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명작산책
이문열
르네
닛쉐스족이 사는 곳에 왔을 때, 르네는 그 인디언들의 풍속에 따르기 위해
아내를 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르네는 그 아내와 함께 지내지는 않았다.
우울한 성격 때문에 르네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온종일 혼자서 보내곤
했다. 그래서 그는 미개인들 가운데서도 어 미개인처럼 보였다. 그는 양아버지인
샥타스와 로잘리 요새의 선교사 수엘 신부 이외에는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이 두 노인들은 그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샥타스는
자애스러운 너그러움으로, 또 수엘 신부는 그와 반대로 가혹하리만큼
엄격함으로 르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눈먼 인디언 추장인
샥타스가 비버 사냥을 할 때 겪었던 자신의 모험담을 르네에게 이야기해
주었지만, 르네는 자신의 이야기는 하려들지 않았다. 샥타스와 선교사는
유복하게 태어난 이 유럽 청년이 무슨 불행한 사연이 있기에 이런 루이지애나
광야에 묻혀 살겠다는 이상한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무척 알로 싶어했다. 그럴
때마다 르네는 순전히 자신의 개인적 생각이나 감정에 관한 이야기라서, 아무
재미도 없을 것이라며 거절했다.
저를 아메리카에서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 사건, 그 사건을 저는 영원한
망각 속에다 묻어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두 노인은 르네의 비밀을 캐내지 못한 채 몇 년이 흘러갔다. 그런데
외방전도회를 통해 유럽에서 온 편지를 한 통 받자 르네의 슬픔을 한층 더
심해졌고 그는 자기의 친구들인 두 노인조차 기피하게 되었다. 두 노인은
자기들에게 마음을 털어놓아 보라고 더욱 르네를 졸라대는 한편 때로는
사근사근하고 은근하게 또는 점잖게 달래기도 해서 르네가 하는 수 없이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르네는 자기 인생의
모험들이라기보다는 그의 마음속에 감추어진 남모르는 감정들을 그들에게 들려
줄 날짜를 저하고야 말았다.
인디언들이 꽃의 달 이라고 부르는 그 달 스무 하룻 날, 르네는 샥타스의
집으로 찾아갔다. 추장은 르네의 팔을 잡더니 그를 매샤르베 강가에 있는
삿사프라 나무 아래로 인도하였다. 수엘 신부도 늦지 않고 그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벌판에 벌통같이 널려
있는 인디언들의 오두막들과 뽕나무 숲이 있는 낫쉐스족의 동네가 보였고, 또
오른쪽 간 언덕으로는 프랑스 식민지와 로잘리 요새가 보였다. 천막들이며 반쯤
지어진 집들이며, 또 이제 짓기 시작한 성채들과 흑인 노예들과 까맣게 덮인
개간지며, 인디언과 백인의 무리들, 그 모두가 이런 좁은 공간에서도 미개인의
풍습과 사회적 풍습들을 잘 대조시키고 있었다. 동쪽 끝으로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깨어진 듯한 산정들 사이로 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산봉우리들은
황금빛으로 물든 하늘 높이 새겨진 푸른빛글자들 같았다. 서쪽에는 메샤스강의
물결이 장엄하고 조용히 흐르고 있어서 한없이 넓은 한 폭 그림의 테두리와
간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젊은 청년과 선교사는 한참 동안이나 그 아름다운 경치에 경탄하였다. 그들은
이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없는 샥타스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샥타스와 수엘 신부는 나무 밑 잔디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노인들 사이에 자리잡은 르네는 한참이나 말없이 있다가 노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다.
...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니, 부끄러운 감정을 억누를 수 없군요. 존경하는
두 분의 평온한 마음과 저를 둘러싸고 있는 대자연의 고요 앞에서 저는 제
마음의 동요와 혼란에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분은 저를 얼마나 가련하게 여기실지! 저의 이 한없는 불안이 두 분께는
얼마나 끔찍하게 보일 것인지! 인생의 온갖 슬픔 따위는 다 비워버리신 두
분께서, 기력도 없고 또 덕성조차도 갖지 못하였으며 가슴속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또한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자기 자기임을 인정 할 수밖에 없는
젊은이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아, 저를 비난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너무나
많은 벌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나오면서 어머니의 생명을 대가로 치렀지요. 말하자면 칼을
품고 어머니의 가슴을 헤치고 나온 셈입니다. 제게는 형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맏아들이었기에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지요. 저는 일찍부터 남의 손에
맡겨져, 아버지의 보호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제 성미는 급했고 변덕도 심했지요. 유쾌하게 떠드는가 하며 슬픈 듯 말이
없기가 일쑤였고, 친구들을 물러 함께 놀다가도 금방 그들을 버려둔 채 구석진
것으로 가 앉아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거나 잎새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곤
했으니까요.
가을이 되면 저는 외진 시골, 호수 가까이에 있는 숲 가운데 자리잡은
아버지의 성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아버지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하고 겁을
먹었던 저는, 누이인 아멜리 곁에서만 마음이 편하고 흐뭇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남매는 기질이나 취미가 서로 같았기 때문에 잘 어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이는 저보다 몇 살 더 위였습니다. 우리 둘이는 함께 언덕을
기어오르고 호수에서 노젓기를 하고, 또 낙엽지는 숲에서 이리저리 거닐기를
좋아했지요. 그때의 산책들을 생각하노라면 지금도 제 마음을 기쁨으로
차오릅니다. 어린 시절의 꿈과 고향의 환영들, 그 감미로움은 영원할 것인가요?
어떤 때는 어딘가 묵직한 듯한 가을의 소리와 우리들 발 밑에서 쓸쓸하게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말없이 걷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는
장난삼아 들판의 제비들을 쫓아가기도 했습니다. 또 때로는 아름다운 경치에
흥이 나서 시를 읊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시를 지었습니다. 열 여섯 살
때의 마음, 가장 순수한 정열만으로 이루어진 그때의 마음만큼 시적인 것이
있을까요? 인생의 아침이란 꼭 하루의 아침과 같은 것이어서 순수함과 이미지와
조화로 가득 차 있는 것이지요.
일요일과 축제일에는 큰 숲 속에서, 수목들 사이를 거쳐 들여오는 종소리를
때때로 듣고 했습니다. 사람들을 교회로 부르는 종소리였죠. 그럴 때면 저는
느릅나무에 기대어 앉아서 경건하게 울려오는 그 소리를 조용히 듣곤
있었습니다. 종이 울릴 때마다, 그 순결한 전원생활, 고독이 가져다주는 평온,
종교가 지닌 매력,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갖게 되는 달콤한 우수, 이런 것들이
내 마음에 떠올랐지요. 오! 아무리 심술궂은 사람이라도 자기가 태어난 고장의
종소리를 들으면 짜릿해짐을 느끼지 않을 이가 있을까요? 요람에서 듣던 그
희열에 부르르 떨던 종소리, 그라 세상에 왔노라 하고 처음으로 알려준 그
종소리, 심장의 고동을 처음으로 알려 준 그 종소리, 아버지의 성스러운
즐거움과 그야말로 더 표현할 수 없는 어머니의 고통과 기쁨을 알려 주었던 그
종소리! 고향의 종소리를 들을 때 홀린 듯한 꿈속에 잠겨 버립니다. 그 환상
속에는 신앙과 가정과 조국, 요람과 죽음, 그리고 과거와 미래가 다 함께 들어
있으니까요.
아멜리와 저는 이처럼 우울하면서도 감미로운 생각들을 그 누구보다도
즐겼지요. 우리 둘 모두가 마음 속 깊이 슬픔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슬픔을 우리는 신 혹은 우리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어떤 병에 걸리시더니, 그 병 때문에 며칠 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님은 제 팔에 안겨서 숨을 거두셨지요. 저는 제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의 입술에서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인상을 너무도 깊은
것이어서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저는 처음으로 영혼의 불멸이라는 것을
눈앞에서 똑똑히 본 셈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다른 어떤
곳에서 나온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아버님의 영혼과 다시 만나게
되기를, 기쁨과 경건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확신으로 바뀐 것은 다름 어떤 현상을 목격하고
나서였습니다. 아버지의 얼굴 모습에서는, 죽음이 지닌 바의 그 어떤 숭고함도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신비가 바로 우리들이 불멸이라고
부르는 것의 징조가 아닐까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죽음은 돼 저승의 온갖
비밀을 장차 그가 데리고 갈 사람의 이마에 그려놓지 않는 것일까요? 왜 무덤
속에서 영원의 위대한 모습을 흔적도 볼 수 없는 것일까요?
슬픔이 복받친 아멜리는 그만 성탑 속으로 숨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딕식으로 된 그 성의 둥근 천장 아래로 행렬을 지어 가는 신부들의
노랫소리와 조종 소리들이 들려왔겠지요.
저는 아버지를 따라 그의 마지막 안식처까지 갔습니다. 그의 육신이라는
껍질은 다시 흙에 갇혔습니다. 영원과 망각이 온 힘을 다하여 그를 짓누르는
것이지요. 바로 그날 저녁, 아버니의 무덤 위를 무관심이라는 것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분의 딸과 아들을 제외하면 마치 그분은 전에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아멜리와 저는, 이제 형님의 소유가 된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우리는 조부모님 댁으로 갔습니다. 이 기만적인 인생행로의 입구에 서서 저는
삶에 뛰어들 엄두를 못내고 하나씩 하나씩 삶의 길을 따져보기만 했습니다.
아멜리는 때때로 저에게 신앙생활의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또 제가 바로
그녀를 이 세상에 붙들어 놓는 단 하나의 혈육이라고 말하면서 쓸쓸하게 저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녀의 경건한 이야기에 깊이 감동되어, 저는 새로 살게 된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수도원으로 때때로 발길을 옮기기도 했지요. 한 순간이기는
했지만, 저도 그 수도원에서 한평생 숨어 살아볼까 하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항구를 떠나지 않고 항해를 끝마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이며, 또 저처럼
이 세상에서 무익한 나날을 보내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것일까라고
생각했었지요. 끊임없이 불안한 유럽 사람들은 스스로 고독을 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마음이란 부산하고 수선스러울수록 안정과 적막에 끌리는
것인가 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는, 불쌍하고 약한 사람을 위한 구호소가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곳에서 불행이라는 감정은 흐려지고
또 안식처에 대한 희망이 마음속에 심어지지요. 어떤 때는 지대가 높은
곳에서도 그러한 구호소가 있어서 마치 고산식물처럼 경건한 신앙심이 하늘로
뻗어 올라 스스로 그 향기를 하늘께 바치는 듯합니다.
이 변덕스런 운명을 피해 평생을 의탁하여 했던 그 옛 수도원의 장엄한 숲과
개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저는 해가 질 무렵이면 쓸쓸하면서 깊은
울림을 주는 그 수도원 안을 이리저리 헤매기도 했습니다. 달빛이 홍예문
기둥을 반쯤 비추어 맞은편 벽에 그 그림자가 어릴 때면, 저는 걸음을 멈추고
묘지를 가리키는 십자가와 묘석 사이에 키가 자란 풀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을 등진 채 말없이 살다가 대지의 침묵으로 옮겨간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무덤은, 내 마음속에 대지에 대한 혐오감을 가득 채우는구나!
원래 변덕쟁이여서인지 혹은 수도원 생활에 대한 편견에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계획을 바꾸어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했습니다. 누님께
작별을 고했지요. 누님은 저와 헤어지는 것이 오히려 기쁘다는 듯 즐거운
태도로 저를 안아 주었습니다. 인간의 우애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라는 쓰디쓴
생각을 품지 않을 수 없었지요. 하여튼 저는 불타는 마음으로 혼자서 이 험악한
인간 사회의 바다 위에 몸은 던졌던 것이지요. 어디에 항구가 있으며 어디에
암초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저는 우선, 이제는 사라져 버린 옛 민족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강렬하게,
그리고 아주 정교하게 옛것을 기억시키는 나라, 궁전은 먼지속에 파묻히고
제왕의 무덤을 가시로 덮여 버린 나라, 즉 로마와 그리스를 돌아다니며 그
폐허에 앉아 보기도 하였습니다. 자연의 그 힘이라니! 인간을 얼마나 나약한
것이겠습니까? 한 포기의 풀이 굳은 대리석 무덤도 뚫고 나오는 것을 보고,
저는 제 아무리 위세 있던 자리라도 한 번 죽으면 영원히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어떤 때는 높다란 돌기둥 하나만 이 홀로 광야에 서 있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마치 시간과 불행으로 말미암아 황폐화된 영혼 속에서 간간이 위대한
사상이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기념물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겪었을 온갖 사건들을, 그 시간적 흐름을
따라 반추해 보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그 도시의 주춧돌이 세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던 바로 그 태양이 장엄하게 그 폐허위로 지는 것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또 어떤 때는 맑은 하늘에 떠오르는 달이, 제게 반쯤 부서진 두
개의 유골단기 사이로 창백한 묘지들을 보여 주기도 하였지요. 꿈의 양식이라
할 그 달빛을 보면서 저는 종종 명상에 푹 빠져 있는 화상의 정령이 바로 제
곁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러나 무덤들을 찾아다니는 데도 지치고
말았습니다. 저는 항상 죄짓고 죽어간 송장의 먼지만을 일으켰을 뿐이니까요.
저는 살아있는 종족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죽어간 종족들보다는 더 많은 힘을
줄 것이며, 불행감을 별로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어느 날,
제가 어느 큰 도시를 산책할 때, 한 궁전 뒤를 지나서 외지고 인적 없는 마당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동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 동상의 손가락은 어떤
희생 때문에 유명하게 된 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장소의
고요함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비극의 대리석 상 주위에는 한 줄기 바람만이
구슬픈 소리를 내고 있었지요. 일꾼들은 무심코 그 대리석상 밑에 누워 있거나
휘파람을 불어대며 돌을 다듬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그 기념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의 몇몇만이 겨우
대답할 수 있었을 뿐,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금 새기고 있는 그 비극의
내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찮은 우리들의 존재와 인생에서 겪게 되는 여러
사건들의 의미를 저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돌을 쪼느라고
소란을 피우던 그 사람들은 지금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간은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걸어나갔고, 대지는 하루하루 그 모습을 다시 했던 것입니다.
여행 중에 저는 특히 예술가들과 성직자들을 두루 찾아보았습니다. 시인들은
리라의 줄 위에서 신들을 노래하고 성직자들은 법, 종교, 그리고 무덤을
경배하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은 고결한 종족으로서 하늘이 자신에
내린 유일한 재주를 소유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생활은 순진하고 또
숭고한 것으로, 그들은 황금처럼 귀한 입으로 신을 찬미하고 또 그들은 가장
순박한 사람들로서 마치 불멸을 인간인 양 서로 어린애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은 우주의 법칙을 이야기하면서도, 인생의 가장 사소한 일들은 이해할 줄을
모릅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하여 경탄할 만한 생각을 가졌으면서도, 마치
갓난아기처럼, 죽는 줄도 모르면서 죽어 가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칼레도니아산 위에서 어떤 시인이 시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이 황량한
세계에서 제가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음유시인이었는데, 그가 들려준 노래는
자신의 늙음을 위안하는 어떤 영웅의 시였습니다. 우리는 이끼 덮인 네 개의 돌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밑에는 여울이 흐르고 있었지요. 부서진 성 저쪽
폐허에서 사슴이 풀을 뜯고 있었으며 바닷바람이 코나의 황무지 위로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높은 산악지 방에서 일어났던 기독교가 지금은 모르방의 여러
영웅들 묘지에다 십자가를 꽂아 놓았고, 또 옷시앙이 그의 하프를 뜯던 바로 그
여울가에서 기독교는 다윗의 하프를 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셀마의 신들이
전쟁을 좋아했던 만큼 평화를 수호하는 기독교는, 그들은 보호해주었습니다.
기독교는 살인을 일삼는 유령들이 살고 있는 구름 속에까지 평화의 천사들을
골고루 보내 준 것입니다.
한편, 수많은 걸작들을 보여준 고대 이탈리아의 모습은 내게 미소를 보내는
듯 했습니다. 종교에 바쳐진 그 거대한 예술적 건축물들을 두루 보며, 저는
신선하면서 시적인 경외감에 얼마나 사로잡혔던지! 석주의 미로! 끝없이 늘어선
아치와 둥근 천장들! 둥근 천장 주위에서 들려오던 그 아름다운 소리들! 대안의
물결이 속삭이는 것 같은 가 하면 숲 속에서 바람이 웅얼대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 같기도 한 그 소리들! 말하자면
건축이한 시인의 사상을 짓고 또 그 뜻을 밝혀주는 것인가 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처럼 그때까지 제가 애써서 배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고임들 사이에서 저는 확고한 것이란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으며, 현대인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것이란 아무런 것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과거와 현재란 곧
두 새의 온전치 못한 조상에 불과합니다. 과거는 시대 온갖 찌꺼기로 불구가
되어 버렸고, 또 현재는 아직 완성된 미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계시는 두 분께서는, 특히 광야에 살고 계시던 여러분께서는 제가
여행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는 도중, 한 번도 자연이 남긴 기념물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 아마 대단히 놀라셨겠지요?
어느 날 저는 에트나산 꼭대기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 화산은 섬
한가운데서 불타고 있었습니다. 저는 발 밑의 무한히 넓은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실리섬은 발 밑에 하나의 점처럼 작아져 보였고
바다는 공간 속으로 멀리 펼쳐져 있었습니다. 수직으로 펼쳐진 그림 같은 그
광경 속에서, 강들은 지도 위에 그려진 선처럼 보였습니다. 한쪽 시야에 그러한
광경이 들어 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검은 연기 사이로 불길을 내보이는 에트나
화산의 분화구에 눈길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열정에 겨운 한 젊은이가 화산 어귀에 앉아서 그 밑으로 보일 듯 말 듯한
인간의 집들은 바라보며, 인간들을 애석히 여겨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어르신들께서도 동정한 만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나 어르신들이 이 르네를
어떻게 생각하시든 간에 제가 말씀드리는 이 광경에서, 저의 성격과 존재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눈앞에 거대하면서 동시에 감지할 수 없는
삼라만상을 두고 살아왔으며, 곁에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을 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한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말을 하고 나서 르네는 입을 다물더니 곧이어 명상에
빠져들었다. 수엘 신부는 놀라서 르네를 바라보았고 눈이 먼 늙은 추장은
젊은이의 이야기가 들리자 않게 되자 그 침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르네의 시선은 즐겁게 평원을 지나가는 인디언들에게서 떨어질 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르네가 갑자기 감동된 표정을 짓더니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행복한 미개인들! 오! 언제나
너희들을 떠나지 않는 그 평화를 나는 왜 즐길 수 없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많은 나라들을 쏘다녔어도 얻은 것이라고는 조금밖에 되자 않는데, 너희들은
너희들의 떡갈나무 아래서 가만히 앉아서 날이 가는 줄도 모르고 세월을
보내는구나. 너희들은 나보다도 더욱 지혜를 얻듯이 말이다. 복에 겨워 생기는
이런 식의 우울을 너희들이 느낄 때면 너희들은 금방 그 순간적인 슬픈
생각에서 벗어나서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 가련한 미개인을 동정하여 주는
무언지 모를 그 무엇을 감동적으로 찾겠지.
여기서 다시 르네의 음성은 꺼져 버리더니, 자기 가금에 얼굴을 묻었다.
샥타스는 어둠 속으로 팔을 뻗어 양지의 팔을 잡더니 감동된 어조로 소리치는
것이었다. 얘야!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 격한 음성에 르네는 제 정신으로
돌아와 자신이 혼란에 빠져 있던 것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샥타스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그 인디언 노인을, 얘야, 너처럼 쉽게 감격하는 사람도
없겠다. 그처럼 너를 괴롭혀 온 그 성격을 좀 가라앉혀보렴. 네가 세상일에
남달리 괴로워한다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위대한 영혼은 평범한 사람의
영혼보다 더 괴로움을 견뎌내야 하는 거다. 네 이야기를 계속하렴. 덕분에
우리는 유럽의 한 부분을 온통 훑어볼 수 있었지. 이제 네 조국을 좀
알려주거라. 너도 알지만 나도 프랑스라는 나라에 가보았고 그 나라 대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나는 그 대왕의 화려한 집도 가보았다. 얘야, 이제
나는 추억 속에서만 살 고 있단다. 추억으로만 사는 늙은이란 숲 속에 쓰러져
있는 그 떡갈나무와 비슷한 것이지. 그 떡갈나무는 이제 다시 잎새가 나서
가꾸어지지는 않지만, 해묵은 가지에서 자라나는 다른 초목들이 벌거벗은
고목을 덮어 준단다. 이 말에 마음이 가라앉은 르네는 다시 자기 마음속의
이야기를 이렇게 이어 나갔다.
...아버님, 슬프게도 저는 그 위대한 세기에 관해서는 이야기해 드릴 수가
없어요. 그 세기의 종말을 저는 유년시절에 보았고, 제가 고국에 돌아갔을 때는
이미 그 세기는 끝나 버렸으니까요. 한 민족에게 그보다 더 급작스럽고 놀랄
만한 변화가 일어난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뛰어난 재능과 종교에 대한
경의, 그리고 풍속의 엄격함, 이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연약해지고 불경과
타락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저를 떠나지 않고 어디든지 따라다니던 그 극성맞은 욕망과 불안을 가라앉혀
줄 그 무엇을 고국에서 찾아볼 수 있으리라고 저는 기대했지만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세상살이 공부를 해 보아도 배운 것이라고는 없었으며, 그렇다고
무지한 자가 갖는 고요함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어떤 행동이라고 꼭 꼬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누님은 오히려 저의
고툥을 키우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누님은 제가 도착하기
며칠 앞서 파리를 떠나고 없었기에 제가 그녀 있는 곳으로 만나러 가겠다고
편징를 보냈습니다. 누님은 일이 있기 때문에 어디서 머물지 알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제 계획을 바꾸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대답해 왔습니다. 저는
그때 우애라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랑이란 만나보아도 미지근한 것이고 보면 아주 사라져 버리며, 불행에는
견뎌내지도 못하고, 사랑이 한창 잘 진행되면 더욱더 견뎌내지도 못하고, 사랑이
한창 잘 진행되면 더욱더 견뎌내지 못하는 법이지요.
저는 외국 땅에 있었을 때보다도 고국에서 더욱 외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도 제게 이야기를 건네지 않고, 또 제 이야기를 듣지도 않을 세계에 파묻혀
얼마 동안이나마 지내보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어떤 열정에도 사로잡히지
않았던 제 영혼은, 그 영혼을 불러줄 대상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요구했던 것은,
고상한 말씨나 깊은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만 제 삶을 축소시켜서
사회와 보조를 같이해 나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저는 어디서나 낭만적인 기질을
가진 자로 취급당하였고, 제가 하는 젓에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사람들과 세산
만사에 갈수록 염증만을 느꼈으므로 남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혼자서 살 마음을
먹고 교와에 숨어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어둡고 독립된 생활에 상당한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군중에 섞이곤 했습니다. 그 광막한 인간의 사막으로 말입니다.
때로는 사람이 별로 찾지 않는 성당에 들어가 앉아 몇 시간이고 생각에 잠겨
보기도 했습니다. 주님 앞에 엎드리는 가련한 여인네며 참회의 심판대에 무릎을
꿇는 죄인들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곳을 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얼굴을
활짝 펴고 나갔습니다. 밖에서 떠들어대는 그 시끄러운 소리란, 곧 주님의 성당
문턱에서 사라져 버리는 세상의 온갖 풍파며 정열의 파동에 불과한 것
같았습니다. 그 성스러운 구석에서 제가 남몰래 흘리던 눈물을 굽어살피신
주님만은, 제가 그 발 밑에 엎드려 생존이라는 짐을 벗게 하여 주십사고 빌었고,
저를 늙은이로 만들어 주십사고 그 몇 번이나 빌었던가를 아시겠지요. 아!
여울물에 몸을 씻어 다시 태어나고, 다시 젊어져, 자신의 영혼을 생명의 샘에
적실 필요성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저녁이 되면 저는 처소로 가다가 지는 해를 보려고 다리 위에 멈춰 서곤
했습니다. 태양은 도시를 벌겋게 물들이면서 마치 수세기 묵은 괘종의 추처럼
황금 물결 속에서 천천히 흔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밤과
더불어 쓸쓸한 거리의 미로를 지나 귀가하곤 했습니다. 인간이 사는 처소에
밝혀진 불빛을 보면서 저의 생각은 그 불빛이 보여 주는 괴로움과 즐거움의
여러 가지 장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하였습니다. 저 많은 지붕 아래에 친구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고딕식 대성당의 종탑에서는 시간을 알리는 규칙적인
종소리가 들려왔고, 또 그 소리들은 멀리까지 온갖 음색으로 되풀이되어
이곳저곳의 성당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슬프게도 매시간마다 이 사회는 무덤을
파고 또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처음에 저를 사로잡았던 그 생활도 오래지 않아 견디기 힘든 것으로
변했습니다. 똑같은 관경과 똑같은 생각이 자꾸 이어지는 바람에 지쳐 버린
것이지요. 저는 스스로 마음을 달래보기도 하고 또 제가 무엇을 하려고
원하는지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숲 속 생활을 꽤 감미로우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저는, 이제 겨우
시작한 인생행고, 하지만 이미 꽤 많이 허비해 버린 인생행로를, 전원의
유배지에서 끝내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든 계획을 열심히 짜고 세운 다음, 전에
세상 구경을 떠날 때처럼, 간간 오두막에 묻혀 살려고 서둘러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변덕스러운 취미를 가졌다느니, 한 가지 생각을 오래 지니기
못하느니 하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쾌락의 밑바닥에 서둘어 도달하려는, 그런
상상 속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제가
붙잡을 수 있었는데도 언제나 그 목표를 지나쳐 버린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본능이 시키는 대고 미지의 행복을 찾고 있을 뿐입니다. 그 어디서나
한계만 느껴질 뿐이며, 이미 끝난 것은 제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이 제 잘못일까요? 아무튼 저는 생활의 단조로운 감정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제가 미친 듯이 행복을 믿고 있다면야 그 행복이라는
것을 평상시의 생활에서 찾을 수도 있었겠지요.
절대의 고독과 대자연의 풍경! 글로는 묘사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 저는
빠지고 말았습니다. 친척이나 친구도 없니, 말하자면 이 대지 위에서 홀로,
이제껏 전혀 사랑을 해보지 못했으면서, 저는 삶의 충만함에 압도당했습니다.
어느 때는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기도 했고, 제 가슴속에서는 용암이 끓어
넘쳐흐르는 듯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괴로워하기가 일쑤요, 꿈에 쫓기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계곡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보기도 했고, 산으로 올라가 보기도
했습니다. 미래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존재를, 내 욕망의 힘을 다해
찾으면서 말입니다. 저는 바람 속에서 그 대상을 들었다고 믿었습니다. 모든
것은 상상력에 의한 환상으로 변했으며, 하늘에 있는 성좌였으며, 우주에 퍼져
있는 삶의 원리, 바로 그것이 되었습니다.
안정되어 있으면서도 불안하고 풍성하면서도 빈곤한 그러한 상태가 아무런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버들가지 잎새를 하나씩 뜯어
냇물에 띄워 보내면서, 냇물에 실려 가는 그 버들잎 하나하나에 한 가지
생각들을 실어 주며 즐긴 일이 있습니다. 급작스러운 혁명으로 왕관을 잃을까봐
조마조마 하는 왕의 조바심도 가지에서 떨어져 나간 그 버들잎이 위태롭게 될까
안타까워하는 마음보다 더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 인간의 나약함이란!
영원히 늙을 줄 모르는, 인간 마음의 유년시절이여! 바로 그 때문에 우리의
고상한 이성은 얼마나 유치해지는 것인지! 또한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버들잎과 같이 보잘 것 없는 것에다 자기의 운명을 걸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산책 도중에 느꼈던 그 많은 순간순간의 감정들을 어떻게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텅 빈 제 마음속에 울리던 그 정열의
소리는, 흡사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광야의 바람 소리나 강물 소리와도 같아서,
비록 그것을 즐길 수는 있다 해도 도저히 그것을 그려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한 불안 상태 속에서 헤매는 동안 가을이 닥쳐왔습니다. 너는 기꺼이
폭풍의 계절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어느 때는 바람과 구름과 유령들 사이를
헤매는 무사가 되고 싶었고, 수풀 한 구석 풀 포기 위에 피운 보잘 것 없는
모닥불에 손을 녹이는 목자의 운명을 부러워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 목자들의
구성진 노랫소리를 듣고 이 세상 어느 곳에서건 인간이 내는 자연스런 소리는
그것이 비록 행복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슬플 수밖에 없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란 완전하지 못한 악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줄이 몇 가닥
모자라는 리라 같은 것이어서 기쁨의 노래를 나타내려 해도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나타내는데 쓰이는 소리로 표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날 저는 저쪽 끝에 수풀이 보이는 넓은 황무지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제가
명상에 잠기는 데는 별로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이라든가 헐벗은 나무 꼭대기 위로 피어오르는 오두막집의 연기라든가,
또는 북풍에 흔들리고 있는 이끼나 외로이 놓인 바위며, 시든 등심초가
속삭이는 쓸쓸한 연못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계곡 한가운데서 멀찌감치 홀로
우뚝 서 있는 종탑도 간간이 눈길을 끄는 것이었고, 머리 위로 날아가는 철새도
시선을 끌었습니다. 철새들이 날아가는 먼 곳의 기후와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바닷가들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저도 그 날개 위에 타고 가보았으면, 하고
생각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 어떤 비밀스런 본능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저는
한낱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방랑할 때는 아직 오지 않았어. 죽음의
바람이 불면 그제야 자네가 원하는 그 미지의 곳으로 향하여 날개를 펼 수 있을
걸세. 그때를 기다리게나.
이 르네를 다른 삶으로 데려다 줄 폭풍이여, 어서 빨리 일어나라! 이렇게
외치며 저는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얼굴은 달아올랐고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렸으며, 빗방울도 오한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했고,
고통스러웠으며, 마치 악마에 마음이 사로잡힌 듯했습니다.
그날 밤 폭풍이 오두막을 흔들고 빗줄기는 지붕으로 억수같이 쏟아질 때,
바다 위에서 떠도는 흐릿한 배처럼 첩첩이 덮인 구름 사이로 달이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던 그날 밤, 제 가슴은 생명에 벅차 올랐고 천지라도 창조해낼 듯한
힘이 솟아올랐습니다. 아! 제가 그때 겪은 기쁨을 어느 여인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었더라면! 주여! 당신이 제 욕심에 따라 한 여인을 제게 주시었다면,
우리의 첫 선조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내 몸의 일부로 빚어낸 이부를
주셨다면.......아름다운 천상의 여인이여! 나는 그대 앞에 끓어 엎드렸을 텐데.
그대를 품에 안고 내 남은 생명을 그대에게 바치리라고 영원하신 주님께 기도할
수 있었으련만.
아아, 그러나 나는 혼자였을 뿐, 이 세상에 다만 나 혼자였을 뿐이었으니.
제몸은 남모르게 초췌해 갔고 어린 시절부터 느껴오던 삶에 대한 혐오가 다시
새롭게 엄습해 왔습니다. 이윽고, 제 마음은 사고에 아무런 자양도 되지 못했고,
저는 오로지 권태라는 감정 속에서만 존재를 느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동안 저는 병과 싸워 보았습니다만 곧 그 병에 무관심하게 되어 버렸고, 또
그 병을 이겨낼 확고한 마음도 없었습니다. 어디에나 있으면서 또 아무 곳에도
없는 이런 괴상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마침내 저는
세상을 등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천주님의 목자이신 신부님! 제 이야기를 듣고, 거의 이성을 잃어버렸던 그
불행한 자를 용서하시겠지요. 저는 신앙심에 가득 차 있었으면서도 불경스러운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가슴속으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으면서도 머리는
주님을 몰라 뵈었던 것입니다. 제 행동, 제가 하던 말, 제 감정들, 이 모든 것이
암흑이고 거짓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으며,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저로부터 빠져나갔습니다. 우애와 세상과 은둔처가 한꺼번에 저를
버린 것이었습니다. 저는 별의별 짓을 다 해보았습니다만 그 모두가 저를
파멸로 이끌 뿐이었습니다. 사회로부터 배척을 받고 아멜리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채, 고독조차도 아쉽게 여겨지는 상태에서, 제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제가 마지막 도피의 도구로 삼은 것은 바로 그
고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독이라는 널빤지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저는 느꼈습니다.
삶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마음먹고 나서, 저는 그 미친 짓에
온 정신을 다 쏟아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이제 저를 재촉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출발의 시간을 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생존의 마지막 순간들을
느릿느릿 맛보고 싶었고, 온 힘을 다해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는 재산에 관해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멜리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잊고 있는데 대하여 몇
마디 원망이 나오고 말았으며, 제 마음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들고 일어났던 그
어떤 감동을 나도 모르게 드러내 보이고 말았습니다. 저는 비밀을 잘 감쌌다고
생각했었지만 제 마음을 속속들이 잘 알 수 있었던 누님은 쉽게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제 편지를 감싸고 있던 그 무서운
어조에 놀라, 또 제가 지금까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일에 대해 묻는 것을
보고는 몹시 놀라서, 답장을 써 보내는 대신 불쑥 달려왔고, 이번에는 제가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아멜리를 다시 보았을 때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며 얼마나 흥분했었던가를
느끼시려면, 아멜리는 제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 저의
유년시절의 달콤한 기억들은 모두 그녀와 얽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일종의 황홀한 마음으로 그녀를 맞이하였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고 또 그 앞에서 마음을 열어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로 오랜만의 일이었습니다.
아멜리는 제 팔에 몸을 던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정하구나, 너는
죽으려는데 누이는 살아있다니! 너는 네 누이의 마음을 의심하고 있구나!
설명하지도 말고 변명하려고도 하지 마, 나는 다 알고 있으니까. 너와 함께
지냈던 것처럼 모두 알 수 있어. 네 감정의 움직임을 샅샅이 알고 있는 나를
속일 셈이니? 그게 바로 너의 불행한 성격이고 너의 나쁜 점이고 네가 틀린
점이야. 약속하렴. 이제 다시는 그따위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다시는 죽으려고 하지 않겠다고 제발 맹세해다오.
이렇게 말하더니, 아멜리는 동정과 연민이 가득 찬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는
이마에 키스를 퍼부었습니다. 흡사 어머니 같기도 했고 혹은 그 이상으로
정다운 그 무엇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제 마음은 기쁨으로 활짝 열렸습니다.
어린애처럼 위로를 받고만 싶었습니다. 저는 아멜리의 힘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아멜리는 엄숙히 맹세하기를 요구했습니다. 저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맹세를 하면서, 제가 장차 더욱 불행해지리라는 것은 의심조차
해보지도 못했습니다. 힘께 있다는 희열을 즐기면서 우리는 한 달도 어 같이
지냈지요. 아침이 돼서 일어나 보면 전처럼 혼자가 아니었고, 누님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행복에 겨웠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아멜리는 날
때부터 성스러운 무엇을 지니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녀의 마음도 그녀의 몸과
마찬가지로 순진한 아름다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부드러운 감정은
끝이 없어서 그보다 더 아름답고 그보다 더 꿈꾸는 듯한 마음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씨와 생각 그리고 그녀의 음성들은
합창처럼 새어 나왔습니다. 누님은 여인들이 갖는 수줍음과 사랑을 가졌고 또
천사들의 순결과 선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제 분별없는 모든 행동을 속죄할 때가 왔었습니다. 몽환 속에서 저는,
적어도 고통의 실체를 얻어보려고 불행이라고 겪어보았으면 하고 바라게까지
되었습니다. 아! 주님은 노함 속에서 그런 무서운 소원도 들어주시는
것이었으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요? 오, 제 눈에서 흘러내리는 이 눈물을
보십시오. 제가 그럴 수가.......요 며칠 전만 하더라도 그 어느 것도 제게서 그
비밀을 캐낼 수가 없었겠지만......이제 모든 것은 다 끝났습니다.
그러나 오! 이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침묵 속으로 파묻혀져야 합니다. 오직
광야의 나무 아래서만 이야기되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겨울이 다 지나갔을 때였습니다. 저는 아멜리가 건강과 휴식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반대로 저는 그녀로부터 건강과 휴식을 얻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메말라만 갔습니다. 눈은 움푹 패어 들어갔고,
거동은 지친 듯, 또 목소리는 흐려져갔습니다. 어떤 날은 그녀가 십자가 밑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이 세상, 고독, 밤, 낮, 저의
존재 혹은 부재, 이 모든 것이 아멜리를 불안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뜻하지 않은 한숨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아주 활기에 찬 모습을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기력이 다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녀는 일손을 잡았다가도 이내 일감을 밀쳐 버리는 것이었고
책을 펴들기는 했지만 읽을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한 줄을 읽어내려 가기는
하지만 그 한줄 조차 끝까지 읽어 내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물러가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비밀을 캐내려고 애써 보았지만 헛일이었습니다. 제 품에 그녀를 껴안은
채 그녀에게 물어보면, 그녀 역시 저처럼 뭐가 뭔지 모르겠다면서 웃음을
띄우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럭저럭 석 달이 흘러갔습니다. 그녀의 몸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녀가 우는 까닭은 그 이상한 서신 왕래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받는
편지에 따라서 그녀는 차분히 가라앉기도 하고 마음이 들뜨기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침 함께 앉아서 식사할 시간이 지났지 때문에 저는
그녀의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습니다.
저는 문을 빠끔이 열어 보았습니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다만 벽난로
위에는 제 앞으로 된 편지 한 통뿐. 저는 떨면서 그 편지를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간수하고 있는 이 편지로 말미암아 저의 미래에는 기쁨이라는 것이 사라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르네에게
르네야, 한 순간만이라도 네게서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면 나는 목숨을
몇천 번이라고 내던질 수 있으리라는 것을 하늘을 증인이 되어 주실 거야.
하지만 박명한 나로서는 너의 행복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죄인처럼 너도 몰래 집에서 빠져 달아나는 나는 용서해 주겠지. 네가 붙잡으면
뿌리칠 용기도 없거니와,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도 되었기 때문에.......주여, 저를
가엾게 여기소서!
르네야, 너는 내가 언제고 신앙생활에 기울어져 있던 것을 알지! 이제야
하늘의 가르침에 따라야 할 때가 되었나봐. 왜 내가 이처럼 늦도록
기다렸는지.......주님은 나를 벌하셨어,
나는 너 때문에 이 세상에 남아 있었단다.......용서해 다오. 나는 너를 떠나야
할 그 슬픔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고 있단다.
바로 지금이, 네가 그토록 반대하고 나서던 안식처로 떠나야 할 때인 것 같아.
우리가 언제나 여러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불행한 탓이겠지. ......네 자신도 오직 그 신앙의 안식처에만 안전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해. 이 속세는 네게 알맞는 것이라고는 아부것도 주지
ㅇ않을 테니까.
너에게 네가 한 그 맹세를 다시 말하지는 않을래. 나는 네가 약속을 꼭 지킬
줄 알고 있으니까. 너는 맹세했어. 나를 위해서라도 너는 살아야 새. 인생을
하직하겠다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이 또 무엇이겠니? 하지만
이 누나는 믿어 다오. 산다는 것은 더욱 힘드는 일이야.
여하튼 나의 르네야, 하루 속히 그 고독에서 빠져 나오거라. 고독이란
너에게는 좋지 않아. 무슨 일자리든 구하도록 하여라. 프랑스에서는 누구나
직위을 가졍야 한다 는 필요성을 너는 아마도 쓴웃음으로 대핳 테지만, 그래도
우리 선조들의 경험이나 지혜을 우습게 보지는 말아야 해. 인간들의 평범한
생활을 좀더 닮아 보려고 애쓰면서 조금이라도 불행을 덜어보는 것이 훨씬 나을
거야.
아마 결혼이라도 한다면 너는 슬픔에서 벗어나 안정을 얻게 될는지도 몰라.
어는 한 여인이, 또 네 자식들이 너의 삶을 채우게 될 거야. 너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지 않을 부인이 있겠니? 너의 열성적인 마음과 그 재주, 정열적이며
고귀한 태도, 부드럽고도 늠름한 그 눈길, 그 모두가 아내의 극진한 사랑을
너에세 보장해 줄 거야. 그러면 너의 아내는 그 얼마나 벅찬 기쁨으로 너를 품
안에 난아 주겠니? 그녀는 언제나 너를 응시하고 너를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너의 괴로움을 덜여 주려고 애를 쓸 것이겠고, 네 앞에서는 아내야말로 사랑와
순진, 바로 그것일 거야. 그리고 그녀에게서 너의 누이를 다시 발견할 거고.......
나는 어느 수도원으로 떠난다. 바닷가에 있는 수도원은 내 영혼상태에 꼭
알맞은 곳이야. 밤이면 내 방에서도 수도원의 벽을 보듬어 주는 파도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겠지. 흔들리는 소나무 꼭대기에서도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흔들리는 소나무 꼭대기에서도 파도소리을 들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수풀 속을 너와 함께 거닐던 그 시절을 생각할 거야. 어린 시절부터 정다운
친구였던 너를 이제 아주 볼 수 없게 되었구나. 나이는 몇 살밖에 더 먹지
않았지만 나는 너의 요람도 흔들어 주었고 어떤 때는 같이 짐이 들기도 하였지.
한 무덤 안에서 언젠가 같이 다시 모일 수 있다면! 아니야, 사랑을 모르는 이
여인들이 영원히 쉬게 될 그 성역의 싸늘한 대리석 밑에서 나노 혼자 잠들어야
해.
눈물 때문에 거의 반이나 지워진 이 글을 네가 알아볼는지 모르겠구나.
여하튼 우리는 조만간에 떠나냐 하는 것 아니겠니? 무엇 때문에 너를 더욱
불안스럽게 하고, 또 네 삶의 가치를 내가 깎아내려야 하겠니? 릴르드
프랑스에서 난파당한 청년 M씨를 생각하여 보렴. 그가 죽은 지 몇 달후 그의
마지막 편지를 받을 때쯤에 그의 시체는 이미 다 썩어 없어진 뒤였잖아.
우럽에서 그의 장례를 치를 때 인도에서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가 아니겠니?
그처럼 잊어버리기 쉬운 사람이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겠니? 어느 친구들은
벌써 위로까지 받았는데 어는 치누들은 그의 죽음조차 알 길이 없다니!
사랑하는 르네야, 나에 대한 기억이 네 마음 속에서 그렇게 빨리 사라질 수
있을까? 르네야, 나는 지금 이 사간 속에서 너를 떠나가기는 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저 세상에서 너와 다시는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란다.
아멜리
추신-여기에 내 재산의 증여증서를 동봉한다. 내 우애의 표시이니 제발
거절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마 발 밑에 떨어진 벼락이가도 이 편지보다는 더 나를 놀라게 히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아멜리는 제게 무슨 비밀을 감추고 있었던 것일까요? 누가
그녀에게 갑작스레 신앙생활을 강요한 것일까요? 사랑이라는 매혹으로 저를
살려 놓고서는 다시 그 매혹을 걷어차 버린 것이었습니다. 아, 왜, 그녀는
나타나서 나의 계획을 바꾸게 한 것일까요! 자비심이 발동해도 그녀는 제
곁으로 왔던 것이었습니다만, 그녀는 곧 괴로운 의무감에 지쳐서 이 세상에서
오직 자기만을 의지하고 있던 불행한 저를 버려두고 서둘러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을 죽지만 않게 해놓으면 할 일은 다햐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저는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다시 제 자신에게로
되돌아 왔습니다. 아멜레, 너무 하는군. 만약 누나가 내 처지라면.......나처럼
허무한 나날을 보내도록 버림을 받았다면, 아! 결코 누나는 동생한테서 버림을
받지 않았을 거야 라고 저는 아멜리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다시 읽어보니 그 편지에는 무언지 알 수 없는 슬프고도
애정에 찬 그 무엇이 있어, 마음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언뜻 어떤 희망이
떠올랐습니다. 아멜리는 아마도 감히 고백하지는 못하지만 어떤 남자에게
마음을 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의 우울과
이상스러운 서신 왕래며 그 편지 속에 풍기는 열정적인 어조를 비로소 어렴풋이
나마 편지를 띄웠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답장이 왔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녀의 비밀을 알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다만 자기가 수련기간을 면제받았다고, 또 주님께 대한
서약을 곧 할 것이라고만 알려 왔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아멜리의 고집,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씨가 나의 애정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화가 나고 말았습니다.
잠시 주저하다가 저는 누님과 직접 만나서 마지막으로 한 번 졸라보기 위하여
B로 가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제가 자라났던 곳을 지나야
했습니다. 제 생애에 있어서 행복했던 오직 걷잡을 수 없었고,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싶은 충동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큰 형님은 아버지가 물려준 집을 팔아 버렸지만 아직 새 주인이 들어와서
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전나무 길을 한참이나 가서야 그 성관에 다다랐습니다.
저는 황폐한 뜰을 걸어서 지났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굳게 닫힌 창문이며 반쯤
부서진 창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벽 밑에서 자라고 잇는 엉겅퀴와 문턱에 흩어진
잎새들, 그리고 아버님과 그의 하인들이 늘 살다시피 하던 황량한 현관들을
너는 서서 바라보았습니다. 계단들은 이미 이끼에 덮여 버렸고 틈이 벌어져서
흔들거리는 그 돌들 밑으로는 노란 계란 풀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웬 낯선
집지기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여보시오, 며칠 전에 여기
왔던 그 낯선 여인처럼 그러시려우? 그 여자도 들어가려다 말고 그만 정신을
잃었다우.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마차에다 태워주었는데.......
저는 그 낯선 여인 이 누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저처럼 그곳에
와서 과거를 되씹으며 눈물을 흘린 이가 누구였겠습니까?
잠시 수건으로 눈물을 가린 후 저는 선조 할아버지들이 사시던 그 지붕밑으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저는 제 발자국 소리만 웅웅 울리는 방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녔습니다. 방들은 모두 닫혀 있는 덧창 사이로 새어드는 희미한 햇빛
때문에 침침하였습니다. 저를 낳으시면서 세상을 뜨신 어머님의 방과 아버님이
쓰시던 방, 또 제가 요람에서 잠자던 방과 주님과 함께 우리의 우애가 처음으로
맺어졌던 방들을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객실에는 군데군데 휘장이 없어졌고,
버려둔 침상에는 온통 거미줄 천지였습니다. 저는 그곳을 얼른 빠져나와 감히
되돌아 보지도 못하고 성큼성큼 멀어져 버렸습니다. 젊은 남녀 자매들이 늙은
부모님 그늘에서 다시 모이는 그 순간은 비록 아늑하다 하지만 또한 얼마나
빨리 지나쳐 버리는 것인지! 사람의 감정이란 꼭 하루살이 같습니다. 주님이 한
번 불어 버리면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입니다.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겨우
알아볼 뿐! 떡갈나무는 그의 둘레에서 열매가 싹트는 것도 볼 수 있지만 인간을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B에 도착하여 저는 수도원으로 찾아가서 누님에게 면회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누님은 아무와도 만나지 않는다고 누가 일러주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주님에게 몸을 바치는 손간에는 세상일은 조금도
생각을 할 수가 없으며, 또 제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저의 고통 때문에 괴로움을
받지 않도록 피해주면 좋겠노라는 아멜리의 대답이 왔었습니다. 그녀는 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여하튼 내가 서원을 하는 날 네가 제단에 올 수 있으면
와서 아버님 대신에 일을 보아다오. 정말 너의 용기에 꼭 합당한 일이 될 테니.
또, 우리의 사랑이나 나의 안정에도 좋은 것이 될 테니.
저의 열렬한 애정에 비하여 그토록 쌀쌀맞게 나오는 그녀의 완강함을 보고
저는 몹시 격분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길로 바로 돌아와 버리려고
하였습니다만 그 미사성체를 방해하고 싶은 마음에 그냥 눌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지독한 마음이 들었던지 성당 안에서 자살을 해서 아멜리를 제게서
빼앗아 가는 그 맹세 소리에 원망 소리가 함께 울려 나오도록 할까 하는
생각까지 해 보았습니다. 수도원장은 지성소 안에 자리를 하나 마련해 놓았다고
제게 미리 알려주면서, 그 이튿날부터 있을 예정인 의식에 참석해 달라고
했습니다.
동이 터오르자 첫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열 시 가까이 되어서야
최후의 고통이라도 치르는 듯 겨우 수도원으로 몸을 이끌고 갔습니다. 그러한
광경을 보아야 한다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것이 어디 있으며,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성당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누가 저를 그 지성소 안에 있는 의자에
데려다 놓았을 때 저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 또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면서 얼른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제단에는 이미 신부님이 기다리고
있었고, 이어서 곧 신비로운 창살문이 열리면서 화사롭게 차린 아멜리가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너무도 성스러운 그 무엇이
있는 듯하여 모두들 놀라움과 찬탄을 마지않았습니다. 성녀의 거룩한 고뇌와
신앙의 위대함에 눌리고 기가 꺾여 버린 저는 폭력을 쓰려던 계획을 집어치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맥이 탁 풀어지고 말았습니다. 전능한 손에 붙잡혀서
욕설과 위협은커녕 제 마음은 오히려 깊은 탄복으로 가득 찼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신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멜리는 제단 밑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촛불을 펴놓고 미사성제는
시작되었습니다. 사방에는 꽃과 향기가 풍겨 제단에 있는 희생물은 더욱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찬미가가 울려오자 신부는 아마로 지은 사교복만 빼놓고
제복을 전부 벗었습니다. 신부는 단 위로 올라가더니 주님에게 바치는 그
동정녀의 복됨을 간단하고도 비장한 말로써 이야기하였습니다. 신부가 그는
불꽃 속에서 타고 있는 향기인 양 나타났습니다. 라고 말하였을 때, 듣고 있던
우리들은 몹시도 조용하여 신비로운 비둘기의 날개 밑에 몸을 감추고 있는
것같이 느꼈고, 천사들이 제단 위로 내려왔다가 다시 관과 향내에 싸인 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 것 같았습니다.
신부는 말을 마치고 옷을 입은 다음 다시 미사성제를 계속하였습니다. 아멜
리가 젊은 수녀 두 사람에게 부축되어 제단의 맨 아래 층계에 무릎을 꿇었을때,
아버지는 노릇을 해야 할 저를 누가 찾아왔습니다. 제단으로 비틀거리면서
나아가는 제 발자국 소리에 아멜리는 그만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습니다.
신부에게 가위를 주기 위하여 곁에 자리를 잡자, 저는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분노는 곧 폭발될 듯했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낸 이멜리가, 비난과
고뇌에 찬 눈 초리로 노려보았을 때, 저는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끝내 신앙이 이기고 만 것이었지요. 누님은 제가 괴로워하고 있는 동안을
이용하여 자신의 머리를 의젓이 내밀었습니다. 아름다운 머리 타래가 성스러운
칼 밑에서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가는 베로 만든 기다린 겉옷이 당신의 온갖
장식물 대신으로 그에게 입혀졌습니다만 아멜리는 조금도 애잔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마에 그려진 슬픔도 아마포로 된 띠 밑으로 감추어지고, 신앙과
동정녀의 상징인 베일은 깍아 버린 아멜리의 머리에 꼭 어울렸습니다. 아멜리가
그때보다 더 아름다운 적은 결코 없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속죄하는 그녀의
눈길은 이 세상의 티끌에 두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녀의 넋은 이미 하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아멜리가 맹세의 말씀을 할 때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어 없어지자면 무덤을 거쳐서 와야 하니까요. 그녀가 대리석 위에
눕자 관 위에 덮는 새까만 천이 그녀의 몸 위에 펼쳐졌습니다. 사면에서 촛불이
켜졌고, 목에 스톨라를 찬 신부는 한 손에 성경을 든 채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젊은 수녀들이 그 뒤를 이어 갔습니다. 신앙의 기쁨이란 그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하지만 또한 너무 호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억지로
끌려가서 그 곁에 무릎을 끊게 되었을 때 갑자기 죽음의 베일 밑에서부터 알지
못할 속삭임이 솟아 나왔습니다. 저는 앞으로 몸을 굽혔습니다. 그러자 무서운
말(저는 혼자만 들을 수 있었던)이 들려왔습니다. 자비로우신 주여, 제가 이
무덤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저처럼 죄악의 욕정을 품지
않았던 동생에게는 행복을 주시옵소서.
관에서부터 새어나오는 이 소리를 듣고 비로소 저는 무서운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성을 잃고, 죽음의 천 위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누님을 껴안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숙한 아내여, 내 이
마지막 포옹을 받아주오. 당신을 당신의 동생으로부터 갈라놓은 죽음의
냉혹함과, 영원의 심연을 통하여 보내는 이 서약을.
이 동작, 이 외침, 이 눈물에 식은 그만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놀란 신부와 창살문을 닫아 버린 수녀들. 사람들은 웅성거리면서 제단으로
몰려왔고, 저는 정신을 잃은 채 다른 곳으로 옮겨져 나왔습니다. 아, 다시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가 다시 깨어났을 때, 식은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저는 정신을 잃은 채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고, 누님은
다시는 자신을 찾지 않도록 부탁을 남겨 놓았습니다. 아, 내 삶이란 그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누이는 동생에게 얘기하기를 겁내고, 동생을 그 누이에게 자기의
목소리가 들릴까봐 두려워하다니! 저는 속죄의 장소를 나오듯이 그 수도원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 수도원은 천상의 삶을 예비하여 주는 정열이 있는 곳, 또한
지옥에서처럼 희망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그런 곳으로 제게는
보였습니다.
우리들 자신 곳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불행을 이겨내는 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남의 불행의 씨가 되는 수도 있는 것이어서,
그렇게 되면 정말 견디기 어렵게 됩니다. 누님의 병이 무엇이었던가를 환히
알게 되자 저는 아멜리가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가히 상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제가 이제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사실이
스스로 풀렸습니다. 제가 여행을 떠날 무렵, 아멜리가 가졌던 그 기쁨과 슬픔의
뒤얽힘, 제가 올 때쯤 해서 조심스레 피하곤 하던 일들, 하지만 그러한 것들
때문에 아멜리는 그렇게도 오랫동안을 수도원으로 들어가 버리지 못한
것이었겠지요. 아아, 불행하게도 그녀는 그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자부한
모양입니다. 그녀의 은둔계획과 수련문제, 또 자기 재산을 제게 주도록 해 둔 일
등이 모두 표면상으로는 나를 속이고 만 그 비밀 서신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결코 환상이 아니었던 그 병 때문에 누이가 흘렸던 눈물이 무엇인지를 그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이나 망설여 왔던 정열은 맹렬하게
그녀에게로 쏠렸습니다. 심지어 저는 슬픔 가운데서 생각지도 못했던 만족감
같은 것을 찾아 볼 수도 있었고, 고통이란 것은 쾌락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식어
버리고 마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밀한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저는 전능하신 주님이 명하시기 전에 세상을 하직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죄악이었습니다. 주님은 아멜리를 제게 보내셔서 저를 구하셨고,
또 벌 주셨던 것입니다. 그처럼 모든 못된 생각과 못된 죄스러운 행동 때문에
혼란과 불행이 찾아왔던 것이지요. 아멜리는 저에게 제발 죽지 말아달라고
졸랐던 것이며, 그녀를 더 큰 고통에 빠뜨리지 않게 할 책임이 제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정말 이상한 일입니다만!) 정말 불행하게 되면서부터 제게는
죽겠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온통 슬픔에만 잠길
수밖에 없었으며, 마음은 그야말로 권태롭고 비참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유럽을 떠나 아메리카로
가기로 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루이지애나로 갈 일단의 배들이 B항구에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배의 선장 한 분과 얘기가 되어서 제 계획을 아멜리에게
알린 다음 떠날 채비를 차리느라고 분주했습니다.
누님은 그때 죽을 고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동정녀의 첫
종려나무 가지를 주기로 약속한 주님은 그처럼 빨리 아멜리를 자신의 곁으로
부르려고 하시지는 않았던가, 이 세상에서의 그녀로 내려온 그 여주인공은,
십자가를 지고 용감히 고통과 맞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싸움 속에서
승리만을, 극심한 고통 속에서 넘쳐흐르는 영광만을 보면서 말입니다.
제게 남아있던 약간의 재산을 팔아서 형님에게 물려드리는 일, 함대의 준비
등이 더디게 진행되었고 바람도 역풍이어서 저는 그 항구에서 오래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침마다 저는 아멜리의 소식을 알려고 찾아갔다가 돌아올
때는 여러 가지 새로운 소식들을 알게 되어 그때마다 찬탄과 눈물을
지었습니다.
해변가에 새워진 그 수도원 주위를 저는 끊임없이 헤매고 다녔습니다. 가끔
쓸쓸한 해안으로 난 창살문에 기대어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앉아 있는 수녀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지구 저쪽 끝에서 전진해오는 배가 바라보이는 대양의
모습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몇 번인가 저는 바로 그 수녀가 달빛을 받으면서
창가에 앉아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지요. 그 수녀는 달빛에 환히 비친
바다를 바라보면서 황량한 바닷가에서 처량하게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녁이면 수녀들을 밤샘과 기도에 불러들이는 종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종소리가 느릿느릿 들려오고, 또 수녀들이 주님의 제단으로 묵묵히
발을 옮기는 동안 저는 수도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담벼락 밑에서, 홀로,
찬미가의 끝 구절을, 경건한 환희에 싸여,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습니다. 파도의
가냘픈 소리와 함께 그 마지막 찬미가의 구절들은 성당의 둥근 천장 밑에서
섞여 나왔습니다.
제 고통을 더욱 무겁게만 해 줄 것 같던 그런 일들이 어떻게 해서 오히려
고통을 무디게 할 수 있었는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제 눈물을 바위 위로, 바람
사이로 흩뿌리면 그 눈물의 쓰라림은 줄어들었으며, 슬픔조차도 그 슬픔이 지닌
이상한 성질 때문에 조금씩 치유가 되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불행이라 할지라도
평범한 것이 아니면 즐길 수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님도 덜 불행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제가 떠나기 전에 누님에게서 받은 편지가 이러한 생각을 더욱 굳게 해
주었습니다. 아멜리는 정답게 저의 고통을 걱정해 주었고, 시간이 가면 자신의
고통도 사라질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켰습니다.
내 행복에 대해서 절망하지 않아. ......아멜리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사 성제가 끝난 지금에 있어서는 도리어 좀 가혹했던 그
성제가 안정을 주고 있나봐. 친구들은 모두들 순진하며 그들의 맹세는 거짓이
없고, 생활은 규칙적이어서 향유를 뿌린 듯 나는 매일매일이 행복하단다. 폭풍이
으르렁거리고 바다새들이 창에 날개를 부딪칠 때면 천국의 불쌍한 비둘기인
나는 폭풍 피할 곳을 미리부터 찾았다는 행복에 잠긴단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움도 여기서는 그쳐 버리고, 하늘의 아름다운 화음을 처음으로 들을 수
있는 높은 꼭대기 바로 이곳이 성산이란다. 바로 이곳에서 신앙심은 다정다감한
사람들을 부드럽게 달래고 있는 거야. 신앙은 가장 열렬한 사랑일지라도 타는
듯한 순결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단다. 그 순결이야말로 사랑하는 여인이 자기의
처녀성과 결합될 때 생기는 것이야. 신앙은 한숨을 정화하고 순간의 정열을
영원히 변치 않는 정열로 바꾸어 놓을 뿐만 아니라 또 숨을 곳과 쉴 곳을 찾는
사람들의 쾌락과 고통, 비록 그것의 찌꺼기일자도 거기에 안정과 순결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란다.
하늘이, 아직도 내게 주려고 남겨 놓은 것이 무엇인지, 또 어디를 가나 내가
가는 곳마다 폭풍이 따라 다닐 것이라고 하늘이 귀띔해주려는 것인가, 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함대가 출발한다는 지시가 내렸습니다. 벌써 몇몇 배는 해질 무렵쯤에는
준비도 끝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멜리에게 작별의 편지를 쓰기 위해 마지막
밤을 뭍에서 보내기로 미리 얘기해 놓았지요. 한밤중, 제가 편지에 빠져서
종이까지 눈물로 적시고 있었을 때, 어디선가 바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기울이자 폭풍소리를 뚫고 수도원의 종소리에 섞인 경적대포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바닷가로 뛰어가 보았습니다. 사방에는 사람 하나 없고,
오직 파도의 울음뿐이었습니다. 저는 바위 위에 앉았습니다. 한쪽에는 파도가
번쩍이면서 펼쳐져 있었고, 한쪽으로는 컴컴한 수도원 담벼락이 끝도 없이
하늘에 닿을 듯 아득히 보였습니다. 창살이 붙은 어느 조그마한 창에 불이
켜졌습니다. 아! 아멜리, 십자가 아래 엎드려서 당신의 불행한 동생에게 폭풍이
일지 않도록 주님에게 기도 드리는 것이 바로 당신이오? 바다에서는 폭풍이
일고, 당신이 숨을 곳에는 안정이 서렸구나. 암초에 부딪힌 인간을 무엇이 와도
꿈쩍 않는 당신의 피난처 발 밑에 쓰러져 있소. 방의 다른 쪽 벽으로는 무한히
있고, 흔들리는 비의 신호등과 꼼짝 않는 수도원의 불빛, 항해하도록 운명지워진
자의 불안과 단 하루 속에서 삶의 앞날을 모두 알아볼 수 있는 순결한 여인,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아멜리, 당신의 영혼도 대양처럼 폭풍이 일고 있으리.
선원들의 것보다 무서운 조난을 겪고 있으리. 이러한 모든 광경이 지금도
그림같이 기억 속에서 선합니다. 저의 비통한 눈물의 증인인 새로운 하늘의
태양, 그녀의 음성을 되받아 외쳤던 아메리카 해안의 메아리들, 처참했던 밤이
지나고, 이튿날이 되자 저는 갑판 끝에 기대어 서서 영원히 떠나가는 조국을
바라보는 몸이 되었습니다. 흔들리는 조국의 나무들과 지평선 밑으로 내려가
버린 수도원의 지붕 꼭대기들을 저는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르네는 이야기를 마치자 종이 한 장을 꺼내 수엘 신부에게 주더니 그만
샥타스의 팔에 안겨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르네가 흐느끼고 있는 동안
선교사는 르네가 방금 중 그 편지를 이리저리 대충 읽어보았다.
편지는 원장 수녀로부터 온 것이었다. 거기에는 전염병에 걸린 그의 동료들을
사랑과 열성으로 극진하게 간호하다가 희생이 된 미제리코르드파의 아멜리
수녀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녀의 모든 동료들은 더할 수 없이
애통해 하였고, 심지어는 아멜리를 성녀로 생각하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원장은 덧붙이기를, 그가 책임자로 있은 지 30년이 넘었지만 속세의 고뇌를
떠나서 그처럼 흡족해 하는 수녀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샥타스는 르네를 끌어안았다. 그 늙은이는 울고 있었다. 아들아. 그는
르네에게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오브리 신부님이 지금 여기 계시면 얼마나
좋으랴...신부님은 그의 깊은 가슴속에서 우리에게 알 수 없는 평화를 꺼내어
보여 주실 텐데, 폭풍우를 잠재우면서도, 폭풍우와 꼭 닮은 그런 평화를 말이다.
폭풍우 부는 밤의 달과 같은 것이지. 이리저리 떠도는 구름이라도 그 달을
앗아가지는 못하리라. 한결같이 께끗하기만 한 달님은 그 위로 고요히 나아가고,
아! 나에게는 모두가 고통스럽고 모두가 나를 괴롭히는구나!
수엘 신부는 그때까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근엄하게 르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연민의 정이 솟아올랐으나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아서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추장의 감정이 그로 하여금
침묵에서임을 떼게 하였다.
그 어느 것도........ 수엘 신부는 르네에게 말헸다. 자네 이야기중의 그 어는
것도 지금 자네를 향해 일고 있는 이 동정심과는 맞설 수 없을 것이네. 나는
지금,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며, 머리 속에는 공상으로 그득 찬
젊은이 앞에 있는 셈이지. 모든 짐을 벗어 던지고 무용한 몽상에 빠진 젊은이
말일세. 여보게, 세상을 추악한 것인 줄을 알았다 해서 그가 뛰어난 사람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일세. 인간이나 인생이란 널리 잘 모지 못하는 데서 증오와
혐오가 생기는 것이니까, 더욱 시야를 넓히도록 해 보게나. 자네가 한탄하던 그
모든 죄악이란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거야. 자네의 삶에서
그 어떤 실제의 불행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순결과 지조와 신앙, 그리고 성녀의 그 모든
영광이라도 겨우 자네의 슬픔 한가지를 견딜 수 있게 할뿐이니. 자네 누이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게야. 하지만 내 생각에는 무덤 속에서 나온 고백 따위가
이번에는 자네 마음을 괴롭히고 있지나 않은지 두렵군. 자네에게서야 아주
당연한 일이겠지만. 자네는 도대체 이 삶이라는 숲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자신의 의무를 저버린 채 하루하루를 그냥 소비하면서, 성자들은 황야에 묻혀
있다고 말할 참인가? 그 성자들은 그들의 눈물과 함께 있는 것이야. 자네가
자신의 정열을 끄는데 쓰고 있을 것이고, 인간은 그 시간을 그들은 그들의
정열을 끄는데 쓰고 있은 것이고, 인간은 제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있는
주제넘은 젊은이 같으니! 고독이란 그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살지 않는 자에게는
좋지 못한 것이지. 고독이란, 그들에게서 스스로 시험할 모든 대상을 고독이
앗아가 버릴 때 비로소 영혼의 힘을 더욱 크게 하는 것일세. 누구든 힘을 얻은
자는 그 힘을 동포를 위한 일에 써야 할 것이지, 쓸데없는 데 쓴다면
비참하게도 남모르는 벌을 받는 것이고, 조만간에 하늘은 무서운 책망을 그에게
내리고 마는 법이야.
이 말을 듣고 당황한 르네는 샥탸스의 품에 숙이고 있던 머리를 쳐들었다.
앞을 못보는 추장은 미소를 띠었다. 눈웃음과 어울리지 않는 그 입 언저리의
미소는 무언가 신비롭고 거룩한 것을 지닌 듯했다. 얘야. 아탈라의 옛 애인인
샥타스가 말하였다. 신부님은 우리에게 가혹한 말씀을 하시는구나. 신부님은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를 고쳐주시지. 신부님의 말씀이 옳다. 평범한 길에서만
행복은 있는 거지.
어느 날, 메샤스베강은 그의 수원지 가까운 곳에서 자신이 낡은 시내에
지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싫증이 났었단다. 메샤스베강은 산에게는
구름을 빌고, 여울에는 물을, 폭풍에게는 비를 빌었다. 이윽고 둑을 넘친 강물은
아름다운 양쪽 기슭을 헝클어 놓으면서 거만하게도 자신의 힘을 자랑했지.
하지만 그가 지나는 곳마다 황폐해지고 후에 홀로 버려진 채 흘러가는 제
모습을 보게 된 후, 그제서야 그는 그 옛날 고요히 흘러내리던 때의 그 보잘 것
없던 자기 친구들......자연과 새들과 꽃들이며 나무와 개울들, 이 모든 그의
친구들이 마련해 주었던 그 볼품없는 강바닥을 아쉬워하게 되었단다.
샥타스가 말을 끝맺자, 메샤스베강의 깊숙한 갈대밭 속에서는 한낮이 되면
폭풍이 온다고 알리는 둣 홍학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집으로 가는
기롤 접어들었다. 아마 두 노인의 권유에 못이겨 르네는 그의 아내 곁으로 갈
것이겠지만, 거기서 그는 결코 행복을 발견치 못하리라. 그 얼마 후에
루이지애나에서 벌어졌던 프랑스인과 닛쉐스족의 학살 때문에 수엘 신부와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르네가 황혼녘이면 앉아 있곤 하던 그 바위를 우리는 지금도
볼 수 있다.
초월로 가는 길목으로서의 사랑
샤토브리앙( 르네 의 작가)은 대혁명으로 처절하게 무너져내린 앙시앙 레짐 의
찬연한 노을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꿈을 삶의 일부로 간주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를 존재하지도 않은 완전한 세계의 환상에 빠져 끝내 세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던 몽상가로 제쳐놓는다.
한때는 반혁명군으로 싸우기도 했고 그 싸움에서 패배한 뒤에는 오랜
망명객으로 신대륙을 떠돌았던 그에게 그토록 집착하였으나 끝내 잃어버린
세계는 환상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그 비극적인 몰락이 자아낸
뒷사람들의 연민은 이제 전설로만 남은 옛 영광의 잔영에 더욱 휘황한 덧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도이든 체제이든 인류사에 일정한 수명을 가지고 존재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너지는 그 아침으로 온전히 무용해지는 일은 없다. 또 우리에게
새로운 것에 열광할 권리가 있다면 사라진 것에 연연할 권리도 있다. 하물며 그
새로움의 내용이란 게 기껏 그로부터 백년도 안돼 간교한 부르주아들의 허구로
판명되고 사람들은 다시 피흘리며 새로운 혁명을 준비해야 했음에랴.
이 작품 [르네]는 그런 샤토브리앙의 세계해석에는 조금 벗어나 있으나
사랑을 주제로 한 프랑스 낭만주의 단편의 한 정화로 꼽을 만하다. 잘날
이론가들은 이 작품에서 근친상간의 모티브를 끌어내 원형분석을 시도할지도
모르고 남매콤플렉스를 들며 심리학적 분석을 하려들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은
내 이해 밖이다.
젊은 날 이 작품이 내게 감동을 주었던 것은 그 사랑의 철저한 관념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들의 삶에 베푸는 엄청난 효용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들 두
불행한 연인들에게는 육신을 가진 인간의 삶이 없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조차 어려울 만큼 육체와 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로서는 가벼운 살갗의 스침조차 없는 사랑도 사랑일 수
있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그 사랑으로 우리 존재가 직면하고 있는 거대한
고독의 심연을 헤쳐 가는 유일한 수단으로 삼고, 그 사랑과 삶의 나머지
부분들을 기꺼이 맞바꾼다. 그리고 궁극으로는 그 사랑을 통해 초월의 길목으로
접어든다. 아멜리가 죽은 뒤 르네의 삶은 냉정하게 보면 방기이고 일탈이지만
젊은 내게는 그것조차도 초월의 한 양상으로 이해되었다.
그밖에 나를 감동시켰던 것은 샤토브리앙의 문장도 있다. 비록 불완전한
번역본을 통한 것이기는 하나 젊은 시절 한동안 나는 애절함과 격정을, 회한과
고독을, 지성과 교양을 두루 드러내면서도 격조를 잃지 않은 문장이란 바로
샤토브리앙의 문장, 특히 [르네]에서 보여주고 있는 문장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토마스 울프의 [그대 가시 고행에 못가리]와 더불어 내 초기 문장수업에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것이 이 [르네]가 아닐까 한다.
물론 이제 그때로부터 이십 년이 훨씬 넘어 다시 읽어보려는 느낌이 옛날과
같을 수는 없다. 액자형식의 이야기들은 낡고 느슨해 보이며, 세계는 일방적인
관념으로 이해되어 있고 감정은 너무 과장돼 있는 듯 느껴진다. 문장의
화려함에서도 어떤 전형성이 보여 젊은 날의 감동은 많이 줄었다.
하지만 나의 지난 이십년간이란 게 또한 어떠했던가. 단편의 재능이 없는
탓에 구성의 무게에 과도하게 짓눌려온 세월이었으며, 구조니 총체니 하는
용어들로 고전적인 문장론을 깔아 뭉개버린 강단이론가들에게 주눅들어 지낸
세월이었다. 내용도 애매하고 설가 유행적으로 확정된 내용이 있다 해도 결코
전폭적인 동의에는 이르지 못했던 리얼리즘의 주문에 가위눌려 지낸 이십
년이었다. 그런 세월이 과연 내 안목의 발전에만 기여할 수 있었을까. 순수한
감동을 잃어버린 대신 쓸데없는 눈치만 늘게 하지는 않았을까.
거기다가 샤토브리앙의 산 시대와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아제 와서 눈에 띄는
흠들에는 얼마든지 관대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르네]는 사랑을 다룬 단편의
한 전범 가운데 하나로 아직 유효할 수 있다고 보아 주저 없이 골랐다.
호수
노인
어느 늦가을 오후, 옷을 잘 차려입은 한 노인이 천천히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유행이 지난 단추 달린 구두가 먼지에 뒤덮여 있는 것으로 보아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것 같았다. 그는 금손잡이가 달린 기다란 지팡이를
옆구리에 끼고 침침한 눈으로 조용히 사방을 살피면서 눈앞에 전개된 저녁놀에
물든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흘러가 버린 청춘을 모두 담아 둔 듯한 눈은
빅설처럼 새하얀 그의 머리칼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어쨌든 그는 다른
지방 사람 같았다. 얼떨결에 사람들은 그 엄숙한 눈동자로 빨려 들어가자 않을
수 없었지만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마침내 그는 어떤 높다란 뾰족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다시 시가 쪽을
돌아보고는 현관으로 들어갔다. 벨이 울리자 현관에 접해 있는 안방 창문의
녹색커튼이 걷히고 한 노파의 얼굴이 나타났다. 노인은 등나무 지팡이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직 불을 켜지 않았니? 하며 노인은 약간 남쪽 지방의
억양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가정부는 다시 커튼을 내렸다. 노인은 지체하지
않고 넓은 현관을 통해 홀을 지나 맞은편 출입문으로 해서 좁다란 복도로
나왔다. 홀에는 자기꽃병이 나란히 놓인 큼직한 박달나무 선반이 벽에 세워져
있었다. 복도는 좁은 계단을 통해 뒤채의 2층으로 통해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
계단을 올라서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구석진 데다 조용했다. 한쪽
벽에는 인물화와 풍경화가 걸려 있고 푸른 책상보가 덮인 책상 위에는 여러
권의 책들이 펼쳐진 채 흩어져 있으며 그 앞에는 빨간 비로드 쿠션의 묵직한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노인은 모자와 지팡이를 한쪽 구석에 놓고는 그
안락의자에 앉아 산책의 피로를 풀로 있는 듯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더니 마침내 한 줄기 달빛이 유리창을 통해 벽에
걸려 있는 그림 위로 떨어졌다. 그 밝은 달빛이 서서히 옮겨짐에 따라 노인의
눈도 그 빛줄기를 쫓아가고 있었다. 얼마 뒤에 그 빛은 검은 액자에 끼워져
있는 조그마한 초상화 위를 비쳤다. 엘리자벳! 하고 노인은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그 말을 하는 짧은 순간에 세월이 변해 버렸다. 이제 그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와 있게 된 것이다.
아이들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조그마하고 귀여운 한 소녀가 그에게로 달려 왔다. 그
소녀의 이름은 엘리자벳, 나이는 다섯 살쯤 되어 보였다. 그는 소녀보다 꼭
갑절쯤 되는 나이였다. 소녀는 목에다 빨간 스카프를 둘렀는데 그것이 소녀의
자색 눈동자와 아주 잘 어울려 기가 막힐 정도로 귀엽게 보였다.
라인하르트! 하고 소녀가 소리쳤다. 우리 나가 놀자. 하루종일 수업이
없거든. 내일도 그렇고.
라인하르트는 어느새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석판을 재빨리 현관 아래에다
내려놓고 엘리자벳과 함께 대문을 빠져나가 들판으로 내달렸다. 뜻하지 않은
방학으로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다. 라인하르트는 엘리자벳의 도움을 받다
잔디풀로 집을 지어 놓았었다. 그들은 그 속에서 한여름 밤을 함께 지낼
작정이었는데 아직 벤치가 미완성 상태였다. 그들은 즉시 일에 착수했다. 못이며
쇠망치며 거기에 필요한 판자는 벌써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엘리자벳은 둑을 따라 거닐면서 들에 핀 해바라기 열매를 앞치마에다 담고
있었다. 그것으로 자물쇠와 목걸이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못 몇
개를 쳐서 겨우 벤치를 만들어 놓고 다시 창 밖 밝은 데로 나왔을 때 소녀는
이미 멀리 떨어진 풀밭 저쪽을 걷고 있었다.
엘리자벳, 엘리자벳? 그 소리를 듣고 소녀가 뒤돌아 볼 때 소녀의
곱슬머리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이리와. 하고 그는 말했다. 벌서 우리들의 집이 다 됐어. 더웠지? 자,
안으로 들어와. 둘이서 새 벤치에 앉아 보자. 내가 얘기해 줄게.
그리고 두 아이는 새 벤치에 걸터앉았다. 엘리자벳은 앞치마에서 조그마한
고리 모양의 열매를 쏟아 긴 실에다 꿰었고 라인하르트는 예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세 사람의 실 뽑는 여자가 있었는데......
아아!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그런 얘기라면 난 훤히 알고 있는 걸. 언제나 똑같은 얘기라면 싫어.
라인하르트는 하는 수 없이 세 사람의 실 뽑은 여자 얘기를 중단하고 그 대신
사자의 굴속으로 잡혀간 가련한 남자의 예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방이었어. 하고 그는 말했다. 알겠지? 아주 캄캄한 밤이었다구. 그래서
사지들은 졸고 있었단 말이야. 그러나 졸면서도 하품을 해서 새빨간 혓바닥이
날름거렸다, 그럴 때마다 그 남자는 벌벌 떨면서 빨리 날이 새었으면 하고
생각했지. 그때 느닷없이 그 남자의 주위에 밝은 빛이 비쳐 와서 눈을 떠보니
천사가 서 있는 게 아니니. 천사는 그 남자에게 손짓을 하고는 바로 바위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엘리자벳은 열심히 듣고 있었다. 천사가? 하며 소녀는 물었다. 그 천사는
날개가 있었어?
그저 그런 얘기야. 하고 라인하르트는 대답했다. 천사란 없는 거야.
아이 참! 라인하르트! 하고 소녀가 말하면서 우두커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불안한 눈으로 노려보자 소녀는 의아해서 이렇게
물었다. 그럼 왜 모두들 항상 천사가 있다고 할까? 엄마도 그러고 아주머니도.
또 학교에서도 그러잖아?
나도 몰라. 하고 그는 대답했다.
그럼 말이야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사자도 없는지 몰라.
사자가? 사자가 없다고? 있어, 인도에 있지. 인도에선 중들이 사자를 수레에
매어 끌게 하면서 사막을 넘어간다구. 나도 크면 혼자서 가보려고 해. 거기는
우리 나라보다 몇 배나 더 아름답지. 너도 같이 가야 해. 갈 거지?
응 하고 엘리자벳은 말했다. 그렇다면 엄마도 같이 가야지 뭐. 그리고 너의
엄마도.
안돼. 하고 라인하르트는 말했다. 그땐 벌써 엄마들은 할머니가 되어서
안돼.
그럼 나 혼자선 갈 수 없어,
꼭 가게 해줄게. 그땐 너는 내 색시가 되어 있을 테니 아무도 네게 뭐라고
억지로 시킬 수는 없어.
그러면 엄마는 울 걸.
우린 곧 다시 돌아올 텐데 뭐 하고 라인하르트는 화를 내며 말했다. 어서
바로 말해봐. 나와 같이 갈 거지? 싫다면 나 혼자서라도 가고 말 테야.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어.
소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지
마. 하고 소녀는 말했다. 나도 같이 인도에 갈게.
라인하르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소녀의 두 손을 잡더니 풀밭으로
끌어냈다. 인도로 인도로! 하고 노래를 부르며 소녀와 함께 빙빙 돌았기
때문에 소녀의 목에 둘려진 스카프가 바람에 훨훨 날렸다. 그러던 그가 소녀의
손을 갑자기 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암만 해도 안 되겠어. 네게는
그럴 용기가 없는걸.
엘리자벳! 라인하르트! 그때 대문 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예요. 여기 있어요! 하고 아이들은 대답하면서 손을 잡고 집쪽으로
뛰어갔다.
숲속에서
그런 식으로 두 아이는 언제나 함께 지냈다. 소년에게는 가끔 소녀가 너무
얌전을 떤다는 생각이 들었고 소녀에게는 소년이 지나치게 난폭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두 아이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 노는
시간은 거의 함께 지냈다. 겨울에는 서로의 어머니들의 비좁은 방에서, 여름엔
숲 속이나 풀밭에서. 엘리자벳이 라인하르트 앞에서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었을
때 소년은 선생님이 노여움을 자기에게로 돌리려고 일부러 석판을 책상에
매어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님의 눈에 뜨이지 못한 채 그냥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그때부터 지리 수업엔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리고
대신에 한 편의 장시를 지었다. 시 속에서 그는 자신을 씩씩한 독수리에,
선생님을 회색 까마귀에 비유했다. 엘리자벳은 흰 비둘기였다. 그 독수리는
날개가 튼튼하게 자라기만 하면 회색 까마귀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 시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으며 자기가 매우 훌륭해진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 그는 백지를 꿰매어 양피지로 겉을 씌운 다음
노트를 펴서 첫 페이지부터 그 처녀시를 공들여 베껴 넣었다.......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른 학교로 옮겨갔으며 거기서 같은 또래의 소년들과 새로운
우정을 맺게 되었다. 그렇지만 엘리자벳과의 사이는 그런 것으로 인해
멀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소녀에게 몇 번이고 거듭 들려줬던 동화 중에서 특히
소녀의 마음에 들었던 것들을 베껴 두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기 자신의
생각도 거기에다 삽입하고 싶은 욕망이 들었지만 웬일인지 그것이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기가 들은 대로 정확하게 기록했다. 그런 다음에 그 노트를
엘리자벳에게 넘겨주면 그녀는 그걸 서랍 속에 정성껏 간직했다. 밤이 되어
때때로 그녀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노트를 꺼내 어머니에게 낭독해 주는 것을
들을 때마다 그는 흐뭇한 마음이 들곤 했다.
7년이 흘렀다. 라인하르트는 상급 학교에 다니기 위해 그 도시를 떠나야 했다.
엘리자벳에게는 머지 않아 라인하르트가 곁에 없게 되리라는 사실이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보통 때처럼 동화를 써서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동봉할 터이니 소녀 쪽에서도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회답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엘리자벳은 무척이나 기뻤다. 떠날 날이
가까워졌다. 떠나기도 전에 양피지 노트 속에는 이미 여러 편의 시가 담겨졌다.
그 책 전부도, 차례로 백지의 반을 메워 놓은 대부분의 시도 결국은 엘리자벳이
동기가 되었지만 그 사실만은 알리지 않은 채 비밀로 남기기로 했다.
6월이 됐다. 라인하르트는 이제 떠날 날을 하루 앞두게 되었다. 그의 주변
사람들 모두는 라인하르트에게 보다 더 줄거운 하루를 만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근처에 있는 숲 속으로 소풍을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한 시간 가량 걸리는 숲 속까지는 마차로 가고 거기서부터는
음식물을 넣은 상자를 들고 내려서 걸어갔다. 우선 전나무 숲을 빠져나가야
했는데, 그 숲은 냉랭하고 어둠침침했으며 땅바닥엔 온통 침엽들이 깔려 있었다.
반시간 가량 걸은 다음에 전나무 숲의 어둠으로 빠져 나와 상쾌한 떡갈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거기는 무엇이나 밝고 푸르렀으며 이따금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람쥐 한 마리가 나타나서 사람들의 머리
위를 가지에서 가지로 건너뛰며 따라왔다. 일행은 떡갈나무 고목이 둥근 천장을
이루고 있는 넓은 공터에서 걸음을 멈췄다. 엘리자벳의 어머니가 상자 하나를
열었고 노인 한 분이 음식 준비를 맡아 나섰다.
모두 내 곁으로 모이시오, 젊은이들! 하고 그 노인이 소리를 쳤다. 내 말을
들으시오. 이제부터 아침 식사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른 빵을 한
개씩 드리겠소. 버터를 가져오지 않았으면 빵에 발라먹을 것은 여러분 자신이
구해야 합니다. 숲 속에는 딸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찾아내는
분들에게만 그럴 뿐입니다. 못 찾는 사람은 맨 빵을 그대로 먹어야 합니다.
인생이란 어디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말을 알아듣겠소?
네, 알겠습니다. 하고 젊은이들은 대답했다.
그렇다면 됐군. 하고 그 노인은 말했다. 내 말이 끝난 건 아니오, 우리
늙은이들은 지금까지 세상을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이 나무밑
집에 남아있을 겁니다. 그래서 감자를 깍고 불을 지펴 식사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 대신에 여러분은 따 모은 딸기의 반을 내놔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후식으로 쓰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동쪽이든 서쪽이든 마음내키는 대로
떠나십시오. 약속을 꼭 지켜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모두들 얼굴을 찡그렸다.
잠깐만! 하고 그 노인이 또 한 번 소리를 쳤다. 이런 얘기는 할 필요가
없겠지만 하나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리 늙은이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명심해 두시오. 이제 여러분은 오늘 하루 귀중한 교훈을
많이 얻을 것이며 거기다 딸기까지 얻게 되면 인생에 있어서도 성공하는 사람이
될 겁니다.
젊은이들도 노인의 말에 동갑이었다.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출발하기
시작했다.
이리와, 엘리자벳. 라인히프트가 말했다. 나는 딸기가 많은 데를 알아.
엘리자벳에겐 맨 빵을 먹이지 않겠어.
엘리자벳은 밀짚모자에다 푸른 리본을 동여매어 팔에 걸었다. 그럼 가. 하고
그녀가 말했다. 바구니도 됐으니.
두 사람은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점점 깊이 들어가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축축한 나무 그늘을 뚫고 나갔다.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했는데 그들의 머리 위
공중에서 보이진 않지만 오직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들은
다시 깊은 풀숲을 빠져나갔다. 숲 속은 너무 무성해서 라인하르트가 앞장서서
가지를 꺾기도 하고 넝쿨을 헤치기도 하며 나가야만 했다. 그러다가 뒤쪽에서
엘리자벳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라인하르트! 그녀가 부르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라인하르트.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훨씬 떨어진 뒤쪽에서 관목과 싸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겨우
보였다. 그녀의 귀여운 머리가 이빨 같은 나뭇잎 속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그리로 돌아가서 엉킨 관목 사이에서 그녀를 끌어내어 넓은 공지로 데리고
나왔다. 거기는 푸른 나비들이 외로운 꽃 사이로 날개를 팔랑거리며 날아다녔다.
라인하르트는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에서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줬다.
그런 다음에 밀짚모자를 씌워 주려고 했으나 그녀가 마다했다. 그래도 그가
다시 억지로 씌워 주려고 했으므로 그녀는 그의 말에 따랐다. 그런데 아까 말한
딸기는 어디 있어? 하고 그녀는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쉬며 물었다.
여기쯤에 있었는데! 하고 그가 말했다. 두꺼비란 놈이 우리보다 먼저
다녀갔나 봐. 족제비나 요정인지도 모르지.
그런가 봐.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줄기는 그대로 있는데....... 하지만
이런데서 귀신 얘기는 말아 쥐. 더 가봐. 조금도 피로하지 않으니 좀더 찾아봐.
그들의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는 또 숲이 보였다. 라인하르트는
엘리자벳을 두 팔로 껴안고 냇물을 건넜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어두컴컴한
그늘에서 다시 넒은 공터로 나왔다.
여기는 꼭 딸기가 있을 거야. 하고 소녀가 말했다. 냄새가 참 좋은데.
딸기나무와 가시가 이리저리 뒤엉켜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풀과 땅 위를
덮은 히드의 짙은 냄새가 진동했다. 여긴 쓸쓸해.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돌아갈 길에 대해서는 라인하르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잠깐만 기다려!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지?
그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나 사실은 바람은 전혀 불지
않았다.
조용히 해.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저쪽을 한 번 불러봐.
라인하르트는 입에다 손을 대고 외쳤다. 이쪽으로 와요. 이쪽으로 와요!
하며 그쪽에서도 대답이 들려 왔다.
대답을 하는군! 엘리자벳이 말하며 손뼉을 쳤다.
아니야, 저건 산울림이야.
엘리자벳은 라인하르트의 손을 잡았다. 무서워! 하고 소녀가 소곤거렸다.
괜찮아. 하고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무서울 것 없어. 여긴 멋진 곳인데.
저쪽 나무 그늘 밑에 있는 풀밭에 앉아 잠시 쉬었다가 가자. 다른 사람들을 꼭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엘리자벳은 떡갈나무 밑에 앉아서 조심스레 주위에 귀를 기울였고,
라인하르트는 거기서 2, 3보 떨어진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묵묵히 소녀
쪽을 보고 있었다. 태양은 바로 머리 위에 떠 있어 찌는 듯한 한 낮의 더위였다.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조그만 날벌레들이 날개를 펴 공중을 빙빙 날아다녔다.
그들의 주위에는 붕붕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 있고 가끔씩 숲 속에서는
딱따구리의 나무 찍는 소리와 그 밖의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저 소리를 들어봐.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종소리가 울려오는데...
어디서? 하고 라인하르트가 물었다.
우리 뒤쪽에서 들려 오나 봐. 정오의 종소리야.:
그렇다면 우리 뒤쪽에 시가가 있는 셈이군. 그러니 이쪽으로 똑바로 뚫고
나가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거야.
그들은 귀로에 올랐다. 엘리자벳이 피곤해 했기 때문에 딸기 찾는 일은
단념해 버렸다. 마침내 나무 숲 뒤에서 일행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땅바닥에 하얀 천조각이 희끗희끗 비치고 있는 것도 보였는데 그것이 식탁
대용이었고 그 위에는 딸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까 그 노인이 단추 구멍에
냅킨을 꽂고 열심히 불고기를 자르며 젊은이들에게 설교를 들려주고 있었다.
저기 낙오자가 돌아왔다. 엘리자벳과 라인하르트가 나무 사이를 빠져 나오는
것을 보더니 젊은이들이 소리를 질러 댔다.
이쪽으로 와요. 하고 노인이 불렀다. 수건을 비우고 모자를 뒤집어 봐요!
얼른 찾아낸 것을 여기에 내놓도록.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를 뿐입니다. 하고 라인하르트가 대답했다.
그게 전부라면 하며 노인은 산처럼 담아 올린 큰 접시를 두 사람 쪽으로
내밀어 보이기만 했다. 약속은 기억하고 있겠지? 그걸 잘 지켜야지. 여기선
게으른 사람에겐 먹일 수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 노인은 부탁을
들어줬다. 식탁 정리가 끝나자 그와 때를 맞추어 울창한 노간주나무 속에서
새소리가 들여 왔다.
이렇게 그날은 지나갔다...그러나 라인하르트는 역시 무언가 한 가지는 발견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비록 딸기는 아니지만 역시 그것도 숲 속에서 자란
것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 낡은 양피지 노트에다 그걸 적어 뒀다.
여기 산허리엔
나뭇잎 흔드는 바람도 없고
나뭇가지들은 나직이 드리워 있는데
그 아래서 소녀는 쉬고 있네.
소녀는 티미안꽃 속에 앉아
향기에 묻혀 앉아 있네.
푸른 날벌레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숲은 말이 없는데
소녀의 맑은 눈은 그 속을 응시하고
갈색 머리 위에
넘쳐흐르는 태양빛.
멀리서 껄껄거리는 두견새
마음에 오고 가네.
소녀는 지쳤네
숲 속 여왕의 금빛 눈초리를.
거리의 아이
크리스마스 이브. 아직 해는 하늘 높이 떠 있는데 라인하르트는 다른
학생들과 어울려 시청 지하실에 있는 주점에서 낡은 나무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그 지하실은 벌써 어두컴컴해졌기 때문에 벽에 걸린 램프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손님은 드문드문 앉아 있고 급사는 피곤한 듯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과 칠현금을 타는 집시 풍의
처녀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악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학생들의 테이블에서는 샴페인 터지는 소리가 났다.
마셔라. 내 보헤미안의 연인이여! 하고 귀공자 티를 내는 어떤 청년이
샴페인이 가득 든 컵을 처녀 쪽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싫어요 하고 처녀는 자세도 흐트리지 않고 말했다.
그럼 노래라도 불러봐. 하고 그 귀공자는 떠들면서 은화 한 닢을 그 처녀의
무릎 위에 던져 주었다. 그 아가씨가 검은 머리칼을 조용히 매만져 올리고
있는데 바이올린 켜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다 뭐라고 소곤거렸다. 그러나
아가씨는 머리를 제치며 턱으로 칠현금을 눌렀다. 저런 사람을 위해서는 타기
싫어. 하고 그녀가 말했다.
라인하르트가 컵을 손에 들고 그녀 앞으로 내달려 갔다.
왜 그러시죠?
네 눈이 보고 싶어서.
내 눈이 댁과 무슨 관계가 있죠?
라인하르트는 눈을 반짝이며 그 여자를 내려다봤다.
난 잘 알아. 그 눈은 나쁜 눈이야.
그녀는 뺨을 손으로 가린 채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라인하르트는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너의 아름답고 죄많은 눈을 위하여! 하며 그 술을
마셨다.
여자는 웃으면서 머리를 뒤로 제쳤다 그러던 여자가 느닷없이 주세요!
하면서 그 검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남은 술을 마셔 버렸다.
그런 다음 삼화음을 울리며 열정적인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오늘, 오직 오늘 뿐
아름다운 내 모습도
내일이면, 아아 내일이면
온갖 것이 전부 변하고 말 걸!
이 순간만
그대는 나의 것.
즉음 뿐, 아아 죽음 뿐
오직 나 혼자 떨어져서.
바이올린 주자가 빠른 템포로 후주곡을 연주하고 있는 동안 새로운 손님이 그
무리에 끼어들었다.
너를 데리러 왔어. 네가 떠난 뒤에는 네게 크리스마스 선물이 왔어
하고 그가 말했다.
헛소리 말아! 네 방은 전나무와 크리스마스 케이크 냄새투성이던데.
라인하르트는 컵은 내려놓고 모자를 집었다.
왜 그래요? 하고 그 처져가 물었다.
곧 돌아오겠어.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여기 그대로 있어요.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다정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라인하르트는 주저했다. 그렇게는 안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킬킬거리며 그를 꼬집었다. 가세요. 하고 그 여자는 말했다 당신은
소용없어요. 전부 쓸데없는 일이에요. 하며 여자는 등을 돌려 버렸다. 그 동안에
라인하르트는 천천히 지하실 계단을 올라왔다.
거리는 어둠에 싸여 있었다. 그의 달아오른 얼굴에 겨울 바람이 와 닿았다.
여기저기 창으로부터 전나무에 켜 놓은 불빛이 흘러 나왔고 때때로 집안에서
피리나 양철 나팔의 요란스런 소리와 거기에 섞여서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려
왔다. 거지애들이 떼를 지어 이 집 저 집으로 몰려다니며 계단의 난간에
올라서서 창 너머로 자기들에겐 소용없는 호화로운 방 안 풍경을 엿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때때로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째질 듯한
목소리가 이들 어린 손님들을 밝은 집안으로부터 어두운 길바닥으로 내쫓았다.
또 다른 곳에서는 현관에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크리스마스 노래가
불리고 있었는데 소녀들의 맑은 목소리도 거기에 뒤섞여 들려왔다. 그러나
라인하르트의 귀에는 그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거리에서 거리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가 하숙집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며 층계를 올라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냄새며 고향의 크리스마스 날 어머니 방에서
맡던 냄새와 똑같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불을 켰다. 책상 위에 큼직한 소포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끌러 보자 낯익은 갈색의 축하 케이크가 나타났다. 그리고
어떤 케이크에는 사탕으로 만든 그의 이름의 머리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엘리자벳의 솜씨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뜨개질로 짠 고급 하의와 손수건과
커프스를 싼 조그만 보따리,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엘리자벳의 편지도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우선 엘리자벳의 편지부터 뜯었다.
깨끗한 사탕 글자는 케이크를 만들 때 누가 도와 주었는가를 당신께 말해 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당신을 위해 커프스의 자수도 놓았습니다. 오해 이곳의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정말로 쓸쓸할 것 같군요.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9시 반만
되면 물레를 한 구석으로 치워 버린답니다. 당신이 여기 오시지 않는 겨울은
정말 쓸쓸해요. 게다가 당신에게서 받은 홍방울새가 지난 일요일에 죽어
버렸답니다. 나는 무척이나 을었어요.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 새를 잘 보살펴
주기는 했어요. 그 조그만 새는 오후가 되어 새장에 햇빛이 비치기만 하면
언제나 울었답니다. 당신도 아시죠? 어머니는 그 새가 울면 못 울게 하느라고
가끔 보자기를 그 위에 하느라고 가끔 보자기를 그 위에 씌웠습니다. 이젠
방안이 한층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가끔 당신의 옛친구 에리히씨가 찾아와
줍니다. 언젠가 단신은 그 사람은 자기가 입고 있는 자색 외투와 비슷하다고
말씀하셨죠. 그렇답니다. 그분이 문 쪽에 나타나기만 하면 나는 항상 당신의 그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이상해요. 하지만 그런 얘기는 어머니께 하시지
마세요. 어머니는 금방 화를 내실 거예요...내가 당신의 어머니께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뭣을 드릴지 알아맞혀 보세요. 모르시겠죠? 저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에리히씨가 지금 목탄으로 저를 그리고 있거든요. 벌써 세 차례나 모델이
되어야만 했답니다. 언제나 꼭 한 시간씩이에요. 하지만 아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내 얼굴을 익히게 하는 데 싫어서 죽을 뻔했답니다. 그래서 싫다고
했는데도 어머니가 하도 성화를 부리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베르너 부인께서도
기뻐하실 거라구요.
라인하르트. 당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군요. 옛날 얘기를 적어 보내기지
않으니 말예요. 나는 이따금 그것 때문에 당신 어머니에게 불평을 쏟아 놓지요.
그러면 어머니 말씀은 당신은 지금 너무 바빠서 그런 어린애 같은 짓을 할 틈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이 곧이 들리지 않아요. 필시 무슨 다른
곡절이 있을 거예요.
라인하르트는 어머니의 편지도 읽었다. 두 통의 편지를 다 읽은 뒤에 찬찬히
접어 밀쳐 놓았다. 주체할 수 없는 향수가 밀려 왔다. 그는 잠시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길 잃은 나그네
갈 길 몰라 헤맬 때
길가에 선 어린 소녀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네!
그런 다음 책상으로 다가가서 돈을 꺼내 다시 층계를 내려갔다. 거리는 벌써
조용해졌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등불도 꺼져 버려 배회하던 아이들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쓸쓸한 거리에는 바람이 불었고 노소를 막론한 모든 사람들이
집에 모여 단란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제2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지하실 주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래쪽에서 바이올린과
칠현금을 타는 처녀의 노랫소리가 여전히 들렸다. 그때 주점 문의 벨이 울리고
검은 그림자가 희미한 계단을 급히 올라왔다. 라인하르트는 집 그늘에 몸은
숨기며 빠른 걸음으로 거길 지나쳤다. 얼마 뒤에는 불이 켜진 환한 보석상에
들어가서 빨간 신호로 만든 조그만 십자가를 산 다음 다시 온 길로 돌아섰다.
하숙집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서 초라한 옷차림을 한 소녀가 어떤 집
문간에 서서 문을 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보였다. 도와줄까? 하고 그가
말했다. 소녀는 아무 대답도 않더니 육중한 손잡이를 놓았다. 라인하르트가 이미
문을 열었다. 안될 걸. 하고 그가 말했다. 쫓겨날지도 모른다. 나를 따라와,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줄 테니. 그는 문을 다시 닫아 보리고 소녀의 조그만 손을
잡았다. 소녀는 아무 말없이 그를 따라 하숙집까지 왔다.
그는 나갈 때 램프를 그냥 켜 두었었다. 케이크를 줄게. 하면서 케이크를
되는대로 반쯤 집어서 소녀의 앞치마에 담아 주었다. 사탕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만은 주지 않았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거라. 어머니께도 나누어 드려야 한다.
소녀는 몹시 주저하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그런 친절은 처음이었기에
소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모양이다. 라인하르트는 문을 열고 소녀에게
불을 비춰 줬다. 소녀는 케이크를 갖고 참새처럼 계단을 뛰어내려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라인하르트는 난로불을 피우면서 먼지 낀 잉크병을 책상에 놓았다. 그런 다음
어머니와 엘리자벳에게 편지를 썼다.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손도 안 댄 채 곁에
놓아두었으나 엘리자벳이 보내 준 커프스는 끼워 보았다. 그의 흰 셔츠와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겨울의 아침해가 얼어붙은
유리창에 비쳐와서 맞은편에 걸린 거울에 창백하고 진지한 자신의 얼굴이
비쳤을 때도 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고향에서
부활절이 되자 라인하르트는 고향으로 떠났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그날
아침으로 엘리자벳을 찾아갔다. 아름답고 훤칠한 한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을 때 그가 말했다. 많이 컸어. 소녀는 얼굴을 붉히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인사를 하면서 그가 잡은 손을 소녀는 살그머니 빼려고 했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 소녀를 쳐다봤다. 이젠에는 소녀가 결코 그러지 않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엇인지 서먹서먹한 것이 끼인 느낌이었다. 그가 꽤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며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소녀를 찾았으마 그러한 상태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두 사람만 있게 되면 이따금 말이 막혔는데 그것이 그로서는
몹시 괴로워서 그걸 미리 막아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방학 동안 무언가
하나의 일정한 즐거움을 갖기 위해 엘리자벳에게 식물학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식물학으로 말하면 그가 대학에 처음 들어가서 몇 달 동안 열심히
연구한 과목이었다. 엘리자벳은 무슨 일이든 그의 말을 따르는데다 공부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기꺼이 그 계획에 찬성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몇 번씩 들이나
숲으로 식물을 채집하러 나갔으며 한낮이 되어 풀과 꽃으로 가득해진 녹색의
채집 상자를 집으로 갖고 돌아오면 라인히르트는 몇 시간 뒤에 다시 와서 그
공동의 채집물을 엘리자벳과 나누곤 했다.
어느 날 오후 그가 그럴 목적으로 막 방에 들어섰을 때, 엘리자벳은 창가에
서서 전에 본 일이 없는 금박 새장에다 갓 꺽어 온 별꽃풀을 넣고 있는
중이었다. 새장에는 카나리아 한 마리가 소리를 지르며 엘리자벳의 손가락을
쪼고 있었다. 전에는 바로 거기에 라인하르트가 보내준 새가 있었던 것이다.
나의 불쌍한 홍방울새가 죽어 카나리아로 환생한 건가? 그는 쾌활한 기분으로
물었다.
홍방울새하면 저러지 않지. 하고 안락의자에 앉아 실을 자고 있던
엘리자벳의 어머니가 말했다.
오늘 낮에 자네 친구 에리히씨가 그분의 농장에서 엘리자벳에게 보내 왔어.
어느 농장 말입니까?
아직 그것도 모르나?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죠?
한 달 전에 에리히씨는 임멘 호반에 있는 부친의 제2농장을 인수했지.
그런데 왜 제게 여태 그런 말씀을 한 마디도 하시지 않으셨죠?
아! 하고 어머니가 대꾸했다.
자네도 그 친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들려주지 않더군. 그분은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은 젊은이야.
어머니는 커피를 끓이러 밖으로 나갔다. 엘리자벳은 라인하르트에게 등을
돌린 채 조그만 새집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곧 끝낼 거예요. 라인하르트로부터 보통때와는 달리 대답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갑자기 이때까지 그녀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고뇌의 흔적이 가득했다. 왜 그래요? 라인하르트 하고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가면서 물었다.
내가? 하고 그는 아무런 생각 없이 물으며 꿈꾸는 듯한 눈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척 슬퍼 보이는군요.
엘리자벳, 나는 저 노랑새가 싫단 말이야.
그녀는 기가 막힌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신은 참 이상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녀는 말없이 손을 그대로 맡기고 있었다. 얼마
뒤에 어머니가 다시 들어왔다.
커피를 마시고 나자 어머니는 물레를 향해 앉았고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벳은
옆방으로 들어가서 채집해온 식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꽃술의 수를 세기도
하고 잎이나 꽃을 곱게 펴서 종류마다 두 개씩 표본으로 말리기 위해 커다란
책갈피 속에 끼우기도 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조용한 오후였다. 근처에선
어머니의 물레 소리가 들려 올 뿐이고, 이따금씩 식물명을 중얼거리며 분류하는
소리와 엘리자벳의 신통찮은 라틴어 발음을 교정해 주는 라인하르트의
중얼거림이 들렸을 뿐이다.
은방울꽃이 없어졌어. 하고 채집물의 분류와 정리가 끝나자 그녀가 말했다.
라인하르트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양피지 노트를 꺼냈다. 이 은방울꽃을
줄게. 하며 그는 반쯤 마른 은방울꽃을 꺼내며 말했다.
엘리자벳은 뭔가 가득 쓰여진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또 동화를 지었어요?
동화가 아냐 하며 그는 그 책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것은 시뿐이었는데 대부분은 겨우 한 페이지를 채울 정도의 길이였다.
엘리자벳은 한장 한장 들췄는데 제목만 읽는 것 같았다.
[그녀가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을 때], [그들이 숲 속에서 길을 헤맬 때],
[부활절의 동화에 부쳐서], [그녀가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 왔을 때] 등으로
거의가 그런 거였다. 라인하르트는 살피듯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페이지를 넘겨
감에 따라 드디어 그녀의 맑은 얼굴이 붉게 물들어 그것이 차차 얼굴 전체로
퍼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싶었으나 엘리자벳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아무 말없이 책을 그의 앞에 놓았다.
그런 식으로 그 책을 돌려주지 마! 하고 그가 말했다.
그녀는 양철통 속에서 자색 풀잎 하나를 꺼냈다. 당신이 좋아하는 풀을 끼워
드립니다. 하며 그의 손에 책을 놓았다.
드디어 방학도 다 끝나 떠나야 할 아침이 되었다 엘리자벳은 우편마차가 있는
곳까지 전송하고 와도 좋다는 어머니의 허락을 받았다. 우편마차의 정류장은
집에서 몇 마장 떨어진 곳에 있었다. 대문을 나서자 라인하르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렇게 하고 그는 그 날씬한 아가씨와 나란히 묵묵하게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지금부터 긴 작별을 고하기 전에 무언가 귀중한 것을
그녀에게 말해 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자신의 장래의 모든
가치라든지 행복이 거기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표현할
말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그는 불안해졌고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늦겠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성 마리아 성당의 종이 벌써 쳤어요.
그래도 그의 걸음을 빨라지지 않았다. 드디어 더듬거리며 말했다.
엘리자벳, 앞으로 2년간은 만나지 못할 것 같은데.......그때 다시 돌아올 때도
지금처럼 나를 사랑해 주겠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정스럽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을 변호해 드렸어요. 하고 그녀가 잠시 뜸을 뒀다가 말했다.
나를 변호했다구? 누가 나보고 뭐라고 했길래?
저의 어머니가 그랬어요. 어젯밤, 당신이 돌아가신 다음에 어머니와 함께
오랫동안 당신 얘기를 했어요. 당신은 옛날만큼 그렇게 좋은 분이 아니라고
엄마가 말씀하셨어요.
라인하르트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다음 그녀의 손을 잡고 진정 어린
시선으로 그녀의 귀여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절대로 전보다 나빠지지 않았어, 그것만은 믿어 주겠지, 엘리자벳?
네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고 그녀와 같이 바쁜 걸음으로
마지막 거리를 지나갔다. 작별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에는 점점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는 너무나 빨리 걸어서 그녀가 따라오기 힘들 정도였다.
왜 그래요, 라인하르트?
내게는 비밀이 있어, 아름다운 비밀이! 하며 그는 기쁨에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년이 지나고 다시 돌아오면 그때 가르쳐 줄게.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우편마차가 있는 데까지 왔다. 마악 출발하려는 때였다.
다시 한 번 라인하르트가 그녀의 손을 쥐었다. 안녕! 잘 있어, 엘리자벳! 지금
일을 잊지 말아요. 그녀는 말이 없었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말했을 뿐이다.
마차가 덜그렁거리며 시가지의 모퉁이를 돌아갈 때 그는 또 다시 그녀의 귀여운
모습을 돌아다봤다. 천천히 돌아서 가는 그녀를.
편지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라인하르트는 연구를 함께 하는 친구를 기다리며
램프불 앞에서 책과 노트 속에 묻혀 있었다. 그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그러나 막상 들어온 사람은 하숙집 아줌마였다. 편지가
왔습니다., 베르너씨! 하고 그 여자는 다시 내려가 버렸다.
라인하르트는 고향에 다녀온 뒤로 엘리자벳에게는 편지를 한 번도 쓴 적이
없었고 그녀로부터도 한 통의 편지도 받지 못했다. 이번 것도 그녀로부터 온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필적이었다. 라인하르트는 겉봉을 뜯어읽어 내려갔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네 나이 때는 해마다 모습이 다른 법이란다.
젊은이들이 절망할 수는 없지 않느냐. 여기서도 여러 가지로 변한 일이
많았단다. 만약 평소의 내 생각이 틀림없다면 이 일은 아마 너를 괴롭게
만들게다 에리히가 마침내 엘리자벳에게서 승낙을 받았단다. 2월중으로 두
번이나 간청해도 안되더니 그녀도 단단히 결심히 섰던 모양이다. 드디어는
그렇게 했으니 말이야. 뭐니뭐니 해도 아직 어린 나이가 아니냐. 결혼식을 머지
않아 올릴 테지. 그렇게 되면 그녀의 어머니도 함께 여기를 떠나게 될 것이다.
임멘 호
다시 몇 해가 지나갔다........따뜻한 어느 봄날 오후, 나무 그늘이 지 내리받이
좁은 숲길을 햇빛에 그을리고 기운 차 보이는 한 청년이 걷고 있었다. 진지해
보이는 회색 눈은 잔뜩 긴장한 채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 단조로운
길이 어서 바뀌기를 바라고 있는 눈치였으나 그러한 변화는 좀처럼 시작되지
않았다. 드디어 짐수레 하나가 천천히 그 길로 올라왔다. 어이! 여보세요 하고
그 청년은 짐수레를 따라오는 농부에게 소리를 질렀다. 임멘 호수로 가자면 이
길로 가면 되는지요?
끝까지 똑바로 가십시오. 하면서 농부는 둥그런 모자에 손을 붙이고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곳까지는 아직 멀었나요?
바로 코밑이죠. 담배 한 대 피울 짬도 못 돼 호수에 닿을 겁니다. 저택은
바로 그 옆이죠.
농부는 지나갔다. 청년은 나무 그늘을 따라서 한층 더 걸음을 재촉했다.
15분쯤 지나자 왼쪽으론 갑자기 나무 그늘이 끝나고 길은 산 위로 경사가 졌다.
그 경사면 아래부터는 백년이나 된 떡갈나무 가지가 이마를 겨우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가지 너머로는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이 햇빛을 받으며 전개되어
있었다. 멀리 아래쪽에 호수가 한가로이 누워 있는데 암청색 물이 햇빛을 듬뿍
받으며 녹색 숲에 둘러싸여 있고 오직 한쪽으로만 조망이 전개되었으나 그것도
마침내는 푸른 산으로 막혀 있었다. 맞은 편의 푸른 숲 속에 눈 같은 것이 깔려
있었는데 그것은 과수원이었다. 그 가운데 호수 언덕 위에 붉은 지붕의 흰
벽돌집이 우뚝 서 있었다. 황새 한 마리가 그 집의 연통에서 날아올라 윤무를
하듯 수면 위로 유유히 빙빙 돌았다.
임멘 호로군! 청년이 외쳤다. 이제야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거기에 버티고 서서 꼼짝도 않고 발 밑의 나뭇가지들 너머로 저택의 그림자가
아련히 수면에 넘실거리고 있는 맞은편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또 걷기 시작했다.
길은 급한 경사가 져서 산을 내려갔기 때문에 나무들이 다시 그늘이 졌으며
그와 동시에 호수가 내려다 뵈는 조망도 가려지고 말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간간이 호수가 번쩍번쩍 빛나 보일 뿐이었다. 길은 다시 평평해지다가
오르막길이 되었으며 길 양쪽으로는 수풀이 없는 대신 잎이 무성한 포도밭이
길을 따라 길게 뻗쳐 있었고, 그 양쪽으론 꽃이 한창 만발해 있는 과수들이 서
있어서 꿀벌이 윙윙거리며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그때 자색 외투를 입은
당당한 사나이가 청년 쪽으로 걸어왔다. 그 사나이는 근처까지 와서 모자를
흔들며 명랑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어서 오게나, 라인하르트. 잘 왔네, 잘 왔어, 임멘 호반의 농장까지!
잘 있었나, 에리히? 이렇게 환영을 해주어 고맙네 하고 나그네도 그를 향해
소리쳤다.
두 사람은 서로 다가가서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데 정말 자네가 틀림없지?
하고 에리히는 옛날 동창생의 근엄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물론 그렇지. 에리히! 자네도 틀림없지? 전에 비하면 훨씬 쾌활해진 것
같은데.
그 말을 듣자 즐거운 듯한 미소가 에리히의 단순한 얼굴을 더욱 밝게 해줬다.
라인하르트 하고 그는 다시 한번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그 이후로 운이
좋았거든. 자네도 잘 알겠지만. 그러고는 손을 비비면서 즐거운 듯 지껄여 댔다.
놀랄 거야. 자네가 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을 테니.
놀라다니 ? 라인하르트가 물었다. 도대체 누가 놀란단 말인가?
엘리자벳 말일세.
엘리자벳이? 그렇다면 자네는 내가 온다는 얘기를 그녀에게 하지 않았나?
한 마디도 안했지, 라인하르트. 그 여자는 자네에 대한 것 생각지도 않아,
어머니도 그렇고. 내가 너를 편지로 부른 것은 전연 비밀로 해뒀어. 그만큼
기쁨이 커지도록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옛날부터 이런 식으로 남몰래
계획을 세우기 좋아했거든.
라인하르트는 생각에 잠겼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길 오른쪽으로는 그 넓은 포도밭이 없어지고 대신 채소밭이 나타났다.
그 밭은 호수의 언덕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었다. 때때로 황새가 내려앉아
채소밭 사이를 힘찬 걸음으로 돌아다녔다. 어이! 손바닥을 치면서 에리히가
고함을 질렀다. 저 다리 긴 이집트 녀석이 또 완두콩을 쪼아 먹는군. 황새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새로 지은 건물의 지붕 위로 날아갔다. 그 건물은
채소밭 끝에 있는데 위로 매달아 몰린 복숭아와 살구나무 가지들로 뒤뎦혀
있었다. 저것이 주정 공장이야 하고 에리히가 말했다. 농장터는 작고하신
선친께서 새로 마련하셨고 살림집은 옛날에 조부께서 지으셨어. 그런 식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거지.
그런 얘기를 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그 공터의 양쪽은
농장터로, 뒤쪽은 저택으로 막혀 있었다. 저택의 양쪽으로 마당 담이 이어져
있고 그 뒤에는 우거진 수송 생나무 울타리가 보였다. 여기저기에는 접골목이
만발한 꽃가지를 들판 쪽으로 드리우고 있었다. 햇빛에 그을린 사나이들이 그
공지를 가로지르면서 두 사람에게 인사를 보냈다. 에리히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할 일을 지시하기도, 일에 관한 것을 묻기도 했다.......잠시 후에 두
사람은 저택에 도착했다. 천장이 높고 냉랭한 현관이 그들을 맞이했는데 그
현관 끝에서 왼쪽으로 구부러지며 얼마 쯤 어두컴컴한 복도가 이어졌다. 거기서
에리히는 미닫이를 열고, 두 사람은 뜰에 접한 커다란 홀로 들어갔다. 그 홀은
무성한 나무가 맞은 편 창문을 가리고 있어서 양쪽은 어둑어둑한 녹색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창과 창 사이에는 양쪽으로열리는 창문이 두 개나 있어서 그곳을
통해 빛이 가득히 들어와 깨끗하고 정연하게 손질된 화단과 우뚝 솟은 나무
울타리, 그리고 뜰을 내다볼 수가 있었다. 그 울타리는 똑바른 넓은 통로로
갈라져 있고 그 곳을 통해 호수뿐 아니라 멀리 건너편 물가의 숲까지
바라보았다. 두 친구가 안으로 들어서자 훈풍의 싱그러운 향기를 듬뿍 안겨
줬다.
뜰로 통하는 문 앞에 흰 옷을 입은 소녀와 같은 모습을 한 부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뿌리가 돋친 사람처럼 굳어져서 낯선 손님을 꼼짝도 않고 바라보았다. 손님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라인하르트!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라인하르트! 어머나! 당신이었군요.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그렇군요 하고 그도 입을 떼긴 했으나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막상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보니 가슴 속이 아려 왔던 것이다. 그가 다시 그녀를
쳐다봤을 때 그녀는 몇 해 전 고향 거리에서 헤어질 때의 그 경쾌하고
나긋나긋한 모습 그대로 그 앞에 서 있었다.
에리히는 기쁨으로 얼굴을 반짝이며 문 쪽으로 물러섰다. 엘리자벳, 어때?
하고 그가 말했다. 설마하니 이 사람이 오리라곤 짐작도 못했겠지!
엘리자벳은 누이 같은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정말 친절해요,
여보. 하며 그녀가 말했다.
에리히는 그녀의 조그만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일단 라인하르트를 맞이한 이상에는 그렇게 빨리 놓아주지는 않을 테야. 오랜
세월 바깥 세상에 나가 있었으니 한 번쯤은 고향에 묻혀 봐야지. 좀 봐요.
얼마나 훌륭하게 변했는지 모르겠군.
엘리자벳의 불안해하는 시선이 라인하르트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렇게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너무 오랫동안 못 보았으니까 말이야 하고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마침 그때 어머니가 열쇠를 팔에 걸고 문으로 들어왔다. 베르니씨! 하고
어머니는 라인하르트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참으로 귀한 손님이
오셨군.
그런 다음 서로 이것저것 묻고 대답하며 대화는 막힘 없이 진행됐다.
여자들은 일을 시작했고 라인하르트가 다과를 들고 있는 동안 에리히는 단단한
해포석으로 만든 파이프에 불을 붙여 연기를 내뿜으면서 그의 곁에 않아 얘기를
했다.
다음 날 라인하르트는 에리히와 함께 밭과 포도원 그리고 주정 공장을
둘러보게 되었다. 어느 곳이나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들에서 일하든
공장에서 일하든 모두가 건강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한낮이 되자 가족들은 모두
뜰에 이어진 홀로 모였다. 그래서 그날은 주인의 배려로 모두 함께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전 중의 처음 한두 시간과 저녁 식사를 하기 몇
시간만은 라인하르트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수년 전부터 그는
민간에 유포되어 있는 가곡들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 수집한 것을
정리하거나 가능하면 이 지방의 것도 새로 모아서 증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엘리자벳은 언제나 부드럽고 다정하게 에리히의 변함없는 염려를 겸허하고
고맙게 받아들였다. 전에는 그렇게도 쾌활했던 소녀가 어떻게 저렇게 조용한
부인이 되었을까 하고 라인하르트는 가끔 생각해 보았다.
이틀째부터 그는 저녁때만 되면 언제나 호반을 따라 산책을 했다. 길은 정원
바로 아래쪽으로 통해 있었다. 그 뜰 바깥쪽에 의자 하나가 높다란 백양나무
그늘 아래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낙조의 벤치라고 불렀다. 거기에
앉으면 해가 지는 정경을 제일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인하르트는 어느 날 그 길을 걸어 산책에서 돌아오던 도중에 비를 만났다.
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 아래로 잠시 피했으나 비는 금세 큰 빗방울이 되어
나뭇잎 사이로 떨어졌다. 그는 이미 흠뻑 젖어 버려서 마음을 굳히고 그냥
천천히 걸어가기고 했다.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고 비는 점점 신나게
내렸다. 그가 마침 낙조의 벤치 가까이 왔을 때 희미한 백양나무 사이로 흰옷을
입은 부인의 모습이 보이듯 했다. 그 모습은 부동 자세였는데 그가 접근함에
따라 마치 누구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라인하르트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걸음을 재촉해서 그 여자에게로 다가가 함께 정원을 지나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그 모습은 천천히 방향을 바꾸더니
어두운 옆길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화나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엘리자벳에 대해 화를 낼 기분도 아닌 데다 틀림없이
엘리자벳이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그녀에게 물어
본다는 것도 쑥스런 일이었다. 혹시나 정원 입구로 들어오는 엘리자벳과
마주칠까봐 그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홀에는 들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소원
그로부터 2, 3일이 지난 뒤였다. 그 시각에는 언제나 그렇듯 저녁때가 가까워
올 무렵에 가족들은 뜰에 모였다. 출입문은 모두가 열려진 채였으며 태양은
이미 호수 건너편의 숲 속으로 잠겨 버렸다.
사람들은 라인하르트에게 몇 편의 민요를 소개해 달라고 졸랐다. 그는 그날
오후 시골에 사는 어떤 친구로부터 민요를 우편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가 종이 두루마리를 들고 즉시 나타났는데 두루마리는 깨끗하게
청서되어 있는 두서너 장의 종이 같았다.
사람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엘리자벳은 라인하르트 쪽으로 앉았다.
닥치는 대로 읽어봅시다. 하고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저도 아직 들춰보지는
않았습니다.
엘리자벳이 원고를 폈다. 악보도 붙어 있군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불러
보세요,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는 먼저 티롤 지방의 민요를 두서너 번 읽었다. 그것을 읽으며 그
흥겨운 멜로디를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명랑한 기분이 그 조그만 모임을
에워쌌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노래를 대체 누가 지었을까? 하고 엘리자벳이
물었다.
무슨 소리를! 에리히가 대답했다. 들으면 알지. 직공이라든지 이발사라든지
그러한 쾌활한 사람들이 지어낸 거야.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이런 노래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야. 자연히 생겨나는
거지. 마치 거미줄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세상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나중엔 사방에서 일제히 불리워지는 거야. 우리 자신의 거짓 없는 번민이라든지
행동도 이러한 노래 속에서 찾아낼 수가 있지. 마치 우리가 힘을 합해 만든 것
같이.
그는 다른 종이를 꺼냈다. 높은 산봉에 올라서.......
난 그 노래를 알아요. 하고 엘리자벳이 소리를 질렀다. 저도 함께 부를
테니어서 불러요, 라인하르트!
그래서 두 사람은 인간에 의해서 생각되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불가사의한 그 멜로디를 함께 불렀다. 테너에 맞추어 부르는 엘리자벳의 음성은
다소 알토에 가까웠다.
어머니는 그사이에 열심히 바느질을 계속했고 에리히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라인하르트는 묵묵히 종이를
옆에 놓았다. 마침 호반에서 낙조의 정적을 뚫고 가축 떼의 방울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들 자기도 모르는 결에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맑은 소년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높은 산봉에 올라서
깊고 깊은 계곡을 굽어보며.......
라인하르트는 미소를 지었다. 들었지요? 저렇게 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거야.
저것은 부근에서 자주 불리는 노래예요.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그래요.
하고 에리히가 끼여들었다. 저것은 양치기 카스파르야. 소를 몰고 돌아오는
길이군.
그들은 잠시 동안 그 방울 소리가 윗 농장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릴
때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것은 태고의 곡조지 하고 라인하르트는
말했다. 저런 곡조는 숲 속 깊숙히 잠들어 있는 거지. 누가 그걸 찾아냈는지는
하느님이나 아실 걸.
그는 새 종이를 꺼냈다.
벌써 날은 어두워졌다. 호수 건너편 숲에서 새빨간 저녁놀이 비누거품처럼 떠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종이를 펴놓았고 엘리자벳은 그 한족 끝에 손을 올려놓고
함께 그걸 들여다보았다. 라인하르트가 낭송했다.
다른 남자를 잡으라고
어머니가 바라셨네
마음속에 간직했던 그대를
잊어버리라고 말씀하셨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될 내 마음.
그러시지 말기를
어머니께 얼마나 애원했던가
허나 이제 죄가 되었으니
나는 어찌하면 좋을까.
사랑과 기쁨 대신에
맛보는 괴로움
아아 그럴 줄 알았더라면
말라 버린 들판을 헤매면서
동냥하는 아이라도 될 것을.
그걸 읽는 동안에 라인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종이가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낭송이 끝나자 엘리자벳은 조용히 의자를 뒤로 밀어 놓고 말없이 뜰 아래로
내려갔다. 어머니의 시선이 그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에리히가 따라가려 하자
어머니가 엘리자벳은 밖에서 일이 있어요, 하고 말했으므로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밖은 밤이 뜰에도 호수에도 점점 쌓여 갔고 부나비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기세를 부리면서 열려진 문 앞으로 덤벼들었으며, 그 문으론 다시 꽃향기가
흘러들어 왔다. 호수 쪽에서 개구리 소리가 들려 왔다., 창문 아래쪽 뜰 깊숙한
곳에서는 밤꾀꼬리들이 서로 화답을 하고 있었다......달빛은 높은 나무뜰로
내비치고.......라인하르트는 지난번에 엘리자벳의 희미한 자태가 사라진 나무 길
근처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다음 원고를 모으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다음 집을 나서서 물가로 내려갔다.
숲은 말없이 서서 검은 그림자를 멀리 물 위로 던지고 있었다. 호심은 몽롱한
달빛을 받으며 한가로이 누워 있었다. 때때로 나무가 흔들리며 아련한 소음이
들렸는데 그것은 바람소리가 아닌 여름밤의 한숨이었을 뿐이다. 라인하르트는
언덕을 따라 걸었다. 언덕에서 돌을 던지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한 송이의
수련이 있음을 발견했다. 갑자기 그 수련을 가까이 에서 보고 싶은 충동으로
그는 옷을 벗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은 얕았으며 뾰족한 풀과 돌들이
발바닥을 찔렀다. 아무리 가도헤엄칠 정도로 깊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발이 꺼지면서 머리까지 푹 파묻혔다. 물 위로 다시 떠오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런 다음 손발을 움직여 빙빙 헤엄쳐 돌면서 조금 전 물에
빠진 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수련이 다시 눈에 띄었다. 수련을
반짝이는 커다란 잎 사이에 외로이 누워 있었다. 그는 천천히 헤엄쳐 들어가며
간간이 팔을 들어올리면 떨어지는 물방울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꽃과의 거리는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뒤를
돌아다볼 때 언덕은 먼 뒷면으로 자꾸만 흐려져 갈 뿐이었다.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힘을 내어 같은 방향으로 헤엄을 계속했다. 마침내 은빛 꽃잎을 하나하나
달빛 속에서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꽃 가까이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몸이 그물에 휘감긴 느낌이었는데 물 밑에서 자라난 일렁이는 꽃줄기가 그의
팔다리에 엉겨 붙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은 컴컴하게 주위에 펼쳐 있었고
뒤에선 물고기가 뛰노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갑자기 남모를 곳에 와 있다는
불안이 엄습해서 그는 힘껏 달라붙은 풀을 잡아떼며 숨을 헐떡이면서 물 밖으로
헤엄쳐 나왔다. 언덕에 올라서서 다시 호수를 돌아보자 수련은 먼저와 같이
멀리 검은 심염 뒤에 외로이 떠 있었다. 그는 옷을 입은 다음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왔다. 뜰에서 홀을 지나며 보니 에리히와 어머니가 다음 날 떠나기로
예정한 나들이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밤늦게 어딜 갔다 오나? 하고 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저 말이에요? 하고 그가 대꾸했다. 수련을 찾으려 했는데 제대로 안
되는군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하고 에리히가 말했다. 도대체 수련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옛날에 한 번 그 꽃을 본 적이 있었지.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하지만 벌써
먼 옛날 얘기라서.
엘리자벳
다음 날 오후,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벳은 호수 건너편 숲을 지나 삐죽이 나온
언덕을 산책했다. 엘리자벳은 에리히로부터 부탁을 받았던 것이다. 그와
어머니가 없는 동안 이 근처의 가장 아름다운 경치, 특히 건너편 언덕에서 집
쪽이 바라다 보이는 장관을 라인히르트에게 소개해 주라는 부탁이었다. 두
사람은 여기저기 열심히 돌아다녔다. 마침내 엘리자벳은 피로에 지쳐 나무
그늘에 앉았고 라인하르트는 그녀와 마주 서서 나무에 기대러 섰다. 그때 숲
속에서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들여왔다. 갑자기 이런 모든 일리 벌써 옛날에도
한 번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라인하르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딸기나 따러 갈까요? 하고 그가 물었다.
딸기철도 아닌데요. 하고 엘리자벳이 대꾸했다.
하지만 곧 돌아올 텐데요.
엘리자벳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고 두 사람은 산책을
계속했다. 걸어가면서 그의 시선이 몇 번이고 그녀 쪽으로 집중됐다. 그녀의
걷고 있는 모습이 옷 때문에 마치 사뿐사뿐 날으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여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걸은 뒤에 쳐져 그녀의 모습을 송두리째 눈 속에
넣으려 했다. 그런 모습으로 그들은 히드가 무성한 탁 트인 공터로 나왔다.
라인하르트는 허리를 굽혀 땅 위에 자란 풀을 뜯었다. 그가 다시 허리를 폈을
때 그의 얼굴에는 고통스런 번민의 표정이 스쳤다. 이 꽃 알겠어요? 하고 그가
물었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에리카에요. 가끔 숲 속에서
따 본 적이 있어요.
난 집에 낡은 노트를 한 권 갖고 있지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 전에는 거기다가 시와 노래를 적었는데 이젠 그 일도 중단하고 말았죠. 그
노트 속에 히드가 한 잎 끼여 있었어요. 이젠 말라 버리고 만 것이지만 그것을
내게 준 사람이 누군지도 알고 있나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내리깔고 그가 손에 쥐고 있는 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그들은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녀가 그를
쳐다봤을 때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을 알았다.
엘리자벳! 저 푸른 산너머에 우리들의 청춘이 있었지요. 그 시대는 이젠
어디로 갔을까?
그것 뿐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없이 그대로
나란히 호수 쪽으로 내려갔다. 날은 무더웠고 서녘 하늘엔 검은 구름이
나타났다. 소나기가 올 것 같아요. 하고 엘리자벳이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라인하르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보트가 있는 데까지 언덕을
따라 급히 내려갔다.
호수를 건너는 동안 엘리자벳은 뱃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노를 저으면서
그는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해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져 그녀의 손위에 머물렀다. 그 하얀 손은
그녀의 표정 속에 감추어져 있는 무언가를 그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그
손에서, 밤마다 번민하는 가슴 위에 놓여지는 아름다운 여심의 손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은밀한 고뇌의 아련한 흔적을 보았다. 엘리자벳은 자신의
손위에 닿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자 손을 뱃전에서 살그머니 떼어 물 속으로
미끄러뜨렸다.
마당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숫돌을 팔러 다니는 마차 한 대를 만났다. 검은
머리칼을 길게 풀어헤친 사내가 열심히 수레를 밟으며 집시의 멜로디를 입
속으로 웅얼거리고 있었고, 수레에 붙들어 맨 개가 숨을 헐떡거리며 그 옆에
가로누워 있었다. 현관에는 딱해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의 소녀 하나가 누더기를
몸에 걸치고 서 있다가 엘리자벳 쪽으로 손을 내밀며 구걸했다.
라인하르트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그보다 먼저 급히
지갑 속을 뒤져서 있는 대로 그 소녀의 손안에다 털어 주었다. 소녀는 급히
몸을 돌려 버렸다. 그 소녀가 층계를 올라가면서 흐느껴 우는 소리를
라인하르트는 들었다.
그는 소녀를 만류하려다가 생각을 고치고 계단 곁에 멈춰 섰다. 소녀는
먼저처럼 얻은 돈을 손에 쥔 채 꼼짝도 않고 현관에 서 있었다. 또 무엇을
원하지? 하고 라인하르트가 물었다.
거지 아이는 소스라지게 놀랐다. 아무것도 싫어요. 라고 말하더니 그를 향해
고래를 돌려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보다가는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뭐라고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그것은 이미 소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팔짱을 낀 채 앞뜰을 가로질러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죽음뿐, 아아 죽음뿐
오직 나 혼자 떨어져서.
옛날에 들었던 노래가 그의 귓전에 울려왔다. 그는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러나
그것도 그 순간뿐이었고 그는 몸을 돌려서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일을 해보려고 앉았으나 머리가 조금도 정돈되지 않았다. 한시간
가량이나 헛되이 애를 쓰다가 안방으로 내려갔다. 거기는 아무도 없었고 그저
냉랭한 녹색의 어스름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엘리자벳의 재봉틀 위에는
그녀가 오후에 목에 감고 있었던 빨간 리본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었으나 가슴이 메는 듯 해서 제자리에 놓아 버렸다. 아무리 해봐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호수로 내려가 보트를 풀어 건너편 언덕으로 노를
저어 가서 조금 전에 엘리자벳과 거닐던 길은 다시 한 번 그대로 걸어 보았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두워졌다. 마당에서 말에게 먹이를 주러
가는 마부를 만났다. 나들이 갔던 사람들이 방금 돌아온 참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니 에리히가 뜰을 왔다갔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리로 가지 않고
잠시 제자리에 서 있다가 얼른 계단을 올라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창가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수송나무 울타리에서 울려오는 꾀꼬리 소리를
듣는 체했으나 들려 오는 것은 자신의 심장 고동뿐이었다. 층계 아래에서는
모두가 잠들어 밤은 점점 깊어만 갔으나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그는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마침내 몸을 일으켜 창문에 기댔다.
나뭇잎 사이로 밤안개가 내리고 밤꾀꼬리는 이미 울음을 그쳤다. 밤하늘의 짙은
청색이 점차로 동쪽에서부터 시작되는 희미한 미광에 쫓기고 있었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서 라인하르트의 달아오른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첫 종달새는
환성을 울리면서 하늘을 날아오르고…….
라인하르트는 느닷없이 뒤를 돌아보다가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손으로
더듬어서 연필을 찾았다. 그걸 손에 쥐고 자리에 앉아 한 장의 백지에다 몇 줄
갈겨 썼다. 다 쓰고 나서는 모자와 단장을 집어들고 종이는 거기다 둔 채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현관으로 내려갔다. 새벽의 여명이 이직 집 안
구석구석에 남아있고 커다란 고양이가 짚방석 위에 앉았다가 그가 아무 생각도
없이 내민 손에 털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바깥 뜰에서는 참새들이 나뭇가지에서
떠들어대며 이미 날이 밝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 때 2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구인지 계단을 내려왔다. 그가 고개를 쳐들었을 때
그의 눈앞에 엘리자벳이 서 있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고 뭐라고 입술을
움직였으나 그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젠 안 돌아오시겠지요?
하고 드디어 그녀가 말했다.
알아요. 거짓말을 해도 알아요. 이젠 절대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거죠?
그래요. 이젠 절대로 안 와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녀는 힘없이 손을 내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현관을 지나 대문 쪽으로 나섰다. 그녀는 꼼짝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멍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그는 한
걸음 나서며 그녀 쪽으로 팔을 쳐들어 보이다가 결연하게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밖은 어디에나 상쾌한 아침빛에 싸여 있고 거미줄에 방울진 이슬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뒤로는 조용한 저택이 점점 자취를 감추었고 앞으로는 크고
망망한 세계가 전개되었다.
만년
이미 유리창으로 달은 비쳐오지 않는다. 주위는 어두워졌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손을 포갠 채 안락의자에 기대앉아서 정신없이 방안을 둘러본다. 그를
에워싼 저녁의 어두움이 그의 눈앞에서 차차넓은 호수로 변해 간다. 시커먼
물이 점차 깊게 멀리 멀리로 펼쳐지고 노인의 눈에는 거의 다다를 수
없으리만큼 먼 수면에, 넓은 잎 사이에 끼인 흰 수련이 외로이 떠 있다.
방문이 열리며 밝은 빛이 방안에 비쳐 들었다. 잘 왔군, 브리키테 하고
노인이 말한다. 등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아 주게나.
그런 다음 그는 의자를 책상 쪽으로 당겨 놓고 거기에 펼쳐진 책들 가운데 한
권을 집어든다. 그리고 일찍이 청춘의 온갖 심혈을 쏟았던 연구에 온 정신을
빼앗겨 버린다.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영혼의 낙인
같은 샘물이라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벌이 마시면 꿀이 된다. 또 같은
나무라도 강남(양자강 남쪽)에 심으면 귤이 되고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도 그러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나머지 삶을 황폐시키는
독이 되고 일생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 추억의
달콤함과 향기로움이 영원과 절대 앞에서는 어차피 헐벗고 쓸쓸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의 한 살이를 견딜 만하게 달래준다.
젊은 라인하르트의 사랑이 슬프게 끝난 원인은 어쩌면 그 연인 엘리자벳 쪽에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라인하르트가 믿음을 가지고 학업에
전념하고 있는 사이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어머니의
강요란 것이 지닌 힘을 감안한다 해도 그것은 틀림없이 변심이며, 거기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은 달라질 수도 있다. 곧 사랑을 격렬한 분노와 증오로 바꿔 일생
자신과 상대를 괴롭히는 독과 가시를 품고 가는 경우이다.
그런데도 젊은 라이하르트에게는 분노나 증오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오히려 아름다운 시를 빌어 연인을 변명하고 확인 못할 그녀의 수긍을 무슨
축복처럼 간직하며 외로운 자신의 길을 떠난다. 그 뒤 라인하르트의 청춘은
구름처럼 허망히 흘러갔으나 독신으로 학문탐구에 바친 그 일생을 반드시
불행했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으리라. 왜냐하면 그의 가슴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상처......품고 있는 그리움만큼이나 깊고 넓은
호수가에 청초한 수련처럼 떠있는 엘리자벳의 영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 슈토름은 원래 서정시인으로 출발해 아아헨도로프, 뫼리케등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 나중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 켈러 등과 함께 19세기 독일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대략 50편이 넘는 중단편을 남겼는데
[호수]는 그의 출세작으로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낭만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슈토름은 서른 살 때 도르테아 옌첸이라는 소녀를 만나 사랑했으나 이미 사촌
콘스탄체와 약혼 중이어서 헤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 일이 [호수]를 쓴
동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받은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시작했으나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는 상당한 자부심을 품게 된 듯 부모에게 이런 글을
남기고 있다.
이 작품은 시와 청춘의 매력 때문에 오랫동안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참고로 슈토름은 아내 콘스탄체가 산욕열로 죽은 이듬해인 마흔 아홉 살 때
다시 도르테아 옌첸과 결혼했다고 한다.
귀여운 여인
퇴직한 하급관리인 쁠레먄니코프의 딸 올렌까는 생각에 잠겨 자기집 현관
층계에 앉아 있었다. 날씨는 무더운데, 파리까지 짓궂게 덤벼들어서 기울어져
가는 해가 빨리 저물기만 기다려졌다. 검은 비구름이 이따금 생각난 듯이, 습기
찬 미풍을 일으키며 동쪽으로부터 몰려왔다.
뜰 안에는 이 집 건넌방을 빌어쓰고 있는 지볼리 야외극장 지배인 꾸우낀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기랄! 그는 울상이 되어 투덜거렸다. 또 비야!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허구한 날 비만 오니 이건 내 모가지를 졸라매자는 건가!
날마다 손해가 이만저만이어야지! 이러다간 파산이로군, 파산이야!
그는 올렌까에게 두 손을 쳐들어 보이며 불평을 계속했다.
우리들의 생활이란 요모양 요꼴입니다. 올리가 쎄묘노브나. 울어도 시원찮을
지경이죠! 별 고생을 다하고, 죽도록 기를 쓰며 일해봐야, 그리고 어떡하면 좀더
나아질까 하고 밤잠도 자지 않고 별 궁리를 다 해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첫째로, 관중이 야만이나 다름없이 무지막지하단 말에요. 나는
그들에게 일류 가수들을 동원하여 가장 고상한 오페레타나 무언극을 공연해
주지만, 과연 관중은 그런 것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설사 그걸 구경한다 해도,
도대체 무엇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관중은 광대를 요구합니다. 아주
저속한 것을 상연해야 합니다. 거의 매인 저녁같이 비가 오지 않습니까? 오월
십일부터 시작해서 유월내 장마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구경꾼을
얼씬하지도 않는데, 그래도 자릿세를 물어야 하고, 배우들에게 보수를 줘야
합니까?
이튿날도 저녁 녘이 되면서 검은 구름이 몰려 왔다. 꾸우낀을 미친 듯이
웃으며 말하는 것이다.
좋아, 퍼부을 테면 얼마든지 퍼부어라! 극장이 몽땅 물에 잠기고, 물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실컷 퍼부으란 말이야!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저승에서까지 나를 못 살게 만들겠다는 게로군! 배우들이 나를 걸어 고소해도
좋다!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내도 좋고 교수대에 올려 놔도 겁날 것 없다!
핫핫핫!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올렌까는 꾸우낀의 넋두리를 아무 말없이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듣는
것이었고, 그러한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때도 있었다. 꾸우낀의
불행은 드디어 올렌까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말았다.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안색이 누렇고 이마네 고수머리가 덮힌 작달막한 키에 몸집이
여윈 사람이었다. 음성은 가느다란 테너였는데, 얘기할 적마다 입을 씰룩거렸고,
얼굴에는 언제나 절망의 빛이 떠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올렌까의 마음속에
순결하고도 깊은 애정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올렌까는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했고, 또 그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여자였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를
무척 따랐다. 그 아버지는 지금 괴로운 숨을 몰아 쉬며, 어두운 방안에서
안락의자에 앉아 앓고 있다. 그리고 2년에 한 번쯤이나 브란스끄에서 다녀가는
작은 어머니도 사랑했다. 여학교 시절에는 프랑스어 선생을 사랑했었다.
올렌까는 고운 마음씨를 가진, 착하고 인자한 여자였다. 또한 그녀의 눈길은
잔잔하고 부드러웠으며 신체는 매우 건강한 편이었다. 그녀의 통통하고
발그레한 뺨이며, 보드랍고 흰 살결에 까만 점이 찍힌 목덜미며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들을 때 떠오르는 티 없이 상냥한 미소 같은 것을 보면, 사내들은 으레
거 괜찮게 생겼는걸...... 하며 자기들도 미소를 짓는 것이었고, 여자 손님들은
얘기를 주고받다가도 아아 참 귀엽기도 하지! 하며 느닷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었다.
올렌까가 태어날 때부터 살아 왔고 또 아버지의 유언장에도 그녀의 명의로 돼
있는 잡은 도심지에서 떨어진 쯔이간스까야...슬로보드까에 있었다. 찌볼리
야외극장이 가까워서 저녁마다 늦도록 음악소리와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런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올렌까는 자기의 운명과 싸우며 자기의 가장
큰 적인 무관심한 관중을 향하여 공격을 가하고 있는 꾸우낀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이었고, 그러면 그녀의 심정은 달콤한 감격으로 벅차 오르는 것이었다. 잠을
청할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았다. 새벽녘에 그가 돌아보면 침실 창문을 똑똑
두드리고 커튼 사이로 얼굴과 한쪽 어깨만을 내밀며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했다.
꾸우낀은 올렌까에게 청혼하여 그들은 결혼하였다. 그녀의 목덜미며,
포동포동한 두 어깨를 보게 되었을 때 그는 두 손을 번쩍 쳐들고 이렇게
말했다.
정말 당신은 귀엽구려!
그는 행복하였다. 그러나 결혼식 날에도 하루종일 비가 왔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서도 절망의 빛이 아주 사라지지는 못했다.
결혼 후에도 그들은 다정스럽게 살았다. 올렌까는 입장권을 팔기도 하고, 극장
안의 여러 가지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며, 계산서를 꾸미고 월급을 치러 주기도
하였다. 그녀의 발그레한 두 뺨과, 티 없이 맑고 귀여운 미소가 매표구에서
보였는가 하면 무대 뒤나 구내 식당에 나타나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 덧 자기 친지들에게, 연극이야말로 인간생활에서 가장 보람있고 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며, 연극을 통해서만 인간을 참다운 위안을 느낄 수
있고, 교양을 지닌 인도주의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거라고 곧잘 설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관중이 관연 그걸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건 광대라니까요! 어제 파우스트의 개작을
공연했더니 관람석이 아주 텅 비어 있었어요. 그렇지만 우리 주인 바니치까와
내가 저속한 신파를 공연했더라면 틀림없이 대만원이었을 거예요. 꼭 보러
오세요.
그리고는 연극이나 배우들에 관해서 꾸우낀이 하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 하곤
했다. 남편이 하는 그대로 예술에 대한 관중의 포즈를 고쳐주고 악사들의
몸짓을 감독하기도 했다. 어저다 지방신문에 연극에 관한 악평이 실리는 일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고, 그 악평을 해명하려고 직접 신문사에 찾아
다니기도 했다.
배우들도 올렌까를 좋아했다. 그들은 바니치까와나 라거나 귀여운 여인 이라고
그녀를 부르게 되었다. 그녀는 배우들을 동정해서 많지 않은 돈이면 빌려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배우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에도 남편에게 일러바치는
일은 없었고 그저 혼자서 눈물을 찔끔찔끔 짜고 마는 것이었다.
두 내외는 겨울에도 잘 지냈다. 그들 단원들은 겨울 시즌을 맞아 국립극장을
빌려 공연에 나섰고, 야외극장은 소러시아에서 흘러 온 소규모의 극단이라든가,
마술가들이라든가 그렇지 않으면 시곡 아마추어 연극 동호회 같은 데 단기간씩
다시 빌려 주었다. 올렌까는 점점 몸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흡족한 표정으로
얼굴리 환해져 갔다. 그러나 꾸우낀은 노랗게 말라만 가면서 겨우내 경기가
나쁘지 않았는데도 손해가 막심하다고 투덜거리기만 했다. 그는 밤마다
쿨룩쿨룩 기침을 했다. 그래서 얼렌까는 남편에게 딸기라든가 보리수 열매를
짜서 끓여 먹이기도 했고, 향수로 찜질도 해주었으며, 자기의 따뜻한 숄을 씌워
주기도 했다.
난 당신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남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는
다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당신은 좋은 분이셔!
사순제가 되어 꾸우낀은 극단원들과 합류하러 모스크바로 떠났다. 남편 없이
올렌까는 잠을 이룰 수 없었고, 그래서 밤이 새도록 별들만 바라보며 들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런 때 그녀는 닭장에 수탉이 없으면 괜히 겁을 집어먹고 밤새
잠을 못 자는 암탉과 자기를 비교해 보기도 했다. 꾸우낀은 모스크바에서
한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부활절까지는 돌아갈 테니 극장 일은 이러저렇게
하라는 편지를 보내 왔다. 그러나 부활절을 일주일 남긴 월요일 밤 늦게 불길한
예감을 주는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문 밖에서 누군가가 커다란 나무통을 쿵쿵
두드리고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잠이 채 깨지 않은 식모가 맨발로 물이
질펵하게 괸 뜰을 거쳐 대문으로 달려 나갔다.
문 좀 열어 주시오! 밖에서 거칠고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전보왔어요!
올렌까는 이전에도 남편으로부터 전보를 받은 일이 있었지만 이번만을 어쩐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전보지를 펴 들었다.
전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반 빼뜨로비치 금일 돌연 사망. 화요일 장례식. XXX지시를 바람.
장례식 다음에 적힌 글자는 전혀 뜻모를 말이었다. 발신인은 소가극단
모대감독이었다.
여보! 올렌까는 흐느껴 울었다. 나의 소중한 바니치까!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요! 왜 나는 당신과 만났을까요? 왜 나는 당신을 사랑했을까요! 불쌍한
당신이 올렌까를 두고, 이 가엾고 불행한 올렌까를 두고, 당신은 혼자 어디로
가버렸단 말예요.......
꾸우낀의 장례식은 화요일 모스크바에서 치렀다. 그리고 수요일에 올렌까는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몸을 던지고, 한길에서나 이웃집에서도
들릴 만큼 큰 소리로 통곡하는 것이었다.
가엾기도 해라! 이웃집 사람들은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귀여운 올
리가 쎄뵤노브나가 저렇게 상심해 하다가는 몸을 상하겠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수심에 찬 올렌까는 상복을 입고 미사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웃에 사는 바실리 안드레이치 뿌스또발로프도 역시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우연히도 올렌까와 나란히 걷게 되었다. 그는
바바까예프라는 목재상의 주인이었다. 맥고모자를 쓰고 금시계줄을 드리운 흰
조끼를 입은 품이 상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시골 지주라는 편이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주의 처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올리가
쎄묘노브나. 그는 동정 어린 음성으로 침착하게 타이르듯 말했다. 우리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 중의 누가 죽는다 해가 그것은 주의 뜻입니다.
우리는 슬픔을 참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문까지 올렌까를 바래다 준 다음 그는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의 침착하고 위엄 있는 음성은 그녀의 귓전에서 온종일
사라지지 않았고 눈을 감기만 하면 그의 검은 수염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올렌까는 그를 퍽 좋아하게 되었다. 남자 쪽에서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며칠 후 조금 안면 있는 어떤 중년
부인이 커피를 마시러 집으로 찾아와서 식탁에 앉기가 무섭게 뿌스또발로프의
말을 꺼내며, 그가 아주 착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신랑감이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
시집가라며 뉘 집 색시든지 혹하고 덤빌 것이라는 말을 장황히 늘어놓고 간
일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흘 후에는 뿌스또발로프가
찾아왔다. 그는 불과 10분이나 앉아 있었을까, 말도 몇 마디 하지 않고
돌아갔으나 올렌까는 벌써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에게 반해 버렸는지,
그날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곧
혼담이 성립되었고 결혼식도 부랴부랴 치뤄졌다.
결혼한 후, 뿌스또발로프와 올렌까는 의좋게 지냈다. 남편은 보통점심 때까지
상점에 앉아 있다가 일을 보러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러면 올렌까가 그를
대신하여 저녁때까지 사무실에 앉아서 계산서를 작성하기로 하고 물건을 팔기도
하였다.
목재는 해마다 이십 프로씩이나 값이 오르고 있답니다. 물건을 사러 오는
손님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는 이 지방 목재만 가지고도 장사가 되었는데 지금은 우리 주인
바시치까가 목재를 구입하러 모길레프현까지 해마다 다녀와야 합니다. 그리고
운임은.......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아주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엄청나게 먹힌다니까요!
올렌까는 벌써 오래 전부터 자기가 목재상을 경영해 온 것처럼 느끼는
것이었고, 또 목재야말로 인간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불가결한 물건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들보, 통나무, 서까래, 판자, 각재, 창재, 기둥,
톱밥 등등, 이런 말들이 어릴 적부터 귀에 익은 것처럼 다정스럽게 들리는
것이었다. 잠을 잘 때에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두껍고 얇은 판자의
산더미라든가, 어디론지 시외로 나무를 운반해 가는 우마차의 긴 행렬이라든가,
길이가 10미터가 넘는 20센티미터 두께의 들보 목재가 곤두서서, 마치 군대처럼
재목 저장고로 행군하는 꿈을 꾸었다. 통나무, 들보, 판자 같은 마른나무가
요란한 소리를 내고 서로 부딪치며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가는, 다시 저절로
쌓아 올려지는 꿈도 꾸었다. 그럴 때면 올렌까는 소스라쳐 깨어나곤 하였다.
그러면 뿌스또발로프가 어린애 달래듯 말하였다.
왜 그러지, 올렌까? 어서 성호를 그어요!
남편의 생각은 바로 아내의 생각이기도 했다. 가령 남편이 방안이 너무
넓다고 생각하든가, 장사가 시원치 않다고 생각하면, 그녀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어떤 종류의 오락도 즐길 줄 몰랐다. 공일에도 그는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아내도 역시 매한가지였다.
매일 집과 사무실에만 박혀 있지 말고 극장 같은 데 구경이라도 다녀 보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이렇게 권했다.
우리 바시치까와 나는, 극장엔 가지 않기로 하고 있지요. 그녀는 위엄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우리 근로자에게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구경을 하고 다닐
여가가 없습니다. 극장에 다녀봐야 뭐 하나 이로울 게 있어야죠.
토요일이면 뿌스또발로프 내외는 저녁 기도에 참석했고, 일요일엔 아침
미사에 참례했다. 교회에서 돌아올 때 그들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란히 걸었다.
아내의 비단옷은 사각사각 기분 좋은 소리를 내었고, 남보기에도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 집에 돌아와서는 버터빵에 여러 가지 잼을 발라서 차를 마시고
그 다음 케이크를 먹었다. 매일 점심때가 되면 이 집에서는 스프며, 양고기며,
오리고기를 볶는 냄새가 대문 밖 한길까지 풍겨 나왔고 육식을 금하는 단식
날에는 생선으로 요리를 만들었다. 그래서 누구나 이 집 앞을 지날 때 군침을
삼키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무실에는 언제나 사모바르가 끓고 있어서
손님들은 차와 도넛 대접을 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이 부부는 목욕탕에
갔다가 불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나란히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지요. 올렌까는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였다.
남들도 모두 바시치까와 내가 사는 것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주께 기도한답니다.
뿌스또발로프가 목재를 구입하러 모길레프 현에 다녀오는 동안 그녀는 퍽
적적해 했고 밤잠도 못 자고 눈물만 짜고 있었다. 그녀의 집 건넌방을 빌어쓰고
있는 젊은 군수의관인 스미르닌이 저녁이면 이따금 놀러 왔다. 그는 올렌까에게
이야기도 해주고 트럼프를 함께 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그녀에게는 여간 위로가
되는 게 아니었다. 스미르닌의 가정 얘기는 특히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수의관에게는 아내와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아내의 행실이 좋지 못하여
헤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자기 아내를 몹시 원망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들의 양육비로 매달 40루블씩 보내주고 있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며
올렌까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측은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주께서 당신을 구해 주시도록 기도하겠어요. 층계까지 촛불을 들고 나와서
그를 보내며 올렌까는 말했다.
심심한데 와 주셔서 고마웠어요. 주께서 당신에게 건강을 주시고 또
성모마리아께서도...
그녀의 말투는 남편을 닮아 침착하고 위엄이 있었다. 아래층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수의관을 일부러 불러 세우고 그녀는 이렇게 충고하였다.
블라지미르 쁠라또니치, 부인과 화해하셔야 합니다. 아드님을 봐서라도
부인을 용서해 줘야지요! 어린 자식 마음에 그늘이 지게 해서는 안되니까요.
뿌스또발로프가 돌아오자 그녀는 남편에게 수의관이 불행한 가정 얘기를
소근소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들 내외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저으면서 그
어린애는 얼마나 아버지가 보고 싶겠느냐고 남의 일 같지 않게 동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외는 이상하게도 생각이 일치해서 성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들에게도 자식을 주십사 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뿌스또발로프 내외는 깊은 사랑 속에 말다툼 한 번 한일이 없이 6년
동안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바실리
안드레이치는 상점에서 뜨거운 차를 한 잔 들이키고 목재가 반출되는 것을
살피러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가 그만 감기에 걸려서, 드디어는
앓아 눕게 되었다. 이름난 의사들을 불러 보았지만 그의 병세는 조금도 차도가
없더니 넉 달을 누워 앓다가 끝내 죽고 말았다. 올렌까는 다시금 과부가 된
것이다.
나들 두고 당신은 혼자 어디로 가신단 말예요, 여보!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고 그려는 이렇게 통곡하는 것이었다. 당신 없이 나 혼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아요. 내가 가엾고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이웃 여러분들이 나를
보살펴 주어요. 나는 이제 사고무친의 신세가 돼 버렸어요.......
올렌까는 모자나 장갑을 끼지 않은 채 상장이 달린 검은 옷을 입고 교회나
남편 묘지에 가는 이외에는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다. 마치 수도원의 수녀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뿌스또발로프가 죽은 후 6개월이 지나자, 올렌까는
상복을 벗었고 들창에 무겁게 닫혀졌던 덧문을 열어놓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이따금 식모를 데리고 시장에 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사람들은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집안에서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런 것은 그저 제멋대로 추측을 해 보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그녀가 뜰에 앉아 수의관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을 누가
보았다느니,, 또 우체국에서 어떤 친구를 만난 올렌까는 이런 말을 하더라느니
하는 소문이, 그러한 추측의 근거가 되었다.
이 고장에서는 가축 관리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요, 그것이 여러 가지 병이
생가는 원인이지요. 우유로부터 병을 얻게 되고 말이나 소로부터 무서운 병이
사람에게 옮는다는 것쯤은 알만도 할 텐데. 사실 가축의 건강에 대해서도
사람의 건강에 못지 않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거예요.
수의관의 견해를 그대로 남에게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에
대해서나 그녀는 벌써 수의관과 똑같은 의견을 갖게 된 것이었다. 올렌까는 그
누구에 대한 애정 없이는 단 1년도 살아갈 수 없는 여자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집 건넌방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은 것이다. 다른 여자였다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겠지만, 올렌까의 경우에는 누구도 악의로 해석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올렌까와 수의관은 누구에게도 자기들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고 될수록 감추려 했지만, 그것은 안될 일이었다. 올렌까는 비밀이란 것을
가질 수 없는 여자였다. 연대에 같이 근무하는 수의관의 친구들이 놀러 오면,
올렌까는 그들에게 차를 대접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밤참을 차리기도 했다.
그런 좌석에서 그녀는 페스트, 결핵 등 가축의 질병이나, 도회지의 도살장과
같은 문제에 대해 늘어놓기가 일쑤여서 수의관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손님들이 돌아간 후 수의관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화를 내며 나무랐다.
똑똑히 알지도 못하는 그런 얘긴 하지 말라고 그러지 않았소! 우리 수의끼리
얘기할 땐 제발 말참견 좀 그만 둬요. 내 꼴이 뭐가 되겠소!
그러면 올렌까는 놀라움과 불안이 뒤섞인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묻는
것이었다.
그럼 볼로치까, 난 무슨 말을 하면 좋아요?
그리고 눈물이 글썽해서 그를 껴안으며 성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행복하였다.
그러나 그 행복도 계속되지는 못했다. 연대가 딴 곳으로, 시베리아는
아니었지만 아주 먼 곳으로 이동하게 되어 수의관도 연대와 함께 영영 떠나가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올렌까는 다시 혼자 남아있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그야말로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도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그가 앉았던 의자는 다리가 하나 부러진 채 먼지를 가득
쓰고 지붕 밑 시렁 속에 들어가 있다. 그녀의 복스러웠던 얼굴도 이제는 여위고
귀여움은 사라졌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이전처럼 그녀에게 미소를
던지는 일이 없었다. 분명히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리고
다시는 그녀에게 되돌아올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행복이란 꿈도 꿀
수 없는 그늘 진 생활이 새로 시작된 것이다. 해가 기울어지면 올렌까는 현관
층계에 앉아 있었다. 야외극장으로부터는 음악소리와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예나 다름없이, 들려 왔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리고 아무 욕망도 없이, 그저 멍하니 텅 빈 정원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밤이 오면 잠자리에 들어가서 폐허 같은
자기 집 정원을 다시 꿈속에 보는 것이었다. 음식은 마지못해 먹는 시늉만 냈다.
그러나 그녀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불행은, 이미 아무 일에도 자기 의견은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주위의 사물이 눈에 띄었고 또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런 일에 대해 아무런 자기
의견도 세울 수 없었을 뿐더러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없다는 그것이 그녀에게는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가령, 병이 놓여있다든지, 비가 온다든지, 농부가 달구지에 올라타고
간다든지 하는 것을 보았다 해도, 무엇 때문에 있는 병이며, 무엇 때문에 비는
오며, 또 농부는 뭣하러 가는지 제 생각으로는 얘기할 수 없었다. 아마 천
루블을 줄 테니 말해 보라 해도 무어라 입을 뗄 재주가 없었을 것이다.
꾸우낀이나, 뿌스도발로프나 그 다음 수의관과 함께 지낼 때에는 모든 일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고 그럴듯한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머릿속과 가슴속은 자기 집 뜰안처럼 공허하였다. 그것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가지는 점점 사방으로 퍼져 나와서 쯔이간스까야 슬로보드까도 이제는 큰
거리가 되었다. 찌볼리 극장과 목재상이 있던 자리에는 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이리저리 골목길이 생겼다. 참으로 세월은 빠른 것이다. 올렌까의
집은 연기로 그을리고, 지붕은 녹이 슬고, 헛간은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뜰
안에는 잡초와 가시나무가 무성하였다. 집주인인 올렌까의 얼굴에도 흉하게
주름이 늘어갔다. 여름이면 허전한 마음으로 시름없이 층계에 나와 있었고,
겨울에는 눈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들창가에 앉아 있었다. 훈훈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그 바람을 타고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 오면, 문득 지난날의
추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나서 가슴이 매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눈물도 오래 가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금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 수 없는 공허감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브리스까라고 부르는 새까만 고양이가 야옹거리며 곁에 와서 재롱을 부렸으나,
그러한 고양이의 재롱이 올렌까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고양이의 재롱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의 존재,
자기의 이성과 영혼을 독점하고,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생활의 방향을 제시해
주며, 식어 가는 피를 다시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옷깃에 매달리는 고양이를 떼내어 밀어버리며 싫은 소리를 냈다.
저리 가거라! 귀찮다!
날이면 날마다 아무런 기쁨도, 아무런 자기 의견도 없이 이렇게 세월을
보내며 해가 거듭되었다. 살림은 식모 마브라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다.
무더운 유월 어느 날 저녁녘이었다. 들판으로 나갔던 가축들이 집안에 온통
먼지를 날리며 들어올 무렵 해서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올렌까가 나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을 보았을 때, 하마터면 기절을 할
뻔했다. 문 밖에는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한 수의관이 평복을 하고 서 있었다.
순간, 그녀에게 잊어버렸던 모든 과거가 되살아 왔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한
마디 말도 입밖에 내지 못한 채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흐느끼는 것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흥분 속에서 그 다음 두 사람이 어떻게 집으로 들어오고,
어떻게 차를 마시러 식탁에 마주 앉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오셨구료! 기쁨에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블라지미르 쁠라또니치! 어디 계시다 이렇게 찾아 오셨어요?
아주 이 고장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수의관이 입을 열었다. 군대도
그만두고, 이젠 내 마음껏 일을 해서 자리잡힌 생활을 해 보려고 왔지요. 그리고
아들놈도 학교에 입학시킬 때가 되었습니다. 다 자랐어요. 나는......알고 계신지
모르지만 아내와 화해를 했습니다.
그럼 부인은 어디 계신데요? 올렌까가 물었다.
어린애하구 여관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셋방을 얻으러 다니는 길이지요.
아니 셋방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집에 와 계시면 될텐데. 왜
여기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방세는 한 푼도 안 받을 테니까 우리 집으로
오세요, 네! 올렌까는 다시 흥분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 방을 쓰시도록 하세요.
나는 건넌방 하나면 되니까. 그렇게 하시면 난 얼마나 좋을지 몰라요!
이튿날, 지붕에는 벌써 페인트칠을 하고 벽도 희게 칠하게 했다. 올렌까는
가슴을 펴고 두 손을 허리에 얹고서, 집안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예전과 같은 미소가 떠올랐으며,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날 것처럼 그녀의 온몸에서는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수의관의 아내가
아들과 함께 이사를 왔다. 입게 생긴 얼굴에 머리를 짧게 자리고, 성미가
까다로울 것 같은, 여윈 몸집의 여자였다. 아들 쌰샤는 열 살 난 어린애치고는
키가 작고 통통한 편이었는데, 눈이 파랗고 볼때기엔 오목 팬 보조개가 있었다.
아이는 뜰 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고양이를 쫓아서 달려가더니 곧이어
명랑하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주머니, 이거 아주머니네 고양이지요? 쌰사가 올렌까에게 물었다. :새끼
낳으면 우리 하나 주세요. 우린 어머님 쥐새끼를 제일 싫어해요.
올렌까는 차를 따라 주며 쌰샤와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면 가슴이 훈훈해
오고, 이 아이가 제 자식처럼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저녁에 쌰사가
책상에 앉아 복습을 하고 있으면 그녀는 대견스럽게 그것을 바라보며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참 귀엽기두 하지....... 어쩌면 어린것이 조렇게 똑똑하구 조렇게 깨끗하담!
섬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육지의 한 부분입니다. 쌰샤가 소리를 내어
읽었다.
섬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올렌까도 받아 읽었다. 이것이 여러해
동안 자기 의견이라는 것을 모르고 침묵 속에서만 살아 온 그녀가, 자신을
가지고 입밖에 낸 맨 처음 의견이었다. 이제야 올렌까는 자기 자신의 의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밤참때 그녀는 쌰샤의 부모와 이야기하면서, 중학교 과목은
어린애들에게 어렵긴 하지만, 실업 교육을 받게 하는 것보다는, 역시 기초적인
고전들을 교육시키는 중학교가 장래를 위해서 더 좋다는 의견도 내었다. 즉
중학교를 마치면 의사라든가, 기사라든가, 자기 원하는 대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쌰샤는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하리꼬프에 있는 자기 언니네
집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아버지는 매일같이 가축 검사를 하러 출장 가서
어떤 때는 2,3일씩 묵었다가 오는 일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쌰샤는 자기
가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었고, 따라서 완전히 버림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올렌까는, 쌰샤가 그러다가 굶어죽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가 거처하는 건넌방에 붙은 조그만 방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쌰샤가 올렌까에게 와서 살게 된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아침이 되면
그녀는 아이 방으로 들어갔다. 쌰샤는 한쪽 뺨 밑에 손바닥을 괴고 죽은 듯이
잠자고 있어서. 아이를 깨우는 것이 가여워서 그녀는 늘 망설이는 것이었다,
얘, 싸셴까야! 올렌까는 애처로운 듯이 아이를 불렀다. 이젠 일어나거라,
학교에 갈 시간이 되었어!
쌰사는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아침 기도를 드린 다음, 차 석잔과, 커다란
도넛 두 개와, 버터 바른 빵을 조금 먹었다. 조반은 잠이 덜 깬 채로 뿌루퉁해서
먹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싸쎿까야, 너 학교에서 배운 그 우화 똑똑히 따라 외지 못하더구나,
마치 아이를 어디 먼 곳으로 떠나 보내기나 하는 것처럼 그녀는 이렇게
타일렀다. 나는 항상 네 일이 걱정이란다. 열심히 공부하구......선생님 말씀도
명심해 들어야 한다., 알겠니?
아이, 그런 말 제발 그만 둬요! 쌰샤는 이렇게 내쏘곤 하였다.
이윽고 소년이, 자기 머리보다 훨씬 큰 모자를 쓰고 책가방을 둘러메고
한길에 나와 학교 쪽으로 걸어가면, 올렌까도 그 뒤를 슬금슬금 따라나서는
것이다.
쌰셴까야! 뒤에서 불러 세워 가지고는 대추나 캐러멜을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학교가 있는 골목길로 접어들면, 쌰샤는 몸집이 큰 여자가 뒤에 따라오는
것이 부끄러워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젠 돌아가요, 아주머니. 나 혼자라도 갈 수 있어.
올렌까는 멈추어 서서 소년이 학교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년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그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과거에
사랑한 일이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처럼 깊은 애정을 바친 적은 없었다.
모성으로서의 사랑이 날이 갈수록 불타오르는 지금처럼, 그렇게 헌신적이고
순결하며, 자기에게 희열을 주는 애정이, 그녀의 영혼을 독차지해 버린 일은
결코 없었다. 자기와는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이 소년에게, 볼에 박힌 오목한
그 보조개에, 그 커다란 학생모에, 그녀는 자신의 한평생을 눈물과 기쁨을
가지고 바칠 수 있었다. 왜냐고? 누가 그에 대답할 수 있으랴?
쌰샤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올렌까는 흡족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요 반년 사이에 한결 젊어진 그녀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옛날처럼 그녀에게 친밀감을 느끼며
말을 걸어오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귀여운 올리가 셰묘노브나! 요새 어떻게
지내십니까?
중학교 학과가 아주 어려워졌더군요. 시장에서 올렌까는 이런 말을 하였다.
글쎄 이제는 일 학년 애들에게 우화의 암송과, 라틴어 번역과, 또
수학문제까지 숙제를 내주었으니, 그게 말이 됩니까...아직 어린아이들에게
부담이 너무 과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올렌까는 교원들이며, 학과며, 교과서 등에 대해, 쌰샤에게서 들은
얘기를 그대로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후 세시에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함께 예습을 하기 위해 땀을 빼곤 하였다.
쌰샤를 잠자리에 누이며 그녀는 몇 번이나 성호를 긋고 입 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 다음에야 자기도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는 쌰샤가 대학을 마치고,
의사나 기사가 되어 마구간과 마차까지 있는 커다란 저택을 가지게 되고, 또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이와 같이 아득히 먼 미래에 대한 환상에 잠기는
것이었다. 눈을 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뺨에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겨드랑 밑에서 고양이가 가르릉가르릉 코를 골고 있었다.
밤중에 별안간 대문을 꽝꽝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올렌까는 겁을 먹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숨이 막혔다.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했다. 잠깐 사이를 두고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리꼬프에서 전보가 왔구나! 온몸을 후들후들 떨면서 올렌까는 이렇게
생각했다. 쌰샤의 어머니가 그 애를 하리꼬프로 보내라고 전보를 쳤나봐...아...이
일을 어쩌면 좋아!
올렌까는 절망 속에 빠져 들어갔다. 머리와 사지가 얼음장처럼 얼어 붙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다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의가 클럽에서 돌아온 것이다.
아이 고마워라! 그녀는 한숨을 몰아 쉬었다.
가슴속에 뭉쳤던 무거운 것이 차차 풀리며 다시 가벼워졌다. 올렌까는,
옆방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쌰샤를 생각하며 자리에 누웠다. 이따금 쌰샤의
잠꼬대가 들려 왔다.
난 싫어! 저리 가! 때리지 말어!
세상을 이해하는 눈 혹은 삶의 방식
사랑은 어떤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게는 삶의 기본조건이며 방식이 된다.
그들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체홉이 [귀여운
여인]에서 그려내고 있는 올렌까는 바로 그 전형이다.
올렌까의 삶에 사랑이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세상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척도로 기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극장
지배인을 사랑할 때 세상은 오직 극장과 연극을 통해서만 이해되고 설명된다.
또 목재상을 사랑할 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재이고 그녀는 그 목재를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하며, 수의사를 사랑할 때는 가축의 위생과 질병이 목재를
대신한다. 사랑의 성질은 달리하지만 수의사의 아들 쌰샤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그녀의 세계는 중학생의 교내 생활과 과제물을 중심으로
이해된다.
과거는 올렌까에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그녀도 남편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애인과의 이별을 괴로워 하지만 그것은 과거에의 미련이나 집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곧 새로운 사랑을 찾고 사랑 받게 되는 것 보면 그것은 홀로 남은,
사랑 받고 사랑할 수 없게 된 그녀 자신을 위한 슬픔과 눈물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올렌까의 사랑이 변천하는 과정도 여자의 사랑이 지니는 어떤 보편성을
시사한다.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를 따랐고 작은어머니를 사랑했으며 여학교
시절에는 불어선생을 사랑했다. 그리고 두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사통을 거친 뒤
마침내 그녀의 사랑은 모성적인 것으로 마감한다. 사랑 받는 여자의 특성으로
귀여움과 단순함과 솔직성을 강조하는 것 외에 여지의 사랑이 걷데 되는
보편적인 길을 암시하는 것도 체홉의 의도에 있었던 것일까.
오늘날의 페미니즘 문학은 이 [귀여운 여인]을 다른 견해로 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홀로 서지 못하는 영혼, 철저한 타인지향의 정신을 여성해방의 전사들은
가장 못 견뎌 한다. 그런 이들에게 올렌까는 전혀 가망 없는 여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렌까는 틀림없이 사랑 받는 여인의 전형이다.
미래야 어떠하건 체홉의 시대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남자들의 다수는 그녀 같은
여인들과 행복했다. 톨스토이 같은 거장이 네 번이나 읽은 것도 상큼하게
형상화된 그 전형성이 준 감동은 아니었을까.
안톤 빠블로비치 체홉은 돈벌이를 위한 유머작가에서 출발한 작가다. 그러나
곧 문학의 본령으로 진입하여 단편과 희곡으로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사에서도 길이 잊혀지지 않을 중요한 작가가 되었다. 내가 체홉을
남다르게 기억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이미 말했듯 내 단편 습작가의 스승 중에 하나였다는 것과 그의 희곡
[갈매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내 희곡 습작의 전범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갈매기]는 초연에서 실패했고 현대 연극이론가들도 그리 높이 쳐주지 않는
듯하나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류의 작품을 한 편쯤은 꼭 내 희곡 목록에
가지고 싶은 걸작으로 친다.
둘째로 체홉이 특별하게 기억되는 것은 그와 동시대 평론가들의 불화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념 지향적인 평론가들은 그의 무경향성 내지 무이념성을 못
견뎌 했다. 그 바람에 그의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혹독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는데 내게는 왠지 그게 남의 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은
체홉은 이렇게 빛나게 살아 남았지만 그를 못살게 물어뜯었던 그 평론가들은
거의가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것은 체홉의 만년이다. 그는 44년의 짧은 생애를 찬연한
불꽃처럼 타다 갔다. 특히 죽기 전의 3년은 여배우 올리가와의 연애와 결혼으로
삶의 마지막 장에 처절한 아름다움을 더했는데 그것이 쓸쓸한 문학청년시절을
보내던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듯하다.
에밀리를 위한 장미
에밀리 그리어슨양이 세상을 떴을 때 우리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남자들은 무너져 버린 기념비에 대한 애정 어린 존경심
때문에, 여자들은 대부분 그녀의 집안을 들여다보려는 호기심 때문에 참석했다.
지난 십년 동안 정원사이자 요리사였던 늙은 하인을 빼놓고는 누구도 그 짐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에밀리양이 살던 집은 한때 흰색으로 칠해져 있던 커다랗고 네모난 목조
건물이었는데, 이 건물은 1870년대 특유의 대단히 우아한 양식을 살려 지은
것이다. 작고 둥근 지붕들, 첨탑들, 소용돌이 무늬로 장식한 발코니들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위치도 한때 우리 마을에서 가장 좋았던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자동차 수리 공장이라든가 면화에서 면섬유를 분리해 내는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인근의 건물은 물론 존엄한 명사들의 이름까지도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에밀리양의 집만이 남아서, 완고하면서도 교태를 부리는 듯한
자태로 자신의 쇠락한 모습을 면화 운반용 짐수레나 주유소의 주유기들
위쪽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야말로 눈에 거슬리는 것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눈에 거슬리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에밀리양도 그 장엄한 이름들을 대표하던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들은 향나무가 생각에 잠긴 듯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공동묘지에 제퍼슨
전투에서 산화한 북군과 남군의 유명 무명 용사들의 틈에 끼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을 당시 에밀리 양은 일종의 전통이자 의무였고 또한 관심을 보여야 할
존재였다. 말하자면, 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짊어져야 했던 세습적인 짐이었던
것이다. 쌰토리스 대령이 에밀리양의 아버지가 세상을 뜬 날부터 영구히
그녀에게 세금 면제의 혜택을 부여했는데 그날은 1894년 어느 날이었다. 바로
그날부터 에밀리양은 마을 사람들에게 일종의 짐이 되었던 것이다(쌰토리스
대령으로 말하자면, 흑인 여자는 누구도 앞치마를 두르지 않은 채 거리
바깥으로 나올 수 없다는 포고령을 내린 사람이었다). 에밀리양이 그러한 자선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그래서 쌰토리스 이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하나
꾸며냈다. 즉, 일찍이 에밀리양의 아버지가 마을에 돈을 꿔 준 적이 있는데
마을로서는 사무 절차상 이런 식으로 돈을 면제 해 주는 방식을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취지로 이야기를 꾸며냈던 것이다. 아마도 쌰토리스 대령 세대의
사람들이나 그 세대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만이 이런 식의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에밀리양과 같은 여자만이 그런 이야기를 믿을 것이다.
보다 더 근대적인 사상을 지닌 다음 세대의 사람이 시장과 시의원이 되자, 이런
조처에 불만을 표시하는 목소리가 크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새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초에 세금 고지서를 그녀에게 우송하였다. 2월이
되었으나 답이 없었다. 그들은 아무때고 편리한 시간에 보안관 사무실로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그녀에게 발송하게 되었다. 일주일이 지난 다음
시장이 몸소 그녀에게 편지를 써서, 직접 모시러 가든가 아니면 차를
보내겠다는 뜻을 전했다. 답장으로 시장은 아주 고풍스러운 모양의 종이 위에
사연을 써놓은 쪽지 하나를 받게 되었다. 색이 바랜 잉크를 사용하여 흐르는
듯한 필체로 가늘게 써 놓은 사연에 의하면, 그녀는 더 이상 결코 외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세금 고지서도 함께 반송되어
왔다.
그들은 시의원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했다. 그녀의 문제를 담당할 대표자가
선정되나 그는 사람들과 함께 그녀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그 문은 팔년
전인가 십년 전 그녀가 하던 도예 그림 강습을 그만두고 난 이래 아무도 통과해
본 적이 없던 문이었다. 늙은 흑인이 그들을 맞이하여 어둠침침한 현관으로
안내하였는데, 현관 쪽에서 하나의 계단이 더욱 어둠에 싸여 있는 곳으로
통하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집에서 나는 먼지 냄새가
났고, 밀폐된 공간에서 나는 축축한 냄새가 났다. 흑인이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하였다. 그곳에는 가죽으로 덮인 육중한 가구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흑인이
덧문 하나를 열자 가죽에 금이 가서 터져 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이윽고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허벅지 근처에서 희미한 먼지가 굼뜨게 일어나서는 한
줄기 햇살 속을 천천히 움직이던 티끌들과 합쳐져 함께 맴도는 것이 보였다.
벽난로 앞에는 변색된 금빛의 이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크레용으로
그린 에밀리양 아버지의 초상화가 얹혀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살찐 여자 하나가 검은 옷을 입은 채 들어서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허리께까지 드리워진 가느다란 금줄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 줄의 끄트머리는 허리띠 안쪽으로 감추어져 있었다. 그녀는 또한
변색이 된 금빛 손잡이가 달린 흑단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골격은 작고 빈약하였다. 다른 여자의 경우라면 통통해 보인다고 할 정도의
살집을 갖고 있는데도 그녀가 그렇게 뚱뚱해 보였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치 움직이지 않는 물레 오랫동안 몸을 담가 놓았던 것처럼
부어 있었으며, 또한 피부는 창백한 빛을 띠고 있었다. 퉁퉁 부은 것처럼 살이
쪄서 움푹 들어가 질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은 밀가루 반죽 덩어리에다 석탄 두
조각을 눌러 박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방문객들이 용건을 말하는 동안 그
눈은 이 사람의 얼굴에서 저 사람의 얼굴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자리에 앉도록 권유하지 않았다. 대변자가 더듬거리며 겨우
말을 마칠 때까지 그녀는 그저 조용히 서서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금줄 끄트머리에서 보이지 않는 시계가 째깍째깍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메마르고 차가웠다. 제퍼슨 마을에서는 저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싸토리스 대령이 그것에 대해 저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당신네들 가운데 누구든 마을의 기록 문서를 살펴보면 그걸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게 했었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마을의 행정 담당자들이니까요.
보안관이 서명을 해서 보낸 고지서를 받으셨지요?
예, 물론 무언가 종이 쪽지 한 장을 받았어요. 에밀리양이 대답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자기가 보안관이라고 생각하나 본데...제퍼슨 마을에서는 저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도 아시겠지만 문서상으로는 그것 증명해 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그저...
상대의 말을 끊고 에밀리양이 말했다. 쌰토리스 대령을 만나 보세요. 제퍼슨
마을에서는 저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상대의 말을 끊고 에밀리양이 말했다. 쌰토리스 대령을 만나
보세요. 쌰토리스 대령을 세상을 뜬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제퍼슨
마을에서는 저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게 외어 있습니다. 토비! 흑인이
나타났다. 이분들을 밖으로 안내해 드려요.
이렇게 해서 그녀는 이들 전부를 내쫓게 되었다. 마치 삼십년 전에 그들의
부친을 악취 주변에서 쫓아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난 이년 후였고,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고 우리 모두가 믿었던
그녀의 애인이 그녀를 버리고 떠난 지 얼마 안되어서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다음 그녀는 별로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애인이 떠난 다음 사람들은
그녀를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몇몇 부인네들이 무모하게도 에밀리양을 찾아가
만나려 하였으나 문 밖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젊은이였던
흑인이 시장 바구니를 들고 드나드는 모습뿐이었다.
어떤 남자든 남자 하나만으로 부엌일이 다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네요.
부인네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그 냄새야말로 비천하고 사람들이 들 끊는 이 세상과 고귀하고
막강한 그리어슨 가를 이어주는 또 하나의 연결 고리와도 같았다.
이웃에 사는 여인 하나가 시장 일을 맡아 하던 여든 살 나이의 스티븐즈
판사에게 불만을 호소했다.
그렇지만, 부인, 그 문제를 놓고 제가 어떤 조처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 그거야 냄새 좀 그만 피우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을까요? 여인이
반문했다. 그런 걸 다스리는 법 같은 것이 없나요?
그걸 필요가 있겠습니까? 스티븐즈 판사가 말을 이었다. 아마 그녀가
데리고 있는 검둥이 녀석이 마당에서 잡은 뱀이나 쥐 때문이겠지요. 그
녀석한테 내가 한 번 따끔하게 말하지요.
이튿날 두 건의 불평이 더 접수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어떤 남자한테서
나온 것인데, 그는 자신이 없는 어투로 진정을 했다. 판사님, 이 일과 관련해서
정말 무언가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야 추호도 에밀리 아씨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번엔 무언가 조처를 취해야 해요. 그날 밤
시의원 모임이 있었다. 흰 수염을 기른 세 분의 노인과 신세대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이가 모여 숙의를 했던 것이다.
간단해요. 젊은이가 말을 이었다. 집안을 대청소하라는 명령을 내리면
되지요. 얼마 동안 시간을 주고 기다리다가 그래도 청소를 하지 않는다면.......
당치도 않은 말이요. 스티븐즈 판사가 말했다. 숙녀를 앞에 놓고 냄새가
난다고 책망을 할 수 있겠소?
그래서 그 다음 날 밤 자정이 지난 다음 네 명의 남자가 에밀리양 집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서 마치 도둑처럼 집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벽돌담
아래쪽이나 지하실 입구를 따라 킁킁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녔는데, 그들 가운데
한 명은 계속 씨를 뿌리는 사람처럼 잔등에 걸머진 자루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는 동작을 취했다. 그들은 지하실 문을 강제로 열고 석회를 뿌렸으며, 그
모든 부속 건물 안을 석회로 소독하였다. 그들이 다시 잔디를 가로질러
나오려고 할 때 지금까지 어두웠던 창문 하나가 밝아졌다. 그들은 그 창문을
통해 에밀리양이 등불을 뒤쪽으로 하고 마치 조상처럼 상체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숨을 죽인 채 기어서 잔디를 가로질러 나온
다음 가로를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아카시아 나무 그늘에다 몸을 숨겼다.
1,2주일리 더 지난 다음 냄새는 사라졌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사람들은 그녀에게 정말로 미안하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대고모였던 와이어트 노부인이 끝내는 완전히
미쳐 버렸다는 점을 기억하고는 그리어슨 가의 사람들은 별것도 아니면서 좀
대단한 체 하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젊은 청년들 가운데 누구도 에밀리양과
같은 처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투였던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들을
그림 속의 인물들로 생각했다. 말하자면 에밀리양이 흰옷을 입은 채 배경을
장식하는 호리호리한 인물이라면,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말채찍을 움켜쥐고 다리를 벌린 상태로 전경에 서 있는 실루엣에 해당한다.
이들 두 사람은 뒤쪽으로 문을 열어 놓은 채 문틀을 액자 삼아 서 있는
형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서른 살이 되어서도 아직 미혼이었을 때
우리의 기분이 꼭 유쾌했덨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들의 판단이 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가계에 정신병이 유전된다고 하더라도 기화기
실제로 주어지기만 했다면 에밀리양이 모든 기화를 다 뿌리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에게 남겨진 유산이라고는 그 집이
전부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은 그 접을 기쁘게
생각했다. 거지와 같은 처지로 혼자 남게 되었다면 인간다운 모습을 보이게
되지 않겠냐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이제 한 푼이라도 돈이 더 많고
적음에 황홀해 하거나 절망하는 그 오랜 인간의 습성을 그녀 또한 체득하게 될
것이 아닌가.
부친이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우리의 관습이 그러하듯이, 모든 부인네들이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위로의 말과 도움을 줄 준비를 하였다. 에밀리양은
평소와 같은 차림에 얼굴에는 아무런 슬픈 표정도 없이 그네들을 문간에서
만났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말했다. 목사님들과
의사들이 그녀를 방문하여 시신을 처리하지고 설득하였으나, 그녀는 그런
식으로 사흘을 버텼다. 마침내 법률상의 강제 수단에 호소하자 그녀는
굴복하였고, 이에 사람들은 재빨리 시신을 처리하였다.
그 당시에 우리는 누구도 그녀가 미쳤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믿을 뿐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어버지가
그 많은 젊은 청년들을 쫓아 보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또한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한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그 무엇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그녀와 같은 처지가 되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그녀는 병석에 누워 있었다. 우리가 다시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잘라 마치 소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교회의
창문을 장식하고 있는 채색 유리로 된 천사들과 어딘가 닮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일종의 비극적인 고요함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마을은 막 보도를 포장하기 위한 계약을 체결하였던 참이었고,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뜬 그 해 여름,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 건설 회사가 검둥이들과
노새들과 기계들을 끌고 왔다. 그리고 호머 배론이라는 이름의 현장 감독도
마을에 오게 되었다. 북부 출신의 호머 배론은 키가 크고 피부가 검고 행동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으로, 커다란 목소리에 얼굴빛보다 더 밝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떼를 지어 그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그가 검둥이들에게
퍼붓는 욕설을 듣거나 검둥이들이 곡괭이의 오르내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마을 사람들을 모두 알게
되었다. 광장 어디에선가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리면 거기에는 반드시 호머
배론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마련이었다. 이윽고 그와 에밀리양이 일요일
오후 노란 바퀴의 사륜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우리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 마차는 마차 대여업소에서 빌린 것으로 이에 잘 어울리는 갈색 말들이 끌고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들은 에밀리양이 무언가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워했다. 부인네들은 모두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으니말이다. 물론 그리어슨
가문의 사람이라면 북부 사람, 그것도 일당노동자를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그러나 할머니들 가운데에는 아무리 비통하더라도 진정한 숙녀라면
대갓집 사람으로서의 의무 를 저버려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었다. 물론
대갓집사람으로서의 의무 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네들은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에밀리가 참 안됐어. 그녀의 친척들이 와서
돌봐야 할 건데. 알라바마 주에 그녀의 친척이 몇 있었지만, 미친 여자였던
와이어트 노부인이 상속한 재산 문제를 놓고 수년 전에 의가 상하게 되어 두
가족 사이에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 그들은 심지어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에밀리가 참 안됐어. 라는 표현을 할머니들이 쓰게 되자 곧 사람들은
수군대기 시작하였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물론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이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 말이었다. 짝을 잘
이룬 두 필의 말이 가늘게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재빠르게 지나갈 때면, 일요일
오후의 햇빛을 막기 위해 내려놓은 덧문 위에서 목을 길게 뺀 사람들의 비단
옷이나 공단 옷 스치는 소리에 섞여 들리는 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에밀리가 참 안됐어 였다.
우리가 에밀리양의 타락을 믿고 있었을 때조차도 그녀는 고개를 아주
빳빳하게 들고 다녔다. 마치 그녀는 그리어슨 가문의 마지막 사람으로서 그녀의
위엄을 인정하는 것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같이 보였다. 그녀는
감히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재확인시켜 주기
위해 그 정도의 타락을 감수하는 것처럼 행동하였던 것이다. 그녀가 쥐약으로
사용하는 비소를 사려고 했을 때도 사람들은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에밀 리가 참 안됐어 라고 말하기 시작하고 일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당시 에밀리양에게 사촌이 되는 두 여자가 손님으로 방문하고
있었을 때였다.
독약이 좀 필요한데요 그녀가 약제사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는 당시 서른
살이 넘었으며, 보통 때보다 더 여위어 있긴 했지만 아직 날씬한 몸매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검은 눈이 차갑고 거만한 빛을 띠고 있었으며,
등대지기의 얼굴 모습을 상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것과 같이 관자놀이 쪽과
안공 주변의 근육이 부자연스럽게 긴장되어 있었다. 독약이 좀 필요한데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예, 아가씨. 어떤 종류 말씀이죠? 쥐를 잡을 때 쓰는 그럴 것 말씀하시나요?
제가 추천하고 싶은 게 있다면...
약제사의 말을 끊고 에밀리양이 말했다. 댁이 갖고 있는 것 가운데 효력이
제일 센 것으로 주세요. 종류는 아무래도 좋아요.
약제사는 몇 가지 독극물의 이름을 열거했다. 이놈들로는 코끼리까지 죽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가씨가 원하는 것은...
다시 상대의 말을 끊고 에밀리양이 말했다. 비소예요. 그 정도면 괜찮은
거겠죠?
비소...라구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아가씨가 원하는 것은...
다시 한 번 말을 끊고 그녀가 말했다. 저한테는 비소가 필요해요.
약제사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팽팽하게 긴장된 깃발과도 같은
얼굴을 곧게 세우고는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아, 예, 알겠습니다. 약제사가
말했다. 그걸 원하신다면 드리지요. 그렇지만 어디에다 쓰실 건지 법률상
밝히게 되어 있는데요.
에밀리양은 눈과 눈이 마주치도록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결국 그는 눈싸움에서 밀린 채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비소를 꺼내 포장했다. 점원으로 일하는 검둥이 소년이
그녀에게 포장물을 가져다주었다. 약제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집에 가서 포장을 끌러보니. 극약물임을 표시하는 해골과 뼈 그림이
상자 위에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 쥐잡이용 이라고 씌여 있었다.
그리하여 이튿날 우리들은 그녀가 자살을 하려나봐. 라고 수군거렸다. 그게
아마 최선책일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가 호머 배론과 같이 있는 것이
처음 우리의 눈에 띄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결혼하려나봐.
얼마간 시간이 지난 다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직 그를 설득 중인가 봐.
왜냐하면 호머 스스로 자신을 결혼할 타입의 남자가 아니라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 남자들끼리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가 엘크스 자선 및
사교 모임에서 젊은이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곤 한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알려져 있었다. 이어서 우리는 일요일 오후 머리를 높이 치켜든 에밀리양과
모자를 젖혀 쓴 채 여송연을 이빨 사이에 물고 노란 장갑을 낀 손에 말고삐와
채찍을 쥔 배론이 함께 번쩍이는 마차를 타고 지나갈 때 덧문 뒤에서 에밀리가
참 안됐어. 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몇몇 부인네들이 에밀리양과 배론의 결혼은 마을의 수치이고
젊은이들한테 좋지 않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는 투의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끼여들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결국에는 부인네들의 성화에 못 이겨
침례교 목사가 에밀리양을 방문하게 되었다(에밀리양의 가족들은 성공회
소속이었다). 그는 그녀와 만나서 이야기하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일체 발설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다시 찾아가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다음
일요일에도 그들은 여전히 마차를 탄 채 거리를 지나갔다. 결국 그 다음 날
목사님 부인께서 알라바마에 있는 에밀리양의 친척에게 편지를 띄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핏줄이 같은 사람들과 다시 한 지붕 아래 기거하게 되었고,
우리는 느긋이 뒤로 물러앉아서 일이 어떻게 진전되는가를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틀림없이 결혼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에밀리양이 보석 가게에 들렀다는 사실과
은으로 된 남성용 화장 도구 한 벌을 주문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남성용 화장 도구 하나 하나에는 모두 호머 배론의 머리 글자가 새겨 있었다고
한다. 이틀이 더 지난 다음 우리는 그녀가 잠옷을 포함하여 남성용 의복을
하나도 빼지 않고 사들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혼을 한
거로군. 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우리는 정말로 반겼다. 우리가 반겼던 이유는
에밀리양의 사촌이었던 두 여인이 에밀리양 본인보다도 한결 더 그리어슨
가문의 티를 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호머 배론이 마을을 떠난 것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도로
포장 공사가 얼마 후에 끝났던 것이다. 시끌벅적한 행사가 없었던 거세 우리가
다소 실망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에밀리양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든 그 지겨운 사촌들을 쫓아 보낼 기회를 그녀에게 주기 위해서든 떠난
것이라고 믿었다(그때쯤에는 에밀리양의 사촌들을 따돌리는 일이 비밀 음모
같은 것으로 바뀌었고, 우리 모두가 에밀리양의 편이 되어 이 일에 가담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이 더 지난 다음 그들은 떠났다. 그리고 우리들이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사흘도 채 되지 않아서 호머 배론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어느 날 저녁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졌을 무렵 검둥이 하인이
부엌문으로 그를 맞아들이는 것을 누군가가 보았다고 하였다.
그것이 우리가 호머 배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게다가
에밀리양의 모습도 그후로는 얼마 동안 볼 수 없었다. 검둥이 하인이 시장
바구니를 들고 드나들었지만, 건물의 현관문은 굳게 닫혀진 채였다. 이따금씩
창가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을 언뜻 볼 수는 있었다. 어느 날 밤엔가
사람들이 그녀의 집에 가서 석회를 뿌릴 때 보았던 것과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6개월 동안 그녀는 거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윽고 우리는 이것 또한 예상했던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여자로서의 에밀리양의 삶을 그렇게도 수없이 좌절시켰던 그녀 아버지의 성품이
너무도 독기에 차있고 너무도 강렬한 것이어서 아직 죽지 않은 채로 집안에
떠돌고 있는 양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다음에 에밀리양을 보았을 때 그녀는 많이 뚱뚱해져 있었고 머리는
잿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몇 년 동안 머리는 점점 더 잿빛으로
변하더니 마침내 희끗희끗한 철회색을 띠게 된 다음 변색을 멈추었다. 74세로
그녀가 세상을 뜨던 날까지 그녀의 머리는 활동적인 남자의 머리가 그러하듯이
여전히 힘에 넘친 철회색을 띠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 줄곧 그녀의 집 현관문은 닫힌 채였다. 그녀가 마흔 살이었을
무렵 약 5,6년 동안 현관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도예 그림 강습을
하던 때였다. 아래층에 있는 방 하나에 화실을 만들어 놓았는데, 쌰토리스
대령과 동일한 연배의 사람들이 딸이나 손녀딸들을 그녀에게 보냈다. 마치
일요일 날 헌금함에 넣을 25샌트짜리 동전을 쥐어 주고 교회에 보내듯 아주
규칙적으로 또한 교회를 보낼 때와 비슷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그녀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 동안 내내 그녀는 세금 면제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이윽고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이 마을의 중추 세력이 되어, 시대 조류를
이끌어 가게 되었다. 그림 강습을 받던 아이들이 자라서 빠져나가게 되었지만,
자기 아이들에게까지 물감 통과 지겨운 붓들, 여성 잡지에서 오려 낸 그림들을
들고서 그녀를 찾아가게 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학생이 떠나자 현관문은 다시
굳게 닫힌 채 그후로는 영원히 열리지 않았다. 마을이 무료 우편배달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을 때, 현관문 위쪽에 금속으로 된 번호판을 부착하는 일과
문짝에 우편함을 다는 일에 거부 의사를 표시한 것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도대체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는 동안 우리는 내내 시장 바구니를 들고
드나들던 검둥이 하인의 머리가 점점 더 희어지고 허리가 굽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매년 12월이 되면 우리는 그녀에게 세금 고지서를 보냈고, 일주일
후에는 이따금씩 아래층 창문 안쪽에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명백히 짐의 이층 부분은 폐쇄해 버린 것 같았다. 창을 통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벽면을 움푹 파놓고 그곳에다 세워 둔 상반신의 조각품과도 같아
보였다. 그런데 창 밖을 향해 있는 그녀가 우리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한 세대를 지내고 또 한 세대를
지내게 되었다. 모두에게 소중한 동시에 피할 수도 없고 어쩔 수도 없는
여인으로, 또한 냉정하고도 고집 센 여인으로 에밀리양은 세월을 비껴가며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세상을 떴다. 거들어 주는 이라고는 비틀거리는 늙은
검둥이 하인 하나밖에 없는 집에서, 먼지와 그림자로 가득 찬 바로 그 집에서
그녀는 병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검둥이 하인에게 무언가 정보를 얻으려는 시도조차 포기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녹슬어 있었던 것을 보면, 심지어 에밀리양과도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그녀는 아래층에 있는 어느 방에서, 커튼이 드리워진 육중한 호도나무 침대
위에 누워 숨을 거두었다. 세월과 햇빛의 부족으로 누렇게 곰팡이가 낀 배게
위에 그녀의 잿빛 머리를 얹은 채.
검둥이 하인이 첫 번째로 찾아온 부인네들을 현관에서 맞이하여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목소리를 죽인 채 수군거리면서 호기심 어린 시선을 재빨리
여기저기로 던지는 부인네들을 남겨 놓은 채 하인을 사라졌다. 그는 집안을
가로질러 뒷문을 통해 나가서는 다시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에밀리양의 사촌인 두 여인이 즉각 왔다. 그들은 이틀째 되던 날에 장례식을
거행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가게에서 사온 한 아름의 꽃 속에 파묻혀 있는
에밀리양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크레용으로 그린 그녀 아버지의
얼굴이 관 위쪽에서 깊고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고, 부인네들은 으스스한
표정으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아주 늙은 사람들이 베란다와
잔디에서 마치 에밀리양이 그들과 같은 또래의 사람인 양 그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몇몇은 남군의 군복을 손질해서 차려 입고 있었다.
그들은 한때 그녀와 춤을 추기도 했고 어쩌면 구혼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노인네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시간을 소학적으로 정확히
진행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흔히 노인네들은 모든
과거는 사라져 가는 희미한 것이 아니라 겨울의 손길이 전혀 닿은 적이 없는
광활한 초원으로 생각하고, 그 초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최근의 십여
년이라는 세월이 병목처럼 그 사이를 죄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지 않은가.
이미 우리들은 지난 40년 동안 아무도 보지 못한 구역이 위층에 있으며
그곳에 방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 방을 열려면 힘을 써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격식을 갖추어 에밀리양을 땅에 묻을
때까지 사람들은 기다렸다가 마침내 그 방을 열게 되었다.
문을 거칠게 부수어 여는 바람에 번지가 일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무덤의 관
덮개와도 같은 엷고 매캐한 먼지가 신혼 첫날밤을 위해 꾸미고 장식한 이 방
어디에나 덮여 있었다. 침대를 장식한 희미하게 퇴색된 장미빛 빛깔의 커튼
위에도, 장미빛 전등 갓 위에도, 화장대 위에도, 일련의 섬세한 크리스탈 그릇과
변색된 은으로 감싸인 남성용 화장 도구의 은은 너무도 심하게 변색되어 그
위에 새겨진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물건들 사이에 장식용 옷깃과
타이가 마치 방금 벗어 놓은 것 같은 상태로 놓여 있었다. 그것을 들자 가구의
표면 위에 희미한 초승달과도 같은 자국이 먼지 한 가운데에서 드러났다.
의자에는 정성 들여 개킨 양복 한 벌이 놓여 있었으며, 의자 밑에는 벗어 던진
양말과 함께 한 켤레의 구두가 말없이 차지하고 있었다.
남자 자신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육탈이 되어 심오한 웃음을 짓는 듯한 해골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우리는
오랫동안 그곳에 그저 서 있었을 뿐이었다. 분명히 남자는 한때 포옹의 자세를
취한 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 사랑보다 오래 계속되는 길고
긴 잠이, 고통에 일그러진 사랑까지도 정복해 버린 잠이 그를 능멸하고 있었다.
잠옷이었던 천 조각 아래에 그가 남긴 육체의 흔적이 보였는데, 그것은 그가
누워 있는 침대와 뗄 수 없을 만큼 뒤엉켜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 위에,
그리고 옆에 놓여 있는 베개 위에도 끈질긴 먼지가 고르게 덮어 있었다. 우리는
두 번 째 베개 위에 누군가 누워 있었던 것처럼 움푹 들어가 있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다.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거기에서 무언가를 들어올렸다. 그
희미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마루고 매캐한 먼지를 콧구멍으로 느끼면서 우리는
몸을 굽힌 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철회색을 띤 길다란 머리카락이었다.
세월과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의 전율스러움
침대와 구분조차 할 수 없게 썩어있는 호머 배론의 시체 옆 베갯머리에서 한
가닥의 길다란 철회색 머리칼을 발견할 수 있었다.....아주 오래 전 그같은 이
작품의 마지막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감동보다는 기괴한 전율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월과 죽음을 뛰어넘은 에밀리의 한서린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같은 결말의 극적이 효과를 위한 작가의 안배도 아직 소설의
기교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던 젊은 내게는 적지 않이 충격적이었다. 작가가
에밀리의 신체에 나타나는 세월의 변화를 느끼면서 반드시 머리칼의 색깔을
함께 묘사한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사랑과 증오는 함께 간다고 한다. 또 단순한 독법으로는 에밀리의 사랑을
동성연애자인 애인을 독살함으로써 독전하려 한 변태심리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짧지만 효율적인 묘사의 장치들을 작가는 너무
많이 숨겨두고 있다.
한때는 그 번성이 눈부셨으나 지금은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의 전통, 하나의
의무, 하나의 걱정거리로 남겨진 몰락한 남부의 명문거족 그리어슨가의 마지막
후예...작가의 이같은 설정은 이미 에밀리의 사랑이 단순하고 속되게 해석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녀에게 뜨내기 양키인 호머 배론은 아무런 흠이 없어도
결혼의 상대로는 애초부터 맞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도 그녀가 젊은 열정을
이기지 못해 그와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보고 서슴없이 말한다. 불쌍한 에밀리!
라고.
호머 배론이 동성연애자였다거나 에밀리와의 결혼을 거부했다는 것도
풍문으로만 기술되어 있을 뿐 명확한 진상은 아니다. 다시 말해 에밀리가 그를
독살한 표면적인 동기는 불확실한 풍문으로만 처리되어 있다. 거기다가 더욱 그
동기를 의심스럽게 하는 것은 그 비극적인 결말 뒤로도 이어지는 에밀리의
사랑이다.
만약 호머 배론에 관한 풍문이 진실이라면 그는 에밀리와의 사랑에서는
배신자가 된다. 아무리 그녀가 변태라 하더라도 그런 배신자에게 전율스럽도록
길고 치열한 사랑이 가능할 것인가. 오십년이 넘는 세월과 죽음의 파괴력을
뛰어넘어, 이미 형태조차 없어져버린 연인의 시체와 죽기 며칠 전까지도
베갯머리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까.
에밀리로 하여금 그같이 끔찍한 방법으로 자신의 사랑을 지키게 한 것은
아마도 몰락하기는 해도 아직 온전히 스러지지는 않은 남부 귀족의 전통 혹은
아직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의 의무감까지 느끼게 하는 그리어슨 가문의
무게였을 것이다. 호머 배론을 독살한 뒤 홀로 늙어간 긴 세월의 처절한
외로움과 이웃의 천박한 호기심과 변하는 세태에 꿋꿋이 맞서 가는 그녀에게서
나는 스산하면서도 장엄한 노을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썩고 삭아 가는 시체에서 건장하고 쾌활했던 연인을 느끼면 오십 년이나 곁에
누울 수 있었던 소름끼치는 정신력도 수백년 축적된 남부의 자존심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는지. 그리하여 그것을 위해 희생된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오히려 더 단단한 이념미로 되살아나 그녀의 남은 삶을 인도했던 것이나
아닌지.
지난 80년 대 중만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미국 전역을 돌게 되었을 때 그
방문일정표에 내 개인적인 관심이 반영된 작가는 허만 멜빌과 윌리엄 포크너 두
사람이었다. 나는 윌리엄 포크너가 그 생애 대부분을 보낸 미시시피 옥스포드를
어렵게 찾아가 그가 살던 집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유별난
관심이 다소 지리하지만 문학적으로는 상당히 참고가 된 그의 대표적 장편
[음향과 분노] 때문이었는지 혹은 젊은 나를 전율시켰던 단편 [에밀리를 위한
장미]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대답할 자신이 없다.
지은이 윌리엄 포크너는 20세기 전반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1947년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세기말적 탐미주의의 영향 아래 출발한 그의 문학은
만년으로 갈수록 예술적 깊이와 폭을 더해가 [음향의 분노]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의식의 흐름 에 합류하게 된다. 미국문학에서는 역시 한 산맥 같은
작가로 깊이 있는 작가연구를 위해서는 따로이 시간을 내기를 권한다.
환상을 쫓는 여인
웨쎅스 상부 지방에 있는 유명한 해면 도시 쏠런트씨에서 윌리엄 마치밀은
기거할 집을 구한 다음 아내가 있는 호텔로 돌아왔다. 아내는 마침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고 없었다. 군인 복장의 호텔 급사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마치밀은 가족들을 찾아 나섰다.
세상에, 멀리도 나왔군! 아이고 숨차라. 마치밀은 아내 곁에 도착하자 짜증을
내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걸으면서 책을 읽고 있었고, 세 아이들은 유모와 함께
훨씬 앞서가고 있었다.
마치밀 부인은 책을 읽으며 명상에 잠겼다가 깜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네,
당신이 너무 오래 안 오셔서요. 적막한 호텔 방에 남아있기가 지겨웠어요.
이렇게 찾으시게 해서 미안해요, 여보.
집을 구하느라 아주 고생했어, 공기 좋고 쾌적한 방이라고 해도 들어가 보면
답답하고 불편한 집이더라고. 간신히 하나 정했는데 그 정도면 괜찮을지 한 번
가보지 않겠소? 그 집엔 방이 별로 많지는 않지만 더 이상 좋은 집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 모두 사람들이 살더군.
부부는 아이들과 유모는 그대로 산책을 하도록 놔두고 돌아왔다.
나이도 그렇고, 용모도 빠지지 않을 만큼 서로에게 잘 어울리고, 집안 형편도
괜찮았지만, 이들은 성격이 달랐다. 남편은 둔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고 차분한
편인데 비해 아내는 예민하고 활발했다. 그러나 그렇게 자주 충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공통되자 않는 점이 있다면, 취미나 기호처럼
아주 사소하지만 특색이 확실히 드러나는 면에서였다. 마치밀은 아내의 기호와
습성을 다소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남편은 북부 지방의 번화한 도시에서
총기 제조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정신적으로 언제나 이 사업에 몰두해
있었다. 반면 그의 아내는 시신의 숭배자 라는, 우아하지만 시대에는 뒤떨어진
명칭이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고 소심한 이 여인은
엘라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녀는 남편이 만들어내는 물건들이 생명을
빼앗기 위한 도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남편의 직업에 대해 더 이상
상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머지않아 그 부기 중 적어도 일부는 인간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대하듯이, 자기보다 힘이 약한 동물들에게 잔인하게 구는 무서운
해충이나 야수를 없애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겨우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그의 직업이 그를 남편으로 맞아들이는데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생활을 꾸릴 능력이 필요했으며 그것이 어머니들이 늘
강조하는 첫째 덕목이었다. 때문에 결혼에 이르렀고 신혼 기간을 거쳐 뒤를
돌아다 볼 정도의 시기가 되기 전까지는 남편의 직업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제야 그녀는 마치 어두운 곳에서 발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
사람처럼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생각으로만 그 주위를
맴돌면서 그것이 어떤 것일까 가늠해 보았다. 희귀한 것인가, 평범한 것인가,
금이 들어 있나, 은이나 납이 들어 있나, 장애물인가 주춧돌인가. 그녀에게
중요한 것인가 별것이 아닌가를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막연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그 이후로 그녀는 자신을 소유한
사람의 우둔함과 고상하지 못함을 측은히 여겼다. 스스로도 측은히 여기면서
상상적인 일이나 공상 혹은 탄식을 통해 자신의 섬세하고 우아한 감정을
발산시킴으로써 겨우 생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가 빠져 있는 상상의
세계는 남편이 알게 되더라도 크게 당황하지는 않을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작고 우아했으며 체격은 날씬하고 동작은 매우 경쾌하고 생기가
넘쳤다. 그녀의 눈은 검었으며 그 눈동자에서 신비롭게 빛나는 영롱한 광채가
엘라와 같은 영혼을 소유한 사람들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남자 친구들의 마음에 고통의 원인이 되었으며 결국 어떤 때는 자신을
상심케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남편은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길며, 갈색
수염과 함께 생각에 잠긴 듯한 시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아내에게
친절하고 관대했다. 그는 딱딱한 말투로 이야기했으며, 무기를 필수품으로
여기는 이 세상에 대해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그들이 찾는 여러 집들과 마찬가지로 번지가 있었는데 모두들
뉴 퍼레이드 13번지 라고 불렀다. 그러나 다른 집들보다 약간 컸기에 집주인
여자만은 굳이 코버어그 저택이라는 이름을 고집했다. 그곳은 때마침
여름철이라 햇볕이 들고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겨울에는 비와 바람 때문에 문
앞에 모래 포대를 쌓고 열쇠 구멍까지 틀어막아야 했다. 비바람에 페인트칠이
거의 다 벗겨져 초벌칠과 이음새를 매운 칠자국이 드러나 보였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집주인 여자는 길가에서 그들을 맞이하여
방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미망인으로, 전문직에 종사하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고 했다. 아울러 그 집의 편리한 점을
근심 어린 말투로 얘기했다.
마치밀 부인은 위치와 집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러나 집이 작아서 방을 다
쓰지 않으면 불편하겠다고 말했다. 집주인은 실망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매우 솔직하게 손님들이 꼭 자기 집에 머무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방 둘은 어느 독신 신사가 영구 임대 중이었다. 해수욕 철의
특별 방세를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년 내내 방을 빌리고 있으며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아주 훌륭하고 흥미로운 젊은이이기 때문에 비싼 세를 받더라도
한 달 임대 를 위해 그를 내보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혹시
그분이 잠시 동안 나가 있겠다고 하실 지는 모르겠군요. 집주인은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그들은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중개업자에게 더 문의를 해 볼
생각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그들이 호텔로 돌아와 차를 마시려고 앉자마나 그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신사분이 친철하게도 3,4주일 자기 방을 내줄
테니 새로 오신 손님들을 내보내지 말라고 제안했다는 것이었다.
매우 친절하신 분이군요. 그렇지만 그분에게 그런 불편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요. 마치밀 부인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만에요, 불편을 끼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집주인이 웅변조로 말했다.
그분은 말이에요, 보통 젊은이와는 전혀 다는 분입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하고
고독하며 약간 우울한 분이지요. 제철인 지금보다는 남서풍이 문 앞으로
몰려들고 바닷물이 이곳 큰길가에서까지 덮쳐서 사름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를 더 좋아하십니다. 기분 전환도 할겸 가끔 찾아가는 건너편 섬의 어느
작은 별장으로 가시겠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왔으면 한다고 그녀는 말하였다.
그래서 마치밀 일가는 이튿날 그 집에 짐을 풀었다. 집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마치밀씨는 부두로 산책을 나갔으며, 마치밀 부인은
아이들을 모래 사장으로 놀러 보낸 다음 이것저것 살펴보기도 하고, 옷장 문에
달린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그 젊은 신사가 쓰던 뒤쪽의 작은 거실에서 다른 방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래서 그의 사적인 면모를 눈치 챌 수 있는 다른 가구들을 찾아냈다.
해수욕 철에 찾는 손님들이라면 그런 책들에 흥미가 없으리라 생각했는지 이
방의 전 주인은 눈에 잘 안 띄도록 구석에 책을 쌓아 좋았다. 그 책들은
희귀본이라기보다는 정본이라고 할 수 있는 낡은 책들이었다. 아마도 그 신사는
저술가인 모양이다. 집주인은 마치밀 부인이 못마땅한 점을 발견하면 바로잡을
생각으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책들이 있으니, 이 방을 제 방으로 썼으면 좋겠네요. 마치밀 부인이
말하였다. 그런데 방을 내 주신 신사분을 책이 무척 많으시네요. 제가 좀
읽어도 괜찮을까요, 후퍼 부인.
아무렴요. 괜찮고 말고요. 그분은 책이 참 많으시죠. 그분은 문학 방면에 어느
정도 명성이 있으신 분이에요. 사실 그분은 시인이랍니다. 예, 시인이자요,
그리고 대단한 부자는 아니자만 시를 쓰며 살 정도의 자기 수입도 있답니다.
시인이요? 그래요! 그런 줄은 전혀 몰랐군요.
마치밀 부인은 책 한 권을 펼쳐들고 첫 장에 있는 책 주인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어머나! 그녀는 환성을 올리고 말을 계속하였다. 저도 잘 아는
이름이에요. 로버트 트리위. 잘 알고 말고요. 그분의 시도 알고 있지요. 우리가
빌린 방이 바로 그분 방이라니, 우리가 그분을 쫓아낸 셈이군요.
잠시 후 엘라 마치밀은 혼자 앉아서 호기심과 놀라움을 느끼며 로버트
트리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의 최근 생활을 보면 그런 호기심을
당연했다. 나름대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애쓰는 문인의 외동딸인 엘라 역시
지난 1,2년간은 직접 시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시를 통해 고통스럽게 자신을
감싸고 있는 감정들을 쏟아놓을 수 있는 적절한 통로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살림살이를 꾸려나가고 평범한 남편에게 아기를 낳아 주는 우울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녀의 정신은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에는 맑고 반짝이던
지난날의 생기가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자 이름으로 시를 기고해서
여러 무명잡지에 실었으며, 상당히 이름 있는 잡지에 두 차례나 발표되기도
했다. 그녀의 시가 이름 있는 잡지에 두 번째로 실렸을 때, 공교롭게도 로버트
트리위의 시와 함께 실렸었다. 그녀의 시가 작은 활자로 실리고 바로 그 위에
로버트 트리위가 같은 주제로 쓴 시 2,3편이 큰 활자체로 실렸던 것이다. 사실
이들 두 사람은 신문에 보도된 비극적인 사건에 놀라 동시에 그것에 관한 시를
지었던 것이고, 편집자는 이 두사람의 시가 우연히도 일치함에 대해 언급하고
두 시가 모두 탁월하여 함께 발표한다고 주석을 달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존 아이비 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하던 엘라는 어디에
나오든 로버트 트리위라는 이름으로 실린 작품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반면 로버트 트리위는 남성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성별차이라는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으며 여성으로 행세하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일이 없었다.
마치밀 부인은 그 반대의 경우였다. 즉, 남성으로 행세하는 일에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시에 표현한 그녀의 정서가 수완 좋은 사업가의 부인, 무미건조한
총기 제조업자의 부인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녀의 영감은 신뢰성을 잃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트리위의 시는 기발하기보다는 정열적이고, 세련되기보다는 풍요하다는
면에서 최근의 여러 시인들의 작품들과는 격이 달랐다. 그는 상징주의자도
퇴폐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인간 생활에는 행운이 있는 것처럼 최악의 우연도
있음을 관조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 비관주의자였다. 내용과 상관없는 형식과
운율의 우수성에 대하여는 전혀 애착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가끔 그의 감정이
예술적인 형식을 능가할 때는 운을 잘 안 맞춘 채로 엘리자베스 양식의
소네트를 써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엄격한 비평가들로부터 그런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지적을 받곤 하였다.
엘라 마치밀은 슬프지만 가망 없는 시기심에 사로잡혀 이 경쟁자의 작품을
수없이 읽어보고 운율을 살펴보았다. 미약한 자신의 시와 비교하면 할수록 그의
시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그녀는 언제나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경향을 모방해 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그의 수준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깊은
비탄에 빠질 때도 있었다. 몇 달 후 그녀는 출판사의 목록에서 트리위씨가
시편들을 모아 한 권의 시집을 낸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얼마 뒤 실제로
시집이 출판되었으며 다소간에 칭찬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 시집을 출판
비용을 충당할 정도는 팔렸다.
이와 같은 사태 진전에 자극을 받은 존 아이비 는 자신도 시편을 모아,
지금까지 발표를 많이 못했기에 공표된 몇 편의 시와 미발표 원고들을 덧붙여,
한 권의 시집을 만들어 볼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녀는 출판 비용 때문에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소수의 서평이 그녀의 빈약한 시집에 대해 언급했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시집은 세상의 빛을 본 지 이주일 뒤에는 영영 묻혀
버리게 되었다.
이 시인은 바로 그 무렵 자신이 셋째 아이를 밴 것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린 수 있었다. 그녀에게 집안 일이 없었더라면 시집 출판의
실패는 더 큰 타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은 병원 치료비와 출판사
경비까지 지불하였고 그것으로써 당분간 모든 일은 끝장나고 말았다. 그녀는
비록 한 세기를 풍미하는 시인은 못되었지만 그렇다고 흔해 빠진 엉터리는
아니었다. 엘라는 최근 들어 과거의 시적 영감이 다시 한 번 살아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우연하게도 그녀는 자신이 로버트 트리위의 방에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생각에 잠 긴 채 의자에서 일어나 동료 시인으로서의 흥미를 지니고
방안을 두루 살폈다. 다른 책들 틈엔 그의 시집도 끼어 있었다. 그 내용은 이미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마치 그것이 말을 걸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사소한 용무를 구실로 안주인 후퍼 부인을 부른 뒤 젊은
시인에 대해 물어 보았다.
한 번 만나 보시면 그분에게 흥미를 갖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너무
수줍어 하시기 때문에 만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후퍼 부인은 그 방의
이전 거주자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 주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 산 지 오래되었냐구요? 예, 이년 가까이 되었지요. 여기서 묵지 않을
때에도 언제나 방은 그냥 두고 있었으니까요. 아마도 이 지방의 온화한 공기가
그의 가슴에 좋기 때문에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도록 해 두고 싶어하시죠.
그분은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보내고, 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사실은 매우 선량하고 친절한 분이어서 누구든지
그를 사귀기만 하면 가까이 지내려고 한답니다. 그렇게 다정한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요.
아, 그분은 친절하고 착하시군요.
그렇구 말구요. 내가 부탁만 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준답니다. 가끔 나는 이런
말을 하지요. 트리위씨, 기운이 없어 보이시네. 그러면 그분은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그렇습니다. 후퍼 부인 하고 대답한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권하지요. 기분 전환을 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그분은 하루나
이틀 후에는 파리나 노르웨이 또는 그 밖의 지방으로 여행을 가겠다고 하지요.
그리고 돌아올 때면 훨씬 생기가 넘쳐흐르는 걸요.
아, 그래요. 그분은 정말 감수성이 예민하신 분이시군요.
그렇지요.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이상하실 때도 있답니다. 한 번은 밤이
늦었는데 시 한편을 완성하시고는 밤새 그것을 낭송하면서 방안을 걸어다닌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마룻바닥이 얇아서, 말씀드렸지만, 사실 너무 급하게
지은 집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결국 구분께 잠 좀 자게 해 달라고 부탁을
드리게 되었죠... 그래도 그분과는 매우 사이가 좋답니다.
이것은 이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유망한 시인에 대하여 나눈 대화의
시초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번은 후퍼 부인 때문에 전에는 알아보지 못했던 것에
엘라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침대머리 커튼 뒤 벽지에 연필로 자디잘게
끄적거린 글씨였다.
아, 어디 좀 볼까요. 마치밀 부인은 허리를 굽혀 아름다운 얼굴을 벽 가까이
갖다대면서 애정 어린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그분 시의 출발이고 최초의 착상이에요. 후퍼 부인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어조로 말을 계속하였다. 그 분은 이걸 대부분 지워버리려
했지만 아직은 읽을 수 있지요. 제 생각으로는 그분이 밤중에 밤에서
깨어났다가 머리에 떠오른 구절을 아침에 잊어버릴까봐 벽지에 적어 둔 걸
거예요. 여기 씌여진 것 중에서 일부는 나중에 잡지에 발표된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어요. 어떤 것은 최근에 새로 쓴 거지요. 이건 저도 전에는 보지 못한
건데요. 바로 며칠 전에 써둔 모양이에요.
아, 그렇군요!
엘라 마치밀은 까닭 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불현듯 집주인이 이런
정보를 제공해 주었으므로 이제 그만 나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그녀는 문학적이라기보다는 형언할 수 없는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그 글을 혼자
읽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큰 즐거움을 기대하며 혼자
읽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한편 엘라의 남편은 섬밖에 풍랑이 거칠게 일었기 때문에 별로 좋은 선원이
못되는 아내와 함께 나가기보다 혼자서 배를 타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울 거라
생각했다. 그는 관광용 기선에 이처럼 혼자 타는 것을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다.
그 배에서는 달밤에 남녀가 춤을 추기도 하고 갑자기 껴안기도 했다. 그는 배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어서 그런 곳에 아내를 데리고 가고 싶지 않다고 돌려서
이야기했다. 이 부유한 제조업자가 숙소를 떠나 이렇게 바다 바람을 쏘이며
기분을 전환하고 있는 동안, 엘라의 생활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무척 단조로워
날마다 몇 시간씩 해수욕을 하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시에 대한 충동이 다시 강하게 일러나자 그녀는 열정에 휩싸였으며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최근에 나온 트리위의 시집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었고 그의 시를
능가하는 시를 한 번 써보려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그러나 결국 실패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접근할 수 없는 스승의 자석과
같은 매력은 지적이고 추상적인 요소보다는 개인적인 요소가 더 강했기에,
그녀는 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밤이나 낮이나 똑같은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 환경은 늘 그녀에게 그의 존재를 문자 그대로 속삭임을
통해 전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그녀가 가까이 할 수 있는 첫 번째의 적절한
대상에 자신의 벅찬 감정을 쏟아부으려는 충동일 뿐이라는 것을 엘라 자신은
이해하지 못했다.
문명이 결실을 위해 고안해 낸 결혼이라는 실용적 조건에서 나온 애정이 흔히
그렇듯이 남편의 부인에 대한 사랑을 우정 정도에 그칠 뿐 부인의 사랑보다,
아니 그만큼도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매우 정열적인 여성이었기에
어떻게든 자신의 정열을 충족시켜야 했으며, 이 우연한 기회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이번 기회는 우연이 제공해 주는 것치고는 너무나 고상한
것이었다.
하루는 아이들이 벽장에서 숨바꼭질을 하다가 신이 나서 옷장 속의 옷을
꺼냈다. 후퍼 부인은 그것은 트리위씨의 것이라고 말하며 다시 벽장 못에
걸어두었다. 환상에 사로잡힌 엘라는 그날 오후 늦게 주위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그 벽장문을 열고 거기 걸려 있는 옷 중 하나인 레인코트를 꺼내 입어
보았다.
엘리야의 외투여! 그녀는 중얼거렸다. 나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영광스러운
천재인 그와 한 번 겨룰 수 있게 하소서!
이런 생각에 잠길 때면 그녀는 언제나 눈물에 젖게 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심장이 이 외투 속에서
고동쳤으며, 그의 두뇌가 이 모자 밑에서 그녀로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고상한 사유를 전개했으리라. 그와 비교해 볼 때 그녀는 미약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의식이 몹시 가슴을 아프게 했다. 옷을 벗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남편이 방안에 들어왔다.
도대체 뭐하는 거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옷을 벗었다.
이 벽장 속에 걸려 있더군요. 그녀가 대답하였다. 그래서 장난 삼아 입어
본 거예요. 이런 장난이라도 해야지, 너무 심심해요. 당신이 늘 집에 안
계시니까요.
늘 집에 없다고? 그야...
그녀는 그날 저녁에 안주인과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시인에게
애정 비숫한 것을 품어 온 안주인은 그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무척
좋아하였다.
트리위씨에게 꽤 흥미를 갖고 계신 모양이군요. 집주인이 말했다. 방금
전갈이 왔는데 내일 오후에 들러서 내가 집에 있으며 이 방에서 필요하신 책을
좀 찾아가시겠답니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아 그럼요!
만나 보실 의향만 있으시다면 트리위씨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남모르는 즐거움을 느끼며 약속을 하고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은 이렇게 말하였다.
엘! 난 당신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소. 바로 내가 밤낮 혼자 나다니면서
당신에게는 아무런 즐거움도 주지 못한 채 내버려둔다는 말 말이오. 당신의
말이 맞는 것 같소. 오늘은 바다가 조용하니 당신과 함께 요트나 타러 가고
싶소.
엘라가 남편의 그와 같은 제안에 대해 기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남편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에 잠겨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는 분명 사랑을 느끼는 그 시인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다른 모든 생각을 압도하였다.
가고 싶지 않아. 그냥 갈 수는 없어. 안 갈 거야.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뱃놀이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남편은 별 상관을 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날은 아이들이 모두 해변에 나가고 없었으므로 집안은 조용하였다. 햇볕이
비치는 가운데 창문 덮개가 담 너머 바다의 부드럽고 끊임없는 파도에 맞춰
흔들렸다. 여름 한 철 고용된 외국인으로 이루어진 그린 싸일리지언 이라는
악단의 연주가 마을 대부분의 주민들과 산책하는 사람을 모두 끌어가 버려
코버어그 저택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밀 부인은 하녀가 나가 보는 것 같지 않아 몸이 달았다. 책들은 지금
그녀가 앉아 있는 방에 있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벨을 눌렀다.
누군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예요, 부인. 벌써 간 지 오래 돼요. 제가 나가 보았는 걸요. 하녀가
대답하자 곧 후퍼 부인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실망이 되네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트리위씨는 결국 안 오신 답니다..
그렇지만 전 노크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그건 어떤 분이 집을 잘못 알고 방을 빌리러 왔던 겁니다. 깜빡 잊고 말씀
안드렸는데 트리위씨는 점심 조금 전에 쪽지를 보내셨어요. 책이 필요 없게
되어 오지 않겠으니 차 준비를 필요 없다고요.
엘라는 크게 실망하였다. 한동안 [이별의 삶]이란 그의 슬픈 시조차도 읽을 수
없었다. 그토록 그녀의 들뜬 가슴은 아팠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아이들이
양말을 적시고 엄마 앞에 달려와서 놀고 온 이야기를 조잘대어도 보통 때의
반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후퍼부인, 저...여기 계시던 그분의 사진이 혹시 있나요? 그녀는 그의 이름을
대는 것이 이상하게도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예, 있어요. 부인의 침실 난로 선반 위에 있는 사진틀에 있지요.
거기에는 공작 부처의 사진이 있던데요?
예, 그렇죠. 그러나 그분 사진은 그 밑에 있습니다. 원래는 그 분
사진틀이에요. 제가 일부러 사온 거죠. 그런데 그분이 가시면서 제게
부탁했답니다. 제발 이 방에 드는 분에게 제 사진이 눈에 띄지 않게 가려
주세요. 전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게 싫을 뿐 아니라, 그들도 내가 쳐다보는
것을 원치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제가 그분의 사진 앞에다 임시로 공작 부처의
사진을 끼웠답니다. 마침 사진을 넣을 틀도 없었고 장식용으로는 왕족 사진이
더 어울릴 것 같아서요. 그 사진만 꺼내면 그 아래 그분 사진이 있을 거예요.
아마 그 분이 아시더라도 상관 없을 겁니다. 그분께서는 이 방에 드는 분이
이렇게 아름다운 귀부인인 줄 미처 몰랐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아마 숨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분은 잘 생기셨나요? 그녀는 수줍어하며 물었다.
글쎄요,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녀는 진지하게 물었다.
부인께서도 그러실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잘 생겼다기보다는 매우
강한 인상을 준다고도 하지요. 큰 눈에 늘 생각에 잠긴 듯한 분인데 주위를
빨리 살필 때면 시 쓰는 것으로는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시인에게서 시대할
만한 날카로운 눈빛을 보게 됩니다.
나이가 얼마나 되었지요?
아마 부인보다는 몇 살 손위일 겁니다. 서른 한 두살쯤 되셨을 거예요.
실은 엘라도 서른을 넘긴 아니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비록 그녀의 천성은 어리고 감정적이었지만, 이미 그녀의 나이는
첫사랑보다는 마지막 사랑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한 때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안됐지만, 이제 머지않아 적어도 허영심이 많은 여자라면 창문에
등을 돌리거나 덧문을 반쯤 내리지 않고서는 찾아 온 남자 방문객을
맞아들이려고 하지 않게 될 만큼 나이를 먹고, 그리하여 한결 더 우울한 인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후퍼 부인이 한 말을 생각해 보고는 더 이상
나이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때 전보가 한 장 왔다. 남편에게서 온 것이었는데 남편은 친구들과 함께
요트로 해협을 따라 버드미쓰까지 가게 되었으며 다음 날에야 돌아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해질 무렵까지
머물려 무슨 격정적인 일이 일어날 것을 조용히 기대하는 심정으로 방에 아직
가려져 있는 사진을 생각했다. 이 젊은 여인은 공상이라고 하는 미묘한 사치를
즐기는 데 능숙했으므로, 남편이 그날 밤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자 참을성
없이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 그 사진을 꺼내 보는 것을 삼가하였다. 그녀는 훤한
오후의 햇살이 비출 때보다는 고요, 촛불, 엄숙한 바다, 별들이 빚어내는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혼자 사진을 살펴보기를 원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잠자리에 들게 했다. 그리고 아직 열 시도 되지 않았는데
바로 침실에 들어가서 강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준비를 했다. 우선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책상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걸터앉아서 트리위의 가장 달콤한 시 몇 편을 읽었다. 그리고
사진틀을 불 앞으로 들고 와서 뒤를 열고 사진을 꺼내 눈앞에 놓았다.
그의 얼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멋진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렀으며 깊숙이
눌러 쓴 모자가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아까 안주인이 말하던 커다란 검은 눈은
무한한 슬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잘생긴 이마 밑의 눈은 그것을
바라보는 상대편 얼굴을 보고 온 우주를 읽어내는 듯했고, 상대 얼굴에
떠오르는 미래상에 대해 별로 즐거워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엘라는 나지막하고 풍부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그토록
잔인하게 몇 번이나 저의 빛을 가린 사람이 바로 당신이군요.
그녀는 오랫동안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싶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두
눈에는 마침내 눈물이 고였으며 사진에 입술을 댔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웃어대고는 눈물을 닦았다.
남편과 세 아이를 가진 여인이 낯모르는 사나이에게 이렇게 터무니없이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 얼마나 사악한 일인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니다.
그는 모르는 사나이가 아니다. 그녀는 그의 감정과 생각을 자기 것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생각과 감정은 그녀의 생각과 감정과 똑같은 것으로
남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남편이야 가족을 부양해야 되므로 그런
감정이 없는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 사람이 진정한 나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어. 비록 한 번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윌보다는 이 사람이 진전한 나와 훨씬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침대 곁 탁자 위에 그의 책과 사진을 놓았다. 그녀는 베개에 몸을
기댄 채 전에 종종 로버트 트리위의 시를 읽으면서 감동적이고 진실하다고
표시해 두었던 부분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나서 시집을 치우고 그의 사진을
침대 한쪽 끝에 세워 놓고는 누워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다시 머리 위의
벽지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연필 자국을 촛불을 들고 살펴보았다. 거기에 그대로
적혀 있었다. 셸리의 단편처럼 어구, 연구, 화운이, 시행의 첫 구절 혹은 중간
구절이,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단상들이 적혀 있었다. 그중 제일 짧은 것조차
너무도 강렬하고 너무도 달콤하며 너무도 생생해서, 그를 둘러싸고 있었듯이
지금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벽으로부터 시인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숨결이
스며 나와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수없이 이렇게 손을 들었을
것이다. 손에 연필을 들고, 이렇게 팔을 뻗었으니까 글이 비스듬히 쓰여진 게
틀림없었다.
시인의 세계가 어떤 형상을 이루고 있는지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었다.
살아있는 인간보다 더 진실한 형상들
불멸이 키우는 아기들
이렇게 묘사되어 있는 이 시인의 세계는 틀림없이 비평가들의 구설수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깊은 밤에 사색과 정신의
모색을 통해 얻어진 것이리라. 아마 이것들은 달빛에서나 등불 아래서, 희미하게
먼동이 트는 새벽녘에 급하게 쓴 것이지, 환한 대낮에 쓴 것일 리가 없다. 쉽게
사라지는 상상을 포착했을때 그의 팔이 놓여 있던 곳에는 지금 그녀의
머리카락이 스치고 있다. 그녀는 시인의 정신에 깊이 잠기고, 마치 천상의
영기를 들이키듯 시인의 정신에 흠뻑 취해 그의 속삭임을 들으며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이와 같이 꿈에 빠져 있을 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곧
그녀는 바로 문 밖으로부터 남편의 무거운 발소리를 들었다.
엘, 어디 있어?
그녀가 자신이 빠져 있던 환상을 남편에게 설명해 주려 애쓰더라도 그는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하고 있던 일을
남편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생각에 그 사진을 베개 밑에 슬쩍
감추었다. 남편은 저녁을 잘 먹은 사람처럼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이거 실례했군. 머리가 아파? 내가 방해했나 보군. 윌리엄 마치밀이 말했다.
아녜요. 머리가 아픈 게 아녜요. 그녀는 대답했다. 웬일로 이렇게
돌아오셨어요?
오늘 안에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있더군. 내일은 또 갈 곳이 있으니 거기서
하루를 더 허비하고 싶지 않았소.
식당으로 내려갈까요?
아니, 나도 몹시 피곤하오. 저녁은 잘 먹었소. 나도 곧 자야겠소. 내일
아침에는 여섯 시에 일어나야 하거든. 아마 당신 일어나기 훨씬 전일 테니까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그의 동작을 주시하면서 사진을
가만히 더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정말 몸이 불편한 것 아니오? 아내 위로 몸을 구부리며 물었다.
아녜요. 단지 기분이 좀 언짢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괜찮지만. 그는 몸을
굽혀 그녀에게 키스했다. 오늘 밤 당신하고 같이 지내고 싶소.
이튿날 아침 마치밀은 여섯 시에 눈을 떴다. 그녀는 남편이 깨어나 하품을
하면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밑에서 소리나는 게 도대체 뭐야, 이거?
그녀는 반쯤 뜬 눈을 통해 주변을 뒤져서 무엇인가 꺼냈다.
제기랄 이게 뭐야! 남편이 소리쳤다.
왜 그러세요? 아내가 물었다.
오오, 당신도 깨었소? 하하하!
왜 그렇게 웃으세요?
웬 녀석의 사진이야. 집주인의 친구 같은데. 그런데 이 사진이 어떻게 여기
와 있을까? 자리를 펼 때 선반을 건드려서 떨어졌나 보군!
어제 내가 보던 사진인데, 그렇다면 떨어진 것이 틀림없군요.
오오, 그럼 이 작자가 당신의 친구요? 하나님 맙소사!
엘라는 존경의 대상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남편의 조소를 잠자코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떨렸으며 그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상황에 맞지 않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는 유망한 시인이에요.
나는 아직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지만 우리가 들기 전에 이 방 두 개를 쓰고
있던 사람이에요.
그걸 어떻게 아나, 한 번 만나 보지도 못했다면서 어떻게 그걸 알지?
후퍼 부인이 사진을 저한테 보여 주면서 말했어요.
아, 그래. 난 이제 그만 가야겠군. 오늘은 일찍 돌아오게 될 거요. 함께 가지
못해서 미안하오. 아이들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오.
그날 마치밀 부인은 후퍼 부인에게 트리위씨가 언제 올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였다. 손님들이 떠나시기 전 다음 주쯤에 이 근처에 있는 친구
집에 며칠 묵으실 거예요. 그땐 꼭 오실 거예요.
마치밀은 오후 일찍 돌아왔다. 그는 자기가 없는 동안에 도착한 편지들을
뜯어 보고 갑자기 가족들과 함께 당초의 계획보다 일주일 앞당겨서, 사흘 후에
떠나야겠다고 말했다.
일주일쯤 더 있으면 안될까요? 그녀는 남편에게 애원했다. 전 여기가
좋아요.
그렇지만 난 안 좋은 걸. 점점 싱거워지는 것 같소.
그럼 나하고 아이들은 남겨 두고 혼자 가세요.
엘라, 당신도 고집이 어지간하구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한단 말이오? 그럼
또 당신을 데리러 와야 하지 않소. 그러지 말고 함께 돌아갑시다. 얼마 수에
노스 웨일스나 브라이튼에 가서 지내기로 합시다. 그리고 여기서도 아직 사흘은
더 남아 있잖소!
따를 수 없는 시적 재능에 경탄을 보내며 이제는 완전히 애정을 느끼게 된 그
남자를 만나지 못할 운명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막 노력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트리위가 맞은편 섬의 번화한 도시에서 별로 멀지
않은 조용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집주인으로부터 알아내고 다음 날 오후
근처의 부두에서 배를 타고 그리고 건너가 보았다.
그것은 얼마나 허황된 여행이었던가! 엘라는 그 집 위치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뿐이었다. 그의 집인 듯 싶은 것을 찾아 낸 다음 그녀는 길가는 사람에게
저 집에 시인이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설사 그가 산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방문할 수 있겠는가? 물론
세상에는 그럴만한 배짱이 있는 여자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불쑥
찾아가면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혹시 한 번 방문해 달라고 청할 수
는 있었겠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녀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바닷가의 언덕을 서성거리다가 시간이 되자 배를 타고 저녁 시간에
늦지 않게 돌아왔다.
남편은 뜻밖에도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원하니 나중에 자기가 데리러 오지
않아도 집에 돌아올 수만 있다면 주말까지 아이들과 함께 머물러 있어도 좋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무척 기뻤으나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이튿날 아침 마치밀은
혼자서 떠났다.
그러나 트리위는 그 주가 다 지나가도록 찾아오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에 마치밀 가의 나머지 가족들은 그녀에게 그렇게 정열을
불태우게 하던 고장을 떠났다. 쓸쓸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기차, 뜨거워진
좌석에 내리쬐는 먼지를 가득 머금은 햇볕, 길게 뻗은 더러운 철로, 낮게 드리운
전선들, 이런 것들이 그녀의 길동무였다. 그녀가 머물던 시인의 집도 사라져
버렸다. 축 처진 기분으로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눈물이 나왔다.
마치밀씨의 사업은 번창 일로에 있었으며 그의 가족은 커다란 새집에 살고
있었다. 집은 그가 사업을 경영하는 중부 도시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대지가 꽤 넓었다. 교외의 생활이 으레 그렇듯이 어떤 계절에는 몹시
쓸쓸했다. 엘라는 따라서 그녀의 취미인 서정시나 비가를 쓰며 지낼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집에 돌아오자 애독하던 잡지 최신호에서
트리위씨의 시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가 쏠런트씨로 피서가기 직전에 쓴 것이
분명했다. 후퍼 부인이 최근의 것이라고 말했던 벽재의 시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엘라는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충동적으로 펜을 들어 존 아이비라는
이름으로 동료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보내는 축하 편지를 썼다. 동일한 정서적
일에 바친 자신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지 못한 데 비해, 그는 자기 영혼을
움직이는 사상을 성공적으로 운율에 담은 것에 대해 축하의 편지를 썼던
것이다.
감히 답장을 기대하지 못했는데 2,3일 후 축하편지에 대한 회신이 왔다. 예의
바르면서도 간결한 문구로 자기는 아이비씨의 시를 잘은 모르지만 언젠가 아주
촉망되는 시가 발표될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또 아이비씨와 편지로 시귀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한다면서 앞으로 쓰는 시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보겠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남자가 쓴 편지로 본다면 좀 어리고 소심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트리위씨의 답장은 선배이며 한수 위라는 듯한 어조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가 답장을 보내 오지 않았는가!
그녀가 잘 아는 바로 그 방에서 그의 손으로 직접 써 보낸 편지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편지 왕래는 두 달 남짓 계속되었다. 엘라 마치밀은
가끔 자기가 쓴 시구 가운데서 가장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을 몇 편 보냈다.
그는 매우 감사히 받았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자세히 읽었다는 말을 없었으며
회신에 자기 시를 보내는 법도 없었다. 트리위씨는 그녀가 남자인 줄아고
답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훨씬 더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황으로는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그가 자신을 한 번
보기만 하면 사태는 전혀 달라질 것이라는 아첨의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 한
구서에서 흘러나왔다. 기쁘게도 우연한 기회로 그걸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
그렇제 않았던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밝혀서라도 상황을 바꾸었을 것이다. 그 지방과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신문의
편집인인 남편의 친구가 어느 날 저녁 그들 내외와 식사를 같이 하였다. 그들의
화제가 시인에 관한 것으로 바뀌자 그 친구는 풍경 화가인 자기 아우가
트리위씨의 친구라는 말을 하고, 그 둘이 지금은 웨일즈에 함께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엘라는 이 편집인의 아우도 알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편지를 써서
화가에게 돌아가는 길에 자기 집에 들려서 며칠 동안 묵어가라는 내용의 초대를
하고, 친구인 트리위씨와도 친교를 나누고 싶으므로 가능하면 함께 와달라고
요청하였다. 며칠 후에 답장이 왔다. 자기와 친구인 트리위는 남부 지방으로
가는 길에 기꺼이 그녀의 초청에 응하겠으며 다음 주 이러이러한 날에
방문하겠다고 했다.
엘라는 즐겁고 힘이 났다.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사모하면서도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 오게 된 것이다. 보라, 그는 우리집 담 너머에 서 있다.
그는 창을 바라본다. 창살 사이로 모슴을 드러냈다. 이렇게 그녀는 열광적으로
읇었다. 또 보라, 겨울은 가고 비가 그쳤다. 이 땅에도 꽃이 만발하여 새들이
찾아와 노래할 때가 되었다. 이 땅 위에는 산비둘기의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그가 오면 묵고 식사할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됐다. 그녀는 몹시
신경을 써 준비를 갖추고 그날이 오기만을 고대했다.
오후 다섯 시쯤 초인종 소리와 함께 편집인의 동생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여류 시인이었지만, 아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엘리는 값진 옷감으로 된 유행 의상을 공들여 입는 것을 피할 만큼 숭고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 옷은 최근 런던에 갔을 때 본드 가에 있는 양장점에서 산
것이었다. 예술적이고 낭만적인 기질의 여인들에게 유행하는 스타일로서
그리스의 카이튼이란 옷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손님은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손님의 뒤를 넘겨 보았다. 그러나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로버트 트리위는 어디 있단 말인가?
아, 정말 미안합니다. 화가는 인사를 나눈 다음에 이렇게 말을 이었다.
트리위는 정말 묘한 친구입니다. 마치밀 부인. 처음에는 오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못 오겠다고 하는군요. 배낭을 지고 여러 마일을 걸어와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 썼거든요. 그래서 그대로 집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그분은 안 오시는 건가요?
예, 안 옵니다. 저더러 대산 사과를 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언제 그, 그분과 헤어지셨나요? 그녀는 아랫입술이 몹시 떨리기 시작하여
마치 트레몰로와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그녀는 이 지겨운 상황에서 벗어나
어디서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금 막 저 건너 큰 길에서 헤어졌답니다.
예? 그렇다면 우리집 문 앞을 지나갔단 말씀인가요?
네, 우리가 문 앞까지 왔을 때... 정말 훌륭한 문이더군요. 제가 봤던 현대식
철문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거기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자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 친구는 작별을 하고 돌아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지요.
사실 그는 지금 기분이 우울해서 어떤 사람도 만나기 싫다더군요. 참 좋은
친구고 다정한 친구입니다만 땔고 안정을 잃고 우울해질 때가 있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요. 그 사람의 시는 취향에 따라서는 너무
에로틱하고 정열적이 면이 많아요. 그는 어제 발간된 잡지에서 굉장한 혹평을
받았답니다. 정거장에서 우연히 그것을 읽게 된 거지요. 아마 부인도
읽으셨겠지요?
아니오.
읽지 않기를 잘 하셨습니다. 생각할 값어치도 없는 글이죠, 그 잡지를
팔아주는 편협한 구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쓴 글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는 그 글을 보고 화를 냈습니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엉뚱한 비난 때문이었습니다. 정당한 공격이야 참을 수 있지만, 반박할
수도 없고 퍼지는 것을 막을 수오 없는 거짓말은 견딜 수 없다고 하더군요.
트리위의 약점은 바로 이런 데 있어요. 그는 혼자서 살기 때문에 사교계나
상업계의 번잡한 세계에 살았다면 아무렇지 않을 것에도 마음의 큰 상처를 받곤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오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너무 최신식이고 이거
실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돈이 많아 들어가 보인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여기에는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마 아셨을 텐데요! 혹시
이 주소로 띄운 편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못 들으셨어요?
예, 예, 그 말은 들었습니다. 존 아이비라고요. 아마 그때 여기 와 있던
부인의 친척일 거라고 생각하더군요.
그분께서 아이비를 좋아하신다는 말은 없으셨어요?
글쎄요, 아이비라는 사람에게 흥미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시에 관해서는요?
제가 알기에는 그의 시에도 별 흥미는 없는 것 같더군요.
로버트 트리위는 그녀의 집이나 시나 그것을 쓴 사람에게 전혀 흥미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게 되자마자 아이들에게로
달려가서 그들에게 마구 키스를 퍼부움으로써 상한 감정을 씻어 버리려고 애를
썼지만 아이들마저 그녀의 남편처럼 평범해 보인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혐오감이 치솟았다.
우둔하고 순진한 풍경 화가는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은 그가 아니고
트리위뿐이라는 것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는 이
방문을 매우 즐겁게 생각하였으며 엘라의 남펴과 어울려 다니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엘라의 남편도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그 근처를 모조리
구경시켰지만 그들은 모두 엘라의 상한 기분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화가가 떠난 지 하루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그녀는 이층에 혼자
앉아 방금 배달돤 런던 신문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하였다.
시인의 자살
장래가 촉망되는 서정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최근 몇 년가 잘 알려진 토버트
트리위씨는 지난 토요일 밤 쏠런트에 있는 그의 숙소에서 권총으로 바른편
관자놀이를 쏘아 자살하였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는 최근 새로운 시집을
내어 지금보다 훨씬 광범위한 독자들의 주의를 끌고 있다. [미지의 여성에게
드리는 서정시]라는 제목으로 엮은 이 시집은 대개 정열적이 시편으로서 그것이
전달하는 감정의 폭넓은 때문에 이미 칭송을 받은 바 있지만, 한 잡지에서
신랄한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잡지가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으며 그와 같은 비평이 지상에 실린 후로 그가 매우 침울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 글 때문에 이런 슬픈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나 추측되고
있다.
수사 결과에 대해서도 보도되어 있었으며, 멀리 있는 친구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도 실려 있었다.
친애하는 벗에게
이 편지가 미처 자네 손에 들어가기 전에 아는 이미 내 주위의 것을 더 이상
보고 듣고 알게 되는 괴로움을 면하고 있을 걸세. 나는 나의 이 처사가
타당하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네만, 그태아ㅕ 자네에게 구구한 설명을 늘어놓아
번거롭게 하고 싶자는 않네. 만일 하나님께서 니게 어머니나, 누이나, 그밖에
날 몹시 아껴주는 여성을 보내 주셨더라면 나는 내 생명을 더 연장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네. 그러나 자네도 알다시파 나는 오랫동안 이와 같은,
찾을 수 없는 여인을 동경했다네. 아다시피 그녀가, 발견할 수도 없고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여인이 내 마지막 시집에 영감을 불어 넣었네. 세상에는 구구한
말들이 떠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환상의 여인에 불과했으며 실제하는
여인은 아니네.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만날 수 없었고, 끝내 얻은 수
없었다네. 어느 여인이든 나를 가혹하고 거만하게 취급했기에 내 자살을
빚었다고 비난받게 하고 싶지 않으므로 이 점을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네. 하숙집 주인에게 이런 불미스런 일을 저질러 죄송하다고
전해 주게. 그렇지만 내가 그 방에 묶었다는 것은 아마 곧 잊혀질 걸세. 비용을
치를 만한 돈은 내 이름으로 은행에 예금되어 있네.
엘라는 얻어맞은 듯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옆방으로 달려가서 침대에 얼굴을
묻고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슬픔과 괴로움은 그녀를 갈기갈기 조각나 수천 조각으로 부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 시간 이상이나 격한 슬픔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의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오, 만일 그가 나를 알기만 했더라면... 나를, 나를
알기만 했다면! 내가 그를 만나기만 했다면. 단 한 번이라도, 그래서 그의
뜨거운 이마에 내 손을 얹고... 키스를 했더라면...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줄 수 있었다면... 그를 위해 어떤 수치나 비방도 달게 받고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겠다는 것을 알려줄 수만 있었다면! 그랬더라면 그 귀중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것인데... 그렇지만, 아냐... 그건 허용될 리 없어. 하나님은
질투가 심하거든. 그이와 나에게는 그런 행복이 허용될 리가 없지.
모든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영영 만날 가망이 없어져 버렸다. 그런
시간은 결코 실현될 수 없었지만, 그녀의 환상에는 지금까지도 만남의 순간이
보이는 듯했다.
존재할 수도 있었지만 이젠 영원히 사라진 시간
남자와 여자의 마음이 잉태해 낳았건만
그러나 그런 시간이 불가능한 삭막한 삶
그녀는 가능한 한 억제된 문체로 쏠런트씨에 있는 숙소 집주인에게 제 3자의
입장으로 편지를 썼다. 후퍼 부인에게, 마치밀 부인이 신문에서 그 시인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읽었으며, 후퍼 부인께서도 아다시피 코버어그 저택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트리위씨에게 커다란 흥미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의 관
뚜껑이 덮이기 전에 그의 머리카락을 조금 얻어서 보내주면 기념으로 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진틀에 있던 사진도 함께 보내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부탁한
다음 1파운드의 우편환을 동봉하였다.
회신 우편으로 요청한 물건이 든 편지가 왔다. 엘라는 사진을 받아들자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비밀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흰
리본으로 매어 고이 품속에 간직하고 아부도 보지 않는 곳에서 가끔씩 꺼내어
입을 맞추었다.
대체 그게 뭐요?
한 번은 그녀가 그러고 있을 때 신문을 보던 남편이 쳐다보며 물었다. 뭘
보고 우는 거요? 머리카락을? 대체 누구의 머리칼이오?
죽었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누가?
당신이 굳이 요구하지 않으시면 지금은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 속에는 침통한 느낌이 서려 있었다.
그래, 알겠소.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겠죠?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그럼, 그렇게 해요.
그는 특별한 곡조도 없는 휘파람을 불면서 나가 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시에
있는 공장에 도착하자 다시 그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도 쏠런트씨에 묶었던
집에서 자살극이 벌어진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아내가 그의 시집을
보고 있던 것을 기억했으며 그들이 쏠런트씨에서 머물 때 집주인이 트리위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도 기억났다. 그는 갑자기 외쳤다. 물론 그 녀석일 거야.
대체 그 녀석을 무슨 재주로 알게 되었담. 여자란 참으로 교활한 동물이란
말이야!
그는 그 문제를 잊어버리기로 하고 차분히 사무를 처리했다. 이때쯤 집에
있는 엘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후퍼 부인은 머리카락과 사진을 보내면서
장례식 날짜도 알려 주었다. 시간이 지나 점심 무렵이 되자 그의 묘지가 어딘지
알고 싶은 마음이 이 동정심 많은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제 그녀는
남편이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괴한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 지 거의 개의치
않고, 그날 오후와 저녁은 집을 비우고 내일 아침에 돌아오겠다는 간단한
쪽지를 마치밀 앞으로 적어 놓았다. 그녀는 책상 위에 쪽지를 남겨두고
하인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는 걸어서 집을 나섰다.
마치밀씨가 오후 일찍 집으로 돌아올 때 하인들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모는 그를 조용한 방으로 안내하며 지난 며칠 동안의 부인의 태도로 보아
부인은 너무나 큰 슬픔에 잠겨 있으므로 혹시 투신자살이라도 하러 나선 것이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마치밀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내가
그랬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집안 사람들에게 행방은 밝히지 않았지만
자기를 기다리느라고 밤을 새지는 말라고 당부한 뒤 집을 나섰다. 그는
정거장으로 달려가 쏠런트씨행 열차를 샀다.
그는 급행을 타고 나섰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위가 컴컴했다.
그는 아내가 자기보다 먼저 떠났다면 완행차밖에 없으므로 그녀가 자기보다
별로 빨리 도착하지는 못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쏠런트씨는 이제 제
철이 지났기에 길거리는 몹시 쓸쓸하고 마차도 드물고 요금이 쌌다. 그는
묘지로 가는 길을 물어 곧 그곳에 다다랐다. 문은 잠겨 있었다. 묘지 관리인은
경내에 아무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문은 열어 주었다. 그는 관리인의 설명을
따라 그날 매장한 묘지가 있다는 구획을 향해 꾸불꾸불한 길을 더듬어 갔다.
그는 풀뿌리에 발끝을 채이기도 하고 말뚝에 걸리기도 하면서 가끔 몸을
구부리고 사람의 모양이 보이지 않나 두루 살폈다.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있는 지역에 이르게 되었는데 거기 새로 묻은
무덤 곁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녀도 그의 발소리를
듣고 땅에서 벌떡 일어섰다.
엘! 이게 무슨 바보 짓이오? 그는 격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집에서
뛰쳐나오다니, 나는 그런 일은 상상도 못했소! 그렇다고 이 가엾은 사나이를
질투하자는 게 아니오. 그러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셋씩 가지고 머지않아
넷째가 탄생할 당신 같은 여인이 죽은 옛 애인에게 정신을 잃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요! 당신은 여기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아마
밤새도록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그 사람과는 갚은 관계를 맺지 않았길 바라오.
그런 모욕적인 말은 입에 담지 마세요, 윌.
명심해요. 난 이런 일은 더 이상 용납 못하겠오. 알겠소?
알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그녀의 팔을 끼고 묘지 밖으로 나갔다. 그렇지만 그날 밤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초라한 모습을 남의 눈에 띄고 싶지도 않아서 그는 아내를
정거장 근처에 있는 허술한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곳을 떠났다.
말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결혼 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불협화음의 일종이라는
생각에서 그들은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고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오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하였다.
여러 달이 지나갔다. 두 사람은 아무도 감히 이 일에 대해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엘라는 너무 자주 슬프고 무력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 같았으며,
시름시름 앓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 했다. 그녀에게는 네 번째 해산의
괴로움을 겪어야 할 날이 점점 다가왔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기운이
나게 하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이겨 낼 것 같지 않아요. 어느 날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다.
원, 그런 소리가 어디 있소? 지금까지 잘 견뎌 왔는데, 이번이라고 못할 게
뭐 있소?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 꼭 죽을 것 같아요. 넬리와 프랭크와
티니만 아니라면 차라리 그쪽이 나을 것 같아요.
나는 어떡하구?
당신이야 저를 대신할 사람을 곧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당신은 마땅히 그럴 권리가 있어요.
정말이에요.
엘, 당신은 아직도 그... 시인 친구를 못 잊는 게 아니요?
그녀는 남편의 이와 같은 비난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이번에는 병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요. 그녀는 되풀이했다.
틀림없이 그럴 거라는 예감이 들어요.
이와 같은 생각은 흔히 그렇듯이 나쁜 일의 시작이 되는 법이다. 그래서
6주일이 지난 오월 어느 날, 맥도 없고 핏기도 없는 그녀는 숨을 쉬는 것조차도
힘겨워 하며 누워 있었다.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아이를 낳기 위해 그녀는
살찌고 건강한 육체와 서서히 작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임정하기 전에
마치밀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윌, 저는 당신에게 그 일, 당신도 아시겠지만 우리가 쏠런트씨에 갔을 때
일어날 일을 숨김없이 고백하고 싶어요. 내가 무엇에 사로잡혔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당신, 남편인 당신을 그렇게 잊어버릴 수 있었는지 저도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저는 병적인 상태였고, 당신은 친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제 지식 수준이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고, 반면
그 사람은 저와 같은 수준이거나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또 다른
애인을 필요로 했다기보다는 좀더 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원하고 있었나
봐요.
그녀는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남편에게 이야기하지 못한 채 몇 시간 후에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윌리엄 마치밀은 여러 해 동안 참아 온 남편들이
그러하듯이 지난날의 질투로 말미암아 마음이 산란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미 죽어 자기에게 아무런 불편도 끼칠 수 없는 사내에 대한 애정 고백을
아내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내가 죽은 여러 후에 재혼할 여인을 집안에 맞아들이기 전에
없애버릴 생각으로 잊었던 편지들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봉투 속에서 한 줌의
머리카락과 시인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뒤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는 데 죽은
부인의 필체였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쏠런트씨에 머물던 때였다.
마치밀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어머니의 죽음을 초래한 막내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아니는 벌써 걸어다니며 수선을 떨 나이였다. 그는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아이의 얼굴과 자세히 비교했다.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설명하기는
곤란한 자연의 술책으로 그 아이의 닮은 모습에는 분명히 엘라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남자와 닮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시인의 꿈꾸는 듯하고
독특한 표정이 마치 생각을 물려받았다는 듯 아이의 표정에 서려 있었으며
머리카락도 같은 색이었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까. 마치밀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놈하고 하숙집에서 놀아났었군! 어디 보자! 날짜가 8월 둘째주고 태어난 것이
5월 세 번째주니...그래...그랬었군. 저리 가라! 이 못된 놈아. 넌 나와는 상관없는
놈이다!
외날개의 새
사랑은 그 자체와 지극히 혼동하기 쉬운 두 개의 유사물을 가지고 있다.
육욕과 환상이 그러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또한 사랑의 두 날개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랑은 그 두 날개 중 어느 것이 없어도 온전하게 날지 못한다.
[환상을 쫓는 여인]은 바로 그런 불구한 사랑과 그것이 집어내는 엉뚱한
비극이다. 여주인공 엘라는 겉보기로는 유복하면서도 별 특징 없는 유부녀지만
내면으로는 엄청난 열정과 욕구를 지닌 여인이다. 남편은 현실적으로는
유능하고 합리적인 사람일지 몰라도 사신을 숭앙하는 엘라에게는 다만
물질적이고 둔감한 속인으로만 느껴진다. 요컨대 육욕은 채워줄 수 있어도
환상을 품게 할 수는 없는 인간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시인 트리위를 향한 엘라의 사랑은 어쩌면 남편과의
사랑이 달아주지 못한 환상의 날개를 갖추기 위한 엘라 나름의 절실한
노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상을 달리하다 보니 결국 두 사랑은 모두
불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직 환상만으로 사랑을 꿈꾸다 절망한 트리위가
끝내 엘라의 사랑을 알아채지 못하고 자살하자 비극은 차례로 전염된다.
먼저 비탄으로 쇠약해진 엘라가 아이를 낳다 죽고 육체 없는 사랑이었기에
오히려 과장되어 남겨진 그 살의 유물들은 남편까지 불행으로 몰아넣는다.
뒤늦은 배신감과 분노로 정신을 잃은 남편은 멀쩡한 제 자식을 죽은 아내의
부정이 끌어들인 남의 핏줄로 단정하는 지경에 이른다.
작가 토마스 하디는 19세기 후반의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원래는 건축을
공부하다가 당시의 인기소설가인 메레디스에게 인정받아 문단에 나왔다.
우리에게는 그의 대표작인 [테스]와 [귀향]으로 잘 알려져 있고 그밖에
[케스브리지의 시장] [미천한 사람 주드] 그리고 만년에 쓴 3부작 [패왕]등이
있다.
하디는 비극주의적 정명론을 자신의 철학으로 신봉했는데 그 흔적은 [환상을
쫓는 여인]에도 엿보인다. 엘라와 그 남편, 그리고 시인 트리위가 겪게 되는
불행은 개인의 능동적 선택이라기보다는 그가 말한 내재의지 에 의해 결정된
불변의 인간형을 바탕으로 설명되고 있다.
별
알퐁스 도데
프로방스 지방, 어느 목동의 이야기
뤼브롱 산에서 양들올 지키고 있을 무렵, 나는 초원 속에서 혼자사냥개
라브리와 양들을 데리고 몇 주일 내내 사람의 그림자 하나구경 못한 채 지내고
있었습니다. 가끔 몽 드뤼르의 수도자들이 약초를 찾아 이곳을 지나가기도 하고,
삐에몽 주변 숯장사의 시커먼 얼굴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이들은 사람들과의
접촉이 없는 소박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별로 말이 없었고, 이야기하는
홍미조차 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저 아래 마을이나 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숩니다. 그래서 보름마다 반
달치의식량을 가지고 산길을 올라오는 농장 노새의 방울소리가 들릴 때, 어 린
머슴아이의 쾌활한 얼굴이나 늙은 노라드 아주머니의 붉은 두건이 차츰 언덕
위로 나타날 때면 나는 정말 한없이 기뻤습니다. 나는저 아래 마을 소식, 영세
받은 일, 시집가고 장가간 일들에 대한 이 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우리 주인집 딸 스떼파네트 아가씨의
소식을 듣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인근 주위에서 아가씨보다 더 예쁜 처녀는
없었습니다. 나는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체하면서 아가씨가 잔칫집에 자주
초대받으며 야회에도 많이 나가는지, 여전히 새로운 남자 친구들이 아가씨를
찾아오는지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불쌍한 산의 목동인 나에게 그런 일들이
무슨 소용이 될 수 있었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내 나이 스무 살이었고, 스떼파네트는 이제껏 내가 본 여성 중 가장
아름다웠노라고,
그런데 어느 일요일, 기다리고 있던 보름치의 식량이 아주 늦게서야
도착하였습니다. 아침 나절에는 '대미사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고있었고, 점심
때에는 심한 소낙비가 내렸으므로 길이 나빠 노새가 떠 나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3시경이 되자까침내 하늘이 씻은 듯이 개고, 산은
물기와 해빛으로 빛나는데, 나 뭇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물이 불은
시냇물이 넘치는 소리에 섞여 노새의 방울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부롸절에울리는 교회의 종소리만큼이나 맑고 경쾌했습니다. 그런데
노새를이끌고 온 것은 머슴아이도 노라드 아주머니도 아니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바로 우리 아가씨였습니다. 아가씨 자신이었습니다.버들 바구니
사이에 몸을 똑바로 세우고 앉아 있는 그녀는 소낙비 뒤의 시원한 산바람을
맞아 뺨이 온통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머슴아이는 앓아 누웠고 노라드 아주머니는 말미를 얻어 자식들집에 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쁜 스떼파네트가 노새에서 내리며 내게 이 모든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는 도중 길을 잃어서 늦어졌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러나 꽃 리본과 화려한 치마와 레이스로 성장한 아가씨는 숲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맸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무도회라도 들렀다오느라 늦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오, 귀여운아가씨 ! 그녀를 아무리 쳐다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습니 다. 정 말 내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를 본 적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겨울에 양떼를 데리고 들판으로 내려가면, 나는 농장에 가서 저녁
식사를하였는데, 그때 언제나 화려한 옷차림을 한 아가씨가 하인들에게 말
을건네지도 않은채약간 으스대며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은 가끔 있었습니다만
그런데 지금 그 아가씨가 이렇게 내 앞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나 하나를
위해서 그래도 내가 정신을 잃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스떼파네트는 바구니에서 식량을 다 끄집어내고는 신기하다는 듯 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아가씨는 금방 때묻을 것만 같은 나들이 옷의 고운
치맛자락을 들어올리고는 양 우리 안으로 들어오더니, 내 잠자리며, 양피를 깐
짚방석이며, 벽에 걸린 커다란 외투며 지팡이며 석총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모두
아가씨에게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이런 데서 살고 있군요? 가엾어라! 항상 혼자있으니 얼마나
따분할까! 무얼 하며 지내세요? 무슨 생각을 하지요? "
나는 '아가씨, 당신을' 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말했어도 거짓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단 한 마디의 말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가씨는 분명히 그것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그러니 심술궂은
아가씨는 이런 장난스런 질문으로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들고 좋아했던 것이지요,
"애인이 가끔 당신을 만나러 오지요? ······그건 틀림없이 황금빛 양이
아니면, 산꼭대기만을 뛰어다니는 선녀 에스테렐일 거야······."
그런데 이런 말을 나에게 하고 있는 아가씨 자신이야말로 머리를뒤로 젖히고
예쁘게 웃는 모습이나 유령처럼 왔다가 급히 가 버리는것이 마치 선녀
에스테렐인 것 같았습니다.
"잘 있어요."
"아가씨, 안녕."
아가씨는 빈 바구니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녀가 비탈길을 따라 사라져 갔을 때, 노새 발굽에 채여 구르는 조약돌
하나하나가 나의 가슴 위에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질 무렵까지 잠에 취한 듯
꿈이 깰까봐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저녁이 되어 깊은 골짜기에 푸른
빛이 감돌기 시작하고, 양들이 소리내어 울며 서로 밀치고 우리로 돌아올
무렵이었습니다. 비탈길에서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리 아가씨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난것입니다.
얼마 전의 명랑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옷이 물에 젖은 채 추 위와
무서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아가씨가 산 아래 이르렀을 때, 소낙비 때문에
소르그 냇물이 불어 있었는데, 무리하게 건너려고 하다잘못하여 물에 빠졌던
모양입니다. 딱하게도 밤이 된 이제 농장으로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가씨혼자서 지름길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내가 양떼를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산에서 밤을
보낸다면 무엇보다도 집안 식구들이 걱정하리라는 생각에 아가씨는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아가씨 마음을 안심시키려고 하였습니 다.
"아가씨, 7월의 밤은 짧으니······ 잠깐만 고생하면 되지요."
그리고 나는 아가씨가 소르그 냇물에 흠뻑 젖은 발과 옷을 말리도록 급히 불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우유와 양젖 치즈를 아가씨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가엾게도 아가씨는 불을 쬐려하지도 않고, 음식을 먹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가씨의 눈에 굵은 눈물 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나도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완전히 밤이 되었습니다. 뿌연 햇살과 희미한 석양빛이 산정
위에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아가씨가 우리 안에 들어가 쉬도록 했습니다.
깨끗한 짚 위에 고운 새 모피를 깔아 놓고,아가씨에게 잘 자라고 이른 다음
밖으로 나와 문 앞에 앉았습니다.사랑의 불길에 혈관이 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티끌만큼의 나쁜 생각도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하느님은 믿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안 한구석에서 잠든 아가씨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있는 양들 곁에서-다른 어느 양보다도 더 소중하고 순결한 양인 양
주인집 따님이 나의 보호 아래 마음놓고 잠들어 있다는 자랑스런생각 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늘이 그처럼 아득하고 별들이 그처럼 빛 나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홀연 양 우리의 빗장문이 열리더니 스떼파네트
아가씨가 나타났습니다. 아가씨는 잠을 이룰 수가없었던 것입니다. 양들이
움직여서 짚더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내는가 하면, 꿈을 꾸며 울어댔던
것입니다. 아가씨는 불 곁으로 나오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오는 것을 보자 나는내 양 모피로 그녀의 어깨를 덮어 주고 불꽃을 더 강하게
지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별빛을 바라보며 밤을 보낸 적이 있으시다면, 우리가 잠드는 시각에또 하나의
신비스런 세계가 고독과 정적 속에서 눈을 뜬다는 사실을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때, 샘물은 더욱 맑게 노래하며, 연못에서는작은 불꽃들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산의 정령들이 자유롭게 오고 가며, 대기 속에서는 잘 분간할
수조차 없는 음향과 가볍게 스쳐가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한 음향들은
마치 나뭇가지가 자 라고 풀잎이 돋아나는 소리와도 같이 들리는 것입니다.
낮이 생물들의 세상이라면 밤은 사물들의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밤과친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밤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아가씨는
몸을 후들후들 떨며 아주 작은 소리만 나도 내게 몸을 바싹 붙 이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길고 구슬픈 음향이 저 아래 반짝이고있는 연못으로부터
우리들 있는 곳을 향해 메아리쳐 왔습니다. 바로그 순간 아름다운 유성 하나가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소리나는 쪽으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마치 방금 들은 저
구슬픈 음향이 빛을 이끌고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게 뭐죠?"
'과 함께 그들의 친구'별의; 결혼식에 초대받았더랍니다.병아리집은 성질이 아주
급해 제일 먼저 길을 떠나 윗길로 갔다는군요. 저것 보세요.저 위에 아주 하늘
한복판에있지요.'세명의왕'은아랫길로 질러가서 제아리집'을 따라갔답니다.
그러나 느림보인 '쟝 드 밀랑'은 너무 늦게까지 자고 있다가 아주 뒤에 처지고
말았지요. 그 래서 화가 난 그는 두 친구를 멈춰 서게 하려고 지팡이를
던졌답니다. 그래서 세명의 왕을 쟝 드 밀랑의 지팡이라고도 부르지요-그러나
모든 별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우리를의 별인 '목동의별'이랍니다. 새벽에
우리들이 양떼를 몰고 나갈 때, 또 저녁이 되어양떼를 몰고 들어올 때, 저 별은
우리들 앞에서 빛나고 있지요. 우리들은 이것을 '마글론느'라고도 부른답니다.
예쁜 '마글론느'는 '프로방스의 베드로(토성)'의 뒤를 쫓아가서 칠년에 한 번씩
그와 결혼을 한
답니다."
"뭐라구요!별들도 결혼을 하나요?
"그럼요."
그리고 별들의 결혼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했을 때, 나는 무엇인가신선하고
보드라운 것이 어깨 위에 가볍게 얹히는 것을 느꼈습니다.내게 살포시 기댄
것은, 잠이 들어 묵직해진 아가씨의 머리였으며,리본과 레이스, 그리고 물결치는
머리카락이 함께 부드럽게 스쳤습니다.
아가씨는 날이 밝아 하늘의 볕들이 희미하게 사라질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그렇게 있었습니다. 마음 속이 약간 두근거렸지만, 아름다운 생각만을 보내준
청명한 밤의 신성한 보호를 받으며 나는 잠들어있는 아가씨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별들이 양떼처럼 말없이 조용한 운행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별들 가운데서 가장 곱고 가장 빛나는 별이 길을
잃고 내려와내 어깨 위에서 잠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멀고 잡을 수 없는 것의 아름다움
이 짧은 아름다운 소설이 준 감동은 지금에 와서 되돌아 보기조차가슴 서늘한
시절의 추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 1966년 가을 다급한 마음으로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하게 된 나는 고등학교 2, 3학년 교과서를 한꺼번에 사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나흘을 기한으로 국어교과서부터 통독해나가기 시작했는데 '별은 바로
3학년교과서에 실려있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가 '별을 읽은 날은 햇볕 쨍쨍한 가을날 아침이었다.
여름내 나를 괴롭힌 질병에서 완전히 놓여나지 못 한 몸으로 2학년 교과서를
정성 들여 통독하느라 한 이틀 무리한 탓 에 미열까지 느끼며 3학년 교과서를
펴든 나는 이내 별과 만났다. 실제로 그 단편소설이 교과서 맨 앞에 실려
있었는지 아니면 그 무렵의 독서습관대로 재미있는 것부터 읽어나가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 읽고 난 나는 조금 전까지의 미열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신열을 느끼며 내
골방 창문을 굳게 닫았다. 바깥의 쨍쨍한 햇볕이 방금 내가 받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다쳐놓을까 두려워서였다. 그리고 중요한 시험을 두 달 앞둔 내
다급한 처지도 잊은 채 하루 종일 어두운 골방에서 몽롱한 감상에 젖어
보내다가 해가 진 뒤에야 겨우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고백하면 나는 결국
그해 시험에서 수학이 과목낙제를 당하는 바람에 이듬해 봄에야 대학에 진학할
자격을 얻 게 되었는데 그해의 실패에는 몽롱한 감상에 젖어 보낸 그 하루또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때 내가 그토록 큰 감동을 받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내 나이가 그 목동과
같았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나도 한창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그리움, 이를 수
없는 곳에의 동경에 빠져 있었다. 열정은 대상이 추상화될수록 오히려
치열해지고, 맑고 깨끗함이 아름다움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던 시절이었다. 그런
내게 별처럼 멀고 잡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사랑을 그토록 맑고 깨끗하게
그려낸 소설은 감동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나이 들고 세상일에 닳아빠진 심성으로 '별을 다시 읽고 느끼는 감동이
옛날과 같을 수는 없다. 이 목동의 사랑이 성숙한 사랑으로 가기 전의 어떤
원형적 감정인지 아니면 사랑이 지향해야 할 어떤 승화된 단계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육욕과 타산에서 유리되고 어리석은 독점욕이나
복수심과도 같은 '공격성을 수반하지 않는 이러한 종류의 감정도 사랑의 한
중요한 양태라는 것은 분명하며, 그런 뜻에서 이 '별은 사랑을 주제로 한 단편의
한 전범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작가 알퐁스 도데는 그의 단편들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다. 그는 이 '별이
들어있는 "풍차방아간 소식이라는 단편집으로 유명해졌고 우리 국어교과서에
실린 또 다른 작품 '마지막 수업이 들어있는 "월요이야기란 작품집으로 탁월한
단편작가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사실주의 계열의 장편도 여럿 썼으나
단편에서처럼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듯하다.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
야르투르 슈니츨루
덥지도 춥지도 않은 5월 어느 날 밤 블래레 했은 '밤의 여왕(모짜르트와 쉬카
네더 공동창작 오페라 '마적 에 나오는 여가수 역할 :역주)' 역으로 오랫만에
다시 무대 위에 나타났다. 이 여가수는 거의 두 달씩이나 오페라에 출연하지 않
았었는데, 그 이유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3월 15일 리하르트 베
덴브루크 대공이 말에서 떨어져, 수시간 병상에 누워 있다가 그만 세상을 뜬 사
건이 있었는데, 이때 그 수시간 동안 줄곧 클래레가 그 곁에 있어주었고, 결국
그는 그녀의 품 안에서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클래레는 심히 낙망하였으며, 그
래서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녀의 생명을, 그 다음에는 그녀의 이성을, 그리고 최
근까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심히 걱정스러워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걱정도 처음 두 가지 걱정처럼 전혀 쓸데없는것이었다는 게 곧
드러났다. 그녀가 다시 관중 앞에 섰을 때, 관객들은 친형하고도 기 대어 린 마
음으로 그녀를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 이 미 첫번째 긴 아리아가 끝난 후 그녀
와 절친한 벗들은, 그녀와 그렇게 가깝지 않은 다른 벗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
을 수 있었다. 5층 관람석에서 있던 패니 링아이저양의 동안은 기쁨의 빛을 발
하였고, 상위 열에 앉은 고정 팬들도 이 패니양의 동료,에게 이해심 깊은 소리
없는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은 패니양이 그저 마리아힐프 가(비엔나의 제6
구역으로 서쪽 근교:역주)의 장식 레이스 상인 딸 에 불과하지만 이 인기 여가
수의 몇 안되는 가까운 친구이며, 가끔오후 간식 시간에 그녀의 초대를 받는 터
이고, 작고한 대공을 남몰래사랑해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중간 휴식 시
간에 패니양은 주 위 남녀 친구들에게, 이 '밤의 여왕' 역으로 클래레가 다시 등
장한 것 은 라이젠보그 남작의 아이디어이며-이는 이 역할의 의상이 그녀의기
분상태와 일치 한다는 걸 감안한 것이 었다고 말해 주었다.
남작 자신은 오케스트라에 인접한 좌석, 그러니까 항상 그런 것처럼, 중앙통로
제1열 귀퉁이 좌석에 자리잡고 앉아서 인사를 건네오는 친구들에 게 매력 적 이
지만 거의 고통스러운 웃음으로 응답하고 있 있다. 오늘은 갖가지 기억들이 그
의 머리를 스쳐가고 있었다. 남작은10년 전부터 클래레를 알고 있었다. 원래 그
는 팔강 머리에 늘씬한어떤 젊은 여인이 예술가 수업을 쌍는 것을 도와주고 있
었다. 그런데아이젠슈타인 음악학교의 연극의 밤에 이 여인이 미뇽 역으로 데
뷔하는 자리에 남작이 참석했다가, 이 여인이 출연한 장면에서 필리네역을 맡
아 노래하는 클래레를 보았던 것이다. 당시 남작은 스물다섯의 나이에 독신이
었고 물불 가리지 않을 때였다. 그는 미뇽 역 여인과의 관계에 개의치 않고, 공
연 후 나탈리에 아이겐슈타인 부인을 통 해 자신을 클래레에게 알리고는 자신의
마음, 재산 그리고 총감독과의 인간관계 등을 모두 그녀에게 맡기겠노라고 선언
하였다. 클래레는 당시 체신부 중간 간부의 미망인인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어
떤의대생한테 빠져 있었다. 그녀는 가끔씩 시 외곽의 알저포어슈타트구역에 있
는 이 대학생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잡담을 나누곤 하는 사 이였다. 그녀는 남작
의 열화와 같은 구애를 거절했지만, 이런 찬사때문에 마음이 온화해져서 이 의
대생의 애인이 되었다. 클래레가 자 신의 애정관계를 남작에게 숨김없이 털어놓
자, 그는 다시 빨강 머리여자에게 돌아섰으나 클래레와 친분관계는 계속 유지해
나갔다. 그 는 핑계거리를 만들어주는 축제일마다 그녀에게 꽃과 봉봉 과자를보
내었고 가금씩 이 체신부 간부 미망인의 집을 인사차 방문하기도하였다.
가을에 클래레는 데트몰트 극장과 최초의 계약을 맺었다. 라이젠보그 남작은-당
시 중앙청 관리였다-첫번째 성탄절 휴가를 이용하여 클래레가 새롭게 체류하게
된 그곳을 방문하였다. 그는 의대생이 의사가 되어 지난 9월에 결혼했다는 사실
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새로운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되나 클래레는 여전히
꼿꼿한 태도로, 남작이 도착하자 그에게 자신이 궁정 극장의 테너 가수와 사랑
하는 사이임을 밝혔다. 때문에 남작은 클래레와 시내의 숲에서 플라토닉한 산책
을 하고 그후에 그녀의 동료들과 어울려 극장 안의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한 것 외에는 특별히 기억할 만한 일을 데트몰트에서 만들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데트몰트를 자주 왕래했고,예술감각적인 호감에서 클래레의 괄목할 만한
발전에 큰 기쁨을 느 꼈으며, 문제의 테너 가수가 계약상 함부르크로 가게 되어
있는 다음해 시즌에 대해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 해에도 실
망할 수밖에 없었다. 블래레가 폴란드 출신의 루이스 베르하옌이라는 거상의 구
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있다.
클래레는 세번째 시즌에 드레스덴 궁정 극장의 초빙을 받았다. 이 때 남작은 아
직 젊은 나이 임에도 전도가 양양한 국가 관리로서의 출세길을 포기하고 거주
지를 드레스덴으로 옮겨갔다. 이제 그는 매일저녁 클래레와 그녀의 모친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는데,이 모친은 딸의 모든 애정 관계에 대해서 짐짓
전혀 모른 체 해줄 만큼 영리했다. 그는 새롭게 꿈을 구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
스럽게도그 폴란드 상인에게는 고약한 습관이 있었다. 매번 편지에다 다음 날
자기가 을 것이라 예고하였고, 애인을 일단의 자기 첩자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였으며, 더욱이 그녀가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 을 경우, 그녀를 극히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상인은 한
번도 찾아온 적 없이 클래레를 점 차적으로 극도의 신경과민 상태에 마뜨려 갔
기 때문에, 라이젠보그남작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이 문제를 종결시키
기로 결심하고 그 사람과 개인적으로 담판 싯기 위해 데트몰트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상인은 클래레에게 보낸 자신의 사랑의 편지나위협의 편지
가 단지 기사도적인 견지에서 쓴 편지라고 설명하면서,앞으로 그런 의무감에서
벗어난다면 자신에게 그것보다 더 환영할일이 없으리라고 남작에게 천명하였다.
라이젠보그는 행복한 마음으로 드레스덴으로 돌아와 클래레에게 이번 담판이 아
주 원만하게 마무리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감사해 하면서도 남작이 그
녀와의관계를 더 진척시키려 하자, 그런 시도를 단호히 거절하여 그에게 이 상
한 생각이 들게 하였다.
간략하지만 절박한 남작의 물음이 있은 다 음에야 그녀는 이윽고 고백하기를,
남작이 떠나있을 동안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카예탄 왕태자가 자신에게 격렬한
연모의 정을 느껴,자신의 청을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맹세했다는
것이었다. 왕실과 나라 전체를 슬픔에 빠지게 하지 않기 위해 그녀가 왕태자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엄청나게 찢겨진 마음을 부
여안고 라이젠보그는 드레스덴을 떠나비엔나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인간 관계를 작동시키기시작하였다. 클래레가 그 이듬해 비엔나 오페라와 계약
을 맺게 된 것 에는 그의 부단한 노력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성공적인 초청'
공연이 있은 다음 클래레는 10월에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비엔나에서
의 최초 공연 저녁, 그녀는 라이젠보그가 보낸 화려한 꽃바구니를 의상 보관실
에서 받았다. 이 꽃바구니는 청원과 회망을 동시에 드 러내고 있었다.
남작은 매료된 채, 공원 후에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으나 또 다시
선수를 빼앗긴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주 에 그녀는 상당히 비중이 있는 작곡
가이자 조감독이기도 한 금발의남성과 공부를 했는데 이 남자는 클래레로부터
권리를 인정받았고,그녀는 그의 권리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손상시키지 않으려
하였다.
그후 7년의 세월이 홀렀다. 이 조감독을 뒤이어 여러 남자들이 클 래레를 거쳐
갔다. 대담한 명 기수 클레멘스 폰 로데빌씨, 가끔자신이 지휘하는 오페라와 함
께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 가수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게 한 악장(훗장) 빈센
츠 클라우디씨, 트럼프로 오스트리아의 영지를 날리고 나중에 저지 오스트리아
에 있는 성 하나를 땄다는 호남자이며 악장인 알반 라토니 백작, 자기가 쓴 발
레대본에 붙일 음악 작곡을 위해 거금을 쓰기도 하고 자작 비극 공연을 위해 얀
츠 극장을 임대하기도 했으며 자작시를 영지에서 가장 얇은 고급지에 가장 아름
다운 글씨체로 인쇄하게 했다는 에드가 빌헬름씨, 불과 열아흡 나이의 예쁘장한
아마두스 마이어라는 신사-그 는 거꾸로 설 줄 아는 애완견 폭스테리어 말고는
가진 게 없었다. 이 마이어씨 뒤를 이은 인물이 바로 제국에서 가장 멋쟁이 신
사라는 리 하르트 베 덴브루크 대공이 있다.
클래레는 자신의 애정관계를 숨기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중류층의 가옥
을 지니고 있었고, 가끔씩 남편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 녀의 대중적인 인기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일요일마다 미사에참석하고, 한 달에 두 번씩 고해성
사를 하며, 교황께서 축성한 마돈나 상을 자신의 수호신으로 항상 가슴에 달고
다니고 또 기도를 드리지 않고는 결코 잠을 청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 등은 상류
층 사람들을 크게 감격시켰다. 가끔 자선 바자회가 개최되 었는데 그때 그녀는
직접 물건을 파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문 좋은 귀부인들이나 돈많
은 유태계 부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클래레와 함께 자신들의 물건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꼈다. 열광적인 젊은 남, 녀 팬들은 무대로 통
하는 문 곁에서 그녀를 오매불망지키고 서 있곤 했는데, 그녀는 이들을 향해 사
람 넋을 빼놓는 웃음으로 화답하곤 했다. 그녀는 선물 받은 꽃들을 그 인내심
많은 팬들에 게 나누어주곤 하였는데, 한 번은 의상실에 꽃을 잊고 두고 온 상
황에서 자신의 얼굴에 지극히 잘 어울리고 사람의 생기를 불러 일으키는비엔나
말씨로 이렇게말하는것이었다.'내정신좀봐,내가방금 살라트(꽃을 팬을 먹이는 '살
라트'로 나타낸 것임:역주)를 내 방에 두 고 잊고 나왔네! 이봐요 뭘 좀더 먹고
싶은 분들은 내일 오후에 저 한테 오세요." 그런 연후 마차에 올라타서 막 떠나
는 순간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커피도 한 잔 드릴게요!;
이런초대에 선뜻 응할 만큼의 용기가 있었던 팬은 소수에 불과하였는데이 소수
의 젊은 열성팬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패니 링아이저였다.클래레는 패니양과
농담섞인 환담을 나누는 참에 마치 태공비처럼 상냥하게 그녀의 가족사항을
물어보았고, 황홀해 하는 이 싱 싱한 처녀 아이의 수다가 맘에 들어 곧 한 번
다시 오라고 요청했다.패니는 이 요청에 응하였다. 패니는 곧 이 여가수 집안에
서 주목할만한 위치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그녀가 이렇게 된 것은, 클래레가그
녀에게 아무리 친밀하게 대해 오더라도, 자신은 클래레에 게 결코 진정한 친숙
함으로 응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가 거듭되면서패니양도 여러 번에 걸쳐
청혼을 받게 되었는데, 청혼자들은 대부분그녀가 무도장에 함께 춤추러 다니곤
했던 마리아힐프 가 공장주들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청혼들을 모두
퇴짜놓았다. 그녀는이제 어쩔 수 없이 정기적으로 클래레의 연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 있다.
클래레는 베덴브루크 대공을 3년 이상 줄곧, 그리고 그 이전의 어 떤 남성보다
더 심도깊은 열정으로 성실하게 대했던 터 였다. 수없이실망을 맛본 터였지만
결코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라이젠보그도 이제는 10년 전부터 갈구해 오던 행
복이 영원히 꽃피지 못할지도 모 른다는 걱 정을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남성에 대한 클래레의 호의가 흔들리는 기미만 있으면 언제든지, 어떤 경
우 어떤 순간에서라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위해,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에게
라도 이 별을 고했던 터 였다. 이 번에 리하르트 대'공의 급사 경우에도 마 찬가
지였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정말 처음으로 어떤 확신 때문이아니라, 그저 습
관적으로 그러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클래레가 너무너무 고통스러워 하여, 사람
들은 모두 그녀가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영원히 마감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녀는매일 묘지를 찾아가서 세상을 떠난 대공의 묘소에 꽃
을 놓았고, 화사한 옷들은 모두 벗어버리고 장신구들은 책상의 가장 깊숙한 서
랍 속 에 쳐박아버렸다. 영원히 무대를 떠나겠다는 그녀의 생각을 지우기위해
그야말로 진지한 설득이 필요했다.
대단한 성공으로 마무리된 복귀무대 뒤에, 그녀의 삶은 적어도 외 면적으로는
통상의 궤도를 가고 있었다. 약간 소원해졌던 예전의 벗 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음악 비평가 베른하르트 포이어슈타인은 점 심 식사 메뉴가 무엇이었건간에 자
켓에 시금치나 토마토 자국을 묻 한 채 나타나 클래레가 확실하게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남녀 동료들과 무대감독에 대해 욕설을 늘어 놓았으며, 리하르트의
두 조카인루치우스와 크리스티안은 베덴브루크 가문의 방계에 속한 이 들로,
이들은 예전처럼 클래레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지극히 공손하게 비위를
맞추려 애썼다. 또 프랑스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 신사와 체코의 피아노 명인이
새로이 그녀에게 소개되었다. 6월 10일 그녀는 처음으로 경마를 하러 나갔다.
그러나 문학적 재능이 없지 않은 루치우스 대공이, '그녀의 영혼만이 깨어났고,
마음은 여전히 살 폿한 잠 속에 빠져 있어' 라고 표현한 바 있었는데, 사실 그
말 그대로였다. 젊은 친구이든 나이든 친구이든 누군가가, 이 세상에는 부드러운
사랑파 격정 같은 것이 있다는 걸 아무리 넌지시 암시하더라도, 그녀에게서는
곧 미소가 사라지고, 눈은 어두운 빛을 발하였으며, 때 로는 이상야릇한 거부 동
작으로 손을 가볍게 쳐들기도 했다. 이 런 거 동은 그 어느 누구에게나 그리고
그 언제까지나 영향을 끼칠 것처럼보였다. 6월 후반부에 북구 출신의 가수
지그루트 욀세가 오페라에서 트리스탄 역을 맡아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완하게 고 상하지는 않았지만, 맑고 힘이 넘쳤다.
그는 대단히 큰 키였으나 비 만한 편이었고, 쉬는 상태에서의 그의 표정에는 특
별한 표현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러나 노래를 시작하면 곧 그의 금속성 잿빛 눈
은, 마 치 신비하게 타오르는 내부 불길에서 나오는 것 마냥 반짝였다. 그는목소
리와 눈빛으로 모든 사람들을, 특히 부인네들을 도취상태로 끌 어들였다.
클래레는 공연이 없는 동료들과 함께 특별 객석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노래에
감동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다음 날 오전에그녀는 극장 사무국에서
지그루트 욀세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어제공연에 대해서 그에게 친절하지만, 그
러나 거의 차가운 말 몇 마디를건네었다. 그날 오후 욀세는 청하지 않았는데도
클래레를 방문했다.라이젠보그 남작과 패니양이 동석했다. 그는 그들과 차를 마
시며 노 르웨이 작은 소도시에서 어부일을 하며 살아가는 자기 부모님에 대 한
이야기,여행을하던한영국사람이한외딴피오르드해안에하얀 요트를 타고와 정박하
였다가 자신의 노래 소질을 기적처럼 발견하게 된 이야기, 이탈리아 사람이었던
자기 아내가 대서양 상에서 신 혼여행을 하다가 사망하여 수장됐던 이야기 등
을 늘어 놓았다.그가 떠난 뒤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침묵에 젖어 있었
다. 패 니양은 가괌씩 빈 테라스를 건너다 보았고, 클래레는 피아노 앞에 덮 혀
있는 뚜껑 위에 팔을 괴고 앉아 있었다. 반면 남작은 말없이 걱정스러워 하며
의문 속에 빠져들었다. 대공이 죽은 후, 이 세상에 부드럽거나 격정적인 애정관
계 등 살아가는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모든 암시에 대해서 클래레는 예의 진기
한 거부 동작을 취하곤 했었는데,그녀가 지그루트가 이야기하는 동안에 왜 그
동작을 취하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웠다.
지그루트 욀세는 그 밖의 다른 초청공연 배역으로 지그프리트와로헨그린 역을
맡아 노래를 불렀다. 클래레는 매번 열 감동없이 특별객석에 앉아 있었다. 그러
나 지금껏 노르웨이 파견단원 말고는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던 이 북구의 가수
는 매일 오후가 되면 클래레 집을 찾아왔고, 그때마다 라이젠보그 남작을 만났
으며 특별한 경 우를 빼놓고는 패니 링아이저도 늘 만날 수 있었다.
7월 27일 욀세는 트리스탄 배역을 마지막으로 연기하였다. 별 감 동없이 클래레
는 관람석에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패니와함께 대공의 묘소를 찾
아가 엄청나게 큰 화환을 그 앞에 놓고 돌아왔고 그날 저녁, 내일이면 비 엔나
를 떠나게 되어 있는 이 초청가수의환송 연회를 열었다.
벗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모여들었다. 지그루트가 그녀에 대한 열정
으로 훨싸여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감춰질 수 없었다.늘상 그런 것처럼 그는
홍분하여 이야기를 많이 늘어 놓았다. 그런중에 그는 배를 타고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러시아 대공과 결혼한 한 아라비아 여자가 자기 손금을 보고는, 곧 그
에게 가장 숙명적인시기가 다가을 것이라고 예언했었노라고 말했다. 그는 그 예
언을 단순한 홍미거리 이상의 무엇인 것처럼, 확고히 믿고 있었다. 그는 또 이
미 잘 알려진 사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지난 해 초청공연을 하기
로 되어 있던 뉴욕에 착륙한 후, 바로 그날, 아니 바로 그 시간에, 많은 벌과금
을 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박의 상륙용브리지 위에서 검정 고양이가 자신
의 다리 사이로 달려 지나갔다는이유 때문에 유럽으로 돌아가 버린 적이 있었
다. 그런데 그는 이해할수 없는 징표와 인간의 숙명 사이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믿을 만한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었다. 런던의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공연을 하
기로 되어 있던 어느 날 저녁, 그는 무대 위에 서기 전에 할머니로부터 전수 받
은 주문을 암송하는 것을 잊어서, 갑자기 음성 이 나 오지않은체험을한적이있
었다. 또 어느날밤 꿈속에서핑크빛타이츠를 입은 날개달린 정령이 나타나, 그가
좋아하는 면도사의 죽음을 알려준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 날 실제로 그 면도사
가 목을 매 단 시체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욀세는 짧지만 내용이 풍부
한편지 한 장을 지참하고 있었는데, 그 편지는 브뤼 셀에서 열렸던 심 령 사 회
의에서 이미 사망한 여가수 코르넬리아 루얀의 온령으로부터 건네 받은 편지로,
지그루트가 유럽과 아메리카를 통틀어서 가장 홀륭한 가수가 될 것이라는 능숙
한 포르투갈어로 쓰인 예언을 담고 있 있다. 오늘 그는 이 모든 것을 이야기
했다. 그린우드 회사 제품의 분홍색 편지지 위에 쓰여진 심령술사의 편지가 손
에서 손으로 옮겨다니자 모임 안에 깊고 넓은 술렁임이 일어났다.
클래레는 거의 표정의변화가 없었고 다만 가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
었다. 그럼에도 라이젠보그의 불안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그의 날카로워진 눈에
는 위험한 징조가 점점 다가오는 것이 분명하게 잡혀들었다. 특히지그루트는, 예
전에 클래레의 연인들이 모두 그러하였듯이, 저녁 식사 시간 동안 내내 남작에
게 호의를 보이며, 그를 몰데 해안에 있는자기 저택으로 초청하고, 나중에는 친
밀하게 너'라고 하며 말을 터왔다. 게다가 패니 링아이저는, 지그루트가 말을 건
넬 때마다 몸 전 체를 부르르 떨었으며, 그가 커다랗고 차가운 잿빛 눈으로 그
녀를 쳐 다볼 때면, 얼굴 표정 이 창백해졌다 발그스레해졌다 오락가락했다.그
가 이제 떠날 시간이 임박했다고 말을 하자, 그녀는 큰소리로 울기시작했다. 그
러나 클레레는 여전히 침착하고 진지했다. 그녀는 지그루트의 타오르는 눈길에
거의 응수하지 않았고, 그에게 던지는 말도다른 사람들에 게 하는 것보다 특별
히 생기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 침내 그가 클래레의 손에 키스를 한 후 간청
하고 약속하고 절망하는듯한 눈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녀의 눈길은 베
일에 싸여 있는 듯하였고,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라이젠보그는 이 모든 것
을 불안한 마음으로 유심히 관찰했다. 이윽고 연회가 모두 끝나고 서 로 작별
인사를 나눌 때, 남작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을 당하였다.남작이 맨 마지막으
로 다른 사람들처럼 클래레 손에 키스를 하고 자 리를 뜨려는 순간, 그녀는 그
의 손을 꽉 잡고는 속삭였다. "다시 오세요. 그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의 손을 팍 잡더니 그의 귓가 가까이에 입술을 대
며 다시 반복했다. "다시 오세요. 한 시간 안에 다시 오실 걸로 알고 기다릴게요.
거의 비틀거리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왔다. 그는 패니양과 함께 지그
루트를 호텔까지 바래다주었고, 마치 먼데서 들려오는것 같은, 지그루트가 클래
레에 대해 꿈꾸는 듯이 주절거리는 소리를들었다. 이어서 그는 패니 링아이저
를 부드러운 밤의 서늘함을 느끼며 조용한 도로를 통과해 마리아힐프 구역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그는 안개 너머인 양 희미하게 어린애처럼 발그스레한
패니양의볼 위로 멍청히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런 연후 그는 마 차
에 몸을 싣고 클래레의 집 앞으로 달려갔다. 그녀 침실의 커튼 사 이로 불빛이
어른거 렸다. 그는 그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보았다. 커튼 틈 사이로
그녀의 머리가 언뜻 보였고 그를 향해 끄덕이고 있었다. 결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라이젠보그 남작은 프라터 공원으로 말을 타고 산책을 나갔다. 그
는 행복감과 젊은 기운을 느꼈다. 오랜 바람이 뒤늦게이루어진 데에는 보다 깊
은 의미가 있는 듯이 생각되었다. 그가 지난밤 체험했던 것은 비할 데 없는 진
기한 놀라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클래레와 맺어온 관계의 상승이자 필연적인 귀결
위에다름이아니었다.그는이제다른어떤일이일어날수없다고느꼈으며, 바로 다음 순
간 거기에 이어지는 미래를 설계하였다. '그녀가 얼마 동안이나 더 무대 위에 있
을까?' 그는 생각했다---. '아 마 4년이나 5년 정도겠지. 더 일찍이는 안되겠지
만, 그렇게 되면 난 그녀와 결혼을 하겠지. 우리는 함께 시골에서 살게 될 거야,
비엔나에서 가까운 시골에. 아마 생 바이트나 라인쯔(비엔나 서쪽 근교에 위치한
당시의 고급 주택가:역주)가 되겠지. 거기다 집을 한 채 사야겠어.아니면 그녀의
취향대로 집을 짓든지. 우린 아주 조용히 살아가겠지만, 긴 여행도 하게 될 거야
스페인이나 이집트, 인도로'그는 말을 타고 호이슈타들 목초지를 빠른 속도로 달
리면서 이렇게꿈을 꾸고 있었다.
그는 다시 빠른 속도로 대로 안으로 접어들어 프 라터 로타리에서 마차로 옮겨
탔다. 그는 포사티 화원에서 마차를 멈 추고 클래레에게 화려한 흑장미 부케를
보내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슈바르쩽베르크플라쯔 광장 변의 자기 집에서 혼자
아침 식사를 했다.식사후그는긴안락의자에몸을뉘였다.클래레를보고섶은마음이 그
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다른 여인들은 도대체 그에게 어떤의미를 지닐 수 있었
을까? 그들은 다만 그의 소일거리 대상이었다-그 이상은 전혀 아니었다. 그리
고 그는 클래 레가 자기에 게, 다 른 남자들이 나에게 무엇이었냐구요?-당신이
내가 사랑한 유일한남자예요--- 라고 말하게 될 날이 오리라 예감하고 있었다
---. 그 는 눈을 감은 채 긴 안락의자에 누워서 클래레를 거쳐간 남자들을떠올
렸다---. 확실해, 그녀는 나 이전에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거야, 그리고 항
상 나만을 사랑한 거지. 그리고 모든 사람 안에서 나 를 보았던 거야! 남작은 옷
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최초의 재회를 마음에 새 기며 몇 초 동안 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서인 양, 그녀 집으로 향하는 익숙한 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
다. 원형광장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 았지만, 계절이 을나가고 있었다. 라이
젠보그는 이제 여름이 온 것과클래레와 여행가는 것, 그녀와 함께 바다와 산을
즐기게 될 것을 생각하며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는 황홀한 나머지 큰소
러로 환호성을 지르게 될까봐 자신을 억눌렀다.
그녀의 집 앞에 서서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창문에서 반사되어
눈부셨다. 대문 쪽으로 두 계단을 올라가서 초인종을 눌 렀다. 문이 안 열렸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라이젠보그는 그 제야 문에 저금통 모양의 자물쇠
가 채워져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이 무슨 뜻이지?. 내가 잘못 찾았나? 그녀는 문
패를 걸어놓지 않았으나, 맞은편 집에서 늘상처럼, '폰 엘레스코비츠 중위'라는
문패를 읽 을수있었다.의심의여지가없었다.그는그녀집앞에서있고,그 녀 집은 닫
혀있는 것이었다 그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와서 관리인 집 문을 열었다. 여자
관리인은 어두운 공간 안의 침대 위에 앉아있었고, 한 아이가 지하층의 작은 창
문을 통해 거 리를 내다보고 있었으며, 또 다른 아이는 빗으로 장난을 치고 있
었다. "헬양은 집에 안 계시오?" 남작은 물었다. 여인이 일어섰다. "안 계십니다.
남작님. 헬 양은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뭐요?" 남작은 소리를 질렀다.
"아,맞아." 그는 곧바로 덧붙였다
"세 시에, 맞지요?"
"아니요, 남작님. 아침 여덟 시에 떠났습니다."
'어디로 떠났소?' 내 생각으로는 곧장 그는 제멋대로 말했다.
'아가씨는 드레스덴으로 가겠지요?"
"아닙니다. 남작님. 아가씨는 아무 주소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아가씨는 곧
어디에 있는지 편지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요? 네 그렇군요. 고맙소." 그는 몸을 들려 거리로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집
쪽을 되돌아보았다. 석양 무렵의 해가 창 문으로부터 되비치는 모습이 이전보다
얼마나 딴판인지! 둔중하고서글픈 여름날 저녁의 후텁지근함이 도시 전체를 뒤
덮고 있었다.
클 래레가 떠나?! 왜지? 그를 피해 떠난 건가? 이게 뭘 뜻하지? 그는 처음에 오
페라 극장으로 갈 생각을 했다. 그러나 휴가가 내일 모레 시작되며 클래레는 그
이틀 전에 공연이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부인이 날카롭게 반문했다
그는 마차를 타고 링아이저가 살고 있는 마리아힐프 가 76번지로갔다. 나이든
요리사가 문을 열어주며 말쑥하게 차려입은 방문객을미심쩍은 듯이 살펴보았다.
그는 링아이저 부인을 찾았다. '패니양이집에 있습니까?" 그는 이제 더 이상 억
제할 수 없게 된 홍분상태에서 물었다.
'왜 그러시지요?" 링아이저 남작은 자기를 소개했다.
"아 그러시군요. 잠시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부인이 말했다.
남작은 현관에 서서 다시 한번 물었다. 패니양은 집에 없습니까?"
"남작님, 잠시 드시지요."
라이젠보그는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푸른색 비로드빛 ;
같은 색깔의 커튼이 드리워진 높이가 낮은 어두침침한 방에 잡았다.
"예, 패니는 집에 없답니다. 헬양이 그 애를 휴가에 데리고떠났습니다."
"어디로요?" 라고 남작은 물으면서 피아노 위에 놓인 액자 안에 담긴 클래레의
사진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어딘지는 저도 모릅니다" 라고 링아이저 부인이 말했다.
"아 침 여덟 시에 헬양이 직접 와서 저에게 패니를 보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글
쎄, 그녀가 하도 간절히 부탁을 해서 거절을 할 수가 없었지요."
"어디로 갔습니까---. 어디예요?" 라이젠보그는 절박하게 물었다.
"그건 저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패니는 헬양이 어디에 머물 것 인지 결심을
하게 되면 곧 전보를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내일아니면 모레쯤 연락이
오겠지요."
"그렇군요" 라고 말하며 라이젠보그는 피아노 앞에 놓인 갈대로만든 작은 의자
에 앉았다. 그는 잠시 침묵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일어서서, 링아이저 부인에게
악수를 건네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는말을 남기고, 이 고옥의 어두운 계단을
천천히 걸어내려왔다.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매우 조심스러웠어. 정말이야!
필요이상 조심스러웠어. 내가 추근거리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을텐데.
"어디로 모실까요, 남작님?" 마부가 물었다. 그는 자신이 이미 지붕없는 마차에
올라 한동안 앞을 응시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퍼뜩떠오트는 영감을 좇아, "브
리스톨 호텔(케르트너링 구역 오라 극장 맞 은편에 있는 고급 호텔:역주)로 갑시
다" 라고 대답했다.
지그루트 욀세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남작을 방스브로올라오도록 청
하고는 정성을 다해 맞이하면서 비엔나의 마지막 밤을함께 지내달라고 간청했
다. 라이젠보그는 지그루트가 여지껏 비엔나에 머물고 있는 것이 불안했지만, 그
의 호의적인 태도는 눈물을 흘릴만큼 감격스러웠다. 지그루트는 클래레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라이젠보그에게 클래레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남작이 클래레에게 가장 오래되고 성실한 친구라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라이젠보그는 트렁크 위에 앉아 클래레에 대 해 이야기했
다. 그녀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그의 마음이 편해졌다.그는 이 가수에게 거의
모든 걸 이야기해 주었다. 품위있는 기사로서 말하지 않아야 할 일들만은 빼놓
고. 지그루트는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황홀해지는 것 같았다.
지그루트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당장 오늘 저녁에 비엔나를 떠나몰데에 있는
자기 저택으로 함께 가자고 제의했다. 남작은 자신이 놀라우리 만치 침착해졌
다고 느꼈다. 그는 오늘 당장 그럴 수는 없다고 거절하면서, 여름에 방문하겠다
고 약속했다. 그들은 역까지 함께 마차를 타고 갔다. "당신은 나를 바보 취급하
시겠지만, 나는 한 번만 더 그녀의 창문 곁을 지나고 싶군요" 라고지그루트는 말
했다. 라이젠보그는 그를 곁눈치로 처다보았다. 이게 혹시 그를 속여 넘기려는
수작일까?' 아니면 이 가수 녀석이 일에 전 혀 관계없다는 증거일까?. 클래레 집
의 창가에 도착했을 때, 지그루트는 닫척 있는 창문을 향해 키스를 보냈다. 이어
그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제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라이젠보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들아오면, 전하겠소."
지그루트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여기에 없소이다." 라이젠보그는 덧붙였다.
그녀는 여행을 떠났다오. 인사도 없이 늘 그런 식이오.
말을 덧붙였다.
'여행을 갔군요." 지그루트는 '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 두 사람은 다정한 친구처럼 포옹을 했다.
남작은 그날 밤 침대에서 한없이 울었다. 어릴 때를 빼놓고는 그런적이없는
그였다. 그가 클래레와 함께 했던 그 쾌락의 한시간이 어두운 전율로 그를 에워
쌌다. 어 젯밤 클래레의 눈은 마치 광기로 반 짝였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제야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그 녀의 부름에 너무 일찍이 응한 것이었다. 베덴
브루크 대공의 음영이 아직도 그녀를 덮고 있었다. 라이젠보그는 그가 클래레
를 소유함으로써,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되 었다고 느꼈다.
몇일동안남작은그낮과밤을어떻게처리해야할지모르는상태에서 비 엔나룰 헤매고
다녔다. 예전에 그가 시간을 할애했던 모든일 신문 읽기. 카드 놀이, 승마 산책-
이 이제는 그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전 존재가 오직 클래
레에 의해서만 의 미를 얻게 되며, 더하여 다른 여인들과의 관계조차도 실상은
그녀에대한 열정의 환한 빚 안에서 살아나는 것이라고 느꼈다. 도시 위로 영원
히 지속될 것만 같은 잿빛 먼지가 뒤덮여 있었다. 그가 이야기를나눈 사람들은
뭔가 감추는 듯한 목소리였고 그를 이상스럽게, 아니 배신을 꿈꾸는 듯이 쳐다
보았다. 어느 날 저녁에는 문득 역으로 나가아무 생각없이 이쉴(이쉴 온천. 오스
트리아에 있는 휴양지로 프란쯔 요셉황제의 여름 궁정이 있는 곳:역주)로 가는
티켓을 끊었다. 거기서 만난 어떤 아는 사람이 전혀 별뜻 없이 그에게 클래레
소식을 물었을 때,그가 신경질적이고 무례하게 응수하는 바람에, 전혀 상관없는
그 사 람과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는 전혀 홍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걸음을
옳겨 놓았고, 귓전으로 총알이 횝 소리를 내며 스쳐가는 소리를들었으며, 허공에
다 총을 쏘았다. 그는 이 결투 후 30분만에 이쉴을 떠났다. 그는 티롤, 엥가딘,
베르너 오버란트 그리고 제네바 호반 등 으로 여행했고, 보트를 젓고, 산길을
검고, 산을 기어올랐다. 한 번은알프스 오두막에서 잠자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하루 하루를 어제는 뭘 했고 또 내일은 뭘 할지 도통 모르는 상태로 지나쳤다.
어느 날 그는 비엔나를 거쳐온 전보를 받았다. 그는 열이 오른 손 길로 전보를
펼쳤다. '당신이 만약 내 친구라면, 이 연락을 받은 즉시나에게 와 주시오. 난 지
금 한 명의 진정한 친구가 필요하오. 지그루트 욀세' 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이
전보 내용이 틀림 없이 클래레와모종의 연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았
다. 그는 신속하게 짐을꾸려, 가장 가까운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그가 있던 아익
스를 떠났다. 중간에 지체하는 일이 없이 뮌헨을 거쳐 함부르크로 갔고 거기서
배를 타고 슈타방어를 거쳐 몰데로 갔다. 그곳에는 화창한 여름의 저 녁 무렵에
도착했다. 그에겐 여행이 가도 가도 끝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운 경치의
자극 따위에는 전혀 영향받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에 그는 클래레의 노래나
용모를 더 이상 기 억해낼 수 없었다.비엔나로부터 수년 전에, 아니 수십년 전에
떠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하얀 플란넬 옷을 입고 짧은 채양의 하얀 모자를 쓴
지그루트가 바닷가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마치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 게
어제 저녁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갑판에서 지그루트의 영접을 미소로
응답하고 여유있는 태도로 하선 계단을 내려 갔다.
"제 부름에 따라주어서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지그루트가 말했다. 그리고
간단히 덧붙이기를, "난 고장났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남작은 그를 유심히 살폈다. 지그루트는 심히 창백해 보였고, 관자놀이 부근의
머리카락이 유난스레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팔에는 흐 갖한 녹색잊 숄을 지니
고 있었다.
"무슨 일이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라이젠보그는 굳어진 웃음을 머금으며
물었다.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그루트 욀세가말했다. 남작은 지그루트의 목소리가
예전같지 않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들은 자그맣고 좁은 마차를 타고 푸른 바다
를 낀 예쁜 오솔길을 달려갔다.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라이젠보그는 감히
물을 수 가 없었다. 그의 눈길은 거의 움직임이 없는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파도 숫자를 세겠다는 것처럼 이상스럽고도 이룰 수 없을것이 분명한 생각
을 하고 있었다. 이어 그는 허공을 쳐다보았다. 별 들이 방울져 천천히 떨어져
내린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클래레 헬이라는 이름의 여가수
가 실존하고 있으며, 이 세상어디에선가 배회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중요하지 않았다. 마침내 고삐를 당기는 느낌이 왔고, 마차
는 녹음에 싸여 있는 소박하게 지은 하얀 집 앞에 멈춰섰다. 바다가 내려다
보 이는 베란다에서 그들은 저녁 식사를 했다. 하인 한 명이 시중을 들었는데,
이 하인은 표정이 엄격 했고 포도주를 잔에 부을 때엔 위협하는 듯한 표정을 지
았다. 청명한 북구의 밤이 먼 데로 조용히 내려 앉았다.
"자, 이제?" 마치 조급함의 물결이 그에게 갑자기 덮쳐오듯이,.
이젠보그는 물었다.
"난 끝장난 인간입니다!"
바라보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시오?" 라이젠보그는 억양없이 물었다.
당신을 위해 어떻게 해드릴까요?" 기계적으로 덧붙였다.
"그럴 일이 별로 없습니다. 나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는 테이블 덮개, 회랑,
정원, 창살, 도로, 그리고 바다 너머 저 멀리로 시선을 보냈다.
라이젠보그는 마음 속으로 굳어져 있었다. 갖가지 생각이 동시에 번쩍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클래레가 죽었나? 지그루트가 그녀를 살해했나?
바다에 던졌을까? 아니면 지그루트가 죽었나? 아니지, 그건 불가능하지. 이
친구는 지금 내 앞에 앉아 있으니. 왜 말을 안하지?
그리고 갑가기 어떤 엄청난 부려움에 내몰려, 라이젠보그가 말을 뱉어 내었다. "
클래레는 어디 있죠?" 그러자 이 가수가 천천히 남작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약간두터운 얼굴이 안에서 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웃음을 머금은
것 같았다. 그것이 만약 그의 얼골에 어른거리는 달빛이 아니라면. 지그루트는
희미한 눈길로 등을 뒤로 젖힌 채, 두 손은 주머니에 푹 쑤셔넣고 발을 테이불
아래에서 쑥 뻗은 상태로 남작 곁에 앉아 있었다. 남작은 그 순간 지그루트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 피에로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녹색 숄이 베란다
난간에 걸려 있었는데 남작에 게는 그것이 오래되고 친숙한 숄처럼 보였다.
이 우스꽝스러운 숄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나는 몰데에 와 있어. 충분히 특별한 일이야. 그가 맑은 정신이었다면
이 가수 녀석에게 '무슨 일이야? 어이 피에로,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라고
전보를 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는 문득앞의 질문을 다시 던졌다. 먼저보다 훨
씬 상냥하고 침착하게. 클래레는 어디 있는 거요?" 이번에는 이 가수가 고개를
서너 번 끄덕였다. "클래레가 문제지요. 당신은 정말 내 친구지요?"
라이젠보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벼운 오싹함을 느꼈다. 미지근한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어왔다. "난 당신의 친구요. 나에게서 그럴 일이 별로 없습니다. 1
덮개, 회랑, 정원, 창살, 도로, 냈다.
라이젠보그는 마음 속으로 굳어져 있었다--. 갖가기 생각이 동 시에 번쩍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클래레가죽었나?---. 지그루트가 그녀를
살해했나?--. 바다에 던졌을까?
아니면 지그루트가 죽었나?---. 아니지, 그건 불가능하지 --. 이 친구는 지금
내 앞에 앉아 있으니 -- . 왜 말을 안하지?---. 그리고 갑가기 어떤 엄청난
부려움에 내몰려, 라이젠보그가 말을 내었다.
"클래레는 어디 있죠?"
그러자 이 가수가 천천히 남작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약간두터운 얼굴이
안에서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웃음을 머금은 것 같았다.-그것이 만약 그의
얼골에 어른거리는 달빛이 아니라면. 지 그루트는 흐미한 눈길로 등을 뒤로
힌 채, 두 손은 주머니에 푹 쑤 셔넣고 발을 테이불 아래에서 쑥 뻗은 상태로
남작 곁에 앉아 있었다.
남작은 그 순간 지그루트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 피에로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녹색 숄이 베란다 난간에 걸려 있었는데 남작에 게는 그것이 오래되
고 친숙한 숄처럼 보였다 -- . 이 우스꽝스러운 숄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
가?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걸 까?---. 나는 몰데에 와 있어. 충분히 특별한
일이야 -- . 그가 맑 은 정신이었다면 이 가수 녀석에게 '무슨 일이야?. 어이
에로,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라고 전보를 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는 문득
앞의 질문을 다시 던겼다. 먼저보다 훨씬 상냥하고 침착하게.
"클래레는 어디 있는 거요?"
이번에는 이 가수가 고개를 서너번 끄덕였다.
"당신은 정말 내 친구지요?"
라이젠보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근한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어왔다.
"뭘 바라오?"
"남작님, 우리가 헤어지던 그날 저녁을 기억하십니까?스톨 호텔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당신이 날 역까지었지요?"
라이젠보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바로 그 기차로 블래레 헬이 모르시겠지요."
라이젠보그는 머 리를 가슴 쪽으로 무겁 게 숙였다.
나 역시 당신 못지 않게 전혀 예감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지그루트는 말을 이어
갔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는 역에서 클래레를보았습니다. 그녀는 패니 링아이저와
식당칸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거동에서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우연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우연이 아니 었습니다."
"계속하시오." 남작은 그렇게 말하며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나중에 그것이 우연이 아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날 아침부
터 우리는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클래레, 패니그리고 내가요.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어떤 매혹적인 호반 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물과 숲 사이에 있
는 단아한 집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외딴 곳에. 우리는 대단히 행복했지요."
그는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느릿느릿 말했다. 저자가 날 무엇 때문에
이곳으로 불렀지? 라이젠보그는 생각했다. 내게서 뭘 원하지? 그녀가 저자한테
고백했을까?
무엇 때문에 난 여기 이 몰테의 베란다에 저 피에로와 앉아 있지? 결국 이게 꿈
이아닌가? 혹시 내가 클래레 품 안에서 쉬고 있는 걸까? 결국 아직도 여전히 그
밤이 계속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나한테 복수를 하실 겁니까?"
"복수? 아니 왜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남작은 되물으면서 자신의 목소리
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것처럽 느꼈다.
"그녀가 나를 파멸시켰으니까요. 난 이제 끝났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해주시오." 라이젠보그는 딱딱하고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패니 링아이그렇죠?"
"내 생각으로는." 남작이 대답했다.
"압니다." 지그루트가 말했자. "그녀는 우리 가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지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계속하시오." 라이젠보그가 말하고 기다렸다.
"어느 날 아침 클래레가 아직 잠을 자고 있었을 때였지요." 지그루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녀는 항상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잤지요. 난 숲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때 갑자기 패니가 나를 뮈쫓아달려왔습니다. '욀세씨, 늦기 전에
어서 피하세요. 당신은 지금 아주위험한 상태에 있어요. 당장 떠나세요!' 그러나
그 이상 그녀는 다른이야기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요구했고, 결국
패니의입을 통해 나에게 닥쳐을 위험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그녀는
나를 구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그녀는 나에게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난간에 걸린 녹색의 숄이 돛처럼 바람에 위의 램프불이 약간 퍼덕거렸다.
"에니양이 어떤 이야기를 했소?" 라이젠보그는 엄숙한 목소리로물었다.
"기억하십니까?" 지그루트가 물었다.
"우리가 클래레의 집에손님으로 갔었던 그날 저녁을?"
이 날 아침 클래레는 패니양과 함께대공의 묘소에 갔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클래레는 이 여자 친구에 게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털어 놓았습니다." 남작은
몸이 떨려왔다.
"당신은 대공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십니까? 그는 낙마한 뒤 몇 시 간을 더
살았습니다."
"알고 있소."
"그 곁에는 클래레밖에 없었습니다."
"알고 있소."
"그는 그녀 외에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그녀에게
저주를 내렸습니다."
"저주를?"
"저주를요.'클래레, 나를 잊지 말아주시오. 당신이 날 잊는다면,난 무덤 속에서도
편안하지 않을 거요' 라고 대공은 말했습니다. 그러자 클래레는 '난 안 잊을 거
예요' 라고 대답했어요. '날 잊지 않는다고 맹세할 수 있소? "맹세할게요."클래
레, 당신을 사랑하오. 난 죽을 수밖에 없구려 !"'
"누구의 말이오?" 남작은 소리를 질렀다.
'내 말입니다." 지그루트는 말했다. "난 패니양에게 들었고, 패니는 클래레에게서
들었고, 클래레는 대공으로부터 들은 겁니다. 내 말 이해하시겠지요?"
라이젠보그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에게는 죽은 대공의 목소리가 세 겹으로
닫혀진 관으로부터 들려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클래레, 당신을 사랑하오, 그런데 난 죽을 수밖에 없군t 당신이이렇게 젊은데,
내가 죽다니. 다른 남자가 나를 대신하겠지. 그렇게 되라는 걸 난 알아---. 딴
남자가 당신을 품에 안고 당신과복해 하겠지---. 그렇게 하게 할 수는 없어---.
그놈을 그렇게못하게 하겠어;.---. 그놈을 저주해. 듣고 있어, 클래레? 그놈을 난
저주한다구!---. 나 다음에 이 입술에 키스하고, 이 몸을 껴안은 첫번째 남자를
지옥에 떨어뜨리고 말 거야!---. 클래레, 하늘은 죽어가는 자의 저주를
들어준다더군. 조심해. 그자를 조심시켜. 그놈에게 지옥을! 미쳐버려라! 참혹함과
죽음을! 화가 있으라!화가 있으라! '화가 있으라!"'
자기 입에서 죽은 대공의 목소러를 울려내던 지그루트가 몸을 일으켰다. 크고
살찐 몸을 하얀 플란넬 옷으로 감싸고 서서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녹색
의 숄이 난간에서 정원으로 떨어겼다. 남작은 경악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몸 전체가 굳어오는 것 같 았다. 소리를 지르고 섶었지만 입만 크게 벌릴
수 있을 뿐이었다-이 순간 그는 클래레를 처음 보았던 여자 성악교수
아이젠슈타인의 작은 흘에 있었다.
무대에는 피에로가 서서 낭송을 하고 있었다.'법술 위에 저주를 머금고 대'공은
세상을 떴습니다. 그리고 들어보세요. 그녀가 품에 안겼던 그 불행한 자, 그 저
주를 실현시키게 되어 있는 그 불쌍한 인간, 그 사람이 바로 납니다! 나예요!
나!"
이 순간 무대는 우지끈 소리를 크게 내며 무너져 라이젠보그앞에서 바다로 가라
앉았다. 그러나 그는 마치 꼭둑각시 인형처럼 힘없이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겼다.
지그루트는 튀어올라,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 인 두 명이 달
려와 기절한 남작을 들어 식탁 겉에 있는 긴 둥받이 의 자 위에 뉘였다. 한 사
람이 의사를 부르러 뛰어 나갔고, 한 사람은물과 식초를 가져왔다. 지그루트는
남작의 이마와 관자놀이를 문질렀으나, 남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의사가
와서 진찰을 했다.진찰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의사가 말했다. "이분은
죽었숩니다."
지그루트 욀세는 마음이 매우 격앙되었고, 의사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도록
부탁하고는, 테라스를 벗어났다. 살롱을 지나 윗층으로 올라가 침실로 들어가서
불을 켰다.
그리고 급하게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클래레, 난 지체없이 몰데로 왔었는데,
이곳에서 당신의전보를 받았소. 난 실상 당신 말을 믿지 않았었다는 걸 고백하
겠소. 난 당신이 거것말로 나를 안심시키려 한다고 생각했소. 날 용서하시오. 난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오. 라이젠보그 남작. 이 여기에 왔었소. 내가
불렀던 거요.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소.명 예를 아는 남자로서
그는 거짓말을 했을 테니까. 난 기발한 생각을해내었소. 내가 남작에게 대공의
저주 이야기를 전해주었던 거요. 그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소. 남작은 의자와 함
께 뒤로 넘어져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소."
지그루트는 멈췄다. 그리고 대단히 진지해졌고 깊이 생각하는 눈 치였다. 이어서
그는 방 한 가운데로 가서 노래 부르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처음
에는 두려워하는 듯하고 어설펐으나, 점차적으로 소리가 맑게 울러기 시작했고
밤하늘에 크고 힘차게 울려퍼졌다. 나중에는 마치 파도에 부딪쳐 울리는 듯이
광포하게 터져 나왔다. 침착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깊이 숨을 내
쉬었다. 다시 책상으로 다가가 그의 전보에 덧붙였다. "사랑하는 클래레!모든
게 다시 좋아졌소. 사흘 안에 당신 곁으로 가겠소."
치정, 혹은 흉기 같은 사랑
이 작품이 처음 내게 충격을 준 까닭은 굳이 이름을 붙이면 기괴미 또는 추악
미 같은 것이었다. 기괴미는 결국 대공의 저주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데서 받은
느낌이며 추악미는 모골이 송연할 만큼 철저한 배신을 미적으로 표현한
조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랑의 한 양태로서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을
말해보고 싶다. 모든 순교에는 많건 적건 타의가 섞여들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조차도 십자가 위에서 빌지 않는가. "거둘 수 있다면 이잔을 제게서
거무어 주옵소서"라고. 하지만 그래도 순교의 특질은 아무래도 자발적인 죽음의
선택에 있다. 신앙이 빌미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죽음이 순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순애도 그렇다. 사랑을 히해 죽는다고 하지만 대개는 그 선택이 아니고
서는 사랑을 지킬 수 없게 하는 상황의 강요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는 기꺼이 죽음을 껴안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라이챈보그 남작의 불행한 사랑과 죽음은 얼른 보아 칙 칙한 대로한 편의 순애
보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는 사랑에서도 죽음에서도 순애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특히 죽음은 거의 타의로 부여된 것이고,
따라서 순애라기보다는 치정사)란 말이 더 온당할 것이다. 사랑은 여러 빛깔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여러 형태로 우리 삶에기능한다. 높게는 우리 영혼을
천상과 초월로 인도하고 낮게는 타락과 파멸로 이끈다. 삶에 눈프게 하고,
열정과 야망을 불지피며, 분노와 질투로 미치게 하고 때로는 자기부정에까지
이르게 한다.다른 가치에 패배하기도 하지만 또한 다른 가치를 짓밟기도 하고,
더 러는 자기희생으로 결합하여 보다 높은 단계로 숭화하기도 한다.
클래레 헬에 대한 라이젠보그 남작의 사랑은 환상과 희망으로 그 의 삶에 유익
하게 기능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거 짓이었고 기대는 무망했음
이 드러나는 순간 그 사랑은 그의 삶에 치명적인 흉기가 되고 말았디. 실은 대
공의 저주가 그를 죽인 게 아니라 처 참하게 드러난 사랑의 실상이 그를 죽였
다.하지만 우리가 소설을 읽는 목적이 교훈을 얻거나 도덕성을 함양하기 위해서
만은 아니다. 이 단편을 사랑을 주제로 한 열 개의 전범중에 하나로 넣는 것은
그냥 들었으면 시시했을 치정담을 섬뜩하면서도 인상깊은 예술작품으로 빚어낸
아르투르 슈니츨러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아르투르 슈니츨러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의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의대를 졸업한 슈니츨러는 청년시절 우연한 기회에 플로베르와
모파상을 읽은 후 창작에 눈을 들리게 된다.부친의 조수 노루을 하며 집필한 희
곡 '아나톨'이 평단의 반응을 일으키고 뒤이어 발표한 작품 "연애유희"가 사람들
의 관심을 얻자 그는 아예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서 버린다.
사랑과 죽음을 주요 테마로 하는 슈니츨러의 작품에는 공과 낮,환상과 현실이
엇갈리며 그려진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전공인 의학적 지식을 소설 창작에
도입, 주인공의 섬세한 내면이나 복잡한 연애심리를 적나라하게 해부한 데
힘입은 바 크다.
문필가로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자 슈니츨러는 당시 베를린을중심으로 전성하
던 자연주의 문학운동에 대항, 우미하고 섬세한 유 미적 경향의 신낭만파 문학
을 선도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는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의 영향이 컸던 게
사실이다. 슈니츨러를 가리켜 빈 상징주의 문학의 전형적인 작가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워낙 활동력이 강했던 그는 한때 '베른할디 교수' 같은 사회극을쓰기도 했으나
이 분야에서 주목받는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랑과 죽음'의 문학에
관한 한 슈니츨러는 독특한 세계를 일구어 놓았으며 희곡과 소설 양분야에서 두
루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흔치 않은 작가이다.
서정가
가와바다 야스나리
죽은 사람을 향해 말을 건다는 것은 합으로 슬픈 인간의 습성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숭에 가서도 이승에서 지녔던 모습으로 살아있는 줄로
생각한다는 것은 더욱 슬픈 인간의 습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식물의 운명과 인간의 운명과의 유사점을 느끼는 것이 모든 서정시의 영원한
제복이다-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마저도 잃어버렸고, 그뒤에
계속되는 구절도 모르고 이 말만을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식물이란 다만 꽃이
피고 잎이 지는 것만이 그 풋인지, 보다 더 깊은 뜻이 깃들어 있는지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불교의 여러 경문을 비길 데 없이 귀중한 서정시라고
생각하는 요즈음의 저는, 지금 이렇게 해서 고인이 된 당신에게 말을 건다
하더라도, 저숭에서도 역시 이숭에서의 모습을 하고 계신 당신보다. 차라리
당신이 철을 서둘러서 봉오리가 달린 홍매로 변해서 재생했다는 상상을
꾸며내어, 지금 제 눈앞의 도꼬노마(방 한쪽에 바닥을 솜 높게 하고 에는 서화
바닥에는 꽃병 등으로 장식한 곳:역주)에 놓여 있는 홍매를 향해서 이야기하는
편이 얼마나 더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눈앞에 놓인, 제 가 그 이름을
아는 꽃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프랑스 같은 먼 나라의,이름 모를 산의, 한 번도
본 일 없는 꽃으로 당신이 부활했다고 상상하여, 그 꽃을 향해서 말을 건다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만큼이나지금도 여전히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정말로 먼 나라를 바라보는 아무것도 안 보이고, 이 방의
향기가 납니다.
이 향기는 죽었군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는 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향수를 써 본 일이 없는 처녀 였습니다.
기억하고 계시나요? 벌써 4년이 지난 그 밤, 집의 목욕탕에서 갑 자기 짙은
향기를 맡은 저는 그 향수의 이름을 몰랐지요. 그러면서도알몸으로 이렇게 센
향기를 맡는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생각하는 동안 현기증이 나서
정신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바로당신이 저를 버리고 아무 소식도 없이 결혼하시고 신혼여행 첫날밤,
호텔에서 하얀 침대에 신부의 향수를 뿌렸던 때와 같은 순간이었던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결혼하리라고는 몰랐습니다만, 뒷날 따져 보았더니 그것은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당신은 신방에 향수를 뿌리면서 저에게 용서를 빌었던 것일까요?
이 신부가 저였더라면 하고 문득 생각해 보신 걸까요.
서양의 향수라는 것은 현세의 향기가 진하게 납니다.
오늘 밤은 저의 오래된 인구들 대여섯 명이 집에 와서 가투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정월이라고 해도 이레를 지나서의 가투놀이가 때에 안 맞는 건지,
벌써 제작기 남편이나 아들이 있는 우리들의나이가 가투놀이를 싱겁게 하는
것인지, 서로 내쉬는 숨이 방의 공기를 무겁게 한다고 모두 느끼고 있을 때
아버지가 중국산 향을 피워 주었습니다. 그것이 방을시원하게 해주었어도, 역시
모두가 제각기 생각나는 대로 지난 날의 추억에 잠기는 분위기가 되어 자리는
흥겨워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날의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지붕 위에 온실이 있는 방에서 40-50명의 여자가 모 여서 한꺼번에
지난 날의 추억을 더듬는 경쟁을 한다면, 방에서 피어오르는 심한 악취 때문에
온실의 꽃은 모두 시들어 버리겠지요. 뭐 여자들이 불미스러운 행위를 하고
와서가 아닙니다. 미래라고 하는 것에 비하면 과거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생생하고 동물다워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괴상한 생각을 하면서 저는 어머니를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제가 신동이라는 말을 듣게 된 시초는 옛날의 가투놀이 때였습니다.
아직 네 살인가 다섯 살 때, 저는 글자라고는 한 자도 못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편을 짜서 한창 놀이를하는 판에서 제 얼굴을
슬쩍 들여다보시곤, 알겠니? 다쓰에야, 그렇게 언제나 점잖게 보고 있으렴.
그러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편에 끼여 집어 봐라, 다쓰에도 한 장쯤은
집을 수 있을 거야. 적수가 하도 어린애였기에, 여러 어른들은 내밀던 손도
멈추고 저만을 주시했습니다.
엄마, 요것? 하고 저는 무심코, 정말 무심코 어머니 무릎 바로 앞 의 한 장을 그
카드보다 작은 손으로 누르며 어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어머나! 하고 맨 먼저 놀란 것은 어머니였지만, 모두가 어머니를따라 감탄하는
소리를 하니 어머니는, 우연히 맞춘거예요, 글자도못 배운 아기가,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고 보니 모두들 손 님으로 와 있는 우리집에 대한
아첨인지 벌써 숭부는 팽개치고 읽는사람조차도 아기씨 잘 들어요 하면서,
저만을 위해 세 번 네 번씩이나 되풀이 읽어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또 한
장을 집었습니다. 그것도 맞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몇 장을 집어도 다
맞았습니다만,시가를 듣고 있어도 의미는 전혀 몰랐고 한 수라도 시가를 외고
있는 것도 아니고, 글자도 몰랐으니까
그야말로 요행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단지 무심히 손만 놀리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어머니의 손에, 어머니의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 일은 곧 대단한 소문이 되었습니다. 우리집에 초대한
손님들앞에서, 또 어머니와 제가 초대받고 간 많은 집에서, 어린 저는 몇 번이나
이 어머니와 딸 사이의 사랑의 증명이 되는 놀이를 되풀이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투에서 뿐만 아니고 좀더 화려한 신동의 기적 을 차차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백인일수(백 명의 시인의 화가를 한 수씩 골라모은 것:역수)의
노래를 외고, 스스로 카드의 글자를 읽게 된 오늘 밤 의 저는 그저 무심히 손만
놀리던 신동 때보다도 오히려 맞추기가더 어 렵고 서툴기만 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그렇지만 지금의 저는, 그렇게까지 해서 사랑의 증명을 찾으셨던
어머니가 차라리 서양의 향수처럼 다소 역겨워집니다.
연인인 당신이 저를 버린 것도 당신과 저와의 사이에 너무도 사랑의 증명이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당신과 신부의 신방 향수 냄새를, 두 분의 호텔에서 멀리 떨어진목욕탕에서
맡은 뒤부터는 저의 혼은 한 문짝을 닫아 버리고-말았습니다.
당신이-돌아가신 뒤 아직 한번도 당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 한 번도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저의 천사의 날개는 부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계시는 죽음의 세계로 저는 날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히 아름다운 상징의 노래에 그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중향의 나라의
성자들이 향기를 마음의 양식으로 삼았듯이, 레이먼드가 말하는 영계의
사람들은 색깔을 마음의 양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육군 소위 레이먼드 로지는 올리버 로지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1914년 지원병으로 입대, 남부 란카샤 제2연대 소속으로 출정,1915년 9월 14일
후지 언덕의 공격전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는 영매인 레나드 부인이나 퍼터즈를
통하여 영계의 이 모습 저 모습을 상세하게 통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영계의
소식을 아버지로 지박사가 한 권의 큰 책으로 꾸며 냈습니다.
레나드 부인의 숙령은 휘다라고 부르는 인도의 소녀, 피터즈의 숙령 문스톤이라
부르는 이탈리아의 늙은 은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영매는 아주 서툰 영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영계의 제3계에 살고 있는 레이먼드가 어떤 날 제5계로 가보니까,설화석고로
지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커다란 전당이 있었습니다.
그 전당은 새하얗고, 그리고 이런저런 색깔의 둥불이 켜져 있었대요. 어떤
부분은 빨간 색깔의 등불이 가득, 그리고 푸른 색깔, 한 가운데는 오렌지
색깔이었던 모양이에요. 그것들이 지금 한 말에서연상되는 것 같은 싱싱한
색깔이 아니고, 그야말로 부드러운 색조였대요. 그래서 그분은(휘다가
레이먼드를 그분이라 한답니다) 그러한색깔들이 어디서 오는가를 살펴봤답니다.
그었더니 대단히 널찍한 창이 많이 있고, 거기에 그러한 색깔의 유리가 끼워져
있었더랍니다.그리고 전당 속의 사람들은 빨간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핑크색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서기도 하고, 푸른빛 속에 서 있기도 합니다. 오렌지색이나
노란색 빛을 몸에 받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저렇게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그분은 생각했답니다.그랬더니 누군가가 가르쳐
주더래요. 핑크색은 사랑의 빛, 푸른색은진짜로 마음의 을 고치는 빛, 그리고
오렌지색은 지혜의 빛. 모두 가 서로서로 자기가 원하는 빛이 있는 곳에 가서
서 있는 것이라고.그리고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지상의 사람들이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고 현세에서도 언젠가는 여러 가지빛의
효과를 더 연구하게 될 거라고 했답니다.
당신은 웃고 계시겠지요. 그와 같은 빛의 효과로 우리들은 이상의 사랑의 침실
색깔을 꾸몄던 것입니다. 정신병 의사도 색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레이먼드의 향기에 대한 동화도 역시 색깔의 동화처럼 앳된 데가 있습니다.
지상의 말라빠진 꽃향기는 하늘에 올라가서, 그 향기가 지상에서와 폭같은 꽃을
하늘에 피게 한다는 것입니다. 영계의 물질은 모두지상에서 피어올라간 향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향기가 승천하여, 그 향기가 향기가 되기 이전 원래의
것이 그 향기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아카시아의 향기와 대나무의 향기는
다릅니다. 썩은 삼의 향기와 라샤의 향기는 다룹니다.
사람의 영도 혼의 불똥 같이 한꺼번에 시체에서 뛰어나가지는 않 고, 향기의
실처럼 천천히 시체에서 피어올라, 그것이 천상에서 한군데로 뭉쳐 지상에
남겨놓은 육체를 사본 뜨듯이 그 사람의 영의 신체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저승에서의 사람의 모습은 이승에서의사람의 모습과 똑같은 것입니다.
레이먼드도 속눈썹 이나 지문까지 살아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충치였던 자리에 저승에서는 깨끗한 이가 돋아나
있기도 했던 것 입니다.
이 세상에서 봉사였던 사람은 눈을 뜨고, 절름발이였던 사람은 건강한 두
다리를 가지고, 이 세상과 똑같은 말이나 고양이나 새도 있으며, 벽돌집도
있습니다. 더욱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은 엽연초나 위스키 소다마저 지상의
향기로 된 에센스나 에테르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죽은
아기는 영계에 가서 자랍니다. 어려서 이 세상을 떠나 저승에서 자란 형제를
레이먼드는 만나보기도 합니다만, 지상의 세계를 잘 모르는 그 영적인 모습의
아름다움은 특히 빛으로 짠 옷을 입고 손에 백합꽃을 든 릴리라는 소녀의
청순성은,시인이 보고 노래했더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대시인 단테의 신곡이나 대심령학자 스웨덴보르그의 천국과 지옥에 비한다면
레이먼드의 영계통신은 겨우 젖먹이의 말 같기도 하지만, 그런 까닭에 오히려
참말 같은 동화로서즐거움을줍니다.그리고 또 저는 이 지루한 기록속에서
참말같은 부분보다는 동화 비슷한 부분이 마음에 듭니다. 로지인들 영매가
말하는 저승의 모양을 확실한 것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을것입니다. 다만 죽은
아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는,즉 혼의 불멸을 중명하고 유럽의
대전쟁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수십만의 어머니나 여인들에게 이 책을
보냈던 것입니다. 참, 그리고 또한 제가 여지껏 수없이 읽은 영계통신 가운데서
레이먼드만큼 혼 의 영생을 현실적으로 말한 기록은 없었습니다.
물론 당신이라는 사람과 죽음의 이별을 하고, 이 책에서 위로를받지 않으면
안되는 저이면서도 그 속에서 한두 개의 동화만을 찾아내곤 하는 것은 대단히
엉뚱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단테나 스웨덴보르그에 있어서도, 대체로 서양 사람들의 저승에 대한
환상은 불전의 부처님들이 사는 환상의 세계에비하면 얼마나 현실적 이며,
그리고 얼마나 약소하고 비속한 것일까요. 동양에서도 공자 같은 분은 아직
삶을 모르는데 어찌하여 죽음을 알겠느냐고 간단히 집어치워 버렸습니다만,
훌교 경문의 전세와 내세의 환상곡을 다시없이 고마운 서정시로 생각하는
오늘의 저입니다. 레나드 부인의 숙령인 회다가 인도의 소녀라면 레이먼드가
하늘에서 예수와 만났을 때의 떨리는 기쁨을 말하면서도 왜 석가모니의 거룩한
모습은 안 보았을까요. 불전이 가르치는 저승의 풍요한 환상을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레이먼드가 크리스마스에는 하루종일 지상의 집에 돌아와 있다는대목을 보자,
죽음과 더불어 혼도 소멸된 것으로 유족들에게 생각되고있는 영들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지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당신이 돌아가신 뒤 우란분재(조상의
명복을 비는 음력 7월 15일의 재:역주)에서 당신의 정령을 제사지내듯이 제가
당신을 모신 적은한 번도 없습니다.
그것을 당신은 섭섭하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목련존자에 대해 쓴 불설 '우란분경'도 저는 좋아합니다. 도비가 독경의
공덕으로 아버지 해골을 춤추게 했다는 얘기도 '섬자경'에 나와 있습니다.
석가모니 세존의 전신이 흰 코끼리였다는 이야기도 저는 좋아합니다. 마가를
맞이하는 등불로부터 물에 띄워 보내는초롱불까지의 정령제 형식도 아름다운
소꿉장난이라고 생각합니다.연고가 없는 부처를 위해서도 천시아귀(익사자를
위한 법회:역주)를 잊지 않고 바늘공양(2월 8일 공양을 위해 부인들이 부러진
바늘을 모아 담도신사에 바치는 일:역주)까지 하는 일본 사람들입니 다.
그렇지만, '산성 의 오이나 가지를 고스란히 바쳐서 공양하는 가모강의
물'이라고 노래한 익규우선사의 정령제의 마음을 저는 무엇보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큰 정령제일까. 올해 익은 오이도 정령, 가지도 정령,
가모강의 물도 정령, 복숭아나 감이나 배도 정 령, 죽은 망령도 정 령, 살아있는
사람도 정령. 이 정령들이 모여들어서 무심 무념의 대면이니 다 만 크게
고맙구나 라고 생각할 따름, 오직 일체의 정령제, 즉 이 것을 일심법계의
설법이라 한다. 법계 즉 일심 인 까닭에 일심 즉 법계, 초목국토 실개성불제라
하는거지.
흰 비둘기라든가, 한 포기의 아네모네 꽃이 되고 싶습니다.생각하는 편이 삶을
누리고 있을 때의 마음의 사랑이 얼마나 넓게, 그리고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아주 옛날의 피타고라스 일파들도 악인의 혼은 저 세상에서는 짐승이나 새의 몸
속에 처박혀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피도채 마르기 전인 3일만에 예수는 승천하셔서 시체는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회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어 십자가에
못박히고 3일째에 살아나리라 하셨느니라.
이 두 사람의 것처럼 빛나는 옷을 레이먼드가 하늘에서 보게 된 예수도 업고
있었습니다. 예수뿐 아니라, 영계의 사람들은 모두가 광선으로 짠 복장을
입습니다. 그 혼들은 이것을 자기의 마음이 지은 옷, 즉 지상에서 지낸
정신생활이 죽은 뒤의 혼의 옷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혼의
옷에 관한 이야기는 이 세상의 윤리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내세와 마찬가지로 레이먼드의 천국에도 제7계까지가 있어서 혼의 수행에
따라서차차 높은 데로 올라가는 것 입니다.
불법의 윤회전생의 설도 이 세상의 윤리의 상징 같습니다. 전생의매가 이
세상의 사람이 되는 것도, 현세의 사람이 내세의 나비가 되는 것도, 부처가 되는
것도 모두 이 세상의 행위의 인과응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마웠던 서정시의 오점 입니다. 옛날 이집트의 유명한 서정시였던 죽은
사람의 글인 전생의 노래는 좀더 솔직했고, 희랍신화의 이리스의 무지개 옷은
더욱 맑은 빛이었고, 아네모네의 전생은 더욱 명랑한 기쁨이었습니다.
달이거나 별이거나, 그리고 동물이나 식물까지가 모두 신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또한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없는 감정을 가지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희랍신화는, 발가벗고 맑은 하늘 아래의 푸른
풀밭에서 춤추는 것처럼 건전했습니다.
거기서는 하느님이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풀과 꽃이 되어
버립니다. 숲의 아름다운 님프인 헤리데스는 남편도아닌 젊은 청년의 사랑의
눈으로부터 숨기 위해 데이지 꽃이 되어버렸습니다.
폰은 음탕한 아폴로를 피해서 처녀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월계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소년인 아로니스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 인 비너스를
위로하기 위하여 복수초의 모습을 하고 되살아났으며, 아름다운 젊은 청년인
히아신스의 죽음을 한탄한 아폴로는 애인의 모습을 히아신스 꽃으로 바꾸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도꼬노마에 놓인 홍매를 당신이라고 그 꽃을
보고 말을 건넨들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기묘하구나, 불 속에 연꽃이 피고 애욕 속에 참다운 깨달음이 있는 도다.
당신한테서 버림을 받고 아네모네 꽃의 마음을 알게 된 저는 흡사이
말대로였을까요.
아네모네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숲의 여신을 바 람의 신이 언제부터인가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이 일이바람의 신의 연인인 꽃의 신의 귀에
들어가서 꽃의 신은 질투 끝에아무것도 모르는 청순한 아네모네를 궁전에서
쫓아내고 말았습니다.아네모네는 여러 밤을 들에서 울며 새우다가 이럴 바에는
차라리 풀이나 꽃이 되고 말자,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름다운 풀과
꽃으로살자, 풀파 꽃의 솔직한 마음으로 하늘과 땅의 은혜를 받자, 문득 그렇게
깨달았습니다. 불쌍한 여신으로 있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풀이나 꽃이 되는
편이얼마나 즐거울까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여신의 마음은 비로소 아슴프레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저를 버리고 만 당신에 대한 원망과 당신을 뺏아간
아야꼬에 대한 질투로 매일 밤낮을 괴로워 한 저는, 불쌍한 여자로 있기보다
아예아네모네 꽃 같은 게 되는 편이 얼마나 행복할까, 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사람의 눈물이라는 건 이상한 것입니다.
이상하다면, 제가 오늘 밤 당신에게 뭐라고 하고 있는 말도 온통 이상야룻한 것
같습니다만, 생각해 보면 저는 몇천 년 사이의 몇천만의 또 몇억의 사람들이
꿈꾸기도 하고 원하기도 했던 것만을 말하고있는 것으로서, 저는 마치 사람의
눈물 한 방울과 같은 상징서정시로 이 세상에 태어난 여자로 생각됩니다.
당신이라는 연인이 있을 때 제 눈물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볼을
적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이라는 애인을 잃었던 그 무렵 제 눈물은 아침 눈뜰때에 볼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당신 곁에서 잠들고 있었을 때 당신의 꿈을 꾼 적은 없었습니다.당신과
헤어지고 나서 부터는 오히려 매일 밤 당신의 품에 안기는 꿈을 구기는 했어도,
잠자면서 저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침 잠에서 깨는게 슬픈 일이
되었습니다. 밤에 잠들 때가 눈물이 괼 정도로 즐거웠던 그 무렵과는 달라진
것입니다.
사물의 향기나 색깔까지도, 정령들의 세계에서는 마음의 양식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연인의 사랑이 여자의 마음의 샘물이 되었다고 한들 뭐가
이상하겠습니까. 당신이 제 것이었을 무렵 저는 백화점에서 한 개의 옷 동정을
살 때만 해도, 부엌에서 한 마리의 도미를 요리할 때만 해도 행복한 여자다운
사랑의 마음을 나타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잃은 뒤부터는 꽃의
색깔, 새들의 지저귐이 저에게는 따분하고 허무한 것 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지만물과 제혼과의 통로가 뚝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잃은 연인보다도
잃은 사랑의 마음을 슬퍼 했습니다.
그래서 읽은 것이 불교의 윤회전생의 서정시였습니다. 그 구절의 가르침으로
저는 금수초목 속에서 당신을 보았고 저를보았고, 그리고 차차 천지만물을
너그럽게 사랑하는 마음을 되찾은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깨달은 서정시는 너무 속된 애욕이 낳은 슬픔의 마지막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토록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당신과 만난지 얼마 안되어 아직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던 시절의 습성을 따라서
지금도 저는 봉오리 진 홍매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하 나로 가다듬고, 제 혼이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도나 흐름인 양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죽은
당신에게 흘러가도록 굳게 빌고 있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환상을 보고 어떤 말도 하기 전에,어머니가 어쨌
느냐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가 된 두 사람인 까닭에 저는 어떠한
힘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는 없다고 안심하고; 장례식에 가게 된 것이지요.
아버지 집에 두고 온 삼면경의 뒤의 첫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에 심약해져서 우리의 결혼을 허락했던 거 예요.
그 증거로 까만 상복을 맞추어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 슬픔의 화장을 합니다.
당신과 함께 살게 된 이후 처음으로 예장을 한 제 모습은 조금은 여위었어도
정말 아름다워요. 이 거을 속의 저를당신에 게 보이고 싶어요. 그래서 잠시 틈을
타 편지를 써요. 흑색도 아름답지만, 우리들을 위해서 더북 화려한 결혼 의상을
조르겠어요.
그때 어린 동생의 부르짖는 소리와 파도 사이에서쳐든 동생의 한쪽
손과 배의 돛대와 저녁 소나기의 하늘과 거친 파도, 문득 그런 것을 느껴
놀라움에 머리를 들었더니 하늘은 맑았지요. 그래도 급작스레 집에 뛰어
들어가서, 어머니, 동생이 큰일났어요라고 소리 쳤지요.
어머니는 창백해진 얼굴로 제 손을 길길 끌며 바닷가로 달렸습니다. 동생은
마침 요트를 타려고 할 때였습니다.
저의 친구인 여학생 둘하고 여덟 살 난 동생, 항해를 맡은 이는 고등학교 학생
하나였습니다. 샌드위치 같은 멜론, 아이스크림 기구까지 싣고, 잇닿은
바닷가지만 2o리 정도나 떨어진 피서지에 아침부터 출범하려는 중이 었습니다.
과연 그 요트는 귀항하는 도중에 바다에서 강풍이 섞인 소나기를 만나, 돛의
방향을 바꾸려고 하는 순간에 전복했습니다.
승객 세 사람 모두 쓰러진 돛대를 불잡고 거친 파도 속에 떠돌고있는 것을
발동선이 구조하러 갔기 때문에 바닷물을 조금 마셨을뿐 목숨에는 별 지장이
없었지만, 만일 어린 동생이 그 속에 끼어 있었더라면, 남자는 하나뿐이었고,
여학생들은 별로 수영을 잘 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곧장 쫓아나온 까닭은, 제 혼이 미래를 미리 안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투놀이로 내 명성이 높아졌을 때 소학교의 교장이 그런 신동을 한 번
보겠다고 해서 저는 어머니를 따라서 그 집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고, 어설프게 백까지 외울 뿐 아라비아 숫자는 읽을
수가 없었는데도, 곱셈 나눗셈을 쉽게풀었던 것입니다. 까다로운 응용문제 같은
것도 즉시 답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어이없이 쉬운 것으로서, 공식이나 운산을
하는 게 아니고 단지 답의 숫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으로 말하면 되었기 때
문입니다. 간단한 지리나 역사 문제에도 대답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여러 빛깔-바실리 악쇼노츠
달로 가는 도중에
"커피 드릴까요?"
"그럽시다."
"터키식으로 할래요?"
"뭐요?"
"터키식 커피 말예요." 웨이트리스는 이렇게 소리친 다음 식탁 사이를 비집고
서둘러 가 버렸 다.
"치마만 두르면 다 여잔가." 서둘러 가 버리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키르피첸코는 이런 말로 스스로를 달랬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갖고 난리를 치긴!'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며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50분밖에 남지 않았군.
머지않아 탑승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올 테지. 이런 곳엔 아예 얼굴을 내밀지
않는 게 좋을 걸 그랬어. 참, 이런 곳도 명색이 도시라고! 이건 완전히 촌구석
아냐! 모스크바하고는 달라! 이런 곳을 좋아하는 녀석들도 있겠지만, 나야
이따위 촌구석에서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어. 빌어먹을 놈의 동네 같으니라고!
혹시 다시 한 번 오면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정말로 대단한 폭음을 했었다. 흔히들 말하는 멋진 술판에 끼었다가 나온
것이 아니라 완 전히 술독에 빠졌다가 나왔던 것이다. 그것도 어제 저녁,
그저께 저녁, 그끄저께 저녁, 사흘 동안 이나 내내. 모든 것이 다 야비하기
짝이 없는 바닌 녀석과 그의 알량한 누이 덕분이었다. 그들의 꾀임에 빠져
그는 정말로 엉망이 되었던 것이고,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힘들게 모은
돈을 써가며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키르피첸코가 유즈니에 있는 공항에서 바닌과 우연히 마주쳤던 것은 사흘
전의 일이다. 그는 바닌과 자기가 같은 때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사실 그가 바닌을 안 중에 두었던 적은 없었다. 벌목장에서는
항상 그를 놓고 사람들이 야단법석을 떨었으며, 어느 때 고 "바닌, 바닌을
본받으라고! 바닌을 본받아야 해!" 라는 소리다 드높았었다. 그러나 발레리
키르피첸코가 그에게 단 한 번도 이렇다 할 만큼 주의를 기울인 적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도 바닌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고, 전기 기술자인 그와
안면도 있었다. 어쨌든, 작업이 없는 날이 면 사람들이 그를 놓고 그리도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바닌은 대체로 사람들 사이에 묻혀 눈에 띄지 않도록
처신을 했었다.
"아, 저 친구가 바닌이군! 이봐, 저 친구가 바닌이란 말일세!"
벌목장에는 바닌만큼 일을 잘하는 친구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모든
분야에서 그보다 갑절이나 나은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윗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을 지목해서 찬사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그들은 언제나 그를 감싸고 돌기 마련인 것이다. 물론 그런 녀석들을
시기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오히려 동정을 해야 마땅할 것이다. 바유클리에
시니친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도 키르피첸코처럼 트럭 운전 기사였다.
그런데 신문 기자들이 그를 좋게 보아서 더할 수 없을 만큼의 찬사를
늘어놓았다. 처음에 그는 그에 관한 신문 기사를 모두 오려서 보관할
정도였지만, 이윽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오히려 내빼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바닌은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대처해 나갔다. 왜소한
체구의 바닌은 자제력을 잃지 않고 깔끔하고 빈틈없이 처신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소리없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을 잘 꾸려 나갔던 것이다. 작년
봄 통조림 공장에서 생선 내장을 제거하는 일을 맡아하도록 본토에서 200명의
처녀들을 계절 노동자로 데려왔을 때의 일이다. 처녀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총각 녀석들이 이들과 만날 요량으로 몰려나가서는 소리를 지르고 법석을
떨면서 트럭으로 기어올라갔었다. 트럭에 올라선 그들은 바닌이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게 누구야? 이거 바닌 아냐!" 사람들이 놀라서 이렇게 소리쳤다.
유즈니 공항에서 바닌은 둘도 없는 친구라도 만난 양 키르피첸코에게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문자 그대로 숨이 막힐 정도로 즐거워하며, 말할 수 없이
반갑다고 떠들어댔다. 그리고는 하바로프스크에 누이가 살고 있으며, 자기
누이의 친구들 가운데 정말로 삼삼한 여자아이들이 있다고 떠버렸다. 그는 갖은
미사여구를 다 동원하여 아주 세밀하게 누이와 누이의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며, 키르피첸코는 곧 그의 말에 눈이 돌 정도로 혹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처녀들이 떼지어 통조림 공장을 떠난 이후로 발레리 키르피첸코는 겨울
내내 단 두 명의 여자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하나는 출퇴근 장부를 관리하는
여자였고 다른 하나는 요리사였는데, 이들은 사실 여자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는
늙다리 할망구들이었다.
"바닌, 자네 정말 끝내 주는군."
비행기 안에서 바닌은 승무원들에게 계속 이렇게 소리쳤다.
"여보쇼, 조종사 양반들! 화통에 석탄 좀 더 퍼 넣으쇼!"
재치에 넘치는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이 친구가 바로 그 친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바닌, 자네한테 진작 기회를 좀 줬어야 하는 건데."
바닌의 누이가 사는 집은 바람에 날려온 눈더미에 파묻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울퉁불퉁한 도로에는 특수 장비로 제설 작업을 한 흔적이
역력했으나, 길가에는 치우지 않은 눈더미들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 때문에
길가의 자그마한 오두막집들이 눈더미들에 가려진 채 거의 보이질 않았다.
집들은 마치 참호 속에 처박혀 있는 것같아 보였다. 파삭파삭하게 얼어붙은
대기를 가르고 굴뚝에서 푸른색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새 둥지가 달린
안테나와 전신주들이 하늘을 향해 사방팔방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마치 시골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는 듯했다. 저 멀리 언덕 위의 대로를 따라 전차가 다니는
궤도가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공항에는 유리벽으로 뒤덮인 식당 건물이 있었는데, 키르피첸코는 그 식당
건물과 그 앞에 줄지어 길게 늘어선 녹색 불빛의 자동차들을 보았을 때부터
이미 약간 얼이 빠져 있었다. 서리가 앉은 유리창을 통해 재즈곡을 연주하는
깔끔한 차림의 악단이 어렴풋하게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중심가에 있는 고급
식료품 가게에서 그는 완전히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푸른색의
50루블짜리 지폐 다발을 꺼낸 다음 호탕하게 웃으면서 술병들을 주머니에 쑤셔
넣기도 하고 통조림을 한 아름이나 쓸어모으기도 했다. 바닌도 신이 나서
키르피첸코보다 더 큰소리로 웃어대고는, 그도 역시 이것저것 치즈와 통조림을
골라잡았다. 바닌이 담당 지배인을 구워삶은 덕택에 소시지도 하나 살 수
있었다. 바닌과 키르피첸코는 택시에 온갖 종류의 식료품과 체첸 잉구시
지방산의 꼬냑 술병들을 가득 싣고서 오두막으로 왔던 것이다. 누가 감히
그들이 빈 손으로 바닌의 누이 집을 찾아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키르피첸코가 방에 들어서서 보니, 그의 덥수룩한 모자가 거의 닿을 정도로
천장이 낮았다. 그는 하얀 면직물 침대보로 뒤덮인 침대위에 사가지고 온
식료품들을 내려놓았다. 몸매를 가다듬은 다음 키르피첸코는 거울에 비친
시무룩한 표정의 붉고 메마른 자기 얼굴을 흘끗 들여다보았다.
바닌의 누이인 라리사는 키가 작고 통통한 여자로, 외모로 보아 보모 같아
보였다. 그녀는 벌써부터 키르피첸코의 외투 단추를 끌러 주고 있었다. 그녀는
되풀이해서 이렇게 말했다.
"오빠 친구라면 제 친구이기도 해요."
그리곤 외투를 걸치고 장화를 신은 다음 밖으로 나갔다.
바닌이 꼬냑 병의 콜크 마개를 따고 칼로 통조림 통을 따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키르피첸코는 여기저기 방안을 휘둘어보았다. 거울이 달린 장식장, 서랍장,
라디오가 달린 전축 등등, 방안에는 가구들이 상당히 잘 갖추어져 있었다.
서랍장 위에는 전쟁 전 시절에 찍은 보로실로프 원수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 속의 보로실로프는 견장을 착용하지 않은 채 접은 옷깃에 원수를 상징하는
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또한 사진 옆에는 수료증이 담긴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수료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었다. '군사 및 정치 훈련을 성공리에 마친
경비대 특등 사수에게. 동북 지구 노동자 수용소 당국.'
"우리 부친 것이라네." 바닌이 키르피첸코에게 말했다.
"부친께선 무얼 하셨나? 수용소 경비대에 계셨던 것 같군."
"그러셨다네. 그리곤 세상을 뜨셨지." 바닌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돌아가셨단
말일세."
그러나 그의 슬픔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곧 쾌활해져서 이것저것
레코드판을 골라 음악을 틀기 시작했던 것이다. '리오-리타', '검은 바다 갈매기',
온 세상을 두루두루 여행하면서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것을 다 본 사람들인 양
세 명이 가수가 화음을 이루어가며 아주 멋들어지게 뽑아대는 불란서 노래 등,
모두 익히 듣던 곡일 뿐 새로운 것이라곤 없었다.
라리사가 토마라는 이름의 자기 친구를 데리고 돌아왔다. 오자마자 그녀는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오이 절임과 버섯을 가져오는 등 부엌에서 식탁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그 동안 토마는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돌부처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저 여자를 불러다가
어쩌자는 것인지 키르피첸코에게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그녀한테 눈길이
가는 것을 애써 피하려고 했으나, 어쩌다 그녀를 흘깃 쳐다본 순간 그는 눈앞이
아찔해 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손도 꽁꽁, 발도 꽁꽁 얼었으니, 이제는 한잔을 즐길 때가 아닌가!"
바닌이 쾌활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지만, 안절부절 못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식사 준비가 되었으니 식탁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키르피첸코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40년'이라는 상표명의 길다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종이를 말아서 파이프 모양으로 담배 앞에 붙여 놓은 그런
담배였다. 그는 담배 연기를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뿜어내고 있었으며, 라리사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고리 모양의 담배 연기를 새끼 손가락에 끼우려고 했다.
천장이 낮은 방 안의 공기가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가죽 장화를 신고 있던
키르피첸코의 발이 점점 더 축축해졌고, 장화에서는 분명히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바닌은 토마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저녁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바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이자 굳게 다문 그녀의
입술이 실쭉 움직이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토마는 몸매가 아주 뛰어난
여자였는데, 나일론 천으로 된 그녀의 블라우스 안쪽으로 장미빛의 붉은 속옷이
비쳐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키르피첸코의 눈앞에서 벽이, 보르실로프의 초상이,
서랍장 위에 놓여 있는 조그마한 코끼리 조각상이 짙은 오렌지빛의 둥근 원을
그리며 맴돌기 시작했다. 그가 내뿜는 고리 모양의 담배 연기는 방안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라리사의 손가락은 무언가 글자를 쓰듯 담배
연기를 따라 공중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바닌과 토마가 옆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그를 뒤편으로 용수철 자물쇠가
조용히 걸렸다.
라리사가 소리를 내어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발레리, 당신은 왜 춤을 추지
않으셨죠? 춤을 좀 추셨어야 했는데."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끝나고 정적이 감돌았다. 라리사는 갈색의
사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옆방에서는 희미하게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발레리, 먹을 것만 잔뜩 가져오면 다인가요? 사람이 좀 재미가 있어야지요."
라리사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서른 살 가까이 되었다는 사실과 경험이
많은 여자라는 사실이 갑자기 키르피첸코의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미끄러지듯이 그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우리 함께 춤춰요."
"하지만 난 가죽 장화를 신고 있는데."
"그러면 어때요. 자, 이리 와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레코드판 위에 바늘을 올려놓자, 토마토 냄새와
체첸 잉구시 지방산 꼬냑 냄새로 가득 찬 방안에 다시금 불란서 친구들의
삼중창 곡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온 세상을 두루두루 여행하면서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것을 다 보았다는 듯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저 곡은 안되겠는데." 키르피첸코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라리사가 큰 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이건 특별한 레코드판이에요!
분위기가 있잖아요!"
그녀가 방 주위를 맴돌기 시작하자, 치마가 그녀의 종아리에 부딪히면서 소리를
냈다. 키르피첸코는 전축 위의 레코드판을 바꿔 올려놓고 '리오-리타'를 틀었다.
그리고는 라리사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항상 그렇듯이, 어둠 속에서 여자의 손가락이 당신의 목을 어루만지면, 아무리
비싼 창녀가 옆에 누워 있더라도 달의 손가락이 당신을 어루만진다는 착각이
들기 마련이다...... 당신의 목을 어루만지는 여자의 손가락을 손으로 쳐서
치워버리지 않을 수 없을 때라도 결국에는 마찬가지 착각이 들기 마련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달이 높이 떠 있고 그 달이 서리가 낀 창문을 통해
일그러진 달걀 노른자처럼 보일 때, 무슨 착각인들 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며, 자신을 속여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당신은 벌써 29살이고, 변변치 못한 당신의 삶이
정돈되어 있건 엉망이건, 당신의 삶이 아름답건 화끈하건 차디차건, 여자의
손가락이 어둠 속에서 당신의 목을 어루만지면 마치 달의 손가락이......
"몇년도 생이세요?" 여자가 물었다.
"32년도 생."
"트럭 운전 기사죠? 그렇죠?"
"그래서?"
"월급 많이 받나요?"
성냥불을 켜니, 불빛에 비친 그녀의 둥근 얼굴과 갈색의 사팔 눈이 발레리의
눈에 들어왔다.
"그건 알아서 무엇하게?"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렇게 대꾸했다.
다음 날 아침 바닌은 따뜻한 중국풍 내의 바람으로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하고, 절인 오이 껍질을 접시에 집어던지기도 했다. 토마는 전날
저녁처럼 단정한 차림으로 방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난
다음 그녀와 라리사는 일을 하러 나갔다.
"발레리, 어떤가? 재미 좀 봤나?" 바닌이 웃음을 띤 채 호의 에 넘친 표정으로
키르피첸코에게 말을 건넸다. "그건 그렇고......자, 그럼 우리 이제 영화 구경이나
가세."
그들은 내리 세 편의 영화를 본 다음 식료품 가게로 갔다. 그 자리에서
키르피첸코는 다시 한 번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붉은색의
루블화 지폐 다발을 꺼낸 다음, 바닌의 팔에 치즈와 통조림을 한 아름 안겼다.
이런 식으로 내리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여자들이 일을 하러 나간 다음 바닌이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자넨 우리 집안 사람이 된 셈이네. 안 그런가, 바렐리?"
키르피첸코는 숙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절인 오이에서 짠 오이즙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만 목에 걸리고 말았다.
"뭐, 뭐라고?"
"'뭐라고'라니? 그거 무슨 말인가?" 바닌이 소리를 질렀다. "자네, 내 누이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나? 안 그런가? 자, 그러지 말고 언제 결혼식을 올릴
건지 말해 보게나. 그러지 않으면 자넬 고발하겠네. 자네의 비도덕적 처신을
묵과하지 않겠단 말일세. 내 말 알아듣겠나?"
키르피첸코는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바닌에게 주먹을 뻗어서 광대뼈를 냅다
후려쳤다. 방 한 쪽 구석으로 나가떨어졌던 바닌이 발닥 일어서더니 의자를
움켜쥐었다.
"이런, 개자식이!" 키르피첸코가 으르렁거리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어쩌다가
얻어걸린 창녀 같은 년하고 결혼까지 하란 말이냐?"
"수용소 출신의 인간 쓰레기 같은 놈이 내뱉으면 다 말인 줄 아나." 바닌이 악을
썼다. "야, 이 상습범 자식아!"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키르피첸코에게 의자를
집어던졌다.
그러자 키르피첸코가 그에게 정말로 본때를 보여 주었다. 바닌은 양가죽 외투를
얼른 잡아채 가지고 잽싸게 밖으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키르피첸코는 치가
떨릴 정도로 엄청난 분노감과 심적 동요, 고독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여행 가방을 끌어내어 그 안에 소지품을 집어 담고, 외투를 입은 다음
그 위에 양가죽 외투를 겹쳐 입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야외용 셔츠를 입고 넥타이까지 맨 채 찍은 사진이었다. 그는
재빠르게 사진 뒤에다 이렇게 썼다. '정다운 추억을 간직한 채, 라리사에게'
라리사의 방으로 들어가서 그녀의 베개 위에 사진을 올려놓은 다음
키르피첸코는 집을 나섰다. 마당에서 침을 튀기며 갖은 욕설과 저주를 퍼붓고
있던 바닌이 사나운 개를 풀어 키르피첸코에게 달려들게 했다. 키르피첸코는
개를 발로 차서 ㅉ아내고는 대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괜찮았어요, 커피 맛이?" 웨이트리스가 키르피첸코에게 물었다.
"나쁘지 않았소. 효과가 있는 걸." 키르피첸코가 한숨을 쉬면서 그녀의 손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또 오세요." 웨이트리스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 비행기에 탑승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키르피첸코는 성큼성큼 힘차게 걸어서 비행장을 향해 갔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골
구석에 있는 숨막히는 오두막에 처박혀서 버섯과 치즈 조각이나 집어먹고
있어야 한다면, 어쩌다가 오랜만에 떠나는 금쪽 같은 휴가의 의의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 따위 오두막에 처박혀서 아까운 휴가를 전부
날려 버리는 녀석들도 있지만, 그는 그런 종류의 멍청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모스크바에 갈 계획이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중앙 국영 백화점에 들러 새옷 세
벌과 멋진 신발 한 켤레를 살 예정이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서
멀리 흑해까지 갈 예정이었다. "갈매기야, 나의 꿈인 흑해의 갈매기야." 그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흑해에 가서 그는 크림 지방산의 과자를
먹고 외투를 벗어 던진 채 짧은 옷을 입고 바닷가를 따라 어슬렁거릴
생각이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우람하고 강인한 체구에 두 벌의 외투를 겹쳐 입고, 사향쥐 가죽으로 된 모자를
쓰고 털 장화를 신은 채, 보무도 당당하게 거리낌없이 걸어나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였다. 몇 년 전 그와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여자의 말이
생각났다. 그의 얼굴이 아메리카 인디언의 추장 얼굴 같다고 그녀가 말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세울 것은 그 여자는 지질 탐사대의
대장이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안나 페트로프나라는 이름의 그 여자는 괜찮은
여자였다. 심지어 학위까지 갖고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그에게 편지를 썼고
그도 그녀에게 답장을 했었다. "친애하는 안나 페트로프나, 어떻게 지내고 있소.
발레리 키르피첸코가 당신에게 편지를 올리고 있소......" 그밖에 말도 안되는
온갖 것들을 편지에 썼던 것이다.
수많은 승객들이 회전식 출입구에 벌써부터 몰려들어 법석대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라리사가 장화를 신은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창백하다 못해 푸른 기운까지 감도는 그녀의 얼굴과 새빨간 그녀의 입술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옷깃에는 달리는 사슴 모양의 브로치를 달고 있었는데, 그
브로치가 몹시도 어색해 보였다.
"무엇 때문에 왔소?" 키르피첸코가 물었다.
"작, 작별 인사를 하려고요." 라리사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벌려 간신히 대답을
했다.
"자, 이젠 다 그만 둡시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당신하고
당신의 알량한 오빠가 사흘 동안이나 나를 엉망으로 만드었소. 다 좋소,
그렇지만 이걸 가지고 사랑이니 뭐니 말도 안되는 소리를 떠들어대지는 맙시다."
라리사는 울음을 터뜨렸고, 이에 발레리는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자, 알았소, 알았다니깐."
"그래요, 우리가 당신을 갖고 놀았어요." 그녀가 훌쩍이며 말했다. "우리가
당신을 갖고 놀았단 말이에요......좋아요......당신이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다 알아요......당신 말이 맞아요, 그게 바로 저예요......그래서 전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거죠? 그 말인가요?"
"그만 두라니깐."
"안돼요. 전 그만 둘 수 없어요. 그만 둘 수 없단 말예요." 라리사는 목소리를
높인 채 울부짖다시피 했다. "발레리, 당신은......당신만큼은 여느 사람들하고는
달라요." 그녀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말을 이었다.
"나도 여느 사람들과 다를 데가 없는 똑같은 사람이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는 동안 키르피첸코는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라리사는 등을 돌리고 더욱더 슬피 울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온통 슬픔에
떨고 있었다.
"자, 자, 알았소, 알았다니깐." 키르피첸코는 당황해서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이윽고 승객들이 비행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르피첸코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라리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정말로 마음이 편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그의 멍청한 성격
때문에 키르피첸코는 어떤 여자와 함께 있어도 항상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는 항상 전에 만나던 여자를 잊게 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곤 했다. 일단 정상으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끝이었던
것이다.
그는 햇빛에 반짝이는 거대한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무리지어 가는 승객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곧 모든 것을 잊었다. 끔찍하게도 사흘 동안이나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사실도, 그의 목을 어루만지던 여자의 손가락도 모두
잊었다. 그는 그처럼 형편없는 가격에 자신을 팔 인물이 아니었다. 여느때도
항상 그랬다. 그는 쉽게 사들일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쉽게 망가질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창녀 같은 여자들하고만 관계를 맺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정말로 괜찮은 여자들하고도 관계를 맺기도 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과학자인 안나 페트로프나가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정말로 괜찮은
여자였던 것이다. 그런 여자들과 발레리는 사랑에 빠졌던 것이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야성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말수가 적었기
때문인지도 모르며, 모든 여자들이 그에게 무언가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는 어쩌면 그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는 장님과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그 여자들이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항상 자신에게 이렇게 중얼거린다. "당신이 그런 잔꾀를
써서 나를 잡을 수는 없을 걸. 나를 쉽게 망가뜨릴 수도 없지. 일은 이미
일어났던 것이고 이제는 다 끝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젠 모든 것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는 걸. 정상을 되찾은 거지."
비행기는 엄청나게 컸다. 전함만큼이나 크고도 무거워 보였다. 키르피첸코는
그토록 대단한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었으며, 그런 비행기를 타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워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정말로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그 비행기로 상징되는 첨단 기술이었다. 그는 승강대를 거쳐 비행기에
올라섰다. 푸른 제복을 입고 푸른 모자를 쓴 스튜어디스가 그의 탑승권을
검사하더니 그의 자리가 있는 곳을 일러주었다. 그의 좌석은 맨 앞쪽에
있었는데, 어떤 친구가 벌써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경을 끼고 천으로
된 모자를 쓴 친구였다.
"비키쇼." 키르피첸코가 조용하게 말하면서 안경잡이에게 자기의 탑승권을 보여
주었다.
"내 자리에 가서 앉을 수 없겠소?" 안경잡이가 이렇게 말했다. "뒤에 가서
앉으면 멀미가 나서 그래요."
"비키라고 하지 않았소." 키르피첸코가 호통을 쳤다.
"좀 점잖게 말할 수 없소?" 안경잡이가 기분이 상한 듯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키프피첸코가 그의 모자를 홱 나꿔채서는 그가 마땅히 가서 앉아야 할 자리가
있는 비행기 뒤쪽에다 던져 버렸다. 아주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다음부터는
탑승권에 명시된 좌석에 가서 앉으라는 뜻을 전한 것이다.
"여기 웬 소란이죠?" 스튜어디스가 와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키르피첸코가 말했다.
안경잡이는 완전히 머쓱해진 얼굴로 모자를 찾으러 뒤쪽으로 가버렸다.
키르피첸코는 응당 자기가 차지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는 외투를 벗어 그의 발치에다 놓았다. 이는 말하자면 자기 자리에
대한 권리를 확고하게 밝히기 위한 방편이었다.
승객들이 차례차례 비행기에 오르고 있었는데, 끝이 없어 보였다. 기내에서는
경음악이 울리고 있었고, 승강구를 통해서는 차가운 햇빛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스튜어디스들이 통로를 따라 분주하게 왔다갔다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똑같은 종류의 푸른 제복을 입고 있었으며 늘씬한 다리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키르피첸코는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군비 축소와 베를린
사태에 관한 기사가 있었고, 칠레에서 거행되는 축구 선수권 대회 준비에 관한
기사도 있었다. 그리고 겨울 농사를 위해 쌓인 눈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에
관한 기사도 그의 눈에 띄었다.
숄을 어깨에 걸친 나이든 시골 아낙네 하나가 창가의 자리에 가서 앉았고, 뺨에
홍조를 띤 젊은 선원 하나가 키르피첸코의 옆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 앉아서
그는 계속 익살을 떨었다.
"아주머니, 유언장은 작성하셨나요?" 그리고는 스튜어디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아가씨, 유언장은 누구한테 제출해야 하지?"
항상 이런 익살꾼들과 함께 여행을 해야 한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침내 승강구의 문이 닫히고, 경보판에 붉은색의 글자로 된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나타났다. '금연. 안전띠를 착용하시오.' 무언가 영어로 된 글귀도 함께
나왔는데, 아마도 똑같은 뜻의 안내문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어쩌면 전혀 반대의 뜻을 전하는 안내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끽연.
안전띠를 착용하지 마시오.' 키르피첸코는 영어를 몰랐던 것이다.
어떤 아가씨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흘러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기장 이하 저희 승무원은 소비에트 항공 소속 TU-114호에
탑승하시게 된 승객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희 대형 항공기는
하바로프스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승객 여러분을 모실 것입니다. 현재 저희
항공기는 고도 9000미터 상공에서 시속 700킬로미터로 운항하고 있으며, 예정
비행 시간은 8시간 30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서 영어로 횡설수설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ㅆ라, ㅆ라,
ㅆ라......땡큐."
"아무렴, 그래야지." 키르피첸코는 만족해서 이렇게 말하고는 옆자리의 선원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모든 게 틀림없군."
"틀림없지 않으면 자넨 어떨 거라고 생각했나?" 선원은 마치 비행기가 자기
것이고, 2개국어로 하는 안내 방송이라든가 그밖에 모든 것을 다 자기가
주관하여 진행한 듯한 말투로 키르피첸코에게 물었다.
이윽고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시골 아낙네는 바짝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공항의 건물들이 창문을 스치고 빠르게
지나갔다.
"외투 좀 치워도 될까요?" 스튜어디스가 물었다.
소란을 떤다고 해서 키르피첸코에게 왔던 바로 그 아가씨였다. 그녀를 쳐다보는
순간 그는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가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에 미소를
담고 그녀가 그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러자 그녀의 검은 머리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니, 검은 머리라기보다는 칠흙 같은 머리였다. 칠흙 같은 그녀의
머리는 매우 부드러워 보였다. 단정하게 손질이 되어 있는 그녀의 머리는 또한
모피든 양털가죽이든 나일론이든 세상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어떤 귀중품과도
견주어 볼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키르피첸코의 양가죽 외투
깃에 닿았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결코 본 적이 없는 그런 손가락이었다. 아니,
그렇게 섬세한 손가락을 잡지에서 본 적은 있다. 그러나 그리도 섬세한 손가락,
그리도 멋진 미소, 그리도 매혹적인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이처러 아름다운
여자,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처럼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이 되어
그의 눈앞에 나타나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정녕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가씨가 내 양가죽 외투 가져가는 거, 자네도 보았지?" 키르피첸코가 선원에게
멍청한 웃음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선원이 그에게 눈을 찡긋하면서
다 안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일하는 게 맘에 들지, 안 그런가?"
아가씨가 돌아오더니 시골 아낙네의 짧은 털외투와 선원의 가죽상의,
키르피첸코가 벗어 놓았던 또 한 벌의 외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모든
옷가지를 그 멋진 몸으로 껴안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무들, 안전띠를 착용하세요."
엔진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창가에 앉아 있던 시골 아낙네가 두려움에 몸을
움츠린 채 남몰래 성호를 그었다. 선원이 놀리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흉내를
냈고, 그러는 동안 내내 곁눈질로 키르피첸코가 웃고 있는지 어떤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키르피첸코는 목을 길게 뺀 채 옷가지를 어디엔가로 나르고
있는 그 아가씨에게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사탕을 쟁반에 담아
갖고 와서는 승객들에게 권했다. 그녀가 승객들에게 권하는 것은 사탕이 아니라
심장약인지도 모를 일이었고, 아니면 금덩어리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행기가
일단 이륙하자 그녀는 곧이어 음료수와 광천수,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가장
깨끗한 폭포에서만 흐르는 그런 종류의 천연수를 가져다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사라졌다.
"카드 한 판 치지 않겠나?" 선원이 제안했다. "어떤가, 심심풀이로 한 판 치지."
붉은색의 경보판 신호등이 꺼졌으며, 키르피첸코는 이제 담배를 피워도
괜찮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일어서서 앞쪽으로 나가 커튼 뒤쪽에 마련된
좁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이미 담배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승객 여러분, 잠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때 스피커에서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재 저희는 고도 9000미터를 유지하면서 시속
750킬로미터로 운항하고 있습니다. 바깥쪽 대기의 온도는 섭씨 영하 58도입니다.
감사합니다."
저 멀리 아래쪽으로 바위투성이의 황무지가 지나갔다. 거칠고 황량한 대지 위로
얼음같이 차가운 대기를 헤치고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송연처럼
생긴 몸통 안에 인간의 체온과 품위, 담배 연기, 잔잔하게 들리는 말소리와
웃음소리, 집안 식구에게라면 감히 건넬 수도 없는 농지거리, 광천수, 비옥한
땅을 가르고 흘러내리던 폭포수의 물방울을 가득 담은 채 비행기가 대기 속을
나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키르피첸코의 몸은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비행기의 기내 앞쪽 어딘가에서 키르피첸코가 앉아 담배를 피우는 동안
뒤쪽 아니면 가운데 쪽에서 이 세상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여자가,
당신에게는 저 하늘 위의 달만큼이나 멀고도 멀게 느껴지는 그 여자가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키르피첸코는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친구들한테 이것저것 허풍을 섞어가며 자신의 시시한 모험담을 풀어놓을 때를
빼놓고는 그래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번이 네 번째 대륙 횡단 여행이로구나. 그렇지만 내 돈을 들여 대륙
횡단 여행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얼마나 멋진가!'
이전의 대륙 횡단 여행은 모두 정부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었다. 발레리가 아직
어린아이였던 1939년의 일이었다. 스타브로폴 지역의 집단 농장에 소속되어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사에 따라 갑자기 극동 해안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길고도 먼 여행이었다. 그때의 여행과 관련하여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맛이 간 우유라든가 시큼한 양배추국, 불을 지핀 화물차 한쪽
구석에서 빨랫감을 말리기 위해 창 밖에 걸어 놓던 어머니, 창밖에서 깃발처럼
휘날리다가 추위 때문에 꽁꽁 얼어붙은 빨랫감들이 화물차의 벽을 치면서 내던
덜그럭 소리, 그리고 그런 와중에 어린 그가 부르던 노래, 이런 것들이 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높이, 높이 날고요,
조종사는 하늘에서 우릴 내려다보지요.
그의 어머니는 전쟁이 한창일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45년 어느 날 쿠릴 열도에서 벌어졌던 전투에 참전하셨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셨다. 발레리는 고아원에서 7년간 학교를 다닌 다음 직업 학교에 가서
견습공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는 탄광에 가서 일을 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그는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석탄덩이를, 조그만 석탄덩이를,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석탄덩이를 파내는 일'을 했던 것이다. 1950년에 그는 징집 명령을
받고 다시 한 번 대륙 횡단 여행을 하게 되었다. 다만 이번에 간 곳은 발틱
해안 지방이라는 점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군대에서 그는 트럭 운전병
교육을 받고 근무하다가, 제대를 한 다음 친구와 함께 흑해 연안에 있는
노보로시스크에 정착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을 때쯤 그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몇 놈의 개자식들이 그가 일하던 정비 공장에서 상습적으로 예비 부품을
훔쳐냈던 것이다. 그러나 경찰관 나으리들은 누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느라 오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키르피첸코를 '재산상
손실에 책임이 있는 자'로 지목하여 체포해 버렸던 것이다. 3년 징역형을
언도받은 그는 사할린에 있는 노동자 수용소로 보내졌다. 노동자 수용소에서
1년 6개월을 복역한 다음 그는 모범수로 석방되었다. 후에 가서 그에 대한
혐의가 풀리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완전한 사면을 받게 되었다. 노동자
수용소에서 나온 이래로 그는 줄곧 벌목장에서 일을 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재미를 붙였을 뿐만 아니라 벌이도 괜찮았다. 재목을 실은 트럭을 끌고
비탈길을 따라 능선까지 올라갔다가 브레이크란 브레이크는 모두 걸어 놓고서
다시 내려오는 일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독주를
마시거나 영화관에 드나들었다. 여름이 되면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는 처녀들과
춤을 추러 다니곤 했다. 그는 합숙소 생활을 하였는데, 따지고 보면 그는 일생을
합숙소, 군대 막사, 수용소에서 보낸 셈이었다. 이단 침대, 막사용 단층 침대나
이층 침대, 널판으로 짠 간이 침대나 긴 의자...... 단지 이런 것들 위에 자신의
몸을 의지한 채 그는 이제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그에겐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알고 지내는 사람'만 잔뜩 있을 뿐이었다. 그는 경원의
대상이었고, 함부로 장난을 걸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수틀리면 그 자리에서
한방 먹여 상대방의 눈이 시퍼렇게 멍들도록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을 아주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기계를
좋아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친구를 기억하듯이 자기가 몰던 각종 차를 기억하곤
했다. 군대에서는 몰던 '이반 윌리스'라는 이름의 지프, 트랙터, 1.5톤짜리 트럭,
체코제 승용차 타트라, 현재 몰고 있는 디젤 트럭을 그는 차례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이따금씩 유즈노 사할린스크, 포로나이스크, 또는
코르사코프 등의 도시로 외출을 나가곤 했다. 그곳을 가게 되면 그는 때때로 길
모퉁이에 서서 신축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아파트 건물의 창문에 눈길을 주곤
했는데, 창문을 통해 보이는 그 모든 멋진 전기 스탠드와 커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때때로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이제까지 나이를
의식하면서 살아 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몇 달만 있으면 서른을 넘기게 된다는
사실이 얼마 전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자. 그리고
모스크바에 가면 양복 세 벌과 초록색 모자 하나를 사자. 그런 다음엔 거물급
기사나 기술자들처럼 여행용 가방을 들고 남쪽으로 가는 거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돈을 여행자 수표로 바꾸어 속바지 안쪽에 감춘 다음 꿰매어
이를 보관하고 있었다. 남쪽에 가면 재미있는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이
정상으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정상으로 잘 진행되고 있는데 무엇이 또
문제이겠는가!
그는 일어서서 그 아가씨를 찾으러 나섰다. 이 아가씨가 어디로 갔다지?
승객들이 목이 말라 무언가를 마시고 싶어하는데, 이 아가씨는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 서서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어떤 녀석과 영어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어떤 녀석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영어로 지껄이기를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녀석이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말라빠진 체구의
사나이로, 상당히 젊은 친구인데도 짧게 깎은 그의 머리에는 백발이 섞여
있었다. 그의 상의 단추는 끌러져 있었는데, 혁대에서 주머니 안쪽까지 가느다란
금줄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말들이 마치 그의 이빨에 부딪혀서 소리라도 내는 양 우뢰 같은 소리를
내며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떤 종류의 잡담을 하고 있는지, 듣지 않아도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남자:아가씨,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위스키나 한 잔 합시다.
여자:공연히 사람 들뜨게 하지 마세요.
남자:바나나 나무와 레몬 나무 우거진 싱가폴에서......아가씨, 무슨 말인지
알겠소?
여자:진심이세요? 때는 바야흐로 바나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겠지요?
남자:그래서 우리는 102층으로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재즈 악단이 부기우기를
신나게 연주하고 있었단 말이요.
키르피첸코가 다가가서 자본주의자의 어깨를 살짝 밀쳤다. 자본주의자가 움찔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 엠 쏘리." 물론 그의 말에 전혀 다른 뜻이 담겨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젊은 친구, 조심하라고. 잘못하다간 큰코 다쳐."
"자, 자, 진정하시오." 키르피첸코가 말했다. "평화와 우정이 우리와 함께 하길."
그도 나름대로 처세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키르피첸코의 머리 너머로 자본주의자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던졌는데, 그가
듣기엔 이렇게 들렸다. "나요 이 친구요, 두 사람 가운데 하나를 택하시오.
블라디보스토크냐 샌프란시스코냐, 하나를 선택하란 말이요."
이윽고 그녀가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전 이 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
그러니 저에게 맡겨 두세요. 이래봬도 전 소비에트 공화국의 여성인 걸요."
"동무, 무얼 원하시죠?" 그녀가 키르피첸코에게 물었다.
"목이 타서 죽을 지경이오." 그가 이렇게 말했다. "뭐든 마실 것 좀 없소?"
"이리 오세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서 한 마리의 새끼 양처럼 활기에 넘친
걸음으로 앞장서서 갔다. 앞서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꿈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 기내 앞쪽에서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내내 그가 얼마나 그녀를 보고 싶어했던가.
그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자태로 앞장서서 걸어가더니, 키르피첸코를
간이 식당처럼 보이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그를 안내한 곳은 어쩌면
아무도 없는 그녀의 보금자리, 저 높은 곳의 태양이 작열하는 광선을 창문
안쪽으로 평화롭게 던져 주고 있는 이곳이 키르피첸코에게는 신축 아파트
건물의 아홉번째 층에 있는 그녀의 보금자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가 병을
하나 집어들더니 방울방울 거품이 이는 액체를 유리잔에 따랐다. 그녀가 잔을
들어 올리자 그 잔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신 빛을 발산했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는 그녀를 통해 자신의 아기를 갖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기를 갖고 싶어할 때 하는 짓거리를 그녀에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그에게는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느낌이 들었던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다. 예기치 않던
행복감에 그의 마음은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가씨, 이름이 뭐요?" 트럭을 몰고 산비탈을 내려올 때마다 느끼던 것과
똑같은 감정에 휩싸인 채 그가 이렇게 물었다. 두려움과 이제는 가장 힘든 일을
넘겼다는 안도감을 함께 느낄 때 갖던 묘한 감정이 그를 휩싸고 있었던 것이다.
"타티아나 빅토로프나예요." 그녀가 대답했다. "타냐라고들 해요."
"내 이름은 키르피첸코, 발레리 키르피첸코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그에게 손가락을 내맡긴 채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댁은 참 거리낌이 없는 분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약간은 그렇소." 기가 완전히 꺾인 채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몇 초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는 참았다. 그도 역시 참았지만, 마침내
참을 수가 없어서 그의 생애에 단 한 번도 지어 보지 않았던 그런 종류의
미소를 그녀에게 보냈다.
이윽고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고, 그러자 그녀는 비행기 기내의 아래쪽으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키르피첸코도 몸을 돌렸다. 그러자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이 거울에 비추어졌다.
"참, 인상 한 번 대단하군." 그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당히 험악한
인상이군. 깡패같은 인상이야. 하지만 그 아가씨가 무서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 분명히 그 아가씨는 요만큼도 겁을 집어먹는 것 같지 않았거든."
그는 기내의 통로를 지나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안경잡이를 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몸을 의자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마치 대리석을 깎아 조각한 것처럼 잘생긴 그의 얼굴이 키르피첸코의 눈에
들어왔다.
"형씨, 나 좀 봅시다." 그의 어깨를 가볍게 찌르면서 키르피첸코가 말했다. "생각
있으면 내 자리에 가서 앉아도 좋소."
그가 눈을 뜨고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만, 이 자리도
견딜만 하군요."
그는 아마도 이런 종류의 비행기를 타고 처음 여행하는 친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어쩌면 조종실로 통하는 문이 열리는 것에 눈길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열린 문을 통해 승무원들이 가려운 데를
긁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거나 웃기도 하고, 신문을 읽거나 이따금씩 계기판을
들여다보기도 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타냐가 식사를 날라다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발레리에게 음식이 담긴
쟁반을 가져다주면서 그녀는 가까운 친구라도 되는 양 키르피첸코에게 친근한
눈길을 보냈다.
"타냐, 집은 어디요?" 그가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타냐, 타-냐,티-에이-엔-와이-에이."
"모스크바예요." 이렇게 대답하고서 그녀가 가 버렸다.
키르피첸코는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도중 자기의 고기 덩어리가 다른
사람의 것보다 더 두껍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또한 사과도
다른 사람보다 자기에게 더 큰 것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빵도 다른 사람보다
자기에게 더 많이 주었다는 생각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이윽고 타냐가
차를 가져다주었다.
"그럼 모스크바 사람이란 말이오?" 그가 재차 물었다.
"네, 그래요." 그녀가 재빨리 이렇게 대답을 하고는 가 버렸다.
"여보게, 시골 양반, 자네 공연히 시간 낭비하고 있구먼." 선원이 이를 드러낸 채
씩 웃으며 말했다. "틀림없이 말쑥한 차림의 애인이 모스크바에서 저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을 걸세."
"걱정 말게나." 키르피첸코는 느긋한 평온감과 행복감에 도취되어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들뜬 기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법이다.
드높은 상공을 날던 비행기도 언젠가는 지상으로 내려오기 마련 아닌가. 그러면
스튜어디스들도 자신의 일과를 마감하게 되고, 직무에 수반되는 모든 자잘한
일들을 마무리짓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당신이 안에 입던 외투를 그 아가씨가
당신에게 가져다주고, 연약해 보이는 작은 손으로 양가죽 외투를 가져다준다.
그때 이미 그녀의 눈길은 저 멀리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장난감의 태엽 장치처럼 천천히 느린 속도로 아래쪽을 향해 하강한다. 마침내는
'아에로플로트, 당신의 항공사'라는 광고문과 더불어 잡지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있는 아가씨처럼 단조롭고 김빠진 것이 되고 만다. 다듬고 칠한 손톱, 굽이 높은
구두 위의 늘씬한 다리, 갖은 정성을 들여 손질한 머리는 비할 바 없는
경이로움을 선사했었지만, 결국에는 단조롭고 김빠진 것처럼 보이기 마련인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아래쪽을 향해 하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단조롭고 김빠진 것이 되어 버린 것도 없었다. 비록 모든 것이 지상을 향해
미끄러져 내려오긴 했지만......
이제 소란스럽게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푸른
모자를 쓰고 있던 아가씨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동무, 새치기 좀 하지 마시오......"
"거기 계신 양반, 앞으로 좀 움직입시다......"
"아이고 이런, 여기가 바로 모스크바 아냐......"
"드디어 모스크바에 도착했군......"
"자, 제발 앞으로 좀 나갑시다......"
아직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 채 키르피첸코는
선원을 따라 비행기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계단을 밟고 내려와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공항 건물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하늘의 거인, 소비에트
항공사 소속 TU-114호'는 재빨리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그의 꿈을 지켜
주던 날으는 요새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택시는 좌우 각각 2차선으로 된 넓은 고속도로를 따라 빠르게 미끄러져 갔다.
바깥쪽의 차선을 따라 화물차, 소형 트럭, 덤프 트럭들이 달리고 있었다. 안쪽
차선에서는 승용차들이 질주하고 있었는데,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려서 바깥쪽
차선의 차들이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윽고 수목 지대가 끝나고,
남서부 교외 지역으로 들어서자 아파트 단지가 시작되었다. 진홍빛으로 물든
수천 개의 아파트 창문들이 키르피첸코와 선원의 시야에 들어왔다. 조바심을
치면서 자리에 앉아 있던 선원이 발레리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우리나라의 수도에 오게 되었단 말일세. 발레리, 자네 느낌은 어떤가?"
"여보게, 그 비행기는 이제 되돌아가나?" 키르피첸코가 이렇게 물었다.
"물론이지. 내일 떠날 거야."
"승무원들은 바뀌지 않나?"
선원이 키르피첸코를 놀리는 듯한 음조로 휘파람을 불었다.
"제발 좀 잊어비리게나. 그 아가씨는 많고 많은 멋쟁이 현대 여성 가운데 하나일
뿐일세. 모스크바에 들어가면 그런 아가씨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네. 그
아가씨한테 얼이 빠져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단 말이야."
"그냥 궁금해서 물어 본 거라네." 키르피첸코가 이렇게 얼버무렸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운전 기사가 물었다.
"붉은 광장에 있는 중앙 국영 백화점으로 갑니다." 키르피첸코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는 곧 비행기와 관련된 모든 일을 깡그리 잊게 되었다.
택시는 벌써 모스크바의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백화점에 가서 그는 내리 세 벌의 양복을 샀다. 감색, 회색, 갈색이 양복을 각각
한 벌씩 샀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갈색 양복을 입었다. 그가 이제까지
입고 다녔던 낡은 양복은 4년 전 코프사코프에 있는 양복점에 가서 맞춰 입었던
것인데, 이 옷은 뚤뚤 말아서 화장실 칸막이 안에 놔두고 왔다. 선원도 방수
복지 한 감을 끊었는데, 오뎃사에 가서 그 천으로 방수 외투를 한 벌 만들어
입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식료품 가게에 갔다. 샴페인 두 병을 산
다음 한 병씩 마시고 나서, 크레믈린 궁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런 다음
국영 호텔에 가서 점심을 들었다. '쥴리엔'인가 뭔가 하는 환상적인 이름의
요리를 먹고, 고급품으로 꼬냑도 한 병 마셨다. 그곳에는 타냐처럼 생긴
아가씨들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어쩌면 타냐도 거기에 와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타냐가 지금 그들 곁에 앉아서 그에게 광천수를 한 잔 따라 주는
장면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요리사들이 그가 먹을 고기를 잘 굽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그녀가 주방을 들락날락하는 장면도 상상해 보았다. 아무튼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자본주의자가 거기에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키르피첸코가 그에게 손을 흔들어 아는 척을 하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몸을 굽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윽고 키르피첸코와 선원은 다시
거리로 나와 샴페인 두 병을 산 다음 다시 한 병씩 마셨다. 고르키 거리에 나가
보니 천지에 온통 타냐가 널려 있었다. 그녀는 전차를 타거나 내리기도 하고,
상점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길 건너편에서 불량 소년 차림의 젊은
아이와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심지어 상점의 진열장 창문 저쪽에서 미소를
던지기도 했다. 키르피첸코와 선원은 팔짱을 굳게 낀 채 미소 띤 얼굴로 고르키
거리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선원이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고향 마다가스카르......"
황혼이 이미 거리를 감싸고 있었으나, 아직 가로등 불빛이 거리를 밝히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 거리 저쪽 끄트머리에서, 이 세상이 시작되는 저쪽
어딘가에서 작열하는 봄빛이 세상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곳이야말로 꿈이 곧
현실로 바뀌는 별천지이다. 그들은 아가씨들이 왜 그들을 피해 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 후에 그들은 영업을 하는 곳마다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길게 늘어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키르피첸코와 선원은 어디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윽고 오늘밤을 어디에서 보낼 것인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고 브누코보 공항까지 갔다. 공항 호텔에서 이단 침대가 있는 방을 하나
얻었다. 침대 위의 하얀 이불보를 보자 키르피첸코는 말할 수 없을 만큼의
피로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곧 새로 산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선원이 그를 깨웠다. 선원은 '스푸트니크'라는 상표명의
전기 면도기로 뺨을 문질러 대면서 방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그는 흥에 겨워 웃기도 하고 환성을 지르기도 하고
헐떡거리기도 했다.
"발레리, 어서 일어나게! 멋진 아가씨 몇 명을 낚았단 말씀이야! 야, 정말 대단한
아가씨들이야. 어서 일어나서 빨리 만나러 가자구! 근처 합숙소에 살고 있는
아가씨들인데, 진짜 대단한 물건들이란 말일세. 식은 죽 먹기였지. 나야말로
여자 냄새 맡는 데는 타고난 천재란 말씀이야...... 자, 자, 어서 일어나게! 내
고향 마다가스카르......"
"거 참, 알 낳은 암탉 모양 시끄럽긴 되게 시끄럽네." 키르피첸코는 머리맡의
탁자에서 담배를 가져다가 피워 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 갈 거나, 안 갈 건가?" 문을 나서려고 하면서 선원이 그에게 물었다.
싱싱하게 형상화된 사랑의 양면성
여기서 시베리아 오지의 벌목꾼 키르피첸코는 한편으로는 거칠고 비정한
욕정의 사람이면서 한편으로는 한없이 순수한 열정의 사람이다. 유형과도 같은
격리된 노동으로 여러 해 축적된 욕정과 급료를 소비하기 위해 한 달간의
휴가를 떠나게 된 그는 출발 초두부터 쉽게 그것들을 소비할 대상을 만나게
된다. 바닌의 여동생도 객관적으로 봐서는 그와 그렇게 층진 대상은 아니며
모스크바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욕정을 풀 대상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답잖은 인연으로 얻게 된 여객기의 스튜어디스 타냐의 환상에
이끌리어 남은 휴가와 돈을 비행기 위에서 허비하고 만다.
여객기의 승무원이 언제나 같은 노선, 같은 시각의 비행기에 오르지는 않는다는
것쯤은 그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설령 몰랐다 하더라도 첫 번째 허탕을 친
뒤쯤은 어떻게 타냐가 탈 비행기를 달리 알아볼 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손쉬운 추적은 제쳐놓고 그 먼 항공노선을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쏟으며
미련스러울만치 되풀이 오락가락하는 그에게서 어떤 순수의 절정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거칠고 비정하게만 느껴지던 그의 욕정도
건강하고 정직한 것으로 제자리를 찾아간다.
삼인칭 소설에 느닷없이 일인칭의 작가가 끼어드는 뒷부분이 소설기법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벌목꾼을 통해 사랑의 양면성을 싱싱하게 형상화한
단편이다. 소설을 공부하는 이들도 기억해둘 만한 수작으로 보아 함께 묶는다.
지은이 바실리 악쇼노프는 러시아 카잔에서 태어난 현대작가로서 우리에게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30년대에 태어났고 의사이며 '작가는 도덕과
교훈 따위의 전염병을 피해야 한다'는 그의 좌우명 정도가 그와 관련해 내가
기억하는 전부다.
바니나 바니니
지은이:스탕달
-혹은 마지막 카르보나리 당원과의 야릇한 관계
182 년 봄날 저녁이었다. 로마는 온통 야단법석이었다. 유명한 은행가이기도
한 B공이 베네치아 광장의 새로 지은 궁에서 무도회를 연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예술, 파리와 런던의 호사스러움이 총동원되어 꾸며진 궁전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모인 사람들도 엄청났다. 금발의 영국 귀족 미녀들은 서로 이
무도회에 참가하려고 온갖 수를 다 썼다. 그녀들은 무리를 지어 무도회장에
나타났다. 로마의 일등 미녀들은 그녀들과 그녀들과 아름다움을 겨루게 된
것이다. 그때, 그 반짝이는 눈이나 칠흑 같은 머리결로 보아 로마인임이
틀림없는 젊은 처녀가 아버지에게 이끌려 무도회장에 들어왔다. 그러자 온갖
시선들이 모두 그녀 쪽으로 향했다. 야릇하게 뽐내는 듯한 기색이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졌다.
무도회장에 들어서는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무도회의 화려함에 아연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유럽의 그 어떤 왕이 베푸는 축제도 여기 비하면 어림없겠군"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유럽 왕들의 궁전은 로마 양식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자기
궁내의 귀족부인들밖에는 초대할 수 없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B공은 예쁜
여자들만을 초대하곤 했다. 그날 저녁 그는 자신이 초대한 사람들을 보며
흡족해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모두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결같이 빼어난 미녀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를 뽑을 차례가
되었다. 얼마동안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은 바니나 바니니 공주, 검은 머리에
불타는 눈을 한 그 미녀가 무도회의 여왕으로 발표되었다. 그러자 곧이어 모든
외국인과 로마의 젊은이들이 다른 방들은 모두 제쳐두고 그녀가 있는 방으로
몰려와 법석을 떨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돈 아스드루발레 바니니 공은 그녀가 우선 두세명의 독일
제후들과 춤을 추도록 했다. 이어서 그녀는 매우 잘생겼으며 지체가 높은 몇몇
영국인들의 권유에 선선히 응했다. 그러나 그들의 뻣뻣한 표정에 그녀는 금방
싫증이 났다. 그녀에게 홀딱 반한 것같은 돈 리비오 사벨리 청년은 그녀가 춤
상대를 바꿀 때마다 그녀가 일부러 자기를 괴롭게 만들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가장 훤출한 청년이었으며 게다가 그 역시 왕족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에게 소설책 한 권 읽기를 권한다면 20페이지도 넘기지 않아
골치가 아프다며 책을 던져버릴 그럴 위인이었다. 바니나로서는 그점이 영
못마땅했다.
자정 무렵 무도회장에 한 가지 소식이 날아 들어와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셍
앙쥬 성(국사범을 가두는 감옥)에 갇혀 있던 한 젊은 카르보나리(19세기 초
오스트리아 압제하의 이탈리아 해방과 통일을 기도한 비빌결사 당원)당원이
바로 그날 저녁 탈출을 했으며, 변장을 한 채 감시초소까지 가서는
대담무쌍하게도 단도로 군인들을 찔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경관들이 핏자국을 좇아 추적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잡히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바니나와 방금 춤을 추고 난 돈 리비오
사벨리는 그녀를 자리로 인도하면서 사랑에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대의 마음에 들 만한 것은 무엇이란 말이요?"
"조금 전에 탈출했다는 그 젊은 카르보나리 당원 같은 사람이지요. 최소한 그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무언가 해보려고 했잖아요."
그때 돈 아스드루발레 공이 딸에게 다가왔다. 그는 부자인데도, 자기의 연
수입을 아주 높은 이자로 그에게 빌려주고 있는 집사와 이십년 전부터 셈을
치루지 않고 있었다. 당신이 만약 길에서 그를 만난다면 그는 나이든 연극
배우처럼 보였을 것이다.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큰 반지를 대여섯 개나
끼고 있는 그의 손에도 미처 눈길이 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의 두 아들은 제수이트가 되었다가 미쳐서 죽었다. 그는 그 아들들 일은 잊고
지냈다. 대신 그는 그의 하나 남은 딸인 바니나가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화가 나 있었다. 벌써 열아홉이 되었으면서 훌륭한 혼처들을 모두 마다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무도회 다음 날 바니나는, 그토록 데면데면하고, 평생 열쇠를 손에 쥐어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던 아버지가, 궁의 3층에 위치한 방으로 이어지는 작은
계단 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잠그는 것을 보았다. 그 방에는 오렌지 나무가
심어진 테라스 쪽으로 창문이 있었다. 그날 바니나는 로마로 외출해 이곳
저곳을 들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문 쪽이 장식조명
부품들로 어수선해져 있기에 마차를 뒤뜰 쪽으로 몰 수밖에 없었다. 바니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아버지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문단속을 한 방의 창문
하나가 열려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수행인을 보내버린 후 궁의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찾아본 끝에, 오렌지 나무가 심어진
테라스 쪽으로 난, 다른 작은 창문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그녀가 밑에서 보았던
그 열려진 창문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저 방에 누군가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런데 누구지? 다음 날 바니나는 오렌지 나무가 있는 테라스로 향하는 작은
문의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 열려있는 창문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 덧창 뒤로 살짝
몸을 숨겼다. 방안에는 침대가 있었고 침대 위에 누군가가 있었다. 처음에는
흠칫 놀라 그녀는 몸을 뒤로 뺐다. 그런데 의자 위에 던져놓은 여자 옷이 눈에
띄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좀더 자세히 보니, 금발에 아주 젊었다.
그녀는 그 사람이 여자임에 틀림없다고 믿었다. 의자 위에 던져놓은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여자 신발에도 핏자국이 있었다. 그
사람이 몸을 뒤척였다. 바니나는 그가 부상 입은 몸인 것을 알아차렸다. 피가 밴
큰 헝겊이 가슴을 덮고 있었으며 가는 끈으로 그 헝겊을 겨우 묶어놓고 있었다.
헝겊을 그런 식으로 묶어놓은 것은 절대로 의사의 솜씨가 아니었다. 바니나는
매일 4시경 아버지가 자기 방을 걸어 잠근 후, 이어서 그 미지의 사람에게로
가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버지는 금방 그 방에서 나와서, 계단을 내려와
마차를 타고 비텔레쉬 공작부인에게 가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떠난 후에
바니나는 그 미지의 사람을 살펴볼 수 있는 작은 테라스로 올라갔다. 그녀는
그토록 볼행한 젊은 여인을 향해 연민은 느꼈다. 그리고는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을까 알고 싶어했다. 의자 위에 던져놓은 피묻은 옷은 단도에 찔린 것
같았다. 바니나는 칼에 찔린 자국의 수를 헤아릴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그
미지의 사람을 좀더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그 푸른 눈이 위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기도하는 것 같았다. 곧이어 눈물이 아름다운 눈을 그득
채웠다. 젊은 공녀는 그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다음 날 바니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가 들르기 전에 그 작은 테라스로 가서
몸을 숨겼다. 얼마후 아버지가 그 미지의 사람의 방에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음식물이 들어있는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엔 표정
변화가 별로 없었고, 특별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기 때문에 창문이 열려있는 데도 불구하고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다.
'이 가엾은 여자에게는 무서운 적들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 그렇게
데면데면한 아버지가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매일 그 높은 곳으로
손수 올라가 돌보곤 하는 거지'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느 날 저녁, 바니나가 천천히 그 미지인의 방 창문 쪽으로 다가가다가 그만
눈이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들켜버린 것이다. 바니나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는
소리를 질렀다.
"당신을 좋아해요. 나는 당신 편이에요."
그 미지인이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하지요. 내 어리석은 호기심 때문에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하다니! 비밀을 지킬게요. 그리고 당신이 원하신다면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게요." 라고 바니나는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보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데 그걸 마다하겠어요? 당신 이 궁에
사시나요?" 라고 미지인이 말했다.
"그럼요, 당신을 저를 잘 모르실 거예요. 전 바니나예요. 돈 아스드루발레의
딸이지요."
미지인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면서 덧붙였다.
"당신이 매일 나를 만나러 오시기를 간청해도 괜찮을는지요.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모르셨으면 좋겠는데요."
바니나의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그 미지인의 태도가 그럴 수 없이 고상해
보였던 것이다. 이 가엾은 젊은 여인은 어떤 유력인사에게 거슬리는 행동을 한
게 틀림없어. 어쩌면 질투심에 사로잡힌 순간 자기 애인을 죽였는지도 몰라.
바니나로서는, 그 미지인이 그런 고상한 이유로 불행에 빠진 것이라고만
생각되었지 다른 저속한 이유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미지인은 바니나에게, 그가
어깨에 상처를 입었으며 그 상처가 가슴 깊은 데까지 이어져 아주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때로는 입안으로까지 피가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의사를 안 부르세요!" 라고 바니나가 큰소리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로마에서는 자기가 돌보고 있는 상처 입은 사람은 모두 경찰에
신고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각하께서 손수 이렇게 상처를 싸매 주신 겁니다."
미지인은 아주 우아하게, 자신이 겪은 사고에 대해 동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바니나를 유도했다. 바니나는 그가 좋아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바니나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대단히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중인데도
그 미지인이 갑자기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려는 태도를 가끔 보인다는
것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바니나가 물었다.
"클레망틴느예요."
"아, 그래요! 자, 클레망틴느, 내일 저녁 다섯 시에 다시 올게요."
다음 날 바니나는 새로운 친구의 몸 상태가 매우 악화된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친구를 껴안으며, "내가 당신을 의사에게 데려가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어요. 어떻게 은인들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로마 총독 사벨리 카탄자라의 주치의는 바로 우리집 하녀의 아들이에요. 그는
우리들에게 충실할뿐더러, 지위도 지위인 만큼 어느 누구도 겁내지 않아요.
아버지는 그 사람이 얼마나 충실한 사람인지 인정하지 않나 보죠. 내가 직접
그에게 얘기할게요."
"저는 의사가 필요없어요." 미지인이 강하게 부정하는 바람에 바니나는 놀랐다.
미지인이 이어서 말했다.
"당신 혼자 저를 만나러 오세요. 만일 신께서 저를 부르신다면, 당신의 품에서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 거예요."
다음 날 미지인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바니나는 그의 곁을 떠나면서
말했다.
"당신이 저를 좋아하신다면 제발 의사를 만나세요."
"그가 온다면 내 행복은 사라질 겁니다."
"의사를 불러오게 할래요."
그러자 그 미지인은 아무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더니 그 손에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고, 미지인은 그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바니나의 손을 놓더니 마치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고백할 것이 하나 있어요. 이틀 전 제 이름이 클레망틴느라고 한 것은
거짓입니다. 저는 카르보나리 당원입니다."
놀란 바니나는 의자를 뒤로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이런 고백을 하면, 저를 이 세상에 붙잡아 놓고 있는 단 한 가지 행복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저는 잘 알아요. 하지만 당신을 속일 수는 없어요. 제 이름은
피에트로 미시릴리입니다. 열아홉 살이구요. 아버지는 셍-앙젤로-인-바도의
가난한 의사이고 저는 카르보나리 당원이지요. 저희 집회가 습격을 받았고, 저는
손발이 묶인 채 로마니아에서 로마로 끌려왔어요. 그리곤 밤낮으로 불을
밝혀놓은 감옥에 갇힌 채 열세 달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비로운 분이
저를 구해줄 생각을 하셨답니다. 그가 제게 여자 옷을 입혔죠. 감옥을 거의
빠져나가 마지막 문의 초소를 지나갈 때, 그들 중의 한 명이 카르보나리 당에
대해 심한 욕설을 하더군요. 그래서 따귀를 올려붙였죠. 맹세컨대 허세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경거망동인 것은 틀림없었죠. 밤새 로마 거리를
쫓겨다니다가, -물론 창검으로 부상을 입은 상태로였죠, 기진맥진한 채 문이
열려있는 어떤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뒤에서 병사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저는 정원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산책중이던 부인을
만나게 되었구요."
"비텔레쉬 공작부인이에요! 우리 아버지의 친구지요." 바니나가 말했다.
"어떻게! 그녀가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했나요" 라고 그가 큰소리로 말하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쨌든 그 부인이, 제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그 부인의 이름은 절대로 말하면
안되는데......군인들이 저를 잡으려고 부인의 집으로 들어왔을 때, 당신 아버지가
저를 그의 마차에 태워 밖으로 나가게 해주었습니다. 아, 지금 너무나 아파요.
며칠 전부터, 이 어깨의 총검 상처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들어요. 저는 곧 죽을
겁니다. 게다가 불행에 빠져서......당신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을테니......"
바니나는 참을성있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더니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미시릴리는 그녀의 그토록 아름다운 눈에서 그 어떤 동정의 빛도 찾아낼 수
없었다. 단지 오만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한 그런 표정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밤이 되자 의사가 나타났다. 그는 혼자였다. 미시릴리는 절망했다. 그는 다시는
바니나를 볼 수 없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가 의사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묵묵히 사혈을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바니나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피에트로의 눈은 바니나가 드나들곤 하던 테라스의
창문에 고정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비탄에 빠졌다. 한 번은 자정쯤
되어, 테라스의 어둠 속에 누군가가 있는 것같이 그는 느꼈다. 바니나인가?
사실상 바니나는 매일 밤 그곳에 와서 젊은 카르보나리 당원이 있는 방의
창문에 뺨을 갖다 댄 채 방안을 보곤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가
그에게 말을 건다면, 나는 끝장이야! 안돼. 다시 그를 만나서는 안돼'라고 속으로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결심이 약해지면 그녀는, 이 젊은 사내를 자신이 어리석게도 여자로
생각했을 때에 느꼈던 애정이 자신도 모르게 되새겨지곤 했다. 그렇게 친근한
마음을 가졌었는데 그를 잊어야 하다니! 가장 분별력이 생겼을 때, 바니나는
자기 생각이 바뀌는 것에 대해 두려움까지 가졌다. 미시릴리가 본명을 이야기한
이래로, 그녀에게 이전에 익숙해 있던 생각들은 마치 베일에 가려졌거나 혹은
아주 멀어진 듯했다.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바니나는, 질린 얼굴로 약간 떨면서, 의사와 함께 젊은
카르보나리 당원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단지, 아버지 대신 하인이 그를
돌보게끔 아버지에게 권하겠다고 말을 하러 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몇 초
동안만 방에 머물렀다. 그러나 며칠 후 그녀는 인정에 끌려 의사와 함께 그의
방으로 다시 왔다. 어느 날 저녁, 미시릴리의 상태가 아주 좋아졌기에, 그의
생명이 걱정된다는 핑계거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감히 그의 방으로
혼자 들어왔다. 그녀를 보자 미시릴리의 행복은 절정에 달했지만 그는 사랑의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 그는 무엇보다 한 남자에게 걸맞는 위엄을 잃어버릴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봐 지레 겁을 먹고 얼굴에
홍조를 띤 채 그의 방에 들어온 바니나는, 그가 고상하고 헌신적이긴 했지만
부드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애정으로 그녀를 맞이하는 것을 보고는 당황했다.
그녀가 방을 떠날 때도 그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며칠 후 그녀가 다시 찾아왔을 때도, 전과 같은 공손한 행동과 영원한 감사의
말들만이 그에게서 나올 뿐이었다. 바니나는 젊은 카르보나리 당원의 정열에
제동을 거는데 몰두하기는커녕, 자기 혼자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의아해할 정도였다. 그때까지 그토록 자신감에 차 있던 이 처녀는
자신의 정열이 끝없이 켜져가고 있는 모습을 씁쓸하게 느낄 뿐이었다. 그녀는
짐짓 명항한 체도 해보고 심지어는 냉정한 태도도 보였으며, 그의 방에 들르는
횟수도 줄였지만 그 젊은 환자를 아주 안 보고는 못 견딜 지경이 되었다.
한편, 사랑에 불타오르면서도, 미시릴리는 자신의 어두운 출생과 자신의 의무에
대해 생각하고는, 바니나가 일주일 이상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한 고개 숙여
사랑을 고백하지는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반면 젊은 바니나의 자존심은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그를 보러 가는 것은 나를 위해서일
뿐이야. 내가 즐기려고 그러는 거지. 그에게 호기심이 있다든지 하는 것은
절대로 고백하지 않을거야'라고, 마침내 그녀는 결론맺었다.
바니나의 방문 횟수와 길이가 차츰 늘어났다. 그러나 미시릴리는 그녀와 단
둘이면서도 마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듯한 말투를 쓸 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하루 종일 그를 증오하면서, 오늘은 평상시보다 그를 한결 차갑게
대해야지, 더욱 혹독하게 대해야지, 라고 결심한 바로 그날 저녁,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받아들였다.
그때 바니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완벽한 행복감을 느꼈다. 미시릴리도
이제 더 이상 사내에게 걸맞는 위엄 따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19살 먹은 청년이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와
똑같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는 사랑이라는 정열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한없는
솔직성을 가지고 그녀를 대했으며, 드디어 그토록 자존심이 강한 아가씨에게,
그녀의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 그가 사용한 책략까지도 고백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행복한 것에 대해 스스로도 놀랐다. 넉 달이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 날 의사는, 이제 그의 병이 완치됐음을 알렸다. 미시릴리는
생각했다.
'이제 난 어떻게 하지?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의 집에 그냥 몸을 숨기고
있어? 그러면 내게서 햇빛을 차단한 채 열세 달 동안을 감옥에 가두어 놓았던
그 비열한 독재자는 내 기를 꺾어놓았다고 생각하겠지? 이탈리아여! 너의
자랑스런 자식들이, 이런 하찮은 일 때문에 너를 포기한다면, 너는 진정으로
불행할지니라!'
바니나는 피에트로가, 지금의 그의 행복, 그가 보이고 있는 그 행복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정말 너무나 행복했던
것이다. 하지만 보나파르트 장군의 한 마디 말, 단 한 마디 말이 이 청년의
영혼에 비통하게 울림을 주었으며, 여인에 대한 그의 행동에 영향을 주고
말았다. 1796년, 보나파르트 장군이 브레시아를 떠날 때에, 도시 어귀까지 그를
전송한 경찰 대원들이 브레시아 시민들은 그 어떤 이탈리아인들보다도 자유를
사랑한다고 그에게 말했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 그들은 그들의 연인들에게까지 자유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미시릴리는 바니나에게,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 말했다.
"밤이 되자마자 떠나야겠소."
"날이 밝기 전까지는 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조심하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날이 밝을 때면 나는 로마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 거요."
"좋으실 대로, 그런데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거죠?"
바니나가 차갑게 말했다.
"로마니아로 가겠소. 복수하러."
"제가 부자니까, 제게서 무기와 돈을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거절은 않겠죠?"
바니나는 가능한 한 차분하게 말했다.
미시릴리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품에 몸은 던지며 말했다.
"오, 내 생의 영혼이여! 당신은 내게 모든 것을 잊게 했소. 나의 의무까지도.
하지만, 고귀하고 진귀한 당신의 영혼은-그 영혼이 고귀할수록 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오."
바니나는 펑펑 울었으며, 결국 하루 더 로마에 머물겠다고 약속을 그에게서
얻어냈다. 다음 날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피에트로, 당신은 종종 이렇게 말했지요. 어떤 유명한 사람, 예컨대 로마의 군주
같은 사람이 많은 돈을 내놓는다면, 자유를 위해서는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라구요 멀리서 오스트리아가 지원을 해서 전쟁을 벌이게 되면......"
"그랬지요." 피에트로가 놀라서 말했다.
"좋아요. 당신은 용기가 있어요. 당신에게는 높은 지위가 없을 뿐이에요. 제가
당신에게 힘이 되겠어요. 그리고 20만 리브르의 연금을 당신께 드리겠어요.
아버지의 동의는 제가 얻어내고 말 거예요."
피에트로는 그녀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바니나를 기쁨으로 얼굴이 환해졌다.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당신을 열정적으로 사랑합니다. 하지만 저는 내 조국의 가난한 종일
뿐이에요. 이탈리아가 불행하면 할수록 나는 조국에 충실해야 해요. 돈
아스드루발레 공의 승낙을 얻어내려면, 제가 몇 년 동안이나 그의 앞에서 슬픈
연기를 해야만 하겠어요. 바니나, 당신의 제의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이어서 미시릴리는 서둘러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말을 마칠 용기가 사라질까
두려워서였다.
"당신을 목숨보다 사랑한다는 것, 로마를 떠난다는 것은 내게 가혹하기 그지없는
형벌이라는 것, 그게 바로 나의 불행이오. 아! 이탈리아는 어찌하여
야만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과 함께 미국행
배에 몸을 실을 수 있을 터인데."
바니나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자신의 도움을 이런 식으로 거절하다니,
그녀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미시릴리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지금처럼 사랑스럽게 느껴진 적은 없었어요. 그래요, 나의 귀여운
시골뜨기 총각, 나는 영원히 당신 거예요. 당신은 우리의 옛로마인들처럼 위대한
사람이에요."
미래에 대한 생각, 상식에 입각한 슬픈 생각 따위는 모두 사라졌다. 그 순간만은
완전한 사랑의 순간이었다. 제정신이 돌아오자 바니나가 말했다.
"당신이 로마니아에 도착한 즉시 바로 그리로 가겠어요. 포레타의 욕조들을
정리해 놓을라고 해야지. 저는 포를리 근처에 있는 산 니콜로 성에-그건 우리
성이거든요-머물겠어요."
"그래, 거기서 당신과 함께 평생을 지냅시다." 미시릴리가 말했다.
"이제부터 내 운명은, -아, 모든 것을 감수해야지." 그녀가 한숨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을 위해 제 자신을 버리겠어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당신은, 이,
가문으로부터 쫓겨난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나의 여인 아니요? 영원히 숭배를 받을......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이며
당신을 보호할 것이요."
하지만 어쨌든 바니나는 자신이 속한 세계의 사람이었으며, 거기로 가야 했다.
바니나가 미시릴리를 떠나자마자,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분별없었던가를
깨달았다. 그는 생각했다.
'조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그 어떤 혜택을 주었다고해서 우리가
감사해야 할 그런 존재는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조국을 돌보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에 빠지거나 우리를 저주할 그런 존재도 아니야. 조국이나 자유라는 것,
그것은 내 외투 같은 거지. 그래 사실이야. 내게 유용하고, 만일 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지 못했다면 내가 사야만 하는 그런 거지. 하지만 어쨌든
나는 조국과 자유를 사랑해. 그 둘 다 모두 내게 유용하니까. 내게 그것이
필요없다면, 만일 그것이 내게 8월 복중의 외투 같은 것이라면, 그것을 사 봤자,
그것도 그렇게 큰 값을 치르고 사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리? 바니나는 정말
아름다워. 정말로 재능도 있구. 누구든 그녀 마음에 들려고 앴르 거야. 그녀는
나를 잊을 거구. 도대체 단 한 명만을 사랑하는 여자가 어디 있어! 로마의
군주들은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갖고 있지. 아! 내가 떠난다면 그녀는 나를
잊을거야. 그리고 나는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 거구......'
한밤중에 바니나가 그를 보러 왔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조금전에 빠져 있던
번민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조국'이라는 거대한 단어에 대해, 자신이 했던 마음
속의 갈등에 대해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바니나는 너무 행복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조국과 나 중에 하나를 필히 선택해야 한다면, 그는 나를 택할 거야.'
가까운 곳의 교회 종소리가 세 시를 알렸다. 마지막 작별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피에트로는 연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계단을 내려섰을 때
바니나가 눈물을 감추면서 웃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을 돌보아준 사람이 만일 시골의 가난한 여인이었다면, 당신은 그녀에게
감사의 표시로 그 무엇인가를 해주시겠어요? 그녀에게 무언가 보답하려
하겠지요?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해요. 당신은 적들 한가운데를 여행해야 할
거구. 제게 감사의 표시로 사흘만 주시지 않겠어요? 저를 시골의 불쌍한
여인으로 여기고, 제가 돌보아드린 것에 대한 보답을 해주세요."
미시릴리는 사흘을 더 머물렀다. 이윽고 그는 로마를 떠났다. 외국대사관에서
구입한 여권 덕분에 그는 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모두들 크게 기뻐했다.
그가 죽은 걸로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환영의 표시로 한두 명의
헌병을 처치했다. 그러자 미시릴리가 말했다.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이탈리아인을 쓸데없이 죽이지 말자. 우리의 조국은
영국처럼 평온한 섬이 아니야. 유럽의 왕들이 우리나라에 개입해 들어올 때
우리에게는 그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군인이 필요해."
얼마후, 헌병에게 포위당하는 상황에 처하자, 미시릴리는 바니나가 그에게 준
권총으로 그들 두 명을 죽였다.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붙게 되었다.
바니나는 로마니아에 나타나지 않았다. 미시릴리는 그녀가 그를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자부심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와, 그의 연인을 가르고 있는
신분의 차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감동에 젖거나, 지난날의 행복했던 순간이
못내 그리워지면, 그는 바니나가 어떻게 지내는가 보기 위해 로마로 돌아가 볼
생각까지 했다. 이런 분별없는 생각에, 그가 자신의 의무로 여기고 있는 것조차
소홀히 여기게 된 어느 날 저녁, 산중턱의 교회 종소리가 평시와는 다르게, 마치
종치기가 심심풀이로 종을 치고 있는 듯이 울렸다. 그것은 미시릴리가
로마니아에 돌아오자마자 가입한 카르보나리 당의 집회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날 밤 모든 당원이 숲 속에 있는 어느 오두막집에 모였다. 슬픈 마음으로
그곳에 도착한 미시릴리는, 그 당의 우두머리가 체포되었으며, 바로 자신이,
이제 겨우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 그가 50줄을 훨씬 넘긴, 1815년 이래로 그
음모에 가담해온 그런 사람들의 우두머리로 선출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기대치 않던 영예를 받아들이면서 피에트로의 가슴은 크게 두근거렸다. 홀로
있게 되자 그는 더 이상, 이미 자신을 잊었을 로마의 처녀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모든 생각을, '이탈리아를 야만에서 해방시킨다.'는
의무에 쏟기로 결심했다.
이틀 후 미시릴리는, 당의 우두머리에게 올려지는 보고서에서 바니나가 산
니콜로 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곳을 떠나고 도착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정이 그에게 보고되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이름을 읽는 순간
그는 기쁨보다는 일종의 동요를 느꼈다. 그날 밤 안으로 산 니콜로 성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조국을 향한 충성심을 아무리 다짐하고
다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가 잊고 있었다고 믿었던 바니나를 향한 생각
때문에, 아무리 사려 깊게 자신의 의무를 다짐하려 해도 헛일이었다. 다음 날
그는 그녀를 만났고, 그녀는 로마에서처럼 그를 사랑했다. 그녀의 결혼을 원하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출발이 늦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20만리브르의 돈을 가지고
왔다. 예상치 못했던 이 막대한 돈 때문에 당에서의 미시릴리의 권위와
당원들의 신뢰는 더없이 커졌다. 코르푸에서 무기를 제조케 했고 카르보나리
당의 추적 임무를 맡고 있는 총독의 개인비서를 매수할 수 있었다. 또한 정부의
끄나풀 노릇을 하고 있는 신부의 명단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이 시기가, 불행한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수많은 모반들 중에서 비교적 덜
광적인 움직임인 카르보나리 운동 조직이 끝나가던 시기였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 글의 방향에서 빗나가는 것이므로 삼가겠다. 단지, 미시릴리의
계획이 끝까지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에게 상당한 영광이 돌아갈 수
있었으리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의 손짓 하나로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든 채 지도자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상태였던 것이다.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우두머리들이
체포되는 바람에 모반 조직이 와해되는 시기는, 결정적인 성공의 순간이 코앞에
다가온 그러한 시기와 일치하는 법이다.
로마니아에 도착하자마자 바니나는, 자신의 연인이 조국을 향한 사랑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랑은 잊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젊은 로마처녀의 자부심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애써 생각을 가다듬어 보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두운
슬픔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유를 저주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곤 했다. 어느 날 미시릴리를 보러 포를리로 온 그녀는,
그때까지 자신의 자존심으로 억누르고 있던 자신의 고통을 억제할 수 없게 되어
그에게 말했다.
"정말로, 당신은 저를 한 명의 남편으로서 사랑하시는군요. 그건 제가 바라는 게
아니예요."
이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지만 그 눈물은 미시릴리를 비난할 정도로
자신이 비굴해진 데 대한 부끄러움의 눈물이었다. 미시릴리는 그 눈물에 대해,
일에 열중한 한 사내로서 대답했다. 바니나에게는 그를 떠나 로마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홀연 들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비굴한 말을 던진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벌함으로써 일조의 잔인한 기쁨을 맛보고픈 것이었다. 잠간
사이 침묵이 흐른 뒤에 그녀의 결심은 굳어졌다. 그녀가 미시릴리의 곁을
떠나지 않는 한 자신은 미시릴리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만약 자신이 떠난다면, 그때 그가 느낄 고통과 놀라움을
상상하며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녀가 그를 위하여 그토록 후많은
터무니없는 짓을 했는데도 그 사내의 사랑을 얻을 수 없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침묵을 깨고 그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끌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는 부드러운 말을 속삭였지만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것은 그가 정치적인 일에 대해 말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어조였다. 정치에 대해서 그는 고통스럽게 말했다.
"아! 이 일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정부가 그것을 또 발각해낸다면 나는 조국을
떠나야 하리!"
바니나는 꼼짝않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 전부터 그녀는 이제 과거 연인을
마지막으로 만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던진 그 말이 그녀에게
어떤 운명적인 빛을 던져주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카르보나리 당에게 나는 수천 리브르의 돈을 제공했어. 아무도 카르보나이 당에
대한 나의 충심을 의심하지 않을 거야.'
바니나는 피에트로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때까지 줄곧 몽상에 잠겨 있었다.
"저와 함께 스물네 시간을 산 니콜로 성에서 함께 지내지 않으시겠어요? 오늘
저녁 모임에는 당신이 없어도 되잖아요. 내일 아침이면 산 니콜로에서 산책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면 당신 흥분도 가라앉을 거고, 이런 큰일을 하는 데
필요한 냉정도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피에트로가 동의했다.
바니나는 여행 준비를 하러 간다며 그의 곁을 떠나면서, 언제나처럼, 그를
숨겨놓은 작은 방의 문을 열쇠로 잠갔다.
그녀는 이전에 그녀의 하녀였다가 이제는 결혼하여 포를리에서 작은 가게를
꾸려나가고 있는 한 여자에게 달려갔다. 그 여자 집에 도착하자 바니나는
그녀의 집에 있는 일일기도서 가장자리에, 바로 그 날 밤 카르보나리 집회가
열리게 되어 있는 장소를 정확하게 썼다. 그리고 그 밀고장 끝에 이렇게 적었다.
'이 당의 당원은 열아홉 명입이다. 여기에 그들의 이름과 주소가 있습니다.'
미시릴리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정확하게 써넣은 후에, 그녀는 자기가
신임하고 있는 여인에게 말했다.
"이 책을 추기경 총독님께 갖다 드려. 이 책을 읽으시라고 한 후 돌려 받아야
해. 자, 여기 십 리브르가 있어. 총독 입에서 네 이름이 나오게 되는 날, 네
목숨도 끝인 줄 알아. 내가 여기 적은 부분을 총독이 읽게만 해준다면 너는 내
목숨을 구해주는 셈이야."
모든 일이 기막히게 잘 진행되었다. 총독은 겁이 많아서 그 위엄에 걸맞지 않은
일을 지시했다. 그는, 가면을 쓴 채 자신을 뵙기를 간청하는 한 평민
아낙네에게, 손발을 묶은 채라면 괜찮다며 알현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 여상인은 지체 높은 분에게 인도되었다. 총독은 녹색 양탄자가
덮인 거대한 탁자 뒤쪽에, 방어진지 뒤에 자리잡고 있듯이, 앉아 있었다.
총독은, 혹시 정교한 독이라도 들어 있지 않나 겁내듯이 가능한 한
일일기도서와 멀리 떨어져서 읽었다. 그는 그것을 여인에게 돌려준 후 아무런
명령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옛 하녀가 돌아온 것을 본 바니나는, 애인 곁을
떤나 지 정확히 40분만에, 이제 그는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믿으면서
미시릴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마을의 움직임이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그에게 말했다. 한 떼의 헌병들이, 전에는 나타나지 않던 마을 거리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저를 믿으신다면 바로 지금 당장 산 니콜로로 떠나기로 해요."
미시릴리가 동의했다. 바니나는 마을에서 반 마일 떨어진 곳에서, 하녀-물론
입이 무거웠으며 두둑한 돈으로도 매수한-와 함께 그를 기다렸고, 그는
그곳까지 걸어서 혼자 갔다.
산 니콜로 성에 도착하자, 바니나는 자신의 이상한 행동거지가 탄로날까 두려워,
애인에게 평시보다 훨씬 상냥하게 대했다. 하지만 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그녀의 모습이 그에게는 무슨 연극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전날 배반을
하면서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잊었었다. 두 팔에 연인을 안고 있으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누군가 그에게 말을 하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그로부터 영원히 그는 나를
싫어하게 될 거야.'
한밤중이 되자 바니나의 하인 한 명이 갑자기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그녀가 모르고 있었지만, 카르보나리 당원이었다. 미시릴리는 그녀에게도 비밀이
있었으며, 소상한 부분은 더욱이 그러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
사내는 미시릴리에게, 그날 밤 열아홉 명의 당원의 집이 포위되었으며, 그들이
집회에서 돌아오자마자 체포되었다고 보고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습격이었지만 아홉 명은 도망치는 데 성공했으며, 열 명은 헌병들에 의해
요새로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요새로 끌려가는 도중 한 명이 우물에 몸을
던졌으며, 우물이 깊었기에 그만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덧붙여졌다. 바니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피에트로는 그녀를 주의깊게 바라보지
않았다. 만일 그러했다면 그녀의 눈에서 범죄를 읽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인은, 지금, 포를리의 수비대가 모든 길을 지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옆의
동료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정도로 빽빽하게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주민들은 거리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널 때마다 장교가 있는 곳에 가서 취조를
받아야만 했다.
그 사내가 밖으로 나가자 피에트로는 아주 잠깐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군."
바니나는 거의 빈사상태에 있었다. 그녀는 연인의 시선 앞에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당신 조금 이상하군. 어디 안 좋아?" 라고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곧 다른 생각에 잠겨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한낮이 되자,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감히 말을 걸었다.
"다시 당을 조직할 수 있을 거예요. 당분간은 조용히 계시는 게 좋겠어요."
"아주 조용히......"라고 미시릴리가 웃음을 띠며 대답했는데, 그녀는 그 웃음에
몸이 떨려왔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용무가 있어 산 니콜로 마을 신부-제수이트의 스파이임에
틀림없는-를 방문하러 외출을 했다. 일곱 시쯤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기 애인이 숨어 있던 방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를
찾아 온 집안을 헤맸지만 헛수고였다. 낙담한 채 그의 방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쪽지 한 장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읽었다.
'나는 총독에게 자수하러 가오. 우리들의 과업에 대해 절망했소. 하늘도 우리
편이 아니잖소. 누가 우리를 배반했을까? 틀림없이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 그
자일 거요. 내 목숨이 이 가엾은 이탈리아에 아무 소용이 없는 한, 동료들
가운데서 혼자 살아남은 내가 바로 그들을 팔아먹었다는 그런 의심을 받으며
살아있길 바라지 않소. 안녕,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복수를 해주오.
우리를 배반한 그 비열한 자를, 비록 그가 나의 아버지일지라도, 그를
없애버리고 죽여버리길 바라오.'
바니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 혹독하지 그지없는 슬픔에 빠져 의자에 쓰려졌다.
그녀는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타는 듯 빛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허둥지둥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아, 신이시여! 제 맹세를 받아주세요. 그래요, 배반한 비열한 자를 내 손으로
벌할 거예요. 하지만 그전에 피에트로를 자유롭게 해야해요."
한 시간 후, 그녀는 로마로 향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돌아오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녀가 없는 동안 그는 리비오 사벨리 공작과의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바니나가 도착하자마자 그는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전했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그녀는 아버지가 그 말을
하자마자 선선히 응낙을 했다. 바로 그날 저녁 비텔레쉬 공작 부인의 집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거의 공식적으로, 돈 리비오를 소개시켰다. 그녀는
그와 많은 말을 주고 받았다. 그는 우아한 청년으로 보기 좋은 머리카락을
가졌다. 하지만 그의 재치는 인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성격은 아주 경솔한
것으로 평판이 나 있었다. 따라서 그가 무슨 큰일이라도 저지를 만한
인물이라고 정부로부터 의심받을 염려는 전혀 없었다. 바니나는 우선 그의
환심을 사놓은 이후에 그를 아주 편리한 앞잡이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가,
로마의 총독이면서 경찰장관인 사벨리 카탄자라의 조카였으므로, 스파이들도
감히 그의 뒤를 쫓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사랑스런 돈 리비오를 며칠 동안 환대한 후에 바니나는 그에게, 결코 당신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머리가 너무 경박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어서 이렇게 덧붙였다.
"만일 당신이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당신 아저씨의 부하들은 당신에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해주겠지요? 예컨대, 최근 포를리에서 발각된 카르보나리 당원들을
어떻게 할 것이라든지......"
이틀 후 돈 리비오는, 포를리에서 붙잡힌 카르보나리 당원들이 모두 탈출했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경멸스럽다는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았으며, 저녁
내내 그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다음 날, 돈 리비오는 얼굴이 벌개진
채, 처음에는 녀석들이 자기를 속였다고 그녀에게 와서 말했다.
"하지만, 제가 아저씨 사무실 열쇠를 하나 손에 넣었지요. 거기 있는 서류에서,
추기경들과 고위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회합이 곧 있으리라는 것, 아주 극비리에
열리는 그 회의에서 카르보나리 당원들을 로마에서 재판해야 할지 혹은
라벤나에서 재판하는 것이 좋을지를 토의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포를리에서 체포한 아홉 명의 카르보나리 당원과 미시릴리라고 하는 그들의
두목은, -그 친구는 멍청하게도 제발로 걸어 들어왔는데요-지금 산 레오의 성에
갇혀 있답니다."
'멍청하게도'라고 말을 하는 순간, 바니나는 온 힘을 다해 돈 리비오를 꼬집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직접 당신 아저씨 방으로 가서 그 서류를 읽어야겠어요. 당신이 잘못
읽었을 거예요."
그 말에 돈 리비오는 몸이 떨렸다. 바니나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처녀의 비상한 재능은 그의 사랑을 한없이 증폭시키는데
성공했다. 며칠 후 남장을 하고 돈 리비오 사벨리의 정복을 입은 채, 바니나는
경찰장관의 일급 비밀 문서를 반시간 동안 볼 수 있게 되었다. 피고 피에트로
미시릴리에 대한 매일 보고서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커다란 기쁨과 행복감에
젖었다. 그 서류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몹시 떨렸다. 그리고 그 이름을 다시
읽으면서 그녀는 심한 고통을 느낄 지경이었다. 로마 총독의 궁을 나서면서,
바니나는 돈 리비오에게 포옹을 허락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정말 어려운 일을 부탁했는데 잘 해내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젊은 공작은, 바니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라면 바티칸 궁에
불이라도 지를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날 저녁 프랑스 대사의 집에서
무도회가 열렸다. 그녀는 돈 리비오와 여러 번, 아니 그만을 상대로 춤을
추었다. 돈 리비오는 행복감에 취해 있었으며, 그가 곰곰이 생각해볼 틈을 주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어느 날 바니나는 그에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가끔 이상하세요. 오늘 아침에 갑자기 두 명을 해고하셔서,
그들이 내게 와서 울면서 하소연하잖아요. 한 명이 로마총독인 당신 아저씨
집에 자리를 얻을 수 없냐고 해요. 다른 한 명은 프랑스 포병대의 군인이었는데
셍 앙쥬 성에서 일했으면 하고요."
"그 둘 다 내가 거두리다." 젊은 공작이 씩씩하게 말했다.
"내가 언제 그걸 요구하던가요? 그 가엾은 사람들이 요구하던 바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당신에게 반복하는 거예요. 그들이 요구하던 바로 그 자리가
필요하지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바니나가 거만스럽게 그의 말을 잘랐다.
세상에 그보다 어려운 일이 있을까. 카탄자라 각하는 결코 경솔하지 않은
사람이어서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 외에는 집에 들이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온갖 즐거움에 둘러싸인 것 같은 생활 속에서도,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는 바니나는 더없이 불행했다. 일이 더디게 진행되는 것이 그녀는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사업이 잘돼 돈을 잘 벌어들이고 있었다. 부모의
집으로부터 도망쳐서, 로마니아에서 애인과 함께 탈주를 해야 하나? 참으로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거의 그 생각을 실행할 참이었다. 그런데, 그
어떤 우연찮은 일이 그녀의 운명을 동정했다.
어느 날 돈 리비오가 그녀에게 말했다.
"미시릴리 도당의 열 명의 당원들이 선고를 받은 후에 로마로 이송될 거랍니다.
로마니아에서 처형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어쨌든 우리 아저씨가 오늘
저녁 교황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그렇답니다. 로마에서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당신하고 나 둘 뿐이랍니다. 이제 만족하시죠?"
"당신은 이제 훌륭한 남자가 되었어요. 제게 당신 초상화를 선물로 주세요."
라고 바니나가 대답했다.
미시릴리가 로마에 도착하기로 된 전날 저녁, 바니나는 시타 카스텔라나로 갈
구실을 마련했다. 바로 그 마을의 감옥에서, 로마니아로부터 로마로 이송하는
카르보나리 당원 죄수들이 하룻밤을 보내게끔 되어 있었다. 그녀는 아침에
감옥에서 나오는 미시릴리를 보았다. 그는 사슬에 묶인 채 죄수차에 홀로 갇혀
있었다. 얼굴이 매우 창백해 보였지만 기가 꺾여 보이지는 않았다. 어떤 노파가
그에게 제비꽃 한다발을 건네주었고 그는 미소로서 답례했다.
그의 연인을 한 번 보자, 바니나의 모든 생각은 새로워진 듯했다. 그녀는 새로
용기를 얻었다. 오래 전부터 그녀는, 그녀의 연인이 갇히게 될 셍 앙쥬 성의
카리 신부와 친분을 맺어놓았었다. 그녀는 그를 고해사제로 선택된다는 것은,
로마에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카르보나리 당원의 재판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귀찮은 놈들이, 자기들도
어쩔 수 없는 결정에 의해 로마로 오게 된 데 분격해서, 극우과격당은 그들을
심판하게 될 위원회를 가장 야망에 찬 성직자들로 구성했다. 그 위원회는
경찰장관이 주도하게끔 되어 있었다.
카르보나리 당원들에게 적용되는 법은 명백했다. 포를리의 카르보나리
당원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온갖 수를 내어 목숨을
구하여 애썼다. 판관들은 그들을 사형에 처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손목을
자른다든지 보다 잔혹한 형벌을 덧붙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앞길이
훤하게 뚫려있는 경찰장관으로서는(그 자리를 떠나게 되면 추기경이 되는 것이
보장되어 있는 자리였다)그들의 손목을 자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교황에게
선고문을 가져가서 그는 모든 죄수들의 형을 몇 년간의 징역으로 감하는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피에트로만은 예외였다. 경찰장관에게는 그가 아주
위험스러운 광신도로 보였기 때문이며, 한편 우리가 전혀 말한 바 있듯이 두
명의 헌병을 죽인 죄로 이미 사형을 언도받은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니나는,
경찰장관이 교황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고의 내막과 감형 소식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 카탄자라경이 자정쯤 되어 자신의 궁으로 돌아왔을 때 하인이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놀란 그는 여러 번 벨을 눌렀다. 결국 나타난 것은 늙고
멍청한 하인이었다. 경찰장관은 참지 못하고 손수 옷을 벗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문을 잠갔다. 날씨가 무척이나 더웠다. 그는 벗은 옷들을 뭉치로 만들어
의자 위에 던졌다. 너무 힘을 주었던지 이 옷의 의자를 넘어서 창문의 모슬린
커튼을 건드렸고, 커튼 뒤의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재빨리 그의 침대로
몸을 던지고는 권총을 들었다. 그가 창문 쪽으로 다시 다가가자 제복을 입은
젊은 청년이 권총을 손에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것을 복 장관은 권총을
눈으로 가져가 겨누었다. 막 총을 발사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청년이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아니, 각하, 바니나 바니니도 못 알아보시나요?"
"아니, 도대체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짓이야?" 경찰장관이 화가 나서 꾸짖듯
말했다.
"자, 냉정을 찾으시지요. 우선 각하의 총에는 총알이 없습니다."
놀란 경찰장관은 사실을 확인하려 했다. 뒤이어 그는 조끼에서 단도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바니나는 아주 매력적이면서도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각하, 앉으실까요? 그리고 그녀는 소파 위에 조용히 앉았다.
"어쨌든 너 혼자겠지?"
"물론이지요 맹세할게요." 바니나가 큰소리로 말했다.
장관은 바로 그 점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방을 돌면서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그런 후 그는 바니나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는 의자에 앉았다.
바니나가 부드럽고 조용하게 말했다.
"안심하세요. 제가 각하와 같이 절도있는 분을 헤쳐봤자 얻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래 봤자 성미 급하고 유약한 사람미 그 자리를 계승해서, 분별없는 짓이나
여기저기 할 텐데요."
"그러면, 아가씨, 도대체 원하는 게 뭐지? 이런 행동은 내 마음에 안 들어. 빨리
끝냈으면 좋겠군." 각하가 언짢은 투로 말했다. 그러자 바니나가 갑자기 우아한
표정을 싹 감추면서 높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저보다도 당신에게 더 중요한 일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건
카르보나리 당원인 미시릴리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거예요. 만일 그가
처형된다면 당신 목숨도 일주일 이상 지속되기 힘들거예요.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저에게는 아무 소득도 없는 일이에요. 당신이 지금 언짢아하고 계신 이
일을, 우선은 제가 재미삼아 해보는 거구, 다음으로는 제 여자친구를 위해서
하는 거랍니다."
바니나는 친근한 표정을 되찾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는, 곧 제 아저씨가 되실 분, 그리고 틀림없이 이 집의 기둥이 되실 분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했지요."
경찰관장에게서 화난 표정이 사라졌다. 이러한 빠른 표정 변화에는 바니나의
미모가 한몫을 단단히 했음이 틀림없었다. 로마에서는 누구나, 카탄자라 각하가
예쁜 여성들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사벨리의 몸종처럼 변장을
하고 비단 양말을 꽉 졸라맨 채, 붉은 조끼에, 은빛 장식을 한 푸른 옷을 입은
바니나의 모습은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각하는 거의 웃음까지 머금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봐, 이 미래의 조카 아가씨. 참,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하고 계시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럴겐가?"
"각하처럼 현명하신 분은 비밀을 지켜주시리라 믿어요. 특히 리비오에게는요.
사랑하는 아저씨, 내 친구 애인의 생명을 구해주신다면 아저씨께 입맞춤을
해드리겠어요. 그러면 아저씨도 이 일에 끼어드는 게 되겠죠?"
반쯤 농이 섞인 듯한 식으로 대화를 계속해 나가면서-로마의 여인들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그런 식으로 다룰 줄 알고 있었는데-, 바니나는 처음에는 손에
권총을 들고 시작한 이 면담을, 젊은 사벨리 공주가 그의 시숙인 로마 총독을
방문한 것으로 꾸며 놓을 수 있었다.
얼마 안있어 카탄자라 각하는, 위협에 굴복해서 그러는 것이라는 생각을
오만하게 떨쳐버리고, 미래의 조카 며느리에게 미시릴리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각하는
바니나와 함께 방안을 거닐었다. 그는 벽난로 위에 있는 레모네이드를 크리스탈
잔에 가득 채웠다. 그가 잔을 입술에 가져가려는 순간 바니나가 그것을
빼앗더니 잠시 가지고 있다가 장난이라도 하는 듯이 정원으로 던졌다. 잠시 후
각하가 과자통에서 초몰릿 봉봉을 집자 바니나는 그것도 빼앗으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조심하세요. 각하 집에 있는 건 전부 독에 오염되었어요. 사람들이 당신의
죽음을 원하니까요. 이게, 제가 미래의 시숙님께 용서를 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사벨리 집안에 주는 것 하나없이 빈 손으로 들어올 수는 없잖아요."
매우 놀란 카탄자라 각하는, 미래의 조카 며느리에게 감사했고, 미시릴리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 대해 희망적인 언질을 주었다.
"우리의 거래는 이제 이루어졌어요. 그 증거로, 여기 보상을 해드리겠어요."
그녀는 각하를 포옹하면서 말했다. 각하는 그 보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곤
덧붙였다.
"바니나, 내가 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해. 또한, 네 눈엔 내가
나이들어 보일지 모르지만, 오늘 흐른 피가 하나의 얼룩으로 변할 때까지
오랫동안 살아있을 만큼 젊다는 걸 알라구."
카탄자라 각하가 정원의 작은 문까지 바니나를 배웅해줄 때이미 두 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다음다음 날, 각하가 이제부터 전해야 할 말 때문에 당혹스러운 가운데 교황을
만났을 때, 교황 성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보다 당신께 은혜를 베풀도록 요구하고 싶구려. 포를리의 카르보나리 당원
중에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자가 있다면서요. 내 그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구려. 그 사내 목숨을 구해야겠소."
교황께서 오히려 제 몫의 일을 처리해주는 것을 보게 된 경찰장관은 여러 번
반대를 하다가 마침내 사면령을 쓰기에 이르렀고, 이어서 예외적으로 교황이
그에 서명을 했다.
바니나는 자기 애인이 사면을 받게 되리라고 믿었지만 누군가가 그를
독살할까봐 겁이 났다. 전날부터 미시릴리는 고해사제인 카리 신부로부터 전해
받은 건빵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나라에서 주는 음식물에는 손도 대지 말라고
주의를 들었다.
뒤에 바니나는 포를리의 카르보나리 당원들이 산 레오 성으로 이송된다는
소식을 알고는, 그들이 시타 카스텔라나를 지날 때 어떻게 해서든 미시릴리의
보고자 했다. 그녀는 죄수들이 도착하기 하루 전에 그 마을에 당도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며칠 전에 도착한 카리 신부를 만났다. 그는 간수를 매수해,
미시릴리가 자정에 감옥의 예배당에서 미사를 들으러 오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발을 쇠사슬로 묶은 상태에서라면, 간수가 예배당 문
쪽으로 멀찌감치 물러나 단지 죄수의 모습만 살펴볼 뿐-그것은 그의 절대
의무였다-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듣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바니나의 운명을 결정할 날이 드디어 왔다. 아침부터 그녀는 감옥의 예배당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 긴긴 하루동안 그녀 안에서 소용돌이쳤던 수많은
생각을 누가 감히 표현할 수 있을까? 미시릴리는 과연 자기를 용서할 만큼
사랑하고 있을까? 그녀는 그의 조직을 밀고했지만, 그의 목숨은 구했다.
혼란스런 마음에 어느 정도 안정이 찾아오자 그녀는, 자기와 함께 이탈리아를
떠나자는 그녀의 제의를 그가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죄를 범했지만 그것은 너무나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4시가 되자,
그녀는 멀리서 헌병들의 말발굽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발자국 소리 하나
하나가 그녀의 가슴을 울리는 듯햇다. 곧이어 그녀는 죄수를 호송하는
마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차는 감옥 앞에 있는 작은 광장에 멈추었다.
그녀는 두 명의 헌병이 마차 안에 혼자 있던 미시릴리를 부축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너무나 무거운 쇠사슬에 묶여 있어서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 최소한 살아있기는 해. 그들이 아직 독살하지는 않았어."
잔인한 저녁이었다. 높이 걸려 있는 데다가 기름을 아끼려고 간수가 심지를
낮추어 놓은 희미한 제단의 램프불만이 홀로 어두운 예배당을 밝히고 있었다.
바니나의 눈에는, 이웃 감옥에서 죽은 중세의 귀족들이 무덤 위에 아른거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들의 조상은 잔인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바니나는 홀로 불길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자정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박쥐가 날아 다니는 것
같은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고 느꼈다. 그녀는 걸어보려고 했지만 반쯤 넋이
나간 채 제단의 난간에 쓰러졌다. 그 순간, 언제 다가왔는지 소리도 없이 두
명의 유령이 그녀 곁에 나타났다. 간수와, 마치 쇠사슬을 뒤집어 쓴 듯한 모습의
미시릴리였다. 간수가 램프의 불을 켜더니 바니나 곁의 제단 난간에 놓았다.
죄수의 모습을 똑똑히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후 그는 문 옆 안쪽으로
물러갔다. 간수가 멀어지자마자 바니나는 미시릴리의 목을 껴안았다. 그를 두
팔로 감싸면서 그녀는 쇠사슬의 차갑고 날카로운 감촉 외에는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도대체 그를 이 사슬로 묶은 자는 누구일까?'
애인을 품에 안으면서도 그녀는 아무런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
고통에다가 이번에는 다른 두려움이 그녀의 가슴을 찌르듯이 엄습해왔다.
그녀는 한순간 미시릴리가 자신의 범죄를 알고 있지나 않은가 하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반응이 차가웠던 것이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그대가 나를 향해 베풀었던 사랑을 회한속에 바라보고
있다오. 내게 무엇이 있어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소용없을 뿐이었소. 자, 이제 기독교인다운 마음으로 돌아가, 우리를 길
잃게 했던 환상에서 벗어납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소유가 아니요. 나의
일들이 계속해서 실패했던 것은, 아마도 나 스스로 끊임없이 정신적 죄를 범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요. 포를리의 그 운명적인 밤에도 나는 왜
친구들과 함께 체포되지 않았던가요? 인간적으로 조심하라는 충고에만 귀를
기울인 탓이 아닐까요? 왜, 그 위험한 순간에 나는 내 자리를 지키지 않았던
걸까요? 왜 그 자리에 없어서, 정말 견디기 어려운 잔인한 의심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죠? 그건 바로 내게 이탈리아를 해방시킨다는 정열 외에 다른
정열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소."
바니나는 미시릴리의 변화를 보고 놀란 나머지 멍하니 서 있었다. 눈에 띄게
야위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른 살은 되어 보이는 듯했다. 바니나는 그가
감옥에서 받은 학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아, 당신을 잘 대접하겠다고 간수들이 그토록 약속을 했는데......"
사실은, 죽음을 앞두게 되자, 이탈리아의 자유와 결합되어 있던 모든 종교적
원칙들이 이 젊은 카르보나리 당원의 가슴 속에 되살아난 것 뿐이었다.
차츰차츰 바니나는, 그의 애인에게서 확연히 드러나 보이는 그 변화가 실은
순전히 정신적인 것일 뿐 육체적으로 학대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절정에 달해 있다고 믿었던 그녀의 고통이 한층 가증되었다.
미시릴리는 입을 다물고 있었고, 바니나는 질식해버릴 지경에 이를 정도로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약간 감동에 찬 표정으로 덧붙였다.
"내가 이 지상에서 단 하나 사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니나 당신일 것이오.
하지만 하느님 덕분에 나는 내 생애 단 하나의 목표만을 갖게 되었소. 나는
감옥에서 죽을 것이요. 이탈리아에 자유를 주기 위해 애쓰면서."
다시 침묵이 흘렀다. 정말로 바니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려고 애썼지만
헛일이었다. 미시릴리가 덧붙였다.
"친구여, 의무는 혹독한 것이오. 하지만 의무를 완수하려는 얼마간의 노력이
없다면 영웅적 행위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겠소? 나를 이제 더 이상 찾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주겠소?"
그를 꽉 조이고 있는 쇠사슬이 허락하는 한 그는 억지로 손목을 움직여
바니나의 손가락까지 뻗쳤다.
"당신에게 소중한 한 사내의 충고를 허락한다면, 당신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당신에게 걸맞는 상대와 결혼하기를 권하고 싶소. 그에게 절대 나와의 일은
털어놓지 마시오. 그리고, 나를 더 이상 찾지 말아요. 이제부터 서로 남남이
됩시다. 당신은 조국을 위해 상당한 금액의 돈을 내놓았소. 조국이 압제자의
손아귀로부터 벗아나게 되는 날, 그 돈은 국가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되돌려질
수 있을 거요."
바니나는 대경실색했다. 그녀에게 말을 하는 도중에 피에트로의 눈이 빛났던
때는 '조국'이라는 말을 할 때 뿐이었다.
마침내 젊은 아가씨에게 자존심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다이아몬드와 작은 줄을
준비해 왔었다. 그녀는 대답없이 그것들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하나의 의무로서 그것을 받아들이겠소. 탈출할 방법을 찾는 것도 내
의무니까. 하지만 결코 당신을 다시 만나지는 않을 것이오. 당신이 새롭게 베푼
이 은혜 앞에서 내 맹세하오. 안녕, 바니나. 다시는 내게 글을 쓰지도 않고 나를
보려고 애를 쓰지도 않겠다고 약속해주오. 나를 조국의 편에 남겨 놓아주오.
나는 조국을 위해 죽을 테니. 안녕."
"안돼, 당신은, 당신을 향한 사랑 때문에 내가 무슨 일들을 했는지 알아야 해요."
바니나가 격노해서 외쳤다. 그녀는, 미시릴리가 총독에게 자수하러 산 니콜로의
성을 떠난 순간부터 그녀가 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
바니나는 덧붙였다.
"그뿐이 아녜요. 나는 그 이상의 일도 했어요. 당신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배반에 대해 말했다.
"뭐라고, 이런, 개 같은......" 피에트로는 격노에 차서 소리쳤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몸을 던지면서 쇠사슬로 그녀는 때리려 했다.
비명 소리를 듣자마자 간수가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그녀를 죽였을
것이다. 간수가 미시릴리를 붙잡았다.
"이런, 천하에...... 난 네게 빚진 게 하나도 없어." 미시릴리는 가능한 한 힘껏
줄과 다이아몬드를 바니나 쪽으로 던지면서 소리쳤다. 그런 후 그는 총총히
사라졌다.
바니나는 넋이 나간 채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로마로 돌아왔다. 그리고
신문에서는 그녀가 돈 리비오 사벨리 공작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른 가치와의 충돌
사랑의 힘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고 한 아가서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나 사랑은 만능이 아니며 때로는 다른 가치와의
충돌에서 패배하기도 한다. 사랑이 다른 가치와 충돌할 때 우리는 질타하거나
한탄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악이 용서되었는가'라고.
'바니나 바니니'는 다른 가치와의 충돌로 비극적이 되고만 사랑의 이야기다.
맹목적인 사랑의 논리를 따르면 여주인공 바니나의 사랑은 열정과 순진함에서
아무런 흠이 없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힘과 지혜를 모두 동원해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카르보나리(숯구이당)인 미시릴리에게는 사랑에
우선하는 가치체계가 있다. 그것은 조국 이탈리아의 해방과 통일 및 독립이다.
그런 두 사람의 만남은 처음부터 비극이 예정된 것이었다. 하기야 그럴 때도
소설가들이 곧잘 쓰는 해법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우월한 가치를 위해 사랑을
희생함으로써 결과로는 그 가치의 무게까지 껴안은 보다 큰 사랑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승화시키는 길이다. 하지만 바니나는 끝내 미시릴리의 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껴안을 수 없었고 그들의 사랑은 참혹한 결말을 맺게 된다.
그같은 결말은 일생 열정적으로 사랑을 추구했으면서도 사랑에 대해 다분히
냉소적이었던 스탕달식 사실주의의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련된
사실주의의 눈으로 보면 그가 채택한 이른바 충격적 반전이 꼭 필요했던가
의문이 든다. 그것은 오래잖아 바니나가 돈 리비오 사베리 공작과 결혼을
했다는 후문을 전하는 구절이다. 그 구절로 그녀의 사랑은 다른 가치 앞에 더욱
참담하게 패배하게 되고 그녀는 사랑의 화신에서 영혼없는 세속의 여자로
전락하고 만다.
스탕달은 발자크와 함께 19세기 프랑스문학의 큰 봉우리로 손꼽히는 작가이다.
1800년 나폴레옹의 원정군을 따라 이탈리아로 간 경험이 그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바니나 바니니'도 그중의 하나다. 대표작으로는 '적과 흑',
'빠르므의 승원'등이 있고 그밖에도 유명한 '연애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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