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와 시 인
이상우
차 례
작가 소개
1. 구란도의 비극
2. 보이지 않는 손
3. 금지된 장난
4. 가장 저주스러운 하루
5. 푸른 셔츠입은 사나이
6. 이상한 목소리
7. 두번째 비극
8. 터키 행진곡의 비극
9. 두번째 요구
10. 개들의 초능력
11. 용의자
12. 같은 환경
13. 협각
14. 세번째 사건
15. 수거된 증거물
16. 새로운 요구
17. 신이 된 사나이
18. 대치
19. 종말
작가의 말
1. 구란도의 비극
민은수는 창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런 소리 때문에 잠을 깼다.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에 섞여 맹수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도 얼
핏 들었다. 어젯밤 이 섬에서 80년을 살았다는 진문태 할아버
지의 신비로운 이야기에 홀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던 민
은수는 도저히 더이상 이불 속에 있을 수가 없었다.
[으악.]
[사람 살려.]
사람들이 마치 맹수에 쫓기면서 필사적으로 지르는 것 같은 비
명이 계속해서 들렸다. 그 중간 중간에 들리는 맹수소리는 자
세히 들어보니 맹수가 아니라 개 짖는 소리였다. 개가 뜻밖의
불청객을 보고 짖는 소리가 아니라 무엇을 습격할 때 내는 소
리였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가 동시에 짖어
대는 소리 같았다.
시계를 보았다. 8시7분. 부지런한 섬 사람들이 다 일어나 밖에
나갔을 초여름 시간이었다.
민은수는 얼른 옷을 챙겨입고 문을 열고 마루로 나갔다. 그런
데 웬일인지 집 안에는 사람 기척이 없었다.
[닥터 박.]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박봉순.]
민은수가 다시 큰 소리로 불렀으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박봉
순이란 이 집의 주인이면서 보건소 지소에 근무하는 여의사였
다. 그녀는 민은수와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섬으로 그녀가 민은수를 초대했었다.
박봉순은 나이 서른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
었다. 이 섬에는 자칭 시인이라는 괴짜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
었다.
[으르르, 으릉.]
그때였다. 갑자기 송아지만한 개가 마루로 껑충 뛰어오르며 무
시무시한 흰 이빨을 드러낸 채 민은수를 공격했다.
[이거! 미친 개 아냐.]
민은수의 말이 맞았다. 미친 개였다. 민은수는 재빨리 덤벼드는
개를 피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문을 잠갔다.
[으르르르렁.]
그러나 그것은 소용이 없었다. 개가 단숨에 방문을 부수고 방
안으로 들어와 민은수의 멱살을 물었다.
[으악.]
민은수는 개의 목을 끌어안고 나뒹굴었다. 덩치는 컸지만 사냥
개 같지는 않았다. 개는 다행히 민은수의 목은 물지 못하고 그
의 점퍼 깃을 물고 늘어졌다. 민은수는 한쪽 팔로 개의 목을
껴안고 다른 팔로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스라이터를 집어들
고 불을 켰다. 민은수는 시퍼런 불꽃을 개의 얼굴에 가져다 댔
다. 그러나 이게 웬일, 개는 털이 타면서 지독한 냄새와 연기를
뿜었지만 민은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지독한 개는 처음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맹목
적으로 덤벼드는 그 개의 눈에서 이상한 살기를 느꼈다. 자기
를 꼭 물어 죽이고 말겠다는 개의 눈빛은 그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라이터 불을 개의 얼굴에
들이댔다.
개의 털이 거의 다 타고 눈도 이제 불꽃 앞에 타버릴 판이 되었
다. 그러나 개는 포기하지 않았다. 더욱 거세게 민은수의 멱살
을 물고 늘어졌다. 개는 라이터 불꽃으로 인해 눈이 거의 안
보이게 되는 순간 민은수의 멱살을 잠깐 놓았다.
민은수는 그 순간 재빨리 개의 포로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급히 마당으로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사람 살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비명에 가까운 구조 요청을 들은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마당가에 있는 감나무 위로 올라갔다. 한참 정신없이 나
무를 오르다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반쯤 그을린 개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나무에 오르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민
은수가 저게 개가 아니라 자기를 복수의 대상으로 아는 지옥의
맹수처럼 보였다. 개는 무엇을 뜯어먹었는지 입가에 핏자국이
낭자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꼭 자기를 물어 죽일 것
만 같았다. 코난 도일의 소설 버스커빌의 사냥개가 저러했
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그는 개한테 물린 이곳 저곳이 아프고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왼쪽 팔과 오른쪽 허벅지, 그리고 목
덜미가 몹시 아팠다. 그는 틀림없이 공수병에 걸릴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누구 없어요.]
민은수는 나무에 매달린 채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
나 아무도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
을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는 이게 꿈이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개한테 물린 곳이 이렇게 아
픈데 꿈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은수!]
그때였다. 누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면서 뒤꼍에서 나왔다.
박봉순이었다.
[봉순아.]
그녀는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옷이 갈기갈기 찢기고
팔다리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뜯긴 치마 사이로 허연 허
벅지가 다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워낙 위급한 처지
라 자기 모습이 어떤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우왕.]
나무 밑에서 으르렁거리던 개가 이번에는 박봉순을 향해 돌
아섰다.
[조심해.]
민은수는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나무에서 뛰어내려 박봉
순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진 개한테 덤벼들었다. 마침 곁에
있던 괭이를 들고 공격을 했다. 괭이로 개 잔등을 힘껏 내리
치자 녀석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박봉순을 놓아주었다.
민은수는 미친 사람처럼 개를 공격했다. 괭잇날로 개의 머리
를 후려친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그 사납던 개가 사지를 부
들부들 떨면서 쓰러졌다.
[빨리 방으로 들어가.]
민은수는 박봉순을 부축하고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걸어잠
갔다. 그녀는 그제사 정신이 좀 든 듯 자기 몰골을 내려다보
았다.
[이리 와. 우선 피 나는 것부터 좀 닦아내야지.]
민은수가 박봉순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대강 닦아냈다. 허
벅지와 양쪽 팔목 목덜미 등에 상처가 나 있었지만 다행히
깊은 상처는 없었다.
[안 되겠어. 붕대 같은 게 없을까?]
[저기 응급상자가 있어.]
박봉순이 선반 위를 가리켰다. 시골집에서 흔히 보는 문 위
의 선반에 붉은 십자 표시가 그려진 구급상자가 있었다.
[우선 소독부터 하고 붕대로 감아야 해.]
그녀는 의사답게 천천히 자기 상처의 응급처치를 지시했다.
민은수는 그녀의 허벅지 깊숙한 속살까지 닦아내면서 희고
부드러운 그녀의 피부를 민망스럽게 훔쳐보아야만 했다.
[어디 봐. 민 소장도 상처가 심한 것 같은데.]
그녀는 자신의 상처가 대강 수습되자 민은수를 보살피기 시
작했다. 흐르는 피를 닦아내자 장딴지와 왼팔, 그리고 목덜
미의 상처가 드러났다. 박봉순은 민은수를 민 소장이라 불렀
다. 민은수는 명동에서 회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공인회
계사였다.
[피는 많이 흘렸지만 상처가 심하지 않아 다행이야.]
그녀는 고통을 참으면서 민은수의 상처를 열심히 싸매주었
다.
[옷 좀 갈아입을 테니까 민 소장은.]
그녀가 횃대에서 옷을 걷어내며 민은수를 바라보았다. 벽에
줄을 친 뒤 옷을 걸고 커튼 같은 것으로 막아놓은 횃대가
바로 옷장 역할을 했다.
[알았어. 밖에 나가 있을게.]
민은수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그녀가 기겁을 하고 말렸다.
[안 돼. 문을 열면 큰일나. 저 소리 안 들려.]
그제야 민은수는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까부터 무슨 소
리가 들리긴 했으나 신경을 쓰지 않아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
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니 그 소리는 수십 마리의 맹수들이
아우성치며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저게 무슨 소리야?]
민은수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아까 밖에서 보았잖아. 이 동네 개들이 몽땅 미쳤나봐.]
[뭐.]
민은수가 놀라 크게 뜬 눈을 감을 줄 몰랐다.
박봉순은 무엇인가를 아는 듯 태연한 얼굴로 옷을 갈아입었다.
민은수는 돌아앉아 있는 척 했으나 실은 슬금슬금 박봉순의 몸
매를 훔쳐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상처투성이의 여자 몸매를
곁눈질하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아침에 마당에 내려섰더니 우리 집 바둑이가 갑자기 나한테
달려들지 않겠어. 나는 반가워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
지 뭐야? 내 허벅지를 물고 악을 쓰면서 놓아주지 않는 거야.]
[아까 그 송아지만한 놈이 이 집 바둑이?]
[아니야. 바둑이는 그 놈의 절반도 안 되는걸.]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민은수는 코발트빛 원피스로 갈아입은 박봉순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물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약간 마른 몸
매에 길게 보이는 팔다리 유난히 흰 목이 그녀를 늘씬하게 보이
게 했다.
약간 동그스름한 얼굴 윤곽이 미인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귀여
운 얼굴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고 민은수는 늘 생각해왔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바둑이를 짓밟아 떼냈지. 아, 그랬더니 이
번엔 어디서 들어왔는지 송아지만한 그 개가 달려들지 뭐야. 나
는 여러 군데를 물리면서 결사적으로 도망쳐 집 뒤 광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는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 얼마 후 깨어나 민
소장 비명을 듣고 뛰어나갔지.]
[그럼 이 동네 개들이 몽땅 저렇게 미쳤단 말이야.]
민은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럴지도 몰라. 밖의 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어봐.]
[그나저나 우린 공수병에 걸린 건 아닐까.]
민은수는 걱정 하나를 더 보탰다.
[거의 그렇겠지? 빠른 시간 내 치료를 받아야 해.]
[그럼 빨리 어떻게 손을 써야지.]
민은수가 박봉순의 얼굴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부터 좀
알아야겠어.]
[원인보다 지금 이 섬 상황이 어떤지부터 알아보아야 하지 않
을까? 우선 밖의 형편을 좀 살피자구.]
민은수가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마당을 내다보았다. 맹수 소리
는 아까보다 훨씬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마당에는 아까
덤벼들던 큰 개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죽은 것 같았다.
[이걸 가지고 나가. 동생이 동네 애들과 야구놀이할 때 쓰던 건
데.]
박봉순이 야구 방망이를 민은수에게 건네주었다. 박봉순의 남
동생은 진환이었다. 민은수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진환이는 참 어디 갔어.]
민은수는 그때야 어제 이곳에 도착할 때 보이던 박진환이 생각
났다.
[어제 저녁 뭍에 나갔어. 보리암에 묵고 있는 친구를 만난다
고 진환이는 여기 사는 것도 아니거든. 잠깐 여기 있기도
했는데 동네 사람들하고 사이가 안 좋아.]
보리암이란 이 섬이 속해 있는 남해군에 있는 오래된 사찰이었
다. 민은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불행 중 다행이군 그런데 왜 사이가 안 좋아?]
[동네 사람들이 자기 시를 이해도 못 한다고 진환이는 무시하
고, 동네 사람들은 머리가 살짝 돈 젊은이 취급을 하거든.]
[하긴 진환이 시를 읽으면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해.]
민은수가 바깥 동정을 살폈으나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아 야구
방망이를 단단히 쥐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살금살금 걸어나가
대문을 따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어디서인지 개들이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으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닥터 박, 이리 나와봐. 괜찮을 것 같아.]
박봉순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왔다. 얼굴이 창백했다. 다리
를 끌다시피 하며 고통을 참고 걸어나왔다.
[밖으로 나가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해야겠어.]
민은수가 박봉순을 부축하며 말했다.
[동네 사람들이 무사하다면.]
박봉순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 저 경운기 움직일 수 있어?]
민은수가 마당가에 버려져 녹이 쓴 경운기를 가리키며 물었
다.
[시동이 걸리긴 할 거야. 몇 달째 움직여본 적은 없지만.]
민은수가 봉순의 설명은 듣지도 않고 뛰어가 경운기의 시동
을 걸었다. 그러나 쉽게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여러 차례
끈질기게 노력한 보람이 있어 마침내 경운기 시동이 걸렸다.
[이 경운기는 이 동네 하나뿐인 기동력이야. 이곳은 농사를
거의 짓지 않으니까 농업용으로 둔 것이 아니라 고깃배 고
기 나르는 데 쓰던 것이래.]
박봉순이 덜덜거리며 움직이는 경운기가 신기한 듯 내력을
설명했다.
[어쨌든 우리에겐 이게 지금 탱크보다 나은 무기지. 뒤에 올
라타고 이 야구 방망이를 단단히 쥐고 있어.]
두 사람이 탄 경운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문 밖으로 나
섰다.
[어디로 갈까.]
민은수가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박봉순
을 돌아보며 물었다.
[우선 보건소 지소로 가.]
[지소엔 사람들이 많아?]
[아니. 나하고 간호 보조사 한 사람하고 둘뿐이야. 하지만
거기엔 약품이 있으니까 다친 사람들이 있으면 그리로 올
거야.]
그들은 동네 구멍가게가 있는 큰길에 나섰다.
[어마! 저것 봐.]
박봉순이 비명을 질렀다. 큰길 어구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
둘이 나뒹굴고 있었다. 개한테 물어뜯겨 처참한 모습으로 죽
어 있었다. 박봉순은 떨면서 울기 시작했다.
[크르르릉.]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대여섯 마리의 크고 작은 개가
경운기를 향해 덤벼들었다. 얼른 보아 선봉에 선 개는 불독
같았고 나머지는 누렁이나 토종개, 잡종견 같았다. 날카로운
이빨과 주둥이에는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
[이놈들.]
민은수가 고함을 지르면서 경운기 악셀을 끝까지 밟았다. 그
러나 경운기는 경운기라 속력이 나올 턱이 없었다. 박봉순도
필사적으로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개들은 목숨쯤
이미 내놓았다는 듯 물러서지를 않았다.
하지만 개들도 쉽게 두 사람을 공격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두 사람도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개들과 싸우면서 두 사람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보건지
소에 도착했다. 그들이 거기까지 오는 동안 길에서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지 못했다. 그들이 경운기를 몰고 보건지소
문을 들어섰을 때 그때까지 그들을 쫓아온 개는 한 마리뿐
이었다.
[으악!]
지소 대문을 들어서자 박봉순이 비명을 질렀다. 지소 마당에
물어뜯겨 처참하게 된 여자 시체가 있었다.
[정자야! 정자야! 아이구 이 일을 어떻게 해.]
박봉순이 울부짖으며 경운기에서 뛰어내렸다. 정자란 여기서
박봉순과 함께 일하는 간호 보조사였다.
박봉순이 경운기에서 뛰어내리자 이때란 듯이 쫓아온 개가
덤벼들었다. 그러나 민은수가 재빨리 가로막아섰다. 봉순이
가 쥐고 온 야구 방망이를 받아들고 맞섰다. 개와 사람의 처
절한 격투가 벌어졌다. 개는 야구 방망이에 대가리를 몇 차
례 얻어맞고 쓰러졌다. 개들은 죽어가면서도 절대로 도망가
는 일이 없었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용병들이 제 목숨쯤은
우습게 보고 덤벼드는 것과 같다고 할까.
민은수는 재빨리 대문을 걸어잠근 뒤 정자를 안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박봉순이 응급조치를 해보았으나 그녀는 시체가
된 지 이미 오래였다.
[온 마을이 개한테 습격을 당한 것 같아. 빨리 뭍에 연락을
해야 돼.]
민은수가 전화 수화기를 집어들며 말했다.
[여기서도 112가 통하나.]
박봉순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112를 돌리던 민
은수가 힘없이 수화기를 놓아버렸다.
[전화가 불통이야. 놈들이 벌써 전화선까지 끊어버렸나봐.]
민은수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 놈들이 누구야.]
박봉순이 울음을 그치고 물었다.
[참 그렇군. 개들이 전화선이야 끊을 수 없겠지.]
민은수는 자기가 한 말이 터무니없다는 생각을 하고 피식
웃었다. 이 긴박한 판국에도 웃음이 나오는 것이 이상했다.
[이 섬에는 경찰서 같은 치안기구가 없어.]
민은수는 그때야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있어. 지서 같은 것이 있지.]
[경찰관이 몇 명이나 있을까.]
[정식 지서가 아니라서 세 명인가 있는데 오늘이 일요일이
라 뭍에 나간 사람도 있고 하니까 두 명은 있을 거야.]
[그럼 빨리 그곳으로 가보자구. 전화도 통 하지 않고 하니
까.]
두 사람은 다시 경운기를 타고 지서로 향했다. 시계를 보았
다. 9시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 보이지 않는 손
그들은 지서로 가는 동안 길거리에서 처참하게 죽어 있는
시체들을 수없이 만났다. 할머니, 할아버지에서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무차별 공격을 당한 처절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산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미친 개들의 습격은 상당히 뜸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렇게 사납던 개들이 거의 보이지 않거나 가끔 보여도 그렇
게 결사적으로 덤비지는 않았다. 경운기를 보고 두어 번 짖
다가 그만두거나 아예 본 척도 하지 않는 개도 있었다.
개들은 모두 입과 주둥이에 시뻘건 선혈을 묻히고 다녀 짐
승들의 지옥을 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공격해오는
개가 줄었기 때문에 한결 공포감도 줄어들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개들이 왜 변하고 있을까.]
박봉순이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말했다.
[마치 정복자들이 유린한 적지를 여유있게 돌아다니는 모습
같군.]
[따지고 보면 저 개들이 섬을 완전히 정복했다고 봐야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사람이 있을까.]
[우리가 살아남아 뭍에 가서 이야기해도 믿지 않을 거야.]
[그럼 이렇게 많은 사람을 우리가 죽였다고 생각하게.]
말을 해놓고는 소름이 끼치는 듯 민은수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지서에 도착했다. 열려 있는
사무실 안으로 재빨리 들어가 개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문을
닫았다.
[우욱, 저것 좀 봐.]
박봉순이 구토가 나오는 듯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소파 위
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처참한 모
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 작업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경찰관임이 틀림없는 남자
가 얼굴이 뜯겨 거의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되어
있었다. 그는 가슴, 허벅지, 등도 찢겨 허연 뼈가 다 드러난
모습으로 소파에 상반신만 걸친 채 죽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핏덩이와 개의 털이 한 움큼 쥐어져 있어 필
사의 투쟁을 한 흔적을 역력히 보여주었다. 사무실 안은 집
기들이 제멋대로 뒹굴고 두 마리의 개가 머리에 피를 흘리
고 죽어 있었다. 아마 경찰관의 총에 맞은 것 같았다. 소파
밑에 권총이 떨어져 있었다.
[누구 없어요.]
민은수가 소리를 치며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사람은커녕 생
명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이 어젯밤 숙직 경관이었나 봐. 그렇다면 다른 경찰
관이 지금쯤 여기 왔어야 하지 않아.]
민은수가 봉순을 보고 물었다.
[오늘이 일요일이니까 아마 뭍에 나간 사람들은 내일 새벽
에나 오게 될걸.]
박봉순이 자신없는 추측을 했다.
[좌우간 경비전화로 뭍에 연락이나 해보자구.]
그들은 경비전화를 찾아보았다. 전화기들도 깨지고 흩어져
어느 것이 경비전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있는 전화기를 다
들어보았으나 모두 수화기 아니면 송화기가 박살나 쓸 수가
없었다.
[딴 곳 전화기를 가져와서 연결시켜 보지.]
박봉순의 의견이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옆집이 구멍가게던데 거기 가보고 올
게.]
[조심해야 돼.]
박봉순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가만 있어 봐요. 무기고에 가서 총을 가지고 가야지.]
민은수가 안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무기고는 철책
속에 들어 있고 문은 잠겨 있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는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주워들었다. 빈 탄창이 나왔다. 그
는 여기저기를 뒤져 실탄이 들어 있는 탄창 하나를 찾았다.
장전을 한 뒤 안전장치를 풀고 오른손에 단단히 들고 지소
문을 나섰다. 그는 장교 출신이라 권총을 다루는 데 자신이
있었다.
[으왕.]
송아지만한 개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그러나 스피드나 날쌔
기가 아까보다는 훨씬 못했다. 민은수는 재빨리 그놈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개는 비명을 지르고 달아나다 꼬꾸라졌다.
민은수의 군대시절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옆집 구멍가게에 들어가 보았다. 집 앞에 늙은 남자가
목이 떨어진 채 나뒹굴어 있었다. 가게 안에는 젊은 여인이
샅을 다 내놓은 채 큰 대자로 죽어 있었다. 보기가 민망해
사타구니 옷을 여며주었다.
민은수는 들어가 전화기를 찾았다. 그는 전화기를 잡아당겨
줄을 끊은 뒤 그것을 가지고 지소로 무사히 돌아왔다.
전화기를 겨우 경비전화라고 생각되는 선에 이어보았다. 그
러나 수화기는 먹통이었다. 그는 선을 뽑아 딴 선에 연결해
보았다. 그래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보건소처럼 여기 전화도 다 끊어졌어.]
민은수가 포기하고 힘없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처참한
경관 시체에 손이 얹혀졌으나 놀라지도 않았다.
[누가 끊었을까.]
[개들이 한 짓은 아닐 거야.]
[그렇다면 이 섬에 누군가 지옥을 연출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냐.]
박봉순이 갑자기 공포에 질렸다.
[이곳 전화국은 어디 있어.]
[전화국이란 건 없어. 마을회관이 있는데 거기서 취급하는지
도 몰라.]
[그게 어디지.]
[보건지소 옆이야. 아침에 건강체조 노래도 거기서 녹음기로
틀어줘. 마을에 공지사항이 있어도 거기서 알리거든.]
[그래.]
민은수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럼 거기서 마을에 대고 방송을 하면 다 들리겠네.]
[물론이지.]
[그럼 그리로 가자. 혹시 살아 있는 사람이 어디 숨어 있는
지 모르니 그리로 나오라고 해보자.]
민은수가 밖을 내다보았다. 미친 개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
았다.
[그러다가 악당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 공연히 우리 위치만
노출시키는 게 아닐까.]
박봉순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개한테 물린 상처들이
아픈지 손으로 만져보며 고통스런 표정을 숨기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죽기 아니면 살기야. 자 그리로 가보자구.]
그들은 지소 밖으로 나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개들이 보이
지 않았다. 그들은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재빨리 경운
기에 올라탔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경운기가 꼼짝을 하
지 않았다.
[연료가 없어.]
한참 만에 그것을 발견했다.
[걸어가자구.]
민은수가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경계를 하면서 앞장서서
걸었다. 초여름 바닷바람이 구수한 비린내를 풍기며 불어왔
다. 멀리 수평선은 티 하나 없이 맑은 일직선을 그어 보여주
고 있었다. 그들이 한참 걸어가도 개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미안해요. 재미있게 보내라고 초대한 것이 그만 이렇게 엉
망이 되다니.]
박봉순이 은수를 올려다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민은수
는 그녀의 웃는 모습이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천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초등학교 동창이지만 사실은 그후도 근 이십 년 동
안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의과 대학에서 같이
만났었다. 그러나 민은수는 의사되는 것이 싫다면서 일년쯤
다니다가 그만두고 경영대학에 갔었다. 지금은 서울 명동에
조그만 회계사 사무실을 차려놓고 있었다.
[조명자 생각나요.]
박봉순이 불쑥 엉뚱한 이름을 댔다.
[조명자? 초등학교 우리 동창? 조명자가 두 사람인데.]
[맞아요. 꼬마 명자 말이에요. 꺽다리 명자 말고.]
[그래, 기억나요. 부잣집 아이 말이지? 지금 어떻게 되었어요.]
그들은 까마득한 옛날, 초등학교 시절을 머리에 떠올렸다. 민은
수는 두 갈래로 머리를 땋고 란도셀을 메고 깡충깡충 뛰면서
자기를 따르던 박봉순을 생각했다. 그는 이성이 무엇인지 몰랐
지만 그녀가 마냥 좋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봉순이와 꼭 결
혼할 것이라고 속으로 다짐하기도 했었다. 민은수는 그때를 생
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봉순이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담임 선생님 집에 자주 놀러다녀서 아이들이 담임하던 강 선
생 애인이라고 놀리곤 했지요.]
[후후후, 맞았어. 철없던 시절의 낭만이지.]
[걔네 집에 쬐그만 강아지들이 여러 마리 있었는데 그렇게 개
가 귀여울 수가 없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 개들이 치와와
같은 애완용 개였던가 봐요.]
[요크셔 테리어, 푸들 같은 개였는지도 모르죠.]
그들은 마주보며 웃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손을 쥐
었다.
[봉순아.]
민은수가 잔뜩 감정이 들어간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어마.]
그때였다. 박봉순이 자지러지며 민은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들의 발 앞에는 처참하게 물어뜯겨 걸레가 되다시피 한 어린
아이 시체가 있었다.
[대철이에요. 대철이.]
박봉순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말했다.
[대철이가 누구지.]
[아주 착하고 명랑한 아인데 아버지가 없는데도 얼마나 씩
씩했는지 몰라 작년에 뭍에 살던 여자가 아이 하나를 데리
고 이리로 이사를 왔거든.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어서 차 없는
동네에 온다고 여기로 왔는데 저렇게 되다니.]
민은수는 여기저기 개한테 물려 처참하게 죽은 시체를 많이 보
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저 아이처럼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는 시체를 수습해서 길 옆 풀숲에 편안히 뉘었
다. 풀을 뜯어서 시체를 덮어주었다.
[빨리 가.]
그들은 다시 보건지소까지 왔다. 그러나 전화가 어떤 선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동네 마이
크도 어떻게 조작하는지 알지 못했다. 몇 번 이런 저런 방법을
써보았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들은 보건지소 환자대기용 의자에 주저앉았다.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코발트빛 바다는 파도도 일지 않고 조용했다.
[개들이 왜 조용해졌을까.]
민은수가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그들은 발작하는 시기가 있는지 몰라. 언제 또 미쳐서 우리를
공격할지 몰라. 배 고프지? 이거라도 먹어.]
박봉순이 진찰실 안에 들어가 과자와 주스 병을 가지고 나왔
다.
[이 과자 어릴 때 먹던 생각 나지?]
[센베이라는 과자 아냐.]
민은수가 과자를 한 입 물었다. 하지만 박봉순은 한 조각도 들
지 않았다.
[오늘은 일요일이고 여기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기 때문에
뭍에서 누가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어.]
[하지만 지서 같은 데 연락을 해보고 안 되면 누가 와도 오지
않을까.]
민은수가 실낱 같은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하지만 박봉순은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배도 일요일엔 다니지 않거든.]
그 이야기를 하며 창 밖 바다를 무심코 바라본 박봉순이 갑자
기 소리를 쳤다.
[앗, 저것 봐.]
통통통.
발동기 소리가 들렸다. 창 밖 간이부두에서 조그만 발동선 한
척이 막 떠나고 있었다. 푸른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타고 있었
다.
[저게 누구야?]
푸른 셔츠를 입은 사나이는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뭍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멀리서 봐서 누군지 도저히 알 수 없네. 섬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이 섬에 저런 원색 넘치는 옷을 입은 청년은 없거든.]
멀리서 보아 얼굴이 너무 작게 보이기도 했지만 뒤통수밖에 보
지 못해 누군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몸놀림으로 보아
젊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해변으로 가봐.]
민은수가 뛰어나가며 말했다.
[조심해.]
박봉순이 따라나가며 소리쳤다. 아닌게아니라 그들이 골목으
로 나서자마자 개 한 마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민은수가
재빨리 권총을 그놈을 향해 겨누었다. 얼굴이 순해 보이는 개
는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물끄러미 그들을 쳐다보고 있다가
슬그머니 돌아서서 가버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미쳐서 날뛰던 개가 두어 시간 지나자 이렇게 얌전해졌다는 것
이 믿기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일로 친다면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들은 빨리 바닷가에 가보았다. 발동선은 벌써 까마득히 먼
곳까지 가버린 뒤였다.
[다른 배는 없나.]
민은수는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사람이 타고 다니는 배는 없구, 고기잡이 하는 배는 몇 척 있
어. 하지만 그건 아무나 조종을 할 수가 없어. 배 조종해 본 일
있어.]
[아아니. 나는 배만 보면 멀미가 나서 잘 타지도 않아. 우린 원
래 육지생이잖아.]
[배 타도 멀미하지 않는 비결이 있는데.]
그녀가 문득 얼굴을 붉히더니 살짝 웃으며 말했다.
[무슨 비결.]
그녀가 웃자 민은수도 따라 웃었다. 무슨 우스개 같은 소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여기 섬 사람들한테 들었는데 의학적으로도 근거 있는
말이래.]
민은수는 그녀가 의사라는 것을 상기했다.
[배 위에서 남녀가 꼭 껴안고 애무를 하면 멀미가 없어진대.
후후후, 우습지.]
그 말을 해놓고 봉순이는 대단히 겸연쩍어 했다. 얼굴에 홍조
까지 띠었다.
[왜 그렇대.]
민은수도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남
녀는 남녀였다.
[멀미를 일으켜야 할 신경이 사랑을 느끼느라고 제정신이 아니
게 되거든. 그래서 멀미 감각이 둔해지는 거지. 실제로 섹스를
하고 있을 때의 사람의 모든 신경 기능은 둔해져서 딴 사람의
소리도 잘 안 들리고 시력도 줄어든다고 해.]
[글쎄, 의사 애인이라도 있다면 한번 실험을 해봐야 알기 쉽겠
는데 후후후.]
[짓궂기는.]
그녀가 때리는 시늉을 했다.
[위로 다시 가자. 배도 고프고.]
[어떻게 해야 뭍에 연락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걸어가다가 모래바닥에 버려진
이상한 물건들을 보았다. 아까 발동선이 출발한 자리였다.
[저게 뭘까?]
거기에는 옛날 장수들이 입던 갑옷 같기도 하고, 야구팀의 포
수들이 입는 프로텍터 같기도 한 물건들과 검도할 때 쓰는 투
구 같은 것이 흩어져 있었다. 민은수가 쫓아가 그것을 뒤적여
보았다. 얇은 철판과 두터운 직물로 만든 옷 같았다. 한참 뒤적
여본 뒤에야 그들은 그것이 맹수의 습격을 막기 위해 일부러
만든 보호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아까 그놈이 이걸 여기 벗어던지고 달아난 것 아닐
까.]
[그렇군요. 이건 미친 개한테 물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일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오늘 새벽에 이
섬의 모든 개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란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이에요.]
박봉순의 얼굴이 다시 공포로 일그러졌다. 민은수는 박봉순의
어깨를 감싸쥐고 천천히 동네로 걸어들어갔다.
[몇 시나 되었어.]
봉순이 물었다.
[벌써 열두 시나 되었어. 살아 있는 사람이 한두 명은 분명히
있을 거야. 우리가 찾아보자구.]
[배가 고파 아무것도 못 하겠어. 우선 밥부터 지어먹어.]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대문을 단단히 잠그고 밥을 지었다. 박
봉순은 어느 틈에 다친 몸으로 된장찌개까지 끓여왔다.
[진환이는 왜 오지 않는 거야.]
[모르겠어. 걔는 시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애니까 언
제 올지 몰라. 주민등록은 여기로 돼 있지만 여기 산다고 말할
수도 없는 애야.]
[이 섬에는 모두 몇 명이나 살아.]
[글쎄,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 백여 명 살걸. 가구 수가 모두 마
흔일곱이니까.]
[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개한테 습격을 당해
몰살했다고 하면, 이 터무니없는 일을 세계의 어떤 사람이 믿
어줄까.]
민은수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사실 아닌가?
[이 섬에는 옛날에도 개와 얽힌 무서운 전설이 있었대.]
[나도 어젯밤에 진문태 할아버지한테 들었어. 이 섬의 이름이
구란도인데 한자로는 구할 구(救)자와 난초 난(蘭)자를 써서
난초와 인연이 있다고 하지만.]
[이 섬에는 자생하는 희귀종 난초들이 많다고 해. 그래서 옛날
부터 이곳에 난초를 캐러오는 사람들이 많아 멸종할 위기에 처
하게 되었대. 이 안타까운 모습을 보다못한 섬 사람들이 외부
인 출입금지를 시켰다더군. 말하자면 구란(救蘭)운동이라고 할
까.]
[자연보호운동이구먼.]
[먼 옛날이니까 그런 용어를 쓰지는 않았겠지만 그래서 외
지 사람이 못 오니까, 난초는 구했지만 사람들은 살기가 어려
워져 이곳을 다 떠나버렸대.]
[내가 들은 이야기는 개 구(狗)자와 어지러울 란(亂)자를 써서
개가 난리를 일으킨 섬이라는 거였어. 그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아주 그럴듯해. 옛날에 이 섬에 한 총각이 늙은 어머니와 단둘
이서 개를 여남은 마리 기르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고기를 잡
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예쁜 색시가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을 보
았대. 총각이 그 색시에 반해서 바닷가에 지키고 앉아 가지를
않았대. 보다못한 색시가 바닷가로 나와 총각에게 말을 걸었대.
그런데 그 색시가 사람이 아닌 인어였다지. 그러나 보름달이
뜨는 날만 사람으로 변한다는 거야. 총각은 그 인어를 집에 데
리고 와서 행복하게 살았대.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뱃사람들이
이 섬에 와서 행패를 부리다가 인어 색시를 보고 놀림감을 삼
았다는 거야. 인어 색시는 울다가 울다가 지쳐서 죽어버렸다는
거지.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총각 집.]
[장가갔는데도 총각이야?]
[그렇다고 치고 좌우간 그 집 개들이 전부 달려나와 이웃
뱃사람들을 모두 물어 죽여 인어의 복수를 해주는 참극이 벌어
졌다는 거야. 그래서 구란도(狗亂島)라고 한다는 거지. 어쩌면
이번 사건을 예언한 것 같지 않아.]
[보이지 않는 무슨 손이 여기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
봉순이가 몸을 움츠리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는 광견병에 걸려서 죽는 것 아닐까요? 빨리 어
떻게 손을 써야 하지 않을까.]
민은수의 말에 박봉순은 공포에 젖은 표정만 보일 뿐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의사인 그녀는 그들의 장래 운명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 봤는데 우리 나라에서 광견병이 사라진
것은 10년이나 되었다고 하대. 근데 얼마 전에 광견병 환자가
발생해 난리를 치렀다더군. 우리 나라에는 광견병 약이 없어
미군 부대를 이용해 일본서 약을 공수하는 소동을 벌였다고 하
는 걸 신문에서 읽었어.]
[북한에는 아직 공수병이 있으니까 거기서 전염되었는지 모르
지.]
[그럼 닥터 박, 북한의 미친 개가 이쪽으로 왔다는 말인가.]
[그렇다기보다는 휴전선에 있는 오소리 같은 야생동물이 북한
의 미친 개와 싸우다가 물려서 전염된 뒤 또 남쪽 개와 싸우다
가 옮겨주는 수가 있다고 보아야지. 북한서 전염된 오소리나
너구리들은 강원도나 경기도 북부 지방의 민가에 내려와 남한
의 개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전염되었을 가능성이 크지. 왜냐하
면 올해 들어 발생한 여덟 건의 광견병은 모두 경기도 연천이
나 강원도 영월 등 휴전선에 가까운 북부 지방이었으니까. 광
견병은 뱀 같은 냉혈동물 외의 모든 동물로부터 전염이 되거
든. 우리 나라에서는 공수병이 사라졌다고 세계보건기구에 보
고하려던 참이었는데.]
[공수병에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정말 물이 무서워지나?
살아날 길이 없나.]
민은수가 갑자기 겁이 난 듯 자기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며 말
했다.
[왜 그래? 민 소장도 알 만큼은 알 텐데 목이 부어올라 물
을 마시는 게 고통스럽게 된다고 하지. 그래서 물만 봐도 겁이
나서 울게 된다는 뜻에서 공수병(恐水病)이라고 하는 거야. 그
러나 그 병에 걸렸다고 해서 다 죽는 것은 아니야.]
[음, 나는 원래 의학 공부는 별로 하지 않았어 앗! 저것 봐.
배다.]
그때 민은수가 문득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다가 소리를 질렀
다. 두 사람은 밖으로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정말 멀리 뭍 쪽에
서 배 한 척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여기예요! 여기!]
두 사람은 목이 터지게 소리를 질렀다. 민은수는 윗도리를 벗
어 높이 흔들며 외쳤지만 배는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들은 듯
유유히 섬을 옆으로 지나쳐버렸다. 두 사람은 맥이 풀려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3. 금지된 장난
구란도에서 박봉순과 민은수가 개들의 습격을 받아 고군 분투
하고 있을 때, 봉순의 동생인 박진환은 그 나름대로 고민에 쌓
여 있었다. 그는 애당초 시상(詩想)을 가다듬어 시나 몇 편 쓸
까 하고 이곳 남해로 내려와 구란도의 누님 집과 남해의 보리
암을 왔다갔다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죽마고
우인 안수인이 찾아왔다.
안수인은 그와 고등학교 동창일 뿐 아니라 대학에도 함께 다녔
다. 박진환은 문과대학에 다녔지만 그는 물리학과를 다녔다. 고
등학교 다닐 때부터 공부를 잘해 별명이 아인슈타인이었다. 그
의 이름도 비슷했지만 자연과학 계통에 특히 뛰어난 재능을 보
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가끔 담임 선생님이 혼동할 정도로 함께 다니고 행
동도 비슷했다. 동성연애를 하지 않느냐고 놀림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가는 길이 각각 달라졌다. 박진환은
그의 누나 말대로 문학병이 들어 시를 쓴답시고 직장에 갈 생
각도 돈벌이할 생각도 않고 여기저기를 쏘다니기만 했다. 물론
결혼할 능력도 없거니와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수인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 20대에 벌써 물리학 박사
학위까지 따고 재벌 그룹의 자연과학 계통 연구소의 책임 연구
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수인에게 박진환의 말을 따르면 '인생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 인생문제 때문에 그가 연구소도 팽개치고 서울에서
이곳 보리암으로 쫓아온 것이다.
옆을 보지 않고 오직 공부에만 모든 인생을 걸었던 그가 뜻밖
에도 여자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내노라 하는 양갓집에
서 사윗감으로 그를 점 찍고 매파를 넣었으나 그는 거들떠보지
도 않았다. 서른이 훨씬 넘어 장가들 것을 생각해 보거나, 아니
면 평생 독신으로 살 수도 있다는 말을 박진환에게 자주 했었
다. 그러던 그가 한 여자를 알게 된 뒤부터는 인생관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 여자를 위해서는 내 인생을 다 걸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
게 되었다. 남녀관계에 워낙 관심이 없던 그인지라 박진환은
저러다가 말려니 하는 생각도 했으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안수
인의 사랑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안수인이 사랑하게 된 여자가 그에게 어울리는 나이라든지 환
경을 가진 여자라면 박진환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성사가 되
도록 노력했겠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소위 '인생문
제'가 생긴 것이다.
안수인이 오성 그룹 부설 연구소의 책임 연구원으로 공채된 지
난해 가을 그 회사의 연수원이 있는 충북 진천에 몇 달 동안
가 있었다. 회사의 기숙사가 있었으나 불편하다고 그는 연수원
가까이에 있는 민가에서 하숙을 했다.
하숙집 주인은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이곳으로 내려와 조
그만 도자기 공장에 경리일을 봐주러 다니고 있었고 그 부인이
하숙을 치고 있는 30대 후반의 평범한 부부였다. 아직 아이가
없어 때로 걱정도 했으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지는 않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다 마음씨가 착해 보였다. 특히 부인은 살결
이 희고 나이에 비해 몇 년은 젊어 보였다.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어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만한 인상이었다. 눈이 크고 목이
길지만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어느 일요일 날 게으름을 피고 있던 안수인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야 정신이 들었다.
[안 박사님 아직 안 일어났어요.]
하숙집 아주머니였다.
[아, 아뇨 이제 일어났어요.]
그는 얼른 바지를 꿰어입고 위에 티를 걸친 뒤 문을 열고 나갔
다. 대청마루에는 아주머니가 낯선 여자처럼 차리고 앉아 있었
다. 늘 우중충한 블라우스나 스웨터를 걸치고 바지 차림이던
그녀가 눈처럼 흰 원피스에 코발트색 짧은 블라우스를 위에 덧
입고 있었다. 흰색이 그렇게 화려하게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엷게 한 화장과 단정히 뒤로 빗어넘긴 긴 머리, 동그스름한 작
은 어깨와 도톰한 젖가슴이 그의 시선을 당황하게 했다. 하숙
집 아주머니가 이렇게 멋있는 여자였던 것을 내가 왜 진작 발
견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안수인이 놀라는 눈으로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얼굴에 약간의 홍조를 띠우며 옷매무새를 여몄
다.
[쉬시는데 공연히 방해한 것 아닌지요? 이 옥수수가 맛이
괜찮아서.]
그녀는 소쿠리에 담긴 익은 통옥수수를 내밀며 말했다.
[그거 좋지요. 정말 제가 좋아하는 거예요.]
안수인은 옥수수 한 통을 덥석 잡았다. 동시에 그것을 집어
주려고 소쿠리에 손을 넣던 아주머니의 손을 안수인이 덥석
잡고 말았다.
손을 쥔 채 두 사람은 잠시 서로 얼굴을 보았다. 일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두 사람의 눈과 눈,
그리고 손과 손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무엇을 주고받았
다.
[잘 익었군요.]
안수인은 그렇게 말하며 옥수수를 먹었지만 실은 옥수수 맛
보다 아주머니의 자태에 온 신경이 쏠렸다.
[안 박사님은 물리학이 전공이라고 했죠.]
[박사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래요?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지요? 총각?]
[하하하, 총각은 아니구요.]
[어머나, 총각이 아니라고요? 결혼도 안 했으면서?]
안수인은 처음에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으나 한참 있다
가 그 뜻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
[그런 뜻이 아니구요 저 그냥 이름을 불렀으면 좋
겠어요.]
[그럼 나한테도 아주머니란 말 쓰지 마세요. 앞으로 수인씨
라고 부를 테니까. 수인씨.]
그녀에게 이름을 불리고 보니까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기
다란 그녀의 목덜미와 코발트색 블라우스 깃 사이로 드러난
하얀 그녀의 가슴, 파릇하고 가느다란 그녀의 발목이 그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한달 이상을 같은 집에서 생활하며 왜
그녀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었는지 후회스러웠다.
[아주머니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고 불러요.]
[내 이름은 안정아예요. 안정아. 오랜만에 내 이름을 불러
보니까 정말 낯선 이름 같네요. 대학 졸업한 뒤로는 별로
이름쓸 일이 없었거든요. 아주머니 아니면 최병길 부인이었
으니까요.]
최병길이란 그의 남편 이름이다.
[정아씨. 그거 괜찮은데요. 퍽 로맨틱한 이름입니다.]
[그럼 로맨틱하게 한번 불러봐요. 수인씨.]
[정아씨.]
안수인은 자기가 부른 그녀의 이름에 정말 정감이 담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두 사람은 하숙생과 주인 아주머니의 관계
와는 다른 인간관계가 이루어졌다.
안수인은 안정아에게서 난생 처음으로 이성이란 것을 느껴
보는 것 같았다. 연구실에서 일이 끝나면 공연히 빨리 하숙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집에 들어섰
을 때는 제일 먼저 그녀의 모습을 더듬었다. 그녀가 생긋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아줄 때는 한없이 뿌듯한 무엇을 느꼈
으나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는 공연히 마음이 안정되지 않
았다.
그는 자기가 왜 이러는가 하고 여러 번 반문을 해보았다.
그러나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냥 그녀의 모습을
보아야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상대는 유부녀인데 내가 정신없는 놈이야. 정신을 차
려야지. 아냐 하숙을 옮겨버릴까?'
그는 혼자 별 생각을 다 해보았으나 결론은 그녀가 없는 곳
에는 가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인 최병길이 일이 있어 일 주일째 집에 들어오
지 않던 그해의 어느 깊은 가을밤이었다. 초저녁에 잠이 든
그가 무엇엔가 자극을 받아 눈을 떴다. 창 밖이 훤했다. 보
름달이 쌍닫이 창호지 문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달빛에 끌
려 일어나 대청마루로 나가보았다.
[아니, 정아씨.]
그의 입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숙집 아주머니의 이름
이 튀어나왔다. 장난 삼아서가 아닌 그의 이름을 불러본 것
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대청마루 끝에 앉아 밤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얀
한복 속옷 차림에 머리는 가르마를 타서 곱게 빗어넘겼다. 그
녀의 자태는 마치 민속화 속의 미녀가 달빛 아래 내려온 것 같
은 감동적인 인상을 주었다.
[주무시지 않고 여태 여기 있었어요.]
그가 그녀 옆에 나란히 앉으며 말을 걸었다.
[달빛이 좋아서요.]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엷은 웃음을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하게 흘리며 말했다.
하얀 달빛은 그녀의 청초한 자태를 빚어낸 뒤 대청마루를 온통
흰빛으로 물들였다. 달빛은 마당에도 호수의 물처럼 가득찼
다. 하얀 마당가에 감나무의 그림자가 추상화처럼 드리워져 있
었다.
[수인씨는 자연과학을 공부했으니까 저 달빛을 보아도 월식이
나 아폴로호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되지요.]
그녀가 수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달빛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목덜미 아래 그녀의 가슴속에
숨겨진 유방이 하얀 적삼 깃을 뚫고 솟아오를 듯한 자태를 하
고 있다고 그가 생각했다.
[정아씨는 국문학과를 나오셨다고 했죠? 그러니까 달을 보는
감회가 우리와는 다르겠지요. 하지만 나도 이런 밤이면 더
구나 선녀 같은 여인이 곁에 있는 밤이면 저 달을 보면서 김동
리의 무녀도(巫女圖)에 나오는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답니다.
]
[예? 물리학 박사가 그런 소설을 읽으셨군요.]
그녀가 놀라운 눈으로 안수인을 다시 돌아보았다.
[숫자와 싸우는 틈틈이 머리도 식히고 교양도 얻을 겸 그런 책
들을 더러 보았지요. 그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달빛 아래
서 아름다운 정사를 벌이며 여인의 깊은 곳을 통해 한없이 흘
러들어오는 달빛을 받아들여 잉태를 하는 장면이 있지요.]
[달은 정말 우리 여인들의 한이고 운명이고 낭만이에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참 앉아만 있던 정아가 손을 뻗어 옆에 있는 안수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녀의 손이 닿자 안수인은 전신이 감전된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만 다급하게 뛰었다.
[최병길씨는 언제 와요.]
안수인은 무슨 말인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불쑥 이렇게 말했
다. 말을 뱉고 나서야 그 말이 지금 분위기에 얼마나 맞지 않는
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와 내가 어떻게 결혼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말을 바꾸었다.
[연애 결혼.]
정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대학 졸업반일 때 어머니 아버지가 갑자기 비행기 사고
로 함께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나는 삼촌 집에서 살았는데, 남
의 집에 얹혀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그래서 빨리
그 집에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에 삼촌이 정해주는 남자와 그냥
결혼해버린 거예요.]
[그 남자를 사랑합니까.]
안수인은 또 너무 세련되지 못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
녀는 대답하지 않고 한참 묵묵히 있었다. 그녀의 볼록하고 육
감적인 가슴이 가쁘게 숨을 쉬었다. 달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
에 번쩍이는 무엇이 보였다. 두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왔
다.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정아씨.]
안수인은 어쩔 줄을 몰랐다. 이럴 때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랑이 없는 사람과 함께 십 년 세월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요? 언제나 타인 같은 남자와 한이불 속에서
그 낯선 남자의 욕정 덩어리를 받아내야 하는 여자의 고통을
모르실 거예요.]
[결혼하신 지 십 년이나 되셨군요.]
그러나 그녀는 다시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얼굴의 눈물을 닦
아낸 뒤 다시 웃는 얼굴로 안수인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달빛 때문에 센티해졌나 봐요.]
[저기 봐요. 기러기가 날아가네요.]
정말 정아가 가리키는 서쪽 하늘엔 기러기가 질서 정연하게 줄
을 서서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수인씨는 올해 몇 살이에요.]
그녀는 몇 번이나 망설이던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스물아홉. 나이만 먹었죠? 한 일도 없이.]
[그건 내가 할 얘기인걸요.]
[정아씨는 몇 살인가요.]
[나이를 대면 정아, 정아 하고 부를 수 없게 되어요.]
그녀가 수인을 돌아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상관없어요.]
[몇 살로 보여요?]
[서른셋.]
정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서른둘.]
[알면 실망해요.]
[꼭 알아야겠어요.]
[그보다 훨씬 많아요. 수인씨보다 여덟 살이나 많아요. 수인씨
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초등학교에 다녔어요.]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고 하지 않아요.]
[사랑?]
수인의 입에서 무심코 사랑이란 단어가 나와버렸다. 그는 그녀
가 보고 싶고 곁에 없으면 서운한 생각이 든다는 것만 알았지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가
슴에서부터 사랑이란 말이 나오고 말았다.
4. 가장 저주스러운 하루
구란도의 비극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만 12시간이 지난 그날
저녁때였다.
구란도로 전화를 걸던 뭍의 몇 사람이 통화가 되지 않는다고
신고를 했었다. 그러나 그날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쉽게 조치
가 되지 않았다. 그날 섬으로 들어가는 배들도 거의 없었다.
섬에 살아남은 민은수와 박봉순은 세상에서 가장 길고, 가장
저주스럽고, 가장 뜨거운 하루를 보냈다.
그들이 거의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뭍을 향해 구조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지나가는 배가 몇 척 있기는 했으나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섬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마치 이 섬의 개하고 뭍의 사람들이 짜고 우리를 골탕먹이려
고 하는 것 같네.]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에 있는 조그만 둔덕에 앉아 바다를 내려
다보며 지나가는 배를 기다리던 박봉순이 고개를 돌려 민은수
를 쳐다보며 말했다. 바닷가라서 그런지 희디흰 그녀의 얼굴이
금세 빨갛게 익었다.
[민 소장, 이 섬에서 도망친 그 푸른 셔츠 입은 사나이는 도대
체 누구일까? 그 사람과 미친 개들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박봉순이 얼굴에 다시 공포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말했다.
[닥터 박, 그보다 개들이 언제 또 미쳐서 날뛰게 될지 모르니
까 조심해야 돼.]
민은수도 몸서리쳐지는 새벽을 생각하며 말했다.
[벌써 해가 뉘엿해졌는데 오늘도 사람들이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으면 내일 새벽엔 어떻게 되는 거야.]
[만약에 하루에 한번씩 개가 미친다면 내일 새벽이 위험하게
되겠지. 닥터 박, 우리가 이 섬을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
으니까 좀 안전하게 밤을 보낼 장소를 찾아야 해.]
민은수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일어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발만 움직이면 사방이 시체투성이인데.]
박봉순도 따라 일어섰다.
[저 산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어.]
민은수가 야트막한 뒷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해발 1백5십 미터
나 될 법한 산이었다.
[저 구란산 말이지? 한번도 가본 일이 없어.]
[그럼 해가 지기 전에 가보는 게 좋겠군.]
민은수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박봉순이 뒤를 따랐다. 그
들은 시체가 보이지 않는 곳을 골라서 걷기 시작했다.
얕은 산치고는 나무가 아주 울창했다. 산 중턱에 이르자 소나
무와 측백나무가 하늘을 가렸다.
[여기서 좀 쉬어가자.]
숨이 턱까지 찬 봉순을 뒤돌아보며 민은수가 말했다. 그는 비
스듬하게 놓인 바위에 걸터앉았다. 옆자리를 가리키며 봉순이
올라와 앉도록 손짓을 했다. 그녀가 한 발을 올려놓고 바위 위
로 올라오려다가 미끄러져 뒤로 벌렁 넘어졌다.
[엄마.]
벌렁 드러누운 그녀는 스커트 자락이 치켜올라가 허연 허벅지
가 민은수의 시선에 정면으로 들어왔다. 손바닥만한 팬티가 탱
탱한 그녀의 두 허벅지 사이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민은수가 황급히 그녀를 일으키려고 바위에서 풀쩍 뛰어내리
다가 그만 그녀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스커트를 걷어올리고
있는 그녀 위를 덮친 꼴이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서로 무안해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민은수의 가슴
밑에 깔린 봉순은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울창한 나뭇가지를
쳐다보았다. 겹겹이 쌓인 청솔가지 사이로 햇볕이 한 줄기 비
추고 있었다. 그녀는 왠지 자기 위에 얹혀 있는 민은수를 갑자
기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종일을 공포와 충격 속에 보낸
그녀는 편안한 품 속에 숨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녀는
팔을 뻗어 민은수의 가슴을 안았다. 자기의 행동을 자기도 제
어하지 못했다.
[봉순이.]
어쩌면 민은수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는 마치 선수
를 빼앗긴 선수가 무엇을 만회하려는 듯 그녀를 힘주어 껴안았
다. 그리고 번개같이 그녀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포개었다.
두 사람은 갈증난 사람들처럼 서로의 입술을 탐닉했다. 입술이
며 뺨이며, 목덜미에 미친 듯이 입맞춤을 하던 민은수가 오른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그의 손은 거칠게 그녀의 브
래지어를 헤집고 들어와 손바닥으로 그녀의 유방을 한 움큼 움
켜쥐었다. 보드랍고 짜릿한 유방의 촉감이 심장에까지 느껴졌
다.
[봉순아.]
민은수는 다시 신음을 토했다.
[안, 안 돼.]
박봉순은 가슴을 유린하고 있는 민은수의 손을 의식한 듯 신음
소리같이 거부 의사를 표했다. 그러나 그녀는 민은수의 손을
떨쳐내지 않았다.
[봉순아 너 날.]
민은수의 손이 이번에는 밑으로 내려갔다. 팬티 속을 거칠게
헤집고 들어갔다.
[아냐, 아냐.]
봉순은 그의 손을 의식하고 몸이 꿈틀거렸다.
[봉순아, 넌 날 사랑하고 있었지.]
민은수의 손이 마침내 그녀의 중심부에 닿아 그녀의 장미꽃을
유린하자, 그녀는 갑자기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안 돼. 안 돼.]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민은수는 그녀로부터 떨어져나
가 맨땅 위에 뒹굴었다.
그녀는 일어나 앉아 옆으로 넘어져 있는 민은수를 바라보며 당
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자신도 왜 그런 갑작스런 거부 반응
이 나왔는지 의아스러워 했다.
[미, 미안해.]
그녀는 재빨리 스커트를 밑으로 내리고 블라우스 옷깃을 여미
며 말했다. 민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돌아섰다.
그리고 정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박봉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동안 걸
음만 재촉할 뿐 침묵을 지키다가 박봉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민 소장 화났어?]
[.]
민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네 사람이 모두 죽은 채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는데 어
쩐지.]
그녀가 슬그머니 민은수의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여긴 나무가 더 없는 것 같아.]
민은수가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말했다. 정말 그들이 정상에
이르자 거기에는 오히려 나무가 없었다.
[나 사실은 민 소장이 좋아지는 것 같아.]
봉순이 민은수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자기 말만 했다. 조금
전의 갑작스럽게 덮쳐온 그의 달콤한 입술의 감촉을 잊지 못하
는 것 같았다. 그녀는 민은수를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울창
한 숲은 없어지고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그들 머리 위에 내
려앉았다.
민은수는 멀리 수평선 쪽을 바라보았다. 두어 개의 섬이 부표
처럼 떠 있었다. 뭍 쪽을 보았다. 해안선이 손에 잡힐 듯이 가
까웠다. 섬을 내려다보았다. 빨간 기와집 지붕들과 가르마 같
은 길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언제 그런 비극이 있었느냐는
듯이 그곳은 평온하게 보였다.
[아직 화 안 풀렸어? 자, 이제 마음대로 해도 좋아.]
그녀는 굳어 있는 민은수의 태도가 몹시 마음에 걸리는 것 같
았다. 그녀는 팔짱 끼고 있던 팔을 풀어 민은수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민은수는 마지못한 듯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부
드러운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아까는 미안했었어. 내가 주책이었지.]
그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정말 화난 것 아니지.]
이번에는 그녀가 재빨리 말한 뒤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
리고 그의 허리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민은수의 아랫배에 바싹 붙였다.
그러나 민은수는 슬그머니 그녀를 놓아주면서 말했다.
[여기는 개를 피할 만한 곳이 없군.]
그녀도 그의 허리를 놓아주었다.
[이 섬에 살아도 여기까지 올라와 본 것은 처음이야. 참 아
름답지.]
그녀가 점점 짙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홍색 노
을빛이 하얀 그녀의 얼굴을 적시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모습
이 평소보다 몇 배나 더 아름답게 보였다.
민은수는 붕대를 감은 그녀의 팔을 이제야 발견한 듯 쓰다
듬었다. 그는 오랫동안 봉순이와 만나왔지만 오늘처럼 행동
한 일은 없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려면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입맞춤 한번
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두 사람의 행동은 너무나 갑
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평소에 감추어둔 행동이 갑자기 가슴을 열고 나온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개들이 언제 다시 발작을 할지 모르잖아. 그것들이 미치기
전에 안전한 곳을 찾아야 해. 다시 동네로 내려가봐.]
그녀는 민은수의 손을 끌고 먼저 내려가는 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동네로 내려와 보건지소로 갔다.
[이곳 2층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아. 이 계단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녀가 2층에 올라가는 계단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게 좋겠군. 우선 2층에서 버틸 만한 식량과 물이 있어야
돼. 여기 꼼짝 말고 좀 기다려.]
민은수는 혼자 동네에 하나뿐인 가게로 뛰어갔다. 길가에는
몇 마리의 개들이 돌아다녔으나 전혀 적의를 갖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 그들이 미쳐서 날뛸지 모르기 때문에
민은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손에 든 권총의 안전장치
를 풀고 조심스럽게 뛰었다.
그는 하늘을 향한 채 반듯이 누워 죽어 있는 주인집 아주머
니를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면서 가게 안의 과자며 라
면 등을 주섬주섬 주워 상자에 담았다. 그는 약탈이란 것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그는 보건지소로 돌아와 2층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계
단 앞에 책상 같은 사무용 가구를 가져다 쌓았다. 그리고
기름통과 성냥을 준비해 두었다. 여차하면 계단 밑으로 경
유를 붓고 불을 질러 개들을 물리칠 생각이었다. 박봉순은
돌멩이며 몽둥이들을 안아다 쌓았다.
[이만 하면 충분히 버틸 만하지.]
그들을 땀을 씻으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벽에 걸린 시계가
일곱 시를 알렸다.
[앗, 저것 봐.]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박봉순이 소리를 질렀다. 민은수도
창 밖을 내다보았다.
[배다! 배.]
민은수도 함께 소리를 질렀다. 정말 바다 위에는 뭍으로부
터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뛰어나가 선착장으로 갔다. 얼마 가지
않아 조그만 발동선은 섬에 닿고 거기서 먼저 이 섬의 지소
경찰관인 김호기 경장이 내렸다. 교대를 할 때가 아직 안
되었지만 섬에 통신이 두절되어 좀 일찍 출발한 것이었다.
[김 경장님.]
박봉순이 반가워 소리쳤다. 그녀의 눈에는 물기까지
서렸다.
[아니 보건소 박 선생님 아니오? 근데.]
그는 팔에 붕대를 감고 반가워 펄쩍 뛰는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배에서는 동네 사람 두 명이 더 내렸다. 서울에 갔다오던
농협 조합 사무실 남자와 친정에 다녀오던 새색시였다.
그들의 가족도 물론 희생되었기 때문에 박봉순은 그들을
보자 마치 자기가 무엇을 잘못한 것처럼 느껴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김 경장님,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요. 산 사람은 우리 둘뿐입니다.]
박봉순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지 그녀는 다리에서 갑자기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김 경장은 눈만 둥그렇게 뜰 뿐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가 말씀을 드리지요. 전 어제 이 섬에 온 민은수라는
사람입니다. 박봉순씨와는 학교 동창이지요.]
민은수가 자기 소개를 한 뒤 천천히 상황설명을 했다.
그때까지도 믿지 않던 김 경장과 돌아온 두 섬사람들은
동네에 들어선 뒤에야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고 넋을
잃었다.
[언제 다시 저놈들이 미쳐서 습격을 할지 모르니 빨리 뭍에
알려 사람들을 부르든지 우리가 이 섬을 떠나든지 해야
합니다.]
너무나 엄청난 충격 때문에 멍해 있는 김 경장을 보고
민은수가 말했다. 김 경장은 곧 경비전화부터 복구시켰다.
그리고 거짓말 같은 사실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비극이 발생한 지 12시간 만에 세상에 이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본서로부터 수십 명의 무장
경찰관과 비상소집된 민방위 대원 등이 몰려왔다. 해남
보건소 직원과 군의 행정요원들도 건너왔다.
오는 사람마다 모두 이 엄청난 비극을 보고 모두 아연해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로 인정이 되고 우선
분주하게 사실확인 작업을 시작했다.
[우리는 빨리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임시로 설치된 사건수습 본부격인 비좁은 지소에 앉아서
상황설명에 바쁘던 민은수가 책임자인 듯한 사람을 보고
말했다.
[우선 사건파악부터 한 뒤에 조치를 하겠습니다.]
이마가 벗어지고 나이가 마흔은 훨씬 넘어 보이는 그 경찰
간부는 그게 뭐 그리 급하냐는 투로 말했다.
[우리가 죽고 없거나, 아니 죽지 않더라도 혼수상태만
되어도 이 섬의 비극은 영원히 수수께끼가 되고 말아요.
우리를 치료하지 않아 죽게 했다면 서장님도 편하지는 않을
텐데요.]
박봉순이 결정적인 말을 한 것 같았다. 박봉순은 그가 남해
경찰서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빨리 뭍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군청 소재지인 남해읍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거기서도 별다른 치료는 할 수가 없었다. 팔다리에
난 상처나 치료하고 영양제 주사나 놓는 정도였다.
광견병에 대한 백신이 그곳에 있을 턱이 없었다. 그들이
입원해 있는 군 보건소에는 더 많은 각 기관 사람들이
몰려와 질문을 하기에 바빴다.
한편 구란도에서는 분주하고 긴박한 순간이 계속되었다.
우선 길거리에 흩어져 있거나 집에 들어가 있는 개들을
체포하기 위해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다.
[개는 될 수 있는 대로 생포해야 한다. 사로잡아야 원인을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사살을
허용한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죽이지 말라.
그리고 절대로 적들에게 아니 개새끼들에게 물려서는
안 된다. 그럼 작전 개시.]
조인후 경찰서장의 지시에 따라 구란도에서는 개
생포작전이 벌어졌다. 한편 다른 경찰관들은 온 동네에
흩어진 시체의 수습과 신원파악에 나섰다. 우선 시체의
위치를 확인한 뒤 신원을 기록하고 딴 곳으로 옮겼다.
시체들은 꼬리표를 단 채 보건지소 마당으로 옮겨져왔다.
상황본부인 지소의 유일한 외부 연락선인 경비전화는 불이
날 지경이었다.
날은 어느새 어두워지고 사방에서는 개들의 비명과
총소리가 들렸다. 지난 새벽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개들이 인간에게 당하는 차례였다. 수백
명의 병력이 투입된 이 일은 새벽녘에야 대강 끝났다.
새벽 다섯 시께 미명을 뚫고 구란도 앞 바다에는 각종 배들이
갈가마귀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믿어지지 않는 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전국의 보도진이 몰려
들기 시작했다. 이 소식은 그날밤 텔레비전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져 전국을 경악하게 했다. 외신을 타고 곧 전 세계로 퍼지
기 시작했다.
새벽녘에 섬에는 서울에서 내무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 등 정
부의 중요 각료들과 경찰청장, 보건원장 등이 섬으로 달려왔
다.
남해읍에 대책본부가 설치되었다. 섬에는 현장 지휘부가 마련
되었다. 보도요원들은 섬에 들여놓지 않고 남해 대책본부에서
브리핑을 받도록 조치했다.
[사망자는 모두 몇 명이나 되오.]
내무 장관이 밤새 현장수습에 정신이 없던 경찰서장을 보고 물
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생존자는 두 명입니다. 신원미상의 한 사람
이 이 섬에서 탈출했다고 하는데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습된 시체는 모두 백팔십육 구입니다.]
[모두 섬 사람이오.]
내무 장관이 부스스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남자가 91명, 여자가 95명입니다. 십 세 미만의
유아와 아동이 그 중 32명입니다. 아직 시체가 더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날이 밝으면 다시 수색을 하겠습니다.]
경찰서장은 어설프게 생긴 모습과는 달리 카랑카랑한 목소리
로 대답했다.
[개들은 어떻게 되었소.]
[새벽 04시 현재 337마리는 생포하고 여섯 마리는 사살했습니
다. 아직도 몇 마리가 산 속에 숨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날
이 밝으면 곧 소탕될 것입니다.]
서장은 마치 강력한 적군과 맞선 것 같은 어투로 대답했다.
[섬은 완전히 통제되어 있겠지요.]
보사부 장관이 다짐하듯 말했다.
[물론입니다. 기자들은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서장이 자신있다는 투로 말했다.
[내 말은 기자들을 봉쇄해서 뉴스를 통제하라는 뜻이 아니오.
이곳은 역학적으로 위험지구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오.]
보사부 장관이 볼멘목소리로 말했다.
남해서 사고수습 대책본부의 통제를 받으며 입원해 있는 박봉
순이나 민은수는 박진환을 찾아보았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어때?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
박봉순이 민은수를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난 괜찮아. 닥터 박은 어때.]
민은수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환자 가운을 입은 봉순은 갑자
기 큰 병이나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개한테 물린 곳이 이제야 아프기 시작하네. 하지만 견딜 만은
해.]
그들은 서로 미소를 보내며 악몽에서 살아나온 것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좀 어떻습니까.]
병실 문이 열리고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왔다. 아주 젊고
발랄해 보였다.
그들은 그냥 미소로 대답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까.]
의사가 수첩을 꺼내들며 빠른 어투로 물었다.
[당신 의사 아니죠.]
박봉순이 탁 쏘듯이 말했다.
[예? 예.]
그는 금세 가운을 벗어서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실은 서울 한양일보 기잡니다. 도저히 만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변장을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두 사람은 가만히 있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데 당국의 발표에 거짓이나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
두 사람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가 없었다.
[나쁜 뜻이 아니고 국민들에게 충격을 덜 주기 위해 무엇
을 숨길 수도 있지요. 가령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든지 특수
한 바이러스로 그 섬이 오염되었다든지.]
그가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며 침을 삼켰다.
5. 푸른 셔츠입은 사나이
[우리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랍니다.]
박봉순이 일어나 앉아 머리 매무새를 고치며 말했다. 욱신거리
던 상처는 조금 나은 것 같았다.
[우리나 당신이나 아는 게 없는 건 마찬가집니다. 자고 나니까
개들이 전부 미쳐서 섬 사람들을 물어 죽이고 있었습니다. 개
는 30만 년 전부터 인류와 함께 살아왔을 뿐 아니라 주인을 배
신하는 일이 절대로 없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오죽하면 의리
있는 사람을 충견이라고 표현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개들이 일
제히 단결해서 주인들을 모두 물어 죽였단 말입니다. 우리는
운 좋게도 그 지옥에서 살아나왔을 뿐입니다. 왜 개들이 그런
반란을 일으켰는지는 알지 못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서 무엇
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에요.]
민은수가 장황하게 설명을 했다. 기자는 낭패한 표정으로 그들
을 쳐다보고 있다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입니까? 박봉순씨는 보건소에 파견되어 있
는 의사라는 것을 압니다만.]
[나는 닥터 박의 친구입니다. 학교 동창이지요.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구란도에 놀러왔다가 이런 변을 당했지요.]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그 섬에서 살아난 사람은 오직 박
봉순씨와 민은수씨 두 사람. 정말 기적이지요.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은 외지에서 온 유일한 남자입니다. 섬 사람 186명이
개한테 물려 죽었는데 오직 한 사람 외지에서 온 사람은 살아
남았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지요.]
기자의 말이 약간 빈정대는 것 같다고 민은수는 느꼈다. 슬그
머니 화가 났다.
[그래서 유감이란 겁니까? 아니면 내가 무슨 음모라도 꾸미려
이 섬에 왔다는 말입니까.]
민은수가 화가 나서 싸울 듯한 태도를 취하자 그는 황급히 물
러섰다.
[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닙니
다. 다만.]
[다만, 뭡니까.]
[민 선생이 구란도에 들어갈 때 같이 간 사람이 누구 없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같이 간 사람.]
민은수가 무슨 뜻인지 몰라 박봉순을 돌아보았다.
[같은 배로 온 사람은 모두 동네 사람들이었어요. 뭍 사람은
없었어요.]
[그렇습니까.]
기자는 다시 실망한 듯 한동안 아무 말도 않고 서 있었다.
[우리 말고 구란도에 왔다가 간 사람이 있긴 있습니다만.]
민은수는 그 푸른 셔츠를 입고 발동선을 타고 탈출한 사나이를
생각했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기자의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은 우리 말고도 살아서 탈출했다는 것과 푸른 셔츠 그
렇지요, 스카이블루색의 셔츠를 휘날리며 발동선을 타고 섬을
빠져나가는 뒷모습만 보았을 뿐입니다.]
[나이가 몇 살이나 된 것 같습니까.]
기자가 수첩을 꺼내들고 적으면서 긴장했다.
[2, 30대쯤? 글쎄 자신없어요.]
그때였다. 도어가 덜컹 열리고 진짜 의사와 형사인 듯한 사람
들이 급히 들어왔다.
[당신 누구요.]
형사인 듯한 사람들이 기자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이거 놔요. 난 서울서 온 한성일보 기자요.]
그가 윗저고리에서 신분증을 내보였다.
[여긴 통제구역이니까 들어오면 안 됩니다. 감염되어 죽을 수
도 있어요.]
기자의 팔을 잡고 있던 형사가 소리쳤다.
[감염이라구요? 그러면 구란도 사건은 바이러스에 의한
.]
기자는 눈이 번쩍 뜨이는 모양이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런 경우도 염두에
두고 역학조사를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신문에 그렇게 쓰
면 큰일나요.]
의사 가운을 입은 나이 든 사람이 설명했다.
[빨리 나가요. 더 문제 삼기 전에.]
기자는 큰 수확이라도 얻은 듯이 박봉순과 민은수에게 눈인
사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그 사람하고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기자의 팔을 낚아챘던 사람이 민은수를 보고 물었다.
[선생은 뉘시오.]
민은수는 그의 고압적인 태도가 못마땅해서 정색을 하고 물
었다.
[아, 예. 나는 대책본부에 파견된 맹달수라고 합니다. 경찰청
소속입니다.]
[맹 경감의 명성은 일찍부터 잘 들어왔습니다. 살인사건 수
사가 전문이라죠.]
민은수가 약간 비꼬듯이 말했다.
[칭찬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 기자라는 사람한테 쓸데
없는 말 하지는 않았겠지요.]
[예? 쓸데없는 말이라고요.]
민은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때야 맹달수는 실수
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얼른 얼버무렸다.
[미, 미안합니다. 말이 헛나와서 제 말은.]
그 모습을 보자 민은수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몇
번이나 물었던 말을 다시 물은 뒤 나갔다.
그날 오후까지 두 사람이 격리된 병상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오후 늦게 간호사들이 석간신문을 가져다주었다.
신문들은 온통 구란도 사건으로 도배질을 한 것 같았다. 그
중에도 원인에 대한 추측이 여러 갈래로 나와 있었다.
원인은 대체로 바이러스에 의한 개들의 일시적 감염현상을
가장 유력한 이유로 들고 있었다.
따라서 구란도를 감염지구로 선포하고 출입을 통제해야 한
다는 것이었다. 감염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억측들을
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세균전을 폈을 가능성을 들기도 했
다.
그러나 감염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학자들도 있었다. 우
선 개들을 일시적으로 광란시켜 공격적인 성격으로 만드는
바이러스는 아직까지 보고된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뿐 아
니라 섬 전체의 모든 개를 동시에 광란하게 하는 감염이란
아무리 인위적으로 한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섬의 풍토적 영향이 원인일지 모른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다른 의견은 구란도의 전설처럼 신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
이란 것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주장 하나 사실을 뒷받침하
지는 못했다.
신문에는 박봉순과 민은수의 인터뷰 기사도 크게 나 있었
다. 한성일보뿐 아니라 다른 모든 신문도 그들을 마치 만났
던 것처럼 기사를 썼다.
그날밤 텔레비전에서도 온통 구란도 이야기뿐이었다. 현지
르포, 학자들을 동원한 원인 분석, 대책본부의 대처 상황,
구란도에 대한 유래 등이었다. 나라 안이 온통 구란도 사건
으로 발칵 뒤집힌 것 같았다.
특히 섬에서 사라졌다는 푸른 셔츠의 사나이가 마치 모든
열쇠를 가지고 있는 양 그 사람에 대한 추리도 수십 갈래로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민은수가 보기에는 모두 공상소설에
불과했다.
그날밤 늦게 민은수와 박봉순은 공수병 예방주사를 맞았다.
국내에 그 약이 없기 때문에 일본에서 급히 공수를 해왔다
는 것이었다. 그날밤 10시께 주사를 맞았는데, 그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이상증세를 보이지 않았다. 또한 생포해서
관찰하고 있는 개들도 더이상 이상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
다. 정상적인 개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사건이 생긴 날 새벽, 그러니까 5시경부터 아침 9시 가까이까
지 개들이 미쳐 있었으니까 꼭 4시간 정도 광란을 부리고는 언
제 그랬느냐는 듯 조용하기만 했다.
박봉순은 개들이 12시간 이상 아무런 증세를 보이지 않기 때문
에 공수병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했으나 그녀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두 사람은 주사를 맞고 병실 아닌 병실에 갇힌 채 싱글침대에
각각 나란히 누워 있었다. 텔레비전은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구란도의 비극을 되풀이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타의에 의해서 하룻밤 동침하게 되었네.]
민은수가 심술스럽게 박봉순을 건너다보며 말을 걸었다.
[그런 소리 나올까봐 방을 각각 달라고 했는데 보안상 어쩌구
하면서 이 방에 강제로 연금시키고 말더군. 이건 자의가 아니
니까 설사.]
[하하하.]
민은수가 갑자기 소리내어 웃는 바람에 박봉순이 말을 그쳤다.
[하하하 강제로 동침을 당했다구? 하하하.]
[거 불결하게 동침이란 말 좀 안 쓸 수 없어.]
박봉순이 눈을 흘겨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개들이 처음 발작을 시작한 것이 정확하게 몇 시쯤이었지.]
민은수가 박봉순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너무 예뻐서 보는 거야.]
[피이.]
민은수가 일어서서 박봉순의 침대로 갔다. 박봉순은 누운 채로
침대 가운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으며 경계태세를 취했다.
민은수는 그녀의 침대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박봉순의 가
운을 걷어내렸다. 환자복 속에 숨겨진 그녀의 불룩한 젖가슴이
숨가빠했다.
[왜 이래.]
그녀가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말했다.
[천재일우의 동침 기횐데 그냥 넘길 수는 없잖아.]
민은수가 갑자기 박봉순 위에 엎어지듯 포갰다.
[아얏.]
박봉순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았다. 민
은수가 움칫하고 일어나자 박봉순도 재빨리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와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이 방을 밖에서 감시하고 있을지 몰라요.]
박봉순이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
이 더욱 육감적으로 보였다.
[감시.]
[감시라기보다는 관찰하고 있을지 몰라. 괜히 웃음거리가 되
기 전에 점잖게 지내. 우리.]
민은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자기 침대에 가서 앉았다.
[아까 내가 무슨 질문 했었지.]
[개들이 정확하게 몇 시에 발작을 일으켰느냐고 했었지.]
박봉순이 다시 침대에 가서 누우면서 말했다. 붕대가 감겨 있
긴 했으나 그녀의 포동포동한 하얀 두 다리가 민은수의 눈을
자극했다.
[그 시간은 아마 5시20분쯤 된 것 같았어. 5시부터 마을 방송
이 시작되는데 방송에서는 늘 아침 행진곡을 먼저 틀거든. 그
행진곡 스피커 소리에 나는 늘 잠을 깨니까.]
[아침 행진곡.]
[구란도에도 다른 시골 마을처럼 동네 방송이 있어. 옛날 박정
희 대통령 시절,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만든 거겠지. 마을의
중요사항은 그걸로 알리는데 구란도에서는 새벽마다 행진곡을
틀어 스피커를 요란하게 울려 잠을 깨운단 말야. 말하자면 모
닝콜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호호호 모닝콜 이야기 하니까
우리 대학 시절 함께 외국갔던 생각 나네. 민 소장 방 두 남학
생은 다른 사람이 다 로비에 모였는데도 나오지 않았었지. 오
사카 여행갔을 때 말이야. 알고 보니 일본말이 서툴러 5시에
모닝콜 해달라는 것을 7시로 이야기했으니, 호호호.]
박봉순이 일어나 앉으며 웃었다.
[마을에선 무슨 행진곡을 틀지.]
[터키행진곡이야. 만날 들어서 다 외울 정도지. 노곤한 새
벽잠 속에서 그 곡을 들으면 마치 꿈속에서 듣는 것처럼 기
분이 좋아져.]
박봉순은 그 소리를 기억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어 음미하려
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터키행진곡이라 그건 누가 골라와서 트는 건가.]
[늘 부지런한 마을 김 이장님이 하는 일이야.]
[김성일 이장이라는 사람이지? 김일성을 거꾸로 부른 이름
인데 그 노인이 터키행진곡을 어떻게.]
[그거야 나라에서 틀라고 정해준 이래 늘 트는 거지 뭐. 하
긴 김 이장님은 지금은 비록 외딴 섬에서 한가히 지내지만
오스트리아 유학까지 하고 온 음악도였다고 하대. 젊은 시
절 정신장애를 일으켜 병원신세를 지다가 구란도로 요양온
뒤 그냥 몇 십 년을 눌러앉은 사람이래.]
[정신병을 앓았다고.]
민은수가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난 것 같았다. 민은수의 엉
뚱한 상상을 알아챈 듯 박봉순이 입을 열었다.
[김 이장님은 지금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에요. 더구나
사람의 정신질환과 개는 아무 상관이 없어.]
박봉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묘한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낮에 구란도에서 본 김 이장의 처참한 시체가 눈
에 다시 떠올랐다. 김 이장은 마을회관에서 20여 미터 떨어
진 길 한가운데 누워 있었다. 개들에게 목을 집중적으로 공
격당해 목덜미와 가슴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 두 시께나 되
어서야 잠이 들었다.
이튿날 새벽 박봉순이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민은수는 겨우
눈을 떴다. 그는 밤새도록 미친 개한테 쫓겨다니는 악몽을
꾸었다.
그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뜨자 박봉순의 미소띤 얼굴이 자
기 눈앞에 바싹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세수를 말끔
히 하고 엷은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어제 화장을 못 해서 얼굴이 너무 타버린 거 있지.]
박봉순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완전히 촌 여자가 돼버렸어.]
[돈 주고 선탠하는 세상에서 뭘 그래? 지금 몇 시야? 왜 일
어났어?]
[해가 중천에 떴어. 대책본부 사람들이 아침 먹으러 같이
가재.]
[우리하고? 우리는 감염된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민은수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대책본부의 역학 조사팀과 함께 해변에 은밀히
마련된 음식점에 가서 매운탕을 먹었다. 그들은 집요하게
따라붙는 보도진을 교묘하게 따돌리고 있었다.
[선생님, 뭐 좀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매운탕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 난 박봉순이 침묵을 깨고 허
진 박사를 향해 물었다. 허진 박사는 박봉순의 의과대학 은
사일 뿐 아니라 예방 의학의 한국 최고 권위자다. 이 조사
단의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아니.]
허 박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런 기가 막히는 일은 처음 보았어. 더 자세한 검사가 끝
나야 하겠지만 구란도에서는 아무런 특이한 점을 찾아내지
못했어. 그뿐 아니라 개들에게서도 무슨 바이러스나 이상증
상을 전혀 찾을 수 없었어. 닥터 박이 목격한 사실만 없다
면 구란도나 그곳의 개들은 모두 정상이야.]
[개들은 언제 또 발작을 할지 몰라요.]
민은수가 경고하듯이 말했다.
[개들은 그후 계속 정밀한 관찰을 하고 있지만 사건 발생
후 24시간이 지난 현재까지 지극히 정상적이야.]
허 박사가 역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미칠 노릇이구먼. 그 마을 사람들 시체만 없었다면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거짓말쟁이가 될 뻔했군.]
민은수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을 먹고 난 그들은 대
책본부의 수사본부에 들러 몇 가지 참고조사에 응했다. 몇
번씩이고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특히 푸른 셔츠의 탈출
자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날 오후부터 그들은 비교적 자유스러운 몸이 되었다. 대
책본부에서는 두 사람이 이곳에 있지 말고 먼 곳에 가서 휴
양을 하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다. 자기들과 연락이 닿는 곳
이면 어디
든지 좋다고 했다.
두 사람은 그동안 얼굴도 볼 수 없었던 박봉순의 동생 박진
환과 그의 친구 안수인을 만났다. 안수인에 관한 이야기는
박봉순도 잘 알고 있었다. 박봉순 남매는 서로 얼싸안고 사
지에서 돌아온 혈육을 반겼다.
그들은 보도진의 추적을 피해서 안수인이 묵고 있던 작은
민박집에서 만났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우리 어디 멀리 좀 가 있을
데 없을까.]
박봉순이 진환을 보고 물었다.
[진천으로 가. 내가 하숙하고 있던 집이 좋아. 아주 시골
냄새가 물씬 나는 낭만적인 곳이지.]
안수인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참, 안정아씨도 왔다더니 어디 있어.]
박봉순이 그제야 생각난 듯이 물었다.
[벌써 진천으로 갔습니다. 유부녀가 함부로 외지에 돌아다
닐 수 있나요.]
박진환이 안수인의 얼굴을 흘깃흘깃 보면서 말했다.
[여기까지 왔다가 안수인씨와 하룻밤 묵지도 않고.]
박봉순이 안수인의 홍당무가 된 얼굴을 보자 말끝을 흐렸
다. 정말 요즘 청년 같지 않은 순진한 사람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누나도 참, 늑대 두 마리가 밤새 술 퍼먹는데 잠은 무슨
잠이야?]
[오, 누나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너는 그러면 퍼질러 잤겠
구나?]
[그야 물론이지. 점심때가 돼서야 일어났으니까.]
박진환은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누나도 뭐 생사의 고비에서 은수 형이랑 모험을 했으니 황
홀경에 빠져 있었겠네, 뭐.]
[뭐야?]
박봉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얼굴은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흠흠, 그럼 진천 안정아씨 집에 가서 신세를 좀 질까.]
박봉순이 결론을 내렸다.
[아인슈타인 연애하는 데 우리가 들러리 서주는 것 아닌가?
후후후.]
박진환이 안수인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 네 명은 대책본부에서 내준 차편으로 진
천 안정아의 집으로 들어가 민박을 시작했다.
그 집은 방이 세 칸밖에 없는 시골집이라 모든 식구가 함께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집 주인인 안정아와 그의 남편은 이
웃집 빈 방에 가서 잠만 자기로 했다. 방 하나는 박봉순이
쓰고 하나는 민은수, 그리고 하나는 박진환과 안수인이 같
이 쓰기로 했다.
안주인인 안정아는 불안하면서도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않
았다. 안수인이 다시 자기 집에서 당분간 묵게 되었다는 것
이 더없이 흐뭇한 일로 생각되는 것 같았다. 집 안에서 그
와 마주치는 눈길에서 한없는 사연을 주고받는 것처럼 느껴
졌다.
안정아의 집은 진천 읍내에 있으면서도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농촌 마을이나 진배없었다.
도자기 공장에서 경리일을 보고 있는 주인 최병길씨는 말이
경리지 그 공장의 온갖 허드렛일을 다했다. 그 중에도 수금
하러 도시에 나다니는 일이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민은
수 일행이 온 이튿날도 최병길씨는 부산으로 수금을 나갔
다.
남편이 집 안에 없자 안정아는 신이 난 듯 하루 종일 싱글
벙글 웃으며 안수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호박잎을 살짝 데쳐 만든 쌈에 된장찌개와 풋고추 등으로
마련한 저녁상을 마당 평상 위에 차리고 주인과 손님이 둘
러앉았다.
[야! 참 오랜만에 보는 저녁상이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 처
음 보는 밥상인데.]
박진환이 평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며 말했다. 모두
가 둘러앉아 풋풋한 시골의 맛을 즐겼다.
밥을 먹으면서도 안정아와 안수인은 서로 눈을 맞추며 의미
있는 행복한 웃음을 주고받기에 바빴다. 박봉순은 그 모습
을 훔쳐보면서 그들의 안타까운 사랑이 가슴아팠다.
[안씨는 본이 여러 갠가.]
박봉순이 그들의 장애물 중 하나인 동성동본을 생각하며 물
었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박
봉순은 자기가 공연한 말을 꺼낸 것 같아 후회스러웠다.
[아 그거 말입니까.]
안수인이 얼른 눈치를 채고 말을 받았다.
[안씨는 흔한 성이 아닌데 뜻밖에도 본이 여덟도 넘습니다.
안가가 장가를 들면 안 서방, 안 서방 하는 통에 시집
을 왔어
도 제 서방이 아니란 뜻이죠.]
[하하하 그거 그렇군.]
민은수도 웃으며 분위기를 바꾸는 데 협력했다.
[안가의 본관은 광주, 경기도 광주 말입니다. 순흥, 안산,
제천, 주천, 죽산, 태원, 탐진 등이 있지요. 나는 탐진 안
가입니다. 한자로는 탐난다는 탐(眈)자에 나루라는 진(津)
자지요.]
[안정아씨두.]
민은수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
다. 그의 얼굴에는 슬픈 그림자가 엷게 깔렸다.
[우리 탐진 안가들의 본향은 전라남도 강진군에 있는데, 우
리 증시조 안자 의(義)자 되는 분이 임란 때 꽤 공로를 세
웠다고 합니다. 그 어른은 손홍록(孫弘錄)이라는 사람과 함
께 전주 사고(史庫)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조의 왕조실록과
역사어용(曆史御容) 등을 내장산 용굴암에 숨겨놓고 1년 이
상이나 목숨을 걸고 그것을 지켰다고 합니다.]
[탐진 안씨는 전국에 몇 명이나 있어요.]
민은수가 물었다.
[공식 통계를 보면 1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안정아가 대답했다.
[그것밖에 안 돼? 4천만 중에 만 명밖에 안 되는 그렇게 희
귀한 사람들이 이렇게 만났단 말이야.]
박진환이 안수인과 안정아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들이 저녁을 먹는 사이 어느새 달이 중천에 떠올랐다. 안
정아는 달을 보면서 안수인에게 처음 몸을 열어주던 그 밤
을 떠올렸다.
그날밤 민은수는 자청해서 자기가 이웃집에 얻어둔 방에 가
서 자겠다고 고집했다.
[이 집 안주인이 이 집에 자야 합니다. 우리는 객이니까 아
무 데서나 자도 됩니다. 오늘밤엔 정아씨가 안방에서 자기
로 해요.]
민은수의 고집을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정아
는 안방, 박봉순은 건넌방, 그리고 박진환과 안수인은 사랑
방에 들었다.
사람들은 각각 자기 방에 들어가 자리에 누운 뒤에야 민은
수가 왜 그 집에 가서 자겠다고 고집했는가를 알고 무릎을
쳤다.
[야! 수인아 자니.]
나란히 한방에 누운 박진환이 안수인의 다리를 툭툭 찼다.
[아니, 왜.]
[야, 능청떨지 말고 안방에 가봐.]
[뭐라구.]
[능청떨지 말랬잖아. 은수 형이 왜 옆집에 가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렸는지 이제 알겠어.]
[왜.]
[고집 부리지 말고 선배 말 들어. 나만 아는 걸로 할 테니
까 지금 슬그머니 나가.]
박진환이 안수인을 떠다 밀다시피 했다. 안수인은 못 이긴
체 하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이 하얀 달빛을 받아 흰 광목을 깔아놓은 것 같았다.
안수인은 달빛을 밟고 안방으로 갔다. 가만히 방문을 열었
다. 방 안에 있는 정아는 잠이 들었는지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정아씨.]
수인이 나직이 불렀다. 그러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수인은
옷을 벗고 정아 옆에 가만히 누웠다.
[사랑해요.]
그때 갑자기 안정아가 돌아누우며 안수인을 와락 껴안았다.
[아니 자지도 않으면.]
정아의 뜨거운 입술이 수인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수인의
한 손은 정아의 젖가슴으로 또 한 손은 황급히 그녀의 아랫
도리에 있는 장미밭으로 들어갔다.
6. 이상한 목소리
정아는 수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그
를 끌어안았다.
[정아씨.]
수인이 정아의 비밀한 곳을 모두 쓰다듬으며 신음을 토하듯 말
했다.
[응.]
정아도 신음을 토하듯 응답하고는 그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수
인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정아의 옷을 난폭하게 벗기려 들었
다. 너무 급히 서둘러서 그런지 좀체 벗겨지지 않았다.
[잠깐만 내가 할께.]
그녀는 수인의 손을 잡고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그러나 수인
의 한 손이 그녀의 아랫도리를 헤집고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잠깐만.]
그녀가 다시 엉켜 있는 수인의 손을 떨쳐내고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급하게 서둘던 조금 전과는 달리 침착하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 웃옷을 벗고 헝클어진 채 허리에 매달려 있는 브래
지어를 풀어내자 그녀의 가슴 윤곽이 선명히 드러났다. 창문에
비추는 달빛이 역광이 되어 그녀의 가슴을 실루엣으로 보이게
했다. 가장자리에 윤기가 흐르는 그녀의 가슴 실루엣은 어느
화가의 판화처럼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비쳤다. 그녀는 앉은 채
이번에는 슬립과 팬티를 벗었다. 볼륨이 적당한 히프의 실루엣
도 고운 곡선을 이루었다. 누워서 옷 벗는 여인의 모습을 창문
에 스며드는 달빛과 함께 감상하고 있던 수인의 마음은 조금
전과는 달라졌다.
정아를 향해 불꽃처럼 타오르던 정념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
고 깨끗하고 순수한 꽃 한 송이를 감상하는 것 같은 심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의 육감적인 육체를 깔고 타오르는 욕정
을 한껏 발산해야겠다는 욕망은 갑자기 눈 녹듯 사라졌다.
[정아씬 정말 아름다워요.]
정아가 완전한 나신이 된 채 수인의 곁에 누우려고 했다.
[가만.]
수인은 나신의 정아를 받아드릴 태도는 취하지 않고 그녀의 동
작을 멈추게 했다.
[저기, 방문 앞에 가서 서 보아요.]
수인이 엉뚱한 주문을 했다. 정아가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머
뭇거렸다.
[좀 일어서 보라구요. 조각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요.]
[뭐라구요? 조각? 호호호.]
정아는 그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녀는
일어서서 창문 앞에 섰다. 가느다란 목에서 흘러내린 곡선이
끝이 쳐진 어깨를 지나 볼륨 넘치는 가슴, 그리고 급하게 빠진
허리로 이어졌다. 실루엣 선은 갑자기 우렁차게 쏟아지는 폭포
를 연상하게 하는 펑퍼짐한 히프로 이어졌다. 그녀가 머리를
흔들자 긴 머리카락이 달빛을 털어내며 하늘거렸다.
[아름다워.]
수인은 누운 채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인씨 여기 와봐요. 아름다운 건 창 밖이에요.]
정아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달빛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수
인이 천천히 일어나 그녀 곁으로 갔다. 함께 창 밖을 내다보았
다.
하얀 달빛이 온 천지를 덮고 있었다. 푸른색이 무성하던 활엽
수들도 흰색으로 보였다. 멀리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들녘, 그
리고 그 너머의 얕은 산들도 모두 낮에 보던 색깔이 아니었다.
정아는 나신으로 곁에 서 있는 수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
리고 부드러운 입술로 그의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수
인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젖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숨결이
다시 가빠졌다. 그녀의 손이 수인의 아랫도리를 더듬었다. 흥
분으로 손가락이 떨렸다.
[수인씨.]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그녀는 마침내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수인을 안고 방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은 열어둔
창문으로 넘치듯이 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마침내 완전한
이심일체를 이루었다.
[정아씨.]
[응.]
달빛은 두 번씩이나 아래 위 자세가 바뀐 두 사람의 등에서
부셔져 나갔다.
이튿날 아침 마당 평상 위에 아침 밥상이 차려졌다. 안정아
가 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부엌과 마당을 드나들며 손님
밥상을 차렸다.
[와아! 멋있는데.]
동네 앞 개울에 나가 세수를 하고 들어온 박진환이 평상 위
의 밥상을 보고 감탄했다. 풋고추와 된장, 호박잎 쌈이 그
의 구미를 돋우었다.
박진환, 민은수, 안수인, 박봉순이 평상 위에 둘러앉았다.
[정아씨도 빨리 와요.]
박진환이 먼저 숟가락을 들고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곧 안
정아도 함께 둘러앉았다.
[어느새 이렇게 잘 차렸어요? 어젯밤엔 고단했을 텐데
새벽 잠도 못 주무시고.]
박진환이 안수인과 정아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심술궂은 웃
음을 흘렸다.
[아이 박 선생님도.]
정아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다.
[두 사람 결혼식은 언제 올릴 거예요.]
박봉순이 웃으며 말했다. 개한테 물린 상처는 이제 딱지가
앉은 곳도 많았다.
[결혼이라구요.]
갑자기 안정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안수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아씨는 남편이 있는 몸입니다. 그뿐 아니에요. 법이 가
로막고 있어요.]
박봉순은 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적당하지 못한 화제를 꺼
냈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이야기 나온 김에 좀 해두자는 듯
안수인이 말했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장애를 받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소위
동성동본 결혼 불허라는 민법 809조 1항입니다. 뭐 사랑에
는 국경이 없다구요? 그건 남의 사정 모르는 사람들의 헛소
리랍니다.]
[동성동본도 용인하는 경우가 과거에 있지 않았어요.]
박봉순이 안수인을 동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말했다.
[지난 정초에 정부의 어느 책임 있는 장관이 동성동본 폐지
를 주장한 일이 있지요. 유림 등의 반대가 거셀지도 모르지
만 공청회 등을 열어 개정하는 방향으로 하겠다고 했지만
그게 어느 세월에 됩니까?]
[금혼은 10촌 이내로 제한하도록 고친다는 것이 여당의 방
침이라고 한 것을 신문에서 본 것 같은데.]
부지런히 숟가락질을 하고 있던 민은수가 거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 나라는 그런 것을 법으로 만들어놓
고 난리야? 우생학적 어쩌구 하면서 말이야.]
박진환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 나라도 고려 때까지는 동성동본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고려 말에는 근친혼이 사회문제로 대두
되자 조선조에 들면서 이것을 금지하게 되었지요.]
안수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선조의 숭유(崇儒)사상과 맞아떨어진 셈이지.]
박진환이 거들었다.
[법률로 나타난 것은 1958년 12월 현행 민법의 개정 때였
죠. 원래 동성동본의 금혼제도는 중국 주나라 때 부족간의
세력다툼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해요.]
[아니 세력다툼을 하자면 오히려 권장해서 인구를 늘여야
할 텐데.]
박진환이 안정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주나라의 각 부족들은 1백 리 내의
혼인금지라는 제도를 만들어 신부를 구하기 위해 1백 리 밖
의 부족을 항복시키는 수단으로 택했지요. 약탈혼의 일종이
라고 할까.]
[그럼 중국에는 지금도 동성동본.]
민은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안수인이 대답을 했다.
[중국에서는 이미 80여 년 전에 8촌 이내만 금혼한다는 것
으로 바꾸었지요.]
안정아는 그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앉
아 있었다.
[그러면 현재 우리 나라에 그 법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
은 얼마나 되나요.]
민은수가 다시 정아를 보고 물었다.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지요. 하지만 지난 78년과 88년 두
차례에 걸쳐 한시적으로 동성동본의 혼인신고를 받아준 적
이 있습니다. 그때 신고한 사람이 78년에는 5천 명, 88년에
는 1만5천여 명이었습니다.]
[민법을 고치기 위한 무슨 추진 단체 같은 것은 없나요.]
박봉순이 물었다.
[91년에 동성동본 금혼 피해자 모임이 생겼어요. 하지만
법이 쉽게 바뀌겠습니까? 당하는 사람의 고통을 그렇게 자
기 일처럼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안정아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결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녀지만 얼굴에는 수수하고 순박한 한국적 여인상
의 이미지가 강력했다.
[결혼을 못 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자살한 남녀
가 수두룩하답니다. 어떻게 수모 아닌 수모를 참고 산다 하
더라도 그 2세들은 미혼모의 아들딸이 되고 말지요.]
[민법 개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민은수가 안수인을 보고 물었다.
[혈통을 중시하는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을 지켜야 한다느
니, 우생학적 견지에서 어떻다느니, 사회질서를 문란시키고
가족제도를 허물어뜨린다느니 어쩌니 하는 것이 이유랍니
다. 그러나 타당성은 거의 없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러나
.]
안수인은 밥 숟가락을 놓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
를 시작했다. 그는 이 법은 위헌이라고 했다. 그것은 부계
혈통만을 중시하여 남녀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했다. 개
인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다.
또한 우생학적 운운하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그것은
근친일 때의 문제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유전학에서는 남녀
가 같은 조상의 유전자를 공통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을 때
기형아 출산, 사산 등의 확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문제의 공통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비율은 3촌
간에는 8분의 1이고 4촌 간에는 16분의 1, 10대 손끼리는
10만분의 1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물며 수십 대를 내려온 남녀야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안수인의 설명을 들은 일행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
거운 분위기가 아침상 주변에 내려앉았다.
[자, 우리 그 일은 잠시 접어두고 오늘같이 화창한 날 무엇
을 할 것인지 의논이나 하지.]
민은수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새 제안을 했다.
[은수와 정아씨는 나무그늘 아래서 낮잠이나 푹 자고 싶을
걸 어젯밤 같은 천재일우의 기회에 그냥 두 사람이 껴
안고 잠만 잤겠어.]
박진환이 노골적으로 놀리기 시작했다. 원래 성질이 활달하
고 낙천적인 그는 주책이 없을 정도로 아무 말이나 마구 하
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틀 동안 바깥주인 없는 집에서 법석을 떨며 보냈
다. 이틀 뒤 돌아온 안정아의 남편 최병길은 처음엔 별로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나 사흘째 되는 날 태도가 완전
히 달라졌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그는 조
용히 아내 안정아를 동네 앞 냇가의 정자로 불러냈다.
[여기 좀 앉아요. 내 묻는 말에 똑똑히 대답해야 돼.]
그는 평소의 온화한 얼굴과는 달리 심각한 표정이었다. 안
정아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정자 바닥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
았다. 이 정자는 안수인과 함께 몇 번인가 정사를 가졌던
곳이다. 남편 몰래 한 짓이라 가슴이 약간 떨렸다. 남편 최
병길이 그것을 알고 이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으리라고는
물론 그녀도 생각지 않았다.
최병길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않고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무겁고 답답한 분위기가 한동안 계속 되었다. 그러나 이 분
위기 속에서 안정아가 먼저 무엇이라고 입을 열 수는 없었
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난 최병길이 먼 산을 바라보며 드
디어 입을 열었다.
[당신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어야 해요. 아니 그전에 내 말
부터 해야겠어. 난 당신을 사랑해. 우리 사이는 어떤 장애
물도 끼어들 수 없어. 어떤 경우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전제를 포기해서는 안 돼.]
그리고 그는 슬쩍 눈을 돌려 안정아의 표정을 보았다. 정아
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운 것처럼 보였다.
[당신 안 박사를.]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다시 정아를 돌아다보았다. 정아는 깜
짝 놀라 눈을 크게 떴으나 곧 올 것이 왔다는 체념의 표정
으로 변했다.
[당신이 안수인을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어. 몇 달 동안 그
사실을 알면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몰라. 당신도 괴로웠겠
지.]
안정아는 가슴에 바위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안수인
과 자기의 관계를 다 알고 있었다니 그러면 왜 그는 아
내의 외도를 보면서 고민만 했단 말인가.
[왜 이제야 그 말을 하느냐고 하겠지. 나도 수십 번이나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 그러나 나는 두려웠어. 당신이 내
곁을 떠날까봐 두려웠다고 하는 것이 옳을 거야.]
그는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불을 켜대
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당신 진짜로 안수인을 사랑하는 거야.]
정아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아내의 탈선
을 알면서 혼자 수습하고 다시 남편 곁으로 오기를 기다리
면서 혼자 고민하고 있었던 남자라면 얼른 생각하면 착하디
착한 남자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정아의 머리를 스쳤
다. 세상의 어떤 남자가 아내의 부정을 지켜보면서 참고 지
낸단 말인가?
[대답 안 해도 좋아. 당신이 대답하지 않는 것은 당신이 내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해. 지금이라도 당신이 그와 관
계를 끊는다면 나는 옛날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복
하게 지낼 수 있어.]
그가 슬그머니 팔을 뻗어 정아의 어깨를 쓸어안았다.
[우리.]
그때 정아의 눈앞에는 안수인의 슬픈 얼굴이 떠올랐다. 지
금이 자기의 의사를 분명히 해두어야 할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랑 나누어본 지 오래 됐지. 오늘밤엔.]
정아가 그의 팔을 걷어내며 말했다.
[당신한테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나도 나를 어쩔 수 없어
요.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난 수인씨의 품에서 도망칠 수 없어
요.]
안정아는 단호한 표정으로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면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야.]
최병길은 절망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측은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정아는 먼 산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인데 차라리 잘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둘일 수야 없는 것이지요. 당신한테는 정말 미안해요.
당신이 싫어진 것은 아니에요. 당신은 좋은 남편이었어요.]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오.]
[나도 모르겠어요. 수인씨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
이 들어요. 이건 수인씨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선택한 일
이에요.]
[그러면 그 사람과 혼인을 하겠다는 뜻인가.]
[할 수만 있다면 아니 어떤 장애라도 뚫고 할 거예요.]
[다시 한 번만 확인하겠어요. 나하고 헤어지지 맙시다.]
최병길이 다시 정아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물기가 어렸
다. 정아는 그 모양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다.
[절 놓아주어요.]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음성은 낮았으나 그 목소리에는 절규
가 담겨 있었다.
최병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고 벌떡 일
어서며 말했다.
[나도 질투할 줄 알고 복수할 줄 아는 평범한 남자야. 사랑이
증오로 변하면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지 각오는 했겠지.]
그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것 같았다. 그는 무슨 일이 닥쳐도
호들갑을 떠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결심하면
무서운 사람이란 것을 정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무서운 결심
을 한 사람 같았다. 안정아는 그가 저지를 일이 무엇인가를 생
각해 보았다.
최병길은 그의 예언대로 가만 있지 않았다.
그 이튿날 안수인과 안정아는 경찰의 호출을 받았다. 최병길이
이혼청구 소송과 함께 간통죄로 두 사람을 고소했기 때문이었
다.
그 집의 식객인 민은수와 박봉순 그리고 박진환은 참으로 난처
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빨리 다른 곳으로 가야 해요.]
박봉순이 민은수를 보고 말했다. 그들은 어차피 거기를 떠나야
만 했다. 구란도 대책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두 사람은 빨리
남해의 대책본부로 내려와 다시 검진도 받고 원인규명 일을 도
와달라는 것이었다.
[박진환씨는 여기 남아서 친구 안수인씨의 일을 돕도록 하고
우리는 남해로 가도록 하지요.]
민은수가 제의했다.
[그게 좋겠어요. 진환이는 여기 남아서 최 선생이 소송을 취하
하도록 잘 설득을 해보아요. 그 일이 잘 안 되면 수인씨는 일단
구속이 되는 불상사가 생기게 되니까.]
그러나 최병길을 설득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모두 알
고 있었다. 결혼을 했건 안 했건 남녀가 좋아하면 함께 잠잘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안정아나 안수인의 주장이
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법은 그것을 중대한 범법행위로 규정
하고 있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이 있는 것이다.
민은수와 박봉순은 다시 그날 오후에 남해의 대책본부에 도착
했다. 그들은 먼저 허진 박사를 만났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오. 아니 내가 무능한 사람이란 것을 절
실히 느끼고 있어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개들이 발작을 일으
켰는지 실오라기만한 단서도 하나 발견하지 못했어요. 구란도
에 대한 역학조사는 가혹하리만큼 철저하게 진행되었는데 모
든 것이 너무나 정상적이었어요.]
허진 박사는 두 사람을 보자 낭패한 얼굴로 자탄을 하고 있었
다.
[개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민은수가 물었다.
[아무 변화도 없어요.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식이야.]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앉아 있던 허 박사가 다시 입을 열
었다.
[대책본부의 수사팀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중대한 일
이 또 하나 생긴 모양입니다. 같이 가볼까.]
그들이 막 일어서려고 할 때 수사팀 요원이 두 사람을 데리러
왔다.
그들은 임시 수사팀 본부로 쓰고 있는 조그만 민가로 갔다. 보
도진의 눈을 피해서 민간인 건물에 수사팀 일부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좀 앉으시지요.]
안면이 있는 수사 책임자가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일이 안 될려니까 별 괴상한 일이 다 생깁니다. 구란도의 괴
사건을 자기가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놈이 다 있습니다.]
수사관이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면서 말했다. 나이 쉰 살쯤 되어
보이는 그는 몹시 피로해진 것 같았다. 형사들이 보여주는 특
이하게 날카로운 인상이라든지, 반짝이는 눈동자 같은 것은 찾
아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한 졸리운 눈에 얼굴
은 주름투성이였다. 날카로운 인상은커녕 복덕방 맘씨 좋은 할
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서울 본청에서 온 추병태 경감이라고 하지요. 살인사건
만 20여 년을 다루어왔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백여 명이 살해된
사건은 처음입니다.]
그는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는 땀을 계속 닦으면서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선생님이 그 유명한 추 경감님이시군요.]
민은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자기가 저질렀다고 하는 자가 도대체 누굽니까.]
[이걸 한번 들어보시지요.]
추 경감이 책상 위에 있는 녹음 테이프를 틀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테이프에서는 목이 쉰 듯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녹음상
태가 나쁜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구란도에서 섬 사람들을 몽땅 죽인 것
은 내가 한 짓이오. 우선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되게 한데 대해
그 사람들의 영혼에게 사죄를 드립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
을 위해서는 작은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
이하 정부 고위층 여러분 그리고 입법 활동을 하는 국회의원,
정치인 여러분, 이 나라의 사회지도층 인사, 지식인 여러분.
내가 구란도의 개들을 시켜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나는 앞
으로 어떤 곳에서든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
분들이 앞으로 요구할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전국 어디
서든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마십시오. 신은 인간의 의견을 물어보고 구원하
러 오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어떻게 그
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은 신이나 신의 허락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럼 다음에 다시 내 요구사항을 이야기하겠습니다. 푸른 셔츠
로부터.]
녹음은 거기서 끝났다.
[이거 정신병자 아닌가요.]
민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테이프는 어떻게 전달되어 왔습니까.]
박봉순이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책본부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몇 시에 전화를 할 테니 녹
음준비를 해놓으라고 한 뒤 그 시간에 이 전화가 걸려왔습니
다.]
추 경감이 설명했다.
[목소리를 변성한 것 같은데.]
민은수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송화기를 헝겊으로 싸고 말을 했기 때문에 그렇
게 들린 겁니다.]
[그럼 어디서 전화를 걸었다는 것은 알 수 있겠군요.]
[물론입니다. 그 자가 쓴 전화는 이동무선 전화기였습니다. 번
호까지 추적을 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남해에 휴가차 온 어느
중소기업 사장 차에 있던 전화기였습니다. 범인은 그 전화기를
훔쳐가지고 가서 전화를 했습니다. 건 장소가 어딘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자동차를 자세히 조사해 보
았지요. 하지만 범인이 그런 곳에 지문을 남겨 놓았겠습니까.]
추 경감이 새 담배를 입에 물고는 켜지지 않는 지포 라이터를
계속 철거덕거리며 말했다.
[장난친 게 아닐까요.]
박봉순이 의견을 말했다.
[장난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선 계획적으로 남의 핸드폰을
훔쳐 추적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과 필터를 이용해 목소리를 숨
기려고 한 점을 볼 때 단순한 장난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
니다.]
[목소리 감정은 해보았나요.]
박봉순이 다시 물었다.
[물론입니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남자, 서울 태생, 고
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 등을 알아냈습니다. 여러분을
모신 것은 이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은 것 같지 않느냐 하는 것
입니다.]
[변성을 시켜놓았으니 알 수가 있어야죠.]
박봉순이 앞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따르며 이야기했다. 팔에
감았던 붕대는 이제 풀었다.
[여기 필터를 조금 걸러낸 목소리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들
어보시겠습니까.]
추 경감이 다시 다른 테이프를 틀었다. 먼저 목소리보다는 훨
씬 선명했다.
7. 두번째 비극
[목소리에는 성문(聲紋)이라는 것이 있어서 사람마다 특징
이 있잖아요.]
박봉순이 허진 박사를 보고 물었다.
[그렇지.]
[그렇다면 사람의 목소리를 모두 주민등록번호나 지문처럼
등록시켜 놓았다가 이럴 때 쓰면 금방 누군지 찾아낼 텐데
.]
박봉순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말끝이 흐려지는 것으로 보아
자기가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지문 하나만도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느니 안 했느니 하는
판인데 이제 목소리까지? 그런 끔찍한 생각 좀 안 할 수 없
어요.]
민은수가 추 경감과 박봉순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
[우리 수사관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박 선생 말이 맞지요.
허허허.]
그러나 추 경감의 얼굴 표정은 전혀 웃는 모습이 아니었다.
이 협박전화는 일선 수사관들의 생각과는 달리 고위층에서
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박봉순이나 민은수
가 혹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낼까 해서 불렀으나 많이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듣는 것 같기도 하다는 그들의
아리송한 진술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사정이 조금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자기가 했다고 주장하는 범죄치고 진짜 자기가 하는 경우
는 거의 없어요. 아무래도 제정신 아닌 놈이 장난을 친 것
같아. 글쎄 말이 되는 소리야? 지가 무슨 견공들의 대부라
고.]
수사 본부장은 추 경감의 의견과는 전혀 달랐다. 처음부터
그는 이 협박전화를 장난으로 보고 있었다.
[큰 사건이 나면 으레 뒤따르는 장난이야. 한두 번 겪어보
았나.]
민은수와 박봉순은 수사실을 나와 임시 하숙집인 바닷가의
민가로 걸어갔다. 사건 초기처럼 보도진이 그렇게 기를 쓰
고 따라붙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해변에 나섰을 때는 바다 끝에 지는 낙조가 장관
을 이루고 있었다. 선홍빛과 주홍색 그리고 노란색이 조화
를 이룬 바다의 낙조는 민은수의 가슴을 감동시켰다.
[자연이란 참 감동적이지. 누가 저 낙조 같은 예술품을 만
들어낼 수 있겠어요.]
민은수가 박봉순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며 말했다.
[우리 저기 조금 쉬었다가 가요.]
박봉순이 바닷가의 좁다란 모래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야 기자들이 없겠지.]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비탈을 내려갔다. 모래사장에 내려서
자 민은수는 박봉순의 손을 꼭 쥔 채 다시 낙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여기 앉아.]
박봉순이 그를 모래사장에 끌어앉혔다. 그녀는 옷에 모래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정아씨와 수인이는 어떻게 될까.]
박봉순이 리드미컬하게 들리는 파도소리를 한참 즐긴 뒤 말
했다.
[사랑의 열매는 달콤할 때보다는 쓸 때가 더 많다고 했지
.]
[누가 그랬는데.]
[민은수.]
[엉터리.]
[하하하.]
박봉순이 민은수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우리도 씁쓸한 열매 한번 만들어볼까.]
민은수가 갑자기 박봉순의 어깨를 쓸어안고 모래사장에 나
뒹굴었다.
[아니.]
전신이 모래투성이가 되었으나 박봉순은 가만히 있었다. 구
란도의 산 위에서 갑자기 그녀를 끌어안던 민은수의 돌발
행동이 다시 발동을 한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모래 위를 뒹
굴던 두 사람은 모래가 목덜미로 허리춤으로 들어와 껄끄러
워진 뒤에서 일어나 앉았다.
[모래가 배꼽에까지 들어왔으니 어떻게 하지.]
민은수가 목에 묻은 모래를 쓸어내면서 말했다.
[난 더해.]
박봉순이 일어서서 치마를 훌훌 털기 시작했다.
[우리 바다에 들어갈까.]
[수영복도 없는데.]
박봉순이 웃으며 말했다.
[이대로면 어때.]
민은수가 갑자기 박봉순의 손을 잡고 바다로 뛰어들어갔다.
노을이 비쳐 그새 바닷물은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
다. 두 사람은 옷을 입은 채로 주홍빛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바닷물이 무르팍을 넘어 엉덩이까지 왔다. 잔잔한 파
도가 이내 그들의 가슴을 간지럽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즐
겁기만 했다. 이번에는 파도가 곧 그들의 목을 간지럽혔다.
그들은 주홍빛 파도와 함께 물 속으로 넘나들며 장난을 쳤
다. 동네 개구쟁이 시절이 생각났다. 민은수는 박봉순의 겨
드랑이를 간지럽히려고 애를 썼다.
[아이 이러지 마.]
박봉순이 민은수의 팔을 막으려다가 그의 가슴을 끌어안고
말았다. 민은수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찝찔한 바
닷물이 입 속으로 스며들었다.
[무슨 키스 맛이 이렇게 짜지? 호호호.]
박봉순이 그로부터 도망치면서 웃었다. 물 속에서 장난을
치던 그들은 이상한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모래사장을
흘깃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모래사장과 부둣가에 서서 아우성을 치고 있
었다. 그들은 모두 물 속에서 엉겨붙어 있는 두 사람을 향
해 무어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남자 서너 명은 물 속에
뛰어들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민은수와 박봉순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빨리 건져. 빨리.]
모래사장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 아우성 속에서
이런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저 사람
들이 왜 아우성을 치는지 알았다.
두 남녀가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 하거나, 조난을 당한 것으
로 생각한 것 같았다.
[빨리 붙잡아요. 쯧쯧쯧.]
그때 물 속까지 다가온 청년 네 명이 민은수와 박봉순의 양
팔을 움켜잡고 바닷가로 끌고 나갔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팔 아파요. 좀 놓으세요.]
박봉순이 소리를 쳤으나 그들은 들은 척도 않고 그녀를 모
래사장으로 끌어냈다.
두 사람은 끌려나오며 오해를 받을 만도 했다고 생각했다.
두 남녀가 옷을 입은 채로 바닷속에 뛰어들어 서로 부여잡
고 물 밑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했으니까 조난당한 사람 아
니면 자살하려는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황
혼의 바다에서 정사(情死)하려는 남녀로 보이는 것이 무리
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모래 위에
주저앉았다. 둘러선 사람들이 모두 한마디씩 했다.
[그만하기 다행이지.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우선 살아놓고
볼 일이야.]
늙수그레한 아주머니가 동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못된 젊은이들 같으니라고. 보아하니 이 동네 사람들도 아닌
데 어디 죽을 곳이 없어서 여기 와서 뒈진단 말이야.]
나이 환갑은 지난 것처럼 보이는 할아버지가 악담을 퍼부었다.
[무슨 일이야? 모두 좀 비켜요.]
어느새 왔는지 정복을 입은 순경 두 사람이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와 모래 위에 앉아 있는 민은수와 박봉순을 보았다. 물에
빠진 생쥐 모양이라고 하더니 꼭 그런 형상으로 두 사람이 고
개를 숙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너무 졸지에 당한 일이고 창피
해서 변명도 할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아니 당신들은.]
경찰관들은 두 사람이 구란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란 것을 금
방 알았다.
[어찌된 일이오.]
그 중 키가 작달막한 경관이 민은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물었
다.
[미안해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바닷물에 옷 세탁 좀 하
려고.]
박봉순이 얼버무렸다.
[좌우간 저쪽으로 좀 들어가 옷이나 갈아입어요.]
경찰관은 두 사람을 부축해서 가까운 횟집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선 두 사람은 그제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
다.
[이게 무슨 창피야.]
민은수가 어깨를 치켜올리고 양손을 펴보이며 말했다. 서양
사람들의 제스처를 흉내낸 것이었다.
[호호호 모두가 낙조 때문인 것 같은데. 호호호.]
[낙조? 하하하.]
민은수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곁에서 보고 있던 두
경찰관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색시 우선 이 옷이라도 좀 갈아입으시구료. 쯧쯧쯧.]
횟집 아주머니가 여자 옷가지들을 들고 와서 방 안의 사람
들을 둘러보다가 박봉순을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민은수도
그 집 남자의 헌 옷을 빌어 갈아입었다. 그 동안에 경찰관
한 사람은 카운터에 있는 전화를 붙잡고 상부에 보고하느라
바빴다.
[네. 틀림없이 보건지소 박 선생과 그 집 손님 민 선생입니
다. 그렇습니다. 바닷물에 옷을 입은 채로 들어가 자살
하려는 것으로 봐서 지금도 낙조가 어떻고 하면서
아직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광견병이 정신질환을 불
러 일으킨 것이 아닐까요? 빨리 대책본부로 모시고 가야 한
다구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다시 경찰차에 실려 대책본부 역학
조사반에 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거기에는 허진 박사가 어느 틈에 와 있었다. 그리고 박봉순
도 잘 아는 국립 정신병원에서 파견된 한 박사도 있었다.
민은수와 박봉순은 자초지종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이 오해를 한 것이다, 이 말이군.]
허 박사가 안도하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자네들이 발작을 일으킨 줄 알았어. 미친 개의 바
이러스가 뇌에 침투한 것이나 아닌가 하고 말이야.]
[미친 개한테서 바이러스가 검출되었습니까? 선생님.]
박봉순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물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소동은 그것으로 끝나고 두 사람은 다시 정해진 민가의 숙
소로 돌아왔다.
[창피는 당했지만 우리 둘이 정사를 하려고 했다는 것은 기
발한 착상인데.]
늦은 저녁밥을 먹고 난 민은수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박봉순을 보고 말했다. 그녀는 전혀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블라우스와 폭이 넓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옷 매무새나
색깔이 촌티가 줄줄 날 뿐 아니라 중년 여인의 냄새까지 풍
겼다. 횟집 아줌마 옷을 임시로 빌려입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한 일이네. 아이 속상해. 하필
이면 처녀가 정사라니.]
그때였다. 집 주인 아저씨가 대청마루로 뛰어나왔다.
[선생님! 큰일났어요.]
그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반바지에 웃옷은 아예 러닝 셔츠도
입지 않은 맨살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박봉순이 그를 쳐다보기가 민망스러워 고개를 돌린 채 물었
다.
[글쎄, 구란도 사건이 또 났어요.]
[예? 구란도에서 또 개가.]
[그게 아니고 이번에는 뭍에서 났어요. 조금 전에 텔레비전
보니까.]
그는 숨이 차서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뭍에 어딥니까.]
민은수가 텔레비전이 있는 안방으로 쫓아가려다 말고 물었
다.
[충청도라 합디다.]
그때였다. 안방 아주머니까지 뛰어나왔다. 그녀도 내복 차
림이었다.
[선생님요, 전화 왔어요. 빨리 본부로 나오라 그러네요.]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 커다란 유방이 덜렁거렸다. 그러나
그녀도 충격을 받아 자기가 지금 어떤 차림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민은수와 박봉순은 뛰다시피 대책본부가 있는 군청으로 갔
다. 그곳에는 벌써 경찰청에서 내려온 김명호 차장 주재로
간담회가 열리고 있었다. 허진 박사도 와 있었다.
[선생님, 어떻게 된 일이에요.]
박봉순이 허 박사를 보고 물었다. 허 박사는 박봉순의 이상
한 옷차림을 보고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충청남도 당진군이야. 구란도와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어
요. 다른 점이 있다면 새벽이 아니라 저녁에 일어났다는 것
뿐이야.]
[그러니까 그 푸른 셔츠의 협박이 거짓이 아니라고.]
팔짱을 낀 채 벌레를 씹은 듯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던
김명호 차장이 불쑥 내뱉었다.
[희생된 사람이 모두 몇 명이나 된대요.]
민은수가 낯익은 수사요원을 보고 물었다.
[오늘저녁 7시께 일어난 사건이라서 아직 자세한 것은 잘
모릅니다. 당진군에 있는 어느 산골 마을인데 그곳 인구는
한 백 명쯤 된다고 합니다.]
그는 계속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어쨌든 빨리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김명호 차장이 또 퉁명스럽게 말했다.
[차량 준비되었습니다.]
그때 경찰 정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와 김 차장에게 차렷자
세로 보고했다.
[그럼 모두 가시죠.]
김명호 차장이 벌떡 일어서서 나갔다.
[우리도 가야 합니까.]
민은수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물었다.
[현장 목격자들이 안 가면 누가 가요.]
김명호 차장이 여전히 볼멘목소리로 말했다. 군청 마당에는
승용차가 7, 8대나 준비되어 있었다.
박봉순은 허 박사와 한 차를 탔다. 집에 핸드백을 가지러
갈 시간도 없었다. 민은수는 추 경감과 함께 수사본부 요원
들의 차를 탔다. 그는 군청 문을 나서며 시계를 보았다. 10
시를 훨씬 넘고 있었다.
[그 마을은 어떤 곳이에요.]
같은 차에 탄 네 사람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답답
하게 보여 민은수가 입을 열었다.
[당진에서 서산 쪽으로 가는 39번 국도로 가다가 북쪽으로
25킬로쯤 떨어진 곳에 있는 외딴 마을이라고 하더군. 마을
이름이 구본리라던가.]
추 경감이 자신없는 듯이 말했다.
[구본리가 아니고 구반리라고 했어요.]
운전을 하고 있는 젊은 수사관이 거들었다. 그의 운전 솜씨
가 거칠어 민은수는 몇 번이나 자동차 천장에 이마를 받았
다.
[구반리? 개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뜻인가? 구란도와 무슨
관계라도.]
추 경감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 만약에 한자로 개 구(狗)자, 반란 일으킬
반(叛)자를 쓴다면.]
민은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동네 이름에 개 구자를 쓰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운전하던 청년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거들었다.
일행은 밤새도록 국도를 달려 이튿날 새벽녘에야 동네입구
에 닿았다. 길을 잘 몰라 동네를 지나쳤다가 되돌아오기도
했다. 구반리는 39번 국도에서 좁은 비포장 도로로 한참 들
어갔다. 큰 산도 없는 지형인데 동네는 산 속에 묻혀 있었
다. 동네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비포장 도로인 이 길뿐이라
고 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주머니처럼 생긴 마을이었다. 그
비포장 도로만 막으면 동네를 드나들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훤하게 밝은 새벽에 일행은 비극
의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현지 경찰이 수습에 나서고 있었지만 처참한 모습
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박봉순과 민은수는 다시 구란
도의 생지옥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우선 코를 찌르는 비릿한 피냄새가 그들의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동네 이곳 저곳에 처참하게 찢긴 시체들이 엉겨
있었다.
현지 경찰들이 시체를 대강 치웠다고 하지만 아직 담 밑이
나 논두렁에 사지가 찢긴 채 널브러져 있는 부녀자와 어린
아이의 시체가 많았다.
[이건 구란도보다 더 지독하군.]
추 경감이 코를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여기 개들은 모두 어떻게 했어요.]
[경찰관이 모두 체포했나 봐요.]
[체포? 후후후.]
[아니, 이 판국에 웃음이 나와.]
박봉순이 민은수에게 핀잔을 주었다.
[너무 기가 막히면 웃음이 나오는 법이야.]
그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옹기종기 처마를 맞대
고 있는 시골 마을은 더없이 평화롭게 보였다. 그런데 이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에 이 무슨 재앙이란 말인가?
남해 대책본부에서 온 일행은 그곳의 임시 지휘부가 있는
마을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침통한 표정의 공무원들
과 경찰관들이 앉아서 대책회의를 열고 있었다.
[제가 당진 경찰서장 맹도열입니다.]
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점퍼 차림의 늙수그레한 사나이가 벌
떡 일어나 김명호 차장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김명호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허 박사도 따라 앉았다.
좁은 마을회관이 거의 서 있는 사람들로 찼다.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맹도열 서장은 잠시 입을 열지 않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입
을 열었다.
[사망자는 모두 79명입니다. 아니 새벽 7시 현재까지 확인
된 사망자입니다. 생존자는 다섯 사람이 있습니다. 마을 주
민이 모두 88명이니까 아직 행불이 네 명입니다. 아마도 사
망한 걸로 추측됩니다.]
[사건 경위를 얘기해 보시오.]
김명호 차장이 담배 한 개비를 물자 맹 서장이 재빨리 라이
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예.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어제 저녁 6시께
부터 갑자기 동네 개들과 사육장 개들이 미치기 시작해 닥
치는 대로 사람을 물어죽이기 시작해서 7시께는 동네 사람
들이 거의 전멸을 했습니다.]
[사육장이란 무얼 말하지요.]
허 박사가 물었다.
[예. 이 마을에 있는 한 농가에서 보신탕용으로 개를 사육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육장엔 개가 몇 마리나 있었나요.]
김 차장이 물었다.
[백 마리가 넘는다고 합니다.]
[가두어서 기르지 않았나.]
[물론 가두어 두었습니다만 그놈들이 미치자 울타리는 있으
나 마나였답니다.]
[개들은 어떻게 했소.]
백여 마리는 사살했고 나머지는 체포해서 가두어 두었습니
다.
개를 체포했다는 말을 듣자 민은수는 참지 못하고 쿡쿡 웃
었다.
[생존한 사람을 한 사람 데리고 올 수 있겠소.]
허 박사가 맹 서장을 보고 물었다.
[물론입니다.]
맹 서장의 지시를 받은 경찰관이 곧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
고 있는 청년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는 아직도 제정신
이 아닌 것 같았다.
김명호 차장이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주고 불을 붙여주었
다. 청년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
다. 한참 만에 그는 정신을 좀 가다듬은 것 같았다.
[처음부터 생각나는 대로 얘기를 좀 할 수 있겠나.]
김명호 차장의 말을 듣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
을 열기 시작했다.
8. 터키 행진곡의 비극
제 이름은 정홍길이라고 합니다. 영농 후계자라고 사람들
이 말합니다. 1960년생입니다. 올해 만으로 서른네 살이지
요.]
김명호 경찰청 차장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생존한 청년이라는 정홍길은 입을 열어 우선 자기
소개부터 했다. 이마가 훌렁 벗겨져 그를 나이보다 훨씬 늙
어 보이게 했다. 햇볕에 적당히 그을은 피부와 두툼한 목이
퍽 건강하게 보였다. 그러나 지성적인 얇은 그의 입술은 그
를 천박한 무지렁이로 보이지 않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
다. 그는 비오듯 쏟아지는 얼굴의 땀을 손바닥으로 훔쳐냈
다.
[결혼은 했나.]
김명호 차장이 물었다.
[예. 하지만 독신입니다. 이혼을 했거든요.]
[이혼.]
[예. 농촌 총각 장가 보내주긴지 뭔지 하는 걸로 결혼을 했
는데 글쎄 도시 여자가 농촌에 와서 사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그건 그렇고 어젯밤 상황을 좀 설명해 주게나.]
맹 서장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저녁 7시쯤이었을 것입니다. 동네에서 개들의 아
우성 소리가 처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더니 다음엔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
습니다. 사람들이 개를 때려잡는 줄 알았습니다. 한 30분
지난 뒤 가보니까. 아 글쎄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고
개들은 코를 킁킁거리며 어슬렁거리고 있었어요.]
그는 연방 목덜미까지 타고 내려온 땀을 씻기에 바빴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있었단 말이오.]
옆에 있던 추 경감이 질문을 했다. 그는 추 경감을 흘깃 보
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해 봐요. 그 시간에 어디에 있었길래 마치 딴 동네
에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김명호 차장이 거들었다. 청년은 아주 난처한 듯한 표정이
었다. 그러나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뒷산 범바위에 있었습니다.]
[뒷산 범바위.]
[예. 마을 뒤 개울가에 크고 넓적한 바위가 있는데.]
[거긴 왜 갔어요? 그리고 마을에서 아우성이 났는데 30분이
나 그 바위 위에 있다가 내려왔단 말이오.]
추 경감이 말이 안 된다는 투로 따졌다.
[.]
청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좋아요. 그건 그렇고, 개들이 발작을 하기 전에 마을에 무
슨 이상한 징조는 없었어요.]
김명호 차장이 물었다.
[이상한 징조요? 글쎄요.]
[개들이 발광을 시작한 것이 7시께라고 했는데 어떻게 시간
을 정확히 알 수 있었지.]
추 경감이 물었다.
[마을회관 방송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우리 마
을도 딴 새마을처럼 저녁 6시30분부터 20분간 마을방송을
하거든요. 마을에 알리는 공지사항 내일 해야 할 일 등을
마친 뒤 새마을 노래를 끝으로 방송을 마칩니다. 그런데 어
제는 마지막에 새마을 노래가 아니고 행진곡을 틀던데요.]
[행진곡? 터키행진곡.]
추 경감이 눈이 둥그래져서 물었다.
[예. 그건 보통 아침 방송에 트는 것인데 새벽녘에 마
을회관 스피커에서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터키행진곡을 들으
면서 눈을 뜰 때가 많아요.]
추 경감이 놀란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구란도에서 개들이
살인 광란을 일으킬 때도 터키행진곡이 나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침 새마을 방송 시간에 수천 군데의 새마을에서
터키행진곡을 방송하는데 다른 마을은 아무 이상이 없지 않
은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추 경감은 입을 다물었다.
[왜 어제 저녁엔 새마을 노래가 아닌 터키행진곡을 내보냈
는지는 몰라요.]
김명호 차장도 그 부분이 걸리는 것 같았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방송을 내보내는 것은 이장 어른이
주로 하는 일이 돼놔서요.]
[이장은 어떻게 되었소.]
김 차장이 맹 서장을 보고 물었다.
[함께 죽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범바위에서 마을로 내려왔을 때는 몇 시경
이었지.]
김 차장이 물었다.
[아마 7시 반쯤 되었을 것입니다. 골목에 들어서자 피비린
내가 확 풍겼습니다. 우리 외갓집 7살 난 조카 아이가 개한
테 물어뜯겨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을 처음 보았습니
다. 나는 울부짖으며 동네를 헤매다녔지요. 하지만 살아 있
는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골목마다 피투성이가
되고 내장이 터져나오기도 한 시체들만 뒹굴고 있었으니까
요. 지옥이라도 그런 지옥은 없었을 것입니다. 개들은 모두
주둥이에 벌건 피를 묻힌 채 어슬렁거리고 다녔습니다. 나
는 처음에 개가 그랬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개들은 모두 정상적인 상태였단 말이죠.]
박봉순이 질문을 했다.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나를 보고 꼬리까지 흔들며 반
가워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참 뒤에 박씨네 개가 뛰쳐나
와 난동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그곳으로 가보
았습니다.]
[그곳이라니요.]
박봉순이 다시 물었다.
[박씨가 개를 사육하고 있는 사육장 말입니다. 그곳 개들이
전에도 미쳐서 문제를 일으킨 일이 있었거든요.]
[문제를 일으켰다고.]
맹 서장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개 사육장 주인은 어떻게 되었나.]
김 차장이 맹 서장을 보고 물었다.
[가만 있자. 그 사람 이름이.]
[박중군입니다.]
정홍길이 얼른 대답했다.
[살아 있습니다. 저기 회관 뒷방에 있습니다.]
맹도열 서장이 생존자 명단을 넘겨보며 말했다.
[좀 불러올 수 있겠나.]
김 차장이 물었다. 그는 천천히 담배 한 대를 피워물며 정
홍길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곧 불러오겠습니다. 당진서 온 의료진이 응급치료를 하고
있는데 아마 끝났을 겁니다.]
맹 서장이 나간 뒤 얼마 되지 않아 박중군을 데리고 들어왔
다. 박중군은 두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얼굴도 한쪽에
는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나이 마흔은 훨씬 넘어 보였
다. 하얀 얼굴이 농촌 사람 같지 않았다.
[서울서 오신 경찰청 차장님이시다. 인사드려요.]
맹 서장이 소개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했
다.
[불행 중 다행입니다. 거기 좀 앉으시지요.]
김 차장이 담배 한 대를 권했다.
[당시의 상황을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예. 저는 저녁을 먹은 뒤 사육장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
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왼쪽 사육장에 있던 개들이 날뛰
면서 순식간에 철창을 물어뜯어 열고는 마당으로 쏟아져 나
왔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놈들은 나
를 향해 덤비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순식간에 양팔을 물어
뜯겼습니다. 나는 비상시에 쓰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삼지
창을 비껴 들었습니다.]
[삼지창? 저팔계가 쓰던 창 같은 거요.]
민은수가 싱겁게 거들었다.
[전번에 미친 개 몇 마리가 날뛰어서 혼이 난 이후 날이 세
개 달린 방어용 긴 창을 만들어 두었었지요. 그래서 그것을
휘두르며 나는 얼른 빈 사육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빈 사육장이라니.]
김 차장이 물었다.
[우리 사육장에는 보통 150마리 정도의 개가 있는데 지난
달에 50여 마리는 팔려나가고 백여 마리만 남아 있었습니
다. 그래서 마침 마당가에 있는 빈 사육장으로 들어가 급히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들어왔는지 한 마리
가 철창 안에 들어와서 나를 향해 덤벼들었습니다. 눈에 시
퍼런 불을 켜고 덤비는데 꼭 개 같지가 않고 늑대 같았습니
다. 나는 그놈과 생명을 건 싸움을 했지요. 하지만 내 삼지
창을 당하지는 못해 곧 비명을 지르며 나가 자빠졌어요. 그
렇게 악착같이 덤벼드는 개는 처음 보았어요.]
박중군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이야기했다.
[그 개는 무슨 종자였습니까.]
추 경감이 물었다.
[똥개예요, 똥개. 똥개가 그렇게 용감하게 사람한테 덤비는
꼴 처음 보았어요. 마치 내가 저들을 길러 보신탕 집에 보
내 작살을 내는 인간이란 것을 알아가지고 복수라도 한다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김명호 차장이 새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있었지요. 창살 밖을 내다보니까
다른 우리에 있던 놈들도 어떻게 나왔는지 모두 밖으로 기
어나와 컹컹거리며 아우성을 치더군요. 대부분 밖으로 뛰어
나가고 대여섯 놈만이 나를 공격하려고 우리 창살을 물고
늘어지며 으르렁거렸어요. 가두어 두는 우리가 안전한 방어
역할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일이지요.]
그는 말을 마치고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주인이 개한테 갇힌 꼴이 된 거구먼,
하하하.]
민은수가 느닷없이 큰 소리로 웃자 김 차장과 맹 서장이 얼
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우리에 갇혔다가 언제 풀려났습니까.]
김명호 차장이 물었다.
[근 한 시간쯤 지났을까요? 갑자기 개들의 태도가 바뀌었습
니다. 으르렁 소리도 내지 않고 나를 공격하지도 않았습니
다. 그냥 드러누워 숨만 헐떡이는 놈도 있고 꼬리를 치며
돌아다니는 놈도 있었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저놈들이 내가
안심하고 나오도록 능청을 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개
는 역시 개지 지능이 그렇게 높을 리가 없지요. 한참 만에
내가 철창문을 살며시 열고 조심스럽게 나가자 놈들은 나를
흘금흘금 보면서 피하지 뭡니까.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
그는 붕대가 감겨 손이 전혀 보이지 않는 팔을 휘저어가면
서 설명했다.
[거기서 사육하던 개는 대개 어떤 종류였습니까.]
추 경감이 수첩을 꺼내 적으면서 물었다.
[대개가 토종 똥개들이죠. 보신탕은 똥개가 최고니까요. 하
지만 도사견이나 혼혈 포인타, 불독, 혼혈 진돗개 등 잡종
도 더러 있지요.]
[사냥개도 보신탕으로 씁니까.]
박봉순이 질문을 했다.
[가끔 쓰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개들은 애완용이나 방범용
으로 팔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개 사육은 꽤 할 만한 업종입니까.]
이번에는 민은수가 물었다.
[아이구 아닙니다. 이 짓을 한 지가 올해 꼭 9년째인데 점
점 이문이 박해져서 요즘은 사료값도 안 나오는 경우가 많
아요. 더구나 올해는 지금이 경기가 한창 좋을 땐데 그놈의
개사건이 일어나고는 주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형편입니
다.]
그는 다시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이 사건들이 왜 개파는 데 지장을 줍니까?]
추 경감이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찜찜하니까요. 얌전히 먹혀주는 음식인 줄 알았는데, 사람
들한테 복수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먹고 나갔다가 어떤 개
새끼가 동족의 원수라고 달려든다든가 하는 생각이 들면 먹
고 싶어지지 않겠지요, 뭐.]
[하기는 이번 사건이 개를 식용으로 삼는 우리 나라에 내린
천벌이라고 주장하는 외국인들이 있다고 하더군.]
김 차장도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 자식들은 그렇다면 목장에서 소들이 반란을 안 일으키
는 건 뭐라고 설명하는지 몰라.]
그때 정복 경찰관 한 사람이 들어와 맹도열 서장에게 메모
지 한 장을 전해주고 나갔다.
[생존자를 한 사람 더 찾아냈습니다. 마을 뒷산 산신당에서
피투성이가 된 여자를 구해냈는데 생명은 건진 것 같다고
합니다.]
[예? 산신당에서요.]
맹 서장이 김명호 차장에게 보고하듯이 하는 말을 듣고 갑
자기 마을 청년 정홍길이 큰 소리를 질렀다. 모두 그를 쳐
다보자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고들 했어요. 두 사람 다 나가서 치료나 더 받으세요.
수고들 했습니다.]
김명호의 말이 떨어지자 정홍길과 박중군은 공손히 절을 한
뒤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정홍길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범바위에
서 할 일 없이 반 시간 이상 혼자 있으면서 마을의 아우성
을 듣고도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더구나
산신당에서 사람을 구했다니까 갑자기 놀라는 것 봐요. 제
가 그 산신당에서 구했다는 여자를 좀 만나보겠습니다.]
추 경감이 혼잣말처럼 늘어놓고는 일어섰다.
[여자 환자를 만나시려면 저하고 같이 가요.]
박봉순이 따라 일어섰다.
[그게 좋겠구먼.]
김명호 차장도 동의를 했다. 추 경감과 박봉순은 임시 치료
실로 쓰고 있는 마을회관의 작은 강당으로 갔다. 세 명의
환자 틈에 여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거의 전신
을 붕대로 감다시피 하고 있었다.
[쯧쯧 발가벗은 채 거기까지 쫓겨가다니.]
환자를 돌보고 있던 생존자 아주머니 한 사람이 푸념을 하
며 그녀에게 시트를 덮어주고 있었다.
[이 여자가 산신당에서 구출된 사람입니까.]
추 경감이 아주머니를 보고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발가벗은 채 거기까지 쫓겨갔다는 것은 무슨 뜻
입니까.]
추 경감이 아주머니를 보고 다시 물었다.
[개들이 덤벼드니까 벗은 채로 거기까지 갔던 것 같아요.
옷만 입고 있어도 저렇게 많이 물리지는 않았을 터인데
.]
그녀는 연방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러나 추 경감은 그녀가
벗은 채 마을에서 산신당까지 달아났다는 것이 어쩐지 믿기
지 않았다.
[저기 다른 환자 두 명은 걸을 수 있지요.]
추 경감이 아주머니를 보고 물었다.
[그런데요.]
[이 여자 환자만 두고 모두 자리를 좀 피해 줄 수 있겠습니
까.]
추 경감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하자 아주머니는 환자들과
함께 옆의 곡물창고로 나갔다. 다른 환자들은 팔이나 다리
를 물린 사람들이었으나 심한 상처가 난 것은 아니었다.
방 안에 여자 부상자와 박봉순, 추 경감 그렇게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많이 아프세요? 난 남해군에서 온 의삽니다. 이분은 서울
서 오신 경찰관이구요.]
박봉순이 침대 위의 여자를 보고 말했다. 여자는 잔뜩 겁
먹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간단히 몇 마디만 묻겠습니다. 많이 아프십니까.]
추 경감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이는?]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김옥자라고 해요. 올해 서른세 살.]
[남편은 무얼 하시나요.]
박봉순이 물었다.
[혼자예요. 몇 년 전에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어요.]
[어젯밤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보세요.]
추 경감이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겁내지 말고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어요.]
박봉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물
고 있던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정홍길씨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이도 죽었나요.]
[정홍길씨요.]
추 경감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무엇인가를
추리해낸 것 같았다.
[정홍길씨는 살아 있습니다. 다친 데도 없구요. 조금 전에
그 사람을 만나 경위를 듣고 오는 길입니다.]
[.]
그녀는 다시 아무 말도 않고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한참 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죽일 년이였어요. 정홍길씨한테 이야기 들은 그대로
예요. 나 같은 년은 죽어야 하는데.]
그녀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말아요. 몸에 해로워요. 자, 천천히 그때 일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보아요.]
박봉순도 정홍길이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생각이 적중하는 것 같았다.
[다 말씀드릴께요. 우리는 저녁 무렵부터 산신당에 함께 있
었습니다. 꼭 세 번째 만난 것이였지요. 동네 사람들은 아
무도 모릅니다. 우리 친정에서 알면 나는 살아남지 못해요.
하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했어요.]
박봉순이 그녀의 눈에 어린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리는 그 일에 열중하느라고.]
[그 일이라뇨.]
추 경감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무슨 뜻
인지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개 짖는 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어요. 한참 만에 정홍길씨
가 급히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더군요. 그때 개들의 울부짖
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섞여 들렸어요. 나는 그대로 누
운 채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었어요. 개 짖는 소리나 사람
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건성으로 들리고 내가 여기 와서
이런 못된 짓을 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아무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어요. 후회하는 한편에는 정씨를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가만히 누워 있었어요.
옷 입을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산신당 안으
로 황소만한 개가 뛰어들어왔어요.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어요. 산신당에서 못된 짓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지요.]
추 경감과 박봉순은 정홍길이 거짓말한 이유를 알았다. 짝
이 없는 젊은 두 남녀가 눈이 맞아 동네 사람 몰래 산신당
을 사랑의 보금자리로 삼고 몸을 섞어왔던 것이다. 그녀가
세 번째라고 한 것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이튿날 한낮이 되어서야 구반리 사람들의 생사가 밝혀졌다.
주민 88명 중 생존자는 모두 여섯 명, 행방불명되었던 세
명도 시체로 발견되어 사망자는 모두 82명이었다.
난동을 일으킨 개들은 2백여 마리였는데 죽거나 없어진 개
가 20여 마리고 나머지 개들은 모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얌
전하게 있었다.
서울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을 수습하기 위한
사람들과 수사를 위한 요원들 그리고 엄청난 숫자의 보도진
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도 구란도처럼 일단 역학적인 검사를 위해
통제구역으로 설정되었다.
민은수와 박봉순은 이 마을의 사건을 구란도 때와 비교해서
하는 일을 주로 도왔다.
[아무래도 그 터키행진곡인가 뭔가가 문제인 것 같은데
.]
추 경감이 이렇게 말하자 다른 수사관들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비웃기만 했다.
[터키행진곡 같은 음악을 알아듣는 개가 우리 나라에 있다
고 해봐요.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아니오? 그 방면으로 잘
연구해 봐요.]
수사관들은 이렇게 빈정대기만 했다. 그러나 추 경감은 포
기하지 않고 마을회관에 가서 혼자 그 테이프를 찾아가지고
나와 자동차 안으로 들어갔다.
카세트에 테이프를 넣고 스위치를 누른 뒤 몸을 뒤로 젖히
고 우렁차게 울려나오는 행진곡을 들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
다.
그때였다.
9. 두번째 요구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추 경감이 터키행진곡을 들으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차창
을 두드린 사람은 박봉순이었다.
[행진곡 좀 듣고 있었습니다. 이 터키행진곡을 들으니까 나
도 공연히 엉덩이가 들썩들썩해지면서 뛰어다니고 싶어지는
군요. 그렇다고 개들이 사람보다 리듬 감각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을 텐데.]
추 경감이 차의 문을 열면서 오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들어가도 되겠어요.]
박봉순이 자동차의 앞좌석에 들어가 앉으며 말했다.
[숙녀하고 같이 명곡을 감상하는 것은 영광이지요.]
추 경감이 정말 황송하다는 몸짓을 하면서 말했다.
[그런데 터키행진곡은 터키의 누가 작곡을 했습니까.]
[호호호 터키행진곡이라고 해서 터키 사람이 작곡한 것
은 아니랍니다. 그 곡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이지요. 모차
르트의 많은 소나타 중의 하나지요.]
자동차의 스피커에서는 4분의 2박자의 경쾌한 피아노곡이
빠른 템포로 절정의 고개를 넘고 있었다.
[모차르트라고요? 하아 이거 무식한 경찰관이 돼놔서.]
추 경감은 민망해서 오른손으로 뒤통수를 긁으면서 말했다.
[이 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에이 장조 311번이라고
하지요. 311번의 맨 끝 악장이 이 터키행진곡이랍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왜 하필이면 터키행진곡을 만들었을까
요.]
[당시 유럽의 예술계는 동양풍이 대단히 유행했다고 합니
다. 모차르트의 작품 중에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 5번도 동
방 취미를 잔뜩 살린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지요. 소나타
제 311번 중 터키행진곡의 주제로 되어 있는 마지막 악장에
는 '알라 투르카' 그러니까 '터키풍으로'라는 주가 붙어 있
답니다.]
[박봉순씨는 인물만 예쁜 것이 아니라 고전음악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으시군요.]
추 경감이 웃어 보였다.
[저도 들은 풍월이에요. 제가 의과대학에 다닐 때 취미 서
클에 들어갔었는데 별로 할 만한 것도 없고 해서 고전음악
감상 서클에 들어갔었거든요. 하루 종일 해골이나 시체들과
씨름을 하고 나면 그런 취미 속으로라도 도망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 저의 대학 시절이었답니다.]
[모차르트가 특별히 개를 좋아했다든지 뭐 그런 기록은 없
나요.]
[개요? 호호호 글쎄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요. 경감님은 아직도 이 행진곡과 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그건 무리가 아닐까요.]
[개도 사실은 사람보다 훨씬 음악을 즐긴다는 것을 우리 인
간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개의 청력이 사람보다 16배나 더 뛰어나고 개의 후각은 사
람보다 일만 배나 더 예민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리듬을
즐긴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어요.]
[글쎄요. 내 생각이 좀 망상이죠? 하지만 서울 올라가면 CD
로 된 터키행진곡을 구해 가지고 스테레오로 개들에게 들려
주고 반응을 볼 작정입니다.]
[호호호 경감님 고집 아무도 못 꺾는다는 이야기 들었
어요. 모쪼록 개와 명곡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발견하시기
를 바라겠습니다.]
그때 녹음 테이프가 끝났다. 추 경감이 자동차의 라디오 스
위치를 넣었다. 박봉순이 차에서 막 내리려고 할 때 라디오
에서는 오후 뉴스가 시작되었다.
다음은 당진의 개 습격 사건의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
다. 남해의 구란도 사건 이후 당진 사건이 나기 이틀 전 구
란도 대책본부에 걸려왔던 괴 협박전화의 녹음 테이프가 오
늘 보도진에 공개되었습니다. 당초 수사본부측은 그 괴전화
를 개들의 습격 사건과 관련이 없는 장난전화로 생각했었으
나 당진 사건이 난 이후 그것이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고 판
단하고 전화를 건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그 목소리를 공개
한다고 대책본부 대변인이 설명했습니다. 협박전화를 건 주
인공은 2, 30대의 남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조
작해서 전화를 했기 때문에 누구의 음성인가를 확연히 알기
는 어렵습니다만, 이 목소리를 알고 계시는 분은 방송사 보
도국이나 수사기관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소리를 분
석해본 결과 범인은 서울 태생으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
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어서 그 문제의 협박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박봉순과
추 경감은 수십 번도 더 들은 목소리였다.
[아니 여기서 무슨 밀어를 그렇게 즐기고 있습니까.]
어느새 왔는지 민은수가 자동차 밖에 서 있었다.
[우리 더운데 나무그늘에 가서 이야기해요.]
박봉순이 차에서 내려 민은수에게 팔짱을 끼었다. 두 사람
이 느릅나무 그늘 아래로 가는 것을 보며 추 경감은 카세트
에서 테이프를 뽑아들었다.
[추 경감과 무슨 이야기를 했어.]
[질투나요.]
[질투? 질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민은수가 봉순의 허리를 잡아 그늘 아래 바위에 앉히면서
말했다.
[클래식 감상 좀 했어요.]
[클래식? 그 양반도 괴짜군. 피비린내 나는 지옥에 와서 남
의 여자 꾀어서 클래식 감상이나 하고 있다니 경찰관이
그래도 되는 거야.]
태연한 척 하려고 하던 민은수의 입에서 드디어 거친 말이
나왔다.
[민 소장, 질투하는군.]
박봉순이 민은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생글거리면서 놀
리다시피 말했다.
[우리 이 사건 끝나거든 결혼하자.]
민은수가 봉순의 어깨를 슬그머니 감싸면서 말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박봉순은 싫지 않은 듯 체중을 그의 가슴에 실으면서 말했
다.
[갑자기가 아니고 구란도에 갈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갔던 거야. 그 이튿날 그런 엄청난 사건만 나지 않았더라면
좀더 낭만적인 장소에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거절하
지 못하도록 해놓은 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아. 나는 낙도에 자원해 온 의사라
고. 나하고 결혼한 뒤 섬에서 보건소 여의사의 남편으로 할
일 없이 청춘을 썩히고 싶어.]
[당신이 원한다면 낙도의 의사 노릇 얼마든지 해도 좋아.]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야? 공인회계사가 섬에 와서 할 일이
뭐가 있겠어?]
박봉순의 말투가 진지해졌다. 그때였다.
[저 선생님 두 분 함께 따라오십시오.]
군복을 입은 청년이 두 사람 앞에 와서 부동자세로 인사를
한 뒤 딱딱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군복을 입었지만 군인은
아니고 경찰관이었다.
[누가 오라고 했어요.]
박봉순이 물었다. 민은수는 박봉순의 어깨를 껴안고 있던
팔을 슬그머니 풀었다.
[경찰청의 김 차장님이 모시고 오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일어서서 추 경감이 있던 자동차를 흘깃 보았다.
그는 벌써 가고 없었다. 두 사람은 부지런히 걸어 임시 대
책본부 겸 수사본부로 쓰는 마을회관으로 갔다.
두 사람이 실내에 들어서자 모두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또 일어났습니까.]
민은수가 추 경감을 보고 나직하게 물었다.
[이 목소리도 두 분이 한번 감정해 보시지.]
김명호 차장이 손으로 의자를 권하면서 민은수와 박봉순을
보고 말했다.
[다시 한 번 틀어봐.]
김명호 차장이 명령하자 수사본부의 조 경감이 녹음 테이프
를 돌렸다. 스피커에서는 전에 들은 일이 있는 변성된 목소
리가 흘러나왔다.
우선 당진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나는 푸른 셔츠 입은
국민의 한 사람이다. 내가 며칠 전 경고한 일을 정부에 계신
여러분은 우습게 생각한 것 같다. 내가 두 번째 사건을 일으켜
무고한 국민들의 많은 목숨을 앗아간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여러분이 내 말을 미친 사람의 잠꼬대쯤으
로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므로 사실상의 책임은 여러분
한테 있는 것이다.
내가 정부에 다시 한 번 경고를 한다. 지금 우리 나라는 여러
가지 모순된 제도나 관행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바로 잡아
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한꺼번에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우선 급한 일부터 시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다소의 국민이 희생되어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전쟁이 나면 무고한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가. 그러나 이 일은 전쟁에 비교할 수 없
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주기 바란다.
나의 첫번째 요구조건은 우리 나라 방방곡곡에 널려 있는 부도
덕한 물건들을 싹 쓸어내는 일이다.
전국의 책방에는 부도덕한 음란 퇴폐 서적들이 널려 있다. 이
런 서적들을 싹 쓸어서 불태워야 한다. 다음 전국 크고 작은
마을마다 총총히 들어서 있는 비디오방의 음란 비디오 테이프
들이다. 이 물건들은 단 한 개도 남기지 말고 모두 수거해서
불태워야 한다.
우리 동방예의지국이 언제부터 이런 음란 공화국이 되었단 말
인가?
전국의 음란물을 다 몰아내고 이 나라를 건전한 도덕 군자의
나라로 만드는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제 3, 제 4의 구란도 사건
이 또 일어날 것이다. 불쌍한 민초들을 더이상 희생시키지 않
으려면 긴급조치를 취해 이 나라를 타락으로부터 구해야 할 것
이다.
시대가 변하면 제도와 문물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
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바꿔야 할 법 제도는 바꾸지
않고 못된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 아닌가.
나의 요구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정부의 높으
신 여러 어른들이나 정쟁과 당리 당략만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일 주일 이내에 다시
이 나라 어디에선가 제 3의 구란도 사건이 난다는 것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 나의 이 요구가 관철되면 다시 다음 연락을 드리
겠다.
다시 경고하거니와 나는 신의 의지를 집행하는 사람이기 때문
에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것이다. 푸른 셔츠로부터
테이프를 다 듣고 난 박봉순이 질문을 했다.
[이 녹음은 어떻게 전달되어 왔습니까.]
[전화가 걸려온 것입니다. 구란도의 대책본부로 걸려온 것을
녹음한 것입니다. 이 테이프는 남해 본부로부터 전화로 받은
것입니다.]
맹 서장이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어때요? 먼젓번 목소리와 비슷하지요.]
김명호 차장이 담배를 피워물면서 말했다.
[얼른 듣기에는 같은 사람 같습니다. 동일인 여부는 성문(聲
紋) 검사를 해보면 금방 알게 되겠지요.]
[이미 같은 사람의 목소리라는 국과수의 회답이 와 있습니다.]
맹 서장이 말했다.
[이 전화는 언제 걸려온 것입니까.]
민은수가 질문을 하면서 녹음기의 스위치를 다시 눌렀다.
[오늘아침 10시8분이라고 합니다. 전화를 건 곳은 대전입니
다. 공중전화였다는 것까지는 밝혀냈습니다.]
맹 서장이 담배연기를 계속 뿜어내면서 설명했다.
[어때요? 어디서 들은 것 같지 않나요.]
김명호 차장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글쎄요. 어떻게 하면 귀에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들으
면 전혀 생소한 목소리 같거든요.]
민은수가 박봉순을 돌아다보며 대답했다. 박봉순은 눈을 지그
시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범인의 이 새로운 요구는 당진의 현지 대책본부나 수사본부뿐
아니라 서울의 정부 당국도 발칵 뒤집어놓았다.
총리 주재로 곧 국무회의가 열려 장시간 이 문제에 대해 논의
를 했으나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우선 범인이 주장
하는 음란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수준을 말하는지 애매할 뿐
아니라 설사 어떤 기준이 있다 해도 단 시간 내에 그것을 제거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범인이 요구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준다고 하면 이 일을 하는
데 몇 년이 걸려도 완벽하게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설사 우리
정부가 일정한 기준을 설정하여 그대로 시행한다고 해도 그것
은 위헌이라는 시비가 당장에 생길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 창
작의 자유 운운하면서 도처, 각계에서 성토의 목소리가 높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법을 개정해서 한다고 하더라도
법을 고치는 데 상당한 시일이 요구될 뿐 아니라 국회에서 그
렇게 쉽게 우리 정부 쪽 요구를 들어줄지가 의문입니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주무부 장관인 문화부 장관은 아주 난감한
말만 되풀이했다.
[미친 놈의 협박전화 한 통에 우리가 너무 흥분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제까짓 놈이 무슨 재주로 개들의 반란을 조종할 수
있단 말입니까? 구란도의 비극은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절
대로 아닐 것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열변을 토했다.
[그렇게 속단할 일이 아닙니다. 범인이 예고한 대로 사건이 터
지지 않았습니까? 만분의 일이라도 또 무고한 국민이 희생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총리의 말이었다.
[우리는 두 가지 입장에서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국무회의가 열린 지 한 시간 반이 되도록 아무 말도 않고 있던
과기처 장관이 입을 열었다.
[범인을 자극시키지 않도록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면서
그와 협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 한편으로는
전국에 있는 개를 모두 단속하는 일입니다.]
[말도 안 돼요. 정부가 어떻게 공갈 협박꾼하고 협상을 합니
까? 그리고 전국에 있는 개를 모두 단속을 한다구요? 정말 개
가 들어도 웃을 일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흥분해서 회의탁자를 치면서 말했다.
[보복부 장관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라구요? 그 말 취소하시오.]
과기처 장관도 지지 않고 일어서서 삿대질을 하면서 대들었다.
[자, 자, 조용히 합시다. 이러다가 정말 싸움나겠습니다. 과기
처 장관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법제처와 법무부에서는 관계
법률 개정 여부를 검토해 보시고, 내무부와 국방부 서울특별시
농수산부 등에서는 전국의 개 사육실태 파악과 함께 유사시 개
를 연금하는, 가만 있자 연금이란 말이 어째 이상하지만, 하여
튼 개를 단속하는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지요. 오늘 회의는 여
기서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국무회의는 이렇게 해서 끝이 나고 전국의 각 시도에는 개를
'연금'하기 위한 지시가 계속 내려갔다.
신문과 방송들도 이 일을 크게 보도했다. 두 번째 협박전화의
목소리도 한 시간이 멀다 하고 되풀이되어 전국에 방송되었다.
매스컴에서 이렇게 떠들게 되자 설상가상으로 죽을 지경이 된
곳은 대책본부와 수사본부였다. 아무리 통제를 해도 마구 밀고
들어오는 세계 각국의 기자들 등살에도 죽을 지경인데, 협박전
화의 목소리 주인을 안다는 신고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냥 묵살할 수도 없고 일일이 다 찾아가서 확인하자면 수사요
원이 수천 명이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신고된 용의자들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가장 혐의가 농후하
다고 생각되는 사람부터 수사를 하도록 하지.]
김명호 차장이 내린 결론이었다.
대책본부와 수사본부는 현지 두 곳에 파견본부를 둔 채 서울에
통합관리 기구인 총본부를 두었다. 따라서 민은수와 박봉순도
수사 총본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안수인과 안정아 사건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서울로 올라온 다음날 박봉순이 민은수를 보고 걱정스럽게 이
야기했다. 그동안 당진 사건으로 진천의 두 사람 일을 까마득
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진천에 남아 있던 박진환은 안수인과 정아의 일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무진 노력을 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최
병길은 소송을 취하하지 않았다. 이혼청구 소송과 함께 안정아
와 안수인을 간통죄로 고발한 그의 태도는 완강했다.
결국 안정아는 경찰서 보호실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안수인은 경찰의 두 번째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한 사람
은 잡혀들어 가더라도 한 사람이 남아 일을 수습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고생스러울 것을 생각하면 자기가 갇혀
있고 싶었지만 일의 수습을 위해 일단 몸을 숨겨야 한다고 그
는 박진환에게 이야기했었다.
박진환은 정아가 경찰서 보호실에 갇힌 지 사흘째 되는 날 그
녀를 찾아갔다. 형사실 사무실에서 잠깐 면회가 허락되었다.
[정아씨! 고생이 많지요.]
박진환은 정아가 자기를 만나면 눈물부터 흘릴 것이라고 생각
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는 너무나 담담한 표정에
오히려 약간의 미소까지 담고 있었다.
[미안해요. 이런 일로 박 선생님을 괴롭히게 되어서.]
[지내는 데 불편은 없어요.]
그녀는 사흘 사이에 얼굴이 약간 수척해진 것 같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요. 남편은 절대로 고
소를 취하하지는 않을 거예요. 나라도 그렇게 하겠어요. 얼마
나 배신감을 느끼겠어요.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위대한 속성이 있는가 봐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다문 입에 약간
의 미소를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평화롭게 보였다. 경
찰서 유치장에 갇힌 사람이 그렇게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는 것이 약간은 이해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 닥친 것뿐이에요. 전 각오가 되어 있
어요. 간통죄는 평생을 교도소에서 보낼 만큼 큰 죄는 아니라
고 하더군요. 대가를 치르고 나면 우리는 오히려 떳떳하게 사
랑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이 장애물을 넘어도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긴 하지만.]
[또 하나의 장애물이라뇨.]
[우리는 동성동본이잖아요.]
그녀가 다시 웃어 보였다.
[수인이한테 특별히 전할 말이 있나요.]
[제 남편한테 너무 비굴하게 굴지 말라고 하세요. 사랑하는 것
이 무슨 잘못입니까. 다음에 오실 때 몽테뉴 수상록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갑자기 몽테뉴가 읽고 싶어지는 것 있지요.]
그녀가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미인은 아니지만 가
지런하게 흰 이를 드러내며 미소지어 보이는 정아의 표정에는
다른 여인에게서 찾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박진환은 생
각했다.
박진환이 안정아를 면회하고 있는 동안 안수인은 최병길을 만
나고 있었다.
진천 시내의 허름한 소주집에서 만난 그들은 해물찌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최 선생의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지요. 하지만 꼭 그렇게 해야
만 직성이 풀립니까.]
안수인이 술기운을 빌려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자들이 간통죄의 폐지를 반대했을 때 이해하지 못했
지. 하지만 내가 당하고 보니까 그 심정이 이해가 가더군. 가
장 숭고해야 할 사랑을 배신한다면 고통을 당해야 해. 정신적
인 고통뿐 아니라 육체적인 고통도 당해야 한다구.]
그는 소주잔을 연거푸 석 잔이나 입에 털어넣었다. 그의 말이
처음보다 상당히 거칠어지고 있었다.
[이미 자기에게서 멀어진 사랑은 복수할 가치도 없는 것 아닌
가요.]
[복수? 고상한 소리 하고 있네. 이봐 너는 말이야, 도둑놈에
불과해. 남의 사과를 훔쳐간 도적놈! 하하하 그렇지 훔친
사과가 뭐 어떻다고 하던가.]
최병길의 눈에 갑자기 흰자위가 많아졌다. 그리고 바람 빠진
웃음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술이 오른 것 같았다.
[이제 일어나시지요. 동네까지 내가 바라다 드리겠습니다.]
안수인이 술값 치를 제스처를 취하면서 일어섰다.
[야! 이 도적놈아. 내 여편네 물어내! 그 여자는 너 같은 놈이
데리고 놀 여자가 아니란 말이야. 네 놈이 그 여자의 진가를
아느냔 말이야.]
최병길이 갑자기 일어서서 안수인의 멱살을 잡았다.
[취하셨군요. 자 밖으로 나갑시다.]
안수인이 그에게 멱살을 잡힌 채 술값 계산을 했다.
[이 새끼 가긴 어딜 간단 말이야? 갈 곳은 딱 한 곳밖에 없어.
너 같은 놈은 지옥에도 갈 자격이 없어. 연옥에서 몇 억 년을
보내면서 나한테 빌어야 돼. 건방진 놈, 남의 여편네를 훔쳐서
올라타다니. 야 임마 네 물건이 그렇게 좋으냐? 어디 좀 내놔
봐.]
최병길의 주정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안수인은 그를 큰길
까지만 데리고 나온 뒤 돌아서버렸다. 처음에 마주앉아 술잔을
따를 때까지만 해도 서로 대화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최병길은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니 본성이라기
보다는 솔직한 한 인간으로 돌아간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안수
인은 생각했다.
그는 착잡한 심경으로 임시 거처인 여인숙으로 돌아갔다. 그는
정아를 경찰서 보호실에 사랑의 인질로 잡혀놓고 내가 하는 일
은 지금 이것이 고작인가 하고 생각했다. 너무나 무기력한 자
신이 그저 원망스러웠다.
그가 여인숙 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닫혀진 대문 안에서 여
인숙 아주머니가 고함을 지르며 마당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수
인이 대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뚱뚱한 여인숙 아주머니
가 송아지만한 셰퍼드를 묶으려고 끈을 들고 쫓아다니고 있었
다. 그러나 개는 껑충껑충 뛰면서 주인 아주머니를 놀리고 있
었다.
[아주머니 문 좀 열어주세요.]
안수인이 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아주머니는 개
를 안쪽으로 쫓은 뒤 대문께로 와서 살짝 문을 열어주었다. 안
으로 들어간 안수인은 쫓겨다니느라 눈이 둥그래진 셰퍼드를
보며 물었다.
[개를 파시려고요.]
[팔다뇨? 아 파출소에서 나와 이 개를 단단히 묶어 가두든지
죽여 없애든지 하라고 야단이에요. 우리 집뿐 아니라 온 동네
개를 다 가두라고 한답니다.]
[예.]
[그 구란도 사건인지 구반리 사건인지 때문에 그러지 않겠어
요? 세상이 말세가 되니까 개가 지랄을 하는 세상이 되었지 뭡
니까. 이런 세상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세요.]
[무슨 세상이라고 하는데요.]
[이런 세상을 개판이라고 한답니다.]
[개판? 하하하 정말 개판이군요.]
안수인은 안주인과 마주서서 웃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너무
나 공허한 웃음이었다.
10. 개들의 초능력
서울에 총 수사본부가 설치된 이후 민은수와 박봉순은 서울로
올라와 있었다. 박봉순이 벽지 의사인 본업으로 돌아가기란 당
분간 힘든 것 같았다. 먼저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보건소를 유
지할 필요가 없었고, 박봉순도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아직 없었다.
이들을 따라 추 경감도 세 곳을 왔다갔다 하게 되었다. 추 경감
이 서울에 잠시 올라왔을 때, 그는 숙제 하나를 해결하기로 마
음먹고 개와 관련된 이곳 저곳을 찾아다녔다. 이름 있는 수의
사, 애견 훈련소 등을 돌아다녔다. 그는 개가 수십 마리나 있
는 서울 근교 덕소의 한 애견 훈련소를 찾아갔다. 경찰청 간부
의 소개를 받아 갔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비교적 친절하게 그를
맞아주었다.
[우선 견공 구경부터 할까요.]
추 경감이 만난 조련사는 뜻밖에도 20대의 여자였다. 지나치게
깡마른 체구에 긴머리를 출렁거리는 그녀는 상당한 미인이었
다. 도저히 개 조련사로는 보이지 않는 패션모델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녀가 추 경감을 반갑게 맞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견공이라고 했습니까? 아가씨.]
추 경감이 같이 일어서면서 물었다.
[결혼했걸랑요.]
그녀가 다시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아주머니.]
추 경감은 불쑥 이렇게 말해놓고는 아차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
었다. 아주머니라니.
[호호호 아주머니란 호칭 처음 들어보네요.]
[미, 미안합니다. 제가.]
추 경감이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불러주시니까 제가 어른이 된 것 같아요.
저 결혼한 지는 사실 일 주일밖에 안 되었거든요.]
두 사람은 개가 따로따로 수용되어 있는 우리 앞에 갔다.
[저 수염을 길게 기른 양반개는.]
추 경감이 머리에 리본을 달고 있는 다갈색의 조그만 개를 보
고 말했다.
[양반개라구요? 호호호, 저건 애완견인데 요크셔 테리어라고
해요. 이 우리는 모두 소형 애완견만 있는 곳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거기엔 쥐만한 개에서부터 강아지만한 개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노루처럼 생긴 놈이 있는가 하면 털에 덮여 앞뒤 구분이 안 되
는 놈도 있었다.
[저기 도사견 분재도 있군요.]
추 경감이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주먹만한 개를 가리켰다.
[도사견 분재라구요? 호호호 경감님도 참 재미있으셔. 저건 도
사견을 축소해서 기른 것이 아니고 원래 저렇게 생겼어요. 퍼
그라는 개죠.]
그녀는 추 경감을 대형 개들이 있는 우리에 데리고 갔다.
[여기에는 맹견들이 많지만 아주 순한 개들도 많아요. 덩치가
크다고 다 무서운 개는 아니에요.]
그녀는 각양 각색으로 생긴 개들을 설명해 주었다. 멋쟁이 블
러드 하운드에서부터 비렁뱅이처럼 생긴 아이리쉬 울프 하운
드까지 친절하게 설명했다. 추 경감은 견종이 인종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개는 어떤 경우에 사람을 물게 되나요.]
추 경감이 개 우리 앞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그녀
도 맞은편 의자에 마주앉아 무릎을 포갰다. 너무 깡말랐다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포개진 다리의 각선미는 아주 보기에 좋았
다.
[개는 좀체 사람을 물지 않습니다. 특히 훈련받은 개는 주인의
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은 절대 물지 않지요.]
[개는 원래 야성의 동물이었는데 사람들이 데려다 순치시킨 것
아닙니까.]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개의 원래 본성인 물어뜯기라는 야성
이 아직도 남아 있지요. 개에게 있어서 입이란 인간의 손에 해
당하는 것이지요. 꼭 물어뜯기 위해 무는 것만이 아니지요. 친
밀감을 표시할 때도 살짝 물지요. 개가 실제로 상대를 해치기
위해 무는 경우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기가 위
협당할 때이고 둘째는 종족 본능을 위해서랍니다.]
그녀가 뒤의 견사에서 손으로 개 한 마리를 불러 입을 벌리게
하고 설명을 계속했다.
[이걸 보세요. 개의 이빨은 사람처럼 음식을 씹기 좋도록 평평
하게 되어 있지 않고 물어뜯기 좋도록 이렇게 열육치(裂肉齒)
로 되어 있지요.]
[한번 물면 빠져나오기 어렵겠군요.]
추 경감은 날카로운 개의 송곳니를 보며 구란도와 구반리 일이
생각나 소름이 끼쳐졌다.
[개와 인간이 맨손으로 맞붙으면 누가 이길까요.]
추 경감이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했다.
[글쎄요. 참 막연한 질문이네요. 개와 인간과의 격투, 글쎄 격
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경기가 고대 로마 시
대 스포츠의 일종으로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서로 상대가 되
는 모양이지요.]
[개는 주로 사람의 어디를 공격합니까.]
[오래 전부터 개는 순치되어 인간과 주종관계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을 죽이기 위해 공격하는 일은 거의 없지요. 그러
나 때로 이 주종관계가 무너지는 경우가 있지요. 그때는 개의
본능인 공격성이 되살아나 사람을 공격하게 됩니다. 우리 나라
에서도 도사견 같은 맹견이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을 공격해
서 죽인 일이 몇 번이나 있었지요. 외국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개는 멸종시켜야 한다는 논란까
지 있었지요. 개는 주로 자기의 테리터리(territory)를 침범
당했을 때 공격을 하게 됩니다. 사슬에 묶여 있는 개라면 묶여
있는 줄의 길이가 자기의 테리터리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니까 영토보존 본능이군요.]
[그런 셈이지요. 그러나 비록 자기의 테리터리를 침범했더라
도 자기의 주인이나 주인이 인정하는 사람은 공격하지 않습니
다. 그러나 주인의 적은 곧 자기의 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
지요. 그래서 주인과 등을 돌리는 경우에는 공격당하기 쉽습니
다. 그래서 사람이 개한테 가장 많이 물리는 부위는 발 뒤꿈치
랍니다.]
[사냥개가 멧돼지나 맹수류를 공격할 때는 단숨에 짐승의 급소
를 물지 않습니까.]
추 경감이 여 조련사의 각선미에 홀린 듯 거의 눈을 거기에 고
정시키고 있자 그녀가 눈치를 채고 가만히 일어섰다.
[개의 투쟁 본능이 살아나기 때문이지요. 개 박사라고 할 수
있는 조병하씨의 저서를 보면 개의 투쟁 본능이 잘 설명되어
있어요. 개는 사랑을 위해서만은 동족끼리도 싸우지요. 그러
나 평소에는 투쟁 본능이 잠들어 있기 때문에 위험한 일은 좀
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개가 어떤 자극에 의해 집단적인 행동을 자주 합니까.]
[글쎄요. 사냥개들이 맹수를 공격하기 위해 집단행동을 할 때
가 있긴 있습니다만.]
[집단으로 사람을 공격한다든지.]
[지난번의 구란도 사건 같은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입
니다. 이유가 있다면 개가 집단으로 어떤 자극을 받아 투쟁 본
능이 일제히 살아났다고 볼 수 있는데.]
[개는 음악을 좋아합니까.]
[음악요? 호호호, 개가 노래를 즐긴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의 반응을 보이는 수도 있지요.]
[개의 청각은 어느 정도입니까.]
[아이구 경감님도. 제가 뭐 개 박사라도 되나요? 안으로 들어
가요. 제가 책을 보고 대답해 드릴 테니까요.]
그녀가 앞장서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책을 보여주기
전에 냉장고에서 시원한 냉수 두 잔을 들고 와서 테이블에
놓았다.
[고맙습니다.]
추 경감은 냉수를 마시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개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뜻밖에도 소리이다. 벼락, 폭
음, 총성 등에 민감해 그런 소리가 날 때는 도망치거나 잘
안 보이는 곳에 숨어버린다. 심지어 어린이 딱총 소리에 놀
라 숨어서 벌벌 떠는 개도 있다.
개는 귀가 늘어진 놈보다 세워진 놈이 훨씬 소리에 민감하
다. 개는 사람보다 4배나 먼 곳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개의 청력은 인간의 무려 16배나 되기 때문에 사람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개는 자기가 싫어하는 소리를 들으면 견디기 어려워한다.
개에게는 '음향 공포증'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병으로서 무서운 소리가 그친 뒤에도 얼마 동안은 정신이상
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때로는 광란상태가 되어 무분별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처음 사냥을 따라간 개가 총소리에 놀라 도망치고는 돌아오
지 않는 예가 많다. 조병하씨에 의하면 어느 나라에서는 셰
퍼드가 출산한 이튿날 화산 폭발이 있었는데 이 화산 폭발
음에 놀란 셰퍼드가 광기를 부려 자기 새끼들을 모두 물어
죽여버린 일이 있다고 한다.
그 외 개는 빛이나 불을 다른 짐승들처럼 그렇게 겁내지는
않는다. 담뱃불을 앞발로 비벼꺼서 불조심 강조 주간에 표
창을 받은 개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개가 들을 수 있는 청력은 120킬로사이클 이상이라고 합니
다. 인간에게 들리는 음파는 20사이클이라고 하니 인간이
듣지 못하는 초음파도 들을 수 있지요.]
그녀는 책을 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초음파를 이용하여 개를 훈련하여 특수임무에 사용하는 경
우가 많다. 눈이 부자유한 사람들을 위해 쓰이는 '개피리'
같은 것이 이에 속한다. 1975년 미국의 미니애폴리스의 여
성 훈련사인 아그네스 맥클레이 여사는 맹도견과 마찬가지
로 농아들의 청력을 대신할 개의 훈련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 이후 현재까지 200여 마리의 청도견(聽導犬)이 탄생했다
고 한다.
[그러나 개의 이 뛰어난 청력도 냄새를 맡는 후각에 비교하
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개는 사람보다 300만 배나 뛰어난
후각을 가지고 있답니다.]
[삼백만 배라구요? 맙소사. 우리 마누라보다 훨씬 뛰어나군
요.]
추 경감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호호호 사모님을 개에 비유를 하시다니.]
여 조련사가 허리를 잡고 웃었다.
[우리 마누라는 내가 발을 씻지 않고 자는 날은 딴 방에서
자면서도 냄새를 맡고 호통을 치니깐요. 후후후.]
추 경감도 함께 웃었다.
[개는 주둥이가 길수록 후각이 발달되어 있지요. 가장 후각
이 예민한 개는 블러드 하운드라는 개지요. 그래서 블러드
하운드나 셰퍼드 같은 개는 추적견으로 사용하지요. 불독,
퍼그, 페키니스 같은 개는 주둥이가 짧아 후각에 큰 차이를
보인답니다.]
[멀리 보내진 개가 자기 집을 찾아오는 것도 그 후각 때문
이라고 하던가.]
[꼭 후각 때문만은 아니지요. 개는 이동할 때 자기가 간 곳
을 되돌아올 수 있게 표시를 하면서 가지요. 주로 배설물을
묻혀놓는 방법을 쓴답니다. 그리고 그 냄새를 찾아 돌아오
지요.]
[전번에 진도에서 대전으로 보내진 진돗개 한 마리가 몇 달
만에 진도의 자기 집으로 되돌아온 일이 있었지요. 이때는
혼자 표시를 하면서 간 것이 아니고 자동차나 기차, 또는
비행기를 타고 갔을 텐데 어떻게 찾아왔지요.]
[개는 자동차 같은 데 실려갈 때는 바깥 모양을 유심히 보
고 잘 기억을 해둡니다. 밖이 보이지 않을 때는 뛰어난 방
향감각이 작용을 하지요. 지금은 북북서로 얼마쯤 가다가
남서쪽으로 꺾었다는 등의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답니
다.]
[놀라운 일이군요. 컴퓨터와 같군요.]
추 경감은 입에서 질겅질겅 씹던 담배를 뱉어내고 몇 번이
나 물어볼까 말까 하던 질문을 끄집어냈다.
[개들이 사랑을 하는 것 말입니다. 뭐라고 할까 좀 유별나
지 않습니까.]
[재미있죠? 개가 사랑의 상대를 선택하는 것은 암캐 쪽입니
다. 암캐는 아무 때나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발정기가
되어야 사랑을 부른답니다. 그러나 수캐는 발정기가 따로
없지요. 인간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사랑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요. 암캐가 발정기가 될 때는 여러 징후가 나타납니다.
요염한 아양을 떤다든가 호호호, 성기에서 출혈이 있게
되고 또 그 모양이 호호호.]
여조련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추 경감도 따라 웃
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가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
문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저어 암수 두 마리가 정작 사랑을 시작하면 그 왜.]
추 경감이 다시 우물쭈물하자 그녀가 웃으면서 다른 책을
가지고 와서 펼쳤다.
[무엇이 궁금하신지 알겠어요.]
그녀가 가지고 온 두툼한 책은 개의 해부도였다. 그녀는 컬
러로 된 한 곳을 펼쳤다.
[이것이 개의 생식기인데.]
그녀는 아주 진지한 표정이 되어 책 위의 한 그림을 손가락
으로 가리켰다. 끝이 뭉툭하게 부풀어오르고 둥치 쪽이 가
늘게 생긴 수캐의 성기 그림이었다.
[흠. 마치 로켓포처럼 생겼군요.]
[로켓포라구요? 표현이 재미있군요. 개가 교미를 할 때는
사정이 끝나면 이 끝 부분이 크게 원형으로 팽창하게 된답
니다. 그래서 암캐의 그것으로부터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
죠.]
추 경감이 알고자 하는 해답이었다. 그는 어릴 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골목에서 개 두 마리가 엉덩이를 맞대고 멍청하
게 서 있으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물을 끼얹어 그놈들을 쫓
아버리던 일이었다.
[몇 시간이나 그러고 있어야 합니까.]
추 경감은 여자에게서 그런 설명을 듣기가 거북했으나 내친
김이라 더 물었다. 그러나 여 조련사는 조금도 스스럼이 없
었다.
[짧게는 10분 길게는 30분 정도죠. 사람보다 나은 점도 있
어요.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기 볼 일만 보고 나면 아내의
기분이야 어떻게 되든 돌아누워 쿨쿨 자거나 담배를 피워물
고 나 몰라라는 식이죠. 그러나 수캐의 애프터서비스 정신
이야말로 내 말이 좀 심했나? 미안해요.]
그녀가 방긋 웃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을 하는 여 조련사가
조금도 천박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가 그 이야기를 하
는 태도에 학문을 가르친다는 진지함이 보였기 때문이리라.
[개들도 일부일처 제도가 있나요.]
그녀는 책을 제자리에 도로 가져다놓은 뒤 냉장고를 열고
캔 콜라 두 개를 가지고 와서 한 개를 따서 추 경감에게 주
었다. 금방 냉수를 마신 터라 아직 갈증은 나지는 않았다.
[정조관념이 희박한 사람을 보고 개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점에 있어서 개는 박애주의자입니다.]
[박애주의자라구요? 하하하.]
추 경감이 너무 웃는 바람에 머금었던 콜라가 튕겨져 나왔
다.
[이제 중요한 일에 좀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추 경감이 콜라 한 캔을 단숨에 마신 뒤 가지고 온 가방을
열면서 말했다.
[여기에 개가 들을 수 있도록 마이크 장치가 혹시 되어 있
지는 않습니까.]
추 경감은 가방에서 CD 한 장과 CD 플레이어를 꺼냈다.
[노래를 들으실려고요.]
여 조련사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추 경감이
꺼내놓은 CD 케이스를 집어들었다.
[모차르트군요.]
[그렇습니다. 터키행진곡을 좀 들으려고요. 마이크 장치가
있습니까.]
[있어요. 개들의 우리에서 들을 수 있게 해두었지요. 경감
님은 학교다닐 때 러시아의 생물학자 파블로프가 실험했던
법칙을 아시죠.]
[개에게 먹이를 줄 적마다 종을 친 이야기 말이죠? 관성의
법칙이던가.]
[맞아요. 그러나 그게 관성의 법칙은 아니고 조건반사라고
하죠. 그래서 우리도 개에게 식사를 줄 때는 마이크로 종소
리를 내지요. 그러면 모두 우리 앞으로 주둥이를 내밀거든
요.]
[그러면 이 터키행진곡을 개에게 좀 들려주고 반응을 보려
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구란도와 구반리의 일을 실험하려고 하는군요. 하지만 그
건 헛수고일 것입니다.]
여 조련사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웃을 때 그녀의 양뺨에
는 매혹적인 볼우물이 파여 보기 좋았다.
[아니 그럼.]
[맞아요. 내가 녹음 테이프를 사다가 실험을 해보았어요.
하지만 개들은 음악을 이해하지 못해요. 더구나 클래식은
그러나 CD로는 해보지 않았는데 한번 해볼까요.]
그녀가 추 경감을 데리고 옆방으로 갔다. 그녀 전용의 탈의
실 같았다. 화려한 무늬의 외출복과 실내의 등이 걸려 있고
한켠에는 그녀의 핸드백이 얹힌 조그만 책상이 있었다. 그
위에 마이크가 있었다.
[가만 혹시 모르니까 개들이 제대로 우리 속에 다 들어가
있는지 보고 나서 시작하죠.]
그녀는 추 경감을 데리고 개 우리를 모두 점검한 뒤 다시
마이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틀어보세요.]
추 경감이 콤팩트 디스크를 넣고 스위치를 눌러 터키행진곡
에 맞추었다.
[자, 나갑니다.]
우렁찬 행진곡이 마이크를 타고 퍼져나갔다.
[빨리 나가보아요.]
여 조련사가 추 경감의 소매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볼륨을
높여놓은 스피커에서는 행진곡이 우렁차게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개 우리를 지나가면서 그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
다. 그러나 행진곡이 나오는지 마는지에 대해 관심을 보이
는 개는 한 마리도 없는 것 같았다.
[음치들만 모인 것 같은데요.]
여 조련사가 추 경감을 쳐다보며 웃었다. 행진곡이 끝날 때
까지 거기에 관심을 보인 개가 없자 추 경감은 맥이 쭉 빠
지고 말았다.
[구란도 사건은 터키행진곡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저
는 진작 알고 있었어요. 병리학적 측면에서 원인 규명을 해
야 할 거예요.]
그녀는 추 경감의 마음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이 말했다.
[미스, 저.]
[어머, 아직 제 이름을 말하지 않았나요? 조윤정이라고 해
요.]
[미스 조. 결혼하신 지 일 주일밖에 안 되었다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미스 조라고 불러도 큰 실례는 아니겠군요.]
[호호호, 미안해요. 사실은 미혼이에요.]
그녀가 정말 미안한 듯 얼굴을 붉혔다. 조금 전 개의 섹스
에 관해 설명할 때도 얼굴을 붉히지 않던 그녀였다.
[저도 구란도 사건에 무지무지한 흥미를 가지고 있어요. 참
고될 만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경감님께 연락을 드리겠어
요.]
추 경감은 아무 소득도 없이 수사본부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아까부터 본부에서 찾고 있었는데
요.]
민은수가 수사본부가 있는 경찰청 현관에서 추 경감을 보고
말을 걸었다.
[개 공부 좀 하고 왔지요.]
[개 공부.]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
추 경감이 민은수와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그 푸른 셔츤가 뭔가 하는 미친 놈이 또 편지를, 아니 녹
음 테이프를 보내왔는데 먼젓번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곧
대도시에서 반란이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아니 어쩌면 전
국에서 일제히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전국에서 일제히.]
추 경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결코 협박으로만 볼 수는 없
는 일이었다.
[녹음 테이프를 보내왔다면 음성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인데.]
추 경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헌데 그게 아닌가 봐요. 그 녹음 테이프의 성문(聲紋)은
전번과 전혀 다르대요. 얼른 들어보면 목소리가 비슷한데
성문은 전혀 유사점이 없다는 것이에요.]
[여기서 무슨 재미있는 얘기들을 하세요.]
어느새 박봉순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 협박 테이프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지.]
[그 테이프의 성문은 인공으로 가공된 거래요. 도저히 누구
의 것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해요. 그걸 보면 협
박자는 자기 말대로 신의 심부름꾼 정도의 초능력을 가졌거
나 아니면 특수한 과학적 재능을 가진 사람인지도 모르겠어
요.]
[아무려면.]
민은수가 심각해진 박봉순을 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어디 가서 시원한 빙수나 한그릇씩 먹을까.]
추 경감이 제의를 했다.
[경감님은 본부에서 찾고 있어요. 그리고 요즘 세상에 빙수
파는 곳이 그리 쉽게 눈에 띌 것 같아요? 아이스크림이라면
모를까.]
민은수가 핀잔을 주었다.
[난 아무래도 제 3의 사건이 곧 터질 것 같아요. 이번에 사
건이 터진다면 수백만 명이 희생될지도 몰라요. 결코 방정
을 떠는 게 아이랍니다.]
박봉순은 정말 심각하다 못해 공포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11. 용의자
[정말 경찰은 이렇게 아무런 대책도 없는 겁니까?]
민은수가 분통이 터지는 듯이 큰 소리를 쳤다. 세 사람은
빙수집을 찾지 못하고 대책본부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본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박봉순은 거짓말한 것처럼 되어서
민망하게 이쪽 저쪽을 돌아보았다.
[경찰도 나름대로 열심히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추 경감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했다.
[열심히 하면 뭘합니까? 단서도 하나 잡지 못하면서.]
민은수는 말을 하다가 뚝 끊었다. 박봉순이 옆구리를 찔렀
기 때문이다.
[닥터 박, 편들 일이 아니야. 우리는 비싼 세금을 내서 국
가를 경영시키고 있는 거야.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데, 그 미친 놈 하나를 못 잡고 있다는 말
이니.]
[경찰이 별로 잘 하는 것은 없지만 너무 얕잡아 보지도 말
아주시기 바랍니다.]
갑작스레 민은수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추 경감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니 잘 아는 사이인 모양
이었다.
[강 형사, 일은 잘 됐나?]
민은수와 박봉순은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책본부
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처음 보는
형사였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데 아주 샤프하게 생겨
서 유럽 영화에라도 나오는 형사 같았다. 동네 아저씨 같은
추 경감과는 영 딴판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경의 강 형사라고 합니다. 아, 두 분
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아니 세계적으로 두
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강 형사의 너스레 섞인 소리에 민은수와 박봉순은 찔끔했
다. 둘은 바라지도 않았는데 엉뚱하게 유명인이 된 것이다.
민은수의 사무실로는 하루에도 몇 통씩 인터뷰 신청과 강연
요청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구애편지도
하루에 수십 통이 들어오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까 하시던 말씀은?]
민은수가 물었다.
[허허허, 이 사람은 시경 소속인데 내 직속부하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친구하고 같이 일을 하면 어려운 사건도 절로
풀리는 일이 많습니다.]
추 경감이 갑자기 끼어들어 대화를 끊었다.
[응, 민 소장. 잠깐 좀 나와봐.]
박봉순이 민은수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어, 잠깐.]
민은수는 갑작스런 박봉순의 태도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끌
려서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 추 경감이 우리한테 이야기를 들려주
기 싫어하는 거잖아.]
[으응, 그러고 보니 그렇네.]
민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헌데 무슨 이야기를 우리가 들으면 안 되는 거지? 여
태 대책회의는 모두 다 참여했는데?]
민은수는 박봉순의 만류를 뿌리치고 추 경감이 있는 방문
앞으로 가 귀를 쫑긋 세웠다. 추 경감의 목소리는 낮아서
들리지 않았지만 활달한 목소리를 가진 강 형사의 말은 드
문드문 들렸다.
그 소리를 조용히 듣던 민은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진천의 안수인 박봉순의 동생 박진환의 친구.
]
다른 사람들 이름을 말할 때는 아는 이름이 아니어서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안수인, 박봉순, 진환의 이름은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민은수는 문을 벌컥 열었다.
[어?]
강 형사와 추 경감이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민 선생?]
추 경감이 능청맞게 물었다. 민은수는 성난 목소리로 물었
다.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겁니까? 왜 남의 뒷조사를 하고 다니
는 거예요? 범인은 안 잡고?]
[반장님, 이 사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강 형사가 추 경감에게 물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엿들으신 모양이군요?]
추 경감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엿들었어요. 그게 죄가 됩니까? 죄가 되면 체포하
세요!]
[허허허, 흥분하지 마시고요.]
추 경감이 달래려고 했지만 민은수는 점점 더 흥분했다.
[사람 내몰아놓고 닥터 박 뒷조사나 하고 말이야! 우리가
개새끼들을 조종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어머, 그게 무슨 소리야?]
뒤늦게 달려온 박봉순도 어리둥절해서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이 사람들이 닥터 박 뒷조사를 했더라구. 진천에 우리가
갔을 때 저 형산지 뭔지를 파견해서 우리를 감시한 모양이
야.]
[뭐야?]
[허허허, 오해하지 마시고 자리에 앉으십시오.]
민은수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버티고 서 있었다.
[민 선생, 반장님이 앉으라고 하시잖아요.]
강 형사가 다가와 민은수를 잡아 앉혔다. 민은수는 용을 쓰
며 서 있으려고 했지만 강 형사가 허리께를 슬며시 누르자
몸에서 힘이 빠져 의자에 털썩 앉고 말았다.
[두 분에게 설명을 드리지요. 하지만 이건 외부로 발설을
하면 안 됩니다.]
추 경감은 두 번이나 다짐을 하고 말을 시작했다.
경찰청에서 처음에 파견한 사람은 맹달수 경감이었다. 하지
만 맹 경감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수사에 진전이
없었다. 그 때문에 새로이 파견된 사람이 추 경감이었다.
민은수와 추 경감은 남해의 대책본부에서 처음 만났는데,
사실은 추 경감도 그날 내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내려오자
마자 구반리 사건을 만난 것이다.
추 경감은 처음부터 심복인 강 형사를 대동하고 싶었지만
시경의 사정상 강 형사는 바로 합류할 수가 없었다. 강 형
사는 담당하고 있는 사건을 처리하는 한편 추 경감의 지시
로 몇 가지 조사를 해야 했다.
[나는 이 사건에 단서가 몇 가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요.]
추 경감이 담담하게 말했다.
[단서라고요?]
민은수와 박봉순은 깜짝 놀랐다.
[예. 첫번째 단서는 범인이 구란도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
다.]
박봉순과 민은수는 서로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아니, 추 경감님, 그게 무슨 단서가 됩니까?]
[단서가 됩니다. 서울 시민 중 구란도를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강 형사가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기는 나도 닥터 박의 초대를 받기 전에는 몰랐지.]
민은수가 말꼬리를 흐렸다.
[범인은 이전에 구란도를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
리는 지난 1년간의 방문자 명단을 조사했습니다. 다행히 구
란도는 섬이기 때문에 배를 탈 때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워낙 알려지지 않은 섬이라 방문자
는 의외로 수가 적었습니다.]
강 형사가 다시 보충설명을 했다.
[얼마나 됩니까?]
[모두 456명이었습니다.]
민은수와 박봉순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 숫자가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의 단서는 푸른 셔츠, 즉 범인의 이상한 행동입니다.]
추 경감이 말을 다시 꺼냈다.
[범인은 별로 이상한 행동을 한 게 없는데요? 그냥 배를 타
고 떠나갔을 뿐이에요.]
박봉순이 이의를 제기했다.
[범인은 이상한 행동을 두 가지 했습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것뿐입니다.]
강 형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게 뭡니까?]
민은수가 비위 틀리는 소리로 물었다.
[첫째는 범인이 섬을 떠난 시간입니다. 두 분의 증언으로
볼 때, 범인이 섬을 떠난 것은 오전 9시경입니다. 도대체
범인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섬에 남아 있었
을까요?]
추 경감이 말했다.
[그야 자신의 목적이 달성되는지를 두고 보려고.]
[그런 것은 이미 새벽에 개들이 미쳐 날뛸 때 알 수 있습니
다. 더구나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위험을 무릅쓰고서 그 시
간까지 있었다는 것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
려줍니다.]
[그럼 그 목적이 뭐였을까요?]
민은수가 물었다. 여태까지 저런 늙수그레한 사람이라고 얕
잡아보던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다음으로 이상했던 점은 보호장구를 벗어놓고 갔다는 점입
니다.]
[그건 또 왜 이상한 점이 되나요?]
박봉순이 물었다.
[그걸 벗어놓지 않았다면 이 범죄를 일으킨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범인은 일부러 단서를 남겨놓은
것입니다.]
강 형사가 설명을 했다.
[하지만 우리들이 보았는걸요?]
민은수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랬지요. 하지만 그것은 범인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우연
히 발견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본래 범죄자들은 언제
나 자신의 계획이 완전하다고 믿지만 사실은 이런 곳에서
실수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강 형사가 계속 설명을 했다.
[범인은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한 것에 틀림없습니
다. 그래서 이것이 계획된 범죄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일
부러 보호장구를 벗어놓은 것입니다.]
민은수는 그 말을 듣자 등골로 전율을 느끼고 말았다.
[그렇다면 범인이 늦게 떠난 이유가.]
추 경감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
다.
[일종의 확인사살을 위해서였는가, 뭐 이렇게 생각하시는
거지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들은 두
분이 움직인 시간대와 장소를 면밀히 계산해 보았습니다.
범인이 사망자들을 확인하면서 우연히 두 분을 회피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강 형사의 말을 추 경감이 받았다.
[그 외에도 범인은 혼자 힘으로 동력선을 움직일 줄 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해 인근을 샅샅이 수색
해서 그 배를 찾아냈습니다.]
민은수와 박봉순은 그 말에 정말 깜짝 놀랐다.
[정말 대단합니다. 그럼 범인이 누군지도 알아낼 수 있겠군
요?]
[불행히도 그렇진 못합니다. 그 배는 인근의 한 어부 소유
였는데, 그날밤에 훔쳐서 범인이 이용했던 것입니다. 여러
모로 조사해 보았지만 범인이 그 배를 선택한 이유는 오직
그 배가 훔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는 점뿐이었습니다. 물
론 우리들이 그 배가 범행에 이용된 배라는 걸 알아낸 것은
그 배가 그날밤과 오전 중에 분실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
다. 배 안에서 범인의 유류품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아, 별 소득이 없었던 거군요. 그런데 왜 그 배를 우리
한테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본다면 확실한 확인을
해드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요?]
민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분이 보신 배는 아주 흔한
형태로 남해의 웬만한 어부들은 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닙니다. 정밀한 심문이 있었지만 두 분은 뱃사람이
아니라 배들이 가지는 특징적인 면을 구분할 줄 모르셨습니
다. 그래서 번거롭게 배를 확인하는 절차는 생략했던 것입
니다.]
[그렇다면 그 배가 정말 구란도에 간 건지 어떻게 알 수 있
나요?]
박봉순이 물었다.
[기름이지요.]
강 형사가 대답했다.
[그 배는 항해일지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주인이 마지막으
로 돌아왔을 때의 기름량이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배가 발
견되었을 때, 줄어든 양은 꼭 구란도 왕복행만큼이었습니
다.]
[흠, 하지만 결국 얻어낸 것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추 경감이 말했다.
[범인은 남해로 돌아온 만큼 육로는 어떤 방법이든 남해를
거쳐서 빠져나간 것이 됩니다. 그리고 범행 전에 남해에 있
는 배를 훔쳤으므로 그 전날 남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 됩
니다. 따라서 범인은 남해에 어떤 흔적을 남겨놓았음이 분
명합니다.]
추 경감이 담배를 꺼내들고는 낡은 지포라이터를 철컥거렸
다. 몇 번을 철컥거렸지만 지포라이터에는 불이 붙지 않았
다. 강 형사가 성냥을 켜서 담뱃불을 붙이려 하자 추 경감
은 성냥을 입으로 훅 불어 꺼버렸다.
[그런데 이 무렵에 구반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우
리는 범인의 윤곽을 좀 줄여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반리는 내륙이라 방문자의 신원 같은 것은 남지 않습니다
만.]
추 경감은 물끄러미 담배를 바라보다가 다시 담뱃갑에 밀어
넣었다.
[범인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첫째는
구란도에 방문한 적이 있다. 둘째는 구란도 사건을 전후해
서 남해 또는 그 근방을 거쳐갔다. 셋째는 구반리를 알고
있다. 넷째는 동력선을 혼자 움직일 수 있다. 다섯째 음성
변조를 식은죽 먹기로 할 수 있다. 이상의 다섯 가지는 무
슨 심리학 이론 따위를 동원하지 않고도 알아낼 수 있는 것
이고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조사된 구란도의 혐의자 456명 중 이 조건에 해당되는 사람
들을 뽑아보았습니다.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은 18명
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남해를 거쳐갔다는 조건이 결정적이
었습니다.]
[그럼 안수인이나 진환이가 그런 혐의자 18명 중 하나란 말
입니까?]
민은수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두 분도 그 18명 중에 속합니다.]
강 형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뭐라고요!]
박봉순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아, 진정하세요.]
추 경감이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의심에 대해서 말한다면 사실 우리는 그 465명 모두를 의
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제외한 전 국민을
의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하지만 진환이와 수인이는 알리바이가 있잖아요?]
약간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박봉순이 물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알리바이를 지켜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
지요.]
강 형사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정말 이 사람이!]
민은수가 벌컥 화를 냈다.
[참으세요. 우리는 모든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말씀드렸습니
다. 두 분의 협조와 양해를 기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진환이나 수인이가 구반리를 알고 있다는 건 무슨
이야깁니까?]
박봉순이 물었다.
[그 경우에 박진환씨는 해당이 없습니다. 안수인씨는 당진
에서 비교적 가까운 진천에 살고 있기 때문에 거론되었을
뿐입니다.]
강 형사가 답변을 했다. 민은수는 뭔가 생각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범인이 추 경감님 생각대로 움직였다는 보장은 없
는 것 아닙니까? 구란도가 선택된 것도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 모르고, 구반리도 지도책을 펼쳐가지고 맘대로 찍은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추 경감은 깊은 주름살을 지었다.
[민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
이 우리들의 고민입니다.]
[정말 범인이 노리는 게 뭘까요? 사회정화를 바라는 것이
진심일까요?]
민은수도 이제 누그러진 목소리가 되었다. 추 경감이 솔직
하게 자신들의 약점을 인정한 것에 기분이 좋았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 분야는 우리 전공은 아닙니다만
이번 사건은 그 중대성 때문에 외국의 학자들까지 대거 국
내에 불러들여 분석을 가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어떤 결론이 나오고 있습니까?]
[불행히도 정신병자의 짓은 아니라는 게 대체적인 결론입니
다. 범인은 분명한 목적이 있고 아주 냉혹한 인물이라는 게
지금까지의 테이프를 분석한 결과입니다. 범인이 치밀하다
는 것은 유일하게 범인이 남긴 유류품과 선박에서 아무런
지문도 검출되지 않은 것을 보고 우리도 짐작은 했습니다
만.]
추 경감의 얼굴이 침통하게 굳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음, 제가 학생 때 읽었던 추리소설 생각이 나네요.]
민은수가 침묵을 끊고 말문을 열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인데 범인이 맹목적으로 A, B, C순
으로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범인은 분명한 목
적이 있었고, 미치광이도 아니었던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이번 범인도 본래 죽이고 싶었던 사람이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합 269명이나 되는 사망자
가 있다면 그 원한관계를 추적한다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닙
니다.]
추 경감이 한숨을 내쉬었다.
민은수와 박봉순은 눈짓을 교환하고 밖으로 나왔다.
[수인이한테 경찰이 주목하고 있다고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몰라?]
박봉순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을 텐데, 뭐 좋은 일이라고 알려줘.]
민은수가 손까지 흔들었다.
[정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박봉순은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12. 같은 환경
날이 점점 더 무더워지고 있었다. 추 경감은 모처럼의 일요일
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차피 대책본부에 있어도 아무 수
가 없기 때문에 속옷도 갈아입을 겸 집에 왔지만 영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래도 다시 나가야겠는데.]
추 경감이 아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러시구려. 언제는 집에 엉덩이 붙일 짬이 있으셨소? 하긴
날도 더운데 당신 나가면 열 뿜는 사람 하나 줄어서 좋고 대책
본부 에어컨은 사람 하나 더 식히니까 좋겠구려.]
아내가 피시식 웃으며 말했다. 추 경감이 몸을 일으키는데 인
터폰이 울렸다.
[내가 받지.]
수화기를 들어보니 딸 나미였다.
[어, 아빠. 아직도 계셨어요?]
나미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도 신기하지? 사실은 나도 신기하단다.]
후훗 하고 웃는 소리가 인터폰 너머로 들려왔다.
[잘 됐어요. 아빠, 컴퓨터 좀 들어다 주세요.]
아침에 일찍 고친다고 들고 나갔던 컴퓨터를 고치고 온 모양이
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서민 아파트 5층에 살고 있으니, 딸
애 혼자서 들고 올라오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더 늦었으면 엄마랑 나랑 들고 올 뻔했네요.]
나미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좀 오래 걸린 것 같구나.]
[동네 조립품을 샀으니까 그렇지. 대기업 제품을 사면 집에서
앉아가지고 전화만 척 하면 되는데.]
추 경감은 허허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근데 처음에 갔더니, 아무 이상이 없이 잘만 켜지는 거야. 얼
마나 당황이 됐는지 몰라요. 거기서는 뭐, 원래 전문가가 손을
대면 그냥 고쳐진다는 둥 잘난 척이나 하고.]
[그래서 그냥 가져온 거니?]
[아니오. 잘못된 게 뻔히 있는 건데 뭐. 내가 아주 강하게 틀림
없이 집에서는 안 된다고 말했더니, 아무튼 자기들이 보기에는
정상이라는 거지 뭐예요. 몇 번 실랑이를 하는데, 거기 과장이
라는 사람이 얘기를 좀 들어보자고 그러더라고요.]
[흐음, 그래서?]
[그래서 컴퓨터를 부팅하면 화면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더니, 뭐 처음에는 모니터에 전원을 넣었냐는 둥 완전 초보
자 취급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모니터가 21인치라 도저히
모니터를 들고 올 수가 없어서 일단 컴퓨터만 가져온 거라고
말하고, 전화로 상담을 이리저리 했었다고 말을 다시 해줬지
요.]
[아이고,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 가자.]
추 경감은 4층 계단참에서 담배를 꺼내물었다. 잠깐 움직였을
뿐인데 땀으로 와이셔츠까지 흠뻑 젖었다.
[그랬더니 그 과장이 동일한 환경에서 다시 테스트를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랬더니 대번에 문제를 알아낸 거예요. 그래픽
카드에 꽂힌 V램에 에러가 있었던 거래요. 다행히 거기에 재고
가 있어서 바로 바꿔가지고 왔어요.]
[흐음, 그래?]
추 경감은 직감적으로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마음이 급
해져서 그냥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버렸다.
[어, 아빠! 아빠!]
나미가 부르는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추 경감은 대책본부에 도착하자마자 강 형사부터 찾았다.
비번이었던 강 형사는 투덜거리면서도 금방 나타났다.
[반장님, 이렇게 아무 때나 호출을 하시면 저는 대체 언제 세
종이를 좀 봅니까?]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세종이를 어떻게 봐?]
세종이는 노총각인 강 형사가 아들을 낳으면 붙이겠다고 미리
만들어놓은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마누라 감을 만들 기회를 먼저 주셔야지요.]
[헛소리 그만하고 녹음에 대해서 좀 아는 사람 좀 찾아봐. 녹
음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 말야.]
[제가 그런 사람 알 리가 있나요, 뭐.]
강 형사가 야단을 맞자 뽀루퉁하게 대꾸했다.
[한시가 급한데, 그런 식으로 놀 거야?]
추 경감이 닦달을 하자 강 형사는 마지못한 듯 몸을 일으켰다.
[참, 그런데 녹음 기술자는 어디에 쓰시려고요?]
[구반리하고 구란도에를 좀 가봐야겠어.]
[예? 이 시간에 거기로 떠난단 말입니까?]
강 형사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헬기로 갈 거니까 사람이나 빨리 찾아봐!]
[누구를 찾으십니까?]
불쑥 입구에 사람 하나가 들어오며 말했다. 민은수와 박봉순이
었다.
[어라? 일요일에 두 분이 무슨 일입니까?]
강 형사가 놀라서 물었다.
[달리 갈 데도 없고 해서 피서 삼아 왔습니다.]
민은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실 거구, 정말 무슨 일로 나왔습니까? 뭐 새로운 정보
라도 있는 것 아닙니까?]
강 형사가 다시 채근을 했다.
[그런 건 아니구요.]
박봉순이 말했다.
[사실은 구란도에 좀 가봤으면 해서요.]
[구란도요? 거기는 무슨 일로?]
추 경감이 몸을 반쯤 일으키며 물었다.
[그때 너무 황망하게 섬에서 나오느라고 챙겨오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서요. 다시 가서 정리도 좀 하고 이것 저것 가져올
것도 많은데, 출입금지라고 못 들어가게 한다지 뭐예요? 제가
뭐 나쁜 짓을 할 것도 아닌데 좀 심한 것 같아요. 벌써 거기
개들도 모두 잡아들였잖아요.]
박봉순은 투덜거리며 계속 말했다.
[입을 옷도 없다니까요. 보건소 의사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새
옷으로 모두 사입을 수도 없는 거구요. 그런데 도대체 다른 분
들하고는 말이 돼야죠. 그래서 추 경감님을 만나뵙고 사정을
좀 해볼려고 왔어요.]
[아아, 그렇습니까? 그거 잘 됐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구란도
에 가볼 작정입니다. 함께 가시죠.]
추 경감이 선뜻 동행을 허락하자 두 사람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봐, 추 경감님하고는 말이 통할 거라고 했잖아.]
민은수가 좋아하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 찾으라고 한 사람이 누굽니까? 같이 갈 분인가
보죠?]
[아직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강 형사가 말했다.
[저희도 적당한 사람을 찾으려던 참입니다. 녹음기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시는군요.]
[녹음기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오? 아, 구란도의 마을회관에
있는 장비를 사용하시려고 하는 거군요?]
민은수가 말했다. 추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친구가 프로그램 제작소에서 일을 합니다. 대학동창인데
방송반 출신이었으니까 그 정도 장비는 충분히 다룰 겁니다.
그 친구를 데려가면 어떨까요?]
[대환영입니다. 지금 바로 떠날 수 있겠습니까?]
[일단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민은수는 바로 전화를 몇 군데 걸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끝
에 약간 난감해 하며 말했다.
[지금 마침 여기 가까운 곳에 촬영을 나와 있는데, 조금 문제
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내일새벽에 중요한 촬영이 있어서 오늘 중에 돌아와야 한답니
다. 그러기에는 구란도가 좀 멀어서 말입니다.]
추 경감의 얼굴이 펴졌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주십시오. 오늘 중에 꼭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일행은 먼저 구반리에 도착했다. 구반리는 완전히 죽은 마을이
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들도 모두 마을을 떠났
다. 구반리와 구란도에는 원혼들이 밤마다 떠돌아다닌다는 가
십성 기사들이 주간신문들에 흔히 실리고 있을 정도였다. 하기
는 죽은 사람들보다 더 곤욕을 치르고 있는 사람은 개 사육장
주인인 박중군이었다. 구란도의 사건은 피해자들이 기르던 개
에 의한 것이라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구분이 있을 수 없었지
만 구반리 사건은 좀 달랐던 것이다. 구반리에 큰 피해를 입힌
개는 대부분 박중군의 개였다. 그래서 피해자 유족들은 박중군
에게 피해보상을 하라고 소송을 제기해놓은 상태였다. 박중군
의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지만 피해자 유족들의
심정도 십분 이해가 갔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경비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추
경감이 떠나기 전에 미리 이야기해 놓았기 때문에 당진 경찰서
에서는 그곳에 개 한 마리를 튼튼한 상자에 넣어 보내놓았다.
[혹시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두 분은 따라오지 않아도 됩니다.
]
추 경감이 민은수와 박봉순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개 한 마리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민은수는 뭘 걱정하느냐는 듯이 말했다. 일행 다섯은 구반리
마을회관을 향했다.
[무서워요.]
박봉순이 떨면서 민은수에게 몸을 기댔다.
[무서울 게 뭐 있어?]
민은수가 박봉순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여기 남은 건 쥐새끼들뿐이야. 이것들이 미치기 전에는 아무
걱정 말라고.]
[그런 이야기 말아요.]
박봉순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차리리 미친 개를 보는 게 낫겠어요.]
마을회관에 도착하자 추 경감은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테이프
를 꺼내서 따라온 민은수의 친구 정달채에게 건네주었다.
[이 테이프를 틀어주십시오. 세 분은 이곳에서 문을 닫고 기다
려 주십시오. 강 형사하고 나는 마당에서 방송을 들으며 개하
고 같이 있겠습니다.]
추 경감은 강 형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게 소용이 있는 일입니까?]
강 형사가 물었다.
[반장님은 이미 개들한테 그놈의 터키행진곡인지 토끼행진곡
인지를 들려준 적이 있잖아요?]
[같은 환경 아래 테스트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야. 간단
한 진리지.]
추 경감이 담배를 한 대 물며 말했다.
음악이 금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상자 속의 개는 아무 반응이 없는데 추 경감이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입니까?]
강 형사가 재빨리 권총을 꺼내들었다.
[이 음악이 아니야!]
[예?]
[이건 새마을 노래잖아!]
[예, 그렇네요. 새마을 노래 끝나고 나서 행진곡이 나올 모양
이지요.]
강 형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야. 그때 정흥길이라는 친구가 증언을 할 때 저녁에
는 본래 새마을 노래가 나오는데 그날따라 터키행진곡이 나왔
다고 그랬어.]
[그래요? 그렇다면 테이프가 바뀐 모양이군요. 이거 괜히 헛수
고라니. 나 원.]
강 형사가 마을회관 문을 열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지 않아. 이건 내가 직접 회수한 거야. 그때 이곳에서 직
접 회수를 했고 증거 품목에도 내가 사인을 해두었어. 이건 내
가 회수하기 전에 바꿔치기된 거야.]
추 경감의 말은 독백에 가까웠다.
[이봐, 강 형사. 사람들 나오라고 그래. 그리고 테이프도 가지
고 나와. 빨리 구란도에 가봐야겠어.]
추 경감은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폈다 했다. 사람들은 서둘러
서 다시 헬기에 올랐다. 추 경감은 아예 개도 실어서 함께 구란
도로 떠났다.
[구란도는 입구를 지킬 필요도 없는 섬이니 아예 텅 비어 있겠
군요?]
박봉순이 추 경감에게 물었다.
[그렇진 않습니다. 구란도만한 섬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범죄
자, 불순분자, 간첩 등의 소굴로 화할 수도 있기 때문에 1개
중대 병력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군부대로 착륙을
해야 합니다.]
추 경감이 말했다.
[안심이네.]
박봉순이 민은수에게 말했다.
[뭐가?]
[텅 빈 섬에 달랑 몇 사람만 있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물론이지.]
민은수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일단 먹을 게 없으니까 얼마나 배가 고프겠어.]
[뭐야!]
그때 민은수와 박봉순은 소름이 오싹 돋는 소리를 들었다. 평
생 잊을 수 없을 그 소리는 개가 으르렁대는 소리였다. 박봉순
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민은수는 박봉순을 달래려는
듯 껴안아주었지만 자신도 덜덜 떨리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놈이 낸 소리예요.]
강 형사가 우리 같은 상자를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긴장해서 그런 거예요.]
정달채가 웃으며 말했다.
[개들은 소리에 민감하거든요. 헬기 소음에 신경이 곤두선 거
지요. 이놈은 지금 좁은데 갇힌 데다가 공중에 떠 있는 상태라
아주 불안해 하고 있어요. 거기에다가 시끄러운 소음도 있지
요. 결정적으로는 의지할 주인이 없는 상태고요. 으르렁대지
않는다면 더 이상한 거지요.]
[개에 대해서 많이 아시는군요.]
추 경감이 말했다.
[그냥 관심이 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구반리에서는 제가 좀
도움이 되었습니까?]
[예, 크게 도움이 됐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만.]
[아직은 말씀드릴 때가 아닙니다. 구란도에서 실험을 해본 뒤
에 확신이 서면 말씀드리지요.]
추 경감은 정중하게 정달채의 요청을 거부했다. 개도 좀 진정
이 되는지 상자에 배를 깔고 누워 끙끙대기만 하고 있었다.
구란도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군인이 뚜벅뚜벅 걸어와 인
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구란도 경비중대 중대장 오길호 대위입니다.
]
[수고가 많으십니다. 서울 시경의 추 경감입니다.]
추 경감이 인사를 했다.
[구란도에는 민간인은 전혀 없습니까?]
사람들을 소개시킨 후에 추 경감이 물었다.
[예. 한 사람의 민간인도 없습니다. 완전 유령지대가 되어버렸
습니다.]
[사람들도 없는 곳을 군대가 지키고 있는 이유가 뭐예요?]
박봉순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사람들이 살지 않기 때문에 불순분자들이 잠입할 우려가 있습
니다. 경비중대의 임무는 그런 음모를 사전에 분쇄하는 것입니
다. 의학에서도 치료보다는 예방이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
다.]
오 중대장은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일행은 먼저 보건지소 옆의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현재 마을회관은 중대 지휘본부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보건
지소는 중대 의무대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 중대장이 설명했다.
[그럼 마을에 있는 집들도 이용하고 있나요?]
박봉순이 걱정스럽게 물어봤다. 자기 집에 낯 모르는 군인이
살고 있다면 정말 끔찍한 일일 것 같았다.
[아닙니다. 마을에 있는 집들은 개인 사유물입니다. 군부대가
이용할 까닭이 없습니다.]
[아, 예.]
[이 섬은 앞으로 어떻게 될 예정입니까?]
민은수가 물었다.
[행정적인 절차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바가 없습니다.]
[언론에 보도된 걸 보니까 정부가 수용해서 군사훈련 시설로
활용한다는 말이 있던대요?]
[아는 바 없습니다. 군인은 정해진 임무만 수행하면 됩니다.]
이런 앞뒤 막힌 군인아. 민은수는 속으로 욕을 한마디 해줬다.
[다 왔습니다. 하차하십시오. 박 선생님은 마침 오셨으니, 보
건지소에 대한 인수인계증에 서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재고
조사는 중대 의무병들이 해놓았습니다. 경감님은 볼 일을 보시
기 바랍니다.]
박봉순이 중대장을 쫓아 사라지자 추 경감은 곧 일을 시작했
다. 녹음시설이 가동되자 이번에는 제대로 터키행진곡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역시 개는 아무런 조짐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까?]
정달채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추 경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앞서 말씀하신 대로 설명을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민은수는 그 사이에 보건지소에 다녀온 박봉순과 함께 짐을 꾸
리러 떠났다. 추 경감은 강 형사와 정달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터키행진곡과 새마을 노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예?]
두 사람이 모두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 추 경감을 바라보
았다.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개의 관점에서 말이지요.]
추 경감이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말을 추가했다.
[원, 반장님두. 개가 음악이 뭔지나 압니까? 개가 알 게 뭐예
요.]
강 형사가 피식 비웃었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요?]
정달채가 뭔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음악하는 개도 있다는 말입니까?]
강 형사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음악하는 개야 있겠어요? 있어도 전 세계에 한 마리나 있어서
해외토픽에 실릴 테고.]
[그럼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거지요?]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예?]
추 경감과 강 형사가 모두 놀랐다.
[터키행진곡은 새마을 노래에 비해서 두 배쯤 길지요. 개들한
테는 이 두 가지 음악이 모두 그저 소음으로 들릴 테지만 아무
튼 터키행진곡이 더 길다는 것은 개 입장에서 가질 수 있는 유
일한 차이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럼 개보고 두 노래 중 어느 게 더 기냐
하고 물어보면 개가 터키행진곡이 더 길다고 말해 준단 말입니
까?]
[강 형사, 실례되는 이야기는 그만둬.]
추 경감은 강 형사를 제지하고 정달채를 바라보았다.
[예리한 지적입니다.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는 설명을 좀 들을 수 있겠군요.]
정달채는 환하게 웃었다.
[설명이라, 글쎄요. 설명을 할 거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추 경감이 따라 웃으며 담배를 빼물었다.
[구란도 사건이 났을 때 기본적인 의문점 중 하나는 범인이 왜
섬에서 늦은 시간에 빠져나갔느냐 하는 점이었습니다. 범인이
그 시간에 빠져나간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에 틀림
없습니다.]
추 경감이 말을 이었다.
[구반리 사건 때는 범인이 눈에 띄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구란
도 사건에서 의외로 들킨 것 때문에 좀더 주의를 기울였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반리 사건 땐 다른 의문점이 제기되었습니
다. 왜 새마을 노래가 나오지 않고 터키행진곡이 나왔는가 하
는 점입니다. 개들의 살인행동이 아직 해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만 구반리 사건 때 느닷없이 나온 터키행진곡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환경 아래 테스트를 해보신 거군요?]
정달채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구반리에서 의외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테이프가 바뀐 것이지요. 생존자들의 증언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증거물 관리에서 허점이 있었다고 볼 수
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범인이 테이프를 회수해 갔군요!]
강 형사가 이제야 알았다고 소리를 쳤다.
[그렇지. 범인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테이프를
다시 가져간 거라고 생각이 돼. 그렇다면 구란도에서의 행동도
이해가 되지. 테이프를 훔칠 시간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어.]
[하지만 비약일 수도 있지 않나요? 그렇게 확신하시는 데는 다
른 이유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예리한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곳 마을회관이 그 또다른
증거입니다.]
추 경감이 말했다.
[이 마을회관은 출입구가 한 곳밖에 없습니다. 창문에는 쇠창
살이 붙어 있습니다. 사실 개의 공격으로부터 이곳보다 안전한
곳은 없었을 것입니다. 마을회관의 현관문은 개들이 뚫을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실제로 개들은 이 문을 공격한 적이 없습니
다. 그런데 구란도 마을 이장은 그 안에서 개들한테 죽임을 당
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박봉순씨와 민은수씨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저 문은 닫혀 있었다고 합니다. 도어를
돌리기 전에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개는 한 마
리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경감님 말씀은 누군가가, 아니 범인이 일부러
개를 안으로 던져넣어 죽게 했단 말입니까?]
[불행히도 그렇습니다.]
추 경감이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13. 협각
나는 푸른 셔츠의 사나이다.
범인으로부터 또다시 협박 테이프가 날아왔다. 수사본부는
긴장하여 테이프를 들었다.
내 양심적인 의견을 계속 묵살하고 있는 데 따른 부작용이
상당히 심각하리라 생각되지 않는가? 아직도 이 정부는 정
신을 차리지 못한단 말인가? 얼마나 더 많은 인명이 희생되
어야 내 주장을 따라줄 작정인지 알 수 없다. 죽은 사람들
이 촌의 어부와 농부들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
다. 이번에는 중요한 나리들이 사시는 서울에 신의 징벌이
내릴 것이다. 재주 있다면 막아보도록 해봐라. 7월 5일에
신의 무거운 징벌이 내릴 것이다. 장소도 알려주마. 남산이
다.
수사관들은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단순한 협박이라면?
[어떻게 생각되시오?]
김 차장이 수사관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행동입니다.]
맹 경감이 얼른 입을 떼었다.
[범인이 서울에 나타난다면 체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어떻게 말이오?]
김 차장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남산 주위에 경계를 가하지 않고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범
인이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나서 파출소마다 개를 한 마리
씩 데리고 있다가 개들이 이상 현상을 보이면 즉시 남산 일
대에 비상선을 쳐서 범인을 검거하는 겁니다.]
맹 경감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요? 그렇게 하면 시민들에게도 알릴 수 없는데
남산에 시민들이 우글대다가 개들한테 물려죽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요?]
김 차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국민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추 경감이 말했다. 김 차장이 계속 말하라는 눈길을 보냈
다.
[경찰은 국민이 닥칠지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
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범인이 실제로 노리는 것은 이런 사실을 국민에게
알려서 정부의 무능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국민들에게 알릴 수밖
에 없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그래, 추 경감 생각으로는?]
[범인은 예고한 대로 범행을 저지를 것 같습니다.]
[흐음, 철저한 방비를 한다면 개들은 단속할 수 있는 것 아
니오?]
김 차장이 말하자 맹 경감이 뒤를 이었다.
[그렇습니다. 개들은 단속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공
표하면 범인은 범행을 실행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물 먹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개들은 실제로는 잘 단속이 안 됩니다. 서울에도
수십만의 떠돌이 개들이 있습니다. 3일 이내에 그 개들을
잡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흐음, 그것도 그렇구만.]
김 차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구란도와 구반리 사건 결과 작은 애완견들도 광증에 사로
잡히면 야수와 다름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을 강조해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 개는 그렇지 않
을 거라고 믿을 것입니다. 개들이 사람에게 충성을 하듯이
사람도 개한테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추 경감이 설명을 계속했다.
[결국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단속을 하고 계몽을 해도 빈틈
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빈틈을 범인이 공략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범인은 상시적인 공포감을 국민들한
테 심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김 차장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방법이 없군. 이렇게 무력하게 범인에게 끌려다녀야 하나?
]
김 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시를 내렸다.
[테이프는 국과수에 넘겨서 정밀분석을 시키고 기자회견 준
비를 시켜. 그리고 특수감시 대상들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
지 말 것. 이상.]
추 경감은 강 형사를 시켜 민은수와 박봉순을 불러오게 하
였다.
[무슨 일입니까?]
민은수가 심상찮은 수사본부의 모습을 보고 긴장해서 물었
다.
[비상이 걸렸습니다. 두 분도 잠시 서울을 떠나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추 경감은 간단하게 설명을 했다.
[그럼 우리보고 떠나라는 것은 우리가 혐의자라는 이야깁니
까?]
민은수가 기분이 상한 투로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추 경감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범인이 혹시 두 분을 노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
박봉순이 깜짝 놀랐다.
[범인이 서울을 범행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서울에서 범행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게 더 사회에 파급력이 있었겠지요.]
민은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범인이 서울을 이제 와서 범행대상으로 삼은 것은 물론 여
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 하나로 두 분의 안
전도 고려해야 합니다.]
추 경감의 말에 민은수도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럼 어디로 가 있지요?]
박봉순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진천으로 가지, 뭐.]
민은수가 말했다.
[그래요. 진환이도 아직 거기 있으니까. 수인이도 걱정되
고.]
박봉순은 말끝을 흐렸다. 안수인은 간통죄에 휩싸여 있지
않던가. 소문낼 일은 아니니까.
박봉순의 말에 강 형사가 뭐가 말을 꺼내려 했는데 추 경감
이 눈을 끔벅해서 강 형사의 입을 막아버렸다. 두 사람은
당일로 진천으로 내려갔다.
[나야 어차피 휴가중인 셈이니까 괜찮지만 민 소장은 덩달
아 이게 무슨 고생이야?]
박봉순이 진천으로 가는 버스에서 민은수에게 살며시 기대
며 말했다.
[미인하고 놀러다니는 게 무슨 고생이야? 이런 고생이라면
백날 천날 해도 좋지.]
[호호, 내가 미인이야?]
박봉순이 웃었다.
[그럼,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박봉순이 민은수의 품으로 살며시 파고들며 은근한 목소리
로 물었다. 민은수는 부드러운 봉순의 젖가슴이 느껴지자
그만 다음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두 남녀는 아무 소리
없이 진천까지 서로 꼭 끌어안은 채 내려갔다.
버스터미널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진환이 나와 있었다.
[안수인씨는 어떻게 됐어?]
민은수가 진환을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그냥 그렇지, 뭐.]
[안정아씨는 풀려났니?]
[아니.]
진환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이, 이 더운 날에 얼마나 곤욕일까? 면회는 좀 가봤니?]
[별로. 수인이가 매일 가보고 있어.]
[흐흠, 그건 별로 좋지 않은데. 정아씨한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일 아닐까?]
민은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고소돼서 감옥에 갇힌 판인데 더 문제될 게 뭐 있
겠어요?]
박봉순이 별 소리를 다 듣는다고 중얼거렸다.
[최병길씨는 어디 있어?]
박봉순이 동생에게 물었다.
[수인이를 안 만날려고 그러는지 통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집에도 안 들어오고.]
[합의를 보는 걸 아예 원천봉쇄하겠다는 거군.]
민은수가 말했다.
[최병길을 잡아야 합의를 봐서 정아씨가 풀려날 텐데, 이것
참 난처하게 됐군, 그래.]
일행은 안수인과 박진환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갔다. 안수
인과 안정아의 관계가 소문이 난 후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안수인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여관으로 갈 수밖에 없었
다.
그날밤 늦게 안수인은 만취해서 돌아왔다.
[아유, 어쩌다 이렇게 술을 먹었어?]
박봉순이 안수인을 맞아들이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안수
인은 비틀거리다가 박봉순을 덥석 껴안았다.
[어머, 수인아!]
박봉순이 놀라 몸을 비틀었지만 안수인의 힘이 의외로 세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안수인은 박봉순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정신없이 애무를 하고 있었다.
[정아씨, 정아씨.]
[민 소장! 나 좀!]
박봉순이 다급하게 민은수를 불렀다. 민은수가 허둥지둥 나
왔을 때 안수인의 손은 박봉순의 치마를 마구 끌어올리고
있었다.
[야, 임마!]
민은수는 안수인의 머리를 잡아 올리면서 그대로 얼굴을 주
먹으로 내질렀다. 안수인은 맥없이 퍽 나뒹굴었다.
[어머, 너무 심했어! 술취한 것뿐인데.]
박봉순이 쓰러진 안수인을 살피려고 하자 민은수가 팔을 잡
아 막았다.
[뭐하는 거야?]
[수인이는 내가 정아씬 줄 알았을 뿐이야.]
박봉순이 설명을 하는데 안수인이 머리를 흔들며 일어났다.
[안수인씨, 괜찮아요? 난.]
민은수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다가 안수인의 눈길을 보고
는 흠칫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안수인은 파랗게 불꽃이 이
는 눈길로 민은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광인 같았다.
[너, 너, 너 최병길이구나! 정아씨와 날 갈라놓은 악마! 내
가 본때를 보여주마!]
민은수는 안수인이 돌진이라도 할까 대비를 하는데, 안수인
은 주머니를 뒤적뒤적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민은수와 박
봉순은 어리둥절해서 서로 마주보았다. 그제서야 잠에서 깬
박진환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어?]
얼굴이 벌겋게 된 세 사람을 바라보던 진환이 알겠다는 듯
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수인이 녀석이 누나를 정아씬 줄 안 모양이지? 이 녀석 며
칠 전에는 여관 아주머니를 껴안고 난리치다가 주인 아저씨
한테 맞아 죽을 뻔했다는 거 아냐.]
민은수와 박진환은 쓴웃음을 짓고 주머니를 사뭇 뒤지고 있
는 안수인을 잡아끌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수인은 그대
로 쓰러져 코를 골며 잠에 빠져버렸다.
아침에 안수인은 얼굴을 만지며 일어났다. 눈을 뜨자 박진
환과 민은수가 빙긋이 웃으며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엇, 민 회계사님 오셨어요?]
안수인은 입을 열자 얼굴이 당기는 것을 느꼈다. 무의식적
으로 손을 들어 얼굴에 갖다대자 깜짝 놀랄 만큼 통증이 있
었다. 짧게 신음소리를 내자 박진환과 민은수는 껄껄 웃고
말았다.
[내가 어젯밤에 무슨 실수라도 했나 보지?]
안수인도 기억이 끊긴 어젯밤 일을 생각해 보려고 애를 썼
지만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어젯밤에? 그렇지 큰 실수를 했지.]
박진환이 입을 떼는데 박봉순이 들어섰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조용히 해.]
그런데 그 말에 안수인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짐작이
가고 말았다. 안수인은 모른 척 할 수도 아는 척 할 수도
없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괜찮아. 모르고 그런 건데 뭐.]
박봉순도 안수인이 눈치챘다는 것을 알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젠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아침을 먹고 나서 민은수가 안수인에게 물었다.
[회사에 사표를 냈습니다.]
안수인은 뜻밖의 말을 했다.
[회사 동료들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최병길이도 찾아야
겠고 해서.]
[허허, 그런데 금방 수리가 되겠어요?]
민은수가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까짓거 안 되면 말라죠.]
안수인은 피식 웃어버렸다.
[본래 연구하는 건 뭐였어?]
박봉순이 분위기를 바꿔볼까 하는 마음에서 화제를 돌렸다.
[음성인식 기술이에요.]
[음성인식이라면 컴퓨터가 사람 소리를 알아듣게 하는 그것
말인가요?]
민은수가 물었다.
[말하자면 그거지요.]
안수인은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는데 박봉순이 눈치
없이 계속 물었다.
[그런 거라면 벌써 나와 있는 거 아냐? 오성 컴퓨터에서 선
전할 때 나오잖아.]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지요. 미리 기록해 둔 명령어만 사용
할 수 있거든요.]
[그런 게 나오면 편해지려나?]
[편해지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박진환이 툭 끼어들었다.
[얘, 너는 명색이 시인이 기계의 발전에 대해서 그렇게 긍
정적인 자세를 갖고 있는 거야?]
[그럼. 시인은 컴퓨터 안 쓰는 줄 알아?]
[이 기술은 컴퓨터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야.]
안수인이 말을 꺼냈다.
[텔레비전에도 적용할 수 있지. '채널 7'이라고 외치면 7번
이 나오고 '채널 11'이라고 외치면 11번이 나오게 할 수 있
고, '밥 지어'라고 말하면 밥을 지을 수도 있어. '냉방 시
작'이라고 하면 에어컨이 작동되고, '난방 시작'이라고 하
면 난방이 시작되는 거지.]
[하하, 그거 재미있네. 그거야말로 진짜 홈 오토매이션이구
만.]
민은수가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그러면 일상생활 용어와 중복이 돼서 엉뚱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중요한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채널 11에서 오늘밤에 영화가 한대'라고 말하
는데 확 11번으로 바뀐다든가.]
박봉순이 의문을 표시했다. 얼른 민은수가 맞장구를 쳤다.
[그것도 그렇네. 가스가 새어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옆에서 꼬마가 '불이야' 하는데 가스레인지에 불이 켜져서
꽝 하고 집이 날라간다든가.]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그래서 대비책이 여러 가지 마련
이 됩니다. 방법 중의 하나는 집 안에 명령 마이크를 설치
해 두고 그 마이크를 통해서 내려지는 명령만 수행하게 하
는 것이지요. 또다른 방법으로는 암호를 설치하는 겁니다.
'열려라 참깨'와 같은 암호를 말한 뒤에 이어지는 단어만
명령으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열려라 참깨! 호호호, 아주 아라비안 나이트로구만.]
박봉순이 깔깔 웃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인류의 상상력의 보고와 같은 거야. 알
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나온 그 문은 오늘날 자동문으로
되살아났고, 하늘을 나는 융단은 헬리콥터로, 만병통치의
사과는 항생제로 나타난 거지.]
박진환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그럼 명령은 어떻게 기계한테 전달되는 거지요?]
민은수가 안수인에게 물었다.
[미묘한 것을 질문하셨습니다. 전달 방법은 예전부터 유선
방법이 많이 연구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마이크에 연결해서
명령이 직접 기계에 전달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방법은
기계마다 마이크를 부착하고, 또 음성인식 장치를 달아야
한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고가의 장
비를 간단한 장비에까지 붙여야 한다면 비용이라는 측면에
서 낭비였던 거지요.]
[그게 무슨 말인지 난 잘 모르겠네?]
박봉순이 물었다.
[간단하게 말씀드린다면 이런 겁니다. 전기밥솥에서 밥을
하는 데는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되잖아요. 이것은 간단한
신호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음성을 인식하는 장치를 부착시키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겁니다.]
[음성인식 장치라는 것도 일단 개발이 되면 싸게 대량 생산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사람의 음성은 모두 다 다릅니다.]
[그래, 그래서 성문이라고 하지. 지금 수사본부에서도 그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밥'이라고 말한다 해도 기
계는 그것이 '밥'인지 '죽'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좀 이상한데 아무리 사람마다 음성이 다르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거 아니겠어? 기계가 그 정도의
차이까지 민감하게 반응을 해서 구분을 한단 말야?]
민은수가 반론을 내놓았다.
[민 소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대체로 비슷한 파동을 갖기는
합니다. 하지만 음성인식 장치는 그 차이를 세밀하게 분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밥, 밤, 팝과 같은 비슷한 말들도
음성인식 장치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언어를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음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약간 잘못 들은 부분이 있다고 해도
앞뒤 문맥을 따라 스스로 고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
만 기계는 문맥이라는 것을 모르지요.]
[음, 여러 가지 음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단 말이지. 하
지만 전기밥솥에 붙이는 장치에는 '밥'이라는 단어만 인식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한 글자만 인식해야 한다고 해도 특수한 장치가 되
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바보 같은 이야기구만. 그냥 음성인식 장치는 하나만 만들
고 거기에다가 다른 기계들을 연결시켜주면 되잖아.]
박진환이 의견을 내놓았다.
[맞아. 바로 그거야. 그런데 선으로 연결하는 것은 역시 문
제가 있었어.]
[응? 무슨 문제?]
[선이란 기계들을 일정한 장소에 고정시키는 속박의 줄이
야. 이미 여러 가전제품들은 전력을 공급받기 위해서 선이
하나씩 꼬리처럼 달려 있지. 그런데 여기다가 또다시 음성
인식을 위한 꼬리를 달아야 한다면 소비자에게는 너무 귀찮
은 일이 되고 마는 거야.]
[무선으로 하면 되겠네?]
박봉순이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음성인식 장치가 주인의 명령을 받은 다음
에 그 일을 수행할 기계한테 단순화된 신호로 그 명령을 전
달해 주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안수인은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여관의 텔레비전은 무선 리모컨이 없습니다만 제가 만
일 여기서 텔레비전을 제어하려 한다면, 그건 불가능합니
다. 진환이가 리모컨과 텔레비전의 직선경로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음성인식 장치가 집 안의 가전제품
을 가동시키려면 이런 적외선 방식의 리모컨으로는 역시 곳
곳에 리모콘 장치를 설치해야 되는 비용이 들어가게 됩니
다.]
[그렇겠군요. 그럼 해결방법을 찾았습니까?]
민은수가 물었다.
[아직 완전한 해결방법은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가지 방법을 연구해 보고 있었습니다.]
[어떤 방법입니까? 아, 회사 기밀이라면 말씀 안 하셔도 됩
니다.]
[회사야, 그만둔 거니까 상관없습니다.]
안수인은 잠시 뭘 생각하는 눈치였다.
[본래 대부분의 기계는 결국 ON과 OFF의 두 가지 스위치만
갖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점에 착안을 했습니다. 기
계들이 갖고 있는 명령어들은 분해를 해보면 결국 몇 개 되
지 않습니다. 음성인식 장치가 어떤 기기의 작동을 명령받
으면 ON에 해당되는 음성을 내보냅니다. 그러면 기기가 작
동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정해진 명령어를 음성인식 장치
가 만들어서 내보내면 해당 기기들이 그 음성을 접수하면
해당 작동이 일어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난 또 잘 모르겠는데? 처음에 음성인식 장치가 비싸서 각
기기마다 달 수가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하는 말은
결국 각 기기마다 음성인식 장치를 만들어 단다는 거잖아?]
박봉순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전혀 다른 거예요. 사람마다 다른 음성을 인식
할 수 있는 장치는 고가가 되는 거지만 제가 말한 것은 기
계가 내는 음성이기 때문에 사전에 그 음성만 기록할 수 있
는 거지요. 따라서 저렴한 비용에 생산이 가능하답니다. 비
유해서 말한다면 음성인식 장치는 기계와 사람간에 대화를
시켜주는 통역사예요. 통역사는 비용을 들여서 교육시켜야
하지만 통역사가 해주는 말을 듣는 데 따로 돈이 드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겠군요. 그런데 우연히 음성인식 장치가 가진 목소리
와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있거나 그 음성을 흉내내
서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가령 음성인식
장치가 부착된 현관문을 열게 한다든가?]
민은수가 우려를 나타냈다.
[그 점이 역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리고 집 안이 시
끄러울 가능성도 제기되었구요. 이 때문에 저는 사람은 들
을 수 없는 높은 영역대를 명령어 전달의 통로로 이용할 생
각이었습니다. 사람은 20사이클에서 20킬로사이클 사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상의 영역을 사용하
면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이 기기한테 명령어를 전달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면 빛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애물이 놓여 있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멋진 방법이야. 하지만.]
박봉순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뭐죠?]
안수인이 물었다.
[애완동물한테 영향이 있을지 몰라. 개들은 120킬로사이클
이상도 들을 수 있다더라고.]
[그래요? 그 점을 몰랐군요 연구소에는 개는 없었거든
요. 하지만 이 신호들이 개나 동물한테 별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네요. 어쨌든 짧고 간단한 신호니까요. 그나저나
학술회의를 열기에는 너무 배가 고프네요. 그만 밥이나 먹
으러 가는 게 어떨까요?]
그 말에 모두 웃으며 일어났다.
14. 세번째 사건
7월 5일이 되었다. 비상선이 남산 주위에 쳐진 상태로 경찰
은 초비상상태였다. 그동안 남산 주위의 개들을 모두 묶어
둘 것을 방송을 통해서 수십 차례 내보냈을 뿐만 아니라 치
안을 팽개치다시피 하면서 전 경찰병력과 행정인력이 호별
방문을 통해 개끈을 나눠주기까지 했다. 남산 일대는 군대
까지 동원되어 떠돌이 개들을 소탕했다. 그러나 남산의 숲
속에는 아직도 수십 마리의 개들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남산을 주위로 배치된 경찰에게는 모
두 실탄이 지급되어 있었다. 또한 각 경비병력은 개들을 단
단하게 묶어서 한 마리씩 데리고 있었다. 이 개들이 이상
행동을 보인다면 서울 일원에는 비상경계령이 내려지도록
되어 있었다.
초조한 가운데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추 경감은 남대문
방면의 남산 진출입로에 나와 있었다. 바보가 되더라도 아
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시간이
이미 오후 5시가 다 되어갔다. 별일 없이 오늘이 넘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심리학의 전문가
들은 오후 또는 밤늦은 시간에 범행이 일어나기 쉽다고 미
리 경고를 했다. 범인이 하루 전체를 지목한 것은 긴장도를
높였다가 해이해질 즈음을 노리는 고단수 술책이라는 분석
이었다.
[정지!]
누군가가 태연하게 경찰 사이를 뚫고 남산으로 들어가려다
제지되었다.
[왜들 이러세요?]
젊은 여자였는데 가슴에는 요크셔 테리어를 안고 있었다.
[오늘 남산은 통제구역입니다. 출입이 불허되었습니다.]
[어머, 왜요?]
경관은 피곤함을 느꼈다. 오늘 100번 이상 설명을 한 것 같
았다. 그렇게 엄청난 선전을 했는데도 오늘의 일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아무튼 남산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무슨 말이에요? 멀쩡한 산이 왜 폐쇄되었다는 거예요? 난
좀 올라가야겠어요.]
여인이 안고 있는 개가 약간 꿈틀댄다는 느낌이 든 것은 그
때였다. 개는 순식간에 주인의 품에서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경관의 목을 물었다. 추 경감은 약간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었지만 바로 코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그 일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개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순발력을 발휘하여 검문 경관의
목을 행해 달려들었다. 핏줄기가 원호를 그리며 뿜어져 나
오고 경관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젊
은 여인은 엄청난 비명소리를 질렀다. 추 경감은 권총을 뽑
아들며 외쳤다.
[비상을 울려. 상황이 시작됐다.]
때를 같이 철망 속에 들어 있던 실험용 개가 미친 듯이 짖
어대기 시작했다. 아니 입가에 거품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미친 것 같았다.
추 경감이 미처 두 걸음도 떼기 전에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
다. 경관의 동료가 칼빈 소총으로 개를 한 방에 날려보낸
것이었다. 추 경감이 달려갔을 때 동료 경관들이 쓰러진 경
관의 목을 지혈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개는 정
확하게 경관의 경동맥을 절단했다. 추 경감은 고개를 흔들
었다. 너무나 정확한 가격이었기 때문에 쓰러진 경관이 살
아날 확률은 희박했다. 지혈이 되지 않았고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추 경감은 고개를 돌려 개를 보았다. 개의 머
리통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개 몸뚱이 뒤로 뿜어져 나간
것처럼 부챗살 모양으로 피와 살이 부서져 있었고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경관의 피와 섞여 강물처럼 흘렀다.
대책본부로 이 소식은 바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상증상을
보이는 개에 대한 보고도 들어왔다. 다행히도 이 이상증상
은 남산을 둘러싼 비상선을 넘지 않았고 남산의 북쪽 면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으로 판단되었다. 즉시 대책본부는 병력
을 이동시켜 포위망을 좁혀나갔다.
철저한 대책을 마련한다고 했지만 끝내 인명피해를 막을 수
는 없었다. 역시 남산에는 34마리의 개들이 숨어 있었고,
부랑자와 가출 청소년들이 70여 명 숨어 있다가 개들한테
사냥을 당해서 쫓겨 내려왔다. 행동이 늦었던 사람들은 개
들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총 17명의 사망자와 42명의 부상
자가 발생했다. 이 중 13명은 중상이었다. 사망자 중 한 명
은 경관이었다.
대책본부는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어수선했다. 모든 전화
는 항의와 질책으로 불통인 상태였다. 사건조사를 할 수 있
는 상황이 아닐 정도로 본부는 정신이 없었다. 내무부 장관
은 말할 것도 없고 국무총리와 여당 대표까지 대책본부로
나와 있는 형편이었다.
대통령 선거 일정을 앞두고 있는 때인 만큼 이 문제는 정치
권으로 비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두 사건은 우발적으
로 빚어진 것이었지만 이번 사건은 범행이 예고된 상태였
고, 따라서 정부의 모든 힘이 기울여진 상태에서 빚어진 일
이었다. 먼저 야당의 대변인들이 포화를 열었다.
[현 정부의 상태는 말 그대로 개판입니다. 개들이 이렇게
거리로 뛰어나와 시민들을 학살하는 마당에 정부는 아직도
그 원인은커녕 조그만 단서도 잡지 못하고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동안 희생된 수백 명의 시민
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총사퇴를 결행해야 할 것입니
다.]
여당 대변인도 지지 않고 맞성명을 내놓았다.
[국정의 책임은 정부 여당뿐만 아니라 국정의 파트너인 야
당에도 있는 것입니다. 야당은 정치공세로만 눈을 돌려 무
책임한 내각의 총사퇴를 운운할 것이 아니라 현 사태에 대
하여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입니
다.]
양당의 정치공세와 맞물려 대책본부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
는 지난 사건의 경과를 브리핑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었
다.
추 경감이 애초에 대책본부를 떠나 현장에 나와 있던 것은
이런 생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들이 반응을 하기 시작한 시간과 장소를 표시해서 가져
오도록 해.]
추 경감은 강 형사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하고 담배를 피워물
었다. 그가 맡았던 어떤 사건도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대학
살극은 없었다. 범인은 미치광이가 아니라고 학자들은 말하
지만 이런 대학살극을 저지르는 자는 미치광이일 수밖에 없
다는 게 추 경감의 생각이었다. 이 악마는 사회와 격리를
시켜야만 한다는 생각이 추 경감을 조급하게 만들어가고 있
었다.
강 형사가 남산 일대의 지도에 관측된 개들의 상태에 대하
여 표시를 해나갔다.
경계선을 따라 원호가 그려졌다. 추 경감은 면밀하게 그 원
호를 살펴보았다. 계곡과 능선에 따른 차이를 고려하고 개
들이 반응을 보인 시각을 따져보았다. 추 경감은 한 지점을
짚었다.
[병력을 뽑아서 이 지역을 수색한다. 헬기로 공중 조명을
지원하도록 요청하도록.]
강 형사는 추 경감의 단호한 지시에 놀라는 눈치였다. 추
경감과 10여 년을 같이 일하면서 처음 보는 무서운 태도였
기 때문이다.
이미 긴 여름해도 넘어가 남산은 새카매진 상태였다. 헬기
4대가 조명을 비춰주고 있고 도로변마다 서치라이트가 날라
져 와 수색을 도왔다.
[반장님, 뭘 찾아야 합니까.]
[뭔지는 나도 몰라. 무엇이든지 이상한 것은 수집을 한다.
빈 병도 좋고 깡통도 좋다. 뭔가 달라 보이는 것은 뭐든지
수집을 하고, 특별히 수상해 보이는 것은 즉시 보고를 한
다. 기계류는 특별히 주의해서 찾아내도록 한다.]
추 경감의 지시를 받고 수색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수색이
시작된 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추 경감을 찾는 전화가 걸
려왔다.
[나, 국회의원 이익모요. 지금 몇 신 줄 알고 헬기를 띄워
서 지역 구민들을 괴롭히는 거야! 당장 수색이고 나발이고
중지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추 경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없어? 당신 말 들어보니까 경감밖에 안 되던데? 지
금 경감이 국회의원의 말에 불복한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저는 국민을 상전으로 모시는 사람일 뿐입니
다.]
[뭐야? 이것 봐라! 나는 그 국민이 뽑아준 대표야. 이거 정
말 뭘 모르는 인간이구만. 이것 봐, 원님 뒤에 나발 불기
지, 지금 무슨 성과가 있다고 수색이야, 수색이. 그만했으
면 광고효과는 충분히 났을 테니까 그만하란 말야.]
[전화 끊겠습니다.]
추 경감은 전화를 내려놓았다. 추 경감은 일체 걸려오는 전
화를 받지 않고 묵살해버렸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대책본
부장인 김 차장이 달려왔다.
[추 반장, 이게 무슨 짓이에요.]
김 차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지금이 개들이 미치는 이유를 알아낼 유일한 기회입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이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을 겁니다.
]
추 경감이 말했다.
[으음. 하지만 성과가 없을 경우도 대비를 해야 되는 것 아
니겠소? 이렇게 떠들썩하게 일을 벌였다가 성과가 없다면
누가 감당을 하겠소.]
[제가 옷을 벗겠습니다.]
추 경감은 단호한 자세로 말했다.
[허허, 추 반장이 옷을 벗는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데.]
김 차장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추 경감이 그를 밀
치며 밖으로 나가버린 탓이었다.
추 경감은 창문 아래로 들어오는 어떤 물체를 보고 황급히
내려간 것이었다.
[들여오지 말고 거기 내려놔.]
추 경감이 큰 소리로 지시를 했다.
추 경감은 비닐을 제치고 물체를 살펴보았다. 제일 먼저 눈
에 보이는 것은 스피커가 깨진 것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 외에 금속질의 부서진 조각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추
경감은 물체들이 깨진 면을 찬찬히 관찰을 했다. 틀림없이
폭약에 의해서 부서진 것이었다. 부서진 물체더미를 조심스
럽게 헤치던 추 경감의 눈이 반짝였다. 녹다 만 테이프 쪼
가리를 본 것이다.
[수색 중단해. 이 물건들을 즉시 국과수로 옮겨서 복원하도
록 해. 특히 이 테이프에 뭐가 녹음되어 있었는지 꼭 밝혀
내야 해.]
진천의 박봉순 일행도 오후 5시부터 진행된 텔레비전의 생
중계를 지켜보았다. 개에게 물어뜯긴 부랑자들이 구조장치
에 실려서 산을 내려오는 것을 보자 박봉순은 더 참지 못하
고 채널을 돌렸다.
[구란도 생각이 나서 도저히 더 볼 수가 없어.]
박봉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완전히 악마 출현이구만. 사람의 심장으로는 저런 일
을 할 수 없을 거야.]
민은수도 몸을 떨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일이 발생하는 걸 보니 정말 나라가
갈 때까지 갔다는 생각이 드는데.]
박진환이 일어났다.
[은수 형, 우리는 맥주나 한잔 하러 갑시다.]
[왜 이래? 나도 따라갈 테야.]
혼자 있기가 무서웠는지 박봉순도 일어났다. 안수인은 어디
를 갔는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맥주집에서도 화제는 온통 개의 광란극뿐이었다. 텔레비전
에서는 피해자 가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이 소년은 올해 14세입니다. 소년의 형은 돈을 벌어오겠다
고 집을 나갔고, 소년 가장인 을식군은 앓아누우신 할머니
를 모시고 어렵게 생활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집을 나간 형
이 생활비로 돈 10만원을 지난 달에 처음 부쳐와서 을식군
은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립고, 보고싶고,
의지가 되던 형은 개들의 습격을 받아 싸늘한 시신으로 돌
아왔습니다. 푸른 셔츠의 사나이라는 범인은 사회 정화를
목표로 천인공노할 범죄를 태연히 저지르고 있습니다. 범인
에게 말합니다. 이 소년의 눈물을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느껴보기 바랍니다.]
소년은 흐느껴 울고 있었다. 기자가 소년의 어깨를 툭툭 치
자 소년은 돌아서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너, 죽일 거야! 죽일 거.]
화면은 황급히 스튜디오로 바뀌어져 소년의 절규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어딜 가나 빠져나갈 수가 없군. 이건 마치 천형이네.]
민은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수인이는 어딜 간 거지?]
박봉순이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하필 오늘 같은 날이라니? 그 말 한번 이상하네?]
박진환이 무슨 이야기냐며 귀를 세웠다.
[경찰이 이번 사건 용의자 리스트를 작성했는데, 거기에 너
랑 수인이도 들어 있단다.]
[뭐야? 그 인간들 제정신이 아니군 그래!]
박진환이 벌컥 화를 냈다.
[그럼 수인이가 누나를 죽이려고 구란도에 개를 풀어놨다는
이야기잖아! 이게 가능해!]
[흥분하지 마라, 얘. 내가 그랬니? 경찰이 그랬지.]
[누나는 그런 이야기를 왜 안 해준 거야? 경찰한테 뭐 받은
거 있어?]
[받은 거? 얘, 얘, 받기는커녕 직장도 잃고 이렇게 떠돌고
있잖아.]
[후후후, 그건 그렇군. 그러고 보니 여태 수인이 녀석 걱정
을 했는데, 이제 보니 걱정할 필요도 없구만 그래.]
[그건 또 무슨 소리니?]
[경찰 나리들이 술 취한 수인이를 잘 보호해줄 것 아니겠
어? 참 그러고 보니 여기에도 어디쯤에 짭새가 한 마리 앉
아 있을지 모르겠네?]
박진환은 낄낄거리고 웃었다.
세 사람은 저녁도 안주거리로 채우며 양껏 맥주를 들이켜고
11시나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때
까지 안수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 사람은 방도 제대로 가
리지 못하고 그냥 쓰러져버렸다.
박진환이 목이 말라 눈을 뜬 것은 새벽 2시쯤이었다. 창가
에 희끄무레하게 앉아 있는 사람이 보여 박진환은 흠칫 놀
랐다. 유령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니 안수인이
언제 돌아왔는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박진환은 그를 부르
려 했는데 어둠 속에 눈이 익으면서 안수인의 어깨가 가늘
게 흔들리는 것을 알았다. 정아씨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게
지. 박진환은 그렇게 생각하고 아무 말 없이 돌아누웠다.
그 시간 추 경감은 현장에 나타난 여인을 상대로 철야심문
을 하고 있었다.
[당신들은 살인마야. 연약하고 힘없는 강아지를 그렇게 비
참하게 죽이다니 당신들 같은 살인마와는 아무런 이야
기를 할 수 없어! 그리고 내 꼴을 봐! 갈아입을 옷 한 벌을
주기는커녕 샤워도 못 하게 하고 있잖아!]
여인은 아직도 그대로 피투성이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것 봐요. 그 연약하고 힘없는 강아지가 건장하고 바로
몇 시간 전까지 펄펄 살아 움직이던 경찰관을 죽였다고요.
당신 눈으로 본 거잖아!]
강 형사가 터지는 울화를 간신히 억누르면서 말했다.
[말도 안 돼요! 내가 본 건 멍청한 경관 하나가 갑자기 쓰
러지자 옆에 서 있던 불한당 경찰이 내 귀여운 베쓰를 총으
로 쏴, 쏴, 쏴 죽인 것뿐이라고요! 이 악당들아!]
여인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반장님, 도저히 심문이 안 되겠는데요?]
강 형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형사 생활 몇 년인데 젊은 여자 하나를 못 다루고 그렇게
쩔쩔매는 거야?]
추 경감이 핀잔을 주었다.
[저는 못 다루겠습니다. 아무래도 총각인 탓이겠지요, 뭐.
실전경험이 많으신 반장님이 직접 한번 다뤄보세요.]
[허허허, 이거 강 형사, 자네도 능구렁이 다됐구만. 완전
능구렁일세 그려.]
추 경감이 모처럼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내가 직접 심문을 해보지.]
추 경감이 심문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것 보세요.]
젊은 여자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언제까지 여기에 잡혀 있어야 하는 거예요? 난 무지 졸립
고 배고프고 피곤해요. 빨리 내보내 주세요.]
[우리도 졸립고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요. 저녁은 사준 것도
싫다고 먹지 않았다고 하던대.]
[그런 싸구려 음식을 어떻게 먹어요! 굶는 게 낫지.]
[그럼 그 점은 불평할 게 없잖소.]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남산 일대는 모두 통행이 금지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당
신은 최종 경비선까지 접근을 해왔어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추 경감은 그녀의 신원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일상적인 루트를 따라왔다면 당신은 벌써 되돌려 보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태연히 최종 경비선까지 나타난
것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접근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 무슨 소리에요? 터무니없어요!]
[터무니없는 건 당신입니다. 당신은 개만 한 마리 달랑 데
리고 있었을 뿐 핸드백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당신은 돈
도 한푼 없어요. 하늘에서 떨어진 겁니까?]
[땅에서 솟았을지도 모르지요.]
여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당신이 안고 있던 그 개는 왜 더 물기 쉬운 위치였을 당신
의 팔이나 가슴을 물지 않고 검문 경관에게 뛰어올랐을까
요?]
추 경감의 뜻하지 않은 질문에 여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
다.
[개가 뛰어올라서? 아니에요. 나는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당신은 개를 잡으려는 어떤 동작도 취하지 않았어요. 오히
려 개를 떨쳐버리는 것 같은 동작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요?]
[천만에요! 잘못 본 거예요! 나는 그러지 않았어요!]
여인은 몸을 반쯤 일으키며 악다구니를 썼다.
[앉으세요.]
추 경감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무서웠던 겁니다. 개 한 마리를 들고, 물론 당신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조그만 애완견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몰래 숨어서 앞의 두
군데 초소는 지나쳤습니다. 어쩌면 그럴듯한 거짓말을 했는
지 모르겠습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일부러 소지품은
챙기지 않았습니다. 실수로 핸드백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데, 그렇게 되면 곤란할 거라고 계산한 거지요.]
여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추 경감을 바라보았다. 추 경감
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잠시 경관과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당신이 데리고 온
개는 낮은 소리로 그르릉대기도 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기미
를 보였습니다. 당신은 구란도와 구반리의 참혹한 시신들을
떠올렸지요. 결국 당신은 공포를 참지 못하고 개를 던져버
렸습니다. 그런데 그 개는 그 탄력을 이용해 앞에 서 있던
경관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습니다.]
여인은 언젠지 모르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당신이 조금만 참았다면 그 개는 당신의 팔뚝 정도나 물었
을 텐데. 그랬다면 애꿎은 생명 하나가 사라지지 않았을 것
인데, 당신은 그 작은 용기가 없어서 사람을 죽게 만든 것
입니다.]
추 경감은 담배를 한 대 피워물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은 게 대체 뭡니까? 기사 한줄이라
도 얻었습니까? 다음 여성지에 대문짝만하게 이름을 날릴
기회를 잡았습니까?]
[그, 그걸 어떻게.]
여인의 얼굴이 흑색으로 변했다.
[아무런 목적 없이 호기심만으로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없습
니다. 대가가 크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이 존재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대언론사들은 경찰의 협조요청을
받아 취재경쟁을 자제하기로 말한 바 있습니다. 대언론사의
기자가 아니면서 사실 확인이 필요한 사람, 프리랜서로 글
을 여기저기에 실으려는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당신도 그
중 한 명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요?]
여인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의 그 변변찮은 모험심 때문에 한 경관이 죽고 만 것
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자신의 입장만 생각해서 취조에도
협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추 경감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당신을 처벌할 근거도 없을 것 같습
니다. 여기 조서가 있습니다. 당신이 알아서 자술서를 작성
하고 돌아가기 바랍니다. 이젠 아무도 당신을 괴롭히지 않
을 겁니다. 당신의 양심 말고는 말입니다.]
추 경감은 여인 앞에 종이와 볼펜을 밀어놓고 일어섰다. 여
인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15. 수거된 증거물
[최소한 당일에 남산에 들른 용의자들은 없습니다.]
강 형사가 추 경감에게 보고했다.
[서울에 있었던 용의자들이 두 명 있기는 했지만 모두 남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추 경감이 졸린 눈을 비비며 말했다.
[남산 사건은 타임 장치가 있었을 거야. 일정 시간이 되면
작동되는 장치가 있었을 거야.]
[그럼 설치는?]
[며칠 전에, 아니면 몇 주 전에 해놨을지도 모르지. 꼭 타
임 장치가 아니더라도 원격조정 장치가 있었을 수도 있으니
까.]
[그럼 그 많은 용의자들을 쫓아다닌 게 모두 헛수고 아닙니
까?]
강 형사가 투덜댔다.
[결과적으로는 그렇지만 시작하는 시점에서야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우리는 대비할 수밖에 없는 거야.]
추 경감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반장님이 이번 일로 신경이 곤두서긴 서셨네요. 이렇게 말
몇 마디에 신경질 부리시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려.]
[뭐야!]
추 경감이 쌍심지를 돋웠지만 강 형사는 느물거리며 웃었
다.
[국과수에나 가보기로 하지요. 들어오시라고 연락이 왔습니
다.]
추 경감은 그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능구렁이로구만. 이제 세종이 아빠라는 별명은 취소
야!]
[아니 왜요? 장가가려는 제 유일한 희망의 별명인데.]
[능구렁이한테 시집오는 여자는 없어. 빨리 가기나 해!]
추 경감은 발을 들어 강 형사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국과수에 도착하자 이미 대책본부의 주요인물들이 모두 모
여 있었다.
[어서 오시오.]
김 차장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권했다.
[모두 모였으니 시작하지.]
김 차장의 말이 떨어지자 한 남자가 단상으로 나왔다.
[김동호라고 합니다. 어제 수거된 증거물을 철야로 조사한
끝에 흥미있는 사실들을 여러 가지 발견했습니다. 지금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불이 꺼졌다. 김동호가 스위치를 누르자 단상에는 슬라이드
화면이 나타났다. 미색의 플라스틱 덩어리 같은 것이 나타
났다.
[이것은 현장에서 수거된 물품입니다. 편의상 증거물 1호라
고 부릅니다. 이것은 강화 플라스틱입니다. 이렇게 파괴하
기 위해서는 강력한 폭약이 필요한 매우 단단한 물체입니
다. 이 부서진 단면을 보면 깨끗하게 잘려나간 것이 아니라
녹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서질 때 고열에 노출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점으로 볼 때 범인은 폭약을 잘 다
루는 인물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습니다.]
슬라이드 화면이 바뀌었다.
[증거물 2호입니다. 이것은 외부 스피커가 부서진 것입니
다. 이 스피커는 국산 아므로 전자에서 생산하는 것입니다.
이 회사는 중소기업이고 국내 대기업 여섯 군데에 납품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해외에 수출도 하고 있습니다. 수출국
가는 일본을 비롯해서 18개국입니다. 납품처와 수출국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슬라이드 화면이 도표로 바뀌었다.
[이 회사의 스피커는 자체 상표로는 나오지 않습니다. 수거
된 제품은 OEM으로 납품된 것입니다. 어디에 납품된 것인지
는 알 수 없습니다. 범인이 내국인이라면 납품되는 6개 회
사 중 하나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슬라이드의 화면이 바뀌었다.
[증거물 3호입니다. 이것은 녹음 테이프의 릴 중 약간 부분
입니다. 재생해 보았지만 앞으로도 뒤로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컴퓨터 분석 결과 의외의 것을 알
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 테이프에는 분명 녹음이 있었습니
다. 하지만 사람은 들을 수 없는 녹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테이프는 80킬로사이클로 녹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는 사이클을 낮추어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형태로 녹음
을 따보았습니다. 이제 그 소리를 들어보시겠습니다.]
어떤 폭발음 같은 소리가 짧게 울려퍼졌다.
[불행하게도 저희들이 건진 소리는 이것이 다입니다. 하지
만 이것을 바탕으로도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김동호는 불을 다시 켰다.
[이상의 증거물로 저희들이 알아낸 것은 범인은 스피커 증
폭장치를 남산에 숨겨두었다는 것과 이 증폭장치에 녹음된
것은 사람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개에게는 들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범인이 강력한 폭약을 사용하여 이 장치
의 해체를 시도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
범인의 지문이나 다른 흔적은 전혀 발견해내지 못했습니다.
]
[그 소리가 개를 미치게 할 수 있습니까?]
맹 경감이 물었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소리를 들려주고 자문을 구한
결과 폭발음이나 맹수의 포효 같은 것을 개가 오래 들으면
일시적으로 광란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험을 해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추 경감의 가설이 맞는 것 같구만.]
김 차장이 추 경감을 돌아보았다.
[용의자들 중 지금 이 새로운 증거물을 가지고 압축해낼 만
한 사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추 경감을 바라보았다.
[스피커 납품처인 오성 컴퓨터 연구소에 있는 안수인이라는
사람입니다. 안수인은 군대에 있을 때 발파 전문가였습니
다.]
[하하하, 우습지?]
박진환은 안수인과 아침을 먹으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민은수와 박봉순은 대책본부에 가보겠다며 아침 일찍 서울
로 떠났다.
[너 같은 꽁생원과 나 같은 무능력자를 묶어서 이런 대학살
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니 말이야.]
안수인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밥만 먹고 있었다.
[이게 충격 먹었나? 아니면 어제 더윌 먹었나? 얌마, 말 좀
해봐.]
[밥이나 먹어.]
[흥, 하기는 논평할 가치도 없다 이거지?]
하지만 밥은 박진환이 싹싹 먹어치우도록 안수인은 반도 비
우지 못했다. 박진환은 아침에 배달되어온 조간신문을 펼쳤
다. 거의 전면이 남산의 사건에 대해서 쓰고 있었다. 사건
의 경위, 경찰의 대응, 여야간의 논쟁, 개 전문가들의 발
언, 범인에 대한 저주로 신문은 넘쳐흐르고 있었다. 박진환
은 외신난이나 보자고 뒤적여보았다.
[이런 젠장할!]
박진환은 잠깐 외신난을 들여다보다가 집어던졌다.
[빌어먹을 기사들뿐이군. 빌어먹을 기사뿐이야.]
안수인은 눈길을 주는 듯 마는 듯 천천히 밥을 먹고 있었
다.
[빌어먹을 개 말고는 다른 기사가 없을까 해서 외신난을 봤
더니 거기도 모두 젠장할 개새끼 이야기밖에 없구만. 하나
는 미국 측에서 이것이 북한이 세균전을 개시한 것이 아닐
까 의심한다는 기사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의 어떤 미친 여
배우가 개고기를 먹는 한국에 천벌이 내렸다는 기사구만.
이런, 정말 기분 드럽군 그래. 보신탕이나 먹으러 가볼까?]
[금방 배 터지게 먹고는 정말 먹성도 좋군 그래.]
안수인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산에 보신탕을 잘하는 집을 하나 아는데 한번 가볼까?]
안수인의 말에 박진환은 반색을 했다.
[하하, 그래. 자네가 식도락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럼
가봐야지. 세상 사는 재미에서 먹는 것 말고 뭐가 있겠어?
당장 떠나자고.]
[뭘 그렇게 서둘러?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나?]
안수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음, 쫓아온다? 어제 그런 사고가 났으니 오늘 자넬 잡으러
올지도 모르지. 경찰 나타나기 전에 빨리 뜨는 게 상책이
야.]
박진환이 일부러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수인도 따라서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떠나볼까?]
음식점을 나온 안수인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야, 수인아. 거기는 왜 가?]
박진환은 골목을 돌다가 깜짝 놀랐다. 인수인이 지프차를
몰고 골목길을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야, 이게 웬 지프차야!]
박진환이 반색을 하면서 지프차에 올라탔다.
[퇴직금이 어제 나왔다. 그걸로 샀어.]
[근데 너 면허는 있냐?]
[너 모르냐? 나 공병대 수송트럭 몰고 다녔잖아.]
[트럭 몰고 다니는 것보다는 돌덩이 깨는 게 네 전문이었잖
아.]
[폭약 다루는 거야, 나보다는 특공부대 출신인 네가 전문이
지. 아무튼 운전은 할 줄 알아. 너 죽이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무셔.]
[뭐, 아무래도 좋다. 새 차를 타고 한번 씽씽 달려보자!]
지프차는 두 사람을 태우고 바람처럼 달려갔다.
민은수와 박봉순이 대책본부에 도착했을 때 추 경감과 강
형사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들뜨고 바빠서 두 사람을 아
는 척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잠깐 나 좀 봐.]
박봉순이 민은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왜?]
민은수의 물음에 박봉순은 대답하지 않고 무조건 잡아끌며
대책본부 밖으로 민은수를 데리고 나왔다.
[도대체 왜 이래?]
민은수가 다시 재촉하자 박봉순이 주위를 살피고 조심스럽
게 말했다.
[빨리 진천으로 돌아가야 해요.]
[응?]
[경찰이 수인이를 잡아들이려 해요.]
[뭐?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야?]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야. 추 경감님하고 강 형사는 수인
이를 잡으러 진천으로 떠난 모양이라고.]
민은수는 잠깐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괜찮을 거야. 수인이를 어제 보지는 못했지만 서울에 오진
않았을 거야.]
[우리가 알리바이를 만들어줄 수도 없잖아. 수인이하고 진
환이가 걱정이 된단 말야.]
[흐흠, 우선 전화를 좀 해보자.]
민은수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했다. 구란도 사건 이후에
통신 두절에 대한 공포감으로 구입한 전화였다.
[303호 박사님이오? 아침에 친구분하고 식사하러 나간 뒤로
안 들어왔습니다.]
민은수는 전화를 끊고 박봉순에게 말했다.
[아침 먹으러 나가서 안 들어왔대. 우리가 내려가 보도록
하지.]
[그럼 빨리 터미널로 가자.]
박봉순이 몸이 달아 도로로 나가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
다. 다행히 금방 택시가 잡혔다.
[명동으로 가주세요.]
민은수가 기사에게 말했다.
[왜? 사무실에 갈려고?]
박봉순이 뾰족한 어조로 물었다.
[응.]
민은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바쁜데 꼭 지금 가야 돼?]
[응.]
민은수는 짧게 대답하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박봉순은 기가
막혀서 창 밖만 바라보았다. 사람 맘을 이렇게 몰라주다
니 그동안 후하게 주었던 점수를 몽땅 다시 깎아버렸
다.
명동에 도착하자 민은수는 정말 자기 사무실 쪽으로 향했
다. 박봉순은 쫓아가기도 싫었지만 꾹 화를 누르고 뒤를 쫓
았다. 그런데 민은수는 건물에 들어서자 사무실이 있는 3층
으로 가지 않고 지하로 내려갔다.
[타.]
민은수는 날렵하게 생긴 스포츠카 앞에서 말했다.
[뭐, 뭐야? 이거 민 소장 거야?]
박봉순이 깜짝 놀라 말했다.
[왜 차 있단 말을 안 했어? 한번 태워주지도 않고.]
달리는 차 안에서 박봉순이 투덜댔다.
[운전하면서는 닥터 박의 미모를 감상할 수가 없잖아. 아무
래도 신경이 쓰여서 이야기도 많이 할 수 없고.]
민은수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 말 진심이야?]
박봉순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이고 말고. 그런데.]
민은수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이런, 전화 좀 받아줘.]
박봉순이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이런, 누나! 나 진환이야.]
[진환아, 너 지금 어딨니?]
박봉순이 다급하게 물었지만 박진환은 여전히 태연한 목소
리로 말했다.
[히히히, 민 소장님이 이제 전화도 누나한테 임대한 모양이
네 그려.]
[잔말 말고 너 어디 있는 거야?]
[여기가 어디냐고? 음, 천안이야.]
[천안? 천안에는 왜 갔어?]
[놀러왔지. 백수가 뭐 이유가 있어야 움직이는 줄 알아?]
[그래, 수인이는 또 어딨는 줄 알아?]
[수인이? 수인이도 여기 있어. 우린 오산으로 가는 길이야.
]
[오산에는 또 무슨 일로 가는데?]
[보신탕 먹으러.]
[뭐?]
박봉순이 놀라서 꽥 소리를 질렀다.
[개들만 사람을 먹을 수 있나? 우리도 복수를 해야지. 오늘
한번 몇 마리든 끝장을 낼 각오로 한번 먹어볼 생각이야.]
[너 미쳤어? 멀쩡한 애가 왜 보신탕 타령이야?]
[보신탕 좋아하면 멀쩡한 애가 아니란 말이야? 그것 참 말
이 심하군 그래. 민 소장님도 잡숫고 싶으면 오산으로 오라
고 해. 수인이가 퇴직금 받은 걸로 산다고 하니까.]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경찰이 수인이를 잡으러 떠났다
고.]
[그건 무슨 소리야? 농담이겠지?]
[내가 그런 걸로 농담할 사람이야?]
[그럼 정말이란 말야? 왜?]
[왠지는 몰라. 아무튼 한국 경찰 중에서 최고의 경찰이 체
포하기 위해서 진천으로 내려갔단 말야. 필시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너 수인이 곁을 떠나지 말고 잘 지켜. 며칠
만 잘 피하면 별일 없을 거야. 그놈의 범인이 며칠씩 잠잠
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이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고.]
[하하하, 누나도 참. 죄도 없는데 왜 숨어서 지내? 찾으면
가서 만나보지.]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넌 이번 일로 얼마나
세상이 시끄러운지 몰라서 그래? 이런 때 용의자 운운하는
일로 언론에 노출되면 인생 종치는 거야.]
[으음, 수인이는 그럴지 몰라도 나는 좀 다른 것 같은데.
난 공짜로 내 시집 선전이 될 절호의 찬스 같은데? 살인마
박진환의 시집 미친 개의 포효! 이러면 난 돈방석에 앉을
거야!]
[경찰이 넌 제껴두었으니까 신경 꺼라, 응.]
[아무튼 우리는 오산으로 가니까 경찰 아저씨들이 물으면
그렇게 전해줘. 누나 몸 조심해! 민 소장한테.]
박진환은 '민 소장한테'라는 말을 작은 소리로 끼워넣었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오자 담배를 피워물고 있는 안수인이
보였다. 경찰이 저 꽁생원을 용의자로 쫓고 있다고? 이거야
말이 씨가 된 꼴 아닌가? 박진환은 이 일을 안수인한테 알
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라져버렸군요.]
강 형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팔을 펼치며 말했다. 추 경감
과 강 형사는 안수인이 묵었던 303호에 와 있었다.
[일단 이곳을 수색해 보도록 하지. 뭐든 단서가 될 게 있을지
모르니까.]
추 경감도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민 소장하고 박봉순씨도 이곳에 와 있었다고 했는데, 새벽에
서울로 갔답니다.]
강 형사가 말했다. 추 경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추 경
감은 먼 곳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말했다.
[강 형사, 따라와.]
강 형사는 쭐레쭐레 추 경감 뒤를 쫓아가며 투덜댔다.
[어디를 가시게요? 아주 저는 형사가 아니라 반장님 개인비서
같습니다.]
[진천까지 왔으니 안수인이 있던 연구소에 가봐야지. 틀림없
이 단서가 있을 거야.]
[정말 안수인이 범인일까요?]
[그거야 확신을 할 수는 없지. 아직 그 친구를 본 적도 없잖아.
]
추 경감은 답답한 표정이었다. 범인이 언제 또 어디서 사고를
저지를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연구소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미 연락을 받고 연
구소장이 직접 나와 있었다.
[안 박사가 미치광이 개 소동에 혐의가 있다고요?]
소장은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태도로 말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모릅니다.]
추 경감이 대답했다.
[허허, 안 박사가 아주 성실한 사람인데 어쩌다 그런 일에
휘말렸을꼬. 여자문제 말고는 다 좋았는데.]
안수인과 안정아의 관계는 추 경감도 알고 있는 사항이었기에
더 묻지 않고 안수인의 연구실로 향했다.
[이 사람은 안수인 박사와 같이 일한 장호철 박사입니다. 안
박사의 연구에 대해서는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소장은 100킬로그램도 넘을 것 같은 뚱보를 소개시켜 줬다.
[제가 장호철입니다.]
장호철은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시경의 추병태 경감입니다. 이쪽은 강 형사라고 합니다.]
추 경감이 인사를 받았다.
[안수인씨와는 친한 사이셨습니까?]
[친하고 말고는 말씀드리기 어려운 문제네요. 연구실에서는
친하지만 사생활에 대해서는 완전 남남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사이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하면서 처음 만났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라는 게 뭡니까?]
[음성인식 장치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그런 용어들에는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그러실 겁니다. 이제 연구실에 왔으니까 직접 한번 보시지요.
그게 이해가 빠를 겁니다.]
연구실의 문에는 안수인, 장호철의 이름이 문패처럼 붙어 있었
다.
[별다른 일이 없으시면 저는 여기서 이만.]
소장이 허리를 꾸벅하며 인사를 했다.
[일이 있으시면 언제나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추 경감도 웃으며 답례를 했다. 연구실 안에 일행이 들어섰다.
여러 가지 기계들이 정신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산만하게 되어 있지요?]
장호철이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까 설명하시려던 것을 부탁드립니다.]
[음성인식 기술이오? 알겠습니다.]
장호철은 연구실 안에 만들어진 유리문 같은 것 앞으로 가서
섰다.
[문.]
그가 또렷하게 말하자 유리문은 자동문이 열리는 것처럼 열렸
다. 장호철이 통과하자 문은 다시 닫혔다.
[지금 이 문은 제가 말한 명령을 이해하고 문을 열었습니다.
저희들이 연구하는 것은 이런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동문을 연구하는 것입니까?]
추 경감이 물어보자 강 형사가 킥 웃었다.
[아이고, 반장님. 음성인식이라고 했으니까 기계가 사람 소리
를 알아듣게 하는 연구라는 뜻이겠네요.]
[내가 언제 자네한테 물어봤어? 조용히 해.]
추 경감이 눈을 부라렸다.
[형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사람들이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천년 전에 쓰여진 아라비안
나이트에도 있잖습니까, 열려라 참깨!]
장호철이 유리문을 빙 돌아 추 경감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이런 장비가 어디에 유용한지 잘 모르겠군요? 자동문은 그저
사람이 다가가면 아무 소리 없이 열리는 게 더 간편하고 편리
하지 않습니까?]
추 경감이 물었다. 장호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을 맞이하는 서비스 업체라면 그렇겠습니다. 하지만 저
희처럼 연구소라든가 잡상인을 통제하고 싶은 곳이라면 문제
가 다르겠지요?]
[글쎄요? 그 경우에도 '문'하고 말해주면 들어올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보여 드리
지요.]
장호철은 유리문으로 다가가 옆에 달린 마이크를 들었다.
[참깨.]
장호철은 그렇게 말한 뒤 추 경감을 불렀다.
[경감님께서 이곳을 통과해 보십시오.]
추 경감은 유리문 앞에 서서 '문'이라고 말했지만 유리문은 꼼
짝도 하지 않았다.
[참깨.]
추 경감이 다시 이렇게 말하자 유리문이 열렸다.
[군대에서 쓰는 암호 같은 것이로군요. 수시로 말을 바꿀 수
있다 이겁니까?]
[그렇습니다. 아주 안전한 방법입니다.]
장호철이 말했다.
[이곳에서 음성을 변조할 수도 있습니까?]
추 경감의 엉뚱한 질문에 장호철은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예? 음성을 변조한다고요? 목소리를 다른 형태로 바꾸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특별히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얼마든지 가능하지
요.]
장호철은 컴퓨터로 가서 부팅을 시켰다.
[그런 종류의 소프트웨어는 구하는 데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음성 사이클을 변조시키는 일도 하곤 합니다.]
[음성 사이클을 변조시킨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귀로 듣는 청각대는 한정이 있습니다. 일정한 사이클
이상의 소리는 사람이 들을 수 없지요. 만일 사람의 목소리를
그 이상의 사이클로 만들었다가 다시 들을 수 있는 사이클로
바꿔준다면 세상의 소음은 훨씬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건 결국 이어폰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강 형사가 끼어들었다.
[일종의 이어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청기와 같은 것이라
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장호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 응용기술 중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즉
이 기술은 여러 가지 응용이 가능합니다. 모든 전자제품을 음
성으로 컨트롤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사이클을 올렸을 경우 사람은 듣지 못해도
개와 같은 동물들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들을 수 있습니다.]
추 경감이 장호철의 말에 정색을 하고 물었다.
[이곳에서 개가 미친 사건이 있었습니까?]
16. 새로운 요구
[보신탕 장사가 파리를 날린다니, 이게 뭔말이야?]
박진환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을 뜯으며 텅 빈 홀을 바
라보았다.
[신의 징벌이 내린 거라는 그 미친 년 이야기가 여기서 통
하는구만.]
안수인도 맞장구를 쳤다.
[이래서 개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 거야. 개들이
사람을 물어 죽이면 사람이 복수의 심리가 있어야지. 겁이
나서 가만 있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거야.]
[글쎄 말입니다.]
기름을 더 가지고 오던 아주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이게 다 절산 도인인지 하는 미친 노인네 때문에 생긴 일
이라우.]
[절산 도인? 그 치가 개들을 미치게 한단 말입니까?]
박진환이 놀라서 물었다.
[아니지요. 그런 신통력이 있기나 하겠어요?]
[그럼 무슨 얘기에요? 손님도 없는데 앉아서 이야기를 좀
해보셔.]
박진환이 자리를 권했다.
[얘기나마나 할 것도 없어요. 그 절산 도인인지 값싼 도인
인지가 사람들의 죄악이 극에 달해서 개들이 신벌을 내리는
거라고 떠들면서 개는 사람이 환생하는 동물이니까 먹어서
는 안 된다고 초를 쳐가지고는 손님들 발길이 뚝 떨어졌잖
아요. 이번에 살아난 사람들도 모두 평소 개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이라나요?]
[하하하, 그래요? 그 도인은 정말 엉터리구만!]
박진환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이봐요, 아줌마. 내가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 동생이란 말
입니다. 우리 누나는 보신탕을 먹지는 않지만 거기 같이 있
던 우리 형님은 죽고 못 사는 사람입니다. 말짱 거짓말인
데, 어디다가 광고 좀 할 데 없을까 몰라.]
박진환의 말에 아주머니는 깜짝 놀랐다.
[아이구, 총각 그거 정말이우?]
[정말이잖구요. 내가 그날 이 친구만 안 왔어도 구란도에
있다가 비명횡사할 뻔했다는 거 아닙니까.]
[아이구, 아이구. 이거 정말인가 보네. 그놈의 도인 나부랭
이를 그냥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 버려야지. 가만 있어라.
이걸 사장님한테 말씀을 드려야겠네.]
아주머니는 호들갑스럽게 일어나서 식당을 휑하니 나가버렸
다.
[그런 이야기는 뭐하러 했어?]
안수인이 책망하듯이 말했다.
[뭐 어때? 재미있잖아? 또 혹시 알아, 공짜로 개나 한 마리
더 잡아줄는지.]
박진환이 낄낄거리고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다 먹기는 뭘 다 먹어. 이제 시작인데. 소주도 한잔 해야
지. 아참 너는 차를 몰아야 하니까 나 혼자 마실까나?]
박진환은 직접 일어나서 소주를 가져왔다.
[에라, 음주운전하면 어떠냐? 죽기밖에 더 하겠어. 너도 마
셔라, 까짓거.]
박진환은 안수인 앞에도 술을 철철 따랐다.
[개한테 물려 죽으나 개를 먹다가 배 터져 죽거나 개한테
죽는 건 마찬가지지.]
박진환은 껄껄 웃어제끼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
[오산으로 찾으러 가자.]
박봉순이 민은수에게 아양떨듯 말했다.
[소용없어. 어떻게 찾는단 말야.]
민은수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럼 어디를 가는 거야?]
[진천에. 추 경감은 허튼 사람이 아냐. 그 사람이 안수인을
범인으로 지목했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
고.]
[뭐야! 수인이는 내가 잘 알아. 절대 그럴 사람이 아냐.]
[어떤 사람이건 누구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사람마
다 갖고 있는 내면의 세계가 있어.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
야.]
[민 소장! 그 얘기는 수인이가 범인이라는 말과 똑같아. 어
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박봉순은 화를 냈다.
[닥터 박, 냉정하게 생각해야 되는 일이 세상에 있어. 만일
안수인이 범인이라면 지금 진환이는 희대의 미치광이한테
인질로 잡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렇게 생각해 봤어?
]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 수인이는 범인이 아니니까.]
박봉순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래, 닥터 박의 생각이 그럴 수도 있어. 그래서 더더욱
추 경감을 만나봐야겠어. 그 사람을 만나면 무슨 일인지 실
마리가 잡힐 거야.]
[그래, 정 그렇다면 좋아.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해 줘.]
[뭘?]
[약속한다고 말해!]
[이런, 생떼가 있나? 그래, 알았어. 약속하지.]
민은수가 웃으며 말했다.
[절대로 경찰한테 진환이랑 수인이가 있는 곳을 알려줘서는
안 돼.]
[그건.]
[약속한 거야. 남아일언은 중천금이요, 일구이언은 개자식
이라는 말이 있지, 아마.]
민은수는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진천에 도착하자 박진환과 안수인이 묶고 있었던 여관의 출
입도 통제되어 있었다. 별별 이야기를 다 해보았지만 들여
보내 주지를 않았다.
둘은 늦은 점심을 먹고 추 경감이 혹시 돌아오지는 않을까
여관 근처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이것 봐. 내가 오산으로 가야 한다니까, 우겨서 이게 무슨
꼴이야.]
박봉순이 투덜거렸다.
[오산, 오산 하지 마. 누가 들을라. 안 그래도 내가 오산한
것은 잘 알고 있어요.]
민은수의 농담 반 핀잔 반에 박봉순의 입이 쏙 들어갔다.
[맞아. 함부로 떠들면 안 되지.]
둘이 무료하게 기다린 지 한 시간이 넘어서야 추 경감과 강
형사가 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추 경감님!]
민은수가 반갑게 뛰어가서 인사를 했다. 박봉순은 뾰로통한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런, 두 분은 서울로 가셨다고 하더니.]
강 형사가 말했다.
[강 형사님이 진천으로 내려오셨다고 하니 제가 안 쫓아올
수가 있습니까?]
민은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추 경감님!]
박봉순이 큰 소리로 추 경감을 불렀다.
[수인이가 왜 범인이라고 하시는지 설명해 주세요!]
[어디 다방에라도 들어가서 말씀하시지요.]
추 경감이 두 사람을 이끌고 가까운 다방으로 들어갔다.
[동생 친구분이 범인으로 지목되어서 마음이 착잡하실 겁니
다.]
자리에 앉자 추 경감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지금쯤 전국에 수배령이 내렸을 겁니다.]
[뭐라고요?]
박봉순이 비명 가깝게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다방 안에는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어제 남산에서 일어난 사건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서 개들을 미치게 하는 장치를 발견할 수 있었
습니다. 폭탄으로 증거인멸을 기도했지만 일부 남은
물건들을 가지고 그 장치의 용도를 파악할 수 있었습
니다. 그 물품들은 모두 연구소에서 구할 수 있는 물
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연구소에서는 이미 개가 미치
는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박봉순은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 사건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민은수가 물었다.
[달포쯤 전에 경비원이 순찰을 돌려고 셰퍼드를 끈에
서 풀어주는 순간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그 사고가 일
어난 곳은 안수인씨의 연구실 바로 밑이었습니다. 아
마도 안수인씨가 개를 미치게 할 수 있는 테이프를 돌
리고 있다가 일어난 사고였겠지요. 그때 안수인씨가
연구실에 있었다는 것은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나마
그때 경비원은 재빠르게 대응을 해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하더군요.]
[일부러 회사 안에서 사고를 일으킨단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아마도 그때까지는 자신의 연구가 개
를 미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사건으로 개를 미치게 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라
고 생각됩니다. 안수인씨가 연구한 것은 사람 귀에는
들리지 않는 높은 사이클의 소리를 통해서 기계를 작
동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는 사람한테
는 들리지 않지만 개한테는 잘 들리는 소리였던 거지
요. 개들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소리를 들려주게
되면 개한테 충격을 줘서 광란상태에 빠지게 할 수 있
다고 합니다.]
[난 믿을 수가 없어요. 수인이가 왜?]
박봉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동기는 우리도 모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요. 사회에 대한 불만이라든가, 동성동본 연애
의 스트레스라든가.]
[그런 건 이유가 안 돼요. 수인이는 성공적인 길을 달
려온 엘리트예요. 사회에 대해서 불만이 있을 수 없어
요. 안정아씨하고 사랑하는 데는 법적인 문제가 있기
는 하지만 그렇게 순수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런 학살극을 벌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에요.]
[개인적인 믿음으로 사람을 보호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너무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추 경감의 말은 싸늘했다.
[그 증거라는 게 모두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잖아요.
그럴 수도 있다는 것뿐이잖아요?]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안수인씨와 대질신문을 통
해서 얼마든지 밝힐 수 있는 일입니다. 안수인씨가 무
혐의라면 그때 가서 얼마든지 밝혀질 수 있는 일입니
다.]
추 경감의 말이 옳았다. 판결이 내려진 것은 아니었
다. 박봉순은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안수인씨
와 박진환씨는 어디를 간 겁니까?]
민은수는 슬그머니 박봉순의 눈치를 살폈다.
[만일 또다시 백여 명의 사상자가 나온다면 두 분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추 경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씌우지 않습니다. 두 분이
한시라도 빨리 말씀을 해주셔야 두 분의 양심도 발을
뻗고 잠을 청할 수 있을 겁니다.]
박봉순은 우물우물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울음을 터
뜨렸다.
[오산에 보신탕을 먹으러 간다고 했습니다. 연락은 제
핸드폰으로 한다고 했고요.]
[이제 어디로 가지?]
안수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다? 어디로 간다. 자네 지프차를 산 건 최병길을
찾겠다는 생각에서 산 거겠지?]
박진환이 물었다.
[그렇다고 해두지.]
[내가 그 인간이 어디 짱 박혀 있는지 알고 있지.]
박진환의 말에 안수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어디야?]
[내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지 않아?]
[어디냐고?]
[그 친구 성격 급한 거하고는. 옥천이야.]
[확실한 거야?]
[자, 떠나면서 이야기하자구.]
안수인은 아무 말 없이 계산을 하고 차에 올랐다.
[지프차라는 게 타보니까 시야가 시원한 것은 좋은데
좀 시끄럽군 그래.]
[응. 그런데 최병길이 거기 있는 건 확실해?]
[99퍼센트 확실하지.]
박진환이 장담했다.
[옥천이 그 사람 외가더라고. 내가 그 사람 이웃들을
며칠간 탐문한 끝에 알아낸 거야.]
[외가라고 해서 있으란 법은 없잖아?]
[흐흐흐, 그래서 버스터미널에서 최가를 포착할려고
여러 차례 나가보기도 했지. 하지만 소 뒷걸음에 개구
리 잡는 일이 흔한 건 아니더라고. 그래서 좀더 확실
한 방법을 썼지.]
[확실한 방법, 뭐?]
[터미널의 매표원을 매수했어. 최가가 나타나면 어디
표를 끊는지 알려달라고 말야.]
[흐음, 그랬더니 옥천 표를 끊었다 이건가?]
[빙고! 정답이야.]
[최병길, 꼬리를 감춰봤자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이
었구만.]
안수인이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최가를 만나면 어떡할 작정이야?]
박진환의 물음에 안수인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정아씨의 행복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작정이야.]
[무슨 짓이든?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렇게 해서 해결할 수만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지.]
안수인은 진지한 자세로 말했다.
[이런, 이런. 사랑에 눈이 먼다는 시가 그렇게 많더니
만 여기에도 산 증거가 있군 그래.]
[네 시의 재료가 된다니 영광스럽기 짝이 없군 그래.
시인 박진환 한번도 써보지 않은 연애시가 나올 모양
이지?]
[그런 소리 하지 말아. 내 시는 고상한 정신세계를 노
래하는 거야. 허리하학적인 저급한 동물적 생리욕구와
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너야말로 그런 한심한 이분법을 가지고 어떻게 시인
으로 데뷔를 했는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지.]
박진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의자를 눕혔다.
[고기도 많이 먹고 술도 많이 먹었더니 무지 졸립구
만. 나는 좀 잘란다. 옥천에 도착하면 깨워줘.]
박진환은 잠시 뒤척이는 듯하다가 그대로 잠에 빠져들
었다.
오산 경찰서에는 전 보신탕집을 뒤지라는 비상이 걸렸
다. 추 경감 일행은 진천을 떠나기 전에 오산에 미리
연락을 취했다. 오산으로 향하는 차들 중에는 민은수
의 스포츠카도 있었다. 절대로 같이 쫓아가야 한다는
박봉순의 고집 때문에 추 경감도 같은 차에 올랐다.
[이거 강 형사 차만 고물인 줄 알았는데, 민 소장님
차도 같은 계통인 모양입니다.]
추 경감이 생각 외로 덜컹대는 뒷좌석에 앉아서 의아
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이런 죄송합니다. 원래 스포츠카라는 것이 뒷
좌석에는 쿠션을 두지 않습니다.]
민은수가 겸연쩍게 웃었다.
[어머, 그래요? 그럼 차를 좀 세워요.]
박봉순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제 고집 때문에 이렇게 된 일인데 자리까지 불편하시
면 어떡해요? 저랑 자리를 바꾸세요.]
[아, 아닙니다. 어떻게 숙녀분 자리를. 하여간 입이
방정이라 점수를 딸 날이 없군요. 민 소장님, 그냥 가
십시오. 아무튼 한시가 급하니까 세우시면 안 됩니다.
]
추 경감이 두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닥터 박, 못 앉을 정도는 아니니까 너무 미안해 하지
는 말어.]
[추 경감님께는 제가 죄송하군요.]
[민 소장님이 죄송할 게 뭐 있습니까, 허허.]
그때 추 경감의 핸드폰이 울렸다.
[추 경감입니다. 어, 그래?]
추 경감은 잠시 통화를 하고 민은수를 보고 말했다.
[안수인씨와 박진환씨가 식사를 한 곳을 찾아냈다고
하는군요.]
[벌써요? 굉장한 기동력입니다.]
민은수가 감탄을 했다.
[삼거리 영양탕집이라고 하는군요. 두 사람이 떠난 지
좀 됐다고 하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확인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천으로 돌아갑니까?]
민은수가 차 속도를 줄이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일단은 오산으로 가보도록 합시다.]
추 경감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걸었다. 어딘가에 지시
를 내리는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음 그래 그럼 수배를 내리고 지프차였단
말이지? 검문을.]
추 경감은 통화를 마치고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두 사람이 식사 후에 지프차를 타고 떠났답니다. 누
구 찬지 아십니까?]
[아니오? 모르겠는데요?]
박봉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든 진환이 차는 아니에요. 차살 돈도 없는 데다
가 면허도 없으니까요.]
[그래요? 그럼 운전자는 안수인씨라는 말이군요.]
[렌트한 차는 아닐까요?]
민은수가 말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임시번호판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임시번호판이면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거니까
언제 누가 샀는지는 곧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천
의 판매소를 점검하라고 지시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시니까 제 차가 움직이는 이동본부 같습니다.]
민은수가 농담을 했다.
[민 소장, 썰렁한 농담이라는 거 알지?]
박봉순이 핀잔을 주었다. 그때 다시 추 경감의 핸드폰
이 울렸다.
[응, 그래? 옥천이라고 했다고?]
추 경감은 통화를 끊고 다급하게 말했다.
[민 소장님, 옥천으로 가야겠습니다. 톨게이트로 빠져
서 옥천으로 갑시다.]
추 경감은 다시 바쁘게 이 번호, 저 번호를 눌렀다.
[박 선생님, 옥천에 누구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추 경감이 통화를 끝내고 박봉순에게 물었다.
[글쎄요? 제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박봉순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안수인은 물론 자신
도 옥천에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
[왜 옥천을 간다고 했을까요?]
추 경감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속임수일지도 모릅니다.]
민은수가 말했다.
[속임수라고요?]
[예. 이미 오산으로 간 이상 북쪽으로 더 올라갈 가능
성이 많지 않습니까? 진천에서 오산으로 갔다가 다시
옥천으로 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제가 이미
전화를 했기 때문에 쫓기는 줄 알고 있을 텐데 일부러
식당에서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옥천에 간다는 소
리를 했다는 건 이런 뉴스가 경찰한테 들어가기를 바
란 속셈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민 소장님이 아주 날카로운 지
적을 하시는군요.]
[그런 말씀 마세요. 이 사람, 추켜주면 정말 잘난 줄
아니까요.]
박봉순이 농담을 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대비해 놓았습니다. 전국의 검문
소에는 임시번호판을 단 지프차는 모두 검문하도록 조
치해 놓았습니다.]
추 경감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경찰에 대한 도전인 것 같습니
다.]
[도전이오?]
[예. 이미 범인은, 안수인씨는 경찰에 도전을 한 바가
있습니다.]
[남산에서 사건이 일어난다는 말을 한 것 말이죠?]
[예. 그렇습니다. 안수인씨는 남산에서 날 못 잡았다,
옥천에 간들 날 잡을 수 있겠느냐는 식의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건 다른 것 아닙니까?]
민은수가 이의를 제기했다.
[남산의 사건은 철저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일으킨 거
지만 옥천으로 행선지를 향했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
찬가지 아닙니까? 무엇 때문에 그런 위험을 무릅쓴다
는 말입니까?]
[자살행위라는 말씀은 아주 적절합니다. 범죄자들에게
는 그런 심리가 있습니다. 자신의 범죄를 막고자 하는
심리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민은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민 소장, 그건 이런 거야. 심리학 시간에 좀 배운 게
생각이 나는데, 연쇄살인사건을 일으키는 범인은 살인
에서 극도의 긴장과 쾌감을 느낀대. 하지만 그것이 일
탈행위라는 건 스스로 잘 알고 있기도 하거든. 그래서
범죄자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인성이 싸우게 된다는
거야.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처럼 말야.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중지를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면 마치 유희를 하듯이 공권력과 씨름을 하게 된다
는 거야. 그들이 나를 잡으면 나쁜 짓을 안 하게 돼서
좋고, 그들이 나를 잡지 못하면 스릴이 더해져서 좋
고.]
박봉순이 설명을 했다.
[허, 그것 참. 미국 갱 영화에나 나오는 이야기 같은
데, 정말 그런 거야? 그럼 안수인은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거지.]
민은수는 혀를 내둘렀다.
[수인이가 범인이라는 건 아직 확실한 이야기가 아니
야.]
박봉순이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허허, 갑자기 찬바람이 부는군요.]
추 경감이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범인들이 일부러 단서를 흘리는 것은 박 선생
님 이야기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어릴 때 본 만화가 생각이 나는군요.]
민은수가 화제를 돌려볼 생각으로 말했다.
[괴물이 사람 몸에 들어가 정신을 조종하는 내용이었
는데, 한 주인공이 가까스로 제정신을 찾아서 다시 괴
물로 변하기 전에 자신을 죽여달라고 사정을 하는 거
였는데, 이런 심리학에 기초한 만화였다고 볼 수도 있
겠군요.]
[그 괴물이 '악'의 실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
지요.]
추 경감이 맞장구를 쳤다.
[그런 이야기는 그만해요. 차라리 라디오나 듣고 가는
게 낫겠어요.]
박봉순은 우울해 보였다. 민은수는 라디오를 켰다. 일
행은 옥천에 도착할 때까지 더이상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17. 신이 된 사나이
어떤 검문소에서도 소식이 없었다. 결국 안수인과 박
진환은 무사히 옥천에 진입했다는 뜻이 된다. 옥천 안
의 모든 숙박업소에 검문검색이 시작되었지만 안수인
과 박진환은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요?]
강 형사가 해장국을 먹으면서 말했다.
[글쎄.]
추 경감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역시 옥천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도주한 것은 아닐까
요?]
[글쎄.]
추 경감은 뭔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옥천 경찰서로 돌아갔을 때 경찰서 안이 술렁
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왔나요? 범인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답니다.]
[서울 본부에 말입니까?]
옥천 경찰서장의 말에 추 경감이 물었다.
[그게 아니고, 각 일간신문에 동일한 녹음 테이프가
배달되었다는군요. 자신의 의견을 내일 일면 톱으로
실어야 한다고 하면서.]
[내용이 왔습니까?]
[지금 전문으로 와 있습니다. 이겁니다.]
경찰서장이 전해준 용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
다.
공정한 언론보도를 위해 애쓰는 기자 여러분께 감사드
린다.
우리 사회에는 온갖 숨은 악이 판치고 있다는 것을 여
러분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여러분들은 바로
그 일선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미 나
의 요구는 경찰을 통해서 여러분들한테 전달된 바 있
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경찰에 의해서 걸러진
때문인지 나의 의도는 많이 왜곡되어서 전파됐다. 나
로서는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악이라는 것이 사회가 노력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노력해서 없앨 수 있는
구조적인 악도 적지 않다. 이제부터 나, 푸른 셔츠의
사나이는 한 가지씩 사회의 악을 척결해 나갈 것임을
천명한다. 누구든지 사회의 부조리함을 해결하고 싶다
면 내게 알려달라. 그 요구가 타당한 것이라면 나는
그 실행을 위해서 발벗고 나설 것이다. 물론 수고는
개들이 하게 되겠지만.
나는 첫번째 요청을 받았다. 동성동본 결혼금지의 법
률을 철폐하도록 하라. 이것은 과학적으로 보아도 아
무런 근거도 없는데도 사회가 개인의 행복을 짓밟는
행패를 부리고 있는 '사회의 죄악'이다. 그 시한으로
3일을 준다. 3일 안에 내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전국의 모든 개들이 부도덕한 당신들을 향해서 징벌을
내릴 것임을 알려둔다.
공정한 보도를 생명으로 삼는 신문사들이 내 의견을
가감없이 실어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만에 하
나 내 편지에 수정을 가한다면 징벌은 먼저 신문사로
향할 것이다.
푸른 셔츠의 사나이
추 경감은 전문을 움켜쥐었다.
[아주 신이 되었군요.]
어깨 너머로 전문을 읽은 강 형사가 어이가 없다는 투
로 말했다.
[목적이 분명해졌어요. 안수인이 노린 것은 동성동본
혼인금지의 법률 폐지였던 거네요.]
[과연 그런 것으로 이렇게 많은 살상을 저질러야만 하
나?]
추 경감이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물론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겠지요. 이건 첫번째 요청
이라고 했잖습니까?]
[첫번째는 자기 목표를 우선 달성한다는 말이다 이거
지?]
[그렇다고 봐야겠습니다. 과대망상자인 거지요.]
추 경감은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전국의 개를 모두 미치게 하겠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까?]
[말이 그런 거지, 실제로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겁니
다. 하지만 남산 식으로 음향장치를 도심 여기저기에
은폐해 놓는다면 그 피해는 정말 끔찍할 겁니다.]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을 거야. 그 설치된 기기의 크
기로 볼 때 쉽게 시내에 은폐할 수 있지는 않거든.]
[개인이 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강 형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추 경감은 눈을 감
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범인은 마술처럼 불가능해 보
이는 일을 여러 번 해낸 셈이다. 마술은 알고 보면 간
단하지만 알기 전에는 신비한 것이다. 범인은 이미 전
국의 개들을 미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해 놓은
것은 아닐까? 범인이 한 명이라는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추 경감은 눈을 떴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3일이 지나가기 전에 안수인을 잡는 것뿐이다. 살인극
을 저지시키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안수인과 박진환은 옥천 시내에 들어오지 않고 변두리
외딴 곳에 차를 세웠다.
[오늘은 여기서 자야겠다.]
박진환이 말했다.
[차에서 자자고?]
안수인이 어리둥절해 했다.
[응. 사실은 말야.]
박진환이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안수인
도 따라 내렸다.
[경찰이 널 개 사주범으로 몰아서 수배중인 모양이야.
]
[뭐라고!]
안수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뭐, 나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아까 우리 누나한
테 전화를 했더니 알려주더라고. 우리가 시내에 들어
가면 체포될지도 몰라.]
[우리가 여기 있는 줄 모를 텐데. 괜찮지 않을까?]
안수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마 알 것 같아. 아까 보신탕 먹을 때 너무 큰 소리
로 이야기를 했으니까.]
[이런, 그럼 어쩌지?]
안수인은 초조하게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죄 없으면 그만이지, 뭐.]
박진환은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 들어갔다가 잡히면 문제가 좀 복잡하잖
아. 기껏 최가의 행선지를 알아냈는데 말야.]
[그건 그래.]
안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약간 변장을 하고 시내로 들어가서 최가를 만나
서 담판을 짓는 거야. 그러고 나서 경찰에 출두하면
되잖아?]
박진환이 태연하게 말했다.
[으, 으응.]
안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 여름날에 이런 일이 생겨서 얼마나 다행이냐? 겨
울 같았어 봐라. 엄두도 못 내지.]
박진환이 지프차에 누워서 태평스럽게 말했다.
[그것 참, 만사태평이구나. 그런데 경찰이 날 범인으
로 생각하는 이유가 뭐래?]
[글쎄? 자세한 건 모른다고 그랬어? 한 번 다시 전화
해 볼까?]
[아니야, 그만둬. 발신지 추적 같은 걸 당할지 몰라.]
안수인이 만류했다.
[하기는 나도 궁금해. 이런 꽁생원 박사를 뭘 보고 그
런 대담한 범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말야. 혹시 자백이
라도 하게 되면 꼭 내게 판권을 넘기도록 해라. 친구
덕에 한번 벼락부자 좀 돼보자.]
[이 자식이 꼭 아무 말이나 막 해요.]
안수인이 그러면서 박진환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
였다. 박진환은 그냥 킥킥 웃었다.
둘은 새벽에 일어나 앉았다.
[이거 여름날이라고 해도 밤에는 춥군 그래.]
박진환이 부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이불도 없으니까 그렇지.]
안수인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런데 잠입할 무슨 계획이 있어?]
[특별한 계획은 없어. 먼저 이 차가 수배가 됐을 가능성
이 있으니까 이 근처에서 차를 얻어타든지,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겠지. 어차피 검문검색이야 불명확한 사진으로
하는 거니까 부딪쳐 봐도 될 거라고 생각해.]
[그건 너무 위험한 생각인데.]
안수인은 머뭇거렸다.
[어차피 우리한텐 시간이 없잖아. 가보자구. 이것도 스
릴이 넘치는 일이잖아.]
[정말 못 말리는 친구구만. 좋아, 가자.]
둘은 지프차에서 간단하게 짐을 꾸려 길을 떠났다.
[네 보따리에 든 건 뭐야?]
안수인이 박진환에게 물었다.
[별거는 없어. 라디오랑 시집이랑 원고지랑 뭐 그런 것
들이지.]
[여관서 나올 때 별거 다 챙겨가지고 나왔구만.]
안수인이 기가 막혀하며 말했다.
[나야 언제나 마음 내키면 떠나는 사람이잖아. 늘 갖고
다니는 물건들이라고.]
박진환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박진환은 안수인의 짐에는
뭐가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둘은 잠시 걸어가다가
마침 지나는 버스를 얻어탈 수 있었다. 둘은 버스를 타고
서로 모르는 남처럼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것은 물론 같
이 앉지도 않았다.
시내에 들어서자 버스가 지지부진하게 움직이기 시작했
다. 앞쪽에서 검문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서야 경관이 올라섰다.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경관은 천천히 사람들 얼굴을 살피며 전진을 하며 몇몇
사람에게는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어느덧 박진환
의 앞에 섰을 때였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듯싶더니
처절한 비명이 뒤따라왔다.
[사람 살려!]
승객들은 모두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몰렸다. 상당한 크기
의 개가 으르렁대며 행인을 쫓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리
를 물린 모양으로 피를 뚝뚝 흘리며 필사적으로 달아나
고 있었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근처 가게를 비롯해서 문
이 열린 곳이라면 가릴 것 없이 뛰어들었다.
[엄마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반대편에서도 들렸다. 한 소녀가 역
시 개한테 쫓기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개한테 물릴 것만
같았다. 가만 보니 십여 마리 이상의 개가 난동을 부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총소리가 울리며 개 한 마리가 쓰러지
는 것이 보였다. 검문을 진행하던 경관이 개를 쏘아죽인
것이었다. 버스에 올랐던 경관도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
온 듯 버스에서 뛰어내려갔다. 운전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닫았다. 사람들도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약
속이라도 한 듯 창문을 닫아걸었다.
[빠, 빨리 가요.]
어느 아주머니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버스는 출발
을 했다. 총소리가 계속 울렸다.
[반장님! 3번 검문소에서 개들이 날뛰기 시작했답니다.]
강 형사가 고함을 쳤다. 민은수와 박봉순도 깜짝 놀라 몸
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어제 늦도록 혹시 안수인과 박진
환을 찾을 수 있을까 돌아다니고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잠깐 눈을 붙였다가 경찰서로 들어온 참이었다.
박봉순은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서
개들이 미친 것으로 보아 범인은 안수인이 틀림없었다.
박봉순은 현기증을 느끼는가 싶더니 그대로 바닥에 허물
어져 버렸다.
[봉순아!]
민은수가 정신없이 박봉순을 부축하며 끌어안았다. 경찰
서 안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같이 소란스러워 누구도 두
사람을 신경쓰지 않았다. 민은수는 박봉순을 안아서 긴
소파로 옮겼다. 냉수를 떠와서 목을 축여주고 얼굴과 손
발에도 뿌려주었다. 민은수가 초조하게 박봉순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데 박봉순이 끄응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아, 수인이가 그런 짓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박봉순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나도 정말 뜻밖이군. 얌전한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그
친구보다는 따라간 진환이가 걱정이 되는데?]
민은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진환이가 걱정이 되네. 진환이는 아직도 수인이를
믿고 있을 거야.]
[모진 놈 옆에 있다가 정 맞는다고 하더니, 진환이가 그
꼴을 안 당해야 할 텐데.]
박봉순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도 가봐.]
[어디를?]
[거기지, 어디긴?]
박봉순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어딘지 알아?]
[몰라. 민 소장도 몰라?]
[얼핏 3번 검문소라고 들었지만 어딘지 알 수가 있나?]
[경찰서가 텅 빈 것도 아닌데 누구든지 아는 사람이 있겠
지. 빨리 가봐야지.]
박봉순과 민은수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거리는 조용하
기만 했다. 하지만 도로에 거무죽죽하게 묻어 있는 것이
핏자국이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사
람은 추 경감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두 분 오셨군요. 다행히 이번에는 인명피해는 없었습니
다. 경찰들이 있는 곳에서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개들의 수도 적었습니다.]
추 경감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어쩌면 좋지요?]
박봉순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안수인씨와 박진환씨가 옥천 시내에 있는지 밖에 있는
지가 이제 파악이 안 됩니다. 이게 오히려 문젠데.]
추 경감이 난감해 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민은수가 물었다.
[검문소 근처에서 사고가 일어난 건 주의를 돌려서 들어
오거나 나가려고 한 것이지요. 물론 들어왔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만.]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다는 것이 합당한 일이 아닐지
도 모릅니다.]
민은수가 곰곰이 생각하다 말을 꺼냈다.
[옥천에 있는 것처럼 꾸미려고 한 것은 아닐까요? 남산
에서 있었던 일처럼 어딘가 장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지금 그 점을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그럴 가능성이 희박
합니다. 사고 지점들을 연결해 본 결과 장치가 있었을 지
점은 도로나 도로 가까운 곳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박봉순이 놀라며 입을 가렸다. 추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
다.
[안수인씨는 개를 미치게 하는 장치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장치는 반경이 그렇게 크지는 않습
니다. 그리고 본인한테 위해를 입힐 가능성도 있다고 봐
야지요.]
박봉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럼 수인이를 따라다니고 있을 진환이가 정말 위험하
겠어요!]
[그렇습니다. 박진환씨는 자신도 모르게 인질이 된 거나
마찬가집니다.]
추 경감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음, 하지만 진환이가 안수인하고 같이 있었다면 개들이
미치는 것을 보았을 텐데, 그렇다면 의심이 안 생길 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민은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렇게 된다면 우리로서는
좀 안심이 될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민 소장님의 전화로
연락을 취할 테니까요.]
민은수와 추 경감의 말에 박봉순은 심리적인 안정을 조
금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전화 켜져 있지요?]
[물론이지.]
[만일 그 두 사람이 이곳으로 들어왔다면 왜 들어왔는지
를 밝혀내야 합니다. 옥천을 꼭 선택한 이유가 뭔지 알아
낼 필요가 있습니다.]
추 경감이 말했다.
[정말 무슨 이유일까?]
박봉순이 민은수를 바라보았다.
[글쎄? 그런데 차는 안수인이 산 게 맞습니까?]
민은수가 추 경감에게 물었다.
[맞습니다. 퇴직금으로 일시불로 샀더군요.]
[안수인이 차를 왜 샀을까요?]
[그거야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겠지요.]
[하지만 지프차는 별로 빠르지도 않고, 강점이라고는 튼
튼하다는 것과 유지비가 싸게 먹힌다는 것뿐이잖아요.]
[그렇지요.]
[만약 푸른 셔츠의 사나이로 활약하려 한다면 차를 사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추 경감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의 표시를 했다.
[그럼 차를 왜 샀을까요?]
민은수도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추 경감
은 수사의 기본 원칙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 소장님 말씀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따 서에서 만
나뵙기로 하겠습니다.]
추 경감은 현장에서 지휘를 하고 있던 강 형사를 큰 소리
로 불러 어디론가 떠났다.
[우리는 어떻게 하지?]
박봉순이 맥이 풀려서 말했다.
[일단 차에 탄 다음에.]
민은수가 약간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시원한 곳에서 냉커피나 한잔 하며 생각해 보기로 하
지.]
박봉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수인과 박진환은 최병길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저거 최병길 맞지?]
안수인이 흥분해서 박진환의 팔을 꽉 잡았다.
[맞네.]
박진환은 그대로 튀어나가려는 안수인의 팔을 잡았다.
[어쩔려고? 잠깐 뒤따라가 보자.]
최병길은 동네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한 갑 사서 어떤 집
으로 들어갔다.
[저 집이 숨어사는 집이구만.]
박진환과 안수인은 그제서야 그 집 대문으로 들어섰다.
마당에 진돗개 잡종처럼 보이는 개 두 마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최병길씨!]
안수인이 감정을 억누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병길은 무심히 뒤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담담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소?]
[무슨 일이라니? 그걸 몰라서 묻는 겁니까?]
안수인이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나를 그만큼 괴롭히고도 성이 안 차시오?]
최병길은 툇마루에 털썩 앉았다. 하지만 두 사람을 보고
앉으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박진환은 개를 어르고 장
난하면서 둘의 대화는 듣는 체를 하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괴롭히는 것도 못지 않아요.]
안수인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 연약하고 가련한 정아씨를 감방에 집어넣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병길이 벌떡 일어나 주먹을 움
켜쥐고 안수인 앞으로 왔다.
[아직은 내 마누라야. 뉘 앞에서 지금 남의 여편네 이름
을 부르는 거야?]
[그러고도 자기 아내라고 말할 자격이 있어! 칠 테면 쳐
봐!]
안수인도 지지 않고 대거리를 했다.
[주먹이 아까워서 참는다.]
최병길은 다시 툇마루로 돌아가 앉았다.
[용건이 뭐요?]
[정아씨를 풀어주고 이혼해 주시오.]
안수인의 말에 최병길은 뚫어져라 안수인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하기는.]
한참 만에 마치 눈싸움을 푸는 것처럼 눈길을 내리더니
최병길이 말했다.
[개새끼를 부리는 놈이 동성동본을 결혼할 수 있게 해달
라고 하더니만. 네 놈이 요청했나 보지?]
[갑자기 웬 홍두깨 같은 소리요?]
[네 놈하고 여편네하고는 동성동본이라며? 그런데 푸른
셔츤지 하는 놈이 3일 안에 동성동본 결혼을 허용하지 않
으면 다 죽여버린다고 협박을 했더라고. 암만 봐도 네 놈
이 한편인 것 같은데? 신고나 해볼까? 현상금이 1억이나
된다는 건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최병길은 끅끅대면서 웃어댔다. 박진환이 슬그머니 일어
나 밖으로 나갔다.
[엉뚱한 이야기는 그만둬요. 제발 정아씨를 풀어주시오.
]
안수인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제발 부탁이오. 나도 무척 자제하고 있는 중이란 말이
오.]
[자제를 하고 있다고?]
최병길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자제하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지? 그런 빈약한 주먹으
로 나를 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내 목을 비틀 수는 있
어? 그런 용기가 있냐고?]
최병길은 마루에 벌렁 누웠다.
[맘대로 해봐. 나는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야.]
안수인은 주먹을 움켜쥔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두 사람
간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박진환이 다시 마당으로 들
어왔다.
[얘, 병길아, 전화가 왔다.]
안쪽에서 할머니 소리가 들렸다.
[나 여는 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최병길이 의아해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방으로 들어
가 전화를 들고 마루로 나와 앉았다.
[여보세요? 내가 최병길입니다. 뭐라고요? 그
래요, 그 사람 지금 여기 있습니다만.]
최병길은 그렇게 말하며 안수인을 바라보았다.
[수인아.]
박진환이 안수인한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경찰이 이리 오고 있는 모양이야. 일단 밖으로 나가자.
]
안수인은 그 말에 흠칫 놀라며 박진환을 따라 나갔다.
[어, 이봐. 어디 가는 거야!]
최병길이 수화기를 든 채 안수인을 불렀지만 박진환은
안수인의 등을 떠다밀며 밖으로 나가 대문을 닫아버렸
다.
[이쪽이야.]
박진환은 먼저 한쪽 길로 내달렸다. 안수인도 그 뒤를 따
라 달렸다.
18. 대치
[이만 하길 천만다행입니다.]
추 경감이 최병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병길은 들것에
실려 앰뷸런스로 옮겨지고 있었다. 오른팔에 싸맨 붕대
에는 벌겋게 피가 배여 있었다.
[다행은 무슨 얼어죽을 다행이오? 윽!]
최병길은 통증에 몸부림쳤다.
[살인마가 버젓이 걸어다니도록 내버려두는 경찰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소!]
추 경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추 경감은 민은수
의 말을 듣고 있다가 안수인의 주변 인물에 대한 초동수
사가 미흡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즉시 자료를
수집해 보니 안수인과 내연의 관계에 있는 안정아의 남
편이 이곳 옥천에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즉시 전화를 주
는 한편 경찰을 급파했으나 안수인의 검거에는 실패했
다. 다행인 것은 최병길이 그 전화를 받고 황급히 몸을
피해 팔에 약간의 상처를 입는 데 불과했던 것이다.
[반장님, 찾았습니다.]
강 형사가 마당 구석에서 괴상하게 생긴 기계장치를 들
어보였다.
[발신장치로 만들어진 모양입니다. 안에 테이프가 들어
있습니다.]
[한번 열어보게.]
강 형사가 기계장치의 뚜껑을 열었다.
[앗!]
기계 내부에서 갑자기 불꽃이 일어나며 기계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이런!]
추 경감이 놀라서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안의 테이프
는 형체도 없이 녹아버렸다.
[안에다가 인화물질을 넣어두었다가 여는 순간 타오르게
만들어놓은 모양입니다.]
강 형사가 손에 화상은 안 입었나를 살펴보며 말했다.
[괜찮나?]
추 경감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강 형사는 씨익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안수인이 옥천 안에 있는 것이
밝혀진 이상 체포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제 사건
은 해결된 셈이군요.]
[그랬으면 좋겠네만.]
추 경감이 말끝을 흐렸다.
[검문검색을 두 배로 강화하고 개들이 미쳐 날뛰는 소동
이 일어나도 병력의 반은 검문을 계속하라고 지시해야겠
습니다.]
[그렇게 된다면야 좋겠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될 거야. 현
실적으로 개들이 미쳐 날뛴다면 시민을 구하지 않을 수
가 없단 말야.]
[그럼 어쩌지요?]
추 경감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상부에 비상조치를 구해야겠어.]
[예?]
[옥천 일대에 위수령이든 비상조치든 내리라고 해서 주
민들을 모두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안수인을 잡아들여야
해. 그렇지 않고는 방법이 없을 것 같네.]
민은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박봉순과 민은수는 긴장해서 서로 바라보았다.
[받아봐.]
박봉순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 여보세요.]
[아, 은수 형. 저 진환입니다.]
[진환이야?]
박봉순이 민은수에게 물었다. 민은수가 고개를 끄덕였
다.
[진환아, 너 지금 어디 있니?]
[응, 옥천에 있어요.]
박진환의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옆에 안수인이 있냐?]
[예, 같이 있어요.]
[그럼 너 내 말 잘 들어. 그냥 듣기만 해.]
[왜 그래요? 무섭게스리.]
[아무 소리 말고 듣기만 하란 말야.]
[예.]
[안수인이 개를 이용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증명이 되
었어. 너, 옥천에 들어올 때 검문중에 개들이 미쳐 날뛰
었지? 그게 다 안수인이 저지른 거야. 지금 있는 장소를
나한테 말해주기는 힘들 거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 장
소에 안수인이를 잡아두고 경찰을 불러. 안 그러면 너도
당할지 몰라.]
[에이, 형도 그게 무슨 소리에요. 수인이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지 마! 안수인이 눈치채면 큰일난단 말야.]
민은수는 속이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박봉순이 바꿔달
라고 말했다.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진환아, 나 누나야. 다른 이야기 아무 필요 없고 빨리
달아나라. 빨리 달아나! 안 그러면 죽어! 빨리 달아나!]
박봉순은 말하다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카페에 있던 사
람들이 모두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알았어요. 누나 괜한 걱정 말아요. 진천으로 돌아갈 테
니까 그렇게 말해줘요.]
[그, 그러지 말고.]
박봉순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어, 어쩌면 좋지.]
박봉순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민은수는 추 경감에게
연락을 취했다.
[진환이한테 연락이 있었는데, 옥천 시내에 있답니다.]
[알고 있습니다. 최병길씨 집에서 개를 미치게 만들어
최병길씨를 공격했습니다.]
[최병길씨가 여기 있습니까?]
[처음부터 최병길씨를 노리고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최병길씨는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다행히 팔만 조금 다쳤습니다.]
[그럼 최병길씨를 공격할 때 진환이도 그곳에 있었나요?
]
[아닙니다. 안수인은 일종의 원격 공격장치를 만들어 가
지고 다니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떠난 뒤에 개가 공격을
가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거 점점 걱정이 더 되는데요?]
[저희도 그렇습니다. 곧 비상조치를 내리고 시민들을 집
안으로 대피시킬 작정입니다. 두 분도 이곳으로 오시든
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든지 하십시오.]
민은수는 최병길의 집이 어딘지 물어보고 박봉순과 그곳
으로 떠났다. 정류장에서 내려서 최병길의 집으로 방향
을 잡는데 박봉순이 민은수의 소매를 당겼다.
[왜?]
[쉿! 저길 봐.]
박봉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심코 박봉순이 가리
키는 곳을 돌아보던 민은수가 깜짝 놀랐다. 안수인과 박
진환이 그곳에 있었다.
[어떡하지?]
박봉순이 조그맣게 말했다.
[붙잡아야 하지만 내 힘으로는 한 사람밖에 잡지 못할 거
야. 몰래 뒤를 밟다가 도움을 요청해야겠어. 닥터 박은
추 경감한테 가서 알려.]
민은수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그러면 민 소장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잖아.
나도 따라갈 테야.]
안수인과 박진환은 주위를 살펴보지 않는 눈치였다. 두
사람이 잰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민은수와 박봉순
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은수는 조용히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켜
고 짐작으로 리콜버튼을 눌렀다. 언제라도 센드버튼만
누르면 추 경감과 통화가 될 수 있는 상태를 만든 것
이다.
안수인과 박진환은 교통편 이용은 포기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걸어다니는 게 검문을 피하기 더 쉽다고 생
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로 가려는 걸까?]
박봉순이 물었지만 옥천 지리를 모르는 민은수로서도
알 도리가 없었다.
[글쎄? 만일 나라면 버스터미널로 갈 것 같아. 그래야
외부로 도망칠 방법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비상조치
가 취해진다고 했으니 아예 외부로 나가는 길을 모두
차단할 것 같아. 그러면 헛수고가 되겠지.]
[그러기 전에 자수시켜야 하는데.]
박봉순이 말끝을 흐렸다.
[자수 안 할 거야.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 자수
한다고 살려주겠어?]
[사랑이란 게 너무 무서운 거야. 선량한 사람이 그런
살인마가 되다니 말야.]
[그러니까 닥터 박도 사람들 목숨 구하려면 아무 소리
말고 내게 시집와야 하는 거야.]
[뭐?]
박봉순이 뜻밖의 말에 민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민은수는 진지한 눈길로 박봉순의 물음이 담긴 눈길을
맞아주었다. 박봉순의 두 볼이 붉게 물들었다.
[이런, 놓치겠다.]
민은수는 모퉁이를 도는 두 사람을 쫓으며 박봉순의
손을 잡아끌었다. 모퉁이를 돌아 두 사람을 다시 찾고
서도 그 손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닥터 박, 길을 이끌고 있는 게 진환이 같아.]
[그래, 나도 그렇게 봤어. 진환이는 돌아다닌 곳이 많
아서 옥천에도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아주 능숙하
게 길을 가고 있거든. 저러다 공범으로 몰리는 건 아
닌지 몰라.]
박봉순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진환은 척척 어디
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강 형사. 3일 후면 며칠이야?]
추 경감이 뭔가를 알아냈다는 것을 강 형사는 오랜 경
험으로 알 수 있었다.
[15일입니다.]
[15일이면 민방위 훈련이 있는 날이잖아, 그렇지.]
[매월 15일에 민방위 훈련이 있는 건 아닌데요? 이번
달 15일에 민방위 훈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거 빨리 알아봐!]
강 형사는 민방위 본부에 전화를 걸어 문의를 했다.
[반장님, 15일에는 전국에 민방위 훈련이 시작된답니
다.]
[역시 그랬군.]
추 경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웬 뜬금없는 말씀이세요? 민방위 훈련이 지금
옥천하고 무슨 관련이라도 있습니까?]
[옥천하고는 관계가 없지만, 전국의 개들이 미쳐 날뛸
가능성하고는 관계가 있지. 민방위 훈련이 전국에서
실시되면 전 방송국이 동일한 방송을 틀게 되지. 실외
에서도 들을 수 있어. 실외 확성기들이 모두 방송을
하니까. 그 방송전파에 개를 미치게 하는 음파를 실어
보내면?]
추 경감의 말에 강 형사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전국의 개들이 미쳐 날뛰게 되겠군요.]
강 형사는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방송국에 들어가는
것도 문제가 있고 송출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도 저 같은 경우엔 감이 안 잡히는데 말입니다.]
[안수인은 그런 한계를 뛰어넘고 있는 놈이야. 틀림없
이 어떤 방법을 가지고 있는 거야. 여태까지 헛소리
한 적이 없잖아. 서울에 연락해서 방송 시스템을 철저
히 점검하라고 해. 그래도 알아내지 못한다면 민방위
훈련을 취소하라고 전해.]
추 경감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 형사도 머뭇거
리지 않고 전화를 했다.
[반장님, 12시15분을 기해서 옥천 일대에 비상사태를
선언하기로 국무회의 의결이 났답니다. 옥천 시내 주
변은 군대를 동원해 길목뿐만 아니라 야산 농지까지
철저경계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는군요.]
강 형사가 전화 결과를 알려줬다.
[12시15분이라. 이제 20분 남았군 그래.]
추 경감은 무심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전율이 등골을 타고 내렸
다.
[경찰서장 어딨나?]
추 경감은 옥천 경찰서장을 찾아 전화연락을 황급히
시도했다.
[비상사태 선언 지시는 받았지요?]
경찰서장이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주민들한테는 어떻게 알리게 됩니까?]
[민방위 체제와 같은 방식으로 알리게 됩니다. 민방위
본부 통제실에서 방송을 내보내게 됩니다.]
[본부 통제실이 어딥니까? 즉시 그곳으로 병력을 급파
하세요! 그리고 방송을 내보내지 말도록 하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범인이 노리고 있는 곳은 그곳입니다. 그곳에서 방송
을 통해 개들을 조종하려고 할 것입니다.]
경찰서장은 바로 추 경감의 말을 이해했다. 즉시 병력
이 민방위 본부로 향했다.
추 경감이 통화를 끝내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민은수
가 연락을 해왔다.
[두 사람을 찾았습니다.]
민은수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어딥니까?]
[민방위 본부라고 붙어 있는 건물로 들어갔습니다.]
추 경감은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
다.
[큰일입니다. 안수인은 그곳에서 개를 미치게 하는 전
파를 내보내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 경찰 병력이 그곳
으로 떠났습니다만, 들어간 지는 얼마나 됐지요?]
[지금 막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야 합니다. 경찰이 갈 때까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안수인을 막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추 경감은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시민의 생명이
이제 민은수의 노력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개들이 미치는 데는 5분 정도의 시간
밖에 필요없는 것 같았다. 5분 동안 경찰이 그곳에서
안수인을 제압하기는 쉬운 노릇이 아닐 것이다. 제압
하더라도 이미 방송이 나간다면 제대로 저지하지 못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추 경감은 현지 경찰의 도움으
로 민방위 본부를 향해 최대의 속도로 달려갔다.
[닥터 박은 여기서 기다려!]
전화를 끊자마자 민은수는 박봉순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본부 건물로 들어섰다. 박봉순은 멍하니
민은수의 뒷모습을 보다가 뒤를 따라 들어갔다. 민은
수는 박봉순이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 혀를 찼지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건물 안에는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쓰러져 있었
다.
[이런, 안수인이 이렇게 힘이 좋은 줄 몰랐는데?]
민은수가 혀를 내둘렀다.
[이, 이건.]
박봉순이 말을 잇지 못했다.
[뭐, 짚이는 게 있어?]
[이건 진환이가 한 것 같아.]
[뭐야?]
[진환이는 특공부대 출신이야.]
민은수는 깜짝 놀랐다. 특공부대 출신이라면 만만한
노릇이 아니었다. 더구나 상대는 둘이다.
[진환이가 왜?]
박봉순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친구를 맹목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거야. 안수인한테
속고 있는 게 틀림없어.]
민은수는 방송실이 있는 2층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박봉순도 구두를 벗어버리고 맨발로 민은수
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방송실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박진환이 움직이는 모
습이 얼핏얼핏 보였다. 진환이부터 무력화시켜야 한
다. 민은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쾅 문을 발로
걷어차며 그대로 박진환을 덮쳤다.
박진환은 가볍게 몸을 돌리며 민은수의 돌진을 피해버
렸다. 민은수는 방송실 구석의 의자에 안수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 순간 박진환의 돌려차기
에 걸려 나뒹굴었다. 얼른 고개를 드는데 박진환이 공
중에서 무릎으로 찍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민은수는
황급히 몸을 옆으로 굴렸다. 박진환은 무릎으로 콘크
리트 바닥을 찍었지만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대
로 몸을 회전시켜 왼발로 민은수를 내리쳤다. 옆으로
피할 공간이 부족한 민은수는 두 손을 내밀어 박진환
의 발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무쇠덩어리를 받은 듯
박진환의 파워에 밀려 양팔꿈치가 바닥에 꽈당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말았다. 정신을 잃어버릴 만큼 끔찍한
통증이 있었다. 민은수는 저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질렀
다. 박진환은 그 자세에서 상체를 번쩍 일으키면서 민
은수 위로 올라타려 했다. 깔리면 끝장이다. 민은수는
저도 모르는 힘이 솟아올라 박진환의 힘을 이용해 그
가 이동하는 방향으로 힘을 더해 벽에다 있는 힘껏 밀
어붙였다. 예상치 못한 반격을 받은 박진환은 벽에 그
대로 어깨와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박진환의 이마
가 찢어져 주르륵 한 줄기 피가 흘렀다. 민은수는 몸
을 굴리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팔꿈치가 욱신거리고
왼쪽 옆구리에서도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
픔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박진환의 동태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자세를 잡았다.
박진환이 고개를 흔들며 한쪽 팔로 벽을 짚으며 일어
났다.
[진환아, 나 은수 형이야.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느냐고? 날 덮친 건 형이야!]
박진환은 그렇게 말하며 연속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발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
다. 이번에는 붙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민은수는
뒤로 황급히 발을 옮기다 등뒤에 뭔가가 걸리는 바람
에 중심을 잃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왼쪽
옆구리에 박진환의 발이 가격을 해왔다. 민은수는 그
대로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의
타격이었다. 늑골이 부러진 게 틀림없다. 나뒹굴 때
혀라도 물었는지 입 안에도 금방 피가 가득 고여왔다.
퉤 피를 뱉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엇!]
민은수는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자신 옆에
안수인이 의자에 묶인 채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봐, 진환아! 내 말 좀 들어!]
민은수는 조절이 안 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간신히
소리를 내질렀다.
[안수인을 잡았으면 됐어! 우리가 싸울 이유가 없잖
아. 널 덮친 건 내 실수였어. 사과할게! 나를 이만큼
팼으면 됐잖아.]
민은수는 빠르게 말을 하면서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요? 좋아요. 그럼 화해의 의미로 악수나 합시다.
]
박진환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민은수는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정말 다행이야. 때마침 경찰 사이렌 소리도
들려왔다. 민은수는 긴장이 풀리면서 통증이 더 심해
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곧 치료도 받을 테니까.
그런데 그 순간 박진환이 민은수의 팔을 한 바퀴 휙
돌려서 꺾어버렸다.
[아악! 왜 이러는 거야!]
[까불면 확 팡을 뽑아버린다.]
박진환은 민은수의 팔을 꺾은 채 민은수를 비어 있는
의자로 끌고 가 순식간에 묶어버렸다.
[너 무슨 짓이야!]
박봉순이 뛰어들며 빅진환에게 외쳤다.
[누나까지 왔어?]
박진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만 따르면 아무도 안 다쳐.]
박진환은 나일론 끈을 들고 박봉순한테 다가갔다.
[너, 너 나한테까지!]
박봉순이 기함을 했지만 박진환은 아랑곳없이 박봉순
을 묶어버렸다. 그는 쓰러진 안수인의 의자를 일으키
며 말했다.
[아무도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 테니까. 그나저나
내가 앉을 자리도 없구만 그래.]
박진환은 방송기기들을 능숙하게 다루며 장치들을 가
동시켰다. 마이크를 쥐고 책상 위로 올라갔다.
[밖에 있는 경찰 여러분! 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여기
에는 인질도 세 명이나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대들
이 진입하기 전에 나는 내 천벌장치를 가동시킬 수 있
어요. 천벌장치가 뭐냐고요? 바로 개들이 하늘을 대신
해서 내리는 게 천벌이에요. 알겠습니까? 이 푸른 셔
츠의 사나이가 하는 말을요!]
민은수와 박봉순은 깜짝 놀랐다.
[진환아! 네가 그 살인마란 말이냐?]
박봉순은 그 말을 하고는 그대로 실신을 했다. 박진환
은 '이런' 하고 외치더니 마이크를 끄고 밖으로 나갔
다. 민은수는 안수인을 불렀다.
[안수인씨, 당신은 이 살인극하고 관련이 없나요?]
[예. 나는 관련이 없어요. 모두 진환이가 꾸민 일이었
어요. 저도 여기까지 와서야 알았습니다.]
박진환이 돌아와서 두 사람은 대화를 끊었다. 박진환
은 수건에 물을 적셔서 왔다. 젖은 수건으로 누나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박봉순은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
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박봉순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네가 살인마라니! 어떻게 이럴 수가!]
[누나! 다시는 날 살인마라고 부르지 마! 나는 사회정
의를 구현하는 신의 사자야. 푸른 셔츠를 걸친 신의
사자라고!]
박진환은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밖에서 경찰이 말하
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로 봐서 추 경감인 것 같았다.
[안수인은 들어라! 이곳은 완전 포위됐다. 헛된 저항
을 하지 말고 빨리 투항해라! 투항하면 정상을 참작해
주겠다.]
박진환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웃기지 마라! 체포되면 무조건 사형인 줄 안다.]
[범인은 진환이에요!]
박봉순이 꽥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박봉순이 말을 하
자마자 박진환이 마이크를 꺼버린 상태였다.
[이런, 이런.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박진환은 세 사람의 입에 재갈을 채웠다. 그런 후에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여기 박진환, 박봉순, 민은수 이렇게 세 명의 인질이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다이너마이트도 충분히
있어. 섣부르게 굴면 건물을 날려버릴 테다. 하하하,
그리고 내가 마음만 먹으면 옥천시는 개들의 해방구가
될 거요. 알아서 기기를 바라오!]
박진환은 다시 커다랗게 웃었다.
[어떻게 하지요?]
경찰서장이 당황해서 추 경감에게 물었다.
[저곳에서 전 시내의 스피커 장치를 조정할 수 있겠지
요?]
[그렇습니다.]
외부와 연결된 선을 모두 끊어버리세요. 그리고 전력
공급을 언제라도 차단할 수 있게 만드십시오.]
추 경감의 말에 경찰서장의 얼굴이 펴졌다.
[그런 방법이 있군요. 아예 지금 전원을 차단해버리지
요?]
[안 됩니다. 그러면 범인이 자극을 받을 수 있어요.
인질이 있으니까 개들을 조정할 길을 끊어버렸다는 것
을 모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강 형사가 다가왔다.
[반장님, 테러진압반이 이곳으로 출동했다는 보고입니
다.]
[언제쯤 도착한다지?]
[범인을 자극할 우려가 있어서 고공낙하로 투입된다고
합니다. 20분 안에 도착한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야 하겠
군.]
[안수인! 요구조건이 뭐냐?]
추 경감이 다시 스피커를 들고 외쳤다. 잠시 후 마이
크를 통해 대답이 나왔다.
[안전한 퇴로를 보장해라. 헬기를 한 대 보내도록 해
라. 앞마당에 착륙시키고 경찰병력은 모두 철수해라.
내가 직접 몰고 가겠다.]
[좋다. 헬기를 부르는 데는 30분쯤 걸린다. 기다릴 수
있겠지?]
[기다려 주겠다. 하지만 허튼 짓은 하지 마라. 나는
문에다가 부비트랩을 설치해 두었다. 섣불리 진입하면
건물이 통째로 날아간다.]
[절대로 진입하지 않겠다.]
추 경감은 스피커를 내려놓고 강 형사를 돌아보며 말
했다.
[안수인이 헬기 조종을 할 줄 아는 모양이네?]
[경력상으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강 형사도 의외라는 모습이었다. 초조한 시간이 흘러
가고 있었다.
19. 종말
박진환은 안수인의 재갈을 풀어주고 결박도 풀어주었
다.
[너 왜 이런 짓을 한 거니?]
안수인이 피가 잘 안 통하는 모양으로 팔을 주무르며
말했다.
[널 위해서야.]
박진환은 애틋한 눈빛으로 안수인을 바라보았다.
[동성동본이 결혼할 수 없다는 건 말도 안 돼. 난 네
행복을 위해 그런 터무니없는 장벽을 허물어주기로 작
정했지.]
[이게 날 행복하게 해주는 거란 말야? 그렇게 하려고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는 게 말이나 돼? 넌 미쳤어!
]
박진환은 안수인의 말에 킥킥대며 웃었다.
[미쳤을지도 모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 놈 때문에 나는 범인이 됐는데 무슨 빌어먹을 행
복이야!]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여기 네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인들이 있잖아. 너는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
어. 넌 나한테 이용당한 불쌍한 사람으로 남을 뿐이
야.]
박진환은 다시 킥킥거리며 웃었다.
[누나하고 내 매형될 양반하고, 오 은수 형, 설마 나
때문에 우리 누나를 걷어차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간
내 친구 개들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하하, 이건 농
담이야. 이 두 사람이 증언을 해주면 넌 풀려날 거야.
그러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여러분한테 설
명을 해드리는 게 좋겠네. 아무튼 시간도 좀 남았으니
까.]
박진환은 계기반 위에 자리를 잡고 말을 시작했다.
[수인이가 음성인식 장치를 개발하고 있는 것은 예전
부터 알고 있었지. 난 수인이의 연구소도 여러 차례
놀러갔으니까. 그런데 그곳 실험실에 있던 쥐들이 수
인이가 높은 사이클로 신호를 보내면 움찔움찔하는 것
을 난 알았어. 이건 수인이한테도 말했던 거야. 생각
나지?]
[응.]
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이는 짧은 신호를 만들고 있었어. 어차피 사람한
테 안 들리는 신호니까 길게 만들 필요는 없었단 말
야. 꽝 하는 소리 같은 거면 됐지. 그런데 하루는 우
리 둘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신호를 무한 반복상태
로 놓아둔 채 잊어버린 거야. 무슨 실험이라고 했더
라?]
[출력신호를 입력장치가 놓치는 일이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계속 반복을 시키고 있었지. 100퍼센트 입력이
돼야만 상품으로 가치가 있으니까.]
[그래, 그랬지. 그 결과는 오케이였어. 하지만 엉뚱한
일이 벌어진 거야. 아래에 있던 개가 발작을 일으킨
거지. 난 그게 그 신호와 관계가 있는 일이라는 걸 직
감적으로 알았어. 개에 대한 온갖 책을 섭렵한 결과
개는 특정한 소리가 반복되면 일시적으로 미쳐버린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박진환은 다시 킥킥거리고 웃었다.
[나는 여러 차례 실험을 했어. 네가 정아씨와 정신없
이 부둥켜안고 있을 때 나는 네 연구실에서 밤새 어떻
게 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개를 미치게 만들 수 있는지
연구를 거듭했지. 천둥소리, 호랑이의 포효, 공장의
굉음 등등 아무튼 시끄럽고 정신 사나운 소리는 모두
배합을 해봤어. 그 결과 4분이면 개를 미치게 만드는
소리를 합성해냈어. 개들은 미치면 공격본능만 남게
되는 거야. 극도의 공포심 때문에 그렇게 되는 모양이
야. 왜 속담에도 있잖아.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
를 문다는. 정말 그렇게 되더라고. 이건 아주 획기적
인 발명이야. 특허를 낼 수 없는 게 아쉬워. 어떤 신
문에서 이게 북한에서 생화학전을 개시한 것인지도 모
른다고 했는데, 정말 후방 교란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
을 거야.]
박진환은 스스로 대견하다는 듯이 다시 킥킥거리고 웃
었다.
[대량살상이 가능한지 테스트해 보기로 마음먹었지.
대상으로 꼽은 것은 구란도였어.]
박봉순은 그 말을 듣자 얼굴이 대번에 하얗게 질렸다.
[구란도 놈들은 내 시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나를 비
웃었지. 예술을 모독하는 놈들은 천벌을 받아야 마땅
해. 나는 주저없이 그들을 첫 시험의 제물로 선택했
어. 수인이 네가 날 만나러 왔을 때 나는 알리바이를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지. 너는 먼저 술에 곯아떨어졌
고 나는 훔친 배를 타고 구란도에 몰래 상륙했어. 그
런 일은 식은죽 먹기였지. 마을회관으로 가서 테이프
를 미리 준비해 온 것으로 바꿔치기하고 전화선을 절
단한 후에 산 속에서 잠을 잤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음악이 흘러나오자 우리 집으로 갔어.]
박진환은 박봉순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누나가 거기 있기 때문이었지. 누나도 안전하게 빼오
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당장 혐의가 나한테 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몰래 누나를 지키려고 한 거야.
그런데 은수 형이 생각보다 날렵하더라고. 그래서 나
는 일단 마을회관으로 갔어. 테이프를 회수해야 했거
든. 경찰은 내가 문을 열고 개를 들여보냈다고 생각했
지만 그건 아니야. 그 문은 잠겨 있지 않았거든. 개들
이 밀고 들어간 거야. 내가 갔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
료된 상태였어. 나는 테이프를 다시 바꿔넣고는 문을
닫았을 뿐이야. 이로써 직접적인 증거는 없어진 셈이
었어. 하지만 이게 자연적인 재앙이 아니라는 것은 알
려야만 했기 때문에 나는 내 프로텍터를 벗어던지고
다시 배를 타고 빠져나왔지. 시간이 조금 걸린 것은
누나가 상처를 입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어. 은수 형
이 별로 잘 지켜주지 못했던 모양이더라고. 나는 개들
이 얌전해질 시간쯤 되어서 그곳을 떠난 거야. 그런데
내 모습을 두 사람이 보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다
행히 거리가 멀어서 난 줄 눈치채지 못했지. 물론 그
덕분에 푸른 셔츠의 사나이라는 근사한 닉네임을 얻었
지만.]
박봉순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박진환의 이야기를 들었
다.
[구반리는 나하고는 상관이 없어. 나는 예전에 그 마
을을 지나가면서 개 사육장이 있는 걸 보았거든. 그래
서 개가 많은 그곳을 다음의 천벌 지역으로 설정했지.
개가 미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확실히 조종되고 있
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거든. 여기서도 같은 방법을
썼어. 테이프를 바꾸고 나중에 회수했지. 그런데 나중
에서야 음악을 다른 것을 튼다는 것을 알았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내가 만들어놓은 테이프는 그때까지
는 그것밖에 없었거든.]
[너는.]
안수인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포기했다.
[살인마라고? 모든 위대한 사람은 살인을 통해서 명성
을 쌓았다는 거 몰라? 알렉산더, 나폴레옹, 이순신 등
등 말야!]
[그건 살인이 아니라 전쟁이야!]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건 살인이 아니란 말야? 사
람을 죽이는 건 다 같은 문제야. 조국의 명령을 받고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되고, 자기가 판단해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나?]
박진환은 코웃음을 치고 다시 말을 계속했다.
[나는 내 장치를 이용해서 몇 개의 녹음도 만들었지.
그 장치를 이용하니까 성문 변조는 누워서 떡 먹기더
구만. 그런 목적으로 팔아도 될지 몰라. 흐흐흐, 그리
고 구반리에서 일을 저지르기 전에 이미 나는 남산에
광견장치를 만들어놓았어. 아, 나는 내 장치 이름을
광견장치라고 불러. 타이머를 통해서 작동이 되도록
꾸며놓았지. 내가 장소와 시간을 알려준 건 인명피해
를 줄여보자고 한 거야. 그래도 거기서 죽은 놈들은
나라의 명령도 듣지 않는 죽어 마땅한 놈들이라고 볼
수 있지. 나는 그 점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어. 오히려
나라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한 거야.]
[죽어 마땅한 사람은 너야!]
안수인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줘. 내가 말했잖아. 널 위해서 한
일이라고. 내 성의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매몰차게 말
해서는 안 되지. 난 최병길이도 널 위해 죽여버렸다
고.]
[뭐라고?]
[난 간단한 광견장치를 몇 개 갖고 있어. 그때 경찰이
오고 있는 게 아니었어. 그 장치를 작동시킨 다음에
널 데리고 나온 거야. 확인은 못 했지만 죽거나 재기
불능으로 다쳤을 거야. 응?]
박진환은 민은수가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고는 다가와
재갈을 풀어줬다.
[뭐 할 말이라도 있수?]
민은수는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해보았다. 입이 막혀 있
으니 숨 쉬기도 곤란한 것 같았던 탓이다.
[최병길씨는 죽지 않았어. 별로 다치지도 않았고.]
안수인이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넌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 경찰은 그때 진짜로 그곳
으로 가고 있었다고. 전화로 최병길씨한테 주의를 줘
서 무사할 수 있었던 거야.]
[허허, 그 자식 정말 운이 좋은 놈이구만.]
[경찰을 우습게 보지 마. 넌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
어!]
[그건 두고 봐야지.]
박진환은 다시 민은수의 입을 막았다. 그때 안수인은
박진환의 가방을 살그머니 열었다. 민은수는 그것을
보고 박진환이 재갈을 물리지 못하게 하려는 듯 얼굴
을 세차게 흔들었다.
[어허, 가만 있어요. 가만 있으면 안 다치고 일이 끝
날 수 있다고.]
안수인은 박진환이 말하는 광견장치를 가방에서 꺼냈
다. 두 개가 들어 있었다. 하나의 뚜껑을 살며시 여는
순간 푸시시하는 소리가 나며 테이프에 불이 붙었다.
안수인은 엇 하는 소리를 내며 광견장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박진환이 돌아섰다.
[이런, 이런. 수인아. 내 일을 이렇게 방해하면 안
돼!]
박진환이 성큼 한 걸음 다가서자 안수인도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가까이 오지 마. 이건 니가 갖고 있는 마지막 테이프
지? 이걸 부수면 넌 아무것도 아냐. 물러나!]
[수인아, 그러지 마. 넌 이제 내 덕으로 정아씨와 행
복하게 살 수 있어. 그 장치를 이리 줘.]
[웃기지 마. 넌 달아날 수도 없어. 지금이라도 빨리
포기해.]
안수인은 등뒤에 벽이 닿는 것을 느꼈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박진환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안수
인은 다급하게 장치를 열려고 했다.
[안 돼!]
박진환이 안수인의 손을 발로 걷어찼다. 안수인은 손
목이 부러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장치는 공중에
떠올랐다. 장치를 부수는 데 실패했나? 안수인은 손목
의 통증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공에 떠오른 장치만을
바라보았다. 박진환은 정신없이 장치를 받아내려고 몸
을 날렸다. 박진환의 손끝에서 장치에 닿는가 싶었지
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기 전에 장치는 바닥으로 떨
어졌다. 한번 퉁겨오른 장치는 그대로 뚜껑이 열려버
렸다. 푸시시하는 소리와 함께 장치는 불길에 휩싸였
다.
[이런!]
박진환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런! 이런!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박진환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안수인에게 다
가왔다.
[학살극을 중지시킨 거지.]
안수인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진환이 안수인의
어깨를 꽉 잡았다.
[중지! 중지라고! 넌 친구의 우정을 배신한 거야! 난
널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해줬는데! 넌 이 따
위 배신으로 날 대하다니! 이 개자식! 죽여버리겠다!]
박진환은 안수인의 목을 눌렀다. 안수인은 버둥거리며
박진환의 사타구니를 무릎으로 걷어올렸다. 박진환이
나뒹굴었다. 안수인은 그를 더 보지 않고 문을 향해
달려나가려 했다. 하지만 두 걸음도 떼기 전에 발목이
강철 같은 박진환의 손아귀에 걸리고 말았다. 안수인
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엎어졌다. 코피가 주르륵 쏟아
졌다.
[이런 걸 피 봤다고 하는 건가?]
박진환도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충격이 아주 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안수인의 발목은 놓지 않았다. 안수
인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탈출하지 못하면 죽
는다. 안수인은 잡히지 않은 발로 있는 힘을 다해 박
진환의 얼굴을 걷어찼다. 박진환은 악 소리를 질렀지
만 안수인의 발목을 놓치는 않았다. 안수인은 연거푸
박진환의 얼굴을 걷어찼다. 박진환은 한 팔로 안수인
의 공격을 막으면서 안수인을 자기 쪽으로 당기기 시
작했다. 안수인이 제대로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박진환은 안수인의 나머지 발도 마저 잡아버렸다.
그 상태에서 박진환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안수인군. 훌륭한 태도를 보여주었군. 하지만 나한테
는 안 돼! 역부족이야.]
박진환은 안수인의 몸을 들어올리는 듯하다가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안수인의 몸이 한번 꿈틀하더니
의식을 잃어버렸다.
[넌 내가 왜 널 풀어놓았는지 이해를 못 할 거다.]
박진환은 낮은 소리로 중얼대며 박봉순과 민은수의 목
을 가볍게 쳐서 두 사람을 기절시켰다. 다음에 안수인
을 똑바로 눕히고는 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박진환이 돌아보는 데
번개처럼 진입한 요원들이 총을 겨눴다.
[손 들어!]
박진환은 얼른 손을 들었다.
[일어서!]
박진환은 시키는 대로 서서히 일어섰다.
[저는 안수인이 아닙니다. 안수인은 제가 쓰러뜨렸어
요!]
박진환이 큰 소리로 말했다. 검정 두건을 쓰고 있는
요원들은 그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주경
계 태세를 취하는 요원이 있는가 하면 폭탄장치가 있
는지 살피는 요원들도 있었다. 안수인은 재빨리 포박
을 당했다.
[아, 추 경감님!]
박진환이 들어서는 추 경감을 반색을 하며 맞았다.
[이런,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추 경감이 박진환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박진환도 그
제서야 안 것처럼 얼굴을 문질렀다. 온통 피범벅이었
다.
[저도 몰랐군요. 간신히 묶인 걸 풀고 수인이를 덮쳐
서 제압을 했는데 얼굴을 좀 씻고 와도 되겠습니
까?]
[그러시지요.]
추 경감은 곁에 있는 경찰관에게 박진환을 모시라고
말했다.
[이곳에 폭탄은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조사결과가 보고되었다. 추 경감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민은수와 박봉순도 정신만 잃은 모양으로 크
게 다치지는 않아 응급조치를 취하자 금방 깨어났다.
[진환이는? 진환이는?]
박봉순이 정신이 들자마자 말했다.
[안심하세요. 무사합니다. 안수인도 체포했습니다.]
추 경감이 말했다.
[아니에요! 범인은 진환입니다! 우리는 속았어요!]
민은수가 외쳤다.
[뭐요!]
추 경감은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 화장실 앞에는 따
라보낸 경관이 서 있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추 경감이 벼락같이 화를 내며 화장실 안으로 뛰쳐들
어갔다.
[화장실까지 뭘 따라오느냐고 해서.]
뒤따라 들어온 경관은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쩔
쩔매며 말했다. 추 경감은 화장실의 창문이 열린 것을
보고 이미 늦은 것을 알았다. 내려다보니 건물 뒷담이
바로 아래 보였다. 그리로 해서 빠져나간 것이다. 추
경감의 일순간의 방심이 사태를 원점으로 돌린 셈이었
다.
[옥천 시내를 완전 봉쇄하고, 예정대로 비상사태를 선
포해!]
추 경감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안수인씨가 광견장치를
모두 없앴습니다.]
민은수가 위로를 했다. 안수인도 이제 정신이 돌아왔
다.
[원본이 어딘가 있을 겁니다. 사본은 아무리 없애도
소용이 없는 법이지요.]
추 경감이 얼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아마 원본이 이제 없을 겁니다.]
안수인이 말했다. 모두들 안수인을 바라보았다.
[저는 옥천 시내를 들어올 때 개소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진환이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진환이의 보따리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몰랐습
니다. 하지만 진환이 옷에는 테이프가 하나 들어 있었
습니다. 그 테이프가 들어 있는 것은 옥천에 들어오기
전에 노숙할 때 알았습니다만 그때는 그게 뭔지 짐작
도 못 했지요. 하지만 옥천 시내에서의 일을 보고 눈
치를 챌 수 있었습니다. 저 모르게 진환이가 그런 연
구를 했다는 게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저는 기회를
보아 그 테이프를 빼돌렸지요. 아마 그게 원본일 것입
니다.]
[그 테이프는 어디 있습니까?]
[이쪽으로 오다가 하수도 공사를 하는 걸 보고 그곳에
던져 넣어버렸습니다.]
[아, 그래요. 우리가 미행하다가 뭘 버리는 걸 보았어
요. 우리는 빈 담뱃갑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민은수가 안수인의 말을 증명해 주었다. 추 경감은 즉
시 그 장소로 인력을 파견했다.
[그렇다면 박진환이 갈 곳은 한 군데뿐이군요.]
추 경감이 말했다.
[어디지요?]
박봉순은 울고 있다가 그 말에 추 경감을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 그곳으로 가서 박진환을 기다려 봅시다.]
박진환은 킥킥 웃으며 옥천을 벗어났다. 그는 산길을
걸어서 진천을 향했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걸어서 자
정 무렵에 진천으로 들어섰다.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
고 걸어서 이동을 한 것이다. 박진환은 오성 연구소
앞으로 왔다. 그는 연구소 100여 미터 전방에서 포복
으로 이동을 했다. 연구소 철망을 가볍게 뛰어넘고 도
움닫기로 안수인의 연구실 창문 턱을 잡았다. 고양이
처럼 날렵한 동작이었다. 그는 손쉽게 몸을 일으켜 창
문을 넘어 들어갔다. 연구실 안은 깜깜했지만 박진환
은 잘 보이는 모양으로 캐비닛 앞으로 가 서랍을 열었
다. 캐비닛 밑에서 뭔가를 꺼내는 눈치였다.
박진환은 킥킥 웃으면서 의자에 가 앉더니 다리를 주
무르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경찰은 지금쯤 어디 있을까? 안수인이 녀
석은 내가 모든 테이프를 폐기시킨 척 하려는 것과 격
투를 벌인 것처럼 해서 거길 빠져나올려고 했다는 걸
모두 이해했을까? 아마 두 가지 중 한 가지밖에 이해
를 못 했을걸? 크크크.]
박진환은 다리를 바꿔 다시 주물렀다.
[진천에 경계망이 쳐지지 않은 걸 보니 경찰은 내가
이곳으로 돌아오는 걸 꿈에도 생각 못 한 모양이야.
하지만 나한테 이 테이프가 있는 한은 난 영원한 승리
자일 수밖에 없지.]
박진환은 테이프를 톡톡 치며 말했다. 박진환은 컴퓨
터를 작동시켰다. 그는 능숙하게 키보드를 조작했다.
[이제 됐어.]
그는 컴퓨터를 끄며 중얼거렸다.
[완벽하게 자료를 지워버렸다. 테이프만 복사를 하면
이제 이곳 일도 끝나는군.]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 갑자기 연구실에 불이 들어왔
다. 박진환은 깜짝 놀라 눈을 가렸다.
[이제 모든 게 끝났어.]
안수인의 목소리였다. 박진환은 이곳에 몇 명이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수인이, 너 혼자냐?]
[너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했니?]
[세상이 썩었기 때문이야. 순수한 것이 없어. 난 순수
한 것을 찾는 시인이야. 하지만 세상에 무슨 순수가
남아 있지? 왜 이렇게 된 거야?]
박진환은 조금씩 눈을 떴다.
[세상에는 더러운 것이 너무 많아! 누군가 그것을 치
워야 해! 남들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해야만 한
다고. 그게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야! 난 구세주야!
어두운 곳에서 일하는 구세주!]
[넌 살인마일 뿐이야.]
[은수 형!]
민은수도 이곳에 와 있구나. 박진환은 틀렸다는 생각
이 들었다.
[누나는?]
[진환아! 너 정말 왜 이런 거야! 네가 왜!]
[선지자는 고향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가족에게 배척
당하는 법이지. 난 외롭지 않아.]
박진환은 연구실 안에 사람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는
것을 알았다.
[후후후, 나 하나 잡을려고 꽤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
구만 그래!]
박진환은 그렇게 말하며 춤추듯 몸을 돌리며 가까이
있던 한 사람을 끌어당겼다. 그의 동작은 신비할 정도
로 빨라서 아차하는 사이에 경관 하나가 박진환에게
붙잡혔다. 박진환은 칼을 경관의 목에 대었다.
[박진환! 경관을 풀어줘라! 죄만 무거워질 뿐이다.]
[추 경감님!]
박진환은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당신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요. 내가 이리 올 줄 알고
모든 경계를 풀었어요, 그렇죠? 그렇지만 않았어도 내
가 연구실에 들어오지 않았을지 몰랐는데. 흐흐, 내
스스로 테이프의 소재도 밝혀주고 원본 컴퓨터 파일도
삭제했으니 그야말로 가만히 앉아서 꿩 먹고 알 먹고
했군요.]
추 경감의 쭈그러진 얼굴을 박진환이 뚫어지게 바라보
았다.
[그렇다네. 하지만 자네도 대단해. 내 경찰 생활 중
내 눈앞에서 그렇게 달아난 사람은 자네가 처음인 것
같아.]
[피장파장이다. 이건가요? 하지만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어요.]
[승부는 이미 났네. 자네는 무의미한 시간을 연장시키
고 있을 뿐이야.]
[무의미한 시간이라고! 나한테는 내 생명을 연장시키
는 거고, 사회는 건강함을 유지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는 거야!]
박진환은 창 쪽으로 뒷걸음을 쳤다.
[소용없는 일이야. 이미 창 아래에 대부대가 자네를
기다리고 있다네. 그들은 모두 일급 스나이퍼들이야.]
박진환은 그 말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이제 이틀 후면 대재앙이 닥칠 텐데 뭘. 내가 설령
이곳에서 죽어도 난 억울할 건 없어.]
[자네 계획은 탄로났어.]
추 경감의 말에 박진환은 움찔했으나 곧 웃음을 터뜨
렸다.
[그런 식으로 내 의도를 읽어내려고? 정말 고단수구
만!]
[자네가 그걸 가지고 승부가 아직 나지 않았다고 한다
면 그건 오산이야. 자네가 민방위 본부에 설치해놓은
장치는 정말 대단했어. 민방위 훈련 경보가 나가는 도
중에 개들을 미치게 하는 전파를 자동 방출하도록 교
묘한 장치를 숨겨놓았더군. 하지만 그 장치는 해체되
었어. 해체 도중에 성급한 한 친구가 자네의 부비트랩
에 손을 약간 다쳤지.]
뒤편에서 강 형사가 붕대를 감은 손을 들어보였다.
[저런, 안됐군. 화상이 심하지 않기를 바라네.]
박진환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심하게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하지는 않지만 자네가 숨겨둔 테이프는 홀랑 불타
버렸어.]
강 형사가 대거리를 해주었다.
[물론 그래야지. 그 비밀은 나만 알고 있어야 하거든.
]
박진환은 창 아래를 살펴보았다. 총을 겨누고 있는 일
개 소대 병력이 보였다.
[움직이고 살아 있는 표적은 쉽게 맞지 않아.]
그는 창턱에 섰다. 얼른 몸을 뒤집어 경관을 방패막이
삼았다.
[추 경감, 밖에 계신 분들을 물러서라고 전해주시지.
엉?]
그가 추 경감을 바라보느라 몸을 약간 비틀자 목을 겨
누고 있는 칼에 약간의 빈틈이 생겼다. 그 순간 경관
은 번개처럼 박진환의 팔을 잡아 비틀었다. 박진환은
팔에 힘을 주어 경관의 목을 찔렀다. 순간 안팎에서
총성이 울렸다. 박진환은 자기 몸에서 분수처럼 쏟아
지는 피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럴 리가 없
는데 하면서 그는 쓰러졌다.
[그래서 박진환의 연구물인 그 테이프는 아무것도 남
지 않았군요.]
안정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정아와 안수인은 결
혼을 했다. 박봉순과 민은수와 합동 결혼식을 올렸다.
헌법재판소에서 동성동본 금혼조항이 위헌이라는 판결
이 나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런
방법이 있었는데, 바보 같은 친구. 안수인은 그 보도
를 접하고 펑펑 울었다. 박진환은 화장을 해서 무덤조
차 없었다. 그의 뼈를 뿌린 금강에 가서 그는 울었다.
[그렇지요. 총탄이 진환이랑 테이프도 같이 꿰뚫었으
니까요. 마지막 남았던 테이프는 완전히 망가져버려
재생할 것도 없었어요.]
[하긴 그런 악마의 테이프는 없는 게 나아요. 과일이
나 깎아올께요.]
안정아가 일어나 나갔다. 안수인은 다정한 눈길로 그
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테이프를
하나 꺼내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책상서랍에 집어넣
었다.
[그때 내가 버린 건 정말 빈 담뱃갑이었지. 경찰이 아
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을 밖에.]
안수인은 속으로 킥킥 웃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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