면 우리에게도 고기잡이가 허용되기
때문이었다. 우리 둘은 그 전날 돛을 시험해 보았다. 뗏목 양 옆구리에 장대를
하나씩 세우고 그 끝에 침대보를 두 귀퉁이씩 잡아맨 것이었다. 장대가 자꾸 쓰
러지는 통에 우리는 못질을 하고서도 장대와 떼목에 밧줄을 어려 번 동여매야
했다. 그래도 번번이 바람부는 쪽으로 기울곤 했지만, 우리가 출범을 한 그날 저
녁은 순풍이었다. 육지에서 곧장 호수 쪽으로 세지 않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
리는 군수품과 식량을 싣고는 바로 돛을 울려 출범했다. 우리는 호수 가운데로
미끄러져 나갔다. 저녁 해는 호수 저편으로 막 지고 있었다. 몹시 아름다웠다.
나는 하칸에게 아무 말 않으려 했지만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 아름다워 가만 있
을 수가 없었다. 하칸은 내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냥 웃어넘기기만 했다.
이제 와서 그때의 자세한 것까지 모두 기억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하칸은 뗏
목 앞머리에 앉아 있다가 우리가 격침시켜야 할 적선이 발견되었다고 소리질렀
다. 그는 옻을 모두 울리고, 적선을 끌어 잡아당길 쇠갈고리를 준비하라고 명령
했다. 보이는 것은 이제 상당히 높게 이는 물결뿐이었느네도 마치 자신이 해적
선의 선장이나 되는 듯이 고래골고래 돌격을 명령했다. 해는 완전히 떨어졌지만
하늘은 불타듯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칸은 일어나서 석궁을 찾기 위해 쪽으
로 갔다.
뗏목 위는 어디나 다 물기를 머금어 미끄러웠다. 나는 그가 비틀거리다가 미
끄러져 물 속으로 빠지는 것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모두가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칸은 빨갛게 타오르고 있는 수평선 앞에서 춤추는 길루엣으로 빨
진 것이었다. 그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물 속에 잠겨서 나를 올려
다보던 그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눈에 선하다. 나는 그의 겁먹은 얼굴과 함께 창
피해 하던 얼굴을 기억한다. 얼마나 멋쩍고 무서웠을 것인가.
호수의 수면은 물결이 심하게 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로 손을 뻗쳤다. 이미
어두워지고 이쓴데다가 해는 지고 남쪽의 그 빨갛게 물든 수면은 물에서 자맥질
을 하고 잇엇다. 그러면서도 그는 찡그린 얼굴로 웃음을 보이려 했다. 마치 '미
무슨 망신이람'하고 말이라도 하듯. 나는 계속 그에게로 손을 뻗쳐댔다.
다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한참이 지난 후의 일들이다. 한 시간, 어쩌면 그보다
더 시간이 흐른 뒤인지도 모른다. 나는 뗏목 뒤쪽에 앉아 있었고, 하칸은 앞쪽에
앉아 있었다. 그는 등을 나에게로 향한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추
운 듯이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뗏목 위를 둘러보고, 하칸이 물에
빠질 때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고 말았다는 것도 알았다. 돛대도 없어졌고, 노도
없어졌던 것이다. 노 대신 쓰던 장대도 없어졌다. 남은 것이라곤 내가 그위에 앉
아 있던, 못질한 식량상자뿐이었다. 그리고 하칸과 나만이 남은 것이었다. 우리
는 뗏묵 위에서 웅크리고 잇었다. 그 사이에 풍랑은 완전히 멎어 있었다. 수면은
거울의 표면 같았다. 주위는 어둡고 적막했다. 시간은 자정쯤 된 것 같았다. 달
은 이미 떠 있었다. 거의 만월이었다. 밤은 깊었고 물ㄹ은 소리없이 시꺼멓게 깔
려 있어ㅏ다. 달빛은 그 시커먼 수면에 윤기만을 주고 있을 뿐이엇다. 달빛을 받
으며 다 망가진, 움직이지 못하는 뗏목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두 아이. 그것
은 기이한 모습이었다. 은빛 윤기를 발하곤 하는 수면은 한없이 적막했다.
나는 우리가 호수 한가운데로 나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뒤를 돌아다보
니 우리 동네의 먼 불빛들이 마치 검은 비로드 천에 뚫린 하얀 바늘 구명들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다시 하칸의 움직일 줄 모르고 있는 잔등을 바라보았다. 그것
은 마치 꿈 속과도 같았다.. 그리고 또 이상했다. 그 교요함은 아로서는 깨뜨려
볼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깊었다. 나는 하칸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
다.
그렇게 우리는 말없이 오래오래 같이 앉아 있었다.
나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들, 하
칸이 어쩌다가 물에 빠졌으며, 어떻게 건져졌는지, 왜 저렇게 조용히 앉아 있는
지, 그런 것들을 알려 했던 것만을 기억한다. 그리고 바람이 왜 멎었는지, 왜 물
결이 잔잔해졌는지, 달이 어떻게 떠올랐는지에 대해서도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걱정은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느냐는 것이었다. 이젠
노도 없었고, 돛도 없었으며, 바람도 불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아주 먼 곳에서 노젓는 소리가 들려오
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동네 쪽이 아니고, 그 반대인 동쪽에서 들려오고
있는 소리였다. 그쪽에선 사람이 하나도 살지 않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노젓는 소리였다. 나는 시선으 ㄹ동쪽으로 하고 어둠
속을 응시했다. 입을 꼭 다문 채.
노젓는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드디어 보트의 검은 그림자가 달
빛 속에 미끄러져 오는 것이 보였다. 검은 그림자는 차츰 우리 쪽에서 뒷모습을
식별할 수 잇게 되었다.
나는 시선을 그쪽으로 못박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칸도 일어났다. 우리는
멀뚱히 선 채 점점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보트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세요!"
나는 소리쳤다.
"이리 와서 우릴 구해 주세요!"
보트의 사나이는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보트를 저
어 오더니 노를 치켜들며 배를 우리 뗏목에 갖다 붙였다. 치켜든 노에서는 물방
울이 뚝뚝 떨어지고있었다. 정말이지 꿈 속에서 일어나는 일만 같았다. 그는 우
릴 돌아다보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왜?
그는 보트를 뗏목에 바싹 붙이고서야 처음으로 우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달빛 속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모르는 남자였다. 한 번도 본 적
이 없는 사내였다. 머리칼이 검었고, 얼굴은 길고 가늘었는데, 그는 나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하칸만 바라보았다. 그느 우리 동네 사람은 아니었지
만, 우리를 구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는 하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칸은 그 손
을 잡고 조심스레 보트로 건너가 이물 ㅉ에 앉았다. 둘 사이에선 한 마디 말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선 채 그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보트는 뗏목에서 떨어져 갔다. 그것은 나로서는 무슨 영문인지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일어난 일이엇다. 사나이는 자기 자리에 앉더니 노를 저
어 갔다. 하칸은 나에게 등을 돌린 채 조심스럽게 ㅇ아 있었다.
사나이는 노질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보트는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나는 그들을 부를 수가 없었다. 소리칠 수가 없었다. 나는 선 채 화석이 된 듯
그쪽만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아중랫동안 그렇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즈금도 르렇지만,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도 이상했던 일이어서
이야기하기도 힘들다. 나는 보트가 안보이게 되자 뗏목 뒷자리에 주저앉았다. 젖
은 널빤지가 몹시 차가웠다. 나는 나무상자속에 식량이 있는 걸 알고 뚜껑을 열
었다. 그리고 전에는 손도 대지 않던 그 시럽 같은 잼이 든 병을 꺼내서 손가락
으로 퍼먹었다. 혀가 아리게 달았을 텐데도 별로 단 것도 느끼지 못했다. 먼동이
희뿌옇게 터오르면서 호수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안개가 호수를 오나전히 덮었
을 때에샤 날이 밝았다.
그리고 그 다음엔 나를 찾아나선 보트가 드디어 보였다.
제일 먼저 온 것은 할아버지였다. 나를 발견한 할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부르
면서 찾았는데 왜 대답을 한했느냐고 나무랐다. 그러나 나는 아무 소리도 못들
었었다. 뗏목에서 일어날 때 목께로 흘러내린 잼이 끈적거리는 것을 느꼈다. 할
아버지는 나를 두 손으로 안아 보트로 옮겨 태웠다. 나는 비로소 살아난 느끼;ㅁ
이었다. 기억나는 것은 내가 보트 바닥에 뉘어졌다는 것, 그리고 담요에 싸여 오
랫동안 두 다리를 쭉 뻗고 편안했다는 것, 그리고 그러는 동안 할아버지는 급
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조질을 대게 하고 있었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는 난 심하게 앓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높은 열에 시달림 이상한 꿈
들을 꾸었던 생각이 난다. 땀을 계속 심하게 흘렸고, 잠들었다가도 가위에 눌려
고함을 지르다가 여러 번 깨어나고 ㄴ했다. 어머니며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고모인 아니카까지 내 방으로 와서 곁에 있어주곤 했다. 며칠간이었는진 모르겠
지만, 하여튼 여러 날 그렇게 앓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잃던 것이 다 나았다. 마치 전깃불 스위치를 켠것처럼 순식
간에 건강해졌다.
"뗏목은 어떻게 되었어요, 할아버지? 그냥 재버려우셨어요, 아니면 끌어오렸어
요?"
나는 옆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끌어오기는 했었다만" 하고 할아버지는 입을 여셨다.
"재제소 사람들한테 뺏겼나요?" 나는 성습히 물었다.
"아니다. 끌어오기는 했었다만 다시 뜯어서 재목으로 떠내려 모냈지." 할아버
지께선 조용힌 말씀하셨다. "내 손으로 직접 했다."
"그럼 못은요? 전부 뽑아냈어요?"
"그래, 전부 뽑아냈다."
"잘하셨어요. 안 그랬으면 제재소에서 톱날을 전부 버리게 되었을 거예요"
"안다. 이 녀석아."
"그런데 할아버지, 하칸을 데려갔던 그 보트의남자는 누구예요?"
그러나 할아버지는 대답으 ㄹ안하셨다. 생각에 잠기신 얼굴로 앉아만 계셨다.
"그사람 우리 동네에서 사는 사람은 아니던데요?" 나는 말했다. "펄프 공장에
다니는 에릭손을 꼭 닮은 얼굴이긴 했지만, 에릭손은 아니었어요"
"아니구 말구." 할아버지께선 나직이 말씀하셨다.
"이제 좀 자거라."
할아버지는 내 곁에서 몸을 일으켜 나를 다시 한 번 굽어 보셨다. 나는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그러나 할아버지는 이상하게 허둥대는
모습이시더니, 화난 사람처럼 횡하니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가셨다. 그러나 내가
병상에서 일어나 다시 나가 놀게 된 다음 날 할아버지께서 다시 내레로 오셔서
먼저 하다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하셨다.
나는 모두 이야기해 드렸다.
그러는 동안 할아버지께선 교회에 간 사람처럼, 그래서 천사나 성자님을 새각
하고 있는 사람처럼 심각한 얼굴로 꼼짝 않고 앉아만 계셨다. 내가 이야기를 미
쳤는데도 아무 말이 없으셨다. 지루하게 묵묵히 앉아만 계셨다.
"못을 다 뽑아내셔다니 잘하셨어요. 하마터면 제재소의 기ㅖ를 결딴낼 뻔했는
데."
그때 할아버지는 입을 여셨다.
"하칸 그 애는 이제 다시 여기 나타나지 않을 게다!"
나는 그 해 여름, 많은 책을 읽었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책은
항해하는 네덜란드인의 이야기였다. 그는 한때 물에 빠져 죽어가는 선원을 구하
지 않고 재버려둔 무서운 죄를 범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어떤 항구에
도 정박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항해만 해야 하는 저주가 내려졌다. 그의 배가 항
구에 가까이 가면 바람이 불어와 그의 배를 깊은 바다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그
래서 그는 그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찾아 끊임없이 항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났다. 달밤이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밤, 뱃사람들이나 바
닷가 사람들 주엔 키에 묶여 끊임없이 항해만 하는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이 나타
나곤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들려드렸다.
"아시겠어요, 할아버지? 그를 볼 수 있는 건 아주 깊은 밤중뿐이에요. 낮에 본
사람은 없어요. 그리구 그가 누군진 아무도 모르고, 누구와도 그는 말을 나누지
않아요. 그리구 깊은 밤이 되어서야 육지 가까이에 나타날 수가 있는 거구요."
"그새서 어쨌다는 거냐?"
나의 기대에 찬 눈초리에 할아버지는 무슨 소리냐느 ㄴ듯 되물었다.
"아무도 그를 모른다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도 밤중에 나타난 것 아녜요? 모
르시겠어요, 할아버지? 아무래도 무슨 관련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무슨 봄뻐꾸기 소린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퉁명스럽게 대꾸하셨
다.
"그 사람은 밤중에 노를 저어 왔어요. 동쪽에서요. 동쪽엔 아무도 안 산다는
거 할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그쪽엔 나그네조차도 머무는 법이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그쪽에서 왔거든요.'
그 다음부터 나는 호수 건너편 쪽을 수시로 살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게
는 물론 그 까닭 같은 걸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러고 있는 나를 보
면 불러서, 잘 알아듣지도 못할 긴 이야기를 드려주거나 자잘한 심부름을 시키
거나 일을 거들게 했다. 그것은 아무래도 내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 해 여름은 몹시 따가웠다. 호수의 동쪽 땅은 하칸이 늘 '똥 같은 곳'이라고
브르던 곳인데, 실지로 그렇게 아름다운 고장이 아니었다. 물가엔 나무 등걸이
써ㅡ러져 하옇게 껍질이 벗겨져 있었고, 그 위를 덤불이며 남 뿌리들이 마치 목
졸려 죽은 것처럼 벌목을 한 곳이 많아서 보기만 해도 갈증이 일었다. 난ㄴ 물
한 병을 가지고, 그곳을 보다 가까이 살피기 위해 호숫가를 따라 강 쪽으로 가
보곤 했다. 그러나 강물이 흘러드는 북쪽과 흘러나가는 남쪽 호숫가까지 가보아
도 그 바로 건너편 쪽이나 잘 보였지, 가운데 쪽은 우리 동네에서 보느 ㄴ것만
큼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수시로 가보곤 했다. 몇 시간씩 그렇게 쏘
다니다가 물병이 비어 목이 타면 집으로 돌아왔다.
하여튼 그런 식으로나마 호수 건너편을 샅샅이 살피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찾
아낸 것이 없었다. 강물이 빠져나가는 남쪽 건너편 기슭에 거의 다 망가진 색이
바랜 하얀 보트가 한 척 끌어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
었는데, 그 보트는 벌써 몇 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는 것인 듯싶었다. 그래도 나
는 혹시나 해서 그쪽을 향해 큰소리로 불러보곤 했다.
"하칸! 하칸! 하칸!"
그러나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산울림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호수 건너편에 하칸이나 그 보트 사나이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고 생각
하게 되었다.
9월에 나는 마지막으로 그 남쪽 호숫가를 찾아가 보았다. 9월은 내가 자장 좋
아하는 달이었다. 먹을 수 있는 열매들이 도처에 익어 있어서 아무리 쏘다녀도
목마르거나 배고플 염려가 없었다. 그리고 산이나 들에서 그렇게 따먹는 그 이
름 모르는 열매들은 모두 하칸이 가르쳐준 것들이었다. 수면에는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나는 그날도 아무 성과없이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으
로 아주 단념하지는 않았다.
9월의 마지막 날, 나는 할아버지의 보트를 호수로 끌어냈다. 그것은 물론 금지
된 일이었지만, 그날은 내가 아홀 살이 되는 생일이었다.
나는 호수를 가로질러 노질을 해갔다. 엷은 안개가 수면 위를 온통 덮고 있었
다. 엷은 안개였기 때문에 파랗게 맑은 하늘이 그대로 올려다보였다. 안개 속을
노 저어 가니 마차 버려진 외로운 세계로 노 저어 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세상과 나와의 연관은 이미 모두 다 끊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희한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호수 가운데쯤에 이르러 노를 쳐들고 똑박 ㅇ아 정
적속에 귀를 기울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되어 있었다.
안개 속에 혼자 있게 되면 이상하게도 다른 때 혼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썰
렁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보다 감각이 예민해지는 법이다. 나는 지나간 일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앗다. 보트의 사나이느 왜 하칸만 데려갔을까?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돌아오질 않는 것일까? 어른들은 어쩌면 그 이
유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왠지 그들은 이유를 결코 이야기해 줄 것
같지 않앗다. 내가 슷로 알아내야만 하는 일일 것 같았다.
나는 한 시간도 더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안개는 여전히 걷히지 않고
있었다. 그때 나는 보트 한 척이 안개 속에서 내 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발
견했다.
그것은 내가 탁 있는 보트와 마찬가지로 통나무를 파소 만든 카누였다. 그리
고 붐명 나를 의식하고 오고 잇는 것 같았다.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알
아볼 수는 없었지만 어른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보트가 가까이 오자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를 저어 오
고 있는 사람은 하칸이었던 것이다. 분명 하칸이었다. 하칸의 보트는 서서히 다
가왔다. 안개 속을 뚫고 소리없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무
섭지가 않았다. 하칸은 소리 안 나게 계속 조질을 하면서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도 그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전보다는 훨씬 더 나이를 먹은
것 같아 보였다. 그는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주위는 아주 적막했다. 나느 꼼짝 않고 앉아 하칸의 보트가 내보트 옆을 지나
원을 그리며 안개 속으로 다시 사라질 때까지 그의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도 내
게서 내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얼굴 표정은 독특했다. 그는 미소르 ㄹ지
으며 곧장 내 얼굴만 바라보았는데, 그 얼굴 표정은 마치 '나는 여기 있다. 그러
니 너는 더 이상 날 찾을 필요가 없다. 너는 나를 찾은 것이 아니냐' 하고 말하
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젠 그를 찾는 일 같은 것은 그만두어 달라고 청하
는 듯싶었다.
우리는 서로 말은 한 마디도 안했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하칸은 내 보트 옆을 스쳐 지나가 반원을 그리며 사라져버렸다. 그
후 나는 어렸을 적의 유일한 친구인 그를 다시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생각에 잠
겨 오랫동안 움직일 줄을 모르고 앉아 있었다. 그런 연후에야 다시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가 원을 그리며 지나간 곳에 이르자 무언가 물에 떠 있는 것이 보
였다. 그것은 우리가 뗏목을 밀고 갈 때 쓰던 장대였다. 나는 하칸이 그것을 나
에게 돌려 주려 한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것을 가져가기로 했다. 그것을 건져
보트에 올려놓고 동네를 향해 노를 저었다.
동네 앞의 호수에 이르자 물가에 할아버지가 서 계신 것이 보였다. 나는 벌써
멀리서부터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화가 나신 것 같았다. 어깨
를 늘어뜨리고 몸이 빳빳해 보이는 걸 보면 그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았다. 나는 보트를 물가에 대며 노를 치켜 배에 얹었다. 그리고 장대를
집어들어서 육지에 던졌다. 할아버지는 그 장대를 눈여겨 보시더니 이렇게 물으
셨다. "이걸 어디서 찾았는냐?"
"찾았어요, 그냥." 나는 그렇게 간단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보트에서 뛰어내렸다. 우리는 모트를 육지로 같이 끌어올렸다. 그리
고는 할아버지께서 야단을 치시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이제 더 이상 하칸을 찾아 헤매지 않겠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어요.
그 짓은 이제 끝났거든요."
할아버지께선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묵묵히
나를 바라보며 서 계셨다.
"이젠 안 그럴 거예요. 그건 끝이 났거든요. 난 그렇게 결정했어요."
나느 언덕진 풀밭길을 올라갔다. 영근 풀열매들이 발 밑에서 바싹바싹 터지고,
종아리에 부딪쳐 맑은 금속성을 내었다. 할아버지는 어전히 보트 뒤쪽에 서 계
셨다. 모든 일이 이제 지나간 일로만 생각되었다. 그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사
람이 충격에 빠진다고 해서 반드시 희망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심한
일을 당해도 해결책을 찾게 마련인 것이다. 물론 충격을 경험했을 때의 기분은
참담한 것이지만, 사람은 거기서 무언가르 배우게 된다. 만약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더 이상의 성숙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언덕길을 걸으
면서, 항해하는 제덜란드인이며, 얼음나라의 공주 등, 내가 아는 모든 이야기들
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에게서 하칸을 빼앗아간 그 보트의사나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나는 이제 다시는 그 여름 에 앓았던 것과 같은 병은
앓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과 같은 장난을 하고 놀지도 않을 것이고, 그 향해하는 네덜란드인
과 같은 동화를 믿지도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는 ㅇ을 것임도 알
았다. 그리고 그것은 9월에 있었던 일이었다. 하칸도 보름만 더 있으면 열살이
되는 때였다. 나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할아버지께서는 여전히 보트 뒤쪽에 서
계셨다.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곧 진정되었다. 대기느 맑고
싸늘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 보트의 사나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집으로 행했다. 발밑에선 마
른 풀들이 바시락거렸고 종아리에 닿는 풀줄기들은 까슬했다. 이게 이야기의 전
부이다.
작품해설
환상 혹은 신비적 체험으로서의 눈뜸
아주 오래 전,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 나는 하칸을 데려간 보트 속의 남자
가 누구였던지에 대해 한동안 혼란을 느꼈다. 욘손이 워낙 서정적이고 사실적으
로 이야기를 끌어온 터라 그 부분에서 갑작스레 완상이나 신비의 요소를 느낄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나는 곧 몇 가지 근거에서 그 남자가 바로 형상화된 죽음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 첫째는 주인공이 그 남자와 첫 대면을 하던 때의 정황이다. 마
을에서 멀리 떨어진 호수 한가운데서 지는 햇살을 배경으로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 애쓰다 아마는 끝내 실패하고만 아홉 살의 아이에게 현실이 현실 그대로
파악될 것인가.
두번째로 그 사내가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의 형상화라는 느낌을 주는 것
은 그의 의사소통 방식이다. 주인공은 그에게 의사표시를 하지만 그쪽은 살아있
는 주인공에게는 반응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아마도 죽은 자임에 틀림없는 하
칸에게 손을 내밀었고 하칸도 자연스레 반응한다. 곧 그는 살아있는 주인공과는
아무런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는 어떤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보트 속의 남자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은
오랜 탐색 끝에 이루어지는 주인공과 하칸의 만남이다. 이제 보트 속의 남자는
바로 하칸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었으면서도 삶에 속한
주인공과 죽음에 속한 하칸 사이에서는 아무런 의사소통이 일어나지 못한다. 다
만 살아있는 쪽의 의식, 그것도 다분히 자의적인 추측이 있을 뿐이다.
결국 보트 속의 남자는 주인공이 아홉 살의 나이로 직면한 죽음을 형상화한
존재였고, 죽음의 추상성은 오히려 그 형상화를 통해 신비와 환상으로 체험되고
있다. 그가 누군가를 알아보았다는 것이나 이제 다시는 하칸을 찾아 나서서는
안된다는 깨달음도 모두 죽음에 대한 주인공 나름의 눈뜸일 것이다. 그것은 또
한 삶에 대한 아픈 눈뜸일 수도 있으며 그 아픔만큼 주인공의 의식은 성숙으로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선 것으로 보인다.
욘손은 스웨덴 작가로 저규적인 교육은 별로 받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일가를
이루어 국민적인 숭앙을 받는 작가가 되었다. 1974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순직한 영혼
지은이: 귀스타브 폴로베르
옮긴이: 진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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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세기 동안 퐁 레베크 읍의 아낙네들은 오벵 부인이 펠리시테 같은 하녀를
데리고 사는 것을 퍽 부러워했다.
이 하녀는 1년에 백 프랑만 받으면서 요리도 하고 걸레질도 하고 바느질 세탁
다리미질도 하며 말에다 굴레도 달고 가축을 기르고, 젖을 짜 버터를 만들 뿐
아니라, 안주인에게도 충실했다.-하지만 그 안주인은 사람들이 좋아할 인물이 아
니었다.
이 안중인은 재산없는 잘생긴 남자와 결혼을 했어ㅏ다. 그러나 남편은 1809년
초 아직 어린 두 아이와 많은 빚만을 남겨놓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녀
는 톡크의 농지와 제포스의 농장만 남겨두고 자그의 부동산을 팔아버려야 했다.
하지만 그 농지의 수익이 고작 5천프랑 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상 무레느의
집을 팔아 치우고 선대의 집이었던, 시장 뒤의, 훨씬 돈이 안 드는 다른 집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슬레이트 기와 지붕으로 된 이 집은 강까지 이어지느 작은 샛길과 골목길 사
이에 있었다. 집의 내부는 바닥이 고르지 않아 집이 마치 기울어진 듯이 보였다.
좁은 현관을 경계로 하여 양쪽에 부엌과 객실이 있었는데, 오벵 부인은 하루종
일 그 객실의 창 곁에서 짚을 넣은 안락의자에 앉아 지냈다. 객실의 흰 벽 쪽으
로는 마호가니 의자가 여덟 개 일렬로 줄지어 놓여 있었다. 벽에는 기압계가 걸
려 있었고 그 아래 피아노가 있었으며, 피아노 위에는 상자와 두꺼운 종이들이
쌓여 있었다. 또한 융단이 깔린 안락의자 두 개가 루이 15세 양식으로 된 노란
색의 대리석 벽난로 양ㅉ에 놓여 있었다. 난로 위에 놓인 탁상시계는 마치 베스
타의 신전 같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집안의 바닥이 뜰보다 낮았기 때문에, 집안
전체에서는 언제나 곰팡이 비슷한 냄새가 풍겨났다.
2층에는 우선 괸장히 큰'마님'방이 있었는데 퇴색한 꽃무늬의 도배지로 장식되
어 있었고, 혁명 시대의 왕당파 복작을 한 '나으리'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이
방은 작은 방으로 통했다. 이 작은 방에는 매트리스가 없는 아이들 침대가 두
개 놓여 있었다. 그 다음에는 객실이 있었지만 언제나 닫혀 있었고 그 안에는
헝겊 커버를 씌운 가구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복도는 서재로까지 이어졌는데
검은 나무로 된 커다란 책상을 삼면에서 둘러싸고 있는 책장에는 책들과 스크랩
을 한 문서류가 들어 있었다. 양쪽 책장엔 구아슈의 풍경화라든가 오드랑(17세기
판화가:역주)의 판화 등이 잔뜩 진열되어 있어서 바탕을 가리고 있었다. 그 그림
들은 지나간 시절의 호사와 번영을 회상시켜주는 것들이었다. 페리시테의 방은
3층에 있었고 그 방에는 빛이 드는 창문이 하나 있어 목장이 내려다 보였다.
그녀는 미사에 빠지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일어나 밤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식기를 치우고 문을 꼭꼭 당은 다음 타다 만 장작을 재 밑
에 집어넣고 난로 앞에서 묵주를 만지작거리면서 잠드는 것이었다. 물건 살 때
에누리하는 데 있어서는 그녀보다 질긴 여자가 없었다. 또한 얼마나 청결했는지,
그녀가 쓰는 그릇들은 그 어떤 하녀들도 흉내를 낼 수 없을 만ㅋ믐 반짝거렸다.
또한 어찌나 알뜰한지, 천천히 식사를 하면서 손가락으로 식탁 위의 빵 부스러
기를 주울 정도였다.- 그 빵은 자기가 먹기 위해 특별히 굽게 한 12리블(6킬로
그램)의 빵으로서 그녀는 그 한 덩어리의 빠응로 20일을 견뎌냈다.
또한 그녀는 등에 핀으로 꽂는 인디안식 네커치프를 사시사철 매고 있었으며,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모자를 썼다. 또 회색 양말에 빨강 페티코트를 입었고
짧은 재킷 위에 병원의 간호사처럼 가슴자대를 댄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야윈 편이었고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그녀가 스무 살 때 사
람들은 그녀를 마흔 살로 여기기도 했다. 50대가 되자 벌써 몇 살인지 알 수 없
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말수가 적은데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ㅎ으며, 절도가
있어서 마치 자동장치로 움직이는 목제 인형 같았다.
2
그녀도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연대담을 하나 간직하고 잇었다. 그녀의ㅣ
아버지는 미장이였는데 발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어서 어머니가 죽었고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펠리시테를 맡게 된 것은 어느 농사꾼이었다.
그는 아주 어린 그녀에게 시골에서 암소 보는 일을 시켰다. 그녀는 누디기옷 속
에서 떨며 엎드려 늪의 물을 마시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얻어맞기 일쑤였었
다. 그러다가 영문도 모르는 3백 스우의 도난 사건 때문에 쫓겨나고야 말았다.
그녀는 다른 농가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녀는 닭 보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주인
으니 마음에는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한테서 질투를 받았다.
8월 어느 날 밤(그즈음 그녀는 열여덟 살이었다.) 동료들이 그녀를 꼬르뷔르의
축제에 데리고 갔다. 그녀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시끄러움, 나무들 사이의 불빛,
레이스, 현란한 의상, 금빛 십자가, 뛰어노는 ㅅ한 사람들읜 모습을 보고 얼빠진
사람처럼 멍해 있었다. 그녀는 얌전히 구석편에 떨어져 있었다. 그때 궤짝 차 위
에 양팔을 괴고 파이프를 빨고 있던, 얼핏 보기에 유복해 보이는 한 청년이 그
녀에게 다가와서 춤추기를 청했다. 청년은 그녀에게 능금주, 커피, 파이, 스카프
를 사준 다음, 처녀가 자기의의도를 알아챘으리라 생각하고는 바래다 주겠다고
말했다. 귀리밭 모퉁이에서 그는 느닷없이 그녀를 넘어뜨렸다. 그녀는 무서워서
큰소리를 쳤다. 그는 물러갔다.
그후 어느 날 저녁, 그녀가 보오몽 가에서 느릿느릿 앞서 가고 있는 건초 차
를 지나쳐 그 옆을 스쳐가게 되었는데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나이가 바로 테오도
르였다.
그는 침착한 태도로 그녀에게 다가와서, 그때의 일은 술탓이었으니 모든 것을
용서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도 모른 채 다만 도망치고 싶은 생각만 들 뿐
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수확이라든가, 읍내 유지들 얘기를 했다. 그런 이야기를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가 시골인 꼬르뷔르를 떠나 에꼬의 농지로 옮겨
서 지금은 에꼬 읍의 높은 사람들과 이웃 사람처럼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녀는 그저 짧게 "아!"하고 말할 뿐이었다. 그는 모두가 그에게 살림을 차리
라고 독촉을 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급히 결혼할 생각은 없고 자
기의 취향에 맞는 여자를 기다리고 있노라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
러자 그는 결혼을 생각해 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사람
을 놀리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런 게 아녜요, 진담입니다!" 그리고 그는 왼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녀의 걸음이 늦추어졌다. 바람은 부드럽고 별은 빛났다. 네 마리의 말은 발길
을 끌면서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말은 고삐를 잡지 않았는데도 오른편으
로 돌았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는 그녀를 어둠 속으로 끌어
갔다.
테오드르는 다음 주에 그녀와 몇 번인가 남몰래 만날 수 있었다. 둘은 안뜰
구석에 있는 한 그루 외떨어진 나무 밑에서 만났다. 그녀는 요조숙녀라든가 쑥
맥은 아니었다. 동물들로부터 그 방면의지식을 얻었기 때문었다. 그러나 이성과
정조에 대한 본능이 그녀에게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 저항이 테오도
르에게 사랑을 불러 일으켰고, 그 사랑의 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혹은 정직
한 마음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결혼을 청했다. 그녀는 그것을 진실로 받
아들이기를 망설였다. 그는 몇 번이고 굳게 맹세했다.
얼마 후 그는 어떤 난처한 일을 털어 놓았다. 지난 해 그의 부모가 돈을 들여
사람을 사서 자신의 징병의무를 대신하게 했는데, 그러나 머지않아 자신이 끌려
가야 할 형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병역에 복무한다는 생각이 그에게는두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소심함이 펠리시테에게는 애정의 증거로 보였고 그녀의 사랑은
그로 인하여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밤만 되면 집을 빠져나갔고, 테오도르는 그
녀를 만나면 계속 불안스러운 모습을 보여 그녀를 괴롭게 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직접 군청에 가서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 보아야
겠으며, 돌아오는 일요일 밤 열한 시와 자정 사이에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약속
햇다.
그 시각이 되자 그년느 애인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만난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친구였다.
그는, 그녀가 두 번 다시 테오도르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징병
을 피하기 위해 테오도르는 루우세 부인이라는 툭크의 어느 돈 많은 여자와 결
혼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슬픔은 말로 표현 못할 정도였다. 그녀는 짱에 몸을 내던지고 울음을
트뜨렸다. 신의이름을 부르며 들 한복판에서 홀로 해가 뜰 때까지 슬퍼했다. 그
녀는 농가로 돌아가 그곳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 달 말에 제 몫의 돈을 받고
그녀는 조그마한 짐을 꾸려서 퐁레베크로 떠났다.
어느 연인숙 앞에서 그녀는 카프리느 모자를 쓴 어떤 읍내 과부에게 말을 건
네게 되었는데 그녀는 마침 식모를 구하던 참이라고 했다. 젊은 처녀가 아는 것
은 별로 없어 보였지만 마음이 꽤 서글서글할 것 같고 별 욕심도 없어보였기에
과부 오벵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좋아요. 내가 당신을 받아들이겠어요."
펠리시테는 15분 후에 부인의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처음에 그녀는 온 집안을 감싸고 있는 '집안 범절'이라는 것과 '나으리'에 대한
회상 때문에 일종의 전율 같은 것을 느끼면서 살아야 했다. 일곱 살과 네 살짜
리 폴과 비르지니는 그녀에게는 아주 귀중한 존재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 아이
들을 말처럼 등에 태워 주었으나, 오벵 부인은 아이들에게 함부로 키스를 하지
말도록 했다.
그것은 그녀를 매우 가슴 아프게 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행ㅂㄱ했다.
조용한 환경이 그녀의 슬픔을 잊게 한 것이다.
목요일마다 단골 손님들이 카드 놀이를 하러 왔다. 펠리시테는 미리 이 놀이
를 위해서 트럼프와 화로를 준비했다. 그들은 여덟 시 정각에 와서 열한 시가
되기 전에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은 가로수 길쪽에 살고 있는 고물상이 주워모은 고철들을 땅
에 펼쳐 놓는 날이었다. 그럴 때면 읍내는 떠들썩해졌다. 뿐만 아니라말 울음소
리, 새끼양의 울음소리, 돼지의 꿀꿀대는 소리등이 행길의 사륜 짐마차의 딸그락
거린ㄴ 소리와 함께 뒤섞여 소란스러웠다. 정오쯤, 장이 가장 활기를 띨 무렵이
되면, 집 대문 앞에 모자를 뒤로 데껴 쓴 매부리코의 ㅌ은 키다리 농부가 나타
나는 시가이었다. 그는 제포스의 소작인 로브랑이었다. 이어 작고 얼굴이 붉은
뚱뚱한 툭크의 소작인 리에 바르가 외색 저고리를 입고 박차가 달린 가죽 각반
을 신고 나타났다.
둘 다 자기네 지주에게 암탉과 치즈를 바치러 오는 것이었다. 펠리시테느 언
제나 그들의 얕은 꾀를 간파해내었다. 그러면 그들은 근를 향한 존경심을 간직
한 채 돌아가곤 했다.
일정한 시각이 아니지만 이따금 오벵 부인의 백부인 드 그르망빌 후작이 방문
하는 때도 있었다. 그는 방탕한 생활로 파산을 해서 파레에즈에 마지막으로 약
간 남아있는 토지로 생계를 유지하고 잇었다. 그는 언제나 점심때쯤 해서, 지저
분한 강아지를 끌고 나타났는데 이 강아지의 발이 온 가구를 더럽히곤 했다. 그
는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연방 모자를 잡고 귀족 같은
체 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독작을 하며 잔을 거듭하는 동안에 그만 여느때의
버릇이 나타나 상스런 언사를 예사로 내뱉는 것이었다. 펠리시테는 "드 그르망빌
님, 꽤 많이 잡수셨군요. 다음에 하기로 해요" 하고는 그를 점잖게 밖으로 밀어
냈다. 그리고 아예 문을 닫아 버렸다.
그녀는 전에 소송 대리인이었던 부레씨 앞에서는 반갑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하연 넥타이와 대머리, 와이셔츠 가슴에 단 장식, 다갈색의 큼지막한 포록
코트, 팔을 구부리면서 가루 담배를 집는 동작등, 이 인물 전체가 그녀에게는 비
범한 사람의 풍모가 우리에게 풍겨주는, 그런 감동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것이
었다.
그는 '마님'의 토지를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님과 함께 자주 몇 시간이건
'나으리'의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항상 체면을 손상케 하는 일은 두려워했
다. 그리고 사법관으리 신분을 더없이 존중하고 라틴어 실력을 뽐냈다.
그는 아이들이 흥미를 가시고 공부하게 해야 한다며 판화 그림으로 되 지리책
을 선물로 보냈다. 그 판화에는 깃을 머리에다 장식한 식인종이라든가 아가씨를
채가는 권숭이, 사막 안에 사는 베도우인 사람이라든가 갈구리에 걸린 고래 등,
세계의 별의별 풍물이 그려져 있었다.
폴은 이들 목판화를 펠리시테에게 설명해주었는데 그것이 그녀가 받은 문학공
부의 전부였다.
아이들의 교육은 읍 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는 가난뱅이 규이요씨가 맡았다. 글
씨 잘 쓰리고 유명한 그 사내는 장화 위에 나이프를 꽂고 다녔다.
날씨 좋은 날에 식구들은 아침 일찍 그 한복판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바다가
멀리 회색의 얼룩처럼 보였다.
펠리시테가 바구니에서 찬 고기를 꺼내면 낙농장과 붙어있는 방에서 다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 방은, 지금은 사라진 별잔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부분이었
으며, 다 떨어진 벽지가 바람에 너덜거렸다. 오벵 부인은 갖가지 회상에 잠겨 고
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이들도 입을 다물었다. "자, 나가들 놀아라!"하고 부인은
말했다. 아이들은 뛰어 나갔다.
폴은 곳간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새를 잡기도 하고, 자갈로 물베기 장난을 하
기도 하고, 아니면 북처럼 울리는 커다란 통을 막대기로 두들기기도 했다.
비르지니는 토끼에게 먹이를 주기도 하고 도깨비 바늘을 뜯으러 가기도 했는
데 종종걸음 때문에 수놓은 팬티가 드러나 보였다.
어느 가을날 밤, 모두가 목장을 지나 집으로 돌아갈 때의 일이었다.
초생달이 하늘의 일부를 비치고 있었고, 안개가 툭크 개천의 꼬불꼬불한 흐름
을 따라 숄처럼 펼쳐져 있었다. 잔디밭 복판에서 졸고 있던 암소들이 이들 네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세번째 목장을 지나치려는 순
간 몇 마리의 소가 벌떡 일어나서 그들 앞에 둥글게 진을 쳤다. "절대로 두려워
해서는 안돼요!" 펠리시테는 말했다. 그녀는 엘레지 같은 노래를 작은 소리로 부
르면서 제일 가까이에 있는 소의 잔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소는 방향을 바꾸었
다. 다른 소들도 뒤를 따랐다. 그런데 다음 목초지를 지나가려 할 때 돌연 소의
무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황소 울음소리임에
틀림없었다. 그 소는 두 여인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오벵 부인은 뛰려고 했
다. "안돼요! 안돼요! 더 천천히!" 그러나 그져들의걸음걸이는 빨라질 수밖에 없
었다. 뒤에서 점덤 가까워지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발굽이 쇠망치처럼 목장의
풀을 때리고 있었다. 소가 달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펠리시테는 뒤를 돌아보았
다. 그리고 두 손에 흙덩이를 움켜 쥐고 소의 눈을 향해 던졌다. 소는 머리르 숙
이고 뿔을 흔들었다. 소는 무서운 울음소리를 내면서 성이 나서 떨고 있었다. 오
벵 부인은 두 아이와 함께 목장 끝에서 무서움에 떨며 어떻게 이 높은 울타리를
넘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펠리시테는 그때까지도 소 앞에서 뒷걸음질치는 자세
로 연방 잔디의 흙덩이를 던지면서 "빨리 가요! 빨리 가!" 하고 외쳤다.
오벵 부인은 도랑으로 내려가 비르지니에 이어서 풀을 밀어 울린 후 비탈을
기어올랐다. 그녀는 열 번 쓰러지기도 했지만 마침내 위에 닿을 수 있었다.
황소는 이미 펠리시테를 향해 울타리 있는 데까지 육박해왔다. 거품이 근의
얼굴에 튀었고 소의 뿔은 단숨에 그녀으 배를 꿰뚫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겨우,
말뚝 사이로 기어갈 틈을 찾았고, 이번엔 깜짝 놀란 짐승이 우뚝 멈추어 섰다.
이 사건은 여러 해 동안 퐁 레베크에서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펠리시
테는 자신이 영웅적인 일을 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기에 조금도 자랑하지 않았
다. 그녀에게는 단지 비르지니의 일만이 걱정이었다. 비르지니는 놀란 나머지 신
경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푸파르 의사는 트루빌 바다로 해수욕 가기를
권했다.
당시, 사람들은 해수욕을 그다지 즐기자 않았다. 오벵 부인은 트푸빌의 상황을
조사하고 부레의 의견을 들은 다음 마치 긴 여행이나 떠나는 것처럼 준비를 갖
추었다.
짐을 하루 앞서 리에바르의 이륜 마차에 실어 보내고 이튿날이 되자 리에바르
가 말 두 필을 끌고 왔다. 그중의 한 마리에는 비단 등받이를 댄 부인용 안장이
놓여 있었고 다른 말 엉덩이께에 돌돌 말은 외투가 의자처럼 놓여 있었다. 오벵
부인은 리에바르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펠리시테는 비르지니를 맡고, 폴은 잘 타
고 돌려 주겠다는 약속으로 빌린 르샵투와씨의 당나귀를 탔다.
길이 매우 험하여 8킬로미터를 가는데 두 시간이나 걸리 정도였다. 말은 진흙
탕에 여러 번 말목이 빠져서 헤어나오느라고 허리를 사납게 흔들어댔다. 어떤
때는 바퀴자국에 걸려 쓰러지기도 했고 이따금 번쩍 머리를 추켜들고 나뛰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리에바르의 암말이 다시 걷기까지 기다렸다. 그는 도로변에
있는 토지 주인들의 얘기를 하면서 도덕적인 견해를 덧붙이기도 했다. 툭크의
중심부 쯤에 와서 일행이 한련꽃으로 둘러싸인 창 아래를 지날 때, 그는 어깨를
움츠리면서 "여기는 루우세 아주머니라는 여자가 살아요. 이 사람은 젊은 사람과
결혼했는데..." 라고 ㅁ라했다. 펠리시테는 그 나머지는 듣지 않았다. 말은 바삐
달리고 당나귀는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일행은 작은 길로 들어섰다. 문빗장을 돌
리자 사내 아이 둘이 나타났다. 일행은 문지방 가까이 있는 거름웅덩이 옆에 마
차를 세우고 마차에서 내렸다.
리에바르의 아내는 여주인의 모습을 보자 기쁘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그녀는
여주인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점심은 소의 허릿살, 내장, 소시지, 어린 닭의 후리
카세(잘게 썬 닭고기 요리), 거품이 이는 능금주, 과일에 설탕을 넣은 파이, 화주
에 담근 매실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마님의 신수가 좋은 것 같다든가, 아씨께서
'멋장이'가 됐다든가, 폴 도련님이 몰라보게 '커지셨다'든가 하는 숱한 치렛말을
늘어 놓았으며, 리에바르 일가가 몇 대 전부터 모시고 있었기에 당연히 잘 알고
있는, 주인댁의 조상들의 이야기도 잊지 않고 곁들였다. 이 농가는 그 집 주인처
럼 고풍을 지니고 있었다. 천장의 대들보는 벌레 먹었고, 벽은 연기에 그을었으
며, 유리창은 먼지로 흐려 있었다. 참나무로 만든 식기 선반에는 물주전자, 접시,
주석 그럿, 늑대의 덫, 양털 깎는 가위 등 별별 종류의 물건들이 있었다. 그곳에
는 커다란 관장기까지 있어서, 아이들을 웃게 만들었다. 셋으로 나뉘어진 마당에
있는 나무들에는, 뿌리언저리에 온통 버섯이 자라고 있었으며, 잔 곁가지 다발이
수없이 엉켜 있었다. 바람이 그중 몇 그루를 쓰러뜨리기는 했지만 다시 자리를
잡고 자라서는 숱한 사과 열매를 달고 휘어져 있었다. 다갈색 비단 같은 울퉁불
퉁한 초가지붕은, 아무리 거센 돌풍에도 끄떡없었다. 그러나 짐수레 곳간은 거의
부서져 있었다. 오벵 부인은 다시 말에다 마구를 달도록 지시했다.
트루빌에 도착하기까지는 반 시간 정도 더 가야 했다. 이 작은 무리의 여행객
들은 절벽을 지나기위해 마차에서 내렸다. 바다옆으로 불쑥 솟아나온 절벽이었
다. 약 3분 후 그들은 부두의 끝에 닿았고, 다비드 아줌마 집의 '금새끼양'이라
불리우는 마당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비르지니는 며칠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맑은 공기와 해수욕 덕분에 한결 원기
를 되찾았다. 비르지니느 수영복이 없어서 속옷차림으로 해수욕을 했고, 해수욕
이 끝나면 이제는 해수욕객들이 이용하고 있는 세관원의 오두막에서 펠리시테가
옷을 갈아 입혔다.
오후에는, 당나귀를 타고 로쉬 누와르를 지나 엔느크빌까지 가곤했다. 처음에
는 작은 오솔길이, 고원 잔디밭 사이의 길처럼 이어지다가 이윽고 목초지와 경
작지가 번갈아 나타나는 평원에 이르게 된다. 길섶에는 뱀딸기 덤불 속에 참호
랑가시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며, 여기저기 고목나무 가지들이 푸른 하늘을 향해
지그재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언제나, 외편으로 도빌, 오른쪽으로 르 아브르가, 그리고 정면으
로는 양양한 바다가 바라보이는 풀밭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바다는 햇빛에 반
짝였고, 거울처럼 매끄러웠으며, 너무 잔잔해서 그 고요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
했다. 그리고 광대한 하늘이 궁근 천장처럼 이 모든 것을 뒤덮고 있었다. 오벵
부인은 앉아서 바느질을 했고 비르지니는 그 곁에서 풀을 엮으며 놀곤 했다. 펠
리시테는 잡초를 뽑았고, 폴은 지루해 하며 돌아가고 싶어했다.
어떤 날은, 배를 타고 개천을 건너가서 조개르 줍기도 했다. 썰물때면 섬게나
가리비, 해파리 등이 눈에 띄었다. 한편 아이들은 바람에 밀려오는 파도 거품을
잡으려고 달려나가곤 했다. 파도는 모래 위까지 밀려와서는 해변을 따라 펼쳐졌
다. 해변은 까마득히 펼쳐져 있었지만 육지와 맞닿은 곳에는 언덕들이 있어서,
마치 경마장처럼 보이는 광활한 초원지대와 해변을 가르고 있었다. 그곳으로부
터 돌아갈 때면 저 언덕 밑에 자리잡고 있는 투루빌은,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점점 크게 보였으며 집들이 각양각색인 것이 마치, 마을 전체가 즐거운 무질서
속에서 피어나는 듯이 여겨졌다.
날씨가 너무 더울 때면, 그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바깥의 눈부신 햇살
이 덧문 판자 사이로 빛줄기를 만들었다. 마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드려오지 않
았다. 아래쪽 한길에도 사람은 없었다. 널리 퍼진 이 고요가, 온갖 사물들에게서
정적감을 짙게 느끼게 했다. 멀리서는, 조선공들이 뱃바닥에 못을 박고 있었고,
콜타르 냄새가 묵직한 미풍에 실려왔다.
그곳의 주된 기분풀이는, 어선이 항구로 돌아올 때였다. 배들은 항로표지를 통
과하자마자 갈지잘 나아기기 시작했다. 돛은 돛대의 3분의 2 지점까지 내려지고,
앞돛대의 돛은 풍선처럼 부푼 채, 배들은 물결을 헤치고 전진했으며, 항구 한복
판까지 들어오면 닻을 내렸고, 이윽고 부두에 정박하게 된다. 그리고 뱃사람들은
펄펄 뛰는 고기들을 뱃전 너머로 집어던진다. 짐수레 들이 줄지어 배의 정박을
기다리고 있으며, 모자를 쓴 아낙네들이 뒤어들어 바구니를 받고는 남편들에게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아낙네들 중의 한 명이 펠리시테에게 다가왔다. 잠시 후 펠리시테느
굉장히 기쁜 표정으로 제 방으로 돌아왔다. 펠리시테는 자기 언니를 만난 것이
었다. 이제느 르루 부인이 된 펠리시테의 언니 나스타시 바레트는, 가슴에는 젖
먹이를 안고, 오른손으로는 또 다른 어린아이 손을 잡은 채 또 왼편으로는, 누
먹을 허리에 척 기대고 베레모를 비스듬히 눌러 쓴 꼬마 수부를 거느린 채 그녀
에게 나타났다.
약 15분 후, 오벵 부인은 그녀를 귀찮다는 듯 내보냈다.
부엌 근처에서, 혹은 산책을 할 때면 그녀를 만날 수 있었지만,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펠레시테느 언니네 식구들에게 애정을 느꼈다. 그녀는 그들에게 이불, 옷가지,
요리요 화덕 따위를 사주었다. 그들이 그녀를 이용하고 있음이 병백했다. 펠리시
테의 그런 나약한 꼴에 오벵 부인이 좀 화가 난 데다가, 그녀의 조카가 폴에게
너무 허물없이 대하는 것이 보기 싫어서-그가 자기 아들에게 반말을 했던 것이
다-게다가 비르지니가 기침에다 감기 기운이 있었고 좋은 철도 지나갔는지라,
부인은 퐁 레베클 돌아가버렸다.
부레씨가 중하교는 어떻게 선책해야 하는지 부인에게 가르쳐 주었다. 캉에 있
는 중학교가 가장 우수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폴은 그리고 보내졌는데, 의젓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곳에서 살게 된 것이 기뻤던 것이다.
오벵 부인은, 아들을 멀리 보내는 것이 못내 섭섭했지만 체념했다. 어쩔 수 없
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비르지니는 차츰차츰 폴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펠리시테는 그가 만들어내던 떠들썩함이 못내 그리웠다. 하지만 한 가지 니럭리
가 그리움을 잊을 수 있게 했다. 크리스마스부터, 그녀는 비르지지를 매일 료리
료육에 데리고 가게 되었던 것이다.
3
그녀는 성당 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다음, 높은 천장의 성당 안 의자들 사이
로나아가서는, 오벵 부인의 의자를 펼치고 그 자리에 앉은 후 주변을 두러보았
다. 성가대석에는 오른편에는 소년들이 왼편에 소녀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사제
는 중앙에 서 있었다. 그 뒤편의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성령이 성모 마리아를 굽
어보고 있는 그림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마리아가 어린 그리스도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으며, 성궤 뒤에는, 괴물을 무찌르는 성 미카엘 모
습을 나타내는 목조들이 있었다.
사제는 우선 성서를 요약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펠리시테의눈앞에 정말로 천
국, 홍수, 바벨탑, 화염에 싸인 도시, 죽어가는 사람들, 쓰러지는 우상들이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그러한 황홀함 속에서, 하나나님에 대한 경외감과 하나님의오여
움에 대한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이야기를 들
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스도는 아이들을 귀어워하시고, 백성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눈먼 자를 낫게 하셨으며, 게다가 일부러 가난한 사람들 틈에서, 보잘
것 없는 마구간 짚더미 위에서 태어나신 착하신 분이데, 왜 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했단 말인가? 싸뿌리기, 수확, 포도 압착기 등,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친근한 것들이, 그녀의 삶 속에도 그대로 있었다. 신이 왕림함으로
써 그것들이 성화된 것이었다. 그녀는 '길잃은 어린양'을 향한 사랑으로, 양떼들
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으며 성령이 깃들었다는 마음으로 비둘기들을 어욱 사랑
하게 되었다.
그녀는 성령의 모습을 좀체로 상상할 수 없었다. 성령은 새일 뿐만 아니라 불
이기도 했고, 때로는 숨결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밤에 늪 근처를 떠도는
불빛도성령의 불이고, 구름을 밀어내는 것도 성령의 숨결이며, 은은하게 들려오
는 종소리도 성령의 소리인가 보았다. 그녀는 성당의 청결한 벽과 성당의 고요
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숭배에 젖어 있었다.
교리에 관해서는 근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않았
다. 사제가 설교를 늘어놓고 아이들이 따라서 반복하는 사이 그녀는 마침내 잠
에 빠졌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신발 소리를 요란하게 울릴 때야 그녀
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녀는 그런 식의 귀동냥으로 교리교육을 함께 받은 셈이 되었다. 그녀는 어
린 시절에 종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비르지니의
종교의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 비르지니가 단식을 하면 그녀도 단식을 했으며,
고해성사도 함께 했다. 또한 성체첨례일에는 둘이 함께 제단을 만들었다.
비르지니의 최초의 성체베례부터, 페리시테느 정신이 없었다. 비르지니가 신을
구두, 목주, 책, 장갑을 구하느라 거의 흥분 상태였다. 또한, 비르지니의 어머니가
딸에게 옷 입히는 것을 얼마나 떨리는 마음으로 도와주었는지!
미사가 거행되고 있는 동안 그녀는 극도로 불안스러워하기까지 했다. 구레씨
에게 가려서 성가대 한쪽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면으로, 면사포를 쓰고 그
위에 하얀 관을 쓴 일단의 처녀들의 모습이, 마치 눈 내린 들판 모습처럼 그녀
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귀엽게 생긴 목에, 고요한 자태를 뽐내고 있
는, 귀여운 꼬마 아가씨를 찾아낼 수 있었다. 종이 울렸다. 모두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오르간 소리에 맞춰 성가대와 군중이 아그누스데이(성스
러운 양)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소년들의 행진이 시작되었고 그들 뒤에서
소녀들이 일어났다. 소녀들은 한 발짝 한 발짝 밝게 빛나는 제단 앞으로 나아가
서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차례대로 성테의 빵을 받은 다음, 같은 순서로 자
기들 기도대로 되돌아 았다. 비르지니의 차례가 되자 펠리시테는 그녀를 보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참다운 애정에서 비롯된 상상력으로, 그녀에게는 그 아이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처럼 여겨졌다. 소녀의 얼굴이 자기의 얼굴이 되었고, 자신
이 어느새 소녀의 옷을 입고 잇었으며, 소녀의 심장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고동
치고 있었다. 비르지니가 눈을 감으면서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정
신을 잃을 뻔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사제가 펠리시테에게 성체배례를 주려했기에 그녀는 제의
실로 갔다. 그녀는 성체배례를 경건한 마음으로 받았지만 전과 같은 환희는 맛
보지 못했다.
오벵 부인은 제 딸을 나무랄 데 없는 여잘 키우고 싶어했다. 그런데 기요씨는
영어와 음악을 가르쳐 줄 수 없었기에, 그녀는 딸을 옹플레르의 위르슬린느 수
도원에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딸은 아무 반대도 없었다. 펠리시테는 마님이 무정하다고 한숨지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아마도 마님 생각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것들은 어
쨌든 그녀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들이었다.
이윽고, 어느 날 낡은 마차 한 대가 집 앞에 멈추더니, 비르지니를 데려갈 수
녀 한 명이 마차에서 내렸다. 펠리시테는 마차 지붕에 짐을 싣고는 마부에게 몇
가지 주의를 준 다음, 화물 넣는 곳에 여섯 개의 잼 항아리, 한 타스의배를 오랑
캐꽃 다발과 함께 넣었다.
비르지니는 참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는 어머니를 포옹했고, 오모니
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자, 용기를 내야해, 용기를" 이라고 되풀이했다.
발판이 올려지고 마차는 출발했다.
마차가 떠나자, 오벵 부인은 그만 실신을 해 버렸다. 저녁이 되자, 로르모 부
부, 르샵투와 부인, 로슈푀이유의 노천들, 드웁프빌씨와 부레씨 등, 부인의모든
친구들이 그녀를 위안하고자 찾아왔다.
딸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오벵 부인은 처음에는 무척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일
주일에 세 번씩은 딸에게서 편지가 왔으며, 나머지 날들은 딸에게 편지를 쓰거
나 정원을 산책하면서, 혹은 간간이 독서를 하면서 시간의 공백을 메웠다.
펠리시테는, 아침이면 여느때처럼 비르지니의 방에 들어가 벽을 바라보았다.
근는 이제 소녀의 머리를 빗질해주는 일도, 신발을 신기고 끈을 매주는 일도 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그 귀여운 얼굴을 매일 볼 수도 없고 함께 손을 잡고 외출
할 수도 없어졌다는사실 때문에 너무 섭섭했다. 그녀는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뜨개질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무디어진 손감각 때문에 실이나 끊어먹을 뿐이
었다. 아무것도 새로 익힐 수도 없고 게다기잠을 베대로 이루지 못하는 상태에
서, 그녀 말마따나 '좀이 쓸고 있었다.'
그녀는, 기분을 돌리기 위하여, 조카인 빅토르를 불러 올 수 있게 해달라고 오
벵 부인에게 간청했다.
그는 일요일 날 미사가 끝난 수에 오벵 부인 집에 도착했는데, 빰에 홍조를
띠고 가슴을 드러낸 채였으며 그가 지나온 들판의 내음을 풍겨주고 있었다. 펠
리시테는 곧바로 그에게 식사를 차려주었다. 그리고 둘이는 마주 앉아 점심을
먹었다. 그녀는 비용을 아끼겠다는 생각에 자신은 가능한 한 식사를 적게 했으
며 빅토르만 너무 많이 먹게 한 나머지 식사 후 그는 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저녁 기도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그녀는 그를 깨워 그의 바지를 손질하고
넥타이를 매준 다음 성당으로 함께 갔다. 그녀는, 마치 어머니라도 되는 듯이 자
부심을 느끼며 그 아이의 팔에 의지하고 있었다.
빅토르의 부모는 이 아이를 이용해서 언제나 그 무언가를 얻어내려 했다. 흑
설탕 봉지라든지, 비누 따위, 혹은 술 같은 것이었는데 심지어는 때때로 돈까지
얻어재게 했다. 빅토르는 기워입어야만 할 누더기 옷을 입고 나타나곤 했는데,
그녀는 기꺼이 옷을 기워주곤 했다. 다시 누더기 옷을 입고 그 애가 나타날 때
를 기다릴 수 있다는 행복감에서였다.
8월이 되자 빅토르의 아버지가 그르 연안 항해로 데리고 가버렸다.
때는 휴가철이었다. 폴과 비르지니가 집으로 온 것이 그녀에게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폴은 변덕쟁이가 되어 있었고 비르지니는 이미 어린아이 취급을 받을 나
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페리시테와 비르지니 사이는 왠지 서먹서먹했고 벽 같은
것이 느껴졌다.
빅토르는 모르게, 덩커크, 브리톤 등으로 잇따라 항해를 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녀에게 선물을 가져왔다. 처음에는 조개작은 상자, 다음에는 찻
잔, 세번째는 인형 모양의 빵케ㅇ이었다. 그는 더욱 미남이 되었으며 몸매 또한
훌륭했다. 수염도 적당히 나있었고 선량하고 솔직해 보이는 눈매를 하고 있었으
며, 마치 항해사처럼, 가죽모자를 뒤로 제껴 쓰고 있었다. 그는 뱃사람의 말투를
섞어가며 자신의 항해담을 그녀에게 들려주었고 근는 즐겁게 그 이야기를 들었
다.
1819년 7월 14일, 그러니까 월요일 날(그녀는 그 날짜를 잊을 수 없었다), 빅
토르는, 원양 항해를 하게 되었다는 것, 이틀 후면 옹플레르에서 상선을 타고 르
아브르로 가게 되었다는 것, 거기서 스쿠버 배로 옮겨탄 후 출범을 하게 되리라
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왔다. 아마2년 정도는 떠나 있으리란 것이었다.
그가 없는 생활을 떠올리자 펠리시테는 비탄에 빠졌다. 하지만 수요일 날 마
님의 식사가 끝나자, 그에게 작별인사라도 하려고, 그녀는 나무창을 댄 구두를
신고 퐁 레베크에서 옹플레르까지의 40리 길을 단숨에 달려갔다.
그런데 그리스도 십자가상으로 된 이정표를 지날 때 왼쪽 길을 택해야 할 것
을 그만 오른쪽으로 갔기 때문에 조선소 안에서 길을 잃고는, 온 길을 되돌아와
야 할 일이 생겼다. 그녀가 사람들에 게 다가가서 길을 묻자, 그들은 빨리 서둘
러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배들이 가득 정박하고 있는 부두를 한 바퀴
돌았고, 배를 매어놓은 줄에 여러 번 말이 걸렸다. 그녀는 짱바닥에 자빠졌고 여
러 가지 빛들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공중에 떠있는 말이 그녀의 눈에 들어
오자, 그녀는 헛깨비를 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부둣가에서는 바다를 보고 겁을 먹은 다른 말들이 울어대고 있었다. 도르레로
연결한 기중기가 말들을 끌어올려 배에 부리고 있었으며, 배에는 큰 사과술통과
치즈 광주리와 곡물 부대 사이에 승객들이 법석거리고 있었다. 닭들이 우는 소
리와 선장의고함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한 소년 선원이 이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로 뱃머리에 팔굽을 괴고 서 있었다. 펠리시테는 그가 빅토르라
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으면서도 무조건 "빅토르"라고 소리쳤다. 그가 고개를 들
었고, 그녀가 달려가려는 순간, 갑자기 사다리가 걷혔다.
여자들이 노래하면서 밧줄을 풀자, 배는 항구를 떠났다. 배에서 삐걱거리는 소
리가 났고, 묵직한 파도가 뱃머리를 때리고 있었다. 돛이 방향을 바꾸었고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얼마 후,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이는 바다 위에
서 하나의 검은 점처럼 보이더니 차츰차츰 희미해지면서 물에 잠기듯 사라져버
렸다.
펠리시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옆을 지나면서, 근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아이의 앞나에 신의가소가 있기르 빌었다. 그녀는 온통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구름을 향해 쳐든 채 오랫동안 서서 기도했다. 거리는 잠이 들었고, 세관원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문구멍을 통해 물이 급류소리르 내며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시계가 두 시를 쳤다.
수도원 면회소는 동이 트기 전에는 열리지 않겠지. 그리고 늦게 돌아가면 마
님이 역정을 내실 거야. 그녀는 또 한 명의 귀여운 아이, 즉 비르지니를 만나서
안아주고픈 생각이 간절했진만 그냥 돌아갔다. 그녀가 퐁 레비크로 되돌아왔을
때는 주막집 하녀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였다.
그 가엾은 아이는 몇 달 동안 파도 위를 떠다니겠지; 전의 항해들이야 하나도
무서울 게 없었지. 영궁이나 브르타뉴로부터는 금방 돌아올 수 있지. 하집만 그
녀에게 미국, 중남니 식민지, 서인도제도들은, 이 세상 저쪽 끝에 있는, 막연한
지역으로 까마득히 여겨질 뿐이었다.
그때부터 펠리시테는 오로지 조카 아이에 대한 생각만 했다. 해가 쨍쨍 비추
는 날이면 그 아이가 목말라할까봐 가슴졸였고, 천둥과 함께 비바람이 불면 그
가 벼락에라도 맞을까봐 겁에 질렸다. 굴뚝 안에서 바람소리가 들리고 슬레이트
지붕을 들썩일 때면, 그녀는, 그가 부러진 돛대 꼭대기에서 폭풍우를 맞아 바다
거품 속으로 내동댕이 쳐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혹은-판화 그림이 실
린 지리책에서 본 기억으로-그가 야만인들에게 잡아 먹히거나 숲 속에서 원숭이
들에게 붙잡히거나, 황ㄹ한 해변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거녀는 자신의 근심걱정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오벵 부인은 자기 딸 때문에 나름대로 걱정거리가 있었다.
수녀들은 비르지니가 정은 많지만 동시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사소한 감동을 받아도 그 애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피아노 공부도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오벵 부인은 수도원으로부터 정규적로 서신을 받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우체부가 오지 않아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엇다. 그녀는 소파로부
터 창가까지 방 안으 ㄹ서성였다. 정말로 예사일이 아니었다! 나흘씩이나 소식이
없다니!
자기를 예로 들어 마님을 위로하려고 펠리시테는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요. 마님, 여섯 달 동안이나 편지를 받지 못했는데요."
"누구한테?"
페리시테는 조용히 대답했다.
"저, 제 조카한테서요."
"줘, 자네 조카!"
오벵 부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서성대기 시작했다. 마치 '워 그따위 생
각을! 게다가 난 그 따위 비렁뱅이 같은 선원, 그런 별볼일 없는 놈은 우습게 생
각한다고. 내 딸 아이는 그에 비하면, ...원 생각을 좀 해봐' 라고 말하는 것 같았
다.
펠리시테는, 제아무리 하찮은 신분으로 태어나 자라났더라도, 이때만은 마님에
대해서 화가 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귿 잊어버렸다.
펠리시테에게는 비르지니의 일로 정신이 나가버리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그
두 아이는 그녀에게 똑같이 소중했으며, 그 둘을 마음 속에서 하나의 끈으로 묶
고 있어서 그들의 운명은 똑같은 것이어야만 했다.
약방주인이 펠리시테에게, 빅토르의 배가 하바나에 도착했음을 알려주었다. 근
는 신문에서 그 기사를 읽은 것이었다.
하바나는 담배로 유명했기에 펠리시테에게 그곳은 온통 담배 피우는 일 외에
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곳으로 상상되었으며, 그녀는 자욱한 담배 연기에 싸여
흑인들 사이를 돌아나니고 있을 빅토르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래야 할 겨우라
면' 그곳으로부터 걸어서라도 돌아올 수 있을까? 이곳 퐁 레베크와는 얼마나 떨
어져 있는 곳일까? 그런 것이 궁굼해서 그는 부레씨에게 물어보았다.
부레씨는 지도를 꺼내더니 경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어리
중절해 있는 펠리시테를 앞에 두고 유식한 척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윽고
그는 타원 모양의 반점으로 테두리를 그린 지역 속에서 눈에 보일락말락한 검은
점을 연필로 가리키며, "여기예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지도 쪽으로 몸으 ㄹ기울
였다. 색깔 선이 이리저리 얽혀 있는 지도는 그녀의 눈만 어지럽힐 뿐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부레씨가 잘 모르겠으면 물어보라고 하자, 그녀는 비토르
가 묵고 있는 집이 어디쯤인지 가르쳐달라고 했다. 부레씨는 두 손을 들었다. 그
리고는 재채기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토록 순신한 모습이 그를 한껏 즐
겁게 한 것이었다. 워낙에 알고 있는 것에 한계가 있었던 펠리시테로서는, 자기
조카의 초상까지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터였기에, 그가 왜 그렇게 웃어대
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2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잘날이 되자 리에바르가 여느 때처럼 부엌
으로 들어와서는 그녀에게 한 통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둘 다 글을 몰랐으므로
여주인의 도움을 청해야 했다.
뜨개질의 콧수를 세고 있던 오벵 부인은 뜨개질 감을 옆에 놓고 편지를 뜯어
보더니, 진저리를 한 번 치고는 그윽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
로 말했다.
"참 안된 일이군... 나쁜 소식이야, 자네 조카가..."
그가 죽었다. 그 이외의 것은 쓰여 있지 않았다.
펠리시테는 의자에 터썩 주저앉으며 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눈시울
이 금방 붉게 물들었가. 그런 후, 고개를 숙이고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멀뚱멀
뚱한 눈으로 이렇게 되풀이 말했다.
"가여운 아이, 가여운 아이..."
리에바르는 한숨을 지으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벵 부인은 약간 떨고
있었다.
오벵 부인은 그녀에게, 트루빌로 가서 언니를 마납라는 제안을 햇다. 펠리시테
는 몸짓으로 그럴 필요없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선량한
리에바르는, 이제 물러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그 애 부모들한테는, 이런 일이 아무것도 아닐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또 떨구었다. 그리고는 반짇고리에 있는 긴 바늘을 기계적으로
들었다 놓았다 했다.
여자들이 손수레를 밀며 안뜰을 지나고있었는데, 수레에 실린 옷가지가 삐죽
이 나와 있었다. 창문을 통해 그들의 모습이 보이자 펠리시테는 자기의 빨랫감
이 생까났다. 어젯밤 물에 담구어 놓았으니 오늘은 헹구어야 했다. 그녀는 밖으
로 나갔다.
그녀의 빨래판과 대야는 툭크의 냇가에 있었다. 그녀는 제방에 속옷 더미를
던져놓더니 소매를 걷어부치고는 빨래 방망이를 쥐었다. 그녀가 힘차게 내리치
는 방망이 소리가 근처 집 마당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초원에는 아무도 없었으
며 바람만이 냇물을 흥들 뿐이었다. 냇물 속에는 키가 큰 수초가, 물 속에 떠있
는 송장의 머리카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그녀는 저녁이 될 때까지 슬픔을 억누
르고 장하게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제방으로 돌아오자 다시 슬픔에 빠져들
었으며, 양쪽 관자놀이에 수 손을 갖다댄 채, 이불 위에 엎드려 베개 속에 얼굴
을 묻었다.
그로부터 훨씬 뒤, 그녀는 빅토르가 탔던 배의 선장으로부터 그가 어떻게 최
후를 맞게 되었는가를 알게 되엇다. 그가 황열병에 걸렸을 때, 병원에서 지나치
게 사혈을 했다는 것이었다. 으사 네 명이 그에게 배달렸으나 그는 금방 숨을
거두었고 주임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또 한 명이로군!"
빅토르의 부모들은 언제나 그를 거칠게 다루었었다. 펠리시테는 그들을 차라
리 보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들편에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는데, 잊어서 그랬
거나 혹은 가난한 사람이 지니기 쉬운 무감각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비르지니는 점점 쇠약해져갔다.
숨가빠하며 기침을 해대고, 열이 떨어지지 않는데다 광대뼈의 피부에 반점 같
은 것이 나있는 것이, 무언가 깊은 병의 징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푸파르씨는 남
쪽 지방으로 옮겨 잠깐 마물러보는 것이 괜찮겠다고 권했다. 오벵 부인은 그 충
고를 따랐다. 그러나 곧 비르지니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 퐁 레베크의 기후가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오벵 부인은 마차 전세업자와 협상을 맺어, 매주 화요일이면 수녀원에 다녀왔
다. 정원에는 세느강을 굽어볼 수 있는 작은 언덕이 있었다. 비르지니는 어머니
의 팔에 매다려, 포도나무 낙엽으 ㄹ밟으며 그곳을 산책햇다. 그녀는 탕카르빌의
성으로부터 르 아브르의 등대까지, 수평선 멀리 돛단배를 바랍곤 했다. 그럴 때
면 이따금 수름 사이로 햇살이 나타나 눈을 깜빡거려야 할 때도 있었다. 둘은
앞으로 덮인 햇살이 나타나 눈을 깜빡거려야 할 때도 있엇다. 둘은 앞으로 덮인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오벵 부인은 작은 통에 든, 질 좋은 말라가 산 포
도주를 준비해왔다. 하지만, 비르지니는 위하면 재미있겠다고 웃으면서도 두어
모금 입에 댔을 뿐 더 이상 마시지는 않았다. 비르지니가 기력을 회복했다. 가을
은 조용히 지나갔다. 페리시테는 오벵 부인을 안심시켰다. 헌데, 어느 날 저녁
펠리시테가 주변을 샅액하고 돌아ㅇ을 때 그녀는 문 앞에 푸파르씨의 마차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푸파르씨는 이내 현관으로 들어갔고, 오벵 부인이 황급히
모자의 끈을 묶고 있었다.
"내 발덮개하고, 지갑, 장갑을 갖다 줘요, 빨리 빨리!"
비르지니가 폐렴에 걸려서 위독한 상태였다.
"아직은 괘찮아요"라고 의사가 말했다. 의사와 부인은 마차에 올랐고, 마차는
눈보라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곧 밤이 되 것이었다. 몹시도 추운 날씨였다.
펠리시테는 급히 성당으로 갓 춧불을 하나 켰다. 그런 후, 그녀는 의사의 이륜
마차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고, 한 시간 후에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차 뒤쪽으로 가볍게 뛰어 올라서는 줄을 잡고 섰다. 그때 그녀에게 문득 한
가시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고, 대문을 안 잠궜네, 도둑이 들면 어쩌나!" 그녀는
마차에서 내렸다.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그녀느 의사의 집으로 갔다. 그느 벌써 돌아와서 또
시골로 왕진을 나간 참이었다. 그녀는 누군가 편지라도 가져오겠지 하는 생까에
여인숙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침 일찍, 결국은 리쥬행 합승마차에 올랐다.
수도원은 가파르고 작은 길 거의 끝편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수도원
가까이 가자, 조종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일 거야" 라고 그
녀는 생각했다. 펠리시테는 문고리를 나폭하게 잡아 흔들었다.
몇 분 후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반쯤 열렸고 수녀가 나타났다. 수
녀는 비통한 표정으로 "그 애가 방금 운명했어요" 라고 말했다. 그와 동시에 성
레오나르의 조종이 더욱 강하게 울렸다.
펠리시테는 3층으로 올라갔다.
방 문턱에서 그년느, 비르지니가 두 손을 모으고 입을 벌린 채, 그리고 머리
는, 그녀 쪽으로 향해 있는 검은 십자가 아래서 뒤로 제껴진 채 누워 있는 것을
보앗다. 비르지니는 흰 휘장에 싸여 있었는데, 그 얼굴이 휘장보다도 창백했다.
오벵 부인은 침대 발치에서 침대 다리를 두 팔로 안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원
장 수녀가 그 오른쪽에 서있었다. 장농 위에 켜놓은 촛불 세 개가 붉은 반점을
이루고 있었으며 안개가 창을 희뿌옇게 하고 있었다. 수져들이 오벵 부인을 데
리고 나갔다.
펠리시테는 이틀 밤 동안 유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똑같은 기도소리
를 반복해 중얼거렸으며, 덮개 위에 성수를 뿌렸고, 다시 돌아와 무릎을 꿇고는
유해를 응시했다. 첫날 밤을 새고 났을 때 그녀는 비르지니의얼굴이 누래졌으며,
입술이 파래졌고 코가 좁아졌으며 눈이 움푹 들어간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 얼굴에 수도 없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설사 비르지니가 눈을 떴더라도 그
다지 크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녀와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초
자연적인 일도 아주 단순하게 여겨질 수 있는 법이니까. 그녀는 유해를 화장시
킨 후 수의로 싸서 관에 넣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펼쳐주었다. 금발이었으묘ㅕ
그 나이에 비해서는 꽤 길었다. 펠리시테는 머리카락 한 뭉치를 잘라서 절반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결코 버리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유해는 오벵 부인의 의사에 따라 퐁 레베크로 운반되었다. 부인은 마차를 타
고 창문을 닫은 채 영구차를 뒤따랐다.
미사가 끝난 후, 약 45분이 걸려 묘지에 닿았다. 폴이 맨 앞에서 흐느끼며 걷
고 있었다. 부레씨가 그 뒤를 따랐고, 다음에는 마을의 유지들과 검은 외투를 감
싼 부인들이 뒤를 이었으며 펠리시테도 그 틈에 있었다. 그녀는 ㅈ카 생각을 하
고 있었다. 조카에게는 이런 식의 예식을 베풀어주지 못했기에, 마치 조카가 비
르지니와 함께 매장되는 것처럼 여겨져서 그 슬픔이 자못 더했다.
오벵 부인이 절망은 끝이 없었다.
우선 그녀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개했다. 딸애가 나쁜 짓도 안했고, 그토록 순
결한 영혼을 지녔었는데, 목숨을 앗아간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이렇게도 생각했다. 아냐! 그 애를 남부로 데려 가야만 했어. 그래, 다르 ㄴ의사
였더라면 그 앨 구했을 거야! 그녀는 자신을 책망했으며, 딸 아이의 뒤를 따르고
도 싶었으며, 꿈 속에서도 비탄에 잠겨 울부짖었다. 꿈중에서도 특히 한 가지 꿈
을 자주 꾸었다. 선원 복작을 한 그녀의 남편이 기나긴 여행으로부터 돌아와, 자
기는 비르지니를 데려가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울면서 이야기하는 꿈이었다. 그
리고 꿈 속에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비르지니를 어디에 숨겨야 할까 함께 궁
리를 했다.
한 번은 넋이 나간 채 정원으로부터 집 안으로 들어온 적도 있었다. 방금 전
에 남편과 딸이 차례차례 그녀 앞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장소를 가
리켰다) 그들은 아무 말도, 아무 몸짓도 없이 그녀를 바랍고만 있었다는 것이었
다.
몇 달 동안을 그녀는 꼼짝 않고 제 방에 쳐박혀 있었다. 펠리시테는 부드럽게
그녀를 타일렀다. 아들 생각을 해서라도 몸을 돌보아야 하며, 또한 딸 아이를 생
각하더라도, 그 아이를 잊지 않으려면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딸 아이?" 라고 오벵 부인은 잠에서라도 깨어난 것처럼, 되받아 말했다. "아!
그래! 그래... 자네는 그 아이를 잊지 않았지." 바로 무덤에 관항 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때까지 사람ㄷ르이 신경을 써서 오벵 부인을 무덤에 가지 못하게
왜왔던 터였다.
펠리시테는 매일 거기에 갔었다.
네 시 정각에 그년는 늘어선 집을 지나 언덕을 올라, 울타리 문을 열고는 비
르지니의 무덤에 닿았다. 장미빛 대리석으로 되 작은 원주 모양의 무덤으로서,
아래에 한 장의 포석이 깔려 있고 둘레에는 쇠사슬이 쳐져 있어 작은 뜰을 이루
고 있었다. 온통 꽃들로 뒤덮여 있어서 화단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
는 잎에 물을 주기도 하고 모래를 갈아주기도 했으며, 무릎을 꿇고 땅을 갈기도
했다. 오벵 부인이 그곳에 올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러한 것 때문인지 그녀는 슬
픔이 누그러지고 일종의 위안을 받았다.
이렇다 할 일 없이 몇 년이 비슷비슷하게 흘러갔다. 부활제라든가 성모승천제
만성절 등등의 축제 일 등이 유별난 날이라면 날이 뿐이었다. 단지 집안에서 일
어난 일들의 날짜만이 남아서 후에 기억될 뿐이었다. 예컨대 1825년에는 유리가
게 사람 두명이 현관 유리를 갈아 끼웠다든가, 1827년에는 지붕기와가 안뜰에
떨어져 어떤 남자 한명이 죽을 뻔했다든가, 하는 일들이었다. 1828년 여름에는
오벵 부인이 성찬의 빵을 받았다. 그때 부레씨가 이유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었
다. 그리고 옛 지기들이 하나씩 하나씩 죽어갔는데, 기요, 리에바르, 르샵투와 부
인, 로브란, 그르망빌 아저씨 등이 그들이었다.
어느 날 저녁, 우편 배달 마부가 와서는, 7월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퐁 레
베크에 전해주었다. 얼마 후 새 부지사가 임명되어 왔다. 전에 미국 영사였던 라
르소니에르 남작이었는데, 가족으로는 부인 외에도 처제와 벌써 장성한 세 딸이
있었다. 딸들이 호사로운 블라우스를 입고 뜰 잔디밭에 나오ㅘ 있는 모습이 자
주 눈에 띄었다. 그들에게는 흑인 하인 한 명 외에 앵무새도 한 마리 있었다. 오
벵 부인은 그들의 방문을 받았고, 또 답례방문을 빼놓지 않았다. 그들이 아주 멀
리서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펠리시테는 달려와서 부인께 보고를 했다. 하지만
부인의 마음을 정말로 움직일 수 있는 일은 단 한가지 밖에 없었다. 바로 아들
의 편지였다.
폴은 술집에 주로 틀어박혀 있을 뿐 진득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부인
이 그의 빚을 갚아주면 그는 또 다시 빚을 지곤 했다. 창가에서 뜨개질을 하면
서 짓는 한숨소리가 부엌에서 물레를 돌리고 있는 펠리시테의 귀에까지 들렸다.
부인과 페리시테는 함께 과수원 울타리를 따라 산보하곤 했는데 언제나 비르
지니에 대한 이야기를 햇다. 이런 것은 그 애가 좋아했을 것이라든지, 이런 경우
그 애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는 식이었다.
딸이 쓰던 자잘한 물건들은 모두 침대가 둘 있는 방의 벽장 속에 들어 있었
다. 오벵 부인은 가능한 한 그 벽장을 열어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여
름 체념하고 열어 보았다. 그러자 나방들이 몇마리 날아갔다.
딸의 옷들은 한 선반 위에 일렬로 줄지어 놓여 있었고, 옆에 인형 세 개, 굴렁
쇠 여러 개, 장난감, 딸이 쓰던 대야들이 놓여 있었다. 부인과 펠리시테는 함께,
속치마와 양말, 손수건 등을 꺼내어 침대 위에 펼쳐 놓았다. 태양이 이 가련한
물건을 비추어 얼굴이라든지 주인의 몸동작에 의해 생긴 주름들을 환히 보이게
했다. 무덥고 맑은 날씨였댜. 콩새 한 마리가 지저귀고 있었으며 천지가 깊은 평
온 속에서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털이 긴 밤빛의 비단 모자를 발견했
다. 온통 좀이 슬어 있었다. 펠리시테는 그 모자는 자기가 간직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눈물이 글썽이는 눈을 서로 마주치고 있었다. 이윽고 여주인이 두 팔
을 벌렸고 하녀는 그 품에 몸을 던졌다. 둘은 힘껏 껴안은 채, 신분차이를 지워
버리는 입맞춤을 하며 서로의 슬픔을 실컷 나누었다.
그런 일은 그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엇다. 오벵 부인은 마음이 헤
픈 사람이 이니었던 것이다. 펠리시테는 마치 은혜라도 입은 듯 그 일에 대새
감사히 여겼고, 그 뒤로는 마치 가축처럼 헌식적으로, 또한 종교적인 숭배감을
갖고 부인을 섬겼다. 펠리시테의 착한 심성은 더욱 널리 퍼졌다.
거리에서, 행진하는 군대의 북소리라도 들려오면 그녀는 능금주술병을 들고
나가 군인들에게 마시게 했다. 또한 콜레라 환자를 돌보기도 했다. 그녀는 폴란
드에서 망명온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했는데, 그중의 한 명은 그녀에게 청혼까지
했다. 하지만 둘 사이는 곧 틀어지고 말았다. 어느 날 아침 그녀가 삼종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그 사나이가 혼자서 부엌에 들어가 야채 샐러드를 만들어
유유히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폴란드 사람들에 이어 콜미슈라는 노인 건이 있었다. 그는 1793년에 무언가
끔찍한 짓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냇가에 있는, 헐어빠진 돼지우리에
살고 잇었다. 개구장이 아이들이 자주 벽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면서 노인에게
돌을 던졌고, 돌은 노인의 침대에 떨어졌다. 노인은 끊임없이 심한 감기에 시달
리며 그 침대에서 신음하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은 몹시 길었고 눈꺼풀은 열을
띠고 있었으며 팔뚝에는 머리통만한 종기가 나있었다. 펠리시테는 노인을 위해
속옷도 넣어 주었으며, 그 빈민촌을 청소하로고도 했고, 마님께 폐만 안된다면
세탁장을 그의 거처로 내주면 어떨까 하는 꿈까지 품었다. 노인의 종기가 터지
자 그녀는 매일 그에게로 가서 붕대를 감아 주었으며, 때로는 빵을 가져가서 먹
이고 짚어미에 앉혀 볕바라기를 시키기도 했다. 불쌍한 노인은 침을 질질 흘리
고 몸을 벌벌 떨면서 스녀에게 감사하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고 그녀가 가려고 하면 마치 그녀를 잃을까봐 두렵다는 듯 두 손을 뻗쳤다. 그
느 죽고 말았다. 펠리시테는 그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 미사르 부탁했다.
그날 그녀에게 커다란 행복이 찾아들었다. 저녁 식사 때 라르소니에르 부인
집의 흑인이 새장에 앵무새를 넣어가지고 온 것이다. 새장에는 횟대도 있었고
쇠사슬과 자물쇠도 있었다. 나마작 부인이 오벵 부인 앞으로 보낸 편지에 의하
면 암편이 지사로 승진해서 오늘밤 가족이 ㅁ두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남
작 부인은, 하나의 기념으로쏘, 또 오벵 부인에 대한 경의로써 앵무새를 보내니
받아주십사고 덧붙였다.
그 새는 오래 전부터 펠리시테의 상상력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새는 아메
리카로부터 왔으며, 아메리카라는 단어가 그녀에게 빅토르를 상기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흑인에게 그 새에 대새 자주 물었고, "그 새를 갖게 된다면 마님이
퍽이나 기뻐하실 텐데"라는 말까지 했었다.
흑인이 그 말을 자기 여주인에게 전했고, 또한 그 새를 가져갈 처지도 못되었
으므로 그런 식으로 처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4
새의 이름은 루루였다. 몸빛깔은 녹색이었으며 날개끝은 장미빛이었고 이마는
푸른색에다 목덜미는 금빛이었다.
그런데 루루는 횟대를 물어뜯는 고약한 버릇을 가지고 있는데다, 깃털을 뽑았
고 더러운 오물을 흩트렸고 먹이통의 물을 뿌려댔다. 진저리가 난 오벵 부인은
그 새를 아예 펠리시테 몫으로 주어버렸다.
그녀는 새를 훈련시키기로 했다. 얼마 안 있어 새는 "귀여운 놈, 감사합니다,
선생님. 안녕 마리" 등의 말을 되풀이하게 되었다. 루루ㅢ 새장은 문 옆에 놓여
있었는데, 그르 작코라고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당시 앵무새는 모두 작코라고 불리웠던 거싱다. 사람들은 루루를 머
저리나 얼간이로 여겼다. 펠리시테에게는 그 얼마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이었는
지! 또한 루루에게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는데, 누가 자신을 바라볼 때는 결코 입
을 열지 않는 것이었다.
어쨌건 루루는 동무를 구했다. 일요일이면 예의 로슈푀이유 아가씨들과 우트
빌르씨 및 새로 사귀게 되 약제사인 옹프르와씨, 바렝씨, 마튜대위들이 트럼프
놀이를 하는 동안, 새는 날개로 유리문을 두들겨 대는 등 하도 소란을 피워대서
서로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던 것이다.
부레씨의 얼굴이 새세게는 아주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루루는 그를 알
아보자마자 목청을 다해 웃어제꼈다. 새 울음소리가 옆집 뜰까지 울려 퍼지면
이웃 사람들이 창가에 얼굴을 내밀고는 함께 웃었다. 그래서 부레씨는 앵무새에
게들키지 않으려고 모자로 옆 얼굴을 가린 채 벽에 바짝 붙어 냇가까지 간 다음
정원 문으로 돌아들어가곤 하였다. 그가 새를 향해 던지는 눈초리가 두드러울
리가 없었다.
루루는 전에 푸줏간 소년의 바구니 속에 머리를 틀어박았다가 알밤을 맞은 일
이 있었다. 그때부터 새는 그 소년만 보면 부리로 쪼으려고 했다. 푸줏간 아이
파뷔는 새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겁을 주었다. 사실 그 소년을 팔에 문신
을 하고 구레나룻을 하고 있었지만 난폭한 성질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앵무
새를 좋아하는 편이었으며장난삼아 새에세 욕설을 가르치고 싶어했다. 펠리시테
는 앵무새가 그런 못된 입버릇을 배울까봐 루루를 부엌에 가두었다. 그런데 그
쇠사슬을 풀어놓으면 새는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새는 계단을 내려올 때는 발판에 둥근 부리를 댄 채 오른발 왼발을 차례로 들
오올렸다. 그러한 몸짓을 하다가 현기증이라도 나면 어쩌나하고 펠리시테는 염
려가되었다. 새가 병에 걸렸다. 루루는 말도 할 수 없었고 먹지도 못했다. 새의
혀 아래 부분에 종기 비슷한 것이 생겼던 것이다. 펠리시테는 손톱으로 얇은 껍
질을 벗겨내서 치료를 해주었다. 어느 날 폴이 무심결에 새의 콧구멍에 담배연
기를 내뿜었다. 또 한 번은 로르모 부인이 양산 끝으로 새를 약올렸고 루루는
양산 끝을 덥석 물었다. 결국 새는 기절하고 말았다.
펠리시테는 새가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풀밭에다 놓고는 잠깐 자리를 비웠
다. 그런데, 그녀가 돌아왔을 때 앵무새가 없어졌던 것이다.! 우선 그녀는 덤불
사이를 찾아보았고 물가도 찾아본 후 지붕에까지 올라가보았다. "조심해! 미쳤어
요?" 라는 여중인의고함소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후 그녀는 퐁 레베크에
있는 집들의 정원이란 정원은 다 찾아다녔다. 그녀는 지나는 사람을 붙들고는
"혹 어디서 제 앵무새를 보지 못하셨어요?" 라고 물어보았다. 그 앵무새를 모르
는 사람을 마난면 앵무새의 생김생김을 설명해주었다. 돌연, 그녀는 언덕기슭으
로부터 풍차 그뒤쪽으로 그 무언가 파란 것이 날아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하
지만 언덕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잡화를 팔러 다니는 상인 한 명이 조금 전
셍므랜느의 시몽 할머니 가게에서 그 새를 보았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녀는
그리고 달려갔다. 그러나 거기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마침내 근는누더기가 된 실발을 끌고 기진맥진해서 집으로 돌아왔
다. 거의 초죽음이었다. 그녀는 마님 옆 의자에 앉아서는 지초지종을 이야기했
다. 그때, 그녀의 어깨 위에 갑ㅂ게 얹히는 것이 있었다. 루루였다.! 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래,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다시 기력을 회복하기 힘드었다. 아니 차리리, 그로부터 다시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오한을 앓더니 이어서 구강염이 찾아왔고 어마후에는 귓병을 앓았다. 그리고
삼년 후에는 귀가 멀고 말았다. 따라서 그년느 큰 목소리로 말을 했고, 심지어
성당에서까지 그러했다. 그녀가 고백한 죄가 교구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간다 해
도 그녀에게 불명예가 될 리가 없고 그 누구에게도 폐가 되 바는 아니었지만,
사제는 앞으로 근의 고해르 성구실 안에서만 받겠다고 했다.
마침내 그녀는 환청 때문에 시달림을 받게까지 되었다. 그녀의 여주인은 자주
그녀에게 "맙소사! 이런 바보같으니!" 라고 말하게 되었고 그녀는 "그러문입쇼,
마님"이라고 대답하고는 주변에서 그 무언가를 찾는 것이었다.
그녀의 좁은 사고의틀은 더욱 좁아져서, 울리는 종소리도 황소의 울음소리도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것들이 유령처럼 소리없이 움직일 뿐이었다.
오직 한 가지 소리만이 근의귀에 닿았으니 바로 앵무새의소리였다.
마치 그녀의 그분을 풀어주려는 듯이 앵무새의 딸그락 쇠꼬챙이 돌아가는 소
리라든지, 생선 장수가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 맞은편네 살고 있는 목재상의 톱
질 소리 따위를 흉내내었다. 그리고벨이 울리면 오벵 부인의 말투를 흉내내어
"펠리시테, 대문이야, 대문!"이라고 지껄였다.
그녀와 새는 곧잘 대화를 나누었는데, 루루는 자신의 장기인 세 가지 문구를
싫증나도록 반복하는 것이었고 펠리시테는 그와는 상관도 없는 말을 대답으로
해주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속에는 애정이 넘쳐 흘렀다. 그녀의 고독 속에서
루루는 자식이자 애인이었다. 새는 종종 근의손가락 위로 올라가서는 입술을 가
볍게 깨물거나 숄에 매달리거나 했다. 그리고 그녀가 마치 갓난아기에게 젖이라
도 먹이는 양,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흔들면, 그녀 모자의 큰 챙과 새의 깃이 함
께 흔들렸다.
구름이 뭉게뭉게 밀려오고 천둥이 치면 루루는 아마도 그가 태어난 고향 숲의
소나기가 생각나는지 날카롭게 울어댔다. 물 흐르는 소리가 그의정신을 흐려놓
는지 루루는 미친 듯 날아다녔다. 천장까지 날아올라 온갖 것을 뒤집어 엎기도
했고, 창을 통해 뜰로 나가서는 진창 속을 헤집기도 했다. 하지만 금방 돌아왓는
장작 받침쇠 위에 앉아, 깃털을 말리려는지 깡총거리면서 때로는 꽁지 쪽을, 대
로는 부리 쪽을 난로 쪽으로 향했따.
1837년 어느 몹시 추운 겨울 날 아침 펠리시테는 루루가 추울까봐 난로 곁에
그를 놓았었는데, 그만 죽은 채 발견되었다. 새장 한가운데, 머리를 숙이고 발톱
으로 창살을 움켜쥐 채였다. 충혈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독초를 먹고 새가 죽었
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아무런 즉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뷔
에게 혐의를 씌었다.
그녀가 어찌나 울어대는지 여주인이 마침내, "그럼 그걸 박제로 해보지!"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녀는 항상 앵무새에게 부드럽게 대해주던 약방 주인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는 르 아브르로 편지를 보냈다. 페라세라고 하는 사람이 그 일을 맡았다. 합승
마차에서는 자주 소포 분실 사고가 있었기에, 그녀는 앵무새를 가지고 직접 옹
플레르로 가기로 했다.
길 양편으로는 잎이 진 사과나무가 연이어 계속되고 있었다. 도랑은 얼음으로
덮여 있었고, 농가 주변에서는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조그마한 나막신
을 신은 채, 외투 속에 두 손을 묻고는 장바구니를 들고 길 한복판을 잰걸음으
로 걸어나갔다.
그녀는 숲을 니나고, 오셴느를 지나서, 셍가티엠에 닿았다.
그녀 뒤편으로 한 대의 우편 마차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비탈을 쏜살같이 내
려오고 있었다. 한 어자가 길을 비킬 생가도 않은 채 태연히 길 한폭판으 ㄹ걷
는 것을 보고 마부는 벌떡 일어났다. 조수도 소리를 질렀지만, 마부조차 제어치
못하게 된 네 마리의 말은 속력을 더할 뿐이었다. 선두의 두 마리 말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마부는 힘껏 고삐를 당겨 말을 길가로 몰았다. 잔뜩 화가 난 마
부는 팔을 쳐들더니 긴 채찍으로 그녀를 위에서 아랠 휘갈겼고, 그녀는 벌렁 뒤
로 자빠지고 말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가 취한 첫번째 행동은 바구니를 열어보는 것이
었다. 다행히 루루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오른쪽 뺨이 화끈거리는 것
을 느꼈다. 손을 대보았더니 빨갛게 물들었다.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갈 더미 위에 앉아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볍게 두드린 후, 준비해 온
빵껍질을 씹었다. 그리곤 새를 바라보며 상처의 아픔을 잊었다.
엑크모빌 꼭대기에 도착하니 옹플레르의 들불이 마치 별들처럼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바다는 저 멀리 막막히 펼쳐져 있었다. 갑자기 온몸에 힘
이 빠지는 듯하여 그녀는 멈추어서ㅕ다. 어린 시절읜비참했던 새왈, 첫사랑의 환
멸, 노카의떠남, 비르지니의 죽음들이 마치 물결처럼 한꺼번에 밀려와서, 그녀의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잠시 후 그녀는 이야기를 나눌 배의 선장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보내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지도 않은 채 그에게 여러 가지 부탁을 했다.
펠라셰는 앵무새를 오랫동안 맡아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다음 주까지 일
을 끝내겠다는 말만 했다. 6개월이 니자자 그는 상자를 발송했다고 알려 왔다.
하지만 루루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그놈들이 ㄴ게서
그걸 훔쳐갔을 거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마침내 루루가 도착했다. 마호가니 대에 막힌 나뭇가지 위에 똑바로 서서, 한
쪽 발을 하공에 내놓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그리고 입네느 호두를 모고 있
는 근사한 모습이었다. 호두에는 멋을 낸다고 금박을 씌워놓았다.
그녀는 그 박제를 자기 방에다 넣어 두었다. 그녀는 제 방에는 사람을 별로
들이지 않았는데, 예배당 같기도 하고 시장 같기도 한 곳이었다. 그만큼 별의별
종교적 물건과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방에는 커다란 옷장이 있어 문을 여닫기에 거추장스러웠다. 정원 바로 위의
창문과 마주하고 있는 작은 창으로는 안뜰이 내려다 보였다. 침대 곁에 있는 탁
자 위에는 물주전자 한, 빗 두 개, 이빠진 접시에 놓인 사각형 비누가 놓여 있었
다. 벽 모퉁이로는 묵주, 부적, 성모상 몇 개, 야자 열매로 만든 성수기 등이 있
었다. 마치 제단처럼 천으로 덮어 놓은 옷장 위에는빅토르가 그녀에게 준 조개
상자가 있었다. 그외에 물뿌리개와 공, 몇 권의 습자첩, 판롸 그림으로 된 지리
책 따위가 있었다. 또한 거울을 걸어놓은 못에, 바로 그 작은 비단모자가 걸려
있었다! 펠리시테의 이런 식의 마음 씀씀이는 아주 옛날 일까지 닿아 있어서 주
인 어른의 프록 코트까지도 거두어 둘 정도였다. 오벵 부인에게는 필요없게 된
이러한 모든 고물들을 그녀는 거두어 들여 제 방에 두었다. 이런 식으로, 옷장
끝에는 조화가 놓여 잇었고 천장 구석진 부분에는 아르투와 백작의 초상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방 안까지 삐져나온 굴뚝 위에 작은 판자를 이용해서, 루루를 놓을 받
침대를 만들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그녀는 새벽빛 속에서 새를 발견하고는 ,
지나간 나날들, 여러 가지 의미없는 일들을 자ㅈ란 데까지 아무런 슬픔없이 아
주 잔잔한 마음으로 회상했다.
그 누구와의 교제도 없이 그녀는 몽유병자처럼 마비상태 속에 살았다. 그런데
성체의 축제 행렬이 그녀에게 생기를 주었다. 그녀는 거리에 새워질 제단을 아
름답게 꾸미기 위해 촛대나 돗자리를 구하러 이웃 집들을 들락거렸다.
성당에서 그녀는 언제나 성령상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앵무새의 그무엇인가가
깃들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비슷한 점은 '우리 주님'의 세례식을 보여주고
있는 에피날상에 더욱 또렷이 나타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랏빛 날개와 에메
랄드 색의 몸을 한 '우리 주님'의 모습은 정말로 루루의 초상 바로 그것이었다.
그 그림을 사서 그녀는 그 그림을 아르투와 백작 대신 벽에 걸어 놓았다. 그
리하여 그녀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앵무새는 성령과의 관계로 인
해서 신성화되고, 성령은 근의 눈에 생생하게 살아나 더욱 이해하기 쉽게 됨으
로써, 그 둘은 그녀의 생각 속에서 서로서로 맺어졌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비둘기 대신 루루의 조상 하나를 택하셨는지도 모른다. 비둘
기는 소리를 낼 줄 모르니까. 펠리시테는 성상을 보면서 기도를 드렸고, 이따금
새 있는 쪽을 흘끗 쳐다보기도 했다.
그녀는 성처녀 봉사단에 가입하고 싶어했다. 오벵 부인이 그것을 말렸다.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폴의 결혼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공증인의 서기 노릇을 했고, 이어서 장사도 하고, 세관 및 세무
서에서도 일도 하는 등 방황했었는데, 서른여섯이 되었을 때 갑자기 하늘의 계
시라도 받은 듯 제 길을 찾았던 것이다. 바로 등기소 일어었다! 그는 그 방면에
서 아주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어느 검사관이 제 딸을 그에게 주고 후견인이 되
겠다는 제안을 하게 된것이었다.
한결 착실해진 폴은 근를 어머니에게 데리고 왔다.
그녀는 퐁 레베크의 관습을 깔보고, 마치 귀공녀처럼 굴어서 펠리시테의 눈에
거슬렸다. 오벵 부인은 그녀가 떠나자, 무거운 짐이라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음 주에, 부레씨가 브르타뉴의 어느 여인숙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자살했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의 평판에 대해서도 수많은 의혹이 제
기되었다. 오벵 부인이 그의 회계를 조사해보니, 그의 잇따른 비열한 짓이 금방
드러났다. 소작료를 착복하고, 제복을 밀매하고, 영수증을 위조하는 등등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사생아도 있었고, 도쥘레의 어떤 여자와 모종의 관계까지
있었다.
이런 파렴치한 행위들이 오벵 부인을 몹시 슬프게 했다. 1853년 3월에 그녀는
가슴에 통증을 느꼈고, 혀에는 백태가 가득했다. 거머리로 사혈을 해도 고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기를 아흐레째 되던 날 그녀는 일흔 두 살로써 생을 마감
했다.
띠모양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던 다갈색 머리카락 때문에 그녀는 항상 나이보
다 젊게 보였다. 그녀의 죽음을 애석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는데, 그녀의 행동
거지가고상해서 사람을 가깝게 끌어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주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법인데도 펠리시테는 눈물을 흘렸
다. 마님이 자기보다 먼저 죽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혼란스러웠다. 그런 것은
사물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허용할 수 없는 괴상한 일로여겨졌던 것이
었다.
열흘 후(브장송으로부터 달려오는 데 필요한 기간), 상속인 부부가 왔다. 새댁
은 이곳 저곳 서랍을 뒤적이고, 좋은 가구면 고르고 그그렇지 않으면 팔아버렷
다. 그런 후 그들은 등기소로 되돌아갔다.
마님의 안락의자, 작은 탁자, 발덮개, 그밖에 걸상 등이 없어져 버렸다. 칸막이
벽 한가운데 여러 곳에 노란 네모꼴 자국이 나 있어 판화가 걸려 잇던 곳임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두개의 작은 침대를 매트리스 째로 운반해
갔다. 게다가 벽장 속에서 비르지니의 물건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펠리시
테는 슬픔에 젖어 계단을 올라갔다.
이튿날 대문에 쪽지 한 장이 나붙었다. 약제사가 집을 팔기 위해 내놓은 것이
라고, 그녀의 귀에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면서 제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녀를 절망에
빠지게 한 것은 자신의 방을 내놓아양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가엾은 루루에게
그토록 알맞는 그곳을! 비탄의 눈길로 새를 감싸면서 근는 성령에게 애원했었고,
앵무새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는 우상숭배의 습관이 생겼다. 때때로 천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유리로 된 새의 눈에 닿아 눈부신 광선을 번쩍이게 했고,
그녀는 황홀경에 빠졌던 것이다.
그녀는 주인 마님의 유언에 으해 380프랑의 연금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마
당엔 채소를 부쳐먹을 수 있었다. 옷은 눅을 때까지 입을 만큼 충분히 갖고 있
었으며, 해가 지자마자 잠자리에 들어 연료를 아꼈다.
그녀는 전혀 외출을 하지 않앗다. 자기 집의 옛 가구들 몇개가 진열되어 있는
고물상 앞을 지나기 싫어서였다. 전에 한 번 크게 놀란 사건 이래로, 그녀는 한
쪽 다리를 절었다. 거기다 기운도 다 떨어졌기 때문에 식료품상을 하다가 망한
시몽 할머니가 매일 아침 와서 장작을 패주고 물을 길어 주었다.
근의 시력도 약해졌다. 덧문은 굳게 잠긴 채 열리지 않았다. 몇년이 지나갔
다. 그러나 집은 세들겠다는 사람도 사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쫓겨날까 두려워
펠리시테는 무엇 하난 수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지붕 판자는 썩어갔고 겨올 내
내 그녀의 베개는 습기에 젖어 있었다. 부활제가 지난 뒤 그녀는 피를 토했다.
그러자 시몽 할머니가 의사를 부러왔다. 펠리시테는 자기 건강이 어떤지 알고
싶어했다. 하지만 귀가 너무 어두워져서 '폐렴'이라는 단어 하나만이 겨우 들려
올 뿐이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단어였고 그녀는 조용히 "아! 마님과 똑같군요"
라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주인 마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
문이었다.
제단을 세우는 날이 가까워졌다. 제1제단은 여느때와 같이 언덕 기슭에 세우
고 제2제단은 우체국 앞, 제3제단은 거리 한가운데 세울 참이었다. 그런데 제3제
단을 세울 장소를 놓고 경합이 붙었고, 결국 교구의 여자들이 오벵 부인의 안뜰
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펠리시테는 점점 숨이 차고 열이 더해갔다. 그녀는 제단 세우는 일에 아무 도
움도 되 수 없어서 슬펐다. 최소한 그 제단에 무언가 바칠 수라도 있다면! 그때
앵무새가 생각났다. 이웃 사람들이 당치않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교구가 하락을
해주었다. 그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자기가 죽으면 자신의유일한 재산인 루루
를 받아주십사고 사제에게 간청할 정도였다.
화요일부터 성체 대축제 전날인 토요일까지, 펠리시테의 기침 빈도수가 잦아
졌다. 그날 밤 근의 얼굴은 부어올랐고 입술이 잇몸에 오르라ㅂ었으며, 구토 증
세를 보였다. 이튿날 날이 새자 스스로 마니막ㅇ이 되었음을 느낀 펠리시테는
사제를 불러오게 했다.
종부성사를 하는 동안 세 명의 여인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그러자 그녀는 파
뷔에게 할 말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일요일 나들이 옷을 입고 나타났는데, 이런 비통한 분위기가 어색한 듯
서먹서먹해 했다. "용서해 주게." 그녀는 팔을 뻗치려고 안간힘을 다하면서 말했
다. "루루를 죽인게 자네인 줄 알았어."
"뭐야,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나같은 사람을 살해자로 의심하다니!" 그는 화가
나서 떠들어댔다.
"이 할머니, 제 정신이 아니네, 자 보세요."
펠리시테는 가끔씩 망령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 명의 여인이 돌아갔고 시몽
할머니는 점심 식사를 했다.
잠시 후 할머니는 루루를 데리고 와서는 펠리ㅅ에게 가까이 가져가면서 말했
다.
"자, 작별 인사를 해야지."
루루는 박제품이었는데 벌레가 슬고 있었다. 날개 한쪽은 부러져 있었고 배쪽
으로는 솜조각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눈이 완전히 먼 펠리시테는 루
루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한참 동안 볼에다 대었다. 시몽 할머니가 제단에 갖다
놓기 위해 루루를 다시 가져갔다.
5
목초들이 여름 냄새를 실어왔다. 파리떼가 윙윙 소리를 내었다. 강물이 태양빛
에 반짝였으며, 지붕 기와가 달아올랐다. 시몽 할머니는 바응로 돌아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종소리에 그녀는 잠에서 개어났다. 사람들이 저녁 예배를 위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펠리시테의착란은 진정되었다. 성체행렬에 대해 생각하니 그녀는 마치
자기가 그 행렬을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눈에 선했다.
학교 아이들 전부와, 성가대와 송방수들이 보도 위를 행진하고, 길 한복판으로
는 창을 손에 든 성당 경비원들이 앞서 나가고 이어서 커다란 십자가를 든 성당
지기와 장난꾸러기들을 감시하는 학교선생들이, 다음에는 수녀들이 계집 아이들
을 보살피며 나아가고 있다. 천사처럼 곱슬머리를 한 세 명의 귀여운 여자 아이
가 장미꽃잎을 공중에 흩뿌린다. 보조 사제가 팔을 벌려 연주 지휘를 하고 있다.
그리고 향로를 든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성체 쪽을 되돌아본다. 성체
는, 네 명의 성당 재산관리위원이 떠받치고 있는 분홍색 비단 포장 밑에서, 우아
한 제복을 입은 사제의 손에 들려 운반되고 있다. 그 뒤로 사람의 물결이, 빽빽
하게 뒤따르고 있으며, 이윽고 그들이 언덕 아래에 도착한다.
차가운 땀이 펠리시테의 관자놀이를 적셨다. 시몽 할머니는, 자기도 언젠가는
이런 일을 겪게 되겠지, 라고 생각함 그녀의 땀을 닦아주었다.
군중의 떠들썩한 소리가 커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일제 사격 총소리가 유리창을 흔들었다. 성체현시대에 경배하기위해 역마차
마부들이 쏜 총소리였다. 펠리시테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가능한 한 낮은 목소리
로 말했다.
"그 애 괜찮을까?" 앵무새를 염려해서 하는 소리였다.
임종의고통이 시작되었다. 할딱이는 숨이 차츰 빨라졌고 늑골이 계속 들먹거
렸다. 거품이 입 양 언저리로 흘러 나왔고 전신을 떨었다.
얼마 후, 관악기 울리는 소리와 아이들의 맑은 소리, 어른들의 굵은 소리가 제
각각 또렷하게 들려왔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시에 소리가 그쳤다가는 다시,
한떼의 사람들 발자국 소리가 잔디 위를 달려 가는 소떼 소리를 내었다.
성직자가 안뜰에 나타났다. 시몽 할머니는 의자 위로 기어올라 창가에 이르더
니, 그런 식으로 성체식 제단을 내려다 보았다.
영국식 레이스로 가장자리 장식을 한 제단 위에는 녹색의 꽃장식이 늘어져 있
었다. 한가운데는 성자의 유물을 넣은 작은 틀이 있었고, 귀퉁이마다에는 각각
두 그루씩의 오렌지 나무가 있었다. 이 갖가지 항아리에는 해바라기, 백합, 모란,
지키타리스, 수국꽃 등이 꽂혀 있었다. 현란한 갖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동산 같은 무더기는 비스듬히 경사져 있었고, 2층 높이로부터 포석 위에 펼쳐진
주단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또 별의별 진귀한 물건들이 사람들의눈길을 끌었다.
진홍빛의 설탕 단지에는 오랭캐꽃이 왕관처럼 소복히 꽂혀 있었고, 아랑송 석으
로 만든 샹들리에 장식들은 이끼 위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두 개의 중국 병
풍에는 산수화가 그려져 있었다. 루루는 장미꽃더미에 묻혀, 곤색 금속판 같은
파란 이마만이 겨우 보일락말락하고 있었다.
성당 재산관리위원들과 성가대원들과 아이들이 안뜰에서 각각 세 편으로 나뉘
어 늘어섰다. 사제가 조용히 제단으로 오르더니, 번쩍이는 금빛 성체함을 레이스
위에 놓았다.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쥐죽은 듯 고요가 흐럴ㅆ다. 이윽고
향로들이 그것을 매어두었던 사슬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청명한 향연이 펠리시테의 방 앞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콧구멍을 앞으로 내밀
며, 일종의 신비스런 감각으로 그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 입술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조금씩 느려지더니, 마치 샘
이 잦아들듯, 메아리가 사라지듯 매번 약해지고 조용해졌다.그리고 그녀가 마지
막 숨을 거둘때, 그녀는 반쯤 열린 하늘나라에서, 자기 머리 위로 유유히 날아가
는 커다란 앵무새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작품해설
단순하고 소박한 영혼의 궤적
성장소설이 언제나 진지하고 심각한 깨달음만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
니다. 연속된 시간으로서의 삶을 다루고 있고 나름의 눈뜸과 성장의 과정을 담
은 것이라면 성장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듯에서 프로베르의
'순직한 영혼'은 지금까지와는 유형을 달리하는 성장소설이 된다.
'순직한 영혼'은 펠리시테란 하녀의 일생을 요약하여 기술하고 있는 중편이다.
제목 그대로 단순하고 소박한 영혼의 궤적을 절제된 묘사로 보여주고 있는데 여
기서 시간의흐름은 그녀의 눈뜸이나 성장으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의 변화
로만 나타난다. 불행하게 끝장이 난 첫사랑으로부터 주인집 남매, 조카로 이어지
다 마지막에는 앵무새에게로 옮아가는 그녀의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삶의 덧없
음과 더불어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가슴저리게 느끼게 된다.
체홉과 모파상에게는 불경이 될지 모르지만 무엇인가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영혼, 혹은 상처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랑의 열망이란 점에서 '귀
여운 여인'과 여자의일생'을 아울러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중학시절부터 소설을 습작한 플로베르는 법학을 공부하다가 간질과 유사한 병
을 앓게 되면서 문학에 전념 하였다. '보라비 부인'으로 프랑스 당대 최고작가라
는 칭호를 들은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칩거생활을 즐겼다. 친구의 누이동생
의 모파상은 그가 만년에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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