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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숙녀

by Casey,Riley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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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숙녀
이상우

                    차  례
1. 이등 아내의 죽음
2. 사랑의 추억으로
3. 지난 날의 오후
4. 우리 시대의 마지막 배신녀
5. 세 남자
6. 순애보
7. 새로운 용의자
8. 알리바이 추적
9. 밀회 이전
10. 묶여있는 사슬
11. 또 하나의 살인
12. 우리 시대 마지막 숙녀



       1. 이등 아내의 죽음
  "현장에 갔다 올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리든지 설군
  하고 얘기나 하고 놀든지 맘대로 하구려."
  손현식은 시큰둥하게 내뱉듯이  말하고는 자동차를
  몰고 휑하니 가버렸다.
  사무실에는 전화받는 미스 배와 설성도, 그리고 손
  현식의 아내인 정윤경만 남게 되었다. 정윤경은 남편
  의 무뚝뚝한 태도에 조금은 화가  났다. 그러나 설성
  도 앞이라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남편
  의 제자인 설성도 앞에서 부부의 어긋난 모습을 보이
  기가 싫었던 것이다.
  "저 양반은 뭐가 그리 바쁜지  항상 저 모양이라니
  까. 집에까지 차좀 태워 달라고  모처럼 들렀는데 글
  쎄 자기 볼 일  바쁘다고 휑하니 가버리는  것 봐요.
  그래도 일 다음엔 나를 생각해 준다나요, 난 항상 이
  등이라니까."
  정윤경이 약간 미소를 머금어  보이면서 열심히 이
  야기했다.
  설성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했
  다. 원래 말수가 적고 하는  일이 묵직한데다 빈틈이
  없어 손현식이 퍽  아끼는 제자였다.  정윤경도 남편
  못지않게 설성도를 좋아했다. 나이는  자기보다 열두
  살이나 아래인 올해 스물여덟이지만 윤경은 설성도한
  테서 세월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갓 마흔에 접어든 자기 나이도 잊고 윤경은 설성도
  와 잘 어울렸다.
  "뭐하면 제 차로 모셔다 드릴 수도 있는데요."
  아무 말도 않고 빙그레 웃고만 있던 설성도가 입을
  열었다.
  "성도군도 바쁜 것  아뉴? 나같이 한가한  여자 차
  태워줄 시간 있수?"
  윤경은 너무 반가워 얼굴에  함박웃음을 담고도 말
  은 그렇게 했다.
  "가시죠, 차는  시원찮지만 운전  솜씨는 쓸  만하
  죠."
  설성도가 성큼 일어서서 사무실 문을 나섰다.
  "안녕히 가세요."
  미스 배가 기계적으로  인사를 했다.  그녀는 손톱
  소제를 하느라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윤경은 얼른 핸드백을 챙겨들고  설성도를 따라 나
  섰다.
  반소매의 녹색 원피스에 흰 벨트를 맨 모습이 40대
  로는 보이지 않았다. 동그스름한 어깨,  선이 잘록한
  허리를 그리며 내려오다가 히프에 와서는  크게 부풀
  어 절정을 이루었다.
  약간 가늘게 보이는  하얀 두 다리는  윤기가 흘렀
  다. 뒤에서 보면 20대 초반의 발랄한 처녀와 꼭 같았
  다.
  실제로 윤경의 얼굴도 이제 막 피어나는 성숙한 여
  인 같았다. 동그라한  턱이며 작은 입술,  곧은 콧날
  등이 그의 나이를 숨겨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아파트로 모실까요?"
  설성도가 곁에 앉은 윤경을 슬쩍 곁눈으로 보며 말
  했다.
  하얀 목덜미가 짙은 초록색 옷과 대조적이었다. 노
  란 선으로 깃을 단 가슴에 볼록하게 솟은 두 개의 유
  방이 설성도의 눈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올림픽 도로를 쭈욱."
  윤경은 즐거운 듯 입술을  쫑긋 내밀며 어리광부리
  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차는 곧 여의도를 벗어나 올림픽 도로로 들어섰다.
  손현식의 건축설계 사무실은 여의도에 있었다.
  올림픽 도로로 나서자 설성도는 액셀러레이터를 무
  섭게 밟았다. 금방 계기판의 침이 바르르 떨면서 120
  을 가리켰다.
  "미스터 설, 너무 밟는 것 아냐?"
  윤경이 놀란 듯 설성도의  허벅지를 덥석 잡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는 빙긋 웃기만 할 뿐  속력 늦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미스터 설, 이러다가 사고 내겠어."
  정윤경이 이번에는 그녀의 허벅지를 흔들면서 말했
  다.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차  사고로 죽었다면 사람들
  이 뭐라고 할까요?"
  설성도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끔찍한 소리도 하네.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여편
  네들한테 좋은 꺼리 하나 대주는 꼴 밖에 더 되겠어?
  연하인 남편제자와 드라이브하다 어쩌구  저쩌구, 그
  들은 평소에 어떤  사이구 어쩌구그런  지저분한
  얘기나 쏟아질 것 아녜요?"
  "하하하, 그게 왜 지저분한 얘깁니까? 얼마든지 아
  름답고 애틋하게 봐 줄 수도 있는 일 아네요?"
  "하긴 욕들을 하면서도 은근히 그런 관계를 부러워
  하는 것이 여자의 심리인지도 모르지."
  "사모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
  정윤경이 이번엔 설성도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이구 아야!"
  정말 꼬집힌 것이 아팠던지  차가 휘청하며 중앙선
  을 넘어설 뻔했다.
  정윤경은 누구와든 스스럼없이 잘 친했다. 특히 남
  자들한테는 인기가 있었다. 남편 친구들과도 잘 어울
  렸고 남자들의 진한 농담도 잘 받아 주었다.
  설성도는 대학 다닐 때부터  윤경의 집을 드나들어
  가깝게 지냈다. 남편  손현식이 건축  사무실을 내기
  전에는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가르쳤었다.
  "어때 ? 우리 아파트에 들어가 커피 한 잔 하고 가
  지 않겠어요?"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자 윤경은  차에서 먼저 내
  리면서 말했다.
  "차는 여기 그냥 세워둬도 괜찮걸랑요."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정윤경을  따라 그녀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설성도를 보자 윤경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누가 뭐 잡아먹기라도 한대요?  왜 그렇게 꾸물거
  려."
  윤경이 팔을 너무 세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신발을
  막 벗으려던 설성도는 그만 중심을 잃고 앞으로 기울
  어지면서 공교릅게도 윤경의 가슴에 머리를  박고 말
  았다.
  "아이, 한잔 한 것도 아닌데."
  윤경은 넘어지려는 그의 어깨를  싸안으며 말했다.
  얼떨결에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자세가 되어 버렸다.
  설성도는 두 손으로 윤경의 허리를 끌어안고 현관 바
  닥에 서 있는 모습이 되었고 거실 위에 서 있는 윤경
  은 그의 머리를 젖가슴께에 묻으며 어깨를 싸안고 있
  는 모습이 되었다.
  "그냥 올라와요."
  윤경이 그를 안아  올리다시피 하며  말했다. 그는
  윤경을 껴안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거실에  올라섰
  다.
  라일락 같은 향수 냄새와 함께 달콤한 여인의 냄새
  가 코를 자극했다. 가늘고 나긋한  여인의 허리 감촉
  이 팔에 와 닿았다. 생긋 웃는 윤경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설성도는 날쌔게 윤경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개
  는 상상을 했다. 뜻밖의 공격을  당한 윤경이 피하기
  는커녕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와 설성도의 목을 끌
  어안고 키스를 퍼붓는 상상을했다.
  설성도는 목을 휘두르며 불결한 생각을 털어냈다.
  한참만에 설성도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하영의 모
  습이 눈앞에 선명히  나타났다. 오하영의  화난 듯한
  얼굴이 뇌리를 스쳐간 것이다.
  "저어."
  설성도는 공연한 상상이 들키기나 한 듯 얼굴이 홍
  당무가 되어 정윤경의 손을 놓았다.
  "이쪽으로 올라와요."
  윤경은 나긋한 얼굴로 그에게  미소를 던지며 소파
  를 권했다.
  "예, 저."
  설성도는 여전히 어색한 모습으로 소파에 주저앉았
  다.
  맞은편 열린 도어 너머로 안방이 들여다보였다. 침
  대 위에 윤경의 것임이 틀림없는 핑크빛 잠옷이 아무
  렇게나 걸쳐져 있었다.
  그는 널찍한 더블 침대와 여자의 잠옷을 보는 순간
  다시 엉뚱한 상념이 떠올랐다.
  그는 문득 윤경을 껴안고 그 침대  위에 있는 남자
  가 스승인 손현식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부도덕한 생각은 잠시 주춤거렸다.
  "저어."
  그는 자신이 윤경의 가슴을  누르고 있다는 상상을
  주저 속에도 더욱  발전시켰다.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을 때 윤경이 그의 입을  자기 입술로 막으
  며 적극적인 자세가 되어오는 것을 상상했다.
  그의 상상의 날개는 더욱  대담해지고 더욱 부도덕
  해졌다.
  촉촉한 그녀의  입술은 그를  침묵시키기에 충분했
  다. 설성도는 라일락꽃 향기를 맡으며 그의 뇌리에서
  하영의 영상을 쫓아 버렸다.
  설성도는 차츰 대담해졌다. 한 손으로 그녀의 젖가
  슴을 움켜쥐었다. 부드럽고 거대한 어머니 품을 느끼
  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일 뿐 곧 부드러운 유방의 촉감
  은 그의 모든 욕정의 줄을 잡아당겼다.
  가슴 깊숙이에서 시작된 그의  욕정은 사방으로 퍼
  져나가 발끝까지 달아오르게 했다.  호홉이 가빠지고
  쿵쿵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윤경의 보드라운 입술을 빨면서  옷 위에서 맴돌던
  그의 손이 옷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심플한 재단으로 만든 원피스에는  그의 손이
  들어갈 만한 틈이 없었다.
  그는 손을 그녀의 등뒤로 돌려 단추를 풀기 시작했
  다. 하지만 한 손으로 등뒤에 있는 여자의 단추를 풀
  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할께요."
  답답해서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윤경이 벌떡 일
  어나 앉으며 허리띠부터 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리고 두 손을 뒤로 돌려 능숙한  솜씨로 원피스의 단
  추를 풀어내리기 시작했다.
  설성도는 그 동안에도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목덜
  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아이 잠간만."
  윤경은 간지러운 듯 목을  비틀면서 원피스를 벗어
  던졌다.
  하얀 슬립 모습이  나타났다. 윤경은  그 슬립마저
  벗어버리고는 창문 커튼을 닫았다. 갈색의 두꺼운 커
  튼이 닫히자 이번엔 스텐드의 백열등을 켰다.
  간접 조명이 방안을 채우자 조금 전과는 너무 다른
  아늑한 방안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역광을 받은 윤경
  의 몸매가 검은 실루엣 판화처럼 선명해졌다. 설성도
  는 황급히 윗저고리부터 벗기 시작했다.
  그의 상상은 멈추지를 않았다.
  마침내 윤경을 에덴 동산의
  원시적인 이브로 만들었다. 그가 모든 준비를 끝내
  고 상상의 절정을 향해 막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딩동 !
  공교롭게도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설성도에
  게는 그를 엉뚱한 상념에서 불러내는  굉음처럼 들렸
  다.
  딩동 !
  다시 한번 초인종이 울렸다. 그가  눈을 번쩍 뜨자
  정윤경이 부엌에서 찻잔 두 개를 쟁반에 받쳐들고 나
  왔다. 설성도는 그녀의 얼굴을 죄지은 사람처럼 바로
  보지 못했다.
  "누가 왔나봐요."
  그녀가 찻잔을 탁자에 놓으며 혼잣말처럼 했다.
  "아무도 올 사람이 없는데."
  딩동 !'
  이번에는 초인종이 신경질을 냈다.
  "제가 가서 열어 줄까요?"
  설성도가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구부
  리고 있던 윤경의 얼굴을 머리로 받을 뻔했다.
  "죄, 죄송합니다."
  설성도가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다시 윤경의 얼굴
  을 받을 뻔했다.
  "괜찮아요. 그냥  앉아 있어요.  내가 나가  볼게
  ."
  그녀가 천천히 돌아서서 현관으로  내려섰다. 거실
  에서 현관으로 내려서는 동작은 약간 살이 찐 그녀의
  히프를 율동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잘록한 허리와 가느다란  다리가 그녀를 더
  욱 여성스럽게 했다.
  설성도는 그녀의  뒷모습을 훔쳐보는  자기 시선이
  민망해 딴곳을 쳐다보면서 크게 말했다.
  "혹시 선생님이 오신 것 아닐까요?"
  그는 제 말에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윤경이 현관
  에 내려선 채로 그를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가만히 계세요. 그이가 오시려면  아직 멀었어요.
  누가 왔는지 내가 복도에 나가 보고 오겠어요. 차 식
  기 전에 어서 드세요."
  윤경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았기 때문에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설성도는 차 마실 생각은 않고 벌떡 일어서서 아까
  부터 눈여겨보던 침실로 들어가 보았다. 공연히 죄짓
  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콩콩 뛰었다.
  방에서는 여인 특유의 체취가 향수와 섞여 풍겼다.
  가지런히 정돈된 화장대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두꺼운 커튼을 열어제쳤다.
  뉘엿한 석양이 갑자기 방안을 밝게 비추었다. 화장
  대의 정결한 모습과는 달리 침대 위에는 그녀의 잠옷
  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그는  한 주부의 부끄
  러운 모습이 햇빛에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
  것을 주워서 한쪽으로 치웠다.
  그는 침대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촉감이 자기 집의
  낡은 싱글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
  다. 라이터불을 붙이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밖
  에 나간 윤경은 무슨 일인지 한참  동안 들어오지 않
  았다. 그는 담배를 태우면서 마음의 여유를 조금이나
  마 되찾았다. 침실 벽을 휘둘러보았다.
  베이지색의 은은한  벽지가 아늑하고  따뜻한 감을
  주었다.
  레이스 장식이 잘된 헝겊으로  싸인 작은 전화기가
  침대 머리맡에 동그마니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정윤경과 손현식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제주도의 노란 유채밭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포옹
  을 하면서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설성도는 신
  혼 여행 때 찍은 사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성도는 그 사진을 보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가 미친 놈이지!"
  그는 조금 전의 상상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눈
  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자 나긋나긋하고  탐스러운 윤경의
  벗은 몸이 눈앞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나타
  났다.
  향긋한 욕정이 고개를 들려고 하자
  "내가 미친 놈이야, 정말 !"
  설성도는 다시 고개를 저어  윤경의 모습을 털어내
  려고 했다.
  그때였다. 윤경이 현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 그
  는 재빨리 거실로 나갔다.
  "아니, 차 다 식었잖아 ! "
  윤경이 거실로 올라와 소파에  마주 앉으며 아쉬운
  듯이 말했다.
  "누구였어요?"
  "응, 친구야. 친구라기보다 친구  남편이라고 해야
  겠지. 내가 이  모습을 해가지고  나갔더니 어떻게나
  요모조모로 눈여겨보는지 부끄러워 혼났어요."
  "그런데 친구분 남편을 들어오시라고도  하지 않고
  그냥 보내셨어요?'
  "미스터 설도 참 ! 이 모양을 그 사람한테 보여 주
  란 말이야?"
  윤경이 곱게 눈을 흘겨 보였다.
  "참, 그렇기도 하군요. 그런데 친구의 남편이 대낮
  에 왜 아내의 친구를 찾아왔단 말입니까?"
  "응, 전화를 해도 받지 않기에  왔다는 거야. 우리
  가 집에 들어오기 전에 전화를  었던가봐요. 친구인
  병숙이가 없어졌대요. 어제 나가서 아직 안 들어왔다
  고 하면서."
  "사랑 싸움이라도  한 모양이군요.  처가에나 가서
  찾으실 일이지 ."
  성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아닌가봐. 저녁밥 짓다가 전화받고 나갔다는
  데 영 돌아오지를 않는다는 거야."
  "예, 그래요."
  설성도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남의 일이고 우리 얘기나 좀 해요."
  윤경이 생긋 웃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성도씨 애인  없어요? 그만한  조건이면 미인들이
  줄을 설텐데."
  윤경이 찻잔으로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물에 젖은
  그녀의 입술이 더욱  육감적이라고 설성도는  생각했
  다.
  "노코멘트."
  설성도는 하영의  얼굴을 머리에  떠올리며 대답했
  다.
  "사모님만한 여자가  있다면  벌써 결혼했을  겁니
  다."
  "나? 호호호."
  윤경은 자기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
  다. 몹시 흡족한 것 같았다.
  "아이, 말솜씨도 보통이 아니야. 이러다가 나 미스
  터 설한테 반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
  성도씨에서 미스터 설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녀도
  설성도를 남편의 제자가  아닌, 한  남성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미인이신데다가 지성적이시고."
  설성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것이 인사치레의 말
  이 아닌 진심이었다. 그러는 정윤경을  볼 때마다 그
  는 '저만한 여자라면.'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더 있다가는."
  차를 마시고 난 설성도가 천천히 일어섰다.
  "더 있다가는 어떻게 되는데."
  윤경이 따라 일어섰다.
  "뜨거워지면 큰일 나니까안녕히 계십시오."
  설성도가 갑자기 몸을 빨리 움직여 현관을 나섰다.
  그는 앨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계단으로 뛰어내
  려가 우악스럽게 자동차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그
  곳을 빠져나왔다.
  강변 도로로 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가슴 한구석을
  씻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돌아가면서도 마음에 찜
  찜한 기분이 자꾸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은사의
  아내인 정윤경과의 불결한  상상 때문에  자책감으로
  고민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무르익은 40대 여
  인의 살결이 자꾸만 유혹하는 바람에 몇 번씩이나 고
  개를 가로 저어야만 했다. 애인인 오하영에게서 느낄
  수 없는 완숙한 멋이 정윤경에게 있었다. 오하영에게
  이제 막 익은 풋사과의 싱그러운  멋이 있다면, 정윤
  경에게는 잘 익은 멜론 멋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윤경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오하영을 자주 만났다.
  발랄하고 영리한 오하영은 상류  집안 출신답게 구
  김살이 없었다.
  하영의 아버지는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어느 국
  영회사의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있다. 어릴 적부터 미
  국으로 캐나다로 다니면서 상류 사회의  매너를 익혔
  기 때문에 사교술이 좋고 순박한 처녀였다.
  대학교 4학년이지만, 외국으로 아버지를 따라 돌아
  다니며 딴 곳에 대학을 다닌 일이  있기 때문에 동급
  생들보다 나이는 조금 많았다.
  설성도와 오하영의  사귐은 그녀의  부모들이 이미
  승인한 일이었다. 그리고 시골에 있는 설성도의 부모
  들도 알고 있었다.
  오하영이 학교만 졸업을 하면 곧 결혼식을 올릴 준
  비들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주례를 서 주셔야지요."
  설성도는 손현식 앞에서 오하영의 이야기가 나오면
  늘 이렇게 말했었다.
  주말이면 오하영은 설성도의 자취방에 와서 빨래도
  해 주고 밑반찬 거리도 만들어 주고  가는 일이 많았
  다.
  설성도는 다시 손현식 교수의  건축 사무실에 들를
  까 말까하다가 그냥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면서도 정윤경의 매혹적인 몸매가 뇌리에
  서 떠나지 않아 괴로움을 당했다.
  오하영과는 거의 반년쯤 전부터  서로의 육체를 알
  고 지냈다.
  서구 사회의 퐁물을 어릴 때부터 보아온 하영은 설
  성도와 함께 잠자리를 갖는 것에 대해 주저나 거부감
  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하영의  허세에 불과했
  다. 그녀는 실제로는 처녀였다. 다만 유학 시절의 분
  위기와 심지어는 한국인 동료까지도 휩싸여  있는 프
  리 섹스의 당연시되는 풍조에 자신도 으레 그래야 하
  는 것 같은 기분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그
  녀는 스스로는 담대하였지만 이미 쓴맛 단맛 다 겪은
  성도에게 있어서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어린 여자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 이유가 하마터면 사제지간에 넘
  을 수 없는 벽을 허물려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뻔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성도는 자신이 벌써 하영에게  싫증이라도 내고 있
  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도 하기 전
  에 권태감이라니.
  성도는 자신이 한심하여 문득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파트의 좁은 마당에 차를 세우고 열두 평짜리 아
  파트로 뛰어 올라갔을 때였다.
  "자기, 이제 오는 거야? 나, 오늘  맛있는 것 만들
  어놓고 갈테야. 사과 파이라는 것 있지 ?"
  뜻밖에도 오하영이  아파트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
  말고 설성도를 맞이했다.
  그녀는 긴 머리를 뒤로 아무렇게나 모아 끈으로 거
  칠게 질끈 묶고 있었다.  소매가 없고 목이  푹 파인
  검정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빨간  당초문 같은 무
  늬가 배와 허리께 수놓인 까만 원피스는 더없이 화사
  하고 섹시하게 보였다. 길쭉한 목과 하얀  두 팔, 짧
  은 원피스 밑으로 쭉 뻗은 연약한  다리가 특별한 그
  원피스와 잘 어울렸다. 정윤경의 몸매를 그리며 약간
  의 열기에 젖어 있던 설성도의  가슴에, 하영의 모습
  은 불을 지르고 말았다.
  설성도는 현관문을 닫으며 손을 뒤로 돌려 문을 잠
  갔다.
  그러는 동안 눈은  하영의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서 생긋 웃고 있는  하영의 앞에 다
  가섰다.
  하영은 설성도의  표정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설성도는 마치 겁에 질려  꼼짝도 못하는 개구리를
  뱀이 덥석 삼키듯,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는 목
  에 매달리는 그녀를 안고 침실로 들어가서 침대에 눕
  혔다.
  "배고프지 않아요? 천천히 해도  시간은 충분히 있
  어요."
  하영은 뜨겁고 거친 설성도의  숨결을 귓전으로 느
  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는 자기의 온 몸을 그에게 맡긴  채 가만히 누
  워 있기만 했다.  모든 일이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처리하기를 좋아하는 하영이지만 설성도 앞에서는 얌
  전하고 부끄러운 처녀로 변하고는 했었다.
  그녀는 얼핏 보기에 순박하고  구김살 없는 여자로
  보이지만 의외로 집념이 강한 일면도 있었다. 아버지
  를 따라 고등학교도 세 나라나 떠돌아 다녔지만 성적
  은 늘 우수했다. 미국에서 일류 대학을 마친 뒤 전과
  를 해서 다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영
  문학을 공부했지만 서울서는 물리학과를 다니고 있고
  벌써 졸업반이었다.
  설성도는 가만히 누워 있는 하영의 옷을 급히 벗기
  기 시작했다.
  "아이, 아직 해도 안 떨어진 대낮이란 말이에요."
  하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  그렇게 말했
  다. 그러나 설성도의 손길을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몸
  짓은 어디서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영의 겉옷이 금
  방 벗겨지고 굴곡이 선명한 육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설성도는 하영을 완전히 알몸으로 만든  뒤 일어서서
  천천히 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작은 창으로 들어
  오는 뉘엿한 빛이 그녀의 곡선을 더욱 선명하고 매력
  적으로 만들었다. 설성도는 천천히 엎드려 하영의 어
  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하영아 ! 내가 정말 좋으니 ?"
  그러나 하영은 아무  말도 않고 성도의  입을 자기
  입으로 막아 버렸다.
  뜨거운 숨결이 좁은 아파트 방을 가득 채웠다.
  눈을 떠 보니 포만스런 아침이었다.
       2. 사랑의 추억으로
  '이런, 늦었잖아.'
  시계를 확인한 설성도가 당황해서  말했다. 하영은
  언제 나갔는지 옆에 없었다.
  '이런, 시계나 맞춰 놓고 가지.'
  설성도는 투덜거리며 옷을 꿰입었다.  급히 입느라
  와이셔츠의 단추를 잘못 끼우고는 다시 풀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설성도는 짜증스럽게 수화기를 들었다.
  "설 선생님이세요? 얘기 들었어요?  사모님이 돌아
  가셨어요."
  전화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는 손현식 교수 건축사무
  소의 미스 배였다.
  2 사랑의 추억으로
  현장은 한 사람의 죽음을  알리기에는 너무나 조용
  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보라색 외벽이 산뜻
  하게 보이는 아파트의 5층 503호실. 4층이 없는 아파
  트이니까 말하자면 이 곳이 4층인 셈이다.
  항상 그렇듯이 현장에 늦게  도착한 추경감은 강형
  사로부터 상황 보고를 받았다.
  추경감은 거실 가운데  가만히 서서  듣기만 했다.
  강형사는 추경감 주위를 쉬지 않고  돌면서 담배연기
  와 함께 말을 토해냈다. 얼른  보면 강형사가 추경감
  을 부동자세로  세워 놓고 야단치고 있는  장면과 흠
  사했다.
  "그러니까 최초의 발견자는  남편인 손현식입니다.
  손현식씨는 나이 43세. 미진건축설계  대표이며 한강
  대학 건축과에 출강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대학에만
  있었는데 2년 전부터 건축설계 사무소를  차리고, 대
  학은 일주일에 한두 시간 강의만 나갑니다."
  "그건 자네 수첩에다 적어  놓고, 손현식씨가 부인
  시체를 발견한 경위부터 다시 설명해  봐. 자네,형사
  생활 몇 년째인데 아직 그 모양이야? 뭐가 중요한 건
  지도 모르고 다니나?쯧쯧! "
  추경감은 몹시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담배
  를 꺼내 물었다. 약간 벗어진 이마와 잔주롬투성이인
  얼굴이 그의 관록을 말해 주는 듯하지만, 동그스럼한
  뺨은 아직도 동안을 연상케 했다.
  작달박한 키며,  지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얼굴이,
  마음씨 좋은 복덕방 노인쯤으로 오해하기  꼭 알맞았
  다.
  추경감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고물 지포 라이터
  를 철거덕 거렸지만, 좀체 불이 켜지지 않았다.
  "반장님, 그거 제발  좀 바꾸십시오.  요즘 휘발유
  넣어서 쓰는 라이터 갖고 다니는  사람 보셨어요? 그
  거 단기 몇 년때 겁니까?"
  강형사가 조금 전에 당한  복수라도 하듯이 핀잔을
  주며 가스라이터를 켜댔다.
  그러나 추경감은  강형사가 켜대는  라이터불을 훅
  불어서 꺼버리고, 입에 물었던 담배를 다시 담뱃갑에
  집어넣었다.
  손현식이 일을 끝내고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아
  침 9시쯤이었다고 한다.
  초여름인데도 벌써 후끈한 열기가 물씬거려 대낮과
  다를 바가 없는 시간이었다.
  "이 여편네가 또 어딜 갔군! "
  현관 부저를 두어 번 눌렀으나 응답이 없자 손현식
  은 현관키를 꺼냈다.
  이 아파트의 열쇠 장치는 모두 카드식으로 되어 있
  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도둑이라도 이 전자식  카드 키
  앞에는 아무도 꼼짝 못한다고 관리실에서  늘 자랑해
  왔다.
  카드 키를 꽂아 현관 문을 연 뒤 거실로 들어선 손
  현식은 이상하게 섬뜩해지는 공기를 느꼈다고 한다.
  거실은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고 방문도 닫혀 있
  었다.
  손현식은 부엌을 들여다보았으나 아무 이상도 발견
  할 수 없었다.
  그가 안방문을 열었을 때  뜻밖에도 아내 정윤경이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늦잠을 자면서 문을 열어 주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손현식은 화가 나서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이봐요"
  그 순간 아내의 얼굴에서 손현식은 죽음 같은 섬뜩
  함을 읽을 수 있었다.
  "여보 !"
  손현식이 윤경의 어깨를 흔들었으나 그녀는 고개만
  아래로 떨어뜨릴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보, 윤경아 ! "
  손현식이 덮고 있는 얇은  이불을 걷고 흔들었으나
  그녀는 이미 싸늘한 시체였다.
  "아니, 이럴 수가."
  손현식은 아내가 죽었다고 느끼는  순간 눈앞이 캄
  캄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사람이 죽었어요, 사람."
  그는 경비실로 통하는 인터폰을 들고 소리쳤다.
  "여보세요, 누구  없어요? 사람이  죽었어요, 사람
  이."
  그러나 인터폰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손현식은 5층에서 경비실로 뛰어 내려갔다. 엘리베
  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는 경비실 근처에서 같은 동에 사는  주부 두 사
  람을 만나자 고함을 질렀다.
  "아주머니, 저희 집 사람이 죽었어요!"
  미친 듯이 소리를 치자 마당에 있던 경비원 공명진
  이 뛰어왔다.
  손현식과 공명진, 그리고 2층에 사는 주부 준이 엄
  마와 502호실 주부 백상혜 등  네 사람이 엘리베이터
  를 타고 올라가 손현식의 아파트로  허둥지둥 달려갔
  다.
  현관문은 그대로 열린 채였다.
  네 사람이 집안에 들어와  정윤경의 죽음을 확인했
  다.
  "그래서 경찰에 연락한 사람은 누구야?"
  추경감은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나서 강형사에게
  물었다.
  "그건 경비원인 공명진씨입니다. 아, 마침 저기 있
  군요."
  겁에 질린 듯  현관에 서서 신발장을  붙들고 있는
  사람을 강형사가 가리켰다.
  그는 갈색 제복에 모자는 쓰지 않고 붉은 머리띠를
  하고 있있다. 가슴에는 인권쟁취라고 쓴 리본을 달고
  있었다.
  "아, 저것 말입니까? 지금 아파트 경비원 노조에서
  쟁의중입니다. 봉급 인상과 근로 조건  개선 등을 내
  세우고 파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손현식이 집에서
  경비실 인터폰으로 사람을  불렀으나 응답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강형사가 의아해 하는 추경감을 보고 설명했다.
  "그러면 여기 있는 모든 경비원들이 파업중이란 말
  인가?"
  "그렇습니다."
  "누가 이 동에 드나들었는지 전혀  알 수도 없겠구
  먼."
  "아마 그럴 겁니다."
  "그래, 사인은 무엇으로 추측되나?"
  "약물 중독으로 보입니다. 자세한  것은 부검이 끝
  나야 알겠지만, 현장 검시의의 말로는 피부의 시반이
  약물 중독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약물은 발견했나?"
  강형사가 두리번거리다가 감식반 최순경을 보고 물
  었다.
  "그거 경감님께 보여드려."
  최순경이 차반에 담긴 컵을  손수건으로 감싸 쥐고
  보여주었다.
  "이 컵에 먹다가 남은 사이다가  있는데 아마도 독
  약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최순경이 공손하게 말했다.
  "그것은 어디에 있었나?"
  "침실 방바닥에 있었습니다."
  "다른 흔적은 아직 못 찾았나?"
  "지금 조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최순경은 그 컵을 박스 속에 집어넣으며 걸어 나갔
  다.
  "결국 자살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강형사가 자신 있게 말했다.
  "어째서?"
  추경감이 퉁명스러워졌다.
  "첫째, 현관문이 잠겨 있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정윤경이 단정하게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점. 셋째는, 그 방에서 자살한 독약이  든 컵이 발견
  된 점입니다."
  "현관문이 잠겨 있있다는 것이 어쨌다는 거야?"
  "혼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  아파트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카드식 열쇠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밖에서 현관문을 닫았을  경우는 잠겨지지가  않습니
  다. 안에서 손잡이에 있는 '로크'를 눌러야 잠겨집니
  다. 만약 범인이 정윤경을 죽인 뒤 도망갔다면 이 현
  관문을 잠글 수가 없었을 겁니다.
  밖에서 잠글 때는 카드 키가 있어야만 됩니다."
  "범인이 카드 키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추경감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키는 두 개뿐입니다."
  그때 넋을 잃고  소파에 앉아 있던  손현식이 말했
  다.
  "카드 키는 저와 제 아내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절
  대로 같은 걸 만들 수도 없습니다."
  "부인이 쓰는 키는 어디 있나요?"
  추경감이 물었다.
  "아내는 늘 여기에 키를 넣어 두지요."
  손현식이 장식대에 놓인 도자기 단지 속에 손을 넣
  었다.
  장미를 그린 조선백자는 정숙한  한국 여인의 목처
  럼 단아하게 보였다.
  "이것이지요."
  손현식이 하얀 카드 키를 끄집어냈다.
  "잠깐, 지문 감정을 해야 합니다."
  강형사가 그 키를 받았다.
  "그렇다면 누군가 정윤경씨를 독살하고  도망간 것
  은 아니란 뜻 아닌가?  만약 그런 범인이  있었다면
  제3의 카드 키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구."
  추경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초동수사를 빠긴 것 없이  잘해 둬. 나중에
  또 신문에 얻어맞지 말고 말야."
  추경감이 수사  요원들을 보고  주위를 환기시키고
  있을 때 설성도가 뛰어 들어왔다.
  "선생님,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사모님이 왜 자
  살을 한단 말입니까!"
  설성도는 손현식의 손을 잡고  눈물이 글썽해졌다.
  손현식은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비
  통한 얼굴을 제자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
  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강형사가 가만히 설성
  도의 어깨를 두드렸다.
  "실례입니다만, 돌아가신 분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요?"
  설성도는 강형사의 아래위를 한번 훑어보고는
  "우리 은사님의 사모님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뉘신
  지요?"
  "예, 저는 강형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경찰관이시군요. 전 설성도라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조금 전에 사모님이 자살했다
  고 말씀하셨는데,  자살했는지 피살되었는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그렇게  말했나요? 건축사무소의  미스 배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아니,  그럼 사모님이  누구한테
  살해당하셨나요?"
  설성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했다.
  "뭐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됐습니다."
  강형사는 설성도에게 더 말을 걸었다가는 거북해질
  것 같아 그냥 돌아서 버렸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부검이 끝난  뒤 하기로 하
  고저 대단히 죄송하지만, 손 교수님은 저희 사무
  실에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눌까요?"
  추경감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요?"
  손현식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금세 평온한 얼굴
  로 돌아오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살인  용의자의 한 사
  람이라 이거지요. 좋습니다. 가족이라고는 단 하나뿐
  인 처도 죽고 없는 판에 제가 거리낄 것이 뭐 있습니
  까? 연행도 좋고 임의 동행도 좋습니다. 가십시다."
  손현식이 뜻밖에 자학스럽게 나왔기 때문에 추경감
  은 민망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게, 그게 아닙니다. 교수님을 살인 용의자로 보
  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만 사모님께서  자살한 무슨
  이유라도 있었나 해서 그걸 좀  여쭤보려고한 것입니
  다. 여긴 사람도 많고 하니, 사적인 이야기는."
  "좋습니다. 제가 뭐 아내 속 썩이게 불륜이라도 저
  질러서 그런가 하는 모양인데, 좋습니다,  같이 가시
  죠."
  이렇게 해서 서로가 떨떠름한  이상한 분위기 속에
  경찰서로 함께 갔다.
  추경감은 죽은 정윤경과 손현식의  관계를 여러 각
  도에서 물어보았으나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결혼한 지 14년이나 되었지만 아직 아이가 없었다.
  부부관계는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최근에 와서
  정윤경이 자주 짜증을 냈었다고 한다.  부부 간의 권
  태기 같은 것이  와서 그럴 거라고  손현식은 설명했
  다.
  정윤경의 외출이 잦아지고 낭비벽이 드러나기 시작
  했다고도 했다.
  원래 부잣집 막내딸로 자랐기  때문에 좀 참을성이
  적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는 외고집이 있었는데, 그
  런 성격이 최근에 더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
  다.
  추경감이 손현식으로부터 별다른  단서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 때, 강형사가 놀란  토끼처럼 뛰어 들어
  왔다.
  그들은 손현식을 돌려 보낸 뒤 다시 사건을 검토해
  보았다.
  경감님, 정윤경의 부검 결과가 나왔는데 이상한 일
  이 있습니다. 정윤경의 몸에서 남자의 정액이 발견되
  었습니다. 그것은 죽기 서너 시간  전에 정사를 했다
  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정액은 O형으로 판명이 났
  습니다."
  부검에 따르면 정윤경은 전날 밤에 어느 남자와 정
  사를 가졌다는 결론이다.
  전날 정사를 나누고, 오전에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극히 극적인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 단서를 열심히 캔 강형사는 그의 소견을 추경감
  에게 털어놓았다.
  "정윤경은 죽기 전날 밤부터 남편 손현식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손현식은 시간에 대 주어야  할 설계 일
  이 있어서 설계 사무실에서 작업을 하니 밤을 새웠답
  니다. 그것은 확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확인이 되었나?"
  추경감은 강형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슨 연구 서
  적 같은 책을 읽으면서 질문을 했다.
  "사장님, 그거 무슨 책입니까"
  강형사는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되물었다. 남은 열
  심히 수사 보고를 하고 있는데 쓸데  없는 책이나 뒤
  적이면서 건성으로 듣는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거 ? 토정비결이야."
  "예."
  강형사는 어이가 없어 입만 벌리고 있었다.
  "얼마나 재미있다고그건 그렇고."
  "예, 그건 확인했습니다. 옆집에 있는 옥문 식당이
  라는 데서 설렁탕을 배달했다고 하니깐요. 그때가 새
  벽 1시께였답니다. 뿐 아니라 아침식사도 배달했다고
  하더군요. 옥문식당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손현식은
  파자마 바람으로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옥문 식당? 거 묘한 식당  이름이군. 자네 옥문이
  무슨 뜻인지 아나? 후후후."
  추경감이 여전히 자기의 보고를  건성으로 듣는 것
  같아 강형사는 더 보고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슬그
  머니 나가려고 등을 돌렸다.
  "어딜 가려는 거야?  하던 이야기나 끝내  놓고 나
  가지 그래."
  강형사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돌아서서 보고를 시작
  했다.
  "그러니까 손현식과 정윤경은 전날부터  피살될 때
  까지 동침한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정윤경이 정사를
  나눈 대상은 남편 아닌 다른 남성입니다."
  강형사는 힘이  빠지는 목소리로  마지못해 대답했
  다.
  "정사를 가긴 시간과 피살된 시간과 짧으년 5시간,
  길어야 10시간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그랬지?"
  "그렇습니다."
  강형사는 추경감이  자기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면 정사를 나눈 남자가 범인일  수도 있군 그
  래."
  "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농후하다고?"
  추경감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강형사는  지금까지
  정윤경은 자살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
  다.
  "부검 결과 의외의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게 뭐야?"
  "정윤경의 팬티입니다."
  "팬티 ?"
  추경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팬티가, 그게  글쎄 거꾸로  입혀져 있더라지
  뭡니까?"
  팬티를 거꾸로 입었다고?"
  "예, 이건 뭐 여러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범인이 정사를 나누고 살인을 저지른 뒤에 자살로 꾸
  며 놓으려고 다시 옷을 입혀 놓은 거지요. 그런데 그
  만 사소한 실수를  저질러 팬티를 거꾸로  입혀 놓은
  겁니다. 사실 저도 여자 팬티를  입히라고 한다면 어
  느쪽이 앞인지 모를 것 같기는  합니다만여자 것
  은 앞에 구멍이 없으니 말입니다."
  "하하, 그래 ? 그럼 범인은  자네처럼 여자 경험이
  적은 총각 정도겠구만."
  추경감도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러나 곧 다시
  딱딱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피살되었다는 것으로 보아야겠군."
  "그리고 정윤경의 주변에 대해 좀 자세하게 조사한
  것이 있습니다."
  강형사는 의자를 들고 와서  추경감 책상 가까이에
  앉으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윤경이란 여자는 알고 보면 외롭고 불쌍한 여자
  랍니다.
  아니, 그보다 순정에 울고 순정에 웃는."
  "그 유행가 가사  같은 센티멘탈리즘은  이제 버릴
  수 없나?
  자네가 문학 청년이란 건 내가  옛날부터 알아. 군
  소리 싹 빼고."
  강형사는 멋적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정윤경의 주변에는 이상할 정도로  가깝게 지내는
  남자가 몇 사람 있습니다. 남편의  학교 제자인 설성
  도, 그리고 한 아파트의 같은 층에  사는 구영민, 여
  고 동창생의 오빠인 저 유명한 고인국씨."
  "고인국? "
  추경감의 눈이 둥그레졌다. 고인국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유명한 야당 정치인이다.  요즘 파격적인 정
  계 개편안을 들고나와 정가를 뒤흔들어  놓은 장본인
  이다.
  "예, 고인국하고는 여러 번 은밀히 만난 증거도 있
  습니다.
  하여간 그 얘긴 조금  있다가 드리기로 하고정
  윤경이 왜 손현식과  결혼하게 되었는가부터  말씀을
  드리지요."
  추경감은 담배를 물고 지포 라이터를 철거덕거리기
  시작했다. 좀체 불이 켜지지 않았다.
  지금도 고운 피부와 뛰어난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정윤경.
  학교 시절에도 남학생들이 줄을 설 정도로 인기 있
  는 미팅 상대였다.
  여자 대학으로서는 일류라고 일컫는 백합대학 영문
  학과에 다니던 윤경이 손현식을 처음 만난 것은 학생
  서클 활동에서 였다.
  윤경은 사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어리광을 부리
  며 자란 6남매 중 막내딸이었다.
  윤경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까먹
  지 않고 사업을 일군 몇 안 되는  이 나라 사업가 중
  의 한 사람이었다.
  대체로 아버지의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으면, 그 아
  들은 이것 저것 안 되는 일에  손을 대다가 마침내는
  빈털터리로 나앉는 것이 공식처럼 되어 있는 우리 사
  회다.
  그런데 윤경의 아버지는 오히려  유산을 몇십 배로
  늘려 놓은 수완 좋은 사람이었다.
  윤경이 현식을 만날  무렵, 윤경의  집은 전성기에
  이를 즈음이었다.
  윤경의 두 언니는 모두 출가해서 미국에서 살고 있
  었고 오빠 두 사람도 장가를 들어  역시 미국서 공부
  를 하고 있있다.
  바로 위의 언니인 미경이만이 대학교 4학년이었다.
  그러나 미경이도 졸업만 하면 레지던트로  있는 의과
  대학생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부잣집 막내인 윤경은 부모와 언니, 오빠들의 귀여
  움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윤경이 대학교 2학년 때 학교  서클 멤버들이 크리
  스마스 파티를 근사하게 열었다.
  양지에 있는  윤경이네 별장에서  파티는 시작되었
  다. 그들은 여학생만 열두어 명  모이자니 멋없을 것
  같아 국립대학의 유사한 서클 멤버인  남학생들을 초
  청했다.
  초청객 중의 한 사람이 손현식이었다.
  수줍음을 잘 타고,  듬직한 체구보다는  겁이 많은
  손현식은 곧 정윤경과 짝이 되었다.
  구김살없이 활달한 정윤경과 성격이  전혀 맞지 않
  을 것 같았으나, 뜻밖에도 두 사람은 처음부터 잘 어
  울렸다.
  그들의 서클은 야외로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는 스
  케치 클럽이었다. 건축과 3학년 학생인  손현식은 자
  기의 전공과도 관계가 있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야
  외 스케치를 자주 다녔다.
  두 사람은 곧 친해져 윤경이의 차를  타고 서울 교
  외를 들락거렸다.
  당시만 해도 여대생이 자가용을  몰고 다닌다는 것
  은 굉장한 일이었고 대학가의 화제거리였다.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은 곧 양쪽 학교에 퍼져 나가,
  학생들의 입방아감이 되었다.
  그런 것은 아랑곳없이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의 싹
  이 트기 시작했고, 마침내 장래를  함께 하자는 약속
  까지 하게 되었다.
  그들이 처음 만나 크리스마스  시즌을 보낸 다음해
  음력 정초 어느 날 둘은 춘천  호반으로 겨울 스케치
  를 나갔다.
  그러나 호반의 겨울 바람이 너무 차서 도저히 작품
  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인근 식당에서 멧돼지 요
  리를 맛있게 먹고 오후 느지막해서  서울로 돌아오는
  귀가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들이 가평을 넘어서  청평으로 가는 고개
  에 이르렀을 때였다. 봄날 꽃가루  날리듯 엷던 눈발
  이 갑자기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10미터 앞이 보
  이지 않을 정도로 폭설이 퍼붓기 시작했다.
  "위험해서 도저히 안 되겠는걸."
  작은 입을 꼭 다믈고 핸들에 힘을  주며 눈길을 헤
  쳐 나가는 윤경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현식은 입술
  이 바싹바싹 말랐다.
  "조금만 더 가면 고개를 넘을 수 있어요."
  윤경의 다부진 얼굴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래도 위험하지 않아?"
  "겁나면 두 눈을 꼭 감고 있어요. 자, 나한테 기대
  고 있다가 눈 뜨라고 하면 뜨세요."
  윤경은 마치 누나가 칭얼대는  남동생 다루듯 현식
  을 대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하고 자동차는 눈밭에 미끄러지
  면서 길 옆의 언덕받이를 들이받고 말았다.
  윤경의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여기 좀 쉬었다가 가요."
  윤경이 기어를 뽑으며 말했다.
  "울고 싶자 뺨 때린다더니.  자동차가 알아서 쉬게
  하는데요. 호호호."
  윤경이 큰 소리로 웃으며 현식의 무릎을 제 무릎인
  양 쳤다.
  그러나 그것이  현식의 참담한  심경을 위로하려고
  일부러 하는 짓이란 것을 현식은 알고 있었다.
  날은 벌써 뉘엿해지고  옅은 어둠이 흰  눈밭 위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손현식은 이러다가 산길 가운데서 굶어죽거나 얼어
  죽지 않나 하는 생각이 덜컥 나  차 밖으로 튀어나왔
  다.
  사방을 둘러보며 큰  숨을 내쉬었다.  멀리 보이던
  산들이 어둠에 묻히기 시작했다.
  왼쪽 산기슭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분명히 인가가 있다는 신호였다.
  "이봐 윤경씨, 저기 집이 있어, 집이."
  현식은 차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오며 말했다. 목
  소리에 생기가 넘쳤다.
  "그래요?"
  윤경도 반가운 듯 현식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
  다.
  "우리 그럼 저 연기를 찾아가 볼까요?"
  윤경은 능숙한 솜씨로 언덕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자동차를 빼냈다.
  연기가 나는 곳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산간의 좁
  은 길로 들어서자, 얼마 안 가서 아담한 산장이 나타
  났다.
  두 사람은 생기 넘친 모습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
  리다가만 캔버스와 이젤을  각각 손에 든  채 산장의
  현관으로 들어섰다.
  "아이구, 이 눈 속에 큰 고생했습니다그려."
  산장 안에서 도토리묵을 먹고  있던 늙수그레한 사
  나이가 그들을 맞았다.
  "아저씨, 고마워요. 여기서 좀 쉬었다가  갈 수 있
  죠"
  윤경이가 어깨와 머리에 얹힌 눈을 털면서 말했다.
  "쉬었다가 가다니요? 이 눈구덩이  천지에 어딜 가
  신단 말씀입니까? 더구나 저렇게 작은 자동차로 가다
  간 큰일 나고 맙니다.  여기 주무실 방도  있으니 두
  분이 폭 쉬시고, 내일이건 모레건 눈이 딱 그치고 길
  이 좀 뚫리거든 가시도록 하시지요."
  그는 두 사람을 영락없이 부부로 보는 눈치였다.
  "자, 이 방으로 들어오십시오."
  산장은 통나무로 지어졌지만 실내는 꽤 아늑했다.
  그가 안내해 준 곳은  빼치카처럼 생긴 벽난로에서
  장작불이 타고 있는 따뜻한 방이었다. 전깃불이 없어
  석유 램프를 들고 들어와 불을 켜주었다.
  "고마워요."
  현식이 램프등을 받아 들면서  늙은이를 보고 인사
  말을 처음으로 건냈다.
  "저녁밥은 안 잡수셨을 텐데 뭣하면."
  "괜찮아요. 우린 점심을 늦게 먹었거든요."
  윤경이 좀 난처해  하는 주인의 입장을  가볍게 해
  주려는 듯 말을 가로 막았다.
  "뭣하면 도토리묵이라도 좀 드시겠어요?"
  "그거 좋지요."
  이번엔 현식이 말을 받았다.
  그들은 주인이 가져다 주는  도도리묵을 아주 맛있
  게 먹었다. 구수한 양념장이 눈  내리는 겨울방의 입
  맛을 더욱 돋구는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한 방에서 밤
  을 새우게 되었다.
  윤경이가 밖에 나가 차  트렁크에서 등산용 털담요
  를 가지고왔다.
  "이것 하나 뿐인데 손형이 덮고 자요. 난 여자니까
  피부에 지방질이 많아 추위 같은 건 모르거든요."
  윤경이 털담요를 방 가운데에 펴 주며 말했다.
  "이래봬도 나는 남자랍니다. 연약한 숙녀가 앉아서
  밤을 새우겠다는데 난 담요나 덮고 자란 말입니까?"
  손현식이 담요를 들고 와 앉아 있는 윤경의 어깨에
  덮어 주며 말했다. 현식은 담요를 어깨에 두른 뒤 뒤
  에서 가만히 윤경을  껴안았다. 두  손바닥에 윤경의
  젖가슴이 쉽게 잡혔다.
  그러자 윤경은  현식의 손을  의식하면서도 그것을
  뿌리치려고 하지 않았다.
  현식은 윤경의 유방을 가만히  쥐면서 그녀의 귀밑
  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뜨거운 숨결이 윤경의 목덜미
  에 뿜어졌다.
  "눈이 너무 온다고 생각 안해 ?"
  현식이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눈이 말이야, 눈이 너무 온단  말이야. 이렇게 눈
  이 많이 와서야."
  현식은 계속 눈을 핑계대면서 껴안은 양 팔의 힘을
  조여 왔다. 그의 큼직한 두 손이 윤경의 양쪽 유방을
  옷 위에서 감싸쥐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엷
  은 털셔츠를 뚫고 손바닥을 간지럽히듯 전해졌다.
  윤경은 두 손을  올려 현식의 양쪽  팔목을 가만히
  잡았다.
  결코 거부의 몸짓은 아니었다.
  윤경은 고개를 뒤로 젖혀  현식의 이마를 넘겨다보
  았다. 얼굴과 얼굴이 서로 거꾸로 밀착되었다.
  현식은 윤경의 귀밑,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
  다. 그 다음엔 그의 뜨거운 입술이 윤경의 입을 덮었
  다.
  윤경은 눈을 지그시  감고 현식의 팔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호흡을  끊은 채
  그렇게 있었다. 포옹하는 조각품처럼 꼼짝 않고 얼마
  를 있었을까?
  두 사람은 동시에 막힌 숨을 내뿜으며 입술을 떼었
  다.
  "이건 순전히 눈 때문이다. 눈이 너무 와서."
  현식은 계속 눈 핑계를 대면서 이번엔 윤경을 방바
  닥에 눕혔다.
  위에서 그녀의 가슴을 껴안은  채 격렬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윤경은 더욱 대담해져 현식의 목을 껴안는
  적극성을 보였다.
  "윤경아."
  "."
  "사랑해 !"
  현식의 젖은 듯한 속삭임을  들으며 윤경은 약간의
  경련을 일으켰다.
  현식은 이제 완전히 윤경을 점령한 상태가 되었다.
  그는 엷은 털셔츠를 들치고  윤경의 가슴에 오른손
  을 집어 넣으려고 애를 썼다.
  "잠깐만."
  딱 붙은 셔츠와 단단히 맨 브래지어, 꼭 끼는 내의
  등이 그의 손 앞에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다.
  윤경이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앉았다.
  "저기 불 좀."
  윤경이 램프를 가리켰다. 석유 램프는 시뻘건 불빛
  을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대며 춤을 추고 있었다.
  현식이 램프불을 불어서 꺼버렸다.
  캄캄한 밤은 눈이 조금  익숙해지자 창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밖이 흰 눈  천지이기 때문에 반사되
  는 빛이었는지 모른다.
  윤경은 가만히 자기의 쉐터를 벗어버렸다.
  현식은 윤경이 쉐터를 벗자마자  황급히 그녀를 다
  시 껴안고 방바닥에 넘어졌다.
  현식은 스커트며 내의를 우악스럽게 마구 벗겨내기
  시작했다. 윤경은 입을 꼭 다문 채 가만히 누워 있었
  다. 허물어져 가는 자기의 모습을 포기한 한 포기 식
  물 같았다.
  마침내 희뿌연 어둠 속에 뜨거운 윤경의 나신이 완
  전히 드러나고 말았다.
  어둠이 아니었다면 부끄러워 빨갛게 상기된 윤경의
  얼굴이나, 약간은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이 현식 앞
  에 선명이 드러났을 것이다.
  그녀는 현식 앞에 모든 것을 내놓으면서 미지의 세
  계가 두려워 약간 떨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하나가 되는 거야. 지금부터 모든 것
  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하나로 있는  거야. 윤경아,
  사랑해."
  윤경은 현식의 속삭임이 문법에  맞지 않는다는 엉
  뚱한 생각을 하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마음
  과 몸의 가장 깊숙한 중심에 와  닿는 강렬한 미지의
  무엇을 느끼면서 그는 파도에 휩쓸려 갔다.
  조그만 창밖에는 폭풍우 같은  진눈깨비가 밤새 쏟
  아지고 있었다.
  그들의 결합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혼에
  이르는 길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우선 윤경 자신이 주변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녀는 사립 명문 신라대학교  정치학과 학생인 고
  인국을 잊지 못했다.  친구의 오빠인  고인국은 고교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는 터였다. 두  사람 사이는 시
  간이 흐를수록 이성의 관계로 발전했다. 최근에는 고
  인국이 윤경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내는 일
  을 계속하고 있었다.
  성질이 남성적이고 활달한 그였지만 이성 문제만은
  의외로 수줍음을 잘 타서 윤경 앞에서 적극적인 헥동
  을 취하지는 않았다.
  윤경은 그와 오래 사귀는 동안 가족과 같은 친밀감
  을 느꼈다. 쉽사리 그를 배반하고  딴 남자한테로 훌
  쩍 떠나 버릴 수 있도록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다.
  한 남자에게는 마음을, 그리고 한 남자에게는 몸을
  준 그런 입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윤경이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도 문제가 되
  지만, 또 다른 난관이 나타났다.
  현식의 집에서 결혼을 반대한 것이다.
  오랫동안 말단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정년 퇴직한
  현식의 아버지는 장남인 현식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었다. 공부를 잘해 일류라는  국립대학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당시만 해도 한창 인기가 있던 건축과 학
  생이었다.
  현식의 부모는 현식이가 집안의  모든 소망을 한꺼
  번에 이루어 줄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생을  말단 공무윈으로  지내면서 받은
  갖가지 설움을 아들을 통해 보상받고자 했다.
  아버지는 며느리도 내노라 하는  집안의 딸을 원했
  다.
  그는 전에 공무원 시절에 모시고 있던 상사의 딸과
  약혼하기를 원했다.
  의과대학 본과에 다니는 그녀의  인물은 별로 볼품
  이 없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
  에 있었다.
  의사 며느리도 보고  권력 있는 사돈도  얻고 싶은
  것이 현식 아버지의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곤란한 문제는 어머니였다.
  현식이 윤경과 결혼해야 한다고 우겨대자 어머니가
  궁합이라는 것을 보고 와서는 펄쩍 뛰었다.
  두 사람이 서로 상극이라 절대로 결혼해서는 안 된
  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우겨서 결혼한다면 젊어서  사별을 해야 하
  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현식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아들의
  결혼읕 반대했다.
  그러한 여건 속에도 두  사람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만났다.
  윤경의 솔직한 심정은 처음에는 고인국에게 막연히
  쏠려 있던 마음을 수습할 수 없을  것 같았으나 현식
  과 만나는 동안 그 마음이 현식에게로  옮겨 가는 것
  을 느꼈다.
  한번 맺은 육체의 대화는 열어 놓은 대문처럼 쉬워
  졌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에게는 사랑의 싹이 무성한 나
  무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현식 부모와  집안의 반대는 더욱
  완강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윤경이 흥분하며 뛰어왔다.
  "현식형, 이것 좀 봐요.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야
  비할 수 있나요?"
  윤경이 내놓고 흥분한 것은  신라대학교 신문 마지
  막 페이지 한귀퉁이에 나 있는 학생 수필이었다.
  고인국이 쓴  수필이었는데, 정윤경을  사랑한다는
  말을 수 없이 되풀이해서 써 놓았었다.
  "온천하에 대고 사람을  이렇게 망신시킬  수 있어
  요? 난 창피해서 이제  학교도 못 나가게  됐단 말예
  요. 아이, 속상해."
  윤경은 신문을 발발이 찢어 내동댕이치면서 분해했
  다.
  "하하하, 재미있는데. 우리 윤경이  매스컴 탔
  어. 하하하."
  현식은 농으로 얼버무렸지만 속으로는 윤경이 못지
  않게 화가 났다. 이렇게 유치한  녀석은 주먹으로 다
  스려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3. 지난 날의 오후
  질투로 이글이글 타오르던 현식은 고인국이 다니는
  대학 입구 골목에서 며칠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형씨, 나 좀 봅시다. 댁이 고인국이란 학생이오?"
  형식이 어깨를 움츠려 올리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서툰 깡패 흉내를 내었다.
  "내가 고인국입니다만댁은 뉘신데."'
  고인국이 다소 기가 죽어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상대방이 워낙 도전적이라 주춤거리는 것 같았다.
  "고인국인지 곰국인지 모르지만, 너  나한테 혼 좀
  나야겠어. 야, 안경 벗어!"
  현식이 기합을 넣듯 큰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뭘 잘못."
  철썩.
  그때 현식의 주먹이 고인국의 뺨을 후려쳤다.
  느닷없이 기습을 당한 고인국이 그냥 있을 리 없었
  다.
  "이 자식이 정말 환장했구나."
  고인국의 발이 현식의 어깨까지 올라갔다.
  "이 천하에 비겁한 놈! 네놈이 무슨 법학인지 정치
  학인지를 한다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것을
  오늘 좀 보여 주마."
  현식은 이를 악물고 코뿔소처럼 덤벼들어 고인국을
  마구 쥐어박고 때리고 할퀴었다. 손발과 머리까지 동
  원되어 총공세를 폈다.
  현식의 저돌적인 전면전 공세를  고인국은 당할 수
  가 없었다. 체격이나 힘으로 치면  고인국이 필씬 윗
  수지만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비는 사람을 당할 수는
  없었다.
  고인국은 마침내 그 자리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고인국, 잘 들어라. 앞으로 한번만 더 윤경이에게
  추근대면 그때는 뼈가 성하지 못할 줄 알아 ! 사나이
  가 비겁하게 싫다는 여자를 왜 자꾸 괴롭히느냐 말이
  야. 그것도 가장 치사한 방법으로."
  배를 움켜쥐고 골목에 쓰러져  있던 고인국이 갑자
  기 벌떡 일어섰다.
  "네놈이 바로 손현식이라는 제비구나. 너야말로 미
  스 정한테서 손떼지 않으면 다리  몽댕이가 남아나지
  못할 줄 알아라."
  고인국이 현식의 멱살을 잡으며 악을 썼다.
  "이게 아직도 덜 맞았군!"
  손현식은 무릎으로 고인국의 아랫배를 거세게 공격
  했다.
  "윽!."
  고인국이 비명을 지르며 다시 쓰러졌다.
  "윤경은 내 약혼자라는 것을 명심해 ! "
  현식은 길바닥에 쓰러쳐 고통으로 일그러진 고인국
  에게 다짐하듯 이렇게 내뱉었다.
  그러나 현식의 이러한 만용이 일을 만들고 말았다.
  고인국은 전치 5주의 진단서를 끊어 현식을 고소했
  다. 그가 장파열로 입원까지 하는 사태가 되었다.
  현식은 마침내 묶여 들어가  폭력범으로 재판을 받
  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정윤경의 집은  더 완강하게 현식과의
  결합을 반대했다.
  손현식의 집에서도  윤경이 때문에  이런 불상사나
  생겼다고 그녀를 더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
  손현식이 몇 달만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을 땐 윤
  경을 만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윤경의 집에서 한번만 더  손현식을 만난다면 부모
  가 모두 자살해 버리고 말겠다는 최후의 선언까지 해
  놓은 터라 그녀는 몹시 고민하고 있었다.
  "현식씨, 우리 당분간 만나지  말고 냉각기를 가져
  요.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예요."
  어렵게 해서 현식과 윤경이 어느 카페에서 몇 달만
  에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윤경은 눈물을 글썽이며 당분간  헤어져 있자는 이
  야기를 했다.
  "윤경이가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아.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질  수 없
  어. 나도 부모님을 다시 설득시킬 터이니 한번 더 노
  력을 해봐."
  그러나 그녀는 절망적인 눈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
  다.
  "우리 내일 아침까지만 같이  있어. 그리고 당분간
  헤어져야 한단 말이야.  설득도 시간을  두고 해야지
  지금은 아주 좋지  않은 시기야. 우리  밖으로 나가.
  답답해서 더 있을 수 없어요."
  윤경은 정말로 답답한지 일어섰다.  그들은 남산에
  올라가 별을 바라보며 나란이 앉았다.
  "현식씨, 난 그 동안 곰곰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었어. 면회도 한번 밖에 못  가서 미안하게 생각
  하고 있어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결론을 얻있어요."
  "무슨 결론?"
  "나 진짜로 현식씨를 사랑하는 것 같아. 솔직히 말
  해 한계령 산장에서 그날 밤 장난친  것은 그냥 장난
  반 진담 반 그런 것이었어요. 그날 밤 분위기가 그냥
  그렇게 되었던 거예요. 날 욕해도 좋아요. 왜 현식씨
  의 품에 처음 안겼을 때는 뭐가 뭔지 몰랐어요. 솔직
  히 말해 호기심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예요. 현
  식씨와 꼭 결혼을 해야 한다든지, 현식씨를 사랑하고
  있다든지 하는 생각은 별로 없이요. 그냥."
  "."
  윤경은 한동안 아무  말도 않고 한참  동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여름밤의 별자리는  영롱한 초록빛
  을 띠고 반짝였다.
  "하지만."
  윤경은 슬그머니 현식에게 어깨를 기댔다.
  "하지만 지금은 현식씨 말고 딴  남자를 생각할 수
  없어요.
  우리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제할 수
  있어야해요. 무작정 부모님들 앞에  버티기만 해서는
  무슨 해결이 나지 않아요. 우리 여기서 별을 보며 밤
  을 밝혀요. 그리고 내일부터 당분간  서로 딴 사람이
  되는 거예요."
  윤경은 현식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끝을 흐렸
  다.
  현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윤경을  꼭 껴안고 등
  을 다독여 주었다. 윤경이의 어른스럽게 자제하는 태
  도가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이 벌어졌을 때
  어른들은 흔히 냉각기를 갖는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
  이 그런 경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들었다.
  그날 밤 이후 현식과 윤경은  정말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코 서로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현식은 부모들의 이야기를 일단 듣는 척했다.
  아버지의 옛날  상사였으며 지금은  정부 모부처의
  차관으로 있는 차민호의 딸 차정원과의  혼사를 부모
  들은 추진하고 있었다.
  차정원은 의과대학 본과 4학년 학생이었다. 현식이
  군대에 다녀와서 졸업반인 것을 감안하면 1년 후배인
  셈이었다.
  현식이네 식구들은 가끔 차관  집을 방문하고는 했
  다. 특히 신정.구정 때는 빠짐없이 아버지를 따라 세
  배를 갔었다.
  현식이가 어렸을 때는 큰집  나들이나 하는 것처럼
  즐거웠으나 차차 철이 나면서 세배 다니는 일이 좋게
  생각되지 않았다.
  마치 봉건 시대의 하인이 상전을 찾아가 문안을 드
  리는 듯한 아버지의  자세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
  다. 차민호 앞에서는  마치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듯한 아버지가 너무 비굴하게  보였다. 그뿐 아
  니라 거의 같은 또래인 차정원을 대하기도 점점 서먹
  서먹해졌다.
  이성으로 차정원을 느끼기보다는 상전의  딸, 귀족
  과 평민의 관계 같은 야릇한 감정이  자꾸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현식이가 그녀와의 결합에 강력한  반발을 보인 배
  경에는 윤경의 존재와 함께 이런 감정의 수렁이 있었
  던 것이다.
  손현식은 일단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는 척했다.
  "얘, 기술고시를 치는 것이  어떠냐고 차관님이 말
  씀하셨어.
  너는 공직 사회로 나가는 것이  좋을 거야. 차관님
  이 사위 뒤를 얼마나 잘 밀어 주겠어."
  아버지의 이 말에 현식은  역겨움까지 느껴야만 했
  다.
  "전 관리 같은 것은 싫어요. 전 외국에 가서 더 배
  운 뒤 대학에 남는 방향을 원해요."
  현식이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얘, 그까짓 고리타분한 훈장  같은 것은 집어치워
  라. 세상에 제일  푼수 없는 사람들이  훈장이다, 훈
  장."
  "그래도 저는 그 일을 하고 싶은데요."
  도저히 일치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현식은 잘
  알았다.
  아버지와 자신의  가치관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
  다.
  현식은 더 이상 부모들과 신경전을 할 필요가 없다
  고 생각했다. 4학년 때의 초여름 어느  날 현식은 마
  침내 결단을 내렸다. 집을 떠나  정윤경과 함께'사랑
  의 도피' 같은 것을 생각해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옷가지며 책  등 자기 물건
  들을 친구집으로 옮겼다.
  부모는 그의 나르기식 이사를 눈치채지 못했다.
  자기 필수품들을 친구집에 옮겨  놓은 현식은 윤경
  에게도 결단을 촉구했다.
  마침내 D데이가 정해졌다. 그  동안 부모한테서 이
  런 저런 핑계로  타낸 돈과 가정교사를  하며 틈틈이
  모아 두었던 돈을 챙겼다. 제법 큰 돈이었다.
  D데이. 윤경도 간단한 자기  일상복과 책들을 챙겨
  가지고 집을 나왔다.
  그들은 처음에 변두리의 허름한  여관에 우선 들었
  었다. 그러나 방값도 비쌀 뿐 아니라 그곳에 더 있기
  란 너무나 괴로웠다.  어른들의 탈선과  불륜을 매일
  밤 보면서 지낸다는 것은 정말 지겨운 일이었다.
  그들은 서울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군포로 가서
  허름한 셋방을 얻었다. 새마을 사업으로 슬레이트 지
  붕을 이은 농가였다.
  그들은 그 농가의 뒤꼍 방  한칸을 얻었다. 보금자
  리를 차린 것이다. 풍로며 냄비,  숟가락까지 사다가
  새 살림을 차렸다.
  학교에 나갔다가 부모들에게 붙잡힐지 모른다는 생
  각 때문에 가지 못했다.
  곧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때문에 학교는 꼭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각각 집에다가  편지를 냈다.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집을 뛰쳐나온 자기들을 용서해  달라는 편
  지였다. 두 사람은 세상 끝까지  같이 살아야 한다는
  뜻을 여러번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그들의 편지에는 물론  주소 같은 것을  쓰지 않았
  다. 군포 근방의 우체국 소인이  찍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정부에까지 가서 편지를 부쳤다.
  그들은 단칸방에서 옹색한 새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가출 대학생 부부가 된 것이
  다.
  그들이 집을 나올 때 가지고 온  돈은 금방 바닥이
  났다.
  그들은 젠셋방을 다시 월셋방으로  옮기고 그 돈으
  로 입에 풀칠을 했다.  그러나 그 돈도  금세 바닥이
  났다.
  현식은 할 수 없이 공사판에 뛰어들어 시멘트와 자
  갈을 져나르는 막노동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윤경은 군포 근처의 봉제공장에 나가 발이 퉁퉁 붓
  도록 서서 일을 했다.
  두 사람이 열심히 벌었지만  입에 풀칠하기에 바빴
  다.
  그런 고생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 따풋한 체온을 확
  인하며 행복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 작은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들이 집을 나올 때 가지고 온  돈은 이미 바닥이
  나 버렸고, 윤경과 현식이 봉제공장과 공사판에 나가
  는 것도 그렇게 여의치는 않았다.
  그들은 마침내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까지 이르렀
  다.
  항복을 하고 부모에게 원조를 요청하든지 소꿉장난
  같은 살림을 집어치우든지 해야 할 판이었다.
  "윤경아,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께 고개 숙
  이고 빌면 설마 쫓아내기야 하겠어?"
  현식이 슬금슬금 윤경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그
  러나 윤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절대로 안 돼요!"
  현식은 더 이상 무어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이렇
  게 하자고 먼저 제안을 한  사람이 자신이었는데, 그
  만 들어가자고 한것도 자신이었다는 것이  조금은 떳
  떳하지 못했다.
  궁색한 나날이 흘러갔다. 방학도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 집에 좀 다녀올께요."
  윤경이 무슨 마음이 내켰는지 불쑥 이런 제안을 했
  다.
  "집에 ? 윤경이네 집 ?"
  "그럼은. 내가  지금 현식씨  부모 만나게  되었나
  요?"
  "뭣하러 ?"
  윤경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대답했
  다.
  "이대로 더 살  수는 없잖아요. 아버지  유산 중에
  내 몫을 가불 좀 해 와야겠어요."
  "그게 그렇게 쉽게 될까? 아직 윤경이 아버님은 정
  정하신데."
  "여하튼 부딪쳐 보겠어요."
  그 길로 윤경은 서울로 올라갔다.  아침에 간 사람
  이 하루종일 기다리는 사람도 아랑곳 없이 그 이튿날
  오후께야 돌아왔다.
  "어떻게 되었어 ?"
  현식은 썩 밝지 않은 윤경의 표정을 흘깃흘깃 살피
  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톱도 안 들어갔어요. 아버지는 절  본 척도 하지
  않던걸요."
  윤경은 방바닥에 모로 쓰러져  누우며 힘없이 말했
  다.
  "그래도 내가 불쌍한지 어머니가 자고 가도록 두었
  어요.
  아버지가 밖에 나가고 없는 사이 제가 좋아하는 칼
  국수를 만들어 주시며 우셨어요. 내가  올 때는 큰길
  까지 따라 나와 이걸 주셨어요. 아이 속상해."
  윤경은 누운 채로 핸드백을  열고 조그만 손수건에
  싸인 물건을 내놓았다.
  "이게 뭐요?"
  "돈이에요."
  현식이 받아 풀어보았다. 여러 장의 수표와 현금이
  섞여 있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현식은 눈이 둥그레졌다. 벌어진 입가엔 이겐 살았
  다는 안도의 미소가 감돌았다.
  "이게 얼마래 "
  "헤아려 봐요."
  꽤 큰 돈이었다. 그들은 그  돈으로 사울 변두리에
  올라와 작은 전셋방을 하나 얻고 소꿉장난 같은 살림
  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어렵게 해서 그들은 학교를 마쳤다.
  영문과를 나온  윤경은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도
  썩 잘했다. 친구가 다니는 출판사의 번역일을 밤새워
  해 주기도 하고, 때로는 관광회사  통역원 노릇도 했
  다.
  윤경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현식은 대학원
  과정도 마쳤다.
  현식은 박사 과정을 하는 동안 전임강사 자리를 얻
  어 처음으로 월급을 받게 되었다.
  현식이 첫 월급을  받아오던 날 그는  윤경의 가는
  허리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현식은 몇년 뒤 대학 강단을 팽개치고 돈벌이가 좋
  은 설계사무소 일을 시작했다.
  그들은 쉽게 꽤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두 사람은 처가나 시가와는 완전히
  담을 쌓아 버렸다.
  현식은 소문으로나마 집안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경은 가끔 어머니 생각을 하며 현식 몰래
  눈물을 찍어내고는 했다.
  강형사의 손현식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추경감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
  려운 착잡한 심정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추경감 자신
  이 젊었을 때 겪은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래서 손현식은 가족이 처밖에 없다고 했었구만.
  그러나 정윤경의 천정이나 손현식의 본가에  대한 조
  사를 포기해서는 안돼. 오히려 그  측에 무슨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추경감이 담배를 꺼내 물고  질겅질겅 필터를 씹었
  다.
  "반장님, 지포 라이터 어떻게 했습니까? 제 라이터
  드려요?"
  강형사가 불이 켜지지 않는  추경감의 지포 라이터
  를 빗대어 말했다.
  "그럼 정윤경 주변 인물을 좀 정리해 볼까."
  추경감은 강형사의 짓궂은 질문을 무시하고 명령하
  듯 딴 소리를 했다.
  "그렇게 하지요."
  강형사는 수사 노트의 두꺼운 표지를 넘겼다. 강형
  사는 판지로 표지를 입힌 대학 노트를  늘 수사 수첩
  으로 쓰면서 모든 것을 거기에 메모해 놓고 있었다.
  "정윤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은  약 30명쯤
  됩니다.
  그 중에 살해 사건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보는 사람은  대여섯입니다. 그  속에 범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첫째, 그녀의 남편인 손현식입니다.  다음엔 제자
  인 설성도, 정윤경의 처녀 시절 애인인 고인국 의원,
  같은 동에 살면서 친하게 지낸  구영민, 그리고 설성
  도의 애인인 대학생 오하영 등 다섯 명이."
  "그러면 다섯 명 중에 가장 혐의가 가는 인물은 누
  군가?"
  "헤헤헤, 반장님도절 테스트하시려는 겁니까?"
  추경감이 강형사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냐는 표
  정을 지었다.
  "전에도 몇번이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정윤경에
  게서 O형의 정액 반응이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남
  편 손현식은 O형이지만 동침한 일이 없고, 제자인 설
  성도, 같은 동의 구영민, 고인국 의원도 모두 O형 혈
  액을 가지고 있다고 컴퓨터실에서 조회 회답이 와 있
  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아, 정사를  했다고 범인이라고 할  수 없
  어. 오히려 그 반대지. 정사를 나누는 연인 관계라면
  무엇 때문에 죽이겠어 ?"
  "반장님도 참 모르시는 말씀을모든  범죄는 남
  녀 관계부터 싹튼답니다.  애증이란 단어가  있지요.
  사랑과 미움.
  사랑이 지나치든지 모자라든지 배신하든지 하면 그
  것은 증오가 됩니다.  증오는 복수로  변하고 복수는
  죽음을. "
  추경감을 더 못 참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던 추경감이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자네, 설성도 애인이란 여자 좀 챙겨봐!"
  강형사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그는 설성도
  의 연인인 대학생 오하영을 찾아  여러 곳을 헤맸다.
  학교를 체크했으나 벌써  끝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강형사는 하영의 집에  전화를 걸어보았으
  나 무뚝뚝한 여자 목소리로 집에 없다는 대답만 들었
  다. 강형사는 자기가 남자니까 하영의 어머니가 따돌
  리는 것이 아닌가 해서 다방 레지를  시켜 다시 걸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집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
  다.
  강형사는 백합대학 부근의 여러  카페를 뒤져 보았
  으나 그녀를 찾지 못했다.
  강형사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집에 가서 잠복하기
  로 했다.
  몇 시간을 그녀의 집 앞에 숨어  지키던 보람이 있
  어 그녀가 집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강형사가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 오하영은
  이미 와 있었던 것이다.
  오하영은 간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커다란 백을 들
  고 나왔다. 짤막한 미니 스커트에  유방의 곡선이 잘
  드러난 웃옷이 테니스복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었
  다. 그가 든 큰 가방은 테니스 라케트용이었다.
  그녀는 동네에서 멀지 않은  사설 테니스장으로 갔
  다. 그녀는 거기서 쉬고 있던 젊은 남자와 인사를 나
  누더니 테니스를 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솜씨는 상당해  상대 남자가 쩔쩔  매는 것
  같았다.
  강형사는 먼발치에 앉아서 휴대용 라디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경쾌한 팝송을 들으며 느긋하게 기다렸
  다.
  코트에서 날렵하게 움직이는 하영은 마치 나비처럼
  경쾌했다. 지나치게 가느다란 발목에  비해 허벅지의
  볼륨이 육감적이었다. 스매싱을 하기  위해 오른팔을
  높이 들고 발뒤꿈치를 세울 때라든지 서브를 넣은 뒤
  허리를 굽힐 때는  그녀의 풍만한 히프가  잘 드러나
  보였다. 쏟아지는 햇빛은 그녀의 흰 다리와 근육질의
  팔 위에서 빛났다.
  한참 동안 테니스를 즐기던  오하영은 이마의 땀을
  씻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강형사는 쓸데없는 미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
  다. 티없이 맑고 발랄한 여대생이  무슨 살인 혐의가
  있다고 뒤를 캐라고 하는지 추경감이  야속하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는 추경감에게 이 구김살 없는 한 여대생을 미행
  하는 일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가를  낱낱이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오하영이 들어간 건
  물로 따라 들어갔다.
  가운데 긴 복도가 있고 옆에는  다방, 간이 음식점
  같은 곳이 보였으나  문이 닫혀 있고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오하영이 어디 있는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어
  디서 인기척이 났다.
  "하아, 하아."
  여자의 신음소리 같은 것이 약하게  들렸다. 그 소
  리는 규칙적으로 되풀이되었다. 아주  고통스러울 때
  내는 신음소리거나 아니면  환희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내는 소리 같았다.
  그 소리에 섞여 간간이 금속성의 마찰음 같은 것도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방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강형사는 그 안에서 분명히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
  고 있다고 생각하고 도어를 열고 한 발짝 들어섰다.
  "어마?"
  여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거기는 여자
  헬스 클럽이었다. 한 여자가 팬티만  입고 유방은 완
  전히 드러낸 반나체의 모습으로 바퀴 없는 자전거 타
  기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한 여자는 완전히 발가벗은 채 바닥에 반듯이 누워
  양 팔로 목 뒤에 각지를 낀 채 상체를 일으켰다 눕히
  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규칙적인  신음소리는 그 여
  자가 일어날 때 내는 기합소리였다.
  아름다운 젖가슴, 흰 피부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비
  너스의 숲을 가진 그 나체의 여인은 바로 오하영이었
  다.
  "시실례했습니다."
       4. 우리 시대의 마지막 배신녀
  아내의 죽음에 대한  충격을 받은 손현식은  근 한
  달 동안 멍한 상태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20년 가까이 담을 쌓고 살던 본가와 처가에 알릴까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어쩐지 그것은 죽은 아내의 뜻
  이 아닌 것 같아 그냥 있었다.
  처가나 친가에서 이 불행을  어쩌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문에도  보도되고, 텔레비전에
  도 나가고, 또 어릴적 친구들이  다 아니까 전해졌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양쪽 집에서  모두 아무 연락
  이 없었다.
  손현식은 정윤경이 죽고 나서야, 자기가 그녀를 얼
  마나 사랑했나 하는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큰  충격이 아내의
  죽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한 달쯤 시간이 흐르자 눈을  뜨고 비로소 주
  변을 살펴보았다.
  건축 사무실은 하던 일에 시간을 못 맞추어 주었기
  때문에 모두 취소가 되고, 주문도  전혀 받아 놓지를
  못했다.
  한 마디로 사무실 운영이 엉망이 되었다.
  그는 사무실에 나갈 생각도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
  었다.
  우선 아내가 쓰던 물건들을 그대로 흩어놓고 볼 수
  가 없었다. 아내의  옷가지 하나, 화장품  한통을 볼
  적마다 가슴이 아파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내의 물건들을 모두  광처럼 쓰는 부엌방에
  집어넣었다. 집어넣었다기보다는 소중한 물건이 도망
  가지 않게 가두어 두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는 아내가 쓰던 가계부를 챙기다가 문득 대학 노
  트 한 권에 눈이 갔다.
  일기장이었다. 그는 노트를 가슴에 껴안고 한참 동
  안 아내의 숨결을 느끼려고 애를 썼다.
  일기장을 펴보았다. 그날 그날의 평범한 일상이 대
  강대강 적혀 있었다.
  한참 읽어 나가다가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자기 이
  외의 어느 남자 이야기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라고만 표현된 낯선 남자가 그녀의 일기장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풋풋한 젊음과 겁없는 패기는 허즈와 옛날을
  생각나게 한다. 이제는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 세대에
  찌들고 세속화한 허즈, 그는 허즈와 대조적으로 나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손현식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는 이제 나의 꿈이 되었다. 나의 즐거움이 되었
  다.'
  이 구절을 읽다가는 일기장을 집어던져 버렸다. 눈
  에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정숙
  하고 자기만을 사랑하는 아내로 믿었던  정윤경이 이
  럴 수가 있는가?
  손현식은 더할 수 없는  배신감과 절망감을 감당하
  기 어려웠다.
  그는 벌떡 일어나 골방에 넣어 두었던  아내의  옷
  가지며 화장품들을 끄집어내어 아무 곳에나  마구 동
  댕이를 쳤다.
  크림통 하나가 거울에 맞아 박살이 났다. 핸드백이
  창문을 쳐서 유리가루가 방안을 뒤엎었다.
  "그럴 수는 없어. 이건 말도 안 돼."
  손현식은 미친 사람처럼 날뛰며  혼자 소리소리 지
  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아내가 모두  딴눈을 팔아도 정윤경만
  은 그렇지 않을 줄 알았다.  어떻게 이룩된 결혼식에
  얼마나 깊은 애정으로 쌓아올린 가정인가?
  정윤경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숙녀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 아내가 어떻게 다른 남자를 일기장 속에
  불러들일 수 있는가?
  그의 풋풋한 젊음.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손현식의  눈앞에서 설성
  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다. 자기가 없을 때는 설성도가 여러번 아내와
  같이 있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자기 집처럼 드나들
  었고, 윤경을 태우고 드라이브를 다닌  것이 한두 번
  이 아니었다.
  손현식은 방안의 더블 배드를  타는 눈으로 바라보
  았다. 그위에서 벌거벗은 윤경이 어깨 넓은 설성도의
  가슴 밑에 깔려 즐거운 신음을 토하며 몸부림치는 모
  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쁜 놈?"
  손현식은 소리치며 밖으로 뛰어나왔다.
  아파트 복도를 달려나가다가 창문에  비친 자기 모
  습을 잠깐 보았다. 수염은 자랄  대로 자라 덥석부리
  에다가 런닝셔츠 차림이었다.
  그는 다시 아파트로  돌아가 작업 감독할  때 입던
  점퍼를 걸치고 나왔다.
  시간을 보았다. 오후 9시 15분.  그는 설성도를 만
  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파트 현관에서 공중전화로 설성도의 아파트
  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침 집에 있었다.
  손현식은 그의 집에서 가까운 석촌 호수 근방 어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는 제의를 했다.
  "선생님, 무슨 일입니까?"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설성도가 물었
  다.
  "나와서 얘기해. 나 지금 곧바로 갈 테니까."
  손현식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던
  지듯 놓고는 자동차 시동을 걸고 호텔로 달렸다.
  "선생님, 접니다. 저도 금방 왔어요."
  호텔 현관에 기다리고 있던  설성도가 허둥지둥 들
  어서는 손현식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손현식의 분노에 찬 얼굴을 보자 잠시 주춤했
  다.
  손현식은 호텔 로비의 이곳  저곳을 살피다가 마땅
  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소매를 끌고 호텔 밖으
  로 나왔다.
  설성도는 손현식의 심상찮은 태도를 눈치챘는지 아
  무 말도하지 않고 그냥 따라갔다.
  두 사람은 석촌 호반에 있는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
  갔다.
  손현식은 아무 말도  않고 소주 서너  잔을 안주도
  없이 연거푸 마셨다.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조금  찾았는지 설성도를 쳐
  다보았다.
  설성도는 공연히 죄지은 사람이  되어 눈동자가 겁
  에 질려 있었다.
  "자네, 정윤경이란 여자 알지?"
  손현식이 이상한 질문부터 했다.
  "예? 아니, 선생님."
  "알아 몰라?"
  손현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모님은 왜 갑자기."
  "사모님이 아냐. 정윤경이란 여자 말이야. 고운 피
  부, 검고 긴 머리, 큰 눈동자 작은 입술, 야들야들한
  허리.그런 여자 말야 !"
  "."
  설성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대답을 못해 ?"
  손현식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선생님, 무슨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요. 차근차근
  좀 말씀해 보시지요."
  설성도가 어물어물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느꼈는
  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네가 내 제자야? 은사의  마누라와그럴 수 있
  어?"
  "선생님, 진정하십시오. 자, 제 술 한 잔 받으시고
  천천히 이야기하시지요. 아직 초저녁인데요."
  설성도가 소주를 잔에 따르며 능청스럽도록 침착하
  게 대했다.
  "오냐, 그래, 좋다. 천천히 따져보자."
  손현식은 마음을  다시 가라앉히고  설성도가 따라
  준 술을 마셨다.
  "그래, 우리 남자대 남자로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나와 너는 제자와 스승 같은 시시한 관계는 집어치우
  자. 이제 한 남자 손현식과  설성도의 입장에서 솔직
  하게 이야기하잔 말야."
  "선생님, 당치 않습니다."
  "이 자식아 !"
  손현식은 갑자기 설성도의 멱살을  쥐었다. 금방이
  라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다시  슬그머니 멱살
  을 놓았다.
  "어쨌든두 남자와 한 여자다. 이미 이 세상 사
  람이 아닌, 우리 시대의 마지막 배신녀."
  손현식은 초점 없는 말을 계속 늘어놓았다.
  "너, 우리 여편네 좋아했지 ? 말해 봐!"
  손현식의 말은 점점  거칠어졌다. 이미  어느 정도
  술에 취해 있었다.
  "좋아한 것이 아니고 존경했습니다."
  같이 술을 마셨지만 설성도는  아직 정신이 말똥말
  똥했다.
  "존경 ? 하하하. 웃기지 마. 남자가 여자를 존경하
  는 것이 어떻게 하는 거니 ? 하하하."
  손현식은 초점 잃은 눈동자로 계속 술을 마시며 설
  성도를 잡아삽킬 듯이 노려보았다.
  얼마나 마셨을까?  끝까지 버티던 설성도도 마침내
  정신이 몽롱해졌다.
  "사모님 정말 죽었습니까? 정말."
  "그래, 정말 죽었다.  내 보기 싫어  죽었다. 이놈
  설성도야,
  정윤경일 좋아했지. 끄윽.아니, 존경했지 ? 존경이
  어떤거야? 침대에  쓰러뜨려 놓고  존경했지? 하하
  하."
  손현식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설성도는 비틀거리는  솜씨로 손현식의  차를 몰고
  그의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는 고래고래 노래
  를 부르면서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갔다.
  설성도는 그제야 안도의 숨울  길게 뿜으며 걸어서
  한강변으로 나왔다.
  술이 거의 깨는 것 같았다.
  설성도는 어두운 한강을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
  여 물었다. 검은 강에는 멀리 있는 다리의 불빛이 희
  미하게 반사되며 파도를 따라 춤추었다.
  그는 떠오르는 정윤경의 얼굴을 한강 위로 계속 흘
  려 보냈다. 그러나  상냥하게 미소짓는  그녀는 자꾸
  설성도의 눈앞에 나타났다. 나중에는  눈부신 나신이
  되어 설성도 앞에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달
  려오는 그녀를 한강물 속으로 떨어뜨렸다.
  그는 몽상에서 깨어나려고 걷기 시작했다.
  "설성도씨 아니시오?"
  그때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가 다가왔
  다.
  "나 강형사요."
  강형사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며 설성도 앞
  에 다가섰다.
  "아니, 강형사, 당신 날 미행하고 있었군."
  설성도는 마지막 남은 술기운이 마저 깨는 것을 느
  꼈다.
  "아닙니다. 내가 왜 설성도씨를 미행합니까?"
  "그러지 말아요.  그럼 우연히  나를 만났단  말이
  오?"
  "그렇죠. 난 손현식씨를 좀 만나러 왔다가 그냥 가
  는 길입니다. 정말입니다."
  강형사는 두 손을 벌려 보이는 서양 사람들 흉내까
  지 내며 말했다.
  "속아 주지요. 그래, 손현식씨는 만났어요?"
  "술이 엉망이 되어 안 만난 거나 마찬가집니다."
  "헌데 왜 아직도  우리 선생님을  쫓아다닌단 말이
  오? 사모님은 자살하신게 아니에요.?"
  "그게 미심쩍은  점이 있습니다.  우리 입장으로는
  살해된 것이 틀림없다고 여겨지고 있어요."
  "아니, 뭐라고요?"
  설성도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정윤경을 마지막으
  로 본 것은 자신이었으니.
  "범인은 엉뚱한 실수를 해버렸다 이겁니다. 그리고
  애당초 자살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었어요. 유서도 없
  었고 자살할만한 고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건
  그렇고, 설형, 우리 어디 가서 쐬주나 한잔 할까요?"
  강형사의 그 말은  설성도에게 너 좀  조사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거절할 수가 없었다.
  "좋아요. 지금이 11시 반밖에 안 되었군요."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스텐드 바로 들어갔다.
  좁은 스탠드 바에는 한참 열기가  올라 있었다. 가
  득 찬 담배연기와  술냄새 속에 좁은  무대에 올라선
  무희가 완전 나체로 춤을 추고  있었다. 붉은 조명이
  발광하는 리듬에 맞취 무희는 온 몸을  주객 앞에 꼬
  면서 보여주었다.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저 여자 체모는 가발이야."
  설성도가 무희의  무성한 비너스  둔덕을 손짓하며
  말했다.
  "과연 설성도씨군. 척하면후후후."
  강형사가 구석 자리에 설성도롤 앉히면서 말했다.
  "자, 우리 정윤경의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 좀 할까
  요?"
  "예 ? 정윤경의 남자요?"
  "설형도 그중 하나 아니오?  정윤경은 애인에게 당
  한 것 같은데."
  강형사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정윤경 사모님은 정
  숙한 분입니다. 공연히  돌아가신 분  두고 애인이니
  정부니 따위 소리를 함부로 하고 다니면 명예 훼손으
  로 고소당할걸요."
  설성도도 강형사 못지  않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나 강형사는 빙긋이 웃음을 머금을  뿐 설성도의
  말을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뭐 은사의 부인이라고 그렇게  감쌀 것 없습니다.
  그만큼 변명했으면 체면치레는 되었으니까 이제 우리
  까놓고 이야기 좀 합시다. 자 우선 한 잔 하고."
  강형사가 설성도의 빈 잔에 술을 가득  부은 뒤 자
  기도 쭈욱 들이켰다.
  "야, 분위기가 야하니까 술이 더 잘 넘어가는구나.
  저 무대 위  여자 좀  보아, 사람  죽이는데후후
  후."
  강형사는 설성도의 굳어진  마음을 누그러뜨리려는
  듯 어울리지 않는 웃음까지 보였다.
  "도대체 누가 우리 사모님을  해쳤습니까? 속 시원
  하게 말좀 하시죠."
  설성도는 천천히 술을 마시며  눈을 스트립 댄서의
  히프에서 떼지 않고 말했다.
  "학창 시절의 보이 프랜드이며,  지금은 정계의 거
  물인 고인국 의원, 그리고 아파트의  같은 층에 사는
  구영민, 구영민은 511호엔가 있지요. 30대 후반의 멋
  쟁이. 독신 남."
  "또 없나요?"
  "우선 두 사람만 알아냈습니다. 한 사람 더 있으면
  설성도씨 당신 아닐까요?"
  "흥."
  "한 여자를 여러 남자가 좋아했다면, 그 여자는 남
  에게 없는 특별한 매력이 어디엔가 있는 것 아닐까?"
  "어쨌든 고인국인지 곰국인지 하는  녀석하고 구영
  민인가 건달인가 하는 녀석이 어째서  사모님의 애인
  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 좀 해 보실까요?"
  설성도가 몹시 궁금한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
  다.
  "오,흥미가 있으시군요. 그럼 제가 건져낸 것을 대
  강 말씀드리지. 그  대신 당신도  정윤경과의 관계를
  솔직히 털어놔야 합니다. 자, 우선 한 잔."
  강형사는 다시 설성도의 잔에  술을 채우면서 뜸을
  들였다.
  "정윤경이란 여자는  좀 복잡한  여자더라구. 보통
  한 여자가 사랑을 하면 한  남자를 상대하는 법인데,
  정윤경은 동시에  여러 남자를  교제하고 있었거든
  ."
  "교제와 사랑은 다르다는 것을  모르시지는 않겠지
  요?"
  설성도가 이의를 제기했다.
  "깊은 것은 잘  모르지만같은 층에  산다는 그
  멋쟁이 구영민씨 말입니다. 그 자의 차를 타고 밤 늦
  게 집으로 돌아온다든지, 함께 그 자의 차를 타고 외
  출하는 일이 잦았거든."
  "그건 어떻게 아셨나요?"
  "아파트 경비원한테 들었지. 밤  늦게 집에 돌아을
  때는 아파트 현관  앞에서 내리지 않고  아파트 단지
  입구의 모통이에서 정윤경이  먼저 내리고  구영민은
  혼자 차를 몰고 현관 앞으로 들어온다고 하더군."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자동차  좀 편승했기로서니
  그게 뭐 이상한 일입니까?"
  설성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정윤경의
  변호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속마
  음은 그렇지 않았다. 배신감 같은 것이 들었다. 무엇
  인지 확실히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 속임을 당한
  것 같은 감정이 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녀가 괘씸하는 커녕, 지금 결백하다고  변명을 해 주
  고 있지 않은가?
  "그뿐 아니오."
  강형사는 설성도를 설득시키려는 투로  나왔다. 설
  성도가 그녀를 변명하고 나서니까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정윤경이 구영민의 아파트에 있는 것을 목격한 사
  람이 있단 말입니다. 그것도 밤중에."
  "예? 이웃 사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요? 구영민의  집에 드나드는  파출부가 있는
  데, 그 여자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은 그냥 예사로
  운 사이가 아닌 것 같단 말입니다."
  "그래요? 두 사람이 발가벗고 침대 위에 있는 것을
  보기라도 했답니까?"
  설성도가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말끝이 분노로 약간 떨린다고 강형사는 생각했다.
  파출부가 그 집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
  가다가 깜박 잊고 안 가지고 나온 것이 있었대요. 집
  에 가져갈 찬거리인데 그녀가 구영민의 아파트로
  되돌아가 무심코 도어를 열고 들어갔더니, 글쎄 뜻밖
  에도 옆집 아줌마인 정윤경이 거실에 서 있더라는 겁
  니다. 구영민은  잠옷 차림으로  욕실에서 막  나오
  고."
  "그 파출부란 아줌마 말을  어떻게 그렇게 믿어요.
  여자란 원래 남의 스캔들  퍼뜨리기를 좋아하거든요.
  또 사모님이 볼 일이  있어 그 집에 들를  수도 있는
  일이죠. 가령 신문을 빌리러 왔다든지."
  "후후후, 맞아. 빌릴 것이 또 있지. 구영민이 사타
  구니에 차고 다니는 것 말야. 후후후."
  강형사가 웃음을 참지 못해 입에 머금은 맥주를 푸
  푸 뿜어내면서 말했다.
  "그건 그렇다 치구요, 고인국은  어떻게 했다는 겁
  니까"
  설성도는 정윤경을 그런 불결한 농담에 관련시키고
  싶지 않아 화제를 바꾸어 버렸다.
  "아, 고인국 의원님! 이 사람은  상류 사회 인사답
  게 고상하게 노시는 것 같더군요. 저 여자 좀 봐, 저
  러다가 허리 부러지는 것 아닐까 ! "
  스테이지의 나체 댄서가  허리를 바이브레이션처럼
  흔들어대고 있다.
  설성도는 강형사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술이
  약해 보이는 강형사는 벌써부터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 의원님은 말야, 자기  개인 사무실보다 호텔을
  좋아했지."
  "정윤경씨가 고인국 의원과 호텔에  들어갔단 말입
  니까?"
  설성도가 다시 분개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이지. 영동에 있는 라데빵스  호텔 같은 곳에
  서 두 사람이 자주 만났지."
  "거짓말 ! "
  설성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너무 흥분하지 말아요. 호텔에 갔다는 것이 꼭 침
  실에 들어갔다는 말은 아니니까. 호텔의 고급 식당에
  서 느긋하게 만찬을 즐길 수도 있고, 지하 디스코 클
  럽에서 엉덩이를 흔들 수도 있고."
  "정윤경은 그런 더러운 여자가 아니란 말야 ! "
  설성도가 일어선 채로 또 한번  고함을 질렀다. 이
  쪽 두 사람을 유심히 보고 있던 보이들이 달려왔다.
  "손님, 취하셨군요."
  그중 두 사람이 설성도 팔을  잡고 끌어냈다. 겉보
  기는 점잖게 술취한 사람을 모시는  것 같았으나, 그
  들에게 팔을 잡힌 설성도가 취중에도 어찌나 팔이 아
  픈지 비명을 지를 판이었다. 그들의  무서운 힘 앞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설성도는 홀 밖으로 끌려나가 내
  동댕이 쳐졌다.
       5. 세 남자
  초인종의 요란한 소리에 설성도는 눈을 떴다. 골이
  쪼개지는 듯 아팠다. 설성도는 얼굴을 찌푸리며 간신
  히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나갔다.
  "누구요?"
  "뭐야? 설형, 아직도  자는 거야? 지금이  몇신 줄
  알아?
  열시야 열시."
  도어 밖에서 낭랑한 오하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설성도는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하며 현관을
  열었다.
  오하영이 들어서자 바로 마루에 벌렁 누워 버렸다.
  "이런 ! 오늘 백마에 놀러 가기로 했잖아요."
  "오늘이 일요일이었지. 그렇군."
  설성도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전혀 일어날 생각
  을 하지 않았다.
  "어젯밤 어떻게 된 거예요?"
  설성도의 머리맡에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앉
  은 하영은 나직하게 물었다. 짧은  녹색 스커트 밑으
  로 쭉 뻗은 하얀 두 다리가 눈부셨다. 설성도는 비스
  듬히 누운 채 손으로 하영의 두  다리를 가볍게 쓰다
  듬었다.
  "어젯밤?  가만 있자, 어떻게 되었더라?"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의 가닥을 정리했다.
  "강형사하고 한잔 했었지."
  "강형사? 그 사람 만났어 ? 나, 그 사람 너무 싫더
  라."
  오하영이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왜? 사람 괜찮아. 형사답지 않게 솔직하고."
  "사람이 너무 경망스럽고 교양이  없어 보여. 근데
  그 사람은 왜 만났어?"
  "응, 그냥."
  설성도는 대답을 얼버무리고 슬그머니 하영의 히프
  를 끌어안았다. 얼굴을 하영의 가슴에 묻으며 부드럽
  고 풍만한 그녀의 유방의 촉감을 즐겼다.
  하영은 자기의 몸을 맡겨준 채 다시 질문을 했다.
  "강형사가 그냥 놀자고  설형을 찾아왔을  턱은 없
  고, 그 사람 정윤경씨 건 때문에 왔죠?"
  "정윤경이라."
  "얼버무리지 말고  분명히 이야기해  봐요. 설형과
  정윤경씨 관계에 대해 물었죠? 나한테도 그것 캐물었
  거든요. 설형, 정말  정윤경씨와 섬싱 있는  것 아네
  요?"
  오하영은 두 손으로 설성도 얼굴을 잡고 자기 가슴
  에서 들어올리며 말했다. 오하영의 두 손에 설성도의
  얼굴은 거울처럼 들려졌다.
  "섬싱은 무슨 섬싱이야?"
  설성도는 오하영의 허리를 휘감았던  팔을 풀고 일
  어나 앉았다.
  "그런데 왜 강형사가 그렇게 집요하게 따라다녀요?
  나한테까지 찾아와 이상한 눈초리로  보더군요. 불쾌
  해서 혼났어요. 마치 설형과 공모해서 정윤경이란 여
  자를 해치우지 않았나 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봤어요. 설형이 은사의  아내인 정윤경과  남의 눈을
  피해 은밀히 메이킹 러브를 하다가  약혼자가 생기니
  까 그녀가 짐스러워져 처분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려면."'
  "아니, 정말 유 그런 것 아네요?  정윤경이 나 때
  문에 짐스러워진 것 아니에요?"
  오하영이 설성도를 반히 쳐다보면서  캐물었다. 평
  소에 그녀가 하던 짓이 아니었다.  여자는 질투의 동
  물이라고 누가 말했듯이 질투 앞에는 모든 여자가 평
  등인 모양이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쓸데없는 억측은 그만두고 배 고파 죽겠으니
  뭐 먹을것 좀 해 줘."
  설성도가 부시시 일어나 옷을 주워 입으며 말했다.
  오하영은 눈을 한번 흘겨  보이고는 일어나서 웃저
  고리를 벗어 걸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들은 사다 놓은 빵조각과  치즈로 간단히 샌드위
  치를 만들어 먹은 뒤 함께 집을 나섰다.
  "제 차를 타고 가요."
  두 사람은 베이지색 스텔라에 함께 탔다.
  "강형사가 그러는데 구영민인가 뭔가 하는, 정여사
  아파트에 사는 독신 남이 그렇게 멋쟁이라면서요?"
  오하영이 시동 키를 돌리면서 혼잣말처럼 했다.
  "구영민 ? 응, 알지. 기생오라비  같다고 할까? 아
  니, 제비라고 할까 ! "
  "설형이 언제 그 사람 봤어요?  오라, 그러니까 유
  가 정여사 아파트에 자주 드나든 건 틀림없군요."
  오하영이 출발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자동차가 신경질적으로  출발하는 바
  람에 설성도의 허리가 앞뒤로 휘청거리며 꺾였다.
  "지금 어느 쪽으로  가는 거야?  백마는  이쪽으로
  가지 않는데."
  하영이 모는 자동차가 북한산성  쪽으로 접어들자,
  그때까지 멍청하게 앉아 있던 설성도가 말을 걸었다.
  "자기 입이 들러붙지는 않았었군. 그냥 한 바퀴 돌
  아서 시내로 들어가요."
  하영은 설성도에게 눈길도 한번 주기 않고 말했다.
  전에 없던 시비조의 말이었다.
  "왜 맘이 변했어?"
  "자기처럼 재미 없는 사람하고 그런데  가서 뭘 해
  ? 우리 시내 들어가 파이나 사먹고 팝송 들어."
  그들은 하영의 말대로 북한산성  입구에서 차를 돌
  려 서울 시내로  다시 들어왔다.  휴일이라 어떻게나
  자동차가 많은지 네 시간이나 걸려  간신히 무교동까
  지 올 수 있었다.
  "나, 자기한테 꼭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솔직히 대
  답해 주겠어?"
  하영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넓적한 파이를 거의 혼
  자 다 먹다시피 하고 입을 열었다.
  약간 금적색이 미치는 머리결이  스카이 라운지 커
  튼 사이로 들어온 오후의 햇볕을 받아 이슬을 머금은
  듯 반짝였다.
  희고 긴 목덜미와 잘 어울렸다.
  설성도는 담배를 꺼내 피워 물면서 아무 말도 않고
  하영을 쳐다보기만 했다.
  "자기, 사모님과 어떤 관계였는지 솔직하게 이야기
  해 봐요.
  나도 들은 것이 있어서 묻는 말이에요."
  하영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단호하고 매몰찬
  결단이 숨겨진 것 같은 차가운 무엇을 느끼게 했다.
  "지금 나보고 하는 얘기야?"
  그때야 설성도는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럼, 여기 자기 말고 누가 또 있어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어?"
  "지금 생각해 보니까 강형산가 뭔가  하는 그 얼간
  이가 한 말이 예사로운 말이 아니었단 말예요."
  "무슨 말을 했는데."
  설성도는 가슴이 뜨끔함을 느끼며 어물어물 되물었
  다.
  "자기를 알았을 때 자기가 이미 정윤경이란 여자와
  사귀고 있을 때였나, 아니면 나와 자기가 알고 난 뒤
  에 자기가 정윤경을 사귀게 되었나 뭐 그런 질문이있
  어."
  "그게 뭐가 그렇게 이상하단  말야. 스승의 아내와
  제자가 알고 지낸다는  것이 수상할 것  하나도 없잖
  아? 그 사모님은 내가 학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었어."
  "강형사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단 말예요. 마치
  자기와 정윤경이 불결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을 전제한 것처럼  얘기했단 말예요.  솔직하게 말해
  봐요. 지나간 일이니까 그냥 알기만 하면 돼요. 그걸
  문제삼을 그런 옹졸한 여자 아니에요."
  "문제삼지 않으려면 캐물을 이유도 없잖아?"
  "그러니까 섬싱이 있었다는 뜻이에요?"
  하영의 얼굴색이 싹 달라졌다. 핏기가 가시고 창백
  해졌다.
  그래서 편법으로 교수들이 모두 리포트를 제출하면
  시험 대신 학점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독 손현
  식 교수만은 시험을 치르겠다고 고집을 했다.
  원리원칙주의자인 손현식은 학점을 짜게 주기로 이
  름난 교수였다. 학생들은 누군가가 손현식 교수를 설
  득시켜 리포트로 대신해 주도록 해야  한다고 떠들었
  다. 과대표인 설성도가 그 일을 마다할 수가 없었다.
  그는 토요일 저녁 무렵 손교수의 단칸 셋방을 찾아
  갔다.
  손교수는 겨우 전임강사 자리를  하나 얻어 변두리
  의 단칸방에 살림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 날은 눈이 몹시 와서 그가  손교수 집에 닿았을
  땐 머리와 어깨가 온통 눈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아이구, 설성도 학생 아니에요? 이  눈 속에 웬일
  이에요? 좀 들어와요."
  정윤경이 반갑게 그를 맞아 주었다. 윤경은 잠자리
  에 들었다가 나왔는지 핑크색 잠옷 차림으로 문밖 툇
  마루에 나와서 설성도를 맞이했었다.
  "이거 늦게 죄송합니다. 교수님 안에 계십니까?"
  설성도가 열린 문  사이로 방안을 흘낏  보며 말했
  다.
  "안 계세요. 하지만 잠깐 들어와 몸  좀 녹이고 가
  세요. 이 눈 속에."
  설성도는 어떻게 할까 잠깐 망설였다. 교수도 없는
  데, 단칸 방에  들어가기가 좀  뭣해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아이, 이렇게  산다고 방에도  안 들어올  참이에
  요?"
  "선생님은 언제 요셔요?"
  "들어와서 얘기해요. 아이 추워."
  윤경은 옷깃을 여미며 재촉했다.  설성도는 교수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꽁꽁 얼었겠어요. 여기 이불 밑에 발  넣고 좀 녹
  여요."
  윤경이 수건으로 설성도의 머리에서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 설성도는 엉거주춤 앉았다. 몸둘  곳을 제대
  로 찾지 못해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모양을 하고 있
  었다. 윤경은 이불 밑에 발을 넣고 비스듬히 누워 텔
  레비전의 연속극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레이스
  달린 베개와 얇사한 이불이 이상한  분위기를 자아내
  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속극의  러브신이 한창
  전개되고 있었다.
  14인치 정도 될 법한  조그만 텔레비전이지만 방안
  이 워낙 좁아 뒷벽에 기대 앉다시피  해야 제대로 보
  였다. 텔레비전 옆에는 싸구려 냄새가  물씬 나는 조
  그만 경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잡다한 화장품 종
  류며 가위.화장지.볼펜 등이 흩어져 있었다. 그 옆에
  는 손현식 교수의 책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작
  은 창문께는 임시 빨랫줄이 쳐져 있고 거기엔 와이셔
  츠에서부터 스타킹, 여자의 삼각팬티  등이 주렁주렁
  널려 있었다. 부부가 살을 맞대고  오손도손 사는 모
  습이 숨김 없이 드러나 보이는 방안 분위기였다.
  설성도는 정윤경이 권하는 대로  발을 슬그머니 뻗
  어 이불 밑에 넣었다. 방바닥이  따끈따끈한 게 기분
  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윤경이도 발을 뻗
  어 슬그머니 이불 밑에 넣었다.
  "저 연속극 참 재미있어요.  한대희라는 사람이 쓴
  드라마라고 하는데착실한 가정집  유부녀가 학창
  때의 애인을 만나 그만 한번 선을 넘는 바람에호
  호호. 성도씨는 선을 넘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
  르죠 ? 총각이시니까 아마."
  설성도는 공연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이구, 옷이 다 젖었네."
  윤경이가 그의 웃옷을 만져보며 말했다. 어깨의 눈
  이 녹는 바람에 옷이 젖기 시작했다.
  "쯧쯧. 어떻게 하나."
  윤경이는 지나치게 신경을 쓰며  설성도의 상체 이
  곳 저곳을 만져보왔다. 화장품 냄새에  섞여 30대 여
  인의 체취가 설성도를 충분히 자극했다.
  "저, 교수님은 언제쯤 들어오시나요?"
  설성도가 몸을 옆으로 피하면서  그녀의 관심을 돌
  릴 셈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안 되겠어요. 좀  벗으세요. 방바닥에  펴 놓으면
  금방 마를 거예요."
  윤경은 설성도의 뜻은 무시한 채 웃옷을 벗기기 시
  작했다.
  "아니, 저."
  설성도는 말만 그렇게 했을 뿐 그냥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윤경이가 그의 웃옷을 벗겨내는 바람에
  그녀의 유방이 성도의 얼굴에 살짝 닿았다. 브래지어
  를 하지 않은 풍만한 유방이 비록 잠옷 속에 있긴 했
  으나 그의 얼굴을 스치자, 그는  야룻한 흥분으로 심
  장이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스무  살이 넘도록 아직
  여자의 알몸을 한번도 만져본 일이 없었다.
  "선생님은 건축 설계 때문에  철야 작업 나갔어요.
  오늘 밤은 돌아오지 않아요."
  그녀는 설성도의 웃옷을 벗겨 방바닥에 정성스럽게
  펴면서 말했다.
  "야유, 체격도 좋아. 어쩜 이렇게 우람할까?"
  그녀는 웃옷을 벗은 설성도의  어깨와 가슴을 만져
  보며 감탄했다.
  "저어저어."
  설성도는 얼굴이 빨개지고 숨결이  고르지 않았다.
  입이 바싹바싹 말라 혀로 계속 입술을 축였다.
  "저어저어.사모님, 물 좀 있으면."
  설성도는 숨결만 거칠어진 것이  아라 손까지 흥분
  해서 떨렸다.
  "목이 말라요? 잠깐만."
  그녀가 밖으로 나갔다.  툇마루에 붙어  있는 간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도망칠까?'
  설성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적당히 핑계를 대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꼼
  짝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을 자기가 제어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자, 끓는  물이에요.  주전자를 올려놓고  그만
  ."
  윤경이 쟁반에 찻잔을 받쳐 들고 들어오며 생긋 웃
  었다. 미소 아래로 희디 흰  그녀의 목덜미와 가슴이
  설성도의 눈을 더욱 황홀하게 했다. 보리차를 꿀꺽꿀
  꺽 마시고 나도 타오른 설성도의 가슴은 진정되지 않
  았다. 곁의 이불 밑에 슬그머니 발을 뻗고 앉은 윤경
  은 설성도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그녀의 육중한
  히프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녀의 다리는 대담하
  게도 설성도의 다리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저어, 사모님."
  설성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릇한 여인의 체취가 그를  더 이상 가만히
  있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래요?"
  윤경은 요염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만 가가 봐야겠습니다."
  그가 슬그머니 일어서려고 몸을 움직였다.
  "아이, 몸 좀 녹이고  가요. 밤 공기가  얼마나 찬
  데."
  당황한 윤경이 설성도를 끌어앉히려고 그의 양팔을
  잡았다. 그 바람에 설성도는 균형을  잃고 윤경이 위
  에 넘어지고 말았다.
  "음."
  설성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음을 토하고 말
  았다. 설성도의 양팔을 쥐고 밑에  치어 버린 윤경은
  이불 위에 그냥 벌렁 드러누운  모양이 되고 말았다.
  윤경의 가슴 위에  포개진 채 넘어진  설성도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덮어놓고 윤경을 끌
  어안았다. 제정신이 아닌  그는 윤경의  목을 껴안고
  숨만 가쁘게 내쉬었다.
  "아니이러면이러면."
  이번에는 윤경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설성도를 확 밀어냈다. 설성도는  그 순간 정신
  이 번쩍 나니 무릎을  끓은 채로 뒤로  쭉 물러섰다.
  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폭 수그린 채  가만 있자 윤
  경이 입을 열었다.
  "너무 그렇게 죄지은 것처럼 하고  있지 않아도 돼
  요."
  "예 ?"
  설성도가 놀라 반문했다. 그통에 고개를 들어 윤경
  을 보게 되었다. 그녀도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
  다. 숨을 가쁘게  쉬느라 오르내리는  풍만한 가슴을
  보자 설성도에게는 다시 욕망이 꿈틀거리며 솟아오르
  는 것이었다.
  "젊은 학생에게  내가 너무  거리감이 없었나봐요.
  그 나이에는 그럴 수도 있지."
  진정으로 윤경이 그렇게 생각한다고는 여겨지지 않
  았다.설성도에게는 그 말이 어서  나를 함락시키라는
  공공연한 유혹처럼 들렸다. 설성도는 용기를 내어 다
  시 윤경의 옆으로 접근했다.
  "자, 가까이 와요."
  머뭇거리는 설성도를  오히려 윤경이  손을 내밀어
  가까이로 끌어들였다. 설성도는 벌써  정신이 어질어
  질하며 온 방안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어떻게 주체할 줄을 몰랐다.
  "어머, 정신 좀 차려요."
  윤경이 깔깔대며 그를 놀렸다. 설성도는 다시 윤경
  의 옆에 앉았다.
  "옷이 마를 때까지 얌전히 있는 거예요, 호호."
  하지만 설성도의 신경은 온통 이불 속의 두 다리에
  집증되어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등을  꼿꼿이 한 채
  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차츰 편안하게
  몸을 이불 안으로 밀어넣었고, 점차로 오른쪽으로 비
  켜 윤경을 옆에서  끌어안는 듯한 자세를  갖춰 나갔
  다. 충분히 윤경은 그런 설성도를  의식하고 있었다.
  한데도 오히려 그녀  자신도 몸을 서서히  틀어 주는
  것이었다. 설성도의 얼굴은 자연히 윤경의 유방에 다
  가가게  되었다. 설성도는 용기를 내어  윤경을 조금
  끌어내렸다. 윤경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스르르 미
  끄러졌다. 금방 설성도의  얼굴은 윤경의  유방 속에
  파묻혔다. 윤경의 격한 심장 고동이 설성도에게 그대
  로 전달되었다.
  "아."
  윤경은 길게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 신음소리가 설
  성도를 더욱 자극하였다. 그는 손을  뻗쳐 윤경의 허
  벅지를 더듬었다. 그 순간 윤경은  설성도의 손을 잡
  아 매끄러운 자신의 허벅지에서 떨어지게  하고는 그
  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더 크거든 오는  게 좋겠어. 학생에게는  더 멋진
  여자가 배정되어 있을 거야."
  윤경의 뜻하지 않은 행동에  넋이 나간 설성도에게
  윤경은 미련의 내음이  짙게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설성도의 얼굴은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옷이 마르지 않았나 모르겠네."
  윤경의 말에 설성도는 정신을 차린 듯 일어나 황급
  히 웃도리를 주워 입었다.
  "이런 멋진 미남을 그냥 보내려니까  너무 배가 아
  프네."
  윤경은 방을 나서는 설성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다시 뭉쿨하게 그녀의 체온과  풍만함이 전달되었다.
  설성도는 두눈을 질끈 감고 윤경에게서 팔을 빼냈다.
  밖에 나와 초겨울의 찬 바람이 뺨을  에이자 그는 정
  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내가 스승의 아내를.'
  그는 후회와 죄책감으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어둠 속을 헤치며 제정신이 아닌 채로 하숙집으로 돌
  아온 설성도는 며칠 동안 학교도 가지 않고 두문불출
  했다.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손교수를 만나기
  조차 두려워 손교수의 눈이 마주치면 얼른 피해 버리
  고는 했다. 그 뒤 근 1년 동안 손현식 교수집에 드나
  들지 않았다. 그러나  1년 이상이 지난  뒤 부득이한
  사정으로 정윤경을 만나야 했다.  선배들의 졸업기념
  건축설계 전시회에 설성도가 접수와 안내를  맡게 되
  었다. 그 전시장에서 설성도는 정윤경을 안내해야 하
  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설성도는 시선을 엉뚱한 데 두고 인사를 했다.
  "아니, 설성도 학생 아냐? 참 오랜만이에요. 그 동
  안 공부 잘하고 있었어요?"
  정윤경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1년 전의 일
  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설성도는 윤경의 그
  러한 태도가 오히려  섭섭했다. 무슨  여자가 저렇게
  시치미를 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머리를 떠
  나지 않았다. 그 뒤로 설성도는  다시 스스럼없이 손
  현식 교수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와 윤경은
  한번도 그 겨울 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설성도
  는 손교수 보기가 민망스럽고 미안해  그의 일이라면
  마다 않고 열심히 해 주었다.  자연히 손교수의 수제
  자가 되다시피 했다. 정윤경도 설성도를 집안 식구처
  럼 생각하고 몇 년이 흘러갔었다.
  그러나 최근 정윤경이 죽기 직전에는 다시 두 사람
  의 사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정윤경은 설성도
  를 다시 한 사람의 남자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8년 전 그 겨울 밤의 일을 다
  시 생각해낸 것 같았다. 재 속에 묻어 두있던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러나
  설성도의 입장은 이제 달랐다. 그는 철부지 프레시맨
  도 아닐 뿐 아니라 오하영 같은 연인이 새로 생긴 것
  이다. 그렇다고 윤경을 쾌락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은
  사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설성도는 정윤경과의
  애증을 오하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몹시  신경을 썼
  었다. 그러나 오하영은 여자의  육감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한편, 정윤경  피살 사건이
  미궁으로 빠지는 것 같아 추경감은  초조하기 시작했
  다. 애매하게 강형사만 들볶았다.
  "거 고인국인가 곰국인가 하는 친구가 아무래도 수
  상한 것 아냐?"
  추경감이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의 필터를 질겅질
  겅 씹으며 말했다.
  "반장님, 담배 필터를 자꾸 씹는 것은 욕구 불만인
  사람들 이랍니다."
  "그래, 난 욕구  불만형이야. 살인범을  잡아야 풀
  려."
  "추경감님의 선조분 중에 추적(秋適)이라는 대학자
  가 계셨는데, 그 분이  편찬하신 명심보감(明心寶鑑)
  이라는 책을 보면."
  "아니, 강형사가 추적 선생을 어떻게 알지 ?"
  "헤헤헤, 제가 이래도 사대부집  막내 손자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종아리 맞아 가
  며 명심보감을 읽었죠. 헤헤헤."
  강형사가 장난기 어린 얼굴을 하면서 말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곰국인가  고인국인가 하
  는."
  "그 사람은 야당의 거물이 되어서 함부로 다루다가
  큰코 다칩니다."
  "정계 거물이면  범죄를 저질러도  괜찮은가? 큰코
  다친다구? 자네는 큰코도 아닌 납작코니까 다칠 것도
  없어. 샅샅이 캐봐."
  "반장님, 제가 왜 납작콥니까?  이래봬도 미남이라
  고 여자들이 줄줄."
  "시끄러워. 그래서 이제까지 장가도 못 가고 있군.
  쓸데없는 소리 그만두고."
  "곰국에 관해서는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살인 사
  건이 나던 날 행적이 수상하긴 합니다. 그 전날 밤에
  없어졌다가 이튿날 오후 늦게 의원  사무실에 얼굴을
  디밀었거든요. 그러니까 약  22시간 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답니다."
  "어디 가서 오입하고 온 것이 아닐까?"
  "후후후, 그럴지도 모르죠."
  "그 같은 층에  산다는 30대의  복덕방쟁인지 뮌가
  하는 독신 녀석은 수상한 점이 없나?"
  추경감이 자기의 수첩을 뒤적이며 말했다.
  "구영민 말이군요. 나도 지금 그 친구가 몹시 수상
  하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밤 늦게  자주 정윤경을
  자기 차에  태우고 다녔다는  것은 확인이  되었습니
  다."
  "그 날은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보았나?"
  "본인에게 직겁  물어보기는 않았지만  알리바이는
  있을 겁니다."
  "내가 언제 자네보고 추측하라고 했나?"
  "그건 추측이 아니고 추리라고 생각하는데요."
  강형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추린지 나발인지 말대꾸 그만 하고  빨리 그 녀석
  한테 가서 직접  물어보고 오란 말이야."
  추경감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강형사는  볼멘 표
  정으로 수첩을 들고 나갔다. 강형사가 구영민을 찾아
  갔을 때 그는 자기 사무실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다가 강형사를 보고 눈이 둥그레졌다. 30대 후반으
  로 보기에는 너무 겉늙어 보이는  그는 사회인으로서
  의 관록이 풍겼다.
  "우린 불법적인 일 하는 게 없는데."
  들어서는 강형사를 보며 구영민이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저는 강력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부동산 관계와는
  거리가 멀지요."
  강형사가 웃으며 그의 불안을 덜어 주었다.
  "아하, 정윤경씨 장례식 때 뵈었던 분이군요. 그쪽
  으로 앉으시지요."
  구영민은 커다란 제스처를 쓰며 강형사에게 자리를
  권했다.
  "예,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구영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오."
  "물론 그러시겠지요."
  "그리고 그때 얼핏 듣기에는 자살이라는 말을 하던
  것 같은데."
  "예, 그때만 해도 저희가  범인의 농간에서 헤어나
  지 못하던 때지요."
  "그럼 범인이 누군지 알아내셨습니까?"
  "아직은그 때문에 이렇게 탐문을 다니는 것 아
  니겠습니까?"
  "허허, 그렇군요.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6. 순애보
  강형사는 그의 으레적인 인사말을 들으며 능청스러
  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아파트의 같은 층에 살면서 아직 범인이 잡혔는지
  안 잡혔는지도 모른단 말입니까?"
  강형사가 핀잔을 주듯 말했다.
  "강형사님이야말로 정보가 늦군요. 나는 그 아파트
  에서 나온 지 오래 됩니다."
  구영민이 빙긋이 웃으며 여사원을  불러 차를 부탁
  했다. 부동산 중개업자인 그는  여사원들만 거느리고
  있었다.
  "뭐요?  이사를 가셨다구요? 어디로 가셨나요?"
  "왜 그렇게 놀라시오? 뭐 조그만 빌라로 갔지요. 8
  억 정도 주었어요."
  "예 ? 빌라를  8억이나 주고 샀단  말입니까? 여기
  장사가 그렇게 잘 됩니까?"
  강형사는 놀라 입을 딱 벌리면서 말했다가 곧 입을
  다물어 버렀다. 빌라도  비싼 것은  10억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바쁘실 텐데 몇 가지만 물어보고 가겠습니다."
  강형사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그는 두 팔을  벌려 보이며 서양인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평소에 정윤경씨와 어느 정도 가까웠나요?"
  그 질문에 그는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강형사를 한
  참 동안 쳐다보았다.
  "무슨 뜻입니까?"
  "아니, 뭐 별 뜻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니구요. 가끔
  퇴근할 때 구영민씨 차를 타고 정윤경이 돌아온 일이
  있다고 하기에."
  "왜요? 이웃집 아주머니,  퇴근길에 좀  태워 주면
  안 되나요?"
  "가끔 정윤경씨가 당신 아파트를  방문했던 모양이
  던데특히 밤중에 말이오."
  강형사는 그의 표정을 흘금흘금 살피면서 말했다.
  구영민이 정윤경의 방에 드나든  것을 아는 사람은
  강형사뿐이 아니었다.  설성도나 손현식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어느 날인가, 설성도가 정윤경을 아파트
  앞까지 태워다 주고 막 돌아서려고 할 때, 키가 훤칠
  하게 큰 30대 남자가 다가와 윤경에게  아는 체를 했
  다.두 사람이 주고 받는 눈길이 보통 사이 같지 않아
  그 남자를 유심히 보아 두었던 설성도는  며칠 뒤 또
  그 남자를 아파트 앞에서 보게 되었었다.
  "그 미남은 누굽니까, 사모님?"
  설성도가 그 뒤 넌지시 물어보았을 때 윤경은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미스터  구라는 사람이야. 가
  끔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내기 바둑도  두고 그러지
  요."
  정윤경의 바둑  솜씨가 아마추어를  넘는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다.
  "내기 바둑을 두나요?"
  "가끔씩."
  "무슨 내기를 하나요?"
  "글쎄, 그건 미스터  설 상상에  맡기겠어. 남녀가
  내기를 하면 서로 무엇을 걸게 될까? 호호호."
  정윤경은 간지럽게 웃으면서  설성도에게 슬그머니
  팔짱을 끼었다.
  "반장님,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강형사가 호들갑스럽게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로 그러나?"
  추경감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일단  강형사의 들뜬
  기분을 마이너스시켜 버렸다.
  "반장님도 이번 일을 들으시면  그렇게 태연하시지
  는 않을 걸요?"
  강형사는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왜 그래 ? 그럼 어디 곰국이나  한 그릇 먹으면서
  이야기를 들어볼까?"
  "반장님, 이번에는  곰국이 아니라  구영민에 대한
  새로운 사실입니다."
  "그럼 설렁탕으로 먹어야 하나?"
  추경감은 여전히 반농담조로 말을 하고 있었다.
  강형사는 충격적인 첫마디를 뱉어내고 말았다.
  "구영민과 정윤경은 예전에 같은 동네에 살았던 적
  이 있었다 이겁니다."
  "한 동네 ? 그게 그렇게 대단한 사실인가?"
  추경감은 그 소리에도 별로 감동(?)을 받은 눈치가
  아니었다. 강형사는 더욱 열이 올랐다.
  "그럼요. 대단한 사실이고 말고요.  구영민의 끝없
  는 순애보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뭐, 뭐 ?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끝없는 순애보라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구영민과
  정윤경의 관계는 어제, 오늘에 있었던 해프닝이 아니
  라 벌써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사
  연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 ? 그거야말로 한바탕 해장거리가 되겠군. 어
  디 식사나 하면서 들어보도록 하세나."
  추경감도 결국 강형사의 능청맞은  작전에 결국 손
  을 들고 말았다. 그의 이야기에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구영민은 정윤경보다  세 살이  어렸다.
  둘이 처음 대면했을 때, 윤경은 이미 소녀티 나는 14
  살, 중학교 2학년 때였지만 구영민은  아직 국민학교
  5학년의 코흘리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이 차보다도
  더 큰 간격은 둘이 사는  가정 환경이었다.윤경은 부
  짓집의 막내딸이었지만 구영민은 천애고아로 뒷 골목
  의 왕초 밑에서 구두닦이 찍새 노릇을 하고 있었다.
  구영민은 중년의 지금도 미남이지만  어렸을 때 역
  시 붙임성 있고  귀엽게 생겨 그가  구두를 닦으라고
  권하면 손님들도 대개는 허허거리며 구두를 내어주고
  는 했다. 따라서 구두닦이 닦세형  역시 구영민을 아
  끼고 있었다.
  윤경과의 만남도 구영민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
  첫발이 내디뎌졌다.그 날도 여전히  구두를 찍어오기
  위하여 다방을 거쳐 중국집으로 정해진  코스를 따라
  움직이던 구영민은 적당한 구두를 발견했다.
  "아저씨, 구두 닦으세요."
  구영민은 말을 건네며 대뜸 구두를 벗기려 했다.
  "일 없다."
  신사는 발을 당기며 쌀쌀하게 구영민을 내몰았다.
  "그러지 말고  닦으세요. 번쩍번쩍  광을 내드릴께
  요."
  구영민은 붙임성 있게 웃으며 다시 권했다.
  "일 없다니까 !"
  신사의 목소리에는 역정기가 조금 섞여 있었다. 좀
  어렵겠다 싶은데 새된 목소리가 툭 끼어들었다.
  "일 없으시다는데 왜 구질구질하게  끼어들고 그러
  니?"
  고개를 돌려 보니 계집애 둘이 앉아 있었다. 그 중
  에 좀 더 나이를 먹어 보이는 계집애가 말을 한 모양
  이었다.
  "어머, 아빠 ! 쟤가 날 노려봐."
  사실 구영민은 그저 쳐다본 것 뿐이지 무슨 특별한
  생각이 있어 그 여자를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이 놈의 자식이 !"
  그런데 신사는 대뜸 솥뚜껑  같은 손으로 구영민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 일었다.
  하마터면 바닥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왜 때려요?"
  구영민은 순식간에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꼭 참으며
  말했다.하지만 목소리는 벌써 물기에 젖어 있었다.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지."
  그 계집애가 얄미운 소리를 또 했다.
  "야, 뭐야?"
  중국집 종업원이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다가왔
  다.
  "손님, 무슨 일입니까?"
  "아, 글쎄 이 자식이 구두를 안  닦는대도 계속 추
  근거리며 행패를 놓고  있잖아. 이거야  어디 밥맛이
  떨어져서 여기 다시 오겠나?"
  신사는 어깨를 넓히며 보다 근엄한 태도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
  다."
  종업원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더니 구
  영민의 뒷덜미를 잡아 번쩍 치켜들었다.
  "임마, 짱구형 얼굴 봐서 그냥 보내 줄 테니, 다시
  이런 일 있으면  그때는 정말 출입금지시켜  버릴 거
  야."
  종업원은 그래도 왕초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영
  민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너무  약이 올라 그대
  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왕초도  닦세형도 그에게
  손을 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무슨 금쪽 같은
  딸래미라고 느닷없이 뒤통수를 패버릴 수  있단 말인
  가.
  구영민은 1시간이 넘도록 씩씩거리며  중국집 앞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드디어 신사가  두 계집애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그때 일어
  났다. 두 계집애 중 작은 계집애가, 그래도 구영민보
  다는 컸지만, 쪼르르 그에게 달려왔다.
  "얘, 나 좀 봐."
  구영민은 오히려 놀라 시선을 피했다.
  "아까 일은 미안하게 됐어. 내가 대신 사과할게."
  구영민은 그 말에 더욱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쌍꺼풀이 시원스레 진 커다란 두 눈이  제일 먼저 띄
  었다. 그리고 예쁜 보조개가.
  "난 윤경이라고 해. 넌 ?"
  "구영민."
  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직도 화가 난 모양이구나."
  윤경이 무슨 말을 더하려 하였을 때 신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윤경아, 뭐하냐? 빨리 가자."
  "나 가봐야 해. 담에 또 봐."
  작은 소녀는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구영민은 자기
  보다 더 나이가 많은 형들과 어울려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조숙한 편이었
  다. 그의 꿈의 공주님으로 윤경이  자리를 잡은 것은
  그 나이에 있어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
  른다. 그녀는 그만큼 예뻤고, 구영민에게  따뜻한 말
  을 건넨 최초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 무슨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를 그렇
  게 주걸주절 늘어놓나?"
  추경감은 뭔가 쇼킹한 이야기가  나올 것을 은근히
  기대하다가 30년이나 옛적  일을 강형사가  늘어놓자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건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강형사는 포만감을 느끼며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
  다. 이제 배도 부른데 내가 급할 게 뭐냐는 식이다.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럼  다음 이야기를
  빨리 해봐."
  "반장님도 식후연초면 불로장생이라는 말도  못 들
  어보셨습니까?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시작하죠."
  "담배 피우면서 이야기하면 자네  주둥이에 불이라
  도 붙는데 ?"
  "하, 참. 그럼 어쩔 수가 없군요."
  강형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구영민이  비록 윤경
  을 꿈 속의  연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짝사랑에 불과했다.  구영민은
  그 후에 윤경을 두세 번 만날  기회가 있기는 했지만
  윤경은 가볍게 인사를 하며 지나쳤을 뿐 둘만의 시간
  을 갖는다든가 하는 기회는 전혀  없었다. 윤경은 구
  영민에게 있어 동화 속의 공주와 다를  것이 하나 없
  는 여인이었다. 그것은 사춘기의 구영민에게 좋은 작
  용을했다. 자칫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쉬운 환경에
  놓여 있던 그가 대입 검정고시까지  무사히 치러내고
  야간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윤경이라는 그
  림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 역시 윤경이 오를 수  없는 나무라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분출되지 못하는 욕구는
  엉뚱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그는 고급층을 노리는
  제비로 변신했다. 그의 제비 생활은 주민등록증을 가
  진 나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구영민은 허랑방탕한 중
  년 부인들과 놀아나며 마음 속으로는 항상 윤경을 그
  렸다. 그것이 윤경에 대해서는 큰 죄를 짓는 것 같았
  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자기
  모순의 시간 속에 그는 머물고  있었다. 구영민은 다
  른 동료들과는 달리 버는 돈을 알뜰하게 저축하고 있
  었다.그는 자신의 인생을  결코 뒷골목의  한 건달로
  마치고 싶지 않았다. 초년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
  과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는 말을 인생의 목표
  로 삼고 장차 뻗어나갈 발판을 만든다고 허황되게 번
  돈일지라도 낭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유한 부인을  상대로 협박
  같은 일도 거의 하지 않았다. 뒷날 어떤 자리에서 만
  나게 되었을 때  얼굴을 붉히는 사이가  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영민에게 있어 상류 사회란 남
  의 동네가 아니었다. 그 곳은  언젠가 자신이 들어서
  야 하는 자리였으며  따라서 그는 잘  사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 따위는 애당초 갖고 있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런 구영민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
  생했다 이겁니다."
  "가난뱅이 손현식과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점
  말인가?"
  "예, 바로 그렇습니다. 그 당시까지 구영민의 사고
  방식으로는 그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
  습니다."
  "구영민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지?"
  "구영민은 끊임없이 정윤경의 행적을  알아보고 있
  었습니다. 당시 그치는  손현식 부부가  신방을 어느
  곳에 차렸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있었단 말야?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
  기고도."
  식당 아줌마의 눈초리가 이상해서  두 사람은 일어
  서며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순애보라고  말씀드리지 않
  았습니까? 구영민의 행복은 정윤경이 어떻게 잘 되느
  냐에 달려 있었던 것이지, 자기가  데리고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과 산다면 그 집안
  의 일반적인 배우자의 수준과 비교해 볼  때 말도 안
  된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런데 손현식이라는 인물은."
  "예, 바로 그겁니다. 손현식은 비록 국립대 출신이
  기는 해도 그 점만 뺀다면 무엇  하나 자신보다 나아
  보이는 것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때서야 구영민
  은 정윤경에  대한 소유욕이  뜨겁게 불타  올랐습니
  다."
  구영민은 연상의 여인인 정윤경을  끝내 포기할 수
  가 없었다. 그는 군포에 있었던  윤경의 신혼방 근처
  를 배회하는 일이 많았다. 윤경이  고운 손을 망가뜨
  리며 현식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을 보며  그는 못내
  가슴이 아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병신 같은  새끼! 그렇게  고생시키려고 윤경씨를
  데려갔어?"
  구영민은 걸핏하면 이렇게 중얼거렸고 친구나 똘만
  이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이런 손현식  같은
  놈'이라는 욕을 해댔다. 그런 그에게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보내는 날이 왔다. 부하  하나가 허겁지겁 구
  영민의 개인 사무소로  뛰어 올라오더니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형, 그 여자가 나타났어요."
  "그 여자라니?"
  구영민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워낙에  먹고 사는
  짓이 제비 역할이다 보니 그 여자라고 해서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영 알 수가 없었다.
  "군포에 사는 그 여자."
  "뭐, 뭐야? 어디에?"
  "큰형 보러 온 거 아뉴? 우리  동네까지 왜 왔는지
  내사 모르겠수. 정사장 댁에 들어가던데 파출부 왔는
  지도 모르죠."
  "임마, 그 여자가 정사장 딸이야."
  구영민은 부하의 이마빼기를 한  대 쿡 쥐어박고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뽑은  지 얼마 안  되는 액셀을
  몰고 윤경의 집 앞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기 시
  작했다. 물경 5시간이나 기다렸을까? 밥도 차 안에서
  시켜다 먹고 기다리고 있는데 대문이 열렸다. 윤경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나타났다.  구영민은 서서히
  차를 몰아 윤경이 앞으로 갖다대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구영민은 마치 우연히 윤경과  부딪친 것처럼 너스
  레를 떨었다. 윤경도 그를 알아보았다.  야간대에 붙
  었다고 했을 때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넨 적이 있었
  다.
  "어디까지 가시는지 태워 드릴 테니까 타시죠?"
  구영민은 싱긋이 웃으며 차문을 열었다.
  "그래 주실래요?"
  뜻밖에 윤경은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차에 올랐다.
  구영민은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곧 스스로 참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구십명의
  유부녀와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싶어서였다.
  "집을 나가 계신 모양이지요? 요즘은 통 뵐 기회가
  없더군요?"
  "그래요. 저 결혼했어요."
  "예에 ?"
  "유부녀를 테워서 후회되나요?"
  "아이구, 천만에 말씀을. 저는 유부녀에게 더 친절
  한 사람입니다."
  윤경은 그 말에 살짝 웃었다.  구영민도 속으로 같
  이 웃었다. 내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면  넌 정말 펄
  쩍 퓔 거다 싶으면서.
  "자, 어디로 가시렵니까?"
  "팔자가 좋아지셨나 봐요?"
  구영민의 질문에는 아랑곳없이 윤경은 엉뚱한 질문
  을 했다.
  "팔자까지 좋아질 거야 뭐  있겠습니까? 육자나 칠
  자 정도면 몰라도."
  "예 ? 어머, 호호호."
  윤경은 구영민의 너스레에 깔깔대고 웃었다.
  "정말 오랜만인데 어디 가서 차나 한잔 하시죠."
  "차는 그만두고 술이나 한잔 사줘요."
  그 말에는 구영민이 놀라 윤경을 돌아보았다.
  "왜요? 술값이 안 되나요?"
  "원 천만에요.  저한테도 이런  행운이 오리라고는
  정말 생각지 못했습니다."
  구영민은 그 길로  차를 몰아 자주  들르는 영동의
  고급 룸살롱인 불핀치로 갔다.
  "어머나, 여긴 정말 휘황찬란하네요."
  윤경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실내를 돌아보았다.
  묵직한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은은한 불빛이 대리
  석으로 치장되어 있는 실내를 한층 더 우유빛으로 물
  들이고 있었다. 바닥의 카페트마저도  색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해서 이렇게 돈을 벌었지요?"
  브랜디를 홀짝거리며 윤경이 물었다.
  "그건 아직 밝힐 수가 없군요."
  구영민은 빙긋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보다 남편은 무엇을 하는 분인가요?"
  "학생이에요."
  "허, 학생 부부란 말입니까? 그럼  양쪽 집에서 꽤
  나 벅차겠는데요?"
  "벅차다고요? 예, 벅차지요, 벅차고말고요."
  윤경은 갑자기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아니, 윤경씨, 왜 이러십니까?"
  구영민은 당황했다. 그리고 쓸데 없는 질문을 했다
  고 후회했다. 그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
  가?
  "이거 놔요? 이 남자가 왜 이래?"
  윤경은 구영민이 슬그머니 어깨에  올린 팔을 뿌리
  치며 브랜디를 병째 들더니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
  다.
  "윤경씨 ! 이러시면 안 됩니다."
  구영민은 깜짝 놀라 윤경에게서 병을 뺏었다.
  "이거 왜 이래 ? 구영민이 너  내 남편이라도 되니
  ? 남의 여자 술 마시는 걸 가지고 왜 이러냔 말야?"
  벌써 윤경의 목소리는 풀려 있었다.
  "나쁜 새끼들. 다  나쁜 놈들이야.  남매면 뭐하고
  부모면 뭐해 ?"
  윤경은 얼굴을 탁자에 묻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몸이 축 늘어져 물에 젖은 솜덩이  같은 윤경을 구
  영민은 능숙한 슴씨로 부축을 하고  나왔다. 그런 광
  경을 이미 수없이 보아 온 불핀치의 웨이터는 여전히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윤경이 정신을  차린 것은
  호텔 방에 아침이 밝은 뒤였다.
  "어 ? 여기가 어디지 ?"
  무심히 중얼거린 윤경은 다음 순간 화들짝 놀라 자
  기 몸을 살폈다. 옷은  지난 밤 입고  있던 그대로였
  다. 차가운 냉기가 등골을 훑어 내려갔다. 옆에 누군
  가가 잔 흔적 같은  것은 없었다. 약간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욕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 얼굴
  을 씻다 보니 목욕도 하고  싶어졌다. 깨끗한 욕실에
  서 혼자 목욕을 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었다.
  천천히 옷을 벗어 나갔다. 따뜻한  물이 욕조에 차
  오로는 것을 보고  있자 공연히 마음이  안정되어 왔
  다. 샤워를 막 마치자 전화벨이 울렸다. 윤경은 실오
  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태연히 전화를 받았다.
  "잘 주무셨습니까? 구영민입니다."
  "아이 고마워요. 지금 어디 계세요."
  "옆방입니다. 그런데 아무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하
  셨으니 큰 일입니다."
  "괜찮아요. 집에 다녀온다고 나왔던걸요, 뭐."
  윤경은 그렇게 얘기를 주고 받고 있자니 서서히 몸
  도 추워지고 부끄러움도 생겨났다.
  "저 얼굴 좀 씻고 나가도록 할께요. 기다려 주시겠
  어요?"
  "물론이지요. 천천히 하십시오."
  "금방이면 돼요."
  "그럼 한 시간 후에 스카이  라운지에서 뵙도록 하
  겠습니다."
  그 한 시간 동안 윤경은 꼼꼼히 화장을 고쳤다. 손
  현식에게 잘 보이려고 하던 때보다  더 열심이었는지
  도 모른다. 구영민은  대단한 신사라는  생각이 들었
  다. 만약 처녀 때 그를 좀 더 알았다면윤경은 나
  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카이  라운지에 올라가
  자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이 구영민이
  앉아 있는 모습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어제는 제가 못난 꼴을 많이 보였죠?"
  "아닙니다. 윤경씨가  그렇게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왜 진작 저를 한번 찾지 않으
  셨습니까?"
  "그거야."
  윤경은 말을 꺼내려다가 입안으로 삼켰다. 눈치 빠
  른 구영민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구두닦이나 하던 꼬맹이한테  무슨 손  벌릴 일이
  있겠느냐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구두를 닦는
  소년이 아닙니다."
  구영민은 먹던 비프 스테이크를  옆으로 밀어 놓으
  며 말했다.
  "저 자신 어두운 그늘 아래서 커  왔고 또 그 그늘
  을 삶의 모든 것으로 알고  지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있
  었기에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던 겝니다."
  "그게."
  "그렇습니다. 나는 항상 윤경씨를  바라보며 저 환
  한 빛의 세계로 나갈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윤경씨
  는 내게 이상의 연인이었습니다."
  구영민은 잠시 말을 끊고 윤경을 바라보았다. 윤경
  의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어젯밤 강제로 윤경씨를 차지할 수도 있었습
  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나는, 단지, 윤경씨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것 만으
  로 족한, 불을 따르는 나방과 같은 그런 존재일 뿐입
  니다."
  말을 마치며 구영민은 윤경  앞으로 손수건을 내밀
  었다.
  "이게 뭐지요?"
  "돈입니다."
  구영민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난."
  윤경이 난색을 표했다.
  "10년 거치로 빌려 드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원금
  만 갚아 주십시오."
  윤경의 말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구영민의 말이었
  다. 윤경은 눈물을 두 세 방울 흘렸다. 그 돈을 거절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도 한스러웠고 자신을 이렇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도  감동하여 나온
  눈물이었다.
  "그럼 그 돈이."
  "예, 바로 손현식을 군포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
  려준 돈이었던 겁니다. 어머니한테서  받았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지요."
  추경감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 참, 작금의 현실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
  야기구만. 그럼 그  당시에는 아무  사고가 없었다는
  것인데, 언제부터 둘이 사고를 치기 시작한 거야?"
  "그건 구영민이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온 뒤의 일인
  것 같습니다. 지금 아파트는 바로  손현식의 첫 작품
  이었는데 여기에 구영민이  입주하는 데는  정윤경의
  힘이 꽤 컸던 모양입니다."
  "그 전에는 둘이 만난 적이 없단 말야?"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선을 넘어본 적
  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말하자면 평범한 친구 관계였
  다고 할까요."
  "그런데 갑자기 왜 사태가 진전한 거야?"
  "그거야 뭐, 이제 나이도 들어가고 하니까."
  "뭐야? 그럼 나는 오입을 했어도 수십 번을 했어야
  겠네."
  "그거야 뭐 알  수 있습니까? 제가  한번도 조사를
  안 해봤는데."
  강형사가 시치미를 떼고 하는  말에 추경감도 어이
  없는 웃음을 머금어 보였다.
       7. 새로운 용의자
  오하영은 설성도에게서 은근히 풍겨오는 수상한 냄
  새를 지그시 참아 나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자기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
  릴 것 같아. 우리 당분간 냉각기를 갖는 게 좋겠어."
  "도대체 왜 그래 ?"
  설성도도 짜증스럽게 하영에게 반문했다. 강형사가
  비위 좋게 웃으며 엉겨붙는 것이나 하영이 자꾸만 이
  상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나 그에게는  커다란 압박
  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자기가 그 늙은 유부녀와 바람을 피웠다는 것까지
  는 이해할 수 있어요."
  "말 조심해."
  "흥, 하지만 정말 못 참겠는 건 자기가 그 늙은 색
  녀를 죽인 것은 아닐까 하는."
  "사모님을 그런 식으로 보지 말아 ! "
  설성도가 고함을 빽 내질렀다.
  "죄지은 게 있긴  있는 모양이지. 고함을  치는 걸
  보니."
  하영은 움츠러들기는 커녕 큰소리를 치고 나왔다
  "설성도씨, 우리 이렇게 피곤하게 나가지 맙시다."
  설성도는 지쳐 있었다.
  "이봐, 하영이, 어떻제 해야 내 말을 좀 믿어줄 수
  있겠어 ? "
  "혈서를 써 주면 혹 믿을지 모르지."
  "이봐, 농담이 아냐!"
  "나도 농담이 아니에요."
  설성도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좋아, 그럼 말야, 우리가 진범을 잡아내면 어때 ?
  내가 범인이 아니라면  내 결백도 자연  입증이 되는
  것이겠지?"
  설성도의 제안은  오하영에게 좋은  반응을 유도했
  다.
  "우리가 탐정이 된다는 거지. 그거 좋은 생각인데.
  이 연극의 제목은 '쥐덫'이라고 한다는 말이지 ?"
  하영의 뒷말을 설성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리
  둥절한 그의 얼굴을  보며 하영은 웃으며  알려 주었
  다.
  "'햄릿'에 나오는  대사야. 햄릿이  아버지를 죽인
  삼촌과 그 자의 가공스런 동반자인  어마마마에게 그
  자들의 범죄를 그대로 재현하는 연극을  보여주자 왕
  과 왕비는 공포에  떨며 연극을 보다가  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햄릿에게 묻는 거야. '왕자는  내용을 알고
  있는가? 연극 중에 괴이한 점은  없는가?'하고 말야.
  햄릿은 대답하지. '그저 강난일 뿐입니다. 이 연극의
  제목은 '쥐덫'입니다. 하고."
  "뭐야, 그럼 내가 이미 사건의 내용을  다 알고 있
  다는 거야?"
  설성도가 뾰루퉁하게 말했다.
  "오, 아니에요. 우리 아가."
  하영은 방긋 웃으며 설성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
  을 포개었다. 설성도는  그만 정신이  아득하여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이 하영의 부드럽고 가는 허리를
  담쑥 안아서 끌어당겼다.
  허리 벨트를 풀고 원피스의 지퍼를  쭉 내렸다. 하
  영은 순식간에 브래지어와 팬티만을 걸친  채 설성도
  앞에 서 있었다.
  설성도는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하영의 몸에 자신
  을 밀착시켜 나갔다.  브래지어 위로  하영의 봉긋한
  젖가슴의 감촉이 전달되어  왔다. 부드럽게  그 위를
  어루만지자 하영의 꽃 같은 입술은 어느새 달디단 신
  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이런, 어느 놈이 이 시간에  찾아오고 지랄이야 !
  "
  모처럼 하영의 기분을 돌리는 데 성공하고 그 여파
  를 몰아 앙금을 모조리 없애 버리려  작정을 하고 있
  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자, 설성도의  울화는 끝간 데
  를 모르고 치솟았다.
  "그냥 내버려 둬."
  일어서려는 설성도의 머리를 매끄러운 자신의 복부
  로 끌어당기며 하영이 말했다.
  "저러다 지치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가겠지."
  "그래, 그래."
  설성도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하영의 몸을 돌
  려 침대 위로 올려놓았다. 석양의  비낀 햇살이 하영
  의 볼륨 있는 몸매를 더욱 아름답게 비춰 주었다. 팔
  을 돌려 브래지어의 고리를 풀려 하던 설성도에게 불
  현듯이 고개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그걸 모두 놓치고 있었어."
  설성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초인종 소리는 아직
  도 나고 있었다.
  "누구세요?"
  하영은 어이가 없어 그런  설성도를 멍하니 바라보
  았다.
  "자기, 왜 그래?"
  그러나 설성도는 그 말에  대답을 하긴커녕 셔츠를
  팔에 끼우고 현관으로 나갔다.
  "강형사올씨다."
  "햐, 안 그래도 강형사님이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이
  내내 들고 있었어요."
  설성도는 문을 열며 반갑게 말했다.
  "왜 이렇게 문을 안 여셨어요? 밖에 오하영씨 차가
  세워져 있길래 올라왔는데."
  강형사가 의미 있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열린 방
  안으로 하영의 매끄럽고 긴 다리와  아무렇게나 팽개
  쳐진 원피스가 훤히 보였다.
  설성도가 강형사의 시선을 가로  막듯이 서서 방문
  을 닫았다.
  "헤헤, 제가 영 때가 안 좋은 날 찾아왔군요."
  강형사가 겸연쩍게 웃었다.
  그 소리는 방문 너머로 하영에게도  들렸다. 그 말
  에 하영은 속이 메슥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활짝
  피어 버리지 못한 욕망의 앙금이 모조리 울화로 바뀌
  는 것 같았다.
  "그래요! 이런 때 쳐들어오다니  날강도 같지 않아
  요!"
  하영은 방문을 꽝 걷어차고 나왔다. 강형사는 얼른
  돌려 외면했다. 하영은 브래지어와 팬티 바람으로 그
  냥 뛰쳐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영이 ! "
  설성도가 놀라 화를 내며  하영을 방안으로 밀어넣
  었다.
  "왜 이래 ? 자기 여자보다 강형산지 강아지 새낀지
  가 더 좋은 사람이."
  "듣겠다. 여자가 이게 무슨 보일 만한 꼴이라고 이
  러고 나타나? "
  "흥, 저 능구렁이는 볼 것 다 본 녀석인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몰라 !"
  하영은 샐쭉해서 뒤돌아서 버리고 말았다.
  "저 능글맞은 형사가 내가 다니는  여성 전용 헬스
  클럽에 불쑥 뛰어 들어왔었단 말야."
  "뭐야? 알았어. 옷이나 빨리 입어."
  설성도는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서  방에서 나왔
  다. 강형사는 시간을 잘못 골라  찾아왔다 싶어서 좌
  불안석이었다.
  "강형사님, 잠시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강형사는 영문을 모르는 채 엉거주춤 일어섰다.
  "에잇!"
  설성도는 그 순간 강형사의  아랫배에 강펀치를 날
  렸다. 격심한 고통으로 강형사는 배를 움커쥐고 쓰러
  졌다. 그 순간  역시 설성도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무슨 증거를 잡은 걸로 착각하고 자신을 없애
  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내 애인의  몸을 훔쳐본 댓가요.  만약 폭력
  행위로 날 체포하겠다면 체포해 가도 좋소."
  강형사는 간신히 몸을 추스리며 말했다.
  "난 아무것도 보지 않았소."
  "헬스 클럽에서도?"
  그 말에 강형사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
  에 그 곳의  여자 손님들이며 여주인에게  얼마나 낯
  뜨거운 곤경을 당했는지 설성도는 몰랐다.
  "그 점은 내가 솔직히 설형에게 사과하리다."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고 말이오?"
  "아니, 아니, 난 그런 말재주에는  능한 사람이 아
  닙니다."
  "거짓말 말아요. 추경감님이 맨날 되다만 문학도라
  고 부르던데요, 뭘."
  강형사는 비록 배가 아팠지만 웃음을 띠지 않을 수
  가 없었다.
  "하하, 좋아요. 이번은  공무집행 방해나  기타 등
  등의 죄목을 적용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런 일이
  종종 있어서는 곤란해요."
  "그건 저 역시 동감입니다."
  설성도도 웃으며 손을 내밀어  강형사와 악수를 나
  눴다.
  "그런데 설형은 나에게 뭐 특별히  할 이야기가 있
  는 모양인데."
  강형사는 자리를 잡자마자 물었다.
  "그래요, 사모님에게는 병숙이라는  친구가 있었어
  요."
  "그건 알고 있소. 실종 신고가 들어와 있는 상태지
  요."
  "사건이 있던 날 저는 사모님을  차로 댁에까지 모
  셔다 드렸지요. 그리고 거기서 커피  한 잔을 대접받
  는."
  설성도는 말을 하다가 그만 말끝을 흐리게 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의 애초의 생각은 바로 그 찾아왔던
  남편이 수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만일 경찰이 그를  조사하기 시작한다면
  분명 그는 그날  윤경의 모습에 대해서  진술하게 될
  것이고 자신은 더욱 윤경과 불륜의 관계에 놓여 있었
  다는 오명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건 지난번에 진술한 내용이군요."
  강형사가 다음 말을 재촉하듯이 설성도를 바라보았
  다.
  "그때 찾아온 사람이 있었어요."
  설성도는 이미  빼어든 칼이라고  생각하고 내뱉어
  버리고 말았다.
  "그럼 그 사람이 바로."
  "예, 바로  병숙이라는 친구의  남편이라고 했습니
  다. 물론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럼 설형과 더불어 살아 있는 정윤경씨를 마지막
  으로 본 사람이 되겠군요?"
  "무슨 말씀을. 살아 있는  사모님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범인 이외에 다른 사람이 아니지요."
  "물론 지당한 이야기지요. 문제는  그 범인이 누구
  냐는 것이지요."
  강형사가 같은 이야기를 이리저리  돌리며 하는 양
  을 설성도는 지켜보며 이 사실을 공연히 가르쳐 주었
  다는 후회가 들었다. 만일 하영이만  이 자리에 없어
  도 강형사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양해를 구해  볼 수
  있었을텐데, 하영이가 방문 뒤에서 촉각을 세우고 듣
  고 있으리라 생각하자 그 이야기를 더  이상 꺼낼 엄
  두가 안 났다.
  어쩌면 벌써 어떤 감을 잡고 있을는 지도 몰랐다.
  "그건 그렇고, 강형사님이 제가  무슨 생각이 떠올
  랐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고, 무슨 이
  유로 이렇게 왕림하셨습니까?"
  "예, 사실은 고인국 의원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어
  서 왔습니다. 고인국 의원을 아시지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사무소와도  약간 관계가 있
  지요."
  "그리고 손현식씨와 과거 연적의  관계였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예, 최근에 우연히 들었습니다."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사모님한테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설성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얘긴 내가 내일 시경으로 찾아가서 드리지요."
  그제서야 강형사도 씩 웃으며 낮게 말했다.
  "이런. 제가 너무 눈치가 없군요."
  강형사는 다시 큰 목소리로 말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문을 향해서도 한 마디 했다.
  "오하영씨도 잘 계십시오."
  강형사가 나가자마자 오하영이 뛰쳐나왔다. 여전히
  브래지어와 팬티만을 걸친 상태였다. 하영은 그 자세
  그대로 설성도에게 뛰어와 안겼다. 설성도는 한 손으
  로 하영을 애무하며 다른 손으로 자신의 옷을 벗어나
  갔다.
  한바탕 격랑이  지나가고 나서  하영이 설성도에게
  담뱃불을 붙여 주며 물었다.
  "그 여자랑 뭘 하고 있을 때 그 남자가 찾아왔어?"
  "뭘 하기는?"
  설성도는 뜨끔했지만 시치미를 뗐다.
  "그럼, 왜 내 브래지어를 벗기려다 말고 그 생각이
  났었느냔 말야, 이 사기꾼 같은 남자야! "
  "그거야 그냥  떠오른 생각이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거야."
  "그 말 믿어도 되는 거야?"
  "믿어, 이 사람아. 벌써 의부증이라도  있는 것 아
  냐?"
  설성도는 하영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할 요량으
  로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가슴을 꼭 움켜쥐
  었다.
  "아이, 아파."
  하영은 코먹은 소리를 내며  앙탈했지만 그 문제를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하늘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강형사는 바로 시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초 경찰
  서에 먼저 들렀다. 전병숙이라는 윤경의 친구가 살고
  있는 곳이 이곳 관할이었기 때문이었다. 강형사는 서
  초 경찰서에서 그 동안의 수사 진행에 대해서 소상한
  자료를 건네받을 수가 있었다.
  "남편은 진형구. 나이 48세로  운수업을 하고 있었
  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병숙의 실종을 담당하고 있는  하일우 경사가 대답
  했다.
  "운수업이란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겁니까?"
  "트럭업을 말하는 겁니다."
  "그럼 망하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예, 바로 그렇습니다. 저희 생각에는  그 부인 되
  는 전병숙씨의 실종도  사실은 그 부도  사건에 따른
  가출이 아닐까 여기고 있습니다."
  "부도를 냈단 말이군요?"
  "예, 사실 조사해 본 결과 진사장의 잘못은 없다고
  해도 무방할 만한 일이더군요."
  강형사는 이 작달막한 하경위가  맘에 들기 시작했
  다.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참 야무지게 조사를 했다
  는 느낌이 들었다.
  "그 부도 건은 그 계통에서는 제법 대기업 축에 들
  어가는 한성통운이 진사장의 회사를 말아먹으려는 작
  정에서 비롯된 사건이었습니다. 한성통운은 형구운수
  에게 막대한 공사를 하청시키고는 공사비에 허덕이는
  형구운수에 제대로 어음을 끊어주지 않아  부도로 넘
  어지게 했답니다. 참말 돈이란 게 뭔지있는 놈들
  이 더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지요."
  "만약 납치 등의 사건이 아니라면 갈 만한 곳이 뻔
  한데 다 조사가 되었습니까?"
  "먼저 친정집부터 조사를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사
  위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던 모
  양이었습니다.
  부인도 남편이 망했는데 친정으로  돌아갈 것 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남는 건 친
  구들 밖에 없는데 꽤나 친한 친구들이  세 명 있더군
  요. 그러나 셋 다 아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이번
  에 죽은 정윤경이라는 여자지요."
  "집을 나가던 당시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마침 진사장이 집에 막 들어간  뒤에 나왔다고 했
  습니다.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 자신이  들어가자 놀란 듯이
  전화를 끊고 잠깐만 나갔다 오겠다고 말했답니다. 그
  말을 할 때는  예전대로 평안한 자세여서  아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답니다. 저녁밥을 차려 놓고는 핸드
  백 하나만을 가지고  태연히 집을  나섰답니다. 어디
  가느냐고 물었지만 그저 좋은 일로  나가는 거라고만
  말했다더군요."
  "좋은 일이라?"
  "진사장은 어디에 돈을 꾸러 가는  것은 아닐까 하
  고 생각해서 깊이 물어보지 않았다고  여간 후회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이미 부도가 났는데도 만회할 길이 있는 건가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지만 빚도  갚아야 하는 것일
  테고 재기를  하기 위해서도  돈은 필요하지  않습니
  까?"
  "음, 그건 그렇겠군요."
  강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큰 도움이 되겠어요."
  강형사는 꼼꼼한 하경위에게 치사를 하고 서초서를
  나왔다.
  일단 시경에 전화를 넣어 성과 보고를 할까도 생각
  했지만 쫀쫀한 추경감의 화살를 벗어나려면  이왕 손
  댄 김에 뿌리를 보아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그대
  로 진사장의 집으로 향했다.
  진사장의 집은 아직 차압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는
  지 50평의 큼직한 아파트 그대로였다. 경찰이라는 소
  리에 반색을 하며 문이 열렸다.
  "아내에 대해서 무슨 단서라도 있습니까?"
  며칠 잠을 설친 모양인지 꺼칠한 모습에 피곤에 지
  친 40대의 사내가 거기 있었다. 금방 라면을 끓여 먹
  었는지 아파트 안에 라면 냄새가  스며 있었다. 이런
  고급 아파트에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다.
  "지금 전력을  다해서 수사  중입니다. 참고적으로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아내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라도 성심껏
  알려 드리겠습니다."
  "부인이 나가기 전에 돈 문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
  이 게십니까?"
  "이야기야 거의 매일 했지요. 그 망할 놈의 부도가
  난 이후로."
  진사장의 눈쌀이 찌푸려졌다.
  "부인은 돈 문제에 대해서 뭐 특별한 말을 한 적은
  없습니까? 이를테면 걱정 말라든가, 자신이  구해 오
  겠다든가 하는 식의 말 말입니다."
  "딱 부러지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단지
  어떻게 해서라도 구해 보겠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요.
  하지만 그게 그렇게 큰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라고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진사장은 허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마치 아내가 그
  곳에 있는 양.
  실종된 다음날 정윤경이라는 부인의 친구분을 찾아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슨  단서라도 얻으셨습니
  까?"
  "특별한 단서는 없었습니다.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고 오히려 놀라더군요.  그런데 그때  가운을 걸치고
  나와서 눈둘 곳이 없어서 아주 당황했었습니다."
  "어 ? 그게 정말이십니까?"
  "물론 정말이지요."
  진사장이 불쾌하다는 투로 강형사의  말을 받았다.
  강형사는 정중히 사과를  했지만 속으로는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 시간에 설성도는 손현식의 아파트에 있었다. 그
  런데 정윤경은 가운을 달랑 걸치고 친구 남편을 맞았
  으니,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설성도 녀석 아무 일 없었다고 내숭만 떨더니 사실
  은 뒤로 호박씨는 다 깠군 그래.
  강형사는 절로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진사장은 그런 강형사를 더욱  불쾌한 눈초리로 뱌
  라보았다.
  강형사도 눈치를 챘다.
  "이런, 이런. 실없이 웃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전
  혀 다른 문제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부인의 경우도
  단순 실종이 아니라  다른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납치입니까?"
  진사장은 겁에 질린 말투로 변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답변을 드리기 어
  렵군요."
  강형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부인과 정윤경씨는 어떤 사이였습니까?"
  "고등학교 동창에 대학도 같이  백합여대에 들어갔
  지요. 서로 과는 틀렸습니다만. 그래서 대학시절에도
  단짝으로 지냈던 모양입니다. 저는 졸업 후에 중매로
  만나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
  다. 아마 손교수가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손교수
  는 대학 다닐 때 부인을 만났다고 했으니까."
  "그럼 최근에 손교수  부부에 대해서  특별히 어떤
  이야기를 한 적은 없습니까?"
  강형사는 일정한 답을 기대하며 물어보았다.
  "아니오. 그 당시엔 남의 부부 문제나 이야기할 만
  한 한가한 기분이 아니었을 때라서."
  진사장의 대답은 기대 밖이었다.  하지만 강형사는
  나름대로 가정을 하고  있었다. 아직은  그 가정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강형사는 진사장을 새로운 용의자로 등록했다.
       8. 알리바이 추적
  이른 아침부터 벨이 울리고 있었다.
  요즘은 일이 전혀  없어 모처럼 늦잠을  즐기게 된
  설성도는 투덜대며 문으로 나갔다.
  "선한 자는  오지 않고  온 사람은  선하지 않았더
  니."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하영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선하지 않다는 거야?"
  밖에 비가 오고 있는지 하영의 아랫도리는 흠씬 젖
  어 있었다.
  "말이라고 해 ?  오늘은 또 무슨  바가지를 긁으러
  왔는지 알게 뭐람."
  설성도는 그렇게 말을 하며 담요를 가지고 와 하영
  을 감싸주었다.
  "비 많이 와?"
  "많이 오는 정도가 아니고 숫제 장마야."
  하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잘 됐네. 비도  오고 하니까 나가지  말고 집에서
  놀지?
  창수랑 순영씨를 불러다 고스톱이나 한판 할까?"
  "어유, 누가 한국 토종품이 아니랄까봐. 무슨 고스
  톱이야,
  고스톱은."
  하영은 말하며 재치있게 담요  속에서 바지를 벗었
  다.
  "바지 마르거든 나가도록 해요."
  "응? 어딜?"
  바지를 가지고  화장실로 가며  설성도가 건성으로
  물었다.
  "먼저는 남편 손현식 소장의 알리바이 조사부터 시
  작하는게 순서일 것 같아요."
  "뭣 ?"
  설성도는 깜짝 놀라 되돌아왔다.
  "왜, 자기가 그랬잖아. 진범을 잡아 누명을 벗겠다
  고. 그러면 범인을 잡는 작업을 빨리 시작해야지."
  설성도는 그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무엇부
  터 이야기를 해야 될는지 영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오하영씨 ! 우리가  무슨 경찰이야?  무슨 재주로
  범인을 잡는다고 그러는 거야?"
  설성도는 하영이 뭐라고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계
  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조사를 한다고 해도 그래. 왜 선생님을 조
  사해야해?"
  "무슨 남자가 그렇게 생각이 짧아?"
  더 말하려는 설성도의 말을  중도에서 하영이 날카
  로운 어조로 끊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조사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 "
  "암."
  설성도가 갑자기 크게 고개를  끄덕여 하영을 당황
  하게 만들었다.
  "누구?"
  "카인."
  "카인 ? 카인이 누구야?"
  "카인도 몰라? 성경에  나오잖아, 동생  아벨을 죽
  인."
  "에이, 뜬금없이 갑자기 성경은  왜 들먹이고 그래
  ?"
  하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나님이 살인범 카인의 얼굴에  표지를 붙여 줬잖
  아? 카인을 죽이면 보복을 받을 것이다. 어쩌구 저꺼
  구 하면서 말야."
  "그래서 살인범을 찾으면  벌 받을까  무섭다 이거
  야?"
  하영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와락 설성도에게 달
  려들었다.
  "이거 왜 이래 ? 말만한 처녀가  허벅지를 다 내놓
  고."
  설성도가 후다닥 달아나며 말했다. 그 말에 하영도
  웃으며 멈취섰다.
  "이리 와요."
  "가면 안 꼬집는 거야?"
  설성도가 아기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했다.
  "장난치지 말고요."
  하영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제서야  설성도도 천천
  히 하영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 앉아서 천천히 말해 봐요."
  하영이 설성도의 팔을 잡아 끌며 앉혔다.
  하영은 블라우스 자락을 끌어내려  훤히 드러난 허
  벅지를 가렸다.
  "성도씨가 자기 선생님을 변호하려는 맘은 잘 알아
  요.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잖아요?"
  하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이 이야기했다.
  "사모님은 정말이든 아니든 간에 여러 남자와 루머
  가 있었어요? 그렇죠?"
  설성도는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생님이 수호지에 나오는 무대가  아닌 이상에야
  그 소문을 어디선가 듣고 사모님을 죽."
  "천만에. 절대로 그러실 분이 아니야. 얼마나 사모
  님을 알뜰히 생각하시던 분인데."
  "그렇게 알뜰히 생각하셨다면 왜  걸핏하면 자기더
  러 차를 몰아서 집에 데려다 주게 했겠어요?"
  "바쁘니까 그렇지.  더구나 바람피는  아내를 이런
  미남한테 붙여서 집에 돌려 보내겠어?"
  "자기가 그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도 몰라요. 그리고 바람을 피우고  있기 때문에 평소
  에는 얼굴을 보기 싫어서 바쁜 척한 건지도 모른다고
  요."
  "그건 말도 안 돼. 내가 늘 곁에 있는데 바쁜 척하
  는 건지, 정말 바쁜 건지를 모르겠어 ?"
  "하지만 한번 생각해 봐요. 자기는 집에 와서 자는
  데도 선생님은 사무실에서 밤 새우는  일이 많았잖아
  요?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그건 하영이가 몰라서 그래. 선생님은 사모님하고
  결혼하기 위해서 집안과 절연을 하다시피 한 분이야.
  따라서 젊은 시절에 얼마나 고생을 한 줄 알아? 그런
  고생이 뼈에 사무쳐 계시다 이 말이야. 그 덕분에 일
  에 대한 애착이 남보다 휠씬 강해지신 거다 이거야."
  "본래의 목적보다도요 ?"
  "본래의 목적이라니?"
  "돈을 벌려는 본래의 목적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서가 아니었나요? 그런데 이제는 돈이, 그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린 짝이네요."
  "그렇게 말하는 건 하영이가 가난이라는 고통을 실
  제로 부딪쳐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사변
  적인 말에 불과하다는 거지."
  "그래요, 좋아요. 사변적이라고 해둬요. 하지만 조
  사는 해야만 해요. 선생님이나 루머가 있었다는 고인
  국 의원이나 다 믿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예요."
  하영은 조사라는  기본 원칙에서는  물러서지 않는
  다.
  "흥,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
  설성도는 짜증스럽게 말하며 벌떡 일어섰다.
  "내 바지 다 말랐어요?"
  하영이 웃으며 설성도를 다시 앉혔다.
  "그렇게 화를 낼 문제가  아니잖아요? 성도씨는 평
  소에 사모님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이런 시절에는
  볼 수 없는 현모양처니 뭐니 해 가면서요."
  "그게 듣기 싫었다 이거지?"
  "그런 말이 아니에요.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던 사
  모님이 이제는 숱한 루머에 싸여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잖아요? 그걸 밝혀 주는 것도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속한다고요."
  "그래, 좋다고. 누가 뭐랬나?"
  설성도는 약간 누그러진 말투가 되었다.
  아직도 설성도가 정윤경을 헌신적인 훌륭한 아내라
  고 생각하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정숙한 아
  내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
  다. 대학 시절의 경험도 그렇고 바로 죽기 직전에 있
  었던 해프닝도 있지 않았던가?
  설성도가 하영의 주제넘는 양을  그저 내버려 두려
  고 하는 것에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하영이 직접 일
  에 나서서 조사랍시고 돌아다녀 보면 그게 얼마나 쉽
  지 않은 일인지 잘 알게되고 스스로  손을 뗄 것이라
  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일에 나서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하영은 기자라고 자기를 자칭해 가며  아주 뻔뻔스
  러울 정도로 일을 척척 진행시켜 나갔다.
  "옥문 식당에 그날 밤 한시하고  새벽 다섯시에 설
  렁탕을 배달했다는 걸 확인했어요."
  하영이 얼굴을 약간 상기한  채로 설성도가 기다리
  는 다방에 들어오며 말했다.
  "그럼 선생님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군.
  사모님은 새벽 다섯시경에 돌아가셨다고 했으니까."
  "그건 꼭 그렇지도 않아요. 옥문 식당의 주인은 선
  생님을 직접 만난 것이 아니라고요."
  그 말을 설성도는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중요하
  거나 긴급한 프로젝트를 맡았을 경우  보안과 안전의
  문제 때문에 문 안에 아무도 들여 놓지 않는 것이 사
  무실의 관례였다.
  "식당 주인이 본 것은 단지 창에 비친 선생님의 실
  루엣 뿐이었어요."
  "설마하니."
  설성도는 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것까지 서로 확인할 필요는 없잖아요?"
  하영은 차갑게 말했다. 설성도는 가슴이 크게 울렁
  거려 제대로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날 있었
  던 프로젝트 건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기
  술상 어려웠던 일도 아니었고 시간이 촉박한 것도 아
  니었다. 그저 일거리가 있으면 미뤄놓지를 못하는 선
  생님의 체질 때문에 야근을 하시겠다는  줄 설성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또 하나의 버릇이 선생님을 위기로 몰아
  넣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그저 버릇일 뿐이야."
  설성도가 으르렁대듯이 말했다.
  "누가 뭐라나요?"
  하여튼 흥분하는 설성도가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었다.
  "우리, 사무실로 한번 가 보지요?
  "사무실에는 왜? 아무도 없을 텐데 ?"
  "아무도 없으니까 가 보자는 거지요."
  하영은 설성도의 팔을 잡아당겼다.
  설성도는 갖고 다니는  사무실 키로  문을 열었다.
  벌써 보름 이상을 들어와 보지  않았다. 먼지가 뽀얗
  게 앉아 있다가 사람들이 들어서자 풀풀 솟아올랐다.
  "에휴, 이게 뭐야?"
  하영이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으며 말했다.
  "그러길래 들어오지 말자니까."
  설성도가 핀잔조로 말했다. 다행히  평소에 청소를
  잘해 두는 편이라  창문을 열어 공기를  갈자 먼지는
  곧 가라앉았다.
  "선생님이 나온 후로  이곳에 온  사람들은 없었나
  요?"
  "왜? 미스 배가 나와서 선생님하고 자리를 바꾼 뒤
  에야 선생님이 집으로 가셨을 거라고."
  "자기는 왜 없었나요?"
  "몰라서 물어 ?"
  "몰라요."
  "자고 있었어."
  "어머, 팔자도 좋아. 그래도 안 짤려요?"
  "짜르면 사무소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인데 ?"
  "피, 거짓말."
  하영은 혀를 낼롬 내밀었다.
  "뭣 때문에 여길 들어오자고 한 거야?"
  설성도가 다시 물었다. 평소의 사무실과 다를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하영은 말하며 사무실 이곳 저곳을 유심히 살폈다.
  "쓰레기통은 언제 비우나요?"
  "매일 퇴근 전에. 그리고 아침에 출근해서 보통 청
  소를 하지."
  "청소를 자기가 해요?"
  "응. 아니, 보통은 미스 배가 하지."
  "잘하는 거예요.  앞으로도 그렇게  하도록 하라고
  요."
  "비꼬는 거야 ?"
  "아니에요. 멀쩡한 자기가 청소를 왜 해요?"
  "점점, 그럼 멀쩡하지 않은 사람이 청소를 하나?"
  "그만!"
  하영은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한 튀 쓰
  레기통을 들어올렸다.
  "사무실에 쓰레기통이 이것 하나예요?"
  "아니, 그건 응접실용인 셈이고  각자들 책상 옆에
  하나씩 놓여 있어."
  "됐어요. 밥 먹으려면 여기서 먹었을 테니까."
  하영은 쓰레기통 뚜껑을 열더니  조심스레 안의 내
  용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무실 안의 휴지통이라  부패성 물질이 들
  어 있지않아 썩는 냄새 따위는 나지 않았다.
  하영은 미리 생각을 했는지 핸드백 안에서 비닐 봉
  지 하나를 꺼내더니 쓰레기를 옮겨 담기 시작했다.
  "이건 휴지 그리고 소독저."
  두 가지 물건을 옮기더니 다른 건 더 없나 하는 식
  으로 쓰레기통을 뒤적뒤적대는 것이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요."
  하영이 간단하게 대답을 회피했다.
  "이제 보니 하영이, 미국에서 영문학 공부한답시고
  셜록 홈즈만 들입다 읽어댄 모양이군."
  "왜 안 그랬겠어요? 애거더  크리스티의 앵큘 포아
  로, 미스 매플도 다 읽었답니다."
  하영은 설성도의 기를 죽이기라도  할 양으로 혀를
  굴리며 영어 발음을 냈다.
  "오우, 그렇습네까?"
  설성도가 비꼬는 투로 말하자  하영의 얼굴도 굳어
  졌다.
  "농담으로 이러고 있는 것 아니에요. 다 필요한 일
  이고 시간이 지나면 못해낼 일일지도  모르는 거라고
  요."
  사무실 밖으로 나오자  비가 서서히  개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검은  구름이 물러나고 있는  것이 보였
  다.
  "잘 됐어요. 자기는 이 길로 고인국 의원의 알리바
  이를 조사해 주세요. 난 들를 데가 있어요."
  "뭐야?  날 여기 팽개쳐 두고 가겠다고?"
  설성도는 기가 막혔다.
  "급한 일이라니깐. 자기가  무슨 한두 살  먹은 어
  린애예요?"
  "아니지, 세 살 먹은 어린애야."
  "말 장난할 시간 없어요. 오늘 밤에 봐요."
  하영은 차에 오르더니 시동을 걸었다.
  "하영이, 난 고인국이와 만난 적도 없다고."
  "거짓말 말아요. 사무실에 미팅 약속이 돼 있는 메
  모지를 벌써 봤어요."
  하영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더니 재빨리 차를 전
  진시켰다.
  "잘 먹고 잘 살아라 ! 그 똥차하고."
  설성도는 사라져 가는 하영의  차에다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설성도가 고인국 의원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은 하영
  의 지적처럼 거짓말이었다.
  고인국과는 아파트 건설 문제 때문에 몇 번이나 만
  나본 적이 있었다. 고인국은 국회의 건설위에 소속되
  어 있어서 자연 밀접한 관계를 맺어두면 서로가 좋은
  형편이었다.
  지금 손현식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가 본래 그린
  벨트로 묶여 있었던 것인데 고인국의 로비 덕분에 풀
  려나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일을 성사시킨
  덕에 아파트 시공업체인 로라 건설에서도  적잖은 금
  액을 내놓아 주었었다.
  하지만 고인국과 정윤경이 과거에 핑크빛 로맨스가
  있었던 사이라는 것은 이번 사건이 일어난 뒤에야 알
  았다. 그것도 강형사를 통해서였기 때문에 정말 자세
  한 내용은 영 모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 관계는 어떤 것이있을까? 선생님도 알고 있었을
  까? 알고 있었다면 과거의 연적에게  손을 벌리게 되
  었을 때 기분은  어땠을까? 어쩌면  아는 사람이라고
  좋아했던 것은 아닐까?
  설성도의 상상은 끝간  데가 없이  펼쳐졌다. 그걸
  계기로 고인국과 정윤경이 밀착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금세 정윤경의 고혹적인 벗은 몸매가 떠
  올랐다. 설성도는 머리를 흔들어 음탕한 생각에서 벗
  어났다.
  "손님, 다 왔습니다."
  기사가 그를 도와주었다. 설성도는  사무실 앞에서
  택시를 잡아 강동구의 고인국 사무실로 온 것이다.
  "수고했습니다."
  계산을 하면서 고인국이 사무실에  있을까, 있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여보세요, 미진 설계의 설성도라고  합니다. 고의
  원님 계십니까? "
  설성도는 먼저 전화를 걸었다.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 말에 설성도는 고인국이  사무실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통화에 응해 줄
  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 여보세요."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안녕하십니까? 전 설성도라고 합니다."
  "음, 설군이로군. 그래, 무슨 일이지요?"
  "정윤경 사모님 일  때문인데 잠시  만나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설성도는 정공법으로 붙이기로 작정을 했다.
  "으음."
  고인국은 깊은 신음  소리를 내며 말을  하지 않았
  다. 어색한 침묵이 수화기 사이로 흘렀다.
  "좋아요, 설군. 만나기로 하지요.  하지만 오랜 시
  간을 낼 수는 없소. 어디서 만나기로 할까요?"
  "예, 감사합니다. 지금 의원님 사무실 밑에 있습니
  다. 이 근처서 뵙지요."
  "그래요? 그럼 우리 사무실 앞으로 오도록 하시오.
  같이 나가도록 하지요."
  "예,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아니, 들어올 필요는 없소."
  "예 ? 예, 알겠습니다."
  설성도는 전화를 끊었다. 쓸데없이  구설수에 오르
  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들어오지 말라는  것인 줄 짐
  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의외로  고인국이 먼저 나와
  담배를 한 대 피고 있었다.
  "아, 이런,  이렇게 빨리  나와 계실  줄 몰랐습니
  다."
  "허허, 괜찮소. 설군은  얼굴이 한층  좋아지신 것
  같구료."
  "살펴 주시는 덕분입니다."
  "아, 그럼 어디로 가 볼 거나?"
  고인국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갈  곳을 마음
  속에 정해놓은 양 앞장 서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고인국이 설성도를  안내해 간  곳은 코르도바라는
  레스토랑이었다.
  "의원님 오십니까?"
  들어서자 웨이터가 알아보고 허리를 꺾으며 인사를
  올렸다.
  "방으로."
  웨이터의 인사는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고인국은
  굽힌 허리 위에 툭 말을 내뱉었다. 설성도는 그 모습
  을 보며 사람은 역시 출세를 하고  볼 일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뭘 좀 들지요?"
  커다란 룸으로 안내되어 자리에 앉자마자 고인국이
  설성도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그냥 커피나."
  "허허, 이렇게 커다란  곳에 앉아 커피나  달랑 두
  잔 시키면 욕 먹기 딱 좋지 않겠소?"
  "그, 그것도 그렇군요."
  "요금 이르기는 해도 점심이나 먹는  걸로 해 두시
  지."
  "아무거나 시켜 주십시오. 촌놈이  돼놔서 이런 데
  오면 뭘 시켜야 하는지 영 모르겠습니다."
  고인국은 그 말에 껄껄  웃으며 웨이터에게 이것저
  것 말을 건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상품의 비프 스테이크틀 먹으면
  서도 설성도는 무슨 말을 해야 할 건지를 생각하느라
  음식 맛을 느낄 수 없었다.
  후식까지 끝낸 뒤에야 설성도는 입을 열었다.
  "이런 걸 물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설성도는 정면 공격으로 일관하기로 맘을 굳혔다.
  "뭐든지 물어보게."
  고인국은 선선히 대답했다.
  "정윤경 사모님이  돌아가실  때 어디에  계셨습니
  까?"
  설성도는 마른 침을 꿀꺽  심키며 고인국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장이 물어오라고 하던가?"
  그 말에 기겁을 하게 놀란  것은 설성도였다. 설성
  도는 그렇게 자기가 정공법으로 나오면  고인국이 왜
  그런 걸 알려고 하나 하는 정도로  말을 하고 그러면
  자기는 다시 이러저러해서 그러노라고 말할 작정이었
  는데, 고인국은 지금 손현식을 걸고 넘어지지를 않는
  가.
  "아니,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당황하는 설성도를  보며 고인국은 추
  정을 굳히는 듯이 고개를 의미 있게 끄덕거렸다.
  "뭐, 그렇게 놀랄 것은 없지요. 나는 숨길 만한 일
  을 갖고 있지는 않아요."
  "그날 밤에 행적이 묘연하다는 말을 얼핏 들었는데
  요?"
  설성도는 내친 걸음이라 생각하며 밀어붙였다.
  "행적이 묘연하다? 그 수사를  좋아하는 형사가 일
  러준 말이겠군. 그 친구도 멍청해. 알아볼 만한 곳에
  서 알아보면 내가 어디 있었는지 알았을 텐테."
  고인국은 슬며시 말투를 낮췄다.
  "어디 계셨던 겁니까?"
  설성도의 재촉하는 질문에 고인국은 눈쌀을 찌푸렸
  다.
  "자네도 헛되이 소문을 내진 말게."
  고인국은 강한 눈빛으로 설성도를 바라보았고 움찔
  한 설성도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민중정당을 건설하려는 신당  추진위 사람들과
  만나고 있었네."
  그 말에 설성도는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비밀인지 정치에 어두운  그로서는 이해
  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밤 10시에 회합을 가져서 다음날 아침 6시까지 꼼
  짝 안하고 신당의 강령 초안 작업을 했었네. 이 사실
  은 정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외부에
  누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걸세. 나의 정치 생명이 달
  려 있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고의원님은  필요한 경우에는  얼마든지
  증인을 대실 수 있겠군요?"
  "허허, 얼마든지는 아니라네. 그중에는 지명수매자
  도 몇 명 있으니까."
  알리바이 조사는 끝났다 설성도는 새로운 궁금증이
  싹터 올랐다.
  "의원님은 제가 물어본 것이 왜 손선생님이 물어보
  라고 한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럼 정말 아니란 말인가?"
  "예, 절대로."
  "흐음, 그럴 수도 있겠지."
  고인국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며 천장을 올려다보
  았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단 말이지 ? 그래, 알려 줌세."
  설성도는 귀를 기울였다.
       9. 밀회 이전
  고인국은 정윤경과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 만났다.
  처음 보았을 때 고인국은 고 3이었고 정윤경은 고 1이
  었다.
  고인국의 동생인 인희가 윤경과 절친한 사이여서 집
  으로 놀러 온 것이 첫 대면의 시작이었다.
  인희가 평소에도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는  박식한
  자기 오빠 이야기를 많이 해 놓아서 윤경은 첫 대면부
  터 전혀 낯설지를 않았다. 멋진 체격에 미남인 고인국
  을 처음 본 순간 윤경의 마음은 크게 동요했다. 그 첫
  만남에 고인국은 단지 안녕이라는 말 한 마디밖에  한
  것이 없는데.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것은  아니었다. 고인국 역
  시 윤경의 아직 다 피어나지도 않은 미모에  순간적으
  로 빠져 들어갔던 것이다.
  고인국은 그때까지 학교에 남아 자습하던 습관을 버
  리고 일찍 돌아와서 서성이는  버릇까지 생겼다. 종종
  집으로 놀러 오는 윤경을 한번 보려는 속셈에서였다.
  동생 인희는 친구들끼리 노는데 나타나  얼쩡거리려
  하는 오빠가 귀찮기 짝이 없었지만 친구들은 모두  고
  인국을 좋아했다. 잘생긴 점도  큰 매력이었지만 공부
  하다가 모르는 무엇을 물어도 척척 대답을 해내는  믿
  음직스런 가정교사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윤경
  은 유별나게 많은 것을 물어 왔었다.
  물론 고인국은 더욱 자상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나 윤경의 생각으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성적은 점차 떨어져 어느덧 전교 10등 밖으로  밀려나
  기까지 하였다.
  여전히 상위권임에는 틀림 없었으나  전교 1, 2등을
  늘 해오던 그로서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는 윤경의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끝내 그는 성적을 회복하지 못하였고, 사실 그 때문에
  손현식이 다니던 국립대를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
  일 그가 정치외교학과를  고집하지 않았다면 그  곳의
  다른 단과대학에 입학이 가능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그는 그 점에 있어서는 확고한 결심이 서 있
  었다.
  그리고 재수 같은 것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스스로
  의 성격상 그런 따분한 공부를 두 번이나 배겨내지 못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많은 변화와 활기찬 생활을 원했다. 고교 때에
  는 이곳 저곳으로 많이 여행을 다녔었고 각지에서  즐
  거운 일도 많이 겪었으며 친구들도 많이 만들어  두었
  다. 성격이 워낙에 외향적이고 활발해서 퍽 잘 어울리
  는 편이었다.
  그가 윤경과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부터였다.
  제일 첫 사건은 대학 합격 발표일에 있었다.
  명문으로 이름 높은 신라대에 합격한 것이라 여기저
  기서 당락 여부를 묻는 전화와 축하 전화가  정신없이
  걸려오고 있었다.
  고인국은 또 울리는 전화를 받으며 이 전화도  그런
  것이려니 하고 무심히 들어올렸다.
  "여보세요? 인희네 집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저, 인국이 오빠예요?"
  인희 친구라면 대충 알고 있다 혹시 윤경이가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
  "안녕하세요? 저 윤경이에요."
  "오, 그래 ! 잘 지냈어 ?"
  고인국은 금방 방긋 웃음을 머금었다.
  "오늘 발표했지요? 어떻게 되셨어요?"
  "음, 떨어졌어."
  "예 ? 정말이에요?"
  윤경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정말이잖고. 종로학원이나 다녀야 할까봐."
  "거짓말이죠?"
  윤경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정말이라니깐. 떨어진 사람 위로는 못할망정 약 올
  리는 거야?"
  "피이, 거짓말. 다 알아요. 벌써 방송국에 전화해 보
  고 합격인 줄 뻔히 알고 축하드리려 한 전환걸요."
  "아니, 방송국에 전화를 했어 ? 이거 두 손 다 들었
  음."
  "헤헤, 그러니까 역시 붙었군요?  방송국 전화는 거
  짓말인데."
  "윽! 이번에는 두 발도 다 들었음."
  "그럼 전화는 어떻게 받고 있는 거예요?"
  "목하고 턱으로 받고 있어. 어휴, 말하기 힘들어."
  고인국은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전화를 하고 있었
  다. 그런 그를 윤경은 아무 말 없이 받아주고 있었다.
  "이제 보니까 인국이 오빠는 어린애예요. 그것도 강
  보에 싸인 아해라고요."
  "어허, 최종학력 중졸이 최종학력 고졸에게 이런 식
  으로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보다 오빠, 정말  축하해
  요."
  "말로만?"
  "말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요.  이런 좋은 날에는
  붙은 선배가 앞으로 시험칠 후배에게 맛있는 것을  사
  주면서 이야기해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윤경은 꼬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고인
  국이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들렸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지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우와, 정말이죠?"
  "그럼."
  "좋아요. 그럼 뭐 사주실래요?"
  "뭐든."
  고인국은 잠깐 생각을 하고 말했다.
  "정류장 앞의 제과점으로 나와."
  "지금요?"
  "그래. 왜 지금은 안돼?"
  "안 되죠. 여자가 뭐 남자처럼  몸만 일으키면 외출
  할 수 있는 줄 알아요?"
  "그럼 누워서 나오냐?"
  "말장난하기 없기. 머리도 감아야 하고, 옷도 골라야
  지요.
  뭐 좀 찍어 발라야 하고."
  "아, 아, 알았어. 1시간이면 되겠지 ?"
  "노력해 보죠. 그때 봐요."
  전화가 끊어졌다.  고인국은 잠시  멍하니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치장을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
  고인국은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 더디 가는 한  시간
  을 느꼈다. 너무  일찍 나가는 것도  꼴불견이다 싶어
  방안을 왔다갔다하다 시간을 보내다가 책도 공연히 뒤
  적거려 보고 라디오를  틀어 음악도 들어보고  했지만
  어느 것 하나에도 마음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당연
  히 시간은 흐르지를 않았다.
  15분쯤이나 남겨 놓고 약속 장소인 제과점으로 달려
  나갔다. 윤경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5분쯤이나  약속
  시간에서 지난 뒤 윤경의 모습이 제과점 밖에  나타났
  다.
  "늦었지요? 원래 여자가 약속 시간을 꼭 맞춰 지키
  는 것도 센스가 없는 거래요."
  윤경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회색의 오바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머리는 평소처럼 묶지 않고 길게  늘어
  뜨려 있었다. 그런 모습이 좀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뭐 먹을래 ?"
  "아유, 무슨  남자가 이렇게  무드도 없이  말을 해
  요?"
  앉자마자 먹을 것부터 챙기는 고인국을 윤경이 살짝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럼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고인국이 한심할 정도로 답답하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 건가 생각도 안 하고 나왔어요?
  숙녀를 만나러 나오면 그 정도는 딱 생각을 하고 있었
  어야지요."
  "음, 그래도 뭔가를 시켜서 자릿세를 내고 말하지."
  고인국은 일어나 이것저것 빵과 우유를 시켜서 가져
  왔다.
  "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어 ?"
  "예 ? 아니오."
  윤경은 무슨 뚱딴지 같은  질문이냐며 눈을 동그랗
  게 떴다.
  "거기에 보면 이런 귀절이 있다고."
  고인국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희는 너희가 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말라.  하느
  님이 너희의 말할 바를 준비해 주시리라."
  "에이, 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다고."
  윤경이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게 정말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요?"
  "어, 정말 있다니까. 내가 그대로 외웠는지는 잘 모
  르겠지만."
  "저것 봐. 그새 발땜을 하시네."
  윤경의 말에 둘은 깔깔대고 웃었다.
  "우리 어디 좋은 데 놀러 가요."
  빵을 먹고 난 뒤에 윤경은 그윽한 눈길로 고인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 ? 어린이 대공원 ?"
  고인국은 약간 놀리는 식으로 말했다.
  "어린이 대공원. 그래요, 좋아요.  거기 가본 지  꽤
  오래 전이에요."
  윤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리, 빨리 가요."
  고인국은 어리둥절한 채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어린이 대공원도  한산한 편이었
  다. 쌓여 있는 눈도 녹지 않은 채 군데군데 빙판을 이
  루고 있었다.
  "어머나 ! "
  윤경이 눈길에서 살짝 미끄러져  중심을 잃고 휘청
  거렸다.
  고인국은 놀라 얼른 손을 내밀어 윤경을 부축했다.
  "자, 손을 잡아. 또 미끄러지지 말고."
  고인국은 손을 내밀었다. 윤경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끼고 있던 노란색 강갑을 벗어 들고는 손
  을 잡았다. 장갑 안에 있던 윤경의 손은 따뜻했다.
  그것은 둘의 첫사랑이었다.
  잠깐의 만남이 어느덧 오후를 넘기고 있었다.
  설성도와 고인국은 간단히 한잔하자며 맥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벌써 위스키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러니까 사모님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배신녀
  로구만요."
  설성도가 혀가 감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꼭 그런 것도 아니었지."
  고인국은 아주 침착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첫사랑은 깨어진다는 일본 속담도 있지  않나? 설
  군은 첫사랑이 없었나?"
  "아, 왜요? 저도 비오는 날이면 떠오드는 꿈결 같은
  첫사랑이 있었죠. 다 내가 못난 탓으로 헤어졌지만 그
  때 잘 되었더라면  지금쯤 애 아버지가  되어 있을는
  지도 모르죠."
  "보게. 자네도 첫사랑이  있었고 자네가 못난  탓에
  헤어진 거라고 생각하잖나. 나도  마찬가질세. 첫사랑
  이 있었고 내가 못난 탓으로 헤어졌던 것이야."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건 경우가 틀려요. 이  설성
  도가 사랑했던 여자는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흔하
  디 흔한 여자일 뿐이라고요. 사모님은 아니에요. 사모
  님은 그럴 수 없어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요."
  "허허, 이 사람 취했구만."
  "국회의원이 되려면 술을 자알 마셔야 한다고 하더
  니만 정말 그렇군요. 우리가 해치운 게 몇 병인데 안
  취한단 말입니까?"
  "허허, 별 쓸데없는 소리."
  "그런데 말입니다. 난 정말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
  다. 전번 건설 건도 그렇고 이번에 추진 중인 일에도
  의원님 도움이 적잖은 걸 알고 있어요. 우리 선생님하
  고 예전에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팍팍 봐주고 밀어
  주는 겁니까? 아니면  우리 사모님을  생각해서 그래
  주는 겁니까?"
  설성도는 훌쩍 술을 마셨다. 목구멍으로 종이 탄 것
  같은 내음이 확 올라오며 뱃속으로  열기가 퍼져나가
  는 것이 느껴졌다.
  "와우, 멋지군!"
  설성도는 술에 대하여 감탄을  늘어놓더니 다시 말
  했다.
  "사모님을 생각해서  벌어진 일이었으면  좋겠습니
  다. 중년의 로맨스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사
  랑은 영원한 것."
  설성도는 흘러간 유행가 가사를 흥얼대었다.
  "자네, 진짜 취했군."
  고인국은 설성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도 취
  기가 서서히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취하긴 제가 왜 벌써 취합니까?"
  설성도는 억지로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좋아, 좋아. 우리 한 잔 더하지."
  둘은 잔을 높이 들었다.
  "이 세상에 혹 존재한다는  요조숙녀와 현모양처를
  위하여.그리고 그런 여자를 기다리느라 장가를 못
  가는 불쌍한 남정네를 위하여."
  둘은 신나게 떠들면서 술을 넘겼다.
  "이봐, 설군, 그럼 내가 얘기를 해주지. 왜 손현식이
  라는 녀석과 내가 손을 잡게 되었는지 말이야."
  고인국은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와이셔츠 단추를
  서너 개 풀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손현식이 학교를  그만두고 설계  사무소를 차렸을
  당시 그는 상당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는
  단지 하나의 일거리만을 보고서 학교를  그만둔 것이
  었다. 본래 교수는 설계 사무소를 관계할 수 없게 되
  어 있었다. 실제로는 그 때문에 많은 교수들이 자문위
  원이니 고문이니 하는 이름으로 설계  사무소와 관계
  를 갖고 있는 형편이었다. 손현식이 그런 식의 관계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교수라  하나 실은 조교수
  의 자리에 있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곰곰
  생각해 본 결과 그 자신이 직접 경영을 하는 것이 보
  다 이로울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일 속에 들어와 보니 그것은 생각보다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첫번째의 일거리가 마쳐진 이
  후 그는 아무런 다른 일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자신
  이 속으로 당황한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건축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박식했지만 그 계통의 실
  무진들이라고는 같은 학교의  제자들 이외에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제자들 역시 그를 도
  와주고 싶어도 본래 형성되어 있는 기존의 관계를 무
  너뜨린다는 것에 난점이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처럼 그에게는 비
  빌 만한 언덕이 절실했다.
  그때 머리에 떠오른  것이 고인국이었다.  고인국은
  그때 벌써 재선 의원으로 그 주가를  한창 올리고 있
  었다. 비록 자신과는 주먹다짐에 법정 싸움까지 벌려
  전과자로 만들어버린 원수  같은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 시절 싸움의 발단이 바로 아내  정윤경 때문에 일
  어난 일이라 그도 분명 아내에 대해서는 애틋한 감정
  을 지니고 있으리라 여겨졌다.
  손현식이 고인국의  연락처를 찾은  것은 그야말로
  아무런 문제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와의
  연락을 담당해야할 윤경을 설득하는 데 있었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그런 짓은 할 수가 없어요!"
  윤경은 손현식의 말을  듣자 펄펄 뛰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여자가 갖고 있는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옛날 남자
  를 만나 사정을 하란 말이에요? 당신 지금 제 정신이
  에요?"
  "제 정신이지, 그럼 내가 돌기라도 했단 맣야?"
  손현식도 짜증이 났다. 자신으로서도 부득이하여 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되어서 남변의 고충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 데에 화가
  난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존심만 중하고 남편은 어떻게 되어
  도 상관이 없다 이거야?"
  "우리가 당장 거리로 나앉을 판도  아니잖아요? 조
  금만 더 기다려 보면 좋은 일이 있을지 몰라요. 꼭 그
  렇게 해야만 하나요?"
  손현식이 무섭게 화를 내자 윤경도 조금 기가 죽었
  다.
  "거리로 나앉은 다음에는 수를 써도 늦어. 지금이니
  까 이렇게 한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란 말야."
  "여보, 잘 생각해 봐요.  고의원은 당신을 폭력죄로
  감옥에 넣은 사람이에요. 우리한테 호의를 가지고 있
  을 리 만무하다고요."
  "나한테는 그럴지 몰라도 당신하고는 틀려. 둘이 아
  름다운 첫사랑의 추억을 갖고 있지 않느냔 말야."
  "당신 ! 어쩌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윤경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손현식은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남자한테 첫사랑이란 각별한 의미가 있지.  여자도
  그런지는 몰라도 말야."
  더 하려는 말을 윤경이 막았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저, 그저 호감이있을 뿐이에
  요. 사춘기의 소녀가  연상의 남자들한테,  마치 총각
  선생님한테 품어 보는 그런 류의 감정 말이에요."
  "그래, 그것도 그럴 듯한  말이야. 고인국이는 당신
  가정교사로도 있었으니까."
  손현식이 비꼬는 투로 말했다. 고인국은 대학에 들
  어간 후에 윤경에게 과외 공부를 가르쳤었다. 사실상
  고인국의 호기심 같았던 감정이 열렬한  사랑의 감정
  으로 싹터 올랐던 것은 그때부터였다.
  마찬가지로 윤경이 자신의 감정이 사춘기의 일시적
  인 감정이라고 생각된  것도 역시 그  시절의 유치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즐거웠던 경험들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 정말 너무해요."
  윤경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손현식과 결혼  생활을 해나가며  때때로 고인국을
  떠올리기도 한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는 매스컴
  의 각광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으니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와  결혼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뚜렷이  떠오르는 생각이 윤경에
  게는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고인국을 사랑
  했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사춘기의 소
  녀가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었을 따름이었다. 윤
  경은 고인국과의 만남을 첫사랑으로 치수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 바로 첫사랑인 남편의 놀림을 받자
  울음을 터뜨리게 된 것이다.
  "좋아요. 내가 그 사람을 만나겠어요."
  윤경은 이를 막물고 말했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손현식도 자기가  다그쳤으나 아내의  그런 얼굴을
  보자 마음이 측은해졌다.
  "고마워, 고맙다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죠?"
  윤경은 딱딱한 사무조의 말씨였다. 손현식은 자신이
  당장 필요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바로 그린벨
  트 해제에 대한 건이었다.
  "그렇게 돼서 난 다시 미세스  정을 만나게 되었던
  거야."
  "흥, 그럼 고의원님은 뇌물 수수죄로 쇠고랑을 차셔
  야겠네요?"
  설성도는 탁자에 얼굴을 묻고  있었지만 아직 말할
  기운은 있는 모양이었다.
  "돈 받은 것은  없는걸 ? 미인계에  걸렸다고 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
  "미인계라고요? 아하,그 강형사라는 푼수가  그러더
  군요.
  의원님과 사모님이 영동  라데빵슨지 라면뻔슨지에
  들락거렸다고요? 그래, 우리 사모님은 어떻습니까?"
  순간 고인국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렸다. 그러나 정
  신없이 주절대고 있는 설성도를 보더니 다시 낮고 굵
  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 미세스 정은 내 사무실로 찾아왔었지. 하지
  만 그건 정말 남의  이목에 좋잖은 일이었어. 그래서
  라데빵스 호텔을 이용하기로 한 거야."
  "사업도 이야기하시고 사그라드는 청춘도 만끽하면
  서요?"
  "이 녀석 ! 아무리 취했기로서니 은사의 부인을 그
  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거야 ! "
  고인국은 대뜸 호통을 쳤다. 설성도도 좀 정신이 드
  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전 영 취한 것 같아요."
  설성도는 고개를 들어 사과를 표시했다.
  "자네가 나와 미세스 정의 첫  만남을 안다면 그런
  이야기는 하지 못할 걸세."
  고인국은 옛일을 회상하느라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의원님, 정윤경씨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인터폰으로 비서가  내방한 손님의  이름을 알렸을
  때만 해도 고인국은 그때 정윤경이  찾아 왔으리라고
  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 사람이 누굴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라지 ?"
  "옛 친구분이라시는데요."
  그 소리에 고인국은 정신이 화들짝 났다.
  "들어오시라고 해."
  문이 열리기도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삼
  넥타이를 다시 추키고 자못 긴장된 얼굴로 윤경이 들
  어서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윤경이 들어왔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
  다웠다.
  "앉으시지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존대를 했다. 아무튼 그녀는
  이제 남의 아내가  아니던가.
  정윤경이 손현식과 달아났을 당시만  해도 그는 희
  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 아무런 소식
  도 접할 수가 없었고 개강 뒤에야  둘이 학생 부부가
  된 것을 알았다. 그의 손길에서는 이제 완전히 날아가
  버린 파랑새가 된 것이었다.
  둘은 무심한 태도로 서로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
  로 서두를 꺼내야 할는지 서로 몰랐다.
  "어떻게 지내시오?"
  "그저 그럭저럭."
  윤경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순간 고인국은 윤
  경이 뭔가 부탁을 하러 온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집에는 이제 왕래를."
  고인국은 그들이 집안과 의절한  듯이 지낸다는 것
  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어찌되었나 싶어 물어보
  았다.
  "아니오, 우린 버려진 자식들인걸요."
  윤경은 다소 냉소적으로 말했다.
  "버려진 자식이란 게 어디 있겠소. 자기들이 버려지
  는 것이겠지요."
  고인국은 부드럽게 말을 했다. 그 말로 윤경이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그래, 행복하시오?"
  "예."
  윤경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의원님께서는 잘 지내시는지요?"
  윤경의 첫인사인 셈이었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일까.
  "옛날처럼 인국씨라고 하면 안 될까요? "
  고인국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시절은 이제 다 지났지요."
  윤경도 따라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고인국
  에게는 비수 같은 말이었다.
  "그 시절에는 재밌는 일들이 많았지요."
  고인국이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말했다.
  둘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이제는 둘
  다에게 가정이 있었고 그것은 그저 추억 속의 바꾸어
  지지  않는 그림자였을 뿐이었다.
  "나는 느꼈지. 이제  그 여자는 나의  것이 아니다.
  아니, 어폐가 있군. 아무튼 그  여자는 옛날부터 나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고인국은 자조적으로  말하며 다시  술잔을 기울였
  다.
  설성도는 대취한 상태에서 고인국의  말을 듣고 있
  었지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이  술에 취한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옛 정인에게도 몸을 맡기지  않은 여자가 제자에게
  수작을 부린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10. 묶여있는 사슬
  설성도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영 기억이  없었
  다. 고인국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그들은 한국의 정
  치인들이며, 정부에 대해서  기다랗게 욕을 늘어놓았는
  데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를 않았
  다. 고인국은 그의 집을 모르니  그가 이곳으로 데려다
  놓았을 리도 만무하고.
  벌써 꽤 늦은  아침이었다. 창으로는  후끈한 열기가
  밀려 들어왔다.
  세수를 하는데 전화가 왔다. 하영이었다.
  "일어났어? 고주망태씨."
  "응?"
  "어제 누가 집에다  자기를 날라다  놨는지 알아 몰
  라?"
  "어? 그럼 하영이가?"
  "그래, 밤 11시에 전화를  해가지고 나오라고 난리법
  석을 떨었지? 이제 우리집에는 올 생각도 말어."
  "아니 ? 내가 정말 그랬단 말야?"
  "그래, 점점 더 실망이야.  아주 못된 버릇이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어.  천만다행이지 뭐야. 결혼한  뒤에나
  알았어봐. 어휴, 끔찍해."
  "어, 어, 사실은 그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으, 응, 여긴 집안이라고."
  "흥, 그 따위 말장난에 또 넘어갈 줄 알면 큰 오산이
  야. 전화 끊어."
  하영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설성도는 어쩔 수 없이 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
  하영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게 다 자기 때문인데 왜 화를 내는 거야."
  "그게 왜 나 때문이야?"
  하영이가 나더러 고의원의 알리바이를 알아보라고 했
  잖아.
  "그래서 그걸 캐내기 위해서 술을 마시게 된 거라고.
  헌데 고의원 주량이 얼마나 대단한 지,  난 그 자의 반
  도 마시기 전에 취해 버렸던 거야."
  "흥, 그래서 뭘 알아내기는 하고?"
  "그럼, 중대한 정보를 서너 가지 입수했지."
  "좋아, 그럼 공이 있으니 내가 좀더  생각해 보고 나
  서 정상을 참각해 주도록 하지요."
  "참작은 무슨 참작? 당장 와서 상이나 내려 줘야지."
  "피, 그건 두고 보기로 하죠."
  "하하, 그렇다고 해도 하영이 성격에 내가 알아낸 게
  궁금해서라도 오지 않고는 못 뱃길걸."
  "흥, 그 말만 안 했어도 갔을지  모르지만 나도 자존
  심이 있는 여자예요. 절대로 안 가요."
  "예, 예, 어디 두고 봅시다."
  설성도는 여전히 자신 있는 말투였다.
  아니나 다를까 하영은 채 한 시간이 못 되어  나타났
  다.
  "이번에는 정말 특별 케이스야. 다음에 또 이런 경우
  가 있으면 그때는 정말 절교예요."
  "어이구, 이거 앞으로 가슴이 떨려서 술이나 먹겠나."
  설성도는 여전히 장난스럽게  하영의 말을 취급했다.
  하영도 어쩔 수 없다고 느꼈는지 피시식 웃고 말았다.
  "그래, 무슨 대단한 사실을  알아냈다고 이렇게 유센
  지 좀 들어나 봅시다."
  설성도는 곧 고인국과의 대화를 알려주었다.
  "뭐예요? 구체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잖아요? 자기는
  그저 고인국이하고 사모님이  불결한 관계가  없었다는
  말에만 온 신경을 썼죠?"
  "왜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 증인이 수두룩하게 있다
  는데."
  "그 증인 하나만 대 주시죠?"
  하영이 비웃으며 말했다.
  "응? 그건."
  "왜 말씀을 못 하십니까?"
  "하지만 고의원은 증인을 댈 수 있을 거야."
  "물론이지요.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유능한 인재를
  매장시키려 하겠어요?"
  "증인들을 만들어낸단 말야?"
  "능히 그럴 수 있지요. 매스컴에서는 또 계획직인 야
  당 탄압이니 하면서 북과 장구를  쳐대노라면 흐지부지
  되지 않겠어요?"
  설성도는 그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는 기본적으로 정치인이에요. 스스로 사모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지만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가 있겠어요?"
  그 말은 설성도로서는 정말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이
  었다.
  그러나 하영은 날카로운 눈빛을 대하자 고개를  끄덕
  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 일은 그렇고 하영인 어제 뭘 한 거야?"
  "한 가지 일은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서 알려 드
  릴 수가 없어요. 다른 하나를 먼저 알려 드리지요."
  "뭔데?"
  "구영민이라는 사내에 대한 거예요."
  "그 복덕방 영감?"
  "복덕방 영감이라니오? 억대 재벌이던데요."
  "그래 ?"
  설성도는 깜짝 놀랐다.  구영민이 하고  다니는 양을
  보아 부자라는 것은 쉬 짐작 가는 일이있지만 억대  재
  벌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를 못했었다.
  "자기도 별수 없는 속물이야. 억 소리가 나으니까 얼
  굴에 아주 존경의 빛이 떠오르는구만."
  "쓸데없는 소리. 억대 재벌이라기에는  사는 곳이 너
  무 초라하지 않아?"
  "그게 참 묘한 일이라고 생각돼."
  하영은 빙긋빙긋 웃으며 핵심을 얘기하지 않고  있었
  다.
  "그럼 설마 사모님  때문에 그  아파트에 들었단 말
  야?"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십중팔구는 그런 것 같아."
  "그럴 리가 없어."
  설성도는 발작적으로 말했다.
  "왜 이래 ? 촌스럽게. 자기는 어떤 사내가 내가 좋다
  고 옆집에 산다면 어떻게  할 거야? 쫓아가서 이  집을
  왜 샀소 하고 빨리 나가시오 할 수 있어 ?"
  설성도는 할 말이 없었다.
  "대한민국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는 나라라고."
  하영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그래, 한국은 게다가 부동산만  두들기고 있으면 도
  깨비 방망이 못잖게 돈을 벌 수 있는 나라지."
  "자기도 거기에 일조를 기하고 있으면서 뭘 그래 ?"
  "뭐?"
  "금방 구영민 같은 억대 재벌이 사는 곳이라긴  초라
  하다고 했지만 거기가 그렇다고 서민 아파트야?  그 정
  도 살려고해도 자칭 중산층들한테는 힘겨운 동네라고."
  하영의 말에 설성도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본래 손
  현식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서민 임대 주택을 그  근본
  목적으로 삼고 계획된 것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진행되
  어 가면서 아파트는 모두 30평 이상의 중형으로 변신하
  고 말았다. 최초에 계획  잡혀 있던 15평에서 20평까지
  의 아파트 도면은 지금도  사무실의 금고 안에  얌전히
  놓여 있는 형편이었다.
  "결국 자기들이 구영민 같은 사람을 키워 주고  있는
  거라고."
  "그건 말이 지나쳐."
  설성도가 정색을 했다.  그러나 하영에게는 두려워하
  는 빛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기는 그렇게 얘기해도 선생님하고 구영민이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란 걸 알면  쉽제 내 말을 반박할  수
  없을걸."
  하영의 말은 점점 더 설성도의 궁금증을 부채질했다.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 두 분이 서로 알고  있었단
  말야?"
  "서로 옆집에 사니 안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아? 하지
  만 그 정도의 문제가 아니지. 두 사람은 악어와 악어새
  같은 관계란 말야."
  "악어와 악어새."
  "서로 도와주며 살아가는 공생 관계라고도 하지."
  "그건 나도 알어. 뭘 서로 도운단 말야?"
  "건축업자와 부동산업자, 거기다가 법의 제정자인 국
  희의원까지 끼워 준다면 멋진 한 폭의 그림이 연상되지
  않아요?"
  설성도의 머리가 띨하고 울려왔다.
  "그럴, 그럴 리가."
  "자기가 믿건 믿지 않건 사실이에요. 아마 내가 모르
  는 다른 사람도 틀림없이 관계가 있을 거예요. 가령 건
  설회사 따위 말이죠."
  하영은 당황한 빛을 얼굴 가득히 띠고 설성도를 즐기
  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각 관계가  형성된다면 떼돈  벌 일이 어디
  한두 가지겠어요? 어느 곳의 그린벨트가 풀린다는 정보
  를 부동산업자가 제일 먼저 캐치하고 건설업자는 그 부
  동산업자한테 싸게 땅을  구입하고,나는 그 방면에
  문외한이라서 더 좋은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뭐 그렇고
  그런 일이 아니겠어요?  사실상 구영민이 그  아파트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 이유였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설성도는 가볍게 신음소리를 내고 있을 뿐 대꾸를 하
  지 못했다.
  "구영민이 이사를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더 이상 선생님한테 얻어낼 것이 없을 테
  니까요."
  "구영민이 이사를 했다고?"
  설성도는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그는 하영의 말에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손현식이 삼각관계나
  사각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
  니었다. 자기 자신이 그 관계에서 철저하다시피 소외되
  어 있었다는 데서 오는 심적인 충격이었다.
  "그래요, 8억짜리 빌라라나요? 야주  멋진 곳으로 옮
  겼더군요."
  "혹시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격으로 시건  현장에서
  멀어지려 한 건 아닐까?"
  설성도는 어느새 하영의 리드에 자신이 완전히  말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뒤집기에는 너
  무 늦었다.
  "글쎄, 그럴지도 모르죠."
  하영은 고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구영민의 알리바이 조사는 어떻게 된 거지?"
  "알아볼 만큼  알아보았어요. 구영민은  집에 있었대
  요."
  "집에? 그건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야기나 한 가지
  아냐?"
  "하지만 우리는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어요."
  "놓치고 있는 사실이라니?"
  "그 아파트 말이에요."
  "아파트?"
  설성도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 아파트 열쇠는 카드로 되어 있잖아요."
  "그래."
  대답을 하던 설성도에게는 짚이는 생각이 있었다.
  "그 열쇠는 복사를 할 수가 없어! "
  "바로 그거예요."
  설성도는 다시 혼란스러워지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관리실에는 여벌의 열쇠가 있었을  거야. 만약 그것
  이 유출되었다면."
  "만약 그것이 유출된 것이 아니라면?"
  둘은 서로 마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다른
  열쇠를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손현식이.
  "구영민이 시체가 발견되기 한 시간쯤 전인  8시쯤에
  아파트에서 나왔대요."
  잠시 후 침묵을 깨며 하영이 말했다.
  "하지만 회사에는 9시 반쯤에 나왔다는데 그  중간에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사건이 일어났다고 추정되는 시간에는 뭘 하고 있었
  대?"
  "역시 뚜렷한 알리바이가 없어요.  혼가 사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알리바이가 억지로라도
  있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거예요."
  "그럼 아침 출근 시간은 어떻게 알 수 있었지?"
  "7시만 되면 파출부가 오거든요. 아무렴, 그런 부자가
  마누라가 없다고 자기처럼 밥짓고 빨래하고 살 것 같아
  요?"
  "뭐라고? 지금 날 놀리는 거야?"
  설성도는 짐짓 화를 내며 하영을 잡아 간지럼을 태웠
  다.
  "항복, 항복 ! 그만해요! "
  하영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설성도는 손을
  놓는 듯이 하며 하영을 반듯이 눕히고는 대뜸 입을  맞
  췄다. 침묵의 분위기는 벌써 사라지고 말았다.
  "반장님, 설성도가  어제 고인국을  만났는데 어쩐지
  수상한 냄새가 납니다."
  "조심하게."
  강형사의 흥분한 목소리에 추경감은 느긋하게 대꾸했
  다.
  "조심하라니요? 제가 형사 생활이 몇 년인데 그런 핫
  바지한테 맞을 일이 있겠습니까? 반장님도 참."
  "누가 설성도에게 맞을 걸 조심하라고 했어?"
  "예 ?"
  강형사는 추경감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어리둥
  절했다.
  "아무 데서나 냄새 잘 맡는  자네 그 개코를 복날에
  조심하란 말야."
  추경감의 능청에 강형사는 피식 웃었다.
  "웃는 것도 개가 트림하는 것 같군."
  "둘은 코르도바라는 룸이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10
  시간 가까이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설성도는 그
  오하영이라는 여자가 와서 데려갔지요. 하지만 의원 나
  으리는 대단하던데요. 멀쩡히 걸어 나오더군요. 그날 둘
  이 마신 술값만 60여 만원이 나왔답니다."
  "그것도 일종의 과소비로군."
  "과소비지요. 그  돈이면 반장님하고  저하고 꼼장어
  안주로 근 한 달을 매일같이 마시고도 남을 돈인걸요."
  "그래, 뭐 얻어낸 정보라도 있어?"
  "그 방면은 그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설성도
  는 점점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고인국을 만나
  기 전에 자기 사무실에 들렀답니다."
  "자기 사무실에도 못 들르나?"
  "그런 게 아닙니다."
  강형사는 왜 난 늘 인정을  못 받는 것일까 하는 생
  각에 볼이 부은 상태로 말했다.
  "오하영은 분명 그 곳에서  뭔가를 가져갔습니다. 그
  게 뭔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뭔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왜 해?"
  추경감은 정말 만사평안한  상태에서 말하고 있었다.
  강형사는 다시 울화가 치밀어올랐지만 힘을 주어 잘 삭
  혀 버렸다.
  울화 따위는 표시해 보아야 진급에 지장이 있을 따름
  이었다.
  물론 너무 울화를 엿보이지 않아도 추경감처럼  진급
  과는 영 거리가 먼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뭔지 알 만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강형사는 다시 이번이야말로 느긋한 너구리의 뒤통수
  를 누를 수 있는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했다.
  "최근의 손현식 부부  사이의 냉기류에 대한  새로운
  정보입니다."
  "으음."
  추경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손현식은 바람을 피우고  있
  었습니다."
  "손현식이 바람을."
  "예, 더구나 그 상대역이 더욱 재미있습니다."
  "그게 누군데?"
  추경감도 몸이 달았다.
  "차정원입니다."
  강형사는 추경감의 애를 올리려는 속셈으로 다른  부
  연 설명을 전혀 붙이지 않았다.
  "차정원? 그  차관으로 있었다는  차민호의 딸  말이
  야?"
  강형사는 방심하고 있다가 혀를 찔린 격이었다. 추경
  감이 그런 사소한 문제를 기억하고  있을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예, 예, 그렇습니다."
  강형사는 한 줄기 식은  땀이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둘은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지 않았어 ?"
  "둘이 사이가 안  좋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
  다. 단지 손현식은 억지로 맺어져야만  하는 둘의 사이
  를 혐오했던 것이지요. 둘은 소꿉친구들로 그런 측면에
  서 본다면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강형사는 다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만약 주위의 서투른  강요가 없었다면 둘은  무난히
  결혼을 했을 것이고 오늘날 우리는 야근을 하면서 정윤
  경의 살인범이 누굴까 하는 데 골머리를 썩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장황한 얘긴 빼고."
  추경감이 가볍게 일침을 놓았다. 하지만 강형사는 오
  랜만에 승기를 잡은 터인데  쉽사리 물러설 수가  없었
  다.
  "차정원은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시 의대를
  다니고 있있고 또 무사히 졸업을 했습니다."
  추경감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강형사를 바라보고 있
  었다.
  강형사는 추경감의 눈빛을 무시한 채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차정원이 대학원까지 올라가면서 전공한 과목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성형수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차정원은 자신이 정윤경에게 밀린 것은 외모에 따른 문
  제였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중이 제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차정원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았던 모양
  인지 그 여자는 탤런트 뺨치는 미모로 둔갑해서 역삼동
  에서 성형외과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미모를  미끼로 다시 손현식에게  접근을
  했다는 거야?"
  "바로 그렇습니다."
  강형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럼 그 여자는 남편도 없이 혼자 사나?"
  "과붑니다."
  강형사는 추경감의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추경감의 눈치를 살짝 살피더니 다시 말했다.
  "7살 된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기가 있는 셈 아냐?"
  추경감의 반문은 시기가  적절하지 못했다. 강형사의
  계산으로는 과부라는 것을 밝혔을 때 그 질문이 나왔어
  야 했다.
  그러면 다시 아들이 하나 있어서 걸리적거린다는  뜻
  정도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동기가 됩니다만 좀 약합니다."
  "왜?"
  "첫째로 아이가 있습니다. 애미  없는 아이란 소리를
  듣게하지 않으려면 자식이 없는 손현식이  아버지로 적
  격이 될는 지 모르지만, 차정윈은  자식을 끔찍이 사랑
  하고 있으며 혼자 생활 능력도  있습니다. 만약 결혼한
  다면 시댁 사람들과 싸움이 붙어 아들을 빼앗길지도 모
  르는 일입니다. 둘째로 결혼한다고 해서 남편의 뒷바라
  지를 잘해 줄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굳이 둘이 같이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같
  이 산다고 해도 지금 만나는  것 이상으로 자주 볼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셋째로 그 두  사람은 이미 과거에
  결혼 문제가 양가에서  올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결혼 이야기가 나온다면 두 사람 다  사회에
  서 우스개 대접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경우를 따져 볼  때 두 사람은 가끔  만나
  는 현재의 상황에  아주 만족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
  다."
  "그 때문에 정윤경이가 자기도 질 수 없다는  식으로
  바람을 피운 모양이군."
  추경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소리 하기를  강형사는
  열망하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건 또 그렇지  않습니다. 정윤경이 그  사실을 안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건 왜 ?"
  강형사는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정윤경의 친구들을 통해서 알아봤습니다."
  "그래? 그럼 차정원과 손현식이가 바람을 피우기  시
  작한 것은 언제부터야?"
  "차정원의 남편이 죽고 2년쯤 후 그러니까 한 5년 전
  에 손현식과 첫만남이 있었습니다만 바람을  피우기 시
  작한 것은 약 1년 전쯤 된 것 같습니다."
  "손현식이라는 놈 아주 웃기는 친굴세 ?"
  추경감이 기가 막힌 듯이 말했다.
  "한 마디로 집안 자체가 이상한 곳이지요."
  강형사도 씁쓰레하게 맞장구를 쳤다.
  "가만, 그러면 손현식이가 범인일 가능성이 농후하잖
  아. 카드 키에다가 최근에 부인이 바람 피우는 것을 알
  고 거세게 바가지를  긁고 그 어떤  점을 들어  협박을
  했다면 ?"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다만  손현식의 알리바이는
  입증되어 있으니까 오히려  차정원이 수상합니다. 더구
  나 독살은  여성의 선호하는  살인에 들어가지  않습니
  까?"
  "멋대로 생각하는구만. 자네가 정윤경이라면 생판 모
  르는 여자가, 아니지, 혹시 알지도 모르긴  하지만 연적
  이 와서 불쑥 내민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겠나?"
  추경감이 톡 쏘아붙였다. 강형사는 잘 나가다가 오버
  센스한 자신을 속으로 크게 나무랐다.
  "무슨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분명히."
  강형사에게 그 방법이  무어냐고 추경감이  물었다면
  강형사는 열 가지도 넘는 방법을  창안해서 추경감에게
  들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추경감은 아무  소리 하지 않
  고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강형사는 혼자 중얼중얼댈 수밖에 없었다.
  "사건 당일날 차정원은 알리바이가 없었습니다. 그러
  니까 이건 생각할 여지도 없이, 즉."
  "그 따분한 추리는 그만두지."
  추경감이 고개를 들어 강형사를 노려보았다.
  "실종된 전병숙 건은 어떻게 됐어?"
  "아직 조사 중에 있습니다. 뭐 특별한 소식이 들어오
  는 게 없습니다."
  "없으면 좀 만들어 보지."
  추경감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강형사는 더욱 위축
  되었다.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강형사가 사무실을 나오려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가까운 위치에서 그가 먼저 수화기를 들었다.
  강형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장님, 전병숙의 시체가 발견되었답니다."
  강형사의 외침에 추경감도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났
  다.
  "장소는 어디야?"
  "사당에서 과천으로 넘어가는 중간 지점의  공지에서
  발견 되었답니다."
  "음, 가보도록 하지."
  추경감과 걍형사는 현장으로 향했다.
       11. 또 하나의 살인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체를  치운 뒤였다. 부
  패한 지가 오래 되어 일단 옮겼다는 말을 들었다. 신원
  은 실종자 신고에 있는 것과 동일한 옷과 구두로  확인
  된 것이고 지문조차 채취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
  나 전병숙이 맞는지 확실한 것은 전병숙이 다니던 치과
  의 기록표와 대비할 작정이었으므로 결과는  금방 판명
  이 날 것이었다.
  "반장님, 결과가 나왔답니다."
  강형사가 사무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래, 어떻게 됐어 ?"
  "역시 전병숙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부검 결과도
  나왔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무슨?"
  추경감이 담배 필터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청산가리에 의한 독살이랍니다."
  강형사의 말에 추경감은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친구
  둘이 같은 수법에 의해 죽었다. 우연일까? 그런 우연이
  발생할 확률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사망 추정 시간은?"
  강형사는 달력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실종 직후인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정윤경이 피살되
  기 직전인 셈이지요."
  "허허, 이거야 원. 무슨 단서가 있어야 추적을 할  것
  아니야?"
  추경감도 답답한 모양이었다.
  "반장님, 역시 정윤경  피살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윤경을 죽인 범인을  찾으신다면 전병
  숙을 죽인 범인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꼭 그렇게 볼 수만도 없어. 여기에는  너무 많은 변
  화가 있단 말야."
  추경감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래, 정윤경 살해범과  어떤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만은 틀림없겠지. 일단은 정윤경 사건에
  총력을 기울여야겠군."
  추경감은 강형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수집된 자료를 전부 가지고 와 봐. 처음부
  터 다시 시작해 봐야겠어."
  강형사는 큰 소리로 대답을 했다.
  손현식은 아파트 두 블럭쯤  떨어진 곳에 있는  다윈
  레스토랑에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지 연신 담배만을
  빨아대고 있었다.
  대낮이라 손님들도 없이 한산했다. 손현식이 와 있은
  지 15분이나 지났을까, 미모의  중년 여성이 입구에 나
  타났다. 손현식은 손을  들어 자신의 위치를  나타냈다.
  여인은 우아한 자태로 걸어왔다.
  "어쩌려고 이런 곳으로 부르고 그러는 거죠?"
  여인은 손현식에게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
  나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정원이."
  "홀아비 생활은 어때요?"
  정원이 물었다.
  "과부 생활보다는 괜찮을 것 같아."
  손현식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정원이 손을 내밀어
  테이블 밑으로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야 ! 만져 줄 곳은 거기가 아니라고."
  손현식은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면서 농담을 했다.
  "뭐예요?"
  정원은 곱게 눈을 흘겼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웨이터가 다가와 물었다.
  "난 함스테이크."
  손현식이 말하며 정원을  쳐다보았다. 뭘 시키겠냐는
  질문이었다.
  "난 먹고 싶지 않아요. 커피나 한 잔."
  웨이터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왜 안 들지 ?"
  "당신이 이상한 소리를 해서 식욕이 달아났어요."
  "호, 성욕이 발동하면 식욕이  없어진다더니 정말 그
  런 모양인데?"
  정원은 다시 손현식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런 얘기 막 해도 귀신이 안 나타나는 것 보면 대
  한민국은 역시 살 만한 나란가 봐요?"
  둘은 식사 후에 팔짱을 끼고 호텔로 바로 직행했다.
  "홀아비하고 과부가 만나게 되었네요."
  "이 기회에 둘이 합치는 건 어때?"
  "노! 자기가 그러느라 마누라를 죽인 거면 안됐지만."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러지  않았다는 건 자기가  잘
  알고 있잖아."
  "어머나, 그랬던가요?"
  정원의 능청스런 대답에 손현식은 화가 났는지  거칠
  게 그녀를 침대에 쓰러뜨렸다.
  "서둘긴, 시간은 많다구요. 이제 방망이  들고 쫓아올
  사모님도 없잖아요?"
  겉옷도 벗기지 않은 채 블라우스 단추를 허겁지겁 푸
  는 손현식의 손을 살짝 밀치며 정원이 말했다.
  "먼저 좀 씻어야 하잖아요?"
  정원은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손현식은 아쉽다
  는 듯이 침대에 털색 주저앉았다. 정원은 욕실 문을 열
  어놓은 채 들어가 옷을 벗었다.  그녀는 미용에 엄청나
  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내일 모레면 40이 되지마는 몸
  에 군살 하나 없었다.
  얼굴에도 주름살이 하나 없어 누구든지 그녀를  보면
  30대 초반 정도로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정원은 자신의 몸매를 욕실에 있는 대형 거울에 비취
  보며 스스로 만족해 했다. 동그라한 어깨선에서 부드럽
  게 솟아오른 가슴, 매끄럽게 둔부로 이어지는 허리선하
  며 알맞게 솟아오른 히프,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
  다. 아쉬운 곳을 억지로 찾으라고  한다면 아이 하나를
  낳느라 변해 버린 유두의 색깔이었다.  그것은 정말 인
  력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곳이었다.
  "정말 그 여자는 자살한 건가요?"
  정원이 몸에 비누칠을 하며 물었다.
  "그렇다니까."
  손현식이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왜죠?"
  비누칠을 한 살갗들이 매끄럽게 서로 부벼지는  쾌감
  을 느끼며 정원이 다시 물었다.
  "흥, 알게 뭐람."
  "어유, 저래서 남자는 다  도둑놈이라고 하는 거래니
  까. 마누라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말에서부터 그렇게
  괄시예요? "
  "그것도 다 몰랐을 때 얘기라고. 알고  보니 그 년도
  바람을 피우고 있었어."
  "호호호, 그것 재밌네요? 정말요?"
  정원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래, 뻔뻔하게도 일기장에다가  버젓하게 적어놓았
  더군."
  "이해하세요. 나한테 모든 진을  다 뺏기고 껍데기만
  맨날 집으로 갔으니 부인이라고 어떻게  욕정을 주체했
  겠어요?"
  샤워 소리가 들렸다.
  "홀아비 생활은 오래 못할 것 같죠? 제자 중매나  서
  드릴까요?"
  "일 없어."
  "헤, 속으로는 좋으면서. 어디 이런  기회가 남들한테
  도 다 돌아온대요? 이 기회에 처녀 장가나 한번 더  가
  보는 거지."
  "처녀보다는 자기가 더 좋은걸."
  손현식이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 하지만 아부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전에도 말
  한 적이 있지요? 우리는 과거 속에서  만나고 있는 거
  예요. 현재라고는 생각지 말아요. 더구나  미래는말
  도 안 되는 거죠."
  정원은 타월을 들어 꼼꼼히 몸을  닦았다. 그리고 나
  서 타월을 바닥에 던진 채  알몸으로 걸어나왔다. 그만
  큼 자신의 몸매에 자신이 있었다.  손현식도 달랑 팬티
  하나만을 걸친 채 정원을  바라보며 침대에 누워  있었
  다.
  정원은 치부를 살짝 감추며 요염하게 침대로  걸어가
  걸터 앉았다. 손현식은 등뒤로부터 손을 내밀어 정원의
  가슴을 움커쥐었다. 뭉클한 감촉이 느껴짐과 동시에 정
  원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손현식은 정원의
  등골을 따라 입을 맞춰 내려갔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
  온 탓인지 정원의 피부는 매끄러우면서도 차가웠다. 그
  점이 더욱 손현식을 달아오르게 했다.  그는 허리로 입
  술의 진로를 바꾸면서 서서히 그녀를 침대 위로 끌어올
  렸다. 그녀는 요란한 신음소리를 내며 매달려 왔다.
  손현식도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침대가 정신없이 흔
  들렸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한바탕 격렬한 정사가 지난 후 손현식에게 담배를 물
  려주며 정원이 물었다.
  "왜 자기하고 결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정원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 만나며 한번도 해 본 적이  없
  는 이야기였다. 서로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는 정말  어렸었지. 어리고 어리석었
  어."
  "그런다고 지나간 날들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에요."
  정원의 말투가 냉랭하게 변해 있었다.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싫어했지요.  그게 이유의 다
  였어요.
  아, 내가 또 당신의 사모님보다 흉측했었다는 이야기
  도 해야겠군요."
  정원은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나러 갔을 때 당신은  알아보지
  못했었죠. 생각나세요?"
  손현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교수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창밖으로
  는 매미 소리가 시원하게 들리고 있었다.방 앞에 웬 여
  인이 왔다갔다 하면서 서 있었다.
  손현식은 볼 일이 있는 학생이겠거니 하면서  무심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등뒤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 여자도
  몸을 돌이켜 그를 마주보았다. 서로  당혹해 하는 시선
  이 지나갔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현식씨, 아니 교수님."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손현식은  그녀가 누군지
  얼핏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코와 입매를 보면 알던 여
  자 같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전혀 기억이 없는 여자였
  다.
  "절 몰라 보시겠어요?"
  손현식의 당황한 얼굴을 살피더니 여자가 킥  웃으며
  말했다.
  "차정원이에요, 저."
  손현식은 쾅 하는  충격을 받았다.  차정원이 이렇게
  예쁜 여자였나 싶었다.
  "얼굴이 영 아니에요? 옛날에 더 예뻤어요?"
  정원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조교들이 흘금거리며 쳐다보고  지날 때야  손현식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일단 들어가시죠."
  방에 들어와 자리를  권하고 커피를  끓였다. 조교를
  시켜도 됐지만 어쩐지 부르고 싶지 않았다.
  "이제 팔자가 좀 펴신 모양이지요?"
  방안을 둘러보며 정원이 말했다.
  "아버님은 아직도 가끔 저희 집에 찾아오시는 모양이
  에요."
  그 말을 손현식은 외면했다.  10년이 다 되도록 한번
  도 집을 찾아본 적이 없었다.
  "아직도 왕래를 안 하시는 모양이군요?"
  "불효 자식을 훈계하러 오신 겁니까?"
  손현식이 차갑게 말했다.
  "어머나, 아니에요.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세요."
  정원은 솔직하게 사과했다.  손현식의 감정도 가라앉
  았다.
  "사과할 것까지는 없어요."
  "이미 했는걸요, 뭘."
  정원은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었다.
  "얼굴에 칼을 좀  댔어요. 제 전공  과목이기도 하고
  요."
  손현식은 그랬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저 생글거리는 표정을 연습하느라 고생  많았겠다는 생
  각이 들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역삼동에서 병원 하나 하고 있어요."
  "결혼하셨다는 이야기는  풍문에 들있는데  축하하러
  찾아가 뵙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풍문에 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찾아간다면 아버지를 만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안갔던 것이다.
  "마음만 있으면 되지요. 꼭 찾아와야 하나요?"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 무슨 일을 하고 계시지요?"
  "전에 말인가요? 지금 말인가요?"
  정원은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예 ? 물론 지금 말이지요."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요. 착한 사람이기는
  했는데 천당에 갈 만큼 착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거든
  요."
  "예? 그럼."
  "예, 죽었어요. 교통사고였지요. 고속도로에서 트럭이
  주행선을 넘어왔었대요. 거의 형체도 남지 않았지요."
  정원에게서는 별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남의 이
  야기를 옮겨 주는 것 같았다.
  "커피 드십시오."
  손현식은 별 할 말이 없자 당황하여 손짓을 하며  커
  피를 권했다.
  "교수님은 잘 지내고 계신지요?"
  "예, 덕분에."
  "슬하에 자녀는 몇이나?"
  "아직 하나도 없답니다."
  "아직도요?"
  "예, 둘 다 문제가 없다는데도 그렇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요."
  "저는 사내가 하나 있습니다. 이제 두 살이니 유복자
  나 다름없게 되었어요."
  "허, 그것 참. 어려우신 점이  많겠습니다. 어떻게 도
  울 방도가."
  손현식은 말을 하다가  뚝 끊었다.  상당히 의례적인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기보다 수입도 훨씬
  좋은 여자가 아니던가.
  "제가 어디 좋은 자리에 중매를 설까요?"
  "아, 아닙니다."
  정원이 펄쩍 뛰며 놀랐다.
  "일부종사를 하려는  생각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
  고."
  정윈은 말끝을 흐리더니 곧 다시 말했다.
  "저는 아들하고 헤어지지 못할 것 같아요, 제가 만일
  재혼한다면 시댁에서는 대를  잇는다니 아들을  달라고
  그럴 거예요. 난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손현식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갔다.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그것은 첫만남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나고 만나고 하
  는 도중에 선을 넘고 말았던 것이다. 거기에는 어느 정
  도 손현식의 책임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혼자 사는
  외로움에 젖어 있는 차정원이 주범인 것도 분명한 사실
  이었다.
  그때부터 손현식은 아내에게 죄스런 마음을 갖게  되
  어 아내의 낭비벽을 교묘히 자극하기 시작했다. 부잣집
  의 막대둥이로 자라난 윤경은 본래 사치스런 마음을 갖
  고 있었지만 그 동안의 어려운 생활로 인해 근검절약하
  는 태도가 몸에 어느 정도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남편이 살살 부추기게 되자 자제의 선은 금세 허물어지
  고 말았다. 손현식은 그로써 아내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다른 데 돌리게 한  것을 기뻐했고 나름대로는  보상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자기를 달랬다.
  "아직도 그 생각이에요?"
  정원이 그를 흔들며 말했다. 그녀는 어느덧 블라우스
  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손현식은 손을 흔들어 그렇지 않다는 표시를 했다.
  "집으로 한번 초대해 주지 않겠어 ? 당신 아들을  한
  번 보고 싶은데."
  "어머? 그러지요. 우리 성민이를 한번  보면 집어 가
  고 싶으실 거예요."
  "당신이 그림 속의 천사처럼 뜯어 고쳐 놓았을  텐데
  오죽할라고."
  "뭐예요?"
  정원은 손을 내밀어 닥치는 대로 그를 꼬집었다.
  "취소 ! 취소 ! "
  둘이 호텔에서 나왔을 때는 긴 여름 해도 이미 반넘
  어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호텔에서 나온 지  채
  2, 3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이쿠, 선생님 ! "
  손현식을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설성도와 오하영이
  었다.
  손현식은 식은 땀이 살짝 흐르는 것을 느꼈다. 조금
  만 늦게 호텔에서  나왔다면 입구에서 정면으로  만날
  뻔했던 것이다.
  "어이."
  손현식은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날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신 이후에 첫대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둘은 다가와 정원에게도 인사를 했다. 손현식의  친
  구로 알고 있었다. 정원도 정중하개 고개를 숙여 답례
  했다.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음, 자네들도 어디 가는 모양이군."
  "예, 좀 급한 볼일이 있어서."
  손현식은 오히려 안도하며 빨리 가보라고 손짓했다.
  "그래, 어서 가보게."
  "예, 그리고 내일쯤 해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오후에 오게나."
  "예."
  설성도는 다시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자기, 너무 예의를 차리는 것 아냐? 옛말에 과공이
  면 비례라고 했어."
  하영이 맘에 안 든다는 투로 말했다.
  "저 여자는 누구야 ?"
  "친구야."
  설성도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려 보이는데 ?"
  사모님보다 한두 살 적을 거야."
  "정말 ? "
  하영은 깜짝 놀랐다.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였는데?"
  "네가 늙어 보이는 거지."
  "뭐라고?"
  하영은 잡고 있던 설성도의 오른팔을 갑작스레 등뒤
  로 꺾어올렸다.
  "아, 아 ! 항복 ! 항복 ! "
  설성도가 비명을 올리며 몇 번이나 항복이라고 외친
  뒤에야 하영은 팔을 놓아 주었다.
  "아이고, 어디서 이런 우악스런 방법을 배웠어 ?"
  팔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설성도가 물었다.
  "범죄율이 세계 최고라는 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이
  야. 흑인이라도 나타나면 '아임 코리언. 두유 노우 가
  라데 ?"라고 말하면서 폼을 착 ! "
  "왜 또 가라데야 ? 태권도 아니고?"
  "흑인들한테는 그렇게 말하는 게 빨리 알아듣고  좋
  아. 내가 뭐 진짜로 태권도를 하면 그렇게 말해도  되
  지만 그러다가 태권도가 뭔지 모르는 무식한 놈을  만
  나 봐. 나만 고달픈 거 아니에요?"
  설성도는 대꾸를 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어, 왜 웃어요?"
  하영은 물었지만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계속  낄낄거
  리고 웃는 것이었다.
  "어, 정말 왜 이래요?"
  하영이 재차 다그쳤다.
  "정말 얘기 안 하면 다시 비틀 거예요 ! "
  하영이 양팔을 벌리며 다가오자 설성도는 빠른 걸음
  으로 두 세 걸음 가량 하영에게서 떨어졌다.
  "아마 고달픈 사람은 하영이가 아니고 혹인일 거야.
  밤마다 내가 고달프듯 말야."
  "거기 서요 ! "
  하영은 얼굴이 빨개져서 설성도를 쫓아왔다.
  "지금 장난할 때가 아니라고."
  설성도가 숨이 차서 쫓아오는 하영에게 손을 내밀어
  장난치지 말라는 뜻을 표했다.
  "쳇, 장난은 누가 먼저 쳤게요?"
  하영도 지쳤는지 다가와 얌전히 걸었다.
  "왜 전병숙을 죽였는지만 알면 얘기가 좀  풀리겠는
  데 말야."
  "그런 이야기는 누가 못해요? 누가 죽였는지만 알면
  되는데 그러지요?"
  하영이 톡 쏘아붙였다.
  "그런 게 아냐. 차근차근 생각을 좀 해 보자고."
  "그런데 설성도씨."
  "응?"
  하영이 갑자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자 설
  성도는 당황했다.
  "우리 어디 시원한 데 가서 차근차근 생각하지요."
  "알았다. 요 짝쟁아."
  둘은 냉방완비라고 써 붙여 놓은 다방으로 쪽  들어
  갔다.
  콜라를 두 잔 시켜 놓고 전병숙의 죽음을 따지기 시
  작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 얻는 게 뭐지 ?"
  성도가 물었다.
  "여러 가지겠지, 뭐. 돈, 복수."
  "대체로 그 두 가지겠지 ?"
  "미친 놈이 아닌 다음에는."
  "그럼 전병숙의 경우는 뭘까? 그 여자는 가긴  돈이
  없었어."
  "왜 ? 뉴욕에서는 5달러만 가지고도 사람만 잘 죽더
  라."
  "그래, 미국 다녀온 거 잘났어."
  "어 ? 그런 식으로 얘기할 거야?"
  하영은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봐. 뉴욕에서는 그래 5달러를 뺏기 위해서 청
  산가리를 사용하니 ? "
  "아니. 아, 그렇구나."
  "그래, 전병숙은 청산가리로 죽었어. 자살이 아니라
  면 계획적으로 죽이려고 들었던 거야."
  설성도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렇구나. 전병숙한테 재산이  없는 것은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에요. 그럼 남은 것은 복수?"
  "그렇다면 그건 그 여자 개인의 일이 되는데 우연히
  도 사모님과 같은 청산가리로 죽었다는 것이 첫번째로
  맘에 걸리고, 죽은 시기가 일치한다는 것이 또 알  수
  없는 일이란 말야."
  "만약에 돈이 쪼들린 그 여자가 누군지를  협박하고
  있었다면? 아니, 아니, 그  누군가가 행한 나쁜  짓은
  사모님도 알고 있는 일이었고, 그래서 범인은 두 사람
  을 다 죽여서 입을 막으려 한 거라면."
  "그건 정말 그럴 듯한 생각이야. 범인은 우리가  알
  고 있는 누군가가 틀림없어. 이 선을 쫓아간다면 틀림
  없이 범인과 마주치게 될 거야."
  추경감과 강형사도 역시  그런 선을 쫓아가고  있었
  다.
  "뭔가 구린 것과 관계가 있다면 손현식, 고인국, 구
  영민의 삼각관계 안에 그 문제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
  습니다."
  강형사도 열변을 토했다.
  "삼각관계라?"
  "그 부정한 거래를 전병숙이 눈치채고 누군가를  협
  박한 것이지요. 그러자 협박의 당사자는 가장  안전한
  입막음의 방법으로 살인을 선택했다 이겁니다."
  "그건 좀 이상한데 ?"
  추경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삼각관계는 실로 은밀한 것 아니야? 어떻게  아
  내의 친구라는 두 길 건너의 사람이 그 부정을 알  수
  있으며, 설령 안다 한들 협박을 할 정도로 자세한  내
  막을 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아마도 그 정보를 알려준 것은 정윤경일 겁니다."
  "무어 ?"
  "틀림없습니다."
  강형사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그래서 정윤경도 죽음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던  겁
  니다."
  "그래, 정윤경이 왜 그런 사실을 전병숙에게 알려줬
  단 말인가?"
  "그거야,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요."
  강형사는 이마에 주름을 잡더니 말을 이었다.
  "전병숙을 도우려는 선의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전병숙에게 바람을 피우던 현장에서 잡혀가지고  협박
  을 당해서 일 수도 있고."
  "자네, 설마 그런 말을 진심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니
  겠지?"
  추경감은 간단하게 강형사의 긴 사설을 봉쇄했다.
  "그보다는 고인국의  알리바이 조사  결과나  꺼내
  봐."
  "그게 좀 묘한데."
  "묘하긴 뭐가 묘해."
  "고인국의 알리바이를 설성도가 알아오지  않았습니
  까?"
  "설성도가? 그 친구 탐정 노릇으로 직업 바꿨대 ?"
  "그런 건 아니고,  여자 친구인 오하영이  설성도가
  정윤경과 바람을 피우다가  죽은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군요. 그래서  결백을 주장하느라  조사를
  하고 다닌다더군요."
  "그래, 뭐든 좋아. 설성도가 알려준 그 정보를 확인
  해 보았어?"
  "예, 그런데 그게 묘하단 말입니다."
  "빨리 말이나 해봐. 묘한지 안 한지."
  강형사는 다시 머리를 긁적이고는 말을 꺼냈다.
  "고인국은 그때 재야 인사들과 신당 추진 모임에 있
  었답니다."
  "무슨 당이 또 생기려나?  그건 그렇고, 그게  뭐가
  묘한 거야?"
  "문제는 고인국이 그 회합 장소에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도 없거니와 그 모임에 참가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고인국을 본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하는 데 있
  습니다."
  "그거 다른 쪽 루트로도 확인이 안 되나?"
  "그게 워낙에 극비리에 모인 것이라 추후 정보만 약
  간 입수되었을 뿐 현장은 완전히 놓쳐 버렸다더군요."
  "그럼 고인국은 알리바이가 없는 거지, 뭐."
  추경감의 말에 강형사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재야 사람들이 고인국이 현장에 없었다고
  하는 것은 그 자를 감싸기 위한 수법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감싸다니 ?"
  "고인국은 지금 야당의 거물입니다. 그런 사람이 공
  공연히 신당 창당 작업에 관여하고 있었다고 해  보십
  시오. 제꺼덕 해당분자로 몰려 제명이 될지도  모릅니
  다. 그러면 재야 쪽에서는 가능성이 농후한 후보 하나
  를 놓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고인국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할 밖에요."
  "허, 그거 그럴 듯한 이야기구만."
  추경감이 무릎을 탁 쳤다. 강형사의 어깨가 절로 으
  쓱 올라갔다.
  하지만 고인국이 이런  사건과 관계가 있어  궁지에
  몰렸다고 한다면 그들은 벌떼 같은 증인이 될  것이라
  이겁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말인가?"
  강형사는 그 질문에  약간 풀죽은 목소리로  대꾸했
  다.
  "아마 사실일 것 같습니다. 제 탐문 수사에  의해도
  그 사람들 고인국에게 여간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게
  아닙니다.
  그 점으로 보아 분명 고인국은 신당과 관련이  있습
  니다."
  강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그런 점이  이 수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회합 중 고인국이 자리를 비웠는지 어쨌는 지도 알 수
  가 없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게 된다면 한번도 비운  적이
  없노라고 증언을 하게 될 거란 말이지 ?"
  "바로 그렇습니다."
  강형사는 침통하게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정치인, 그것도 현역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함부로 조사를 할 수 없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건 내가 더 잘 알아."
  추경감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강형사의 말을  막았
  다.
  "좋아. 그 날의 알리바이는  그렇다고 치고, 그  전
  전날 전병숙이 살해된 날의 알리바이는 어때 ?"
  "그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자기 지역구에
  서 경로 잔치가 있어서 그 곳에 있었던 모양인데 전혀
  이동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고인국은 용의자 선에서 제외해도 무방하
  잖아?"
  "예?"
  강형사가 반문했다.
  "두 가지 범죄는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하나
  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다른 하나도 성립되지 않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기막힌 우연이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고인국을 벌써 용의선 상에서  제외한
  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잠깐 ! "
  추경감이 문득 강형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책상  위
  에 놓여 있는 조간신문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자네도 신문 타이틀이 보이나?"
  강형사도 신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신당주비위 출범야당의 고인국, 박용희,  오기
  현 의원 참여 선언 ! "
  강형사로서는 갑자기 명치를 쿡 쥐어박힌  느낌이있
  다. 허겁지겁 신문을 주워 들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
  다.
  "반장님, 그날의 회합은 정말 있었군요."
  "그럼, 고인국은 두 살인에 모두 무관하다는 건가?"
  추경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것 참, 신문도 요즘 읽어본 지 꽤 됐습니다.  이
  래 가지고 밥 먹고 살겠다고 아둥바둥대니."
  "자넨 원래 신문 따위는 보지 않잖아? 뭘  새삼스레
  그러나?"
  "무슨 말씀입니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올씨
  다."
  "됐네, 이 사람아."
  추경감은 손을 내저었다.
  "갑자기 더워지는 것 같군. 선풍기나 한번 틀어봐."
  선풍기에서조차 더운  바람이 웅웅거리며  쏟아지자
  추경감은 짜증스레 꺼버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손현식과 정윤경의 집안에 대한 조사 결과는  어떻
  게 됐어?"
  손현식의 부모는 재작년에 미국에 있는 큰아들의 집
  으로 이민을 가 버렸습니다. 손현식의 가까운  친지는
  삼촌들밖에 없는 형편인데 거의 만나지 않고 있는  것
  이 확인되었습니다. 손현식이 찾아가 보는 적은  없다
  고 해도 무방하고 사촌들이 가끔 찾아오는 편인가  봅
  니다."
  "그래서 손현식에게 유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없
  던가?"
  "유감이야 다들 가지고  있지요. 어디 좋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부모 형제도 아니고, 그  문제
  로 사람 죽일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이 사람아, 그런 문제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어
  디 있어 ! "
  추경감이 답답하다는 듯이 책상을 탁 내리쳤다.
  "그런 것을 알아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왕
  래가 어떠했고 그 속에서 어떤 문제가 있지 않았나 하
  는 것을 체크 했어야지."
  "걱정 마십시오. 그 점도 다 체크해 왔습니다."
  강형사는 약간 거드름을 피면서 말했다.
  "손현식의 경우는 돈거래는 물론 사업상의 관계로도
  전혀 하자가 없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럼 정윤경의 경우는?"
  "정윤경의 경우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강형사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해졌다. 추경감이  서툰
  문학도 흉내를 그만 내라고 할 때에 쓰는 말투다.
  "정윤경은 신혼 때에 집에 한번 찾아가 본 적이  있
  습니다.
  정윤경의 집안에서 한국에 남아 있는 자식은 정윤경
  의 바로 윗 언니와 정윤경뿐입니다. 다 본집에서는 나
  와 살고 있는  형편이고 부모들은  따로 살고  있습니
  다."
  "그래서 ?"
  "그리고 옛말에도 있지 않습니까? 딸 가진 죄인이라
  고요.
  이제는 손현식도 제법 형편이 피고 했기 때문에  처
  가에서는 맘에 안  드는데도 인정해 주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정윤경의 어머니는  가끔
  딸을 만나고 전화도 종종 했었다더군요."
  "그런 사람들이 왜 장례식 때는 코배기도 안 내밀었
  대 ?"
  "다른 사람들의 속마음은 알 수가 없지만 정윤경 어
  머니는 그제야 가본다는 것이 사위 보기에 너무  민망
  해서 갈 수가 없었다는군요. 그게 다 자기 죄라고  생
  각하고 절에 들어가 딸을 위한 제를 올리고  있었답니
  다."
  "흥,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군."
  추경감이 시덥잖게 말했다.
  "그런데 그 사실 말고는?"
  "없었습니다. 반장님이 찾는 어떤 물질적인  왕래는
  물론 자매지간에도 서로 손을 벌린 바가 없습니다."
  "성과가 하나도 없었다는 말밖에 안 되잖아?"
  "죄송스럽지만 그렇습니다."
  "강형사, 오늘 불쾌지수가 80이라고 하던데?"
  "헤, 반장님이 언제 불쾌지수를 따지셨습니까?"
  강형사는 그렇게 말하며  어느새 점퍼를 들고  있었
  다. 쨉싸게 빠져나가는 강형사의 등에 대고  추경감이
  외쳤다.
  "단서를 찾기 전에는 들어올 생각을 말라고 ! "
  강형사가 시경을  나서자 어두컴컴했던  하늘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루룩 비가 내렸다.
  "다시 차정원이나 알아봐? "
  강형사는 가게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생각에  잠
  겼다.
  "그 여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하영이 설성도를 흔들며 말했다.
  "뭐가 ?"
  설성도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사모님이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미모의 여성
  을 만나는 거야 ? "
  "두 분은 친구 사이라니까."
  "남녀 사이에 무슨 친구 사이야 친구 사이는?"
  "함부로 말하지 마."
  설성도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한 친구 사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야. 난  알
  아."
  "알긴 뭘 안단 말야 ? "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쳐다보는 얼굴. 둘은  꼭
  그런 모습이었어."
  "그런 식으로 선생님을 모함할 테야?"
  "어유, 자기는 뭘 몰라.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하영은 설성도의 옆구리를 쿡 쥐어박았다.
  "난 그렇다고 선생님이 범인이라고 말한 것도  아닌
  데 뭘 그래 ? "
  "좋아, 좋아. 내일 선생님을 만난다면 내가  단도직
  입적으로 물어보지."
  "미쳤어, 지금?"
  하영이 펄쩍 뛰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자연스레 두 사람 앞에 펼쳐질 것
  이라는 점은 물론 알 수 없었다.
  "이거 왜 이래?"
  하영이 느닷없이 설성도의 허리를 껴안고  늘어지자
  설성도가 펄쩍 뛰었다.
  "아이."
  그러나 하영은 평소 그답지 않게 끈질기게 달라붙었
  다. 하영은 재빨리 설성도에게 입술을 포갰다. 설성도
  는 하는 수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슬그머니  하영의
  젖무덤을 더듬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손교수를 범인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해요."
  설성도는 부지런히 하영의 옷을 벗겨 방안 이곳  저
  곳에 집어던졌다. 뜨거워진 하영의 알몸은 오늘  따라
  더욱 요염했다.
  "저어."
  "말은 필요없어."
  두 사람은 어느새 마른 하늘에 폭풍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12. 우리 시대 마지막 숙녀
  진형구는 아내의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저것은 다른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아내처럼  누워
  있는 것이다. 난 지금 다른 사람의 뼈를 부수고  지금
  여기에 뿌려버리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되뇌고  되뇌
  었다.
  그러나 이제는 늦은 것일까? 다시는 아내가  눈앞에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인생은 참 많은 면에서 아내에게 의지하여  살아
  왔다. 아내는 그들 돌보고 그는 회사를 돌보았다.  그
  러나 이제는 그가 돌볼 것도 그를 돌볼 이도 모두  없
  는 것이다. 그는 슬며시  자신의 허리띠를 당겨  보았
  다. 남은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다. 같이 세상을 떠나
  자는 생각만이 그의 가슴 속에 메아리쳤다.
  어느 산쯤으로 갈까 하고 주위를 돌아보는 그를  부
  르는 소리가 있었다.
  아내의 환영이었다. 무엇인가 그에게 끊임없이 말하
  려는 것만 같았다.
  "여보, 여보, 일어나요."
  눈을 들어보니 웬 중년의 낯선 사내가 자기를  바라
  보고 있었다.
  "대낮부터 술 자셨소? 길바닥에 그러고 쓰러져 있으
  면 어쩌려고 그러오?"
  진형구가 정신을 차린 것을 보더니 사내는 휘적휘적
  제 갈 길로 걸어가면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원, 그렇게도 할 일이 없나?"
  진형구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할 일이 하나 있다.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아
  내 대신 목을 매달아 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저승에
  서 아내를 만나야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나
  도 아내를 돌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진형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들아왔다.
  문제의 요체는 그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전화를 걸
  어온 자가 누구냐는 점이  그 초점이다. 그는  당연히
  정윤경이 그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날 정윤경을 찾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
  니었다. 그리고 그녀도 죽었다. 같은 수법이다.
  다른 친구였을까? 그는 다른 친구들에게 모두  전화
  를 했었다. 그러나 통화를 했다는 친구는 없었다.  회
  사가 망한 후로 아내는 친구들과 전화 따위를 하지 않
  았던 것이다. 오직 왕래가 있었던 친구는 정윤경 뿐이
  었다.
  그는 아내가 무엇이든 단서를 남겼으리라  생각하고
  온 방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 하나 얻어지
  는 게 없었다.
  분명한 것이라고는 아내의 죽음이 무조건  정윤경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무슨 관계
  ? 그는 또 방안을 뒤졌다.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
  다.
  강형사의 머리도 깨어질 듯이 아팠다.
  "범인은 무조건 손현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카드 키
  말고는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추경감에게 그는 대들 듯이 말했다.
  "그렇긴 한데, 그렇다면 너무나 멍청한 범죄를 저지
  른 것 아냐?"
  "실수는 누구나 하는  것 아닙니까? 범죄자가  실수
  했다고 감싸 주시려는 건 너무 지나친 관대함  아닙니
  까?"
  "범죄자는 무슨 범죄자?"
  "손현식은 폭력 전과가 있습니다. 잊으셨습니까?
  "하, 이 사람아, 그렇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젊은
  날의 한 때 실수지, 교수 자리를 지내고 지금은  사장
  이야."
  "그런 사실이 범죄의 외곽을 감싸 진실을 보는 눈을
  흐리게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반장님입니다."
  강형사는 끝까지 자기 주장을 내세웠다.
  "좋아, 좋아. 그런데  손현식의 알리바이는  어떻게
  되었지?"
  "그, 그건."
  강형사는 말을 더듬었다.
  "이런 젠장할 ! 한 가지가 풀리면 다른 하나는 꼬여
  있다니까."
  강형사가 투덜대다가 이마를 탁 쳤다.
  "아하 ! 반장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오늘  중
  에는 이 고약스런 치통을 뿌리뽑아 버리겠습니다."
  강형사는 점퍼를 챙기더니 휑 하고 나갔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모르지만 치통에다가 치질마저
  걸려서 돌아오지는 말게."
  추경감이 그 뒤에다가 한 마디를 던졌다.
  강형사는 귓전으로 그 말을 흘리며 역삼동으로 향해
  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차정원의 성형외과였다.
  "손님, 차례를 기다리세요."
  무조건 안으로 들어가려는 강형사를 간호사가  막아
  서며 말했다. 강형사는 마음만 급해서 버럭 소리를 질
  렀다.
  "비켜요 ! 바뻐 ! "
  간호사는 기가 막히다는 눈초리로 강형사를  쏘아보
  았다.
  "요즘에 다 바쁜 사람들 뿐이지 누군 한가해요?"
  그 말에야 강형사는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머머, 왜 그렇게 남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세
  요?"
  "남의 얼굴이니까 쳐다보지,  제 얼굴도 쳐다볼  수
  있답디까?"
  강형사의 말에 대기실에 와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까
  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간호사는 기가 막혀 강형사를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난 경찰입니다.  원장님을 잠시  뵙고
  자문을 구할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겁니다."
  경찰이라는 소리에 장내는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가 자문을 구하러 왔다고 하자 다시 분위기가 조금 살
  아났다. 간호사의 얼굴에도  순간적으로 핏기가  가셨
  다.
  "원장님은 지금 수술을 집도 중이셔서 만나뵐  수가
  없네요. 30분쯤 기다려 주십시오."
  간호사가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물어봐도  될까
  요?"
  강형사는 간호사에게 수갑을 걸었다.
  "뭔데요?"
  "여기서 근무하면 모두 미스처럼 예뻐집니까?"
  그 말에 간호사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제 얼굴은 고친 게 아니고 타고난 거예요!"
  갑자기 간호사가 큰  소리를 치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두 그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어머머, 몰라 ! "
  간호사는 병원 내부로 통하는 문으로 재빨리 도망치
  듯 나가버렸다.
  강형사는 속절없이 30분을 꼬박 기다린 후에야 정원
  을 만날 수 있었다.
  "자문을 구하신다고요?"
  강형사도 차정원을 보며 나이를 어림짐작해 내지 못
  하고 깜짝 놀랐다.
  "사실은 자문이라기보다는 어떤 사실을 확인해 보려
  고 찾아왔습니다."
  "뭐지요?"
  정원은 아주 당당한 태도로 강형사를 대했다.  솔직
  하게 말한다면 강형사로서는 그런 정원의 자세가 납득
  이 가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날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만."
  네가 그런다면 나도 그러마, 강형사는 같이 눈치 작
  전으로 나왔다.
  "손현식씨의 부인인 정윤경씨가  살해된 날  말입니
  다."
  정원의 이마에 가는 주름이 잡혔다. 이 자는 뭘  알
  고 내게와서 이러는 것일까? 대뜸 물어보는 것으로 보
  아 어느 정도 내막은 파악을 한 모양이군.
  "그 날이 뭐 어쨌게요?"
  정원은 강하게 나가기로 생각했고 예상대로  강형사
  는 움찔했다.
  "그 날의 알리바이를 알고 싶습니다."
  "없어요."
  그 대답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와 걍형사를 더욱 놀라
  게 했다.
  "잘 됐군요. 나는 멋진 동기를 가지고 있고 여긴 병
  원이라 청산가리도 구하기 쉽잖아요? 날 교수대에  세
  우고 싶으신가요."
  강형사는 당황했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차정
  원이 그가 해야 할 말을 먼저 함으로써 당황했던 것뿐
  이다. 바둑에도 호구칠 곳이 급소라는 말이 있듯이 강
  형사는 선구를 제압당한 것이다.
  "동기라니? 무슨 동기를 가지고 계십니까?"
  차정원은 잠시 더 생각을  했다. 일부러 자기  패를
  다 보여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현식씨와 난 한때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던 사이
  였지요.
  그런데 정윤경이라는 여자 때문에 파토가 난 것  아
  니겠어요?"
  "그래서 살인을? 그건 말도 안 되는 스토립니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잘 아시는군요. 그럼 나가 주세
  요."
  정원은 냉기서린 얼굴로 강형사를 밀어냈다.
  정원은 나름대로 그 도박에서 좋은 패를 잡았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강형사의 패는 더욱 좋은  것이었다. 그
  는 완전히 목적했던 것을 손에 넣었다.
  강형사는 그 길로  손현식을 만나러  갔다. 손현식은
  설성도와 함께 있다가  강형사를 맞았다.  둘은 충격을
  씻고 다시 사무실 문을 열 것을 상의 중이었다.
  "어이 강형사님, 오랜만이구료.  그래, 수사에는 진전
  이 있습니까?"
  손현식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손현식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하나 가득이었다.
  "범인이 누군지 알아내셨습니까?"
  "예, 그래서 지금 저랑 같이 시경으로  좀 가 주셨으
  면 합니다."
  "예, 좋습니다. 가고말고요. 가고말고요."
  손현식은 일어나며 점퍼를 걸쳤다.
  "내 다녀올 테니 애들하고 미스 배하고 내일부터  정
  상 출근하라고 해."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강형사가 불쑥 한 마디 던졌다.
  "? "
  둘은 멍해진 채 강형사를 바라보았다.
  "범인은 당신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요."
  강형사는 손현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뭣, 뭣이라고?"
  손현식은 기절초풍하게  놀란  모양이었다. 설성도도
  놀라서 펄쩍 뛰었다.
  "무슨 돼먹지 않은 소립니까?"
  "되어먹든 아니든 시경에 가서 따집시다."
  강형사는 본래 조용히  손현식만을 데려갈  생각이었
  다. 그러나 손현식이  어쩐지 군자연하면서 설성도에게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을 보니 약이 올랐던 것이다.
  "잠깐, 나도 같이 갑시다."
  설성도는 벌써 문을  빠져나가는 강형사와  손현식을
  따라 나섰다.
  시경에 도착해서는 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영도
  그 사실에 깜짝 놀라 시경으로 오겠다고 했다.
  "강형사, 이게 지금 무슨 일이야?  여기가 시장 바닥
  이야?"
  추경감이 잔뜩 약이 올라서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
  이 손현식과 설성도가 서로 흥분해서  추경감을 붙들고
  큰 소리를 꽝꽝 쳤기 때문이었다.
  "내가 언제 자네보고 범인을 붙들어 오라고  그랬어?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게 무슨 짓이야?"
  "지금부터 증거를 대 보이겠습니다."
  강형사는 자신만만했다.
  "당신은 사건이 있던 날 밤 사무실에 있었다고  했지
  요?"
  "그렇소."
  "그걸 누가 봤습니까?"
  "옥문 식당 주인이  알고 있을  거라고 그때도 말했
  소."
  손현식의 말투도 거칠었다.
  "하하, 하지만 식당 주인이 당신을 직접  본 것은 아
  니었어요. 당신은 음식을 문 앞에  두고 가라고 주문을
  했었지요? 전화로요? 하지만 전화는 꼭  사무실에서 걸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식당 주인은 당신이라
  고 여겨지는 실루엣을 보았을 뿐이다 이겁니다."
  "당신은 내가 창문에 비치게 옷걸이라도 꾸며 놓았다
  는 겁니까?"
  "셜록 홈즈의 시대에도 그런 건 통하지 않았어요. 움
  직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당신은 정부인
  차정원을 당신의 대리로 갖다 둔 겁니다."
  그 말에 손현식은 헉 하고 숨을 한번 들이키더니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강형사는 더욱 의
  기양양해졌다.
  애당초 강형사가 차정원에게 가서 알리바이를 확인하
  려 했던 것도 지금의 이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차정원
  은 강형사에게 아무런 알리바이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
  것이야말로 손현식의 유죄를  증명하는 증거인  셈이었
  다.
  "당시 아파트 관리인들은 파업  중이었지요. 누가 들
  어가고 누가 나오는지 그들은  알 수가 없었다  이겁니
  다. 그 순간적인 허실을 관통해서 짜여진 이번 살인 계
  획은 참으로 치밀했어요. 당신과 차정원의 관계가 이미
  부인과 친구들에게 알려져 있다는 것을 당신이 모른 것
  이 단 하나의 흠이었지만 말이오."
  손현식은 계속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한없는
  자책감에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이거 왜 이래요? 무죄한 사람 구하겠다는데 !"
  취조실 밖에서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하영이다."
  설성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하영이, 여기야."
  추경감이 문틈으로 들여 보내라는 눈짓을 했다.
  "경찰이라고 인권을 이렇게  유린해도 돼요?  확실한
  조사도 하지 않고 무조건하고 잡아오기만 하면 되는 거
  냐고요?"
  하영은 강형사에게 삿대질을  하다시피 하며  대들었
  다. 강형사도 속으로 부아가 치밀어올랐지만 금방 인권
  이니 하면서 대들었기 때문에 꼭 참고 앉아 있었다.
  "성도씨하고 저는 사건이 있던 날 밤의 휴지통을  조
  사했어요. 잘 들으세요, 강형사님.  우리는 거기서 소독
  저와 휴지 몇 장을 건졌지요. 저는 이걸 의대에서 법의
  학을 전공하는 친구에게 감정해 달라고 맡겼어요. 거기
  서 나온 결과가 이 데이터예요."
  그녀는 강형사에게 수치와  영문이 짜드라하니  적혀
  있는 종이를 보여주었다.
  "이 데이터에 따르면 그날 밤 그곳에는 남자와  여자
  둘이 있었던 거예요. 남자는  오형, 여자는 비형이에요.
  차정원씨의 혈액형을 조사해 보면 그날 밤 사무실에 두
  분이 같이 있었다는 것이 증명될 거예요."
  "흥, 그건 아무런 증거도 되지 않아요."
  강형사가 코웃음을 쳤다.
  "오히려 손선생의 확실한 유죄에 뒷받침이  된다고나
  할까.뭐라고요?"
  하영의 얼굴색이 변했다.
  "당신의 그 증거라는 것은 둘이 같이 있었던  시간이
  같다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오."
  "과연 그럴까요?"
  하영은 다시 침착하게 반격의 실마리를 찾아나갔다.
  "강형사님, 머리를 좀 쓰시죠. 회색의 뇌세포를 좀 돌
  려 보시란 말이에요. 강형사님은 분명 음식을 배달받은
  현장에 선생님이 안 계셨기 때문에 범인이 되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줄 아는데, 소독저에서, 바로 음식물을
  섭취한 소독저에서 나온 오형의 혈액형은 그럼 누구 것
  이란 말이죠?"
  하영의 반격은 신속했고 반박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
  이었다. 강형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 밖
  에 없었다.
  손현식은 제자 앞에서 이런 일들이 모두 밝혀지자 안
  도보다는 수치스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자주  야근을 하는  게 수상하다고 했
  죠."
  하영은 작은 소리로 설성도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강형사는 그 점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복수
  의 기회는 남아 있었다. 잔인스러운 것 같았지만 이 기
  회에 보복을 해야만 한다고 마음 속의 작은 사탄이  그
  를 꼬셨다.
  "그렇다면 범인은 설형이겠구만?"
  "예?"
  설성도와 하영이 동시에 소리쳤다.
  "평소에 정윤경씨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
  은 다 알고 있지. 안 그런가, 설형 ?"
  강형사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몰래 밤에 아파트로 간 거야. 손현식씨가 안 들어온
  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안성마춤이었겠지. 같은 건축
  사무소에 있으면서 카드 키를  여는 방법쯤은 이미  다
  알고 있었
  "어. 그래서 몰래 침입해서는 강제로."
  "그만둬요!"
  하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소하겠어요. 인격 모독도 유분수지."
  "흥, 맘대로 해  보구료. 난 그대  낭군 목에  밧줄을
  걸어볼테니까."
  "야! 강형산지 강아지 새낀지야! 너 정말 죽을래!"
  하영이 악에 받친 듯이 큰 소리를 내질렀다.
  "성도씨는 사모님을  겁탈할 수가  없었다고. 인간이
  세 번씩이나 하고 또  뭐가 아쉬워서 월장을  하고, 또
  월장을 한들 되냐, 왜 ? 이 바보, 멍충이, 병신 쪼다야!"
  하영은 말을 마치더니 왕 울음을 터뜨린 채 뛰쳐나갔
  다.
  강형사는 물론 설성도가 범인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
  았다.
  다만 하영의 약을 조금 올려 주려 한 것  뿐이었는데
  전혀 엉뚱한 결과가 빚어지자 쑥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다.
  "선생님, 나갑시다."
  설성도가 차갑게 주위를 돌아보며 손현식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밖으로 나오자 하영이  서 있었다.  설성도를 보더니
  다시 울음을 터뜨리며 품에 안겨왔다.
  "어어, 왜 이래 ?"
  설성도가 당황해서 떼어 놓으려 했으나 하영은  떨어
  지지 않았다.
  "그 나쁜 놈이 성도씨를 범인이라고 해서 내가  얼마
  나 놀랐는지 알아요?"
  하영은 훌쩍거리며 그렇게  말하고서야 떨어졌다. 옆
  에 손현식이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선생님, 아까 제가 한 말은  거짓말이에요. 성도씨를
  보호하려고 한."
  "으, 응, 그렇겠지."
  손현식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취조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 지도 잘 기억이  나
  지 않았다.
  "강형사, 자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야? 완전히
  돌았군 ! "
  시경에서는 추경감이 펄펄  뛰며 강형사를  나무라고
  있었다.
  "시말서 써. 이게  사건으로 비화되면 옷  벗을 생각
  해."
  강형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반장님."
  "듣기 싫어 ! "
  추경감은 아예 강형사가 말을 못 꺼내게 했다.
  전화가 걸려와서 강형사의 어려운 처지가 일단은  궁
  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진형구씨가 단서를 발견했다고 하는군."
  추경감이 강형사에게 말했다.
  "뭐해, 빨리 따라 나오지 않고?"
  추경감이 앞서 나가면서 말했다.
  "예, 알았습니다."
  강형사도 급히 따라 나갔다.
  구영민이 불려온 것은 그 얼마 뒤였다.
  "이거 왜들 이러십니까?"
  구영민은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어디서 힘을 주고 이래요? 당신은 지금."
  강형사가 말을 하다가 추경감의 눈길에 움찔하고  멈
  췄다.
  "일단 앉으시지요."
  추경감이 권하는 의자에 구영민이 털색 앉았다.
  "사건이 있던 날을 기억하시죠?"
  "아, 하다마다요.  몇번 이  형사 나리가  찾아왔었는
  데."
  구영민은 강형사를 가리켰다.
  "잘 됐군요. 그 전날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싶습니
  다."
  추경감의 질문에 그는 일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좀더 자세히 알려 드릴까요. 그날  하오 6시 이후의
  행적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어디 한번 들어보지요."
  "그, 그날 내논 방이 있어서."
  "오, 방이 나와  있었단 말이죠? 강형사,  잘 적어둬.
  몇 호였죠? 평수는? 호주는? 전세 ? 월세 ?  아예 팔려
  고 한 건가요?"
  "아, 아니, 사실은."
  구영민은 흐르는 땀을 닦아내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
  었다.
  "왜 전병숙씨를 죽였는가만 이야기해요! "
  추경감의 입에서 전병숙의 이야기가 나오자 구영민은
  더욱 놀라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얘기 못할 것 같으면 내가 하도록 하지요."
  추경감은 구영민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은 지난 날 정윤경씨를 도와준 걸 미끼로  협박
  하고 손현식과 연계를 맺어 억대 부자로 올라설 수  있
  었지요. 한번 관계를  맺게 된  정윤경씨는 당신에게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당신은 그  방면에는 닳고 닳
  은 친구니까.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챈 사람이
  있었지요. 바로 친구인 전병숙이었다 이겁니다.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남편에게 알려 버리겠다고  협박을 했지
  요. 이건 당신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정윤경이라
  는 젊은 날의  우상과 손현식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
  위를 동시에 잃어버리는 결과가 나올 테니까요."
  "아니야, 아니야."
  구영민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젖고 있었다.
  "그래서 전병숙에게 돈을 주어 입막음을  하겠노라고
  했죠? 하지만 알고 보니 전병숙은 망한  운수회사의 사
  장댁이었고 그 입을 막자니 들어갈 돈이 너무나 많아서
  기겁을 하게 된 나머지 죽여 버리게 된 것이지요?"
  "아니야."
  구영민은 끊임없이 부인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전병숙에게 돈을 건네주기 위한 연락처를 적
  어 주면서 명함을 사용했어요. 그것이 첫번째 실수요."
  "아."
  구영민은 그제서야 풀이 약간 꺾이는 것 같았다.
  "생각이 나겠죠? 아마도 그 명함을 찾기 위해서 핸드
  백을 열두 번도 더 뒤져 보았을 테니까."
  구영민은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당신이 실수한 그 명함을 남편이 발견한 거요. 당신
  의 전화를 받고 전병숙씨는 서둘러서  집을 나왔죠. 남
  편의 저녁밥도 차리지 못한 채로.  이번에 남편의 기운
  회사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밥을 차릴  정신이
  있었겠어요? 그 덕분에 당신의 명함은 전병숙씨의 전화
  번호 수첩 사이에 끼어져 있었던 것이라고."
  추경감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먼저 전병숙씨가 어떻게 당신의 명함을 갖고 있었는
  지부터 말씀해 보실까요?"
  구영민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지만 결코  추경감에게
  항복하지 않았다.
  "전병숙씨를 만났던 사실은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 여자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가 죽였단 말이오"
  추경감이 비웃는 말투로 물었다.
  "정윤경입니다."
  "뭐라고?"
  추경감과 강형사가 동시에 놀라 외쳤다.
  "사실입니다. 윤경씨는 저와의 관계가 알려진다면 파
  멸이라고 하면서 전병숙을 죽이겠노라고 했습니다."
  구영민은 이마에 촉촉히 배는 식은 땀을 닦아냈다.
  "그러면 그 뒤에 당신이 정윤경씨를 죽였나요?"
  "아닙니다. 윤경씨는 자살한 겁니다. 아마도 전병숙을
  죽인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했던 모양이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
  손현식 연행의 잘못 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강형
  사가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정윤경은 결고 전병숙을 죽일 수가 없어. 그 시간에
  정윤경은 남편의 사무실에 있었단 말야. 그건 전병숙의
  실종 사건을 수사하면서 다 알고 있던 사실이야."
  구영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당신이 멋모르고 한 거짓말이 오히려 당신을 얽어매
  다니 ! "
  강형사는 이죽거리며 구영민을 비웃었다.
  "당신은 경찰을 너무 우습게 본 것  같아. 이제는 자
  백을 하시지. 전병숙을 죽인 뒤에 왜 또 정윤경을 죽였
  지?"
  "아닙니다. 그것만은 아닙니다. 윤경씨는 제  젊은 날
  의 우상이었습니다. 꿈이었습니다. 제가 왜 윤경씨를 죽
  인단 말입니까?"
  구영민의 말은 이미 전병숙의 살인을 인정하는  것이
  었다.
  다시 추경감이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피는 피를 부른다는 말이 있지요. 당신은 물론 젊은
  시절에는 정윤경씨를 손이 닿지 않는 저 먼 하늘의  천
  사마냥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세파를 거치며 숱
  한 여자를 겪고 난 후에 다시 정윤경씨를 만나게  되고
  그 여자를 유혹했지요. 그런데 여느 여자처럼 넘어왔던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당신은 정윤경씨를 그다지 흠모
  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그건 그렇지 않아요. 그 여자는 나를 허락하지
  않았어요. 난 어쩔 수 없이 공갈을 쳐야만 했습니다. 남
  편에게 그 돈을 받아갈  때 이미 나한테  몸을 팔았다.
  그 댓가로 너는 오늘날이 있는 것이다 라고 협박했습니
  다. 그제야 그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옷을 벗었답니다.
  윤경씨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 후로도 나는 윤경씨를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혼자  있으면 우울해지곤 했지만
  여전히 예전처럼 쾌활하게  살아가더군요. 남편에게 걱
  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죽였죠?"
  "글쎄 나는 죽이지 않았다니까요! "
  구영민은 강하게 사실을 부인했다.
  "당신은 전병숙의  살인도 부인하고  있지 않았습니
  까?"
  "그건 그렇지만."
  구영민은 머리를 두어 번 흔들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
  다.
  "당신은 이미 전병숙의 살인을 인정한 만큼 청사가리
  의 구입처 및 구입량도 곧  우리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부인은 어려울 텐데요."
  "흥, 내 변호사나 불러 주시오. 그 전에는 아무런  말
  도 하지 않겠소."
  구영민의 자세는 여전히 뻣뻣했다.
  "허, 당신은 스스로를 아주  대단한 인물이라고 여기
  는 모양이군요."
  강형사가 경멸조의 어투로 말했다.
  "일개 바람난 유부녀를  상대로 놀아난 중년의  늙은
  제비가 멋진 앙상블을 이루고 있었을 거야."
  "이 자식 ! 윤경씨를 모욕하지 마 ! "
  구영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느닷없이 강형사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강형사는 살짝 피하며  팔을 잡아 획
  꺾어 버렸다.
  "경솔한 행동은 좋을 게 없다고."
  구영민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당신이 그 여자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살인이라는
  무모한 행위를 저지른 다음 날 벌써 그 여자는  남편의
  젊은 제자와 사랑 놀음을 즐기고 있지 않았나 말야."
  강형사는 구영민의 팔을 풀어 주었다. 구영민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젊은 날의 우상? 헤어지려던 방법이었을 뿐이오."
  "헤어지려는 방법 !"
  "그래요. 윤경씨는 나와의 관계에서 언제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지요. 그래서 내 아름다운 우상이라는 생각
  을 깨뜨리려고 방탕한 짓을 저지른 것뿐이오."
  "흥, 꿈보다 해몽이 좋군. 그런 말을 누가 믿는담? 당
  사자도 죽고 없는 마당에."
  "내가 있소."
  구영민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남자로 태어나 진실로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남
  자의 인생으로 그것도 괜찮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구영민은 추경감을 보며 말했다.
  "담배 한 대 주시구려."
  추경감이 담배를 한 대 꺼내  주었다. 추경감이 연이
  어 꺼내려는 고물 지포 라이터를 강형사가 얼른 제지하
  며 자신의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좋소! 그럼 내가 정윤경을  죽였다는 직접적인 증거
  를 대시오. 증거도  없이 사람을  죄인으로 몰았다가는
  당신들 모가지가 온전하지 못할 거요."
  구영민은 풀이 꺾이긴 했으나 아직도 완강한  태도였
  다.
  "증거 ? 그렇다면 이야기를 하지. 그 곳 아파트에 함
  께 살았기 때문에 밖에서 들락날락할 필요가 없어서 우
  선 경비원들 눈에 뜨이지 않을 수 있었지."
  "흥! 그건 아무런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
  리 동의 아파트는 카드  키 형식으로 되어  있고, 카드
  키가 없으면 출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정
  윤경씨 아파트 카드 키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구영민이 입가에 냉소까지 띠며 말했다.
  "그 집 카드 키는 세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손현식
  이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그 아파트 안의 백자  항아리
  속에 들어 있었죠.  그리고 하나는  정윤경이 핸드백에
  넣고 다녔고 말이오."
  추경감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키가 없는  내가 어떻게 정윤경의  아파트에
  드나듭니까? 더구나 그 카드  키는 문을 열 때만  쓰는
  것도 아니고 문을 잠글 때도 쓰는 것인데. 내가 정
  윤경을 죽이고 나왔다면 현관문이 잠겨  있지 않았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튿날 손현식이 왔을  때 문이 잠겨  있어서
  분명히 카드 키로 열고 들어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경
  감나리, 내 말이 틀렸나요?"
  구영민의 태도는 여전히 빈정거리는 표정이었다.
  "그 말이 틀림없습니다."
  추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3개의 카드 키 중 어느 것이 내  호주머니에
  있었단 말입니까? 내가  하나를 훔쳐서 범행을  했다면
  그 키가 왜 문 잠긴 아파트 안에 있었습니까?"
  "그중 당신이 가지고 있었던 키는 백자 항아리에  들
  어 있었던 것이오."
  추경감이 엄숙하게 말했다.
  "예 ? 뭐라구요? 하하하. 그런데 어째서  그 키가 항
  아리에 남아 있었으며 내가 가져갔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나요?"
  "내가 그 설명을 하지요."
  추경감이 켜지지 않는 지포 라이터를 몇 번 철거덕거
  리다가 말을 이었다.
  "정윤경이 죽은 뒤 당신은 그때야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가 알고 허둥거렸죠. 빨리 현장을 수습하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벌거벗은  채 죽은
  정윤경이 자살한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죠. 벌거벗고 자
  살하는 여자는 없으니까 우선 옷을  입혔죠. 그런데 여
  자 팬티를 벗겨 보긴 했어도  입혀 본 일이 없는  당신
  이 그것을 뒤집어서 입혔죠. 이것이  당신의 첫번째 실
  수요. 정윤경 같은 깔끔한 여자가  팬티를 뒤집어 입을
  리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자살을  위장하기 위한 타살
  이란 걸 알았죠. 다음 당신은 백자 항아리에 두는 카드
  키를 가지고  현관 문을 열고 나온 뒤 다시 잠그고 당
  신 아파트로 갔었죠. 이튿날 아침  출근하는 척하고 숨
  어서 손현식이 오기를 기다렸어요. 아니나 다를까 손현
  식이 나타나 자기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시체를
  보고 혼미백산하여 뛰쳐나왔죠.  그는 현관  문을 열어
  둔 채 경비실로 뛰어갔고,  그 틈에 당신은  카드 키를
  백자에 넣고는 재빨리 그 아파트롤 나온 거요."
  추경감이 웃음을 띤 듯한 얼굴로 구영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구영민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쉽게 항복을
  하지는 않았다.
  "아주 그럴 듯한 추리군요. 하지만 증거는 없지요."
  "증거? 당신은 카드 키에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카드를 항아리에 넣기  전에 손수건으로  잘 닦았어요.
  하지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죠."
  구영민이 아주 불안한  표정으로 추경감을  쳐다보았
  다.
  "물론 그 카드 키에서 당신의 지문을 찾지는  못했습
  니다.
  그러면 그 카드 키에는 당신 지문이 없더라도 정윤경
  이나 손현식의 지문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 지
  문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고의로 지
  문을 닦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그래서 의심을
  품고 여러 각도로 조사를  했죠. 당신은 현관  문을 열
  때와 잠글 때는 키의 지문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래
  서 카드 키에 묻어 있던  당신 지문이 현관 키꽂이  속
  에 복사되어 찍혀 있었던 거죠."
  "예 ?"
  그제야 구영민은 호흡을 멈추고 벌떡 일어섰다. 하얀
  얼굴에 초점 잃은 눈을 하고  한동안 서 있다가 푹  꼬
  꾸라졌다.
  "예, 다 이야기하지요."
  구영민이 담배연기를 천장을 향해 길게 뿜으며  결심
  한 듯 말했다. 한참 동안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보고
  있던 그의 눈에는 어느덧 이슬이  맺혔다. 사나이 눈에
  맺힌 이슬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윤경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숙녀였습니다. 그가
  어떤 남자에게 어떻게 몸을 맡겼는가는  하나도 중요하
  지 않습니다. 그의  순결한 영혼은 진짜  숙녀였답니다.
  윤경씨에 비하면 저는 쓰레기에 불과하지요."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
  다.
  "윤경씨는 나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그 날엔, 그 날엔 내가 저를 위해 손에 묻힌 피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새파란 젊은 녀석을  끌어들여 노닥
  거리고 있었습니다. 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강제
  로 윤경씨를 범했습니다. 윤경씨는 이렇게 말했어요. 내
  몸은 당신한테 어쩔 수 없이 열려 있지만 마음은  바뀌
  지 않는다고. 이왕 버려진 몸  아무한테나 마구 내맡기
  겠다고도 했어요. 난 그 말에 갖고 있던 남은 청산가리
  를 물 속에 넣어 마구 먹였습니다. 네, 내가  바로 그렇
  게 했어요."
  구영민은 고개를 두 주먹 사이로 파묻었다.
  그런 구영민을 내버려 둔 채 둘은 취조실을 나왔다.
  "자네, 멋지게 구영민을 몰아세우더군."
  추경감이 담뱃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그 정도야 기본이지요."
  "그런데 언제 정윤경의 알리바이를 조사했었지?"
  "헤헤, 반장님도. 조사는 무슨 조삽니까? 그냥 공갈을
  쳐본 거지요. 구영민이도 모르는 일인 것에는 틀림없으
  니까요."
  강형사는 그러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맣했다.
  "그런데 영감이 잡히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카드 키
  로 문을 열면 거기 묻은 지문이 정말로 문의  카드꽂이
  에 복사되어 남습니까?"
  "그건 거짓말이었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어?"
  추경감이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구영민에게 넘겨짚기를 했군요?  그런데 반장님, 알
  고 보니 정윤경이라는 여자 정말 대단한 여자였군요?"
  "진정으로 우리 시대 마지막 숙녀였지."
  추경감은 한숨을 폭 쉬더니 강형사에게 날카롭게  말
  했다.
  "자네는 손현식씨와 설성도, 오하영양에게 정중히 사
  과하고 정윤경씨에 대한 진실을 밝혀 주도록 해."
  "예, 그런데 정윤경씨가 설성도씨를  유혹한 것도 그
  대로 알려 줄까요?"
  "이런, 그새 기가 살아서."
  추경감이 핀잔을 주었다.
  그 다음날 조간에는 연쇄 독살범 검거라는 제호의 사
  회면 톱 기사 밑에 50대 남자 자살이라는  조그만 기사
  가 하나 실려있었다. 그 남자는  증명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진형구라는 사실은  훨씬 훗날에야
  알려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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