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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문열 이문열 세계명작산책3

by Casey,Riley 2023.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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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열 세계 명작 산책 3 환상과 기상
   이문열
   

    제4권 [환상과 기상] 서문
  가시적인 인과율에  묶여 있는 현실을  가감없이 받아들이는 정신작용을 
인식 혹은 인지라  한다. 그러나 현실인식과 그 냉정한 전개만으로  감당해 
내기에 우리 삶은  너무 지겹고 힘들다. 특히 과학주위나 기계론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근대 이후의 세계해석은 우리 의식을 더욱 숨막히게 한다. 
  그렇지만 결국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걸 또
한 우리는  안다. 지식의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현상과 
현상 사이에는 인과의  차단이 일어난다. 그렇게 차단된 인과는 우리  편에
서 보면 무지나 미지가 된다.
  다같은 인과의 차단이지만 그것을  무지, 곧 우리는 끝내 알 수  없는 일
로 단정지으면 다만 답답함과 불안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비록 당장은 모
르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질 때는  개연성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의 작동이 시작된다. 상상력은 미지에 도전하는 일차적  수단이며 나
아가서는 우리 사고를 확대하고 자유롭게 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력으로  확대되고 자유로워진 인식을 꿈,  이상, 환상, 
기상, 망상,  광상 등으로 구분지어  부른다. 이러한 종류의 인식은  냉혹한 
삶의 현실을 분석하고 거기에 적절하게 대웅하는 데는 그리 효율적이지 못
하다. 따라서 그것들은 이성신까지 상정되었던 과학과 합리의  시절에는 심
하게 공격당하거나 무시당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상상력이  꺼져버린 문명의 존재를 아무도 인
정하지 않는다. 합리주의와 기계론을 바탕으로 그토록 완고했던  형식적 리
얼리즘도 상상력만은 건들지  못했다. 엄밀한 과학에서조차도 상상력은  이
제 창의력과 거의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다.  
  환상과 기상은 바로  그 상상력의 가장 예술적인 작동양식이다. 특히  문
학에서는 한 표현기교를 넘어 특이한 주제를 이룬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지분을 가진  세계해석의 방식이다. 꿈과  이사아은 그것을 넘어  이루고자 
하는 욕구로 아직은 현실에 묶여 있고 망상과 광상은 절제없는 상상력으로 
지나치게 현실에서 떨어져 있다.
  이에 [환상과 기상]을 표제로 따로이 한 권을 묶는다.

    젊은 향사 브라운  -나다니엘 호손 지음-
  젊은 향사(굿맨은 청교도적  신앙심이 강조되었던 17세기 미국의 뉴잉글
랜드 지방에서  흔히 사용되었던  칭호이며, 신분적으로 '젠틀맨'  아래쪽에 
놓인다. 여기에서는 '젠틀맨'이  흔히 신사로 번역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향사로 번역하기로 한다.) 브라운은 해질 무렵  세일럼 마을의 거리로 길을 
나섰다. 그는 문을 나서면서 고개를 돌려  젊은 아내 페이스(페이스는 성실
함과 신앙심을 암시하는  이름임에 유의하기 바란다.)와 이별의  키스를 나
누었다.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페이스란 이름을 가진 그녀는 귀여운  얼굴
을 한길로 내민 채 모자의  연분홍빛 리본을 나부끼며 향사 브라운에게 말
했다.
  "여보, 제발 좀  해뜰 때까지 여행을 미루시고 오늘 밤은  당신 잠자리에
서 주무세요. 외로운 여자는 좋지 않은 꿈과 불길한  생각에 시달리다가 자
신이 무서워지기도 한답니다.  여보, 일년 열두 달  많고 많은 밤이 있지만 
오늘 밤만은 저와  있어 주세요." 그녀의 입술이 그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부드러우면서도 애처로운 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사랑하는 나의 페이스, 일년 열두 달 많고  많은 밤이 있지만 오늘 밤만
은 당신과 같이 지낼 수가 없구려. 당신이 여행이라고 했는데, 집을 나갔다 
돌아오는 나의 이번  여행은 지금과 해뜰녘 사이에 마쳐야만 하오.  사랑하
는 나의 어여쁜 아내, 당신이 설마 나를 벌써 의심하는  것은 아니겠지? 우
리가 결혼한 지 아직 석 달밖에 안  되었잖소." 젊은 향사 브라운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그럼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편히 다녀오세요." 연
분홍빛 리본을 단 페이스가 말했다. "당신이  돌아오실 때까지 만사 무사하
기를 빌겠어요!"
  "그렇게 되기를!"  향사 브라운이 말했다.  "여보, 사랑하는 페이스. 해질 
무렵엔 기도를 올리고 잠자리에 들어요. 그럼 아무 해가 없을거요."
  그렇게 그들은 헤어졌다.  그 젊은이가 자기 길을 계속 가면서  예배당이 
있는 길목을 막 돌아가려다가 뒤를 돌아보니, 리본의  연분홍빛과는 어울리
지 ㅇ게 우울한 표정으로 그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 페이스의 얼굴이 보였
다.
  "가엾은 페이스!"  그는 마음 속  깊이 괴로움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런 
일로 그녀 곁을  떠나다니, 나는 어찌 이리도 한심한  놈인가! 그녀는 악몽 
이야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녀기 이야기할 때, 오늘 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를 경고하는 꿈이라도  꾼 것처럼 근심어린 표정이 역력하지 않던가.  그러
나 안돼지. 아내 같은  사람이라면 오늘 밤 일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얼어
붙을 거야. 아내는 지상에 살지만 축복받은 천사 같은 여자가 아닌가, 오늘 
밤 일만 끝나면 아내 곁에 꼭 부어 있다가 천당까지 따라가야지.'
  이렇게 앞날에 대해 훌륭한 결심을 하자, 눈앞에 닥친  사악한 일을 위해 
좀더 서둘러 가은 것이 정당화되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향사 브라운
은 갖게 되었다. 그는 숲 속의 음울한 나무들 때문에  더 어두운 느낌을 주
는 황량한 길을 따라  걸었다. 그 숲은 그가 가는 좁은 길이 계속될  수 있
을 만큼만  좁게 열리다가는 곧 뒤에서  닫히는 것 같았다. 참으로  호젓한 
길이었다. 호젓함이 느껴지지만 그것은 예사의 느낌이 아니었다. 수많은 나
무들과 머리위의 굵은 가지들 뒤에 누가 숨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게  하는 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길손은 보이지 않는 군중들  속을 
혼자 외롭게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마다 그 뒤에  악마 같은 인디언들이 있을지도 모르지."  향사 브라
운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흘낏  뒤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악마 녀석이 내 곁에 와 있으면 어쩌지!"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면서 그는 구부러진 길목을 지나갔다.  그가 다시 앞
을 보자 고목의 등걸에 ㅇ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엄숙하고 깔끔한 
차림의 그는 향사  브라운이 다가오자 일어서더니, 그와 함께 나란히  길을 
걸었다.
  "늦었구먼, 향사 브라운."  그가 말했다. "내가 보스턴을  지나올 때 올드 
사우스의 시계탑에 종소리가  나고 있었다네. 그리고 나서 꼭 15분이  지났
어."
  "페이스가 붙잡는  바람에 지체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젊은이가 대
답했다. 아주 예측 안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동행자가 갑자기 나타
났기 때문에 놀라 목소리가 떨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숲에는  땅거미가 드리워졌으며,  어두운 가운데서도  유난스럽게 
어두운 곳을 두 사람은 지나가고 있었다. 아주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
면, 나중에 나타난 길손은 쉰  살 가량으로 나이가 들어 보였고, 향사 브라
운과 같은 계층의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향사  브라운과 상당히 
닮아 보였는데, 용모보다는 표정에서  더욱 그런 느낌을 주었다. 비록 용모
가 닮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누가 보아도 그들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
고 했을  것이다. 연장자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차람새가 간소하고  그이 
태도 또한  마찬가지로 꾸밈없는 것이었지만,  세상사를 잘 아는  사람한테 
느낄 수 있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일  때문에 주
지사의 만찬회에 참석하거나 윌ㄹ엄 궁정에 가더라고 어색해 하지 않을 그
런 분위기를 풍겼던 것이다. 그런데 별나게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면 그
것은 바로 그의 지팡이였다. 그 지팡이는 커다란 검은  뱀과 비슷하게 생겼
는데, 아주 기묘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마치 살아있는 뱀이 몸을  비틀면서 
꿈틀꿈틀 움직이는 듯했다. 이는 물론 희미한 빛 때문에  일어나는 착시 현
상에 따른 것이었다.
  "서두르게, 브라운군." 동료 길손이 말했다. "여행을 막 시작한 셈인데 속
도가 느리군, 그렇게 쉬 피로를 느끼면 내 지팡이를 쓰게나." 
  "여보세요." 젊은이는 느린  발걸음을 아주 멈추며 말했다. "당신을  여기
서 만나는 걸로 약속은 이행했으니, 전 온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당
신이 잘 알고 계신 그 일에 관여하기가 꺼려지는군요."
  "그런가?" 뱀 지팡이의 사나이가 미소를  거두고 대꾸했다. "그렇지만 그
건 계속 걸어가면서 따져 보세. 만약 내가 자네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자넨 
돌아가도 좋아. 우리는 이제 겨우 숲 속에 들어섰을 뿐이댜."
  "아니, 너무 깊이 들어온  것이 아닌가요." 향사 브라운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옮기며 소리쳤다.  "저의 아버지는 이런 일로 숲 속에  들어가신 적
이 없으십니다. 저의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런 적은 없으시죠. 순교자들께서 
살아 계시던 시대 이래로 우리  가문은 줄곧 정직하고 착한 기독교인의 가
풍을 이어 왔습니다.  그러니 브라운이란 성씨를 가진 사람으로 이런  길을 
택해 걷는 것은 제가 처음입니다. 그리고 또..."
  "자네가 나  같은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는  첫번째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것이지?" 연장자는 브라운이 미처하지 못한 말을  거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잘 말했네, 향사 브라운! 나는 그 어떤 청교도들하고 잘 알고 지냈듯이 자
네 가족들과도 잘 알고 지냈다네. 이거 뭐 시시한  이야기하자고 하는 말은 
아니야. 난 보안관인 자네 할아버지를 도와드렸다네. 자네 할아버지가 세일
럼 거리를 돌아다니며 아주 혹독하게 퀘이커 교도 여자에게 회초리질을 할 
때 그랬었다네. 킹 필립(킹 필립 혹은  메타코밋이라 불리는 사람은 뉴잉글
랜드 남부에서 활약하던 인디언 저항자들의 마지막 지도자였는데,  그 저항
은 1676년 그가  죽으면서 끝났다.) 전투 때 자네  아버지가 인디언 마을에 
불을 지를 때, 내  난로에서 일으킨 송진 불 등걸을 갖다 준 것도  바로 날
세. 자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다 나의 훌륭한 친구들이었어. 유쾌하게 이 
길을 따라 산책하다가  한밤이 지나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때가 많았
어. 난 그들을 위해서라도 기꺼이 자네와 친구가 되고 싶네."
  "당신이 말한 대로라면,  그분들이 그 일에 대해 저에계 말해  주지 않은 
게 이상하군요." 향사 브라운이 대답했다. "하기야 그런 소문이 조금이라도 
퍼지는 날엔  뉴잉글랜드에서 쫓겨났을 테니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군요. 
하지만 우리 가족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착한 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런 사악한 일을 견디어 낼 사람들이 아니예요."
  "사악한 일이든 아니든 간에, 이곳 뉴잉글랜드에서  나와 알고 지내는 사
람은 많다네." 두틀린 지팡이를 가진 그 길손이 말했다. "수많은 교회의 집
사들이 나와  성찬식에 쓰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적이 있다네. 이  마을 
저 마을의 행정위원들이 나를 의장으로 추대한 바있고, 주  의회의 절대 다
수가 내 이권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있지. 주지사와 나  사이의 관계도 말야
- 그런데 이건 주 기밀이라 말하기가 어렵군."
  "그럴 수가 있나요?" 향사  브라운은 태연히 걷고 있는 동행자에게 당혹
스러운 눈길을 보내며  소리쳤다. "하지만 전 주지사나  의회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에게야 그들 나름의 생활 방식이  있을 
테고, 그것이 저와  같은 소박한 시민의 생활  방식일 순 없겠지요. 그리고 
만일 제가  당신과 함께 간다면, 세일럼  마을의 그 믿은 깊은  노인장이신 
목사님을 어떻게 쳐다볼 수 있겠습니까? 아, 안식일이나  설교하는 날에 목
사님의 목소리를 들어도 사시나무 떨 듯이 몸이 떨릴 거예요."
  연장자인 길손은 진지한 표정으로 여기까지 듣더니, 더 이상  참을 수 없
다는 듯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웃으면서 몸을 어찌나 심하게  흔들
어대었던지, 뱀과 같은  그의 지팡이가 실제로 꿈틀거려 그에게 동감을  표
시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하! 하! 하!" 그는 여러 차례 큰소리로 웃은 다음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이렇게 말했다. "계속해 보게,  브라운군. 계속해 보란 말이야. 하지만 제발 
웃다가 죽는 일이 없도록 해 주게."
  "그럼, 바로 제 얘기의 결말을 짓죠." 향사 브라운이 몹시 초조한 마음으
로 말했다. "저에겐 아내 페이스가 있습니다. 이런 짓을 하는 것을 알면 제 
아내의 가녀린 가슴은 터지고  말 거예요. 그럴 바엔 차라리 제  가슴을 터
지도록 하는 게 낫겠지요."
  "아니, 정 그렇다면 자네 갈 길을 가던 여자를 가리켰다. 그런데 그 여자
를 보니 향사 브라운이 어릴 때  그에게 교리 문답을 가르쳤던 바로 그 지
극히 경건하고  모범적인 부인이 아닌가.  그녀는 지금도 향사  브라운에게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가 있으면 목사님  및 굿킨 집사와 함께 상담자 역
할을 하는 부인이었다.
  "저 클로이즈 아주머니가 한밤중에  이처럼 황량한 곳까지 와 있다니 참
으로 놀라운  일이군요." 그가 말했다.  "그렇지만, 여보세요, 괜찮으시다면 
숲 속을 통과해 저 신앙심이 두터운 부인을 앞질러 갈 수 없을까요? 저 부
인과 당신은 서로 모르는 사이일 테니, 제가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지, 어디
로 가는지를 물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하게나." 함께 길을  가던 그가 말했다. "그럼 숲 속으로  들어가
게나. 난 이 길을 계속 갈 테니."
  그리하요 젊은이는 숲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숲 속을 지나면서도  젊
은이는 신경을 써서 그의 동행자에게 계속 눈길을 주었다.  그는 길을 따라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더니, 드디어 그 노부인과 지팡이  하나만큼의 거리
도 채 안되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그 사이 노부인은 나이  많은 부인답지 
않게 대단히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갔다. 그녀는 길을  걸으면서 
알아듣기 힘든 말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건 기도임에 틀림없었다. 
향사 브라운과 함께 길을 가던  그가 지팡이를 내밀어 뱀꼬리와 같은 부분
으로 그녀의 말라서 쭈글쭈글해진 목덜미를 건드렸다.
  "악마야!" 신앙심 깊은 그 노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클로이즈  부인께서 자기 옛 친구를  알아보는 
게로군." 이렇게 말하며 그느 자신의 꿈틀거리는  지팡이에 기댄 채 그녀를 
마주보았다.
  "아니, 정말이군요. 정말,  존경하는 당신이군요." 그 훌륭한 부인이 이렇
게 소리쳤다. "정말,  당신이지만, 지금의 그 멍항한 녀석  할아버지인 나의 
옛 친구 향사 브라운의 모습을 하고 계시군요. 그런데  당신이 믿으실지 몰
라도 나의 빗자루가 묘하게도 없어졌어요. 사형을 면한 그  마녀 코리 부인
이 훔쳐간 것  같아요. 그것도 내가 야생  셀러리와 양지꽃의 즙과 '늑대의 
독'이라고 하는 식물의 즙을 온몸에 바르고 있는 사이에 말이죠."
  "아주 고운 밀가루와  갓난 아이의 자방을 함께 섞은  것이겠지." 옛날의 
향사 브라운 노인 모습을 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아, 당신께서는 마법을 아시는군요."  노부인이 수선을 떨며 말했다. "그
래서, 아까 말했다시피, 모임에 갈  모든 준비를 하고 보니 타고갈 말이 없
잖아요. 결국 걸어서 가기로 했죠. 오늘 밤엔 멋진 젊은이를 성찬식에 데려
올 거라는 말들이  있던데어ㅛ. 어쨌거나 존경하는 당신께서 이럴 때  팔을 
빌려주시면 눈 깜짝할 사이에 그곳에 도착할 텐데."
  "그렇게 하기는 어려운데."  그녀의 친구가 대답했다. "팔을 빌려주진  못
해도 클로이즈 부인이 원한다면야 여기 이 지팡이라도 빌려 드리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지팡이를 그녀 발치에 던져주었다. 그 발치에서  틀
림없이 그 지팡이느 예전에  지팡이 주인이 이집트 마술사에게 빌려주었던 
지팡이들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향사 브라운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놀라움에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다시 내려다보았을 때는  클로이즈 아주머니도 뱀 같은 지팡이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  곳에는 다만 향사 브라운의 동행자였던 그만이  홀로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향사 브라운을 기다리
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 그 노부인께서  저에게 교리 문답을 가르쳐 주었어요."  향사 브라
운이 이렇게 말했다. 이 간단한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계속 길을  걸었다. 걷는 동안 연장자는 동행자를 계속  재촉하여 
빠른 걸음으로 쉬지 않고  길을 가도록 하였다. 그때 그의 재촉은  워낙 교
묘해서, 그 자신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듣는 사람의  가슴에서 솟아나오는 
것만 같았다. 길을  가면서 연장자는 지팡이 대신으로 쓰려고 단풍나무  가
지를 하나 꺾어서는 저녁 이슬에 젖어 있는 나뭇잎과 잔가지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의 손길이 닿자 나뭇잎과 잔가지들은  일주일 동안 
햇빛에 쬔  것처럼 시든 다음 말라  비틀어졌다. 그렇게 둘은 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계속 앞을  향해 걸었으며, 이윽고 음산한 공터에 다다르게  되었
다. 그런데 갑자기 향사 브라운이 그 공터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
더니 더 이상 가려고 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결심이 섰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일로는 한 걸
음도 더 나가지 않겠습니다.  천국으로 갈 줄 알았던 그 늙은  부인이 가엾
게도 악마에게 갈 것을 택했다고 한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페이스를 버리고 그 노파를 따라갈 이유가 없죠."
  "자네는 차차 이  일에 대해 좋게 생각하게 될 걸세."  그의 친구가 차분
하게 말했다. "여기 앉아서 잠시 쉬게나.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면 
내 지팡이가 자넬 도와줄 걸세."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는 자신의 동행자에게 단풍나무 지팡이를 
던져 주고는 마치 
깊어가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라도 하듯 재빠르게 시야에서  벗어났다. 젊
은이는 잠시 길가에 앉아서 자신에게 대단한 칭찬을 보냈다.  이제 아침 산
책을 할 때 양심에  거리낌없이 목사님을 대할 수 있게 되었고,  믿음이 깊
은 노집사 굿킨의 눈길에도 움츠러들지  않은 채 떳떳하게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렇게도 사악하게 보냈던 밤을  이제는 페이
스의 팔 안에서 깨끗하고  달콤하게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즐겁고 
갸륵한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향사 브라운은 길을  따라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듣자 그는 숲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좋겠다
고 생각을 했다. 비록  지금 그만 두기는 했지만 그를 여기까지  몰고 왔던 
일에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말발굽 소리와  말을 탄 사람드ㄹ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렸
다. 두 노인이  다가오면서 엄숙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 말밥굽 소리와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인 채로 젊은이가 숨어  있
는 곳과 가까운 곳에 있는 길을 따라 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장소
의 어둠이  특히 깊었기 때문에 그  길손들과 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몸이 길가의 잔가지에  스치고 지나갔지만, 한 조각의 밝은 하늘에서  비스
듬히 비쳐온 희미한 빛을  그들이 순간적으로나마 차단하며 통과하는 모습
을 볼 수는 없었다.  향사 브라운은 웅크렸다가 발끝으로 일어서기도 하고, 
나뭇가지들을 젖히고 할 수 있는 한 한껏 자기 머리를 내밀어 보기도 했지
만, 그림자조차 분별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
만, 조용히 말을 몰고  가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던 두 사람의  목소리는 다
름아닌 목사님과 굿킨 집사의 것임이 틀림없다고 맹세할 수 있었기 때문이
었다. 성직  임명식이나 성직자 회의에 참석하러  갈 때 그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았던가! 그들의 목소리라는 확신이 들자  향사 
브라운은 그만큼 더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말을 멈추고 한 사람이 가느다란 실가지를 꺾었다.
  "목사님, 두 모임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면, 오늘 밤 모임에 빠지기 보다
는 차라리 성찬식에  빠지겠습니다." 집사인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말했
다. "사람들 말로는  우리 회원들 가운데 팔머스나 그 너머에  사는 사람들
도 오늘 모임에 온다고 하더군요. 커넥티커트나 포드아일랜드에서  오는 사
람도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인디언 주술사들도 여러 명 온다고 해요. 그놈
들은 자기네 나름의 방식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우리들 가운데 최고의 인
물에 육박할 수 있을  정도로 악마에 대해 잘 안다고 합니다.  더욱이 젊은 
미모의 여성 한 사람을 오늘 모임에 데려온다고 하더군요."
  "좋습니다, 굿킨 집사!" 귀에 익은 목사의 엄숙한 음성르 지닌 자가 대답
했다. "급히 말을 몹시다. 안 그러면 늦겠어요.  아시겠지만 내가 거기 도착
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시작할 수 없을테니까요."
  멈추었던 말발굽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허공을 울리던  야릇한 
그 목소리들이 교회 모임이 있었던  적도 없고 한 사람의 기독교인도 기도
한 적이 없던 숲을 가로질러 갔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성스러운 사람들은 어디를 향해 저리도 깊은 이교도의 
황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젊은 향사 브라운은 가슴의 무거운 병에 짓
눌린 채 땅에 쓰러져 기절할  것 같아서, 나무 하나에 몸을 의지하였다. 그
는 자기 위에  실제로 하늘이 있는지 의심스러워 위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푸른 창공이 있었고 창공 안에서는 별이 빛나고 있었따. 
  "위에는 하늘이 있고 지상에는 페이스가 있는  한, 나는 여전히 결연하게 
악마와 싸울 것이다!" 향사 브라운은 이렇게 외쳤다.
  그가 깊고 푸른 창공을 여전히 응시하면서 기도를 올리려고 손을 들었을 
때, 바람 한 점  없는데도 구름 하나가 창공 한가운데를 급히  가로질러 가
더니 반짝이는 별들을  가려 버렸다. 창공 바로 한가운데를 빼놓고는  아직 
푸른 하늘이 보였으나, 곧이어 창공 한가운데 있던 검은  구름 덩이가 북쪽
을 향해 재빠르게 하늘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그 순간, 마치 구름 속 깊
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듯이,  하늘 저 높은 곳에서 뒤섞여 있는  듯한 확실
하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그 소리를  듣고 젊은이는 거
기에서 자신의 마을에 사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억양을 식별해 낼 수 있다
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건 불경스러운 사람이건, 그가 
성찬식에서 만났거나 술집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그런 사
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곧 아주  희미해져서 
그가 들었던 것은  다름아닌 숲에서 나오는 웅얼거림, 바람도 없이  속삭이
는 이 오래된  숲에서 나오는 웅얼거림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이윽고 한낮의 세일럼 마을에서 매일같이 듣던 귀에 익은 어조의 목소리들
이 좀더 강하게  밀려나와 그럴 엄습하였다. 이런 소리가 한밤에  구름에서 
나오다니, 이제까지 결코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한 목소리들 가운
데 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무언지 모를 슬픔에 젖어  있는 탄
식조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얻어 봐야 슬픔만 더할  뿐인지
도 모르는 호의를 청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 모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성자이건 죄인이건 할 것 없이  모두 그녀에게 계속하도록 겪려하는 것 같
았다.
  "페이스!" 고뇌와 절망에  찬 목소리로 향사 브라운은  소리쳤다. 그러자, 
어쩔 줄  모르는 가여운 자들이 황야를  헤메며 그녀를 찾고 있는  것처럼, 
숲 속의 메아리가 그를 흉내내어 여기저기에서 페이스의 이름을 되불렀다.
  이 불행한 남편이  숨을 죽이고 응답을 기다릴  때, 슬픔과 분노, 공포의 
외침은 여전히 한밤의  어두움을 꿰뚫고 있었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스치
고 지나가면서 향사 브라운의 머리  위에 맑게 개인 고요한 하늘을 남겨놓
는 순간, 비명소리 하나가 그 비명소리보다 더 큰  웅얼거림 속으로 잠겨들
더니 희미한 웃음이 되어  저 먼 곳으로 사라졌다. 바로 그때  무언가가 공
중에서 가볍게 나부끼며  내려와서는 나뭇가지에 걸렸다. 젊은이가  그것을 
잡고 보니 연분홍빛의 리본이었다.
  "나의 페이스는 가버렸구나!" 한순간 얼이 빠진 듯하더니 그가 소리쳤다. 
"이 땅 위에 선이란 것은  없다. 죄악이 곧 선이 아닌가. 자, 악마여, 이 세
상은 바로 그대의 것이다."
  그리고는 미칠 듯한 절망에 빠져  큰소리로 오랫동안 웃고 나서 향사 브
라운은 지팡이를  잡았다. 이윽고 그는  걷거나 달린다기보다는 숲을  따라 
날아가는 것 같은 속도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길은 점점 더  황량하고 거
칠어졌으며, 그 자취가 희미해지더니 마침내 희미한 자취마서  사라져 버렸
다. 그는 결국 어두운 황야의 한복판에 남게 되었으나, 인간을 죄악으로 인
도하는 본능의  힘에 끌려 계속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숲 전체는  끔찍한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나무들이 부딪히는 소리,  들짐승들의 울부짓음, 인
디언들의 고함소리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바람이 멀리서  들리
는 교회의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고, 때로는 바람이 멀리서 들리는  교회의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고, 때로는 이 나그네의 주위에서  요란하게 울부짖었
다. 마치 자연 전체가 그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
는 그 자신의 모습보다 더 공포감을 자아내는 것은  없었다. 그가 무엇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 하! 하!"  바람이 그를 비웃고 있을  때 향사 브라운도 바람을 따라 
이렇게 웃어 제꼈다. "어느 쪽의 웃음소리가 더 큰지 한 번 들어보다. 너의 
악마적 힘으로 나를  놀라게 할 생각은 마라. 마녀여, 덤벼라.  마법사도 덤
벼라. 인디언 주술사, 너도 덤벼라, 악마 네 놈도 덤벼라. 여기 향사 브라운
께서 나가신다.  이 브라운에게 겁을 주기에  앞서 네 놈들이 이  브라운을 
보고 겁을 먹게 될 것이다."
  사실 온갖 것들이 출몰하는 이  숲 전체를 통틀어서 향사 브라운의 모습
만큼이나 더  무시무시한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계속 검은  소나무들 
사이로 날아가면서 미친 듯한 몸짓으로 지팡이를 휘들러 대는 동시에 때로
는 엄청난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그의 웃음소리가 얼마나  엄
청난 것이었던지 숲이 온통 그의 웃음으로 메아리치는 바람에 온갖 악마들
이 그의 주위에서 웃어대는  것 같았다. 악마가 제 모습을 하고  있을 때보
다 인간의 가슴 속에 들어가 격노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은 더 끔찍한 법이
다. 이처럼 악령에 사로잡힌 사나이가 제 갈 길을  가다가 나무들 사이에서 
몸을 떨면서 앞을 보니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한밤에 숲  속의 빈
터에 있던 벌목한 나무들의 몸통과 가지에 불을 붙이자 그 불이 하늘을 향
해 섬뜩한 화염을 피워 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을 여기까지 계속 
몰고 왔던 폭풍이 잠든 사이 잠깐 멈춰 서서 찬송가와 같은 노랫가락이 울
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그 가락은 멀리서 많은 사람의 목소리에  실려 엄
숙하게 밀려 왔다.   그 노랫가락은 그가  아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마을 예배당의 성가대에서 울려나오던 귀에 익은 가락이었다.  어두워진 황
야에서 모든 소리들이 무시무시한 조화를 이루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들리
는 그런  소리였다. 향사 브라운은  울부짖었지만 그의 울부짓음은  황야의 
울부짖음에 섞여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정적을 틈타 그는 불빛이 그의  눈을 비출 때까지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
갔다. 숲의 어둠에 둘러싸인 빈터 한쪽 끄트머리에 바위가  하나 솟아 있었
고, 그 바위 위에는  사람의 손길로 이루어진 것이라곤느 할 수  없느 투박
한 모습의 제단 혹은  설교단 비슷한 것이 있었다. 네 그루의  소나무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마치 저녁 예배 시간의 촛불처럼 나무의  아래
쪽은 온전한 채 꼭대기 부분만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었다. 바위의 높
이보다 더 높게자란  무성한 잎들이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서 밤하늘 높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  불길은 어쩌다 발작적으로 황야 전체를 비춰  주기도 
하였다. 늘어진 가지며 잎이  무성한 줄기마다 불길에 싸여 있었던 것이다. 
붉은 불길이 치솟아  오르다가 잦아들면 그에 맞춰  수많은 집회 군중들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났다가  다시 어둠 속에 사라지곤 하였다. 그리고  불길
이 어둠 속에서 되살아나면 이  고적한 숲의 한복파은 다시금 사람들의 모
습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어둠의 옷에 몸을  감싼 장중한 무리들이군." 향사 브라운이  이렇게 말
했다.
  사실 그들의 모습은  그렇게 보였다. 불길이 어둠과 광채 사이를  오락가
락 하는 동안 사람들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다음 날  그 지방의 자문위원회 
모임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보였고, 안식일  마다 경건한 표정
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땅  위의 성스럽고도 성스러운 설교단에서 자에
로운 표정으로  운집한 이들을 내려다보던  사람들의 얼굴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곳에 주지사 부인도 있었다. 적어도  그곳
에는 주지사 부인이 잘 아는 지체 높은 부인네들과 명망 높은 남편들의 아
내들, 과부들, 수많은 서민들, 마음을 졸이는 어여쁜 젊은 처녀들도 있었다. 
어두운 황야 위를 발작적으로 비추는 섬광이 향사 브라운의 눈을 현혹시켰
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유별나게  고결해서 세일럼 마을  사람들에게 
명성이 자자한  교회의 신도들 수십 명을  그가 진짜 본 것인지도  모른다. 
믿음이 깊은 노집사  굿킨이 도착해서, 그가 존경하는 성자와도 같은  경이
로운 목사 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엄숙하고  존경받을 만한 경
건한 사람들과 교회의  장로들, 정숙한 부인들과 갓 피어난 처녀들이  있는
가 하면, 그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있었따. 그곳에는 방탕한 
삶을 보내는 남자들,  명성에 금이 간 여자들,  비열하고 더러운 모든 악에 
몸을 내맡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다는 혐의까지 받고 
있는 거련한 사람들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선량한 사람들이 사악한  사람
들한테서 몸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고 죄인들이 성자들을 보고 부끄러워하
지도 않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게 보였다. 게다가 창백한  얼굴을 한 그들의 
적들 가운데는 인디언 사제나 주술사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때때로 영국의 마술사들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주술로 자기들
이 살던 곳을 위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페이스는 어디에  있지?" 향사 브라운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는 희망이 다시금 그의 가슴을 찾아들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느리고 음울한 또 한 곡조의 찬송가가 들려  왔다. 그런데 그것은 
경건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었으나  우리 인간이 죄악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은 말들, 또는  인간의 죄악보다 한결 더 심한  것을 
음산하게 암시하는 모든 말들과 결합되어 있었다. 평범한  인간들이라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악마들의 지혜가 아닌가.  찬송가는 계속 이어졌으
며, 거대한  오르간의 깊고 깊은 선율과도  같은 황야의 합창이 그  사이를 
메웠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찬가의 은은한 마지막 울림과  함께 소리 하
나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모든 악마들의 왕자를  찬양하는 죄인의 목소리
가 울부짖는 바람  소리, 휘몰아치는 강물 소리, 야수의 포효,  무질서한 황
야에서 들리는 그 밖의 온갖 소리들과 뒤섞여 하나가 되었을 때 나오는 소
리 같았다. 불꽃에 휩싸인 네 그루의 소나무에서는 아까보다  더 드높은 불
길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고, 불경스러운 군중들 위를 둥글게  소용
들이치고 있는 연기  아래쪽으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이 그 
불빛에 비추어져 어렴풋하게 드러났다. 바로 그 순간 바위  위에서 붉은 빛
을 띄우며 불꽃이 하나 솟아오르더니  제단 위로 백열의 아치를 만들어 놓
았다. 이윽고 제단 위로 사람의 형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형상은 
비록 경건한 어투로 말을 하였지만 복장이나 태도 어느 면에서도 뉴잉글랜
드 지방의 교회에서 만날 수 있는 엄숙한 사제들과는 조금도 닮은 점이 없
었다.
  "개종자들을 이리 데리고  오라!" 그이 목소리가 벌판을 지나  숲 속으로 
울려 퍼졌다.
  그 말을 듣자 향사 브라운은  나무 그늘에서 나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으로 다가갔다. 향사 브라운은 그의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는 온갖 사악한 
것들에 공감하는 가운데 모여  있는 사람들의 무리에게서 몸서리쳐지는 형
제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  모습을 하고 있는 
형상이 소용돌이치는 연기 아래쪽으로 내려다보면서 그에게 앞으로 다가오
도록 손짓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거의 그의 마음을  지배할 정도였다. 그때 
희미하나마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그에게 돌아오도록 경고
하는 여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의 어머니  아니었던가? 
그러나 목사와 믿음  깊은 굿킨 집사가 그이 팔을  붙잡은 채 불길에 싸인 
바위 쪽으로 그를 이끌고 갔을  때 그에게는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거나 
저항할 힘도, 또한 마음도  남아있지 않았다. 저편에서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윈 몸매의 여인 하나가 또한 다가왔다. 그녀는 향사  브라운에게 교리 문
답을 가르쳤던 경건한 클로이즈 부인과 지옥의 여왕 자리에 오르게 하겠다
는 약속을 악마에게서  받아낸 마녀, 정말로 광포한 마녀인 마르타  캐리어
에게 이끌려 오고 있엇다. 결국 불길로 위쪽을 장식한  제단 앞에 개종자들
이 나와 서게 되었다.
  "나의 아이들아, 너희 종족의  성찬식에 온 것을 환영한다." 검은 형상이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천성과 그대들의 운명이  이처럼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의 아이들아, 너희의 뒤를 돌아 보라!"
  그들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타오르는 불꽃에 순간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악마 숭배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에 
어렴풋하게 떠오르느 환영의 미소도 볼 수있었다.
  검은 옷으로 몸을  두른 형상이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어릴  때부터 존
경하던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그대들은 그들이 그대들보다 더  성스
럽다고 생각했었겠지. 정의롭고  하늘을 향한 열망의 기도로 가득 찬  그들
의 삶과  그대들의 죄악을 비교해  보고는 움츠러들기도 했었겠지.  그러나 
여기에 그들 모두가 나를  숭배하기 위해 이렇게 모여 있다. 오늘  밤 그대
들이 그들의 비밀스러운  행위들을 알 수 있도록 허락하겠노라. 어떻게  하
얀 수염을 기른 교회의 장로들이  자기 집안의 젊은 처녀들에게 음탕한 말
을 속삭였던지를, 어떻게  수많은 여인네들이 과부의 상복을 입고 싶은  욕
망과 잠자리의 남편에게 독약을 마시게  하여 그녀의 품 안에서 마지막 숨
을 거두게 하였는지를,  어떻게 수염도 안난 애송이가 부친의 재산을  서둘
러 상속받으려 했던가를,  어떻게 아리따운 처녀들이 -부끄러워 하지  말지
어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아- 정원에 작은 무덤을 파고 나만을  유일하
게 초대하여 갓난  아이의 장례식을 치렀던지를 알게 해 주겠노라.  죄악을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에  공감하게 되면 그대들은 교회에서선,  잠자리에서
건, 거리에서건, 들판에서건, 숲 속에서건, 범죄가 저질러질 수 있는 곳이라
면 어디에서도  죄악의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온 세상이  죄악게 
물든 거대한 하나의 핏자국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크게 기뻐하게 될 것이
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신비롭고도 깊은 죄악의 샘, 사악한 모든  술책이 흘러나오는 샘
을 꿰뚫어 보는 것도 그대들의 몫이다. 바로 그  샘으로부터 인간의 능력을 
갖고는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심지어 나의 능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도 행동으로 옳기기 어려운 모든  사악한 충동들이 지칠 줄 모르고 흘러나
오는 것이다. 자, 나의 아이들아, 이제 서로를 보라."
  그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지옥 불로 타오르는  횃불과도 같은 소
나무의 불꽃에 의지하여 그 가련한  사나이는 페이스가 자신의 옆에 서 있
는 것을  보게 되었고, 페이스 역시  자신의 남편이 불경스로운 제단  앞에 
몸을 떨고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보라, 나의 아이들이여,  그대들은 함께 내 앞에 서  있지 않은가." 깊고 
엄숙한 목소리로 제단  위의 형상이 그들에게 말했다. 절망적인 위엄을  담
은 그의 표정에는 슬픔의 빛이라고할 만한 것이 감돌고  있었는데, 한때 천
사였던 그의 본성이 비참한 인간을  위해 아직 애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
질 정도였다. "서로의 마음에 의지하여 그대들은  아직까지 선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환상에서 깨어난 
것이다. 악이 인류의 본성이며, 악이야말로 너희들의 유일한 행복이어야 하
느니라. 나의 아이들아, 너희 종족의  성찬식에 온 것을 다시 한 번 환영하
노라."
  "환영하노라." 악마의  숭배자들이 절망감과 승리감을 함께  담은 목소리
로 이렇게 되뇌어 소리쳤다. 
  그리고 이 어두운  세계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그들  한 쌍의 남녀 만이 
악에 빠져들 것인가를 아직까지 결정하지 못한 채 망설이며  서 있었다. 한
편 바위에는  움푹 패인 곳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자연이 만들어  놓은 
물그릇과도 같았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섬뜩한 불빛에  불게 보이는 물이었
던가? 아니면 그것은 피였던가? 그도  아니면 액체로 된 불꽃이었던가? 여
기에다 그 악의 형상은 자신의  손을 담갔다가 꺼내어 그들의 이마에 세례 
표식을 남겨 줄  준비를 했다. 그러한 표식을 받음으로써 그들은  신비로운 
죄악에 대해 의식하는 것보다 더  의식적으로 남들이 마음 속에 숨기고 있
거나 행동으로 옮긴 그들의 비밀스러운  죄악을 의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다. 페이스의 남편은 창백한  얼굴의 자기 아내를 바라보았고, 페이스 역시 
남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다시 한 번  흘끗 눈길을 주었
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죄에 오염된 불쌍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서
로가 서로에게 보여 준  모습을 보고, 그들의 눈에 띈 서로의  모습을 보고 
함께 소리를 쳤다.  
  "페이스! 페이스! 하늘을  올려다보고 우리 이 사악한 악마와  싸웁시다." 
페이스의 남편이 이렇게 소리쳤다.
  페이스가 그 말에  순종하였는지 안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소
리치는 순간 그는  고요한 밤 고적한 숲 속  한가운데 던져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숲 속을  가로 질러 힘겨운 듯이 사라져 가는  바람의 울
부짓음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그렇게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는  비틀거
리며 걷다가  바위에 부딪혔으며, 바위가  차갑고 축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불길에 휩싸여 있던  늘어진 가지들에는 차갑고도  차가운 
이슬이 맺혀 있다가 그의 뺨을 적시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향사 브라운은 천천히 세일럼 마을의  거리로 들어섰다. 그
리고는 넋 나간 사람처럼  그의 주변에 멍한 눈길을 주었다. 믿음  깊은 노
목사님이 아침 식사에  식욕을 돋구기 위한 운동삼아, 또한 설교할  내용을 
깊이 생각해  볼 요량으로 교회의 묘지를  따라 산보를 하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면서 목사님은  향사 브라운에게 축복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러나 
젊은이는 마치 저주를 피하려는 듯이  몸을 움츠려 이 거룩한 성자를 피했
다. 노집사 굿킨은 집에서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젊은이는 열려진 창
문을 통해 그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 마법사가 어떤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일까?" 향사 브라운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노파가 
된 뛰어난 기독교 신자인 클로이즈  아주머니는 자기 집 격자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이른 아침 햇살에 몸을 맡긴  채 서서 아침 우유 한 병을 가져온 
어린 소녀에게 교리  문답을 하고 있었다. 향사 브라운은 악마의  손아귀에
서 어린  아이를 빼앗아 오듯 그  아이를 잡아채서 데리고 왔다.  예배당의 
모퉁이를 돌자 그는 연분홍빛 리본을 한 페이스의 머리를 흘낏 볼 수 있었
다. 그녀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다가 남편을 보고는 말할  수 
없이 즐거운 표정이 되어 온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키스라도 
할 것처럼 거리로  뛰어나왔다. 그러나 향사 브라운은 엄숙하고도 슬픈  표
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고는 아침 인사말도 건네지  않은 채 그녀를 
지나쳤다.
  향사 브라운은 숲 속에서 잠이  든 채 마녀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내용의 
거친 꿈에 시달렸던 것일까?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젊은  향사 
브라운에게 그 꿈은 무언가 불길한 징조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무시무시한 
꿈에 시달리던 그 밤이 지나고 난  다음 그는 비록 절망에 빠진 사람이 되
었다고 할 수는 없어도 어딘가 엄숙하고 슬프면서도 침울한 생각과 의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안식일이 되어 신도들이  성스러운 찬송가
를 부를 때 그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죄악을 찬양하는 노래 
소리가 그의 귀에 밀려들어와 그  모든 축복의 가락을 묻어 버리기 때문이
었다. 목사님이 성경책에 손을 얹은 채 설교단에서 온  힘을 다하여 열렬한 
웅변조로 우리  종교의 성스러운 진리에 대해  설교를 할 때, 성자와  같은 
삶과 슬리에 찬 죽음에 대해 설교를 할 때, 그리고  미래에 누리게 될 천국
의 기쁨이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불행에 관해 설교를  할 때, 향사 브라운
의 얼굴은 창백해져만 갔다.  그느 이 백발의 신성 모독자와 그의  말에 귀
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예배당의 천장이  굉음을 내며 내려앉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을 느꼈떤 것이다. 때때로 한밤중에 갑자기  잠에서 깨어
나 몸을 움츠러 페이스의  품 안을 피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족이  모여 무
릎을 꿇은 채 기도를 올리는 아침녘이나 저녁때가 되면,  그는 얼굴을 찡그
리거나 혼자말로  투덜대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세상을  살다가 
백발의 시신이 되어 묘지로  운구되었으며, 이제 할머니가 된 페이스, 그리
고 그의 자식들과 손자들,  또한 적지 않은 마을 사람들이 대단한  장례 행
렬을 이룬 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묘비에 그 어떤 희
망적인 비문도 새겨 넣지 않았는데, 그가 아주 침울한  가운데 임종을 맞이 
했기 때문이다.

    작품 해설- 환상적으로 드러낸 원죄의식 혹은 인간 내면의 악마성
  이른바 '전기적 오류'가 될지  모르지만, 흔히 [젊은 향사 브라운]은 나다
니엘 호손의 어두은 가문사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부
는 세일럼의 마녀재판 때 무자비한  선고로 악명 높은 윌리엄 호손 판사였
다.
  하나님을 우러르고 악마를 쳐부순다는  명분 아래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
을 마녀로 몰아 처형하고 박해한 조상들의 반이성적 행위는 실제로 호손의 
정신에 강하게 원죄의식을 심어부었던 듯하다. 그의 외롭고  자폐적인 일생
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도  스스로 가문의 이름을 바꾼 일에 잘  드러난다. 
호손은 원래 Hathorne이었던 성의  철자에 w를 덧붙여 Hawthorne으로 바
꾸어 썼다.
  이 작품에서 젊은  향사 브라운이 그날 밤  환상적으로 목도하고 체험한 
것은 인간의 내면에 깃들인 악마성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세상은 거룩한과 
사악함, 천사와 악마가  정연하게 나뉘어져 있지만 밤의 어둠과 신비적  공
간에서 연출된 것은 그것들의 섬뜩한 뒤얽힘이었다. 그리고  그같은 진실에 
대한 그의 반응이 짧고 삭막한 후일담의 형태로 얘기를 맺는다.
  평소 마을에서 그들의 선을 향한 의지와 용기로 이름높던 이들이나 경건
한 신의 사람으로 
불리우던 이들이  진작부터 악마의 사람으로  분류되어 저주받고 기피되던 
이들과 실은 한통속이 되어 세상을  이끌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틀림없이 
젊은 브라운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존경하는 조상들이면  믿
고 사랑하던 아내까지도 예외가 아니었음으 확인하게 되면서 그 충격은 낙
담과 상심으로 그를 미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땅 위에  선이란 것은 없다. 죄악이 곧  선이 아닌가. 자, 악마여, 이 
세상은 바로  그대의 것이다."란 그의  절규는 바로 그같은 낙담과  상심의 
표현이다.
  그런 브라운에게 날이  밝은 뒤의 세계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세계는 다시 둘로 나뉘어져 겉으로는 신을 믿고  선을 구현하려는 모
습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는 이미  그 뒤어 감추어진 어두운 진실을 목도
한 사람이었다. 그날  밤 이후 그가 엄숙하고도 슬픈듯한 표정으로  침울한 
생각에 젖어있는 사나이가  되어버렸고, 세월이 흐른 뒤 우울한 임종을  맞
게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드른 이 작품에서 작가가 자신의 원죄의식을 세상 모두에게로 확
대함으로써 가문의 어두운 역사가 주는  부담을 줄리려 한 게 아닌가 하는 
혐의를 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찌하랴, 세상의 참모습은 브라운이 그
날 밤 본  것과 더 가까운 듯  하니. 싫더라도 우리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악마를 아무도 부인할 수는 없으니.
  여기서 젊은 브라운이 그날 밤 보았던 게 실제로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
지 않다. 작가의 설명처럼 어떤 악마적이고 신비한 힘에 의한 연출이든, 작
가의 어두운 열정이 빚어낸 일련의 가상이든, 또는 우연찮게  꾸게 된 악몽
이든 인간의  내면에 깃들인 악마성을  드러내보이는 기법으로서의 환상과 
기상은 실로 빛나는 데가 있다. 그것이 작가의 고전적인  문체와 어울려 오
히려 주제를 압도하는 느낌마저 준다.
  나다니엘 호손은 미국 단편의  혹립자이자 미국이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작가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12년간이나 독서와  명상에 
잠겨 보낸 세월이  그르 큰 작가로 기르는데 밑거름이 된듯하다.  우리에게
는 장편 [주홍글씨 (정확한 번역은 '진홍글자'여야 한다는 말도 있다)]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이 책의 첫머리에 놓임으로써 [성장과 눈뜸]편에서 그
의 단편 [큰바위 얼굴]을 싣지 못한 아쉬움을 달랜다.

    사빈느  -마르셀 에이메 지음-
  몽마르트르의 드 라브뢰브와르 가에  사빈느라는 이름의 젊은 여인이 살
고 있었는데. 그녀는 특이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즉 마음대로 자신의 분신
을 만들 수 있었으며, 원하는 대로 어느 곳에나 동시에  몸과 마음이 가 있
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결혼한 몸이었으며,  이렇듯 희귀한 재능은 남편의 근심을 살  것
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남편에게는 일절 알리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오직 
자기 아파트 안에 혼자 있을 때에 한해 그 재능을 사용키로 했다. 
  가령 아침 화장을 할 때 얼굴이며 몸매며 태도를 살피기 위해 둘로 혹은 
셋으로 분신을 만들곤 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지체없이 거둬들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같은 인간으로  합쳐진다는 말이다. 겨울철이나  또는 
비가 몹시 오는  날 오후 별로 외출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 때에는 이따금 
열 또는 스물로 분신을 만들어  활기있고 요란스런 대화를 나누는 일도 있
었다.
  그래봤자 실은 자신과의  대화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의 남편 앙트완  르
뮤리에는 S. B.  N. C. A의 소송계 부계장이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눈치채
기는커녕 자기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아내를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따.
  그런데 언젠가 단 한 번, 집으로 돌아왔을 때, 태도만이 각기 다를 뿐 모
든 것이 똑같은 세 명의 아내를  앞에 두고 입을 벌린 채 아연실색하게 되
었다. 푸르고 투명한 여섯  눈동자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빈
느는 지체없이 분신들을 거둬들였지만 그는 자신이 무슨 병에라도 걸린 것
으로 생각했다. 단골 의사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여  뇌하수체의 부족이라는 
진단 아래 비싼 약을 처방해 주었따. 
  4월 어느 날 밤 저녁 식사가 끝난 후였다. 앙트완  르뮤리에는 식당의 테
이블 위에서 계산서를 들여다 보고 있었고 사빈느는 안락의자에 앉아 영화
잡지를 읽고  있었따. 아내를 향해 시선을  든 그는 그녀의 태도와  얼굴의 
표정을 보고 크게 놀랐다.
  머리를 기울인  채 아내는 잡지를 발  밑에 떨어뜨리고 있었따. 크게  뜬 
두 눈은 부드러운 광채를 발하였고 입술에는 미소가 담겼으며 얼굴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따. 감동과 놀라움에 찬 그는 발  끝으로 살
며시 아내에게 다가가 경건하게 몸을 굽혔다. 
  사빈느가 귀찮다는 듯이 그를 떠밀었는데  그는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
다. 그것이 그날 일어난 일이었다.
  일주일 전 아브뉴  쥬노 길모ㅌ이에서 사빈느는 검은  눈동자를 한 나이 
스물다섯 살의 한 청년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는 길을 가로막더니 "부인" 
하고 불렀다. 사빈느는 고개를 치켜들고 성난  눈초리로 "이게 무슨 짓이에
요" 라고 쏘아붙였다.  그러나 결국 일주일 후  사월의 그 한 밤을  그녀는 
남편의 집과 검은 눈동자의 이 청년, 테오렘이란 이름의  자칭 화가의 집에
서 동시에 보내게  된 것이었다. 그가 남편을 계산서나 살펴보라고  푸대접
하며 떠민 바로 그 순간에 테오렘은 슈바리에 드 라바르 가의 그의 아틀리
에에서 젊은  여인의 손목을 붙잡고 "내  사랑, 내 날개, 내  영혼!" 이라고 
막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연인들이  흔히 쓰는 달콤한 말들을 속삭이고 있
었던 것이다. 
  사빈느는 늦어도 열 시에는 아무런  큰 탈을 저지르지 않고 자신을 거둬
들일 작정이었다, 그러나 자정이 되었을 때까지도 여전히  테오렘의 화실에 
있었으며 양심의 가책을 넘어서 후회까지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새벽 두 시에야 사빈느는  자신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그후에도 
돌아가는 시간은 갈수록 늦어졌다.
  밤마다 앙트완 르뮤리에는 아내의 얼굴 위에서 똑같은 환희의 빛을 엿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이어서 도무지 이 세상의 것으로는  보
이지 않았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동료와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던 중 그는 감동에 
겨워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만약 식당에서 밤을 새우는 내  아내를 본
다면 그녀가 천사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아닐까 생각하게 될 걸세."
  과연 넉  달 동안 사빈느는 천사와  계속 이야기하였다. 그 해의  휴가는 
아마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휴가였을 것이다. 
  그녀는 휴가 중,  르뮤리에와는 오베르뉴의 호숫가에서, 테오렘과는 부르
타뉴의 해변가에서 동시에 즐겼던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을 난 본 
일이 없었어." 남편은 그녀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눈동자는 아침 일곱 시 
반의 호수처럼 감동적이군." 사빈느는 아름다운  미소로 답하였으나 그것은 
보이지 않는 산의 요정에게 바쳐진 것 같은 미소였다.
  그때 부르타뉴의 작은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사빈느는 테오렘과 같이 햇
빛에 몸을 태우고  있었으며 그들은 거의 벌거숭이였다. 검은 눈동자의  사
나이는 마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 속에 잠기기라도 한 듯 아무 말
도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늘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데 그는  벌써 진력이 나 있었
다. 젊은 여인이 이 침묵에 대해, 그리고 침묵 속에 담겨진 듯이 보이는 온
갖 말  못할 정열에 감동하고 있을  때, 동물적인 행복에 파묻힌  테오렘은 
조용히 식사 시간을  기다리면서 단 한 푼도 들이지  않고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사빈느는 처녀  시절의 보석드를 이미 팔아치웠으며,  부르타뉴에
서의 휴가비용을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그에게  애걸조로 간청했었던 것이
다. 조금도 반대가 있을 리 없는 일을 그토록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사빈느
의 태도에 다소 놀란 그는, 지극히 만족스럽게 이를 받아들였다.
  예술가란 어떤 경우에도 통속적인  견해에 굴해서는 안되며 더욱이 자기
는 그 누구보다도  그래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는 그였다. "만약  양심의 가
책 따위가 그레코나  바라스케와 같은 걸작을 창작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런 것에 구애될 권리는 나에게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하곤 했다. 리모
쥬에 사는 한 숙부가 보내주는 보잘 것 없는 생활비로 사는 테오렘은 생활
의 해결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오만하고 굴할 줄 모르는  그의 
예술관은 영감의 이끌림이 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금하고 있어다. "십년
을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리겠다" 이렇게 말하는 그였다.
  그가 하는 일이란 대개의  경우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감수성을 풍부히 
기르는 데 힘쓰거나 동료들이  그리는 그림을 구경하면서 비평안을 높이는 
것이 고작이엇다. 이들이  테오렘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묻기라도 하면  그
는 수심어린 표정으로  "나 자신을 찾고 있지"라고 대답하였다.  존경을 강
요하는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겨울철 몸치장의 일부인 큼직한  나막
신과 넓은 비로드 바지로 말미암아 코랑쿠르 가와 데르트르 광장과 아베스 
가 사이에서 그는  매우 멋잇는 예술가라는 평판을 누리고 있었다.  그에게 
악감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그가 놀라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반대가 없었다.
  휴가도 끝날 무렵 어느 날 아침, 두 애인은  부르타뉴풍의 가구들로 장식
된 여관방에서  막 옷을 입는 참이었다.  그곳에서 5~6백 킬로미터  떨어진 
오베르뉴에서는 르뮤리에 부부가 벌써 세 시간 전에  일어났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호수 위에 노를  젓고 있는 남편에게 사빈느는 이따끔 한
두 마디 말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르타뉴의 침실에서 바다를  앞에 
둔 사빈느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희고 가는  손가락을 가진 내 
사랑], [몸과 마음을 누구에게나] 라는  노래였다. 테오렘은 벽난로 위에 있
는 지갑을 들더니 바지 뒤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기 전에 사진을 한 장 꺼
내들고 말하였다. "이것  좀 봐. 여기 사진이  한 장 있군. 작년  겨울 무랑 
드 라가레트 옆에서 찍은 내 사진이야."
  "오오! 내 사랑!" 이렇게 말하는  사빈느의 눈에는 이슬처럼 열광과 자랑
이 빛났다.
  사진에는 겨울 옷차림의 테오렘이 보였는데, 그의 나막신과  발목에 그처
럼 아름답게 졸라 맨 비로드의 넓은 바지를 보고 사빈느는 그의 천재를 의
심하지 ㅇ았다. 그러자 후회의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애는 듯싶었다. 이처
럼 다정한 애인이요,  이처럼 희귀한 천성의 예술가인 이 청년에게  욕되게
도 비밀을 감춘 것을  크게 뉘우치는 것이었다. "참으로 위대해요. 이 신좀 
보세요! 그리고 비로드의  바지를! 토끼 가죽의 모자를! 아아! 당신은  정말 
순수하고 이해심 넘치는 예술가예요! 그런데  내 사랑, 나의 다정한 보물인 
당신을 만난 행운에 넘친 제가 비밀을 숨겨 왔어요."
  "아니, 그게 무슨 이야기요?"
  "여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맹세한 비밀을 가르쳐 드리겠어요. 난 
어느 곳에고 동시에 있을 수 있어요."
  테오렘은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빈느는 말했다.
  "자, 보세요."
  그 말고 함께 사빈느는 아홉 명으로 둔갑을 했다.  테오렘은 아홉 사람의 
사빈느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한동안 정신이 아찔함을 느꼈다.
  "화나지 않았지요?" 그중 한여인이 불안스러운 수줍음 속에서 물었다.
  "아니야, 천만에."
  그는 감사하기라도 한  듯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안심한  사
빈느는 아홉 개의 입으로 열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사월 초, 그러니까 휴가에서 돌아온  지 한 달 가량 지난 후였다. 르뮤리
에는 아내가 이제는 천사하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근심에 찬 울
적한 그녀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당신 그전처럼 쾌활하지 않군." 어느 
날 저녁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 외출이 적은 모양이지. 내일 영화관에 
같이 갑시다."
  바로 이 순간에 테오렘은 그의 화실에서 발을 굴리며 사빈느에게 소리치
고 있었다.
  "그래, 당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당신이 자벨이나 몽
파르나스에서 어느 건달의  품에 안겨 있는지, 리용에서 비단 장사의  품에 
안겨 있는지, 혹은 나르본느의 포도주 장수의 침대 속에 있는지, 그렇지 않
으면 페르샤 대왕의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지, 그래 , 내가 어떻게 안단 말
이야?"
  "그렇지 않아요, 맹세해요, 여보."
  "맹세한다고, 맹세한다고! ....많은 사내들의 품에 안겨도 이렇게 맹세하겠
지, 안그래?  사람 미치겠군, 정신 나가겠다.  이젠 정말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심정이야. 죽여버리고 싶단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작년 고물상  장터에서 산 장검을 향해 눈을 들었
다. 그이 범죄를 막기 위해 사빈느는 열둘로 불어나  장검에 접근 못하도록 
그를 막아섰다. 테오렘은 겨우 진정했다. 사빈느는 자신을 거둬들였다.
  "참 나는 불행하기도  하지." 그는 투덜거렸다. "그렇지 않아요  괴로움을 
견디기 힘든 판에 이 또 무슨 고통이람!"
  그것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양면의 괴로움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의 말
에 의하면 그는 지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석  달이나 집
세를 받지 못한 집주인은 차압을  하겠다고 위협했고.  리묘쥬의 숙부는 별
안간 생활비를 끊어 버렸던 것이다.
  또한 정신적인 면으로는 비록 천부적 재능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만 매우 
고통스런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 안에  천재의 창조적 힘
이 들끓으며 정돈됨을 느끼건만 돈의  부족으로 이를 실현할 수 없다고 하
였따. 집딜리와 굶주림이 문턱에 와 있을 때. 걸작을 그려 보라는 것인가.
  사빈느는 몸서리치는  고뇌에 휩싸여 가슴이  에이는 듯싶었다. 지난  주 
노르벵 가 연탄집에 진 테오렘의  외상값을 청사나기 위해 마지막 남은 패
물을 판 그녀는 천재의 비약을 위해 이제 아무것도 희생할 것이 없음을 알
고 절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인즉, 테오렘의 형편은 보통 때에 비해 
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없었다.
  리모쥬의 숙부는 조카를 훌륭한 화가로 만들기 위해 깊은 애정으로 온갖 
출혈을 감당하고 있었꼬,  한편 집주인은 장래성 있는 가난한 화가에게  투
자한다는 생각에서 적당히 그려낸  그림으로 집세를 대신케 하는데 동의하
였으며 화가 또한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테오렘은 저주받은 시인이나 보헤미안의 영웅으로 자처하는 즐거
움에 만족하지 않고 이러한 비극적  묘사가 젊은 여인에게 그지 없이 대담
한 결단을 촉구하게 되기를 막연히 희망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가 괴로움 속에서 홀로  남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사빈느는 
정부의 집에서 밤을  세웠으며, 드 라브뢰브와르 가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
지 않았다.  다음 날 그녀는 테오렘  옆에서 싱싱하고 행복한 미소와  함께 
잠을 깼다.
  "지금 막 꿈을 꾸었어요.  우리는 셍 뤼스틱 가에서 폭이 겨우  2미터 가
량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잡화상을 열고 있었어요. 우리에게는 단 한  사람
의 손님밖에 없었는데  보리, 설탕과 루두두과자를 사러온 그는 어린  학생
이었요. 저는 큰 호주머니가 붙은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고  당신은 잡화 상
인의 작업복을 입고 있었어요. 저녁에 상점 뒷방에서 당신은  큰 장부 위에 
'매상고, 루두두 6프랑'이라고 적고  계시더군요. 내가 깨어날 때 당신은 이
렇게 말하고 있었어요. '장사가 잘되기 위해서는 또 한 사람의 손님이 있어
야겠는데.... 그래. 흰수염의 그 손님이 보이는군....' 나는 손님이 또 한 사람 
들게 되면  바빠서 머리가 돌겠다고  반대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어요. 
꿈에서 깨어났으니까요." "그래." 테오렘은 말하였다(빈정거리는  그의 콧소
리는 아주  신랄했다. 비아냥거리는 입모양도  그랬다.) "그래, 결국(극도로 
흥분하고 격한 그는 분노로 귀가  벌겋게 물들었고 벌써 검은 눈이 충혈되
어 있었다.) 당신의 야심은 나를 고작 잡화 상인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오?"
  "아니예요. 그저 꿈 얘기를 한 것 뿐이예요."
  "내 말이 그거야. 내가 잡화상 노릇하는 것을  꿈꾸고 있단 말이야? 앞치
마를 걸친."
  "아아! 여보."
  사빈느는 다정하게 항의했다. "만약  당신이 보았더라면! 정말 멋있게 어
울렸어요, 잡화상의 앞치마가!"
  치밀어오른 분노로 말미암아 테오렘은 침대 밖으로 뛰쳐나와 배신당했다
고 아우성쳤다.  무엇인가가 움터오르려고 하는  바로 이 순간에  집주인이 
나를 내쫓고 리모쥬의 숙부가  먹을 권리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인가.
  이 방대한 걸작,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는 아직도  연약하기만한 이 걸작
을, 그래,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웃음걸로 만들고 하찮게 해야만 하는 것인
가. 나 자신을 당신은  잡화상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왜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어서는 안된단 말인가.  테오렘은 잠옷을 걸친 채 아틀리에 안을  서성거
리면서 쉰 목소리로,  비통에 잠겨 마구 고함쳤으며,  집주인에게, 리모쥬의 
숙부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심장을 쥐어뜯는 
시늉을 몇 번인가 되풀이 하는 것이다.
  사빈느는 어쩔  줄 모른 채로, 예술가의  고통이 그 얼마나 깊은  곳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자격 없음를 깨달앗
다.
  정오에 집에 돌아온 르뮤리에는 뭐가 뭔지 모를 상태에서 아내를 발견했
다. 사빈느는 자신을 거둬들이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가 부엌으로 들어
왔을 때  아내는 네 사람의 여인으로  나타나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었지만 눈은 다 같이 우수에 젖어  있었다. 그는 몹시 당
황했다.
  "이런! 그놈의 뇌하수체 결핍증이 또 일어낫군. 다시 치료를 받아야 하겠
는걸."
  잠시 후 증세가 조금 나아졌다고  느끼자 그는 사빈느가 슬픔 속으로 깊
이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고 크게 걱정했다.
  "비애트(갸륵한 애정에서 이  착하고 다정한 사나이가 젊고 아름다운 아
내를 부르기 위해 택한 애칭이  바로 이것이었다), 당신이 이렇게 낙담하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볼 수가 없구료.  이러다가는 나도 병나겠고. 길에서나 
사무실에서나 당신의 그 처량한 눈을 생각하면 별안간 가슴이 에는 듯하고 
몇 번이나 종이 위에 눈물을 떨어뜨렸는지 모르겠어.
  그러노라면 안경알에 김이 서리게 되고 이를 닦지 않을  수 없단 말이오. 
상당한 시간낭비일 뿐만 아니라 이런 누눌을 ㄹ보이는 것은 상관이나 아랫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게 마련이지. 그것보다도 이 슬픔 -물론  그것이 
당시느이 맑은 눈을 형용할 수 없는 비통한 매력으로 채우고 있는 것은 사
실이지만 이 슬픔이 당신의 건강에  미칠 영향을 내가 크게 걱정하고 있다
는 것을 말하고 싶소.
  위험해 보이는 그 정신 상태에 대하여 당신이 빨리 힘을 내 저항하는 것
을 보고 싶단 말이오.  오늘 아침 전무 취체역인 포르퇴르씨가 -완전한  교
육울 받은 새삼 칭찬할 여지도  없이 재능있는 훌륭한 사람인데 참 친절하
게도 홍샹 경마장에 초대장을 한 장 주셨소. 그분의  처남이 파리의 명사인
가 본데 경마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오.  마침 당신도 오
락이 필요한 때이니...."
  그날 오후 생전  처음으로 사빈느는 롱샹 경마를 구경하러 갔다.  도중에 
신문을 한 장 사든 그는  테오크라트라는 이름의 말에 흥미를 갖게 되었는
데 그 이름이 사랑하는 테오렘과 비슷해서 어딘지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사빈느는 샤즈브  장식의 파타라천으로 된  푸른 망토를 걸치고  있었으며, 
해를 가리는 반 베일의  광동 모자를 쓰고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그를 쳐
다보았다. 처음의 경마들은 거의  그녀의 관심을 끌지 않았다. 그녀는 가로
막한 영감의 고뇌에 사로잡힌 사랑하는 화가를 생각했다.  아틀리에에서 추
한 현실의 도전과 싸우기에 기진맥진했을 때의 번쩍이는 그의 검은 눈동자
를 열렬히 상상해 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둘로 불어나 슈바리에 드 라바르 가에 달려가서 괴로운 처지
에 놓인 얘인들이 흔히 하듯이 예술가의 뜨거운 이마 위에 시원한 손을 엊
어 주고  싶은 욕망이 불현 듯  일어났다. 그러나 자신의 탐구에  열중하고 
있는 그를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이를 단념하였다.  사실상 테오
렘은 아틀리에에 있기는커녕 코랑쿠르  가의 바에서 포도주 술잔을 기울이
고 있었으며 영화관에 가자면 좀 늦지나 않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내 마사회장상이  걸린 경주를 위해  말들이 출발 지점에  들어섰다. 
사빈느는 테오크라트 4호  말을 눈여겨 바로보기 시작했다. 당시의  저축금 
전액인 약 1백  50프랑을 이 말에 건  그는 테오렘의 집주인을 진정시키기 
위한 충분한 벌이를 하리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테오크라트 4호를 탄 
기수는 흰색과 녹색으로  반반이 된 인상적인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부드
럽고 섬세하며, 가볍고, 가냘프고,  싱싱한 녹색이었다. 상추가 천당에서 자
란다면 그런 빛을 띤다고나  할까. 말 차제는 흑단처럼 새까만 빛깔이었다. 
출발하자 이내 선두를 달리기 시작한 이 말은 세  마장만큼이나 앞섰다. 경
마팬의 의견에 의하면,  이런 식의 출발로 결과를 예측하기란 어려운  것임
에도 불구하고 벌써  승리를 확신한 사빈느는 흥분에  겨워 벌떡 일어서서 
외치는 것이었다.
  "테오크라트! 테오크라트!"
  그의 주위에서 웃음과 빈정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그의  오른편에는 장
갑을 끼고 외눈 안경을 쓴  품위있는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순진한 
태도에 감동되어 다정하게 그녀를 곁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숭리의 도취감 속에 사빈느는 "테오렘! 테오렘!" 이라고 고함치기까지 했
다. 주이  사람들은 이 때아닌  시위에 떠들썩거리며 흥겨워했으며  경주는 
거의 잊다시피  하였다. 마침내 사빈느는  주위의 반응을 깨닫고  이상했던 
자신의 태도를 의식하면서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그 장갑을  낀 
외눈 안경의 점잖은 노신사가 벌떡 일어서더니 있는 힘을 다하여 외쳤다. 
  "테오크라트! 테오크라트!"  당장에 웃음소리가 사라졌으며, 사빈느는  주
위의 수근거리는 소리로 이 신사가 다름 아닌 버버리 경임을 알앗다.
  그러나 테오크라트 4호는 뒤로 쳐지기 시작하여 경주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듯 자신의 희망이 사라지고 테오렘이 영영  가난과 예술가로서
의 무능에 운명지워진  것을 보자 사빈느는 한숨을  몰아쉬며 눈물도 없는 
흐느낌에 사로잡혔다.
  마침내 콧구멍이 벌렁거리며 경련을  일으키더니 눈에 물기가 고이기 시
작해다. 버버리 경은  대단히 측은하게 생각했다. 몇  마디 말을 주고 받은 
다음 그는 자기 아내가 되어 주지 않겠느냐고 청했다.  자기에게는 20만 파
운드에 해당하는 연금이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순간에 사빈느는  하나
의 환상을 보았다.
  그것은 병원의 초라한 침대에서  숨져가면서 신과 집주인의 이름을 저주
하는 테오렘의 환각이었다.  애인에 대한 그리고 그의 미래의 그림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버버리경의  아내가 돌 것을 수락한다고 대답하
고 말았다.
  다만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심지어 성도 없거니와 있는  것은 
이름뿐이요, 그것도 흔해 빠진  마리라는 것을 잊지 않고 덧붙였다. 버버리 
경은 이 특이한 점을 매우 놀랍게 생각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누이 에미리
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에미리는 나이  지긋
한 처녀로서 왕국의 역사적 가문의 고귀한 전통을 지키는데 일생을 바쳐왔
던 것이다.  마지막 경주가 끝나는 것도  채 기다리지 않고 그는  약혼녀와 
함께 부르제 공항으로 떠났다.  여섯 시에는 런던에 도착하였고, 일곱 시에
는 결혼한 몸이 되었다.
  런던에서 결혼을 하는 동안 사빈느는 드 라브뢰브와르 가 자택에서 남편 
앙트완 르뮤리에와 마주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르뮤리에는  아내
의 안색이 좋아진 것을 알고 그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남편의 그러한 
마음씨에 감동된 사빈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과연 버버리 경과  결
혼한 것이 인간 및  신의 법을 어기는 것은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매우 풀기 어려운 문제였으며  그 안에 또 하나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즉, 앙트완의 아내와 버버리 경의 아내의  동질성의 문제였다. 그들
이 각기 하나의 독립된 생리적 개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자. 그러나 결
혼은 비록 육체적 형태로써 완성된다 할지라도 우선 영혼의 결합이란 문제
가 남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식의 근심은 지나친 것이었다. 결혼에 관한  법률은 한 인
간의 동시존재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인 만큼 사빈느로서는 자유로이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거니와 신의 가르침과 일치된다고 스스로 믿어도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단  한 줄의 교서도 교황의  칙령도 
또는 교령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빈느는 그러한 자기 편의대로의 이유를 방패삼기에는 너무나도 
고결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버버리 경과의 결혼을 간통의  결과
요 연장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믿었거니와 그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요, 마땅히 정죄되어야만 했던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 같이 욕되게 하고 있는  신과 사회와 남편에 대한 보상으로서 그녀는 
테오렘을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돈을 위한 이런  식의 결혼을 치
르고 난 다음 다시 그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수치스런 일일 것만 같았다.
  물론 그의 영광과 안식을 위해 마지못해 받아들인 결혼이기는 했지만 그
녀의 명예로운 순진성은  이를 사랑에 대한 치욕으로  생각게 하였던 것이
다.
  여기서 말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지만, 영국에서의  생활은, 처음에는, 사
빈느의 회한도 그리고 테오렘을  만나보지 못하는 괴로움마저도 능히 참을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버버리 경은 정말 무시못할 인물이었따. 매우 부유
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왕 장 셍 테르의 직손이었다. 그  왕은 -역사가들도, 
왜 그랬는지 그 사정을 알 길이 없지만- 애르메상 드 트랑카벨이란 천민의 
딸고 결혼하여 열일곱의  자식을 두었는데 모두 어린  나이에 죽고 열넷째 
아이 리차드 휴그만이 남았다.  이것이 곧 버버리 가의 조상이었다. 영국의 
모든 귀족들이 부러워하는 특권 중에도  특히 버버리 경 부처는 왕궁 안에
서까지 우산이나 양산을 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기에 사빈
느와의 결혼은 커다란 사건이었던 것이다.
  신부는, 비록 시누이가 타방렝에서 댄서 노릇을 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리
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는 호의에 찬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에서 마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운 사빈느는 대귀족 부인으로서의 의무에 
몹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연회, 오후의  접객, 자선 뜨개질, 골프,  의상의 
가봉 등은 하품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주함 속
에서도 그는 테오렘을 잊을 수가 없었다.
  화가는 영국에서 규칙적으로 부쳐오는  수표의 출처에 대해 아무런 의혹
도 품지 않았다. 또한 그의 화실에 사빈느가 찾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개의치 않게  되었다. 2만 프랑 가량이나 되는 매달의  송금으로 물질
적인 걱정에서 풀려나온 그는  작품완성에 적합하지 않는 지각과민의 시기
에 자신이 처해 있음을 깨닫고,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1년간의 휴식을  -필요하다면 이를 연장할 조건으로- 갖기로 하였다. 
몽마르트에서 그를 만나보는 것은 갈수록 더 힘들어졌다.
  그는 몽파르나스의 바와 샹제리제의 나이트 클럽에서 기분풀이를 하면서 
값비싼 여인들과 더불어  캐비어와 샴페인으로 소일하였다. 테오렘이  오히
려 문란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을  안 사빈느는 그가 빛의 조화와 여인의 가
면 밑에 숨어  있는 불순한 층을 혼합한 고야적  예술의 어떤 형태를 찾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느 날 오후,  버버리 경의 성에서 3주일을 보내고 돌아온  버버리 부인
은 마리존 스퀘어의 호화 찬란한  저택으로 들어서면서 네 개의 상자가 기
다리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 상자 속에는 각기 엘레아천의 야회복과  크
레이프의 오후 외출복과 모직물의 운동복과 스파라드라의 고전적인 상하복
이 들어 있었다. 
  하녀를 물리친 다음 그는 다섯으로 늘어나 옷을 입어  보고 있었다. 이때 
버버리 경이 잘못하여  그 방에 들어왔다. "여보!" 그는  외쳤다. "당신에겐 
아름다운 누이가 넷이나 있었군요. 그리고도 말 안하다니!"
  자신을 하나로 거둬들이지 못하고  당황한 버버리 부인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도착한 길이예요. 알폰신은 저보다  한 살 위지요. 브리지트는 
저와 쌍둥이 형제예요. 그리고 바르브와 로자리는 동생인제  역시 쌍둥이랍
니따 모두가 절 많이 닮았다고 말하더군요."
  네 사람의 누이는 귀족 사회에서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대
환영이었다.
  알폰신은 미국의 애완용 가축의  왕인 백만장자와 결혼하여 대서양을 건
너갔고, 브리지트는 고리자푸르의 왕과 결혼하여 그를 따라  왕국으로 갔으
며, 바르브는 결혼한 나포리의 저명한 테너 가수와 함께  그의 세계 순회공
연의 길에 올랐고, 로자리는 스페인의 탐험가와 결혼하여  파푸족의 풍습을 
연구하기 위해 뉴기니아로 가는 남편을 따라 갔다.
  거의 때를 같이하여 거행된 이  네 쌍의 결혼은 영국은 물론이려니와 유
럽대륙에까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파리에서도 신문들은 흥미를  가지
고 이를 보도하였으며  사진을 개재하였다. 어느 날 저녁 드  라브뢰브와르 
가 자택의 식당에서 앙트완 르뮤리에는 사빈느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버비리 부인과  그의 네 누이의 사진을  보았소? 당신과 얼마나 
닮았는지 참으로 놀랐소. 단지 당신은 눈이 좀더 맑고  얼굴이 갸름하고 입
이 작고 코가 좀  짧고 턱이 덜 바라진 것 뿐이지. 내일 당신  사진과 신문
을 들고 가서 포르퇴르씨에게 보여 주겠소. 깜짝 놀랄 거요."
  앙트완은 웃었다. S. B. N. C.  A.의 전무 취체역인 포르퇴르씨를 놀라게 
하는 것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포르퇴르씨가 어떤  얼굴을 할까 하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는데." 그는 
덧붙였다. "참, 그 사람도. 그건 그렇고 그분이  수요일의 경마 초대장을 또 
보내주었는데 어떻게 할까? 당신 생각은 어때요?"
  "글쎄요." 사빈느는 대답하였다. "좀 까다로운 일이군요."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는 르뮤리에가 포르퇴르씨 부인에게 꽃이라도 보내
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바로 그 순간에  버버리 부인은 레이세
스터 백작과 가마를 타고 있었고, 스리스손 부인은  펜실베니아주에서 종합 
르네상스구의 저택을 장식하며  연회를 베풀기에 열중하고 있었으며,  한편 
바르브 카자리니는 그 저명한 테너  가수가 열차을 하고 있는 비엔나 오페
라 극장에 있었는가 하면, 로자리 발데스 이 사마니에고는  파푸족의 한 촌
락 오두막집에서 모기장을 치고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들은 다 같이 포르퇴르 부인에게  꽃을 바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에 고심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신문을 보고 결혼 축하연에 관한  소식을 안 테오렘은 보도와 함께 실린 
사진을 보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거니와 이 신부들이 사빈느의 새로운 화
신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별 이익이 없는 직업으로 보이는  탐험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편들의 선택이 매우 옳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가 몽마르트르로 돌아올  필요를 느낀 것은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다. 
몽파르나스의 습한 풍토며 샹제리제의  소란스런 메마름에 그는 진력이 나
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버버리 부인이 보내는 매달의  송금은 낯선 곳에서
보다는 뷰트의 카페에서 쓰는 게 더 쓸모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요컨대 그이 생활  양식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는 이내  몽마르트
르의 밤거리를 쏘  다니는 요란스런 주정뱅이란 평판을 얻고야 말았다.  친
구들은 그의 모험담을 듣고 즐거워  즐거워했으며 이러한 그의 호사를 -하
긴 그들도 덕을 보고 있는 셈이었지만- 다소 시기하는 그들은 이제 그림하
고는 볼장 다 본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래도 유
감스러운 일이라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그가 예술가로서 당당한 
소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과 함께였다.
  사빈느는 테오렘의 잘못된 행실을 알게 되었고 그가 파국적인 길에 들어
섰음을 깨달았다. 그에 대한, 그의 운명에 대한 신뢰는 이로써 동요를 느꼈
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그를 더욱 깊이 사랑하였으며 그의 타락의 원인이 
자신에 있음을 뉘우치는 것이었다. 근 한 주일 동안이나  그녀는 몹시 자신
을 괴롭혔다.  어느 날 밤 자정에  남편과 함께 영화관에서 돌아오던  길에 
주노 지라르동  네거리에서 그는 테오렘을  보았다. 그는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술 취한 두  여인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테오렘 자신도  술에 곤드레
가 되어 '검붉은 술을 토해 내면서 두 여자를 향해  듣기도 끔찍한 욕을 퍼
붓고 있었다.
  그중 한 여자는 그이 머리를 붙잡고 허물없이 개망나니라고 부르는가 하
면, 또 한 여자는  군대 용어를 빌자면, 애인의 '능력'을 저울질하며 장난치
고 있었다.  사빈느를 알아 본 테오렘은  그에게 추한 얼굴을 돌려  대면서 
버버리의 이름을 딸꾹질과 함께 내뱉고는 몇 마디 주절주절 토를 단 후 가
로등 아래 쓰러지고 말았다. 이 재회 이후로 그는  사빈느에게 오직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사빈느는 그를 잊기로 결정했다.
  그로부터 두  주일 후, 남편과 함께  버버리 언덕에서 살고 있던  버버리 
부인은 성에서 점심을 같이 한 근처의 한 젊은 목사에게 반했다. 
  그의 눈은 검은 빛이  아니라 파리한 푸른 빛을 하고 있었고,  입술은 관
능적이 아리라 새침하게  처져 있었으며, 그 깨끗하고 청결한 모습에는  자
신이 모르는 것은 단호히 멸시하는  사람드르이 그 차갑고 깨끗이 닦인 양
심이 깃들어 있었다. 처음 점심을 같이할 때부터 버버리  부인은 깊은 사랑
에 빠졌다. 그녀는 밤에 남편에게 말하였다.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제게는 또 하나의 누이가  있어요. 주디트라
는 이름이지요."
  다음 주에는 주디트는 성으로 와서 목사와 함께 식사를  했다. 목사는 매
우 친절하였으나  태도는 차가웠다. 여성은  악한 생각의 집합소요  그것을 
전염하는 운반체라 믿는 가톨릭 여성관에 알맞는 태도라고나 할까.
  식사 후에 그들은  함께 공원을 산책했다. 주디트는 때를 맞추어  자연스
럽게 욥기와 민수기와 신명기를 인용했다. 그로부터 1주일  후 그는 주디트
를 개종시켰고,  2주일 후에는 결혼하였다.  그들의 행복은 짧았다.  목사는 
말끝마다 교훈을 늘어놓았고, 침대 속에서조차 고상한 사상이나  읊조릴 따
름이었다. 주디트는 그와의  생활이 어찌나 권태로웠던지 끝내  스코틀랜드 
호수에서 산책을 틈타 사고로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사실인즉 숨으려고 물  숙에 가라앉았던 것인데, 남편의 눈에 보이지  않
게 되자 버버리 부인의 품 안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목사는 몹시 슬퍼하
였으나 이와 같은 시련을 보내주신데 대하여 오히려 신에 감사하고 그래서 
정원에 작은 석주를 기념으로 세웠다.
  이러는 동안 테오렘은 지난 달의  송금을 아직 받지 못해 걱정하고 있었
다. 단순히 지연된 것으로  생각한 그는 참아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 
달 이상이나 남은 돈으로 연명한  끝에 그는 사빈느에게 이 난처한 사정을 
알리기로 결심하였다. 사흘을 계속해서 아침마다 드 라브뢰브와르  가 길목
을 지키고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은  어느 날 
밤 여섯 시, 우연에 의해서였다.
  "사빈느, 사흘 전부터 기다렸어."
  "그런데 댁은 누구세요? 전  모르겠어요." 사빈느는 대답하면서 지나가려
고 했다. 그러자 테오렘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것 봐요, 사빈느.  내게 대해서 화낼 이유가  없지 않아? 당신이 원한 
대로 나는 했단 말이야. 당신은 앞으로 내 집에 오지  않기로 당신 혼자 마
음먹었지. 그래도  난 왜 나를 버리느냐고  묻지도 않은 채 혼자서  고민만 
했단 말이야."
  "여보세요,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통 모르겠어요. 게다가 함부
로 반말을 하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건 제에 대한 모욕이에
요. 저리 비키세요."
  "사빈느, 당신이 다 잊었을 리는 없지 않아, 생각해 보아요."
  아직 보조금에 관한 이야기는 감히  하지 못한 채 테오렘은 옛정을 불러
일으키려고 노력하였다.  비통한 심정으로  감동적인 추억을  불러일으켰고 
그들 사랑이 역사를 되살렸다. 그러나 사빈느는 놀란, 다소 공포에 질린 눈
초리로 그를 바라보았으며,  분노에서라기보다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항의하였다. 청년은 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난 여름 일을 생각해 보아요. 부르타뉴에서 같이 보낸 휴가, 
바다를 바라본 우리의 방을 말이야."
  "지난 여름이요? 하지만 전 남편과 함께 오베르뉴에서 보낸 걸요."
  "물론! 사실을 방패로 삼겠다면!"
  "뭐라구요! 사실을 방패로  삼는다고요! 날 놀리시는군요.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나갔거나. 비켜나세요. 안 비키면 사람을 부르겠어요."
  이렇듯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자, 테오렘은 흥분한 끝에  그녀의 팔
을 붙잡고 욕을 퍼부었다.  그때 사빈느는 그들으 보지 못한 채  건너편 길
로 지나는 남편을  보았다. 그는 남편을 불렀다.  아내에게로 온 그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테오렘에게 인사를 했다.
  "이 사람 처음 보는 사람인데." 사빈느는 설명했다. "제 길을  가로막고는 
마구 반말을 하고 게다가 마치 자기 애인이나 되는 것처럼 절 대하는 거예
요. 날 애인이라고  부르는 가하면 지난 날의 사랑의 추억인가를  이야기하
는 거예요. 참 어처구니 없게."
  "무슨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앙트완 르뮤리에는 오만하게  물었다. " 
자, 당신은 지금 말도 안되는 수작을 부리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종류의 
수작은 결코 신사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주장 못하겠지요. 조심하시오."
  "좋습니다." 테오렘은  중얼거렸다. "제 처지를  이용할 생각은  없으니까
요."
  "좋도록 이용하세요.  참으실 것  없습니다." 사빈느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앙트완을 향하여, "이 사람이 지난  여름 부르타뉴 해변에서 내가 
자기와 함께 3주일간의 휴가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방금  하더군요. 당신 생
각은 어때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시다." 테오렘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 편이 확실히 상책일 거요." 남편이 그의 말에 찬성하였다.
  "댁에서 알아두실 일은 저와 처는 여름 동안 헤어진 일이 없었다는 것과 
그리고 같이 휴가를 보낸 곳은...."
  "오베르뉴의 호숫가에서지요. 알고  있습니다." 테오렘이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어떻게 아시지요?" 사빈느는 순진하게도 반문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그때가 부르타뉴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고  있을 
때라나요...."
  이 대답을  듣고 젊은 여인은 생각에  잠긴 듯이 보였다. 화가는  새까만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빈느는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결국, 이제 알겠는데,  제가 남편과 함께 오베르뉴 호수에,  그리고 당신
과 함께 부르타뉴 해변에 동시에 가 있었다, 이 말씀이지요? "
  테오렘은 눈을 깜박거리며  그렇다는 표시를 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
제 앙트완 르뮤리에에게는 사정이 분명해졌다. 그는 테오렘의  배에다 발길
질이라도 할 참이었다.
  "여보시오." 그러나 마음씨 고운 이  사나이는 "아마 당신은 혼자 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 근처에  사신다면 댁에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하
고 말았다.
  "제가 누군지를 모르신다는 말씀입니까?" 화가는 놀라며 물었다. 
  "죄송하지만...."
  "전 베르상제토리입니다. 제가 되돌아가는 길은 염려하실 것이 없습니다. 
라마르크에서 지하철을 타고 알레지아에서 가서 저녁을 먹겠습니다. 자, 안
녕히 계십시오. 돌아가서 부인이나 어루만져 드리지."
  테오렘은 이 마지막 말을 하면서  온갖 멸시의 눈길로 사빈느를 훑어 보
고 가혹한 냉소를  퍼부으면서 사라졌다. 이 가엾은 사나이는 자기가  미쳤
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으며, 더 일찍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자신을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광증의 증거는 찾기 쉬웠다.
  부르타뉴의 휴가나 사빈느의 그 능력이 오직 그의 정신 속에서만 있었던 
일이라면 이는 다름아닌 발광한 자의 환각이다. 반대로  그것이 사실이었다
고 하자. 그렇다면 테오렘은 부조리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의 처지
에 놓이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정신병자의 특징인 것이다. 자기가 정신착
란에 빠졌다는 확신은 화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침울하게 방안에 틀어박혀 친구를 피하고 그들의  제언을 물리쳤다. 
동시에 여인들의  세계도 떠났으며, 뷰트의 가페도  드나들지 않았다. 오직 
화실에 갇혀 자신의 광기를 생각하고만 있었다.
  기억ㅇ르 잃지 않는  한 앞으로 병이 나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러나 그와 같은 고독이 다시  그를 그림으로 향하게 하는 다행스런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성난 열정으로,  때로는 광적인 흥분을 느끼며 그리기 시작
했다. 지난 날 카페와 바와 침실에서 발산하였던 그의  아름다운 천재는 광
채를 내고 찬란히 빛났으며,  마침내 반짝이기 시작했다. 6개월간의 노력과 
열정적인 탐구 끝에 그는 충만되게 자신을 실현하였거니와 이제 그리는 것
마다 걸작품이요 거의 모두가 불멸의 것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이미 큰 물의를 일으킨 유명한 [아홉 머리
의 여인상]이 있고,  또한 그처럼 순수하고도 오뇌에 넘친 [볼테르의  의자]
가 있었다. 리모쥬 숙부는 크게 만족하였다.
  그러나 이때 버버리 부인은 목사의 아이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말해 둘 것은 이  두 사람의 행동에는 아직 아무런 일도 없
었다는 것이다. 다만  주디트가 언니의 품으로 되돌아 오면서 아직  태아에 
지나지 않았지만 목사의 아이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버버리 부인은 다소 도덕적인  괴로움은 느꼈으나 매우 튼튼한 옥동자를 
분만하였고, 목사는 태연하게 이  아이에게 세례를 주었다. 어린 아이는 안
토니라 이름지어졌따. 그 외에는 굳이  할 말도 없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고리자푸르의 왕비는 두 쌍둥이를 낳았는데 이들은 분명히 왕의 아들
들이었다. 이것은 커다란 정사로 그곳의 습관대로 백성들은  갓난 왕자에게 
순금을 선사하였다. 한편 바르브 카자리니와 로자리 발데스  이 사마니에고
도 각각 아들과 딸을 낳아 어머니가 되었다. 이 또한 경사였다.
  백만장자의 아내인 스미스손 부인은 언니들과는 달리 몹시 큰 중병을 앓
게 되었다. 그녀는 회복기를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는데, 이때 그 위험한 소
설들을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소설들은 죄에 떨어진 수치스런  남녀를 
너무나도 아름다운 조명하에 그려 보였고, 작가들은 사랑의  기쁨과 쾌락의 
추구를 서슴지 않고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벌받을 자기 만족을 느끼면서,  그리고 아아! 얼마나 달콤한 말들
과 끔찍한 사실을 기술적으로 채색하고 있는가! 이 기술은 가장 추한 상황
도 사랑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그  주인공들을 영광되게 하고  변모시키며, 
이 가증스런 행위의 본 모습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지는 않더라도 (분명
히 그러할 것이지만) 적어도  우리 자신을 잊게하는 악마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책보다  나쁜 것이라곤 없을 것이다. 스미스손 부인은 
그만 이것에 걸려들고 말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다음과  같이 추론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다섯 사
람의 남편을 가지고 있다. 한때는 여섯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애인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여섯  달 동안에 나에게 준 기쁨은 남편들이  1년간 준 
것 전체보다 더 큰  것이었다. 그렇건만 그는 내 사랑을 받기에  합당치 않
은 사람이었다.
  양심의 가책으로 내가  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스미스손  부인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엄지 손가락으로 소설의 페이지를  넘겼다.) [사랑이 나
를 깨울 때]의 애인들은 양심의  가책 따위는 무엇인지조차도 모른다. 그리
하여 소처럼(오히려 신처럼, 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행복하다.  나의 가책이
란 실상 근거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간통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오직  한 사람에게 속한 것을 남에
게 바친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애인을 갖고도 스미스손에게 충실
할 수 있는데 그 어떤 구속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은 멀지 않아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그런데  더욱 불행한 것은 
혼자만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이 번져  언니와 동생들의 마음 
속에 동시에 퍼진다는 사실이다.
  캘리포니아의 도라도 해변에서 요양이  끝날 무렵 스미스손 부인은 음악
회에 갔다. [월광소나타]를 재즈 형태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베토벤과 마귀
에 홀린 그의 음악에 매혹돼 큰 감동을 받은 스미스손 부인은 끝내 북치는 
악사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이 악사는 이틀 후 필리핀을 향해  배로 떠
날 예정이었다.
  그로부터 두 주일 후 부인은  급히 마닐라에 분신을 보내어 도착하는 악
사를 마중하였고 그의 사랑을 받게 되엇다. 이와 같은 때에, 버버리 부인은 
잡지에서 사진으로만 본  한 표범 사냥꾼에게 열중하여  바로 분신을 보냈
다.
  테너 가수의 아내는 스톡홀롬을  떠나면서 역시 분신을 남겨 오페라에서 
발견한 젊은 합창단원과  사귀게 하였고, 한편 종교의식 중 파푸족에게  남
편을 먹히게 된  로자리 발데스 이 사마니에고는  남태평양 항구에서 만난 
네 사람의 사나이들과 사랑을 하기 위해서 넷으로 불어났다.
  이리하여 단시일에 이 가엾은  여인은 열광적인 음란에 사로잡혀 지구상 
도처에 애인을 갖게 되었다.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 흩어진 
군단에는 모든 종류의 인간들이 섞여 있었다. 선원, 식물재배자, 중국 해적, 
장교, 카우보이, 장기 선수, 스칸디나비아의 운동 선수, 진주잡이, 인민위원, 
고등학교 학생, 소 몰이꾼, 투우사, 고깃간 인부,  엘네 사람의 영화인, 자기 
수리공, 일흔일곱 사람의 의사, 후작, 네 사람의 러시아 공자, 두 사람의 철
도공, 기하학 교수, 마구 제조인, 열한 사람의 변호사, 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특히 지적할 사람은 발칸 지역에 순회공연중인,  수염을 늘어뜨린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다.  마르키스군도의 한 섬에서만도 이 만족할 줄  모
르는 여인은 서른 아홉으로 늘어났다. 
  그곳 종족이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석 달 동안에  그녀는 
지구상에 950명의 몸으로  늘어났다. 그후 6개월 사이에 이 숫자는  약 1만 
8천에 도달했으며 이는 무시 못할 일이었다. 세계의  모습이 이로써 달라질 
지경이었다.
  1만 8천 명의 애인들은 한 여인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 사이에는 자신
도 모르는 중에 어떤 동일한  소원과 느낌과 평가 방식의 유형이 확립되었
다. 뿐만 아니라  한 여인의 의견과 그리고 그녀에게 사랑받으려는  동일한 
욕망으로 형성된 그들은 마침내 태도, 윗도리의 모습,  텍타이의 색갈, 심지
어는 얼굴의 표정까지도 서로 닮고야 말았다. 그 결과  기하학 교수는 중국 
해적을, 학술 회원은 그  수염에도 불구하고 투우사를 닮아갔다. 결국 하나
의 인간 유형이 태어난 것인데, 그 신체적인 특징은  어떤 연구로써도 밝힐 
수가 없었다.
  사빈느는 콧노래를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프랑스 경호대에 나의 애인이 
있지.....'로 시작되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그의 무수한 애인들, 그리고 그들
의 친구들 사이에 퍼져 마침내 국제적 유행가가 되었다.
   알카포네 갱들이 시카고 은행을 털면서 이 노래를  부른는가 하면, 우나
이나의 해적들이 황해의 정크를 습격하면서, 그리고 불멸의  학자들이 아카
데미 사전을 편찬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끝으로 사빈느의 실루엣, 그의 프
로필, 그의 눈의 모습, 다리의 움직임 등은 이제 새로운 여성미의 표준으로 
등장할 듯이 보였따.
  여행가들, 특히 특파원들은 세계 도처에 사빈느와 흡사한  여인들을 발견
하고 크게  놀라는 것이었다. 신문들은  대서 특필하였고 과학계에서는  이 
현상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
켰으며 아직도 끝을  보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유전인자의 돌연변이 및  종
의 무의식적 선택으로 인한 종족의 수평화라는 반 종말론적 이론이 대중속
에서 우세하였다.
  버버리 경은 이  논쟁을 깊은 관심으로 주시하고 있었는데, 차츰  아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드 라브뢰브와르 가의 사빈느  르뮤리에는 조용한 아파트에서 예나 다름
없이 주의깊고 알뜰한 주부로서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따.
  시장에 다니고,  비프스테이크를 굽고 떨어진 단추를  달고, 남편 내의를 
오래 입도록  손질하고 동창생들과 서로  교재를 나누고, 크레프몽  페랑의 
늙은숙부에게 어김없이 ㅍㄴ질ㄹ 썼다. 네 자매들과는 반대로  그는 스미스
손 부인의 소설의 부도덕한 권유를 다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애인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증가시키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았
다. 아마 이러한  조심성이 허울 좋고 교활하고 위선적이라고 생각할  사람
도 있을 것이다. 사빈느와 수많은 죄인들은 유일한 완전  동일 인물이기 때
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죄인들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신에게  버림받는 것은 
아니니, 신은 이 가엾은  영혼들의 어둠 속에 한 가닥 광명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이 광명이 사랑에 홀린 무수한 여인들의 1만 8천분의 1 속에 구현되었다
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사실  사빈느는 최초의 법적 남편으로서  앙트완 
르뮤리에의 우위성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자 하엿다. 그에 대한  사빈느
의 행동은 끊임없이, 이  명예로운 의도를 입증하고 있었다. 르뮤리에는 투
기에 실패하고 크게 빚을 짊어지게 되었는데 그때 병까지 겸하게 되었다.
  살림은 극도로 어려워졌고, 거의 무일푼의 상태에 가까웠다.  약값, 쌀 팔
돈, 집세 등이 한꺼번에 밀려 돈이 달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듯 사빈느는 괴로운 나날을 보냈지만, 집달 리가  찾아오고 앙트완이 
사제를 청할 때에도 버버리 부인이나 스미스손 부인의 재력에 호소하고 싶
은 유혹을 물리쳤다. 그러나 병자의 머리맡에 앉아 그의  딱한 숨소리를 살
피면서도 그는  자매들의 (당시 4만 7천  명이었다) 뛰노는 모습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몸짓을  바라보며 (이따금 한숨을 몰아쉬면서) 그  음란한 
소용돌이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열을 띤  안색에 다소 동공
이 커진 사빈느의  모습은 마치 열띤 주의력을  가지고 교환대를 지켜보는 
젊은 전화 교환수와도 같았다. 
  비록 이 향락의 물결, 음란하고 땀 흘리며 신음하는  이 간음의 복합체계
에 참여하고 (또한  다분히 닮기도 하고) 이에 즐거움을  느끼건만 (필연적
이고 숙명적으로 그리고 구조의  불가피하고도 절대적인 동일성에 의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빈느는 만족을 몰랐으며 마음은 욕망에  시달렸다. 그
녀는 테오렘을 다시 사랑하기 시작하였으나 결코 그에게 알리지 않을 하였
기 때문이었다.  그의 4만 7천 명의  애인도 이 희망없는 사랑의  파생물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편, 사빈
느가 오직 깔때기형의 운명에 저항할  길 없이 동경을 느끼는 것이라고 가
정할 수도 있다(크리쉬  가와 크리쉬 광장 합류점에  서 있는 사를 푸리에 
동상의 대좌에 적힌  그의 말을 참조할 것 -'매력은 운명에  비례된다.') 사
빈느가 테오렘의 성공을 알게 된 것은 처음 우유집 주인을 통해서였다.
  그후 그녀는 신문에서 보고 알았다. 전시장에서 그녀는  황홀한 심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아홉 머리 여인상]을 감상하였다. 그처럼 다정하고도 
비극적이며 비현실적인 그러나  그에게는 의미심장한 그림이었다. 옛  애인
은 이제 순화되고 구원되고 속죄되고  다시 혈색이 돌고 새롭게 빛을 발하
는 듯이 보였다.  오직 그만을 위하여 사빈느는,  그가 훌륭한 침대와 좋은 
식탁과, 언제나 맑은 마음을  갖게 되고 한편 그의 그림이 나날이  더 아름
다워질 것을 감히 기도하는 것이었다.
  테오렘의 눈은 여전히 검었다.  그러나 광기는 그를 떠났다. 그렇다고 자
신의 광기를 입증하기  위하여 같은 논리를 되풀이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
다. 그는 현명하게도 이렇게 생각했다. -그 무엇을 위해서도 훌륭한 이유가 
있는 법이고, 나의  광기의 증거를 파기하기 위해서 분명히 훌륭한  이유들
이 있다, 라고.  그는 굳이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이 
삶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일에 열중한,  대개의 경우 고독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거의 변함  없었다. 일에 열중한, 대개의 경우 고독한 생
활이었다. 사빈느의 소원대로 그의 그림은 갈수록 더 아름다워졌고, 미술평
론가들은 그의 작품의 정신성에 대하여 매우 희귀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이제는 카페에서 그를  만나볼 수 없게 되었으며  친구들 앞에서도 거의 
말이 없는 그는 위대한 고뇌를 품은 인간의 모습과 슬픈 몸매를 지니고 있
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깊이 반성해 보았으며,  사빈느에 대해 자신이 
비열했음을 의식하고 있는 테오렘은  하루에도 수없이 얼굴을 붉히고 자신
을 상놈, 천한  놈, 뒤틀리고 악독스런 두꺼비,  거만한 돼지라고 욕하였다. 
사빈느 앞에 죄를 뉘우치고 그의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너무나 분에 넘치
는 일로 생각되었다.
  부르타뉴 해변가를 순례한 그는  잡화 상인도 흐느끼리만큼 아름다운 그
림 두  폭과 자신의 비열한 뼈저린  추억을 안고 돌아왔다. 사빈느에  대한 
그의 사랑에는 너무나도 많은 자기 학대의 감정이 스며들어 이제는 사랑받
은 것을 오히려 후회할 정도였다.
  죽을 뻔한 앙트완 르뮤리에는 다행히 병에서 회복되어 다시 적장에 나가
기 시작했고, 그럭저럭 부채도 청산하였다. 이 시련을 겪는 동안 이웃 사람
들은 이제 남편이 죽어가고 가구는 팔려 나가고 여편네는 길거리에서 방황
하리라는 생각에 은근히 기뻐들 했었다.
  하긴 그들도 남과 다름없이 훌륭하고 알뜰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요, 
르뮤리에 부부에 대한  아무런 원망도 없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
위에서 소란과 변화와 집주인의 아우성과 집달리와 고열 등 음산한 비극이 
연출되는 것을 본 그들은 이  비극에 합당한 종말을 기다리며 초조한 나날
을 보낸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러나 르뮤리에가  죽지 않은 것을 원망하게 되었다. 모든  것
을 망친 것은 그  자였다. 이에 대한 복수로써 그들은 아내를  동정하고 찬
양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하였다. "르뮤리에 부인,  얼마나 
욕보셨어요? 모두 당신을  생각했답니다. 난 당신을 만나보려고 올라  갈까 
했지만, 프레데릭이 방해가 된다고  말리곤 했지요. 하지만 다 알고 있었어
요. 그리고 늘  되풀이 말했지요. 어제만 해도  부르베씨에게, 참, 르뮤리에 
부인은 훌륭해요,  참, 놀라워요,하고." 이 말들은  르뮤에리 앞에서도 그때 
그때마다 되풀이 되었고, 다시 문지기, 3층, 5층의  아낙네들에 의해 반복된 
나머지 마침내 이 가엾은 사나이는  도무지 감사의 표시를 찾을 방도를 잊
고 말았다.
  어느 날 밤  등불 아래에서의 사빈느의 모습이 피로해 보였다.  그녀는 5
만 6천번째의 애인, 미남의 헌병 대위를 상대하고 있는 참이었다. 
  이 애인은 카사블랑카의 호텔에서 허리띠를 풀면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시거를 피운 다음  사랑은 꿈같이 감미롭다고 말하고 있었다. 존경의  마음
으로 아내를 바라보고  있던 앙트완 르뮤리에는 손등에다  입술을 갖다 댔
다.
  "여보, 당신은 성녀요.  성녀 중에도 가장 다정하고 아름다운  성녀요. 성
녀, 진정한  성녀지." 이 찬사와 동경의  눈초리에서 무의식인 조롱을 읽은 
사빈느의 마음은 매우 아팠다.
  그는 손을 빼고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는 신경질을 부린  데 대해 사과하
고 방으로 물러갔다. 그녀가 머리핀을 꽂으려고 할 때  아테네의 한 식탁에
서는 수염이 풍성한 학술회원의 동맥류가 파열되어 죽어갔다.  사빈느가 그
와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는데,  물론 그곳에서는 큐네공드라고  불리웠고 
그의 조카로 통하고 있었다.
 이 이름은 멋을 부린, 말하자면 문학적인 이름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
나 주의하기 바란다. -즉, 월력에는 5만 6천의 성녀가 없지만 이들을 다 기
념해야만 했으니 그런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인물의  유물은 
소중히 다루어져야 함을 확신한  큐네공드는 그 유물의 하나로서 사빈느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그녀는  다음 날 아침 앙트완 르뮤리에에 가한  수많은 
모욕을 속죄하고자 빈민굴 한발크에 파견되었다.
  큐네공드는 루이즈 메냥이라는 이름으로 생 투앙 빈민굴의 한 움막을 집
으로 택했다.
  이 추한 소굴 한복판에 세워진  움막들은 재와 사람의 퀴퀴한 냄새가 뒤
섞인 부슬부슬한 부식토 위에 산더미처럼 쌓아 올려진 쓰레기를 앞에 바라
보고 있었다. 부서진  집의 묵은 재목과 방수포로 만들어진 루이즈의  판자
집은, 널판으로 칸이 막힌  방 두 개로 되어 있었는데 기능  상실한 천식증
의 노인이 소년에게 간호를 받고 있었다. 이 노인은  밤낮 죽어가는 목소리
로 소년에게 욕을 퍼붓는 것이었다. 
  루이즈 메냥이 이 이웃과 사귀고  벌레와 쥐와 냄새와 싸움질 하는 고함 
소리와 빈민굴 거주자들의 난폭과 이  지상의 최후의 지옥 같은 곳에서 삶
이 강요하는 온갖  누추한 불편과 길들기에는 오랜 시일이 걸렸다.  버버리 
부인과, 결혼한 자매들, 그리고  5만 6천의 애인들은 (그 수는 증가 일로에 
있었다) 며칠 동안 밥맛을 잃고 말았다.
  이따금 버버리 경은  아내가 창백한 모습이 되어  머리와 손이 흔들리고 
눈이 뒤집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무엇인가 내게  숨기고 있구나'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로 말하면 루이즈  메냥이 판자집에서 배부른  쥐와 
대치하고 있었거나 빈대와  침대를 다투고 있는 것 뿐이었다. 버버리  경이 
알 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상상할지도 모른다. -속죄를 위하여 저주받은 자와  넝마주이들 
속에, 그리고 악취와  벌레와 상처와 공포와 굶주리과 칼과 누더기와  독한 
술과 백치들의 아우성 속에 뛰어들었으니 이 복합체의 죄인은 덕을 향하여 
크게 상승했을 것이라고.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일어났다.  루이즈 
메냥과 5만 6천 명의  자매들과 (6만 명이 되었다) 짓궂은 아내는 셍  투앙
의 빈민굴을 잊기 위하여 기분전환하기에 열중할 뿐이었다.
  자신이 고통을 누리는 대신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이로운 일이었을 것
이다- 루이즈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은 채 오히려 5대륙에서 전개
되는 불순한 향락의 광경으로 기분을 발산시키기에 노력하였다.  이는 쉬운 
일이었다. 6만 명이 두 눈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중의 한  쌍의 눈이 제공하
는 구경거리에 탐닉한다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귀를 위해서도  마찬
가지였다.
  다행히도 신의 섭리가 굽어 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저녁녘 바람은 훈훈하였다. 판자집과 사람이  묵고 있는 마차
와 쌓아올린 오물에서 풍기는 냄새가 썩은 고기에서 풍기는 짙은 냄새처럼 
녹아들고 있었다. 빈민굴을 덮은 가벼운 안개는 구불구불한  배경과 샛길을 
흐리게 감싸고 있었다. 아낙네들은 서로 잡년, 더러운  년, 도둑년하며 이야
기를 주고 받고  있었으며, 판자집 카페에서는 라디오가 자전거 경주  선수
의 인터뷰를 방송하고 있었다.
  루이즈 메냥은 공동수도에서 초롱에 물을 채우고 있었다.  그때 마차에서 
괴물과 같은  사나이가 기어나와 공동수도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깨며 얼굴이며 무릎까지  늘어긴 긴 팔이며 마치  고릴라같이 생긴 그는 
덧신을 발에 걸치고 짝짝이의 각반을 메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굴리듯 걸어나오더니 아무 말없이 루이즈 옆에 걸음을 멈추
고 섰다. 작은 두눈이 텁수룩한  얼굴 위에 반짝이고 있었따. 전에도 딴 사
내들이 우물가에서 그녀에게 접근한 일이 있었고, 그중에는  그녀의 판자집
을 맴도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무례한 자들도  어떤 관습적인 절차
는 지키려고 애쓰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자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음이 확실했다.  그는 마치 버스를 
타기라도 하는 것처럼 태연해 보였다. 루이즈는 감히 눈을  들지도 못한 채 
늘어뜨려진 큼직한 손을  바라보며 공포에 떨 뿐이엇다. 초롱에 물이  차자 
루이즈는 되돌아 왔다. 고릴라는  여전히 말없이 그녀를 따랐다. 그는 루이
즈 곁에서 총총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허리에 비해 발이 지나치게 작았기 때문에 발이 휘었다.  이따금 그는 담
배를 씹다 말고 침을 뱉었다. "무엇 때문에  날 따라 오세요?" 루이즈는 물
었다. "상처가 터지기 시작했어." 이렇게 말하고 걸으면서 허벅다리에 달라
붙은 바지를 꼬집어 보였다. 그들은 집에 다다랐다.
  공포에 질린 루이즈는 할 걸음 앞서 집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러
나 자물쇠를 걸기도 전에 그는 한 손으로 문을 떠밀고 방안으로 몸을 들여 
놓았다. 루이즈가 있는 것에 아랑곳 없이 그는 고름나는  상처의 둘레를 옷 
위로 살펴보려는 듯  조심스럽게 궁둥이 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러한  행
동은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옆방에서는 늙은이가  욕을 지껄이면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  어린 
놈이 자기를 죽이려  했다고 울부짖었다. 공포에 질린 루이즈는 방  한복판
에 서서 고릴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일어서면서 고릴라는 그녀의  시
선을 보면서  마치 참으라는 듯이 손짓을  하였다. 그는 문을 닫고  나더니 
의자 위에 씹는  담배를 내놓았다. 파리, 런던, 상하이, 바마코,  바통, 루쥬, 
밴쿠버, 뉴욕, 브레스로,  와르소비, 로마, 퐁디케리, 시드니,  바르스론 그리
고 지구상 도처에서 사빈느는 숨을 죽이고 고릴라의 동작을 주시하고 있었
다. 버버리 부인은 친구의 살롱에 들어선 찰나였다.
  그녀를 마중하러 나온 친구의 부인은 그녀가 코를 찡그리고 눈은 혐오에 
이글거리면서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그녀는 어느 노  대령의 
무릎 위에 주저 앉고 말았다. 나피에(뉴질랜드)에서는 6만 5천 명중 마지막 
분신인 에르네스틴이 한 젊은 은행원의 손을 손톱으로 할퀴어 깊은 상처를 
냈다. 그 은행원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빈느는 루이즈 메냥을  수많은 분신 중 하나에게로  흡수해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전혀 안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
을 거부할 권리가 자기에게는 없다고 느껴졌다.
  고릴라는 여러 차례 루이즈 메냥을 범했다.
  도중 쉴 때마다 그는 담배를 씹었다. 그리고는 다시  의자 위로 내려놓았
다. 칸막이 저편에서는  늙은이의 신음소리가 계속 되고 있었고 떨리는  한 
손으로 나막신을 내던지며 젊은 놈을 치려고 하였다. 
  그때마다 젊은 자는 바보같은  웃음 소리를 터뜨렸다. 거의 밤이 되엇따. 
어둠 속에서 고릴라가 몸을 들먹거릴  때마다 때와 썩은 음식과 사내의 악
취와 피고름의 냄새가  짐승같은 털과 옷에 밴 채 물씬거렸다.  마지막으로 
담배를 입에 다시 문 그는 마치 인생을 아는 사내처럼 20프랑 동전을 테이
블 위에 던지고는 "다시 오겠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이날 밤 6만 5천 명의 자매들 중에 단 한사람도  잠을 잘 수가 없었으며, 
그들의 눈물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제  그들은 스미스손 부
인의 소설이  그려보인 사랑의 쾌락이란  기만적인 환상일 뿐이요,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사내도  결혼의 신성한 울타리 밖에서는  오직 그가 가지고 
있는 것  -결국(그드른 생각하였다) 고릴라가  준 것과 대동소이한 것들을 
줄 수 있을 뿐임을 깨달았다.
  그들 중 수천의 여인들이  애인들과 다투었고 애인들은 여인들의 눈물과 
싫증난 얼굴에 그만 역정을 내고 말았다. 여인들은 이내  그들과 인연을 끊
고 떳떳한  생활 전선에 나섰다.  공장에서 일하거나 식모살이로  나서는가 
하면 병원 또는 양로원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마르키즈에서만도  열두 사람
이나 나병원에 들어가 병자들을 간호하였다. 아아! 이 움직임이 보편화되었
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새로운 죄인들이 증가되어  죄로 인한 상실의 크기가 더 컸
다, 회개의 길에 들어선  여인 중에도 유혹에 넘어가 다시 옛  향락으로 되
돌아 가기도 하였다.
  다행히 고릴라는 루이즈 메냥을 자주 찾아왔다. 언제나  변함없이 추하고 
난폭하고 악취를 발하고 있었던 만큼 그의 음란한 행위는 반대로 효과적일 
수 있었다. 그가  판자집을 찾아올 때마다 커다란 혐오의 전율이  여인들을 
휩쓸었고, 노동의 위엄과 자선사업 속에 피신하는 여인들의  수는 1~2천 명
에 이르렀다.
  물론 생각을 고쳐 다시 옛  습성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
다. 요컨대  숫자상으로 볼 때 사빈느가  선의 길로 크게 진전되었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애인의 수는  6만 7천 명으로 대략  고정되었으며 
말하자면 그렇게 고정되었다는 것이 유일한 발전이었다.
  어느 날 아침 고릴라는 큼직한  천 보따리를 짊어지고 루이즈 메냥을 찾
아왔다. 그 보따리  속에는 여섯 상자의 간  파이, 여섯 상자의 연어  파이, 
세 상자의 염소 치즈, 세 개의 치즈, 여섯 개의 계란, 열다섯 개의 오리, 다
진 돼지고기 한  단지, 순대 4킬로그램의 빵, 포도주 열두  병, 럼주 한 병, 
1912년제 축음기와 녹음된 실린더 등이 들어있었다. 이  실린더는 셋이었는
데 고릴라가 좋아하는 순서로 말하면, [황금빛 보리밭의 노래]가 첫째요 다
음의 난잡한 독백, 그리고 샤롯테와 베르테르의 이중창이었다. 어쨋든 고릴
라는 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찾아와 루이즈 메냥과 방안에 갇힌 채 이틀 후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야 되돌아 갔다.
  머리를 맞대고 지난 이틀  동안의 계속적인 소름끼치는 혐오스러움에 대
해서는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알아 둘 일은 이 기간에  2만 
명의 여인들이 환상에서  깨어나 그들의 애인을 버리고  보상 없는 노력에 
헌신하며 괴로운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중 9천 명이  (거의 반수
이다) 다시 죄로 떨어졌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수확은 좋았다. 그후로는 옛 습성에로의 복귀와  타락에도 불구하
고 계속적으로 상황은 유리해져 갔다. 이 무수한 육체드리  단 하나의 영웅
에 의해 움직여진다면 왜 결과가 신속하게 나타나지 않느냐고 의아하게 생
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활의 습관이란, 다시 말하면 특히 가장 
일상적이고 단순하고 표면성 무의미한  듯한 습관이란 마치 영혼이 육체에 
부착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의 자매들 중  수로안내자와 같은 생활을 한 여자들, 매일같이  애인을 
갈아치우고 보따리 싸기에 바빴던 여자들이 제일먼저 회개하였다.  그 외의 
대부분은 정한 시간의 식욕증진제, 안락한 아파트, 식탁의  둥근 냅킨, 문지
기의 미소, 샴의 고양이, 토끼 사냥개, 매주의 머리세트, 라디오, 재단사, 깊
숙한 안락의자, 브릿지의 상대자, 끝으로 남자의 규칙적인  존재, 그와 주고 
받는 날씨, 넥타이, 영화, 죽음, 사랑, 담배 등에  관한 의견 교환에 의해 악
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어물은  하나하나 
무너져 갈 듯이 보였다.
  매주 고릴라는  계속해서 2~3일  루이즈의 집에 머물렀으며,  몸서리치게 
만취되어 있었고 훙분과 냄새와 고름으로 휩싸여 끔찍스러웠다.  수천의 탕
녀들이 그들의  사랑을 끊고 순결과  자선사업에 덤벼들었으며, 그후  진흙 
속으로 되돌아갔다가는 다시 뛰어나와 망설이고 궁리하고 선택하고 더듬과 
부딪치고 스스로를 잃었다가는 되찾고  마침내 대다수가 순결과 노동과 포
기의 생활 속에 갇히고 마는 것이었다.
  놀라움 속에 숨을 헐떡이면서  천사드른 하늘의 울타리에서 몸을 기울이
고 이 영광스런  싸움을 주시하였으며, 고릴라가 루이즈 메냥의 집으로  들
어갈 때는 환희의 송가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신도 몸소  일별을 던질 
때가 있었다. 그러나  신은 천사들의 영광을 더불어 나누기는커녕 다만  미
소를 지으며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인자하게) "자,  조용히들 해요. 그
래, 어쨌다는 거야.  이것도 역시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영혼이지. 너희들이 
보는 것은 내가  6만 7천개의 육체를 주지 않은  모든 가난한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영혼의 싸움이  구경거리가 될 만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렇게 원했기 때문이지."
  드 라브뢰브와르 가의 사빈느는  조심스럽고 명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자
기의 영혼의 움직음을  살피고 이를 주부의 생활  메모에 숫자로 기록하였
다. 회개한 누이들의  숫자가 4만 명에 이르자 그녀의 얼굴은  한결 고요한 
표정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경계를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때때로 저녁 식당에서의  그녀의 모
습은 미소로써 빛났으며, 그럴 때면 앙트완 르뮤리에에게는  아내가 천사와 
속삭이고 있는 듯 보였다. 어느 일요일 아침 사빈느는  창가에서 침대의 깔
개를 털고 있었고  르뮤리에는 그의 곁에서 글짓기  퀴즈를 생각하고 있었
다. 이때 테오렘이 드 라브뢰브와르 가를 지나고 있었다.
  "저것 봐요."  르뮤리에가 말했다. "미친 사람이  지나가는군. 오래간만인
데."
  "미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면 안되요." 사빈느가 부드럽게 꾸짖었다.  "테
오렘씨는 위대한 화가예요."
  한가한 걸음걸이로 테오렘은  운명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우선 데  솔 
가로 내려가 크리냥 쿠르문 뒤편의 고물시장에까지 걸었다.  고물에는 아랑
곳 없이 발길이 향하는 대로 거닐었으며, 마침내 빈민들의  소굴로 접어 들
었다. 그들은 의젓한  옷차림의 낯선 사람에 대한 천민들의 은근한  적의를 
품고 그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방인이 호기심을  가지고 
비참한 광경을 구경하는 듯이 느껴진 것이다. 테오렘은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마지막 움막에  이르렀을 때 초롱을 들고  오는 루이즈 메냥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루이즈는 맨발에 나막신을 신고 있었고  몸에는 더덕더
덕 기운 검은색의 얇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그는  초롱을 빼
앗아 들고 뒤따라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옆방의 늙은이가  접시를 한 장 
사려고 고물시장으로 기어나갔기  때문에 움막은 조용했다. 테오렘은  루이
즈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서로 불행을 맛보게 한데  대해 사과하려 하였으
나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테오렘이 그의  발등에 엎드리자 루이즈
는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도 주저앉고 말았다. 그들의 눈에는 눈
물이 가득 괴었다. 이때 고릴라가 들어섰다.
  그는 어깨에 큰  식량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었다. 루이즈의 움막에서  일
주일을 보낼 작정이었다. 조용히 보따리를 내려 놓은 그는  아무 말없이 두 
애인의 목을 두 손으로 휘어  잡고, 치켜 들더니, 마치 물병처럼 좌우로 흔
든 다음 짓눌렀다.
  그들은 동시에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서로 바라보면서 죽어갔다.  둘을 
각각 의자 위에 앉힌 다음 그들과 함께 식탁에 자리잡은 고릴라는 간 파이 
한 상자를 헤쳐 놓고 포도주를 마셨다. 그는 그렇게 온종일 먹고 마셨으며, 
[황금빛 보리밭의 노래]를 듣기 위해  축음기를 틀었다. 밤이 되자 두 시체
를 한데 묶고 큰 보따리 속에 집어 넣었다.
  그가 어깨 위에 짐을 짊어지고 움막을 떠나려 할 때 가슴 윗부분에 무엇
인가 연민과도 같은 뭉클한 전율이 느껴졌다. 그는 보따리를 다시 열고, 어
느 마차 창가에서 꺾은 제라늄 한 송이를 그 안에  넣어 주었다. 그는 시내
의 대로를 따라 세느  강가로 향했다. 그곳에 닿은 것은 밤  열한 시경이었
다. 그 사건은 결국 그에게 약간의 상상력을 주었던 것이다. 케드라 메지스
리에서 두 시체를 강 속으로 내던질 때 그는 삶이 책처럼 권태롭고 싫증나
는 것임을 깨달은 듯 싶었다.  이내 삶과 끝장을 내고 싶어졌다. 그러나 물 
속에 뛰어드는 대신 그는 우아하게도 테라방디에르 셍트 오포르륜 가의 현
관 아래서 목을 베고 죽었다.
  루이즈 메냥이 목 졸려  죽는 순간, 6만 7천여 명의 자매들도  목에 손을 
가져가면서 행복한 웃음과 함께 숨을 거두었다. 그중 버버리  부인 및 스미
스손 부인과 같으 여자들은 호사한 무덤에서 잠들고 있으며,  그 외에는 모
자처럼 불룩한 흙더미 아래 쉬고 있다.
  이것도 세월과 함께  이내 지워 지고 말 것이다. 사빈느는  몽마르트르의 
작은 셍 방상 묘지에 묻혔다. 때때로 친구들이 그를 찾았다. 사람들은 그가 
천당에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최후의 심판의  날에 6만 7천 명의  몸과 
함께 부활하는 기쁨을 누리리라는 것을.

    작품해설 - 진진한 향수와 참혹한 종장
  [사빈느]는 한 여인의 의식 밑바닥에 잠재된 욕망을  분신술 혹은 편재술
이라 불리우는 상상  속의 마술로 변주한 기상곡이다. 작가가 곳곳에서  암
시하고 있듯이 사빈느는 평범한 월급쟁이의 아내였고, 그  정숙함도 욕망도 
여늬 여인들처럼 평범했다.  동시에 여러개의 몸으로 나뉠 수 있는  특이한 
재주만 아니었다면 그 욕망을  전개하는 방식도 평범해서 아마도 한가로운 
상상이나 망상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사빈느에게 그 특이한 재주를 부여해 상상이나 망상을 현실로 바
꿈으로써 기발한 변주가  시작된다. 열정적이면서도 재능있는 젊은  예술가
와의 사랑은 어쩌면 대부분의 주부들이 가져보는 꿈일지도  모른다. 유별나
게 바람기가 있거나,  성실하지만 답답한 남편에게 불만을 품은 여자가  아
니라도 통속적으로 기대되는 달콤한  분위기는 성적인 망상의 대상으로 일
쑤 예술가를 떠울리게 한다.
  사빈느도 거기 따라 불 같은 열정의 젊은 화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게 남편의 그늘  아래서 품어보는 망상이 아니라  몸을 나누어 체험하는 
실제의 사랑이기 때문에 다양한 욕망의 변주가 연쇄적으로  이어전다. 예술
하는 영혼의 광기와 변덕,  그 몸의 궁핍과 고난은 또 다른  욕망의 대상에 
눈길을 주게 하고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가속도를 얻어 연쇄폭발한
다. 그리고 마침내 절망으로 오히려 지나치게 비대해진 욕망은  몇 만의 몸
을 가지고도 멈출 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용의주도하게도 그 겉잡을 수 없는 욕망의 연쇄폭발을 중
단시키는 계기를 너무 늦지 않게 마련한다. 곧 여자의  의식 밑바닥에 잠재
해 있는 또 다른 욕망,  자비와 거룩함 순수를 향한 어떤 끌림이다. 동기도 
철저하지 못하고 실천도 보잘 것 없지만 사빈느가 자신의 분신중에 하나인 
루이즈 메냥을 빈민굴로  보내는 것은 그 끌림을  외면하지 못한 까닭이었
다.
  그런데 그 빈민굴에서  사빈느는 바로 최악의 대상과 만나게 된다.  괴물 
혹은 고릴라라고 표현되는, 더 내려갈 데 없이 비천해진  욕망의 대상은 사
빈느를 몸서리치게 했다.  그러나 거기에 또 길들여지는 분신 루이즈  메냥
을 보며 사빈느는 절망에 빠진다. 이제 사랑의 쾌락은  단지 기만적인 환상
인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떨어질  수 있는 비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비참
이었고 인간성이 겪을 수 있는 모멸 중에서도 가장 참담한 모멸이었다.
  그 절망, 그 비참과 치욕에서 사빈느를 구해주는 게  그래도 아직 간직하
고 있던 젊은 화가 테오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었다.  비록 형식은 질투로 
눈먼 괴물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6만 7천 명의 사빈
느가 욕망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되는 한 그것은 구원일 수밖에 없다.
  이 [사빈느]는 내 독서체험에서 한  특이한 예외가 된다. 나는 이 작품을 
서른 가까이 되어서  만났는데 읽고나자 경이를 넘어  어떤 절망까지 느꼈
다. 그때 멀지 않은  등단을 두고 중단편에 몰두하고 있었을 때라  더욱 그
랬겠지만 한동안 글쓰기가  주저될 정도였다. 그러다가 [벽을  드나드는 사
나이] [집달리] 등 같은 작가의 작품을 몇  편 더 구해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경이를 '이런 재능도 있구나' 하는 감탄으로 바꿀 수 있었다.
  작가 마르셀 에이메는 프랑스  문단에서 매우 독특한 작품세계를 일구어 
낸 사람이다.  대다수의 프랑스 지성들이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눅눅하고 
암울한 글을 쓰고 있을 때 에이메는 환상과 기상을 주요 정조로 하는 극적
인 작품들을 발표하여 문단에 충격을 주었다.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작
품 경향을 배제하는 그의 소설 쓰기는 초기 작품들에서부터 두드러지기 시
작, 대표작인 [푸른  말]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당시의 프랑스  전원 생활
을 구체적이고 환상적인 문체로 그려내면서 한 시골 사람의 삶을 감동적으
로 형상화시킨 이 소설은  발표하자마자 독자와 평자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모았다.
  에이메의 작품들은 프랑스의 전통과  크게 엇나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라브레로부터 시작된 풍자와 웃음의 미학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철저하
게 훈련된 리얼리즘의  전통 위에 환상과 풍자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켜 한 
차원 높은 작품 세계를 구축해낸 것이다. 

    벽문  -H.G 웰즈 지음-
  1
  석 달쯤 전 어느 날 밤, 허물없이 얘기하는  자리에서 라이오넬 월러스는 
'벽의 문'에 관한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하였다. 나는  그때 그가 이 이야기를 
공연히 꾸며 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너무도 솔직담백한  투로 확신에 차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내가 살고 있는 아파
트의 방에서 잠이 깼을 때는 주위의 분위기가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침대
에 누운  채 그가 이야기한 것들을  되돌이켜 보았을 때, 그의  진지하고도 
느린 음성이 지닌 매력은 사라진 상태였으며, 갓을 씌운 탁자의 불빛도, 우
리를 감싸던 은은한  분위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분좋게 
빛나던 것들, 함께  나눈 저녁 식사의 후식이나  유리잔, 식탁보 등 일상의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밝고  작은 세계를 이루던 것이 없어지자, 그가  얘기
한 문은 전혀 믿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나를 홀렸던 것이야!" 라고 나
는 중얼거렸다. "감쪽 같은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친구가 그렇게 감쪽
같이 꾸며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 걸."
  그리고 나서 나는 침대에 앉아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그의 회고담에 스며 있는 놀랄 만한 현실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까 생각했다.  그의 이야기는 그런 방식으로가  아니면 달리 말할 수  없는 
무언가의 경험을 암시하거나 제시하거나 혹은 전달하고자 -글세 어떤 단어
를 써야 될지 모르겠지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식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한때 지녔던  의심에서 
이제 완전히 벗어났다.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 믿었던 것처럼, 월러스가 자
신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자기 비밀의  진실을 보여 주려 했다는 
점을 이제는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정말 본 것인지, 아니면 보았
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는  엄청난 특권의 소유자인지, 아니면 환상적 꿈
의 희생자인지, 나는 추측해 볼  도리가 없다. 나의 의혹을 영원한 미궁 속
으로 빠뜨린 그의 죽음에 관한  여러 사실조차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독자 자신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나의 어떤 우연한 논평이나 비판이 그 친구같이 과묵한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게 만들었는지 지금은 잊었다. 아마 그 당시에있었던  대대적인 사회
운동에서 그가 맡아 하던 역할에  실망한 나머지 내가 그 운동이 느슨하고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난하자 그 친구가  자신을 옹호하는 중이었던 
것 같다. 그가 불쑥 그  이야기를 꺼냈다. "한 가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잇
는게 있어."
  얼마 후 그가 말을  이었다. "게을렀다는 것은 나도 인정해. 사실은 말이
지, 영혼이나 유령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게 참  말하기 묘한데, 레드먼드, 
그러니까 말이야, 나는 홀려 있는 거
야. 무언가에 홀려 있단 말이지. 그 때문에 온갖 사물은 광채를 잃고 내 마
음은 무언가 열망으로 가득 차 있게 된 거지....."
  그는 잠시 멈추었다.  우리들이 무언가 감동적인 일, 중대한 일,  혹은 아
름다운 일에 대해 이야기하려 할 때 흔히 우리를 압도하곤 하는 그 영국인 
특유의 수줍음 때문에 말문이 막혔던 것이다.  "자네도 세인트 앨설스턴 학
교를 쭉 다녔지?" 라고  그가 말했는데, 한동안 그 말이 하던  얘기와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말하고 그가 말을 멈추
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무척 머뭇거렸지만 차차 훨씬 수월하게 자기  인생
의 숨은 비밀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만족시킬  수 없는 가지각색의 
동경으로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고, 이 세상의 온갖  흥미거리와 
구경거리마저 싱겁고 지루하고 헛된  것으로 보이게 할 정도로 아름다움과 
행복이 깃든 회고담이었다.
  이제 그 이야기에 대한 실마리를 잡고 보니 그런 느낌이 그의 얼굴에 분
명히 쓰여 있던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의 초연한  표정이 강조되어 나타나 
사진 한 장을  갖고 있다. 그 사진을  보면 그를 몹시 사랑했던 한  여인이 
그에 대해 한 말이  생각난다. "그이는 갑자기 흥미를 잃어버린 거예요. 상
대를 잊은  것이지요. 바로 앞에 있는  사람조차 전혀 거들떠보지 않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항상 흥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일에 주의를  집중
하기만 하면 월러스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실제로 그의  생애는 가
지가지의 성공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나보다 훨씬  앞서 
나갔다. 내  머리 저 위로 날아올라  나로서는 도저히 따르지 못할  출세의 
길을 달렸다. 그는 아직  서른아홉이었다. 그러나 만일 살아만 있었다면 사
람들 말대로 그는 관직에 있음은  물론 틀림없이 새로운 내각의 각료로 임
명되었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그는  별반 애쓰지 않고도 늘  나보다 
앞섰다. 꼭 그렇게 타고난 것 같았다. 우리는 학창시절 거의 대부분을 웨스
트켄싱턴에 있는  세인트 앨설스턴 학교에서  같이 보냈다. 입학할  당시만 
해도 나와 비슷한 실력이엇지만, 나중에는 눈부신 실력과  훌륭한 성적으로 
나보다 월등히 앞서게 된  것이었다. 물론 나 역시 중간 정도의  성적은 올
리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벽의 문'에 대해 내가 처음 이야기를 들
은 것은 그 학교에서였다. 그러니까 그가 세상을 뜨기 불과  한 달 전에 들
은 것은 두 번째가 되는 셈이었다.
  이 '벽의  문'은 적어도 그에게는  실재하는 문으로서, 현실의 벽을  지나 
영원불멸의 세계이 이르게 하는 그런 문이었다. 그 점에  대해 나는 지금도 
상당한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문은 그가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의 어린 아이였을 때 그의 생
활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가 천천히 엄숙하게 내게  고백할 때, 그 시기를 
신중하게 추정하고 계산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
는 진홍색의 담쟁이 덩굴이 있었지. 맑은 햇살이 비추는  하얀 벽을 배경으
로 온통 빛나는  진홍색이었어. 어떻게 해서 그런 인상이 들었는지  확실히 
기억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인상이 남아 있거든. 그리고 초록색  문 바
깥, 깨끗한 도로 위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있었어. 그 나뭇잎들은 노랑과 초
록으로 알록달록했었지. 갈색이나  거무죽죽한 색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방
금 떨어진 잎임에 틀림없었어.  그로 미루어 그때는 시월이었을 거야. 나는 
매년 유심히 나뭇잎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틀림없을 거야."
  "그러니까 내 기억이  옳다면 아마 다섯 살하고  넉 달이 되었을 때일거
야."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꽤 조숙한 편이었다. 그는 비정상적이라할 만큼 
어린 나이에 벌써 말을 배웠으며 나무도 분별이 있고 이른바 '어른티'가 나
서 보통 아이들 같으면 일곱이나  여덟 살이 되어서야 얻는 행동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이 되어 있엇다. 그가 두 살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
후에는 어머니보다는 주의를 덜 기울이고 엄격하지 않은 가정교사 밑서 자
랐다. 부친은 엄격하고  일에 열심인 변호사였는데 그에게 별로 관심을  쏟
지는 않았으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명석했으나  이 세상이 따분하
고 무미건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는 길을 헤메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주의가 소홀한 틈을 타  집을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혹은 
웨스트켄싱턴의 어떤 길로 갔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이제
는 어찌할  수 없는 기억의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졌다. 그러나  하얀 
벽과 초록색 문만은 매우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 어린 시절의 추억에 따르면 그는 그 초록색 문을 처음 본 순간 그 문
으로 가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이상한  감정, 매력, 욕망을 느
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유혹에 빠진다는 것은, 둘 중 어느 쪽
인지는 모르겠으나, 현명하지 않든지 아니면 잘못하는 일일  것이라는 확신
을 분명히 가졌다는  것이다. 한편 기억이 틀림없다면 그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원하기만  한다면 곧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도 그는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어린 소년이 한편으로는 끌리면서도 한편 주저하는 모습을 눈에 선
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지만, 만일 그 문으로 
들어가면 아버지가 크게 노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 속에도 분명히 
떠올랐다고 한다.
  월러스는 이  망설임의 순간을 대산히  상세하게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그 문 앞을 바로 지나간 다음, 두 손을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잘 나오
지도 않는 휘파람을 애써  불면서 벽의 끝을 지나 곧장 걸어갔다.  그는 거
기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여러 가게들을 기억해 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토관, 함석판,  수도전, 벽지 견본, 에나멜통  같은 것을 지저분하게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철물점 겸 벽지 가게를 기억해 냈던  것이다. 그는 물
건을 구경하는 척했지만,  그 초록색 문이 '탐'났으며 그 문을  열고 들어가
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때 그는 격정에  휩싸였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주저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그 초록색 문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곧바로 초록색 문
을 열고 들어갔으며, 들어서자 문이 곧 쾅하고 닫혀지도록 손을 놓았다. 그
래서 그의 일생에 걸쳐 그를  사로잡곤 하던 그 정원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들어갔던 것이다.
  월러스로서는 그가 들어간 정원의 느낌을 남김없이 이야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정원에는 사람을  기뻐 들뜨게 하는 분위기,  다시 말하면 경쾌함, 행
운, 유복함의 느낌을 안겨 주는 그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광경에는 
색채를 선명하고 완벽하고 정묘하게 반짝이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거기에 
들어서는 순간 더할 나위없이 기쁘기만 했다. 이 세상에는 아주 드문, 우리
가 어리고 즐거울 때나  느낄 수 있는 그런 기쁨이었다. 거기서는  모든 것
이 아름다웠다.
  월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말이지." 
그는 믿을 수 없는  일에 이르러 망설이는 자신 없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거기엔 큰 표범이 두 마리 있었어. 점이 있는 표범이었지. 그래도 나는 무
섭지 않았어. 길고  넓은 길이 있었고 길 양쪽가에는 가장자리가  대리석으
로 된 화단이 있었지. 그런데 매끄러운 피부의 그 큰  표범 두 마리는 공을 
가지고 뛰놀고 있었어.  그중 한 마리가 호기심이 생겼는지 고개를  치켜돌
고는 내게 다가왔어. 곧장 내게로 달려와서는 내가 내민  조그마한 손에 그 
부드러운 둥근 귀를 조용히 비비며 기분이 좋은지 목에서 가르릉가르릉 소
리를 내더군. 그것은  마법의 정원이었어. 그렇고 말고. 크기는  얼만큼이냐
고? 아아! 사방 팔방으로 쭉 펼쳐져  있었어. 멀리 저쪽에는 언덕이 있었던 
것 같아. 웨스트켄싱턴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모르겠더군. 그런
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꼭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어."
  "문이 내 뒤에서 닫힌 그 순간부터 나는  그 길, 나뭇잎이 떨어져있고 마
차와 장사꾼의 손수레가  다니던 그 길을 깨끗이 잊어버렸어. 뿐만  아니라 
집안의 규율과 복종으로 돌아가도록 끌어당기는 힘도 잊어버렸과,  온갖 종
류의 주저와 공포도,  신중함과 이 세상의 일상적 현실도 모조리  잊어버렸
단 말이야. 나는 그 순간 매우 즐겁고도 행복에 찬  새 세계에 사는 소년이
었지. 그것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어. 햇빛은 더 따뜻했고 깊숙이 
스며들면서도 더 부드러웠어. 은은하게 맑은 기쁨이 대기에서 느껴졌고, 푸
른 하늘에는 햇빛를 받은  구름이 둥실 떠 있는 그런 세계였어.  그리고 앞
에는 나를 환영하듯이 길고  넓은 길이 펼쳐져 있었고, 그 양쪽  가에는 잡
초 하나 없는 화단이  있었고 거기에는 들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지.  또 두 
마리 큰 표범의 부드러운 털 위에 무서움 없이 내 작은 손을 얹었고 그 동
그란 귀와, 귀 바로 아래의 민감한 부분까지 쓰다듬어 주었지. 그리고 표범
들과 함께 뛰어 놀았어.  그들은 마치 내가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는 듯 
했어. 내 마음엔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 곧 키가 큰 예쁜 
소녀가 나타나더니, 얼굴에 미소를 띠고 나를  마중하러 다가와서는 '안녕?'
하고 인사를 하더니, 나를  들어올려 키스를 한 다음 내려 놓고는  손을 잡
고 길을 인도했어.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어, 다만 그런 것들이 당연하다는 
즐거운 느낌, 그 동안  왜 그랬는지 무시해 왔던 행복한 일들이  다시 상기
되는 듯한  인상을 받았어. 긴 못처럼  생긴 참제비꽃 사이로 널따란  붉은 
계단이 눈에 띄었는데, 우리가 그 계단을 올라가자 울창한  고목 사이로 난 
큰 길이 나왔던 것이  기억나. 이 빨갛게 벗겨진 가지의 고목  사이 가로수 
길을 따라 대리석으로 만든 의자와 석상이 있었고, 잘  길들인 다정스런 흰 
비둘기 때가 있었지...."
  "그 시원스런 가로수  길을 따라 그 소녀가 나를 인도했지.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여러 가지를 묻기도  하고 또 무슨 
얘기를 해 주었는데,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즐거운 이야기였던  것만
은 분명해. 그때 그 부드러운  선, 그 아름답고 상냥한 얼굴의 섬세하나 턱
이 생각나는군.... 곧 매우 깨끗한  카푸친 종의 원숭이 한 마리가 나무에서 
내려와 내  옆으로 달려왔어. 불그스레한 갈색  털이 나 있었고 회색  눈이 
순해 보였어. 나를 올려다보며 웃더니, 이내 내 어깨로  뛰어 올라 왔어. 이
렇게 우리 두 사람은 매우 즐겁게 걸어갔지."
  그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재촉했다.
  "여러 가지 사소한 것이 기억나는군. 우리는  월계수 사이에서 생각에 잠
겨 있는 한 노인  옆을 지나, 앵무새들이 즐겁게 지저귀고 있는  곳을 지났
지. 그리고 넓고 그늘진 주랑을  지나, 마침내 아주 넓고 시원한 궁전에 이
르렀어. 그곳은 시원한 분수와 아름다운 것들, 소망하는 것과 그 충족의 약
속으로 가득 차 있었어. 그리고 거기에는 온갖 물건과  많은 사람들이 있었
는데,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다
소 어렴풋하게 기억이 날 뿐이야. 그러나 이들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아
름답고 친절했어.  자세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여튼 그들은 모두  무척 
친절했고 내가 온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더군. 그들의 몸짓, 
부드로운 손, 환영과 사랑의 눈빛 때문에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었
어."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거기서 나는 함께 놀 친구들을 발견했지. 나
는 외톨이 소년이었으므로 그것은 내게 매우 기쁜 일이었어.  그 애들은 꽃
으로 장식된 해시계가 있는 잔디밭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어.  그리고 놀 때
에도 사랑이 넘쳐 있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기억에는 공백이 있어. 우리가 무슨  놀이를 했
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아.  직후에도 기억할 수 없었어. 나중에 나는 어린
애같이 몇 시간이고 눈물까지 흘리며  그 행복한 놀이의 방법을 되새겨 보
려고 애를 쓰기도 했어.  나는 그 놀이를 내 방에서 혼자 다시 해  보고 싶
었던 거야. 그러나 실패했어.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그때의 행복감과, 그리
고 늘 내 옆에 있던 두  명의 놀이 친구 뿐이었어....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침울하고 어두운 표정의 여자가 나타났어. 엄숙하고 창백한  얼굴에 꿈꾸듯 
공상에 잠긴 눈을 한 침울한 여자였어. 그녀는 엷은  자주빛의 부드러운 긴 
옷을 걸치고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는데, 나를 손짓해  부르더니 홀 위에 있
는 화랑으로 데리고 갔어. 함께 놀던 친구들은 나와 헤어지기 싫었던지, 놀
이를 중단하고 그 자리에 선  채 내가 이끌려 가는 것을 지켜보았어. '돌아
와! 빨리 돌아와야 해!'라고 그들은 소리쳤지.  나는 그 여자의 얼굴을 올려 
보았으나 그 여자는  친구들의 말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어. 그녀의  얼
굴은 매우 부드러웠으나  엄숙했어. 그녀는 화랑의 어느 의자로 나를  데리
고 갔어. 나는  그 여자 옆에 서서  그녀가 무릎 위에 책을 펼치면  들여다 
볼 생각을 하고  있었지. 책이 펼쳐졌어. 그  여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어. 왜냐하면 그 살아 있는 책에서  내 자신을 봤기 때
문이야. 그것은 바로 내 자신에  관한 책이었어. 그리고 그 안에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겪은 모든 것이 들어 있었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어.  그 책의 책장은 그림이  아니라 현실이었으니 
말이야."
  월러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멈추고는 이해해 달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어서 계속해 봐!" 라고 나는 말했다. "이해할 수 있어."
  "그것은 현실이었더.  그래, 현실이었음에  틀림없어. 사람들이  움직이고 
물건들이 그 속에  나타났다 없어졌다 했으니까. 거의 잊어버릴 뻔했던  사
랑하는 어머니, 엄격하고 강직한  아버지, 그리고 하녀, 유모, 집에 있는 낯
익은 물건들이 보였어.  그 다음은 대문과 이리저리 오가는 마차들이  나타
났어. 나는 그것을 보며 정말  놀랐고, 믿기지 않아 다시 여자의 얼굴을 올
려다 보았어. 그리고는  다시 책장을 넘겨 여기저기 뛰어넘으면서 책을  조
금이라도 더 보려했어. 그래서  결국 길고 흰 벽과 초록색 문  바깥에서 배
회하면서 주저하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에까지 이르렀어. 그리고 다시  나
는 갈등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지."
  "'그 다음은?' 이라고 소리를 치며 책장을 넘기려고 하는데 그 엄숙한 여
자의 차가운 손이 나를 제지했어."
  "'그 다음은?' 이라고  말하며 난 고집을 부렸지. 그리고 나는  어린 힘을 
다하여 그 여자의 
손가락을 잡아  당기면서 밀어내려 했어.  마침내 여자가 양보하고  책장이 
넘겨졌을 때 그 야자는 그림자처럼  내 위로 머리를 수그리고 이마에다 키
스를 했어."
  "그러나 책장은 내게 마법의 정원도, 표범도, 내  손을 이끌어 준 소녀도,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던 놀이 친구들도 보여 주지 않았어.  그 책장은 등불
이 켜지기 전 싸늘한 저녁 시간의 길고 어두침침한 웨스트켄싱턴 거리만을 
보여줄 뿐이었어. 그리고  나는 바로 거기 있었어. 작고 초라한  몰골로. 나
는 울음을 참으려 애썼지만  그만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어. 내  등 뒤에
서 '돌아와! 빨리 돌아와야 해!' 라고  소리지르던 그 친구들 곁으로 되돌아
갈 수 없어서  울었던 거야. 나는 거기 그렇게 내버려진  거지. 더 이상 책 
속의 한  장면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이었어.  그 마법의 정원 그리고  나를 
제지하던 엄숙한 부인의  손도 사라졌어.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이
었을까?"
  그는 다시 말을 멈추고, 불빛을 들여다보며 잠시 동안 가만히 있었다.
  "아!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그 비참함이란!" 그는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는 조금 후 그를 재촉했다.
  "난 그야말로 가련하고 불쌍한 아이였지! 이 회색의 세상으로  다시 되돌
아오다니 말이야! 내게  일어난 일을 깨닫자 나는  억누를 수 없는 슬픔에 
잠기고 말았어. 그리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울었다는 그 수치심과 굴욕감, 
그리고 겁에 질린 채 집에 돌아갔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 금테 안경
을 쓴 한 인자한 노신사가 걸음을 멈추고 우산으로 쿡 찌르면서 내게 말을 
건넸는데 그 얼굴이 기억에 생생하군. 그분이 말했어. '불쌍한 아이로군. 길
을 잃었나 보구나!' 글세 다섯 살이나 되는 런던 소년인 나늘 두고 말이야! 
그러더니 친절한 젊은 경관을 불러오고 사람이 모여들게 하고는 함께 집까
지 데리고 갔어. 결국 엉엉 울면서, 여러 사람들의  눈길을 받으며, 겁에 질
린 채 마법의 정원에서 우리집의 계단까지 돌아왔던 거야."
  "그 정원, 나를 지금도 사로잡고 있는 그  정원에 대한 모습은 이 정도밖
에 기억할 수가 없네. 그리고 물론 나는 그 주위에  감돌던 형언할 수 없는 
그 반투명한 비현실성을, 보통 경험과의 '차이'에 대해서는  설명해 줄 수가 
없군. 그러나 그런 일이,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야. 만일 그것이 꿈
이었다고 하더라도 낮에 있었던 별난 꿈이었던 것은 틀림없어.... 물론 그후
에 아주머니,  아버지, 유모, 가정교사  등 갖은 사람한테서 귀찮은  질문을 
받았었지...."
  "나는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으나 아버지는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전 
처음으로 내 종아리를  때렸어. 나중에는 아주머니에게도 이야기하려  했지
만, 내가 완고하게도  끝끝내 고집을 부린다고 해서  또 다시 벌을 받았지. 
그리고는 전에도 말했듯이 모두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금지되어 한 
마디도 듣지 ㅇ게 돼버렸어.  심지어는 동화책도 얼마 동안 빼앗겼어. 내가 
너무나 '공상적'이기 때문이라는  거야. 뭐? 그래. 그랬다니까.  정말 압수당
했어. 아버지는 약간  구식이었거든.... 그래서 내 이야기는 나  혼자 간직하
는 수밖에 없었어. 나는  배개에다 속삭였지. 애들처럼 눈물을 흘리며 속삭
이는 바람에 내 배개는  가끔 축축하게 젖곤 했어. 그리고 열성이  없는 형
식적인 기도뒤에 진심에서 우러나온  한 가지 요구를 덧붙이게 되었어. '하
나님, 제발 그 정원에  대해 꿈꾸게 해 주세요. 아! 제발 저를 정원으로  데
려가 주세요!'  라고 말이야. 그 정원으로  데려가 주세요! 사실  그 정원을 
자주 꿈꾸기는 했지. 그때마다 내가 처음과 다르게 약간  보태거나 혹은 좀 
바꾸었는지도 모르겠어.... 이 모든  것은 자네도 알겠지만 단편적인 기억을 
가지고 매우 어렸을 때의 경험 자체를 재구성해 보려는  것이지. 이 기억과 
그 이후 어린 시절의  다른 기억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어.  그런데 그 
놀라운 환상을 다시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때가 오게 되
었어."
  나는 뻔한 질문을 했다.
  "아니," 그는 대답했다.  "어렸을 때는 정원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으려
고 노력한 기억은  없어.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아마 이 사고가 있은 
후부터는 내가 또 길을 잃지  않도록 행동에 대한 감시가 더 엄격해졌는지
도 모르지. 자네를 알  무렵까지는 그 정원을 다시 찾으려고 했던  적이 없
어. 그리고 지금은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되지만, 한때는 그 
정원을 깨끗이 잊어버린 적도 있었지. 아마 그때가 여덟이나  아홉 살 무렵
일 거야. 자네, 세인트 앨설스턴 학교에서 내 어렸을 때 모습 기억하나?"
  "물론이지."
  "내가 그 무렵 무슨 비밀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아
니겠지?"
  2
  그는 갑자기 미소를 띤 채 얼굴을 들었다.  
  "'노스웨스트 항로'라는 놀이를  나하고 해본 적이 있던가?....  아니, 학교 
가는 길이 나하고는 달랐었지?"
  그는 말을 이었다.  "그건 변화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매일 하는  그런 놀
이였어. 방법은 학교로 가는  '노스웨스트 항로'를 발견하는 것이었지. 학교
가는 길이야 뻔하잖아. 그래서 색다른 길을 발견하는 것이  이 놀이의 골자
였는데 평소보다 십 분 일찍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출방해서 안 다녀본 생
소한 길로 목적지인  학교에 도달하는 놀이였어. 그런데 어느 날은  캠프던 
힐의 맞은편, 빈민가에서 그만 길을 잃었어. 나는  이번에는 실패구나, 학교
에 지각하겠는데 하고  걱정을 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막다른 골목으로  보
이는 길에서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끝까지 갔더니 다행히 또 다른 길
이 나오더군. 나느 다시  희망을 갖고 그 길을 서둘러 지났어. '아직  할 수 
있어'라고 중얼거리면서 걷다보니 이상스럽게도 낯익은  지저분한 가게들을 
지나가게 되었어. 그리고 놀랍게도 그 앞에 긴 하연  벽과 마법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초록색 문이 나타난 거야!"
  "갑자기 나타난 거지. 역시 그 정원, 그 놀라운 정원은 꿈이 아니었던 거
야!"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그 초록색  문을 두 번째로 보았을  때는 학생으로 바쁜 생활을 
보냈기에, 예전 어렸을 때 얼마든지 놀 시간이 있던 시절과는 달랐어. 어쨌
든 이때는 곧장  문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어.  그건 말이야, 우선 시간에 
늦지 않게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야.  개근 기록을 깨고 
싶지 않았거든. 물론 그 문으로 들어가보고 싶은 생각이  조금은 있었을 거
야. 그래, 그러고  싶은 생각이 분명히 있었을  거야.... 그러나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 문의 유혹은 하나의  방해물로 생각되었던 모양이
야. 물론 초록색 문을 다시 발견하자 대단한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어. 나는 
오직 그 생각만 하면서 계속  걸었어.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어. 그
것 때문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단 말이야. 나는 뛰어가면서  시계를 꺼내 들
었어. 아직 십 분 가량  여유는 있었어. 언덕을 내려가니 낯익은 길이 나왔
고 나는 숨을 헐떡이며 학교에 도착했어. 온몸은 땀에  흠뻑 젖었지만 그래
도 지각은  면했어. 그리고 코트와 모자를  건 것도 기억하네.... 바로  앞을 
지나가면서 그냥 지나쳐 버렸던 거야. 이상하지 않은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야 물론 그것이  늘 
거기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몰랐었지.  학생의 상상력이란 제한되어  있는 
법이거든. 그 문이 거기에 있고,  또 그곳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되었다는 점
은 꽤 즐거웠던 것 같아. 그러나 학교 수업이 있었지. 그날 아침 나는 몹시 
산만하고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았던 것 같네. 곧 다시  만나게 될 그 아름답
고 신비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었거든. 참  이상하게도 나는 그
들이 나를 만나면  기뻐하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어....  그래. 그
날 아침 나는 그 정원을 힘드는  학교 공부 틈틈이 찾아갈 수 있는 즐거운 
장소 정도로 생각했었어."
 
 "그러나 그날은 거기에 가지 않았어. 다음 날이  토요일이라 그것이 내 생
각에 영향을 끼쳤거나 아니면 그날 수업에 태만한 벌로 보충수업을 받아서 
거기 들렀다가 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어느 쪽인지  모
르겠어.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날 마법의 정원이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
아서 도저히 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야."
  "그래서 난 이야기했지. 이름이 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들이 스퀴프
라고 부르던 그 흰 족제비같이 생긴 녀석한테 말이야."
  "홉킨스 2세말이군." 하고 내가 말했다.
  "그래, 홉킨스였어. 그 녀석에겐 말하고  싶지 않았었는데, 그에게 말하는 
것은 뭔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도, 얘기를 하고 말았어. 집에 가는 
길이 그 친구와 같은 방향이어서 같이 걷고 있었어. 그  녀석은 말이 좀 많
은 편이어서 그  마법의 정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아무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 형편이었어."
  "그랬더니 그 녀석이 내 비밀을 모두에게 떠벌린  거야. 다음 날 노는 시
간이 되자 나보다 큰 놈들  대여섯 명이 둘러싸더니 반은 놀리면서도 한편 
호기심에 가득 차 그  마법의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더  하라는 거야. 
거기엔 그 키 큰 포세트도 끼어  있었지. 자네, 그 녀석 기억하나? 또 카너
비, 모얼리 레이널즈도  있었지. 자넨 거기 없었지?  자네가 거기 있었다면 
내가 기억하고 있을 거야...."
  "애들의 감정이란 참 묘한 거지. 난  은근히 내 자신이 혐오스러우면서도 
그 덩치 큰 녀석들의  주목을 받는 통에 다소 우쭐한 기분도  들었거든. 특
히 크로쇼우가 찬사를 보낼 때는 특별히 기분이 좋았어.  왜 자네도 기억하
겠지만, 작곡가  크로쇼우의 아들 크로쇼우  말이야. 그 녀석이 '이거  들어 
본 중에 제일 가는  거짓말이군!' 이라고 말했지. 그러나 동시에 나는  신성
한 비밀을 얘기한 데  대해 정말이지 가슴 아픈 수치를 느꼈어.  그 짐승같
은 포세트란 놈이 그 초록색 문 안에 있던 소녀에 대해 농담을 했거든."
  그 수치의 뼈저린 기억 때문에 월러스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난 
못 들은 척했어." 그는  말했다. "그러자 카너비가 갑자기 나를 거짓말쟁이
라고 부르기에, 나는 정말이라고 우기면서 한바탕 입씨름을 벌였지. 그리고 
그 초록색 문이 있는 곳을 똑똑히 알고 있으며 십 분이면 그곳으로 데리고 
갈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지. 카너비는 정색을  하고, 자기들을 꼭 데리고 
가야 하고, 증거를  보여 주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는 거야. 자네 
카너비에게 팔을 비틀려 본 적이 있나? 그렇다면 내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정말이라고 맹세했어. 그 당시 카너비에게 당하
는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 학생은 전교에 하나도  없었지. 크로쇼우가 한두 
마디 끼어들기는 했지만. 카너비 녀석 사냥감 하나 잡은  거지, 뭐. 난 흥분
하여 귀가 빨개지고 겁도 좀 났어. 난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 그 결
과, 마법의 정원을 혼자 찾아가는 대신, 놀려대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에 
차서 협박하는 여섯 명의  애들을 이끌고 가게 된 거야. 내  뺨은 상기되고 
귀는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은 쑤시고 아프고, 마음은 더할 수 없는 비참함
과 수치심에 타오르고 있었지."
  "그런데 우리는 그 하얀 벽과 초록색 문을 찾지 못했어...."
  "무슨 뜻이지?"
  "찾을 수 없었다, 그 말이야. 찾을 수만 있었으면 데리고 갔을 거야."
  "그리고 나중에 혼자 갔을  때에도 찾을 수 없었어. 다시는 찾지 못했어. 
그후에도 학교  다니면서 줄곧 찾아  봤지만 결코 찾아 내지  못하고 말았
어."
  "애들이 괴롭히지는 않던가?"
  "지독하게 혼났지.... 카너비는  내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다고 회의를 
소집했어. 나는 운  흔적을 감추려고 집에 가서도 몰래 이층으로  올라갔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네. 나는  엉엉울다 잠이 들었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카
너비 때문은 아니었어.  그것은 그 정원과, 내가  간절히 바란 그 아름다운 
오후와, 그 아름답고 다정한  여자들과,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 때문이
었어. 그리고 다시 배우고 싶은 놀이, 그 잊어버린 아름다운 놀이 때문이었
어...."
  "그 녀석들에게 말하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굳게 믿었어.  그후로는 형
편없는 세월이었어. 밤에는 울고 낮에는 멍청하게 넋을 잃고 말이야. 두 학
기 동안 죽 게으름을  부려서 성적이 나빠졌지. 자네 생각나나? 물론  기억
하고 있을 거야. 자네가 산수에서  나를 이겼지. 그 때 그래서 다시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던 거야."
  3
  얼마 동안 나의 친구는 잠자코 타오르는 불길 한가운데의 불꽃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열일곱이  될 때까지는 그것을 다시는 
보지 못했어."
  "그런데 세  번째 기회가 내게  찾아왔던 거야. 옥스퍼드의 장학생  선발 
시험을 보기 위해  마차로 패딩턴 역에 가는 도중이었어. 아주  순간적으로 
힐끗 보았을 뿐이야.  이륜마차의 창문에 팔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면서  내 
자신이 꽤 훌륭하게 출세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어. 별안
간 그 문과 벽이 나타났단 말이야. 잊을 수 없었던, 그리고 아직은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솟구쳤어."
  "우리는 털거덕거리며 지나가고 있었어. 나는 너무나  놀라서 그 길을 다 
지나 모퉁이를 돌 때까지  마차를 멈출 생각도 못했어. 나는 내  의지가 둘
로 나뉘는 묘한 순간을 경험했어. 나는 마차 천장의  조그만 문을 두드리면
서, 시계를 꺼내려고  팔을 아래로 내렸지. 마차꾼이 '네, 뭡니까?'  라고 곧 
물었으나 나는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내가 잘못 생각했소!  시간이 별
로 없소. 그냥 갑시다!' 라고 소리쳤어. 마차는 계속 달려갔지...."
  "난 장학금을 받게 되었지.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말을 듣던 날 밤 나
는 아버지 집의 이층의  작은 내 서재에서 난롯불을 쬐며 앉아  있었어. 좀
체로 칭찬하는 일이 없던 아버지의  칭찬과 좋은 충고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지. 나는 애용하는 파이프,  청년용의 매우 뭉뚝한 파이프를 피우며 그 
긴 흰 벽의 초록색 문을 생각하고 있었지. '만일 그 마차를 정지시켰더라면 
나는 장학금을  놓쳤을 거고, 옥스퍼드에도 들어가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내 훌륭한 경력이  엉망이 되었을지도 몰라! 나도 이제는 사리를  판단하게 
된 것 같군!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깊은 생각 끝은 내 출세를 위해서라면 
마법의 정원쯤은 희생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어."
  "그 사랑스런 친구들,  그리고 그 맑은 분위기는 내게 몹시  아름답고 훌
륭해 보였으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어. 그 대신 현실에 대한 집착이 
점점 강해져 갔지. 나는 다른 문,  즉 출세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봤던 거
야."
  그는 다시 불 속을 들여다 보았다. 장작이 활활 타오르는 한 순간, 그 붉
은 불빛이 그의 얼굴에 굳센 의지를 떠오르게 했지만 이내 다시 사라져 버
렸다.
  "그래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난 출세를 위해 노력했지. 나는  많은 일, 
어려운 일을 했어.  그러나 그 매혹적인 정원을  수천 번이나 꿈꾸었고, 그 
이후 네 번이나 그 문을 본 거야. 적어도 힐끔 보기는 했어.  그래, 네 번이
나 말이야.  한동안 이 세상이 매우  밝고 흥미로우며 의미와 기회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보인 반면, 그 정원의 반쯤  사라진 매력은 희미하고 거리
가 멀게 느껴졌지. 아름다운 여인, 유명 인사들과 갖는 만찬회에 나가는 길
에 누가 표범이나 쓰다듬고 싶어하겠나? 옥스퍼드를 졸업하자 전도 유망한 
청년으로서 런던에 나왔지. 사실 당당한 실적도 올렸어. 꽤 성공을 거둔 셈
이야. 그러나 실망스러운 것도 있었어...."
  "나는 두 번 사랑에  빠진 일이 있었지. 뭐 그 이야기를 자세히  하고 싶
지는 않지만, 언젠가 내가 접근할 용기를 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하던 여
인을 찾아가고 있었어. 나는  얼즈 코오트 근처 왕래가 드문 길을  통해 지
름길을 찾던 중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하얀 벽과 낯익은  초록색 문을 만났
어. '참 이상하다! 이 담은 캠프던 힐에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스토운헨지의 
돌을 세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장소가 아니었던가. 
나의 기묘한 백일몽의 장소이기도 했지.' 이렇게 나는  중얼거렸어. 나는 목
적에 열중한 채 그곳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네. 그날  오후에는 그것이 내게 
그다지 매력이 없었던 거야."
  "기껏해야 세 걸음만 옮기면 되었기 때문에 문을 열어 볼까 하는 충동을 
일순간 느끼긴  했지. 비록 마음 속에는  문이 열려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나의 명예가 걸린 그 약속을 어기게 될 것이라고 생
각했지. 나중에는 시간을 너무  엄격히 지켰던 것을 유감으로 여겼어. 적어
도 잠깐 들여다보고 표범들에게 손이라도 흔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
나 그때쯤에는 열심히 찾아도 발견되지  않은 것은 뒤늦게 다시 찾으려 들
지 않을 정도로 세상사에 익숙해져 있을 때였어. 그  순간이 무척 유감스럽
군...."
  "그후 몇 해 동안은  열심히 일했고 그 문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 그것
이 내게로  다시 돌아온 것은 극히  최근이야. 이와 더불어 나의  세계에는 
엷은 때가 덮여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어. 그 문을 다시 볼  수 없
다는 것이 매우 슬픈  일처럼 여겨지기 시작한 거야. 아마 과로로  다소 몸
이 쇠약해졌는지도 모르겠어. 혹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사십대  남자들이 느
끼는 그런 감정일지도  모르고, 잘 모르겠어. 그러나  애를 써도 힘드는 줄 
모르게 하던 예리한  빛이 최근에 이르러서는 확실히  사라지고 모든 것이 
시들해지기 시작했어. 그것도  새로운 정치적 발전이니 뭐니 해서 내가  적
극적으로 활동을 해야만 할 바로 이때에 말이야. 참 이상한  일 아닌가? 그
러나 나는 인생이란  몹시 고달픈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보상을 
받을 만해지니까 그  보상이라는 것이 아주 값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게 된 것이지. 그래서 얼마 전부터 그 정원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지
기 시작했어. 그래. 그리고 나는 세 번이나 봤지!"
  "그 정원을?"
  "아니, 그 문을 말이야! 그런데도 들어가지 않았어!"
  그는 매우 슬픈 어조로 이야기하며 테이블  위로 몸을 숙였다. "세번이나 
기회가 있었어. '세 번' 이나! 만일  그 문이 내게 다시 나타난다면 나는 이 
속세의 지저분함과 싸움, 허영심의  공허한 화려함, 이 힘들기만 하고 헛된 
세계로부터 벗어나 그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맹세했지. 들어가서는  다시 되
돌아오지 않겠다고.  이번만은 머물러 있자....  이렇게 맹세를 했지만  막상 
그때가 닥쳐오면 나는 '가지 않았던 거야'"
  "한 해 동안 세 번이나 그 문  앞을 지나쳤는데도 들어가진 못했어. 작년 
한 해에 세 번씩이나 말이야."
  "첫번째는 소작인  구제법안에 대해  의견이 분열되었던 그날  밤이었어. 
그 밥안에서 정부가 세  표 차로 간신히 이겼는데, 자네 기억하나?  우리편
에서나 반대편에서나 그날  밤 결정이 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어.  그런
데 의외로 토의는 곧 종결되었어. 나와 호츠키스는 그의  사촌과 함께 브렌
트퍼드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어. 우리 둘만 표결에 참석하지 않았고  현재 
찬반이 동수라고 전화로 호출을 받았어. 즉시 그 사촌의  차를 타고 의사당
으로 달려갔지. 간신히 시간 내에 도착했는데, 가는 도중에 우리는 나의 벽
과 문을 지나쳤던 것이지. 달빛을 받은 곳은 납빛으로 보이고, 자동차 불빛
을 받은 곳만 노랗게 비쳐 얼룩이 졌지만, 틀림없는  그 벽과 문이었어. '세
상에!' 이렇게 내가  소리치자, 호츠키스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 나는  '아
냐, 아무 것도 아냐!' 라고 대답했으며 그 순간은 그렇게 지나가고 말았어."
  "'난 큰  희생을 치르고 왔어!'  의사당에 들어가면서 원내총무에게  말을 
던졌더니, '다들 그랬다네' 라고 대답하고는 급히 지나가 버렸어."
  "그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지. 다음 번 기회는  아버지의 임종
의 자리로, 그 엄격한 분의 마지막을 지켜보기 위해  달려가고 있을 때였었
어. 그때 역시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긴급한 때니까 어쩔  도리가 없었
어. 그러나 세 번째는 달랐지. 바로 일주일 전에  일어난 일이야. 지금 생각
해 보아도 너무 후회스러워. 그때 나는 거커와 랠프스와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지.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거커하고 이야기가 다 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 우리는 프로비셔즈에서 식사를  하면서 둘 사
이에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새 내각에서 내 자리 문제는  늘 토
의 대상이 되기 바로 전의 상황이었지. 그래, 그래. 이제 다 결정됐어. 아직
은 말을 낼 필요가  없지만 자네한테야 뭐 감출 이유가 있겠나....  응, 거듭 
고마워. 하지만 내 이야기 좀 들어주지 않겠어?"
  "그런데 그날 밤에는  일이 아직 확정되어 있지도 않았고, 내  지위는 매
우 미묘한 상태였어. 나는  거커로부터 무슨 확답을 듣고 싶었지만, 랠프스
가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 바람에 그게 어려웠지.  나는 가볍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면서, 나에  관한 문제에 너무 노골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지  않
도록 애를 쓰고 있었지.  그랬어야만 했어. 그후 랠프스의 행동을 보더라도 
당시에는 그렇게 조심한  것이 참 잘한 일이었어....  나는 랠프스가 켄싱턴 
대로를 지나서는  우리와 헤어질 것이며,  그러면 거커에게 바로  솔직하게 
얘기를 꺼내 놀라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사람이란  때로는 그런 잔꾀
를 부려야만 할 때가 있지.... 그런데  바로 그때 내 시야 한쪽에는 다시 한 
번 하얀 벽과 초록색 문이 들어왔던 거야. 거리 저쪽으로 말이지."
  "우리는 이야기하면서 그 앞을  지나갔지. 그냥 지나쳤어. 우리들이 천천
히 지나갈 때 나와 랠프스의 그림자 앞으로 가는  거커의 인상적인 옆모습, 
그림자와 돌출한 코 위로 내려 눌러쓴 오페라 모자,  주름잡힌 그의 목도리
가 지금도 눈에 선해."
  "나는 그 문에서 몇  발자국도 되지 않는 곳으로 지나갔어. '그들에게 작
별을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자문해 보았지. 사실 
거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지."
  "다른 문제들로  머리가 복잡해서 그  문제에 대답할 수는 없었어.  나는 
생각했지. '그들은 나를 미쳤다고 생각할 거야. 가령 지금 사라진다고 하자! 
전도유망한 정치가의  놀라운 실종으로 여겨질 거야!'  그런 것들이 신경이 
쓰였네. 그 중요한 순간에 생각도 할  수 없는 만큼 보잘 것 없는 속된, 수
천 가지의 생각들이 마음을 사로잡앗던 거야."
  그리고 그는 슬픈 미소를 띤  채 내게로 몸을 돌리고 천천히 "그래서 여
기 있는 거야!" 라고 말했다.
  "그래서 여기 있는 거야!" 그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리고 기회는 영영 
사라졌어. 한 해 동안 세  번이나 그 문은 내게 나타났는데. 평화에 이르고 
기쁨에 이르는 문,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이  지구상에서
는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친절함에 이르는 그 문이 말이야.  그런데 레드먼
드, 나는 그 문을 거절했고 그 문은 영영 사라졌어."
  "어떻게 알지?"
  "난 알아. 알고  말고. 나는 이제 내게 기회가  올 때마다 그토록 강하게 
나를 사로잡은 일들에  얽매여 그것을 계속해 나가는 수밖에 없어.  자네는 
내가 성공을 했다고 말하지. 이 천하고 겉만 번지르르하고 역겨운 것, 사람
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래, 나는  성공했지." 그는 큰  손 안에 
호두를 하나 쥐고 있었다. "만일 이것이 내가 거둔 성공이라면 말이야." 이
렇게 말하면서 그는 호두를 쥐어 깨고는 나더러 보라고 내밀었다.
  "여보게, 레드먼드,  그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 나를 파괴시키고  있네. 
두 달 동안, 거의 십주일 동안 가장 필요한 긴급한  일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어. 내 마음에는 달랠  수 없는 후회의 심정 뿐이야. 사람들이 알
아보지 못할 듯한 밤에 나가  홀로 헤메지. 그래. 만일 사람들이 안다면 어
떻게 여길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지. 각료  가운데 한 사람이, 모든 
부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서를 맡고 있는 장관이 그  문, 그 정원 때문
에 슬퍼하며, 때로는  거의 소리내어 흐느끼며 홀로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말이지!"
  4
  나는 이제 그의 창백한 얼굴과 그의 두 눈에 담긴 낯설고 음울한 불빛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오늘 저녁에 나는 아주 똑똑히 그의  모습을 보
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마지막 말을, 그의 어조를  되새기며 앉아 있다. 그의 
사망 기사가 실린 어젯밤의 [웨스트민스터 거제트]지가 소파  위에 놓여 있
다. 오늘 점심 때는 그의  죽음으로 클럽이 시끄러웠다. 그 밖의 다른 화제
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시신은 어제 새벽 이스트켄싱턴 역 근처의 깊은 웅덩이에서 발견되
었다. 그것은 지하철을 남쪽으로 연장하기 위해 파놓은 두  개의 갱도 가운
데 하나였다. 그곳은 일반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큰  길에다 널빤지로 울타
리를 쳐  놓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부근에 사는 노동자들의 편의를  위해 
널빤지에는 조그만 통로가  뚫려 있었다. 그 문은 양쪽 갱도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부주의로  잠그지 않은 채 내  버려둔 상태였다. 그 문으로  그는 
걸어 들어갔떤 것이다.
  내 마음은 여러 가지 의문과 수수께끼로 어둡다.
  그날 밤 그는 하원에서  내내 걸어왔던 것 같다. 지난 회기  동안에도 걸
어서 집에 돌아오는 일이  자주 있었다. 시간이 늦은 텅 빈  거리를 외투를 
뒤집어 쓴 채 생각에 골몰하여  걸어가는 그의 어두운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려 본다. 그는 정거장 근처의 창백한 전등불로 인해  거친 널빤지를 하얀 
벽과 비슷한 것으로 착각했던 것일까?
  도대체 벽에 초록색 문이란 것이 실제 있었던 것일까?
  알 수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내게 말해 준  그대로를 이야기를 했을 뿐이
다. 때로는 월러스가 드물지만 전례가 없지도 않은 그런 종류의 혼각과, 부
주의로 인한 함정의  희생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은 아니다. 여러분은 나를  미신
적이라거나 혹은 어리석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이지  나는 그
가 비상한 재능과 의식이랄까 뭐 그런 것을 갖고  있었다고 굳게 확신한다. 
그래서 그 무엇인가가 그에게 벽이나 문의 형태를 빌려 이 세상으로부터의 
출구, 이 세계보다는 훨씬 더 아름다운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은밀한 통로
를 제공했던 것이라  확신한다. 어쨌든 결국에는 그것이 그를 배신하지  않
았느냐고 말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배신일까? 여긱에서 당신은 
이들 몽상가들, 환상과 상상력의 소유자들의 가장 깊숙한  비밀에 접근하는 
셈이 된다. 우리는 우리  세계를 아름답고 일상적인 것으로, 널빤지로 둘러
싸여 있고 또한 웅덩이가 있는 곳으로 본다. 우리의  환한 대낮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한다면 그는 안전한 세계에서 어둠과 위험과 죽음의 세계로 걸어
가 버린 셈이다.
  그러나 월러스도 과연 그렇게 보았을까?

    작품해설 - 때묻은 상상력으로는 열 수 없는 문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  작품에서와 같은 문이 하나씩은 있다. 삶의  어느 
시기 아직 때묻지 않은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돌아보다가 만나게 되는 신
비하고 환상적인 세계로의 입구이다. 비록 흰 벽에 난  초록의 문은 아닐지
라도 그것을 지나면 현실의  질서들은 무력해지고 상상력은 무한한 자유로 
아름다움을 즐기고 기쁨을 누린다.
  그 문은 또한 이 작품의  주인공에게서처엄 모든 사람들에게 일생 한 번
만 열린다. 철이 든다는  말은 그 문의 기억을 잊었다는 말이고  그래서 대
개는 그런 문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은 채 어른이 되어간다. 더러  그 문을 
소중히 기억하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다시 그 문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도 그 일이 불가능함을 알 만큼은 철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문을 다시 찾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때묻지 않은 
유년의 상상력과 그것에 대한 순진한 믿음만 있으면 그 문은 우리 앞에 나
타날 수도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앞에  몇 번이고 그 문이 다시  나타난 
것은 성년의 삶이 언제나  비정한 현실감과 영악한 계산만으로 채워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모자라는 것은 용기였다. 눈앞의  성취, 닥쳐온 현실의 
기회를 박차지 못해 그는 그 문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다시  그 문을 찾고 축복받은 벽안으로 되
돌아간다.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든 어떤 이는 나면서부터  줄곧 그 담
장 안에서 머물다가 죽는 사람도  있고 더러는 나중에 찾아가 다시 돌아오
지 않기도 한다.
  주인공은 어땠을까.  내가 보기에 그도 마침내  그 문을 찾고 그  안으로 
든 사람인 듯 싶다. 세상사람들은 그걸 사고사라고 끔찍한  듯 말했지만 성
년이 되어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그가 가슴 속의 끔으로서가 아니라 현실
의 공간과 시간에 비끌어매인 몸까지 이끌고 다시 그 문을 찾아들 길은 그
밖에 없었으리라.
  작가 H. G. 웰즈는 영국의  한 가난한 하층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고학으
로 런던대학 이학부를 졸업했다. 그 뒤 문학에 투신한  그는 소설가로서 뿐 
아니라 당대에 가장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일생동안 1
백권이 넘는 책을  써낸 그는 초창기 [투명인간]  [타임머신] 등 공상 과학 
소설을 쓰다가 점차 사랑과 웃음이 넘치는 소설 [킵스] [토노 번게이] 등을 
쓰는 등 끊임없는  모색을 계속했다. 문명 비평가로서도 명성을 떨친  웰즈
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단일 세계국가' 구상을  제창하기도 하였는데 그 
고민의 결과물로  나온 책이 [세계사 대계]  [생명의 과학] [인류의  노동과 
부와 행복] 등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단일세계국가'의 꿈
은 무너지고 낙관주의적 세계관도 와해되기  시작, 마지막 저서 [정신의 한
계]에서는 어둡고 절망적인 어조로 문명 비평을 가하고 있다.

    스페이드의 여왕  -알렉산드르 푸쉬킨 지음-
  스페이드 여왕은 숨겨진 악의를 뜻한다.  -신판 카드점서
  1 
궂은 날씨에 모두들 자주
모여 앉아 투전을 했네.
-하나님의 용서를!
오십부터 백까지 
판돈을 걸고
이기고 진 것을 
분필로 그으며 
궂은 날씨엔 
모두들 그렇게
 시간을 보냈네.
  어느 날 근위 기병 나루모프의 집에서 카드 놀이가  벌어졌다. 기나긴 겨
울 밤 이지나가고 밤참을 먹기 위해 모여 앉았을 때는 새벽 네시가 지났을 
때였다. 노름에  이긴 사람들은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덤벼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빈  접시를 앞에 놓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샴페인이 
나오자 대화는 활기를 띠었고, 모두들 거기에 끼어들었다.
  "자넨 어떻게 됐나, 수린?" 주인이 물었다.
  "잃었네, 늘 그렇지 뭐. 솔직히 말해서 재수가 없어. 난 미란돌(카드 놀이
의 일종:역주)을 할 땐, 절대로 흥분하거나 당황하는 적이 없는데도 언제나 
잃거든!"
  "그래, 자넨 한 번도 말려들지는 않았지? 한 번도 루째(같은 패의 연속적 
승리:역주)에 걸지 않았지? 자네 고집에 난 정말 놀랐어."
  "그런데 게르만은 어지간하군!"  손님 중 하나가 젊은 공병  사관을 가리
키면서 말했다. "저 친구는 이때까지  카드 한 번 손에 쥐어 보지 않고, 파
롤리(돈을 두 배로 거는 노름:역주)  한 번 하지 않았으면서도 다섯 시까지 
우리와 함께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으니 말이야!"
  "난 노름을 아주 좋아해." 게르만이 말했다. "그렇지만 여분의 돈을  얻으
려고 꼭 필요한 돈을 버릴 형편은 못 돼요."
  "게르만은 독일 사람이라 계산이 빠르거든. 그저 그럴 따름이야!" 톰스키
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내 할
머니 안나 페도토브나 백작 부인이지." 
  "뭐? 누구라구?" 손님들이 외쳤다.
  "정말 알 수 없어."  톰스키는 말을 이었다. "어쩐 일로 할머니가  노름을 
하시지 않는지 말이야!"
  "그게 뭐 이상한가?" 나루모프가 말했다.  "여든이나 된 할머니가 노름을 
하지 않기로서니. 안 그런가?"
  "그럼, 자넨 우리 할머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나?"
  "모르지, 정말 아무것도 몰라!"
  "아아, 그래, 그럼 내 말 좀 들어 보게.
  우선 알아둬야  할 것은, 지금부터 약  60년 전에 할머니가 파리에  가신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인기가 대단했었다는  사실이야. 사람들이 '모스크바
의 비너스'를 보려고 쫓아다녔대. 리셜리외(프랑스의 원수이며 재상:역주)까
지도 홀딱  반했었다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할머니가  너무나도 
냉정했기 때문에 자칫  권총 자살까지 할 뻔했다네. 그 무렵의  귀부인들은 
파라온(노름의 한 종류:역주)을  즐겼어. 하루는 할머니가 궁중에서  오를레
앙 공과 겨루었는데 무척 많이 잃었다는 거야. 할머니는  집에 돌아와서 얼
굴에 붙인 점을  떼고 페티코트를 벗으면서, 할아버지께 노름이 진  얘기를 
하고 나서는 잃은 돈을 갚아달라고 하셨지.
  내가 기억하기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심부름꾼 같았어. 할
머니를 불처럼 무서워 하셨지만, 그렇게 엄청나게 잃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는 화를 버럭 내셨지. 주판을 가지고 오셔서 반년  동안에 50만 루블씩이나 
썼으며, 파리 교외에는, 모스크바  근교나 사라토프현에 있는 땅 같은 것은 
없다고 할머니께 말씀하시고는 돈의 지불을 딱 잘라  거절하셨다네. 그랬더
니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뺨을 후려치고, 화가  난 표시로 그날 밤은  혼자 
주무셨다는 거야.
 다음 날, 할머니는  어제 준 벌이 효과가 있으려니 생각하시고  사람을 부
르셨어. 그러나 할아버지는 꺾이지 않으셨어. 할 수 없이 할머니는 난생 처
음으로 남편에게 의견을  얘기하고 변명도 했지. 매우 공손하게 빚도  빚나
름이라느니, 공작과 마차꾼과는 다르다느니 하며 그를 설득하려고  했던 거
야. 그러나 어림도 없었지.  할아버지는 노발대발하셨어. '안 된다면 그만이
야!' 할머니는 어쩔 줄 모르셨어.
  그러나 할머니는  아주 유명한 어느  인물과 가까이 지내셨어.  자네들도 
매우 이상한 소문이 많은 생제르망 백작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테지. 다들 
알고 있겠지만, 그는 영원한 유태인임을 자처하고, 불로불사의 영약이니 현
자의 돌이니 하는 것의 발명자로 자처하고 있었지. 세상  사람들은 그를 협
잡꾼이라고 비웃었지만, 카사노바(이탈리아의  문인. 각국의 궁전을 출입하
고, 엽색 모혐으로 생애를 보냈음:역주)는  자신의 [회상록] 속에서 그를 간
첩이라고 쓰고 있다네.  그건 그렇고 생제르망은 아주 묘한 처지에  있으면
서도 겉보기에는 아주 훌륭했고 사교계에서도 매우 상냥한  사람이었어. 할
머니는 지금까지도 무턱대고 그를 좋아하셔서, 그에 대해서  멸시하는 말을 
하면 몹시  화를 내시지. 할머니는 생제르망이  큰 돈을 융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어. 그래서  그에게 부탁하려고 결심을 하시고, 편지를 써서 
곧 자기에게 와 달라고 청하셨지. 
  그 괴상한 늙은이는 곧 나타났는데, 와 보니 할머니가  지독한 슬픔에 잠
겨있는 거야. 할머니는 남편의  박절함을 하소연하고, 결국 모든 희망을 당
신의 우정과 후의에 걸고 있다고 말씀하셨지.
  생제르망은 깊이 생각에 잠기더니 마침내 이렇게 말했어.
  '나는 그 금액을 당신에게 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돈을 청
산하실 때까지 안심하실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당신
이 또 새로운  걱정을 하는 것을 바리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잃은 돈을 도로 따 오시는 겁니다.'
  '그렇지만 백작님,' 할머니가 말씀하셨어. '지금 우리에게는  전혀 돈이 없
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돈은 조금도 필요없어요.' 생제르망은 대답했지. '내 말을 잘 들으세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할머니에게 어떤 비결을 일러 주었다는 얘기야.  그 
비결을 알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값진 대가를 치르기를  마다하지 않을 
걸."
  젊은 노름꾼들은 더욱  관심이 커졌다. 톰스키는 파이프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고 나서 말을 이었다.
  "바로 그날 저녁 할머니는 베르사이유에서 벌어진 왕비의 카드놀이에 나
타나셨어. 오를레앙 공이 물주가 되었지. 할머니는 빚을 갚지 못한 것을 가
볍게 사과하고, 변명의 뜻을 잠깐 얘긴한 다음 그를  상대로 노름을 시작했
지. 할머니는 석 장의 카드를 골라서 차례로 겨루었어. 석 장 모두 첫 판에 
이겼으니, 할머니는 졌던 것을 완전히 만회해 버린 거야."
  "그건 우연이야!" 손님 중의 하나가 말했다.
  "꾸며낸 이야기야!" 게르만이 말했다.
  "아마 속임수를 썼겠지?" 또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네."  톰스키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
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건가?" 나루모프가 말했다.
  "자네에겐 연거푸  석 장씩이나 좋은  카드를 뽑는 할머니가 계신데,  왜 
이제까지 그 비결을 전수받지 않았지?"
  "제기랄,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하고 톰스키는 대답했다. "할머니에
겐 우리 아버지까지 아들이 사형제 있었어. 네 분이  모두 광적인 노름꾼이
었지만, 할머니는 어느 한  사람에게도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어. 
만일 전수받았더라면 그분들에게는  물론이고, 나에게도 나쁠 리는  없었을 
텐데. 그러나 이것은 백부이신 이반 일리치 백작이 얘기해 주신 건데, 명예
를 걸고 틀림없다는 것이었어.  고인이 된 챠플리쯔키, 그 몇백만이라는 돈
을 탕진해 버리고 빈털터리로  세상을 떠난 바로 그 사람 말이야.  그가 젊
었을 때, 아마 조리치였지, 조리치에게 거의 삼십만이나  잃은 적이 있었어. 
그는 절망에 빠져  있었지. 그런데 젊은이들의 장난에는 항상 엄하게  대하
시던 할머니가 어찌된  일인지 챠플리쯔키를 동정하셨어. 그래서  차례차례
로 겨두도록 이르고 카드  석 장을 주셨지. 물론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겠
다는 굳은 약속을 받고서 말이야. 챠플리쯔키는 처음 패에  오만을 걸어 처
음부터 연거푸 이겼어. 그리고 다시 두 배를 걸어 또 이겼어. 당장 진 것을 
모두 만회하고, 게다가 따기까지 했단 말이야..."
  "그건 그렇고, 이젠  잠을 자야지. 벌써 여섯 시  십오 분 전이나 되었다
구."
  정말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술잔을 비우고 뿔뿔이  헤어졌
다.
  2
  '아마 당신은 하녀들이 
  몹시 좋으신 모양이지요?'
  '아니, 마님,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훨씬 신선한 걸요.'
  -사교계의 대화
  연로한 백작 부인 xxx씨는 자신의  화장실 경대 앞에 앉아 있었다. 하녀 
셋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는 연지통을, 하나는 머리핀이 든 조그
만 곽을, 또 다른 하나는 불붙는 듯 선명한 색깔의  리본이 달린 모자를 들
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이미 오래  전에 퇴색해 버린 용모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젊었을 때의 습관은 버리지  않았
던 것이다. 칠십년대의 유행에는 엄격히 따랐으며, 육십년 전과 마찬가지로 
옷을 입는 데에 오랜  시간을 소비했고, 조심스럽게 몸치장을 했던 것이다. 
작은 창문 옆에는 그의 양녀인 소녀가 자수틀에 마주앉아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머님." 방에 들어온 젊은 사관이 말했다. 
  "봉쥬르, 마드모와젤 리즈(안녕하세요,  리즈양, 이란 뜻의 불어:역주). 그
랑 마망(할머니, 란 뜻의 불어:역주), 저,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뭔데 폴?"
  "제 친구  하나를 할머니에게 소개할  테니, 그 사람을 금요일  무도회에 
데리고 오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그러면 곧장 무도회로 데리고 와서, 거기서 소개해 주려무나. 어제 저녁
에 넌 xxx에 갔었지?"
  "물론이지요, 참  즐거웠어요. 다섯 시까지 춤을  추었는걸요. 엘례쯔카야
는 정말 미인이예요!"
  "어머, 넌! 그 사람의 어디가  좋더냐? 그 사람의 할머니인 공작 부인 다
리야 페트로브나는 그  정도가 아니었는걸...? 그건 그렇고,  어떻더냐, 공작 
부인은 많이 늙으셨지?"
  "뭐요, 늙으셨냐구요?" 톰스키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벌써 돌아가신  지
가 7년쯤 된답니다."
  소녀는 고개를 들어 청년에게 눈짓을 했다. 그는 이  연로한 백작 부인에
게 같은 연배의 사람들의 죽음을  모두들 숨기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입
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백작 부인은 새로운 소식을 듣고도 태연했다. 
  "돌아가셨다구!"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 걸  난 여태 모르고 있었구
나! 우리는 함께 궁중 여관에  임명됐었단다. 그래서 우리가 뵈러 들어갔더
니, 여왕께서..." 백작 부인은 손자에게 같은 얘기를 백번째로 들려 주었다.
  "얘, 폴."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이제 나 좀 일어나게 부축해  다오. 리
즈야, 내 담배갑은 어디 있느냐?"
  백작 부인은 화장을 끝마치기 위해서  세 하녀를 데리고 칸막이 뒤로 갔
다. 톰스키는 소녀와 둘이 남았다.
  "누구를 소개하시려는 거예요?" 리자베타 이바노브나가 조용히 물었다. 
  "나루모프인데 그 사람을 아세요?"
  "아니요! 그 분은 군인, 아니면 문관이신가요?"
  "군인입니다."
  "공병인가요?"
  "아니오! 기병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공병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소녀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폴!" 칸막이 뒤에서 백작 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뭔가 새로운 소설을  보내주렴. 그러나 제발 요즘 것이 아닌  걸로 말이
야."
  "그럼 어떤 거요, 할머니?"
  "말하자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짓밟는 주인공이 없고, 또 익사한 송장이 
나오지 않는 그런 소설  말이야. 난 물에 빠져 죽은 송장이라면  아주 무서
워!"
  "요새 그런 소설은 없어요. 러시아 것은 어떠세요?"
  "아니, 러시아 소설도 있니...? 그렇다면, 그걸 보내주렴. 꼭 보내다오."
  "죄송합니다, 할머니. 제가 좀 바빠서요... 미안합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
나! 어째서 당신은 나루모프를 공병이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잠시 후 톰스키는 탈의실을 나왔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혼자 남았다.  그녀는 일거리를 놓아 두고, 창 밖
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곧  큰길 한쪽 모퉁이에 있는 집 뒤에  젊은 사관이 
나타났다. 그것을 보자, 그녀의  양쪽 뺨이 빨개졌다.  그녀는 다시 일을 시
작하며, 수 놓는 천 위로 얼굴을 숙였다. 그때 옷을다 입은 백작 부인이 들
어왔다.
  "리즈, 마차를 준비시켜라" 하고 그녀는 말했다. "바람이나 쐬러 나가자."
  리즈는 자수틀에서 일어나 일감을 치우기 시작했다. 
  "너 왜 그러니, 얘야! 너 귀가 먹었니!" 하고 백작  부인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빨리 마차를 준비하라고 일러라."
  "지금 가요!" 조용히 대답하고, 소녀는 문간방으로 뛰어갔다. 
  하인이 들어와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공작에게서 온 책을 백작 부인에게 
전했다.
  "좋아, 고맙다고 전해 줘." 백작 부인이 말했다. "리즈야, 얘,  리즈, 넌 어
딜 그렇게 뛰어가니?"
  "옷을 갈아 입으려구요."
  "시간은 넉넉하다,  얘. 여기  앉아라, 제1권을  펼쳐서 큰소리로  읽어다
오..."
  소녀는 책을 집어 들고 몇 줄을 읽어 내려갔다.
  "좀 더 큰소리로  읽어!" 백작 부인은 말했다. "왜 그러니,  얘야? 목소리
가 안나오니...? 가 만 있거라... 의자를 이리 당기고 더 가까이..., 자아!"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다시 두 페이지를  읽었다. 백작 부인은  하품을 
했다.
  "그 책은 그만두어라." 그녀가 말했다. "시시한 게, 뭐 그래! 그것을 파벨 
공작에게 돌려 보내라.  고맙다고 전하고 말이야... 그래, 마차는  어떻게 됐
지?"
  "마차는 준비되어  있어요."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한길을  내다보고 말
했다.
  "왜 넌 옷을 갈아 입지 않았지?" 백작 부인이 말했다. "언제나 너를 기다
려야 하는구나! 얘야, 이건 정말 못 견디겠구나."
  리즈는 자기 방으로  뛰어갔다. 2분도 지나지 않아서 백작 부인은  온 힘
을 다해 초인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한쪽 문으로  하녀 셋이, 그리고 다른 
한쪽 문으로는 하인이 뛰어왔다.
  "뭐냐, 너희들은  불러도 안  들리느냐?" 백작  부인은 그들에게 말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에게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라."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외투를 입고 모자까지 쓰고 들어왔다.
  "드디어 왔군!"  백작 부인이 말했다. "얘야,  굉장한 차림이로구나! 무슨 
일이지...? 누구를 홀리려고...?  그래, 날씨는 어떠니? 바람이 부는 것  같구
나."
  "전혀 불지 않습니다, 마님! 아주 고요합니다요." 하인이 대답했다. 
  "너희들은 언제나 그렇게 분별없는 소리만 하느냐! 들창을 열어 봐라. 그
것 봐, 바람이  불지 않니! 그리고 굉장히  춥구나! 마차를 거둬라! 리즈야, 
나가지 말자, 치장할 필요도 없는 걸 그랬구나."
  '아이구, 내 신세야'하고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생각했다.
  사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불행한 처녀였다. 타인의  빵은 맛이 쓰고, 
남의 집 현관 층계는  오르기가 힘들다고 단테(이탈리아 르네상스 기의 대
표적 시인:역주)는 말했다. 이 명문 노파의 가엾은 양녀가 아니고서야 누가 
타인의 신세를 지는 괴로움을 알 수 있으랴? 물론 xxx백작  부인에게 악의
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상류 사회에서  버릇없이 성장한 여
성으로, 무엇이든  제멋대로 했으며, 화려한 시대를  즐겁게 지내고 지금은 
소외당하고 있는 모든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인색하고 냉정한 이기주의 밖
엔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상류 사회의 헛된 모임에는 빠짐없이  참석하
고, 무도회에도 출입했는데, 연지를 찍고 고풍스런 차림을 하고서는 무도회
에 없어서는 안될 기형적 장식물처럼 늘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러면 
그곳에 온  손님들은 정해진 예식에라도  따르는 듯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정중히 인사를 했지만, 그  다음에는 누구 하나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녀는 엄격한 예절을 지켜, 누가 누군지 얼굴도 모르면서, 시내의 모든 사
람들을 자기 집에 초대했다. 그녀의 여러 하인, 하녀들은 현관 방이나 하녀 
방에서 실컷 먹기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고들 있었으며,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파의 물건들을 앞을 다퉈 훔치면서, 하고 싶은  짓을 마음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이 집의  수난자였다. 그녀가 차를 
따라 주면 설탕을 너무 쓴다고 꾸중을 들었다. 또  소설을 읽어주는 경우에
는 그 작가의 모든  실수를 혼자서 뒤집어 썼다. 백작 부인의  산책에 따라 
나가면, 날씨와 포장 도로에  대해서까지 그녀가 책임을 져야 했다. 그녀의 
봉급은 정해져 있었지만,  받아 본 일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처럼,  즉 극소
수의 여자들처럼 상당한 옷차람을  하고 있어야 했으며 사교계에 나가서는 
가장 비참한 역할을 해야 했다. 누구나 그녀를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
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무도회에서 그녀가 춤을 추는 경우는  파트너
가 모자랄 때뿐이었다.  그리고 귀부인들은 어딘가 자기 옷 매무새를  고치
기 위해 탈의실에 갈  일이 있으면 꼭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녀는 자존심
이 강하고, 자신의 처지를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절부절 못해 구원
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자기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그러나 경박한  공명심
에 급급한 청년들은, 그들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방약  무인하고 냉랭한 처
녀들보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가 백  배나 귀여웠지만 전혀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화려하지만  지루한 홀을 몰래 빠져 나와서, 벽지를 
붙인 칸막이와 장, 경대, 그리고 칠을 한 침대가  놓여 있고, 구리 촛대에서 
수지로 만든 촛불이 희미하게 비치는  쓸쓸한 자기 방에 돌아와 울음을 터
뜨린 적이 대체 몇 번이었던가!
  어느 날 -이 소설의 처음에 묘사한 밤으로부터 이틀 후, 지금 우리가  머
무르고 있는 때보다  일주일 전이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창가의  자수
틀에 마주 앉아 무심코 한 길을 내가보다가, 그녀의  창문을 쳐다보면서 꼼
짜고 하지 않고 서  있는 공병 사관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오 분쯤  지나서 다시 밖을 내다 보니 청년  사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관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따위의 짓은 해 
본 일이 없어, 그녀는  한길을 내다보기를 그만두고, 이번에는 고개도 들지 
않고 두 시간이나 가까이 계속 수놓는 데만 열중했다.  그러는 사이에 식사 
시간이 되었다. 그녀는 일어서서  자수틀을 치우기 시작했는데, 또 다시 무
심코 한길을 보니, 사관은 아직까지도 서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그녀는 약간 불안한 기분으로 창문에 다가섰으나, 아미 사
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있었
다. 
  이틀쯤 지나서, 백작  부인과 함께 마차를 타러  나갔을 때, 그녀는 다시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해달피 깃으로 얼굴를 가리고 현관 옆에  서 있
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모자 밑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리자베타 이바노
브나는 까닭없이 깜짝  놀라, 형용하지 못할 전율을 느끼면서 마차에  올랐
다. 
  집에 돌아오자, 그녀는 또 다시 창문 쪽으로 뛰어갔다. 사관은 전과 같은 
장소에 서서  그녀에게로 시선을 더니고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에  휩싸여 
난생 처음 맛보는 감정에 몸을 떨면서 그 자리를 물러섰다.
  그때부터 그 청년이 일정한 시간에 이 집 창문 밑에 나타나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뭐라고 말하기 힘든 관계가 이루어 졌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일거리를  잡고 앉아 있어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느꼈고, 그러면 고개를 들고,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오랜 시간을 그를 바라
보게 되었다. 보건대 청년 쪽에서는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들의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그의 창백한 뺨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곤 하는 
것을, 그녀는 젊은이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알아챘다. 일주일쯤  지나자, 그
녀는 그에게 미소를 보이게 되었다.
  톰스키가 백작 부인에게  자기 친구를 소개하는 걸  허락해 달라고 청을 
드렸을 때, 가엾은 처녀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루
모프가 공병이 아니라  근위 기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경박한  톰스키에
게 점잖지 못한 질문으로 자신의  비밀을 입밖에 낸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
했다.
  게르만은 러시아에 귀화한  독일인의 아들로, 아버지에게서 약간의  재산
을 상속받고 있었다. 게르만은 자신의 자주 독립을 더운  굳혀야 한다고 확
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자에는 손도 대지 않고 봉급만으로 생활하고  있
었으며, 사소한 변동도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속을 터
놓지 않는 인간이고 또 야심가였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은  그의 지나친 절
약을 비웃을 기회를 좀처럼 갖지 못했다. 강한 정열과  불타는 상상력의 소
유자였지만 의자가 굳었으므로, 젊은이들이 빠지기 쉬운 나쁜  행동에 빠지
는 일도 없었다. 예를 들어 마음속으로는 노름을 하고 싶었지만 '여분의 돈
을 바라서 꼭  필요한 돈을 버리는'(그의 말투지만) 따위의 짓은,  자신에게 
형편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번도 카드를 잡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밤새 카드놀이 탁자에 마주 앉아서  노름이 가지가지로 
변해가는 것을 미칠 듯이 가슴 죄면서 지켜보는 것이었다.
  석 장의 카드  얘기는 그의 상상력에 매우 강하게 작용했으며,  밤새도록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약에', 하고 그는 다음 날  밤, 페테르스부르크 
거리를 방황하면서 생각했다. '만약에 그 늙은 백작  부인이, 자신의 비결을 
나에게 가르쳐 준다면 어떨까!  즉 재수 좋은 석 장의 카드를 가르쳐 준다
면 말이야! 나의 재수를 시험해 보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만나서 환심을 사야겠다. 아니, 그녀의 애인이 되는  것이 좋겠지...  그러나 
그건 시간이 꽤 걸릴거야... 어쨌든  상대는 여든 일곱 살이나 됐으니, 어쩌
면 일주일 후  아니 이틀 후에 죽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 얘기가 정말일
까...? 그걸 믿어도 좋을까...? 아니다! 절약, 중용, 근면, 이것이 나의 재수좋
은 석 장의 카드다. 이것만 있으면 내 재산을 갑절로 만들 수 있으며, 일곱 
배로 늘려 안락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즐길 수 있단 말이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어느새 페테르스부르크의 어떤 한길에 있는 고풍스런 
집 앞을 걷고 있었다. 한길은 마차들로 빽빽했다. 마차는 불빛이 밝은 현관
에 속속 도착했다. 마차에서는 젊은 미인들의 날씬한 다리,  소리가 요란한 
승마용 장화, 줄무늬가 있는 스타킹, 그리고 외교관의 단화 등등이 속속 나
왔다. 모피 외투와 망토가 정장을 한 문지기 옆을 어른거리며 지나갔다. 게
르만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어느 분의 저택이지요?"  하고 그는 모퉁이에 선 순경에게 물었
다.
  "xxx백작 부인이오." 순경이 대답했다.
  게르만은 몸을 떨었다. 이상한  카드의 얘기가 또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 
그는 이 집 주인과 그녀의 신기한 재주에 대해 생각하면서 집 주위를 배회
하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서야  그는 초라한 자기 숙소로 돌아왔지만, 오랫
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겨우 잠이  들자, 카드장, 초록색 탁자
와 지폐 뭉치, 금화  더미가 꿈에 보였다. 한 장 겨루어, 마침내는  배로 걸
고, 계속 이겨서,  금화를 긁어모으고, 지폐를 주머니에  쑤셔 놓었다. 다음 
날 아침 늦게 잠이  깨어, 끔 속의 돈이 사라졌음을 생각하고는  한숨을 쉬
었다. 다시 거리로 나와 거닐다 보니 어느새 그느 또 다시 xxx백작 부인의 
집 앞에 와 있었다.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백작 부인  댁으로 이끌어 
온 것 같았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창문을 쳐다보았다. 한  창문에,어떤 책 
위에, 아니 어쩌면 자수틀 위인지도 몰랐다. 고개를 숙인 검은 머리가 보였
다. 고개를 들었다. 게르만은 활기 찬 얼굴과 검은  두 눈을 보았다. 참으로 
이 순간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3 
  그대 나의 천사여,
  난 아직 읽지도 못했는데 
  또 넉 장의 편지를 주네.
  -서신 왕래
  리자베타 이바노브나가 외투와  모자를 채 벗기도 전에, 백작 부인은  벌
써 그녀에게로 사람을  보내 다시 마차를 준비시키라고 일렀다. 두  사람은 
마차를 타러  나왔다. 두 하인이 노파를  부축하여 마차 안으로 밀어  넣던 
바로 그때,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예의 그 공병 사관이 차 바퀴  옆에 바
싹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사내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너무 놀라
서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청년의 모습은 사라졌으나 그녀의 손에는 편지 
한 장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편지를 장갑  속에 감췄다. 이후 그녀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고 어느 것도  보이지도 않았다. 마차를 타면  백작 
부인은 '지금 우리가  만난 사람이 누구냐?' '이  다리의 이름이 무엇이냐?' 
'저 간판에는 뭐라고 씌어 있느냐?' 하고 쉴새없이 물어대는 버릇이 있었는
데, 이때만은 리자베타 이바노브나가 아무렇게나 당치도 않은  대답을 했기 
때문에, 마침내 백작 부인을 화나게 하고 말았다.
  "너 어떻게 됐구나, 얘야! 정신이 나간 거냐, 응? 아니면  내 말이 들리지 
않니, 알아듣지 못하는 거니...? 아이구, 나는 아직  혀도 꼬부라지지 않았고 
정신도 말짱하단 말이야!"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그  말도 듣고 있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
녀는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 장갑 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편지는 봉해지
지 않은 채였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재빨리 그것을 읽었다. 편지의 내
용은 사랑의 고백이었다. 그  내용은 매우 부드럽고 예의바르고, 모두 독일 
소설에서 인용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독일어를  몰
랐기 때문에, 다만 매우 만족할 뿐이었다.
  그렇기는 했지만 그 편지는 그녀를 무척 불안하게 했다.  그녀는 난생 처
음 젊은 남자와, 남의 눈이  두려운 깊은 사이가 된 것이었다. 사내의 대담
함에 그년느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조심성 없는 행동을  나무랐
다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몰랐다. 창가에 앉는 것을 그만두어, 젊은 사
관의 마음이 식기를 무관심하게  기다릴까? 그에게로 편지를 돌려 보낼까? 
아니면, 냉정하게 딱 잘라 회답을 할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상의할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친구도,  이끌어 줄 사람도 없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회답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조그만 책상에 마주 앉아 종이를 갖다 놓고 펜을 잡고 생각에 잠
겼다. 몇 번이나 쓰기 시작했다가는 찢어 버리곤 했다. 말투가 너무 겸손한 
것 같기도 했고, 또 지나치게 박절한 것 같게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녀는 만족스러운 몇 줄을 쓸  수 있었다. '저는,' 하고 그녀는 썼다. '당신
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며, 일부러 저를 모욕하려고  그런 경솔한 행
동을 하시지는 않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교제가  이렇게 시
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여기 편지를 돌려 드리오니 차
후로는 터무니없는 실례의 행동을 했다고 나무라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다음 날 걸어오는 게르만의 모습을 보자,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자수틀
에서 일어서서 홀로 걸어가 들창문을 열고 한길로  편지를던졌다. 틀림없이 
청년 사관이 그것을 알아채고서 재빨리 달려오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아니
나다를까, 게르만은  뛰어오더니 편지를 주워가지고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봉함을 뜯어 보니 그 속에는 자신의 편지와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의 회답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러리라고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후의 책략을 이
리저리 골똘히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사흘  후, 유행품 가게에서  심부름을 왔다는 눈치빠르게  생긴 
조그마한 계집아이가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에게 편지를 가져 왔다.  리자베
타 이바노브나는 청구서를 가져 왔으리라 예상하면서 걱정스레 개봉했지만 
곧 게르만의 필적임을 알아차렸다.
  "이것 봐, 잘못 가져왔어." 그녀가  말했다. "이 편지는 나한테 오는 것이 
아니야."
  "아니예요, 틀림없어요!" 하고 콧대가 센 소녀는 교활한 미소를 감추지도 
않고 대답했다. "어서 읽어 보세요!"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편지를  훑어 보았다. 게르만은 밀회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성급한 요구와, 그가 쓴 방법
이 어이없어서, "이 편지는 분명히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야"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편지가 당신에게 온 것이 아니라면 왜 찢어 버리지요?" 하고 소녀가 말
했다. "부탁한 사람에게 돌려 주어야 하는데."
  "이것 봐 제발,"  상대방의 말에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리자베타 이바노
브나는 말했다. "다시는 이런  편지를 가져 오지 마. 너를 보낸  분에게, 이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전해 줘..."
  그러나 게르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이런
저런 방법으로 보내 오는 그의 편지를 매일같이 받았다.  그것은 이미 독일 
소설의 인용은 아니었다. 정열에 넘쳐서 게르만이 쓴 것이며, 글 말도 게르
만 자신의 말이었다. 거기에는, 억누를 수 없는 욕망과 방자하고 종잡을 수 
없는 상상이 적혀  있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이제 그것을 돌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어느새 그것을  기뻐하고 회답을 쓰게 되었다. 그녀의 편지
는 날이 갈수록 길어졌고,  부드러워졌다. 마침내 그녀는 다음과 같은 편지
를 창문 밖으로 던졌다.
  '오늘 저녁에 xxx공사 댁에서 무도회가 있습니다. 백작  부인도 나가십니
다. 우리는 두 시께까지 그곳에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단둘이 만나기에 꼭 
좋은 기회입니다. 백작  부인이 떠나시면 하인들도 아마 곧 이리저리  흩어
질 것입니다. 문지기는 문간에 남아 있겠지만, 그도 대개는 자기 방으로 가 
버립니다. 열한 시  삼십 분에 오세요. 그리고 곧장 층계를  올라오세요. 만
일 현관 방에 사람이  있으면 백작 부인이 계신지 물어 보십시오.  안 계시
다고 대답하면 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마 
아무도 만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녀들은 모두 한 방에 있습니다. 현관에
서 왼쪽으로 꺾어져서 그냥 똑자로 백작 부인의 침실까지  오세요. 침실 칸
막이 뒤에 조그만 문이 둘 있습니다. 오름쪽은 백작  부인은 전혀 들어가시
지 않는 거실로 통하고, 왼쪽은 복도로 통합니다. 복도로 나가면 좁고 꼬불
꼬불한 층계가 있는데 그리로 올라오시면 제 방이 됩니다.'
  게르만은 정해진  시간을 기다리면서 호랑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밤 
열 시에는, 벌써  백작 부인의 집 앞에 있었다. 무시무시한  날씨였다. 바람
은 으르렁 거리고,  눅눅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불은 희미하고, 
한길은 텅 비어 있었다.  이따금 여윈 말에 썰매를 끌리는 마부가  늦은 밤 
손님을 찾으며 지나가는  정도였다. 게르만은 단지 프록 코트만 입고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바람도 눈도 느끼지 못하고 서 있었다.  이윽고 백작 부인
의 마차가 끌려 나왔다. 게르만의  눈에, 담비 털가죽 외투에 몸을 싼 구부
정한 노파를 하인들이  부축해서 데리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뒤에  춥게 
보이는 망토를 입고 머리에 생화를 꽂은 그의 양녀가  어른거렸다. 문이 쾅 
닫혔다. 마차는, 푸석푸석한 눈 속을 힘들게 움직여  갔다. 게르만은 인기척
이 사라진 집 주위를 거닐기 시작했다. 그는 가로등에  다가서서 시계를 들
여다보았다. 열한 시 이십 분이었다.  그는 가로등 밑에 선 채 시계 바늘을 
쏘아보며, 남은 몇 분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각 열한 시 삼십 분
에 게르만은 백작 부인 댁 층계를 올라가 불빛에 눈이 부신 문간으로 들어
섰다. 문지기는 없었다. 게르만이 층계를 뛰어 올라가 현관 방의 문을 열자 
하인 하나가 램프 밑에, 어지럽혀진 고풍의 의자들을 붙여  놓고 그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가벼운, 그러나 야무진 걸음걸이로  게르만은 하인의 옆을 
지나갔다. 홀과 객실은  어두웠지만 현관 방의 램프가 희미하게 비치고  있
었다. 게르만은 침실로 들어갔다.  고풍의 성상들이 가득 있는 침실 앞에는 
황금으로 만든 등에  불빛이 보였다. 꽃무늬도 퇴색한 비단을 붙인  안락의
자와 새털 방석을 놓은  도금이 벗겨진 채의 긴 의자가, 당초  무늬 종이를 
붙인 벽 가까이 놓여 구슬픈 조화를 이르고 있었다.  벽에는 루브랑 부인이 
파리에서 그린 두 장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한 장에는 흐린  초록색 군
복을 입고 훈장을 단,  마흔 살쯤 된 뚱뚱한 몸집에 얼굴이  붉은 사나이가 
그려져 있고, 또  한 장에는 매부리코에 앞머리를 곱슬곱슬하게 만들어  높
이 빗어 올리고 화장분을 뿌린  머리에 장미꽃을 꽂은 젊은 미녀가 그려져 
있었다. 방 네 귀퉁이에는 도자기 목동상, 유명한 르로아 공장에서 만든 탁
상 시계, 조그마한 상자, 룰레트(도박용 기구의 하나:역주), 새털 부채, 그리
고 지난 세기말에 몽골피에(프랑스의 발명가. 열  공기 기구와 낙하산을 발
명했음:역주)의 기구나 메스메르(오스트레일리아의 의학자:역주)의  자력 요
법과 함께  발명된 가지각색의 부인용  장난감들이 놓여 있었다.  게르만은 
칸막이 뒤로 갔다. 거기에는  조그만 철제 침대가 있고, 오른쪽에는 거실로 
통하는 문이, 왼쪽에는 복도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게르만은 왼쪽 문을 열
었다. 가엾은 양녀의 방으로 통하는 꼬불꼬불한 층계가 보였다... 그러나 그
는 돌아서서 캄캄한 방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주위는 조용했다. 객실에서는 시계가 열두 시를 
쳤다. 모든 방드ㄹ 시계가 차례로  열두 시를 알리고 나자, 주위는 다시 잠
잠해졌다. 게르만은 차가운 페치카(러시아 식 가옥의 난방  장치:역주)에 기
대 서 있었다. 그는  침착했다. 뭔가 위험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일을  하
려고 결심한 사람처럼  그의 심장의 고동도 규칙적이었다. 시계가 새벽  한 
시를 치고, 두시를  치자, 그는 멀리서 달려오는 마차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했다. 마차는 가까이 와서 멈춰 섰다. 발판을 내리는 소
리가 들렸다. 집 안은 떠들썩 거리기 시작했다. 하인들이 뜁박질을 하며 오
갔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온 집안에 불이 켜졌다.  늙은 하
녀 셋이  침실로 뛰어들자, 이윽고 겨우  목숨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백작 부인이  들어와서 볼테르 안락의자에  주저 앉았다. 게르만은  틈으로 
엿보고 있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가 그의 옆을 지나갔다. 게르만은 좁은 
층계를 한 계단 한  계단 바삐 올라가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었다.  그는 양
심의 가책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다시 잠잠해졌다. 그는 돌처럼 굳어 버렸
다.
  백작 부인은 거울  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장미꽃으로 장식한  머리 
수건을 벗고, 다음에 깨끗이 깎은 백발에 썼던 화장분을  뿌린 가발을 벗었
다. 머리핀이 그녀의 주위로  비오듯 떨어졌다. 은실로 꿰맨 노란색 의상이 
그녀의 부은 발 밑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게르만은 백작  부인의 흉칙한 화
장의 비밀을 목격한  것이다. 마침내 백작 부인은 잠옷을 입고  나이트캡을 
쓴 모습이 되었다.  노령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하니 그녀는 오히려  그다지 
무섭지다, 보기 흉하지도 않았다.
  대체로 늙은 사람들은 모두들 그렇지만, 백작 부인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옷을 벗고 나서 그녀는 창가에 있는 볼테르  안락의자에 앉아 늙은 
하녀들을 돌려 보냈다. 촛대도 가져 갔다. 방에는 다시 등불만이 비치고 있
었다. 백작 부인은 노란 얼굴에  축 늘어진 입술을 떨며, 좌우로 몸을 흔들
고 앉아  있었다. 흐리멍텅한 그녀의 두  눈에는 전혀 아무 생각도  없음이 
나타나 있었다. 지금의  그녀의 모습을 보면 무서운 노파의 몸이  흔들리는 
것은 그녀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몸에 숨어있는 전기 요법의 작용
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돌연 송장 같은 그 얼굴이 형용하기 힘든 상으로  변했다. 입술은 움직이
지 않고, 두 눈이 생기를 띠었다. 백작 부인 앞에 낯선 사나이가 서 있었던 
것이다.
  "놀라지 마세요.  제발 놀라지 마세요!" 그는  분명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마님께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서 왔습니다."
  노파는 묵묵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말을 듣고 있
지 않는 것 같았다. 게르만은  그녀의 귀가 안 들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몸
을 굽혀 바로 그녀의  귀 밑에 대고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노파는 여
전히 말이 없었다.
  "마님은," 그는 말을  이었다. "저에게 평생의 행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님께는 매우 쉬운 일입니다. 마님은 계속  석 장의 카드를 
맞추실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게르만은 말을 멈췄다.  백작 부인은 부탁이 무엇인가를 이해한 것  같았
다. 그리고 대답할 말을 생각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건 농담이었어요."  마침내 그녀는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건 농담이
었어요!"
  "그런 농담이  어디 있어요." 게르만은 화가  난 듯이 대꾸했다.  "당신이 
잃은 것을 복구하게 해 주신 챠플리쯔키를 생각해 주세요."
  백작 부인은 당황했다. 그녀의  얼굴은 심한 마음의 동요를 나타냈다. 그
러나 그녀는 곧 여전히 무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어떠십니까" 하고 게르만은 계속했다. "저에게  석 장의 이기는 패를 가
르쳐 주실 수 없으실까요?"
  백작 부인은 말이 없었다. 게르만은 말을 이었다.
  "누구를 위해서,  마님께서는 그 비밀을 지키십니까?  손자들을 위해서입
니까? 그들은 그것없이도 부유하십니다. 그분들은 돈의 가치도 모르십니다. 
낭비하는 사람에겐 마님의 석 장의 카드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어
버이의 유산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제아무리 악마같이  애써보아도, 역시 
굶어죽을 것입니다. 저는 낭비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저는 돈의 가치를 알
고 있습니다. 마님의  석 장의 카드는, 저에게 오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 어서..."
  그는 말을 멈추고, 몸을 떨면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도, 그녀는 
말이 없었다. 게르만은 무릎을 꿇었다.
  "만약 언젠가," 하고  그는 말했다. "마님께서 사랑을 경함하셨다면  그리
고 사랑의 기쁨을  기억하신다면, 단 한 번이라도 갓난 아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미소지은  일이 있으시다면, 그리고  언젠가 마님의 가슴이  인간적인 
그 무엇에 감동한 적이 있으시다면, 아내로서 애인으로서  어머니로서의 감
정과 이 세상의 모든 성스러운 것을 걸고 마님께  부탁드립니다. 저의 부탁
을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마님의 비결을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마님
께는 아무것 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면 비결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무
서운 죄가 되든가, 영원한 해옥을 잃게 되든가, 혹은 악마와의 약속을 이행
하게 될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마님은 연로하셔서 이젠 
오래 살지 못합니다... 마님의 죄를  저의 영혼이 넘겨 받아도 좋습니다. 그
러니 비결만은 가르쳐 주십시오. 한 인간의 행복이 마님의 손에 달렸고, 저
뿐만 아니라 자식들, 손자, 증손자들까지도 마님이 기억하셨던 것을 고맙게 
여기고, 마님을 성모님처럼 공경하리라는 것 좀 생각해 보십시오..."
  노파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게르만은 일어섰다.
  "에잇, 늙어빠진 마녀!"  하고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대답하게끔 해줄 테다..."
  그 말고 동시에 그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권총이 보이자 백작 부인은 다시 한 번 강렬한  느낌을 표시했다. 그녀는 
쏘는 것을 막으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 두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뒤로 
넘어지더니..., 그만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애 같은 짓은 그만두세요." 노파의 손을 잡고 게르만이 말했다.  "다
시 한 번 묻겠어요. 석 장의 패를 가르쳐 주겠습니까? 가르쳐 주겠소, 못하
겠소?"
  백작 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게르만은 그녀가 죽은 것을 깨달았다.
  4
  18xx년 오월 칠일
  절조도 없고 신앙도 없는 사람!
  -서신 왕래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아직  무도회 의상을 입고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자기 방에 앉아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 내키지 않는 태도로 그녀에게 시킬 
일이 없느냐고 묻는 졸린 듯한 하녀를, 옷은 혼자서  갈아 입겠다며 돌려보
냈다. 그리고 몸을 떨면서 방에 들어왔지만, 마음 속으로는 게르만이 와 있
을지도 모른다고 기대를  걸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와 있지 않기를  바라기
도 했던 것이다. 첫 눈에 그가 없는 것을 알고, 그들의 밀회를 방해한 운명
의 신에게 감사했다.  그녀는 옷을 벗지도 않은  채 주저앉아서, 얼마 되지 
않는 사이에 이렇게 깊은 관계에  이르게 된 모든 사정을 회상하기 시작했
다. 조그만  창문으로 그 청년을 처음  본 후로부터 아직 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서신 왕래가  있었고..., 또, 그는 늦은 밤의 밀회를 요구하
여 숭낙을 얻은 것이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단지 몇 통의 편지 끝
에 그의 서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얘기 한 번 해 본 적도, 목소리
를 들은 일도 없고, 소문조차 들은 일이 없었던 것이다... 바로 오늘 저녁까
지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그날 밤 무도회에서 톰스키는,  여느 때와는 
달리 그에게가  아니라, 다른 남자에게 교태를  보인 젊은 공장 영양  폴린 
xxx에게 화를 내고, 냉정한  태도를 보이면서 복수하려고 리자베타 이바노
브나를 불러 그녀늘 상대로 끝없이 마주르카(폴란드의 민속 무용곡:역주)를 
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내내 그는  그녀가 공병 사관에게 홀딱  반했다고 
놀려 대고, 그녀가 추측할 수  없는 일 까지도 알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의 
농담 중에서  어떤 말은 너무나 직선적으로  아픈 데를 잘 찔렀기  때문에,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몇 번이나 자신의 비밀이 그에게 알려져 있다고 생
각했다.
  "그건 누구한테 들으셨지요?" 웃으면서 그녀는 물었다.
  "당신이 아는 분의  친구에게서" 하고 톰스키는 대답했다.  "무척 유명한 
사람에게서요!"
  "그 유명한 사람이 대체 누굴까요?"
  "그의 이름은 게르만."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과 발은 얼
음장같이 차가웠다...
  "그 게르만은," 하고 톰스키는 계속했다. "그야말로 로맨틱한  인물이어서 
옆으로 본  모습은 나폴레옹(프랑스의  황제:역주), 마음은  메피스토펠레스
(독일의 파우스트 전설에 등장하는 악마:역주) 같은 사내입니다.  내 생각으
로는, 그는 적어도 세 가지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있어요. 아이쿠, 안색
이 아주 안좋군요!"
  "머리가 아파요... 그런데  그 게르만인가 뭔가 하는 이가  당신에게 뭐라
고 했지요?"
  "게르만은, 그  친구에 대해서 매우 불만입니다.  그는 자기가 그 친구의 
입장에 있다면 전혀  다르게 했을 거라고 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게르만 
자신이 당신에게 생각이  있는 거예요. 적어도 친구의 정사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는 그는 아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답니다."
  "아니 대체 그분이 어디서 저를 보셨을까요?"
  "교회겠지요, 아마. 아니면, 산책하시는  걸... 알 게 뭡니까? 어쩌면 당신
이 잘 때 당신  방에서 인지도 모르지요. 그 정도의 짓은 능히 할  만한 인
간이거든..."
  그때 귀부인 셋이 다가와서  "우블리 우 르그레(잊으셨어요, 아니면 미련
이 있으신가요? 라는 뜻의  불어:역주)?" 하고 그에게 물었기 때문에, 리자
베타 이바노브나에게는 괴로울 정도로  흥겨워지던 대화가 그만 중단 되었
다.
  톰스키가 선택한 여인은, 다름아닌 공작 영양 xxx였다.  그녀는 여분으로 
한 곡 더 추고,  의자에 앉기 전에 다시 한 곡 추는 사이에  톰스키를 거뜬
히 녹여 버렸던 것이다. 이윽고 자기 자리로 돌아온  톰스키는 이미 게르만
에 대해서도,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
는 중단된 대화를 꼭  다시 계속하고 싶었지만, 마주르카도 끝났고, 그러자 
연로한 백작 부인이 그 자리를 떠나 버렸던 것이다.
  톰스키의 얘기는 마주르카에 붙어 다니는 공연한 소리에  불과했다. 그러
나 그의 말은  상상력이 풍부한 처녀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었다.  톰스키가 
대강 말한 사나이의 모습은, 그녀가 마음 속에 그리던 것과 부합되었다. 그
리고 최근의 소설의 영향으로,  그 보잘 것 없는 인물이 어느새  그녀를 위
협하는 동시에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깍지 끼고, 아직도 그대
로 꽃을 꽂은 머리를 드러난 가슴위로 숙이고는 꼼짝않고  앉아 있었다. 이
때 돌연 문이 열리더니 게르만이 들어왔다. 그녀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어디 계셨지요?" 그녀는 겁에 질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백작 부인 침실에요."  게르만은 대답했다. "지금 거기서 나오는  길입니
다. 백작 부인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아마도," 하고 게르만이 말을  이었다. "돌아가신 건 저 때문인 것  같습
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마음 속에는 '그 사람에
겐 적어도 세 가지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있다!'고 한 톰스키의 말이 생
생하게 떠올랐다. 게르만은 그녀의 옆 창틀에 앉아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공포에 떨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그 정열
적인 편지도,  그 불타는 듯한  요구도, 대담하고 집요하게 쫓아다닌  것도, 
모두가 사랑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돈..., 그의 영혼이 갈망하고 있던 것
은 바로 그것이다! 사나이의 욕망을 만족시켜 행복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가엾은 양녀는 분별도 없이, 강도를 도
와 자기 은인인 늙은이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이제 어찌 할 수 
없는 괴로운 마음을 못 이겨,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게르만은 말없이 그녀
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역시  매우 마음이 아팠지만, 거친 그의 영혼을 뒤
숭숭하게 한 것은 가엾은 처녀의 눈물도 아니요, 슬픔에  잠긴 그녀의 놀랄
만한 아름다움도 아니었다.  그는 죽은 노파를 상기해도 양심의 가책은  느
끼지 않았다. 단지 하나  -부자가 되기를 기대했던 비결을 영원히 잃고  말
았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것이었다.
  "당신은 괴물이에요!" 마침내 리자베타 이바노브나가 쏘아붙였다. 
  "죽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는 대답했다. "권총에는 탄환도 들어  있지 
않았어요."
  둘 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침이 가까워졌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다 타 가는 촛불을 껏다. 새
벽녘의 푸릇한  빛이 그녀의 방을 밝혀  주었다. 그녀는 눈물에 젖은  눈을 
닦고 게르만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팔짱을 끼고, 무섭게 이마를 찡그
린 채 창틀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이상스럽게도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상기시켰다. 이 비슷함은 리자베타 이바노브나까지도 놀라게 했다.
  "이 집에서  어떻게 빠져 나갈 거예요?"  마침내 리자베타 이바노브나가 
말했다. "비밀 층계로 당신을  안내하려고 생각했지만, 그러려면 침실 옆을 
지나가야 하는데, 무서워요."
  "어떻게 해서 그 비밀 층계로 나가는지 가르쳐  주세요, 나 혼자 나갈 테
니까."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일어서더니  열쇠를 꺼내어 게르만에게 넘겨주고 
길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게르만은 그녀의 차갑고 반응없는 손을 잡고, 
수그린 이마에 키스를 한 다음 방을 나갔다.
  그는 꼬불꼬불한 층계를  내려가 다시 백작 부인의 침실로 들어갔다.  이
미 숨이 끊어져 뻣뻣해진 노파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깊은 
정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게르만은 그 앞에 멈춰 서서, 무서운 진상을 확인
하려는 듯이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거실로 들어가  벽
지 밑에 숨겨져 있는  문을 찾아 내어,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어두운 층계
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 60년쯤 전에는,  바로 
이 시간에, 수놓은 카프탄을  입고 학처럼 우아하게 머리를 빗고, 삼각모를 
가슴에 안은  젊은 행운아가 바로 이  침실로 남몰래 출입했을 것이다.  그 
사내는 이미 오래 전에 무덤에서 썩어 버렸는데, 장수를  누린 그의 애인은 
오늘에야 심장의 고동을 멈춘 것이다...
  게르만은 층계를 내려와 다시 문을 찾아, 같은 열쇠로 문을 열고, 밖으로 
통하는 복도를 지나 한길로 나갔다.
     
  5
  그날 밤 나에게 고인인
  베(B) 남작 부인이 왔다.
  흰옷 차림의 고인은 나에게 
  "안녕하세요, 고문관님!" 하고 말했다.
  -슈베덴보르그
  운명의 밤으로부터 사흘이 지난 아침 9시에 게르만은  xxx수도원으로 떠
났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백작 부인의 장례식을 치르기로 되어 있었다. 
후회는 하지 않았지만, 너는 노파를  죽인 놈이다! 라고 되풀이하는 양심의 
소리를 완전히 억눌러 버릴 수도 없었다. 진정한 신앙심이  없었던 그는 많
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죽은 백작 부인이 장차 그의  생활에 해
를 끼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서  그 장례
식에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교회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게르만은 군중을 헤치고  겨우 안으로 들
어갈 수 있었다. 관은  벨벳 덮개가 있는 화려한 관대 위에  안치되어 있었
다. 고인은 레이스가 달린 머리  수건에 흰 비단옷을 입고,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관 속에 누워 있었다. 그 주위엔 그녀의 집안 사람들이 서 있었다. 남
자 하인들은 검정색 카프탄을 입고, 어깨에는 문장이 붙은 리본을 달고, 손
에는 촛불을 들고  있었다. 아들, 손자, 증손 등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아무도 우는 사람은  없었다. 눈물을 흘렸다 해도 그것은 가식이었을  것
이다. 백작  부인은 너무나 고령이었으므로  그녀의 죽음에 아무도  놀라지 
않았으며, 친척들은 오래 전부터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
던 것이다. 젊은 주교가 조사를 읽었다. 그는  평이하면서도 감동적인 말로, 
오랜 세월 크리스천으로서의 죽음을 조용하고 착한 마음으로 염원해 온 경
건한 고인의 평화로운 죽음을  애기했다. "죽음의 천사는," 하고 주교는 말
했다. "끊임없이 경건한 명상에 잠겼고, 또 한밤의 신랑을 고대하던 그분을 
찾아 내셨습니다."
  예식은 구슬픈 예로 끝을 맺었다. 우선 제일 먼저  육친들이 유해에 고별
했다. 그 다음에 오랫동안 그들의 헛된 유락에 참석해  온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수많은 손님들이 앞으로 나갔다. 그뒤에는 하인들이  모두 
따랐다. 끝으로 고인과 같은 연배의 늙은 하녀가 다가섰다. 젊은 하녀 둘이 
부축해서 데리고 온 것이다. 그녀는 땅에 무릎을 꿇을 기운도 없어, 차가운 
자기 주인의 손에 입을 맞추며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린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다음에 게르만은 관에 가까이 가려고 결심했다. 그는  땅에 엎드려 얼마 
동안 전나무 가지를  흐트러뜨린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몸을 던지고 있었
다. 이윽고 일어나더니, 죽은  사람처러 새파랗게 질려 관대의 층계를 올라
가서 몸을 구부렸다...
  그 순간 죽은 사람이 한쪽 눈을 깜빡이고 비웃는 듯이 그를 쳐다본 것같
이 느껴졌다. 게르만이 황급히  뒷걸음질치는 순간, 발을 헛디뎌 뒤로 반듯
이 넘어졌다. 사람들이 곧  그를 일으켰다. 바로 그대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도 정신을 잃고, 교회의 현관으로  들려 나갔다. 이 뜻밖의 사건 때문에 잠
시 암담한 의식의 장엄함은 흐트러졌다.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  사 이에 뭔
지 알아듣기 힘든  웅성거림이 일어났고, 고인의 근친인 야윈 시종은  옆에 
서 있는 영국인에게  그 청년 사관은 고인의 사생아라고 귀엣말로  알렸다. 
그 말을 들은 영국인은 냉담하게 "오?" 라고 말했다.
  그날 종일  게르만은 마음이 매우  어수선했다. 쓸쓸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그는 자신의 습관을 깨고,  많은 술을 마셨다. 마음 속의 흥분을 진
정시킬까 해서였다. 그러나 술은  그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시켰다. 집에 돌
아오자 그는 옷을 갈아 입지도 않고 침대에 몸울 던지고는 그대로 잠에 떨
어져 버렸다.
  그가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창으로 달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
었다. 시계를  보니 3시 15분 전이었다.  졸음은 싹 가셨다. 그는  침대위에 
앉은 채 백작 부인의 장례식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 한길에서  창문으로 엿보는 자가 있었는데 곧 물러갔다.  게
르만은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1분쯤 지나서, 이번에는  현관 방의 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게르만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하인이 밤놀이를 하고 돌아왔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들리는 발소리는  귀에 익지 않은 것이었다. 누군지 조용히  실내화
를 끌며 걷고  있는 소리였다. 문이 열렸다. 흰옷 차림의  부인이 들어왔다. 
게르만은 자기의 늙은 유모인  줄 알고, 이런 시각에 무슨 일로  왔을까 이
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새하얀 여인은  미끄러지듯 다가와서 불쑥  그의 
앞에 나타났다... 쳐다보니, 틀림없는 백작 부인이었다!
  "본의 아니게 오게 됐다" 하고 그녀는 똑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청
을 들어 주라는  말씀이 있으셔서 말이야. 삼,  칠, 일을 그 순서대로  하면 
이긴다. 단 일 주야에 한 장  이상 걸지 말고, 또 이긴 다음에는 평생 걸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말이다. 그리고 우리 양딸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와 결혼
해 준다면, 나를 죽인 죄는 용서하겠다..."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조용히 돌아서더니  문께로 나가, 다시  실내화를 
끌면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게르만은 현관 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들었고, 
누군가 또 창문으로 엿보는 것을 보았다.
  게르만은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옆방으로 나가 보았다. 
그의 하인은 마룻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게르만은 억지로 그를 깨웠다. 하
인은 여느때와 미찬가지로  술에 취해 있어, 그에게서는 아무 얘기도  들을 
수가 없었다. 현관 문은 잠겨져 있었다. 게르만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 촛불
을 켜고 자신의 환영을 적어 놓았다.
  6
  '스톱!'
  '어떻게 자네가 감히 스톱을 거는가?'
  '각하, 저는 스톱 하시옵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자연계에 있어 두  개의 물체가 동시에 동일 장소를  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계에 있어서도 두 개의 고정 관념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이
다. 곧 삼, 칠,  일이 게르만의 마음 속에서 죽은 노파의 모습을  덮어 버렸
다. 삼, 칠, 일은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쉴새없이 그의 입술에 떠올
랐다. 젊은 처녀를 보면, "아가씨, 참  날씬하군...! 진짜 하트의 삼이야"하고 
그는 말했다. "지금 몇 시입니까?" 하고 물으면, 그는 "이제 5분 있으면  칠
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배가 나온 남자만  보면 그는 일을  상기했다. 삼, 
칠, 일은 꿈  속에서까지 온갖 형태를 취하며  그를 쫓아다녔다. 삼은 그의 
눈앞에 화려한 꽃의 모습으로 피었고, 칠은 고딕식 문으로, 일은 거대한 거
미로 나타났다. 그의 모든 사상은  한 점에 집중되었다. -그토록 비싼 값을 
치른 비력을 이용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퇴직과  여행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의  공개 도박장에 가서, 황홀한 운명의 여신에
게서 재보를 빼앗자고 생각했다. 우연힌 기회가 그의 시름을 덜어 주었다.
  모스크바에 유명한 체칼린스키를 좌장으로 하는 노름꾼들의 클럽이 있었
다. 그는 평생을  카드 노름으로 보냈고, 이기면 어음으로 받고,  지면 현금
으로 갚는다는  방식으로 일찍이 수백만의  재산을 모은 사나이였다.  오랜 
세월의 경험은  친구들의 신뢰를 받기에  충분했으며, 모든 손님들에  대한 
환대며, 솜씨있는 요리사, 그리고  애교있는 명랑한 태도 등이 세상 사람들
의 존경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가 지금 페테르스부르크에 왔다. 청년들은 
카드 때문에 무도회를  잊었고, 파라온의 유혹 때문에 여자를 유혹하는  즐
거움을 잊고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나루모프도 게르만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예의바른 하인들이 가득한 호화로운 방을 여러 개  지났다. 몇 명
의 장군과 추밀원  고문관들이 휘스트 게임을 하고 있었디. 젊은이들은  비
단을 붙인 소파에 기대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하고 파이프를 피우기도 
하고 있었다. 홀에는 길다란 탁자 주위에 스무 명쯤  되는 노름꾼들이 혼잡
을 이루었고, 주인은 앉아서 물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예순 살쯤 되
어 보였으며,  보기에 매우 겸손하고,  머리는 은발로 덮여 있었다.  살찌고 
생기있는 얼굴은 선량해 보였으며 눈은 끊임없이 미소를 띠고 활기있게 빛
났다. 나루모프는 그에게 게르만을 소개했다. 체칼린스키는 그와 정답게 악
수하고, 너무 격식을 차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는, 다시 물주 노릇을 계
속했디.
  패를 나누는데 꽤 오래  걸렸다. 탁자 위에는 삼십 장 이상이나  되는 카
드가 놓여 있었다.  체칼린스키는 패를 한 장  던질 때마다, 승부를 겨루는 
사람들에게 패를 갖출 여유를 주기  위해서 그들이 잃은 액수를 적기도 하
고, 정중히 그들의 요구를 듣기도  하며, 또 더욱 정중하게 무심히 누가 꺾
어 놓은 카드의 귀를 펴기도  했다. 마침내 그 한 판도 끝났다. 체칼린스키
는 카드를 섞어서 다음 판에 나눠 줄 준비를 했다.
  "나에게도 나눠 주세요."  게르만은 거기서 돈을 걸고 있는  뚱뚱한 신사 
뒤에서 손을 뻗으면서 말했다.
  체칼린스키는 미소를 짓고, 쾌히 승낙하는 표시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
다. 나루모프도  웃으면서 게르만이 오랫동안의  절제를 푼 것을  축하하고 
시작부터 재수있기를 빌었다.
  "자, 갔다!" 분필로 자기 패 위에 큰 액수를 적은 게르만이 말했다.
  "얼마이신지요?" 물주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다. "미안합니다. 잘  보
이지 않아서요."
  "사만칠천." 게르만이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모두들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모든  시선은 게르만에게 집
중되었다.
  '저놈이 미쳤군!' 하고 나루모프는 생각했다.
  "좀 말씀드려  두겠습니다만," 체칼린스키는 여전히 미소를  띠면서 말했
다. "댁의 내기는 좀 지나치군요.  여기서는 아직 한 번에 2백 75루블 이상
을 건 분은 없는데요."
  "뭐 어떻습니까?" 하고 게르만은 대꾸했다. "제 패와 겨루겠습니까,  그만 
두시겠습니까?"
  체칼린스키는, 역시 승낙한다는 표시로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 마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고 그는 말했다. "친구들의  신
용은 충분히 얻고  있습니다만 현금이 아니면 물주  노릇을 하기 어려워서
요. 물론 나로서는 말씀만으로도 좋습니다만, 아무래도 노름이나 셈하는 질
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패에 현금을 대시기를 부탁합니다."
  게르만은 주머니에서 은행 어음을 한 장 꺼내에 체칼린스키에게 넘겨 주
었다. 상대방은 대충 살펴보고 나서, 그것을 게르만의 패 위에 얹었다.
  마침내 패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른쪽에는 구, 왼쪽에는 삼이 나왔다.
  "됐다!" 하고 게르만은 자기 패를 보이면서 말했다.
  노름꾼들 사이에서 쑥덕 공론이 일어났다. 체칼린스키는 잠시  인상을 찌
푸렸으나, 곧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돌아왔다.
  "받으시겠습니까?" 그는 게르만에게 물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체칼린스키는 주머니에서 몇  장의 은행 어음을 꺼내어 곧 셈을  끝냈다. 
게르만은 돈을 받고  탁자에서 물러섰다. 나루모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
었다. 게르만은 레몬수를 한 잔 마리소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저녁, 그는 다시 체칼린스키한테로 갔다. 역시 주인이 물주 노릇
을 하고 있었다. 게르만은  탁자에 접근했다. 노름꾼들은 곧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체칼린스키도 정답게 인사했다.
  게르만은 다음 판을 기다려 패를 놓고 그 위에 사만칠천 루블과 어제 딴 
돈을 얹었다.
  체칼린스키가 패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른쪽에 잭, 왼쪽에 톤이 나왔다.
  게르만은 칠을 던졌다.
  모두들 감탄했다. 체칼린스키도 분명히 당황한 빛을 보였다. 그는 구만사
천을 세어 게르만에게  넘겨 주었다. 게르만은 태연하게 그것을 받아  가지
고 곧 물러섰다.
  다음 날 저녁, 게르만은 다시  노름 탁자 옆에 나타났다. 모두들 그를 기
다리고 있었다. 장군들과 추밀원  고문관들까지도, 이 보기 드문 노름을 구
경하려고 휘스트 노름을 그만두었다. 
청년 사관들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고, 하인들까지도 모두  홀에 모여들었
다. 일동은 게르만을 둘러쌌다. 다른 노름꾼들도 자기 패는 놓지 않고 어떻
게 될 것인지  안절부절 못했다. 얼굴이 창백해졌으면서도 역시 미소를  띠
고 있는 체칼린스키와 혼자 내기할 태세로 게르만은 탁자  옆에 서 있었다. 
서로 카드  묶음의 봉인을 뜯었다. 체칼린스키가  카드를 섞었다. 게르만이 
그것을 끊고, 자기 패를 놓은 다음, 그것을 은행  어음 묶음으로 덮었다. 그
것은 결투와도 같았다. 숨막힐 듯한 침묵이 주위를 짓눌렀다.
  체칼린스키가 패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떨렸다. 오른쪽에는 여
왕, 왼쪽에는 일이 나왔다.
  "일이 이겼다!" 게르만이 자기 패를 쳤다.
  "댁의 여왕은 죽었어요." 체칼린스키가 말했다.
  게르만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실, 그가 던진 것은 일이 아니라 스페이
드 여왕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 패를 잘못 뽑았는지 알 수 없었고, 또 자
기 눈을 믿을 수도 없었다.
  그 순간, 스페이드 여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싱긋 웃는 것같이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닮은 그 모습에 그는 깜짝 놀랐다.
  "그 할멈이다!" 그는 공포에 싸여 소리질렀다.
  체칼린스키는 딴 어음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게르만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가 탁자에서 물러서자 소란한 웅성거림이 들끓었다. 
  "멋있는 내기였어!" 노름꾼들은  저마다 말했다. 체칼린스키는 다시 카드
를 섞었고, 노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맺음
  게르만은 미쳤다.  지금은 오브호프 병원 17호실에서  무슨 말을 물어도, 
굉장히 빠른 말로 그저,  "삼, 칠, 일! 삼, 칠, 스페이드 여왕!"  하고 중얼거
릴 뿐이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아주 선량한 청년과 결혼했다. 그는  어느 관청에 
근무하고 있어 상당한 재산도  갖고 있으나, 실은 전에 늙은 백작  부인 밑
에서 집사 노릇을 하던 사람의 아들이었다. 리자베타는 가난한  집 딸을 데
려다가 양육하고 있다.
  톰스키는 대위로 승진하고 공작 영양 폴린을 아내로 맞았다.

    작품해설 - 죄의식이 만든 환상
  이 [스페이드  여왕]은 특별히 환상적인 작품이라기보다는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에 걸치는 시대의 정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각  장마다 앞머리에 
서시나 서언을 배치한 게 그러하고, 사건의 도입 전개  발전 결말의 순서가 
정연한데다 친정하게 후일담까지 곁들인 게 또한 그러하다.  낭만주의적 요
소는 주로 게르만의 어둡고 비뚤어진 열정의 묘사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환상과 기상]편에 넣은 까닭은  주인공이 마지막 순
간에 본 환상의  강렬한 인상 때문이다. '그 순간, 스페이드의  여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싱긋  웃는 것같이 느껴졌다.' -오래 전 그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온몸에 소름이 쭉 끼치는 듯한 괴기스러움과 공포를 느꼈다.
  주인공이 백작 부인의 장례식 다음 날 새벽에 보고 들은 것은 아마도 그
의 아직 채워지지 못한 열망과  괴로운 죄의식이 어울료 빚어낸 환영과 환
청이었을 것이다. 그가  미치기 직전에 본 스페이드 여왕의 섬뜩한  눈웃음
도 심리학은 마침내 절망과 공포로 변한 죄의식이 이끌어낸 착시쯤으로 설
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환상적이고  신비한 내용을 다룬 
것으로 내 젊은 기억에 깊이 새겨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읽는 지금  세찬 감동은 옛 그대로 되살릴 수 없
어도 이 작품이 그렇게 인상지워진 원인은 대강 짐작이  간다. 그것은 무엇
보다도 주인공의 꿈과 착시가 불가사의한 백작 부인의 전설과 강하게 연결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가 무명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불우한 
문청(문학청년)이 주인공의 어둡고  비쭐어진 열정에 느끼는 동정과 그  비
극적 결말에 보내는 연민이 감동을  배가해 이 작품을 더욱 환상적이고 신
비한 것으로 기억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작가 푸쉬킨은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라는 명칭 못지 않게 천재적인 
소년시절로도 유명하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수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던 그는 열두 살 때 이미 몰리에르를 본딴 프랑스어본을 써서 
주위를 경탄케 했으며  열여섯 살 때 시 [짜르스코예 셀로의  추억]을 발표
하여 당시 최고의  시인이던 제르자빈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또 스무  살 
때는 장편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 러시아에 로맨티시즘이란 말
이 일반화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낭만적 기질과  자유
주의 사상은 관이 그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탄압하도록하는 요인이 되었으
며 죽을 때까지  계속된 비극의 진원지였다. 줄기차게 쓰고 읽으며  작가의 
자유로운 성장을 방해하는 사회와  맞서던 푸쉬킨은 서른여덟 살에 갑자기 
죽었다. 그를 시기하는  세력의 음모에 말려들어 시작된 결투가 한  탁월한 
재능을 한창 나이에 꺾어버린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시인으로서보다 [대위
의 딸]이라는 장편의 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립 밴 윙클  -워싱톤 어빙 지음-
  디드리히 니커보커의 유고
  색슨사람들의 신 위덴,
  수요일과 인연이 있는 워덴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리,
  진리는 지켜야 하느니 
  나의 이 몸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그날까지...
  -카아트라이트
  배를 타고 허드슨 강을 따라  올라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캐츠킬 산맥
을 기억할 것이다. 그 산맥은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강
의 서편 저 먼 곳으로 눈을 돌리면 당당한 높이의 산들이 위용을 자랑하면
서 주변 지역을 압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계절의 변화나 날
씨의 변화에 따라, 심지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시간에  따라 캐츠킬 산맥의 
불가사의한 색조와 형상은  변하기 때문에, 근처에 살건 또는 멀리  떨어져 
살건 모든 유덕한  아낙네들은 이 산맥을 완벽한 청우계로 생각한다.  날씨
가 맑고 안정되어 있을 때에는 산들이 푸른빛과 자주빛을  띠고, 그 뚜렷한 
윤곽을 맑은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그  주변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에도 회색빛의 운무가 때때로 산봉우리를 뒤덮을 
때가 있는데, 저물어 가는 해의 마지막 빛을 받아  영광스러운 왕관처럼 찬
란하게 빛나기도 한다.
  이 요정과도 같은 캐츠킬 산맥의  기슭 어딘가에 있는 마을에서 옅은 빛
깔의 연기가 굽이치며  오르는 것을 항해자라면 아마도  목격한 적이 있을 
것이다. 널빤지 지붕들이  수목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이 마을을 경계로  하
여 고원 지대의 푸른빛이 마을  아래쪽에 펼쳐진 싱싱한 녹색의 근경과 자
연스럽게 뒤섞이고 있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아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 조그만한 마을은 네덜란드계 이주민들이 식민지 초기 시대에 세운 것이
다. 말하자면,  저 훌륭한 지도자이셨던 피터  스타이비샌트 총독이 세상을 
다스리기 시자할 무렵에 들어선 것이 바로  이 마을인 것이다.(이제 그분도 
세상을 떠났으니, 저 세상에서 편히 쉬시기를 바랄 따름이다). 마을이 들어
서고 몇 년안에 초창기 이주민들의 집이 몇 채  세워지게 되었는데, 격자형 
창문들이 달려 있고 전면에 박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꼭대기에 닭 모양의 
풍향계도 설치한 이들 집은 네덜란드에서 수송해 온 노란색의 자그마한 벽
돌로 지은 것들이었다.
  이 마을에, 그것도  위에서 말한 집들 가운데  하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형편없이 퇴락하고 풍상에 시달린 어느 한 집-에 오랜 옛날부터,  그러니까 
이 나라가 아직 대영 제국의  영토였던 시절부터 립 밴 윙클이라는 이름의 
소박하고도 마음씨 좋은 사나이가 살고 있었다. 그의 조상인  밴 윙클 가문
의 사람들은 피터 스타이비샌트  총독이 다스리던 기사들의 시절에 무예로 
명성을 날렸으며, 그리하여 총독을 따라 크리스티나 요새를  공략하는 전쟁
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조상들이 지녔던 무인의  기질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는 소박하고  마음
씨 좋은 사나이였다. 게다가 그는 이웃에게 친절하였고  아내에게 순종하는 
공처가형 남편이었다. 사실  공처가형 남편이었던 덕택에 성격이  온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온순했기 때문에 그는 또한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
었다. 집에서  바가지를 긁는 아내에게  길들여진 사나이들은 대체로  밖에 
나가면 온순하고 타협적인 사람들이 되기 마련이다. 의심할 바 없이, 집 안
에서 겪는 갖은 종류의 환난이  끓어오르는 용광로와 같은 역할을 하여 그
런 사나이들의 기질을 나긋나긋하고 다루기 쉬운 것으로 바꿔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집 안에서 아내에게 듣는 한 번의 훈계가  이 세상의 모든 설교와 
맞먹는 가치를 지닐 때가 있으니, 참을성을 기르고 오랜  환난을 참는 미덕
을 가르치고자  할 때 그러하다. 따라서  입심 사나운 아내란 어느  면에서 
보면 상당히 괜찮은 축복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며, 그렇다면  립 밴 윙클은 
축복을 삼중으로 받은 사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는 마을의 모든 유덕한 아낙네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좋은 사나
이였다. 마을의 아낙네들은  여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온갖 시시한 남의  집
안 다툼에 끼여들고, 저녁  때 모여 잡담을 하다가 밴 윙클  집안의 다툼이 
화제에 오르면 언제나  모든 잘못을 밴 윙클의 아내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마을의 어린애들도  또한 그가 다가오면  환성을 올리면서 맞이하곤  했다. 
그는 아이들의 놀이에 친구가  되기도 하고, 장난감을 만들어 주기도 하며, 
연 날리는 방법과 구슬 던지기 놀이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귀신이나 마녀, 인디언들에 관한  긴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래서 그가 이리
저리 몸을 피하여 마을을 돌아다닐  때면 아이들의 떼를 지어 몰려와 그를 
둘러싼 채 옷에  매달리기도 하고 등 위를 기어오르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그에게 수천 가지  장난을 치기도 하였는데, 그래도 그는 아이들을  나무라
는 법이 없었다. 마을 어디에서도, 심지어 개조차 그를 보고 짖어대려 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립의 성품 가운데  가장 큰 결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득이 생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견딜 수  없을 만큼 혐오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부
지런함이나 인내심이 부족해서 그런 결함을  갖게 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
었다. 그가 축축한  바위 위에 앉아 타타르족 무사들이 사용하는  창만큼이
나 길고 묵직한 낚싯대를 갖고 낚시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점이 확
인된다. 비록 고기가 입질  한 번 하는 것으로 크게 고무받는  것은 아니었
지만 한 마디 군소리  없이 하루종일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그에게 
인내심이나 부지런함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다람쥐나 산비둘기  몇 
마리를 잡기 위해 엽총을 어깨에 메고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 숲 속과 늪
지를 돌아다니거나 언덕과 계곡을 오르내리는 것을 보아도,  그가 부지런하
지 않다거나 인내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힘이 드
는 일이라고 해도  이웃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으며, 
옥수수의 껍질을  벗긴다든지 돌담을 쌓는다든지  마을 사람들이 다모여서 
하는 일에는 언제나  앞장을 섰다. 마을의 아낙네들도 그에게 곧잘  심부름
을 시키기도 하였으며, 집안 일에 덜 신경을 쓰는  남편들이 잘해주려 하지 
않는 사사로운 잡일들도 그에게 시키곤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립은 자기 
일만 빼놓고는 누구의 일도 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
기 집안 일을 하거나 자기  농장을 돌보는 일이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사실 그는 자기 농장에서 일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선언한 바 있
었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처럼 성가시게 느껴질 만큼 조그만  땅덩
어리는 없다고 말하면서,  무엇을 해도 잘되지 않고 아무리 자신이  노력해 
보아도 잘될 것이  없다고 단언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울타리는  계속해서 
허물어지고 있었고, 그가 키우는암소는 멋대로 길을 잃거나  채소밭에 들어
가 짓밟곤 하였다. 다른  어떤 곳보다 그의 밭에는 틀림없이 잡초가  더 무
성하게 자랐으며, 그가 밖에  나가 일을 좀 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비가 내
리곤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는 그가  관리흘 
하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차츰 줄어들어  결국 얼마 안되는 옥수수 밭과 감
자 밭밖에 남은 것이라고는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것마저 그 근
처에서 가장 손길이 덜 간 밭이었던 것이다.
  그의 아이들 역시  초라하고 몰골이 사나워서, 마치 부모가 없는  아이들
처럼 보였다. 그의 아들 립은 아버지를 꼭 닮았는데, 언젠가는 자기 아버지
의 헌옷과 함께 아버지의 습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을 것같이  보였다. 이 아
이는 아버지가 입다 벗어 던진 헐렁한 바지를 입고 망아지처럼 늘 제 어머
니의 꽁무니만 따라다녔는데,  한 손으로 법석을 떨며 바지통을 잡아  올리
는 모습이 꼭 비오는 날 귀부인이 치맛자락을 잡아 올리는 것이나 다를 것
이 없었다.
  그러나 립 밴 윙클은 태평스러운 인간일 뿐 아니라 우유부단하고 나른한 
성품의 인간인지라 세상을  쉽게 살았다. 머리를 쓰거나 몸을 움직이지  않
고서 생기는  것이라면 흰 빵이든 검은  빵이든 가리지 않고 먹었으며,  한 
파운드의 돈을 벌기 위해 일하기보다는 차라리 동전 한 푼을 놓고 굶어 죽
는 쪽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면 그는  휘파람이나 불면
서 아주 만족하게  세상을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게으르다
는 둥 조심성이 없다는 둥 이러다간 집안이 완전히 망할 거라는 둥 끊임없
이 그의  귀에 불평을 쏟아  부었다. 아침이고, 한낮이고, 저녁이고  가리지 
않고 그녀의 혀는 끊임없이 계속 움직였고, 그가 말하거나  하는 일은 모두 
폭포와도 같이 쏟아지는 아내의 웅변을 감당해야만 했다.  립에게는 아내가 
퍼붓는 온갓 종류의 훈계에 응답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도 쓰다 
보니 버릇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어깨를  으쓱 올리고 머리를  가로저으며 
눈을 하늘로 향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버릇이었다. 그러나  이런 반응
은 항상 아내의 성을 돋구어 새로운 공격을 불러  일으키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철수시켜 집  밖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코 집 밖이야말로 공처가인 남편이 지낼 만한 곳이었다.
  집 안에서 립을 따르는 오직 하나의 친구는 그의  개 울프뿐이었는데, 이 
개 역시 안주인 앞에서는 립만큼이나 꼼짝 못했다. 밴  윙클 부인은 게으른 
면에서 이들은 한 통속이라고 여겼고, 주인 양반이 그렇게  자주 옆길로 새
는 원인은 바로 울프 때문이라는 듯이 매서운 눈으로 이 개를 쏘아보곤 하
였다. 사실 울프는  자랑스러운 개라면 지녀야 할 기백을 모자람없이  지니
고 있는 개로서, 숲  속을 헤메고 다닌 그 어떤 동물과  비교하더라도 떨어
지지 않을만큼 용맹스러웠다.  그러나 아무리 용맹스러운들 쉴새없이  계속
되면서 모든 것을  뒤집어 엎는 여인네의 독설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집에 들어오는 순간 울프는 기가  죽어 꼬리를 땅에 축 늘어뜨리거나 다리 
사이로 말아 넣고서는 도살장에라도  들어선 듯 곁눈으로 안주인의 눈치르
러 살피면서 슬금슬금 기어들곤 하였다. 그러다가 안주인이  빗자루나 국자
라도 조금 휘두르기만 하면 황급히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듯이 문 
쪽으로 급히 도망치곤 하였다.
  결혼 생활은 세월을 따라 계속되었지만 립 밴 윙클에게 세상살이는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갔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쏘는 듯한 성품은  부드러워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끊임없이 사용하는 가운데 더욱더  모서리가 날카로
운 연장이 된 것은  오로지 부인의 예리한 혀뿐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립
은 집에서 쫓겨나면 마을의 현자들과 찰학자들, 그밖에  한가로운 사람들이 
늘 모여 있는 모임의  자리에 나가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 이  모임은 죠지 
3세 폐하의 홍조를  띤 초상화가 전면에 걸려  있는 조그마한 여인숙 앞의 
벤치에서 이루어지곤 하였다. 해가 길고 나른한 여름날 내내  나무 그늘 아
래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그들은  두서없이 마을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이
야기하기도 하고 지루하고 무의미한  이야기를 끝도 없이 계속하기도 하였
다. 그러나 어쩌다  그곳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헌 신문이라도 그들의  손에 
쥐어 주게 되면,  그야말로 어떤 정치가라도 비용을 지불하고 들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심오한  토론이 때때로 벌어지곤 하였다. 교장 선생님이신  데
릭 밴 봄멜씨가 느릿느릿 점잖은 말투로 신문의 내용을 읽어 주었을 때 사
람들은 얼마나 엄숙하게  귀를 기울였는지 모른다. 밴 봄멜씨는 깔끔한  차
림에 학식이 깊은 키가 작은 분으로, 사전에 나오는  아무리 엄청난 단어로
도 그의 기를 죽일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들이 몇  달 동안 사회적 이슈를 
놓고 현자들답게 얼마나 진지한 논의를 했는지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비밀스러운 모임의 의견을 좌우하는 사람은 니콜라스  베더였는데, 그
는 이 마을의  원로이자 여인숙의 주인이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
무의 그늘이 위치를 바꾸게 되면 햇볕을 피해 그 그늘 바깥으로 나가지 않
기 위해서만 몸을  움직일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이웃 사람들은 마치  해시
계를 보는 것처럼 그가 어느  자리에 있는가를 보고 정확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사실 그는  별로 말을 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파이프 담배만을 
피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 -위대한 사람에겐 모두 추종자가  있
는 법이 아닌가-은  그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견을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가도 잘 알고 있었다. 읽거나  말한 내용이 그
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사람들은 그가 격렬하게  담배를 피우면서 화난 
듯이 짧게 자주 연기를 뿜어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 때면,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담배 연기를 들여  마셨다가 엷고 잔잔한 
구름 모양의 연기를 내뿜는 것이었다. 때때로 파이프를 입에서  뗀 채 향기
로운 연기가 그의 코 주변을 감돌게 하도록 내버려 둔 채 완전히 동의한다
는 표시로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하였다.
  불행한 립은 결국에 가서 입심  사나운 아내의 공격을 받아 이 피난처에
서도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느닷없이 이  조용한 집회에 뛰어들
어 모인 사람들 모두를  묵사발이 되도록 욕을 해 댔던 것이다.  근엄한 원
로이신 니콜라스  베더조차도 이 무시무시한  여장부의 대담무쌍한 독설을 
면할 수가 없었는데, 그녀는 이 노인에게 자기 남편을  부추겨 습관적인 게
으름에 빠뜨리는 장본인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비난을 해댔다.
  가엾은 립은 마침내 절망에 가까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농장 일
과 아내의 아우성으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대안은 손에 총을 들고 숲 속
으로 들어가  거니는 것이었다. 숲 속에  들어가서 그는 때때로 나무  밑에 
앉아 전대에 담아 온  것을 울프와 나누어 먹곤 하였다. 립은  자신과 마찬
가지로 학대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이 울프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불쌍한 울프야, 너의 안주인이 너를 비참한 생활을 하도록 만드는
구나. 그러나, 얘야,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살아있는 동안 곁에 있어줄 친
구를 아쉬워하지 않게 될 것이니!"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생각에 잠긴 
듯 주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울프는 꼬리를 흔들곤 하였다. 만일  개들에
게도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틀림없이 울프는 마음을 다하여 자신
의 감정을 전했을 것이다.
  쾌청한 어느 가을날,  산책이라고 할 만한 걸음걸이로 오랫동안 숲  속을 
돌아다니다, 립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캐츠킬 산맥에서 가장 높은  지역
을 향해 기어오르게 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다람쥐 사냥을 하고 있었으며, 
총을 쏘면 그 소리로 고요한 정적이 깨지면서 연이어  메아리가 쳤다. 늦은 
오후, 립은 숨이 차고 지친 채 절벽 꼭대기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푸른 둔
덕, 산풀로 뒤덮인 푸른 둔덕에  몸을 던졌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열린 틈
으로 그느 몇 마일에 걸쳐 펼쳐져  있는 그 모든 울창한 삼림 지대를 내려
다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아래쪽에는 위풍당당한 허드슨 강이  소리도 없
이, 그러나 장엄하게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강물 위에는 자줏빛 구름의 
그림자와 느리게 흘러가는  작은 배의 돛폭이 여기저기에 펼쳐져 있어,  마
치 거울 같은 수면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듯했다. 마침내  강은 푸른빛
이 감도는 고원 지대 사이로 자취를 감추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반대편으로는 황량하고 쓸쓸하며 초목이  무성한 깊은 협곡이 내려다 보
였으며, 그 밑바닥은  인접해 있는 가파른 절벽에서 떨어진 바위  조각들로 
가득 차 있는 것도  보였다. 계곡의 바닥은 저물어 가는 햇살의  반사 광선
이 거의 닿지 않아  어둑어둑하였다. 얼마 동안 립은 누워서 이  광경을 가
만히 바라 보았다. 저녁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고, 산들은 계곡 위로 길고 
푸른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곧 날이  어두
워질 것이다. 밴 윙클 부인이 휘두르는 공포와 조우할  생각을 하니 무거운 
한숨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립 밴 윙클!  립 밴 윙클!" 그가 막 내려가려고  할 때 멀리서 누군가가 
큰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눈에  띄는 것이라고
는 산을 가로질러 혼자 날아가는 까마귀 한 마리뿐이었다.  착각을 하여 잘
못 들었던 것이려니  생각하고는 다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 다시 한 번 그를 부르는  소리가 조용한 저녁 하늘을 가르고 울려 퍼지
는 것이었다. "립 밴  윙클! 립 밴 윙클!" 그러자 울프가 잔등의 털을  곤두
세우고 나지막한 소리로 으르렁거리면서  주인 곁으로 몸을 숨기고는 협곡 
아래쪽을 두려운 듯이 내려다 보았다. 립도 이제 슬며시  자기 몸을 파고드
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울프가  바라보는 쪽을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더니, 괴상한 모습을 한 사람이 바위를  천천히 기어오르
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무언가 무거운 것을  등에 지고 있어서 허
리가 굽어  있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이 한적한 곳에서 인간을  만나게 
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도움을 필요호  하는 
이웃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 서둘러 내려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을 때  립은 더욱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낯
선 사람의 행색이 너무도  괴상했던 것이다. 그는 키가 작고 어깨가  떡 벌
어진 늙은이였는데, 숱이 많은  무성한 머리와 백박의 수염이 눈에 띄었다. 
옷차림은 옛날 네덜란드  사람들이 입던 방식으로, 허리를 가죽 끈으로  동
여맨 채 천으로 된  조끼와 여러 벌의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반바지 가운
데 겉에  입고 있는 것은 폼이  넓은 것이었으며, 양쪽으로 단추가  줄지어 
달렸고 무릎  근처에는 돌기 같은 것들이  달려 있었다. 어깨 위에  튼튼한 
나무통을 메고 있었는데 그 속엔 술이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가
까이 와서 짐 나르는  것을 좀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처음  만나는 사
람이라서 다소 내키지 않고 믿음이  가지는 않았으나 립은 늘 하는 식으로 
그의 요청에 선선히 응했다. 서로 힘을 보태가면서 그들은  전에 급류가 흐
르던 자리인 것이 분명한 좁은 골짜기를 따라 기어올라갔다.  산을 타고 올
라가는 도중 립은  가끔씩 먼 곳에서 울리는 천둥  소리와도 같은 긴 울림 
소리를 들었는데, 그 소리는 높이 솟은 바위 틈 사이에 있는 깊은 계곡, 계
곡이라기보다는 틈이라고 해야 할 곳에서 나와 그들이 타고 올라가는 울퉁
불퉁한 길 쪽으로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으
나, 고지대의 산악에서 가끔 만날 수 있는 천둥을  동반하는 일시적인 소나
기 때문에 들리는  소리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걸음을 계속했다.  계곡
을 지나 마치 조그마한 원형 극자과 같은 분지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그곳
은 깎아지른 듯한  수직의 절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절벽의 가장자리에  매
달려 있는 나무들의 가지가 튀어나와  있어서 짙푸른 하늘과 밝은 저녁 구
름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립과 그의  동행자는 
말없이 짐을 날랐다.  무슨 목적으로 술통을 이처럼 깊은 산중으로  운반하
는지 대단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 미지의  사람 주변에는 무
언가 불가사의하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어서 두려움에 
휩싸인 채 감히 근접할 수가 없었다.
  원형 극장에  들어서니 더욱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운데 
평평한 곳에서 묘하게 생간 사람들이 모여 구주회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들은 기묘한 이국풍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옛날에  유행하
던 허리가 잘록한 재킷을  입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조끼를  입고 있었
다. 그들은 하나같이 허리띠에  기다란 칼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립이 따라온 노인과 비슷한 모양의 엄청나게 헐거운 반바지를 입
고 있었다. 그들의 생김새도 또한 괴상했다. 어떤 사람은 턱수염이 길고 얼
굴이 넓적했으며, 눈은 돼지 눈같이  아주 작았다. 또 어떤 사람은 코가 너
무 커서  얼굴에 코만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는 자그마하고 붉은  수탉 
꼬리 깃털로 장식한 원추형의 하연 모자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그들 모두
는 턱수염을 길렀는데 그것도 형태와 색깔이 가지각색이었다.  그들 가운데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땅딸막한 노신사로  갖은 풍파를 
견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옛날에 유행하던 허리가  잘록한 
재킷을 입었는데, 그 재킷에는 레이스 장식이 달려 있었다. 또한 폭이 넓은 
허리띠에 칼을 차고 깃털로 장식한  높다란 모자를 썼으며 붉은 양말과 장
미꽃 장식이 달린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보니 립은 
옛날 플란더즈 지방의 화가가 그린 그림이 떠올랐다. 그  그림은 마을 목사
이신 도미니 밴 샤익씨의  집 응접실에 걸려 있던 것으로, 이주  초기 시절
에 네덜란드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들 했다. 산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  바로 
그 그림에 그려져 있던 인물들을 연상시킨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즐겁게  놀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얼굴 표정을 한  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신비로운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처럼  침울한 표정으로 
모임을 즐기는 사람들을 립은 결코 본 적이 없었다.  구주회 공소리 이외에 
그곳의 정적을 깨뜨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이 굴러갈 때마다  으르
렁거리는 천둥 소리처럼 큰소리가 나서 산이 따라 울렸던 것이다. 
  립과 그의 동행자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은 갑자기 유희를 멈추고 목석
처럼 고정된  시선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몹시 낯설고  괴상하고 
윤기없는 그들의 얼굴 표정과 마주치니, 심장이 쿵쿵 뛰고  두 무릎이 마주
칠 정도로 덜떨  떨렸다. 그와 같이 온  사람이 이윽고 술통에 든 술을  몇 
개의 큰 병에다 옮겨  담고 나서, 립에게 모여 있는 사람들이  술을 들도록 
시중을 들라는 신호를 보냈다. 겁이  난 립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들은 깊
은 침묵 속에서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나서 다시 구주회 놀이로 돌아
갔다.
  립이 느끼던 공포감과  불안감이 점점 가라앉게 되었다. 심지어 그는  아
무도 자기에게 눈을 주지  않을 때 술맛을 볼 정도로 대담해졌다.  맛을 보
니 아주 뛰어난  네덜란드의 술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천성적으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채 계속 술을 마셔댔다. 
한 번 마시니 또 한 번 마시고 싶어졌던 것이다.  결국 너무도 자주 술병을 
찾다보니 마침내 감각이 마비되어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윽고 고개가 
수그러지더니 그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나서 눈을  떠보니 협곡을 타고 올라온  노인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 푸른  둔덕이었으며 햇빛이 빛나는 밝은 아침이었다. 새들은  덤불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지저귀고 독수리가 신선한 산바람을 가슴으로 받으면
서 하늘 높이  떠서 맴돌고 있었다. '틀림없이  밤새도록 여기에서 잠을 잔 
것은 아닐  텐데.' 립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잠들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해 보았다. 술통을  메고 가던 이상한 사람, 산중의 계곡,  바위에 둘러
싸인 자연의 은신처, 구주회 놀이를 하던 음울한 얼굴의 사람들, 술병이 머
리에 떠올랐다. '아, 그렇지,  그 술병 때문이었어! 그 나쁜 놈의 술병  때문
이었어!' 이윽고 립은 밴 윙클 부인을 떠올렸다. '마누라한테 뭐라고 변명을 
한다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총을 찾아 보았으나, 깨끗하게 기름칠  해놓았던 엽
총 대신 자기 옆에 낡은 총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총신은 녹이 슬고 발사
장치는 다 떨어져 나간  상태였으며, 개머리판은 벌레가 먹어 있었다. 이윽
고 그에게는 엄숙한 얼굴로 술을 마시며 산에서 놀던 그 자들이 그에게 속
임수를 쓴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술에 취하도록  만들어 
놓고 총을 훔쳐간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울프의 모습 또
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울프야 다람쥐나 메추라기를 쫓아 산을  헤메고 
있을 수도 있다. 휘파람으로 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이름을  직접 불러 보기
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산울림이 그의 휘파람 소리와 이름을 외쳐 
부르는 소리에 응답을 했지만, 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의 유희 장소에  다시 찾아가서 어제 만난 사람들 가운데  누구라
도 만나게 되면  개와 총을 되돌려 달라고  말해야지.' 그는 이렇게 마음을 
먹고 일어서서 걸으려  하였다. 그러나 뼈마디가 뻣뻣해서 평소 하던  동작
도 하기가 어려웠다. '이 산에서 자는 일이 내 채질에는 맞지 않는구나.' 이
런 생각을 하면서 립은 다시  시름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잘 
놀고 다닌 덕택으로 관절염에라도 걸려 누워지내게 된다면,  꼼짝없이 마누
라와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할  텐데.' 어렵사리 협곡으로 내려가서,  지난 
밤 그와 거기에서 만난 노인이  함께 따라 올라갔던 좁은 골짜기를 찾아냈
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좁은 골짜기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골짜기의 물
은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부딪히며 흐르고 있었고, 웅얼거리는  물소리가 
골짜기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흐르는 물의  가장자리를 따라 힘겹
게 기어올라갔다. 자작나무, 녹나무, 풍년화 나무가 우거져  있는 관목 숲을 
헤치고 나아가다 때로는 야생 포도 덩굴에 발이 걸려  쓰러지기도 했다. 포
도 덩굴은 나무와 나무를 덩굴로 휘감고 있어서 마치 그가 가는 길에 그물
이라도 쳐 놓은 것 같았다.
  마침내 골짜기가 절벽  사이로 열려 원형 극장을  이루던 곳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원형 극장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꿰뚫을 
수 없는 높은 장벽과도 같은  바위들 위에서 급류가 깃털과도 같은 거품을 
내며 콸콸 흘러 내려  넓고 깊은 물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 웅덩이는 
사방을 둘러싼 숲의  그림자에 가리워져 낮에도 컴컴했다. 가엾은 립은  여
기에서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개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휘파람으로 신호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의  외침과 휘파람에 응답을  보낸 
것은 한 떼의 한가한 까마귀들뿐이었다. 햇빛이 잘 드는  절벽에 매달려 있
는 메마른 나무 위쪽의 높은 하늘에서 장난을 치던 까마귀들이 깍깍거리며 
울어댔던 것이다. 이  까마귀들은 하늘 높은 곳에 안전하게 더서  당황해서 
어떨 줄 몰라하는 가엾은 인간을 깔보고 조소하는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하나? 아침이 다 지나갈  무렵이었으며, 립은 아직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해 
배가 고팠다. 애석하긴 했지만 개와 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를 
만날 생각을 하니 두렵기도 했으나,  산 속에서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그
는 그럴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가로저은 다음 녹슨  총을 어깨에 맸다. 그
리고는 가슴에 고민과 불안을 하나 가득 안고서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마을이 가까워지면서 립은  몇몇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그는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근
방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든  그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었다. 게다가 그들의 옷차림 또한 그가 아는 사람들의  옷차림과는 다른 것
이었다. 그들 모두는  그와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 하고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그에게  시선을 줄 때마다  그들은 예외없이 자신들의  턱을 
쓰다듬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이런 동작을 계속해서 되풀이하자  립은 자기
도 모르게 자신의  턱을 쓰다듬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의  턱수염
이 한 자나 되도록 자라있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그는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한 무리의 낯선  아이들이 그의 뒤를 
따라오며, 소리쳐  야유를 하기도 하고  그의 은백색 턱수염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개들 또한 한 마리도  알아볼 수 없었는데, 이 개들도 립이 지나가
자 그를 보고 마구 짖어댔다.  마을 자체가 변해 있었다. 전보다 커지고 사
람도 많아졌던 것이다. 전에 보지  못한 집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가 뻔
질나게 드나들던 낯익은 집들은 보이지 않았다. 집 앞  문위에는 낯선 이름
의 문패가 걸려 있었으며,  창 밖으로 내다보는 얼굴도 전혀 알아볼  수 없
는 낯선 얼굴들이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불안감이 립
의 마음을  내리눌렀으며, 자기와 자기 주변의  온 세계가 다 같이  마법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이곳은  그가 
겨우 하루 전에 떠났던 그의 고향 마을이었다. 저쪽으로  캐츠킬 산맥이 우
뚝 서 있엇고, 저 먼  곳에는 은빛의 허드슨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언덕도 
구릉도 전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립은 몹시  당
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어젯밤 그놈의 술병이 가엾은 나의 머리를 돌게 
만든거야!'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가까스로 그는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찾고는, 두려움에  질려 숨을 죽이
고 집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 금방이라도 밴 윙클  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
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윽고 그는 페허가 다 된 자기  집을 발견하였
다. 지붕은 내려앉았고, 창문은 산산히 부서진 채였으며 문의 경첩은 다 떨
어져 있었다. 울프처럼 생긴 개 한 마리가 굶주려 다  죽게 된 몰골을 하고 
집 주변 어딘가로 슬금슬금 숨었다. 립이 울프의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그 
똥개는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더니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이렇게 모
른 척하다니, 이거야말로 정말  매정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내 개까지
도 나를 잊었구나!" 가엾은 립은 한숨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을 말하자면, 밴  윙클 부인은 집안을 늘 
깨끗하게 정돈해 놓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여자였다. 그러던 집안이  이제 
텅 빈 채 황폐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버
려진 집 같았다. 이와  같이 황폐한 모습을 보자 그는 부인에  대한 공포도 
잊고 큰 소리로 아내와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텅 빈  방들이 그의 
목소리로 잠시 동안 울리더니, 다시금 침묵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윽고 립은 서둘러 밖으로 나와  그가 전에 자주 드나들던 마을의 여인
숙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여인숙도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여
인숙이 있던  자리에는 큰 목조 건물이  넘어질 둣이 서 있었다.  멍청하게 
벌린 듯한  입 모양의 커다란 창문들이  달린 집이었는데, 부서진 몇  개의 
창문은 헌 모자와 속치마로  가려져 있었다. 문위에 '조나단 두리틀의 유니
온 호텔'이라고 씌여진 글자가 보였다. 전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어 
그 조용한 네덜란드식 여인숙을 그늘로 덮어 주곤 하였는데,  이제 그 자리
에는 칠을  하지 않은 높직한 장대  하나가 들어섰고, 그 꼭대기에는  잠잘 
때 쓰는 빨간 모자와  같은 것이 붙어 있었으며, 그 아래로  깃발이 나부끼
고 있었다. 별과 줄이 묘하게 조합된 깃발이었다. 이 모두가 낯설고 이해하
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간판에 홍조를 띤 죠지 왕의  얼굴은 알
아볼 수 있었다. 그 아래에서 전에 얼마나 자주  평화로운 마음으로 파이프 
담배를 피웠던가!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초상화마저 묘하게 변형된  것이
었다. 붉은 상의가 푸른색과  황갈색의 옷으로 바뀌었고, 손에는 왕권을 상
징하는 홀 대신 칼이 들려 있었으며, 머리 위에는 테를  젖혀 올린 삼각 모
자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 큰 글자로  '워싱턴 장군'이라고 씌어 
있었던 것이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문 근처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으나,  립이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의 품성마저도 달라진 것 같았다.  
몸에 익은 나른함과 졸음을 이끌 정도의 조용한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지
고, 사람들은 바쁘게  서두르고 떠들썩하게 마치 논쟁이라도 하는 듯한  투
로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넓은 얼굴에 이중의 턱을 한  현자 니콜라스 
베더, 한담을 하는 대신 구름 같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상당히 긴 파이프로 
담배를 피곤 하던 니콜라스 베더를 찾아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낡은 신
문에 나오는 기사 내용을 천천히 읽어 주던 교장 선생님 밴 붐멜의 모습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분들 대신 까다롭게 생긴 깡마른 친구  하나가 주
머니에 선전 전단을 가득 넣은 채 정열적인 어조로 열변을 토하고 있는 것
이었다. 시민의 권리가 어떻고, 선거가 어떻고, 의회 의원들이 어떻고, 자유
가 어떻고, 벙커스 힐에서의 전투가 어떻고, 76년도의  영웅들이 어떻고, 그
리고 또 뭐가 어떻고 하면서 지껄여대고 있었는데, 어리둥절해  있는 밴 윙
클에게 이런 말들은 모두 다른 나라 말같이 들렸다.
  기다란 은백색 턱수염을 늘어뜨리고 녹슨 엽총을 맨 채 남루한 차림새의 
립이 한 떼의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이끌고 나타나자  곧 여관 앞에 모인 
정치가들은 그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립을 둘러싸고  대단히 
호기심이 어린  눈초리로 그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살펴 보았다.  열변을 
토하던 자가 그의 곁으로 분주하게 다가오더니 그를 옆으로 잡아끌면서 어
느 편에 투표를 할 것이냐고 물었다. 립은 어안이  벙벙해서 물끄러미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키가 작고 분주해 보이는  또 한 명의 친구가  립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발돋움을 하고 그의 귀에  입을 대고 "당신은 연방당원
이오, 아니면 민주당원이오?" 라고  묻는 것이었다. 립은 여전히 무엇을 묻
는지 알 수 없어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유식한 척  잘하는 거만
한 노신사 하나가  테를 젖혀 올린 삼각 모자를  쓴 채 팔꿈치로 사람들을 
좌우로 밀어 제치면서  군중 사이를 뚫고 밴 윙클  앞으로 다가와 우뚝 섰
다. 도전하듯 한 손은 허리에 대고 다른 한 손은 단장에 올려놓은 채, 그는 
마치 날카로운 눈초리와 뾰족한 모자로 립의 영혼까지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한 자세를 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뭣 때문에 당신은  총을 어깨
에 메고 군중을 이끌고 선거장에  왔소? 마을에서 폭동이라도 일으킬 셈이
오?"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아, 여러분, 저는  이 고장 출신으로 겁 많고 온순한  사람이며, 국왕 폐
화께 충성하는 백성일 따름입니다.  국왕 폐하께 축복이 있을지어다!" 립은 
다소 당황해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렇게 말하자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외쳐댔다. "왕당파다, 왕
당파야! 스파이, 잠입자다! 저놈을 해치워라! 없애 버려라!" 삼각 모자를 쓴 
거만한 그 노신사가  어렵사리 다시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나서, 전보다  열 
배는 더  엄숙한 표정으로 이 미지의  혐의자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 
고장에 왔으며  누구를 찾아 왔느냐고 다시  한 번 물었던 것이다.  가엾은 
립은 겸손한 말투로 그에게 자기는  아무도 해칠 뜻이 없으며 다만 여인숙 
주변에 모이곤 했던 자기 동네 사람들을 몇몇 찾아보려고 여기에 왔노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누구요? 이름을 대 보시오."
  립은 잠깐 동안 생각을 하더니, 물었다. "니콜라스 베더씨는 어디 계십니
까?"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난 다음  한 노인이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
했다. "니콜라스 베더씨를 찾는다고?  아, 그분이 돌아가신 지 벌써 18년이
나 되오! 전에 교회  묘지에 나무로 된 묘비가 있어서 그분의 일생에 대한 
얘기를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다 썩어 없어지고 말았소."
  "브롬 더쳐씨는 어디 계십니까?"
  "아, 그분은 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들어갔어요. 스토니 포인트를 공격할 
때 전사했다는 말도 있고, 안토니 노우즈 언덕 기슭에서  폭풍우를 만나 익
사했다는 말도  있소. 자세히는 모르겠소만, 그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
소."
  "밴 붐멜 교장 선생님은 어디 계시지요?"
  "그 분도 역시 전쟁에 참가했소. 굉장한  장군이셨다가 지금은 의회 의원
이시오."
  자기 고향과 친구들과 관련하여 그처럼 슬픈 변화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
고 나서 이제 이  세상에는 오직 자기 혼자뿐이라는 생각을 하니,  립의 가
슴은 미어질 듯  아팠다. 또한 대답마다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뿐이
었다. 시간이 그렇게 엄청나게 흘렀다니,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그렇게 
많이 있다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쟁은 무엇이고 의회는 무엇이며 스
토니 포인트는 다 무엇인가? 더  친구의 소식을 물을 용기를 잃고 그는 절
망에 빠져 소리질렀다.
  "여러분들 가운데 립 밴 윙클을 아는 분은 안 계십니까?" 
  "아, 립 밴 윙클!" 두세 사람이 이렇게  외쳐댔다. "응, 틀림없지! 저기 립 
밴 윙클이 나무에 몸을 기대고 서 있지 않소."
  립이 바라보니, 그가 산으로 올라갔을 때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한 사
나이가 서 있었다. 명백히 그와 마찬가지로 남루한 차림의  사나이가 서 있
었던 것이다. 이  가엾은 친구는 이제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자기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자기가 자기인지 또는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
다. 그가 이처럼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삼각 모자를 쓴 사
나이가 당신은 누구이며 이름은 뭐냐고 물었다.
  "누가 압니까!"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이렇게 소리질렀다. "저는 제
가 아닙니다. 저는 누군가 딴  사람인가 봅니다. 저기 있는 사람이 저 아닙
니까. 아닙니다. 누군가가  제 자리를 차지한 겁니다. 지난 밤만  해도 저는 
저였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하룻밤 바고 나니 놈들이 제  총을 바꿔 놓았고 
모든 게 바뀌고 말았어요. 저도 바뀌고 만 것입니다.  제 이름이 뭔지, 제가 
누구인지,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군요."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
가 의미 깊은 눈짓을 하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자기네 이라믈 치기 시작했
다. 또한 총을 빼앗아야 한다느니, 저 늙은이가 엉뚱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느니,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도 들렸다. 이런  소리를 듣더니, 삼
각 모자를 쓴 그 거만한 노신사가 약간 서두르는 기색으로 황급히 뒤로 물
러났다. 이  위급한 순간에 예쁘게 생간  젊은 여자 하나가 군중을  헤치고 
나와 은백색 수염의 노인을 살짝 훔쳐보았다. 이 여인은  포동포동 살찐 아
기를 두 팔에 안고  있었는데, 그 아기가 노인의 모습를 보고  놀라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립아, 울지 마."  그녀는 이렇게 소리쳤다. "조용히 해, 
이 바보같은 녀석아. 할아버지가 너를 헤칠 것  같으니?" 어린 아이의 이름
과 그 애  엄마의 태도,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어조,  이 모든 것들이 립의 
마음 속에 일련의 기억을 일깨웠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부인?" 립이 이렇게 물었다.
  "제 이름은 주디스 가디니어예요."
  "그러면 부친의 함자는 어떻게 되지요?"
  "아, 가엾은 분이셨던 저의 아버지는 '립  밴 윙클' 이라는 함자를 가지고 
계셨어요. 총을 메고 집을 나가신 지 벌써 이십년이 되었은데, 그후로는 전
혀 소식이 없으세요. 데리고  갔던 개만 혼자서 돌아왔었죠. 잘못해서 총으
로 자기를 쏘셨는지,  아니면 인디언들이 잡아 갔는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저는 그때 아주 아주 조그만 아이였어요."
  립에게는 이제 딱 하나 더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  그는 더듬거리면서 다
음과 같이 물었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요?"
  "아, 어머니는 그후 얼마 안있어 돌아가셨어요. 뉴잉글랜드의 행상인에게 
화를 내다가 혈관이 파열되셨어요."
  이 사실을 알자 그는  적어도 한 가득의 위안을 얻게 되었다.  이 정직한 
노인은 더 참을 수 없어서, 자기의 딸과 그 딸의 아기를 두 팔로 껴안았다. 
"내가 너의 아버지란다!"  그는 외쳤다. "한때는 젊은 립  밴 윙클이었는데, 
이제는 늙은 립 밴  윙클이 되고 말았단다. 여기 누구 이 불쌍한 립  밴 윙
클을 아는 분은 안 계십니까?"
  모든 사람이 놀라멍한 표정으로  서 있을 때, 마침내 한 노파가  군중 속
에서 비틀거리며 나와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잠깐 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소리쳤다.  "틀림없어요! 립 밴 윙클이에요.  바로 그 사람이에
요! 다시 오셔서  반갑군요, 옛 이웃 양반. 아니, 이십  년 동안이나 도대체 
어디에 가 계셨어요?"
  립의 이야기는 곧  끝났다. 이십여 년의 세월이라지만 그에겐 겨우  하룻
밤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네 사람들은  그를 뚫어지
게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눈짓을 하기도 하고 또한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짓기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소동이 가라앉았을 때에는 삼각  모자
를 쓴 그 거만한  노신사가 이미 그곳에 돌아 와 있었는데,  입을 삐죽이면
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 머리
를 가로젖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피터  밴더동크 노인의 의견을 듣기로 했는데, 그가  마
침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조상  가운데에는 
그와 같은이름을 가진  향토 사학자가 있었는데, 이 지방의 초창기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놓은 바 있었다. 밴더동크 노인은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이 지방과 관계되는 모든 놀랄 만한 사건들과  관습에 정통해 있
는 사람이었다. 그는 즉시  립을 알아보고, 가장 만족스러운 방법으로 립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는 또한 향토 사학자이신 자신의  조
상이 전한 바에 따르면, 이상한 사람들이 항상 케츠킬  산상에 출몰하는 것
은 사실이라면서, 이 점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아울러, 허드슨 강
과 이 지방을 처음 발견하신 저 위대한 핸드릭 허드슨이 '반월호'의 선원들
을 동반하고 이십년마다 한  번씩 순시한다는 것도 확인되었음을 사람들에
게 말해 주었다. 이런 방식으로 이전의 활동 무대를  재차 방문하여 자기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강과 큰 도시에 대한 보호자의 역할도 한다는 점을 사
람들에게 말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선친도 전에 그들이  옛날의 
네덜란드식 옷을 입고  깊은 산 속 공터에서 구주회  놀이를 하는 것을 한 
번 목격한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도 어느 여름날 오후  마치 천
둥이 치는 것과 같은 공 굴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고도 말했다.
  긴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흩어져서  선거라고 
하는 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 다시금 관심을 쏟게 되었다. 립의  달은 아버
지를 모시고 집에 가서 함께 살았다. 그녀는 아늑하고  가구가 잘 갖추어진 
집에서 튼튼한  체구의 쾌활한 농부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살고  있었는데, 
립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녀의 남편은 바로 옛날 자기 등에 올라타곤 했
던 개구쟁이 가운데 하나였다. 나무에 기대 서 있던 립의 아들이자 상속자, 
립과 닮지 않은 데라고는  한 구석도 없는 그의 아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
는 남의 집에 고용되어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전적인 기질을 그
대로 나타내기라도 하듯 그는 자기  일을 빼놓고는 누구의 일이든 잘 돌봐 
주었다.
  이윽고 립은 옛날에  하던 대로 어슬렁거리기도 하는  등 옛날 버릇으로 
되돌아갔다. 옛 친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그들
은 모두  세월의 퐁파에 시달려 몸의  상태가 다소간 더 악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막  떠오르는 세대의 젊은이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이내  그들 
사이에 호평을 바든 사람이 되었다.
  집에서 할  일도 없고, 이제는 게으름을  피워도 책망할 사람 하나  없는 
행복한 나이에 이르게 되자, 그는 다시 한 번 호텔  앞의 벤치에 자리를 잡
고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제 마을의 원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
경을 받게 되었고,  이른바 '전쟁 전'이라는 옛 시절을 간직하고  있는 살아
있는 기록으로서  대접을 받았다. 얼마 후  그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잡담 
속에 정규적으로 끼어들게  되었으며, 자기가 마비 상태에 있는 동안  일어
났던 세상의 모든 일들을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어떻게 해서 
독립 전쟁이 일어났고,  이 나라가 어떻게 영국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
으며, 자신이  죠지 3세 폐하의 백성이  아니라 합중국의 자유로운  국민이 
되엇는가를 알게 되었다. 사실  립은 정치가가 아니어서, 국가와 제국의 변
화가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오랫동안 
그 밑에서 신음해 왔던 특이한 형태의 전제 정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치마 바람이 관장하는  정부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 정부도 이제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이제 결혼 생활이라고 하는 그의 목을  죄던 사슬에서도 풀
려났다. 이제 밴 윙클  부인의 폭정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마음  내키는 대
로 나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쩌다가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게 되면,  그는 머리를 가로젓고 어깨를  으쓱 올린 다음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지곤 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몸짓은 운명에 대한 체념의  표시로 
도 읽힐 수 있고 또한 구원에  대한 즐거움의 표시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
다.
  그는 두리틀씨의 호텔을 찾아오는  낯선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해
주곤 하였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할 적마다 몇 가지  점에서 내용이 바뀌곤 
하는 것이 목격되었는데, 이는 틀림없이 그가 정신을 차리고  난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의 이야기는 하나로  굳
어져서 내가 위에서 전한 것과 똑같은 것이 되었으며,  남자건 여자건 어린 
아이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이야기를  암기하다시피 하였다. 
어떤 사람은 항상 그의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척하였고,  립이 제 정
신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이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그의 머리가 좀 
돌아 있는 것  같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네덜란드계 
주민은 예외없이 모두 그의 이야기에 완전한 신뢰감을  보였다. 오늘날까지
도 그들은  여름날 오후 캐츠킬 근처에서  천둥과 같은 소리가 나면,  이는 
틀림없이 헨드릭 허드슨과 그의 선원들이 구주회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라
고 말한다. 그리고 이  근방에 사는 모든 공처가 남편들은 삶의  무게가 그
들의 손을 무겁게 짓누를 때면 립  밴 윙클의 술병에서 술을 한 번 들이키
고 마음을 가라앉혔으면 하는 소망을 누구나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작품해설 - 익숙한 상상력의 서구적 형상화
  우리는 옛부터 시간의  상대적 진행을 극대화한 설화에 익숙해 있다.  시
간의 진행이 현저하게  빠른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  현실로 복귀했을 때에 
받게 되는 충격을 노린 것으로 그 충격의 내용은 주로 시간의 파괴력과 연
관된 것이 많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속담을 남긴 옛 
전설이나 무릉도원의 설화 같은 게 그러하다.
  [립 밴 윙클]은 그런 동양적 상상력을 서구적으로  형상화한 특이한 작품
이다. 립이 다른  시간궤를 경험하고 자신의 시간궤로 되돌아오게 되는  과
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설화에 매우 닮아있다.  그러나 그것을 형상화
하는 방식이나 주인공에게 남겨진 충격의 흔적은 아주 다르다.
  그 차이는 먼저  서술과 묘사에서 드러난다. 동양의 설화는 애매한  시대
와 추상적인 인물들에 의해 진행되는데 비해 이 작품의 주인공과 시대배경
은 구체성을 띠고  드러나며 묘사도 아주 사실적이다. 그것은 어쩌면  세련
된 현대의 단편과 정제되지 못한 민담의 차이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차이는 다른 시간궤에  속한 사람들의 초월성에 대한 해명에 있
다. 동양의 설화에서는 그들이  신선이거나 자연의 특혜를 받은 이들, 혹은
시간의 파괴력도 어찌해볼 수 없는 한이나 비원을 품을 이들 등으로 그 해
명이 시도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왜 초기 네덜란드계  이민들이
나 헨드릭 허드슨 선장과 그  배 반월호의 선원들이 시간을 초월해 나타나
게 되었고, 또 왜 그들의 공간에서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진행되는지에 대
해 설명이 없다. 서구의  근대문명이 초월성의 논리에 약하기 때문일까, 아
니면 독자의 상상력에 부과하는 작가의 숙제일까.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아무래도 그 경험의 충격이 주인공에게 
남긴 흔적일 것이다.  동양의 주인공들은 그 충격으로 자신들도 초월을  지
향하게 되거나 최소한 그 초월적 공간을 다시 찾아가려고 애를 쓰고 그 과
정에서 흔히 현실과의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립에게는 그런 노력의  흔적
이 전혀 보이지 않거니와 오래잖아  되찾은 현실과 조화를 이루며 살게 된
다. 그게 서구인의  현실지향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면 그 점만으로도  이 
[립 밴 윙클]은  소설공부를 하는 이들에게 눈여겨 봐두기를 권할  만한 작
품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미국 독립 초창기인 1783년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뉴욕에서 성장
한 어빙은  19세 때부터  사회풍자 기사나 극평을  신문에 기고하기  시작, 
1807년에는 직접 잡지를 창간해 자신의  글을 싣기도 하는 등 매우 진취적
이며 개척정신이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상사 주재원과  공사관을 거치며 
영국 스페인 등을 두루  여행한 그는 자신의 폭넓은 경험을 살린 작품 [스
케치 북] [알함브라 전설] [대초원에의 여행]을 발표해 성공을 거두었다. 일
찍부터 골드스미스 등 영국 작가에 심취해있던 그는 단아하고 로맨틱한 작
품들로 명성을 얻었는데 반면  당시에 강력히 대두되던 미국 국민문학에의 
요구를 외면해 문단에서 외톨이가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악마와 대니엘 웹스터  -스티븐 빈센트 메네 지음-
  이 이야기는 메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주가 서로 인접해 있는 곳인
주경계 지대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이다.
  그렇다, 대니엘  웹스터(이 소설에서 '대니엘 웹스터'라는  이름은 제목에
서 그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거론할  때와 대니엘 웹스터 자신이 자신의 이
름을 거론할 때에만 사용되고 있다. 그 외의  자리에서는 '대늘 웹스터'라는 
애칭이 사용되고 있다.  친근감이 가는 전설적 인물이자 민중의 사랑을  받
는 인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작가가 이처럼 애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애칭을 사용하는  일이 우리 문
화에서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따라서 소설에  대한 이해에 무
리가 없다는 판단 아래 우리에게 좀더 익숙한 서양식  이름인 '대니엘 웹스
터'로 통일하여 번역하기로  한다. 이 점에 대한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는 
세상을 떠났다.  아니, 적어도 그의 육신은  땅에 묻혔다. 그러나  마쉬필드 
근방에서 천둥 소리가 들릴 때면 텅 빈 하늘에서 그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
을 수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그리고 만일 그의 무덤에  가서 크고 
명료한 소리로, "대니엘 웹스터, 대니엘 웹스터"라고 부르면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나무가 떨리기 시작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면 굵고 낮은 목소리로 "여보시오, 합중국은  요즘 형
편이 어떻소?"라고 묻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합중국은 
반석 위에 자리잡고 철갑으로 무장했을  뿐 아니라 하나로 뭉쳐져 있어 떼 
놓으래야 떼 놓을 수없다고 대답하는 게 좋을 거라고들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니엘 웹스터가 땅 속에서 벌떡 일어나 나올  것이라고들 한다. 적
어도 이것이 내가 어린 아이였을 때 들은 이야기이다.
  알다시피 잠시 동안이나마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인물이었다.  대통
령까지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어쨌든 가장 큰 인물이었다. 전능하신  하나
님 다음으로 그를 믿었던 사람이 수천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그에 관한 것
이나 그와 관계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마치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의 조상들에 대해 이야기하듯 그를 떠받들어 이야기거리로  삼았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가 일어서서 연설을 할 때면 성조기가  즉각 하늘에 나타나
곤 했다는 것이다. 언젠가 한 번은 그가 어떤 강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퍼
부어 그 강을 땅 속으로 가라앉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가 자신의 낚시
대인 '몰살'을 들고 숲 속을  지나가면 냇물의 송어가 그와 겨뤄 봐야 소용
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물 속에서 펄쩍 뛰어나와 바로 그의 주머
니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가 소송  사건과 관련하여 변
론을 하게 되면  천상 세계가 하프를 타듯 지하  세계를 뒤흔들 듯 거침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에 저  위 마쉬필드에 있
던 거대한 그의 농장도 그에게는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가 
키우는 닭들은 종아리까지 온통 흰 살이었으며, 암소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보살핌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농장에는 그가 골리앗이라고  이름 
붙인 커다란 숫양도  있었는데, 그 숫양은 나팔꽃 덩굴처럼 멋지게  휘어진 
뿔을 갖고 있었으며 그 뿔로는  철문이라도 들이받아 뚫을 수 있었다고 한
다. 그러나 대니엘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여느  한가한 부농은 아니었다
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농지에 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고, 자질구레한 
농장 일이 잘 마무리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잠자리에 들지 않은 채 촛
불을 들고 돌아다니곤 했다고 한다.  맹견의 입과 같은 단호한 입, 산과 같
이 우람한 이마, 석탄  불과도 같이 이글거리는 눈-이것이 한창 시절  대니
엘 웹스터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맡아서 변론을  펼친 바 있는 
가장 큰  소송 사건은 결코 기록으로  남겨져 있지 않은데, 그것은  악마에 
대항해서 펼친  변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상막하의 변론을 펼친  끝에 
무조건의 승소를 끌어냈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 나는 늘  다음과 같은 이야
기를 듣곤 하였다.
  1
  뉴햄프셔의 크로스  코너즈라는 곳에 제이비즈  스톤이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옥수수를 심게 되면 옥수수에  좀벌레가 생기고, 감자를 
심으면 감자에 병이 들어 말라죽었다. 그는 대단히 비옥한  땅을 갖고 있었
지만 도대체 하는  일이 잘되지 않았다. 부인도 참하고 아이들도  얌전했으
나, 식구가 늘면  늘수록 정작 먹여 살릴  식량은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웃 사람이 밭에서 돌메이을 캐어내면 그는 밭에서 자갈을 들어내는 판이
었다. 또 말한테 관절염이 생겨 무언가를 얹어 주고 그  말을 다른 말과 바
꾸게 되면  이번에는 비칠거리는 말이  걸려들었다. 분명히 세상에는  일이 
그런 식으로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제이비즈  스톤
은 어느 날부터인가 만사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날 아침  밭을 갈다가 쟁기를 바위에  부러뜨렸다. 맹세해도 좋을만큼, 
어제만 해도 거기에는  틀림없이 바위가 없었던 것이다. 부러진 쟁기를  바
라보며 서 있노라니, 저쪽에 서  있던 말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병에 걸
려 수의사를 불러야  할 조짐을 보이는 그런  종류의 끈적끈적한 기침이었
다. 저 아래 집에는 두 아이놈이 홍역에 걸려 있고  여편네도 앓고 있을 분
만 아니라, 그  자신도 엄지 손가락 끝의  화농성 염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이비즈 스톤에게 엄지 손가락 끝의 화농성 염증은 마지막 일격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절망에  가까운 표정을 지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이
렇게 말했다.  "맹세컨대, 정말로 맹세컨대.  이 정도라면 이제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싶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지! 나 역시 
단 두 푼에라도 좋으니 영혼을 팔아 버리고 싶다."
  말하고 싶었던 바를 말하고 났을 때, 자신이 무언가  묘한 기분에 감싸이
는 것을 그는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뉴햄프셔 사람의 
기질을 타고난 그인지라  그는 자신의 말을 취소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지
만 동시에 저녁이 되고 그때까지 아무리 주의해서 둘러보아도 아무런 불길
한 징후도 눈에 뜨이지  않자 마음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종
교적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격에 적혀 있듯이  항
상 무언가의 징후가  조만간 눈에 뛰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저녁 식사를 할 무렵,  목소리가 부드러운 검은 옷 차림의 낯선  사람이 멋
진 마차를 타고 와서 제이비즈 스톤을 찾았다.
  글세, 제이비즈가 그의 가족에게 뭐라고 했는가, 제이비즈는 낯선 사람이 
유산 문제로  그를 만나러 온  변호사라고 둘러댔다. 그렇지만  제이비즈는 
그를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에게는 낯선 사람의 외모뿐만  아니
라 이를 드러낸 채 웃는 그의 표정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이는 하얗
고 수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이가 줄칼로  갈아서 끝이 뾰족하였다
고들 하나 나는 그  말의 사실 여부를 보증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개가 
그 낯선 사람을 흘끗 보고는 꼬리를 다리 사이에 감춘 채 울부짖으며 도망
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이미 맹세는 한 것이고, 그는 
어떻게든 이를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헛간 뒤쪽으로 가서  계약을 
맺었다. 제이브즈 스톤은 서명을  위해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야 했다. 이에 
낯선 사람이 은으로  된 바늘을 빌려주었다. 상처는 곧 깨끗이  아물었으나 
자그마한 하얀 자국이 남게 되었다.
  2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갑자기 제이비즈 스톤의 형편이 나아지면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기 시작했다. 그의 암소들은 살이 오르게 되었고, 그의 
말들은 윤기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농장에서 거두어 들이는  농작물
은 어찌나 탐스러웠던지 이웃 사람들이 부러워할 지경이었다.  또한 번개가 
계곡 전체를 때릴 때에도 그의 헛간만은 피해갈 정도였다.  얼마 안돼 그는 
그 지역에서 아주  잘사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지역 행정위원으로 출마하라는 부탁을  했고,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주 
의회의원으로 그를 밀자는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요컨대, 스톤 일가는 
낙농업을 하는 집안의 고양이처럼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말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이비즈 스톤만  빼놓고 실제로 그들은  행복감과 
만족감에 도취도어 있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그도 충분한  만족을 느꼈다. 사납던 운이  바뀐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라고 할 만하며, 그럴 때  사람들은 대부분의 다른 
일들을 머리 속에서 쫓아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쩌다, 특히 날이라도 궂
을 때면, 그의 손가락에 남이있는 희고 작은 상처가  쑤시듯이 아프게 느껴
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일년에 한  번은 시계처럼 정확하게 그  낯선 
사람이 멋진 마차를 타고 지나가곤 했다. 그러나 육년 째  되는 날 그 낯선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으며, 이로써 제이비즈 스톤의 평화는  끝장나고 말았
다.
  그 낯선 사람은 지팡이로 자신의 장화를 치면서 아래쪽 들판을 가로질러 
왔다. 그가 신은 장화는  정말로 멋진 검은색 장화였지만, 제이비즈 스톤은 
그 모양새가, 특히 발가락 쪽의 모양새가 결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윽고 
인사말을 건네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스톤씨, 당신은 굉장한  분이
군요. 이곳에 굉장히 멋진 농토를 소유하고 계시군요, 스톤씨."
  "글쎄요,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
람도 있을 거요." 제이브즈 스톤은 뉴햄프셔 사람답게 이렇게 말했다.
  "아, 그런 식으로 자신의  근면을 깎아 내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낯선 
사람이 아주 편한 자세로, 이를  드러낸 채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
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지요. 그리고 그거
야 계약과 계약상 세목에 따른 것 아니오? 그렇게 해서, 어흠, 내년에 가서 
저당 시간이 만기가 될 때 당신에게 유감이 되는 일은 없도록 해야지요."
  "그 저당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선생, 한두 가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
소이다." 제이비즈 스톤은  이렇게 말하면서 도우ㅁㄹ 청하듯  하늘과 땅을 
둘러보았다.
  "의문이 생겼다고요?"  낯선 사람이 별로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제이비즈 스톤이 말을 이었다. "이곳은  미 합중국이고, 
저는 항상 신앙심이 깊은 사람입니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한결 대담해
져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선생, 저는 그  저당이 법정에서 효력을 갖
는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법정이야 얼마든지  있지요." 위아래쪽 이를 부딪혀  짤깍거리면서 낯선 
사람이 말했다.  "어쨌든, 원래 계약서를 한  번 들여다보는 것이 좋겠는데
요." 그렇게 말하고는 서류로 가득 찬 검은색의 커다란 지갑을 끄집어냈다. 
"셔윈, 슬레이터, 스티븐즈,  아, 그 다음이 스톤이군."  그는 혼자 중얼거렸
다. "나 제이비즈 스톤은 칠년 기한으로... 아,  이거 내 생각에는 잘못된 곳
이 없는데요."
  그러나 제이비즈 스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검은색의 지
갑에서 무언가가 퍼덕거리며  뛰쳐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나방같이 생긴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방은 아니었다. 제이비즈 스톤
이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더니, 피리를 불 때 나는  것과 비슷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목소리는 아주  작고 가늘긴 하였으
나 여전히 인간의 목소리와 대단히 비슷했다.
  "여보시오, 스톤씨!"  그것이 빽빽거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보
시오, 스톤씨! 나를 좀 살려 주시오! 제발, 나를 좀 살려 주시오!"
  그러나 제이비즈 스톤이 손 하나  발 하나 까딱하기도 전에 낯선 사람은 
염색이 된 커다란 손수건을 획 꺼내 들더니 마치 나비를 잡듯 그 생명체를 
손수건으로 잡아채었다. 그리고는 손수건 끝을 묶기 시작했다.
  "방해가 되어 미안하오." 낯선 사람이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나 제이비즈 스톤은 놀란 말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건 구두쇠 스티븐즈의 목소리가 아닌가요."  침울한 목소리로 그가 말
했다. "그런데 당신이 그 사람을 손수건 안에 갖고 있다니!" 
  낯선 사람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사실 진작에 그를  수집 상장에다 옮겨 넣었어야 하는데." 그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상자 안에  좀 특별난 표본들이 몇 개 
들어 있는데다가 상자를  지나치게 꽉 채우고 싶지 않았다오. 자,  자, 이런 
식의 사사로운 분란은 항상 일어나기 마련 아니오."
  "'분란'이라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만, 그건 구두쇠 스티븐즈의 
목소리요!" 제이비즈 스톤이 말했다. "게다가 그는 아직 죽지  않았소! 그가 
죽었다고 당신도  말하지 못할 거요.  그는 화요일까지만 해도  쥐새끼처럼 
날쌔고 인색했단 말이오."
  "살아있는 동안에는..." 낯선 사람이 어딘가 경건한 표정으로  말했다. "들
어 보시오!" 그때 계곡에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에 귀를 기
울이는 제이비즈 스톤의  얼굴에 진땀이 흘러 내렸다. 왜냐하면 그  종소리
는 구두쇠 스티븐즈를 위해 울리는  것이고 그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사
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래된 거래를 마감하는  일을 좋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요." 낯선 사람은  한숨을 지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거래는 거래니 어쩔 
수 없지요."
  그는 아직 손수건을  손을 들고 있었고, 제이비즈 스톤은 손수건이  요동
을 치고 펄럭거리는 것을 보자 정나미가 떨어졌다.
  "다 저렇게 작은가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작다니요?" 낯선 사람이 물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군요.  왜요, 사람
마다 다르지요." 그는 눈짐작으로 제이비즈 스톤이  얼마나 큰 사람인지 재
어보고는 이를 드러낸  채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스톤씨. 당
신은 상당히 좋은 등급을 받을 것 같소. 당신 같은  사람이면 수집 상자 바
깥에 내 놓아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요. 하기야, 대니엘 웹스터 같
은 사람은 물론... 글쎄요, 그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따로 상자를 만
들어야겠지요. 게다가  날개 폭만 해도 당신  같은 사람이 보면 깜짝  놀랄 
거요. 그 사람 같으면 정말  대단한 물건일 거요. 그 사람하고 일이 잘되기
를 바랄 따름이오. 그건 그렇고 당신 경우에는 내가 아까 말했듯이..."
  "그 손수건  좀 치워 주시오!" 제이비즈  스톤은 이렇게 말한 다음  애걸 
복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그가  얻어 낼 수 있었던  최상의 
것은 조건부로 기간을 삼년간 연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계약을 맺을 때까지만 해도 사년이라는 세월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생각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사년의 세월이  거
의 끝나갈 무렵  마지막 몇 달 동안에는 이미  제이비즈 스톤의 명성이 주 
전체에 알려진 상태였고 그를 주지사 후보로 내세우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가 그에게는 모래를  씹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이제 또 하룻밤이 지나갔구나'
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매일 밤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검은색의  지갑
이나 구두쇠 스티븐즈의 영혼을 머리에 떠올리고는 마음 깊이 낙담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결국에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마
지막 해의 며칠 전에 그는 말을 타고 대니엘 웹스터에게 도움을 청하러 달
려가게 되었다. 대니엘은  뉴햄프셔가 고향인데다가 크로스 코너즈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까운 이웃 사
람들에게 특히 약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3
  그가 마쉬필드로  간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그러나 대니엘은  벌써부터 
일어나서, 농장 일꾼들에게  옆 사람은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지시를  내리
는가 하면, 숫양 골리앗과 씨름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말을 타 보기도 하
였다. 그런가  하면, 존 씨 캘훈을  반박하는 연설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뉴햄프셔 사람 하나가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는 전갈을 듣고는 
그가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대니엘의  버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느 제이비즈 스톤에게 다섯 사람이 먹어도 다  못 먹을 분량의 
아침 식사를 대접하면서,  크로스 코너즈에 살고 있는 모든 남자와  여자의 
근황을 빠짐없이 물어 본 다음  결국에 가서 무슨 일로 자기를 찾아왔는가 
물었다.
  제이비즈 스톤은 일종의 저당 사건 때문에 그를 찾아왔다고 대답했다. 
  "글쎄요, 난 오랫동안 저당  사건 변론은 맡아 하지 않았소. 지금도 그쪽 
분야와 관련해서는 대체로 변론을 맡아 하지 않고 있소.  하기야 최고 법원
에 올라가서 하는 변론이라면 별 문제이긴  합니다만." 대니엘은 이어서 이
렇게 말했다. "그러나 도울 수 있으면 돕도록 하겠소."
  "그렇게 말씀하시니, 전 십년만에 처음으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
이비즈 스톤은 이렇게 말한 다음 자세한 사정 이야기를 했다. 
  대니엘은 뒷짐을 진 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서 스톤의 사정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끔  가다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마치 두 눈
이 바닥에 구멍을 뚫는 송곳이라도  되듯 두 눈으로 바닥을 뚫어져라 내려
다보기도 했다. 제이비즈  스톤이 사정 이야기를 마치자 대니엘은 그의  두 
볼을 불룩하게 부풀렸다가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제이비즈  스톤에게 몸을 
돌리고는, 마치  모나드녹 산 위로 해가  떠오르듯 온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스톤씨, 당신은 확실히 악마의 짐을 스스로 짊어진 폭이 되었군요. 그렇
지만 이 사건은 제가 맡겠습니다." 대니엘이 이렇게 말했다.
  "맡아 주신다구요?" 감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제이비즈 스톤이 물었다.
  "그렇소." 대니엘이  말을 이었다. "그밖에 처리해야  할 일이 일흔  다섯 
가지나 되고 미주리  절충안도 해결해야 하지만, 당신 사건을 맡을  작정이
오. 뉴햄프셔 사람 둘이서 힘을  합했는데도 악마 하나 당해 낼 수 없다면, 
차라리 이 나라를 인디언들한테 되돌려 주는 게 낫지 않겠소?"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제이비즈  스톤과 악수를 하고 나서 그에게 물었
다. "서둘러서 여기에 오셨던가요?"
  "글쎄요, 서두르긴 서둘렀습니다만." 제이비즈 스톤이 대답했다.
  "오실 때보다 더  서둘러 가도록 합시다." 대니엘 웹스터는  이렇게 말하
고 '헌법'이라는 이름의 말과 '성좌'라는 이름의 말을 끌어다 마차에 매도록 
조처를 취했다. '헌법'과 '성좌'는 앞쪽의  발 한쪽이 하얀, 한 쌍의 잘 어울
리는 회색말들로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그건 그렇고, 그들이 드디어  도착하였을 때, 저 위대한 대니엘 웹스터를 
손님으로 맞이하게 된 것에  스톤씨의 가족들이 얼마나 흥분하고 기뻐했는
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술하지 않겠다. 제이비즈 스톤은 집으로 오는  도
중 모자를 잃어버렸는데, 바람을  만나 모자를 날려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에  그다지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어쨌든,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그는 웹스터씨와 아주  특별한 용무가 있다는 이유로 가족을 먼
저 잠자리에 들게 하였다. 스톤 부인은 그들에게 현관  응접실에 앉아서 일
을 볼 것을 제안했으나, 대니엘 웹스터는 현관 응접실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기에 부엌이 더 편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부엌에  앉아 낯선 사람
을 기다리게 되었다. 계약서상의  세부 조항에 따르면, 그는 자정에 나타나
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그들  앞에는 술
병이 놓여져 있었고, 벽난로에는 불이 밝게 지펴져 있었다.
  그건 그렇고, 술 한  잔 같이 나눌 만한 벗을 찾고자 할 때  대부분의 남
자들에게 대니엘 웹스터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계
의 똑딱거림과 함께 시간이 자꾸  흘러갔고 그에 따라 제이비즈 스톤의 슬
픔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의 눈은 주위를 헤매고 있었고, 술병에서 술
을 한 잔 따라 마셨지만 누구라도 그가 술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한눈
에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에는  시계가 11시 30분을 알렸을  때 
그는 손을 뻗어 대니엘 웹스터의 팔을 잡았다. 
  "웹스터씨! 웹스터씨!" 이렇게  대니엘 웹스터를 불렀을 때, 그의  목소리
는 두려움과 억지 용기에 떨리고 있었다. "제발,  웹스터씨, 말에 마차를 매
고 떠나실 수 있을 때 이 자리를 떠나세요."
  "여보시오, 나하고 벗이 되기 싫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를 이 먼 곳
까지 끌고 온 것은 아니겠지요?" 대니엘 웹스터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술병
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저는 참으로 가련한  놈입니다!" 제이비즈 스톤이 신음하듯 말했다. "저
는 당신을 악마한테 끌고 온 셈입니다. 이제 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 녀석이 원하다면저를  끌고 가게 합시다. 솔직하게 말해 바라
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견디어 낼 수는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야 합중
국의 기둥이며 뉴햄프셔의 자랑입니다. 웹스터씨, 그 녀석이 당신을 데려가
게 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단 말입니다!"
  대니엘 웹스터는 난로불의  불빛을 받은 채 창백하게  질려 온몸을 떨고 
있는 얼빠진 사나이를 바라보고서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 위에 얹었다.
  "고맙소이다, 스톤씨!"  점잖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친절한 생각이십
니다. 그렇지만 식탁에 술병이  있고 사건이 수중에 있는데 떠나다니요. 내 
생애 한 번도 술병이나 사건을 절반만 끝내고 그만둔적이 없소이다."
  바로 그 순간 누가 문을 한 번 날카롭게 두드렸다.
  "아, 댁의 시계가 좀 느린 것  같소, 스톤씨." 대니엘 웹스터가 아주 침착
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고 말했다. "어서 오
시오!"
  낯선 사람이 들어섰다. 그의 모습은 난로불의 빛을 받아  매우 어둡고 커 
보였다. 그는 팔  밑에 상자를 하나 끼고  있었는데, 뚜껑에 자그마한 공기 
구멍들이 뚫려 있는 검은색의 옻칠을 한 상자였다. 그  상자를 보자 제이비
즈 스톤은 나지막하게  신음소리를 내고는 방 한구석으로  몸을 움츠린 채 
뒷걸음을 쳤다.
  "웹스터씨 아니오?" 낯선 사람이 매우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의 눈
은 깊는 숲 속의 여우 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제이비즈 스톤의 등록  변호사올시다." 대니엘 웹스터가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도 이글거리고 있었다. "댁의 존함은 어떻소?"
  "내 이름은 상당히 많습니다." 낯선 사람이 무관심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아마 오늘 저녁에는  스크래치라는 이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지역 사
람들은 흔히 나를 그렇게 부르지요."
  그렇게 말한 다음 그는 식탁 앞에  앉아 술병에서 자기 몫의 술을 한 잔 
따랐다. 술병에  술이 있었을 때는 차가웠었는데,  낯선 사람의 술잔에서는 
김이 오르고 있었다.
  "자, 그럼." 낯선 사람이 이를 드러낸 채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법
을 준수하는 시민의  한 사람인 당신께 요청하건대, 나의 소유물을  차지하
는 데 도움이 되실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어쨌든 이리하여 변론은  시작되었고, 치열하고 격심한 변론이 이어졌다. 
변론이 시작되었을 때 제이비즈 스톤은 일말의 희망을  갖기도했다. 그러나 
대니엘 웹스터가 조목조목  밀리는 기색인 것을 보고는  옻칠을 한 상자에 
눈을 고정시킨 채 넋을  놓고 한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증서와  서명 어디 
하나 의심할 구석이 없었고 이것이  그에게 가장 불리한 점이기도 했기 때
문이다. 대니엘 웹스터는 몸을 비틀거리기도 하고 돌리기도  하고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치기도 했지만 낯선 사람의 공격을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타
협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낯선 사람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대니엘 
웹스터는 마침내 재산의 가치가 늘었다는 사실과 주의원들은 더 가치가 나
간다는 사실을 지적했지만, 낯선 사람은 법률의 자구대로 하자고 고집했다. 
대니엘 웹스터는 진실로  위대한 법률가였지만, 성경의 말씀대로  악마야말
로 '법률가의 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대니엘 웹
스터는 처음으로 적수다운 적수를 만난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낯선 사람이 약간의 하품을 하였다.  "사건 의뢰인을 위해 당신이 
쏟는 열띤  노력을 보니 과연 명성에  어울리는 분이군요, 웹스터씨." 낯선 
사람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더 제시할 변론이 없으시다면, 저야 시간이 
쫓기는 사람이니 이만..." 이 말에 제이비즈 스톤은 몸서리를 쳤다.
  대니엘 웹스터의 이마가 먹구름처럼 어두워졌다.  "바쁘시건 바쁘시지 않
건 이 사람을 보내주지 못하겠소!" 그가 우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톤
씨는 미국 시민이고,  미국 시민이라면 누구도 외국의 군주를 섬기도록  강
요받을 수 없소이다. 이 문제  때문에 우리는 1812년 영국과 싸웠고, 그 문
제 때문이라면 앞으로 악마가 아니라 누구와도 싸울 작정이오."
  "외국이라니요?" 낯선  사람이 물엇다. "누가 저를  외국인이라고 하던가
요?"
  "글쎄요, 나는 악 -아니, 당신이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소이다." 대니엘 웹스터가 놀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나보다 더 미국 시민의 자격을 갖추고 있느지 따져 봅시
다." 낯선 사람이 그가 지어 보이곤 하던  끔찍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말
했다. "최초의 인디언에게  최초의 잘못이 저질러졌을 때 나는 바로  그 자
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노예선이 콩고를 향해 떠났을  때 나는 그 
배를 타고 있었다오.  정착 초기 시절부터 당신들의 책에든 이야기에든  신
앙에든 내가 등장하지 않았던가요? 여전히 뉴잉글랜드의 모든 교회에서 나
에 대한 이야기가 화젯거리가 되고 있지 않은가요? 북부 사람들은 나를 남
부 사람이라고 부르고 남부 사람들은 나를 북부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나야 북부 사람도  남부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그저 당신과 
같은 정직한 미국 사람일 뿐입니다. 집안도 가장 훌륭한 편에 들지요. 사실
을 말씀드리자면, 웹스터씨, 집안 자랑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우리 집
안 성씨야  당신네 집안 성씨보다  이 나라에서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
요."
  "아, 그래요!" 대니엘 웹스터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그렇다면 
난 미국 헌법을 고수하겠소. 나는 내 사건 의뢰인에  대한 재판을 요구합니
다."
  "이번 사건을 보통  법정에서 처리하기란 어려울 거요." 낯선  사람이 기
세 좋게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그리고 이젠 정말 시간이  너무 늦어서…
…."
  "어떤 법정이든  좋소이다. 재판관이 미국인이고 배심원들이  미국인이라
면 당신이 어떤  법정을 선택하더라도 따르기로 하겠소."  대니엘 웹스터는 
도도한 어투로 말했다. "산  사람 아니라 죽은 사람이라도 좋소. 난 판결을 
감수하겠소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낯선  사람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바깥쪽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
다. 바람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분명하고 또렷하게 밤을  타고 들려왔던 것
이다. 그러나  그때의 발자국 소리가  살아있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도대체, 이렇게 밤늦은 시각에 누가 오는  거요?" 제이비즈 스톤이 두려
움에 벌벌 떨면서 소리쳤다.
  "웹스터씨가 요청한  대로 배심원들이 오는  겁니다." 술잔에  담긴 펄펄 
끓어오르는 술을 홀짝이며 낯선 사람이 말했다.  "한두 사람은 몰골이 아주 
흉측할 텐데 용서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들은 아주 먼길을 따라 오는  분들
이니까요," 
  4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퍼런 불빛이 감돌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
고는 열두 사람이 차례차례 한 명씩 집으로 들어섰다.
  만일 바로 전의  제이비즈 스톤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의 
그는 공포에 눈이 멀  지경이 되었다고 할 만하다. 독립 혁명  당시에 모호
크 계곡을 화제와  공포로 휩쓸었던 왕당파의 워터  버틀러가 눈에 띄는가 
하면, 백인들이  화형대에 묶인 채 타  죽는 것을 보고는 인디언들과  함께 
환성을 지르던 배신자 사이몬 거티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은 스
라소니의 눈처럼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사냥용 셔츠에는 사슴을  잡다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인디언 추
장인 필립 왕이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납고 거만한 모습으로 나타났
는데, 그의 머리에는 그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혔던 거대한  칼 자국이 그대
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을 형차에 묶여 능지처참을 하던  잔인한 인간 데일 
총독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플리머스  식민지를 그토록 괴롭히던  메리 
마운트의 모톤이 홍조를  띤 채 유연하고 잘생긴  얼굴 모습으로 나타났는
데, 그의 얼굴에서 믿음 깊은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을 읽을 수 있었다. 북
실북실한 검은 털로  가슴이 뒤덮인 잔학무도한 해적 티치도 눈에  띄었다. 
사람을 목 졸라 죽이던 손을 하고  목사복을 입은 채 존 스미트 목사가 마
치 교수대를 향해  걸어가듯 기품있는 걸음걸이로 들어섰다. 그의 목  둘레
에는 아직 밧줄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지만, 한 손에는 향수를  뿌린 손수
건을 들고 있었다. 이들이 방에 들어왔을 때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지
옥의 불씨가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그들이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낯선 
사람은 그들의 이름과 행적을  밝혀줌으로써 드디어 열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났다. 낯선사람의 이야기에는  거짓말이라고는 없었으니, 이들 열두 사람
은 모두 미국에서 제 몫을 담당했던 사람들이었다.
  "배심원들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웹스터씨?"  그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낯선 사람이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대니엘 웹스터의 이마에 땀이 맺혔으나, 그의 목소리는 뚜렷했다.
  "아주 만족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배심원 가운데 아놀드  장군이 
보이지 않아 섭섭하긴 합니다만."
  "베네딕트 아놀드는 다른 일 때문에  바쁘십니다."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낯선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아 참, 재판관을 요청하
셨던 것 같은데요."
  그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들어  문을 가리키자, 청교도 식의  복장으로 
근엄하게 차려 입은 키 큰 남자 하나가 광신도의 타는 듯한 눈초리를 번쩍
이며 방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재판관석에 앉았다.
  "호손 판사께선 경험이 많은 법률가이십니다." 낯선 사람이 말을 이었다. 
"이 분께선 언젠가 세일럼에서  열렸던 마녀 재판을 주재하신 적이 있으시
지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나중에 가서 회개하는 분들도 여럿 계십니다만, 
이 분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유명한  기적과 같은 일을 수행한  다음 회개하다니요?" 근엄한 
늙은 판사가 말했다.  "안될 말이지, 그들은 교수형에 처해야  하오, 모조리 
교수형에 처해야 한단 말이오." 그리고 그는  제이비즈 스톤의 영혼에 얼음
이라도 두들겨 넣는 듯한 태도로 혼자서 무언가 중얼거렸다.
  그리하여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충분히 예상하였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변호하기 좋은 방향으로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제이비즈 스톤은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도 별로 하지 못했다.  사이몬 거터를 한 번  쳐다본 
다음 그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혼절한 것이나 다
름없는 그를 원래 있던 구석자리로 되돌아 가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재판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재판은  재판답게 
계속 진행되었던 것이다.  대니엘 웹스터는 한창 때 몇몇 까탈스러운  배심
원들이나 교수형을 선고하는 재판관과도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처럼 까탈스러운 배심원들과 재판관은 만나 본 적이 없고,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눈에 빛과 같은  광채를 발하며 앉아 있었으며, 
낯선 사람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재판정을 지배했다.  그가 이의를 
제기할 때면 매번 "이의 수용합니다."라는 답변이 나오기 마련이었고, 대니
엘 웹스터가 이의를  제기하면 "이의 기각합니다"라는 답변이 나오기 마련
이었다. 글세, 스크래치씨 같은 친구한테 어찌 공정한 경기를 기대할 수 있
겠는가.
  이런 일이 마침내  대니엘의 신경을 건드리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용광
로의 쇠처럼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변론을 하려고  일어섰을 대 그는 
법과 관련하여 알려진 모든 꾀를  동원하여 낯선 사람은 물론 재판관과 배
심원들에게 비난을 퍼부으려  했다. 그렇게 해서 법정 모독이 되든  아니면 
그 때문에 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젠 더 이상 개의치 않을 정
도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변론할 내용을  생각하면서 점점 더 열이  올라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생각을 집중하면  할수록 점점 변
론할 말들이 마음 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결국에는 마침내 일어서서 변론할 차례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번갯불과
는 같은 맹렬한 공격을 잔뜩  퍼부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리고 변론을 시작하기  전에 그가 늘 하던 버릇대로 잠깐  동안 재판
관과 배심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 어린 광채가 전보다도 두  배는 
더 강해져 있다는 점과 그들  모두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여우를 잡기 직전의 사냥개와도 같았던  것
이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동안 방안에 퍼진 시퍼런  악의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느끼게 되었다. 그때 자신이 하려고  했던 것이 무
엇인가를 새삼 깨달은 다음 마치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막 모면
한 사람처럼 앞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들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단지 제이비즈 스톤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 
때문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그들의 번쩍이는  눈에서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이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는 것을 보고서도 눈
치채게 되었다. 그리고 만일 그들 자신의 무기를 갖고  그들에 대항해서 싸
운다면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지 말
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는 어쨌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눈이 
불타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분노와 공포심이었던 것이다.  그 분노와 공포
감을 일소해  버리지 않는다면 재판에서 질  것이 뻔했다. 잠시 동안  그는 
검은 눈으로 석탄 불과도  같은 빛을 발하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
고는 이윽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누구가 들을 수  있는 또렷한 목소
리로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말하길, 자신이 원하기만 하며 그는 천상 세계
의 하프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일이 그에게는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간단하고 손쉬웠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남을 저주하거나 비방하는  것으로 말의 서두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한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고 한 인간을 인가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느끼는 단순하고 소박한 것들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젊었을 때 느꼈던 맑게 개인 아침의 상쾌
함, 배가 고팠을 때 먹었던  음식의 맛, 어릴 적에 느꼈던 하루하루의 새로
움 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끄집어내  가지고는 
자기 손 안에  놓고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일들은 
좋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자유가  없다면 병적인 것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
리고 그가 노예가 된 사람들과 노예 상태의 비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목소리는 마치 거대한 종소리와도 같이 우렁찬 것이 되었다.  그는 미국 초
창기 시절에 대해, 그리고 그 시절을 이룩하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
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는 허풍선이의 과장된 연설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
을 직접 깨닫게 하는 그런 종류의 연설이었다. 일찍이  인간이 저질렀던 모
든 잘못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잘못한 일과 잘한 일을 거울삼아, 또한 
고통과 기아로부터 벗어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이룩
하게 되었는가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심지어  배신자까지도 
그렇게 새로운 것을 이룩해 나가는 데 제몫을 했다는 점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는 제이비즈 스톤에게 주의를  돌려 그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
다. 운이 나쁜 상태에서 그 운을 바꿔 보려고 애를  썼던 평범한 사람 가운
데 하나임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쁜 운을 바꾸려 했던  까닭에 
이제 그는 영원히 벌을 받게 되었다는 점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제
이비즈 스톤에게는 좋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며, 그가  어떤 좋은 점을 
지니고 있는지도 보여 주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냉혹하고  비열한 면도 없
지 않으나 그는 여전히 한 인간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이는 동시에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하다는 점도 덧붙여 말했
다. 그리고  어떤 점이 자랑스러운 것인지를  느끼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자세하게 이야기를 통해 보여  주었다. 그렇다, 설령 지옥에 빠지더라도 인
간이 인간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수 없다. 이쯤 이야기가 되었을 때, 대니
엘 웹스터의 목소리는  오르간이 울리듯 장엄해졌지만, 그는 이미 어떤  한 
특정한 사람만을  변호하기 위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인간들의 실패와  끊임없는 여행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은 속임수에 넘어가고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또한 
꾐에 현혹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위대한 여행의 길을  걸
었다는 점도 역설하였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난 어떤 악마도  그 여행의 내
적 가치를 알 수 없으며, 오로지 안간만이 그 진가를  알 수 있음도 덧붙여 
말했다.
  5  
  난로의 불이 사그라지기 시작했고 새벽녘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대니
엘 웹스터가 이야기를 끝마칠 즈음엔 어슴푸레한 빛이 방안을 감싸기 시작
했다. 끝에 가서 그의  이야기는 뉴햄프셔 지방으로, 각각의 사람들이 사랑
하고 집착하는 대지의 어느 지점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그것을  한 폭의 그
림처럼 펼쳐 놓았고,  각각의 배심원들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들을  그들
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숲과 숲 속의  비밀과도 같이 들렸으
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바다와 바다의 폭풍과도 같이 들려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의 목소리에서 나라를  잃어버린 국민들의 외침을 듣기도 하였으
며, 또한 어떤  사람은 오랜 세월 기억하지  못했던 자그마한 정경, 해로울 
것이 어무것도없는 정경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어쨌든 사람마다  모두 무언
가를 제각기 보게 되었던 것이다. 대니엘 웹스터가 변론을  끝마쳤을 때 그
는 자신이 제이비즈 스톤을 구제하게 되었는지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기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재판관과 배심원들의 눈에는 번쩍이던 빛이 사라졌고, 그리고  그 순간만큼
은 그들이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 왔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간이라
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변론을  마치겠습니다." 대니엘 웹스터는 이렇게  말하고 산처
럼 우뚝 서 있었다.  그의 귀에는 아직 자신의 웅변이 메아리처럼  남아 있
었고, 그리하여 호손 판사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까지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배심원들은 물러가서  어떤 판결을 내릴지 상의
하기 바랍니다."
  월터 버틀러가 그의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그의 얼굴에는 어둡지만 활기
에 찬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배심원들은 어떤 판결을 내릴지 상의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다음 낯선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상의  결과 
피고 제이비즈 스톤의 무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낯선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싹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월터 버틀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판결은  증거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저주받은  자라 하더라도 웹스터씨의 웅변
을 듣고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탉의 긴 울음소리가 희뿌연 잿빛의 아침 하늘을 
갈랐다. 이윽고  재판관과 배심원들은 마치  아무도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갑자기 한 줌의 연기처럼 방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낯선  사람은 대니엘 웹
스터에게 몸을 돌려 쓴웃음을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버틀러 소령은 
항상 대담한 사람이었고. 그래도  그처럼 대담해질 줄은 생각도 못했소. 어
찌되었든 두 분께서 서로 축하를 올리듯 나도 두 분께 축하를 올립니다."
  "괜찮으시다면 서류를 먼저 받고 싶소."  대니엘 웹스터가 이렇게 말하고
는 서류를 받아 이를  네 조각으로 찢어 버렸다. 그때 종이의  감촉이 묘하
게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자, 이젠 당신 차례요." 대
니엘 웹스터는 손을 뻗쳐 마치 곰을 잡는 덫과도 같이 우악스런 힘으로 낯
선 사람의  팔을 잡았다. 정정당당한  경기에서 스크래치씨와 같은  사람을 
일단 이기게 되면 그의 마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크래치씨도 이 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낯선 사람은 몸을 비틀기도 하고 꿈틀거려 보기도 했으나 대니엘 웹스터
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  이봐요, 웹스터씨." 그는 창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리... 아야... 어리석은 짓이요. 만
일 당신이 소송 비용 때문에 걱정이 되신다면 물론 제가 기꺼이 지불하..."
  "그렇게 해야  할 거요." 낯선 사람의  이가 맞부딪쳐 소리가  날 정도로 
그를 흔들어 대면서 말을 이었다. "이 식탁  앞에 즉시 앉아서 약속 문서를 
작성하시오. 최후의 심판 날이 될 때까지 제이비즈 스톤은  물론 그의 상속
인이나 법적 양도인 누구도 결코 괴롭히지 않을뿐만 아니라 뉴햄프셔 사람 
가운데 누구도  다시는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 문서를 작성하란  말이오. 
만일 뉴햄프셔 주에서 지옥 같은 분란이라도 일으키고 싶다면 이방인이 도
와주지 않아도 우리가 알아서 일으킬 것이니 말이오."
  "아야!" 낯선 사람이 말을  이었다. "아야! 글쎄요, 분란을 일으켜도 그렇
게 크게 일으킨 적도 없었지요. 그렇지만... 아야... 좋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래서 그는 의자에  앉아 약속 문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대니엘  웹스
터는 계속 끝까지 그의 코트 옷깃을 손으로 꽉 잡고 있었다.
  "이제 가도 되겠습니까?" 대니엘이  문서가 격식을 갖추었는지,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지를 검토하고 나자, 아주 겸손한 어투로 낯선 사람이 물었다.
  "간다고?" 한 번  더 낯선 사람을 잡아 흔들어 대면서  대니엘이 말했다. 
"나는 아직 당신한테 어떤 식으로 빚을  갚을지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이제 
사건 비용은 치름 셈이나 나하고는 아직 셈이 끝나지  않았소. 나는 당신을 
마쉬필드로 데려갈까 생각 중이오." 그는 무언가  궁리를 하는 듯한 표정으
로 말했다.  "우리 농장에 철문이라도 들이받아  뚫을 수 있는, 골리앗이란 
이름의 숫양  한 마리가 있소. 그  숫양이 노는 들판에다 당신을  풀어놓은 
다음 그 놈이  당신한테 어떤 대접을 하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
요.'
  그건 그렇고, 이렇게 말하자 낯선 사람은 애원을 하기도  하고 호소를 하
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하도 겸손하게 애원하고 호소하는 바람에  천성적
으로 인정이  많은 대니엘은 결국 그를  놓아주기로 했다. 이에 대해  낯선 
사람은 너무도 고마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서로 친구임을 보여  준
다는 뜻에서 떠나기 전에 대니엘의 점을 쳐 주겠다고  제안했다. 비록 대니
엘은 일반적으로 점쟁이들을 별로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
이기로 했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낯선 사람은 다른 점쟁이들과  약간 달랐다. 
어쨌든, 그는 대니엘의 손금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자세히 눈여겨 본 다음, 
주목할 만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하였다. 그러나 그건 모두 과거의  일이었
다.
  "그렇소, 그건 모두 사실이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오." 대니엘 웹스터
가 말했다. "그런데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소?"
  행복하기라도 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낯선 사람은 씩 웃으며, 머리를  끄
덕였다. "미래는 당신이 생각한  대로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장래는 어둡군
요. 웹스터씨, 너무 큰 야망을 갖고 계시군요."
  "그렇다오." 대니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싶어한다
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거의 이루어질 것  같으나 결국에는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낯선 사람
이 말을 이었다. "당신보다  못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것이고, 당신 차례는 
그냥 지나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대니엘 웹스터일 것이오.  이야기를 계
속 하시오." 대니엘 웹스터가 말했다.
  "두 명의 건장한 아들을 두실 겁니다."  머리를 끄덕이며 낯선 사람이 말
했다. "두 아들한테 가문의  기반이 될 것을 기대하시겠지만, 둘 다 전쟁에 
나가 죽게 될 것이고 아무도 위대한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죽든 살든 내 아들은 여전히 내  아들이오." 대니엘 웹스터는 이렇게 말
했다. "이야기를 계속하시오."
  "멋진 연설을  많이 해 오셨지요." 낯선  사람이 말했다. "앞으로도  멋진 
연설을 더 하시게 될 겁니다."
  "아, 그렇수?" 대니엘 웹스터가 말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하시는 멋진  연설 때문에 수많은 당신 친구들을 적
으로 만들게 될 겁니다." 낯선 사람이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당신의 이름
을 '불명예'를 뜻하는 이커바드라고 부르거나 그밖에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될 겁니다. 뉴잉글랜드에서조차 당신이 옷을 바꿔 입고  나라를 팔아먹었다
고 떠들어 댈 겁니다. 당신이 반대하는 그들의 커다란  목소리는 당신이 세
상을 뜰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그래도 정직한 연설이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개의치 않겠소." 
대니엘 웹스터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낯선 사람을 쳐다  보았다. 그들의 시
선이 서로에게 고정되었다.
  "질문이 하나 있소." 대니엘 웹스터가 말했다. "나는 합중국을 위해  일생
을 걸고 싸워 왔소. 합중국을 분열시키려는 자들에 대항해서  싸우는 이 싸
움이 내 살아 생전 승리로 끝나겠소?"
  "살아 생전 보지는 못할 겁니다." 불길한  표정이 되어 낯선 사람이 말했
다.
  "그러나 승리할 겁니다.  게다가 당신이 세상을 떠난 다음 수천  명의 사
람들이 당신이 하신 말씀 때문에 당신의 뜻을 위해 싸우게 될 겁니다."
  "아, 그렇소이까? 몸통이  길고 호리호히한 데다가 얼굴은 바싹  마른 이 
점쟁이에다가 고리대금업자인  양반아!" 대니엘 웹스터가 큰소리로  우렁차
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방 먹이기 전에 어서  당신 나라로 썩 꺼져 버
리시오! 독립 13개 주의 이름을 걸고 말하건데 나는 합중국을 구하는 일이
라면 지옥에라도 뛰어들 작정이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말이라도 놀라게 할 만큼 한 대 걷어차려는 듯 
발을 뒤쪽으로 끌어 당겼다.  다만 그의 신발 끝이 낯선 사람의  몸에 닿았
을 뿐인데도 그는 수집 상자를 팔  아래 끼고는 나는 듯이 문 밖으로 빠져
나갔다.
  "자, 그럼 술병에 술이 얼마나 남았는지 봅시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
기 시작한 제이비즈 스톤에게 눈을 주면서  대니엘 웹스터가 말했다. "밤새 
떠들다 보면 당연히 목이 마르기 마련 아니겠소? 아침 식사 때에는 파이가
나왔으면 하오, 스톤씨."
  사람들에 의하면, 이런 일이 있은 다음 악마가 마쉬필드  근처에 올 때마
다 지금까지도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돌아간다고들 한다.  그리고 뉴햄
프셔 주에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악마를 볼 수 없다고들 한다. 한  마디 덧
붙이겠는데,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메사추세츠나  버몬트 주에도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해설 -어리숙한 악마를 물리친 통쾌한 억지
  호손의 [젊은 향사 브라운]이 초기 미국사에 드리운  죄악의 그늘을 반영
하고 있는데 비해 베네의 [악마와 대니엘 웹스터]는  미국사의 소박하나 건
강했던 시절을 상기시켜  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건국 초기의 미국과 그 정신을 알고 있어야  한다. 대니엘 웹스
터를 비롯해 호손 판사나 버틀러 소령, 사이몬 거티  등은 실존했던 인물들
이며 이야기 자체도 미국 동부의 전설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대니엘 웹스터의 변론은  특히 건강한 미국과 그 정신에 의지하고  있다. 
먼저 그는 미국을 강조해 미국인들만으로 재판관과 배심원을 부르게 한 뒤 
미국 정신을 내세워 '계약은 이행되어야 한다.'는 법논리의  한 기둥을 흔들
어 놓는다. 그리고 이어 법정에서는 정상참작이나 받을까  말까한 인간적인 
사유들을 달변으로 늘어놓아 스톤의  명백한 계약위반을 무죄로 이끌어 간
다.
  악마도 역시 어리숙하고 순진한 점에서는 초기 미국의 건강한 상식에 속
해 있다. 재판관과  배심원으로 동원한 망령들에 대한 느슨한 통제도  그렇
거니와 대니엘 웹스터의 억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것도 그렇다. 
어찌보면 이 작품은 [파우스트]의 패러디일 수도 있지만  감동이 전혀 다른 
것은 악마가 그렇게 미국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두기를 권하고 싶은 점은 어둡고 불길한 환상을 동원
하면서도 전혀 다른  효과를 내는 베네의 특이한 솜씨다. 일반적으로  악마
와의 계약이나 악마와 그들 생전의 악행으로 이름높은 망령들의 등장 같은 
것들은 음울하고  비극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그러나 베네는 반대로  선의 
승리를 확신시키는 장치로 그들을 동원하고 있다. 패배하고  조롱당하는 것
은 오히려 악마다.
  그 다음  또 하나 상기시키고 싶은  것은 환상과 기상의 효과이다.  만약 
이 작품의 무대가 현실의 법정이 되고 내용은 한 의로운 변호사가 악덕 고
리대금업자와의 불평등  계약에 고통받는 채무자를  구해 주는 것이었다면 
틀립없이 지루한 얘기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적절하게 구사된  환
상과 기상은 중학생들조차 감동시키기 어려운 미국의 건국이념이나 감상적
인 휴머니즘을 통쾌함과 후련함으로 읽어나갈 수 있게 해준다.
  자가 베네에 대해서는 앞에서  간략하게나마 소개한 적이 있기에 여기게
서는 그가 국민시인으로 불리울 만큼 미국인들로부터 사랑받은 시인이기도 
했다는 점만을 덧붙인다.

    국경 위의 집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우리가 마악  식탁 앞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하려는데 프록 코트를  입고, 
머리에는 굴뚝 모자를 쓴 사람들 몇이 우리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국제기구 상부기관에서  왔습니다." 그들이 말했
다. 
  그런 예기치 않은 손님이 온다는 것은 우리에겐 좀  난처한 일이었다. 왜
냐하면 우리는 남의 땅이나 부쳐먹는 가난한 시골사람이니까.  그날 우리의 
저녁 음식은 만두였고,  자루에다 짚을 넣은 우리의 이부자리는 벌써  땅바
닥에 깔려 있었따.
  우리는 신사들에게 식사를 권했지만, 그들은 외교관의 예법이 그렇듯, 아
주 정중하게 거절했다.
  "우리는 여기에 새로운 국경선을 제정하기 위해 파리에서 파견되어 왔습
니다. 어서 편히 드십시오. 우리는 국경선만 정하고 곧 가겠습니다."
  "왜 바로 여기지요?"  우리가 물었다. "그런 거라면  마당 건너라든가 집 
뒤로 긋지 않고요?"
  "그럴 순 없지요." 그들이  말했다. "국경이란 개인의 편의를 따를 수  없
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건 저 복도 한 가운데를  지나 이 식당을 양
분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조리대는 국경  이쪽, 식탁은 국경 저쪽이 
될 수도 있는 거죠."
  "마음대로들 하시구료.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금을 긋는 것이라면 그게 
무슨 대수겠소." 우리 장모님의 말씀이었다.
  그들은 회의용으로 쓰기  위한 탁자 하나를 빌리자고 했다. 우리가  네모
난 탁자를 내주자 그들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회의용  탁자는 둥글어야 하
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탁자가 우리에게는 없었따. 그들은 결국 톱을 
좀 빌리자더니 탁자의 모서리를  잘란서 둥그르름한 모양이 되게 하고서야 
자리를 잡았다. 결국 우리 탁자 하나만 작살이 난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부엌으로 물러났다. 그들이 자리  잡
은 거실에서는 흥분된  음성이 들려나오곤 했다. 한 번은 누군가가  울기도 
했다. 외교관들은 간간이 달려나와  물 한 컵을 청해 마시고는 또  즉시 그
리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졸음이  와서
자고 싶어했고, 집  안은 그을음 냄새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좀처럼 
끝이 나지 않았다. 밤 한 시경이 되었을 때 그들의  토론은 결말을 보는 듯
싶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둘러 앉은 탁자를 반으로 가르면서  옷장 앞을 지
나 창문 쪽으로  곧장 국경선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곧바로 
결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할 경우엔 한쪽의 자연보고가  너무 크게 훼
손을 입는다는  것이었다. 즉 이 경우엔  맛좋은 월귤나무 열매 술이  가득 
들어 있는 커다란 술통이 옷장 쪽으로 속하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새벽나절이 되었을 때야 그들은 일을 끝내고 물러갔다. 
  그러나 우리가 집  안에서 움직이는 데 크나큰  어려움은 없게 되었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즉  모든 식구에게 영구 통행증 같은 것이  발급된 것이
다. 옷장에서 침대로 갈  때라든가, 또는 부엌 부뚜막에서 마루청으로 나갈 
때 그 증명서만  제시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른과 동반한 아이들에겐  따로 
검사를 하지 않았다.
  이 증명서 조사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우리집엔 두 사람의 제복을 입은 
관리가 파견되었다. 각기 국경 한쪽의 권리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은 그 회의가 있던 바로 그 다음 날에 파견되어  왔는데, 그런대로 봐줄 만
한 사람들었었다.  한 가지 곤란한 점은  우리 음식을 죽자고 넘겨다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배가 출출해서 그러는 것인데 어쩌겠는가. 우리는 
그들을 식사에 초대했다.  그럴 때 그들은 입으로는 예절 바르게  사양했지
만, 한 번도 진짜로 안 먹고 물러나는 적은 없었다. 나중엔 빈 말로도 같이 
먹자는 소리는 꺼내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리고는 별일없이 지나갔다.  딱 한 번 이런  사건이 있었다. 밤에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국경선은 바로 내 옆을 지나고 있어서, 내 
맞은 편의 옷장은 국경 저쪽이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왜
냐하면 나는 '특별  야간 통행증'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나는 잠이  깨서 무
의식적으로 팔을 뻗었는데, 그 손에 장화를 신은 다리 한 짝이 잡혔다.
  "거 누구냐!" 내가 소리쳤다.
  "쉬, 조용히 해! 세관원이 깨요." 누군가가 속삭였다.
  나는 곧 이게 밀수꾼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일에 끼어들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경보를 울렸다. 곧 불이 켜지고, 아이들이 깨어났다. 
그러나 내 손에 잡힌 것은 월귤나무  열매 술을 몰래 한 잔 따라 마시려던 
한쪽 세관원에 지나지 않았따. 그러니 뭐라고 한단 말인가. 나는 얼결에 이
렇게 말했을 뿐이다.
  "장화를 신은 채 남의 침대를  넘어다니다니, 당신 미쳤소! 새로 빤 시트
를 깐  것이 보이지도 않아요? 아무리  나라에서 나온 사람이라도  그렇지, 
장화쯤은 벗을 줄 알아야지."
 "아, 양말이 더러워서..."
  상대방은 이렇게  핑계를 대고 물러갔다. 나는  이 일로 그 이튿날  내내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어쨌든  저쪽은 권력을 가진 사람인데,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하고도 무사할 것인가  말이다. 결국 나는 그날  낮 
남몰래 월귤나무 열매  술을 한 병 따라서 그의  책상 밑에 넣어 주고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국경은 우리 식당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음식이 조리되
는 부뚜막은  국경 저쪽이었고, 식탁이 놓여있는  곳은 국경의 이쪽이었다. 
국경을 넘나드는 물건에  대해서는 세금을 물어야 한다. 심지어는 포크  같
은 것에 대해서까지도.  그러나 일반적으로 먹는 식사에 대한 세율은  그리 
높지가 않았다. 다만 별식에 해당하는 것,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파이 같
은 것에는 엄청난 세금이  붙었다. 그것도 양쪽에서. 그래서 파이같은 것을 
먹어 본다는 것은 일찌감치 단념하고 말았다.
  양국의 관계는 그 국경책정회의 때  일치를 본 성명서에 의해 서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가끔 대표단의 위원들이  우리집에 찾아와서 묵고  가는 
수도 있었는데, 그들은 소파 위에서 자거나 부엌 의자들을  한데 붙여 놓고 
그 위에서 잤다.
  그런데 얼마 지나자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에  나는 별로 대수롭
지 않게 생각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 이날 저녁 음식은 후추를  친 쇠고기 스프였
다. 이때 아내가 부탁을 해왔다.
  "여보, 초에 절인 오이 몇 개만 갖다 주세요."
  그것은 마루방에 있는 통 속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컴컴한 마루방
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그때 뭔가 발길에 채였다. 전에는 같은 자리에 아무
것도 없던 것을 아는 터라  나는 화가 났다. 나는 성냥을 켜보았다. 그랬더
니 거기엔 벙커가  하나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갓 만들어진 벙커였다. 
그 위엔 위장을 하느라고 초에 절인 오이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나는 아무
에게도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평화시에 무슨 벙컬까 하고 생각했다. 어쩌
면 아이들이 병정놀이를 하느라고 세워놓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또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그때도 저녁 식사 때였는데,  나는 포크를 식탁 밑으로 떨어뜨렸다. 식탁
보가 밑에까지 깊게 드리워 있어  굴러 떨어진 포크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가 않았다. 나는 결국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어두침침한 그곳에서 공병대의 마크를 단 어떤 육군 중위와 부딪
치고 말았다. 그는 납작 엎드린 채 쌍안경으로 식탁에  둘러 앉은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마루방 쪽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철모에는 잎사귀 달린 나뭇가지가 위장으로 꽂혀 있었다.
  "쉬, 당신도 애국자라면 조용히 하시오!" 그가 내게 속삭였다.
  "글세, 그렇게 말씀은 하시지만"  하고, 나직이 대꾸했다. "나는 집안에서
움직일 일이 너무 많구료.  이쪽에 갔다가는 곧 저쪽엘또 가야하고, 그러니 
당최 내가 어느 쪽에  속한 사람인지 알겠어야 말이지 원. 점심  먹고 낮잠 
잘 때라면 나는 이쪽  소파에 눕곤 하니까. 그때라면 나는 분명  이쪽 편이 
이기는 걸 바라지요. 그러나 밤에 자러 가기 전 발을 씻을 무렵에는, 그 장
소가 저쪽인 만큼, 내가 있는 그쪽이 내 쪽으로 여겨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선 정말 훌륭한 애국자가 된다는 것이 더럽게 어렵지요."
  "그저 잠자코만 계시오!"
  이렇게 말하고 중위는 내가 떨어뜨린 포크를 집어 주었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이 계속해서 빈번히 발생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우리가 먹는 스프 그릇 속에선 양쪽에서  서로 설치한 소형 
지뢰가 발견되는 판이었다. 특히 토마토 스프나 감자 스프를  먹을 땐 각별
히 조심해야 한다. 멀건 고기국을 먹을 때나 안심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멀건 고기국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이니까.
  나는 이 해의 내  생일은 치르지 않을 셈이었다. 그런 모든  사건들 때문
에 나는 좀 긴장이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양쪽에서 그런 우스꽝스러운 
쇠붙이 망치를 집안 도처에다 설치해 놓은 것이어서 집안엔 당최 사람들을 
초대해 들일  공간이 없었다. 그런데 내  생일이 되기 이주일 전부터  생일 
축하 카드들이 사방에서  와대니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가. 그것도  나로서
는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그것들은 국경  양쪽에서 답지하는 것들
이었다. 그리고내 생일을 놓치지 않고 찾아와서 축하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디서 날 아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게 되었는지 몰랐다.
  그리고 생일날엔  정말 대집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모두가 전혀  낯선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고만고만한 나이의 젊은  사람들이었고 
옷차림도 두 패로 나뉘어 말쑥하니 동일했다.
  그들은 아주 쾌활하게 집 안을 활보하면서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손님 접대를 했다. "모자를 이리 
주시지요?", "외투를 벗으실까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그런 것을 거부
했다. 감기에 걸릴까봐 싫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외투속과 모자 속엔 무엇
을 감추었길래 그러는 것일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이 아직 상대
편에 대해 적대감을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까
지 지속될까?
  나는 담배를 사와야겠다고 하고 얼른 집을 빠져 나왔다.
  어디 다른 데 일자리를 빨리  구하고 집을 얻어서 식구들을 데리고 옮겨
야 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찾아오기나 할는지...
 
    작품해설   -제도와 권력의 희화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것은 주로 초자연적인 현상과 관련된 환상과 기
상이었는데 그중에는 여러 문학적  장치를 빌어 아예 '있을 법한 자연'으로 
설정된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이 [국경 위의 집]은 인위적인 제도,  특히 그
중에서도 국가현상을 그야말로 기상으로 처리한 일종의 희화다.
  인간이 만든 제도  중에서 국가만큼 그 당위성과  미덕을 옹호받은 것도 
드물다. 하지만 국가는  또 그만큼이나 자주 부정과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문학도 국가에  대해서는 그리 우호적인 편이 못된다. 오히려 
이 의제된 인격의 모순성과 폭력성은 그 권위주의나 편견,  변덕 따위와 더
불어 문학의 적의를 더 자주 자극해왔다는 편이 옳다.
  특히 우리 세기에 들어 많은  문학적 영웅들이 국가와 그 권력현상에 적
의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그것에 속한 제도나 현실의 지배자를 신랄하게 공
격했다. 대개는 국가의 영향력만큼이나 많은 분량의 원고에다  국가의 권위
만큼이나 장중한 어조였다. 거기 비해 이 [국경 위의 집]은 한 특이한 예외
가 된다.  이처럼 짧은 길이에 이토록  경쾌한 어조로 국가의 여러  악덕과 
약점을 선명하게 드러낸 경우는 흔치 않았다.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온갖 횡포를 
'국가'라는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자유롭게 그려낼  수 있었던데에는 결코 
평탄할 수  없었던 그의 개인적인 이력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흔히 영국인으로  분류되는 카네티는 불가리아  태생의 스페인계 유태인이
다. 청년시절 빈대학을 졸업하고 오스트리아에 머무르던 그는  나치의 박해
가 심해지자 런던으로 이주, 그곳에서 독일어로 소설을 썼다. 그는 이 시기
에 매우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카파카나 
조이스와 비견되는 문인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장편소설 [현혹]과 희곡 
[허공의 코미디]로 유명한 그는 198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어셔 가의 몰락  -에드가 엘런 포우 지음
  그의 심장은 줄을 꼭 조여 놓은 류트
  줄을 건드리자마자 이에 응답한다.
  -드  베랑제(프랑스 시인  삐에르-장 드  베랑제(1780~1857)의 시  [거부
(1831)]에 나오는 구절. 포우는  원래의 시에 '나의 심장'으로 되어 있는 부
분을 '그의 심장'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음산하고 어둡고도 조용하던 가을 어느 날, 구름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낮게 하늘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날 나는 하루종일 혼자서  말을 달려 유
난히도 쓸쓸한 시골  길을 지나 땅거미가 드리워지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음울한 어셔 가의 저택이 보이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저택을 처음 보는 순간  견딜 수 없는 울적한 감정이  내 
영혼을 압도하였다. 견딜 수  없다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시적인 기질로 인해 어느 정도까지는  유쾌해질 수 있는 
감정을 갖고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황량하거나 무시무시한 것이  제아무리 
준엄한 자연의 모습을 취하고 있더라도 마음은 이를 보통 받아들이기 마련
이다. 그러나 저택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그처럼 어느 정도까지  유쾌해질 
수 있는 감정을 갖고 있더라도 풀릴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나는 내 앞
에 펼쳐진 광경에 시선을  주었다. 덩그런 한 채의 저택과 저택  주변의 간
소한 경관, 황량한 담, 멍한  표정의 눈과 같은 창, 몇 포기의 무성한 사초, 
몇 그루 되지 않는  쇠잔한 나무의 줄기들에 시선을 주었을 때,  나의 영혼
은 완전히 억눌린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때의 느낌은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어떤 느낌과도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아편 중독자가 
약 기운이 사라져  고통스럽게도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했을 때의 느낌,  고
통을 가리던 장막이  끔찍하게도 걷혀졌을 때 아편  중독자가 갖는 느낌과 
비교한다면 그래도 비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음은 차디차게  얼어붙
고 가라앉은 동시에 아픔에  젖어, 또한 생각은 채울 수 없을  정도롤 쓸쓸
해져, 아무리 억지로 상상력을 자극하더라도 다시는 마음과  생각을 숭고한 
그 무엇으로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
엇 때문일까? 잠시 멈춰 서서 생각을 해 보았다. 어셔  가의 저택을 바라보
고 있는 나의 마음이 이렇게도 무력해지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할 수 없는 불가사의였다. 곰곰이 생각하는  동
안 나에게 엄습해 왔던 어두운 상념들을 아무리 통제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불만족스럽긴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결론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아주 단순한 자연물들을 조합하여 놓은 상태이지만, 그와같은  조합이 우리
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무언가 우리가  지금 느끼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
게 하고 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
향력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에  대한 분석은 도저히 우리들의 능력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불만족스럽기는 하나 이상과 
같은 결론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이런 해석도 가능했
을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구성하고 있는  특정 요소들 -말하자면, 
그림을 구성하는 세부 구성 요소들-을  다르게 배열하기만 해도 슬픈 인상
을 심어주는 힘을 어느 정도  감소시키거나 아주 없앨 수도 있을지 모르겠
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저택 옆에 있는 검은색의 섬뜩한  늪가로 말
을 몰아갔다. 가장자리가 가파른  그 늪은 잔잔한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늪에는 모양을 달리한 채 거꾸로  뒤집혀진 상태로 회색의 사초와 유령 같
은 나무 줄기가, 텅 빈 눈과 같은 창문들이 비쳐지고 있었다. 물 위에 비친 
그 영상들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전보다도 더 한층 오싹하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음침한  저택에서 몇 주일을 머물 것을 스스
로에게 제안했던 것이다. 이 저택의 주인인 로데릭 어셔는  어렸을 적 나의 
친구였는데, 서로 헤어진 뒤로는 수년 동안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 떨어져 살고  있던 나에게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그 편지는 
로데릭이 보낸 것이었는데,  대단히 집요하게 조르는 어투로 쓰여진 이  편
지를 받고 직접 그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의  추신을 보고 그가 신경 
과민에 빠져 있다는 확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는 사연과 정신 이상으로 괴롭다는 사연을 편지에 밝히고  나서, 자신이 가
장 아끼는 친구이자 단 한 명의  진정한 친구인 나를 진심으로 한 번 만나
고 싶다고 하였다. 나를  만나 유쾌한 생활을 하다 보면 그의  질병이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모든 사연과  그밖에 다
른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는 편지의 글투로 보아 망설일 여지가 없다는 판
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요청에는 명백히 진심이 담겨  있었떤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직도 대단히  기묘하다고 생각하는 그의  초청에 
즉시 응했던 것이다.
  어렸을 때 우리들은  마음 속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이긴 했지만,  사
실 나는 그 친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는 너무 지나치게 또한 
습관적으로 말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매우 유서 깊은  그의 가문에는 특
별히 예민한 기질의 소유자가 많은 것으로 오랜 옛날부터 유명하다는 정도
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한 기질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고상한 예
술 작품을 통해  발휘되어 왔다. 최근에 와서 그러한 기질은  관대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자선 사업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표출되기도 하였고,  또한 
복잡미묘한 음악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것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아마
도 음악에 관한 한 그  집안의 사람들은 정통적이고 따라서 쉽게 식별해낼 
수 있는 아름다움보다는 복잡미묘함에 더 열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내
가 알게 된 또 하나의 매우 특이한 사실은 어셔 가가 매우 유서 깊은 혈통
의 집안이지만 어떤 시기에도 영구적인 분가를 형성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 일족은  전체가 직계만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아주 사소하고 
일시적인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항상 그런 상태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바
로 이런 결함이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널리 인정된  사람
들의 성격과 함께 특정 유산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점을 적어도 
머리 속으로는 대략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또한 수세기라는 긴  세월이 경
과하는 동안 유산이 사람들의  성격 형성에 미쳤으리라고 짐직되는 무언가
의 영향력에 대해 깊이있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결함이라고 하
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와 같은 결함은 부차적인 것인지도 모르며, 이
로 인해 결과적으로 조상에서 현재의 자손에 이르기까지 이름과 유산을 온
전하게 전수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국에는 이름과 유산이  동일한 것이 
되어, 저택의 원래 이름이 '어셔 가'라는 기묘하고도  애매모호한 이름과 합
쳐지게 되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농부들의  마음에는 
어셔 가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사는 저택이 모두 '어셔 가'라는 명칭 안
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늪 위에 비친  영상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고 했는데, 다소  어린 아
이와 같은 나의  행동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그서은 무엇인가.  나에게 
미친 유일한 영향이 있다면 이로 인해 내가 맨 처음 받았던 기묘한 인상이 
더욱더 강화되었는데, 이 점을 나는  앞서 말한 바 있다. 또한 미신에 대한 
나의 믿음 -이런  표현 이외에 달리 어떤 표현을 쓸  수 있겠는가-이 급속
하게 강화되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깨
달음은 미신에  대한 믿음 그 자체를  오히려 더 강화시킬 뿐이었다.  오랜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공포감을 저변에 깔고 있는  모든 
감정은 이처럼 모순된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이마도 단지  이런 이유 때문
이었는지 모르나, 늪 위에 비친 저택의 영상을 주시하던  눈을 들어 다시금 
저택 자체를 올려다보았을 때 나의  마음 속에는 기묘한 생각이 싹터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너무 어리석은 생각이어서, 나를 짓누르던 충격
적인 느낌이 얼마나 생생하고 힘이 있는 것이었던가를 보이기 위해 언급할 
따름이다. 어찌나  심하게 상상력이 발동하였던지  나는 정말로 저택과  그 
주변 전체가 나름의 특이한 공기로 감싸여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하늘 전체
를 감돌고 있는 공기와는  아주 딴판인 그 무엇, 고사목과 회색의  벽과 정
적에 싸인 늪에서  뿜어나오는 악취로 이루어진 공기가  저택과 그 주변을 
감싸고 있다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독으로 충만한 불가사의한 공기가  무
디고 둔하게, 눈에 뜨일 듯 말 듯이 납빛으로 뿌옇게  저택과 그 주변을 감
싸고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망상이라고 하지 않고는 달리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나의 영혼
에서 떨쳐 버린 채 나는 더욱더 자세히 저택의  진정한 모습을 살펴보았다. 
일차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특징이 있다면  대단히 고색창연한 저택이라는 
점이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건물은 대단히  퇴색되어 있었으며, 미세한 
곰팡이들이 건물의 바깥쪽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섬세하게  얽혀진 거미줄 
모양의 곰팡이들이 추녀 끝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이런 정도만으로 건물이  엄청나게 황폐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석조물  가
운데 허물어진 부분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의  석조물이 모두가 
부서진 상태라는  사실에서 터무니없는 부조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집의 이러한 모양은 오래되었으나 외관이 그럴 듯한 목공예품의 전체적 모
습을 연상시키는 그  무언가의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바깥쪽 대기의  숨결
에 간섭을 받지 않은 채, 아무도 찾지 않는 둥근  천장 아래에서 오랜 세월
에 걸쳐 썩어가고 있는 오래된  목공예품의 그럴 듯한 겉모습을 나는 떠올
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폐화가 도저함을  암시하는 이와 같
은 징후들을 제외하면 건물의 구조가 불안정하다는 조짐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아주 꼼꼼한 관찰자의 눈이었다면, 눈에 띌까 말까 한 균열이 건물 
앞쪽 지붕에서 시작하여 갈지자 형태로  벽을 타고 내려와 음울한 빛을 띤 
늪의 물 속으로 사라지고 있음을 아마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들에 주목하면서 나는 제방  위의 짧은 길을 지나 저택까지 말을 
타고 갔다.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나의 말을 데리고 간 다음, 나는 고딕풍
으로 된 아치형의  현관 통로로 들어섰다. 은밀한 걸음걸이의 집사가  거기
서부터 나를 안내하였다. 한 마디 말도 없는 집사를  따라 어둠침침하고 복
잡한 복도를  수없이 지나고 나니 집주인의  서재가 나왔다. 왠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서재까지 가는 도중  눈에 띄던 것들 가운데 많은 것이  내가 이
미 앞에서 말한 막연한 느낌을 한층 더 강화시켜 주는  것 같았다. 내가 스
쳐 지나온 것들 -천장의 조각들, 벽에 걸려 있던 음산한 색채의 장식용  주
단들, 바닥에 깔린 검은 흑단, 그리고 발걸음을 옮겨 지나갈 때마다 덜걱거
리는 소리는 내며 울리는 환영과도  같은 전승 기념품들-은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낯익은 것들이나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지만, 또한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얼마나 친숙한  것인가를 주저없이 인정할 수 있었지만, 이런  평범
한 사물들이 불러 일으키는 환영들이 얼마나 낯선 것인가를 깨닫고는 나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층계를 올라가다 이 집안의 주치의와 만났다. 
내 생각에 그의  얼굴에는 교활한 표정과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이 뒤섞여 
있는 거처럼 보였다.  그는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말을  건
넨 다음 지나가 버렸다.  이윽고 집사가 어느 방문을 열고 나를  그의 주인 
앞으로 안내하였다. 
  내가 들어간 방은  매우 넓었으며 천장도 높았다. 창문들은 길고  좁았으
며 바깥쪽으로 돌출해  있었다. 그 창문들은 검은색의 떡갈나무로 된  마루
로부터 너무 먼  거리에 있어서 안에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
다. 심홍색의 희미한 빛이  격자형의 창문을 비집고 흘러 들어오고 있어서, 
주위의 물건들 가운데 창문보다 크기가 큰 것은 충분히 구분해 낼 수 있었
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방안 저쪽 구석이나 격자 무늬로  장식한 반
원형의 천장은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벽에는 어두운  색의 장막이 드리워
져 있었으며,  방안에는 잡다한 가구들이 수없이  많았따. 가구들은 편안한 
느낌을 주지 않는, 고색창연한  모양의 낡고 해진 것들이었다. 수많은 책과 
악기가 어수선하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지만, 방의 분위기에  활기를 불
어 넣어 주지는 못했다. 슬픔의 분위기를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엄숙하고 심오하며 어찌하기 어려운 침울한 분위기가  방안을 감돌
고 있었고 어디에든 깊이 스며 있었다.
  내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어셔는 다리를 펴고 길게 누워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쾌할함이 넘치는  따뜻한 표정으로 나를 맞아 주었따. 그런데  쾌할
함이 넘치는 그의 따뜻한 표정을 대했을  때 그 안에 짐짓 지어낸 듯한 친
절함 -인간사에 권태로움을 느낀 사람이 억지로  꾸며 낸 듯한 친절함- 이 
상당 부분 배어 있다는  느낌을 나는 처음에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나는 그것이 완전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우리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잠시 연민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로데릭 어셔처럼 그토록 짧은 세월에 이처럼  놀
라울 정도로 모습이  변해 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눈앞의 이 
창백한 사나이가 내 어린 소년시절의 친구였다니, 도저히  이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눈에 띄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창백한 얼굴색, 비할 바 없이 크고 투명하며 
빛나는 두  눈, 약간 엷고 핏기가  없지만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곡선을 
일고 있는 입술, 섬세한 헤브라이 형의 코이지만 그런  형태의 코에서는 보
기 드물게 콧구멍이 넓은 코, 잘 생겼지만 두드러지지  않은 탓으로 정신적 
활기가 부족해 보이는 듯한  턱, 거미줄보다 더 부드럽고 가는 머리카락  -
이와 같은 특징들이 관자놀이 쪽이  남달리 넓다는 점과 더불어 쉽게 잊을 
수 없는 그의 용모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한  것이라고는 이와 같은 
용모상의 주요한 특징들이 다만 좀더 두드러져 보이게 되었다는 점과 이로 
인해 그의 용모상의 특징들이 전해  주곤 하던 표정들도 좀도 과장되어 보
인다는 점뿐이었는데, 나는  지금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지 의심이 갈  정
도의 놀랄 만한  변화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제  무시무시
하리 만큼 창백한 피부색이며  불가사의하게 번쩍이는 눈빛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동시에 두려움까지 느끼게 되었다. 또한  비단결 같던 머
리카락도 제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둔 채였다. 그러다 보니 머리는  헝클
어진 망사와 같은 형태가 되어  얼굴 위로 드리워져 있기보다는 위로 들떠 
있게 되었따.  아라베스크 풍의 복잡한  무늬처럼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 
모양을 보자,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도저히 이것이 단순한 보통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즉시 친구의 태도에 앞지가  맞지 않는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
리게 되었다. 그의 태도에  일관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곧  이와 같은 비일관성은 습관적인  발작 -즉, 극도의  신경질적인 
흥분 상태-을 억제하려는  일련의 투쟁, 미약하고도 무모한 일련의  투쟁에
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기야 나는 이런  종류의 사태에 대비하여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의 편지를 읽었기 때문만이  아니
라 그가 지녔던 무언가 소년시절의 특질을 회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또한 
그의 특이한 신체 구조와 기질에 비추어 무언가 결론을 내릴 수 있었기 때
문에, 나는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행동은 명
랑한 것이다가 갑자기 침울한 것으로 바뀌었으며, 침울한  것이다가 갑자기 
명랑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의 목소리도 재빠르게  바뀌곤 하였다. 동물적 
생기를 잃게 되면  그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는  우유부단한 것이 되다
가, 그런가 하면 갑자기  힘에 찬 간결한 목소리로 바뀐다. 갑작스러우면서
도 무게있고, 침착하면소도 공허한 어조로 바뀌는 것이다.  아니,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주정꾼이나 치유가  불가능한 아편 중독자의 경우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납처럼 무거운 균형 잡힌  목소리로, 또한 목구멍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완벽하게 조율된 목소리로 바뀌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무쌍한 어조로 그는 나는 나를 부른  목적이 무엇인지, 얼
마나 진지하게 나를  만나고 싶었는지, 내가 그에게 주리라고 기대하는  위
안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했다. 얼마 동안 이에 대해 말한 다음, 그는 화
제를 돌려 자신의 질병이 어던  성격의 것인지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
를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질병이 타고난 유전인 것으로서, 치료 방법을 
찾느라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즉시 단순한 
신경 게통의 병세에  불과하니 틀림없이 곧 없어질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
다. 그의 병세는  일군의 불가사의한 감정 표출의 형태로 드러난다고  말하
면서, 이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비록 그가 사
용하는 용어나 이야기하는 전체적인  태도에는 나름의 무게가 있었다고 생
각되지만, 그의 설명  가운데에는 흥미를 끌면서도 여전히 갈피를 못  잡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는 병적인 과민성으로 인해 대단히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극도로 단백한 음식이 아니면 견딜 수 없고, 의복도 일정한 
섬유 조직으로 된 것이  아니면 입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또한  꽃의 향기
는 어떤 종류의  것이건 감각을 압박하고, 아무리 약한 광선이라고  하더라
도 눈에 고통이 된다고도 고백했다. 여기에 덧붙여, 다만 어떤 특정한 음향
만이 자신에게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음향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바로 현악기의 음향이라고 했다.
  그가 변칙적이고 이례적인 공포감의 노예가 된 채 여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죽게  되겠지." 그는 이렇게 말했
다. "이렇게  한심스러울 만큼 멍청한 꼴로  죽게 될거야. 이런  꼴로, 바로 
이런 꼴로, 달리 방법이 없이 이런 꼴로 파멸하고 말거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야. 아무리  사소한 사
건이라도 그것이 영혼을 이처럼 견딜 수 없을 만치 휘저어 놓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몸소리가  쳐져. 사실 내가 증오하는 것은 위험  같은 것
이 아니야. 다만 위험에  절대적으로 뒤따르는 공포를 증오할 뿐이지. 이처
럼 무기력한 상태, 한심한 상태에 빠진 채, 그러니까 두려움이라고 하는 무
시무시한 환영과 투쟁을 벌이는 동안, 나는 내가 생명과  이성을 모두 포기
해야만 하는 시기가 조만간 오리라고 느끼고 있지."
  나는 그  외에도 이따금씩, 단편적이고 애매모호한  암시의 도움을 받아, 
그의 정신 상태에  무언가 특이한 점이 또 하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
다. 그는 자신이 현재  살고 있고 또한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떠나려 한 
적이 없었던 그의  저택과 관련하서, 무언가 미신적인 느낌에 홀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택이 미신적인  힘을 지니고 있
어서 도저히 여기에서 다시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미묘한 방식으로 자신에
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가문이 살아왔
던 저택에는 단순히 형태상의 것이든 또는 내용상의 것이든 무언가 특이한 
점이 있어서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다 보니 그의  영혼을 지배할 수 있는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회색의 벽과 작은  탑들의 특이한 생
김새라든가 벽과 탑들이 모두  내려다보고 있는 늪의 어둠침침하고 독특한 
모습이 결국에는 그의  영적 존재에 무언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
다. 바로 이와 관련하여 그는 무언가 미신적인 느낌에 홀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망설이면서도  자신을 이처럼 괴롭히는 특이한 형태의 
우울증은 상당 부분 보다 더  자연스럽고 한결 더 감지하기 쉬운 원인에서 
유래된 것일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 원인은 그가  애틋하게 사랑하는 누
이 동생-오랜 세월 동안 그의 유일한  동무이기도 하며 이 세상에서 단 하
나밖에 남아 있지 않은 혈육인 그의  누이 동생- 이 오랫동안 심각한 질병
에 시달려  왔다는 데, 그리고 이제는  정말 그녀의 죽음이 분명히  눈앞에 
다가왔다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는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비통한 어조
로 말했다. "누이동생이  세상을 떠나면, 내가, 이 절망적이고  허약한 내가 
유서 깊은 어셔 가의 마지막 생존자가 되겠지." 그가 말을 하는 동안, 매들
린 부인(사람들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이 방 저쪽을 천천히 걸어서,  내
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말할 수 없
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여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왜  그러한 
느낌을 갖게  되었는지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저쪽으로  멀어져가는 
그녀의 발걸음에 시선을  주는 동안, 마음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에  짓눌리
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나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호
기심에 차서 그녀 오빠의  얼굴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두  손 안에 
묻고 있었으므로, 나는 다만 평상시보다 한결 더 파리한  피부색이 여윈 손
가락들을 감싸고 있음을,  그리고 그 손가락들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매들린 부인의 질병이 그녀를 돌보는 의사들의 기술을 무색한 것으로 만
든 지는 오래 되었다. 고질적인 무감증, 점진적인  신체 쇠약증, 일시적이긴 
하나 빈번이 일어나는  부분적인 근육 경화증, 이런 것들이 그녀의  특이한 
병세였다. 지금까지 그녀는 자신의 질병이 그녀에게 가하는  압력에 대항하
여 침착하게  견디어 왔고, 끝까지  병상에 몸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언키 어려운 불안감에 휩싸인 채 그녀의 오빠가 그날 밤 나에게 와서 전
한 바에 의하면, 그날  저녁 시간이 끝날 무렵 그녀가 병마의  무서운 힘에 
그만 굴복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모습을 얼핏 보았던  것
이 아마도 나에게는 그녀를 볼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라고 생각
하게 되었다. 아니,  적어도 그녀가 살아 움직이는  동안 나는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후 며칠 동안  어셔와 나 어느 쪽도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
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나는  내 친구의 우울증을 완화시키는데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하
고 책을 읽기도  하였다. 또는 그가 자유분방하게 연주하는 풍부한  표현의 
즉흥적 기타 선율에 나는 마치 꿈 속에 잠긴 듯한 기분으로 귀를 기울이기
도 하였다. 이리하여 점점  더 그와 나 사이의 친밀감이 깊어가자  나는 더
욱더 스스럼없이  그의 영혼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 넣으려는 나의 모든 시도가 헛
된 것임을 그만큼 더  쓰디쓴 기분으로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마음
으로부터 어두움이, 마치  그의 마음 안에 처음부터 자리잡고 있던  적극적 
성향인 양, 한줄기의 끊이지 않는 우울함을 방사하여 정신  세계와 물질 세
계의 모든 대상들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메카에서 자신의  몸을 천으로 감싸고 있는 이슬람 교도들처럼,  나
는 언제나 어셔 가의 주인과 함께 단둘이서 보낸 그와 같은 수많은 엄숙한 
시간들에 대한  기억을 내 주위에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를 
끌어들이거나 인도하여 함께 행했던  연구나 작업이 정확하게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제아무리 생각으로 정리하여 전달하고자 해도, 그런  나의 시
도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다. 흥분하여 극도로  광적인 상태가 되었
을 때 그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모든 대상 위에 유황불과도 같은 퍼런 광휘
를 던졌던 것이다. 그의  길다란 즉흥적 만가들은 영원히 내 귀에  울릴 것
이다. 무엇보다도 [폰 베버의 마지막 월츠(폰 베버의 마지막 월츠는 고트리
프 라이시거(1798~1859)가 독일의 작곡가  칼 마리아 폰 웨버(1786~1826)를 
기념하여 작곡한  곡임. 한편 폰  웨버는 초자연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낭만적 음악을 작곡한 사람으로  유명함.)]의 격정적인 선율을 나름대로 기
묘하게 뒤틀고  확장시키던 그의 연주는  고통스럽게 내 마음에  남아있다. 
한편, 그의 정교한  상상력이 깃들어 있던 그림들을  놓고, 또한 그가 붓을 
대면 댈수록 점점 더  모호해지던 그림들(그런 그림들의 모호함에 나는 몸
서리를 쳤는데,  이유를 모르면서 몸서리를  치는 바람에 더욱더  섬뜩하게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을 놓고,  나는 단순한 언어적 표현이라는 
영역 안에 담을 수 있는 적은  분량의 의미 이상의 것을 끌어 내려고 헛되
이 애를 쓰곤 하였다.  이들 그림에 담겨 있던 영상들이 지금도  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름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구도를 극도로 
단순화시키고 또한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는 보는 사람의 주의를 사로
잡고 압도하였다. 만일 그림으로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며ㅛ, 
그는 바로  로데릭 어셔일 것이다. 당시  내가 처해 있던 환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이  우울증 환자가 자신의 화폭 위에 솜씨 
있게 투사해 놓은 순수 추상들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강렬한 두려움이 배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타오르는  듯한 푸젤리(존  헨리  푸젤리
(1741~1825)는 스위스 태생의  영국 화가로 모든 사물의 극단적인 면을  화
폭에 묘사하였다. 그의 유명한 그림 [악몽](1785~1790)은  심리학적 공포 체
험에 대한 낭만주의적  관심을 보여주는 전형적 예임.)의 환상적인 그림들, 
그러나 지나치게 구상적인  환상을 담고 있는 그의  그림들을 눈여겨 보긴 
했으나, 어셔의 그림에서 배어 나오던 것과 같은 두려움을  나는 아직 어디
에서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내 친구의 환상적인 그림 가운데 하나는 추상적 정신이 그다지 엄밀하게 
깃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말을 동원하여 그 윤곽을 미약하게나마라도  보
여 줄 수 있을 것이다. 한 장의 작은 그림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무한하게 
긴 직사각형의 복도 혹은  동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 복도 혹은  동굴의 천
장은 반원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낮고 매끄러운 흰색의 벽  위에는 그 어떤 
장애물이나 장치도 걸려  있거나 부착되어 있지 않았다. 한편 모종의  보조
적인 점들을 구도에 맞춰 사용함으로써  이 동굴 혹은 복도가 지표면 아래 
대단히 깊은 곳에 있다는 느낌을 효과적으로 살려내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뻗어 있는 내부 어느  곳에도 출구가 없었으며, 횃불이나 그 외에  어떤 인
공적인 광원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넘쳐 흐르는  강렬한 빛이 사방으
로 흩어져, 전체를  무시무시하고 어울리지 않는 광채로 휩싸이게 하고  있
었다.
  청각 신경의 병적 상태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던 내 친구는 현악기의 어
떤 특정한 선율  이외에는 그 어떤 음악에도  견디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은 
조금 전에  밝힌 바 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에게 오로지 기타  연주만을 
허용하였는데, 아마도 그의  연주가 띠고 있던 환상적인 성격은 상당  부분 
이런 식으로 음악의  범위를 협소하게 제한했던 데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
다. 그러나 그가 즉흥곡을 연주할 때 보여 주었던  열정적인 능란한 솜씨는 
도저히 이런 식으로는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자주 즉흥적인 
음악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운을 맞춘 시를 읊기도 하였는데, 광적인  환상
을 담고 있는 시를 문제삼건  또는 음악의 선율을 문제삼건 그가 연주하던 
즉흥곡들은 강렬한 정신적 침잠력과 집중력의 결과임에 틀림이  없었고, 또
한 사실이 그러했다. 그가  보이던 강렬한 정신적 침작력과 집중력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고도의 인위적  흥분 상태에 도달해 있는  어떤 
특정 순간에만 관찰되는  특질이었다. 그가 읊었건 광상시 가운데 어느  한 
편을 나는 쉽게 기억해 낼 수 있다. 그가 그 시를 읊조릴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아마도 그 읊조릴 때  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시의 의미가  저변을 
감도는 가운데 혹은 신비롭게  흐르는 가운데 나는 무언가를 감지하였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셔의 지고한  이성이 
자신의 왕좌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어셔 쪽에서 이 점을 최초로  완전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감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령에 사로잡힌 궁전]이란 
제목이 붙어 있던 그 시는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았
다.
  1
  착한 천사들이 깃들어 살던
  푸르고 푸른 우리 골짜기에
  언젠가 아름답고 웅장한 궁전이,
  빛나는 궁전이, 우뚝 서 있었다.
  사상이란 군주가 지배하던 곳
  거기에 궁전이 우뚝 서 있었다!
  최고의 천사도 이처럼 아름다운 궁전에 
  날개를 드리운 적은 없었으리라.
  2
  노란빛 감도는 영광스러운 황금색 기가
  궁전의 지붕 위로 휘날리고 있었고,
  (이는, 이는 모두, 아주 먼 옛날 옛적,
  오래고 오랜 옛날의 일)
  한가로이 노닐던 부드러운 바람들마다,
  그 달콤한 날에,
  위용을 자랑하는 나른한 성벽을 따라
  향기로운 날개로 스쳐 지나 갔었다.
  3
  그 행복의 골짜기에 방랑객들은 
  빛나는 두 개의 창을 통해 보았지,
  루트의 조화로운 음의 원리에 맞춰
  음악을 따라 움직이는 영혼들을,
  왕좌를 돌던 영혼들을. 그 왕좌에는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ㅕ!)
  영광에 어울리게 당당히 앉아 계신 
  왕국의 지배자이신 왕이 보인다.
  4
  아름다운 궁전의 문은 
  진주와 루비로 온통 찬란히 빛나고,
  그 문으로 흘러, 흘러, 흘러 드는
  언제나 영원히 빛을 발하는
  에코의 무리들. 그들의 달콤한 임무는 
  오로지 노래하는 일,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들 왕의 기지와 지혜를.
  5
  그러나 악령들이 슬픔의 옷을 입고
  군주의 고귀한 저택을 공격하였다.
  (아, 슬프다. 다시는 내일의 태양이 
  그를 비추지 못하리, 적막함이여!)
  그리고 홍조를 띠운 채 꽃을 피우던 
  영광은 이제 집 주변에 떠도는 
  다만 땅 속에 묻힌 그 오랜 옛날의
  희미하게 잊혀진 이야기일 뿐.
  6
  그리고 이제 그 골짜기에서 방랑객들이
  붉은빛 비치는 창문을 통해 보는 것은
  화음이 맞지 않는 가락에 맞추어
  기괴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형체들뿐.
  그 사이, 무시무시한 급류와도 같이
  창백한 빛의 문을 지나
  소름 끼치는 무리들이 영원히 밀려나와
  큰 소리로 웃지만, 이제 미소는 없다
  발라드 풍의 이 시가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야기하다 어셔의 견해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일련의 사색에 이르게 되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
게 기억한다. 내가 여기에서 어셔의 견해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그의 견
해가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어셔 이외에도 그런 생각을 해 왔던 사
람들이 있다.-포우는 이와  관련하여 '와트슨, 퍼시발 박사, 스팔란자니,  그
리고 특히 란다프  주교-[화학 논고] 제5권 참조'라는 노트를 남기고  있다. 
리차드 와트슨(1737~1816)은 영국의  신학자이자 화학자. 전5권으로 된 [화
학 논고](1781~1787)가 있다. 란다프 주교는  와트슨을 가리킴. 토마스 퍼시
발(1740~1804)은 영국의 과학자로 식물에도 감각적 지각 능력이  있다는 논
문을 쓴 바 있음.  라자로 스팔란자니(1729~1799)는 이탈리아의 동식물학자
이자 생리학자. [동식물의 자연사와  관련된 논고](1784)라는 저술이 있음.), 
그가 자신의 견해를 펼  때 보였던 집요함 때문이다. 일반화하여 말하자면, 
어셔의 견해는 모든 식물이 지각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
질서한 상상이 뒷받침이 되어 그의 생각은 한결 더 대답한 성격을 띠게 되
었는데, 어떤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생물의 영역을 뛰어넘어 무생물의  영
역에까지 적용되는 것인지,  또한 얼마나 그의 믿음이 진지한 동시에  자유
분방한 것이었는지를 밝힐  수 있는 말을 나는  갖고 있지 못하다. 어쨌든, 
어셔의 믿음은, 내가  이미 암시한 바와 같이,  그의 선조들의 살던 저택의 
회색빛 석조물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의 상상에 따르면, 석조물들이 지각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필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그  조건
은 이러한 석조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것으로 충족되는 
것이었다. 석조물들  위로 드리워진 수많은  곰팡이들과 석조물 주위에  서 
있는 고사목들이 일정한 순서로 배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석조물들 역시 
일정한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는 것으로 지각의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에 의하면, 그 순서가  오랜 세월 동안 망가지지 않은 채 그
대로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모습이 늪의 정지된 물 위에  반영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석조물이 지각  능력
을 갖고 있다는 증거는 수면과  벽 주변에 나름의 공기를 완만하지만 확실
하게 응결시키고 있다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그
가 말하는 것을 들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덧붙여  그가 나에게 한 말
에 따르면, 석조물들이 말은 없지만 끈질기고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발휘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그로 인해 수세기 동
안 그의 가문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또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현재의 인물
로 그가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에는 별다른 설명
이 필요치 않다. 따라서 나는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을 것이다.
  이 병약자의 정신 세계가 형성되는 데 오랜 세월 동안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책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환상으로 가득 찬 이와 같은 종류
의 인물에 꼭 들어맞는 것들 뿐이었다. 우리는 함께 그레세의 [베르베르]와 
[샤르트뢰즈], 마키아벨리의 [벨페고르],  스베던보리의 [천국과 지옥], 홀베
리의 [니콜라스 클림의 지하  여행], 로버트 플루드.쟝 댕다지네.들 라 샹브
르의 [수상학], 티에크의 [창공 여행], 깜빠넬라의  [태양의 도시] 등과 같은 
책들을 탐독했다.(어셔의 서재에  있던 이상과 같은 책들은  그가 초자연적
인 것과 악마적인 것에 심취해 있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루이 그레세
(1709~1777)는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시인으로  [베르베르]와 [라 샤르트뢰
즈]라는 책의 저자. 니꼴로 마키아벨리(1469~1527)는 이탈리아의 정치 철학
자로 [벨파고르, 아내를 맞이한 악마]라는 초자연적  소설의 저자. 에마누엘 
스웨덴보리(1688~1772)는 스웨덴의 신비주의자로 기괴한 비전으로  가득 찬 
철학적 논문인 [천국과  지옥]의 저자. 루드비히 홀베리(1684~1754)는  덴마
크의 극작가로 [닐스  클림의 지하 여행]의 저자. 이 책은  [걸리버 여행기]
를 모델로 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것임. 로버트 
플루트(1574~1673)는 영국의 의사이자 신학자, 요한네스 인다기네는 16세기 
독일의 신부, 마르땡 뀌로 들 라 샹브르(1594~1669)는  프랑스의 의사. 이상 
세 명은 수상학에 관한 저술을  남긴 바 있음. 루드비히 티에크(1773~1853)
는 독일의 작가로 [낡은 책과 푸른 창공으로의 여행]의 저자. 이 작품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그린 것임. 또바쏘 깜빠넬라(1568~1639)는 
이탈리아의 신부이자  철학자로 [태양의 도시]라는 유토피아  소설의 저자) 
어셔가 특히 좋아했던  책은 도미니크 파의 신부인  에이메릭 데 기론느의 
[종교 재판 지침서]라는 조그마한 8절판 책이었으며, 폼페니우스 멜라의 저
작 중에 있는 고대 아프리카의 사티로스와 에기판스에 관한 대목들도 그는 
몇 시간 동안이나  꿈에 취한 듯 앉아서 탐독하곤 했다.(에이메릭  데 기론
네(1320?~1399)는 스페인의 종교 재판관으로,  종교 재판 때의 고문을 다른 
논문인 [종교 재판 지침서]의  저자. 뽐뽀니우스 멜라는 1세기 로마의 지리
학자로, 고대 세계의 지리에 관한 책인 [지지학]의  저자. 이 책에 전설상의 
동물에 대한 설명이 나옴.  싸티로스는 숲 속의 정령으로,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이고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음. 에기판스는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판
의 별칭.)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고딕체의  사절판으로 된 아주 
희귀하고 기묘한 책인 [메이엔스 교회 성가대에 따른 사자를 위한 철야 의
식](확인이 불가능한 책. 그러나  사자를 대신하여 참회하는 의식을 기록한 
유사한 종류의 저술들이  중세 시대에 많이 출간되었음. -본문의  작가명과 
작품명이 역주와 다른 것은 포우의 기억력 착오이거나 식자공이 범한 오류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을 정독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저녁 어셔가 갑작스럽게 나에게 매들린 부인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나서, 최후로 매장하기 전에 14일  동안 시신을 저
택의 주벽 안쪽에 있는 수많은  지하실 안에 보관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
다. 바로 그때 나는 앞서 말한 책에 기록된 야만적  의식과 그것이 이 우울
증 환자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세속적인  것을 들
먹이며 이와 같은 기이한 의식  절차를 치루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놓고 나
는 한가롭게  그와 논쟁을 하고 싶은  심경이 아니었다. 그가 나에게  말한 
방에 의하면, 고인의 질병이  특이한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또한 의사
들 쪽에서 그녀의 질병에 대해 갖고 있는 무언가 지나칠 정도의 열렬한 탐
구 의식을 고려하여, 또한  가족 묘지가 너무 먼 곳에 있고  비바람에 노출
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와 같은 결정에 이르게 되었단는 것이다. 내
가 이 집에 왔던 첫날 계단에서  만나 그 의사의 불길한 얼굴 표정을 마음 
속에 떠올리면서, 나는 그의 예방 조치가 좋게 생각하면  해로울 것도 없고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라고 판단하였다.(누군가가  시신을 훔쳐 내어 
해부해 보고 싶어하는  의학도에게 팔 가능성도 있거니와, 이에 대비한  예
방 조치를 취하는 일에 반대할 마음이 없었다는  뜻임.) 나는 그와 같이 판
단되는 예방 조치에 반대할 마음이 없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어셔의 간청을 받아들여 임시 안치를 위한 준비 작업을 할 때 나는 직접 
그를 도왔다.  시신을 입관시킨 다음 우리는  단 둘이서 관을 메고  시신의 
임시 안식처로 갔다.  우리가 관을 안치해 놓을 지하실은 오랫동안  그대로 
닫혀 있었던 곳이었는데,  우리가 들고 있던 횃불들은 무거운 대기에  눌려 
반쯤  꺼진 채 연기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 안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
다. 그러나  지하실은 작고 눅눅했으며, 그곳에는  빛이 들어올 틈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와 같은 지하실이 아주 깊은 곳에, 내가 잠을 자는 방이 있
는 이 저택의 바로 아래 부분에 있었던 것이다. 명백히  이 지하실은 먼 옛
날 봉건 시대에  지하 감옥이라는 최악의 목적에  사용되었던 것처럼 보였
다. 한편, 바닥의  일부분 및 우리가 방에  도착하기 전에 통과한 아치형의 
길다란 통로의 벽면이 온통 등판으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보니, 그후에는 화
약이나 그밖에 고도로 인화성이  높은 물질을 저장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처럼 보였다. 출입문 역시  이와 비슷하게 육중한 철판으로 덮여 있었다. 
엄청난 무게 때문에 출입문은 경첩을 축으로 움직이면서 귀에 거슬리는 유
별나게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슬픔을 자아내는 우리의 짐을 이 공포의 영역 안에 있는 반침대 위에 내
려 놓고, 우리는  아직 못을 박지 않은  관의 뚜껑울 한쪽만 살짝 열고  그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두  남매의 얼굴이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사실이 이제서야 처음으로 내 주의를 사로  잡았따. 아마도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그는 무언가 몇 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서 나
는 고인과 어셔가 쌍둥이며,  그들 사이에는 남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공
감이 늘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시신이 오랫동
안 시신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공포감을  느끼지 않은 채 내려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꽃 같은 나이의 젊은 여인의 생명을  이처럼 앗아가 버
린 질병은, 엄밀하게 말해  경화증이라고 할 수 있는 질병에 걸린  모든 사
람들한테서 흔히 확인되는 증세이지만, 가슴과 얼굴에는 희미하게  붉은 반
점 비슷한  것이 남아 있었다. 또한  죽은 사람을 그토록 무섭게  보이도록 
하는 미소가 묘하게도 그녀의 입가에 맴돌고 있었다. 우리는  관 뚜껑을 맞
추어 못을 박고 철문을  꼭 닫은 다음, 그곳과 다를 바 없이 어두운  그 저
택의 위쪽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럭저럭 며칠인가  혹독한 슬픔의 나날들이  지나갔다. 이제 내  친구의 
정신병 증세에 현저한  양상의 변화가 보이게 되었는데, 그가 평상시에  보
였던 태도는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는 일상적으로 하던 일들도  등한시
하거나 잊었으며, 바쁘고 불안정한 발걸음으로 목적없이 이 방  저 방을 돌
아다녔다. 창백한 얼굴은 한층 더 무섭게 창백한 빛을 띠게 되었지만, 빛나
던 눈은 광채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이따금씩 들을  수 있었떤 가라앉
은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으며, 항상 극도의  공포에 휩싸
인 듯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곤 하였다. 사실 끊임없이  초조해 
하는 그의 마음이 무언가 숨막히는 비밀로 인해 진통을 겪고 있으며 그 비
밀을 고백하는 데 필요한 용기를 모으려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여
러 번 있었다. 또한 어떤 때에는 부득이 이 모든  것을 미친 사람의 불가해
한 변덕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 상상 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양 더할 수 없이 심각한 태도로 오랜 시간 동안 허공을 응시하는 
그를 목도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는 이 때문에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나까지도 그런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셔 자신의 엉뚱하지만 인상 깊은 미신적인 믿음이 발휘하는 광적인 영향
력이 느리긴 하나 상당 정도 나의 마음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매들린 부인의 시신을 지하실에 안치한 지 7~8일이 지난  날 밤 늦
게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러한 느낌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
었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흘렀지만 잠은 나의  침상 가까이 오지 않았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신경과민증을 이성으로 무마해 보려고  갖은 애를 다 
써 보았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내가 갖고 있는 느낌의 상당 부분은  방 안
의 음울한 가구나 세간들이  무언가 혼란스런 영향력을 발휘하는 탓이라고 
믿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몰아치는  폭풍우의 거친 숨결에  고통스럽게 
움직이는 장막이 벽 위에서 발작적으로 이리저리 요동을 치기도 하고 침대
의 장식물을 스치면서 기분 나쁜 소리를 내곤 하였는데,  바로 이같은 장막
의 움직임 탓이려니 생각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모든 노력은 허사
였다. 억누를 수 없는 전율이 점차적으로 내 몸을 지배하게 되었고, 결국에
는 아무리 해도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포가 악령과도 같이 내 자신의 가
슴을 짓눌렀다. 헐떡이며, 몸부림치며 이 공포를 떨쳐  버리고, 나는 베개에
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의  강렬한 어둠 속을 뚫어져라 응시한 채, 폭풍우
가 간간히 멈추었을 때 어딘지 알  수 없는 그런 곳에서 오랜 간격을 두고 
들려오는 무언가 낮고  뚜렷하지 않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본능이  나를 
그런 행동으로 몰아갔따는  말 이외에 내가 왜  그랬는지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설명할  수도 없고 견디기도 어려운 강렬한 공포감에  압도된 
채, 나는 급히 옷을 찾아 몸에 걸쳤다. 아무리 해도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림으로써 
내가 처한 가련한 상태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이런 식으로  방 안을 두서너 번  오락가락했을 때, 내 주의를  사로잡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근처 계단에서 사람이 올라오는 듯한 가벼운 발소리
였다. 이윽고 나는 그것이 어셔의 발소리임을 깨달았따. 다음 순간 그는 내 
가 있는 방의  문을 가볍게 두드리더니, 램프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색은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몹시도 창백했다. 그러나  안색은 창백하면서
도 그의 두 눈에는 무언가 광적인 환희의 빛이  감돌고 있었으며, 전체적인 
거동에는 병적 발작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명백히 감돌고 있었
다. 그의 태도가 나를 놀라게  했지만, 어떤 것도 이때까지 내가 그렇게 오
랫동안 견디어 왔던 적막감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출현이 위안
이라도 되는 듯 그를 환영하는 마음조차 잊었다.
  "그럼 자넨 그걸 보지 못했나?"  얼마 동안 침묵을 지킨 채 자기 주위를 
응시한 다음 그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걸 보지 못했군? 잠깐 기다려! 보
여 줄 테니." 그렇게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램프를 가려 놓고, 그는 서둘러 
창문 쪽으로 다가가 폭풍을 향해 창문 하나를 활짝 열어 젖혔다.
  강풍이 어찌나 사납고  격렬하게 밀려 드는지 우리  두 사람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이었지만 매섭게 아름다운 밤, 공포
와 아름다움이 뒤섞여  있는 너무나도 기묘한 밤이었다. 회오리 바람은  명
백히 우리 근처에 힘을 결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근처에서 바람
은 시시각각 맹렬한 기세로 그 방향을 바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더
할 수 없을 만큼 짙은 구름들이 저택의 작은 탑들을 짓누르려는 듯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 구름들이 먼 곳으로 사라지지 않은  채 사방에서 휘
몰아쳐 서로 부딪히고 있을 때의  그 생생한 속도감을 감지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더할 수  없을 만큼 짙게 구름들이 
끼어 있는데도 이런 속도감을 감지하는  데 그 구름들이 방해가 되지는 않
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달도 별도 볼 수 없었고 또한  내리치는 번개
의 섬광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직접 둘러싸고  있는 지상의 
모든 물체는 말할 것도 없고 동요 상태의 거대한 증기 덩어리 아래쪽 표면
은 무언가  불가사의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저택을 감싼 채 그  주변에 
드리워져 있는 기체  형태의 기류,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으나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기류에서 불가사의한  빛이 새어나와 주변을 비춰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안돼, 자넨 이런  것을 봐선 안돼!" 몸서리를  치면서 나는 어셔를 향해 
소리쳤다. 동시에 나는 가볍게 힘을 주어 그를 창문에서  떼어낸 다음 자리
에 앉혔다. "자네를 놀라게 하는 이러한 광경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잇는 
정전기 현상에 불과한 거야.  아니면, 악취를 발산하는 독기가 늪에서 새어
나와 이런 무시무시한  광경을 만드는지도 몰라. 자,  이 창문을 닫도록 하
지. 공기가 차서 자네 몸에  해로워. 여기 자네가 좋아하는 이야기 책이 하
나 있군. 내가  읽어 줄 테니 들어 봐. 그러면서  이 무시무시한 밤을 우리 
함께 보내도록 하지."
  네가 손에 든 고서는 란슬로트 캐닝  경의 [어지러운 약속 장소](이 책은 
실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은 상태임. 포우  자신이 꾸며 낸 것일  가능성이 
높음)였다. 나는 그 책을 어셔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는 진심에서 
한 말이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  사실 이 책의 장황
한 내용은 투박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이 담겨 있기 때문에 내 친구와 같이 
고귀하고 영적인 상상력을 지닌 사람의 흥미를 끌만한 것이 거기에는 별로 
없다. 그러나 그 책이 그때 가까운 곳에 있던  유일한 책이었다. 그래서, 내
가 읽어 주는 멍청한  이야기를 듣는 사이, 현재 이 우울병  환자를 안절부
절 못하게 만드는 흥분 상태가 혹시 가라앉지나 않을까라는 막연한 희망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질환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식의 이례적인 변칙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가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극도로 생기에 차서 내가 읽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고 판단되었다고 하
자. 사실 그렇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면 내  계획이 성공적이었다는 것 
때문에 당연히 자축을 했을 것이다.
  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에쎌레드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은둔자가 머물고 
있는 곳에 들어가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다음 마침내 폭력을 사용하
여 억지로 들어가려는  이야기가 나오는 그 유명한 부분에 이르렀다.  여기
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천성적으로도 용맹스럽지만 그가 퍼마신 술 기운 덕택에 더욱
더 힘이 솟아 있던 에쎌레드는 진실로 고집불통에다가 악의에 찬 은둔자와 
담판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더라. 때마침 어깨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고  에쎌레드는 폭풍우가 불어닥칠 것이 걱정
도 되었더라. 그리하여 즉각 철퇴를 치켜들어 문을 몇  번 후려갈기니 순식
간에 장갑을 낀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생겼더라.  기운차게 구멍에 손을 
밀어 넣고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잡아채고 산산조각을 내니,  마른 판자가 깨
질 때 공허한 울림 소리 온 숲을 놀라게 하며 여기저기 울려퍼지더라."
  이 구절을 끝까지 읽었을 때 나는  놀라 잠시 읽기를 멈추지 않을 수 없
었다. 흥분된  상태에서 엉뚱한 상상력이  발동하여 헛들은 것이라고  즉각 
결론을 내리긴 하였지만, 저택 안 아주 먼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나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려온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란슬로트 경이  그렇게 
상세하게 묘사한 바 있는 바로  그 부수고 잡아채는 소리와 아주 닮았다고 
할 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은 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
만 명백히 무언가 막힌 듯 둔한 소리였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내  주의를 사로 잡은 것은 다만 우연의  일치일 뿐이었다. 
창문의 문들이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고, 점점 더  기세를 더해 가는 
폭풍우가 으레 그렇듯이 잡다한 소음으로 사방을 뒤덮고 있을  때, 소리 그 
자체 때문에 마음을  쓰거나 불안해질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야
기를 계속 읽어 나갔다.
  "그러나 용사  중에서도 용사인 에쎌레드가 이제  문 안으로 들어섰지만 
악의에 찬 은둔자의 모습은,  애통하게도, 화가 치밀게도, 놀랍게도, 보이지 
않더라. 그 대신 비늘에  뒤덮인 거대한 자태의 용 한 마리가  입으로 불길
을 내뿜고  있더라. 이 용이 쭈그리고  앉아서 성채는 금이요 바닥은  은인 
궁전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벽에는 청동으로 된 빛나는  방패가 있엇고 그 
위에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더라.
  여기 들어오는 자, 정복자이도다.
  용을 죽이는 자, 방패를 얻으리라.
  이윽고 에쎌레드가 철퇴를  치켜들어 용의 머리를 내려치니, 용이 그  앞
에 쓰러진 채 독기를 내뿜으면서 진절머리 나는 거친  비명을 지르더라. 그 
소리 어찌도 귀청을 찢는 듯  날카로운지 에쎌레드는  그 무시무시한 소리
에 두 손으로 얼른 귀를 막지 않을 수 없었더라.  그와 비슷한 소리 누구도 
예전에는 결코 들어 본 적이 없는 소리더라."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그리고 이번에는 대경실색하여 읽기를  갑자
기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의문의 여지가 절대로 있을 수 없이, 비록 어느 
방향에서 발생한 것인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분명
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나지막한 소리, 그러나 거칠고 질질  끄는 듯
하면서 전혀 예사롭지 않은 비명 소리, 또는 신경을  건드리는 듯한 소리를 
실제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상상 속에서 나는 이 이야기의 작가가  묘사한 
바 있는  용의 불가사의한 비명 소리를  이미 떠올리고 있었는데, 바로  그 
상상 속의 비명 소리와 너무도 똑같은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기묘한 우연의 일치가 두 번씩이나  발생하자 나는 오만 가지 서로 모순
되는 느낌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특히 나를 지배하던 느낌은 놀라움과  극
도의 공포감이었다. 확실히 그런  느낌에 시달리고 있긴 하였으나, 내 친구
의 예민한 신경을 자극시키는 일은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아직은 충분히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지난 몇 분 사이에 그의 태도에  묘한 변화
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그가 문제의 소리를 의식하고  있는지는 
나는 결코  확신할 수 없었다. 처음에  그는 나를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점점 의자를 돌려 나중에는  방문 쪽을 향한 채 앉아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마치  들리지 않게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처럼 입술을  부들
부들 떨고 있는 것은 볼 수 있었지만, 그의  표정을 부분적으로밖에 감지할 
수 없었다. 머리를 가슴 쪽으로  축 늘어 뜨리고 있었으나, 그가 잠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알 수 있었다. 옆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을 때 경
직된 상태로 부릅 뜬  그의 눈이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의  몸 동작도 
또한 그가 자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하였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쉴 
사이 없이 일정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재
빨리 파악한 다음 나는 란슬로트  경의 이야기를 다시 소리내어 읽기 시작
하여쓴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용의 무서운  격노를 피한 용사 에쎌레드는 청동 방패에 
생각이 미치자, 또한 그 위에 씌어 있는 마력을  깨뜨려 버려야겠다는 생각
이 미치자, 그 앞에 놓여 있는 용의 시체를 한쪽으로 치워 놓은 다음, 용감
무쌍하게 성으로 들어가 은으로 된 바닥을 지나 방패가 걸려 있는 벽 쪽으
로 다가갔더라.  그러나 그가 정말 방패가  있는 곳에 이르기도 전에  청동 
방패는 굉장히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울림  소리를 내며 용사의 발치 앞 어
딘가 은으로 된 바닥 위로 떨어지더라."
  이 말이 입밖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그때 나는 마치 청동 방패가 정
말로 은으로 된 바닥 위로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과 같은 뚜렷하
고 공허한 금속성의 쨍그랑 소리가 울려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명백히 무언가에 덮여 있는  듯 둔하게 울려퍼졌다.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몸을 흔들던  어셔의 자세에는 변화가 없었다.  나는 그가 앉아 있는  의자 
쪽으로 달려갔다. 그의 눈은 앞을 향한 채 고정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돌덩
이와 같이 굳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병적인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으며, 마
치 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양  낮고 빠르게 뜻 모를 말을 혼자 중얼
중얼 지껄여대는 것이  나의 눈에 띄였다. 그에게 바싹 허리를  구부려서야 
겨우 소름 끼칠 듯한 내용을 담고 있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 소리가 안  들리나? 그래, 난 들려. 계속  듣고 있었지. 오래 전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매분,  매시간, 매일, 나는 계속 저 소리를  듣고 있었지. 
하지만 나는 감히 말할 수가  없었어. 아, 이 불쌍하고 비참한 나라는 인간
은 감히 그것을 말할 수  없었던 거야! 내 누이 동생을 우리가 산 채로 무
덤에다 놓고 온 셈이야!  내 감각이 예민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제 자
네에게 말하네만, 그 텅 빈 관에서 내 누이  동생이 처음으로 미약하게나마 
움직일 때 그 소리를 들었단 말이야. 며칠, 며칠 전에 벌써 그 소리를 들었
어. 그렇지만 나는 감히, 나는 감히  말을 못한 거야! 그러나 오늘 밤 지금, 
에쎌레드라고? 하, 이거  참! 은둔자가 기거하는 곳의 문이 부서지는  소리, 
용이 죽으면서 지르는  비명 소리, 방패가 떨어지면서 쨍그랑 울리는  소리
라니! 아니,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내 누이  동생의 관이 부서지는 소리, 
그 애를 가두어 놓은 지하실 철문의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 동판을 깔아놓
은 지하 통로를  빠져나오려고 그 애가 기를 쓰는  소리라고 하면 어떨까? 
아! 어디로 도망쳐야 하지? 그 애가 곧 이리 오지나 않을까? 내 성급한 행
동을 나무라기 위해  서둘러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단을 올라오는 그 
애의 발소리를 내가 모를 것  같은가? 저 묵직하고 무시무시한 그 애의 심
장 뛰는 소리를 내가 구별해 낼 수 없을 것 같은가? 이  어리석은 친구야!" 
여기까지 말한 다음  그는 사나운 기세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는 마치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는 듯이 또박또박 
끊어서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이 어리석은 친구야! 내 누
이 동생이 이제 바로 문밖에 서 있단 말이야!"
  초인간적인 힘을 발산하는  그의 말에는 마치 마법의  힘이 담겨 있었던 
것처럼, 그가  가리킨 커다랗고 고색창연한  문틀이 시커멓고 무거운  턱을 
벌리듯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몰아 닥친 강풍 때문이겠지. 바로 그
렇게 생각하는 순간, 열려진  문 바깥쪽에 수의를 몸에 감은 채  어셔 가의 
매들린 부인이 기품어린  자세로 서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얀  수의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었고, 그녀의 수척한 몸에는 온통  처절한 몸부림의 자취
가 엿보였다. 잠시 동안 그녀는  문 턱 위에서 부들부들 떨며, 이리저리 비
틀거리며 서 있더니,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있는  오빠에게로 무
섭게 쓰러졌다. 이윽고, 그녀가 격력하고 고통스러운 마지막 죽음의 몸부림
을 치는 가운데, 그녀의 오빠는  마루 위에 쓰러져 숨을 거두게 되었다. 그
는 자신이 예기하고 있던 공포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방으로부터, 그 저택으로부터  나는 기겁을 하여 도망쳤다. 오래된 제
방 위의 길을 건너고 있을 때에도 폭풍은 여전히 온 힘을 다하여 광포하게 
사방을 휩쓸고 있었다. 갑자기 길을 따라 한 줄기의  격정적인 빛이 내리비
쳤다. 나는 그처럼  예사롭지 않은 빛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확인하기  위
해 뒤돌아  보았다. 내 뒤에는 오직  거대한 저택과 그 그림자만이  외로이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었따.  그 빛은 저물어가고 있는 피빛처럼 붉은  보름
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제 달은 내가 전에 지붕에서 바닥까지  갈지자형
으로 뻗쳐 있다고  얘기한 바 있는 건물의  갈라진 틈, 한때는 보일 듯  말 
듯 하던  그 틈 사이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 갈라진 틈이 급속도로 벌어지면서 회오리 바람이  한 번 맹렬
하게 불었다. 이윽고 달의 둥근 모양이 갑자기 내 시야에 떠올랐다. 거대한 
벽이 빠른 속도로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현기중을 느
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천 개의 파도가 합쳐져 소리를 내듯  길고도 소란
스러운 외침  소리가 드릴더니, 발 밑에  있는 깊고 어두운 늪이  침울하게 
소리도 없이 '어셔 가'의 파편들을 삼켜 버렸다.

    작품해설 [어셔 가의 몰락] - 현실에 바탕한 환상의 미학
  [어셔 가의 몰락]은 단편의 요체를 환상과 추리에서  찾은 포우의 문학론
을 대변하는 듯한  작품이다. 여기서 환상은 추리적 수법으로 현실과  단단
히 이어져 있다.  마지막을 환상적으로 장식하는 저택의 붕괴만 해도  꼼꼼
이 읽어보면 처음부터  치밀하게 암시되고 있었다.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
는 늪지대에 세워진 석조 건물, 그것도 이미 긴  세월이 흘러가 퇴락한데다 
화자조차 곳곳에서 붕괴의 조짐을 느낄 정도였다. 매들린  부인의 괴기스러
운 출현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고, 어셔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이미 지
병의 형태도 여러 차례 암시된 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한결같이 환상적으로만 느껴지는 까닭
은 아마도 포우가 사용한 여러 고풍스럽고 괴기스런 장치들과 화려한 문체
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잘 알려지지 않은 중세의  마법서나 저승과 망령들
에 관한 문서들,  그리고 전설에 바탕한 고풍의 시가는 자칫하면  유치하다
는 느낌을 줄  소도구들이다. 또한 사용하고 있는 문체도 다른  곳에서라면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과장스럽게  느껴질 위험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것들이 묘하게 어울려 현실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사건을 환상적이
고 신비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년 시절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는 다만 충격적인 감동  뿐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소설이  무엇인가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몇 군데 불만스런 
곳이 눈에 띄었다. 환상적인 공간의 어셔와 현실 속의  화자가 무언가 거칠
고 억지스럽게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과 매들린 부인이 가사 상태로 입관
된데 대한 암시가 빠져있는 것 따위 주로 구성과 연관된 것들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포우의 다른 단편 [붉은 죽음의  가면]으로 이 작품을 대
산하는 것을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붉은 죽음의  가면]은 드러나는 흠이 
없는 반면 구성이 단순할뿐더러 아무래도 소품이란 느낌이 있어 이 작품을 
그래도 싣는다. 내 불만은 독법에 따라서는 해소될 수도  있거니와 설령 그
게 객관적인 흠이 된다 하더라도 이 작품에는 그 흠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빛나는 부분이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비평가인  포우는 1809년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고아가 되어 상인에게  양자로 입양되었고 17세 되는 해에 버지니아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양부모로부터 학비가  조달되지 않는 등  어려운 
형편과 무절제한  사생활 때문에 1년도 안되어  퇴학당했다. 18세 때  이미 
[티무르]를 익명으로 출판한 적이 있고 이름을 바꾸어  군대에 들어가 웨스
트포인트 육군 사관학교에  적을 두기도 했다. 그러다가 22세 때부터  미망
인 숙모와 그의 딸 버지니아와 함께 살면서 쓴 작품들이 여러 잡지와 신문
의 현상공모에 당선됨으로써 그의 단편 전성시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27
세 되는 해에 14세밖에 되지 않은 버지니아와 결혼하였고,  각종 잡지의 편
집자로 전전하면서 단편을 계속 발표했다. 보들레르는 포우의  단편을 읽고 
'여기에는 내가 쓰고 싶었던 작품의 모든 것이  있다.'고 극찬하면서 평생을 
포우의 작품 번역에 바쳤다. 포우는 [어셔 가의 몰락]에서 주인공처럼 현실
에 등을 돌리고 내면의 심연에 주목하는 한편, 추리와  분석 능력을 이용하
여 [모르그 가의 살인]에서 탐정 듀팡과 같은 인물을 창조, 추리 소설의 장
르를 개척하기도 했다.

    하동  -야꾸다가와 류노스께 지음
  서
  이건 어느  정신병원의 환자 -제23호가  누구에게나 지껄이는  이야기다.  
그는 이제 삼십이 넘었을 게다.  허나 얼핏 보아, 참으로 젊은 기분에 넘친 
정신병자다. 그의 반생의 경험은-아니, 그런 건 아무러면  어떻겠는가. 그는 
다만 물끄러미 두  무릎을 안고, 이따금씩 창 밖으로 시선을  보내면서 "쇠
창살을 낀 창문 밖에는  마른 잎조차 보이지 않는 떡갈나무가 한  그루, 금
시 눈이라도 내릴 듯한 하늘에 가지를 뻗고 있었다"고, 원장인 S박사나 나
를 상대로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하기야 몸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다. 그는  예컨대 "놀랐다"는 경우엔 별안간 얼굴을  뒤로 젖히곤 
했다...
  나는 이같은 그의  이야기를 퍽 장황하게 옮겨 놓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에 내 필게에 대해 만족해 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도쿄시외 xxx촌에 있
는 정신병원을 찾아가 보는 게 좋겠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제23호는 우선 깍듯이 머리를 숙이고, 쿠션이  없
는 의자를 가리킬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울한 미소를 띄우고, 조용조용히 
이 이야기를 되풀이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야기를 끝냈을 때의  그
의 얼굴 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느
닷없이 주먹을 휘두르면서,  누구에게나 이렇게 소리를 질러  댈 것이다. -
"나가지 못해? 이  악당 같은 놈! 네놈도 벽창호  같은, 샘 많고, 추잡하고, 
뻔뻔스럽고, 잘난  체하고, 잔인한, 독선적인 동물이겠지.  나가지 못해? 이 
악당 같은 놈아!"
  1
  삼년 전 여름의 일이죠. 나는 남들처럼 륙색을 메고, 저 가미고오찌의 온
천 여관으로부터 호다까산으로  오르려 했습니다. 호다까산에 오르자면  아
시다시피 아즈사가와를 거슬러 오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전에 호다까
산은 물론이요, 야리가산도 오른 적이 있었고 해서, 아침 안개 내린 아즈사
가와의 계곡을 안내자도 없이 올라갔습니다. 아침 안개  내린 아즈사가와의 
계곡을 -그러나 그 안개는  아무리 가도 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뿐더
러 되려 깊어지기만 합니다.
  나는 한 시간 가량 걷다가  가미고오찌의 온천 여관으로 되돌아 갈까 생
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가미고오찌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좌우간 안개가 
갠 연후라야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안개는 시시각각으로  자꾸만 
깊어갈 따름입니다. 에이, 차라리 올라가고 말자- 나는  이렇게 생각했기에, 
아즈사가와 계곡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산백죽 숲을 헤치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나의 눈을  가로막는 건 여전히 깊은 안개뿐입니다. 하긴  이따금
씩 안개 속으로 굵다란 참나무며 전나무의 가지가 푸릇푸릇 이파리를 드리
운 것도 보이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리고 또 방목하는 말과  소도 별안간 
내 앞에 얼굴을  내밀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나타났는가 하면  순
식간에 다시 자욱한 안개 속에 숨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발도 피곤해  오고, 배도 차츰 고파 오기 시작하고  -게다가 
안개로 젖을 대로 젖은 등산복이며 모포 따위도 이만저만한 무게가 아닙니
다. 나는 그만 고집을 꺾고, 바위에 막혀 있는 물소리를 의지해서 아즈사가
와 계곡으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나는 물가의 바위에 걸터앉아,  우선 식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콘드 비
프 통도 따고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불을 지피고 -그런 일을 하고 있
는 동안에  이럭저럭 십 분은 지났을까요.  그 사이 심술궂은 안개는  어느 
결에 희뿌옇게 개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빵을 씹으면서, 무심코 팔목시계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시각은 벌써 한 시 이십분이 넘었습니다.
  허나 그보다도 놀란 것은 무언가 기분이 언짢은 얼굴이  하나, 동그란 팔
목시계 유리 위에 언뜻 그림자를 떨어뜨린 일 때문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갑빠라는 걸 본 것은 실로 이때가  처음
이었던 것입니다. 내 등  뒤에 있는 바위 위엔 그림에 있는  그대로인 갑빠
가 한 마리, 한  손은 자작나무 둥치를 안고 또 한  손은 눈 위에 얹은 채,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얼마 동안 꼼짝도 않고  있었습니다. 갑빠도 역시 
놀랐던 모양  눈 위에 얹은 손조차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는 중에  나는 
일어서기가 무섭게, 바위 위의 갑빠한테 달려들었습니다. 동시에 갑빠도 달
아나려 했습니다. 아니, 아마도 달아났을 것입니다. 실은  날새처럼 몸을 뒤
치는가 싶자,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나는 더욱  놀라면서 산백죽 숲  속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갑빠는 
도망치는 자세를  한 채, 2~3미터 떨어진  저편에서 나를 돌아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꼴은 이상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의외였던  것은 갑빠의 몸 빛깔 그것입니다. 바위  위에서 
나를 보고 있던 갑빠는 몸 전체에 잿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은 온몸이 온통 초록빛으로 변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새끼!" 하고 고함을 지르고, 다시 한 번 갑빠한테 달려들었습니
다. 갑빠가 달아나려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로부터 나는 한 삽십 
분 동안, 산백죽 숲을  헤치고 바위를 뛰어넘어, 마구 갑빠를 쫓아다녔습니
다.
  갑빠 또한 발이 빠르기론 결코 원숭이 따위에 뒤지지  않습니다. 나는 정
신없이 쫓아 다니는 동안에 몇 번이고 그 그림자를  놓칠 뻔했습니다. 뿐더
러 발을 헛디디고 나뒹굴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허나,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한  그루 굵다랗게 가지를 뻗친 밑으로 오자, 
다행히도 방목하는 소가  한 마리가 갑빠의 앞길를 가로막고 섰습니다.  게
다가 그놈은 뿔이 굵고 눈에 핏발이 선 황소인 것입니다.
  갑빠는 이  황소를 보자, 무언가 비명을  지르면서 한층 높은 산백죽  숲 
속으로 재주넘기라도 하듯 뛰어 들어갔습니다.
  나는 -옳지 됐다고 생각했길래,  거침없이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엔 내가 알지  못하는 구멍이라도 뚫어져 있었나 보지요. 매끄러운  갑
빠의 잔등에 가까스로 내 손가락 끝이 닿았는가 싶자,  순식간에 깊은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의 마음은  이러한 위기일발의 경우에도 어처구니 없
는 일을 생각하는  법입니다, 나는 '아차!'하는 수간에  저 가미고오찌 온천 
여관 옆에 xxxx다리가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다음 -그 다음 일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눈앞에 번개와  같
은 걸 느꼈을 뿐, 어느새 제정신을 잃고 있었습니다.
  2
  그러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벌렁 자빠진  채 숱한 갑빠들
한테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굵다란 주둥이  위에 코안경을 쓴 
갑빠가 한 놈,  내 곁에 무릎을 꿇고서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있었습니다. 
그 갑빠는 내가 눈을 뜬  걸 보다, 나한테 가만히 있으라고 손짓을 하더니, 
그 다음에 누군가  뒤에 있는 갑빠한테 Quax  Quax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갑빠가 두 놈,  들 것을 가지고 걸어왔습니다. 나는 이 들
것에 실린 채, 숱한  갑빠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를 조용히 몇  마장인가 진
전해 갔습니다.
 나의 양켠에 늘어선 거리는 긴자로(도쿄의 번화가)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
니다. 참나무 가로수 그늘에  각종의 가게가 차양을 늘어뜨리고, 그 가로수 
사이에 끼인 길을 자동차가 수없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후 나를 실은 들  것은 가느다란 골목길도 꼬부라져 들어가는가 싶
더니 어떤 집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집은 뒤에 알게 된 바로는, 저 코안
경을 쓴 갑빠의 집 -'책'이라고 하는 의사의 집이었던 것입니다.
  '책'은 나를 산뜻한 침대 위에 눕혔습니다. 그리곤  무언가 투명한 물약을 
한 컵 먹여 주었습니다. 나는  침대 위에 누운 채, '책'이 하는 대로 내맡기
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나의 몸은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뼈마디마
디 쑤시고 있었으니까요.
  '책'은 하루에 두세  번은 반드시 나를 진찰하러 왔습니다. 또  사훌에 한 
번씩은 내가 맨 처음 대면한 갑빠 -'백'이라는 어부도 찾아왔습니다.
  갑빠는 우리들 인간이 갑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인
간에 대한 걸 알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들 인간이  갑빠를 생포하는 것보다
도 갑빠가 인간을 생포하는 일이 훨씬 많기 때문인가 봅니다.
  생포라고 말하는  건 타당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들 인간은  나보다 
이전에도 번번이 갑빠의  나라로 왔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생동안  갑
빠의 나라에 살고 있었던 자도 많았던 것입니다.
  왜냐고 말씀하시는가요. 우리는 다만 갑빠가 아닌, 인간이라고 하는 특권
으로 해서 일하지 않고서 먹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백'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떤 젊은 도로인부는 역시  우연하게 이 나라에 
온 후로, 암놈의 갑빠를 아내로 삼아 가지고, 죽을 때까지 거주했다고도 합
니다. 하기는 그 암놈의 갑빠는  이 나라 제일의 미인인 데다가, 남편인 도
로인부를 속여 넘기는 데도 지극히 재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 일주일 지난 후, 나는  이 나라의 법률이 규정한 방에 의해, 특별보호
주민으로서 '책'의 이웃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내 집은  작은 폭으로 퍽이
나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나라의 문명은 우리들 인간의 나라의 문명 -적어도 일본의 문명 
따위와 별반 차이는  없습니다. 길거리를 향한 객실 구석에는 조그마한  피
아노가 한 대 있고, 벽에는 액자를 넣은 에칭 따위도 걸려 있었습니다.
  다만 문제의  가옥을 위시해서, 테이블이며  의자의 치수도 갑빠의  키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아이들 방에 들어간 것처럼 그것만은 불편하게  느껴
졌습니다.
  나는 언제나 저녁녘이 되면,  이 방에 '책'과 '백'을 맞아들이고선, 갑빠의 
말을 배웠습니다.
  아니, 그들뿐만은 아닙니다. 특별보호주민이었던 나한테 누구나가 호기심
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날마다  혈압을 조사해 달라 해서, 몸소 '책'을 불러
오는 '게엘'이라는 유리회사  사장 같은 이도 역시  이 방에 얼굴을 내밀곤 
했습니다.
  그러나 맨 처음 반 달 가량  동안 나와 제일 친하게 군 것은 역시 '백'이
라는 어부였습니다.
  어느 후덥지근한 날의 저녁녘이었습니다. 나는 이 방의  테이블을 가운데
다 놓고 어부 '백'하고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은 어떤 생각에선
지, 갑자기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하고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습니다.
  나는 물론이상하게 생각했기에  "Quax, Bag, quoquel quan?" 하고  말했
습니다. 이것은 일본말로 번역하면, "야, '백', 웬일이지?" 라는 뜻입니다. 하
지만 '백'은 대답을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별안간  일어서더니, 날름 혀를 
빼문 채, 꼭 마치 개구리가 뛰듯이 덤벼들 기색조차 보였습니다. 나는 더더
욱 겁을 집어먹고, 슬며시 의자에서 일어서서 한 걸음에  문 어귀로 뛰어나
가려 했습니다. 
  마침 그때 거기에 얼굴을 내민 건 의사 '책'입니다.
  "임마, '백', 뭘 하지?"
  '책'은 코안경을 쓴 채, 그러한 '백'을 노려보았습니다. 그러자 '백'은 송구
스럽다는 듯이, 몇 번이고 머리에 손을 가져가면서, 이렇게 '책'한테 사과하
는 것입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실은 이  나으리가 겁을 내는 꼴이 재미나서, 그만 장
난을 좀 했지요. 제발 나으리께서도 용서해 주세요."
  3
  나는 이야기를 더 계속하기 전에 잠깐 갑빠라는 걸 설명해 주어야겠습니
다. 갑빠는 아직껏 실재하는지 어떤지도 의문인 동물입니다.  허나, 그건 나 
자신이 그들 사이에 살고 있었던 이상, 조금도 의심할  여지는 없을 터입니
다.
  이들이 어떠한 동물인가 하면, 머리에 짤막한 털이 있는 것은 물론, 손발
에 물갈퀴가 달려  있다는 것도 [수호고략] 등에 나와 있는  것과 두드러진 
차이는 없습니다. 신장도 대략 1미터를 넘을까 말까 한 정도겠지요. 체중은 
은사 '책'에 의하면 9킬로그램에서 14킬로그램까지 -드물게는 23킬로그램이 
넘는 큰 갑빠도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 한가운데에는  타원형의 접시가 있고, 또 그 접시는  연령에 
따라 차츰  경도를 더해 가는  모양입니다. 사실상 나이먹은 '백'의  접시는 
젊은 '책'의 것과는 전연 감촉도 다르니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불가사의한  건 갑빠의 피부색일 겝니다. 갑빠는 우리들  인
간처럼 일정한 피부색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그 주위
의 색과 같은 색으로 변해 버리는 -가령 풀 속에 있을 때엔 풀처럼 초록빛
으로 변하고, 바위 위에  있을 때엔 바위처럼 회색으로 변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물론 갑빠에 국한된  게 아니고, 카멜레온에게도 있는 일이지요. 어쩌
면 갑빠은 피부조직 위에 무언가 카멜레온에 가까운 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사실을 발견했을  때, 서국(여기서 말한 '서국', '동북'은 물론  일
본 국내에서의 각  지방을 가리킨다:역주)의 갑빠는 녹색이며, 동북의 갑빠
는 빨갛다는 민속학상의  기록을 상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을 쫓아갈 
때, 돌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던 것을 상기했습니다.
  게다가 갑빠는 피부 밑에 꽤 두꺼운 지방질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라, 이 
땅 속 나라의 온도는 비교적  낮아 평균 화씨 오십도 전후임에도 불구하고 
옷이라는 걸 모르고 지냅니다. 물론 어느 갑빠고 간에 안경을 쓰거나, 궐련
갑을 가지고  다니거나, 돈지갑을 가지고 있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갑빠는 
캥거루처럼 배에 주머니를 가지고 있어서, 그러한 물건들을  간직할 때에도 
별반 불편을 느끼지 않는단 말입니다.
  다만 나로서 우스웠던 것은  허리 언저리조차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
다. 나는 어느 때던가 이 습관을 웬일이냐고 '백'한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
더니 '백'은 몸을 뒤로 젖힌 채, 언제까지나  깔깔 웃고 있었습니다. 뿐더러, 
"난 당신이 감추고 있는 게 우습구료." 그런 대답을 하더군요.
  4
  나는 차차 갑빠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말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갑빠의 풍속이며 습관도 납득할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이상스러웠던 점은, 갑빠는 우리들 인간이  진지하게 생
각하는 일을 우습게 여기며, 동시에 우리들 인간이 우습게  여기는 일을 진
지하게 생각하는 -이 같은 기묘한 습관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예컨데  우리
들 인간은 정의니 인도니 하는  걸 진지하게 생각하지만 갑빠는 그런 말을 
들으면 배를 잡고 웃어댄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우습다는 관념은 
우리들이 말하는 우습다는 관념과는 전연 기준을 달리하고 있나 봅니다.
  나는 어느 때인가 의사  '책'하고 산아제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
니다. 그러자 '책'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코안경이  떨어질 지경으로 웃어댔
습니다. 나는  물론 화가 나서 무엇이  우스우냐고 힐문했습니다. 분명치는 
않지만 '책'의 대답은 대략 이러했다고 기억합니다. 하긴  다소 세세한 부분
은 틀렸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아직 그즈음은 나도 갑빠가 사용하는  말
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양친의  사정만을 생각한다는건  우습지 뭡니까. 글세  너무나 
독선적이다, 그 말입니다."
  그 대신 우리들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사실 말이지  또 갑빠의 해산만큼 
우스운 건 없지요. 실지로 나는 얼마 안 가서  '백'의 마누라가 해산하는 장
면을 '백'네 오두막으로 구경하러 갔습니다. 갑빠도 해산을  할 때는 우리들 
인간하고 마찬가지지요. 역시  의사나 산파 등의 도움을 얻어 해산을  한다
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막상 해산을 할 단계가 되면, 아범되는 갑빠는  전화라도 걸 듯
이 어멈되는 갑빠의 xxx xx에 대고는 "너 이 세계에 태어나오겠느냐 어떠
냐, 잘 생각한 다음에 대답을 해봐." 하고 커다란 소리로 묻는다 그 말입니
다. '백'도 역시  무릎을 꿇으면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이렇게 말했습니
다. 그런 다음에 탁자 위에 있던 소독용의 물약으로 양치질을 했습니다. 하
니까 부인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다소 걱정이라도 하듯,  이렇게 작은 소리
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첫째 저의  아버지의 유전인 정신병만 하
더라도 견딜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갑빠적 존재를 옳지 못한  걸로 믿
고 있으니까요."
  '백'은 이 대답을 들었을 때, 창피한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와 있던 산파는 때를 놓치지  않고 부인의 xx에다가 굵직
한 유리 파이프를 질러  넣고, 무엇인지 액체를 주사했습니다. 그러자 부인
은 안도한 듯이 굵은 숨을 내쉬었습니다. 동시에 또  지금까지 커다랗던 배
는 수소 가스를 뽑아낸 고무풍선처럼 쭈글쭈글 움츠러들어 버렸습니다.
  이런 대답을 할  정도에서, 갑빠의 어린 것은 태어나기가 무섭게  걸어다
니기도 하고 지껄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책'의 말에 의하면, 출산 후 스무
엿새만에 신의  유무에 관해 강연을 한  어린 애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긴 
그 아이는 두 달만에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만. 해산  이야기를 한 끝이니다
만, 내가 이  나라에 온 지 석달째  되던 날 우연히 어느 거리  모퉁이에서 
본 커다란 포스터 이야기를 하지요. 그 커다란 포스터 이야기를 하지요. 그 
커다란 포스터 밑에는 나팔을 불고  있는 갑빠며 검을 가진 갑빠가 열두서
너 마리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위에는 갑빠가  사용하는 흡사 시계
태엽과 같은 나선문자가 잔뜩 나열해 있었습니다. 이 나선문자를 번역하면, 
대략 이러한 의미가  되는 셈입니다. 이것도 혹시 세세한 부분은  틀렸을지
도 모릅니다. 좌우간 나로서는  나하고 같이 걷고 있던, '랩'이라는 갑빠 학
생이 커다란 소리로  읽어주는 말귀를 일일이 노트에  적어 두었던 것입니
다.
  유전적 의용대를 모집함!!
  건전한 남녀 갑빠들이여!!
  악유전을 박멸하기 위하여 불건전한 남녀
  갑빠들과 결혼하라!!
  나는 물론 그때에도 그런 일이 실천될 수 없다는 것을 '랩'한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랩'뿐만 아니라 포스터 근처에 있던  갑빠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죄다 캬들캬들 웃어댔습니다.
  "실천될 수 없다? 하지만 당신 말을 들어  보면, 당신네들도 역시 우리들
과 마찬가지로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당신은 아드님이  하녀한테 
반하거나, 따님이 운전수한테 반하거나 하는 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가요? 그건 모두  무의식적으로 악유전을 박멸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첫째 
요전번에 당신이 이야기한  당신들 인간의 의용대보다도 -한  줄기 철도를 
빼앗기 위해 서로 죽이고 죽는  의용대 말입니다- 그러한 의용대에 비긴다
면, 훨씬 우리들의 의용대는 고상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랩'은 정색하고 이렇게 말했는데  뚱뚱한 배만은 우스운 듯이 연신 물결
치듯 하고 있었습니다. 허나, 나는 웃는 와중에 허겁지겁 어떤 갑빠를 붙들
려 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방심을 틈타 그 갑빠가 내  만년필을 훔친 걸 깨
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부가  매끄러운 갑빠는 용이하게  우리들한테 붙들리지 않습니
다. 그 갑빠도  쭈루루 미끄러져 빠지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도망치고  말았
습니다. 마치 모기같이 야윈 몸을 거의 넘어질 듯이 구부리면서.
  5
  나는 이 '랩'이라는 갑빠한테 '백' 못지 않게  신세를 졌습니다. 그 중에서
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턱'이라는 갑빠를  소개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턱'은 
갑빠 일파의 시인입니다.  시인이 머리카락을 길게 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 
인간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는 이따금씩 '턱'네 집에  심심파적으로 놀러 갔
습니다. '턱'은 언제나 비좁은 방에 고산식물의 화분을 늘어놓고, 시를 쓰거
나 담배를 피우면서, 참으로 편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 방 구석에는 암
컷 갑빠가 한  마리('턱'은 자유연애가라 마누라라는 걸 갖지 않습니다)  뜨
개질인지 뭔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턱'은 내 얼굴을 보면 언제나 미소를 짓고 이렇게 말합니다(하긴 갑빠가 
미소하는 건 그다지 기분  좋은 게 못됩니다. 적어도 나는 처음  얼마 동안
은 차라리 겁을 집어먹곤 했지요.).
  "어, 잘 왔네. 그래, 그 의자에 걸터 앉게나."
  '턱'은 곧잘  갑빠의 생활이며  갑빠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턱'이 믿는 바로는 정상적인  갑빠의 생활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는 것입니
다. 부모, 자식, 부부, 형제라는  건 모두가 다 서로 고통을 주고 받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특히나 가족제도라는  건 어리석고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턱'은  언젠가 
창 밖을 가리키면서, "보게나. 저 어리석은  꼴을!" 하고 내뱉듯이 말했습니
다. 창 밖 길거리에는 아직 나이 젊은 갑빠가 한 마리, 양친인 듯한 갑빠를 
비롯해서 일고여덟 마리의 갑빠를 목 둘레에 달고선, 숨이  거의 넘어갈 듯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젊은 갑빠의 희생적 정신에  탄복했
으므로, 되려 그 갸륵함을 칭찬해 마지 않았습니다.
  "허, 자넨 이 나라의 시민이  될 만한 자격을 갖고 있네그려... 헌데 자넨 
사회주의자인가?"
  나는 물론 qua(이건 갑빠가 사용하는 언어로 '그렇다'는 의미를 나타냅니
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백 명의 범인을 위해 기꺼이 한 사람의 천재를 희생하는 것도 
개의치 않을 테지."
  "그럼 자넨 무슨 주의잔가? 누군가 '턱'군의 신조는 무정부주의라는 말을 
했었는데..."
  "나 말인가? 난 초인(직역하자면 갑빠)일세."
  '턱'은 자랑스러운  듯 단언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턱'은 예술상으로도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턱'이 믿는 바에 의하면, 예술은 그 무엇
의 지배도 받지 않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무엇보다도 
먼저 선악을  초절한 초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긴 이건 반드시  '턱' 
일개의 의견만은 아닙니다. '턱'의 동료 시인들은 대개가  같은 의견을 가진 
모양입니다.
  실지로 나는 '턱'과 함께 곧잘 초인 클럽으로  놀러갔습니다. 초인 클럽으
로 모여드는 건  시인, 소설가, 극작가, 비평가, 화가, 음악가,  조각가, 아마
추어 예술가 등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나가 초인입니다. 
  그들은 전등이 밝은 살롱에서 언제나 쾌할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곤 했습
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득의양양해서 그들의 초인다움을  서로 과시하곤 
했습니다.
  예컨대 어떤 조각가는  커다란 풀고사리 화분 사이에  나이 젊은 갑빠를 
붙들고서는, 자꾸만 xx를 가지고 희롱하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암놈의 소
설가는 탁자 위에 일어선 채,  압상트 술을 육십 병 마셔 보였습니다. 하긴 
이 자는 육십 병째에 탁자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가 하더니 삽시간에 운명
하고 말았습니다만은.
  나는 어느 달이 밝은 밤, 시인인 '턱'과 팔짱을  낀 채 초인 클럽으로부터 
돌아왔습니다. '턱'은 여느때와  달리 울적한 듯 한  마디 말도 없었습니다. 
이윽고 우리는 불빛이  비치는 조그마한 창 밑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창 저쪽에는 부부인 듯한  암수 두 마리의 갑빠가, 세 마리의  갑빠와 함께 
만찬의 탁자를 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턱'은 한숨을  지으면서 돌연 나
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말이지,  초인적 연애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말일세, 저러한 가정의 
분위기를 보면, 역시 선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군."
  "그러나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된 일이라곤 생각지 않나?"
  하지만 '턱'은 달빛 밑에 물끄러미 팔짱을 낀 채,  그 조그마한 창 저쪽을 
-평화로운 다섯 마리 갑빠들의  만찬의 탁자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
고 잠시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기 있는 달걀부침은 뭐니뭐니 해도, 연애보단 위생적이니깐 말야."
  6
  사실 말이지 또  갑빠의 연애는 우리들 인간의  연애와는 퍽이나 취향이 
다릅니다. 암놈의 갑빠는 이거구나  싶은 수놈의 갑빠를 만나기만 하면, 수
놈 갑빠를 붙잡기에  여하한 수단이건 다 동원합니다. 제일 정직한  암놈의 
갑빠는 필사적으로 수놈 갑빠를 쫓아갑니다. 사실 나는  미치광이처럼 수놈
의 갑빠를 쫓아 다니는 갑빠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닙니다. 젊은 암놈의 갑빠는 물론,  그 갑빠의 양친이나 
형제까지 함께 어울려 쫓아 다니는 것입니다. 수놈의  갑빠야말로 불쌍합니
다. 아무튼 죽도록  도망쳐 다닌 끝에, 재수  좋게 붙들리지 않는다 하더라
도, 두서너 달은 자리에 드러눕고 마니까요.
  나는 언젠가 내  집에서 '턱'의 시집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기에 뛰
어든 것은 저 '랩'이란  학생입니다. '랩'은 우리집으로 굴러들어 오자, 마룻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이 끊어질 듯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큰일 났다! 끝끝내 난 붙잡히고 말았어!"
  나는 그 순간 시집을  내던지고, 문에다 자물쇠를 걸어 버렸습니다. 그러
나 열쇠 구멍으로 엿보니까, 유황가루를 얼굴에 바른 키가  작은 암놈 갑빠
한 마리가 아직도 문께에서 서성거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랩'은 그날부터 몇  주일 동안인가 내 자리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틈엔가 '랩'의 주둥이는 온통 썩어 문드러지고 말았습니다.
  때로 암놈의 갑빠를 열심히 쫓아  다니는 수놈의 갑빠도 없는 것은 아닙
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을 말하자면 쫓아다니지 않고선  배기지 못하도록 
암놈의 갑빠가 꾸며 놓은 것입니다.
  나는 역시 미치광이처럼  암놈의 갑빠를 쫓아 다니는  수놈의 갑빠도 본 
적이 있습니다.  암놈의 갑빠는 도망치는 동안에도,  가끔가끔 일부러 멈춰 
서 보기도 하고, 네 발로  넙죽 엎드려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꼭 적당
한 시기가 되면, 그만 낙담한 양 지극히 손쉽게 붙잡히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본 수놈의 갑빠는 암놈의 갑빠를 껴안은 채 얼마 동안 거기에 뒹굴
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까스로 일어선 것을  보니, 실망이랄까 후회라고 
할까, 아무튼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가엾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또 괜찮은 편입니다.  이것도 내가 본 건데, 조그만 수놈 갑
빠 한 마리가 암놈 갑빠를 쫓고 있었지요. 암놈 갑빠는 여느때나 다름없이, 
유혹적 둔주를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쪽 거리로부터 커다란  수
놈의 갑빠  한 마리가 콧숨을  씩씩거리면서 걸어왔습니다. 암놈의  갑빠는 
어찌어찌하던 중에 문득 이 수놈의 갑빠를 보자,
  "큰일 났어요! 살려 주세요!  저 갑빠는 절 죽이려 합니다!" 그렇게 쇳소
리를 내어 외쳤습니다.
  물론 커다란 수놈의  갑빠는 단박에 조그만 갑빠를 붙잡더니, 길거리  한
복판에 깔아 눕혔습니다. 조그만 갑빠는 물갈퀴가 있는 손으로  두세 번 허
우적거리다가, 급기야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때 암놈의 갑빠는 
싱글벙글하면서, 커다란 갑빠의 목덜미에 꼭 매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수놈의 갑빠는 누구나 다 약속이나 한 듯이 암놈의 갑빠
한테 쫓겨다녔습니다. 물론 처자를 가진 '백'도 역시 쫓겨다녔지요. 뿐만 아
니라, 한두어 번은 붙잡혔던 것입니다. 다만 '맥'이라는 철학자만은(이 친구
는 저 '턱'이라는 시인의 이웃에 있는 갑빠입니다) 한 번도 붙잡힌 적이 없
습니다. 이건 한편으로는 '맥'만큼 못생긴 갑빠도 적기 때문이겠고, 또 한편
으로는 '맥'만은 그다지 길걸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집 안에만 있기 때문입
니다.
  나는 이 '맥'네  집에도 종종 얘기하러 갔습니다. '맥'은  언제나 어둑어둑
한 방 안에 일곱 빛의  색유리 랜턴을 켜놓고, 다리가 긴 책상에 마주앉아, 
두꺼운 책만 읽고  있지요. 나는 언젠가 '맥'과 갑빠들의 연애에  관하여 서
로 토론했습니다.
  "왜 정부는 암놈의  갑빠가 수놈의 갑빠를 쫓아  다니는 걸 좀더 엄중히 
단속하지 않는지요?"
  "그건 한 가지로는 관리들 속에 암놈의  갑빠가 적기 때문입니다. 암놈의 
갑빠는 수놈의 갑빠보다도 한층 질투심이 강하니까요. 암놈의  갑빠 관리만 
늘어난다면, 필시 수놈의 갑빠는 지금보다 쫓기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 효력도  대단할 건 없지요. 왜냐하면 관리들끼리라 해도  암놈의 
갑빠는 여전히 수놈의 갑빠를 쫓아다니니까요."
  "그럼 당신처럼 살고 있는 건 제일 행복한 셈이겠군요."
  그러자 '맥'은 의자에서 일어나 나의 두 손을 잡은  채, 한숨과 함께 이렇
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들 갑빠가 아니니,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
러나 나도 어떤 때면 저 무서운 암놈의 갑빠한테 쫓겨 다니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답니다."
  7
  나는 또 시인인  '턱'하고 여러 차례 음악회에도  갔습니다. 하나. 지금껏 
잊혀지지 않는 건 세 번째 갔던 음악회의 일입니다.  음악회장 분위기는 일
본과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층층이 올라간 좌석에  암수의 갑빠가 3~4백 
마리, 모두가 프로그램을 손에 들고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 번째 음악회 때엔 '턱'이랑 '턱'의 암컷 갑빠 이외에도 철학자
인 '맥'과 어울려, 맨  앞좌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첼로 독주가 끝난 
후 이상스레 눈이 가는 갑빠 한 마리가 아무렇게나 보본을 안은 채 단상으
로 올라왔습니다. 이 갑빠는  프로그램이 가르쳐 주듯, 유명한 '크라백'이라
는 작곡가입니다.  프로그램이 가르쳐 주듯-아니, 프로그램을  볼 것까지도 
없습니다. '크라백'은  '턱'이 소속된 클럽의  회원이라 나도 역시  얼굴만은 
알고 있지요.
  "Lied-Craback."(이 나라의  프로그램도 대개는 독일어를 나열하고  있었
습니다.)
  '크라백'은 요란한 박수 속에 잠깐 우리한테 한 번  절한 다음, 조용히 피
아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렇게나 자작의 리드를  치기 시작
했습니다. '턱'의 말에  의하면 '크라백'은 이 나라가 낳은  음악가중 전후에 
비길 바 없는 천재라  합니다. 나는 '크라백'의 음악은 물론이요, 또 여기인 
서정시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길래, 커다란  궁형을 한 피아노의  음향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턱'이랑 '맥'도 황홀해서 듣고  있던 모
습은 나보다도 더했을 겁니다.
  허나 저  아름다운(적어도 갑빠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암놈의  갑빠만은 
프로그램을 꼬옥 쥔 채,  이따금씩 참으로 초조한 듯 긴 혀를  날름날름 내
밀곤 했습니다. 이것은 '맥'의 얘기를 들으면, 한 십년 전에 '크라백'을 붙잡
으려다 실패했으므로, 아직껏  이 음악가를 눈의 가시로 여기고 있다는  것
입니다.
  '크라백'은 온몸에 정열을 담아,  싸우듯이 피아노를 쳐 나갔습니다. 그런
데 돌연 회장 안에 우레   소리처럼 울려 퍼진 건 "연주 중지"라는 소리입
니다. 나는 이  소리에 깜짝 놀라, 엉겁결에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소리
친 당사자는 다름아닌, 맨 뒷자리에 있는 키가 월등히 큰 순경입니다. 순경
은 내가 뒤돌아  보았을 때, 태연히 걸터 앉은 채,  다시 한 번 아까보다도 
큰소리로 "연주 중지" 하고 외쳤습니다. 그 다음-그  다음부터는 대 혼란이
었습니다. "경관 횡포다!" "꺼지지 못해?"  "양보 말아라!" - 이러한 소리들
이 끓어 오르는 속에  의자는 쓰러지고, 프로그램은 날아가고, 게다가 누가 
던지는 것인지 빈  사이다병이며 돌멩이, 먹다 만 오이쪽마저 쏟아져  옵니
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턱'한테  그 이우를 물었습니다. 허나 '턱'도 흥분
했는지 의자 위에  벌떡 일어서면서, "'크라백' 계속해라, 계속!"  하고 떠들
어 댑니다. 뿐만  아니라 '턱'의 여편네인 갑빠도 어느 틈에  적의를 잊어버
렸는지, "경관 횡포다"하고 외치는 꼴은 조금도 '턱'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맥'을 향해, "웬일인가요?"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이거 말입니가? 이건  이 나라에선 흔히 있는 일이랍니다.  원래가 그림
이니 문예니 하는 것은..."
  '맥'은 무슨 물건들이 날아올  때마다 흠칫 몸을 움츠리면서 여전히 조용
히 설명했습니다.
  "원래가 그림이니 문예니 하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무엇을 표현하고 있
느냐 하는 것을 좌우간 똑똑히 알  수 있을 터이므로 이 나라에선 결코 발
매금지나 전람금지는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연주는 금지입니다. 아무튼 
음악이라는 것만은 아무리  풍속을 문란케 하는 곡이라 하더라도, 귀를  가
지지 못한 갑빠에겐 이해가 가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저 순경에겐 귀가 있다는 말인가요?"
  "글세, 그건 의문이군요. 아마도 지금의 멜로디를 듣고 있는 중에 마누라
하고 같이 잘 때의 심장의 고동이라도 떠올랐던 거겠지요."
  이러는 동안에도 대소동은 오히려 더욱더  요란해질 따름입니다. '크라백'
은 피아노를 향해 앉은  채, 오연히 우리들을 돌아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
나 제아무리  오연히 앉아 있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물건이 날아오는  건 
피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2~3초마다 태도도 달라졌던  것입니
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대음악가의 위엄을 지켜나가면서, 가는 눈을 무섭
게 빛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도 물론  위험을 피하기 위해 '턱'을 임시방패로 삼고  있었지요. 
그러나 호기심에 끌리어, 열심히 '맥'과 얘기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런 검열은 난폭하지 않습니까?"
  "뭐, 어느 나라  검열보다도 도리어 진보했다 할  지경이지요. 예컨대 xx
를 보십시오. 실지로 바로 한 달쯤 전만 해도..."
  바로 이렇게 말하려 한 순간입니다. '맥'은 공교롭게도  정수리에 빈 병이 
떨어졌으므로, quack(이건 그저  간투사입니다.) 하고 한 번 소리를 지르고
는 그만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8
  나는 유리회사  사장인 '게엘'에게 이상하게도 호의를  가졌습니다. '게엘'
은 자본가 중  자본가입니다. 모르면 모르되 이 나라 갑빠  중에서도 '게엘'
만큼 커다란  배를 한 갑빠는 한  마리도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지(박과의 일년생:역주)와 같이 마누라며  오이와 같은 어린 것을 좌우에 
거느리면서,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장면은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가끔씩  재판관인 '펩'이랑 '책'을 따라서  '게엘'댁 만찬에 나갔습니
다. 또 '게엘'의  소개장을 지닌 채 '게엘'이며 '게엘'의 친구들이  다소의 관
계를 가지고  있는 각종 공장도 보고  다녔습니다. 그 각종 공장  중에서도 
특히 나에게 재미가 있었던 건 서적 제조회사입니다. 
  나는 젊은 갑빠의 기사와 이 공장 안에 들어가,  수력전기를 동력으로 한 
커다란 기계를 보았을  때, 새삼스레 갑빠의 나라의 기계공업의 진보에  경
탄하였습니다. 아무튼 거기서는  일년간 7백만 부의 책을 제조한다고  합니
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건 책의 부수가 아닙니다.  그만큼의 책을 제조하
는데 조금도 손이  가지 않는다는 그것입니다. 아무튼 이 나라에서는  책을 
만드는 데에 다만 기계의 깔대기  모양을 한 입에다가 종이와 잉크와 회색
을 한  분말을 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니까요. 이들 원료는 기계  속으로 
들어가면 거의 5분도 지나기 전에  국판, 사륙판, 국반재판 등의 무수한 책
이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여러 가지 책을 바라보면서, 배를 내밀고  선 
기사에게 그  회색 분말은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기사는 
거무스레 빛나는 기계 앞에  멈춰 선 채, 별로 신통스러울 것도  없다는 듯
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거 말인가요? 이건 당나귀의 뇌수랍니다. 에에,  한 번 건조시킨 다음, 
대강 분말로 만들었을 뿐이지요. 시가는 한 톤에 2~3전이구요."
  물론 이러한 공업상의 기적은 서적 제조회사에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
닙니다. 회화  제조회사에서도 음악  제조회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엘'의 말에 의하면, 이 나라에서는 평균 1개월에  7~8백 종의 기계가 신
안되고, 아무튼 거침없이 대량생산이 행해지고 있다합니다. 따라서 매년 해
고당하는 직공이 4~5만 마리를 넘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아직껏 이 나라에선 매일 아침 신문을 읽어  봐도, 파업이란 글
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이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기에, 언젠가 또 '펩'
이랑 '책'과 '게일'댁 만찬에 초대받은 기회에 슬쩍 물어 보았습니다.
  "그건 죄다 먹어버리는 거랍니다."
  식후의 여송연을  빼어문 '게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했습니
다. 그러나 '먹어버린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코안
경을 쓴 '책'은 내가 미심쩍어 하는 걸 눈치챈 듯 보충 설명을 가해 주었습
니다.
  "그 직공은 모두 도살해 버리고 그  고기를 식료품으로 사용하는 거지요. 
여기 있는 신문을  보십시오. 이 달엔 꼭 육만사천칠백육십구 마리의  직공
이 해고되었으니까, 그만큼 고기값도 떨어진 셈이지요."
  "직공은 아무 말없이 도살당하는가요?"
  "그야 떠들어댔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직공 도살법이 있으니까요."
  이 말은 산도 화분을 뒤로 한 채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던 '펩'이 내뱉은 
말입니다. 나는 물론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인 '게엘'은 물론
이요, '펩'이나 '책'도 그런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사실 말
이지 '책'은 웃으면서, 조롱하듯이 나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즉, 굶어죽거나 자살하는 수고를  국가적으로 생략해 주는 셈이지요. 잠
깐 유독 가스를 맡게 할 뿐이니 대단한 고통은 없지요."
  "그렇지만 그 고기를 먹는다는 건..."
  "농담 마십시오. 저  '맥'한테 이 말을 한다면  정말 크게 웃어댈 겝니다. 
당신의 나라에서도 제사 계금의 딸들은  매소부가 돼 있지 않습니까? 직공
의 고기를 먹는 것쯤 가지고 분개하거나 하는건 센티멘틀리즘이지요."
  이러한 문답을 듣고 있던 '게엘'은 가까운 탁자 위에 있던 샌드위치 접시
를 권하면서 태연자약하게 나보고 말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좀 드시면? 이것도 직공의 고깁니다만."
  나는 물론 어처구니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아니, 그것뿐이 아
닙니다. '펩'과 '책'의  웃음소리를 뒤에 남기고 '게엘'댁  객실을 뛰쳐나왔습
니다.
  그날은 하늘에  별빛도 보이지 않는, 비라도  퍼부을 듯한 밤이었습니다. 
나는 그 어둠 속을 헤치고 내 집으로 돌아오면서,  쉴새없이 구역질을 했습
니다. 밤눈에도 희끄무레 흐르는 걸 구토하면서.
  9
  그러나 유리회사 사장인  '게엘'은 붙임성있는 갑빠였음에 틀림이 없습니
다. 나는 곧잘  '게엘'과 함께 '게엘'이 속해  있는 클럽에 가서는, 유쾌하게 
하룻밤을 지내곤 했습니다.
  그 클럽은 '턱'이  속해 있는 초인 클럽보다도  훨씬 앉아 있기가 편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게엘'의 이야기는 철학자인  '맥'의 이야기처럼 깊
이는 갖추지 못했다할망정,  나한테는전연 새로운 세계를 -넓은 세계를  보
여 주었습니다. '게엘'은 언제나 순금 스푼으로 커피잔을 휘저어 가면서, 쾌
활하게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아무튼 어느 안개가 깊은 밤, 나는 겨울장미를 담아  놓은 꽃병을 가운데
로 하고 '게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방전체는 물론이
요 의자나 탁자도 하얀 데다가 가느다란 금테를 두른 세세션풍의 방이었다
고 기억합니다.
  '게엘'은 평소보다도  더 득의만면한 듯  얼굴 가득히 미소를 떠올린  채, 
마침 그 즈음 천하를 잡고 있던 Quorax당 내각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
다. '쿼랙스'라는 어휘는 그저 의미가 없는  간투사이므로 '어허'라고나 번역
할 수밖에 없습니다. 좌우간 이 당은 무엇보다도  '갑빠 전체의 이익'이라는 
걸 표방하고 있던 정당이었던 것입니다. 
  "퀘랙스당을 지배하고  있는 건 유명한 정치가  '로페'지요. '정직은 가장 
훌륭한 외교다'라고 한 건 비스마르크가 한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로페'
는 정직을 내정에도 미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로페'의 연설은..."
  "아니 내 말을  좀 들어 보십시오. 그 연설은 물론  철두철미한 거짓입니
다. 그렇지만 거짓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으니까, 필경은 정직과 다름
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걸 가지고 일률적으로 거짓이라 하는 건  당신들만
의 편견입니다. 우리들  갑빠는 당신들 모양... 그러나  그건 아무러면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로페'를 지배하고 있은 건  Pou-Fou 신
문의(이 '푸우-푸우'라는 말도  역시 의미가 없는 간투사입니다.  가령 억지
로 번역하자면, '아아'라고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장인  '쿠이쿠이'입니다. 
하나 '쿠이쿠이'를 지배하고 있는 건 당신 앞에 있는 '게엘'입니다."
  "그렇지만-이건 실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푸우-푸우' 신문은  노동자
의 편을  드는 신문이 아니겠어요.  그 사장인 '쿠이쿠이'도 당신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은..."
  "'푸우-푸우' 신문의 기자들은 물론 노동자의  편입니다. 그러나 기자들을 
지배하는 건 '쿠이쿠이' 이외엔 없을 겝니다.  그런데 '쿠이쿠이'는 이 '게엘'
의 후원을 받지 않고선 배기지 못한답니다."
  '게엘'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순금의 스푼을 손끝으로 희롱하고 있습
니다. 나는 이러한 '게엘'을 보니, '게엘' 자신을 미워하느니보다도, '푸우-푸
우' 신문 기자들한테 동정심이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게엘'은 나의 
침묵에 동정심을 느꼈는지 커다란  배를 부풀리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
니까.
  "'푸우-푸우' 신문  기자들도 전부가  노동자의 편은 아니랍니다.  적어도 
우리들 갑빠라는 건 누구의 편을  드느니 보다도 우선 우리들 자신의 편을 
드니까요. ...그러나 더욱 시끄러운  일로는 이 '게엘' 자신조차 역시 타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게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건 나
의 처입니다. 아름다운 '게엘' 부인이란 말입니다.
  '게엘'은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그건 차라리 행복하겠지요."
  "좌우간 저는 만족해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당신 앞이기에 -갑빠가  아
닌 당신 앞이기에 마음 놓고 떠들어 댈 수 있지요."
  "그렇다면 '쿼랙스' 내각은 '게엘' 부인이 지배한다, 그거군요."
  "자,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7년 전의 전쟁 같은 건 확실히 
어떤 암놈 갑빠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전쟁이라니? 이 나라에도 전쟁이 있었던가요?"
  "있었구 말구요. 미래에도 언제 있을지 모릅니다. 아무튼 인국이 있는 한
은..."
  나는 사실상 이때 비로소 갑빠의 나라도 국가적으로 고립돼 있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게엘'이 설명한 바에 의하면, 갑빠는 항시 수달을 가상적으
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수달을 상대로 갑빠가 전쟁을  한 이야
기에 적지  않은 흥미를 느꼈습니다(글세 갑빠의  강적으로 수달이 있다는 
둥 하는 건  [수호고략]의 저자는 물론이요, [산도민담지]의  저자인 야나기
다 구니오-일본 민속학의 거의 유일한  최고의 권위자임-씨조차 알지 못하
고 있는 것 같은 새로운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물론 양국이 다 방심하지 않고 가만히 상대
방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두
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이 나라에 있던 수달  한 마리가 어떤 
갑빠 부부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암컷 갑빠는 제 서방을  죽여 
버릴 작정으로 있었지  뭡니까. 아무튼 남편이란 자는 난봉꾼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생명보험이 붙어 있었다는  것도 다소의 유혹이 되었을지도 모릅니
다."
  "당신은 그 부부를 아시는가요?"
  "네, -아니, 남편  갑빠만은 알고 있습니다. 내 처 같은  여자는 이보다도 
오히려 여러 갑빠한테 붙들리는 걸 무서워하고 있는 피해망상이 많은 정신
병자지요... 그래서  그 여자 갑빠는 제  남편의 코코아잔 속에  청화가리를 
넣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걸 또 어떻게 잘못했는지 손님인 수달한테  먹이
고 말았지요. 수달은 물론 죽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전쟁이 벌어진 것인가요?"
  "네, 공교롭게도 그 수달은 훈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전쟁은 어느 쪽의 승리로 돌아갔는가요?"
  "물론 이  나라의 승리로  끝났지요. 삼십육만구천오백 마리의  갑빠들은 
이 전쟁을 위해  갸륵하게도 전사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에 비하면 그  정
도의 손해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입니다. 이 나라에 있는  모피란 모피는 거
개가 수달 모피 즉  수달피입니다. 저도 그 전쟁 때엔 유리를  제조하는 외
에도 석탄재를 진지로 보냈습니다."
  "석탄재를 무엇이 쓰는가요?"
  "물론 식량으로 쓰이지요. 우리들 갑빠는 배만  고프면 무엇이든 먹을 건 
뻔한 노릇이니까요."
  "그건-아무쪼록 노하지 말아 주시오.  그건 전지에 있는 갑빠들에게... 우
리 나라에선 추문이 되는데요."
  "이 나라에도 추문임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 이렇게 말하
고 있으면, 아무도 추문으로  보지 않는 법입니다. 왜 철학자 '맥'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너희의 악은 너희 스스로가 말하라. 악은  저절로 소멸할 것이
니' ...게다가 나는 이익 이외에도 애국심에 불타 있었으니까요."
  마침 거기에  들어온 건 이  클럽의 급사입니다. 급사는 '게엘'에게  절을 
한 다음, 낭독이라도 하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댁 이웃에 불이 났습니다."
  "부-불!"
  '게엘'은 놀라며 일어섰습니다. 나도  일어선 건 물론입니다. 그러나 급사
는 태연자약하게끔 다음 말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이젠 꺼져 버렸습니다."
  '게엘'은 급사의 뒷모양을  바라보면서,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을 지었
습니다. 나는 이러한 얼굴을 보자, 어느 틈엔가 이 유리회사 사장을 미워하
고 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게엘'은 이미  이제는 대자본가도 아무
것도 아닌 보통의 갑빠가  되어 서 있는 것입니다. 나는 꽃병  속의 겨울장
미꽃을 뽑아 가지고 '게엘'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비록 불은 꺼졌다  하지만, 부인께선 퍽이나 놀라셨을 겝니다.  자, 이걸 
갖다 드리세요."
  "감사합니다."
  '게엘'은 내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곤 갑자기 싱긋  웃고선, 작은 소리로 
나에게 말했습니다.
  "이웃집은 내 가옥이니까요. 화재보험의 돈만은 탈 수 있지요."
  나는 이때의 '게엘'의 미소를 -경멸할 수도 없었거니와 증오할 수도 없는 
'게엘'의 미소를 아직껏 역력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0
  "웬일이지? 오늘은 또 이상스레 울적한 모양이군."
  그 불이 났던 다음 날입니다.  나는 궐련을 빼어 물면서, 나의 객실 의자
에 걸터앉은 학생인  '랩'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이지  '랩'은 오른
다리 위에다 왼다리를  포갠 채, 문드러진 주둥이조차 보이지 않을  지경으
로 멍하니 마룻바닥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랩'군, 왠일이냐 말야?"
  "아니, 뭐,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랩'은 간신히 머리를 들고는 슬픈 콧소리를 내었습니다.
  "저는 오늘 창 밖을 내다 보면서, '어허, 오랑캐꽃이 폈구나' 그렇게 무심
코 중얼거렸습니다. 그랬더니 제 누이동생의 얼굴빛이 갑자기 변하면서 '그
래요, 아무렴 전 오랑캐꽃이죠' 하고 대들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저의 어머
니도 지독히 누이동생 역성을 드는 편이라, 역시 저한테 공격을 해왔지요."
  "오랑캐꽃이 피었다는 게 어째서 여동생한텐 불쾌한 일이 되지?"
  "글쎄요, 아마  사내 갑빠를 붙든다는  의미로라도 해석했겠지요. 거기에 
어머니하고 사이가 나쁜  고모도 싸움에 끼어 들었으니까, 더욱더 큰  소동
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일년 내내 술주정에 빠져 있는  아버지는 
이 싸움을 알자, 이놈 저놈  구별할 것 없이 마구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것만으로도 수습할 수 없는 판국인데, 저의 남동생은 그  틈에 어머니의 돈
지갑을 훔쳐 가지곤 재빨리 영환가 뭔가를 보러 가  버렸답니다. 저는 정말 
이젠..."
  '랩'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묻고, 아무 말도 않은 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내가 동정한 건  물론입니다. 동시에 또 가족제도에 대한 시인  '턱'의 경멸
을 상기한 것도 물론입니다. 나는 '랩'의 어깨를 두드리고, 열심히 달래었습
니다.
  "그런 일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지. 용기를 내게나."
  "그렇지만... 그렇지만 주둥이라도 문드러지지 않았던들..."
  "그건 단념하는 수밖에 없잖은가. 자, '턱'군네 집에라도 가자꾸나."
  "'턱'씨는 절 경멸하고  있습니다. 저는 '턱'씨처럼 대담하게  가족을 버릴 
줄도 모르니까요."
  "그럼 '크라백'군 집에라도 가지."
  나는 저 음악회 이래로 '크라백'과도 친분이 생겼으므로,  좌우간 이 대음
악가의 집으로 '랩'을 데리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크라백'은 '턱'에 비하면  훨씬 호화롭게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본가
인 '게엘'처럼 살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여러 가지  골동품을 -타
나그라 인형이며 페르시아 도기를 방 하나 가득히 진열한 채 터키풍 긴 의
자를 놓고, '크라백'  자신의 초상화 밑에서 언제나 아이들과 놀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왠일인지 두  팔을 가슴 위에 낀 채, 씁쓸한  얼굴을 짓고 
앉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발 밑에는 종이  부스러기가 잔뜩 흩어져 
있었습니다.
  '랩'도 시인 '턱'과 함께 번번이 '크라백'과는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
나 이 모양을 보고 무서워졌던지,  오늘은 깍듯이 인사를 한 채, 말없이 방
구석에 걸터 앉았습니다.
  "웬일이지? '크라백'군."
  나는 인사하는 대신에 이렇게 대음악가에게 질문부터 했습니다.
  "웬일은 무슨 웬일인가? 밥통 같은 비평가 녀석 같으니라구! 뭐, 내 서정
시는 '턱'의  서정시하곤 비교할 바  못된다, 그렇게 씨부렁 거리지  않았냐 
말야."
  "그러나 자넨 음악가이지.."
  "그것만이라면 참을 수도  있지. 난 '록'에 비하면,  음악가 소릴 들을 수 
없다, 그러지 않느냐 말야."
  '록'이란 '크라백'과 곧잘  비교되는 음악가입니다. 그러나  그가  초인 클
럽의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둥이가 말려 올라간, 어딘가 범할 수 없는  기품이 있는 얼굴만
은 여러 번 사진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록'도 천재임이 분명해. 그러나 '록'의  음악은 자네 음악에 넘쳐있는 근
대적 정열을 갖지 못했지."
  "자넨 정녕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하구 말구."
  그러자 '크라백'은 일어서기가 무섭게 타나그라의  인형을 집어들더니, 느
닷없이 마룻바닥에 팽개쳤습니다. '랩'은  어지간히 놀란 모양, 뭐라고 소리
를 지르곤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크라백'은 '랩'과 나한테는 잠깐 '놀
라지 말라'는 손짓을 한  다음, 이번에는 냉정하게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
까.
  "그건 자네도  속인처럼 귀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야. 난 '록'을  두려워 
해..."
  "자네가? 겸손을 가장하는 건 그만두게."
  "누가 겸손을 가장한다구? 자네들한테 가장해 보일  양이면, 비평가들 앞
에서 가장해 보이겠네. 난 -'크라백'은 천재다. 그 점에선 '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을 두려워한다는 말이지?"
  "무엇인지 정체를  알지 못할 것을  -말하자면 '록'을 지배하고  있는 별
을."
  "어째 나로선 납득이 안 가는 걸."
  "그럼 이렇게 말하면 알까. '록'은  내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반면 나는 어
느 틈엔가 '록'의 영향을 받고 만다, 그 말이야."
  "그건 자네 감수성의..."
  "가만, 내 말을 듣게. 감수성 따위 문제가  아닐세. '록'은 언제나 마음 놓
고 그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엉. 그러나 나는 초조해 한다  그 말
이야. 그야 '록'의 눈으로  보면, 혹은 한 걸음 차이일지도 몰라,  하지만 나
한텐 10마일이나 틀린다 그 말일세."
  "그러나 선생님의 영웅곡은..." '크라백'은 가느다란  눈을 더욱 가늘게 뜨
고, 아니꼽다는 듯이 '랩'을 노려보았습니다.
  "닥치지 못해?  자네 따위가 무얼 안다구?  난 '록'을 알고  있단 말이다. 
'록'한테 굽신거려 마지 않는 개 같은 것들보단 '록'을 알고 있단 말이다."
  "글세 좀 조용히 하게나."
  "만일 조용히 하고  있을 수 있다면... 난 언제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는 나를- '크라백'은 조롱하기 위해서 '록'
을 내 앞에 내세웠다 그 말일세. 철학자인 '맥'은  이러한 사실을 죄다 알고 
있어. 언제나 그 색유리 랜턴 밑에서 낡아빠진 책만 읽고 있는 그 주제에."
  "어째서?"
  "요즈음 '맥'이 쓴 [벽창호의 말]이란 책을 보란 말일세..."
  '크라백'은 나한테 한  권의 책을 넘겨 주었다느니보다  던졌습니다. 그리
곤 또 팔짱을 낀 채 퉁명스럽게 이렇게 말을 던졌습니다.
  "그럼 오늘은 실례하겠네."
  나는 풀이 죽은  '랩'과 함께 또 다시 길거리로 나서기로  했습니다. 사람 
왕래가 많은 길거리에는 여전히  참나무 가로수 그늘에 각양각색의 가게가 
즐비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할 일 없이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그때 거리를  지나간 건 머리카
락이 긴 시인인 '턱'입니다. '턱'은 우리 얼굴을 보자, 배의 주머니에서 손수
건을 꺼내가지고 몇 번이고 이마를 닦았습니다.
  "아, 그 동안 못 만났구나. 난 오늘은 오랜만에 '크라백'을 찾아갈까 하는
데..."
  나는 이 예술가들을  다투게 해서는 안된다 생각하고,  '크라백'이 어지간
히 기분이 좋지 않더라는 말을 완곡하게 '턱'한테 했습니다. 
  "그런가. 그럼 그만두기로  하지. 아무튼 '크라백'은 신경쇠약에 걸렸으니
까... 나도 요 2~3주일 동안은 잠이 오지 않아 야단났는걸."
  "어때, 우리하고 같이 산책이나 하면?"
  "아니, 오늘은 그만두기로 하지. 어허?"
  '턱'은 이렇게 외치자  내 팔을 꽉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결엔지 온
몸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웬일이지?"
  "웬일이십니까?"
  "아니, 저 자동차 창  속에서 녹색 원숭이가 한 마리 목을 내민  것 같았
는 걸."
  나는 다소 걱정이 되어, 좌우간 의사 '책'한테  진찰을 받아보도록 권했습
니다. 그러나 '턱'은 아무리  말해도 그러겠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쩐지  미심쩍다는 듯이 우리 얼굴들을 번갈아 보면서,  이런 
말조차 해대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무정부주의자는  아닐세. 그것만은 꼭 잊지 말아 주게  -그럼 
안녕. 난 '책' 따위는 질색이란 말야."
  우리는 멍하니 멈춰 선 채,  '턱'의 뒷모양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아
니 우리는  아닙니다. 학생인 '랩'은  어느 틈엔가 길거리 한복판에  다리를 
벌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동차며 사람의 왕래를 가랑이  사이로 내다보
고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 갑빠도 발광했나 싶어 놀라면서  '랩'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장난 작작하게. 이게 무슨 짓이람?"
  그러나 '랩'은 눈을 비벼대면서, 뜻밖에도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녜요, 너무 우울하길래, 거꾸로 세상을  바라봤지요. 그렇지만 역시 마
찬가지군요."
 

 11
  이것은 철학자 '맥'이 쓴 [벽창호의 말] 속의 몇 대목입니다. -
  '벽창호는 언제나 그 자신 이외의 타인을 벽창호라 믿고 있다.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은 우리를 미워하거나  질투하거나 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장 현명한 생활은 한 시대의 습관을 경멸하면서, 그러면서도 또 그 습
관을 조금도 깨뜨리지 않고 살아가는 그것이다.
  우리가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 그것 뿐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우상을 파괴함에 있어서 이견을 가진 자는  없다.  동시  
에 누구를 막론하고 우상이 됨에 있어서 이견을 가진 자는 없다.
  그러나 우상의 대좌 위에 태연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는, 가장 제신의 
은총을 받은 자-벽창호, 아니면 악인, 아니면 영웅 그것이다. ('크라백'은 
이 대목 위에다 손톱 자국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사상은,  삼천년 전에 끝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우  
리는 다만 낡은 장작에다 새로운 불길을 더할 따름일 것이다.
  우리의 특색은 우리 자신의 의식을 초월하는 것을 상례로 하고 있다.
  행복은 고통을 수반하며, 평화는 권태를 수반하는 것이라면-?
  자기를 변호하는 일은 타인을 변호하는 일보다도 곤란하다. 이 말을 신
용하지 않는 자는 변호사를 보아라.
  긍지, 애욕, 의혹-온갖 죄악은 삼천년 이래로 이 삼자로부터 발단하였다. 
동시에 또한 미상불 온갖 덕목도. 
  물질적 욕망을  감쇄함으로써 반드시 평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우리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 정신적 욕망도  감쇄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크라백'은 
이 대목 위에도 손톱 자국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간보다도  불행하다. 인간은 갑빠만큼  진화하지 못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었을 때 부지중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행한다는 것은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행할 수 있다는  것은 행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경 우리의 생활은 이러한 순환논법을 탈각할  수
는 없다-즉 불합리로 시종하고 있다.
  보들레르는 백치가  된 연후, 그의 인생관을  단 한 마디로-여음이란  한 
마디로 표백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을 말해 주는 것은  반드시 이러한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천재에-그의 생활을 유지하기에 족한 시적 천재에  신
뢰하였기 때문에 위장이란 한 마디를 잊는다는  그것이다. (이 대목에도 역
시 '크라백'의 손톱 자국은 남아 있었습니다.)
  가령 이성을  시종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성을 신성시한 볼테르가 행복하게  일생을 마친 것은, 
즉 인간이 갑빠보다도 진화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12
  어느 비교적 추운 오후입니다. 나는 [벽창호의 말]도 읽기에 싫증이 났고 
해서, 철학자 '맥'을 방문하러 나섰습니다.
  그러자 어느 쓸쓸한 거리 모퉁이에  모기처럼 야윈 갑빠 한 마리가 멍청
하니 벽에 기대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틀림없는, 언젠가 내 만년필
을 훔쳐 간 갑빠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옳지 됐구나 하고, 마침 그곳을 지
나가던 건장하게 생긴 순경을 불러 세웠습니다.
  "잠깐 저 갑빠를  취조해 주십시오. 저 갑빠는  바로 한 달쯤 전에  저의 
만년필을 훔쳤으니까요."
  순경은 오른손에 쥐었던 방망이를  들고(이 나라의 순경은 칼 대신에 소
방목 방망이를 휴대하고 있습니다) "이것 봐, 여보게" 하고 그 갑빠에게 말
을 걸었습니다. 나는 혹시  그 갑빠가 도망치지나 않을까 했었습니다. 하나 
뜻밖에 태연자약하게  순경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팔짱을  낀 
채, 사뭇 오만스레 내 얼굴이며 순경의 얼굴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지 않
겠습니까.
  그러나 순경은  성내지도 않고, 배의  주머니로부터 수첩을 꺼내  가지고 
즉시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은?"
  "'그룩'!"
  "직업은?"
  "2~3일 전까지 우체부를 했었습니다."
  "좋아. 그런데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자네는 이 사람의 만년필을 훔
쳐 갔다는데?"
  "네, 한 달쯤 전에 훔쳤습니다."
  "왜 그랬지?"
  "어린애 장난감을 하려고 그랬습니다."
  "그 아이는?"
  순경을 비로소 상대방 갑빠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쏟았습니다.
  "일주일 전에 죽어 버렸습니다."
  "사망 증명서를 가지고 있나?"
  야윈 갑빠는 배의 주머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습니다.  순경은 그 종
이를 훑어 보더니, 갑자기 빙그레 웃으면서 상대방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좋아, 수고 많이 했네그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순경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러는 동안에 야윈  갑빠는 무엇이라 중얼중얼 뇌까리면서, 우리를 뒤에  남
긴 채 가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이렇게 순경한
테 물어 보았습니다.
  "왜 저 갑빠를 체포하지 않는가요?"
  "저 갑빠는 죄가 없거든요."
  "그러나 내 만년필을 훔친 건..."
  "어린애 장난감을 하기  위해서였겠지요. 그렇지만 그 아이는  죽었지 않
습니까. 만약 미심쩍으시거든, 형법 1,285조를 검토해 보십시오."
  순경은 이렇게 말을  던지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어디론가  가버렸습
니다.
  나는 할 수 없이, 형법 1,285조를 입  속으로 되풀이하면서, '맥'네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철학자인 '맥'은 손님  접대를 즐겨합니다. 실제로 오늘도  어둑어둑한 방
에는 재판관인 '펩'이며 의사인 '책', 유리회사 사장인 '게엘'이랑 모여서, 일
곱 색 색유리 랜턴 밑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재판장인  '펩'이 와 있다는 건  무엇보다도 나에겐 안성마춤입니
다. 나는 의자에  걸터앉기가 바쁘게, 형법 제 1,285조를 들춰  보는 대신에 
곧장 '펩'한테 질문을 던졌습니다.
  "'펩'씨, 대단히 실례입니다만, 이 나라에선 죄인을 처벌하지 않는 것인가
요?"
  '펩'은 금테 달린 담배의 연기를 우선 천천히 뿜어  올린 다음, 아주 흥미
없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왜, 처벌하지요! 사형마저 실시하는 정도니까요."
  "그렇지만 난 한 달쯤 전에..."
  나는 곡절을 이야기한 다음,  문제의 형법 1,285조에 대해서 물어 보았습
니다.
  "암, 그것은 이런 의미지요 -'여하한 범죄를 행하였다  할지라도, 해 범죄
를 행하게 한 사정이 소멸한 후는 해 범죄자를 처벌할 수 없음'. 즉 당신의 
경우로 말하자면, 그 갑빠는 전에는 애 아버지였지만 지금은  이미 애 아버
지가 아니므로, 범죄도 자연적으로 소멸된다 그런 말입니다."
  "그건 너무 불합리하지 않은가요?"
  "농담 마세요. 애 아버지였던 갑빠와 애  아버지인 갑빨를 동일시하는 그
거야말로 불합리합니다. 아,  그렇군, 일본의 법률에선 동일시하도록  돼 있
군요. 그건 어째 우리 보긴엔 우스꽝스럽습니다. 흐흐흐 흐흐흐 흐흐흐."
  '펩'은 궐련을 내던지면서, 관심이  없는 미소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거기
에 참견한 것은 법률과는 연분이 먼 '책'입니다.  '책'은 잠깐 코안경을 고쳐 
쓰고선 이렇게 나에게 질문했습니다.
  "일본에도 사형은 있습니까?"
  "있구 말구요. 일본에선 교수형이지요."
  나는 냉연하게 버티고 앉은 '펩'에 대해 다소 반감을 느끼고 있었던 참이
라, 이 기회에 야유를 퍼부어 주었습니다.
  "이 나라의 사형은 일본보다는 문명적으로 돼 있겠군요?"
  "그건 물론 문명적입니다."
  '펩'은 여전히 태연했습니다.
  "이 나라에선 교수형 같은 건 사용하지  않습니다. 간혹은 전기를 사용하
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전기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범죄
의 명칭을 말해 줄 따름입니다."
  "그것만으로서 갑빠는 죽습니까?"
  "죽구 말구요, 우리들  갑빠의 신경 작용은 당신들의  것보다도 미묘하니
까요."
  "그건 사형뿐만은 아닙니다. 살인에도 그 수법을 쓰는 자가 있지요..."
  사장인 '게일'은 색유리 빛 때문에 얼굴 전체가  보라색으로 물들면서, 인
정스런 웃음을 띠어 보였습니다.
  "나는 요전에  어떤 사회주의자한테서 '네  놈은 도둑놈이다'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 했습니다"
  "그건 의외로 많은 모양이죠. 내가 알던 어떤  변호사 친구는 역시 그 때
문에 죽어 버렸으니까요."
  나는 이렇게 말참견을  한 갑빠-철학자 '맥'을 돌아다 보았습니다.  '맥'은 
역시 여느때나 다름없이 시니컬한 미소를 띤 채, 누구의  얼굴도 보지 않으
면서 지껄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갑빠는  누구한테선가 개구리란 소리를  듣고선, -물론 당신도  알고 
계시지요, 이 나라에서  개구리란 소리를 듣는 건 비인간이라는 의미가  된
다는 것쯤은-난 개구리일까? 개구리는  아닐까? 그렇게 매일같이 생각하는 
동안에 마침내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건 즉 자살이겠지요."
  "하긴 그 갑빠를 개구리하고 한 놈은  죽일 작정으로 말했던 것입니다만. 
당신들의 눈으로 본다면, 역시 그것도 자실이라는..."
  바로 '맥'이  이렇게 말했을 때입니다. 돌연  그 방 벽 저쪽에서  -확실히 
시인인 '턱'네 집에서 날카로운 권총 소리가 한 발,  공기를 퉁기듯 울려 퍼
졌습니다.
  13
  우리는 '턱'네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턱'은 오른손에 권총을 꽉 잡고, 머
리 위 접시에서 피를  흘린 채, 고산식물 화분 속에 벌렁  나자빠져 있었습
니다. 
  또 그 옆에는 여자 갑빠가 한 마리, '턱'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선 커다란
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자 갑빠를 안아 일으키면서, (도대체가 나
는 미끌미끌한 갑빠의 피부에 손을  대는 걸 벼로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만) "왠일이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다만 무슨 글인지 쓰고 있나  했더니, 별안간 
권총으로 머리를 쏜 거예요. 아아, 전 어떡하면 좋을까요? Qur -r-r-r-r-,
Qur-r-r-r-r-(이건 갑빠가 우는 소립니다)."
  "아무튼 '턱'군은 고집쟁이였던 건 사실이야."
  유리회사 사장 '게엘'은  슬픈 듯이 머리를 흔들면서, 재판관  '펩'보고 이
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펩'은 아무 말없이 금테 궐련에다가 불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
러자 이제까지 무릎을 꿇고  '턱'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던 '책'은 제법 의사
다운 태도를 취한 채, 우리들 다섯  사람에게 선언했습니다(실은 한 사람과 
네 마리입니다).
  "이미 틀렸군요.  '턱'군은 원래가  위병인지라, 그것만으로도 울적해지기 
쉬웠던 것입니다."
  "무슨 글인지 쓰고 있었다는데요?"
  철학자인 '맥'은 변명하듯  이렇게 혼자말을 뇌까리면서, 책상  위에 있던 
종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목을  빼어 들고(하긴 나만은 예외
입니다) 딱벌어진 '맥'의 어깨 너머로 한 장의 종이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어서, 일어나 갈 거나.
  사바계를 가로막는 골짜구니로.
  바위들은 강파르고, 샘물은 맑아,
  약초꽃 향기로운 그 골짜구니로.'
  '맥'은 우리들을 돌아다보면서, 씁쓰레한 웃음과 함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괴테의 [미뇬의  노래]의 표절이지요. 그렇다면 '턱'군이 자살한 건 
시인으로서도 피로해 있었던 게 아니겠어요."
  거기에 공교롭게 자동차를 몰고 온 것은  음악가 '크라백'입니다. '크라백'
은 이러한 광경을 보자, 잠시  동안 문 어귀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우리들 앞으로 다가오더니, 호통치듯이 '맥'한테 말을 걸었습니다.
  "그건 '턱'의 유언장인가요?"
  "아니, 최후에 쓰고 있던 시랍니다."
  "시?"
  여전히 도금도 떠들지 않는 '맥'은 머리카락을 곤두세운 '크라백'에게 '턱'
의 시고를 넘겨  주었습니다. '크라백'은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그 시고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뿐더러 '맥'이 하는 말엔 거의 대답조차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턱'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서, 일어나, ...나 역시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해요... 사바계를 가로막는 
골짜구니로..."
  "그러나 당신 역시 '턱'군의 친구 중 한 사람 아니었던가요?"
  "친구? '턱'은 항상 고독했습니다... 사바계를 가로막는 골짜구니로... 다만 
'턱'은 불행하게도... 바위들은 강파르고..."
  "불행하게도?"
  "샘물은 맑아,... 당신들은 행복합니다... 바위들은 강파르고..."
  나는 아직까지도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는 여자 갑빠한테 동정이 갔으므
로, 살짝 어깨를 껴안 듯이 해서, 방 한구석 긴 의자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에는 두 살 아니면  세 살쯤 되어 보이는 갑빠가 한  마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채 웃고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여자 갑빠를 대신해서  애 갑
빠를 얼러 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틈에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이는  걸 느
꼈습니다. 내가  갑빠 나라에 살고 있는  동안에 눈물이라는 걸 흘린  것은 
이전이나 이후에나 이때뿐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자기 하나만 아는 갑빠와 함께 살게 됐던 가족은 가엾지 
뭡니까?"
  "누가 아니랍니까. 글세 뒷일도 생각지 않으니까요."
  재판관 '펩'은 여전히  새 궐련에다 불을 붙이면서, 자본가  '게엘'에게 대
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음악가 '크라백'의 고함 소리입니다. '크라
백'은 시고를 손에 쥔 채, 누구를 향한 것이 아닌 소리를 질렀습니다.
  "옳지! 멋진 장송곡이 되겠는걸."
  '크라백'은 가느다란  눈을 빛내면서 잠깐  '맥'의 손을 잡더니,  느닷없이 
문 어귀로 뛰어나갔습니다.  물론 이미 이때에는 이웃 동네의 갑빠들이  숱
하게 '턱'네 집 문께로 모여들어, 신기한 듯 집안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입
니다. 그러나 '크라백'은 이 갑빠들을 마구 좌우로 밀어젖히기가 바쁘게, 날
새처럼 자동차에 뛰어  올랐습니다. 동시에 자동차는 폭음 소리도 높이  어
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야, 야, 왜들 그렇게 들여다보지?"
  재판관 '펩'은 순경 대신에  숱한 갑빠를 밀어낸 다음, '턱'네 집  문을 닫
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방안은 갑자기 조용해지더군요. 우리들은 이
러한 고요 속에서-고산식물 꽃향기에 섞인 '턱'의 피 냄새 속에서 뒷처리에 
관한 일들을 의논했습니다. 
  그러자 저 철학자 '맥'만은 '턱'의 시체를 바라본  채, 멍하니 무엇인가 생
각에 잠겨 있습니다.  나는 '맥'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무얼  생각하고 계시
죠?" 하고 물었습니다.
  "갑빠의 생활이라는 걸 말이오."
  "갑빠의 생활이 어떻게 되는 거요?"
  "우리들 갑빠는 뭐니뭐니 해도, 갑빠의 생활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선..."
  '맥'은 다소 부끄러운 듯 이렇게 작은 소리로 덧붙였습니다.
  "좌우간 우리들 갑빠  이외의 그 무엇인가 힘을 믿어야 한다,  그 말이지
요."    
  14
  나에게 종교라는 걸 생각나게 한 것은 '맥'의 그  말이었다. 나는 물론 물
질주의자인지라, 진지하게 종교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 분
명합니다.
  그러나 이때는 '턱'의 죽음에서 어떤 감동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갑빠의 종교는 무엇일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나는 즉시로 
학생 '랩'에게 이 문제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야 기독교, 불교, 마호메트교,  배화교 따위를 믿는 사람도 있지요. 그
래도 제일 세력이 있는 건 근대교겠지요. 생활교라고도 합니다만."
  (생활교라는 풀이는 타당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원어는 Quemoocha
입니다.  cha는 영어의  ism이라는 의미에  해당되겠지요. quemoo의  원형 
quemal은 단순히 '산다'느니보다는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를 행하
거나' 그런 의미입니다.)
  "그럼 이 나라에도 교회랑 사원이랑은 있다는 말일 테지?"
  "농담 작작하세요. 근대교의  대사원 같은 건 이 나라 제일  가는 대건축
인 걸요. 어떠십니까, 잠깐 구경하러 가시면."  
  어느 후덥지근한 흐린  날의 오후, '랩'은 득의양양해서 나와 함께  이 대
사원으로 가보았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곳은 니콜라이당(당시 일본 도
쿄으 명물의  하나)의 열 배나  되는 대건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갖 
건축양식을 하나로 얽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대건축 앞에  서서 높은 탑이며 둥근 지붕을 바라보았을  때, 어
딘지 무시무시한 느낌조차 들었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것들은  허공을 향
해 뻗어오른 무수한 촉수같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현관 앞에 우뚝 선  채(그 현관에 비교한 우리는 얼마나 작아 보
였을까요!), 잠시 동안 이 건축이라기보다 차라리 어처구니 없는 괴물에 가
까운 희대의 대사원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대사원의 내부 또한  광대합니다. 그 코린트풍의 원주가 서 있는  속에는 
수많은 참배인이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  다름없이 지극
히 작게만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는  허리 굽은 한 마리의 갑빠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랩'
은 이 갑빠한테 끄덕 머리를 숙인 다음, 정중하게 이렇게 말을 걸었습니다.
  "장로님, 근력이 좋으셔서 무엇보다 축복드립니다."
  상대방 갑빠도 절을 한 다음, 역시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아, '랩'씨군요. 그간 별고  없으시고-(이렇게 말하다 말고 잠깐 말이 막
힌 것은, '랩'의 주둥이가 썩어 문드러진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겠
지요)-아, 좌우간 별고 없으신 모양이군요. 헌데 오늘 어떻게 또..."
  "오늘은 이분을 동반해서 왔지요. 이분은 아마 아시다시피..."
  '랩'은 청산유수로 내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째 그건  또 '랩' 자신이 대사
원에 좀체로 잘 오지 않는데 대한 변명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이분의  안내를 해주십사, 부탁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만."
  장로는 점잖게 미소를 지으면서 우선 나에게 인사를 하고 조용히 정면에 
있는 제단을 가리켰습니다.
  "안내해 드린다 하지만  아무 도움도 돼 드리진 못할 겝니다.  우리들 신
도가 예배하는 건  정면 제단에 있는 '생명의 나무'입니다.  '생명의 나무'엔 
보시다시피, 금빛과 녹색의 열매가 맺혀 있습니다. 저 금빛 열매를 '선과'라 
하며 저 녹색 열매를 '악과'라 합니다..."
  나는 이러한 설명  속에서 벌써 따뜻한 걸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모처럼
의 장로의 말도  낡아빠진 비유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물론  열심히 
듣고 있는 척  했습니다. 그러나 이따금씩은 대사원의 내부로 슬며시  시선
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코린트풍의 기둥, 고딕풍의  돔, 아라비아식 소방목 무늬의  마루, 세세션
인가 싶은 기도대,-이런  것들이 조성하고 있는 조화는 이상하게도  야만적
인 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눈을 끈 것은 무엇보다도 양편 감실 속에 있는 대리석 반신상
입니다. 나는 어쩐지  그 반신상들을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이 느꼈습니다. 
그것도 역시 이상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 허리  굽은 갑빠는 '생명의 나
무' 설명을 끝마치자, 이번에는  나와 '랩'과 함께 오른편 감실 앞으로 다가
서서, 그 감식 속 반신상에 대해 이러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 성도의 한사람-온갖 것에 반역한 성도 스트린드베리입니
다. 이 성도는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스웨덴 보르그의 철학으로  인해 구
원된 것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은  구원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 성도는 오직 우리들과 같이  생활교를 믿고 있었을 따름입니다-아니 믿
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성도가 우리들한테 남겨놓은 [전설]이라는 
책을 읽어 보십시오. 이 성도도 자살미수였음을 자신이 고백하고 있지요."
  나는 약간 울적해지면서  다음 감실로 눈을 돌렸습니다. 다음 감실에  있
는 반신상은 코밑 수염이 굵은 독일사람입니다.
  "이것은 짜라투스트라의 시인  니체입니다. 이 성도는 성도  자신이 만들
어 낸 초인에게서 구원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구원은 얻지 못하
고 미치광이가 되고  말았지요. 만약에 미치광이가 되지 않았던들 혹은  성
도의 수효에 들 수도 없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장로는 잠깐 침묵한 다음 제3의 감실 앞으로 안내했습니다.
  "세번째에 있는 것은  톨스토이입니다. 이 성도는 누구보다도  고행을 했
습니다. 그 까닭은  원래가 귀족이었기 때문에 호기심이 많은 공중에게  자
기 고통을 보이기를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 성도는 사실상  믿을 수 없는  
그리스도를 믿으려 노력했습니다. 아니,  믿고 있는 것처럼 공언한 적도 있
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만년에는 비장한 거짓말쟁이였다는  점에 대
해 견딜 수 없게끔  되었습니다. 이 성도도 이따금 서재 대들보에  대한 공
포를 느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렇지만 성도의 수효에 들어 있을  정도니
까, 물론 자살한 것은 아닙니다."
  제4의 감실  속에 있는 반신상은 우리들  일본인의 한 사람입니다.  나는 
이 일본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아닌 게 아니라 정다운 마음을  느끼지 않
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구니까 다돕뽀(1871~1908 수많은 단편을 쓴 일본문학 초기의 작
가, 시인)입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인부의 심정을 똑똑히 알고 있던 시인입
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설명은 당신한테는 불필요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
럼 다섯 번째 감실 속을 보아 주십시오."
  "이건 바그너가 아닙니까?"
  "그렇죠. 국왕의 친구였던 혁명가입니다. 성도 바그너는 만년에는 식전기
도조차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기독교보다도 생활교신도의  한 사람
이었지요. 바그너가 남긴 편지에 의하면, 속세의 고통은 몇 번이나 이 성도
로 하여금 죽음 앞으로 몰고 갔는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들은 이미 제6의 감실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도 스트린드베리의 친구입니다. 어린애가  많은 마누라 대신에 
열서너 살 난 타히티 여자를 아내로 삼은 상인  출신의 프랑스 화가입니다. 
이 성도는 굵은 혈관 속에 뱃사람의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입술
을 보십시오. 비소인가 무엇인가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제7의 감실 속에 
있는 것은... 이제 당신은 피곤하실 테지요. 그럼 어서 이리로 오십시오."
  나는 사실 피로해 있었기에,  '랩'과 함께 장로를 따라, 향기 풍기는 복도
를 걸어 어떤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그 조그마한방 구석에는  비너스 상 밑
에 산포도 한 송이가  바쳐져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승
방을 상상하고 있었던 만큼 약간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장로는 내  태도에서 이러한 눈치를 챘던지, 우리에게 의자를  권
하기 전에 어지간히 미안하다는 듯이 설명했습니다.
  "부디 우리들의  종교가 생활교라는 점을 잊지  마시기를. 우리들의 신... 
'생활의 나무'의 가르침은 '왕성하게 살라' 그것이니까요... '랩'씨, 당신은 이
분한테 우리들의 성서를 보여 드렸습니까?"
  "아녜요, ...실은 나 자신도 거의 읽은 적이 없답니다."
  '랩'은 머리의 접시를 긁적거리면서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장로
는 여전히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렇다면 잘  이해하지 못하시겠습니다.  우리들의 신은 하룻동안에  이 
세계를 만들었습니다('생명의 나무'는 나무라고는  하지만, 이루어서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암갑빠를 만들었습니다. 그랬
더니 암갑빠는  심심한 나머지, 수갑빠를 요리했습니다.  우리들의 신은 이 
한탄을 불쌍히 여기고,  암갑빠의 뇌수를 뽑아, 수갑빠를  만들었습니다. 우
리들의 신은 이  두 마리 갑빠에게 '먹어라, ...해라, 왕성하게  살아라' 축복
을 내려 주었습니다..."
  나는 장로의 말을 듣는 도중 시인 '턱'을  생각했습니다. 시인 '턱'은 불행
하게도 나와  같이 무신론자입니다. 나는 갑빠는  아니므로, 생활교를 알지 
못했던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갑빠 나라에 태어난  '턱'은 물론 '생명의 나무'를 알고 있었을 것
입니다. 나는 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던 '턱'의 최후를 불쌍히 여겼으므로, 
장로의 말을 가로막듯이 '턱'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하, 불쌍한 시인이구료."
  장로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깊은 숨을 내쉬었습니다.
  "우리들의 운명을 정하는 것은 신앙과  환경과 우연 그것뿐입니다. (하긴 
당신들은 그 밖에도 유전을 들추실 겝니다.) '턱'씨는 불행히도 신앙을 갖지 
못했던 것이지요. '턱'은  당신을 부러워하고 있었을 겝니다. 아니,  저도 부
러워합니다. '랩'군 같으면 나이도 젊고..."
  "저도 주둥이만 온전하다면 낙천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장로는 우리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자, 다시 한 번  깊은 숨을 내쉬었습니
다. 그리고 눈물이 글썽해진  채, 물끄러미 검은 비너스를 응시하고 있습니
다.
  "나도 실은-이건 나의 비밀이니, 부디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마십시오-나
도 실은 우리들의 신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나
의 기도는..."
  바로 장로가  이렇게 말했을 그때입니다.  돌연 방문이 열리더니  커다란 
여자 갑빠가 한 마리,  느닷없이 장로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여자 
갑빠를 껴안고  막으려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자  갑빠는 
눈깜짝할 사이에 장로를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이 늙은 것  같으니라구! 오늘도 또 내  지갑에서 한 사발 들이킬  돈을 
훔쳐 갔지 뭐냐!"
  한 십 분 지난  후, 우리는 정말이지 도망치다시피 해서 장로  내외를 뒤
에 남기곤, 대사원의 현관을 내려갔습니다.
  "저래 가지고 장로가 '생명의 나무'를 믿을 수 있겠어요?"
  얼마 동안 잠자코 걸은  다음, '랩'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대
답하기보다도 부지중 대사원을 돌아다 보았습니다.
  대사원은 무겁게 흐린  하눌에, 여전히 높은 탑이며 둥근 지붕을  무수한 
촉수처럼 뻗쳐 올리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사막의 하늘에  보이는 신기루와
도 같은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15 
  그로부터 그럭저럭 일주일이 지난 후, 나는 문득  의사인 '책'한테서 신기
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턱'의 집에 유령이  나온다는 이야기입니
다.
  그즈음에는 이미 여자  갑빠는 어딘가 다른 데로 가버리고, 우리들의  친
구인 시인의 집도 사진사의 스튜디오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잘은 모르겠
지만 아무튼  '책'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으면 
'턱'의 모습이 어느 틈엔가  반드시 몽롱하게 손님의 뒤에 비쳐진다는 것입
니다.
  하긴 '책'은 물질주의자인지라,  사후 생명 같은 건  믿지 않습니다. 사실 
그 이야기를 할 때에도 악의있는 미소를 띄우면서 "역시 영혼이란 것도 물
질적 존잰가 봅니다그려" 하는 등 주석 비슷한 말을 덧붙이고 있었습니다.
  나도 유령을 믿지 않는다는 점은 '책'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인 '턱'에겐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즉각 책방으로 달려가,  '턱'의 
유령에 관한 기사며 '턱'의 유령의 사진이 실린  신문과 잡지를 사왔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사진들을  보니, 어딘가 '턱' 비슷한 갑빠가 한 마리, 남
녀노소 갑빠들 뒤에 희미하게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턱'의 유령에 관한 심령학협회의 보고입니
다. 나는 상당히 축어적으로 그 보고를 번역해 두었으니, 아래에 대락을 게
재하기로 합니다. 단 괄호 속에 있는 것은 나 자신이 가한 주석입니다.
  '시인 '턱'군의 유령에 관한 보고(심령학협회 잡지 제8274호 소재)
  우리 심령학협회는 전번  자살한 시인 '턱'군의 옛집이자  현재는 xx사진
사의 스튜디오인 xx가 제251호에서 임시조사회를 개최하였음. 참석한 회원
은 아래와 같음(씨명을 생략).
  우리들 17명의 회원은 심령협회 회장  '펙'씨와 더불어 9월 17일 상오 10
시 30분, 우리들이 가장 신뢰하는 '메디엄 홉' 부인을 동반, 해 스튜디오 일
실에 모였음.
  '홉' 부인은  해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즉시, 이미 심령적 공기를  느끼고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는 한편,  구토하기를 수삼 차에 이르렀음. 부인의 말
에 의하면, 이는 시인 '턱'군이 강렬한 연초를 애용한  결과 그 심령적 공기 
또한 니코틴을 함유함으로 인한 것이라고.
  우리들 회원은 '홉' 부인과 더불어 원탁 묵좌하였음. 부인은 3분 25초 후, 
극히 급격한 몽유상태에 빠져 들어감, 동시에 시인  '턱'군의 심령이 빙의하
는 바 되었음.
  우리들의 회원은 연령 순에 따라, 부인에게 빙의한  '턱'군의 심령과 다음
과 같은 문답을 개시하였음.
  문:그대는 무엇 때문에 유령으로 나오는가?
  답:사후 생명을 알기 위해서임.
  문:그대-또는 심령 제군은 사후도 역시 명성을 욕망하는가?
  답:적어도 나는 욕망하지  않을 수 없음. 그러나 내가  해후한 일본의 한 
시인과 같은 경우는 사후의 명성을 경멸하고 있음.
  문:그대는 그 시인의 성명을 알고 있는가?
  답:나는 불행히도  잊어버렸음. 다만 그가 즐겨  지은 십칠자시의 일장을 
기억할 따름.
  문: 그 시는 어떤 것인가?
  답:'묵은 못물은,  개구리 뛰어들고, 다시금  고요.(직역하면 '묵은 못물이
여,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작자는 마쓰오  바쇼오(1644~1694), 일본 전통
의 단문예 하이꾸의 창시자이자 그 전무후무한 종장으로 숭앙을 받는 존재
이다. 이  한 대목은 그의  하이꾸 문학에 개안적인  역할을 한 것이라  한
다.)'
  문:그대는 그 시를 가작이라 보는가?
  담:나는 반드시 악작이라고는 보지 않음.  다만 개구리를 갑빠로 하는 경
우, 그야말로 광채육리할 것임.
  문: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답:우리들 갑빠는 여하한 예술에도 갑빠를 요구함이 통절하기 때문임.
  회장 '펙'씨는 이때에  임하여, 우리들 17명 회원에게  이는 심령학협회의 
임시조사회이지 합평회가 아님을 주의하였음.
  문:심령 제군의 생활은 어떤가?
  답:제군들의 생활과 다를 바 없음.
  문:그렇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이 자살하였음을 후회하는가?
  답:반드시 후회하는 것도 아님. 나는 심령적 생활에  권태를 느낀 경우는, 
다시 권총을 잡고 자활할 터임.
  문:자활함은 용이한가 어떤가?
  '턱'군의 심령은 이  물음에 대해 반문하였음. 이는 '턱'군을  아는 자에게
는 극히 자연스러운 응수일 것임.
  답:자살함은 용이한가 어떤가?
  문:제군의 생명은 영원한가?
  답:우리들의 생명에 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여 신빙할 수 없음.
다행이도 우리들 사이에는  기독교·불교·마호메트교·배화교 등 여러 종
교가 있음을 잊지 말라.
  문:그대 자신이 신망하는 바는?
  답:나는 항상 회의주의자임.
  문:그러나 그대는 적어도 심령의 존재를 의심치 않을 터인데?
  답:제군과 같이 확신할 수는 없음.
  문:그대의 교유관계는 어떤가?
  답:나의 친구는 고금동서에 달하여,  삼백 명은 덜하지 않을 것임. 그  저
명한 자를들면 클라이스트, 마이렌데델, 와이닝겔...
  문:그대의 친구는 자살자뿐인가?
  답:반드시 그런 것도  아님. 자살을 변호한 몽테뉴 같은  자는 외우의 한 
사람임. 다만 나는 자살하지 않은 염세주의자-쇼펜하우어 따위와는  교제치
않음.
  문:쇼펜하우어는 건재하는가?
  답:그는 목하 심령적 염세주의를 수립하여, 자활함의 가부를 논하고 있는 
중임. 그러나 콜레라도 세균병이었음을 알고는, 지극히 안도한 모양임.
  우리들 회원은  계속 서로 나폴레옹,공자,도스토예프스키,다윈,클레오파트
라,석가,데모테네스,단테,센노리뀨우 등의  심령의 소식을 질문하였음.  그러
나 '턱'군은 상세히 답하기를 피하고, 도리어 '턱'군  자신에 관한 각종의 가
십을 질문하엿음.
  문:나의 사후 명성은 어떠한가?
  답:어느 비평가는 '군소시인의 하나'라고 하였음.
  문:그는 내가 시집을 보내지 않았음에 원한을 품은 사람일 것임.
내 전집은 출판 되었는가?
  답:그대 전집은 출판되었으나, 판매성적은 매우 부진한 모양임.
  문:내 전집은 3백년후-즉 저작권이 상실된후,  만인이 구독하는 바 될 것
임. 나와 동서한 여성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답:그녀는 서사 '랙'군의 부인이 되었음.
  문:그녀는 지금 불행히도  '랙'군이 의안임을 알지 못할  것임. 내 소생은 
어찌 되었는가?
  답:국립고아원에 있다고 들었음.
  '턱'군은 잠시 침묵한 후 다시 질문을 시작했음.
  문:내 집은?
  답:모 사진사의 스튜디오로 되었음.
  문:내 책상은 어떻게 되었는가?
  답: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자 없음.
  문:나는 내 책상 서럽에 비장한 한 묶음의 편지를-그러나 이는 다행이도 
분주한 제군이 관계할 바 아님. 이제 바야흐로 우리의  심령계는 서서히 박
모속에 잠기려 하니, 나는 제군과 결별하려 함. 안녕. 제군 안녕. 우리의 선
량한 제군.
  '홉' 부인은 이  최후의 말고 더불어 재차 급격히 각성하였음.  우리들 17
명의 호원은 이  문답이 진실하였음을 상천의 신에  맹세하여 보증하려 함
(그리고 또 우리들이 신뢰하는  '홉' 부인에 대한 보수는 이전에 부인이 여
우였던 때의 일당에 따라 지불하였음)'
  16 
  나는 이러한 가사를 읽은 후, 차츰 이 나라에 있는 것도 우울해졌으므로, 
어떻게든지 우리들 인간의  나라로 돌아갔으면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 돌아다녀도, 내가 떨어졌던 구멍은 찾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  '백'이라는 어부 갑빠의 이야기로는,  분명치는 않으나 
아무튼 이 나라의 거리  변두리에 어떤 나이를 먹은 갑빠가 한  마리, 책도 
읽고, 피리도 불고  하면서, 조용히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갑빠한
테 물어 보면,  혹시 이 나라를 빠져  나가는 길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곡 거리 변두리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거기로 가 보니까, 참으로 자그마한 집 속에  나이를 먹은 갑빠는
커녕, 머리의 접시도 채 굳지 않은,  겨우 열두어 살 난 갑빠가 한 마리 유
유히 피리를 불고 있지  않겠습니가. 나는 물론 딴 집으로 잘못  들어선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혹시나 하고 이름을 물어  보니, 역시 '백'이 
가르쳐 주던 나이 먹은 갑빠가 틀림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꼭 어린 아이 같은데..."
  "자넨 아직도  알지 못하는가? 나는  어찌된 운명인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을 때엔 백발머리였다네. 그후부터 차츰차츰 나이가 젊어 지더니. 지금 
와선 이런 어린 아이가 된  걸세. 하지만 나이를 세어 보면, 태어나기 이전
을 육십이라 치더라도, 이럭저럭 백십오륙 세는 될지도 모르겠는걸."
  나는 방 안을 둘러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내가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검
소한 의자며 탁자 사이에 무엇인가  정결한 행복이 서리어 있는 것 같지만 
했습니다.
  "당신은 어째 다른 갑빠들보다도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군요?"
  "글세, 그건 그럴지도 몰라. 나는 젊을 때는  늙은이였고, 나이를 먹을 때
는 젊은이가 되어 있지.  따라서 늙은이처럼 물욕에도 주리지 않으며, 젊은
이처럼 색에도 빠지지 않거든.  좌우간 내 생애는 설령 행복하지 못할망정, 
편안했던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으이."
  "옳군요, 그렇다면 편안하겠지요."
  "아니지, 아직  그것만 가지고선 편안해지진  않지. 나는 몸도  튼튼했고, 
한평생 먹고 살기에  궁하지 않을 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네.  그러나 
제일 행복했던건  역시 태어났을  때에 늙은이였다는 그게  아닌가 생각하
네."
  나는 얼마 동안 이 갑빠하고, 자살한 '턱'이야기며  매일같이 의사의 진단
을 받고 있는 '게엘'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나이를 먹은 
갑빠는 그다지 내 이야기 같은 것에 흥미가 없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
니다. 
  "그러면 당신은 다른 갑빠처럼  살아있다는 점에 각별히 집착을 가진 건 
아니겠군요?"
  나이를 먹은 갑빠는 내 얼굴을 보면서, 조용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다른 갑빠처럼 이 나라에 태어날지  어떨지, 일단 부친한테 질문을 
받은 다음 모친의 태내에서 떨어졌었지."
  "그런데요, 나는 어찌어찌하다가 그만, 이  나라로 굴러 떨어졌답니다. 제
발 나한테 이 나라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나갈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지."
  "그 길은?"
  "그건 자네가 여기로 온 길이야."
  나는 이 대답을 들었을 때에 어쩐지 소름이 쭈욱 끼치는 걸 느꼈습니다.
  "그 길을 글쎄 찾을 수가 없었다니까요."
  나이를 먹은  갑빠는 싱싱한 눈으로  물끄러미 내 얼굴을  응시했습니다. 
그리고선 그제야 몸을  일으키고, 방 한구석으로 다가가더니, 천장으로부터 
거기에 드리워져 있던 밧줄 하나를 잡아 당겼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천창이 하나 열렸습니다. 그 동그란  천장 
밖에는 소나무며 삼나무가 가지를 뻗은 저편에 높은 하늘이 짙푸르게 개어 
올라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흡사 커다란 화살촉 같은 야리가산 봉우리도 
솟아 있습니다. 나는  비행기를 본 어린 아이처럼 팔짝 뛰어오르면서  기뻐
했습니다.
  "자, 저리로 해서 나가 보구려."
  나이를 먹은 갑빠는 이렇게  말하면서, 아까의 밧줄을 가리켰습니다.  이
제까지 내가 밧줄인 줄 알았던 것이 실을 줄사다리로 돼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저리로 해서 나가겠습니다."
  "다만 미리 말해 두지만 말일세. 나가 보고서 후회하지 말도록."
  "걱정 마세요. 난 후회 같으 건 안합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기가  바쁘게, 벌써 줄사다리를 기어오르고  있었습니
다. 나이를 먹은 갑빠 머리의 접시를 아득히 먼 아래로 바라보면서.
  17 
  나는 갑빠의 나라로부터 돌아온 후  얼마 동안은 우리들 인간의 피부 냄
새에 그만 질려 버렸습니다.  우리들 인간에 비한다면, 갑빠는 참으로 청결
하다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인간의 머리는 갑빠만 보아온 나한테는 얼마나 기괴
하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이건 혹은 당신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
릅니다. 그러나 눈이나 입은 또  몰라도, 이 코라는 건 야릇하게 무서운 마
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물론 되도록  아마도 만나지 않을 궁리를 했습니다만, 우리들  인간
에 대해서도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한 반년 지내는 동안에 어디에나  나가
게끔 되었습니다. 다만  그래도 난처한 일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부지중
에 갑빠 나라의 언어를 입에 내고 마는 그것입니다. 
  "자넨 내일은 집에 있겠는가?"
  "Qua."
  "무에라구?"
  "아냐, 있겠다는 그 말이야."
  그러나 갑빠의 나라로부터 돌아온 후, 꼬옥 일년이 지났을 때, 나는 어떤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S박사는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 얘긴  그만두시오" 하고 주의를 주
었다. 아무튼 박사의 말을 들어  보면, 그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간호원
도 손을 쓸수 없을 만큼, 난폭해진다는 것이다.)
  그럼 그 얘기는 그만 둡시다. 그러나 어떤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나는 
또 갑빠의 나라로 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렇죠. "'가고 싶다'가 아닙니다. '돌
아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게끔 되었습니다. 갑빠의 나라는 당시의 나로선 
마치 고향이나 다름없이 느껴졌으니까요.
  나는 남몰래 집을 빠져 나와, 중앙선 기차를 타려 했습니다. 그러나 판에 
재수 사납게 순경한테 붙잡혀 가지고, 그예 병원으로 끌려  오게 된 것입니
다. 나는 이 병원에 들어온 후 얼마 동안은 갑빠  나라 생각 밖엔 없었습니
다. 
  의사 '책'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철학자 '맥'도  여전히 일곱 색 색유리 
랜턴 밑에서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나의 친구였던, 
주둥이가 썩은 학생 '랩'은-오늘처럼 흐린 어느 날의 오후입니다. 
  이런 추억에 잡겨 있던 나는 부지중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백'이라는 어부 갑빠가  한 마리, 내 앞에 와 서면서,  몇 번이
고 머리를 숙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나는 기분을 고쳐 가진  다음-울었는
지 웃었는지조차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좌우간 오래간만에  갑빠 나
라의 말을 사용하는 데에 감동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여보게, '백', 왜 왔지?"
  "예, 문병드리려구 왔습니다. 듣자 하니 병환이시라 하길래."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았누?"
  "라디오의 뉴스로 알았지요."
  '백'은 뽐내듯이 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왔지?"  
  "뭐, 문제 없지요. 도쿄의  냇물이나 개천은 갑빠한텐 행길이나 마찬가지
니까요."
  나는 갑빠도 개구리와 같이  수륙양서 동물이었다는 점을 새삼스레 상기
했습니다.
  "하지만 이 언저리엔 냇물은 없을텐데, 응?"
  "아녜요, 하수도 철관을 빠져서 왔지요. 그 담에 잠깐 소화전을 열고..."
  "소화전을 열고?"
  "왜 나으리께선 잊으셨나요? 갑빠에게도 기계공이 있다는걸."
  그후 나는 2∼3일마다  각계 각층의 갑빠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나의  병
은 S박사에 의하면  조발성치매증이라 합니다. 그러나 의사 '책'은(이건  당
신에게도 매우  실례가 되리라 믿습니다) 내가  조발성치매증 환자는 아니
다, 조발성치매증  환자는 S박사를 위시해서, 당신들  자신이라고 말했습니
다.
  의사인 '책'도  올 정도라, 학생인  '랩'이랑 철학자인 '맥'이  문병하러 온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더욱이 2∼3마리가  함께 오는 것은  밤-그것도 
달이 있는 밤입니다.
  나는 엊저녁에도 달빛 속에서 유리회사 사장인 '게엘'이며 철학자인 '맥'
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악가 '크라백'한테서도 바이올린 
곡을 한 곡  들었습니다. 보시오, 저기 저  책상 위에 흑백합꽃다발이 놓여 
있지 않아요? 저것도 엊저녁에 '크라백'이 선물로 갖다 준 거랍니다...
  (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물론 책상 위에는 꽃다발도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도 철학자인 '맥'이 일부러 갖다 준 것입니다. 잠깐 맨 첫 
끝의 시를 읽어 보십시오. 참,  당신은 갑빠 나라의 말을 아실 까닭은 없습
니다. 그럼, 대신 읽어 볼까요. 이건 최근에 출판된  '턱'의 전집 중의 한 권
입니다.- 
  (그는 헌 전화번호부를 펼치고) 이러한 시를 커다란 소리로  읽기 시작했
다. 
  '야자꽃이랑 대나무 속에 
  불타는 이미 잠들었다.
 
  길섶에 시들은 무화과와 함께 
  그리스도도 이미 죽엇나 보다.

  그러나 우리들은 쉬어야겠다
  설령 연극의 배경 앞일지라도.
  '그 또 배경의 뒤를 보면, 
  더덕더덕 깁고 기운 캔버스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전처럼 염세적이지 않습니다. 갑빠들이 가끔가끔 와 주
는 한은-아 참, 이걸 잊고 있었군요. 당신은 나의 벗이었던 재판관 '펩'을 
기억하겠지요. 그 갑빠도 직업을 잃은 후 참말 발광하고 말았답니다. 듣건
대 지금은 갑빠 나라의 정신병원에 있다고 합니다. 나는 S박사만 허락해준
다면, 문병하러 가 주고 싶기도 한데요, 글쎄 말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갑빠는 순전히 일본인들의  상상의 동물이다. 그 모
양새가 인간의 유아를 많이  닮았으며, 악의없는 장난질을 잘한다 하여, 상
상 동물이라 하지만 그들 일본인에게 퍽 친밀감을 주고  있다. 일본식 한자
로 '하동' 또는 '수호'라고 쓴다.
  그런데 근자에 한국에서도  하동이란 말을 가끔 쓰는 모양이나, 이는  신
문기자들의 조어인 것  같고, 의미도 아시다시피 이와는 썩 다르게  쓰여지
고 있다.
  갑빠의 정의를 그들의 사전 광사림에 의하여 좀더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상상의 생물, 수륙공서. 형태는 3~4세의 어린 아이를 닮았으며 ...정수리가 
옴폭하게 패어  약간의 물을 담는데, 그  물이 있는 동안 육상에서도  힘이 
강하다 함... 속설에 하중(물 속)에서 어린 아이가 익사하는 것은 그 때문이
라 함.')

    작품해설 [하동]  -동양적 상상력과 서구적 정신병리의 만남
  [하동]은 아꾸다가와의 가장 좋은 작품도 아니고 환상과  기상을 다룬 단
편의 전범으로 삼기에도  반드시 합당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
서는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 처럼 발표 당시에는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나 이제 와서 보면 어딘가 설익은 듯한 현대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갑빠라는 일본 고유의 도깨비와 병든 현대인의 이상 심리가 결합
하는 방식이 재미있다. 굳이 의미를 붙인다면 동양적인 상상력과 서구적 
정신병리의 만남이라 할까. 거기다가 전범의 지역적 안배라는 측면도 있어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대로 싣는다.
  지은이 아꾸다가와 류노스께는 일본 대정시대의 시민문학을 대표하는 작
가로 우리에게는[나생문]이란 작품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일본 작가이다. 
나스메 소세끼의 문하에서 문학수업을 했고 주옥 같은 단편들로 이름을 떨
쳤으나 서른여섯  살의 젊은 나이로  자살했다. 1920년대 후반  일본문단을 
휩쓴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모더니즘운동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다가 신경
쇠약에 걸려 자살했다는  게 정설이다. 죽은 뒤에 발표된  [어떤 바보의 일
생]과 [톱니바퀴]는 자살하기 직전의 어두운 심리상태가 잘 묘사되어 있다.

    천녀유혼  -포송령 지음
  영채신은 절강 사람으로 시원스럽고 호탕한 성격에 품행이 단정했다. 그
는 언제나 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생 내 처말고는 여색을 가까이 해본 일이 없소이다."
  한 번은 그가 금화현에 일이 있어 가다가, 성 밖 북쪽 어느 절에 여장을 
풀게 되었다. 그절은 법당이나 돌탑이 화려하고 훌륭하기는했으나, 뜰에는 
잡초만 사람 키를 넘을 듯이 무성하고 아무도 나다닌 흔적이 없었다. 동쪽
과 서쪽의 승방은 자물쇠로  잠그지도 않은 채 그냥 문만 닫아  두었고, 남
쪽 승방의 조그마한 방, 하나만이 자물쇠가 새로 채워져 있었다. 또 법당의 
동쪽 모퉁이를 돌아가 보니 아름드리나 되는 대나무가 하늘로 치솟아 있었
고, 돌층계 아래로는 큰 연못이 있는데 연꽃이 벌써 활짝 피어 있었다. 영
채신은 조용하고 그윽한 이곳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마침 이 고장에 학사
가 내려와 수재들의 시험을 주재하게 되어 성안의 집세가 무척 올라 있었
으므로, 그는 이 절에 묵으면 되겠다 생각하고 부근을 산책하면서 그 절의 
스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해가 저물자 한 서생이 나타나서 남쪽 승방의 문을 열었다. 영채신은 달
려가 인사를 하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서생이 말했다.
  "이 절에는 주인이 없었습니다. 저도 역시 잠시 묵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이렇게 황량한 곳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이제부턴 아침 저녁으로 당신에게 
가르침을 청할 수 있을터이니 정말 잘된 일입니다."
  영채신은 기뻐하며 짚단을 깔아 침대로 삼고, 판자를 나무로 고여 탁자
를 만드는 등 앞으로 오랫동안 유숙할 준비를 했다.
  그날 밤은 달이 휘영청 높이 떠서 맑은 광채를 물같이 흘려내리고 있었
다. 두 사람은 법당 복도에 무릎을 마주 대하고 앉아서 각자 통성명을했다. 
서생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성이 연씨이고 자는 적하입니다."
  영채신은 그가 과거시험을 보러 온 수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씨가 
절방 지방사람과는 달랐으므로 고향이 어딘지를 물어 보았다. 
  "섬서 출신입니다."
  그의 말투는 매우 소박하고 성실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이야기거리도 
없어졌으므로,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져 각자의 잠자리로 돌아갔다.
 영채신은 이곳 잠자리가 생소하였으므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
다. 바로 그때, 승방의 북쪽에서 소근소근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있
는 것 같았다. 영채신은 일어나서 북쪽 벽의 창가로 살금살금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낮은 담장 건너편으로는 좁다란 뜰이 있는데, 마흔 살쯤 된 아
낙네와 등이 굽고 늙수그레한 노파가 달빛 아래서 서로 말을 주고 받고 있
었었다. 그 노파는 검붉은 색의 옷을 입고, 머리에는 장식용 은빛을 꽃고
있었다. 
  아낙네가 말했다. 
  "소천이가 왜 여지껏 오지 않죠?"
  "아마 곧 오겠지."
  노파가 대꾸했다.
  "할머니한테 무슨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던가요?"
  "못 들었는 걸. 그러나 뭔가 시름이 있는 것 같던데."
  "그 애는 대하기가 정말 까다로워요!"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참인데, 열일고여덟 살 난 처녀가 걸어왔다. 처녀는 
보기 드물게 예뻤다. 노파가 웃으며 말했다.
  "몰래 남의 말을 말라더니, 우리 둘이 마침 이야기하는 참에 요것이 소
리도 없이 몰래 나타났군. 다행히 험담은 하지 않고 있었네만."
  그리고는 또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는 정말 그림 속의 미인 같아. 이 늙은이가 사내라면 혼이 다 달
아나겠는걸." 
  그러자 그 처녀가 말했다. 
  "할머니께서라도 칭찬해 주지 않으면 누가 또 좋게 봐주겠어요?"
  이 여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더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영채신은 이들
이 이웃집 사람들이려니 생각하고, 더 이상 엿들을 생각을 않고 다시 자리
에 누었다. 소근소근하는 소리는 얼마간 계속 되더니 이윽고 잠잠해졌다.
  영채신이 겨우 잠이 들려고 할 무렵, 누군가가 방안에 들어오는 듯하여 
황급히 일어나 보았더니, 바로 북쪽 뜰에 있던 그 처녀였다.    
  "무슨 일이시오?"
  영채신이 놀라서 물었다. 처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달빛이 하도 밝기에 잠이 오지 않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서요."
  영채신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당신은 세상에 나쁜 평판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하고, 나는 남의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오. 일단 발을 한 번 잘못디디면 그
야말로 몸을 망치고 창피를 사게 될 뿐이오."
  처녀가 말했다.
  "한밤중이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걸요."
  영채신은 다시 꾸짖었다. 처녀는 그래도 머뭇거리면서 무엇인가 또 말을 
하려고 하므로, 영채신은 호통을 쳤다.
  "냉큼 돌아가기 못할까! 그렇지 않으면 남쪽 방의 서생을 불러서 알릴 
테다!" 
  처녀는 겁을 내면서 그제서야 물러났다. 그러나 방문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더니, 한 덩어리의 황금을 요 위에 내놓았다. 영채신은 그것을 
집어들어 마당으로 내던지며 말했다.
  "도리에 어긋난 재물은 내 주머니만 더럽힌다!"
  처녀는 부끄러워 하며 밖으로 나가, 황금을 주으면서 중얼거렸다.
  "이 사내는 철석같이 냉정하군!"
  다음 날 아침 난계현에 사는 한 서생이 하인을 데리고 시험을 치러 왔다
가 동쪽 승방에  머물렀는데, 그날 밤중에 갑자기  죽어 버렸다, 그 서생의 
발바닥에는 송곳으로 찌른  듯한 조그마한 구멍이 뚫렸고, 붉은 피가  약간 
배어나와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죽은 까닭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
룻밤이 지나자 그  하인마저 죽고 말았다. 증상은 역시 주인과  마찬가지였
다. 
  저녁 때가 되어  연생이 돌아왔다. 영채신은 연생에게 이들 죽음의  원인
에 대해 물어 보았다. 연생은 유령에게 홀렸기 때문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
나 영채신은 본래 강직한 성격이었으므로  이 말을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
았다.
  한밤중이 되자 며칠 전의 그  처녀가 다시 영채신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
했다.
  "저는 여지껏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당신처럼 곧은 분은 없었습니다. 당
신은 참말 성인과 같은 분이시니 감히 숨기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름을 소
천이라 하며 성은  섭씨입니다. 열여덟에 요절하여 이 절간 옆에  묻었습니
다. 그런데  걸핏하면 요괴가 저를 윽박질러서  여러 차례 천한 짓을  하게 
했습니다. 뻔뻔스럽게 사람을 대하고는 있지습니다만, 실은 제가 좋아서 하
는 짓은 아닙니다.  이 절 안에는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자가 없으니, 아마 
곧 야차를 불러 올 것입니다."
  영채신이 깜짝 놀라 대책을 물어 보았다.
  "연생과 한 방에 계시면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녀가 대답했다. 
  "어째서 연생은 홀릴 수 없는 거요?"
  "그 사람은 기인이어서 감히 범접을 못 합니다."
  "사람을 홀릴 때는 어떻게 하오?"
  "저를 희롱하려  할 때에, 몰래 송곳으로  그 사람의 발바닥을 찌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멍청하게 정신이 나가고 맙니다. 그때  피를 뽑아서 요괴
가 마시도록 바치는 거예요.  또 때로는 황금을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그것
은 실은  황금이 아니고 나찰의 뼈로서,  그것을 몸 가까이에 두면  사람의 
심장이 잘려나가고 맙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그때 그때 사정에  따라 사
용한답니다."
  영채신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서 자신이 조심해야 할 시기를  물었다. 
처녀귀신은 영채신에게 내일  밤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면서  헤어질 
때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가엾은  고해에 빠져서 기슭으로 올라갈래야  올라갈 수가 없습니
다. 당신은 하늘 위로 솟구칠  듯한 의협심을 갖고 계시니, 반드시 저를 이 
고통으로부터 구해 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만약 제  뼈를 거두어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옮겨 주신다면, 저를  다시 살려 주시는 것보다 더  큰 
은혜로 알겠습니다."
  영채신은 선뜻 승낙하면서 처녀귀신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을 물었다.
  "까마귀가 둥지를 틀고 있는 백양나무 아래라고만 기억해 두세요!"
  처녀귀신은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자 곧 어디론지 모습을 감추고 말
았다. 
  다음 날 영채신은 연생이 외출이라도 할까봐 일찌감치 그를 찾아가 초대
했다.
  진시(7시에서 9시  사이:역주)가 되자 술과  음식을 차려 내놓고,  연생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영채신이 틈을 보아 같은  방에 머물기를 간청
하자, 연생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면서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영채신은 못  들은 체하고 억지로 연생의  침구를 자기 방으로 옮겨  왔다. 
연생은 할 수 없이 잠자리를 옮겼다. 그리고는 이렇게 당부했다.
  "저는 당신이 대장부라는  것을 알고 몹시 흠모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리
고 싶은  것이 있긴 하나 지금  당장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아무쪼록 
저 작은 상자는 열어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차 재미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영채신은 삼가 약속을 지키겠노라고 다짐했다.
  이윽고 밤이 되어  제각기 잠자리에 들었다. 연생은 상자를 창가에  두고 
베개를 베고 자리에 눕더니,  얼마 되지 않아 우레 같은 소리로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영채신은 불안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두어 시간쯤 지났을  때 창밖에 어렴풋이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이윽고 
무엇인가 창문에 가까이  와서 방안을 들여다 보는데, 그 눈에서는  번쩍번
쩍 빛이 났다. 영채신은 놀라서  연생을 깨우려고 했다. 그 순간 갑자기 상
자를 뚫고 흰  비단같이 반짝거리는 것이 튀어나갔다. 그것은 창에  부딪혀 
도롤 된 창살을 깨뜨려놓고,  다시 번쩍 하면서 번개 같은 속도로  상자 속
으로 되돌아갔따. 연생이  눈을 뜨고 일어나 앉으므로 영채신은 잠자는  체
하고 거동을 살폈다. 연생은 상자를 끌어다가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내더
니 달빛에 비추며 냄새를 맡아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영롱하게  흰 빛을 띠
고 있었는데 길이는 두 치  가량, 폭은 부춧닢만 했다. 연생은 이윽고 그것
을 몇 겹으로 다시 싸서 뚫어진 상자 속에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어떤 괴물일까? 이렇게 대담하다니. 상자가지 망쳐 놓았구나."
  그리고는 다시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영채신은 너무도  괴이하게 생각
되었으므로 일어나서 연생에게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묻고, 또  지금까지 
자기가 본 바를 이야기했다. 그러자 연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잘 아는 사이니까 숨기지 않겠습니다. 저는 검객입니다. 만약 저 
돌창살만 없었더라면 요괴는  당장에 죽었을 텐데... 그래도 상처는  입었을 
겁니다."
  "겹겹이 싸둔 것은 무엇입니까?"
  "칼입니다. 지금 냄새를 맡아 보니 요기가 서려 있더군요."  
  영채신이 그 칼을 보고 싶다고 하니 선뜻 꺼내서  보여 주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한 자루의 단검이었다.
  날이 밝아 영채신이 창문 밖을 조사해 보니 붉은 피를 흘린 자국이 있었
다. 그리고 절간의  북쪽으로 나가 보았더니 황폐한 무덤이 총총히  들어서 
있고, 처녀가 말한 바대로 높은 가지에 까마귀가 둥지를  틀고 있는 백양나
무도 있었다. 영채신은  볼일을 끝내자 행장을 서둘러 꾸려 고향으로  돌아
갈 준비를 했다. 그러자 연생은 송별연을 베풀어 주면서  이별을 못내 아쉬
워했다. 그는 또 다 닳은 가죽자루 하나를 영채신에게 선사하며 말했다.
  "이것은 칼 주머니입니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으면 요괴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채신이 검술을 배우고 싶노라고 하자 연생이 말했다.
  "당신은 신의를 지킬  줄 알고 강직한 분이시니, 검술을 배우는  것은 문
제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부귀를  누릴 분이지, 이런 길을 걸을 분이 아
닙니다."
  이리하여 영채신은 이곳에 여동생이  묻혀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섭소천
의 뼈를 파내어 옷가지 속에 넣어서 배를 얻어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영채신의 서재는  들판을 향하고 있었다.  영채신은 그 서재밖에  무덤을 
마련하여 처녀의 뼈를 묻고, 제사를 지내며 기원했다.
  "그대의 외로운 넋을  불쌍히 여겨 나의 집 옆으로 옮겨  묻었소, 여기라
면 그대의 노래소리도  울으소리도 모두 들릴 터이므로, 저 포악한  요괴에
게 시달림은 받지 않을  것이오. 여기에 드리는 한 그릇의 국은  그렇게 맛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디 마다하지 말고 받아 주구려!"
  축원을 끝내고 돌아오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같이 가게 좀 기다리세요!"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바로 섭소천이었다.
  그녀는 기쁜 표정으로 영채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당신은 정말  신의가 있으시군요. 제가  열 번을 죽었다 다시  산다해도 
보답할 길이 없겠습니다.  저를 함께 데려가셔서 당신의 부모님을 뵙게  해
주세요. 저는 첩이나 하녀로 삼으신다 하더라도 후회는 않겠습니다."
  영채신이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살결은 안개처럼 뽀얗고, 전족한 
발은 죽순처럼 가늘었다. 낮에 보는 그 모습은 더 한층 아름다웠다.
  영채신은 그녀를 데리고 서재로 돌아왔다. 잠시 그녀를  앉아 기다리도록 
하고, 먼저  안방으로 들어가서 어머니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펄쩍 뛸 듯이 놀랐다. 마침 영채신의 아내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아내에게 알려서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고 어머니가 타일렀다. 이야
기를 하고 있는 참인데, 섭소천이 훌쩍 들어와 바닥에  엎드리면서 절을 했
다. 영채신이 말했다.
  "이 처녀가 바로 섭소천입니다."
  어머니는 놀라서 미처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데, 섭소천이  이렇게 말했
다.
  "저는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몸으로,  부모형제와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
다. 다행히 아드님의 커다란  은혜를 입어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무
쪼록 평생 곁에서 모시면서 조금이라도 은혜에 보답했으면 합니다."
  어머니는 아름답고 귀여운 섭소천의 모습을 보고 겨우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내 아들을  생각해 주는 것은 더할 나위없이 기쁜  일이네. 그
러나 이 애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고 조상의  대를 이어가야 하니까, 
유령과 짝지워 줄 수는 없겠네."
  그러자 섭소천이 다시 말했다.
  "저에게는 조금도 딴  마음은 없습니다. 저승의 사람이라  어머님이 믿어
주시지 않는 이상  더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아무쪼록 아드님을 오빠로  여
기면서, 어미니 곁에서  아침저녁으로 시중이라도 들고 싶은데  어떠하신지
요?"
  어머니는 그 정성을 갸륵하게 생각하여 마침내 허락하게  되었다. 섭소천
은 영채신의 아내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했으나, 어머니는  며느리가 병석에 
있다는 것을 이유로  그만두게 했다. 섭소천은 즉시 부엌으로 내려가서  어
머니를 대신하여 밥을  짓기 시작했다. 분주히 안팎을 드나들며 음식을  장
만하는 모습은 마치 오랫동안 한 집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익숙했다.
  날이 저물자 어머니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섭소천더러 얼른 물러가서 
자라고 하면서도  따로 잠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 섭소천은  어머니의 
뜻을 알아차리고 즉시 밖으로 나왔다. 서재 앞까지 왔을  때 안으로 들어가
려고 하다가  문득 뒤로 물러서더니, 다시  들어갈 생각을 않고 문  밖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가 겁이 나는  듯했다. 방안에서 영채신이 
그녀를 보고 불렀더니, 섭소천은 이렇게 말했다.
  "방안에 있는 검의  살기가 너무 두렵습니다. 지난번에 길을 오실  때 뵙
지 못한 것도 실은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영채신은 가죽자루 때문이라 생각하고 이것을 가져다 다른 방에 걸어 놓
았다. 그제야 섭소천은 방으로 들어와서 등잔 밑에 앉았으나, 얼마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섭소천은 말문을 열었다.
  "밤에도 책을 보세요? 저는 어렸을 때 [능엄경]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은 거의 다 잊어버렸어요. 한 권 빌려 주시면 밤에  시간이 있을 때 오
빠께 배울게요."
  영채신은 그러마고 승낙했다. 섭소천은  또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이
경이 다가도록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므로, 영채신은 빨리 가서  자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섭소천이 슬픈 듯이 말했다.
  "낯선 곳에 저 혼자, 더욱이 황량한 무덤 속에서 지내려니 겁이 나요."
  "서재 안에는 따로  침상도 없소. 게다가 우리가  오누이지간이라 할지라
도 서로 거리를 두어야 하지 않겠소?"
  영채신이 이렇게 말하자, 섭소천은 일어서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당장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하면서, 비칠비칠 방문  밖을 나서서 돌층계  아래로 
사라졌다. 영채신은 마음 속으로 측은하게 생각하여 딴  침대에서라도 자도
록 해주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노하실까 염려되었다.
  섭소천은 매일 아침 일찍 어머니에게 문안을 드리고 양치질과 세수를 도
와 드린 다음 부엌으로 내려가 일을 했는데, 어느  하나라도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면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와 
서재로 와서는 등잔 아래서 [능엄경]을 읽었다. 영채신이 잠을 자려고 하면 
그제서야 슬픈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영채신의 아내는 전부터 병이 들어 일을 할 수  없었으므로, 어머니는 힘
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섭소천이 온 다음부터는 아주  편하게 
되었으니 마음 속으로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차츰  날이 갈수록 친
자식처럼 정이 들어  마침내 그녀가 유령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가  되었고, 
저녁에도 차마  돌려보내지를 못하고 한방에서  침식을 같이 하도록  했다. 
섭소천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음식을 들지 않았으나,  반년 가량 지나자 
차츰 묽은 죽을 먹을  수 잇게 되었다. 어머니도 아들도 모두  그녀를 끔찍
히 아껴서 그녀가  유령이라는 것을 입밖에 꺼내지도 않았고, 이웃  사람들
도 그러한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영채신의 아내가 죽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은근히 섭소천을 
며느리로 맞아들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마, 혹 아들에게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었다. 섭소천은 어머니의 이런 마음을 알아차리고  기회를 보
아 어머니에게 말했다.
  "벌써 일년 남짓 지났으니 제 속마음이  어떤지는 아시겠지요. 무고한 나
그네들에게 화를  입히는 것이 싫어서  아드님을 따라 이곳까지  왔습니다. 
제가 아드님에게 마음을 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아드
님의 훌륭하신 행동은 신이라도 감탄할 만한지라, 제가 아드님을  몇 년 동
안 모시면서, 장차  아드님의 덕택으로 봉고(황제가 신하의  부모나 처자에
게 내리는 칭호:역주)의 영예를 받아 저승에서  이름을 빛내고 싶어서일 뿐
이에요."
  어머니도 그녀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만 후손이  끊
길 것이 염려되었다. 섭소천이 계속 말했다.
  "자식은 하늘에서 내리는  거예요. 아드님은 복이 많은  분이어서 집안을 
빛낼 아들을 셋이나 두실 겁니다. 저승 사람이 아내가  되더라도 그것을 막
을 수는 없죠."
  어머니는 그녀의 말에  수긍을 하고 이 일을 아들과 의논했다.  영채신이 
몹시 좋아했기 때문에  곧 큰잔치를 베풀고 친척과 친지들을 초대했다.  누
군가가 신부를 보고 싶다고 하자, 섭소천은 거리낌 없이  성장을 하고 나왔
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라면서, 그
녀가 유령이리라 의심하기는커녕, 선녀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리하여 원근의 아낙네들이 모두 선물을 가지고 와서 축하를  하며, 앞을 다
투어 신부의 얼굴을 한 번 보려고 모여들었다. 섭소천은  난초와 매화를 잘 
그렸기 때문에, 작은 그림을 하나씩  그려 답례로 주곤 했다. 이 그림을 받
은 사람들은 모두 이를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영광으로 생각했다.
  어느 날 섭소천은 창가에서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근심스러운 듯한 표정
을 짓다가, 문득 영채신에게 물었다.
  "그때의 그 가죽자루는 어디에 두셨지요?"
  "당신이 무서워 하길래 단단히 봉해서 다른 곳에 두었소."
  "저는 오랫동안 살아있는 사람의  기운을 받아서 이젠 무서울 것이 없어
요. 가져다 머리맡에 걸어 두었으면 해요."
  영채신은 무슨 일인지 물어 보았다.
  "이삼 일  전부터 마음이 불안해지고  있어요. 금화의 요괴가 제가  멀리 
도망친 것을 원망하고, 어쩌면 조만간에 여기로 찾아올 것 같아요."
  영채신이 가죽자루를 가져오자,  섭소천은 그것을 여러 차례나  살펴보더
니 말했다.
  "이 자루는 검선이  사람머리를 집어 넣는 데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  모르겠어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군요."
  섭소천은 그 자루를 머리맡에 걸어 놓았다.
  다음 날 섭소천은 다시 그 가죽자루를 문턱 위에 옮겨 걸도록 했다. 
  밤이 되자 섭소천은  등잔불 앞에 두고 앉더니  영채신에게도 잠을 자지 
말도록 당부했다. 바로 그때,  밖에서 휙 소리를 내면서 무엇인가가 새처럼 
날아 내려 앉았다. 섭소천은 깜짝 놀라 장막 안으로 숨었다. 영채신이 살펴
보니, 야차 같은 괴물이 번개불 같은 눈에 피묻은 입을 쫙 벌리고, 덤썩 움
켜잡을 둣이 덤벼들려는  차였다. 그러나 괴물은 문턱에 이르자 흠칫  뒤로 
물러나서 한참을 주저하더니, 차츰차츰 가죽자루에 다가가 발톱을  뻗쳐 움
켜잡고 그것을 찢어 놓으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척 하는 소리와  함께 자
루가 삼태기를 양쪽에  합친 크기만큼 커지면서, 귀신 같은 것이  상반신을 
내밀더니 야차를 붙잡아  들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자 않고  가죽자루는 다시 원래대로  줄어들었다. 영채신은 이  광경이 
두렵고 기괴하기만 했다.
  곧이어 섭소천이 나오면서 뛸 듯이 기뻐했다.
  "아, 이제는 살았어요!"
  함께 자루 속을 조사해 보았더니 몇 되나 되는 맑은 물이 남아있을 뿐이
었다. 
  몇 해가 지난 후 영채신은 과연 진사에 급제했다.  그리고 섭소천은 아들 
하나를 낳았다. 영채신이 소실을 들이고 난 뒤로, 또 섭소천과 소실이 각자 
아들 하나씩을 더 낳았다. 이 세 아들은 훗날 모두  관리가 되어 세상에 이
름을 떨쳤다.

    작품해설 [천녀유혼] -인의와 괴기가 어우러진 동양적 전범
  이 작품은  청대 작가  포송령의 [요재지이]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요재지이]는 당대 전기소설의 전통 위에 작가의 문학적  재능이 더하여 이
루어낸 소설집으로 중국문학에서도 이채를 띤다.
  여기에 뽑은 [천녀유혼]은 그 책 제2권에 실려있다. 모두 합쳐 이백 편이 
넘는 작품 중에서 가장 빼어났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으나 인의와 괴기를 
재미있게 얽어 처음과 끝이 가지런한 작품이다. 거기다가  연전에는 턱없이 
과장되고 윤색된 같은 제목의 홍콩영화가 인기를 끈 일도 있어 특히 이 책 
말미에 싣는다. 무릇 소설을 할  사람이면 기회 닿는 대로 [요재지이] 전편
을 한 번쯤 읽어보도록 권한다.
  작가 포송령은 명말에 태어나서 청 강희 54년에 죽은  인물이다. 그도 당
시 중국의 보편적인 지식인들처럼 학문을 닦어 관리가 되려고 했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한 뒤 뜻을  소설 쪽으로 돌렸다고 한다. [요재지이]는 포
송령의 대표적인 저술로 그는  자서에서 전문과 길거리에 떠도는 얘기들을 
바탕으로 썼다고 말하고  있다.(여기에 수록된 [천녀유혼]은 도서출판 진원
에서 펴낸 [요재지이]-전3권-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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