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 밤에 죽다
이상우
일. 여류명사 김을숙
김광준한테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첫발이었다. 구년만에 밟은 조국의 땅이었다. 광준은 입
국 수속을 마치고 김포공항 광장에 나서며 우선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른 봄이라 아직은 쌀
쌀한 날씨지만 하늘은 사파이어처럼 투명한 옛 모습 그대로였다. 광준은 콜택시를 타고앉아
수첩에 적힌 주소를 꺼내 보았다. 방배동에 있는 유지 아파트 삼단지 갑시다. 광준은 주소를
일러주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눈을 지그시감았다. 조국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내심 누나한테 귀국 일자를 알리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예고 없이 현
관문을 덜컥 열고 들어서며, 누나 광준이가 왔습니다. 하고 그 감격의 첫 대면을 가지고 싶
었다.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범벅된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누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손님
몇동으로 모실까요.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한 입구를 들어서며 운전사가 물었다. 십사동인데
요. 콜택시는 십사동 입구에 섰다. 광준은 차에서 내려 천천히 아파트로 들어섰다. 십일층
삼호. 광준은 다시 수첩의 주소를 확인하고 계단 쪽으로 발을 옮겼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가 뒤에서 퉁명스럽게 불렀다. "저 말입니까?" 광준이 질질 끌던 여행용 대형 가방을 든
채 돌아섰다. "누굴 찾아오셨는지요." 금테를 두른 모자에 늙수그레하고 새까맣게 탄 얼굴을
한 경비원이 물었다. "저, 미국서 왔는데요. 십일층 삼호실에 누님이 살고 계셔서..."
"아, 예. 김을숙 여사를 찾아오셨구먼요." 경비원은 그 검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반가운
척했다. "엘리베이터는 이쪽입니다." 경비원은 뛰다시피해서 광준의 대형 백을 엘리베이터
앞까지옮겨 주었다. 광준은 과연 듣던 대로 서울의 여류명사라고 생각했다. 경비원까지도 누
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갑자기 태도가 이렇게 달라진다는 데 내심 흐뭇했다. 십일층에 도착
한 광준은 벨을 눌렀다.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떤 엄청난
일을 기대하는 듯한묘한 기대감에 찼다. 누님이 뛰어나오면 먼져 무어라고 말을 건넬까 하
고 잠깐 생각했다.처음 서울에 올라와 양말 짜는 공장에 다니며 단칸방에서 남매가 고생하
던 시절의 누나얼굴이 떠올랐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얌전하고 예쁘던 단말머리 소녀시절. 그
러나 지금은 삼십대로접어든 한국 여류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 변모되어 있을 의젓한누님.
한참을 기다려도 벨 소리엔 응답이 없었다. 오늘은 일요일이지 만 워낙 바쁜 사람이라 어딜
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광준은 다시 벨을 눌렀다. 여전히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광
준은 무심코 현관문을 잡아당겨 보았다. 뜻밖에도 육중한 철제 현관문이 덕컥 열렸다. 광준
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현관 안으로 들어셨다.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광준은 다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의식하며 거실로 올라섰다. "누님! "광준이 큰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아
무런 대답이 없었다. "누이 을숙누나!" 광준이 더 큰소리로 불렀다. 그래도 아무 기척이 없
다. 광준이 기실 소파께로 좀더 들어 갔다. 소파에는 누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뒤로 보이는 소파에는 여자의 머리만이 보였다.
누님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잠이라도 든 것일까?
광준은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소파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누나!' 하고 불렀다. 그러나 소파에 앉은 여인의 머리는 꼼짝도하지 않았
다. 광준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앞으로 돌아가 소파에 앉은 누나의 얼굴을 보았다.
분명히 을숙 누나다. 그러나 첫눈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누나! " 광준이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누나는 멀뚱하게 눈을 뜬 채
고개를 옆으로 축 늘어뜨렸다. "누이 " 광준은 갑자기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보라빛 홈웨
어 위에 피가 번져 있었다. 머리에 상처가 나고, 거기서 귀 뒤로 흘러내린 핏자국이 보였
다. 김을숙 여사는 분명히 죽어 있었다.
"누나! 이게 어찌된 거야? 누나! 나 광준이야! 광준이가 왔어, 누이 "
아무리 울부짖고 흔들어도 김을숙 여사는 꼼짝도 안했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구년 동안 이를 악물고 고생도 외로움도 참으면서 오직 혈
육이 라곤 하나뿐인 누님을 생각하며 살아온 지난날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려앉았다.
누님이 조국에서 부쳐주는 학비를 쪼개고 쪼개쓰면서 구년만에 석사학위 그리고 전자공학
박사학위까지 기어이 따내고 달려온 광준인데...
누님의 대견스러워하고 감격해 하는 그 순간을 위해 살아 온것같은 광준의 지난 세월이 눈
사태처럼 일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았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광준은 벌떡 일어섰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
순간 빨리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준은 테이블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헬로우" 그러나 전화는 먹통이었다. 광준은 밖으로 뛰어나왔다, 엘리베
이터를 기다리지도 않고 비상계단으로 뛰기 시작했다. 맨 아래층 경비실까지 와서 소리쳤다.
"사람이 죽었어요. 사람이..." 그러나 경비실은 잠겨 있는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광준은 밖으로 뛰어나왔다. 아무 곳이나 무작정 뛰었다. 공중전화를 찾으려고 했으나 쉽게
발견할 수가 없었다. 광준은 차들이 모두 속도위반을 하다시피 질주해 대는 큰길까지 뛰어
나왔다. 건너편 모통이에 파출소가 보였다.
광준은 질주하는 차 틈을 헤치고 길을 건너 파출소로 뛰어갔누가 봤다면 죽으려고 환장
한 사람이라고 했을 것이다. 달리던 차동차들이 삑빡 비명을 지르며 급정거를 했다.
광준은 파출소에 뛰어들며 숨이 턱까지 찬 채 소리쳤다. "누님이 죽었어요. 누님이."
광준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듣고 있던 경찰관 두 명이 광준을 따라 나섰다.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남은 한 경찰관은 본서에 신고를 하느라 전화기를 붙들고 씨
름을 했다. 아파트 현관에 도착한 경찰관은 곧 경비원의 제지를 받았다.
"위에 살인사건이 났어요. 당신은 여기서 드나드는 사람을 좀 기록해 놓으시오."
경찰관이 경비원에게 대강 설명을 한 뒤 지시를 하다시피 했다. "저 젊은이가 조금 전에 미
친 듯이 뛰어나가길래 무슨 일이 있었는가 했지요." 경비원이 사색이 된 채 광준을 가리키
며 말했다. "아니 당신은 아까 여기 없었지 않아요."
광준이 경비원에게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말씀을. 당신이 문을 두드리다가 밖
으로 뛰어나갔지 않아요. 내가 뒤따라가며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어요?"
경비원은 어이없다는 투였다.
광준은 당황해서 뒤에서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이 라고 생각했다.
두 경찰관과 광준은 십일충 삼호실로 급히 올라갔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히 소파에 앉은 채로 죽어 있던 누님 김
을숙의 시체가 없어진 것이다. 이 방 저 방을 다 뒤져보았으나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광준은 꼭 도깨비한테 홀린 것만 같았다.
이방 저방과 시체가 있었다는 소파를 자세히 살펴본 경찰관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광준을
쳐다봤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그동안에 시체가 어디로 갔단말입니까?"
광준은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삼십여 분이 지난 뒤 이번에는 본서에서 강력계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수사를 지휘하러 온 듯한 추경감은 경찰관 두 사람으로부터 경위를
듣고 난 뒤, 먼저 아파트의 출입구를 봉쇄한다는 지시를 했다. 그것은 이미 두 경관이 조처
를 해 활은 일이다. 그리고 광준을 소파에 앉히고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우선 여권을 좀 보여 주실까요?"
추경감은 아주 부드럽게 광준 앞에 손을 내밀었다. 작은 눈에 눈 가장자리는 주름투성이의
꾀죄죄한 모습이 경감이라는 직책과는 퍽 어울리지 않는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그러나 늘
입가에 미소를 띤 그의 모습은 사람 좋은 복덕방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오늘 처음 서울에 둘아왔군요." 광준의 얘기를 대강 듣고 난 추경감이 다시 물었다.
"이 아파트에 도착한 것이 몇 시쯤이었습니까?" 추경감이 여권을 돌려주며 물었다.
"오후 세시쯤 됐을겁니다. 열두시 십팔분에 비행장에 도착한 다음,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곧장
택시를 타고 왔으니까요." "왜 미리 누님한테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누님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요. 우리는 구년만에 만나는 것이거든요."
"예 알겠습니다. 공항에서 누님 집으로 전화 같은 것을 걸지 않았습니까?"
진화를 걸 것 같으면 미국서 떠나기 전에 걸었죠." "예. 그렇겠군요."
추경감은 뭔가를 계속 수첩에 적어 넣으면서 잠깐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열초가 지난 뒤
다시 물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만 시체를 발견했을 때의 모습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예, 얼마든지 말씀드리지요. 누님은 눈을 뜬 채 소파에 축 늘어져 앉아 있었습니다. 머리
왼쪽에서 가늘게 피가 흘러내려 홈웨어 위에까지 묻어 있었습니다."
"그때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습니까?"
"글쎄요. 제가 큰소리로 여러번 불러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긴 했습니다만... " "사람이 있다
고 느끼진 않았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혹시 현관에서 신발 같은 것은 못 보셨습니
까?" "그걸 볼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렇겠군요. 누님은 이 집에 혼자 살고 있었습니까?"
"예. 누님은 아직 독신이었거든요. 저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가족 얘기가 아니고 가정부라든가..."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추경감은 담배를 꺼내 피우려고 하다가 먼저 광준에게 권했다.
"전 못 피웁니다."
광준이 사양하자, 추경감은 호주머니에서 지퍼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려고 애를 썼다. 그러
나 기름이 떨어졌는지 좀체 불이켜지지 않는다. 곁에 있던 강형사가 불을 켜댔다.
"경감님, 그 고물 라이터는 이제 제발 버리십시오." 강형사가 빈정거렸다.
"참 강형사. 경비원을 좀 오라고 해." 추경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라이터를 다시 호주머
니에 집어넣고 광준을 쳐다봤다. 현관에서 초인종을 처음 누른 뒤 들어와서 김을숙 여사의
시체를 확인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습니까?"
"글쎄요. 한 삼십초, 아니 일이분쯤 걸렸을 겁니다." 그때 얼굴 까만 경비원이 질린 표정으
로 들어섰다. "경비원은 모두 몇 병입니까?" 추경감이 물었다. "예, 모두 열두 명이 있는데
요." "교대는 어떻게 하고 있죠?" 이번에 강형사가 물었다.
"예, 이 아파트는 모두 이교대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섯 명 이 당번 근무를 하는 셈이군요. 여기 아파트가 16동까지 있는데 여섯 명이
그걸 어떻게 한단 말이지요?" 추경감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이 아파트 전체 말입
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십사동만 말씀드린 건데요." "그래요? 그럼 동별로 경비
조직이 다르다는 말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여기 제삼단지는 모두 동별로 자추제 관리를
하기때문에 다른 동은 모릅니다." "자추제?"
"예. 거 왜 한동 안에 사는 사람들이 돈을 거둬서 저희들한테 월급을 주고 하는..." "응. 자
치제란 말이군. 그럼 이 십사동은 출입구가 몇군데 있습니까?" 추경감이 새담배에 불을 붙
이며 물었다. "세군데가 있습니다. 한군데에 두명씩 열두시간 근무를 합니다." "그럼 다른 출
입구에서 이쪽 아파트로 올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천백삼호실은 제가 지키
고 있는 에이출입구로만 올라올 수가 있습니다. 비출입구나 씨출입구는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키고 있는 입구의 엘리베이터나 비상계단을 통하지 않으면 이 방은 올
수가 없다는 얘기군"
"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일곱시부터 쭈욱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조금전에 저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겠군." 추경감이 광준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입죠. 저
가방을 제가 엘리베이터까지 들어다 드렸는데요." "그럼 나가는 것도 보았겠군." "예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불러도 뒤돌아 보지않고 막 뛰어나가던 걸요" 추경감은 잠깐 생각하다가 다
시 물었다.
"그 뒤에 이 아파트에서 누가 나가는 것을 못 보았나요?" "예 구백삼호 아주머니와 그집 꼬
마만 나갔습니다. " "구백삼호실" 추경감이 강형사의 얼굴을 보았다. "구층 삼호입니다. 그
집이 오늘 이사를 하고 있거든요." 경비원이 대답했다. "그러면 이삿짐 같은 걸 들고 나갔습
니까?" "아뇨 이삿짐을 들고 어떻게 엘리베이터로 나갑니까? 그건 콘도레로 달아서 내려보
내지요." 경비원은 곤돌라를 콘도레라고 했다. "그건 언제 사용했지?" 추경감이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조금 전 이삿짐 센터 인부 세명이 와서 짐을 챙기고 있는데요."
추경감이 강형사한테 눈짓을 했다. 강형사가 재ㅐ빨리 뛰어나갔다. "알았어요. 나가 보세요.
누구누구가 출입하는지 잘 적어놓으세요." 경비원이 절을 꾸벅하고 돌아섰다. "잠깐만" 추경
감이 다시 불렀다. "저말입니까?" 경비원이 다시 돌아섰다. "여기 김을숙씨 집에 김을 숙씨
혼자 살고 있었습니까?" "아뇨, 살림도 하고 비서 노릇도 하는 미스곽이 있는데요."
"미스곽?" "예. 우리가 미스 오리라고 하죠. 곽정자라는 아가씨예요." "미스 오리?"
추경감이 입가에 다시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예. 그 성이 곽씨라서 곽곽하는 게 꼭 오
리 울음소리 같기도하구요. 또 천씨는 그 아가씨 엉덩이가 커서 오리 엉덩이 같다고해 서...
" '후후후... "추경감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헤헤헤. 일러바치친 마셔요. 제가 혼나요." 경비원도 따라 웃었다. "천씨란 누구요?"
추경감이 물었다. "저 하고 짝인데 오늘 근무여요." "경비원이란 말이죠? 그런데 왜 안 보입
니까?" "예. 저 삼백육호 아주머니 심부름을 갔어요. 시골서 부쳐온 고추랑 쌀을 찾으러
화물역에 갔습죠." "아니 경비원이 그런 일도 해요?"
"예. 저희들은 그보다 더 어려운 심부름도 합니다." "됐어요. 나가 보세요."
경비원이 다시 절을 꾸벽하고 나가려고 했다. "미스곽이란 아가씨를 못 오셨습니까?"
그때 추경감이 다시 경비원의 뒷통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아침 나절에 김여사 심부름 간다면서 나갔어요. 아직 안 돌아왔는데요. "
경비원이 돌아서서 대답하고는 다시 절을 꾸벅하고 나갔다.
그동안에 감식차가 도착하고, 여기저기서 무슨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수사경관들이 애를 썼다. 광준도 그들을 따라 이 방 저방을 훑어보았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거실이 장식돼 있고 이 구석
저 구석마다 골동품 장이며, 절구통, 삼태기 같은 옛날의 농촌가재가 멋있게 배치되어 있었
다. 탁자 대신으로 쓰고 있는 궤짝이며 장식대 대신 놓인 골동품 삼충장 위에 감사패와 같
은 것이잔뜩 놓여 있었다. 침실엔 널찍한 침대가 놓여 있고 호화스런 커튼이 뉘엿한 햇볕에
반사되고 있었다. 서재에는 이천여 권은 됨직한 책이 꽉 차, 들어가는 사람에게 중압감을 주
고 있었다. 부엌은 맡끔히 손질돼 있고. 미스곽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작은 방도 깨끗이
정돈되 있었다.
광준은 이 구석 저 구석을 보면서 누님의 깔끔하고 정결한 성미를 느끼고도 남았다. 아니
금방이라도 방그레 옷으며 어디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구백삼호실에 뛰어갔던 강형사가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시체를 이곳에서 빼돌리려면 가장 적당한 방법이 뮈야?"
추경감이 다급하게 물었다. "장은 아직 옮기지 않았구요. 자질구레한 이삿짐이나 침대 같
은 것은 벌써 한 차 싣고 갔던데요," 강형사가 실망한 얼굴로 추경감의 얼굴도 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게 몇 시쯤인데..." "글쎄 확실한 시 간은 모르겠는데, 두 시나 세 시쯤일거라는
데요." "그래서... "
추경감이 벌떡 일어섰다.
"이사간 집으로 사람이 갔습니다만, 그 이삿짐 틈에 시체가 끼어 나감직하지는 않습니다."
'그 집 주인이나 식구들에 대해서 단단히 알아봐. 그리고 이삿짐 센터서 왔다는 그 인부 세
명도..."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헛수고인것 같군요." "헛 수고 ?"
추경감이 혼자 싱긋 웃었다. 조소 같은 것이었다.
"그보다, 범인이 어디로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범인이 이곳에 들어 왔다면 사람을 죽인 뒤
에 어디론가 나갔을 것 아닙니까? 경비실에 있는 그 경비원을 붙들고 이것저것 자세히 캐물
어봤읍니다만 낯선 사람은 아무도 드나든 적 이 없대요. 오늘 이곳에서 밖으로 나간 사람들
은 거의 없어요. 낮 열한 시쯤 이 집의 미스곽이 나간 이후를 집중적으로 체크해 봤는데. 지
금 이사중인 구백삼호실의 아주머니와 어린이들 그리고 인부 세 명이 들어온 것, 그 외 여
기 김광준 씨가 온 것 말고는 출입자가 전혀 없답니 다."
"미스곽이 나가기 전까지는 김을숙 씨가 살아 있었다는 얘기아냐. 그렇다면 범인은 그 이
전에 이 아파트에 숨어 들어와 있다가 김여사를 죽이고 도망쳤다는 얘긴데..."
'도망을 못 치고 이 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죠." "이 에이출입구 내에 있는 아파트는 모두
몇 가구인가?" 추경감이 파출소에서 나와 있는 경관을 보고 물었다.
"예. 모두 사십가구입니다. 한 층에 네가구씩이죠." "이곳이 십일층인데?"
강형사가 계산이 안 맞는다는 투다.
"아아 녜. 다른 데도 그런 곳이 있습니다만 여긴 사층이란게 없습니다. 삼층 다음에 오층이
지요." "사십 가구라... " 추경감이 난감한 표정이다.
"그런데 여섯 가구는 사람이 부재중이라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홉 가구는 아직 분양이
안 끝나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지 금 사람이 살고 있는 가구는 스물다섯
가구뿐입니다."
"그러면 우선 스물다섯 가구를 모조리 수색해 보는 수밖에 없겠는데요."
강형사가 제안했다.
"범인은 아직 이 아파트 안에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범인이
김을숙씨를 쇠뭉치 같은 걸로 머리를 때려 살해하자마자, 김광석 씨가 이 곳에 도착했다고
생각해 보게. 범 인은 우선 방안 어디에 몸을 숨겼다가 광준 씨가 도로 나가는 것을 보고는
시체를 둘러매고 뛰어나갔다고 생각할 수 있지"
"그령다면 경비실에서 아무도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 지가 헬리콥터를 타고 간 것도
아닐 테고..."
강형사가 맞장구를 쳤다.
"미스곽이라는 그 아가씨가 무슨 관련이..."
김광준이 의견을 내놓았다.
"글쎄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조. 하지만 미스곽이 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때 곽정자가 뛰어들어왔다. 놀라서 온통 사색이 되었다.
"우리 회장님이... 우리 회장님이 어떻게 됐습니까?"
미스곽은 울음 섞인 고함을 지르면서 거실로 올라섰다. 현관에서 대강 얘기를 들은 모양이
다.
"우리 회장님은 어디 계셔요?"
미스곽은 아무나 붙들고 소리소리쳤다.
광준은 천천히 미스곽의 어깨를 잡아 소파에 앉혔다.
"미스곽 진정해요. 난 미국서 온 회장님의 동생입니다. 앉아서 천천히 얘기합시다."
미스곽은 벌떡 일어나 광준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시 털썩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회장이란 김을숙 여사가 운영하고 있는 민속 보존 협의회 회장직을 말하는 것이다. 열
개 이상의 감투를 쓰고 있지만, 김을숙 여사가 가장 힘을 쏟고 있는 민속보존 협의회의 회
장 직함을 불러주기를 김을숙 씨 자신이 원하고 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
고 했다. "곽정자 씨! 진정해요. 그리고 우리가 묻는 말에 정확히 대답해 줘요."
추경감이 미스곽과 마주앉으며 말했다. 놀라고 슬퍼하고 당황해 하는 미스곽의 얼굴을 보면
서, 추경감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곧 물음이 터질 것 같은 동정심에 가득 찬 표정이다.
"미스곽이 이 집에서 나간 것은 몇 시쯤이었습니까?"
추경감이 물었다. "열두 시 십 분 전쯤이었어요." "어디에 갔다 왔습니까?"
"회장님 심부름을 갔다 왔어요. 협의회 사무실에 있다가 왔어요."
"오늘은 일요일인데..."
추경감은 곧 자신이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질문을 했지만 물을 건 다 물었다. '
마음씨 좋은 복덕방 아저씨 같은 추경감이고, 남의 슬픔을 자기 슬픔처럼 때론 눈물까지 보
이는 가련한 성품의 추경감이지만, 그러면서도 자기 할 일은 다 해낸다.
"오늘은 일요일이지만 여대생들이 거기 오지로 했었어요. 우리 협의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민속 자료에 관한 파일을 학생들이 열람한다고 해서 그 일을 마치고 오는 길이에요. 그런데
세상에 이 무슨 청천벽력 입니까?"
"곽정자 씨는 회장님 집안 일만 보는 줄 알았는데요?"
강형사가 물었다. 그렇죠, 저는 주로 집에 있습니다만 회장님이 관여하는 여러단체에 심
부름도 다니고 일도 돕고, 때론 원고를 쓰시는 일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곽정자 씨가 집을 나갈 때 누가 찾아온 사람은 없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회장님은
소파에 앉아서 텔리비전을 보고계셨어요." 그렇다면 열한시 오십분 이후부터 김광준이 집에
도착한 세시경 사이에 김을숙은 피살된 것이 확실하다.
그동안이라면 이 아파트에 드나든 사람이 없으니 아직 시체와 범인이 이 아파트 안에 있다
고 추정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파트 주민 중에 범인이 있다고 추정할 수가 있다.
"강형사는 두어 사람 더 데리고 아파트 수색을 해보게. 주민들한테 실례 안 되게 정중하게
수색해야 돼. 영장도 없이 하는 일이니까 신중히 집주인의 양해를 얻어서 하라구. 그리고 그
이삿짐 옮기는 인부 세 명의 소명을 확보해 놓도록." 추경감이 지시했다.
강형사가 정복 경관 한 사람과 사복 경관 한 사람을 데리고 나갔다.
김을숙 씨가 사는 옆집부터 방문을 시작했다.
십일층의 세 가구에서는 아무런 용의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강형사 일행은 십층으로 내려갔다. 십층의 두 가구는 아직
입주자가 없고 한 가구는 문을 잠근 채 다 외출하고 없었다. 남은 한 가구에는 신흔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잠옷 바람으로 일요일을 즐기고 있던 두 부부가 화들짝 놀라 뛰어나왔다. 그
집에서도 아무런 용의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구층에서 이사를 가는 구백삼호실 째고 한 집은 비어 있었고. 두 집은 별다른 이상한 점이
없었다. 강형사는 그러나 끈질기고 정중하게 한 집 한 집을 조사해 나갔다.
오층까지 가는 동안 이렇다 할 수확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집 저집 집안을 뒤져보는
동안 뜻밖에도 호화스런 가구며 집안 치장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불경기니 어쩌니 하면서
도 회사 사장이니 이사니 하는 사람들의 집들은 모두가 가난한 공무원인 강형사의 집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골프채 두서너채씩 없는 집이 거의 없었다.
오층 오백일호실에 왔을 때 강형사는 잠깐 주춤했다. 이 집은 사십대 초반쯤 된 부부와
어린 여학생. 중학 일학년쯤 됨직한 여학생과 세 식구 그리고 가정부 등 네 명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일요일이라 모두 집에 있었다. 주인은 명동에서 조그만 오파상을 경영하는 사장이
었다. 강형사가 이곳저즛을 세밀히 둘러보고 부엌 쪽을 힐끗 보았을때 두 남녀가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분들은 누구시죠?" 강형사가 물었다.
"아. 네. 저 부부는 바로 위층에 사시는 내외예요. 육백일호실이 "그런데 여기는..."
이 집 주부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설명했다. "위층 쓰레기통이 막혀 내려가지 않는다고
보러 왔어요. 이 아파트는 쓰레기통이 맨 위층에서 지하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가끔중간에서
막히는 수가 있어요. 아파트를 지을 때 워낙 쓰레기 통로를 좁게 만들어 가끔 막한답니다."
주부는 자세하게 묻지 않는 것까지 설명을 했다.
쓰레기통 문을 열고 플래시로 살피고 있는 위층 부부는 이쪽의 주고 받는 말을 거들떠 보
지도 않았다. 아내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앞치마를 입은 것으로 보아 집안청소를 하다 내려
온 것 같았다. 남편은 티셔츠 차림이었다.
쓰레기통이란 말을 듣자 강형사는 머리에 얼른 스치는 게 있어 열려진 문으로 쓰레기통
을 들여다봤다. '그렇다. 시체를 쓰레기통에 넣어 지하실 쓰레기 창고로 떨어뜨릴 수도 있
는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으나 쓰레기통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
다. 쓰레기통의 통로는 건장한 여자의 시체가 통과할 만큼 넓지 모했다. "그러나 시체를
토막내서..." 강형사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후다닥 지하실로 뛰어내려갔다. 쓰레기가 떨어져
쌓여있는 곳까지 뛰어가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강형사는 감식반을
시켜 혈흔 같은 것을 찾아보리라고 생각하고 올라왔다. 아파트내의 스물다섯가구를 다 샅샅
이 조사해봤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거참 귀신 곡할 노릇인데요. 그놈이 홍길동이나 수
퍼맨이 아닌이상...' 강형사는 투덜거리며 천백삼호실로 되돌아왔다. "누님의 시체를 본 것이
틀림없습니까?" 강형사가 이번에는 광준을 보고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아니 내가 거짓말
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광준도 질세라 대들었다. "꼭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오랜 여행때문에 피곤하다든지 해서
태평양을 건너 비행기를 타고 오자면 잠도 제대로 못자고 시차에 시달리기도 하고..." 강형
사가 말을 얼버무렸다. "여보시오 내가 허깨비를 봤다는 말입니까?" 광준은 더욱 화가 치밀
었다. "제가 허깨비를 봤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누님의 시체를 잘못 보았다면 얼마나 좋
겠습니까. 나는 이 넓은 천지에 혈육이라곤 딱 누님 한 분뿐이랍니다. 그 누님이 피투성이
가 된 시체였는데, 그걸을 내가 잘못 봤다는 말입니까?"
광준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제가 허깨비를 봤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누님의 시체를 잘
못 보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이 넒은 천지에 혈육이라곤 딱 누님 한 분뿐이랍니다.
그 누님이 피투성이가 된 시체였는데, 그것을 내가 잘못 봤다는 말입니까?" 광준이 악을 쓰
다시피 내뱉었다. "아니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추경감이 두사람의 싸움을 말렸다.
그때 감식반이 초동수사가 끝났다고 보고했다. "그럼 일단 여기서 철수하도록 하지. 아파
트 현관통제도 해제하도록 하고...' 추경감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곽정자씨는 같이 서까지
좀 가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추경감이 말하자 미스곽은 눈물을 닦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일어섰다.
텅빈아파트 천백삼호실에 어둠이 깃들었다. 노루꼬리만큼해가 길어졌다고는 하나 봄날의
해는 쉬어둠을 몰고왔다. 김광준은 불토켜지않고 낮에 누나가 쓰러져있던 소파에 그냥 주저
앉아 넋을 잃고 있었다. 지나온 삼십년의 세월이 허망하기 이를데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광
준이 다섯살때로 기억되는 어느 추운 겨울날,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누나 손을 잡고 마을
을 떠나던 생각이 문득 났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 만 동네 사람들한테 눈총을 받으며 고향인 탈무골을 떠나던 기억
이 어렴풋이 났다. 달구지에 헌 가재를 싣고 아버지는 말없이 소를 재촉했고 어머니는 명주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채 질금질금 눈물을 뿌리며 탈무재 고개를 넘었다. 광준은 네 살위인
누나 을숙의 꽁꽁 언손을 꼭 잡고 눈 비탈길을 넘었다. 꽁꽁 언강 너머로 탈무골을 몇 번이
나 뒤돌아보며 재를 넘었다. 무엇 때문에 쫓겨나다시피 정든 고향을 떠나 정치 없는 타향으
로 일가가 몽땅 떠났는지 광준은 아직도 모른다.
동네 사람들이 팔을 동동 걷고 집에 물려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고 아버지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비겁자 모양으로 이리저리 피해다니고 어머니는 집 모퉁이에 돌아서서 울기만 하
던 기억이 어슴푸레했다. 광준은 철이 든 뒤에도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누나한테 물어
본 적이 없다. 조그만 읍에 나와 살던 아버지는 매일 술타령 만 하다가 끝내는 위장병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갖은 고생을 하며 집 안을 이어갔다. 떡 행
상도 하고 양품 행상도했다. 그러나 불행의 그림자는 광준의 집을 계속 쫓아다녔다.
광준이 초등학교 이학년이고 누나 을숙이 오학년이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어머니는 행
상 나갔다가 기차 건널목에서 기차에 치어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고아나 다름없는 남매
는 굶다시피하면서 이곳저곳을 헤매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서울까지 올라와 누나가
조그만 양말 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했다. 광준은 구두닦이 껌팔이를 하면서 야간 학교에
다녔다. 누나도 고등학교 입학 검정고시를 친다고 새벽 세시네시가 되도록 공부를 했다.
광준은 하루 종일 양말 공장에서 시달리다가 들어와 죽 두사발을 끓여 끼니를 때우고는
또 책과 씨름하는 누나를 볼 때마다 누구에게도 아닌 분노 같은 것이 치솟아 올랐다. 세상
누구에게도 아닌 모든 사람한테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광준이 그때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비치고 있을 때 경찰서 에 갔던 미스
곽이 돌아왔다. "불은 왜 켜지 않았어요?" 미스곽이 벽에 걸린 스위치를 눌렀다. 휘황한 불
빛이 거실을 찬란하게 비쳤다. 텅 비고 싸늘한 거실 벽에 걸려 있는 하회탈춤에 나오는 탈
들이 더욱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나는 광준이 라고 합니다. 낮에 수선 틈에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광준은 예의 바른 초
등학교 아동처 럼 자리 에서 일어나 공손히 미스곽에게 인사를 했다. "회장님께서 늘 말씀
하셨어요. 전 곽정자라고 불러 주세요. 김선생님이 지난 겨울에 기어이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회장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미스곽의 태도는 낮과는 완연히 달랐다.
"경찰서에서 김선생님 저녁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으시더군요."
미스곽은 수화기를 무심코 내려보다가 말했다.
"어머나, 전화가 먹통이네요. 누가 스위치를 뽑았어요."
미스곽이 빠져 있는 전화 스위치를 꽂으며 말했다.
광준은 낮에 경찰서에 신고를 하려고 전화를 들었을 때 통하지 않던 이유을 알았다.
"그놈이 전화기 스위치를 뽑아 놓았었군요."
광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놈이 라뇨?"
미스곽이 눈이 등그레져서 물었다.
"범인 말입니다. 누나를 죽인..."
광준은 더 말을 계속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녁을 드셔야죠. 제가 곧 마련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미스곽이 부엌으로 들어가고 채 삼십 분도 안 되어 밥을 차렸다.
"저녁 좀 드셔요. 갑자기 밥을 짓느라 찬이 별로 없습니다만..."
미스곽이 손을 씻고 나오며 약간 웃어 보였다.
광준은 이 판국에 웃음기를 띠는 미스곽이 괘씸하다고 생각했지만, 웃는 모습은 그리 밉지
않다고 생각했다.
알맞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얄팍한 입술, 선명한 눈썹, 그리고 발그레하고 폭 파인 볼우
물이 있는 뺨, 가느다란 체구에비해 오리 궁둥이라고 하던 볼륨 있는 히프, 퍽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드시죠."
괌준은 전혀 식욕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식탁에 가서 앉았다.
"그래 경찰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광준이 맞은편에 앉지도 않고 엉거주춤 서있는 미스곽을 보고 말을 걸었다.
"회장님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캐물었어요."
"어떤 점을..."
"회장님이 관여하는 단체가 어디 어디냐, 최근 자주 만나는 사람이 누구냐. 이 아파트 안에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둥... 어디 회장님이 관여하시는 사업이 한두 가지라야지요."
"대개 어떤 단체에 관여를 했습니까."
광준은 미국서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누나가 문화단체나 여성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여류명
사라는 건 알았지만 구체적 인 것은 잘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걸 편지에 늘 써 보내지 않았던가요? 신문이나 잡지도 안 보셨어요?"
"예. 공부만 하느라고 어디 고국의 신문이나 갑지를 볼 틈이 있어야조. 거기선 구하기도 어
렵구요."
"하긴 그럴 거예요."
광준은 미스곽이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아닌 아주 친숙한 사람처럼 갑자기 느껴졌다. 아니
친숙한 사람이 아니라, 이성으로 느껴졌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혈육을 나눈 누나가 살해된 집에서 그런 묘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스
스로 되뇌었다.
'회장님이 가장 신경을 쓰시는 것은 민속 보존 협의회랍니다.
그 외에도 여성 지위 향상 위원회 의장, 불우 여성 재기 협회 이사장, 여성 민속원 부원장,
청하 양로원 이사장 등을 맡고 있지만... "
"그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회란 어떤 단체입니까?"
"우리나라의 지방에 숨어 있는 민속들을 재발견하고, 사라져가는 민속 기능 보유자를 후원
도 하고 하는 기관이죠."
"그럼 자금이 필요할 텐데요."
"물론이죠. 거상물산의 장회장 말씀을 못 들으셨어요?"
미스곽이 의아스럽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더없이 귀엽고 천진스럽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장회장이 라뇨?"
"거상그룹의 총수이신 장통석 회장님 말입니다. 그분이 민속문화 보존 협의회의 스폰서인
셈입니다. 기금을 서슴없이 내놓고 후원해 주지요. 자기는 돈을 벌어 우리 김회장 같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돕는게 의무라고 늘 말씀하셨거든요."
"얘, 그랬었군요.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뿐이 아니고 우리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회에서 만드는 민속
공예품을 해외에 내다 파는 일도 하고 있어요. 그 이익금은 몽땅 우리 협의회에 내놓는다고
하더군요. 아주 수출이 잘 되나봐요. "
미스곽은 신이 나서 얘기를 계속했다.
"가끔 장회장님 이 직접 우리 회장님을 찾아와 격려도 하고 하나봐요. "
"집에도 가끔 왔습니까?"
광준은 누나가 독신이란 걸 얼른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나 그질문이 너무 어색하다고 생각
하고 곧 얼버무렸다.
"뭐 딴 의미가 아니라..."
따지고 보면 누나가 시집을 가지 않은 것도 광준 자신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아녜요. 장회장님은 한 번도 여기 오시는 것을 못 봤어요. 제가 나가고 없는 달도 그런 일
은 없었던 것 같아요."
미스곽도 단호하게 말했다. 광준은 공연한 질문을 했다고 후회 했다.
"그래서 경찰서는 어떻게 한대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미스곽이 말을 흐렸다.
"그래서요...?"
"그 사람들은 김선생님의 말씀이 어쩐지...,."
"어쩐지 뭡니까? 믿기 어렵다고 얘기하던가요?"
"믿기 어렵다기보다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그런투였어요."
'뭐라구요? 미스곽이 알다시피 나는 미국에서 오늘 구년만에
돌아왔어요. 그리고 누님은 가족이라곤 아니 피붇이 라고는 나외에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무슨 가정에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는겁니까?"
광준은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고 생각했다. 미스곽한테 화를
낼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람들은 회장님 이 피살된 사실을 목격한 사람이 김선생님 혼자뿐이라는데 의심을 가지
는 것 같아요. 더구나 경비실에
신고 않고 파출소까지 왔다는 것을..."
"그거야 그때...,"
"알고 있어요. 경비실에 경비원이 있었는데 급한 김에 없다고
생각하고 뛰어나간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되었더군요."
광준은 힘 없이 두어 숟가락 밥을 떠 넣다가 수저를 놓아 버렸다.
"입맛이 없는 거군요. 커피라도..."
"예. 너무 실례가 안 된다면..."
조금 후에 미스곽이 커피 두 잔을 끓여가지고 나왔다.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회에 사람이 많습니까?"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열서 너 사람 있어요. 사무국장인
남궁선생과 여사무원, 운전기사 등."
"운전기사는 어디에 갔습니까?"
"예. 일요일은 쉬어요. 일요일에 볼일이 있으면 회장님이 직접 운전을 하시거든요."
"아, 예, 그렇습니까. 그럼 이 집엔 늘 미스곽과 누님 두 분만이 계셨군요."
"그런 셈이죠. 전 원래 광주가 고향이랍니다. 지방 대학 사학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민속에
흥미를 가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김회장님을 만났죠. 우리들은 이곳저곳 벽지를 함
께다녔어요. 그러다가 회장님의 친동생처럼 되어버린 거조."
시골엔 부모님이 계십니까?"
"예. 농사를 짓고 계셔요."
"미스곽은 누가 누님을 살해했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그걸 알면 당장 뛰어가 칼로 가슴을 짠러 죽이고 말 걸요."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누가 무엇 때문에 누님을 죽이고 시체를 감추었다고 짐작되는 점이 혹시..."
"글쎄...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전혀 짐작도 못하겠어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사건이에요.
그처럼 자상하고 마음 착하고 아는 것 많은 우리 회장님 이 누구하고 원수를 지 거나 미움
을 산 일은 전혀 없거든오."
"아까 말씀드린 남궁이라는 사무국장인가 하는 사람은 어떤사람입니까?"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멋내기를 좋아하고 깔끔하고 언변 좋기로
이름나 있죠. 사업 수완이나 처세도 아주 매끈한 편이에요. 회장님과는 오년 동안 같이 일했
죠."
"지금 이 집에서 뭐 없어진 것은 혹시 없습니까?"
"예. 낮에 형사들이 캐물어서 조사해 봤습니다만 아무것도 없어진 것이 없는 것 같아요. 회
장님의 핸드백이나 예금통장 같은것도 그대로 있고요. 여기 널려 있는 문화재들도 돈으로
친다면수월찮은 값인데 모두 그대로예요."
"잘 알겠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그만 주무시지요."
"참 내 정신 좀 봐. 미국서 오시느라고 퍽 피곤하시겠어요. 그럼 이만 들어가쉬세요. 방은
회장님이 쓰던 방을쓰시면 될 것같아요. "
미스곽이 안방에 들어가 자리를 봐주고 나갔다
광준은 누님이 자던 침대에 누웠지만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시차 때문만은 아니었다. 낮에 본 누님의 처참한 모습이 뇌리에
서 영영 사라지지가 않았다.
광준은 거의 뜬눈으로 귀국 후의 첫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거의 꼭두새벽에 추경감과 강형사가 찾아왔다.
"이거 아침 일찍부터 죄송합니다. 같은 아파트의 몇 사람한테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왔다가..."
추경감이 장황하게 변명을 했다.
"괜찮습니다. 어서들 오십시오."
"귀국 첫날밤인데 잠이나 설치지 않으셨는지..."
강형사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경 속에 무슨 잠이 오겠습니까? 그래 뭔가를 좀 알아냈
습니까?"
광준이 추경감이 내뿜는 담배 연기를 피하며 말했다.
"오리무중입니다. 우선 범인이 무엇을 노렸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시체를 감추어
야 할 이유도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추경감이 대답했다.
"그 구백삼호실인가 하는 집의 이삿짐은 어떻게 됐습니까?"
광준이 물었다.
"그것도 전혀 의심가는 데가 없었습니다. 이사간 집까지 쫓아가 짐을 샅샅이 검사했습니다
만 아무 곳에서도 혈흔 하나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혈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집
소파나 거실에서도 혈액 반응 같은 것이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김선생님은 분명히 누님
이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다고 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리고 집안 아무 곳에서도
낯선 지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아파트 구석구석 어디에도
범인이나 시체를 숨진 곳은 없었습니다."
"그럼 경감님은 아직도 제가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뒤 아무런 연락도 이유
도 없이 누님이 집에 돌아오지않는 것은 무슨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광준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뿐입니까? 미스곽이 집을 나갈 땐 분명히 누님이 이 집에 있었다고 했는데, 경비실에선
그 이후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것은-무엇으로 설명을 하려고 합니
까? 당신들은 사람이 죽었다는 내 말을 장난으로 듣고 있는 겁니까?"
광준이 더욱 언성을 높였다.
"아니 꼭 헛것을 보았다고 한다거나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건 김을숙
여사가 어제 열두 시 이후지금까지
근 이십시간 동안 실종상태에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삼 일 더 기다려보고 돌아오지 않으면 실종으로 처리하여..."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광준이 고함을 버럭 질러버렸다. 추경감이 깜짝 놀라 팔을 치켜들어 팔뚝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마치 김광준
의 주먹이라도 막는 듯한 모습이었다.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꼭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방향으로도 우린 짚어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만 실례했습니다."
"실례 많이 하십시오."
광준이 안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광준은 경찰을 믿고 있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국에 돌아와서는 엠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로 돼 있었지만 그건 잠시 뒤로 미루고 누
님의 일부터 캐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광준은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미스곽을 앞세워 우선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횐가 뭔가
하는 사무실부터 찾아가 보기로
했다. 김을숙 여사의 신변을 캐자면 그것이 가장 빠른 길 같았기
때문이다.
광준은 인사동 골목 안에 있는 협의회 사무실을 찾아가면서
옆에서 걷는 곽정자의 수수한 차림과 화장기 없는 얼굴이 보통
여자보다는 뛰어난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아흡시가 채 안되었는데도 사무실에는 벌써 여러 사람이 나와 있었다. 사무실은 광준이 생
각했던 것보다는 꽤 넓었다.
"김선생님. 인사 나누세요, 이분이 여기 사무국장님이신..."
미스곽이 활달해 보이는 삼십대 남자를 소개했다.
"남궁현이라고 합니다. 회장님께서 늘 말씀하셔서 초면이 아
닌 것 같습니다."
남궁현은 서글서글한 생김새와 걸맞게 말씨도 시원시원했다.
남궁은 광준으로부터 대강 얘기를 듣고 크게 낭패한 얼굴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군요.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
습니까?"
남궁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 그대로 앉아 있었다.
"회장님의 방을 잠깐 둘러볼까요?"
광준은 미스곽을 앞세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깨끗하고 실용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응접 소
파에는 풀을 먹인 것처럼 새하얗고 풋풋한 시트가 깔려 정갈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회장님이 무슨 약속 같은 걸 한 일이 없습니까?"
광준이 회장 책상에 놓인 탁상일기를 흘깃흘깃 보면서 남궁현이나 미스곽 두 사람에게 다
묻는 형식으로 말을 던졌다.
"왜 없겠습니까? 잡지사며 신문사서 좌담회에 나와 달라는 부탁이 줄을 잇다시피했구요, 강
연회에 나갈 일도 오늘만 해도 한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다녀올 일이 금요일에 있습
니다."
남궁현이 대답했다.
"지방에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부산에 불구 여성 수용소가 처음 생겨 준공식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
"누님이 직접 운영하는 겁니까?"
"아님니다. 거상그룹의 장통석 회장님이 세우신 겁니다."
"그럼 장통석씨도 같이 갑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그때였다. 누가 화장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문이 열리고 이십대로 보
이는 머리를 짧게 깎은 청년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응, 미스터박 무슨 일이야?"
남궁현이 물었다.
회장님 댁에 모시러 갔더니 아무도 없었어요."
"괜찮아, 회장님이 딴 볼일이 있어서 어딜 가셨으니까 기다리고 있어."
남궁이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내뱉다시피했다.
미스터 박이라는 청년은 얌전히 문을 닫았다.
"회장님 운전사랍니다."
남궁현이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그래 경찰에서는 무어라고들 합니까?"
"글쎄, 그들은 내 말을 잘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삼 일 기다려 보고 누님이 나타나지 않
으면 실종으로 처리할 생각인가봐요. "
광준이 힘없이 말했다.
"말도 안됩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남궁이 언성을 높였다.
"당분간 이 사건은 보안을 유지해 주세요. 협의회에도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는 게좋겠습니
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안다면 시끄러울 겁니다."
광준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어째 그런 신통한 생각을 다했다 하고 생각했
다. 광준은 거기서 차한잔을 마신 뒤 김을숙의 차를 타고 거상그룹으로 향했다. 미스곽은 협
의회 사무실에 그냥 남겨 두었다. 그리고 김회장의 일정이며 메모 같은 것을 세밀히 챙겨
아파트에가져다 놓으라고 일렀다. 그리고 거상그룹으로 향했다. 광준은
몇 가지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 장통석 회장 방으로 안내되었다.
처음엔 비서실에서 예약이 없다고 딱 갑아땠으나 김을숙씨의
중요한 전갈을 가져왔다고 하자 금방 안내를 해주었다.
장통석은 재벌그룹의 총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생김새라고 광준은 생각했다.
조그맣고 볼모양 없는 깡마른 체구에 걸맞지 않게 폭삭 늙어있었다. 그러나 조그만 눈만은
반들반들 빛이 나 보였다. 어떻게 보면 총기롭게도 보이고 어떻게 보면 표독스럽게도 보였
다.
"김회장이 보냈다고 ? 그래 무슨 일인가?"
장통석은 앉으란 말도 않고 서류를 뒤지며 광준을 홀것 보았다.
"저... 지는 김회장의 동생인 김광준이라고 합니다."
광준이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
장통석은 안경을 벗어 들고 광준을 쳐다봤다.
"동생이라니? 그럼 미국에 있는 친동생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어제 돌아왔습니다."
"그래? 자 여기 좀 앉게."
그때야 장회장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 소과로 걸어오며
김광준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래, 웬일로 여기까지..."
장통석이 벨을 놀러 비서에게 차를 시킨 뒤 광준을 쳐다봤다.
"누님께서 어제 둘아가셨습니다."
광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뭐라고? 아니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장통석의 작은 눈이 둥그레졌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이
광준은 어제 일어났던 일을 대강 얘기했다. 눈썹 하나 꼼짝많고 얘기를 다 듣고 난 장통석
은 거머쥔 주먹에 힘을 불끈 쥐었다. 눈에서 는 불이 튀는 것 같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죽일 놈 같으니? 그래 그게 어떤 놈이야 도대체."
"그놈이 누군지 알기만 한다면야 제가 이렇게 장회장님을 찾아뵈었겠습니까? 장회장님은 혹
시 짐작 가시는 일이 있는가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럼 자네는 내가 그놈이 누군지 안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런 뜻은 아닙니다만 혹시 평소에 짐작 가시는 일이라도 있으시면... 금전 관계로
해서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었나는지... 본인이 죽고 없기 때문에 너무 막연합니다."
"아니 경찰은 무얼 한다고 하던가?"
"경찰은 제 얘기를 잘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손을 써서 범인을 잡는 데 힘쓰도록 해보지 그러나 내가 자네한데 도움을 줄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다네. 자네도 들었겠지만 김여사가 하는 일이 하도 대견스러워서
내가 좀도와주고 있었을 뿐이야. 김여사의 활동 자금에 보탬이 될까 해서 만드는 민속품을
해외에 내다 팔아 주기도 하고... 그 이상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네."
"누님과 함께 부산 준공식에 가시기로 했다던데요."
"그렇군. 이거 낭패로군. 나 혼자라도 갈 수밖에 없네."
"누님이 죽었다는 것은 당분간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내가 더 부탁하고 싶은 말일세."
광준은 더 얘기해봤자 별 소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상그룹을 나서면서 광준은 뭔가 석연찮은 것을 느꼈다. 장통석의 태도가 어딘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특이 한 생김새나 냉철한 눈동자로 봐서 보통 사람이 해
석 할수 없는 범상한 데가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무당의 예언
해가 뉘엿해서 광준이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민속 협의회 남궁현 국장 그리고 협의회의 경리를 맡고 있는
조민희 양, 민속 문화재 이미테이션을 만드는 공장인 한국 민예사 책임자 주인성 전무 등이
응접세트에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있고 미스곽은 부엌에서 차를 끓이고 있었다.
남궁현이 주인성 전부와 조민희 양을 광준에게 소개했다.
주인성이란 사람은 삼십대 중반쯤 된 사람으로 전형적인 월급장이 같은 인상이었다.
약간 웃어 보이는 입술 사이로 제멋대로 난 이빨이 내다보였다.
"처음 뵙겠어요. 아니 낮에 사무실에서 잠깐 뵈었죠. 조민희라고 해요."
협의회의 경리를 맡고 있다는 조민희가 얌전하게 인사를 했다.
"예, 김광준이라고 합니다."
광준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진한 초록색의 원피스
위에 받쳐진 얼굴엔 옅은 화장지가 남아 있었다. 목걸이 끝에 매달린 하회 탈춤에 나오는
조그만 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목걸이가 퍽 어울립니다."
광준은 이렇게 말해 놓고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저희 공장에서 만든 것인데 외국서도 인기가 있어 수출이 잘됩니다."
주인성이 설명했다.
"공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협의회 사무실 뒤에 있습니다. 공장은 한이백평 정도되고,
주로 주부들이 부업으로 나와서 일을 하고 있죠. 한 6십명 정도
됩니다. 제품은 모두 거상그룹에 납품하고 있습니다."
주인성 이 또박또박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광준에게 설명했다.
"김선생님 무슨 차를 드시겠어요?"
미스곽이 부억에서 나와 광준한테 물었다.
"거피 한 잔 주십시오."
"예."
미스곽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회장님께서 그런 변을 당하시다니요. 우리나라의 큰 손
실입니다. 우리 회장님처럼 민족의식이 선명한 분은 아마 이 나라에서 찾기 힘들 겁니다. 우
리의전통 문화에 대해 회장님처럼 애정을 쏟는 분은 더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분이
었습니다."
남궁현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했다.
"아직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까?"
주인성이 물었다.
"낮에 경찰서의 강형사가 왔다 갔어요."
미스곽이 차를 돌려 놓으며 대답했다.
"왜 왔답니까?"
광준이 물었다.
"아직도 김회장한테서 연락이 없었느냐고 하더군요."
뭐 라구요?"
"그이는 아직도 김선생님 말씀을 믿지 않는 것 같았어요."
광준은 참으로 암담한 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사건의 해결을 경찰에 맡길 수만은 없다는
처음의 생각이 더욱 옳았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나만 완전히 미친 사람 취급받는군."
광준이 혼잣말처럼 내뱉자 일행은 모두 민망한 표정이 옛다.
"저, 회장님이 하시던 일 중 중요한 결재는 김 선생께서 당분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만..."
주인성이 조심스럽게 말을 끄집어 냈다.
"매일 지출되는 돈도 있고 수표도 끊어야 하고..."
"제가 뭐가 뭔지를 알아야 손을 대지요. 그리고 누님이 하던
일을 제가 꼭 맡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지 않습니다."
광준이 주인성의 말을 가로막았다.
"경황이 없으시겠지만 여러 가지로 잘 생각해 주십시오. 김회장님을 모시고 있는 식구가 백
명에 가깝습니다."
남궁현이 조용히 말했다.
"하여간 지 금까지 하던 일은 남궁국장님 이나 주전무님께서 잘운영해 주십시오, 저는 누님
의 동생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무조건 그 일을 맡을 수는 없습니다. 저의 전공과도 전혀 다르고
국내 사정도 잘 모릅니다."
광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일행이 모두 돌아간 뒤 미스곽과 단둘이 남게 되자 곽정자는
장부며 서류뭉치며 통장 같은 것을 한아름 들고 나왔다.
"그게 다 뭡니까?"
광준의 눈이 둥그레지자 미스곽은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회장님에 관해 좀 구체적으로 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차근차근 살펴보시면 혹시 무슨 단서 라도..."
"어디서 그게 다 나왔습니까?"
"회장님의 방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협의회 사무실서도 몇 가지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
건 회장님의 핸드백입니다."
하얀 진주 같은 구슬이 잔뜩 박힌 노블하게 보이는 끈이 짧은
핸드백을 가리켰다.
"어디 같이 좀 살펴보기로 합시다."
광준은 먼저 핸드백을 열어 보았다.
화장품 따위며 신분증. 휴지 수첩, 저금 통장 등이 나왔다.
광준은 먼저 수첩을 집어들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전화번호가 꽉 적혀 있었다. 주로 문화계
의 인사들과 잡지사 전화번호, 신문, 방송국 전화번호 그리고 전혀 알 수 없는 상호의 전화
번호.
그 중에는 거상그룹의 비서실, 경리과 등의 전화번호도 있었다.
요정 이름과도 비슷한 전화번호 하나를 발견했다. 수정궁이라는
이름이 었다.
"수정궁이 뭔지 혹시 아심니까?"
미스곽에게 물었다.
"수정궁요? 예, 그건 요정이에요."
"요정 이 라구요?"
"예. 외국 손님들이 오면 접대하지 위해 가끔 들르는 곳이에요. 우리 민속가구로 온통 꾸며
진 그런 곳이에요."
광준은 그럴 수도 있으리 라고 생각했다. 광준은 통장을 넘겨보았다. 보통예금 통장이 세 개
나 있었다. 광준은 무심코 넘기다가 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됐다.
"이 통장은 누님이 개인적으로 쓰는 겁니까?"
그래요. 공적으로 쓰는 것은 가지고 다니시지 않아요."
"그런데 하루에도 여러 차례 돈을 꺼내 쓴 흔적이 있는데 왜그랬을까요?"
광준은 하루 사이에 이백만 원,일백만 원, 다시 오백만 원, 또일백만 원 등 여러 차례 돈을
껴낸 흔적을 보았다. 그것도 하루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날 계속해서 돈을 꺼냈다 집어 넣었다 한기록이 나와 있었다.
"무슨 일때문에 이 통장은 이렇게 돈의 출납이 심할까요?"
광준이 통장을 미스곽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글쎄요. 저도 내용은 전혀 모르겠는데요. 써야 할 돈은 거의
제가 지불하거나 협의회의 남궁국장이 처리해 왔습니다. 이건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어디 긴히 쓸 일이 있었겠죠."
미스곽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이건 무엇입니까?"
서류뭉치 속에서 광준은 설계도의 청사진 비슷한 것을 펼쳤다. 그것은 투시도였다. 강과 조
그만 다리가 보이고 오십여 채의 주택이 서 있는 어떤 마을의 자세한 스케치 투시도였다.
위에는 조그맣게 탈무골 무속촌이라 씌어 있었다.
"탈무골이라니? 이건 우리 고향 마을이 아닙니까?"
광준은 눈이 둥그레진 채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어릴 때 누나를 따라 피라미를 잡으러 다니던 탈무강이 선명히 보였다. 비가 조금만 와도
넘치던 돌다리도 있고 뒷동산 중턱의 무당집도 있었다. 거다란 두 그루 정자나무 밀에 동그
마니 혼자 서있는 무당집이 어린 광준에게는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항상 얌전하게 머리를
빗어 올리고 하얀 고무신에 박꽃 같은 하얀
한복을 입고 다니던 무당 아주머니가 눈에 선했다. 그러나 일 년에 몇 차례씩 굿을 올릴 때
는 울긋불긋한 장수옷에 쩔렁쩔렁 소리가 나는 칼을 들고 꼭지가 높이 솔은 관을 쓰고 춤을
출 때는 꼭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던 무당 아주머니. 눈을 크게 부라리며 입을 쩍 벌리고
누워 있는 삶은 돼지대가리와 그 무당 아주머나의 무령소리는 언제나 광준에게 무거운 공포
와 신비를 안겨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큰 굿이 있을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며 무당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그때만은 무당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권력 있는 지배자로 둔갑
해 있었다. 광준과 을숙은 밤새워 벌어지는 이 굿판을 몰래 훔쳐보려고 오들오들 떨면서 정
자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오누이는 손을 꼭 쥔 채 그 춤추는 모습을 바라 보며 무서움을
즐겼다.
"맞았어요. 이건 탈무골 지도랍니다. 얼마 전에도 회장님 모시고 다녀왔는데요."
한참 딴 생각에 빠져 있는 광준을 보고 미스곽이 일러 주었다.
"여기가 무당집이구요. 여기 이 탈무강은 거의 메말라 버렸어요. 미스곽이 손가락으로 지도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림위로 왔다갔다 하는 미스곽의 손이 퍽 곱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아니, 미스곽이 이곳에 가봤단 말입니까?"
"가봤다뿐입니까? 탈무골이라면 돌멩이 하나까지 모조리 욀지경입니다. 경부 고속도로로 가
다가 김천에서 내려 동쪽으로 삼십이킬로니까 꼭 팔십 리군요."
미스곽이 방긋 웃어 보였다. 뺨의 보조개가 귀여웠다.
"며칠 전에도 회장님 모시고 다녀왔다니까요."
"무슨 일로 갔습니까?"
"여기 씌어 있지요? 무속 민속촌으로 꾸미기 위해서예요. 회장님이 그 사업을 성사시키려고
몇 년이나 애를 쓰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무속 민속촌?"
"예. 정확히 말하면 무격 민속촌이란 게 옳을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무당의 마을이 탈무골이래요. 특히 탈무골은 옛날부터 무당이 대를
이어가며 이 마을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고 하더군요. 지금 있는 백순조라는 무당할머니는 제이십팔대라고 하던데요. 하여간
이 마을 사람들은 영혼이 모두 이무당한테 묶여 있다고 보면 옳아요. 선사시대, 즉 부권 사
회 이전의 모권 사회 때의 여성 지배 관습이 화석처럼 남아 있다고 어떤 학자는 말하기도
하더군요. 그러나 회장님께서는 유사 이전 제정 일치 사회 때의 사회 개념이 살아 있는 단
면이라고 논문을 쓰기도 했어요. 하여간 탈무골이란 세계에서 몇 남지 않은 특수한 마을인
것만은 틀림 없어요. 회장님은 이곳을 무속마을로 지정 받아 보존하려고 했어요. 그 일 때문
에 거상그룹 장회장님과도 여 러 번 상의를 했고 문공부 장관도 여러번 만났댔어요"
"그래서 지정을 받았습니까?"
"아뇨, 아직. 그것도 여러 가지 뒷받침이 없으면 안되나봐요.
우선 마을을 지 할 사단법인 같은 재단이 있어야 하고, 돈도 꽤 들고... 또 그곳 주민들을
어떻게 하느냐는 등 복잡한 문제가 많은가 봐요."
광준은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그곳이 정신사적 세계나 민속학적 가치가 어느 정도 있는지
는 모르지 만 누나가 늘 그리던 고향 마을에 애착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했
다.
"참, 그런데 이상한 일도 다 있었어요."
미스곽이 갑자기 생각난 듯 생기가 돌았다.
"저번에 회장님을 모시고 갔을 때 마침 천도굿이 열리고 있었어요. 천도굿이란 죽은 사람미
좋은 곳에 가라고 올리는 굿이죠. 그때 백순조 무당이 구경하고 서 있는 우리를 보고. 아니
회장님을 가리켰다고 생각해요. 좌우간 우리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부정한 새가 타지에
서 날아왔구나. 부정한 새여 죽어라.
만월이 되기 사흘전 새는 죽는다. 저 부정 한 새는 죽는다. 어쩌구 했요. 마치 회장님을 몹
쓸 사람이나 보듯이 저주스럽 게 말하더군요. 공연히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어요."
미스곽은 그때가 몸서리쳐진다는 듯 몸을 움츠렸다.
"부정한 새?"
"그때가 언제죠?"
'한 열흘쯤 됐어요."
"오늘이 음력 며칠입니까?"
미스곽이 발딱 일어나 달력을 짚어 보았다.
"이월 십삼일인데요."
""그럼 오늘이 만월이 되는 보름의 이틀 전이군요."
"그러고 보면 이세기 사흘 전... 어마나!"
미스곽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광준과 정자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한동안 말을 잊었다. 텔레비전의 정지화면과도같은 절대 정적의 시간이 잠
깐 흘렀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습니까. 김선생님."
미스곽이 거의 사색이 되었다.
"거 참으로 묘한 주술이군요. 무당의 예언대로 된 셉이아닙니까? 하지만 그런 우연의 일치
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덮어놓고 지껄여 댄 예언이 맞는 수도 있거든요."
광준은 미스곽의 불안한 마음을 씻어 주려고 말은 했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만약 그 백
순조 무당의 저주가 어떤 초능력적인 힘이 있었거나 아니면 죽음을 예견하고 한 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좀더 앞으로 나가 생각하면 무슨 음모를 꾸며 놓고 예언할 수도 있는 것
이다.
"전 꼭 그렇게만은 생각지 않아요. 예언가나 무격들은 현대사회에서 분석되지 않는 신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유리겔라 같은 집력 이라든지... 이십팔대를 이어온 세습 무당
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그 무슨 신비 한 힘 이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스곽은 상당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너무 늦었습니다. 잘 준비나 하지요."
광준이 화제를 바꾸어 버렸다. 자꾸 얘기하다가는 자기도 그 어떤 신비한 힘에 빨려들 것
같은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목욕물을 받아 뒀어요."
미스곽이 일어서며 말했다. 마치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듯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그 말을
하고는 미스곽도 멋제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회장님은 주무시기 전에 늘 샤워를 하셨거든요."
"저는 그냥 자겠습니다."
광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님이 쓰던 침실로 들어갔다.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모로
발을 늘어뜨리고 누웠다.
누나의 죽음 뒤 엔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음모가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 낮에 만났던 사람
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앞에 떠올려 봤다.
재벌 총수의 인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볼품 없는 왜소한
장통석 거상그룹 회장. 그러나 눈빛만은 무언가 해낼 것처럼 유난히 반짝이던 사나이. 그 작
달막하고 야윈 체구가 집념으로 똘똘 뭉쳐진 것만 같았다.
섣불리 접근할 수 없는 무언가가 풍긴다고 생각했다.
남궁현이라는 사나이. 연극 배우라도 함직한 서글서글한 행동. 큰 키에 비교적 호남 스타일
의 삼십대였다. 여자들한테 꽤 인기가 있을 그런 사나이다.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무슨 일을
꾸미자면 꾸밀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민예 회사 전부인 주인성. 깐깐하고 빈틈없는 듯한 인상의 사나이다. 얼굴은 특징적인데가
거의 없지만 그 전체가 하나의 특징적인 프로필이다. 또박또박한 말씨. 경리사원 출신 같은
얌전하고 바른 예절을 지녔다.
조민희. 첫인상은 전형적인 오피스걸이다. 열은 화장이 그의 쪽빠진 뾰족한 턱을 잘 거버하
고 있었다. 그리고 새하얀 살결이
형광등 밑에서는 납인형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녀대로 풍기는
강한 개성이 있었다.
그리고 짧은 머리에 무뚝뚝하고 성실해 보이는 운전수 박기사.
광준은 깍지를 끼고 눕혔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거실 곁에 있는 욕실 손잡이를
확 잡아당겼다.
"어머나"
앗차! 이런 실수가...
거기는 미스곽이 발가벗은 채 샤워를 하고 있다가 기겁을 했다.
미끈하고 눈부신 뭄매였다. 물에 젖어 더욱 윤기가 흐르는 머리 밑으로 화장이 지워진 순박
한 얼굴. 갸름하고 놀라움으로 긴장된 긴 목. 유연하고 반월형으로 축 늘어지다시피한 매력
적인 어깨. 사발을 엎어 놓은 듯한 기하학적 인 두 개의 젖무덤. 그 끝에 긴장감을 자아내는
열은 핑크빛의 젖꼭지 창고의 곱게 흐른
곡선처럼 적당히 파인 허리선. 그 밑으로 대리석처럼 쭉 뻗은 두개의 다리.
미스곽은 두 손으로 얼른 가슴을 감싸며 옆으로 돌아섰다.
"이거 시... 시... 실레했습니다,"
잠깐 동안 멍청 했던 광준은 황급히 욕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불과 일, 이초 사이에 뇌리에 찍힌 미스곽의 놀랍고 육감적인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
다.
광준은 허겁지겁 침실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어린 소년처럼
어쩔 줄을 물랐다.
침대에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그러나 방금 눈앞에 전개되었던 황홀한
모습이 눈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고혹적이고 매끈한 정자의 살결이 자꾸 움직이는 것 같았다.
미스오리 라는 별명 이 붇을 정도의 볼륨 있는 히프가 숨이 막히게 얼굴 앞에 콱 다가서는
것 같았다.
광준은 고개를 힘차게 흔들었다. 끈적끈적한 욕망을 털어버리려고 했다.
"누님의 비참한 최후를 본 것이 엊그젠데... 아직 누가 누님의
시체를 훔쳐서 달아났는지도 모르는데... 누님의 복수는 커녕 원통한 죽음의 원인도 알지
못하는데..."
광준은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누님을 죽인 범인은 내 손으로 꼭 찾아내고 말 것이다. 그리고 뭣 때문에 착한 우리 누님
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꼭 캐내고 말겠다. 누님의 시신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이튿날 아침 식당에 앉은 광준은 더없이 겸연쩍어졌다. 공연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
다. 미스곽도 어색한 표정을 감추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회장님이 누구한테 형박을 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이 정자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정자 씨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광준은 말해 놓고도 스스로 놀랐다. 이때까지 미스곽이라고
만 불렀는데 왜 갑자기 정자 씨로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무심결에 그렇게 불렀지 만 따지고
보면 그 호칭 이 상당한 의미가 있다
고 스스로 생각했다. 미스곽이 란 보통 사무적인 남녀관계 혹은
상사와 부하 직원 간에 자연스럽게 호칭되는 것은 보통이다. 그러나 정자 씨는 그런 관계가
아닌 보다 인간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호칭이라고 광준은 스스로 해석했다. 어젯밤의 조그마
한 욕실 사건이 호칭을 무의식중에 바꿔 놓았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통장 말인데요. 왜 하루에도 여러 차례씩 그렇게 돈을 찾아갔을까요? 더구나 저를 시키
지도 않고 혼자서 말입니다."
미스곽이 찻잔을 광준 앞에 밀어 놓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좀 빗나간 게 아닐까요, 만약 누구한테 협박을 답해서 돈을 줄 판이면
한꺼번에 찾지 그렇게 여러 차례 은행에서 돈을 꺼낼 턱이 없구요. 더구나 돈을 빼낸 것만
이 아니라
집어넣기도 했거든요."
광준이 밥그릇만 내려다보고 열심히 수저질을 하면서 말했다.
"그도 그렇군요. 그럼 저도 모르는 무슨 사업을 벌였거나 아니면... 참 알 수가 없군요."
"그것이 죽음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조. 하여간 놀라운
사실은 탈무골 무당의 예언입니다. 정자씨는 왜 그 얘기를 어젯밤에야 들려 주었습니까?"
"언제 김선생님하고 조용히 얘기할 틈이 있었나요. 더구나 저는 그런 하찮은 얘기는 귓전으
로 흘려듣고 있었어요.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그러나 그 예언의 날짠가 꼭 맞는다는 데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어요."
미스곽의 얼굴에 다시 공포의 그림자가 스치는 것 같았다.
광준은 그날 낮 경 찰서로 찾아갔다. 그러나 추경감이나 강형사는 경찰서에서 벌써 시경 강
력계로 철수해 버린 뒤였다.
광준은 다시 시경으로 추경감을 만나러 갔다.
"이거 김광준 씨 아닙니까? 밖이 몹시 춥지요."
추경감이 의자를 권했다.
"예 기온은 어제보다 높아졌다는데 더 추운 것 같군요."
"아직 붐이라고 하지만 바람이 불어서 체감 온도가 더 낮은 것
같아요. 겨울이 다시 오나 할 정도지요."
추경감의 눈 가장자리가 더욱 주름투성이가 되었다. 그가 웃을 때의 특징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오늘 여기까지..."
"범인에 대한 것은 좀 알아보셨습니까?"
광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글쎄 그게 하루 이틀에 해결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어디서 누님이 전화 같은 것을 걸어온일은 없습니까?"
"예? 아니 죽은 사람도 전화를 겁니까?"
광준은 눈이 둥그레졌다.
"꼭 죽었다고 단정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솔직 하게 말해 광준 씨가 보신 그 환상은..."
"환상이 라구요! "
광준이 소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너무 화는 내지 마십시오. 김회장님은 집에 돌아오지 못할 급한 사정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민속자료에 너무 집착하시는 분이 라 또 어느 특수한 마을을 발견하고 조사에 열중
할지도 모르구요."
"아니 경감님!"
"예. 다 압니다. 하지만 사횰 동안 집에 안 돌아왔다고 해서
가출이나 실종으로 수배를 하기는 좀 뭣하고..."
광준은 기가 박했다.
"그게 아니에요, 경감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듣고 있습니다."
추경감은 여전히 능글능글한 표정이다.
"누님은 그날 죽게 된다고 누가 예언을 했습니다."
"예? 예언을 했다구요?"
"그렇습니다. 제 말 좀 들어 보시고 판단하십시오."
광준은 어젯밤에 미스곽한테서 들은 탈무골 무당의 얘기를 들려 주었다.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광준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동안
추경감은 빙그레 웃으며 들어 주었다. 도무지 심각한 표정이 아니었다.
"거짓말 같습니까?"
광준은 하도 화가 나서 볼멘 소리로 되물었다.
"천만에요.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 문제는 우리 수사에 참고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김선생,
너무 성급하게 행동하지 마시고
좀 느긋하게 기다려 봅시다."
추경감은 여전히 능글능글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광준은 더 있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일어섰다.
"자주 뵙게 될 것 같습니다. 다시 부탁 드리지만 김선생은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것 같
으니 며칠 푹 쉬는게 좋을것 같군요."
추경감의 말이 화가 잔뜩 난 광준에겐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광준은 분하고 억울한 심정을 삭이느라 이를 악물고 밖으로
나왔다.
광준이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회 사무실에 들렀을 때 남궁국장은 어느 젊은 기자에게 시달리
고 있는 형편이었다.
옆에서 얘기하는 걸 얼핏 들어봤더니 김을숙 회장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실종이라뇨?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몇 번이나 얘기해야 합니까? 더구나 피살설이란 더 말
도 안 됩니다.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궁현은 광준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더 큰소리로 말했다. 마치 광준이 빨리 무슨 일이 일
어나고 있는가를 알아차리라는 투였다.
"글쎄 출장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출장간 곳과 무슨 일로 갔는지를 좀 얘기해 달라는
것 아님니까?"
젊은이도 꽤 집요하게 따지는 것 같았다.
"아! 마침 회장님의 계씨되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직접 말씀
드려 보시죠."
남궁현은 광준이 사태를 짐작하게끔 큰소리로 떠든 뒤 응원을
요청하는 투로 말했다.
"김선생님 인사 나누십시오. 서울 매일신문 사회부의 임기자
입니다. 글쎄 김회장에 관해 터무니없는 루머를 어디서 듣고 오신 모양인데요"
남궁현이 임기자를 광준에게 소개했다.
"김광준이라고 합니다. 김을숙 여사는 제 누님이니까 저하고
망씀을 나누실까요."
광준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옆에 비어 있는 소파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임 철 기자입니다."
임 기자는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얼쿨이 갸름하고 유순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오
똑한 콧날이나 빛나는 눈동자. 만만확은 사람임을 한눈에 읽을 수 있었다.
조민희가 차를 가져왔다. 어젯밤에는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있었으나 오늘은 진한 회색 원피
스 위에 갈색의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퍽 세련되어 보였다.
"누님의 신상에 관해서라면 아는 대로 말씀드릴 테니 물어 보십시오."
광준은 단단히 각오를 하고 말했다.
"예. 조금 전에 시경에 들렀다가 추경감이라는 사람이 누구하고 전화하는 내용을 얼핏 들었
는데. 김을숙씨 피살이니 실종사건이나 하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김을숙 씨라면 우리
민속문화계의 명사이신 김회장이 얼른 떠올라서 왔습니다."
"아. 그렇게 되셨군요. 하지만 임기자님, 전화번호부를 한번
넘겨 보십시오.김을숙이란 이름이 수없이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김을숙이 어디 누님 한
분뿐입니까?"
"그럴 수도 물론 있습니다. 동명이인이 수배가 되는지 피살이
되는지 실종이 되는지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추경감이란 사람한테 내용을 물어 보셨습니까?"
"그 사람이 어떤 능구렁인데 순순히 얘기할 것 같습니까? 지방서 에서 어떤 여자에 관해 물
어 온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누님은 지금 지방에 출장중입니다. 꽤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는데 무슨 학술조사의 자문을 좀 해주느라고 늦는다고 했습니다."
"그 지방이란 곳이 어딥니까?"
"지리산 근방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학술조사단이 철수할때까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광준은 자기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는지
자신도 내심 놀랐다. 또 한편으로 왜 누님 피살 사건을 쪽 세상에 숨기기만 해야 하느냐고
스스로 자문자답도 해보았다. 그러나 자기가 사건을 밝힐 때까지는 세상에 비밀로 해두고
싶었다.
행여 생전의 깨끗한 김을숙이란 이름에 티끌만한 먼지가 묻을까
두려워 했다.
또한 누님이 여기저기 벌여 놓은 사업이 혼란에 빠질우려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학술조사란 것은 무슨 문화재를 발굴하는 작업입니까?"
임 기자는 금방 광준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
그것도 저는 잘 모릅니다. 제 전공과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전공은 실례지만 무엇입니까?"
"반도체 입니다."
이때 남궁현이 끼어들었다.
"김선생님은 미국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으시고 며칠 전에 오셨습니 다."
"예, 그러셨군요."
임 기자는 완전히 속야 넘어간 것 같았다. 더구나 김광준이
박사학위를 받고 며칠 전 돌아왔다는 얘기를 듣자 김을숙에 대해 캐는 것은 완전히 단념한
것 같았다.
"그 문화재 학술조사 작업 이 끝나면 저한테 좀 연락해 주실수 없습니까? 발표하기 전에 말
입니다."
임기자는 이제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야 알려 드려야지요. 하지만 그건 저희 협의회서 주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장님은 단순히 지방 강연을 나가셨다가 조사단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뿐
입니다. 하지만 임기자님께 도움 될게 있으면 꼭 전화를 드리지요."
남궁현이 금방 거짓말을 꾸며 댔다.
"이거 실례 많았습니다."
임기자가 일어서서 예의 바르게 절을 한 뒤 사무실을 나갔다.
광준과 남궁현 그리고 조민화는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김선생님 참 거짓말 잘하시더군요."
조민희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임기응변이라고 하는 거야."
남궁현이 조민회를 나무라듯 말했다.
"어쨌건 김선생님이 말씀을 잘해 주었습니다. 나한테 어떻게
나 캐묻고 물러서 지 않는지 흔났습니다. 만약 그 사건이 신문에라도 보도된다면 우리 협의
회는 물론 공장이나 다른 협회도 쑥밭이 되고 맙니다."
남궁현이 아찔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삼. 수정궁의 비밀
광준은 김을숙 회장의 수첩에 적혀 있는 수정궁이란 곳을 찾기로 했다. 특별히 수정궁을
가 보기로 한 것은 수상하다고 느낀점이 있기때문이다.
궁의 위치가사직공원 근방인데다 김을숙이 거래한 통장이 사직동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우
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지명이 같았고, 김을숙의 집이나 사무실과는 동떨어진 은행에 통장
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하루 사이에 몇 차례나 돈을 넣었다 찾았
다 한 점이 이상했다.
"어서 옵쇼. 예약을 하시려고요? 어느 여행사서 오셨죠?" 광준이 들어서자 웨이터인 듯한
사내가 묻지도 않은 질문을 지레짐작으로 해댔다. 외국 관광객이 꽤나 단체로 드나드는 모
양이 었다.
광준은 미국의 교포사회에서도 조국을 비난할 때 가끔 듣던
기생파티 같은 것을 전문으로 하는 집 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들었다.
"저 어..."
광준이 머뭇거리지 사내는 재빨리,
"이쪽 사무실로 들어옵쇼. 지배인을 곧 모시고 오겠습니다."
하고 정원 모퉁이로 안내했다. 꽤 널찍한 정원에 사철나무며
향나무가 손질이 잘 돼 있었다. 여기저기에 돌로 깎은 장식물이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고 청사초롱을 본뜬 옥외등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적 분위기를 살리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으나, 광준의
눈에는 어쩐지 너무 인공적인 냄새가 잗은 것 같았다.
"제가 지배인 박입니다."
이런 집에 어울리지 않게 사무실같이 차려진 조그만 방에 지배인이란 사람이 들어왔다.
"예, 저는 김광준이라고 합니다. 잠깐 좀 여쭤볼 것이 있어서... "
광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배인의 낯빛이 갑자지 바뀌는 것 같았다.
"세무서에서 나오셨군요."
"세무서요? 아, 아닙니다."
광준이 당황해 하자,
"아아, 기관에 계시는 분이군요. 앉으십시오. 요즘 영 파리를
날리는 판이라 전 또 세무서에서 나오셨나 하고... 허허."
지배인은 멋적은 듯이 웃었다. 광준은 더욱 당황해 하며,
"그것도 아닙니다. 전 김을숙 여사의 동생입니다. 김회장님
말입니 다."
엉겁결에 그렇게 말해 버렸다.
"예? 김회장님 동생이라구요?"
지배인은 다소 놀라는 표정이다.
"예, 그렇습니다. 누님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물어 보다뇨? "
"붜 별 것은 아니군요. 누님에 대한 전기 같은 것을 제가 쓰고있는데요. 쑥스러워 누님께 직
접 물어볼 수도 없고 해서요. 저는 소설가입니다."
광준은 그렇게 둘러대놓고도 내심 거짓말을 잘 둘러대는가 하고 놀랐다.
"그러세요? 그런데 뭘 물어보실 게 있는지요."
지배인은 완전히 석연찮은 표정이다.
"누님이 여길 자주 들르셨습니까?"
"자주라기보다 가끔 손님들을 모시고 왔죠."
"어떤 손님들이었습니까?"
"그야 뭐 여러 층이조. 사업하시는 분이라든가 예술가라든가
아무튼 명사들이 워낙 우리 집을 애용하니깐요."
"장통석 화장도 자주 옵니까?"
"장회장님요? 거상그룹 말씀이죠. 물론 자주 오십니다."
"누님하고 같이 오십니까?"
"김회장님하고요? 글쎄 그런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요."
쉽게 뭔가를 얘기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광준은 이것저것 몇마디 더 물어보았으나 형식적인
대답밖에는 하지 않았다.
광준은 별 소득도 없이 그 집을 엉거주충 물러났다. 정원을
내려오다가 뜻밖의 사내를 만났다.
"김광준 씨 안녕하십니까? 여긴 웬일이십니까?"
싱글싱글 웃음을 띠며 말을 건 사람은 강형사였다.
"아니, 강형사님이 여길 웬일이십니까?"
강형사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저를 미행했군요?"
"미행하다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그냥 여길 지나가다가
광준씨가 이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웬일인가 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쇼."
광준은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그래 뭘 좀 알아냈습니까? 누님 소식이라도 들었나요?"
강형사는 여전히 능글맞게 수작을 걸었다.
"죽은 사람이 무슨 소식을 전합니까?"
"여긴 김을숙 여사의 단골집이 아닙니까? 혹시..."
"들어가서 물어보십시오. 실례합니다."
"또 뵙겠습니다."
강형사가 광준의 뒤에 대고 말을 던지다시피 했다.
광준은 공연히 화가 치밀었다. 우선 남의 뒤를 슬슬 밟아다니는게 아무리 직업이라고 하지
만 밉살스럽게만 보였다.
광준은 수정궁을 나와 은행 사직동 지점 에도 들러봤으나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비탈걸을 내려오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광준이 미국에 있을 때 가끔 편지를 주고받던 동창생
하나가 생각났다.
한규빈. 그는 광준과 같은 계통인 반도체를 공부하다가 지금은 거상그룹의 주력 기업인 거
상전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석이라면 장통석 회장에 대해 뭔가 좀 알지 모튼다. 이삼 년
전 그가 뉴욕에 있을 때 한규빈은 장회장의 아들과 함께 그곳에 잠시 있은 적이 있었다. 장
회장의 아들이 뉴욕의 무슨 음악회에 왔을 때 한규빈이 보호자 자격으로 따라왔던 것이 기
억났다. 회장 아들의 보호자 역할까지 했다면 그 집 사정 에 대해 뭔가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광준은 자꾸 마음 한구석에 누님과 장회장과의 사이를 떠올리곤 하는 것이 불유쾌하다고 생
각하면서도, 그 결백 관계를 밝혀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광준은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전화번호부에서 거상전자를
찾아내고 여 러 차례 전화를 건 끝에 한규빈과 통화를 할 수가 있었다.
"짜식아 왔으면 형님부터 찾을 일이지 뭐하고 자빠졌냐? 거기
가 어디냐?"
한규빈은 몹시도 반가워했다.
"좌우간 좀 만나줬으면 좋겠어. 좀 상의 할 일도 있고 말이야."
두 사람은 저녁 무렵 시청 옆 호텔 거피숍에서 만났다. 한규번이 반가워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성격이 쾌활하고
인정이 많아 학교 시절에도 남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던 친구였다.
광준은 누님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커피숍에서 두어 시간이나 소비한 뒤 다시 대폿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 학교는 언제부터 나가기로 했냐? 교수님?"
소주 몇 잔을 마시자 한규빈은 기분이 조금 오른 모양이다.
그보다도 말이야. 실은, 나 너한테 부탁이 좀 있어서..."
광준은 말문을 열었다.
"짜식아 너와 나 사인데 부탁이 뭐냐 부탁이. 뭐든지 말해. 나들이 줄테니. 단 한 가지 마누
라를 빌려 달라는 것만 빼놓고..."
그는 말끝마다 짜식아를 연발했지만 광준에게는 듣기 싫기 보다는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했
다.
"너희 회사 장통적 회장 말이야."
"음. 그 도요또미 말이지"
"도요또미 라니?"
"장회장 별명이야. 그 왜 임진란을 일으켜 우리 민족을 못 살게 한 도요또미 히데요시란 놈
있잖아. 우리 회장님의 풍채가 꼭 그놈 같다고 해서 붇은 별명 이야. 깡마르고 왜소한
체격에 눈만 반들반들하니까 그런 별명이 붙었나봐."
"도요또미 히데요시를 누가 봤냐?"
"수염 삼천 척에 퉁방울눈의 관운장은 누가 봐서 아는 일이니? 짜식아."
"그건 그렇고, 장통석인지 도요또민지 하는 그 회장 말이야."
"짜식아 회장님은 좋은 분이야,"
"그래 그 회장님에 관해서 좀 알고 싶어."
"뭘 알고 싶단 말이야?"
"뮈 든지"
"뮈든지? 하하하, 웃기네."
"예를 들면 사생활이라든지 하루 일과라든지 자주 다니는 요정이라든지 또..."
"또 뭐냐?"
"여자 관계라든가..."
"짜식아 하필 도요또미의 그런 것을 알아서 뭘 하려고 그래.
너 혹시 돈 내라고 협막편지 보내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예끼!"
"하하하. 짜식아 농담이야. 무슨 일 때문에 알고자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유는 묻지 않겠어. 그리고 내가 내일 자세히 리포트를 만들어 교수님
께 제출할 테니 그건 염려 말고 술이나 마셔 짜식아. 참 별놈 다 보겠어. 전자공학 박사님이
남의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다니..."
한규빈은 이렇게 활달하고 마음씨 좋은 친구였다.
광준이 열두 시가 가까워서 집에 들어갔을 때 미스곽은 자지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자씨 미안합니다."
"아무 연락도 없으시기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서울지리도 잘 모르실 텐데..."
미스곽은 진심인 것 같았다.
"저녁 진지 드세요."
"예."
광준은 아무 말도 않고 식 당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미스곽이 금방 찌개를 가스불에
데워다 놓고 마주 앉았다.
"정자씨도 저녁 전입니까?"
"예. 오시면 같이 먹으려고요."
"저런! 그러실 것 없었는데요."
광준은 정자가 다시 한 번 오래 전부터 알아온 친근한 사이처럼 느껴졌다. 장가를 들면 아
내가 이런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준은 정자를 보던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어쩐지 어색했다. 서툰 신혼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자는 광준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조개에 핑크빛 물이 들었다.
광준은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려 밥을 먹는 둥 마는 통하고 누
님 방으로 건너갔다.
"목욕 안하세요?"
"목욕?"
광준이 뒤둘아서서 반문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동시에 두 사람은 얼굴이 홍당무
가 됐다.
전날 밤 욕실에서 벌거벗은 채 마주친 것이 동시에 생각났기
때문이다.
미스곽은 아무말 않고 돌아서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이튿날 아침.
미스곽이 광준이 자는 방문을 급히 두들겼다.
"광준씨! 광준씨!"
광준이 잠이 덜 깬 채 누워 있다가 주심주섬 옷을 입고 문을
땄다.
"광준씨."
미스곽은 몹시 당황한 표정이다. 손에는 편지 같은 걸 들고
있었다.
"이것 좀 보셔요. 어제 온 것인데 깜박 잊고 있다가 아침에 뜯어 봤더니... 글쎄..."
편지를 건네주는 정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광준이 재빨리 읽어 내려갔다.
" 곽정자 앞
깜찍하고 악한 참새는 저주를 받았다. 신령님이 하시는 일을
참견했기 때문에 너는 이월 둘째 인날 인시에 죽으리라"
편지는 간단히 이렇게 씌어 있었다. 붓이나 연필로 쓴 것이
아니라 타자로 쳐져 있었다.
광준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광준은 불안에 떠는 정자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천천히 앉혔다.
광준은 이 순간에 자기가 퍽 어른스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염려 마십시오. 누가 장난을 한 것일 겁니다."
"장난이 아녜요. 이건 틀림없이 그 탈무골 무당할멈의 저주에
"탈무골 무당..."
"예. 틀림없어요. 회장님도 그 무당할멈이 잡아갔어요."
"그런 허무맹랑한 저주를 믿지 마십시오. 그건 미신입니다.
제가 곁에 있지 않습니까?"
광준은 그렇게 위로는 하면서도 내심 섬뜩한 생각을 버릴수가 없었다. 누님 김을숙 여사도
그 무당이 죽는 날을 예언했다고하지 않는가? 최첨단 과학인 반도체 박사가 이런 황당무계
한 주술 앞에 가로놓였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냉정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무슨 무당할멈이 타이프 라이터를 씁니까? 이건 못된 놈의
장난이니 놀라지 마십시오! 편지 봉투는 어디 있습니까?"
미스곽이 편지 봉투를 내놓았다. 편지 봉투는 특별한 특징이
없었다. 하얀 긴 봉투에 옆으로 이 곳 주소가 타이핑되 있고 곽정자 앞이라고 찍혀 있었다.
흔히 백화점 같은 데서 안내문을 넣어서 '번지내 투입' 하고
보내는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발신인 주소나 이름은 없었고,
회현동 우체국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회현동? 광준은 거상그룹
본사가 회현동에 있다는 것이 얼른 머리에 떠올랐다. 며칠전 거상그룹의 장회장을 만나러
같 때 건너편에 있는 우체국 간판을
보았던 것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인날이라는 것이 뭡니까?"
광준이 정자를 보고 물었다. 정자는 국학 전공이니까 잘 알것 같았다. 광준은 불안한 눈및을
하고 있는 정자를 건네다보았다. 의지하고 싶은. 호소하는 듯한 가련한 눈빛이었다.
"인날이란 일진이에요."
"일진이 뭡니까?"
광준은 어릴 때 어른들한테 듣던 소리 같았다. 미스곽은 다소 불안한 그림자가 옅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초등학교 학생한테 여선생님이 하듯 설명했다.
"인이란 한자로 호랑이를 뜻하지요. 여기선 십이간지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음력으
로 세월이다 시간을
해아릴때 육갑이라고도 하는 이 간지를 썼어요. 매년 매년, 매일 매일, 매시 매시를 간지로
표시했답니다. 간지 중 간이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열 자가 있고
지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열둘이 있지요. 이 열둘이 숫자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
다. 달력을 가지고 오지요."
미스곽이 안방으로 들어가 하루가 한 장씩 된 달력을 가지고왔다.
"이월 둘째 인날이란 이 날이에요." 정자가 가리킨 달력은 음력으로 이월 십팔일이었다. 한
자로 무인이라고 씌어 있고 호랑이의 머리가 그려져 있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음력 이월 십오일입니다.""사흘뒤군요, 그럼 인시란 몇 시입니까?"
광준은 제법 심각하게 물었다. "자시가 밤 열두시를 말합니다. 한 지는 두시간 간격이니까
새벽 세시나 네시께를 말하는 거죠."
"그럼 다시 해석하면 음력 이월 십팔일 새벽 네시께란 말이군요."
광준이 신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셈이에요. 어쩌면 좋아요." 미스곽이 다시 불안해 했
다. "광준씨, 나 오늘부터 혼자 있지 않을래요." "그러면?"
"광준씨도 아무데도 가지 마세요. 집에 꼭 붙어 있어요. 어디든지 가면 따라 나설래요. 나
정말이에요." 미스곽의 말은 정말인 것 같았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걱정 말아요. 문을 꼭 잠그고 있으면 허요. 여기가 십일층인데
누가 어떻게 들어온단 말입니까? 그리고 저런 시렁뱅이의 허황한 장난을 설마 지성인인 정
자씨가 믿는 건 아니겠지요."
"광준씬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제가 당사자라도 마찬가집니다. 아니 전 저 보다 정자씨 걱정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는
그런 냉혈동물은 아닙니다."
"그 말씀 정말이에요?"
광준은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너무 속이 내다보이는 것 같아 겸연쩍었다.
"믿어두 돼요?"
"그럼. 믿으셔요.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마음 푹 놓으세요.
내일 우리 그 탈무골이란 델 좀 가 봅시다."
"탈무골엘 가요?" "예. 아무래도 거기 에 무슨 단서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요."
그것은 사실이 었다. 광준은 아무래도 그 백순조 무당이 마음에 걸리는 데가 있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그때 열려 있는 문으로 두 남녀가 들어 왔다. 남궁 사무국장과
미스조였다. 조민회의 열은 보라색이 그의 얌전한 인상과 잘 어울렸다.
"안녕들 하셨어요?" 조민희가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인사했다.
미스곽은 재빨리 그 문제의 편지를 응접세트 서랍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어서 오세요." "무슨 소식이 좀 있었습니까?" 남궁현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 긴 다리
를 포개 올리며 말했다. "아직... "
그 경찰관이란 사람들은 뭘하고 있다고 하던가요? 나원. 추경감인가 뭔가 하는 사람 말입니
다. 그게 무슨 경찰관이에요? 쪽 배추쟁이 같이 생긴 데다 영락없는 촌놈입디다."
남궁현이 늘어 놓았다. "추경감을 언제 봤습니까?" 광준이 물었다.
"어제 우리 협의회 사무실에 왔더군요." "거긴 왜요?" "글쎄 누가 압니까? 수산가 뭔가를 하
고 다닌답시고 왔던데... 아이구 그 주제에 무슨 수삽니까? 회장님 방에 들어가서
한바퀴 헹 둘러보고 어디서 전화 온 것 없느냐, 장회장과는 어떤 사이다, 장회장과의 금전거
래는 어떻게 돼 있느냐, 매일 몇시에 여기 나오느냐, 자주 다니는 곳은 어디냐 뭐 이런 상식
중에도 상식적인 것만 묻더군요. 그래서 내가 하도 심통이 나서 그래 가지고 범 인이 잡히
겠느냐고 따졌더니, 스스로 가출한건지
사고가 났는지 오르는데 무슨 범인이냐고 하더군요. 나원참!"
남궁현은 연방 담배불을 부졌다 다시 피웠다 하며 떠들었다.
조민희는 고개만 끄덕이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경감을 믿고 있다간 아무것도 안 되겠고 회장님 원수는 우리가 갚아야 합니다."
"혹시 짐작가는 데라도?" "그런 짐작가는 데가 있으면 제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남궁 국
장님은 혹시 수정궁이란 델 아십니까?" 광준이 묻자 남궁현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수정궁이 라뇨?" "사직동에 있는..." "아아 예. 알죠. 언젠가 회장님이 외국 손님들이 왔을
때 모시고 갔었죠. 그건 왜 묻습니까?"
광준은 남궁현이 뜻밖에도 당황해 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뭔가를 숨기는 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출근길에 들른 것은 회장님 건도 있지만, 경리관계를 좀 보고
드리려고 ... 미스조 그것..." 조민희가 핸드백에서 수첩 같은 것을 꺼냈다.
'협의회나 민예사의 돈 관계는 제가 맡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건 남궁 국장이
나 주인성 전무께서 처리해 주셔요. 전 그런 건 전혀 모릅니다." 광준이 손을 내저었다. 조
민희가 수첩을 꺼내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목걸이 끝에 달린 하회탈의 이
미테이션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그래도 회장님을 대리해서..." "전 그런 자격 없습니다. 제
발..."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기회에 보고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조민희가 수첩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날 저녁 호텔 커피숍에서 광준은 한규빈을 다시 만났다.
"짜식아, 이건 극비 리포트다. 메모한 것이니까 나중에 보고, 내 얘기부터 들어봐."
한규빈이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타이핑된 종이 두어 장을 건네주었다. 그것은 장통석 회장의
재산이며 신상에 관한 메모였다. 가족, 주소, 경력, 출입하는 골프장, 요정, 그런 거였다. 그
중에는 삼송리에 있는 별장도 있었다."너 장가부터 들어라 짜샤." "뚱딴지 같이..."
"뚱딴지가 아냐. 회장님 딸 중에 막내가 있는데..." "야, 야 그런 얘기는 집어 치워라."
"짜식아, 보통 재벌접 막내딸 하면 얼른 생각나는 도도한 그런여자 아냐." "그래도 그건 싫
어." "얼씨구. 얘기 듣지도 않고?" "들을 것도 없어. 그 얘긴 그만두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
자." "짜식. 고집은 여전하구나. 아니면 숨겨 논 여자라도 있니?" 숨겨논 여자? 그 말에 광
준은 엉뚱하게도 아파트에 있는 곽정자의 얼굴이 떠올라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있다 있어." "정말이야?" "정말일 수도 있고 거짓말일 수도 있지" 둘은 근처 일식집
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한규빈은 장통석에 대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설명했
다. 체구는 작고 볼품없지만 사람은 당차고 야무지다는것. 기억력이 비상해서, 특히 숫자
에 대한 기억력이 비상해서 휘하 사장이나 경리 담당 이사들이 늘 깨진다는 이야기. 보기는
매섭지만 인정이 두터워 말단 직원의 불행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회사에선 인기기 좋
다는 것. 사교술이 능하고 영어, 일어, 불어를 잘 구사해 상담에 능하다는 것. 바쁜 틈틈이
요즘은 아라비아어까지 배워 중동 고객과 인사 정도는 나눈다는 얘기. 딸이 여섯에 아들이
하나인데 지금 미국서 바이올린 공부를 하고 있고 딸 다섯은 출가하고 막내딸은 어느 고아
원의 보모 노릇을 자청해서 하고 있다는 얘기. 나무랄데 없는 가장이고 그룹 총수지 만 여
자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 삼송리에 있는 별장에는 가끔 어떤 삼십대인지 이십대후반인지
하는 미인과 자주 가서 밤을 세운다는 얘기 등이었다.
광준은 여러 얘기 중에 여자를 좋아해서 삼송리 별장에 자주 데리고 간다는 여인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 여인은 어떤 여자야?" "그건 아무도 몰라. 극비사항이니까. 내가 언젠가 급
한 심부름이 있어 한 번 별장에 간 일이 있는데 그때 얼핏 본 일이 있긴있어. 굉장한 미인
이라고 생각했지" "누군지 신분은 모르고 ?' "짜식아, 그걸 어떻게 아니. 재벌 영감 따라다
니며 아양떠는년이 다 그렇고 그렇지 무슨 볼일 있겠니?" "그 별장에 한 번 가볼 수 없
어?"
"야, 너 이상하구나. 그건 캐서 뭘 할려고 그러니?" 한규빈이 처음으로 광준에게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담에 얘기해 줄께. 그 별장에 꼭 좀 데려다 줘." 광준이 단단히 결심
했다고 생각하자 한규빈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 그 사정은 네가 얘기할때까지 묻지 않기로 하겠어. 반도체 박사가 남의 스캔들을
캐겠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는 안가지만 그렇게 하지 짜아식." "지금 가보자 그럼"
광준은 어쩐지 더 이상 그냥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누님이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 그럴 수 없다는 확신을 얻
기 전에는 일 초도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 광준 자신 속
의 또 하나의 광준한테 통쾌하게 복수해야한다는 생각으로 꽉 찼다.
"좋아, 가자. 짜식. 광준이답지 않게 성미가 급해졌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나올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나는 인정해. 마침
외국서 급히 들어온 상담이 있어 보고할 게 있었어. 내일 아침
비서실로 보내도 되지만 멍청한 척하고 급할 것 같아 왔다고 하면돼."
"그럼 장통석 회장이 지금 별장에 있다는 말이야?"
"짜식 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갔다가 있든 없든 왜 왔냐고하면 사실을 대야 하지 않아.
너 운전할 줄 알지?"
"알지만 노클러치 차가 아니면... 더구나 서울은 길을 몰라..."
"그럼 됐어 짜식아. 넌 운전사로 따라가는 거야."
두 사람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통하고 삼송리로 갔다. 차는
한규빈이 자기차를 몰고 갔다. 입구에 가서와 나올 때만 광준이 운전하기로 했다. 광준은 차
를 타고 가면서도 괴로웠다. 공연한 생각을 해가지고 돌아가신 누님한테 죄를 짓는다고 생
각했다. 김을숙 여사가 천하에 둘도없는 착하고 인정많고 정결한 지성인인 김을숙 여사가
광준의 이런 불순한 생각을 안다면 비록 영혼이나마 얼마나 섭섭해 할 것인가? 별장에는 별
장지기 노부부만이 있고 장회장은 없었다. 광준은 혼자 일단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 밤중에 한 부장님이 웬일이십니까?"
6십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별장지기 마누라가 놀라는 표정이다. "회장님이 혹시 여기 계신
가 해서 심부름 좀 왔었어요. 좀 들어가서 쉬었다 가도 됩니까?" 한규빈이 물었다. "물론입
죠. 저녁은 드셨나요?" "예. 걱정 마십쇼." "그럼 커피나 한잔 대접합죠." 광준은 한규빈을
따라 별장 거실로 들어섰다. 휘황한 샹들리에가 켜지자 넓은 거실이 눈에 꽉 차왔다. 벽에
걸린 커다란 동양화는 뜻밖에도 미녀군도였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미인들이 물가에서 노닐
고 있는 보기드문 소재의 동양화였다. 그옆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고 호화로운 소파며
탁자가 가지런히 갖춰져 있었다. 소파 뒤에는 하회 탈춤의 모형이 한 줄로 주욱 걸려 있었
다. 광준은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딱 멎는 것 같았다. 차를 타고 오면서 행여나 하고 걱
정하던 현실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 "커피 좀 드시죠." 그때 찻잔을 들고 들어온 별장지기
할머니에게 광준이 다짜고짜 물었다. "저기 저 귀신 같은 탈바가지는 뭐하는 것입니까?" 할
머니는 살기까지 띤 광준의 갑작스런 질문에 주춤했다.
"저 벽 장식품 말입니다. 저걸 뭐라고 하는지요."
광준은 당혹해 하는 할머니의 표정을 읽자 얼른 태도를 바꿨다. "아아 저것 말씀입니까? 저
거 탈이란 거죠. 거 왜 광대들 춤출 때 덮어 쓰고 덩더쿵 덩더쿵 하는 것 있잖아요."
"예 그렇군요. 회장님이 퍽 좋아하시나 보죠?"
"짜식 저건 우리 계열사인 거상물산에서 외국에 수출하는 민예품 이미테이션이야." 한규빈
이 거들었다. "아이구 부장님. 아녜요, 저건 진짜래요. 이미태긴가 뭔가 하는 가짜가 아녜
요."할머니가 손을 저으며 나섰다. "진짜라구요?" 한규빈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회장
님 자주 모시고 오는 아가씨가 구해온 진짜라던 대요." "아가씨?" "예. 왜 가끔 오셔서 주무
시고 가는 아가씬지, 여산지." 할머니가 말을 얼버무리며 한규빈한테 눈짓을 했다. 아가씬지
여산짖? 광준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민속품을 구해다 주는 여사? 회장과 가끔
장자리를 같이 하는 민속연구가인 삼십대인지 이십대인지 하는 여사? 광준은 얼굴이 하얘진
채 털썩 주저앉았다. 광준은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착잡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광준씨, 하루종일 무서워서 혼났어요." 미스곽이 투정 비슷하게 말했다. 광준은 그 말에 대
꾸도 앉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정자씨는 장통석 회장의 별장을 알지요?" "별장요? 그게
어디있는데요?" "모르면 그만둬요." 광준은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팔깍
지를 하고 드러누워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 여자는 누님이 아닐 수도 있다. 민속품에 취미를
가진 여자가 어디 하나둘인가? 설사 누님이라고 해도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누님의 죽음은
장회장과 무슨 관계사 있을지도 모른다. 치정살인? 미스곽한테 보낸 그 살인 예고장은 또
무엇인가? 그것이 왜 장통석 회장의 사무실 앞 우체국에서 부쳐졌는가? 광준은 영 잠을 이
루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다. 광준은 까칠한 입맛 때문에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미
스곽이 걱정어린 눈으로 건너다봤다. 어제보다 불안은 많이 가신 것 같았다. 그러나 죽음이
뒤에서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듯 검은 그림자가 얼굴 어디엔가 남아있었다. 광준이
막 집을 나서려는데 추경감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일찍부터 어디를 가시려고?" 추경
감은 여전히 눈가에 웃음을 새기며 거실로 들어섰다. 그가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
를 피워무는 바람에 광준은 하는 수 없이 따라 앉았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었습니까?" "소
식이라뇨? 그건 경찰에서 저한테 전해줘야 할 일 아닙니까? 추경감님은 누님이 실종되었다
고 하시던데 지금쯤 편지나 전화가 있었어어야 할 것 아닙니까?" "허허허, 너무 신경 세우
지 마시고 천천히 얘기좀 나눕시다." "나는 경감님과 할 얘기가 별로 없는데요." "그렇습니
까? 그럼 곽정자 양하고 얘기를 좀 할까요?" 커피잔을 들고 나오는 미스곽을 보고 말했다.
"저한테요?" 미스곽은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이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평소와는 달랐다. 자
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속에 싸여 있기 때문에 조그만 일에도 깜짝 놀라는 그런 상태
였다. "거기좀 앉아요." 미스곽이 보조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팽팽하고 볼륨있는 젖가슴이
두근거리는 모습이 광준의 눈에 들어왔다. 애처로워 보였다. "혹시 수정궁이라는 요정을 아
십니까." 추경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 회장님이 손님 접대하러 몇 번 가신 일이
있어요. 저도 따라갔고요." "민속 보존 협의회 사람들은 그곳에 자주 갑니까?" "그건 잘 모
르겠는데요. 그 집은 워낙 고급집이 돼놔서 음식값이 비싸요. 그래서 웬만한 월급쟁이는 다
닐 수가 없는 데에요." "그렇습니까? 그럼 남궁현씨라든지 조민희 양이라든지, 주인성씨 같
은 분은 가본 일이 없습니까?" "그건 잘모르겠는데요. 회장님이 드나드는 곳이니까 심부름
정도하 하지 않았겠어요?" "그 집 여주인인 문마담을 혹시 아십니까?" "그것도 모르겠는데
요. 우리 회장님이 돌아가신 것하고 수정궁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돌아가셨다고 단
정하지 마십니오." 그때 광준이 끼어들었다. "경감님, 아직도 누님이 피살된 것을 믿지 않으
십니까?" "증거가 없지 않소." "제가 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가?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입니가. 왜 제 말을 그렇게 믿지 않으십니까?" 광준이 이번엔 사정조로 말했다. "
글쎄 그건 좀더 두고 보기로 하죠." "두고 보면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광준은 퉁명스럽
게 쏘아붙여 버렸다. "살인사건은 제쳐두고 남의 요정 비밀이나 캐러 다니시는군요. 어제는
강형산지 깡형산지 하는 사람이 제 뒤를 졸졸따라 수정궁까지 오더니, 오늘은 경감님까지
요정 취재를 하고 다니시는군요. 남의 사생활을 너무 그렇게 캐지 마십시오. 수정궁과 누님
의 피살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하하하, 강형사가 광준씨를 단단히 화나게 했군요. 그
사람 눈치없이 미행하다 들키긴 또 왜 들켜?" "뭣 때문에 저를 미행하는 겁니까? 그건 인권
에 관한사항 아닙니까?" "화내지 마십시요. 강형사가 김선생님을 미행했다면 제가 사과를
드리지요. 하지만 미행한 게 아닐 겁니다. 수정궁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우연히 마주친 거
겠지요. 그 인권 어쩌구 하는 얘기는 다시는 하지 맙시다. 제 모가지 떨어져요." 추경감은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그런데 범인은 잡지 않고 수정궁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으십니
까?" "아, 예, 그건 이번 사건, 글ㅆ 사건인지 모르지만, 누님의 실종과는 별..." "실종이 아니
라 살인이오." 광준이 추경감의 말을 토막내 버렸다. "예, 하여튼 사건과는 별로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것에서 한가한 명사님이나 사장님이 모여서 도박을 자주 한다는 제보가 있어서
좀 알아본 것뿐입니다." "도박이라구요? 예. 규모가 억대니 어쩌니 하는 투서가 있어서 출입
하는 사람을 좀 알아보는 중입니다. 그러나 염려 마십시요. 김을숙 여사같은 훌륭한 인격자
가 그렇 일에 발을 들여놓았겠습니까. 아무렴 말도 안되지요." "그럼 왜 여기까지 와서 캐묻
는 겁니까?" "우리 경찰수사에는 참고인 진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수사에 도움될 이
삭이나 주울까 하구요. 오해는 하지 마십시요." "그런 이삭을 주우려면 우범 지대나 교도소
에나 가보시지요. 우리 집안에는 그런 치사하고 붑도덕하고 더러운 이삭은 없습니다." "하하
하 이해합니다. 광준씨가 왜 화를 내고 계시는 지도 잘 압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이
건..." "볼일 다 보셨으면 일어서시죠. 저는 딴 볼일이 있어 좀 나가야겠는데요." 광준이 노
골적으로 추경감을 쫓아내려고 했다. 광준은 도박이라는 말을 듣자 누님의 사직동 통장 생
각이 불쑥 떠올랐다. 그렇다. 도박을했는지도 모른다. 돈을 잃으니까 가까운 은행에서 얘금
을 계속 찾아왔을 것이다. 그럴수가... 김을숙 누나가 그런 더러운 일을 했다니... 그렇다면
어젯밤에 알게 된 장통석 회장의 별장에 간 것도 누님이 틀림없을지 모른다. 겉으로는 여류
명사입네, 지성인입네, 민속 연구가 입네, 독신자입네 하고 뒤로는 재벌그룹의 총수와 밤마
다 육체의 향연을 벌이고 그것도 모자라 요정 뒷방에서 눈이 빨개진 체 도박판이나 벌이고
뀉. 세상이 이런 여자가 있단 말인가? 아니야, 뭔가 단단히 오해가 있을 것이다. 광준의 생
각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추경감은 광준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아무말 않고 일어섰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추경감이 나가자 광준은 미스곽을 소파에 마주 앉혔다. 그리고 간절
한 눈 빛으로 말을 건넸다. "정자씨 솔직하게 말해줘요." "무엇을 말입니까?" "누님에 관해
서 입니다." "회장님에 관해서 제가 아는 건 다 말씀드렸어요." "장통석 회장과 누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관계라뇨? 불결해요. 회장님처럼 품위 있는 분한테 그런 말은 쓰지 마세요."
미스곽이 뽀루퉁해졌다. "회장님과 장회장님은 두분다 세상이 알아주는 인격자예요. 우리 회
장님의 높은 뜻을 이해하고 협조해 주신 여러 저명 인사중의 한 분이예여. 회장님이 우리
전통 민속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그 고결한 뜻을 밀어주기 위해 노력해 주신 분이예요.
그 이상의 관계는 아무것도 없어요. 외국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스캔들 같은 그런 것은
애초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예요. 김선생님이 외국에 오래 계시다 오셨지만 사고방식이
거기까지 미치고 있다는데 실망했어요." "아니 제가 뭐 어떻다고 했습니까? 제가 말한 관걔
라는 것은 무슨 별다른 뜻이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만 뭡니까?" "주의 사람한테
오해받을 일 같은 것이나 없었나 해서입니다." "광준씨는 누님의 인격을 믿지 않는단 말씀
인가요?" "천만에, 그럴리가 있습니까?" "지금 그 경감인가 곶감인가 하는 사람도 말입니다.
우리 회장님을 무슨 도박꾼처럼 생각하나봐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말도 나왔으니 말인데 혹시 협의회 직원 중에..." "그런건 전 몰라요. 우리 회장님만은
그런분이 아녜요." "그럼 다른 사람, 협의회나 민예사 사람 중에다른 사람얘길 좀 자세시 해
줄 수 없나요? 거기 드나든 적은 없나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하긴 남궁현 국장
은 가끔간다고 했습니다만..." "남궁 국장이?" "예. 몇 년전에 도박사건으로 좀 시끄러운일
이 있었어요." "그 얘길 좀 자세히 해줄 수 없나요?" "저도 잘 모르지만 그분은 한때 사람들
의 입에 오르내렸어요. 바람둥이라는니, 모험가라느니, 페미니스트라느니, 뭐 그런 얘기였죠.
사람이 워낙 훤칠하게 생긱고 활달하고 낙천주의자니까 그런 소리를 듣게도 된거죠. 그러나
속은 착한 사람이에요. 회장님이 얼마나 신임하시는 분인데요." "그런데 몇 년전 도박사건이
란 뭡니까?" "그것도 나중에 본인은 잘못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어요. 친구가 노름을 하는
줄 모르고 자꾸 졸라대니까 여지저기서 돈을 꿔다 댔다나요. 그것이 잘못 전해져 남궁 국장
이 노름을 하다가 빚투성이가 됐다고들 했으니까요. 그분이 놀기 좋아하지만 그런분은 아니
에요." "남궁 국장은 결혼을 했습니까?" "물론이죠. 큰애가 사립 초등학교에 지난 해 입학했
다고 하던데요." "그럼 그때 빚은 어떻게 해결됐습니까?" "회장님과 장회장님이 해결해 드린
걸로 알고 있어요. 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액수가 얼마나 됐는데요?" "잘모르겠어요. 몇천
만원이란 얘기도 있었고 억대란 얘기도 있었고..." "억대라뇨? 그 엄청난 돈을 누님과 장회
장님이 해결했단 말입니까?" "뭐 엄청난 액수는 아닐 거예요. 남궁 국장 자신도 딱하다는
친구한테 속은 일이고, 또 그 돈 때문에 우리 민속 보존협의회가씨끄러워지는 걸 회장님이
싫어했거든요." "장회장은 무슨관계가 있었나요?" "그 돈이란게 장회장님 회사에서 물건값으
로 민예사에 끊어준 수표였거든요. 그러니까 장회장님도씨끄러워지는 걸 좋아할리 있겠습니
까? 더구나 우리 회장님의 명예에 혹시 누라도 끼칠까봐 그런거겠죠 뭐." 그러나 광준은 그
얘기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인격자고 돈이 많다고 하는 장회장이라
도 사업가는 역시 사업가인데, 선뜻 남의 일에 돈을 내주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렇
다면 남궁현과 장회장과 김을숙 사이엔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협의회 사무실에 좀 들었다 오겠습니다. 오후에 우리 탈무골에나 갑시다." 광준
은 후다닥 일어나 인사동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협의회 사무실에는 문은 열려 있는데 아무
도 없었다. 직원들이 모두 출근한 뒤 아침 커피를 마시러 다방에 나간 것같았다. 다방에 모
여 상사나 헐뜯든가 남의 얘기나 하는게 틀림없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광준이 무심코 회장
실 문을 열었을ㄸ 거기 앉아있던 두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남궁현 국장과 조민희가 소파에
마주앉아 무슨장부 같은걸 펴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민희가 더 놀라 장부며 전표를 주
섬주섬 챙겼다. "김선생님이 일찍 웬일이십니까? 어서오세요." 두사랍은 마치 무슨 못된 짓
이나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멋적어했다. "그냥 지나다가 들렀습니다. 계속하세요. 제가 방해
가 된것이나 아닌지요." "상관없습니다. 어제 경리장부를 좀 맞춰 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오후에 천천히 해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회장님이 안계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
좀 앉으십시오. 커피나 한잔하시지요." 남궁현이 눈짓하자, 조민희가 재빠르게 장부며 전표
를 챙겨들고 사무실로 나갔다. 조금 있다가 커피 두잔을 조민희가 들고 들어왔다. 커피잔이
란게 어릴 때 시골서쓰던 간장종지같은 것이었다. "이런 커피잔도 있군요." 광준이 커피잔을
받쳐들며 말했다. "예, 그게 그래보여도 백자입니다. 이조때부터 있었다는 이천에 있는 청엽
요에서 구워낸 것입니다. 이조백자의 빛깔을 가장 가갑게 재현하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듣고
있죠." "예 꽤 비싸겠군요." 광준은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소파에 앉았다. "남궁 국장님과 좀
나눌 얘기가 있는데요." 광준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말하자 조민희가 얼른 눈치를 채고
밖으로 나갔다. "무슨말씀이신지요?" 남궁현은 그답지 않게 약간 긴장한 얼굴이다. "예산 얘
기입니다만, 고깝게 생각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요." "고깝게 생각하다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김선생이 누구신데요" 남궁현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전에 화
톳장 같은데 손을 좀 댔다고 하시던데요." "예?" 남궁현은 전기에 감전된 듯 찔끔해 하는
표정이었다. "누가 그런 터무니 없는 얘기를 하던가요? 내 아무래도 고년이 그런 소리 할
줄 알았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주제에 남 흉이나 보다니."
남궁현은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는 것 같았다. "고년이라뇨?" "아, 고년이 누굽니까. 곽정자
고년이지요." "너무 사람을 헐뜯지 마세요. 그 얘긴 미스곽한테 들은게 아닙니다." "미스곽한
테 안 들었다고요?" "예. 그 얘기는 장통석 회장한테 들었어요." 광준은 어디서 그런 엉뚱한
거짓말이 나왔다 하고 자기를 의심했다. 이제 능청구렁이가 돼가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장회장님이 제가 노름꾼이라고 그러던가요?" "그런 건 아니고 노름에 관련돼서..."
"아, 그 얘기 말씀이군요." 남궁현이 다소 안심하는듯 줄줄 얘기하지 시작했다.
"내 친구 녀석이 한 놈 있었는데, 아니 제 친구일 뿐 아니라 미스조의 전 직장 상사지요. 미
스조는 전에 무역회사의 경리로 있은 적이 있었거든요. 거기 총무부장으로 있던 녀석인데
그 녀석한테 속아서 여기저기서 돈을 꿔 줬지요. 녀석이 무슨 정수기 만드는 회사를 차린
다고 허풍을 떠는 바람에 그대로 믿고 돈을 꿔줬지요. 처음엔 조민희 양이 먼저 곗돈 탄 것
을 빌려 줬었거든요. 그런데 그 돈은 안 주고 밑천이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고 하기에 미
스조의 돈을 건져 줄 양으로 밀어줬지요.
헌데 이 녀석이 공장차리는게 다뭡니까. 놀음에 미쳐서 여기저기 사방서 돈을 꿔다 댔지
뭡니까. 자기 회사 공금도 갖다 쓰고 말입니다. 친구하나 밀어주다가 큰 망신당할 뻔했습니
다." "액수가 얼마나 됐나요?" 광준은 남궁현이 거짓말을 해댄다고 생각하면서 물었다.
"한 삼천만 원 되지요. 그런데 이건 처음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그중에 이천백만 원은 조양
이 협의회 공금을가져다 댄 것이었어요. 어쩝니까. 제가 덮어써야죠 뭐. 이건 비밀입니다. 김
선생님께서는 모른 척해 주십쇼." "알겠습니다." 광준은 남궁현이 어쩐지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회장님도 그길 모르셨나요?" "회장님은 순전히 제가 한 것으로만 알고 있
었죠. 조양이 한짓으로 안다면 큰일 나죠." "그건 왜요?" "생각해 보십쇼. 저야 회장님이 곱
게 봐줘서 사무국장까지 지내고 있는 터이지만..." "알겠습니다. 그래서 회장님이 다 메꿔 주
셨나요?" "그런 셈이지요."
"그런 셈이라니?" "회장님이 장통석 회장과 상의해서 거상그룹수표로 막았으니까요."
"장통석씨는 왜 누님께 그렇게 인심을 썼습니까? 그 사람도 지독한 노랭이 사업가라고 하던
데..." "아무리 노랭이라도 우리 회장님 같은 홀륭한 분의 곤경이야 그냥 보고 넘기실 분이
아닙니다." "장통석씨가 아무 조건 없이 삼천만 원을 메꿔줬단 말이죠?" "예. 물론입니다. 우
리 회장님 일이라면 삼억도 쾌히 내놓았을 겝니다." "누님과 장통석씨는 그 정도로가까웠나
요?" "물론입니다."
남궁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광준의 안색을 살피다가 곧 말을 얼버 부렸다. "뭐 특별한 이
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업가로 보람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을 밀어주겠다는 뜻이죠."
"장통석씨는 여자를 좋아한다면서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좀 좋지 않은 의미로 말입니다."
광준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돈 있으면 사내로서 다 해볼만한 일 중의 하나죠."
남궁현은 빙그레 웃다가 갑자기 표정을 고친다. "그러나 우리 김을숙 회장님과는 절대로 불
미한 관계가 아니 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광준은 남궁현이 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수정궁에 자주 갑니까?" "예?" "수정궁 말입니다. 사직동에 있는..."
"아아 예. 뭐 자주 간다기보다..." 언변좋은 남궁현이 이 대목에서도 말을 더듬었다.
"그럼 이만가 보겠습니다." 광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착잡한 심정으로 일어섰다.
누님과 장톰석, 남궁현과 조민희, 그리고 남궁현과 곽정자, 그 사이에 뭔가 숨겨진 일이 있
는 것만 같았다. 광준은 자기가 너무 오버 쎈스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석연찮은
무엇을 지울수 없었다.
사. 탈무골의 달
광준은 약속대로 곽정자와 함께 탈무골로가기로 했다.
"미스곽, 빨리 갑시다."
광준이 먼저 간단한 행장을 챙기고 거실로 나와 미스곽을 독촉했다.
돋보이게 했다. 붉은 줄 무늬의 횐 바탕은 그녀의 유방을 강조하는데 큰 몫을 했다.
담백한 아름다움. 티없는 얼굴. 육감적인 몸매. 거기에 후광처럼 은은한 지성미를 풍긴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까?
"참 멋져요."
광준이 멀거니 정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았다.
"아이, 김선생님도 뭘 그렇게 보셔요. 부끄러워요."
미스곽은 아닌게 아니라 얼굴이 상기되었다.
"꼭 즐거운 소풍이라도 떠나는 것 같군요."
소풍? 그렇다. 광준에겐 불행하고 암담하던 어린 절에나 있었던 소풍이지만 그 날만은 즐거
웠었다. 봉제공장에 다니던 누나 김을숙 여사가 그날만은 일찍 일어나 김밥을 말아주고 ,
옥수수 삶은거랑 사과 두세개를 보자기에 싸들려주고 몇 닢의 동전도 쥐 어 주며 잘 놀다
오라고 당부하던 그 정겹던 모습이 뇌리를 번개처럼 스쳐갔다.
"빨리가셔요."
이번에 정자가 재촉을 했다.
"무슨가방이 그렇게 큽니까?"
"며칠이 걸릴지 몰라서 옷가지를 좀 챙겼지요. 김선생님 허드레옷과 내의도..."
"예? 제 내의를요?"
광준은 자기 목소리가 너무 겼다고 생각했다.
"예. 오전에 제가수퍼에 나가서 몇가지 사가지고 왔어요."
광준의 목소리에 비해 정자의 목소리는 부끄러움으로 더욱 기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마치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랑 신부와도 같은 야릇한
기대와 조금은 흥분된 마음으로 아파트를 나섰다.
누님을 죽인 원수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나, 모레, 음력 십팔일 새땐이면 죽음의 마신이
찾아올 것이라는 정자의 공포가 이순간만은 다 떠나버렸다.
그들은 고 속버스와 완행버스를 번갈아 타면서 탈무골 입구의
조그만 읍인 경북 금능군의 대곡에 닿았다. 거기서 탈무골은 삼십리 남짓하지만 늦어서 들
어갈수가 없었다.
대곡은 원래 대곡사라는 명찰로가는 입구라서 여름철이면 피서객이 많이 찾는곳이다. 폭은
좁지만계곡이 깊은 강이 있고 바위와 산이수려해서 부호들의 별장도 더러 있는 곳이
"정자씨 오늘은 할수 없이 여기서 하룻밤 자야겠군요."
광준은 정류장 건너편에 있는, 이 골짜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호텔을 건너다보았다. 빨간 네온으로 빛나는 온천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저 여관에 들어갑시다."
정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않고 뒤를 따라왔다. 차 안에서부터
씹던 껌을 소리까지 내면서 짝짝 씹어댔다. 즐겁다는 표시인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 어색한 동작을 감추지 못하며 호텔인지 여관인지의 문을 들어섰다. 여자를 데
리고 호텔로 들어서는 심성이 이런것인가 하고 느끼는 광준은 공연히 무슨 죄를 짓는 것 같
았다.
"어서오이소." 프론트에서 주간지를 뒤적이고 있던 보이 녀석이 억센경상도사투리로떠들면
서 벌떡 일어섰다. "경치좋은 방이 있음더. 서울서 오셨지얘." 녀석은 여전히수선을 떤다.
"따듯한 방 두개를 주십시오." 광준이 성큼 다가서며 용기를 내 말했다. "방을 둘이나 쓰실
라고예?" 녀석은 광준과 정자를 번갈아 훑어보며 의아스럽다는 표정이다. "왜 방이 없습니
까?" "아니 없다뇨. 모두 텅텅 비어있음더. 오늘 주무시는 손님은 조금전에 오신 두분뿐이
라예. 이층방이 따듯하이깨 그리 드시소. 목욕탕도 붙어 있고예. 이곳 온천물이 기똥찹니
더." 녀석은 광준이 들고있는 커다란가방을 뺏다시피 들고 이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녀석은
이층에 나란히 붙은 방 두개의 문을 따주면서 줄곧 이상한 남녀란듯이 쳐다봤다. "이까지
오시가꼬 왜 돈 더들이고 방을 따로따로 쓰십니꺼."" 우리야 뭐 돈 더 받이이께 좋지만서
두." 녀석은 개속 남의 일에 참견하려고 들었다. "정자씨 옷갈아입고 밑에 로비로 나오세
요. 어디가서 저녀기나 먹어놔야지요." 광준이 보이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요즘은
철이아니라서 우리 식당은 안합니더.요 건너편에 김천 식당이 있는데 거기가서 저녁 잡숫고
오이소. 그 대신 내일 아침은 우리 식당서 합니더. 딴 손님이 몇 분 있으이께예."
녀석은 히죽 웃어 보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광준은 손발을 닦은 뒤 대강 세수를 하고로비로 나갔다. 텅비고 을씨년스런 소파에 정자가
벌써 나와 얌전히 앉아 있었다.
초록색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이가가르쳐 준 식 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전에 이 여관에 들른 적이 있어요."
정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회장님하고 탈무골 다녀오다가 차가 챌기는 바람에 여기서
하룻밤 묵고 갔어요. 그땐 한여름이라 피서철이 되어서 그런지
방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겨우 방 하나를 얻어서 둘이 자고 간적이 있어요. 오늘도 그때 같
았다면 방은 하나밖에 못 얻었을것 아녜요?"
광준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랬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예? 아이 짓궂기는..."
정자는 금방 홍조를 띠며 입을가리고 웃었다.
"저녁에 무서워서 어떻게 혼자 자죠?"
정자가 자못 심각하게 말했다.
"문을 잠그고 자요. 내가 옆방에서 지켜 드리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럼 열두 시까지만 우리 함께 있어요. 제 방에서 얘기나 하다가 가서 자기로 하죠."
광준은 말해놓고도 엉뚱한 제의를 했다고 생각했다. "김선생님을 믿을수 있어요? 회장님은
늘 사내는 틈만있으면 덤벼드는 승냥이라고 말씀하시던데..." "누님이 그랬어요? 하하하
" "호호호" 둘은 유퇘하게 웃었다. "승냥이도승냥이 나름이지요. 승냥이가 뭐 체면차린대
요?" 미스곽은 곱게 눈을 흘겨보였다. 저녁을 먹고난 그들은 곧 호텔로 돌아왔다. 바깥날씨
가 의외로 쌀쌀하기 ㄸ문에 거리를 걸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들은 광준의 말대로 광준의
방에 함께 들어왔다. 더블 침대옆에 놓인 간이 소파에 마주 앉았다. 자못 어색한 공기가 꼭
꼭 닫은 창문 안에서 맴돌았다. "정자씨는 연애해본일 있으세요?" 광준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꿀 양으로 말을 걸었다. "승냥이는 대개 첫질문을 그렇게 한대요." 정자는 짐짓 옷긴을
여미며 대꾸했다. "그것도 느님이가르쳐주셨나요?"" 아뇨. 소설책에서 봤어요." "그때 대답
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승냥이와 싸울 생각이 있으면 경험이 있다고 대답하구요. 싸우지
않고 항복할 생각이면 고개만 흔드는 거래요" "허허허. 그래 정자씨는 어느쪽입니까?" "고
개만 흔들었으면 좋겠는데 회장님께 꾸중들을까봐 못하겠어요."
"회장님은 돌아가셨는데..."
그 말을 하다가 둘은 자세가 굳어졌다. 그렇다. 우리가 무엇때문에 이곳에 와 있는데 실없
는 소리나 하고 있단 말인가?
그 생각이 동시에 두 사람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는 그만가서 자겠어요. 차에 시달려 피곤하실 테니 김선생님도 주무셔요, 내일 아침 일
찍 식당에서만나요."
미스곽이 단호하게 말하고 벌떡 일어섰다.
"제가 바래다 드리지요."
광준도 따라 일어나 옆의 정자 방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져 깜깜했다. 광준이 변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는다는 것이 벽 아닌
미스곽의가슴에 손이 닿고 말았다.
"정자씨..."
광준은 갑자기 그 손을 허리 뒤로 돌려 끌어 안았다. 그리고
번개같이 양팔에 정자를 껴안고 입술을 더듬었다.
"아... 아니..."
너무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정자는 자기 의사를 표현할 기회가 없었다. 뿐 아니라 너무
뜻밖이라 어떻게 할 줄을 몰라 하다가 벽 스위치를 급히 눌러 불을 켜 버렸다.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자 광준은 주춤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가 주세요."
미스곽이 어느 틈에 광준의 양닺에서 빠져나오며 뾰루퉁해졌다.
"정자씨!"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아요. 나가 주시면 돼요!"
너무도 앙칼지 고 또렷한 목소리에 기가 죽은 광준은 아무 말도 하지못하고 그 방을 나와
버렸다.
혼자 오두마니 빈 방에 남은 정자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형언할수 없는 야릇한 심정이었다. 왜 광준을 쫓아내 버렸는지
자기 심사를 자기도 이해할수가 없었다. 거부하는 몸짓은 여성의 숙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을 했다.
두근거리는가슴과 후회와 한켠으로 몰려 오는 야릇한 충격을
삭일 양으로 침대 시트를 들치고 드러누워 버렸다.
이튿날 아침 광준과 정자는 호텔 아래층 식탁에 마주앉았다.
서로 어젯밤의 해프닝을 의식해서 인지 두 사람은 더욱 어색해했다. 그러 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약간 상기 된 정자의
모습은 갑자기 행복해진 사람의 모습 그대로다.
슬금슬금 곁눈질로 정자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광준은 잡지가
눈이 동그레졌다. 정자의 어깨 너머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은 뜻밖에도 서울 시경의
추경감이었다. 뿐 아니라 뒤에는 강형사가 바둑이처럼 추경감을 따라 들어섰다.
"아니, 저 사람들이...,."
광준이 숟가락을 든 채 굳어지자 정자도 깜한 놀라 뒤를 돌아다봤다.
"아이고 이거 김광준씨 아뇨? 아니 미스곽까지..."
추경감이 함박웃음을 웃으며 반갑게 다가왔다.
"이 골짜기에 웬일들이슈."
강형사도 거들었다.
광준은 엉거주춤 일어나 추경감이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했"설마 두 분이 사랑의 도피를
한 것은 아닐 테고..."
추경감이 옆 테이블에 앉으며 장난기어린 말을 건넸다.
"경감님과 강형사님이야말로 여기 웬일이십니까? 설마 이번에도 저를 미행한 것운 아니겠
죠?"
광준이 정신을 차린 뒤 쏘아붙였다.
"미행이라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김천에 출장 왔다가
여기 경치 좋은 곳이 있다기에 잠깐 들른 것입니다."
추경감이 주름투성이 얼굴에 연방 미소를 지으며 능글능글하게 능청을 떨었다.
"거짓말 마슈. 우릴 미행한게 틀림없어요. 도대체 무엇때문에 날 쫓아다니는 겁니까´ 경찰
관이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심니까?"
"오해하지 마십쇼. 전 한 번도 김선생과 곽정자씨를 미행한일이 없습니다. 아니. 처녀 총각
이 경치 좋은 곳 찾아 밀어를 나누리 다니는데 아무리 눈치 없는 경찰관이기로소니 미행을
하겠습니까?"
"말을 좀 삼가 주세요. 우리가 뭐할 없이 사랑놀음이나 하러 다니는 줄 아세요?"
정자가 더 못 듣겠다는듯이 묄아붙였다.
"그게 아닙니까?"
"아아, 그렇다면 취소하겠습니다."
강형사가 금방 사과하는 태도다.
"도대체 여긴 뭣하러 왔습니까? 혹시 탈무골에가시는 건 아닌지요."
추경감이 정곡을 찔렀다.
"그렇습니다. 살인범 을 찾는 단서가 혹시 있을지 몰라 가보는것입니다. 같이 가시겠습니
까?"
광준은 기왕 이렇게 된 일, 더 적극적으로 나왔다.
"어떻습니까? 아침 먹고 같이가시지 않겠습니까?"
"아아, 아뇨. 우린 이곳 대곡사나 좁 들렀다가 김천으로 나가야 합니다."
"거짓말 하지 마십쇼. 탈무골에서 마주쳐 서로 겸연쩍어하지말고 같이가시죠."
광준도 지지는 않았다.
"천만의 말씀. 넘겨집지 마십쇼. 이래봬도 제 직업이 형사구요. 경찰관 생활 이팔년째입니
다."
너무 딱 잡아떼자 광준은 정발 그들과 우연히 여기서 마주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 어서 아침 식사나 드시죠."
추경감과 강형사는 대수롭지 않다는듯이 국에 밥을 말아 훌훌 마셔댔다,
"누님 피살사건의수사는 어떻게 돼가는 겁니까?"
광준은 영 분이 풀리지 않아 다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아... 그 김을숙 여사 실종사건 말입니까? 전국에 수배를 해놨으니 머지 않아 무슨 단서
가 나올겁니다. 저 희도 힘 쓰는 대로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능글맞은 녀석을 보았다. 광준은 물어본 자신이 잘못이란듯 입을 봉하고 말았다.
광준은 정자를 끌다시피하고 식당을 나와 버렸다.
"서울서만납시다."
나오는 광준과 정자의 등뒤에 대고 추경감이 인사말을 던졌다.
광준과 정자는 호텔을 나와 택시를 하나 전세냈다.
보이 녀석이 희한한 청춘남녀도 다 봤다는듯이 연방 히죽거리며 택시 문을 열어 주었다.
대곡읍에서 탈무골로가는 길은 꽤 험했지만 경치는 그만이었다. 아스팔트가 돼 있지 않아
엉덩방아를 계속 찌어대며 시속
이십킬로 정도의 느린 속도로 차가 달렸다.
"이거 좀 드세요."
정자가 핸드백을 열고 과자를 꺼내 손바닥에 얹고 광준의 턱밑에 갖다댔다.
"이건 어디서 났어요?"
"서울서 올때가져왔어요. 오래 차를 타고가면 출출할 것 같아서..."
광준은 정자의 용의주도함에 감탄했다.
하얗고 조그만 손바닥이 더 없이 귀여워 보였다.
"탈무골에가면 아시는 분이 있어요?"
"아는 사람? 글쎄 너무 오래 돼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무당할머니도 날 못 알아볼 거고. 하지만 몇몇 노인네를 나는 알아볼수 있을 거
야. 자기들은 내가 워낙 어릴때 나왔기때문에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볼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마을에 들어서서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글쎄, 우선 내가 난 생가나 한 번 들러보고 , 그 담에 백순조무당이나 좀만나봐야죠."
"무당을요? "
정자가 놀라는 기색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무당이 괴상한 예언을 했다니까 그걸 좀
캐 봐야겠는데요."
"전 같이가지 않을래요."
정자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스쳤다.
"괜찮아요. 현대 여성이 까짓 미신을 그렇게 마음에 끼고 있을것 없어요. 우리가 뭣때문에
왔는지 무당은 알 턱이 없어요."
차가 뒤뚱거리며 고개를 넘지 자그마한 탈무강이 한눈에 보였다.
가물어서 그런지 강에는 물줄기가 어린애 오줌 줄기만큼가냘프게 쫄쫄거리고 있었다. 그러
나 강 옆으로 치솟은 벼랑이며 그벼랑 위에 선 온갖 풍상을 다 겪은 것같이 뒤틀린 소나무
는 여전히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듯했다.
광준은 한눈에 펼쳐지는 강 건너의 옛고향 마을을 보자가슴이 벅차올랐다.
여섯 살때 철모르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건너던 그 강이다 그때 어머니는 머
리를 감싼 명주수건으로 계속 눈물을 찍어내며 탈무골을 뒤돌아보고 뒤돌아보고 했다.
그때 을숙누나도 따라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버지는 아무말도 않고 대강 챙겨 실은 이삿
짐 달구지를 끌고 있었다.
왜 그런 절망적인 행색으로 일가가 탈무골을 떠나야만 했던지 광준은 아직도 그 이유를 모
른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은 그때 동네에서 추방당한 것이란 것뿐이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떤 일을 저
질러 동네에 살수 없게 되었을 것이란 짐작만을 하고 있었다. 광준은 물론 누님인 김을숙에
게 그때 상황을 한 번도 물어 본 일이 없다.
아프고 슬픈 추억의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심사때문인지도 모른다.
두 남매는 고아처럼 온갖 고생을 헤치고 살면서 도 그 문제만은 무슨 묵계라도 한듯 한 번
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오직 입에 풀칠하고 세파를 헤쳐나가는 데만 정신이 없었다.
그 어려운 유년 시절을 그래도 빗나가지 않고 배움에만 열중하던 남매였다.
이 곳저 곳 사글세 방을 옮켜다닐때도 이웃사람들은 착한 오누이로 동정했었다.
터덜거리던 택시는 어느덧 탈무강 다리를 건너 동네로 들어섰다.
마을은 날씨 탓인지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볼수가 없었다.
"됐어요. 여기서 세워 주십시오."
동네가운데까지 들어가기 전에 광준과 정자는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려선 채 광준은 동네를 눈으로 한 번 훑어 보았다.
언덕배기에 층층대처럼 서 있는 집들은 어렴풋이 옛날 그때의
모습을 더듬게 했다. 동네 뒤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고목은 그때나 다름이 없었다, 다만
그 뒤로 보이는 무당의 집은 없어지고
커다란 기와집의 대문만이 보였다.
"아니 백무당 집은 없어졌잖아?"
광준이 뜻밖이란듯이 혼잣말을했다.
"저기 큰 기와집이 무당집이잖아요."
정자가 손가락으로가리켰다. "그래요 그럼 옛날 집은 헐어버리고 새로 지은 겁니까?" "그건
모르지만 하여튼 저 커다란 집이 백순조 무당이 사는 집이예요." "그렇게 됐군요. 무당할멈
이 큰 부자가 된 모양이죠?" 광준은 참으로 신기했다. "저 집에가면 사랑채 같은게 있는데
대개 이곳에 들른 낯선 사람들은 거기서 쉬다 간대요. 말하자면 동네 응접실 같은 곳이에
요. 저 무당집 울타리 안에 집이 세채나 있어요. 하나는 무당이 자기 신을 모셔놓은 곳이고
한채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당이란 곳이고 또 한채, 대문 옆에 있는 집은 동네 사랑방같
은 곳이래요. 저번에 회장님과 왔을때도 그곳에서 하룻밤 자고 갔어요." 정자가 자세히 설
명을 했다. "그럼 우선 그리로가봅시다." 광준이가방을 들고 앞장 섰다. 그들이 고목나무
앞까지 오는 동안 동네 사람은 아무도만나지 못했다. 광준은 무당의 집에서 우선 방 두칸을
빌렸다. 무당의 집은 이십여년전 광준이 보았을때와는 완연히 달랐다. 위치는 그곳인듯한데
그때의 집 모습은 오데간데 없고 널찍하고 어마어마한 부잣집 대가 처럼 변해있었다. 행랑
채처럼 대문 입구에 서너칸의 집이 한채서있고 그위 산기슭쪽으로 조금 높은 곳에 당이라는
곳과 무당이 사는 본채가 따로 있었다. 행랑채와 본채의가운데는 널찍한 아담이 마련되어
있고 마당 곁으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 대나무숲은 어릴때 본 그대로였다.
방을 비는 것도 아주수월했다. 정자가 안채에 올라가 백순조 무당할머니한테 얘기해서 쉽게
허락을받았다. 무당할머니와 정자는 전부터 안연이 있었기때문이리라.
"내가 누구라고 얘기를 했나요?"
우선 마루에 걸터앉은 광준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정자를
보고 물었다.
" 아뇨."
"그럼 물어보지도 않던가요?"
"새를 연구하는 학교선생님이라고 그랬어요. 이 지방에 사는
조류를 관찰하러 왔다고 했죠."
"잘도 둘러대는군. 내가 무슨 새를 연구한단 말입니까?"
"따지고 보면 영 관계 없는 것도 아니라구요. 우리 회장님이
여기 오셨을때 무당한테 저주받은 타지의 새라는 지적을 받은일이 있었거든요. 무속과 새라
는 것은 옛날부터 야릇한 관계가있어 왔어요."
"하기야 미국에도 멕시칸들이 조롱 속에 새를 넣어가지고 길거리에 나와 새점이라는 것을
치더군요."
"옛날 티베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것으로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요즘도 그쪽 일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잘게 썰어서 새 먹이로 주는 끔찍한풍
속이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새처럼 휠흴 날아가는 자유를 얻으라는
뜻인지..."
"에엣, 끔찍한 얘기를 눈하나 까딱 않고 술술 하는군..."
"어떤 나라에서는 새를 영생불멸의 상징으로 상기도 해요."
"실제로 있지 않은 상상의 새라는 것도 많이 있다던데요."
"그렇대요. 봉황새나 불사조 같은 것은 실제로 없는 새 아녜요? 또 불새라는 것로 있지요.
이곳저곳에 불을 지르며 다니는 새란 뜻도 있고, 정열의 덩어리란 뜻도 있는 그런 상상의
새지요. 스트라빈스키의 저 유명한 무용조곡 중에 화조라는
것이 있지요. 뒤에 안무가 포권이 일막 이장짜리 발레로만들어
더욱 유명해진 곡이에요."
"정자씨는 동서문물을 모르는 것이 없군요."
"미안해요. 너무 아는 척했어요."
"그럼 우리 새 관칠이나 좀 하러 나갈까요?"
광준이 툇마루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광준은 이십여년만에 찾아온 고향 마을을 좀 둘러보고 싶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속 깊
숙한 곳에서 잠자던 동심의 세계를 음미하고 싶었다.
그들은 우선 무당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채 옆에 기역자로 서 있는 당집은 문이 잠켜 있
어 들어갈수가 없었다. 대밭은 하늘을 찌를듯한 대나무가 무성 한 잎으로 정글을 이 루고
있었다. 어두컴컴하고 습윤한 대숲은 어쩐지 들어가보지 꺼림직했다. 금방이라도 부령을 흔
들어대는 표독스런 무녀들이 뛰어나올 것만 같은 약간의 공포가 감도는 그런 숲이었다.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어 대숲이요란하게수다를 떨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를수없이 재잘거리는 것 같았다.
당집의 뒤는 높은 담이 쳐져 있고 그 너머는 뒷산의 숲과 이어져 있었다.
그 산은 탈무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탈무산은 예부터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해서가끔 무
당이 호식을 막는 굿을 하기도 했다.
"호식굿이란 말 들어봤습니까?"
광준이 어릴때 듣던 말이 얼핏 머리를 스쳐 정자에게 물어
보았다.
정월 보름이 지나고 음력 이월로 접어들면 동네는 "호슥굿"
준비로 한창 들떠 있다. 이 굿은 물론 백순조 무당이 주판을 한다. 이 굿에는 호랑이 역을
할 젊은 장정과, 포수, 마을 이장등이 중요 등장 인물이다. 그 중에도 조수역을 하는 것이
가장 영광된 스타이다. 굿의요지는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잡먹 고 난동을 부리 자
용맹스런 포수가 나와 호랑이와 대결해서 쏘아죽인다는 줄거리다.
여기에 무당과 꽹가리 징, 북을 울리는 각종 쟁이들이 등장하고, 온 동네가 합심해서 제물
이며 먹을 것들을 준비한다.
호랑이의 화를 막는 의식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마을 잔치 같은 것이기도 했다.
광준은 누나 을숙과 함께 이 굿판의 뒷전에 서서 종이탈을 쓰고 사람을 마구 잡아 먹는 호
랑이역의 동네 아저씨며 재담을 늘어놓는 포수며, 날이 번쩍번쩍하는 무당의 칼을 지켜보며
웃지도 하고가슴 조이기도 했다. 굿판이 끝날 무렵 갈라 주는 시루떡을 누나의 치마에 싸
들고 집에 와서 맛있게 먹던 생각이 났다.
"호슥굿이라고 했나요?"
정자가 물었다.
"예. 호식굿이란 말을 그렇게 부른 것 같아요."
"그것은 호탈굿이라고 도 하는데요. 주로 경상도 동해안 지역에 전래되어 온 굿이에요. 뒤
에는 탈굿과 합쳐져서 일종의 풍자굿이 되기도 했죠. 양반을 풍자하고 , 행실 나쁜 남녀를
호되게 꾸짓기도 하는 그런 똘이굿으로 아직도 전해 오고 있어요. 하지만 이 탈무골에는 아
직도 호식굿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고 회장님이 늘 말씀하셨어요."
"그 얘긴 나중에 더 듣기로 하죠. 난 동네에가서 뭘 좀 알아보고 와야겠어요."
"뭘 어떻게 말죠?"
"글쎄요. 나도 막연합니다. 그러나 이대로 무당집에 죽치고
있다가 갈수는 없지 않습니까? 누님 이 이 마을을 민속 보존 마을로 정하려고 했다면 필시
거기 얽힌 뒷얘기가 있었을 겁니다."
"뒷얘기라뇨?"
"반대를 했다든지 어떤 이권이 관계되어요구 조건이 있었다던지."
"그런 걸 누구한테 물어 볼 작정이에요?"
"글쎄요. 우선 이장님을 찾아가서 좀 알아볼까 해요. 정자씨는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광준은 명령조로 말하고 마을 쪽으로 돌아셨다.
마을 이장은 마침 집에 있었다. 광준이 어릴때 면서기로 다니던 김칠병이라는 노인이었다.
광준은 첫눈에 김칠병을 알아보았으나 그는 광준을 알아보지못했다. 광준이 마을을 떠날때
는 삼십대였던 그도 이젠 환갑을
지낸 노인이 되어 얼굴에 굵은 주름이 여기저기 잡혀 있었다. 했빛에 그을 린 것도 아닌데
검게 탄 얼굴에 희끗희끗한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전형적인 농사꾼의 순박한 얼굴 그대로였다.
"그래 손님은 무슨 일로 이 첩첩산중까지 오셨나요?"
"저어, 새를 좀 관찰하러 왔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아, 참 그랬었지요짐은 아직 철이 일러 산새들은 보기가 힘들 낍니더. 까치나 까마구나 참
새나 장끼 같은 놈들은 더러 보이지만..."
"저어, 혹시 김을숙씨라고 아시는지요?"
광준이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물었다.
"김을숙이?"
"예, 옛날에 여기 살다가 지금은 서울서 살고 있는..."
"아아 김회장 말씀이군. 김회장 모르는 탈무골 사람이 어디 있읍니 꺼?"
"예. 김회장 말입니다. 제가 김을숙이 동생입니다."
"뭐라카노? 김회장 동생이라고?가만 있자, 그러면 자네가 광준이가?"
노인은 참으로 놀라는 기색이다.
"예. 제가 김광준입니다."
"아이구, 이 사람아, 이게 무슨 일이고 . 이기 몇 년만이고 말이다. 코를 쨀쨀 흘리던 광준
이가 이리 컸다니. 이 사람 반갑네
반가워...,"
김칠병 노인은 광준의 손을 덥썩 잡았다.
김 노인은 지나간 광준의 옛얘기를 묻고 또 묻고 했다. 광준은 적당히 대답하고, 지금은 학
교 생물선생님 노릇을 한다고 얼버 무렸다.
그리고 김회장의 비서와 함께 야생 조수 관찰을 하기 위해 봄방학 동안 여기에 온 것이라고
둘러댔다.
"누님이 이 마을을 민속 보존 마을로만들기 위해 애쓴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거기에 대해 혹
시 들은 일이 있는지요?"
이런저런 얘기 끝에 지나가는 말처럼 광준이 물었다.
"민속 무속 보존 마을이란 거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듣다 마다뿐이겠나. 온 마을이 몇 년 동안 그 일가지고 떠들썩 했는데..."
"떠들썩하다뇨?"
"이젠 우리 마을도 관광 손님 맞아 살판 나게 된다고 들떠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밌는가 하모, 한쪽에선 이제 마을 다 베리놓는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어."
"베리 놓다니요?"
"아, 글쎄 도시 사람들이 모여들모 기중에는 못된 놈도 있을끼고, 바람꿈도 있을끼고...
그래서 동네 인심 베리고, 아들딸
키우기 힘들게 될 끼다 이런 이야기 아인가베."
"예. 그렇겠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될 끼 뭐 있나. 당님이 신령님께 물어봐서 결정하기로
한거 아이가."
당님이란 백순조 무당을 말하는 것이다. 마을의 의사는
예부터 이런 식으로 무당이 신령께 계시를 받아집행하는게 오랜 관습으로 돼 있었다. 그리
고 그 당님의 말은 아무도 거역하지
못했다. 당님의 말을 거역하면 천벌을 받아 급사하거나 동네를
떠나야만 한다.
그 권능에 대해선 아무도 추호의 의심을 갗지 않는다.
"그래서 신령님이 어떻게 결정을 했습니까?"
"글쎄 그게 좀 얄궂게 됐다 아이가."
"얄궂게 되다뇨?"
김칠병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당님 이 좋다고 허락을 했는데 금년 봄에 와서는 신령님이 절대로 안 된다고 말
씀하셨다 이거야."
"아니 신령님도 이랬다 저랬다 합니까?"
"마을 운세로 봐서 작년에 정부로부터 지정을 받았으면 괜찮은데, 올해부터는 마을 운이 바
뀌어서 안 된다는 거야.만약 고발을 거역하면 마을이 풍지박산된다 카는 기라. 역신한테 잡
혀 병들고 죽고 벼락맞아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아이구 끔찍해라."
"그래서 어떻게 결정이 해습니까?"
"결정이고 뭐고가 어딨노? 당님 말씀 거역할 사람이 어딨노?
하기사 한 사람이 있었지만..."
"한 사람이 있었다구요? 그게 누굽니까?"
"자네가 잘 알라는지 모르겠다. 저 물레방앗간집 아들 근세
라고 아나? 김천가서 중학 마치고 온 사람인데 당젯날
민속 마을로 지정받으면 모두 잘 살게 될 거라고 일장 연설을
했지"
김칠병 노인의 얘기는 계속했다.
근세는 말하자면 이 마을의 개화 청년이나. 마을을 개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다.
새로운 농사법을 도입하기도 하고 경운기를 사 오기도 했다. 그러나 백무당은 그 경운기의
털털 거리는 소리가 신령님을 화나게 한다고 해서 당장 집어치우란
명령이 떨어졌다. 동네 사람들의 눈총을 이기지 못한 근세는 경운기를 대곡읍에가져가 팔아
버리고 온 일까지 있었다.
정월 당제 날 동네 사람이 다 모인 굿판에서 소주를 한잔먹고
올라온 근세가 광광 민속 마을로 우리 마을을 바꿔 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했다.
굿을 집전하고 있던 백무당이 대단히 화가 난 것은 당연하다.
"근세 이놈, 탈무산 신령님이 네 버릇 좀 그친다고 칸다. 여기서 당장 목 조아리고 사죄 안
하면 열흘을 살지 못할 끼라!"
백순조 무당이 믄령을 쩔렁쩔렁 흔들었다. 서릿발이 선 무도가 공중에 바람을 일으키며 번
쩍였다.
그뒤 열홀이 못가 근세는 탈무강 얼음판 위를 걸어 건너다 얼음이 꺼쪄 빠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예?"
광준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토록 무섭게 예언이 들어맞을수 있단 말인가?
"근세씨가 죽은 것은 순전히 그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두 말 해서 뭐하노? 당님 말씀 거역해가 살사람,어딨노?"
"그때 사망원인을 따로 조사해 본 일은 없습니까"?"
"조사해 보나마나 아이가. 지서에서 나와가 장까지가 보고 이틀이나 조사해가더이 그뒤 아
무말도 없드라카이."
그렇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민속촌 지정하는 것은 당님이 아직도 반대하고 있습니까?"
"그야 마 그렇다고 봐야재. 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로 아무도
거기 대해서 말 안 한다 아이가."
"그뒤 누님이 오시지 않았습니까?"
"왜 한 달 후깨 다녀 갔지 나하고만나서도 민속 무속 마을은
꼭 해야 된다고 얘기하고 안 갔나. 나도 김회장님께 신세지고 있는 입장이고 또 김회장님
말 들어 보이 그게 결코 나쁜 기 아인기라. 하지만 이 목숨이 하나뿌인데 앞장서서 하잔 말
도 못하고..."
"누님께 신세를 지다뇨?"
"막내딸 하나 있는 거 서울 김회장님 공예품 공장에 취직 안시켰나."
"예. 그랬었군요. 그래서 누님은 그냥 포기하고 올라가셨나요?"
"이네... 김회장님이 포기할 사람이아네. 당님하고 만나서
며칠 동안 말타툼하다 갔지"
"싸웠습니까?"
"싸우다이? 쌈한게 아니고 설득시키다가 올라간 기지"
"당님이 처음엔 찬성하다가 반대한 이유는 뭣이라고 생각합니까?"
"그야 신령님 속마음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노?"
"누님과 당님이 의견이 안 맞았다면 마을 사람들도 누님을 별로 안 좋아하겠는데요."
"안 좋아하다이? 김회장이 우리 마을을 위해 얼마나 공헌을
했는데. 작년에만 해도가뭄이 들어 벼가 다 타네 어쪄네 할때,
그걸 건져 준 사람이 누군데?"
"건져 주다뇨?"
"서울서 우물 파는 기술자들을 데리고 와서 근 한 달 동안 우물을 파주지 않았겠어. 이 동
네는 해발이 높은 곳이라 좀체 지하수가 나오지 않았거든. 그런데 그 기술자들이 돈 한푼
안 받고 이 동네 스물두군데나 샘을 팠다카이. 무슨 빙빙 도는 기계를
갖고 아마 사람 키로 설른 길 쉰 길이나 뚫었을 걸. 조금 내려가
봐야 물도 안 나오고 암석 이 받히 는 바람에 그 바위까지 뚫고 내려가 물을 뽑아 올렸다
아이가. 야 그놈의 기계 참 희한하데이.
나중에 그 기술자 양반들이 이 동네 밑에 박힌 바우가 뭐 특별히
연구할가치가 있다고 하던데. 좌우간 그 어마어마한 역사를 김회장이 다 서둘러 했다 아이
가. 덕택에가뭄을 이겼지.
동네 사람들이 얼매나 고마워하는지..."
"왜 당님이 신령님께 부탁해서 비나 내리게 하지 않았는지요?"
광준이 슬그머니 물어 보았다.
"와 안 했겠노. 당님이 기우제를 두 번이나 올렸지 그런데 신령님이 그 근세놈의 경운기 통
통기리는 소리에 화가 나서 비를
안 준다 칸다 아이가."
"예? 하하하."
광준은 절로 웃음이 나올수밖에 없었다.
"우스운 일이지 하지만 꼭 그 말이 안 맞는다고 할수도 없는기라."
그때였다. 사랑방 문을 열고 할머니가 술상을 차려 들고 왔다. 막걸리 주전자에 김치며 부
침개를 두어 접시 얹어 왔다.
"임자, 야가 글쎄 김회장님 동생 광준이라카이."
김칠병 노인이 광준을가리키며 대견하단듯이 소개했다.
"뭐라카노? 야가 광준이라고... 아이구 광준이가 이렇게 장성했나."
할머니는 참으로 반갑다는듯 광준의 손을 덥석 잡고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타향서 말도 못하게 고생했다는 이야기 우리 다 들었다. 쯧쯧쯧. 그래 이렇게 훌륨히 장성
해서 고향에 돌아오이 얼매나 반감노? 엄마 아부지는 그만 빛도 못보고 쯧쯧. 그때 일 생각
하모 모두 너무했지 너무해."
그 대목에서 김영감이 할머니의 입을 막았다.
"임자는 고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 보래이."
"괜찮습니다. 그때 얘기 좀 들려 주십시오, 할머니."
광준이 할머니의 손을 갑고 애원하듯 쳐다봤다.
"고마나가 보래이."
그러나 김영감이 완강히 말하자 할머니는 엉거주춤 일어서더니
"우리 집에서 점심 차릴 테니 앉아 놀거라이."
하고는 사랑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우리가 이 동네를 떠나게 된 사연을 혹시 아시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광준이 정중하게 물었다.
"모른다. 남으집 사정을 우리가 우에 아노? 엄마나 아부지가
무슨 얘기 안 하더나?"
김영감은 뭔가를 숨기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게 떳떳하지도
못한 남의 집 사정을 얘기해서 괜히 언짢은 얼굴로 대하기 싫다는 표정이다.
광준은 그 집에서 점심을 먹고가라고 한사코 붙들었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스곽이
생각나 혼자 점심을 먹고 있을수가 없었다. 저녁때 들르겠다고 얘기를 하고 간신히 빠져나
왔다.
광준이 무당집으로 돌아오자 거긴 뜻밖에도 백순조 할머니와
정자가 같이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서 오게. 새잡으로 왔다고?"
무당은 얼굴에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로 말했다.
"예. 김광준이라 합니다."
"얘기 다 들었네. 김을숙이 동생이지? 참 장성했구나. 그러고보면 우리가 안 늙은기
라..."
무당은 여전히 아무 표정도 억양도 없이 책 읽듯이 말했다.
이제는 주름이 뺨까지 잡혀 있는 할머니지만 옛날의 혼칠하게
잘생긴 얼굴 윤곽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동네뿐 아니라 금능군내에 미인 무당으로 이름을
달리던 젊은 시절이 그래도 주름살뒤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이거 갑자기 찾아와 폐나 되지 않는지요."
광준은 입에 발린 인삿발을 하면서도 내심 정자가 여기 온 목적을 혹시 얘기하지 않았나 싶
어 걱정하고 있었다.
"여기는 객청이나 마찬가지니까 편안히 쉬게. 내 집에 온손님아잉가베."
무당은 그렇게 말하고 아무 표정 없이 그냥 일어셨다.
"내일 영등제 굿을 올려야 하기때문에 나는 바빠서 그만 나가보겠네. 점심은 재 곧 차려 보
내지"
무당이 나가고 난 뒤 광준은 다급하게 정자에게 다그쳤다.
"우리가 왜 왔다고 얘기했어요? 누님이 죽은 것도 얘기했어요? 정자씨한테 온 편지 얘기도
했어요?"
광준이 하도 급하게 물어 대자 정자는 한참동안 광준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차근차근 한가지씩 물으세요. 한꺼번에 그렇게 서너가지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그때야 광준은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그만..."
"알겠어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우린 새를 관찰하러 왔고 광준씨는 김회장님 동생이라는 얘
기말고는 아무 말도 안 했으니깐요. 속 시원해요?"
"미안해요."
"그래 뭘 좀 알아냈어요?"
정자가 다시 온화한 얼굴로 되돌아와 물었다,
"별로 신통한 얘기는 못 들었지만 몇가지 알아가지고 왔어요."
광준은 김칠병 노인을만난 얘기며, 근세라는 청년의 이상한
죽음이며, 김회장의 계획을 무당이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얘기며 작년가뭄때 김회장이 우
물을 파준 얘기 등을 했다.
"우물을 판 것은 거상그룹 장통석 회장님이 도와주셨어요. 거상그룹에는 지하자원조사회사
가 있는데 그쪽 장비를 동원하면 쉬운 일이거든요." "지하자원조사회사라고요?" "예, 거상
개발주식회사라는 회사예요. 문화재 발굴대도가끔와서 도와주었어요. 석탄광산이나 규조토,
우라늄, 금광같은 것을 찾아내는 일을해요.요즘은 동남아에 나가 석유탐사일에도 한몴하고
있대요." 광준은 거상그룹 장회장 애기가 나오자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곧 점심상이 들어
왔다. 백순조 무당밑에 매어서 일을하는 여자들이 두어명있는 것 같았다. 그여자들이 밥상
을 들고왔다. 별로 푸짐한 상은 아니지만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호박말랭이며 무말랭이
같은 밑반찬이 맛있었다. "여기있는 여자들은 몇이나 됩니까? 잘모르지만 두세명되는것같아
요. 그들은 심방이라고 부르는데 무당수습생대우를 받고 있어요. 굿이나 올리때 한몴들하지
요." "백순조무당은 세습무당이라고 하던데 이십 몇 댄가 됐지요? 처음에 어떻게 무당이 된
걸까요?" 광준이 마주앉아 점심을 맛있게 먹으며 물었다. 광준은 정자가 금석학에 대해 거
의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무당의 기원설화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곳 탈무골의 무
당은 제석설화에 해당되는 것 같아요." "제석설화라고요?"
"예. 제석 설화도 여 러가지가 있는데 듣고 보면 좀 점잖치 못한 점이 있어요."
정자는 약간 겸연쩍다는듯이 말했다.
"어떤 얘기인데요?"
광준은 더욱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제석 설화는 제석굿으로 구체화되어 있는데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 줄거리는 비 슷해요. 탈무골 무당 설화는 이 제석 류의 일종인데 특히 강릉 지
방의 대관령 시준굿 스토리와 비슷해요. 아득한 옛날 어느점에 당금 아가씨가 살고 있었는
데, 어느날 지나가던 스님이 공양을 하러 그 집에 들러요. 스님은 하녀들이 주는 공양은 받
지를 않고 그집 아가씨 즉 당금 아가씨가 직접 공양을 줘야 받겠다고 버텨요. 하는수 없이
당금 아가씨가 나와서 공양을 주는데 스님은 공양을 받은 뒤 하룻밤 자고가겠다고 청해요.
그것도 당금 아가씨 방에서 자겠다고 버텨요. 방가운데 병풍을 쳐 놓고 병풍 밑에 물 세 그
릇을 떠다놓고 절대
그 선을 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요. 당금 아가씨는 안심하고 지는데 자는 척하고 코를 골던
스님, 이 대목에선 중이라고 하지요. 중이 엉큼한 생각을 품고 거미로 둔잡을 해가지고 병
풍을넘어가 당금 아가씨를... 아이 왜 그런 눈으로 봐요"?"
광준이 너무 빤히 정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정자는 얼굴을 붉히며 입에 손을가리고 웃었다.
"하하하,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그래서 하는수 없이 당금 아가씨는요샛말로 당한 거죠 뭐.
아이 기분 나빠."
"하하하. 그래서요?"
"아이 김선생님도 짓궂으셔. 뭐 이런 얘기를 시켜가지고..."
"그래서 당금 아가씨는 어떻게 됐나요?"
"그래서 일을 성사시킨 스님은 박씨 세 알만 주고는 도술을 부려 사라져 버렸지요. 그뒤 당
금 아가씨의 배가 불러 오자 그 아홉 오빠들이가만 있질 않았어요. 처녀가 애를 뱄으니 될
법한일이에요? 그래서 죽이기로 했었대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불쌍하게 생각해 뒷산 석함
속에 당금 아가씨를 갖다가두었대요. 그뒤 당금 아가씨가 아들 셋을 낳았는데 이 아들들은
중이남기 고 간 박씨를 심어서 그 박넝쿨이 간 곳을 찾아갔더니 거기에 엉큼한 스님, 즉 아
버지가 있더래요."
"재미있군요."
"맏아들은 금강산 신령님으로 둘째는 태박산 문수님으로 셋째는 대관령 산신령이 되고, 당
금각시 즉 어머니는 탈무골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고 해요."
"그럴듯한 거짓말이군요."
"그러나 이것은 좀 잘못된 설화 같아요. 이 탈무골은 무속의
형태가 특이하게도 모권 사회의 관습 같은게 불가사의하게 시대를 초월해서 남아 있어요.
중이 등장하는 설화는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봐야 불교가 전파된 이후 아니겠어요?"
"하긴 그렇군요."
"제석굿의 설화가 이곳에 흘러들어와 만들어진 것 같아요. 더구나 강릉 지방의 설화가 태백
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것 같아요.
그러나 태백산 설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는 제주도의 영등설화까지도 비슷하게 남아
있어요."
"영등 설화라니요."
"아까 백순조 무당이 나가면서 내일 영등제 준비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죠."
"영등제란 이월달에 올리는 제사인데 그 뿌리는 제주도에서 찾을수 있어요, 여기 경상도 지
역에는 물론 영등제가 없는 건 아니예요. 풍신제니, 바람 올리느니 하는 음력 이월에 올리
는 제사를 일컫는 거예요. 음력 이월 초하룻날 영통함이 제주선 영등할방이다 하죠. 그 영
등할미가 이곳으로 내려와요. 영등할미는 바람, 비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바람을 주관하는 풍신인가요?"
"우리나라는 계절적으로 봄에 바람이 많이 불어요. 그 바람이
바닷가에 사는 제주 사람들에겐 생명을 좌우하는 중대사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바람을 곱게
불게 해 달라는 기원의 일종이지요. 거기 한수 더 떠서 풍년이 들게 해 달라는 다출산 기원
도들어 있어요. 바람이 부는 이유는 영등할미가 이곳으로 내려올때 며느리나 두 딸을 데리
고 오는데 며느리를 데리고 올때는 며느리가 미워서 고운 치마에 비를 뿌려 못쓰게 하려고
비바람을
불게 하고, 딸을 데리고 올때는 딸의 고운 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팔락거리라고 바람만 불게 한대요. 재밌죠, 호호호."
"하하하, 영등할미도 심술깨나 있군요."
둘은 마주보고 한참 웃었다.
"그 영등할미가 음력 십이월 십오일에서 이십일 사이에 하늘로 올라간대요. 그래서 내일 하
는 영등굿은 작별인사 파티 같은 거래요."
"하하하."
광준은 더욱 큰소리로 웃었다.
"내일 굿마당을 한 번 보세요. 아주 볼만 하답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짧은 해가 뉘엿해질 무렵 광준은 무당을만나 보기로 작정하고 안채 쪽으
로 올라갔다. 널직 한 마당을 건너 높다란 섬돌 다섯 칸 위에 무당이 거처하는 안채가 있었
다.
그 옆으로 걸게 늘어선 별채는 신당이다. 거기는 보통 사람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기때문에 기웃거리지 말라고 정자가 귀뜸을
했었다. 그 신당 앞에는 대나무를 아름씩 잘라다가 묶음을 지워놓아 두었었다. 대나무가지
에는 울긋불긋한 헝겊이며 창호지조각 같은 것을 너울너울하게 달아 놓았다. 그 머리맡에
다섯 개의 물 사발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영등할미한테 바치는 정화수라는 것을
정자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광준은 곁눈질로 슬금슬금 식당을 훔쳐보면서 안채 섬돌로 올라갔다. 신당 쪽에는 무언가
범할수 없는 신비와 같은 공기가
감싸고 있다는 공연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혹은 필부가 이해할수 없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당할머니는 쪽지은 머리를 단정히 빗은 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앉아서 광준을 들어오
라고 했다.
방안 맞은편 벽에는 한손에 칼 한손에 무령을 들고 장군복을
입은 커다란 화랭이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아래 조그만 젯상 위에는 곶감이며 유과들이
한 상 차려져 있었다. 젯상양쪽 끝에는 왕촛불이 켜져 있었다.
"바쁜데 죄송합니다. 몇가지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말해 보게."
무당은 여전히 눈 하나 깜짝 않는다.
"당님은 저희 부모님을 잘 알고 계시죠."
"이 동네에서 신령님의 말씀을 지켰으니 알지"
"그런데 저희 집은 왜 이곳을 떠나야만 했습니까?"
그 말을 듣자 무당은 비로소 고개를 들어 광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뜻밖의 질문이란 표현이
다. 광준은 그러한 무당의 얼굴에서 무언가 조그만 파도가 일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기집이 동네에서 쫓켜난 데는 필경 이 무당할멈과 무슨 관계가 있
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건 이제 와서 왜 묻노?"
"자식된 도리로 내력이나마 알아 두고자 함입니다."
"난 잘 모른다네. 신령님의 뜻이라고만 생각하면 되는게지"
"그럼 저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신령님의 뜻을 어긴 일이라도
있단말입니까?"
"그럴 테지 동네 늙은이들이 뭐라고 얘길 헌는지 모르지만 그건 신령님이 정한 일이었으나
나한테는 더 이상 묻지 말게나."
무당은 단호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난 번에 저희 누님이 오셨을때 무슨 약속이라도 한 일이 있나요?"
"약속이라니?"
"이 마을을 민속 보존 마을로 지정하는 데 대한 무슨 삼으라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신령님이 화내기 전에 그런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아라."
"화내신다고요?"
"우리 이 당집은 천 년도 더 되는 터야. 여기다가 무슨 정부
간판을 갖다 걸고 도회지의 뭇 연놈들을 끌어들여 우리 신성한
탈무골을 더럽히려고 하다니. 내가 살아 있는 한 신령님이 용서치 않을 것이야. 다시 그 말
만 내뱉어도 부정탄다."
"처음엔 당님도 찬성하셨다고 하던데요."
"누가 그런 쓸데없는 소릴 지껄여?"
무당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처음엔 그런 따위 부정타는 일인 줄 몰랐을 뿐이야. 뒤에 우리 신령님껜서 나한테 현몽해
서 야단을 치더라카이. 내가 우리
신령님 팔아묵을 뿐했지"
무당은 화가 나니까 거센 사투리가 마구 튀어나왔다.
"한 달 전 누님이 오셨을때 그 일로 언성을 높인 일이 있습니까?"
"김회장인지 을숙인지 걔도 내 말 안 들으면 제명에 못 죽어.
여러 귀신이 벼르고 있는데 천지도 모르고 개춤을 추고 돌아댕기쌌는다 아이가."
"그래서 목숨이 위태롭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까?"
"내가 목숨이 위태로운지 어떤지 어떻게 아나? 신령님이 내목소리를 통해서 여러 번 얘기를
했을거야."
"그 뒤에 누님이 또 왔습니까?"
광준이 캐묻자 무당은 다시 광준의 얼굴을 빤히 한참동안 쳐다봤다. 그 눈에 살기가 돋운
것 같아 광준은 얼굴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동생이라문서 내한테 물어?"
광준은 더 이상 얘기해 봤자 별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나와 버렸다.
행람채의 정자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정자가 마당에 나와 서있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
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무서워서 그래요."
"무섭다니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까 김선생님이 동네에가셨을때 방에 혼자 앉아 있었어요."
"그래서요?"
"그런데 산쪽으로 나있는 내방창문에 누가 엿보고 있는것
같았어요."
"누군데?"
"글쎄요. 방안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머리 뒤꼭지가 섬뜩한 것같은 생각이 들어 뒤의 창문
을 돌아봤더니 글쎄 창호지에 사람의 그림자 같은게 얼씬거렸어요. 그래서 후다닥 일어나
창문을열어 봤더니 아무도 보이지는 않는데 누가 뛰어가는 발소리 같은게 분명히 들렸어요.
조금 전에도 창문께 뭐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창문을 열어 봤더니 아까와 꼭 같이
누가 엿보고 달아나는듯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어요."
"어디로 누가가는지 봤습니까?"
"보진 못했는데 창문 쪽에서 뒷산 쪽 담 모퉁이로 누가 뛰어가는 것처럼 느꼈어요. 그래서
나와서 그쪽으로가봤지요."
"담 모퉁이를 돌아가 봤더니 그곳은 신당 뒤쪽이었어요."
"아무것도 없었나요?"
"예. 신당으로 들어가는 작은 쪽대문이 돌담 사이에 있는데 그문은 잠겨 있었어요."
기울이고서 있는데 어디서 인기척이 났다.
"거기서 뭣들 하는고?"
그곳에 불쑥 나타난것은 뜻밖에도 무당 백순조였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은 시선둘바를 몰라했다.
"그문은 탈무산 신령님이 오실때만 여는문 아이가. 거기선
아무것도 볼끼라곤 없는데..."
"그냥 산보 좀 나온 겁니다. 진달래도 핀것 같구요. 새소리
도 들리는것 같아서요."
광준이 우물쭈물 대답을 했다.
"여기선 가끔 장기나 까투리가 푸드득거리는걸 볼수가 있지."
"그래요? 다른 새는 어떤 새가 보이나요?"
광준이 말꼬리를 받았다.
"뻐꾸기도 있고 밤에는 부엉이도 날아댕긴다 아이가."
"예에."
"그뿐 아이다. 박쥐도 더러 볼수 있다 아이가?"
"박쥐요?"
"하모."
"박쥐는 새가 아니라 쥐예요."
정자가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날아댕기면 다 날짐승이지 뭐."
무당도 히죽 웃음을 지으며 앞장서 걸어갔다. 두 사람은 하는수 없다는듯이 무당뒤를 따라
도로 행랑채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전 겁이 나서 이곳에 못 있겠어요."
툇마루에 걸터앉은 정자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겁은 무슨 겁입니까? 어린애도 아니고..."
광준이 정자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정자는 자연스럽게 몸을 광준 쪽으로 약
간 기울여 주었다.
"내일이 음력 이월 시팔일이에요. 인시면 새벽이구요."
"인시?"
"예. 아이 어떡하면 좋아요."
정자는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를 밟고 선것 같은 흐린 얼굴로
변했다. 광준도 서울서 받은 저주스런 편지를 생각해 냈다. 그예언대로라면 내일 새볐에 정
자가 죽게 되는것이다.
광준은 물론 그. 편지의 장난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누님 김을숙 회장의 죽음과 무당의
예언 그리고 낮에 들은 근세라는 청년의 죽음도 무당의 예언으로 이루어졌다는것이 맘에 걸
렸다.
우연의 일치라는것은 연거푸 일어나는수도 있으니까, 하고 믿지 않으려는 신념을 굳히려고
애썼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자꾸만 불안이 자라고 있었다.
"그 따위 황당무계한 편지 같은것은 잊어버리십시오. 누가 장난질 한것이 틀림없을 겁니
다."
광준은 필요이상으로 큰 목소리를 내며 정자를 안심시키려고했다.
"김선생님."
"예."
"우리 여길 떠나요."
"떠나요?"
"예. 전 무서워서 여기서 밤을 샐것 같지 않아요. 안되면 우리 어제 저녁에 잔 대곡읍의 그
여관으로라도가요."
정자의 말은 진심인것 같았다.
"걱정 말아요. 지금은 너무 늦었어요. 여기서 자고 내일 영등굿인가 바람굿인가 하는 걸 좀
봅시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 테니까 혹시 뭔가 좀 알아낼수 있을지 몰라요."
"전 행요. 저 신당인지 뭔가 하는게 맘에 걸려요. 이곳에서
자다간 꼭 무슨 일이 생길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 저녁은 밤을 새워서 내가 지켜드릴께요."
"김선생님은 안 주무시구요?"
"나야 뭐 틈틈이 조금 자면서..."
"제 방에 또 들어오실려고요?"
정자는 그 말을 해 놓고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어젯밤에 있었던 느닷없는 광준의 행동이 떠
올랐기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싫지만은 않다고 생각되었다.
오히려은근히 다시 그런 일이 타의에 의해서 되풀이되었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부인할수가 없었다.
"하하하, 어젯밤 일은 우리 없었던 걸로 합시다. 오늘밤은 정중하게 모시겠습니다. 귀부인
을 모시는 기사처럼 분명하고 신사답게 지켜드리겠어요.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그날 저녁도 그곳에서 얻어 먹었다. 저녁 무렵 이장인
김칠병 노인이 사람을 보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으나 광준은
가지 않았다. 정자를 데리고 가자니 이런저런 변명하기가 귀찮았고 정자를 이곳에 혼자 두
고 갈수도 없고 하기때문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두 사람은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았다, 불을켜지 않아도 보름을 갓 지난 달
빛이 대낯처럼 환하게 비쳤다.
우거진 대숲 위로 떠 오른 달은 금방 세수하고 나온 큰애기 얼굴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그저께가 보름이라고 했죠?"
"네. 허지만 보름달 밤보다 하루 먼저 나 뒷날 만월이 될때가 많아요. 오늘이 만월인지도
몰라요."
"달은 여인의 상징이라고 하죠?"
"그런가 봐요. 태양이 남자의 상징이고 달이 여자의 상징이란것은 동서양이 같은가봐요."
"달과 무당은 무슨 관계가 없나요?"
"김선생님도 민속이나 무속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정자가 웃음을 띠며 반문했다.
"글쎄요. 정자씨때문인것 같아요."
"호호호 저때문이라뇨? 제가 뭐 무당이라도 되나요?"
"내가 보기엔 무당선생님 같은데요. 하하하."
두 사람은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티없이 해맑은 웃음이 아니었다. 뱃속 깊이에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불안을 덮어 두려는듯한 자기 위로의 웃음과도 같았다.
대숲 위에 뜬 달은 이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긋이 웃으며 유유히 고요한 당집의 빈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광준과 정자는 어디서 인지도 모르지만 다가오는 운명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달빛에 목욕을
하고 있었다.
오. 인시의 사신
무당집의 뜰은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마당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대폭이 이따금 바람에 흔들려 출렁일 뿐 너무 조용했다.
"정자씨 춥지 않으십니까?"
툇마루에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나란히 걸터앉은 광준이 옆자리에 같은 모양으로 앉은 곽정
자를 향해 고요를 깨지 않으려는듯 나직이 말했다.
"어쩐지 으시시해요"
정자도 나직이 말하며 몸을 움추려 보였다.
"내가 겁나지 않으세요?"
"왜요?"
하고 정자가 광준을 쳐다보다가 늦게야 말귀를 알아들었다.
"늘 조심하고 있어요. 언제 또 승냥이로 변하지 모르잖아요."
"하하하. 하지만 염려 마십시오. 절대로 승냥이가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무심코 얘기하던 정자는 갑자기 말투가 달라졌다.
"아니, 지금 김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걸 물어보시는거예요? 설마 우리 회장님과
장회장님이..."
정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아닙니다. 그냥 물어봤을 뿐입니다. 이상한 연상은 하지마십시오."
"김선생님은 보기보다 나쁜 마음씨가 한 구석에 있군요. 설마하니 그런 발상을 하시다니."
"무슨 발상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다만 누님의 행적을 자세히 알려고 한것뿐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좀더 자세히 예기해보세요. 수정궁이란요정은 도대체 누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
곳임니까?"
광준은 이런 경우를 내친 걸음이라고 생각했다.수정궁이란곳도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는
곳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사직동 지점의 그 저금통장이 아무래도 맘에 걸렸다.
"점점 이상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정자는 이제 완전히 뾰루퉁해졌다. 그러나 광준은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그럼 정자씨는 현금을 넣었다 찾았다 한 그 통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거야 그만한 사정이 있었겠지요. 그 수정궁요정은 회장님보다 남궁현 극장이나 주인성
전무가 더 많이 드나들던 곳이에요. 원래가 남궁국장이 출입해서 회장님이 알게 된 곳이니
까요."
정자는 내뱉듯이 말했다.가시돋친 음성이다.
"남궁씨와 수정궁 문 마담과는 전부터 아는 사이인가요?"
"전 잘 몰라요. 남궁씨한테 직접 물어 보세요."
"누님은 그 집에 남궁씨를 자주 데리고 갔나요? 아니면 장회장님과 같이 자주 다녔나요?"
"그것도 전 잘 몰라요. 남궁씨 같은 수단꾼이 회장님 모시고
한두번 드나들었겠어요?"
"예?"
정자의 뜻밖의 말에 놀란것은 광준이었다.
"그럼 정자씨는 누님과 남궁씨나, 장통석 회장과 그곳에 늘드나드는것을 알고 있었군요? 그
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시렁뱅이 추경감이나 강형사가 눈독을 들이고 들락거
렸나요?"
"그런 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하지만 분명한것은 우리 회장님 같은 인격자를 야릇한 생각
을 가지고 의심한다는것은 용서할수 없어요. 김선생님도 회장님 동생이지만 회장님을 헐뜯
는듯한 엉뚱한 생각은 용서할수 없어요."
"제가 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것은 아닙니다."
"그럼 지금까지 한 얘기는뭐예요?"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앉아 있었다. 각각 딴생각을 하고 있는것 같았다.
아니면 정자는 분을 사이 지 못해 꾹눌러 참고 있었다. 광준에 대해 적잖이 실망한것 같기
도 했다.
한참만에 정자가 입을 열었다.
"제 말을 못 믿겠거든, 다른 사람한테 회장님에 대한 얘기를
들어 보세요."
"다른 사람이 누굽니까?"
"남궁 극장이나, 주전무나, 장회장님이나. 미스조나 누구한테라도 물어 보셔요."
"우리 이제 그 얘긴 그만 하기로 합시다."
그때였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람결에 댓잎이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신음소
리 같기도 했다. 아니 듣는이에 따라서는 여귀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돌연 호흡을 딱 멈추고 귀를 곤두세웠다.
그러나 그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가 분명히 났죠?"
"그래요. 낮에도 저 소리를 분명히 들었어요. 저기 신당속에서 난것 같았어요."
정자가 잔뜩 겁에 질렸다.
"거기 무당이 모시는 신령님이 산다고 했죠?"
두 사람은 다시 숨을 죽이고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달빛만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 신경과민인것 같아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잖아요. 이제 먼저 들어가서 눈
좀 붙이세요. 난 정자씨 잠드는것 보고 내방에서 자겠어요."
"싫어요. 제가 잠든 걸 보고 또 승냥이로 변할지 모르잖아요."
정자는 공포에서 벗어나려는듯 농을 걸었다.
"하하하. 걱정 마세요. 저 달을 두고 맹세하지요."
"믿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자어서들어가세요. 이러다가 감기들겠어요." 광준이 정자의 팔을 잡아끌었
다."알았어요. 김선생님도 그만 주무세요." 정자가 못이긴듯이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자
장지문 밖으로 불이 밝혀졌다. 옷을 갈아입는 모양이다. 광준은 우두커니 앉아 위쪽의 당집
과 신당을 쳐다봤다. 달빛어린 기왓장이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자방에 불이 다시
꺼지는것을 보고 광준은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좁은 방이어서 발을 쭉 펴니까 벽에 닿을듯
했다. 광준은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새벽네시 즉 인시라는 것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리고
혼자 곰곰이 생각했다.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협박편지를 보냈을까? 틀림없이 누님을 살해
한 놈과 그 편지는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무슨 목적으로 정자에게 겁을
주었을까? 더이상 그 사건을 추적하지 말라는 뜻인가 아니면 정자가 무슨 비밀을 알고 있다
는 뜻인가? 그러나 광준은 정자가 자기한테 숨기는 무슨 비밀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러나 저러나 이제 대여섯시간후면 인시가 되는데, 과연 그때 무슨일이 일어날 것인가? 광준
은 무슨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추호도 믿지않았다. 광준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길가로 난 봉창문에 그림자가 얼씬거렸다. 밝은 달에 비쳐 움직이는 그림자는 분명 사람의
손이었다. 사람의 손이 천천히 봉창문 앞으로 다가왔다. 광준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
았다. 그리고 그 창문의 그림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을 느꼈
다. 그림자는 천천히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똑 똑 똑!"
그림자는 극히 조심스럽게 천천히 창문을 두들겼다. 마치 나직이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와
비슷했다. 광준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똑 똑 똑!"
그림자는 다시 전과 똑같은 속도로 천천히 문을 두들겼다.
"누... 누구십니까?"
광준이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을 했다.
"김광준씨 계십니까?"
그림자는 이번엔 노크 대신 나직한 목소리로 들어왔다.
"누구십니까?"
광준이 일어서서 창문가까이에 얼굴을 바싹 들어내고 다시물었다.
"김광준씨를 좀 만났으면 합니다."
그림자는 이번엔 좀 소리를 높여 얘기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광준이 잠겨 있는 봉창문 고리를 벗기고 문을 열었다. 달빛이
밀물처럼 방안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창 밖에는 역광을 안고 키가 조그만 사나이가 서 있었다.
"내가 김광준인데 누구십니까?"
"나는 정용세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이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들어오십시오."
"대문이 잠겨 있어요."
"내가 열어 드릴께요. 대문 앞으로 오십시오."
광준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대문께로 나갔다. 소리만 나게 가만히 빗장을 열었다. 그
리고 천천히 대문을 젖혔다. 다행히 삐걱 소리는나지 않았다. 조그만사나이는 재빨리 문틈
새로 들어왔다.
광준은 그 사나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정용세라고 합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났지요. 읍내 나가 농업고등학교
를 미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있습니다. 동네 사에이치운동 같은것도 맡아가지고 있지요.
저희 형님은 김선생님이 알것입니다만..."
"형님이 누구신데요?"
"정근세라고..."
"아녜, 지난 겨울에 참변을 다하셨다구요."
"예 그렇습니다. 강의 얼음판을 건너다 실족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예. 낮에 동네일로 김칠병 이장님을 찾아갔다가 선생님이 오셔서 여기 묵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새를 관찰하러 오셨다구요? "
"예 그렇습니다. 저는 학교서 생물선생 노릇을 하고 있어요."
광준이 어물어물 넘기려 했다,
"그건 다 핑계라는 걸 압니다. 미국서 반도체 연구를 하셔서
학위까지 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전자공학 박사님께서 새를
관찰하러 다닌다는것이 말이 됩니까? 더구나 지금은 이른 봄인데 절기에 맞지 않구요."
"내 얘기는 누구한테서 들었습니까?"
"김을숙 회장님께서 해주셨습니다."
"그럼 누님을 잘 아십니까?"
"알다 뿐입니까? 돌아가신 형님과 제가 김회장님 일을 도와드리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요."
"아아, 그랬었군요. 이거 미안합니다. 미처 알지 못해서."
사나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곽정자도 이 정용세 형제를 알고 있을 텐데 왜 얘기를 해주지 않았는지 궁금하게
생각되었다.
"저희 집으로가십시다.가서 소주나 한 잔 들면서 얘기를 나누지요."
사나이가 이쪽 의사도 들어보지 않고 일어서려고 했다.
광준은 잠깐 망설였다. 이미 잠이 든것 같은 정자를 깨워서
알릴까 말까 하고 생각했다.
"이곳은 당님의 집이 돼서 아무래도..."
사나이가 재촉을 했다. 광준은 한 시 간쯤은 있다가 와도 되리라는 판단을 했다. 우선 이
사나이가 여기서는 얘기를 제대로 해줄것 같지가 않았다.
"좋습니다. 여기서 멉니까?"
"아뇨. 바로 아래 모퉁이만 돌면 돼요."
광준은 용세와 함께 살그머니 당집을 빠삐나왔다. 나중에 돌아올때를 생각해서 대문은 그냥
살그머니 닫아 놓기만 했다.
정용세의 집은 전통적인 한식 그대로의 집이었다. 방만 두칸을 터서 한방으로만들어 조금
편게 쓰고 있었다.
"누추합니다. 여긴 제가 혼자 쓰는 사랑방 비슷한 곳입니다.
동네 젊은이들이랑 회의 같은것도 하는 곳이죠."
방 한가운데는 조그만 선반이 차려져 있었다. 용세가 보자기를 열자 부침 개 같은 안주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고 선주가 몇 병곁에 놓여 있었다.
"우선 술이나 한잔 들면서 얘기하지요."
사내가 소줏병을 땄다. 사내는 자그만 키에 다부지게 생긴 몸집을 하고 있었다. 운동선수들
처럼 팔다리 근육이 탄탄해 보였다. 얼굴에 비해 눈이며 코가 너무 작게 생겼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전 술을 잘 못해서 ..."
"이제 주무실 텐데 뭐, 염려 마세요. 한두 잔이야 수면제 아닙니까?"
사나이는 이곳 태생이면서 고등학교 교육까지 마쳐서 그런지
비교적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형님 근세씨 얘기는 김노인한테서 들었습니다. 참 안됐습니다."
"뭐 재수가 없는 탓이겠지요."
"헌데 당님이 저주를 내렸다고 하던데요."
"예.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는 작 그렇게 믿지는 않습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할수도 있겠지
요. 하지만 미심쩍은 데가 전혀 없는것은 아닙니다."
"미심쩍은 데라뇨?"
용세는 소주를 연거푸 두 잔이나 마시고 난 뒤 발을 시작했다.
"그 무당 백순조 할멈이 예언한 날짜 안에 돌아가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은 매일 건너다니던 장인데 하필 그날 그 자리만 얼음이 꺼져 변을 당했다는것
이 좀 미심쩍습니다."
"근세씨는 매일 그 시간에 그곳을 다녔나요?"
"그렇습니다. 형님은 시계처럼 정확한사람이니까요. 언제든지 그 시간에 정미소로 나갑니
다. 강에 얼음이 얼지 않았을때는
위쪽 다리를 건너서 다녔지만... 그렇게가자면 시간이 십분은
더 걸립니다. 그래서 겨울엔 늘 그곳으로 얼음을 건너다녔죠."
"다른 사람들도 그 얼음을 건너다닙니까"?"
"별로 다니지 않는 편입니다. 아시다시피 형님 집에서 정미소까지는 그 강만 건너면 지척이
지만 다른 집 사람들은 정미소에
볼일이 없는 한 그리로 다닐 필요가 없지요. 그러니까 형님네 서구들만 다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고가 난 뒤 경찰이 원인을 조사한 일이 있나요?"
"경찰요? 그들은 별로 믿을게 못 됩니다. 타살처리를 하면 일이 복잡해지니까 단순 익사사
고로만 몰고가는 거죠. 누가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없고 말입니다. 헌데 아직도 제 생각은
왜 그곳만 얼음이 꺼졌느냐 하는것입니다. 재수가 없으려면 그럴수도 있겠습니다만..."
"경찰에서는 백순조 무당이 저주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조사했습니까?"
"물론이죠."
"그래 경찰의 견해는 어땠습니까?"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요즘 세상에 그게 말이 되느냐고요. 그 사람들은 자기 편
한 대로만 해석하고 그저 말썽 없게 하자는 자들 아닙니까?"
용세의 말투는 관청이나 경찰은 믿을게 못 된다는 투다.
"그래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대로 할수 있는건 다 했을 겁니다."
"김선생님은 안 당해봐서 그러십니다."
용세는 못마땅한 투다. 광준도 추경감이나 강형사를 머리에 그려 보았다. 정용세의 말이 맞
는지도 모른다.
"그 얘긴 그쯤 해두고..."
정용세가 술잔을 광준한테 내밀었다. 정용세는 벌써 한병 반은 혼자 마신것 같은데 전혀 취
하는것 같지 않았다. 굉장히 술이 센모양이다.
"말씀해 보시죠."
"김회장님에 관한 얘긴데..."
"저희 누님 말씀입니까?"
"예, 김을숙 회장님 말입니다. 그분을 우리가 도와줘야 합니다. 대한민국 지성인치고 김회
장님만한 선각자가 없습니다. 한국인의 정신이 똑바로 박히신 분입니다. 우리 마을을 민속
보존마을로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럼 정형이 좀 도와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저희 형제가 도와주지 위해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당님 백순
조 할멈입니다.",
"당님이 반대하고 있다면서요?"
"물론입니다. 한데 이상한 건 처음엔 찬성하다가 중간에 햇가닥한 겁니다. 그뿐 아니라 그
무당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꾸미다뇨?"
"동네 사람들은 겁이나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지만 그 무당이
이해할수 없는 짓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
"이 마을에 있는 땅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땅을 사들여요?"
"예. 그 무당이 마침내 복부인이 되었는지 이해할수 없는 짓을 합니다."
"돈이 어디서 나서 땅을 사들인단 말입니까?"
광준도 참으로 뜻밖의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하기야 쉽게 말해서 땅을 사들인다고 할수 있겠지만, 도시의
복부인들처럼 엄청난 돈을 들이는 건 아닙니다. 우선 우리 동네서 도회지로 나가버리고 버
리다시피한 헌 집터 같은것을 헐값으로 사들였지요. 여기야 이농이 많아 집을 버리다시피하
니까웬만한 집 한 채어 몇십만 원만 주면 사니까요."
"그런 집을 사들였단 말이죠?"
"그러다가요즘은 버려진 야산이나 채소밭 같은것도 더러 사들였어요. 아무도 쓰지 않고 버
려 둔 땅을 뭣때문에 사들이는지
정말 이해할수가 없어요."
"거기에 대해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신령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니까 아무도 내용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령님이 시켜요?"
"우리 탈무골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당님이 하는일엔 이유가 없습니다."
"정형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다고 했다간 저주를 받아 제명에 못살게요."
정용세는 한참 있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갑니다. 그건 김회장님이 하는일을 방해하려고 하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정용세는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면 탈무골 땅을 자기가 다 사들이겠다는 겝니까?"
"그 할멈 심술이 그렇게 할수만 있다면 할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탈무골은 김회장님 뜻대로 보존하는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회장님 일에 대해
요즘도 이러쿵 저러쿵 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소주 두 병을 비웠다. 그러나
주로 정용세가 마셔 버렸다.
"이러쿵 저러쿵 하다니 무슨 말입니까?",
광준의 목소리도 꽤 높아졌다. 취기가 올랐다는 신호다.
"아, 그야 김회장님 얘기지요."
"우리 누님이 뭘 잘못했나요?"
"잘못하긴 뭘 잘못합니까? 옛날 얘기를가지고 그러는 늙은주책들이지요."
그 소리에 광준은 술이 확 깨는것 같았다.,
"옛날 얘기라뇨? 우리가 이 마을을 떠날때 얘깁니까?"
광준의 태도가 감자기 굳어지자 정용세도 주춤해졌다.
"아니 뭐 늙은이들 사이에 그냥 왔다갔다 하는 얘깁니다. 난 잘 몰라요."
"정형!"
광준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예?"
"그 얘길 좀 해 주십시오, 우리가, 아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왜 이 동네를 버리고 떠나갔습니까?"
"글쎄 그걸 난 절 모른다니까요."
정용세가 꽁무니를 뺀다.
"아는 데까지만 좀 얘기해 주세요.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동네서 쫓겨나는것 같았단 말입
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우리를 이동네서 꽃아낸것입니까?"
"글쎄 자세 한것은 모르지만... 아마도 백순조 무당과 관계가
있는것 같았습니다."
"백순조 무당과?"
"예 무당이 동네를 떠나라고 한것 아니겠습니까?"
"왜 우리를 쫓아냈단 말입니까?"
"글쎄 그게, 얘기가 여러 갈래라서 어느 얘기가 옳은지..."
정용세가 영 입을 나들이 버리려는 기색이다.
"정형! 제발 아는 대로 좀 얘기해 주십시오."
"동네 늙은이들 얘기로는 김선생님 아버님과 백순조 무당이
무슨 불미로운 일이 있는것처럼...,"
"예?"
"또다른얘기는김선생님 아버님이 행실이 좋지 않아동네 젊은 여자들과..."
"예?"
"그런 거 신경 쓸것 없습니다. 모두가 헐뜯기 위한 거짓말일테니까요."
"더 자세히 좀 얘기해 주십시오. 정형!"
"글쎄 그 이상은 나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자, 우리 술이나 한잔 더 나눕시다."
광준은 뒤 통수를 얻어 맞은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가슴 밑바닥에서 막연한 분노 같은것이
끓어을랐다.
"그럴수가... 그럴수가..."
광준은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이며 누구에게도 아닌 분노를
참느라 애를 썼다.
광준이 정용세의 집을 나선것은 거의 자정이가까워서 였다.
술을 과하게 마신 탓으로 아랫도리가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걸음을 가누며 당집까지 다다랐다.
그런데 살그머니 밀어 붙여두고 간 대문 한짝이 훤히 열려 있었다. 누가 또 다녀간것일까?
곽정자가 나를 찾아나선것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간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광준은 황급히 대문을 들어서며 오른편으로 정자의 방을 흘깃
보았다. 문이 환히 열려 있었다. 장지문의 창호지가 달빛에 반사되어 마당을 훤히 비치고
있었다.
"아니?"
순간 광준은 피가 얼어붙었다. 툇마루 밑 마당에 누가 쓰러져
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찍도 않고 몸을 찧으로 누인 채 얼굴은 반듯이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자씨! 정자씨!"
광준은 엉겁결에 정자의 허리와 어깨를 번접 들어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뉘였다. 불을 켰다. 정자의 얼굴에 귀를 갖다 대 보았다. 숨을 쉬고 있었다. 기절한
것 같았다.
광준은 정자를 깥바로 누이고 베개를 받힌 뒤, 웃목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손수건에 적신
뒤 이마에 얹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사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광준은 거의 혼비백산한 채 한 일이라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얼마를 지났을가? 정자가 눈을 떴다.
"정자씨! 정신이 들었군요."
들여다보고 있던 광준이 이제야 자기도 정신이 돌아오는것 같았다.
정자는 눈을 뜨고 사방을 조용히 살펴 보았다. 그 눈동자는 겁에 질려 거의 정상이 아닌것
처럼 보였다.
"정자씨 접니다. 광준입니다."
광준이 나직하게 그러나 힘있게 말했다. 그러나 공포에 젖은
눈동자는 풀리지 않았다.
"제가 지금 살아 있는 거예요?"
정자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정자씨 안심하세요. 여긴 내 방입니다."
그제서야 정자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자기 옷을 살펴보았다. 얇은 네글리제 차림새라는것을 알자 얼른 두 손으로가슴을가
렸다. 커다랗고 육감적인 젖가슴이 손가락 사이에서 심히 두근거리고 있는게 겉으로도 드러
났다.
"정자씨 어떻게 된 겁니까? 다친 데는 없습니까?"
광준이 다가앉으며 물었다. 정자는 얼른 손을 뒤로 올려 머리를 만져보았다. "괜찮은것 같
아요. 전 꼭 죽는 줄만 알았어요." 정자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빛이 돌았다. "도대체 어
떻게 된겁니까? 저 위채에는 사람이 없습니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알릴 틈도 없었어
요." "어떤 놈이었습니까?" "김선생님은 절 지켜준다고 큰소리치시더니 어떻게 된거예요.
사람을 이 제경에 이르도록 해놓고 어딜 갔다 오셨어요?" 정자는 몹시 섭섭한 모양이다. "
그얘긴 차차 해드릴 테니 정자씨얘기부터 들어봅시다." "제가 옷을 갈아입고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을때 김선생님이 나가시는 기척을 느꼈어요." "알고 있었군요. 난 또 자는 줄 알
고." 광준이 겸연쩍어했다. "잠이 쉽게 들지않아 뒤척이고 있었죠. 그런데 김선생님이 나갔
다는 것을 알자 갑자기 무서워졌어요. 이렇게 혼자 누웠다가 죽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들었어요." "그래서요?" "그런데 정말 무서운일이 일어났어요. 길쪽으로 난 창문쪽
에..." 정자는 손으로 봉창문을 가리키며 무서움에 떨었다. 정자는 공포를 삼키며 얘기
를 계속했다. 창문쪽에 시커먼 그림자가 다가오더니 창호지를 뚫고 커다란손이 들어오더란
것이다. 그 손이 창문고리를 벗기고 창문을 확 열어젖히더란것이다.
달빛 속에 보인 얼굴은 사람인지 짐승인지 잘 분간이가지 않았다고 한다.
기겁을 한 정자는 금방 숨이 넘어가는것 같았다고 한다. 정말 이제 저 괴물한테 잡혀 죽는
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괴물은 달빛에 유
난히도 반짝이는 흰 이빨을 드러내고 히죽이 웃는것 같았다.
정자는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목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움직이려고 해도 사지가 꼼짝하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수가 없다. 죽을수는 없다."
속으로 계속 이렇게 되뇌었지만, 꼭가위눌린 사람처럼 마음속으로만 바둥거리는 꼴이었다.
마침내 괴물이 창문을 넘어올 양으로 얼굴을 방안으로 디밀었다,
정자는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였다.
"사... 사... 사람 살려요!"
그러나 그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가슴 속에서만 맴돌았다.
정자는 사력을 다해 방문을 박차고 사당으로 뛰어나왔다. 엎어지면서 마당에 내려서는 순간
무언가 육중한 고무뭉치 같은것이 뒤통수를 후려치는것이다.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악! "
신음소리 같은 약한 비명을 지르며 다시 사당으로 쓰러졌다.
그리고는 정신을 않고 말았다.
"워낙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뭐가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모르겠어요." 얘기를 끝낸 정자는
어깨에 두른 이불을 움츠리며 몸서리를 쳤다. "맞은 데는 괜찮습니까?" 광준이 걱정스레 얼
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괜찮은것 같아요. 머리만 좀 띵하고 조금 아파요. 천만다행입니
다." "그래 괴물이 사람이었나요. 짐승이었나요?" "그야 지금 생각하면 사람일테지요. 그러
나 그때는 꼭 지옥에서온 염라대왕의 사자처럼 보였어요." "도대체 어떤 놈이 그런 장난을
쳤을까요?" "장난이 아녜요. 분명히 나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나한테 죽는다고 예언을
한 그놈일거예요.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르지만." 광준의 머리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앞
뒤를 이해할 수없는 일이었다. 이 괴이한 사건과 김을숙누님의 피살은 무슨 필연적인 관계
가 있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만 들었다. "김선생님도 너무하셨어요. 그래 저를 귀신한테 잡
혀가게 혼자두고 그럴 수가 있어요?" 정자가 원망에 가득찬 눈초리로 광준을 쳐다봤다. "정
말 미안합니다. 설마하니 그런 일이 있으리라곤 짐작이나 했겠습니가? 이젠 정자씨 옆에 꼭
붙어 있겠어요. 일생동안이라도 지켜드리겠어요." "그게 정말이예요?" 정자의 눈빛이 빛났
다. "그럼요. 지켜드리고 말고요." 광준은 그 말에 힘을 주면서 슬그머니 정자 옆에 다가앉
았다.
그리고 왼손을 뻗어 부드럽게 정자의 어깨를 감쌌다. 정자는 가만히 어깨를 맡겨 두었다.
광준은 이번에 오른팔도 함께 올려 정자를 가만히 가슴에 안았다.
정자가 오들오들 떨고 있다고 느꼈다.
광준은 팔에 힘을 주고 정자의 상체를 꼭 껴안았다.
광준의 오른팔 아래 감싸인 정자의 유방이 따뜻하고 부드러운감촉을 느끼게 했다.
광준은 자신의 심장고동이 갑자기 거칠고 빨라진다고 생각했다.
"정자씨!"
정자는 아무 대답도 않고 광준의 팔어 모든 걸 맡긴채 고개를
들어 광준의 얼굴을 쳐다봤다.
포근하고 온화한 촉감을 즐기는것 같았다.
광준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정자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갰다.
정자의 입술은 어릴때 따 먹던 진달래꽃잎처럼 부드러웠다.
그때였다. 정자가 갑자기 얼굴을 옆으로 돌리면서 광준의 팔
에서 빠져나갔다.
"이러면 안 돼요. 저쪽에가서 앉아요."
정자의 태도는 돌변했다. 벽쪽으로 옮겨 앉으며 옷깃을 여몄다.
"왜 그래요?"
두 사람은 그대로 방에 앉은 채 밤을 새울 각오를 했다.
광준은 누군가가 정자와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것을 믿지 않을수가 없었다.
무엇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정자를 죽이려고 하는지 통 짐작이가지 않았다.
저렇게 순진하고 가련한 여자를 공포 앞에서 오들오들 떨게하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무당 백순조는 과연 그 편지대로 정자의 죽음을 예언한것일까?
광준은 날이 밝으면 꼭 백순조 무당을만나 뭔가를 캐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용세가 얘기한
자기 집안과 무당과의 베일에
싸인 관계도 꼭 캐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광준은 쉽게 무당 백순조를만날수 없게 되었다.
앉아서 비몽사몽 간에 밤을 지새운 광준과 정자는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눈
을 떴다.
새벽부터 영등굿 준비를 하느라 심방들과 동네 아낙네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해가 돋울 무렵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때를 지어 당집 사당으로 모여들고 마당가운데는 커다
란 멍석 두 장이 깔렸다.
광준과 정자도 대강 옷을 추슬러 입 고 간단히 세수를 마친 뒤
마당에 운집한 구경꾼 틈에 섞였다.
마당가운데 펴진 멍석 위쪽에 큼직한 젯상이 놓이고 돼지머리며 시루떡이 높다랗게 쌓였다.
상 밑에도 떡시루가 두서너개놓였다. 그 앞에는 울긋불긋한수백 개의 헝겊이 엮어진 대나무
가지가 놓여졌다. 어제 신당앞에 있던 색동 대나무였다. 그 곁으로 커다란 북이 놓였다. 북
채는 몇백년이나 된듯 닳고 찌들어 오랜 풍상을 말해주는듯했다. 한 여인이 북앞에 단정히
앉았다. 그 옆에는 장고와 징, 꽹가리, 계금이 차례로 놓이고 무복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와
서 앉았다. "저기 장고나 징을 치는 사람들을 재비라고 해요." 사람들틈에서 정자가 광준한
테 설명했다. "재비? 그거 재미있군요." "원래 우리나라의 제의는 굿거리와 비손이라는 두
종류로 크게 나뉘어져요. 굿거리란 저기 보이는 것처럼 가무가 따르고 비손은 무당 혼자서
만하는 거예요. 지금 하려는 것은 그러니까 굿거리군요." "그래요?" "굿거리도 개인을 위한
굿거리가 있고 동네서 공동으로 올리는 별신굿이 있지요. 지금 하려는 것은 별신굿의 일종
이에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기 탈무골에서만은 어느 지방에도 없는 독특한 양식의 별신
굿을 해요." "언제 그런걸 다 보셨습니까? 김회장님한테 들은 풍월이에요." 그때였다. 백순
조무당이 신당믄을 열고나왔다. 광준은 눈을 크게떴다. 어제 보던 모습과는 전혀다른 모습
을 한 무당할멈이었다. 두루마기처럼 생긴 이상한 검정색옷을 입었다. 동정도없는 옷에 소
매는 붉은색이다. 머리에는 갓도 아니고 모자도 아닌 이상한것을쓰고 양손에도 처음보는 물
건을 들고 나왔다. 아주 근엄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아름답고 황홀하게까지 보였다.
"저 옷은 굿거리를 할때 입는 옷인데 구군복이라고
하지요. 머리에 쓴것은 전립이라고 해요. 저기 왼손에
든것은 무령이라는 방울이에요. 유자처럼 생겼지요?"
"끝에 방울이 달려 있군요."
"예. 저것을 흔들어 신을 부르는 거예요."
"오른손에 있는 저 거다란 포크 같은것은 뭡니까?"
광준과 정자는가만히 속삭이다시피 말을 주고받았다.
"포크라뇨? 호호호."
"포크 비슷하잖아요."
"저건 삼지창이란 거예요."
"저 젯상 곁에 날이 시퍼런 칼은 뭡니까?"
"저건은 월도라고 하는 건데 춤을 출때 들고 추기도하죠."
그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때 돌연 김칠병 노인이 젯상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식당을 향해
공손히 절을 한 뒤 젯상에 술을부어 바쳤다.
"저건 뭐하는 겁니까?"
"저 사람을 수화주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마을 대표예요. 마을 대표가 각종 신한테 이제 굿
거리를 올린다는 신고를
하는거죠."
"녜에..."
광준은 어릴때, 여러번 본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오늘 하는 굿거리는 보통 음력 이월 십삼일날 올리는 영등맞이굿이라고 하는데, 이 탈무골
서는 음력 이월 보름이 지난 뒤에 올려요. 그리고 다른 지방의 영등굿과는 전혀 양식이 달
라요. 일종의 별신굿이에요."
정자가 가만가만 얘기를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퍽 열심이고
진지했다.
그때였다. 백순조 무당이 방울을 요란하게 흔들어 댔다. 재비들도 덩달아 북이며 징을 치기
시작했다. 조용한 산골이 갑자기
춤을 추듯 소란해졌다.
"지금 신령님을 불러 모으는 거예요."
얼마간 요란을 떨더니 갑자기 뚝 그치고 백순조 무당이 멍석가운데로 나와 무가를 불렀다.
"저건 말하자면 오페라 같은 거군요..."
"호호호" 정자가 광준의 팔을 꼬집으며 웃었다. 어젯밤의 일은 까맣게
잊은것 같았다. 백무당은 방울을 흔들며 무기를 계속했다.
"...안을 돌아 열두 영정
밖을 돌아 열두 영정
영정님네 난데 본은 그 어데가 본일런가
대천지 저 한바다로 솟은 물거품이 영정일레라.
뒷동산 치치올라 청솔잎에 놀던 부정, 혹솔잎에 놀던 영정,
미리너에 영정아, 재너머 영정아...
신묘장구 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라..."
오페라는 계속됐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수가 없군요."
"저건 부정굿의 창이라고 해요. 별신굿을 시작할때 대개 부정
굿이라는것부터 시작하는때가 많아요."
얼마를 지났을까? 복잡한 여러 절차가 끝난 뒤 백순조 무당이
갑자기 커다란 포크, 아니 삼지창으로 돼지머리를 푹 찍었다.
그리고는 돼지머리를 위로 하고 삼지창을 세웠다. 그냥 서지않으니까 쌀을 담은 그릇에 삼
지창의 자루를 나무 심듯이 박아서 세웠다.
"저게 잘 서야 마을에 풍년이 든대요."
정자가 나직이 설명했다.
돼지머리가 창에 꽃힌 채 허공에 우뚝 섰다. 그 모양은 어떻게 보면 섬찟하고 어떻게 보면
우스웠다.
돼지머리가 서자 김칠병 노인이 그 위에 천원짜리 돈을 갖다얹었다.
뒤따라 여기저기서 동네 여인들이 나와 돈을 갖다 얹었다. 그리고 식당을 향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나갔다.
이렇게 계속된 굿거리는 거의 정오에 가까워서 야 끝났다.
"다른 지방의 별신굿은 하루종일 계속되고 또 밤새도록 계속돼요. 그리고 막판에는 동네 사
람들이 남녀노소 없이 다 어울려
맘껏 춤을 추면서 끝나지요. 말하자면 일종의 레크레이션이에요."
정자가 열심히 설명했다.
굿이 끝나고 흩어지는 사람들 틈에서 광준은 정용세를 찾아냈다.
그는 정용세의 팔을 슬그머니 끌면서 나직이 말했다.
"정형 저쪽에가서 얘기 좀 합시다."
정용세도 얼른 광준을 알아보고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은 신당 뒤로 돌아가 언덕 기슭 납작한 돌 위에 걸터앉았다.
"어젯밤 너무 실례가 않았어요."
광준은 우선 인삿말부터 건넸다.
"잘 주무셨는지요?"
정용세도 나직이 말했다.
"누님을위해서 애쩌 주신다니 참고마운 일입니다. 정형을 믿고 내가 해둘 말이 있습니다.
꼭 비밀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광준은 어젯밤부터 이 사람만은 믿을수 있다는 판단을 굳히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 점은 염려 마시고 어서 말씀 하십시오."
광준은 우선 어젯밤에 정자한테 일어난 일부터 대충 설명을
했다. 정용세는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질문을 했다.
"정자 아가씨의 방은 살펴봤습니까"?"
"예. 아침에 들어가 봤는데 아무런 흔적을 발견할수가 없었어요. 길쪽으로 난 창문만 열려
있고 창문의 장호지가 사람 손 하나 들어올만큼 찢기 있었어요."
"그런데 그 창문의 찢겨진 모습이 좀 이상했어요. 밖에서 손을
밀어 넣었다면 종이 나부랭이가 방 안쪽으로 나와야 할 텐데 그게 걸쪽으로 너울거렸단 말
입니다. 마치 안에서 창문을 뚫은것
같았어요."
"그거야 손을 밖에서 안으로 넣었다 다시 빼면 그럴수도 있지요. 그외는 이상한 흔적이 없
었습니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이 얘기를 당님한테 했습니까?"
"아뇨."
"절 하셨습니다. 당분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고 알아보기로 합시다."
"그리고 정형!"
광준은 더욱 진지한 표정으로 정용세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저의 누님인 김을숙 회장님이 실은..."
여기서 광준은 잠깍 망설였다. 그러나 결심한듯 말을 계속했다.
"실은 누님이 피살되었습니다."
"예? 뭐라구요!"
정용세가 너무 놀라 소리치는 바람에 광준이 황급히 정용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입이 남의 손에 막힌채 정용세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조용, 조용히 얘기합시다."
"미... 미안합니다."
정용세는 좀체 충격이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광준은 서울에서 있었던 불가사의한 일을 그대로 설명했다.
가만히 끝까지 듣고 난 정용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군요. 어떤 놈이 도대체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처럼 훌륭한 분을 무슨
죄가 있다고..."
"아무래도 백순조 무당과 무슨 관련이 있는것은 아닐까요?
"저는 미신 같은것도 믿지 않고 신통력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샤머니즘에 대해서는 잘모르지만,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없는 것은 전 믿지않습니다." "그거
야 현대인의 상식이 아닙니까? 제생각에는 어떤 추악한 음모가 그 뒤에 숨어있으리란 생각
이 듭니다. 김회장님의 주변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정용세가 의견
을 말했다. "그래서 말씀인데요. 제가 서울 올라가서 그 점은 더알아보겠습니다. 무당할멈
을 좀 만나본 뒤 여길 떠나겠습니다. 정형께서 다음일을 좀 알아주십시오. 무당에 관한 일
이라든지. 어젯밤 정자씨방에서 일어난 일이라든지. 혹은 정형 형님인 근세씨의 죽음에 관
한 일이라든지 좌우간 무엇이든지 좀 캐내서 알려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광준이 정용세의
두손을 잡았다. "염려마십시오. 제가 알수있는 것은 다 알아가지고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두사람은 바위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신당을 돌아나와 헤어졌다.
광준은 당집으로 들어와 무당을 만날 양으로 안채로 올라갔다. 심방 두 사람이 끝난 굿판의
뒤치닥거리를 하고있었다. "당님 계십니까?" "안방에 들어가 보시소." 심방여인은 거들떠보
지도않고 말했다. 광준은 안방으로 올라가부당 백순조앞에 앉았다. "저희는 오늘 올라가야
겠습니다." 백순조무당은 광준을 흘깃보고는 무표정하게말했다.
"새는 다 잡았능교?"
"철을 잘못 택해서 안 되겠어요. 여름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런데 당님!"
광준은 결심을 하고 말했다.
"김을숙 회장에 관한 얘기인데요..."
"그 얘기라면 벌써 끝난 일 아잉가?"
백순조 할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끝난 일이 아닙니다. 김회장은 이 탈무골을 사랑합니다."
"그거야 나보다 더 할 사람 있는교."
"물론 당님도 탈무골을 사랑하겠지요. 그래서 이 탈무골은 꼭
영원토록 보존돼야 합니다."
백순조 무당이 그제야 넌지시 광준을 건너다보면서 말했다.
"이 탈무골을 영원히 보존시킬라모 김회장처럼 하모 안 되는기라. 도회지 뭇 잡놈들이 관광
한답시고 떼를지어 와가지고 다짓밟아 뿌는기라. 우리 신령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놔두는기
탈무골을 위하는 길인 기라."
무당의 말은 카랑카랑하고 단호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집은 자꾸 헐리고..."
"씰데 없는 소리 그만 하그래이."
백무당은 더 듣기 싫다는 투다. 일어서려고 했다.
"최근에 김회장님만난일 없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뜻밖에 백무당의 언성이 높아졌다. 하도 큰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광준이 움찔했다.
"혹시만나셨나 해서입니다."
"만난일 없어. 지난 날인가 언제 잠깐 왔다 갔지만..."
"그땐 무슨 얘기를 나누셨나요?"
백무당은 이상한 사람 다 봤다는듯이 광준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김을숙이가 계속 고집만 부리고 다니면 제명에 못 살아."
"예?"
"이 탈무골을 두고 자꾸 입에 오르내리게 하모 칠성님 옥황상제님이 기양 두지 않는단 말이
다. 지목숨이 몇개라고 ..."
"그게 신령님 말씀인가요?"
"하모. 신령님이 몇 뿌이나 선몽을 했어. 인자 정신좀 차리고 내 당골판 뺏는 일 그만하라
고 해. 더살고 싶으모..."
백무당은 이 렇게 내뱉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광준도 하는수 없이 방을
나올수밖에 없었다. 내 당골판 뺏는 일이라고 했는데 당골판이 뭣인지 이해가 안 갔다.
"김선생님. 배도 안 고프세요? 뭣 좀 들어요."
행랑채 방으로 돌아오자 정자가 섬돌에서 기다리다가 광준을
맞았다. 두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소반에 부침개며, 떡이며, 미역국을 가득 차려 놓았다.
"이게 다 어디서 났지요?"
그제서야 광준은 시장끼를 느끼며 상 앞에 앉았다.
"제가 직접 도가에가서 가지고 왔어요."
"도가 라뇨? "
"아까 굿할때 차린 음식들을 장만하고 가르고 하는 곳을 도가라고 한답니다."
"무당들 부엌이군요."
"호호호, 그런 셈인가요."
정자도 미역국을 훌훌 마셨다.
"그런데 당골판이란것이 어떻게 생긴 겁니까?"
광준이 궁금하던것을 물어 보았다.
"당골판? 누구한테 들었어요."
"아까 당님한테 들었어요?"
"그건 무가에서 쓰는 말인데, 말하자면 관할권 같은 겁니다.
세습 무당한테는 자기가 관할하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관할하에 있는 신도들은 일정하게 쌀이며 돈들을 세습 무당한테
바치고 있지요. 옛날 중세때 유럽의 성주와 비슷한 제도지요. 그 대신 세습 무당은 그 관할
마을의 질병 퇴치며 풍년 제사 등 액땜을 맡아서 해주는것입니다. 이것을 당골이라고 하고
자기 관할 군역을 당골판이 라고 하지요. 다른 무당이 들어올수없게 되어 있는게 관례입니
다. 어떤 지방에서는 단골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장사꾼들이 단골 손님이라고 하는것도
거기서
온것 같아요."
정자가 신이 나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당골의 어원은 단군이나, 하늘을 뜻한다는 학설도..."
"예예 잘 알겠습니다. 정자씨는 참 모르는게 없습니다."
광준이 정자의 말허리를 끊었다. 그러면서 내심으론 정자가
이런 학구적인 면도 있다는게 대견스러웠다.
"오후에는 서울로 올라갑시다."
"정말이에요? 새 관찰은 이제 끝났나요?"
"늙은 새밖에 없어 흥미없어요."
광준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요기를 한 뒤 그들은 당집을 나섰다. 대곡까지는 차가 없기때문에 걸을수밖에 없었다.
정자의 커다란 여행용가방을 광준이 들고 앞장을 섰다. 대곡까지 이러고가지면 어깨깨나 빠
지겠다고 생각했다.
"무거워서 어떡하죠?"
정자가 미안하다는듯 말했다.
"이 정도야 뭐. 걱정 마세요."
광준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팔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탈무재를 겨우 넘어서지 광준은 더 이상 걸을수가 없었다.
"여기 좀 쉬었다 갑시다."
광준은가방을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때였다. 마을 반대 쪽에서 차가 한 대 먼지를 일으키며 오고 있었다. 검은색 지프였다.
지프차는 광준과 정자가까이 다가오자 지나치지 않고 그 앞에 섰다. 지프에서 누가 내렸다.
회색 바바리 코트 차림에 키가 작고 얼굴이 주름투성이인 사나이가 내렸다.
그 사람은 뜻밖에도 추경감이었다.
"야 이게 누굽니까? 김선생과 미스곽 아닙니까?"
추경감은 함박웃음을 얼굴에 담고 반가워했다.
"아니, 경감님이 여길 일일이십니까?"
광준은 참으로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뭐 안 다니는 데가 있습니까? 그래, 두 분 재미는 좀 보셨소?"
추경감이 의미 있는 웃음을 다시 눈가에 지어 보였다.
"재미라뇨? 누구 약을 올리는 겁니까?"
광준은 추경감의 그 재미란 말이 너무나 역겨웠다. 역겹다기보다는 유치하게 들렸다. 그래
서 고운말이 나올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우리 꽁무니를 쫓아온 겁니까? 추경감님,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경찰관이 그렇게 할 일이 없습니까?"
"김선생,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대로 할 일이
있어서 다니는 겁니다. 김선생 뒤를밟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때 지프차에 같이 타고 있던 사람이 내렸다. 사복 차림의
지방 경찰관 같았다.
"김형사, 걱정마. 우리 김선생은 다하고 워낙 무관한 사이라
추경감이 연신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따라 내린 형사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읍내까지 걸어갈 작정 아시오?"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마십시오."
광준이 공연히 화를 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여기서 추경감한테 화를 낼 이유는 없다.
"김선생보다도 우리 미스곽이 하이힐 바람으로 읍내까지 어떻게 걸어갑니까? 자, 우리가 읍
내까지 태워다 드릴 테니 타십시오." 추경감이 권했다. "너무폐가되는 것 아녜요?" 정자가
체면불구하고 차에 탈 기색이다. 도저히 더 걸을 수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엉거주춤 광준과 정자는 추경감의 차를 얻어탔다. 지프는 다시머리를 돌려읍내쪽으로 향했
다. 이렇게되자 아까 화낸것이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탈무골가는 길이었나요?" 광준이 부
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강형사가 거기가있기때문에 데리러가는길입니
다." "형사를 모시러 경감이갑니까?" "허허허. 그렇게됐나요? 탈무골이어떻게생겼나 구경도
할겸." "그럼 강형사님이 탈무골에 지금 계신단 말예요? 언제 가셨어요?" 정자가 놀란듯이
물었다. "예. 어제 오후에 갔었지요." "어제오후에 갔다구요? 본일이 없는데요?" 광준도 뜻
밖이란 듯이 말했다. "형사가 남의눈에 띄게 다닙니까? 몰래 다니는게 직업아닙니까?" "나
같은 행동느린 늙은이나 질척거리지요." "무슨일로 거기까지 갔나요?" 정자가 관심을 보였
다. "우리 누님일때문에 갔었나요?" 광준도 덧붙여 물었다.
"글쎄요. 꼭 그렇다고는 할수 없지만, 뭣 좀 알아볼게 있었
습니다."
"그게 뭡니까? 얘기할수 없나요?"
"아닙니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지난겨울에 거기서 한 청년이 익사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걸 좀 알아보러 갔습니다. 그런건 이곳 경찰서의 일이고 벌써 끝난 사건이지만..."
추경감이 어물어물하면서 말했다.
"정근세씨의 일이군요."
광준이 내심 놀라 저도 모르게 말이 나오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일단 사고사로 처 리했지만 좀 미심쩍은 데가 있어서... 그런데 광준씨는
그 일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가 오히려 물어볼 말입니다."
"후후후. 이거 형사질도 이젠 그만둬야겠군. 후후후."
추경감은 별로 우습지도 않은 대목에서 온 얼굴을 주름살투성이로 만들며 혼자 웃었다. 꼭
어린애 같았다.
"내 다 털어놓지요. 김을숙 여사의 일을 알아보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것은 꼭 김을숙
회장의 일때문만은 아닙니다. 거상그룹이라는 재벌을 아시죠? 그 재벌의 장통석 회장과 이
곳이 좀 관련이 있는것 같아서 참고
자료를수집하고 있었습니다."
광준과 정자는 놀랐다. 장통석 회장과 탈무골? 그리고 정근세의 죽음? 도대체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인가?
"누님의 일을 이제 김을숙 회장 실종사건이라고 표현은 안하는군요."
김광준이 엉뚱한 말로 되받았다. 궁금한것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건 여전히 실종사건이지요. 피살되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지 않습니까?"
"누님과 거상그룹과 무슨 관계가 있었나요?"
"아닙니다. 절대로 무슨 관계가 있다고 얘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거상그룹건은 회사 업무 문
제입니다. 김을숙 회장과 관계가 있어서 알아보러 다니는건 절대 아닙니다. 다만 공교롭게
도 그것이 김을숙 여사 아니, 김광준씨의 고향인 탈무골과 관계가
있는것 같아 알아보는것 뿐입니다."
광준과 정자는 추경감이 능청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필경
김회장의 피살사건과 관계가 있고, 모종의 분명한 단서를 가지고 쫓마다니는 거라고 생각했
다.
어느새 지프차가 읍내 버스 정거장에 닿았다.
"자, 여기서 내리시지요. 우린 탈무골로 다시 들어갑니다. 서울서 만납시다."
추경감이 정자의가방을 받아 내려주며 작별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추경감이 황급히 지프에 타더니 부릉 소리를 내며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광준과 정자는 그날밤 열한시가 넘어서야 서울 아파트로 돌아왔다.
이튿날 광준은 정자의 의견에 따라 누님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찾기로 결심했다. 정자가 집
회장이 쓰던 민속 보존 협의회 사무실로 나가자, 광준은 누님이 쓰던 헌 물건이며 방을 샅
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여러 종류의 핸드백이며 방안의 서랍이며, 장농등을 모조리 뒤지지
시작했다.
여기저기 서류함에서 알기 힘든 기록이며 영수증 같은것을
수없이 찾아냈다. 그러나 별로 도움될만한것이 없었다.
대부분의 자료들이 문화재에 관한 고증 서류나 사들인 영수증, 혹은 스크랩들이었다. 특히
열 몇 권이나 되는 스크랩에는
여러 신문 잡지에 쓴 문화재나 민속에 관한 글들이 모아져 있었다.
거의 점심나절이나 되었을때 헌 핸드백 속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병원의 진찰권이
었다. 날짜는 일월 십육일. 김선화 산부인과라고 적혀 있었다. 여자니까 산부인과에 다닐수
있
을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광준은 그것에서 뭔가 걸리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산부인과에 다니면 큰 병원에 다니지 이런 의원급의 병원에
다녔다는게 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광준은 진찰권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고 김선화 산부인
과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여보세요. 그곳 위치가 어디쯤이지요?"
수화기의 간호원인듯한 아가씨가 가르쳐 준 곳은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같았다.
광준은 불쑥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문을 잠근 채 그 병원으로 갔다.
산부인과 병원은 전화에서 가르쳐준대로 그리 멀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일킬로쯩 떨어진 후미진 골목 입구에 있는 슈퍼마켓의 이층에 옹색하게 자리잡
고 있었다. 누님이 왜 이런 병원에 다녔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로 볼품없는 병원이었
다.
광준은 몇 번 망설이다가 이층 병원 안으로 올라갔다.
"어서 오세요."
하얀가운의 아가씨가 앉아서 주간지를 읽고 있다가 인사를
했다. 눈길이 누구하고 같이 왔느냐는 투다. 그도 그럴밖에, 산부인과에 젊은 남자 혼자 온
다는것이 이상할수밖에 없었을것이다.
"저어..."
광준은 어색해서 얼굴까지 붉어지며 어물거렸다.
"원장님하고 상의할 일이 있군요. 부인에 관한 일이라면 걱정
말고 말씀하세요."
아가씨는 얼른 자기대로 짐작을 한듯 원장실로 광준을 안내했다. 마누라가 원치 않는 임신
을 했다든가, 혹은 애인이 그런경우를 당했을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상의하러 온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대머리에 예순은 훨씬 더 되어 보이는듯한 원장이 의자를 권했다.
"저어...,,."
"걱정 말고 말해요. 부인이 문제가 생겼나요?"
원장은 안경 너머로 광준을 넌지시 건너다보며 다 안다는 표정이다.
"저어, 실은 뭘 좀 알아보려고 왔는데요."
"예, 어서 말해요."
"저어, 한 서너 달쯤전에 이 병원에 다녀간 어떤 여자에 대해 좀 얘기를 들어보려고 하는데
요."
"예?"
원장은 별사람 다 보았다는듯한 표정이다.
"저의 형수인데요. 김을숙이라고 ."
"뭣때문에 그런 걸 알리는 겁니까잔 환자의 비밀은 절대로 공개할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저의가족입니다. 이 병원에 다녀온 뒤 죽었단 말입니다."
광준은 그냥 순진하게 행동하다가는 안 될것 같다는 생각이들어 태도를 바꿨다.
"이 병원서 어떻게 했길래 생사람을 잡는 겁니까? 고소부터하자고 가족이 펄펄 뛰지만, 우
선 병원에서 잘못한것이 없을지
모르니 알아보자고 제가 말린 겁니다."
광준은 조용조용 말을 했으나 그 뜻은 아주 겁을 주는 내용의
거짓말이 었다.
"뭐라고요? 나한테 공갈치는 거요?"
원장은 큰소리는 치지만 뭔가 켕기는 눈치다. 담배를 피워 무는 손이 가늘게 떨리는것을 놓
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병원의 잘못이 없다는 기록만 보여주면 됩니다.
저도 병원서 뭘 잘못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가족들이
그러니까..."
한참 담배만 빨던 원장은 결심한듯 말했다.
"알았습니다. 진찰기록을 좀 찾아 봅시다. 날짜가 언제라고했죠?"
"일월 십육일입니다. 이름은 김을숙."
원장은 여러 서류철이며 카드를 한참 뒤척이다가 카드 하나를
뽑아 들고 왔다.
"김을숙, 나이 이십구세, 주소는 관악구..."
광준은 나이가 이십구세라고 적힌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수긍이 갔다. 누님도 여자니까 삼십대로 적기는 싫었을것이다.
"아아, 이 아주머니 생각남니다. 남편과 같이 왔었지요.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피임이 잘못
돼 임신을 했다던 그 아주머니군요."
"예? 임신을 했다구요?"
"아니 그럼 그것도 모르셨어요?"
"그야 뭐, 시동생한테 그런 얘기까지 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그래서 남편 되는 분의 구두 동의를 얻어 낙태수술을 했었죠.
그뒤 두어 번 왔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전혀 후유증이
없었는데 죽다니요?"
광준은 원장의 이야기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님이 이런 곳에 와서 남몰래 낙태수술을 하다니! 더구나 남편하고 같이 왔다고.
"형님하고 같이 왔다구요?"
"예. 참 재미있는 분이더군요. 우스운 얘기도 잘하고 훤칠한 키에 인물도 좋고..."
원장은 다소 안심이 되는듯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병원측은 잘못이 없다고 가족들한테 얘기하죠."
광준은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병원을 뛰쳐나왔다. 누구에게도 아닌 분노가 치솟았다. 누
님이 그런 타락한 여자라니! 훤칠한 커에 미남이더라고? 흥. 어떤 놈팽이와 놀아났기
에...
광준은 혼자 씩씩거리며 김으로 돌아왔다. 분해서 견딜수 없는 심성이 되었다. 누구든지 만
나면 주먹으로 때려주고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면 어디가서 혼자 실컷 울고 싶은 심정이었
다.
육. 음모의 실마리
광준은 산부인과 병원에서 을숙 누나의 더럽고 비열한 과거의
한조각을 보고 난 뒤 더욱 착잡한 심정을 가눌수가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분노로 변해 있
었다. 세상 모든것에 대한 울분과
같은것이었다. 그럴수는 없다. 설마하니 누님이 거기까지 타락했을리는 없다.
광준은 속으로 이렇게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게 얼마나 다행이었을 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누가 누님을 죽였건 상관하지 말고 지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김을
숙 누나의 과거는 캐면 캘수록 더욱 두려운 일들만이 노출될것 같았다. "그래도 끝까지 캐
봐야 한다. 누님의 원수는 내가 꼭 갚아야 한다."
광준은 한편으로 이 생각을 버릴수가 없었다.
"누님이 아무리 나쁜 여자었더라도 역시 누님은 누님이다. 범인은 꼭 잡고야 말겠다."
광준은 며칠 동안 집에 틀어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다가 드디어 이런 결심을 얻어냈다.
광준이 꼼짝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자 초조해진것은 정자였다.
"김선생님, 어떻게 된거예요. 어디 편찮으시기라도 한 거예요?"
곽정자가 커피며 과일이며를 날마다 정성스레 들고 들어와 안타까워 했지만 광준은 별로 대
꾸조차 해주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말씀 좀 해 보셔요. 제가 보기 싫어서 그런거예요?"
"정자씨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럼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실수 없습니까?"
"김회장님을 살해한 범인 추적은 이제 포기하신 거예요? 만약
김선생님이 그 일을 포기했다면 제가 나서겠어요."
"누가 포기한다고 했습니까?"
광준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왜 그러고만 계시는 겁니까?"
"그 일이 과연 해 볼만한가치가 있느냐 하는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정자는 너무 뜻밖의 말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정자씨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무얼 말입니까?"
"김회장님의 사생활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정자씨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참, 김선생님도 답답하십니다. 제가 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전 숨기는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는 다 이야기했습니다. 탈무골까지 따라갔다 오지 않았
어요?"
정자는 뾰루퉁해지면서까지 강력하게 항변을 했다.
"누님은 정말 애인이나, 가까이 사귀는 남자가 없었습니까?"
"또 그 얘기군요. 몇 번을 이야기해야 곧이듣겠습니까? 김회장님은 김선생님이 생각하시듯
그런 불결하고 부도덕한 위선자가 아니에요. 이거 답답해서 살수가 있나. 속이라도 확 뒤집
어보여 주고 싶군요."
정자는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럼 몇가지만 묻겠습니다."
"물어 보셔요."
"김회장님은 장통석 회장 별장에 뭣하러 드나들었습니까?"
"예? 장회장님의 별장이라고요?"
정자는 확실히 놀라는것 같았다. 얼굴에 번개처럼 스치는 엷은 파도를 광준은 놓치지 않고
읽었다.
"예. 별장 말입니다. 삼송리에 있는 장통석인지 나발인지 하는 작자의 별장 말입니다."
광준은 스스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거칠게 내뱉았다.
"그런 일은 처음 들어요. 장회장님의 별장이 삼송리에 있는지
사송리에 있는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정자도 언성이 높아졌다.
"정자씨 얘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김회장 얘김니다."
"김회장님한테도 그런 얘기 들은 적은 없어요. 도대체 누구한테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들으
셨어요?"
광준은 더 이야기해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했다.
"그 얘긴 그만둡시다."
그 순간 광준은 산부인과 의사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같이온 남자는 잘생긴 인물에 우스갯
소리도 잘 하는 남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혹시 남궁현 국장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궁국장과 누님 사이는 어떤 관계입니까?"
"예?"
정자가 다시 놀라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자는 광준이 어떤 심한 층격을 받아 자기 감정을가누지 못하고 있는 걸로 받아들였다.
"김선생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지독한 편견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것은 아닙니까?"
"내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럼 남궁국장과 김회장님의 사이를 물어 본것은 무슨 뜻입니까? 분명하게 대답해 보세
요."
정자도 그렇다면 그냥 넘길수 없다는 태도다.
"남자와 여자의 사이를 물은것입니다."
"어머머 "
정자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그냥 아무 말도없이 나가 버렸다.
이번에는 곽정자가 자기 방에 처박혀 꼼짝을 하지 않았다. 김광준 같은 사람과는 다시는
말도 나누지 않겠다는 투였다.때가되면 나와서 밥상만 차려 놓고는 식사도 마주앉아 하지
않았다.
이틀을 그런 냉전 상태로 보낸 광준은 태도를 바꾸었다.
정자의 문앞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망설이 다가 노크를 했다.
"뭐예요?"
앙칼진 정자의 목소리가 도어를 뚫고 비수처럼 날아왔다.
"좀 나와 보셔요."
"그대로 말씀 하셔요."
여전히 앙칼진 목소리다.
"아파트 앞에 개나리가 한창입니다. 산책이나 나갑시다."
"혼자 다녀 오셔요."
좀 누그러진 목소리다
"사내 혼자 무슨 꽃구경입니까? 같이좀 가줘요."
광준이 마치 어리광부리듯 말했다. 조금 있다 문이 열리고 정자가 나왔다. 멋적은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김선생님 나쁜 사람".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화해를 했다.
광준은 김을숙 누나에 대한 과거를 더 캐보려면 정자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만나볼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회 사무실로 찾아갔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고 조민희 혼자 동그마니 책상에 앉아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미스조는 광준을 보자 다소 뜻밖이란 표정이었으나, 곧 반겨주었다.
"미스조. 혼자 있었구먼 그래."
광준도 반가운 척했다.
"남궁국장은 어디 나갔어요?"
"예. 조선조 백자를 만든다는 그곳 말입니다."
"남궁국장은 거길 자주가나요?"
"일 주일에 두서너번씩은 다녀와요. 그곳 물건들을 찾는 외국손님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외국 손님을 그곳까지 모시고가기도 합니까?"
"예. 때로는 그러기도 해요. 국장님은 손수 운전을 하시니까
옆에 손님을 태우고 왔다 갔다 하죠. 외국분들은 그 공장 구경이
신기한가 봐요."
"미스조도가본 일이 있나요?"
"예. 저도 국장님 차를 얻어타고 두어 번가봤어요. 거진 손님들을 접대하지 위해 아주 잘
꾸며진 숙소 같은 곳도 있어요."
"거기서 자고 오신 일도 있나요?"
"예. 너무 늦으면..."
"남궁씨도 함께?"
"예. 아니 무슨 말씀을..."
조민희는 엉겁결에 예라는 대담을 해 놓고는 그게 무슨 뜻인지 짐작하고는 금방 당황한 표
정이다.
"아니 뭐 손님을 접대하자면 그럴수도 있을 테니까요."
민망해 하는 조민희를 오히려 광준이 얼버무려 주었다.
"김을숙 회장님도 그곳에 자주 들르셨나요?"
"가끔..."
"그때도 남궁국장차를 타고 다녔나요?"
"회장님은 주로 박기사가 모시고 다녔어요. 남궁국장님의 차를 잘 이용한것은 미스곽이었
죠."
조민희는 약간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는 안할말을 뺏다는 표정이다. 금방 얼
굴빛이 달라졌다.
"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녜요."
새침하면서도 야무지게 생긴 얼굴.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순진해 보이고 어떻게 보면 닳아
빠진 오피스걸 같아도 보이는 조인희. 한듯만듯한 은은한 화장이 남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
분한 세련된 모습.
"미스곽이 뭣 하러 그곳엘 자주 다닙니까?"
"그야 뭐 김회장님 심부름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다 통하는것아녜요."
조민희의 말에는 여전히 가시 같은것이 감추어져 있었다. 광준은 그것이 일종의 질투라고
생각했다.
"그럼 미스곽과 남궁국장은 다른 일로도 자주 어울려 다녔겠군요."
광준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 슬그머니 호기심이 일었다.
"제가 어떻게 남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겠어요. 그냥 그런것같았어요... 저 선생님 차
한잔 대접해 드릴까요?"
조민희가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은 광준 앞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지금 점심시간인데 우리 밖에 나가 점심이나 같이 할까요?"
광준이 넌지시 제의를 해봤다.
"지금 사무실이 비어서 나갈수가 없어요. 조금 있으면 주인성
전무님이 오실 텐데..."
조민희는 주저하는 눈치다. 자기한테서 미스곽과 남궁국장에 관한것을 더 캐들을까봐 피하
는것 같았다..
"그냥 사무실을 잠그고 나가면 안 되나요?"
"그럴수는 없어요. 전화 오는것도 받아야죠, 또 딴 손님들이
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군요. 그동안 사무실 운영은 어떻게 해 왔나요?"
"운영이 라구요?"
"결재 같은것 말입니다. 회장님이 안계신지가 꽤 오래 되지않았습니까?"
"그건 김선생님 말씀대로 남궁국장께서 협의회 일은 결재를
하셨구요. 민예품 회사는 주전무께서 결재를 하셨어요. 필요하시면 제가 별도로 보고를 해
드릴수가 있어요."
이 대목에서 조민희는 상당히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갔다.
"아니 뭐 내가 꼭그런 걸 알자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금이 잘 안 돌아갈때는 남궁국장이 거상그룹의 장회장님과 상의를 하는것 같았어
요."
"장회장님이 여기 들르는 일이 있습니까?"
"그런 일은 없어요. 민예사 개소식때 한번 왔다가고는 온일이 없는것 같아요."
"그럼 김을숙 회장은 장회장과 주로 어디서만나나요?"
"그야 저보다 미스곽이 더 잘 알텐데요.가끔 회현동의 장회장님의 회사를 들르시는것 같았
어요. 외부에서 만날때는 수정궁에서만나는것 같구요."
"수정궁?"
"예. 사직동에 있는 한식요정이에요. 그런건 저보다 미스곽이 주로 맡아 했으니까 잘 알거
예요. 김회장님과 장통석 회장님
사이의 심부름이라든지 김회장님과 남궁국장 사이 심부름같은 건 미스곽이 도맡아 했거든
요."
"남궁국장 같은 멋쟁이는 드물게 보는 사람입니다. 미스조,
그렇지 않아요?"
광준이 동의를 구했다.
"멋쟁이면 뭐합니까? 사람이 진실해야죠?"
그러나 조민희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대꾸했다.
"그럼 남궁국장이 건달이란 말씀인가요?"
"제가 언제 그랬나요?"
"그러면...?"
"우리 국장님은 너무 여자를 울리고 다니는것 같아요."
"여자를 울려요?"
"너무 멋쟁이셔서 그런가 봐요."
조민희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갑자기 얼굴이 귀밑까지 발그레 물이 들었다.
여기서 광준은 조민희와 곽정자와 남궁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는것을 직감했다. 거기다가 김을숙 회장까지 끼어들어 있으리란 짐작도 쉽게 할수가 있
었다.
광준은 그 비밀을 어디서든지 캐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다음에 또 들르겠습니다. 점심은 그때 하기로 하죠."
광준은 협의회 사무실을 나왔다. 그러고는 회현동 거상그룹 빌딩 지하 다방에가서 한규빈
을 불러냈다. 한규빈이 점심 먹으러 나갔다고 해서 삼십분 이상이나 다방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했다.
누님을 살해한 배경에는 남궁현이나 조민희 그리고 장통적 회장이 관련돼 있는것만 같은 생
각이 자꾸 들었다. 특히 장통석은
여러가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것 같았다.
탈무골을 민속 보존 마을로 지정하는 데는 장통석의 도움 없이는 거의 어려웠을것이다. 그
것은 돈줄 없이 무슨 일이 성사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장통석 회장은 김을숙 회장이 아무리 숨겨 놓은 정부라고 하지만 아무 이득 없이 막대한 자
금을 투입 할리가 없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짜식아 뭘 그리 멍청하게 생각하고 있냐?"
어느새 한규빈이 들어와 생각에 잠긴 광준의 어깨를 툭 쳤다.
"어! 너 왔구나!"
"짜식아 소식도 없이 그동안 어디 쏘다니다 왔냐? 집에 한번
전화를 넣었더니 아무도 받지 않더구나. 어디 살림 차렸냐?"
"살림?"
"짜식아 너 숨겨 놓은 여자 있다며."
광준은 웃을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딜 쏘다니다 왔냐?"
"새 잡으러 갔다 왔지"
광준도 엉뚱한 대답을 했다.
"새 잡으러? 좋지 입술 빨갛게 칠하고 엉덩판 넓적하고, 허리 잘룩한 새 많지 그래 짜식아
몇 마리나 잡았냐?"
한규빈도 농담으로 받아 넘겼다.
"다 임자가 있어서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짜아식. 너 같은 주제에 그게 그리 쉽게 될것 같으냐?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
기까지 왔니? 어이. 아가씨 여기
커피 두 잔." 한규빈은 물어 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커피를 시키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실은 또 좀 알아봐줘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짜식아, 넌 우리 회장님 뒷조사를 해 달라는 거냐? 나 그런짓 자꾸 하다가 모가지 날아가
겠다. 짜식아."
"미안해."
"하지만 걱정마. 이 한규빈이 그렇게 눈치 없는 놈 아니니까... 어디 말해 봐."
"너희 그룹 중에 거상개발주식회사라는것 있지"
"거상개발? 있지. 한데 그건 또 왜?"
"이유는 묻지 말고 거기 대해서 좀 알고 싶어서 그래."
광준은 거상개발이 탈무골의 우물을 파는 일을 했다는 얘기를
들을때부터 거기 대해 뭔가가 알고 싶었다.
더구나 추경감과 강형사가 거상그룹의 일을 캐기 위해 탈무골
에 갔다고 하지 않았는가?
"짜식아 이제 복부인이 될려고 하는 거야 뭐야? 거상개발이란
변두리의 땅을 헐값에 사서 아파트 단지며 공업용지로 바꿔 팔아먹는, 말하자면 허가 낸 복
부인 같은 거야."
"그 일밖에는 하지 않는 거야?"
"왜 더러는 광산권 설정 같은것도 하고 석유 시추 사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러지"
"실은 말이야..."
광준은 고향인 탈무골에 다녀온 이야기를 대강 들려 주었다.
그리고 경찰이 거상그룹과 탈무골 관계를 뭔가 추적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리고 지난 여름 거상개발에서 탈무골에 우물을 파주었다는
얘기도 들려 주었다.
"짜식아 너 반도체 공부한게 아니라 혹시 산업스파이 공부하고 온건아니니?"
한규빈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일때문에 그래. 이유는 나중에 말해줄께."
한규빈은 한참동안 광준을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알았어. 이유는 묻지 않을께. 마침 거상개발 기회실에 우리 후배 한놈이 있어. 그놈을 좀
써 먹야지 그래 알고자 하는 초점이 뭐야?"
"탈무골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그걸 좀 알고 싶어."
그때 커피 두 잔을가져왔다. 한규빈은 설탕도 타지 않고 커피를 훌훌 소리를 내며 마셔댔
다.
"저녁때 여기서만나. 다섯시 십분께 퇴근할 테니까. 그때 어디가서 한잔 하자구."
한규빈은 그렇게 말하고 훌쩍 일어서서 나가 버렸다.
광준은 지하 다방을 나와 서울거리를 서너 시간 서성거렸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엄정난 사건과 마주쳐 근 일년만에
온 서울 거리도 마음 놓고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다섯 시가 조금 넘어서야 다시 터덜터덜
걸어서 다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굶고 다녀 몹시 지치고 배가 고팠다.
다방에는 한규빈이 벌쩌 와 있었다.
"김박사 여기야 여기"
한규빈이 큰소리를 지르며 손짓을 했다. 다른 손님들이 무슨 일이 났다 해서 두리번거릴 정
도였다.
김광준이 귀국한 이래 김박사라고 볼러 준것은 한규빈이 처음이었다.
"야, 박사가 뭐니 창피하게."
"이런 짜식 봤나. 나 같으면 자랑스러워 명함을 큼직하게 적어 막 뿌리고 다니겠다. 창피하
다니? 짜식 그게 무슨 소리야.
뭐 박사란게 나일론 뽕해서 따는 줄 아니?"
한규빈이 수다를 떨었다.
"야, 배고파 죽겠다. 어디 딴데로 옮기지."
둘은 일어서서 전에가 본 일이 있는 무교동 낙지집 으로 갔다.
광준은 배가 고픈김에 우선 하얀 쌀밥을 낙지볶음에 비벼 정신없이 퍼 먹고 나서 매워서 얼
얼한 혓바닥에 소주 두어 잔을 퍼부었다.
광준의 모습을 입을 벌린채 지켜보고 있던 한규빈이 히죽이
웃었다.
"짜식아 이제 정신이 좀 드나? 꼭 백 년은 굶은 사람 같다."
"그건 그렇고 내 숙제는 해가지고 왔나?"
"천천히 얘기하지. 나도 우선 목부터 축이고..."
한규빈도 소주병을 기울였다. 연거푸 세 잔을 마신 뒤 입을
열었다.
"거 참 희한한 비밀이 있더군."
"희한한 비밀?"
"짜식아, 너희 고향이라는 탈무골 말이야. 무당이 지배하는
마을이라면서? 요즘 세상에 그런 곳이 남아 있다니 참 희한한
노릇이야. 그뿐이 아냐. 내가 희한하다고 한것은 그 탈무골의
땅속이야."
"땅속이라고?"
광준은 정신이 번쩍 드는것 같았다.
"작년가뭄때 관정을 파려고 내려갔던 거상개발팀이
말이야..."
"관정이 뭐하는 거야?"
"우물 말이야 짜식아. 지하수를 뽑아내는 우물..."
"알았어. 그래서..."
"근데 고놈의 마을 바닥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리 파도 지하수가 나오지 않더라는 거야.
깊은 곳은 팔십피트까지 팠다고 하니
말이야."
"그래서?"
광준은 술잔을 든채 한규빈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그런데 땅 밑에는 대부분 암석층으로 덮여 있었다 이거야. 그암석을 다시 뚫고 내려가자
그때야 거기 지하수가 고여 있더란
거야. 이건 석유를 캐는 작업과 비슷하다고 할수 있지"
"그럼 석유가 나왔단 말이야?"
"짜식아, 무식하긴. 그 정도 파가지고 석유가 나올것 같아?
한국 땅에서 석유나오는것 봤니?"
한규빈은 턱을 쑥 내밀어 보이며 광준을 힐책했다.
"그럼 뭐가 희한한 일이란 말야."
"잠자코 듣기나 해. 이건 거상그룹의 초특급 비밀인데 말야.
야 야, 그거 캐내는 데 군자금깨나 들었다. 알아서 해."
"어서 얘기나 해 봐."
"근데 그 암석이란것이 문제란 말야. 거상그룹 연구실에서 그
암석을 분석한 결과 엄청난 광맥을 찾아냈다 이거야."
"광맥?"
"그럼. 아주 고품위 우라늄 광맥이란 것을 확인했어. 이쪽의
분석으로 세계에서 몇 군데 없는 우라늄 노다지 광맥이란 거야.
그런데 그게 묘하게도 모두 탈무골의 마을 밑에 집중돼 있다 이거야. 지상은 무당이 지배하
고 지하는 우라늄 천지의 세계이고 ,
이거 아이로닉 하지 않아?"
"그래서 거상그룹선 어떻게 한대?"
"짜식아 그걸 말이라고 물어?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나?"
한규빈이 소줏잔을 홀짝 들어부으며 말했다.
"광업권 설정을 하고 캐내서 때부자 되겠다는 거지 뭐야."
"우리나라에 있는 우라늄땅은 경제성이 없다고 들었는데..."
"짜식아, 그러니까 아무도 캐려고 들지 않는것 아냐. 그러나
그것이 고품위가 돼서 노다지라면 문제가 다르지 않겠어.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우라늄광은
두 군데가 있어. 충북 옥천계하고
경북의 영양계가 그것인데 이것은 모두 영점영영사프로밖에 함유량이
없어서 경제성이 없었단 말야."
"그럼 탈무골은 얼마나 되는데?"
"거긴 노다지야 노다지 세계시 우라늄 생산량이 많은 곳은 미국, 호주, 캐나다인데 여기것
들은 모두 품위가 영점칠프로가 넘는단말야. 경제성이 있자면 최소 영점일프로는 돼야한대.
그런데 탈무골
지하의 우라늄은 그 함량이 대충 시칠프로가 넘는다 이거야. 이런 고품위는 어디에도 없어.
이거야말로 노다지지 뭐냐."
한규빈은 자기 일처럼 신이나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캐자면 마을 전체 집들을 사들여야 되게 돼있단 말이야."
"그곳을 지금 무속 보존 마을로 지정하려고 하는데.,..,,."
"짜식아, 그러니까 문제가 있는것 아니냐 이거야. 그곳에 노다지기 묻혔다는 소문만 나 봐
라. 누가 집이며 밭을 팔려고 하겠어. 팔아도 엄청난 값을 내라고 할것 아냐. 그러니까 몰
래 집이며 땅을 살금살금 사들이는 방법밖에 없단 말야."
그제야 광준은 머리에 얼른 떠오르는게 있었다. 그렇다. 무당 백순조가 헌 집이며 밭이며
언덕배기를 슬금슬금 헐값에 사들이고 있다고 정용세가 귀띔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무당 백
순조가 장통식의 사주를 받고 그런 짓을 하고 있는것이 틀림없다고 봐야 한다.
거기다가 민속 보존 마을로 지정해 버리면 자기들 일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
무당 백순조가 처음엔 민속 보존 마을 지정을 찬성했다가 중간에 맹렬히 반대한 이유가 거
기에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백순조의 적은 누구인가?
민속보존 마을을 고집한 김을숙 회장이 최대의 방해자로 보였을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광준은 벌떡 일어섰다.
"짜식아 갑자기 왜 이래?"
한규빈이 술잔을 든채 광준을 쳐다보고 눈이 둥그레졌다.
"알았어. 알았단 말야!"
광준이 소리릍 버럭 질렀다.
"짜식이 미쳤나? 뭘 알았단 말야?"
"나쁜 놈 같으니.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
"짜식아 누가 누굴 죽였단 말야?"
"장통석. 그놈 짓이야."
"...? "
한규빈은 어이없다는듯이 광준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다가 말했다.
"너 술 취했구나. 야, 나가자 나가."
그들은 낙지집을 나왔다.
한규빈과 헤어진 광준은 집으로 오면서 계속 치를 떨었다. 도요또미히데요신지 장통석인
지 하는 녀석. 어디 두고 보자. 그는 입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김으로 돌아온 광준은 곽정자를 불러 놓고 한규빈한테 들은 얘기를 대강 들려 주었다. 그리
고 범인임에 틀림없는 장통석을 그냥 돌수 없다고 혼자 흥분해서 떠들었다.
"전에 정자씨한테 보낸 협박편지 말입니다. 그 봉투에 찍힌
소인이 회현동 우체국으로 돼있어요. 회현동이란 거상그룹이
있는 곳 아닙니까? 내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
살인예고 편지도 장통석이란 놈의 짓이 틀림없어요."
"장회장님이 왜 저한테 그런 무시무시한 편지를 보냈을까요."
정자가 몸서리쳐진다는듯 몸을 움추리며 말했다.
"그야 뻔한일 아닙니까? 정자씨나 내가 더 이상 누님의 피살사건을 캐지 말라고 겁준거 아
니겠어요?"
광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장통석 회장님이 김회장님을 죽였다손치더라도 아무런 증거를 찾을수 없잖아요."
"증거? 그거야 지금부터 찾아내야죠. 꼭 증거를 찾아내서 사형대에 올려 세울 겁니다. 실컷
농락하고 나중에는 죽이기까지하다니..."
"농락이라뇨?"
"장통석이 누님을 농락했단 말입니다. 삼송린가 사송리에 별장을 지어놓고 거기 누님을 데
리고가서 농락했단 말입니다."
"어머!"
정자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따위 재벌 총수가 있으니까 다른 재벌들이 욕을 얻어 먹는것 아닙니까?"
"김선생님. 확증도 없으면서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다니요."
광준이 너무흥분해서 떠드는 바람에 정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확증? 확증 다가지고 있습
니다. 내 일생을 바쳐서라도 장통석이란 놈을 꼭 파멸시키고 말겠어!"
두 사람은 한동안 묵묵히 앉아 있었다. 목걸이에 달린 하회탈을 두 손으로만지작거리고 있
던 정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자가 여자를 농락했다는 표현은 점잖지 못할 뿐 아니라 옳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곽정자가 워낙 톤을 낮춰 타이르듯 조용히 말하는 바람에 광준도 아무 말 않고 조용히 쳐다
보기만 했다.
"그런 말은 전 세대적 용어랍니다. 저는 우리 회장님이 그런유치한 짓을 했으리라고는 물론
추호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김선생님이 말씀하신 농락이라는 남녀관계의 표현에는 저항을
느끼게 되네요.요즘의 성인남녀들은 모두 자기 일은 자기가 판단할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
다. 누가 누구를 농락했다고 하는 봉건적인 용어는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하지만 한쪽의 감언이설에 속아 같이 놀아 줄수는 있는 일 아닙니까"?"
"그렇더라도 농락이라고 볼수는 없는 거예요."
"남궁현 국장 같은 사람이 농락의 명수라면서요?"
말이 달리자 광준은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 따지고 보면 엉뚱한 방향이 아니라 남궁현도 장
통석이처럼 김회장을 농락한 사람이란 생각때문에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
"왜 얘기가 빗나가세요?"
"그렇지 않습니까? 미스곽도 남궁현 국장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면서요?"
광준은 내친 김에 조민희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쏟아버렸다.
"어머! 그게 무슨 의미예요?"
"남궁국장 차를 타고 도요지에 자주 다녔다고 하던데요. 거기서 놀다 오기도 하고."
이 대목에서 광준은 히죽 웃었다. 이것이 질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구한테서 그런 중상 모략 얘기를 들으셨어요? 밝혀 보세요."
정자는 야무진 말씨로 따지고 들었다. 밝혀야 한다는 태도다.
광준은 괜히 실없는 소리를 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꼭 밝혀야 합니다. 김선생님! 절 이제까지 그런 여자로 보아왔어요? 아이 분해!"
"그야 뭐, 꼭 어떻다는 얘기가 아니고..."
광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얼버무리려고 했다.
"누구예요? 말씀해 보세요."
정말 낭패였다. 광준은 하는수 없이 미스조를 대지 않을수 없었다.
"미스조가 그러는데..., 뭐 곡 헐뜯으려고 한 말은 아니야.
그건 분명해요."
"조민희? 세상에 그럴수가... 그럴수가... 자기가 한 일을
나한테 덮어씌우다니..."
정자가 적잖이 흥분하는것 같았다.
"자기가 한 일이라고요?"
"예. 조민희가 어떤 여자인지 잘 모르죠? 제가 이런 말은
안하려고 했지만 분해서 말씀드리지 않을수 없어요."
"어떤 얘긴데요?"
"이런 말 하는것은 내 인격부터 깎이는 일이지만, 기왕 말이 나왔으니다 얘기 하겠어요. 미
스조는 보기는 그렇게 얌전하고 깔끔하게 보이지만 행실은 아주 개차반이에요. 우리 회
사에 오기 전부터 있던 회사에서 남녀관계로 말썽이 많았어요."
"어떤 말썽이었나요?"
광준은 아주 훙미롭다는듯이 담배를 피워 물며 본격적으로 들어줄 태세를 갖췄다.
"남녀관계 말썽이란게 뻔한것 아녜요. 직장 상사와 눈이맞아 놀아나다가 고소를 하네마네
하고 떠들었죠, 또 옆에 있는 과의 미혼 남자사원과도 하루가 멀다 하고 호텔이며 온천
을 돌아다녀 회사에 치사한 소문이 파다했대요. 그러자니 회사 공금에도 손 대게 되
고... 좌우간 엉망진창이었대요. 그무렵에 사귀게 된 사람이 남궁국장인데 금세 또 눈이
맞았나 봐요. 남궁국장이 조민희를 우리 협의회에 끌어들였으니까요. 협의회 일을 하면서도
계속 남궁국장과 놀아나면서 결국은 공금까지 탈을 냈던 거예요. 남궁국장이 도박 뒷돈을
누구한테 대 주다가 그렇게 됐다고 하지만 실은 두 사람이
놀아나면서 가져다 쓴걸거예요."
곽정자는 한 번 말문을 열자 그냥 술술 풀어 놓았다. 광준은 얌전하고 예의바른 숙녀인 정
자한테 이런 면이 있었다 하고 다시 보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구요."
"그뿐 아니에요. 그녀는 남자를 홀리는 데 천재적인 재질이
있는지 천성이 그런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한 남자만으론
직성이 풀리지 않는가 봐요. 주인성 전무까지 홀려가지고..."
"예?"
광준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정말이에요. 까짓거 다 털어놔 버리지요. 어느날 제가 회장님 심부름으로 급히 민예품 공
장에 간 일이 있었어요. 시간이 늦어 모두 퇴큰했을까봐 급히 서둘러 인사동까지 갔는데
마침 사무실 문이 열려 있었어요. 제가 무심코 사무실 문을 확 당기고 들어섰었지요. 그런
데 나원 참...!"
정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광준은 더욱 궁금해졌다. 정자는 광준한테서 시선을 돌리고
나직이 발했다.
"주전무님과 미스조가 소파에서.,...,"
정자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수 있어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에요."
"사랑에 장소와 시간이 문젭니까. 하하하. 재미있군요. 더계속해 보세요."
광준이 익살을 부렸다. 그럴수록 정자는 수줍어 어쩔줄 몰라했다.
"그게 도대체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그날 저녁에 제가 회장님을 모시고 어떤 호텔 커피숍에
간 일이 있는데 글쎄..."
정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발을 계속했다.
"글쎄 그 커피숍에 이변엔 남궁국장과 마주 앉아서 생글거리고 있잖아요. 세상에 사람이 그
럴수가 있어요."
"주전무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설마하니..."
"그러실 거예요. 안믿어도 좋아요. 주전무님도 사람은 예의바르고 정직하게 보이지요. 하지
만 그런 엉큼한 구석이 있답니다. 하기야 여자가 그런 식으로 덤비면 물러날 남자가 있
겠어요?"
정자의 말도 옳은 점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들을 김을숙 회장님은 모르고 있었나요?"
광준이 물었다
"속속들이야 모르셨겠지만 소문이 파다한데 모를리가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공금까지 축낸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누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몇 번 불러서 야단을 쳤죠. 요즘 미스조한테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도니 조심하라는 정도로
처음엔 얘기했어요. 그래도
계속 그런 소문이 나돌자 한번은 불러다가 호되게 꾸짖었어요.
"그게 언젭니까?"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쯤이었나 봐요."
"그랬군요."
광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미스조가 김회장에대한 앙심을 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김회장과 남궁국장이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면 중간에 끼어든 조민희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여자의 질투란 얼마나 무서운가를 광준은 미국 소설에서 자주 읽
어 봤다. 더구나 김회장은
조민희보다 나이가 많다는 핸디챕이 있다. 그렇다면 김회장이
조민희를 그냥 꾸짖는 정도로 끝내지는 않았을것이다. 줄수있는 온갖 모욕은 다 주었을것이
다.
그런 경우 조민희같이 막돼먹은 여자가 그냥 있을리 없다.
충분히 살인이라도 할수 있었을것이라고 광준은 생각했다.
"조민희와 주전무의 관계도 누님이 알고 있었나요?"
"아마 대강은 눈치채고 있었을것입니다."
정자는 다털어놓고나니 시원하다는 표정보다는 공연히
흥분해서 떠든것을 후회하는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주전무와 남궁국장 사이는 어땠어요?"
"그게 저는 좀 이해 안가는 점이 있었어요. 치사한 말로하자면 주전무님이 남궁국장으 애인
을 새치기한 셈이 되는데, 오히려 주전무님이 고자세로 나오고 남궁국장님이 절절
매는것 같았거든요. 아이 우리 이런 치사한 얘기는 그만두기로 해요. 오히려 우리 인격만
버리게 되는것 같아요."
정자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광준은 참으로 놀라운 사회의 뒷면을 보는것 같아
마음이 개운하지 못했다. 문화사업을 한답시고 모여들 앉아 겉으로는 민족문화가 어떻고
하면서 떠들어대고 뒷구멍에서는 치사하고 불결한 싸움질이나 해대는 그런 사람들. 국가의
경제가 어쩌고 수출이 어쩌고
하면서 기부할 궁리나 하고, 끼리끼리 사회의 뒷그늘에서 성욕을 채우며 놀아나는 재벌 총
수 장통석.
"하하하."
광준은 천장을 쳐다보며 큰소리로 웃었다.
광준은 이래도 누님의 살인범을 찾아내야 하느냐 하는 의문에 잠시 빠졌다.
그들의 하는 짓이 살인과 다를 바가 뭐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법률적으로야 살
인보다 더한 죄가 있을까마는, 이것은 도덕적으로 교수형을 받아도 마땅한 짓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치사한 구렁텅이에 정자씨는 빠져들지 않은게 천만다행입니다."
"저도 그런축이라고 김선생님은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정자는 미소를 띠며 상냥하게 말했다. 기분이 좋다는 표시다. 광준은 그런 모습의 정자가
더없이 맑고 귀염게 보였다.
도톰한 입술에 정감이 무르익었다. 조금 전에 보였던 성난 표정은 찾아볼수가 없었다.
"천만에요. 정자씨가 누군데요. 우리가 알게 된것이 한달만 되었더라도 제가 청혼을 했겠습
니다."
"그건 무슨 뜻이에요?"
"만난지 한달도 안돼 사랑한다느니 미워한다느니 하면 그게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게 아
닙니까?"
"사랑이란 첫눈에라는 말이 있어요. 시간이 무슨 문제인가요?"
정자는 더욱 생글거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지금 내가 프로포즈를 해도 받아주시겠습니까?"
광준이 몸이 단듯했다.
"어떻게 되나 한번 해보세요."
"정자씨 사랑합니다. 우리 결혼합시다."
광준은 농담삼아 한 말이지만 실은 진정에 더가까운 말이었다.
"어머머... 몰라요. 우린 아직 그런 달콤한 얘기를 할 처지가 아니랍니다. 김선생님 정
신 차리세요."
정자가 또록또록한 말씨로 타이르듯 하고는 일어서서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날 광준은 시경으로 추경감을 만나러 갔다. 마침 추경감은 멍하니 다리를 포개고 앉
아 뭔가 생각에 장겨 있었다.
왼손에 끼고 있는 담배가 다 타들어가 손이 델 지경인데도
모르고 있었다.
"경감님!"
앞에 다가서서 광준이 부를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화들짝
자세를 고치고 쳐다봤다.
"아니 이거 김광준씨 아닙니까? 어서 오십시오."
추경감은 두리번거리다가 멀리 있는 의자를 끌고 와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밖에 나가서 차라도 한 잔 하실까요?"
광준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에 추경감은 뜻밖이라는 표정이다.
"이거 영광입니다. 김선생이 차를 다 사겠다고 하니... 암 가고 말고요."
추경감이 일어서서 앞장 셨다. 두 사람은 시경 옆 골목 지하 다방으로 들어가 마주앉았다,
"그래 무슨 바람이 불어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까?"
앉자마자 추경감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다 낡은 지퍼 라이터기가 불이 켜지지 않아
몇번이나 켜댔다.
"그래 탈무골에선 뮐 좀 캐냈습니까?"
광준이 먼저 물었다.
"그 정근세라는 사람의 익사사건 말입니까? 그건 아직 별다른 진전이 없습니다."
"그것보다 거상그룹과 탈무골의 관계는 좀 알아낸게 있습니까?"
그때 레지가 와서 차 주문을 받아 갔다.
"장통석이란 사람 혹시 아시는지요?"
추경감이 물었다.
"한번만난 일이 있습니다. 누님의 일을 후원해 주고 있다고 해서..."
"참 그랬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탈무골에 대해 무지무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건 벌써 제가 다 알아냈습니다."
"예? 어떻게 그걸..."
추경감이 놀랐다. 광준은 조금 으시대고 싶은 어린애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라늄광을 캐내려고 무당을 시켜 마을 땅을 사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참 용케 알아내셨군요. 김선생이야말로 형사 뺨치겠군요."
추경감은 주름투성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담았다.
"그러면, 장통석 회장이 자기 일의 방해자인 누님을 살해했다고는 보시지 않는지요?"
"글쎄. 그건 좀 비약이 아닐까요?"
"비약이라뇨? 동기가 확실한데 비약이랄수가 있습니까?"
"첫째, 김을숙 여사가 살해됐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둘째 과연 재벌의 총수이며 사회적인 저명 인사가 그런 졸렬하고 상식 밖의 일을 했다고 생
각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경강님은 아직도 누님이 살아 있다고 믿는 겁니까?"
광준이 언성을 높였다.
"아, 아, 김광준씨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꼭 그렇다고 확신하는것은 아닙니다. 어느 쪽이
든 가능성은 있는것입니다. 즉 김을숙 여사가, 김선생 주장처럼 실해된 경우, 둘째 스스로
자취를 감춰 버린 경우, 셋째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 경우, 이 세가지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
는것입니다. 한가지 확실한것은 김을숙 여사가 십이일동안 사라진것입니다,"
광준은 그 문제를 더 따져봤자 경감의 태도가 변할리 없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수정궁은 뭣때문에
내사를 했습니까?"
"수정궁? 거 사직동에 있는 요정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강형사가 나를 미행해서 왔던 곳이죠."
"미행이라뇨? 우리 그런 일은 없었던 걸로 합시다."
"어쨌든 거기서 무엇을캐냈습니까? 그것이 누님의 피살과 관계가 있습니까?"
"장통석 회장의 사생활을 좀 조사하다가 그곳이 나온것 뿐입니다. 그곳에 민속 보존 협의회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더군요.
한가지만 말씀드리죠. 거기 남궁현이란 사람과 주인성이란 사람이 있죠?"
경감이 광준을 넌지시 건너보았다. 그 눈에는 착하디착한 웃음거기서려 있었다.
"예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 드나들면서 손장난을 좀 했더군요."
"손장난이 라뇨?"
"도박 말입니다. 상습적인 전과자 몇 사람과 도박을 벌인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한테 걸리면 패가망신하기 마련이지요."
"거기에 우리 누님도 함께 끼었단 말입니까?"
"예? 김을숙 여사가요? 글쎄 김여사 같은 인격자가 거기에 끼일 턱이 있습니까?"
"그럼 장통적 회장과는 관계가 있습니까?"
"장회장은 그런 도박 같은것은 안 합니다. 다만 거기 주인인
문마담이란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와 가까이 지냈다는것만은
확실합니다. 그요정을 차린것도 장통석 회장이 돈을 대준것
같았습니다. 이 거 비밀을 너무 털어놓는것 같은데... 김선생 이건 안들은 걸로 해주시
오."
추경감은 여기서 말문을 닫아버렸다.
장통석이란자가 누님을 농락하더니, 문마담도 역시 그런 희생자였구나 하고 광준은 생각했
다.
광준은 우선 누님 김을숙 여사를 살해했을 제일의 혐의자로
장통석 거상그룹회장을 지목했다. 죽일만한 동기가 충분히 있는것이다. 그리고 장통석이 김
을숙을 숨겨 놓은 여자로 삼아 엔조이를 했다면 이제 신물이 날 단계에 왔음직도 하다. 세
상에 스캔들이 알려져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것이다. 대재벌 그룹의 총수와 여류명사의 불륜의 정사.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충분한 입방아감이 될뿐 아니라 기업 자체에 큰 마이너스를 가지고
올수도 있는것이다. 더구나 탈무골의 일을 방해하는 강력한 장애물을 제거시켜 버릴 필요도
있었을것이다.
두번째의 용의자로는 남궁현을 염두에 둘수 있다. 조민희,
주인성 등과 함께 치사한 치정관계를 이어오고 있던 남궁현을
김을숙이 호되게 꾸짖었을것이다. 더구나 남궁현과 김을숙이
지저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그 질투는 광적이었을지 모른다. 견디다 못한 남궁현이 김
을숙을 죽였을지 모른다. 아니 그보다도 돈을 좋아하는 남궁현이 협의회나 민예품 공장의
돈을 빼돌려 난처한 입장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번째 용의자로는 조민희를 꼽을수 있다. 자기의 애인인 남궁현을 김을숙이 가로챘다고 생
각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여자의
소견으로는 복수를 택할수도 있는것이다.
네번째 용의자로는 주인성 전무를 배제할수가 없다. 조민희
와의 부정한 관계를 김을숙이 알고 있었을지 모츤다. 그렇다면
김을숙이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남궁현과 주인성이 짜고 공금을 어떻게
축낸 이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섯번째의 용의자는 탈무골의 무당 백순조를 꼽을수 있을것이다. 그 무당의 불가사의한 여
러가지 행동, 그중에도 민속마을 지정을 반대했다는것은 범행의 동기로 성립될수 있다.
아니, 그보다 두 사람 사이에는 끈끈한 그 무엇이 얽혀 있는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광준은 이 다섯 사람의 용의자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것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가야 한다."고 생각한 광준은 장통석 회장을 만나
보기로 하고 그의 회사로 찾아갔다.
비서실에서 신분을 밝히고 장회장을 꼭만나야겠다고 단호하게 부탁했다.
바쁘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평계를 아예 대지 못하게 하려고
필요 이상으로 강경한 태도를 보여줬다. 그러나 비서는 의외로
면회를 허락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김을숙 회장의동생 김광준입니다."
광준이장통석을 만나자 수다스러울 정도로 인사를 했다.
"어서 오게. 알아보다 뿐인가. 거기 좀 앉개. 안그래도 내가
좀 만나려고 했는데..."
장통석과 마주앉은 광준은 장통석의 얼굴을 다시한번 찬찬히 바라보았다. 쭈글쭈글한 비계
덩이 같은 얼굴, 볼품없이 구겨진 코, 짤막하고 방정맞은 턱, 왜소한 제구, 거기에 어울리
지 않게 매서운 눈초리 그렇다. 누가 도요또미라고 별명을 잘지었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장통석의 얼굴이 더욱 추하고 호색한처럼 보였다.
"더러운 녀석."
이 말이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그래 김회장에 관한 단서는 좀 찾았는가?"
장통적이 입가에 미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웃음을 흘리면서
물었다.
"조금 찾긴 했습니다만..."
"그래 어떤 놈이 김회장을 죽였단 말인가?"
"그보다... 저. 제가 지난 주어 탈무골을 좀 다녀왔습니다."
광준은 일부러 탈무골이란 단어에 힘을 주면서 말하고, 장회장의 표정을 살쳤다.
"탈무골?"
장회장은 확실히 찔끔하는것 같았다.
"예, 저희 고향이고 회장님도 관심을가지고 계시는 탈무골 말입니다."
"거긴 무슨 일이 있었나?"
"이런 능청스런 늙은이 보았나."
광준은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그곳에 백순조라는 무당이 있는데 그 무당이 평소에 누님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캐보러 갔었습니다."
"무당이 죽음을 예언했다고?"
장회장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보았다.
"예. 회장님은 혹시 그 무당을 모르시나요?"
"무당? 그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알겠나?"
"평소에 백순조 무당에 관해 들은 일이 없으십니까?"
"듣기야 김여사한테 여러번 들었지 하지만 그런 예언을 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네. 하긴
좀..."
장회장이 무언가 생각난다는 표정이다. 광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누님이 백순조에 대해 무어라고 얘기하던가요?"
"김여사가 가끔 무당 얘기를 했는데 나로서는 이해할수 없는
얘기였다네."
"어떤 얘기였는데요?"
"김여사가 너무 무속이 라는 데 열중하다 보니까, 아니 열중이라기보다 심취하다 보니까,
무당의 신비성을 믿는것 같기도 했어."
"무당을 믿다니요?"
광준운 더욱 궁금해졌다.
"김여사가 가끔 자기는 무당과 끊을수 없는 어떤 운명의 실로 묶여있는것 같다는 말을 했었
지 그러나 그것은 꼭 탈무골 무당만을 지청하는것은 아니었어. 뭐 자기의 핏속에는 무당의
피가 흐르는지도 모른다는 등 이해할수 없는 말들을 가끔 했지"
"무당의 피가 흐른다고요?"
"김여사는때로 진지한 학자의 태도를 보일때가 많았지. 학문과 자기를 혼동하고 있는것 같
은때가 가끔 있었어. 너무 무속연구에 몰두하다 보니까 무당이 된것 같은 착각을 할때가 있
는것 같았네."
"예. 그럴수도 있겠군요."
광준은 여기서 잠깐 자기를 되돌아보았다. 반도체에 미쳐 끼니도 잊고 연구에 열중했을때는
자기의 두뇌가 칩으로 가득찬것 같았고, 자기의 손톱이 디램으로 보인 적도 있었다. 그것은
미국 대학 연구실에서의 이야기다. 학자라면 그런 착각에 빠질수도 있다.
"난 김여사의 핏속에 무당피가 흐른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하나 무당과 김여사는 범인이 이
해할수 없는, 말하자면 텔레파시
같은것이 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네."
"회장님은 영적교류를 믿으세요?"
"충분히 이해를 하네."
광준은 이 사람이 보통의 장사꾼과는 좀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래 장회장을
찾아온 목적을 달성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님과 김을숙 누나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어떤 관계? 무슨 의민가?"
장회장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인간적인 관계 말입니다."
"자네가 뭔가를 오해할 그런 관계는 아니라네. 그러니까 지금부터 팔년전인가..."
장통석은 담배를 피워 물며 말을 시작했다.
"내가 우리 회사의 어떤 조그만 하청 업체에 시찰을 난 일이
있다네. 봉제공장인데, 거기서 수출품 샘플로만든 우리 고유의
여러가지 깜찍한 봉제품을 발견했네. 이게 누구의 아이디어냐고 사장한테 물었더니, 김을숙
이라는 사원의 아이디어라고 하더군."
"어떤 봉제품이었습니까?"
"흔히 우리의만화에 나오는 마음씨 좋은 호랑이의 모습, 도깨비의 모습 그런 거였다네. 그
래서 쓸만하다고 생각하고 김을숙이를 불러 오라고 했지"
장통석 회장은 거기서 김을숙을 처음 봤다고 해다. 깔끔한 몸가짐에 빼어난 미인이라고 생
각했다.
장회장은 김을숙을 데려다 자기 회사의 비서실에 근무하게 했다.
김을숙은 공원으로 다니던 봉제 회사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 대학에 다녔다고 했
다. 그녀는 그의 빼어난 미모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당했다. 같이 일하는 남자 공원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던때문이다. 계속 따
라다니며 데이트를신청해 왔던것이다.을숙은 적당히 웃어넘기며 자기 몸을요령있게 잘 간수
했다. 때론 작업 조장이나 과장들이 침을 흘리고 온갖 감언이설로, 혹은 직책을 이용해 접
근해 왔다. 그러나 예절바르고 상냥하게 그 끈적끈적한 압력을 잘 막아냈다, 그리고 야간대
학을 졸업했다. 그녀를 기특하게 생각한 봉제공장 사장이 그를 작업장의 실 먼지 덮어쓰는
고된 일은 면하게 해 주었다. 개발실이란데를 보내 새 제품 모델을 개발하게 했다.을숙은
여기서 토속적인 모델 개발에 노력했다. 토속적인것에 심취하다가 마침내 민
속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봉제공장의 사장은 마흔 살이 넘은 홀아비였다. 그 또한 끈질기게 을숙을 잡아당겼다. 나중
에는 결혼하자고까지 졸랐다. 그러나 을숙은 결혼보다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을숙이
그사장의 집요한 요구를 피해 도망이라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장통석 회장을 만
나게 된것이다.
김을숙은 장통석을 따라 그 회사를 빠져나갔다. 장회장은 김을숙을 자기 비서실에 근무하게
하고 공부하는 뒷바라지를 다해 주었다. 김을숙은 마침내 민속학에 대한 일가의 경지를 이
루고, 사보에 글을 쓰기 시작한것이 인연이 되어 여기저기 잡지에
민속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여성들의 사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고 마침내는
독립해서 사업도 하였으며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회 회장까지 맡게 되었다. 이것이장통석이
설명하는 김을숙 여사와의 관계였다.
"그러니까 나는 똑똑한 딸 하나 얻는 셈치고 뒤를 밀어 주었다네."
"딸이 라고요?"
광준운 창자 속에서부터 역해 오는 감정을 꾹 눌러 참았다.
"그래 딸 같은 여자를 삼송리 별장에 밤마다 데리고가서 망가뜨려 놓았단 말이야? 이 뻔뻔
한 녀석아."
그러나 이 말은 차마 내뱉자 못했다.
"그런데 누님이 탈무골을 장회장님께 양보하지 않았단 말이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광준의 입에서 이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양보하지 않다니?"
도요또미의 눈이 희둥그래졌다.
"에잇 모르겠다."고 생각한 광준은 내친 김에 말해야겠다 결심했다.
"탈무골이 우라늄 노다지 광이란것을 제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곳을 무속 보존 마을로 해야 한다고 우긴것이 누님 아닙니까?"
충격을 받은듯 한참 눈만 깜박이던 장회장이 결심한듯 입을
열었다.
"김군이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네만... 탈무골에 우라늄 광맥이 있는것
은 틀림없다네. 꽤 품위가 높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곳이 문화재적가치가 있어서 보존해야
된다면 난 끝까지 우라늄을 캐자고 우길 생각은 없네. 어느것이 더 나
라를 위하는 일인가 하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네."
"이런 뻔뻔스런 녀석 보았다." 하고 광준은 속이 뒤틀렸다.
"그래서 누님과 심한 의견 충돌이 있었군요."
"천만에, 김을숙 회장은 거기에 우라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네."
광준은 장회장이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김여사에 관한 소식은 좀 들었는가? 도대체 어떤놈의 짓인것 같은가?"
광준은 장회장이 능청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회장님께선 짐작가는 범인이 꼭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요?"
광준이 입가에 약간 비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건 잘못 짚은것 일세."
광준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오늘은 물러나기로했다.
광준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등 하고 회장실을 나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몇가지 생각이 좀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나가 현실과 학문을 혼동해서 무속에 너무 미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의 핏
속에 무당의 피가 흐른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발상은 범상한 일이 아닌듯 싶었다.
광준이 아파트 앞에 다다랐을때 십사동 앞에 낯익은 자동차 한대가 멎었다. 분홍빛 스텔라
였다. 특이한 색깔이라 얼른 눈에
띄었다. 광준은 어디선가 본듯한 차라고 생각했다.
거기서 한 여자가 내리고 차는 곧장가버렸다,
거기서 내린 여자는 뜻밖에도 곽정자였다. 화사한 하늘색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스커트를 입
고 큼직한 핸드백을 왼쪽 어깨에
메고 있었다. 희디 흰 얼굴빛이 봄날의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참으로 건강하고 풋풋한 아름다움이라고 광준은 생각했다.
"정자씨!"
광준이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앞서서 걸어가던 정자가
깜짝 놀라 뒤돌아셨다.
"어마! 김선생님!"
정자는 함빡 웃음을 담으며 반가워했다.
"어딜 갔다 오는 길입니까?"
"예. 학교에 좀 다녀오는 길이에요."
"학교라니요?"
"공부하러 갔죠."
정자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공부하러?"
광준이 의아해 할수밖에 없었다.
"예.가면서 얘기해요 우리."
정자가 슬그머니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두 사람은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서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제가 학위 논문 준비하고 있는것 몰랐죠."
"정자씨는 이미 석사학위를 끝낸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이상은 학위가 없나요 뭐."
"그럼 피 에이취 디?"
"예."
정자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거의 다 했요. 이번 하기에 제출하려고 해요."
"야아, 곽정자 박사님이라... 그거 괜찮은데요."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엇에 관한것입니까?"
"한국 무속의 근원과 현존 상황에 관한것이에요."
"어쩐지 그 방면에 도통하다 싶더라니..."
광준이 정자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대견스럽고 귀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자는 고개를 들고 광준을 쳐다보며 그냥 웃기만 했다.
조그만 엘리베이터 안이 갑자기 야릇한 기분으로가득 찬 밀페된 공간으로 두 사람에게 느껴
졌다.
광준이 슬그머니 왼손으로 정자의 허리를 감아 끌어안았다.
"아이! 점잖지 못하게, 여긴 엘리베이터예요."
정자가 부끄러워했으나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서버리고 문이 열렸다. 꼬마
두명이 탔다. 정자와 광준은
못된짓 하다 들킨 아이들처럼 겸연쩍어했다.
"아까 그 분흥색 차는 누구 참니까? 어디서 꼭 본듯한 한데..."
광준이 궁금해 하던것을 물어 보았다.
"남궁국장 차예요. 협의회 사무실에 들렀다가 태워다 준다고
하는 바람에... 남궁국장이 이쪽에 볼일이 있어 오는 길이니 같이가자고 하더 군요. 남
궁국장은 서초동 전시관에 간다고 했어요."
정자가 뜻밖에 당황한듯 길게 변명을 늘어 놓았다.
"남자가 무슨 그런 색깔의 차를 타고 다님니까?"
"남궁국장은 좀 그런 별난 데가 있어요. 쉽게 말해 속된 멋을
좋아하거 든요."
"속된 멋이 아니라 유치한 멋이군요. 바람둥이들이나 하는 짓처럼."
광준은 공연히 남궁국장을 비난한다고 생각되었다. 그가 정자를 태우고 다녔기때문에 슬그
머니 화가 난것 같았다.
"질투하시는 거예요?"
정자가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
"질투? 천만에요. 내가 그따위 바람둥이한테 질투를 한단 말입니까? 생각만 해도 치사해
요."
그러나 광준의 그 말투는 질투로 가득 차있었다. 누구를 질투한다는것, 그것은 누구를 사랑
한다는 전제가 없이는 안되는일이다.
두 사람은 대화를 뚝 끊은 채 아파트로 들어왔다.
"어때요? 커피 한 잔 하실 생각 없으세요?"
정자가 물었다, 마치 외출하고 돌아온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말 같았다.
"정자씨가 같이 마셔 준다면?"
광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은 커피잔 두 개를 마주 놓고 앉아 봄날의 오후 한때를
한가하고 다정하게 보냈다.
광준은 장통석 회장을 만난 이야기며 우라늄 광에 관한 이야기를들려 주었다. 그리고 제일
의 용의자는 장통석이요, 그다음은 남궁현, 조민희, 주인성의 순서 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
다.
정자는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 내용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자기 의견도 그런것 같다
고 말하고는 덧붙였다.
"김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남궁현 국장님도 동기가 성립되는군요. 그렇다면 남궁국장과
조민희가,회장님께 무엇인가를
속이고 있다는 가정을 할수 있습니다.가령 협의회와 민예품 공장의 공금을 축냈다든가..."
여기까지 말한 정자는 갑자기 눈을 깜박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누굴 시켜서 회계 감
사를 해보면 어때요. 남궁국장이 필경 거액의 공금을 탈냈을 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것이
탄로날까 두려워 회장님을 해칠수도 있는 일 아녜요?"
그럴수도 있다. 광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광준은 정자의 말대로 누구를 시켜 경리
장부를 조사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장인 김을숙 여사를 없애야 할 일이 그 사람들한테 있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얽힌 치정. 거기다가 금전관계가 개입되었다면 더욱 필연적인 이유가
될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장통석이 만약 범인이 아니라면 그 다음은 남궁현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협의회와 민예품 공장의 장부를 정밀하게 검사해 보면 그들이 한 짓이 나올지도 모
른다.
언젠가 광준이 협의회 사무실에 들렀을때 조민희와 남궁현이
전표며 장부를 늘어 놓고 맞추고 있다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본기억이 났다. 그때는 무심코
넘겼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무슨 협잡을 하고 있었던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광준은 아침 일찍 일어 나 세수를 하는둥마는둥 하고
한규빈한테로 달려갔다.
거상그룹의 지하 다방에서 한규빈을 불러냈다. 그리고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이봐 한군. 회계사나 세무사 한 사람 믿을만한 사람 있어?"
"짜아식.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유는 나중에 말할게. 경리 감사를 좀 할 일이 있단 말이야."
"좌우간 차나 한 잔 마시고 얘기하지."
한규빈이 커피를 시켰다. 그리고 자기 동창생 중에 회계사 사무실을 열고 있는 친구를 알선
해 주겠다고 했다.
다음날 광준은 한규빈이 소개해 준 박문경 이라는 회계사와 함께 우선 협의회 사무실에 들
이닥쳤다.
남궁현 국장과 조민희가 영문도 모르고 반겨주었다.
"남궁국장님 인사 나누세요. 회계사인 박선생입니다."
광준은 응접소파에 앉기전 인사부터 시켰다. 남궁국장은
다소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시키는 짓이라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남궁국장은 전부터 나보고 누님 대신에 결재를 봐달라고 했는데, 내가 그런 자격이 있어야
지요. 그래서 박선생께 부탁해서
돌아가는 사정을 좀 알아보고 난 뒤 내 마음을 정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광준이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예, 그러셨군요. 잘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저와 미스조가 박선생께 그간의 경위를 브리핑
해 드리겠습니다."
남궁현은 뜻밖이란듯 잡시 놀라는 표정이었으나 곧 사태를
집작한듯 얼버무리려 했다.
"브리핑만 해 드릴것이 아니라 아예 모든 장부며 전표를 다보여드리고 진단을 받는것이 좋
을듯합니다. 박선생, 그래야겠죠?"
광준이 응원을 청하자 박문경이 받아 넘겼다.
"물론이죠. 제가 처음부터 다 맞춰 보겠습니다."
그때야 남궁현과 조민희는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한 일주일 걸릴 겁니다. 김선생님 어떻습니까? 민예품 회사
장부도 이번 기회에 훑어보는게 어떨지요?"
박문경은 한수 더 떴다.
"그렇습니까? 박선생께 완전히 맏기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단체에 대한 경리 감사가 시작되었다. 박문경은 자기 회사 직원 두 사람을
더 데리고와서 아침부터 밤까지 장부며 전표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칠. 조여오는 검은 손
아침 일찌 장형사가 아파트로 광준을 찾아왔다. 비도 내리지않는데 구겨져 볼품 없는 비
닐 우산을 소중히 들고, 담지 않아
먼지투성이가 된 구두를 신은 채였다. 후줄그레한 바바리, 꺼칠꺼칠한 살결이 꼭 실업자 행
색이다. 그러나 얼굴 표정만은 항상
명랑하고 농도 잘 걸었다. 추경감과 같이 있을 땐 연방 핀잔을
받으면서도 이런저런 의견을 잘 내놓있었다. 의견 한가지를 냈다가 핀잔을 받을때는 목을
쑥 빼고 콧잔등을 잔뜩 찡그려 보이는 밉지 않은 버릇도 있었다. 대체로 그런 사람일수록
가정에서는 원만한 남편이고 알뜰한 아버지일수가 많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거피 한 잔 얻어 먹으러 왔습니다. 바깥 날씨가 어떻게나 우중충한지 꼭 저녁 굶은 경감님
같단 말야."
장형사는 소파에 앉아 구겨진 은하수 담배갑에서 담배 한개비를 꺼내 물며 능청을 떨었다.
"저녁 굶은 시어미란 말은 들어도 저녁 굶은 경감이란 말은 못들었는데요?"
광준도 인사 대신 빙긋이 웃어 보이며 마주앉았다.
"말마쇼. 우리 추경감님이 그렇게 덩치는 작지만 어떻게 많이
먹어대는지 놀랄 지경이랍니다.수사 일로 바삐 뛰어다니다 저녁이라도 굶을라치면. 아이구
말도 마슈. 곧 숨넘어가는 사람처럼 엄살을 부린답니다."
"허허허. 경감님이 그런 면도 있다구요?"
"어쨌건, 미스곽 어디 갔나요. 따끈한 커피 한잔이 생각나는
강형사는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정발 커피 냄새라도 맡을듯이
코를 킁킁거렸다.
"정자씨 차한잔 끓여 와요. 나도 한잔 주고요."
광준이 정자의 방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금방 문이 열리고
정자가 생긋 웃는 얼굴로 나왔다. 희고 고운 살결이 약간 부은것처럼 보였다. 오늘따라 그
의 커다란 엉덩이가 더 육감적이다
못해 육중하게 보이는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따끈따끈한 커피를 대접할 테니까요."
정자가 춤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강형사님처럼 바쁜 분이 여길 키피나 마시러 들르진 않았을테고, 무슨 일이 있습니까"?"
광준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김을숙 여사의 일때문에 이곳에 잠깐 들렀습니다."
"누님의 일때문이라구요?"
"예. 원래수사 원칙에 막히면 현장에 다시가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혀서 온것은
아닙니다."
"아니, 경찰에서는 처음부터 내 말을 믿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그러면 누님이 살해됐다는것
을 이제 인정하는 겁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김을숙 여사가 한달이가깝도록
나타나지 않는것은 사실 아닙니까? 어제 신문에는 외국에 여행
중이라고 문화 단신란에 나있더군요. 아마 민속 보존 협의회에
자꾸 문의가 오니까 그렇게 말한 모양이죠?"
"그러면 여행 끝나고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면 될일이지 무슨
수삼니까?"
광준이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그걸 몰랐군요."
강형사가 시침을 뚝 떼고 받아 넘겼다.
그때 곽정자가 커피 석잔을 들고 나왔다.
"고맙습니다."
강형사가 먼저 커피 잔을 들면서 정중히 인사를 했다.
"김을숙 여사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이 아파트의 집입니다. 피살되었건, 실종되었건,
혹은 스스로 자취를 감췄건 간에
그때의 상황을 다시한번 점검해 보려는것입니다."
"그래 뭘 좀 알아냈습니까?"
광준도 빈정거리던 태도를 바꾸고 말했다.
"당시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점검해 보았습니다만. 별로 이렇다할 단서가 없었습니다. 김선
생님이 신고를 하자마자 이 아파트 중 십사동을 봉쇄하고 출입자를 체크했습니다만 이렇다
할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당시 이사를 하고 있던 집이 있었습니다만 그 집도 이상한 점
은 전혀 없었습니다. 입구를 봉쇄하고 아파트 내의 전가구를 점검했는데, 김을숙씨나 범인
같은 사람은 전혀 찾아낼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집의 거실이며 방을 면밀히 조사했으
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김을숙씨와
곽정자씨의 지문 이외는 다른 사람의 지문을 찾아낼수가 없었습니다. 현관문에선 김선생님
의 지문을 찾았습니다만..."
"바보가 아닌 담에야 범인이 자기 지문을 남겨 놓을 턱이 있습
니까?"
"그럴수도 있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지문이 없을수도 있지않습니까?"
"여전히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하하하. 뭐 꼭 그렇다는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여러가지 가능성을 놓고 조사를
하니깐요."
"그래서 뭘 좀 알아낸것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광준이 더 얘기해봤자 소용없다는듯 마치 결론이라도 빨리
내놓고가라는 투로 말했다.
"뭐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는 정도입니다. 그날 아파트의 내부만 조사한것이 아니라 외무
도 철저히 조사를 했지요. 예를 들면 그날 이 아파트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라든가. 주변에
있었던
행상이라든가, 주차해 있던 자동차라든가... 참 자동차 얘기가
났으나 말인데 그날 십이동 앞에 있던 분흥색의 스텔라 한대가
서 있었다고 하는 목격자가 있는데, 그 차를 혹시 본일이 없습
니까?"
"분흥색 스텔라 차라구요?"
광준이 눈이 둥그래섰다. 자기도 어디선가 본 차라고 생각되었다. 그날 공항에서 달려와 현
관으로 들어가려다 본것 같은 기억이 났다. 아니 딴데서 본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알고 계십니까?"
장형사가 잔뜩 긴장된 얼굴로 광준과 정자릍 번갈아보았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혹시 기억나면 연락해 드리지요."
"예. 그러십시오."
강형사는 실망한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건 그렇고 탈무골서는 무얼 좀 캐냈습니까?"
광준이 물었다.
"아직 이렇다할 확증은 같은게 없습니다. 장통석 회장과 무슨
관계가 있긴 있는것 같은데..."
"백순조 무당은 만나 보셨습니까?"
"무당을요? 하하하. 형사가 무당한테 점치러 갑니까?"
강형사는 또다시 오리발을 내밀었다. 광준은 더 이상 이야기
해보았자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커피 값이나 내시고 나가 볼까요. 난 시내에 볼일이
좁 있어서요."
광준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강형사는 할수 없다는듯 일어서서 현관으로 나갔다.
그리고 구겨진 비닐 우산을 소중히 챙겨 들었다.
강형사와 헤어진 광준은 종로에 있는 박문경의 회계사 사무실로 갔다. 오늘까지 협의회의
경리 감사에 관한 중간 보고를 듣게 돼 있기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엉망이었습니다."
박문경은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와 첫마디를 떼 놓았다.
"엉망이라구요? 하기야 아마추어들이 사업을 맡아 왔으니까
장부 정리가 제대로 안 된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마추어라니요? 당치 않은 얘깁니다.
그들은 회계나 경리의 명수들이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엉망이란 말씀입니까?"
"어떻게나 교묘하게 장부 처리들을 해 놨는지 맞추는 데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예?"
광준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교묘한 방법으로 엄청난 돈을 빼돌렸더군요. 전체 외형의 이십삼프로를 빼돌려 버렸더군
요."
박문경은 담배를 피워 물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빼낸 총 액수는 일억 팔천여만 원에 이르렀다. 빼내는 방법은
여러가지를 썼는데, 주로 쓰인 수법은 주인성이 관할하는 민예품 제작회사에서 그 이익금을
협의회에 기부하는 형식을 취했다. 기부받은 항목은 면세되는것을 기화로 증발시켜 버리는
수법을 썼다. 뿐아니라 타기관에서 민속 보존 사업비로 들어온 돈도 거의 증발시키는 방법
을 썼다. 이런것은 자체 장부 감사만으로는 적발이 되지 않는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박문경
은 쌍방의
장부를 조회하는 방식으로 이것을 찾아냈다고 한다. 주인성 전무가 넘긴것으로 된 기금은
쌍방이 짜지 않으면 성립될수 없는
성질의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제야 짐작가는것이 있군요. 조민희를 가운데 두고 주인성과 남궁현이 서로 이용하고 있
었군요. 그래서 남궁현은 조민희를 주인성한테 가로채임을 당하고도 큰소리를 치지 못했군
요.
그야말로 짐승 같은 사람들입니다."
광준이 주먹을 쥐었다 졌다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그 세 사람이 야합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박문경이 두 번 세 번 그 대목을 강조했다.
"그러면 그러한 부정행위를 회장은 모르고 있었단 말입니까?"
"김을숙 회장님 말씀입니까?"
"예."
"그들은 김회장의 허가를 받아서 한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회장이 결재한 전표나 서류는 하
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예
기장에서 누락시킨 부분이 대부분이니까, 보고를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구두로 보고하고
전표나 장부에서 자료를 없애버렸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김회장님이 그런 치사한 일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혹시 그들이 저지른 일을 김회장이 눈
치를 채지나 않았을까요?"
"그건 본인밖에는 모르는 일이죠."
박문경은 설명하기 위해 꺼냈던 자료를 다시 챙겨 봉투에 넣기 시작했다.
"이것을 법률적으로 처리하자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광준은 그냥 둘수 없다고 생각뵀다.
"그건 엄연한 위법사항입니다. 우선 탈세가 문제가 됩니다.
그 다음은 업무상 배임. 횡령 같은것이 되겠지요. 고발만 한다면 당장 구속될수 있다고 생
각합니다."
광준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들이 구속되도록 고발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것을 생각했
다.만약 고 발을 한다면 어떻게될까? 광준은 흔히 신문 사회면에 시커먼 활자로 크게 보도
되는기사를 머리에 떠올렸다.
"민속 보존 협의회 거액 부정"
이런 제목이 얼른 머리에 들어왔다. 그렇게 되면 민속 보존
협의회 뿐아니라 그 김회장인 김을숙 누나마저 크게 망신을 당하는 셈이다.
"박선생님, 어떻게 하는게 좋겠습니까? 고발을 해야 합니까,
그냥 둬야 합니까?"
광준이 물었다.
"제 생각으로는 고발을 하는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박문경은 단호하고 명확하게 말했다. 광준은 이때 얼른 정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 경
리 감사를 해보자는 의견을 낸것이 정자니까 정자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는것이 좋으리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밤, 저녁을 먹고 난 광준은 곽정자를 거실로 불러 소파에
마주 앉았다. 분홍 체크 무늬의 화사한 블라우스 위로 보름달이
뜨듯, 받쳐져 있는 정자의 얼굴은가히 고혹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발그레하게 홍조 띤 뺨이
며 새까맣고 커다란 눈이 차마 바로볼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오늘밤 따라 정자가 꼭 이
당 김은호의 미인도에나 나오는 여인처럼 황홀해 보였다.
"아이, 뭘 그렇게 쳐다보세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정자는 광준의 불꽂 튀는듯한 시선을 의식하고 수줍음을 타는것 같았다.
"거피 한잔 끓여 올까요?"
정자가 이쪽 대답을 듣지도 않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광준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오리궁둥이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풍부하고 육감적인 히프가 광준의 두 눈동자에 꽉 차왔다.
광준이 멍하고 있는 사이 정자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와
얌전히 앉았다.
광준이 낯에 박문경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대강 이야기했다. 곽정자가 짐작했던 대로
엄청난 금액을 빼돌렸다는 이야기를 특별히 강조해서 일러 주었다. 그리고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요. 고발을 해야 할지 그냥 둬야 할차..."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회장님이 계셨더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을것입니다. 우리 사
회에는 그런 일이 이곳저곳에서
종종 일어나지만, 지성인들이 한다는 문화 사업 단체에서까지
그런 일이 있다니요. 말도 안 돼요."
곽정자는 의외로 강경하게 나왔다.
"그런 사람은 법에 호소해서 혼을 내야 합니다. 세상에... 우리 회장님이 자기들을 얼마
나 아쪄주었는데, 그런 배은망덕한짓을 했단 말입니까?"
정자는 분을 삭이지 못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그러나만약 그들을 고발해서수사가 시작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민속 보존 협의회가 쑥
밭이 되는것은 물론이요. 김을숙 회장님은 죽은 뒤에도 크게 망신을 당하는 꼴이 되지 않습
니까?"
광준이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것은 정자가 강경하게 나왔기때문에 더욱 그러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선생님. 그들이 김회장님을 해쳤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회장님이 내막을 알게
되면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회장
님을 해치웠는지도 모르잖습니까"?"
"해치워?"
"어머. 제말이 너무 지나쳤군요. 미안합니다."
광준과 정자는 그 일을 결론내지는 못했다. 며칠을 두고 더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날 참으로 이상한 일이 생겼다.
저녁 무렵 한규빈을만나고 돌아온 광준은 소파에 우두커니앉아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정자
의 얼굴에서 더없이 쓸쓸함 같은것을 느꼈다.
"웬일이에요?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나요?"
광준이 부드러운 웃음을 띠며 말을 걸었다.
"이것저것 좀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녁은 어떻게 했어요? 밖에서 잡수셨어요?"
"아뇨. 오늘은 정자씨와 함께 먹겠어요."
광준이 소파에 마주 앉았다.
"어쩜! 이를 어떻게 해. 아직 저녁을 짓지 않았어요."
정자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이다.
"괜잖아요. 기다릴 테니 천천히 지어요."
"그럴게 아니라 우리 오늘 모처럼 외식을 하는게 어때요?"
정자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듯이 말했다. 금세 얼굴에 생기가 돌고 눈이 반짝 빛
났다.
"그럴까요."
광준도 맞장구를 쳤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정자가 깡층창충 뛰듯 즐겁게 자기 방으로 들어가 얇은 세타를 입고 나왔다.
"자, 나가요."
정자는 몹시 즐거운 표정이었다. 매일 바둑이처럼 집만 지키고 있던 주부가 모처럼 남편과
함께 화려한 파티에 나가는것 같은 즐거운 표정이다.
정자는 아파트앞 광장으로 나가자 슬그머니 광준의 오른쪽팔에 팔짱을 끼었다. 마치 연인들
이 자연스럽게 산책을 하는 그런 모습이다.
"김선생님."
정자가 나직하고 물가가 흐르는듯한 정겨운 목소리로 불렀다.
"네, 정자씨."
광준도 그 기분을 이심전심으로 느낀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광준은 흐뭇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한 기분이었다. 누가 좀 보아 주었으면하는 생
각이 들정도였다.
광장은 벌써 땅거미가 진지 오래고 가로등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만들었다.
그때였다.
"악, 조심해요!"
갑자기 정자가 비명을 지르며 광준의 오른팔을 온힘을 다해
잡아당기며 오른쪽으로 나가 쓰러졌다. 광준도 넘어진 정자 위에 옆으로 쓰러졌다, 바로 그
와 동시에 자동차가 부르릉 하고 맹수처럼 소리를 지르며 스쳐 저나갔다.
눈깜빡하는 순간이었다. 자동차는 헤드라이트를 끈채 달려들었다가 그대로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정자가 광준을 갑아당기지 않았다면 틀림 없이 광준은 그 맹수같은 자동차에 치어 버렸을
것이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정자씨! 다치지 않았어요?"
광준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먼저 일어나 정자를 일으켰다.
정자는 왼팔을 감싸쥐고 일어 섰다. 팔꿈치를 다천것 같았다.
"많어 다쳤어요?"
광준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조금 긁힌것 뿐이에요."
"후유."
광준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미친 녀석 아냐."
광준이 자동차가 지나간 곳을 보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자동차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 번호는 보았어요?"
정자가 물었다. 몸을 떨고 있는것 같았다.
"번호 라고요?"
"예."
"어두워서 뭐가 보여야지요. 헤드라이트도 백 라이트도다 끄고 달아났어요."
그렇다. 밤중에 볼을 켜지도 않고 무지막지한 속도로 차가 달린다는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
니다. 더구나 그 차는 광준을 치고
달아나려고 한것이 틀림없지 않은가? 만약 정자가 순간적으로
광준을 잡아당겨 넘어뜨리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그 차에 치여죽었거나 병신이 되었을것이
틀림없었다.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광준은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자기를 죽이려고 한것
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끔찍한 생각에 갑차기 머리털이 쭈뼜 서는것 같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흩렀다.
"큰일날뻔했어요. 정자씨가 아니었다면 정말 일날뻔 했어요. 뒤에서 차가 덤벼드는 걸 어떻
게 알았어요?"
"그게 여자의 육감 아니겠어요. 감자기 등골이 오싹해지고 뒤에서 뭐가 꼭 덤벼드는것 같았
어요. 그때 저기 그림자가..."
정자가 두 사람 앞의 그림자를 가리켰다. 가로등을 등지고 걸었기때문에 두 사람 앞의 그림
자가 앞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뒤에서 차가 달려올때도 그림자가 보인것이 틀림없었다.
"누군가가 고의로 한짓입니다. 우리를 죽일려고 한 짓이 틀림없어요."
"저보다는 김선생님이 위험했어요. 차는 바로 김선생님 뒤에서 덤볐으니까요."
그 말은 틀림없었다.
"누가 날 죽이려고 했을까요?"
"전들 어떻게 알겠어요."
두 사람은 뒤늦게 두려움에 떨면서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조그만 경양식 집으로 숨다시피
들어갔다.
식탁에 앉은 두 사람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친 곳은 어때요?"
정자는 공포의 그림자가가시지 않은 채 아직도 떨고 있는것같았다.
"하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습니까? 내가 그놈들의 정체를
꼭 밝혀 내고야 말 테니까 너무걱정하지 마세요."
광준은 정자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큰소리를 쳤다.
"자, 들어가서 잠이나 푹 자둡시다."
"전 샤워를 좀 하고 자겠어요. 김선생님이 저 샤워하는 동안 거실에 앉아서 지켜 주세요."
정자가 약간 미소를 띠며 엉뚱한 부탁을 했다. 그 말을 하고는 무얼 상상했는지 얼굴을 붉
혀 보였다.
광준은 그날 밤 욕실에서 샤워하는 물소리를 들으며 정자릍
밖에서 지켜주었다.
광준은 처음 이 아파트에 왔을때 실수하여 정자가 샤워중인
욕실 문을 열어젖혔던 모습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다아 솨아하는 물소리는 너무도 선명
하게 정자의 황홀한 나신을 그려 보이는것 같았다.
물에 흠뻑 젖어 치렁치렁해진 검은 머리. 물방울이 싱그럽게
튕기는 사과 같은 풋풋한 두 뺨. 화난것처럼 봉긋한 두 젖무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육중해 보이기까지 하는 오리궁둥이. 그 밑으로 동양화의 선처럼 뻗어
나간 두 다리. 광준은 계속 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물소리를 괴롭게 들어야만 했다.
죽음의 늪에서 위기일발로 목숨을 건진 광준은 정자의 민첩함에 감사하고 있었다. 정자가
아니었다면 자기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것이라 생각하니 아찔했다. 그러고 보면
정자는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또 한편으로는 누가 그런 끔찍한 계획을 했는지 참을수가 없었다. 광준을 없애버림으로써
득을 볼 사람이 누군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광준과 정자가 김을숙을 죽인 범인을 추적하고 있으니까 그살인범이 한 짓이라고 쉽게 짐작
할수 있다. 그렇다면 광준이 꼽고 있는 용의자 중의 하나인 장통석 거상그룹 회장이 꾸민
짓일수도 있다. 다음은 김을숙의 죽음을 예언한 백순조무당, 그다음은 남궁현이나 주인성,
조민희를 들수가 있을것이다.
더구나 남궁현, 주인성과 조민희는 그들의 경리 부정이 들통날까봐 그런 짓을 할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봐야 할것이다.
어행든 그 사건이 있은 후 정자는 갑자기 우울해진것 같았다.
두 번씩이나 죽음의 그림자를 밟은 사건이 충격을 준것 같았다.
그렇게 명랑하고 미소 속에 살던 정자가 방에 처박혀 잘 나오지도 않고, 광준과 말을 나누
는것조차 꺼리는것 같았다.
광준은 정자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더 그 공포 속으로
빠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침내 광준은 주인성, 남궁현, 조인희를 고발하기로
결심했다.
광준은 회계사인 박문경을 시켜 모든 증거를 확보해 검찰과
세무서에 고발하도록 일렀다.
그러한 사실을 추경감한테 알릴까도 생각했으나, 저절로 알게 될것이라고 믿고 알리지는 않
았다. 박문경이 부정 사실을 고발한 다음날 참으로 예상치 못한 엉
뚱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광준이 잠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 정자가 거실에서 소리쳐 광준을 불렀다. 몹시 당황한 목소
리였다.
광준이 후다닥 일어나 불길한 상상을 하면서 거실로 황급히나갔다.
"김선생님, 이것 좀 보셔요, 이럴수가 있습니까?"
정자가 조간 신문을 펼쳐 든 채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광준이 신문을 뺏다시피 가로채서 펼쳐 보았다. 사회면 머릿기사에 시커먼 활자들이 어지럽
게 박혀 있고 그 밑으로 김을숙 회장의 인물 사진이 큼직하게 나 있었다.
"민속 보존 협의회에 억대 부정"
"회장 김을숙은 자취 감춰."
얼른 눈에 들어온것은 이런 제목이었다. 광준은 황급히 기사를 얽어 내려갔다.
문화사업을 한답시고 민속 보존 협의회를 조직 한 김을숙은 그동안여러가지수법으로 억대의
돈을 횡령. 탈세하고 이것이 들통날까봐 한 달째 자취를 감추고 있다. 경찰은 김을숙을 전
국에
지명수배하고 협의회장부를 모두 압수했다. 협의회 경리 책임자인 남궁현과 조민희 및 방계
회사의 주인성 전무 등을 연행 조사중인데, 탈세, 업무상 배임, 횡령 등 혐의로 구속할것이
다.
기사는 대략 이런 줄거리였다. 광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엉터리 기사가 어딨어!"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신문기사가 이렇게 엉터리일수가 있어요?"
정자도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분해헌다.
"이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해야 합니다.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 돼요."
광준이 소리쳤다. 그것은 미국적 발상으로 쉽게 떠오른 생각이다.
"신문사와 싸워서 이길것 같아요? 당한 사람만 억울하지"
정자의 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런 경우 자기의 권리나 명예를 찾겠
다고 신문사를 상대로 싸울 생각
을 하지 않는다. 물론 소송을 하고 싸우면 이 나라도 법치국가인데 안될 리는 없는것이다.
"그러면 이대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다른 신문에 어떻게 났는지 좀 봐야겠어요."
정자가 밖으로 나갔다. 얼마 있다가 두가지의 다른 조간 신문을 사들고 와서 사회면을 들쳤
다. 똑같이 약속이나 한듯 사회면 머릿기사로 다루었다, 그러나 거기서는 회장인 김을숙씨
가
협의회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기사만을 썼다. 김회장이 부정의 장본인이란 말은 없다.
광준은 그나마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망치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민는 사람한테 보복당한듯한 배신감에 차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자 뛰어든것은
카메라를 멘 사진기자와 전에 본적이 있는 임기자라는 사람이
었다. 협의회 사무실에 언젠가 와서 김을숙 회장이 어디갔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던 그 임기
자였다.
"당신들도 도대체 사람이오?"
광준이 이들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임기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따위 거짓말을 쓰다니요."
정자가 신문을 들고 흔들어 보이며 악을 썼다. 그때야 기자들은 사태를 짐작하고 빙긋이 웃
으며 말했다. 얄밉도록 능글능글하다.
"뭐가 잘못 됐습니까? 틀린게 있다면 죄꽁송니다. 바로 써드릴테니 사실대로만 좀 얘기해
주십시오."
임기자는 올라오란 허락도 받지 않고 거실로 올라와서 소파에
앉으며 사진기자를 눈짓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그래 뭐가 잘못 보도된 건지 우선 그것부터 얘기해 봅시다.
현째 김을숙 여사가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건 우리도 모릅니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광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예? 자살을 했단 말입니까?"
임기자가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누님이 뭣때문에 자살을 합니까?"
"그럼 죽었을 지 모른다고 한것은?"
"누가 죽일수도 있는것 아닙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김을숙 여사가 한 달째 행방을 밝히지 않는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건 그랬다.
"그렇다고 이 부정사건을 저지르고 도망쳤다고 쓰면 되는 겁니까?"
광준이 신문을 다시 주웠다 팽개치며 소리를 질렀다.
"어디 그렇게 씌었습니까? 다만협의회의 책임자인 김을숙 여사는 한 달째 자취를 감추었다
는 이야기와, 이 부정사건과 김회상의 행방불명이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경찰에서 조사하고
있다고만 씌어 있지 않습니까? 김회장이 억대의 돈을 젬켜서 도망갔다고는 쓰지 않았지 않
습니까?"
기사를 자세히 보니 그 말이 맞긴 맞다. 그터나 한구절 한구절은 그렇게 돼 있지만 누구든
지 그 기사를 읽으면, 김을숙 회장이 억대의 돈을 챙겨 도망가 버린것으로 지레짐 작할수
있게 되어 있다. 기사의 마력이다. 정자나 광준도 제목이며 기사의 흐름을 읽고는 그렇게
쓴것으로 생각했으니 말이다.
"김을숙 회장은 이 사건과 관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면 김을숙씨가 사
라져야 할 무슨 딴 이유라도 있는것 입니까?"
임기자는 또박또박 물었다. 광준과 정자는 잠깐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잘못 얘기했다가는 또 무슨 기사를 써 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피살당했다고 곧
이곧대로 이야기해봤자 미친놈 취급밖에는 받지 못할것이 뻔하다.
"그런건 남의 사생활입니다."
광준이 피할수 있는 좋은 구실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어물어물해서 기자들을돌려보낸것은 거진 열두시가가까워서
였다. 광준과 정자는 토스트와 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인사동의 협의회 사무실로 나
갔다.
사무실은 벌써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서 몰려든 기자들이 한탕을 치르고 간 뒤이고, 여기저기걸린 거래 관계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부분 돈을 받아가야 할 사람들 같았다.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운전기사 미스터박과 심부름 하는 아이인 봉숙이가 땀을 빼고 있었
다. 올해 여고 일학년인 봉숙은 곽정자를 보자 금방 눈물을 주룩 흘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한테 지불할 돈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제 문을 닫는 겁니까?"
"김을숙 회장은 어디 있어요?"
모두가 한마디씩 했다. 순순히 물러가겠다는 투가 아니다.
"여러분, 좀 조용히 해 주셔요. 여러분이 받을 돈은 회장님이
며칠새 나오셔서 해결할 겁니다."
정자가 거짓말을 해댔다.
"지금 당장 나오라고 하슈."
"어디로 빼 돌렸어?"
말씨가 점점 험막해졌다. 정자는 조금만 기다리면 차근차근
해결해 주겠다고 여러번 다짐을 했다. 그러나 쉽게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사람은
한두시간 기다리다 돌아갔지만,
두어 명은 끝까지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뿐 아니라 눈에 독기까지 머금고 대들었
다.
"김을숙 이년 내놔라. 그년이 상판대기 하나는 멀쩡하게 생겼나 싶더니 끝내는 꼴값 하는구
나! 빨리 을숙이년 내놔! 그돈 못받으면 망한다구 망해..."
마흔은 됨직한 아주머니 한 분이 얼굴을 붉히고 삿대질을 하면서 악을 썼다.
민역품 공장에 매듭짓는 실을 대준 상인이었다. 정자도 자주만나 안연이 있는 여자나. 평소
에 실을 납품할때는 "김회장님,우리 회장님" 하면서 김을숙 여사 앞에서 죽는 시늉을 하던
여자였다. 정자만 보면 점심 사줄 테니 나가자, 화장품 한 세트 선물하겠다는 등 공인사를
하면서 다니던 여자였다.
그 여자가 이렇게 태도가 돌변한 데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광준과 정자가 그들에게 시달리며 달래며 거의 하루를 보냈다. 점심도 굶은 채였다. 해가뉘
엿해서야 그들은 돌아갔다. 정자와 광준은 비로소 시장기를 느끼고 옆에 있는 동해루에서
자장면을 시켜왔다. 막 젓가락을 들려는데 이번에 또 우루루 여러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러
나 그들은 빗장이와는 전혀 태도가 달랐다. 늙수그레한 남자 이명과 여자 세명, 그리고 어
린 소년 세명 이었다.
그들은 멈칫멈칫하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저..." "여기가 김회장님 사무실입니까?"
늙수그레한 남자가 공손히 물었다.
"그런데요. 어디서 오셨죠?"
봉숙이 나서서 물었다.
"맞긴 맞는구먼요. 그런데 우린 아침 텔레비를 보다가 깜짝 놀라 평택서 달려왔습죠.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우리 김회장님이 도망을 가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사나이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나왔다. 광준은 젓가락을 놓고
물끄러미 그들을 쳐다봤다.
"예. 정말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우리 김회장님이 돈을 떼먹고 도방가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어느 못된 연놈이 그따위
거짓말을 했습니까?"
곁에 있던 여자도 거들었다.
"어디서 오셨는지 앉아서 차근차근 말씀하시지요."
그들은 소파며 사무용 의자에 여기저기 앉았다.
그들은 평택에 있는 음성 나환자 마을에서 왔다고 했다. 나병은 이미 다 나았지만 세상 사
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별종 인간으로 보기때문에 따로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어렵게 살아왔
다고한다.
이가난한 나환자 마을에 몇년전부터 구세주가 나타났다.
그가 바로 김을숙 여사라고 한다.
아무도 몰래 한 달에 한 번씩 이 마을을 다녀 갔다고 한다. 쌀을 사다 주기도 하고 돈을 갖
다 주기도 하고 때로는 병든 사람을 자기가족처럼 돌봐주기도 했다는것이다.
김을숙 회장의 그런 은밀한 행동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정자씨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광준이 물었다. 정자도 감동한듯 멍하니 앉았다가 고개를 끄덕 거렸다.
"그렇게 훌륭한 우리 회장님이 돈을 떼먹고 도망을가다니요.
말도 안되는 얘깁니다."
그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것 같지는 않았다.
광준은 심한 혼란을 일으켰다. 도대체 머리가 정리되지 않는것이다.
김을숙이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된 여자일까?
지금까지 그가 캐낸 김을숙 누나의 행적으로 보아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않는 면인것이다. 마치 두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을 보는것 같았다.
김을숙의 노출된 면은 지성적이고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여류명사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
경과 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진면목은 이와 반대였다.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이기적인 위선자에 불과했다. 이
것이 광준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위선자가 남몰래 불행한 사람을 돕고 있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광준은 그것이 한 여인의 허영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광준은 그들을 안심시켜 보내고는 정자와 함께 밤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 동안 광준과 정자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착잡한 심정이었다.
이튿날 광준은 시경으로 추경감을 만나러 갔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나 해서였다.
추경감은 전날과 다름없이 함박웃음으로 광준을 맞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좀만날까 했는데 마침 잘 오셨어요."
추경감의 얼굴은 오늘따라 더욱 볼품없어 보였다. 주름투성
이에 세수를 며칠씩이나 하지 않은 사람처럼 꾀죄죄한 얼굴이었다. 연신 담배 연기만을 뿜
어대고 있었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광준은 권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전에 곽정자씨한테서 전화가 왔더군요. 큰일날뻔 했습니다. 하마터면 뺑소니차에 귀
신도 모르게 죽을뻔하지 않았습니까?"
추경감은 입가에 웃음을 홀리면서 말했다. 그러나 눈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의 고운 속마
음이 그대로 나타났다.
"정자씨가 그런 전활 했습니까?"
광준은 내심 정자를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김선생님을 잘 보호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
다."
"그랬었군요."
광준 갑자기 콧등이 찡해 오는것을 느꼈다. 정자가 진심으로 자기를 아껴준다는것을 가슴으
로 느낄수 있었다.
"그래 누가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광준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놈을 안다면 당장 살인미수로 쇠고랑을 채우겠습니다만..."
"뭣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한것 같습니까?"
"글쎄 그것도 명확하게 알수가 없군요. 그러나 가정은 할수가 있습니다. 첫째, 김을숙 여사
가 김선생의 말대로 피살된것이라면, 그것을 캐지 못하게 하려고 한 짓이란 생각을 할수가
있습니다."
"그럼 이제야 경감님은 누님의 피살을 인정하는 겁니까?"
"아, 꼭 그렇다는것은 아닙니다. 그럴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둘째는 김선생 집안과 개인적인 원한이있는 경우일것입니다. 세번
째는 김선생이 있음으로 해서 자기의 일을 방해 받는다고 생각한 사람의 짓일지 모릅니다.
참, 남궁현과 주인성을 고발했더군요."
추경감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한것이 아니고 공인 회계사가 한 일입니다."
"어쨌건 잘 하신 일입니다. 우리도 은밀히 그점을 수사하고있었습니다. 남궁현이란 사람이
분수에 넘치게 돈을 쓰고 다닌 흔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수정궁에서 상습도박
꾼들과 어울려 돈을 쓰고 있었거든요. 강형사가 그곳을 자꾸 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거야 재판이 끝나봐야 알겠지만 아마 벌금에다 꽤 살아야
나올 걸요. 참 그 여자 경리는 불구속으로 조사한다고 하더군요. 조민희 말입니다. 주범도
아니고 그냥 두 남자 틈에 끼여 어쩔수 없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하더군요."
"조민희는 풀려난단 말이죠?"
광준이 되물었다. 추경감은 그저 고개만 끄떡끄떡 했다.
"장통석 회장의 일은 좀 진전이 있습니까?"
광준이 추경감의 눈치를 봐가며 슬그머니 물었다.
"글쎄 그건 경제반으로 넘겼기때문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광준은 추경감이 또 오리발을 내민다고 생각했다.
"김을숙 회장이 피살됐다고 발표하는게 어떻습니까?"
슬그머니 화가 난 광준은 엉뚱한것을 들이댔다.
"피살됐다고 발표를 해요?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요. 그러다가
나중에 나여기있소 하고 불쑥 나타나면 우리 경찰 체면은 뭐가
됩니까?"
추경감은 여전히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경감님은 참으로 고집 세고 딱한 분입니다. 제 말을 그렇게도
믿지 않다니요. 그건 맘대로 해석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신문들이 마치 김을숙 회장이 무
슨 못된 짓을 하고 도망친것처럼 써대고 있으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나도 신문기사를 유심히 읽었는데 김회장이 똑 떨어지게 어떤 짓을 햇다고는 쓰지 않았더
군요."
광준은 그 문제는 추경감과 이야기 해봤자 별 소득이 없다는것을 알았다. 이것저것 해서 슬
그머니 화만 났다.
"경찰이나 기자나 모두 한통속이군요. 좋습니다. 범인은 꼭 내손으로 잡고 말겠어요. 안녕
히 계십시오."
광준은 횡하니 시경을 나와버렸다. 울적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정자는 그 사건이 있은 후로 사람이 좀 달라진것같이 광준이
느꼈다. 말이 적어지고 침울해졌다.
하루종일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기만 했다. 무언가 심각한 문제에 부딪혀 고민하는 사람처
럼 보였다.
"정자씨 밖에 좀 나와봐요. 햇볕이 따뜻합니다."
광준이 정자 방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좀 기분전환을 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했기때문이
다.
정자가 자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부스스한 얼굴로 나왔다.
"이렇게 화사하게 갠날 왜 방에만 박혀 있습니까?"
"저어... 논문 쓰던 걸 끝내려고씨름하고 있었어요."
정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나온 사람같지는 않았다.
논문이란 박사학위를 받겠다던 그 무속 관계 논문을 말하는것이다.
"요즘 정자씨가 좀 달라진것 같아요.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 말에 정자가 약간 동요를 일으키는것 같았다.
"달라지다뇨? 전 언제나 곽정자 그대로예요."
정자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도 전처럼
활짝 핀 웃음이 아니라고 광준은 생각했다.
탈무골에 있는 정용세로부터 편지가 왔다. 탈무골을 떠나 올때 광준이 부탁한 일 몇가지에
대해 회답을 해온것이다.
백순조 무당은 여전히 땅을 사들이는 일을 그대로 계속한다는
말이 씌어 있었다. 형인 근세의 사안에 대해서는 경찰서에서 재조사를 하고 있는것 같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것보다는 광준이 더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것에 대한 실마리를 써보냈다.
광준 일가가 이십여년전 탈무골을 쫓켜나던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다고 씌어 있었다. 그 내
용은 김칠병 노인이 알고 있는것 같다는 이야기만 씌어 있었다.
광준이 김칠병 노인을 직접만나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정용세의 생각으로는
그 일과 백순조 무당이 관계가
있는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편지를 읽고 난 광준은 부쩍 안달이 났다. 누님의 피살과 이십여년전 그들이 마을을 쫓겨났
던 일이 꼭 연관이 있는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광준은 다시 탈무골로 갈 결심을 해다.
정자를 혼자 놔두고 갈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자씨 바람이다 쐴겸 탈무골에 좀 다녀올 생각 없습니까?"
광준이 조심스럽게 넌지시 물었다.
"저 혼자서요?"
정자는 뜻밖이란 표정이다.
"아뇨. 혼자라니요. 저하고 같이가시지 않으렵니까? 혼자 서 울에 남아 있게 하기는 너무
미안하고 ..."
"그러니까 김선생님이 탈무골가실 일이 있다 이거군요. 혼자다녀오십시오. 나야 뭐 여기서
죽든 살든 상관 있어요?"
정자가 뾰루퉁해졌다.
"그러니까 같이가자는것 아닙니까? 벌써 진달래가 질때가 됐어요."
정자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파릇파릇하던 수양버들가지가 이젠 다 큰 처녀의 치렁치렁
한 머릿단처럼 무성하다.
늦봄이 삭막한 아파트 단지를 막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 내일 아침 일찍 떠납시다. 그래야 중간에 자지 않고 탈무골까지 바로 갈수가 있을 테
니깐요."
광준은 아무말도 않는 정자가 동의한것으로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정자가 밥을 지어 놓았다. 두사람은 아침 일곱 시경에 아파트를
나섰다.
현관에서 뜻밖에도 서성거리고 있는 장형사를만났다.
"아니 강형사님. 새벽부터 웬일이십니까?"
"아, 예, 두 분이 어딜가시려고요?"
강형사는 멋적은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탈무골에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왜 또 미행이라도 하시겠습니까?"
광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미행을 꼭 했으면 좋겠는데... 알수 있습니까? 또 자동차가
어디서 덮칠지..."
강형사의 말은 농담이 아닌것 같았다.
"사실 이 아파트에서 알아봐야 할 일도 아직 남아 있지만, 그보다 김선생을 덮친 그 정체불
명의 차에 대해 좀 알아보려고 온것 입니다."
"그땐 밤이었고, 더구나 차가 불을 끄고 순식 간에 지나갔기때문에 차넘버나 색깔, 차종 같
은것은 전혀 알수가 없었어요. 다만 승용차라는것만 느낄수 있었어요."
광준이 설명했다.
"그래서 혹시 그날 밤 목격자가 이 아파트 근처에 없나 해서
수소문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목격자가 있었습니까?"
"웬걸요, 아무도 그런 차를 본 사람이 없던 걸요."
강형사가 히죽이 웃으며 말했다.
광준은 참으로 바보 같은 행사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설프게 여기저기 묻고 다닌다
고 될 일 같지가 않았다.
"어쳤든 그건 살인미수 사건이니까 경찰에서 알아서 범인을
잡아 주십시오. 그럼수고 하십시오."
광준은 정자의 등을 밀고 큰길로 나와 버렸다.
"정자씨는 왜 쓸데없이 그 일을 추경감한테 얘기해가지고 멍청한 강형사만 고생시킵니까?"
광준이 고속버스터미널로가는 택시를 타고 정자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때까지정자는 침울
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요. 경찰에 알려 두는게 좋을것 같았어요. 그 범인이 우리
회장님을 죽인 범인과 동일 인물일수도 있는 일 아녜요?"
"하지만 그 엉터리 같은 추경감이나 강형사한테 알려봤자 무슨 뾰족한수가 생길것 같습니
까?"
"어쨌든 김선생님 신변에 또다시 위험한 일이 생기는걸 전 더보고 있을수가 없단 말이에
요."
광준은 정자의 깊은 사려를 내심 고 맙게 생각했다.
그들은 해가 뉘엿해질 무렵 대곡읍에 닿았다. 전번에 왔을때
하룻밤 묵고 간 여관이 그대로 낯익고 반갑게 보였다.
"김선생님, 전 여기서 기다릴 테니 혼자 탈무골에 갔다 오실수 없어요?"
여관을 바라보고 었던 정자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그게 무슨 소립니까? 혼자 여기 남다니"
광준이 놀라서 물었다.
"어쩐지 탈무골은 두 번 다시가고 싶지 않아요. 그날 밤 일만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져요.
전 저 여관에서 하룻밤 쉬고 있을테니 내일 돌아오심 안돼요?"
정자는 애원하는 목소리다. 광준을 올려다보고 있는 큼직한
눈이 공포에 젖어 있는것같이 보였다.
광준은 잠깐 망설였다. 그렇다. 꼭 거기까지 정자를 데리고
갈 이유는 없다. 오히려 탈무골에서는 정자가 없는 편이 편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혼자 밤을 보낼수 있겠어요?"
광준이 진심으로 걱정했다.
"문제 없어요. 안될것 같으면 멋진 남자나 한 사람 꼬셔내면
될것 아녜요?"
광준의 말에 정자는 다소 여유를가진것 같았다. 모처럼만에
들어보는 농담이었다.
"하건 그렇군요. 정자씨만한 미인이라면 놈팽이들이 줄을 설테니깐요. 하하하."
광준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여관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이소. 또 오실 줄 알았심더."
프런트의 그 능글능글하고 짓궂은 보이 녀석이 떡 벌어진 앞니 하나를 내보이며 히죽히죽
웃었다.
"이층 편리한 곳에 방 하나만 주십시오."
광준은 녀석의 표정을 못 본 척하고 말했다.
"예. 하나면 되지요. 아주 경치 좋고 아늑한 방으로 드리겠임더. 따라오이소."
녀석은 전번에 봤을때 방 두개를 쓴것을 기억하고 있는것이 틀림없었다. 녀석은 광준의가방
을 받아 들고 껑층껑층 이층으로 앞장서 서 올라갔다.
"정자씨, 그러면 내가 다녀올때까지 꼼짝 말고 이 방안에만
계셔야 합니다. 저녁이나 아침밥을 배달해다 먹고요."
광준이 적정스럽게 정자를내려다보며 말했다.
"적성 마세요. 김선생님이나 조심해서 다녀오셔요."
정자는 생긋 읏어 보였다.
광준은 꺼림칙한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 정자를 남겨 두고 택시를 전세내어 탈무골로 향해
다.
광준이 탈무골에 도착한것은 완전히 해가 떨어진 뒤였다. 늦봄이라고는 하나 해가 진 뒤에
는 날씨가 아직도 으스스했다.
정용세는 광준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두 사람운 소주 두어병을 놓고 저녁을 먹었다. 겨우
내 먹던 묵은 김치며, 무말랭이
마른 고사리 등이 밥상에을랐다. 특히 구수한 된장은 오랜만에
먹어 보는 고향맛이었다.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부랴부랴 내려왔는데, 뭐 좀 알아낸게 있습니까?"
광준이 대강 배를 채운 뒤 말을 꺼냈다.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하나. 저어, 김형이 올라간 뒤 부탁한것을 슬금슬금 알아봤지요. 당님
은 여전히 기세가 펄펄하더군요.
더구나 그 밭뙈기 등을 사들이는 일은 계속하고 있어요. 전번에
동네 뒤에 있는 박씨네 선산도 사들였거든요."
"그런 산은 시세가 얼마나 갑니까?"
"돈이야뭐 몇 푼 되겠습니까? 한 평에 백원 정도밖엔 안갑니다."
"예."
"백순조 무당은 누가 뒤에서 돈을 내주고 있는것이 틀림없는것 같아요."
"형님인 근세씨 사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경찰서에서 사복형사들이 여러날 현장이며 이곳저곳을 살피더군요. 나한테는 이런저런것을
물어 보더군요."
"대체로 어떤것을 물어 보셨나요?"
광준이 소줏잔을 권하며 물었다.
"주로 당시의 상황을 물어 보더군요. 누구하고 원수진 일이 있느냐, 그날 아침에 아침밥을
먹고 나갔느냐, 부부 싸움은 한 일이 없느냐, 형님이 그곳 얼음판을 건너다니는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 누구냐, 그날 얼음판을 건너다니는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누구냐, 그날 얼음 두께가 얼
마나 됐느냐. 뭐 그런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타살의 가능성을 두고 재수사를 한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래 어떻게 결론이 났다고 합니까?"
"그건 아직 알수가 없어요. 한 형사는 헛수고만 한다고 투덜거리더군요. 그러나 내가 잘 아
는 한 간부는 타살의 가능성이 짙다고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무당의 예언이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런 그렇고 , 제 일에 대해서 좀 알아보셨습니까?"
광준이 용세의 입을 쳐다봤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김선생의 부모님께서는 이 동네서 쫓겨 나간것이 틀림없다고 하더군
요."
"그건 누구의 얘깁니까?"
"그때 상황을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무당 백순조와 김칠병
노인 내외분입니다. 전 김칠병 어른한테서 조금 들었는데요."
"그래 쫓겨난 이유는 뭐라고 합니까?"
"그게 말입니다."
용세는 참으로 민망하다는듯 말을 얼른 꺼내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지나간 일 아닙니까. 어떤 얘기를 해도 지금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다만 부
모에 관한 일이니까 내력이나마 알고자 하는것뿐입니다."
광준은 장황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 일이 혹시 누나 김을숙의 피살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
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떨칠수 없다는 이야기도 함께 했다.
"글쎄 말입니다. 김노인이 김선생을만나면 자세히 이야기 할것도 같았습니다. 나한테는 그
냥 추접한 남녀관계때문이 라고만 하더군요."
용세가 결심한듯 말했다.
"추잡한 남녀관계라고요?"
광준은 참으로 뜻밖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용을 더욱 더 알고 싶어
졌다.
"지금 당장 김칠병 노인집에 좀가봅시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겠습니다."
광준이 성실 급하게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아, 앉아요. 그렇게 서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김영감은 초저녁 잠이 많아 벌써 잠들었
을것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 찾아뵈도 늦지는 않습니다."
광준은 정용세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두 사람은 밤이 늦도록 소주 몇 병을 더 갖다 마시고는 사랑방에서 같이 잠이 들었다.
광준은 정자의 일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것은 아니지만. 내일오후면 만날 테니, 일단은 잊어
버리기로 하고 잡아 들었다.
얼마를 잤을까. 밖의 소란한 소리를 꿈결에 들으며 광준이 눈을 떡다.
"불이야! "
멀리서 여인의 찢어지는듯한 비명이 들리는것 같았다.
"이봐요. 김선생님 빨리 일어나요."
정용세가 광준을 흔들어 깨읒다. 광준은 벌떡 일어나 잠옷바람으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왼쪽 동네 복판에서 불길이 대낯처럼 솟고 있었다.
"아니 저건 저건..."
정용세가 놀라 말을 제대로 잇지를 못했다.
"저것은 이장님 집이야!"
"이장님이라고요"? 김칠병 노인 집이란 말입니까?"
"그래요. 빨리가봅시다."
광준과 정용세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불난 곳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이곳 저곳에서 자다가 뛰어나온 동네 사람들이 놀라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물어야 물어야 하고 소리만 지를뿐 어떻게 손을 쓸수가 없었다.
김칠병 노인의 집은 본채와 사랑채로 갈라져 있는데 불길에
휩싸인 곳은 본채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김칠병 노인은 런닝 셔츠와 편리 바람으로 풀적풀적 뛰며 안채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려고
몸부림을 쳤고 동네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정용세와 광준은 직감적으로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것을 알고
불길 앞으로 접근해 갔다.
그러나 불길이 워낙 기세에 집 속에서 사람이 타죽고 있어도
들어갈수가 없었다.
동네 몇몇 사람이 물을 퍼가지고 와서 뿌렸으나 그야말로 바위에 계란 치기밖에 되지 못했
다.
동네 사람들은 그냥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저 속에 경식이 에미가 있단 말입니다. 경식아! 경식아!"
김칠병 노인이 여전히 입에 제거품을 물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연옥이 있다면 이와 같은 처절한 모습일것이라고 광준은 생각했다,
광준도 공연히 불길 주위를 이곳저곳 뛰어다녔을 뿐 아무런일도 할수가 없었다, 이가 딱딱
마주치도록 떨리기만 했다.
이 처절한 연옥 같은 광경은 거의 두 시간이나 지나서야 수그러 들었다. 수그러 든게 아니
라 탈것은 다 태운 뒤에야 시커먼
재기둥을 드러냈다.
이 소동 틈에 벌써 날이 밝기 시작했다.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는 재떠미 위로 사람들이 뛰어들어 갔다.
사람들은 거기서 다 타버린 김칠병 노인의 늙은 아내의 유해를 발견했다. 자다가 갑자기 치
솟은 불길때문에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참변을 당한것이다. 김칠병 노인은 사랑방에서
잤기때문에 참변을 면한것이다.
정용세의 집으로 돌아온 광준은 그때까지도 다리가 후들후들떨렸다.
그렇게 엄청나고 무서운 장면은 태어난 후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방바닥에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밖에 나갔던 정용세가 혀를 끌끌 차며 들어왔다.
"그 늙은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더 상한 사람은 없습니까?"
"김칠병 노인이 까무라쳐서 읍내 병원으로 싣고 갔습니다."
"불은 왜 났습니까?"
"글쎄 그게 좀 이상합니다. 군 소방서와 경찰서에서 조사를 나왔는데 아무래도 누가 일부러
불을 지른것 같다고 하는군요."
"일부러 불을 질러요?"
광준은 남의 일이지만 의혹의 눈빛을 빛냈다.
"그런가 봐요. 감자기 불이 붙은 점이며 아궁이 같은 불씨 있는 곳에서 불이 난것이 아니라
뒷곁 안방 창문 쪽에서 불이 시작된것 같다고 하는군요. 더구나 그 곁에는 기름에 젖은 신
문조각 같은것이 남아 있어 누가 일부러 안방 쪽에다 방화를 한것 같다는 겁니다."
"누가 그런 못된 짓을 했단 말입니까?"
"글쎄 그게 이상합니다. 그들 늙은 부부는 동네를 위해 앞장서는 분들이고 누구하고 말 한
마디 다툰 적 없는 사람들입니다. 법없어도 살 사람이란 바로 그들 부부를 두고 하는 말 같
았지요."
"그렇다면 범인은 부부를 다 죽일 심산으로 저지른 일 아니겠어요? 그 집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나요"?"
"부부만 살고 있지요. 딸은 서울서 김회장님이 하시는 민예품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 얘긴 저도 들었어요."
광준은 아침에 김노인을 만나기로 한것이 뜻밖의 사건으로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일단 대곡으로 나가기로 했다.
"이대로 서울로 올라가시려는 겁니까?"
떠나는 광준을 보고 정용세가 물었다.
"일단 대곡에가서 결정하겠습니다. 다시 돌아올수 있으면 탈무골로 오고, 거기 병원에서 김
노인을 만날수 있다면 만나 보겠습니다. 내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전에 말씀드린것을 잘 좀
부탁합니다. 특히 백순조 무당의 동태를 잘 살펴서 알려 주시기 바람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리고 김칠병 노인집의 화재사건도 아무래도 꺼림칙합니다.
어떤 음모가 개입돼 있는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드는군요."
"그것도 조사가 끝나는 대로 연락을 해드리겠습니다."
광준은 정용세한테 단단히 일러놓고 대곡으로 나왔다. 큰 화재사건이 난 터라 다니는 차가
많아서 대곡으로 나오기는 쉬웠다.
광준이 대곡의 여관에 도착했을때 프론트의 사내는 빙긋이
웃으며 아는 체를 했다.
"사모님께서는 아직 주무시는것 같은데요."
녀석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주접을 떨었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 자고 있단 말인가."
"이제 겨우 열시 지난 거 아입니꺼. 새벽에 잠이 안오는지 여관을 들락날락 하시더니 이제
잠든걸낍니더."
광준은 이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노크했다. 아무 기척이 없었다. 정말 아직까지 자고 있는
모양이다. 광준이 문을 쾅쾅 두드렸다.
"누구세요?"
방안에서 졸리는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나요. 광준입니다."
그제야 열쇠 고리 벗기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아직까지 자고 ..."
광준이 그렇게 말을 하다가 멈췄다. 정자는 이미 화장까지 마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앉
아 있었다.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찍 오셨군요."
"일찍이고 뭐고 끔찍해서 혼났어요."
광준이 침대 위에 털석 걸터앉으며 말했다.
"끔찍 하다니요."
"동네에 불이 나서 사람이 타 죽었어요."
"예?"
정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딱 벌렸다.
"오늘 새벽에 김칠병 노인집에 불이 나서 할머니가 타 죽었어요."
"예? 이장집에 불이 났다구요?"
정자는 여전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광준은 어곗밤에 일어난 일을 대강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방화를 한것 같다는게 경찰의 추측이라고 하러군요. 누가 그런 못된 짓을 했을까
요.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다구..."
" 예..."
정자는 그저 뜻밖의 일들에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 한참만에 평정을 찾은 듯 정자가 말했
다. "혹시 백순조 무당과 관계있는 일은 아닐까요?" "나도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는데 꼭
무슨 음모가 있긴 있는 것 같아요."
광준은 걸터 앉았던 침대에 그냥 드러누웠다. "영 잠을 설쳐서 피곤하군요." " 그럼 거기서
우선 한숨 주무셔요. 전 밖에 나가 아침을 좀 먹고 오겠어요. 호텔 식당에 갈거예요." "그
렇게 하시겠어요? 광준은 다시 일어나 우선 웃저고리만 벗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정자는 시
트를 잡아당겨 덮어주고는 조용히 나갔다. 꼭 잠자는 아기를 재우고 나가는 어머니 같았다.
정자가 나가자 광준은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옴을 느꼈다. 눈을 감고 스르르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팔. 비련의 마을
얼마를 잤을까? 광준이 눈을 떴을 대 제일 먼저 느낀것은 시장기였다. 광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경대거울 앉에 정자의 핸드백이 얌전히 얹혀 있고 의자엔
녹색 코트가 길게펴져 있었다. 광준은 길게 드리운 커튼을 열어 젖혓다.
눈부신 햇살이 홍수처럼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햇살은 로마 병사들이 성을 점령하듯
방안의 구석구석을 모두 채웠다.
광준은 장렬한 햇살 앞에 눈을 가늘게 뜨고 주섬주섬 웃옷을
챙겨 입었다.
눈을 비비며 아래층 로비로 내려갔다. 계단을 다 내려서기도전에 광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광준은 눈을 비비고 다시 로비의 소파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정자가 얌전히 앉아 있고 맞은편 소파엔 추경감이
앉아 있었다. 추경감은 왼손에 잡은 담배에서 생연기가 계속 나는데도, 거기엔 신경쓰지 않
고 정자한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저 멍청이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 우릴 미행해 온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우리가 아파트를
나올때 강형사가 얼쩡거리고 있었거든. 그렇다면 강형사도 이곳 어디에 와있을 거야." 광준
은 얼른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슬그머니 화가 났다. 마치 은밀
한 데이트를 하다가 거북한
상대한테 들킨 기분이라고 할까?
"경감님, 지금 무슨 음모를 꾸미고 계십니까?"
그러나 광준의 입에서는 생각과 달리 엉뚱한 농담이 튀어나왔다.
"이제 일어나셨군요."
정자가 일어서서 미소를 띠며 광준을 쳐다보았다.
"허허허, 한숨 잘 주무셨습니까?"
추경감이 악의 없는 동안으로 웃었다. 조금도 형사 같은 인상은 풍기지 않았다.
"그래 또 무슨 일때문에 저희들을 미행해 왔나요? 우리가 뭐살인이라도 저지른 사람으로 보
입니까?"
광준이 정자 옆에 앉으며 말했다.
"미행이라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김광준씨나 곽정자씨를
우리가 미행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건 정말 오해입니다.
지금 정자씨한테 그 오해를 풀도록 설명하는 중입니다."
추경감은 두번 세번 강조해서 변명했다.
"우연이라고 자꾸 말씀하시지만, 우연이 번번이 이렇게 겹칠수가 있습니까? 솔직하게 우리
를 미행했다고 시인하세요. 강형사도 이 근처 어디에 와 있겠죠?"
광준이 빈정거렸다.
"장형사는 지금 김칠병 노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곧 돌아올 겁니다."
"거봐요. 그래도 미행하지 않있다고 잡아떨 참입니까? 어쨌든. 경감님은 뭐때문에 여길 오신
겁니까?"
추경감이 잠시 머뭇거리다 담배 연기를 축 뿜으며 연기 속에
말을 날려보내듯이 말했다.
"탈무골 일때문에 왔습니다. 거상그룹과 탈무골의 관계를 더캐기 위해서 온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을숙 여사 피살사건과는 관계가 없겠군요."
광준이 계속 빈정거렸다.
"아, 그야... 꼭 그렇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추경감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시인도 부인도 아닌 말이다.
"하여튼 난 지금 배가 고파 죽겠으니 점심이나 좀 먹고 얘기합시다."
"점심이라뇨? 저녁때가 다 됐어요,"
정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저녁이라고 하고..."
"저녁밥치고는 좀 이르죠?"
"하여튼 뭐든지 좀 먹읍시다. 그럼 경감님 실례합니다."
광준이 정자를 재촉해서 일으켜 세웠다. 늪에 빠진 애인을 건져서 데리고가는 기분으로 광
준은 정자를 데리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전에가본 일이 있는 맞은편 식당으로 들어갔다.
광준이 식탁에 앉으며 물었다.
"무얼 드실랍니꺼?"
식당처녀가 와서 물었다. 광준은 갈비탕 한 그릇을 시켰다.
"잘 모르겠어요. 탈무골의 우라늄광 문제는 경제반으로 수사를 넘겼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일때문에 왔다는것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로비에서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제가 김선생님이 잠든 뒤로비로 나왔더니 추경감이 거기 앉아 있더군요. 아침에 도착했는
지 그 호텔에서 잔것인지는 알수가 없었어요. 저를 보고 깜짠 놀라더군요. 그러면서 언제 왔
느냐고 들었어요."
"녀석, 늙은게 능청스럽기는..."
광준은 자신도 모르는새 거친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추경감이 탈무골 이장집에 불이 난 사건을 알고 있더군요."
정자가 몸시 리쳐진다는듯 몸을 움추리며 말했다.
"그거야 이곳 경찰서에서 들었겠죠. 경찰이 지금 화재원인을
캔다고 하던데..."
"화재원인을 캔다고요?"
"그래요, 방화의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군요."
"방화를 해요? 누가 그런 짓을..."
정자가 놀라는 표정이다. 그 놀라움은 차차 공포로 변했다.
광준은 정자의 눈동자에서 공포를 읽을수 있었다. 탈무골 당집에서 있었던, 달밤의 그 괴이
한 사건을 회상한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난 김칠병 노인을 좀 만나야겠어요. 같이 병원으로가실까요? 호텔에 그냥 있겠어
요?"
광준이 물었다.
"저도 같이 갈래요. 어쩐지 무서워서 김선생님을 놓치기가 싫어요."
그래서 그들은 다시 김노인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갔다.
김노인은 이제 정신이 든 모양이다. 링겔 주사를 꽂은채 눈만 멀뚱멀물 뜨고 누워 있었다.
"영감님, 접니다. 광준입니다."
"광준이라고 ? 자네가, 자네가 웬일인가? 자네말이야..."
김노인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하던 말을 중지했다.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자네 말이야..."
김노인은 손짓으로 광준을 가까이 불렸다. 광준의 귀를 자기
입가까이 내리는 시늉을 했다. 마치 숨 넘어가는 사람이 유언이라도 할듯한 모습이다.
광준이 김칠병의 입에 귀를 바싹 갖다 대었다.
"자네 말이야..."
김노인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나직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말이야, 탈무골엔 절대로가지 마래이."
"예? 탈무골에가지 말라고요?"
"쉿."
김노인은 또다시 사방을 한참 두리번거렸다.
"탈무골 당님이 죽일지도 몰라. 우리 할멈도 탈무골 당님이 쥑있단 말이다."
김노인은 공포에 질려 숨이 넘어가는듯한 목소리로 켜우 말했다.
"예? 할머니를 백순조 무당이 죽였단 말입니까?"
"하모. 자기 말 안 듣는다고 불에 태워 쥑있어."
"할머니가 왜 무당 말을 안 들었단 말입니까?"
"김회장이 하는 무속 마을 지정을 꼭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거든. 그리고 왜 동네 땅을 사 들이느냐고 따졌거든. 아이구 불쌍한 여편네야."
김노인은 눈물을 추록 흩렸다. 정자가 얼른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장님. 이 방에는 우리밖에 없어요. 좀 자세하게 말씀하세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어요."
광준이가 나직나직 말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쉬잇. 지금 뭐라카노? 신령님은 눈에 안 보이지만 우리가 가는곳은 다지키고 있대이. 아이
구 신령님. 우리 불쌍한 할망구를 와 갑아 갔는교? 우리 불쌍한 할망구..."
김노인은 다시 눈물을 흘리지 시작했다.
광준은 더 이상 무엇을 물어 보았지 대답이 나올것 같지가않았다.
"이장님. 한숨 푹 주무십시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광준은 정자한테 눈짓을 해서 같이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병실을 나온 두 사람은 병원 밖의
조그만 정원으로 내려셨다.
"이장은 만나봤습니까?"
정원의 벤치에는 뜻밖에 추경감이 앉아 있었다.
"또 우릴 미행한것입니까?"
광준이 쏘아붙였다.
"천만의 말씀을. 우린 참 우연한 곳에서 자주만남니다만, 절대로 김광준씨를 미행한것은 아
닙니다. 다만 알고 자 하는것이 같은 장소에 있었을 뿐이라구요."
"그럴까요? "
광준은 더 이상 말대꾸를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그냥 나가려고 했다.
"김광준씨 내일 다시 들러서 김노인 얘기를 들어 보시지"
추경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얘기를 듣습니까?"
광준이 나가려 던 발걸음을 멈추고 추경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반쯤 벗겨진 머리가 석양에 비쳐 반들반들 빛났다. 그러나 눈가장자리엔 무성한 주름이 웃
음을 머금고 있었다.
화를 낼수 없는 얼굴이다.
"지금 김노인은 정상을 되찾지 못했어요. 엄청난 일을 겪은 충격에서 깨나지 못하고 있기때
문에 심성이 정상이 아니랍니다.
공포에 짓눌려 아무 말이나 마구 뱉어내고 있거든요."
그 말은 맞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그럼 담에 또 봅시다."
"오늘 서울 올라가시나요?"
경감이 광준의 뒤통수에 대고 말을 던졌다.
"생각해 봐야겠어요."
"혹시 여기서 묵는다면 저녁에 나하고 소주나 한 잔 합시다."
"난 술 같운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어쨌든 저녁 여덟시쯤 호텔 식당에 있겠어요."
광준은 추경감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병원 정원을 나섰다.
날씨가 꽤 쌀쌀했다. 봄이 라고 하지만 아직 모진 겨울 바람의
여운이 산골에 그냥 남아 있었다.
호텔로 돌아온 광준은 정자 방의 옆방을 하나 더 얻었다.
넉살좋은 프론트의 보이 녀석은 뭐가 이상하지 연방 두 남녀의 얼굴이며 아래 위를 흘끔흘
끔 훑어보았다. 왜 방을 따로따로 쓰느냐는 투다. 이런 곳의 호텔이나 여관에 찾아온 젊은
남녀라면 뻔한 일인데 무슨 절차가 그렇게 까다로우냐는 표정이다.
"어젯밤엔 무서워서 혼났어요."
수트케이스를 가지러 정자 방에 들르자 정자가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탈무골에 같이가자고 했던것 아닙니까?"
"거긴 더 무서운 곳이에요. 죽을뻔한기억이 생생한데 어떻게
선뜻 따라 나서겠어요?"
"밤에 잠을 설쳤을 테니까 일찍 주무시죠."
광준이 수트케이스를 들고 그냥 나왔다. 자기 방에 들러 소파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물
었다.
바로 옆방에 정자가 혼자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어쩐지 마음이 안정이 안 되었다. 다시 그
방으로가볼까 하는 생각이 한켠으로 없는것도 아니었다. 서울의 아파트에서는 텅 빈 집에
밤마다 두 사람만이 자고 있었지만 별로 느끼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이곳이 낯선 여행지이기때문에 마음이 좀 달라진것이라고 생각했다. 광준은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일어섰다.
지금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 있을 정자를 눈앞에
떠올렸다. 꼭 자기가가서 손이라도 잡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만 잡아서는 안될것
같았다. 두려움으로 할딱거리는
작은가슴을 포근히 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광준은 문을 거세게 밀어 젖히고는 복도로 나왔다, 뚜벅뚜벅
걸었다. 그러나 방을 나올때와는 달리 정자 방 앞을 그냥 지나쳐 계단 쪽으로 갔다. 생각과
말이 따로따로 노는것 같았다. 발길은 계단을 내려서 아래층로비에 와버렸다.
광준은 방을 나올때의 생각과 실제의 행동이 달라진것을 알자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여이, 김광준씨 내려올 줄 알았어요."
추경감이로비 소파에 앉아 있다가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여긴 어쩐 일로..."
"아까 저녁에 여기서 만나자고 했었잖아요."
그러고 보니까 병원에서 추경감이 저녁에만나 한잔하자고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자, 나갑시다. 저쪽에 돼지갈비를 잘 하는 대폿집을 봐 놨거든요."
추경감은 함박웃음을 담고 앞장서서 걸었다.
두 사람은 조그만 돼지 갈비집 식탁에 마주 앉았다. 곧 소줏병과 돼지갈비 안주가 나왔다.
"객지에선 술맛이 더 나는 법이랍니다. 자, 우선 한 잔씩 쭉하고 ..."
추경감이 콸콸 소리가 나도록 소줏병을 기울였다.
"그래 김선생 사업은 잘 돼 갑니까?"
추경감은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광준을가끔 김선생이라고 불렀다.
"사업이라뇨?"
"정자씨와 벌인 청춘사업 말입니다."
"눈치가 너무 빨라 오버 센스도 하시는군요."
"허허, 이러지 맙시다. 이래봬도 형사 생활 삼심년이 다 돼갑니다. 그만한 눈치 없겠어요."
추경감은 손을 저어가면서 다 안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시시한 얘기는 그만두시고... 이장님집 화재의 원인은
알아냈습니까?"
"그것 말입니까? 거 아무래도 무당이수상한것 같던데..."
"백순조 무당이 불을 질렀나요?"
"글쎄. 무당이 질렀는지 신령님이 질렀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 무당과 관계가 있지 않나 하는 육감이 들거든."
추경감은 연거푸 술을 마시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이 됩니까?"
"첫째, 그 집이 불타고 나면 그 접터는 헐값에 사들일수가 있단 말야."
"아무러면 그 일때문에 불을 질러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광준은 수긍이가지 않았다.
"그도 그렇군요. 하지만 불나기 며칠전 김칠병 노인이 무당을
찾아가 좋지 않은 언쟁이 있었던것 같아요."
"무당과 이장이 싸웠단 말입니까?"
광준이 바짝 긴장해서 귀를 세웠다.
"뭐 싸웠다고 하는 건 정확하지 않은 표현인지 모릅니다. 무당은 지배자고 이장은 순종하는
입장에 있는것이 탈무골의 특징아닙니까. 그러니까 싸웠다기보다는 이장이 의견을 내놨다고
할수 있지요."
"무슨 의견을 내놨습니까?"
"이곳 형사들이 알아낸 건데, 이장이 탈무골은 민속 보존 마을로 지정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한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그야 뻔한 일 아닙니까? 무당이 펄펄 뛰었겠죠. 그리고 신령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큰 재앙
을 만나고 목숨까지도 잃게 된다고 경고를 했답니다. 너희 집이 망하고 너희 식구들도 다
죽을것이다. 신령님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것이다 라고 호통을 쳤다는것입니다."
추경감은 이 대목을 이야기할때 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 예언대로 된 셈입니까?"
"말하자면 그렇게 된것이지요. 오늘 낯에 형사들이 백순조 무당을 찾아갔는데 무당은 신령
님이 벌을 내린것이라고 딱 잘라말하더라고 하더군요."
"그럴수가... 그럼 자기의 범죄를 자기 입으로 말했단 말입니까?"
"허허, 광준씨. 자기의 범죄라뇨? 무당이 어디 신령닙입니까?"
"하긴 그렇군요?"
광준은 쓴읏음을 지을수밖에 없었다. 무당은 옥황상제와 신령님의 사자이니까 주범은 신행
이나 옥퐝상제일수밖에 없는것이다.
"정말 무당의 주술에 의해서 불이 날수도 있는지 모르겠어요.
유리겔러 같은 초능력자도 있지 않습니까? 나 형사 노릇 하다가
신령님수사하기는 또 처음입니다. 허허허..."
추경감은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그 불이 방화로 인해서 일어났다는것은 틀림없습니까?"
"여러가지 증거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어요."
"그럼 경찰에서는 백순조 무당이 자기가 예언한 말을 입증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생각하
고 있나요?"
"그 점도 용의점에 올리지 않은것은 아닙니다만, 어쩐지 백순조 무당이 불을 지른것 같지는
많더군요."
"그건 어째서 입니까?"
"육감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백순조 무당의 배후라고 추측되는 거상그룹의 짓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글쎄요. 대재벌 그룹에서 그렇게 악날하고 무모한 방법으로
땅을 사들일수가 있겠어요. 우리 그 이야기는 고민하고 술이나
한잔 더 합시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 한병 더 주십시오."
추경감은 졸고 있는 주모를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이튿날 광준은 정자와 함께 호텔 식당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난 뒤 혼자 김칠병 노
인의 병실을 찾아갔다. 곽정자가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그냥 호텔에 기다리고 있게 했다. 김
노인이 광준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는데, 광준은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같
이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칠병 노인은 어제보다 상당히 상태가 좋은것 같았다. 마음의 평온을 되찾은것 같았다.
"이장님 기분이 좀 어떻습니까?"
광준이 사가지고 간 음료수를 내놓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게나, 아직 서울 안올라갔었나?"
김노인은 반가워하면서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얼마나 상심되십니까? 하지만 모두 운영으로 돌리고 , 큰마음
잡수십시오."
광준은 위로의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노인들 말투를 흉내낸다고 생각했다.
"김회장님 잘 계신가?"
김 노인은 김을숙이 죽었다는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뿐 아니라 민속 보존 협
의회가 횡령 사건으로 들통이 나버렸다는 사실도 모르는것 같았다.
광준은 적당히 대답을 했다. 시인도 부인도 아닌 그런 대답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이십년 전
왜 자기들 일가족이 탈무골에서
쫓겨났는지를 알고 싶어 서울서 여기까지 왔다는것을 힘을 주어 말했다.
"내사 이미 당님 눈에 난 사람 앙인가. 벌을 더 받아봐야 이목숨 앗아가는것밖에 더 있겠나.
내 오늘은 다 털어놔 뿌릴기라."
김노인은 한참 생각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결심 한듯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비밀이란 언션가는 밝혀지는 기라. 담배 한대 주게."
광준은 담배를 꺼내 주고 성냥불을 켜댔다.
김노인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을 꺼냈다.
"자네 춘부장이 좀 특별난 사람인지라."
"...?"
"좋게 말하면 한량인 기라. 놀기 좋아하고 큰소리 잘치고 인심 좋고 여색 좋아하고"
"더 좋게 말하자면 영웅 호걸 축에 드는 사람인 기라. 그런데
그게 좀 지나쳐가지고..."
김노인은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광준의 아버지 김춘팔은 원래가 이곳 탈무골 태생이 아니
라고 했다. 경상남도 울산이 원고향인데 어릴때 단신으로 이곳에 들어와 무당집에서 머슴살
이를 했다고 한다. 여남은살 갓 넘었을때 무당집에 들어와 잔심부름도 하고 꼴머슴 노릇을
하며 차렸다고 했다. 물론 그때의 당님은
백순조 무당이 아니라 백순조의 어머니가 무당 노릇을 하고 있을 때였다.
몇 살 아래인 백순조와는 어릴때부터 오누이처럼 한 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나이가 차자 당님이 당집에서 심부름하던 복실이와 짝을 지어주었다는것이
다. 그 복실이가 바로 광준의 어머나라고 했다. 춘팔이와 복실이는 당집에서 독립해 나와 살
림을 차렸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자 그때 이야기는 다 묻혀 버리고 을숙이와 광준이 남매를
낳고 농군이 되어 일가를 이루었다는것이다.
그러나 동네에서는 춘팔이가 가끔 말썽을 일으켰다.
동네 밖에서 받고랑 매는 이웃 처녀의 손목을 잡았느니, 혹은 남의 마누라 목욕하는 모습을
담너머로 훔쳐보고 농을 걸었느니 하는 말썽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래서 동네서는 아비
없이 자란 개망나니라서 그렇다고 모두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한번은 이웃에 사는 김초시네 손주며느리와 마을앞 물레방앗간에서 일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좍 퍼졌다. 동네 노인들이 김춘팔이를 잡아다놓고 따졌으나 김춘팔이가 딱 잡아뗐을 뿐 아
니라, 아무도 확실한 증거를 대지 못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마을에 또 하나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당집의 무당이 죽고 백순조가 새로운 당집 주인인 세습 무당이된 몇년후의 일이었다.
새 무당인 백순조와 김춘팔이 보통 사이가 아니란 소문이 나돌았다.
새벽에 김춘팔이 무당집에서 나오는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고 무당집 뒤 대숲에서 두사람
이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있는것을 먼 곳에서 보았다는 소문까지 났다.
조그만 마을에 남의 이야기 좋아하는 동네 여편네들이 있는말 없는 말을 보태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김칠병 노인은 서너살 아래인 김춘팔과 가까웠기 때문에 김춘팔의 일을 비교적 자세하게 알
고 있었다고 한다.
백순조 무당은 젊은 시절에 빼어난 미인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때의 미모가 주름살 뒤에
감추어피 있다고 말했다.
광준도 백무당을 처음 봤을때 젊은 시절에는 상당한 미인이었을 거란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이 동네 총각들 뿐 아니 라 이을 마을 총각들도 백무당을 보고 마음을 설레던 그런
시절이었다.
동네 김춘팔과 백무당의 소문이 나기 훨씬 전에 김춘팔이 김칠병 노인한테 고백을 하더란것
이다.
"형님, 나 백무당한테 장가들어야겠어요."
김칠병은 이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이 사람 그게 무신 소린고? 자네 복실이는 어떻게 할라고?"
"마누라 둘가지면 안 되는 겁니꺼?"
김칠병이 춘팔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진심인것 같았다. 얼굴에 결심이 분
명히 나타나 있었다.
"패가망신할 소리 그만 하게."
김칠병은 엄하게 꾸짖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두사람이 금단의 선을 넘고 있었다.
김춘팔은 이러한 사련때문에 고민 속에 세월을 보냈다. 동네서는 어렴풋이 이 일을 짐작한
여인들이 입방아를 찧고다녔다. 그러나 상대가 감히 누구도 거역할수 없는 당님인 백순조였
기때문에 아무도 나서서 따지거나 까놓고 이야기는 하지못했다. 공공연한 비밀이 된채 십여
년이 홀러갔다.
그런던 어느 날 당제가 열리던 날이었다. 굿판이 한참 무그익었을 무립 백무당이 돌연 폭탄
선언을 해버린것이다.
"김춘팔이는 탈무골을 떠나거라. 신령님이 노하셔서 일가족한테 천벌을 내릴것이니, 자식들
이 불쌍하면 하루빨리 이 마을을 떠나라."
백무당의 이 선언은 절대적이었다. 누구도 백무당의 말을 거역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다.
그래서 그 다음달 김춘팔은 을숙과 광준의 손을 이끌고 탈무재를 넘어 정든 탈무골을 떠나
고 말았던것이다.
"왜 갑자기 백무당이 그런 소리를 했을까요?"
이야기를 듣고 난 광준이 물어보았다.
"글쎄. 확실한 사정은 당사자만이 알겠지 내가 짐작키로는
자네 춘부장이 계속 다른 여자들과 좋지 않은 소문을 만드니까
그렇게 된기아인가 생각하네만..."
광준은 김노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착잡한 심정이었다.
아버지와 백무당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뒤 아무도 증명해 주
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그런 행동이 광준에게는 두가지의 측면으로 받아들여졌
다.
첫째는 아버지의 그러한 무분별하고 부도덕한 행동이 뒷날 누나인 김을숙에게서 다시 나타
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두번째는 백무당과 아버지의 이룰수 없었던 안타까운 사랑을 동정하고 싶은 생각이다. 사랑
하는 사람은 뒤에 남켜 둔채 현실에 얽매여 탈무재를 넘던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것
같았다.
아버지의 그러한 무모하고 독선적인 행동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원망의 눈초리 한 번 던지자
않고 비참하게 일생을 살다간
어머니의 착한 모습이 눈에 아물거렸다. 어떻게 보면 끝없이 자기 희생만을 바쳐서 일생을
살아온 어머니가 거룩하게 보였다.
가장 한국적인 여인, 운명을 거역하거나 저항해 보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런 여인상을 어머
니에게서 보는것 같았다.
누나인 김을숙은 어머니의 인내력과 환경에 순응하는 운명적인 모습을 닮은게 아니라 아버
지의 모습을 더 많이 닮았던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광준이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까지의 김을숙은 가장 한국적인
여인의 표본이었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끈질긴 노력과 핏줄에대한 냉엄한 책임감. 그리고 절
망을 극복하는 슬기. 그러나 광준이 돌아와서 들은 누나의 위선적인 이중생활, 명예욕에 치
우쳐 지혜를 그 쪽에만 써먹은 비굴한 행동. 육체의 쾌락을 찾아 타락한 모습. 그런것이 아
버지를 닮은 젊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어머니는 인내와 희생의 표본같은 사람이었다고 광
준은 생각했다. 어머니가 생전에 한번도 그러한 아버지를 욕하거나 미워하는 것을 본저기
없었다. 무슨일이든지 있으면 먼저 아버지한테 상의했고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아무일도 하
지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과거를 한번도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도 그렇게 슬퍼할 수가 없었다. 며칠동안 음식을 끊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같았다. 광준은 누나가 어머니를 닮은 데가 있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리고 어
머니와 누나를 보고 자라면서 그것이 여인상이라고 생각했다. 조용히 운명에 순응하고, 어떠
한 불행도 말없이 소화하면서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이 한국의 여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러한 누나가 십여년 사이에 그토록 변해버
렸다는데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가ㅛ통사고로 돌아가신날 누나의 모습은
꼭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의 어머니와 같았었다. 슬픔에서 헤어난 단발머리 김을숙은 광준
이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고 여러 번 이야기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의지는 그대로 나
타나 서른이 훨씬 넘도독 독신으로 지내면서 광준의 유학
뒷바라지를 한것이었다.
광준은 누나 김을숙만은 아버지와 백무당의 관계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김을숙이 무속에 관한 연구에 심취한것이라든지 탈무골에대해 남다른 애착을 보인것이라든
지 그런것이 예사로운 일만은 아닌것 탸은 생각이 들었다.
장통석 회장의 말대로 김을숙은 무당과 숙명적인 무슨 실로
연결돼 있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누님은 아버지와 백무당의 관계를 알고 있었습니까?"
광준이 김노인을 보고 물었다.
"돌아가신 자네 어머니가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럼 알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런것도 같고 아인것도 같고...,..."
김노인은 애매한 대답만 했다.
"우리가 탈무골을 떠난뒤 백무당은 우리 서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까?"
"마을을 떠난 사람들을 뭣 땜에 욕하겠나? 아무도 자네네 식구에 대해 입방아 찧는 사람은
없었다네."
"동네 사람들은 모두가 아버지와 백무당에 관한 일을 알고 있있습니까?"
"소문이 났을때 더러는 긴가민가 했었지 그렇지만 백무당이
자네네를 쫓아낸 뒤에는 그기 정말이리라고 생각했지. 함부로
그런말을 한다는건 당님에 대한 불경이라고 생각들한거 아이가베."
"돌아가신 할머니는 알고 계셨습니까?"
"우리 할망구 말인가?"
"예."
그러나 김칠병 노인은 눈만 껌벅껌벅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불쌍한 여편네..."
김노인은 눈물을 주루룩 홀렸다.
광준은 더 이상 물어봤자 소용이 없을것 같아 다음으로 미루고 그냥 조용히 병실을 나와 버
렸다.
호텔로 돌아은 광준은 정자와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커피 두잔을 시겨놓고 한참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장님은 제정신이 돌아오셨나요?"
정자가 침울해 하는 광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자씨는 대곡사에가 보셨
나요?"
광준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대곡사라뇨? 이곳에 있는 절 말입니까? 못가봤어요."
"그럼 거기나 가봅시다."
광준은 정자의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일어섰다.
정자는 광준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을 생각인듯 말없이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근 한시간쯤 산등성이를 올라 대곡사로 갔다.
"김노인이 무슨 언짢은 이야기라도 했나요?"
말없이 걷던 정자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산속에선 새소리가 가끔 적막을 깨뜨렸다.
"정자씨는 우리 집의 내력에 대해 누님한테 들은 적이 있나요? "
광준은 대답 대신 또 엉뚱한 질문을 해다.
"한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아버지나 어머니에 관해서 도 들은 적이 없나요?"
"착한 분들이란 얘기외는 들은게 없어요. 회장님은 탈무골이
고향이란것밖에는 별로 들려준게 없었어요."
"탈무골 사람들한테도 무슨 말을 들은것이 없었나요."
"왜 자꾸 그런것만 물어보죠?"
정자가 슬그머니 광준의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팔에서 팔로 흘러 심장으로 들어 오는것 같았다.
광준이 정자를 내려다보았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쩐지 그 미소가 쓸쓸하게 보였다. 꼭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우리 여기좀 쉬었다 갑시다."
광준이 절 앞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정자도 말없이 앉았다.
"우리 결혼할까봐."
광준이 먼산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산등성이에는 아지랭이가 아른아른 피어오
르고 있었다.
"광준씨 정신 좀차리셔요. 우리가 지금 무엇때문에 여기까지 와있는지 잊으셨어요?"
정자가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나 싫지는 않은 표정이다.
"정자씨는 누님을 죽인 범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광준의 느닷없는 질문에 정자는 한참 말을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아니 꼭 누구라고 말한다는게 아니라, 심증이란게 있지 않습니까?"
"김선생님은 심증이 가는 범인이 있으세요?"
"난 처음엔 장통석 회장이 한 짓이라고 굳게 믿었었죠. 지금도
그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는것은 물론 아닙니다만...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백순조 무당이
범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광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백순조 무당이 처음부터 김회장님의 죽음을 예언했고 , 정근세라
는 사람의 죽음도 예언했고 , 그리고 이강인 김칠병 노인의 아내까지 예언대로 죽지 않았습
니까?
더구나 저까지 죽게 된다고 예언을 했거든요."
"하지만 정자씨야 꼭 백무당이 한 짓이라고 할수 없잖습니까?"
광준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러면 누가 그런 협박편지를 보냈단 말입니까?"
"글쎄요."
정자는 그때의 일을 떠올린듯 눈동자에 겁을 삼키고 있었다.
"무당이 예언한 일은 어떤 방법으로든 꼭 일어나고만다는것이 아무래도 수상해요."
"그런 경우는 대체로 두가지로 해석할수가 있습니다. 무속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힘으로 다
룰수 없는것을 다루고 있기때문에 조리로서는 설명이 안된답니다. 무당의 주술은 꼭 어떤
영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는것이 무속의 세계니까요. 하지만 다른 한년으로는 무당
의 예언을 치밀한 과학적 계산으로 실천에 옮기는 방법이 있다고 가정할수가 있지요. 백무
당이 자기가 제거하고 싶은 인물에 대해 죽게 된다는 예언을 하고 그것이
마치 불가사의한 신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것처럼 보이게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무속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오직 신의 뜻에 의해 죽고 사는것이 이루
어지고, 그것을 인간세계와 연결시켜 주는, 신의 통역관이 무당일뿐
이니깐요."
정자가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면 정자씨는 어느것을 믿습니까?"
정자는 대답하지 않고 먼 산만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말을 이었다.
"무속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저의 학위 논문은 허위일뿐입니다."
두 사람은 제법 두터워진 늦봄의 햇살을 맘껏 마시며 산사를
한바퀴 돈 뒤 다시 대곡읍의 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했다.
"서울엔 언제 올라가실 거예요?"
정자가 걱정스레 물었다.
"내일 탈무골에가서 백무당을 다시 만나보기로 합시다."
"예? 탈무골로 가자구요?"
정자가 놀랐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백순조 무당이 뭔가 열쇠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 열쇠를 뺏어야 돼요."
광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글쎄요"
정자는 무당 이야기만 나와도 겁먹은 표정이다.
"두려워할것 없어요. 내가 있지 않습니까."
"김선생님도 믿을수가 없어요. 어쨌든 전 탈무골에는 절대로
갈수가 없어요."
정자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어쨌든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광준은 정자의 태도가 너무나 완강했기때문에 더 이상 강권을 하지는 않았다.
그날 밤 돼지갈비 집에서 광준은 추경감과 강형사를만났다.
정자는 혼자서 조용히 쉬고 싶다고 해서 그냥 호텔에 두고 나왔다.
"우리 여기까지 왔으니 솔직히 털어놓기로 합시다. 자, 우선
내 술부터 한 잔 받으십시오."
광준은 오늘 이야말로 이 두 친구의 전의를 꼭 캐고 말겠다
는 각오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허허 이거 큰일났는데. 우린 털어놓고 주워담고 할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경감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소줏잔을 받았다.
"저는 누님의 살해범을 잡는 일을 일생을 바쳐서라도 해내고
말것입니다. 추경감님이나 강형사님도 쉽게 물러설 분이 아니란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솔직하게 털어놓고 힘을 합치면
더 일이 빨라질것 아닙니까?"
"그말은 옳아요. 헌데 김광준씨나 나나 뭘 숨긴게 있어야말이지." 강형사가 거들었다. "무슨
말씀을. 그럼 우선 강형사님께 물어보겠는데요. 강형사님은 우리를 미행하는 겁니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로 우리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겁니까?" 광준은 입가에 한껏 비웃음을 흘려보내
며 물었다. 가장 아픈곳을 찔렀다고 내심 생각했다. "천만의 말씀. 제가 왜 김선생을 미행합
니까?" "그럼 곽정자를 미행한 겁니까?" "미스곽을? 그것도 당치 않은 말씀이죠." "그럼 우
리가 처음 마주친 곳이 사직동에 있는 수저궁이란 요정이었습니다. 그곳은 거상그룹 장통석
회장 관계로 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거라고 칩시다. 그 다음 전번 우리가 탈무골갔을 때도
우연히 마주친 것입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우연히 마주친것입니까? 그 우연 참 희한한 우
연이군요." 광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거야 광준씨나 우리가 추적하는 목표가 같으니까 그
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추경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문제는 그만두기
로 합시다. 경찰에선 도대체 범인을 누구로 보시는 겁니?까 장통석 회장입니까? 남궁현입니
까. 주인성입니까 조민희입니까. 아니면 백순조 무당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당이 말하는
신령님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김을숙 여사가 살해됐는지 어쩐지에대한 결론을 내
리지 못했습니다. 김을숙씨가 납치되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종적을 감추었을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범인이라고 하는것은 김선생과 우리의 견해가 조금 다릅니다."
추경감이 잔을 넘켜주며 말했다.
"그럼 제가 백보를 양보해 납치범이라고 합시다. 그 범인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명확하게 납치범이라고 단정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파트 앞에서 나를 자동차로 치어 죽어려고 하던 그살인 미수범은 누구라고 생각
하십니까? 이 일은 나만 겪은게아니고 곽정자도 함께 겪은 일이니까 믿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광준이 다짐을 하듯 말했다. 아니 윽박지른다고 해야 맞을 말투였다.
"그건 물론 믿습니다. 하지만 그 살인 미수 사건이, 솔직히 말해 김을숙 여사와 관계가 꼭
있다고 볼수는 없는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김광준씨 개인에 관한 일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한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탈무골의 백순조 무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다뇨?"
추경감이 돼지갈비를 질근질근 엡며 말했다. 강형사의 말대로 대식가임에 틀림없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믿는지요."
"다른것은 몰라도 정근세씨의 사망과는 관계가 있는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곳 경찰이 조
사한 바로는 누군가가 정근세가
다니는 얼음판을 새벽에 깨 놓았던것 같습니다. 그 위에 살얼음이 댄것을 모르고 지나가다
빠진것 같습니다."
"그런 증거가 있나요?"
"원래 강의 얼음이란 가장자리부터 얼기 시작하고 가장자리가 두꺼운 법입니다. 그런데 정
근세가 빠진 곳은 장의 기운데가
아니고 가장자리입니다. 강을 다 건너와가장자리서 얼음이 꺼져 빠진다는 건 납득이 안갑니
다. 이곳 경찰은 백무당이 정근세가 죽을것이란 예언을 해놓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새
벽에 얼음을 깨고 살얼음이 얼게 한 뒤 빠져 죽도록 함정 같은것을
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음 함정이군."
강형사자 혼자 히죽 웃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지요. 백무당한테는 진짜로
사람의 생명을 뺏을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지
광준이 물었다.
"초능력이나 신통력을 믿는다면 수사라는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것입니다."
"그러면 김을숙 누님에 대한 죽음의 예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그것도 사람을 괴롭히기위한 일종의 협박수단이 아니 었을까요."
그것은 추경감의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
광준은 그날 밤 돼지갈비 집에서 자정이 가까워서야 호텔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광준이 눈을 떴을때 창밖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창을 열고 내다보았더니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호텔 건너의 야트막한 대곡산도 비에 묻혀 보이지가 않았다.
비가 밤새 쏟아진 모양이다. 어디선가 홍수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외출 준비를 하고 복도로 나왔다. 정자가
자는 방문을 노크했다.
"누구세요? "
낭랑한 정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광준입니다."
잠시후 문이 열렸다. 정자는 벌써 단정하게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잘 주무셨어요. 들어오세요."
정자가 방긋 웃었다. 해맑은 얼굴이 그렇게 귀여울수가 없었다.
"어껫맘에는 미안했어요. 추경감하고 소주 한 잔 하느라...
열두시쯤 들어왔더니 주무시는것 같더군요."
광준이 정자의 방으로 들어섰다. 향긋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찬것 같았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군요."
정자가 창문의 커튼을 젖히며 말했다.
"비가 와도 아침밥은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어떻게 하실 작정이셔요. 전 서울로 올라갔으면 하는데."
"서울가야 뭐 기다릴 사람 있습니까? 난 이번 여행에서 끝장을 내버릴 작정입니다."
광준이 엄숙하게 말했다. 일부러 엄숙한 투를 냈기때문에 연극 대사를 외는것 같아 우습게
들렸다.
"호호호, 뭘 끝장을 내시려고 그러세요?"
정자가 손으로 입을가리고 웃었다. 너무나 천진하게 보였다.
웃음소리에 따라 알맞게 불룩한 젖가슴이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었다.
"두가지입니다."
광준이 여전히 연극투로 말하며 손가락 둘을 펴 보였다.
"첫째는 탈무골의 탈을 벗겨서 누님의 범인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리고요"?"
"둘째는 정자씨를 내 사람으로만드는 일입니다."
"호호호, 어떻게 하면 제가 광준씨 사람이 되는 거예요"?"
정자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었다.
"그것은..."
머뭇머뭇하던 광준이 갑자기 정자를 와락 껴안았다. 너무나
돌연하게 일어난 일이라 정자는 깜쪽 놀란듯했다.
"지금은 아침이에요."
정자가 허리를 뒤로 제끼고 한 손으로 달려드는 광준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정자는 자연스럽게 광준의 필에서 빠겨나가며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배고파요. 식당에 안가실래요?"
광준은 머 쓱해진 채 할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자를 따라 식당으로 갔다.
그들이 아침을 먹고 나자 날씨는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화창하게 개어있었다. 테양이 물먹은
산천을 찬란하게 비치고 있었다. 광준은 정자를 데리고 탈무골에 가기위해 정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자는 탈무골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광준은 꼭 가야만 한다고
우겼다. 정자를 노리던 살인범이 전번에 탈무골에 나타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그 범인을
잡으려면 꼭 거기 가야 한다고 버텼다. 정자는 자기가 그럼 낚시의 미끼냐고 대들었다. 자기
의 생명을 미끼로 걸고 도박을 하겠느냐고 대들었다. 근 한시간이 걸려 광준은 정자를 설득
하는데 성공했다. 탈무골에 들어가면서부터 나올 때까지 정자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겠다
는 조건으로 승낙을 얻었다. 그들은 택시를 전세내어 탈무골로 향했다. 비에 씻긴 산골 경치
는 금방 그려놓은 수채화처럼 맑고 영롱했다. 그들이 탈무재를 넘어서자 탈무강은 수량이
불어나 물소리를 크게내며 흘러내리고있었다. 전번에 왔을때 어린에 오줌줄기같던 강물이
세찬 구비를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그들은 전번처럼 당집으로 들어가 행랑채의 방 하나를
빌었다. 백순조 무당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않고 낯익은 심방여인하나가 그들을 맞아주었
다. "오늘이 이장님댁 장사날이 돼서 당님은 그곳에 갔심더. 저녁무렵에 돌아오끼라예." 심
방은 심한 사투리를 썼다.
"방은 하나면 됨니다."
광준이 말했다.
심방은 두 사람을 유심히 번갈아 쳐다보다가.
"결혼식 했심니꺼?"
엉뚱한 질문을 했다.
정자의 얼굴이 홍당무가 돼 버렸다.
"곧 결혼할 칩니다. 저어..."
광준이 얼버무려 놓고 정자를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게 무슨 망신이에요."
정자가 불만가득 찬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들은 거기서 잠시 숨을 돌린 뒤 정용세의 집을 찾아갔다.
정용세도 산에가고 없었다. 마을 모든 남정네들어 산역하러
상여를 따라간것 같았다. 정용세의 아내가 두사람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정자가 이곳을 자
주 다녔기때문에 정용세의 아내와는 구면이었다.
"김회장님 일은 참 안됐심더. 얼매나 훌륭한 분인데..."
정용세의 아내가 정자를 보고 위로의 말을 했다.
정용세의 아내는 그동안에 일어났던 이장집 화재사건을 대층
정자한테 설명했다. 그리고는 결론으로 말했다.
"경찰에서는 누가 와서 불을 지른것이 확실하다고 말했심더. 불을 지른 증거가 드러났다고
안캅니꺼. 하지만 그건 틀림없이 당님의 저주를 받은 거라예. 사람이 우찌 그런 짓을 함니
꺼? 신령님이 노한게 틀림없는 거라예."
"경찰에서 무슨 증거를 잡았다고 하던가요?"
정자가 물었다.
"경찰즈그가 뭘 압니꺼? 신령님이 하시는 일을우찌 압니꺼? 뭐 불을 지르는데 쓴 신문지랑
타다 남은 성냥을 찾아냈다던가?"
"타다 남은 성냥을 찾았다고요?"
정자가 다시 확인을 했다.
"예, 그기 읍내서 쓰는 성냥이라 카덩까... 아이구 내 정신 좀봐. 시장하시지요. 내 얼른 점
심차릴게 쪼끔만 기다리시이소."
정용세의 아내가 얼른 일어서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 광준과 정자는 당집의 행랑채 방 하나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서울의 아파트에서 한 달 이상을 한집에서 살았고 탈무골 여행은 두번째였지만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침나절에 퍼붓던 비가 그치고 난 뒤 눈부신 햇볕이 쏟아지던 밖은 어둠으로 덮이고 중천
에는 벌써만월을 갓 지난 달이 교교하게 탈무골을 비추고 있었다,
그 밝은 달은 한달전 두사람이 당집에서 묵던 그날 밤을
연상하게 헌다.
"무서 워요?"
광준이 불안한 그림자를 지우지 않고 오두마니 앉아 있는 정자를 보고 물었다.
시골집의 좁은 방은 두 사람의 숨소리만으로도 가득 차는것 같았다.
"달이 무서워요."
그러면서 정자는 웃어 보였다.
"누가 왔다고·"
갑자기 문 밖에서 억선 사투리가 들렸다. 광준이 문을 열었다. 백순조 무당이 방문 밖에 서
있었다. 달빛을 뒤로 받고 서있었기때문에 기다린 그림자가 방안까지 쭉 뻗쳤다. 왠지 섬뜩
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정자가 인사를 했다. 밖에 나갔다 이제 돌아온 모양이다.
"웬일로 또 왔노? 또 새 잡으로 왔나? 탈무골 새는 다 죽고
없다."
백무당은 밑고 끝도 없는 이 말만을 남기고 행하니 돌아서 가버렸다. 차갑고 무거운 바람을
뿌렸다.
백무당이가고 난 뒤 두 사람은 씁쓸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마주보았다.
"이렇게 앉아서 밤을 새울 작정이세요?"
정자가 무거운 침묵을 깨려는듯 나직하게 말했다.
"당님은 내일 다시만날 테니 우선 오늘밤은 좀 자 둡시다. 먼저 주무십시오. 내가 지키고 있
을 테니."
낯에 준비해 두었던 이불 두채를 따로따로 펴면서 광준이 말했다.
웬일인지 좋아하는 여인과 한방에 있다는 오붓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처녀와 총각이
한방 안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하면 무슨 일이 있었을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할것이다. 그러
나 정말 오늘밤같은 분위기라면 그 말이 거짓일수밖에 없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혼자 쓴웃
음을 지었다.
"잠깐만 밖에 나갔다 오세요."
이불을 다 펴고 나자 정자가 난처한듯 말했다.
"왜요?"
"아이 눈치도 없으시긴. 이옷 입고 그냥 잘수는 없잖아요."
광준은 뒤통수를 긁으며 문 밖으로 잠시 나갔다.
마당에 길게 드리운 대숲이 추상화를 그려 놓은것 같았다.
안채의 신당에는 아직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광준이 다시 방에 들어왔을때 정자는 몸은 보라빛의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더욱 청초하고 가련하게 보인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갖는
그런 속된 감정은 전혀 없었다. 이상했다. 신비하고 고고한 자태를 보는 순수한 마음이었다.
정자는 양쪽 이불이 펴진가운데 방바닥에 성냥알을 한 줄로
죽 펴서 잇고 있었다.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성냥개비놀이 하는 겁니까?"
광준은 정자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 물었다.
"마지노선을 치는 거예요. 언제 또 선생님이 승냥이로 변할지 모르잖 아요."
정차는 성냥개비를 이어서 줄을 긋고 방을 둘로 갈라 놓았다.
"이런일 하려고 성냥을가지고 다니십니까? 참으로 용의주도하군요."
광준이 다소 빈정거리돗 말했다.
"낯에 호텔에서가져온 거예요. 김선생님 담뱃불 붙여 드리려고요. 담배를 입에 물었을때 곁
에 있던 숙녀가 재빨리 성냥을
탁 그어대는 모습 멋있잖아요."
광준은 웃지 않을수 없었다.
광준과 정자는 성냥개비 마지노선을가운데 두고 따로따로
이불 속으로 들어 갔다. 참으로 기묘한 잠자리라고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이 기묘한 밤에 닥쳐올 엄청난 일을 두 사람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운명의 순간이 고고한 달빛을 타고
서서히 탈무골로 다가오고 있었다.
구. 불새 밤에죽다.
소란한 소리에 광준은 눈을 번쩍 떴다. 밖에서 비명과 울음소리가 범벅이 되어 들렸다. 창
호지로 바른 문살이 불빛에 벌겋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불이 났구나!"
광준은 깜짝놀라 벌떡 일어났다. 곁을 보았다. 정자가 자던
자리엔 이불만 개어져 있고 정자는 보이지 않았다. 바깥의 불길을 따라 방안이 붉은 조명을
비춘듯 밝아지다 어두워지고는했다.
마치 불길이 파도처럼 방안에 밀어닥친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꽤 오랜시간을 기다려야 할것같은 어둠 속이었다.
광준은 옷을 입은 채로 잤기때문에 그대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이게 웬일인
가?
위채인 신당과, 본채가 물질에 힘싸여 있었다.
며칠 전에 본 이강 김칠병 노인집의 불길보다도 훨씬 맹렬한
기세로 치솟고 있었다.
광준은 며칠새 두 곳의 불길과 만나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기가 연옥 뛰어든것
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었다.
불길 앞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이리 뛰고 서리 뛰고 있었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것 같았고 누가 누구인지 잘 분간도 가지 않았다.
옷매무새가 풀어헤쳐진 젊은 여인 서너 명이 뭐라고 아우성치며 미친듯이 뛰어다썼다.
심방이라는, 무당 밑에서 일하는 여인들 같았다.
연이어 동네 사람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가지며 대야 등에 물을 퍼가지고 와서 퍼
부었다. 그렇지만 불길이 거세어서 아무도 접근을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수라장이었다.
문득 광준은 정자 생각이 났다. 불길때문에 정자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것이다. 급히 서두르며 이리저리 집주위를 뛰어다녔다. 그러나 찾을 길이 막연했
다.
불길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대마디가 튀는듯한, 탁탁 소리가 불꽃 속에서
튀어나왔다.
"아이구 신령님 이게 웬일입니꺼! 아이구 신령님! 아이구 신령님!"
백순조 무당이 속저고리 속치마 바람으로 두 손을 내저으며
미친듯이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을 광준은 뒤늦게 발견했다.
쪽 차있던 머리가 풀려 산발이 된 데다가 맨발로 마당을 이리뛰고 저리 뛰었다. 흰옷에 붉
은 불꽃이 비쳐 분흥으로 물들어 보였다.
"아이구 신령님, 우리 을숙이를 살려 주이소, 을숙이를 살려주이소"
광준은 자기귀를 의심 했다. 광준은 백순조 무당 앞으로 뛰어갔다. 무당의 소매를 잡고 늘어
졌다.
"당님!을숙이라니. 을숙이는 우리 누님 아닙니까? 누님이 어떻게 되었단 말입니까?"
광준이 무당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를 챈다.
무당의 그 표정은 참으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처참해져 있었다. 눈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짐승의 눈과도 같았다.
"저 속에... 저 속에... 아이구 신령님 신령님!"
무당은 타오르는 신당의 불길을가리키며 미친 사람이 되어있었다.
"저 속에 을숙누님이 있단 말입니까?"
"하모 하모, 우리을숙이 좀 살려 주이소,을숙이 좀 살려 주이소."
무당은 광준이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팔에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불길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올라 문짝 사이로 지옥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벽을 핥았
다.
지붕의 기와가 탁 탁 소리를 내며 높은 온도를 못 견뎌 튀고있었다.
"누님이 저 속에 있다니, 죽은 누님이 그 속에 있단 말입니까?"
광준이 무당의 양팔을 붙잡고 미친듯이 흔들어대며 물었다.
"아이구 우리을숙이, 을숙이 좀 살려 주이소."
무당은 거의 실정한 사람처럼 같은 말만 외쳐댔다.
광준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어째서 죽은 누님이 살아서 저 불길 속에 있단 말인가?
그러면 서울의 아파트에서 분명히 죽은 채로 목격되었던 여자는 누구인가?
아무리 세월이 홀렀지반 광준이 누님을 알아볼수가 없었단
말인가. 광준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당이 미쳐서 날뛰는것을 보면 분명 저
불길 속의 당집 안에 을숙누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광준이 당집 앞으로 달려갔다. 신당의 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자 열기와 함께 무서운불길이
이마를 삼킬듯이 쏟아져 나왔다. 화염 방사기의 기습 같았다.
불길이 쏟아질때 신당 벽에 길렀던 탱화들이 불을 뿜으며 너울거렸다.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수가 없었다. 광준은 물러나와 대청 마루 쪽으로 뛰어갔다. 마루에 올
라서려고 하자 대들보와 서까래가 불기둥이 되어 우르르 쏟아졌다, 거기도 도저히 접근할수
가 없었다.
"광준씨 광준씨."
누가 뒤에서 악을 쓰며 불러댔다. 정용세였다.
광준이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자 용세가 뒤에 와서
허리를 안고 사당으로 나뒹굴었다.
"안돼요 안돼!"
용세가 악을 냈다,
"이거 놔! 이것 놓으란 말이야. 누나를 살려야돼."
광준이 발버둥을 쳤다.
광준의 발악을 이기지 못하자 동네 사람 서너 명이 더 달려들어 광준을 마당가운데로 끌어
냈다.
"을숙아,을숙아!"
그 순간 비명을 남기고 무당이 불길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당님! 당님을 살려라."
동네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무당이 달려들어간 신당 문앞으로 우루루 몰려갔다.
그러나 맹렬한불길이 접근을 용납할수없다는듯이 동네 사람들의 얼굴을 향해 뿜어댔다. 사
람들은 다시 우르르 물러설수밖에 없었다.
"당님, 당님!"
목이 터져라 아우성을 쳤다. 물통의 물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달걀로 바위 치기다. 불길은 물을 먹고 더 거세어지는것 같았다.
무당은 불길 속에 뛰어든 뒤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심방들이 울며 아우성쳤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어떻게 할수가 없었다. 참으로 처절한 모습
이었다. 불길이 무섭다는것은
알았지만 이처럼 어마어마한 위력을가졌다는것을 사람들은 처음으로 실감했다.
인간의 힘이 얼마나 미약하고 보잘것 없는것인가를 느끼게 해준것이다.
오랜 세월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백순조 무당이 검붉은
물질의 혓바닥에 삼켜지는 처참한 모습을 대책없이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더할수 없이 비참했다.
지상에 연옥을 옮겨놓은듯한 한밤중 탈무골의 이 비극은 먼산에 동이 틀 무렵에 막을 내렸
다.
식당이 있는 건물은 기와 지붕까지 완전히 내려앉은 뒤에야
불이 꺼겼다.
방새도록 미친 사람처럼 날뛰던 동네 사람들은 완전히 허탈한
상태로 검은 잿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불에 그을린 얼굴 같았다. 눈에는 핏발들이
서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동네 사람들은 아직 불꽃이 남아 있는 잿더미를 뒤지지 시작했다. 백순조
무당의 시체를 찾기 위해서였다.
거의 두세 시간이 겉려 사람들은 완전히 타 버리고 뼈만 남은
시체 하나를 찾아섰다. 무당 백순조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그 뼈를 정중히 다루며 멀쩡하게 남아 있는 행랑채로 옮겼다.
심방들은 눈물도 말라버린듯 울지도 못했다.
잿더미를 뒤지던 사람들은 맹렬한 불길 속에서 견뎌낸 놋촛대며 놋그릇, 그리고 부처님상을
갖아냈다. 곧이어 신당의 지하부분에 해당하는 곳에서 또 하나의 시체를 찾아냈다.
지하실에 있었기때문에 완전히 타지 않아 형체는 그을린채로 조금 남아 있었다.
여자였다. 광준은 그 시체가 을숙누님이라고 단정해다. 얼굴형제는 알아볼수 없었으나 누님
이 틀림없다는 확실한 신념을
가질수 있었다.
그것은 혈육끼리만 가지고 있는 영감인지도 모른다.
"누나,을숙누나."
동네 사람들이 들고 나온 시체 위에 없드리며 광준이 몸부림쳤다.
시체의 그을음과 광준의 얼굴이 뒤범벅이 되었다. 사람들이
광준을 뜯어말리고 시체를 옮겼다.
"김형, 정신 차려요. 그 사람이 누님인지 아닌지 모르잖아요."
정용세가 옆에서 광준을 부축하며 위로했다.
광준은 마당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날이 이제 완전히 밝아 하늘이 푸른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듯 눈이
아프도록 청명했다.
광준은 정신이 번쩍 드는것 같았다. 벌떡 일어섰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허탈한 모습으로 앉고 서고 한 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광준은 시선을 한 바퀴빙 돌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정자가
보이지 않았다.
광준이 뛰어가 행랑채 방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도 정자는 보이지 않았다.
정자가 누웠던 자리에는 이불이 얌전하게 개어 있었다. 간밤에 마지노선으로 그었던 성냥개
비의 줄도 그대로 있었다.
광준이 다시 나오려고 하다가 머리맡에 놓인 이상한것을 발견한다. 조그만 노트였다. 정자가
늘 백 속에 떻고 다니던 노트였다. 광준은 급하게 노트를 집어들었다. 마치 누가 빼앗아가기
라도 할것처럼 접어들고 얼른 표지를 보았다.
"김광준씨에게"
노트에는 얌전한 글씨로 그렇게 씌어 있었다. 평소에 광준이
보았을때는 아무 글씨도 없던 표지다.
광준은 황급히 노트의 표지를 넘겼다. 거기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꼼꼼하게 볼펜으로 시작
되어 있었다.
"김 광준씨
김선생님이 라고 부르지 않고 김광준씨 라고 하는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어쩐지 선생님보다
는씨라고 하는것이 한결 가까운
사람 같아서입니다.
우선 말씀드리기 전에 밝혀둘것은 이것이 광준씨와 나와 펜으로나마 나누는 마지막 대화가
된다는것입니다.
광준씨가 이 글을 읽고 있을때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것이기 때문입니다.
광준씨는 왜 제가 이런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을것입니다.
제가 광준씨를 처음만난것은 한 달쯤 전 서울 김회장님의
아파트에서 였습니다. 경찰관이 입회한 무거운 공기 속에서지요.
솔직히 말해 그때 저의 심정은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약 한 달 동안 광준씨와 함께 생활하고 여행하는 동안 저는
너무나도 달라졌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 있었습니다. 마침내는 그 변화가 제 스스
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보니 제 자신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처음 김광준씨를 향한 저의 감정은 김을숙이라는 여자의 동생이란것밖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꾸미고 있는 거대한 음모의 한 소도구로밖에 느끼지 않았습
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지는 김광준이 라는 사람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로
인해 내 목숨까지 버려야 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광준씨는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수 있는 엘리트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고학을 하다시피
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엘리트들의 필수 코스인 미국 유학을 하고 거기서 학위를 받아 금
의환향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지한테는 별로 달갑지 않은 시시한
인생의 주인공이었지요. 그러나 김을숙씨는 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김을숙씨 이야기는 뒤에 하기로 하고 우선 광준씨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그러한 엘리트 중의 한 사람인 광준씨에게 떳떳치 못한 가문에서 태어나 사회에 크게 두각
도 나타내지 못하고 남의 하잘것없는 심부름이나 하는 저 같은 사람이 눈에 뜨였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광준씨를 관찰하는 동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광준씨에게 끌려들어가고 말았습
니다. 최면술에 걸렸다고나 할까.
범인을 찾겠다는 광준씨의 그 집념이라든지 너무나 순박하고
어떻게 보면 저돌적이기까지 한 그때묻지 않은 순수성이 저를
최면술의 노예가 되게 했는지도 모르지요.
때로는 무관심한 척하기도 하고,때로는 너무 자상하기도 하고, 그러나 남녀가 지켜야 하는
예의는 어떤 경우도 꼬박꼬박 지켜 주시던 사람이었지요. 흔히 남녀간의 예의를 지킨다고
하면 찬바람이 날 정도로 절도와 거리를 두지만, 광준씨는 그렇지 않있습니다. 우리 사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늘 적당하고 끈적끈적한 접근을 저한테 해오기도 했지요. 어떤때는 저를
당황하게 할정도로 순진한 애정의 표시를 하기도 했지요. 저처럼 세상살이의 이것저것을 다
경험하면서 때묻을 대로 묻은 감정을 가지고있는 사람은 광준씨의 그 철없이 보이기도 하는
애정의 표시가
그토록 마음을 들뜨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깜짝깜짝 놀랄때가 많
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엉뚱한 일에 크게 흔들린다는 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거기서부터 문제는 생긴것입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광준씨가 좋아지고, 곁에 있고 싶었
고, 관심을 끌고 싶었던 거예요.
처음엔 제 감정을 제가 비웃었어요. 천하의 곽정자가 유치한
사랑놀음에 빠겨드는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광준씨를 만난지
열흘이 채 안 되어서 저는 광준씨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것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날부터 제 감정은 누구도 매어둘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고 세상사에 도통
하다고 자부하던 제가 그때부터
저를 원망하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광준씨를 아끼고 싶고 사랑해 주고 싶은 저의 심정은 이 순간
까지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알량한 사랑때문에 저의 음모는 산산조각이 난것입니다.
아니 산산조각이 난것이 아니라 제가 산산조각을 내버린것입니다. 그렇게라도하지 않으면
저는제 심정을 이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삼류소설에서 사랑을 위해 자기목숨을 불태운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흔히 읽어 왔지요. 그
런데 진짜 사랑을 위해 제 목숨을 버리는 일이 저한테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광
준씨."
여기까지 읽고난 광준은 담배를 피워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평소에 생각할 수 없었던 정
자의 모습을 보는 것같았다. 정자가 그런 절실한 감정으로자기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
하니 연민의 정이 불끈 솟는것 같았다. 정자의 음모라니.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광
준은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다시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김을숙이라는 여자. 그 이
야기부터 하기로 하지요. 김을숙씨와 제가 같이 지내는 사년동안 저는 참으로 여러가지일을
많이 겪었고 생각도 많이 하게되었습니다. 김을숙씨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완벽한 여자였
습니다. 가난한지베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남이 겪지 않은 모진 시련을 겪으면서도 비뚤어지
지않고곧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일찍 인생과 학문에 대해 눈뜬 여자입니다. 여자가 완벽하다
는 것을 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첫째. 꿋꿋한 정신력입니다. 세파에 시달리면
서도 미래를 향한 집념. 그것은 김을숙씨에게서 누구나 느끼는 점입니다.외경스럽기까지 한
장점입니다. 그 정신력으로 그는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여자의 정조튿 끝까지 지켜온것입니
다.
둘째, 그는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그의 미모 앞에 모든여자들은 열등감을 느끼지 않
을수 없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 못생긴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김을숙씨 앞에서는
질투 같은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셋째, 김을숙씨는 예절 바르고 너그러운 인격의 소유자입니다. 그가 학계나 여성계나 사교계
에서 여왕처럼 군림 한것은 그의 고결한 인품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 그는 탁월한 학자입니다. 민속학에 대해서는 대가의 경지를 이루어가는 성숙단계에 있
었습니다.
다섯째, 그는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뒷바라지를 즐겁게 했으며, 손아래 사람을 거느리는데도 흐뭇한 정감으로 대했습니
다.
이와 같이 완벽한 여자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의
사람이었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로 하여금 그냥 있을수 없게만든것입니다.
김을숙씨가 화려한 모습으로 사교계에 등장했을때 수행원으로 따라간 저 같은 사람은 열등
삼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제가 김을숙씨와 처음만난것은 학문적인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저는 김을숙씨의 개인 비서로 전락하고, 집에서는 가정부로 전
락해 버린것입니다.
물론 김을숙 자신이 저를 그렇게 취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주위 사람들은 모두 저를 그렇게 보았습니다.
화려한 모란꽂송이 곁에 붙은 하잘것 없는 잎 하나가 저 같았습니다. 저는 김을숙씨가 솟아
나면 솟아날수록 비참해졌습니다. 저는 열등감에 견디다 못해 마침내는 그 꽃을 망가뜨리고
싶었습니다.
벌레가 먹게 하고 시들게 하고 , 마침내는 꺾어 버리려고 한것입니다.
광준씨는 저의 이 심정을 도저히 이해할수 없겠지요.
하지만 광준씨가 활달하고 야망 있는 여자였다면 이해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는 원래가 황당무계한 꿈을 잘 꾸고 살았습니다. 저는 이세상 뭇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
상이 되고 싶은 욕망에 불타는 여자 였습니다.
이곳저곳에 잘 뛰어들고, 무절제하게 남자도 사귀었습니다.
광준씨는 제가 정숙하고 얌전하고 순진한 처녀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 점에서 저의 연기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김을숙씨와만나 일 년이 채 안 되던 어느 여름이었습니다.
우리는 장충동의 조그만 한옥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사귀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
다.
광준씨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잘 생긴 인물에 서글서글한
성격이 있습니다,
그는 저와 결혼하자고 매달렸습니다.
어느날 김을숙씨가 외출하고 없는 틈에 그 사나이가 찾아왔습니다.
우리들은 즐겁게 차도 끓며마시고 점심도 지어먹고 하면서 마치 신혼살림이나 차린듯 즐거
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저녁 무렵 우리는 대청마루에 나란히 누웠습니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 껴안
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김을숙씨가 외출에서 돌아오나 우리의
모습을 본것입니다.
김을숙씨의 그때 표정은 지금도 몸서리쳐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증스럽고 추한 모습을 본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겁이 나서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김을숙씨는 당장 두 사람 다 이 세상에서 없어지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거리의 여자도 아닌 곽정자가 이런 부도덕한 행동을 할수 있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녀는 저의 어머니처럼 당당했습니다. 김을숙씨가 너무 지나치게 화를 내는 바람에 그 사
나이는 정신을가다듬지도 못한채 허둥지둥 대문 밖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때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도망치다시피 달려가던
사나이가 골목에서 큰길로 나서 다가 그만 트럭에 치어 그 자리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의 저의 심정은 광준씨도 이해할것입니다. 김을숙씨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 일을 두고 김을숙씨는 저한테 큰 죄를 지었다고 늘 사과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부터 제가 김을숙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라고 해서 김을숙씨 같은 저명한 여류명사가 되지 말라는법도 없는것 아니겠습니까?
저만 왜 늘 김을숙씨의 그늘에가려서 하잘것 없는 잎사귀
노릇만 해야 합니까?
저는 그 사나이를 잃은 뒤 방황하는 심정을 가라앉힐수가 없었습니다. 김을숙씨 몰래 이남
자 저남자를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워낙 저의 천성이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김을숙씨 주변에 있는 남자를 유혹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표면에서 느낀 열등감을 그늘에서 보복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미모에는 꽤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에 그 일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저는 우선 김을숙씨의 기둥이요 후원자인 장통적 거상그룹
회장을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김을숙씨의 심부름으로 장통석 회장을만나러 갔다가
마침 점심때라, 점심을 사달라고 슬쩍 말을 건넸습니다.
장회장은 웃음을 얼굴가득 담으며 선선히 응했습니다.
우리들은 빌딩 옥상의 아늑한 별실에서 점심을 즐겼습니다.
장회장은 줄곧 탐욕스런 눈으로 저의 몸매를 흘끔흘끔 보는것
같었습니다.
"미스팍은 올해 몇인가."
장회장이 이렇게 물었을때 저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서른둘이요."
나이를 일곱 살이나 올려서 얘기한것은 순전히 장난기였습니
"아니끼 그게 정말인가? 스물서넛밖에 안돼 보이는데..."
장회장은 눈이 둥그래졌습니다.
우리들은 그뒤 몇 번 저녁을 같이 했습니다.
나는 장회장을만날때면 일부러 나이든것 같은 차림을 하고다녔습니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 김을숙의 흉내를 낸것이라고 뒤에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은 김을숙씨 몰래 호텔이며 별장을 드나들었습니다.
이십대의 발랄한 숙녀와 점잖은 그룹 총수의 밀회였지요.
저는 삼송리에 있는 그의 별장에 자주 돌렸습니다. 별장지기들은 저한테 끔직히 공대를 했
습니다.
저는 마치 상류사회의 여왕이 된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룹 총수의 사모님이
된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삼송리 별장에 나타날때는 저도 모르게 위풍당당하게 중년부
인의 행세를 했습니다.
김을숙씨 몰래 김을숙이가 된듯한 쾌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거기서 복수의 쾌감 같은것을 느꼈던것입니다.
광준씨가 김을숙씨와 장통석 회장이 놀아났다고 생각한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김을숙씨도 저와 같은 인간인데 그렇게 탈선해 보고 싶은심
성이 왜 없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김을숙씨의 그 믿바닥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제가 대신 해
주었다고 생각할수도 있지요. 이건 독선입니까? 글쎄요. 맘대로 생각하세요.
어쨌든 저는 여기서 쾌감을 얻은뒤 더욱더 김을숙씨 행세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제가 김을숙씨가 된듯한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김을숙씨를
더욱 타락시키고 싶은 심정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다음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접근해 오는 남궁현을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
다. 그이는 천성적인 바람둥이니까
누구한테라도 추파를 던지는 인물 아닙니까?
남궁현이 조민희를 이미 짓밟을 대로 짓밟았다는것을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궁현이 나를 짓밟게 한것입니다. 저는 김을숙을 대행하는 여자니까 남궁
현이 저를 농락하는것은 김을숙을 농락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지도 않은 환상이 라고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그일에서 여러가지 쾌감을 얻을
수 있었답니다. 우선 뛰어난 페이니스트인 남궁현 국장의 달콤한 사랑이 좋았구요, 다음에
이것이 김을숙에 대한 복수라는 쾌감을 얻었습니다.
뿐 아니라 그 새침때기 조인희의 애인을 빼앗았다는 성취감 같은것도 있었습니다.
남궁현과 어울린 저는 그를 따라수정궁에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광준씨가 알다시피 수정
궁은 겉으로는 민속요정이지만
속은 노름꾼이 들끓는 타락의 소굴이랍니다.
우리들, 우리들이란 저와 남궁현과 장통석 회장, 주인성씨 등을 말합니다. 어쳤든 우리들은
가끔 그곳에서 노름으로 스릴과
인생의 묘한 일면을 맛보며 지냈습니다.
물론 김을숙씨가 우리들의 이러한 뒷면 생활을 알 턱이 없지요.
남궁현이 이때 주인성의 약점을 잡아 공금을 탕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남궁현의 경리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광준씨한테
권했죠. 이것은 제가 이런 이면을 알고 있었기때문입니다. 그시점에선 남궁현을 우선 교도소
에 집어넣어 놓아야 할 이유가
있었기때문입니다.
광준씨 정말 미안해요.
저는 김을숙을 타락된 인간, 다시 제식으로 말하면 인간다운
인간을만들고 싶었습니다. 완벽한 인간이란 이 세상에 존재할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을숙씨 자신이 변모하지 못한다면 제가 대역으로 변모시킬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이 김을숙의 진짜 면모는 이런사람이었다는것을
알면 얼마나 분해하고 놀라겠어요.
어쨌든 저는 그 뒤도 김을숙의 역할을 계속했습니다. 남궁현과 함께 산부인과에 찾아가 중
절수술을 받은것도 물론 제짓입니다.
남궁현은 제가 자기의 아이를 임신했으니까 같이가야 한다고
우겼을때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실운 그 중절로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아이가 남궁현의
아기인지 아닌지는 저도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광준씨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저는 원래가 그런 여자랍니다."
여기까지 읽고 난 광준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곽정자라는 여자가 그렇게 깜찍하게 사람을 속일수 있었다는것이 무섭기만 했다.
광준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물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노트의
두께로 보아 아직 절반도 얽지 않은것 같았다.
"광준씨!
저는 병원에서도 물론 김을숙의 이름을 댔습니다. 온갖 인간적인 일에 김을숙의 이름을 다
기록해 놓고 싶었습니다.
뒤에 광준씨가 중절수술한 진찰권을 을숙씨의 방에서 발견했지요. 그것은 우연히 발견된것
이 아닙니다. 제가 광준씨의
눈에 뜨이게 해두었던것입니다.
광준씨의 눈에 뜨이게 한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어떤은행의 사직동 지점 통장에서수백만 원을 넣었다 뺏다한 김을숙씨의 통장을 본 일이 있
지요. 그것도 제가 해놓은 일이 랍니다.
광준씨를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제가 김을숙의 대역을 했으니까 그렇게 할수밖에 없는일 아녜요.
솔직히 말하면 김을숙씨는 화투장을만져 본 일이 없는것은
물론이고, 그 혼한 고스톱도 원수처럼 여긴 사람이랍니다.
저는 제가 김을숙이 될수 있다는 생각을 나중에는 확실히 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김을숙
을 없애야 한다는 망상에 이르게
된것입니다.
나의 애인에 대한 복수. 세상 사람들에게 가정부 취급을 당한복수. 퍼펙트 우먼에 대한 질투
같은 거였다면 이해가 되겠지요.
한가지 덧붙여 둘것은 제가 쓰고 있던 무속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 말입니다. 그것도 실은
김을숙씨가 써놓은 논문이랍니다.
저도 무속에 관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만 도저히 김을숙씨를 따라갈수가 없었습니다. 그
래서 그 학문에 관한 일도 제가
대역을 하기로 결심했었죠.
이러한 저의 음모는 잘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음모를 엉망으로만들어 버린것은 바로 광준씨
입니다.
완벽하게 타락된 한 여류를 제거하고 내가 그 자리에 올라설수 있다는 확신을가지고 있었거
든요.
일이 잘못된것은,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광준씨가 미국에서 돌아와 아파트로 찾아오던 날입니다.
하필이면 그날 돌아올것이 무어란 말입니까? 광준씨가 어느날 온다는 예고만 있었던들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면 그일까지도 대수로운것은 아닙니다.
광준씨와 제가 범인을 잡는답시고 각각 동상이몽을 꾸고 있던 한달간이 문제였습니다.
저는 수많은 남자들과 사랑을 나누어 보았지만 광준씨 같은
바보멍청이는 처음 보았습니다. 이런 별종의 인간도 세상에 존재하는가 할정도였습니다. 그
생각이 마침내 광준씨를 사랑하는 불꽃으로 타올랐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범할수없는 순수
하고 깨끗한 사랑을가지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곽정자답지 않게, 이 무슨 못난 생각인
지 모르겠습니다.
광준씨. 이야기를 마저 끝내야겠지요."
여기서부터 시간에 쫓겨던지 글씨가 거칠어 읽기에 힘들었다.
"처음 광준씨를만났을때는 광준씨를 이용할 생각이었지요.
동생의 입으로 누님의 위선적인 생활 이면을 세상에 폭로하는일. 이 얼마나 아이로닉한 일
입니까?
그래서 누님의 사생활에 관한 힌트를 하나씩 하나씩 제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만월이 되는 날 밤 인시에 저를 죽인다는 협박장 사건을 기억하시불. 그것은 제가 저한테
보낸 연극이었습니다.
그 협박장을 타자해서 보낼때부터 제 생각은 흔들리기 시작한것입니다. 저는 광준씨가 너무
나 집요하게 김을숙 사건을 추적하는 데 놀랬습니다. 놀랐다기보다는 접이 덜컥 났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방해하려고 협박장 사건을 꾸며냈습니다. 발신지도 회현동 우체국을 택한것
은 거상그룹의 장회장을 끌어넣어
초점을 흐리게 할 심산이었지요.
하지만 지금 생각으론 꼭 그 이유때문만은 아닌것 같아요.
광준씨를 제곁에 꼭붙어 있게 하고 싶기도 하고, 광준씨로부터 동정을 받고 싶기도 했다고
할수 있어요. 저한테 관심을 돌리도록 했다고나 할까요.
탈무골에서 우리가 보름달 밤을 보낸 날을 기억하시죠. 광준씨가 제 옆방에서 자다가 정용
세씨 집에가신 날 밤 말입니다.
그날 밤에 제가 괴한한테 습격받아 죽을 뻔했죠. 인시의사건 말입니다. 그것도 제가 연극을
한것이었어요.
정말 속여서 죄송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한테 어리광을 부렸다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
니다.
그러나 서울의 우리 아파트에서 불을 끈 자동차에 치어 하마터면 죽을 뻔한 일을 기억하시
죠. 그건 진짜랍니다.
광준씨가 너무 사건의 핵심에 접근해가자 저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이러다가 지의 음모가 탄로나 나는게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광준씨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마침 경리 부정 관계로 곤경에 몰린 남궁현 국장이 광준씨를 없애야 한다고 강력히 주
장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타의반 자의반으로 광준씨를 밖으로 유인해 간것입니다. 불을 끄고
쏜살같이 달려온 그 차는 남궁현의 차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왜 제가 광준씨를 구했는가 하고 의심하겠지요.
그건 저도 몰라요. 다만 광준씨가 죽는 모습을 볼수가 없었어요.
갈대처럼 흔들리는것이 여자의 마음 아니겠어요.
이제 그 일을 다 털어놓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군요. 정말입니다.
광준씨에게 제가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 드리지요.
광준씨가 그처럼 알고자 하던 광준씨 집안의 비밀을 제가
알려 드릴께요.
저는 처음에 김을숙씨를 따라 탈무골에 왔다갔다 하면서 탈무골 사람들과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저 혼자 김을숙씨 심부름으로 자주 다녔죠.
거기서 저는 광준씨 부모의 비밀을 알게 되였숭니다. 광준씨 아버지와 어머니가 탈무골에서
추방당한것은 광준씨 아버지와 무당인 백순조의 치정때문이었습니다.
총각때부터 사모해 오던 백순조를, 광준씨의 아버지는 결혼후에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정사는 남의 눈을 피해 물레방앗간에서, 갈대 숲 속에서, 그리고 무성한
대나무 숲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엔 동네사람들이 어렴풋이 짐작만 했으나 확증을 잡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 불장난 끝에 백순조 무당은 마침내 임신을 하고
남의 눈을 속여 어린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광준씨의 어머니는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었지만,
하늘 같은 남편이 하는 일이라 순종만 했습니다. 백순조 무당이
낳은 아이는 광준씨의 어머니가 낳은 아이로 둔갑이 되었고, 동네 사람들은 미심적어하면서
속야 넘어갔다고 하더군요.
광준씨는 백순조 무당이 늙었지만 빼어난 미모가 어딘지 남아 있다고 느꼈을것입니다.
그 미모가 누구를 닮았다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지요?
백순조 무당이 낳은 그 아이가 바로 광준씨의 누님인 김을숙회장입니다.
놀라셨죠? 그러니까 광준씨와 김을숙씨는 이복남매랍니다.
광준씨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 여인입니다. 쉽게 체념할수 있고 운명에 순종하고 인내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그 비밀을 눈을 감을때까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백순조 무당과 광준씨 아버지의 미련은 몇해 동안 계속되어
동네에 해괴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백순조 무당이 세습 무당의 직권으로 광준씨 일가에
추방령을 내리고만것입니다. 알다시피 탈무골에서 당님의 명을 어길 자가 그 누가 있겠습니
까.
저는 이 비밀을 가지고 백순조 무당과 흥정을 시작했습니다.
김을숙씨가 탈무골을 전통 무속 보존 마을로 지정 받으려고 할때, 장통석 회장은 그곳의 우
라늄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해가 엇갈리기 시작했지요.
저는 삼송리 별장의 호화스런 침대에서 장회장의 품에 안긴채 제안을 했날. 무당을 움직여
땅을 모두 무당이 사들이게 한뒤 넘겨줄테니, 그 대가를 치르겠느냐고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장회장은 영악한 장사꾼 아닙니까. 선뜻 제 제의를 받아들이더군요.
저는 그때부터 무당을 협박하기 시작했지요. 내 말대로 해준다면 엄청난 부를 누릴수 있지
만 그렇지 않으면, 김을숙씨의
출생 비밀을 밝혀 무당과 그 딸인 김회장을 모두 파멸시키고 말겠다고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스캔들에 약한것은 여자인가봐요.
무당은 순순히 제 제의를 받아들이더군요. 그리고 무당 자신보다 김을숙의 사회적 위치를
더 걱정했어요. 그게 핏줄인가봐요.
실제로 김을숙씨를 망신시키겠다고 을러대자 한결 더 효과가 있었거든요.
백무당은 이런 괴로운 연유때문에 갑자기 무속 마을 지정을
반대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지요.
그뿐 아니라 김을숙씨를 다시는 탈무골에 못 오게 하기 위해
타지의 새는 죽는다는 둥하고 주술을 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우습죠. 그러나 누구나 자기 혈육과 관계되는 일이라든지 사랑과 관계되는 일에는
약해진답니다.
자기 출생의 비밀에 관해 김을숙씨는 처음엔 모르고 있었지요.
백순조 무당은 김을숙이 자기가 낳은 딸이란것을 알았지만,
김을숙은 무당이 자기 생모란것을 몰랐던 거예요.
이러한 비밀을 처음 나한테 알려 준 사람은 김칠병 이장의 부인이었담니다. 김이장의 부인
은 제가 하고 다니는 일도 대강 알고 있었지요. 제가 섭섭찮게 선물이며 돈도 건네줬으니까
요.
하지만 최근 들어 광준씨가 점점 사건의 핵심으로 접근해가자 저는 제일 먼저 김칠병 노인
의 늙은 마누라쟁이가 무엇인가
입을 놀릴것 같았습니다.
제가 대곡읍에서 광준씨를 따라가지 않고 거기 남겠다고 한것은 실은 조그만 음모를 꾸미기
위한것이었습니다. 저는 김칠병 영감 내외의 입을 막을 방법을 궁리했지요.
광준씨가 탈무골로 혼자 간 뒤 저는 몰래 호텔을 빠져나와
택시를 대절해 타고 탈무골에 숨어 들었어요. 그리고는 김칠병
노인 집에 불을 지르고 몰래 탈무골을 빠져나왔던 겁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것이 방화라는 단서가 나와서 저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불이난 다음 날 추경감이 현장에서 주웠다는 성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들어 있
던 그 호텔 마크가 붙은 성냥이랍니다.
제가 당황해서 그것을 현장에 그냥 던지고 온것 같아요.
음흉한 추경감은 그걸 제게 슬쩍 보여 주었습니다. 아무래도
추경감은 제가 한 짓을 다 알고 있는것 같아요. 저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암담함을 느꼈습
니다.
이제 더 달아날 곳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로 한것은 이것이 직접적인 동기라고 할수 있죠.
이야기가 좀 빗나갔군요.
저는 김을숙을 납치해서 탈무골의 백무당한테 넘기기로 했지요.
백무당도 자기 딸이니까 죽이기 보다는 그쪽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선뜻 동의를 했습니다.
백무당은 자기가 탈무골의 땅을 다 사들여서 그것을 장통석
회장한테 넘겨준 뒤 김을숙을 내놓겠다고 약속했지요.
그때가 되면 이미 무속 지정 마을이란 아무도 거론할수 없게
되기때문입니다.
저의 음모는 그대로 들어맞는것 같았습니다.
저는 하수인으로 남궁현을 시켰지요. 남궁현은 경리 부정을
비롯해 저한테 여러가지 약점이 잡혀 있어 포로가 되다시피했으니까요.
얼마 전 강형사가 광준씨한테, 처음 아파트에 오던날 핑크색 스텔라 차를 아파트 밖에서 본
일이 없느냐고 물은 적이 있지요. 핑크색 스텔라 차는 남궁현의 차라는것을 그땐 기억해내
지못했었나요?
저는 얼마나가슴이 뜨끔했는지 모른담니다.
남궁현은 내가 시키는 대로 김을숙을 협박해서 탈무골 백무당한테 데려다 주고 왔었죠.
그날, 그러니까 일요일이었지요. 오후 늦게 출발해서 밤중에
탈무골까지 김을숙을 싣고 와서는 무당한테 넘겨 준 뒤 다시 서울로 새벽에 돌아왔던것입니
다.
남궁현이란 사람은 워낙 믿을수 없고 여색을 밝히는 사람이라 김을숙이 변을 당했는지 어쨌
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가 김을숙을 협박해서 탈무골까지 끌고가자면 순순히 말을
들었겠습니까?
정말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함니다.
일요일날 제가 집을 일부러 비우고 난 뒤 남궁현이 혼자 있는
김을숙의 아파트를 찾아간것입니다.
남궁현은 그때 경리 부정 관계가 곧 터질 위기에 있었기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이른 상태였
지요. 저는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해 남궁현을 쉽게 조종할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말을 듣지 않으면 김을숙이 무당의 사생아라는것을 폭로해서 망신을 시키겠다고 협박
을 했겠죠. 여자한테는 치명적인
협박이었을 집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명성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생겼으니까요.
저는 남궁현이 그 협박만은 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쥐도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습니까?
남궁현 같은 자가 천하의 절색이며 넘볼수 없는 숙녀를 아무도 없는 아파트에서만나 그냥
두었으리라고 쉽게 생각되지 않는군요. 이것은 모두가 제 죄입니다."
광준은 글을 읽어나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노트는 이제 두어 장박에 남지 않았다.
"광준씨. 용서하세요. 저는 이렇게 나쁜 여자랍니다. 도저히
광준씨 같은 사람의 순수하고 해맑은 사랑을 받아들일수 없는여자랍니다. 마음도 육체도 모
두 악마한테 짓밟힌 그런 여자랍니다.
저는 제 계획이 뒤틀리기 시작하고 있다는것을 며칠 전부터
알았습니다. 광준씨가 제정체를 아는것은 시간 문제 였다는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추
경감이나 강형사는 저를 앞질러가고 있다는것도 알았습니다.
저는 그들에 걸린 새의 신세가 되어가고 있었던것입니다.
그렇죠. 저는 한 마리의 나쁜 불새였습니다.
제 별명이 오리 히프라는것을 들은 일이 있으시죠. 오리도
새는 새 아닙니까?
광준씨.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김을숙 회장님운 드물게 보는 훌륭한 여자였습니다. 지금쯤은 신당
의 불길 속에서 재로 변해 있겠지만 참으로 아까운 여자였습니다.
아직 그 말씀을 드리지 않았군요. 저는 비록 실패는 했지만
제가 처음 시도했던 일을 이루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지경에 이른것은 오로지 이 탈무
골이라는 마을과 무당 모녀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끝내는 대로 당집을 태워 버릴
작정입니다.
저 혼자만 죄를 지고 이 세상을 하직할수가 없기때문입니다.
광준씨
그동안 짧은 세월이었지만, 참으로 잊을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당신의 곽정자로부터"
노트는 이렇게 끝나 있었다.
광준은 노트를 덮으며 참으로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곽정자가 그렇게 철저한 이중인격자였다는것이 우선 몸서리쳐졌다.
사람이 어떻게 생겼으면 그토록 거짓과 진실을 마음대로 연출할수 있었단 말인가?
광준은 그동안 정자한테 속야 누님을 나쁜 여자로 생각해 온자 기가 부끄러웠다.
지금은 불에 탄시체가되어 안방에 누워 있는 누님이 너무도
안타깝고 불쌍했다.
분노와 연민이 한꺼번에 머리와가슴을 꽉 채웠다.
"김선생. 여기 계셨군요."
누군가가 방문을 열며 큰소리로 말했다. 듣던 목소리다.
추경감이 었다.
"여기서 혼자 뭘 하고 계십니까? 빨리 좀 나오십시오."
추경감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 탈무골까지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늘 빙그레 웃던 그 모습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채웠다. 아주 딴 사람처럼 보였다.
"언제 오셨습니까?"
광준은 노트를 윗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일어섰다.
"다 끝난 뒤에 뭣하러 나타나셨나요?"
광준이 볼멘 소리로 내뱉었다.
"다 끝나다뇨. 그럴까요?"
추경감은 비틀거 리며 방을 나오는 광준의 손을 갑아 주었다.
"자. 빨리 대곡 읍내로 갑시다. 여기 일은 정복 경찰관들이 맡을 겁니다."
"대곡읍엔 뭣하러 갑니까?"
"가보면 압니다."
"곽정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차차 말씀드리지요."
추경감은 대문 밖에 세워 둔 지프차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광준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꽥 질렀다.
"누가 말입니까?"
"살인범 곽정자 말입니다."
"글쎄 가면서 얘기 합시다."
추경감이 광준을 밀다시피 해서 지프차에 태웠다.
"안녕하심니까 김박사님."
강형사가 지프차 안에 미리 타고 있다가 인사를 했다.
"너무 늦게들 오셨군요."
광준이 불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빨리 오기도 하고 너무 늦게 오기도 했죠."
강형사가 퉁명스럽게 말하는 동안 지프차는 늙은이 해소병 앓는듯한 엔진 소리를 내며 출발
했다.
무당 집의 입구에는 앰뷸런스며 정복 경찰관들이 여러 명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어린이 어른 할것 없이 모두 이곳에 모인것 같았다.
차가 출발하자 추경감이 광준한테 담배를 권했다.
광준이 담배를 받아들자 강형사가 재빨리 성냥불을 그어 댔다.
"김선생을 서울 방배동 아파트에서 처음 뵙 던 날 내가 담배를
권했죠. 그때 김선생은 못 피운다고 했습니다. 왜 거짓말을
했습니까?"
추경감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때 제가 담배를 못 피운다고 한게 거짓말이란것을 알았습니까?"
광준이 담배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왼손 인자의 손톱이 니코틴에 찌들어 있는것을 보았습니다. 선생이 그때 거짓말
을 했기때문에 선생의 누님 피살
신고를 믿어야 할지 어쩔지 망설이게 했습니다. 왜 그때 거짓말을 했습니까?"
"제가 담배를 못 피운다고 한것은 확실한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땐 담배를 피울 기분이 아니었기에 무심코 한 말입니다. 그러나 누님의 시체를 본것은 절
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광준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것을 느꼈다.
지프차는 막 탈무장 다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건 사실입니다."
추경감이 나직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누님이 이곳 탈무골에 와 있었습니까?"
"그럴 이유가 있었지요. 남궁현이 모두 자백을 했거든요. 하지만 남궁현은 곽정자의 하수인
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죽일 놈 같으니. 천벌을 받고 말것입니다."
광준이 다시 흥분해서 말했다.
"남궁현은 그날 아침 일찍 아파트 십사동에 숨어들어와 있었습니다. 열두 시쯤 되어 곽정자
가 외출을 하자 남궁현이 천백삼호실로 느닷없이 뛰어들어갔죠. 일요일이라 잠옷바람으로
휴일을 즐기고 있던 김을숙 회장은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죽일 놈 같으니."
광준이 추경감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저주에 찬 욕설을 퍼부었
다.
"그래서 남궁현은 곽정자가 시킨 대로 협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파트 방에는 지금
남궁현 자신과 김을숙씨밖에는 없고 자기가 어떤 짓을 해도 말릴 사람이 없다는 엄포부터
놓기 시작했죠."
"잠깐! "
광준이 추경감의 말허리를 갈랐다.
"왜 그러십니까?"
추경감이 광준을 돌아보았다.
"그 대목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누님 이 그 짐승 같은 남궁이란 자한테 어떤수모를 당했는
지 안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얘기는 제발 그냥 놔 두싶시오."
그것은 광준의 진심이었다.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누님에게 불결한 이미지를 남기고 싶
지 않은 심정이었다.
"알겠습니다. 남궁현은 정자가 시킨 대로 그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위협 했지
요. 자기를 따라가지 않으면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리겠다고 했지요. 무당의 사생아에다가 을
숙씨아버지는 파렴치 하고 부도덕한 사람임을 폭로하겠다고 윽박질렀지요. 그래도 김을숙씨
가 순순히 말을 따르지 않았지요. 말을 따르지 않은것이 아니라 오히려 준엄하게 남궁현을
꾸짖고 인격적인 모독까지 주었지요. 김을숙 여사처럼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라면 있을
법한 이야기죠. 남궁현이 약이 올라 마침내
곁에 있던 절구통의 절구공이로 김여사의 머리를 후려쳐 버렸지요. 거실에 장식품으로 놓여
있던 그 옛날 절구통과 절구공이를
보았을 겁니다."
광준이 기억을 더듬었다. 응접 탁자로 쓰고 있는 옛날 궤짠옆에 낡아 백 년은 됨직한 절구
통이며 키 같은것이 있었다.
"김여사가 정신을 잃고 소파에 그냥 쓰러져 버렸지요. 공교롭게도 그때 김선생이 문을 열고
들어온것입니다. 남궁현은 인기척이 나자 급히 부엌의 다용도실로 숨어 버렸지요. 김선생은
그때 누님이 기절해 있는 모습을 보고 죽었다고 생각한것입니다.
그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죽었다고 생각하겠지요. 절대로 무리가
아닙니다."
추경감은 이 부분에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런데 그 녀석과 누념은 어떻게 그 아파트를 빠져나갔습니까? 그때 입구를 봉쇄하고 전
아파트내의 가가호호를 다 방문하지 않았습니까?"
광준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남궁현과 김을숙 여사를 보고도 놓친것입니다."
추경감이 한탄하둣 말했다.
"내가 바보였어요."
장형사가 말을 받았다.
"그때 내가 아파트의 전가구를 샅샅이가가호호 방문을 했지요. 그런데 한 군데서도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사가는 집이 하나 있어서 그 집만 열심히 체크를 했지요."
"그러면 남궁현과 누님이 현관으로 걸어나갔단 말입니까?"
"그렇게된 셈이지요."
강형사가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가가호로 방문하고 있을때 사층의 일호실 즉 오백일호를
방문했을때의 일입니다. 그곳은 사층이란 말을 쓰지 않고 바로
오층이 라고 하니까 사실은 사층이죠. 그 오백일호실에는 사십대 초반
쯤된부부와 어린 여학생, 즉 중학교 일학년쯤 됨직한 여학생
세 식구, 그리고 가정부 등 네 명이 살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날이 일요일이라 모두 집에
있더군요. 그런데 그때 부엌에 어떤
남녀가 서 있었습니다.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와이셔츠 바람
이고, 여자는 머리에수건을 푹
둘러 쓴 채 앞치마를 입고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내가 물었더니위층인 육백일호에 사는 부
부인데 쓰레기통이 막혀 들여다보러 왔다고 했습니다. 아파트의 쓰레기 처리 통로는 제일
위층에서부터 마지막층까지 한 통로로 연결돼 있으니까 있을수 있는 일입니다. 더 구나 바
로 위 층 사람들이 라면 바로 밑층에 와서 이 상 유무를 점검할수 있는것입니다. 그때 저는
문득 쓰레기통으로 시체를 흘려보낼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그 집을 뛰쳐나와 지
하 하치 장으로 달려가봤습니다. 그러나 거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중대 실수
였습니다. 그 육백일실에 산다는 부부를 자세히 관찰하지 못한것이 제 잘못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육백일호실에는 그때 아직 입주자가 없어 비어 있는 집이었답니다. 그 십사동
에 있는 총 사십가구 중 아직 분양이 안된 아홉가구중의 하나가 육백일호실이었숩니다. 그
부부로 위장한 사람이 남궁현과 김을숙 여사였단 말입니다. 나 참 기가 막혀서..."
강형사가 정말 기가 막힌듯 입맛을 쩍쩍 다시며 말했다.
"그렇다면 오백일호 사람들은 바로 위층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도 몰랐다는 말입니까?"
광준이 믿기지 않는듯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아파트라는 곳이 그런 곳입니다. 위층뿐 아니라
같은 층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서로 모르고 지냅니다. 얼굴을
모르고 지낼 정도가 아니라 서로가 자기 정체를 감추고 살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말에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지요. 이 말은 죽은 지 오랩니다. 특히
아파트가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이웃과는 두껍고 단단한 콘크리트로 벽을 쌓아 버린것이지
요. 마음의 문까지 꼭 닫아 걸어 잠근것입니다. 이웃집에서 사람이 죽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
습니다. 천구백삽십년대. 미국의 뉴욕 어느 아파트촌 입구에서 한 젊은 여자가 괴한에게 살
해되고 있었는데,
아파트 주민이 모두 창문으로 그 장면을 내다보면서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가운데 죽은 비극이 있었습니다. 아파트란
이렇게 비정한 점이 있습니다. 그 오백일호 사람들이 육백일호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는것은
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남궁현이 육백일호에 산다니까 그렇게 믿은것뿐입니다."
추경감이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때 남궁현은 김을숙씨를 협박하는데 성공해서 김을숙씨가 그런 연극에 협조하도록 한것
입니다. 김선생이 김여사의 거절한 모습을 보고 파출소에 뛰어가 신고하고 오는 동안에 김
을숙씨가 깨어나고 남궁현은 김을숙씨를 협박해서 그런 연극을
한것입니다. 두 사람은 현관의 통제가 해체된 뒤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 남궁현의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해서 탈무골에 간 것입니다."
광준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 경찰에선 처음부터 누님이 피살된것이 아니라 납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수사를 하다가 금방 우리들의 실수를 발견한것이지요.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왜 저한테는 감추고 있었습니까?"
광준이 화를 냈다.
"미안합니다. 그 점은 여기서 사과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강력 한 배후 조종 용의자로 곽정
자를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김선생과 곽정자가 사랑에 빠져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진실을
얘기합니까?"
추경감이 비로소 미소를 띠며 말했다.
"뭐라구요?"
"아아, 농담입니다. 우리는 김여사의 소재를 찾기 위해 곽정자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는 자꾸 김선생님을 미행해 다닌것 같았습니다만 실은 곽정자를 미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였다. 광준 일행이 탄 지프차는 대곡 읍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고는 곧 병원 앞에서 멎었다. 김칠병 노인이 입원해 있던
병원이었다.
"아니 여기는 왜 왔습니까?"
광준이 차에서 내리며 추경감과 강형사를 돌아보고 물었다.
"곧 알게 됩니다. 김선생이 만나볼 사람이 있습니다."
추경감이 앞장 서서 광준을 데리고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 병실 앞에 와서 섰다.면회 금지라는 붉은 글씨가 붙어있었다. 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정복 경찰관이 추경감을 보자 거수경례를 했다.
추청감은 본척도 않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광준에게 들어가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광준은 엉접결에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맞은편에 링겔 주사를 찾고 누워 있는 여자를 발견
했다. 광준이 다가섰다.
"아니?"
광준은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명상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여자는 김을숙 누나였다.
"누나! "
광준은 자신도 모르는 새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어릴때
늘 부르던 누나 라는 말이 튀어나왔던것이다.
"누님, 지예요. 광준이에요."
광준은 뛰어가 김을숙의가슴에 엎어졌다.
김을숙은 천천히 손을 뻗어 광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주루룩 홀러
내렸다,
광준은 손으로 김을숙의 눈물을 닦아 주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광준의 눈에도 뜨거운 눈
물이 홀러 김을숙의 모습이 아물아물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한참동안 응시했다.
"누님이 살아 있었군요. 정말 살아 있었군요."
광준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 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한것이 됫기가 전혀 없었다. 무척수척해져 있었다.
"어떻게 해서 여기 와 계신 겁니까?"
한참만에 광준이 눈물을 닦고 물었다.
"어젯밤에 추경감이 나를 그 신당의 지하에서 구출해 줬어. 난
그곳에 같혀 있었거든. 이제 아무 걱정 말아라. 내가 구출된 뒤에 거기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렸다고 하더군."
김을숙은 마치 남의 일인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때야 광준은 추경감이 한 말의 뜻을 알았다. 자기가 너무
늦게 왔다고 하자 너무 빠르기도 하고 너무 늦기도 했다는 그 말뜻을 새길수가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김을숙은 고개를가로 저었다.
"빨리 서울로 올라갑시다. 이곳은 이제 지긋지긋해요."
광준의 그 말에 김을숙은 아무 대 담도 않고 한참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서울에 다신가지 않는다."
김을숙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광준이 물었다.
"당님이 불에 타 돌아가셨다면서. 그러면 탈무골은 누가 지킨단 말이냐? 나는 무당의 딸이
야. 내 몸에는 무당의 피가 흐르고 있어. 내가 제이십구대 세습 무당 자리를 이어받아야 해.
그건 나의 숙명이야. 우리의 당골판을 그냥 비워 둘수가 없어."
"예?"
광준은 하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그때 추경감이 병실로 들어왔다.
"자, 김여사님 좀 쉬게 우리 나갑시다."
김광준은 추경감을 따라 나오며 궁금하던것을 물었다.
"그러면, 탈무골 식당에서 타 죽은 여자는 누굽니까?"
"그건 곽정자가 아닐까요?"
"예끼 곽정자가 왜 거기서 타 죽었단 말입니까?"
"글쎄요. 제풀에 꺾여 불 속에 날아든 불새가 아닐까요? 우리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답니
다."
추경감은 주름투성 이 얼굴에 깊은 주름을 지으며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깊은 연륜을
느끼게 하는 표정 임에도 그의 얼굴은 밝고 티없는 동안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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