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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by Casey,Riley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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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우사르비아문고


 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


        (저자 소개)




                    전채린 
    수암과 같이 놀던 시절

  수암^36,36^이것은 나와 함께 자라난 내 사촌 형의 이름이다.
  내가 아직껏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 서로의 맨 처음 일은 별반 즐거운 것 
은 아니었다. 그 무렵 우리들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는 잘 생각 나지 않는다. 그때 
아마 내 나이가 다섯 살이었고, 그는 다섯 살 남짓 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우리들은 가느다란 꼬챙이로 한문책의 어려운 글자를 짚고 있는 
아버지 앞에 함께 앉아 있었다. 수암은 그 글자의 뜻을 알아내야만 했다. 아침에 
배웠던 것을 지금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 것 같았다. 수암은 아버지가 연거푸 
물었는데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기만 했다. 
  아버지는 공명심이 많은 사람으로, 이미 세상을 뜬 아우의 아들에게 그처럼 
어려운 한문을 일찍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글자는 채소를 말한다. 한자로는 어떻게 읽지?"
  성미 급한 스승이 물었다. 
  "채!"
  수암이 재빨리 대답했다.
  "잘했다."
  아버지는 그를 칭찬한 다음,
  "다음 글자는 무엇이라 읽지?"하고 다시 물었다.
  이것은 첫번 글자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았다. 수암은 입을 꼭 다문 채 눈을 
내리깔고 방구석을 여기저기 곁눈질하면서 난처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글을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야, 이 바보 녀석아!"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수암의 가느다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려 신기하고 어려운 글자를 적셨다. 그것은 무척 나를 슬프게 했다.
  수암은 나의 어릴 때의 동무였다. 우리는 늘 함께 놀았고, 아침 저녁을 같이 
먹었으며 어디든지 함께 다녔다. 우리 집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나에게는 세 
명의 누이가 있었다. 그래서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리고 또 구월이란 아이가 
있었는데, 그녀는 방 치는 것이며 아기 보는 일이며 모든 것을 도맡아 하는 
하녀였지만 역시 어린 아이들 축에 끼여 있었다. 
  그들은 다 우리보다는 나이가 들었고, 서로 같이 놀 수 없는 계집아이들이었다. 
그래서 우리 둘만이 늘 함께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기엔 우리는 다 같이 짙은 
갈색 옷고름이 달린 분홍 저고리와 회색 바지를 입었고, 또 같은 검은 빛 가죽신을 
신었다. 수암의 나이가 나보다 반년밖에 많지 않아서 우리들이 그처럼 달리 
생기지만 않았던들 서로 혼동되어 쌍둥이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그는 뚱뚱하고 건강한 피부를 지닌 조그마한 사내아이였고 꽤 평범한 볼에는 
도도록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또 유난히 눈에 띄는 엷은 눈과 거의 입술이 없는 
입과 예쁘장한 코를 가졌다. 나는 그와 어울리지 않게 바싹 마르고, 길고 큼직한 
눈과 큰 코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따로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단짝이었다. 거의 같이 웃고 같이 울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서 우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애들을 너무 꾸짓지 말아요!"
  어머니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한 다음, "학교에 가게 되면 곧 배울 것 
아니에요?"했다.
  우리는 어머니 덕분에 가까스로 그 방에서 풀려 나온 것이었다.

  해는 언제나 우리들이 노는 뒤뜰을 아주 잘 비춰 주었다. 우리는 이 조용하고 
넓은 뜰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재미있게 놀 수 있었다. 낮에는 아무도 
이곳을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날이 무더울 때에는 옷을 훌렁 
벗고 알몸으로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이 마당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이웃 사람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었고, 또 야채를 뜯으러 오는 누이들이나 
하녀 구월에게는 부끄러워할 게 없었다.
  수암은 길고 곧은 호를 파서 내가 날라다 준 평평한 돌로 덮었다. 그 호의 한쪽을 
더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다른 쪽에는 굴뚝을 만들었다. 우리는 돌 사이의 틈을 
흙으로 메워 연기가 굴둑을 향해 올라가도록 했다. 수암이 나에게 일러준 이 
'놀이'는 아주 재미있었다.
  수암은 결코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착하고도 영리한 
아이였다.
  또 한번은, 우리 고장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알아야만 하는 잠자리 채 만드는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가느다란 버들강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서 기다란 장대에 
매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채를 거미줄로 꽉 채웠다. 고운 잠자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 즉시 이 잠자리 채를 들고 쫓아가 되도록 날쌔게 휘저었다.
  수암은 운이 좋게도 곧잘 잠자리를 잡았고, 또 조심스럽게 채에서 내려 엄지와 
장지로 두툼한 배를 잡고는 꼬리를 될 수 있는 대로 앞으로 굽혀 잠자리가 제 
꼬리를 물도록 하였다. 또한 풍댕이를 잡으면 넓고 반들반들한 돌 위에 거꾸로 뉘어 
오랫 동안 날개를 치며 춤추게 만들었다. 그건 정말 재미있는 놀이였다. 
  우리들은 걷기에 지치면 짚베개에 앉아서 햇볕을 쪼였다. 이 뒤뜰에는 우리의 
놀이터 외에도 남새밭과 물이 말라버린 얕은 우물과 큼직한 창고가 있었다. 담 
밑에는 봉선화가 피었고, 남새밭에는 오이며 호박이며 참외의 희고 노란 꽃이 피어 
이었다. 수많은 붉은 열매가 열리는 큰 석류나무도 있었지만, 너무 시기때문에 
우리는 그 열매를 따먹지 않았다. 
  우리 집에는 여러 군데 뜰이 있었다. 원형으로 지어진 집채는 방이 여섯, 부엌과 
마루가 있었고 한가운데 뜰이 있으며 여자들이 쓰 마당이 있었다. 거기에는 화분과 
오리집, 그리고 비둘기장이 있었다. 몸채 앞에는 중문이 있는 담으로 갈라진 두개의 
뜰이 있었다. 오른쪽의 아버지의 사랑에 이르는 마당은 샘뜰이라고 불렸다. 
우리들은 이 바깥 뜰에서만 놀 수 있었다. 
  어느 날씨 좋은 날 오후, 수암은 놀이를 그만두고 나를 안뜰로 데리고 가더니 
깊숙하고도 어둠침침한 이른바 식모방^56,36^우리들이 좀처럼 들어가지 
않는^36,23^으로 끌고 갔다. 나는 그가 언제나 신나는 일을 궁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좋아서 따라갔다. 거기서 그는 얼마 동안 장롱 앞에 서서 그 위에 
놓여 있는 빛나는 갈색의 단지를 근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나는 이 단지를 본 적은 있으나 거기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몰랐다.
  수암은 베개를 여러 개 쌓아 올려서 장롱에 올라가려고 하였다. 나는 밑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었다. 그는 몇 번이고 나둥그러졌다. 한국의 베개는 평평하지를 
못하고 길고 둥글기만 해서 딛고 오르기에는 무척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종내 
그만두지를 않고 결국 장롱 위로 올라갔다. 그는 오랫 동안 그 위에 서 있었는데 
그가 입맛을 다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얼 먹는냐고 물었으나 그는 대답도 
없이 계속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참 만에 꿀을 좀 내려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왼손으로 장롱 모서리를 잡고, 오른손을 단지속에 처넣어 조심스럽게 
내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위태위태하게 쌓아놓은 베개가 무너졌기 때문에 그는 
데구루루 방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꿀 묻은 손으로 여기저기를 더듬고 
허후적거려서 단지속의 먹음직한 누른 빛갈의 꿀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손을 말끔히 핥은 다음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 것인가를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마냥 기분이 좋아 그 방에서 나왔다. 
  저녁에 우리는 그에 대한 벌을 받아야만 했다. 수암은 자기 어머니 방에서, 그리고 
나는 우리 어머니 침실에 누워 있다가 난데없이 불려 나갔다. 참외나 배나 무슨 
먹을 것을 주려나 하고 우리는 큰방으로 들어갔다. 구월은 조심스럽게 베개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혀를 차고 있었고, 두 어머니는 우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수암은 잔뜩 풀이 꺾여 시무룩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베개가 우리들의 비밀을 
드러냈다는 것을 눈짓으로 알려주었다.
  수암의 어머니인 숙모가 장롱에 올라갔느냐고 물었다. 수암은 입을 꼭 다문 채 
매를 들고 서두르는 자기 어머니를 쌀쌀하게 흘겨보았다. 
  숙모는 매를 들어 둘의 볼기를 쳤다. 나는 아파서 그만 소리를 내어 울어버렸지만, 
수암은 용하게 참고 견디었다. 그는 으레 매를 맞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울지도 항의도 않고 말없이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독약을 먹은 장난꾸러기

  매일 아침 수암은 아버지에게서 한문 네 글자를 배웠다. 나는 조용히 그 옆에 
앉아서 공부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잘 알지 못하였다. 그가 넉 자를, 
처음에는 한 자씩 나중에는 모두 합해서 뜻과 그 음을 따라 이야기 하기까지는 퍽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얼마 후에는 나도 함께 배우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우리 훈장은 새 책을 
내놓으면서 말하였다.
  "옆에서 구경만 할 때가 지났다. 너도 이제부터 배워야한다."
  그 책은 수암의 것과 똑같은 파란 실로 노란 표지를 꿰맨 것이었다. 나는 곧 
책장을 폈고, 아버지는 나에게 첫 줄의 네 글자를 가르쳐주었다, 그것이 나에겐 무척 
엄숙하게 느껴져서 나는 온몸과 정신이 마비된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수암은 이제부터는 자기 홀로 그 고역을 치르지 않게 되어 좋아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뒤에 우리는 습자를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읽기보다 훨씬 즐거웠다. 
우리는 제각기 필통과 많은 종이를 받았고, 맨 처음으로 먹 가는 것을 배웠다. 
벼루의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물을 붓고 손가락만한 굵기의 먹을 물이 기름처럼 될 
때까지 갈았다. 먹 냄새는 향기로웠다. 그 다음 우리는 큰 붓으로 한 획, 한 획을 
'습자책'에 따라 썼다. 그러기에는 여간 참을성이 없어서는 안 되었다. 
  우리가 처음 쓴 글자는 다름 아닌 '천'자였다. 우리는 백 번도 더 연습을 
거듭했다. 청소부가 총채를 쥐듯이 단단히 쥐고 말끔히 종이 위에 위에서 아래까지 
쭉 갈겨 썼다. 손가락은 온통 먹물투성이가 되었다. 그것을 되는 대로 바지에 쓱 
문질러버리고는 다시 써내려갔다. 나보다 훨씬 성미가 급한 수암은 습자에는 나보다 
나았지만, 그 성미 탓으로 연회색 바지 가랑이에 검은 먹물을 몇 곱절 더 
그어놓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분홍색 옷소매는 점점 더 검게 물들여졌다. 
이 습자 공부의 첫날, 집안 여자들은 모두 놀랐으나 우리는 이 때문에 벌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우리를 감싸주었고, "그건 명필의 자랑거리이니라."하며 웃었다.
  가장 언짢은 것은 손이었다. 한번 먹물에 젖은 손은 다시 깨끗해지기가 어려웠다. 
먹은 수없이 많은 손금에 배어 씻겨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리를 종종 
먹동이라고 놀렸다. 매일 아침 우리의 손을 씻겨주어야 했던 구월은 혀를 차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 손이 더 검은지, 까마귀 발이 더 검은지 알고 싶어."  
  우리는 '천'자 다음에는 '지'자를 썼고, '현', '황'등 천자문 순서대로 차례로 썼다. 
그러나 방의 장판을 더럽혀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안채의 마루에서만 썼다. 그 
다음에는 '일월성신'을 이어서 썼다. 
  공부가 끝나면 우리는 금방 아버지 방에서 나가야만 했고, 불리지 않고는 다시 
들어 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방에는 아주 신기한 물건들이 그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 오후, 이 방이 마침 비어 있었다. 나의 부모와 숙모는 밖에 나가고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기회다 생각하고 그 방에 들어가서 무슨 물건이 
있는가를 마음 놓고 뒤져보았다. 교의며 책상이며 나무 담뱃갑이랑 돌 담배갑을 
뒤져본 다음 벽장문을 열어 보니 아주 재미있는 물건들이 많았다. 족자며 모자 
상자며 북 치듯 두들길 수 있는 잘 울리는 장기판이 들어 있었다. 장롱 왼편에는 
흙빛의 나무로 된 수없이 많은 서랍이 있는 높다랗고 신비스런 상자가 있었다. 그 
많은 서랍은 억울하게도 모두 잠겨 있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겨 
보았으나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수암은 갑자기 왼편에 있는 자그마한 열쇠를 
찾아서 서랍을 하나하나 차례 열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속에 있는 신기한 
물건들을 샅샅이 뒤져볼 수가 있었다. 이 일로 인해 우리에게는 큰 불행이 일어났던 
것이다.
  여기에 위험한 물건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우리는 서랍 속을 
뒤져보았던 것이다. 그 속에는 굳고 흰 구근이며 가느다란 나무 줄기, 갈색의 조각, 
그 이외에 숱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약간 단맛이 도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씹어 보았고, 수암은 그동안 연거푸 
뒤지면서 많은 거무튀튀한 환약이며 흰 알약을 먹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어찌된 
셈인지 갑자기 잠잠해지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미악!"
  그는 나에게 색다른 일을 알리려 들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부드러운 음성으로 
불렀다. 그는 'ㄹ'과'으'를 발음할 수 없어서 나를 그렇게 불렀다.      
  "미악, 물을 좀 갖다 줘."
  내가 물을 한 그릇 떠다 주었더니 그는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까무러지듯 한동안 그냥 앉아 있었다.
  "미악, 내 목 좀 봐줘."
  그는 부르짖으면서 입을 크게 벌렸다. 목구멍은 벌겋게 부어 있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픔에 젖은 소리로 말했다. 
  "난 죽고 마는구나!"
  우리는 모든 걸 그대로 내버려둔 채 안채로 달려갔다. 누이들이 모여들고 구월을 
부리나케 어른들에게로 보냈다.
  목구멍은 점점 더 부어오르는 것 같았다. 수암은 호흡이 가빠졌다. 불쌍한 수암. 
그가 이처럼 가엾게 보인 적은 아직껏 한번도 없었다. 간신히 숨을 내쉬면서 
방바닥에 누워 있는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나와 영영 작별을 고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의원을 데리고 달려 왔다. 무엇을 먹었느냐고 캐어 물으면서 
검은 약을 한 그릇 마련하였다. 
  이 거무스름한 약은 참으로 신통했다. 이튿날 수암은 회복되었다. 다만 그는 
평소보다 얼마간 조용해졌고, 쓴 약을 마다 않고 들이켰다.
  의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수암에게 있는 많은 다른 병을 발견한 것이다. 
이때부터 수암은 자주 진찰을 받아야 했고, 여러 가지의 약을 먹어야만 했다. 그 
검은 약이 자기 목숨을 건져주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쓴 약을 즐겨 마셨다. 
  그러나 훔쳐 먹은 죄에 대한 진짜의 벌을 받아야 할 짓굳은 날이 수암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아직은 누워 있기 때문에 특별한 벌은 받지 않았지만. 나는 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숱한 꾸지람과 매를 맞았으나 그것은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수암이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이 기뻤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나보다 
훨씬 더 언짢은 일을 견디어야만 했던 것이다. 
  무더운 어느 날 오후, 그는 사랑방의 의원에게로 끌려갔다. 의원은 등에 쑥 뜸질을 
해야 되겠다고 설명을 늘어놓았다. 수암은 숙 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게 한 뒤에 
결국 의원 앞에 꾸부려 도사렸다. 
  "네 곁에서 떠나지 마, 응?"
  수암은 이렇게 나에게 말했다. 
  "응! 안 떠나마."
  나는 똑똑히 대답해 주었다. 
  두 어머니는 그가 조용히 있도록 그의 손을 잡았다. 의원은 두 개의 회록색 쑥 
뭉치를 수암의 헐벗은 등에 올려놓고는 그 꼭지에 불을 붙였다.
  "벌써 연기가 난다, 수암아."
  나는 속삭이듯 말하였다.
  "아프지 않니?"
  의원이 물었다.
  "아니오."
  수암은 야무지게 대답했다.
  "앗, 뜨거!"
  그러나 얼마 후에 수암은 질겁을 하며 소리쳤다.
  "조금만 더 참아야 해! 쑥 기운이 살 속에 푹 배어야 한다."
  의원은 딴 쑥 덩어리를 만지작거렸다. 
  "아이구! 탄다, 타!"
  수암은 비명을 질렀다. 
  "미악, 등에 있는 것 좀 빨리 치워줘!"
  "잠깐만 참고 견뎌!"
  어머니는 나를 옆으로 밀쳐내면서 말하였다. 
  "빨리 없애줘! 미악아. 으윽, 살이 탄다, 타."
  그는 연거푸 소리를 질렀다. 
  "할 수 없어, 수암아."
  "빨리 빨리! 미악, 미악아."
  이 가슴을 짖는 듯한 광경은 수암의 욕지거리로 끝이 났다. 
  "야, 이 망할 자식의 의원아! 이 개자식아!"
  그는 마구 지껄였다.

  이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쉬지 않고 한문책을 익혔다. 그 책은 
'천자문'이라는 표지에 쓰인 것이었다. 꼭 천자가 적혀 있었고, 네 글자는 서로 운을 
맺고 있었다. 이 책은 원 제목 외에도 부제로 '백발서'라고 쓰여 있었다. 그 뜻을 
아버지는 우리가 이 책을 다 끝냈을 때 비로소 가르쳐주었다.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이 책의 저자는 죄수였다고 한다. 그는 젊은 청년으로서 중국 천자의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기 때문에 그를 아끼던 
신하들은 그의 구명을 간청했고, 천자는 그에게 몹시 어려운 과제를 내주면서 이걸 
풀기만 하면 살려주겠노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천자가 아무렇게나 모아놓은 천 개의 글자를 가지고, 하룻밤 
동안에 훌륭한 시를 짓는 일이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이 시인은 그 과제를 모두 
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이 시를 가지고 천자 앞에 갔을 때, 천자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자기의 생명을 결정하는 이 하룻밤 사이에 그는 백발 노인으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시가 너무 훌륭하였기 때문에 천자는 그가 시에 타고난 
재능이 있음을 깨닫고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이야기를 퍽 감동 깊게 
들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해 버렸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하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선생을 청하여 바깥채에 서당을 차리고 친한 집안 아이들을 청하였을 
때, 우리들의 생활에는 큰 변동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서른 남짓 되는 젊은 청년들과 
한 계집아이가 있었다. 
  이때부터 우리 둘은 매일 아침 낯선 훈장 앞에서 종일토록 읽고, 쓰고, 그의 
감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녁때까지 고스란히 앉아 꼼짝 하지 못하고 
배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이 되면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여간 재미있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우리에게 많은 새로운 놀이를 가르쳐주었다.
  아이들이 별나게 하는 놀이에는 '제기'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구멍 뚫린 
엽전과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걸 한 발로 높이 차올렸다. 이렇게 해서 
떨어뜨리지 않고 가장 오래 반복하는 아이가 이기는 것이다. 보통은 서로 이기려는 
경쟁심과 즐거움에서 제기를 찼고, 더러는 진 아이들을 비웃고 놀려대거나 팔목을 
두 손가락으로 힘껏 갈겨주는 재미로 제기를 차는 아이들도 있었다. 또한 구운 
콩이나 밤을 걸고 제기를 차는 아이들도 있었다. 
  수암은 열심히 제기 차기에 끼여 들었다. 그러나 막판에는 싸우기 일쑤였고 주먹 
다짐이나 발로 차는 것으로 끝장을 보곤 하였다. 
    습자지로 만든 연

  수암은 큰사랑방 곁의 작은방에서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는 기다란 대나무를 
가느다랗게 쪼개어 날이 새파랗게 선 칼로 반반하게 될 때까지 말끔히 다듬고서, 
정서를 하여 둔 습자지에다 동그란 구멍을 내고 그 밑에 나비를 그렸다. 그리고 그 
가느다란 대나무 살과 종이에 풀칠을 해서 말린 다음 연을 만들었다.
  우리는 집 앞의 성벽을 타고 아이들이 연을 띄우는 것을 자주 보았고, 그런 연을 
오래전부터 무척 가지고 싶었다. 우리는 이런 욕심마저 다른 많은 것과 함께 
부모님에 의하여 금지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룰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의 연을 잘 살펴본 수암은 제 스스로 그 연을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연방 재주있는 사촌의 솜씨를 경탄하면서 연이 하는 높이 올라갈 것이 사뭇 즐거워 
곁에서 그를 거들어주었다. 
  이튿날 우리 뒤뜰에서 몰래 첫 실험을 했다. 그러나 연은 올라가기는커녕 자꾸만 
땅바닥으로 처박히기만 했다. 수암이 실끝을 잡아맨 반대 방향으로 되도록 빨리 
달릴 때마다, 나는 몇 번이나 연을 높이 던져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은 
띄워지지 않았다. 풀이 꺾인 수암은 전의 것보다 더 엷은 대나무살과 얄팍한 종이로 
다른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띄워지지 않았다. 수암은 차례차례로 자꾸만 새것을 
만들었다. 종이는 많이 있었다. 매일 글을 배울 때마다 석 장의 새 종이를 받기 
때문에 그 중의 두 장은 글을 썼지만 나머지 한 장은 연 만드는 데 쓰고 있었다. 
그런데다 작은방에는 수많은 종이 뭉치가 있었으므로 그는 종종 그 종이를 썼던 
것이다. 
  저녁에는 이 방에 아무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일을 할 
수가 있었다. 나는 노곤하고 약간 실망한 채 내 방으로 돌아와버렸다.
  나는 벌떡 드러누워서 병풍의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병풍은 여덟 가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산이며 바위, 꽃, 시내, 다리, 기러기가 날아가고 있는 
바닷가가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들은 은은한 촛불 아래서 무척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소를 타고 파리를 부는 목동의 그림이 내 마음을 끌고 있었다. 
그는 높다란 수양버들 아래를 지나 멀리 언덕 뒤로 보일락말락 어슴푸레 숨겨져 
있는 자기 마을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햇빛이 드리운 오솔길이며 그 위를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소가 좋았고, 
마치 귓전에 피리 소리를 듣는 듯한 취할 것 같은 마음에 저절로 흐뭇하고 끝없는 
평화를 느끼는 것 같았다.
  내가 홀로 있을 때는 가장 어린 셋째누나가 자주 찾아오곤 했다. 그 누나는 
나보다 두 살이 더 많았고, 집안에서는 '셋째'라고 불렸다. 그녀는 참으로 별난 
소녀였다.
  셋째누나는 저녁때 뒷마당에 모여 앉아 온갖 장난으로 재잘거리고 즐기는 다른 
누나들이나 사촌 누이들과 어울리기를 꺼렸다. 줄곧 내게만 찾아와서 옛날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셋째누나는 별과 달과 해는 물론이고 제비며 토끼, 범이라든지 가난한 
농사꾼과 나무꾼들에 관한 숱한 전설과 동화를 알고 있었다. 누나가 들려주던 
이야기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한 젊은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갔다. 그런데 산 언덕배기에서 도토리 
하나가 굴러 내려왔다고 한다.
  "이건 어머니께 드려야지."
  그는 호주머니에 그 도토리를 넣었다.그러자 다시 새 도토리가 굴러 왔다. 그럴 
적마다 나무꾼은 어머니를 생각하고 호주머니에 도토리를 집어넣었다. 그가 저녁때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있던 그 도토리들은 모두 눈부신 황금으로 변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또 다른 동화에서 가난한 한 어부가 큰 강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온종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갈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그는 겨우 비늘이 은같이 번쩍이는 큰도미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바구니에 넣으려 할 때 그는 그 도미가 슬프게 울부짖는 것을 들었다. 그것이 
고기잡이의 마음을 몹시 안타깝게 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물속에 놓아주었다. 
이튿날 아침, 남해의 용왕이 그를 데려가서는 '보물 단지'로 그에게 보답을 했다. 
바로 그 살려준 도미가 용왕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보물 단지에서는 무엇이든 
어부가 원했던 것이 쏟아져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딴 누나들처럼 셋째는, 대부분 남자 아이만을 가르치는 우리 학교에는 오지 
않았다. 여자들은 어머니나 늙은 부인들에게 가사를 배워야만 했다. 그러나 셋째는 
그러기엔 아직은 나이가 어렸다.
  나는 자주 셋째 누나가 마당가에 앉아 봉선화를 따서 새끼손가락에 감는 것을 
보았다. 셋째는 그걸로 손톱을 빨갛게 물들였고 그걸 곱게 여겼다. 그리고 이따금 
그 누나가 방에서 두꺼운 책을 읽고 있는 것도 보았다. 셋째는 전설과 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녀가 읽는 책은 어려운 한자로 쓰인 책이 아니고, 다만 스무 자 가량으로 
이루어진 알기 쉬운 한글로 쓰여 있었다. 한글에는 한 글자가 '하늘'이니 '땅'이니 
'달'이니 '해'니 하지 않고, 다만 '아' 또는 '오', '에', '가', '나'라고 한다고 셋째는 
차례로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셋째는 아주 일찍이 유모에게서 글을 배웠기 때문에 그때부터 온갖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이 간단한 우리들 고유의 글을 '한글'이라 하였고, 간단한 이야기와 
전기, 소설 등에 쓰여, 대부분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부인들이 읽도록 만들어졌다. 
  셋째는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좋아했다. 누나는 나에게 숫자와 경축일, 제삿날 
등과 그밖의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누나가 옛날 이야기를 해주지 않고 팔장을 
낀채 내 옆에 앉아 있을 때에는, 이내 나는 누나가 무슨 질문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사방을 무엇이라 하니?"   
  "동, 서, 남, 북." 
  "색은 뭐라고 하니?"
  "청, 황, 홍, 백, 흑."
  "사철은 어떻게 계속되니?"
  "춘, 하, 추, 동."
  "봄은 어떤 아름다움을 가져오니?"
  누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누나는 사철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많은 문자를 
가르쳐주었고, 나는 그것을 외야만 했다.
  "산에는 꽃이 피고, 뻐꾸기는 계곡에서 노래한다." 
  "옳아! 여름에는 무엇이 아름답니?"
  "가랑비가 밭에 내리고, 담장에는 버들이 푸르다."
  "가을에는 무엇이 아름답니?"
  "시원한 바람이 들에서 속삭이고, 시든 잎이 나무에서 떨어지고, 달이 외로운 뜰을 
비친다."
  "잘했어. 겨울은 무얼 가져오니?"
  "언덕과 산에 흰 눈이 덮이고, 길에는 아무 나그네도 없다."
  "넌 참 영리해."
  누나는 나를 잔뜩 칭찬해 주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다시 수암이 무엇을 하나 싶어 비밀 창고로 갔다. 그동안 그는 
숱한 조그마한 연을 시험해 보았다. 이제 그는 아주 큰 연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둥근 구멍 아래 검은 색으로 나비를 그리게 했다. 그 사이 그는 대나무 
살을 깎았다. 풀은 끓어올랐고 인두는 화롯불 속에 꽂혀 있었다.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종이에 붙였다. 그때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더니 아버지가 
들어 오셨다. 수암은 연을 황급히 숨겼으나 아버지는 벌써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린 
후였다. 
  아버지는 우리와 연과 찢어진 종이 뭉치를 한참 동안 어리벙벙하게 훑어보시더니 
화를 버럭 내어 소리 질렀다. 
  "밖으로 나와! 흥!" 
  우리는 애지중지 아끼던 연을 그냥 팽개치고 끌려 나갔다. 
  "얘는 그저 제가 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을 뿐입니다."
  수암은 나를 벌하지 않도록 변명을 하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에게 벌이 내렸다. 연을 만든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만, 습자를 하기 위해 받은 종이를 함부로 써버렸다는 소행 때문이었다. 훈장 
앞에서 우리는 바지를 걷어 올려 종아리를 맞아야만 했다. 훈장은 손가락만한 
굵기의 회초리를 여러 개 곁에 놓고 있었으나, 이제까지는 한번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야 우리는 평온한 학교의 첫 표본으로서 선례를 보이게 된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우리 말썽꾸러기가 방 한가운데 앉아 있는 동안 우리의 꼬락서니를 
구경하기 위하여 뱅 둘러싸고 있었다. 
  훈장의 꾸지람^36,36^그것은 너무 엄숙하였다.
  훈장은 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비행을 다시 한 번 상세히 설명하고는 
회초리를 들고서 단단한지 어떤지를 살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마침내 
수암을 보고 종아리를 걷어 올리라고 했다. 수암은 심히 거슬리는 듯 회초리를 
넘겨다보다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제 발로 좀 못 오겠나?"
  훈장은 그를 보고 소리 질렀다. 
  수암은 한숨을 내쉬면서 훈장 앞으로 갔다. 그리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훈장은 
연거푸 종아리를 내리쳤고, 수암은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를 감싸주었다. 나는 자기가 연을 만드는 것을 옆에서 보고만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세 차례의 매를 맞았다. 무척 아팠다. 
  그러나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끔한 아픔쯤은 견디어낼 수 있었으나 
우리를 몹시도 동정하며 옆에서 보고 있는 아이들의 눈앞에서 매를 맞는 치욕감이 
못 견디게 고통스러웠다. 
    종각이 있는 놀이터

  거의 모든 아이들은 나보다 나이가 들었으므로 공부가 우리 둘보다 휠씬 앞섰다. 
그들 가운데 몇은 벌써 '당시선'을 읽었고, 운율을 연습하고 있어서 다른 아이들이 
무척 부러워할 정도였다. 거기에는 언제나 꽃이며 비며 달빛과 술잔의 시정이 
흥건히 읊어져 있었다. 다른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는 공부란 큰 역사책인, 
'통감'이라 불리는 15권의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 책은 나라가 서로 싸우고 왕조가 
몰락하고, 다른 한 왕조가 다시 대치되는 내용들이었다.
  수암과 나는 딴 꼬마 아이들과 함께 아직도 '삼강오륜'과 짧게 간추려진 한국 
역사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가 이 입문서를 마치고 큰 역사책의 제1권을 손에 
잡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침마다 서당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은 모두 훈장 앞에서 공손하게 큰절을 해야 
했다. 그리고는 전날 익힌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지 시험을 당해야 했다. 그걸 아는 
아이들은 다시 되풀이해야만 했다. 아이들은 시험이 끝나면 저마다 벼루를 꺼내어 
먹을 갈았고, 훈장에게서 새 습자 교본을 받아 글씨 연습을 했다. 그리고는 잠깐 
동안의 휴식이 있었고 이날의 과제를 읽었다. 큰소리로 저마다 다른 곳을 읽었기 
때문에, 온 서당 안은 흡사 벌집처럼 와글거리고 수선스러워졌다.
  오후 수업은 오전보다 훨씬 쉬는 시간이 잦았고, 여름이면 자주 미역 감으러 
냇가로 몰려갔다. 우리 고향 수양산 골짜기는 시내가 많아서 맑디맑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뛰놀 수 있었고 물장구를 칠 수가 있었다. 또한 시내로 
가는 길이 무척 아름다웠다. 마을을 지나면 그늘진 길에 이르고 그 길이 넓고 깊은 
연못에 닿기까지 좌우에 수많은 석상들이 서 있었다.
  늪가에서 옷을 활활 벗어 던지고 시원한 물속에 우리는 거꾸로 뛰어들었다. 
텁텁한 더위가 가시고 시원해질 때까지 우리는 이 늪에서 풍덩거리고 놀았다. 
그리고는 다시금 이 길을 따라 마을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숲속에서는 서로 
다투거나 하는 듯이 매미가 한창 울어대고 있었다.   
  저녁밥을 마치면 어머니들은 남문까지 소풍 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우리는 
신나게 돌아다녔다. 저녁 노을에 비친 삼층석탑은 우리의 어린 마음을 못 견디게 
설레게 했다.
  우리는 성벽과 집채 사이로 통한 작은 길을 지나서, 셀 수도 없이 많은 돌 계단을 
밟고 올라가 탑 앞에서 모이곤 했다. 어떤 아이들은 낡아빠진 동전을 땅바닥에 
던지고는 그걸 납작한 돌멩이로 맞히는 놀이를 했고, 어떤 애들은 제기를 찼다. 또 
다른 패들은 한 발로 될 수 있는 대로 같은 길을 오락가락했다.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괜히 장담을 늘어놓고 서로 다투기도 했으며, 또 다른 곳에서는 씨름판을 
벌여놓기도 했다.
  그러나 삼문 위에서 음악이 들려오면, 흥겹던 우리들의 놀이도 곧 조용해졌다. 이 
문은 여기서 꽤 멀리 떨어져 거리 한가운데 목사집 현관 앞에 있었지만, 고요한 
저녁에는 황홀한 음악이 곱고도 맑게 남문까지 울렸고, 우리들의 뛰는 마음을 어둠 
속에서 아늑히 가라앉게 해주었다. 
  그것은 목사의 저녁 인사였다. 낮이 기울고 밤이 깃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근심 
모르고 편히 쉬기도 했다. 우리 고장에는 평화가 지배했다.
  밤의 고요가 살며시 밀려왔다. 집집마다 연기가 오르고, 회색 지붕들은 하나씩 
저녁 노을 속에 잠겨 갔다. 다만 높은 산봉우리만이 아직도 하늘의 푸름 속에서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슬프게 하였다. 다시금 낮이 지나고, 이제는 
신비의 밤이 둘러싸나 보다 하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잠자코 앉아 있노라면 키가 큰 한 사람이 느릿느릿 돌 계단을 밟고 올라와서는 
탑을 지나 종루의 문을 열고 무거운 망치를 꺼내어 들었다.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서는 음향에 귀를 기울였다. 음향이 끝나자마자 그는 망치를 메어들며 큰 종을 
두들겼다. 그 소리는 산까지 울리며 떨렸다.   
  우리는 그 종루치기를 둘러싸고 모여 몇 번이나 치는지 헤아려보았다. 처음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에서 새끼손가락까지 꼽았다가는 다시 반대쪽으로 폈다. 그러면 
열이 되고 그래서 우리는 오른손으로 다시 열까지 셀 수 있도록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구부렸다.
  매일 저녁마다 종은 스물여덟 번 울렸다. 그건 스물여덟의 운명의 신이 지배하고 
있는 땅에 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금 망치를 종각에 넣고는 조심스레 문을 닫고 넓은 마당에 내려섰다. 
그는 추위 속에 흉벽앞에 서서 짧은 담뱃대에 담배를 그득히 넣었다. 그 얼굴은 
종치기로 해서 사뭇 불그무레 상기되었고, 땀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도 않은 채 매일 밤 평화의 상징으로 불을 피우는 봉화산 봉우리를 
쳐다보았다. 그 봉홧불은 다시금 다음 산에서 받아서는 또 다음 산으로 전달하여 
밤의 산꼭대기를 타고 서울 왕궁에까지 이러르야 했다. 우리는 이 전설적인 
도시(서울)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봉화산 마루의 봉화는 희미한 불빛을 
천천히 발하였고 곧 황혼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문지기는 안심하며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그는 우리들을 보며 언제나 
"도깨비가 돌을 던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거라"라고 일러주었다. 
  우리들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아이들은 널찍한 돌에 앉아서는 미끄럼을 탔다. 
돌은 많은 아이들의 미끄럼질로 깨끗하고 반들반들하게 잘 닦여 있었기 때문에 
더러운 우리들의 바지가 더 이상 더러워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문각으로 달려가서, 남문이 잘 닫혔는지 엿장수들이 전을 벌였는지 
살펴보았다. 엿목판 위에는 군침이 도는 동그랗고 기다랗게 도막난 엿들이 재료 
별로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초롱불과 엿도막을 베어내는 가위가 
놓여 있었다. 엿장수는 종종 처량한 곡조로 그가 만들어 놓은 엿을 자랑해 가면서 
곡조에 맞추어 가위를 짤그랑거렸다. 
  우리는 흥겨워져서 어두워지는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귀신을 겁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여러 집 문 앞에는 불빛이 새어 나와 있었고, 우리는 나직히 
저녁 음향의 곡조를 따라 부르곤 했었다. 
  내가 얼마 동안 뒤뜰로 가서 계집아이들의 놀이를 구경하고 있노라면 몰래 빠져 
나갔던 수암이 늦게야 돌아왔다. 
  우리 마울의 사내아이들은 딴 마을의 낯선 아이들을 적으로 몰아서 마구 두들기고 
싸웠다. 아이들은 대개 주먹으로 싸웠지만, 이따금 다른 물건이나 돌맹이를 가지고도 
싸웠다. 밤이 서늘해지면 서늘해질수록, 또 달이 밝으면 밝을수록 이런 아이들의 
패싸움은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이러한 때에 수암의 웃옷은 말이 아니게 흉해 
보였다. 
    즐거웠던 설놀이

  집안 관계에 있어서 아버지는 그다지 다복스럽지 못한 것 같았다. 삼촌이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과부가 된 숙모와 세 아이를 아버지가 보호해야만 되었다. 
그런데다가 아버지의 누이도 남편을 여의게 되어 상복을 벗게 되자마자 외아들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왔다. 
  그 아이는 열 살쯤 되어 보였고, 우리 셋 중에서 제일 나이가 들었을 뿐 아니라 
발그스름한 볼을 한 미소년이었다. 그는 내 나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야위고 
예쁘장했다.
  꼭 하나 흠집이 있다면 그의 입술이 너무 두툼하고 딱딱한 것이었다. 그건 몹시 
심한 병을 앓고 나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의 눈은 총명하게 빛났고 그의 귀는 
둥그스름하게 고왔다. 얼굴빛이 부드럽고 빰이 발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내아이 옷만 입지 않았다면 계집아이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 어느 것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말할 수 없이 깨끗한 손이었다. 내 
손을 볼 때마다 그와 나의 사이가 너무나도 멀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저녁녘에 샘마당에서 제기를 차고 있을 때 그가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는 우리에게 "누가 수암이며 누가 미륵이냐?"하고 물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누가 있는지를 알았다. '칠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고종 
사촌이었다. 
  나에게는 이 칠성이 무척 예뻐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나는 곧 그에게 같이 
놀자고 했다. 수암은 별로 마음에 드는 것 같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우물에 
기대어 서서는 하다만 놀이를 다시 시작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놀기는 너무 추워."
  수암은 곱고 가냘픈 새 아이를 꺼리는 눈치로 넘겨다보았다. 
  우리가 다시 얼마 동안 제기를 차고 있는 동안 칠성은 주머니에서 대나무통과 
칼을 꺼내어 깎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두텁고 무딘 입술로, 처음에는 즐거운 
지난날을 회상케 하는 길게 빼는 구슬픈 곡조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신나고 빠른 
노래를 불러댔다. 나는 온몸에 어떤 황홀한 경쾌감이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수암이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보자 무척 즐거웠다. 
  나는 또한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었고, 칠성의 노래는 점점 신이 나서 흘러 
넘쳤다. 그는 피리를 불고 또 불었다. 
  우리들은 취해 버린 듯이 춤을 추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칠성의 할아버지가 
사랑방으로 통하는 층계에서 웃으시면서 보고 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직까지 내가 춤추는 것을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할머니의 가르침으로 우리가 춤추던 방에는 아버지가 한 번도 
들어와 계신 적이 없었다. 누나들은 작은 북으로 장단을 맞추며 유치한 노래를 
불렀고, 우리 둘은 아무렇게나 손발을 흔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도 아름답고 내면적인 곡조는 누나들이 결코 따라 노래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탈춤'의 곡조였다. 탈춤은 해마다 한번씩 도시에서 상연되는 
인기있는 무언극이었다. 
  어떤 좋은 여름날 아침, 구월이 수암과 나를 데리고 그 연극을 구경한 것도 
그때는 벌써 몇 년이 지난 뒤였다. 그때 우리들은 약 삼십 명의 탈을 쓴 광대들이 
음악에 맞추어 온 거리를 통해 북문 앞 노천 극장까지 행진하는 그 무리들 속에 
흽쓸렸다. 무수한 사람들이 성벽 위의 문루며, 무대를 둘러싼 높은 언덕이며, 그늘진 
큰 나무 아래에 앉아 구경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절을 떠나서 거리로 나온 승려들이 등장했다. 그는 미녀를 사랑하게 
되어 기쁨에 넘쳐흘렀다. 그 다음에는 수없는 방울을 몸에 달아 움직일 때마다 
소리를 내는 우스꽝스런 광대가 등장했다. 광대는 자꾸만 중놈이 구^36^애하는것을 
훼방 놓고는 끝내는 미녀를 유괴하고야 말았다. 불쌍하고도 늙어 빠진 중은 다시금 
산속의 절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중의 작별은 활발하기는 하였으나 무척 쓸쓸한 춤이었고, 그것이 종일토록 계속된 
연극의 종막을 이루었다.
  이 마지막 춤은 석양녘에 시작해서 다음날이 접어들 때까지 계속되었고,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이다. 노인이 무거운 곡에 맞추어 기다란 소매를 한 
번은 뒤로, 한 번은 앞으로 흔들며 지친 듯한 다리를 멀리 딛었다 가까이 딛었다, 
등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공중에 애통의 원을 그리던 그 모든 광경은 나의 가슴속 
깊이, 그리고 나의 뇌 속에 스며들었기에 그날 밤 내가 외어서 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내가 한창 흥겹게 노는 것이 마음에 들지않았지만, 그래도 세 명의 
사촌이 어울린 첫밤을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사실 우리는 가을과 겨울을 서로 사이좋게 지냈다. 그 중 나이 많은 사촌이 
우리에게 새로운 놀이를 많이 가르쳐주어서 몹시 기뻤다. 학과가 끝나자마자 
우리들은 얼어 붙은 강으로 달려가서는 어둡도록 팽이를 쳤다. 집에서 온갖 장난감, 
팽이, 대퉁소, 대나무자, 담뱃갑, 재떨이 등을 만들었다.
  얼마 후였다. 우리 고장에서 일년 중 가장 큰 명절인 설이 가까워졌다. 한밤중에 
조상의 신주 앞에 제사를 드린 뒤에 축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큰 
안방에 불려가서는 맛있는 과일을 대접받았고, 우리들이 앉아 있고 싶은 대로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세배를 드리러 갔다. 날씨는 꽤 차가웠다. 길바닥은 얼음장처럼 
붙었고 칼날 같은 바람이 마구 휘몰아쳤으나 우리들은 신이 나서 집집마다 
돌아다녔다. 그리고 잘 왼 세배의 말들을 가는 곳마다 옮겼다. 어디에서나 따뜻하게 
맞아주었으며 단 과자와 과일을 대접받았다. 기쁘고 우스운 이야기를 듣고, 맛있는 
음식만을 먹을 수 있는 그런 명절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우리 집은 할머니를 바롯하여 구월에 이르기까지 모든 식구가 좋은 옷을 입었다. 
아무도 찌푸린 얼굴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싫어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마름으로 있는 둔한 순옥까지, 여느 때는 나를 무능하다고 비꼬았으나, 이날만은 
"언젠가 너도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다정스레 말해주었다. 모든 사람이 
농을 걸었고 선물을 주었다. 
  밤늦게 잠자리에 들려 했을 때^56,36^나와 수암은 일년 전부터 한방에서 
잤다^36,23^앞으로 보름 동안 방학이 계속된다는 생각에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수암은 벌써 코를 골고 있었다. 
  아이들 다음으로 어른들이 세배하러 갔다. 수많은 이웃 사람과 계집아이, 부인, 
청년과 노인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고, 집안은 기쁨과 웃음으로 가득 찼었다. 
이렇게 명절이 하루하루 계속되었다. 내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명절 기분에 잠겨 
있는 동안 수암은 저녁이면 몰래 집에서 빠져 나가 늦게야 돌아왔다. 
  그를 탐탐하게 여기지 않는 까불이 패들과 새해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호사스러운 그의 옷은 온통 흙 발자국과 코피로 얼룩져 있었고, 그는 아무도 몰래 
그것을 모두 지웠다. 그러나 한번은, 다른 날보다도 더 실컷 맞아서 들어왔다. 
양소매 절반쯤 찢겨 있었고 머리에는 여러 군데 타박상을 입었다. 그는 적들한테 
에워싸여 아주 호되게 두들겨 맞다가 끝판에야 동무들이 말렸다고 했다. 그것이 
그의 투쟁욕을 줄게 한 것 같았다. 
  이튿날에도 싸움은 더 거칠어졌고 며칠 후에는 결판이 날 판인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 없이 집안에만 처박혀 있었다. 그 대신 집안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가 
일으킨 분란이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저녁,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우리를 불러 이상한 놀음을 
가르쳐주었다. 
  딱딱하게 생긴 종이 한장에는 가장 높은 고관에서부터 제일 말단 관리에 이르는 
직명이 쓰여 있었다. 우리들은 우리 경력을 가장 낮은 단계에서 시작하여 판서의 
직위에 먼저 오르는 사람이 놀음에 이기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책을 들고 아무 
곳이나 마음데로 폈다. 그래서 나오는 면의 첫 글자가 운으로 선정되어 우리들 
모두는 이 말로 끝나는 어떤 고전적 시인의 시를 말하여야만 했다. 
  먼저 칠성이 부딪힌 첫 글자는 '군'자였다. 그는 이 글자로 끝나는 시를 하나도 
알지 못하였으므로 오랫 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는 수암의 차례가 돌아왔다. 
수암의 운자는 봄 '춘'자였다. 그건 아주 보편적인 운자였으므로 우리는 수암을 
부러워했다.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봄이 깃든다."
  "잘했다."
  아버지는 그를 문관의 지위에 진출시켰다. 그것은 수암의 큰 성과였다. 그러나 
그것은 수암에게는 최고요  최후의 성과였다. 그는 그와 같은 운수 좋은 운자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진급할 수가 없었다. 수암은 여태껏 단 한 권의 
시집만 읽었을 뿐 아니라 그것마저 완전히 기억하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칠성과 
나도 곧 진급이 멎어버렸다. 그는 제 삼에, 나는 제 사의 진급에 머물러 있어서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
  며칠 뒤에 우리들은 그 놀음을 다시 계속했다. 이번에는 시인의 내기가 아니고 
쌍윷 기술에 의한 것이었다. 칠성은 이렇게 하는 것이 휠씬 간단하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들은 모두가 관리가 되었고, 계속해서 진급되었으며 놀음은 반 시간 
뒤에 끝이 났다. 각 놀음에 동전이 걸렸다. 이 놀음을 찬성하지 않던 아버지도 
나중에는 우리를 도와주어서 각개 관리의 지위와 권력이며, 현실에 있어서 그러한 
지위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관한 설명을 아주 재미있게 해주었다. 
  수암은 우리 고을의 목사의 지위에 마음이 쏠렸다. 작년에 우리는 목사가 
취임하는 장면을 보았다. 위세 당당한 목사는 한 십여 리나 줄지어 늘어선 
부하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는 시외에서 장래의 영지에서의 첫 식사를 하고 말을 
타고 문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들은 구월과 함께 집앞에 늘어선 군중들 틈에 끼여 
있었다. 멀리서 야단스러운 음악이 들리고 남문에서 기마 대열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갈색 말을 탄 악대들이 들어왔다. 그 다음에는 색색으로 갖춘 비단에 
감긴 40 명의 처녀가 다섯 쌍의 말을 타고 왔고, 으리으리한 검은 관복을 입은 열 
쌍의 고관이 뒤를 따랐다. 그것은 그 당시 23 현의로 나누어 있던 우리 지방의 
현감이었다. 그 다음으로 목사가 아직 소년인 예쁘장한 두 시종을 데리고 지나갔다. 
그가 탄 말은 그의 머리처럼 흰 빛을 하고 있었다. 갓은 호박끈으로 턱 아래 걸려 
있었다. 목사 뒤에는 한 떼의 관노들이 줄을 지어 따랐다. 이 어마어마한 목사의 
행렬한테 받은 수암의 감동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그와는 달리 나는 어사를 더 바랐다. 그는 전국을 순시하면서 부정이 지배하지나 
않는지, 왕의 수령들이 제 임무를 다하고 있는지 순찰하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왕에게 보고함으로써 질 나쁜 고관도 쫓아낼 수 있을 뿐더러 말단의 관리를 
승진시킬 수도 있었다. 그런 직위의 관리가 암행어사였다. 아무도 이 위세 당당한 
사람이 근처에 있는지를 모르며, 대개는 거지로 가장하여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수없이 가난한 가정에는 돈과 쌀을 갖다주었고, 무고한 죄수들을 석방시켜 준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거지처럼 어사가 되고 싶었다. 
  우리가 놀음을 할때,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쌍윷에서 6점을 얻으면 모든 다른 
사람이 똑같은 6점을 얻지 않는 한 다른 모든 관리는 추방되었다. 그동안에 나는 
홀로 출세를 계속하여 판서로서, 뒤따르는 사람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젠 
경쟁자를 무서워 하지 않아도 좋았다. 한번 밀려 내쫓긴 사람, 유독 연거푸 
추방되어야만 하는 운수 나쁜 사람은 이 불명예에 화를 냈다. 
  수암은 자주 추방되었기 때문에 부아가 나서 날뛰었다. 이상하게도 칠성이 추방할 
때면 특별히 더 심했다. 수암의 이 격노는 점점 개인적인 것으로 약화되어 갔기 
때문에 거의 매일 밤 불만을 품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계속하여 잃었기 때문에 설날 모은 밑천이 곧 한푼도 없게 되었다. 물론 
나도 잃었다. 그래서 칠성이 몽땅 다 딴 것이다. 나의 두 사촌은 원래 잘 어울리지 
않았다. 하나는 너무도 조용하였다. 칠성은 언제나 수암에게 모범생으로 지적되었다. 
그런데다 그는 너무도 깔끔했다. 몇 달을 두고 입은 옷이라도 새옷 같았지만, 수암의 
옷은 사흘 가는 게 없을 만큼 더러워졌다. 
  커다란 구름덩어리가 공중을 오락오락하여 어느 조그마한 불꽃 속에서도 강한 
번개가 번뜩이고 있었다. 이럴 때 이 놀음을 다시 시작했다. 마침 아버지는 집에 안 
계셨다. 칠성이 나를 추방했다. 나는 되돌아와 다시 추방되었고, 또다시 돌아왔다. 
동전이 다 떨어진 수암은 오랫 동안 우리의 놀음을 구경하고만 있었다. 
  칠성은 나를 또 한 번 추방하기 위하여 쌍윷을 높이 던졌다. 쌍윷이 채 떨어지도 
전에 수암이 그에게 덤벼들어 미리통을 잡고 늘어졌다. 둘은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뒹굴었다. 나는 수암을 약간 도왔다. 모범적이라는 아이가 흘리는 찢어진 그의 
저고리를 한번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았던지! 이것은 우리들 공동 생활의 
마지막이었다. 
  우리들이 받을 형의 재난은 빨리 왔으나 그것은 공정하지 않았다. 나는 칠성이 
주형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돈을 다 따서 싸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수암이 호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칠성을 몹시 구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칠성은 무죄 언도를 받고 아버지의 사랑방에서 
나갔다. 수암은 아버지한테 세 차례 종아리를 얻어맞았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자, 이젠 네 차례다. 이리 와!" 
  나는 바지를 걷어붙이지 않았다. 칠성은 무죄고 우리 둘만이 얻어맞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암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종아리를 
걷어 올리도록 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주저하면서 바지를 걷어 올렸고, 아버지는 
매질을 시작했다. 내 저항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나는 힘차게 꽉 잡혀 있었기 
때문에 빠져 나갈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세 차례 맞은 후에 돌아서서 "칠성도 
매를 맞아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려 했다. 그때 또 한 차례 매를 맞았다. 
이번에는 정강이 뼈에 맞았기 때문에 몹시 아팠다. 
  나는 그만 울부짖고 말았다. 수암은 그 사이에 아버지의 손에서 매를 빼앗으려 
하다가 엉덩이에 호된 매를 맞고 낑낑거리며 물러났다. 나는 연방 매질을 당해야만 
했다. 자그마치 열 대는 맞았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말했다. 
  "이젠 네몫이 다 되었다."
  그러나 나는 물러나지 않고 반항적으로 뇌까렸다.
  "더 때려!"
  "뭐라고?"
  아버지는 소리치면서 다시 나를 때렸다. 수암이 또 한번 그 사이에 끼여 들어서 
한참 후에 아버지 손에서 매를 빼앗고는 달아나버렸다. 
  "자, 이젠 나가, 이 고집통아! 네 마음대로 해."
  아버지는 나를 억지로 밖으로 내쫓았다. 
    불공을 드려준 여인

  봄에 칠성은 고모와 함께 우리 집을 떠났다. 길 건너 자그마한 집으로 이사를 
갔다. 칠성이 어머니가 살림을 따로 나려고 그랬는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이 
싸웠기 때문에 한집에 같이 지낼 수 없어서 그랬는지 나는 잘 몰랐다. 어쨌든간에 
이렇게 떨어지게 된 것은 잘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 우리들은 다시 만나서도 
다시는 싸우지 않았다. 수암과 나는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촌을 두들긴 것을 못내 
부끄러워하기까지 했다. 그는 지극히 깔끔하였으나 그것은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며칠 후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아주 흔치 않은 방문을 받았다. 그 사람은 아주 
먼 지방에서 온 한 할머니였다. 그는 자그마한 사내아이였던 나를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 내 어머니도 그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그가 비록 나를 
낳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내 어머니를 위해서 아들을 낳아 달라고 빌었고 또 그랬기 
때문에 나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할머니는 애 낳기를 원하는 여자들을 위해서 빌어주는 노파였다. 
점치는 책들과 온갖 색칠한 부채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사람의 장래를 예언하는 
점쟁이나, 소리와 춤으로 귀신을 불러들이는 무당과 그 할머니를 혼동해서는 결단코 
안 될 말이었다. 그 할머니는 훨신 더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인생의 저열한 
일에는 관계하지 않는 여자였다. 그 할머니는 다만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보살의 
이름에만 빌었다.
  나의 어머니가 이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불원천리하고 그곳으로 가 
빌어주기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못 낳고 늙을까 무척 
근심스러웠다는 것이다. 이 축수하는 할머니는 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에 49일 동안 
묵으면서 부처님의 제자인 미륵불에게 큰 축원을 드렸고, 그에 따라 내 이름을 
미륵이라 지었다고 했다.  
  그 할머니가 온 지 며칠 후,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나는 두 어머니를 따라 숲으로 
갔다. 거기에서 우리들은 성자의 입상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려 했다. 우리 
고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깊은 산골짜기에 미륵불의 등신대 석상이 있는 사당이 
있었다. '제석 어머니'는 근처에 있는 마을에서 열쇠를 가져와서 문을 열고 촛불을 
켰다.
  그 사이 날은 이미 저물어, 무서운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두 어머니 사이에 서서 
환한 촛불 앞에서 빛나는 석상을 우러러보았다. 그 용모는 조용하고 평화스러웠다. 
미륵불은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귀는 아주 길쭉했고 두 팔은 몸에 꼭 붙어 있었다. 
손은 팔짱에 끼고 있었으며 발은 붙어 있었고 꼿꼿하게 서서 발까지 같은 굵기로 
내려와 다만 그게 발이라는 것을 나타낼 뿐이었다.
  '제석 어머니'는 세 번 접은 종이에 불을 켜고는 석상 앞에 서서 두손 모아 
빌었다. 나는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너그러운 
중개로 하여 이 세상에 내가 태어나 존재할 수 있게 한, 어두운 숲에서 희게 빛나는 
성자의 모습에 너무나도 감동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이 축원을 마친 뒤 사당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이 
세상의 길로 인도해 준 '제석천'에 대한 감사의 정을 느꼈다. 그 할머니의 축원이 
아니었던들 나는 어딘지도 모를 다른 곳에 태어났을 것이며 수암과 구월이, 그리고 
누나들도 없이 자랐을 것이기에. 나는 그 할머니의 손을 굳게 잡았고, 그 할머니는 
나를 이렇게 불렀다.
  "내 아들아, 귀염둥이야!"
  그 할머니는 나에게 분에 넘치는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문 안으로 갈 때는 
언제나 내게 무슨 소원이 없느냐고 물었고, 내가 원한 것을 모두 받아들였다. 한번은 
내가 무척 좋아했던 거북을 갖다 주기도 했다. 내가 한번도 보지 못한, 그런 
거북이었다. 등은 흡사 아름답게 깎은 먹통 같았고, 배에는 선명하게 한자로 
'왕'자가 새겨져 있어서 경외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가졌던 네 발 짐승 동무는 아주 자그마하고 나를 잘 따르는 
예쁘장한 다람쥐였다. 내가 서당에서 돌아오는 저녁에는 언제나 내 얼굴이며 목에 
뛰어오르기도 하고, 땅콩이나 밤을 받을 때까지 내 팔 위에서 뛰놀았다. 나는 이 
말을 그 할머니에게 했다. 그 다람쥐가 달아나버린 게 무척 아깝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할머니는 다람쥐 대신으로 거북을 가져온 것이다.
  나는 간간이 거북의 등을 조심스레 만졌다. 그 이상 거북과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다람쥐와는 엄청나게 달랐다. 뛰지도 소리 지르지도 않았고, 느릿느릿 
마루마닥을 돌아다니다가는 오랫 동안 한자리에 머물러 있곤 했다. 마치 군주답게 
보였고, 아주 어젓하고 깊은 생각을 가진 것 같았다. '제석 어머니'는, "거북은 
인간의 운명에 관해서 명상하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을 예언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걸 알아 보기 위해서는 등이 평평하게 되도록 구부려야만 했다. 그리고는 거북을 
등에 올려놓고 기어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 거북이 오른편으로 기어 내려오면 
행운을 뜻하고, 왼편으로 기어 내려오면 불행을 뜻했다.
  수암과 나는 매일 아침 한 번씩 땅에 구부려서는 거북이 오랫 동안 주저한 뒤에 
기어 내려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게 왼편으로 기어 내려오더라도 나는 조금도 
기분이 언짢지 않았다. 수암은 언제나 나에게 내 등의 외편을 조금 높이 듦으로써 
거북이 오른편으로만 기어 내려오도록 가르쳐주었다. 신탁을 보여준 다음에 거북은 
풀려나서 안마당으로, 샘뜰로, 유유 자적하게 기어다녔다.
  거북은 우리들이 늘 넉넉하게 가져다 주는 오이만을 먹고 살았다. 그러나 이 
희귀한 짐승이 성장하는 남쪽 나라에서는 매일 아침 해돋이 때 그의 입술에 
방울지는 이슬만으로 산다고 한다. 
  또다시 한여름으로 접어들었다. '제석 어머니'는 우리 곁을 떠났다. 날이 너무 
무덥기 때문에 서당은 오전에 끝났고, 오후에는 냇가에 가서 오랫 동안 마음대로 
미역을 감아도 괜찮았다. 우리가 이제 제법 헤엄을 칠 수 있었으므로 물 깊이가 4,5 
미터 되는 깊은 곳에도 들어갈 수가 있었다. 냇물이 너무도 맑았기 때문에, 이렇게 
깊은 곳에서도 바위가 많고 모래가 깔린 내의 바닥이 푸르게 비쳐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들은 마치 개구리처럼 헤엄쳤고 바닥에까지 잠겨보기도 하고, 또는 물속에 
누워서 저절로 돌아지도록 가만히 있기도 했다. 바위 위에 누워서 눈을 감고 
물소리를 듣는 것은 퍽 재미있고 좋았다. 
  수암과 나는 늘 거북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거북이 마음대로 헤엄을 칠 수 있게 
내버려두었다. 오고가는 길에서는 뙤약볕에 쪼이지 않도록 큰 호박잎으로 
감싸주었다.
  꼭 한 차례 거북을 데리고 가는 것을 잊은 적이 있었다. 이 날에 불행이 일어났던 
것이다. 홀로 남은 거북은 물을 못 잊어서 그랬는지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다.
  저녁때 우리들이 돌아와서 먹이를 주려고 했을 때 아무리 찾아도 거북은 온데 
간데 없었다. 온 식구가 다 거들어서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노을이 깃들고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얀 박꽃이 빛나고 박쥐가 공중을 찍찍거리며 날아다녔다. 
그런데도 거북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촛불과 호롱불을 들고 방과 곳간과 
뜰의 낮은 곳까지 온통 찾았다. 급기야 구월이 솥에서 거북을 찾아냈으나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땅에 갖다 놓았을 때도 움직이지 않았다. 거북은 죽은 것이었다.
  이튿날 수암은 뒷마당에 구덩이를 파서 거북을 묻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평지에 만든 묘지라고는 없었다. 집집마다 자기 산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 가정 묘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거북을 산에 묻고 싶었다. 
수암은 한 낮이 기울기까지 거의 1 미터 높이가 되도록 구덩이의 흙을 퍼올렸다. 
나는 두 개의 굵은 나뭇가지와 짚으로 거북을 무덤까지 들고 갈 수 있는 관을 
만들었다. 거북은 움직이지 않고 하루 종일 거기 누워 있었다.
  우리는 산신령과 죽어버린 동무에게 술 대신 한잔씩의 물을 바쳐 죽은 짐승의 
넋이 편히 쉬기를 빌고, 해질 무렵에 시체를 묻었다. 호박 크기만한 무덤이 다 
만들어졌을 때, 나는 무척 슬픔을 느꼈다. 거북은 오랜 생명을 가지며 수천년이나 
산다고 한다. 그러나 희귀한 동물이 우리 집에서 죽었을 때에는 아마 좋은 것을 
뜻하지는 않으리라. 
    병석에 누운 아버지

  그 후 몇 달 뒤에 아버지가 병석에 누웠다. 아버지는 여행중이었는데 며칠 후에 
갑자기 돌아왔고, 온 집안은 그로 인하여 야단 법석이었다. 어디가 편찮은지 나는 잘 
몰랐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숙모가 아버지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의원이 왔고 또 다른 의원이 번갈아 
찾아 왔으나 아무도 아버지를 구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온 밤과 이튿날 오전을 
누워 있기만 했다.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약을 먹도록 권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후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구원에 대한 희망은 꺼져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기절하여 안체로 모셔졌다. 온 집안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여자들은 아버지의 
사랑방에 모여 앉았고, 남자들은 그 앞마루에 모여 앉았다. 아무도 입을 때는 사람이 
없었다. 수암의 어머니인 숙모만이 아버지의 입에 약을 떠넣으려고 자꾸만 애를 
썼다.
  어머니는 안방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다시 정신을 차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내 손만을 꼭잡고 있었다.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 왔을 때 어머니는, "이젠 만사가 끝나버렸어요, 
어머님!"하고 말했다.
  할머니는 듣지 않았다. 할머니는 앉은 채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둘째누나 어진이 와서는 "오늘 아침 통지해 둔 의원이 이제야 왔다"고 했다. 
수암과 나는 곧 사랑방으로 달려갔다.
  이 새 의원은 청을 많이 받은 유명한 의원이었다. 그는 몇 주일 전부터 이곳의 
환자를 보기 위하여 우리 고을에 와 있었으나, 일을 다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이었다. 그가 우리 집에 온 것은 오직 우리 집 일꾼의 완강한 
고집에 의한 것이었다. 의원은 병자를 잠깐 동안 살펴보더니 숙모를 보고 말했다.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저로서는 어쩔 수 없으니 손을 떼고 싶습니다."
  "제발 최후까지 노력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병자보다 더 창백해진 숙모는 애원을 했다. 숙모는 낯선 남자의 소매를 잡고 
방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의원님께서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다 드리겠습니다."
  그는 앉아서 맥과 심장을 짚은 다음 병자의 전신을 샅샅이 조사했다.
  "좋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지요. 만약 그 보람이 없다고 해도 절 
책망하지는 마십시오." 
  의원은 주머니에서 침통을 끄집어내어 긴 침을 뽑았다. 의원은 그것으로 처음에는 
병자의 윗입술을, 다음에는 아랫입술을 찔렀다. 그리고는 침을 입술 아래에서부터 
윗부분까지 깊이 찔러놓고는 잠시 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천천히 뽑아냈다. 
  "만약 병자가 살게 된다면 오늘 저녁 안으로 어떤 징조를 나타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의원은 방을 떠났다. 
  저녁이 되었다. 온 집안에는 다시금 희망이 살아났다. 아버지가 더 악화되지 않은 
것이 좋은 징조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오전처럼 조용히 누워있었다. 
어둠이 접어들 때 손을 움직였고 손이 서로 맞닿았다. 우리들은 바싹 정신을 차리고 
거동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숙모는 말없이 아버지의 팔과 손을 쓰다듬었다. 
아버지는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깊은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눈을 감았고, 
왼편으로 돌아 누웠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곧 잠이 들었고 성한 
사람처럼 숨을 쉬었다. 
  "살았다!"
  숙모는 울음을 터뜨렸다. 일어날 기운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도와 숙모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동안에 어머니는 몇 번 아버지 방에 들어왔으나, 완쾌할 만한 차도가 있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때까지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으며 
어머니 자신도 시체같이 보였다. 어머니는 차차 진정하여 우리를 모두 방에서 
나가게 했고, 부엌일이며 의원의 접대에 관한 지시를 했다. 
  수암과 나는 자야만 했다. 우리는 곧 잠들었다. 내가 한밤중에 깨어서 사랑채로 
갔을 때에는 아버지는 일어나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께로 
뛰어갔고, 아버지는 나를 어머니가 끌어갈 때까지 무릎에 앉혀주었다. 나는 참으로 
아버지가 살아있는가 믿어지지가 않아 자꾸만 쳐다보았다. 나는 아버지의 이부자리 
곁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두 분은 그동안 기적을 가져온 의원에 관해서 나직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말 이 의원이야말로 신통한 의원이었다. 훗날에서야 나는 비로소 그가 우리 
고을뿐만 아니라 온 고을의 숱한 사람의 생명을 건져준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다시금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방금 무덤에 끌고 간 한 사람의 생명을 다시 
살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많은 돈을 요구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그를 부를 수도 
없었다. 이러한 그릇됨이 그로 하여금 생명을 잃게 했다. 그가 한 부자를 치료하고 
돌아갈 때 그에게 20관이나 되는 돌이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그가 성벽 아래에서 
납작하게 찌그러진 것을 사람들이 발견해 냈다. 누가 범인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무거운 돈자루가 이 돌덩이로 변해 버렸다고들 말했다. 
  아버지는 점차 완치되어 갔다. 가을을 넘기고 겨우 내 아버지는 무척 조심스레 
보양하였다. 중풍을 무릅쓰고 그동안 쭉 해왔던 모든 일을 이제는 그만두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집안과 바깥과의 날카로운 선을 그었다. 모든 사교적인 의무는 
중단되었고, 아버지와 가장 친분 있는 친구들만이 집으로 찾아왔다. 처음에는 이 
의원의 요청과 가족의 권유를 하는 수 없이 따랐으나 점점 아버지 스스로 더 휴식을 
즐겨야만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점차로 주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결국에 가서는 집안 일도 정리해야 했다. 서당은 해체되었고, 아이들은 다시 만날 
기회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바깥뜰은 다시금 조용해졌고 다만 젊은 서기인 
순필과 마름인 순옥과 하인들만이 아직도 거처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에는 문중 회의가 열렸다. 수암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들은 수암이 
한문을 익히기 위해 계속해서 서당에 다녀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수암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시골로 가야만 했다. 고전을 잘 가르쳐주는 동네로 옮겨야 
했다. 수암의 어머니는 거기서, 여태껏 아버지의 소유였고 또 아버지가 관리하던 
농장의 경영을 맡아야 했다. 그리하여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 우리는 최초의 이별을 
해야만 했다. 
  나는 수암을 우리 고을에서 한 시간이나 걸어야 갈 수 있는 용지 항만까지 바래다 
주었다. 여기서부터 수암은 배를 타고, 건너가야 했다. 수암은 제 어머니와 둘째누나 
사이에 앉아서 겁먹은 듯이 우리 쪽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작은 배는 돛을 올리고는 잔잔하지 않은 푸른 물결 위를 흔들리며 까맣게 멀어져 
갔다. 
  이렇게 가족이 적어진 다음에 우리들의 생활은 정상적인 과정을 밟아 나갔다. 
아버지에게 큰 변화가 진전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불경과 염불을 가정에 
끌어들였다. 매일 저녁 아버지는 염불로 시간을 보냈다. 비, 바람, 손님, 집안의 어떤 
불안도 아버지에게서 그걸 방해할 수는 없었다. 염불은 범어로 하기 때문에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나는 그 모든 말들이 아버지의 장래 생명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잠작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진심으로 불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머니를 무척 기쁘게 
하였다. 여름이 되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신광사를 찾아 거기서 불공을 드리지 
않겠느냐고 의논했다. 또한 어머니는 이 절의 스님을 집에 모셔 와서 여러 가지 
의식이며 제사에 관하여 상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생각은 실행되지 못하고 
다음해 여름으로 미루게 되었다. 그건 정말 서운한 일이었다. 
  우리 고을은 산으로 둘러싸였으며 산에는 수많은 암자와 절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절을 구경해 보지 못했다. 우리는 여태껏 부처에게 아무런 
치성도 드리지 않았고, 절에 큰 불공을 드리려 하지도 않았다. 자주 우리를 찾아와 
문 앞에서 염불을 외는 시주승은 결코 세상 사람을 종교적으로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오직 일년에 한 번(부처님이 19 년 동안 명상한 뒤에 다시 목욕을 
하고 설법하기 시작한 사월 초파일)만 고을에서 불교 의식이 있었다.  
  그럴 때면 큰길 가의 모든 집 앞에 집보다 세 배나 네 배가 넘는 노끈나무가 
진열되었다. 온갖 색깔의 헝겊으로 싸이고 꾸며진 이 나뭇가지에는 색색의 노끈이 
지붕 위며 땅위로 내려져 있었다. 저녁에는 줄과 노끈에 등을 매달아 정원이 수백만 
개의 빛나는 꽃으로 변해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절을, 더욱이 양친이 자주 이야기하는 신광사를 꼭 한번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화창한날 오전, 이렇다 할 생각도 없이 신광사로 소풍 가는 두 소년과 
동행하게 되었다. 
  나는 아침 소풍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문 안에서 지난날의 서당 아이들을 
만났다. "어디 가느냐?"라고 묻자 그들은 "신광사"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은 울렁거렸고, 나는 그만 망설이지 않고 같이 가자는 데에 
응했던 것이다. 
  나는 늠름하게 걸어갔고 닥쳐올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소풍은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우리들은 고을을 빨리 벗어나 많은 산골짜기를 거쳐 
산속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완전히 산으고 둘러싸이게 되었다. 햇볕은 따갑도록 내리쬐였고, 
우리는 걷잡을 수 없이 땀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지치지 않고 줄곧 산길을 더듬어 
마침내 멀리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평평한 마당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신광사의 
지붕이 풀잎 사이로 아늘거렸다.
  우리들이 도착했을 때, 나는 나무들이 기다란 그림자를 땅에 던지며 해가 
뉘엿뉘엿 서녘으로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고는 적이 놀랐다.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너무 늦지 않도록 집으로 곧장 돌아가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는 날이 너무 
저물어 오늘 밤은 절에서 자야 하겠다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이 내가 어디 있는지를 모를 터이므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곳에서 밤을 새우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굳이 귀가를 고집해 보았지만 아무런 
보람도 없었다. 그들은 우선 절을 구경하려고 했다. 우리들이 말다툼을 하는 사이 
해는 점점 더 기울어져, 우리를 마중한 젊은 중이 위험한 길을 밤중에 돌아간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라고 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생전 처음으로 이 산에서 우울한 
밤을 밝혔다. 
  나는 수많은 불상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훌륭한 절을 거의 보지 않았으며,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다. 
  나는 줄곧 우리 고을이 있을 산 너머만 바라보았다. 어느 곳에도 내 눈에 익숙한 
그 넓은 계곡이며 바다의 풍경은 보이지를 않았다. 다만 험준한 산봉우리만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고 절의 저녁 종소리만 외로운 산골을 은은히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누런 장삼을 걸친 스님이 저녁 염불을 하러 마당에 들어섰다. 손에는 염주를 
드리우고 있었다. 절의 벽 주변에는 수많은 촛대가 불빛을 흘리고 있었다. 여기서는 
스님과 죽은 사람의 가족들이 죽은 사람의 혼을 위해서 불공을 올리고 있었다. 얼마 
동안 멎었다가는 다시 이어지는 염불과 불공은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는 이 불공 드린 사람들은 마당에 나와서 백명이 넘는 스님과 가족들이 
함께 천천히 원을 그리고 있었다. 여자들은 두 손으로 원통처럼 접힌, 분명히 죽어 
간 영혼의 거처인 듯한 나무 판을 받들고 서 있었다. 원의 한가운데에는 빨간 
장작불이 밝아 오는 아침 햇살에 타오르고 있었다. 엄숙한 음률이 묵중하게 울리고, 
스님들은 합창으로 작별염불과 함께 '나무아미타불'을 외었다. 
  이제야 죽은 사람의 영혼은 마침내 땅에서 해방되어 다른 세계로 옮겨지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목탁의 가락과 운율적인 노래에 감동되어 조용히 여자들의 뒤를 
따랐다. 끊임없이 우리도 원을 그었다.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사람들의 얼굴은 차차 
뚜렷해졌고 계곡은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염불은 자꾸 열이 오르고 원무는 
빨라졌다. 이제 동녘에는 붉은 해가 산봉우리에서 치밀었고, 새로운 햇빛이 계곡과 
절을 내리비치기 시작했다. 스님들이 연거푸 읊조리는 동안 부인들은 한 사람씩 
불에 가까이 가서 신위를 불 속에 던졌다. 여자들은 모두 통곡 했다. 
  그것은 영원한 마지막 작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따라 울었다. 침울하고 
슬프게 목탁의 운율이 울렸고 스님들은 끊임없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었다. 

  이 밤의 감동을 깊이 간직한 채 산에서 작별하여 귀로에 섰다. 모든 책망과 벌을 
아무런 반항 없이 나는 받았다 나는 이상스럽게도 이 종교적 경험에 감동했고, 내가 
하루 전보다 훨씬 성장해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곧 나룰 용서해 주었고, 내가 경험한 것을 죄다 이야기해 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반가워하는 눈치였고, 이날 저녁부터 염불의 한 대목을 같이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염불을 마치고 아버지는 내게 양자강 계곡에 흩어져 있는 
여러 절과 암자에 대한 것들이며 유명한 시인들이 찾아와 노래한 것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당시선'을 읽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즐겨 들은 얘기가 쓰여 있는 
소설이나 시가 아닌 당시대의 설화, 전설, 일화 등이었다.
  그 당시에는 불행한 시인도 많았고, 고독을 견디기 어려워 강의 흐름에 뛰어들어 
죽고 싶은 마음으로 괴로움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슬픈 곡조가 바위에서 
울렸고, 또 고독한 협주곡이 풀잎에서 들렸으며 동정호의 저녁 노을에 슬픈 
이별가가 떠돌아다녔다.
  아름다운 달밤에는 샘뜰 살구나무 아래에 아버지가 자리를 펴게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적인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고 이따금 소리를 높여 시를 읊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늘 지녔던 근엄함도 사라지고, 만약 좋은 운이 떠돌아 기분이 
내키면 나와 농까지 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술병에서 한잔 가득 따라 나에게 마셔보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우리 옆에 없던 어느 아름다운 달밤이었다. 어머니가 옆에 없었던 
것은 잘된 일이었다. 어머니는 결단코 내가 아버지와 술을 마시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술에 대해 엄한 반대자였고, 아버지는 이 독한 술을 무척 즐겼다. 
그 때문에 종종 둘 사이가 불쾌해지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관대하였고 매일 밤 아버지에게 쌀술을 한 병 가득 갖다 
주곤 했다. 아버지와 내가 자리를 같이할 때면 술병이 놓여 있는 자그만 상에는 두 
개의 술잔과 쟁반 가득 담긴 과일이 놓여 있었다. 보통때 어머니는 밤이 이슥하게 
깊어 술병이 거의 비게 될 때까지 우리 곁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해 여름밤엔 
모든 아낙네들의 독서회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옆에 없었던 것이다. 
  달은 어느덧 빈 서당의 지붕 위에 올라와 있었으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텅 
빈 이 큰집에는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었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모든 생명, 
모든 인식이 나에게는 그처럼 잘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웃는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아버지는 술잔을 더 기울였고 그럴수록 이야기는 
생생해지기만 했다. 수많은 시들이 인용되었고 읊어졌다. 
  "너, 위대한 시인 김 삿갓을 아느냐?"
  "모릅니다."
  나는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행복스런 기대에 차서 대답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북도의 어느 고을 원님이었단다. 왕은 정치를 그르쳐 백성에게 
신망을 잃었거든. 당시 강력하던 북도의 원님은 3 만 명의 병졸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명포수들이었지. 그들과 함께 이자가 왕을 물리치려고 서울로 향해 
행진해 들어갔다는 거야. 삼도는 이미 그에 합류하고 아무도 이 패를 막아내질 
못했다는 거야. 아, 그런데 그가 병졸을 거느리고 새로 빼앗은 고을에 입성을 하려 
할 무렵 길가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과 만났단 말이야. 그는 무장도 하지 않은 
터였지만 이 승리에 찬 정복자의 말고삐를 냉큼 잡았다는 거야."
  아버지는 술잔을 보더니 얼른 다 마셔버렸다. 나는 다시 잔을 채우려 했으나 병이 
텅 비어 있었다. 
  "더 없느냐?"
  아버지가 물었다. 
  그때 약간^56,36^내가 그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슬프게 보였다.
  "더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병을 들고 일어났다. 
  아버지는 웃으며 내 손을 쥐었다. 
  "넌 참 대단하구나. 어머니께 잘 말해 봐라, 아마 너에게 줄지 모르겠다."
  "술을 꼭 가져다 드리겠어요."
  나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곧 병 하나 가득 가져와서는 아버지의 잔에 
따랐다. 
  아버지는 무척 좋아하였다. 
  "누가 그 상대방이었지요?"
  "응, 그걸 방금 네게 물어보려고 했었지. 그 용감한 사람이 누구였겠니?"
  "원님께서?"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원님께서 몸소 나와서 그렇게 무기도 없이 적에게 대했더라면 그야 
옳았을 것이고말고. 아마 다른 원님 같았더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원님은 무척 겁쟁이였거든. 유감스럽게도 그건 원님이 아니라 그 손자였더란 
말이야. 바로 김삿갓이란거지. 그렇고말고.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지? 그렇지만 
참으로 원님의 손자였다는 거야. '적군을 물리치라!'고 그는 조부에게 요구했으나 
조부는 들은체도 않고 적군에게 항복해 버렸지 그만. 그러므로 적군은 
계속해서 딴 고을을 무찔렀고 김삿갓은 임금에게 충성하였으므로 조부와 적대하여 
일을 도모하지 않고 그만 걸인과 방랑의 시인이 되어버렸지."
  "저 같으면 할아버지를 도왔을 텐데요."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직 그걸 모른다. 임금께 충성을 맹세한 이상 결코 불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김삿갓은 자기 할아버지께도 복종을 약속하였으니 그것 또한 거부할 수 없지 
않아요?"
  "물론이지."
  아버지는 나의 논리에 기뻐하면서 동의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할아버지에게 반대 행동을 하지 않았고 시인이 되어서 이 
세상과 결별하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전 할아버지를 도와야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말했다. 나에게는 임금 때문에 자기 자신의 조부를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야, 이 고집쟁이야!"
  아버지는 소리쳤다.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냥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저는 아버지가 어른이라고 해서 
저보다 그걸 더 잘 아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잘 말했어!"
  "자, 이 똑똑한 녀석아. 어디 우리 한잔 같이 마셔보자."
  아버지는 사용하지 않던, 확실히 치레만을 위해서 놓아두었던 다른 잔에 술을 
따랐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때까지 나는 어머니가 언제나 반대하여 이야기하였기에 
취하게 하는 음료를 적으로 여기는 데 익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손으로 술잔을 잡았다. 
  "자, 마셔라."
  나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러나 잠시 후에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술이 무척 
독했다. 아버지가 얼른 대추를 입에 넣어주었기 때문에 훨씬 나아졌다.
  "맛이 좋았지?"
  "좋았어요."
  "그것 봐! 자 한잔만 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가슴속은 울렁거렸고, 목은 마치 
졸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신음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으려고 애를 썼다. 
  아버지는 그동안 김 삿갓의 시를 하나씩 읊었다. 
  우리들이 둘째 잔을 비웠을 때는 나는 손에 대추 두 개를 쥐고 있었다. 이번은 
그렇게 나쁘지가 않았다. 나는 유쾌하고 사내답게 대추를 씹었다. 그러자 곧 머리가 
빙 돌기 시작했다. 참으로 이상스럽고도 기묘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물러나지 
않고 마치 편한 것처럼 앉아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돌아와서 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이지, 그럴 수밖에!"
  "두 잔이나 마셨거든!"
  어머니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시선은 그렇게 
엄격하지도 꾸짖는 것 같지도 않았고 약간 비웃는 듯했다.
  "한잔 더 마셔도 되나요?"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말이 되는 소리냐?"
  어머니가 소리치며 술잔을 빼앗았다.
  "제발 그렇게 무참하게 하지 마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한두 잔의 술은 결코 해롭지 않아. 나는 이 외로움 속에서 친구를 가져야 하지 
않겠소?"
  "오늘 한번만은 마음대로 하세요."
  어머니는 조용히 잔을 채웠다. 
  나는 의기 양양하게 셋째 잔을 비웠다. 왠지 나 자신이 무척 자랐고 큰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버지의 친구가 되다니! 저렇게 현명하고도 그렇게 아름답게 
이야기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 아버지, 너는 아니 참 당신은 아십니까^56,36^나는 이제부터 
존대하여야겠습니다. 어머니가 시인에게 술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아시기만 한다면!"
  "그래!"
  어머니는 옆에서 감긴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머니가 놀라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정말 상관이 없었다. 
  달은 아주 밝았고 살구는 향그러웠으며, 나는 술상 앞에 앉아 아버지의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유리창이 달린 학교

  나는 이른바 이 새 학교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자주 들었고, 지난 가을부터는 나의 
부모님도 가끔 그 이야기를 하였다. 몇 해 전에 세워진 주목할 만한 이 학교는, 시의 
북쪽에 있는 직물 거리 근처에 있었으며 수많은 빛나는 유리창을 달고 있었다.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주 이상한 것들이라고 했다. 거기서는 학생들에게 
습자나 시 같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학문만 가르쳐준다고 했다. 
  그 학문이란 새로운 지구의 일부에서, 서양이나 또는 유럽이라고 하는 곳에서 
들어온 것이라 했다. 이런 곳이 참으로 어느 곳에 있으며 그 학문이 무엇인가는 
아무도 확실히 몰랐다.
  많은 사람들은, 이 학교에서 고등 산술이며 어려운 요술을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이 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을 
망쳐놓을까봐 두려워했다.
  이 학교에 관해서 더 많이 아는 것 같고 더 좋은 것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어머니와 온 가족과 오랫 동안 상의한 끝에 나를 일년 동안 거기서 교육시키기로 
결정했다. 나는 내 나이 열한 살에 비해 고전을 충분히 읽어 갈 수 있었다. 내가 
여러달 전에 배운 바 있는 '중용'과 '맹자'로 우선은 충분했으며 다음에 배울 책들은 
연령에는 너무 어렵다고 했다. 
  새 학교에 가고 싶으냐고 물어보았을 때 나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망쳐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한문이며 그밖의 
한시 읽기를 좋아하였다. 나는 아버지를 믿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맑고 아직도 차가운 어느 봄날 아침, 아버지를 따라 시내로 갔다. 
나는 제일 좋은 옷을 입었고 어머니가 장만해 준 새 보자기에 점심을 싸서 들고 
갔다. 우리는 골목을 빠져 큰길로 나갔다. 
  "거기서 천문학을 가르친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렇게 들었다."
  아버지는 대답했다.
  "언제든 하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 조심스럽게 들어라. 그것은 아주 높은 
학문이다."
  "제가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영혼은 언제나 맑아야 한다."
  아버지는 진지하게 나에게 충고했다. 
  우리는 종로를 지나서 옆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곧 큼직한 건물의 문 앞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들의 입에 그렇게 오르내리던 무서운 학교였다. 
학교 이름이 문패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엄청나게 크게 보이는 교정을 
들여다보았다.
  "들어와!"
  앞장 섰던 아버지가 말했다.
  "약간 떨리느냐?"
  내가 따르기를 주저하며 머뭇거리자 아버지는 이렇게 물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웃었다. 
  나는 천천히 문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문 안에 다시 서서는 많은 별관 건물을 
살펴보고 있을 때, 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 이끌어 한 교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교실에서 한 노인이 나왔다. 나는 아버지의 지시대로 그 노인을 보고 인사를 했다. 
  "이분이 이 학교 교장 선생님이시다."
  아버지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순종하여라."
  아버지가 아직도 교장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나는 조그맣고 음울한, 
햇빛 없는 방으로 '송선생'이라고 불리는 젊은 선생님에게 인도되었다. 나는 
그에게도 인사를 했다. 나는 그의 자리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껏 방바닥에 앉았었기 때문에 의자란 것을 몰랐고, 그것은 나에게는 
너무나 고상한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제야 조심스레 그 위에 
앉았다. 
  "이제껏 무얼 배워 왔니?"
  내가 한참 동안 굳어버린 듯한 표정을 한 채 앉아 있었더니 그는 계속해서 
물었다.
  "예를 들면, '통감'을 읽었니?"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네, 여덟 권째까지."
  "그리고는 무얼 읽었니?"
  나는 다시금 조용해졌다. 나는 그 뒤에 무엇을 읽었지 곧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당황하고 있었다.
  "'사락'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맹자'도?"
  또 한번 나는 끄덕거렸다
  "너는 벌써 '중용'도 읽었니?"
  "네, 그것도 읽었습니다."
  "무척 많이 읽었구나!"
  그는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와서는 내 앞에 펴 놓았다.
  "이걸 한번 읽어봐!"
  나는 읽었다.
  "잘 알 수 있니?"
  잠깐 머뭇거리다가 나는 그렇다고 했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니?"
  그는 '미국'이라는 말을 가르켰다.
  "그건 아마 영국 근처에 있는 나라가 아닌지요."
  나는 대답했다. 나는 사람들이 유럽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자주 이 두 이름을 
인용하는 것을 들었다. 송 선생님은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나를 소위 제 2 학년으로 
결정했다.
  아버지는 나를 한 번 더 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교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맡겨두었던 것이다.
  첫날에는 하늘에 관해서 배우지 않았다. 물리 시간에는 말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끄는 공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긴 유리관을 보았다. 거기에는 한쪽 끝에서 
동전과 새털을 다른 끝으로 떨어뜨렸다. 다른 시간에는 산수를 배웠다. 유리관을 
눈앞에 대어 속을 보면 그 속에는 모든 물건이 화려한 색으로 빛났다.
  해가 저물었다. 우리 반 학생들은 모두 교문으로 몰려 나갔다. 거기서 나는 두 
권의 교과서와 란도셀, 석판 그리고 많은 연필을 받았다. 선생님은 상인이 나를 
위해서 학교에 가져온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책을 보았다. 한 권은 '동양시'라 적혀 
있었고, 다른 한 권 은 '자연 법칙'이라 적혀 있었다. 나는 책을 펴서 한 장씩 
훑어보았다. 물리책에는 그림이 있었다. 저울이며 유리관, 돛을 단 배, 유럽 기선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한 공은 거기에 없었다.
  송 선생님은 내게 시계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없다고 하자 아버지는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역시 가지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그것 안되었군." 그는 
근심스러운 듯 이렇게 말했다.
  "너는 새 시간을 아니?"
  "열두 시간?"
  "옳아, 그렇지만 열두 시간이 두 번이야. 오전 오후에 열두 시간씩으로 말이야. 
아침 여덟 시에 학교에 와야 한다. 오늘 아침에는 여덟 시가 될 때 해가 남쪽 
운동장 벽에 걸려 있었어. 어쨌든 아침밥을 먹었으면 곧 와야 해!"
  "알겠습니다, 선생님."
  나는 대답하고는 다시 물리책을 펼쳤다
  "이 책에서 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잠시 후에 이야기했다.
  "어떤 공 말이냐?"
  "네 말이 끄는 공 말입니다.
  "그건 옥 선생님께 여쭤봐라. 나는 역사밖에는 가르치지 않는다. 날이 어두어지니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거라. 집에서 부모님들이 네가 돌아오길 기다릴테니!"
  아버지의 사랑방에는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 중에는 둘째누나도 앉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 책과 가방과 연필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아버지 진지상의 나머지를 퍼먹었다. 
  그들이 각기 제 방으로 돌아간 뒤, 나는 아버지와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아버지는 
새로 무엇을 배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아주 많은 것을 배웠어요."
  "유럽에 관해서 들었니?"
  "네, 그건 참말 이상스러운 것이었어요."
  "그럼 뭐라고 하였는지 얘기해 봐라."
  아버지는 성급히 말하였다.
  "잘 설명할 수 없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걸 조심스럽게 듣긴 했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선생님은 네 마리의 말이 공 하나를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간다고 이야기 하셨어요. 저녁때가 되자 전 유리관을 보았어요. 학교 교정의 모든 
돌이며, 사람들의 옷, 지붕의 기왓장, 모든 것이 그 유리를 눈 앞에 대기만 하면 
온갖 색으로 곱게 빚났어요. 전 그게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좀 설명해 주세요".
  "유럽에서 온 것이라던?"
  한참 동안 잠자코 있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네, 그렇게 생각됩니다."
  "어떤 선생님이 보여주던?"
  "옥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그 선생님은 뭐라고 하던?"
  "햇빛이 그처럼 분리했다고 하던데?"
  "햇빛이 분리를 해? 빛이 갈라져?"
  아버지는 연방 중얼거리기만 하였다.
  잠시 후 아버지는 남폿불을 돋우게 하더니 책장에서 책을 꺼내어 오라 하였다 이 
책은 아버지가 서울에서 받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수많은 유럽의 훌륭한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이 책 저 책을 더듬어보더니 다시 책장에 꽂게 하였다.
  "넌 학교에서 더 주의 깊게 들어야겠다."
  아버지는 실망해서 말하였다.
  "불을 끄고 그만 자거라."
  "정말 오늘은 너무 이상스러웠어요."
  내가 말을 께냈다.
  "학교의 모든 게 아주 낮선 것 뿐이었어요. 오랫 동안 저는 숱한 근심을 했거든요. 
거기는 이제껏 제가 익숙해 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마음에 안들 것 
같아요."
  아버지는 오랫 동안 잠자코 있었다.
  "섭섭했니?"
  아버지는 나중에 이렇게 물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이었어요. 전 언제나 서당을 우리 집으로 생각해야만 했어요."
  "내 곁으로 들어오너라."
  아버지는 손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너는 아직 소동파의 시를 잘 알고 있을 테지?"
  나는 다시 생각해 보고는 그렇다고 했다. 항행하는 시인의 노래를 작년에 배웠다.
  "그것을 읊어봐라."
  나는 막히지 않고 읊었다.
  "너는 저 '영탄가'를 읊을 수 있니?"
  나는 그것도 읊었다. 50절이 끝나기까지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젠 네 마음이 좀 진정 되었니?"
  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내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내일 또 학교에 가겠느냐?"
  "네, 아버지가 원하신다면." 
    수소, 인력, 에이브러햄 링컨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기섭이라는 학생은 아주 예쁘고 영리한 사내아이였고,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아주 조금밖에 못 알아듣고, 또 풀이 
죽어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를 무척 동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물리에는 거의 
아는 게 없었고 산수는 더 형편없었다. 그는 가끔 내 빈 공책을 들여다보고는 몇 
자씩 적어주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려운 산수의 답이나마 집으로 가져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도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답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하루 종일 맥이 풀려 앉아서 저녁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나는 물리 시간에 조금 알아차린 것과 유럽에 
관해서 곰곰이 머리 속을 정리해 보았다.
  아버지는 새것이라면 아무리 조그만 것도 기뻐했다. 나는 들은 것 모두를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고, 조금이라도 유럽의 것처럼 보이는 것은 모두 가져왔다. 유럽 
글자가 적힌 종이조각이며 고층 건물, 철교나 탑의 사진까지도. 아버지는 
그것을 오랫 동안 세밀히 살펴보았다.
  휴식 시간이나 학과가 끝난 후에 아이들은 운동장에 모여서 유럽 각국에 대한 
그들의 높은 학문과 지혜와 현명한 사람들^56,36^그 이름들은 아주 낯설게 들렸기에 
기억하기는 무척 어려웠다^3623^에 관해서 말했다.
  한 부유한 중국인이 유럽의 현자를 방문했다고 동급생인 복술이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손가락에 낀 아주 비싼 금강석 반지를 마룻바닥에 떨어뜨렸다. 
현자와의 회담중에 그는 주인에게 자기에게 일어난 불운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손님, 유럽에서는 아무도 땅에 떨어진 남의 물건을 줍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 걱정하고 있는 사람은 창문을 통해 마침 뜰을 쓸고 있던 시종이 
처음에는 반지를 손에 들었다가 땅을 깨끗이 쓴 다음에 다시 그 자리에 놓아두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기섭은 한참 동안 유럽에 살았던 중국 황태자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그가 다시 
중국에 돌아오려고 할 때 작별 인사 겸 손님에 대한 친절에 감사하기 위해서 그 
나라의 가장 높은 사람을 찾아갔다. 성의 뜰에 이르러 그는 마침 자갈이 많은 땅을 
깨끗이 쓸고 있는 정원사에게 그의 주인이 시간이 있으면 자기를 만나줄 것인지 
물었다. 정원사가 말했다.
  "내가 바로 이 나라의 대통령입니다. 유럽에서는 미국에서와 같이 상전도 없고 
종도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알마나 즐거워했는지!
  "그것 봐라."
  그는 기쁨에 차서 말했다. 
  "유럽 사람이 참으로 진정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며칠 뒤에 집에 가져오게 한 큰 기둥 시계가 밤 열두 시를 쳤다. 그건 
우리 온 집안에 울렸고, 조용한 밤에 계속해서 똑딱똑딱 소리를 냈다. 
  아버지는 아직도 등불 아래 앉아서 나의 교과서를 뒤지고 있었다.
  "유럽에 관해서 더 들은 것은 없니?"
  "아뇨."
  "이 나라들은 누가 다스리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던?"
  "아뇨. 그렇지만 제 생각으론 대통령일 거^36^예요. 그건 일종의 왕일 겁니다."
  "응, 그렇기도 하겠지!"
  아버지는 생각하다간 또 웃으며 쉬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책을 펼쳐놓고 
아버지와 갈려 있는 새 세계를 꿰뚫어보려는 듯이 앞을 응시하였다.

  어느날 저녁, 내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교실 문 앞에서 웬 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상급생인 용마라는 아이였다.
  "네가 남문 안에 사는 이감찰 댁 아들이냐?"
  그가 물었다.
  "응, 그렇다."
  내가 대답하자 그는 다시 물었다. 
  "우리 오늘 어떤 집에 함께 가보지 않겠니? 그 집 애를 학교에 넣도록 하려는 
것인데."
  나는 일찍이 새 학교의 아이들이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이 집 저 집 찾아가 
아이들을 새 교육으로 이끌려고 학교의 좋은 점을 늘어놓는 것을 들었다. 
  "송 선생님이 우리 둘을 오늘 당번으로 결정했다."
  용마는 내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저녁 먹고 곧 버들다리로 오너라. 거기서 만나자. 부모님들이 볼 수 있게 네 
교과서도 몇 권 가져와야 해, 응?"
  우리들이 강을 따라 걷고 있을 때에는 벌써 어두워졌다. 여울물이 저녁빛에 곱게 
빛나고 있었다. 
  "너 뉴턴에 관해서 아니?"
  용마는 걸으면서 물었다.
  "아니."
  "너는 모든 것이 땅으로 떨어진다는 인력에 관해서 들은 적 없니?"
  "없어."
  용마는 사뭇 놀란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 또래의 아이가 인력에 관해서 
모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같았다.
  "나는 지구가 해의 주변을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
  "좋아, 너는 그것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또 산소에 관해 이야기해도 된다. 너는 물이 산소와 수소의 두 다른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이야기해야 돼. 우리들 조상들은 전세계가 음과 양 두 극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이 원칙을 개별적으로 알았지. 
마치 물, 공기, 바위에서와 같이."
  그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고 그는 자세하고 신중하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나쁜 시대가 왔다고들 말한다. 그러면 너는 분명히 말해 
줘라. 그건 조금도 나쁜 시대가 아니고 새로운 시대이고, 그것은 갓 시작된 
것이라고. 예를 들자면, 눈이 많은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이, 진달래가 
피고 뻐꾸기가 우는 것과 같이 온다고 말이야. 나는 '현대'를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들이 찾아가려 한 집의 아버지는 붓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 집 바깥 벽에는 
붓을 판다는 큼직한 글자들이 여기저기 나붙어 있었다. 
  우리들이 돌층계에 이르자 마침 주전자를 손에 들고 내려오던 젊은 부인과 
마주쳤다. 우리들이 이러이러해서 왔다는 것을 전하자, 그녀는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집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닫아 걸어버렸다. 몇차례나 문을 두드렸지만 끝내 열어주지 
않았다. 우리는 한참 동안 거기 서서 골짜기의 야단스러운 물소리만 듣고는 
돌아왔다. 
  "네 집에 나무 상자가 있거든."
  용마는 말을 계속했다. 
  "검은 종이로 안과 바깥을 붙여. 단지 한쪽만은 그냥 두고 거기에 흐린 유리를 
덮어라. 그 반대 방향에는 바늘만한 가는 구멍을 낸 다음 그 상자로 풍경을 내다봐. 
그러면 온갖 나무와 꽃들이 유리에 비친 것을 보게 될거야. 네가 이 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때에는 이와 같은 것으로 사진을 만든다고 이야기해도 좋다."
  용마의 집 앞에 이르자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책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것들의 일부분은 유럽식으로 제본되어 있었고, 금박의 
글자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만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이 먹으로만 쓰고 있을 때 유럽 사람들은 금촉으로 쓴단다."
  그는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을 때 그는 내게 조그맣고 얇은, 푸른 표지를 한, 
유럽식의 이름이 쓰여 있는 책을 주었다. 
  "이 책는 진보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읽는다. 한번 아버지에게 보여라."
  나는 그걸 받아 들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에이브러햄 링컨, 에이브러햄 링컨? 이건 사람일테지?"
  아버지가 말했다. 
  "그렇게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몇 쪽을 읽고는 다른 쪽을 열어 보더니 책을 앞뒤로 뒤적이며 음미했다. 
  "너는 그만 자라."
  아버지는 짧게 말하고는 쉬지 않고 연달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유럽의 현자입니까?"
  내가 이렇게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나 맹자처럼?"
  "아니, 다른 층의."
  "그럼 우리 나라의 율곡과 같은?"
  "그렇지가 않아!"
  어버지의 표정은 귀찮다는 듯이 보였다. 나는 잠자코 아버지가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버지는 이 전기에 무척 흥분한 것처럼 보였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골똘히 앞에 놓여 있는 책만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난 뒤, 담뱃대에 불을 
붙이고 담배를 피웠다.
  이 유럽 사람은 어쩌면 시인이었을까, 한 용사였을까? 아니면 나쁜 왕의 충실한 
신하이었을까? 유럽에는 악정을 하는 왕이 있는지! 나는 사진들을 서랍에서 꺼내어 
높은 집이며, 긴 다리, 철탑을 구경했다. 사람들은 이 탑으로 무얼하는 것일까?
  괘종 시계는 천천히 떨리면서 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를 수 없는, 다만 구름 
사이로만 비치는 저 아득하 먼 자혜(사랑과 은혜)의 성에서 오는 소리처럼 울렸다.
  아버지는 거의 손님을 받지 않았다. 아버지는 많은 휴식이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읍에서 오는 온갖 사무적인 방문자는 젊은 서기인 순필이 접대했고, 우리 
농장에서 오는 농부들은 마름인 순옥이 맞아서 의논을 했다. 사람들은 번번이 오고 
갔고 흥정했으며 계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옛날의 서당이던 
바깥채에서만 하였다. 바깥채에서 담과 중문으로 떨어져 있는 샘채는 하루 종일 
적막하리만큼 조용했다. 
  아침이면 머슴이 뜰을 깨끗이 쓸었고, 저녁때가 되면 구월이 정원에 물을 뿌리곤 
했다. 
  어버지가 매일같이 만나는 사람이란 저녁 식사 후에 구월이나 다른 시종들을 
거느리고 와서는 한참 동안 앉아 있는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가정에 
관해서 상의했고, 안채에 관한 일이며, 여자 손님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석양녘에 어머니는 오랫 동안 학교에 관한 나의 이야기를 들은 후, 걷어 
올린 대나무 발을 열려 있는 문 앞에 내리고는 남포등에 불을 켰다. 나는 어머니가 
안녕히 주무시기를 바라면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나의 누나들 중에서는 가운데 누나인 어진이 저녁이면 자주 나에게 와서 이야기를 
들었다. 누나는 우리 학교에 관해서 무척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누나는 종종 내 
책을 펴보았고 마음에 드는 구절은 되풀이하여 읽었다. 다음날이면 내가 필요하지 
않은 이 책 저 책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자기 방으로 가지고 올라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누나에게 새 학교에 가고 싶냐고 묻자 누나는 깜짝 놀라며 
다시 책을 놓아버렸다. 
  "왜 그런 농담을 다 하세요?"
  누나는 난처한 듯 대답했다. 
  '큰애기'라 불리던 내 큰누나는 오래전에 시집을 갔고, 제일 어린 셋째누나는 
아직도 자기 방에 들어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부모님이 오랫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나는 혼자 안채의 
작은 방에 있었다. 그때 어진이 누나가 들어왔다. 
  "이 책은 아주 이상해."
  누나는 나무라듯이 말했다. 
  "아무런 고전적 문고도 없을 뿐더러 깊은 의미가 있는 곳은 전혀 없어. 너는 이 
책으로 현명해지리라고 믿느냐?"
  "난 믿고 있어."
  "넌 이 책에서 무얼 배우니?"
  누나는 소중한 듯이 이 책 저 책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정말로 너를 위해 애석해. 넌 재주 있는 아이였고, 벌써 '중용'을 읽었고 또 많은 
시를 읽었으며 '율곡전'까지 청서하지 않았니? 그런데 넌 이제 이런 가치도 없는 
책으로 너의 재능을 낭비하고 있잖아."
  어진이 누나는 영리했다. 일화며 좋은 소설 등 많은 책들을 읽었으며, 어머니조차 
모르는 문구를 간간이 입 밖으로 뇌곤 했다 
  그 누나는 우리들 형제 중에서 가장 영리하다고 사람들은 말했으며, 또 나를 자주 
꾸짖는 유일한 누나였다. 누나는 내 글이 나쁘고 점잖지 못하며, 내 말이 멋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누나와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새 학문은 또 달라."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꺼낼 수 밖에 없었다. 
  "거기선 예를 들면 매일 수천 리를 달릴 수 있는 기차를 만드는 것을 배울 수 
있어. 또 달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이며, 조명하기 위한 전력을 이용하는 것 등을 
배우는 거야."
  "그렇더라도 넌 군자가 될 수는 없다."
  누나는 근심스레 말했다.
  "지금은 딴 시대가 왔어."
  나는 말을 계속했다.
  "어두운 시대에서 밝은 시대로 새로운 바람이 우리를 일깨우는 거야. 이젠 오랜 
겨울이 가고 새봄이 온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잖아."
  누나는 잠자코 오랫 동안 침묵을 지킨 채 내 말을 들은 체도 안 했다.
  "유럽이란 나라가 도대체 여기서 얼마나 머니?"
  "그것은 아직 배우지 않았어. 아마 수만 리는 될거야."
  "한번은 소군 공주가 꽃 없는 나라에 시집 갔었대. 아마 그곳인지."
  "아니야, 그건 다만 오랑캐 나라였어."
  "유럽에도 백합이며 진달래, 개나리꽃이 핀다고 생각하니?"
  "난 몰라."
  "너는 달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지을 수 있게 거기에도 남풍이 
불어준다고 믿니?"
  "나도 확실한 것은 말할 수 없어."
  "너는 도무지 아무것도 모르잖니?"
  누나는 실망해서 딱 잘라 말했다. 
    방학은 즐거워라.

  서당에는 여름 방학이 없었으며, 아주 더워지면 공부를 보통보다 조금 덜 배우는 
대신 목욕하러 갈 뿐이었다. 또한 일요일도 없었고, 다만 한 달에 이틀만을 쉬었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는 일요일은 휴일이었고, 여름이면 한 달을 편하게 보낼 수 있는 
방학도 있었다. 얼마나 좋은 제도였는지, 아버지도 역시 그 제도를 좋아하였으나, 
나보고 어느 먼 시골에 사는 고전 필적으로 유명한 훈장에게 가서 습자를 더 
공부하든지 아니면 아버지 곁에서 학문책을 청서하든지 둘 중의 하나로 결정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나의 필적에 만족하지 않고 방학을 습자 연습에 이용하기를 요구했다. 
나는 둘째 제안으로 결정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많은 가는 붓과 글자가 쓰이지 
않은 책을 받았고, 그 책을 쌀알만한 크기의 글자로 채워야 했다. 
  나는 매일 아침 두 면의 원본을 배웠고, 또 오전 내내 그것을 청서했다. 아버지는 
많은 글자를 나에게 반복해서 연습시켰고, 전면을 또 한 번 청서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시켰다.
  오후에는 바둑을 배웠다. 그것은 수많은 흑색과 백색 돌로 된 고상한 판놀이였다. 
희고 고운, 종이같이 엷은 바둑돌에서 나는 바닷가의 조개 부스러기를 연상했다. 
검은 돌은 굵고 둥글며 석판처럼 회색이 돌았다. 그것들은 강바닥에서 주워 온 것 
같았다. 내가 주의 깊게 희고 검은 돌들을 살피고 있을 때, "자, 검은 돌을 쥐어라."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네 힘껏 돌을 판 위에 놓아라!"
  나는 그렇게 했고, 위가 바둑판인 상자가 맑고 은은한 소리를 오랫 동안 울렸다. 
상자의 빈 곳은 많은 동선으로 감겨 있다고 아버지는 설명했다. 
  "상대방이 돌을 놓거든 소리가 울리는 동안 기다려라. 그리고는 너의 돌을 놓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경솔하게 놓지는 말아라."
  나는 20점을 받아 쥐어 대국은 시작되었다. 
  "천천히!" 
  내가 돌을 잡고 유리하게 보이는 점에 가려고 급히 서둘면 아버지는 항상 
말하였다.
  "언제나 처음에 잘 생각해야 한다. 적의 약점은 종종 착각일 수가 많다."
  한번은 아버지가 바둑놀이는 원래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선에게 
속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신선들은 지상의 산정에 내려와서는 이 놀음으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넌 아이들이 경주를 할 때처럼 그렇게 성급히 노는 신선을 상상할 수 있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신선은 아주 고상하지요."
  "너는 신선 세계에 잘못 들어가 그들의 놀이를 구경하였던 나무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지? 그가 옛날 살던 곳에 돌아왔을 때 도끼자루가 썩은 것을 
발견했다는 거야. 이 시간 없는 신선의 놀음은 지상의 인간에게는 너무나 오래 
계속된 것이지."
  우리는 바둑을 두고 또 두었다. 찌는 듯한 더위가 가신 오후에 나는 언제나 
바둑판을 그늘진 나무 아래 갖다 놓아야 했다. 아버지와 나는 판을 앞에 넣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계속해서 졌고, 그런데도 한번은 이기라는 것을 꼭 믿고 
있었다. 우리는 서늘한 그늘에서 구월이 저녁밥이 준비되었다고 부를 때까지 연달아 
수없이 두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문안하는 저녁때면 나는 자주 용마에게 끌려갔다. 우리는 종종 
학생 권유 운동을 하러 다녔고, 이따금 상점을 구경하기 위해서 시내를 산책했다. 
우리는 한길을 통해 동문까지 산보하였고 거기서 일본 상점을 구경하곤 했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옛적부터 '왜놈'이라고 불렀고, 별로 윤리적인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이 일본에 관해서는 그다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용마는, 일본은 이제 유럽 사람에게 많이 배워 유신을 했기 때문에 지금은 
문명국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 상인들은 유럽에서 온 많은 이상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이 과자며 남포, 석유, 인형 그 밖의 장난감들이었다. 상점 중에는 
많은 못이 박혀 있는 큰 널판지가 걸린 곳도 있었다. 사람들은 동전 한 닢으로 
경사지게 서 있는 판에 공을 굴려 내렸다. 공은 아래까지 내려가서는 숫자를 
가르켰다.
  최고의 상품은 괘종 시계였고, 그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외쳤다.
  "와서 도박하라. 내 괘종 시계를 가져가라. 아라, 아라, 아라! 내 시계를 
잃어버렸다."
  다른 상점에서는 자전거를 팔며 세를 내어주었다. 용마는 여기서 가장 오래 
머물며 바퀴를 유심히 살폈다. 용마는 이것이야말로 이처럼 이상하게 생겼으니 
유럽에서 온 것일 거라고 말했다.
  "나도 한번 타 볼까?"
  다른 아이들은 한참 동안 구경을 한 뒤에 나에게 물었다.
  "그건 별로 점잖지 않다."
  나는 이상한 장난감이 정말로 유럽에서 온 것인지 똑똑히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그래도 선비집 아들이 아니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또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는 그걸 단념하였다.
  모든 상점은 밤에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파는 사람들은 제각기 그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국 사람과는 달리 그들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 검은 옷감에는 
단순한 선이나 점으로 눈같이 희게 무늬가 져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등에 큰 
글자까지 달고 있었고, 그것은 기막히게도 조잡해 보였다. 아무도 고상한 흰옷을 
입지 않았고 게다가 신도 신지 않았다.   
  모두가 물건을 팔고 있고 마치 전부가 종인 것처럼 가마도 타지 않고 걸어다녔다. 
이들은 모두 하층 계급 출신이거나 또는 너무도 가난하여서 자기의 부인을 접대부와 
같이 거리로 내보내야만 하는지도 몰랐다. 나는 이 사람들의 고향이나 그들의 마을, 
도회지에 관계되는 아무런 사진도 보지 못해다. 용마도 거기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다만 그는, 일본은 이제 개화하여서 많은 기차와 기선을 가지고 있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여섯개의 문명국이 있다고들 주장해."
  그는 언제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이야. 일본은 물론 다른 나라 흉내를 
냈기 때문에 꼬리를 붙은 거야."
  "우리 나라는 어디에 속하니?"
  "아직 문명국이 되려면 멀었어!"
  그는 힘없이 말했다. 
  "우리는 아직 기차가 적기 때문에."
  "중국은?"
  나는 다시 물었다.
  "중국 사람들은 너무 보수적인 것처럼 보여."
  그는 오랜 침묵 후에 이야기했다.
  "비 장수 유가더로 '상투는 구식이니까 그런건 깍아 버려라'했더니 날 지독히 
욕하는 것이 아니겠니. 굉장히 성히 나서, 내가 달아나지 않았던들 반드이 뺨을 
맞았을 거야. 남산 뒤에 있는 야채 장수도 아주 구식이거든. 나는 그에게 내 
교과서를 한번 보였줬지. 그가 뭘 아는지 보기 위해서였어. 그는 웃으면서 손을 
저었어. 그리고는 담뱃대를 가지고 '유럽은 오랑케 나라다. 거기에는 공자적인 
윤리가 없다'는 글을 땅에 썼어."
  '보수적'이란 말은 별로 아름답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게 '바보' 또는 '완고'를 
뜻하는 것으로 알았다. 중국인이 참으로 고루하다면 그건 정말로 유감이었다. 
나에게는 중국이 아름답고 부드럽고 훌륭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양자강'이나 
'동정호', '서주' 또는 '황주'란 말의 음을 듣거나 또는 '소동파'나 '도연명'의 시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내 앞에는 황홀한 세계가 전계되었다.
  셋째누나와 어진이도 수많은 중국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또 
느끼곤 했다. 그들은 비록 양자강 계곡의 노을이나 달빛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면서도 저 훌륭한 중국을 어느 곳마다 좋아했고, 그들이 자주 '동방의 작은 
나라'라고 경멸적으로 부르는 자기 나라보다도 더 사랑하였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나는 묘하고도 아름다운 저녁을 보냈다. 나는 저녁 식사 
후에 기섭과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두 아이한테 끌려갔다. 그들은 나와 함께 곧 
학교로 가야 한다고 했다. 오늘은 왕이나 왕비 혹은 귀인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시가 행진을 해야만 했다.
  학교에 이르렀을 때, 나는 2백여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교정에 집합해 있는 것을 
보았다.
  체조 선생이 와서 키 순으로 넉 줄을 지으라고 했다. 용마는 제일 컸기 때문에 맨 
앞에, 나는 반대로 대열의 거의 끝에 기섭과 같이 서 있었다.
  우리들은 질서 정연하게 행진함으로써 온 읍 사람들과 다른 학교의 학생들을 
놀라게 하라는 주의를 받았다. 
  점점 어두워졌다. 학생마다 촛불과 초롱을 밝혀 들고 교정을 출발했다. 우리는 
북과 나팔 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행진하였고, 애국의 노래를 부르면서 종로로 
걸어나갔다. 남쪽과 동쪽에서 똑같이 노래하며 초롱을 든 학생들의 대열이 행진해 
왔다. 그들은 이 여름에 설립된 조그마한 학교의 학생들이었다. 기섭의 말로는 
하나는 기독교 선교사가 설립했다고 했다.
  이 새 학교가 합류하여 우리는 종행으로 시내를 행진하였고 마지막으로 '삼문'을 
통하여 목사관에 도착했다. 목사관의 넓은 마당은 빛의 바다처럼 환히 빛났다. 
나에게는 무척 장엄하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이곳에는 많은 축제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옆문에서 조그만 마당까지 밖에 들어가지 못했다. 여기서 나는 다른 마당의 
불놀이를 구경했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다. 이제 다시 대열은 움직여 큼직한 
삼문을 지나 많은 집들을 거쳐 연정의 마당에 도착하였고, 거기엔 목사가 직접 
나와서 맞아들였다.
  우리는 우리 왕실의 문장인 오얏꽃 모양으로 된 큰 연못 주위에 서 있었다. 
  숱한 초롱불이 물에 비쳤다. 그러자 우리 지방의 가장 높은 사람이 정자 앞에 
나타났다. 지방 장관은 우리들이 새로운 시대를 이해한 현명한 견해를 칭찬해 
주었다. "우리 조국은 비록 조그마한 나라이나 우리 선조는 높은 문화를 가졌으며 
그것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이 선두에 서서 우리나라를 
개혁하는 데 도와 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기에 우리는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동쪽의 이 나라처럼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기쁘게 우리의 조국과 왕을 위해서 만세를 불렀다. 
  끝으로 우리들은 모두 새 문화에의 인식에 대한 상으로서 한 묶음의 연필과 두 
권의 공책을 받았다.
  우리는 만족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오늘 저녁의 일들이 매우 기쁘고 
즐거웠다. 우리가 조그마한 민족이며, 조그마한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현명함이다. 저 크나큰 중국은 일찍이 
우리의 선조가 그렇게도 현명하였기 때문에 '소화'라고 불렀던 것이다. 일본에 
글이며 철학, 종교, 건축 기술 기타 무엇이든지 보내준 것이 우리가 아니고 그 
누구였던가! 새로운 문화에는 우리가 일본에 약간 뒤떨어졌으나 그건 상관 할 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목사가 이야기한 것처럼 현명하다. 그것은 나에게 상당히 
엄숙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가을도 가고 겨울이 와서

  가을에는 학과가 더 오래 걸렸다. 새로이 지리와 세계사를 배우게 되었는데, 
교과서가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칠판에 쓴것을 받아 적어야만 했다. 그랬기때문에 
교문을 나올 때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서 어둑어둑하고 바람은 매우 차가웠다. 
  어느 날인지 저녁 무렵 구월이 나를 마중 나왔다. "오늘은 혼자 거리를 나다니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마중 보냈다"고 구월은 말했다. 거리에는 많은 일본 
병정들이 돌아다녔고, 그들은 민가에까지 침입하기도 했다.
  나는 일본 사람들이 적으로가 아니라 우리를 도와 주러 온 친우로 와 있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지만 무척 불안해졌다. 나는 일본 병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겁이 나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우리는 집으로 빨리 갔다
  "아버지는 뭐라고 하시던?"
  "곧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하셨어."
  "순옥은 뭐라고 하던?"
  "이젠 세상이 끝장이 난다고 했어?"
  우리는 바삐 서둘렀다. 큰거리는 보통 때보다 어두웠고 길에는 그 많던 과일 장수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평상시 같으면 남폿불 아래서 늦수박이며, 호박, 배, 
종종 떡까지 팔았었는데. 또한 남문은 어두운 밤하늘에 외로이 우뚝 서 
있었고 언제나 그렇게 거세게 떠들어대던 엿장수도 오늘은 온데 간데 없었다.
  우리가 집에 도착하자 식구들은 그날 사건에 관해 흥분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거리나 골목마다 병정들이 나다녔고 많은 집들이 가택 수색을 받았다. 
순옥은 큰길에 있는 국숫집에 3 명의 병정들이 들이 닥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무엇을 찾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누구도 그 곁에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읍에 어떤 불길한 일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짐작했다. 어른들은 이날 밤늦도록 
의논했다.
  어머니는 성숙한 어진과 가장 어린 나를 안전한 곳에 보내야겠다고 제안했다. 
가택 수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아버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날 아무런 동기도 없으며, 병정들도 무고한 사람들에게는 나쁜 짓을 할 리가 
없을 뿐더러, 우리가 반항해서는 안 되며, 무엇을 가져가든지 내버려 두라는 
것이었다. 어떠한 까닭이 있어 우리의 임금이 스스로 보냈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하였다.
  이날 쉽게 진정되지 않았던 어머니는 오랫 동안 주저한 끝에 결국 내가 집을 
떠나서는 안된다고 결심하고는 이날 밤에는 안 채의 골방에서 자도록 하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의 말에 순순히 따랐고 아버지는 나를 진정시켜 주었지만 나는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이튿날, 오후쯤 되어 무기를 가진 4 명의 병정이 우리 집에 와서는 온 뜰안을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호기심에 차서는 모든 방이며 다락, 창고 할 것 없이 모두 
뒤졌고,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귀찮게 굴지는 않았고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온 식구들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고, 나는 또 학교에 갈 수가 
있었다. 병정들의 눈초리 때문에 이 마당 저 마당으로 피해 달아나야 했던 어진이 
누나만이 오랫 동안 마음이 산란했던 것이다.
  가택 수색은 번번이 반복되었고 거의 매일 같이, 어떤 때는 하루에도 두번씩이나 
되풀이 되었다. 병정들은 이른 아침녁에 자주 나타났고, 또 저녁때에 갑자기 안채에 
들이닥쳐 부인들을 놀라 달아나게 했다. 
  때를 같이해서 언짢은 소문도 떠돌았다. 농부며 사냥꾼들, 그 밖의 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새 세상과 화합하려 하지 않고 일본인들을 침략자라 하여, 가까운 산에 
모여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읍에 무기가 저장되어 있다며 연달아 가택 
수색을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처음에 그것을 다만 뜬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단코 소문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언제나 일본 병정들이 중무장을 하고 북문이며 서문으로 
행진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군가를 부르면서 전장에서 시내로 돌아왔다. 
나중에는 포로를 끌고 왔다. 그것은 무서운 광경이었다. 피가 나게 얻어 맞고 
무거운 수갑이 채인 채 끌려가는 사람들을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부르르 가슴이 떨리는 듯하였다. 두려움에 질려 식은 땀이 온몸에 베어 흘러 내렸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계속 열이 나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다시금 나를 잠잠한 어느 시골로 보낼 것을 제안했다. 나는 몹시 약하기 
때문에 그러한 광경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오랫 동안 의논했으나 끝내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종들과 마름을 우리 농지의 농부들에게 보냈다. 농부들이 일본인에게 그런 바보짓을 
하지 못하게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행진하는 군대는 절대로 보지 
못하게 했다. 교양이 없는 아이만이 그들 얼굴을 보려는 호기심이 많다고 했다. 
전쟁은 더욱 더 잦았고 심해져만 갔다. 온 겨울과 봄을 통하여 포로들이 거리로 
끌려왔다. 자주 부인들도 섞여 있었다.
  여름이 되어 장마철로 접어들자 거리는 오랜만에 조용해졌고 가택 수색은 완전히 
중지되었다. 비는 여러 날째 계속되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요히 내리고 또 내렸다. 
  어느 날 저녁, 기섭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창백하고 여위어 보였다.
  "넌 들은 적 있니?"
  "아니, 무엇 말인데?"
  그는 잠시 잠잠했다.
  "나는 우리들이 사기당했다고 믿어."
  그는 말을 계속했다. 
  "우리 나라는 강제로 합병당했어."
  "일본에게?"
  "물론 일본이지."
  "너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니?"
  "만약 시간이 있으면 나중에 남문으로 가서 고시를 읽어봐. 그렇지만 조심해. 
거기는 병정들이 서 있어. 너는 욕하거나 고시를 찢어서는 안 돼."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구월을 데리고 남문으로 갔다. 거기에는 기섭이 말한 
대로 인쇄된 큰 종이가 붙어 있었고, 두 남폿불로 비춰지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광고판 가까이 가서는 옥새로 찍혀 진 것을 보았다.
  그것은 진짜 임금님의 글이었다. 그건 내 인생을 두고 최초로, 그리고 최후로 읽은 
임금님의 글이었다. 그것은 내게는 장엄하면서도 슬펐다. 5백여 년 동안 우리를 
보호하고 있었던 왕조의 작별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글을 다 읽었을때 
구월이 가까이 와서는 문루에서 내 손을 떼었다. 
  "뭐라고 적혀 있니?"
  구월은 그걸 읽을 수 없었다. 
  "임금님이 물러나셨어." 
  "영원히?"
  "응, 영원히."
  "왜 물러나셨니?"
  "난 모르겠어."
  집에 돌아와 나는 아버지에게 한 마디 한 마디 고시의 내용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잠자코 조심스럽게 들었다.
  "앞으로도 일이 더 악화될까요?"
  아버지는 묵묵하기만 했다. 
  온 집안 식구들은 모두 잠잠했다. 바깥채의 마름들이며 어머니, 누나도 모두 
침묵만을 지켰다. 밤이 퍽이나 깊었는데도 나의 양친과 순옥은 술잔을 앞에 두고 
모여 앉아서는 이 왕조의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계속해서 
학교에 다닐 것이며 세상사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그 해 가을에는 성벽과 성문이며 낡은 관청의 청사를 허물어 좁은 길을 넓히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상점은 부서져 있었고 파내어진 구들장은 집과 마당에 
지저분하게 나와 있었다. 옛길은 쓰레기 더미로 변하였기 때문에 학교로 가거나 
돌아오는 길에는 고생스럽게 길을 뚫고 나와야만 했다. 
  사람들은 낮이나 밤이나 미친 듯이 일했으며, 어디서든지 망치로 두들겨 치는 
소리가 들렸고 톱질을 하여 먼지가 가득히 날아다녔다. 또한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웃고 떠들거나 싸우고 치고 받았다. 
  나는 이런 혼잡함 속에서 빨리 빠져 나오고 싶어 성급히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닫고 나면 그제야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우리 바깥채도 이제는 불안하게 
되었다. 행상인이며 거지가 늘어 끊임없이 사람들이 왔다갔다했다. 
  쫓겨난 농사꾼들과 파면당한 벼슬아치, 피난민,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해매는 
방랑자들이 기숙하기를 원했다. 순옥은 그날 밤만을 대접하고 이들에게 다시 길을 
떠나게 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 집은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재산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다른 데로 가서 적선을 받는 게 나을 것"이라고 이르곤 했다. 그러나 
언제나 거지와 행랑인들로 객실은 웅성거렸고, 추운 겨울은 이렇게 하여 지나갔다. 
순옥은 집앞에 앉아서 욕지거리를 하며 저주했다. 
  "이 몹쓸 세상, 이 더러운 세상."
  그래도 샘채만은 조용했다. 여느 때보다 더욱 조용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수없이 많은 새 규칙과 세금에 관해, 점령군과 통역을 통해 매일같이 
흥정한 후에는 고단하여 이른 저녁부터 자리를 보았기 때문에 나와 오래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학교에 관해 이야기를 할라치면 잠시 귀를 기울였을 뿐 나도 
눕게 하고는 불을 끄라고 했다. 아버지는 자주 내 이야기를 가로채어 이렇게 
말하였다. 
  "이젠 충분하다. 잠깐 바람 쐬러 나갔다 오너라. 그리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내가 아버지에게 귀찮은 존재라는 것을 알아챈 나는 말없이 잠잠했다. 나는 
산보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파괴된 성벽이며 헐어버린 문간이 나로 하여금 밤에는 
형용할 수 없도록 슬픔에 젖게 했고 내 가슴에 큰 무서움을 가져왔던 것이다. 나는 
즐겨 집안에 머물러 있었다. 더욱이 아버지의 곁에 있을 때에는 어딘지 모르게 
아직도 아늑히 안겨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핏줄이었고 아버지의 품은 
나를 받아 들일 수 있을만큼 넉넉했다. 

  여름이 다시 돌아왔다. 어느 몹시 무더운 날 석양녘에 아버지는 나더러 옥계천에 
가서 시원하게 목욕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반가이 그러자고 했다. 
  옥계는 수많은 노목이 울창하게 뻗어 있는 조용한 계곡에 자리잡은 시내였다. 그 
나무 그늘은 내가 서당에 다녔을 때 많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보냈던 곳이었다. 
  구월은 술과 과일을 얹은 소반과 자리를 들고 앞장을 섰고, 나는 바둑판을 들고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거리를 빠져 나와 시내를 끼고 가는 낯익은 길로 
접어들어 골짜기를 지나 낡은 정자가 서 있는 산성까지 올라갔다. 
  구월은 우리들의 자리를 펴놓고는 돌아갔다. 내가 바둑판을 펴고 검은 돌로 열 
개의 선점을 놓고 있는 동안에 아버지는 주변을 구경했다.
  "여기는 이 풍상을 겪는 동안에도 변치 않았구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너는 이곳이 한 독자적인 세계라고 믿지 않느냐?"
  "네. 그렇고말고요, 아버지."
  여기는 사람의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다만 나무 그늘 속에 파묻혀 매미가 
자지러지게 울어댔고, 벽계수가 종알거리고 있었다. 푸른 그늘에는 고요가 깃들었고, 
간간이 맑은 산바람이 살랑살랑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아버지에게 술을 따랐다. 
  "천만 년을 누립소서."
  나는 기생의 말을 흉내 내어 말했다. 아버지는 그냥 웃었다.
  "너 시조를 읊으려고 해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한번 해보아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는 '부드러운 남쪽 바람'을 읊었다. 그것은 유명한 
기생들만이 부르는 어려운 원주가였다. 아는 아버지가 그렇게도 아름다운 옛 노래를 
읊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지만 나는 그걸 따라 읊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바둑판을 보았다. 
  "아직도 열 점이나 선점을?"
  아버지는 탐탁하지 않은 듯 물었다. 나는 주저하면서 두 갓 점을 다시 떼고 속 
담장만 내 돌로 놓아 두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두 점을 떼었다. 
  "네 늙은 아버지를 여섯 점 선점만으로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말하고는 첫번째 돌을 놓았다. 물론 나는 첫판은 졌다. 
  "그럼, 자 여덟 점으로."
  나는 또 졌다. 아버지는 나를 안됐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동안에 많이 잊어버렸군. 좋건 그르건 두 점 더 앞서야겠다."
  "그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나는 열 점을 놓고 계속해 두었다. 
  "바둑은 그만두자."
  내가 다시금 몹쓸 자리에 돌을 놓은 것을 본 아버지는 갑자기 말했다.
  "이젠 옷 벗고 물에 들어가거라."
  나는 아버지를 실망시켜서 섭섭했다.
  "범도 종종 개한테 물리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나는 아버지를 위안해 말했다. 
  "잘 알았다. 그럼 이리 와 한번 보여라. 내 앞에 꼿꼿이 서라. 아버지 앞에서는 
부끄러워할 것 없다."
  아버지는 나를 두루 살폈다. 
  "아주 말랐구나."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몇 살이더냐?"
  "열세 살."
  "그렇구나! 천천히 물에 들어가거라. 여기는 몹시 차다니 조심하거라."
  아버지는 술을 마시며 내가 무척 서투르게도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건너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버지도 물에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조심스레 크고 
넓은 돌 밑에 앉아서는 물이 어깨 위로 소리내며 흘러 가게 잠겼다. 그러나 일 분도 
채 못 되어 빨리 걸어나와서는 갑자기 모래 위에 쓰러졌다. 아버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추워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곧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점점 아버지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 겨우 몸을 일으켰다. 
  "어찌된 일입니까, 아버지!"
  "아무렇지도 않다. 내 옷을 가져오너라."
  우리는 옷을 입었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겁내지 마라. 나는 오래오래 살 것이야. 네가 고운 여자를 얻고 내가 손자 녀석을 
보게 될 때까지는 말이야."
  나에게는 세상의 어떤 기쁨도 사라졌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시죠."
  "아니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봐라! 나는 다시 좋아지지 않았느냐. 잠시 이곳에서 자연을 즐겨보자."
  아버지는 바야흐로 낙조가 비친 산을 바라보았다. 산정은 이미 그늘 속에 잠겼고, 
계곡에서는 찬바람이 불어왔다. 
  "한번 더 바둑을 두어보겠느냐?"
  "싫습니다. 제발 집으로 돌아가요."
  마침 그때 구월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 시내에서는 땅의 힘이 꺾이지 않고 솟아오른다."
  아버지는 걸으면서 말하였다. 
  "다시 여기서 목욕할 때는 조심하거라."
  얼마 후에 우리는 집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문지방을 들어서자마자 또 
한번 의식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집안 사람들은 아버지를 부축하여 안방으로 
모셨다. 나는 밤새도록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다녔으나 소용없었다. 자정이 지난 
뒤에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의 곁에 앉아 아버지의 손을 쥐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간절히 빌기 시작했다. 
  구월이 기다란 흰 베로 아버지의 침소에서 문지방까지 영혼의 길을 준비할 동안 
온 집안 사람들은 모두 기도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상복을 입고

  어진이 누나는 조용해졌다. 누나는 이전처럼 자주 떠들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별세가 누나를 변하게 한 것처럼 보였다. 아무 말 없이 안채에서 일만 하였고, 
그전에 어머니가 남자 근처에는 가지 말라고 권고했음에도 줄곧 사랑채에 드나들던 
그 누나가 이제는 거의 아버지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가 가을에는 자주 
출행하였고, 어머니가 출행하면 어진이 누나가 모든 것을 어머니 대신 했기 때문에 
그때에만 저녁 늦게야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한지 내 방에 들렀다. 누나는 내가 
그리고 쓰는 그림의 뜻도 묻지 않았고, 잘못된 글씨를 나무라지도 않으며 잠시 동안 
보고만 있었다. 
  "빨리 자거라."
  그리고는 부드러운 말씨로 말했다. 
  "어머니가 그러라고 하셨지 않니!"
  나는 한밤중에까지 자주 책을 읽었다. 학과는 전보다 훨씬 어려워졌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게 했다. 모든 교과서가 일본말로 바꾸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말을 
배워야만 했다. 또한 우리들은 역사를 다시 배워야만 했다. 한국의 독립 시대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깎아 없애버렸던 것이다. 한국 민족은 이제부터 독자적인 
역사를 지닌 민족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다만 오래 전부터 일본 제국에 공물을 
바치는 변경(가장자리 변, 곳 경) 민족으로 여겨졌을 뿐이었다.  
  우리는 다른 과목, 예컨대 지리와 물리 같은 과목도 배우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많은 개념이며 표현이 교재의 지시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일본말에 역점을 
두기 위하여 이러한 학과의 교육은 아주 단축되었고 나중에는 이 학과를 위한 
시간조차 없었다. 선생들은 상세히 설명도 하지 않고 교재만 한번 훑어 읽고는 
말았다. 다른 모든 것은 학생들이 알아서 해야 했다. 
  나의 학우들 가운데서는 기섭이 나와 약간 잡담을 하며, 나의 학과를 도와 주기 
위하여 자주 나에게로 왔다. 그는 자주 아파서 몇 주일 동안이나 학교를 쉬었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나 우리 반에서 가장 으뜸 가는 학생에 속했다. 또 언제나 나의 
수학 공부를 도와 주려고 하였다. 내 옆에 앉아서 내가 어떻게 문제를 푸는지도 
봐주었다. 내가 문제를 잘못 풀면 그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것을 고쳐 주었다.
  용마는 매일 저녁 우리 집에 왔으나 언제나 잠시만 머물렀고, 내게 학교에서 배운 
것 가운데서 모르는게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들 중에서 가장 영리했고 가장 
경험이 많았으며, 또 일본 말을 잘 했기 때문에 나를 가장 잘 도와 줄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질문에 정확하고, 그리고 분명하게 명확한 대답을 하였으며, 다른 
친구들을 도와야 했고 자기 공부도 하기 위해서는 곧바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일년 전부터 학급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서 나와 친하게 지냈던 민수도 역시 
우리와 함께 모여 놀았다. 그는 잡담을 잘했고, 자주 자기의 소풍에 관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또한 이상스런 고목이며 개울에 있는 아름다운 헤엄터, 그가 처음 찾아낸 
고을 주변의 절, 탑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곤 하였다. 그는 물리에 관한 지식을 
나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배우기 때문에 나에게 무척 도움이 되었다.
  이런 많은 동무들의 조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따라가기 위해서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것은 다만 내가 서당에 오래 다녔기 
때문에 새 학문을 배우는 데 아직 익숙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나는 많은 것을 이해해 낼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원자며 이온, 에너지 
등과 같은 개념은 도무지 명백하지가 않았다. 거기에 또 나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주는 대수학이 있었다. 나는 방정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고, 대수학이 
무엇인가를 알 도리가 없었다. 만수와 기섭도 그것에 관한 설명을 할 수 없었고, 
영리한 용마까지도 이런 대수학이 나중에 고등 물리학 연구에 적용될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한밤중까지 홀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밤늦도록 책을 펴들고 잠과 싸우는 것을 본 어머니는, 나에게로 와서 연필을 
빼앗고 책과 공책을 치우고 어서 자라고 하였다. 내가 조금만 더 공부해야겠다고 
말할라치면, "그럴 필요 없어, 내말을 들어라." 어머니는 간단히 대답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밤, 어머니는 내게 이부자리에 든 뒤에는 한참 동안 내 곁에 앉아 
있었다.
  "무슨 공부가 제일 어려우니?"
  어머니가 물었다.
  "전부가 다."
  나는 중얼거렸다. 
  "수학, 물리, 화학. 난 모든 것을 잘 알 수가 없어요."
  "슬퍼해서는 안 돼!"
  어머니는 한참만에 말했다.
  "네가 이 학교에서 충분히 재주가 없더라도 괜찮아! 우리들에게 그렇게까지 
서투른 문화는 맞지 않는거다. 지난 일을 생각해 보아라. 너는 얼마나 쉽게 
고전이며 시를 배웠었니! 넌 총명했단다. 너를 괴롭히는 새 학교에서 나오너라. 
그리고 올 가을에는 송림촌으로 가거라. 휴양하러 말이다. 그곳은 제일 작은 
땅이지만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농토다. 밤이며 감이며 많이 있다. 거기 가서 푹 
쉬어라. 우리 일꾼들과 그들의 일을 익혀라. 한적한 마을에서는 네가 이 불안스런 
읍에서 보다 훨씬 더 잘 자랄 거야. 너는 옛 시대의 아이다."
  그건 나를 슬프게 했다. 나는 언제나 새 학문에 대한 재능이 없을까 
두려워했었다. 아버지가 이끌어준 이것만이 우리에게 더 높은 문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제 내가 4 년간의 열중했던 공부를 재능이 없다고해서 
집어치우고 퇴학을 해야하는 것은 나를 아주 슬프게 만들었다.
  "너는 그렇게 할 테냐?"
  내가 잠자코 있는 동안 어머니가 물었다.
  "물론 어머니가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나는 맥빠진 대답을 하였다.
  "아이구, 기특한 내 자식아."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고는 빙문을 나섰다. 
    외로운 포구 송림 마을

  송림 마을은 멀리 떨어진 외딴 포구에 있었고, 그 대안의 입구에는 굴 바위가 
앞에 놓여 있었다.
  포구를 따라 숨겨질 듯 나타날 듯 20여 호의 초가 지붕의 농가들이 해변을 따라 
뻗어 있었다. 낮이면 마을은 텅 빈 것 같았다. 남정네며 아낙네들이 다 언덕 너머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밭 저 밭을 다니며 사람들이 곡식을 베고는 
단으로 낟가리를 해서 수레를 끌고 집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저녁에 나는 농감의(농감: 농사 농, 살필 감) 사랑방인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주 
초라하고 흙벽으로 된 방이었다. 구석에는 생나무로 짜놓은 나직한 책상이 놓여 
있었다. 
  마을에서는 잠시 동안 조용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소는 어느 곳에서나 우물거렸고, 
어머니들은 갯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밥 먹으라고 불러들었다. 그리고 온 
마을에 꿈같은 고요가 흘렀다.
  농가의 주인만이 잠깐 동안 내 방에 와서 나와 이야기했다. 그는 나에게 제일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서 쉬라고 했다.
  그는 화롯불가에 앉아서 새끼를 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가을에 초가집 이엉을 
새로 하는데 필요한 것이라 했다. 두툼한 기름불 종지에는 맑은 식물기름이 담겨 
있고 심지가 아주 가느다란 불꽃을 밝혀 올렸다. 단조로운 짚소리와 따스한 
방바닥의 온기가 나를 어느새 잠들게 하였다. 
  내가 눈을 떴을 때에는 거의 불이 다 꺼졌고 돌다리 아저씨^56,36^내가 그렇게 
불렀던^36,23^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집과 온 마을은 죽은 듯이 괴괴했고, 다만 해안을 스쳐 가고 스쳐 오는 밤 바다의 
물결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별다른 농사일이 없는 날이면 나는 구경을 그만두고 낚시질을 나갔다. 나는 자주 
고기를 낚았다. 그것은 단순한 밭일에 대한 즐거운 기분 전환이었다. 나는 바구니와 
낚싯대를 들고 해안을 따라 포구의 입구까지 가서 바닷물이 썰물일 때에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굴 바위로 갔다. 나는 그 바위에 앉아서 밀물이 거리낌없이 다가올 
때까지 낚시질을 할 수 있었다. 아저씨는 밀물에 휩쓸리지 않게 어느 때 바위에서 
내려와야 되는지 자세히 일러주었다. 
  거기서 나는 홀로 온종일 낚시질을 했다. 거의 공미리라는 생선이 물렸다. 
손가락만큼 굵었으나 별로 맛은 없었다. 이따금 나는 더 좋은 생선을 잡을 수도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제일로 치는 도미는 가을 내내 한마리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매일 같이 쉴 때는 그곳 바위 위에 끈기 있게 앉아 있었다. 생선 
때문만은 아니라 내가 그렇게도 즐겼던 바다의 먼 조망 때문이었다.
  여기는 좁은 만 밖에 있었고, 내 앞에는 무한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어스푸레하게 바다와 하늘이 멀리 수평선에서 서로 닿아 있었다. 서녁에는 가을의 
맑은 공기 속에 바위가 많은 연평도가 자리 잡고 있었고, 북쪽으로는 멀리 가느다란 
사안이(사안: 모래언덕) 낮은 언덕을 둘러싸고 있었다. 멀리 어느 곳에서도 배 한 척 
볼 수 없었다. 다만 찬 바람만이 젖은 굴 바위를 간간이 스치고 지나갔다. 
  집집마다 낚시 도구가 놓여 있었지만, 농부들은 낚시를 하지 않고 어망으로만 
생선을 잡았다. 그들은 만 밖에서 소위 '큰소'라고 부르는 근처에 어망을 쳤다. 그 
어획물은 조그마한 공미리가 아니고 가자미와 넙치, 준치 또는 길고긴 갈치, 그런 큰 
생선들이었다. 나는 어떻게 그물을 치며 또 어떻게 고기를 잡는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는 그물을 치러 가자는 권고에 거절하지 않고 즐겨 따라 나섰다. 
마을 사람들은 밤의 썰물이 일 때를 골랐기 때문에 내 기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밤에 제일 좋은 고기가 그물에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달이 없었기 때문에 모래밭은 몹시 어두웠다. 자주 건너야 하는 얕은 물은 살을 
에는 듯이 차가웠다. 한없이 맑은 하늘에서 고요히 내리비치는 별빛으로 하여 
해상은 밝아졌다.
  나는 미역이며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게를 아직도 어둠침침한 주변에서 알아낼 수 
있었다. 물결은 이 시각에 넓은 바다로 흘러 가고 있었다. 우리는 많은 좁고 깊은 
곳을 건넜다. 한참 동안 건넌 뒤에야 마치 거센 물결이 솟아내리는 강물과 같은 
'큰소'에 도달하였다. 우리는 그물을 그곳에 대고 병풍 치듯 말발굽 모양으로 쳤다. 
그러자 곧 여기저기에서 큰 팔뚝만한 생선들이 그물을 뛰어넘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조수가 얕아지면 얕아질수록 강하게 걸려 든 생선들은 숙명에서 벗어나려고 
거칠게 퍼덕거리며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끝내는 모두가 물 없는 바닥에 깔려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은빛으로 빛났다.
  우리는 서둘러서 생선을 바구니에 담아 귀로에 올랐다. 사면은 깊은 정적이 흘러 
넘쳤다. 물결소리, 파도소리가 멀리 밀려 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고요한 
사람들의 지껄임만을 들었다. 아마 그들도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속삭인다고 
생각되었다. 그와 같이 밤은 아름답고 고요했다.
  좋은 날씨가 연달아 계속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곡식을 
타작하였다. 콩과 팥, 메밀, 무 그리고 끝판으로 벼를 거둬들였다. 곡식은 키에 
까불러 깨끗해졌고 스무 말씩 가마니에 퍼 담았다. 그리하여 이집 주인은 나를 이집 
저집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일의 과정을 들려주었다. 
  돌다리 아저씨는 내가 그 마을에 외로움을 느끼지않도록 무척 애를 썼다. 
저녁때에 내가 아무 할일이 없으면 책을 방에 넣어주곤 했다. 그것은 오래된 한 
권의 시집과 일화집과 두 권의 두툼한 소설책이었다. 이 모든 책들은 짙은 갈색으로 
기름칠한 종이가 너무 이지러져 침침한 불빛 아래서는 그 깨알같은 작은 글씨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여기서 산다는 것이 너에겐 퍽 심심할 것이다."
  어느 농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지금까지 도회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생각해 봐라, 
세상이 어지러울 때 은퇴하여 시골에 온 많은 선비들도 있지 않았느냐? 그들은 밤에 
붓을 들기 위해서 낮에는 호미를 쥐었다. 그들처럼 너도 몹쓸 세상이 좋아질 때까지 
이 고요한 속에서 지내라."
  새 왕조가 이룩되기만 하면 다시 좋은 세상이 돌아 올 것이라고 모든 농군들은 
믿고 있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 민족의 보다 더 화려한 
앞날을 상상할 수가 없었지만 굳이 반대는 안했다. 더욱이 내가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그분들에게 반대한다는 것은 불손하게 여겨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주의 가정과 소작인의 가정을 한집안으로 삼고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좋은 풍습이었다. 나는 즐겨 그렇게 불렀고, 수많은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소위 택호를 붙였다. 그래서 한 사람은 '웃골 아저씨', 그 부인은 
'웃골 아주머니', 또 '뒷섬 아저씨', '뒷섬 아주머니'라는 식으로 불렀다. 소작인 
농군들은 으레 나를 '도회지에서 온 조카'라고 했고 진짜 조카처럼 친절히 대접해 
주었다. 
  나이 많은 농부는 말했다. 
  "이 습관은 참 좋다. 그럼으로써 지주와 소작인들이 진정으로 맺어지는 것이다."
  모두가 큰 일가를 이루었고, 지주의 집안은 큰집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유족할 수 있었다. 
  가을이 가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낮이나 밤이나 탐스러운 흰 눈이 소복이 
내렸다. 포구 위에, 밭 위에, 길 위에, 쉬지 않고 휘날렸다. 가을 일은 끝나고 곳간은 
감사기도 후에 자물쇠로 잠겼다. 
  지붕은 새 짚으로 이었고 창문은 새 종이로 발랐다. 농군은 따뜻한 방에 앉아서 
손일을 하고 있었다. 새끼를 꼬며 자리를 짜고 그물을 깁고 나막신을 만들었다. 
아낙네들은 서당의 훈장에게 갔다. 시골의 훈장도 또한 농부였다. 그는 쓰고 읽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겨울에만 아이들을 모았다. 
  저녁에는 여기저기 농군들이 일감을 가지고 한곳에 모여들었다. 거기서 그들은 
허튼 소리를 하거나 번갈아 가며 읽는 소설을 들었다. 그 소설의 내용은 대부분 
주인공이 죄없이 구박받는 구식 소설이었다. 
  남의 모함을 받고 쫓겨난 주인공은 고향을 떠나야 했고 마침내 이곳 저곳으로 
방황하며 굶주림과 추위에 고생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엔 현명한 은자를 찾아가 
그의 도움을 받게 된다. 나중에 이 주인공은 자기도 현자가 되어 임금에게 초빙되고 
높은 세도가가 되는 것이다. 그는 총명하고 아름다은 여자와 결혼하여 다시금 
고향에 돌아와 다른 모든 사람의 부러움 속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모든 소설은 
그렇게 시작해서 그렇게 끝났다. 
  그렇지만 농군들은 그러한 소설을 언제나 또다시 되풀이하여 읽곤 하였다. 
그때마다 착하고 죄없는 사람에게 내려지는 불행에 흥분했다. 그들은 소설을 아주 
엄숙하고 신중히 읽었다. 구절과 내용에 따라 어느 때는 높게, 어느 때는 낮게 또는 
슬프고 명랑하게 노래하듯이 읽었다. 밤이 조용해지면 조용할수록 이 낭독은 더 
감정적으로 되어 멀리서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얼마나 어려운 상태에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자주 그런 집 앞에 서 있었다. 
  소설의 줄거리가 어떻게 되는지를 듣는 것이 아니고^56,36^나에게, 우리 나라에 
평화가 깃들었고 근심 없던 소년시절을 회상시키는^36,23^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유럽에의 꿈을

  겨울 동안에 나는 옛날의 학교 시절을 그리고 학교의 동무들이 나에게 이야기해 
준 신세계 유럽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내가 어렸을 적에 모았던 
그림들을 다시 펼쳐보았다. 그것은 너무나 높았기 때문에 땅의 영역에 속하기보다는 
하늘의 영역에 속했던, 훌륭했던 집들과 성들이었다. 
  내가 눈보라를 무릅쓰고 포구를 따라 거닐면 먼 서쪽의 이 건물들을 연상할 수 
있었고, 키가 크고 즐거워 보이는 금발의 외인들이 거기에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지상의 근심을 몰랐고 생존 경쟁의 쓰라림을 몰랐다. 
  그들은 자연과 우주에 관해서만 연구하였고 현자의 길만을 걸었다. 새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참다운 교양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곳에서만 공부를 하여야 할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스스로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모든 것을 경험하며, 모든 학문을 
연구해 낸 학자에게서 직접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이 경이의 세계에 
관해서 들은 많은 아름다운 전기며 일화가 다시금 생생해졌고, 내가 어떻게 하면 
그곳에 다다를 수 있을까 궁리하게 되었다. 
  이제는 눈이 더 오지 않았다. 포구의 얼음장도 풀렸고 날씨도 서서히 따뜻해졌다. 
  어느 날씨 좋은 3월의 오후, 나는 이틀 동안이나 걸어서 가야 하는 신막 시장으로 
길을 떠났다. 이 시장을 통해서 기차가 간다고 했다. 내가 차를 탄다면 우리 나라의 
북쪽 국경을 통과할 것이고, 거기서 다시금 서쪽으로 침투할 기회가 생길 것이며 
결국에는 유럽에 도달할 것이다. 그것이 우선 내가 아는 전부였다. 기차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타는 것인지, 외국에서는 무슨 말로 이야기해야 하며 유럽에서도 
돈이 사용되는지 그 모든 것을 나는 몰랐다.  
  나는 그날 오후와 온 밤을 걸었다. 길은 달빛 때문에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튿날도 하루 종일 걸어야 했다. 저녁때에야 멀리 시장이 보임을 알았다. 
나는 이미 멀리서도 그곳이 우리 고향 도시와는 다른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거기는 
잡음과 교통의 양이 휠씬 더 많았다. 소리 지르며 종을 흔들고 뿡뿡거리며 인력거, 
자동차, 오토바이가 넘쳐 흐르는 인파 속을 지나갔다. 큰길에는 거의 일본인들만이 
살았고 어디에서나 게다 소리를 들었다. 
  나는 기를 쓰고 좁은 거리의 인파를 뚫어 정거장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거기에서 
만주행 기차가 내일 아침 일찍 여기를 지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모든 것이 
생소했기 때문에 내일 아침 실수가 없도록하기 위해 정거장 건물이며 플랫폼, 
출입구를 자세히 보아두었다. 오랫 동안 헤맨 끝에 그 고을의 바깥 끝에서 조그마한 
주막을 발견하였다. 나는 난생 처음 여관에서 그날 밤을 지새웠다. 
  저녁밥을 먹은 후, 나는 다음날 아침 늦지 않기 위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지난 밤을 쉬지 않고 걸어온 나는 무척 고단했다. 
  그러나 그렇게 고단했으면서도 편하게 잠이 들지는 못했다. 다리는 아리고 쑤셨고,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나의 눈앞에는 어머니의 환상이 어른거렸다. 나는 어머니를 
위하여, 쓸데없이 나를 찾지 않도록 책상 위에 짧은 작별의 편지를 남겨놓았었다. 
나는 어머니가 아직도 어리고 철이 없다 하여 떠나 보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 편지를 써 놓았다는 생각이 나를 안정시켰으며 어머니 
생각을 별로 하지 않게 했다. 
  그런데 잠이 설든 나는 정말 내 눈앞에 어머니가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가운데 나는 마침내 잠이 들었고, 또 깨었다간 잠들고 다시 깨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또 어머니가 내 편지를 앞에 두고 슬프게 말없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한번은 어머니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그 전에 며칠 동안 
송림에 와서 그랬듯이 미소를 짓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하룻밤이 지났다. 
  나는 나의 소년 시절을 꿈꾸었다. 우리 집 뒷마당의 짚방석에 앉아서 어머니가 
물들인 비단 수건을 나는 바라보았다. 해가 마당을 따뜻하게 비쳤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이 몹시 즐거웠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로 달려가 뒤에서 꽉 껴안고 
소리쳤다. 
  "어머니!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맞혀 보세요."
  어머니는 비단 수건을 널어놓고는 뒤돌아서서 나를 높이 치켜들었다. 
  "응, 이게 누구냐?"
  어머니는 웃었다. 
  "응, 이게 누구냐. 내 금지 옥엽아. 너는 위대한 시인이 되려니? 훌륭한 화가나 
높은 영웅이, 아니면 우리 고을 목사가 되려니?"
  새벽에 나는 어머니가 몹시 우는 것을 보았다. 내 머리는 어머니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몹시 놀라서 속삭였다. 
  "아니, 어머님! 나는 떠나지 않으렵니다."
  나는 어머니가 그러한 때를 꼭 한 번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의 장사 후에 높은 
산에서 내려와 묘지기의 집 앞 천막에서 밤을 새울 때였다. 
  나는 다시 잠이 깨었다. 몸에는 열이 있는 것 같았고 떨렸다. 
  밖은 어두컴컴했고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흰 칠로 단장된 조그마한 정거장 
대합실은 휜하게 전등불이 켜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글거렸고, 대부분이 일본 
군인들과 부인들이었다. 그들은 우두커니 서 있거나, 서로 작별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을 서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했다. 자꾸만 사람들이 몰려들어 걷고 움직이기가 
곤란해졌다. 
  마침내 조그마한 창구가 열려 차표를 팔기 시작했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직무에 따라 입구에 서 있었다. 사복과 게다를 신은 사람들도 거기에 끼여 있었다. 
나는 마지막 줄에 서서 내 차례가 돌아오자 만주의 수도에 가는 차표를 샀다. 
  플랫폼 위에는 여명이 스쳤다. 바람이 얼음처럼 차갑게 불었다. 마침내 기차가 
천둥치는 듯한 소리를 내며 연기를 뿜고 왔다. 손님들은 찻간에 뛰어올랐다. 기차는 
'꽤엑'하는 기적 소리를 울리며 곧 떠나 버렸다. 나는 플랫폼에 그냥 서 있었다. 
  한 철도 역원이 나에게 가까이 와서는 왜 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내가 잠자코 
있자 그는 내 차표를 보았다. 
  "심양까지?"
  그는 놀라 소리를 지르고 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나를 사무실로 
데리고 가다니 자기 동료에게 이 뜻밖의 사실을 이야기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역원 하나가 의아스럽다는 듯 바라보더니 내 이름과 나이와 
직업을 물었다. 
  "너의 부모들이 네가 혼자 심양에 가는 것을 허락했니?"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는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래, 너는 만주에 가서 무엇을 하려고 했니?"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계속해서 유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는 오랫 동안 내 얼굴을 지켜보았다.  
  "아하! 너는 그렇게 멀리 여행하려고 했니? 그럼 여권은 가지고 있니?"
  "안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건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래, 그래, 짐은?"
  "없습니다."
  "영어나 독일어, 프랑스어를 할 줄 아니?"
  "아직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럼 돈은 얼마나 가지고 있니? 어디 내놓아봐."
  나는 내 돈 전부를 책상 위에 내놓았다. 그는 그것을 잠시 흘겨보더니 웃었다. 
  "그래, 넌 짐도 없고 영어도 모르고 여권도 없이 이 적은 돈으로 유럽까지 가려고 
했니?"
  "예, 그렇습니다."
  그는 또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런데 왜 너는 차를 타지 않았니?"
  나는 다시 잠자코 있었다. 나를 여기에 데리고 온 젊은 역원이 이 물음엔 아무런 
대답이 없었노라고 말했다.  
  "말을 해! 왜 차를 타지 않았는지."
  노인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조용하지 않고 소란스러워.."
  나의 이 대답을 듣고 젊은 사람은 웃었다. 그리고 전에도 기차를 처음 보는 한국 
사람이 여러 번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기차는 이 사람들에겐 너무 시끄럽고 조급하여 점잖지가 않지."
  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웃어댔다. 
  "그렇지만 너는 당나귀를 타고 유럽에 갈 수는 없지 않니?"
  노인의 말이었다.  
  "그건 그럴 테지요."
  "비록 시끄럽지만 우리 기차로 유럽에 가려고 내일 또 한번 해볼래?"
  "난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의 대화는 끊어졌다. 직원은 나에게 차표를 반환하게 했다. 
  "이제 너는 고향에 다시 돌아가 거기서 더 공부하도록 해라. 우리 학교도 유럽 
학교만큼 좋단다. 네가 재주가 있어서 학교 공부를 일등 한다면 서울로 가서 전문 
학교에 다닐 수 있다. 우리 전문 학교도 유럽 전문 학교처럼 좋다. 서울에서 너는 
여러 가지 새 문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공공 건물은 유럽식으로 지어졌고, 
3층이나 4층까지 있다. 교수들도 고상한 유럽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서울에도 
너의 부모가 허럭한 뒤에야 갈 수 있다. 규칙대로 하자면 집을 뛰쳐나온 모든 
소년들을 체포하여 경찰서를 통하여 집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너에게만 나는 
예외를 만들겠다. 너는 나쁜 아이 같지는 않다. 돈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리고 
돈은 아주 소중한 것이니 조심해야한다."
  나는 주막에 돌아와서 잠이 들었다. 내가 깨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나의 방에는 햇빛이 조금도 비치지않았다. 나는 몸이 떨렸다. 밖에서는 거리의 
소음이 들려 왔다. 인력거꾼이 소리쳤고 차바퀴가 요란스러웠다. 장사치들은 소리 
지르며 그들의 물건을 선전했고 특히 일본약 '은단'을 선전하는 소리가 가장 
시끄러웠다. 멀리서 기차의 기적이 울리더니 곧 정거장에 머물렀다. 사람 부르는 
아우성이 들렸다. 기차가 반대편에서 또 들이닥쳤다. 고막이 찢어지도록 큰 기적을 
울렸다. 어디에선지 헌병이 사람을 치고 질타하는 소리가 들렸다. 게다 소리가 
보도에 따닥거렸고 행진곡이 울렸다. 
  나는 귀로에 올랐다. 
    가뭄은 계속되고

  돌다리 아저씨는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내 앞에 서서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왜 돌아왔는지 묻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거라.
  그는 다만 짧게 부르짖었다. 그의 아내는 마치 딴사람이 된 것같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어 아주머니는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나는 언제나 나를 잘 
보살펴주었던 아주머니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몹시 기뻤다. 
  "아주머니! 나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아무 대꾸도 없이 그냥 밖으로 나갔다. 
  나는 사흘 이상이나 밖에 있었다. 귀로는 가는 길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다. 나는 
산비탈 오솔길을 지나 궁벽한, 보잘것없고 낮은 언덕 사이를 감돌아 마침내 내 
고장의 산줄기를 볼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이 아무런 잡음이 없는 고요한 마을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따금 소가 '음매'하고 울고 조수가 굴 바위에 부딪쳐 깨어졌다. 내가 한밤중에 
문을 열었을 때, 저만치서 물결 치는 파도를 보았다. 이 모래 사장은 은빛 파도에 
휩쓸려 가지도 않고 다만 고요히 소리를 냈다. 어두운 언덕 앞에 있는 지붕은 
퇴색한 달빛아래 잠들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또한 이 마을의 모든 
것이 꿈인지 아닌지를 몰랐다. 
  농부들은 이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모를 심었다. 집에서는 여자들이 실이며 
직조물을 바랬고 누에고치를 길렀다. 숲에서는 종달새와 뻐꾹새가 공중을 날며 노래 
불렀고, 미나리아재비며 들장미가 아름답게 피었다. 
  화창한 날씨가 초여름까지 매일처럼 계속되어 농부들은 비가 내리지 않아서 무척 
걱정이었다. 밭의 흙은 가루처럼 메말랐고 논엔 물이 없는 곳이 많았다. 모두 
흉년이 들 것을 두려워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가뭄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서로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왜놈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처럼 많은 성벽을 부쉈고, 명예로운 건물을 
옮겨 세웠으며, 오래된 묘를 파냈다. 뿐만아니라, 더욱 악질적인 일은, 묘에서 
사자에게 공양한 고귀한 도자기를 훔쳐낸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동경에 가져가서 아주 비싸게 판다고 했다. 발굴된 수많은 묘가 
하늘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 산이 없었다. 아주 오래된 인간 뼈가 햇볕을 쏘이며 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도로 건축을 한답시고 야만인들은 낡고 낡은 묘지를 
많이 발굴하여 모독했다. 사람들이 산 밑을 걷고 있노라면, 종종 사람의 뼈다귀가 
머리 위로 떨어지곤 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놀라 달아났다. 나도 하늘이 
인간의 그런 비행을 복수하리라고 믿었다.
  아직도 가뭄은 계속 되었다. 드넓은 논은 이제 한방울의 물기도 없이 여기저기 
쩍쩍 벌어졌다. 농군들은 밤마다 물을 긷기 시작했다. 마을 가까이에 있는 유일한 
시내가 말라버렸을때, 사람들은 다른 물줄기를 찾아 모든 그릇으로 물을 길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리고 약한 볏모가 적어도 이튿날까지만이라도 말라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몇 시간을 걸어다녀야 했다. 많은 여자들은 별빛이 비치는 밤에 
뒷마당이나 밭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그들은 촛불 아래 한 바가지의 물을 나무상에 
떠놓고, 죄없는 농민을 너무 혹독하게 벌하지 않도록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하늘은 냉혹했다. 매일 이침 불덩이 같은 해가 동녘에서 떠올랐다. 날마다 
괴로움에 찬 땅을 내려다보며 이글거렸다. 일하면서 아무도 노래하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낮에는 풀을 뽑았고 밤에는 절망 속에서도 하늘에서 한점 구름을 찾았다. 나 
또한 밤에 잠을 잘 수 없었고 자주 하늘만을 쳐다보았다. 우리들은 모두 홀로 
생각에 잠겨 거의 한마디의 이야기도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아침 일찍 집안 사람들에게 갑자기 깨워졌다. 하늘이 무너질 듯 
험악하였다. 온 포구에 비가 쏟아졌고 마을에서는 힘찬 기쁨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소나기가 내린 다음에는 곧 더워지고 푹푹 삶아대기 시작했다. 벼는 다시 살아나 
마구 자랐다. 농군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도록 풀을 뽑았다.
  나는 매일같이 어머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허락 없이 집을 
뛰쳐나갔던 일을 편지로 용서를 빌었다. 나는 어머니가 뭣이라도 말씀하실 때까지 
그냥 머물러 살려고 했다. 농감의 말에 의하면, 내가 도망간 날 어머니는 한잠도 안 
주무시고 한 술도 안 떴다고 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기방에 홀로 머물러 아무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걱정스러웠다. 고생하지나 
않나 싶었다.
  어느 날 저녁, 이러한 어머니가 몸소 마을에 왔다는 말을 듣고 나는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 곁으로 달려갔을 때, 어머니는 조용히 
웃으면서 맞아주고 건강에 관해서만 물었다.
  다음날 저녁, 어머니는 아직도 공부하고 싶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어머니."
  나는 대답했다. 
  "잘 생각해 봐라."
  "정말 싫어요."
  "왜 그렇게 생각에 잠기고 기운이 없니?" 
  "내가 공부한다면 나중에는 서울에 가야하기 때문에."
  "넌 그러고 싶지 않니?"
  "예."
  "왜 싫어?"
  "난 어머니 곁에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네가 서울에 가도 좋다.."
  어머니가 말했다. 
  "내일 시내에 가서 다시 공부를 시작해라."
  "난 싫어요." 
  "왜? 해봐! 내가 그러고 싶으니!"
  나는 어머니가 왜 그렇게 말을 하는지, 왜 그러는지 몰랐다. 
  나는 정말로 더 공부하지 않으려고 했다. 새 시대는 나에게 너무나도 낯설고, 또 
확실히 새 학문에 관해서 나는 재주가 없다고 믿었다.
  "예, 어머니.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이렇게 대답하였다 
    입학 시험

  나의 학교 동무들은 내가 다시 학교에 갔을 때 모두 즐거워했다. 그들은 내가 
놓친 시간들을 어떻게 따라오며, 어떻게 하면 가장 빨리 전문 학교 공부를 할 수 
있는지 일러주었다. 내가 고향의 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동안 서울에 있는 좋은 
중학을 다녀 전문 학교 수학을 위한 입학 시험 준비를 하려면 아직도 3,4 년이 
지나야만 했다. 이 시간을 자습으로 단축하여, 곧 통신 강의로 시험에 준비할 것을 
권하였다. 이 방안은 내 마음에 솔깃했다. 
  나는 중학 과정에 관한 유명한 통신 교육 기관의 강의록을 받아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되었다. 강의록은 쉽게 쓰여 있었기에 모든 
학과를, 수학까지도, 어렵지만 잘 해나갈 수 있었다. 강의를 시작한 지 몇 달 후에 
시작한 영어만이 나를 곤란에 빠뜨렸다. 영어 발음의 일본 '가나'에 의한 귀찮은 
표음이나 문법 설명을 수없이 외고 읽었으나 나는 똑똑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여태껏 영어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우리 고향 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몇 명 안되는 한국인 영어 교사는 서울에 있는 좋은 학교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나의 학우들도 나를 도울 수는 없었다. 그들 역시 거기에는 아무런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용기를 아주 꺾어버렸다. 이 영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다. 영어를 모르고서는 도시 유럽 문화에 접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용마는 화학과 물리를 도와주었다. 기섭은 수학을 도와주고, 각성이라고 불리는 
다른 학생은 낯선 이름 때문에 곤란했던 서양사를 도와주었다. 그들은 매일 밤 와서 
내가 공부할 수 있을 만큼 열심히 나를 도와주었다. 그들은 모두 나와 같이 고향 
학교를 졸업했으나, 여러 가지 다른 문제 때문에 서울로 공부하러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적어도 우리들 중 누구 한 사람은 전문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다 썼다. 내 방은 매일 저녁 교실로 변했다. 다만 보통의 
교실과 다른 것은, 한 학생이 배우고, 셋 또 어떤 때는 그 이상의 선생이 가르친다는 
점이었다. 
  나의 공부를 돕지 못한 단 한 명의 동무는 만수였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 없이 언제나 이 동무 저 동무에게로 돌아다녔다. 벌써 열일곱 살이나 
되었는데도 배우는 것이나 직업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매일 방 나에게 왔다. 그러나 아주 늦게, 모든 친구들이 다 가버리고 난 다음 
나 혼자 책을 보고 있을 때 왔다. 그는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을 잠깐 바라보고는 
자기 방에 같이 가서 잠시 음악이라도 하자고 했다. 그는 긴 현악기인 가야금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음악가와 가수들은 가야금을 좋아하였다. 내가 아직 공부를 더 
해다 한다고 하거나 매우 고단하니 차라리 자고 싶다고 하면, 그는 오히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나를 고단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했다. 
  만수는 언제나 반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인간 정신을 
상하게 한다든지, 어머니의 외아들인 내가 정신병 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든지 
하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자기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나는 자기의 유일한 동무이며 
그러기에 제 청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그와 잔돌이 깔린 마당에 있는^56,36^다른 출입구를 가진, 그래서 밤에도 
방해되지 않고 출입할 수 있는^36,23^그의 방으로 갔다. 방에는 책과 책상, 시계등 
어느 학생에게나 필요한 물건들은 전혀 없었다. 그 조그마한 방은 거의 비어 
있었다. 한구석에는 이불이 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아교 그릇이 들어 있는 
화로가 있었다. 벽장 안에 그는 전 재산을 보관하여 두었다. 거기서 그는 술병을 
꺼내고 놋그릇에 담긴 몇 개의 과일을 내놓았다. 
  "자, 마셔라, 내가 너를 위해서 특별히 가져온 것이다."
  그는 으레 이렇게 말하고는 가야금을 내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두텁고 낡은, 베껴 쓴 악보를 펼쳤다. 그 악보 속엔 많은 고전 음악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몰랐다. 그는 한 줄을 가리키며 음부대로 뜯었다. 나도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 손가락이 다시 익숙해질 때까지 펴서는 한곡을 거의 틀림없이 뜯을 수 
있었다. 그는 악보를 계속해서 끈기있게 뜯고는 나의 손의 위치를 교정해 준 다음 
얼마간 제 마음에 흡족해지면 피리로 나를 반주해 주었다. 
  우리들은 오래 뜯었다. 
  "아, 미륵아!"
  그는 입을 열었다. 
  "정말 너는 꼭 서울에 가야만 하고 공부를 해야만 하니?"
  "응! 시험에 통과하기만 하면 그렇게 할 테야."
  "네가 여기 살아서 언제나 나와 같이 음악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너는 
일을 안 해도 좋고, 걱정을 안 해도 되며 행복한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도 되지 
않니? 네가 원하기만 하면 동무들을 불러다 하늘이며 땅이며 세계며 사람들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니? 너는 산에다가 집을 한 채 짓게하여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흘러 가는 구름을 볼 수 있지 않니? 너의 어머니는 행복할 
것이고, 너도 행복하게 살 것이며, 또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수 있지 않겠니?"
  "아니, 나는 공부해야 해!"
  "너는 정말 이상하다."
  그는 끝끝내 안타까이 말을 뱉었다. 

  일년은 빨리 지나갔고 또다시 겨울이 돌아왔다. 눈은 적게 내렸고 아주 추운 
겨울이었으나 나에게는 유혹적인 기회가 내 새 운명 앞에 던져졌다. 그것은 내년에 
있을 의학 전문 학교 입학 시험 광고였다. 그곳에서는 다만 다섯 가지의 학과만을 
수험하게 되어 있었다. 수학, 화학, 물리학, 일본어 그리고 한문이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영어도 역사도 없었다. 
  이 의학 전문 학교의 모집 광고는 나를 퍽 솔깃하게 했다. 모든 사람이 의학은 
나에게 적합한 학문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더욱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학교의 입학 시험엔 너무도 많은 응모자가 모여, 전부터 가장 어려운 학교로 알려져 
있었다. 중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수험생 중의 십분의 일이 합격하였다. 
  나는 오랫 동안 생각하다가 학우들의 격려에 그만지고 말았다. 
  나는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일주일 후에는 수험 허가에 관한 통지를 받았다. 
지정된 수험일에 연필과 붓과 먹과 자를 가지고 시립 병원으로 출두하라고 했다. 이 
시립병원에서 우리는 시험을 치렀다. 
  시험 첫날 아침, 간호부가 나를 조그만 방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에는 벌써 세 
사람의 응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알지 못했다. 그들 셋은 나를 보고 
웃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글은 창백하고 근심스러워 보였다. 조금 후에 시험 위원이 
들어와서는 우리들 이름을 부르고 자원서에 첨부된 사진과 우리의 얼굴을 대조하여 
보았다. 그리고 그는 시험 문제를 정신적인 여유를 가지고 명백히 생각한 끝에 답을 
쓰라고 주의시켰다. 
  우리는 닷새 동안 시험을 치를 일정표를 받았다. 그날, 우리들은 의사의 진단만을 
받았다. 우리는 그러기 위하여 큰 방으로 안내되어 두 명의 의사로 하여금 신장 
기타 기관을 진찰받았다. 처음 다른 세 사람이 나간 후 나는 어찌된 셈인지 또 한 
번 오랫 동안 심장을 진찰받았다. 두 의사가 한참 동안 상의한 뒤에 건강하다고 
해서 겨우 나올 수 있었다.
  필기 시험은 매일 이른 아침부터 소강당에 집합하여 오랫 동안 치러야만 했다. 
  첫날에 수학이 있었고, 다음날에 어학, 셋째 날에 물리와 화학 순으로 이어졌다. 
수학은 아주 쉬웠고, 물리와 화학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대 일본어와 
고전 한문의 원문을 일본어로 번역해야 하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이 두 
학과에서 낙제해야만 했다. 시험 위원은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조용히 난로 옆에 
앉아 있었다.
  아마 우리들이 서로 얼마간씩 도와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무도 남의 것을 굽어보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셋째 날에 작은 
종이 뭉치가 내 책상 위에 살짝 굴러왔다. 나는 그걸을 살펴보았다. 거기엔 노란 
유황과 붉은 유황의 상이한 용해점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날의 구두시험 때 시험 위원은 내가 왜 의학 공부를 선택했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즐겨 생과 사의 원인을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웃으면서 오랫 
동안 연필로 장난하고 있었다. 
  "그건 아주 고도의 목적이다."
  그는 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우선 많은 실무 의사를 양성해야 한다. 특히 너의 고향에 
말이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아주 위생 관념이 적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화 도중 그는 잠깐 동안 시험실을 떠났다. 그래서 나는 그의 시험명단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우리들 이름 아래 여러 가지 난이 있고, 특별한 표시가 되어 
있었다. 내 이름 아래에는 '언어' 난에 단순 명료, '성격' 난에 정직 유화 은근, 
'학습의 목적' 아래는 아무것도 적혀 있이 않았다. 
  시험 위원은 곧 돌아돠서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말하였다. 
  "너는 시험을 잘 치렀다. 너는 예선에 들었다. 그렇지만 결선에서 다섯 명 중 한 
사람이 우리 학교에 입학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네가 섭섭한 대답을 듣더라도 그것 
때문에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결선은 마치 심지 뽑기와도 같다."
  작별할 때 그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네가 우리 나라라고 말할 때는 언제나 한국뿐만아니라 일본 제국까지를 통틀어 
말하고, 우리 동포라고 할 때도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에 있는 전 국민을 
말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 말에 잠자코 있었다. 
  약 3주일 후였다. 나는 서울의 의학 전문 학교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4월 
초에 전문 학교 사무실에 출두하라고 적혀 있었다. 이날 나는 큰누나의 저녁 초대를 
받았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니 온 집안 식구와 동무들이 내 방에 모여 앉아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모두 입을 다물고, 용마가 나에게 통지를 
읽어보라고 주었다. 모두가 축하해 주었다. 내 어머니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손만 연거푸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는 
차츰차츰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내 동무들은 그들이 매일 밤 나를 도와준 목적이 이제야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곧 저 먼 세계로 나갈 것이고, 그들은 계속해서 이 좁은 고향의 
소도시에 살아야만 했다. 집안 고용인들은 아마 내가 우리 집에서 아주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듯하였다. 구월은 읽지도 못하는 학교의 통지서를 근심스럽게 보고 
있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저녁, 나는 동무들의 전송을 받으며 서울로 데려다 줄 기선이 
장박해 있는 용두로 갔다. 유쾌하게 이야기하며 만수, 용마, 기섭이 앞서 갔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그들을 따랐다. 어머니는 성내에서 나와 얼마 동안 같이 걸었다. 
여행에 관한 주의와 대도시의 생활에 관한 주의를 주었다. 
  "과거를 너무 생각지 마라."
  끝으로 어머니는 말하였다. 
  "네가 자주 말한 것처럼 시대가 변하였다. 과거는 새 문화에 앞서 갔다. 새 문화는 
자주 분수를 모른다. 그러나 네가 그것에서 무엇을 배우려고 하든지 그것이 
생소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아야 하며, 또 언제나 온화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동무들은 달빛에 잠긴 포구까지 나를 바래다 주었다. 흰 기선이 요술처럼 어두운 
바위 틈에서 떠올랐다. 나는 한 사람씩 작별을 하고 작은 배에 올라탔다. 작은 배는 
흰 배를 향하여 거친 물결을 헤치고 나아갔다. 동무들은 선교에서 기선이 서서히 
돌아 슬픈 고동 소리를 울릴 때까지 서 있었다. 그들 셋이 나 없이 외로운 귀로에 
오르는 것을 보는 건 퍽 마음이 언짢은 일이었다. 
  그들은 무슨 얘기를 했을까? 용마가 얘기를 했을까, 만수가 얘기를 했을까? 
아니면 내 여행에 관해서 혹은 음악에 관해서 얘기를 했을까? 그들은 곧 남쪽 
언덕과 선녀산 사이를, 우리들의 사랑스러운 고향의 전원을 방황하겠지.
  바위에서 다른 학생들이 입을 모아 큰소리로 인사하였다. 모두가 시험 성과를 
축하하였고, 모두가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용두만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높은 수양산은 멀리 가라앉고, 수압산은 바로 눈앞에 
미끄러져 갔다. 이윽고 우리는 넓은 바다에 들어섰다. 바다만이 달빛 아래 
수평선에서 수평선으로 파도치고 있었다. 
    서울 유학 무렵

  아침 식사 직후에 우리 배는 제물포항에 입항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기차를 탔다. 기차는 조그마한 정거장에 몇 번이나 정거한 다음, 드디어 정오경에 
삼각산 방향으로 질주하였다. 언덕과 계곡이며 마을이 우리 옆을 달아났고, 우리는 
5백 년 동안 임금이 등극해 있었던 서울로 점점 더 접근하였다. 우리가 모든 한국 
지방에서 소년 시절에 성벽에서 보았던 그런 밤의 봉화 신호가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이 왕궁에서 목사들은 민중을 통치하기 위한 전권을 받았다. 이곳으로 
우리나라의 유명한 시인들이 모였으며 선비며 예술가가 몰려들었다. 나는 침착하게 
앉아 있었다. 
  기차는 강 위쪽에 있는 철교를 지났고, 곧 굉장히 큰 역사에 들어갔다. 밖에서는 
우리가 서울에 닿았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나는 짐을 들고 역 구내에서 나오는 
군중을 따랐다. 말할 수 없이 넓은 광장이 앞에 놓여 있었다. 인력거, 자전거, 
오토바이가 경적을 울리며 빨리 달아나는 전차 사이로 질주하였다. 우리는 전차를 
탔다. 우리들이 현대식 상점, 은행, 식당 등이 즐비한 번화가를 지나 대부분의 
학생들이 살아야 하는 북쪽 서울 시내에 닿기까지는 아직도 먼 것 같았다. 
  나는 어느 거리에서나, 책방에서나, 음식점에서나 학생들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비슷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모자와 깃에 단 학교와 학과 표지로 그들을 식별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학과도 학교도 어느 곳 출신인지도 묻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한 커다란 가정에서 태어난 것처럼 서로 인사하고 돕곤 했다. 
  나는 다음날 아침, 시의 동쪽에 자리 잡고 유럽 양식의 수많은 건물로 이룩된 
서울 의학 전문 학교 입구에 서 있었다. 감색 제복에 '의학'이라는 금빛 표지를 단 
학생들이 몰려 들어가고는 몰려 나왔다. 그러나 신입생들은 아직도 평복을 입고 
있었다. 한국인은 흰옷을, 일본인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사무실에 가서 학생증과 시간표와 제복과 모자에 다는 표지를 받았다. 
  화학 강의는 아주 재미있었다. 그건 일목 요연하게 구성이 되었고 언제나 실험이 
뒤따랐다. 생리학 강의는 그저 그랬다. 그건 우리에게 아무런 새로움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강의인 해부학도 그보다는 낫지 않았다. 
  호리호리한 교수는 특색이 없는 강의를 시작하였다. 아무 강조도 활기도 없었다. 
그는 뼈를 들고 평면과 심부와 융기를 일본어, 독일어, 라틴어로 구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표현이 지나치게 빨랐기 때문에 첫줄에 앉은 학생들까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간간이 그는 칠판에 무엇을 썼으나 그건 그의 말처럼 알아보기 
힘들었다. 우리는 차례차례 펜을 놓고 고생스러운 두 시간 강의가 끝나 메마른 
교수의 얼굴이 사라질 때까지 무료하게 앉아 있었다. 
  "이 사람은 바보다."
  몇 명이 중얼거렸다.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강단에 올라가 상자 속에서 
어떤 뼈 조각을 꺼내어 융기와 심부를 교과서에 있는 그림과 가까이에서 비교해 
보았다. 
  "우리도 저렇게 해야 하지 않아?"
  며칠 동안 자주 같이 앉은 옆의 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같이 한다면."
  그렇게 말하고 나는 하나의 깨끗한 광대뼈를 꺼내어 그 앞에 놓았다. 그는 한동안 
만지지 않고 보고 있었다. 
  "이건 사람 뼈다귀지?"
  그는 말했다. 
  오랫동안 그는 뼈를 보고 난 후, 천천히 손으로 잡아서 달아보더니 다시 앞에 
놓았다. 
  "이상하다!"
  그는 중얼거렸다. 
  "이게, 즉 인간의 실체구나."
  우리들은 모두 절개부와 능선과 융기를 보고는 우리들이 적어놓은 공책을 
정정하였다. 
  강의 노트를 서로 보충하여 정정하고는 같이 실제로 실험을 함으로써 학생들은 
서로 한 쌍씩 나누어졌다. 시간에 따라서는 친한 벗이 되기도 했다. 그러한 학생의 
쌍은 저녁에도 공부하기 위하여 같은 하숙에 들었다. 
  내 옆에 학생은 북쪽에서 온 조용하고도 인정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의 이름은 
익원이었다.
  익원과 나는 아주 좋은 하숙의 크고 밝은 방을 나누어 썼다. 우리는 매일 저녁 
읽고 또 토론하였다. 어떤 때는 물리학에 관하여, 어떤 때는 화학이나 해부학에 
관하여 토론했다. 독일어는 의학도에게 필수불가결의 과목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의학 문헌은 독일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주일에 네 시간씩 듣는 독일어 
문법에 관해서도 토론했다. 우리는 자리에 누워서도 자주 동사 변화를 서로 묻고 
답했으며 또 명사, 형용사 변화도 연습했다.
  우리는 매일 아침 같이 학교에 갔고, 저녁이면 자정까지 서로 공부하기 위하여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또 함께 물건을 사러 갔고 목욕을 하러 갔다. 같이 극장에 
가고 일요일이면 서울 시내를 관광하러 갔다. 경복궁이며 남한 공원, 동물원을 
구경하였고, 한강까지 갔다. 익원은 벌써 서울에서 일년이나 공부하였기 때문에 어느 
곳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 학교는 한국의 최고 학부였다. 한국을 여행하는 유명한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를 방문하였고, 서울에 어떤 공자나 유명한 정치가가 오면 우리는 정거장까지 
그들을 환영하러 행진하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총독부에 직속해 있는 
모든 학교와 마찬가지로 우리 학교 안의 분위기는 거의 군사적이었다. 우리는 
강의나 실습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었고, 아무도 급한 원인을 제외하고는 무더운 
7월까지 계속되는 강의를 결석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마침내 학기의 최후의 날이 와서 우리의 제복을 벗어 던져 
고리짝 속에 오랫 동안 집어넣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매우 기뻤다. 우리들은 가을에 
다시 모여 계속 공부하기 위해 방학 동안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상의하였다. 익원은 
내가 광학이 제일 뒤떨어져 있다고 했다. 익원은 책상에 앉아서 나를 보라보았다.
  그는 부모가 없기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방학 동안을 서울서 지내려고 
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그는 기독교 가정의 양자로서 성장했고, 그가 기독교 전문 
학교에 가지 않고 의학 전문 학교에서 공부하기를 결싱한 후부터 집에서는 그가 
오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마지막 밤을, 이제까지는 하지 않았던 시내 산책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우리는 궁궐의 이끼 낀 긴 담장을 따라서 오래되고 조용한 길을 걸었다. 이 궁궐의 
담장 안에는 전 왕실의 후^36^예가 수백 명의 시종과 시녀를 데리고 살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길은 언제나 조용하고 고요했다. 나는 이 길을 걸을 때마다 
항시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고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들 왕족의 인기척이나마 
듣고 싶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말도 아무런 발자국 소리도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5백 년 왕조의 저 후손들은 지극히 
조용해졌다. 
  우리는 옛 궁궐의 성벽을 따라가서 남쪽으로 뻗친 큰길을 방황하였다. 길은 
낮처럼 환했다. 일본제며 유럽제의 사치품들이 진열장에서 빛났다. 어디서나 유럽 
음악을 틀어댔다. 사람들은 바이올린이며 피아노, 손풍금, 축음기 등을 들었다. 철도 
호텔의 정원에서는 유럽 행진곡이며 무도곡이 울렸다. 우리는 나의 고향 동무를 
위한 몇 권의 오락책을 사기 위하여 책방으로 들어갔다. 
  귀로에서 우리는 시 동쪽의 넓은 옆길에 펼쳐진 소위 야시를 구경하였다. 수없는 
노점에서 낡고 싼 물건을 팔고 있었다. 표지가 누렇게 바랜 책, 푸르고 붉은 줄이 
있는 종이, 그림, 부채, 파이프, 담뱃갑, 모자, 비단, 여자의 신발, 모두 낡고 먼지 
묻은 것들을 몇 푼 동전으로 살 수 있었다.
  먼지가 묻기는 했으나 고상한 비단옷을 입은 노인이 싸구려를 외치며 길 가는 
사람들을 유혹했다. 그들은 아마 옛날 '면'이나 '읍'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가난해지고 권력이 없어져 아이들의 굶주림을 면키 위해 여기서 몇 푼의 동전을 
벌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얼마라고 값을 대고 깎으며 서로 다투고 
있었다. 
  저만치 마지막 점포에는 엷은 대나무로 만든 퉁소가 수없이 쌓여 있었다. 퉁소 한 
개를 두 닢에 팔고 있었다. 익원은 여기에 서서 퉁소를 보았다. 나는 그에게 사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 퉁소는 만든 솜씨가 거칠었고, 구멍은 맑은 소리를 내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소원대로 사려고 했다. 그로서는 
아직껏 아무런 악기도 손에 들어본 일이 없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그는 
다만 혼자 너무 외로워지면 민요를 시험해 보려고 한 것이다. 나는 그 많은 퉁소 
중에서 겉으로 보아 깨끗하고 소리가 괜찮은 것 몇 개를 골라서 그 중에서 한 개를 
고르라고 했다. 
  익원이 그 중 하나를 고르는 동안에 낯선 젊은 사람이 다가와서 자기를 위해서도 
쓸 만한 것으로 하나 골라 달라고 청했다. 나는 그렇게 해줬다. 그러나 퉁소를 
시험해 봐 달라는 사람은 이 청년뿐만이 아니었다. 노인 한 분과 두 사람이 그에 
합류하여 곧 수없는 사람이 내가 부는 퉁소 소리를 듣기 위하여 주변에 둘러섰다. 
나에겐 별로 유쾌하지가 않았다. 나는 군중들 틈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늙은 장사치가 나에게 와서 완전히 다른, 참으로 예술가의 
퉁소^56,36^아주 단단한 대로 된 잘 깎인 부드러운 장식이 있는^36,23^를 보였다. 
그도 똑같은 것을 쥐고는 짧게 명령하듯이, 타령을 따라하라고 말했다. 타령은 가장 
좋아하는 고전곡으로, 옛 음악 학교를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당연히 불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 퉁소와 말투로 보아 그 노인은 옛날의 음악 선생이었거나 황실의 
음악가였음이 분명했다. 
  그는 요즈음 어디서나 유럽 음악만을 배우기 때문에 할 일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고전 악기를 옳게 손에 쥘 줄 아는 젊은 사람이 와서 자기와 다시 한번 고전곡을 불 
수 있게 된 것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불기를 주저하였다. 우리는 야시에서 
군중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동안 아무 말 없이 이상한 흥분으로 모든 노래를 듣고 있던 익원은, 우리가 
제복을 입지 않았고 또 노인이 아주 즐거워 할 것이니 그렇게 하라고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천천히 퉁소를 입에 대었고 비단옷을 입은 노인이 불기 시작하였다. 
우리 주변은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노음악가가 간간이 걸으며 더욱 흥겹게, 한 고전 
음악에서 다른 고전 음악으로 밤새 불었다. 새 일본인 거리인 남쪽에서는 수없는 
불이 반짝거렸고, 북쪽의 낡은 한국인 거리는 어둠 속에 잠들었다. 삼각산 위에는 
벨벳처럼 검은 밤하늘이 펼쳐졌고, 오래된 창덕궁은 과거 속에 잠겼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익원은 나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철두 철미 공부하였다. 그걸 나는 이미 첫학기에 
알았고 나중에 더욱 더 잘 알게 되었다. 나는 매일의 강의를 빠짐없이 받아 쓰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이해함으로써 만족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참 동안이나 생각하면서 
거기에 앉아 새로운 불명료한 점과 새 문제를 발견해 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주 
이 학과 저 학과를 다시 살펴야 했고 끝없이 토론하였다.
  익원은 모든 학과를 열심히 했다. 그 중에서도 물리학과 화학 문제에 관하여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특별히 그가 '에테르'니 '원소'니 '에너지'같은 어려운 
개념에 관해서 토론할 때에 즉시 알차하렸다. 그러면 그는 온 밤을 필요로 해야만 
했고, 그래서 자정에야 비로소 다른 강의, 예를 들면 생리학이나 해부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밤 시간에 우리는 허기를 느꼈고, 떡 장수가 밖을 지나며 김이 무럭무럭 
나는 떡을 사라고 소리 지를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떡 장수는 벌써 어느 길, 
어느 집의 학생들이 늦도록 공부하며 허기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소리는 처음에 멀리서 마치 모기가 우는 것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점점 더 
커져서 우리 집의 높은 창문에 와서는 멎었다. 우리는 그가 상자를 내려놓으며 
뚜껑을 여는 소리를 들었다. 익원은 웃으며 장지를 열고 달콤한 속이 들어 있는 두 
개의 떡을 받았다. 노랫소리는 다시 밤거리를 방황하였고 우리는 다시 책을 읽었다.
  익원의 장서에는 학술 서적 외에도 많은 오락책이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유럽 
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한 책이었고, 나도 그 이름만은 알고 있었다. 한번은 그 속에서 
철학적인 내용의 책을 몇 권 발견하였다. 그 중 하나는 '존재의 이론'이라는 
제목이었다. 나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익원이 한 학우를 
찾아갔으므로 집에는 나 혼자 있었다. 나는 익원이 돌아올 때까지 이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내가 그처럼 깊이 파고드는 것을 보자 익원은 웃으면서 나에게 너무 많은 
철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하였다. 그건 나의 본래의 공부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동양 사람은 너무 이론적인 면으로 
기울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책에서 떠나기가 매우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 
인간이 제출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것을 손에서 놓고 더 읽지 않으려고 결심해도 그건 아무 소용 없었다. 나는 
자꾸만 계속하여 읽고 싶어짐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익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철학책을 잡았다. 
  "우리가 유럽 인에 뒤떨어진 현대 학문은."
  어느 날 저녁 익원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철학적 사고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자연 과학에 있어서도 그렇고 의학에 
있어서도 그렇다. 우리들의 선조들은 인체를 낡은 철학의 면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데 반하여, 서양 연구가들은 그것을 해부하여 내부 기관을 자기 눈으로 관찰하는 
대담한 용기를 가졌다. 그들은 생각하거나 숙고하는 대신에, 어디에 심장이 있고 
어디에 위가 있으며 어디로 혈관과 신경선이 가고 있는지를 보았다. 이 대담한 용기 
때문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옛날 것보다 몇백 배 더 위대한 모든 의학 지식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들의 전통적인 의학에 관해서 익원이나 나는 조금도 몰랐다. 그것이 비록 
우리 연구의 분야에 속하여 있었지만, 우리들은 이제까지 모든 오랜 전통이 
낡아빠졌고,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우리는 
구식 의원이 어떻게 공부하였고 그들 학문을 어떻게 구분하였는지 몰랐다. 우리는 
낡은 한방 의술에서는 의사가 되기 위해 적어도 10 년은 공부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귀밑머리가 세지 않은 의사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우연히 이 희귀한 책이 우리 손에 들어왔다. 익원은 
아저씨가 한의사였던 한 친구를 찾아갔다. 그가 남겨놓은 책은 불태워야만 했었는데 
그는 꼭 한 권을 남겨서 자기 것으로 보관하여 두었다. 그래서 익원이 이 귀한 책을 
하룻밤 빌려와 우리는 해부학의 일부를 표현하고 있는 이 두꺼운 책을 조심스럽게 
뒤져보았다. 거기엔 여러 모로 그려진 인체의 먹그림이 실려 있었다. 
  모든 그림에는 많은 선과 점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고, 전신 상부를 덮고 
있었으며 복잡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선은 이른바 생명선인 것 같았으며, 그의 
경로는 혈관이나 신경에 일치하지는 않았다. 거의 마지막에는 마찬가지로 먹으로 
그려진 내부 해부학의 몇 개의 그림이 있었다. 각 기관의 외형이 조잡하고 단순하게, 
마치 예술가가 아무렇게나 그린 스케치처럼 그려져 있었다. 위의 모양과 심장의 
모양은 우리 교과서와 완전히 일치했다. 그렇지만 간은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일곱 엽으로 되어 있었고, 갈비뼈로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었다. 폐는 
양편에 각 세 엽으로 되어 있고, 왼쪽 폐에서 두꺼운 줄이 심장으로 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소순환의 상징으로 보았다.
  우리는 이 졸렬한 해부학에 대해 웃었다. 그러나 책의 저자가 직접 보지도 않고 
적어도 이 정도까지 정확히 내부 기관을 그린 재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방 
의원은 결코 한 번도 해부를 해보지 않았다. 그들은 시체 내부를, 몸을 
더듬어봄으로써 알아차렸다. 
  그런 고귀한 한방 의원은 병자의 신체를 거의 만지지조차 않았다. 그들은 등을 
두드리지도 않았고, 내부 기관을 청진하지도 않았다. 다만 병자의 얼굴을 보았고 
병자가 아야기하는 것을 조심스레 듣고는 맥을 짚었다. 그리고는 처방을 썼고 
처방에 따라 조수가 약을 곧 준비하였다. 조제실에는 모든 필요한 약이며 고약이며 
즙을 의원의 감시 아래 만들 수 있게 해 두었다. 병자에게는 그외 아무 일도 
없었다. 엑스레이는 물론, 수술, 주사도 한방 의원은 몰랐다. 다만 특정한 병에만 
여러 곳에 침을 놓았다. 이런 곳은 생명선 위에 있어야 했고 그 방해가 병이 된다고 
했다.
  이 단순한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그처럼 오래 공부를 하는지? 그처럼 오래 인간 
존재의 의의를 철학적으로 생각했는지? 또한 그들이 약초에 관해서 그처럼 오래 
공부했는지?
  우리들은 아직껏 한의학에 관한 아무런 책도 보지 못했다. 인간 신체의 구조에 
관한 책도, 병에 관한 책도 구경하지 않았다. 책방에서 그것을 살 수가 없었고, 어떤 
의사도 그들의 책을 마치 비밀 문서처럼 감추었다.
  인간의 육체는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영혼이 그를 떠난 
후에는. 그래서 사람들은 시체를 땅의 일정한 곳에 돌려줘야 하며 그럼으로써 
방해 받지 않고 행복한 조화로 자연에 복귀하여 후손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오지 않도록 했다. 그러기에 시체의 해부는, 비록 의사가 하더라도, 자연 법칙과 
영혼에 대한 죄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당시 우리 학교의 한국 학생만이 해부학 실험을 같이할 것을 거부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현대 의학이 낡아빠진 한의학보다 훨씬 더 벌전했다고 
생각하여 신의학의 학습을 받았으나, 아직도 시체를 해체하는 것은 큰 죄악으로 
보았다. 
  서구 문화를 우리나라에 도입하는 시험기였던 수십년 전에는 더 그러했을 것이다. 
낡은 견해를 오래전부터 벗어버린 우리들 자체도 어느 날 오후 처음으로 떨어져 
있는 잿빛 해부실에 인도되었을 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다른 여섯 명 학생과 
함께 익원과 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청년의 시체에 천천히 접근하였다. 얼마쯤 
떨어져 서서 우리들은 창백한 사자를(사자: 죽은 자) 보았다. 그는 깊은 대지의 그늘 
속에서 쉬는 대신 여기 연판 위에 누워 옷도 입지 않은 채 알몸을 여름 햇빛에 
쪼이고 있어야만 했다. 익원은 슬프게 나를 바라본 다음 내 손을 잡았다.
  "향연조차 없어!"
  그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교수가 들어와서 우리들에게 오늘은 장부 기관의 위치만을 보라고 했다. 시체의 
해부는 인간의 권위에 대한 침범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오히려 우리들이 그의 
지상의 그림자를 고귀한 학문의 제단에 바침으로써 사자에게 큰 명예를 부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용감히 시작하여 처음에는 횡격막 근처의 피부를 
아래로 절개하라고 했다. 우리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급기야 한 학생이 
천천히 주저하면서 그의 기계 상자를 끄집어내어서는 명령한 대로 했다. 그 
다음에는 다른 학생의 차례가 왔고, 우리는 마지막에는 오메툼 마유스(Omentum 
majus)가 깨끗이 나타날 때까지 함께 작업하였다. 
  우리들이 등불 아래서 모든 기관을 끝마친 후 집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벌써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집에 돌아온 우리는 먹는 것도 잊고 온 밤을 침묵으로 보냈다. 
우리는 서로가 주고받을 만한 이야깃거리를 몰랐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56,36^학문, 철학, 자연, 인간의 생활^36,23^이 우리에겐 무의미하게 보였다. 아니 
더럽게 보였다. 우리가 시체 해부를 마치고 학교에서 나올 때, 우리는 더운물로 
깨끗이 목욕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 자신의 신체를 보아야 하며 피부를 
손으로 만지는 게 겁이 났다. 나는 오늘 오후 움직이지 않고 누워만 있던 그 시체에 
대한 무서운 광경을 잊어버리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익원은 책상 앞에 앉아서 
의미없이 이책 저책을 뒤적이더니 집어 던져버렸다. 
  "무서운 짓."
  "야만적!"
  "언어 도단."
  익원은 이러한 말들을 내뱉었다. 마지막에는 그의 흥분을 진정시킬 만한 책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는 쉬지 않고 읽었다. 나는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깨었다 
하면서 그가 밤새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너는 계속해서 의학을 공부할 것이냐?"
  다음날 아침 그는 나에게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기미 만세의 절규 속에

  우리들의 3 학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오후, 안과 강의가 끝나 강의실에서 
나오다가 상규라고 하는, 나와 친한 학생에게 붙들렸다.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내일 
저녁 중요한 회담이 있는데 식당 남운헌에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기를 
약속하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를 물었다. 상규는 나를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더니 거의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는 한국 전문 학교의 많은 학생들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그 때문에 
이야기한다고 했다. 한국 민족은 곧 부정한 일본 정책에 대한 일종의 시위 운동을 
감행할 것이며, 전 한국인 학교의 학생들이 참가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선 우리 
학교의 믿을 만한 몇몇 한국 학생들에게 우리들도 참가 해야 할 것인지를 물어보는 
것이라고 했다. 상규에게서 초대받은 익원은 조심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그는 
집으로 가는 길에 한마디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저녁 과제를 빨리 마친 다음 
우리 민족이 일본 정부에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를 이야기했다. 선거법? 또는 자국의 
군대를? 그것도 아니면 자치를?
  "어쨌든간에 정치적인 것일 거야."
  익원은 언짢게 말했다. 
  "물론이지!"
  "우리들이 참가한 것이 관청에 드러나는 날에는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해 
봤니?"
  "물론 나도 그걸 생각하고 있어."
  "우리들은 더욱 심할 거야. 정부 직속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우리들은 그 
고마움 때문이라도 결코 정치적 시위에 참가해서는 안 될 것이야."
  이제야 우리들이 참가해야 되는지 안 해야 되는지의 큰 문제가 나타났다. 
우리들은 아무런 의무도 지우지 않고 우리들에게 고상한 학문을 가르쳐주는 학교가 
고마웠다. 우리들에게 국비로 여러가지 관광을 시켜주었고, 또 유명한 학자며, 승려, 
정치인에게 안내해 주었다. 
  익원은 오랫 동안 입을 다물고 심사 숙고하였다.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그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우리들도 우리 전 민족에 관계되는 일이 생긴다면 같이 해야지." 
  "그렇긴 해."
  "너의 의견은?" 
  나는 잠자코 있었다. 
  "제기랄."
  그는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같이 행동하자고 그는 말했다. 
  "말할 필요 있나."
  이튿날 저녁, 우리가 남운헌 식당에 도착했을 때 약 열 명 가까운 학생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시위 운동은 벌써 상당히 준비되어 있고, 다만 국립 학교 학생 
만이 모르고 있다고 상규가 말했다. 그들이 우리를 '반 왜놈'이라고 하며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긴장하여 상규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한명도 
빠짐없이 그 시위 운동에 참가하기로 의견이 일치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으며, 또 무엇을 일본 정부에 요구할 것인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은 참석하기를 원했다. 
  그 뒤 우리는 오랫 동안 우리의 유구한 문화와 우리 조상의 문화 유산에 대해서 
이야기하였고, 또 일본놈은 얼간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고들 말했다. 우리들은 맨 
처음 발명된 인쇄활자며, 거북선, 도자기 기술, 특별한 종이와, 우리들 조상이 이 
세계의 누구보다도 먼저 발견하였던 여러 가지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비교적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인 익원까지도 오랫 동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
  "잘됐어, 하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마치 우리 의과 전문 학교 학생들은 시위의 최후의 장해였던 것처럼 보였다. 
운동에 참여할 대중들은 멀지 않은 목적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상규는 우리에게 
시위에 대한 새로운 준비며, 국기며, 삐라며, 행진 질서 등에 관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첫 시위는 3월 1일 오후 2시에 종로의 탑골 공원에서 개시된다는 중요한 
보도가 들어왔다.
  그날은 말할 수 없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내가 잠이 깨었을 때, 익원은 
벌써 일어나 제복을 입고 서 있었다. 나는 그즈음 며칠 전부터 전염병 때문에 
결석을 하고 강의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정오에 공원으로 와." 
  그는 악수를 청하면서 말했다. 
  "그래야지, 거기에 만나 같이 시위를 해야지."
  "그렇고말고."
  그는 나가면서 삐죽이 웃었다. 우리들은 밤새 잠을 설쳤던 것이다. 그래서 납처럼 
무거운 고단함이 나를 이불 속에 파묻혀 있게 했고 일어나기가 매우 어렵게했다.
  내가 공원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경관들로부터 포위를 당하고 있었다. 담장 
내부는 단 열 발짝도 걷지 못하게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익원도, 다른 어떤 학생도 
그 근처에서 아무리 찾아보았으나 눈에 뛰지 않았다. 
  나는 담장 구석에 서서 학생들이 입구로 몰려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깊은 
정적이 감돌았고, 나는 누군가가 이 조용한 가운데 연단에서 독립 선언서를 읽는 
것을 보았다. 나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 되더니 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좁은 공원에서는 모두 전율하였고 마치 폭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공중에는 
각양각색의 삐라가 휘날렸고, 전 군중은 공원에서 나와 시가 행진을 하였다. 
  나도 한 장 받아서 선언문을 읽었다. 일본에 의한 한국 민족의 합병은 부당하며 
앞으로 효력이 없다고 쓰여 있었다. 한국인은 자유로운 민족으로서 자기 운명을 
자신이 결정할 권리를 소유하였으니, 그 권리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였다. 나는 몇 
번이고 선언서를 읽었으며, 행진 대열에 참가하였다. 공원 입구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한 뭉치의 삐라를 주면서 짧게 명령하였다. 
  "뿌려라!"
  길은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놀라고 질려 서 있다가 엉겁결에 삐라를 
받았다.
  "이제야!"
  몇 사람들도 부르짖었다. 여자들은 울며 감격하여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경관들은 개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내의 길을 완전히 개방하고 있었다. 다만 관청과 영사관에만 중무장을 
한 경관들이 학생들의 어떤 폭력 행위가 있지 않을까 하고 날카롭게 감시하고 
있었다. 
  저녁때에야 시위 행진은 방해를 받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행동의 자유는 점점 
좁혀졌다. 우리들이 행진하거나 행진하였던 구역은 경관과 병정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고 점점 폐쇄당하였다. 우리들이 프랑스 영사관 앞에서 '자유 민족'임을 
거리낌없이 선언한 다음 총독부로 행진하려 할 때, 우리들은 완전히 포위당하였다. 
도로는 차단되었고, 모든 도로의 양면에는 중무장한 경관이, 한가운데에는 병정들이 
네 줄로 서 있었다. 잠깐 동안 양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대치하고 있었으나, 곧 
병정의 전열에서 희게 빛나는 총검이 군중을 향해 돌진하였다. 
  맨 앞줄의 군중들은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었으나 뒷줄에서는 공포에 싸여 
후퇴하였다. 이로써 국면을 잃고야 만 것이다. 거기엔 비탄의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병정들은 이 순간에 우리들을 큰 도로에서 내몰았고, 
거기서 다른 분대가 우리를 다시금 몰아냈다. 
  나는 조금도 아치지 않고 곧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내가 다시 일어났을 
때는 이미 어두워 있었다. 그런데 익원은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를 찾으러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삼엄하였고 거의 
행인이 없었다. 어두컴컴한 길 양편에는 기관총을 든 병정들이 서 있었으며 잇달아 
검은 장갑차가 지나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샛길로 돌아서 동무들을 하나씩 찾았다. 
그러나 익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는 아무런 소득 없이 하숙집을 
한 집 한 집 들러보았다. 그러다가 순찰 중에 있는 상규를 어느 길모퉁이에서 
만났다. 그는 거의 모든 친구 집을 찾아다니면서 익원을 합하여 다섯 명의 동료가 
행방 불명이 된 것을 확인 하였다. 밤 열두 시가 지나 집으로 돌아왔으나 방은 
아직도 비어 있었다. 
  밤은 서서히 처량하게 지나갔다. 
  이튿날 아침, 상규가 익원과 다른 네 친구는 경상을 입고 감방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감금된 동무들에게 식사를 차입시켜 주려고 하였다. 
  그동안 민족 봉기는 바람과 같이, 대도시와 소도시에서 시장과 마을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다. 또한 고향에서는 다른 동무들과 함께 기섭과 만수가 감옥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대학생과 중학생 다음에는 상인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노동자와 농부들이, 마지막으로 한국인 관리까지 시위 운동에 참가하였다. 
총독부는 곤경에 빠져 계속 일본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군대는 10 년 전 우리 
나라가 합병될 때와 같이 낮이나 밤이나 행군하였다. 도처에는 살상으로 인해 
여기저기 붉은 피로 물들고 있었고,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 어느 마을에서는 전 
주민이 교회에 갇힌 채 그냥 불타고 말았다. 낡은 감옥과 유치장이 확장되고 새로 
건축되었으며, 경관들은 종일토록 고문을 하였다. 서울 학생들은 네번째 시위 후에 
지하로 잠복하여 비밀 운동을 시작하였다. 나는 삐라 제작하는 일을 맡기로 하였다. 
  동경 정부는 군사적 진압을 계속하였으나 총독 하세강와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사이토 해군 대장을 한국으로 보내어 사실적인 유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우선 
이제껏 세무원이었거나 교사였거나 통역관이었거나 의사였거나를 막론하고 제복을 
입고 일본 칼을 찼던 모든 관리를 무장해제시켰다. 민중의 공포의 대상이던 헌병은 
해체되고 경관들의 고문도 금지되었다. 한국인의 봉급은 일본인의 것과 같아졌고, 
언론의 자유가 선포되었다. 또한 한국인 학교는 일본인 학교와 평등하게 되었으며 
서울에 제국 대학을 창설하였다. 
  이상하게도 이 유화 정책과는 반대로 삼일 운동에 가담했던 자에게는 중형이 
가해졌다. 재판소는 소요자를 구형하기에 바빴고, 경찰은 운동의 모든 참가자를 
적발하고 체포하기에 분망하였다. 추격당하는 사람들은 외국으로 도망가야 했다. 
나는 학생복을 벗어 버리고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불안의 전 시기를 통하여 나도 몇 번인가 서울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은근히 어머니에게 보고하였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몹시 걱정하였다. 내가 겼고 
지내온 모든 것을 상세히 이야기했더니 어머니는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지난 한 달 동안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아주 
피곤하였다. 
  저녁때가 되어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오더니 침울한 얼굴로 말하였다. 
  "너는 도망쳐야 한다."
  "도망?"
  나는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무의식 중에 말했다. 나는 무서우리만큼 크고도 
불가피한 피로를 느꼈기 때문에 무엇을 깊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너는 달아나야 한다."
  어머니는 거듭 말하였다.
  "국경인 압록강 상류에는 아직도 경계가 그렇게 심하지 않다고 들었다. 
거기에서는 북쪽으로 도망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많은 학생들이 도망치다가 체포되었고, 또 
사살당했기 때문에 나는 도망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머니에겐 그 
위험은 별반 대단스럽지 않은 것 같았다. 어머니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국경선을 
넘는 데 성공하였고, 또 그곳에서 잘 살 수 있다고 말하였다. 나도 또 그렇게 하여 
국경 저편의 어디에서든지 여권을 만들어 나의 학문을 계속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여행하도록 힘써 보아야 했다. 
  유럽이란 말부터가 나에게 용기를 돋우지 못했다. 나는 유럽에서의 공부가 모든 
면에서 얼마나 어려우며, 또 언어 한 가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아시아 학생에게는 
만만치 않은 장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꾸만 반복하여 말하였고, 나는 어머니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어머니 말씀대로 도망쳐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언젠가 닥쳐올 위험 
속에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와 멀리 헤어져 있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시위 운동에 참가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이튿날 저녁, 어머니와 나는 이별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 더 머물러 있는 
것을 말렸다. 내가 국경을 넘기까지는 아무도 나의 출발을 알아서는 안 되었다.  
  어머니는 가벼운 양복과 은 회중 시계와 돈 보따리가 든 조그마한 버드나무 
고리를 주었다. 그것이 내가 어릴 때부터 그처럼 꿈꾸었던 다른 세계에의 여행에 
가져갈 수 있는 전부였다. 안개와 어둠을 무릅쓰고 어머니는 마을에서 나가는 길을 
멀리까지 바래다 주었다. 
  "너는 겁쟁이가 아니다."
  어머니는 오랫 동안 잠자코 걷다가 말하였다.
  "너는 자주 낙심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충실히 너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너를 
무척 믿고 있단다. 용기를 내라! 너는 쉽사리 곡경을 넘을 것이고, 또 결국에는 
유럽에 갈 것이다. 이 에미 걱정은 말아라. 나는 네가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겠다. 세월은 그처럼 빨리 가니, 비록 우리가 다시 못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슬퍼 마라. 너는 나의 생활에 많고도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자! 내 아들아, 
이제 너 혼자 가거라." 
    압록강은 흐른다

  나는 국경에 있는 커다란 강에 다다랐다. 도처에는 사람의 키만큼이나 큰 갈대가 
여기저기 서 있었다. 밭과 논은 매우 드물어서 나는 잘 통과할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도록 무장한 병정들이 순시하였고 총성이 울렸다. 도피자가 가장 
많이 왕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새벽에는 더욱 총성이 잦았다. 나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농부나 어부의 도움으로 다음 마을까지 인도되어 어떤 조그마한 어부의 
초가집에 닿았다. 거기서 사공이 강을 건네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음날 밤에는 나와 똑같이 강을 건너려는 두 학생이 왔다. 그들은 나보다 더 
어린 것 같았다. 창백하게 겁에 질려 있는 그 중의 한 소년은 열일곱 살도 채 안 된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앉아서 줄곧 앞만 응시하고 있었으며, 도망치려고 한 것을 
후회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 이튿날 밤에야 어떤 늙은 어부가 나타나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달빛이 밝아 쉽게 발견될 것 같아서 떠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사공은 달빛이 밝을 
때만 국경 경비가 그리 심하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그를 믿고 갈대밭 사이로 
난, 거의 알 수 없는 조그마한 길을 따라갔다. 이렇게 한 시간 남짓이나 도망쳐서야 
한 작은 숲에 닿았다. 
  사공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저만치에서도 비슷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두 어부가 나타나 우리들을 인도하여 갈대 사이를 한참 더 걸어 마침내 
강변에 도달하였다. 우리들은 깜짝 놀랐다. 여기 강물은 하구에 가까워서 강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마치 바다처럼 멀고도 넓었다. 우리들이 꼼짝 않고 서 있는 동안 
어부들은 한참 서로 속삭이더니 잠자코 통나무처럼 된 배를 뗏목에서 풀었다. 이 
배는 너무나도 작았기 때문에 두 사람만이 간신히 앉을 수 있었다. 
  한 어부가 우리들을 한 사람씩 일엽 편주에 태우고 넓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지극히 조용하고 소리없이 넓은 강 위를 노를 저으며 갔으므로 마치 영원에의 
항해같이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강 한복판에 들어섰을 때, 우리들은 멀리서 몇 방의 총성을 들었다. 나와 함께 탄 
어부는 웃으면서 잠자코 있으라고 손짓했다. 나중에야 그는 그것이 철교에서 
내리쏘는 경고의 총성일 것이라고 속삭였다. 빛나는 수면 위에서는 결코 우리를 
발견할 수가 없었으리라.
  우리들이 강 건너편에 도달했을 때에는 이마 한방중이었다. 어부는 우리들에게 
다음 중국 국경 도시까지 세 시간이 걸리는 길을 간단히 이야기해 주고는 작별했다. 
우리들은 잠시 동안 그대로 서서 세척의 배가 서서히 고국으로 노저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묵묵히 낯선 만주 땅의 자갈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중국 도시에 도착하여, 어부가 가르쳐준대로 한국 음식점을 오랫 동안 
고생스럽게 찾았을 때는 벌써 날이 밝았다. 우리는 곧 잠에 떨어졌다.
  그날 오후에 우리들은 서로 헤어졌다. 우리 셋 중의 가장 나이 어린 애는 
장춘으로, 나이 많은 애는 삼양으로 출발하였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중국의 거리를 걸어갔다. 사람들은 좁은 거리에 범람하였고 
금글씨로 쓰인 많은 간판이 걸려있었으나, 건물은 검고 사람들의 의복은 푸른 
빛이었으므로 음울하게 보였다. 이곳은 한국 도시보다 훨씬 더 생기가 있었고 
시끄러운 것 같았다. 도처에는 생소하고 이상한 냄새가 감돌았다. 
  나는 도시를 떠나 한 번 더 강을 보기 위하여 언덕으로 올라갔다. 조용히 푸르게 
빛나는 강은 저녁 노을에 잠긴 양쪽 언덕 사이의 모래밭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주 
가깝게 반 킬로미터도 안 되는 것같이 보였다. 나는 강 건너편 사람들의 얼굴을 
거의 알아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물을 널고 있었다. 부인과 처녀들이 집 
앞에 앉아서 저녁에 끊일 콩 껍질을 벗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아이들은 
장난치며 씨름을 하고 있었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고국을 이 무한한 만주 벌판과 분리시키고 있는 국경의 강은 
막을 길이 없이 흐르고 흘렀다. 이편은 모든 것이 크고 음침하고 진지하였으나, 
저편은 모든 것이 잘고 쾌활하였다. 언덕에는 빛나는 초가집들이 산재해 있었다. 
또한 많은 굴뚝에서는 벌써 저녁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멀리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산맥과 산맥이 연달아 물결치고 있었다. 산은 햇빛에 빛났다, 또다시 황혼의 
아름다운 빛에 물들었다가 서서히 푸른 이내에 잠겨 갔다. 나는 먼 남쪽의 골짜기며 
시내가 있는 수양산을 눈앞에 보는 듯했다. 소년 시절 언제나 저녁 음악을 들었던 
이층탑 건물도 눈앞에 선했다. 나는 한 번 더 저 남쪽에서 들려 오는 황홀한 음악을 
듣는 것처럼 착각에 빠졌다.
  소리없이 압록강은 흘렀다. 어느새 날은 저물어 어두워졌다. 나는 다시 언덕을 
내려와서 철도로 걸어갔다. 
  기차가 북쪽으로 달리는 동안 음울한 하늘이 무한한 평야를 덮고 있었다. 이 
드넓은 평야는 나를 무척 놀라게 하였다. 내가 고향에서 산과 언덕과 개울 그리고 
좁다란 협곡만을 보아 온 까닭이리라!
  나는 드넓은 평야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을 때, 언제나 약간 언덕진 것을 
상상하였지 이처럼 평평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런 고지(높은 땅)도 
저지(낮은 땅)도 없이 그냥 평탄하기만 했다. 어디선가 폭풍이 일어나 두꺼운 먼지 
구름이 몰려왔다. 나는 옛날에 몽고족과 만주족의 기마 대군이 어떻게 해서 몰려 온 
것인지를 상상할 수가 있었다. 남쪽은 하늘이 맑게 개어 창백한 달빛이 온 벌판을 
비치고 있었다. 
  만주의 수도인 심양도 역시 이러한 무방비 평야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그 육중한 
성벽은 무서운 성의 인상을 주었다. 중앙 아시아에서 불어오는 폭풍과 몽고 
사막에서 날려 오는 먼지에 둘러싸인 이 성이 바로 아시아의 절반까지 확장된 만주 
세력의 본거지였다. 
  나는 마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나는 거기에서, 이전엔 마적이었고 오늘날 만주 
지방을 낡은 제도로 지배하고 있는 장작림 장군이 살고 있는 궁전을 보았다. 성벽 
밖에 있는 처형장의 광경은 무섭기 짝이 없었다. 이 처참한 처형장의 한가운데에는 
처형 행위가 집행되는 큰 정자가 서 있었다. 그 주변에는 처형된 자의 묘가 있었다. 
묘 앞에는 한결같이 비와 먼지로 바랜 나무 묘비에 이름, 연령, 직업이 적혀 있었다.
  심양의 기차역에는 대합실이 있었다. 아무런 덮개가 없이 강한 정오의 햇빛이 
비치는 곳에 나를 북경으로 실어다 줄 황색 차량이 줄지어 서 있었다. 기차는 곧 
만원이 되었고, 으레 연발하는 기차의 출발을 기다렸다. 이미 가을인데도 날은 
무더워 점점 견딜 수 없었다. 기차는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 발차하였다. 이 급행차 
출발에 모두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자 곧 기차는 예상치 않았던 급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푸른 하늘 아래 옛날에는 중국과 만주간의 무인 완충 지대였던 
7백 마일의 요동 평야를 지나갔고, 밭과 집과 묘지를 지나갔다. 한번은 근처에 
항만이 나타났고, 또 한 번은 멀리서 산정과 산맥이 떠올랐다. 기차는 자꾸만 저 
오랜 역사의 중국을 향해 달려갔다. 
  저녁이 되었다. 승객들은 좁은 의자나마 몸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씩 
잠들기 시작했고, 또 차례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동안에도 기차는 발해만을 따라 
서쪽으로 질주했다. 한밤중에야 달이 반쯤 조명한 차내를 비치기 시작했다. 
  내가 잠깐 동안의 깊은 잠에서 깨었을 때, 기차는 이미 정거해 있었다. 내 옆에 
앉았던 사람은 움직이지도 않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랐다. 
아직 새벽의 반 어둠에 싸여 있었으나 높고 푸르게 빛나는 산이 하늘에 솟아 
있었고, 그 위에는 회백색으로 빛나는 담이 하늘과 닿아 있었다. 그것이 2천 년 
전의 위대한 제왕 진시 황제가 쌓게 한 만리 장성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전율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역사책에서 배운 것은 결코 전설이 아니었다. 2천 년 전,. 으레 
번영하는 나라에 침입하는 야만족을 방비하기 위해 돌멩이를 산 높이까지 짊어지고 
올라가 이 요새를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사람들이 저 위에서 일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낡은 성벽은 푸른 하늘에 점점 더 밝게 빛났다. 
  중국과 만주의 국경 도시인 산해관에 정거하였다. 관리가 여행자의 모든 짐을 
완전히 조사하기까지 한나절이 걸렸다. 모든 중국 사람은 처음에는 짐을 푸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물건만을 이야기했다. 관리는 그것을 참을성 있게 
듣고는 그래도 짐을 풀어야겠다고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요?"
  여객은 물었다. 
  "그 속에 아편이 들어 있지 않나 봐야 하오."
  "없습니다."
  중국인은 또 한 번 더 말하고는 웃었다.
  "그렇지만 짐 내용을 직접 봐야만 하겠습니다."
  관리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이 새 규칙이니까요."
  세 명의 관리가 마침내 우리 객차 안을 떠날 때까지 조사는 계속되었다. 우리는 
숨을 내쉬었다. 차는 서서히 전진하였다. 긴 절차를 통과해서는 조심스럽게 
이민족의 문지방을 넘었다. 만리 장성이 우리를 둘러쌌다. 
  나는 천진에서 북경으로 가지 않고, 시간을 아낄 심산으로 곧 남경행 기차를 탔다. 
북경도 또한 볼 만한 도시이긴 하나 나 자신은 북쪽에 위치한 중국의 기질보다는 
오히려 타타르 민족의 기질을 더 가진 이 도시를 보고 싶은 욕망이 컸다.
  남경행 열차에서 볼 만한 것은 잘 익은 보리밭 사이를 따뜻한 가을 햇빛 아래 
도도히 흐르는 강이었고, 붉고 푸른 돛을 단 수많은 돛배의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수나라의 향락적인 황제가 제국의 남쪽으로 향해하기 위하여 만들게 했다는 
바로 그 삼천리 운하였다. 
  그 배는 절세 미인이 비단 그물로 낮에는 천천히, 달빛 아래서는 더욱 천천히 
끌고 갔다고 한다. 그는 아마 그보다 이천 년 전쯤에 이 밭들을 방황하면서 
인류에게 사치와 명성을 경고했던 위인을 잊었으리라. 우리는 공부자가 탄생한 
노나라^56,36^지금의 산풍지방^36,23^를 달렸다. 그의 현명함 때문에 오늘도 
중국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평화스러운 민족이 된 것이다.
  나는 얼마나 공자의 묘에 가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의 묘에 참배하고, 적어도 
그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그렇지만 나는 나의 갈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나는 그가 한 번쯤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마을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축복 같은 가을 하늘 아래, 숲속에 숨겨져 있는 회색 지붕이며 누른 곡식 
이삭이며 나무와 관목이 있는 작은 언덕이 전개되어 있었다.
  다음날 저녁, 기차가 정거했을 때는 아주 캄캄하였다. 모든 사람이 기차에서 
내렸다. 어디에 와 있는지, 어디로 가서 바꾸어 타는지도 모르고 나는 그들을 따라 
내렸다. 나는 갑작스레 잠에서 깨었기에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한 사람씩 좁은 통로를 지나 어둡게 빛나는 물처럼 보이고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은 평판 앞에 섰다. 수없이 많은 배의 작은 불빛이, 알지 못할 어둠속에서 흘러 
내릴 것 같은 물 위를 흐르고 있었다. 나는 어떤 까닭 모를 전율을 느꼈다. 나는 
주저하면서 높은 건물을 돌아 선교에 가서 크고 빛나는 원청정에 '양자강'이라고 
쓰여 있는 글을 읽었다. 여기가 바로 그 역사도 오랜 양자강이었다. 
  조그마한 배가 한 척씩, 많은 여객을 태워 어두운 강으로 나가 남경을 향하여 
남으로 저어 갔다. 배 아래엔 그 많은 골짜기에서 흘러 내린 물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숱한 시인이 이 강을 찬양했다. 이 강물은 오미산 아래의 평야에서, 
적벽에서, 치산에서, 동정호에서 흘러 내렸다. 그처럼 자주 동정호에 관해서, 강남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던 나의 누이가 이 오랜 물 위에 내가 탄 배가 떠 있는 것을 
알기나 하랴? 그렇게 나를 위해 주던 어머니가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알기나 하랴? 그리고 그처럼 소동파를 이야기하던 아버지는 이미 
잠들어 대지의 품속에 계시고. 모든 것은 고요히 침묵을 지키고 어둠 속에서 
뱃전의 물소리만이 철렁거렸다.
  강을 건너자 수많은 목재가 깔리고 천장이 있는 길과 도로를 지나, 역마차가 나를 
어느 여관으로 안내 하였다. 이튿날, 우연히도 같은 집에 기숙하고 있는 고국 사람이 
남경의 여러 구경거리를 안내해 주었다. 이곳은 북쪽 도시에 비하여 모든 것이 
섬세하고, 생을 즐기고 있었고, 심양의 이중 삼중의 담 대신 이곳에는 운하와 
수양버들이 있었다. 북쪽에서는 힘센 병정들이 총을 들고 순시하는데, 여기서는 
섬세한 부인들이 배를 저었다. 가느다란 창살이 있는 집들, 날씬하게 올라간 지붕, 
운하에 걸려 있는 나무 다리는 물과 잘 조화되어 빛나고 있었다.
  오후엔 역마차를 타고 명나라 태조의 묘를 참배하러 시외로 나갔다. 이 황제는 약 
오백 년 전에 중국을 지배했고, 원제국이 파괴한 이전의 제국을 재건하였다. 그는 
애당초 걸식을 하는 중이었고, 그의 첫 귀의자도 역시 걸인이었다. 그러나 그 중은 
걸인이면서도 비밀 계획을 품었고, 또 그의 눈에는 때때로 아는 사람만이 아는 
초인적인 광채가 발했다. 
  한국에서 전해지는 전설은, 이 걸식승이 한국의 황해도 태생이라고 했다. 작은 
한국은 언제나 가능한한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그 중은 전 
한반도를 걸식한 다음 만주로 갔다. 여기서 유명한 이성계^56,36^자기 자신도 
중국의 길을 향하고 있는^36,23^를 만났다. 이 두 젊은이는 한 외롭고 늙은 여자가 
살고 있는 작은 집에서 날을 밝혔다. 노파는 두 사람을 떡과 술로 대접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가난한 노파는 매우 고귀한 술잔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금으로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으로 된 것이다. 장래에 자신 만만한 지배자로 
자처하는 이성계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금잔은 나에게 주고, 은잔은 저 거지에게 줄 테지.'
  그러나 노파는 이성계의 생각과는 반대로 하였다. 이성계는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위대한 사람이 조그마한 일 때문에 쓸데없이 굴 것인가? 이튿날, 이 두 
사람이 노파에게 하직하고 막 길을 떠나려 할 때, 노파는 이성계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저 사람 혼자 중국으로 가게 해라. 너의 길은 동방에 있다."
  이 순간 중은 작별하려고 돌아섰다. 그때 이성계는 그의 눈에서 초인적인 빛을 
보았다. 그 후 이성계는 한국으로 돌아와 왕조를 세웠다. 그때 그는 같은 시기에 
중국에 명 왕조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큰 범의 석상이 서 있는 곳에 도달할 때까지는 한 시간이 더 걸렸다. 석상으로 
둘러싸여 급경사가 진 길을 천천히 올라가서 여러 개의 대문과 마당을 지나, 거의 
산처럼 크고 앞을 가로막은 둥근 언덕에 닿았다. 
  석양녘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대숲을 지나 시내로 돌아왔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나는 젊은 남녀를 만났다. 그들은 이야기하며 노래를 
부르면서 산보하고 있었다. 수천 년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돌아가는 길의 남경 땅은 
얼마나 좋았는지. 어떤 버들가지도, 새소리도, 산들바람도 또한 어느 식당도 
나에겐 친숙한 것처럼 느껴졌다.
  저녁에는 그리 크지 않은, 녹색과 금색으로 단장된 아늑한 방에서 우연히 만난 
그와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그는 동양 사람이 잘 아는 중국 생활이며 남경의 
구경거리를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여기서 공부한 뒤에 이웃 도시에서 선생 
노릇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자정이 지나서야 우리는 작별하고, 나는 위층에 있는 
조그맣고 푸르게 칠해진 놋침대가 있는 침실로 올라갔다. 화장대와 흰 장롱과 
수놓은 양산이 좁은 방을 채우고 있었다. 
    중국의 하늘

  상하이에 도착하자 나는 한국 해외 유학생 고문을 찾아 유럽에 갈 나의 소원을 
이야기했다. 그는 말투로 보아 북쪽 사람인 것 같았고, 또 마음씨 좋게 생긴 중년의 
신사였다. 나의 출생지와 학력과 가정 사정을 묻더니, 중국 정부의 증명서를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다만 나에게 좀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만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정으로 친절을 베푸는 관리에게 독촉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너무 오래 계속되었다. 
  아름다운 가을, 날이 한 주일씩 자꾸만 흘러 가서 결국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지나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기가 시작된 것 같았다. 언제나 종일토록 아침부터 
밤까지 가랑비가 내렸다. 공기는 점점 더 서늘해졌고 나는 방에서 덜덜 떨었다. 
방은 한국처럼 밑에서 불을 때어 덥게 하지도 않았고, 화로나 난로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시내 주변을 산보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밭까지도 한 시간 이상이나 걸어야 했다. 왜냐하면, 대도시는 사방으로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도 심양에서도와 마찬가지로 평평하였다. 언덕도 시내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다못해 만주에서와 같은 폭풍우조차 없었다. 빗방울이 힘없이 
회백색 하늘에서 날려 와서는 검게 포장된 도로에 깔렸다. 
  저녁떼에야 서쪽 하늘이 밝아지고 약간 붉은 빛이 비췄다가는 곧 젖은 황혼에 
사라지곤 했다. 넓은 들판엔 안개가 급히 퍼져서 나무와 숲을 감싸고 나중에는 
길까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어찌된 셈인지 들판의 조그마한 돌무더기에 
있는 검게 옻칠한 관 만이 안개에 묻히지 않고 귀신처럼 떠올랐다. 그리고는 또 
비가 주럭주럭 내렸다.
  어느날 저녁, 종종 나와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한국 사람이, 나 이외에도 
증명서가 없어서 유럽으로 여행하지 못하는 몇몇 학생들이 있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실제로, 나와 똑같이 외로운 방에 앉아서 행운만을 기다리고 있는 네 명의 
한국의 학생을 차차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여름에 이곳으로 왔었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하여 프랑스로 가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의 반년 동안이나 허송하며 증명서를 기다렸다. 그 때문에 
용기를 잃어 여행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여기에 
머물러서 더 기다리는 것 이외에도 아무런 방도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매일 밤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장기를 두고, 몸을 데우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 또 그들이 많은 책에서 읽고 아는 프랑스의 생활에 관해서도 가끔 
이야기하였다. 그들 중의 봉운이라는 사람은, 그가 아주 어릴때 이미 프랑스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또한 독일의 몇몇 도시도 알고 있어서 만약 우리들이 
참으로 여행할 수 있다면 나를 독일에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당분간은 음울한 '파우강 거리'에 앉아서 우리는 장기를 두어야만 했다. 나날이 
우리들의 용기와 희망은 줄어들었다.
  겨울이 지나가고 어느새 봄이 되었다. 큰 여객선이 차례로 항구를 떠나 서양으로 
항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들에게도 기쁨의 날이 온 것이다. 우리들 모두 
증명서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위하여 물건을 사고 짐을 꾸리며 
밤이나 낮이나 준비를 하느라고 일대 혼란에 빠졌다.

  우리들이 차를 타고 항구로 향하는 들에는 흐린 햇빛이 비췄다. 우리들은 수많은 
사람의 홍수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는 큰 여객선을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우리들도 다른 사람들에 섞여 거의 끝이 없는 것 같은 계단을 
올라갔다. 수없이 많은 통로를 지나 마침내 우리들의 공동 선실이 있는 갑판에 
도달하였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손을 흔들어 소리치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우왕좌왕했다.
  깊은 고동 소리가 나더니 거선은 천천히 바다로 향하였다. 해변에서는 오랜 
여행을 축원하는 뜻으로 커다란 꽃불을 터뜨렸다. 손짓하는 사람들이며, 해변이며 
집들은 서서히 한 직선으로 뭉쳐 들어서더니 없어지고 말았다. 기적이 한 번 더 
울린 다음 기선은 양자강 강어귀를 떠나서 높은 파도 한가운데로 들었갔다. 하늘은 
누렇고 어둡게 덮여 있었다. 
  배는 적당한 바람과 지나가는 가랑비 속을 조용히 흔들려서 남쪽으로 항행하였다. 
저녁에 나는 송 왕조의 비극적인 종말을 머리에 떠올렸다. 
  전쟁에 차례차례 패하여 거대한 전 중국은 몽고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약한 
황실은 왕궁에서 다른 왕궁으로 도망치다가 결국에는 바다에 도달하였다. 무자비한 
몽고 장군은 추격을 계속하여 그의 함대는 황제의 배까지 접근하였다. 그 배에는 
공포에 떨고 있는 열두 살의 세자와 찬란한 송 왕조의 최후의 봉사자인 재상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낙양을 바라보다가 송 왕조의 옥새를 
자기의 가슴에 매달고 그 아이를 껴안아 함께 파도 속으로 뛰어내렸다.
  그것은 천 년도 훨씬 전에 남지나해^36,36^어쩌면 지금 우리들이 방금 지나고 
있는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거친 파도 위에 황혼이 깃들었다. 
외로운 정크가 우리 길을 가로 질렀다. 나는 선실로 내려 갔다. 
  소정의 여비에서 얼마쯤 할인된 여비를 지불한 우리들 극동 학생에게는, 배의 
머리에 있는 큰 화물실을 비워서 이른바 학생 선실로 고친 방이 할당되었다. 거의 
백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여기에 잠자리를 마련하여 누워 있었다. 어둠침침한 불빛 
아래서 나는 좁은 통로를 더듬어 왼편 깊숙한 구석의 내 잠자리까지 갔다. 여기에서 
모든 고향 사람들이 모여 항해가 끝나는 동안 같이 지내야 했다. 
  중국 학생과의 재미있는 대담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대의 중국말은 
우리들이 서당에서 배운 한문과는 완전히 발음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들 중의 한 
명만이 현대 중국어를 유창하게 했고, 나는 조금밖에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깊은 내용의 대화를 할 때는 자주 붓을 잡아야만 했다. 각 글자의 의미와 문장의 
문체만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발 후 3일 만에 사이공에 입항하였다. 우리는 상륙하였으나 좋은 안내자를 얻지 
못하여 별로 구경을 하지 못했다. 목적 없이 열대 식물이 울창한 공원 같은 곳을 
방황한 뒤에 우리들은 동물원에 도달하였다. 모두들 고단하였기 때문에 더운 오후의 
나머지를 여기서 지내고 말았다. 바람이 불어 시원해졌을 때에야 우리는 갈대밭 
사이의 보도를 걸어서 배로 돌아왔다. 나는 안남의 집들을 많이 못 본 것이 매우 
섭섭하였다. 이 나라는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와 너무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안남에 관해서 거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 일찍, 다섯 명의 안남 학생들이 우리들과 같은 선실에 함께 
있게 되었을 때의 나의 기쁨은 말함 수 없이 컸다. 안남에서도 사용되는 중국 
글자의 도움으로 나는 그들과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안남 학생들도 우리들이 
한국에서 온 것을 알자 매우 기뻐하였다. 오랫 동안 잠자코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들 중 한명이 펜으로 한국은 북쪽의, 안남은 남쪽 예의국의 관문이라고 썼다. 

    바다를 건너가며

  우리들이 탄 배가 남쪽으로 갈수록 날씨가 점점 더워졌다. 싱가포르 근처에서는 
햇빛이 곧바로 내리쪼여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지독한 더위가 나로 하여금 
아주 나쁜 눈병을 얻게 한 원인이리라. 
  어느 날 아침, 나는 잠에서 깨었을 때 두 눈을 무엇으로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내 두 눈은 몹시도 빨갛다고 했다. 나는 곧장 
선의에게 달려갔다. 그는 잠시 동안 검사한 후에 왠 진홍빛 약을 바르고 붕대로 꼭 
묶었다. 그는 나에게 무슨 병인가도 말하지 않고 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싱가포르에 상륙할 수가 없었다. 
  아픔은 계속되었다. 내가 의사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먼 빛으로나마 보기 
위하여 붕대를 풀었더니 염증은 더욱 악화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단지 눈앞에 반짝이는 빛만이 보였을 뿐이다. 아픔은 타는 것 같았다. 의사는 
햇빛에 의한 불필요한 자극을 피하기 의하여 오랫 동안 선실에 누워 있을 것을 
지시하였다. 나는 그의 충고에 순순히 응했고, 사실 시원한 선실이 바깥보다는 한결 
나았다. 나는 가만히 누워서 성난 파도 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이 
들고는 또 깨어 다시 파도 소리를 듣곤 했다.
  내가 다시 눈으로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 수마트라 해협을 지나 인도양을 
항해하고 있었다. 먼곳에나 가까운 곳에나 아무런 정크도, 섬도, 해안선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 팔방으로 짙은 청색 하늘 아래에 파도만이 있었다. 그렇더라도 눈을 
뜨고 누워 천막 그늘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즐거웠다. 한국 사람은 중국 
학생들처럼 책을 읽는 데 열중하지 않았다. 
  중국 학생의 대부분은 대개의 시간을 그들 숙소에서 마음대로 시원한 곳을 찾아 
책을 읽기 위해 머물러 있었다. 책을 들고 있지 않은 중국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 
반면에 책을 읽고 있는 한국 사람은 더욱 더 드물었다. 
  안남 학생들도 책을 읽긴 읽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락 소설이었고, 중국 
학생들처럼 교과서를 읽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읽고 있는 소설이나 이야기의 
일부분은 안남 말의 책이었고, 다른 일부분은 프랑스말의 책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책을 읽을 때는 잠자코 읽었으나, 안남 소설을 읽을 때는 반쯤 노래하듯 낭독하였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웃었다. 웬일인지 그 책 읽는 소리가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왜냐하면 북쪽에 사는 한국 사람도 또한 그처럼 읽기 때문이다. 
나는 고향을 생각했다.

  갑판 위에는 극동 학생 외에 싱가포르에서 탔을 것으로 보이는 인도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학생이 아니었고, 따라서 우리 선실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일등이나 이등 선실에 속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언제나 갑판 위에 있었고 
그 위에서 잠자코 식사하였다. 그들은 한 젊은 부인과 두 백발 노인, 그리고 한 늙은 
부인이었다. 갑판 한가운데 자리를 잡아 짚과 담요로 살 만하게 만들어놓았다.
  오랜 옛날, 7백 내지 8백 년 전에 많은 한국 학자들이 불경의 원천을 캐내기 
위하여 인도로 갔었다. 그들은 우선 전 만주, 몽고, 쿠쿠놀, 티베트 고원을 2 년 
이상이나 걸려서 '서역의 경이의 나라'에 도달하기 위하여 걸었다. 이 방황자의 
대부분은 아마 도중에서 죽었을 것이며, 그 중 몇 명만이 다행히도 히말라야 산맥을 
넘을 수 있었으리라. 마침내 경이로운 열대 세계에 도달하여 금빛 전각 앞에서 
인도의 현자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의 심경을 어찌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갑판 위에 있는 인도인은 퍽 조용한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잠자코 앉아서 
종종 속삭였고,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는 파도의 무한한 넓이를 부동 자세로 보고 
있었다.
  콜롬보에서는 비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잔교로 달려가 실론 
섬을 소개하려고 하는 안내자를 따라갔다. 사이공에서는 안내자가 없어 구경을 못 
했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들과 섞였다. 많은 사람의 무리가 천천히 시내로 움직였다. 
도시는 조그마한 인도의 상점 외에는 유럽 양식의 집들이 서 있어서 서울이나 
상하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우리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으나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배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침내 시내를 
벗어나 대나무 못과 종려나무 재배지를 지나 어느 큰 집이 외로이 서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물관이라고 했다. 거기엔 수천 주의 불상이 서 
있었다. 안내자는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설명하고, 우리들은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완전히 피로해질 때까지 안내자를 따라다녔다. 
  우리들 사이에는 많은 예술가와 승려가 있었다. 이들은 이 짧고 귀중한 시간을 
불상 연구에 바치려고 하였는지도 모른다. 관람객의 대부분은 설명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불상을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서든지 조용히 
서기만 하면 곧 주머니에서 안내서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는 저 귀찮은 팁의 문제가 
일어났다. 그것은 안내했던 시간보다도 오래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리고는 출범에 
늦지 않기 위하여 숨가쁜 걸음으로 우리는 배로 돌아왔다. 
  이튿날은 구름을 쓸어버힌 것처럼 하늘이 깨끗하고 맑게 개어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순수하게 짙은 푸른색 하늘에서 태양이 비쳤다. 갑판은 거의 비어 있었다. 
더위를 잘 견디는 것처럼 보이는 인도 사람들까지 모두가 시원한 선실에 남아서 
책을 읽었다. 저녁이 되자마자 갑판은 활기 있어 보였다. 배에 모여 있는 모든 
민족의 여행자들이 갑판으로 나와서 각기 자기들대로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국 사람들끼리도 다섯이 모여 말 잘하는 김씨의 자기 고향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고향 사람 하나가 약간의 술과 얼마 안 되는 프랑스 과자를 준비해 왔다. 
우리들은 차례로 저녁 이야기 때에 약간의 먹을 것을 가져오는 것이 몇 주일 전부터 
습관이 되어 있다. 이 과업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술과 기타 음료는 식사때 
곁들이는 것으로, 마개를 딴 뒤에 제공되었고, 이때 외에 더욱이 저녁에는 기타 
기호품의 판매는 허락되지 앉았다. 우리들은 우리 중의 누구 하나가 거짓 발작을 
일으켜 식당 보이에게 강장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믿게 하기엔 여간 설득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얼마 되지 않은 배당에도 우리들의 기쁨은 더욱더 컸다. 
  한때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고도 송도에서 자라난 김은 유명한 집안의 수많은 
일화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차례로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들은 뱃머리의 아주 가까운 다리 께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장소였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파도 소리에 섞였다. 우리는 
학문적인 이야기로 깊이 파고드는 중국 사람도 방해하지 않았다. 안남 사람들은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그들의 숙소는 많은 상자로 만들어져 있었다. 
한국어, 중국어, 인도어가 하나의 독특한 소리의 혼돈으로 짜여졌다. 때때로 일제히 
조용해졌다가는 또 벌집처럼 와글거리곤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한 사람 한 사람 잠들기 시작하였다. 다만 우리 김씨만이 고향에 관해서 
조용히 이야기했고, 여객선 폴르카 호만이 달빛 밝은 인도양의 어느 곳을 향해하고 
있었다. 
    마르세유 항구

  배는 지부티에 기항하였다.
  이런 괴상한 이름은 내 평생 처음 들었다. 나는 우리 배가 석탄 때문에 이 
외떨어진 아프리카 한 모퉁이에 입항한다고 들었다. 이 항구는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래가 깔린 언덕에는 입구에 종려나무가 두 그루 서 있는 흰 집 한 채만이 
있었다. 사람들은 일사병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불과 몇 사람만이 상륙하였다.
  한국 사람들도 오랫 동안 궁리한 끝에 조그마한 보트를 타고 나무 한 그루 없는 
타는 듯한 해안을 건너 갔다. 직사 광선 아래의 모든 것은 비참하게 보였다. 돌로 
쌓은 제방이며 모래 언덕이며 조그마한 정원을 뒤로 한 카페에서는 흑인 아이들이 
부채질하고 있었다. 우리는 계속 육지 내부로 들어갔다. 우리는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이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한 작고 외로운 집 앞에 섰다. 이것은 마치 인도의 학교처럼 보였다. 
늙은 한 인도인이 벽 가운데에 앉았고, 약 스무 명의 어린이들이 벽을 따라 입구에 
이르기까지 앉아 있었다. 모든 어린애 앞에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손으로 
쓴 독본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원주민 마을에 갔다. 두 줄의 집들이 좁은 거리에 서 있을 
뿐이었고, 길은 햇볕에 타고 있는 사막에서 다른 사막으로 향해 뻗어 있었다. 집 
안팎에는 흑인 남녀가 서서 그들의 크고도 맑은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좁은 거리로 갔다가 속히 되돌아왔다. 사막 한가운데의 이 마을은 얼마나 
외로워 보였는지 몰랐다. 우리들은 입구에서 다시 한번 돌아보고 곧 우리 배로 
돌아왔다. 
  그곳엔 졸졸 흐르는 시내도 없고 과일 나무도, 물결 치는 곡식 밭도 없었다. 다만 
두 개의 빈약한 그늘을 지워주는 집의 대열만이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고요한 달밤에 무엇을 생각하는지. 
  우리는 홍해를 항행하였다. 어느 이른 아침 봉운이 나를 깨워 갑판으로 
인도하였다.
  "시나이 산."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아주 먼 거리에 검푸른 빛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산정을 
가리켰다. 
  그날 밤, 우리들의 배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였다. 큰 여객선은 모래 언덕 사이의 
좁은 물길을 고생스럽게 간신히 지나갔다. 좌우로 쓸쓸한 풍경이 창백한 달빛 
아래에 전개되었다. 천천히, 우리들이 걷는 것보다도 별로 빠르지 않은 속도로, 휘황 
찬란한 창을 수없이 가진 배가 처참한 빈 사막을 미끄러져 갔다.
  점차로 공기는 험악해졌고 파도는 높아졌으며, 때때로 시원한 바람이 갑판 위에 
불었다. 다시금 봄이 왔다. 배는 고요히 흔들리면서 짙은 청색의 지중해의 하늘 
아래로 나아갔다. 북쪽에는 크고 작은 섬이 나타났다. 
  봉운이 나에게 속삭였다. 
  "그리스 섬들이다."
  그때 나는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그리스!"
  나도 부르짖었다. 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을 비록 멀리에서나마 
바라보았다. 산호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안개에 싸인 채 그것들은 유럽 해변을 
따라갔다.
  오후 늦게 파도는 높아졌다. 해는 두꺼운 구름 뒤로 사라졌고 점점 더 
어두워졌다. 선원들은 돌아다니며 곧 태풍이 닥칠 것을 알려주며 선실로 들어가기를 
권했다. 곧이어 굵직한 빗방울이 떨어졌고, 파도가 심하게 출렁거렸다. 차차로 
갑판은 비었고 태풍이 불어왔다. 거선은 자꾸만 더 기울어지고, 바다의 거품속에 
마치 호두 껍질처럼 춤을 추었다. 배의 반이 파도에 잠기고는 곧 올라와서 다시금 
깊이 가라앉으려고 하였다. 선실에서는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배도 
신음하고 '키이! 키이!' 소리를 내면서 폭풍우와 싸웠다. 그것은 밤새 계속되었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제껏 한 번도 그런 폭풍우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에는 모든 것이 마치 환영처럼 사라졌다. 해가 빛나고 
바다는 거울처럼 잠잠하였다. 배는 아무런 요동 없이 떠갔고, 시실리 섬의 
에트나(이탈리아 시실리 섬의 활화산)에서는 봄바람의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우리들의 배는 유럽 땅을 밟기 위해 점점 더 육지에 접근하였다. 기선은 
메시나(시실리 섬에 있는 도시) 해협을 지났다. 산이 가까워졌다가는 멀어졌다. 
집들이 서 있는 언덕이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햇볕 든 밭에서 일하는 
농부를 보았다. 기차가 해변을 따라 터널로 들어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마침내 
유럽 땅을 밟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감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들이 마르세유 항구에 입항한 것은 정오 조금 뒤였다. 그러나 잔교가 내려져 
2천 명이 넘는 긴 대열이 천천히 움직이기에는 무한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극동에서 온 우리 학생들은 아직도 함께 머물러 각자의 짐을 든 채 유럽 땅 위에 서 
있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다려야만 했다. 프랑스에 있는 중국 학생회 회장이 
우리들을 인수하여 도와주기 위해 이리로 온다고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우리를 
어디로 안내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 같았다. 우리들은 오랫 동안의 상의 끝에 먼 
길을 행진하여 어떤 미지의, 학교처럼 생긴 건물의 큰 운동장에 도달하였다. 여기서 
회장은 긴 인사말 뒤에 우리들에게, 객지의 풍속과 습관을 존중할 것이며 오천년 
문화 민족의 후손으로서 모든 일에 신중히 행동해야 된다고 충고하였다. 공자라도 
낯선 나라에 가서는 그 나라의 풍습대로 살아야 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이 연설 후에 우리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방에 불려가서 많은 귀중한 충고를 
받았다. 거기서 우리들은 증명서와 성적 증명서 및 가지고 돈 재산을 제시했고 체재 
허가를 얻었다. 그리고 여러 프랑스 대학의 보도와 그 외 유용한 서류를 얻었다. 
그리고 한 그룹씩 학교 운동장을 떠났다. 
  봉운과 나 둘의 차례가 되어서 짧은 상의 후에 나왔을 때는 이미 저녁이 다 
되었다. 봉운은 나를 독일에 데려다 주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얼마나 고마워해야 할지! 우리는 프랑스에 머물려고 하는 다른 모든 
길동무들과 작별하였다. 나의 두 고향 사람만이 계속 영국으로 여행하려고 하였다. 
우리들은 작은 식당에 들어가서 우리들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상의하였다.
  봉운은 나에게 처음으로 파리 시가를 구경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독일에서 
학습을 시작하면 후에 이런 기회가 오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거절하고 오늘 밤으로 독일로 여행하기를 원했다.
  저녁이 되자 뭣인지 모를 커다란 비애가 나를 엄습하였다. 나에게는 그것이 유럽 
땅 위에서의 첫 황혼이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내가 공부할 곳인 나의 목적지에의 
길을 떠나고 싶었다. 봉운은 한참 동안 지도를 들여다보더니 리용, 디종, 
스트라스부르를 통한 길을 선택하였다.
  우리들은 역에 가서 곧 출발하는 기차를 탔다. 나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한 늙은 
부인 옆에 조용히 앉았다. 봉운은 프랑스 사람 사이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는 곧 
잠이 들었다. 
    꽈리에 붉게 타는 향수

  날은 다시금 밝아졌고 우리 둘만이 찻간에 있었다. 다른 여객들은 이미 밤새에 
내린 것 같았다. 밖에는 아직도 어두운 아침 햇빛 아래 밭과 시내와 마을과 
언덕들이 마치 돌아가는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기차는 흔들리지 않고 북으로 달렸다. 
  "야, 이것이 유럽이다!"
  봉운이 소리치고는 웃었다. 그는 다시금 여기에 온것을 매우 기뻐하면서 우리들이 
보는 밭, 집, 교회, 옷,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프랑스에는 회색 지붕이 많고, 독일에는 붉은색 지붕이 많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프랑스 사람과 독일 사람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몇 번이나 바꿔 탔고, 저녁때에야 라인 강을 건너 밤새 달려 이튿날 아침, 
비로소 내가 처음에 머울러 있게 될 중부 독일의 작은 도시에 도착하였다. 봉운이, 
처음 유럽에 왔을 때 여기서 얼마 동안 살았으며, 나에게도 대도시보다 쉽게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질 수 있고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해 주었다. 우리들은 
큰 공원 같은 곳을 지났다. 비현실적으로 엷은 녹색이 아침 햇빛에 범람하고 
있었다. 강을 건너고 옆길로 접어들어 잠깐 걸으니 봉운은 어느 정원 문앞에 섰다.
  "이젠 다 왔어."
  봉운이 웃으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벨을 눌렀다. 이윽고 한 
부인이 나타나 봉운과 반갑게 재회의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안내하여 일층의 넓은 
방으로 인도하였다. 그런 뒤 내가 이해 할 수 없는 오랜 상의가 계속되었다. 마침내 
봉운이, 나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겠노라는 그 부인의 말을 전했다. 
  일주일 동안 그는 내가 익숙해지는 것을 돕기 위하여 나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는 
그는 밤차로 다시 프랑스로 갔다. 우리들이 함께 정거장에 갔을 때, 그는 내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독일의 풍속과 습관을 한 번 더 일러주었다. 봉운은 
무엇보다도 내가 많이 이야기하기를 권고하였다. 
  "너는 너무 말이 없고 너무 많이 생각한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침묵은 오래된 동방에서는 아직도 미덕으로 인정되나, 서방에서는 그렇지가 않아. 
여기선 그게 비사교성의 표시로, 심지어는 거만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언제나 
이야기하는 데에 섞여 같이 대화를 나누어라. 무엇에 관한 이야기든간에. 날씨나 
기후나 또는 음식이나 옷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과 사교하는 동안에는, 땅에서 
살고 있는 이상엔 언제나 철학적인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단다. 유럽 
사람도 땅위에서 살고 있으며 즐겨 세상 이야기를 한다."

  그의 고마운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야기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의 어휘는 
아직도 지극히 적었기에, 말이 서툴러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해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였고 봉운이 
독일어 학습에 좋다고 권한 책만을 파고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읽은 책은 '녹색의 하인리히'였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였기 
때문에 봉운은 나에게 권고한 것이었다. 나는 이 책까지도 천천히 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항상 매 구절마다 단어를 찾아야 했고, 또 어려운 문장은 그 뜻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하여 오랫 동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아무도 설명조차 해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매일처럼 눈이 피로하여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읽고는 생각하고 또 읽고는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눈이 아프면 책을 
밀쳐놓고 짐시 동안 휴식하였다. 나는 서편 창문으로 정원을 넘겨다 볼 수가 있었고, 
그 녹색이 나의 눈을 빨리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는 
한 줄 한 줄 고생스럽게 또 읽어 나갔다. 
  밖은 온통 여름이었다. 정원이며 길에는 꽃이 피었고 향기가 그윽하였다. 
  그러나 나는 내면적인 안정이 없었으므로 산보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쯤 학문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 이 어려운 말을 배우게 될는지 몰랐다. 밖에서 사람들과 
만나면 아직도 낯선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 생생하였다. 늦은 저녁 시간, 모든 것이 
조용해지면 나는 시내를 따라 거닐거나 버드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았다. 조용히 
흐르는 물의 광경은 나를 기쁘게 하였다. 시내는 가볍게 찰랑거리며 내 앞을 흘러 
내렸다. 나는 언제나 저 물이 자꾸만 흘러서 결국은 한국 서해안에, 어쩌면 
연평도에, 어쩌면 외로운 송림만에 닿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방학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푸른 하늘 아래 이 섬과 이 포구가 스쳐 지나갈 
때면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곧 북편에 암석 많은 수양산이 
솟아올랐고, 조그마한 기선은 조심스레 용지에 들어갔었다. 나를 배에서 데려가기 
위하여 기섭, 용마 그리고 만수가 와 있었다. 이 친구들과 다시 만나 웃으며 
농담하며 고향의 들을 건너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우리 마을을 찾아갈 때에는 
얼마나 기뻤던지. 어머니는 대문에 서서 나를 맞아들였다.
  "너는 다시 이 에미한테로 돌아왔구나."
  어머니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어머니가 즐겁게 웃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던지.
  그리고는 우리들, 나와 동무들은 매일 산 위 못에서 목욕했고, 모교 운동장에서 
정구를 했으며, 저녁에는 우리 집 마당에 모여 앉아 이야기했고 또 노래했다. 만수는 
황홀하게 피리를 불었다. 용마는 그가 갓 읽은 톨스토이의 소설을 곧잘 이야기했다. 
기섭은 언제나 조용했으며 다른 사람 이야기만 들었고 또 웃었다. 세 사람이 다 
우리 어머니를 아주머니라 불렀다. 종종 마음씨 좋은 구월을 채전으로 보내어 익은 
오이며 수박을 따오도록 했다. 내가 동무들과 모여 앉아 있을 때면, 어머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기쁘게 생각하고 즐겨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지금 어머니는 뭘 하고 계실까! 주무시고 계시는지 깨어 계신지. 빈 마당에 홀로 
앉아 고독의 감정에 잠겨 계시는지, 지금도 이 담이 작고 약한 아들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이젠 어머님이 알지 못하는 멀고 먼 다른 세상에 있어 더 보호할 수 없는 
이 아들을! 
  어디서나 달리아가 피었다. 그것은 석양에 황홀하게 빛났다. 나는 첫번 책을 이미 
다 읽었고 이젠 '명상시'를 읽고 있었다. 이 책은 첫번 책보다 훨씬 나았다. 
왜냐하면, 이젠 단어를 찾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가을이 빨리 다가왔다. 아침과 저녁은 이미 싸늘하였다. 저녁 노을이 시내 위에 
걸렸고, 길에는 언제나 낙엽이 바람에 휘날렸다. 나는 어머님이 경작지에 가 
계시리라고 생각했다. 벌써 가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송림의 돌다리 
아주머님에게 가 계시는지 아니면 강물의 수암의 집에 가 계시는지, 산촌 석탑에 가 
계시는지? 석탑 마을에서는 밀만 생산되었고, 너무나 산중에 있어 들어가기 힘들어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오랫 동안 좁고 경사진 길을 걸어야만 했고, 또 
넓고도 돌 많은 냇바닥을 건너야만 했다. 
  나는 날마다 한 번씩 고향에서 소식이나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우체국에 
가보았다. 그러나 언제나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고, 내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내가 유럽에 도착한지 벌써 5개월이 지났기 때문이다. 나는 내 편지가 한국으로 
배달되지 않은 것 같았고, 또 해마다 고향에서의 아무 소식 없이 이 곳에서 살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언젠가 우체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알지 못하는 집 앞에 섰다. 
  그 집 정원에는 한 포기 꽈리가 서 있었고 그 열매는 햇빛에 빛났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그처럼 많이 봤고, 또 어릴 때 즐겨 갖고 놀았던 이 열매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였던지. 나에겐 마치 고향의 일부분이 내 앞에 현실적으로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 집에서 어떤 부인이 나오더니 왜 
그렇게 서 있는지 물었다. 나는 가능한 한 나의 소년 시절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그 
부인은 꽈리를 한 가지 꺾어서 나에게 주었다. 나는 얼머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얼마 후에 눈이 왔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성벽에 흰 눈이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흰 눈에서 행복을 느꼈다. 이것은 우리 고향 마을과 
송림만에 휘날리던 눈과 같았다. 
  이날 아침, 나는 먼 고향에서의 첫 소식을 받았다. 나의 맏누님의 편지였다.
  지난 가을에 어머님이 며칠 동안 앓으시다가 갑자기 별세하셨다는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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