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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외)

by Casey,Riley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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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은 흐른다(외)
이미륵

  
    수암
  수암-그것은 나와 함께 자라난 내 사촌형의 이름이다.
  내가 아직껏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 서로의 첫 경험은 별반 즐거운 것은 아니었
다. 그 당시 우리들의 나이가 얼마였는지는  생각나지가 않는다. 그때 아마 내 나이가  다섯 
살이었고, 수암은 여섯 살 반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저녁, 우리들은 가느다란 꼬챙이로 한문(漢文)책의 어려운 글자를 짚고 있는 아버
지 앞에 함게 앉아 있었다. 수암은 그 글자의 뜻을 알아내어야만 했다. 그는 아침 나절에 배
웠던 그 글자를 지금 벌써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같이  보였다. 아버지가 연거푸 물었는데도 
그는 꿀벅은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기만 했다.
  나의 아버지는 공명심(功名心)이 많은 사람으로, 이미 죽은 아우의 아들에게 그처럼 어려
운 한문을 일찍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글자는 채소를 뜻한다. 한자로는 djEJgrp 읽지?"
  성미 급한 스승이 다시 물었다. 
  "채(菜)!"
  수암은 재빨리 대답했다.
  "잘했다!"
  아버지는 그를 칭찬한 다음 
  "다음 글자는 어떻게 읽지?"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나 이것은 첫 번 글자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았다.
  수암은 입을 꼭 다문 채 눈을 내리깔고 방구석을 여기저기 곁눈질하면서 난처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나는 그를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그 글자를 읽을 수 없
었기 때문이다.
  "야, 이 바보 녀석아!"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수암의 가느다란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신기하고 여려운 문자를  적셨
다. 그것은 나를 너무나도 슬프게 했다.
  수암은 나의 어릴 때의 동무였다. 우리는 늘 함께 놀았고, 아침 저녁도 같이 먹었고, 어디
든지 함께 다녔다. 우리집에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나에게는 누이가 셋이나 있었고, 수암
에게는 누이가 둘 있었다. 그래서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리고 또 구월(九月)이란 애가 있었
다. 그녀는 방 소제며, 애기  보는일이며, 모든 것을 도맡아하는  하녀였지만 역시 어린것들 
축에 끼어 있었다.
  그들은 다 우리들보다는 나이가 들었고, 서로 같이 놀 수 없는 계집애들이었다. 그래서 우
리 둘만이 항상 함께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기엔 우리는 다 같이 짙은 갈색 옷고름이 달
린 미색 저고리와 회색 바지를 입었고,  또 모양이 같은 검은빛 가죽신을 신었었다.  수암의 
나이가 나보다 겨우 반 년밖에 많지 않아서 우리들의 모습이 그처럼 달리 생기지만 않았던
들 서로 혼동되어 쌍둥이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수암은 뚱뚱하고  거친 살결을 한 조그마한 
사내아이였고, 제법 평평한 볼에는 도도록하게 살이 올라 통통했다.
  그는 유난히 남들의 눈에 띌 정도로 엷은 눈과 거의 입술이 없는 입과 예쁘장한 코를  하
나 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반대로 삐쩍 마르고, 눈은 큼직했으며 코도 제법 큰 편이었다.
  그러나 아리들은 따로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eksWKr이었다. 웃을 때는 거의 같이 웃었고 
울 때도 같이 울었다. 
  천만다행히도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서 우리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애들을 너무 꾸짖지 말아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 다음,
  "학교에 가면 어련히 배울 것 아니에요!" 했다.
  우리는 가까스로 구제되어 그 방에서 풀려 나온 것이었다.
  
  우리들이 매일 뛰노는 뒤뜰에는 태양이 잘 비치었다. 이 조용하고 넓은 뜰에서 우리는 아
무 방해도 받지 않고 잘 놀 수 있었다. 낮에는 아무도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날이 무덥기만 하면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뛰어다닐 수도 있었다. 이 
마당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이웃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들여다볼 수 없었
다. 그리고 야채를 뜯으러 이리로 종종 오는 누이들이나  하녀인 구월이 앞에서도 우리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수암은 길고 곧은 호를 파서 내가 날라다준 넓적한 돌로 그 위를  덮었다. 그는 이 ㅎ ㅗ
의 한 쪽을 더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다른 쪽에는  굴뚝을 만들어 세웠다. 그리고 아궁이에
다가 마른가지를 때면서 연기가 굴뚝으로 빠져 나가는가 어떤가를 바라보았다. 우리들은 연
기가 굴뚝만을 통해 하늘 높이 오를 때까지 돌 틈을 모두 흙으로 메웠다. 그것은 수암이 내
게 가르쳐준 재미나는 '놀이'였다. 수암은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결코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착하고도 영리한 아이였다.
  또 한 번은 그는 우리 고장에서는 어떤 아이들도 알아야만 하는 잠자리채 만드는 법을 내
게 가르쳐주었다. 가느다란 버들가지를 휘어서 동그라미를  만들어서는 길다란 장대에 단단
히 동여맸다. 이 잠자리채를 들고 우리는 거미줄을 찾으러다녔고, 끝내 그 채를 거미줄로 꽉 
채웠다. 예쁜 잠자리가 ㄴ라아가는 것을  보자마자 이 잠자리채를 들고  쫓아가서는 되도록 
날쌔게 휘둘렀다. 수암은 종종 운이 좋게도 곧잘 잠자리를 잡았고, 또 조심스럽게 그놈을 그
물에서 떼냈다. 그가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잠자리의 가슴팍을 꼭 잡으면, 이 잠자리는  제 
꼬리가 물릴때까지 꼬리를 안쪽으로 꼬부렸다. 또 수암은 풍뎅이(黃金蟲)를 잡으면 넓고 반
들반들한 돌 위에 거꾸로 뒤집어놓고 오랫동안 날개를 파득거리며 이리저리 뱅글뱅글  돌게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여간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뛰놀다 지치면, 우리들은 짚단을 깔고 앉아서 햇볕을 쬐었다. 이곳 뒤뜰에는 우리들  놀이
터 외에도 채소밭과 물이 말라버린 얕은 우물과 큼직한 창고가 있었다. 울타리 옆으로는 봉
선화가 빨갛게 피었었고, 채소밭에는 오이며 참외며 호박 등이  흰꽃과 노란꽃으로 보기 좋
게 덮여 있었다. 수많은 붉은 열매가 여는 큰 석류(石榴)나무도 그곳에 서 있었지만 열매가 
너무 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따지 않았다.
  우리집은 뜰이 많았다. 뒤뜰은 집 뒤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원형으로 지어진 본
채는 방이 여럿 개에 부엌과 마루가 있었고, 중간 뜰이 있으며 여자들이 기거하는 안마당이 
딸려 있었다. 그곳에는 화분들과 오리집과 비둘기장이 있었다. 본채 앞에는 중문(中文)이 달
린 낮은 담으로 갈라져서 두 개의 뜰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는 집 오른쪽
에, 우물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 우물뜰이 있었고 , 그리고 높은 대문과 손님이 드는 사
랑채로 둘러싸인 왼쪽 들을 바깥뜰이라고 부렀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뒤뜰에서만 놀 수 있
었다. 
  날씨가 좋은 어느 날 오후에 수암은 놀이를 그만두고 나를 안뜰로 데리고 가서 깊숙하고
도 어둠침침한, 이른바 식모 방으로 끌고 갔다. 이전에는 우리들은 이 방을 거의 눈여겨보지
도 않았다. 나는 수암이 언제나 신나는 이릉ㄹ 궁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좋아
서 그를 따라갔다. 거기서 그는 한참 동안 높은 장롱 앞에 서서  그 위에 놓여 있는 번쩍거
리는 갈색의 단지를 유심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전에 이  단지를 본 적이 있었으나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수암은 배게를 여러 개 가져다가 탑처럼 쌓아올리
고 장롱에 기어오르려고 했다. 그 때 나는 밑에서 할 수 있는 대로 그를 도와주었다. 한국의 
베개는 평평하지 않고 길다랗고 둥굴었으므로  그는 몇 번이고 나둥그러졌다.  그래도 그는 
종내 그만두지 않고 끝내는 장롱 위에 올라갔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위에 가만히 서 있었는
데 그가 입맛을 다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거기서 뭘 먹느냐고 나는 물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입맛만 다셨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야 나에게 꿀을 좀 내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오른손을 단지 속에 깊이 넣었다간 왼손으로  장롱 모서리를 단단히 잡으면서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그러나 결국 위태위태하여 쌓아놓은 베개가 무너지는 바람에 그는 방
바닥에 나둥그러지고야 말았다. 수암은 꿀 묻은  손으로 여기저기를 붙잡으면서 허우적거렸
기 때문에 먹음직스런 누런 빛깔의 꿀은 손에만 별만 남지  않고 말았다. 그런데도 내가 그
의 손을 말끔히 핥았을 때, 우리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좋
아서 그 방을 나왔다. 
  저녁때 우리들은 저지른 죄의 벌(罰)을 받아야만 했다. 우리들은 별써 이불 속에 누워 있
었다. 수암은 자기 어머니 방에, 그리고 나는 우리 어머니 방에 누워 있다가 우리 둘은 난데
없이 불려나갔다. 단맛이 나는 참외나 배나 무슨 것을 주려나 하는 기대에 부풀어 어머니방
이라고 불리는 큼직한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집안 여인들이  못마땅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집안일을 돌보는 구월이는 이 베개  저 베개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서 혀를 끌끌 찼다. 그때두 어머니들은 우리들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수암은 잔뜩 풀이 꺽여 
절망적으로 나를 쳐다보며, 베개에 뭐 묻은 것이 우리들의  비밀을 드러냈다는 것을 알려주
었다. 수암의 어머니인 숙모가 우리더러 장롱에 기어올랐는가 물었다. 수암은 입을 꼭  다물
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우리에게 벌으 ㄹ주려고 참대  회초리를 든 자기 어머니를 매섭
게 흘겨보았다. 숙모는 우리를 회초리로 때리지  않고 그 대신 우리의 뺨을 좌우로  갈겼다. 
나는 너무 아파서 그만 소리를 내고 울어버렸지만, 수암은 끽  소리도 내지 않고 용하게 참
고 견디었다. 그는 의당 매를 맞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 같았다. 그는 울지
도 않고, 항의도 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독약
  매일 아침 수암은 아버지한테서 새 한문(漢文子) 넉 자식을 배웠다. 나는 그 옆에 조용히 
앉아서 그가 풀려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배우는 것이 퍽  더디었다. 그가 이 넉 자를, 처
음에는 한 자 한 자식 배우고, 나중에는 넉  자를 모두 합해서 듯과 그 음(音)을 따라 외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책은 누런 표지에 파란 끈으로 맨 수암의 것과 똑같은 책이었다. 나는 곧 책장을  폈고, 
아버지는 나에게 첫 줄의 네 글자를 가르쳐 주었다. 그것이  나에겐 매우 엄숙한 기분이 들
었다. 나는 전신이 마비된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동안 수암은 나도 함께  배우게 
돼서 이젠 자기 홀로 고역을 치르지 dskg아도 좋게 되어 기뻐하고 있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우리들은 붓글씨를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읽는 공부보다 훨신 즐거웠
다. 우리들은 제각가 벼룻집과 여러 장의 습자지를 받았고, 맨 처음으로 먹가는 법부터 배웠
다. 벼루의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물을 따라붓고, 손가락만한 굵기의 먹으로 물이  기름처럼 
진해질 때까지 오랫동안 앞뒤로 갈았다. 먹 냄새는 향기로웟다. 그 다음 우리들은 큼직한 붓
으로 <습자책>을 따라 한 획 한 획씩 썼다. 이렇게  습자 연습을 하는 데는 인내심이 필요
했다. 우리가 처음 쓴 글자는 다름 아닌 하늘 천(天)자였다.
  적어도 한 자(子)를 백 번 이상 써보았다. 우리드은 청소부가 총채를 취듯이 붓을 단단히 
잡고, 엷은 종이에다가 위에서 아래까지;  하나 가득 차도록 마구  썼다. 우리들의 손가락은 
온통 먹물투성이가 되었다. 그런 손가락을  되는 대로 바지에다 쓱쓱  문질러버리고 나서는 
다시 써 내려갔다. 모든 일에서 나보다 활달했고, 붓글씨에서도 나보다 재치 있었던  수암은 
그 성미 탓으로 밝은 회색 바지에다  검은 먹물을 몇 갑절 더 그어  놓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분홍색 옷소매도 점점 더 검게 물들어갔다. 이렇게 습자 공부를 싲가한 첫날, 집안
의 여자들은 모두들 깜짝 놀랐으나, 우리들은 벌(罰)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아버
지는 우리를 감싸주기까지 했다. 
  "이게 바로 서예가의 명예 훈장이니라." 하며 웃었다.
  가장 골칫거리는 우리들의 손이었다. 한 번 먹물에 젖은  손은 아무리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먹물은 수없이 많은 손금에 배어 아무리 씻어도 씻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
들은 우리를 보고 종종 먹동(墨童)이라고 놀려댔다. 아침마다 우리를 씻겨 주어야 했던 구월
이는 혀를 차면서,
  "까마귀 발과 네 손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검은지 정말 알고 싶다" 하고 말했다.
  하늘 천(天)자 다음에 우리들은 따 지(地)자를 썼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배운 독본(讀本)
의 순서대로 검을 현(玄)자와 누루 황(黃)자를 써 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방에 있는 깨끗한 
돗자를 더렵혀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항상 안채의 마루에서 글을  썼다. 이것이 우리에게 방
해될 것은 없었다. 그 다음 곧 이어 또 날 일(日), 달 월(月), 별 성(星), 별 진(辰)자를 썼다.
  공부가 끝나면 곧 우리들은 아버지 방에서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부르기 전에는 다시 들
어갈 수 없었다. 우리들은 아버지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되었고, 그리고 아버지를 자주 방문하
는 손님들을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서운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방에는 너무나 신기한 물건들이 그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에는 이 방이 마침 텅 비어 있었다. 나의 양친과 수암의 어머니는 외
출하고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방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을 마음 
놓고 뒤져보았다. 우리는 방석과 등받이, 책상이며 나무 담배갑이랑 돌 담배갑을 뒤져본  다
음 벽장의 미닫이문을 밀어젖혀 보았다. 그 속에는 정말 재미있는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족
자며, 갓통이며, 북 치듯 두들기면 소리가 잘 나는 바둑판이 들어 있었다. 벽장 왼편에는 흙
빛의 나무로 된, 수도 없이 많은 서랍이 달린 높다랗고 신비스런 상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서랍이 억울하게도 모두 잠겨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아무리  심하게 당기고 밀고 
흔들어도 열리지 않았다. 그때 수암이 갑자기 왼편에 있는 자그마한 열쇠를 하나 찾아서 그 
속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신기한 물건들을 샅샅이 뒤져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일로 말미
암아 큰 불행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 속에 위험한 물건이 들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하고 우리는 서랍 속을 모조
리 뒤져냈던 것이다. 그 속에는 단단하고 흰 구근(球根), 가느다란 나무줄기, 자그마한  갈색
의 조각이며 그 외에도 다른 물건들이 수없이 많이 들어  있었다. 나는 단맛이 나는 가느다
란 나무 줄기를 씹어보고 있는 동안 수암은 연거푸 뒤지면서 많은 검은 환약이며 하얀 알약
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이상스럽게 조용해지더니 어찌 된 셈인지 그대로 말없
이 주저앉았다. 
  "미악!"
  그는 언제나 나에게 어떤 신기한 일을 알리려드는 때처럼  부드러운 소리로 불렀다. 그는 
'ㄹ'자와 '으'자를 제대로 발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를 그렇게 불렀다. 
  "미악, 물을 좀 갖다줘!"
  내가 그에게 물을 한 그릇 떠다주었더니 그는 단숨이 다  마셔 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마치 마비된 것처럼 한동안 그냥 앉아 있었다. 
  "미악, 내 목 좀 들여다봐 줘!"
  그는 슬프게 부르짖으면서 입을 크게 벌렸다. 목구멍은 빨개졌고 심하게 부어있었다. 내가 
그것을 말하자 그는 눈물을 마구 흘리면서, 
  "이제 죽고 마는구나!"하고 슬픔에 젖은 소리를 냈다. 
  우리는 모든 걸 그대로 내버려둔 채 안채로 뛰어나갔다.  누이들이 달려오고 구월이를 부
리나케 어른들에게 보냈다. 목구멍은 점점 더 부어오르는 것 같았다. 
  수암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아이구, 불쌍한 수암! 그가 이처럼 가엾게 보인 적은 아
직껏 단 한 번도 엇었다. 숨을 간신히 내쉬면서 방바닥에  누워있는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
았다. 마치 나와 영영 작별을 고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의원을 데리고 달려왔다. 의원은 우리가 먹은 것에 대해서 세밀히 묻고 나
서 시커면 탕약 한 대접을 마련했다. 
  이 검은색의 탕약은 참으로 신통했다. 수암은 다음날 아침에 회복됐다. 다만 그는  평소보
다 조금 조용해졌고, 이 쓴 약을 계속 기꺼이 마셨다. 
  의원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해서 수암의 여러 가지 다른  병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래서 
수암은 그 후 가끔 진찰을 받아야만 했고, 또 여러 가지 약을 먹어야만 했다. 자기의 목숨을 
건져준 것이 바로 이 시커먼 탕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시키는 대로 기꺼이 
했다. 그러나 훔쳐먹은 죄에대한 벌을 호되게 받아야 할 짓궂은 날이 수암을 기다리고 있었
다. 그가 아직은 중태에 빠져서 누워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나는 내 벌의 몫으로 숱한 꾸지람과 따귀를 얻어맞았다. 그러나 이것드은 나에게 아
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수암이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이 다행이어서 기뻤을 뿐이었다.  그러
나 수암은 나보다 좀더 지독한 일을 견디어내야만 했던 것이다. 
  날씨가 무더운 어느 날 오후, 수암은 사랑방에 와서  자기를 기다리는 의원에게로 끌려갔
다. 이 의원은 수암의 등에 쑥뜸질을 해야 되겠다고 설명을 늘여놓았다. 그래야만 뜨거운 기
운이 피부 속에 스며들어 병을 고친다는 것이었다. 수암은 잠시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게 
한 뒤 잠깐 생각하다가 끝내 의원 앞에 가서 등ㅇ르 구부렸다. 
  "너 내 곁에서 떠나지마, 응?"
  수암은 불안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 안 떠날게!"
  나는 그를 안심시키느라고 똑똑하게 대답해 주었다.
  두 어머니는 그가 가만히 있도록 그의 두 손을 단단히 잡았다. 의원은 두 개의 회록색 쑥 
뭉치를 뾰족하게 만들어서 수암의 헐벗은 등에다 올려놓고는 그 꼭지에다 불을 붙였다.
  "벌서 연기가 난다, 수암아!"
  나는 가만히 말했다. 
  "너 아프니?"
  의원이 수암에게 물었다. 
  "아니요!"
  수암은 아주 용감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야아, 뜨거워진다" 하고 수암은 비명을 질렀다.
  "조금만 더 참아라. 쑥 기운이 살 속에 푹 베어들어야 한다."
  의원은 타고 있는 쑥덩이 주위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아이구, 뜨거워라!"
  수암은 질겁을 하고 고함쳤다.
  "미악아! 등에 있는 것 좀 치워버려!"
  "조금만 더 참아라!"
  두 어머니는 나를 옆으로 밀쳐내면서 말했다.
  "미악아, 그것 빨리 없애줘!"
  그는 다급하게 다시 한 번 소리 질렀다. 
  "으윽, 살이 마구 탄다, 타!"
  "나는 할 수 없어, 미악아/"
  "빨리 떼라, 미악아, 빨리 빨리! 미악, 미악... 아이구 미악아!"
  이 가슴을 찢는 듯한 광경은 분노가 폭발한 수암의 욕지거리로 끝났다.
  "야, 이 망할 자식 같은 의원놈아! 이 개놈아!"
  수암은 고래고래 고함 쳤다. 
  
  이런 온갖 고난의 기난에도 우리들은 쉬지 않고 한문책을 익혔다.  그 책은 <천자문(千字
文)>이라고 표지에 제목이 붙어 있었다. 꼭 천 자가 적혀 있는 이 책은 한 줄에 넉 자식 서
로 운(韻)을 맺고 있었다. 이 책은 본래의 제목 외에도 부제(副題)로 백발서(白髮書)라고 쓰
여 있었다. 우리들이 드디어 이 책을 끝까지  다 배우고 난 다음에, 아보지는 이 책  이름의 
뜻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의 설명에 의하면, 이 책의 저자는 죄수여따고 한다. 그는 젊은 청년으로서 중국 천
자(天子)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시인(詩人)이었기 때문
에 그를 아끼던 모든 신하들이  그의 구명을 간청했다. 천자는 그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를 
내주면서 그가 이걸 풀기만 하면 살려주겠노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려운 과제는 다름이 아
니라 천자(天子)가 아무렇게나 모아 놓은 천 개의 글자를 가지고  하룻밤 사이에 훌륭한 시
(詩)를 짓는 일이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이 젊은 시인은 그  과제를 다 풀었다고 한다. 그러
나 다음날 아침에 그가 이 시를 가지고 천자 앞에 나타났을 때, 천자는 그를 알압지 못하였
다. 자기의 사생(死生)을 결정하는 이 하룻밤 사이에 그는  백발노인이 돼버렸던 것이다. 그
렇지만 이 시가 너무나 훌륭하고 경탄스러웠기 때문에 천자는 그의 시에대한 천분을 깨닫고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아버지 무릎 앞에 조용히 앉아서 이 이야기를 아주 감동깊게 들었다. 우리는 그
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끝내 모르고 말았다. 그러나 죽음과의 투쟁에서 그의 머리가 완
전히 하얗게 백발이 돼 버렸다는 것이 우리를 매우 슬프게 하였다. 
  
  아버지가 훈장 한 분을 집에 모셔다가 바깥채에 서당을 차리고 친한 집안의 아이들도 이 
서당에 다니게 되었을 때 우리들의 생활에는 큰 변동이  일어났다. 서른 남짓되는 사내아이
들과 한 계집아이가 이 서당에 다녔다. 우리들은 이 때부터  맹리 아침 낯선 훈장한테 가서 
그의 감독을 받으며 읽느 것과 쓰는 것을 배웠다. 우리들에겐  이 새로운 생활이 마음에 들
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저녁때까지 가만히 앉아 꼼짝도 못 하고 글을 배워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쉬는 시간이 되어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만이 매우 재미있는 일이
었다. 그 아이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놀이를 많이 가르쳐주었다. 
  사내아이들이 별나게 많이 하는 놀이에 '제기차기'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다. 그건 마치 '배
드민턴'공과 비슷한 것이었다. 우리들은 구멍이 뚫린 엽전과 습자지 같은 얇은 종이로  그걸 
만들었다. 그것을 우리들은 발로 높이 차 올리고, 땅에 떨어지기 전에 발로 다시 차 올리고, 
떨어지면 다시 차올리곤 하였다. 이렇게  해서 떨어뜨리지 않고 가장 많이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였다. 우리들은 보통 승리자가 되려는 영광 때문에 이 놀이를 했으나, 어
떤 아이들은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을 비웃고 놀려대거나, 진 사람의  팔목을 두 손가락으로 
팔매 몇대씩을 때리는 재미로 제기를 차는아이들도 있었다. 또 어떤 아이들은 한 줌의 볶은 
콩이나 밤을 걸고 이 놀이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수암은 제기차기를 워낙 심하게 
했다. 따라서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판국에 가서는 가끔  싸움이 벌어져 주먹질이나 발길질
가지 했다. 
  
    첫 번째 벌(罰)
  수암은 큰 사랑방 옆에 붙은 작은 방에 앉아서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기다란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서 날이 새파랗게 선 칼로 미끈하게 될 때까지 다듬었다. 그러고 나
서 붓글씨용으로 받은 큼직한 종이에다 동그란 구멍을 내고 그 밑에 먹으로 나비를 그렸다. 
그 가느다란 대나무 살과 종이에다 풀칠을 하고 팽팽하게  붙여서 말리면 종이연이 되었다. 
우리들은 집 앞의 성벽을 타고 다른아이들이 연을 띄우는 것을 자주 보았고, 우리들도 오래 
전부터 그런 연을 한 번 가져봤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많은 다른 장난들처럼 이 연놀이
도 부모들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이 갖고 있는 연을 세밀히 본 수암은 자기 스스로 그 연을 막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재주 있는 사촌의  솜씨에 경탄하면서, 곧 연을 띄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그를 도와 연살을 팽팽하게 만들고 말리는 것도 거들어 주었다. 
  그 다음날, 우리는 뒤뜰에서 몰래 첫 실험을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연은  올라가
기는커녕 땅바닥으로 처박히기만 했다. 나는 수없이 연 있는 데로 달려가서 수암이 실 끝을 
쥐고 전속력으로 반대방향으로 달려가는 동안 연을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 그러나 안타깝게
도 연은 띄워지지 않고 땅에 처박히기만 했다. 실망에 가득 찬 수암은 아까보다 더 가는 참
대살과 더 얇은 종이로 새 연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 떠오르려 하지 dskgdkT다. 
수암은 차례차례로 만들고 또 만들었다.  종이는 얼마든지 있었다. 매일 습자용으로  석장씩 
받은 종이에서 두 장은 붓글씨 쓰는 데 쓰고 마지막 한 장은  연 만드는데 쓰고 있었다. 그
런데다가 작은방에는 여러 뭉치의 좋은 종이가 있었다. 수암은  이 뭉치에서도 가끔 ㅈ라라 
썼던 것이다. 저녁때는 이 방에 아무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방해받지 않고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지치기도 했고 실망했던 나머지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자리에 누운 채 병풍의 그림을 눈여겨 바라보는 게 좋았다. 병풍은 여덟 폭짜리였다. 
그 위에 산이며 바위며, 꽃이며 시냇물이며 다리, 그리고 기러기가 날아가고 있는 해변이 그
려져 있었다. 그 그림은 은은한 촛불 빛을 받으며 진기하게 빛나고 있었다. 소를 타고  피리
를 부는 목동(牧童)의 그림이 내 마음을 제일 끌고 있었다. 그는 높다란 수양버들 옆을 지나 
멀리 언덕 뒤에 보일락말락하게 아슴푸레 숨겨져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
는 어쩐지 햇빛이 드리운 오솔길이며 그 길을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소가 마음에 들었고, 
마치 피리 소리가 귓전을 스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저절로 흐뭇해졌고 끝없는평화
를 느꼈다.
  내가 이렇게 홀로 누워 있을 때면, 가장 어린 셋째누나가 자주 찾아오곤 했다. 그  누나는 
나보다 두 살 더 많았고, '셋째'라고 불렸다. 이 누나는 좀 별난 성격의 소녀였다. 저녁 시간
이면 뒤뜰에 모여앉아 온갖 장난으로 재잘거리고 즐기는 다른 누나들이나 사촌누이들과  어
울리는 것을 꺼려했다. 그 대신 줄곧 내게만 찾아와서 옛날 얘기를 해주곤 했다. 이  누나는 
별과 해와 달은 물론이고,  제비며 호랑이라든가 가난한 농사꾼과  나무꾼들에 고나한 우화
(寓話)나 동화(童話)를 수없이 많이 알고 있었다. 
  누나가 들려준 어느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가난한 나무꾼이  깊은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그런데 산 언저리에서 개암 하나가 굴러 내려왔다고 한다. 
  "이것은 어머니께 드리고."
  이렇게 말하면서 나무꾼은 개암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새  개암이 계속해서 굴러 낼
려왔다. 그는 그럴 적마다 어머니만을 생각하고 굴러 내려오는  족족 모조리 호주머니에 집
어 넣었다. 그런데 그가 저녁때 집에 돌아왔을 때, 주머니 속의 개암이 눈부신 황금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동화에서는, 어느 가난한 어부가 큰 강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온
종일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비늘이 은(銀)처럼 반짝거리는 잉어 ㅎ나 마라를 겨우 잡았다. 그러나 
고기를 바구니에 담으려고 할 때 그는, 잉어가 슬프게 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어부
도 슬픈 마음이 들어 그 잉어를 다시 물 속에 놓아주었다. 이튿날 아침에 그는 남해의 용왕
(龍王)에게 영접되어, 용왕의 외아들인 그잉어를 살려보낸 보답으로 보물단지를 선물받았다. 
이 보물단지에서 어부가 원하는 모든 것이 쏟어져 나왔다고 했다.
  다른 누나들처럼 셋째누나도 주로 사내애들이 공부하는 우리 서당에는 다니지 않았다. 딸
들은 그저 어머니나 할머니한테서 가사를 배워야만 했다. 그러나  셋째는 그런 가사를 배우
기엔 아직 너무 어렸다. 그 누나는 바느질도 뜨개질도, 음식 끓이는 것도 배우지 않고  종일 
소꿉장난을 하거나 조잘대는 것으로 나날을  보냈다. 때때로 나는 셋째가  마당에 앉아서는 
봉선화 잎을 짓이겨 새끼손가락에 동여매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했다가 떼면 손톱이 빨갛
게 물들어 예쁘게 보였다. 그런가 하면 나는 이따금 셋째가  방구석에 앉아 두툼한 책을 읽
는 것도 보았다. 이 누나는 전설이나 소설책을 즐겨 읽었다.
  그녀가 읽는 책은 어려운 한자(漢子)로 쓰여진 책이 아니고, 약 스무자 가량으로 이루어진 
알기 쉬운 한글로 쓰여진 것이었다. 한글에서는 개개의 글자가 '하늘'이니 '땅'이니 '해'니 하
지 아니하고 그저 '아' 또는 '오', '에',  '가', '나'라고 한다고 셋째가 차례로 나에게 설명해주
었다. 셋째는 한글을 아주 일찍부터 유모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그때부터 온갖 소설을 읽을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 고유의 글이었던 이 쉬운 글을 '한글'이라 하였고,  쉬운 이야기
며 설화나 소설 등에만 사용하여 대부분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여자들도 dflr을 수 있게 하
였다.
  셋째는 내게 가르쳐주는 것을 좋아했다. 이 누나는  내게 수(數)와 축제일(祝祭日)과 생일
(生日), 그리고 중요한 날들을 일려주었다. 누나가 옛날 이야기를 해주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내 옆에 조용히 누워 있을 때에는, 나는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마침내 눈
치챘다.
  "사방(四方)을 뭐라고 하니?"
  누나는 나에게 물었다.
  "동, 서, 남, 북" 하고 나는 대답했다.
  "색깔에는 어떤 것이 있지?"
  "푸른색, 노랑색, 빨강색, 흰색, 검은색."
  "계절의 순서는 어떻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러면 봄은 어떤 아름다움을 가져오지?"
  누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셋째는 사철의 아름다움을 ㅁ라하는 많은 문자를 가르쳐 주었으
며, 나는 그것을 되풀이해서 외어야만 했다.
  "산에는 꽃이 피고, 계곡에는 뻐꾹새가 노래 부른다."
  "그래, 맞았어! 그럼 여름에는 무엇이 아름답지?"
  "밭에는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담장엔 버들이 푸르다."
  "가을에는 무엇이 아름답지?"
  "들에는 시원한 바람이 속삭이고, 시들은 잎이 나무에서 떨어지고, 달은 고독한 뜰을 비친
다."
  "참 잘한다. 그러면 겨울은 무엇을 가져오니?"
  "언덕과 산에 흰 눈이 덮이고, 길에는 다니는 나그네도 없다."
  "얘, 너 참 영리하구나!"
  누나는 나를 잔뜩 칭찬해 주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수암이 뭘 하고 있나 보려고 그 비밀 골방으로 다시 가 보았다. 그 동
안 그는 수없이 많은 작은 연을 시험해 보았다. 이제 그는 아주 큰 연을 만들어보려고 하였
다. 그는 나에게 둥근 구멍아래 검은 큰 나비 두 마리를 그리게 했다. 그 동안에 나는 참대 
살을 깎았다. 풀이 끓어 올랐고, 인두는 화롯불 속에 꽂혀 있었다. 우리가 살을 하나씩 하나
씩 종이에 붙이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면서 아버지가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우리
는 소스라치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수암은 서둘렀지만 연을 숨길 수는 없었다. 아버지
는 벌써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아버린 후였다. 
  아버지는 우리와 연과 찢어진 종이뭉치를 한참 동안 어리벙벙하게 바라보다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이라 나와! 썩 나오지 못해!"
  우리는 정성껏 만들어서 애지중지 아끼던 연을 방에 그냥 둔 채 밖으로 끌려나겼다. 
  "얘는 그저 내가 만드는 것을 보고만 있었어요."
  수암은 내가 벌을 받지 않도록 더듬거리며 변명해 주었다. 
  이튿날 아침에 우리는 벌을 받게 됐다. 연을 만든다는 그  자체는 그리 나쁜 일이 아니지
만 습자를 하기 위해서 받은 종이를 함부로 썼다는 것과,  값비싼 종이 뭉치를 마음대로 풀
어 쓴 것은 나쁜짓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바지를 높이 걷어올리고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훈
장은 손가락만한 굵기의 회초리를 여러 개 곁에 놓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그것을 사용한 적
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 우리 둘이 평화로운 이 서당의 첫 본보기가 되게 되었다. 우리 두 
말썽꾸러기가 방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우리가 벌 받는 모습을 구경하
기 위해여 벽에 빙 둘러섰다. 그  분위기는 너무나 엄숙했다. 가슴이 써늘할 정도로  엄숙했
다. 훈장은 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비행을 다시  한 번 세세히 설명한 후, 매를 
손에 들고 단단한가 어떤가를 만져보았다. 이  얼마나 무서운 순간이었던가! 그리고는 수암
을 보고 종아리를 걷어올리라고 했다. 수암은 몹시 마음에  거슬리는 듯 매를 넘겨다보고서
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제 발로 오지 못할까?"
  훈장은 수암을 보고 소리 질렀다. 수암은 한숨을 내쉬면서  훈장 앞에 나가서 바지가랑이
를 걷어올렸다. 매는 쏜살같이 연거푸 종아리를 내려갈겼고, 급기야 수암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게는 아무런 죄가 없으며, 자기가  연을 만드는 것을 옆에서 구
경만 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나도 세 차례의  매를 맞았다. 무척 아팠다. 그러나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끔하게 아픈 것쯤은 견딜 수 있었으나, 우리들을  몹시도 
동정하며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아이드 앞에서 매를 맞는다는 치욕감은 너무나  고통스러웠
다. 
  
    남문(南門)에서
  거의 모든 서당 아이들이 우리 둘보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공부에서도 우리보다  앞섰
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 몇은 벌써 당시선(唐詩選)을 읽었고, 운율(韻律)을 연습하고 있어서 
다른 아이들이 아주 부러워할 정도였다. 거기에는 언제나  꽃(花)이며 비(雨)며 달빛과 술잔
의 시정이 흥겨이 읊어져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애들은 열다섯권으로 된 통감(痛鑑)
이라고 불리는 큼직한 역사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 책은 흥미진진했다. 거기에는 국가가  서
로 싸우고, 왕조(王朝)가 몰락하고, 다른 한 왕조가 다시 대치되는 것으로 꽉 차 있었다.  수
암과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아직도 이른바 삼강오륜(三綱五倫)과 짧게 간추려진 한국 역
사를 배우는 입문서(入門書)를 읽고 있었다. 우리들도 드디어 이 책을 다 떼고 큰 역사책의 
첫권을 손에 들었을 때 그 기쁨이란 정말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아침마다 이 서당에 훈장이 나타나면 아이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훈장에게 공손하게  큰절
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 전날 배운  것을 다 알고 있는지 시험을 당해야 했다.  그것을 
아는 아이는 새 과제를 받았고, 그걸 잊어버려서 모르는 아이는 어제 것을 되풀이해야만 했
다. 시험이 끝나면 아이들은 저마다 벼루를 꺼내어 먹을 갈았고, 훈장으로부터 새  습자교본
을 받아 글씨 연습을 했다. 그리고  잠깐 동안의 쉬는 시간이 끝난 후에  우리들은 이 달에 
배운 것을 읽었다. 큰소리로 저마다 다른 곳을 읽었기 때문에  온통 서당 안은 흡사 벌집처
럼 시끄러웠고 와글댔다.
  오후에는 오전보다 쉬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리고 여름이면  우리드은 가끔 멱을 감으로 
냇가로 몰려갔다. 우리 고향에 있는 수양산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가 많아서 마
음대로 뛰놀 수 있었고, 물장구치며 장난칠 수 있었다. 그런 냇가로 가는 길은 무척  아름다
웠다. 마을을 벗아나기만 하면, 넓고 깊은 연못에 이르기까지 좌우에 수많은 석상들이 서 있
는 그늘진 길을 우리들은 걸었다. 늪가에서  옷을 훨훨 벗어던지고, 시원한 물 속에  우리는 
머리를 박고 거꾸로 뛰어들었다. 너무나 무덥던 더위가 가시고  시원해질 때까지 우리는 이 
늪에서 풍덩거리며 놀았다. 그리고는 다시금 이 아름다운 길을  따라 마을로 돌아오는 것이
었다. 숲속 나뭇가지에서는 매미가 서로 내기라도 하듯이 한참 울어대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어머니들은 남문(南門)까지 잠시 소풍 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우리들
은 정말 신나게 돌아다녔다. 저녁 노을에 빛나는 삼층석탑은 말할 수 없이 장엄하게 보였다. 
우리는 성벽과 집채 사이에 난 골목길을 통해 수없이 많은 돌 계단을  밟고 올라가 성문(城
門)앞 광장에 모여 이웃 동네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어떤 아이들은 낡은 동전(銅錢)을 땅바
닥에 던져서는그것을 납작한 돌맹이로 맞추는 놀이를 했고, 다른 애들은 제기를 찼다. 또 한 
패는 한 발로, 그들이 더  이상 뜀박질할 수 없을때까지 일정한  거리를 왔다갔다하는 외발 
뛰기의 놀이를 했다. 그들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괜히 장담을 늘어놓고, 그러다가는 ㄷ
서로 다투기도 하고, 심지어는 맞잡고  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삼문(三門)  위에서 음악이 
울러퍼지기 시작하면 흥겹던 우리들의 놀이도 곧 조용해졌다. 이  성문으여기서 꽤 멀리 떨
어져 시(市) 한 가운데 있는 수령(首令)의 관아 앞에 서 있었지만, 고요한 저녁때면 마치 천
국에서나 울려오는 것 같은 황홀한 음악이 멋있게 그리고  맑게 남문가지 울렸고, 우리들의 
뛰는 마음을 어둠 속으로 아늑히 가라앚게 해주었다. 그것은 이곳 고을 원의 저녁 인사였다. 
날이 저물고 받이 깃들기 시작하면, 이 고을 사람은 걱저이 없이 잠자리에 들어 쉴 수 있었
다. 우리 고장에는 고요한 평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저녁의 고요가 서서히 밀려왔다. 집집마다 저녁 연기가 오르고, 회색 지붕들은 천천히  저
녁 노을 속에 잠겨갔다. 다만 제일 높은 산봉우리만이 아직도 하늘의 푸르름 속에서 마지막 
햇살을 받고 있었다. 그러면 내 마음은 가끔 나도 모르게 슬퍼지곤 했다. 그것은 아마도  다
시금 낮이 가고, 우리 모두가 신비한 밤에 휩사이는 데서 오는 적막한 느낌이리라.
  우리들이 이렇게 골몰해서 앉아 있는 동안, 한 큼직한 사람이  천천히 돌 계단을 밟고 올
라와서는 탑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종루의 문을 열고 무거운 망치를 꺼내어 들었다.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서는 들려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음향이 끝나자마자 그
는 망치를 높이 치켜들고 거대한 종을 치기 시작했다.  종쇼ㅗ리는 진동하며 산에까지 울려
퍼졌다. 우리들은 이 종루지기 주위에 모여 서서 몇 번이나 치는지 헤아려보았다. 처음에 바
른손의 엄지손가락에서 새끼손가락까지 꼽았다가는 다시 반대족으로  폈다. 그러면 열이 되
었다. 그리고 오른손처럼 다시 열까지 세기 위해 왼손의 엄지를 재빨리 굽혔다. 저녁마다 종
은 스물여덟 번 울렸다. 그 까닭은, 저녁 종소리가 스물여덟  명의 운명의 신(神)에 의해 지
배되는 이 땅의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금  망치를 종각에 넣고는 조심스럽
게 문을 잠그고 넓은 앞마당에 서서 짧은 담뱃대에 담배를 그득히 다녀넣었다. 그의 얼굴은 
힘들여 종을 치느라고 사뭇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도 않고 평화가 지배하고 있다는 표시로 저녁마다 불을 피워올리는 봉화산의  봉우
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봉화는 다시금  다음 산에서 받아서는 또 다음 산으로  전달된다. 
이렇게 밤 동안 산봉우리를 타고 달려가 우리 나라의  왕도인 서울에까지 전달된다. 우리들
은 이 전설적인 도시인 서울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봉화산 마루의 봉화는 희미한 불빛을 
천천히 발하더니 밤이 어두워지면서 곧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종지기는 만족하여 다시금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그는  우리들을 보면 언제나 조
그만 밤귀신이 돌멩이를 던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일러주었다. 아이들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애들은 널찍한 가장자리 돌에  앉아서는 미끄러져 내려갔다. 우리도 미끄럼을  탔
다. 돌이 많은 아이들의 미끄럼질로 아주 깨끗하고 반들반들  닦여져 있었기 때문에 더러운 
우리들의 바지가 더 더러워질 것도 없었다.
  우리들은 문각 있는 데로 달려가서 남문이 정말 잘  닫혔는지, 엿장수들이 전을 벌였는지 
살펴보았다. 넓은 판 위에는 군침이 도는  엿사탕과 엿가락, 조각엿 등이 그  크기와 akst의 
종류별로 잘 진열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자그마한 초롱불과  조각엿을 베어내는 가위가 놓
여 있었다. 엿장수는 이따금 처량한 곡조로 엿에 배합한 여러 가지 향로(香爐)를 자랑하면서 
박자에 맞추어 가위를 짤그랑거렸다.
  우리들은 흥겨운 마음으로 어두워지는 길을 따라 집을 돌아왔다. 우리들은 도깨비를 조금
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벌써 여러 집 문 앞에는 불빛이 새어나와 있었고, 저녁 음향의  멜로
디l가 우리 귀에 쉬임 없이 들려왔다.
  내가 뒤뜰에 가서 얼마 동안 계집애들의 놀이를 구경하고 있노라면 수암은 여기저기로 몰
래 빠져나갔다가 상당히 늦게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우리 마을의 사내애들은 어느 골목이나 
어떤 장소에 모여서 낯선 동네의 아이들을 적(敵)으로 몰아서 마구 두들기고 싸웠다. 애들은 
대개 주먹으로 싸웠지만, 이따금 다른 물건이나 돌멩이를 가지고 싸우기도 했다. 저녁이  선
르해지면 그럴수록, 그리고 달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이런 애들의 패싸움은 심해지기만 했
다.
  이러한 때에는 수암의 웃옷은 말이 아니게 흉해 보였다. 
  
    칠성이
  친척 관계에 있어서 우리 아버지는 그다지 다복스럽지 못한 것 같았다. 삼촌이 일찍 도아
가셨기 때문에 과부가 된 숙모와 세 아이를 아버지가 보살피게끔 되었다. 그런 데다가 아버
지의 누이도 남편을 잃었다. 그래서 상복기(喪服期)를 마치자마자 외아들을 데리고 우리 집
을 왔었다. 그 애는 열 살쯤 되어보였고, 우리 셋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았다. 그리고 볼이 
발그스름한 예쁜 소년이었다. 그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야위고 예쁘장했다. 혹시 흠잡을 
데가 있다면 그의 입술이 너무 두텀하고 딱딱한 것이었다. 입술이 그렇게 된 것은그가 몹시 
심한 병을 앓고 나서부터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생기가 있었고 귀는 복
스럽게 동그스름했다. 그는 얼굴 빛이 부드러웠고, 볼도 불그스름해서 사내 옷을 입지만  않
았더라면 틀림없이 계집애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말할 수 없이 깨끗한 그의 손이었다. 내 손을 볼때마다 그와 나 사이에 어청난 거리가 있다
는 것을 느꼈다.
  저녁녘에 우리들이 우물가의 뜰에서 제기를 차고 있을 때 별안간 그가 우리 앞에 나타났
다. 그는 가까이 와서 우리에게 누가 수암이고, 누가 미륵인가고 물었다. 우리는 곧 앞에 선 
아이가 누구라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 우리와 함께 놀게 될 고종사촌 '칠성'이었다. 나에게는 
이 칠성이가 무척 예뻐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나는 곧 같이 놀자고 했다. 그러나 수암은 별
로 달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우물이 기대어서서 중단한 놀이를  다시 계속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놀기엔 너무 추운데."
  수암은 상냥하고 가냘픈 새 아이를 꺼리는 눈치로 넘겨다보았다.
  우리들이 다시 얼마동안 제기를 차고  있는사이에 칠성이는 주머니에서 짧은  대나무통과 
주머니칼을 꺼내어 이리저리 깎고 잇었다. 그러면서 그는 두툼한 입술로 처음에는 발랄하고 
빠른 곡조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즐거웠던 지난날을 회상시키는 길게 끄는 구슬픈 곡조로 피
리를 불었다. 나는 사지(四肢)에 어떤 황홀한  경쾌감이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흠뻑 젖었
다. 그리고 수암의 손과 발이 장단이 맞춰 신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무척 즐거웠다.  나도 
따라서 함께 춤을 추었다. 칠성이의 피리 소리는 점점 더 신나고 흥겨워져 갔다. 그는  피리
를 계속 불었다. 우리들은 아버지와 칠성이의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사랑채로 통하는 계단에 
서서 우리들을 구경하고 웃고 계셨다는 것도 모르고 도깨비에 홀린 듯이 덩실덩실 춤을 추
었다.
  아버지는 내가 춤추는 것을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할머니의 가르
침으로 우리가 춤추던 방에는 아버지가 한 번도 들어와 계신  적이 없었다. 제일 손위의 두 
누나는 작은 북으로 장단을 맞추며 애들이 부르는 노래를  불렀고, 우리들은 아무렇게나 손
발을 흔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답고 은근한 곡조를  누나들이 우리 앞에서 노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탈춤에서 따온 곡이었다. 탈춤은 해마다 이 고
을에서 거행되는 가장 인기있는 무언극이었다. 구월이가, 아름다운 어느 이른 봄날에 수암이
와 나를 데리고 그 연극을 구경하러  고을에 갔던 것도 벌써 몇 년이  흐른 후였다. 그때에 
우리들은 삼십 명의 탈을 쓴 광대들이 음악에  따라 전 시가를 누비며 북문 앞에 노천무대
(露天舞臺)로 행진해 가는 대열 속에 깨였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늘을 던지고 있는 
높은 나무 밑의 무대를 두러싸고 성벽과 성문, 그리고 언덕  할 것없이 새까맣게 앚아 있었
다.
  맨 처음에는 절간을 버리고 도시로 나온 승려가 등장했다.  그는 어쩌다가 예쁜 여자에게 
반해 기쁨에 넘쳐 춤을 추었다. 다음에는 수없이 많은 방울이 다린 관목을 들고, 몸을  놀릴 
때마다 방울 소리를 내는 우스광스런 바보 광대가 등장했다. 광대는 승려의 구애(求愛)를 계
속 방해하다가 끝내는 아름다운 여인을 유괴하고야 말았다. 이  불쌍하고 늙은 중은 다시금 
산 속에있는 절간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이 중의 작별 장면에 춘 춤은 격정적이면서도 매
우 슬픈 것이었다. 이 춤이, 종일 계속된 광대놀이 연극의 종막을 이루었다.
  이 마지막 춤은 석양녘에 시작해서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내 어린 마음을 완
전히 사로잡고 말았다. 이 노인이 우울한 곡조에 맞춰 길다란  소매를 한번은 뒤로 한 번은 
앞으로 흔들며 지친 듯한 다리를 멀리 디뎠다 가까이 디뎠다, 등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공
중에 애통의 원(圓)을 그리던 그 모든 광경이 나의 가슴 깊이, 그리고 나의 머리 속에  하도 
깊이 스며들었기에 그날 밤에 다시 흉내내어 출수 있었을 정도였다. 내가 한창 흥겹게 노는 
것을 아버지는 탐탁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  세 사촌이 어울린 첫날 저
녁을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기뻐하셨다.
  실제로 우리들은 가을과 겨울 동안을 사이좋게 지냈다. 그  중 나이많은 사촌은 우리드에
게 새로운 놀이를 많이 가르쳐 주어서 몹시 기뻤다. 서당이 파하면 얼어붙은 강으로 다려가
서는 어두워질때까지 팽이를 쳤다. 집에서는  온갖 장난감 팽이며, 참대  피리며, 대나무 자 
등 그리고 담배갑과 재떨이 등을 만들었다.
  우리 고장에서 일년 중 가장 큰 명절인 설이 가까워졌다. 한밤중에 조상(祖上)의 신주 앞
에 제사를 드린 후에 축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은 큰안방으로 불려가 맛있
는 음식과 과일 대접을 받고, 우리들이 앉아  있고 싶은 대로 그곳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우리는 고운 옷으로  치장(설빔)을 하고 온 친척집과  친한 이웃집에 세배를 
드리러 다녔다. 날씨는 무섭게 추었다.  길바닥은 꽁꽁 얼어붙어 거울처럼 미끄러웠고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바람이  마구 휘몰아쳤으나, 우리들은 신이  나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절을 하고, 잘 외어둔 새해의 인사말을 올렸다. 어디에 가나 어른들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으며, 맛있는 음식과 과일을 대접해  주었다. 그저 추켜주는 다정한  말만 듣고, 맛있는 
것만 대접받는 그런 명절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우리 집에서도 할머니를 비롯하여 구월이에 
이르기까지 온 식구가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누구 하나 찌푸린 얼굴은 하지 않았다.  그리
고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듣기 싫은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집에서 마름으로 있으며,  항상 
나를 쓸모없는 녀석이라고 놀려대단 거친 순옥이  아저씨마저도 오늘은 다정하게, 언젠가는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익살로 우리들을 놀리면서 선물을 
주었다. 우리들이 밤늦게 잠자리에 들려 해씅ㄹ 때-수암과 나는 일년  전부터 한 방에서 잤
다-앞으로 보름동안 방학이 계속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나는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그러나 수암은 벌써 코를 골고 있었다. 
  아이들이 세배가 끝난 다음에 어른들이 세배하러 다녔다. 수많은 이웃사람들과  아가씨들, 
부인들, 청년과 노인들이 우리 집에 찾아왔었고, 집안은  기쁨과 웃음으로 가득했었다. 이렇
게 명절이 하루하루 계속되었다. 
  내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명절 기분에 잠겨 있는 동안 수암은 저녁에 몰래 집에서  나가
서는 늦게야 돌아왔다.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 까불이 패들과  새해 싸움이 벌써 시작된 것
이다. 그의 고운 곳은 어디나할 것  없이 흙 발자국과 코피투성이었다. 그는 그것을  아무도 
몰래 지웠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 그는 실컷 두들겨맞고 돌아왔다. 양쪽 소매는 절반쯤  찢
겨졌고, 머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혹이 생기고 멍들어 있었다. 그는 적들한테  에워싸여 
아주 호되게 두들겨 맞다가 끝판에야  친구가 와서 그를 구출해 줬다고  했다. 이로 인하여 
그의 투쟁욕은 줄어든 것 같았다. 저녁마다 싸움은 점점 거칠어졌고, 며칠 후에는 싸움의 결
판이 날 판인데도 그는 아무 말없이 집안에 처박혀 있었다. 
  그 대신에 우리들은 집 안에서 셋이 다툴 수 있는 다른 싸움이 있었다. 이 싸움은 다른사
람도 아닌 아버지가 일으킨 분란이었다. 어느 날 저녁, 손님이 없을 때 어비지는 우리를  불
러 이상한 놀이를 가르쳐주었다. 딱딱한 종이에 제일 높은 직위(職位)에서부터 제일 말단의 
관리에 이르는 관직 명칭이 기입되어 있었다. 우리의 경력을  가장 낮은 단계에서 시작하여 
판서의 직위에 먼저 오르는 사람이 이기느 놀이였다. 아버지는 책을 들고 아무 데고 마음대
로 펼쳤다. 그 때마다 나오는  면(面)의 글자가 운(韻)으로 선정되어  우리들 중의 누구나가 
이 말로 끝나는 어느 고전시인(古典詩人)의 시를 낭송해야 했다. 이렇게 시를 외울 수 있는
사람이면 한 등급 한 등급 올라갈 수 있었다.
  칠성이가 부딪친 첫 글자는 임금 군(君)자였다. 그는 이 글자로 끝나는 시를 하나도 알지 
못했으므로 오랫동안 잠자코 있엇다. 다음이 수암의 차례였다. 수암에게 걸린 운자는 봄  춘
(春)자였다. 이 글은 너무나 보편적인 운자였으므로 우리는 수암의 행운을 부러워했다. 그는 
잠시 더듬거리다가,
  "봄이 길에 깃들인다" 라고 말했다.
  "잘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 수암을 문관의 지위에 진출시켰다. 이것이야말로 수암이 해낸 큰
업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운수 좋은  운자
를 다시 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급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까지 시집(詩集) 한 권을 겨우 
읽은 데다 그것마저 완전히 기억하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칠성이와 나의 진급도 곧 멎어
버리고 말았다. 칠성이는 세 번 진급했고, 나는 네 번 진급하고 나서 그냥 머물러 있었기 때
문에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
  며칠 후에 우리는 이 놀이를 다시 계속했다. 그러나  이번에는시인의 싸움이 아니고 쫀쫑
(주사위) 굴리기 싸움이었따. 말하자면 칠성이는이런 방법이 훨씬 간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우리들은 모두가 벼슬아치가 되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진급했다. 놀음은 반 시간 뒤에 
끝장이 났다. 내기마다 동전을 걸고 했다. 본래 이런 놀이에 찬동하지 않았던 아버지도 나중
에는 우리를 도와 주어서 각  관리의 지위와 권력이며, 현실에 있어서  어떻게 그런 지위를 
얻을 수 있는가에 관한 재미있는 설명을 해 주었다.
  수암은 우리 도(道)의 목사(牧舍;고려 및  조선 때의 정삼품 외직 문관)의  직위에 마음이 
쏠렸다. 작년에 우리는 이 관찰사(觀察司)의 취임식을 구경했다. 이 위세당당한 사람은 십여 
리 밖에서부터 그의 육방관속(六房官屬)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자기 통치 영역에 들어와서 
첫 식사를 한 후 말을 타고 고을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들은구월이와 함께 집 앞에 늘어선 
군중들 틈에 끼여 있었다. 멀리서 벌써  장엄한 음악이 들려왔다. 그러나 남문을 통해  기마
(騎馬)대열이 가까이 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갈색 말을 탄 악대들이 둘씩 다섯 줄로 들
어오고, 색색으로 갖춘 비단옷을 몸에 감은 사십명의 처녀가 말에 앉아 그 뒤를 따르고,  으
리으리한 검은 관복을 입은 열 쌍의 수령(守令)이 그 뒤에 배열해 있었다. 이분들은당시 스
물세 고을로 나뉘어 있던 우리 도(道)의 목사들이었다. 그러고 나서 멋지게 생긴 두 청년비
장(靑年裨將)의 호위를 받으며 관찰사가 말을 타고 지나갔다. 그가 탄 말은그의 머리처럼 흰 
백마(白馬)였다. 머리에는 눈처럼 하얀  깃털이 나부끼는 갓을  썼는데, 그 갓은 호박(琥珀) 
끈으로 턱 아래에 매어 있었다. 감사의  뒤에는헤아릴 수 없이 많은 관속(官屬)들이 뒤따랐
다. 이 어마어마한 사람한테서 받은수암의 감동은 여간 큰 게 아니었다. 
  이와는 반대로 나는 소위 말하는 어사(御使)를 갈망했다. 그는 전국을 순시하면서 부정(不
正)이 지배하고 있지 않는지, 왕의 수령들이 자기 임무를 다하고 있는지를 순찰하는 직책의 
사람이다. 그는 왕에게 보고함으로써 질이 나쁜고관들을 파면시킬 수 도 있을뿐더러 말단의 
관리를 승진시킬 수도 있었다. 이  권세 있는 사람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도록 
대개의 경우, 그는 거지로 가장해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우리는 지금까지 숱한 어사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는 많은  가난한 가정에는 돈과 쌀
을 갖다주었고, 죄 없는 무고한 죄수들을 석방시켜 주었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수
백 명의 비밀 나졸들을 달고 다니고 그 권력이 비길 데 없이 강하면서도 거지꼴을 하고  다
니는그런 어사가 되고 싶었다. 
  우리들의 놀이에서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쫀쫑을 던져 섯 점을  얻어내면, 다른 사람들이 
여섯점을 얻지 못하는 한, 다른 모든 관리들은 추방되었다. 그 동안에 나만이 출세가도를 달
려 판서로서 뒤따라오는 사람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젠 경쟁자를 무서워하지 않아
도 좋았다. 
  한 번 내쫓기고도 연거푸 내쫓겨야만 하는 운수 나쁜 사람은 이 굴욕에 울화통이 터졌다. 
수암은 자주 추방되었기 때문에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이상하게도  칠성이가 자리를 
추방해 버리면 수암은 더욱더 날뛰었다. 이 분노는 점차  개인적인 것으로 악화되었기 때문
에 수암은 거의 매일 밤 불만을 품은 채 잠자리에 들어갔다. 수암은 계속해서 잃었다.  그러
다보니 설날에 세뱃돈을 모았던 그의 전 재산이 몽땅 털리고 말았다. 나도 잃었다. 칠서이가 
몽땅 다 땄다. 나의 두 사촌은 원래 잘 어울리지 않았다. 하나는 너무 격정적인가하면  반면
에 다른 사람은 너무 조용했다. 칠성이는 수암에게 너무 자주 모범생으로 지적되었다.  그런
데다 그는 또 언제나 너무 깔끔했다. 몇 달을 입어도 그의 옷에서는 입은 gms적을 찾으 ㄹ
수 없었다. 반면에 수암의 옷은 사흘이 멀다 하고 깨끗할 날이 없었다. 이러다보니 칠성이는 
우리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짙은 먹구름이 하늘에 오락가락한 지는 오래 되었다. 그래서  작
은 불꽃이 보이기만 해도 심한 번개가 칠 판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놀음은 아주 안성맞춤이
었다. 방학이 끝날 무렵에는 나도 돈을 다 털리고 말았다. 우리들은 나의 마지막 동전을  걸
고 놀았다. 마침 아버지는 집에 안계셨다. 칠성이가 나를  추방했다. 나는 되돌아와 다시 추
방되었고, 또다시 돌아왔다. 이미 밑천이 다 떨어진 수암은 오랫동안 우리의 놀음을 그저 보
고만 있었다. 칠성이는 나를 다시 한 번 추방하기 위해서 쫀쫑을 높이 던졌다. 그러나 이 쫀
쫑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수암이 그에게 덤벼들어 그의 머리통을 잡고 늘어졌다. 둘은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뒹굴었다. 나는 수암의 편을 좀 들었다. 이 모범적이 아이가 코피를  흘리
고 그의 저고리가 찢긴 것을 보니 정말 내 속이 시워했다. 
  이것은 우리들 공동 생활의 종말이었다.
  심판이 곧 내려졌으나 그것은 공정치 못했다. 내 생각으로는 칠성이가 제일 큰 벌을 받아
야만 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따고, 그것 때문에 이 싸움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수암이, 남을  호되게 두들겨팼으므로 두 번째 벌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칠성이는 무죄 언도를 받고,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방
을 나갔다. 수암은 아버지에게 종아리 세대를 맞았으나 그는 찍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자, 이젠 네 차례다!"
  재판관의 말이었다.
  나는 바지를 걷어붙이지 않았다. 칠성이는 무죄고 우리 둘만이  얻어 맞아야 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데 수암이 내 옆구리를 꾹 찌르면서 종아리를 걷어올리도록 내게 암시했다. 주저하
면서 다리를 걷어올리자마자, 아버지는 매질을 했다. 나의 저항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아
버지는 힘이 세서 나를 단단히 붙잡았기 때문에 내가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세 차례 맞
은 후에 나는 돌아서서 다른 사촌도 자기 몫의 매를 맞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하려고  했
다. 그러자 한 대 더 때렸다. 이번에는 경골(脛骨)에 맞았기 때문에 몹시 아팠다. 나는 그만 
울부짖고 말았다. 수암은 그 사이에 아버지의 손에서 매를  빼앗으려 했다가 도리어 엉덩이
에 호된 매를 맞고 아파서 낑낑거리면서 물러났다. 나는 매르 frP속 맞았다. 자그만치 열 대
는 더 맞았을 것이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말했다.
  "이젠 네 몫이 다 되었다."
  그러나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더 때려요!"
  나는 반항적으로 말했다.
  "뭐라고!"
  아버지는 소리치면서 다시 나에게 매질을 했다. 이러자, 수암이 다시 그 사이에  뛰어들어 
옥신각신하다가 한참 후에 아버지 손에서 매를 빼앗아가지고 달아나버렸다.
  나는 방에서 강제로 내쫓겼다.
  "자, 이젠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이 고집통아!"
  
    대원 어머니
  봄에 칠성이는 자기 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을 떠났다. 그들은  길 건너 이웃에 있는 자그
마한 집으로 이사해 갔다. 칠성이 어머니가 살림을 넓히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우리들이  싸
운 것이 화근이 되어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어서 그랬는지  나는 몰랐다. 어쨌든 간에 이렇
게 떨어지게 된 것은 잘된 일이었다. 우리들은 다시 만나서도 다시는 싸우지 않았다. 수암과 
나는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촌을 패준 것을 못내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놀랄 정도
로 깔끔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 후 얼마 있다가 우리는 매우 진귀한 방문을 받았다. 그 사람은 아주 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에서 온 어떤 할머니였다. 그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비록 이  할
머니가 나를 낳지는 않았지만 내 어미니를 위해 아들을 낳도록  빌었고, 그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  여자는 아이 낳기를 소원하는  부인들을 위해서 
빌어주는 '대원 어머니'였다. 사람들은 그 노파를, 신탁서(神託書)와 알락달락한 색칠한 부채
를 들고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사람의 장래를  예언하는 점장이나, 소리와 춤으로 귀신
을 불러들이는 무당과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되었다. 할머니는 훨씬 높은 지위에 있었고, 인생
의 저열한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 할머니는 오로지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보살의 이
름에만 빌었다. 나의 어머니가 이 할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그 분을 찾아가 빌어주기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늙을까 무척 걱정스러
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축수(祝手)하는 할머니는 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에 와서는사십구 
일 동안 묵으면서 부처님의 제자인 미륵불(彌勒佛)에게 그 축원을 드렸고, 그에 따라 내 이
름은 후에 미륵(彌勒)이라 했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온 지 며칠 후 어떤 날  저녁, 나는 두 어머니를 따라 숲속으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성자(聖者)의 입상(立像)앞에 감사의  불공을 드릴 참이었다. 우리  고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깊은 산골짜기에 미륵불의  등신 대석상이 있는 작은 사당이  있었다. 이 대원 
어머니는 근처에 있는 마을에서 열쇠를  가져와서는 문을 열고 촛불을 켰다.  그 동안 날은 
이미 저물었다. 무서운 생각으로 겁을 먹고 나는 두 어머니  사이에 서서 훤한 촛불 앞에서 
빛나는 석상을 우러러 보았다. 그 용모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였다. 미륵불은 눈을  내리뜨
고 있었다. 귀는 정말 길쭉했다. 두 팔은 몸에 꼭 붙어 있었다. 손은 팔짱을 끼고  있었으며, 
다리는 서로 밀착되어 곧게 발까지 비슷한 굵기로 죽 내리뻗쳐 있었는데, 다만 서로 떨어져 
있다는표적뿐이었다.
  대원 어미니는 세 번 접으 종이에  불을 붙이고 석상 앞에 서서 기도를  드렸다. 나는 그 
할머니가 중얼거리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이  어두운 숲속에서 희게 
빛나고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성자의 모습에 너무나도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축원을 마치고 사당문을 다시 닫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이 세상의 길로 인
도해 준 대원 어머니에게 무한한  감사의 정을 느꼈다. 이 할머니의  기도가 없었던들 나는 
어딘지 모를 다른 곳에 태어났을 것이며, 수암과 구월이도, 그리고 누이들도 없이 자랐을 것
이기에 말이다. 나는이 할머니의 손을 더욱 굳게 잡았고, 할머니는 나를 가끔
  "내 아들아, 귀염둥이야!" 하고 말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선물을 분에 넘치도록 가져다 조었다. 문 안으로 들어갈 일이 있을 때마
다 언제나 내게 무슨 소원이 없는가고 물었고,  나는 원했던 것을 모두 받을 수 있었다.  한 
번은 할머니가 나에게 큼직한 거북을 갖다주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그런 거북은 본 적이 없었다. 등은 흡사 아름답게 조각한 먹통 같았고,  배에는선명
하게 임금 왕(王)자가 새겨져 있어서 경외(敬畏)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다.
  나의 또 다른 네 발을 가진 친구는 잘 길들여진  자그마한 예쁜 다람쥐였다. 내가 서당에
서 돌아오느저녁때면 언제나 내 얼굴이며 목에 뛰어오르기도 하고, 따콩이나 밤을 나한테서 
얻어먹을 때까지 내 팔에서 뛰어놀았다. 나는 이런 것을 대원 어머니에게 이야기하고,  다람
쥐가 달아나버린 것이 무척 아깝다고 못내 그 할머니에게  탄식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다
람쥐 대신으로 거북을 사다주었던 것이다.
  나는간간이 거북이의 등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 이상 거북이와는 다른 장난을 할 수 없
었다. 거북은 다람쥐하고는 엄청나게 달랐다. 뛰지도 않았고, 소리 지르지도  dskg고 느릿느
릿 마룻바닥을 돌아다니다가는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물러 있곤 했다. 그 놈은 매우 의젓하
고 마치 군주(君主)처럼 당당해 보였으며, 깊은 생각을 하는  것같이 보였다. 대원 어머니는 
나에게, 거북은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을 예언할 수 있다
고 설명했다.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는 등이 평평하게 되도록 구부려야만 했다. 그리고는거북
을 등에 올려놓고 기어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놈이 오른쪽으로  기어내려오면 행운을 
뜻하고 왼쪽으로 기어내리면 불행을 뜻했다. 수암과 나는 매일 아침 한 번씩 땅에 구부려서
는 거북이 오랫동안 주저한 뒤에 기어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놈이 왼쪽으로 기어내려
오더라도 나에겐 기분이 언짢지 않았다. 수암은 내게 서북이가 언제나 오른쪽으로 기어내리
도록 왼쪽 등을 늘 좀 높여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신탁을 보여준 다음에는거북이는 우리로
부터 풀려나서 안마당으로, 우물뜰로, 유유자적하게 기어다녔다. 거북은 우리가 풍부히 마련
해주는 오이나 참외만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 희귀한 동물이 성장하는 남쪽나라에서는 아침
마다 해뜨기 전에 입술에 맺히는 이슬만으로 산다고 한다. 
  
  또다시 한여름을 접어들었다. 대원 어머니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심한 무더위 때문에  서
당은 오전에 끝났고, 오후에는 냇가에 가서 마음 내키는 대로 오랫동안 멱을 감아도 좋았다. 
우리들은이젠 제법 헤엄을 잘 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심지어 물 속 깊이 4, 5미터  되는 긾
은 물에도 들어갈 수 가 있었다. 이렇게 깊어도 냇물이  너무나도 맑았기 때문에 바위가 많
고 모래가 깔린 바닥이 푸르게 비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들은 마치 개구리처럼 헤엄
치기도 하고, 바닥에까지 잠수하기도 하고, 또는 물 위에 누워서 여울에 저절로  떠내려가기
도 했다. 바위 위에 누워서 눈을 감고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것도 역시 재미있고 좋았다. 
  수암과 나는 매번 거북을 데리고 갔다. 그래서 거북이 마음대로 헤엄칠 수 있게 내버려두
었다. 오고 가는 도중에 뙤약볕에 쪼이지 않도록 우리들은  큼직한 호박잎으로 거북을 감싸
주었다. 꼭 한 차례 우리는 거북을 데리고  가는 것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날 
그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홀로 남아 있던 거북은 물을 못잊어서 그랬는지 어디론지 가버리
고 말았다. 저녁때 우리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먹이를 주려고 했을  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온 집안을 모조리 찾아헤맸다. 온 식구가 다 우리를 거들어서 샅샅이  뒤
졌다. 노을이 깃들고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얀 박꽃이 빛나고 박쥐가 공중을  찍찍거
리며 날아다녔다. 그런데도 거북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사람이 촛불과 호롱북을 들고 방이
며 곳간이며 뜰의 낮은곳을 온통 찾았다. 급기야 구월이가 솥에서 그놈을 찾아냈으나,  거북
은 이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땅 위에 갖다 놓았을 때도 놓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죽은 
것이었다. 
  다음날 수암은 뒷마당에 삽으로 구덩이를  파서 거북을 묻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 당시 
한국에는 평지(平地)에 묘가 없었다. 집집마다 자기 산을 갖고 있어서 그 곳에다 가족 묘지
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산처럼 솟아오른  언덕을 만들어 거기다 거북을 
묻을 생각이었다. 수암은 한낮이 기울기까지 해서 언덕이 1미터 높이가 되도록 흙을 퍼올렸
다. 나는 굵은 나뭇가지 두 개와 짚으로 거북을 무덤까지 들고 갈 들 것을 만들었다. 거북은 
움직이지도 않고 하루 종일 그 곳에 누워있었다. 우리들은  산신령과 죽어버린 동무에게 술 
대신 물 한 잔을 바쳐 죽은 동물의 넋이 편히 쉬기를  빌고 일몰(日沒)과 함께 시체를 묻었
다. 호박만한 크기의 무덤이 완성되었을 때 우리들은 무척 슬펐다. 
  거북은 장수하는 동물이라 수천 년을 산다고 한다. 그러한 희귀한 동물이 우리 집에서 죽
었을 때에는 그것은 확실히 불길(不吉)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나의 아버지
  그 후 몇 달 뒤에 나의  아버지는 병환이 나셨다. 그는 여행 중에  있었는데 갑자기 며칠 
후에 되돌아왔다. 따라서 온집안은 야단 법석이었다. 어디가  편찮으신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아버님이 꼼짝도 하지 않고 방에 누워 계시는 것만을  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계셨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숙모가 그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의원이 
왔고, 또 다른 의원이 번갈아왔으나 아무도 그를 구할 수 없었다. 온 밤과 다음날  오전까지 
그는 그렇게 누워 있었다. 어머니가 약을 들도록 권하는 것으 ㄹ알아차리는 것을 보니 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후가 되었을 때 그의 구원에 대한 희망은 꺼져버리고 말았다. 어머니
는그만 기절하고 안방으로 운반되어 갔다. 온 집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여자들은  아
버지 방에 모였고, 남자들은그 앞 마루에 모여  앉았다. 어느 누구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
다. 수암의 어머니인 숙모만이 그가 삼키지 못하는 약을 떠넣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어머니는 안방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다시 정신이 들었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고 다만 
내 손만을 꼭 잡고 있었다. 할머니가 방 안에 들어왔을 때 어머니는,
  "이제 만사가 다 끝났어요, 어머니!" 하고 할머니께 말했다.
  할머니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앉은 채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둘째누나 어
진이가 들어와서는 우리에게 오늘 아침 사람을  시켜 데리러보낸 새 의원이 방극ㅁ  왔다고 
했다. 수암과 나는 급히 아버지의 사랑방으로 달려갔다. 
  이 새 의원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의원이었다. 그는  몇 주일 전부터 이곳의 환자
를 돌보기 위해 우리 고을에 머물러 있었는데, 마침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가 
끝내 우리 집에 온 것은 다만 우리 집 일꾼의 끈질건 설득 덕택이었다. 의원은 잠시 환자의 
진맥을 보더니 숙모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분은 이미 가셨습니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으니 손을 떼고 싶습니다."
  "제발 마지막으로 힘 좀 써봐 주세요!"
  병자보다 도 더 창백한 숙모가 애원을 했다. 숙모는 낯선의원의 소매를 잡고 방에서 나가
지 못하도록 말렸다.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다 드리겠습니다."
  그는 앉아서 맥과 심장을, 다음에 병자의 전신을 짚으며 진맥을 하였다. 
  "좋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보람이 없다고 해도 나
를 책망하진 마십시오."
  그는 주머니에서 길쭉한 통을 꺼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긴 침을 뽑아서 그것으로 처음에
는 병자의 윗입술을, 다음에는 아랫입술을 살짝 찔렀다. 그리고서 바로 늑골 밑 위장 부근에 
침 전부를 깊숙이 박고, 한참 동안 그대로 찔러두었다가 천천히 다시 뽑았다. 
  "만약에 병자가 살게 되면 오늘 저녁 안으로 어떤 징조를 나타낼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방에서 나갔다. 
  저녁이 되었다. 온 집안에서는 다시금 희망이 솟았다. 아버지의 병환이 더 나빠지지  않는
다는 징조가 벌써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오전처럼 조용히 누워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
하자, 아버지의 양손이 서로 맞닿을 정도로 움직였다. 우리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의 거
동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숙모는그의 손과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는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긴 숨소리가 방 안을 스쳐갔다. 그는 눈을 다시 감고는 왼쪽으로 돌아누
웠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곧  잠이 들고 성한 
사람처럼 숨을 쉬었다. 
  "살았다!"
  숙모는 이렇게 말하고 그만 자제력을 잃고 울음을 터뜨렸다.  숙모는 일어날 기운조차 없
었다. 다른 사람들이 부축하여 숙모를 숙모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어머니가 아버지 방에 들어왔으나 완쾌될만한 차도가 있는 것을 믿
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전신을 떨고  있었으며, 마치 시체처럼 보였다. 어
머니는 점차 진정해서 우리를 모두 방에서 나가게 했고,  부엌일이며 의원의 접대에 고나한 
지시를 했다. 수암과 나는 잠자리로 가야 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곧 잠이 들었다. 내가 한밤
중에 깨어나서 환자의 방으로 달려갔을 때 아버지는 일어나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
다. 나는 아버지에게 뛰어갔다. 아버지는 나를 어머니가  끌어낼 때까지 무릎에 앉혀주었다. 
나는 아머지가 정말 살아있는가를 확인하려고 그를 자꾸만 쳐다보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이부자리 곁에 누웠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두 분은 이  기적을 가져온 의원에 관해서 나직
히 얘기하고 있었다. 
  참으로 이 의원은! 그분은 정말 신통한 의원이었다. 나중에 들었지, 그분은 우리 고을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많은사람의 생명을 구해 준 의원이었다. 그가 다시 자기 고향으로 돌아
갔을 때는 방금 무덤에 끌고 갈 사람의 생명을 다시 구해줬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의원은 너
무나 많은 돈을 요구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그에게 왕진을  청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이 그릇됨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 생명을  스스로 잃게했다. 어느 날, 그가 부유한  환자를 
치료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큰 바위가 그에게 굴러떨어져 그가 성벽 아래 쪽에서 찌그
러져 죽은 것이 후에 발견됐던 것이다. 누가 범인인가를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무거운 돈
자루가 이 바위덩이로 변해 버렸다고들 말했다. 
  아버지는 서서히 회복되어갔다. 가을을 넘기고 겨우내  아버지는 무척 조심스레 보양되었
다. 중풍(中風)을 무릅쓰고 그 동안 쭉 해왔던 모든 일을 이제는그만두어야만 했다. 그는 집 
안과 바깥일을 날카롭게 선을 그었다. 모든 사교적(社交的)인 의무는 중닺되었고, 그와 가장 
친분 있는 친구들만이 집으로 찾아왔다. 처음에 그는 하는수 없이 그 의원의 요청과 가족의 
권유에 따랐으나, 이제는 스스로 휴식을 더 많이 취해야겠다는 것을 보다 절실히 느꼈던 것
이다. 그는 한 발짝 한 발짝 주위의 세계에서  물러섰다. 결국에 가서는 집안일도 정리했다. 
서당이 해체되어 버리자 아이들은 다시  만나지도 못하고 뿔뿔이 헤어졌다.  바깥뜰은 다시 
조용해졌다. 다만 젊은 서기(書記)인 순필이와 늙은 하인인 방 노인과 마름인 순옥이만이 아
직도 거처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대가족회의가 열렸다. 수암을 어떡하면 좋을까? 사람들은 수암이 한문을 더 익
히기 위해서 계속 서당에 다녀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수암은 한학을 잘 가르치는 서당이 
있는 시골 마을로 자기 어머니와  함께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거기서 지금껏 
아버지의 소유였고 또 그가 직접 관리해오던 토지의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수암과 나
는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이래 처음으로 큰 이별을 맞게  되었다. 나는 수암을 우리 고을에
서 한 시간 이상이나 걸어야 갈 수 있는 항만인 용지(龍池)에까지 바래다주었다. 여기서부터 
그는 배를 타고 암석투성인 깊은  해협을 지나 저편 바닷가로 건너가게  되었다. 배가 돛을 
올리고 물결 치는 푸른 파도 위를 흔들리며 멀어져가는 동안, 수암은 그의 어머니와 둘때누
나 사이에 앉아서 좀 겁먹은 듯이 우리 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갖고이 적어진 다음에 우리들의 생활은 정상적인 과정을 밟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의 마음 속에서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불교문학(佛敎文學)과 염불을 가정에 들여
오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매일 저녁 염불로 시간을 보냈다. 어떤 비도 바람도, 손님도 집안
의 어떤 불안도 그에게서 그걸 방해할 수는 없었다. 염불은 범어(梵語)로 하기 때문에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다만 그 모든 말들이 그의 장래의 생명에 해당하는 것
이라고 상상했을 뿐이었다. 
  어머니 자신은 진심으로 불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머니를 무척 기쁘게 했다. 
여름이 되자, 어머니는 신광사(神光寺)에 가서 불공을 드리지 않겠느냐고 아버지에게 의논했
다. 어머니는 또한 이 절의 스님을 집에 모셔와서 여러  가지 의식이며 제사에 관해 상의하
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다음해 여름으로 미뤄졌다. 그것은  나에게 
정말 서운한 일이었다. 
  우리 고을은 산으로 둘러싸였으며, 산에는 수많은 암자와 절간이 여기저기 있었지만 나는 
아직 한 번도 절간을 구경해 보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부처님에게 치성(致誠)을 올린 
일도 없고, 또 절에 가서 크게 불공을 드린 일도 없었다. 자주 우리 집에 찾아와  대문 앞에
서 염불을 외는 시주승은 세상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인도하는데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만 일 년에 한 번, 부처님  자신이 십구년 동안 명상한 뒤에 다시  목욕을 하고 설법하기 
시작했다는 사월 초파일에만 우리 고을에서  불교의식이 거행되었다. 그럴 때면  큰 길가의 
모든 집 앞에 이따금 집보다 세 배나 네 배가 넘는 노끈나무가 진열되었다. 줄기에 여러 색
깔의 천이 감기고 장식된 이 나무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색색의 줄들이 지붕과 땅 위에 내
리 드리워졌다. 저녁에는 이 줄과 노끈에 초롱불을 매달아, 수백만 개의 빛나는 꽃으로 뒤덮
인 정원을 거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절간을 꼭 한 번 구경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화창한 날 오전, 나는 이렇다  할 생
각도 없이 신광사로 소풍 가는 두 소년과 동행하게 되었다.  나는 아침 소풍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마침 서분 안에서 옛 서당 친구를 만났다. 어디 가느냐고 내가 물었더니 그는 신
광사로 간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은 울렁거렸고, 나는 그만  같이 
가자는 청에 망설이지 않고 무조건 응했던 것이다. 
  나는 늠름하게 걸어갔고 닥쳐올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소풍은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우리들은 고을을 빨리 벗어나서는 수많은 산골짝을  거쳐 산 속 깊이 파
고들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완전히 산 속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햇볕은 따갑도록 내리쪼였고 
우리는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러면서도 지치지도 않고 줄곧 산길을 걸어 마침내 멀리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평평한 마당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회색으로  보이는 신광사의 지붕이 나
뭇잎 사이를 뚫고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우리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나무 그늘이 땅에 길다랗게 깔리고 해가 뉘엿뉘엿 서
쪽 하늘로 기운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나는 다른 애들에게 너무 늦어지지 않도록 곧 집으
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는 너무 저물었으니 오늘 밤은 절간에서 자야 하겠
다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나 나는 부모들이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를 터이므로 어떤 일이 었
어도 그곳에서 밤을 새우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꼭 집으로 돌아가자고 그들을 졸
랐지만 아무런 보람도 없었다. 그들은 우선 절간을 구경하려고 했다. 우리들이 말다툼을  하
고 있는 동안에 해는 더욱더 기울고 우리를 맞은 젊은 스님이 이 밤중에 위험한 길을  되돌
아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
을 단념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첫 번째의 우울한 밤을 이 산 속에서 보냈다. 
  나는 수많은 불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화려한 절간들을 구경하지도  않고, 그 스님이 설
명하는 것을 듣지도 않고, 그리고 그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나는 우리 
고을이 있을 저쪽 산 너머만을 바라보았다. 어느 곳에도 내 눈에 익숙해진 그 넓은계곡이며 
바다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험준한 산봉우리만이 사방으로 둘러사여 있고,  절간의 
저녁 종소리가 깊은 계곡으로 쓸쓸하게 울려퍼질 뿐이었다. 누런  장삼을 걸친 스님이 저녁 
염불을 외러 마당에 들어섰다. 손에는 염주를 감아 드리우고 있었다. 벽을 두러싸고  세워놓
은 제단 앞의 수없이 많은 촛불 빛이 대웅전에서 새어나왔다. 여기서는 스님과 죽은 사람들
의 가족들이 죽은 사람의 혼을 위해서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얼마동안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는 염불과 불공은 밤을 새우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나서 불공 
드린 사람들이 넓은 뜰로 나왔고, 승복으로 정장한 백여 명의 승려들과 상복을 입은 여자들
이 원을 그리며 천천히 절 마당을 돌았다. 여자들은 모두  두 손으로 원통처럼 접어진 분명
히 죽은 영혼의 거처인 것 같은 나무판을 받들고 서  있었다. 밝아오는 아침에 성스러운 장
작불이 이 원의 한가운데서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엄숙한 염불 소리에 섞여 둔탁한 목탁
소리가 울려오고, 승려들은 합장으로 작별의 염불과 함께 나무아미타불을 외었다. 
  이제서야 죽은 사라의 영혼은 마침내  땅에서 해방되어 다른 존재로  옮겨지는 것이었다. 
목탁의 박자와 운율적인 노래에 감동하여, 우리 세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조용히 여자들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도 끊임없이 원을 그리며 돌았다. 어느  새 아침이 환히 밝았다. 사람들
이 얼굴이 차차 뚜렷이 분별됐고, 계곡은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염불은 점점  열광적으로 
고조되고 원무는 더욱더 빨라졌다. 이제 동녘 산봉우리에 붉은 해가 치솟으며, 새로운  일광
이 계곡과 절간을 내리비치기 시작했다. 승려들이 염불을 외는 동안, 부인들은 한 사람식 불 
앞에 다가와서 영혼의 거처를 불 속에  던졌다. 여자들은 모두 통곡을 했다. 이것이  영원한 
마지막 작별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덩달아 흐느껴 울었다. 목탁의 운율은 둔탁하고 구슬프게 
울렸으며, 승려들은 끊임없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었다. 
  이날 밤의 감격을 깊이 간직한 채 우리는 산에서 작별하고 귀로에 나섰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모든 책망과 벌을 아무 반항도 없이 참고 받았다. 나는 이상스럽게도 
이 종교적 체험에 감동되었고, 하루 전보다  더 어른이 된 것같은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곧 
나를 용서하고 내가 경험한 것을 모두 이야기하라고 하셨다. 
  그는 이것을 기쁘게 여기는 것 같았으며, 심지어 이날 저녁부터  그가 외는 염불의 한 대
목을 같이 하도록 허락했다. 염불을  마친 후에 그는 양자강 유역의  골짜기에 산재해 있는 
여러 절과 암자에 관한 것들이며,  그리고 그곳을 찾는 유명한 시인과  그들이 부른 노래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중국 고전으로 당시선(唐詩選)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에게서 즐겁게 들
은 것은 책으로 된  사기(史記)나 시(詩)가 아니라 당시대부터  전해 오는 설화며 전설이며 
일화 등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많은 불행한 시인과, 고독을 견디기 어려워 강물에 뛰어
들어 죽고 싶어하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많았다.애절한 곡조가 바위에서 울렸고, 또  고독한 
협주곡이 풀잎에서 들렸었고, 동정호의 저녁 노을에 슬픈 이별가가 떠돌아 다녔다. 
  아름다운 달밤이면 아버지는 샘뜰 아래 자리를 만들라고 했다.  그러면 그의 이야기는 시
적으로 승화되어 끝날 줄 몰랐고, 이따금  소리를 높여 시를 읊기도 했다. 아버지의  근엄한 
모습도 사라지고, 만약에 좋은 운이 떠올라 기분이 내키면 그는 나와 농까지 했다. 한  번은 
아버지가 술병에서 한 잔 가득히 따라 부은 잔을 마셔보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우리 옆에 없었던 어느 아름다운 달밤에  있었던 일이었다. 어머니가 옆
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일 옆에 계셨더라면 아버지와 함께  술을 마시도록 허락하지 않았
을 것이다. 어머니는 술이라고 하면 절대 반대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독한 술을 즐겨  마
시곤 했다. 이 일로 인하여 두 분 사이에는 종종 사소한 시비가 벌어져TEk. 그러나  일반적
으로 어머니가 늘 양보하고 저녁마다 아버지께 그 곡주를 한  병 가득히 가져다 드렸다. 우
리 부자가 같이 앉으면 술병이 놓여지는 자그만 상에는 두 개의 술잔과 한 쟁반 가득  담긴 
과일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보통 밤이 깊어지고 술병이 빌  때까지 우리 옆에 앉아 있었
다. 그러나 그해 여름 밤엔  마을 부인네들의 독서회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우리 옆에 
없었다. 
  어느덧 텅 빈 서당의 지붕 위에 달이 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하늘에 달이 빛나고 있
었다. 두 뜰 사이에 담이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모든 생명, 
모든 의식(意識)이 그처럼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웃는 얼굴에 빛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는 술잔을 더 기울였고 그의 이야기는  생기를 더해갔다. 수많은 시
들이 인용되고 읊어졌다. 
  "너, 한국이 낳은 위대한 시인 김삿갓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나는 새 이야기에 대한 즐거운 기대에 차서 대답했다. 
  "그의 어버지는 남도의 어느 고을 원님으로 높은 벼슬자리에 있었다. 임금이 정치를 잘못
한 까닭에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었거든.  당시 강력하던 남도의 원님은  3만 명의 병졸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명포수들이었어. 그들과 함께 이 자가 임금을 물리치려고 서울로 
진군해 들어갔다는 거야. 세 개의 도(道)가 이미 그에 합류하여 아무도 북진을 막아내지 못
했다는 거야. 그런데 그가 병졸을 거느리고 새로 빼았은 고을에 입성하려 할 무렵, 길가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과 만났단 말이야. 이 사람은 무장도 하지  않았고 손에 든 것도 없었지
만 그는 이 승리에 도취된 정복자의 말에 다가가서 말고삐를 냉큼 잡았다는 거야."
  아버지는술잔을 들여다보고 나서 얼른 다 마셔버렸다. 나는 잔을  다시 채우려 했으나 병
은 이미 텅 비어있었다. 
  "더 없느냐?"
  아버지가 물으셨다. 
  그때 아버지는 -내가 그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약간 슬픈 얼굴 표정이었다. 이것
이 내 마음을 흐리게 했다. 
  "더 가져오겠습니다."
  나는병을 들고 일어셨다. 
  어버지는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너 참 대단하구나. 어머니께 잘 청해 보아라! 아마 조금은 줄지 모르겠다."
  "술을 꼭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나는 곧 병 하나 가득히 술을 가져다가 아버지에게 따랐다. 
  아버지는 무척 기뻐했다.
  "그런데 그 상대방은 누구였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래 그것을 네게 물어보려던 참이다. 이 대담한 사나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한참 곰곰이 생각하다가
  "임금 자신이 아닙니까?" 하고 말했다. 
  "그래! 임금이 몸소 나와서 그렇게 무기도 없이 적에게 대했다면  그야 물론 옳았을 것이
다. 아마 다른 임금이라면 그랬을지 모르지. 하지만 이  임금은 매우 겁쟁이였거든. 이 대담
했던 사나이는 임금이 아니고 정복자의 아들이었단 말이야. 이 아들이 바로 저 유명한 김삿
갓이란 말이다. 그래 어떠니?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지?  그렇지만 그는 틀림없이 그의 
아들이었다는 거야.
  '남으로 회군하십시오!' 하고 그는 아버지에게 간청했다지만, 아버지는 '내 군관이 되면 너
에게 삼천 군졸을 주겠다'고 했다는 구나. '할 수 없습니다"하고 아들은 '아버님은 상감에 댛
나 충성을 어겼습니다. 따라서 저도 아버님께 복종을 거절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거야. 이 
말만 하고 그는 아버지의 진군을 더 이상 막지 않았지. 김삿갓은 임금에게 충성했어. 그렇지
만 아버지와 적대하여 일을 도모하지는 않았단다. 오히려 그는 방랑의 거지 시인이되어버렸
지."
  아버지가 이야기를 끝내자 나는,
  "저 같으면 아버지를 도왔을 텐데요" 하고 말했다. 
  "아니다."
  아버지느 말했다.
  "너는 아직 그걸 모른다. 임금께 일단 충성을 맹세한  이상 결코 그에게 불충해서는 안되
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삿갓은 아버지에게도 복종을 서약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거역하지 말았어
야 옳았습니다."
  "물론이지"
  아버지는 나의 논리에 동의하면서 기뻐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계획에 반대하지 dskg고 시인이 되어 시끄러운 세상에 등
을 돌리고 말았다."
  "그렇더라도 저라면 아버지를 도왔을 겁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임금 때문에 자기 아버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야, 이 고집쟁이야!"
  아버지가 소리쳤다. 
  "아닙니다. 아버님은 그렇게 생각하시겠습니다만,  저는아버지가 어른이라고 해서  저보다 
그걸 더 잘 아시는진 모르겠습니다."
  "말 잘했다! 그래 똑똑하구나. 자, 우리 한 잔 같이 마시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 사용하지 않고 그냥 격식으로 갖다 놓아두었던 다른 빈잔에 순을 
따랐다. 
  나는 이 제안에 매우 놀랐다. 어머니가 언제나 반대해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
는 취하게 하는 음료를 적(敵)으로 여겨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손으로 술잔을 잡았
다. 
  "자, 쭈욱 마셔라."
  그러나 나는 단숨이 잔을 비웠다. 그러나 잠시 후에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술이 너무  독
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얼른 입에 대추를 하나 넣어주었다. 그것을 씹으니 좀 괜찮았다. 
  "맛이 어떠냐?"
  "좋습니다."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것 봐! 그럼 한 잔만 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막 울렁거리고 목은 마치 졸
려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으려고 애를 썼다. 이러는  동
안에 아버지는 김삿갓의 시를 계속 읊었다. 
  우리들이 두 번째 잔을 비웠을 때 나는 손에 대추 두 개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나는용기를 내어 사내답게 대추를 씹었다. 그러나 기묘하고 이상스럽
게도 머리가 빙빙도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물러서지 않고 마치  기분이 좋ㅇ느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돌아와서 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물론이지. 그렇지 그래. 벌써 두잔이나 마셨거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하도 놀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시선은 그렇게 엄격하지도 
않고 꾸짖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나를 좀 놀리는 것 같았다. 
  "한 잔 더 마셔도 되나요?"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며 잔을 빼앗았다. 
  "제발 그렇게 심하게 굴지 마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한두잔 정도의 술은 그에게도 해롭지는않아요. 내가 이렇게  외로운데 친구가 있어야 하
지 않겠소."
  "그럼 제발 오늘만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말하고 어머니는 잔을 채웟다. 
나는 의기양하게 세 번째 잔을 단숨이 비웠다. 나는 어른이 된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
게 현명하시고 이토록 재미나게 이야기하시는 아버지의 친구가 되다니!
  "아, 아시나요, 아버지? 아니, 참  아시겠습니까? ... 존대말을 써야 겠습니다.  ... 어머니가 
시인에게 술이 얼마나 불가피한가를 아시기만 한다면!"
  "정말 그렇다."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는 옆에서 잠긴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나를 대견
해 하는지 혹은 웃음거리로 여기는지 나는 분간할 수 없었다. 여하튼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 
상관 없었다. 
  달은 매우 밝았고, 살구꽃은 향기로웠다. 나는 술상에 마주 앉아서 아버지의 친구가  되었
던 것이다. 
  
    신식학교
  이른바 이 신식 학교에 관해서는 나는 일찍부터 종종 들어왔고, 지난 가을부터는 나의 부
모들도 가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몇해 전에 세워진 이 기묘한 학교는 이 고을의 북쪽
에 있는 직물 거리 근처에 있다고 하며, 번쩍이는 많은 유리 창문이 달려 있다고 했다.이 학
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주 신기한 것이라고 했다. 거기서는 학생들에게 고전 한문도,  습자
와 시 같은 것도 가르치지  않고, 대양(大洋)의 서쪽, 유럽이라고 하는  지구의 다른 곳에서 
수입해 온 신식 학문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이런 곳이 실제로  지구의 어느 곳에 있는지 그 
학문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  학교에서는 고등산수며 어려운 의술
(醫術)을 가르친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지리학(地理學)과 천문학(天文
學)에 관해서까지 가르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은 이 학교에서 
한학(漢學)은 가르치지 않으므로 아이들이 못쓰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학교
에 관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좋은 점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나의 아버지는  어머니
와 또 온 가족들과 오랫동안 상의 끝에 나를 일  년 동안 그곳에서 교육시키기로 결정했다. 
나는 내 나이 열한 살 임에 비해서는 고전 한문을 충분히 읽어갈  수 있었다. 내가 여러 달 
전에 배운 바 있는 중용(中庸)과  맹자(孟子)로 당분간은 충분했으나, 그  다음에 배워야 할 
책들은 내 연령에는 역시 너무 어려운 것 같았다. 
  신식학교에 가고 싶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외아들이었기 때
문에 몹쓸 놈이 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한문이며 기타 한시 읽기를 좋아하였다.  그
러나 나는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용기 있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원하신다면 가보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날이 맑으나 아직도 쌀쌀한 어느 봄날 아침에 아버지를 따라 문안으로 갔
다. 나는 제일 좋은 옷을 입었고, 어머니가 장만해 준  새 보자기에 점심을 싸서 들고 갔다. 
우리들은 골목길을 빠져 큰길로 나섰다. 
  "아버지, 거기서 천문학을 배운다는데, 사실입니까?"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구나."
  아버지가 대답했다. 
  "언제든지 하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주의 깊게 들어둬라. 그것은  아주 높은 학문이
다."
  "제가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신이 언제나 맑아야 한다."
  아버지는 진지하게 나를 충고했다. 
  우리들은 종각 거리를 지나 옆길로 접어 들어갔다. 그러자 곧  큼직한 건물이 문 앞에 이
르렀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입에 그토록 오르내리던 무서운 학교였다. 학교 이름이  대문 
위에 새겨져 있었다. 교정을 들여다보았더니 엄청나게 큰 것 같았다. 
  "들어오너라!"
  앞장섰던 아버지가 말했다. 
  "약간 겁나니?"
  내가 뒤따르기를 주저하자 아버지는 이렇게 물었다. 
  그는 웃었다. 나는 천천히 문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문 안에 다시 서서 많은 별관 건물을 
살펴보고 있을 때 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끌며 어떤 실내로  들어갔다. 이 방에서 한 노인이 
나왔다. 나는 아버지의 지시대로 이 노인을 보고 절을 했다.
  "이분이 이 학교 교장선생님이시다."
  아버지가 웃으면서 설명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말 잘 들어라."
  아버지가 아직도 교장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나는 햇빛이 들지 않는 침침한 작
은 방으로 송 선생님이라 불리는 젊은 선생님에게 인도되었다. 나는 그에게도 절을 했다. 그
는 나더러 앉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자리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까지 돗자리에만 앉았었기 때문에 의자란 것을 몰랐고, 그것은 나에게는 너무나 고상한 
것 같았다. 송 선생님이 앉아도 된다고 허락하자, 나는 조심스레 그 위에 앉았다. 
  "이제까지 무엇을 배웠지?"
  그가 물었다. 
  내가 한참 동안 굳어버린 듯한 표정을 한 채 앉아 있었더니 그는 계속해서 물었다.
  "예를 들면 통감(痛鑑)을 읽었니?"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네, 여덞권까지."
  "그러고는 무엇을 읽었지?"
  나는 다시금 잠자코 있었다. 나는 그 다음에 읽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곧 생각이 나지 않
았다. 나는 너무나 당황하고 있었다. 
  "사략(史略)인가?"
  그가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맹자도?"
  나는 다시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중용도 벌써 읽었겠구나?"
  "네, 그것도 읽었습니다."
  "참으로 많이 읽었구나!"
  그는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와서는 내 앞에 펴 놓았다. 
  "이걸 한 번 읽어봐라!"
  나는 그 책을 읽었다. 
  "이것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니?"
  그는 '미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를 짚으면서 물었다. 
  "그건 아마 영국 근처에 있는 나라가 아닌가요?"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유럽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이 두 이름을 자주 인용하는 것을 들었다.
  송선생님은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나를 소위 제2학년으로 정해 주었다. 
  아버지는 나를 한 번 더 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교장실에는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
지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맡겨버렸던 것이다. 
  첫날에는  늘에 관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 자연(自然) 시간에는 네  필의 말(馬)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끄는 공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긴 유리관을 보았다. 
그 속에서 동전과 깃털을 한 쪽 긑에서 다른 쪽  끝으로 떨어뜨렸다. 다른 시간에는 산수를 
배웠다. 두 번씩이나 체조를 해야 했다. 저녁때에 나는  다시 유리관을 보게 되었다. 눈앞에 
갖다대고 들여다보면 그 속에 있는 모든 물건이 화려한 색으로 빛났다. 
  해가 졌다. 우리반 학생들은 모두 교문으로 몰려나갔다. 그러나 나는 또 한 번 송선생님에
게 불려갔다. 거기서 나는 교과서 두 권과 란도셀과 많은 연필과 석판을 받았다. 어떤  상인
(商人)이 나를 위해서 가져온 것이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책들을 보았다. 하나는 동양
사라고 적혀 있었고 다른 책은 자연법칙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책을 펴서 한 장씩 훑어보
았다. 자연책에는 그림이 있었다. 저울이며, 유리관이며, 돛을 단 배며, 유럽 기선 등이 있었
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한 공은 그 속에 없었다. 
  송선생님은 내게 시계가 있느냐고 물었다. 
  "없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아버지는 갖고 계시지?"
  "아니오."
  "그거 안됐구나" 하고 그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너는 새 시간을 보는 법을 아니?"
  "열두 시간 말입니까?"
  "옳아, 그러나 열두시간씩 두 번이다. 오전 오후에 각기 열두 시간 씩으로 말이야. 아침에
는 여덞시에 학교에 와야 한다. 오늘 아침에는 여덟 시가 될 때  해가 남쪽 운동장 벽에 걸
려 있었다. 여하튼 아침밥을 먹으면 곧장 학교로 오너라."
  나는 다시 자연책을 펼쳤다. 
  "이 책에서는 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한참 만에 말했다. 
  "어떤 공 말이냐?"
  "말 네필이 끄는 공 말입니다. "
  "그것은 옥(玉) 선생님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역사밖에는 가르치지 않는다. 그럼 이젠 집
으로 돌아가거라. 날이  벌써 어두워진다. 집에서는  부모님들에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릴텐
데!"
  
  아버지의 사랑방에서 우리 집안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그 중에는 어머
니와 둘째 누나도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내 책과 가방이며 연필을 세밀하게 구경했다.  그 
동안에 나는 아버지의 진지상에 남은 것 들을 퍼 먹었다.   
  그들이 각기 제 방으로 돌아가고 아버지와 나 둘이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오늘 새로 무
엇을 배웠느냐고 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아주 많은 것을 배웠어요, 아버지."
  "유럽에 관해서도 좀 배웠느냐?"
  "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이상스런 것이었어요."
  "그럼 어떤 이야기였는지 들어보자."
  아버지는 성급하게 말씀하셨다. 
  "저는 옳게 설명할 수 없어요. 선생님이 말한 것을 주의 깊게 들었는데도 잘 이해가 되질 
않았어요. 선생님은 네 마리의 말이 공 하나를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간다고 설명했어요. 다음
에 저녁때가 되자, 저는 유리관을 보았어요. 학교 교정의 모든 돌이며, 사람들의 옷이며,  지
붕의 기왓장 등 모든 것이  유리관을 눈앞에 갖다대기만 하면 온갖  색으로 곱게 빛났어요. 
왜 그렇게 되는 지 저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버지는 그걸 설명해 주실 수 있겠어요?"
  "그것이 유럽에서 온 것이라던?"
  한참 동안 잠자코 계시던 아버지가 물으셨다. 
  "네, 그렇게 생각됩니다."
  "어느 선생님이 보여주더냐?"
  "옥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하더냐?"
  "햇빛이 그렇게 갈라진다고 한 것 같아요."
  "햇빛이 갈라진다구? 빛이 갈라져?"
  아버지는 반복해서 중얼거리기만 하였다
  잠시 후에 아버지는 남포에 불을 켜고 방구석에 있는 나지막한 책장에서 책들을 꺼내오라
고 하셨다. 이 책은 그가 서울에서 받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유럽의 많은 지혜가 담겨져 있
었다. 아버지는 이 책 저 책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나서 다시 책장에 꽂으라고 했다. 
  "너 학교에서 좀더 주의 깊게 들어야겠다."
  아버지는 실망해서 말씀하셨다.
  "불을 끄고 그만 자거라."
  "오늘은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내가 말을 꺼냈다.
  "학교의 모든 것이 매우 낯설었어요. 오랫동안 저는 무서워지기도 했어요. 거기는 전혀 내 
맘에 안 들 것 같아요. 이제까지 제가 익숙해 있던 것과는 모든  게 너무 다른 까닭인가 봐
요."
  아버지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럼 슬프더냐?"
  아버지는 나중에야 이렇게 물었다.
  "좀 그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어요. 옛 서당과 우리 집을 자꾸자꾸 생각하지 않은 수 없었
어요."
  "내 곁으로 좀 오너라."
  아버지는 말하고 나서 내 손을 끌어당겼다.
  "너는 아직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외고 있을 테지?"
  나는 다시 생각해 보고 그렇다고 했다. 배를 키고 가며 지은 이 시인의 노래를 나는 작년
에 배웠었다.
  "그것을 한번 읊어봐라."
  나는 막히지 않고 읊었다.
  "너는 저 영탄가를 읊을 수 있니?"
  나는 그것도 쉽사리 해냈다. 오십 절이 끝나기까지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때, 이젠 네 마음이 좀 진정되었니?"
  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말하고 내 이부자리로 돌아갔다. 
  "내일 또 학교에 갈거냐?"
  "네, 아버지가 원하신다면…."
  


    시계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기섭이라는 남학생은 아주 예쁘고 영리한데다가 무엇이든지 다 알
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아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풀이 죽어 앉아 있었기 때문
에 나를 무척 동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자연은 거의 아는 게 없었고, 산수는 더 형편없
었다. 그는 때때로 내 빈 공책을 들여다보고는 숫자 몇 개씩을 적어넣어 주었다. 이  어려운 
산수의 답이나마 집으로 가져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도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답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는 하루종일 맥이 풀려 앉아서는 저녁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나
는 자연 시간에 다소나마 알아챈 것과 유럽에 관해서 들은 새로운 것들을 아버지에게 이야
기하기 위해서 곰곰이 머리 속을 정리해 보았다. 아버지는 새로운 것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
이라도 기뻐했다.
  나는 학교에서 들은 모든 것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고,  조금이라도 유럽의 것처럼 보이
는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렸다. 유럽 글자가 적힌 종이조각이며, 고층 건물이나  철
교, 탑의 사진 등 이 모든 것을 아버지는 오랫동안 세밀히 살펴보곤 했다.
  휴식 시간이나 방과후에 많은  아이들이 운동장에 모여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의 높은 학문과 현명한  인물에 대하여 얘기들을 했다. 그런데  그 이름 모두가 
이상할 정도로 낯설게 들려서 기억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어느  부유한 중국인이 유럽의 어
떤 현인(賢人)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고 동급생인 복술이가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아
주 비싼 금강석 반지를 손가락에서 빠뜨려 그만 뜰에  떨어뜨렸다. 그는 현인과 이야기하던 
도중 주인과 자기에게 일어난 불운을 이야기했다 한다. 그랬더니 주인이 말하기를,
  "걱정할 것 없습니다, 손님. 유럽에서는 아무도 땅에 떨어진 남의  물건을 줍지 않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도, 걱정하던 이 사람은 창문을 통해 방금  뜰에 비질하던 시종이 처음에는 
반지를 손에 들었다가 뜰을 깨끗이 쓸고 난  다음에 그 반지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는 을 
보았다는 것이다.
  기섭이는 한동안 유럽에 살았던 중국  황태자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그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그는 작별 인사 겸 그간의 호의에 사의를 표하려고 그 나라의 제일  높은 
사람을 찾아갔었다. 궁정 뜰에 이르러 그는 마침 자갈이 많은 길을 소제하던 정원사에게 그
의 주인이 자기를 만나줄 시간이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때 정원사는,
  "내가 바로 이 나라의 대통령입니다. 유럽에는 다른 야만국에서와 같은 그런 상전도 없고 
종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몰랐다.
  "그것 봐라."
  아버지는 기쁨에 차서 말했다.
  "유럽 사람이 바로 진정한 사람이야."
  아버지가 며칠 후에 집에 가져오게 한 큼직한 벽시계가 밤 열두 시를 쳤다. 그 소리는 온 
집안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시계는 조용한 밤에 계속 똑딱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등불 옆에 앉아서 나의 교과서를 뒤져보고 있었다.
  "유럽에 관해서 더 들은 것이 없느냐?"
  "없습니다."
  "이 나라들은 누가 다스리는지 사람들이 네게 말하지 않더냐?"
  "아니오. 그러나 저는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일종의 왕일 겁니다."
  "응, 그럴 테지!"
  아버지는 종종 깊이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미소를 지으면서 책을 계속 읽고 있었다. 그
러고는 책을 옆에 제쳐놓고 그에게 가리워져 있는 새 시계를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처럼 앞
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때 내가 막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교실  문 앞에서 웬 아이가 나를 기
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상급생인 용마라고 하는 아이였다.
  "네가 남문(南門) 안에 사는 이 감찰 댁 아들이냐?"
  그가 물었다.
  "응, 그래"하고 나는 대답했다.
  "우리, 오늘 어떤 집에 함께 가보자. 그 집 아들을 우리 학교에 넣도록 하려는데 말이다."
  나는 전에 신식 학교의 아이들이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이 집 저 집 찾아가 그 집  아이들
을 신식 학교에 보내도록 우리 학교의  좋은 점을 늘어놓으면서 부모를 설득시킨다는  말을 
종종 들은 일이 있었다.
  "송 선생님이 오늘 저녁에는 우리보고 가라고 그랬어."
  나는 주저하는 모습을 보며 용마가 말했다.
  "저녁을 먹고 곧 버들다리로 오너라! 거기서 만나자.  부모들이 볼 수 있게 네 교과서 몇 
권 갖고 오너라."
  우리들이 강을 끼고 건너고 있을 때는 벌써 어두워졌다.  여울물이 저녁빛에 곱게 빛나고 
있었다.
  "너 뉴턴에 관해서 좀 아니?"
  용마는 걸으면서 물었다.
  "아니."
  "모든 것이 땅으로 떨어진다는… 중력(重力)에 관해서 정말 듣지 못했니?"
  "아니" 하고 나는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마는 사뭇 놀란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도래의  아이가 중력에 관해서 전혀 알
지 못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은 알고 있어."
  나는 말했다.
  "좋아. 너는 그것이라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또는 산소에 관해서 말해도 된다. 너는 물이 산소와 수소라는 서로 다른 두 물질로 구성
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라. 우리 선조들은  우주가 음(陰)·양(陽)의 두 극(極)으로 형성
되었다는 것만을 안 것 같애.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물이라든가 공기, 혹은 바위와 같은  개
별적인 것에도 이 원칙이 지배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다. 그리고 말씨는 명확하고 신중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제 나쁜 시대가 왔다고 한다. 그러면 너는 분명히 말해 줘라. 
그건 조금도 나쁜 시대가 아니라, 방금 시작된 아주 새로운 시대라고, 예를 들자면 눈이  많
이 온 긴 겨울 다음에 봄이 오듯이, 진달래가 피고 뻐꾸기가 우는 것과 같이 온다.  나는 우
리 시대를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들이 찾아간 집의 아버지는 붓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 집의 바깤 벽에는 붓을 판다
는 큼직한 글씨들이 여기저기 씌여 있었다. 우리들이 막 돌층계  앞에 왔을 때 주전자를 손
에 들고 내려오던 젊은  부인과 마주쳤다. 그 여자는 우리들이 찾아온 목적을 듣자, 한 마디
의 대꾸도 없이 집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닫아 걸어버렸다. 우리들이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렸
지만 끝내 열어주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 집 앞에 서서 얼마 동안 가까운 계곡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가 돌아오고 말았다.
  "너 혹시 집에 나무상자가 있거든…."
  용마는 말을 계속했다.
  "검은 종이로 안팎을 붙여라. 다만 한 쪽만은 그냥 두고 거기에다 흐린 유리를 덮어라. 그
리고 그 반대 방향에 바늘만한 가는 구멍을 내라. 네가 이 상자로 풍경을 내다보면 온갖 나
무와 꽃들이 유리에 비치는 것을 보게  될 거다. 네가 이 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일 때에는 
이와 같은 것으로 사진을 만든다고 이야기해도 좋다."
  자기 집에 왔을 때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책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자기  방으로 
이끌고 갔다. 책 중의 몇 권은 유럽식으로 제본되어 있었고 금박한 글자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감히 만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이 먹으로만 글을 쓰고 있을 때, 유럽  사람들은 금촉으로 글을 썼단다"하고 그는 
나에게 설명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그는 내게 조그맣고 얇은 푸른  표지를 한, 유럽식으로 
들리는 이름이 쓰여져 있는 책을 주었다.
  "이 책은 진보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읽는다. 한번 너의 아버지에게 보여드려라!"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아브라함 링컨, 아브라함 링컨, 이것은 아마 사람의 이름일 테지?"
  아버지가 나직이 물었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몇 장을 읽어보고, 다른 장들을 넘기고는 책을 앞뒤로 뒤적이며 음미했다.
  "너는 그만 자거라."
  아버지는 짧게 말하고는 쉬지 않고 연달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유럽의 현자(賢者)입니까?"
  나는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끄덕였다.
  "공자나 맹자처럼?"
  "아니야, 그분들과는 다른 것 같다."
  "그럼 우리 나라의 율곡 같은?"
  "전혀 다르다."
  아버지늬 표정은 방해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나는 잠자코 아버지가  그 책을 다 읽을 때
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에 무척 흥분한  것처럼 보였으나 나에게는 일언
반구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앉아서 앞에 놓인 책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담뱃
대에 불을 붙이고 담배를 피웠다.
  이 유럽 사람이 그럼 시인이었단 말인가? 혹은 영웅인가? 아니, 나쁜 임금의 충실한 신하
였을까? 유럽에서도 악정(惡政)을 하는 임금이 있는가?
  나는 서랍에서 사진을 꺼내다가 높은 집이며  긴 다리며 뾰족탑 등을 유심히  들여다보았
다. 사람들은 이 탑을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 괘종시계는 천천히  그러나 윙윙 울리면서 치
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지나가는 구름 사이로 어쩌다가 비쳐오는, 도달할 수 없는 저 먼 지
혜의 성에서 울려오는 소리이기나 한 것처럼 들렸다.
  아버지는 손님을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많은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읍(邑)
에서 오는 온갖 사무적인 방문객은 젊은 서기인 순필이 접대했고, 우리 농토에서 오는 농부
들은 마름 순옥이로 하여금 맞아서 의논하게 했다. 사람들은 빈번히 오고 갔고 흥정하고 계
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옛날의 서당이던 바깥채에서만 하였다.  바깥채에서 
담과 같혀진 중문으로 떨어져 있는 샘채는 하루 종일 적막하리만큼 조용했다.
  아침이면 머슴이 뜰을 깨끗이 쓸었고, 저녁에는 구월이가 작은 정원에다 물을 주었다.
  아버지가 매일같이 맞이하는 방문객은 저녁식사  후에 구월이나 다른 시종들을  거느리고 
와서는 잠시 앉아 있는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가정에 관해서 상의했고, 안채에 
관한 일이며, 여자 손님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을 한참 듣고 난 다음에, 걷어올린 대나무 발을 열려 있는 문 앞에 내려놓고 남포등에 불을 
켜고 안녕히 주무시라는 말을 남기고 가셨다.
  나의 누나들 중에서 가운데 누나인 어진이가 저녁이면 자주 우리한테 건너와서  이야기들
을 듣고 갔다. 누나는 우리 학교에 관해서 무척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누나는 내 책들을 
자주 뒤적이다가 마음에 들 만한  곳들을 읽기도 했다. 다음날이면 내가  필요로 하지 않는 
이 책 저 책을 자기 방에 가져가서 자세히 읽어보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누
나에게 신식 학교에 가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누나는 깜짝 놀라서 다시 책을 놓아 버렸다.
  "아버지는 왜 그런 농담을 다 하세요?"
  당황해서 누나는 그렇게 말했다.
  '큰애기'라고 불리던 나의 제일 큰누나는 이미 시집간 지  오래 괴었다. 제일 어린 누나인 
셋째는 아버지의 사랑방에 들어오는 것을 아직 부끄러워했다. 어느  날 저녁에 부모들이 오
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내가 혼자 안채의 작은 방에 있었는데 그때 어진이 누나가 
나한테로 왔다.
  "이 책들은 참 이상하구나."
  그 누나는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한문자(漢文字)도 없고, 깊은 뜻을 지닌 문장도 없으니 말이다. 너는 이 책으로 현명해지
리라고 믿니?"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말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너는 뭘 배우니?"
  그 누나는 소중한 듯이 이 책 저 책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정말 너에게는 참으로 애석하다. 벌써 중용(中庸)도 읽었고 또 많은 시를 읽었으며, 심지
어는 율곡(栗谷)까지 청서한 너 같은 재주 있는 애가 이게 뭐냐? 그런데 넌 이제 이런 가치
도 없는 책으로 너의 재능을 낭비하고 있잖아."
  어진이 누나는 영리했다.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일화며 훌륭한 문장의 소설들도 제법 읽
었다. 종종 어머니도 미처 모르는 고전 문장을 입으로 뇌이곤 했다. 그 누나는 우리  남매들 
중에서 가장 영리하다고 사람들은 말했으며, 또 나를 자주 꾸짖는 유일한 누나였다. 그 누나
는 내 글이 곱지 못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았으며, 내 말은 멋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능하
면 나는 누나와 대화를 피하려고 했다.
  "새 학문들은 다르단다."
  나는 마침내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기서는 예를 들면 매일 수천  리를 달리는 기차를 어떻게  제조하는가를 배우고 있어. 
그리고 달까지의 거리를 특정하는 방법이며, 불을 켜기 위해 전력을 이용하는 방법 등도 배
우고…."
  "그러니 너는 현인(賢人)이 될 수 없어."
  누나는 근심스레 말했다.
  "지금은 다른 시대가 온 거야."
  나는 말을 계속했다.
  "어두운 잠을 깨고 보니 밝은 시대가 왔어. 새로운 바람이 우리를 일깨운 거라구. 이젠 오
랜 겨울이 가고 새 봄이 온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잖아."
  누나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내 말을 거의 듣지도 않았다.
  "그러면 유럽이란 나라가 도대체 여기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줄 아니?" 하고 누나가 
물었다.
  "나는 아직 그것을 배우지 않았어. 아마 수만 리가 될 거야."
  "옛날에 소군 공주(小君公主)가 꽃이 없는 나라에 시집 갔었는데, 그러면 아마 거길까?"
  "아니야, 그것은 다만 오랑캐 나라였어."
  "유럽에도 백합이며, 개나리며 진달래 같은 꽃이 핀다고 넌 생각하니?"
  "난 몰라."
  "너는 그럼 달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지을 수 있게 그 고장에서도  남풍이 불어
온다고 생각하니?"
  "난 확실한 것은 말할 수 없어."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잖니?"
  누나는 실망한 나머지 딱 잘라 말해 버렸다.
  
    방학
  서당에는 여름방학이 없었다. 날씨가 아주 더워지면 보통 때보다  좀 공부 시간을 줄였을 
뿐이었다. 물론 일요일도 없었고, 다만 한 달에 이틀씩만  놀았다. 그러나 이 새 학교에서는 
일요일은 휴일이었고, 여름에는 한 달 동안이나 편하게 보낼 수가 있었다.
  '얼마나 좋은 제도인가!'
  아버지도 또한 이 제도를 좋아하셨고, 멀리 떨어진 어느  시골에서 고전 필적으로 유명한 
훈장한테 가서 습자를 더 공부하든지, 아니면 아버지 곁에서  한문책을 청서하든지 양단 간
에 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나의 필적에 만족하지 않고 방학을 습자 연습에 이용하기를 바랐
다. 그러나 나는 둘째 제안으로 결정했다. 나는 많은 가는  붓과 빈 공책을 받았고, 이 책을 
쌀알만한 크기의 글자로 채워야만 했다. 매일 아침 나는 원문에서  두 면씩 배우고 또 오전
동안에는 그것을 청서했다. 아버지는 내게  많은 글자를 반복해서 연습시키고, 때로는  전면
(全面)을 다시 쓰게 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오후에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소위 바둑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수많은 흰 돌
과 검은 돌로 고상한 판놀이였다.
  희고 종잇장같이 엹은  고운 바둑돌에서 나는 파도에 닦인  조개껍데기 조각을 연상했다. 
한 면에는 아직도 진주 조개층이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 돌은 굵고 둥글며 편암(片岩)처럼 
회색빛이 돌았다. 이것들은 강바닥에 주워온 것 같았다.
  내가 흰 돌과 검은 돌을 주위 깊게 살피고 있을 때 아버지는, "자, 검은 돌을 주워라"하고 
말했다.
  "네 힘껏 세게 판에다 놓아봐라."
  나는 그렇게 했다. 위가 바둑판인 그  상자는 맑고 은은한 소리가 오랫동안 울렸다.  판의 
내부 공간에는 용수철이 많이 감겨 있다고 아버지께서 설명해 주었다.
  "상대방이 바둑돌을 놓거든…."
  아버지는 계속해서 말했다.
  "소리가 울리는 동안에는 기다려라. 그러고는 너의 돌을 놓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경솔하
게 놓지는 말아라."
  나는 스무 집을 얻어놓고 대국을 시작했다.
  "천천히!"
  내가 돌을 쥐고 유리하게 보이는 곳으로 급히 놓으려고  서둘면, 아버지는 이렇게 소리쳤
다.
  "언제나 처음에 잘 생각해야 하느니라. 상대방의 약점은 흔히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 수가 
있다!"
  언젠가 아버지는 나에게, 바둑은 원래가 인간에게 속한 놀이가  아니라 이곳 저곳의 산정
에 내려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이 놀이로 소일하던 신선에게 속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너는 아이들이 경주할 깨처럼 그렇게 성급하게 바둑을 두는 신선을 상상할 수 있니?"
  "아니요, 신선은 아주 고상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너는 신선 세계에 잘못 들어갔다가 그들이 두는 바둑놀이를 구경하고 돌아온  나무꾼 이
야기를 들었지? 그가 자기의 옛날 자리에 돌아와 보니 도끼가  썩어 있었다는 거야. 시간을 
초월한 신선들의 놀음은 지상 인간에게는 너무나 오래 계속된 것이었어."
  우리는 바둑을 두고 또 두었다. 찌는 듯한 더위가 가신  오후에 나는 언제나 바둑판을 들
고 정원으로 내려가 그늘진 나무 밑에다 놓아야 했다.
  우리는 바둑판을 사이에 놓고 돗자리에 앉았었다. 나는 계속 지기만 했다. 그러나  언젠가
는 한 번 이기리라는 굳은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서늘한 그늘 밑에서 구월이가 저
녁밥을 준비되었다고 부를 때까지 연달아 수없이 바둑을 두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문안하는 저녁때면 나는 종종 용마에 끌려나갔다. 우리는 종종 학생들
을 모집하고 권유하러 다녔고, 이따금 상점을 구경하며 읍내를 쏘다니기도 했다. 우리는  큰 
행길을 통해 동문(東門)까지 산보하였고, 거기서 일본 상점도 구경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옛적부터 '왜놈'이라고 부르고,  별로 윤리적인 인간으로 취급하
지 않았던 일본 사람들에 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러나 용마가 말하기를, 일본은  이
제 유럽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나라를 개혁했기 때문에 이제는 문화국으로 간주해
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일본 상인들은 유럽에서 들여온 듯한 이상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이 과자며 남포며, 석유며 인형이며, 기타 장난감  등이었다. 상점 중의 한 곳
에는 못이 많이 박힌 커다란  널빤지가 세워져 있었다. 동전 한  닢으로 사람들은 경사지게 
서 있는 판에 공을 굴려내릴 수 있었다. 공이 아래에 가서 닿으면 어떤 숫자를 가리켰다.
  최고의 상품은 괘종시계였다. 그것 때문에 일본 사람은 언제나 외쳐댔다.
  "한번 와서 놀아보시오. 자, 내 괘종시계를 가져가시오. 아라, 아라, 아라! 내 시계를  잃어
버렸다."
  또 다른 상점에서 는 자전거를  팔기도 하고 세를 놓기도 했다.  용마는 여기에 오랫동안 
서서 바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렇게 독특한 물건이니까 틀림없이  유럽에서 온 것일 거
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한참동안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나에게,
  "나도 한번 타볼까?" 하고 물었다. 
  "그건 별로 점잖지 못해서..."
  나는 이상한 장난감이 정말로 유럽에서 온 것인지 똑똑히 알지도 못하고 말했다. 
  "너는 그래도 선비집 아들이구나, 얘!"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또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계획을 단념하고 말했다. 
  모든 상점들은 밤늦게까지 불을 환하게 켜져 있었다. 물건  파는 사람들은 돗자리를 깔고 
그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국 사람들과는 반대로 그들은 검정 옷을 입고 있었다. 그  검정 
옷감에는 눈송이처럼 유별난 흰 무늬나 단순한 선이나 혹은 점들이 박혀 있었다. 심지어 많
은사람들은 정말 상스럽게 보이는 글자를 등에 달고 다니기도 했다. 아무도 고상한 흰 옷을 
입지 않았고, 신도 신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가 발을 안쪽으로 발브며 '게다'를 끌고 다녔다. 
일본 여자들도 물건을 팔았고, 그들  모두가 마치 종이기나 한 것처럼  가마도 타지 못하고 
시종도 없이 시가지를 걸어다녔다. 이들은 모두가 염치도 모르는 최하층의 출신들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너도 나도 가난해서 자기 마누라마저도 심부름꾼으로 거리에 내보내야만  했
을까?
  나는 이 사람들의 고향이나, 이들의 마을이나 도시에 관계되는 사람들을 도무지 구경하기 
못했다. 용마도 거기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는 다만 일본이 개화되어 많은  기
차와 기선을 가지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 세상에는 여섯 개의 문명국이 있다고 해"하고  그는 내게 언
젠가 말한 일이 있었다.
  "그 나라들은 영국·프랑스·러시아·일본 등이야. 그런데 일본은 남의 흉내만 냈기 때문
에 사람들이 꼴찌에다가 걸어 놓았어."
  "그럼 우리나라는 어디에 속하는 거지?"
  나는 놀라서 물었다.
  "문화국이 되려면 아직 멀었어."
  그는 힘없이 말했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 기차가 너무 적기 때문이야."
  "그럼 중국은?"
  나는 다시 물었다.
  그는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중국 사람들은 너무 보수적(保守的)인 것처럼 보여. 비단장구 유(劉)가에게, 상투는  구식
이니 그런 것은 깎아버리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가 나는 욕만 실컷  얻어먹었어. 이 노인이 
머리 끝가지 화가 나서, 아마 내가 빨리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뺨이라도 얻어맞을 뻔했다니
까. 남산 뒤에 사는 야채장수도 지독히 구식이야. 나는 언젠가 그에게, 뭘 좀 아는가 보려고 
내 교과서를 보여 준 일이 있지. 그리고 내가 한자(漢子)로 중국이 유럽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지. 그러고는 대뜸 담뱃대를 가지고 땅바닥에
다 이렇게 쓰는 거야. '유럽은 오랑캐 나라다. 그 곳에는 공자(孔子)가 가르치는 윤리 도덕이 
전혀 없다.'"
  '보수적'이라는 말은 별로 아름답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이 '바보' 또는 '완고'를 뜻
하는 것으로 알았다. 중국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보수적이었다면 그건 정말  유감이었다. 
중국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보수적이었다면 그건 정말 유감이었다. 나에게는 중국이 어딘
지 아름답고, 부드럽고, 훌륭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양자강'이나 '동정호', 
'서주' 혹은 '황주'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또는 '소동파'나 '도연명'의  시 몇 구절을 읊기만 
해도 내 앞에는 황홀한 세계가 전개되었다.
  셋째누나와 어진이 누나(이미륵씨의 둘째누나로서  본명은 의정〔儀貞〕1977년 9월  18일 
서울에서 사망)도 중국 소설을 많이 읽은 까닭에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느꼈다. 그
들도 양자강 계곡의 아침 안개나 달빛에 반짝이는 요앙(yoang) 잎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저 훌륭한 중국을 어느 것보다도 좋아했고,  심지어는 그들이 가끔 경멸적으로 동소국(東小
國)이라 부르는 우리 자신의 나라보다도 더 사랑하였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에 나는 묘하고 아름다운 저녁을 보았다. 저녁 식사 후에 나는 기섭
과 '호랑이'라는 무서운 별명을 가진 두 학우에게 끌려나갔다.  그들은 나와 함께 곧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다. 오늘이 바로 임금의 생일이거나 혹은 왕비나 어떤 높은 귀인의 생일이었
기 때문에 우리는 시가행진을 해야만 되었다.
  우리들이 학교에 닿았을 때, 나는 벌써 2백여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교정에 집합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체조 선생이 와서 키 순서대로 넉 줄로 서라고 했다. 용마는 그 중에서 
제일 컸기 때문에 맨 앞줄에 서고, 반대로 나는 대열의 거의 끝에 기섭이와 나란히 서게 되
었다. 학교에서는 우리에게 긴 연설을 하고,  고을 안의 모든 시민들과 다른 학교  학생들이 
우리를 보고 놀라도록 거리에서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라고 누차 훈계하였다.
  해가 지고 점점 어두워졌다. 학생마다 제각기 촛불 초롱을  밝혀들고 교정을 출발해 나섰
다. 북과 나팔 소리에 맞추어 애국가를 부르면서 행진하여 종각 거리로 행진해 왔다. 남쪽과 
동쪽에서도 똑같이 노래하며 초롱을 든 학생 대열이 행진해 왔다.  이 두 학교는 금년 여름
에 생긴 자그마한 신식 학교였다. 기섭의 말에 의하면, 선교사들이 그 중의 하나를 설립했다
고 했다.
  이제 세 학교가 합류해서 우리는 종횡으로 시내를 행진하였고, 마지막으로  '삼문(三門)'을 
통하여 태수의 저택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저택의 넓은 마당은 빛의 바다처럼 환희 빛나고 
있었다.
  나에게는 매우 장엄한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여기서 많은 축제가 거행되었다. 그러나  나
는 옆문을 통해 작은 마당가지 밖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곳에서 나는 다른 마당의 불꽃 장
식을 구경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다.  이제 대열은 다시 움직이며 거대한  ;삼문;을 지나 
많은 관아를 끼고, 연정(蓮亭)이  있는 뜰로 나왔다.  여기서 우리들은 고을 목사(牧使)에게 
직접 영접되었다.
  우리는 우리 왕실의 문장(紋章)인 오얏꽃 모양의 커다란 연못 주위에 늘어섰다. 수많은 초
롱불이 물에 비치었다. 그러자 우리 도(道)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정자 앞에 나타났다.
  감사는 새 시대를 적시에 인식한 우리의 현명한 통찰을 칭찬했다. 우리 조국이 비록 조그
마한 나리이나 우리 선조들은 고귀한  문화를 창조하여 그것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이 선두에 서서 우리 나라를 개혁하는 데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그러므로 우
리도 동쪽의 이웃 나라처럼 발전하도록 우리 모두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들은 즐겁게 우리의 조국과 임금님을 위해서'만세'를 불렀다.
  끝으로 우리들은 모두가 새 문화에의 인식에 대한 상(賞)으로 연필 한 다스와 공책 두 권
씩을 받았다.
  우리들은 만족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날 저녁이 기뻤다. 우리가 조그마한  민족이
고, 조그마한 나라라는 것은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현명함
이다. 저 크고 찬란한 중국도 일찍이 우리의 선조들이 그렇게도 현명하였기 때문에 '소화(小
 )'라고 불렀던 것이다. 일본에 문자(文字)며 철학이며, 종교적 건축술이며 기타 무엇이든지 
보내준 것이 우리가 아니고 그 누구였던가! 신식 문화에는 우리가  일본에 약간 뒤떨어졌으
나, 그것은 별로 걱정할 것이 못 된다. 우리는 목사 자신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매우  영리한 
민족이다. 이것이 나에게는 매우 고무적으로 느껴졌다
  이 저녁이 나에게는 무척 좋았다.
  
    옥계천(玉溪川)에서
  가을에는 수업 시간이 더 길었다,.  새로이 지리와 세계사도 배우기 시작했으나  교과서가 
없었으므로 흑판에 쓴 것을 일일이 받아적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문을 나설 때면 
날이 이미 어둑어둑하고 차가웠다.
  어느 날 저녁 늦게 구월이가 나를  마중하러 나왔다. 구월이의 말이, 오늘은 혼자  거리를 
나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마중 보냈다고 했다.  거리에는 많은 일본 
병정들이 돌아다녔고, 그들은 심지어 일반 민가에 침입해 들어갔다고 했다.
  나는 일본 사람들이 적(敵)으로서가 아니라  친우로서 우리를 돕기 위해  와 있다는 말을 
종종 들어왔지만, 어쩐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은 빨리  걸어 집으로 왔다. 나는 일
본 병정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항상 겁이 좀 났다.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던?"
  나는 구월이에게 물었다.
  "나는 몰라."
  "그럼 어머니는 뭐라고 하시던?"
  "곧 다시 전쟁이 날 것이라고 하셨어."
  "수옥이는 뭐라고 하던?"
  "이젠 세상이 끝장이 난다고 했어."
  우리는 걸음을 빨리 했다. 큰 거리는 보통 때보다 더 컴컴했다. 길에는 그렇게 많던  과일
장수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보통 때 같으면 남폿불을 켜놓고 늦참외며,  호박이며 
배며, 어떤 때는 떡까지 팔았던 것이다. 남문은 시커먼 밤 하늘에 하품하듯이 우뚝 서  있었
다. 사실, 거리마다 골목마다 병정들이 들끓었고,  많은 집이 가택 수색을 당했다.  순옥이는 
한길 건너편에 있는 국수집으로  세 군인이 들어닥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
구도 무엇을 찾고있는지 몰랐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들 
근처에는 아무도 얼씬거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다만 우리 고을에 어떤 나
쁜 일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이날 밤에 나의 부모님들은 밤늦게까지  의논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적어도 가족의  일부, 
예컨대, 성숙한 어진이 누나와 가장 어린 나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자고 제의했다. 가택 수색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모르셨던 아버지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질 아
무런 이유도 없으며, 병정들도 죄 없는 백성에게 나쁜 짓을 할 리가 없을뿐더러, 우리가  그
들에게 저항해서는 안 되며, 그들이 무엇을 가져가든지 그냥 내버려두라고 했다. 어떤  까닭
이 있어 우리의 임금님이 그들을 직접 보냈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이날 쉽게 진정되지 않았던 어머니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결국 양보하고 내가 요 며
칠 동은 집에서 밖으로 나가지도 말고, 오늘 밤은 안뜰에 있는 옛 동쪽 골방에서 자도록 지
시했다. 나는 이미 불안하지도 않고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놓였지만, 어머니의  의견
을 순순히 따랐다.
  다음날 오후에 실제로 무기를 든 네 명의 병정이 우리 집에 와서는 온 뜰 안을 어슬렁 거
렸다. 그리고 호기심에 차서 모든 방이며 다락이며, 창고 할 것 없이 모조리 뒤졌으나, 아버
지가 말씀한 것처럼 우리를 성가시게 굴지도 않았으며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도 않고 물러갔
다. 그래서 온 식구들은 일단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학교에 다시 가게 되었
다. 병정들의 눈을 피해 이 마당 저 마당으로 달아나야  했던 어진이 누나만이 오랫동안 마
음이 심란했던 것이다. 
  이런 가택 수색은 빈번히 반복되었고, 어떤 때는 거의 매일 같이, 심지어는 하루에 두  번
씩 되풀이 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병정들은 가끔 이른  아침에 들이닥치는가 하면 또 저
녁에도 불숙 안채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부인들이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언짢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농부며, 사냥꾼들, 그밖에 새 시대를 
달가워하지 않고 일본인들의 나쁜 의도를 간파(看破)한 젊은이들로 중심을 이룬 이 나라 백
성들이 여러 곳에 모여서 침략자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고을에 무
기가 저장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연달아 가택 수색을 벌인다고 했다.
  아버지는 처음에 그것을 다만 하찮은  잡소리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들은 일본군들이 점점 더 중무장을 하고 때로는 북문으로,  때
로는 서문을 통해 출정(出征)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군가를 부르면서 행진해 나갔다가는 
어딘가에 가서 싸우고는 다시 군가를 부르면서 시내로 돌아왔다.
  나중에 그들은 포로를 끌고 왔다. 그것은 무서운 광경이었다. 피가 나게 얻어맞고  무거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은 이  나라의 농부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엉망으로 알아볼 
수조차 없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쇠사슬에 묶이고, 얻어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나는 가슴이 부르르 떨리는 듯하였다. 공포에 질려 식은 땀이  온몸
에 흘러내렸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열이 나서 나는 불덩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나를 당분간 학교에 보내지 말고 아직도 평화로운 어느 시골로 보내자고 제안했
다. 내가 너무 연약한 애여서 그러한  광경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오랫동안 의논했으나 끝내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방 머슴과  마름을 우리 농지의 농
부들에게 보내어 일본인들에게 그런 어리석은 일들을 하지 말도록 타이르게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행진하는 군대는 절대로 처다보지 말라고 했다. 교양이 없는 아이만이 그들의  얼굴
을 들여다 보려는 호기심에 차있다고 말했다.
  전쟁은 점점 더 잦았고 심해만 갔다. 온 겨울과 봄  내내 사로잡힌 사람들이 도시로 끌려
왔다. 그 중에는 가끔 아낙네들도 끼어 있었다.
  여름이 되어 우기(雨期)로 접어들자 겨우 좀  조용해졌다. 가택수색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장마비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요히 내리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기섭이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창백하고 여위어 보였다.
  "너 그 이야기 들었니?"
  그는 나에게 물었다.
  "아니, 무슨 말인데?"
  그는 잠시 잠자코 있었다.
  "나는 우리들이 사기 당했다고 생각해"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우리 나라가 합병(合倂)당했어."
  "일본에게?"
  "물론 일본한테지."
  "어디에 그렇게 쓰여 있었니?"
  "너 시간이 있거든 나중에 남문(南門)으로 가서 고시를  읽어봐. 그렇지만 조심해! 거기에
는 병정이 서 있어. 너는 욕을 하거나 고시를 찢어서는 안돼!"
  저녁을 먹은 후에 나는 구월이를 데리고 남문으로 가갔다. 사실, 그곳에는 인쇄된  큼직한 
종이가 붙어 있었고, 두 개의 남폿불이 그것을 비추고  있었다. 주위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성문이나 한길가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두 개의  불만이 어둠 속에서 팔락이
고 총을 든 병정 한 명이  공포문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게시판 가까이 
가서는 임금님의 큼직한 옥쇄가 찍힌 것을 보았다.
  그것은 진짜 임금님의 글이었다. 그것은 내 생애에서 최초로, 그리고 최후로 읽은  임금님
의 글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장엄하면서도 슬펐다. 이별의 글인  까닭이었다. 그것은 5백여 
년 간이나 우리를 보호하고 있었던 왕조(王朝)의 마지막 글이었다. 내가 그 이별의 글을 다 
읽었을 때 구월이가 와서는 문루(門樓)에서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뭐라고 적혀 있니?"
  구월이가 내게 물었다. 그 여자는 글을 도무지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임금님이 물러나셨다!"
  "영원히?"
  "응, 영원히란다."
  "왜 물러나셨지?"
  "난 모르겠어."
  집에 돌아와서 나는 아버지에게 고시의 내용을 한 마디 한 마디 전부 이야기 해 드렸다.
  아버지는 말 한 마디 없이 조심스럽게 듣고 계셨다.
  "앞으로 일이 더 악화될까요?"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고 잠자코 있었다.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잠자코 있었다. 바깥채의 남정네들도, 어머니며 누나들도  모
두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밤이 매우 깊었는데도 나의 양친과 순옥이는 술잔을 앞에 놓고 앉아서 지난 왕조의 임금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전(全)왕실이 우리를 보호하기에는 너
무나 약해졌다고 말했다. 우리는 새 임금이 나타나서 통치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
에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걱정 말고 계속해서 학교에 다닌 것이며, 세상사에 관해서
는 관심을 갖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그 해 가을에 벌서 성곽(城郭)과 성문이며,  낡은 관청의 청사를 모조리 허물어내고  좁은 
길을 넓히기 시작했다. 상점들이 허물어지고 집과 마당은 갈라져나갔다.. 파내어진 구들장이 
흙쓰레기더미에 나와 있었고, 옛길은 쓰레기더미로 변했기 때문에 학교로 가는 길이나 돌아
오는 길에 나는 고생스럽게 길을  헤치고 다녀야 했다. 사람들은 낮이나  밤이나 미친 듯이 
일하고 있었다. 어디서든지 두들겨 치고,  망치질을 하고, 톱질을 하여  먼지가 자욱이 일고 
있었다. 사람들은 소리소리 지르고 명령하고 싸우고 치고 난리였다. 나는 우리 집에  들어서
서 문을 닫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졌다.
  우리 집 바깥채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오가고 야단이었다.  행상인이
며 거지들이 늘어났다. 쫓겨난 농사꾼이며, 파면당한 벼슬아치며, 피난민이며,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헤매는 방랑객들이 묵고 가기를 원했다. 순옥은 그들을 하룻밤만 대접하고, 다음  날
에는 다시 길을 떠나게 했다. 그는 언제나 계속해서, 이 집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는 
재산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다른 데로 가서 적선을 받도록  하라고 누누이 이르곤 했다. 이
렇게 하여 추운 겨울을 이럭저럭 넘겼다. 그러나 거지와  방랑객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기만 
했고, 우리 집 객실은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순옥은 집  앞에 앉아서 욕지거리를 했고, 저주
했다.
  "아, 몹쓸 놈의 세상, 이 더러운 놈의 세상이 그저!"
  그리고 샘채만은 아직 조용했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더욱 조용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종
일 수 없는 새 규칙이며 새로운 세금에 관해서 점령군과 통역을 통해서 흥정해야만 했으므
로, 그 일이 끝나며 지쳐서 초저녁만 되면  자리에 누워 오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내가 
학교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아버지는 잠시 귀를  기울였을 뿐 휴식이 필요하므로 나도  눕게 
하고는 불을 끄라고 했다. 그는 자주 내 말을 가로채면서 말했다.
  "그만하면 됐다. 잠시 바람 쏘이러 나가거라. 그리고 나중에 다시 오너라."
  내가 아버지에게 귀찮은 존재라는 것을 느끼자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산보하러 나가
기도 싫었다. 파괴된 성벽이며 지붕이  헐린 성곽이 밤에는 나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도록 
슬픔에 젖게 했고, 내 가슴에 큰 공포감을 가져왔던 것이다. 나는 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더 좋았다. 아버지 곁을 떠날 때는 어딘가 모르게 그래도  아늑하게 품에 안겨 보호받는 기
분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핏줄을 타고 태어났고, 그는 나를 돌봐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여름이 다기 돌아왔다. 어느 몹시 무더운 날 오후 아버지는 나더러 옥계천에 가서 시원하
게 목욕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뻐서 얼른 그러자고 했다. 옥계천은 수많은 노목
이 울창하게 뻗어 있는 조용한 계곡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시내였다. 이 나무 그늘에서 나는 
서당에 다닐 때 많은 어린날들을 보냈었다.
  구월이는 술과 과일을 담은 작은 소반과 돗자리를 들고 앞서갔고, 나는 바둑판을 들고 아
버지를 따라나섰다. 거리를 빠져나와서 우리는 서 있는 산정까지 천천히 올라갔다. 구월이는 
여기에다 우리의 자리를 만들어 놓고 다시 돌아갔다.
  아버지는, 내가 바둑판을 펴놓고 검은  돌로 열 개의 선점을 놓고   ㅆ는 동안에 주위를 
두루 살펴보았다.
  "이 풍상(風霜)을 겪은 몇 년 동안에도 여기만은 변한 것이 없구나!"
  아버지가 말하고는 빙그레 웃으셨다.
  "너는 이곳이 독특한 딴 세계라고 느껴지지 않느냐?"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하고 나는 말했다.
  여기는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다만 나무  꼭대기에서 매미만이 자랑스럽게 울어
댔고, 계곡에서는 벽계수가 종알거리고 있었다.
  푸른 나무 그늘에는 고요가 깃들었고, 간간이 시원한 산바람이 살랑이며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아버지의 잔에 술을 따랐다.
  "만수무강하십시오."
  나는 기생들이 하는 말을 흉내내어 말했다.
  아버지는 그냥 웃기만 하셨다.
  "너 시조를 읊으려고 해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어디 한 번 해보아라!"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부드러운 남쪽 바람>을 읊었다. 그것은 유명한 기생들만이 
권주가로 부르는 어려운 옛 노래였다. 나는 놀라서 말문이 막힌 채 아버지를 바라만 보았다. 
나는 이 아름다운 옛 노래를  아버지께서 읊을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짐작도 못했다. 나는 
감히 아버지를 따라 읊을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는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열 점씩이나 선점을 놓느냐?"
  아버지는 못마당한 듯이 물었다.
  나는 주저하면서 두 가점(加點)을 다시 떼고 속 담장만 내 돌로 놓아 두었다. 그러네도 아
버지는 두 점을 다시 떼어버렸다.
  "여섯 점 선점으로 네가 늙은 아버지한테 이길 수 있을까?"
  아버지는 웃으면서 말하고는 첫 돌을 놓았다.
  물론 나는 첫 판을 깨긋이 졌다.
  "그럼, 자, 여덟 점을 놓고!"
  그러나 나는 또 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나를 안됐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동안에 많이 잊어버렸구나. 좋든 나쁘든 두 점을 더 놓아야겠다."
  "그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나는 말하고 나서 열 점을 먼저 놓고 계속해서 두었다.
  "바둑은 이제 그만 두자!"
  내가 돌을 불리한 자리에 놓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갑자기 말했다.
  "이젠 옷을 벗고 물에 좀 들어가거라."
  나는 아버지를 싱말시켜서 슬픈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도 종종 개를 낳는다는 것을 생각하셔야지요."
  나는 그를 위로하려고 말했다.
  "이젠 됐다. 그럼 이리 오너나. 옷을 벗고 내 앞에  똑바로 서라! 아버지 앞에서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는 나를 두루 살폈다/
  "아직도 무척 말랐구나."
  그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너 몇살이지?"
  "열 세 살입니다."
  "어쨌든! 천천히 물에 들어가라. 여기는 물이 몹시 차다."
  그는 술을 마시며 내가 매우 서툴게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건너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아버지도 물에 들어왔다. 그는 조심스레 크고 널찍한 바위 아래에 앉아서 어깨 너
머로 물을 철썩 끼얹었다. 그러나 1분도  채 안 되어 얼른  물에서 걸어나와서는 그만 갑자
기 모래 위에 스러졌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
가 추워서 떨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빨리 수건을 가져다가 몸을 닦아드렸다.
  차츰 그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자, 가서 내 옷을 가져오너라!"
  우리는 옷을 입었다. 나는 아직도 온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나를 보
고 말했다.
  "겁내지 말아라, 나는 아직도 오래 살 테니까. 나는 네가 고운 색시를 얻고, 내 손자를 보
게 될 개까지는 살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내게는 세상의 모든 기쁨도 사라졌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시다."
  "아니, 그럴 건 없다."
  그는 웃으시면서 대답했다.
  "봐라! 나는 다시 좋아지지 않았니.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잠시 머물러 있자!"
  그는 바야흐로 낙조가 비치는 산을 바라보았다. 산정마저도 이젠  그늘 속에 잠겼고 산꼴
짜기에서는 싸늘한 산바람이 불어왔다.
  "한 번 더 바둑을 두어 볼래?"
  "그만 하겠습니다. 제발 이제 집으로 돌아가십시다."
  다행스럽게도 구월이가 다시 나타나서 우리를 데리고 돌아갔다.
  "이 시내에서는 지력(地力)이 꺾이지 않고 솟아오른다."
  아버지는 걸으면서 말했다.
  "여기서 다시 목욕하려거든 조심해라!"
  아버지는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두 번째의  발작을 일으켰다. 집안 사람들은 의식을  잃은 
아버지를 안방으로 안고 들어갔다. 나는 밤새껏 이 의원 저 의원을 찾아다녔다.
  자정이 좀 지나서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의  왼편에 꿇어앉아 아버지의 손을 쥐라고  했
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오른손을 쥐고 빌기 시작했다. 구월이가 길다란 흰 천으로  아버지의 
침소에서 대문까지 영혼의 길을 준비하는 동안 온 집안 사람들은 모두가 빌고 있었다.
  
    상복기(喪服期)
  어진이 누나는 조용해졌다. 그녀는 이제 전처럼 자주 떠들어대거나 지껄이지 않았다. 아버
지의 별세가 누나를 변하게 한 것처럼 보였다. 아무 말 없이 안채에서 자기의 일만  하였고, 
아버지 생존시에는 어머니가 남자 근처에 가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줄곧 사랑채에  드나들
던 그 누나는 이제 와서는 아버지 방에 거의 들어오질  않았다. 어머니는 그러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가을로 접어들면서 출행하거나 해서 어진이가  어머니를 대신하여야 했기 때문에 
그때에만 모든 것이 잘 정돈되었나 살피려고 밤늦게 내 방에  오는 일이 있었다. 누나는 그
림의 뜻을 묻지도 않고, 잘못된 글씨를 나무라지도 않고, 그저 내가 그려대고 스는 것을  잠
시 동안 보고만 있었다.
  "빨리 자거라."
  그러고는 부드러운 말씨로 말했다.
  "어머니가 그러기를 원한다."
  나는 항상 한밤중까지 책에 매달려 있었다. 학교 공부는 전보다 훨씬 어려워졌고,  시간을 
잡아먹게 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일본말을 배우게 됐고, 모든 교과서가 일본말로  바뀌어진 
까닭이었다. 우리들은 역사(歷史)를 달리 다시 배워야만 했다. 한국의 독립 시대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은 삭제되었으며, 한국  민족은 독자적인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으로 간주되지 
않고, 다만 오래 전부터 일본 제국에 조공(朝貢)을 바치는 변경(邊境) 민족 집단으로 여겨졌
다.
  지리나 박물학(博物學) 같은 다른 과목들은 배우기 어려웠다. 교재에 나오는 개념이며, 표
현이며 정리법 등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일본말 공부에 역점을 두기 위해 이러한 과목의 수
업은 아주 단축되었다가, 나중에 가서는 이 학과를 위한 시간조차 없어졌다. 선생들은  상세
한 설명도 하지 않고 교재만 한 번 훑어가며 읽고 말았다. 다른 모든 것은 학생들 자신에게 
위임되어 있었다.
  나의 학우들은 가운데서는 기섭이가 나하고 잡담도 하고 나의 학습을 도와주기 위해서 종
종 나에게로 왔다. 그는 이따금 몸이 아프고, 때로는 몇 주일씩 학교를 쉬기도 했으나, 그래
도 우리 학급에서 제일 우수한 학생에 속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나의 수학 공부를 도와
주려 하였다. 그는 내 옆에 앉아서 내가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 보았다. 내가 틀리면 그는 웃
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것을 고쳐주었다.
  용마는 매일 저녁 왔으나 언제나  잠깐 머물렀고, 매번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 가운데서 
모르는 게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들 중에서 제일 영리했고 경험도 많고 일본말도 잘했
기 때문에 나를 가장 잘 도와줄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질문에 정확하고 명료하게  대답했다. 
다른 친구들도 도와야 하고 자기의 공부도 해야 했으므로 그는 다시 돌아갔다.
  일 년 전부터 학급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서 나와 친했던 만수도 역시 우리와 함게 어울렸
다. 그는 잡담을 잘했고, 자주 자기의 소풍에 관해서  나에게 얘기해 주었고, 도한 이상스런 
고목(古木)이며 산개울에 있는 아름다운 헤엄터며, 그가 고을 주변에서 새로 찾아낸 암자며 
탑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영리하여 무엇이나 쉽게 깨우쳤고, 박물학에 관한  여
러 가지 지식을 나보다 훨씬 빨리 익혀냈기 때문에 종종 내게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많은 친구들이 나를 도와주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따라가기 위해서 다른 애
들보다 훨씬 많이 공부해야만 했다. 그것은 내가 전에 서당에  너무 오래 다녔기 때문에 새 
학문을 배우는데 아직 익숙치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나는 많은  것을 이해해 낼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원자며  이온이며 에너지와 같은 개념은  도무지 명백하지 않았다. 
이에 더해서 또 나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주는 대수학이란  과목이 나타났다. 나는 방정
식이 무엇을 뜻하는 지 몰랐고, 대수학이 무엇인지를 알 도리가 없었다. 만수와 기섭이도 이
에 관해서는 설명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머리가 좋은 용마까지도 이런 방정식 이 후에 고
등 물리학 연구에 적용될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홀로 한밤중까지 
골똘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내가 이렇게 밤늦게까지 책을 펴들고 잠과 싸우는 것을 보면 어머니는 내게 와서 연필을 
살짝 빼앗고는 책과 공책을 접어놓은 다음에 어서 자라고 하셨다. 그러나 내가 더 공부해야 
되겠다고 말하면 어머니는 간단하게 말을 맺었다.
  "그럴 필요 없어. 내 말을 들어."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머니는 내가  자리에 들어가 누운 뒤에도 한참 동안  내 곁에 앉아 
있었다.
  "무슨 과목이 네게 제일 어려우냐?"
  어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모두가 다요."
  나는 중얼거렸다.
  "수학·물리·화학 모두가 아직 불투명해요."
  "걱정하지 말아라."
  어머니는 한참 잠자코 있다가 말했다.
  "네가 이 학교에서 충분히 재주가 없더라도 괜찮아! 우리 모든  사람에게 낯설기만 한 이 
새로운 문화는 네게도 맞지 않은 거다.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아라! 너는 얼마나 쉽게 고전 
대가와 시를 배웠었니! 너는 정말 총명했단다. 너를  그토록 괴롭히는 신식 학교를 그만 두
거라. 그리고 몸도 회복할 겸 올 가을에 시골 송림 마을에 가 있거라. 그곳은 제일 작은 당
이지만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농토이다.  그곳에는 밤나무며 감나무도 있단다. 거기  가서 
푹 쉬거라. 우리의 농가들과 그들이 하는 일을 익혀 두어라. 이 불안한 도시보다 오히려  한
적한 시골에서 너는 잘 자랄 거다. 너는 바로 옛 시대의 아이다."
  나는 슬퍼졌다. 나는 언제나 새 학문에 대한 재능이 없지 않은가 하고 두려워하였다. 아버
지가 인도해 준 이 학문이 우리를  보다 높은 문화로 이끌 것으로  믿었다. 4년간 열중했던 
공부를 재능이 없다고 하여 집어치우고 학교를 그만두어야 한다니, 내 마음은 몹시 아팠다.
  "너 그렇게 할테냐?"
  잠자코 누워 있으려니까 어머니가 다그쳐 물었다.
  "물론이죠. 어머니의 소원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맥없이 대답했다.
  "아이구, 기특한 내 자식아."
  어머니는 말씀하시면서 방문을 나섰다.
  
    송림(松林) 마을에서
  송림 마을은 멀리 떨어진 한적한 포구 옆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입구의 해안에는 굴바위
들이 많이 앞에 놓여 있었다.  이십여 호의 초가지붕의 농가들이 해변과  포구 뒤쪽 깊숙이 
가려진 곳에 있었다. 그러나 낮이면 이 마을은 텅 빈 것 같았다. 남정네들이고 아낙네들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언덕 너머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차례로 보리며 
밀이며, 조를 거둬들이고 있었다. 나는 이 밭 저 밭으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곡식을 베어서 
단으로 묶어 수레에 실어서는 소에 끌려 집으로 운반해 가는 것을 보았다.
  저녁때면 나는 농부의 사랑방인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  장식도 없는 초라하고 점토벽
으로 된 방이었다. 방구석에는 대패질도 하지 않은 생나무로  짜놓은 나직한 책상하나가 놓
여 있었다.
  마을에서는 잠시 생기 있는 생활이 계속 되었다. 소들이 도처에서 음매하고 울어댔고,  어
머니들은 해변에서 노는 아이들을 밥먹으라고 집에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조용해
지고, 온 마을이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농가의 주인만이 잠간 동안 내 방에  와서는 나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는 나에게 제일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서 쉬라고 했다. 그는 불  앞
에 앉아서 새끼를 꼬고 있었다. 그는 올 가을에 초가지붕을 새로 잇는 데 많은 새끼가 필요
하다고 했다. 두툼한 기름불 종지에는 말간 식물유가 담겨 있었고, 심지가 아주 가느다란 불
꽃을 밝혀 올렸다. 새끼 꼬는  단조로운 소리와 따스한 방바닥의 온기가  내 생각과는 달리 
나를 어느덧 잠들게 하였다. 내가 눈을 떴을 때에는 거의 불이 다 꺼졌고, 내가 그렇게 불렀
지만, 돌다리 아저씨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집  안도, 온 마을도 죽은 듯이 고요했다.  다만 
해안을 스쳐가고 스쳐오는 밤 물결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별다른 농사일이 없는 날이면 나는  구경도 그만두고 낚시질을 떠났다.  그것은 단조로운 
들일을 하고 나서 즐거운 기분 전환이었기 때문에 나는 자주  고기 잡으러 갔다. 나는 바구
니와 낚싯대를 들고 해안을 따라 포구 입구까지 가서 바닷물이 썰물일 대에는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굴바위로 갔다. 나는 그런 바위에 앉아서 밀물이  밀려올 때가지 아무 방해도 받
지 않고 낚시질을 할 수 있었다. 돌다리 아저씨는 매번 불어오는 밀물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언제 바위에서 내려와 백사장으로 나와야 하는가를 내게 세밀하게 일려주었다.
  나는 그곳에 홀로 앉아 하루 종일 낚시질을 했다. 대개는 공미리라는 생선이 물렸다. 손가
락만큼 굵은 고기였는데 별로 맛은 없었다. 이 고기보다 더  좋은 고기를 낚기란 어려운 일
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제일로 치는 도미는 가을 내내 한 마리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
는 한가한 때면 그곳에 가서 끈기 있게 바위에 앉아 있었다. 고기를 낚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렇게도 즐겨했던 바다의 먼 조망  대문이었다. 이곳은 좁은 만(灣)을 벗어난 곳이라 
내 앞에는 무한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물과 하늘이 저  멀리 수평선에 서로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서쪽으로는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바위가 많은 연평도가 우뚝 솟아 있었고,  북쪽
으로는 가느다란 모래밭이 낮은 언덕을 둘러싸고 멀리 뻗어 있었다. 멀리 사방 어디를 보아
도 배 한 척 볼 수 없었다. 다만 찬바람만이 젖은 굴바위를 간간이 스치고 갔다.
  농부들은 집집마다 좋은 낚시 도구를 갖추고 있었으나 낚시질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
망으로만 고기를 잡았다. 그들은 만 밖에서 소위 '큰소' 라고 불리는 근처에 어망을 쳤다. 그
들이 잡은 고기는 조그마한 공미리가  아니라 가자미니 넙치니, 준치니 혹은  길고 흰 갈치 
등 고급 생선으로 쳐지는 전혀 다른 고기들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그물로 고기를 어떻게 잡
는지, 또 그 그물을 어떻게 치는지 지금가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사람들이 함께 그물을 치러가자고 했을 때 즐겨 따라나섰다. 농부들이 밤의 썰물이 일 때를 
택했기 때문에 우선 내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한밤중에 제일 좋은 고
기가 그물에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달이 비치지 않았기 때문에 모래사장은 어두웠다. 우리들이 자주  건너야 했던 얕은 물은 
살을 에는 듯이 차가웠다. 밝은 하늘에서 헤아릴 수 없이 반짝이는 별빛으로 해상은 천천히 
밝아왔다. 나는 어두컴컴한 주변에서 차차  미역이며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게를  구별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숱한 좁은 물고랑을 건너갔다.  바닷물은 이 시각에 이 고랑을 통해  넓은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는 물 속을 한참 걷고서야  쏟아져내리는 큰 강줄기처럼 엄청
난 바닷물이 모여들며 소용돌이치는 '큰소'에 도달하였다. 바로  여기에다 그물은 마치 병풍
을 치듯이 말발굽 모양으로 둘러쳐졌다. 그러자 곧 여기저기에서  팔뚝만한 큰 생선들이 그
물을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쳤으나 허사였다. 조수(潮水)가 얕아지면 얕아질수록 그물에 걸려
든 고기들이 숙명에서 벗어나려고 더욱 날뛰었다. 고기들은 미친 듯이 서로 얽혀 사납게 퍼
덕거렸으나 끝내는 모두가 물 없는 바닥에 스러져서 밤 하늘에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서 생선을 바구니에 담아가지고 귀로에 올랐다. 이젠 바닷가에는 깊은 정적
이 흘러넘쳤다. 물결 소리, 파도 소리가 멀리 밀려갔기  때문이다. 다만 어디선가 다른 사람
들의 말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아마 그들도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
디에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밤이 하도 아름답고  고요해서 물에 빠져죽은 사람들
의 영혼이 떠돌아다니면서 서로 속삭인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천고마비의 좋은 가을 날씨가 계속되었다. 농부들은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곡식을 
타작하고 있었다. 콩이며 팥이며, 메밀이며 무를, 그리고 끝으로 벼를 거둬들였다. 곡식은 키
에 까불려서 깨끗해진 다음 스무 말식 가마니에 채워졌다. 돌다리  아저씨는 나를 이 집 저 
집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일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곡식의 종류에 따른 품질의  차이를 
알려 주었다.
돌다리 아저씨는 내가 이 마을에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무척 애를 썼다. 저녁때에 내가 
아무 할 일이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면 무엇인가 읽도록, 손으로 쓴 여러 권의 책을 방에 
넣어주었다. 그것은 한 권의 자그마한 옛 시집과 일화집과 두 권의 두툼한 소설책이었다. 그
러나 짙은 갈색으로 기름먹인 이 책의 책장들이 하도 닳아서 침침한 불빛 아래서는 그 깨알
같이 작은 글씨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었다.
  "여기서 산다는 것이 너에겐 매우 심심할 것이다."
  그는 언젠가 어느 농가에서 나를 데려오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네가 지금가지 도회지에 살았기 때문이야. 그래도 생각해 봐라.  세상이 어수선할 
때 산 속으로 은거하였던 많은 선비들도 있지 않았느냐? 그들은 밤에 붓을 들기 위해서 낮
에는 연장을 들고 일을 했다. 그들처럼 너도 저 왜놈들이  물러가고 옛날 같은 좋은 세상이 
올 때까지 이 조용한 곳에서 지내거라."
  이 나라에 새 왕조가 이룩되기만 하면 다시 좋은 세상이 돌아올 것이라고 모든 농군들은 
믿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비록 우리 민족의 화려한 앞날을 상상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어른
들에게 반대한다는 것이 불손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지주의 가정과 소작인의 가정을 한 
집안으로 보고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예부터 내려오는 풍습이었다. 나는 즐겨 그렇게 했다. 그
리고 많은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소위 말하는 택호를  덧붙였다. 그래서 
한 사람은 '웃골  저씨', 그 부인은 '웃골 아주머니' 또 '뒷섬 아저씨', '뒷섬 아주머니'라고 불
렀다. 소작인 농군들은 대체로 나를 '도회지에서 온 조카'라고 불렀고, 친조카처럼 대해 주었
다.
  나이 많은 농부는 내게,
  "그렇게 함으로써 농부와 지주가 한 집안에  속한 것처럼 느끼는 까닭에 이 습관은  좋은 
풍습이다"라고 설명했다.
  모두가 서로 큰 일가를 이루고 지주의 집안이 큰집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집보다도 풍족
할 수가 있었다.
  벌써 가을이 가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큼직한 흰 눈발이 낮이나 밤이나, 포구며  이며 
길 위에 휘몰아쳐 내렸다. 추수일도 끝나고 감사제가 지나고  나면 곡간은 큼직한 자물쇠로 
잠겨졌다. 지붕은 새 짚으로 이어지고, 창문은 새 창호지로 발라졌다. 이젠 농군들이 따뜻한 
방에 앉아서 손일을 하고 있었다. 아낙네들은 실을 뽑고 베틀에 올라가 베를 짜고, 아이들은 
서당의 훈장에게 갔다. 시골 훈장도 농부였고,  그는 다만 겨울에 쓰고 읽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아이들을 모았다.
  저녁때면 여기저기서 농군들이 일감을 가지고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거기서 그들은 잡담
을 늘어놓으면서 번갈아가며 읽어대는 소설을 함께 들었다. 그것은  대개 주인공이 아무 죄
도 없이 박해받는 구식 소설이었다. 그는 모함을 받고 쫓겨서 고향을 떠나야 했고, 이곳  저
곳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끝내는 현명한 은자를 만나서 그의  도
움을 받게 된다. 나중에 이 주인공은 자기도 현자가 되어  임금의 부름을 받아 높은 세도가
가 되는 것이다. 그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여 다시금 자기 고향에 돌아와 다른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받으면서 행복한 세월을 영위한다. 모든  소설은 그렇게 시작해서 그
렇게 끝났다. 그런데도 농군들은 이런 소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때마다 참을성이 강한  이 
청취자들은 착하고 죄없는 사람에게 들이닥치는 불행한 운명에 새롭게 흥분했다. 그들은 소
설을 대함에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엄숙하게, 혹은 노래하듯이 읽었다. 때로는  음성
을 높이고 때로는 음성을 낮추어서, 혹은 명랑하고 다시 애통하듯 구성지게 읽어갔다.  눈이 
깊이 쌓이면 쌓일수록, 밤이 조용해지면 조용할수록, 낭독은 더욱더 감동적으로 고조되어 갔
다. 따라서 사람들은 멀리에서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빠져들고 있는가
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종종 이런 집 앞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소설의 줄거리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나라에 평화가  깃들여 있던 때의 걱정없
는 내 어린 시절을 회상시키는 그 목소리를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이른 봄에
  겨울 동안에 나는 옛날의 학교  시절과 학교 동무들,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이야기해 준 
신세계 유럽의 물정에 관하여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어렸을 적에 모아두었던 그림
들을 다시 꺼내보았다. 그것은 너무나  높았기 때문에 지상의 영역에  속하기보다는 하늘의 
영역에 속했던 화려한 집들과 장엄한 산성들이었다.
  내가 눈보라를 무릅쓰고 포구를 따라 산책하노라면 머나먼 서쪽에서 이런 건물들이 내 눈
앞에 아롱거리고 키가 크고 쾌활해 보이는 사람들이 그곳에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지상의 근심 걱정을 몰랐고, 생존 경쟁과 죄악도 몰랐다. 그들은 다만 자연과 우주에 관해서 
연구만 하고 지혜의 오솔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 새 문화의 참된 교양인이 되려면 그곳에
서 교육을 받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스스로 보고 경험하고 학자들로부
터 모든 학문을 직접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이 경이의 세계에 관해서 들었던 많은 아름
다운 전설이며 일화들이 내 머리 속에서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러자 나는 어떻게 하
면 그곳에 다다를 수 있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눈이 더 오지 않았다. 포구의 얼음장도 녹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사라져버렸다.  날
씨도 따뜻해졌다.
  어느 날시 좋은 3월달 오후에 나는 이틀 간이나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신막 시장으로 가
는 길을 떠났다. 이 시장을 통해서 기차가 다닌다고 했다. 내가 이곳에서 기차를 타면  우리 
나라의 북쪽 국경을 넘어설 것이다.  국경 밖으로 벗어나면 계속해서 서쪽으로  향해 갈 수 
있는 길이 트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틀림없이 유럽에 도달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 
당시 알고 있던 것의 전부였다. 기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기차를 타는 것인지, 외국
에서는 어떤 언어가 통용되는지, 그리고 유럽에서도 돈이 사용되는지, 나는 이런 모든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오후 내내 걸었고, 달빛으로 길을 분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온밤은 쉬지 않고 걸었
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에도 종일 걸어서 겨우 저녁 무렵에야  넓은 평지에 자리 잡은 시장
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이미 멀리서도 이 고장이 우리의 고향 도시와는 전혀 다른 곳이
라는 것을 알았다. 그곳은 교통이 훨씬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고함을 지르며 종을 울리며, 
뿡뿡거리며 달리는 인력거·자동차·오토바이가 넘치는 길을 뚫고, 수많은 보행객이 밀어닥
치는 틈을 통해 나는 걸어갔다. 한길가에는 거의 일본 사람들이 살았고, 그들이 신고 다니는 
'게다'소리가 도처에서 시끄럽게 들렸다. 나는 간신히 이 혼잡하고 비좁은 거리의 인파를 뚫
고 정거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나는 만주행 열차가  내일 아침 일찍 이곳을 통과한
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일 아침에 이곳에서 어리둥절 방황하지 않으려고 정거장 건물이며 플랫폼이며, 들
어가고 나가고 하는 개찰구 등을 세밀히 살펴두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난생 처음  보았다. 
오랫동안 헤맨 끝에 그 고을의 외곽에서  자그마한 여인숙을 발견하고 나는 그곳에  투숙했
다. 이런 여관에서 자보는 것도 내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내일 아침 시간에 맞추어 일찍 일어나야 했으므로 저녁을 먹고 곧 잠자리에 들었다. 
지난밤을 쉬지 않고 계속 걸어가야 때문에 나는 무척 고단했다.
  그렇게 고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저히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다리가 쑤시고 아
픈데다가 몽롱한 잠 속에서 나의 눈앞에는 어머니의 환상이 계속해서 어른거렸다. 어머니가 
나를 공연히 찾아 헤매지 않도록 나는 책상 위에다가 짧은 작별의 편지를 남겨놓았었다. 어
머니가 나를 어리석게 여기고 나를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편지를  써놓았다는 생각으로 길을 걸으면서  다소의 안도감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별로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가 마치 내  앞에 
와 계시기나 한 것처럼 계속해서 나타났다. 마침내 나는 설핏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깨어났다. 다시 잠이 들었다가 나는  또 깨어났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또 어머니가 내 편지를 앞에 놓고  말없이 슬프게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한  번은 
어머니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사고, 그 전에 며칠 동안 송림으로 나를 찾아와서 즐겨 그
렇게 했던 것처럼 미소를 짓기도 하였다. 이렇게 밤새 이런 장면이 계속되었다.
  나는 나의 소년 시절에 대해서도 꿈을 꾸었다. 나는 뒤뜰 짚방석에 앉아서, 어머니가 염색
한 명주를 말리기 위해 뒤뜰에 와서 줄에다 명주를 걸어놓은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태양은 
뒤뜰에 따뜻하게 비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보고 기뻐서 달려갔다. 그리고 뒤에서  어머
니를 껴안고 소리쳤다.
  "어머니, 맞혀보세요! 엄마 뒤에 누가 있는지!"
  어머니는 명주를 다 널고 나에게 돌아서서 나를 높이 치켜들었다.
  "정말 이게 누구냐?"
  웃으면서 묻고는 나를 어머니의 얼굴 위로 높이 치켜올리고 있었다.
  "정말 이게 누구지? 내 금가지구나. 내  옥덩어리구나! 그래 너는 위대한 시인이 되려니? 
아니면 훌륭한 화가가 될래? 그것도 아니면 영웅이 될래? 그렇지 않으면 우리 고을의 목사
(牧使)가 될래?"
  새벽녘에 나는 어머니가 몹시 우는 것을 보았다. 나는 머리를 어머니의 무릎에 파묻고 있
었다. 나는 깜작 놀라서,
  "아니, 어머니! 나는 떠나지 않으렵니다"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어머니가 이렇게 서럽게 우는 것을 단 한 번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의 장사(葬事)를 
마치고 높은 산에서 내려와 묘지기의 집 앞 천막에서 밤을  새웠을 때였다. 나는 다시 잠이 
깨였다. 몸에 열이 좀 있는 것 같았고 몸이 떨렸다.
  밖은 어두컴컴했고 찬바람이 평지 위로 휘몰아쳤다. 하얗게 칠한 정거장의 자그마한 대합
실은 훤하게 전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와글거렸다. 대부분은 일본  사
람들이었다. 여기저기 둘러선 군인들과 부인들이 서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작별을 하
면서 조그마한 선물을 주고받았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밀어닥쳐 이제 서로 허리를 굽혀 인
사하기도 거북스러워졌다. 마침내 조그마한 창구가 열리고 표를 팔기 시작하자 제복을 입은 
역원들이 직위에 따라 입구에 늘어섰다.  사복을 하고 '게다'를 신은  사람들도 거기에 끼여 
있었다. 나는 줄의 맨 끝에 가 서서 내 차례가 왔을 때 만주의 수도로 가는 차표를 샀다.
  플랫폼 위에는 여명(黎明)이 스쳤다.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불어왔다.  마침내 기차가 
천둥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기적 소리를 울리고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왔다. 사람들이 열
차 있는 데로 달려가 찻간으로  마구 뛰어올랐다. 기차는 어느덧 기적  소리를 울리고 급히 
다시 떠나버렸다. 그런데 나는 플랫폼에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한 역원이 나에게 다가와서 왜  차를 타지 않았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내 손에서 기차표를 빼앗아 들고 들여다보았다.
  "아니, 심양(瀋陽)까지?"
  그는 놀라 소리를 지르고 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나를 데리고 역 사무실로 
가서 자기 동료에게 이 놀라운 사건을 이야기 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역원 한 명이 나를 의아스럽다는 듯 쳐다보더니 내 이름과 나이와 
직업을 물었다.
  "네 부모가 심양에 가는 너의 여행을 허락했니?"
  그는 나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그래, 너는 만주에 가서 뭣을 하려고 했니?"
  "계속해서 유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나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심각하게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너는 그렇게 멀리 여행하려고 했니? 너 그러면 여권이랑 가지고 있니?"
  "아니오. 나는 그런 것은 생각해 본 일도 없어요."
  "그래 그래, 그러면 네 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 영어나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잘할 줄 아니?"
  "아니오, 아직 배우지 않았습니다."
  "돈은 얼마나 가지고 있니? 어디, 내놓아봐."
  나는 갖고 있던 돈을 책상 위에 놓았다. 그는 그 돈을 슬쩍 쳐다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래, 넌 짐도 없이. 영어도 모르고, 또 여권도 없이  몇 푼 안 되는 돈을 갖디고 유럽으
로 가려고 했니?"
  "네, 그렇습니다."
  그는 다시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런데 너는 왜 기차를 타지 않았니?"
  나는 다시 잠자코 있었다. 나를 이리로 데리고 온 젊은 역원이 내가 그 물음엔 아무런 대
답이 없었노라고 말했다.
  "말해봐. 왜 안 탔는가?"
  나이 든 역원이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모든 게 소란하고 불안스러웠어요."
  나는 대답했다.
  젊은 역원이 웃으며,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노라고 이야기했다.
  "기차는 이 사람들에게 너무 시끄럽고 조급하고 점잖치가 못해."
  그가 이렇게 말하자, 방 안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그렇지만 너는 당나귀를 타고는 유럽을 갈 수 없지 않니?"
  노인의 말이었다.
  "물론 그럴 테지요."
  나는 대답했다.
  "이렇게 시끄러워도 내일 다시 기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려고 해볼 테냐?"
  "난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의 대화는 끊어졌다. 그러자 역원이 나에게 기차표를 반환하게 했다. 돈을 다시  세
어서 다른 뭉치 위에다 올려놓았다.
  "이제 너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 거기서 공부를 더  하도록 해라. 우리의 학교도 유럽의 
학교만큼 좋다. 네가 재간이 있는 아이고 학교에서 일등을 하거나 혹은 좋은 성적으로 졸업
하면, 너는 서울에 가서 그곳에 있는 전문학교에 다닐 수 있다. 우리의 대학도 유럽의  대학
만큼이나 좋다. 서울에 가면 너는 도처에서 새로운 문화에 접하게 될 것이다. 모든 공공건믈
들은 유럽식으로 지어졌고, 삼층이나 사층까지 있다. 그리고 교수들도 점잖은 유럽 옷을  입
고 있단다. 그러나 네가 서울에 가는  것도 양친이 허락해야 한다. 규칙대로 하자면  가출한 
모든 소년들은 체포하여 경찰서를 통하여 집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쁜 아이 
같지는 않은 것 같아서 너만은 예외로  봐주겠다. 자, 그 돈을 갖고  집으로 가거라. 그리고 
돈은 조심해야 한다. 돈은 아주 소중한 것이니까."
  나는 여인숙으로 돌아와서 잠이 들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나의 방에는 햇빛이 조금도 비쳐들지 않았다. 나는 추워서 몸이 떨렸다. 밖으로부터  거리의 
소음이 들려왔다. 인력거꾼이 소리쳤고,  자전거가 찌르릉 소리를  내고, 장사치들이 그들의 
물건을 소리 높이 선전하고 있었다. 특히 잘 알려진 일본약 '인단' 선전하는 곧 증기를 내뿜
으며 정거장에 머물렀다. 사람 부르는  소리며 대답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이번에는 
다른 기차가 반대편에서 들어오면서 귀를 째는 듯한 경적을  울렸다. 어디선가 헌병이 사람
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신음하는 소리며 용서를 비는 소리가 들렸다. '게다'소리가 보도  위
를 따닥거리며 시끄럽게 울렸다. 흡사 '게다'의 행진곡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때, 나는 귀로에 올랐다.
  
    가뭄
  돌다리 아저씨가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만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는 내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어디에  있었으며, 
왜 돌아왔는지 묻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거라."
  그는 짧게 한 마디 던졌다. 그의 아내도 내가 마치 전혀 딴 사람이 되어버리기나 한 것처
럼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저녁 밥상을 들고 내 방에 들어왔다.  나
는 언제나 나릴 잘 보살펴주었던 아주머니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정말 기뻤다.
  "아주머니, 다시 돌아왔어요."
  나는 말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사흘 이상이나 나는 밖에 나가 있었다. 귀로(歸路)는 갈 때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다. 마
침내 내가 우리 고장의 산줄기를 바라보게 될 때까지는 나지막한 언덕 몇 개가 늘어선 단조
로운 이 지역을 점토길이 뚫고 끝없이 뻗쳐져 있었다. 어디선가  다만 암소 한 마리아 음매 
울고 있었다. 조수는 굴바위에 부딪쳐 쏴 하고 부서지고 있었다. 내가 한밤중에 창문을 열었
을 때, 해안가지 전 포구가 파도에 쉽싸인 것이 보였다. 모래사장은 은빛 파도에 싸여  조용
히 철썩대기만 했다. 어두운 언덕 앞에 위치한 초가지붕은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잠들어 있
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일이, 또한 이 마을의 모든 것이 꿈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농부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지금은 모를 내고 있었다. 아낙네들은 집에서 실이며 직
조물을 바랬고, 누에고치를 기르고 있었다.
  종달새가 재잘대며 하늘 높이 날았고, 소오룡이며 들장미가 만발하였다. 뻐꾹새는 먼 계곡
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좋은 날씨가 계속되며 봄비는 오지 않았다. 날씨가 계속 가물어
서 초여름이 다가오자 농부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밭 흙은 가루처럼  메말랐고, 
논에는 물이 없는 곳이 많았으므로 모두가 흉년이 들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가뭄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의 
왜놈들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성벽을 부숴버렸고, 명예스러운 건물들
을 철거해 버리고 오래 된 옛날 묘들을 마구 파헤쳤다. 특히 이 마지막 일은 악질적인 소행
이었다. 왜놈들은 묘에서 사자(死者)에게 공양된 고귀한 도자기를 마구 훔쳐냈다. 그들은 그
것을 동경(東京)에 갖고 가서 비싼 값으로 팔았다고 했다. 수많은 묘가 파헤쳐져 하늘을 쳐
다보고 있지 않은 산이 없었다. 수천 년 전의 조상들의  해골이 산정의 햇볕을 쬐며 여기저
기에 흩어져 뒹굴었다. 도로  건축을 한답시고 이  야만족들은 낡은 옛날  묘소를 파헤쳐서  
손상시켰다. 사람들이 산허리를 지나가노라면 종종 사람의 뼈나 혹은 완전한 해골이 산에서 
굴러내려 기겁을 하고 도망치기도 했다. 나 역시 하늘이 인간의 그런 비행을 벌하리라고 믿
었다.
  여전히 가뭄은 계속되었다. 넓은 논에는 이제 물 한 방울도 없이 말라버렸다. 그래서 여기
저기 깊이 갈라져나간 흔적뿐이었다. 농부들은 밤마다 물을 퍼나르기 시작했다. 가까이에 있
는 유일한 물줄기인 냇물이 다 말라버렸을 때 사람들은 다른 물줄기를 찾아가서 담을 수 있
는 모든 그릇에 물이 퍼담기 위해 몇 시간씩 걸어가야만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어리고 약
한 볏모가 적어도 이튿날까지라도 마르지 않고 견디기를 바랐다.
  많은 아낙네들은 뒤뜰이나 밭에서 별빛이 반짝이는 밤마다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있었
다. 그들은 촛불 옆에 한 바가지의  물을 나무상에 떠놓고, 죄없는 농부들을 너무  혹독하게 
벌하지 않도록 하늘에 빌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매일 아침 불덩이 같은 해가 동녘에서 떠올랐고, 종일  괴로움에 
찬 땅을 내려다보며 이글거렸다. 어느 누구도 일하며 노래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사
람들은 말없이 낮에는 김을 매고, 밤이면 절망적이면서도 하늘에서  구름 한 점이라도 보이
는가 찾았다. 나도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종종 하늘을 쳐다보았다. 우리
들은 모두가 생각에 잠겨 거의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나는 갑자기 집안 사람들이 깨워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하늘이  누그러져서 
양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온 포구에 비가 쏟아져내리자 마음 속에서는 힘찬 기쁨의 환성
이 폭발했다.
  소낙비가 그치자마자 날씨는 다시 뜨겁고 푹푹 찌는 듯해지기  시작했다. 벼는 다시 살아
나서 무럭무럭 자랐다.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김을 매고 있었다. 한편 나는 
매일 어머니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허락 없이 집을 
뛰쳐나간 것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나는 어머니가 뭣이라고 말씀하실때까지 그냥 송림에 
머물려 살려고 했다. 나는 농사 책임자인 돌다리 아저씨로부터 내가 도망쳐 나간 밤에 어머
니는 한잠조 주무시지 않고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항상 방
에 혼자만 있었고 아무하고도 한 마디의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
가 혹시 어떤 병환이라도 나시지  않았나 하고 매우 걱정스러웠다. 어느  날 저녁에 이러한 
어머니가 몸소 이 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 곁으로 달려갔을 때, 어머니는 조용히 웃으면서 나를  맞아주고 내 건강이 어떠냐고 
물었다.
  다음날 저녁, 내가 방 안에  홀로 있었을 때 어머니는 나에게  아직도 공부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아닙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봐라."
  "정말 싫어요."
  "이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제가 공부한다면 나중에 서울에 가야 하지 않아요?"
  "넌 그러구 싶지 않니?"
  "네."
  "그게 왜 싫지?"
  "저는 이제 어머니 곁에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너는 서울에 가도 좋다."
  어머니는 말했다.
  "내일 시내에 가서 다시 공부를 시작해라."
  "싫어요. 저는 공부하지 않을래요."
  "그러지 말고 해봐라. 이제는 내가 그러기를 바란다."
  나는 어머니가 왜 이렇게 말하고 왜 이렇게 양보하는지 몰랐다.  나는 정말로 더 이상 다
시는 공부하지 않으려고 했다. 새 시대는 나에게 너무나도 낯설며  아마도 이 새 학문에 대
해서 나는 전혀 재주가 없다고 믿어왔다.
  "네, 어머니, 공부해 보겠습니다"하고 드디어 나는 대답했다.
  
    입학 시험
  나의 학교 친구들은 내가 다시 학교에 되돌아왔을 때 매우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들은 내
가 놓친 시간을 어떻게 따라가며, 어떻게 하면 가장 빨리  전문학교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지 일러주었다. 내가 고향에 있는 학교를 졸업하고 전문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서울에 있는 
졸은 중학을 다니자면 아직도 3,4년이 지나야만 했다. 주위 사람들은 나에게 이 시간을 자습
으로 단축하고, 곧 통신 강의로 시험 준비를  할 것을 제의했다. 이 방안은 내 마음에  들었
다. 나는 중학 과목에 관한 유명한 통신 교육 기관의 강의록을 받아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되었다, 강의록은 쉽게 쓰여져 있었지 때문에 모든 과목
에 있어서, 특히 수학에 있어서도 비교적 쉽게 잘해 나갈 수 있었다. 강의록 공부를  시작한 
지 몇 달 후에 시작한  영어만이 나에게 몹시 어려웠다. 영어  발음의 '가나'에 의한 복잡한 
표음이나 문법 설명은 내가 비록 수없이 반복해 읽었으나  여전히 명백히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영어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우리  고향 학교에서는 영어를 전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뿐만아니라 많은 수준 높은 과목에  있어서는 아직도 좋은 교
사가 없었다. 그나마 몇 명 안  되는 한국인 영어 교사들은 모두 서울에  있는 좋은 학교로 
불리어갔다. 그래서 나의 학교 친구들도 그들이 영어에 대해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나를 
도울 수 없었다. 그것이 나의 용기를 아주 꺾어버렸다. 이 영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
다. 왜냐하면 영어를 모르고서는 도무지 유럽 문화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마는 화학과 물리를 도와주었다. 기섭은 수학을 도와주었고, 각성이라고 불리는 다른 학
생은 그 많은 낯선 이름 때문에 나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던 서양사를 가르쳐주었다. 그
들은 저녁마다 내 방에 와서 내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 때까지 나와 같이 공부했다. 그들
은 모두가 우리의 고향 학교를 졸업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서울로 공부하러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전문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모든 수
단을 다 썼다. 때문에 내 방은 매일  저녁 교실로 변했었다. 다만 보통의 교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학생은 하나인데 가르치는 선생이 셋, 넷 된다는 점이었다.
  나의 공부를 돕지 못한 단 한 사람의 친구는 만수였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데 
가 없었다. 여전히 이 친구 저 친구한테 돌아다니면서, 나이가 벌써 열일곱 살이나 됐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배우려고도 하지 않고 일정한 직업을 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는 고전 음악가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도 매일 밤 나에게 왔다. 그것도 아주 늦게 모든 아이들이 다  가버리고 난 다음 나 혼
자 책을 보고 있을 때 왔다. 그는 내가 공부하고 잇는 것을  잠깐 바라보다가 자기 집에 가
서 자기와 함께 음악이라도 조금 하자고 했다. 그는 모든 음악가나 기생들에게 애호되는 긴 
현악기인 가야금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아직 공부를 더 해야 한다거나, 아주 피곤하니 차라
리 잠이나 자고 싶다고 하면, 그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이 나를 고단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
는 항상 반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상하게 
한다든가, 어머니의 외아들인 내가 정신병 환자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식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내가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그는 내가 자기의 유일한 친구이며, 그러니까 자기
의 청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말을 둘러붙였다.
  나는 그와 함께, 좁은 길에  자갈이 깔리고 출입구가 다로 있어서  밤에도 방해되지 않고 
출입할 수 있는 그의 방으로 갔다. 이 방에는 책도  없고, 책상도 없고, 시계도 그리고 모든 
학생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이란 전혀 없었다. 이 자그마한 방은 거의 비어 있었다. 다만 한쪽 
구석에 이불이 놓여 있었고, 또 다른 구석에는 풀 그릇이 들어 있는 화로가 있었다. 그는 벽
장 속에다 그의 전 재산을 보관해 두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그는  우선 술병과 과일이 몇 개 
담긴 놋쇠쟁반을 꺼냈다.
  "자, 마셔라. 내가 너를 위해서 특별히 가져온 것이다."
  그는 매번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가야금을 꺼내  내 무릎 위에다 놓고 두텁고 
낡은, 손으로 사본한 악보를 펼쳤다. 그 악보 속에는 많은 고전 음악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
다. 그가 어떻게 이 비싼 악기를 입수했는지, 그리고  어디서 그 낡아빠진 악보를 구했는지, 
나는 몰랐다. 그는 한 줄을 가리키며 음부(音符)대로 뜯었다. 나도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 손
가락이 다시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해서 한 곡을 거의 틀림없이  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악보대로 끈기 있게 계속해서 뜯고는 내 손가락의 위치를 교정해 준 다음 어느 정도 제  마
음에 흡족해지면, 피리로 나를 반주해 주었다.  이렇게 우리들은 그칠 줄 모르고 오래  뜯었
다.
  "야, 미륵아" 하고 언젠가 그가 말했다.
  "너는 정말 서울에 가서 공부를 해야만 하니?"
  "그래, 시험에 합격하면 그렇게 할 테야."
  "네가 이곳에 살면서 우리들과 같이 음악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좋겠니? 너는 일
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지 않니?  그저 행복한 사람으로 살기만 하면 되지 않니?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친구들을 불러들이고 하늘이며 지구며,  세상이며 인간의 마음에 관
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니? 너는  산 데다가 자그마한 정자를 짓게 하여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볼 수 있지 않니?  그러면 너의 어머니는 행복할 것이고, 
너도 행복하게 살 것이며, 또 나는 항상 네 곁에 있을 수 있지 않니?"
  "아니야, 나는 공부를 해야 돼."
  "너는 정말 이상하구나."
  그는 한숨 지으며 말을 뱉었다.
  일 년이 후딱 지나가도 다시 겨울이 왔다. 눈은 많이  내리지 않았으나 아주 추운 겨울이
었다. 이때 운명은 유혹적인 미끼를 내 앞길에 던졌다. 그것은 바로 내년도 의학전문학교 입
학시험에 관한 광고였다. 시험  과목은 다섯 개인데 수학·화학·일본어·한문이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영어와 역사는 없었다.  이 의학전문학교 입학시험은 나에게는  너무나 큰 
유혹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의학은 내 적성에 맞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더욱 거역할 수가 없
었다. 그런데 이 학교의 입학시험엔 너무나 많은 응시자가 모이므로 전부터 가장 어려운 학
교로 알려져 있었다. 중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수험생 중에서 겨우 십분의 일이 합격
될 정도였다.
  나는 며칠을 두고 생각하다가 학우들이 하도 격려하여 끝내는 이 유혹에 지고 말았다. 그
리하여 나는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일주일 후에 나는 수험 허가에 관한 통지를 받았다. 지정
된 수험일에 붓과 먹, 연필과 자를 가지고 시립병원에 출두하라고 했다. 이 시립병원에서 우
리 고을의 수험생들이 시험을 치렀다.
  시험 첫날 아침에 시립병원으로 갔을 때,  날은 아직 어두웠고 몹시 추웠다. 한  간호원이 
나를 조그마한 방으로 데리고 갔다. 벌써 세 사람의 응시자가  구석에 서서 오는 사람을 기
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셋은  나를 보고 웃었다. 그러나 그
들의 얼굴은 창백하고 근심스러워 보였다. 그러자 시험위원이 들어와서 우리들의 이름을 부
르고, 지원서에 첨부된 사진과 우리의 얼굴을 대조하여 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정신적인 
여유를 가지고 시험 문제를 우선 명확하게 생각한 다음에  답을 쓰라고 주의시켰다. 우리들
은 각기 닷새동안 시험을 치를 일정표를 받았다. 오늘 우리들은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우리
는 그러기 위하여 큰 방으로 안내되어 두 명의 의사로부터 신장(身長)·체중·시력·청각·
척추·폐·심장·위·신장(腎臟) 및 기타 기관의 진찰을 받았다. 처음 다른 세 사람이 나간 
후에 웬일인지 나는 또 한 번 세밀하게 심장을 진찰받았다.  두 의사는 한참 상의하고 나서 
건강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필기시험은 매일 이른 아침부터 소강당에 모여 여러 시간  동안 치러야만 했다. 첫날에는 
수학이, 다음날에는 어학이, 셋째날에는 물리와 화학의 차례로 되어 있었다. 수학은 매우 쉬
웠고 물리와 화학도 어렵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고대 일본어와 고전 한문의 원전을 현대 
일본어로 번역해야 하는 시험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그래서 대부분은  이 두 과목에서 
낙제했음에 틀림없었다. 시험위원은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조용히 난로 옆에 앉아  있었다. 
아마 우리들이 서로 얼마간씩 도와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들 중의 어느 누구도 조용히 홀로 애쓰는 것 외에 감히 딴  짓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셋째날에는 작은 종이 뭉치가 내 책상 위로 살짝 굴러왔다. 조심스레 펴보았더니 거기엔 황
색 유황과 적색 유황의 상이한 용해점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날의 구술시험 때 시험위원은 내가 왜 의학  공부를 선택했느냐고 물어보았다. 나
는 생(生)과 사(死)의 원인이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웃으면서  나를 처다보고 오랫동안 
연필을 만지작거리며 장난하고 있었다.
  "그건 아주 고차적인 목적인데" 하고 그는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당분간은 실무 의사를 많이 양성해야 하겠다. 특히 너의 고향에서는 말이다. 왜
냐하면 너희들은 위생관념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화 도중에 그는 잠깐 동안 실험실을 떠났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갖고 있는 시험 
명단을 볼 수 있었다. 이름 밑에는 여러 가지의 난이 있고 거기에 특별 표시가 적혀 있었다. 
내 이름 아래에는, 언어 :단순 명료, 성격 :정직 유화  은근, 학업의 목적난에는 아무것도 적
혀 있지 않았다.
  시험위원은 곧 돌아와서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말을 시작했다.
  "너는 시험을 잘 치렀다. 따라서 1차 선발에 들었다. 그렇지만 결선에서 다섯 명 중 한 사
람이 우리 학교에 입학할 희망이  있는 것이다. 네가 섭섭한 대답을  듣더라도 그것 때문에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최종 선발은 마치 심지 뽑기나 같다."
  작별할 때, 그는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우리 나라라고 말할 때는 언제나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제국까지를 통틀어 의미하는 
것이고, 우리 동포라고 말할 때도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 내에 있는 전국민을 의미한
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그 말에 대해 잠자코 있었다.
  약 3주일 후에 내가 서울의 의학전문학교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리고 4월 초에 
학교 사무실에 출두하라고 했다. 이날 나는 큰 누나댁에 저녁 초대를 받았다. 집에 돌아오니 
온 집안 식구들과 나의 친구 전부가 내방에 모여 앉아서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모두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용마가 나에게 통지를 읽어보라고 주
었다. 모두가 나를 축하해 주었다.  어머니도 기뻐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내 손만 연거푸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고는 차츰 흔히 있는 긴 침묵이 
방 안네 흘렀다.
  나의 친구들은 그들이 매일 밤 나를 도와준 목적이 이제야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
았다. 나는 곧 저 넓은 세계로 나갈 것이고, 친구들은 계속해서 이 좁은 고향의 도시에 머물
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집안 고용인들은 내가 마침내 우리  집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구월이는 읽지도 못하는 학교의 통지서를 근심스럽게 보고 있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저녁, 나는 친구들의 전송을 받으며 나를 서울로 데려다줄 기선이 정박
해 있는 용지(龍池)라는 포구를 향해 갔다. 만수, 용마, 기섭이는 유쾌하게 이야기하면서  앞
서 갔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그들을 따라갔다. 어머니는 시내에서 나와 얼마 동안 같이  걷
다가 여행에 관한 주의를 일러주었다.
  "과거를 너무 생각하지 말아라."
  끝으로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종종 이야기했던 것처럼 시대는 변했다. 다른 사람들은 새 문화에서 우리보다 앞섰
으나 가끔 실책을 범하고 있다. 그러나 네가 그들로부터 무엇인가 배우고 싶거든 여러 가지 
생소한 면이 있음을 감수해야 하며, 또 언제나 네 온화한 성품을 잘 간직해야 한다."
  친구들은 밝은 달빛에 잠긴 포구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흰  기선이 어두운 바위 틈에서 
요술을 부리는 것처럼 두드러져 보였다.  나는 한 사람씩 일일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작은 
배에 올랐다. 배는 곧 거친 파도를 헤치고 흔들리며 흰 기선을 향해 움직였다. 친구들은  선
교(船橋)에 서서 기선이 천천히 돌아 슬픈 고동 소리를 내며  좁은 포구를 빠져나갈 때까지 
나를 전송하고 있었다. 나 없이 언덕길을 넘어 귀로에 오르는 그들 셋의 모습을 바라보기란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들은 무슨 얘기를 했을까?  용마가 얘기했을까? 만수가 얘기했을까? 
그들은 내 여행에 관해서, 혹은 음악에 관해서 얘기했을까? 그들은 곧 남구릉(南丘陵)과 선
녀산(仙女山) 사이를, 우리들의 사랑스런 고향의 전원을 방황하겠지.
  배 위에 다른 학생들이 환성을 지르며 내게 인사했다. 모두가 나의 시험 결과를 축하하며 
서울에서 도와주겠다고 제각기 약속했다.
  용지만(龍池灣)은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높은 수양산이 멀리  가라앉고, 수압섬이 
바로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우리가 탄 배는 넓은 바다에 들어섰다. 오로지 바다만
이 달빛을 받으며 수평선에서 수평선으로 파도 치고 있었다.
  
    서울
  아침식사 직후, 우리 배는 제물포항에 입항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역으로  나와서 
기차를 탔다. 차는 곧 떠났다. 조그마한 정거장에서 몇  번이나 정거한 다음, 정오경에 차는 
드디어 삼각산 방향으로 질주하였다. 언덕과 계곡이며 마을들이 우리  눈앞을 나는 듯이 지
나갔다. 우리들은 5백년 이상이나 임금님들이 등극(登極)해 왔던 왕도에 점점 접근하고 있었
다. 우리가 어렸을 때 성벽에서 보았던 그런 밤의 봉화  신호가 이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이 
곳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이곳 우리 나라의 가장 유명한 시인들이 이곳으로 모였으며,  모든 
선비들과 예술인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다. 기차는 굴을 통해 빠
져나가 강을 건너면서 돌진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기차는 곧 굉장히 큰 역사(驛舍)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서울에 닿았다고 고함 치고 있었다. 
  나는 짐을 들고 역 구내에서 나가는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말할 수 없이 넓은 광장이 앞
에 놓여 있었다. 인력거·자전거·오토바이가 경적을 울리며  소란스럽게 달리는 전차 사이
로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전차를 타고 갔다. 현대식 상점이며 은행이며, 식당
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번화가를 지나 학생들이 주로 모여 산다는 북쪽 서울 시내로 가면서 
나는 한없이 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실제로 어느 거리고 책방이고,  음식점이고 
할 것 없이 가는 곳마다 비슷한 제복을 입은 학생들을 만났다. 모자와 깃에 단 학교와 학과
를 나타내주는 여러 배지로 그들을 식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학과도  학교도, 
그리고 어느 도(道) 출신인지도 묻지 않았다. 모두가 마치 한 커다란 가정에서 태어난 것처
럼 서로 인사하고 도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서울의학전문학교 입구에 서 있었다. 이 학교는 서울시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고, 서구식으로 된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곤색 제복에  '의학'이라는 
금빛 배지를 단 학생들이 물결 치듯 들어가고 나가고  하였다. 그러나 신입생들은 지금까지 
입던 평복을 그대로 입고 왔다. 한국인은 흰옷을, 일본인은 학생 놋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
들과 함께 사무실에서 검은 옷증이며, 시간표며, 제복과 모자에 다는 배지와 모표 등을 받았
다.
  화학 강의는 아주 재미있었다. 그건 일목 요연하게 구성이 되었고, 언제나 실험이  뒤따랐
다. 생리학 강의는 보통이었고, 우리에게 별로 새로운 것을 가르쳐주지 못했다. 우리에게 가
장 중요한 해부학 강의도 그보다 낫지는 않았다. 빼빼 마른  담당 교수는 말이 고르지 않은 
데다가 어조에 강약이나 활기가 없었다. 그는 뼈를  손에 들고 평면과 심부와 융기를 l일본
어·독일어·라틴어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표현이 지나치게 빨랐기 때문에 맨 
앞에 앉은 학생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간간이 흑판에다 무엇을 썼으나 그
것은 그의 발음만큼이나 알아보기 힘들었다. 우리들은 차례차례 펜을  놓고 괴로운 두 시간
짜리 강의가 끝나고 말라빠진 교수의 얼굴이 사라질 때까지 지루하게 앉아 있었다.
  "이 사람 바본데."
  몇몇 학생들이 중얼거렸다.
  가장 열심인 학생들이 교탁에 올라가 상자에서 어떤 뼈조각을 꺼내들고 가까이에서  융기
와 심부를 관찰하고 교과서에 있는 그림과 비교해 보았다.
  "우리도 저래야 하지 않을까?"
  며칠 전부터 자주 나와 함께 앉은 옆자리 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하는 거지 뭐."
  이렇게 말하고 나는 깨끗한 광대뼈  하나를 꺼내어서 그의 앞에 놓았다.  그는 손도 대지 
않고 한동안 보고만 있었다.
  "이게 왈 사람의 뼈지!"
  그는 말했다.
  한참 동안 그는 뼈를 보고 난 후, 천천히 손으로 잡아서 달아보더니 다시 자기 앞에 놓았
다.
  "이상하다!"
  그는 중얼거렸다.
  "이것이 말하자면 인간의 실체지!"
  우리들은 모든 절개부(切開部)와 능성과 융기를 눈여겨보고는  우리들이 적어놓은 공책을 
정정하였다.
  내 옆의 학생은 북쪽에서 온 조용하고도 인정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의 이름은 익원이었
다.
  
  강의 노트를 서로 보충하여 정정하면서, 그리고 공동 실습을 통해 학생들은 제각기 몇 패
씩 짝이 지어졌다. 동시에 시간이 흐르면서 친한 벗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짝이 지어진  학
생들은 저녁에 함께 공부하기 위해 같은 하숙에 들었다.
  익원과 나는 아주 좋은 하숙집의 크고 밝은 방을 나우어 썼다. 우리는 매일 저녁 서로 읽
고 또 토론했다. 어떤 때는 물리학에 관해서, 때로는  화학이나 해부학에 관해서, 그리고 한 
주일에 네 시간씩 듣는 독일어 문법에 관해서도 가끔 토론했다. 의학 서적의 태반이 독일어
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독일어는 의학도에게 필수 과목이었다. 우리들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동사의 인칭 변화와 다른 품사의 격변화를 연습하며 외었다.
  매일 아침 우리 둘은 함께 학교에 갔고, 저녁이면 자정까지 같이 공부하기 위하여 집으로 
올 때에도 함께 왔다. 우리 둘은 함께 물건을 사러 갔고, 함께 목욕을 갔고, 함께 극장 구경
을 했다. 일요일이면 서울의 명소를 구경했다. 경복궁이며, 남산공원, 동물원  등을 돌아보았
고 한강에도 갔었다. 익원은 벌써 1년을 서울에서 공부하였으므로 어디든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학교는 한국에 있는 최고 학부 중의 하나였다. 한국에 들르는 어떤 유명한 사람이든
지 우리 학교를 방문해하였다. 어떤 황태자나 유명한 정치인이  서울에 오면 우리는 정거장
가지 환영하러 행진하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는  일본 총독부에 직속해 있는 
모든 학교와 마찬가지로 다소는 학교다웠으나 역시 거의 군대식이었다. 우리는 강의나 실습
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특별한  사유 없이는 무더운 7월까지 계속
되는 강의를 한 시간이라도 빠져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마침내 학기의 마지막 날이 괴고, 교복을  벗어서 고리짝 속에 오랫동안 
집어넣을 수 있을 때는 정말 즐거웠다. 우리 둘은 가을에도  함께 공부하기 위하여 방학 동
안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상의하였다. 익원은  내 광학(光學) 공부가 제일 뒤떨어져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두툼한 물리책을 짐 속에 넣었다. 익원은 책상 위에 앉아서 나를  물끄러
미 바라보았다. 그는 부모가 없었기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방학을 서울에서 지내려
고 했다. 그는 일찍이 고아가 되어 어느 기독교 가정에서 양자로 성장했다. 그가 기독교  전
문학교에 가지 않고 의학 전문학교에서 공부하기를  결심한 이래로 그 집에서는 그가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들은 마지막 저녁을, 지금까지 거의 해본 일이 없는 거리를 산책으로 보낼 계획을 했
다. 우리는 창덕궁의 이끼 낀 담장을 따라서 때로는 오르막길이 되고 때로는 내리막길이 되
는 조용한 옛길을 걸었다. 아직 이 궁궐의 담장 너머에는  전 왕실의 후예가 수백명에 달하
는 시종과 시녀를 데로고 살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언제나  조용했다. 나는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나는 왕족들의 음성이나마 한 번 
들었으면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아무런 소리도, 어떠한 말도, 심지어 발자국 소리도 새어나
오지 않았다. 자랑스런 5백년 왕조의 저 후손들은 지극히 조용해 진 것이다. 
  우리는 궁전 담이 끝날 때까지 걸은 다음, 남쪽으로 향하는 큰길을 통해서 갔다. 일본제와 
유럽제의 사치품들이 놓인 진열장이나 길은  대낮처럼 환희 밝았다. 도처에서  유럽 음악을 
틀어댔다. 바이올린이며 피아노며, 손풍금이며 축음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철도 호텔의 공원
에서 유럽 행진곡이며 무도곡이 울려나왔다. 고향에 있는 나의  친구들에게 몇 권의 오락책
을 선물하기 위해 우리들은 서점가에 들렀다.
  귀로에서 우리는 동쪽 넓은 길에 펼쳐진, 흔히 말하는 야시장을 구경했다. 수없이 많은 노
점에서는 낡고 싼 물건을 팔고 있었다. 표지가 누렇게 바랜  책이며 푸르고 붉은 줄이 있는 
종이며, 그림이며 부채, 담뱃대, 담뱃갑, 모자, 부인용 비단신  등 모두 낡고 먼지 묻은 것들
을 동전 몇 푼으로 살 수 있었다. 낡기는 했지만  고상한 비단옷을 입은 노인네들이 싸구려
를 외치며 길가는 사람들을 유혹했다. 그들은 아마  어느 면(面)이나 읍(邑)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가난해진 데다가 권력마저 잃고서,  그들은 저녁마다 아이들의 굶주림을 면키  위해 
여기소 몇 푼의 동전을 벌려고 애쓰고 있었다. 가람들은 얼마라고 값을 대고 깎으며 다투고 
있었다.
  저만치 마지막 노점에는 가는 대나무로 만든 퉁소가 수없이 쌓여 있었다. 한 자루가 동전 
두 닢에 팔렸다. 익원은 여기에 서서 퉁소를 구경했다. 나는 그에게 퉁소를 만든 솜씨가  거
칠고 구멍이 맑은 소리를 내지 못할 것 같으니 사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소원
대로 샀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껏 악기를  손에 대본 일이 없으므로 아무 거라도  괜찮으며, 
혼자 너무 외로울 때면 민요를 불어보려고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많은 퉁소 중에서 겉으로 
보아 깨끗하고 소리가 괜찮은 몇 개를 골라서 그 중에서 한 개를 고르라고 했다. 익원이 하
나를 사는 동안에 어떤 낯선 젊은 사람이 다가오더니 자기를 위해서도 쓸 만한 것으로 하나 
골라달라고 청했다. 나는 그가 부탁한 대로  하나를 골라줬다. 그러나 퉁소를 한 번  시험해 
봐 달라는 사람은 이 청년뿐이 아니었다. 어떤 노인과 두 여자가 그에 합세하자, 곧 우리 주
의에는 내 퉁소소리를 들으려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섰다.  나는 별로 유
쾌하지가 않았다. 나는 군중들을 뚫고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장사치 노인이  달려오
더니 나에게 완전히 다른 퉁소를, 즉 딱딱한 골죽(骨竹)으로 된, 잘 다듬어지고 부드러운 장
식이 그려진 예술가의 진짜 퉁소를 보여주었다. 그도 똑같은 것을 손에 쥐고 명령적인 짧은 
어조로 함께 타령을 불자고 했다. 타령은 옛 국악학교를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불 수 있어
야 하는 인기 있는 고전곡이었다. 퉁소와 그의 말투로 보아  이 노인은 옛날의 음악 선생이
었거나, 왕실의 악사였음이 분명했다. 그는  이즈음 어디서나 유럽 음악만을 배우기  때문에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마침내 고전 악기를 옳게 손에 쥘 줄  아는 젊은 사람이 와서 자기와 
다시 한 번 고전극을 볼 수 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불기를 주저했다. 
우리들은 야시장 한가운데서 군중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동안  침묵만을 지키고 이상한 흥
분 속에서 모든 노래들을 듣고 있던 익원이 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교복을 입지 않은데
다가 노인의 기쁨이 대단하니까 조용히 불어보라고 했다. 내가 천천히 퉁소를 입에 대자 비
단옷 차림인 그 노인도 같이 불기  시작했다. 우리 주변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  예술인이 
발을 이리저리 옮기며 점점 흥이 나서 조용한 밤을 향해 고전곡을 계속 불어대는 동안 주위 
사람들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새  일본인 거리인 남쪽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불이 
반짝거렸고, 북쪽의 옛 한국인 지역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삼각산 위에는 벨벳처럼 검
은 밤하늘이 펼쳐졌고, 오래 된 창덕궁은 과거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구학문과 신학문
  익원은 나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철저하게  공부하였다. 그걸 나는이미 첫 학기에  알았고, 
나중에 더 잘 알게 되었다. 나는 그날 그날의 강의를  빠짐없이 받아쓰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이해함으로써 만족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앉아서  생각하면서 새로운 
불명료한 점과 새 문제를 발견해 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종종 이 학과 저 학과를 새로
이 뒤져야 했고, 끝없이 토론해야 했다. 익원은 모든 과목을 매우 진지하게 공부했다. 그 중
에서도 특히 물리와 화학 분야를 각별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에테르'니 '원소'니 
'에너지'니 하는 어려운 개념에 관해서 토론할 때 이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러면 그는 온 
밤을 다 필요로 했고, 그래서 자정에야  비로소 다른 강의, 예를 들면 생리학이나  해부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밤이면 우리는 허기를 느꼈고, 떡장수가 밖을 지나며 김이 무럭무럭 나는 떡을 사
라고 소리를 지를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떡장수가 밖을 지나며  김이 무럭무럭 나는 
떡을 사라고 소리를 지를 때가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떡장수는  벌서 어느 골목 어느 집에 
학생들이 한밤중까지 공부하며 허기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떡장수 소리는 처음
에 멀리에서 마치 모기가 우는 것처럼 들리기 시작하다가 점점 커져서는 우리 집의 높이 달
린 창문 밑에 와서는 딱  멎었다. 우리들은 그가 떡상자를 내려놓으며  뚜껑을 여는 소리를 
들었다. 익원은 웃으면서 밀창문을 열어젖히고 달콤한 속이 든 떡 두 개를 받았다. 떡장수는 
노래 소리가 다시 밤의 골목을 뚫고 멀리몰리 흩어져가는 동안 우리는 다시 책을 읽었다.
  익원의 장서에는 학술 서적 이외에도 많은 오락 서적이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일본 말로 
번역된 유럽 소설들이었고, 나도 이름만은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한 번은 그 속에서 철학적
인 내용이 담긴 것 같은 책을 몇 권 발견했다.  그 중의 한권에는 <존재의 이론>이라는 제
목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 책을  꺼내 읽었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익원은 그의 친구를 
찾아갔으므로 나 혼자 집에 있었다.  나는 익원이가 돌아올 때까지 오후  내내 재미있는 이 
책을 읽었다.
  내가 그 책에 그처럼 몰두해 있는 것을 보자 익원은 비로소 빙그레 웃었다. 그는 내가 철
학 문제에 너무 매달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일렀다. 왜냐하면 철학 문제는 본래의 공부에서 
나를 이탈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동양사람들은 너무 이론
적인 면으로 기울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책에서 떨어지기가 매우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 인간이 
제기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것을 손
에서 떼고 더 읽지 않으려고 결심을 해도 그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자꾸만 계속하여 
읽고 싶어짐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는 익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부터 다시 계속해서 철학 서적을 탐독했다.
  "우리가 유럽 사람들에게 뒤떨어진 현대 학문은…."
  어느 날 저녁, 익원이 말을 꺼냈다.
  "철학적 사유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자연에 관한 실제적인 지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
것은 자연과학에 있어서도 그렇고 의학에  있어서도 그렇다. 우리의 선조들이  항상 인간의 
육체를 고전철학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했던 것과는 달리,  서양 연구가들은 그것을 해부하여 
내부기관을 직접 눈으로 보려는 대담한 용기를 가졌었다. 그들은 골똘히 생각하거나 숙고하
지 않고, 어디에 심장이 있고 어디에 위가 있으며, 어디에 혈관과 신경선이 달리고 있는가를 
직접 보았다. 이 대담한 용기 때문에 우리들은 결국 옛날 것보다 백 배나 더 위대한 의학적
인 지식을 얻게 되었다."
  우리 고대의 전통적인 한방 의학에 관해서는 익원이나 나나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것
이 비록 우리 연구의 분야에 속하여 있었지만, 우리들은 이제까지 모든 오랜 전통이 낡아빠
졌고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우리는 구식 한의원들이 
어떻게 공부하였고, 그들의 학문을 어떻게  세분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리들은  한방 
의학에 있어서는 의원이 되기 위해서 적어도  십 년간은 공부해야 된다는 소리만을  들어왔
다. 그래서 귀밑머리가 세지 않은 한의사는 한 명도 없었다. 
  이때 다행스럽고 우연하게도 이 희귀한 책이 우리의 손에 굴러들어 왔다. 익원이,  아저씨
가 한방 의원이었던 한 친구를 방문했을 때 그가 보여준  것을 빌려온 책이었다. 그 친구는 
아저씨가 남겨놓은 책을 모두 불태워버렸어야 했는데, 그 중 한 권을 찾아내어 보관해 두었
던 귀중한 책이었다. 그래서 익원이  이 귀한 책을 하룻밤 빌려와  우리는 해부학의 일부를 
표현하고 있는 이 두툼한 책을 조심스럽게 뒤졌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를 여러부분으로 나
누어 먹으로 그린 그림책이었다. 모든 그림에는 많은 선과 점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고, 육
체의 전(全)표면을 덮고 있었으며, 복잡한 명칭이 딸려 있었다. 이 선들이 소위 말하는 생명
선인 것 같았으며, 선의 경로는 혈관이나  신경에 일치하지 않았다. 거의 마지막 면에  가서 
먹으로 그린 신체의 내부 체부도 몇 장이 딸려 있었다.  개개 내부 기관의 외형적인 형태가 
마치 아무렇게나 그린 예술가의 스케치처럼  조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위나 심장의 
형태는 우리 교과서의 그림과 똑같았다. 그렇지만 간(肝)은 우리들에게 아주 놀라운 것이었
다. 일곱 엽(葉)으로 되어 있고, 두꺼운 횡량(橫梁)에 서로 걸려  있었다. 폐는 양 옆에 각기 
세 엽으로 되어 있고, 왼쪽 폐에서 우리가 소순환의 상징이라고 하는 두꺼운 줄이 심장으로 
가 있었다.
  우리들은 이 책의 졸렬한 해부학에 대해 웃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직접 보지도 않
고 적어도 이 정도까지 정확히 내부 기관을 그린 재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방 의원
들은 결국 한 번도 해부를 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신체의  내부를 다만 외부를 
더듬어서 예측했을 뿐이리라.
  이 신통한 한의원들은 환자의 몸을 거의 만진 일도 없었다. 그들은 환자의 등을 두드리지
도 않았고, 내부 기관을 청진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만 환자의 얼굴을 들려다보고  환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듣고서는 진맥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처방을 쓰면 이 처방에 
따라 조수가 약을 곧 준비했다. 조제실에는 모든 필요한 약초며 뿌리며 구근이 보관되어, 거
기에서 환약이며 고약이며 탕약이 의원의 감시하에 제조될 수  있었다. 환자에게는 그 외에 
다른 치료는 없었다. 한방의는 수술도 주사도 투사(投射)도 알지  못했다. 다만 특정한 병에 
대해서만 여러 곳에 침을 놓았다. 이것은  생명선이 지나는 곳이며, 그 방해가 병이  된다고 
했다.
  이렇게 단순한 기술을 배우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인간 존재의 의의에 대해
서 그렇게 오랫동안 철학적으로 사색했을까?  그들이 약초에 관해서 그렇게 오래  공부했던 
것일까?
  우리들은 한의에 관한 책을 본 일이 없으며, 인간 신체의  구조에 관한 책도 구경한 일이 
없었다. 그러한 책은 책방에서도 살 수 없었는데, 의원 개개인은 자기 서적을 비밀 문서처럼 
감추었다.
  인간의 육체는, 특히 영혼이 그에게서 떠난 다음에는,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
서 인간은 시체를 땅의 일정한 곳에 돌려줘야하며, 그럼으로써  방해받지 않고 행복한 조화
로 자연에 복귀하여 후손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오지  않도록 했다. 다라서 시체
의 해부는 비록 의사에 의해서 시행된다 할지라도 자연 법칙과  영혼에 대한 죄(罪)로 간주
되었다. 그래서 당시 한국 사람만이 다녔던 우리 대학의 초창기 학생들이 이런 해부준비 실
습을 거절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아마  현대의학이 낡아빠진 한의학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고 생각하여 신(新) 의학의 학습을  받았으나, 아직도 시체를 해부하는 것은  큰 
죄악으로 보았었다.
  서구 문화를 우리 나라에 도입시키는  이 시험 시기였던 수십 년  전에는 그랬을 법하다. 
이런 낡은 견해를 오래 전부터 벗어버린 우리들 자신도 어느  겨울 오후, 처음으로 따로 떨
어져 있는 잿빛 해부실로 인도되었을 때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다른 여섯 명의 학생 
외에 나와 익원은 해부 실습용인 청년의 시체가 놓인 책상  쪽으로 천천히 접근해 갔다. 얼
마쯤 떨어져 서서 우리들은 창백한 시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사자(死者)는 대지의 그늘 
속에 깊이 묻혀서 쉬는 대신에 이곳 연판 위에 누워서 겨울 햇볕에 알몸을 쬐고 있었다. 익
원은 슬프게 나를 바라보고 내 손을 잡았다.
  "향연(香煙)조차 안 피우고!"
  그는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교수가 들어와서 우리들은 오늘 다만 장부 기관만의 위치를  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시
체의 해부는 인간 권위에 대한 침범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그가 지상에 남긴 유체(遺
體)를 높은 학문의 제단에 바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사자에게  큰 명예를 부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들 중의 누구 한 사람이 용감하게 손을 대서 처음에는 
횡격막 근처의 피부를 아래로 절개하라고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급기
야 한 학생이 천천히 주저하면서 그의 기계 상자를 끄집어내서는 명령한대로 했다. 그 다음
에는 다른 학생의 차례가 왔고, 우리는 결국  오멘텀 마유스(Omentum majus)가 깨끗이 드
러날 때까지 함께 작업했다.
  우리들이 등불 아래서 모든 내부 기관을 보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무렵, 밖은 벌서 어
두워졌다. 집에 돌아와서 우리는 식사를 거절하고, 온밤을  침묵으로 지새웠다. 우리는 서로
가 주고받을 만한 이야기거리를 찾지 못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 학문이며  철학이
며, 자연이며 인간이 산다는 것, 그 모두가 무의미하고  흉해 보였다. 우리는 학교에서 나올 
때 뜨거운 물에 깨끗이 목욕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내 자신의 육체를 보아야 하고 손
으로 내 피부를 만진다는 것이 겁이 났다. 나는 꼼짝도 않고 누워서, 오늘 오후에 있었던 무
서운 광경을 잊어버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익원은 책상 앞에 앉은 채  이 책 저 책을 뒤적
거리더니 그만 내던져버리고는,
  "에이 무서워."
  "야만적이야!"
  "소름이 끼쳐."
  이런 말들을 내뱉었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그의 흥분을 진정시킬 만한  책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는 계속 쉬지 않고 읽기만 했다. 나는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깨었다 하면서  그가 
밤새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 계속해서 의학을 공부할래?"
  다음 날 아침에 그는 나에게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작별
  우리들이 6학기째, 즉 삼학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오후, 나의 안과  강의(眼科講義)가 
끝나 강의실을 나오다가 상규라고 하는 나와 친한 학생에게  붙들렸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
리로 내일 저녁에 중대한 상의가 있으니 식당 남운(南雲)으로 오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물었
다. 나는 그러기로 약속하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고 물었다. 상규는 나를 으슥한 옆으로 데
리고 가더니 거의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는 한국 전문학교의  많은 학생들로부터 이상한 이
야기를 들었으므로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했다. 한국 민족은 곧 부정한 일본 
정책에 대항해서 일종의 시위 운동을 감행할 것이며, 모든 한국인 학교의 학생들이 이에 가
담항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학교의 믿을 만한 한국 학생들에게 우리들도 참가
해야 할 것인가를 우선 물어보려는 것이라고 했다.
  상규에게서 초대받은 익원도 역시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
오면서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저녁 과제를 빨리 마치고  나서 우리 민족이 
일본 정부에 대해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놓고 토론을 했다. 선거법인가?  그렇
지 않으면 자국(自國)의 군대 문제일까! 혹은 자치 문제?
  "어쨌든 간에 정치에 관한 것일 거야."
  익원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틀림없이 그럴 거야."
  "우리들이 참가한 것이 당국에 발각되면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너는 생각해 봤니?"
  "물론 나도 그걸 생각하고 있어."
  "우리들이 정부에 직속되어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니까 우리들은  더욱 심하게 당할 거야. 
우리들은 그런 고마움 때문에 결코 정치적인 시위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겠지."
  우리들이 참가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방관해야 할 것인가 하는  큰 문제가 지금 
대두된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가 받아온 바와 같이 아무런 의무를 지우지 않고 우리들을 높
은 학문으로 인도해 주는 이 학교가 고마웠다. 우리들에겐 국비로 명소를 구경시켜  주었고, 
또 유명한 학자며 승려며 정치인들에게 안내해 주었다.
  익원은 오랫동안 잠자코 있으면서 깊이 숙고하고 있었다.
  "그래, 네 생각으로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니?"
  그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우리들도 전 민족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한께 행동해야지."
  "물론 그렇긴 해."
  "그럼 네 의견은 어때?"
  나는 잠자코 있었다.
  "제기랄, 어쩌면 좋지?"
  그는 중얼거렸다.
  "어찌 되든 간에 우리는 같이 행동하세."
  "그거야 물론이지."
  이튿날 저녁에 우리들이 남운 식당에 갔더니, 그것에 열 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시위 운동은 이미 폭넓게 준비되어 있고, 다만 국립대학교  학생들만이 전혀 모르고 있다고 
상규가 설명했다. 사람들이 우리를 '반왜놈'이라고 하며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긴
장해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모두가 참가하기로 의견이 일치되었다.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시위를 누가 불러 일으켰으며, 그리고 어떻
게 조직되었으며, 일본 정부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
든 동료 학생들은 참가하기를 원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유구한 문화와 우리 조상의 문화 유산에 대해서 이
야기하였고, 또 일본놈은 벼락 출세한 얼간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고들 이야기했다. 우리
들은 세계 최초로 발명한 인쇄 활자며 거북선이며, 도자기 기술이며 특별한 종이며, 기타 우
리 조상들이 세계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발견했던 여러 가지를  놓고 이야기했다. 우리들 중
에서 성격이 가장 조용하고, 생각이 깊은 익원이까지도 오랫동안  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
고 난 다음,
  "잘 됐어, 우리도 참여하자"하고 결론을 내렸다.
  마치 우리 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이 최종적인 장해의 담벽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운동에 참
여할 대중들은 얼마 멀지 않은  듯한 목적을 향해 바야흐로 돌진하고  있었다. 상규는 종종 
우리에게 시위에 새로운 준비며, 국기며, 전단(傳單), 행진 질서 등에 관한 소식을 전해 주었
다. 마침내 그는 삼월 초하루 오후 두 시에 첫  시위가 종로의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다는 
중요한 소식을 갖고 왔다.
  그 날은 따뜻하고 화창한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내가 일어났을 때 익원은 벌써 교복을 입
고 있었다. 나는 며칠 전부터 전염성 피부염 때문에 결석을  하고 오늘도 강의에 나가지 않
고 있었다. 
  "지체하지 말고 정각에 공원으로 나와."
  그는 악수를 청하면서 말했다.
  "거기서 만날 수 있게 말이야. 같이 시위하자."
  "암, 그렇고말고!"
  그는 방에서 나가면서 빙그레 웃었다.
  우리는 밤새도록 거의 자지 않았다. 납덩어리처럼 짓누르는 피로가  나를 이불 속에 파묻
혀 있게 했으므로 다음 날 일어나기가 매우 어려웠다.
  
  오후 2시, 내가 공원으로 갔을 때는 공원은 벌서 경관들에게 포위되어 있었고, 담장  안에
는 손바닥만한 틈도 없이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나는 불과  열 발자국도 더 걸을 수 없
었다. 익원도 다른 어떤 학생도, 그 근처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담장 구석에 서서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입구를 통해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깊은 정적이 흘렀
고, 나는 누군가가 조용한 가운데에 정자의 연단에서 독립선언서를 소리 높이 읽는 것을 들
었다. 나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잠깐 동안  침묵
이 계속되더니 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 조그마한 공원이 
진동했다. 그 조그마한 공원이 진동하고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공중에는 각양각색의  삐라
〔傳單〕가 휘날렸고, 군중들이 공원으로부터 쏟아져나와 시가행진을 하였다. 우레 같은  만
세소리가 계속되었고, 사방에서 삐라가 난무하는 사이를 뚫고 군중들이 행진하였다.
  나도 한 장을 받아서 선언문을 읽었다. 일본에 의한 한국 민족의 합병은 부당하며, 앞으로 
효력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한국인의 자유로운 민족으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으니 그 권리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였다. 나는 선언서를 몇 번이나  되풀이 읽고 이 
행진 대열에 참가하였다. 공원의 입구에서 누군가가 한 뭉치의  삐라를 내 손에 안겨주고는 
명령하듯이 짧게 고함쳤다.
  "뿌려라!"
  길은 벌써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갑작스러운 상태에  놀라 멍하니 서 있던 사람들이  서로 
삐라를 받았다.
  "마침내 이제야!"
  몇 사람들이 부르짖었다.
  "학생들이여! 청년들이여! 자, 이제 때는 왔다!"
  또 다른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여자들은 통곡하고, 부들부들 떨면서도 우리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날라다 주었다. 
  경찰관들은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내로 통하는 길을 완전히 개방하고  있었다. 
중무장을 한 경찰관들은, 학생들이 어떤 폭력 행위로 나올까  날카롭게 감시하면서 관청 건
물과 영사관만을 에워싸고 있었다.
  저녁때야 비로소 우리들이 제지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들의 행동의 자유는 점
점 좁혀졌다. 우리들이 행진해 가고 이미 지나쳐버린 구역은  경찰과 병정들에 의하여 점령
당하고, 우리들은 점점 폐쇄당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프랑스 영사관 앞에서 자유  민족임을 
거리낌없이 선언한 다음 총독부로 행진하려  했을 때 우리들은 완전히  포위당하고 말았다. 
도로는 차단되고 모든 가로의 양 옆에는 중무장한 경관과 한가운데에 넉 줄로 병정들이 서 
있었다. 잠시 동안 양편은 서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자 병정의 전열에
서 희게 번쩍이는 총검이 군중을 향해 돌진하였다. 맨  앞줄의 군중들은 용감하게 대항하고 
있는데, 후열에서는 공포에 사여  전(全)대열이 후퇴하였다. 이리하여  우리는 대치상태에서 
패하고 말았다. 비탄의 소리와 흐느껴대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순간
에 병정들은 우리를 한길로 몰아넣었고 다음 부대가 우리를 받았다가 다시금 몰아냈다.
  나는 부상을 입지 않고 집으로  왔으나 곧 잠이 들어버렸다. 내가  다시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런데 익원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놀란 나머지  나는 
그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몸서리칠 정도로 삼엄하였다. 모든 길에는 행인의  그림자
도 없었다. 가로등도 거의 밝혀 있지 않은 채 길 양편에는 기관총을 든 병정들이 서 있었고, 
검은 장갑차가 쉬지 않고 돌진해 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 골목 저 골목을 더듬으면서 학우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아무도 익
원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는 바로 순찰  중에 있는 상규를 어느 길모
퉁이에서 만났다. 그는 거의 모든  친구를 찾아본 끝에 익원을 비롯하여  다섯 명의 동료가 
행방불명이 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다.
  자정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으나, 방안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처량한 밤이 서서히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상규는 익원과 다른 네 명이 경상을 입고 감방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고는 감금된 친구들에게 식사를 갖다주자고 하였다.
  이 민족 봉기는 그 동안 바람처럼 대도시에서, 소도시로, 그리고 장터와 마을에  이르기까
지 전파되었다. 고향에서는 기섭이와 만수도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감옥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학생들과 중학생들 다음에는 상인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노동자
와 농민들이, 끝으로 한국인 관리들까지도 이 시위 운동에 참여했다. 총독부는 곤경에  빠지
게 되고 계속 일본 군대의 파견을 요청했다. 군대들은 십년 전 우리 나라가 합병된 때와 같
이 밤이고 낮이고 행군했다. 도처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  어느 
마을은 이미 전 주민이 교회에 갇힌 채 그대로 방화되어 산 채로 타죽었다. 낡은 감옥과 유
치장이 확장되고 새 것이 계속 건축되었다. 그리고 경관들은  밤이나 낮이나 고문을 계속했
다. 서울에 있는 대학생들은 네 번째 시위를 마지막으로, 지하에 잠복하여 비밀 행동에 나섰
다. 나는 전단(傳單)을 만드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반란을 군사적으로 진압한 후에, 총독  하세가와를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사이토 해군 제독을 한국에 보내어 실제로  화해 정책을 실시해 나갔다. 그는 우선,  이제껏 
세무원이거나 교사이거나, 통역관이거나 혹은 의사이거나를 막론하고  일본 제복을 입고 일
본 칼을 차고 다녔던 모든 관리를 무장 해제 시켰다.  민중에 대한 공포의 상징이었던 헌병
은 해체되고, 경찰에게는 고문이  금지되었다. 한국인의 봉급은  일본인과 동일하게 되었고, 
언론의 자유가 선포되었다. 한국인 학교는 일본인 학교와 평등하게 되었고, 서울에 제국대학
을 창설하였다.
  화해 행위로 보이는 이 정책과는 반대로,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자에게는 중형이 가해졌다. 
재판소는  이 운동의 주모자를 구형하기 바빴고, 경찰은 운동의 모든 참가자를 적발하고 체
포하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추격받는 사람들은 외국으로 도망쳐가고, 나 역시 학생복을 
벗어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 불안의 전기간 동안에, 나는 어머니에게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암시적으로 
몇 번 보고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내 스스로가 경험하고 행동했던 
모든 일들을 어머니에게 샅샅이 이야기했더니, 어머니는 그만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어머니
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나는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지난 한 달 동안은 거의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으므로 나
는 매우 지쳐 있었다.
  저녁에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너는 도망쳐야 한다."
  어머니가 말을 꺼냈다.
  "도망이라니요?"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는 무엇을  곰곰히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나는 무서울 정도로 극복할 수 없는 피로를 느꼈다.
  "그렇다, 너는 도망쳐야 한다."
  어머니는 거듭 말씀하셨다.
  "국경인 압록강 상류는 경계가 아직 그렇게 심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그곳에 가면 아
직 북쪽으로는 도망칠 수 있을 게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 많은 학생들이 도망치다가 붙잡히고 체포되었고,  또 사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나는 도망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머니에겐 그 위험은 별반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았다. 어머니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국경을 넘는 데 성공하였고, 또 그곳에서 잘 살 수 있
다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 그렇게 하여 국경을 넘고, 어디에선가 여권을 만들어내 학문을 계
속할 수 있도록 유럽으로 가려고 애써야 한다고 했다.
  유럽이라는 말 자체는 나에게 용기를 돋구지 못했다. 나는  유럽에서의 공부가 모든 면에
서 얼마나 어려우며, 또 언어  한 가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아시아  사람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계속 되풀이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머니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라도 도망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어머니  곁에서 계속 위험 속에서 지내
야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어머니 곁을 떠나는 것이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이라고 생
각했다. 나는 이 시위 운동에 참여한 것을 후회할 지경에 이르렀다.
  벌써 그 다음 날 저녁에는 이별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 더 이상 머물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국경을 넘을 때까지는 아무도 나의 출발을 알아서는 안 되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가벼운 양복과, 줄이 달린 은으로 된 회중시계와 돈 뭉치가 든 조그마한 
버드나무 고리를 주었다. 그것이 내가 어릴 때부터 그토록 종종 꿈꾸었던 다른 세계로의 여
행에 가져갈 수 있는 전부였다. 안개와 어둠을 무릅쓰고 어머니는 마을에서 나가는 길을 멀
리까지 바래다주었다.
  "넌 겁쟁이가 아니야."
  한참 동안 잠자코 가시다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너는 종종 용기를 잃는 일이 있었으나 그래도 네 길에 너는 충실했었다. 나는 너를 크게 
믿는다. 그래, 용기를 내거라. 너는 국경을 쉽게 넘고 결국 유럽에도 갈 것이다. 이 어미  걱
정은 전혀 하지 말아라. 나는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겠다. 세월은 빨리  가
느니라. 비록 우리들이 다시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너무 서러워 말아라. 너는 내  생
애에 있어서 나에게 정말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자, 얘야! 이제 너  혼자서 네 길을 가
거라!"
  
    압록강은 흐른다
  나는 국경에 있는 커다란 강에 접근했다. 도처에 사람의 키만큼이나 큰 갈대가 있었다. 밭
과 논은 매우 드물었다. 그래서 나는 거의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무장한 병정들이 순시했고, 이따금씩 총성이 울렸다. 특히 도피자가 많이 떠나는 
것 같은 밤 시간이면 총성은  더욱 잦았다. 나는 지극히 조심스럽게  농부인지 어부인지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인도되어 다음 마을에 가서 간신히 어느 어부의 초막집에 닿았다. 거기서 
사공이 나를 강 건너에 데려다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음 날 밤에 나처럼 강을 건너려는 다른 학생들 둘이 이 초막에 왔다. 그들은 나보다 더 
어린 것 같았다. 창백하고 겁에 질린 듯한 그 중의 한 소년은 열일곱살도 미처 안 된 것 같
았다. 그는 말없이 앉아서 줄곧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밤에야 어떤 늙은 어부가 나타나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아직도 달이 비쳐서 쉽게 발각될 것 같았으므로 이 초막에서 떠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사
공은 달빛이 밝을 때라야 국경 감시가 그리 심하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그를 믿고 갈
대밭 사이의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길을 따라나섰다. 이렇게  한 시간 이상이나 도망을 치다
가 한 조그마한 숲에 닿았다. 사공은 여기서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저만치에서도 비슷한 휘
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두 어부가 나타났고, 우리들은 드디어 강변에 닿을 때까지 갈
대밭 사이를 달려갔다. 여기서 우리들은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여기 강물은 하구에  가까워
지면서 이미 강처럼 보이지 않고 바다처럼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들이 꼼짝도 않고 가만히 서 있는 동안에 어부들이 한참 서로 속삭이더니 말없이 통
나무로 된 조그마한 배를 뗏목에서  풀었다. 이 배는 너무나도 작았기  때문에 두 사람만이 
간신히 앉을 수 있었다. 어부들은 우리를 한 사람씩 쪽배에 태워, 간격을 두고 차례로 강 기
슭에서 떠났다. 우리들은 너무 조용히 소리 없이 이 거대한 물결을 헤쳐갔으므로 마치 영원
(永遠) 속으로 사라지기나 하는 것  같았다. 우리들이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멀리서 몇 
방의 총소리가 들렸다. 나를 태우고 있는 어부는 웃으면서  잠자코 있으라고 나에게 손짓을 
했다. 나중에야 어부는, 때때로 철교 위에서 그냥 경고삼아 쏘는 총소리라고 속삭이듯이  내
게 알려주었다. 반짝이는 수면 위에는 결코 우리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강 건너편에 닿았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어부들은 우리들에게, 다음  중국 
국경 도시까지 세 시간이 걸리는 길을 간단히 이야기해 주고는 헤어졌다. 우리들은 잠시 동
안 우두커니 서서, 세 척의 배가 서서히 우리 고향 쪽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러고는 묵묵히 난생 처음 디디는 만주 땅의 자갈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중국 도시에 도착하여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끝에 우리에게  일러준 자그마한 한
국 음식점을 발견했을 때는 벌서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우리들은 곧 잠이 들고 말았다.
  그 날 오후에 우리들은 서로 헤어졌다. 우리 동행 중에서 제일 나이 어린 애는  장춘으로, 
제일 나이 많은 애는 심양으로 출발해갔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이 중국 거리를 걸어갔다. 사람들은 좁은 거리에 범람하였고, 금색으
로 쓰여진 많은 간판에도 불구하고 건물들이 희지 않고 사람들의 옷이 푸른색이었기 때문에 
음울하게들 보였다. 이곳은 한국 도시보다  더 생기가 돌고, 더  소란스러워 보였다. 어디를 
가나 내게는 매우 생소하고 이상한 냄새가 풍겼다.
  나는 이 도시를 떠나 한 번 더 강을 구경하게 위하여 언덕으로 올라갔다. 강은 언덕 사이
의 모래바닥을 통해 저녁 노을의 미광을 받으면서 흐르고 있었다. 강은 여기서 좁아져서 그 
폭(幅)이 반 킬로미터도 안 되는 것같이 보였다. 나는 맞은편 언덕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거의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그물을 널고 있었으며, 부인들과 처녀들이 저녁밥을 
지으려고 콩을 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린애들은 장난치며 씨름을 하고 있었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고국을 이 무한한 만주 벌판과 분리시키고 있는 국경의 강은 쉬지 않
고 흐르고 있었다. 이편은 모든 것이 거대하고 침침하고 진지했으나, 저편은 모든 것이 작고 
맑게 보였다. 빛나는 초가집들이 언덕에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벌써 저녁 연기가 이  집 
저 집의 굴뚝에서 솟아올랐다. 저 멀리 맑은 가을 하늘  아래에 산들이 잇달아 늘어서 있었
다. 산들은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또다시 황혼의 아름다운 빛에 물들었다가 서서히 푸른 노
을 속으로 잠겨들었다. 나는 먼 남쪽에서 수양산의 골짜기며 냇물을 바라보는 것 같았고, 어
렸을 때 저녁마다 장엄한 저녁 음악이 울려오던 이층 누각을  바로 눈앞에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저 남쪽에서 바람에 따라 들려오는 그 장엄한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압록강은 끝없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덧 어두워져 나는 언덕에서 내려와 역으로 걸어갔다.
  
  내가 탄 기차가 북쪽을 향해 달리는 동안 음울한 하늘이 끝없는 평야 위로 펼쳐져갔다.
  나는 고향에서 산이며 언덕이며, 계곡이며 골짜기만을 보아왔던 까닭에 이 광막한 평야에 
그만 놀라고 말았다. 나는 광막한 평야에 대해 들었을 때에는  언제나 약간 언덕진 것을 상
상했었다. 그러나 이곳처럼 이렇게 평평한 평야는 상상조차 못했다. 높은 곳도 없고 움푹 들
어간 곳도 없이 그저 한없이 평탄하기만 했다. 어디선가  폭풍이 일어나서는 두꺼운 먼지구
름이 우리에게 몰려왔다. 옛날에 몽고와 만주군의  기마군단이 이곳으로 어떻게 밀어닥쳤는
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남쪽에서는 하늘이 다시 개이고  창백한 달빛이 무시무시한 벌판을 
비치고 있었다. 만주의 수도인 심양도 이와 같은 무방비 상태의 평야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
문에, 그 육중한 성벽과 더불어 공포의 성(城)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불어
오는 폭풍과 몽고 사막에서 날아오는 먼지에 둘러싸인 이 성(城)은  한때 전 아시아로 확대
되려던 만주 세력의 본거지였다. 나는 마차를 타고 도시로 가서, 예전엔 마적이었으나  그후 
이 만주 지방을 자기 나름대로 구식제도로 다스리는  장작림(張作霖) 장군의 궁성을 둘러보
았다. 성벽 밖에 있는 처형장의 광경은 정말 무섭기 짝이 없었다. 그 주변에는 처형당한  자
들의 묘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개개의 묘 앞에는 비와 먼지로 얼룩진 나무판에 이름과 
나이, 직업이 적혀 있었다. 외롭기 한이 없는 이 벌판의 한가운데에 그 무서운 행위가  집행
되는 큰 정자가 서 있었다.
  심양의 기차역에는 대합실이 없었다. 넓은 하늘 아래서 정오의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나
를 북경으로 실어다줄 황색 차량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곧 열차는 만원이 되었고, 모두들  좀
처럼 떠나지 못하는 기차가 빨리 발차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가을인데도 더위는 점
점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기차는 발차하였다. 이 급행 열차의 출
발에 모두들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자 기차는 곧 예상치 않았던 급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푸른 하늘 아래 옛날에는 중국과 만주간의 무인 완충 지대였던 7백 마일 폭의  광활
한 요동평야를 통해 갔다. 지금 들판이며 가옥들이며 묘지가  주마등처럼 우리 앞을 스쳐갔
다. 한 번은 근처에 항만이 나타났고, 또 한 번은 멀리서 산봉우리나 산맥들이 떠올랐다. 기
차는 계속해서 저 오랜 역사의 중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저녁이 되었다. 승객들은 제각기 좁은 의자나마 몸을 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씩 잠이 
들기 시작했고, 또 차례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 동안에도 기차는 발해만을 끼고 쉬지  않
고 서쪽으로 질주했다. 오밤중에야 달이 떠올라서 희미하게 조명된  객차 안을 비추기 시작
했다.
  내가 잠깐 동안의 깊은 잠에서 때었을 때, 열차는 정차해 있었다.
  내 옆에 앉았던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고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
랐다. 아직 새벽의 반어둠에 휩싸여 있었으나 높고 푸르게 빛나는 산이 하늘에 솟아 있었고, 
그 위에는 연한 회색으로 빛나는 성벽이 하늘과 닿아 있었다. 그것이 바로 2천년 전에 위대
한 제왕 진시황제가 쌓게 한 만리장성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심한 전율을 느꼈다. 그
러고 보니 내가 전에 역사책에서 바운 것은 결코 전설이 아니었다. 2천년 전, 찬란하게 번영
했던 이 나라를 침범하려는 야만족을 방비하기 위하여 돌맹이 하나하나를 실제로  산꼭대기
까지 짊어지고 올라가 이 요새를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사람들이 그 위에서 일하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역사를 자랑하는 이 만리장성은 푸른  하늘을 향해 점점 밝게 빛났
다.
  우리들은 중국과 만주의 국경 도시인  상해관에 도착했다. 관리들이 여행자의  모든 짐을 
다 조사할 때까지는 거의 한나절이나 걸렸다. 중국 사람들은 모두  자기 짐을 풀 것을 거절
했고, 다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물건만을 이야기했다. 관리들은 참을성 있게 그들 한  사람마
다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그래도 짐을 풀어보아야겠다고 다시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한 여객이 물었다.
  "그 속에 아편이 들어 있지 않나 봐야겠습니다."
  "없습니다."
  중국인 한 사람이 또 한 번 말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만 짐 내용을 직접 봐야만 하겠습니다."
  관리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이 새 규정이니까요."
  세 명의 세관원이 우리 객차에서  떠날 때까지 모든 승객에세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우리들은 마침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열차는 서서히 움직여서  긴 플랫폼을 지나고 동이
족(東夷族)의 문지방을 조심스럽게 넘어섰다. 거대한 만리장성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천진에서 북경 쪽으로 가지 않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남경행 열차를 탔다. 북경 역
시 볼 만한 도시이기는 하나, 중국 사람보다는 타타르 민족의 기질을 더 가진 북쪽의 그 도
시를 보고 싶은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남쪽으로 가는 도중에 나는 진기한 풍경을 보았다. 빨갛거나 갈색인 돛을 달고, 따뜻한 가
을 하늘 아래서 무르익은 곡식밭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듯한 수많은 돛배들은  장관이었
다. 그것은 수(隋)나라의 향락적인 황제가 제국의 남쪽으로 항해하기 위하여 만들게 한 바로 
저 삼천 리 운하였다.
  그의 배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미녀들로 하여금 비단 밧줄로 낮에는 천천히, 달빛 아
래서는 더욱 천천히 끌게 했다고 한다. 그는  아마 자기보다 2천년 전쯤에 한 위인(偉人)이   
이 벌판을 돌아다니면서 인류에게 사치와 방탕을 경고한 사실을 잊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들
은 공자(孔子)가 탄생한 노(魯)나라인 지금의 산동성 지방을  달렸다. 중국 사람들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가장 분수에 만족하고 부지런하고 평화스러운 민족이 된 것은 그의 가르침 덕
분이었다. 그의 묘에 참배하고, 적어도 그가  어떤 길을 걸었는가를 알기 위해서 나는  그의 
묘소를 얼마나 순례하고 싶었던가. 그러나 나는 내 갈 길을 재촉해야 했으며, 그가 한  번쯤 
머물렀을지도 모를 마을이 눈앞에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축복 받은 가을 하늘 아래 숲속에 
숨겨져 있는 회색 지붕이며 누런 곡식 이삭이며 나무와 관목이 들어선 자그마한 언덕이 여
기저기에 펼쳐져 있었다.
  다음 날 저녁, 내가 열차에서 내려야  했을 때는 아주 어두워졌다. 모든 사람들이  차에서 
내렸다. 나도 우리들이 어디에 와 있고, 어디로 가는 차를 바꾸어 타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
들 뒤를 따랐다. 나는 갑작스레 잠이 깼기 때문에 정신이 어리벙벙했다. 우리들은 한 사람씩 
좁은 통로를 지났다. 그러자 얼마 후에  물 같기도 하고 무한히 멀리 펼쳐진  것 같은 검게 
빛나는 평탄한 곳에 와 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배의 작은 불들이  미지의 어둠 속에서 
흘러내리는 것같이 물위를 흐르고 있었다. 어떤 이상한 예감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주
저하면서 높은 건물을 돌아 선교(船橋)에 가서, 크고 빛나는 아치형의 현판에서 '揚子江'이라
는 글을 읽었다. 그 역사도 오랜 양자강―.
  자그마한 배가 한 척씩, 많은 여객을 태워 가지고 흔들리며 어두운 강으로 나가 남경으로 
향하는 남쪽으로 노 저어갔다. 내가 탄 배 밑에서는 수없이 많은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물
소리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숱한 시인들이 이 물소리를 찬양하며 읊었다. 이 강물은  오미산 
아래의 평야에서 적벽(赤壁)에서, 치산에서 저 동정호에서  흘러내려왔다. 그처럼 자주 동정
호에 관해서, 강남에 관해서 이야기해주던 내 누나들이 이 태고의 물 위에 내 배가 떠 있는 
것을 알기나 하랴? 그토록 나를 위해 주시던 어머니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지금은 어
디에 있는지 알고 계실까? 그리고 그렇게도 좋아하시며 가끔 소동파의 이야기를 하시던 아
버지는 이미 잠드신 지 오래고, 지금은 대지의 품속에 누워 있지 않은가. 모든 게  조용한데 
어둠 속에서 뱃전의 물소리만이 출렁거렸다.
  강을 건너자, 수많은 목재가 깔리고  천장이 있는 길과 도로를 지나  역마차가 나를 어떤 
여관으로 안내하였다.
  
  다음 날, 우연히도 같은 집에  머물고 있는 고국 사람이 남경의  여러 구경거리를 안내해 
주었다. 북쪽 도시에 비하면 이곳의 모든 것은 섬세하고 경쾌하였다. 심양의 육중한 이중 삼
중의 성벽 대신에 이곳에는 운하와 수양버들이 있었다. 북쪽에서는 건강한 병정들이 무기를 
들고 순시하는 데 반해, 여기에선 맵시  있는 부인들이 배를 저었다. 가느다란 창살이  달린 
집들, 날씬하게 치켜올라간 지붕들, 운하에 걸려 있는 목교(木橋)들은  물과 푸른 조화를 이
루면서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오후에는 마차를 타고 명 태조(明太祖)의 묘를 구경하려고 시외로 나갔다. 이 황제는 약 5
백 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고 원(元)제국이 파괴한 이전의 전 제국을 재건했었다. 처음에 그
는 걸식을 하는 중〔僧〕이었는데, 그의 초기 신봉자들도 역시 걸인이었다. 그러나 그  중은 
걸인이면서도 가슴속에 거대한 비밀 계획을 품고 있었으며, 그의  눈은 때때로 현인마저 놀
라게 하는 초인적인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한국 전설에 의하면, 이 거지 중은  한국의 황해도 태생이라고 했다. 작은 한국은  언제나 
가능한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그 중은 전 한반도를 걸식한 다음 만
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가슴에 거대한 야망을 품고 중국으로 향하는 이성계(李成桂)를 만
났다고 한다. 이 두 젊은이는 한 늙은 노파가 외롭게  사는 자그마한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
다. 노파는 두 사람을 떡과 술로 대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노파는 매우 고귀한  술잔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금으로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으로 된 것이었다. 장래에 
자신만만한 지배자로 자청하는 이성계는 이 할머니가 금잔은 자기에게 주고 은잔은 저 거지 
중에게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노파는 그 반대로 했다. 이성계는 자기의 불만을 표시
하지 않았다. 위대한 사람이 사소한 일 때문에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다음 날 아침에 두 사
람이 노파에게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나려고 했을 때 노파는 이성계의 소매를 잡고 이렇게 말
했다.
  "저 사람 혼자서 중국으로 가게 해라. 너의 길은 동방에 나 있다."
  이 순간에 중은 이성계와 작별하려고 돌아섰다. 그때 이성계는  그의 눈에서 초인적인 광
채를 보았다. 결국 이성계는 한국으로 돌아와 이씨 왕조를 세웠다. 그 때 그는,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는 명조(明朝)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우리들이 두 개의 거대한 호랑이  석상 앞에 도착할 때까지는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렸다. 
석상으로 둘러싸여 급경사진 길을 천천히 올라가서 여러 개의 대문과 마당을 지나 거의 산
처럼 크고 앞을 가로막는 둥근 언덕까지 닿았다.
  저녁 노을이 질 무렵, 높은 죽림(竹林)을 뚫고 시내로 되돌아  왔다. 시원한 바람이 내 기
분을 상쾌하게 했다. 우리들은 젊은  남녀를 만났다. 그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노래하며 
연주하면서 산책하고 있었다. 돌멩이마다 수천 년의 역사를 말해 주는 이 남경 바닥의 모든 
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어떤 버들가지들도 어떤  새소리도, 어떤 산들바람도 어떤 식당
도, 나하고 친숙해진 것같이 느껴졌다.
  저녁에 우리들은 그리 크지 않은 녹색과 금색으로 단장된 아늑한 방에서 술을 마셨다. 술
을 마시면서 내 고행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남경의 명소와 중국 사람의 생활에 관해서  계
속 이야기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공부한 후에 지금은 이웃  도시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살
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우리들은 작별했고, 나는 위층에 있는 조그맣고 푸르게  칠해진 
놋침대가 있는 내 침실로 올라갔다. 화장대와 흰 장롱과 수놓은 양산이 좁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기다리는 마음
  상해에 도착한 즉시, 나는 한국 해외 유학생 고문을 찾아갔다. 그리고 유럽으로 가고자 하
는 나의 소원을 이야기했다. 그는 말투로 보아 북쪽 사람인 것 같았고, 마음씨 좋게 생긴 중
년의 신사였다. 그는 내 출생지며 학력이며 가정 사정을 묻고, 중국 정부의 증명서를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나는 좀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만 했다. 왜냐 하면  우
정으로 그렇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관리에게 독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너무 오래 걸렸다.
  아름다운 가을, 달이 한 주일씩 자꾸만 흘러가서 마침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우기
(雨期)로 접어든 것 같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가랑비가 내렸다. 공기는 점점 더 싸늘
해졌고 나는 방에서 덜덜 떨었다. 방은 한국에서처럼 바닥에다 불을 때지도 않고 화로나 난
로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가까운 시내 주변을 산책하기 위해 집
을 나섰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들에까지 간다 해도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려야 했다. 왜냐 하
면 대도시는 사방 어디를 가나  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곳도 심양처럼  허허벌판이었다. 
언덕도 자그마한 냇물도 없었다. 만주에서와 같은 그런 폭풍도 일지 않았다. 힘없이  빗방울
이 무색에 가까운 회백색 하늘에서  날려와서는 검게 포장한 도로에  깔려졌다. 저녁때에야 
서쪽 하늘이 개이고 약간 붉은 노을이 스며드는 듯하더니 곧 다시 습기찬 황혼에 사라지곤 
했다. 넓은 들판 위로 급히 안개가 퍼지며 나무와 숲을 마구 감사고, 나중에는 길가지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어찌 된 영문인지 들판의  조그마한 돌무더기에 있는 검게 옻칠한 
관(棺)만이 안개에 묻히지 않고 마치 유령처럼 떠도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또 비가 내렸다.
  어느 날 저녁, 나와 함께 때때로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한국 사람으로부터 증명서가 
없어서 유럽으로 떠나지 못하는 몇몇 학생들이 나 외에도 여러 명이 머물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제로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외로운 방에서 행운만 기다리고 있는  네 명의 한국 
학생은 차차 알게 되었다. 그들은 지난  여름부터 이곳에 와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려고 반년 이상이나 무료하게 증명서를 기다렸으므로, 용기를 잃고 유럽 여행
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별로 희망을 품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곳에 머물면서 
계속 기다리는 것 이외에 아무런  방도도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매일  밤 몰려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장기를 두고, 몸을 녹이려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책을  읽어서 
아는 프랑스인의 생활에 대해서도 종종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들 중에 본근(안중근 의사
의 사촌)이라는 사람은 아주 어렸을 때 이미 프랑스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는 독일의 몇몇 
도시를 알고 있어서 우리들이 정말 떠날 수 있을 경우에는 나를 독일에 데려다주겠다고까지 
약속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어두침침한 '파우강 거리'에 앉아서 장기를 두며 떨고 지
냈다. 우리들의 사기는 나날이 떨어졌다.
  겨울이 지나가고, 어느 새 봄이 왔다.  큰 여객선들은 차례로 항구를 떠나 서양으로  향해 
갔다. 마침내 우리들에게도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았다.  우리들은 모두가 증명서를 받았다. 
우리는 여행 준비를 하느라고 대혼란에 빠졌다. 밤이나 낮이나 물건을 사고 짐을 꾸리고 조
언을 구했다.
  우리들이 차를 타고 항구로 나갈 때, 흐린 햇빛이 우리의 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우리들은 
수많은 사람의 홍수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는 거대한 여객선을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우리들도 다른 사람들 틈에 끼여 거의 끝없는 것 같은 경사진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통로를 지나 마침내 우리들의 공동 선실이 있는 갑판에 도달하였다. 사
람들은 끊임없이 불러대고 고함을 지르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손을 흔들며  웃는 사람도 
있었고, 우는 사람도 있었다.
  음울한 고동 소리가 나더니 거선(巨船)은 서서히 바다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부두에서
는 긴 여행을 축원하는 불꽃을 쏘아 올렸다. 손짓하는 사람들이며 부두며, 집들이 서서히 한 
직선으로 오므라들면서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기선은 또  한번기적을 울리고 양자강 입구를 
떠나서 험한 파도를 타고 항해하기 시작했다. 하늘은 누렇고 어둠침침하게 덮여 있었다.
  적당한 바람과 지나가는 가랑비를 맞으며 배는  조용히 흔들이면서 남쪽으로 항해하였다. 
저녁에 송 왕조(宋王朝)의 비극적인 종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전쟁에 차례차례 패하여 이 장
엄한 중국 땅이 몽고인의 말발굽에 짓밟혔던 것이다. 쇠약해진 황실은 이 궁전에서 저 궁전
으로 도망치다가 결국에는 이 바다로 나오고 말았다. 무자비한 몽고장군은 추격을 계속하여, 
그의 함대는 황제의 배에까지 접근해 갔다. 그 배에는 공포에 떨고 있던 열두 살 난 세자와 
찬란했던 송 왕조의 최후의 봉사자인 재상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도 않
고 낙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송  왕조의 옥새를 자기 가슴에 매달고,  그 아이를 겨안고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천년도 훨씬 전에 남지나해(南支那海)에서,  아마도 우리들이 지금 지나가고  있는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거친 파도 위에 황혼이 깃들었다. 외로운 정크(돛대가 셋
이고 밑이 평평한 중국 해안의 배)가 우리의 길을 가로질렀다. 나는 선실로 내려갔다.
  
  할인된 기선표를 가진 우리 극동 학생들에게는, 배의 앞부분에 위치한 커다란 화물창고를 
비워서 소위 말하는 학생 선실로 고친 방이 배당되었다. 거의  백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여
기에 잠자리를 마련하고 벌써 그들이 자리에 누워 있었다. 어둠침침한 불빛 아래 나는 좁은 
통로를 더듬어서 왼편 깊숙한 구석에 있는 대 자리까지 갔다. 항해 동안에 함께 지낼 수 있
도록 나의 모든 고국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를 정하고 모여 앉았다. 중국 학생들과의 순조로
운 대화는 그리 쉽지 않았다. 왜냐 하면 현대의 중국말은 우리들이 서당에서 배운 한문과는 
완전히 발음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들 중의 한 명만이 현대 중국어를 유창하게 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깊은 내용의 대화를 할 때
는 자주 붓을 들어야만 했다. 각 글자의 의미와 문장의 문체만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발 후 3일 만에 우리들은 사이공(현재 호치민)에 입항했다. 우리는 상륙했으나 좋은 안
내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별로 구경을 하지 못했다. 목적  없이 열대 식물이 울창한 공
원 같은 곳을 방황한 후에 우리들은 동물원에 도착했다. 우리는 모두가 지쳤기 때문에 뜨거
운 오후의 나머지 시간을 여기서 보내고 말았다. 공기가 제법 시원해졌을 때, 우리들은 갈대
밭 사이의 좁은 보도를 따라 배로 돌아왔다. 나는 안남(安南)의 집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
이 내내 서운했다. 이 나라는 중국을 가운데 두고 우리  나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
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나라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 일찍 다섯 명의 안남 학생들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와 함께 선실을 나
누어 쓰게 되었을 때 나의 기쁨은 더욱 컸다. 안남에서도  통용되는 한자 덕분에 나는 그들
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안남 학생들도 우리들이 한국에서  온 것을 알자 매우 기뻐했
다. 오랫동안 말없이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그들 중의 한 명이 펜으로 '한국은 북쪽의, 
안남은 남쪽의 예의국의 관문'이라고 썼다.
  
    대양(大洋)에서
  우리들이 남쪽으로 항해하면 할수록 날씨는 더욱더  뜨거워졌다. 싱가포르 근처에서는 일
광을 무엇으론가 가리지 않고서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이 지독한 더위가 나로 하
여금 악성 눈병을 얻게 한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아침 잠이 깨었을 때, 나는 두 
눈에 무엇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하면, 내 두 눈이  몹시 
충혈되었다고 했다. 나는 곧장 선의(船醫)에게 달려갔다. 그는 잠시 동안 검사하고 나서, 양 
눈에다 진통제 안약을 바르고 안대를 단단히 붙였다. 그는  나에게 어떤 눈병인가도 말하지 
않고 가급적 안대를 떼지 말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싱가포르에서 상륙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픔은 계속 되었다. 내가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멀리에서나마 이 도시를 보
려고 붕대를 뜯었더니 염증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눈앞에  반짝이는 희미한 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통증은 더욱 악화되었다. 의사는 일광에 의한 불필요한 자극을 피하
기 위하여 오랫동안 선실에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지시했다. 나는 그의 충고에 순순히 응했
다. 시원한 선실이 확실히 바깥보다는 견디기가 나았다. 나는 가만히 누워서 배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자다가는 깨곤 했는데, 그 때마다 다시 새로운 파도  소리
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다시 눈을 뜨고 볼 수 있었을 때, 우리들은 이미 수마트라 해협을 지나고 있었다. 우
리가 탄 배는 인도양을 항해하고  있었다. 먼 곳에나 가까운 곳에나  정크도 섬도 해안선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방팔방 어디를 보나 푸른 하늘 밑에 넓고 넓은 바다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렇더라도 눈을 뜨고 천막의 그늘  밑에 누워서 잡담을 나누는 것은  아주 유쾌했다. 한국 
학생들은 책을 즐겨 읽는 중국 학생들처럼 부지런하지 못했다.  중국 학생의 대부분은 대개
의 시간을 그들 숙소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시원한 곳을 찾아 책을 읽기 위해  머물
러 있었다. 그 반면에 책을 읽고 있는 한국 학생은 더욱 더 드물었다.
  안남 학생들도 읽기는 읽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락물을 즐겨 읽었지, 중국 학생들처럼  연
구 서적류는 읽지 않았다. 그들이 읽고 있는 소설이나 이야기의 일부분은 안남어로 된 책이
었고, 다른 일부분은 프랑스어로 된 책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책을 읽을 때에는 잠자코 있었
으나, 안남어 소설을 읽을 때에는 반쯤 노래하듯이 읽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낄낄거렸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책 읽는 소리가 신기하게도 감동적으로 들렸다.  왜냐
하면 여기서 멀리 떨어진 서북쪽 지방에 사는 한국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고향을 생각했다.
  갑판 위에는 극동 학생들 외에도 틀림없이 싱가포르에서 탄 듯한 인도 사람들이 눈에 띄
었다. 그들은 학생이 아니어서 우리 선실에 속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등이나 이등  선실에 
속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갑판 위에서 살았으며, 잠도 거기서 자고  식사도 
그곳에서 했다. 그들은 나이 많은 두 백발의 남자와 늙은 노파와 젊은 부인이었다. 이  사람
들은 갑판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보따리나 담요로 적당히 꾸며놓고 살고 있었다.
  오랜 옛날, 7백년 내지 8백년 전에는 많은 한국 학자들이 불경(佛經)의 원천을 규명하려고 
인도로 갔었다. 그들은 우선 전 만주를, 몽고, 쿠쿠놀 그리고 티벳 고원을 통해서 서방 하늘 
밑에 있는 기적의 나라에 도달하기 위하여 2년 이상이나  도보로 걸었다. 이들 방황자의 대
부분은 도중에서 죽었다고 한다. 다만 몇 사람만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을 수 있었던 모양이
다. 마침내 경이적인 열대 세계에 도달하여 금빛 찬란한 대웅전 앞에서 인도 현자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의 심경을 어찌 상상할 수 있으랴!
  갑판 위에 있는 인도 사람들은  매우 조용한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잠자코 앉아서 
때때로 나지막하게 속삭이고, 움직이지도 않고 부드럽레 출렁거리는 파도의 무한한 넓은 세
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콜롬보에서는 비가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상륙용 다리로 달려갔다. 그
리고 실론 섬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자처하는 안내자를 따라나섰다. 사이공에서 안내자를 만
나지 못해 구경을 제대로 못했던 우리들도 그들과 섞였다. 많은 사람의 무리가 천천히 시내
로 움직였다. 도시는 조그마한 인도인 소유의 상점을 빼놓고는  유럽식의 집들이 서 있어서 
서울이나 상해와 별로 다름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
만, 구경거리를 놓치려고 뒤로 처지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시내를 벗어나 대나무  습지와 
종려수 재배지를 통해 어떤 큰집이 외로이 서 있는 곳에 도착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 
집은 박물관이라고 했다. 그 곳에는 수천  주의 불상이 서 있었다. 안내자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설명하고, 우리들은 이 방 저 방으로 완전히 피로랑 때가지 헤매며 다녔다.  우리
들 중에는 많은 예술가와 승려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과연 이  짧고 귀중한 시간을 불상 연
구에 바치려고 했을지는 의심스러웠다.  관람객의 대부분은 안대자의  설명을 이해하려고도 
불상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든지 조용히  서기만 하면 곧 주머니에
서 안내서를 꺼내어 읽기에 바빴다. 그러고 나서 시끄러운 팁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안내
에 소요된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고는 출발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숨을 
헐떡이며 배에까지 달려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음 날은 구름을 쓸어버린 것처럼 깨끗이 개였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청명한 날씨
였다. 맑고 검푸른 하늘에서는 태양이 뜨겁게 내리쪼였다. 갑판은 거의 비어 있었다. 더위를 
잘 견디는 것처럼 보이는 인도인마저도 모두가 시원한 선실에  남아서 책을 읽었다. 저녁이 
되자마자 갑판은 활기를 띠었다. 이 배에 탄 모든 민족의 여행자들이 앉았서 제각기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끼리도 한족 구석에 다섯이 모여 화술이 좋은 김(金)씨
가 주워대는 그의 고향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고행  사람 하나가 약간의 술과 얼마 
안 되는 프랑스 과자를 준비해 왔다. 저녁 오락시간 때면  차례로 약간의 마실 것을 가져오
는 것이 1주일 전부터 우리의 습관이 되었다.  이 일은 실천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선지 술이나 다른 음료수는  식사시에 부수물로서 마개를 딴  채 제공되었으며, 식사 
시간 외에는, 특히 저녁에는 다른 기호물의 판매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식당  보이
에게 우리들 중의 누구 하나가 허약해서 기절했으므로 강장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믿게 하기
엔 상당한 말재주가 필요했다. 따라서 얼마 안 되는 배당에도 우리들의 기쁨은 매우 컸다.
  고려 시대의 수도였던 옛 도시  송도(松島)에서 자란 김은 유명한  집안의 수많은 일화를 
알고 있어서 그것을 우리에게 차례로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들은 뱃머리에 아주 가까운 선반 뒤의 닻줄을 감아놓은 옆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어
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조용한 곳이었다. 그곳은 바닷물과 아주 가까운 곳이어서 우리
들의 이야기는 파도 소리에 뒤섞였다. 우리는 학문적인 대화로  깊이 파고드는 중국 학생들
에게나, 서로 속삭이듯 이야기하는 인도 사람들에게 방해를 주지 않았다. 안남인들은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들의 자리는 궤짝 위에 깔아 만든 것이었다. 때때로 한국어·중
국어·인도어가 서로 얽혀 독특한 소리의 혼란의 빚었다. 그리고 갑자기 조용해졌다가는 다
시 벌집이나 쑤셔 놓은 것처럼 윙윙 소리가 났다. 그러나 점차 일제히 조용해졌다. 한  사람 
한 사람씩 자리에 누워 잠들기 시작했다. 다만 우리 일행인  김씨만이 계속 조용히 고향 이
야기를 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가 탄 여객선 '포올르카'호는  달빛 밝은 인도양의 어느 곳
을 항해하고 있었다.
  
    해안(海岸)
  우리들은 홍해(紅海)에 들어가기 앞서 지부티에 정박했다. 나는 그 이상한 이름을 난생 처
음 들었다. 사람들은 우리 배가 석탄 때문에 이 외떨어진 아프리카의 한 모퉁이에 입항한다
고 했다. 사실에 있어서 이 항구는 비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래 언덕에는  입구
에 두 그루의 종려수를 심은 하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사람들은 일사병이 무서워서 불과 
몇 사람만이 상륙하였다. 한국 학생들은 오래 생각하다가, 조그마한 보트를 타고 나무 한 그
루 없이 이글이글 타는 해안으로 건너갔다.  직사열 속에서 모든 것이 정말 비참해  보였다. 
돌로 쌓은 제방과 모래 언덕, 그 뒤에 자리 잡은 카페에서는 흑인 아이들이 몇 사람의 손님
에게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다. 
  우리들은 계속 육지 내부로 들어갔다.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는  이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작고 외딴집 앞에서 우리들은 멈추어 섰다. 아마 인도인의 학교인 것 같았다. 한  늙은 
인도인이 벽에 있는 쪽의 한가운데에 기대앉아 있었고, 스무 명 가량의 아이들이 벽을 따라 
입구에 이르기까지 앉아 있었다. 스무 명 가량의 아이들이 벽을 따라 입구에 이르기까지 앉
아 있었다. 아이들 앞에는 작은 책상이 놓였고 그 위에 손으로 쓴 교재가 펼쳐져 있었다.
  다음에 우리들은 원주민의 마을로 들어갔다. 두 줄의 집들이 좁은 거리에 서 있을 뿐이었
고, 길은 햇볕에 이글이글 타고 있는 사막에서 다른 사막으로 향해 뻗어 있었다. 집 안과 집 
앞에는 흑인 남녀가 서서 크고 맑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들은 지름길을 통
해서 갔다가 속히 되돌아왔다. 사막 한가운데의 이 마을은 얼마나 외로워 보이는지  몰랐다. 
우리들은 입구에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 배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과일나무도, 물결치는 곡식밭도 없었다. 다만 두 개의 빈
약한 그늘을 지어주는 집의 대열만이 있었다. 거기 사는 사람은 고요한 달밤에 대체 무었을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는 홍해를 항해하였다. 어느 이른 아침, 본근이 나를 깨워 갑판으로 인도하였다.
  "시나이(Sinai) 산이야!"
  그는 말하면서 유감스럽게도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였다. 대여객선은 모래 언덕 사이에 난 
좁은 수로를 간신히 빠져나갔다. 좌우로 쓸쓸한 풍경이 창백한 달빛 아래 전개되었다.  천천
히, 우리들이 걷는 것보다 별로 빠르지 않은 속도로 수없이 많은 창문에서 휘황찬란한 빛을 
던지면서 이 배는 무서울 정도로 텅 빈 사이를 미끄러져 나갔다.
  날씨가 서늘해졌다. 대기는 거칠어지고, 파도는 더 높아졌으며 때때로 시원한 바람이 갑판 
위로 불어왔다. 다시 봄이 되었다. 조용히 흔들리면서 배는 짙푸른 지중해 하늘 아래를 달리
고 있었다.
  북쪽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나타났다. 본근이가 내게 그리스  섬들이라고 속삭였을 때 내 
마음은 참으로 감동됐다.
  "그리스다!"
  나도 소리를 질렀다.
  비록 멀리서이기는 하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을 본 것이다.  나는 산과 계곡을 구
별할 수 없었다. 안개에 싸인 채 섬들이 우리 앞을 미끄러져 지나갔다. 이제 우리들은  유럽 
해안을 때라 항해했다. 정말로 유럽에 도착한 것이다. 모두들 즐겁게 웃고 있었다.
  오후 늦게 파도는 더 높아졌다. 해는  먹구름을 뒤로 하여 사라지고 점점 더  어두어졌다. 
선원들이 우리에게 와서 가까운 시간 내에 폭풍우가 밀어닥칠 것이라는 걸 알려 주고 선실
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굵직한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아래에서는 파도가  처올라왔
다. 갑판은 점점 비었고 태풍이 몰아쳐왔다. 기선은 점점 심하게 흔들리더니 곧 바다의 거품 
속에서 호도껍데기처럼 춤을 추었다. 배의 반쯤이 파도에 잠겼다가는 다시 올라왔고, 또  다
시 깊이 가라앉으려고 했다. 선실 안에서는 모두들 신음하고  배도 폭풍우와 싸우며 끼이끼
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렇게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나는 바다 위에서 아직 이런 폭풍을 경험
한 일이 없었으므로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모근 것이 마치 환영(幻影)처럼 사라졌다. 태양은 빛나고 바다는 거울처
럼 잔잔하였다. 배는 요동치지 않고 계속 달렸다. 시실리섬의 에트나 화산이 봄바람에  연기
를 내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들은 점점 육지에 접근했다. 이제 기선은 메시나 해협을 지나갔다. 산이 가까워졌다가
는 다시 멀어졌다. 집들이 서 있는 언덕이 우리 앞을 스쳐지나갔다. 햇볕 쬐는 들에서  농부
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였고, 멀리 보이는 열차는 해안을 따라 굴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몇 
시간 뒤에는 이 모든 것들과 다시 이별해야만 했다. 우리가 탄 배는 다시 넓은 바다로 나아
가 그의 고향 항구로 급행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마르세이유 항구에 입항한 것은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그러나  하선 층계가 
내려지고 2천명이 넘는 긴 대열이 서서히 움직이기까지는, 한없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극동
에서 온 우리 대학생들은 아직도 함께 몰려서 각자의 짐을 든 채  유럽 땅 위에 서 있었다. 
우리들은 아직도 무엇인가를 도와주려고 이리로  마중을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우리들을 어디로 안내해야 할 지 모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의논들을  한 후에 많은 길을 통
과하여 학교인 듯한 알 수 없는 건물의 큼직한 정원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회장은 긴 인사
말을 하고, 객지의 풍습과 습관을 존중해야 하며 5천년  문화 민족의 후손에 적합하게 행동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공자 자신도 낯선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풍습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
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 연설과 여러 가지 충고를 들은 다음에 우리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방에 불려가서  충
고를 받고 권고당했다. 거기서 우리들은 증명서와 성적확인서 그리고  가지고 온 재산을 내
보이고 체류 허가를 받았다. 프랑스 여러 대학의 안내와 그 외에 유용한 서류도 받았다.  한 
그룹씩 학교 운동장을 떠났다. 본근이와 나, 우리 둘의 차례가 되어 짧은 의논 후에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저녁이 다 되어 있었다. 본근은 나를  독일가지 데려다 주겠다는 그의 약
속을 잊지 않았다. 나는 그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우리들은 프랑스에 머물고자 하는 모
든 동행자들과 작별했다. 나의 고행 사람 둘만은 계속 영국으로 여행할 계획이었다.  우리들
은 작은 식당에 들어가서 앞으로의 우리들 여행에 관해서 의논하였다.
  본근은 나에게 우선 파리 시내를 한번 구경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독일에서 공부
를 시작하면 이곳에 다시 오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것을 거절하고, 
오늘 밤 안으로 독일로 떠나기를 바랐다. 저녁이 되자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애수가 나를 엄
습하였다. 그것은 유럽 땅에서 내가 처음 겪는 황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공부할 고장인 
목적지로 떠나고자 했다. 본근은 한참 동안 지도를  훑어보고 리옹, 디종, 스트라스부르크로 
통하는 길을 택했다.
  우리들은 역으로 가서 곧 출발하는  열차에 올랐다. 나는 구석에 자리잡고  한 노파 옆에 
조용히 앉았다. 본근이는 프랑스 사람 사이에 앉더니 팔짱을 끼고는 곧 잠이 들었다.
  
    목적지로
  다시 날이 밝았다. 열차 안에는 우리 둘만이 앉아 있었다. 다른 여객들은 이미 밤새  내린 
것 같았다. 밖에는 아직도 희미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들이며 냇물이며, 마을이며 언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차는 흔들리지 않고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그래, 이것이 유럽이야!"
  본근은 말하며 웃었다.
  그는 그곳에 다시 온 것은 무척 기뻐했다. 우리들이 보는 모든 것을, 들이며 집이며, 교회
며 의복이며 자동차 등에 관해서 그는  내게 설명했다. 그는 프랑스에는 회색 지붕이  많고, 
독일에는 붉은 지붕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프랑스 사람과  독일 사람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했다.
  우리들은 여러 번 기차를 바꿔탔다. 저녁때에 라인 강을 건너서 온밤을 계속 달리고, 다음 
날 아침에야 내가 얼마 동안 머물러 있을 중부 독일 도시(뷔르츠부르크)에 도착했다. 본근은 
유럽에 처음 왔을 때 얼마 동안 이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는 큰 도시보다는 이곳이 낮선 
환경에 쉽게 익숙해지고 조용히 공부할 수 있으니 자기가  했던 대로하라고 나에게 권했다. 
시가를 지나는 도중에 우리들은 공원 같은 큰 시설을 통과했다. 아침 햇살이 신비스럽게 연
한 녹색을 뚫고 넘쳐흐르고 있었다. 우리들은 강을 건너 옆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에 어떤 정원 문 앞에 멈춰 섰다.
  "이젠 다 왔어!"
  본근이 웃으며 소리쳤다. 
  그러고는 잠시 주저하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얼마 후에 한 부인이 나타나서 본근과 반가운 재회의 인사를 나누고 우리를 집 안으로 인
도하여 이층에 있는 넓은 방으로 안내하였다. 그러고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긴 의논이 계
속되었다. 마침내 본근은 나에게 부인이 나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겠단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 주일쯤 내가 익숙해지는 것을 돕기 위하여 내  곁에 있었다. 그러고서 그는 밤차
를 타고 다시 프랑스로 갔다. 우리들이 함께 역으로 나갔을 때, 그는 내가 주의해야할 이 고
장의 풍속과 습관을 다시 한 번 일러주었다. 본근은 무엇보다도  내가 말을 많이 하기를 권
했다.
  "너는 너무 말이 없고, 너무 많이 생각하는 편이야."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침묵은 옛 동양에서는 미덕으로 여겨졌으나, 서양에서는 그렇지가 않아. 여기서는 그것이 
비사교적인 것으로, 심지어는 거만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항상 이야기하는 데 함께 어울려
서 같이 대화를 나눠라. 무엇에 관한 이야기든 간에 다 괜찮아. 날씨건 기후건, 음식이건 옷
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이 사회와 지구상에서 살고 있는 한 반드
시 철학적인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는 없어. 유럽 사람들도 지상(地上)에서 살고 있으며 
즐겨 세상 이야기를 잘 하거든."
  그의 고마운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야기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어휘가 너무 부
족해서 난처한 입장에라도 빠지지 않을까 걱정했고, 또 자칫  말을 잘못하여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
하고 본근이가 독일어 학습을 위해 권했던 책에만 매달렸다.
  내가 처음 읽은 책은 《녹색의  하인리히》(콧트프리드 켈러의 소설)였다.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다고 해서 본근이 내게 추천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매 두 줄마다 단어를 찾아야 
했고, 어려운 문장을 만나면 그 뜻을 명백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몇 시간씩 생각해야 했으므
로, 이 책마저도 그리 쉽게 읽어나갈 수 없었다. 나는 매일 혼자 앉아서 눈이 피로해서 글자
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하루종일 읽고 생각하고 또  읽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책을 밀쳐
놓고 잠시 동안 휴식하였다. 서편 창문을 통해 나는 정원 전채를 내다볼 수 있었으며,  정원
의 녹색이 나의 눈을 빨리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읽던 책을 들고, 한 줄 한 줄 
애써서 고생스럽게 읽어나갔다.
  밖은 온통 여름 분위기였다. 정원이며 길가에는 꽃이 만발하여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
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으므로 산책 나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학문을 계속
할 수 있을 정도로는 이 어려운 독일어를 언제쯤 완전히 배우게 될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
했다. 그리고 박에 나가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 낯선 이국 땅에 와 있다는 것을 더욱 절
실히 느꼈다. 다만 저녁 늦게 모든  것이 조용해지면, 나는 가끔 강을 따라가다가  버드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았었다. 유유히 흐르는 물을 보면 내 마음은 기뻤다. 나는 이 물이 이
렇게 계속 흐르고 흘러서 언젠가는 한국의 서해안에, 어쩌면 연평도에, 아니면 외로운  송림 
포구에 닿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방학이면 귀향 길에 배를 타고 가면서 푸른 하늘 아래로 그 섬과 포구가 스쳐  지나
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곧 북쪽에서 수양산이 솟아나고,  조
그마한 기선은 조심스럽게 용지(龍池)에 입항했었다. 나를 배에서 마중하려고 기섭, 용마, 그
리고 만수가 와 있었다. 이 친구들과 다시 만나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고, 그들과 함께  고향
의 들을 걸어 나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고을로 들어설 때면 내 마음은 얼마나 기뻤던
가! 그러면 어머니는 큰 대문 앞에서 나를 맞았었다.
  "다시 이 에미한테로 돌아왔구나!"
  어머니는 웃으면서 말씀하셨었다. 이렇게 즐겁게 웃으시는 어머니 모습을 대하는 것은 정
말 즐거웠다.
  나와 친구들은 매일같이 산골짜기 냇물에 가서 목욕을 하고,  모교의 운동장에 가서 테니
스를 하고, 저녁이면 우리 집 뜰에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악기를 만졌다. 만수는 깜
짝 놀랄 정도로 퉁소를 멋있게 불었다. 용마는 그가 조금  전에 읽은 톨스토이의 소설을 곧
잘 이야기했다. 기섭은 여전히 조용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말을 즐겨듣고 빙그레 웃었다. 그
들 셋은 우리 어머니를 아주머니라고 불렀고, 마음씨 착한  구월이를 구슬려서 야채밭에 가 
잘 익은 참외를 따오도록 했다. 내가 친구들과 모여 앉으면 어머니는 얼마나 기뻐하셨던가! 
정말 기분이 좋아서 어머니는 음식과 술로 그들을 대접했다.
  지금 어머니는 무엇을 하고 계실까? 주무시고 계실까? 깨어나 계실까? 쓸쓸한 고독에 잠
겨 텅 빈 뜰 안에 홀로 앉아 계실까? 지금도 이 담이 작고 약한 자식을 그리워하시겠지. 이
젠 어머니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다른 세상에 가 있어서 더 보호할 수도 없는 이 자식을.
  어디에나 다알리아꽃이 만발하여 석양이면 찬란하게 빛났다.
  가을이 되었다. 드디어 나는 읽기 시작했던 첫 번째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에피그램(격
언적 단시)를 읽고 있었다. 이 책은 첫 번째 책보다는 조금 쉬웠다. 왜냐  하면 이젠 그렇게 
많은 단어를 찾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과 저녁은 제법 싸늘했다.
  가을이 매우 빨리 다가왔다. 가을 안개가 자주 강물 위를 뒤덮었고, 길에는 가랑잎이 점점 
많이 바람에 날렸다. 추수가 시작된 지도 제법 되었을 테니까 어머님은 농지에 가 계시리라
고 나는 생각했다. 어머님은 송림에 사는 돌다리 아주머니한테 가  계실까? 혹은 강몰의 수
암의 집에 가 계실까? 그렇지 않으면 산촌 석탑에 가 계실까? 밀만 추수되는 이 석탑 마을
에 나는 단 한 번 가 본 일이 있었다. 산 속 깊은 곳이어서 다니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
었다. 오랫동안 좁고 경사진 길을 걸어야만 했고, 또 넓고도 돌 많은 하상(河床)을 건너야만 
했었다.
  나는 날마다 한 번식 고향에서 소식이 온 게 없나  알아보러 우체국으로 갔다. 그러나 매
번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점점 불안해졌다. 내가 유럽에 도착한 지도 벌서 5개월이  지
났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 내 편지를 통과시키지 않고  전달하지 않아서 해마다 고향에
서 아무 소식도 받지 못한 채 살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언젠가 나는 우체국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깃에 그만 알지 못하는 집 앞에 멈춰서고 
말았다. 그 집 정원에는 한 무더기의 꽈리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빨간 열매가 햇빛에  빛나
고 있었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그렇게도 많이  보았고, 도 어렸을 때 즐겨 갖고 놀았던  이 
식물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마치 고향의 한 토막이 이곳 내 앞에 실제로 와 있기나 한 
것 같았다. 내가 오랫동안 생각에 몰두해 있을  때, 어떤 부인이 집에서 나와 왜 그렇게  서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가능한 한  자세히 나의 어린 시절을 그 여자에게  이야기했다. 
그 여자가 그 가지를 하나 꺾어서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그리고 곧 철이 바뀌어 눈이 내렸다.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자 성벽에 흰 눈이 흩
날리고 있었다. 나는 눈에 익은 흰눈을 보며 행복감을 느꼈다. 그것은 나의 고향 마을과  송
림만 위로 휘몰아쳐 내리던 바로 그 눈과 같았다.
  이날 아침에 나는 저 먼 고향에서 온 첫 소식을 받았다. 큰누님이 쓴 편지였다. 지난 가을
에 어머님이 며칠 앓으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사연이었다.
  
  무던이
  가을 해가 어느덧 황해 저편으로 저버렸다. 농어촌의 오막살이 몇 채가 있는 동쪽 해안의 
암벽 많은 어느 항구에서 푸른 저녁 연기가 대기 속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곳으로부터 
더 위쪽으론 계곡이 붉은 단풍빛으로 물들어져 협곡을 이루고  있었으며, 회색 지붕에는 어
느덧 저녁의 어둠이 깃들였다.
  이곳이 율곡(栗谷, 밤골)이다. 이곳을 통하여  구소(九沼)라는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있었
다. 그 강은 수많은 굽이굽이에서 계곡을 법어나 아홉 개의 깊고 푸른 늪〔沼〕을 이루고는 
급작스런 흐름으로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쳐부수고 소용돌이치면 천천히 옆으로 퍼져 흘러갔
다. 바로 여기가 양잠업으로 부유하게  살아가는 웃마을과 가난한 농어민의  초가집으로 꽉 
찬 아랫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었다. 흔히들 말하기를, 계곡의 모든 전답은 예전에는  아
랫마을 농부들에게 속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 중 대부분이 인근 대처(大處)에 사
는 어느 지주의 소작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가을이면 황금빛 물결로 불타는 이 아름다운 들
판이 비록 대처 지주에 속하고는 있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가난 속에서도 만족하고 행복했
었다. 그들은 바다에서 고기며 굴이며, 조개며 소라며 새우  등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녁에 생선 반찬에 수수밥을 앞에 놓고 온 식구가 모여 앉았을 때면, 또 밖에서 폭
풍우가 치고 파도가 일 때면 그들은 바깥의 세상일을 잊을 수가 있었다.
  가난한 소작인의 과부 수압댁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
다. 그녀는 곧, 열 네 살짜리 딸 무던이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곧 식사 준비가 끝나요"하고 소녀는 말했다.
  "오늘은 불이 잘 피지를 않았어요."
  어머니는 솥 속을 들여다보았다.
  "너 도대체 뭣을 끓이니?"
  "수수밥!"
  "그런데 아무것도 안에 든 것이 없지 않니!"
  무던이는 깜짝 놀라 솥 속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거기에는 맹물만이 끓고 있었다.
  "맹물만을 먹을 수야 없잖니!"
  어머니는 말하고 웃었다.
  생선 역시 아직껏 비늘도 벗겨지지 않은 채였다. 수압댁은 얼른 스스로 일을 시작했다. 무
던이는 부끄러운 듯 서둘러 어머니를 도왔다.
  "너 오늘 문화 부인댁에 갔지?"
  어머니가 물었다.
  "네" 하고 무던이는 얼른 대답했다.
  "그런데…."
  "그런데 뭐?"
  "그 애가 왔어요."
  "아, 그래? 그래서 네가 그렇게 늦었구나! 그래 그 애가 어떻게 보이더냐?"
  "좋게 보여요!"
  무던이는 대답하고 얼굴을 붉혔다.
  무던이는 이 소년을 진심으로 좋아하였다. 그는 열 한 살이고 이름은 우물이었다.  어머니 
역시 그를 사랑했고, '착하고 귀여운 소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어머니로서는 딸이 그를 너
무나 좋아하는 것이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이 철없는 무던이는 그의 아내가 되었으면,  즉 
이 부잣집 소년의 아내가 되었으면 하고 여간 바라지 않았다.  이 소년이 바로 율곡 농토를 
소유하고 있는 지주의 아들이었다. 수압댁과  딸이 살고 있는 이 조그마한  집도 이 소년의 
부친의 것이었다. 식사 도중 어머니는 딸에게 물었다.
  "너 얌전했니?"
  무던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 밖을 내다보며 천천히 숟가락질을 하였다.
  "그 애가 너에게 친절하더냐?"
  "그 앤 늘 친절해요. 그 앤 나를 껴안았어요!"
  "그래, 그 애는 친절하다" 하고 어머니는 나직이 말했다.
  2년 전 그녀의 남편이 죽은 후 대처에 있는 부잣집에  갔었을 때, 그들은 처음으로 그 소
년을 보았다. 그 당시 수압댁은 이 소년의 양친으로부터 남편의  생시와 똑같이 계속 이 집
에 살며 농토의 소작권을 소유해도 좋다는 허락을 청해야만 했다. 이 간청이 수락될는지 염
려되어 퍽 불안하였다. 왜냐하면 이 동리에만 해도 토지가  부족하여 농부들마다 죽은 농부
들의 소작권을 인계받아보려고 너도 나도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용무를 가지고 수압댁보다 먼저 그 곳을 다녀갔겠는가? 그녀는 대처까지의 그 먼 길
을 걸어 아주 불안한 마음으로 그 큰집의 문턱을 넘어섰다. 무던이는 처음에는 숫제 들어가
지도 않으려 했다. 무던이는 이 대궐 같은 집과 그  집을 들락날락하는 낯선 사람들이 무척
이나 무서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녀는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라도  이 싸움을 끝내 
이겨내야만 했다. 수압댁 자신도  좀 서먹서먹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으니 들어가자!" 라고 
하며 딸을 위로했다.
  그때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이 소년이 그들을  맞아들였고, 그는 아주 초라한 옷차림을 
한 이 시골 소년와 장난도 하고 같이 놀기도 했으며 마치 친척이나 되는 양 무척  다정하고 
붙임성 있게 굴었다.
  그리고 분명 이 소년의 붙임성이 그의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 그녀로 하여금 그들의 간
청을 들어주게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장례 때의 많은  지출을 참작하여 상복기(喪服期) 동
안 집세도 면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수압댁은  작별할 때 그 소년을 껴안고 볼을  맞췄으며, 
가엾은 무던이는 그 부잣집에서의 즐거웠던  며칠간이 아쉬워 한없이 울었다.  그렇게 맛난 
음식도 많이 대접받고 여러 가지 신기한 것도 많이 보고, 게다가 그렇게 친절하고 아름다운 
소년과 함께 놀 수 있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얼마나 행복했던 일인지! 돌아오는 도중 개암
나무 밑에서 쉴 때에 무던이는 가만히 우물과 결혼할 수 있을 건이지를 물었다.
  "아, 이 어리석은 무던아!" 하고  어머니는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  하지만 이 애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한낱 기적을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그 아름다운  집, 그 훌륭한 
물건들, 그리고 그 사랑스런 소년! 오, 하느님, 이  애가 정말 그렇게 된다면…. 안 돼. 그런 
생각을 절대로 해서는 안되지. 그녀가 그렇게  형편없이 가난하지만 않았어도 모를 테지만! 
온 겨우내 그녀는 사랑하는 달에겐  겨우 이틀에 한 번씩밖엔 수수밥을  먹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창 자라나는 소녀는 아주 창백하고 수척해 보였다. 그런데 행복스러운 그 소년은? 
아니, 이런 어리석고 불손한 생각을 일개 농부의 딸이 지껄이다니! 어머니는 무던이가 다시 
한 번 되풀이 해 물었을  때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 무던이는 오직 
하나의 자식으로서 그 자식에게만은 최대의 행운만이 내려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일 그런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 이 다음  그와 결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 그녀는 아직도 작별의 슬픔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는 딸을 위로했다.
  이듬해 가을, 그 소년은 시숙(媤叔)의 농토 일을 감독하며 이 마을에서 살고 있는 숙모 집
에서 겨울을 보내기 위하여 이 곳으로 왔다. 문화 부인이  혼자 살고 있기 때문에 무던이는 
매일 문화 부인댁에 가서 집일을  도와주곤 했으며, 거기서 다시 우물을  만났고 가끔 그와 
함께 지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에게 우물의 아내가 될 수 없으니 절대로 어리석은 생각
을 가지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 후로 무던이는 풀이  죽어 수줍게 그 소년을 훔쳐보며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  거리낌없이 지껄이고 그녀와 식
사도 같이 하고, 그녀의 뒤를 따랐으며 그녀가 제 옆에 없으면 슬퍼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무던이는 어머니와 함께 수압섬〔島〕에 있는 친척집에 가게 되었고 이듬해 봄에야 비로
소 마을로 돌아왔다. 그때 무던이는 몹시 울었다. 하나 다시는 우물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
다.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 일 년 전이었다.
  그리고 오늘 무던이는 다시 우물을 만났던 것이다.
  "그 애가 얼마나 오래 여기 머문다더냐?"
  어머니가 물었다.
  "열흘 동안만."
  "아, 그러면 네 옛 버릇이 다시 시작되겠구나!"
  무던이는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 다시는 울지 않을 거예요!"
  "우는 것이 나쁜게 아냐. 네가 이직도 그 애를 생각하니까 그렇지."
  "나 다시는 그 애 생각도 않을 거예요!"
  다음 날 저녁때 무던이는 소년을 데리고 굉장히 흥분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숙모가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에 볼일이 있어서 갔는데 당일로 돌아올 수 없으므로 그는 수압댁에
서 그날 밤을 지내야만 했던 것이다. 무던이는 어머니 목을 껴안고 급히 귀엣말로 속삭였다.
  "우물은 오늘 우리 집에서 잘 거예요!"
  "무척 좋겠구나!"
  어머니는 웃으며 딸의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데 너, 그 애가 다시 가도 정말 울지 않으련?"
  무던이는 곧 진지한 얼굴이 되어 부엌으로 들어가 조용히  일을 시작했고, 한편 수압댁은 
방으로 들어가 조그만 손님을 맞이했다.
  "네가 다시 왔구나!"
  그녀는 반가이 소년을 껴안으며 말했다.
  "퍽 많이 컸구나! 이제 거의 무던이만큼 컸는데!"
  그는 옛날 그대로 친절하고 붙임성이 있었다. 두 손으로 수압댁의 팔을 붙들고, 있는 힘을 
다해 흔들어대는 바람에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그녀는  성냥을 그어 벽에 걸어놓은 
등잔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흙벽에는 등잔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단 한 조각의  그림
도 없었고, 그 밖에 방을 장식하는 아무런 것도 없었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지 말아라. 아주 초라한 방이란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자 소년은 당황해서 "아녀요!" 하고 말했다.
  저녁식사 후에 수압댁은 생선 몇 마리를 사러 해변가에  나갔다. 무던이는 부엌에서 설거
지를 하고 밤을 삶기 위하여 물을 끓였다.
  "불 앞 방석(짚방석)에 앉아라!"
  무던이는 제 옆에 있는 소년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얘 무던아, 너 왜 나하고 얘기하지 않니?"
  "나 지금 너하고 얘기하고 있잖니?"
  "너는 오늘과 어제 그리고 지난해에도 나하고 제대로 얘기하지  않았어. 또 너는 나를 쳐
다도 보지 않잖아!"
  무던이는 지금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씻고 아궁이에 나무를  집어넣었다. 
솔 밑에서는 마른 나뭇가지들이 바스락거렸다. 그는 그녀에게로 가서 어깨를 흔들었다.
  "도대체 너는 왜 항상 그렇게, 그렇게…."
  그는 그것을 뭐라고 표시해야 좋을지 몰랐다.
  무던이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너를 보면 부끄러워져."
  "도대체 왜?"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부끄러운 듯 땅을  내려다보았다. 문틈으로 찬바람이 들어
왔다. 두 사람은 불 앞에 앉았다. 
  "너 우리 마을에 살고 싶지 않니?"
  "나는 학교에 가야만 해. 신학교에!"
  "거기서 넌 몹쓸 사람밖에 안돼! 너의 아버지에게 말해서 여기 학교에 가겠다고 하렴. 나
는 너를 매일 밤낮으로 보고 싶어."
  "그렇지만 나는 끝끄지 배워야만 해. 이제 겨우 반 년밖에 안 다녔는데, 아직도 아픙로 십
년은 더 배워야 할거야."
  "네가 다시 가면 내가 얼마나 슬픈지 너는 알지 못해. 그리고 나는 너희들이 총쏘는 연습
을 하는 것을 보면 네가 다른 나쁜 사람들과 같이 전쟁터에 나가게 되지 않을까 염려돼."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그건  거짓말이야. 그들이 얼마나 영리한지 알기나  알아? 
그들은 어떻게 돼서 비가 오고, 지구의  모습이 어떻고, 번개가 어떻게 치는지도 모두  아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또 환자가 아픈 줄도 모르게 팔을 자르기도 한단다."
  "너도 그런 모든 것을 배울 생각이니?"
  "물론이지!"
  "그럼 너는 장가도 안 가고 너를 좋아하는 좋은 색시가 있어도 부인으로 맞을  생각이 없
니?"
  어물은 잠자코 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장가야 공부를 다 하고 나서 드는 거고, 부인도 공부를 해 가지고 현대인이 되어야 할거
야."
  "어느 여자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니?"
  "요새는 많은 여자들이 신학교에 다녀."
  "아, 그건 모두 점잖지 못한 처녀들이야! 너 혹시 아는 처녀라도 있니?"
  "나는 여럿을 알고 있어!"
  "몇 살들이나 됐는데?"
  "네 나이와 비슷들 할 거야."
  "그 애들하고 이야기도 하고 같이 놀기도 하니?"
  "물론이지! 우리들은 너처럼 그렇게 남녀간에 차별을 두진 않아."
  "그래, 그러니깐 그 여자들이 점잖지 못하다는 거야!"
  그녀는 말하고 부지깽이로 죄없는 땅바닥을 벅벅 긁었다.
  어머니가 돌아온 것은 이들 둘이서 밤을 모조리 까먹은 후였다. 잠자리가 준비되었다.  우
물에겐 부엌 쪽의 불길이 제일 잘드는 따뜻한 아랫목을 내주었다. 여기에 수압댁은 제일 두
껍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요와 이불을 깔았다. 이부자리는 수압댁이  시집올 때 혼수로 받은 
것이지만 몇 번 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것을 후일  딸이 시집가게 되면 주려고 고
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따뜻한 자리는 무던이에게로 차례가 갔는데, 역시 따
뜻한 이부자리에서 자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만은 제일 웃목 벽 쪽에  변변치 못한 이불 
하나를 덮고 누웠다. 아이들은 곧 잠이 들었다.
  새벽녘이 되니 방안이 얼음장같이 찼다.  문 창호지를 통해 한기가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수압댁은 일어나서 등잔에 불을 켜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일거리를 잡아보려 했으나 너무나 
추워 손이 막 떨렸다. 그녀는  문틈과 창문 틈바구니를 헌 옷으로  틀어막고 아이들이 자고 
있는 이부자리 밑에 손을 넣어 보았다. 무던이는 잠결에 자꾸만 따뜻한 쪽으로 파고 내려가
서 이제는 우물의 자리에 같이 누워서 자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란히 누워서 자고 있는 두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부드럽
게 딸의 이마를 쓰다듬어주고는 방에 불도 지피고 조반 준비도 할 겸 밖으로 나갔다.
  "지금 저녁이냐, 아침이냐?"
  잠에서 깬 우물은 이렇게 묻고  다시 눈을 감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무던이는 아직도 
잠에 취해 있었다. 조금 있다가 우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직도 
캄캄한 밤중인데 등잔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잠자는 무던이를 들여다보다가 가만히 그녀의 
어깨에서 이불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이불을 덮어주고는 자리에 누웠다.  이때
야 무던이는 눈을 뜨고 하품을 하였다. 
  "얘 아직 자니?"
  그녀는 소년을 흔들었다.
  "아니, 나 벌써 언제 깼다고, 아직 저녁이니?"
  "아니야, 새벽이야. 엄마는 벌써 불을 때고 계셔."
  부엌에서 일하는 소리가 들리고 밖에서는  바닷물 소리가 들려왔다. 집  뒤의 울타리가로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소리도 들려왔다.
  무던이는 등잔 있는 데로 가서 불을 꺼버렸다. 그러자 동창(東窓)이 훤히 밝아왔다.
  "너 내 머리에다 무슨 장난을 해놨길래 머리가 이렇게 헝클어져 있니!"
  소년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누워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 늘 나하고 같이 자지 않을래? 이렇게 같이 누워 있으니깐 참 좋아."
  "그래, 참 좋아" 하고 그는 계속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가 동이 트는 것을 볼 수 있게 아침마다  일찍 나를 깨워줘야만 해. 그리고 등잔
불도 켜놓고 또 다른 사람들이 아침밥 지으러 나가더래도 너만은 내 옆에 있어줘."
  
  조반을 먹은 후 우물은 가버렸다.
  "그 앤 이제 퍽 컸더라"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딸은 아무 말 없이 그릇에 행주질만 하고 있었다.
  "오늘은 집에 있거라. 우물에게도  가지 말고. 사람들이 보면  너를 좋게 여기지 않을  거
다."
  :그렇지만, 엄마!"
  "아니야. 무던아, 너도 이젠 처녀가 됐어. 낯선 사람들 눈에 자꾸 띄게 되면 못 쓴단다."
  "하지만 그 애는 낯선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 애 앞에서도 내외를 해야 하나요?"
  이 내외라는 묘한 말은 '남녀간에  간격을 두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처녀들이나 또 
삼십 이전의 부인들은 외간 남자와 가까이 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외간 남자들이 들어올 
수 없는 안채에서만 머물렀으며,  다만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지간에만  서로 부인네들을 볼 
수 있었고 또 그들과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만약 어느 여인이 외간  남자와 가까이 있어서 
몸을 피한다면 사람들은 이 여인이 '내외'를 한다고 말하였다.
  "아니, 내외를 할 필요는 없어. 만일 네가 그를  우연히 보았다면 피할 필요는 없다. 하지
만 그를 방문한다든지 오랫동안 그와 함께 있는다든지 하는 일은 이젠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그 애는 아직 어른이 아니잖아요!"
  "어른은 아니지. 그렇지만 그 애는 부잣집 아들이야. 양반 집안에서는 아이들도 남녀는 서
로 떼어놓는단다. 왜냐 하면 그것이 미풍양속이기 때문이지."
  무던이는 문설주에 기대 서서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가 열심히 위로하는데도 그녀는 오래
도록 울었다.
  저녁때가 되자 무던이는 다시 눈물을 흘렸고, 또 다음날 아침에도 울었다.
  우물은 무던이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거기에 대해  몹시 항거했으나 아무런 소용
도 없었다. 미풍양속이 너무나 엄해서  소녀가 혼기에 달하면 그런  어린애들의 교우마저도 
끊어야만 했던 것이다. 장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장막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우물이 무던이
를 그리는 마음은 커갔다.
  무던이는 모든 것을 운명에다 맡겼다. 그녀는 이제 문화  부인댁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에
게 그 이상 불편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집 안에서 자기 할 일만 하였다. 어머니는 그후 단 
한 번 무던이가 우는 것을 보았다.
  "우물이 가요!" 라고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너 그 애를 봤니?"
  "네, 오늘 강가에서 봤어요. 그 애는 나를 볼 수가  없어서 퍽 슬퍼했어요. 병이 난 것 같
아요. 다시는 이리로 오지 않겠대요."
  "다시 올 거야."
  "아녀요. 그 애는 아주 멀리멀리 간대요."
  어머니는 무던이를 그냥 두고 무던이가 땅에다 놓은 바구니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
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앗다. 무던이는 고기를 사오지 않았던 것이다.
  "너 웃마을에 갔다오지 않았니?"
  어머니가 물었다. 
  무던이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조그마한 입은  고통에 쪼그라들고 눈은 토끼
눈처럼 빨갛게 되어 있었다.
  "강가에서 그 애를 만나고는 얼른  다시 돌아왔어요" 하고 그녀는 목멘  소리로 설명하였
다.
  "무던아, 이젠 울지 말아라. 내일이 네 생일인데 이렇게 우울하면 어떡하니."
  모녀는 방으로 들어갔다. 무던이는 자리에 누웠다.
  "이것 봐라. 너 내일 입으라고 내가 치마를 하나 새로 만들었다. 손님들도 오실 텐데 예쁘
게 보여야지."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장롱에서 치마를 꺼내왔다.
  "누가 치마를 입는댔어요."
  무던이는 죽은 듯이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몸이 이불 밑에서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
는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내다보았다. 먼 곳의 산들은 이젠 보이지가 않았고, 바다  위
로는 저녁 안개가 떠돌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렇게 앉아 있다가 잠자리에 들어갔다.
  침묵 속에서 밤은 깊어만 갔다. 구소의 강물은 끊임없이 하상(河床)을 지나 바다로 흘러갔
다. 갑자기 만조가 되어 기나긴 밤 동안 파도 소리가 요란하였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무던
이의 손이 어머니에게로 왔다.
  "엄마!"
  "응?"
  "화내지 마세요. 내일 아침 일찌감치 가서 고기 사올게요!"
  
  여러 해가 지나갔다. 무던이는 현저하게 모습이 변했으며 통통해지고 키도 많이 컸다.  그
녀는 모든 농사일을 맡아 했는데 파종에다 김매는 일에 수확하는 일까지 해냈다.
  어느 해 여름, 찌는 듯한 삼복 무렵이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저녁을 먹고 나서 집 
밖으로 나앉아 시원한 저녁 공기를  마셔야만 살 것 같았다. 남자들은  흔히 반장집에 모여 
모깃불을 피워놓고 담배를 피우면서 이야기 꽃을 피웠고, 아낙네들은 집에 들어앉아 있었다.
  "이제 좀 시원해졌으니 다리미질을 해야겠다"고  수압댁은 말하고 커다란 빨래  광주리를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무던이는 댓돌 위에 멍석을 깔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긴 손잡이가 달린 
옛날 다리미를 들고 왔다.
  "자, 다리미에 부채질 좀 해라!"는 어머니의 말에 무던이는 부채질을 했으나  억지로 하는 
기색이었다. 그러고는 모녀는 멍석 위에 앉아서 다리미질을 하였다. 무던이는 빨래 한  끝을 
잡고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기고 어머니는 이리저리 다리미질을 하였다.
  "내일 비가 또 안 오면 큰일나겠는데" 하고 수압댁이 말했다.
  "이런 숭악한 해는 참 견딜 수가 없다니깐!"
  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조그마하고 창백한 손으로 빨래만 꽉 붙들고 있었다.
  지난해에도 흉년이 들었었다. 농부들은 겨울을 날 것이 별로  없었을 뿐더러 이른봄에 먹
을 일이 더 걱정이었다. 조금 저장해둔 양식은 일 많은  시기에 먹어야 했기 때문에 여름가
지 보관해 두어야만 했다. 여러 농부들이 겨울 동안 어디 가서 일해 보려고 여러 번 시도해 
봤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수압댁 역시 읍내의 어느 고관댁에  가서 빨래를 해보려고 한 달
이나 집을 떠나 있었으나 번 것이라곤 겨우 그 동안의 그녀 자신의 생활비밖에는 안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딸에게 줄 조그마한 댕기 하나를 샀는데 이것을 사기 위해서 몇 끼를 굶
어야만 했었다. 봄이 되자 그녀는 가끔  소라를 가지고 읍내에 가서 팔았다. 읍까지의  길이 
어찌나 먼지 그녀는 하루 종일 걸어야만 했고 마을로 돌아오면 날이 밝아 다음날이 되곤 했
는데 그것도 대개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그녀는 자주  읍내를 왕래했는데 이것은 그
녀 자신만이라도 여름을 위해 저장해 둔 얼마 안되는 양식을 축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던
이는 무척 어머니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데리고 가지 않았다. 십육칠 세 되는 얌전
한 처녀로서 읍내를 돌아다니며 첩이나 기생처럼 대낮에 뭇사내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어머니는 딸에게 타일렀다.
  달이 중천에 떠올라 마을을 지나 다니는 사람들을 밝게 비춰졌다. 그러나 그늘에 앉아 있
는 사람들은 좀처럼 남의 눈에 듸지 않았다.
  "저기 술집 아줌마가 와요!" 하고 무던이는 흰 자태가 집 쪽으로 가까이 오자 나지막하게 
말했다.
  술집 아주머니가 그들에게 와서 인사를 하였다.
  그녀는 좀처럼 오지 않은 손님이었으며  또 별로 보고 싶은 손님도  아니었다. 왜냐 하면 
그녀의 직업이 아주 천한 직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술집 작부였다. 술  파는 
일 자체는 별로 나쁠 것도 없겠지만 노래도 같이 부르고, 춤도 같이 추는 이런 것들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집안에 별고는 없으슈?" 하고 그녀는 모녀에게 인사하였다.
  "네, 무고하다우. 이리 앉으슈!"
  수압댁은 말하고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술집 아주머니는 팔에다 바구니  하나를 들고 
연방 그 속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이 안에 구운 닭 한 마리가 들어 있다우."
  그녀는 말하며 수압댁에게 조그만 꾸러미 하나를 내놓었다.
  "내가 뭘 드린다고 언짢게 생각지 마슈. 아무도 우리를 보지는 않으니까!"
  "언짢게 생각하다니 말이나 되우. 하지만 이건 댁에서도 필요할 텐데."
  "아, 이 술집 여편네가 남에게  뭘 선사하려는 것이 꽤 당돌한  일이라는 것을 내 자신도 
잘 알고 있다우. 그렇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가지려면 항상 이렇게 사과부터  하는 것이 버릇이었다. 어
느 누구도 그녀를 동등한 신분의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초대하는 사람도 없고 게다가 그녀
를 가까이 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이런 말투로  자기를 낮추어 말하였다. 이런 식의 
말투나 또는 무슨 선물을 들고 가서  어느 믿을 만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면, 
그 때는 자신의 과거를 모조리 얘기함으로써 자기는 결국 이렇게 밖에는 될 수 없었다는 것
을 나타내보이곤 하였다. 그녀는 아주 일찍이 부정한 행실이 있었다는 누명을 쓰고,  이혼을 
당하였다. 이혼당한 여인은 죄악의  화신이었으며, 가문의 큰  치욕이었다. 그녀에겐 기생이 
되거나 아니면 첩이 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란 없었다. 그런데 기생이 되거나 첩질을 하
려면 얼굴이라도 반반해야 했을텐데 그녀는 얼굴마저도 못생겼으니 술을 팔아서 생계를  유
지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율곡에서 좋은 자리를 구해 가지고 벌써 이십여 년
이나 마을 입구에 있는 조그만 오막살이에서 살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아주 보기 흉했다. 지나치게 쑥 들어간 눈에서는 항상 눈물이  질금거렸고, 
코는 볼품없이 뭉툭하고, 입은 컸으며 게다가 온 얼굴은 곰보딱지였다. 동리 남자들이  그래
도 가끔 그녀에게 가서 술을  마시고 즐기기도 했는데, 이것은 마을에  다른 술집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또 하나의 이유를 든다면, 그녀가 술안주로 내놓는 구운 닭이 손
님들의 구미에 맞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젊은 남자들이 혼인을  하게 되면 그녀에게 선심
도 베풀어 농담도 같이 하고 노래를 불러달라고도 간청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너무 
친절하게 군다고 욕지거리를 하는 거친 남자들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그녀는 감수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직업 때문에 사회적으로 농부들보다 훨씬  낮은 계급에 속했기 때문
이었다.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들은 모두가 아주 점잖다우!" 하고 그녀는 손님들 칭찬을 하였다.
  "그런데 어제는 웬 난폭한 사람이 하나 왔는데 가마꾼이었어요. 그자가 나보고 술을 부어
달라고 하지 않겠소. 그래서 싫다고 했지요. 그리고 손님들에게 내가 아무리 요모양  요꼴이 
됐지만 가마꾼에겐 술을 부어 줄 수 없다고 말했더니, 모두들 내 말이 옳다고 합디다."
  달은 점점 중천으로 떠올라서 은실 같은 달빛이 세 사람을 비춰주었다. 어머니는 빨래 광
주리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고, 술집 아주머니가 들고 온  꾸러미는 그냥 멍석 위에 놓여 
있었다.
  "닭은 제발 다시 가지고 가서 손님들한테나 대접하슈!"  하고 수압댁은 방에서 나와 말하
고는 꾸러미를 술집 아주머니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 집에도 많이 있다우."
  많다든지 적다든지 하는 것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평가  기준이다. 무던이는 오늘 저녁 
한 줌의 수수밥에 오이지 두 개밖엔 먹지 못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
었다. 움직일 적마다 힘이 들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잠이 들어 밝을 때까지 잠을  자고, 그러고 나면 또다시 그와 
같은 훌륭한 식사를 하게 되고, 아, 그런데 이 닭이야말로 더할 수 없는 성찬이 아닌가!
  "아,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수압댁!" 술집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꾸러미를 무던이 
있는 쪽으로 밀어놓았다.
  "만일 댁에서 그걸 다시 돌려주면 내가 순결하지 못한 여인이기 때문에 내 것은  모두 더
럽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된다우. 나는 아무에게도 뭘 선사도  못하고 또 다른 사람등 앞
에 나타나지도 못한단 말이지요! 그러면 불  같은 분노가 전신을 엄습해 오고  괴롭기 한이 
없어요. 그래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우."
  "인제 그만해 두세요!" 하고 부던이가 별안간 말했다.
  "제가 그 닭을 먹겠어요, 어머니! 배가 지독히 고파요! 누가 그  닭을 가져왔건 저는 아랑
곳없어요!"
  "물론 그렇구말구요." 하구 술집 아주머니는 감동해서 소리를 질렀다.
  "잠깐 계슈. 내가 차려다드리리다. 내가 부엌에 들어가서 국수를 좀 만들고 고기를 썰어도 
되지요?"
  그녀는 쏜살같이 꾸러미를 들고 집 안으로 사라졌다.
  "어머니, 어머니, 저는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제발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몸이 쇠약해
져서 그런지 전신이 떨려요!"
  수압댁은 아무 말도 안하고 머리만 끄덕이곤 역시 안으로 들어갔다.
  "처녀가 이제 퍽 컸구려. 커가면서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는군" 하고 술집 아주머니는 그
들이 국그릇을 대하고 앉자 또 한 마디 하였다.
  "처녀의 아버지는 참으로 너그럽고 인정 있는 분이었다우. 그분은 내가 그분과 동등한 신
분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한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우."
  "그런 얘기 자꾸 하지 마슈.  모든 것이 운명이라우. 댁에선들  그렇게 되고 싶어 됐겠소. 
뭐니뭐니 해도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이 착해야 한다는 사실이라우."
  "아무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술집 아주머니는 잠깐 동안 잠자코 있더니 드디어 용건을 끄집어내었다.
  "내가 이런 얘기한다고 노여워하지 마슈. 실은 내가 처녀의 중신을 서보려고 하는데…."
  이것은 좀 지나친 일이었다. 다만 흠 없고 단정한 여자만이 중매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일이 성사만 되다면 그녀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얼마나 정의를 표하고 있는가를 도처에 
큰소리치고 다닐 수도 있을 것이며 자기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작부가 아니라 그저  어쩔 
수 없어서 작부 노릇을 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에게 
세상은 열려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전혀 노여워하지 않소. 어서 말해 보슈" 하고 수압댁은 진정 놀란 얼굴로 말했다.
  "나는 혼자서 이렇게 생각했다우" 하고 술집  아주머니는 기뻐서 소리 질렀다. "수압댁의 
집안을 나는 아주 훌륭한 집안이라고 생각했수. 분명 복받을 집안이라고 말이오!"
  "누가 댁에 들렀습디까?"
  어머니가 물었다. 
  무던이의 눈이 점점 동그래졌다.
  :그래요. 내 곧 모든 것을 실토하리다. 어제 웃마을의 신씨 부인이 우리 집에 들렀다우. 댁
에서도 분명 그 댁을 알고 또 잘생긴 그 댁 아들을 아실 거요."
  "그럼요. 그 댁도 알고  그 댁 아들도 잘 안다우."
  "정확히 말해서 무던이가 지난봄에 뽕잎을 따러 웃마을 갔었을 때 말이우…."
  "그 앤 아주 자주 웃마을에 갔었다우. 지난해에도 갔었는걸."
  "그때 말이우. 그 신씨 댁에서 무던이를 여러 번 봤나봅디다. 그 댁 식구 모두가, 즉 아버
지 어머니 아들이 무던이를 봤대요. 그래 그 부모가 아들더러 무던이가 마음에 드느냐고 물
었더니 좋다고 했다지 않우."
  "아, 무던아!"
  어머니는 아주 흥분해서 음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무던이는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번개같이 일어서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수압댁이 이렇게 흥분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신씨  댁은 웃마을에서 제일 부자였으
며 부므들은 아주 점잖은 사람들로 그  아버지는 이관(吏官)가지 지낸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외아들은 참으로 착한 젊은이가 아닌가! 아니 누가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단 
말인가! 무던이가 이들 점잖은 분들의 눈에 꼭 들 줄이야!"
  "이제 가보슈. 내가 내일이나 모레  댁에 들르리다. 아니, 그러지  말고 댁에서 내일 우리 
집에 오슈! 난 지금 무던이와 얘기를 해봐야겠소.  자, 어서 가보슈!" 하고 수압댁은 성급히 
말했다.
  "네, 그럼 가겠수. 여기 참 그 댁 아들의 생일 날짜가 있으니 궁합이 잘  맞겠는가 알아보
슈."
  
  "무던아 얘, 이리 좀 오너라!"
  어머니는 집에 들어와서 딸을 불렀다.
  "네, 곧 갈게요!"
  가냘프고 겁먹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무던이는 어머니에게로 가지 않고 달빛이 비
치지 않는 부엌 한 구석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얘야, 이리 오너라!"
  어머니는 다정하게 말하며 딸의 손을 잡아당겼다. 무던이는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불 켜지 마세요!"
  무던이가 중얼거렸다.
  모녀는 창가에 나란히 앉았다.
  "얘야, 네 생각은 어떠냐? 나는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무던아. 이게 그럼
직한 얘기냐? 너도 그 댁이 어떤 댁인가  하는 것은 알지? 아이구 답답도 해라. 무던아,  말 
좀 해 봐라!"
  딸은 잠자코 있었다.
  "그 댁 마나님은 아주 좋은 분이란다. 그리고 그  아들도 마나님 못지 않게 착하대. 얘야, 
시부모님 된 분들 생각을 해봐라. 그리고  일봉이도 아주 예의 바르고 참한 신랑감이야.  얘 
무던아. 넌 이제 일도 하지 않을 게고 굶주리지도 않을 게고 떨지도 않게 됐어!"
  어머니는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인제 불 좀 켜서 너를 좀 봐야겠다."
  한참만에 어머니가 말했다. 
  조그마한 등잔에 불이 켜지자 장식 없는 방안이 점점 환해졌다.
  "머리칼에 윤기가 하나도 없구나. 너 머릿기름 좀 발라야겠다…  내일은 뭘 좀 맛난 것을 
끓여줄게. 아주 앙상한게… 가엾어라. 그저 제 에미를 잘 못 만나서 이 고생이구나!"
  "어머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고 무던이는 어먼; 무릎위에 주저앉았다.
  "어머니도 노상 굶지 않아요. 아, 불쌍한 어머니!"
  "얘야!"
  "어머니!"
  "응?"
  "왠지 자꾸 불안해요. 아주 불안해 죽겠어요!"
  "아무 소리 말아라. 나도 네 아버지하고 결혼할 때 그렇게 불안하더라만 나중에는 행복하
기만 하더라. 일봉이는 아주 착한 사람이야. 너는 틀림없이 네 자신도 모를 만큼 그렇게  행
복하게 될 꺼야…. 너 그 사람 요 근래 언제 본 일 있니?"
  "모르겠어요. 도대체 그를 봤는지 안 봤는지조차도 모르겠어요."
  "물론 너도 그 사람을 알아. 그 왜 큼직하고 시커먼 눈에 귀도 잘생긴 사람 있잖아."
  "어머니, 그 사람 여지 왔었어요!"
  "뭐라고, 언제 왔었니?"
  "아, 그게 바로 그 사람이었구나! 언젠가 제가 집 앞에  앉아서 콩을 까고 있었어요. 그때 
그 사람이 왔는데 처음에는 그냥 지나쳐가려고 하다가 빨리 저한테로 오더니 돌다리 아저씨 
댁이 어디냐고 묻지 않겠어요. 어찌나 갑자기 나타났던지 집  안으로 들어갈 여가도 없었어
요!"
  "괜찮아. 누구든지 반하면 그렇단다. 그때 그 사람 네 마을에 들더냐?"
  "몰라요" 하고 무던이는 얼굴을 붉혔다.
  "진정한 사랑은 결혼 한 후에야 오는 법이란다. 결혼할 때까지  신랑의 얼굴 한 번 못 보
고 결혼하는 처녀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래도 모두들 나중에는 사랑을 느낀단다."
  무던이는 자리에 누웠다. 
  "제 생각에 그저께 여기 왔다간  그 점장이는 진짜 점장이가 아닌  것 같아요. 그 여자는 
연방 저를 유심히 바라보며 저하고 얘기도 많이 했어요. 그리고 또 저보고 약혼을 했느냐고 
물어보던 그 비단 장수도 분명 그쪽 집에서 보낸 사람일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어머니는 웃으며 무던이가 누워있는 자리로 가서 딸을 쓰다듬었다.
  "아마 잔치는 내년쯤에 하게 될  거야. 그러면 넌 열 일곱  살이 되니깐 시집가기엔 제일 
좋은 나이가 되는구나. 그 사람은 지금 스무 살이지. 가만  있자, 그러니깐 그는 큰 숲 속의 
나무〔木〕고 너는 길가 있는 불〔火〕이라…. 어떻다고 볼 수 있을까? 그래, 아주 좋을  거
야. 그 사람이 물〔水〕이라면 그건 아마 나쁠 거야"  하고 어머니는 열심히 궁합을 맞춰보
았다.
  무던이는 어머니에게 두 팔을 올려놓고, 어머니는 딸을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얘야, 시집가서 신랑이 있으면 참 좋은 거란다."
  밖에서 파도 소리가 요란했다. 무던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말 그래요?"
  그녀가 나직이 물었다.
  "그렇고 말고! 술집 아주머니가 와서 물어보면 아무소리 말고 그저 네, 하고 대답해라."
  "어머니가 말하세요!"
  
  그 후에도 술집 아주머니는 몇 차례나 이 양가를 왕래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혼인날을 받
는 것이 간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름난 점장이인 아랫마을  훈장은 수압댁에게 두 사
람의 궁합은 썩 잘 맞지만 혼인은 결코 금년에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명년 삼월 열이
렛날이 길일' 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가 하면 신씨  댁에서는 혼인을 무척 서둘렀다. 수압
댁은 또다시 훈장에게 가서 '금년에는 정말로 안 되겠는지  다시 한 번 봐달라'고 졸라댔다. 
훈장은 한참이나 책을 들여다보고 연구를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금년에는 도저히 안됩니다. 빨라야 명년 정월 열여드렛날입니다!"
  신씨 부인은 이 날에 동의하였다.
  사주와 함께 봉채함(封采函)은 이 해 여름에 보내왔는데, 그것은 수압댁이 제때에 혼수를 
모두 완료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저녁 느지막해서 커다란 검정 봉채함이 집 안으로 운반되었다. 무던이는 지고 온 
남자의 잔등에서 함을 받아 받아내려야만 했다. 봉채함은 언제나  신랑 집의 가까운 친구나 
또는 스스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단정한 남자에 의해서만 신부 집으로 운반되어야 했
다.
  "이 비단 좀 봐. 얼마나 부드럽고 고운가. 이걸 어떻게 바느질하지?"
  하고 수압댁은 말했다.
  무던이는 잠자코 함에 들어 있는 것을 모조리 꺼냈다.
  "가락지들이 맞는가 한번 끼어보렴!"
  무던이는 들리지 않는 듯 연방 새 물건들만 방바닥에  꺼내놓았다. 별의별 패물들이 연달
아 나왔다. 그리고는 어려운 내용의 편지가 들어있는 빳빳하고 큼직한 봉투 하나가 나왔다.
  "이것이 혼서(婚書)라는 것인데, 한문으로 쓰여 있으니 우리는 읽을 수가 없어. 여기엔 신
랑이 너를 아내로 삼겠다는 것과 또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변심하지 않겠다는 것이 쓰
여 있단다.
  그 다음엔 구먼 뚫린 동전 한꾸러미가 나왔는데, 무던이는 놀란 듯이 이것을 유심히 들여
다보았다.
  "이것은 그저 형식을 갖추는 것이야" 하고 어머니가 설명하였다.
  "진자 돈은 이 밑에, 이 수건 속에 있단다. 자  이제 모두 다시 집어 넣어라. 난 손님들한
테 가봐야겠다."
  사랑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그들을 대접해야만 했다.  그들은 모두 수압댁을 도
와서 집을 정리하고 도배도 같이 하고 청소도 같이 하였다. 그 밖에 농부도 한 사람 초대되
었는데 바로 이 사람한테서 얼룩얼룩한 비단으로 된 기다란 두  개의 등(燈)을 빌려서 대문
을 장식하였다. 이것은 행운을 가져오는 사람(함꾼)에게 장차 신부가 될 사람한테로 가는 길
을 가리켜준다는 의미로 매다는 등이었다. 이 모든 손님들은 함꾼과 그의 일행이 떠나갈 때
까지 쥐죽은 듯이 사랑방에 앉아 있었다.
  "참 잘됐어요" 하고 남자들이 어머니에게 축하를 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무던이가 모
든 것을 잘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무던이는 오늘 생전 처음 비단옷을  입어보았다. 
그녀가 대분가에 나타나자 울긋불긋한 등불에 반사되어 그 흰 모습이 어찌나 매력적이고 고
상하게 보였는지 몰랐다.
  
  반 년이 후딱 지나갔다. 정월달이 되자  이 조그마한 집은 활기에 넘쳤다. 수압댁은  매일 
밤중까지 바느질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전을 지지고 떡을 하고  집안을 닦아 냈다. 마을 아
낙네들은 수없이 들락날락하며 여러 가지 조언을 주기도 했다.  젊은 아낙네들은 가끔 신부 
곁에 모여서 장차 자기네들처럼 시집살이하게 될 신부에게 교훈이  되는 얘기를 해 주었다. 
저마다 다른 경험들과 새로운 교훈을 전해 주었다. 무던이는  이 아낙네들이 멋들어진 말투
로 하는 얘기를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또 묻지도 않았다. 시어머니 시
아버지가 주로 화제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모든 화제의 중점은 신랑에 대한 얘기였다.  여기
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의견들이 많았다. 즉 어느 신랑은  조용하고 명랑한 경치를 더 좋아하
는가 하면 또 다른 신랑은 폭풍이 몰아치는 밤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또 다른 신랑은 풀어
져서 흐르는 듯한 머리를 더 좋아하는가 하면 또 다른 신랑은 가리마를 잘 타서 반반히  밋
어넘긴 머리를 더 좋아했다. 다만 한가지 점에서만 의견들이 같았는데, 그것은 모두 젊은 남
편들이 하나같이 어리석고 자기 생각만 하며 어린애들처럼 칭찬이나 해야 좋아한다는  것이
었다. 어쨌든 간에 남편을 너무 호강시키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다.
  "그저 금방 네, 하지 말고 열 번을 거절하다가 한 번쯤 응해주란 말이야!"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비법들이 무던이에게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 왜냐 하면 이리로 
오는 아낙네들은 모두 가난한 농부의 아내들이기 때문이었다. 농부들은 살아가는 것이 아주 
단순하며 며느리가 마음씨만 착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명심해야 할 것이라곤 고작해야 좀 
세심하면서 공손하며 근면하고 검소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부자들은, 양반들은 어떨까?
  "어머니, 양반들은 어떻게 사는지 아세요?"
  어느 날 저녁 무던이가 물었다.
  :그건 네 스스로가 보게 될걸 뭐. 그저 공손하고 무슨 일이든지 먼저 물어보고 하면 돼."
  "그렇지만 제가 무슨 음식을 해야 하는데 혹시 할 줄 모르면 어떻게 해요?"
  "모든 것은 시어머니한테서 배우게 마련이란다."
  "배워도 할 줄 모르면?"
  "할 수 있을 테니 염려 말아라. 그런 것들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 해
도 마음씨가 착해야 하는 거야."
  "그건 우리들에게서나 그렇죠."
  "아니야.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야. 다만  그들은 느끼는 것을 나타내지 않을  뿐이
지.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절대로 너를 위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우선 시어머니  생각
부터 하고, 다음에 시아버지, 그리고 나서 남편 생각을 해라!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는 
마치 잘 뵈이려고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려서는 안 돼. 그리고  절대로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너보다 낫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
  드디어 어머니 곁에서의 마지막 밤이 돌아왔다.
  수압댁은 아직도 부엌에서 할 일이 많았다. 신부는 혼자 방안에 앉아 있었다. 내일이 잔칫
날이다! 무던이는 혼인식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하는 것을 가끔 듣기도 하고 또 보기도 했었
다.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다. 즉 신랑이 먼저 신부에게 절을 하고 또 신부가 신랑에게 절을 
하고 그러고 나선 신랑 신부가 함께 하늘에 절을 하였다.  다음에는 신랑 신부가 같은 잔의 
술을 마시는데, 이것은 그저 술잔에 스치는 것이지 정말로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나
면 신랑은 아버지나 후행(後行), 즉 이번에는 돌다리 아저씨에게 이끌려 사랑방으로 들어가 
대접을 받는다. 한편 신부는 여러 명의 아낙네들과 친척들,. 친구들과 함께 상(床)을 받아야
만 했다. 그리고 신랑 신부는 첫날밤을 신부집에서 보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일 저녁 신랑
을 여기서 맞게 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일까? 신랑이  신부가 옷 벗는 것을 
도와주고 등잔불을 세 번 불어서 끈다는데 그게 정말일까?
  그리고 그 밤이 지나가면 무던이는 신랑과 함께 시댁으로 가게 되고 그러면 그녀는 부잣
집 며느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머니는 이 방에서 혼자 주무시겠지.  한없이 
외롭게! 그리고 절약하기 위해 불도 때지 않으실 거야. 여기 이렇게 혼자 앉아서 식사도 혼
자 하시겠지! 그 누가 생선을 사오며, 그 누가 마당의 눈을 쓴단 말인가!
  그녀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또다시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방안을  둘러보
았다. 이부자리며 장롱이며 창문들이 보였다. 아, 이것이 정말 마지막 밤이구나!
  다음날에도 여전히 눈이 내렸다. 일봉은 사모관대를 하고 일행과 함께 나타났다.
  무던이는 예쁘게 치장을 하고  두 수모(手母)에게 이끌려  뜰로 나가 전안청(奠雁廳)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벌써 신랑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예식은 금방 끝나버렸다. 
  어느 새 저녁때가 되어 많은 손님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수압댁은 한참 동안 신부 방의 딸 옆에 앉아 있었다.
  :어머닌 오늘 밤 어디서 주무세요?"
  무던이가 물었다.
  "나야 사랑방에서 자지."
  "그 밖에 누가 또 집에 있어요?"
  "아무도 없다."
  "그이는 지금 어디 있어요?"
  "사랑방에 있어. 얘야, 이제 나는 나가야겠다. 신랑이 곧 올게다."
  "아니, 잠깐만 더 여기 계세요!"
  그녀는 어머니의 치마를 붙잡았다.
  "너 몹시 피곤하냐?"
  어머니가 물었다.
  "아녀요!"
  "그럼 불안하냐?"
  "아녀요!"
  "여기에 과일도 있고 꿀물도 있으니 혹시 신랑이 배고파 하거나 갈증이 난다고 하면 주거
라!"
  어머니는 일어섰다.
  :여기 계세요. 어머니, 제발 여기 계세요!"
  어머니는 자리를 깔아놓고 딸을 껴안았다가 슬며시 떼어놓고는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밖에서 어머니가 신랑과 얘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머니는 방문을 열고 신랑을 
들여보냈다.
  무던이는 일어서서 문 옆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큼직하고 시커먼  눈에 귀도 잘생긴 그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보다 키도 
훨씬 컸다. 이마가 훤하고 입은  자그마하며 의지적이고 영리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방 한가운데 서서 신부를 건너다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얼른 방바닥을 내려다
보며, 족두리를 벗어 손에 들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약간 망설이면서 그녀에게로 다가와 손에  들고 있는 족두리를 받으려 하자  그녀는 
힘없이 떨어뜨렸다. 그는 족두리를 문갑(文匣) 위에 놓고 그 옆에 앉았다. 그녀는 머리를 풀
어 땋기 시작했다. 일봉은 마치 머리를 같이 땋기나 하려는  듯 양손을 가볍게 이리저리 움
직였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하얀 모습에, 그녀의 얼굴에  손에, 주름잡힌 치마에 그리고 조
그마한 발에 번갈아 가며 멈춰 있었다.
  그렇다, 이 여자야말로 그가 뒤를 밟던 여자였다. 그 당시 그는 그녀를 아마 세 번짼가 네 
번째로 보았을 것이다. 그때 그는 무척 흥분해서 그녀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 가며 그녀
의 뒤를 밟았다. 그런데 오늘, 신부의 예복을 입고 전안청에 나타난 그녀는 전과는 아주  다
르게 보였다. 낭자머리의 그녀는 너무나 고상하고 너무나 엄숙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커
다랗고 우아한 연꽃봉오리… 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찍이 핀  해바라기와 같았다. 그러나 지
금의 그녀는 다시 온후한 얼굴의 옛날 무던이였다. 나무랄 데 없는 동그스름한 모습이며 부
드러운 귓볼이며 온화하면서도 생기있는 눈초리는  옛날과 꼭 같았다. 지금  그녀는 수수한 
비단옷 차림으로 그의 앞에 서서 땋아 내린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머리에 대고 있는 오른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금방 그에게서 손을 빼냈다. 그
러자 그가 당황해 했다. 그녀의 시선은  불안해 보였으나, 그의 크고 검은 눈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부끄러운 득 주저하면서 팔을 내밀어 그의 손위에 자기 손을 올려
놓았다. 그는 그녀의 조그마한 손을 다정하게 꼭 쥐었다.
  "앉으세요!" 하고 그녀는 거의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촛대 옆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눈을 감고 있었다. 무던이는 과일 쟁반 있
는 데로 가 과일 몇 개를  깎아서 그의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는 창가로  가 창구멍을 통해 
마당을 내다보았다. 눈은 벌써 그쳐 있었다. 그녀의 양손을 창에 놓았다가 다시 얼굴로 가져
갔다. 그러자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왔다.
  "당신은 나를 본 적이 없소?"
  "없어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을 자주 보았소. 당신이 나를 봐주기를  바라면서 가끔 당신 뒤를 따
르기도 했다오. 하지만 당신은 아주 드물게 우리 웃마을에 왔기 때문에 나는 노상 쓸데없이 
뽕나무 있는 데로 가곤 했다오."
  "우리는 누에가 조금밖에 없었는걸요" 하고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말했
다.
  그는 잠자코 한동안 서서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이마, 
머리카락, 양손을 쓰다듬고는 "잘자요!" 라고 말했다.
  그는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그녀는 꼼짝 않고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생각을 했을까, 아니면 잠을 잤을까?
  그의 숨소리가 높아지고 그의 얼굴이 방구석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가 않았다.
  그의 숨소리가 다시 조용해지자,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가 곧 다시 앉았다. 그가 몸을 움직
였다.
  "창가에 앉아 있는 게 춥지 않소?"
  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깜짝 놀라 움찔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서 잠자리에 들어가요. 그렇지 않으면 감기에 걸려요!"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창문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 문에 기대어 앉았다.
  눈빛이 점차 방 전체를 밝혀주었다. 닭이 세 홰나 울 때까지 그녀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어두운 마루로 나가 사랑방까지 더듬어 갔다. 안에
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밝지도 않았는데!"
  "조금만 어머니 옆에서 자고 싶어요!"
  어머니는 불을 켜고 딸을 껴안았다. 자기 자리에 뉘고 볼을 맞췄다.
  무던이는 눈을 감고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띈 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태양은 눈 위에 비쳐 반짝거렸다.
  정오경에는 벌서 신부를 태울 가마가 호피(虎皮)에 덮여서 대문 앞에 준비되어 있었다. 수
압댁은 신부를 이끌어 가마에 태웠고, 사위는 장모에게 작별을 고했다.
  "장모님, 제 처를 위해  베풀어주신 모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한평생 처의 행
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는 엄숙하게 말했다.
  "자네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애는  그저 아무 배운 것 없는  농부의 딸에 지나지 않았네. 
자네네 훌륭한 예의 범절을 잘 모르더라도 관대히 봐주게나!"
  수압댁은 그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가마가 들려지자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딸을 들여다  보았다. 무던이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싸고 울었다.
  가마가 집 모퉁이를 돌아가자 무던이는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 부디 안녕히 계세요!:
  
  강물은 꽁꽁 얼어 있었다. 가마꾼들은  강굽이를 따라 지름길로 가기 위해  여러 번 얼음 
위를 지나갔다. 이 길이야말로 무던이가 초라한 무명옷 차림으로 큰 바구니를 옆에 끼고 뽕
잎을 따러 수도 없이 다니던 그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네 명의 남자가 드는 가마에 
태워져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신부를 마중하러 나온 시댁의 하녀가 앞장을 섰고 가마 옆에는 신랑이 가고 뒤에는 어제 
신랑이 데리고 왔던 일행이 따랐다.
  몇 번이나 경사진 길을 올라가 뽕나무들이 서 있는 곳을 지나갔다. 이제부터 웃마을이 시
작되었다. 집집마다 아낙네들이 문 앞에 서서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가마는  시댁
의 커다란 뜰에 내려졌다. 입구의 층계로부터 시어머니가 마중 나와 신부의 손을 잡고 묵묵
히 집안으로 들어가 사당(祠堂)앞으로 신부를 이끌었다.  신랑 신부는 사당에 여러 번 절을 
하였다.
  "드디어 우리 집 사람이 됐구나!"  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다정히 말했다.  무던이는 
절을 하였다.
  "이분이 너의 시아버님이시다!"
  무던이는 또 한 번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그녀는 신부 방으로 안내되어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무거운 예복을 벗고 가벼운 비단옷을 입었다. 그리고  나서 친척 친지들의 상면식이 
시작되었는데, 마지막에는 가신(家臣) 일동과도 상면하였다. 그녀  자신은 별로 하는 일없이 
상석에 앉아 있었고, 주위에 연방 아낙네들이 떼를 지어 모여들어 경탄과 찬사를 보내곤 하
였다.
  드디어 손님들은 가고 네 사람만이 석양 무렵 커다란 안방에 모여 앉았다. 유난히 얼굴이 
큰 시어머니는 아주 쾌활하게 말을 많이 하였다. 그녀는 연방 자랑스럽게 무던이를 '새아기'
라 부르며 며느리의 감상(感想)을 묻곤 하였다. 시아버지도 며느리에게 여러 가지로 친절하
고 곰살궂게 굴었다. 그는 이미 반백이 된 구불구불한 얼굴의 수염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조그맣고 섬세하게 생긴, 아주 가냘픈 분이었다. 그는 아주 점잖게 말을 했고 여러 가지  낯
선 단어들을 사용하였다.
  "조금 후에 새아기를 제 방으로 보내 이틀간의 피로를 풀게 하라"고  그는 위엄있게 말하
였다. 그는 무던이를 바라볼 때마다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며느리가 마음에 든 확실한 증거
였다. 저녁식사 후 그는 며느리 앞에 서서 깊고 감격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네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하나 나는 네가 우리와 함게 행복하게 살
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잘 자거라!"
  무던이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건…."
  말하기 좋아하는 시어머니가 말했다.
  "우리가 굶지 않고 떨지 않는 것이란다. 암, 너는 굶고 떨 필요가 없지 않구! 자,  이제 가
서 쉬거라."
  무던이는 또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이런 모든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 밖에도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지 않았던가. "그저 묻는 말에나 대
답하라"고.
  그녀는 자기 방에 와 누워서 이불로 얼굴을 덮었다. 남편이 들어왔다.
  "오늘 나 여기서 자야만 하오!"
  그는 아내에게로 오는 것이 마치  금지된 일인 양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무던이는 그를 
바라보고 눈물을 닦았다.
  "당신 몹시 슬프오?" 하고 그는 당황하여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고 팔을 내밀자 그는 그 팔을 쓰다듬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함께 앉
아 있었다. 한참 후 그가 물었다.
  "당신 어머니 생각을 하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은 비록 작았지만 커다란 장롱, 비단 금침, 방석 등으로 잘 장식돼 있었으며 여러  폭의 
병풍이 방 한 귀퉁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저는 언제쯤 어머니에게 갈 수 있을까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열흘 후에!"
  "그렇게 늦게요?"
  "어쩌면 더 일찍 가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며칠 후에 어머니에게 가서 당신이 어
떻게 지내나 하는 것을 얘기하겠소."
  "저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당신이 아주 점잖고, 또 우리  부모님들이 당신을 아주 맘에 들어한다고.  그러나 당신이 
어머니만 보고 싶어하고 남편은 하나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무던이는 급히 자기 손을 남편  손에서 빼내고는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하고 말했다.
  그는 장롱 밑에서 신 한 켤레를 꺼내 가지고 왔다.
  "당신 이 신 한 번 신어 보겠소?"
  그녀는 오른발을 신 속에 넣었다.
  "맞아요! 어떻게 제 발 크기를 아셨어요?"
  "술집 아주머니가 당신의 신 한 켤레와 옷 한 벌을 가져왔다오."
  "그것들이 어디에 있어요?"
  "잘 모르겠는데. 아마 장롱 속에 있을 거요!"
  그녀는 장롱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세  부분으로 갈라져 있는 한 칸에는 그녀의  옷들이, 
서랍 속에는 패물과 주발 대접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칸에는 여러 개의 선반과 
서랍들이 달려 있고 문은 아래로 열게 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남편의 옷들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여기서 조그마한 꾸러미 두 개를 발견하고 그것을 열어보았다. 꾸러미 한 개에는 전
답 문서가 들어 있었고, 다른 꾸러미 속에는 그녀가 찾던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즉 거친 무
명으로 지은 여자 치마저고리 한 벌과 짚신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급히 그것들을 
다시 싸서 한 구석으로 던지며 "이것들을 장롱 속에서 빼버려야겠어요!" 라고  말했다. 남편
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몹시 창백하고 붉어보였다.
  "이것들은 당신이 아끼던 물건들이 아니오. 이것을 버려서는 안 되오!"
  일봉은 말하고 장롱 문을 닫았다.
  "저는 아무것도 가져온 것이 없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당신 것이오. 우리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당신 거란  말이오. 아
니, 보다 많은 것들이 당신 것이 되어야만 하오. 은으로  된 연못, 금으로 된 기둥들도 당신
을 위해서는 오히려 부족할 것이오."
  그는 그녀를 안아다가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무던이의  얼굴은 불같이 새빨갛게 되
었다. 그녀는 몸을 빼내려고 애를 썼고, 그는 그럴수록 그녀를 점점 더 꼭 껴안았다.
  "이러면 못써요!" 하고 그녀가 말하자,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저 오늘 바보처럼 보이지 않아요?"
  한참 후 그녀가 물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칭찬하고 나에게 금실 좋게 살 것을 바랐다오."
  "금실이 무어예요?"
  그녀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금실이란 두 개의 악기를 말하는데, 그 중 하나는  남자가 연주하고 다른 하나는 여자가 
연주하는 거라오. 만약 부부가 서로 정이 좋으면 그 두 악기는 아주 잘 조화되는 법이오."
  일봉이 설명했다.
  "그러나 저는 연주할 줄 모르는데요."
  그녀는 불안한 듯이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짓고 이부자리를 폈다. 그녀의 시선은 점점 수줍고 불안해졌다.
  "저는 오늘 아버님의 말씀도 전부 알아듣지 못했어요. 그건 나쁜 거지요?"
  "아니, 나쁠 건 없소!"
  "당신은 제가 똑똑하지 못하고 서투르다고 해서 내쫓지는 않겠어요?"
  "이제 자리에 누워요. 그리고 아무 걱정 말아요! 아무도 당신을 집으로 보내지는 않을 테
니까."
  그는 불을 껐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불을 켜고 남편이 눕자 불꽃을 응시했다.
  지금쯤 어머니는 무엇을 하실까?
  다음 날엔 일상생활이 시작되었다. 두 남자는 아침식사 때  나타나서 겸상을 받았고 한편 
무던이는 시어머니와 다른 상에서 식사를 하였다. 상들은 모두 작아서 두 사람만이 앉아 식
사를 할 수 있었다. 무던이는 부끄러운 듯 묵묵히 밥그릇을 바라보았고 일봉은 때때로 그녀 
쪽을 훔쳐보았다. 그는 아직 부모님 앞에서 그녀와 말할 용기를 갖고 있지 못했다.
  식사 후 두 남자는 일하러 가고 무던이는 그녀의 많은 옷들을 차례차례로 입어보고, 꿰멜 
것은 꿰매고 고칠 것은 고쳐가며 오전  내내 바느질을 하였다. 그리고는 점심식사, 식사  후 
또다시 바느질을 하였다.
  "네 시아버님은 옷에는 굉장히 까다로운 분이시란다. 그런  면에서는 좀 너그럽지 못하신 
편이지" 하고 시어머니는 말했다.
  "나는 가끔 네 시아버님께 옛날 공자님 얘기를 한단다.  한 번은 공자님께서 저고리를 외
로 입으셨는데 그 이유는 마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지.  그런데 다음 날부턴 공자
님의 3천명의 제자가 저고리를 외로  입고 나타나지 않았겠니. 그래  공자님은 왜 저고리를 
모두 외로 입었느냐고 물으셨지. 그랬더니 제자들은 선생님의 예를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했
단다. 그때 공자님은, 자기는 마나님이 저고리를 그렇게  지었으니까 그렇게 입었을 뿐이며, 
교양있는 남자는 자기 부인의 흠을 들추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단다. 우리 일
봉이는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단다" 하고 시어머니는 계속 말했다.
  "그저 약간 고집이 세고 가끔 무분별하게 될 때가 있을 뿐이지."
  이날 저녁 일봉은 한 떼의 마을 남자들에게  끌려갔다. 그들은 악기를 들고 와서 국풍(國
風)의 하나인 동상례(東床禮)를 치르기 위해 일봉을 술집으로 글고 갔다. 동상례는 혼인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의식이었으며, 이 의식을 통해서  신랑은 말하자면 결혼한 남자들 
틈에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노래를 부르며  악기를 두드리며, 이십여 명의 젊은  남자들은 
마을을 지나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 아주머니는 벌써 오늘 저녁의 행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었다. 모든 일의 지휘자는 볼이 넓은 사십 세의 농부였다. 그는 녹색 칠을  하여 
만든 큰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벽에 기대어 앉았고, 다른 남자들은  막대기나 부채를 들고 
신랑 좌우편에 자리를 잡았다. 신랑은 길고 얇은 명주 수건에  묶여 방 한 가운데에 앉혀졌
다. 드디어 유도 신문이 시작되었는데, 예를 들면 얼마나 자주 신랑이 신부와 입을 맞췄으며 
또 신부는 얼마나 자주 신랑과 입을 맞췄나 하는 등의 신문이었다. 만일 신랑이 한 번 대답
을 못하면 남자들은 매질을 암시하기 위하여 막대기나 부채로  탁탁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신문이 끝나자 술집 아주머니가 나타나 이 흥겨운 남자들을  대접했는데, 이것은 오늘 저녁 
신랑의 부모가 이들에게 한턱 내는 것이었다. 말술이 나오고 계속 고기며 생선 요리며, 구운 
닭이며 국수며 맛난 과일들이 쏟아져나왔다. 밤이 깊어갈수록 젊은  사람들은 신이 나서 노
래 부르고 장단 맞춰 춤도 추며 우스개 소리도 하며  부부간의 비밀을 폭로하기도 했다. 일
봉도 많이 마시고 자기 아내에 대해 얘기해야만 했다.
  자정이 넘어서야 일봉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내의 방 앞에 잠깐  동안 멈춰서서 몇 
번 깊이 숨을 쉬고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촛불이 켜지고 그가 들어서자 
무던이는 한 구석으로 물러나 앉았다.
  "동상례를 치르고 지금 돌아오는 길이오" 하고 그는  설명하였다. 그의 얼굴은 추위와 술 
때문에 빨갛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불안해하지 마오. 내 곧 나갈 테니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쩔 수 없이 마셔야만 
했소."
  그는 웃었다.
  "아무렴 당신도 친정에 가면 한 번은 차례가 올 거요.  그 때는 아낙네들이 와서 내게 한 
거와 똑같은 것을 당신에게 할거요."
  "아녀요" 하고 그녀는 말하고 음미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내게로 조금만 오구려!"
  그는 애걸하듯이 말하고 그녀를 구석에서 끌어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저항했다.
  "나가세요!"
  "좋아, 당신이 나를 내쫓는군!"
  그는 투덜거리며 사라졌다.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무던이는 부엌일을 떠맡았다. 그녀가 시어머니의 안내로 부엌에 들어서니 세 여자가 그녀
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불을 피지 않았니?" 하고  시어머니는 어린 하녀 복심이에게  물었다. 복심이는 얼른 
무던이를 흘끗 보더니 얼굴이 새빨게졌다.
  "저는 새아씨를 기다렸는걸요."
  "그런 일은 너도 할 수 있잖니. 우리 애는 불 피우는 일은 안 한다!"
  복심이는 겁이 나서 얼른 사는 나뭇가지 몇 개를 솔 밑에 밀어넣고 불을 피웠다.
  "이것이 두 남자들의 밥상이고, 여기 이  주발은 네 아버님 것이고, 그보다 조금  작은 이 
주발은 네 남편 것이다. 그리고 이 새 주발이 네 것이란다."
  시어머니는 설명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아씨, 달걀은 몇 개나 찔까요?"
  다른 누 여자 중 나이 어린 여자가 물었다. 무던이는  아직도 주발을 관찰하고 있다가 물
은 사람을 눈이 둥그래가지고 쳐다보았다.
  "어제는 달걀 다섯 개를 쪘는데 좀 적은 것 같았어요. 오늘은 여섯 개를 찔까요?"
  "그래!"
  무던이는 대답하고 그릇들은 상 위에 놓았다.
  "이 두 토막은 구을까요?"
  나이 어린 여자는 다시 물으며 가오리의 중간 토막 두 개를 그녀에게 내보였다.
  "그래."
  무던이는 또 말했다.
  다른 하녀는 고기 한 덩어리를 들고 와 그녀에게 내놓으며 끓여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무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부엌일이 계속되었다. 밥이 잣고 국이 끓고 생선도 구워졌다.
  복심이는 밥솥을 열고 무던이에게 숟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로 뭘 하라는 거냐?"
  무던이가 물었다.
  "밥이 다 되었나 봐주세요"
  "그래!"
  그녀는 대답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기껏해야 스무 번밖에는 쌀밥을 먹어보지 못했다. 수수밥이나마 항상 배
불리 먹을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었을까.
  드디어 그녀는 밥주걱을 건네받고, 복심이는 시아버지의 주발을 들고 그녀의 왼편으로 왓
다. 네 개의 주발에 밥이 담기고, 국그릇에 국이 담기자 복심이는 이제 다른 것은 자기 자신
이 돌봐도 된다고 말했다.
  무던이는 이제 처음으로 밥을 짓고 찬을 만들어 남자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일봉의 밥은 안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안채의 왼편에는 두 하인의 가족을 위한 행랑
이 있었고, 이 행랑채 옆에 일봉은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집 오른편에는 누에와 고치
를 위해 통풍이 잘 되는 방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런  모든 건축물에 대해 부던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관례에 따라 결혼 초 얼마 동안에는 안채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동상례가 지난 지  삼사 일 후 어느 날 저녁  늦게 일봉은 또다시 
아내의 방으로 와서 오늘 저녁 자기의 방을 한 번 구경하고 사람들이 잠든 후 그와 함께 아
랫마을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면?"
  무던이는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우리는 부끄러워 살 수 없을 거에요."
  그러나 그가 거듭 청했을 때 그녀는 드디어 승낙하고야 말았다.
  그녀는 춥지 않도록 옷을 단단히 입고 갈색 수건으로 머리를 싸맸다 불들이 모두 꺼지자 
둘은 발끝으로 방을 나가 길고 어두운 층계를 지나 댓돌을 딛고 뜰로 내려섰다.
  "오른쪽에 멍석들이 쌓여 있소" 하고 그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가만 가만히 정원 문을 열
고 그리고는 재빨리 바깥뜰을 지나 그의 방으로 왔다. 그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그녀를 밖
으로 이끌었다.
  "여기서 사람들이 자고 있소" 하고 그가 가만히 속삭였다.
  이젠 벽을 따라 집 모퉁이를 돌아섰다.
  "이제 담을 뛰어 넘어야 하오."
  그는 담을 뛰어넘고, 그녀는 그의 뒤를 따랐다. 드디어 바깥 세상이었다.
  "이제 이것이 아랫마을로 가는 길이오."
  그는 길게 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요?" 하고 그녀는 웃으며 물었다.
  "아, 좋아라!"
  그녀는 그에게 매달려 뛰었다.
  "조심해요. 저기 개울이 있소."
  그들은 또다시 뛰어넘었다.
  "저기 언덕 위로 갑시다."
  그들은 좁은 골짜기를 지나고 좁다란 나무다리를 건너갔다. 드디어  그들 앞에 하얀 평지
가  뻗어있었다. 나무들이 하나같이 하얀 눈에 덮여 있어 원경(遠景)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
도였다. 아랫마을이 차차 보이기 시작했다. 바다가 보이고 섬들이 보였다.
  눈이 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천천히 가요. 숨이 차 죽겠어요" 하고 무던이는 소리치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
녀의 얼굴은 추위로 빨갛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손을 잡고 계속 얼어붙은 강을 따라갔다. 눈송이는  점점 커지고 탐스럽게 떨어졌
다.
  그녀는 얼굴에서, 머리 수건에서, 어깨에서 눈을 털어내렸다. 그러나 그는 머리 위에 눈을 
그대로 둔 채 묵묵히 계속 걸어갔다.
  조용하고 하얀 눈 속에 덮인 밤길을 계속 걸어갔다. 온누리가 잠들어 있고, 아무것도 움직
이지 않았다.
  드디어 첫 번째 집이 나타났다. 술집 아주머니의 집이었다. 문 앞에 솥 하나가 눈에  함빡 
덮인 채 놓여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떠들썩하던 집이 지금은 마치 죽은 듯이 고요했다.
  계속 모퉁이를 돌아갔다.
  아직도 네 집! 모든 것이 죽은 듯이 고요했다. 몇 발자국 더 가서 그들은 멈춰섰다.
  오, 낯익은 문, 낯익은 층계, 이 위에  무던이는 그 얼마나 자주 앉아 있곤 하였던가!―그
들은 무던이가 아침 저녁 눈을 쓸어내던 마당을 지나갔다.
  그녀는 손으로 문과 창문들을 만져보고 기둥에 기대서서 울었다.
  
  그는 그녀를 해변가로 이끌었다.
  그들은 잠자코 새까만 해변가를 따라  걸었다. 눈송이가 해변가에 떨어졌다가는  곧 다시 
없어지곤 하였다. 그는 바위 위에 앉아 그녀를 끌어다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러자 그녀는  그
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얀 눈이 두 사람을 감싸 덮었다.
  
  "이젠 그만 집으로 돌아가요."
  드디어 그녀는 말하고 그에게서 자기 몸을 빼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녀를 끌어당겼다.
  "여기 이렇게 혼자 있으니 얼마나 좋소!"
  그녀는 그의 몸에서 눈을 쓸어내리고 자기 몸의 눈도 쓸어내렸다.
  "당신 아직도 어머니가 보고 싶소?"
  "아뇨!"
  잠시 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저는 겁이 나요."
  "겁? 뭣 때문에?"
  그들은 마치 밤을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조용조용 이야기했다.
  "저는 꿈을 꿨어요. 제가 나비가 되어 어느 정원을  날아다녔는데 거기가 어딘지는 잘 모
르겠어요. 그때 당신이 와서 저를 잡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당신의 아내이니 저를 그냥 
날게 해달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리기에 보니까 술집  아주머니였어요. 
그리고 저는 갑자기 제 옛날 방에 앉아 있지 않겠어요. 저는 혼인을 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
이 어린애 장난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슬펐소?"
  "네, 참 슬펐어요. 그리고 잠이 깨자 제가 쫓겨나서 다시 어머니에게로 가야만 되는 게 아
닌가 하고 겁이 났어요."
  그는 그녀를 꼭 껴안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잘 모르겠소."
  "그럼, 나쁜 꿈에 틀림없나 봐요. 당신은 그러고 보니 어제 저를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어
요."
  한참 후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자주 내가 당신을 봤다구. 나는 몰래 당신을 볼 수밖에 없다오.  왜냐하면 어머니
가 내 시선과 마주치면 아주 야릇하게 미소를 지으시기 때문이지. 나는 어머니 보기가 부끄
럽소. 나는 또 다른 사람들이 내가 당신에게 반했다고 말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부부가  너
무 빨리 정이 들면 오래도록 행복하게 못 산다는 말도  있다오. 우리가 단 한번만이라도 단
둘이 있을 수만 있다명, 그러면 나는 당신을 하루 종일이라도 바라볼 수 있을 텐데!"
  드디어 귀로(歸路)!
  또다시 같은 길, 같은 정적, 같은 침묵이었다. 팔에 팔을 끼었다.
  여기선 아무도 그들을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다
리를 건너고 골짜기를 지나갔다.
  "나는 그 꿈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 하고 그는 갑자기 말했다.
  "어디서요?"
  "우린 아직 완전히 결혼을 한 것이 아니오!"
  "무슨 일을 또 해야만 하나요?"
  그녀가 급히 물었다.
  그는 잠자코 있었다. 한참 후 그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한 번 한 이불 속에서 자야만 해요. 그러면 그 꿈은 효력이 없어질 것이오."
  "그래도 되나요?" 하고 묻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려왔다. 그들은 계속 걸어갔다.
  "내일 내가 당신에게 가도 되겠소?"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는 재빨리 다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내일 말고 사흘 후에 오세요!"
  가만가만히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내의 방문 앞까지 왔다.
  "아니, 모레 오세요. 사흘 후가 아니고."
  그녀가 속삭였다. 그는 그녀 곁을 떠났고, 그녀의 신발의 눈을 털었다.
  다음 낳에 무던이는 시어머니와 함께 누구를 방문하게 되어 있었다.
  인근 마을에 육십 세의 종조모(從祖母) 한 분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이십 년 전부터 불수
의 몸으로 누워 있어 방문객이 올 적마다 기뻐했으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찾아보지 못하면 
무척이나 노여워하였다. 그녀는 눈도 어둡고 귀도 먹었으나 모든 것을 알려고 했으며.  일봉
의 혼인에 대해서도 자세한 것을 알고 또 친척이 보고 싶어 무척 초조해 하였다. 이 종조모
에게 무던이는 가야 했던 것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흰 저고리에 녹색 치마를 입으렴!" 하고 시어머니가 명령하였다. 무던이는  치마저고리를 
입어 보았다. 그런데 옷들이 너무 커서 빨리 고쳐야만 했다.
  "그 옷이 네게 퍽 잘 어울리니 오늘은 다른 옷이 필요없겠다. 내가 얼마나 예쁜 며느리를 
맞아들였나 하는 것을 그 노인이 보셔야지."
  무던이는 얼굴을 붉혔다.
  "자, 여기를 조금 좁히고, 거기는 조금  줄여라. 그래, 이제 잘 맞는구나. 아니,  조금만 더 
줄이렴. 그래 이제 됐다. 네가 이 옷을 입으니 어쩌면  그렇게 이뻐 보이니. 너를 맞은 것이 
무척 자랑스럽구나!"
  일봉이가 나타났다. 그는 여자들 앞에 서서 일감을 바라보았다.
  "서방님, 뭘 원하십니까?"
  그녀는 근간 아들에 대해서 가끔 존댓말을 썼는데, 그것은 물론 농담이었다. 그러나 그 농
담 속에는 장성한 아들을 가진, 그리고 아름다운 신부를  맞아들인 아들의 어머니로서의 긍
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아들은 모든 교양 있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이 어머니에게 까듯이 
존댓말을 썼다.
  "가마를 부를까 어쩔까를 어머니에게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아니, 그만두어라. 우린 걸어갈 수 있다.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그밖에도 그  애는 나와 
함께, 이 시어머니와 함께 간단 말야. 설혹 사람들 눈에 띈다 해도 나쁠 게 없다. 모든 사람
들이 그 애를 봐야지."
  일봉은 미소를 짓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거기까지 가시려면 길이 퍽 미끄럽고 위험한 걸요.  제가 같이 가지 않아도 되
겠습니까?"
  "우린 복심이를 데리고 가겠다. 너는 같이 갈 필요가 없어."
  일봉은 잠자코 서 있었다.
  "너희들처럼 젊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함께 외출하는  것은 그리 권고할 만한 일이 못  된
다"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너희들은 아직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 거다. 그리고 또 아내 방에도 너무 자주 가지 말
거라!"
  아들이 사라질 때 어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
  "그 애는 벌써 네게 상당히 반했구나" 하고 시어머니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좋은 일이지. 그렇지만 너무 서둘러서는 안 돼! 커다란 독을 단번에 비울 필요가 없
듯이 평생을 두고 서서히 해야 하는 법이야!"
  무던이는 잠자코 바느질만 하였고 시어머니는 그녀 옆에 앉았다.
  "그 애는 제 어미가 제 처와 함께 외출하는 것을 기뻐해야 할 거야. 나는 그런 행복을 갖
지 못했었단다. 나는 어디든지 혼자서 가야만 했지. 그건  못할 노릇이었다. 우리 둘 외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어머님이 혼인하셨을 때는 아버님 혼자뿐이셨나요?"
  "그럼, 단 혼자였지. 나는 모든 손님들을 혼자서  접대해야 했고, 혼자서 밥하고 바느질해
야만 했단다. 모든 것을 첫날부터 혼자서  해야만 했었어. 아무도 나를 치장해 주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예쁘게 해주지 않았단다."
  "그렇지만 그렇게 혼자 있는게 분명 좋았을 거예요."
  오, 하느님! 그녀는 무슨 말을 그렇게 했단 말인가!
  "너는 시어미 없이 혼자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하니?" 하고, 모욕을 당해 창백해진 시어머
니가 물었다.
  자기가 한 말에 놀라 무던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창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시어머니 쪽
을 건너다보기도 하였다.
  "내가 네게 그렇게도 짐스러우냐?"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으나 분명히 한 말이었다.
  새색시는 잠자코 절망적으로 옷 주위만 찌르고 있었다.
  "만일 남편과 함께 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으면  그렇게 하거라. 네 마음을 이해는 하겠
다. 다만 그렇게 젊은 부부가 공공연히 남의 앞에 나타내  보이고 부끄럼 없이 부부가 도취
되는 것이 볼품 사나워서 그렇지. 교양 없는 사람들이나 그런 짓을 하는 거란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니예요." 하고 무던이가 말했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괴로운 침묵이었다.
  그녀는 어쩌면 그렇게도 경솔할 수가 있었을까! 그녀는 물론 하루 종일 그녀를 안고 사랑
스럽게 바라볼지도 모른다고 한 일봉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와 단둘이 있어서 무
엇이든지 그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몹시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어떠했나! 그녀는 며느리를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다. 어디든 며느
리를 내보이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녀는 얼마나 며느리에게 다정했던
가.
  며느리를 위해 반년이나 밤낮으로 바느질을 했으며  며느리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것이  퍽 
행복했다. 그런데 이런 시어머니를 무던이는 그 얼마나 마음 상하게 했는지.
  무던이는 울었다. 그녀는 시어머니에게로 가서 마치 어머니의 위협하는 눈길로 응석을 달
래보려는 어린아이처럼 시어머니를 껴안았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촌 여자예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그래, 괜찮다. 울지 말아라!"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여러 번이나 무던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는 정말로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녀요! 저는 어머님이 이해하시도록 명료하게 말
씀드릴 수 없어요. 그렇지만 저를 믿어주세요. 정말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녀요."
  "그래 그래. 이젠 됐대두."
  시어머니도 같이 울었다.
  종조모 방문은 다음으로 연기되었다.
  침묵 속에서 이날 오후가 지나갔다. 저녁식사 후 무던이는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오
랫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나 이리저리 서성거리다
가 다시 자리에 누웠으나 곧 다시 일어나 복심이가 있는 부엌으로 갔다.
  "서방님을 내게로 좀 오시라고 해라!"
  일봉이 방안에 들어왔을 때는 무던이는 방안에 없었다. 그는 불을 켜고 어째서 그녀가 자
기를 불렀나 하는 이유를 찾기라도 하려는 듯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에 변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병풍의 그림들만이 어스름한 가운데  깜박거리는 불빛에 비쳐 은같
이 빛나고 있었다. 그것들의 일부는 풍경화, 일부는 동화 속에 나오는 그림들이었다. 일봉의 
눈길은 여인의 옷을 가지고 높은 바위 뒤로 사리지는 어느 청년 위에 못박혀 있었다. 옛 전
설에 의하면, 이 나무꾼은 한때 선녀들이 높은 산에 내려와 목욕하는 것을 볼 수 있는 행운
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는 그들의 옷 중 하나를 훔쳐서 감췄다. 목욕 후 선녀들은 다시 하늘
로 올라갔는데 그 중 한 선녀는 옷을 찾지 못해 지상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그 선녀는 그 나무꾼의 아내가 되었다. 억지로 빼앗은, 그러나 아름다운 행운이 아닌가.
  무던이가 들어왔다.
  "당신 오늘 제 옆에 계실 수 있겠어요?" 라고 그녀가 물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고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한밤중 세 시에 커다란 눈덩이가 지붕에서 뜰로 떨어졌다. 그는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내
다보았다. 그때 무던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 위로 몸을 굽혀 그녀의 얼굴을 들여
다보았다. 그녀는 자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한번 중얼거리더니 이번엔 슬픈  목소리
로 커다랗게 어떤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우물아!"
  일봉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 불을 켰다. 무던이는 눈을  떴으나 여전히 꿈을 꾸고 있었
다.
  "우물아!" 하고 그녀는 다시 한 번 불렀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 무슨 꿈을 꾸오?"
  "네, 그가 죽었어요."
  "도대체 누가 죽었단 말이오?"
  무던이는 옆으로 돌아누워 불을 보고 남편을 보았다. 그는 반쯤만 이불을 덮고 그녀 옆에 
앉아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방 안을 죽 둘러보았다.
  "저는 꿈을 꿨어요. 우물이 벼랑 끝 바위에서 물에 빠져 죽는 꿈을요. 우물은 바위에 앉아
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밀물이 들어오니 빨리 해변가로 오라고 그에게 말을 했지
요. 그런데도 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벌써 깊어진 물  속에 뛰어들지 않겠어요? 두 번이나 
그는 물을 마셨어요. 저는 그가 갑자기  파도에 밀려 멀리 떠내려가는 것을 똑똑히  봤어요. 
저도 뛰어들려고 했는데 할 수가 없었어요. 무엇이 저를 꽉 잡아당기더군요. 저는 굉장히 힘
이 들었어요."
  "당신은 그가 그렇게도 좋소?"
  "네, 그가 아주 좋아요. 저는 무척 그와 혼인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그의 부모를 찾아갔던 일이며 그와 함께 놀던 일이며 또한 그와 함
께 잔 일 등은 계속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때에 그녀는 일봉이  아주 창백해져 꼼짝 않고 그
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갓 꿈에 지나지 않을 테지!" 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었
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남편을 바라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점점 커
졌으며 놀라움이 깃들였다.
  "왜 그러세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그는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
  "지금 뭘 하시려고 그래요? 가시려고 그래요?"
  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문께로 걸어갔다.
  무던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그녀의 몸을 한번 흘긋 쳐다보
았다. 그러자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그의 손을 놓으며 자리 위에  털썩 주저앉아 사라지는 
남편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전신이 떨렸다. 그녀는 이제야 아주 
큰 위기를 알아차린 듯했다. 그녀는 옷을 입고 찬물 속의 사람처럼 떨었다. 그녀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남편은 보이지가 않았다. 뜰에는 눈이 하나 가득  쌓여 있었다. 연방 하얀 눈덩
이가 지붕으로부터 떨어져 땅 위에 부서지곤 하였다.
  그녀는 방을 나가 어제와 같이 어두운 마루를  지나 불이 켜져 있는 그의 방으로 서둘러 
갔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가요?"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덜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아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말 좀 하세요. 저는 당신의 아내에요!"
  그러자 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왔다. 그 역시 떨고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그놈을, 내  순결한 사랑의 행복을 뺏아간  그놈을 죽이고 말 
테야!"
  그녀는 그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아니, 당신 무슨 말을 하세요!"
  "놔요. 그리고 그놈에게로 가시오. 결혼 전에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그  문란한 학교
로 말이오!"
  그녀는 팔을 떨어뜨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부들부들 떨며 이부자리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어머니, 어머니…" 하고 그녀는 속삭였다.
  
  비바람이 불고 좀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지붕으로부터 끊임없이 방울방울 눈이 녹아 
떨어졌다. 일봉은 식사 때 나타나도 말이 없었고 곧 자기 방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시어머니
는 친절했으나 차차 말이 적어지고 자주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는 아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아내를 쳐다보지 않는 반면에 아내는 때때로 
아들을 건너다보았다.
  "너 혹시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그 애에게 얘기했니?"
  어느 날 저녁 시어머니는 남자들이 방을 나가자 무던이에게 물었다.
  무던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너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니?"
  무던이는 잠자코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도 캐어물어 보았으나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
했다.
  아버지는 아무런 눈치도 패지 못하였다. 그는 아주 활기  있고 만족스럽게 비단 시장에서
의 좋은 전망에 대해서 집안 식구들에게 얘기했으며, 무던이를  바라볼 때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약간 피로해 보였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른봄 온화한 공기 탓이려니  생각했
다.
  그러자 어느 날 전례 없던 일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늘 수줍어만 하고 스스로 무엇을 말할 용기를 갖지 못했던, 또 일봉이가 쳐다보
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던 무던이가 식사 후 두 남자들이 방을 나가려 하자, 문 있는 데로 
가서 섰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서 있는 남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 당신과 할 얘기가 있는데 응해 주시겠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마술에 걸린 듯 아들은 거기 서 있었다.
  "나는 당신과 아무것도 할 얘기가 없소!" 하고 그는 말했다.
  "좋아요… 가세요!"
  그녀는 말하고 길을 비켜주었다.
  
  이날 일봉은 아무에게도 그가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양친의 집을 떠나버렸다.
  숨막히는 듯하고 괴로운 나날이 지나갔다.
  아버지는 다시는 안방에 나타나지 않았고,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어머니의 미소는 사라졌
으며 아무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일봉을 찾기 위해 심부름꾼을 내보내기도 하
였다.
  두 달 후에 일봉이가 어느 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우린 이젠 볼장 다 봤구나!" 하고 어머니가 한숨지었다.
  "그 녀석 고집은 당할 수가 없어."
  어머니는 남편더러 아들에게로 가서 그를 데리고 오라고 청하였다. 아버지는 갔으나 혼자
서 되돌아왔다. 다음에는 어머니 자신이 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날이 따뜻해지고 땅이 갑자기 녹았다. 나무줄기에는 물이 오르고 땅에서는 새싹이 돋아났
다. 강남갔던 제비들도 돌아왔다.
  
  "너 언제 한 번 네 어머니에게 가지 않겠니?"
  "싫어요."
  "벌써 석 달이 넘었는데."
  "저는 그이 없인 안 가겠어요!"
  "그 애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제가 없으면 돌아올까요?"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1"
  "좋아요, 어머님! 어머님은 아드님을 다시 찾으셔야죠."
  
  저녁 늦게 무던이는 조그마한 보따리 하나를 팔에 끼고 자기 방을 나왔다. 시어머니는 벌
써 자리에 든 지 오래였다. 그녀는 잠시 시어머니 방에서 머뭇거리다가 집을 나섰다.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사내아이들 둘이 길에서 그녀를 보았을 뿐이다. 그녀는  돌
아서서 다시 한 번 커다란 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수척하고  창백한 얼굴에 한 가닥 붉은 
기가 떠올랐다.
  
  날이 어두었다. 흐린 강물만이 이른 봄 밤에 희미하게 빛났다.
  하얀 물체는 계속 아랫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가끔 길에 앉아 쉬었다.
  비는 길 위에 강물에, 그리고 힘없이 걸어가는 외로운 형체 위에 후두둑 떨어졌다.
  아랫마을에는 모든 것이 잠들어 있었다. 다만 읍내에서 밤늦게  돌아오던 여인 하나가 캄
캄한 밤, 비를 맞으며 오래도록 꼼짝 않고 수압댁의 댓돌 위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다음 날에는 어떤 여인의 시체가 강물에 떠내려갔다는 소문이 났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물이 오른  뽕나무 잎들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가볍게  움직였다. 
아랫마을에서는 김을 매고 또 추수도 하였다. 밀물 썰물이 교차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늙어가는 과부 수압댁의 생활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녀는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었
고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었다. 그녀의 사랑하는 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한밤중, 그녀가 고단해 잠이 들면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에게로  와 연약한 목소리로 속삭였
다.
  "어머니 화내지 마세요. 제가 내일 고기 사올게요."



    실 종 자
  황색 사과
  1910년 8월 28일, 일본의 군인이며 정치가였던 데라우치(데라우치 마사다케. 1852∼1919. 1910년 당시 초
대 조선 총독)에게는 대단히 중대한 문서가 전달되었다. 이 문서에 의해서 일본 제국은 22만 평방킬로미터
에 1300만의 인구가 증가되었고, 장기간에  걸친 중(中)·로(露)·일(日) 삼국간의 전쟁은 일본에  유리하게 
종전되고 말았다. 드디어 '황색 사과'를 따도 되는 사람은 바로 데라우치였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사람들이 
한반도를 일본색으로 칠할 것이 아닌가!
  데라우치 장군은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고, 자기가 목표하는 정책이 성공된 데 대해서 광희(狂喜)에 빠
져 날뛰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머리를 끄덕이면서 의미 깊은 문서를 받았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마음속으
로 그는, 이러한 출정(出征)으로 인해 정치적인 무대에 있어서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날지 모르는 세력을 상
상해보았던 모양이다.
  미국은 이미 오늘날 어떤 일이 발생했나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영국 역시 일본의 이러한 행위를 예측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열강국들은 이 일에 대해서 도대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인가?
  그는 동경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생각해보았다.  이 국내의 정치가들과 당원들이 한국에 관해서 
도대체 뭘 알고 있을까! 어쩌면 한국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한국과 통
합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많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역사 깊은 문화국을 식민지화하다니"라
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데라우치는  물론 이러한 의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동경에는 사실상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예술과 종
교의 숭고한 발상지로, 이러한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이상주의자들이 한국의 현실정을 목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국민의 대부분이 불결하고 가
난하게 살고 있으며, 옛날 벼슬아치들은 국민들을 억압하는  데 자기네의 권력을 남용하고, 왕가(王家)라는 
것을 사욕을 채우고 치부만을 생각하는 배반자, 매수자, 환관, 궁녀, 무당들이  모여드는 수용소가 돼버리지 
않았는가! 이렇게 몰락해가는 나라에 대해서 사람들이 도대체 존경심을  가질 수가 있을까? 일본이 유럽의 
문명을 도입, 현대식으로 무장된 나라로서 강화되어 한국을 지배했다는 사실이 한국을 위해서는 차라리 좋
은 일이 아닐까?
  데라우치의 얼굴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길이 없었다. 이마가 툭 튀어나와서 그런지 
무서움을 모르는 표정이었고, 가늘고 긴 눈은 더 커지지도 않고 작아지지도 않았다. 그저 눈꺼풀로 덮인 검
은 눈동자만이 서서히 좌우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이 무시무시한 사람이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이 전율과 
공포심을 갖게 되었으며, 더욱이 자기 나라를 얼마 되지도 않는 일본 은행권으로 팔아먹은 옛 한국의 대신
들이 제일 불안해 하였다. 반일적인 자기 아버지의 자리에 강제로  앉게 된 임금은 너무나 어려서 여러 가
지 면에 밝지 못했기 때문에 이날  밤에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3년 전부터 정치권을 박탈당해서 궁정에 감금되어 있는 임금의 부친님도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
다. 국회도 없고 방위 조직도 없는 실정에 국민들인들 무엇을 알 수 있었겠는가?
  
    새로운 운명권
  서울 거리는 조용했고, 흰옷을 입은 남자들은 가게에 쭈그리고 앉아 참외를 먹으면서  장기도 두고, 수확
이며 저자와 장사에 대해서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 가보아도 조용할 뿐이었다. 그러 일본 총독 관저 
근방과 일본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조그마한 시구(市區)에서나 사람들이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는 쉴 새 없이 이리저리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고,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에 관
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서로  의논들을 하고 있었으나 모두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였
다.
  데라우치란 이런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1300만의 한국민을 아무런  혼란 없이 쉽사리 새로운 운
명권으로 이끌어 넣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이 사실이 국민들에게 점차로 알려지기 전에 모든 보안 조처까
지 철저하게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주 비밀리에, 서서히 그리고 안전하게 옛 한국의 관리들과 권력층들이 현대식으로 교육받은 일본 사람
들로 대치되어갔다. 구식 학교들은 모두 폐교되고  새로운 일본식 학교들이 생기를 띠게  되었다. 오래되고 
비좁으며 지저분한 골목길들이 넓혀졌고, 나지막한 집들은 새롭고  현대식인 건물들을 짓기 위해서 철거되
었다. 얼마 있자니 비좁고 꼬불꼬불한 산길이 있던 자리에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넓은 신작로가 생겨났
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뀜에 따라 일본인 기술자, 상인, 관리 그리고 군인들의 수도 점차로 늘어났다. 도시의 
중심가는 일본식으로 변모해가는 반면에 한국 사람들은 변두리로 밀려나갔다.
  국가의 모습이 달라져갔다. 현대 문명의 새로운 서양 사조가 전통깊은 아시아에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그래도 이 나라에는 새로운 집권자에게  반대하여 불만을 품고 국민들을  선동하려는 층도 얼마 있었다. 
그 중에는 구 한국군이었던 소위 '자유군(自由軍)'도 있었는데 이것이 강제로 해산되자 그들의 일부는 산으
로 은신한 다음 숨어서 반일 투쟁을 하였다. 그들은 이 새 위정자들이 한국을 위해서 무슨 좋은 일을 하겠
다는 것인지 도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폭동을 일으키는 군중들은 국민과 
새 집권자에게 끝없는 불안과 손해를  초래케 하였다. 이 사람들은  비참하게 살해당해야만 했으니 이것은 
실로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이런 비행을 시비할 수는 없었다.
  나머지 국민들은 아무 걱정 없이 온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옛날의 한국적인 생활 방식에 집착
하여 있으면서 소를 몰고 밭갈러 갔고, 낡아빠진  배를 타고 고기잡이 나갔으며, 농토에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는 가을엔 추수를 하였다. 그들은 아무리 어려운 일을 할 때라도 노래를 즐겨 불렀고,  아무리 작은 축
제라도 춤을 췄으며, 산에서 장작을 지고 내려올 때면 북을 둥둥 쳤고, 달이 떠오르면 피리를 불곤 하였다. 
그들의 가옥이 만약 이웃 침략자들에 의해서 파손되면 투덜거리기도 하고 욕지거리도 했을지 모르나 곧 흥
분했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양보하여 다시 조용히  처자들과 웃으며 살기 위해서 안정 지역으로  이사를 했
다.
  이 얼마나 진기한 사실들인가!
  저 위대한(?) 데라우치는 백의 민족인 한국  사람들이 아무 반항 없이 가만히  있는 것에 대해서 기분이 
좋은 나머지 심지어는 어린애 같은 한국 국민들에게 무언의 동정심까지 갖고 있었다.

  달빛이 비치는 바다의 머나먼 곳에서 나지막이 들려 오는 뱃노래가 조용한 가을밤에 구슬프기 짝없었다. 
멀리까지 뻗은 지평선 위로는 안개가 자욱하였고, 가까이  있는 '용지(龍池)'의 만(灣)에는 파도가 아름답게 
번쩍거렸으며, 그 물이 얼마나 맑은지 바닥까지 환희 들여다보였다.
  배 한 척이 서서히 육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쌀가마니와 다른 곡식을  실어서 육중하게 보이는 이 
배는 새벽이 돼서야 암벽 많은 경사의 돌출부에 정박했다.
  가을이 되면 많은 그런 배들이 지주에게, 즉 재산을 논과 수수나 보리 밭에 투자하여 소작인과 농부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는 부유한 도회지 사람들에게 농사 지은 것을 싣고 오는 것이었다.
  지금 막 도착한 배에서는 몇몇 남자들과 동반하여 그 지방 여인들이 흔히 입는 흰옷을 걸친 50세 가량의 
부인이 내렸다. 이 부인의 키는 그저 중간 정도였고 둥글둥글한 얼굴은 창백하고 몹시 피곤하게 보였다. 얼
굴을 보면 그렇게 미인은 아니지만 그녀의 용모와 몸짓에서는 여성다운 품위가 넘쳐흘렀다.
  그리고 이 품위야말로 항상 아름다운  마음씨와 한국 대지주의 부인들에게 알맞은  아주 특수한 우미(優
美)를 지니고 있었다.
  이 부인은 자신의 농토에서 수확물을 싣고 온  민 부인(閔夫人: 남편의 성을 따서 붙여진  호칭이다)이었
다. 이 비싼 수확물을 한 가마 한 가마씩 길가에 미리 대기시켜놓았던 소달구지에 잔뜩  실은 후, 언덕위를 
돌고 땅이 매우 융기된 곳과 경사진 곳을 지나서 '남문내(南門內)'라고 불리는 시구(市區)까지 왔다.
  이곳이 바로 지주의 부인이 살고 있는 집으로서 나지막하지만  제법 큰 집이었다. 공간의 부족을 모르고 
사는 아시아 사람들은 그저 단층집을 짓고 살았지만 그  대신에 폭으로 따지면 퍽 낭비적인 건물들이었다. 
비좁은 안마당 주위는 가족들이 주로 살고 있는 곳으로 마치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바라크로  둘러싸여 있는 
원과 같이 되어 있었다. 이 집에는 하인들과 손님을 위한  방이며 마구간 그리고 온갖 곡물을 넣어두는 곳
간도 있었다. 그래서 이 집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큰 대문을 지나서 안대문으로 들어가 중간 마당을 지나가
야 했으며, 이 안대문을 지나면 그곳은 가족들이 생활하고 활동하는 곳이었다.
  방이 여러 개 있는 이런 집들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평평하게 세워져 있었다. 산에서 내려
다보면 기와 지붕을 올린 이런 집들이 있는 도시는 마치 골짜기에 둘러싸여 있는 고요한 바다처럼 보였다.
  민 부인은 곡식을 싣고 온 후 쌀가마니가 모두 제대로 보관돼 있는 가를 살펴보기 위해  하루 종일 동분
서주하였다. 그녀는 이 곳간 저 곳간으로 왔다갔다하면서 다른 농토의 수확물들도 모두 제대로 도착됐는가
를 하나하나 확인하여보았다. 도시 주위의 농토 넷은 이 부인의 소유지였으며, 그 중 단  한 농토만을 자기
가 손수 관리하였다. 그것은 토야(土野)라는 농토인데  이 부인이 이곳에 애착이 제일 많은  이유는 출생한 
곳도 성장한 곳도 모두 이곳인데다가 그곳에는 아직도 친척들이 여러 분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집은 오늘 아주 활기 있어 보였다. 지주 부인인 이 민 부인에게 이런 저런 간청을 하기 위해서, 또 수
확을 알리는 관리인과 농부들이 여러 명 찾아와서 손님 방들이  모두 꽉 차 있었다. 그녀는 매우 피곤했으
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마음이 흐뭇했으며, 그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받으면서 응대하느라고 정신없이 
바빴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에게 기탁된 집안일을 느그럽게 처리하는 데 대해서 매우 자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
다.
  아시아에서는 그 집이 얼마나 부자인가 하는 것도 물론 돈이 얼마나 많은가로서도  측정되었지만 그것보
다도 더 중요한 것은 집이 얼마나 크며, 하인을 몇이나 되며, 몇 명이나 유숙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기준
이 되는 때가 많다.
  그녀는 청소부인 원식이가 낙엽을 쓸고 있는 마당을 재빨리  왔다갔다하면서, 말을 돌봐야 하는 방 노인
이 보이지 않아 그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이 영감이 또 술 마시러 갔니?"라고 민 부인은  다섯 살 때부터 이 집에 와서 이제 스무  살이 된 구월
(九月)이라는 하녀더러 물어보았다.
  "아마 그런가 봐요, 마님. 좌우간 노상 마시거든요."
  "이 영감 참 불쌍해 죽겠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왔으니 인제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
하는 모양이지"라고 민 부인은 투덜거렸다.
  방 노인은 아주 성실한 일꾼으로 이 집에 온 지도 20년 이상이나  되며, 방 노인 부부는 이 집에 가족으
로 숙소와 양식까지 제공받으면서 이 집에서 일해온 것이다. 이  방 노인 내외는 이 집이 부유해지는데 공
로가 아주 많기 때문에 좀 나쁜 데가 있어도 해고당하지 않고 줄곧  이 집에 붙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늘 술에 취해 다른 사람들과 싸움도 하고 심지어는 주인 마나님이 신경을 별로 쓰지  않으면 자기 마
누라를 마구 패기도 했다.
  이 집에는 딸린 가족이 또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김씨  내외였다. 이 사람은 주로 섬세한 재간을 요하는 
일을 맡아서, 도배를 한다든지 문 창호지를 갈아 바른다든지 돗자리를 엮고 수리하는 일 등을 해왔다. 그런
데 이 김씨가 한 달 전부터 병이 나서 아무 일도 못 하고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김씨 부인은 부엌에
서 밥짓는 일을 맡아 했다.
  별로 길지도 않던 가을이 어느덧 거의 다 지나가버렸다. 햇볕은 이제 그렇게 뜨겁지도 않고 날개같이 뻗
은 지붕 위로는 미광이 비칠 뿐이었다. 민 부인은 지나가다가  아파서 누워 있는 김씨의 방에 들어가 병세
가 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저 그래요, 마님" 하고 아파서 누워 있던 젊은 김씨가 대답했다.
  "아마도 제가 이 집에서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양심상 밥을 거저 먹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도 자네 처가 우리 집을 거들고 있지 않은가."
  "아이고, 제 처 말씀입니까?"하고 끙끙거렸다.
  "제 처는 저를 아주 못할게 해요, 마님. 어제두요, 화가 잔뜩 나 있었어요. 저를 못살게 하면서 돗자리 두 
개를 어서 엮으라지 않아요. 저더러 게으르다는 겁니다, 마님."
  "어디 내가 한 번 자네 처를 만나 얘기를 해볼게" 하고 민 부인은 김씨를 위로하고 나서 밖으로 나가 김
씨 부인이 있는 데로 갔다.

    구월이의 진심
  민 부인은 밤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렸으므로 몹시 피곤해 조금 쉬려고  하다가 이제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된 아들 수심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월이가 저녁상을 차려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구월아, 이제 수심이가 금세 올 텐데 좀 기다리자."
  "도련님이 오늘 밤에도 어딜 가나요?"하고 하녀가 물었다.
  "아마 안 갈 거다. 내가 그애하고 얘기할 것도 많은데. 수심인 별일 없지?"
  "그저 늘 그래요, 마님. 매일 저녁 나가기 때문에 방도 침침해요. 도련님은 항상 글방에 갔어요."
  민 부인은 아들을 유달리 귀여워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 아들을 낳기 전까지 민 부인은 딸만 셋이나 
낳았던 것이다. 그때 벌써 첫째딸과 둘째딸은 출가하였고, 자식들 중 제일 잘생긴 셋째딸은 미혼이었다. 그
래도 어머니의 모든 생각과 걱정은 오로지 자기가 나이가 들면  의지하게 될 귀여운 아들, 지금 어렇게 무
럭무럭 자라고 있는 아들에게만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여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더욱이 
민 부인의 희망이라고는 오로지 이 아들 수심이뿐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 어머니의 소원은 이
처럼 귀한 아들이 지금 다니는  학교를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가장으로서 전적으로  집안일을 돌봐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 부잣집이 망하게 돼서야 될 말인가! 민 부인의 욕심은 전력을 다해서 이 집 재산을 남편
으로부터 물려받은 그대로 유지하여 아들의 대에서도 계속 번영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생각은 어머니의 이런  욕심과는 달랐다. 어머니는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도 수심이는 
열 살 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계속 배우려는 생각뿐이었다. 수심이가 이 신식 학교에
서 무엇을 배우는지 민 부인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때때로 민 부인이 아들의 교과서를 뒤적거려보면 알
지도 못하는 일본말로 된 책에 여러 가지 식물, 동물, 어린애들이며 알 수도 없는  기계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어느 책에서 피부가  다 벗겨지고 근육과 뼈만 남아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아주 징그러운 그림이었다. 민 부인은 몸서리치면서 이 책을 치워버리고 나서는  다시는 그 
그림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불타(佛陀)의 숭고한 철학이나 공자의 도덕  철학을 가르치는 대신 이런 괴상
한 것들을 가르치다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심이가 서당에서 공자를 읽고 이태백의 시를 배
울 때는 아주 총명한 아이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모든  '무식한' 것을 배우겠다고 애를 쓰니 기가 막힐 일
이 아닌가! 그는 어떤 때는 밤을 새우며 공부했고, 다른 애들이 이미 배운 것을 쫓아가기  위해서 개인지도
까지 받았으며, 그저 학교와 새 책들만 생각하느라고 식사도 거르는 때가 있었다.
  방이 컴컴해져버렸다. 구월이는 호롱불을 켜고 바르질 그릇 옆에 앉았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 산
길을 내려오는 나무 장수들의 북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마당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중
간 대문으로 누가 걸어 들어오는 발소리가 났다.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던 민 부인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
다.
  수심이가 들어왔다. 그는 수척하고 허약한 소년으로 얼굴은 거무스름하고 나약해  보였다. 수심이에게 있
어서 남의 눈에 유달리 띄는 것은  눈으로, 활기가 넘쳤다가 환상에 잠기는  듯한 눈초리는 머나먼 훗날을 
바라보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너 다시 수척해졌구나" 하고 어머니는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말했다.
  "저요, 괜찮은데요"라고 수심이는 대답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멍하니 방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나서야 정신을 집중하고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머님, 그간 별고 없으셨어요?" 하고 수심이가 인사를 드렸다.
  "그래, 인곤네 집에도 별일들 없더냐?"
  수심이에게는 인곤네 집이 펵 마음에 걸렸다. 그 이유는 그 집이 동네에서 제일 가난했기 때문만이 아니
라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일을 그집에서 겪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일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내인 인곤의 
어머니가 자기 지주의 아들인 수심이를 저녁 먹으러 오라고  초대하였다. 수심이는 그 집의 딱딱한 음식이 
식성에 맞지 않았지만 많이 먹었다. 그런데 인곤의 어머니는 수심이가 밥을 떠 먹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 
미소를 지었고, 이 어린 수심이는 이렇게 마음씨 착한 아주머니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억지로 
많이 먹었던 것이다. 그가 밥술을 놓았을 때,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서 손님이 밥먹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
던 어린 계집아이가 얼른 밥상 있는 데로 다가오더니  거무스름한 밥그릇을 들여다보았다. 밥그릇이 텅 비
었으니 이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때 이 계집아이는 실망하고 기가  막혀서 소리 높이 울면서 밖으로 뛰
쳐나가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그날 저녁부터 수심이는  가끔 그 집은 살아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인곤의 어머니는 올해에도 소작료를 낼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 그 집에서 내야 할 소작료를 면제해줄 수 없어요?" 하고 수심이는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수심이는 본래 누가 찾아와서 간청을 하면 거절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글세 말이다, 수심아. 너무 빨리  단정 지을 필요는 없어. 너는  우리집 재산을 남들에게 선심만 쓰려고 
해선 안 돼! 우리는 인제 남아 있는 재산에 주의를 기울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호박  껍질이나 두어 
조각 남을 게다."
  수심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밥을 계속해 먹고 있었다.
  "인제 살기가 힘든 때야, 수심아! 이 역경을 이겨 나가야 돼."
  "만약 인곤네 집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해요, 어머니?"
  민 부인은 냉혹한 외부 세계, 몰락하고 버림받아서 추위에 허덕이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고, 거
지와 실업자 그리고 매일같이 늘어나는 부랑자들에 대한 생각을 하였다.
  "그게 우리 때문은 아니지 않아" 하고 어머니는 대답하였다.
  수심이는 눈썹을 찌푸리고 마당을 내다보며 숟가락을 놓더니 밖으로 나가벼렸다.
  어머니는 수심이의 이런 얼굴을, 즉 그녀에게 근심과 분노  그리고 절망을 야기시켰던 표정을 금방 알아
차렸다. 수심이는 어려서부터 이웃에서 사람들이 싸움을 하면 가끔 이런 표정을 지은 일이 있었다. 그는 사
람들이 심하게 떠들면서 얘기하는 것을 참지 못해 했고, 어머니가 혹시 하인들을 욕하거나 하면 마음이 슬
퍼졌다. 그러면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한참 후에야 마음이 다시 풀리곤 하였다. 그는 
너무 심한 얘기를 한다든지 꾸짖는다든지 서로 말다툼하는 것을  보면 도저히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것
으로 보아 그는 거친 세파는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사람들이 억압당하지 않으려면 죽을 힘을 다해서 저항해야 하고, 좋은 말 한 마디보다 주먹이  더 강
한 이런 매정한 세상에서 그는 도대체 어디에 몸을 담아야 한단 말인가?
  "도련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뭐" 하고 식사를 끝내고 다시 바느질을  하고 앉았던 구월이가 한마디 
하였다. 구월이라는 이 처녀에게는 수심이가 하는 일이 모두 옳게 여겨졌다. 그래서 수심이가 뭘 하라고 시
키면 그녀는 생각하지도 않고 아무 일이나 고분고분 들어주었다.  설혹 마나님이 하지 마라고 하는 일이라
도 수심이의 말이라면 그 자리에서 즉시 해주었다. 그래서 구월이는 가끔 꾸지람을 듣는 때도 있었다. 그래
도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잠자코 꾸지람을 참아냈다.  가끔 우는 때도 있었으나 남몰래 가만히 눈
물을 닦고 나서는 수심이가 하라는 일을 다시 척척 해냈다.  수심이가 어렸을 때는 구월이의 잔 등에 업히
기도 하였는데 그녀에게는 도련님이 그렇게 귀엽고 소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 됐다. 구월아, 이제 그만 가 자거라" 하고 민 부인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민 부인은 조용히 앉아서 나중에라도 자기 아들을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 하녀뿐이라
고 생각했다. 구월이는 설혹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수심이를 털끝만큼도 괴롭히지 않은 사람이었
다.

  그런데 이 하녀는 소위 상놈 출신이었다. 이  상놈층(層)에는 사생아, 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자, 대역 
죄인과 그의 후손들이 속하는데, 이들은 관청의 하인, 교수 형리(絞首刑吏), 백정, 교군(轎軍)이나 노예로 이
용되었다. 돈으로 매매되어 몇 년 동안 고용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는 슬픈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구월이는 일곱 살 때 관청의 하인으로 술주정쟁이였던 자기 아버지가 딸을 팔아먹는 바람에 하녀로 팔려 
오게 되었다. 민 부인은 이 가련한 구월이를 가엾게 여겨 어려서는 친딸처럼 생각해왔던 것이다. 시간이 흘
러감에 따라서 구월이도 자기의 신분이 하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나님은 이 불쌍한 구월이에 대한 동
정심을 가지고 눈물을 참아야 했던 반면에, 어리석은 이 아이는  무슨 별난 일이나 있는 줄 알고 기뻐하였
다. 

    여자는 여자로 머무른다
  어린 수심이는 사람이 양반과 상놈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때때로 왜 
구월이 혼자 장보러 가고, 빨래도 혼자 하며, 부엌에서 불 피우는 것도 혼자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하녀야"라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구월이에게 왜 하녀가 됐느냐고 물어 보았다. 구월이 자신도 그걸 몰랐다. 이 순진한 구월
이는 오랫동안 생각하고 나서 "내가 하녀니까 하녀지 뭐" 하고 대답했다.
  수심이는 이 하녀의 빨갛게 된 손을 바라보고 자기의 부드럽고 연한 손가락과 비교하더니 구월이의 손을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서 자기 저고리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직 어렸을 때는 하녀에 대해서 이렇게  착하게 구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점점 들면서 어머니는 아들이 하녀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구월이는 상놈의 혈관 속에는 대대로  유전되는 불순한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
다. 그리고 남자는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 머물러 있는 것이며, 그래서 수심이에게는 품위있는 거동이 있고, 
또 자기는 맹목적으로 복종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밖에는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동네 부인들은 민 부인 댁에 잘 모여들었다. 이 부인들은 옛날 책들을, 
말하자면 소설이며 동화 그리고 일화를 모은 책들을 들고 와서는,  어느 부인이나 이 집의 일가 되는 남자
가 좋은 목소리로 낭독하였다. 
  "참 그때는 세상이 얼마나 좋았겠어요"라고 부인들이 가끔 얘기하였다. 그들은 덕망 있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거나 현명하고 자비로운 관리가 많고,  현인이나 교양 있는 사람들이  최대로 숭배받게 되면 그것이 
참 좋은 세상이라고 얘기하였다. 그 당시에는 남자들은 용감하였고 어린애들은 공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날에는 세상이 얼마나  변해버렸는가! 어린애들은 자기네 어머니를  보고 구식이라고 하면서 
어른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다시 더 좋은 때가 오려나 봐"라고 민 부인은 부인네들을 위로했다.
  "이제 우리 왕조도 종말을 보고, 사람들은 불손해지고, 하늘과 양친과 옛날 풍습에 어긋나는 비행을 하는 
일이 생길 겁니다."
  "나는 그저 댁의 아들 수심이가 부러워요"라고 가끔 민 부인 댁에 바느질하러 오는 여자가 한마디 했다. 
민 부인의 아들은 이제 제법 성장하였으나 일을 하기 싫어해서 민 부인에게는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수심이는 아주 공순하고 근면하고 예의가 바른 아이입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민 부인은 자기 아들보다도 훨씬 더 건강하고 활동적인 다른 집 자
식들을 부러워했다. 왜냐하면 수심이는 험한 외부 세계와 조금만 부딪쳐도 이겨내지 못하는 약골이었기 때
문이다. 남씨(南氏) 부인 댁의 열여덟 살 된 각성이는 일을 얼마나 빨리 하고 의젓하며, 원용마라는 아이는 
얼마나 조심스럽게 집안일을 잘 보살피는지 수심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민 부인에게는 다른 집 자식
들이 꿈 많은 수심이보다 더 나은 것같이 생각되었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 아침, 방 노인이 달려 들어와서 광에 도둑이 들어 뭘  훔쳐 갔다고 전했다. 마나
님은 깜짝 놀라 밖으로 달려나가서 수확물의 대부분이 없어진 곳간 앞에 마비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
다.
  민 부인은 반쯤 의식을 잃은 채로 말 한마디 없이 당황하여 서 있는 방 노인 옆으로 달려갔다.
  "경찰에 가서 알릴까요?" 하고 방 노인이 마나님께 물었다. 민 부인은 서서히 제정신으로 되돌아왔다.
  "그래, 어서 경찰에 가서 신고하게"  하고 민 부인은 심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러고 나서 "구월이는 
어디 갔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 갔어? 김 서방과 원식이는 어디 있나? 손님들은 모두 어디 있
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마나님은 아주 화난 표정으로 횡설수설하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가지 말고 가만히들 있어. 내 옆에들 가만히 있으라니까."  그 사이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달려나
와 마나님 옆에 둘러서 있었다.
  "참 별 흉악스러운 일이 다 있지" 하고 민 부인은 몇 번이고 되풀이 하였다.
  이 도난 사건은 민 부인에게 비싼 쌀가마니를 잃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흉악하고 불운한 일을 초래하는 
징조같이 생각되었다. 한국의 옛날 신앙에 의하면  도난은 가정에 큰 불행을 초래한다고  하였다. 이번일은 
어쩐지 민 부인이 무서워하는 나쁜 유령들의 조화같이 보였다. 텅  빈 곳간에서 민 부인은 무슨 보이지 않
는 어떤 것을 본 것같이 믿고 있지 않는가!
  병들어 앓고 있는 김씨는 갑자기 뭘 알아차렸다는 눈치였다.
  "제가 알아요, 알겠어요" 하고 그는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사실 그는 뭘 알고 있으면서도 더 계속해서 말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옆에 서 있는 자기 마누라가 아무  말도 말고 잠자코 있으라고 쿡쿡 찔렀기 때문이
다. 
  조금 있다가 형사 두 명이 나타나서 심문을 하더니 이 집의 청소부인 원식이를 연행했다.
  "원식이를 왜 데리고 가죠?" 하고 민 부인은 놀라 옆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그저 몇 마디 물어볼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곧 돌려보내겠습니다" 하고 형사들이 대답하였다.
  두 형사가 원식이를 데리고 집을 나서자 김씨가 "그래요, 마님. 원식이 짓이 분명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나님은 이 말을 믿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의 민 부인에게는 누가  도둑질을 했건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도난은 도난이었으므로 집안에 어떤 불행이 초래될 것이라는 접이 제일 걱정이었다.
  오후에 기별이 왔는데 원식이라는 놈이 쌀을 도둑질해서 다 팔아가지고 그 돈으로 노름판 빚을 갚았다는 
것이다. 연말이 되자 남자들은 본래는 정초의 명일 때나 하게 되는 화투놀이를 시작했던 것이다. 경찰의 말
에 의하면 원식이가 밤마다, 때로는 새벽 일찍이 쌀가마니를 메고 나갔다는 것이다.  곳간을 책임지고 지킨 
사람은 젊은 머슴이었지만 이 사람쯤은 원식이가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 종일 답답한 마음으로 조용히 지내다가 저녁때가  됐다. 누구 하나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고, 
밤 먹을 생각조차 하는 사람이 없었다. 수심이가 집으로 돌아오자 마나님은 아들 있는 방으로 건너가서 그
를 안고 울기 시작했다.
  "저 양심도 없는 원식이가 모조리 도둑질해 내다가 팔아먹었단다. 내가 죽을 고생을 해서 거둬들인 곡식
을 말이다. 낟알 하나라도 버리지 않으려고 마당에서 주워 모은 곡식이 이제 다 없어져버렸단다."
  남자고 여자고 모두 마나님을 위로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민 부인방에 모여들 앉았다. 방 노인은 방구
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물부리에 담배를 채워넣었다.
  "그 나쁜 놈이 처음에는 전혀 실토하지 않더라지 뭡니까" 하고 방  노인은 목쉰 주정꾼의 목소리로 한마
디 했다. "마흔 대쯤 매를 맞고 나서야 흐느끼며 끙끙거리면서 용서해달라고 빌더라지 않아요."

  수심이는 "뭐라고요! 원식이를 경찰에 인도했다구요?" 하고 묻더니 놀란 눈초리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민 부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방 노인의  설명만 듣고 있을 뿐이었다. 경찰에서는 죄인들을 고
문한다지 않는가! 그런데 자기 집 머슴이  매를 맞았다는 것과 그 무쇠 같은  놈이 얻어맞고 끙끙거렸다는 
말을 들으니 상상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그저 정치범들이나 고문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 하고 민 부인은 맥없이, 마치 용서를 빌어야겠
다는 투로 말하는데 그 사이에 수심이는 언짢은 표정을 짓고 말없이 방을 뛰쳐나갔다.
  "구월아, 수심이 뒤를 쫓아가 봐!"
  구월이는 두 시간이나 있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수심이가 경찰에  가서 무슨 얘기를 오랫동안 했다고 말
했다.
  민 부인은 아직 불이 켜져 있는 아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수심이는 마루에 나가 앉아서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아직 외투도 벗지 않고 있었으며, 어깨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너 경찰서에 갔다 왔니?" 하고 어머니가 물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방에 들어가자, 밖은 추워."
  그는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갔다.
  "수심아! 너 경찰서에 가서 무슨 얘기를 했니?"
  "어머니! 어떻게 어머니는 원식이가 잡혀 가는 것을 그냥 두었어요!"
  "원식이가 양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니."
  "부정했건 도둑질을 했건 그게 문제가 아니예요. 그 사람은 우리 집 머슴이 아닙니까! 아무도  그를 때리
거나 감금하게 하면 안 돼요!"
  수심은 방에 불도 켜지 않고 있었다. 마당에  쌓인 하얀 눈이 침침한 방까지 반사되었다.  갑자기 먼데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추운데도 일본 군인들이 밤중까지 사격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도대체 어쩌자고 경찰을 우리 집에 오게 했습니까? 어쩌면 어머니가 그럴 수가 있어요. 지금 원
식이는 다리에 상처가 나고 피를 흘린 채로 춥고 컴컴한 형무소에 갇혀 있어요. 아이구 어머니!  어쩌면 어
머니는 그렇게도 몰인정할 수가 있어요."
  "이미 저질러진 일이야. 그러나 내 입장도 한 번 생각해봐라. 내가 얼마나 당황했겠는가도 생각해보구...."
  "됐어요, 어머니. 이제 제발 저를 혼자 있게 해주세요."
  어머니는 수그리고 있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나서 아들 방에서 나왔다. 민 부인은 집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도둑맞지 않은 유일한 곳간 자물쇠를 다시 살펴본 다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동정심으로 꽉 차 있는 이 아들이 장차 뭐가 될까. 이 아들이  지금 이렇게 된 데 대해서는 돌아가신 아
버지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이토록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아들을 좀 훈련시키지는 못할망정 
조금이라도 심하고 비참한 것이면 무엇이나 감추고 보여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애들 앞에서는 욕도 하지 말고 거친 말도 쓰지 말아야 하며 권리나 의무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지 마라고 했던 것이다. 자식을 그렇게 길렀으니 아들이 지금  이렇게 되지 않고 어떻게 달라질 수가 있
었겠는가! 어머니가 아들을 좀 엄하게 다루려고 하면 그는 재빨리 아버지에게로 도망쳤던 것이다.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성장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대견해하고 마음이  착한 면을 늘 칭찬했으며, 모든 인
간들이 오로지 사랑만을 알던 옛날의 좋은 얘기들을 늘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사회 생활에 있
어서 권력보다는 덕망이, 조잡보다는 예의가 그리고 교활보다는 현명한 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
는 인식을 머리 깊숙이 주입시켜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수심이로서는 모든 선한 것은 아버지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고, 마음속으로도 저항감을 가지고 있
던 어머니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가 옛날에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알게 되
면 수심이는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상인으로서 돈을 버느라고 무진 애를  썼고, 채무자들이 
의무를 다할 때까지 그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이 엄했고 완고했다.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나서 부인의 
소원대로 토야에 있는 토지를 사고 난 후만 해도 부인이 경제적인 문제들을 친척들과 정리할  경우에 절대
로 실수 없이 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그만큼 철저한 사람이었다! 아들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아버지의 고상한 모습은 실제로는 그렇
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가 거액의 재산을 벌고 아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했을 때야 그의 주위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
다. 그는 인생의 다른 면에 주의를  기울였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점점 온화해지고 관대해져갔다. 그는 
악한 것은 무엇이나 아들에게 보여주지 않았고, 자식의 약한 마음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 낙관적인 인
생을 묘사하여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리둥절하고 당황해하였다.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은 오로지 자기가 남들과의 생존 경쟁에서 결사적으로 싸워 이긴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만약 아버
지가 이런 저런 채무자들을 관대히 봐주고 그저 다른 사람들만 생각해 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데 그는 
지금 와서 지나간 일을 생각지 않으려고 했다. 민 부인은 몇 차례나 남편에게 지나간 일에 대해서 대체 어
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리고 남편과 관계된 사람들  때문에 고생한 일을 잊을 수  없어서 자주 눈물을 흘린 
일,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남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더니 얼마 있다가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인제는 모든 일이 잘돼 나가게 해야겠다고 했다.
  "당신 이런 일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하고 민 부인은 물었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을 모조리 돌려주지 뭐."
  민 부인은 그가 이런 말을 진심으로 얘기했다는 것을 도시 믿을 수가 없었다. 민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안하여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남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우리에게 재산이 하나도 없으면 이 아들을 데리고 어디 가서 살아요?"
  "여보, 우리가 먹고 살 거야 어느 만큼은  남게 되겠지요. 따라서 아들 놈에게는 따로 뭘  남겨둘 필요가 
없어요."
  민 부인은 흥분하였다.
  "여보! 나는 당신 말씀을 옳다고 할 수 없어요. 우리 아들은 굻으면서 살아서는 안 돼요. 우리 두 사람이 
고생한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수심이는 아무쪼록 우리보다 잘살아야 해요."
  이렇게 민 부인은 아들에게 유산을 넘겨주지 않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남편과 싸움까지 했다. 어떤 때
는 아들이 옆에 있는데도 민 부인은 이 문제 때문에 남편과 다퉜다. 그때 부모가 싸우는 소리를 귀담아 듣
고 난 수심이의 가슴속 깊이에는 이 불길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고 박혀 있었다. 세월이 흐르과 더불어 수
심이는 자기 어머니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벌써 몇 년  전부터 어머니와 단둘이 같이 있는 시간을 의식
적으로 피했고, 단 한 시간도 그는 어머니 방에 머물러 있어본 일이 없었다. 죄우간  수심이는 어머니 겉에 
있는 것을 피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마음은 퍽 괴로웠다. 


      무언으로 반항하는 아이

  그러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에 재산의  대부분을 다 떨어진 신발처럼 남들에게 주어
버렸고, 열네 살 된 적자에게는 기쁨에 찬 무산을 가장 중요한 생활의 규준이라고 설교한  일이 있다. 만약 
어머니의 마음이 아들에게 기대했던 모두가 좌절되지 않는다면 수심이로서는 인생의 또 다른  일면을 배우
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먹을 밤참을 준비해서 김 여인을 시켜 아들 방에 가져다주라고 일렀다. 김 여인이 돌아
와서 하는 말이 수심이가 책상 가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고 했다.
  벌써 자정도 지났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다만 아들  방에 켜져 있는 희미한 
불빛만이 조용히 마당 있는 데까지 비쳤다.  이 집의 외아들이 그렇게 오래도록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을
까? 민 부인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창가에 앉아서 아들 방의  불이 꺼질 때까지 가만히 내다보았다. 조용한 
겨울 밤의 어둠이 이 집의 지붕 위에도 깃들이고 있었다.
  이런 불길한 일이 있은 저녁 이후로 수심이는 어머니에게 더욱 뜸하게 나타났다. 어떤 때는 식사도 자기 
방에서 혼자 하겠다고까지 하였다. 얼굴이 창백해진 수심이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어머니와는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아들이 이토록 상심할 줄은 민 부인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민  부인은 믿었던 집안의 머슴이 
도둑이라는 사실에 한바탕 놀랐고, 고통을 당했으며, 고독했으며, 무서운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아직 마음을 
달래지도 못하고 있는데, 고집 센 아들은 양심도 없이 이 가문을 망하게 만들어놓은 머슴을 경찰에 알렸다
고 어머니를 몰인정하다고 매일같이 한탄만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아들은 어머니가 자기의 장래를 위해
서 그토록 애를 쓰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수심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했다.
  어느덧 연말이 다가왔다. 그런데도 민 부인은 연말 연시의 여러 명절날을 즐겁게 보낼  생각조차 없었다. 
민 부인은 뭘 굽는 일이나 끓이는 일을 일체 못 하게 하고 과일도 사들이지 마라고 하였다. 이웃 가족들은 
조용히 선물들을 받느라고 야단이었으나 정월 초하루가 됐는데도 민 부인은 문을 꼭 닫고 옛날  풍속에 따
라서 세배하러 오는 손님들을 일체  만나주지 않았다. "나는 명절을 세지  않을 테다" 하고 마나님은 집안 
사람들에게 말했다. 수심이는 어머니의 이 의견에 대해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머슴들도 아무 대꾸가 없었
다. 그저 구월이만이 마나님께서 어린 아들에 대해 좋지 않게 얘기하는 것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이 하녀
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전혀 영문은 모르지만 어쩐지 수심이의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마음
이 아팠던 것이다. 
  그때 방 노인은 원식이가 붉은 죄수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했다. 죄수들은 지저분한 적갈색의 광목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시에서 하는 청소 작업에 동원되어 일하고  있었다. 두 사람 두 사람씩 쇠줄로 묶여 
있었고, 일을 하러 갈 때도 무장한 간수들의 감시하에 행진하듯이 걸어갔다. 그것은 결코 좋은 광경일 수가 
없었다. 어린애들은 이런 적갈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오는 것을 보면 모두 도망쳤고, 부인네
들도 이런 비참한 광경을 보면 슬슬 피했다. 방 노인은  아침에 해장을 하고 오다가 원식이가 죄수들이 몰
려가는 행렬 맨 앞에서 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6개월이야"  하고 원식이가 걸어가면서 방 노인에게 
낮은 소리로 얘기하더라는 것이다. 인제 그는 매일같이 시내에서 쇠줄로 묶인 채 쓰레기를 잔뜩 실은 커다
란 수레를 끌어야만 했다. 감옥에서 먹는  음식이래야 콩밥에 소금뿐이었고, 밤에는 20여명이나  되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비좁고 추운 감방에서 자야 했다.
  민 부인은 물론 일이 이렇게까지 확대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방 노인이 이런 얘기를 할 때 5년 간이나 
자기 집 머슴으로 있었던 사람을 경찰에 고발하여 매를 맞게 했다는 것은 과연 비인간적인  처사였다고 후
회했다. 민 부인의 가슴은 미어졌다.
  아이고, 그럴 줄 알았으면 자기 집안의 일을 조사해 달라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불러댈 필요가 없었
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 아들의 말이 옳은 것도 같았다. 부인은 지금 저렇게 비참하게 처벌을  받고 있
는 원식이를 경찰에 신고하지 말 것을 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민 부인은 밤이 깊을 때까지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꾸만 붉은 죄수복을 입은 원
식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다른 죄수들과 함께 묶여서  큰 수레를 끄느라고 얼마나 헐떡이고 있을
까, 낮이나 밤이나 한 덩이의 콩밥을 얻어먹으려고 얼마나 고생을 할까 그리고 밤에는 추운 감방에서 얼마
나 떨고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계속  그녀를 괴롭혔다. 이 죄수들은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불도 피우지 
않은 곳에서 이불도 얻어 덮을 수 없다지 않은가!
  다음날 아침 민 부인은 이런 생각들은 다 잊어버리고 아들 때문에 마음 상한 것만 머리에 떠올라서 가슴
이 답답하였다. 아들에게 말을 몇 마디 걸어보았는데 그나마 무뚝뚝하고 냉정한 어조였다. 마나님은 아들에
게 지난밤엔 왜 늦게까지 자지 않았느냐고 묻는 게 아니라 학교 숙제는 다 했느냐는 등  그전에도 늘 물어
보던 시덥잖은 말들만 물었다. 그리고 도난 사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정월 25일이 아버지의 생신이었다. 1년 전만 해도 여러 사람들이, 친척이며 또 친구들이 찾아와서 생신을 
축하하느라고 집안이 온통 웃음바다가 아니었던가! 직업적으로 춤추며 노래하는 기생들까지 많이 불렀었고, 
방마다 그들의 음악과 아름다운 옷차림으로 활기에 넘쳤었다.  아버지는 널찍한 사랑방에서 친구들과 함께 
자정이 넘도록 술잔을 계속 채웠고 취해서 거나한 기분으로 친구분들에게 더 놀다 가라고 권하곤 했다.
  그 다음 해의 생신 때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서 즐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
버지는 죽음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머니는 지금 큰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더는 몰라도 술이나 한 잔 붓고 촛불이나 켜놓았으면 좋으련만!
  어머니가 아버지의 비위를 맞취주고, 자기의 엄격한  마음을 양보해 술잔을 채워드리면, 즉  활기에 차서 
시의 세계에 도취되어 즐거운 기분으로 시를 한 수씩 아름다운 목소리로 암송할 때까지 술잔을 채워드리면 
아버지는 얼마나 행복해하셨던가!
  민 부인은 장롱 있는 데로 가서 서랍을 열어보고 초가 있는지 찾아보더니 서랍을 다시 닫아버렸다. 어머
니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심상  때문에 아들의 얼굴 모습까지  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에게서는 
무엇을 지향하는 눈초리, 기쁨의 웃음과 성격의 조화 등등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그 대신 어머니에게서는 
후회하는 얼굴 표정, 의견들이 서로 상이한 점을 어색하게 숨겨보려는 마음, 아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고 싶
어하는 기대 등등을 엿볼 수가 있었다.
  어린 학생인 수심은 조상을 숭배하는  옛날의 모든 예식은 미신이라고  아버지에게 얘기한 일이 있었다. 
이 어린 수심이가 사람이 죽은 날에 제사 지내는 일,  양친이나 조부모의 생신에 음식을 차리는 일을 금지
하려고 하는 데는 물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제삿날에  가묘를 모두 불태워버리고는 인제 귀신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귀신이 없다고?"라고 민 부인은 중얼거렸다.  그 이상 더 설명도  하지 않고 아버지는 수심이를 시켜서 
이런 것들을 다 없애버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고, 이 바보 같은 인간들, 눈이 먼 사람들! 미신? 이런 짓들만 하고 있으니 나라가 외국의 침략을 받
고, 사람들이 범행을 저지르고, 양식을 도둑맞고 하는 일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죄라는 것이 
귀신들에 대한 범죄를 위해서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지금까지 보호해왔고 존경해온 귀신들은 인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이 귀신들은 분격하고 복수할 생각으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보복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
다.
  민 부인은 언젠가 길이 새로 난 변두리의 허물어진 무덤가에서 사람들 뼈다귀를 본 생각을  하고 몸서리
를 쳤다. 경외심이 없는 방해자들이 무덤을 파헤쳐가지고는 성스러운 뼈를, 사람의 뼈를  파내서 커다란 구
덩이에다가 쌓아놓지 않았던가! 어떤 때에는 길가의 개천가에서 뒹구는 해골까지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사
실 이것 저것을 따져보면 자기 사유지에 뫼를 쓰는 일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사람들은 산에다 소나무를 
시어 가꾸었고 무덤 앞에는 멋있는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신 날에 제사 지내러 산소를 찾아
가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명당 묏자리가 따로 있다는 생각도 이미 없어져버린 것이다.  산과 강물은 인
제 인간의 생생한 보호물도 가까운 친구도 아니었다. 이제 이  집도 아이든 이 부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형
편이 돼버렸다. 어머니의 생각에는 이 큰 방도  어쩐지 공허해 보이고 활기가 없어 보였고  무정해 보였다. 
사방의 벽들은 냉랭해 보였고 구석구석이 다 죽어버린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을 수심이는 어떻게 상상했을까?  사람이 죽으면 생명이 없고 영혼도 정말  없는 것일까? 오!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망이 아닌가!
  아버지는 자기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봤을까? 아버지는 
어머니를 그런 영혼이 없고 어두운  세상에 남겨놓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참을 수가 있었을까? 아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들이 어머니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있듯이!
  다음날 저녁에 민 부인은 집을 나갔다. 민 부인은 누구를 방문하러 나갔던 것이다. 아마 누구를 찾아가서 
아들이 다시 착해지고 말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조언을 얻으려고  나간 것 
같았다. 이 부인은 수심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분이라는 말을 
듣는 송 선생을 생각하고 길을 나선 것이다.
  민 부인은 밤길를 서쪽으로 향해서 도시의  주위를 따라 읍과 서문 사이로  통하는 넓은 길을 걸어갔다. 
민 부인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그전 길이 아니고 좀 변한 것 같았
다. 읍내에는 큰 공터가 생기고 서문에 있던 건물과 문의 아치가 모두 없어지지 않았는가! 땅바닥을 내려다
보았더니 석판들은 아직 그전 것 그대로  오래 되어 빤질빤질하고 고르지 않게 우묵우묵  들어간 회청색의 
돌이었다. 민 부인은 하도 이상해서 다시 한 번 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더니 옛날에 있던 문의 아치도 보
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문을 이렇게 망가뜨려 놓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예전에는 그녀가 서쪽
에서부터 시내 있는 쪽으로 돌아올 때 이 회색의 기와  지붕을 바라보면 정말 기분이 좋았다. 아주 옛날에
는 집안 식구들이 마중나올때면 바로 이 자리에 자주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이 사
라져 버렸다니! 민 부인은 한숨을 짓고 나서 사람들이 마산이라고 부르던  서산 위에 홀로 서 있는 소나무
를 바라보았다. 황혼이 깃들여가는 저녁의 불그스레한 구름 앞에서 이 나무가 마치 상막같이  보였다. 사실 
이 나무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기도  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나무에 묶여서 총살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민 부인은 뒤를 돌아보고 시내 있는 쪽도 돌아보다가 깜짝 놀라서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검은 제복
을 입은 일본군의 한 부대가 서문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는데 아마도 무슨 교련 때문에 행군하는 것같이 
보였다.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쿵쿵 소리에 깜짝  놀라서 민 부인은 부리나케 빨리 달려갔다.  그녀는 다음 
옆골목으로 구부러 들어간다고 생각했는데도 다시  큰길에 나와 서게 되었다.  그녀는 군인들의 눈에 띌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의심이 많아서 누가 혐의가 있어 보이면 당장에  총질을 했다. 그래서 
민 부인은 왼쪽도 오른쪽도 쳐다보지 않고 그저 헐레벌떡  곧장 앞으로만 달려갔다. 무거운 발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고, 군인들이 민 부인이 있는 곳에 아주  가까이 온 듯하더니 도시의 변두리에 와서야 그들이 
다른 길로 들어서서 이 가련한 부인으로 하여금 조금 마음을  놓게 하였다. 군인들은 민 부인이 땀을 닦는 
것을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행군을 계속하였다. 처음 듣는  이상스러운 행
진곡, 민 부인에게 비인간적으로 무정하고  잔인하게 들리는 곡조가 그저  고향 같고 평화스러운 것으로만 
알고 있던 온 풍토를 망쳐놓았다. 이 부인은 이 놀라운  노랫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민 부인이 송 선생 집 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 후였다.  선생 부인이 밖에까지 나와서 민 
부인을 영접했다. 젊고 활발한 선생 부인은  신식 가정을 꾸미고 사는데도 구식  생활 양식과 구식 부인을 
경멸하지 않는 여자였다. 아주 잘생긴 이 집의 기섭이라는  이들이 일어나서 손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드
렸다.
  "인제 네 물건들을 챙겨가지고 네 방으로 가거라" 하고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기섭은 아무 말도 없
이 책들을 가방에 넣고 자기 방으로 건너갔다.
  "아주 교육을 잘 시켜서 착한 아이로군요." 하고 민 부인은 칭찬했다.
  "건방지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하고 송 여인은 웃으면서 얘기했다.
  "그런데 저 애가 밖에 나가면 얼마나 행패를 부리는지 다른  집 애들을 근방에 얼씬도 못 하게 해요. 그
래도 저는 그러지 마라고 별로 야단은 안 쳐요. 왜냐하면 사내놈들은 힘자랑도 좀 해야 하니까요."
  민 부인은 아무 말 없이 머리만 끄덕거렸다. 그녀는 이  집 아들 기섭이와는 정반대형인 자기 아들을 생
각했던 것이다. 수심이는 아주 약질로서 기운이 없는 아이였다. 민 부인은 자기 아들이 남의  집 아이를 때
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사이에 송 선생이 들어와 민 부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서 그녀가 아들 때문에 걱정하는 얘기를 조심
스럽게 귀담아들었다.
  "네, 네, 그 애는 그래요, 제가 잘 알아요" 하고 송 선생은 진지하게 얘기했다. "그 애는 학교에서도 다루
기 힘든 아이로 알려져 있어요. 그래도 아이가 워낙 재주가 있어서 선생들은 수심이를 참 좋아해요. 그런데 
그 애가 그저 멍하니 있으면서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을  때가 있어요. 그리고 언제나 그저 혼자 있어
요. 저는 수심이가 눈싸움 하는 것도 못  보았고, 다른 애들과 놀이를 하는 것도  한 번도 못 보았어요. 좀 
특수한 아이로서 다른 애들처럼 활발하지 못해요. 언제나 그저 책만 붙들고 있어요. 다른  아이들이 장난으
로 막 덤벼들어도 그저 얼굴만 찡그리고 방어하려고도 하지 않고 또 그 애들한테 대들지도 않아요."
  선생은 하던 얘기를 중단하고 잠시 쉬었다가 얘기를 다시 계속했다.
  "제 생각으로는 수심이의 부친께서 자식을 잘못 기르신 것 같아요. 애가 너무나 순하고 평화롭게만 자란 
것 같아요. 선생들은 애들에게 심지어 전쟁을 위한 것도 가르치는데  수심이는 그런 걸 전혀 모르는 것 같
아요. 부인! 아이를 좀더 엄격하게 기르십시오. 그래야  애가 저항하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요즈음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에 저희는 싸움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선생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언젠가는 한 번 수심이가 삼각자를 훔쳤다는 혐의를 받은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전혀 자기가 그런 짓
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도 하지 않고 우리가 오후에 그 애를 벌  세웠을 때도 반항도 하지 않더군요. 그 애
가 벌을 선 다음날 삼각자를 훔친 놈이 다른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수심이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항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벌을 받았습니다."
  민 부인은 아직껏 학교에 가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교육을 받고 어
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통 모르고 있었다. 좀 무감각한 생각 속에서 민 부인은 아들을 그저 모범생이라고
만 보고, 사람들이 수심이를 칭찬하는 소리만 듣고 싶어했다. 그런데 지금 듣자니 수심이가 벌을 받은 일이 
있는가 하면 죄없이 받은 벌에 대해서 항의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항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벌을 받았다니, 정말 어머니에게는 더욱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민 부인은 일어나서 얼른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급하게 돌아왔다.
  입고 있던 두루마기도 벗지 않고 민 부인은 아들 방으로 들어가서 흥분된 마음을 겨우 억제하면서 "수심
아, 너 지금 다니는 학교를 아무래도 그만두어야겠다"라고 말했다.
  수심이는 깜짝 놀라 어머니를 쳐다보면서, "어머니,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너 학교에서 벌받은 일이 있다지. 그게 정말이냐?"
  "그래요. 어머니."
  "그런데 잘못한 일도 없으면서 왜 항의하지 않았니, 왜?"
  수심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고 있던 책을 덮어 버렸다.
  "너 인제 그 학교 다니지 말아라. 학교에 가면 절대  안 된다" 하고 어머니는 아주 엄한 어조로 다시 한 
번 얘기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수심이는 자기가 어머니에게 순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수심은 학교를 그만두고 어머니가 시키
는 모든 일을 이렇다 저렇다 한마디 말도 없이 성실하게  해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더 벙어리가 되어갔
다. 그저 하루에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는 혼자 가만히 있었다.

      조용하고 검소한 미남 청년

  그런데 도대체 이 수심이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머니는 아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도움도 줄수가 없었다.
  "너 언제 한 번 온천장에 다녀오지 않을래, 수심아?" 하고 어머니가 어느 날 저녁에 물었다. "너 아주 병
든 사람처럼 보이는구나."
  "싫어요."
  "그럼 뭐 먹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일 없니, 수심아?"
  그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어느새 그렇게 춥던 겨울이 지나갔다. 쌓였던 눈은 따가운  햇살에 다 녹아버리고 사방 어디를 바라보아
도 봄기운이 돌았다.
  그런데 웬일로 수심은 아무런 소원이 없을까?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다 해주려고  하는
데! 어머니의 마음은 흐뭇해지고 싶었고, 아들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져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공부할 
때나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외에는  수심의 얼굴을 보기가 매우 힘들었다.  어머니가 그토록 아들과 가까이 
하려고 해도 아들의 눈초리는 어머니와 마주칠 때마다 냉정하기만  했다. 다만 그가 몇 시간이고 자기방에
서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란 가끔 그를 찾아오는 세 친구뿐이었다.
  오후가 되면 벌써 수심이 옆에 와 있는 각성이라는 친구는 나이는 열아홉 살인데 어느 과목이나 다 잘했
기 때문에 수심이로부터는 선생님처럼 존경을 받았다. 수심이는 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가끔 이 각성이
에 대해서 얘기했고, 그를 너무나 과잉 칭찬했으며, 민 부인 자신도 이 아이기 자기  아들을 찾아오면 갖고 
있는 지식과 정력으로 아들을 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퍽 좋아했다. 각성이는 눈이 큼직
하고 길고 모난 얼굴에 입술도 얄팍하고 머리숱도 별로 많지  않았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별로 하
는 일 없이 자유 시간이 많아 그 후로는 한국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당시 이 한국 역사를 공부하
는 일은 독립 운동 사상의 위험이  있다고하여 관청으로부터 금지돼 있었으므로 비밀리에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저 저녁때만 나타나는 조심성 있는 용마라는 친구는 아주 활발한 청년으로서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고, 
그 당시 일본인 농업 학교에 다녔다. 그는 역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고 나라가 망하건 흥하건 걱정
하지 않았다. 그는 남들이 하는 얘기를 듣기만 하고 자기 개인의 의견은 별로 말하지 않는 형이었다. 그 이
유는 귀가 밝은 경찰의 손에 잡히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는 것이었고, 또 한 이유는 그가 유년 시절부터 일
본인 학교를 다녀서 한국과 한국 역사에 대해서는 사실상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 저
녁 새로운 것을 전해주러 수심이의 집으로 왔다. 즉 새로운 쌀 종류, 새로운 인조  비료, 새로운 양계 사료, 
새로운 유성기판의 바늘, 새로운 파리잡이 종이 등등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그는 쉬지  않고 이러한 발명들
을 좋게 해석하며 온갖 특허를 이용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사실 
가난한 친구였다. 중급 관리인 자기 아버지의 봉급과 자신에게  앞으로 속하게 될 전재산을 합쳐보아도 자
기가 앞으로 경영하고자 하는 농장에 필요한 농토를 사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10년이나 기다려야 할 형편이
었다. 그렇지만 이 영리한 용마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수심이의 농토에서 실습하는 것만으로도 당
장은 만족하고 있었다. 설혹 대부분의 실험이 이미 배워서 알고 있는, 용마가 그에게 가르치는 것과 실제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수심이는 용마가  가르치는 것을 잘 이해하였다. 토질에 대해서
는 물론 농부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무와  식물의 특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나 이 농부들은 
지주의 아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못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조심성이 없고 어떤 계획을 포기
한다든지, 이미 한 번 시작한 일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과는 아주 다른 형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열일곱 살 난 만기라는 친구였다. 그는 명사의 이
름도 하나도 몰랐고, 어떤 유익한 아이디어를 짜낼 줄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그는 일본이  그 사이 얼마나 
커지고 강력해졌는지도 몰랐고, 심지어는 중국이며 미국 그리고 유럽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몰랐다. 그
에게는 한국이 세계의 전부였다. 친구들이 얘기를 하면 그는  마치 흥미 있는 그림을 쳐다보는 어린애처럼 
친구들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 친구는 아침 햇살이 지붕에 비칠  때에 와서 수심이가 잠이 들 때까지 같
이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어떤 때는 밤늦게까지 앉아 있다가 주저주저하면서 집을 나설 때도 있었다. 그
러고도 다음날 아침에는 수심이가 아직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그는 벌써 이 집 토방에 와 앉아 있었다. 그
리고 민 부인이 광주리를 들고 밖으로 나오면 그도 마당 일을 도와주곤 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만기야, 너 잠을  거의 자지 않았구나" 하고 민 부인이  말했다. "너의 누나가 뭐라고 
나무라지 않니?"
  민 부인은 '도화'라고 알려져 있는 만기의 누이를 알고 있었다. 기생인 그녀는 제법 인기가 있었다. 그 이
유는 얼굴이 반반하거나 노래를 잘 부르기 때문이 아니었고,  자기 동생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였기 
때문이다. 가문도 제법 좋은 이 여자는 자기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
게 '천한' 직업을 택하게 되었다. 그녀의 양친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어머니가  임종시에 딸에게 어
린 두 동생을 잘 기르라고 유언했던 것이다.

  만기는 늘 그렇듯이 그가 존경하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입을 옆으로 헤 벌리고 미소를 지었다. "어머
니! 저는 요새 우리 누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왜, 너 집에 들어가서 자지 않니?"
  "우리 누님이 저를 내쫓았어요."
  민 부인은 만기를 쳐다보며 "너 무슨 일을 저질렀구나?" 하고 물었다.
  "아이들 몇 명이 우리 누님을 찾아와서는 젊은 남자들을 더 이상 타락시키지 말고, 인제 기생 생활을 집
어치우고 시집이나 가서 가정 주부가 되라고들 떠들어댔어요. 그러자  우리 누님이 그 애들에게 막 욕했어
요. 그러다가 싸움이 벌어지고 나중에는 애들이 온갖 악기와 수많은 사기 그릇들을 깨어버리기까지 했어요. 
그때 저도 물론 아이들 편에 들었더니 누님이 저를 집에서 내쫓아버렸어요."
  "만기야, 너 왜 그런 짓을 했니?"
  "그게 우리 조국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민 부인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국민을 구제하기 위해서 이런 단체들을 만든 학생들의 치안
방해인 소위 '소년 운동'을 알고 있었다. 이 단체들은 국민들에게 담배와 술, 비단옷,  사인교, 그 밖의 사치
스러운 모든 생활 양식을 금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작은 절간과 유령집들을 쳐부수고 소작인들에게 조세를 
유예하지 않으려고 드는 인색한 지주들을 협박하였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한국 백성을 구제할 수 있으며 
외부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느냐 하는  데서 온 것이었다. 민 부인에게는  이 외부의 지배란 하나의 
운명이었다.
  "그래, 그럼 너 어디서 자니?" 하고 민 부인은 만기를 한참 쳐다보고나서 물었다.
  "여기저기 그저 떠돌아다니면서 자요, 어머님" 하고 그는 만족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어제는 북문 밖에 있는 친구네 집에 가서 잤어요. 대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담을 뛰어 넘어갔어요."
  "그럼 먹는 것은 어디서?"
  "저의 형이 매일같이 동전 두 푼씩을 제게 가져다 쥐요."
  "그런데 네 형은 돈이 어디서 나지?"
  "누님의 지갑에서 돈을 훔치는 거예요."
  "너 그런 얘기를 수심이에게도 했느냐?"
  "아니요, 어머님."
  "그럼 내가 그 얘기를 수심이에게 할 테다."
  만기는 이런 얘기를 수심이에게 할  용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수심이를 너무나 우러러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수심이는 만기에게 선생격이요, 모범 인물이지만 세상 걱정거리를 얘기할 만한 친
구는 못 되었다. 그것을 제쳐놓고도  만기는 자기 누이가 기생이라는  것을 그에게 말하려다가도 쫓겨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는 수심이가 가문이 훌륭한 양반집 출신이라는 것과 자기와 수심이 사이에는 도저
히 상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너 수심이를 좋아하니, 만기야?" 하고 민 부인은 한참 있다가 물어 보았다.
  "네, 저는 수심이를 제 친형보다도 더 좋아해요."
  "네 형이 너에게 매일같이 동전 두 푼씩을 가져다준다니 형을 좋아해야지."
  "아니요, 저는 형을 좋아하지 않아요."
  "만기야, 너 어쩌면 그렇게 배은망덕하니?"
  "형은 그저 자기가 선량한 사람인 체하는 것뿐이거든요."
  "아이고, 너희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애들이냐" 하고 민 부인은 반쯤은 웃으면서 그리고 반쯤은 화가 나
서 얘기했다. 그녀는 대문 아래에서 뒤를 돌아보고 만기더러  "너 우리 집에 머물러 있어도 되느냐고 수심
이에게 물어봐"라고 얘기했다.
  이날부터 만기는 수심이의 집에 같이 있게 되었다.
  저녁때면 가끔 수심이의 고종사촌인 박수록이라는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이  사람은 나이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벌써 어느 유명한 일본 제약 회사의 대리점에 취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업무를 성
공적으로 해나갔다. 수록은 아주 조용하고 검소하며, 살림꾼으로서 자기 분수에 알맞게 항상 만족스럽게 살
았고 옷차림도 깔끔하고 미남이었기 때문에 모든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민 부인도 이 청년을 귀여
워했으며, 이 사람과는 정반대형인 자기 아들에게는  그가 모범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민 
부인은 이 청년이 찾아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민  부인을 소스라치게 하는 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군 부대가 있는 데로 가기를 좋아했고, 담이 바쯤 허물어
진 감옥을, 당시 체포되어 있던 한국 지원병들이 징벌을 받거나 아주 심하게 혹사당하고 있는 그곳을 자주 
바라보고 있었다. 붙잡혀 온 죄수들이  쇠사슬에 묶여서 마당에 앉아  있고 들락날락하는 간수들이 그들을 
발길로 툭툭 차면서 다니는 모습도 수록이는 지켜보았다. 그런 수록이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어
쩌면 경관들이, 시민들과 특히 한참 성장하는 아이들을 위협하고 그들에게 복종심을 가르치기 위해서 정치
범들을 일부러 그렇게 공개적으로 학대했는지도 모른다. 부모들은  어린것들이 그런 비참한 현장을 구경하
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분개하여 고문하는  경관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 우려도 있고 
또한 그런 것을 보면 집안에 불길한 일이 생긴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몇몇 아이들은 가
만히 그리로 가서 구경하였고, 이런 별난애들 축에 수록이도 끼여 있었다. 그가 이렇게 체포된 사람들과 고
문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여러 번 얘기하면 수심이는 그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민 여사는 수록이에게 여기 와서 인제 그런 얘기는 하지 마라고 했다.
  이렇게 수심이를 찾아오는 젊은 사람들은 모두 원기가 왕성했다. 그들은 마치 정원에서 무럭무럭 자라나
는 나무처럼 건강하고 원기 좋고 발랄하였으며, 붉은 진달래꽃으로 뒤덮인 산처럼 쾌활하였다. 그들은 수심
이의 어머니께 인사드릴 때는 언제나 미소를 지었고, 민  부인이 그들에게 뭘 가져다주면 아무리 보잘것없
는 것일지라도 고마워할 줄 알고 흡족해하였다. 만기는 민 부인을 멀리서 보고도 벌써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민 부인은 아들을 바라볼 때면 마치 쳐들어서는 안되는 검은 베일을 통해서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너는 네 친구들 중에서 누가 제이 좋으냐?" 하고 어머니는 어느 날 식사를  같이 하다가 수심이에게 물
었다. 
  "제가 누구를 좋아하는가 하는 것이 뭐 그렇게 중요해요, 어머니?"
  어머니는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아들에게 뭘 강요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는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수심이는 어머니가 자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걱정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바로 어
머니가 머슴을 감옥에 가게 했고 자기 자신을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게 하지 않았는가! 수심이는 이제 자기 
어머니에게서 애정이 깊은 어머니구나 하는  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들에게는 '어머니'라는존재가 그저 
자기에게 명령이나 하고, 뭘 강요할 권한이나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아들이 필요한 한국

  아버지의 제삿날이 자나갔는데도 어머니는 아들과 제사에  대해서 말 한마디 없었다. 어머니는  이날 '신
명'이라고 불리는 도시 뒤의 높은 산 속에 있는 절에 가서 죽은 남편의 혼을 위해서 간단한 불공을 드리려
고 했다. 그녀는 속세로부터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거나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 때면 가끔 이 절을 찾아갔
던 것이다. 고독과 산중에서의 정적, 내세에 대한 경건한 마음 등등이 민 부인의 마음을 달랬고, 또한 답답
하던 가슴도 풀어주었다.
  민 부인이 절 가까이 도착하자 그녀를 본 스님들이 마중 나왔다. 그녀는 텅 빈 손님 방에서 쉬면서 좁은 
골짜기로 흘러내리는 듯도 하고 고개를 지나 넓은 평야로 울려 퍼지는 듯도 한 저녁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
다.

  민 부인이 절에 가서 머물러 있는 동안 제사 때문에 많은 손님들이 이 집에 왔다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걸 보고 모두들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런데 아주 먼데서 온 손님 한 분은 민 부인을 기다리며 이  집에 머물러 있었다. 나이가 사십쯤 된 아
주 우아한 부인으로 선 여인이었다. 그녀는 민 부인이 돌아오는 것을 대문 곁에서 지켜보다가 허둥지둥 달
려나가서 "아이고, 형님" 하며 반색하였다.
  민 부인과 이 선 여인은 친 자매가 아니었고,  용모로 보아서도 친척 관계는 아닌 것 같았지만  서로 '형
님', '동생' 하는 사이였다.
  이 두 사람은 17년 전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 두 여인의  첫 상봉엔 민 부인이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잠 못 이루던 밤의 기나긴 사연이 있었다.
  돌아가신 양반이 이 일을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이 두 여인은 서로 모르고 지내왔을지도 모른다. 어느 장
날에 남편이 집에 늦게 와서 부인 귀에 대고 아들을 하나 봤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민 부인은 청천 하늘
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아들이라니요?"
  "여보,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말아요."
  부인은 남편이 보통 농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 하지 마세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
요"하고 중얼거렸다.
  이 충격은 민 부인이 그때까지 딸만 둘 낳았다는 슬픔보다도  더 괴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가
문에 들어와서 아들을 낳지 못한데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대를 
이을 아들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슬픈 생각이 전신에  엄습하였고, 도대체 아들을 낳은 젊은 엄
마가 어느 집 여자고, 나이는 몇 살이나 됐으며, 뭣  하는 여자고, 도대체 가문은 어떤 여자일까 하는 것들
이 궁금했다.
  "그 여자, 과부인데 아주 가난한 사람이오" 하고 남편은 부인의 눈물을 씻어주면서 말했다.
  민 부인은 서둘러 애를 봐줄 여자 편에 옷가지와 여러 가지 선물을 산모에게 보냈다.
  영감님은 몇 차례나 이 아기와 산모를 집에 데려오도록  하자고 부인께 간청하였다. 교양 있는 부인으로
서, 그리고 양반집 부인의 입장에서 민 부인은 남편이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기의 품
위를 지켜야 했고, 여러 사람을 다루어야 했으며, 심지어는 이 '작은마누라'에 대해서까지 신경을 써야만 했
다. 질투하는 표정은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민 부인은 남편에게 좀더 참고  데려오는 것은 차후로 
미루도록 하자고 간청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저는 아직 젊지 않아요?"  하고 부인은 남편에게 다정스럽게, 
말하기 좋은 기회에 한마디 해보았다.
  그로부터 2년 후에 민 부인이 세 번째 아기를 분만했는데 다시 딸이었다. 그러자 민 부인은 지극히 실망
하여 용기마저 잃고 남편에게 그 어린애와 아기 엄마를  집에 데려오도록 하자고 간청했다. 말하자면 사생
아를 양자로 맞아들일 결심까지 하고 있었다. 민 부인은 산후 조리 때문에 아직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작
은부인'이 아기를 안고 문턱을 넘지 못하고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어서 가까이 들
어오게" 라고 말하는 민 부인의 목소리는 어쩐지 슬프고 맥이 없었다.
  그때 그 예쁘고 젊은 '작은부인'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안고 있던 아이를 민 부인의 품에 안겨주었다.
  "이 애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제발 얘에게 인자하게 대해주십시오."  하고 여자는 눈물겨운 목소리로 애
원했다. 민 부인은 몸이 불편해 누워 있는 자기를 쳐다볼 생각조차 못 하는 이 젊은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이 아이를 정말 친자식처럼 귀여워하겠네. 이 아이도 유산받을 수 있는 것이면 다 받아야 하네." 그러고 
나서 민 부인은 아이를 꼭 껴안으면서 "에이구, 예쁘기도 해라" 하고 귀여워했다.
  "이 아이를 꼭 입양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라고 이 여인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마님께서도 아들을 낳게 되지 않겠어요."
  그녀는 자기 아이를 다시 받아 안고서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여기 그냥 있게나"라고 하면서 미니 부인은 그녀를 붙들었다.
  "우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세."
  이후 작은부인은 이 집에 한 한달이나 머물러 있었으며, 그녀가 자기 집으로 가버린 이후에도 두 여인은 
서로 형님, 동생이라고 불렀다.

      젊은 시절의 광채

  운명의 여신은 그 사이에 이상한 장난을 했다. '작은부인'이 낳은 어린 아들이 죽고,  1년 후에 민 부인은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가 수심이었다. 이 새로 태어난 아들은 죽은 아이와 쌍둥이처럼 꼭 닮았다. 이 사실
은 두 부인에게 사생아가 죽고 나서 수심이라는 적출자가 재생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처럼 보였다. 그
러자 이 두 부인은 사실상으로 친척이나  되는 것 겉은 느낌이 들었고,  그때부터 괴로움이나 슬픔을 서로 
같이 나누게 되었다.
  이 집의 어린 자식들은 집안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물론 예측도 못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친절한 
아주머니'를 그저 어머니의 다정한 친구려니 여겼다.

  17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이 '아주머니'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그녀
의 눈도 큼직한 밝은 얼굴에 젊은 시절의 광채가  연륜의 성숙으로 조금 달라졌을 뿐이었다. '형님'이 다정
한 말은 해줄 때마다 그녀는 여름비에 백수선화가 활짝 피듯이 미소를 지었다.
  "너 마치 누가 부르기나 한 듯이 왔구나"라고 어머니는 선 여인과 안방에서 다정스럽게 얘기하다가 아들
을 보고 말을 걸었다.
  "그런데 머슴애들은 만만치가 않아."
  민 부인은 그간 집에 도둑이 들었던  일, 수심이의 다정다감한 성미와 그가  지금 침묵만을 지키고 있는 
일 등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그래도 이 애는 마음이 얼마나 착해요, 형님" 하고 선 여인은 대답했다. 그녀는 어느 날 저녁에, 이미 여
러 해 전의 일이었지만, 작별을 할 때 자기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났다. 수심이의 나이 겨우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수심이 아버지는 그때 그녀에게 아이들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고 낮은 소리
로 얘기해줬다. 그러자 그녀는 수심이를 안고 억지로 웃음을 지은 일이 있었다. 그래도 그 여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쏟아져 나왔지만 그러면 애가 슬퍼할까 봐 어린것의 얼굴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던  일이 있었
다. 그때 그렇게 어리던 이 아이가 지금은  성장해서 이 아주머니만큼이나 키가 크기 않았는가! 이  아이의 
이마와 눈을 보면 어쩐지 돌아가신 수심이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몸짓 하나하나까지도 꼭 아버지를 닮
았고 목소리도 똑 같았다. 좀 다른 면이 있다면 수심이는 아버지에 비해서 온화한 편이었다.
  오늘도 보니 수심이가 방으로 들어올  때 어쩌면 그렇게 아버지와  모습이 비슷한지 대견스럽기만 했다. 
수심이는 이 아주머니를 바라볼 때 기쁨의 파도가 만면에 넘쳐 흐르는 듯하였지만 그는 이  감정의 자극을 
숨기고 이 아주머니 앞에 조용히 서 있기 위해서 입술을 꼭 깨  물었다. 이런 일은 자기 일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그전에는 늘 이 좋은 아주머니의 팔에 안겼었는데  다 큰 지금 다시 그렇게 하자니 어쩐지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것 같았다. 그때 이 아주머니로서는  처음 보는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이 수심이
의 얼굴에 나타났다. 수심이는 밥상 앞에 앉았을 때에도 우수에 잠겨서 머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어디 몸이 불편하니, 수심아?" 하고 그녀는 아주 다정하게 물었다.
  "그래요, 아주머니."
  그녀는 수심이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았다.
  수심이가 방에서 나가자 민 부인은 "동생! 동생이 어디 한 번 수심이와 얘기해봐" 하고 부탁했다.
  "아닙니다, 수심이가 제게 오면 안 돼요. 그러다가  온 동제가 그 애 아버지에 대해서 알게  되면 어떻게 
해요. 아버지가 외도했다는 사실을 수심이가 알면 절대로 안 돼요. "
  "그 애는 아직 철이 없어. 아무것도 몰라."
  "아니예요, 형님. 벌써 볓 년  전에 그 애가 저더러 아버지가  훌륭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저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맸어요."
  "부처님과 애들은 원래 거짓말을 안 한 대요" 하고 민 부인이 덧붙였다. "언젠가는 그 애가 그 애의 아주
머니 두 분과 나를 당황하게 한 일도 있어.  우리 셋이 모여 앉아서 온갖 얘기를 다하고  있었지 않았겠나. 
자네도 그 두 분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않나. 우리는 다 같이 정중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어. 수심이의 나
이가 그때 아마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이 됐을까.  오랫동안 잠자코 앉아 있던 이 아이가 갑자기  '다른 때는 
엄마하고 밤골 아주머니가 고모를 욕했지! 고모하고 엄마가 밤골 아주머니를 흉보고, 또 어떤 때는 밤골 아
주머니와 고모가 우리 엄마를 욕하더니'라고 하지 않겠나.  그래서 내가 그 녀석 말이 맞는  줄을 알면서도 
뺨을 때리지 않았겠나. 그때부터 나는 어린애들 앞에선 항상 조심한다네."
  어머니와 아주머니는 잠자리에 가서 오랫동안 낮은 소리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 두 
사람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소곤소곤 얘길 하고 있었다. 지금 민 부인은 젊은 시절을 자기와 같이 보
냈고, 자기 마음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선 여인의 옆에 있으니 다시 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여름철이 다가왔다. 커다란 호박 잎사귀는 정원과 울타리, 그리고 담 있는  데까지 뒤덮였고 지붕 
꼭대기까지 뻗어 올라갔다. 오이와 수박도 익어가고 있었다.
  민 부인은 저녁때가 되고 달이 담 뒤로 떠오르자 뒤뜰에  나와서 다른 여자들과 같이 앉아 있었다. 구월
이는 모깃불을 열심히 피워놓고 나서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이 집에는 매무리라고 불리는 젊은 바느질꾼
이 며칠 전부터 민 부인의 일은 돕기 위해서 와 있었는데 이 여자도 잠시 동안 다른 부인네들과 같이 뒤뜰
에 앉아 있었다. 이 여자는 어려서부터 고생을 겪을 대로 겪은 가엾은 사람으로서 바느질 품팔이로 그날그
날의 벌이를 하는 사람이다. 이 여자의 양친은 교양 있는  사람들로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민씨 집에 다니
는 손님들 중 호감을 사는 분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아버지는 1년 전부터 정신병에 걸려 아무 데도 
못 나가게 방에 갇혀 있다시피 했다.  그리고 삼촌 한 분은 문학적인 지식도  제법 있는 젊은 사람인데 일 
없이 놀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놀고 있는 이유가 체면상 자신이 생각하는 수입보다 적게 받으면
서는 일을 못 하겠다는 교만한 생각 때문이라고들 했다.
  매무리는 그녀가 벌써 어린 소녀 때부터 수심이의 누이들과 같이  놀던 이 뒤뜰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
는 여기저기서 예전에 놀던 자취들을 발견하곤 지난날을 추억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을 짓게 되
었다.
  그녀는 수심이의 셋째누이닌 의순이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의순이는 아직도 그전처럼 그렇게 수줍어해요?"
  민 부인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이 제일 어린 딸의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속을 너무 썩혔기 때문에 
민 부인은 이 딸에 대해서 별로 얘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 고집쟁이 딸은 자기가 태어나자마자 유
모가 자기를 기르게 되었고, 그리고 이 집의 셋째딸로서 어머니의 참다운 사랑을 받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
면서 남의 손에서 키워졌다는 사실 등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의순이가  여섯 살이 돼서 부모에게 
되돌아오게 됐을 때 이 딸은 양친을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기를 거절하지 않았던가! 이런 데서 온 성격
의 빗나감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딸도  열 일곱 살이나 됐지만 어머니와 같이 있기
가 싫다고 큰 언니네 집에 가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의 동화

  민 부인은 자기 생애의 핵심이 되는 외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꽉차서 딸에 대해서는 뭘 하지 마라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하겠다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오늘 매무리가 셋째는 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의 가슴에 맺혀 있던 옛 상처가 다시 터져서 한없이  괴로웠다. 어려서 자기 딸과 같이 놀던 매무리
가 지금 앉아 있는 뒤뜰에 민 부인도 함께 앉아 있자니 옛날에 담 구석에 외롭게 혼자 앉아서 가끔 슬프게 
울던 어린 자기 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셋째가 그렇게 수줍어할 때에 그래도 가깝게 접촉한 유일
한 친구라곤 그 당시에 아직 제대로  놀 줄도 몰랐던 어린 남동생뿐이었다.  성품이 순한 수심이에게는 이 
어린 놀이 친구가 아주 제격으로 맞았다. 수심이는  이 누이와 '아빠 엄마 놀이'며 다른 놀이도  같이 했다. 
그녀는 시골의 농부들에게서 얻어들은 동화며  옛날 얘기를 수심이에게 들려주었다.  그런데 이 두 아이는 
너무나도 다른 면이 많았다. 이 소년는 호두 껍질처럼 성격이 딱딱했고, 소년은 껍질 벗겨진 나무처럼 연하
다고 할 정도였다.
  "우리 술이나 한잔 마시세"하고 민 부인은 선 여인에게 얘기하고는 집에 들어가서 술단지와 잔을 내오라
고 시켰다.
  수심이의 어머니는 원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k 그저 가끔 남편이 맛보라고 하면 조금씩 입에
다 대본 정도였다. 그래도 민 부인은 불쾌한 일이 있으면 잊고 고통을 달래는 데 술이 매혹적인 작용을 한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달이 중천에 떠올랐다. 이 달의 꿈 같은 광채는 수심이와  만기에게 방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와서 놀라
고 유인하는 듯하였다. 수심이와 만기는 조용히 얘기하면서 여자들이  앉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뒤뜰로 걸어 나와서는 오이밭과 수박 덜굴이 있는 곳으로  곧바로 걸어갔다. 둘이서 오랫동안 허리를 구부
리고 뭘 찾다가 방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민 부인이 만기를 불렀다. 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고 민 부
인이 있는 데로 가까이 갔지만 수심이는 본 체 만 체 곧바로 가버렸다.
  "만기야, 너 술 마실 줄 아니?"
  그는 미소를 짓고 나서 따라 준 술잔을 들고 마치 일꾼이 해장할 때 들이마시듯이 서서히 쭉 마셨다.
  "거기 잠깐 앉아봐라!" 민 부인이 말했다.
  매무리는 얼른 일어서서 좀 비켜 앉았다. 왜냐하면 만기와 매무리가 서로 같이 앉아서 대하기는 아직 서
먹서먹한 하이였기 때문이다.
  즐거운 웃음을 띄운 이 소년은 조심스레 자리에 앉아서 이 두 부인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래 수심이는 지금 뭘 하고 있니?" 하고 민 부인이 물었다.
  "그 애는 그저 책만 읽고 있어요."
  그는 이 부인네들이 여기에 앉아서 가만히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나  듯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머님, 오늘 제 형이 다녀갔어요. 저를 데리고 가겠다지 않아요. 저의 누이도 제게 잘 대해주겠다나요."
  "그럼 너 누이한테 다시 가야지."
  "그런데요, 전 누이에게 가기 싫다고 했어요."
  "왜 그랬니?"
  "여기 있는 게 더 좋아서요."
  민 부인은 웃고 나서 선 여인에게 만기의 형인 만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주 잘생긴 청년이지. 예의 바르고 교양 있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고, 부지런하기로는 머슴보
다도 더한 사람이야."
  선 여인은 만기의 얼굴을 쳐다보고 나서 술을 부었다. 만기는 키는 작아도 술을 작 마시고 또 잘 견뎌냈
다. 그녀는 민 부인이 만기에게 끼친 영향이 제법 큰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술을  마실수록 평소와 다
른 면을 보였다. 어린애와 같은 눈초리지만 아주 세련되어 있었고, 품위 있고 고상하고 정중하게 말할 줄도 
알았다.
  "만약 어머님께서 제가 수심이와 같이 있는 것을 허락해주신다면 저는 여기에 그냥 있겠어요. 저는요,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수심이를 제일 좋아해요."
  그는 술잔을 공손히 받아서 천천히 마셨다.
  "만기야, 너 지금 몇 살이니?" 선 여인의 질문이었다.
  "벌써 열일곱 살이나 됐지만 신식 학교에 다니는 열 살 먹은 애들보다도 더 바보예요. 저는 우리 누이의 
천한 직업 때문에 아주 바보가 됐지만 수심이가 저에게 쉬지 않고 열심히 글을 가르쳐주고 있어요."
  "너희들은 어른들 말에 순종도 하지  않고 은혜도 모르고 살면서 뭣하러  글을 배우고, 그렇게 배워서는 
무엇 하니?" 너희들은 구름이 어떻게 지나가고 번개가 어떻게 치는가 하는 것들은 배우지만 인정에 대해서
는 하나도 모르잖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머님, 저희들도 인간을 이해하고 있어요. 제가 동화를 하나 얘기해드릴까요?"
  만기는 얘기를 시작했다.
  "옛날 어느 섬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열일곱 살이고 동생을 열 살이었어요.  한 번은 이 둘
이서 멀리 떨어진 육지에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육지까지 가는 데 배로 서너 시간쯤  걸렸어요. 동생은 형
을 도와 나무와 장작을 집으로 날라오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기 생애에 처음으로 어디로  가게 된 것
이었어요. 그들은 새벽 일찍이 떠났어요. 해가 쨍쨍 비치는 그날,  날씨도 좋고 서풍도 적당히 불어서 배가 
목적지까지 아주 빨리 도착했기 때문에 어린 동생은 아주  만족스러워했어요. 기분이 좋아서 그는 형의 일
을 도와 주고 어린 손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이 두 부인은 얘기를 점점 더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실은 이것은 만기 자신이 겪은 일이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그는 중부 서해안인 강화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섬으로 되돌아올 때는 날씨가 나빠졌어요. 오후가 되자 벌써 하늘에 먹구름이 피어 오르
더니 사방이 컴컴해졌고, 저녁때에는 서산에 지던 해마저 암벽처럼 가려졌어요.  그러더니 폭풍이 불어오지 
않겠어요. 언덕 가까이에 있을 때만 해도 동생은 아직 용감하게 견뎌낼 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배가 시커먼 
바다 표면의 가운데쯤에서 요동을 치기 시작하자 동생은 무서워졌어요. 그러자 형이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라고 소리 질렀어요. 동생은 창백해진 얼굴에  겁먹은 눈초리로 사나운 차도를 내려다보았아요. 그러
더니 그는 무서워서 울기 시작했고,  이쪽저쪽 왔다갔다하면서 장작단을 하나씩  바다에 던지고 있는 자기 
형을 불렀어요. 결국 배가 뒤집혀지자 이 두 형제는 그들을 삼켰다가는 다시 뱉어내는 듯한 파도와 싸우게 
되었지요. 그래서 동생은 섬을 향해서 열심히 헤엄치는 형의 오른쪽 다리를 꽉 붙들었어요. 형이 불현듯 뒤
를 돌아보니 벌써 반쯤은 헤엄쳐온 것 같았어요. 그때 형이 온 힘을 다해서 자기 다리를 붙들고 있는 동생
의 두 팔을 콱 밀어뜨리니 그저 매달려만 있던 동생이 물 속으로  가라앉게 되었어요. 그때 어떤 배 한 척
이 익사 직전의 발버둥치는 이 어린 소년을 건져서 집에 데려올 때까지 형은 동생이 죽었을 거라고만 생각
하고 있었어요."
  아슬아슬한 얘기를 듣고 있던 두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이분들은 심술쟁이 동생이 
자기 형에게 왜 복종하지 않을까 하는 이유를 가끔  찾아보았으나, 이렇게 비애를 자아내는 일이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에 만기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형이 동생의 생명을 위험하게 했기 때문에 평생을 두고 그때의 일을 후회하며  그 일을 어떻게 만회
해 보려고 동생을 위해서 어떤 일이든지 하려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이 이렇게 노력하는 
것을 보면 가소로워서 못 보겠어요. 그런 일을 완전히 잊고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할 수는 없지 않습니
까. 자기에게는 어느 무엇보다도 자기의 생명이 가장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상놈이에요, 어머님!  상놈들 
중에도 자기가 양반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저는  오로지 수심이에게서만은 그가 진짜 양반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 그런 경우에 저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 둘 다 구조되지 않는 다면 나
와 팔을 끼고 같이 죽었을 것입니다."
  만기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아직껏 이렇게 얘기를 많이 해본 적도 없고 자
기 마음을 이토록 털어놓은 일도 없었다. 만기는 일어나서  조심스레 그리고 약간 비틀거리면서 손에 오이
를 쥔 채 수심이가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삼복 더위가 시작되자 가슴을 누르는 듯한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후덥지근한 공기 때문에 땀에 흠
뻑 젖어서 마치 목욕이라도 한 듯이 기승을 부리는 더위가 사람들을 억압했다. 수심이는 시원한 그늘 밑에
서 책을 읽기 위해 우물가에 있는 복숭아나무 밑에 누워 있었다. 선 여인은 가끔 수심이가 있는 데서 왔다
갔다하면서 과일도 가져다가 깎아주곤 했다.
  "저 미모의 아주머니는 도대체 몇 살이나 됐어요?" 하고 매무리가 어느 날 민 부인에게 물었다.k 
  "마흔 살이야."
  "그런데 훨씬 더 젊게 보여요."
  "그 여자가 남자들 방으로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무슨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물어보는 거냐?" 민 부인의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민 부인은 매무리가 질문하는 말에서 그런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고,  그에 대해서 얼
른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투로 반응을 보였다.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지만요. 그러나 박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나봐요. 엊저녁에 남자들이 집에 없을 때
에 박 부인이 여기 다녀갔어요."
  민 부인은 시누이가 한 번 다녀가면 항상 불만스러운 일과 꺼림칙한 일을 남겨놓고 가기 때문에 별로 달
갑지가 않았다. 그이는 그저 오기만 하면 수심이를 과소 평가하면서 꾸짖기만 했다. 게다가 그 부인은 자기 
아들 수록이의 장점만을 잔뜩 자랑했다. 민 부인도 수록이가 더 착한 아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며, 또한 
수심이 역시 자기 고종 사촌이 훌륭하다고 인정해주면 이  고모가 몹시 기뻐하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박 부인은 올 때마다 이런 사실을 거리낌없이 되풀이 할 뿐만 아니라 수심이의 약점을 들추기 때문
에 민 부인은 마음이 상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 시누이는 지난 얼마 동안은 유달리도 자주 이 집에 나타
났다. 민 부인은 이 시누이가 매무리 때문에 가끔 나타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부지런한 소녀가 아마 
자기 마음에 꼭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주머니가 그러시는데요, 이 집의 고운 아주머니가 수심이 아버지의 첩이였었대요."
  민 부인은 너무나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얘기를 그 여자가 도대체 뭣 하러 했단 말인가? 그녀
가 이 젊은 선 여인에 대해서 질투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이렇게 해서 그 젊은 바느질하
는 처녀(매무리)로 하여금 자기에게 가까워지게 하려는 것일까? 왜  그렇게 남을 악평하기를 좋아할까? 민 
부인은 아연실색해가지고 "그런 얘기를 수심이에게 절대로 하지 말아라" 하고 말하자, 매무리는  "수심이가 
그걸 알고 있는 것이 어쩌면 더 좋을 텐데요"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마나님은 이 말을 듣지 못한 채 그저 
골똘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시누이 되는 분이 본래 험악한 말을 하기는 해도 그 이면에는 그래도 
맞는 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민 부인은 시누이의 매서운 얼굴을 떠올리며 자기의 가슴 깊이까지를 
상하게 하는 가혹한 판단을 듣고만 있었다. '이 여자가 도대체 선 여인으로부터 무슨  얘기를 들었을까? 아
니면 뭘 직접 보았을까? 무슨 저의가 있는 것일까? 참 별일이야.' 민 부인은 마치 어떤 불유쾌한 일을 자신
에게서 털어버리려는 것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수심이가 아주머니와 같이 저녁을 먹으러 들어왔을 때에는 이 아주머니는 아주 딴사람처럼 보였다. 어떻
게, 그리고 어디서 변했을까? 민 부인은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기나긴 계절풍

  날은 점점 더 무더워졌다. 저녁 노을이 지고 어두워지자 부인네들은 뒤뜰에서 목물을 하고  있었다. 매무
리는 전에는 첩이었던 선 여인이 애교 있게, 마치 처녀처럼 행동하는 것을 자세히 관찰했다.  민 부인은 매
무리를 자세히 뜯어보았으나 그렇게 예쁜 처녀는 아니었다. 이마는 툭  튀어나오고 안장코는 조그마했으며, 
볼 데라곤 눈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눈 때문에  얼굴 전체가 빛이 나서 사람의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다. 
마나님은 매무리에게 친근감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자기의 며느리로 삼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이 없었다.
  시원한 옷차림을 한 이 부인 셋은 정원에 앉아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억수 같은 소나기
가 쏟아졌는데 이것이 바로 기나긴 계절풍이 시작되는 징조였다.  너무나 시원해서 사람들은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뜨겁게 달았던 기왓장들도 깨끗이 식었고, 금이 죽죽 갔던 전답도  논물이 채워지면서 흡족해
졌다. 민 부인은 너무나 좋아서 근심과 걱정마저 다 잊게 되었다. 그때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달이 
떠오르듯이 미모의 '동생'이 나타났다. 잘 조화된 그녀의 얼굴은 깔끔하고 깨끗했고, 걸음걸이도 가벼웠으며 
너무나 예뻤다. 그녀는 옆에 와 앉아서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했으며 그저 부드럽고 온화하며 행복
한 그 무엇에 흔들거리는 것 같은 느낌만 들었다.
  이토록 조용하고 아름다운 미인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기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이 여자의 겸손 때문에 스스로 수치스러워져서 좀더 겸허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기 때문에  더욱 시기
심이 강해졌던 것이다.
  "자네 동국이라는 아이의 셋째누이를 아나?" 하고 민 부인은 다른 사람들은  시원해서 모두 방으로 돌아
갔을 때 동생에게 물었다.
  "아이고, 내가 그 처녀를 며느리로 삼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어. 그 처녀는 내가 지금까지 본 처녀들 
중에서 제일 귀여운 처녀거든. 이름은 봉준이라고 하는데 나이도 수심이와 똑같고, 아주 공손하고 부지런하
며 가문도 좋아."
  "형님, 그 처녀의 어머니와 얘기해본 일 없어요?"
  "아직 없어. 내 생각으로는 아마 그 처녀 어머니도  그런 것을 눈치챈 것 같아. 내가 가끔  그 집에 가면 
그 집 마나님이 수심이는 어떻게 잘 있느냐고 꼭 묻거든. 그리고 그 처녀도 내 의도를 틀림없이 알고 있고. 
지난번에 내가 그 깁에 갔을 때는 그 처녀가 자기 방으로 숨으러 들어가 도대체 나오지도 않잖아. 자기 어
머니 말로는 딸이 잠자러 들어갔다지만... 그런데 나중에 집으로 오느라고 그 집 마나님하고 앞마당을 통해
서 나오다가 나는 자기 방의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 딸의 두 눈과 납작하게 눌린 코를 본 일이 
있어. 그래서 나와 그 처녀의 어머니가 함께 웃었지 뭐야."
  "수심이는 정말 교양 있는 색시를 얻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 애는 인생의 실패자가 될거야" 하고 민 
부인은 얘기를 계속했다.
  "형님, 매무리를 집으로 돌려보내세요."
  "나도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장마가 들어서 한 달이나 비가 계속 내렸다. 그러더니 늦여름의 더위가 거친 폭풍우로  바뀌어버렸다. 비
바람이 너무 불어서 반쯤밖에 익지 않은  과일들이 나무에서 마구 떨어지자 민 부인과  구월이는 정원에서 
일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덧 하늘이 맑아지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때 갑자기 매무리의 오빠가 이 집에 나타났다. 긴 장마철이 계속됐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곧 
다가올 가을에 대비하여 옷차림도 보잘것없었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 어색하게 보
였다. 한참 동안이나 우물쭈물하다가 그는 민 부인에게 아무 일이라도  좋으니 이 집에서 일을 할 수 없겠
느냐고 물으면서 자기는 인제 그전처럼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간청이 민 부인
으로부터 거절되자 그는 혹시 경찰에서 자기에 대해서 문의하면 그저 이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이라고만 얘
기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뭐 경찰이?" 하면서 그녀는 깜짝 놀랐다. "나는 이제 경찰이라면 진저리가 난다."
  그는 그런 말을 듣고도 돌아서서 나가지 않고 일자리가 없는 남자들은 경찰에서 뒤를 쫓을  것이라는 얘
기를 했다. 일본인들은 인제 한국 사람에게 일을 하도록 강요했다. 그런데 국민들 중에는 일본 관청에서 일
하기 위해서, 또 거기서 아주 낮은  자리라도 얻기 위해서 아주 자만스럽고  아주 의젓한 체하는 남자들이 
수없이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옛날에 조국에서 쫓겨나 만주나 시베리아에 가서 살아보려다가 실패하고 이
제 고향에 돌아와서 국민들과 농민들을 괴롭히는 방랑자들도 있었다.  올바른 직업을 제시할 수 없는 남자
는 누구든지 경찰에 호출돼서 스물다섯 대씩 매를 맞았다.  사람들을 더욱 부지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강요하는 것이 정당한 방법인가 하는 것은 정말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민 부인은 이런 규정이 새로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얘기를 그
저 떠도는 헛소문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입장이 난처해서 우두커니  서 있던 매무리의 오빠는 다른 곳에 
가서 행운을 찾아보려는 듯 길을 나섰다.
  그러나 민 부인은 이런 얘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오후가 되자 이 집에 경관이 갑자기 나타나서 집안 식구를 모두 모이라고 호령했다. 경관은 손에다 조그
마한 수첩을 하나 들고 사람들을 모두 한 줄로 서라고 한 다음,  한 사람 한 사람씩 호명하여 대조하며 각
자의 직업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민 부인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들 앞에 서서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아주머니의 아들이 벌써 열일곱 살이나 됐소?"
  "아닙니다. 이제 열다섯 살입니다."
  그 경관은 선 여인을 가리키면서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요?"라고 물었다.
  "그이는 우리 집에 온 손님인데 시골서 농사짓는 분입니다."
  그는 선 여인에게 남의 집을 방문해서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어서 집에 돌아가 열심히  일이나 하라고 경
고했다.
  "이 집에는 또 누가 있지요? 안만기라는 사람은 어디 갔소? 그 사람도 나오라고 하시오!"
  만기는 이 집에 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
보았다. 민 부인은 조금 전만 해도 경관이 '열일곱 살'이라는 얘기를 할 때에 만기가 수심이의 옆에 창백한 
얼굴로 서 있던 것을 보았다.
  경관은 다시 한 번 자기 수첩에 기록된 사람들의 명단을 훑어보았다.
  "이 집 주인 민수심 학생."
  "명주 염색업을 하는 민 부인."
  경관이 호명하면 식구들은 "네!" 하고 대답해야만 했다.
  그런데 민 부인은 부엌일을 하는 여자가 둘이나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어쩌자고 그렇게 해놓았을까?
  "방씨 아주머니는 부엌에서 뭘 해요?"
  "그이는 밥을 해요."
  "이런 바보 아주머니를 보겠나!"라고 경관은 소리질렀다.
  "구체적으로 뭘 하는가 말이오?"
  "음식을 다 해요."
  "그럼 김씨 아주머니는?"
  "그이도 밥을 해요."
  "좀 똑바로 대답해요"라고 경관은 점점 더 당황해하는 민 부인에게 호통을 쳤다.
  "방씨 아주머니가 음식을 하면  김씨 어주머니는 필요없지  않아요. 글세 김씨  아주머니는 뭘 하느냐구
요?"
  "그이는 이것 저것 무엇이든 담그는 일을 해요."
  "담그기는 뭘 담근단 말이오?"
  학교를 다녀본 일이 없는 한국 부인들에게는 그렇게 자세하면서도 조리있게 대답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
로서 이는 마치 그들의 머리에 머리칼이 몇 개나 되는가는  매일같이 세어보아야 하는 일과 같았다. 민 부
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선 여인이 민 부인을 대신해서 김씨 아주머니는 무, 
야채 그리고 생선 등을 다듬어서 절이는 일 같은 것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럼 좋아요!" 라고 경관은 알았다는 듯이 한마디 하고는 하나하나를 자기 수첩에 기입하고 기세당당한 
걸음걸이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다시 자기 일들을 찾아 흩어졌으나 수심이만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
이 앉아 있는 데로 가 그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면서 "그렇게 심란해 하지 말아라" 하고 조용히 타일렀다. 
수심은 그저 머리만 끄덕이고 자기 어깨를 잡고 있는 어머니의 양손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가만히 쭈그리
고 앉아 있었다.
  만기는 그날 하루 종일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마음이 산란하고 기운들이 없었으며, 서로  남의 걱정도 못 하고 밥생각이 있는 
사람도 없었고, 집안이 뒤죽박죽돼 있는 것을 정리하려고 하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저녁때가 되어 민 부인이 만기가 어디에 가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그의 누이가 있는 데로 가 보았더니 
그의 누이는 눈물만 흘리고 앉아 있었다. 만기의 형은 누이가  자기를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한다고 증언 했
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에 붙들려 가서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 그는 경찰서에서 돌아와 몸이 아파 자기 
방에 누워서 끙끙 앓고 있었다. 민 부인이 만기의 누이와 얘기를 하는 동안 방의  미닫이문이 열렸다. 방에 
누워 있던 만기의 형이 머리를 내밀고 손님에게 인사를 했다. 
  "아이고, 이 사람아, 그래 아주 심하게 취조하던가?"
  만수는 그저 머리를 흔들기만 했다.
  "아니오, 그저 사람이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경고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가 밖으로 기어나와서 민 부인의 옆자리에 반쯤 누운 자세로 앉는 동안 기생인 그의 누이가 간단한 술
상을 봐 왔다.
  "운명이란 항상 공정한 것인가 봐요, 아주머님" 하고  그는 술잔을 채우고 권하면서 얘기를 하기 시작했
다. "저는요, 매를 펵 많이 맞았습니다. 정말 많이 맞았어요. 매를 맞을 때마다 잘못한 것이 없다고 악을 쓰
면서도 더욱 심하게 맞고 고통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슬퍼하지 마시고 술이나 드세요."
  민 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들어 성급히 들이마시고 나서 "아이고, 나는 집에 가야겠어" 하며 자리
에서 일어섰다.
  "만기는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어머님" 하고  만기의 누이가 민 부인을 위로했다(모든 기생들은  자기의 
후견인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어머님이 얼마나 고마우신지 모르겠어요! 만기는 그 고마운 것을 안지 못하고 있어요."
  도화는 민 부인에게 바싹 다가선 채 마치 어른한테 매를 맞고 우는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역시 만기는 보이지 않았다. 수심이는 선 여인의 무릎을 베고 방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민 부인 방에는 매무리가 혼자 앉아 있었다.
  "너의 오빠도 한 번 조사당했는지 알고 있니?"
  매무리를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일들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민 부인은 매우 원통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야 가난하니까 경관들이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을거야."
  민 부인은 지쳐서 아궁이 곁에 앉아 두 손으로 불을  쬐고 있었다. 밖에서는 아직도 숨어 있는 사람들을 
찾거나 걸음을 걸을 수 없는 죄수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경관들의 무거운 발소리가 울려왔다. 가을 바람이 
솔솔 불어왔고, 달은 마당에까지 훤히 비쳤다.  부인네들은 이미 잠자리에 들어갔으나 민  부인만은 아직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 부인은 추운 감방에서 지내고 있을 만
기를 경찰서에 가서 만나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밤늦게 남자들 방에서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민 부인은 재빨리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녀는 만기
가 절룩거리며 돌아와 흐느껴 울면서 자기의 목을 껴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중간 대문쯤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고 주저주저 하였다. 그렇다! 정말 만기가 돌아왔던 것이다! 민  부인은 더 가까이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벌써 울음이 터져나왔다. 만기와 수심이는 마루에 나와 앉아 있었다. 민 
부인은 대문 기둥에 기대서서 그들이 얘기하는 소리를 귀담아 들었다.
  "그래 이렇게 나이 먹어서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야"라고 만기가 얘기하
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개 같은 놈이 열일곱 살이면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을 할 때 나는 깜짝 놀랐어."
  "그래 너 어디 가 있었니?" 하고 수심이가 물었다.
  "선산에 가 있었어. 경찰이 거기까지는  올라오지 않아. 수심아! 내가 거기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내가 다시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어. 우리가 있던 곳에서는 감시원들이 사람들을 
늘 괴롭혔어. 우리들은 무장한 사람들을 멸시했지만 일본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더라."
  "만기야, 네 말이 옳아. 세상이 이제 그렇게 됐어. 우리는 평온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요람 속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꿈만 꾸고 있었어."
  "수심아! 나는 엊저녁 형에게 다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어. 우린 누가 뭐라 해도  형제야. 언젠가 한 번 
어떤 사람을 괴롭힌 일 때문에 고민하는 의지할 데 없는 한국의 아들이라고 나는 생각했어. 나는 형으로부
터 너무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쓰려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
  민 부인은 밖에 서서 얘기를 듣다가 살금살금 걸어서 자기 방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자리에 누워서 아
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들릴까말까 할  정도로 온화하고 처량한 치리 소리가 고요한 가
을밤의 적막을 깨뜨리며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원한 가을바람 속에서도 모두 한
탄하고 흐느끼며 사색에 잠겼다. 만기가 작별의 노래를 피리로 불고 있었던 것이다.

  매무리는 다른 데로 가지 않고 이 집에 그냥 있게  되었다. 민 부인은 매무리가 벌어오는 것에만 의존하
고 사는 그녀의 오빠와 어머니 때문인지 이 여자에 대해서  동정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 어리고 활동
적인 여자가 여러 가지 면으로 보아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됐고, 미풍양속과 전통 있는 환경에서 자라온 이 
처녀를 민 부인은 퍽 높이 평가하였다. 그녀는 하녀라는 신분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지 않았고, 구월이도 
그 지위에 맞게 대했으며, 일하는 것 또한 근면하고 깨끗하고 검소하였다. 민 부인은 매무리가 결점이 없이 
결백한 기질의 소유자임을 점점 더 깨닫게 되었다. 언젠가는 이런 여자라면 수심이에게는 좋은 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이런 여자라면 수심이의  너무나도 다감한 마음씨를 조금 세련시킬 수
도 있을 것이 아닌가! 인물로 볼 때는 물론 봉준이가 매무리보다 더 예뻤다. 그러나 인물이  반반한 여자는 
좀 까다로운 데가 있고, 또한 남자를, 수심이 같은 성격의 남자를 망쳐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수심이는 예
쁜 사람만 보면 자기 자신과 세상사를  모조리 잊는 형에 속했다. 사나운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인생의 
현실이 그를 정신들게 할 때까지 그는 환상의 무아경 속에 몰두되는 사람이었다. 축제가 있으면 그는 항상 
위험했다. 웃음을 띈 얼굴들이며 춤과 음악은 그로 하여금 산천 천지가 영원한 멜로디 속에서 둥실둥실 떠
도는 꿈나라로 끌려 들어가게 하였다. 흥겹던 축제가 끝나면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눈물까지 흘렸고, 큼직
큼직한 촛불들이 꺼지고 사람들이 새벽같이 평소의 일과로 되돌아가게 되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수심이는 봉준이라는 처녀의 얼굴을 구경한 일도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에게는 도리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밤이 되니 무섭게 추웠다. 민 부인은 매무리  옆에 앉아서 바느질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일을 도와 
주면서도 민 부인은 자기의 마음을 더욱 거세게 사로잡는 이 처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수심이는 도대체 이 여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운명이 모든 것을 결정해주겠지!
  바느질하던 매무리가 조금 물러앉고 민 부인이  자리에 누웠을 때쯤 해서야 선 여인이  수심이의 방에서 
돌아왔다.
  "형님! 저는 내일 집으로 가겠어요."
  자리에 누웠던 민 부인은 깜짝 놀라 선 여인의 얼굴을 주시하면서 "왜?" 하고 물었다.
  "그 이유는, 수심이가 다 알고 있어요."
  "그 애가 그래 뭘 안단 말인가?"
  "돌아가신 영감님과 저와의 관계 말이에요."
  "아이고, 저런!" 하고 소리를 지르는 밀 부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나라의 풍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두 부인이 이토록 놀라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
다. 차디차고 무자비한 동양의 이 풍습, 이 풍습이야말로 단 한 번이라도, 설혹 자기의 남편이 죽은 후에라
도 다른 남자와 관계가 있었던 여자라면 어느 누구나 그 후손들까지도 모욕을 당하게 되는  비열하고 품위 
없는 여자로, 동시에 모든 죄악과 모든 불순의 근원으로 낙인을 찍히게 되는 것이다. 선  여인의 불미한 일
이 알려져 있는 그녀의 마을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 이  여자와 공손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없었다. 설홀 
남자들이 이 여자에게 음탕한 시선을 던진다고  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 여자의 외로운 
처지에 친절과 사랑 그리고 존중과 애호를 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민씨가뿐이었다. 이 집에
서 그녀는 마치 품위 있는 부인이나 존경받는 여인처럼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래 수심이가 자네에게 뭐라고 얘기하던가?"라고 민 부인은 초조한 나머지 물어보았다.
  "제가 수심이더러 잠이 잘 오도록 술이나 한 잔 마시겠느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싫다고 하면서 자기
는 아버지와 다르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그러고는 하는 말이 '아버지가 아주머니를 찾아갔을  때 참 좋았지
요?' 라고 하더군요."
  민 부인은 이런 얘기를 듣고 우울해하는 동생을 위로해주려고 애를 썼다.
  "동생, 수심이가 그 일을 안다고 해서 별로 나쁠 것 없네. 그 애가 그 일을 기뻐한다는 것을 자네도 알게 
될 걸세. 그 애는 자네를 따르고 늘 좋아하게 될 것일세."
  선 여인은 이런 위로의 말을 듣고도 마음이 별로 편하지  않았다. 날도 밝기 전에 그녀는 수심이에게 잘 
있으라는 작별 인사도 한마디 없이 이 집을 떠나버렸다.
  바로 그날 아침 선 여인이 이 집을 떠나고 얼마  있다가 매무리도 집으로 가게 되었다. 불쌍한 매무리가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자기가 스스로 자기 신세를 망친 것이지 뭐'라고 민 부인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때 민 부인은 수심이의 방에 들어가서 젊은 선 여인의 비밀을 누설한 사람이  매무리가 아니라
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심이는 이런  사실을 매무리나 고모나 또는 어느  누구로부터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아버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했다. 벌써 여러 전 해 전의 얘기지만 수
심이는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이 예쁜 아주머니는 왜  '동생'이라고 부르느냐고 자꾸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
랬더니 아버지가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알게  된다"라고 적당히 얼버무려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
느 날 수심이는 이 아주머니와 아버지가 멋있는 연애를 하는  꿈을 꿨다. 수심이 그 얘기를 아버지에게 했
더니 아버지는 깜짝 놀라서 "그게 정말 사실일지도  모른다"라고 아들에게 말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라, 사람에게 금지된 것도 보게  되는 눈이 있듯이 너는 본 것을 함구하
는 입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난 민 부
인은 며칠 후에 매무리를 데리러 갔으나 그녀는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다시 추수기가 다가왔다. 농토마다 바쁜 일손으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 민 부인은 토야로 갔고 수심이는 밤골로 갔다.
  하늘은 푸르고, 해안의 암벽 많은 만 사이로부터 붉은  단풍빛으로 물들여진 협곡이 있는 데까지 뻗어져 
있는 골짜기 사이의 벼가 누렇게 물든 논 위로는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시골 농부들은 기뻐서 웃
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거 얼마나 흥겹고 좋으냐"라고  민 부인은 하녀에게 말하고 길을 걸으면서도 그
녀의 가슴은 한없이 두근거렸고, 더구나 자기 고향, 자기가 태어난 고을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욱 마음이 
흥분되었다. 민 부인으로 말하자면 희망과  행복이 곡식을 타작하는 일뿐만  아니라 생선이 풍부한 바다의 
파도 소리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 중에 속하는 한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봄보다도 가을이 더 소
중했고, 이것은 음악이나 크나큰 왕국보다도 더 좋았다.

  어린 머슴애들은 너덜너덜한 옷에 신도 신지 않고 맨발로,  계집애들은 찢어지고 흟이 묻은 치마를 입은 
채로 마을에서 달려나와 좌우로 뛰어다니며 일을 하고 있었다.  민 부인은 이렇게 어린 사람들에게는 아주
머니요 또한 할머니인 동시에 아무 걱정 없이 이 추수기를 기뻐하는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자선가며 여왕이
기도 하였다. 자꾸만 모여드는 이 시골 사람들과 함께 그녀는 마을로 들어갔다.  "수심이는 왜 오지 않습니
까?" 라고 다른 아이들이 물었다.
  수심이! 그렇지, 그럼! 그로 인해서 금년 가을에 이렇게 풍년이 든 것이 아니가. 수심이가 아니었던들 어
땠을까? 민 부인은 수심이의 노력이 아니었던들 이렇게 될 수  없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민 부인은 자기
가, 몇몇 아이들이 수심이가 오지 않았다고 서운해하는 바로 그 아들의 어머니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오
늘 한 없이 행복했다. 이 소년들과 소녀들은 지주의 아들인 수심이가 농부들에게 선물도 많이 주고, 세력이 
당당한 지사에게보다도 보잘것없는 오막살이에서 사는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더 정중한 인사를  하는 아주 
착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부모들로부터 가끔 들어왔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어려운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고 
선량한 사람들을 자기의 친자식처럼 보호해주는  유능한 통치자에 의해서 이 세상이  다스려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추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청도
도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청년들은 그들이 신문이나 교과서에서 너무나도 자주 기만
당했기 때문에 이런 보도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어떤 보도가 실리더라도 근본적으로 신뢰하지 않
으려고 했으며, 관리나 성직자들의 얘기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 부인 자신도  사람들 말을 모두 
믿을 수 없었지만, 너무나 그렇게 불신만 해도 안 된다고 젊은 사람들에게 누차 설교하듯이 말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진리에 대한 사랑보다도 어린 자식들에 대한 걱정이  더 컸던 것이다. 관청에서는 부당한 모든 
판결에 대해서 점점 더 민감해져갔다. 비밀 경찰은 국민들의  특히 젊은이들의 비판적인 언사에 대해 정보
가 빨랐다. 각성이나 만기 같은 청년들이 경찰의 귀에 거슬리는 '자유', '독립', '억압'이나 이와 비슷한 언사
들을 함부로 입에 담고 다니면 민 부인은 어쩐지 불안하고 듣기가 거북했다. 새 시대에 적응할 수 없는 보
든 사람들에게는 불안과 공포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용마라는 친구가 자기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일본 천황의 사진이 실린  신문 한 
장을 들고 왔다. 젊은 친구들은 신문을  차례차례로 보고 나서 이 천황이  아주 의젓하게 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에는 군복 차림으로만 나와 있기 때문에 한국 청년들에게는 아주 나쁜 인상을  주었다. 통치
자라면 적어도 최고의 덕망을 나타내는 옷차림이어야 할 텐데 무력 행사를 하는 복장을 했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만기는 자기 손으로 사진에 보이는 군도를 덮어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장교들
을 보았지만 칼이나 무기를 몸에 걸치는 것은 역시 하류 사회에 속한다고 하는 옛날부터 갖고 있던 신념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유럽의 황제치고 군도를 차지 않은 황제가 어디 있어!"  하고 용마는 정복 차림을 한 이 일본 
천황을 옹호했다.
  유럽! 유럽은 대부분의 어린애들에게는 위대하고 강력하고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의미하는 듯하였다. 
그들은 이 대륙에 대해서 모두가 수없이 연구되고 수학적인 타산으로 돼 있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됐어" 하고 만기가 용마의 말에 응하고 천황의 사진을 옆에다 놓았다.
  수심이는 어머니가 옆에 있으면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민  부인은 경찰이 어린것들에게 압력을 
가하듯이 자기 아들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수심이는 오랫동안 하라는 대로만 복종하고,  가사에 대해서도 
이따금 조용히 그리고 이해성 있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마음에는 항상 자기와 아들 사이
에 어떤 표현하기 어려운 장벽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수심이는  자기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수심이는 자기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얘기도 해본 적이 
없었으며, 어머니는 아들에게 명령만을 해왔고 이 명령에 아들은 복종할 따름이었다. 아! 그는 얼마나 어리
석었던가. 이 어머니는 오로지 아들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해왔고, 그래서 아들  걱정을 하느라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때도 가끔 있었다.




  어느 날 밤엔가 어머니는 아들 방으로 건너갔다. 자기 아들과 만기가 체포된 악몽에 시달린 때문이었다.
  "수심아! 너 자니?"
  "아니요, 어머니!"
  "나도 잠이 안 온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네가 체포되지 않았겠니. 수심아, 내가  이제 얼마나 살겠니. 오
래 살지도 못할 텐데 조용히 내 옆에 있게 해다오. 만일 네가 무슨 좋지 않은 일을 저지르지 않고, 그저 침
묵만 지키고 있으면 나도 네 마음이 어떠한지 알 수 있어. 모든 것이 그저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잠자코 있
어라. 이제는 세력 있는 사람들이 지당해지는 세상이 돼 버렸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대항할 수도 없어, 
알겠니?"
  "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어요, 어머니. 이제 저는  더 이상 생각할 기력도 없어요. 눈앞에는 그
저 칼과 총검만 보여요. 저는 이제 책도 읽을 수가 없어요. 자꾸만 군인들의 행진 소리가 귀에 울려와요."
  충격을 받은 채로 민 부인은 아들 방에서 나왔다. 어떻게 하면 이  아들을 도울 수 있을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들을 명랑하게 해주고 좀더 가까이 하려고 하면  할수록 아들은 더욱 멀어져 가는 듯한 느낌
이 드는 것이었다. 원식이가 감옥에서 나와 자유로운 몸이 된 지도 벌서 반 년 이상이나 됐건만 아직도 모
자간에는 냉전이 계속되었다.

      수심이의 편지

  이렇게 우물우물하는 사이에 겨울이 다 지나가 버렸다.
  그때 무슨 기적이나 일어난 듯이 아들이 어머니를  찾는 것이 아닌가! 어느 날 저녁이었다. 석탐에  가서 
소작에 관한 일을 좀 정리하고 돌아왔을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아들 방 앞에 앉아서 뽀얀 밤하늘에 반
짝거리는 별들을 쳐다보며 하나하나 세어보고  있었다. 수심이는 머리를 수그리고  중간 대문을 통해 걸어 
들어와서 토방으로 천천히 올라가 자기 방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도 
수심이는 평소 하지 않던 버릇으로 어머니 앞으로 가까이 갔으나 어머니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아들의 
얼굴만 쳐다 보았다.
  수심이는 슬그머니 어머니 옆에 앉았다. "어머니, 제가 다시 왔어요"라고 말하고는 어머니를 껴안았다. 한
참이나 이렇게 앉아 있다가 수심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침묵을 지켰다. 사실은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리
고 아들이 자기를 껴안았다는 사실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어머니로서 이 일은 그토록 값지고 성
스럽게까지 생각되었던 것이다. 민 부인의 가슴은 두근거렸고 손도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서 그녀는 말없이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이 불안한  어머니는 도저히 아들과 얘기를 나눌  형편이 되지 못했고 그저 
아들이 자기를 껴안아준 것만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민 부인은 방에 들어서며 방이 너무나 덥다고 느꼈다. 그래서 방에서 다시 나와 맏딸과 자기를 어머니라
고 전혀 부르지 않는 셋째딸 의순이에게 가려고 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제 너를 곧  내게로 데려올게" 하고 어머니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용서하려 했다. 고집이 세고 변덕스러운 그 딸이 오늘은 웬일인지 아주 가엾게 느껴졌다.  그 딸이 지
난날 시골에 가 있다가 다시 올라와서 도회지 애들과 어울려 놀지도 못하고 딴 데서 왔다고 따돌림을 받았
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 이제 민 부인은 딸에게 자기를 '어머니'라고 부르도록 강요하지 않겠다고 결심했
다.
  딸 짐에 거의 다 도달했다가 민 부인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발걸음을 다른 데로 돌려서 봉준이의 부
모가 사는 집으로 걸어갔다. 실은 그 집에 가서 앞으로 며느리로 삼고  싶은 예쁘고 참한 그 집 딸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수심이가 상냥한 색시를 갈망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장가를 들려면 아직도 몇 년은 더 기다
려야 한다. 그러면 수심이도 예쁜 색시를 맞을 것이 아닌가! 그저 몇 해만 지나면 된다. 지금처럼 어머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기간이래야 겨우 1년밖에 안 될 것이  아닌가. 민 부인은 빠른 걸음으로 동문과 성벽을 
조금 지나서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 집은 시외에, 높은 산맥과 골짜기 사이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강가
에 있었다.
  민 부인이 그 큰 집 앞에 서 있노라니 물 흐르는 소리가 어쩐지 슬프게만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으나 대문이 잠겨 있었다.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북쪽 하늘을 바라보아도 별 하나 보이지 않았고, 산들과 깊은 골짜기들
은 마치 검을 벽으로 뒤덮여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런데 흐르는 시냇물의 흰 물줄기가 점점 더 희게 반짝
거렸으며 흐르는 물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렸다. 그러더니 주위가 무시무시하게 컴컴해졌다. 큰 빗방울이 
후두둑 머리 위에 떨어졌기 때문에 민 부인은 마구 달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집에 도착하여 젖은 옷을 갈아입고  수심이의 방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수심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만기네 집에 갔을까? 아니면 각성이네 집에 갔을까?
  자정쯤 돼서야 비가 멎었다. 맑게 갠 동쪽  하늘엔 별들이 다시 반짝거렸다. 수심이는 도대체  어디 가서 
이토록 오래 머물러 있단 말인가?
  민 부인은 자기 방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므로 귀를 귀울였다. 첫닭이 울었는데도 
수심이는 돌아오지 않아 그녀는 마음이 답답하고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새벽녘이 되자 어머니는 아들방에 
건너가서 "수심아!" 하고 불러보았으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민 부인은 등불을 켜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으
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민 부인은 등불을 켜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방은 비어 있었다.
  민 부인이 아침 늦게 불안한 선잠에서 깨어났을 때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집안의 어느 누구도 수심
이가 어디로 가버렸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마음이 초조해서 사람들을 수심이의 친구집과 시
누이집이며 자기 누이들 있는 데로 찾으러 보냈다. 시내의  여기 저기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수심이는 그림
자도 보이지 않았다. 경찰서에 가서 물어보아도 허사였다. 방 노인은 밤골로 갔고 구월이는  석탐으로 그를 
찾아 떠났다. 그리고 민 부인 자신도 선 여인네 집까지 갔다가 다음날에 돌아왔지만 그곳에도 수심이의 행
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저녁 늦게  이리저리 갔던 머슴들이 돌아왔으나 시원한  소식을 갖고 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제 민 부인은 입술까지 바짝 마르고 눈도 피로해질 대로 피로했다. 그녀는 구월이에게 속히 가서 만기
를 데려오라고 했다. 잠시 후에 만기가 나타났으나 그도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만기의  말에 의하면 수심
이가 얼마 전에 한 번 어디로 떠나버리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 어디로 가겠다고 하더냐?"
  "어디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만기는 수심이의 방으로 들어가보았다. 혹시 방에서 친구가 써놓고  간 편지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글도  보이지 않았다. 책들도 항상 놓여 있던  그대로 있었고 
책장과 서랍을 뒤져보았으나 늘 있던 그대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지리부도에도 아무런 표시를 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만기는 수심이가 지난 얼마 동안에 받을  편지들도 읽어보며 어떤 근거를 찾아보려 하였으
나 그런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만기야, 그 애가 그때 어디로, 왜 가겠다고 하더냐?"
  "수심이 말로는 어디에 가봐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했어요."
  찾을 대로 찾아봐도 허사였기 때문에 민 부인은 자리에 누워버렸다.  몸은 피로하고 마음이 텅 빈 것 같
고 죽을 것같이 맥이 풀렸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서도 첫마디가 "수심아!" 하고 먼저 아들을 찾는 것이었다. 
엊그제 아들이 자기를 껴안은 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을 미리 알았던들! 구월이는 마나님 곁에 앉았다.
  "마님! 제가 또 다른 데 가서 알아볼까요?" 하고 물었다.
  민 부인은 그저 머리만 흔들 뿐이었다.
  그때 구월이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 하녀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마치 사냥개처럼  이리저리 쫓아다녔고, 
사람들이 가보라는 곳이면 어디고 가서 알아보았다. 그렇게 열심히 찾아다니더니 구월이는 마침내 무슨 근
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낸 것이다.
  "여기에 뭐라고 씌어져 있어요, 마님?" 하고 구월이는 물으면서 손에 편지를 한 통 들고 있었다. 민 부인
은 그 편지를 얼른 받아 손에 들었다. 그 편지를 든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 편지를 어디서 찾았니?"
  "도련님 방의 어떤 책 밑에 놓여 있었어요."
  어머니는 이 편지를 뜯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 이  편지는 바로 수심이가 써놓은 편지였다. 아
주 초라한 봉투에다 '어머님전 상서'라고 작은 글씨로 씌어  있었는데, 얇은 종이에다 뭐라고 쓴 것이 봉투 
속에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이 편지를 뜯으려고 할 때  얼마나 흥분했던지 편지가 몇 번이나 바닥에 떨어
지곤 하였다.

  어머님! 안녕히 계십시오. 저는 이제 어머님 곁을 떠나 머나먼 곳으로 갑니다. 저도 제가 떠난 후 어머님
께서 슬퍼하실 것을 알기 때문에 떠나자니 퍽 괴롭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곳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여기서는 살 수 없어요.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제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고 생각하시든
지 저를 낳지 않았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차라리 편하실 것입니다. 그러시면  저 때문
에 그렇게 애를 쓰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어머님의 훌륭한 아들이 되기에는 너무나 약질이고 너무
나 줏대 없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님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얘기하고, 그렇
게 살아보려고 여러 번 시도해보았습니다만 그게 제게는 불가능했던 것을 퍽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마음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저는 인제 공부도 못  하겠고, 생각도 할 수 없고, 
잠도 제대로 오지 않습니다. 매일 밤 추위에 떨고 굶주리며 탄원하는 사람들과 한길에서 피를 흘리는 시체, 
채직질, 총검이며 무기에 대한 꿈만 꾸고 있습니다.
  저를 이렇게 잘못 기르신 아버님을 제발 비난하지 마십시오.  아버님은 제가 미소를 지으면서 사는 사람
들 속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제가 이토록 차디찬 세상에서 얼지 않
도록 따스하게 보호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얼마나 좋은 일이었습니까, 어머님! 아! 이제 모든 것이 
다 과거가 돼버렸습니다. 아버님의 산소에 잡초가 많이 자랐을 것입니다.
 어머님! 저를 찾으시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저는 어머님께서 염려하시거나 애써주실 만큼 가치 있는  자식
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 어머님, 내내 몸 성히 계십시오.

  편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왜?'라고 민 부인은 입속말로 한마디 하고는 "이제 수심이는 가버렸구나" 하고 
곁에 서 있는 하녀는 쳐다보며 말했다.
  "마님, 제가 가서 도련님을 모시고 오겠어요. 지금 어디에 계세요?"
  민 부인은 대답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구월이는 땅에 떨어진 편지를 손에 들고 들여다보았으나 글씨를  읽을 줄 몰랐다. 그녀는 편지의 내용을 
손으로 만져나 보려는 듯이 손가락으로 편지지를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편지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는 잘 접어 봉투에 집어넣었다.
 
  이른봄의 햇살을 뒤뜰에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구월이는 이런 봄날에 장난치던 어린 수심이를, 아
니 '동생'을 뒤뜰에서 안고 들어와서 씻어주고 잠자리에 누이던 일들이 생각났다. 더 놀겠다는 것을 억지로 
안고 들어오면 그가 구월이의 가슴을 얼마나 때렸던가! 그리고 시내에서나 도지사 집에서 무슨 구경거리가 
생기면 그를 잔 등에 업고 가서 얼마나 자주 구경시켜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잔등에서 그냥 
잠이 들어버리는 때도 있었다. 누가 도대체 이 둘이 오누이가 아니라고 생각했겠는가? 갑자기 사람들은 구
월이에게 이 아이를 '수심'이라고 부르거나 '너'라고 하지  마라고 했다. 왜냐하면 구월이는 어디서 사온 아
이요, 고아로서 노예 비슷한 처지에 있는 처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구월이는 이 집에서 아무 불평 없
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도련님'이 구월이를 매우 좋아했고, 뭘 줄 것이  있으면 그는 다른 어
떤 아이들보다도 구월이에게 제일 많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구월이는  수심이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어린 수심이는 구월이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구월아, 슬퍼하지마"라고  말하면서 달래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던 이 두련님이 지금은 어디에 갔단 말인가? 구월이는 읽을 줄도 모르는 편지를 다시 손
에 들고 눈물을 흘리다가 치맛자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민 부인은 마음이 불안하여 친구들 집으로,  친지들 있는 데로 돌아다니면서 수심이  소식을 물어보았다. 
그러다가 옛날 수심이의 선생이었던 송 선생에게까지 찾아갔다. 그러나 수심이가 간 곳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일본으로 유학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아니다,  수심이가 일본으로 건너갔을 리는 없다. 절대 
그럴 리는 없다! 많은 청년들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는 일도 있었으나 그곳은 지금 전쟁중이니 그리로 갔
을 리도 만무하다. 
  그럼 중국으로 갔을까? 그는 가끔 중국의 대하인 양자강 얘기를  한 적이 있기는 하다. 언젠가는 수심이
가 만주와 시베리아에 대해서 얘기한 일도 있었다.
  "눈이 한없이 내리는 그 곳, 그곳에는 사람들도 많이 살지 않아요. 그리고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가려
면 하루 종일 걷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럼 수심이가 지금 그곳에 가서 한없이 걷고 있을까?
  민 부인은 밤새 여러 불행한 일들이 연상되어 악몽에 시달리고 불안해 했으며, 간혹 무슨 소리가 들리기
라도 하면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나 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어쩌면 수심이가 보낸 편
지가 지금 오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지! 아침에 배달부가 다녀갔으나 수심이가 보낸 편지는 없었다.
  그토록 마음이 양순했던 소년이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어쩌면 이렇게도 잔인한 짓을 할 수가 있을까? 언
젠가 한 번은 그가 아직 어렸을 대 어머니 몰래 절간으로 소풍 갔다 와서 혼이 난 후  다시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도 있었건만! 어쩌면 그가 후회하고 오늘쯤 집으로 돌아올는지도 모르지! 민 부
인은 슬픔을 잊기 위해서 잠시 동안 마당에서 일을 붙들어보았다. 그러나 자꾸만 현기증이  나고 괴로웠다. 
민 부인은 마치 꿈속에서처럼 아무 목적 없이 이 방 저 방으로 돌아다녔다.
  "마님, 진지 좀 드세요. 그렇지 않으면 다시 현기증이 일어나요" 하며 하녀가 저녁 식사를 들고 들어와서 
마나님께 권했다.
  민 부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집안 식구들이  모두 귀찮았고, 그저 짜증만 났다. 사람
들은 모두 생기를 잃고 마치 줄기 없는 나뭇가지처럼 허전하게만 보였다.
  민 부인은 텅 비어 있는 아들 방 앞의 토방 있는 데로 가서 한숨을 지으면서 자리에 앉아  마당 쪽을 바
라보았다. 생각하면 바로 이틀 전 이 시간에 아들이 자기에게 가까이 오지 않았던가.
  사방을 바라보니 신록이 우거져 있었고 정원의 화초들도 만발하기 시작했다. 수심이가 지금 집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집안 식구들도 이 집 아들을 위해서 일을 도와주며 그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행복해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어느 낯선 곳에 가서 고생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학교들도 그새 학년말이 됐다. 용마는 관청 사람들로부터 감독  조수로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라는 지시
를 받고 민 부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용마는  민 부인을 위로하면서 수심이가 곧 집으로 돌아
올 것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했지만 부인은 머리만 흔들고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 애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그 애는 고집이 너무 세서 좀처럼  되돌아오지 않을 것 
같구나."
  여기저기서 다시 채굴, 건축 작업들이 시작되었다. 인부들은 새벽같이 성벽 있는 곳에 모여 서 있다가 작
업이 시작되면 두들기고 망치질하고 구멍을 뚫고 야단들이었으며, 감독들은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서 회초
리를 휘두르며 돌아다녔다. 이렇게 해서 도시는 새로운 규모로 확장되어가고 있었다.
  민 부인은 불안한 마음으로 자기 방에 가만히 앉아서 만발해가는 봄철의 꽃들과는 아랑곳없는 듯이 세월
을 보내고 있었다. 저녁때가 돼서야 민 부인은 자기를 위로하고 혹시 아들의 소식을 들었나 알아보기 위해 
매일같이 찾아오는 각성이와 만기와 얘기나 하려고, 아들 방에 와 있는 그들에게로 건너갔다. 이 두 친구는 
민 부인이 중국말도 일본말도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부인 자신이 처리할 수 없는 모든  서류와 문서들을 
정리해 주었다. 그녀는 이토록 의리가 있는 아들의 친구들에게  다정한 말도 해주고 먹을 것도 가져다주면
서 또 들러달라고 간청했다. 정성 어린 이 두 친구는 매일 저녁 혹시 수심이가 그새 돌아왔을까 하는 기대
를 걸고 찾아왔다가는 매번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여름철이 돼서야 수심이의 행방을 알리는 듯한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봄엔가 그를 아는 어느 여 선생이 
북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역구내에서 수심이를 만났는데 그가 시베리아로  가겠노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 그가  그리로 가버렸단 말인가! 1년 내내 눈만 펄펄 내리는 그  나라에 가서 지금 이리저리 방황하
고 있단 말인가! 무슨 놈의 정신 착란이 일어났길래 그 소중한 아들이 그런 황량한 곳으로 가게 됐단 말인
가?
  한여름이 되면서 장마철에 접어들었다. 마음 붙일 곳 없어  산란하고 괴롭기만 한 가운데 가랑비조차 그
치지 않고 부슬부슬 내렸다. 이런 시련을 겪자니  민 부인은 너무나 급격히 노쇠해가는 것  같았다. 시력을 
점점 약해져갔고 두 다리가 노곤하니 피로의 연속이었다.
  구월이는 노랗게 익은 복숭아를 몇 개 따다가 마나님께 껍질을 벗겨드렸다.
  "아이고, 과일이 벌써 이렇게 익었구나" 하면서 민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구월이도 손에 들고 있던 과일과 과도를 툭 떨구면서 흐느껴 울었다. 이 가련한 하녀에게마저 온 세상이 
다 망해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민 부인은 셋째딸에게 갔다. 이 딸도 자기의 혈육인데 이런 때는 어머니를 위로하고 또 집안에 다소나마 
생기가 넘칠 수 있도록 집에 와서 좀 머물러주면 얼마나  좋을까. 지붕도 큼직한 이 집은 쥐죽은듯이 고요
했고 마당에는 비만 단조롭게 줄줄 내리고 있었다. 이 셋째딸이  집에 와서 참외도 마음대로 따 먹고 익은 
살구도 따고 또 자기의 친구들도 초대하며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가져도 되는 귀염둥이  딸이 되어
야만 했다.
  집에는 의순이 혼자만 있었다. 민 여사에게는 그전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던 이 딸이 오늘은 웬일인지 퍽 
예쁘게 보여 마음이 즐거웟다. 딸의 몸은 균형이 잘 잡혀 있었고 얼굴은 맑고 선명하여 선녀같이 예쁘기만 
했다.
  오른편 이마에 화상 자국이 있지만 한참 피어나는 얼굴인지라 좀처럼 남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의순아! 오늘은 내가 너를 데리러 왔다." 라고 민 부인은 말했다. "그래 나하고 같이 갈래?"
  딸은 약간 놀란 듯한 눈치였다. 의순이는 하던 일을 그만  두고 눈을 크게 뜨며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더
니 "저도 벌써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얼굴까지 붉히면서 대답했다.
  "집에 가서 같이 살면서 내게 대한 노여움도 풀어다오.  나는 너를 다른 애들과 똑같이 귀여워하고 있으
니까."
  "저는요, 뭐 귀엽게 생각하는 건 없어요. 저는 그저 어머니가 진짜 어머니라는  기분이 하나도 들지 않는 
것뿐이에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어머니가 "그렇다면 내게 올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고는 돌아가려고 자리에
서 일어섰다.
  "요새 퍽 외로우실 텐데 미안해요, 어머니."
  "그런 동정은 뭣 하러 하니?"
  집에 돌아오니 수심이에게 온 공문서가 와 있었다. 어머니는  그 서류를 뜯어보았으나 일본말로 된 글이
라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민 부인은 편지를 들고 만기에게로 달려갔다.
  기생집 손님방은 꽉 차서 웃어대고 농담들을 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래서 민 부인은 안마당을 통해 
들어가다가 부엌에서 일하는 두 형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음식도 만들고, 손님들  상에 올려놓을 것을 
무엇인지 열심히 굽고 있었다.
  "이 편지 좀 읽어보게나" 하고 말하고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말기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내용인즉 석탐으로 통하는 시골길이 개통되기 때문에  수심이의 명의로 된 전답 여섯 개가  피해를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금은 곧 지불될 것이라고도 적혀 있었다.
  "이런 길은 도대체 뭐 때문에 만드는 걸까?" 그리고 지금 와서 그런일이 그녀와  무신 상관이 있단 말인
가. 모든 것이 다 망해가는 이 판국에!
  기생인 도화는 손님들과 같이 앉았다가 달려나와서 어서 오시라고  인사를 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그
녀의 눈은 피로해 보였지만 말소리는 아주 선명하고 생생했다.
  그녀는 "어머님, 어머님, 어서 제 방으로 들어오세요" 하며 민 부인의 손을 잡고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뭘 드릴까요? 어머님께서는 그렇게도 친절하신데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도화는 민 부인을 감히 어머니라고 부르고 나니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알 수 없었다.
  "그 애는 곧 돌아올 겁니다. 그렇게 슬퍼하지 마세요. 제가 수심이의 마음을  알지만 그애는 어머니나 다
른 분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그렇데 사랑스럽고 어린 동생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지요. 어머님, 그
렇게 어리석지만 마음은 아주 착한 아이예요. 작년에는 수심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왔었어요. 만기도 집에 없
고 해서 제가 수심이더러 술이나 한잔 마시겠느냐고, 그리고 노래도 한 가닥 듣고, 불고기도 좀 먹겠느냐고 
물어봤더니 싫다고 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또 뭘 물어봤어요. 나이도 어리고 예쁘게 생긴  몹시 수줍어하는 
산호라는 기생이 마침 저희 집에 놀러 왔길래 이 아이가 춤추는 것을 보고 뽀뽀도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
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수심이는 아주 언짢은 표정을 하면서 그녀를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
로 나가버렸어요. 잠시 후에 수심이는 다시 방으로 들어오더니 산호에게 가서 자기가 뽀뽀를 하지 않은 것 
때문에 제발 화를 내지 마라고 간청하듯이 말했어요. 그 나이 어린 산호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돼가
지고 당황해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답니다. 그러자 수심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산호에게 뽀뽀를 하고 나서 재
빨리 도망가버린 일이 있었어요."
  방에서 술을 마시던 손님들이 기생더러 빨리 들어오라고 소리소리 지르자 민 부인은 그 집에서  나와 집
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바람이 불어와 수양버들이 흔들거렸고, 짙은 안개는  도시의 파괴된 외벽 
위까지 뒤덮여 있었다. 도시의 뒤쪽으로 드높이 부채  모양으로 보이는 산꼭대기는 기묘하게도 산봉우리까
지 선명하게 돌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암벽이 있는 균열 하나하나와 여울가에 하얗게 씻겨진 돌멩이들까지
도 환히 보일 정도였다. 어느새 벌써 가을이 됐단 말인가?  기러기들이 남쪽 나라로 날아가면 수심이도 어
쩌면 집으로 돌아올지도 모르지.
  가을 날씨라 좀 시원해지자 집안 사람들이 감기에 걸려서 기침을 하는 통에 민 부인도 밤새  잠을 잘 수
가 없었다. 이게 혹시 민 부인이  세상을 떠날 징조가 아닐까? 그녀는 궤  밑에 깊숙이 숨겨놓았던 수의를 
옷장에서 꺼내 펼쳐보더니 자기 몸에다 대보았다.
  "그게 무슨 옷입니까, 마님?"
  "이건 사람들이 황천으로 갈 때 입는 옷이란다."
  구월이는 깜짝 놀라서 이 진기한 옷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비난과 공포 그리고 혐오가 가득한  얼굴 표정
을 짓더니 이 섬뜩한 옷을 더 이상 쳐다보지 않으려고 자기 바느질거리에 시선을 못박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민 부인에게는 뜻밖에도 희소식이 들려 왔다. 방에 앉아서 듣자니 낯익은 여자 목소리가 밖
에서 났다. 이게 대체 누굴까? 의순이가 집으로 돌아오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그렇다, 의순이가 밥상
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제가 왔어요" 라고 의순이는 얼굴을 붉히면서 어머니께 인사를 드
렸다. 이 딸은 매일같이 괴로워하고 경황이 없는 어머니를 돌봐 주고 있는 사람은 구월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 낯익은 모습의 친딸이 자기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마치 꿈을 꾸는  것같이 생각되었
다. 이 딸은 여러 해 전에 수심이로부터 자기가 좋아하는  호박 나물을 만들어달라고 항상 조름을 받던 그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머니는 너무나 감격해서 "의순아, 너 참  잘왔다"라고 말하면서 딸의 머리를 쓰다
듬어주었다.
  이제 이 어린 딸이 와서, 살이 오른 손으로 추수기의 일들을 해줘서 집안일들이 하나하나 정리돼가고 있
었다. 어머니는 일을 모두 딸에게 맡기고, 시골에 가서 곡식을 분배해야 하는 데도 가지 않았다. 민 부인은 
너무나 고단해서 집을 나간 아들이 당장 돌아온다 해도 밖으로 나갈 기력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지난 
얼마 도안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여러 차례 꾸었다. 꿈에 보니 아들이 눈 속에 반쯤 얼어서 시베리
아에서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머니가 꿈에 아들을 껴안고 몸을 좀 따스하게 해주려고 하면 퍼
뜩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어느 날 민 부인의 시누이인 박 여인이 와서 매무리의 어머니에게 찾아가 수록이를 위해서 말을 좀 좋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정말 이 부탁을 들어줘야 하나 어쩌나 하는 것은 민  부인이 결단을 내리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
하면 이 박 여인은 수심이의 생활을 지금 이토록 어렵게 망쳐놓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가서 그 부탁을 들어줘야지. 그래야 내 팔자도 좋아질테니까" 하고 민 부인은 딸에게 얘기
했다.
  "그로 인해서 어쩌면 내 알들이  집으로 돌아올는지도 모르지. 내가 내  운명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착한 
일을 많이 해야지."
  구월이가 마나님을 모시고 매무리네 집 있는 데까지 동반해드렸다. 젊은 매무리는 마나님과 구월이가 자
기 집 마당에 들어서자 아버지의 방문을 닫고  나와 아주 정중하게 자기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민 부인을 
안내했다.
  민 부인은 이 집 부인께 인사를 드리고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박수록이요?" 하고 이 집의 늙은 부인은 
소리를 질렀다. "그 아이는요, 저 늙은 형리의 손자랍니다. 천만에요, 민 부인. 죽어도 그 집으로는 내 딸을 
시집 보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망받고 있는 그런 분의 손자며느리로 내 딸을 보내진 않겠습
니다. 차라리 내 딸이 집에서 굶어 죽는 것을 보고 있겠어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박 노인이 저지른 죄과는 세상이 다  아는 것들이었다. 사람
들이 마치 흑사병 환자 옆에 가기 싫어하는 것처럼 그  노인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그가 어서 비참하게 
망해버리기를 바라기도 했다.
  저녁 햇살이 한길가에 약간 비치고 있었다. 민 부인은 피곤한  몸을 조금 쉬기 위해서 마당 울타리에 기
대어 섰다.
  "저는요, 그 바느질하는 색시가 우리 도련님하고  혼인하는 줄 알았어요"하고 구월이가 느닷없이 중얼거
렸다.
  "너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니?"
  "그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에요."
  "너 혹시 뭘 본 게 있느냐?"
  "그럼요, 마님. 둘이서 방에 있을 때는요,  그 색시가 언제나 도련님을 꼭 붙들고  있었어요. 팔이나 손을 
꼭 붙들고 도무지 놓지를 않았어요."
  "그럼 수심이는, 수심이는 그래 어찌더냐?"
  "가만히 있었어요, 마님."
  "또 본 게 더 있느냐?"
  구월이는 머리만 흔들고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러기들은 어느덧 철을 따라 다 날아가버렸으
며, 민 부인에게는 너무나도 비참했던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차가운 북풍이 불어오니 지붕 위에 쌓여 있던 눈이 날아가고 창문이 흔들거렸다. 민 부인은 북향으로 달
린 위쪽 창문을 종잇조각으로 막아버렸다. 어째서 민 부인의 손이 이다지도 떨릴까? 이토록 무서운 혹한이 
아들이 지금 가 있을 바로 그 북쪽에서 불어닥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 불쌍한  아들은 지금 어느
집, 어느 지붕 밑에서 잠을 자며, 어떤 사람들한테 가서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애걸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민 
부인은 붙였던 종잇조각을 다시 찢어버렸다. 그것이 아들이 가  있을 북녘 하늘과 자기 사이를 막아버린다
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칠성님이여, 제발 이 아들이 어디 가서 추워서 떨지 않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지 않도록 보호
해 주소서. 산수의 신이여! 이 아들이 무인지경의 눈보라 치는 벌판을 헤맬 때면 보살펴주소서.
  아! 불쌍한 내 아들아! 나는 네가 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을 때부터 그저 네 앞길에 좋은 일이 있기만을 
빌었었는데... 그리고 젖을 먹일 때도 언제나 신령님께 기도를 드리곤 했는데... 그러니  아무쪼록 너에게 모
든 것이 고생스럽지 않게 순조로이 성취돼야 할텐데. 설혹 네가 이 어미를 괴롭힌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너의 모든 것을 용서할 것이다.

      겨울밤 눈 녹는 소리

  인제 금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민 부인에게 갑자기 괴로운  일이 생겼다. 그녀는 딸 의순이와 같이 설
에 뭘 차리기 위해서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번 설에는 아들 친구들이나 모두  초대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의순이는 자기 친구들을 오라고 해서 어렸을 때 지내던 식으로 이번 설을 즐겨볼 생각이었다. 그런
데 구월이가 갑자기 뛰어 들어오더니 지금 경찰 몇이 수심이의 방에 들어가 있다고 마나님 귀에 속삭였다. 
구월이가 이런 말을 하자마자 민 부인도 쿵쿵거리는 경찰들의 발소리를 들었다. 이 경찰들은 집을 온통 수
색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 사람들이 이런 가택 수색을 하는 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중
간 마당에서 욕을 막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맙소사!  불상사는 이미 저질러져 있었다. 만기가 그
들의 손에 붙잡힌 것이다. 바로 이렇게 가택 수색을 하고 있는 순간 멋도 모르고 대문을 들어선 만기를 본 
경찰들은 그를 곧 체포했다. 그러고는 그를  땅에 눕혀 놓고 그 무지막지한  구둣발로 마구 발길질을 하며 
때렸다.
  "아이고, 만기야.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민 부인은 울면서 소리질렀다. "만기야,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어?"
  그제야 일어서는 만기의 얼굴을 쳐다보니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입을 비쭉거려보았
으나 입술만 부들부들 떨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만기는 
반쯤은 질질 끌리고 또 반쯤은 쫓겨나듯이 이 집에서 끌려나갔다.
  그런데 이런 불상사가 이해에 또 발생해야만 했단 말인가!
  그 다음 불상사는?
  해가 바뀌기도 전에 민 부인은 이  불쌍한 만기가 불경죄로 징역형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다음에는 사위가 경영하는 큰 양복점도 문을 닫아야만 한다는 입맛 쓴 소식까지 들려왔다. 이 젊고 유능한 
사위는 자기의 기업을 처남의 건실한 재력에 의지하고 이 험한 시기에 사업을 너무나 크게 벌였던 것이다. 
이런 돌발적인 위기로 인하여 사위는 파산을 초래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민 부인이 소유하고 있던 산의 대
부분도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하라는 대로 해야지" 하며 민 부인은 자기 옆에 앉아서 울고 있는 딸을 보고 말했다. 민 부인이 이것저
것 남아 있는 재산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딸도 함께 도와드리면서 어머니를 위로했다.
  "수심이를 위해서 약간은 보유하고 있어야 할텐데."
  그러다 보니 이 대궐 같은 집도 팔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 집에  고용돼 있던 두 집 식구들도 다른 데로 
보내데 되었으나 구월이만은 그냥 남아서 마나님을 돌보게 되었다.
  3월 중순이 돼서 민 부인은 선산 밑에 있는 조그마한 새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좀 둔하게 생긴 이 초
가집은 네 칸짜리 집이었다.
  "눈이 다 녹아버린 다음에 모두 손대서 수리하도록 해야지" 하고 민 부인은 옆에 서 있는 딸과 구월이를 
달래듯이 얘기했다.
  지붕에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여름철에도 볕이 들지 않는 좁은 마당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민 부인은 딸
하고 구월이와 셋이 함께 저녁 식사도 하고 편히 쉴  수가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민 부인은 아들이 돌아오
지도 않았는데 팔아버린 그 큰 집  때문에 지금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장롱 속에 깊숙이 넣어둔 그 
매매 계약서 뭉치는 어떤 일이 생겨도  건드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이런 결심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도 네 몫을 받게 돼, 의순아" 하고 민 부인은 딸에게 재산의 얼마를 줄 것을 약속했다.
  "어머니, 저는 받지 않아도 돼요. 그저 수심이 생각이나 하세요."
  "너는 혹시 시베리아의 봄이 어떤지 알고 있니, 의순아?"
  "몰라요, 어머니."
  민 부인은 하도 궁금하여 세계 지도를 다시 꺼내놓았다.
  "도대체 그 애가 어느 근방에 가 있는지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구월이는 흐느껴 울다가 눈이 퉁퉁 부어가지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구월이가 시집이나 가겠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노상 울기만 하니 도무지 볼 수가 있어야지."
  한참 있다가 어머니는 "저 왼쪽 서랍을 열어보면 내가  구월이를 생각하고 넣어둔 것이 있다. 내가 죽으
면 그걸 구월이에게 주고 그저 보내면 돼" 하고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딸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 집은 네 것이 된다. 네가 나중에 시집을 가면 네 신랑하고 이 집에서 살아도 돼. 수심이는 밤
골에 과수원 집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느니라."
  지금 사는 이 집은 적막하지만 그래도 민 부인의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 와서 사니까 게다짝 끄는 소리
와 쿵쿵거리며 다니는 구둣발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다만 눈이 녹아 떨어지는 소리
가 고요한 밤중에 마당에 단조롭게 들려올 뿐이었다. 민 부인은 잠자리에 누워서까지 온갖 것을 다시 계산
해보고 매매 계약서 뭉치를 생각하면서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남아 있는 농토만을 가지고도 수심이는 쌀 
130가마, 기장 50가마, 그리고 다른 곡식들도 수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제발 이 집 농토를 
지나는 일등 도로만 공사하지 않으면 될 텐데. 민 부인은 자기 집 소유의 땅에 세워져 있는 농가를 하나하
나 세어보았다. 오! 이제 내 손가락이 이렇게 쭈글쭈글해지고 뻣뻣해지다니! 민 부인은 양손을 비비더니 그 
손을 이불 밑으로 집어넣었다.
  지붕에서 눈이 녹아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아직도 들려왔다. 뚝, 뚝,  뚝, 뚝! 물 떨어지는 소리가 이렇게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게 언제였던가? 그렇지, 벌써 여러 해 전 내가 시집 왔을 때였지! 그때도 이렇게  조
그마한 집에서 살았던 것이다. 마당도 정원도 없는 나지막하고 둥근 모양의 그 집은 꼭 이 집과 같이 생겼
었다. 그때도 남편이 장에 간 날에는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더니 지금도 꼭  그때의 심정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새벽녘에 민 부인은 남편 꿈을 꾸었다. 영감님이 바로 옆에  누워 계시는 꿈이었다. "여보! 벌써 날이 밝
았어요" 하고는 옆에 누워 계시는 영감님을 깨웠다. 영감님은 비몽사몽 속에서 조반은 몇 숟가락 뜨고 "바
빠요, 나" 하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민 부인은 영감님을  따라 대문까지 나가서 "너무 늦게 오지 마세요. 
저는 아직 너무 젊어서 혼자 있으면 무서워요" 하고 말했다. 영감님은 마누라의 얼굴을 쓰다듬어주고 눈보
라가 들이치는 대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민 부인은 잠에서 깨어 기침을 하고 나서 호롱불을 켜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이고, 꿈이었구나."
  민 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 벌써 여러 해가 지나갔지만 그런 일이 한 번 있었지.
  고요한 밤중에 지붕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가 그치지 않고 들려왔다.
  "여보, 저도 데리고 가요. 저는 너무나 외로워서 더 살고 싶지가 않아요."


        탈출기


      동경, 사랑 그리고 화해

  나는 어렸을 때 한 번 어머니 몰래 산에 갔던 일이 있다.  학교 친구들하고 소풍 갔다가 그날로 집에 돌
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집과 우리가 갔던 산 중간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살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었
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동경과 근심 그리고 후회로 가득 차서 밤새 한잠도 못 자고 밤을 꼬박 세웠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어머니 곁을 떠났다. 우리 
어머니는 고집이 너무 세었고 자식들이 유복하기만을 항상 바라고  계셨다. 그리고 나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너무 유약하다느니, 너무 다정다감하고 너무나  불안정해서 누가 뭐라고 하면 얼른 유혹
될 형이라고까지 하였다. 나는 본래 사람을 성격에 따라서 분류하는 것을 싫어했다. 다시 말해서 경쟁의 현
실 세계를 경멸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집을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잊고 다 버릴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었다. 즉 나의 책들,  내 방, 집, 고향, 친지, 벗, 
그리고 친척들을 용감하게 저버릴 수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부담스러웠고,  나를 억누르고 굴복
시키는 무거운 짐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떠나버렸고, 또한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단 하나 내가 버릴 수 없었던 것은 동양인에게 그 무엇보다도 중대한 책임인 '자식의 의무'였다.
  많은 부모들 중에는 좋지 못한 분들도 있어서 자식들이 어른들ㄹ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리라는  나의 생각
과 내가 어머니에게 거역하는 것과는 사실상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옛날에 배운 것처럼 천벌에 대해서 나는 잠시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아니, 나에게는 분명히 천
당이나 영혼이 없었고 사람이 죽으면 그저 그만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
은 내가 마치 다 해진 옷을 벗어버리는 것 같은 미신이었다. 터주자리와 신전, 그리고 장례 예식 등은 내가 
보기에는 그저 웃음거리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며, 나 자신에게는 그저 천하게만 여겨졌다.
  내 마음속에는 자식의 의무감이 우러나서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이런 자식으로서의 의무감은 어디
에도 비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이며 어려운 것으로서 나의  마음을 잠시도 편하게 하지 않았다. 나는 어디에 
가나 이러한 의무에 집착되어 있었고, 집을 떠나 다른 도시에  가 있을 때에도 잠자는 시간만 빼놓고는 항
상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떤 때는 걸어가면서까지도  이런 의무감을 생각하다 보면 걸음도 제대
로 걸을 수 없었다. 이렇게 몰두되어 있노라면 아름다운 경치며 산과 다리,  북녘땅의 양지바를 그루터기에 
앉아서 고독을 즐기던 일등이 하나도 소중할 것이 없었다.

  나는 그토록 무력하고 유명무실한 동양  세계의 케케묵은 의무감이라는 것을 경멸하며  이것을 반대하여 
싸우기까지 하였다. 그런데도 나는 이것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식사도 못 하는 형편이었다. 어째
서 나는 이렇게 자주 슬퍼지고 눈물이 날까? 지금 나는 동경, 사랑, 포옹, 그리고 화해,  이 모든 것을 저주
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저속하고 무가치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의무감을 극
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가 죽어 있었고 피로하고 활기를 잃고 있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사고할 수도 없었고, 실
실 상태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단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어머니가 내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
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어머니가 허락해준 덕분에 서울에 가서 의학 공부를 시작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서 한국에는 큰 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월 1일, 한국은 손에 무기 하나 들지 않고 자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어느 사람하나 칼자
루도 들지 않고 이 봉기에 나섰던 것이다. 잔혹한 폭정에 대항해서 이성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행렬을 지어
서 불을 뚫고 나가면서 행진하는 바로 이런 형태의 항전에는 나도 참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기를 든 사
람들끼리의 대전은 내 생각으로는 영혼의 패전이며, 무참한 전쟁을  통해서는 인간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
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토록 흥분한 가운데서도 나의 생명이 누구에게 속하는가 하는  것을 명심하고 있었다. 나는 함성을 지
르며 성급히 달려가는 군중들을 통해서, 어떤 때는 어머니가 내게 손을 내밀었고, 또 어떤  때는 치마로 내  
몸을 감싸주며 보호해주었다. 언제고 밤에 내가 지하실에 내려가서 숨거나 금지된 전단들을 비밀리에 뿌리
고 다닐 때면 꼭 어머니를 뵙게 되었다.
  이런 전단 뿌리는 일을 6개월이나 해오다가 결국 나는 조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발 도망가거라. 어디든 멀리 도망가거라" 하고 어머니는 사정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항상 자기 곁에 데리고  있고 싶어하는 이 불쌍한 어머니에게서 세 번째  떠나게 되었
다. 정말 마음 쓰리고 괴로운 일이었다.
  "네가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멀리 가거라. 네가 그토록 가고 싶어하던  독일이라는 나라로 가거라. 거기 
사서 살아가는 데 뭐가 필요하면 무엇이고 다 보낼 테니. 내 귀여운 자식아. 내 생각일랑 말고 그저 어디에 
가서든 몸만 건강해라."
  "곧 돌아올게요, 어머니!"
  그때 어머니 나이 60이 다 되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아주 늙은이처럼 보였다.

      압 록 강

  옛날 옛날부터 흐르고 있는 시퍼런 압록강은 중국과 경계를 이루면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강의 오른편 둑가의 어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다.  멀리 바라보니 저 반대쪽이 
바로 내가 떠나야만 하는 내 고향이 아닌가! 오후의 햇살이 언덕과  산골짜기와 초원을 기분 좋게 내리 비
치고 있었다. 그때 근방에 있는 오막살이에서 사람들이 하나하나 기어 나와서 고기 그물들을 널고 있었다.
  사방의 공기가 얼마나 맑은지 나는 멀리 있는 논밭, 큰길이며 오솔길들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집들의 울타리와 뜰, 그리고 파도가  밀려나간 해변가의 조그마한 배들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이 
모든 것이 강 건너 햇볓 아래 나의 맞은편에 바라보였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불유쾌한 것을 모조리 씻어 버리는 듯 마음이 상쾌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괴로웠던 일, 그리고 바로 어제 이 강을 가만히 도강할 때 추격 당하던 일까지 모조리 잊어버리고 싶
었다. 그저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내 나라, 저 건너에 보이는 내 조국이나 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을 뿐이
었다.
  압록강은 유유히, 그리고 시퍼렇게 흐르고 있었다. 어느덧 해도 서산에 넘어가버리고 저  멀리 보이는 남
쪽 하늘도 서서히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만주 평야

  흐린 저녁 하늘은 무한한 벌판 위로 뻗어 있었고, 이 평야를 통해서 우리가 탄 기차는 북으로 북으로 달
리고 있었다. 바깥 날씨가 약간 싸늘해지더니  급기야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리잡은 차칸에는 
일본 사람 셋이 같이 앉았는데, 그중 한 사람은 점잖은 옷차림한 신사였고 또 한  사람은 젊은 관리였으며, 
그 옆에는 어떤 부인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해 비참하게 되어가기 시작하는 한국인
들의 새로운 반항 운동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북녘 하늘의 놀을 감상하고 다시 한 번 고국의 하늘쪽을 바라보기 위해 승강구 있는 데로 나라보았
다. 비좁은 이 자리에는 약 20여명쯤 되는 만주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타고 가는 
객실에는 일본 철도청 규정에 의해서 만주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만주 사람들이 승차해도 되는 유
일한 객차는 이미 초만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밖에 나와  서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내가 입은 옷
이 이상하게 보이고, 그리고 내가 중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낄낄 웃어댔다. 아마도  나의 서투른 중국말
을 들어주자니 몹시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내 객실로 되돌아가려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는 어느 노인과 부딪쳤다. 그  바람에 그 노인은 담뱃대에 턱을 부딪쳐 잇몸에서 
피가 조금 나는 것을 뱉고 있었다. 나는 너무 미안해서 죄송하게 됐다는 뜻을 표하기 위해 가만히 서 있었
더니 노인은 괜찮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면서 나의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웃었다. 나는 웃음을 지었고, 우리들은 말 한마디 없이도 서로 잘 이해하게 되
었다.
  이제 비도 점점 멎기 시작했고, 아까 처럼 그렇게 춥지도 않았다.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더니 승강구에 
서 있던 우리에게 먼지가 날아왔다. 남쪽 하늘은 어느덧 맑게  개었고 밝은 광환은 구름에 가린 달 모양을 
보여주었다. 중국 사람들은 피로해서 딱딱한 철판 위에 그냥 앉아 있었고, 어느 노인 한  분은 젊은 사람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큰 보따리들을 옆에 세워놓았으므로  바람이 불어도 얼굴에 바로 부딪히지 않
았다. 어떤 남자 한 분이 내게  미소를 지으며 자기의 무릎에 앉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나는 
지금 별로 피곤하지도 않을뿐더러 점점 더 강하게, 무시무시한  뿌연 벌판에서 사납게 불어오는 이 태풍을 
신기하게 바라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내가 본 첫 번째 중국 도시는 목단이었다. 요동 반도의  중심지에 있는 이 도시는 묵직한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아시아 후부의 태풍과 몽고 지방의 사막에서 오는 먼지가 불어오는 것이었다. 남문 있는 데를 
통해서 오색찬란한 간판들이 있는 큰 거리 쪽으로의 전망은 누구나 볼 만한 경치였으며, 설혹 신식 것만을 
좋아하는 사람이 보아도 놀랄 정도의 전경이었다. 이곳에 있자니 옛날 만주 세력의 찬란한 흔적이 절로 눈
앞에 다가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당시의 이 세력이야말로  후부 아시아의 전지역에 걸쳐서 무한히 확
장되었던 것이 아닌가! 교외에 나가서 옛날의  사형장이었던 곳을 구경하니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 사형장의 주위에는 당시에 처형당한 사람들의 무덤이 있었고, 무덤마다 나무 판자에  이름과 나이, 직업 
등이 적혀져 꽂혀 있었는데 하도 오래 된 나무판들이라 먼지와 비 때문에 불결하기 짝없었다. 이 무덤들이 
인간에게 과연 양심을 환기시킬 수 있었을까? 그리고 묘지 입구에 '더 이상 죄가 없도록 노력하라!'라고 씌
어져 있는 이 뜻깊은 문구가 죄인으로 하여금 개과 천선하도록 할 수 있었을까?
  정오가 되어 나는 정거장으로 달려가서 천진행 중국 열차의 3등칸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객실로 들
어갔더니 내가 타고 온 다음 열차로 목단에 도착한 두 한국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 한 중국 
학생이 자기 부인과 같이 자리에 앉자  어쩐지 우리들은 다 한 종족에  속하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열차는 
중국인들로 꽉 차 있었다. 대부분이 더럽고 낡은  옷을 입은 노동자들로서 모두가 먹을 것과  베개, 그리고 
이불들을 꽉 채운 커다란 짐들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모두가  장거리 여행을 위해서 나보다는 훨씬 더 많
은 준비를 하고 떠난 것 같았다. 나는 트렁크도 하나 없고 덮을  것도 없이 30시간 이상을 이 기차에 앉아
서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기차는 서쪽을 향해서 발차했다.
  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가옥들과 언덕, 그리고 묘지와 논밭이  햇빛을 받으며 주
마등같이 지나갔다. 기차가 이 대국의 중부 지방에 가까워질수록 내 가슴은 더욱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까?" 하고 옆자리에 앉은 원이라는  한국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가 지금 요동  반도를 통해서 약 70마일이나 지나왔는데  이 무인지경의 평야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폭풍을 만나 생명을 잃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는 그저 머리만 끄덕거렸다. 정말 이런 참사들이 수없이 있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너무나 고단해서 나는 잠시 잠이 들었다가  옆 사람과 부딪치는 바람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열차 속은 
어느덧 잠자리로 변해서 그런지 더욱 어두침침해 졌다. 덮개 옆에 있는 조그마한 등불이 가려져 있었고, 회
색 덮개를 덮고 자는 사람들의 코 고는 소리가 정말 들을 만했다.  어느 젊은 처녀 하나는 자기 옆 사람의 
어깨에다 머리를 얹어 놓고 자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아마 꿈을 꾸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한국 사람 하나
는 열심히 창문 밖으로 북쪽을 바라보다가 "저것 봐요"  하고 소리 질렀다. 그래서 나도 그 사람이 가리키
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스름한데 푸른 산들은 이쪽 저쪽으로 희미하게 보였고, 바로 저 산들이 하늘과 
닿은 듯한 그 위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저 위대한 유적인 만리장성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본래 말하기를 좋아하는 원씨도 말없이 가만히 앉아서 그 어마어마한 성을 매혹 당한 듯이  바라보고 있
었다. 그는 마치 세계에서 가장 큰 이 건축물을 완성하기 위해 수천 년 전에 돌멩이를 하나하나 들고 오르
내렸을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듯하였다. 저 위대하고 세력이 컸던 진시황제는 잔인한 이방인들이 중국
을 계속해서 침범하려 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이 요새를 건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화려하던 왕
조가 자기가 왕위에 있을 때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은 미처 예기치 못했을  것이다. 세력이 그토록 강하던 
항우는 8년 간이나 소동을 일으켰으나 어느 서부  중국에 사는 농부의 말을 듣고 결국 소동을  중지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역사가 돼버렸으며, 마치 지금 이 이른 새벽처럼, 그리고 저 위에 있는 
돌멩이들처럼 어스름하게 머리에 떠오르는 일이 돼버렸다.
  산해관역을 지날 때쯤 해서 한 중국인 관리가 기차에  올라오더니 우리들의 짐을 조사했다. 우리는 무엇
이든 보여줄 물건조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옆에  앉아 있던 중국 친구는 자기 짐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트렁크를 하나하나 열면서 모두가 옷가지뿐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 관리는 "그래도 열어보시오"
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립니다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편도 없어요." 그러나 그 관리는 성
실해서 그런지 단 1그램의 아편이라도 들고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않으려고 했다. 그때가 바로 중국의 각 
관청에서 국민들이 아편 중독에 걸리지 않도록 강력히 단속하고 있던 때였다. 역사적으로는 영국인들이 아
편 장사를 하려 드는 것을 금지하려다가 아편 전쟁까지 겪고 호되게 패전하고 나서 결국  중국의 호화이었
던 홍콩까지 빼앗긴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던가! 오늘날에는 자국내의  국민들에게까지도 아편 거래를 엄격
히 금지하고 있었다. 그 학생이 가방을 열지 않으려고 하자  관리가 따귀를 두어 대 후려갈기는 바람에 그 
학생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얻어 맞고 말았다. "때리기는 왜 때려요!" 라고 옆에 있던 부인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막 대들었다. 이 마누라는 재빨리 가방을 열고서 그 속에 든 물건들을  죄다 보여주었다. 미 
마누라는 재빨리 가방을 열고서 그 속에 든 물건들을 죄다 보여주었다. 옆에 앉았던 사람들과 관리까지 모
두 혹시 그 속에 아편이 들어 있지 않나 들여다 보았으나 아편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빨지 않
은 여자 옷이 몇 벌 들어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좋소!" 하며 관리가 다른  데로 가려고 할 
때 그의 곁에 서 있던 힘 센  남자들이 그를 꽉 붙들었다. 차내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왜 죄 없는 학생을 
뺨까지 때렸느냐고 항의하며 대들었다. 물론 이때에 세관 책임자가 나타나, 이 얻어맞은 학생에게 사과하지 
않고 잘못을 저지른 자기 직원을 처벌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들 이 직원은 화가 잔뜩 난 농부들의 주먹 
맛을 한 번 보고 혼났을지도 모른다.
  그 거친 관리의 행실을 한 번 고쳐준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이고 속이 시원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모
두 마음 후련하고 만족스러워했다.
 그 사이에 우리가 탄 열차는 역을 출발하여 미개한 중국 동부의 입구를 지나서 중국의  중심 지대를 통과
하게 되었다. 밖을 내다보니 우리 일행이 마치 만리장성에 포위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병화 씨에게!
  당신은 이름을 이병화라고 제게 소개하셨지요. 제게는 아직도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당신은 살결
이 검은 편이었고 눈은 실눈같이 가늘었어요. 일본 어느 대학생의  교복 차림을 한 당신은 저명한 한국 인
사들이 도망가면 일본 경찰에 인계할 의무를 지닌 정보원이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나
를 안동에서부터 목단을 지나 천진까지 미행하는 통에 매우 즐거워야 했을 중국 여행이 불쾌한  여행이 돼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천진에 도착할 때까지 당신은  쭉 내 옆에 앉아 있다가 당신 생각
으론 나 같은 것은 체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물론 나 같은 존재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가
치할지 모르지만 공포와 불안으로 떨고 있을 저 늙은  나의 어머니에게만은 소중한 사람인 것입니다. 나의 
어머니를 위해서만이라도 천진 역에서 당신이 나를 포기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남 경 행

  우리가 탄 갈색의 열차가 천진에서부터 저 아름다운 산동성을 통과할 때는 정오의 안개가 황금  같은 논
밭의 이삭들을 덮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공자의 탄생지로 우리가 달리는 방향에서 좌측에 위치한 동쪽 산 
언저리였다. 나는 창문을 열고 머리를 기대고 이 대가가 그  옛날에 살았을 이 마을을 차창 밖으로 내다보
았다. 회색의 지붕들, 그 주위에는 푸른 나무들이 줄기줄기 서  있었고, 곡식의 황금 물결이 넘실거리는 이 
모든 풍경이 근면과 인내, 그리고 영원한 만족을 찾을 수 있는 중심지로 보였다. 밭  사이에서 서서히 남쪽
으로 내려가는 돛단배와 삼천리의 길이로 뻗은 은색 운하 위의 배를 보니 이상한 감회에 젖어들었다. 향락
을 일삼던 수양제라는 사람이 이 운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나라 직전에 이 운하를 완공하고 놀
잇배를 타고 국내에서 제일 예쁜 여인들로 하여금 끌어당기라고 하면서 때로는 청천 대낮에, 또 어떤 때는 
달빛 아래에서 유흥하던 운하가 아닌가?
  다음날 저녁, 우리가 갑자기 기차에서 내리게 됐을 때는 달도 뜨지 않고 사방이 컴컴했다. 우리가 도대체 
어디서 하차했는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역에 걸려  있는 간판을 바라보아도 이름도 모를 곳이었
다.
  "모두 하차하십시오!"
  "여기가 도대체 어딥니까?" 라고 누군가가 물어봤다. "여기가 남경은 아닌데,  이렇게 빨리 올 수는 없는
데!"
  "빨리빨리 하차해요!"라고 역부가 소리를 지르며 명령했다. 그래서 승객들은 모두  차에서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역부들은 우리를 한 사람씩 통로를 통해서 나가게 했고 갑자기 우리 앞에는 컴컴하게 번쩍거리는 평면이 
눈에 띄었다. 물이구나! 도대체 이게 무슨 물인가 말인가! 나는 요릿집들의 간판과  우리가 타게 될 보트에 
달린 푯말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나는 차츰 정신을 차리게 됐으나 이 강 이름을 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가슴은 막 떨리기 시작했다. 보트와 배에서 비치는 불빛이  이름 모를 이 물결 위에 사방으로 번쩍거렸
다. 그렇다. 바로 이 방향에서 양자강이 흘러 내려오고 그 파도를 타고 나는 저리로 가게 될 것이 아닌가!
  내가 여덟 살도 되기 전에 저녁마다 이 유명한 양자강에 대해서 얘기해 주던 어른들의 모습이 머리에 떠
올랐다. 그분들은 내가 지금 많은 시인들이 피난처로 찾던 그 강남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분들은 내가 지금 많은 시인들이 피난처로 찾던 그 강남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분들
은 또한 옛날의 영웅들이 새벽같이 나와서 세수하던 그 시냇물이 큰 강이 되어 흐르고 있는  그 유서 깊은 
강에 떠서 항해하는 배 위에 내가 서 있으리라고 설마 생각이나  했을까? 아버지! 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
시던 소동파와 이태백이 달빛 아래에서 술잔을 비우던  그 강물 위에 지금 제가 와 있는데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아버지는 지하의 품에 안겨서 침묵만을 지키고 계시는 것입니까?

  심야의 어둠 속에서 만물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양자강의 물소리만이 배 밑으로 출렁거렸다.
  우리는 배에서 내려 어느 마부가 인내하는 대로 큰 광장을 지나 불빛이 비치는 훤하고 널따란 돌길이 있
는 길 옆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저녁을 먹기 위해서 우리들은 어느 큼직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더니 키
는 큼직하나 약하게 생긴 보이가 음식을 가져왔다. 우리가 들어가 앉은 방이래야 산수도가 있는 여덟 폭짜
리 병풍과 진한 하늘색 커튼을  빼놓고는 장식품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장식이 없는 방이지만 
비좁은 기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고  난 다음이라 연한 하늘색, 노란색으로  도배한 이 방에 시원하게 
불이 켜져 있어서 퍽 마음에 들었다. 단  한 가지 말하기 곤란한 것은 바로 옆에  있는 것을 도저히 볼 수 
없는 꼴이었다. 내 얘기는 한국에는 바로  '그것'이 집 밖에 나가 있는데  여기 중국에는 방 안에 있더라는 
말이다. 그 아름답고 파란 커튼이 바로 이 사실을 숨기려는 것이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보
이가 나의 급하다는 말에 가르쳐주는 것을 보니 이 커튼과 그 뒤의 미닫이를 옆으로 밀면  용변을 바로 그
곳에서 볼 수 있게 돼 있었다. 맙소사!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며 개화됐다는 이 나라에서 이게  도대체 얼마
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그저 맛있는 중국 음식 때문에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원씨가 "그게 다 공간 부족 때
문이죠. 모두 이렇게 빽빽하게 들어섰으니 밖에서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얘기했다.
  "그래도 그렇지"라고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그곳에서 용변을 보고야 말았다.
  다음날, 우리들은 마부를 따라 시내를 여기저기  구경하게 되었다. 남경은 목단에 비하면  미개한 도시나 
어디에 가보아도 온화하면서도 다정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이중삼중으로  둘러싼 거대한 성벽 대신에 운하 
옆으로는 버드나무가 쭉 늘어서 있었다. 목단에서는 씩씩하고 키가  큰 병사들이 총을 어깨에 메고 이리저
리 다니는 것이 보이는데 여기서는 날씬한 부인들이 보트를 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또 하나 대조적인 것
은 남경의 건물들은 우아한 울타리로 싸여 있었고 운하 위에 놓여진 다리들은 물과 하늘의  조화를 이루며 
빛나는 모습이었지만 목단에 있는 건물들의 회색  지붕은 만주 벌판에서 불어오는 먼지로 뒤덮여  있는 듯 
했다.
  점심때쯤 해서 우리들은 마차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서 명 황제의  무덤이 있는 데로 향해 갔다. 이 황제
는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에 중국을 다스리다가 몽고의 침략으로 파괴됐던 전국을 다시 복구한 분이다. 
그는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탁발승이었으며 자기를 따르는 신봉자들 역시 구걸하는 사라들이었지만 보통 다
른 수도사들과 다른 점은 구걸 다닐 대부터 벌써 비상한 계획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의 눈에서
는 정통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초세의 광채가 가끔 빛났다고 한다.
  어느 한국 풍설에 의하면 이 탁발승이 황해 연안의 한국 땅 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작은 영토를 지
닌 한국 사람들은 물론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한국과 관계 있는 것이라고 짐작했을지도 모르지! 이 중은 이 
반도의 방방곡곡과 만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구걸했다고 한다. 그때 그는 중국으로 한 번 꼭 가고 싶어했
던 저 유명한 이성계를 만난 일이 있었다. 당시 이 두 젊은  양반들은 어느 늙은 할머니가 외롭게 살고 있
는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냈던 것이다. 그러자 이 할머니는  이분들게 떡도 해드리고 술 대접도 했던 것
이다. 이 집에는 신기하게도 아주  비싼 잔이 있었는데 하나는 금잔이요,  다른 하나는 은잔이었다. 미래의 
통치자가 되리라고 자부하고 있던 이성계는 이 할머니가 자기에게는 금잔에다가 술을 부어주고, 이 보잘것
없는 중에게는 은잔에다 술을 따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성계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술잔이 상 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도 이성계는 위대한 인물이 될 사람이 어찌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싸우랴 생각하면서 
자기의 불쾌감을 꾹 참았던 것이다. 다음날 이 두 사람이 할머니 집을 나와 작별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나려 
할 때 할머니가 이성계의 팔을 붙들면서, 
  "저 사람은 혼자 중국으로 가도록 하게. 자네가 갈 길은 동쪽 방면일세!"라고 했다고 한다. 그 순간 중이 
그럼 잘 가라고 인사하려고 돌아설 때 이성계는 이 스님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이성계는 중국으로 같이 가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조선을 건립했고, 똑같은  시기에 중국에는 명
나라가 세워졌다는 말을 이성계도 들었다고 한다.

  한 시간 이상이나 마차를 타고 가다가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거대한 두 석조 동물상 앞에 서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가파르고 석상들이 세워진 길을 따라 올라가서 여러 개의 성문과 뜰을 지나  둥그스름한 산이 
있는 데까지 갔더니 그곳은 더 이상 갈 수 없이 막혀버린 곳이었다. 그 옆에 있는 조그마한 개천을 건너가
면 그곳에 바로 옛날에 탁발승이었다가 황제가 된 그분의 무덤이 있었다.
  저녁때가 돼서 우리는 참대숲 사이를 지나 숙소로 돌아오는 도중에 시원한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상쾌했
다. 도중에 젊은 남녀들과 여러번 마주쳤는데, 그 중에는 산보 가는 사람, 의자에 앉아서 얘기도 하고 노래
는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석조상들  하나하나가 이곳을 지나 다니는  뜻있는 사람들의 화제거리가 되고 
있는 이 남경, 그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쁜 일인가! 나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남경에 대해서 얼마
나 관심이 많았던지 이 도시가  제법 낯익은 기분이 들었다. 집  하나하나, 버들가지마다 새소리, 불어오는 
산들바람 소리마저 다 귀에 익어서 알 것 같았다.
  원씨가 머리가 아파 초저녁부터 자리에 누워  있는 동안 우리는 식당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얼마 있다가 원이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데로 오더니 나에게 자기 방에 좀 같
이 가자고 했다. 나는 그를 따라 한 층  더 올라가서 왼쪽으로 구부러져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방에는 웬 젊은 여자가 멍하니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네 중국말 할 줄 알지? 좀 도와주게나"라고 원씨가 나에게 부탁했다. 내 중국어 실력이래야 보잘것없
고 불충분하기 짝없어서 나는 회화보다는 한자를 써서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 더 편했다. 그래서 내 친구의 
부탁대로 그가 지금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 여자와 얘기를  나눌 수 없다고 써보았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웃으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 친구는 아마 머리가 아픈데  젊은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짐작한 대로 내 방에도 나이가 열다섯이나 됐을까말까 하는  소녀가 와 있었다. 이 처녀는 아주 영
리해 보였고 나를 보고 열심히 무슨 얘기를 떠들어댔지만 나는 아마 그중 삼분의 일이나  알아들었을까 말
까 하였다. 나는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이 어린 남경의 소녀를 자세히 관찰하였더니 나중에는 그녀
도 말없이 잠자코 있는 게 마치  뭘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당신 중국 사람이 아니예요?"라고 
나에게 물었다.
  "아니오, 나는 한국 사람이오."
  "아, 그래요"라고 실망에 찬 표정으로 한마디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는 문가에
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면서 "그런데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지도를 펼치고 한국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가르쳐주었다.
  "양친은 살아 계세요?"
  나는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양친께서 살아 계신데도 이렇게 멀리까지 오셨군요?"
  그녀는 아마 내가 몰인정하고 불효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다시 양친들 곁으로 돌아가시지요?"
  "그럼요."
  그랬더니 그녀는 만족한 표정을 짓고 사라져버렸다.

      상 해

  우리가 남경에서 상해로 가는 급행 열차에 승차했을 무렵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어 있었고 공기는 후텁지
근했다.
  우리가 탄 기차는 퍽 깨끗했고  식당차에 들어가서 차를 마셨는데  일류급이었다. 주위를 내다보니 그저 
편편한 평지만 보였다. 철둑을 따라 운하가 있었고 이 운하의 좌우로 뻗은 평지는 수평선처럼 멀리까지 무
한히 내다보였다. 여기에다 지은 쌀 농사는 지금 대풍년이 되어 누렇게 무르익었다. 그리고 바다 위의 섬들
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작은 숲들은 나무로 뒤덮여 파랗게 보였다. 이런 다발 모양의 섬 복판과 그 옆
으로는 지붕이 푸른 농가들이 보였다. 그래서 그 빛들이 회색, 녹색, 그리고 황색으로 계속 바뀌는 것이 마
치 누가 보아도 아늑한 기분이 들 정도로 산뜻하게 짠 양탄자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
들이 운하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으며, 운하의 언덕에는 소들이 누워 있거나 서서 왔다갔다하다가 무리가 
탄 열차가 지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나 몸집이 거무스름하고 
양쪽으로 잘 뻗은 뿔이 보이는 이 소들은 그저 반추를 하면서 조용히 비를 맞고 있었다.
  "여기가 소주요!"
  사람들은 모두 옛날부터 시성들로 유명한 이 도시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저 긴 성과 그 위로 버드나무
가 늘어진 것이나 볼 수 있었는데, 그것도 아주 멀리,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이어서  선명하게 보이지도 않았
다.
  "인제 조금 더 가면 항주지요?"라고  누가 물어보았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들이 있다는 이 도시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소주와 항주는 옛날부터 유명한 곳들이었다.  이곳은 청년들과 
다른 지방에서 오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곳이었다. 누구나 이곳으로 한 번 오기만 하면 엄한 부모들 
곁으로나 어려운 일을 해야 하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싫어한다는  말까지 있는 곳이다. 이곳은 술맛도 그렇
게 좋고 음악도 경쾌하며 뒤를 돌아다볼 겨를도 없이 사람들은 아름다운 여인들의 수줍어하는 눈초리와 추
파에 빠지게 마련인 곳이다.
  우리가 일곱 시간이라는 긴 여행 끝에 드디어 상해에 있는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무럭무럭 나는 것을 바
라볼 때쯤 해서야 계속 내리던 비가 멈추었다.
  여기가 상해다!
  이곳이 바로 중국에서 유럽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살고 있는 도시다. 시내의  새 지역 건물들은 깨끗하고 
현대식으로 건립돼 있었다. 6층 짜리 건물들이 넓고 고른 한길  가에 나란히 서 있었고 도로에는 자동차가 
쉴 새 없이 시끄럽게 왕래하고 있었다. 큰 상점들과 은행,  유흥장, 달러 왕들의 궁정들이 여기저기 보이며 
아름답게 번쩍거렸다. 밤인데도 대낮처럼 이렇게 훤하다니! 비싼 상품들은 번쩍거리는 진열장에 놓여  있었
고 새로운 소식과 선전들은 건물 위에 빙빙 돌고 있는  네온사인에서 볼 수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었으며 위력을 보이는 유럽 구경도 할 수 있었다. 즉 유럽 사람들이 얼마나 빠
른 동작으로 일을 하는가 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부르릉거리는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 기차의 
기적 소리, 비행기 뜨는 소리, 부둣가에서 보트가 쏜살같이 달리는 소리들로 시끄러운 곳이었다.

  본래의 상해는, 즉 중국인들이 사는 지역은 조그마한 원구로 수축돼 있었다. 상해에  사는 많은 사람들도 
도대체 이 지역이 어느 근방에 가 붙어 있는지조차 모르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겸손한 향응자들이 어디서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아랑곳없이 살고 있었다.
  나는 새 도시 지역의 교외에다 방 하나를 구해서 다른 두 한국  사람과 같이 있게 되었다. 방은 제법 큼
직했으나 침침하고 황동 침대가 두 개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독히 적막한 방이군" 하고 장씨가  중얼거렸다. 사면의 벽은 짙은  다홍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창문도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리로 내다보았댔자 간격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높은 벽돌벽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집 
전체가 2층까지밖에 없는데 제멋대로 지은 집이라 건축 양식도 이름조차 없는 것이었다. 벽에도 아무런 장
식이 없었고 지붕에도 궁선 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규모는 아주 둔하게 지은 집이었다. 이런  식으로 지은 
집들이 이 좁은 골목길에 여러 채가 나란히 서 있었으며,  집들의 입구는 대문으로 잠그게 돼 있어서 밤에
는 출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편국에 가봐도 내가 기다리는 편지는 한 장도 오지 않았다. 편지를 학수고대한 지 꼭 일주일이 지났지
만 그래도 첫 주는 유럽의 도시를 구경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제법 빨리 지나가버렸다. 길에 나가면 누구
나 아시아에서는 처음 보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몇 주일이나 더 기다렸는데도 편지가 오지 않
아서 궁금하고 마음이 답답했으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유럽으로 떠나는 배는  제법 있었건만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포캉리'라고 불리는 이 동네의 침침한  방에 가만히 앉아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교묘한 
방법으로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연락을 주고받으려던  일이 혹시 폭로되어 허사가 돼버린 것이나  아닐까? 
어느덧 한 달이 지나갔고 혹시 편지가 왔나  보러 우편국에 갈 때마다 직원은 짜증이 난다는  듯이 머리만 
흔들었다. 점점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다가 호주머니 사정까지 나빠졌으니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골목길에 한 노인이 앉아서 바나나를 팔고 있었다.
  "자! 바나나 한 개에 1전이오, 2전 내면 세 개 줘요!"
  이 영감은 하루 종일 앉아서 지루할  정도로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면서 장사라고  하고 있었다. 밤 열한 
시쯤 돼서 우동 장수가 우리 집 마당에 와서 우동 그릇들을 땅바닥에 놓고 손님들을 불러대고 있었다. 5전
만 내면 고깃국에 우동을 한  그릇 수북이 담아주었다. 주로  할머니나 품팔이꾼들과 어린애들까지 대문을 
열고 나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우동을 사서 한 그릇씩 먹고 있었다. 나도 한 번 사먹을 생각이 있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서 오랫동안 망설인 일이 있다. 그러나 그 다음날부터는 나도 가끔 이 우동을 사먹었는데 
그것도 다른 한국 사람들이 볼 때는  못 사먹고, 게다가 사먹던 손님들이 다  가고 장사꾼이 거의 다 팔고 
집으로 가려고 할 때 사먹을 용기가 나서 한 그릇 먹으려고 마당으로 나갔다.

  상해는 세계의 온갖 인종들이 다 모인 곳이었다. 즉 문지기를 하면서 밥벌이를 하는 인도 사람들, 프랑스 
경찰서에 근무하는 안남 사람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일을 해먹고 사는 흑인들 외에도 별사람이 다 사는 곳
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 나라 고유의 옷을 입고 있었으며, 자기 나라 풍습대로 살고 있었으나, 모두가 유
럽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서 생장되고, 매일매일 점점 더 촉진되는 그런 템포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자동
차도 횡횡 몰고 다녔다. 사람들은 모두 이리저리 막 몰고  다니는 무서운 자동차에 치이지 않기 위해서 앞
을 다투어 뛰어다녔다. 사람들이 그렇게 긴장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자동차는  자동차대로 사정없이 
달리고 항구의 배들도 그렇고 큰 건물의 지붕 위에 달린 선전물들과 사람들의 마음까지 서두르게  하기 때
문이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고 집중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세상 같았다.  행동이 민첩하
고 강한 자가 생존 경쟁에서 승자가 되고, 그렇지 못하고  느릿느릿하며 약한 자는 패자가 되는 그저 난폭
하고 배정한 인간들이 사는 곳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울 시간도 웃을 시간도 없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생활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 대도시로 몰려들어서 상업을 하는 사람들은 번
창해갔고, 이곳으로 모여드는 사람마다 뭘 가져갈 생각들만 하고 있었다. 또한 이곳은  중국의 갑부들이 모
여들었다가 다시 세계의 방방곡곡으로, 즉 유럽이나 미국 또는 일본 등지로 뻗어 나가는 곳이기도 했다.
  요새는 매일같이 비가 내렸다. 빗방울도 맥없이  뚝뚝 떨어졌고, 시커먼 찻길이 매끈매끈하게  돼서 고무 
바퀴를 달고 다니는 차들은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달렸다. 수백 명의 품팔이꾼들은 손수레를 끌면서 자기네
끼리 방향이나 속력을 서로 말하기 위해 이상스러운 소리들을 지르며 달렸다. 짐꾼들은 목적지에 도달하면 
품삯을 받지만 그 돈으로는 담배 한 갑도 살까말까 하는 박한 노임이었다. 돈이 적다고 짐 주인에게 몇 푼 
더 달라고 손을 내밀다가는 어떤 때는 뺨을 한 대 얻어맞는 수도 있고 때로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정수리
를 얻어맞는 일도 간혹 있었다. 그러면 이 불쌍한 일꾼들은  아무 말고 못 하고 돌아서서 도망쳐버리곤 했
다. 이 일꾼들은 벌써 직업적으로 귀가 밝아서 어디서 짐꾼을 부르는 소리가 나면 얼른 알아듣고 손수레를 
끌고 좋아서 누가 부르는 쪽으로 달려갔다. 일꾼들은 대부분 상의를 벗고 짐을 끌기 때문에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몸에서 빗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침침한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그 사이에 다른 곳에다가 숙소를 정했다. 나는 마치 
동물원의 우리 속에 든 사자처럼 방에서 이쪽 저쪽으로 왔다갔다했다. 한쪽 벽을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화
재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주의 사항이 붙어 있었고 다른 벽에는 양자강에 와서 뱃놀이를 하라는 어느 
선박 회사의 안내장이 붙어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불'과 '물' 사이를  왔다갔다하다가 피로해진 셈이다. 그
러다가 나는 창가에 서서 바로 건너편 울타리에 있는 벽돌장을 하나하나, 처음에는 마른 것들, 다음에는 젖
은 것들, 그리고 맨 나중에는 곰팡이가 핀 것같이 낡은 것들을 세어보았다.
  나는 저녁길을 산책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보았다. 안개가 들판 위에 자욱하게 끼어 있어 마치 흰 바다
가 무한히 뻗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다만 이 들판에 놓여 있는 거무스름한 관들만이 안개를 통해서 번쩍
거렸다. 이 관들은 얼마 동안 여기에 안치되었다가 나중에 매장되는 것이다. 왜 중국에는 이런 풍습이 있는
지 모르고 있었으나 그런 일에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하고 나는 차라리 양자강  가에 위치한 아름
다운 도시들을 마음속으로 상상해보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몸에 오한이 나며, 관들이 너울거리는 안개 속에
서 움직이는 것같이 보였다.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서 자리에 누웠다. 내가 털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 
이리저리 뒹굴다가 침대 위의 푹 들어간 자리에 안락하게 자리를 정하자마자 마치 파도치는 배  위에 누워 
있듯이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모든 도시들이 마치 기차를  타고 올 때 스쳐 지나가던 것처럼 눈앞을 
질주하는 것 같았다. 왜 사람들은 갑판 위에서 남경과 소주, 그리고 다른 유명한 도시들을  그저 수박 겉핥
기 식으로만 구경하고 말았을까? 갑자기 나는 깊은 산골짜기에 가만히 서 있다가 그 산 이름이 무엇인가를 
곧 알아냈다. 그게 바로 요산이었다.  나는 빨갛게 단풍진 나무들이 우거진  산길을 따라 걸어갔다. 황량한 
산꼭대기는 흰구름으로 덮여 있다가 천천히 부동하기 시작했고 구름이 개자 내 친구들이 기거하는 집이 어
딘지도 보였다. 어느 집인지 회색 지붕 꼭대기가 잠깐 햇빛을 받아서 반짝거리다가 말았다. 나는 산을 타고 
자꾸만 올라가다가 무지하게 길고 유명한 폭포를 구경하기 위해서  꼬불꼬불 걸어 올라갔다. 어느 바보 같
은 시인이 이 폭포를 흘러내리는 은하수로  착각한 일도 있었다고 하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떨어지는 물소리만이 멀리서부터 내 귀를 요란스럽게 울려주었다. 아니다! 물소리가 아니고 그것은 창
문 사이로 불어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 소리였다.
  상해에서 다채로운 것으로 각기 다른 법에 의해서 관리되는 여러 개의 보호 구역들이 있다는 것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프랑스권 구역에서는 프랑스의 법에 어긋나는  것만 아니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많은 정치 망명객들이 이곳에 와서 프랑스 사람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나 그 대신 프랑스 
망명객들은, 예를 들어 안남 사람들은 이 지역을 조심스럽게 피해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란히 위치하
고 있는 지역들은 원한의 적들을 서로 보호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매일같이 정객들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데 대해서 별로 이상하게 생각될  것은 없는 일이다. 범인들은 사고를 저지르고 
길만 하나 건너가면 다른 지역이라 그만이고, 추격해오던 사람들도 이런 경우에는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상해라는 곳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악운을 초래하는 곳이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안정성이 있
고 조용한 도시였다. 이 도시에는 동양의 여러 혁명가들이  새로운 사상과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서 운집하여 있었다. 3·1운동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한국의 애국 투사들에게도 상해가 첫 피
난처였다. 이제 이런 유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말하자면 여러 해 동안 미국이나 중국  또는 소련에서 망
명 생활을 하던 유명한 반일 투사들도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조국에서 독립 운동이 
새로 전개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이리로 찾아온 것이다. 그중에는  강철 같은 주먹을 가진 저 유명한 이
동휘, 전에 신민회 회장이었던 안창호, 한국에서 연설을 가장 잘했다던 옥빈관 등등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알 만한 사람들이며, 모두 영도자로서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불들이었다. 
또한 한국 신문학의 혜성이라고 할 수 있는 춘원 이광수 선생까지도 이곳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일
본에 유학 갔다가 대학을 막상 졸업한  젊은 청년들도 그들의 새로운 지식으로 위에서  언급한 영도자들을 
협조하기 위해서 상해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사람들의 단체도 점점 커져갔고 매일 같이 새 사람
이 오면 영접하게 됐으며, 옛날의 동료들과 전우들이 다시  자리를 같이하면 주야를 불문하고 열심히들 조
국 광복의 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이분들과 함께 흥분하게 됐으며  무엇인가 크나큰 일을 나도 
함께 겪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나에게도 서서히 모든 전모가 구체적으로 명백
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어느 사무실에 호출돼서 내 이름과 생년 월일, 그리고 직업을 기입해야만 했고 한국 
경찰도 드디어 그들의 과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런 흥분된 
마음을 진정하느라고 여간 애를 쓰지 않았다. 우리 고유의 한국 경찰까지 있다고? 우리를 보호해주는 한국 
경찰이 이곳에 있다니! 사무실 총책임자는 키가 크고 머리가 검은 사람으로 얼굴은 곰보였다. 어느  경찰관
의 말이 자기는 한국이 왜놈들로 인해서 망해갈 때 체포당해서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나 초인적인  힘이 어
디서 났는지 겨우 도망쳐서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이런 사람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
을 알았을 때 얼마나 마음 든든하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요 며칠 전에 나는 어떤 부인을 한 분 알게 되었다. 그  여자는 바로 젊은 나이에 영웅적인 애국 행위를 
하고 세상을 떠난 너무나도 유명한 안중근  의사의 부인이었다.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의 가장 큰 원수였던 
일본의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가 바로 안중근 의사에 의해서 살해됐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물론 일본 법
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의 가족에게까지도  화가 미치게 되자 이 부인은  조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부인은 일곱 살  된 딸과 세 살밖에 안 된  아들을 데리고 막연하게 북쪽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그 후 안 여사는 10년이나 시베리아 땅에서 방랑 생활을 했고, 성장일로에 있던 일본 세력은 이 가
족을 더욱 추적했을 것이며, 혹학과 가난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걱정이 끊인 날이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 이 부인도 상해에 오게 되었고, 마침내 조국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친 의사의 부인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결국 한국 남자들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얼굴도 갸름하고 나이는 사십쯤 되어 보이는 이 부인은 내가 회색으로 도배질되어 있는 작은  방으로 들
어가력고 하는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부인은 "얘가 내 딸이에요"라고 열일곱 살쯘 돼 보이는, 중국 옷차
림으로 서 있는 여학생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소개했다. 아들 아이는 소련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아주 튼
튼하게 생긴 것이 얼굴색은 더욱 건강해 보였다. 우리는 식탁에 자리는 잡고 앉게 되었다.  그 부인은 나에
게 나이는 몇 살이고  직업은 무엇이며 가족들은 어디에  있는가 등을 물어보았다.  내가 나이를 말했더니 
"아직 그렇게 어려요?"라고 말하는데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슬픈 어조였다.
  나는 그 운명과 이름이 어렸을 때부터 친밀감이 드는 바로 그 사람들 곁에 같이 앉아  있자니 감회가 새
로웠다. 내가 안 의사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아직 어린 아이 때였다. 그때 나는  어린 나이에도 안 의사
가 체포돼 있는 동안에 제발 석방될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를 드린 일도 있었고, 구분의 생애의 종막을 마
음속으로 늘 생각하면서 가끔 그분의 꿈까지  꾼 일이 있었다. 결국 안중근  의사가 처형됐다는 말을 듣고 
나서, 세상에는 종교가 있고 도덕과 윤리가 형성되어 있는데도  인간은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침범하며 게다가 죽이기까지 한다는 불의에 대한 분노가 내 마음속에서 불같이 솟아올랐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그때 우리를 그토록 무의미하게 내려다 보고 있는 하늘을 조소하고 원망했다.  이런 일들이 
벌써 과거가 돼버린 이야기라니!
  나는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들 외에도 이 가족에 속한다는 두 남자가 또 있었다. 한 사람은 안중근 의사의  친동생이었고, 또 다
른 한 분은 그분의 사촌 되는 사람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친동생 되는 사람은 엄하고 과묵한 사람으로 나
이는 사십 중반쯤 돼 보이는 사람이 자기  나이에 비해 너무나 진지해 보였으며 말이 없고  좀처럼 웃지도 
않았다. 나는 이 사람의 덕으로 앞으로 상해에 더 체류하는 동안 이 가족들과 같이 있을 수 있었고, 이분으
로부터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는 독립 운동의 진지한 평가와 인간 생활의 견해 같은 것도  들어서 배운 바
가 많아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 장래의 모든 우려와 장해에 대해서도 나에게 설명해주었
고, 우리 국민성의 부정적인 면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나의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얘기해주었다. 상해에 체
류하는 동안 그가 저녁 때면 조용한 시간에 얘기해주는 것이 몇 마디 되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나를 학교에
서 군대식으로 교육한 여러 선생들보다는 더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사촌 되는 사람은 이 사람에 비하면  아주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판이하였다. 나이도 
자기 사촌보다 어려 보이는 것이 이십 중반은 지났을 것 같은데 키는 중키고 얼굴은 둥그스름한 게 단단하
고 몸에 균형이 잡혀 있었다. 그는 활발하고 용감하며  살아가는 것이 낙관적인 형으로서 칭찬하면 좋아하
고 꾸짖으면 흥분하는 사람이었다. "뭘 좀 신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지"라는 말을 그는 가끔 사촌형으로
부터 들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그는 침묵을 지키고 얼굴 표정을 침착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
다. 한국 풍습에서야 역시 손윗 사람에게 맞서기가 어려우니 사촌형의 말은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러
나 아무도 없고 나와 단둘이 있으면 (이제 가끔 둘이 같이 있게 되었지만) 나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 "아
이고!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나, 그만둬."  "좀 웃을 수 없나?" "나하고 산보나  같이 하세." 그래서 나는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갔다. 왜냐하면 나는  나이도 제일 어리고 경험도 없어서  그 사람에 비하면 차이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몇 년 전에 유럽에 유학 갔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되어  귀국했다고 한
다. 그런데 그는 지금 유럽으로 다시  가려고 하고 있으며 나와 동행하자고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출발이 
자꾸 연기되고 있었다. 그토록 기다리는 우편물이 와줘야지!
  그가 유럽에 가서 살던 얘기를 자상하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낡고 병든 아시아에 
비해서 그곳에는 이 지상의 새로운 무슨 특권 같은 것이 매일같이 출현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1월 한달을 
같이 지내는 동안에 자기가 알기로는 유럽은 인간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역설하였다. 나는 이 사람
의 얘기를 들으면서 옛날 동양 것이라면 무엇이나 야만적이라고 하던 체육 선생이 떠올랐다. 그 체육 선생
은 대단히 유치할 정도로 명예욕이 강하고  다른 사람들의 사기를 죽이지 좋아하는 형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싫어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만난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은 한 사람의 칭찬을 다른 사람의 희망과 
결부시키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조국을 장래성이 있는 나라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 
생각으로는 앞으로 우리가 왜적들을 대담하게  멸망시키면 그놈들이 모두 집에 가만히  앉아서 뒤죽박죽이 
되어 다시는 한국으로 건너오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생각들이 그에게는 유치한 환상이 아니었
고 모험적이면서도 실행성이 엿보이는 사상이었다. 그게 사상이든 망상이든 간에 나에게는 그의 씩씩한 성
격이 퍽 마음에 들었다.
  유럽 사람들은 너무나 이상적이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는  가시같이 여겨졌다. 그들은 머리 꼭대기에서부
터 발끝까지 너무나 깨끗하고 근면하며 쉬지 않고 꾸준히 일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은 모두가 정직하
고 철저하며 용감한 것이 내가 평소에 짐작했던 것보다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나는 이런 유럽 사람들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는 데 어떤 것이 약점이 될 것인가를 자주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그 사람들만큼 근면하지 
못하다는 점, 물론 가까이서 보아야 알 수 있지만 좀 더러운 셔츠 소매, 그리고 약간 방심하는 버릇이 있는 
점... 이런 것들이겠지! 아니지! "아닌가?"  "아니지!" 나는 머리를 쓱쓱 긁었다.  그랬더니 안씨 말이 "유럽 
사람들은 머리를 그렇게 긁지 않아"라고 나를 타일렀다.

  그새 벌써 여러 달이 지나갔다.
  3월, 어느 날씨 좋은 날에 나는 드디어 집에서 온 편지를 받았는데 이 편지는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지고 해져 있었다. 나는 너무나 좋아서 편지를 들고 방에 들어가서 뜯어보았다.
  따뜻한 햇살이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서 들이비쳤는데, 나는 그 창가에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
었다. 어머니는 편지에다가 마을의 산들과 강들 얘기를 썼는데 내 고향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낙
엽이 져가고 아낙네들이 타작한다는 얘기까지 씌어 있었다.
  나는 이제 내가 유럽으로 여행 떠날 수 있는 돈이 온 것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아니다. 이것으로는 너
무 부족하다. 그 돈으로는 내가 상해에서 진  빚을 갚기에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이런저런 골치 
아픈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어머니의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고  기뻤다. 문이 쾅 열리더니 
안 형이 방으로 들어왔다.
  "돈이 오기는 왔는데 몇 푼 되지 않아요, 형님"하고  나는 돈이 온 얘기를 하고 그에게 수표를 보여주었
다.
  그는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눈을 보니 그가 뭘 열심히 
계산해 보는 것 같았다.
  "어서 짐을 싸라. 모래 새벽에 출발하는  배가 있어"라고 그는 떠날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는 그렇게만 
말할 뿐 내 의견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네가 진 빚은 나중에 착한 일을 해서 갚을 수 있어."
  저녁 식사 때 사람들은 내가 곧 유럽으로  떠나게 될 것이라는 얘기들을 하고 있었으나 나  자신도 그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 얘기를 계속하는  동안 나아ㅢ 결심도 서서히 귿어지게 되었으
며, 안중근 의사의 동생은 나를 뒤에서 밀어주고 사촌은 앞에서 당겨주고하여 나는 결국 저절로 앞으로 나
가게 된 셈이었다.
  다음날 오후, 내 서류들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운이 좋게 중국인 학생  자격으로 여비를 할인받
는 바람에 은전이 몇 푼 남았으므로 유럽에 도착해 다음번 우편물과 돈이 올 때까지 이 돈에 의자할 수 있
게 되었다. 이제 떠나야지! 나는 여러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봐서 셔츠라도  몇 벌 사려고 밖으로 
나갔다. 날도 따스해지고 제법 봄기운이 돌았다. 봄 향기가 하늘에서도 나고, 부드럽게 싹이 돋는 땅에서도, 
나뭇가지들이며 어색하게 뛰어 다니는 소년들의 옷소매에도 맴도는  것 같았다. 일륜차에는 부인네들이 안
자 있었고, 남자들이 끌고 가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날이 너무 더워 빨리 피로해지지만  하늘로 날아 
올라갈 듯한 기분이 들었다. 봄은 상해에서도 역시 아름답구나! 어쩐지 이곳의 길들이며 차들, 그리고 축축
하게 보이는 담들까지도 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 지루한 노래를 부른 가수들도 내  마음속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떠올랐다.

  나는 간단한 여행 준비를 빨리 끝내고 우리 나라의 임시 정부에 가서 지난 겨우내 나를 도와준 여러분들
께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작별 인사도 나누었다. 그분들이 그 동안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임시 정
부가 들어 있는 건물은 육중하게 성장했고 모든 중요한 사무들은 제대로 집무되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가
다듬기 위해서 잠시 동안 기다란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번 겨울에 상해에 어떤 거대한 일이 
발생하였고, 그의 전통과 탄생을 나도 같이 겪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여라고 하는 분이 2층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아시아의 입장에 대해서 넓은 안목으로 관찰하는 몇몇 
사람들에 속하는 분이며, 일본 정부에서 지난 겨울에 한국 문제에  대한 회담을 할 때 이분을 초대하자 그
는 이에 응했던 것이다.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키는 데는  물론 그의 노력만으로는 성공적이 못 되었
으나 그를 통해 양국간에 견고한 교량이 생기게 되었고, 그  후 우리 나라에 급속도로 성취된 많은 개량점
들 때문에 자기 개인의 출세에는 부분적으로 손해를 본 점도 있을지 모른다.
  "당신 왜 여기 앉아 있소?"라고 그가 물어보았다.
  "여러분들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저는 내일 유럽으로 떠나거든요."
  "참 좋은 일이오. 지금 우리들에게는 지식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
  그는 내 옆에 잠시 서 있다가 "여기 지금 아무도 없어요. 모두들 밖으로 나갔습니다."라고 했다.
  "괜찮습니다. 이제 저는 이 건물도, 선생님도 뵈었으니까요."
  그는 내 손을 붙들고 한참이나 악수하고 나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더 앉아서 몸이 날씬한 여운형  씨가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해는 어
느덧 서산에 지고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했다. 텅  빈 복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걸려  있는 커다란 
벽시계는 이미 여섯 시를 알렸다.
  나는 문 밖으로 나오면서 저녁 바람에 펄럭이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날씨가 우중충하게 흐려 있었다. 방에는 내가 들고 갈 가방이  놓여 있었고 가
방 위에는 안중근 의사 부인이 내게 선사한 담요가 있었다. 이제 오늘부터는 이 부인을 볼 수 없겠구나 생
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부인과 그 집의 착한 애들은 아침 저녁으로 나를 위로해주고 따뜻하게 대해
주지 않았는가!
  내가 이 부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갔더니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이 부인은 가끔 그 자리에 조용
히 앉아서 먼 하늘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었다. 매일같이 우리가  식탁 주위에 모여 앉을 때면 그녀는 온갖 
시련과 걱정을 잊고 모든 잡념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잠시 휴식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생애와 
비인도적인 왜놈들의 행위로 피해를 입는 심적 고통을 지금 이렇게 달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제 드디어 떠나요?"라고 말하더니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게 작별  인사를 나누었더니 그분들은 말없이 내 손을  붙들어 흔들어주고 
나서 옆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토록 정들었던 방을 다시 한 번 두리번거려 살펴보았더니 아직 아침 식사
도 준비되지 않았고, 정원으로부터 창문을 통해서 밝은 빛만 들이비치고 있었다.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뒤늦게 우리가  탄 거대한 객선은 고동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선수를 돌리기 
시작했다. 부둣가에 전송 나온 친구들이 손수건을 꺼내서 전송하느라고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이제 정말
로 떠나는 구나!" 나는 안 형과 또 다른 친구의 손을 꼭 붙들었다. 어느 일꾼 하나가 우리들의 장도에 행운
이 있으라는 의미에서 꽃불을 피워주었다.
  파도가 점점 거세지고 우리가 탄 여객선이  드디어 항구를 떠나자 해변에 나와 있던 친구들이 차츰 보이
지 않기 시작했다. 집들도 희미한 은하수처럼 보이면서 그저  뿌옇게 보이더니 결국 우리의 시야에서 완전
히 사라져버렸다.
  "잘 있어라, 항구야!"
  사방을 바라보아도 그저 푸른 바다뿐, 하늘을 쳐다보니 약간 뿌옇게 흐린 날씨였다.

      남쪽 나라

  저녁때까지 흐리고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에 희미한 저녁놀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조
그마한 여객선 한 채가 우리가 탄  배와 교체되면서 서글픈 고동 소리로 우리  배에 인사를 했다. 그 배는 
아마 대만과 복건을 왕래하는 연락선 같아 보였다.
  우리가 탄 여객선 이름은 '파울레캣' 으로서 2만  톤 이상의 육중한 선체에 승객도 약 2000명  정도 태울 
수 있는데 이 여객들은 1, 2, 3등실로 구분되어 승선했다. 할인권을  산 동양 학생들은 이 3등실에 타지 않
고 그들대로 하나의 '특급'을 구성하여 여행했다. 이  학생들에게는 여객선의 꼭대기에 있는 화물칸이 제공
됐는데 좀 침침하기는 했지만 제법 큼직한 장소로서 판자로 3층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각 층마다 칸이 넉
넉하고 높아서 앉을 수도 있었지만 들락날락할 때는 머리를 잘 숙이고 다녀야지 그렇지 않으면  머리 뒤통
수에 혹이 생길 정도로 위험했다.
  "이것 참 점잖지 못한데"라고 키가 작은 김이라는 한국 친구가 자기  트렁크를 간신히 끌어내리고 그 동
굴 속 같은 복판에 서서 불평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와 자기 친구를  위한 객실을 구해보려고 그 위에 
오랫동안 서 있다가 결국 어느 선원이 그를  데리고 와서 그에게 이 자리를 제공하게 되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이제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자리도 제대로  잡고 가방도 풀어 헤치는데 그는 아직도 안
정되지 않은 자세로 망설이면서 복판에 우뚝 서 있었다.
  김씨가 이렇게 서 있자 안 형이 "그래도 이런 데지만 만족하시고 자리를 어서 정하시오" 하고 그를 위로
했다. "돈을 제 값 다 내지 않고 싸게 탔으니 이런 동굴 같은 데라도 만족스럽다고 여겨야지 뭐."
  순식간에 층층 마다 할인권을 가지고 탄 승객들로 꽉 차게 되었다. 즉 백 명의 중국 학생들과 아홉 명의 
한국 학생들이 각기 짐까지 가지고 이리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상해를 떠나 3일째 되던 날 홍콩에 도착했을 때 자리는 점점 더 좁아졌다. 홍콩에서는 관
동 중국인들이 또 올라탔는데 그들도 우리가 자리잡은 동굴 속으로 들어왔으니 자리가 협소할 수  밖에 없
었다.

  홍콩은 매우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것은 가옥들이나 다른 건물들  때문에 그렇게 멋있게 보인 것이 아니
라 도시에 밀착돼 있는 전경과  산들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항구에 서서히 입항하는데 도시를 
바라보는 인상은 너무나 놀랄 만했다. 우리가 입항한 것은 저녁때  였는데 수도 없이 많은 등불이 산 중턱
까지 비치고 그 불빛이 다시 바닷물에 반사되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우리가 탄 동굴 같은 객실은 홍콩에서  승선한 여객들 때문에 붐비게 되어  더욱 형편없게 되었다. 이젠 
사람들이 짐을 놓을 수 있었던 자리마저도 손님들이 밀려 들어오게 되었고 새로 승선한 손님들도  이 객실
에 들어오게 되니 만족스러울 리 없었으나 항해에 시달리고 긴장하게 되니 이런 실망은 곧 극복할 수가 있
었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서 각자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웃으면서 여행을 계
속했다. 이런 장거리 해상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 객실에  탄 사람들이 한 사람도 불만스러운 얼굴 표정을 
하지 않으면서 지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니다, 그  반대였다. 모두가 여러 가지 일에 익숙해졌
고 재치 있는 말들로 사람들을 경쾌하게 해줬으며 누구나  매일같이 새로운 소식들을 전해왔다. 서로 이렇
게 소식을 주고받고 하지 않았던들 우리는 무슨 일이 발생했을는지 모르고 이 지루한 여행을  답답하게 계
속했을 것이 아닌가!
  객실 안은 물론 깨끗하지 못하고 지저분했다. 객실의 복판에 쓰레기통으로 쓰라는 광주리가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하나밖에 없는 쓰레기통에다가 승객들이 오렌지 껍질, 바나나 껍질, 빨아
먹고 난 사탕수수, 신문지, 통조림 깡통, 담뱃갑과 그  외 다른 지저분한 것들을 집어 던지는데 무뚝뚝하게 
생긴 선원 한 사람이 하루에 단 한 번씩 이 쓰레기를 비우는 실정이었다.
  우리들은 갑판 위에서 한정된 구역내의 특정한 자리에 있으라는  지정을 받았다. 즉 항해하는 동안 아무 
데나 왔다갔다하지 말고 이 지정된 장소에 있으라는 것이었다.  이 장소는 우리 학생들에게는 너무 협소했
으나 반 이상의 중국 학생들이 조용히 책을 읽기 위해서 갑판 아래로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괜찮
았다. 중국 학생들은 마치 중대한 시험 준비나  하는 것처럼 열심히 독서하며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이들처럼 그렇게 근면하지도 않았으며, 잠을 자다가 눈만 뜨면 밖으로 기어 나와 갑판 위에서 서
성거리거나 양손으로 뒷머리를 받치고 따가운  볕을 받으면서 앉아 있었다.  이들은 온갖 얘기를 지껄이며 
웃어대다가 저녁이 되면 노래까지 불러댔다. 나는 중국 학생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손에 책을 들지 않은 사
람을 못 보았고, 반대로 한국 사람 치고 이 배 위에서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 
본래는 옛날부터 재주 있다는 한국 사람들이 너무나 지나치게 근심 걱정 없이, 그렇지 않으면 게을리 살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렇지만 지금은 푸른 하늘 아래에서  푸른 파도를 타고 무한한 바다 한
복판에서 은근히 불어오는 남풍을 맞으면서 구김살 없이 자연스러운 인간이 되려고 하는 이 청년들을 용서
할 수 있지 않은가!
  바닷바람을 쐬서 그런지 한층 더 식욕이 돋는 것  같았다. 하나같이 식성들이 좋아서 대식가들처럼 많이
들 먹었다. 다른 일반 식당과는 동떨어져 있는 우리들의 식당도 음식이 결코 나쁘지는 않았다. 쌀밥과 야채
를 섞어서 볶은 쇠고기 음식은 매번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팔려서  물장수 상 같았다. 음식은 순 중국식 요
리도 아니고 프랑스식도 아니지만 너무나 맛이 좋았다. 빵도 몇 조각씩 끼어 나왔는데 재미있는 것은 매일
같이 끼니마다 같은 메뉴였다. 쌀밥, 빵, 야채, 쇠고기를 우리가 74끼니나 먹으면서 여행했는데  매번 더 많
이 주지도 않고 덜 주지도 않는 똑같은 분량이었다. 그토록 겸손한 중국 사람들까지도 음식을 가끔 바꾸어 
먹고 싶어했다. 그래도 그들은 그런 불평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동양에서는  음식에 대해서 투정하는 
것이 엄금돼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들의 얼굴만 보고도 같은 음식이 계속 나와서 지겹다는 표정
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돈이 많은 여객들은 식당에서  나오는 것만으로 부족하니까 매점에서 다른 것을 
더 사먹었으나, 가난한 학생들은 처음에는 쌀밥만 먹고 나서 빵과 쇠고기를 같이 먹고, 다음에는 이 순서를 
거꾸로, 그리고 세 번째에는 모두 뒤섞어서 먹었다. 나도 이런 식으로 계속 먹었는데 그런대로 괜찮았다.
  아름다운 홍콩을 구경하고 나서 사이공에 와서는 실망이 컸다. 여기에는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그저 
언덕에 파도만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바다에 솟아오른 섬 하나 보이지 않으니 아름다울 리 없었다. 그럼 사
이공 시 자체는 어땠는가? 길거리마다 거지들이 돈을 달라고 노래를 부르고 앉아 있었는데 어떤 곳에는 둘
이, 또 다른 데 가보면 셋이 큼직한 그릇을 옆에다 놓고 구걸을 하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동전을 던
져 주곤 했다. 땅바닥에는 군데군데  구장잎 부스러기들이 흩어져 있었고  야자수 밑에는 프랑스 군인들이 
회색 군북들을 입고 서 있었다. 맨발의 안남 사람들은 넓은  바지를 입고 뜨거운 모래 위를 빈들빈들 돌아
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탄 기선에 석탄선이 와서 닿더니 해골처럼 야윈 노동자들이 석탄을 기선에 퍼 넣고 
있었다. 그들은 바지만 입고 상체는 홀딱 벗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나이가 제법 든 부인들도 있
었다. 누군가가 기선 부엌에서 딱딱하게  말라빠진 빵 덩어리를 밖으로  내던졌더니 일하던 인부들이 모두 
그걸 집어벅겠다고 몰려들었다. 감독관이 소리소리 지르며 발가벗은 잔 등을 회초리로 때리는 데도 아랑곳
없이 마치 고기 뼈다귀를 본 개들처럼 뜯어먹었다.
  열대성 기후의 덕으로 나무가 무성해 그림자를  많이 받는 동물원은 아주 아름답고 넓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재주를 보여준 코끼리를 구경하고 서 있었다. 그것은 별것이 아니고, 이 
코끼리가 도통한 기계적인 재간으로 누가 동전을 코에다가  집어줄때까지 관중들에게 깊숙이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 코끼리는 그 돈을 받아가지고 바나나를 파는 아줌아 있는 데로 가서 돈을 주면  한 개씩 얻어먹
곤 했다. 그러나 관중들이 매번 돈을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돈 한 푼을 얻으려고 그 육중한 몸집으로 
수없이 절을 꾸벅꾸벅 하는 것이 불쌍하게  보였다. 이놈은 매번 인사를 하는  사이에 앞뒤로 진자 운동을 
하면서 조금씩 휴식을 취했다. 어떤 때는 오랫동안 절을 해도 관중들이 돈을  안 주면 돈 없이 그 과일 장
수 아줌마에게 가서 바나나를 하나 달라고  구걸했으나 이 아줌마는 사무적으로 코끼리 코에  돈이 있는가 
찾아보고 없으면 과일을 주지 않았다. 이 코끼리는 사람들이 서 있는 곳에 다시 와서 형식적인 절을 몇 번 
반복하고는 그 아줌마에게 또 가보았으나 역시 허사였다.  코끼리는 이렇게 수없이 왔다갔다하면서도 자기
의 노력과 바나나 사이에는 자기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돈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같이 보였다. 이렇게 영리해 보이는 놈이  도대체 그걸 왜 모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
었다.
  우리 일행을 열대 지방의 햇살이 불덩어리처럼 내리비칠 때에야  동물원 구경을 마치고 나왔다. 넓은 길
에는 먼지가 뽀얗게 깔려 있었고, 땀을 많이  흘린 우리들의 얼굴은 퍽 더러워졌다. 그러나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살 것만 같았다. 조그마한  골목길을 통해서 우리들은 참대밭과 늪  같은 곳에 파종된 논 
사이를 걸어가면서 여기저기 구경을 하게 되었다. 나는 어느 초라한 토착민의 집 뒤에서 참대 울타리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더니 그 집 마누라가 상의를 벗고 앉아서  어린애에게 뭘 먹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 
자기도 숟가락질을 해서 먹으면서 아기에게  뭘 먹여주는 모양이었다. 남편은  벌써 식사를 끝내고 뭐라고 
떠들어대니까 마누라는 그 말을 듣고  좋아서 웃고 있었다. 저 마누라가  어떤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을까? 
도대체 뭘 만들어 먹는 것일까? 나는 그들이 뭘 만들어  먹는지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쌀밥일까, 좁쌀일까, 
아니면 옥수수일까? 아무것이나 먹으라지! 그렇게  찌는 듯하던 해가 서산에  지고 시원해졌는데 가족들이 
뒤뜰에 앉아서 저녁을 먹는 풍경이 얼마나 부럽고 멋있었는지 모른다.
  우리 일행은 다시 배에 올라와서 또 쌀밥과 고기를 얻어먹었다. 저녁때에 산보하다가 남의 눈에 잘 띄지
도 않고 불빛도 비치지 않는 해변가의 넓은 자리를 발견한  우리들은 다 같이 둘러앉았다. 이 자리에서 우
리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아쉬워해야만 했던 고독을 한 번  향유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곳은 나무나도 조
용한 곳으로 바닷물만 고요히 우리들 앞에서 출렁거릴 뿐이었다. 조각달은 갈대밭 위에 떠서 반짝거리는데 
우리들은 말없이 가만히 앉아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새 승객들이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오는 바람에  우리는 깜짝 놀랐다. 다섯 명의 안남 사
람들이었는데 젊고 가냘픈 이들은 피부색도 거무스름하고 많은 안남인들이 그렇듯이 눈은 대부분  움푹 들
어가 있었다. 주위에 서 있는 여러  사람들 때문에 그들은 어리둥절해서 수줍은  듯이 한쪽 구석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 있는 데로  가까이 가서 그들이 읽을 수도 있고 쓸  줄도 아는 한자를 써서 내 
소개를 했다. 한자로 써놓고 읽어봐야 발음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구두로는 의사 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그건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 서로 다른 하늘 밑에  위치해 있지 않은가! 한 
나라는 북쪽으로, 그리고 다른 한 나라는 남쪽 세상의 끝에 있는 셈이 아닌가! 우리들의 환담은 점점 더 재
미있었고, 서로 더욱 호기심을 갖고 시선을 마주치게 되었다.
  저녁때에 날씨가 흐려서 우중충해졌다. 우리 배는, 깊지 않아서 갈대가 많이 있는  해안에서 항로를 찾느
라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갑판 위에는 중국, 월남 등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있
다가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모두들 음침한 객실로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같이 돌아 들어가지 않고 인제 전속력으로  남으로 남으로 항해하는 객선의 선수에  잠시 서 있었다. 지금 
이 배는 어디로 달리고 있는 중일까? 이제 우리는 세계의 남쪽 문턱을 넘어섰는데 더 남쪽으로  가면 도대
체 어디가 될까? 빗방울이 떨어지는 먼 하늘을 바라보니 층운의  덩어리가 여러 군데 뭉쳐져 있었다. 저기
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저 사람들은 세계의 중심에서 저토록 멀리 떨어져 하늘의 비탈에서 살아야 하
니 얼마나 슬플까?

      눈 병

  다음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니 내 눈이 아프길래 친구에게 눈을 좀 봐달라고 했다.
  "여기서는 너무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 저 갑판 위에 나가서 보자."
  밖에까지 나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뜨거운 햇살이 무섭게 내리쬐는 날이었
다. 친구의 말이 "눈이 아주 빨갛게 충혈됐어"라고 하더니 나를 데리고 선의 있는 데로 갔다. 의사는 내 눈
을 자세히 보더니 안대를 감아주면서 아무 데도 쳐다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자
리에 가 누워 쉬고 있었다.
  '그래, 그래. 호기심을 가지고 뭘 엿보는 눈은 벌받아야 해. 사이공에서 어느 집 뒤뜰을 너무 오래 들여다
봤나 봐.'
  옛날 우리 나라에서 행실이 나쁜 애들을 잡아간다는 무서운 괴물인 '핀주'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어려서 
언젠가 한 번 내가 방에 앉아 계신 어른들을 놀리기 위해서 창호지를 뚫은 일이 있었다. 그때 누나들이 나
에게 다른 사람들을 가만히 엿보는 어린애는 '핀주'가 와서 잡아가니 그런 짓을 하지 마라고 주의까지 주었
다. 어린 나로서는 그놈의 '핀주'가 번개같이 빨리 달려와서 그런 애들을 어떻게 잡아갈 수 있을까 하는 데 
대해서 항상 의아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런 말을 맏지 않고 재미있게 문구멍만 뚫고 있었다. 집게손가락
에 침칠을 한 다음 창호지에 대고 살살 밀면 종이가 찢어지고 내  손가락이 쑥 들어가게 할 수 있었다. 그
러고는 호랑이가 우는 소리 모양으로 "어흥" 하면 누님들이 "너는 또 핀주가 와서 잡아갈 테니 두고 봐라"
라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눈을 가리고 자리에 누워 있자니 그때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캄캄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 사람 일곱 명은 교대로 내게 
병문안을 와주었다. 누군가는 "매우 아파요?"라고 물어보았다.
  "누구세요?"
  "저 최입니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요."
  "아주 아픈가요?" 이번에는 다른 분이 물어보았다.
  "당신은 또 누구세요?"
  이분도 자기가 누구라고 대답했다.
  "괜찮아요, 견딜 만합니다."
  그 다음 사람은 자기 이름을 먼저 대면서 "저는 박인데요, 좀 어떠세요?"라고 물어보았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괜찮아요"
  "그래 줄곧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독일어 명사의 격변화를 해봤어요."
  "그게 퍽 어렵지요?"
  "그럼요. 아주 어려워요. 나는 만약 1년동안 장님이 되고 그 대신 그 사이에  독일어 명사의 격변화를 마
스터할 수 있다면 그럴 용의가 있어요. 생각해보세요. 책상은 남성  명사고, 등불은 여성 명사가 돼야 한다
니깐요."
  "아주 꼭 맞는데요. 책상은 남자처럼 꽉 버티고 서서 무슨 짐을 올려놓기를  좋아할 테지요, 예를 들어서 
등불, 등불은 또 바로 여자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 좀 어떠세요?" 이번에는 또 다른 분이 질문했다.
  "나는 지금처럼 남자와 여자 얘기를  하면 듣기 좋아합니다. 지금 막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유럽에서는 
여자들이 미혼이라고 인정받고 싶어하니 미스 누구 누구라고 불러야 한다나봐요."
  그 말을 듣고 있던 박은 "그 반대입니다. 제 책에는 그 반대로 설명돼 있어요"라고 얘기했다.
  누구나 다 유럽의 생활에 대한 책을 한 권씩 들고  있었다. 그런데 책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술돼 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길이 없었다. 심지어 식사 때 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책마다 다르고 통
일되어 있지 않았다. 어느 저자는 마지막 손가락 두 개는 각각 약 15도의 간격을 두고 밖으로 펴고 있어야 
한다고 쓴 데 비하여 다른 저자는 이런 자세는 퍽 교양이 없는 것이라고 비난했으며 차라리  손 전체를 예
쁘게 쥐고 있으면 그것이 좋은 자세라고 했다. 그리고 옷깃은 어떤 모양인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여러 가지 
의견들이었다. 이렇게 책 내용들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가  유럽의 예의를 잘 몰라서 사회 생활에서 
밀려 나가는 결과를 초래하리라 생각되어 우리를 퍽 불안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비하면 한국에서의 생활은 얼마나 간편하고 소박한가! 밥상에 앉아서  밥을 먹을 때에도 어느 누
구 하나 다른 사람의 손 모양에 간섭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옷깃도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만들어 입고 
단어들도 남성, 여성의 복잡한 성 구별이 없고.
  내 눈은 차도가 없이 여전히 아팠다. 의사도 내 눈을  보고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며 안대를 절대로 떼지 
마라고 주의를 주었다. 의사는 병명이 무엇인가를 말해주지 않았고  친구들 중에도 의학 공부를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오히려 의학 공부를 몇  학기 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좀더 아는 편이었다.  내 눈이 
더 악화된 것은 의사가 안대를 꼭 붙이고 있으라고 지시했는데도 우리 배가 싱가포르에 정박했을  때 그곳 
전경을 좀 구경하려고 갑판 위에 서서 안대를 떼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나도  보이지도 않았고, 눈
이 막 따갑고 통증이 나서 나는 끙끙 앓게 되었다. 나는 엉금엉금 걸어서 우리 객실로 돌아와 그날 오후에
는 계속 아파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나를 의사에게 데려가든지 안약이라도 좀 가져다줄 사람
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마음속으로 나는 안대를 다시는 떼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핀주에게 제발 내 눈에서 
손을 떼달라고 기원했다.
  얼마 후에 친구에게 싱가포르가 어떻던가, 혹시 그곳 원주민들을 구경했는가 등등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
다.
  "영국 사람들 말이야?"
  "너 말레이 사람들이 사는 집에 안 들어가봤니?"
  "아니, 핀주가 나올까 봐 무서워서! 여기 네 저녁밥이 있으니 어서 먹어"라고 하면서  그 친구는 밥과 쇠
고기가 담긴 그릇을 왼손에다가 안겨주고 오른손에 숟가락을 집어주었다.  밥과 반찬이 미리 잘 비벼 있어
서 숟가락으로 그저 떠먹기에 아주 편했다. 이 좋은 친구가 나 때문에  괜히 애를 많이 쓰는 것이 몹시 고
맙고 미안했다. 그는 나 대신에 편지도 써주고, 다 쓰고는 다시 읽어주고, 심지어 나의 내의를 세탁소에 가
져다주었고 구두도 닦아주었으며, 나를 화장실에까지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했다.
  여객선은 어느덧 수마트라 해협을 통과하고 있었다.
  "저 수마트라를 봐!"
  "멋있는데. 산맥들이 푸르고 불그레하고 만들에는 바위가 많고 경사가 졌는데."
  "아이고, 얼마나 아름다울까? 마을도 보이니?"
  나는 갑판 위에서 친구 옆에 앉아 있었고 그는 보는 대로 나에게 얘기해 주었다.
  뜨거운 햇살이 계속해서 찌는 듯이 내리쬐고 있었다. 얼마나  더운지 사람들은 그늘 밑에 앉아서도 땀을 
흘리고 있었고 통풍이 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너무나 더워서  객실로 기어 들어갔더니 그곳은 
좀 시원하고 조용했다.
  내 평생 요즘처럼 잠을 많이 자본  적이 없었다. 낮과 밤이 구별되지  않았고 영원한 단일체로 융합되는 
판이었다. 지금 나는 동그란 창문을 통해서 달콤한 자장가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대양의 품에 안겨 잠이 들
어서 꿈을 꾸고 있다. 어디서 모여든 물이 이렇게 많아서  바다를 이루었을까?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수천
만 개의 개천들이 합쳐서 모인 물일까? 어디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일까? 시든 나뭇잎을 불어  날리던 슬
픔에 싸인 가을 바람일까?

      인 도 양

  나를 성가시게 굴던 '핀주' 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내 눈은 그간 완쾌되어 보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
었다. 사방을 살펴보니 갑판 위의 모습이 얼마 전보다 달라졌다. 이제 갑판의 복판에는 수많은 인도 사람들
이 앉아 있었고 그 우측에는 흑인들이 모여 있었으며 아시아  사람들은 좌측에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나
는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둘레 둘레 살펴보았다. 보이는 곳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으며 그저 푸른 하늘 아래 
파도만이 사방에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지나고 있는 것일까? 니코바렌을 지난 지는 한
참 되었으며 수마트라나 말레이의 생활 풍속에 대한 생각을 할 여가조차 없었다. 우리는 인도 앞을, 석가가 
태어난 성교의 나라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오른편으로 히말라야 산이 보였는데 이 산은 그리움을 찾는 방
랑객들에게 선경지대로 가는 길을 차단하는 모든 산들의 성스러운 모산이 아닌가! 이 갈림길 뒤에는,  훨씬 
뒤 우측으로 조금 올라가면 머나먼 그 어느 곳에서 중국이 웃음을 짓고 있겠지!

  우리가 콜롬보를 지날 무렵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그래도  사람들은 모두 배가 착륙하는 쪽으로 몰려섰
다. 세관원들이 몇몇 사람만 붙들어 놓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상륙해도 좋다고 했다. 재수없게  못 나가게 
된 사람들 축에 나도 끼어 있었는데 왜 성가시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 몇몇은 한쪽에 서서 다른 사
라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러자 누가 그 세관원에게 가서 나가도록 허락해달라고 부
탁하기 시작했다.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손가락질을 더 많이 하면서 흥정이 제법 오래 걸리더니 눈을 감아
주는 것인지 우리도 나가라고 허락해주었다. 비는 여전히 계속 내렸고 구경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어디가 유명하고 뭐가 구경거리인지 알아야지? 나는 그저 서서히 시내를 지나다니며 구경하는 우리 일행
의 뒤를 쫓아다녔다. 우리가 지나가는  좌우로는 뭇사람들이 서서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 돈이라도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진주며 새, 그리고 과일들을 팔고 있었다. 어떤 젊은 놈은 원숭이를 
들고 내게로 와서 사라고 조르기까지 했다.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내 친구도 우리가 지금 어
디로 걸어가는 것인지 모르면서 그저 따라만  갔지만 하나라도 구경을 더 하려고 뒤떨어지지  않고 열심히 
걸어갔다. 드디어 우리들은 시내를 벗어나서 참대밭과  야자수가 있는 곳을 지나 흰  집이 외롭게 서 있는 
데로 걸어갔다. 안을 들여다보니 아라한과 불상이 많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무슨  박물관처럼 보였다. 
안내인 한 분이 빠른 영어로 뭘 설명했는데 우리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말았다. 이 방 저 
방으로 왔다갔다하며 구경을 하다 보니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나 개인에게는 흥미 있다기보다 좀 
이상하게 보이는 이 불상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하려고 하는 예술가나 경건한 불교 신자가 도
대체 몇 사람이나 있을까? 우리 일행의 대부분은 나처럼 그걸  꼭 이해하고 감탄할 생각들이 없었다. 몇몇 
사람은 어디서든지 조금 조용히 쉴 수만 있으면 호주머니에서 책을 꺼내 뭘 들여다보고 있었다. 설명을 다 
듣고 나올 때 우리들은 안내한 사람에게 몇 푼씩 걷어서  집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곧바로 우리 배
로 되돌아 왔다. 겨우 이런 정도로 '수박 겉핥기' 식이지만 우리는 비도 별로 많이 맞지 않고 스리랑카섬을 
구경했다. 그러나 콜롬보에서 상륙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는  했지만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고 석연치가 
않았다. 우리를 안내한 사람은 우리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를 손짓해  가면서 설명하느라고 애를 무척 
썼지만 이제 다 지나간 일! 나는 내 몫에 해당되는 돈을 내면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눈이 다시 완쾌
되어 모든 구경을 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자위했다.
   우리 갑판 위에는 그 사이에 인도 승객들의 수가 늘어났다. 두  젊은 남자와 한 부인이 다른 인도 사람
들 옆에 자리를 마련하는 찰나 우리 배는 석양의 슬픈 노호와 함께 훤히 비치는 구름  뒤쪽으로 향해서 출
항했다. 동쪽 방향의 우리 뒤로는 하늘이 먹구름처럼 새까맣게 되며 수없이 번쩍거렸다.
  다음날은 마치 하늘을 청소나 해놓은 듯이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자그마한 조각 구름마저도 볼 수 
없었다. 검푸른 하늘에는 태양이 빛났고 보이는 것이라곤 바닷물과 하늘뿐이었다. 그저 우리가 탄 배보다도 
클 것 같지 않은 작은 산이 우리 옆으로 보였는데 거기에는 풀도 보이지 않았고 새나 뱀, 그리고 그림자를 
비칠 만한 모난 돌멩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이 푸른 바다 복판의 그곳에서는 찌는 듯한 모
래알이 보일 뿐, 이 얼마나 적막한 장면인가!
  저녁때가 되자 사람들이 다시 갑판 위로 몰려들었다. 밖이 시원해지자 사람들이 모두 이리로 모여들었고, 
한국 사람도 아홉 명이 모두 나와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김씨는 재미있는 화제를  꺼내기 때문에 모인 
자리에서 중심 인물이 되곤 했다. 옛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에서 자란 그는 고명한 가문에서 재미있는 일화
를 얻어들어서 그런지 화술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친구인  박은 학식이 많은 승이었는데 1년 전에 
승려 생활을 그만두고 속세에 다시 내려온 분이었다. 깊은 산 속에 있는 절에서 지금까지 부처님을 모시고 
목탁을 두드리며 심신을 연마해왔는데 지금은  그보다도 다른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마치 
높은 산정을 빙빙 날고 있는 고독한 독수리처럼 그 산중에는 고독과 자유를 둘러싸고 그  무엇이 엄습해왔
던 모양이다.
    


  이 두 사람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모르고 지나온  여러 가지 새롭고 좋은 면을 보여주었다. 내
가 부른 암벽 많은 만곡의 노래, 이른 새벽에 부르는 어부들의 노래,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노를 젓는 뱃노
래들이 이분들의 마음에 든 것 같이 생각되어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우리들은 선수에서 아주 가까운 난간 뒤쪽으로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 자리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명당  자리였다. 여기서 얘기를 하고 있노라면 바닷물
과 가까이 있는 데서 우리들의 말소리가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뒤섞여지는 듯했다. 우리는 진지하고 유식
한 대화를 하고 있는 중국 친구들과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이듯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인도  친구들에게 방
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대화했다. 안남 친구들은 우리가 앉은 자리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무슨 궤짝 위에 잠자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안남어, 중국어 그리고 인도어가 막 뒤섞여서 혼란스러운 소
리로 들렸는데 가끔 조용해졌다가 다시 벌집 앞에서 벌떼가  윙윙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다가 한 사람
씩 잠자리에 들어가게 되니 점점 조용해졌다. 그런데도 검은 낮은 소리로 자기 고향 얘기를 계속했고, 우리
가 탄 배는 달빛이 훤히 내리비치는 인도양 해상의 어느 지점을 항해하고 있었다.

      지 부 티

  이런 괴상한 이름은 내 평생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사람들 말이 우리 배가 지금 석탄 때문에 이 아프
리카의 광소에 입항했다고 했다. 모래가 깔린 언덕에는 단 한 채의 집이 보였고, 입구에는  그저 야자수 두 
그루가 서 있을 뿐, 육지에서 왔다갔다하는 사람도 몇몇밖에 보이지 않는 단조로운  항구였다. 승객들은 일
사병에 걸려서 변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바로 이틀  전에도 프랑스 노인 한 분이 일사병으로 죽
어서 깊은 바다에다 바로 수장해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우리는 그 장면을 보고 얼마나  슬퍼했는지 모른
다.
  나는 큼직한 밀짚 모자를 뒤집어썼으나 땅에서 반사되는 뜨거운 열은 오로지 신앙심으로밖에  막아낼 길
이 없어서 나도 그 순간 나의 모든 죄를 참회하고 있었다.
  모래가 깔려 있는 언덕의 돌둑이며, 물속에서 헤엄치면서 언덕과  배 사이의 심부름을 하고 있던 검둥이 
애들도 이런 더위에는 암담하게만 보였다. 벌거숭이 언덕 위에 있는 찻집도 그러했고,  백인들은 뒤에서 부
채질해 주는 검둥이 애들까지 따라다니게 하지만 모두 더워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여러 명의 지부티 사람들과 함께 육지 있는 쪽으로 따라갔다. 사내아이들은 우리가 가는 쪽을 향
해서 두 손을 내밀며 뭐라고 빨리 떠들어대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이
해할 수가 없었다. 눈이 반짝거리는 이 넉살좋은 소년은  몇 살이나 됐을까? 에이! 내가 돈 한푼을  그놈의 
손에다가 집어주었더니 같이 가던 친구가 "돈 주지 마, 그럼 우리가 더  같이 갈 수가 없어"라고 경고했다. 
친구의 말이 맞았다. 나는 어린 검둥이  애들이 떠들어대며 나를 포위하는 바람에  앞으로 더 걸어갈 수가 
없었다. "이제 한 번만 더 주고 안 줄 테야"라고  말하고 나는 짚으로 된 요포를 허리에 걸친 소녀에게 몇 
푼 또 주었다. 이 계집아이는 우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자기 오빠들 곁에서 손을 벌리고 걸어가고 있었
다.
  내 친구가 나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어느덧 우리는 벽이 모두  엮어져 있는 조그마한 집 앞에 서 있었는
데 그게 바로 인도 학교였다. 선생은  벽 쪽에 앉아 있었고 학생들은 벽을  따라서 입구 있는 데까지 줄서 
있었다. 학생 하나하나 앞에는 조그마한 책상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손으로 쓴  교과서가 한 권씩 펴려져 
있었다. 선생이 문 있는 쪽으로 나오더니 우리를 보고 들어오라고 하였다. 내가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동
안 그 학생은 손가락으로 한줄 한줄 따라가면서 소리 높이, 그리고 똑똑하게 낭독했다. 나는 머리를 끄덕이
고 고맙다는 뜻으로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마을 입구에 와서 우리 일행은 세 부인들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이 여자들은 재잘거리며 가끔 몸짓을 하
면서 우리를 보고 뭐라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안 형! 저게 대체 무슨 소리요?"
  그는 잠자코 서서 여자들을 자세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리가 그 여자들 옆에 가만히 서 있자 그녀들은 우리들의 손을 붙들고 가려고 했다.
  "아! 이제 알았어, 우리를 어디로 안내하겠다는 말이야." 안씨가 짐작하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 여자들이? 그것도 손에 손을 잡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여자를 따라갔으나  나는 잡은 손
을 빼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나를 맡은 여자는 내 손을 아주 꽉 붙들고 놓지  않았으며, 세 번째 여자는 
이제 내 팔까지 꽉 붙들었다. 그때 그녀들은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빨리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완전
히 붙들려서 꼼짝도 못 하고 그들이 가자는 마을로 끌려가고 있었다. 걸어가면서 보니 길 양쪽으로는 조그
마한 집 몇 채가 보일 뿐이었다. 남자들과 여자들, 그리고 아기를 잔 등에 업은  소녀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좀 색다른 안내를 받는다는 듯이 웃고들 있었다.
  "이것 봐, 이 여자들이 이상할 정도로 친절한데"라고 안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어느새 
자기를 안내하는 여자로부터 손을 빼고 담배를 붙여 입에 물었다.  나는 나를 붙들고 있는 여자를 보고 이
제 손을 놓아달라고 눈짓으로 애걸해봤다. 왼쪽에 서 있던  여자는 나이도 제법 많았고 여위었으며 얼굴에
는 주름살이 많이 보였고 눈초리는 제법  또렷또렷했다. 그리고 오른쪽에 서 있는  여자는 젊고 힘이 세게 
생겼으며 둥글넓적한 체격으로, 눈을 보니 부끄러움기가 있어 보였다.
  나는 이 두 여자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온갖 힘을 다해서 손을 빼내고 빠져나왔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 여자들에게 손짓을 하고 열심히 도망갔다.  이 일은 참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서 우리가 겪은 갖가지 
일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일이었다.

      담 배

  갑판 위에 나오면 이제 서로 얼굴들을 알아서 아침마다  만나자마자 인사들을 나누었다. 그것도 그럴 것
이 벌써 꼬박 한 달이나 우리는 이 배에서 같이 살아왔으니까.
  가끔 우리들은 앞으로의 걱정과 계획들을 서로 의논했고, 또한 유럽에서의 정치, 문화, 여러 인종들, 그리
고 문화권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다. 왜냐하면 인제 얼마만 있으면  곧 이런 현실과 부딪치게 될 것이기 때
문이었다. 이곳은 열등감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여러 인종들이 모이는 곳이겠고 침묵을 지키는 국제 연맹일 
것이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그리고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세계에서 일등이라고 찬양하는 일이 당연한 
것같이 보였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 나라와의 우호를 두텁게 하기  위해서 비록 변변치 못한 시큼한 술 한 
잔이거나 말린 호박씨 한 줌이라도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야단들이었다.
  이제 우리들은 선원들과도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프랑스 사람들의  이름을 외기가 어려웠다. 
갑판 청소를 하는 선원 하나는 늘 목쉰 소리를 내고 하품만 하기 때문에 '잠에 취한 닭'이라는 별명을 가지
고 있었고, 우리 객실을 청소하는 선원은 검은 옷을 입고 까옥 까옥 하는 목소리를 낸다고 '아침 이슬 맞은 
까마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언제 보아도 사이가 나빠 보였다. 특히 '까마귀'가 자기의 쓰레기통을 지금 막 청소해서 깨
끗한 갑판에다가 흘리면 '닭'과 둘이서 서로 말다툼을 하곤 했다. 언젠가는 한 번 키가 큰 '닭'이 너무 화가 
나서 키가 작고 통통한 '까마귀'의 뺨을  갈긴 적이 있었다. 그래서 둘이  진탕 싸운 결과 수치스러운 일을 
초래한 일까지 있었다. 그때 다른 선원들이 모여들어서 이 두 사람을 조그마한 감방에다가 감금하여버리고
는 주수기를 들고 와서 동그란 창구멍에 대고 물을 뿌렸던 것이다. 벌치고는 아주 지독했다. 우연의 일치인
지는 몰라도 나도 어렸을 때 닭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그놈들의 머리에 물을 뿌렸던 기억이 났다.

  갑판 위에는 내 친구 안씨와 나만 알고 있는 사람이 두 분  있었다. 이 두 사람을 빼놓고는 유럽 사람이
라곤 보이지가 않았다. 참 드문 일이지! 이 사람들도 우리들처럼 할인권을 사가지고 여행하는 것일까? 그들
은 홍콩에서부터 계속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고 우리들 쪽으로 얼굴도 돌리지 않았으며 말하는  것도 아주 
낮은 소리로만 했다. 우리가 아침 식사를 끝내고 올라가면 그  사람들은 벌써 와 있었고 저녁에 우리가 짐
칸에 들어가보면 그 사람들은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선교사처럼 큼직한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은 모자를 쓰지 않고 있었다.
  내 친구는 이 사람들이 둘 다 독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두 사람 다 전쟁 포로였다가 이제 자기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한 사람은 북독으로, 또  한 사람은 뵈멘(독일에서 제일 가까운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으로, 전에는 독일권이었음)으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이 프랑스  여객선을 타고 가면서 얼
마나 외로울까 하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느 프랑스 사람 하나는 내가 독일어 문법책을 뒤적
거리는 것을 보고 나서는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엉터리 영어로 독일어는 야만어라고 하
는 것을 나는 그저 짐작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나는 그가 열을 올리며  떠드는 데 대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런 데서도 우리가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
다. 프랑스로 가겠다고 했기 때문에 나는 이 배를  탈 수 있었으며, 내가 독일어 문법책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한 이 프랑스 사람의 심정을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친구가 독일어를 너무 공공연하
게 공부하지 마라고 충고해서 그의 말대로 조심스럽게 책을 보게 되었다.
  뵈멘 출신의 독일 사람은 내 친구가 독일어를 알아듣고 나도 앞으로 독일에 가서 공부하려고  한다는 것
을 알고서 우리를 찾아왔다. 그는 저녁때 조용하면 우리 있는  데 와 앉아서 전쟁과 포로 수용소에서 얻은 
여러 가지 경험담, 그리고 자기 부인과 자식들에  대한 얘기도 해주었다. 나는 물론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내 평생 처음 대면하는 이 독일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의 얼굴은 둥그스레한게 갈색
이었고, 머리색은 좀 불그레했으며, 연하게 빛나는 눈썹과 갈색 눈은  아주 총명해 보였다. 이 사람은 담배
를 열심히 말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안 형은 식사 후에 중국 친구들이 있는 데로 가고 나 혼자 객실로 돌아와 잠사 자리에 누
워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다리를 툭툭 치므로 깜짝 놀라 쳐다보니 그 뵈멘에서 
온 독일 사람이 내 자리 앞에 와 서  있었다. "구텐 아벤트(안녕하시오)"라고 나를 보고 인사했다. 나도 비
슷한 말로 인사를 하고 나서 이 독일 사람이 누추한 이곳에 왜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얼른 내 
친구의 자리로 기어 올라가면서 그 사람에게  내 자리에 올라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그래도 그는 가만히 
서서 주위를 살펴보더니 나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으나 나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잠시 동안 그
는 문 밖으로 바닷물만 바라보더니 담배 종이를 꺼내 가운데를 접고 내게 내밀면서 "담배 좀" 하고 물어보
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그에게 주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서양사람이 나에게 
담배 달라는 얘기는 물론 도대체 뭘 얻으려고 한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내 담배를 받아서 성냥
불을 붙였을 때 나는 얼마나 흐뭇하고 기뻤는지 모른다. 내가 아마 알아듣기는 바로  알아들었던 모양이지. 
우리 둘은 대화를 해봤지만 나는 주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를 듣고만 있다가 그 사람은 자기 자리로 가
버렸다. 나는 이 독일 사람과 이런 일이 있은 데 대해서 퍽 만족스럽고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담배 좀"
하고 독일 사람이 한 말을 내가 알아듣지 않았는가.

      여름에서 봄으로

  우라는 홍해 해상으로 나흘이나 항해했다. 어느 날 아침, 새벽같이 친구가 나를 깨우더니 "빨리 일어나서 
저겄 봐, 저기 저 사나이 산을!" 하고 소리 질렀다.
  이 산은 아침 안개를 통해서 아주 먼 거리에 검푸른  빛으로 어렴풋이 보였다. 얼마 있다가 해가 떠올라 
이 성지를 훤히 비치고 있을 무렵 우리가 탄 여객선은 한없이 멀리 항해하고 있었다.  너무 늦었다. 우리는 
벌써 수에즈 만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여객선이 육지의 언덕진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을 때 시원
한 바람이 불어와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내 친구는 내가 외투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와서 "다시 봄이 
됐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객실에 들어가서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다른 사람들도 셔츠와 양복을 갈아
입고 기분이 좋아서 모두들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날씨가 조금  싸늘해지는 것 같아서 나는 옷을 약간 두껍
게 입었다. 이제 우리가 지나온 뒤를 바라보니 그 찌는 듯한 무더위가 우리를 못살게 굴던 수평선 위로 멀
리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것은 밤중이었다. 우리를 실은  이 거대한 여객선은 양쪽으로는 모래 언덕
을 두고 있는 좁은 수로를 통해서 간신히 빠져나갔다. 좌우로는 황폐한 경치가 희미한 빛을 받으며 끝없이 
뻗어 있었다. 우리가 탄 배는 속력을 아주 낮추어서 우리가 걷는 것보다도 더 천천히,  수없이 많은 창문으
로 붉은 빛을 비치면서 이 무시무시하게 공허하고 회색빛이 나는 사막을 끼고 항해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이드 항(수에즈 운하의 서단에 있는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이었는데 맑은  아침이었다. 잠
깐 체류하는 동안 우리 일행은 휴식하기  위해서 바다 깊숙이까지 길고 협소하게 쌓아진  제방의 꼭대기에 
높이 세워진 기념비가 있는 데로 갔다. 우리들 옆에는 페스(모로코의 도시명에서 유래한 붉은 터키 모자)를 
쓴 남자들과 면사포를 쓴 여자들도 서서  같이 구경했다. 시원한 아침 바람에  푸른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지중해는 지금 우리의 눈앞에 훤히 뻗어 있었다. 우리가 다시 거친 바다 물결을 만났을 때 북쪽 하늘을 쳐
다보니 작은 섬, 큰 섬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안 보였다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그곳에서 멀지 않
을 것이라는 등 별 얘기들이 다 있었으며, 우리들은  지도를 펼쳐놓고 사람들이 짐작하는 섬들을 찾아보았
다. 사람들은 망원경을 들고 아름답고 푸르게 보이는 만들을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여객선은 이 지점에서 점점 더 멀어지면서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서방으로 달리고 있었다. 파도는 점점 
거세져서 이 거선은 이번 항해중 처음으로 무섭게 요동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하늘이 먹구름장으로 뒤덮이
자 선원들은 돌아다니며 곧 태풍이 닥칠 테니 어서  갑판에서 내려가라고 경고하며 돌아다녔다. 비가 쏟아
지고 파도 때문에 바닷물이 갑판 위에까지 튀겨왔다. 몇몇 여객들은 넘어져서 부상당한 사람들까지 있었고, 
사라들은 모두 객실로 뛰어 들어갔으며 폭풍우는 더욱 심해져갔다.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배는 갑판 있
는 데까지 파도 밑으로 선체가 내려갔다가 다시 쑥 솟아오르곤 하는 것이 금방 침몰이라도 될 것같이 아슬
아슬했다. 승무원들이 나를 보고 화가 난 듯이 소리 지르면서 내 팔을 부축해주었다. 나는  그 선원에게 위
층의 사령교 옆에 서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허락해주었으나  그곳에는 일등실 승객이라곤 한 사라도 보
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서운 파도가 겁이 나 모두들 자기 객실로 기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도 
벌벌 떨며 기어 올라가서 활대를 하나 꽉 붙들고 재미있게 오르락내리락 요동하고 있었다. 파도가 뿌려 올
라와서 온몸이 흠뻑 젖었으나 나는 너무나 재미있었다. 드디어 폭풍이 본격적으로 불어왔고, 주위에는 사나
운 파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폭풍이 너무나 오래 계속되어 나는 추워서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밧줄을 꽉 붙들고 한 발짝  한 발짝 우
리 짐칸이 있는 입구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내가 자리에 누우려고 기어가는 도중에 몇 번이나 여기저기 부
딪쳐서 머리에 혹까지 생길 정도였다. 이 짐칸의 복판에는 물웅덩이 까지 생겨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승객
들은 모두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판자 칸막이의  옆을 꽉 붙들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허
리를 구부리고 멀미에 너무 시달려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밤새도록 사나운 파도가 그칠 줄 
몰랐고, 우리 배는 혹시 불길한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해서 신음하며 낑낑거리는 듯했다. "아이고, 하나님
이시여!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할  수 있습니까" 하고 몇몇 사람들은  예사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반듯이 누워서 두 손으로 결사적으로 나무 판자를 움켜쥐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에 파도는 잠잠해졌고 뙤약볕이  갑판 위에 내리쬐자 선원들은 왔다갔다하면서  일을 하기에 
분주했다. 그들은 털고 닦으며 청소하거나 망치질하거나 뭘 끌어  잡아당기는 등 여러 일들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여객들 대부분은 피로에 지친 나머지 잠이  들어서 코들을 골고 있었고, 몇몇 사람만이  밖에 나와 
앉아서 볕을 쬐고 있었다. 바닷물은 호수같이 잠잠해졌으며 저 멀리에는 시실리 섬이 희미하게  보였다. 에
트나(이탈리아의 시실리 섬에 있는 활화선)에서 고요한 봄하늘에 연기를 내뿜는 것도 보일 정도였다.
  우리 배가 좁다란 메시나(시실리 섬에 있는 도시명) 해협을 통과할 때 내 친구가 옆에 서서 양쪽으로 보
이는 지명들을 설명해주는 동안 나는 명하니 유럽 땅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는 너무 흥분하고 감격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산들이 가까이 보였다가 다시 멀리 보이고, 언덕에 있는 집들, 골목길을 말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들판에서 농부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과, 기차 한 대가 해
변의 철로를 따라 달려오다가 갑자기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흥분과 초조 속에서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결정적인 순간이 임박했다.
  내가 새벽 일곱 시쯤 일어나보니 사람들은 모두 감격해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마르세유가  보일 무렵, 아
침 식사를 하라는 종소리도 아랑곳없이  모두들 갑판 위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객들은 금방 
내릴 테니까 짐들을 꾸리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서 서로 계산할 것도 모두 청산하며 또 목적지에 도착했
다는 엽서를 재빨리 쓰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잘들 가라고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서로의 행운을 비느라고 
모두들 바삐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나는 짐도 얼마 되지 않아서 얼른 꾸릴 것을 다 꾸리고 나서 식당에 들어가 보았더니  식사하러 온 사람
은 도무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불안하고  마음이 심란한데 내 친구는 기뻐서 만면에 희색이 
돌았다. 내 몸은 심지어 환자처럼 열기까지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나는 정말 유럽 땅에 왔으니 나의 젊은 시절에 품었던 꿈이 성취된 것이 아닌가. 나는 드디어 이런 
꿈이 현실화됐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온 세계와  인류를 통치할 능력이 있다고들 하는  이 유럽 땅을 밟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는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남들이 무서워하기까지 
한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살고 있었는가!
  그 동안 여행을 하면서 정이 들었던 사람들이 나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또 만납시다."
  "당신의 조국에 복된 일이 있기를 빌겠고."
  배에서 내리면서부터 부둣가는 인산인해로 난장판이었다. 짐꾼들이 모여들고, 선원들은  이리저리 뛰어다
니고, 부둣가에는 사람들이 꼼짝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많이 서 있었고, 서로 불러대는 소리에 반가워 웃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로 뒤범벅이었다. 나는 우리 일행의 뒤를 따라 짐을 들고 마르세유 땅  위에 서게 되었
다.

      목 적 지

  프랑스에 있는 중국 학생회 회장이 항구 입구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그 사람은 우리 일행을 데리고 골
목 골목을 지나서 어디론가 안내했다. 트렁크를 하나씩 든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이 두 줄로 서서 걸어 가
노라니 그곳의 꼬마들과 부인네들이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 이 얼마나 불쾌한  일인가! 어느 부인 
하나가 창가에 있는 다른 여자를 부르면서 생전  처음 보는 듯한 이상한 '족속'들이라는 듯  바라보며 웃는 
것이 아닌가. 전차와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자동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심지어 하늘까지도 우리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우리들 대부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아직도 많이 걸어가야 되나요?"

  드디어 우리는 어느 큰 광장에 가서 가만히 서서 영접위원의  긴 인사말을 들었다. 날은 무덥고 모든 것
을 참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인사말이  끝나고 나서 이 영접위원은  어느 콘크리트 방으로 사라지더니 
학생들을 하나씩 자기에게 오라고 지시했다. 여기서 각기 자기의 서류를 내 보이고  나서 프랑스 대학생증, 
체류 허가서 및 다른 증명서들을 받았다.
  나는 그 사이에 내 지갑을 열고 여러 나라의 동전들을  국가별로 구별했다. 지전이라곤 한 장도 넘은 것
이 없었고 그저 은전과 동전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전부 합해보아야 얼마 되지도 않아서 나는 불안
해지기 시작했다. 최씨는 내 옆에 서서 비난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더니
  "너 무슨 놈의 동전을 그렇게 많이 수집했니?"라고 꾸짖었다.
  "수집한 게 아니야."
  "그런 걸 왜 받았어. 그런 동전은 어디서 환금해주지도 않아. 지전은 아직 얼마나 남아 있니?"
  "한 푼도 없어."
  그의 큼직한 눈이 보름달처럼 둥그렇게 되더니 내 얼굴과  동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자
기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뭘 열심히 계산하는 눈치였다.
  "이것 받아둬! 이 돈 내가 주는 것이니 좀 조심해야 돼. 너는 이제 다른 대륙에 와 있어, 이 철학자야."
  나는 그 돈을 받아 접어서 제일 안쪽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 되는 안봉근이 콘크리트 방에서 돌아오더니 말했다.
  "자, 이제 우리 우리 갈 길을 가자, 그럼 정거장으로 가야지."
  우리는 모두 파리로 가게 될 다른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형들! 잘 가요."
  "그럼 훗날 조국에 돌아가서 다시 만납시다."

  기찻간에서 내가 내 친구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동안에 리용,  디종, 뮐하우젠, 스트라스부르와 다른 
도시 이름들이 내 귀에 들려왔다. 나와 둑일 국경까지만 동반해 줄 이 친구는 어떻게 가는 것이 내 목적지
까지 가장 가까운 길인가를 설명해주었다. 그는 간간이 웃으면서, 또 가끔 깊이  생각하면서 열심히 종이에
다가 쓰기도 하고 약도까지 그리며 설명해주었다.
  "여기가 국경이라면, 알겠어, 저쪽으로 건너가서, 여기서 기차를 타야 해. 그럼 네가 일곱 시 50분에 X도
시에 도착할 텐데, 시계를 손에다 꼭 쥐고 내려야 할 시간과 역을 잊지 말고... 그리고 역 바로 밖에 나가면 
은행이 있을 텐데 거기 가서 '독일 돈으로 주십시오' 하면서 네가 지금 갖고 있는 돈을 내놓아. 그 다음 은
행원이 뭐라고 하든 그것은 별로 신경쓸 것 없어. '네, 네'라고만 하면 돼. 그럼 Y시행 차표를 사고, 지하도
를 지나 세 번째나 네 번째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쉽게 알 수 있어...."
  그가 계속해서 내게 훈령을 주니 골치가 아프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얼굴을 그렇게 찌푸리고 슬픈 표정을 하지 마라. 다 제대로 될거야. 아직 목적지에도 오지 않았어."
  "제발 좀 웃어봐라"라고 그가 계속해서 간청하듯이 말했으므로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 너는 지금의 내 심정과 내가 얼마나 피로해 고통스러운지를 모를 것이다. 나는 다만 제가 내 옆에 있
어서 고맙다는 생각 이외네는 아무것도 없어. 정말 고마워, 내 사랑하는 벗이여!
  내가 드디어 독일 땅을 밟고 자네를 향해 작별의 손을 흔들 때 자네는 그렇게도  기뻐하더니. '이제 제대
로 보낼 곳으로 보냈구나'라고 자네는 생각했겠지. 자네와  작별하는데 내 가슴은 그토록 쓰리더니. 그리고 
독일 땅에서 처음으로 곡식밭을 바라보면서 지나갈 때도 고향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미어질 듯하더니.
  오로지 한 가지 부탁뿐이야. 로트링겐에서 나를 도와준 자네 친구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전해주게. 자네가 
잘 알지. 누구에게 각별히 감사를 전해달라는 말인지, 그리고 왠지도.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으나 땅에 서 있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꿈속에서도, 어떤 때는 낮에 피곤
해서 나무 밑에 앉아 있을 때도 나는 해상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임시 어느 항구 도시에 
나와 있기 때문에 얼른 다시 파울레캣 호로 되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너무너
무 피로했다. 내 생애의 지독한 피로가 한꺼번에 이제 막 엄습해오는 것 같았다. 여기 총소리도 나지 않고, 
사람들이 체포당하는 일도 없는 이곳에서 피로가 나를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어느덧 여름과 가을이 다 지나가고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이 돼서야 이제 여행이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
었다. 나는 홀로 강가의 벤치에 앉아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적힌 슬픈 편지를 읽고 있었다. 어머
님의 무덤과 나와의 거리가 어쩌면 이토록 멀다는 생각이 들까.  지금 내 눈앞에는 높은 파도와 사나운 폭
풍과 함께 광란하던 검은 물결, 북부 중국의 광활한 곡식밭, 그리고 눈 내리던 저 용동 반도의 끝없는 벌판
이 선하게 어른거린다.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

      중환의 시초

  나는 의사를 찾아가지 않았다. 몇 달 동안은 건강이 예전보다 나쁘지 않았고, 초가을의 날씨도 한없이 좋
았다. 매일같이 해가 나서 나는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다. 감정에 관한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언젠가 강의 
시간에 잠시 언급된 일이 있는 평행론에 대해서도 숙고해 보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신선한 날들이 계속되자 나는 매우 피로해 지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인가는 너
무나 피로하고 열기가 있어서 아무일도 못 하고 초저녁부터 자리에 누워서 쉬었으나 이것이 중환의 시초인 
줄은 전연 모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몸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때까지 책을 읽
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는 일어날 수가 없어서 의사에게 왕진을 청했다.
  그날 오후에 중년의 아주 수척한 모습의 의사가 나를  찾아왔다. 의사는 내가 언제부터 어떻게 아팠나를 
자세히 물어보고 나서 전에 앓은 다른 병과 나의 유년 시절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이에 대해서 대답을 하자니 한참 시간이 걸렸다. 내가 보기에는 이 의사 선생님이 아주 조용하
고 선량한 사람같이 보였다. 이분은 내가 얘기하는 모든 것을, 더욱이 내가 하고 있는  공부에 대해서도 큰 
흥미를 가지고 듣느라고 여러 시간이 지나갔다. 드디어 나를  간단히 진찰하고 나에게 따뜻하게 찜질할 것
을 권했다. 그분은 내가 늑막염에 걸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오랫동안 잠자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앉아 계시더니 "동양  의학에서는 늑막염을 뭐라
고 말합니까?"라고 물으셨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이 늑막염이 동양  의학에 알려져 있는지도 확실
히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만약 이러한 병 증세가  나타나면 많은 형태의 감기라고 짐작하여 의사에 따라
서 '상한'이라고 하거나 '통풍', 아니면 이와 비슷한 다른 표현을 한 것 같다.  나는 의사 선생님에게 동양에
서는 대부분의 병을 약초를 여러 가지로 조합하고 빼내서 만든 약을 환자가 마시거나 흡기하게  되면 치료
된다고 얘기해줬다. 이분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하며 그 약이 환자의 체질에 따라서 조제된다는
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나는 의사의 질문을 분명하게  이해하느라고 오래 생각하고 나서 이렇게 대
답하였다.
  "옛 의학에 의하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세분되는데, 즉 태양, 소양, 태음, 소음으로 나뉘어집
니다. 양은 태양에, 음은 그림자에 비유할 수가 있죠. 예를  들어서 어떤 약은 태양형의 환자에게는 사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매우 기이한 일인데요"라고 의사가 말하더니 오늘날 이러한 여러 가지 논제나 학설을 옛 의학에서 넘겨
받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  이유는 동양 의학의 개관이 완전히 다른  우주론에, 다시 
말해서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우주론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려고 하였다. 음양설은,  땅은 하늘의 등가 
상대이며, 암영은 광명의 등가 상대인 것처럼, 다만 세계관에 의해서만 연역되어질 수 있다.
  삶이란 하늘과 땅의 공동 작용으로 해석되며 병이란 이  공동 작용을 방해하는 징후로 해석된다. 그리고 
인간은 하늘과 땅의 중간체로 여겨지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인체의  미묘한 구조나 태아의 발육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 많은 병원체도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이렇다 할 마취제도 없었다.
  이런 얘기들을 듣고 난 의사 선생님은 아무 대꾸도 없이 그저 혼자서 깊은 생각에 사로잡힌 것같이 보였
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내 책상에 가서 두꺼운 메링의 교과서를 꺼내서는 나 자신이 내 병에 대해서 읽어볼 
수 있도록 침대 옆에 있는 책상 위에 놓았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고 뜨거운 찜질을  했는데도 내 병세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슴이 아프던 
고통은 약간 덜해졌으나 열기는 몇 주일 동안이나  조금씩 오리락내리락 여전하였다. 무엇보다도 예사롭지 
않은 일은 기운이 하나도 없고 계속되는 피로였다. 소원이 있다면 마치 몇  해 동안 잠을 잘 수 없었던 사
람처럼 잠이나 실컷 자보고 싶은 것이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동안에는 의식이 말짱하여 내 병세에 대해서 
책을 읽어보고 사색하려고 애써보았다. 그러나 밤이면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고 악몽에 시달
렸다. 넘어갈 수 없는 높은 바위 앞에 서게 될 때까지 나는 낯설고 끝없는 길을 달려갔다. 또 한 번은 내가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좁은 바다에 빠져 있었다. 거기에는  보트도 없었고 누구와 말할 사람도 하나 없었
다. 나 혼자 이 협곡에 갇혀서 어둠 속에서 양쪽 언덕 위의 높은 암초와 헤엄치는 듯한 얼음 반점 같은 검
은 물결이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한없이 고독하여 흐느껴 울었다. 또  다른 꿈에서는 내
가 배를 타고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이 배가 어디로 항해할 것인지,  또 어떻게 내가 이 선상에 와 있
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꿈에서 깰 때마다 가슴이 죄는 듯한 불안감과 호흡에 지장이 와서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서는 일어
나 앉아야만 했다. 나는 볕이 잘드는 다른 방에 누워 있거나 어딘가 해변가 같은 데로 무척이나 가고 싶어
했다.
  어느 날 오후에 다시 한 번 세밀한 진단을 받고 죄측흉벽에 호흡 장애의 요인인 삼출액이  너무 많이 축
적되어 있기 때문에 이 액을 주사기로 뽑아냈다. 이 삼출액은 아주 투명했고 약간 노르께했다. 의사 선생님
은 내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이것 보세요. 이 액은 아주 투명해요. 순 장액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의사의 얘기는 메링 의서에서 결핵 
원인의 확실한 증세로 간주되는 그런 혈액의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침 일찍이 간호사가 왔다. 이 간호사는 의사 선생님의 지시대로 나를 보살피고 식사 조절을 해주기 위
해서 삼출액을 뺀 이래로 오게된 사람이다.  내가 너무나 조금밖에 먹지 않고  우유를 마시는 것도 여전히 
거절했기 때문에 영양을 섭취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우유를 인간이 섭취하는 
양식으로 치지 않기 때문에 내 평생 우유라고는 마셔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우유를 바라보고 냄새를 
맡으려니 어쩐지 약간 불쾌한 생각이 났다. 간호사의 말은 바로 이 우유가 환자의 잃은 기력을 보충한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매번 생각을 가다듬고 두꺼운 찻잔을 입에 대는 데 시간이 한참씩이나 걸렸다.
  오후에는 나이 어린 엘리 양이 힘든  일을 하려고 방에 들어왔다. 이  여자는 방바닥을 청소하고 난로에 
새 연료를 공급하고 먼지를 털고 컵과 꽃병들을 깨끗이 닦았다.  나는 아직도 어린 엘리 양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을 보고 어쩐지 동정심이 갔다. 그녀의 손은 벌써 중노동을 하는 늙은 여자의 손처럼 딱
딱하고 뻣뻣해져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병들어 있었기 때문에 청소며 빨래, 부엌일 등 모든 집안일을 맡
아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을 운명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한탄하거나 불평을 늘어놓는 일 없이 
하루 종일 열심히 일만 하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기 어머니로부터 일을 조금밖에 하지 않고 건망증이 심
하다고 가끔 꾸지람과 훈계를 받아왔다. 그럴 때면 그녀는 그저 눈물만 흘릴 뿐 변명도 하지 않고 일만 계
속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끔 얼굴이 뻘겋게 돼서 울고 난 부은 눈으로  내 방에 와서 아무 말 없이 스스로
를 달랬다. 왜 야단맞았느냐고 내가 물어봐도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말 재간이 없는 그녀로서는 일어
났던 일들을 조리있게 묘사할 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인지 내게는 그녀가 별로 영리해 보이지는 않았
다. 그래도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는 것을 보면 퍽 딱하게 여겨졌다. 여러 번 내가  본 일이지만 그녀는 젖은 
걸레를 갖고 들어와서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다니며 방바닥의 먼지를 샅샅이 닦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무
리 작은 종잇조각이라도 쓸 만한 것은 다 걷어두고, 구겨진 그림 조각들도 종이 쓰레기통에서 꺼내서는 조
심스럽게 잘 펴서 자기의 앞치마에 달린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느 날 저녁 늦게 엘리 양이 조그마한 푸른 나무를 들고 와서 책상위에 세워놓았다. 이 나무는 많은 은
실로 장식되어 있었고 양쪽 나뭇가지에는 조그마한 초가 꽂혀  있었다. 그제야 나는 성턴절이라는 것을 알
게 되었다. 나는 이미 한국에 있을 때에 독일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어떻다는 얘기를 들은  일도 있고, 그리
고 지난 몇 년 동안에도 직접 구경한 일이 있다. 집집마다 트리가 세워지는 것 같고, 한 번은 어느 넓은 광
장에 트리가 세워지는 것까지 보았다. 나는 사람들이 그런 트리 앞에서 뭘 하는 것인지,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를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제물을 바치는 것일까?  아니면 기도를 드리는 것일
까? 오랫동안 조용히 타고 있는 촛불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고독한 병상에 누워 있는데도 특별한 예식도 없
이 엄숙한 생각이 들었다.
  겨우내 나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계속 호흡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세 차례나 가슴에서 삼출액을 뽑아내
는 등 투병의 연속이었다. 삼출액은 비록 여전히 투명했지만 차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는 오히려 병
세가 점점 악화되는 기분이 들었는데, 이는 병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또 공포감으로 인해 여윌 대로 여위
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무슨 기적이나 일어난 것처럼 갑자기 차도가 있는 것 같았다. 병세가 빨리 좋아지는 것은 아니
지만 열도 계속해서 조금씩 내려가고 그렇게 무섭던, 가슴을 죄는 듯한 감도 어느새 없어져버렸다. 나는 차
차 약을 먹지 않아도 되었고, 드디어는 점심때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시간을 보내게도  되었다. 어느덧 겨울
이 지나가버렸다. 열려진 창문을 통해 봄철의 훈훈한 온기가 얼마나 많이 스며 들었는지, 그늘에 있는 육중
한 장롱과 궤짝까지도 마치 여름철에 호흡하는 것같이 보였다. 처음  며칠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정원 밖을 내다보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번 봄이 벌써 내가 독일에서 맞는 네 번째의 봄이었다.  지금까지는 생활의 모든 것이 낯설고 또한 학
업에만 열중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봄의 따스함이나 새들의 지저귐에 기뻐할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나는 다시 한 번 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 기뻤으며, 너도밤나무 위로 따스한 향기를 맛보고 뻐꾹새 소리
를 들을 수 있어 한없이 기뻤다.  나는 부드러운 나뭇잎들의 초자연적인 녹색을  보고 향기 그윽한 보리수 
밑에서 산책하고 싶은 생각이 못 견디게 났다. 그리고 내 방과 반  년 동안이나 손을 대지도 못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책들도 퍽 마음에 들었다.
  나는 다시 학업에 열중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조금만 과로해도 열이 나곤 했기 때문에 매일 그저 몇 
시간씩만 책을 읽어보았다. 의사 선생님은 오는 여름 학기에는  휴학하고 겨울 학기에나 다시 학업은 계속
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내 병이 재발하게 되면 그때는 치료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
는 의사의 충고에 기꺼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내게는 아직도 원기가 부족했고 안정이 절대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그전처럼 그렇게 고독하지도 않았다. 어렵지 않은 책은 읽어도 된다고 했고 게다가 나를 항상 
돌봐주고 있는 간호사는 그런 책들을 빌려다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쇠약해 보이면 이 책 저  책을 내게 읽
어주기까지 하였다.
  어느 날, 나는 북부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는 어느 한국 사람이 나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받았다. 이 소식
을 듣자마자 첫 기문은 기뻤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울한 편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독일 땅에 온 지 벌써 4
년이나 되는데 아직껏 학업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국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공부에 
성과가 더 좋아 보이는 듯하였다. 그들은 학업에 있어서 진전이 많았고, 그들 중 몇  사람은 나보다도 늦게 
유럽으로 유학왔는데도 지난 여름에 학업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저 제자리걸음뿐, 하고자 하는 본학업은 아직 시작도 못 한 셈이 아닌가. 나 자신도 왜 이렇게 됐는지를 알 
수 없었다. 어렸을 땐 나도 제법 재주 있는 학생에 속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 독일에 와서 벌써 3년간이
나 쉼없이 공부했건만 아직껏 언어의 장벽마저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다. 혹시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 잘
못된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까지 공부해온 방법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어떻게  하면 지금까지
와는 다르게 공부할 수 있을지를 알 수 없었다.
  드디어 한국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시도해왔고 행한 모든 것을 얘기하자 그는 나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 애기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  말도 별로 하지 않고 가끔 그랬을 것
이라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웃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내가 보여준 책들을 차례로 하나하나 관찰
하였다. 어떤 교과서는 한참 동안 읽어보기까지 했으며, 자기도 내가 어떤 공부를  하는지를 대충 짐작하겠
다고 얘기했다.
  그가 내 옆에 앉아서 책을 보는 동안  그가 어린 시절부터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랐
다. 그는 모든 선생님들로부터 성품 좋고 재간도 있으며 근면한 학생이라는 정평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그
는 누가 뭘 묻기 전에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혹시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게 되는 일이 
생기면, 예를 들어서 역사적인 과정을 묘사 한다든가 할 때엔 그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퍽 힘이 드는 것 같
았다. 그래도 그는 모든 학생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았고 나 역시 그를 퍽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씨도 
좋은데다가 내가 혹시 다른 애들과 싸우면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 시골에서 보
통 학교를 졸업하고 건축술을 공부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고,  나는 서울에 올라가서 의학 공부를 시
작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만난 지가 여러 해 되지만 그는 그 동안에도 모습이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저 변한 
점이 있다면 키가 좀 커졌고 더  튼튼해진 정도였다. 그 선량하고 거무스름한  얼굴과 미소를 조금씩 짓는 
것, 말을 하는 태도 같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겸허한 말솜씨로 자기가 지금까지 걸어온 
생활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나는 그를 만난 것이 무척 기뻤으며 더구나 오랫동안 고독하게 지내던 나로서
는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진리를 사랑하고 윤리에 순종하고

  겨울 학기에 나는 '교양'이라는 테마의 철학 강의를 듣게 되었다. 이렇게 다시 강의를 듣게 된 것은 의사
가 여러 번 상의하고 난 후에 허락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강의에서 내가 바랐던 것은 정신적 교양의 전분
야를 통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심리학 공부는 나에게는 조금 망설여지는  과목이었다. 왜냐하면 
개개의 분야가 나를 별로 자극시키지 못하는, 무한히 많은 방법론적인 의문점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었
다. 그래서 신중한 생각 끝에 나는 테마를 바꾸었으며, 어느 분야가 나로 하여금 가장 깊이 인식할 수 있게 
하는가 하는 암시를 얻고자 하였다. 이러한 소원은 우선 여기서도 내 기대에 어긋나고야 말았다. 그 이유는 
대학 강의가 교양에 있어서 극복이 가능한 난제들만을 취급할 뿐 정신적인 교양의 본질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겨울 학기가 시작된 지 몇 주일 지나지  않아서 나는 난해한 개념들 때문에 교수님을 직접  찾아간 일이 
있었다. 교수는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개념을 설명하고  난 뒤 나에게 앞으로 어떤 직업을  택하겠으며, 또 
대학 교수가 될 의향을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글쎄요, 그렇게 희망하고는 있습니다만, 제 적성에 맞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무엇을 전공하고 싶습니까?" 하고 교수는 계속 물어 보았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무엇을 공부하였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배운 학과들을 모조리 차례차례로 얘기했다.
  "지금 얘기한 분야 중 어느 한 학과에도 애착을 갖지 않는단 말입니까?"라고 교수는 놀라운 듯 질문하였
다.
  나는 오랜 침묵 끝에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하였다.
  이 철학 교수는 나를 세심히 관찰하고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창밖을 내다보더니 나에게  오늘 저녁 자
기 집에 와서 조용히 이 문제에 대해서 얘기해보자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가끔 나의 앞으로의  학업을 위한 조언과 충고를 받기  위해서 이 교수댁을 찾아갔다. 
나는 이 교수의 이름이 오래 전부터 자기  나라의 좁을 한계를 초월하여 널리 알려져 있으며  다른 나라의 
많은 학자들도 이 철학자의 학설을 따라간다는  것을 훨씬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점차로 이런 사실을 
이 교수의 옛 제자인 라인 지방에서  온 바이만 동료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런 이후로 이 바이만 씨는 
나에게 이 철학 교수의 세계관을 계속 인식시켜주며 철학의 여러 분야에 대해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
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저녁, 나는 몇  년 전에 이 철학 교수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젊은 중국인 학자를 
알게 되었다. 이 중국 사람은 친절하고 쾌활했기 때문에 자기 교수로부터도 귀여움을 받았었다.  그는 시험
때 중국 철학에서와는 너무나도 판이한 이 교수의 관념들을 번복해보려고 계속 시도했노라고  웃으며 얘기
했다. 교수 부인은 이 중국 사람의 행실이 공손하고 항상 예의가 바르기 때문에 좋게  평가했고, 바이만 씨
는 그의 온건하고 명석하며 평화스러운  인품을 칭찬하였다. 그는 호남성에서  왔다고 하며 자기 아버지는 
옛날에 태수로 있다가 지금은 대학에서 중국사를 가르치는 교수라고  했다. 이 중국 사람은 고향에서는 자
연 과학을 공부하고, 독일에 와서는 수학과 교육학을 수업했고, 수학을 더 연구하기 위해서 몇  년 더 체류
하다가 귀국할 계획이었다. 그의 이름은 번해였다.
  나는 이분을 알게 된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중국  사람은 오랜 역사를 가진 존경할 만한 국민으로서 
전 동양 문화가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종이, 붓, 먹, 도자기 등을 발명하였고, 술이며 시
가와 평화를 사랑하는 일 등을 동방의 여러 나라에 보급하였다.  나는 이 고대 동방 문화의 창시자들이 서
양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퍽 알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우리 둘은 다른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올 때 얼마 동안 같이 걸으며  서로 얘기를 나
누었다.
  그는 한참 동안 자기 고향 얘기를 하더니 "철학  교수님 참 멋있는 분 같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만일 
어느 중국인 학자가 이분처럼 세계적 명성을  떨치게 된다면 그분은 우리처럼 젊은 청년들과  자리도 같이 
하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이 지상의 보통 인간들처럼 하루  세끼 먹고 살아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치욕감
을 가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유명한 철학자는 그렇게 박학다문인데도 이 속세의 인간들을 경멸하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이분은 예술과 음악 그리고 인생을 좋아합니다. 언젠가는 이분께서 교외에  사는 친구 
한 분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가는 도중에 어디에선가 무슨 씨앗을 발견하여 한참 동안 관찰하더니 그것
이 무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분은 이 씨앗을 버리지 않고 갖고  가서 자기 친구분 집 옆에 있는 어느 
숲가에 심어놓았습니다. 이분이 그 해 가을 친구분을 다시 찾아갔을 때 숲가에 심어두었던 무를 빼보니 아
주 예쁘고 큼직하더래요. 참 근사하지요. 동양 철학자들은 너무나 고루하고 지나치게 점잖으며 전통에만 의
지하니 서양 사람들과는 달리 자연과의 관계를 상실해버린 셈입니다. 우리들이야 아직 자연과도 유대를 가
지고 있는 듯한데 말입니다."
 번해 씨는 별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에 유숙하고 있었으며, 그는 이 방을  중국의 서도와 화상 액자며 
화분과 다른 장식품으로 잘 꾸며서  동양적인 방 분위기를 조성해놓고  있었다. 조그마한 도자기대에 놓은 
양초 두 개가 불타면서 향기가 났지만 이 초 냄새보다도 그가 손수 지은 중국식으로 요리한  저녁 식사 냄
새로써 온 방이 중국 냄새로 꽉 차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야 동양의 토산품들을 갖고 있는 것도 없지만, 내 방을 한국식으로 장식할 생각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고향 생각을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피하는 편이었다. 나는  서양 문화와 관
계되는 것들과만 가까워지려고 했으며, 나의 서양 교육에 장해가 되는 것은 어느 것이나 피해왔다. 이런 이
유 때문에 지금까지 나는 한국 여행기나 동양 문화의 번역물이라곤 읽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 이 중국인 친구를 찾아가는 것은 그가 갖추고 있는 동양적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드는 그의 명랑한 인품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며칠 계속해서 쉬지 않고 공부하고 나서는 저
녁때 몇 시간은 이 친구네 집에 가서 일상 생활에서  얻은 체험담들을 주고받으면서 지냈다. 그는 근심 걱
정도 모르고, 불안감이나 초조함이 없이 가능한 대로 어떤 때는 자정이 넘도록 나를 붙들고 얘기를 나누었
다.
  때때로 그를 찾아오는 몇몇 독일인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도 가만히 보니 이 중국 친구의 성격과 비슷한 
것 같이 보였다. 모두들 평화롭고 온건하며 근심 걱정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친구 하나도 성급하게 얘기
하거나 시끄럽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번해 씨가 신중을  기해서 오로지 이렇게 착할 사람들만을 친구로 
삼은 것인지, 아니면 이 사람들이 이 중국 사람의  좋은 성품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의 대부분이 중국 예술과 역사 그리고 문학에까지 조예가 깊은 것을 보면 그들이  그들의 성품에 
의해서 동양적이 되고 서양적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가끔 의심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양귀비의 에피소
드를 모두 알고 있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도연명의 시까지도 번역해보려고 시도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독일 여학생이 쓴 한문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얼마나 달필이고 멋있는지 어
느 중국의 학자가 쓴 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여학생의 용모는 물론 동양적인 데가 없었다. 그
녀의 눈은 맑은 눈동자로 반짝거렸고, 얼굴은 갸름하였다. 나는 너무 놀라워서 그녀가 혹시 중국 학교를 다
니지 않았는가 물어보았다.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하며 한문을  어려서부터 배웠으며 지난 몇 년동안 글씨 
쓰는 연습을 열심히 했다고 했다.
  나는 얼마 후에 번해 씨로부터 그녀가 한문을 배우게 된 자세한 내력을 들었다. 그녀는 어느 언어학자의 
무남독녀로 아주 어려서부터 한 자를 배우고 글씨 쓰는 법도  열심히 배웠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녀의 아
버지가 인도 언어들을 연구하는 동안 이 딸은 계속해서 한자 하나하나를 노트에 써서 암기했으나 중학생이 
되는 바람에 한문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녀는 철학 강
의실에서 번해 씨를 알게 되자 유년 시절에 한문을 배운 것을 상기하고 이것을 다시 새로 시작했던 것이라
고 한다. 그녀는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지금은 벌써 거의 모든 중국 서적들을 쉽게 읽을 수 있다
고 하였다.
  그녀는 정말 잘 읽을 줄 알았고 쓰는 것도 좋은 필적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번해 씨보다도 나았다. 그
런데도 그녀는 여러 가지의 옛날 관용구들을 배우기 위해 이 중국 사람을 찾아왔다. 그녀와 대화하면서 알
게 된 일이지만 이 여자는 그저 한문을 잘 쓰고 잘 읽을 줄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풍속과 습
관에 관해서도 너무나 많이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소위 중국의 예의 범절에 관해 서 
얘기했는데 서양 사람들은 이 예의가 진리를 무시하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었다. 번해 씨가 말과 몸짓을 어
떻게 하는 것이 예의 바른 것인가 하는 것을 몇 가지 예를 들어 얘기하자 그녀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고지
식한 조잡함보다는 이러한 예의 범절을 더  좋아한다고 얘기했다. 나는 몇 주일  전에 왜 서양 윤리에서는 
예의바른 의례보다는 진실한 진술을 더 중요시하는가를 해명해보려고 시도해보았지만 오늘은  그녀에게 무
례한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번해 씨는 웃고 나서, 사실 따지고  보면 동양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처럼 그렇게 예의가 
바른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독일에 와서 다른 사람들한테서 체험한 일이 그로 하여금 
심사 숙고하게끔 했던 일을 얘기했다.
  이것은 바로 그가 언젠가 초대받은 적이 있는 어느 독일  교수 집에서의 일이었다. 마침 그때에 자기 외
에 또 한 손님이 와 있었는데 그분은 저명한 학자로서 말을 들어보니 어려서부터 줄곧  남아메리카에서 살
다가 왔다고 한다. 그는 죽 칠레 대학에서 강의하여왔고 2차대전이 돌발하여 적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추
방될 때까지 안데스 산맥을 연구했던 사람이다. 그가 다시 독일에 돌아올 때는 그가 그곳에서 애써 조금씩 
모은 인디아너 스케치집을 갖고 온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이분은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
해서 이 그림을 한 장 한 장 팔아먹는 형편이었다. 그제야 번해 씨는 왜 이 알지 못하는 손님이 왔는가 하
는 것을 알아차렸다. 집주인은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장을 골라서 염가로 부른 대금을  지불하였다. 그 손님
이 기분 좋아 자리에 있던 분들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할 때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던 이 집 딸이 그분께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얼마 안 되는 토론을 통해서  이 집 딸은 그분이 남미에 
오래 있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게 되었다. 이 노인은 당황해서 어떻게 자기 자신과 물건 판돈을 간수
해야 할지를 몰랐다. 한편 이 집 딸은 약간 친절해지면서 그에게 더 이상 속이지  마라고 경고하였다. 번해 
씨는 이 노인이 가엾은 생각이 들어서 그를 보호해주느라고 이 집 딸과 토론을 하는 동안  그는 아무도 안 
보는 사이에 이 집에서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번해 씨는 이 집 딸에게 그 사람이 남미에 있었건 아시아에 
살았건 간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얘기도 재미있게 하고 묘사도 아주 그림같이 하는 
바람에 우리는 아주 흥미진진한 오후를 보내지 않았는가, 그  자신도 오늘 왔던 이 '학자'라는 분이 대화중
에 몇 번이고 모순되는 얘기를 하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것이 그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지는  않았으며 오
히려 그 노인이 그의 멋있는 화술 때문에  저명한 학자의 정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게다가 
또 조그만 보상까지 받게 되어 그 노인을 위해 기뻤노라고  했다. 이 집 딸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녀는 그것이 모두 동양적이라고  얘기했다. 서양 풍습에 있어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그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얘기해야 하는 것이다. 번해 씨는  이 집 딸에게 그러한 윤리는 정말 하나의 
윤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래 돼서 누렇게  변한 스케치를 팔러 다니지만 잠시라도 학자라는 
신망을 얻어보려는 가난한 노인에 대해서 동정심이 전연 없는 그런 윤리는 인간이 따라야 할  아무런 근거
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도 진리의 윤리를 순종하는 사람은 얼마 없는 것 같다고 그는 이야기를 끝내고 계속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는 인생을 그저 책을 통해서나 알게 되고 기아선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첨하는  말을 해야만 하
는 일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곤궁에 빠져 있는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이 교묘한 수단으로 
궁지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보면 도저히 참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의 약점만을 캐내
려고 하고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사이 좋은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일이 있기를 원하고 타인의 약점을 가급
적 감싸주려고 하며 지위의 차이도 나타내지 않고, 비록 비참하고 부족한 면이 많은 세상이기는 하지만 세
상사를 그저 좋은 말이나 유머로 참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
들은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볼 줄 모르며 그저 남의  얼굴에다 무례한 언사나 던집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
람들은 그들의 주관적인 판단이 진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죠. 그러기 때문에  나는 자기 이웃 사람들에게 
동정심이 없는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진리가 허위고, 그  반면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서는 모든 허위가 진리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나에게 그런  충고를 하고 나서 집으로 같이 오며  다음 학기에는 어떤 강의를 들을 
생각이냐고 내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논리'에 대한 강의를 들을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당신은 순수 철학을 할 작정입니까?"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내게 윤리 지식이 가장 뒤떨어져 있는 것 같아요."
  "순수 철학도 괜찮아요. 하지만 나는 철학을 하나의 장난, 말하자면 끝없는 사색의 장난이라고 봅니다."
  그는 얼마쯤 더 걸어가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황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서양의 모든 신문화는 갈린레이가 진자 운동을 관찰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매혹
시키는 것 외에 뭐 다른 것이 있습니까?"
  "네 물론이지요"라고 나는 대답했지만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계속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당신은 곧 다른 학문을 시작해야 하며, 끝없는 철학 속에서 더 이상 방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 연령
도 생각해 보시오. 당신 나이 벌써 이십 중반이 넘었는데 실제로 학업은 제대로 시작도 못 하고 있는 실정
이 아닙니까. 당신은 한국에서도 당신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그러니  당신 어느 쉬
운 학과를 택해서 공부를 얼른 끝낼 생각은 없나요?"
  그는 아주 진지하게 얘기했으나 그의 얘기가 바로 내가 수년 동안 생각해온 것이라는 것을 그 자신은 모
르고 있었다. 우리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강둑을 따라 걸어갔다. 강물이 흐르고 따스한  공기와 나무들이 
파랗게 물든 것을 보고 나는 봄이 온 것을 새삼 느꼈다.
  나는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사실은 나는 모든 것을 시도해보았으나  너무 발전이 없었어요. 이제는 
기억력도 많이 상실해버렸어요"라고 얘기했다.
  번해 씨는 약간 화가 나서, "당신이 그저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지요. 왜냐하면  당신은 자연 과학을 낮
은 수준의 학문이라고 보며 물질이나 현실과 관계 있는  모든 것을 경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고향이 바로 이러한 학문을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나 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조금만 노력
하면 당신도 다른 한국 사람들처럼 이 학문을 잘해나갈 것입니다"라고 얘기했다.
  "그럼 내가 뭘 전공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까?" 라고 나는 그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나는 벌써 여기에 대해서 여러 번 생각해봤어요. 당신 그전에 의학을 공부한 일이 있으니까 어디 한 번 
생물학을 전공해볼 생각은 없나요? 의학과 생물학은 둘  다 생명이 있는 것과 관계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 생물학 분야에서도 당신이  희망한다면 오늘날 도처에서 떠들고 있는 여
러 가지 문제들을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유전이라든지 적응 또는 노쇠 등 등의 문제말입니
다."
  나는 머리가 혼란한 채로 걸어갔다. 둘이서 우리 집 앞까지 와서 작별 인사를 할 때 나는 그에게 생물학
을 한 번 시도해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 학과도 오래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나는 믿었다.

  연구소의 주임 교수는 나를 자기 방에 데리고 가서 내가 지금까지 해온 공부와 나의 현재의 관심사에 대
해서 자세히 얘기하라고 하였다. 나는 기억력도 나쁘고 또 실제적인 것보다는 이론적인 데 더 치우치는 경
향이 있지만 자연 과학을 다시 공부하고  싶으며 가능하면 생물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얻고  싶다고 얘기했
다. 주임 교수는 내 얘기를 조심성 있고 끈기 있게 끝까지 듣고 나서 아주 친절하게 어디 한 번 자기 연구
소에서 열심히 해서 뜻을 이루어보라고 했다. 교수는 힘이 자라는 데까지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는 생
물학을 공부하려면 어떤 수업과정이 있는가를 얘기하고 나서  부전공 과목들을 정하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그는 나에게 식물학을 제1부전공, 인류학을 제2부전공으로 해보라고 했다. 나는 교수의 지도에 고마운 마음
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로 소위 대실습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나는 텅  빈 커다란 실습실에 인도되어 
창가에 나란히 서 있는 여러 책상중의 한 책상을 차지하였다.
  나는 이 책상 앞에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무슨 색수가 들어 있는 글라스와 알코올로 층이 져 있는 병들과 현미경 등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다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금부터 10년 전,  나는 의과대학 
학생으로서 처음으로 현미경을 받아 가지고 값진 기구들을 조심스럽게  만진 일이 있었다. 그때 나와 학업
을 같이 시작했던 다른 친구들은 이미 오래 전에 의사가 되어 명성을 떨치고 있겠지. 그런데 나는 10년 만
에 다시 현미경 앞에 앉아서 공부를 새로 시작하고 있었다.
  저 바깥 양지 바른 정원에는 신록이 우거지고 한때 수도원이었던 건물의 적갈색 지붕 위로는 따스한 5월
의 향기가 감돌았다.
  잠시 후에 나는 책꽂이에서 두꺼운 교재를  가져다 이곳 저곳을 들춰보았다. 외래어들  중 어떤 것은 그 
뜻이 그저 희미하게 기억나거나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도 있었고 라틴 어나 그리스 어로 되어  있는 동물 
세계의 배열과 분류 묘사라든지 비교 해부학의 전문 용어들도 눈앞에서 아물거리기만 아였다.
  바로 그날 또 다른 두 연구생이 이 큰 실험실에 들어와서 적당한 간격을 두고 각각  자기 책상을 차지하
였다. 실습 준비자가 와서 각자가 실험하고 고찰해야 할 아메바의 껍질을 나누어주었다. 한 젊은 교수가 실
험실이 나타나더니 개별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씩 실험을  지도했다. 우리 세 신출내기들은 열심히 실험하
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우리들은 조그마한, 아주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그리고 우유빛처럼  흰 생물을 현미
경으로 들여다보고 그 움직이는 모습을 여러 가지 형태로 노트에 기입했다. 다른 두 연구생들은 실습을 빨
리 해치우고 연구소를 떠나버렸는데도 나는  여전히 실험실에 앉아서 이리저리 움직이려고  하는 조그마한 
미생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후가 지나면서부터  큰 실험실에는 해도 비치지  않고 또 책장과 책상들도 
거무스름하여 실험실도 점점 더 어두어졌다.  실험을 받던 조그마한 아메바도  지쳐버린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 아메바는 어떤 특정한 모양이나 팔다리를 갖고 있지 앉은  미생물이다. 이 동물은 살아 있기는 하지만 
보통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흰빛을 띤 자패다. 요놈은 가끔  이리저리 기어다니면서 무슨 먹이를 
찾는 것같이 보였다. 이 미생물은 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생물임에도  틀림없고 많은 학자들이 이 
생물에 대해서 글도 발표하였다. 사람들은 이  미생물이 팔다리가 없는데 어떻게 움직이며,  먹이는 어떻게 
섭취하는지 그리고 번식은 어떻게 하는지 등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다음 며칠은 많은 책을 
읽어보아야만 했다. 교과서며 또한 다른 참고서를 열심히 읽어보았지만 한이 없었다. 이 생물이  얼마나 신
기하며 놀라운 생물인가 하는 것을 관찰한 것에 대해 특히  읽을 거리가 많았으며, 또한 이 놀라운 미생물
체의 내부 구조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의문점에 대한 기록이 많았다.
  저녁때에 연구실에 혼자 앉아 실험을 하거나 뭘 읽어 볼 때면 가끔 젊은 조교인 쉴 씨가 내 곁으로 와서 
혹시 자기의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실험하는  것보다도 읽느라고 시간을 더 보낸다는 것과 
규정되어 있는 실험을 잘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아마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실은 내가 이미 배운 것을 
다시 복습해야 했기 때문에 하루 전에 미리  배부된 실험 물질을 전혀 건드리지 못하는 일도  여러번 있었
다. 그래도 조교는 화를 내지 않고 저녁때 자유시간에 실험을 보충하는 일을 거들어주기도 했다. 그는 아주 
끈기 있게, 실험 물질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며 또 어떠한 특징을 잘 고찰해야 하는가 등의 설명을 여러 번 
해주었다. 어떤 때는 실험의 대상이 아주 중요한 것이거나 내가 너무나 자신 없이 무서워하면서 실험을 하
면 자기가 손수 채색을 하거나 실험 물질을 혼합하였다. 조교는  내가 생각을 오래 하는 반면 실제적인 실
험에는 덜 치우치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내가 따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처음 얼마간은 도와주
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 나를 퍽 많이 도와주었다. 이 조교는 연구소에서 퇴근하기 전에 비
록 잠깐 동안이지만 나를 돌보지 않은 적이 단 하루도 없었고, 어떤 때는 내가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보충해주고 이런 저런 의견이나 논제들을 얘기해주느라고 시간을 빼앗긴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끝없는 사색의 장난

  어느 날 조교는 실습이 다 끝나자, 동양에서는 옛날에 무엇을 교육이념으로 삼아왔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지식과, 그리고 어렸을 때 서당에서 몸소 체험한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동양에서는 어린애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는 것을 나는 그에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가 있었다. 즉 
습자, 작시법, 사서 그리고 흔히 종교 또는 윤리 교육으로서  옛 한학자들의 설을 가르친다고 하였다. 그러
나 아주 고대의 교육 이념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은 나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어쩌면 공자의 말
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는데 공자의 설에 의하면  인간은 관용
할 줄 알고, 가난 때문에 치욕감을 갖지 말고 소박하고 알맞게 살아야 하며, 모든 부당한 허식을 피해야 하
며, 우주의 운명이나 의도에 만족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이 조교는 내 얘기를 아주 흥미있게 듣고 나서 서양에서 얘기하는 교육 이념도 결국 이와 비슷하다고 말
했다. 교육의 다른 면은 즉 과학적인 것은 인간에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과학적이라
는 것은 그저 생활의 어떤 면을 조금 도와주는 역할이나  하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과학 그 자체만으
로는 인간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의 교육만은 인간을 고상하게 만들 수 
있으며, 인간이 실로 종교를 가지고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교회 만능주의를 의미
하는 것이 아니고 또 그가 믿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  지상의 모든 종교, 즉 마호메트교, 불교, 힌두교 또
는 도교 등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따져볼 때 같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결론이다. 
말하자면 이 지상의 악덕으로부터 몸을 깨끗이 보존하고 속세의 자아를 극복하며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래야만 우리가 다시 신성한 기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 사람들이 교육의 
이러한 면을 점점 소홀히 하며 젊은 학생들은 그저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데만 급급하고 있는  사실은 자기
의 마음에 거슬린다고 하였다.
  그와 똑같거나 비슷한 의견을 얘기하는 사람들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제
법 많은 것같이 보였고 나 역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과학이라는 것이 사실상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저 직업적인 훈련으로밖에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지만 나 자신은  아직 그렇게까지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사물을 이해하고 진리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인간 정신의 융합을 우주의 내면
적인 본질과 영적인 토대와 관련시킬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이야말로 가능하
다면 우리의 기점으로 되돌아가는 윤리의 길인 것같이 보였다. 다만 내가 이 올바른 유일의 길에 자신있게 
서 있는지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우리는 둘이서 오이덴트린(Eudendrien)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것은 겉으로 보아서는 식물
체 같은데도 그놈이 섭취하는 영양이 동물성이기 때문에 동물과에  속하는 생물이다. 나는 이 단세포 동물
을 모두 조사, 음미하고 나서 아직 동물적인 요소를 많이 지니지 못하고 있는  소위 움푹동물(Coelenterata:
움푹 둘어간 소화 기관을 가진 바다 동물)들이 있는 데로  가게 되었다. 쉴 씨는 이 나무처럼 생긴 미생물
을 바라보면서 전에 그가 나에게 태양동물을 보여줄 때처럼  황홀해졌다. 그러고 나서 그는 산호충이며 나
비 그리고 여러 심해동물 등 아름다운 동물의 모양들에 관해서 다시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러한 
얘기들과 여러 가지 견해나 체제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쉴 씨는 생명의  모든 우월성을 
생명이 없는 기계적인 힘 있는 데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그는 생명을 도리어 
궁극에 가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보는 분이었다.  그는 아메바나 다는 단세포 동물 등 미
생물과 단순한 생물이 어떻게 가능한  범위내에서 자기의 생명을 유지해나가는가 그리고  영양물은 어떻게 
찾아먹는가, 위험한 일이 발생할 때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구조하고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는 어떻게 방어하는가 등등에 대해 감탄해하는 분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생물에게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
기 위해서 자연은 어떤 수단을 적용하는가 하는 모든 점에 대해서도 각별히 신기하게 생각하며, 그 수단이 
간단하면 할수록 그 현상이 우아하면 할수록 더욱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평형 기관이 아주 간단하게 
되어 있어 그저 감각 세포와 조그마한 모래알로 구성되어 있는 가재에 관해서도 그는 감격해서 얘기해주었
다. 모래알이 탈각할 때마다 떨어져나가기 때문에 가재는 평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탈각 후에는 가능
한 한 빨리 하상으로부터 새 모래를 자기 기관에다 밀어넣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그러한 기관이 
기능을 발휘하는가 하는 것은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어떻게 자연이 이렇게 간단한 생각
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은 설명하기가 곤란할 것이다.
  우리가 이 희한한 오이덴트린을 자세히 관찰하고 난 뒤 그는 내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두꺼운 내 책을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그는 이 책이 너무  딱딱하고 재미없이 기술돼 있어서 나에게  훨씬 더 적합할 다른 
책을 한 권 연구소 도서관에서 가져다주었다. 수많은 예쁜 그림들이  들어 있는 이 책에는 동물들이 그 특
징에 따라서 조직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방법에  따라서 정리되어 
있었다. 이것들이 한 번은 자립적으로 생물체로, 그리고 또 한 번은 자연 전체의 일원이라고 묘사되어 있었
다.
  바로 그 주 어느 날인가 나는 생물학 공부에 꼭 필요한 소위 소실습에 참여하기 위해서  시내에서 좀 떨
어진 곳에 있는 식물 연구소를 찾아갔다. 나에게는 이 소실습이라는 것도 대실습을 할 때나 꼭 마찬가지였
다. 모든 교재가 짧은 시간내에 진행돼야 하기 때문에 모든  실험이 재빨리 시행되어 부담이 너무 많은 과
정이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버섯이며 이끼,  꽃, 열매 등을 하나도 빼지  않고 샅샅이 연구하면서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한 번  이런 것에 대해서 실습을 지도하는  교수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는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하고 자기는 예전에 얼마나 더 조용히 그
리고 세심하게 공부했는가 하는 얘기를 해주었다. 가장 좋기로는  우리가 단 하나의 식물만 계속해서 실험
하는 것이며, 식물의 일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발생할 때부터 성장한 단계까지 연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나를 도서관으로 데리고 들어가 여러 가지 식물에 관한 전문 서적들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어느 천여 페이지나 되는 큰 책에는 저자가 10년 이상이나 연구하여 쓴 소맥류의 성장에 관해서 관찰한 것
이 실려 있었다.
  실습이 끝나고 나서 나는 연구소 바로 옆에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 데로 갔다. 여기서 나는 몇 시간 
동안 지금 막 날씨가 따뜻하여 잘 피어나고 있는 독일의, 그리고 이국풍의 식물들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
내고 있었다. 백합, 장미, 석남 등이 구름 한 점 없는 여름 하늘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고, 구역과 화단 그리
고 바위로 막은 칸마다 각각 다른 꽃들이 만발하여 있었다. 가만히 다니면서 보니 여기에는 지상의 식물이
란 식물은 없는 것이 없었다.
  그 후 나는 이 정원에서 가끔 어느 여자 동료를 만나 여러 번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다. 그 여자는 나이
가 퍽 어려 보이는데도 학업에는 진전이 많아 보였다. 그녀는  우리가 본 식물이나 곤충을 모르는 게 거의 
없었고, 그것들의 특성에 대해서도 퍽 많이 알고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언젠가는 나에게  한국의 화초와 동
물에 대해서도 물어본 일이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만날 때마다 나의 고향 얘기, 한국의 풍경, 국민들의 일상 생활,  풍속, 습관, 전통, 불교적
인 관례며 재생의 교훈 등에 관해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들은 종교와 세계관에 관한 얘기까지 하면서 
나는 그 여자 역시 인생이나 인생의 의의가 신앙의 도움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는 의견을  갖고 있음을 알
아차렸다.
  한 번은 그녀가 나와 같이 시내로 돌아  들어가다가 며칠 후 저녁때 그녀가 자기의 어머님이  있는 데로 
오라고 나를 초대하였다. 그 여자의 아버지는 작년에 세상을 떠나서 모녀가 단둘이 시내 북쪽 어디에 살고 
있다며 종이 쪽지에 자기 이름과 집 주소를 적어주었다. 이름을  보고 이 여자가 바로 지난번 쉴의 추천으
로 산 새 교과서를 쓴 저자의 딸 도로테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화론 학자인 외츠 교수는 쾨른텐에서 여름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 어느 날씨 좋은 가을  아침에 연구
소에 출근하였다. 교수는 내가 큰 연구실에서 혼자 일하는 것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인사를 하고 
내 실험이 얼마나 진전되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유감스럽게 그 곤충들까지는 아직 다루지 못했다고 솔
직하게 말씀드렸다. 사실 나는 여름내 하루도 쉬지 않고 나보다 앞서 있는 동료들을 따라가기 위해서 부지
런히 공부했지만 이런 욕심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슐러라는 친구분이 연구소를 떠라버리는 바람
에 그분의 자극마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날씨가 더우면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신선한 아침 시
간에 공부를 조금 하고 나면 졸음이 너무 와서 저녁때 시원해지면 다시 공부할 기운이 날 때까지 의자들이 
죽 놓여 있는 곳에 누워서 쉬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겨우 징그러운 벌레들을 실험하는 단계에서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외츠 교수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더니, "이게 플라나리아(담수에서 사는 편형 동물)의 일종인가요?"라고 물
었다.
  나는 얼른 그렇다고 대답했다.
  "당신은 이 동물들이 아주 쉽게 재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네,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 동물을 실험하면서 재생의 과정을 잘 관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한 놈의 플라나리아를  
두 동강 내서 그놈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만 보면 됩니다. 이 조그마한 벌레들은 아픈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해요."
  나는 교수가 지시한 대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두 동강이 난 플라나리아의 두 부분은  며칠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에 
나는 벌써 한쪽 부분의 앞쪽에 새 꼬리가 나고 뒷부분으로는 머리가 생겨나는 것과 두 부분이 정상적인 동
물처럼 움직이면서 뭘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흘 전에는  한몸이었던 요놈이 지금은 이렇게 두 개가 되
다니. 즉 한 부분은 동물의 앞부분이었고 다른 쪽은 뒷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것들이 두 개의 완연히 
다른 별개의 두 동물처럼 보이고 자기네에게 영양이 되는 살 조각의 여러 군데를 핥아먹고 있었다. 그러다
가 우연히 서로 마주치게 되면 몸을 움츠리며 비키곤 하였다.
  나는 새로 자라난 부분을 다시 떼버리고 본래 있던 낡은 두 부분을 잘 연결시켜 아물어  붙도록 하기 위
해서 아교풀로 접착시켜놓았더니 더욱 신기한  현상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해두고 며칠이 지나면 
이것이 다시 하나의 플라나리아가 돼서 그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동물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이 동물은 
한 생명이 두 개로 나뉘어져도 모르는 것같이 보였다.
  얘기는 더 계속된다. 두 개의 조립되는 부분은 반드시 그 자체의 동물을 연결시켜야 살아난다는 법은 없
다. 만약 한 동물의 앞부분이 다른 놈의 뒷부분과 붙여지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다시 정상적인 조화된 동
물처럼 되는 하나의 플라나리아가 생기게 된다.
  만약 상처가 대단하지 않아서 몸의 일부분이  완전히 갈라지지 않게 되면 재생을 통해서  맞은편에 있는 
부분이 두 배가 되기 때문에 두 개의 꼬리나 혹은 두 개의 머리가 달린 한 개의 동물이 생겨버린다. 이 두 
개의 머리는 서로 다른 개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둘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기어가려고 할 때면 충돌이 생
기는 수가 많다. 그리고 서로 의견이 같아질 수 없는 세 개의 머리통이 한몸에 생기면 이놈은 움직이는 데
에도 힘이 더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 가지 변종으로 이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데 저녁때에 진화론 학자인 이  교수가 내게로 
와서 나의 그런 실험을 아주 흥미있게 관찰하였다. 그러더니 교수가 나에게 이 시도를 계속할 의사가 있느
냐고 물었다. 나는 물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래 대실습은 어느 정도까지 돼 있습니까?"
  "이놈의 곤충들이 아직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교수는 나에게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보여달라고 하더니 이미 시작된 실험을 계속하여 박사 학위 논문으
로 확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단  내가 지금까지 다 못 한 실습을 다음 학기  초까지 다 
끝내겠다는 것을 약속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 저녁, 번해 씨가 내가 있는 연구소로 찾아왔다. 그는 내가 연구하고 있는 것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내가 쓰고 있는 학위 논문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진기한  현상들을 보고 위축된 
기분으로 새로 시작하는 실험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느냐고 묻고 가끔 이런저런 실험 대상  동물을 깊이 
생각하면서 관찰하였다.
  어느덧 겨울이 되었다. 나와 번해 씨가 나란히 그의 집으로  걸어가는데 늦은 밤중에 분말 같은 눈이 길
가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연구소 근방에 있는 어느 조그마한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이 식당은 얼마 
전부터 동양에서 온 몇몇 학생들이 가끔 서로 알고 지내기  위해서 모이는 곳이었다. 번해 씨는 나도 잠시 
다른 학생들과 얘기도 나누고 공부하다가 피로도 풀 겸 이따금 거기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
고 제안했다. 나는 자유 시간도 별로 많지 않고 그렇게  남들과 만나면 학업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도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결국 그의 권유에 따라서 그리고 같이 가보았다.
  거기에 가보았더니 동양과 중동 지방에서 온 여러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몇몇 인도 학생들도 
있어서 나는 이 사람들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들의 대화는 주로 인도  국민의 생활, 옛날 
학교와 현대식 학교 그리고 인도 청년들의 교육 이상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이 말하자면 내가 인도 사
람들과, 즉 자비와 속세 체념의 종교를 멀리 한국에까지 전파시킨 옛 기적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처음으
로 만나보는 기회였다. 이런 전설적인 나라의 후손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도중, 나는  내성적인 마음에 경외
감까지 갖게 되었다.
  중국 사람들과 인도 유학생들 외에도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및 터키에서 온 학생들도 자리를 같이하였
다. 그들은 동양에서 온 어려운 입장에 있는 동료들을 도와 주기 위해서 다 같이 축제의 밤을 계획하고 있
었다.
  동양에서 온 모든 학생들과 손님들이 초대되는 이 축제의 밤은 어느 큰 식당 홀에서 거행되었는데, 인도 
사람들은 단막극을 그리고 중국 친구들은 펜터마임(무언극)을 보여주었다. 어느 터키 학생 하나가 감시하는 
모든 일을 맡았고 나는 기록을 담당했다. 성과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커서 사람들은 다음 학기에 또 한 
번 이런 축제의 밤을 가질 계획까지 세웠다.

  여름 학기가 시작되어 나는 번해 씨로부터 동양 사람들만의 모임 외에도 다른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
이 모이는 전세계 학생 기구의 회합도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이 모임은 독일 학생 지도사업 기구가 외국인 
학생들끼리 서로 알고 지내는 일과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이런 축제의 밤을 계획한다는 것이었
다. 우리는 몇 차례나 이런 모임에 가서 점차로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온 동료들과도 알게 되었는데 그 중
에는 폴란드, 헝가리 그리고 세르비아에서 온 학생들도 하나씩 있었다. 이 모임에서는  모두가 합심해서 어
려운 형편에 놓여 있는 동료들을 위해서 다채로운 프로를 가지고 저녁 행사를 시도해볼 계획이었다. 이 프
로를 짜는 데는 동양 학생들이 지난 학기의 경험을 살려서 하면 실수 없이 되리라는 의견이었다.
  어느 날 오후에는 내가 연구소에 있는데  나와 절친한 사이인 헝가리 친구가  찾아왔다. 이 친구의 말에 
의하면 세계 각처에서 온 학생들을 위한 전통 있는 기구를 창설하기 위해 세르비아의 어느  도시에서 학생
회의가 개최된다는 것이다. 이곳 학생회단이  회합에 협력하기 위해서 대표자를  한 사람 파견할 생각이고 
서로 상의한 결과 내가 적임자라고 추천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이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지금
까지 나는 그런 모임에서 같이 일해본 적도 별로 많지 않을뿐더러 이런 임무를 맡기에 적합치 않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혼자서 그저 학업에만 열중해왔고  사회 사업의 문제나 각국의 문화며 여
러 국민들의 차이점 문제 등에 관해서는 전념을 다해본 일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 회의의 과제는 나에
게는 아직도 생소한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간의 상호 이해 문제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내가 주저하는 점
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내가 동료의 권유로써 용기를 얻어 마침내 이번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승
낙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나는 선편으로 부다페스트로 가기 위해서 파사우로 향해 떠났다. 헝가리 친구는 여
행 준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자상하게 도와주고 나서  이렇게 선편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 날씨도 흐
리고 안개비가 내리긴 했지만 나에게는 몇 년 만의 선편 여행이라 이틀간의 항해는 기분 전환에 아주 적당
했다. 나는 스쳐 지나가는 협곡, 파괴된 건물들과 마을을 아주  기분 좋게 바라보았는데, 강물이 보이지 않
을 정도로 넓어질 때까지 강의 협곡과 만곡이 계속 교차되었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나는 다른 나라에서 온 동료들과 만나서 그들과 함께 헝가리 평야를 지나  회의 장
소가 있는 남방으로 내려갔다.
  회의는 1주일간이나 계속될 예정이었다. 첫 회의에서는 40여 개국에서  온 300여 명의 학생 대표들을 질
의 그룹에 따라서 여러 가지 위원회로 구분하였고, 이 질의 그룹에서는 사회, 문화, 경제 그리고 정치 문제 
등을 토의하게 될 것이며, 개개의 위원회는 중앙 위원회와 연관을 갖게 되어 있었다. 나는 '동서' 질의 그룹
에 해당되는 위원회에 속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우선 동양 학생들이 유학 생활  중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는가, 그리고 두 문화권 사이의 우호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등
에 대해서 토의하여 조사하였다.
  세르비아의 학생회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자기 나라에 체류하는 짧은 시일  동안 최고로 
좋은 추억을 남기도록 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 학생회는 인접 도시를 관광시키는 일
을 맡았고, 그리고 저녁마다 서로 교제할 수 있는 모임을 마련하였다.
  언젠가 한 번 소풍간 곳은 도나우 강가의 숲이 없는 산턱에  위치한 수도 베오그라드(오늘날은 유고슬라
비아의 수도) 시였다. 나는 다른 몇몇 동료들과 함께 평탄하지 않고 돌로 포장된 길을 따라 안내되었다. 이 
길 주위로는 은행, 대학 그리고 성 등 관람할 만한 건물들이 있었으며, 이것은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도 흔
히 볼 수 있는 길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것 같은 도시의 
외곽으로 구경 나갔다. 그곳에서 나는 다른 구경도 많이 했지만  특히 인상적인 것은 네 식구가 살고 있다
는 조그마한 오막살이 한채를 구경한 일이다. 썩은 냄새가 푹푹 나는 울타리와 검은 점토의 방바닥에는 침
구라고는 짚으로 만든 요가 몇 채 있었고 부엌의 냄비 한 개를 빼놓고는 살림 도구라고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냄비 주위에 네 사람이 둘러앉아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가난한 사
람들을 도대체 구경한 일이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이 사람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나는 그 자리에 멍하
니 서서 다른 친구들이 어서 가자고 할 때까지 오막살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일행은 시내 중심가로 다시 돌아가서  어느 조그마한 다방으로 들어갔다. 여기에는 호
화로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모여들어서 무슨 음료수인지 내게는 생소한 것들을 마시고 
있었다. 보이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손님들에게 노란색, 빨간색,  녹색 그리고 흰색의 사탕 조각들을 나
누어주었다. 이 사탕은 마치 반구 모양으로 생긴 것으로 얼마 전까지 자선 시장에 진열되어 있던 것들이다. 
세르비아의 여대생이 내게 통역해주는 것을 들으니 여기 모인 사람들은 세르비아 어,  불가리아 어, 그리고 
터키 어 등을 뒤죽박죽 섞어서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세르비아 친구들이 웃으면서 말했듯이 흔히 '동방의 시발점'이라고 하는  지금까지의 세상과는 아주 
판이한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동방이 이곳까지,  지구의 지리적인 
중간 지점 근방이 되는 이 유럽까지  와 있는 줄은 나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저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작품 속에서나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이런 광경이 실로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동방'은, 우리 한국
도 '동양'에 속하지만 얼마나 다른 점이 많은가. 우리의 동양은 여기서처럼 혼잡하지도 않고 시끄럽지도 않
으며 또한 그렇다고 소박하고 조용하고 신비적인 것도 아니며 그저 내성적일 뿐이다.
  저녁때에 우리는 교외에 있는 오락장으로 나갔다. 그곳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곳이었다.  갑자기 어
둠침침한 어디서인가 3, 40명이 나와서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합창을 하였다. 나는 이 어두운 평야에서 
주님께 슬픈 기도를 드리는 길 잃은 무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
만 그것은 러시아에서 온 학생들이 자기네의 고향 노래를 다 같이 합창하는 소리였다. 이 합창을 마지막으
로 그날 밤의 모든 행사가 끝나고 모두들 회의 장소로 다시 돌아갔다.
  각 위원회마다 차례차례로 활동 업무들을 종결 짓고 마지막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 동안 정관이 발표됐
고, 이 세계 학생 기구를 뭐라고  부를 것인가, 즉 기구명에 대해서  서로 의논하였다. 다시 말하면 본래의 
이름은 이미 있는 것이지만, 어느 동료의 제의에 의해서 원래 있던 명칭에다가 '기독교적'이라는 단어를 하
나 더 삽입하자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한 자극과 협조가 기독교 기구들의 보조
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제안은  기독교적 기구들과의 연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이
라는 단어를 그저 부제로나 붙여두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제의한 세  번째 안은 부제를 도대체 
붙이지 말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활동은 그 규약에도 엄연히 명시되어 있듯이 세계 각국에서 온, 그리
고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학생들이  한데 뭉쳐보려는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제안을 낸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주장을 좀더 설명하고 나서 투표에  들어갔다. 나는 상당수에 달하는 비기독교인 학
생들이 기독교의 행사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두  번째 안은 20표 정도였고 내가 제의한 세 
번째 안은 겨우 두 표밖에 되지 않았다. 즉 나하고 뒷줄에서 어느 친구가 내 안에 동의하며 일어섰다.
  바로 이 동료와 나는 그날 저녁 회의가 끝나고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그는 
나에게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불교에 
대해서 잘 아느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나는 다시 부정하고 나서 지금까지 종교 문제에 특별히 전념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잇따라서 나는 나의 생활,  나의 학업, 그리고 어쩌면 한  번 인간 존재의 의의를 이해하고 
싶은 내 소망 등을 얘기했다. 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면서  내 얘기를 듣더니 자기 자신은 그래도 기독
교가 가르치는 바를 충분히 실행하면 존재의 의의를 발견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의 그런 신조에 깜짝 
놀라 그럼 왜 이번 마지막 총회 때에 내 제안을 지원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스웨덴에서 온 신학자로서 
내부전도를 위해서 지금은 헝가리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유럽 자체내에도 기독교
인이 많이 살지 않기 때문에 유럽 이외의  다른 대륙을 위해서는 이런 내부 전도가 보통  전도 사업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분의 의견도 그저 영세나 받고 신에게 지상의 행복을 빌기 위해서 일요일마
다 교회에 나간다고 해서 모두가 기독교인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독교인이란 예수가 가르친 대로 살아가
는 그런 사람들만을 말하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인은  진실성이 없는 말을 해서는 안 되며,  일시적인 것을 
재물로 여기지 말고 설혹 타인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이웃과 싸워서는 안 된다는  얘기도 했
다. 그는 이번 회의에 참가한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이런 교훈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이런 표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하며 또한 
그들의 기분으로도 이것이 좀 고상하게 들리기 때문에 학생  활동도 이런 이명으로 지정하려고 하였다. 그
는 이런 것이 모두 위선적인 행위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기는  그 안에 반대하였고 이 활동이 초창기에 이
미 명칭을 잘못 붙여서 망친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여행 후의 요양소

  다음날, 나는 독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원래 나는 이번 회의가 끝나고 그리스를 방문하기 위해서 남
쪽으로 더 내려가볼 계획이었다. 번해 씨도 나에게 그리스를 꼭 구경하고 오라고 권유하였고 나 역시 '유럽 
문화의 발상지'인 그리스를 구경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기뻤다. 나는 그리스 친구들이  그들의 친척과 내
가 그리스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나를 안내할 사람들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들도 아직 갖고 있었다. 마지막 
며칠에는 이렇게 먼 여행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쇠약해서 무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나는 모
든 계획을 다 집어치우고, 다음날 북쪽 방향으로 떠나는 기차에 몸을 담았다.
  부다페스트에서 나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도시의 명소, 유서 깊은 건물들, 성, 대학 그리고 국회 등 등을 
관람하기 위해서 헝가리 학생회단으로부터 사흘  동안 정식 손님으로 초대받았다.  나는 마지막 날에 투란
(중앙 아시아의 저지) 협회의 회장까지 알게 되었는데 이 협회는 마자르(형가리 주요 민족)가 동부  어디에
서 유래했나를 연구하였으며 예전에 동족이었던 국민들과 특히 동방 국가들과의 우호 관계를 다시 찾는 일
을 하고 있었다. 나는 헝가리 인들과 다른 몽고 인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의 친근성이 있
는지 모르고 있었다. 헝가리의 저원을 지나갈 때 1000여 년 전 외부 국민들로부터 이렇게 멀리까지 침략당
해서 이렇게 주먹만한 땅덩어리를 가지고  생활을 유지하느라고 이 조그마한 국민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친척이 되는 국민의 장래를 위해  진심으로 복된 나라가 되기를 기원하며 작별 인
사를 하고 독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랐다.

  새 학기에 논리학 강의를 들었다. 나는 순수 철학을 다시  공부하기 위해서 이 강의를 들은 것이 아니고 
그저 박사 학위 논문을 위한 이론적인 도움을 찾기 위해서였다. 지난 학기에는 나의  개념이, 특히 '개체'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실험들을  전혀 시작해볼 수가 없었다. 한 학기  동안 드리쉬, 
윅스퀼, 페르보른 등의 자연 철학 저서를 통해서 그에 대한 유효한 설명을 찾아보려 했으나 허사였고, 결국 
이러한 난점들은 인식 행위 자체내에 근거해 있으리라는 추측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논리학으
로부터 개념의 설명은 인간 사고의 인식을 통해서 얻는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다.
  이 논리학 강의는 아주 훌륭했다. 나는 이 강의에서 처음으로  나를 매우 자극시킨 판단의 여러 가지 형
태를 배우게 되었다. 젊은 철학자인 이 교수는 청강자들을 어려운 문제점까지 명료하게 이끌어갔으며, 여러 
가지 개념들을 특히 사물과 언어 상징과는 달리 지성의  피조물이라고 강조하였다. 나는 교수의 설명을 흥
미있게 따라갈 수 있었지만 우리말의 언어 구조가 독일 말과는 달랐기 때문에 이해하느라 무척 애를 썼다. 
우리의 언어 구조로는 독일식 사고 방식을 따르기가 쉽지 않아서 이 철학 교수가 어느 면회 시간에 얘기했
듯이 소위 '언어 논리'라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 교수의 강의는 사실 내용도 상징도 아니며 오로지 순수 논리와 정신 기능의 형태들이  중심이라고 하
였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영혼을 언어의 경계 너머로, 자연의  현상 뒤로, 말하자면 왔던 길로 되돌아가게 
하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소로 가는 도중 나는 잠깐 휴식하기 위해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길이 몹시 소란해서 
너무 피로해진 것 같았다. 매일 같이 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고, 목적지까지 가려면 별로 먼 길
도 아닌데 가는 도중에 두 번씩이나 쉬다가 갔다. 동료들은  나에게 건강이 아직 좋지 않으니 의사한테 가
서 진찰을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고들 얘기했다. 게다가 내  기분에도 다시 심한 병이 재발하는구나하는 생
각이 가끔씩 들었다. 그러나 평소 그다지 심하게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한테 진찰받으러 갈 결심이 생
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갑자기 학생 후생 단체의 지정 의사가 나를 찾아와서 오랫동안 나의  학업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다가 가면서 자기가 나의 건강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지  검사해보려고 하니 
한 번 들러달라고 간청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찾아가서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별로  오랫동안 진단하지
도 않고 옛날에 앓은 적이 있는 병이 재발하니 당장 학업을 중단하라고 충고했으며, 자리에 누워있어야 하
고, 다음에 다시 진찰받으러 올 때까지 체온이 오르고 내리는 것을 잘 관찰하라는 지시도 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두 번째 진찰이 있었는데 이때는 혈액 검사와 엑스레이 촬영 등으로 제법 오래 걸렸다. 마지막 
진찰 날에 의사 말이 병세가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악화되었으니 가능한 대로 빨리 어느 요양소에  가서 휴
양해야 되겠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무서운 진단이 내리리라고  벌써부터 예감했고, 또한 이  병의 재발은 죽음이나 마찬가지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의사가 나더러 완쾌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으면 안 된다고 나를 안정시켰다. 이 의사는 손수 스위스에  있는 어느 요양소에 나를 수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나는 요양소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자리에 가만히 누워서 요양을 계속해야만 했다.
  내가 학생 후생처의 건물을 나서서 조용한 옆길을 통해 연구소에 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서 어두워
졌다. 연구소의 입구에서 나는 뒤를 한 번  돌아다보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나는 동료들과 내  병에 대해서 
얘기할 흥미조차 전혀 없었다. 내가 번해 씨를 찾아갔더니 그는  브리깃테 양과 여러 가지 건축 양식에 대
해서 토의하느라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머물러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에 나는 서랍 속에서 옛날 편지들, 일기장 그리고 다른 서류들을 모조리 꺼내 다시 한 번 자세
히 읽고 나서 조그마한 소포만 하나 남겨놓고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이 소포를 큰 봉투에 넣어가지고 
한국의 우리집 주소를 적어놓았다. 나는 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같이 생각되어 이 소포를 어린 
엘리 양에게 맡기면서 내가 죽은 후에 이 소포를 나의 누님께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왜냐하면 오로지 이것
만이 내가 나의 생애에서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나는 학생 후생처와 스위스의 요양소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어린 엘리 양은 요즘 낮에는 어느 고서점에 나가서 일하기 때문에 저녁때에나 집에 있었다. 그녀는 1
년 전부터 이 직장에 나가는데 하는 일이 마음에 드는  것같이 보였다. 매일같이 새벽 일찍이 집을 나갔다
가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와서는 부엌에  들어가 빵 몇 조각을 급히 먹고  잠자리로 가곤 했다. 벌써 책을 
판매하기도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그러지는 못한다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녀의 일은 낡은 책들을 먼지를 
털어내고 가게에다 정돈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녀가 이렇게 변변치  않은 일을 하지만 이것이 그녀의 품위
를 더욱 높이는 것같이 보였다. 엘 리가 직장에 다니는 후로는 어머니도 딸도 그전처럼 그렇게 구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어머니를 찾아오는 언니와 오빠 그리고 친척들도 엘리를 그전처럼 그렇게 업신
여기지 않고 어려운 일도 그전처럼 그렇게 심하게 시키지는 않았다.

  요양소에 들어가서 처음 몇 달은 집에 있을 때보다 건강이  더 나빠졌다. 그것은 나를 괴롭혔던 열이 나
고, 기침이 나고, 호흡 장애 때문에가 아니라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 하게 하는 것 때문이었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자리에 누워 있어야 하는 일은 나로  하여금 점점 더 견디기 어렵게 하였고 동시에  전신이 차차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나와 한방에 있는 동료 환자에게 도대체 언제부터 입원중이냐고 물어보았다. "6개
월 됐습니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누워 있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습니까?"라고 물어보았더니  "견딜 만합니
다"라고 그는 나직이 대답했다.
  이 사람도 내 나이쯤 돼 보였는데 나와 거의 비슷한 병 경위를 가진 환자였다. 그는 몇 년 전에 대학 졸
업 시험을 앞두고 갑자기 병이 나서 독문학 공부를 중단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조금씩 중단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줄곧 이 병원 저 병원에 입원하였고, 반 년 전부터 이 요양소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아도 그는 병세가 오래 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여윈 얼굴은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부드럽고 인내력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그는 자기의 운명을  탓하지도 않았고, 내가 나의 병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내 병 증세와 똑같군요"라고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
했다. 깊은 밤중에 내가 너무 아파서 잠도 못 자고 가만히 누워  있을 수도 없어서 잠깐 창가에 있는 의자
에 앉아 있으면 그는 나를 쳐다보고 웃으면서 자리에 다시 누우라고 타일러주었다. 자기도 이 요양소에 들
어와서 처음에는 일어나 앉기도 했지만 결국 그것이 몸에 이로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
가 밤중에 일어난 일이 있은 다음날에는 매번 체온이 올라가더라는 것이다. 역시 자리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이런 악성 병환을 치료하는 데 유일한 치료법인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는 나에게 가능한 한 빨리 자
리에 가만히 누워 있는 일에 습관돼야만  한다고 말해주었다. 밤이 깊어서 그런지  그는 아주 낮은 소리로 
속삭이듯이 타일러주었다.
  요양이라는 것이 별것이 아니고 사실은 자리에 그저 가만히  누워 있는 일뿐이었다. 몇 주일이 지났는데
도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낮이고 밤이고 나는 가만히 자리에 누워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서서히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나도 자리에 누워 있는 일에 습관이 돼서 어떤 때는 마치 내가 이 요양소에 여러 해 전부터 
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어느 날인가는 아마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  진찰이 끝나고 나서 간호사의 연락을 받고 나는  깜짝 놀랐
다. 이 간호사 말이 오늘 오후에는 차를 침대에서 마시지 말고 공동 식당에 가서 마시라는 것이 아닌가! 나
는 초조한 마음으로 누워만 있는 신세를 한 번 면해보려고 오후가 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날부터 나는 차츰차츰 마음대로 행동을 해도 된다는 승낙을  받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는 저녁 식사
를 식당에 가서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고, 날씨가 좋은  때면 요양소 주위에서 산보를 조금씩 해도 된다
고 했다.
  어느덧 여름이 되어 하늘은 맑아지고 석남꽃과 남방에서 피는  여러 가지 꽃들이 만발하였고, 바위 언덕 
밑으로는 푸른빛의 큰 호수가 내려다보였다.
  어느 날 아침, 내가 산책을 하고 돌아왔을 때 집 앞의 베란다에  낯익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샬러(이미륵 씨의 뮌헨 대학 동창생)라는, 날씬하고 적당히  그을은 얼굴에 반짝이는 회색 눈의 동
창생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얼마 전에 결혼을하여 젊은 부인을 데리고 신혼 여행차 스위스를 지나다가 여
기에 입원하고 있는 자기의 외로운 친구를 찾아온 것이다. 나는 너무나 반갑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의사의 허락을 받고 우리는 이 친구의 부인이 우리를 지금 기다리고 있는 이웃 동네로 걸어갔다. 조용한 
파도에 대해서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호수에서 보트를 타는 도중 나는 내가  가끔 병실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던 그 위에 있는 바위를 바라다보았다. 멀리에서  무더운 여름의 부드러운 향기 속에 산봉
우리들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샬러  씨는 산 하나하나와 그 산들의 이름, 그리고  그 산들이 
각기 어디에 속하는가 등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 몽테로자는 여기서 보이지 않았다. 파도가  조금씩 높아지
고 동쪽 하늘에 검은 구름이 보이기 시작하자 우리는 보트를 마을 쪽으로 돌렸다. 저녁 식사 후에 이 신혼 
부부는 다시 북쪽으로 여행을 계속했고, 나는 마을과 언덕진 길을 지나서 천천히 요양소로 다시 돌아왔다.

(작품론)

      이미륵의 생애와 문학

    정 규 화(성신여대 교수)

   1
  독일문학 작품 속에 한국이 최초로 언급되면서 소개된 것은  1669년에 발간된 그림멜스하우젠의 (모험적
인 짐플리치시므스)로 알려져 있다. 그후 함부르크에서 발간된 주간지 (유럽 수요신문)은 1674년 1월 7일자 
기사에 "코레아에서 쫓겨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부들이 중국으로 되돌아갔다"는 내용을 실었다. 이때부
터 여행기와 설화집 등으로 한국을 소개하는 몇 권의 책자들이 출간되었고, 그후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아
르노우스 역의  (한국동화와 전설)(1893),  퀴르쉬너 역의  (춘향전)(1894), 노르베르트  베버의 (조선  여행
기)(1915) 등이 발간되었고, 1923년에는 안드레 에카르트의 (한국어 문법), (한국예술사)(1927) 등의 한국 소
개가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인 작가가 독일어로 작품을 발표하여 한국을 독일 문단에 돋보이게 
소개한 것은 이미륵이 최초이며 유일한 인물이다.  
  이미륵은 1920년 5월 26일 독일 땅에  도착하여 뷔르츠부르크 및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
고, 1925년부터 뮌헨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1928년에는 동물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줄곧 작가생
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토록 그리던 고국의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1950년 3월  20일, 뮌헨 교외
의 그래펠핑에서 타계하였다.
  그의 생전에는 단 하나뿐인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1946)로 이미륵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유명해졌으며 그의 작가적 위치는 전후 독일문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이미륵
은 독자들의 열렬한 간청에 의해 이 자전소설의 속편 2부와 3부까지 탈고하였으나 그의 치명적인 병세, 사
망과 더불어 원고의 대부분이 분실되었으니 이는 지극히 애석한 일로서 독자들과 그의 벗들을 슬프게 하였
다고 한다.
  그러나 역자의 30여 년에 걸친 추적에 의하여 단편들과 중편, 그리고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이 부분적
으로나마 발견되어 역자의 손에 입수되었다. 그후 역자는 발견된 단편들과 중편 (무던이)를  묶어서 1974년 
독일 EOS출판사에서 (이야기)라고 책명을 붙여 원문  그대로 출간하였고, 다른 세 중편을  묶어서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라고 명제하여 분도출판사에서 1982년에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상한 사투리)는 1948년 성
신여대 출판부에서 원문으로 출판되었다. 이미륵의 작품 또는 작품집으로 우리 나라에는 상기한 (압록강은 
흐른다)외에 (어깨기미와 복심이), (어린 복술이와 큰 창)-한국일보, 1973년 7월 3일, 6일자-과 (이야기)-범
우사, 1980-, (이상한 사투리)와 (일본식 두통)-주간조선, 1984년 7월 29일자-등이 소개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인간 이미륵만은 다른 차원에서 몇 차례 소개된 바  있다. 즉 이미륵과 친교가 있었던 김재원 박
사(전 학술원 회원)의 (이미륵의 생애)-조선일보, 1959년 6월 1일부터 4일, 4회 연재-, 고병익(전 서울대 교
수)의 (어떤 이방인)-서울대 신문, 1956년 6월 13일과 20일, 2회 연재-, 전혜린 여사의 (이미륵의 무덤을 찾
아서)-여윈, 1959년 6월호-, 엘리자베트 샬크 여사의 (서양에 핀 동양의 꽃)-문학사상, 1974년 3월호-, 주간
조선의 특집(1984년 7월 22일, 803호와 804호), 발터  라이퍼의 (이미륵, 두 세계의 중재자, 독일작가로서의 
한국인)-게슈프레헤, 1986년 제 1집-과 한국일보,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의 취재기사 등이 있다.
  그리고 이미륵에 관한 학술논문으로는 슈테파니 슈마허의 (이미륵의 문학에 나타난 동서의 세계관)-연세
대 국제대학원 석사논문, 1990년-, 역자의 (아시아  작가와 서양과의 만남)-한국비교문학, 1991년, 제16집-, 
(이미륵의 생애와 문학)-성신여대 논문집, 1992년, 제 32집-,  (이미륵, 바이에른에서 활동한 한국작가의 운
명)-카알 슈토커 교수 정년 퇴임 논문집, 1993년-, 뮌헨대 카알 슈토커  교수의 (극동과 유럽의 문화중재자 
이미륵)-독일 문학, 1988년, 제 40집-, 카림 엘 슈에시의 (동서문화의 만남과 갈등. 한국작가 이미륵의 생애
와 독문작품 연구)-뮌헨대 석사논문, 1995년-등이 있다.
  이미륵을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시 남영정 205번지에서 당시 천석꾼이었던 이동빈(전주 이씨)과 이
성녀(청주 이씨) 사이의 1남 3녀중  막내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그의 별명은 '정쇠'였으며, 아명은 
'미륵'이었다. 모친 이씨가 38세란 여자의 나이에 아들  낳기를 고대하여 미륵보살을 찾아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 하여 '미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관례대로 미륵은 해주 제일소학교(4년제)를 졸업하던 1910년 11세  때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6세
나 연상인 17세의 최문호와 혼인하였다. 슬하에는 1남 1녀 (명기, 명주)를 두었으나 그들이 고향 황해도 해
주에서 월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생사나 생애에 관해서는 모르고  있던 차, 몇 년 전 친척되는 분의 
전언에 의하면 아들 명기는 6·25동란때 사망하였다고 한다. 1911년부터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잠시 
신식 중학교에도 다녔으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학업은 중단하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후 그는 계속 강
의록으로 독학하여 1917년에는 경성의학 전문학교에 입학, 3학년이 되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국기
와 전단 등을 준비하며, 시가행진에도 가담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왜경의 잔인무도한 
총칼에 짓밟히는 조국의 비극을 가슴에 품은 이미륵은 끝내 어머니의 곁을 떠나 압록강을 건어  일단 상해
로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상해에서는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기 위한 여권을 구하려고 무려 9개월이나 
체류하는 동안 독립 운동가들 밑에서 임시정부의  일도 돌보다가 결국 구하게 된 것이  중국 여권이었으므
로, 성명표기는 중국어 발음대로 'Yiking Li (이미륵)'로 되어버렸다. 이 여권을 소지하게 되자 그는 유럽으
로 향하는 여객선을 타고 희망과 고난이 얽힌 유럽행 여정에 올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처음 도착한 곳이 마르세유였으며, 여기서 미륵은  한국을 잘 아는 분도회 수사인 빌헬름
씨를 만나 그의 안내로 독일의 뮌스터슈바르차하라는 수도원에 도착 (1920년 5월 26일), 8개월 동안 그곳에 
머무르면서 독일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독일어 공부에 전념하였다. 이듬해 1921년 1월부터는 뷔르츠부르크
로 이사하여 그곳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다가 1923년  다시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건
강이 나빠져서 휴학하다가 1925년부터는 뮌헨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하였다.  건강을 다시 회복한 그는 다
시 학업에 전력을 기울여 1928년 7월 18일 뮌헨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륵은 자기의 전공분야에 종사하지 않고 곧 창작활동에  열중, 주로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단
편과 이야기들을 독일의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하였다. 1946년 7월  1일 드 몬트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저는 독일에서 몇 학기 동안 의학공부를 계속하다가  자연과학과 철학으로 전과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직
업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활동이 더 절실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자신의 전공을 바꾼 이유와  당시의 생활 
및 자전소설을 준비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글을 써야만  했던 것은 젊은 이미륵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절실한 욕구이자 포부였다.
  최초로 활자화되어 발표된 그의 글은 (하늘의 사자)로서, 옛날 한국의 어느 골목길에서  생겼던 인정어린 
미담으로 시작된다. 옛 서울의 밤거리를 걸어가던 시인이 감옥에 있는 아들의 석방을 위해 담 뒤에서 빌고 
있는 어머니의 소리를 듣고 그녀를 도와주는 이야기었다. 이미륵이 남긴 모든 작품은 독일어로 쓰여졌으며, 
한글로 발표하여 소개된 글은 단 한 편도 없다. 그의  내면에서 항시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 민족혼과 향수
는 그로 하여금 부단히 글을 쓰게 하였다. 창작활동을 시작할  당시 비록 그가 서구문화 속에 살았지만 민
족의식이나 역사관이 결여되어 조국을 비하하는 글은 한 편도 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가 발
표한 초기의 습작들은 그의 문학적인  야심이나 포부가 담긴 순수문학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토속적인 민담이나 이야기식의 단편적인 글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의 풍습이나 윤리
의 소개를 통해서 그의 작가적인 소질이 점차적으로 독일문단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그 이후에 발표
한 수많은 단편들과 수필 및 논평들을 통해 그는 동양문화를 서구에 전달하는 선구적인 기수가 되었다.
  약 4년간 단편들을 발표한 경험을 쌓은 그는 마침내 교양소설의 장르에 속하는 자전소설을  쓰기 시작하
였다. 이런 소설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써보려고 생각한 동기는 첫째 그가 독일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읽
은 소설이 켈러의 대표적인 교양소설이었다는 점이다. "내가  처음 읽은 책은 (녹색의 하인리히)였다. 이해
하기 쉽게 쓰여졌다고 봉근이 내게 추천한 것이었다"라고  그는 그의 작품에 기록하였다. 안봉근은 안중근 
의사의 친척되는 사람으로 이미륵과 유럽으로  동행하여 독일의 '뮌스터슈바르차하' 수도원까지  함께 갔던 
동향인이다. 자전소설에 관심을 가졌던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미국에서 영어로 작가 활동을 하면서 (초당
-1931)을 발표하여 '구겐하임'상 및 '북 오브 더 센추리'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떨쳤던 강용홀의 영향으로 보
인다. 이미륵과 1929년부터 1934년까지 뮌헨에서 함께 지내며  친분이 있었던 김재원씨는 강용홀과의 관계
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이미륵이 "이 책(압록강은 흐른다)을 쓰게 되는 데는 지금도 뉴욕시에 있는 
강용홀씨의 (초당)이라는 소설이 자극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강씨는 1933년 자기의 소설로 생긴  상금으로 
로마에서 약 9개월 있다가 1934년 6월 말 뮌헨에서 이의경 씨와 교제가 생기고 아마 그  때에 이씨도 그런 
책을 쓸 생각을 가지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어쨌든 이미륵의 자전적 성향이 강용홀의 생활배경과 이질적
일 수 없었던 객관적 사정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935년부터는 (수암과 미륵)이라는 제목으로 본격적으로 자전소설  형식을 갖춘 작품들과 단편
들을 몇몇 문예 잡지 및 여러 신문들에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에서 이미륵이 쓴 작품의 대부분은 한국
의 풍습과 전통적인 문화를 보이며, 그가 조국에 살았을 때 한민족이 당한 수난도 직설적으로 대변하고 있
다. 1946년에는 그가 거주하던 뮌헨 교외의 그래펠핑 지역에 '월요대담회'라는 문인단체를 조직하여 정기적
으로 문학토론회와 시사토론회를 가짐으로써 많은 지식인들, 특히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활
동범위는 점차로 확대되었고, 그의 학문적인 지식이나 문학적인 소질도  점차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전후에 뮌헨의 파란만장한 문화생활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2

(압록강은 흐른다)

  1946년에는 그가 1930년대 중반부터 심혈을 기울여 10여년 간이나 집필하여 온 그의  대표적인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뮌헨의 피퍼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전후의 독일문단과 독자들을  놀라게 하며 개가를 
올렸다. 그것은 이 작품에 대한 서평이 유럽의 신문들에만 해도  100여 편에 달했다는 사실로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미륵은 자신의 작품이 발간되기 2년 전 집필 중인 작품의 성격과 그 구성 등을  피퍼 출판사의 사장에
게 서면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당신도 읽으면 알게 되겠지만 나의 소설은 나의 소년시절에 체험한 일들을 소박하게 그려보인 것에 지
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러한 체험들을 서술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기술적이고 설명조의 묘사는 피했습
니다. 동시에 동양인의 내면세계에 적합하지  아니한 세계적인 사건들은 비교적  조심성있게 다루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그려냄으로써 한 동양인의 정신세계를  제시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
게 아주 친근한 것으로 바로 나 자신의 것입니다.

  이미륵은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사촌 수암과 함께 보낸  소년시절, 가정과 학교생활, 구식교육과 신식교
육, 일제의 침략과 탄압정치, 압록강을 건너 조국을 떠나 상해를 거쳐 유럽에  도착하여 독일생활이 시작되
는 이야기까지를 자전소설 형식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 작가는  자기의 어린시절과 역사적인 사건들이 교
차되는 가운데 하나의 인간이 발전적으로 성숙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작가는 한국의 역사적 또는 전통적 
배경을 바탕으로 신문명의 유입과정과 유럽세계와의 접촉을 1인칭 소설로 서술하면서 끝내  되돌아가지 못
한 고향과 조국의 이야기들을 외국의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일에 성공을 거두었다.
  하우젠슈타인은 "(압록강은 흐른다)에 나타난 동서양의  대면은 개인적인 것을 초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 본질적이고도 내면적인 구체성은 확고한 동양사상에 입각한 작가 자신의 조용한 성품에서 드러난다. 즉 
은연 중에 겸손하게, 그러면서도 심오한 자세로 동서양의 대면을  자기 자신 속에서 완성해 보려고 시도한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독자들의 호응을 계속 받던 이 작품이 재판되면서 그 반응과 평가는 더욱 새로워졌다. 어떤 평론가는 이 
작가를 "인간 중의 인간이요, 조용하고 겸손한 양반"이라고 평해주었다. 어느 저명한 독일의 잡지사에 의하
면 "금년도에 독일어로 발간된 서적 중 가장 훌륭한 독일어로 된 책은 우연히도  어느 외국인에 의하여 쓰
여졌다. 그분이 바로 이미륵씨이다"라고 그의 작가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렇게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 독자들의 흉금을 울리며, 미지의 세계였던 '코레아'를 서구에 소개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작품을 발
간해 준 피퍼 출판사 사장도 그의 자서전 (출판인으로서의 내 인생)에서 "이미륵이 쓴 어린 시절의 이야기 
(압록강은 흐른다)는 내가 발간한 책들 중 가장 훌륭한 책들 중의 하나였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독자들은 어린시절의 이미륵에게서 그가 외형적으로 돋보이는 면보다 숨어서라도 정의로운 일을 하고 싶
어하는 소년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함께 성장하던 수암은  그 고을의 '목사'의 직위에 마음이 쏠려 있었지
만 이미륵의 꿈과 포부는 달랐다. "나는 소위 말하는 어사를 갈망했다."
  그가 성장한 고을은 독자들에게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평화롭고 그림같은  고향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
고 있다. "우리 고향에는 평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 '종지기'는 움직이지도 않고 평화가 지배하고 있다
는 표시로 저녁마다 불을 피워올리는 봉화산의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평화롭고 조용한 곳에서 소년은 글을 익히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글과 예의범절을 배우는 
학교와 시골 이야기가 전반 부분을 차지하는  이 소설은 어린 주인공의 순수한 인간성이  성숙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그 옛날 즐겁고 좋기만 하던 고향에서의 부모와 누나들 이야기, 친구들과  놀던 이야기, 인성교육
이 중요시되고 언제나 평화롭던 어린시절의 한국 이야기들을 중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향촌의 
전형적인 정경을 회고적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자연을 통해 시간을 초월하여 먼 옛날의 
시골 마을에 이르고 있다. "그 집 정원에는  한 무더기의 꽈리가 자라고 있었으며, 그 빨간  열매는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우리집 뒷마당에서 그렇게도 많이 보았고, 또 어렸을 때(...) 이 식물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
던가! 마치 고향의 한 토막이 이곳 내 앞에 실제로 와 있기나 한 것 같았다."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작
가의 고향과 조국을 그리워하는 감정과 가족애이다. 동양적인 사고방식의 핵심은 자연과 사회를 있는 그대
로 받아들이려는 태도이다. 이런 마음의 자세가 자연에 적응될 때 그것은 때로는  숙명적인 체념은, 때로는 
심미적인 자연관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사회에 적응될  때 그것은 전통과 예절의 
존중으로 나타난다.
  너무나 이론에만 치중된 공부를 하던  이미륵은 경성의학 전문학교 시절 동창인  익원으로부터 동양인이 
유럽인들에게 뒤떨어진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의 선조들이 항상 인간의 육체를 고전철
학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했던 것과는 달리, 서양 연구가들은 그것을  해부하여 내부 기관을 직접 눈으로 보
려는 대담한 용기를 가졌었다.(...) 이 대담한  용기 때문에 우리들은 결국 옛날 것보다  백 배나 더 위대한 
의학적인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도 당시의 작가와  같은 한국 의대생들은 초창기에 해부준비 실습을 
거부했으며, 또 한의학보다 신의학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해부하는 것은 죄악으로 생각하
고 있었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문명은 거침없이 유입되기  시작했고, 많은 학문분야, 특히 자연과학 분야는 
새로운 학문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가 점령당하고 우리의 전통과 문화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파괴되기 
시작하자, 어린 대학생이었던 작가는 조국의 기구한 운명에 울분을  품고 동료 학생들과 더불어 반일 시위
를 하였으며, "전단을 만드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파고다  공원의 연단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
을 들었으며 "사방에서 전단이 난무하는 사이를 뚫고  행진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왜경의 추적을 피해 끝
내 어머니의 곁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상해를 거쳐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다. "(...)  그래, 용기를 내거라. 
(...) 비록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너무 서러워 말아라. 너는  내 생애에 있어서 나에게 
정말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자, 얘야! 이젠 너 혼자서 네 길을 가거라!" 기약없이  헤어지면서 어머니
가 어린 아들에게 던진 마지막 말이었다. 망국의 위기 속에서 온 국민은 민족적인 치욕과 비분을 억누르며 
조국의 미래를 위해 용감하게 싸웠으나  모두가 허사였고, 많은 애국청년들은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가서 
항쟁하였다. 약관 20세의 이미륵도 조국을 떠나 고난의 유럽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유년시절부터 줄곧 유교가문에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아온 이미륵은 독일에 도착하여  서구문명과 접하면
서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 우선 서양인들은 실재를 객관화하여 보기 때문에 실재가 한정되고, 어떤 특정한 
형상을 갖춘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동양인들의 실재는 객관적인 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관적인 것도 아
닌 주객을 초월한 형상이다. 그러므로 이미륵은 서양은 과학기술이요, 동양은 정신문화니 하는 피상적인 대
립관념에서 벗어나 하나의 인간으로서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하기 위하여 모든 사회적, 물질적 및 정신
적 상황과 대상에 대하여 새로운 과학적 탐구를 시도하며 서양사회에서 생활하게 된다.
  유럽에 도착한 후 목적지까지 친절하게 인도해 준 고향 선배인 봉근은 미륵이 앞으로 유럽생활에 어떻게 
적응하며 생활해야 하는가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침묵은 옛 동양에서는 미덕으로 여겨졌으나, 서양에서
는 그렇지가 않아. 여기서는 그것이 비사교적인 것으로,  심지어는 거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항상 이야기하
는 데 함께 어울려서 같이 대화를 나누어라. (...)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이 사회와 지구상에서 
살고 있는 한 반드시 철학적인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는 없어. 유럽 사람들도 지구상에서 살고 있으며, 
즐겨 세상 이야기를 잘 하거든."
  독일에 도착한 이미륵은 매일 고향에서 온 편지가 없나 알아보러  우체국에 갔었다. 유럽에 도착한 지 5
개월이 지난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고향에서 큰  누님이 보내준 편지가 도착하였다. "지난 가을에 어머님
이 며칠 앓으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가 실린 편지였다. 이것이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며, 이제부
터 이미륵은 파란만장한 30년이라는 기나긴 독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3

    이미륵의 유고

  1.(무던이)

  작가의 생전에는 발표할 기회가 없었던 중편소설 (무던이)는, 그가 타계하고 나서 2년 후 (아틀란티스)지
에 발표되어 주목을 끌었던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우물'은 이미륵 자신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1인칭 소설이 아닌 자전소설 형식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열두살 때 어머니를 따라 아홉 살 된 우
물이네 집에 처음 갔던 무던이는 우물을 보고 나서 그를  그리워하고 마음 속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후 무
던이는 14세의 처녀가 되고, 우물이 학교에서 여자 아이들과 같이 놀았던 이야기를 들으면 시샘을 한다. 그
러나 무던이는 중매로 이웃 마을의 부잣집 아들인 일봉이와 혼인을 하게 된다. 무던이는 정말 순진하고 얌
전한 색시였다. 어느날 꿈 속에서 우물을  만났다는 얘기과 그와 혼인하고 싶어  했던 지난 일을 남편에게 
숨김없이 이야기해 버린다. 무던이는 지난 날 어머니와 함께 우물의 부모를 찾아갔던 일과 그와 함께 다정
하게 놀던 일, 또한 그와 한 방에서 잠을 잤던 일 등을 이야기했다.  "당신은 그가 그렇게 좋소?"라고 일봉
이 그녀에게 묻자 "네, 그는 아주 좋아요. 저는 무척 그와 혼인하고 싶었어요"라고까지 대답한다. 이에 놀라
서 충격을 받은 남편은 집을 나가고 집안의 분위기가 극도로 악화되어 "숨막히는 듯하고 괴로운 나날이 지
나갔다." 그러자 무던이는 모두가 자기 때문에 발생한 불화라고 판단하고 밤중에 물에 빠져 죽는다.
  이 소설에는 무던이처럼 신문명에 접해 보지 못하고 순박하고 가난하게 성장한 옛 한국 여인네의 기구한 
운명이 잘 그려져 있다. 또 작가는 일봉이와 무던이와의 중매과정이며, 전통적인 혼례식과 남녀의 내외하는 
풍습 등 한국의 예의범절과 생활습관을 서구인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한국 작가 이미륵이 쓴 "아름다운 독
일 산문은 명백하듯이 단순하고, 힘찬  듯이 감상적으로 작품 속에서 전개되어  있다"고 독일 언론의 평을 
받았다.

  2.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

  이 유고 작품집에는 자전적인 세 편의 중편소설, 즉 (실종자), (탈출기),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가 실려 
있다. 1947년부터 이미륵과 친분이 있었으며, 전 주한 독일대사관 문정관이었던  발터 라이퍼씨의 주선으로 
이 유고집은 독일 외무성에서 출판비용을 지원받아 1984년도에  (Vom Yalu bis 젹 Isar)라고 책명을 붙여 
한국에서 발간되었다.

  2-1. (실종자)

  1910년 10월 1일 데라우치 총독이 괴수가 되었던 조선총독부는 그를 앞세워 한반도에서 독선적인 무던정
치를 강행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어느 한국의 어머니가  아들 수심과 가정만을 위해 희생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 이 소설이다. 일제  치하에서 조국의 역사적인 배경과 작가  자신의 가정을 둘러싼 제반 
사건들과 어린시절의 체험들이 그림같이 서술되어 있다. 아들은  신식교육을 받으려 하는데 집안에서는 불
타의 숭고한 철학이나 공자의 도덕철학을 계속 가르치려고  애썼다. 유교사상과 권위주의는 서민들의 자주
성을 마비시켰으며, 관존민비의 사회개념은 샤머니즘에 오래도록 매달리게 했던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수심
은 "아이구, (...) 미신? 이런 짓들만 하고 있으니 나라가 외국의 침략을 받아왔고 (...)" 하면서 조상을 숭배
하는 옛날 예식을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 어머니의 소원은 이처럼 귀한 아들이 
지금 다니는 학교를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가장으로서 전적으로 집안일을 돌봐줬으면 하는 것이었다." 어머
니의 집요한 고집과 간섭, 집안의 어려운 일들, 세대간의 갈등, 침략자에 대한 불안감 등 등의 복합적인 원
인 때문에 수심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간다. 어린 자식이 어머니의 곁을 떠나는 모험심과 이
것을 통해 한 젊은이가 고민하며 성숙해 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

  2-2. (탈출기)

  (실종자)의 내용이 계속되는 이 소설은 1인칭 소설로 쓰여졌다. 주인공은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을 두고 길
을 떠나지만 "단 하나 버릴 수 없었던 것은 동양인에게 그 무엇보다도 중대한 책임인 '자식의 의무'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인공의 마음은 자식의 의무감 때문에 항상 답답하고 괴로웠다. 그가 집을 떠나 타지에 있
을 때에도 늘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침내 그는 "동경, 사랑, 포옹 그리고 화해" 등을 저주하게 되
었고, 이 모든 것을 저속하고  무가치한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이러한 의무가을  극복했던 것이다." 그후 
주인공이 서울에 가서 의학공부를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3·1운동이 일어났다. 동료학생들과 함
께 반일전단을 뿌렸던 주인공을 왜경들의 추적을 피해 결국  조국을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네가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가거라. 네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독일이라는 나라로 가거라. (...)" 작별하던 날 어
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건넨 말씀이다. 그는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을 건너 기차를 타고 북으로 북으로 
달려갔지만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통분을 가슴에 안고 있었던 우리의 핏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민족정
서는 그를 영원한 한국인으로 붙잡고 있었다.
  우선 천진으로 가는 3등 열차를 타고 가면서 그는 진시황제가 세운 만리장성을 바라보며 오랜 중국 역사
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천진을 지나 산동성을 통과할  때는 공자의 탄생지라는 생각이 나서 "창문을 열
고 머리를 기대고 이 대가가 그 옛날에 살았을 이  마을을 차창 밖으로 내다 보았다." 강남에 가까이 왔을 
땐 옛 시인들이 피난처로 와 있던  곳, 소동파와 이태백이 달빛 아래에서  술잔을 비우던 낭만적인 강변을 
상상하며, 이런 얘기를 많이 해주시던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잠긴다. 중국 땅에 얼마간 체류하고 나서 몇 
개월 후에 주인공은 (파울레캣트)라는 배를 타고 유럽에  도착하여 어느날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적힌 편지를 읽고 있었다." 작품의 진행 단계는  대체적으로 (압록강은 흐른다)와 거의 비슷하면서도, 내용
상으로는 보완된 부분도 있는 자전소설이다.

  2-3.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

  이 소설은 소위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에 해당되는 부분으로서, 작가가 독일 문화권에  살면서 대학생
활을 계속하지만 사고방식의 차이와 건강의  악화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시점부터 내용이 전개된다. 이제 
그는 이질적인 서구문화의 도전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그의 몸에 박힌 전통문화를  내적으로 간직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미륵이 성장하여온 문화권의 동양철학은 직관적인데 반해  그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서양철
학은 지성적이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지성은 사유와 추리와 연역으로서 실재를 파악하는 자세이다. 그
래서 그는 대학에서 전공이외에 논리학도 수강하고  철학공부도 하기 시작하였다. "겨울학기에 나는 '교양'
이라는 테마의 철학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공부는 의학에서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꾸려는 결심을 
하고, 그는 자기 친구에게 "생물학을 한 번 시도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대학 연구소의 주임교수는 이
미륵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 자연과학을 다시 공부하고 싶으며, 가능하면 생물학부에서 박사학
위를 취득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이리하여 이미륵은 뮌헨대학교 생물학부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실험실에서 학위논문에 전념하면서 조교와 동료 학생들과 원만한 교류를 지속하였다. 이때 그는 독일 친구
들에게 동양에서는 어린애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또한 공자의 말씀대로 살라는 옛날 교육이념에 대해 설
명해 주었다. 즉 "습자, 작시법, 사서,  그리고 흔히 종교 또는 윤리교육으로서 옛  한학자들의 설을 가르친
다. (...) 인간은 관용을 할 줄  알고, 가난 때문에 치욕감을 갖지 말고  소박하고 알맞게 살아야 하며, 모든 
부당한 허식은 피해야 하며, 우주의 운명이나 의도에  만족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매우 동양적인 이야기를 
해줬다. 학위논문에 열중하던 도중 병세가 악화된 이미륵은 의사의 주선으로 요양차 스위스의 유명한 요양
소로 떠나게 되었다. "이 의사는 손수  스위스에 있는 어느 요양소에 나를 수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역자의 조사에 의하면 이미륵은 뮌헨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기 1년 전 스위스의 루가노  근교에 있
는 아르가 요양소에서 1927년 6월 25일부터 9월 25일까지 꼭 3개월간 요양치료를 받았다. 역자는 요양소로
부터 "병명은 늑막염이었으며, 주치의는 한스 알렉산더 교수였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소설도 요양소에서 건강이 회복되는 시점까지 투병하는 내용과 학업을 계속하려는 의욕이  강하게 보
이는 자전소설로서 이미지가 선명하다.

    4

  이미륵이 남긴 작가로서의 공적은 독문작품들과 수필 및 논평들을  통해서 한국 및 동양사상, 그리고 우
리의 정신문화를 서구에 전도한 점이다.
  이미륵 문학의 특성은, 첫째로 소재의 단일성이다. 그의 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는 물론, 유고로 소개된 
(무던이)와 (이야기),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와 단편들도 주로 한국을 중심으로, 동양의 전통과 민족성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우리 문화에 대하여 항상 사랑과 예찬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자전소설에는 낭만이나 
무상같은 소재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험과 성장을 내면의 유기적인 힘으로 이해하려는 휴며니
즘의 정신이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자전적인 글들을 발표했던 것이
다. 작가는 (압록강은 흐른다)를 통해서 자신의 성장과정과 역사적인 배경들을 소박하게 서술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외적인 경험과 내적인 성장 간의 조화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교양소설이다. 이미륵은 서구의 과학
문명과 행동적인 생활방식에 비해 한국의 전통과 문화 및 정관적인 태도를 독일 문화권에 폭넓게 보급시키
려는 데 역점을 둔 것이다. 특히 동양문화의 핵심이 되는 윤리와 도덕, 그리고 풍습들을 배경으로 창작활동
을 한 점은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소재들은  그가 만약 한국땅에서 작가활동을 했었다면 달
라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둘째는 문체의 간결성이다. 간결한 독일어 문장의 뒤에 숨어 있는 작가의 살아있는 혼, 생생한 인격과 사
상이 그의 작품 속에서 잘 전달되고 있다. 그의 묘사는 객관적인 위치에서 배경, 인물, 장면 등을 간결하게,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표현방법이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독자인 독일인들에게 구체적인 이미
지와 동양세계에 대한 인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미륵의 문체에 설명조의 묘사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때때로 설명묘사가 있는 것은 어디까지
나 사건의 경과를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  그리고 독일 독자들에게 우리 고유의 생활풍습을 
소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중편 (무던이)에 나오는 '내외'나 '혼서', 그리고 '동상례'의 설
명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7년 이탈리아로 망명한 독일 작가 슈테판 안드레스는 이미륵에게  보낸 편지에서 
(압록강은 흐른다)에 대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써보냈다. "당신의 작품에 애들이나 어른들  모두가 똑같이 
매료되어 그토록 즐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수용폭이 얼마나 넓은가를 잘 입증해 주는 것
입니다. 당신 문체의 간결성이며, 평온한 분위기며 작가적인 재능을 자극시키는 묘사의 간결성이며, 인간미
를 풍기게 하는 것 등은 나에게 마치 비단 두루마리를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줍니다." 또한 
문예지 (세계와 언어)에서도 "이 소년시절의 회고록은 무엇보다도  소박하고 꾸밈없고 명료한 필치로 서술
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일이다"라고 평했으며, 이 작품이  1950년에 재판되었을 때에도 서평에 인색한 독일
의 평론가들은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여러 신문과 잡지에 좋은 서평들을 실었다. '바이어리쉐 슐레'는 다음
과 같은 서평을 실었다. "그의 언어는 아주 소박하고  포근한 분위기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까운 이웃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아울러 런던에서 발간
된 영문 번역판에 대해서도 "문체가 간결하고 내용이 아름답고 매혹적이어서 모든 독자의 공상을 사로잡는 
작품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러한 이미륵의  글이 -주로 (압록강은 흐른다)의  발췌문- 독일에서는 중,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4종이나 실려 읽혀지고 있다. 이렇게  읽혀지는 것은 문체의 우수성에도 원인이 있
겠으며, 또한 동양세계에 대한 지식을 독일 학생들에게 주입하려는 데도 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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