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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

by Casey,Riley 2023.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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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勳  章


                                          이 외수
                      


          

       [1] 묵은 日記帳

    내  아버지의 별명은 미친개였다. 덕분에 내게 붙여진 별명은 미친 강아지
  였다. 억울했지만  나는 학교에서 곧잘 놀림을 받았고, 자주 내 얼굴은 머큐
  롬 칠로 장식되어졌다.  그러나 밖에서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나는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누설하지 않았다.아버지의 극성이 싫어서였다.
  만약 누설하면 결과는 뻔한  노릇이었다.  그날로 누구 한 사람 아버지의 그 
  유명한 박치기에 앞니 몇 대는 족히 부러지고 마는 거였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대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간혹 아버지
  가 말이라도 걸게되면 어물어물 대꾸해 주고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었다. 
  당연했다.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리면 아버지는 무조건 박치기로 해결하려 
  들었으니까.
    나는 세상에서 제일 지겨운 사람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술을 무던히도 좋아했다. 마당에 송장메뚜기가 한 마리 뛰어다녀
  도, 
    저기 술 안주 한 마리가 돌아 다니는구나, 잡아 오너라. 
  하고 명령할 정도였다.
    사실 아버지는 여러 가지 동물들을 술 안주로 삼았다. 먹어서 죽지 않는다
  고 생각되면 모두 술 안주로 삼는 것 같았다. 그 중에서 특히 아버지가 좋아
  한 것은 뱀이었다.
    엄마가 병으로  죽고부터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자주 엄마의 무덤을 찾아 
  갔는데 그 때마다 아버지의 손에는 소줏병 두 개가 쥐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소주를 엄마보다 더 좋아했던 것은 아닐까.
    원일아 술 안주좀 잡아 오너라.
    미리 준비 해 온 안주가 다 떨어지면  아버지는 내게 사냥을 명령했다. 산
  에는 여러가지 안주들이 살고 있었다. 풀무치, 방아깨비, 새 세끼, 뱀, 도라
  지, 더덕, 두릅--- 이런 것들은 소금만 있으면 날것으로도 아주 맛있는 음식
  처럼 아버지의 입 속으로 들어 갔다.
    아버지, 거미도 돼요?
    그러나 거미는 맛대가리 없어, 였다.
    나는 독사건 물뱀이건 도마뱀이건 뱀이라면 무조건 잡아다 바쳤다. 흡족한 
  얼굴로 칭찬해줄 아버지의 얼굴을 생각하며 나는 땅꾼처럼 뱀을 찾아 헤매곤 
  했었다.
    아버지는 틈만 있으면 훈장을 닦았다. 훈장은  언제나 순금의 광채로 번쩍
  거렸다. 그것은 불행하고 어두운 아버지의 생애 속에서  유일한 위안과 빛으
  로 존재하였고, 그 유일한 위안과 빛을 아버지는 사람마다에게  자랑하고 싶
  어하였다. 아버지는 훈장을 닦기 전 언제나 손을 씻었으며 매번 희고 부드러
  운 헝겊을 새로 준비하였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그 훈장을 만질  수가 없
  었다.  훈장은 소형 철제 금고 속에 보관되어 있었고 금고 번호를 아는 사람
  은 아버지 뿐이었다.
    아버지는 단 한 가지 노래밖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요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으로 떨어져 간
    전우여 잘 자거라.

    괴로우나 즐거우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부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노래  소리만  듣고도 아버지의 기분이 어떤지 금방 알아 낼 수 있었
  다.누구네 가게라도 때려 부수고 돌아오는 날은 완전히 노래가 박력 있었다.
  그러나 남에게 무시당하고도,  힘이 모자라 그냥 돌아오는 날은 노래가 아닌 
  울음이었다.
    아버지는 외팔이었다. 육이오 때 잘려 버린 거였다.
    아버지는 집에, 손님만 오면 나를 시켜 술을 받아 오게 하고, 술이 벌겋게 
  오르기만 하면 큰소리로 무용담을  늘어 놓았다. 맨손으로 인민군 다섯 명을 
  박살내 버렸다는 이야기. 아버지는 특히  맨손을  강조했지만 대개 손님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면 반드시 아버지는 훈장을 꺼내 보였다.
    만약 이야기 도중에 손님이 바쁘다는 핑계로 돌아가 버리면 아버지는 으례 
  나를 불렀다. 그리고 아까보다는 약간 맥빠진 소리로 그 무용담을 끝까지 들
  려 주고야 말았다. 무슨 고지를 탈환하고 무슨 부대를  몰살시키고,  마침내 
  맨주먹으로 인민군 다섯 놈을.... 아 나는 몹시도 지루 하였다. 그러나 만약 
  이야기 도중에 꼼지락거리기라도 한다면, 사내세끼가 왜 이렇게 참을성이 없
  어, 소리와 동시 볼따구니에서 번쩍 번개가 이는 거였다. 
    아버지는 왜 그리 혼자 있기를 싫어했을까. 계모가 우리집에 와서 살기 전
  까지 나는 마음놓고 딱지치기 한 번을 못해 봤었다. 학교 가서 공부하는  시
  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내 시간의 전부를 아버지와 함께 보내야 했었다. 아버
  지는  좀처럼 밖에 나가지 않았다. 줄곧 집에서 술을 마셨다. 그러나 겨울은 
  달랐다.
    겨울은 아버지의 계절이었다. 겨울에 아버지는 비로소 집을 벗어나 활동하
  는 것이다. 
    아버지는 소문난 노름꾼이었다. 겨울에 아버지는 항상 넉넉한 돈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지방으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가 돈을 잃었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한 손으로도 화투를 마술사처럼 자유자재
  로 주물렀다.
    니 새낀 눈치가 빠르니까 이  애비가  화툴 어디다 감추는지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다. 자아 잘 봐라.
    아버지는 가끔 나를 앞에 앉혀 놓고 속임수를 연습하곤 했었다.
    어느 놈을 감춰 주랴.
    척 부채꼴로 화투 몇 장을 펴 들고 아버지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내게 말
  했었다. 그러면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아버지가 펴든 화투 중에서 가장 그
  림이 예쁜 화투 하나를 가만히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좋오아.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손을 가볍게 한 번 움직였다. 움직이
  면 부채꼴로 펴져 있던 화투 몇 장이 가지런하게 손아귀로 들어가 쥐어졌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이미 내가 짚었던 화투는  소리도 없이 어디론가 사
  라지게 되는 거였다. 단 동작 한 번에 아버지는 화투를  손아귀에  정돈하고 
  동시 내가 짚었던 화투를 귀신같이 감추어 버리는 거였다.
    나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가슴을 두근거리며 가만
  히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던 그 예쁜 그림의 화투 한 장을 처음 몇 번은 찾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마치 소년 보안관이 된 기분으로 아버지의 몸
  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없었다. 아버지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는 갱처럼 
  허옇게  웃으며 득의 만만해 하였다. 아버지는 그럼 그 한 장의 화투를 어디
  에다 감추어 두었을까. 흐흐.... 뭐, 아버지 맘대로지.
    무안하게도  내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기도 했고, 요강 속에 빠져 있기도 
  했고, 때로는 숫제 문  밖에 나가 있기도 했다. 정말 아버지 맘대로였다. 아
  버지는 한 번 감추었던 곳에는  절대로  다시 감추는 법이 없었고, 아버지가 
  실수를 하지 않는 한 나는 결코 감추어진 화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어느 겨울 새벽 아버지는 커다란 가방에 돈을 가득 넣어 가지고 들어와 나
  를 깨웠다. 가방속에 들어 차 있는 돈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내가 다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계속 소리내어 웃고 웃었다.
    캴캴캴. 으핫핫핫. 흐흐흐흐. 낄낄낄낄. 우헤헤헤. 히히히히...
    아버지는 계속 소리내어 웃으면서 가방을 끌어 안고 방안을 빙글빙글 돌았
  다. 웃음이라는 웃음은 한꺼번에 모조리 웃어버릴 것처럼 아버지는 오래오래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그리고 웃을 힘이 다 빠져서야
    햐햐햐햐...
    하는 묘한 웃음으로 끝을 맺었다. 하여간 그날 아버지는 최고로 기분 좋아
  했고 나도 공연히 마음이 들떠서 아무 일도 못했다.
    그 후 얼마 안 지나 우리에겐 아주 멋 있는  집이 생겼고, 이어 계모와 계
  집애가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조금은 해방될 수 있었다. 밥과  빨래와  청소로부터는 
  완전히 해방될 수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는 마음이 썩 좋은 사람으로 돌변해 
  버렸다. 대단히, 대단히 신나는 일이었다.
    일요일이면 언제나 계모가 나와 계집애의 손목을 잡고 교회로 갔다.  계모
  는 주일 학교 반사(班師)였다. 애들을 모아 놓고 아주 열심히 그리고 상냥한 
  목소리로  기도와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쳐 주었다. 가끔 쉬는 시간이 생기면 
  애들과 함께 숨박꼭질도 하고 집짚기놀이도 하고 공기놀이도 하며 놀아 주었
  다. 애들은 모두 계모를 좋아했다.
    그러나 웬지 나는 계모가 서먹서먹했다.집에서나 교회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것이 또한 서먹서먹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찬
 송가는 하나도 없었고, 베드로,  요한,  야곱, 유다, 다윗, 베들레헴, 요르단, 
 겟세마네, 그리스도.... 들과도 나는 별로 친해져 있지 않았다.
    내게 있어 교회는 무조건 재미 없는 곳이었다.  교회에서 계모가 가르치는 
  기도와 성경과 찬송가를 배우는 것보다 들판으로 나가 잠자리를 잡아서 꼬리
  를 잘라 버리고 거기에 풀잎을 꽃아 시집을 보내거나, 개구리를 껍질벗겨 모
  닥불을 훌훌 구워 먹는 일이 한결 재미 있을 거였다. 그러나 만약 내가 기도
  하는 시간을 틈타 몰래 도망쳐 버리고, 그사실을 계모가  아버지에게 이르게 
  된다면 나는 또 입술을 당나발이 되도록 얻어 맞을 게 분명했다.
    나는 교회가 지겨웠지만 아버지가 무서워 찬송하고, 기도하고,  계모의 이
  야기를 귀담아 듣는 체 해야했다.
    그러나  모든 교회의 지루한 것들 중에서 나는 지루하지 않은 것을 마침내 
  한 가지 만들어 내었다.그것은 아주 잠깐 동안 실행되는 나만의 오락이었다.
    예배가 시작되면서부터, 나는 구속당한 기분으로 마룻바닥에 앉아, 나만의 
  오락을 즐길 수 있는 바로 그 시간이 돌아오기를 지루하게 기다렸다. 설교고 
  뭐고 모두 흥미 없었다. 그런 시간은 나에게 한눈을 팔게 만들 뿐 귀담아 들
  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게 했다. 나만의 시간이 돌아올 때까지 나는 앞
  에 앉은 애들의 뒤통수와 기계충 오른 자리와, 구멍난 양말과 빠져나온 엄지 
  발가락과, 애들의 별명이며  그  유래 등에 신경 쓰기를 오히려 즐거워했다. 
  그러는 동안 예배 순서는 바뀌어 갔다. 그리고 점차로 나는 긴장되어 갔다.
    헌금 시간입니다. 모두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윽고 목사님 이렇게 말하면 비로소  내 모든 세포는 눈을 뜨고 술렁거리
  기 시작했다.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한 사람이  매미채같이 생긴 헌금 주머
  니를 집어 들면 나는 마구 가슴이 뛰었다. 나만의 오락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 호주머니 속에는 계모가 헌금하라고 준 동전 한 개가 얌전하게 들어 있
  었다. 나는 일단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 넣고 계모가  준 동전을 만지작거
  리며 흥분을 가라앉히곤 했다. 그러나 헌금 주머니가 내 앞에 당도하면 나는 
  계모가  준 동전을 그대로 호주머니 속에 남겨 둔 채 빈 손을  태연자약하게 
  끄집어 내었다. 마치 동전을 쥐고 있는 것같이 손을 꾸며서였다.
    이 순간 나는 침착했다. 침착하게 빈 손을 헌금 주머니에 집어 넣을 수 있
  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를 것이다. 헌금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내 손이 얼마
  나 기계처럼 정확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는가를. 그렇다. 내 손은 헌금 주머니 
  속에 들어가자마자 재빨리 두 개의 손가락으로 집게를 만들어 하나님의 동전 
  한 개를 훔쳐내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나올 때의 내 손은 들어갈 때보다 더
  욱 더 침착하고 태연자약했다.
    그러나 이 오락도 결국 열 번  정도에서 흥미를 잃게 되고 나는 다시금 심
  심해졌다. 그리하여, 또 다른 오락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좀처럼 
  재미 있는 오락은 발견되지 않았다. 교회는 쉽사리 나와 어울려지지 않았다. 
  교회는 내게 있어 타향 같은 곳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얼굴에 희망이라는 것
  을 번들번들하게 칠해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집이었다.  목사와도  집사와도 
  나는 다른 애들처럼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이렇게 심심한 곳으로 나를  데
  리고 오는 계모가 약간은 미웠다. 언제나 나는 전학온 지 며칠 안 되는 녀석
  처럼 겉돌고 있었다. 그저 졸리운 곳이기만 했다.
    마침내 나는 정말로 예배 시간에 잠들어 버리는 버릇을 익히게 되었다. 따
  라서  언제나 맨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당분간 맨 뒷자리에서 나는 마음놓고 
  잠을 잤다.  어떤 때는 <예배시작>부터 <돌아갑시다. 재미 있는 시간이 벌써 
  지났네>까지 잔 적도 있었다.
    겨울이 되자 나는 또 언제나 난로 뒤에 앉게 되었다.더욱 졸음이 잘 왔다.
  특히 목사님의 그 느린 목소리는 나로 하여금 졸음을 금치 못하게 했다.
   어느 겨울 날. 나는 난로 가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
  었다. 난로는 잘피고  있었으며,  목사님의 목소리뿐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나라!
  하는 고함이 나를 화들짝 잠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이 없게도, 
  참으로 어이 없게도 나는 얼떨결에 벌떡 일어섰다. 목사님의  설교는 계속되
  고 있었다.
    다 함께 일어나서 하나님이 앞으로 나아가 우리의 영혼을 영생의 피로 씻
  자고 외치면서....
    그러나  여러  애들은 목사님에게 시선을 돌려 모두 나를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애들 사이에 잠시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나는 심한 부
  끄러움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그대로 서 있었다. 이 때 한 녀석이 못 참겠다
  는 시늉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우헤헤헤헤.
    그 소리는 상당히 컸으므로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주시하도록 
  만드는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윽고 여기저기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나 확실히 나는 용기있는 녀석이었다.
    웃지마, 새꺄!
  라고 큰소리로 말했으니까.  제법 화까지 내면서. 물론 나의 이 돌발적인 언
  사에 웃음은 뚝 그쳐 버렸다. 목사님의 설교도 뚝 그쳐 버렸다.
    죽어, 너 새꺄.
    나는 처음에 우헤헤헤 하고 웃음을  터트렸던 녀석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
  인  뒤 돌아서서 그대로 교회를 나와 버렸다.
    그날 밤 나는 아버지에게 호되게, 호되게 매를 맞았다. 그리고 눈 쌓인 마
  당 복판에서 계모가 예배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맨발로 꿇어 앉아 있었다. 
  나는 도망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내 손발과 뭄뚱이를 밧줄로 단단하게 묶어 
  놓았던 것이다.
    아, 그 때의 추위와 아픔을 어떻게 표현하랴. 온 몸은 젖 떨어진 강아지가 
  낯선 집에 팔려 왔을 때처럼 오들오들 떨렸다.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왔고 다
  리가 뻣뻣하게 굳어왔고 마침내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사방에서 겨울의 
  복병들이 이빨을 번뜩이며 나를 노려 보고  있었다. 바람이 몰아닥칠 때마다 
  허이연 눈가루가 내 작은 몸뚱이를 덮치곤 했다.
    이윽고 더 이상 추위와 악으로 맞설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심한 부끄러
  움을 억누르고 아버지에게 빌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듣겠
  습니다.공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절대로 교회에서 졸지 않겠습니다. 헌금.
  ..하고 말하려다 나는 재빨리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마터면  헌금 주머니에
  서  동전을 훔쳐 낸 사실을 말해 버릴 뻔했다. 나는 다른 말을 생각해  내어 
  거듭 말했다.  그러나 방안에서는 기침 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소주를 비운 뒤 내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혼자 따스한 아랫목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을 것 같았다.
    하늘엔 달이 떠 있었다.  달은  차디차고 맑았다. 나는 카랑카랑한 하늘을 
  쳐다보며 아버지를 증오하고 계모를 증오하고 교회를 증오하였다.
    코피가 쉴새 없이 방울방울 떨어지고있었다.  그러나  묶여 있으므로 닦고 
  싶었지만 닦을 수가 없었다. 쓰리고 아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나는 
  고통과 증오로 이를 악물며 내 모든 세포를 독(毒)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독도 잠시 후에는 시름시름 풀어져 버리고 의식조차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주황색 불빛으로 적셔진 방문이 흔들리고, 땅이 점점 기울어지고,
  별들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고....
    나는  자꾸만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정도 시간이 더  지났을 
  때는 아무 것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시야 가득 안개 같은 것만 뿌
  옇게 떠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서 계모와  계집애가 찬송가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가 아련하
  게 아련하게 들려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따스
  하고 찝질한 피가 입안에서 느껴졌다. 
    무슨 까닭일까. 이 때 내가 두 볼에 주르르 눈물을 흘리게 된것은.
   나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찬송가 소리를 들으며 힘 없이 풀썩 앞으로 고
  꾸라졌다.


    원일이가 나이가 한 살 위니까 오빠다. 인영아, 오빠라고 불러라.
    계모가 그렇게 타일렀지만 계집애는  나를  오빠라 부르지 않았다. 오빠는 
  커녕 오, 오, 오, 소리도 하지 않았다.
    내가 중학을 졸업할 때까지 계집애는 내게 한 번도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
  았다. 대체로 차분한 성격이었다. 좀처럼 소리내어  웃는 법이 없었다. 웃을 
  일이 있어도 그저 하얀 이를 조금만 드러내고 잠깐 입가에 웃음을 담곤 하였
  다. 처음 우리집에 와서 살 때부터 줄곧 그랬다.
    (삼삼한 계집애다.)
    계집애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계집애가  하나 우리집
  에 살게 되었다는 것은 무척 기분 좋은 일이었다.
    너 가져, 너 가져.
    나는 무엇이든 계집애에게 주고 싶어 하였다. 미국 잡지에서 오린  천연색 
  사진도, 물새알 같이 생긴 매끄러운 조약돌도, 분홍색 물을 들인 잎맥  표본
  과 책 갈피에 끼워 두었던 여러가지 꽃잎들도.
    그러나  계집애는 결코 그것들을 받지 않았다. 고아원 뒷산에 올라가 떨어
  질 뻔 하면서  꺼내온 때까치 알도, 심 영감네 과수원에서 몰래 따온 복숭아
  도 계집애는 받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계집애에 대해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계모가  없을  때는 계집애를 어떻게 골려 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집안이 텅비어 있던 어느 날, 나는  공연히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계
  집애를 골탕먹일 기회가 온 것이다.
    나는 단숨에 공동 쓰레기장으로 달려 갔다. 그리고 막대기 하나를 집어 쓰
  레기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쓰레기장이지, 참 쓰레기장에 버
  려진 물건들은 지저분했다. 아가리가 벌어진  구두짝,  녹슨 통조림통, 휴지 
  조각, 깨진 그릇, 약병, 사과 껍질, 연탄재--- 들 속에서 드디어  나는 찾아 
  내었다. 계집아이를 골탕먹이기 안성맞춤인 물체 하나를.
    그것은 강아지의 시체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강아지가 아니었다.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죽어 있는 
  시커먼 털의 징그러움이었다. 나는 계집애의 놀라는 모습을 떠올리며 속으로 
  히히히힛 웃었다. 그리고 그것을 종이에 싸들고 숨차게 집으로 돌아 왔다.
    계집애의 방을  가만히 엿보았다. 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가
  슴을 설레이면서 가만히 문을 열었다. 얼핏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야아 너, 이거나 반찬해 먹어라.
    나는 강아지의 시체를 계집애 곁으로 휙 집어 던진 뒤 그것이 장판 바닥에 
  미끄러져 계집애의 무릎에 부딪히는 걸 보며 문을 닫았다.
    ....
    그러나 조용했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순
  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의식하면서, 기절했다, 라고 판단했다. 
  큰일이었다. 아버지 얼굴이 떠 오르고 식은땀이  흘렀다.  오금이 굳어왔다. 
  나는 겁을 잔뜩 집어 먹고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 어, 어....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계집애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방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보라. 한 손에는 강아지의 시체가 들려 있다. 나는 또  한번 당황했
  고,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고, 이어 기가 팍 죽어 버렸다. 계집애는  잠시 나
  를 똑바로 응시하다가 조용히 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침착하게 변소
  를 향해 발을 옮겨 놓았다.
    계집애가  손을  씻고 다시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대로 마루위에 서서 손톱만 자꾸 물어 뜯고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계집애
  를 향해 한 마디를 뱉았다.
    아버지한테 이르기만 하면 죽여 버린다. 계집애.
    그러나 계집애는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버지도 
  계모도 특별한 눈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공갈에 겁을 먹어서 
  이르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중학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 나는 계집애에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계집애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나느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줄였던 술을 다시 늘이기 시작했다.
    육군 상사, 임 성수를 뭘로 보는거야, 새끼들.
    그 유명한 박치기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만성 고질병이  재발하듯 아버
  지의 호전적 기질이 서서히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즈음 아버지는 무슨 공사장 감독 일을 맡고 있었다. 밤이면 밤마다 술에 
  만취되어 집으로 돌아 왔다. 돌아 와서는 반드시 나를 앞에다 꿇여  앉혀 놓
  고 기나긴 연설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그 어떤 연설이든 나는 듣기가 괴로웠
  다.  대개 똑같은 소리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기 때문이었다. 공부를 잘해라, 
  효자가 되어라, 돈을 많이 벌어라, 용감해라, 아인슈타인을, 심청이를, 오나
  시스를, 나폴레옹을, 모두 가져주기를 아버지는 내게 빌었다.
    햐, 새끼가  벌써  이렇게 커 갖구선. 임마, 너는 꼭 성공해서 이 애비의 
  한 쪽 팔이 돼 주어야 한다. 알았지. 알았어, 몰랐어? 알았으면 일루 와.
    아버지는 때로 눈믈을 글썽거리며  내  팔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내 얼굴에 
  꺼실꺼실한 수염을 비비기도 했는데, 그 때만은  아버지가 한없이 순하고 약
  해져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어쩌다 공사장에서 보는 사람들과 집에 들어오게 
  되면 나를 불러 인사를 시키고,
    이 놈이 내 아들이지. 즈이 반 반장이야.
  라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다.
    호오, 공부를 아주잘 하는군요.
  감탄하며 대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 나는 아버지의  거짓말이 발각당한 
  것처럼 무안해 하며 얼굴을 붉혔다.
    공사장에 나가면서부터 아버지는 새로운 피가 끓어 오르기 시작하는 것 같
  았다.  힘이 절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도시락을 들고 대문을  나서면서부터 
  아버지는 박력 있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서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
  버지의 즐거움은 일거리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닌 듯 했다.
    짐작컨대 아버지는  불구의 소외감 또는 열등의식을 해소할 장소를 이제야 
  만나게 된 거였다. 두팔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감독 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의무. 이것들은  아버지에게서  무척 즐거운 일일 수밖에 없을 
  거였다. 나는 가끔 상상해 보았다. 헐렁한 한 쪽 소매를 국토 건설단 깃발처
  럼 나부끼면서 등짐 진 인부들을 향해 거센 말들을 퍼붓고 있는 내 아버지의 
  모습을.
    그깟 박치기 한 대 먹였다고 너무 섭섭하게 생각 마라.
    아버지는 스스로 눈두덩이 부어 오르거나 찢어져 버린 인부들을 데리고 와
  서 술을 샀다.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박치기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여러 층의 나이, 청년도 있고, 중년
  도 있고, 또 아버지보다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
  들에게 술을 사면서 나를 불러놓고 이놈이 내 아들인데 태권도 초단이다, 우
  리 집안은 대대로 장군감만 태어났었다. 이놈이 제일  약골이다,  공부는 썩 
  잘해서 즈이 반 반장 노릇을 하고 있다. 대학을 보내어 검사를 만들겠다, 하
  고 거짓 자랑을 하거나 예의 훈장을 꺼내 놓고 맨주먹으로 인민군 다섯 놈을 
  때려 눕히던 이야기를 꺼내 놓고야 말았다. 그런 밤 우리는 한잠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애비가  취침도 안했는데 이 새끼가 먼저 자빠져 자다니. 군기가 빠졌다. 
  기상, 기사아앙!
    다음 계모를  깨우고 계집애를 깨우고하여 별로 중대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당부하고 학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내게는 판사의 위대함, 검사의 위대
  함, 변호사의 위대함, 고등고시의 위대함을 귀가 아프도록 누누이 설명해 주
  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버지의 열등의식을 해소할 수 있었던 그 공사
  장에서 힘 한 번  못  쓰고 밀려나게 되었다. 인부들이 농성을 벌인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돈을 더 달라, 감독을 갈아 달라--처우 개선.
    그날부터 또다시 아버지는 집에서 군림하게 되었고 조금씩 성격이 변해 가
  기 시작했다.
    누구한테 잘 뵈려구 화장을 하는 게야?
    계모에게는 자주 그렇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군기가 빠졌구나야. 저 새끼.
    나는 툭하면 <대가리 박아!>였다.  이른바 원산 폭격을 시키는 거였다. 장
  래 검사가 될 몸이 장판 바닥에 대가리를 박는 것까지는 그리 눈물겨운 노릇
  이아니었지만, 계집애가 보는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인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창피였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만큼 용기있는  놈은 못 되었
  다. 나는 되도록이면 아버지를 웃게 해 드리려고 노력했다. 정말이지 검사는 
  못 되더라도 규율부장 정도는 되어 드리고 싶었다. 아니면 하다못해  반장이
  라도. 그러나 늘 나는 십등 안팎에서 맴돌았다. 다만 자신 있는 과목이 있다
  면, 미술,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언제나 칭찬을 받아 왔었다.
    일  학년 가을 나는 도(道)교육위원회에서 주최하는 학생 실기대회에서 특
  상을 받았다.  나는 정말 기뻤다. 아버지를 조금은 웃게 해드릴 수 있으리라
  는 계산도 품고 있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얼마나 
  지루했던지.
    대문을 열면서 나는  체중이  약 삼킬로그램 정도는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모두들 집에 있었다.  아버지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아버지의 
  무릎 앞에는 아직도 술이 반이나 남아 있는  소주병이 근엄한 표정으로 놓여 
  있었다.
    아버지 나 상 탔어요, 오늘.
    나는 부끄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리고 상장과 상품
  을 방바닥에 풀어 놓았다.
    어머어.
    계집애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새어 나온 것은, 또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해 
  주었던가. 계모는 내게 맛 있는 걸 사 주겠노라고까지 말했다. 아버지는  한
  참 동안 상장을 읽어 본 뒤, 
    수채화가 무슨 채소 이름이냐?
   하고  물었다. 계집애가 잠자코 있다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물감을 물에 
  풀어서 그린  그림이라고 대충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는 술취한 눈으로 물끄
  러미 나를 한참 동안  쳐다 보았다. 나는 긴장 하면서 아버지의 칭찬을 기다
  리고 있었다. 그으래? 하고 아버지는 말을 시작했다.
   그으래? 고작 환쟁이이나  되겠다,  이거지. 자식이 굶어 죽으려구 환장을 
  했구만. 임마, 검사가 되랬지. 이 애비가 언제 널 보구 굶어 죽으랬냐. 너도 
  자식아. 이 애비 맘을 알아 주긴 다 틀렸다.  그래도 이 애빈 네가 성공해서 
  병신의 몸으로 외롭게 살아온 한을 씻어 주고야 말...딸꾹!

    !u
      
    아버지는 날마다 방에 누워 담배만 피웠다. 그리고  자주 버럭버럭 신경질
  을 냈었다.
    어멈 어디 갔니?
    하루에도 몇 번씩 계모를 찾았다. 찾다가 없으면 나를 시켜  즉시 불러 오
  도록 명령했다. 유난히 신경질이 늘어갔다. 언제나 계모를 곁에 있도록 명령
  했다. 
    (그렇게 하여 사건은 시작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끊었던 술을 모처럼 마셨고, 다시 심한 복통으로 병원에 
  다녀 왔다. 나도 이제 늙었어. 아버지의 그 신음 속에는 알 수 없는  비애가 
  섞여 있었다.
    여보.  당신 다른 데루 한 번 더 시집 가지 그래, 이 병신하고 살기도 이
  젠 지쳤을 게야.
    가끔 계모에게  그런 소리도 했다. 공연한 트집을 잡아 보기도 했다. 다정
  한 말투로 위로해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지나치게 계모에게 신경을 쓰는 거였다. 먹고 싶은 게 
  없느냐, 자기가 지겹게  생각되지 않느냐, 전 남편은 어떠했느냐, 그런 것을 
  묻고 또 물으면서 나중에는,
    당신 정말 다른 데루 시집가지. 아무래도 나보담은 낫겠지 뭘...
  하고 계모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아버지는 점점 병적(病的)으로 계모를 곁
  에 두고 싶어했다.
    (그렇게 하여 사건은 시작되었다.)
    일요일이면 안절부절을 못했다. 망할 놈의 교회, 왜 이리 안 끝나는 거야, 
  하나님이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어멈 오라구 그래--공연히 나만 들들 볶았
  다.그리고 교회에서 계모가 무엇을 하며 누가 계모와 가장 친하게 지내는가,
  목사는 고향이 어디 어디며 나이는  몇 살인가, 목사와 계모가 단 둘이 있었
  을 때는 없었는가, 하는 질문들을 던져  왔다.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아버지
  의 눈은 번들번들 빛을 띠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은 날로 
  집요해져 갔다. 나는 어느 날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어떻게 설명하면 아
  버지의 유도 심문에 걸려 들어서 가끔 교회엘 가서 내가 본  일들을  낱낱이 
  이야기해 드렸다.
    목사는  미혼남(未婚男). 젊고 건강하며 잘 생겼음. 계모는 누구에게나 상
  냥하여 모두들 좋아함. 언젠가는 목사의 옷가지도 빨아 주었음.
    (그렇게 해서 사건은 시작 되었다)
    아버지는 광맥을 발견한 광부처럼 얼굴이 상기되어 이 새로운 사실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어느 놈하고 시시덕거리며 이제 오는 게야. 교회가 빨래터야.
    그날 교회에서  돌아온 계모에게 대뜸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계
  모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아버지를 잠시 바라보았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
  았다.
    때때로 계모는 아버지를 위해 나즈막한 목소리로 기도하였고, 날로 아버지
  는 계모에게 이상한 트집을 잡아 난폭해져 갔다.
    누굴 만났지?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데도 그런 식으로 따졌다. 멀리 갈 때는 꼭 보고토록 
  지시했다. 순 군대식이었다.  만약 제 시간에 귀대치 않을 경우엔 무조건 소
  찌검이었다. 
    팔이 병신이라고 눈도 병신인 줄 아는 게여? 시겔 봐. 어떤 놈 하고...
    공연한 트집 앞에서 계모는 언제나 침묵이었고 아버지는 더욱 극성이었다.
    아버지는 계모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최대한으로 외출을 금했다. 외부 사
  람들의 출입도 금했다. 월부 책장사나 전기  수리공이나 교인들이 대문을 두
  드리면 아버지는 이상하게 눈을 빛내며 계모를 노려 보았다. 그리고,
    늬들은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직접 나가 보고 올 테니.
  하고 살금살금 대문으로 걸어가 밖을 엿보기도 했다.  때로는 형사가 잠복하
  고 있다가 범인을 덮치듯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덮쳐 누르고
    너는 누구야, 뭣하러 왔어, 솔직히 말해.
  하며 혼을 빼 놓는 수도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계모는 교회에도  마음대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변소엘 가는 데도 보고를 해야만 했다. 보고하면  아버지는 
  갔다 와, 하고 태연히 승낙하지만 계모가 나가는 즉시 문구멍으로 밖을 감시
  했다. 빨래를 하러갔다가 늦게 돌아온 어느 날, 계모는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으로  매를 맞았다. 얼굴이 퉁퉁 붓고 입술이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뽑히
  고....
    한 달에 서너 번은 그런 일이 생겼다. 나는 그만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말리다가 내가 얻어 맞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침착하던  계모도 점점 공포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집안은 형언하
  기 어려운 음산함에 휩싸여 있었다.
    날마다 계모의 신음 소리와 비명을 나는 들어야 했다. 방 구석구석에 핏방
  울이 튀어 있었고 그  핏방울은 조금씩 늘어 갔다. 계모는 그래도 열심히 기
  도하기를 잊지 않았다.
    주여, 죄많은 우리를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옵시고...
    그러나 계모는 눈에 띠게  야위어  갔다. 계모가 경영하던 모든 것이 빛을 
  잃어갔다. 화단에는 차츰 많은 잡초가  자라 오르고 마루는 먼지가 부우옇게 
  덮여 있었으며 넓은 마당에는 여기저기 휴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우리는 이 
  질식할 것 같은 패망의 가옥에서 저마다 모진 외로움을  씹으면서 참담한 표
  정으로 일 년을 보내었고, <주여, 죄 많은 우리를>과 <말해. 어느 놈인지 말
  해>라는 비명에서 몸서리를 치며 죽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즈음 계집애는 따로 정해 준 자기 방에, 한구석을 넉넉히  잡아  철망을 
  치고, 거기 철망 속에다 목적을 알 수 없는 흰쥐들을 기르고 있었다. 아버지
  의 광기(狂氣)에 관해서도 계모의 안간힘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백납 같은 표정, 그 침묵의 저변에는 항시 알 수 없는 냉기
  가 도사리고 있는 듯했지만 나는 그녀에 관해 오히려 친근함을 느끼고  있었
  다.
    우리는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난 우리들 나이 또래 중에서 가장 불행한 환
  경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동류항으로 삼고, 너무도 어둡고 습기찬 땅에서 
  재배되고  있는  여러 해 살이 식물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토양에 
  뿌리를 박고 아버지가 부여하는 물을 빨아 올리면서, 그 나태와 무관심의 관
  찰 기록부에 검사 또는  효자의 기대로 커 나가고 있었다. 결국 우리들은 아
  버지의 버림받은 한 생애를  위하여 아버지가 원하시는 꽃을, 아버지가 원하
  는 열매를 만들어 내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우리들은 불량 품종으로 시들
  어 가고 있었다. 계집애와 나는  대체로 말이 없는 가운데 서로의 어둠을 이
  정해 주면서 조금씩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쥐는 왜 기르니.
    병이야, 쥐 기르는 병.
    아버진 외롭다는 거야?
    치사해.
    우리는 무섭게 번식해 가는 그 실험용  동물들에게  날마다 충실한 먹이를 
  던져 주면서 아버지의 헐렁한 팔소매와 계모의 겁에 질린  얼굴을  잊으려고 
  애썼다.
    혈액형이 O형이래. 저 쥐들은.
    아버지는 F형이야. 나는 혈관 속에 피 대신 알콜이 흐르고 있다.
    계모는  이제 실성한 사람 같았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깊은 밤, 고요의 시간에 홀로 마루 끝에 앉아서 오래오래 우는 버릇도 
  생겼다. 그러나  늘 아버지가 무섭게만 구는 것은 아니었다. 계모가 앓아 누
  우면 아버지는 밤을 세워 간호를 해 주었고 손수 부엌에 나가 미음을 끓이거
  나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약을 모아 오기도 했다.
    때로는 계모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는 안 그러겠어, 여보 제발 나를 버리
  지 말아, 눈믈을 흘리면서  애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모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쥐들이 너무 많아졌어, 어떻하지.
    아버지는 나를 꼭 대학에 보내어 검사를 만들겠다는  거야. 붙을 자신 있
  냐고 묻더군.
    검사 보담은 화가가 더 좋쟎아?
    검사가 좋아. 남을 감옥에 쳐넣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 실험용 동물들을 하루 한 마리씩  죽여 나가기 시
  작했다.  나보다는 계집애가 더 잔인한 살해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노끈으로 쥐를 목졸라 죽이는데 불과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면도칼을 집
  어 들었다. 목을 따서 새빨간 피가, O형의 새빨간 피가 순백색(純白色) 털을 
  적시는 것을 냉혹한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처음부터 죽여 왔구나. 너 혼자서.
    이젠 공범이 생겼어.
    고양이를 사서 저 우리 속에 한 번 넣어 줘 볼까?
    아마 고양이는  괴로와 할 거야. 자기가 처음 보는 이 흰 털의 음식물이, 
  먹어서 부작용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느님은 무슨 이유로 내게 이 많은 은
  총을 내리셨을까, 이렇게  한꺼번에  잡아 먹어도 죄가 되지 않을까, 너무도 
  행복해서 괴로와할 거야.
    즉 불행을 확인시켜 주는 거지 뭐.
    쥐를 잔인하게 죽이는 법 몇 가지.
    꽁무니에 휘발유를 적시고 불을 붙인 뒤  들판에 놓아 주라. 밤에 하는 것
  이 좋다. 살기 위해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을  것인가, 지까짓게 달려 봐야 
  불고기지. 이빨을 모두 뺀 다음 상처 난 잇몸에 바늘 두 개씩을 꽃고 아무데
  나 내버려 두어라. 필경은 굶어 죽게 될 것이다. 시체만은  잘  묻어 줄 것. 
  다리에 무거운 납덩이를 매달아 주고 바로 앞에 참기름을 바른 고구마를  놓
  아 주도록. 절대로 입이 닿지 않는 거리에 놓아주어야 한다. 먹기 위해 바둥
  거리다 기진하고 말 것이다. 그 때 불개미 집으로 가지고 가라. 털에는 꿀을 
  말라 놓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조금은 두려움을 느끼며 주고 받았었지만 한 번도 
  실행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흰쥐들이 줄어들자 우리는 살해를 멈추고 다시 번식을 기다리게 
  되었다.
    아버지도 결심한 바가  있었는지 태도를 완전히 달리하여 우리에게도 부드
  럽게 대했다. 계모에게도 부드럽게 대했다. 웬지 옛날의 위용은 사라져 버리
  고 아버지는 아주 양순하기만  했다. 그러나 계모를 감시하는 일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가을이 왔다. 사랑만 하다가 죽은 자의 아름다운 피처럼 사르비아 꽃이 우
  리집 화단에서 피고 있었다. 아침 저녘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 왔고 살갗
  이 아주 깨끗하게 소독되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가을의 풍경을 바라 볼수 있
  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대학 입
  시 준비가 항시 그늘로 깔려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당분간 물감들과 거리를 멀
  리 할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만은 가야 한다는  생각이 시종 나를 지배하고 있었
  다. 아버지의 소망에까지 도달하려면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이
  었고, 남은 석달간은 몇 양재기 코피를 쏟으며 공부한다고 해도 자신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검사가 될 것을 포기해  버렸다. 아버지한테는 미안했
  지만 실력이 없는 데야 어찌하랴. 미대(美術大學)라면 만만하다.
    무슨 일이건 자신 있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 현명한 법이다. 나는 현명하게
  도 미켈란젤로의 후예가 되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러니까 좀 여유가 생겼다.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앞에 대입(大入)이라는 두 글자가  적힌 여러 권의 책
  들을 뒤적거릴 수 있었다. 대입 생물, 대입 영어, 대입, 대입, 대입....
    어느 날 나는 햇빛이 너무 좋았으므로 그 대입들을 잠시 팽개쳐 버리고 잊
  어버렸던 내 그리운 물감들을 찾아 내었다. 물론 실기(實技)도  시험 과목에 
  들어 있지만, 사실 그걸 더 손에 더 익힐 만큼 내 솜씨가 엉성하다고는 생각
  지 않고 있었다. 실기 시험에 대비키 위해 그림을 그리다는 것은  차라리 시
  간 낭비였다. 그러나 이렇게 햇빛 좋은 날 아무런 목적 없이, 다만 그린다는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틀림없는 여유이자 멋이었다.
    나는 이젤을 마당 가에 세워 놓고 화판에 캔트지를 압침으로 부착시킨 뒤, 
  마루 끝에 앉아서 뜨게질에 열중해 있는 계집애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그리
  고  빠레트에 물감을 골고루 짜 놓았다. 물감들은 가을 햇빛 속에 녹아서 저
  마다 고운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붓에 물을 흠뻑 적셔 맑은 색을 만들
  어 낸 다음  아주  경쾌한 기분으로 칠해 나가기 시작했다. 물감은 매끄럽게 
  캔트지를 적시며 곱고  투명하게 흡수 되었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완전히 
  그림에 몰입되어 내 마음까지 모두 붓에 혼합한 뒤, 그 한 폭의 공간을 차지
  한 계집애의 모습을 완성해 나갈 수 있었다.
    계집애는 마치 경험 많은 모델처럼  본래의  자세를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실과 바늘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도 거기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는 것이 분
  명했다.
    그림은 내 마음에 들었다. 이미 공간 속에 들어앉아  뜨게질을  하고 있는 
  소녀는, 계집애를 떠난 가을로 부터 온 한 폭의 완성된 수채화였다. 나는 흡
  족한 마음으로 내가 만들어 낸 색과  소리와 빛들을 바라보면서 휘파람을 불
  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계집애는  좀처럼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와 무릎과 발 밑에는 
  가을의 차분한 햇빛이 흥건하게 괴어 있었다. 시나브로 여린 바람이 불어 왔
  고, 시나브로  불어 온 여린 바람은 계집애의 단발머리를 조금씩만 하늘거리
  게 해 주었따. 계집애가  경영하는  이  가라앉은 시간 속에서 나도 한 가닥 
  실이 되어 그 희디 흰 손가락에 감기고  있었다. 계집애는 이마로 흘러 내린 
  머리카락을 몇 올을 이따금 손으로 걷어 내곤  하면서  말 없이 그렇게 햇빛 
  속에 젖어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고요하고도 고요하고도 고요했다. 만약 정숙한 삼십대의 
  귀부인 하나가 엷은 잠옷을 입고 발 뒤꿈치를 든 채 가만가만  내 곁을 스쳐 
  간다  해도,  나는 그녀의 잠옷자락에서 풀려 나온 실밥 한 가닥이 땅바닥에 
  끌리는 소리까지 골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계집애를 오래오래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계집애가 아주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 내었다. 어쩌면 그녀는  우리집으로 들어오게 된 그날
  부터 나처럼 눈물 하나 가슴에 매달고, 나처럼 황량한  벌판에서  헤매이고, 
  나처럼 아무와도 친할 수 없는 나날 속에 살으리라고 하느님이 귓속말로  타
  일렀던  것은 아닐까. 바로 나처럼..... 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만 그녀
  가 한없이 정다웁게  느껴졌고, 그리하여 마음 속으로 처음 설레임을 가지고 
  몰래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인영아...)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분명히 나는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지 않고 마음 속으로 불렀는데도, 그녀는 마치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가만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나를 건너다 보았다. 아--- 
  그 때 내 가슴을 흘러가던 그 알 수 없는 고요의  강물  소리 잔잔하게 밀려 
  들어 내 온 몸을 적시던 그 음악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그날 계모는 아버지 몰래 대문을 빠져 나가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로 갔다. 
  아버지는 미친 듯이 계모를 찾기 시작했다. 문이라는 문은 모조리  요란하게 
  벌컥벌컥 열리어졌고 동네방네 아버지는 찾아 헤맸다. 물론 교회에도 달려가 
  보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찾아 내지 못했다.
    교회에  마련되어 있는 기도실이라는 방 한 칸을 그저 예배를 보는 교회의 
  실내만 충혈된 눈으로 흝어보고 이를 갈며 집으로 돌아 왔을 것이다.
    아버지는 벼르고 별렀다. 그러나 그날 밤 계모는 돌아오지 않았다. 계모는 
  밤을 세워 기도를 했을 것이다. 지치고 지친 마음으로.
    나와 계집애는  계모가 어디에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결코 아
  버지에게 알려 주지는  않았다.  이틑날 아침에야 계모는 비틀거리며 대문을 
  들어섰다. 그러나 계모는 채 마당 중간에까지도 못 와서 쏜살같이 문을 박차
  고 달려 나온 아버지의 발길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계집애는 다시금 시작되는 아버지의 광기를 바라보다가 철망 속에 갇혀 있
  던 흰쥐들을 한 마리 한 마리 꺼내어 면도칼로 목을 따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를 말리기 위해 마당으로  달려가 전례대로 몇 대를 얻어 맞았
  다. 흔히 한쪽 기능이 마비되면 다른 한 쪽 기능이 마비된 기능의 힘을 대신
  하여 센 힘을 발휘하듯이 아버지의 한 쪽  팔은  무서운 괴력을 가지고 있었
  다. 나는 번번히 마당에 내동댕이쳐졌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계모
  를 구타했다. 물론 나도 필사적으로 뜯어 말렸다. 잠시 후,
    돌연히 돌연히, 계모가 외마디 소리를 날카롭게 내벹으며  무서운  얼굴로 
  땅바닥에서 벌떡 일어선 것은 참으로 오싹한 일이었다.
    죽여라! 이 개만도 못한 짐승 놈아, 너 죽고 나 죽자!
    계모의 눈에서 새파란 광기가 서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최초의 반항,  이 
  돌발적인  사태앞에서 아버지는 멈칫 몸을 굳혔다. 순간 계모는 달려들어 아
  버지의 가슴팍을 단단히 물고 그대로 실신해 버렸다.


    그날 밤 계모와 그녀의 딸은 몰래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나는 상상 할 수 
  있었다. 딸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 걸음으로 대문을 나서는 한 여인의 가날픈 
  어깨와 새벽가를 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고등학교 여학생의 냉혹한 얼굴
  을.
    그녀의 방 철망  속에는 여러 마리의 흰쥐들이 피에 물들어 나뒹굴고 있었
  고, 그것들 중에서 움직이고 있는 놈은 한 마리도 없었다.
    아버지는 며칠 동안  그녀들을  찾아 동분서주 바쁘게 돌아다녔다. 열흘이 
  지나도 그녀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그녀들은 영영 이 불행의 대문을  열지  않을 거였다. 그녀들이 갇혀 
  있던 감옥이, 그녀들의 인생 중에서 얼마나 가혹한  형벌로 그녀들을 학대했
  는가를 하나님도 자세히 알 수 있을 거였다.
    아버지는 이제 훈장을 닦는 대신 칼을 갈기 시작했다.
    이년들!
    갈다가 수시로 마른 헝겊을 가지고 녹물을 쓱쓱 닦아 낸 뒤 칼날을 이리저
  리 뒤집어 보았다.
    칼은 물 속에서 갓 건져 낸 민물고기의 비늘처럼 희게 번뜩거렸다. 그것은 
  아주 싸늘해 보였으며 한 번씩 비늘을 뒤채일 때마다 날카로운  빛살을 쏘아 
  내 눈을 찔렀다.
    이년들. 내 반드시 이년들을 찾아 내어 배를 찢어 간을 꺼내 대문간에 널
  어 놓을 테다!
    나는 경멸하고 있었다. 협오하고 있었다. 증오의 못 깊숙이에서 끓어 오르
  는 아버지의 독기, 그 이기주의적 흥분과 무모한 내 몸짓을.
    아버지는 오직 나의 적(敵)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내 성적표 보호자란(欄
  )에 이름 석 자가 적혀 있다는 사실조차도 싫을 정도였다. 적과 보호자의 거
  리는  너무 멀었고, 다른 의미였지만 동일인(同一人)으로서 내게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년 시절을 거쳐 소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내 가슴 속에 자
  리잡은 모든 슬픔 중 가장 쓰라리고 짙은 슬픔이었다.
    이 개놈의 새끼, 너도 애빌 배반했단 봐라. 눈알을 파내버리고 말테니까!
  
    칼을 갈며 아버지는  그렇게 못을 박았지만 나는 언제나 한 번쯤 아버지를 
  배반하고 아버지의 입에서 후회의 말이 쏟아져 나오기를 간절히 한번 기다려 
  볼 참이었다. 이즈음 나는 공부고 나발이고 다 시들해져 있었다.
    어느 날밤, 나는 아버지가 잠든 틈을 타서 살그머니 아버지의 방에 침입해
  다. 아버지는 코를 골고  있었다.  머리 맡에는 이 홉들이 소주 반병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양복 주머니를 
  뒤적거려 보았다. 얼마간의 돈이 있었다. 내 호주머니로 옮겨 넣었다.
    우리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돈, 한 쪽 팔을 전
  쟁터에 집어 던진 공로로 나라에서 받아 내는 연금과 그  귀신  같은 재주로 
  화투를 주물러 마련한 목돈이 남의 손을 돌아다니며 불어 난 것과 역시 화투
  로 장만했음직한 논밭 몇 마지기로 우리는 잘 먹고 잘 입고 넉넉하게 썼다는 
  점 하나였다.
    나는 장롱 속도 샅샅이 뒤져 보았다. 거기에는 돈 다발 몇 개가 깊이 감추
  어져 있었다. 나는 내일 아침에 일어날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몇 다발
  을 주머니마다 찔러 넣었다. 
    나는 그 다음 도망을 생각했다. 그리고 일어섰다. 그 때 내 눈에 띈  아버
  지의 보물. 바로 훈장이었다. 훈장은 이미 옛날의 광채를 잃고 있었다. 그것
  은 이제 녹슬고 있는것이다. 깊이 잠든 아버지의 가슴 위에서. 아버지는  그 
  엣날의 용맹을 다시 한번 회상하면서 훈장을 꺼내 쓰다듬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을  것이다.  나는 철저하게 잔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미 빛을 잃어서 
  쇳덩이에 불과한 그 훈장조차도 아버지의 가슴에서 훔쳐 내어 버렸다.


    쎄애끼, 너도 박력 있는 사나이구나.
    얌마, 술이나 처먹어라. 박력 있게.
    나와 녀석은 취했다.
    사람들은  술을 왜 마시는  것일까.  이렇게 맛대가리도 없고 취하면 그저 
  흐리멍텅하게 정신을 휘저어 놓는 술을.  아버지, 칼, 술, 뱀, 화투, 돈, 겨
  울, 눈, 핏방울, 사르비아, 가을, 계집애, 흰쥐, 무덤, 뼈, 흙, 가루, 먼지, 
  재, 물, 햇빛, 수채화, 수채화가 무슨 채소 이름이냐. 상장, 대학, 검사, 외
  팔이, 소줏병, 사금파리, 대낮, 빨래, 계모,  교회, 종소리, 아침, 찬물, 살
  갗, 바람, 나무, 집, 처마, 거미, 밤, 어둠, 발소리,  개, 미친개, 미친강아
  지, 쓰레기장, 비명, 도주, 도주, 녀석의 자취방, 아....쓰펄!
    녀석은 우리반에서 가장 악명 높은 존재였다. 정학을 무려  세번이나 받은 
  바 있고, 퇴학을 눈앞에 두고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 실정
  이었다.그래서 녀석은 저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돌아다녔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까이도 꼬시고, 애들도 패주고.... 뭐 인생이란 제멋대로 살
  아야 후회 없는 게 아니냐는 거여다. 공부 따윈 구질구질 하다는 거였다. 나
  와 녀석은 언젠가 한 번 호되게 싸운 적이 있었다. 일 학년 때였다.
    녀석은 원래 인상부터가 맘에 안 들었다. 체격이 다부지고 얼굴이  까무잡
  잡했으며 날카롭게 찢어진 눈이 항시 이물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녀석은  입
  학하면서 완전히 우리를 겁주었다. 호주머니에서 손칼을 꺼내어 칠판에 던지
  면서  앞으로  자기를 많이 귀여워해 달라는 거였다. 녀석의 칼은 정확했다. 
  백묵으로 그려 놓은  접시  크기의 동그라미 속에 영락 없이 들어가 박혔다. 
  써먹는 단어도 생경했다.
    4같네. 학바리 주제에 꼴복 걸치고 부시기 쪼을 수는 없고.
    말하자면 깡패들이나 쓰는 은어를 썼다는 것이다. 감히 녀석에게 맞붙으려 
  들지를 않도록 녀석은 미리 이빨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다. 녀석은 체격이 
  좋은 놈들만 골라서 이른바 깡다구로  때려  누임으로써 자신의 실력 여하를 
  우리에게 확인 시켜 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런  다음 자기가 무슨 멕시코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오만가지 폼을 다 잡으며 학급을 누비고 다녔다.
    똘마이, 어이 똘마이.
    녀석은 누구든 그렇게 불러 놓고 마치 명령하는 투로 말하곤 했었다. 나는 
  녀석이 아니꼬왔다. 언제고 한판 붙어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어야겠다
  고 생각했다. 어느점심 시간이었다.
    똘마이, 어이 똘마이.
    벼르던 차에 기회는 왔다. 녀석이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그렇게 말
  해 온 것이다. 아니꼬와서 원.
    나는 녀석보다 체격도 작았고 어느 모로 보나 약세였다. 그러나 아무도 모
  를 것이다. 내가 얼마나 매에 단련 되어 있는가를. 나는 말 없이  일어섰다. 
  그리고 녀석의 면상을 있는 힘을 다해 쥐어 박았다. 확실히 선공(先攻)은 상
  대를 당황케 하고 상대의 기를 어느 정도 죽이게 만든다. 몸을 비스듬히하고 
  내  곁에 방심한 채 서있던 녀석은 한 방에 풀썩 나자빠졌다. 그러나 녀석은 
  즉시 일어나 맹수같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우리는 협상하여 변소 뒤로 갔다.
    그리하여 싸움은 시작 되었다. 누가 이겼을까. 많이 맞은 쪽은 나였다. 그
  러나 그날로 싸움이 끝나지는 않았다.
    가서 맞은 만큼 돌려 주고 와!
    아버지는  그렇게  명령 했었다. 나는 닷새 동안을 녀석에게 맞았고, 닷새 
  후엔 녀석이 죽사발이 되었다. 녀석은 완전히 기가 질려서 전의를 상실한 눈
  치였다.
    그 후 내게만은 녀석이  친절하게 굴었으며 은근히 자기와 함께 휩쓸려 다
  니면서 싸움질이나 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기
  를 좋아했다. 
    내가 돈을 훔쳐 가지고 녀석의  방문을  열었을 때, 녀석은 충심으로 나의 
  귀순을 환영해 주었다.
    나는 녀석의 방에 틀여 박혀 학교에 나가지도  않고 만화책 나부랑이나 뒤
  적거리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될 수 있는  한 앞으로의 일에 대
  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불안이 목을 숨통 막히게 죄어 왔으니까.
    녀석은 학교에 다녀 와서 내게 몇 가지씩의 정보를 수집해다 주었다.
    오늘 느네 껍데기 왔다 갔어. 널 잡으면 죽여 버린대더라.
    녀석의 말을 들으면 아버지는 하루 한 번씩 학교에 들르는 모양이었다. 그
  러나 잡힐 염려는 아직 없었다. 녀석이 즐겨 찾는 의리라는  것이  배반으로 
  돌변해 버리지 않는 한, 나는 이 침침한 방 구석에서 하루 백 권씩의 만화책
  을 읽어치우며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헐렁한 한 쪽 팔소매를 잊고, 
  나의 견딜 수 없었던 고통과 날마다 나를 목조르던 회의 속에서 벗어나  <우
  리  진도개 만세> 따위와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통속 소설가들의 엄살이
  나 읽으면서, 아버지의 훈장처럼 나도 녹슬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가끔 녀석은  못  생긴 계집애들을 방으로 데리고 왔고 나는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기분으로 계집애들의 살을 만져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시 그런 생
  활들은 또 하나의 어둠이며 발목에 거치적거리는 쇠사슬에 불과했다. 며칠도 
  못 되어 나는 또다시 숨이 막혀 왔다.
    그러던 어느 날,이제는 겨울로 접어들어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던 어느 날.
  채 수업이 끝날 시간도 아닌데 녀석이 황급히 방문을 열어 젖혔다.녀석의 얼
  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무슨 일인가 일어난 것이 틀림 없었다.
    녀석은 한참 동안 숨을  몰아 쉬면서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니? 라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 보았다. 그러고도 상당히 오래 
  머뭇거리다가 녀석은 아주 어렵게 입을 열었다.
    느, 느네 아버지가....어젯밤에...자살...했대. 칼로 모, 목을.....

            
 
                         勳   章(중편)


                                        이 외수

          [2] 가을 會話集

    준희(焌嬉).  친애하는 말띠, 여류 시인(女流詩人)이 되기 위해 날마다 우
  울을 연습하며 사는  아가씨. 지금은 밤이고 밖에는 가을비. 도무지 잠이 오
  지 않아 수면제를 두 알 삼킨 후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어제부터 대학은 문을 닫았고,  이제 휴교령이 해제될 때까지 우리는 매일 
  공휴일입니다. 따라서 아가씨의 색  바랜 빅스톤 청바지를 자주 보기도 힘들
  어져 버렸습니다. 난해하기가 정신병 환자의 낙서(落書)를 훨씬 능가하는 아
  가씨의 시를 읽기도, 그 시를 읽고 악담을  퍼부어 주기도 무척 힘들어져 버
  렸습니다. 
    시인 아가씨.
    가을은 내게 있어 가장 우울한 계절입니다. 가을에  모든 것은 텅 비게 됩
  니다. 가을에 모든 것은 내 곁에서 죽어 갑니다. 나의 빠레트에는  물감들이 
  마르고 붓들은 굳어서 방바닥에 뒹굴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맹목(盲目)
  의 방황을 시작합니다. 방황이라는 말은 듣기엔 유치하고 윤기 없는 사어(死
  語)입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겼을 때의 쓰라림을 나는 압니다.
    다시금  돌아온  가을, 이 방황의 스물 여섯 나이를 나는 어떻게 경영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여행을 떠나볼까 생각합니다.  춘천(春川). 그 짙은 안개의 도시(都市)로. 
  그리고 가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언제쯤  돌아올  지 아직 나는 알 수 없습니
  다. 다만 우울병을 조금은 치료하게 되는 셈입니다. 물론 몇 권의 책은 휴대
  할 것입니다. 예상 밖의 공휴일이 내게 닥치기는 했어도  역시  공부는 해야 
  할 입장이므로.
    시인 아가씨.
    떠나기 전에 아가씨를 한 번 만났으면 합니다. 오는 토요일 오후 세 시 음
  악이 있는 다실 <우륵>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아가씨께 저녁 식사를  대
  접할  생각이고, 만약 나오시지 않으신다면 아가씨께선 푸짐한 저녁 식사 한 
  끼를 손해보는  셈이 됩니다. 원래 시인이란 수시로 굶어봐야 제대로의 목청
  을 가지고 노래를 읊을 수 있다고들 합니다만.
    자, 그럼 토요일까지 말띠여 건강하시기를. 그리고 이 가을 귀밑머리를 스
  쳐 가는 한 가닥 바람,  뜨락에 괴는 식은 금색 햇빛, 눈물겹게 흔들리는 코
  스모스 꽃밭, 들리는 모든 것이,  보이는  모든 것이, 전부 아가씨의 빛나는 
  시를 위해 하나님이 장만해 준 은혜이기를.

    낙서중(落書中), 낙서중, 낙서중.
    낙서는 왜 하는가. 목이 말라서.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지. 물이라는 물
  은 모두 오물이니까. 현대인(現代人). 덜컥덜컥.  비틀비틀. 허청허청. 웅성
  웅성. 죽었군. 자살이야. 대학생은 외로와. 하나님 이로운게  뭡니까.  몰라 
  인석아. 너 하나님 봤니? 응. 어디서? 만화에서. 만화. 금 하지만 보고 싶은 
  것.  대학생이 보는 만화, 즉 돈과 빽과 비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없으면 못 살아. 원 쓰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
  며 나라에  고독하옵시며 고독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고독을 주옵시고, 일용할 우울을 주옵시고, 
  일용할 불행을  주옵시고, 일용할 안간힘을 주옵시고, 안간힘, 안간힘, 안간
  힘을 주옵시고, 안간힘, 안간힘, 안간힘, 안간, 안, 안, 안, 안간힘을,
  휴유---일용할 돈도 주옵소서. 일용할 빽도 주옵소서. 일용할 비굴도 주옵소
  서. 아멘. 용서해 주옵소서. 낙서, 낙서, 준희는 베토오벤을 좋아해. 준희야 
  너는 좋으냐 그 우울한 귀머거리가.담배를 밥에 비벼 먹어 보라. 맛 있을까?
  옛동산에 아지랑이  할미꽃 피면.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홍도야 우지
  마라 여기 돈 있다. 가을비. 배호는 죽었다. 돌아가는 삼각지. 철저한 불행. 
  철저한 고독. 철저한 먼지. 내 사랑아 내 사랑아 영원한 마돈나야. 마돈나가 
  무슨 뜻이냐. 앞으로 30년  후에 주조회사 사원 채용시험에 나올 것임. 외워 
  둘 것. 마돈나란 무엇이냐. 마,  돈, 나. 마, 시고 돈, 내고 나, 가라구. 이
  사해야지. 저놈의 쥐떼들 때문에, 쥐쥐쥐 쥐쥐. 쥐를 잊을 수 있을까. 낙서. 
  잠재의식. 프로이드. 섹스. 처녀는 없다.  처녀 없애기 강조 기간을 설정 하
  라. 카사노바. 안 돼. 대한 가족계획협회. 나는 바둑이 하고 강에 나가서 놀
  았습니다. 바둑이는 포인터 순종이었으므로 절대로  개헤엄을 치지 않았습니
  다. 바둑이는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매우 즐거워 하셨습니다. 복날
  이 내일이지? 죽은 자를 기억 하지 말라.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것은  작고 
  가까이에 존재하는 것. 춘향이와, 재키와,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춘향이. 나
  는  영어를 잘 못해요. 금으로 만든 샌들을 신겨 주어도 원숭이는 원숭이다. 
  엎질러진 물도 담을 수 있는 데까지 집어 담을 수 있다.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는 난다. 바늘 도둑이 택시 강도 된다.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뜯어라. 
  참새가 전깃줄에 두 마리 앉았습니다. 포수가 총으로 한 마리를 쏘았습니다. 
  명중. 떨어지면서 뭐라고 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쳇, 나만 참샌가, 그랬습
  니다. 그러니까 살아 남은 참새가 뭐라고 말했을까요. 역시 모르시는 모양이
  군요. 쟤 아직 덜 죽었대요, 그랬습니다. 이 정도야 일반 상식이죠. 세상 어
  려워졌습니다.  대학(大學)에 온 이유. 화가가 되려고. 화가란 무엇이냐. 굶
  어 죽는 것. 누군가 예술을 위하여 이 황무지에서는 굶어 죽을 필요가 있다. 
  낙서는 낙서(洛書)가 아니라 악서(樂書). 그러나 악서(樂書)를 악서(惡書)로 
  읽어도 무방하다. 낙서 끝.

    유혹하지 마세요, 그런 편지로.
    나도 시인이 되려구그래.
    배가 부르시군요.
    커피 한 잔밖에 안  마셨어. 그것도 일금 오십 원어치. 요즘 커피는 임꺽
  정이 콧물 두 방울 만큼밖엔 안 돼.
    어젠 뭘 하셨어요.
    아무 일도 못했어.
    젊은 사람이 그래서야 되겠어요. 하다못해 이빨이라도 자주 닦으세요. 팔
  에 근육이나 생기게.
    낭비야. 물과 치솔과 치약의...
    어제는 천연색 꿈을 꾸었어요.
    꿈에 뭘 봤어.
    사르비아.
    네 시는 쉬어빠진 구정물 맛이야.
    무식해.
    우리는 수족관 옆에 앉아 있었다. 수족관 속에는 한 마리의 물고기도 살고 
  있지 않았다. 거기엔 화창하게  형광등이 켜져 있었고 열대풀만 무성하게 자
  라올라 가만가만 흔들리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모래는 희고 깨끗해 보였다. 
  가늘고 투명한 플라스틱 파이프에서는 끊임 없이 작은 물방울들이 뿜어져 나
  오고 있었으며, 한쪽 구석에 설치된  빨간 지붕의 서양식 물레방아도 뱅글뱅
  글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수족관의 모든 것은 정지해 있
  었다. 거기엔 무서운 고요가 용해되어 있었다. 한  마리의 고기도 보이지 않
  는 수족관 속은.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으세요?
    국민학교 사 학년 때 내 짝애를 좋아했어. 볼이 굉장히 고운애였지. 날마
  다 손바닥으로 한 번만 만져 보았으면 했었지.
    손발은 늘 씼으셨나요?
    우리 아버지가 보건소 소장이었어.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되고 싶어요.
    어차피 나는 아편을 먹었어. 단연 예술가지. 굶어 죽는  거야. 꼭 검사가 
  돼서 사람들을 감옥에 쳐넣는 일을 거들어 주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굶어 
  죽는 것도 좋아.창자가 깨끗한 상태로 죽는다는 건 얼마나 인간적이냐 말야.
  
    음악 들리세요?
    슈벨트. 우리 말로 번역하면 구두끈이지. 슈, 구두. 벨트, 끈 슈벨트, 구
  두끈. 요절했어. 천재였던가부지?
    베토오벤이 좋아요.
    머리카락  속에  이가 시글시글 할 것 같아서 싫어. 상처한 지 석달 정도 
  된 남자가 일금 천오백원  짜리 창녀와 하룻밤 동침하고 새벽 골목길을 나설 
  떄처럼 표정이 참담한 것까지는 좋아 해 줄 수는 있지만.
    수족관 옆에는 수족관의 네 배 정도는 족히 되고도 남을 커다란 유리 상자
  가 하나 있었고 거기에 담겨 있는 물은 약간 흐려 있었다. 그 속에는 남미산
  (南美産) 청거북 두 마리와 악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놈들은 상당히 흉
  물스러워 보였다. 가죽에다 아무리 고운  색을 칠해 주어도 결코 우아하거나 
  귀여워 보일 것 같지 않았다. 놈들은 졸고 있었다.
    이놈들은 전부 가짜일 거야. 청거북은 무슨  청거북, 저수지에서 건져 낸 
  자리지. 악어도 그럴 거야. 한 이십 년쯤 묵은 도마뱀.
    무엇으로 증명해요.
    우리 아버지는 동물 학자였어.
    금방 겨울이 올 거예요.
    왜 이리 시간이 안 갈까. 저 벽시계는 뻐꾹시계보다 더 지독한 병에 걸렸
  군.
    한숨 쉬지 마세요. 머리카락 나부껴요. 기껏 잘 빗고 왔는데.
    머리카락에 지나친 신경을 쓰는군. 백호로 밀어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면 해가 한개 준희 머리 속에 축소판으로 들어 박혀 한 이백  촉 정도로 
  빛나게 될 거야.
    세상 밝아지겠네요.
    다방은  만원이었다. 거의가 젊은 사람들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담배 연기 
  자욱한 이 다방에  앉아 만연된 이산화탄소를 마시며, 다방 조명만큼이나 그
  늘 끼인 얼굴을 하고 순도  낮은 오십 원어치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
  고 오십 원어치의 시간과 오십  원어치의 의자와 오십 원어치의 음악을 빌려 
  잠시 쉬고 있었다. 레지들이 조금도 웃지 않는 표정으로 통로를 왕래하며 엽
  차와 눈총과 하품을 덤으로 탁자 위에 날라다 주고 있었다.
    밋치겟어요. 글이 안 돼서.
    미치기가 얼마나 힘들다고. 나도 못 미치는데.
    쳇, 자긴 또 뭔데.
    나는 천재야. 무엇이든 실패해 버리는  데 천재지. 요즘 계속 덜컥덜컥이
  야. 어딘가 고장이 난 거지.
    박재가 되어 버린 둔재군요. 난 뭐 요샌 써 볼 글이 없어요. 어느새 나도 
  눈치보며 쓰게 됐나봐.
    무슨 눈치?
    악담가의. 그리고 뭐...
    그녀는 우리 회화과(繪畵科)에서 좀 이질적인 여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
  는 별명이 하족(夏足)이었고, 그것은 남자를  오뉴월 양말 갈아신 듯 갈아치
  우고, 갈아치우고 한다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녀는 회화과에 적을 두
  고 있으면서도 그림보다 글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느  월간 문예지에 
  두 번 추천받은 경력이 있으며 이제 한 번만 더 추천을 받으면 완전히 <시인
  (詩人)으로 시인(視認)된다>는 거였다. 그러나 이 마지막 한 번의  바리케이
  트 앞에서 그녀는 날마다<밋치겠어요>였다. 그녀는 날마다 <밋치겠어요>였지
  만 <아, 나 못 미쳐>였다.
    준희는 내가 먹었어.
    우리  과(科) 녀석들 중에서 정말 식인종 같이 음흉한 귓속말로 내게 경고
  하는 녀석이  서너명 있었다. 그러나 웬지 나는 그 녀석들의 말이 믿기지 않
  았따. 나는 오늘 밤 그녀의 방종을 확인해 볼 심산이었다. 이제 오후 네 시.
    술 한 잔 할테야?
    끊었어요. 간장이 나빠져서.
    다시 붙여.
    엄마에게 물어보고.
    이 때 레지 하나가  하늘색 플라스틱 양동이 한 개를 들고 우리 곁으로 왔
  다. 그 속에는 열대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레지는 그 양동이를 수족관 속
  에 처박았다.
    갑자기 수족관 속은 혼란하게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 십, 아니 수 
  백 마리의 열대어들이 득실거리기  시작했다. 레지는 양동이 속에 들어 있던 
  플라스틱 바가지 속에다 열대어 몇 마리를  담아 남미산 청거북과 악어가 있
  는 유리 상자 속에 넣어 주었다. 그 흉물스러운  남미산 물짐승들은 금방 활
  발한 동작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한 바가지의 열대어들을 
  다 잡아먹어버렸다.
    비싼 음식 먹고 사는군 팔자좋은 놈들이야.
    나는 갑자기 흉물스러운 동물들을 꺼내어 껍데기를 홀랑 벗겨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준희, 내가 저 놈 가죽으로 핸드백 하나 만들어 줄까?
    나는 진심으로 준희에게 말했다.
    그 성의로 공부나 열심히 하세요. 아, 그런데 왜 이리 배가 고플까?
    나는 저 동물들이 지독하게 맘에 안 들어. 건방지게도  지금은 나를 노려 
  보기까지 하는군.
    조심 하세요. 피해망상증 초기 증세예요. 젊은 사람이 왜 그 모양이예요.
  
    도대체 악어를 길러 우리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겠다는 거야.  어쩌면  저 
  놈이 잔뜩 커서 나중엔 손님들에게까지 입맛을 다실는지도 몰라.
    증세가  점점  악화되면 전문의를 찾아가 상의해 보세요. 그런데 왜 이리 
  배가 고플까.
    점심 안 먹었군.
    연탄이 사망해서 빵으로 때웠어요. 내가 무슨 문화인이라고.
    나도 약간 출출해.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보르 작 신세계 교향곡 제2악장이 흐르고 있
  었다. 꿈 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의 멜로디를 마저 듣지 못하고 우리는 
  계단을 내려 왔다.
    어디 악어고기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 없을까? 남미산 악어고기.
    악어에게 왜 그렇게 신경을  쓰실까. 혹시 그 우람해 보이는 모습에 열등 
  의식을 느낀 건 아닐까?
    저 놈이 크면 반드시 꼬리로 유리를 깨뜨리고 나올거야.
    피해 망상증 초기 증세예요.
    밖은 그래도 다방 구석보다는 공기가  맑았다. 길 위에 깔려 있는 가을 햇
  빛은 아직도 약간의 온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어깨와 머리 위에 그 
  온기가 약간 남아 있는 햇빛을 묻혀 가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돈 있으세요?
    은행에서 좀 찾아 왔지. 여행도 가야겠고 해서.
    은행에서 찾았다니까 갑부 아들같이 높아 뵈는군요. 아니꼬와라.
    아버진 선장이었어. 오나시스가 타는 배의...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삐 걸었다. 그 무엇에겐가 바쁘
  게 끌려 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 이 기계와 돈과 안간힘의 시대에서 적
  어도 우리만은 여유를 가지자고 말하면서, 우리는  뻥과자 한개씩을 사 으적
  으적 씹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나도 저 사람처럼 바쁘게 끌려 다녀야 할 것인가.
    내가 캠버스에 문질러 대었던 그 수많은 색깔, 밤을 새워  경영하던 그 한 
  없는 공간, 발버둥, 추구, 시도, 실패와 극복, 이런 것들이 고작  쉽게 밥벌
  이를 하기 위한 인생 연습은 아니었다.
    하늘이 맑았다. 천고마비지절(天高馬肥之節). 실감나게도 나는 말띠인  아
  가씨를 데리고 식당으로 가고 있었다.
    거리마다  식당은 많았다. 그러나 준희의 마음에 드는 식당은 좀체 나타나
  질 않았다. 어마  간판이 도대체 마음에 안 들어, 중앙식당이 뭐야. 또 북경
  반점은 뭐고. 낡았어, 저런 간판은. 저 식당 요리사들은 새롭고 신선한 요리
  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거야. 동화반점, 우리식당, 평양식당,  
  별미관, 순두부집, 모두 마찬가지야, 뭔가 새로운 이름의 식당은 없을까. 준
  희는 헤매었다.
    간판을 먹으려는 거야?
    아뇨, 무언가 새로운 음식을.
    그 음식은 무엇을 재료로 하여 어느 나라 식으로 만든 음식인지.
    나도 잘 몰라요. 하여간 새로운 음식이라는 것 뿐.
    새로운 음식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게 몇 가지 있어.
    뭔대요?
    빈대부침. 모기튀김. 거미구이
    나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상당히 오래 걸어 다녔고, 준희는  의외로 새로운 음식을 강력하게 
  고집부렸고, 마침내 우리는 지쳤다고 말하며 한식집 하나를 선택했다. 그 한
  식집 간판은 <식당 신선로>였다. 한자로 쓰면  틀리겠지만 <신선...>은 새로
  운 것에 가깝지 않은가. 우리는 거기서 음식을 팔아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식당 문 앞으로 걸어 갔다. 이 때였다. 한 사내가 우리 앞을 가로 막
  은 것은.
    선생님들.
    우리는 동시에 흠칫 멈추어 섰다. 사내는 아주 낡은 군복과 군모를 착용하
  고 있었으며 겨드랑이에 목발 한 쌍을 끼고 있었다. 그의 한 쪽 발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즈봉 가달만 헐렁하게 쳐저 있었다. 그는 조금의 비굴한 기색도 
  없이 씽긋 웃으며 우리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사십 대의 건장한 체구였다.
    나는 말 없이 십 원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어 그 위에 얹어 주었다. 그러나 
  이상도 하지, 그 손바닥은 계속 우리 앞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또 
  한 개를 꺼내어 얹어 줬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약간 화가 났으나 참을 수밖
  에 없었다. 그러나 사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흐흐.  이봐요. 젊은이. 이래뵈도 육군 중사 출신이요. 갈매기 하나에 동
  전 한 개이면 비싼가요. 싼가요.
    나는 준희를 돌아다 보았다. 그리고 동전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어요.
    준희는 손지갑을  잠시  뒤적거리더니 동전 한  개를 찾아 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내의 손바닥에 얹어 주었다. 동전은 아주 새것이었다. 그래서 사내
  의 손바닥에 놓이자 대단히 강렬하게 한 번 반짝 빛났다. 사내는 곧 그 빛을 
  손바닥으로 감아 쥐고,
    복 받으쇼
  하고 말하며 돌아섰다.
    식당으로 들어서며 준희는 낮게 웃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저 사람 참 바보예요. 육군  대위 출신이라고 말하면 다이아몬드 한 개에 
  백 원씩은 받을 수가 있는 건데.
    그러나 나는 잠자코 식당 벽에 붙어 있는 메뉴를 읽고 있었다.
    그만 마시세요.
    그러나 나는 계속 마셨다. 주점 안은  무척 붐비고 있었다. 시끌시끌했다. 
  누군가는 계장 욕을 하고, 누군가는 마누라  욕을 하고, 누군가는 타락한 예
  술가를 욕을 하고, 누군가는 저질 연탄을, 누군가는  악덕 운전사를, 욕하고 
  욕하고 욕하면서 더러는 껄껄 웃고 더러는 분노하고, 더러는  우울해 하면서 
  술들을 마시고 있었다. 주점 벽에는 낙서가 거미들처럼 거믓거믓 기어다니고 
  있었다.
    준희는 내가 먹었다.
    나는 오늘밤 그녀의 방종을 확인 해 볼 것이다. 삼 학년이 되면서부터  나
  와  그녀는 가까와졌다. 학보(學報)에 내가 게재한 수필을 읽은 다음부터 그
  녀는 내게 친절해진 것 같았다.
    나는 아직  그녀의 입술에서 어떤 향기가 나는지도 알아 보려고 들지 않았
  었다.
    보이를 하나 꼬셔야 할 텐데.
    그녀는 나와 자주  만나면서 또 다른 시간을 이용하여 이른바 헌팅에 나서
  곤 했었다. 청바지 한  쪽 종아리를 걷어 붙이고 목에는 새빨간 머플러를 나
  부끼면서, 니가 나를 우습게 봤다 이거지, 니가 나를... 하는 노래를 휘파람 
  불며 불량 소녀 흉내를 내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가끔 거리에서 그녀가  번번이 다른 남자와 동행하는 것을 보았었다. 
  그녀의 얘기는 간단했다. <보이>를 만들려고 꼬셔 놓고 보면 사흘도 못 가 <
  뽀이> 같아서 그만두어 버린다는  거였다. <보이>와 <뽀이>는 내가 생각해도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그만 마시세요!
    준희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계속 마셨다. 그리고 
  취기가 어느 정도 올랐을 때 비로소 나는 술잔을 놓았다.
    비틀거리면서 택시를 잡았다. 준희는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밀면서 어디로 갈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파트로 가겠어요. 혼자
    그녀는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미  그  때 나는 하나의 장소를 
  생각해 내었고 그 장소에다 그녀를 밀어 넣듯 그녀의 등을 힘껏 밀어서 택시
  에 태웠다.
    A대학 정문 앞으로.
    나는 운전수에게 말했다. 택시는 서서히 앞으로 밀려 나가  몇  대의 차를 
  비켜 서더니 곤장 A대학이 있는 방으로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미쳤나봐. 이 밤중에 학굘 가게.
    준희는 약간 불안이 풀어진 듯한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오  분도 못 되어 택시는 우리를 대학 정문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내렸다.
    정문은 커다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고 안으로는 쇠빗장이 견고하게 가
  로 질러져 있었다. 그러나 수위실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철문은 쉽게 타 넘어 
  들어가 안으로 걸린 고리를 벗길 수가 있었다. 
    대학은  어둠 속에서, 마치 몰락하고 있는 옛 궁성처럼 음산해 보였다. 거
  대한 건물 속에서 낮고 무거운 신음 소리라도 들려 올 것 같았다
    어이 없게도 나는 대학의 모든 풍경이 죽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졌다. 무
  섭게 누워 있는  건물들의 동체에서 조금씩 죽음의 냄새가 퍼져 나와 잔디밭
  을 메우고 잔디밭에 서 있는 조각품들을 적시고, 숲과 숲의 모든 나무들까지
  도 쓰러뜨릴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잠시 그 풍경들을  둘러보며 길과 건물과 숲과 게시판 따위들이 불안
  하게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우리는  숲속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작은 빈터 하나를 찾아 내었다. 앉았
  다.
    수상한 짓 하지 마세요.
    준희가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왜 그런 웃음이 
  나왔는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풀벌레가 울고 있었다. 검은 나뭇잎들
  들 사이로 밤하늘이 내다 보였고 간간이 별도 찾아 낼 수 있었다.
    나는 용기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약해져  있었다. 내가 마신 
  술은 그녀를 가져 버리라고 충동질 하는 대신 별로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나를 
  우울 속으로 몰아갔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 왔고, 우수수 나뭇잎이 떨어졌고, 곁에  앉은  준희의 
  머리카락 속에는 비누 냄새가 났고, 정신이 자꾸 말똥말똥해져 갔다.
    내일 떠나세요?
    떠나지.
    부럽군요, 부러워. 어디로든 도망쳐 버릴 수 있으니까.
    한숨 쉬지 마 내 눈썹 나부껴.
    나는 그녀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으면서, 우울하다, 라고 말했다.
    우울은 젊은 사람들이 모두 걸려 있는 병이래요.
    가을에만 우울해, 고약한 병이야.
    나는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 그녀는 따뜻했으며 그녀의 입술에서는 국화냄
  새가 났으며, 나는 우리 과 녀석들의 그 음흉한 말을 앞으로 절대 믿지 않겠
  다고 작정해 버렸다.
    갑자기 통금 사이렌이 목놓아 울었고, 그 소리는 오래도록 하늘에 떠서 길
  게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었으며 우리는 그 맹수의 울음 같은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유목민처럼 외로와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엽신(葉信)I>
    여기 안개는 여전하고 내 옛날의 기억도 여전합니다.
    아가씨. 오늘 오늘 도착해서 간단히 짐을 풀었습니다. 호수가 보이는 여인
  숙입니다. 지금 도시는 안개 속에 흐리게 지워져 있습니다. 몽환의 도시입니
  다. 안개는 지금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체험했던 나의 술, 나의 방황, 나의 
  어둠, 나의 모든 빌어먹을 것들을 서서히 가리워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는  나 살던 곳이므로 친구도 있고 낯익은 물, 낯익은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역겨운 내 일상 중에서 잠시만의 위안이 될 뿐, 언제나 곁
  에 있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가씨. 가능하면 나도  여기 머물러 있는 동안을 이용하여 나의 <풀잎>하
  나를 꼬셔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시인(詩人)이여, 당신은 철저하게 고독해야만 시(詩)를 쓸 수 있습
  니다. 될 수 있는 한 자학하며 사십시오. 그러나 굶거나 몸에 상처를 입히지
  는 마십시오. 부디 시 속에서만,  시 속에서만 우십시오. 밤에는 깊은 잠을, 
  낮에는 젊은 시를. 그리고 안녕.
                                           일요일. 임 원일(林 原一)이가


    버스는 가래끓는 소리를 뱉으며 가파른  길을  헐떡헐떡 기어 오르고 있었
  다. 길은 나선형으로 되어 있었고 창 밖으로 내다보면  길 밑에 길, 그 길밑
  에 또 길이 보였다. 길은 잘 포장되어 있었다. 한 켠으로는  산이 벽처럼 버
  티고 서있었으며 돌이 굴러 떨어짐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그물이  산을 
  모두 싸고 있었다.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현기증뿐이었다.
    버스는 천천히 좀 더 천천히 아주아주 천천히 기어 오르고 있었다. 승객들
  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무슨 요새로 침입해 들어가는 특공대처럼 모두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래도 위도 까마득했다. 만약 내 몸이 창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면 저 밑 까마득한 첫째 길바닥에 떨어져 박살날 때까지 주기도문을 스무 번
  정도는 외고도 아멘을 다섯 번 정도 더 할 시간이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길을  운행할 때 운전수는 위대해 보인다. 특히 이런 길을 침착하게 
  서행할 줄 아는  운전수는  더욱 위대해 보인다. 나는 지금 운전수가 위대해 
  보인다. 표정이 안정감 있어 보인다.  그러나  불안하다. 왜. 차가 고물이기 
  때문에.
    그러나 고물은 도중에서 우리를 빈대떡으로 만들지  않고 고맙게도 무사히 
  목적지까지 다 올라 왔다.
    소양댐.
    나는 출사원(出寫員) 완장을 두르고 카메라를 멘 사람에게 시간을 물어 본
  뒤, 한가한 마음으로 한눈을 팔기 시작했다. 배가 떠나려면 아직 한 시간 반 
  가량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소양강 다목적 댐 안내판.
    높이 백 이십 삼 미터.
    길이 오백 삼십 미터.
    전폭 오백 오십 미터.
    만수위 백 구십 삼점 오 미터.
    나는 저수되어 있는 물을 보기 위해 난간으로 걸어갔다.
    보라, 저 물. 호수도 강도 바다도 아닌 저 암록색의 무시무시한 물을 거기
  에는 세상의 어둠이라는 어둠이 모두 괴어 있었다. 물은 거대한 짐승처럼 구
  비구비 꿈틀거리며 멀리 꼬리를 산 뒤에 감추고 누워 있었다.
    나는 안내판을 다시 살펴 보았다. 거리 관계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현재 수심이 백 미터를 넘고 있었다. 그 깊이를 상상해 보았다. 한 없는  미
  궁처럼 생각되어졌다. 발목에 돌을 매달고 투신한다면 내려가는 동안에 지루
  해서 혀를 물어버릴 지경이었다.
    나는  기념탑  앞으로 돌아 왔다. 기념탑은 상당히 높았다. 기념탑 밑에는 
  사업 개요가 적혀 있었고 총 공사비가 2백 6십 9억 7천 8백만 원이라고 새겨
  져 있었다.
    나로서는 그 돈이  어느  정도 놀라운 액수인지 금방 느껴볼 수가 없었다. 
  나는 스케치북에다 계산하기 시작했다. 백 이십원 짜리 소주 이 홉들이를 산
  다면 몇 병이나 되겠는가. 나눗셈.  원래가 셈본 실력이 형편없는 나는 상당
  히 오래 허우적거리며 계산을 해야 했다.  역시 하도 엄청나서 실감이 안 가
  는 숫자가 나왔다.
    2억 2천 4백 8십 1만 6천 6백 6십 6병을 사고  팔십  원이 남았다. 도대체 
  이게 몇병인가. 숫자가 나왔지만 상상이 잘 안 된다. 그래서 또 계산해 보았
  다. 하루에 다섯병씩 그 소주를 마신다면 몇 년이이나 걸리겠는가. 한참만에
  야 답이 나왔다. 오, 이게 도대체 몇 년이냐. 나는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식은땀이 나고, 살 맛을 잃어 버렸다.
    12만 1백 8십 7년 동안 마시고 삼백 구십 병이 남는다. 지옥에까지 가져가
  서 두고두고 마셔야 할 판이었다. 휴우. 나는 스케치북을 덮어 버렸다. 맥빠
  진다. 맥빠져!
    맥빠지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댐의 풍경만 구경하고 있다.  나는 일어섰
  다. 그리고 다시 물을 내려다 보았다. 저 무시무시한 물이 모두 소주로 보였
  다.
    사람들은 수시로 밀려드는 관광버스에서 내려 댐을 둘러 본 뒤 사진을  찍
  어대곤 하였다.
    이봐요. 출사원 아저씨!
    나는 갑자기 큰소리로 사진사를 불렀다.사진사 한 명이 내게로 뛰어 왔다.
  그리고 찍겠느냐고 물었다.
    찍읍시다.
    사진사는 나를 보고 무엇을 배경으로 하시겠느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내 얼굴을 찍으려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걸 찍어 주십시오.
    농담은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사진사는 찍었다.
    돌에 새겨진 그 현기증 나는 거액의 사업비는 26,978,000,000을.
    사람들은  무엇을 기념하며 사진을 찍는가. 내가 발견한 이 숫자의 엄청남
  을 기념하여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사에게 선금 반액을 지불한 다음 내 
  주소를 불러 주었다.
    사람들은 애인과, 또는 남편과, 친구와 아니면 단체로 이 역사적인 장소에 
  다녀감을 기념하여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기념할 만한 것이 있다면 기념하
  라. 인간은 기념할 만한  것이 있다면 기념하라. 태어난 지 백 일이 되는 날
  의 고추를 기념하고, 태어난  지 일년이 되는 날의 잔치상을 기념하고, 성년
  이 되어 노력 끝에 올린 결혼식,  그날의 아스파라스를 기념하고, 주름살 가
  득한 얼굴로 맞이한 환갑 날의 웃음, 그대의 묘비에 그대의 일생을 글 몇 줄
  로 기념할지니.

    사랑을 해보셨습니까?
    사내가 물었다. 배는 서서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나는 소주를 한 컵 들이
  켜고 새우깡 두 알을 아작아작 씹었다.
    사랑을...말입니까?
    네.
    해보았습니다. 대학을 가기 전 나는 두 해를  묵었습니다. 그 때 내가 살
  던 퇴폐의 마을 남춘천에는 밤 열한 시 사십 분에  마지막 열차가 들어 왔었
  습니다. 주황색 불을 줄지어 밝히고 열차는 아주 천천히  들어 옵니다. 두어 
  번 기적이 울면 나는 반드시 창을 열고 내다보았습니다. 내 집은  철로 연변
  에 있었으므로 기차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교적 자세히 볼 수가 있었
  습니다. 사람들은 몽환에 가득 찬 표정으로 주황색 불빛에 젖어 있었고,  그
  들은  아주  낯선 땅, 멀고 먼 여행에서 돌아 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비록 
  한 정거장을 거쳐 이리로 오는 사람일지라도 불빛은 그를 아주 멀고 먼 여행
  에서 돌아 오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었죠.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때로는 얼굴이 갸름하고 무척 슬프게 생긴 여자
  가 은은한 불빛에 젖어서 나를 멍하니 내다보는 수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의 
  멍한 눈은 틀림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고 지금도 생각되어집니다. 그런 여자
  가 서서히 내 앞을 스쳐  갈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연민에 사로잡히고 맙니
  다. 그러나 내가 그 여자를 잠깐만 사랑하고 말았었죠.
    사내는 내 말을 다 듣고 잠시 하늘을 쳐다 보았다. 배는 탐험선처럼 이 낯
  선 풍경 속을 계속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산이라는 산은 모두 물에 가라앉고 있었다.
    사실...나는 누구에게든 내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내 
  아내는...
    사내는 소주를 한 컵 마신 다음 잔을 내게  건네 주었다. 사내는 아까부터 
  새우깡에는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안주를 들라고  권해도 네, 라고 대답만 
  하고 그냥 깡소주를 들이켰을 뿐이었다.
    내 아내는 정말 굉장히 예쁩니다. 크게 웃을 때 보이는 왼쪽 어금니 끝에
  서 두번째 충치를 빼고는 모두 예쁘죠. 아마 지금쯤 나와서  이 배를 기다리
  고 있을 겁니다. 형씨는 한눈에 놀라 버리고 말 겁니다. 형씨는 한눈에 놀라 
  버리고 말 겁니다. 하도 이뻐서.
    슬을 이렇게 많이 마셨다고 화내지 않을까요?
    내 아내는 압니다. 내가 왜 술을 마시게 되는가를.
    형씨는 술을 왜 마시게 됩니까?
    잊으려고.
    무엇을?
    부끄러운 것을.
    무엇이 부끄러운 데요. 물론 술에 취했다는 것이 부끄러웁겠죠.
    형씨도 읽었군요. 쌩떽쥐베리. 내 아내도 읽었습니다. 어린 왕자를.
    사내 곁에는 수국이 한 다발 놓여 있었다. 그 꽃은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
  다. 사내의 아내가 좋아한다는 꽃이었다. 오늘은 사내의 월급날이었고, 그래
  서 사내는 친구들과 왕창 한 잔 했으며 삼차 하러 가자고 다른 술집으로  가
  다가 꽃집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수국을 보자 하도 아내가 그리워져서 그만 
  친구들을  잠시  따돌리고 꽃 한다발을 사서 아내에게로 가게 되었다는 거였
  다.
    나는 배를 탔을 때, 사내 곁에 놓여 있는 수국이 하도 탐스러워 보여서 배
  를 타기 전 미리 준비했던  소주를 권하며 그 탐스러운 꽃의 주인을 향해 말
  을 건네어 보았던 것이다.
    형씨.
    사내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나는 이제 조금씩 취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술의 분자가 세포 하나하나마
  다 젖어 들어 내살을 노을빛 혼곤으로 몰아 갔다.
    만약 사람이 죽어서 다른 동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형씨께선 무슨 
  동물로 태어나시겠습니까?
    사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늘을 보며 웃고 있었다. 물을 보며 웃고 있
  었다. 나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사내의 물음에 대답했다.
    지렁이...지렁이로 태어나고 싶은데 어떨까요.
    사내는 지렁이라뇨? 하고 반문했다.
    네, 지렁이로 태어나겠습니다.
    너무 조잡스럽게 한평생을 보내지 않게 될까요?
    형씨는 지렁이를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습기찬  땅바닥을  오래도록 기어 
  가고 있는 한 마리의 지렁이를 유심히 관찰해 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형씨는 
  아실 겁니다. 아마.
    무엇을 말입니까?
    지렁이가 얼마나 외로운 동물인가를.
    형씨는 지렁이를 동정하십니까?
    아닙니다. 사랑합니다. 너무 외로와 보여서.
    너무 외로와 보여서....
    사내는  되받아  중얼거리다 껄껄껄 웃어 버렸는데 그 웃음은 웬지 허탈이 
  섞여 있는 듯했다.
    배는 이윽고 품걸리까지 왔다. 그리고 엔진을 끈 뒤 소리 없이 선착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하선하는 손님은 사내와 나, 둘뿐이엇다.
    배는 우리를 남겨 두고 다시 엔진 소리를 뱉아내며 멀어져 갔다.
    사내의 아내는 마중을 나와 있지 않았다.
    형씨....
    사내가 머뭇거리며 내게 악수를 건네었다.
    저는 왼쪽 길로 가야 합니다. 형씨는 저쪽 길. 배 여행 즐거웠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나는 사내의 손을 힘주어 한 번 쥔 다음 돌아섰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형씨!
    몇 걸음 옮겨 놓았을 때,사내가 다시 내 겉으로 달려와 나를 불러 세웠다.
  웬지 사내는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어....어려운 부탁입니다만....이십  미터  정도만 나를 바래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허허 웃었다. 사내가 어린애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죠.
    고맙습니다.
    사내는 물과 접한 비탈을 헤치고 앞서 걸었다. 길도  없었다. 바로 아래는 
  그 시커먼 물이 침울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여깁니다.
    사내가 멈추어 섰다. 그리고 느리게 느리게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 아내 얘긴데...내아내는 작년에 폐를 앓다 죽었습니다.  무덤이 
  바로 저 아래였는데 댐을 막은 뒤 물에 잠겨 버렸죠.
    사내는 수국꽃  이파리를 뜯어 조금씩 물 위에 뿌리면서 점점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내 아내는 이곳에  와서 요양을 하고 있었지요. 뭐 공무원 봉급, 껌 값밖
  에 안되는 걸 가지고 어떻게 내 아내를 살릴 수 있었겠소. 하여간 내 아내는 
  죽었지요. 그래서 치료비도 이제 들지 않게 되었고, 나는 그 돈으로 술을 다
  시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녀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위한 
  꽃도....죄송합니다. 형씨, 혼자 있고 싶군요.
    사내가 다시 내게 악수의 손을 내밀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안녕을, 그리고 너무 슬퍼 말기를.....
    나는 사내를 거기 홀로 남겨 놓고 아까의 길로 되돌아  왔다. 무심코 뒤를 
  돌아다  보았을 때, 막막한 물, 뱃길 한 시간 사십 분으로 여행하면서  내가 
  뿌려 놓은 아픔들이 은빛 물무늬로 잔잔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걸었다. 길
  에는 수없이  많은 비단개구리들의 펄쩍펄쩍 뛰어다니거나 교미에 열중해 있
  거나 창자가 터져  나자빠져 있었다. 물에 잠긴 산, 물에 잠긴 마을, 그러나 
  아직도 이 길은 잠기지 않은 어느 마을에론가 통하고 있을 거였다.
    몇 걸음 물가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가 나는 낚시질을 하는 소년 하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녀석은 싸리가지 끝에다 실을 맨 원시인의 낚시
  대로 저녁 찬거리를 낚아 올리고  있었는데,녀석의 솜씨가 좋은지 아니면 고
  기들이 덜 약아서인지, 던지면 척척이었다.  손바닥만한  붕어들이 퍼덕퍼덕 
  낚여 오르는 것이다.
    어이, 소년 강태공 말 좀 묻겠노라.
    녀석은 인기척을 듣고 돌아다 보았다. 까맣게 그을은 얼굴이 산골아이답게 
  순박해 보였다.
    여기가 바로 품걸리일 터이니, 품안 국민학교로 가려면 어떻게  어느쪽으
  로 가면 좋은가.
    품안리 말이지유?
    옳거니.
    곧장 가다가 오른쪽 길로 꺽어 가서는유, 또 한참 걸으믄 품안리루  가는 
  데여유.  중간에  핵교 또 하나 있어유. 그거는 품걸 국민핵교구, 거기 가서 
  물어 보믄 알아유. 품안 핵굔 품걸 국민핵교 분교니께.
    녀석은 자상하게 일러주고 다시 원시인의 낚시대를 맵시 있게 던졌다.
    고맙노라.
    나는 일러 준 대로 곧장 걸었다.
    나무들은 노을 속에 활활  타고 있었다. 화냥년 속가슴처럼 활활타고 있었
  다.
    작은 마을이 보였을 때 나는 더욱  걸음을 빨리 하였고, 지금 기분으로 말
  하면, 객지 생활 몇 년만에 알거지가 되었어도, 정든 곳 보이자 마음놓이는, 
  한 시골의 청년이 된 것과 흡사하였다.
    마을마다 파란 저녁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좁은 산길을 타고 아이들과 함
  께 몇 마리 소들이 귀가하고 있었다.
    나는 그림자를 길게 끌며 마을 어귀로  접어 들었다. 개들이 달려 나와 짖
  고 있었다. 낟가리 밑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지대한 관심이 서려 있는 눈초
  리로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까 소년 강태공이 일러 준 대로 오른쪽 길로  꺽어  들어서 한참을 
  곧장 걸어 갔다.
    하늘에 해는 보이지 않았고 서녘 산머리가 붉게 노을져 있었다. 거기 노을
  진 자리를 가로질러 몇 마리 새들이 어디론가 헤엄쳐 가고 있었다.
    <품걸 국민학교>
    이윽고 학교를 만났다. 나는 마치 초도순시 나온 교육감처럼 교문 앞에 턱 
  버티고 서서 현판을 읽었다.
    품, 걸, 국, 민, 학, 교.
    그 다음 보무도 당당하게 운동장을 가로 질러 곧장 교무실을 걸어  들어갔
  다. 그러나 교무실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숙질실이나 사택이 있을 테지. 나는 찾기 시작했다. 쉬웠다. 찾기가. 교실 
  세 칸짜리 학교 바로 뒤에 교실 한 칸짜리만한 집이 한 채 있었고, 거기  문 
  위에 숙직실이라고 쓴 문패가 걸려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곧 문이 열렸다. 전형적인 일선 교사 차림의 삼십 대 남자 한 분이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수고하십니다.
    저어, 품안 분교를 찾아가는 길인데요....
    아, 그러시군요. 거기 누굴 만나러 가십니까? 실례지만.
    탁 인국이라고, 제 동창입니다.
    아아, 탁 선생님. 계십니다. 그런데 시간이 어떻게 될지. 곧 날이 어두워
  지고 더구나 초행이실 텐데. 길이 가파른 산길이라 놔서.
    뭐, 젊으니까요.
    그러믄  말이죠, 저기 뵈는 저 길로 계속 올라 가시면 세 갈래 길이 나옵
  니다. 오른쪽 길로 가세요. 저 산을 넘고 나면 신작로가 나오고 신작로 건너
  편에 또 산이 보일 겁니다. 그 산을 또 넘으셔야죠. 신작로에서 보면 밤에도 
  길은 잘 보입니다. 그런데 원채 험준해서 원.
    괜찮습니다. 몇 시간이나 걸릴까요?
    다섯 시간쯤 걸릴 겁니다. 밤중에, 아니 어쩌면 새벽에 도착하시겠군요.
    그래도 가야죠,  라고  말한 뒤 나는 인사하고 돌아섰다. 휘파람을 불면서 
  개울을 건넜다.
    산길을 타고 오르면서 나는  나는 벌레들의 낮은 울음 소리와 나뭇잎 서걱
  거리는 소리와 뱀들이 굴로 돌아가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멀리서 개울물 소리가 들려왔다. 나뭇잎 썩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자꾸만 오르막이 게속되었고 산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길은 좁았으며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나는 숨이 차 오르는 것
  을 의식하면서 잠시 바위에 주저 앉았다.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댐이 생기고 길이 없어지자 사
  람들은 이렇게 산에다 신발 하나 크기의 길을 새로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가을 하늘 위에 뜬 달은 마음 착한 새댁의  손으로 
  닦아놓은 놋그릇처럼 말갛게 빛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지만, 달을 자
  세히  볼 수는 없었다. 울창한 삼림뿐 하늘은 잘 보이지 않았고 다만 가랑잎 
  위에 떨어진 잔해만 볼 수 있었을 뿐 이었다. 
    나는 산을 하나 넘었고 무릎이 까지고 얼굴이 긁혀 쓰려 왔고 옷도 찢어져 
  있었으며 발바닥은 물집이 생겨 따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산과  싸웠다. 산의 고요와 싸웠다. 산짐승들의 울음과 등 뒤로 서리
  는 나의 참혹한과 싸윘다. 
    그리고 이제 두  개의 산을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길은 좀 평탄해져 있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소금물 머금은  배추잎처럼  축 늘어져서 비틀거리며 내려 가고 있었
  다. 어디선지 밤새가 울었다. 어디선지  바람이 내게로 오고 있는 소리를 들
  었다. 나는 다리가 아프고 온 몸이 무거워 왔다.  그래도 나는 걸었다. 임무
  처럼 걸었다. 숙명처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산 아래 마을까지 당도하였다. 마을은 불이 모두 꺼져 
  있었고 개들만 잠이 깨어 요란하게 짖어댔다. 
    학교를 찾기는 쉬웠다. 마을의 끝에 양옥집 같은 학교가 잠들어 있었다. 
    <품걸 국민학교, 품안 분교.>
    나는 친구의 환성을 생각하며, 그동안 이 첩첩 산골에서  고독만 질경질경 
  씹었지, 엄살을 떠는 얼굴을 생각하며 숙직실을 찾았다. 불이  켜져 있었다. 
    실례합니다
    그러나 문을 연 것은 친구가 아니었다. 나이가 좀 많아 뵈는 남자  선생님 
  한 분이었다. 나는 인사하고, 친구를 만나러 왔음을 설명했다. 
    아,탁 선생님. 오늘 애인이 서독 간다고 배웅 차 춘천으로 나가셨는데요.
  아시겠지만 탁 선생 애인은 간호원 아닙니까. 교장 선생님과 사이가 좋지 않
  아  본교에 알리지도 않고 슬그머니 떠났어요. 아마 모레쯤 들어 올 겁니다. 
  누추하지만 방으로 들어 오시지요. 길이 험해서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네.

    <엽신(葉信) III>
    생각 속의 그 무엇이 나를 그리로 가게 했던가.
    기진해서  내가 당도 했을 때, 만나야 할 사람은 거기 없었고 자옥한 물소
  리만 남아 있었읍니다.
    이튿날 아침. 하늘 아래 첫 동네 깊은 산중은 가을이 더욱 차게 당도해 있
  었고 잎들은 벌써 우수수 지고 있읍니다. 
    아 그러한 아침  한  때의 아리인 기억을 얼굴에 적시면서 나는 왔던 길을 
  혼자 되돌아 가고 있었읍니다. 
    이윽고 맞이하는 깨우침도 무상한 하늘이며 바람이며 물에 있었고 나는 시
  종 말이 없었읍니다. 배편으로 기나긴 시간을 띄워 보내며 마침내 나도 물이 
  되었읍니다. 다시 또 쓰게 되기를.

                                             목요일. 임 원일(林原一)이가.

    <엽신(葉信) V>

    오늘 신문을 보았읍니다.  내일  아가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대학이 
  문을 열게 되었으므로.
    벼르고 별러서 한번 가 보려던 아버지의  무덤을 오늘까지도 못 가 보았읍
  니다. 내가 아버지 앞에 나타나기가 아직은 부끄럽고 두렵읍니다.
    이제야 나는 알겠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철저하게 불행했고, 가장 철저
  하게 고독했던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였음을.  나는 아버지의 훈장을 열심히 
  닦으며 내 어리석었음과 죄 많았음을 곰곰이 생각해  볼 계획입니다. 또다시 
  우울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 다시 만나고 우리들 이마에 서린 우울을 서
  로 한 겹씩 걷어 내어 줍시다.

                                   돌아갈 준비 중에. 임 원일(林原一)이가.

    다시 개강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가방 속에 화구들을 쳐넣고  두꺼운 노트
  와 함께 대학의 문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새벽이 되어도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았고  잠이 오지 않
  았으며,  잠이  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제 나는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살갗 전체에 꺼끌꺼끌한 털이 돋아 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맡을 더
  듬어 형광등 스위치를  찾아 냈다. 그것은 책상 다리에 부착되어 있었다. 딸
  깍, 손가락을 밀어 올리자 잠들었던 형광등이 몇 번 깜짝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고 이어 방안이 확 밝아지면서  모든  사물들이 한꺼번에 알몸을 드러내었
  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우리에 갇힌 한 마리 야행성 동물처럼 방안을 어
  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방안은 아주 잘 정돈되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시장 부근의 공
  동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던 내 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남자 친구를 
  처음 방으로 불러 들이는 날의 가정과 일 학년 여학생  방처럼 말끔했다. 밤
  중에 나는 대청소를 실시했던 것이다. 공영히 없는 논문집을  뒤적거려 보기
  도  하고, 반듯이 누워서 천장의 사방연속무늬를 모조리 세어 보기도  하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까지 편지를 써 보기도 하다가, 도무지 잠이 오
  지 않아서 대청소를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책이며, 옷가지며, 화구(畵具)
  며, 소줏병들,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방바닥으로 쏟아져 나와 뒹
  굴던 나의 실내를,  그 너저분하고 무질서한 나의 일상, 나의 껍질, 나의 비
  틀비틀, 그것들을 나는 정돈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발가벗겨진 듯한 썰렁함이여. 이제 모든 사물들이 모두 나를 떠
  나서 저희들끼리만 시침  뚝 떼고 단정하게 제자릴 잡고 앉아 있다. 혼자 사
  는 남자의 삭월세 오천 원짜리  단간방은 좀 지저분하게 어질러 놓을 필요가 
  있다. 허전하지 않기 위해서. 어질러져  있을 때는 그래도 덜 허전한 마음이
  었다.
    나는 묵은 노트 한 권을 책꽂이에서 뽑아 냈다. 그리고 집히는 대로 몇 장
  을 뜯었다. 그 다음 아주 잘게 찢어서 방바닥에  뿌리거나, 구겨서 이리저리 
  던져 놓거나, 두어겹으로 접어서 팽개쳐 놓았다. 확실히  좀 덜 허전한 기분
  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창가로 갔다.
    밖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고 언덕 아래 잠들어 있는 도시는 유리창 속
  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이따금 빗물에 젖은 도시의 불빛들은 투명 기법
  의 수채화 물감처럼 번져서 흔합되거나 해체되면서 떠다니고 있었다. 도시는 
  녹아 내리고 있었다. 문드러지고 있었다. 침몰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움직이는 도시를 내다보다가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 왔다. 뭐 별로 읽어  볼 
  책도 없었다.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모두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랍 속
  에는 소중한 비밀도 값 나가는 물건도 들어 있지 않았다. 나는 두 개의 서랍
  을 빼어 그 안에 든 물건들을 방바닥에 좌르르 쏟아 놓았다. 그리고 빈 서랍
  을 도로 꽂아 놓았다.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거울 속에는 말라빠진 젊은 놈 하나가 들어 있었다. 
  놈의 얼굴은  병색이  짙어 보였으며 놈의 눈섭 언저리에는 우울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나는  놈을 향해 웃음을 던지고자 했다. 그러나 놈은 오히려 
  울상을 짓고 있었다. 웃어라 자식아. 웃어, 웃으라니까. 웃겨 주렴. 웃기네. 
  자식. 잠이나 자라. 나는 입김을 불어 놈의 얼굴을 지워 버리고 그위에 유방
  이 달린 개구리 한 마리를  그려 놓았다. 그 다음 또 할 일이 없어져 버려서 
  잠시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하였다.
    몇 시나 되었을까. 궁금하여 포켓용 라디오를 틀어 보았다. 아무것도 방송
  되지 않았다. 다만 라디오 속에는  솨아 하는 강물 소리만 가득 들어차 있었
  다. 언젠가는 아침 방송이 시작될터이므로  나는  그 강물  소리를 흘러가는 
  데까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정말 몇 시나 되었을까. 짐작컨대 세 시 
  정도일 것이다.
    나는 잠을 청하려고 애를 썼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벽에 걸린 뻐꾹 시계를 쳐다 보았다. 오 분 전 네 시였다. 어제나 통금 해
  제 오 분 전을 가리키는 시계.
    시계는 약 한 달 전부터 절명해 있었다. 도무지 시간이 맞지 않아서 몇 번
  이나 병원을 드나들었고 그러다 마침내 노망까지 들어서,  태엽을 감아줄 기
  분조차 들지 않는 고물이었다. 산 지 일 년도 채 못 되어 치료비가 몸값보다 
  더 많이 허비된 고물이었다. 
    노망이  들기 전까지는 그래도 사랑해 줄 건덕지가 한 가지는 있었다.  이 
  시계는 뻐꾹시계였던 것이다. 
    한 시에는 뻐꾹.
    두 시에는 뻐꾹, 뻐꾹.
    세 시에는 뻐꾹, 뻐꾹, 뻐꾹.
    그렇게 울 줄 알았던 것이다. 비록 기계이긴 하지만 목청만은 아주 청승맞
  아서, 늦은  봄 햇살 따가운 내 고향 뒷산, 솔밭에서 슬피 울던 진짜 뻐꾸기
  를 무색케 할 정도였다. 놈이 그렇게 울 수 있는 기계만 아니었더라도, 나는 
  놈을 내 방으로  데려오기  위해 거금 팔천 원을 아낌 없이 지불하진 않았을 
  거였다.
    중고품이긴 하지만 시간은 기차게  잘 맞을 겁니다. 좋은 시계 사신 겁니
  다. 네, 안녕히 가세요.
    망할 자식. 나는 그 새파란 점원 녀석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었다. 그러나 
  채 석 달이 못 되어 이 중고품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십 분씩이나 늦
  게 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 달 정도 더 지나서는 숫제 열중쉬어.
    나는 하는 수 없이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기분으로  시계를 싸들고 그 
  시계점을 찾아 갔다. 그러나 옛날의 그 자리엔 옛날의 그 사람들이  살고 있
  지 않았다. 시계점은 어느 새 꽃집으로 둔갑해 있었고 새파란 점원 녀석  대
  신 늙그스레한 중년 남자가,시계 대신에 밝은 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수시로 시계 병원을 드나들었다. 시계는 치료를 하고 돌아오면 
  기특하게도 한 달 정도는 제대로 바늘을 움직여 주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였다. 시계가 노망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그날은 일요일. 나는 약속도 특별한 계획도 없었더랬다. 그저 레포트 하나
  를 쓰는 일로 오전을 보내었더랬다.
    그날  나는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 시계를 보았을 때, 시계는 
  정각 두 시를  가리키려  하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나는 은연중에 들려온 두 
  번의 뻐꾸기 울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뻐꾹. 뻐꾹)
    내 눈은 시계의 분침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곧 <정확하고 멋
  있는 오리엔트 손목시계가> 자신 만만하게  정각  두 시를 시보했다. 그래도 
  내 뻐꾹시계는 한참동안 울지 않았다.
    (뻐꾹. 뻐꾹.)
    나는 분침에 시선을 매달고 기다리면서 시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
  다. 정확하게 잘 맞는 시계는 얼마나 주인을 흐뭇하게 만드느냔 말이다.
    정확하고 멋 있는 오리엔트 손목시계의 시보가 있고 약 삼 분 정도가 지나
  서야 내 뻐꾹시계의 분침은 12시로 완전히 겹쳐 들게 되었다.
    (뻐꾹. 뻐꾹)
    당연히 그렇게 두 번 울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내 시계의 자랑이다. 울어
  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멋은 있는 나의 시계여.
    그러나 무슨 해괴한 사건인가.
    (뻐꾹. 뻐꾹.)
    정말 그렇게 울었을까.
    아,  아니었다. 그것은 시계 노망, 시계의 주착,시계의 종말이었다.  놈은 
  이렇게 울었다.
    띠리리리릭, 뻑...뻐, 뻐, 뻐, 틱!
    망할! 그리고  또 한참 있더니 한 스무 번 정도를 계속 울어 젖혔다. 한꺼
  번에 하루치를 몽땅 울어버리겠다는 듯이--- 뻐꾹뻐꾹뻐꾹.....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뭐  저 따위가 다 있어. 나는 기계에 대해서는 맹물이었으므로 
  속수무책, 그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놈에게  태엽을 감아 주지 않았다. 따라서 놈은 관상용 시
  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잠이 안 오고 시간이 풀어진 국수가닥처럼 맥적을 때 
  놈을 발견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나는 놈을 방바닥에 끌어 내렸다.
  한 번 고쳐 볼 심산이었다.  불가능이란 없다. 지당하신 말씀. 나는 이 노망
  한 기계를 고치는데 필요하다고 것이면 모조리 꺼내 놓았다. 드라이버,송곳,
  족집게, 칼, 손톱깍기(여기엔 쓸 만한 도구들이 몇 개 끼워져 있었지만), 옷
  핀, 펜치, 등등. 그다음....캔트  4절지 스케치북 한 장을 뜯어 방바닥에 깔
  았다.
    우선 뒷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드라이버로  몇 개의 나사를 뽑아내어 케이
  스와 기계를 완전히 분리해 놓았다. 뼈와 내장이  드러난 이 늙은 시계는 아
  주 볼품 없어 보였다. 나는 돌팔이 의사가 희귀병 환자를  눕혀 놓고 짐작으
  로 병명을 때려 잡은 뒤, 사람이야 죽건 말건 내장을 꺼내 놓고 보자는 식으
  로 드라이버와 칼과 송곳과 손톱깍기 따위의 수술 기구들을 무자비하게 시계 
  속에 쑤셔 박기 시작했다.
    몇 개의 나사와 톱니바퀴와 철판이 뜯겨져서 하얀 종이 위에 정돈 되었다. 
  용수철이,  쇠막대가, 강철지환이 뜯겨져서 하얀 종이 위에 정돈되었다.  잘 
  안 빠지는 것은 송곳을 디밀고 망치로 두드려 빼기도 했다. 분해하기는 쉬웠
  지만 생각보다  부속들은 정교하고 다양했다. 나는 마치 시계와 전투를 벌이
  듯이 땀을 뻘뻘 흘리고 안간힘을 쓰고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마침내 시계는 
  골격만 남게 되었다.  나는 득의만만해 하면서 시계의 노망이 어디서 발생했
  는가 뒤적거려 보았다. 그것은 쉽게 발견되었다. 그것은 따로 하나의 톱니바
  퀴군(群)을 형성하면서 시간에  따라 횟수를 변경하여 좌우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놋쇠판의 조임나사가 헐거워져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놋쇠판은 열두 개의 톱니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톱니는 뻐꾸기 울음의 
  횟수를 조정하는 것이 틀림 없었다. 그 톱니는 태엽과 연결 지워진 톱니바퀴
  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시간에  맞춰 놋쇠판은 탄력 있는 고무공 하
  나를 누르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고무공을  누르면, 그 곁에 붙어 있는 
  나팔이 청승을 떨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누르면 뻑, 놓으면 꾹.
    나는 조임나사가 풀어져 제멋대로 움직이던 놋쇠판을 바로 잡은뒤 있는 힘
  을 다하여 조임나사를 바른편으로 틀었다. 그리고 톱니를 하나하나 조정하여 
  고무공을 눌러 보았다.
    뻐꾹, 뻐꾹, 뻐꾹.
    정말 신통했다. 띠리리리... 고장났을 때의 이 소리는  헐거워진 놋쇠판이 
  톱니 위를 그대로 지나가는 소리였다. 그러나 이제 걱정 없었다.
    자, 이제 조립할 차례다.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고 부속품들을 역순(逆順)으로 맞추어 나가
  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몇 개 못 맞추고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무
  리 맞추어도 헐겁거나 맞물리지 않거나 틀어졌기 때문이다. 십 분도 못 되어 
  내 머리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맞추고 뜯고 맞추고 뜯고---- 를 수없이 죄풀이 했다.나는  분해할 때보다 
  더 발악적으로 시계와 싸웠다. 시계 속에 내 온몸을 밀어 넣을 듯이 하고 기
  나긴 시간을 등 뒤로 보냈다. 자꾸만 비지땀이 흘렀다. 그야말로 고전분투였
  다. 신경질, 신경질, 신경질.
    이윽고 언덕 아래의 도시로부터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점점 긴장
  이 풀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렌 소리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지속되
  어 있는 동안은 모든 시간이 정지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시계의  문자판을 
  뒤집어  보았다.  여전히 오 분 전 네 시였다. 나는 오 분을 당겨 주어 정각 
  네 시로 맞추어 놓았다. 나는 이제 지쳐 버렸다.
    문득 배가 고팠다. 내가  이  시계를 완전하게 조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이란 있다.
    나는 시게의 부속과 뼈대를 서랍  속에 처박아 버렸다. 그리고 속이 빈 시
  계 케이스를 벽에 반듯하게 걸어 놓았다.
    그것은 이미 시계와 상관 없는 무엇이었다. 내장을 모조리 파먹힌 어떤 것
  의 시체였다.
    그 속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 속에는 약속이 없었다. 그 속에는 다만 공허
  뿐이었다. 나와 함께 두 해를 살아온  그 일금 팔천 원짜리 뻐꾹시계는 이제 
  영영 살아나지 않을 거였다. 그 속에는 내 일상의 회의와 절망과 곤혹, 아니
  면 썩어버린 시간이 가득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배가 고프군. 배가 고프군. 나는 방구석에  놓여 있는 두꺼운 마분지 상자 
  앞으로 걸어 갔다.
    그리고 상자에 인쇄되어 있는 <삼양(三養). 쇠고기.  주의. 햇빛과 습기를 
  피해 주십시오. 50 食入 삼양식품 공업주식회사> 따위의 글자들을 무심코 읽
  은 다음 그 속에서 문명인의 대용식사 한 봉지를 끄집어냈다.
    그것을 싸고 있는 비닐 포장지에는 친절하게도 조리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
  고 계란과 파를 곁들여 먹으면 더욱 맛이 난다는 조언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자취 생활 삼 년 가까이를 그 문명인의 대용식사와 친분
  을 돈독히 해 왔고 조리법은 물론, 달리 후라이 팬에 튀겨  먹는 법, 밥솥에 
  쪄 먹는 법, 전골해 먹는 법까지도 아울러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계
  란과  파보다는 메추리알 몇 개와 생미역 무침을 곁들여 먹을 때가 더  더욱 
  맛이 난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남비에 그냥 끓여 먹기로 작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란이니 
  메추리알은 커녕 개미알 한 개도 나는 준비해 두지 않았으니까.
    창자여, 잠깐만  기다려다오.  참을성이 있어야지. 나는 남비에 물을 붓고 
  석유 곤로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물이 끓기를 기다려 보오들레에르의 <나심
  (裸心)> 오십 삼 페이지를 펴 들었다.
    젊은 작가가 자기의 첫 교정(校正)을  보는 날, 그는 마치 처음 매독에 걸
  린 학생처럼 자랑스러운 것이다.

    물과 카드와 손금 등등으로 하는 점술(占術)에 관한 장(章)을 잊지 말 것.

    여자는 영과 구별할 줄 모른다. 마치 짐승처럼  단순하기 짝이 없다. 익살
  꾼은 말할지도 모른다. 하기야 육체밖에는 없으니까, 라고
    몸치장
    에 관한 일 장(章).
    몸치장의 도덕성.
    몸치장의 교묘함.

    교수와,
    판사와,
    대신들의
    잘난 체 뽐내는 꼴.

    오늘날의 희안한 거인들.
    르낭.
    훼도.
    오끄따브 훼이에.
    스꼴.

    신문 편집장들, 우쎄에, 루이, 지라르랑, 때끄시에,  드  까론느, 쏘라르, 
  뛰르강, 다로.
    쌍놈의 명단. 첫머리에  쏘라르.

    이름이 상당히 보들보들한 느낌을 가진 보오들레에르는 상당히  거칠게 말
  하고 있다. 이름을 꺼끌레에르고 고치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몇 장을 훌쩍 뛰어 넘어 보았다. 칠십 일 페이지가 나왔다.

    이끼를 넉넉한 냉수 속에 열 두 시간 내지 열 네 시간 동안 적셨다가 물을 
  버릴 것.
    이끼를 두 리트르 물 속에 넣어 약한, 변함 없는 불로 끓이기를 두 리트르 
  물이 한 리트를 졸아들 때까지 하고, 겉거품을 걷을 것. 이렇게 된  다음 이
  백  오십  그람 흰 설탕을 넣어서 시럽 액체처럼 진하게 만들 것. 다음 다시 
  식힐 것. 썩 큰  입 숟갈로 세 번, 아침 낮 저녁으로 먹을 것. 발작(發作)이 
  너무 잦을 때에는 걱정 말고 양을 불려도 좋다.

    대단한 악담가이시군.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라면 조리법을 연상했었다.
  어딘가 흡사한 부분이 있었다. 끓는 물 육백cc에 라면을 넣고 삼 분 정도 기
  다릴 것, 다음 스프를 넣고 일이 분 정도 더 기다릴 것, 구미에 맞춰 계란이
  나 파를 곁들이면 더욱 맛이 남, 너무 불어 터져서 먹기 거북하면 개에게 주
  어도 좋다....
    나는 몇 페이지를 더  읽다가 책을 덮었다. 남비의 물은 아직도 끓지 않고 
  있었다. 무료하다. 무엇을 할까.
    내가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라디오의 쏴아 하는 강물 소리가 뚝 
  그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뻐꾹시계가  걸려 있던 벽을 쳐다 보았다. 거기 껍
  질뿐의 시계가 덩그마니 걸려 있었다. 밤새도록  죽어 나간 나의 시간이, 그 
  시간의 잿가루가 껍질뿐의 시계 속에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곧 
  라디오 속에서는 아나운서의 건강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애청자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오늘 하루도 여러분의 가정에 행운과 
  웃음이 같이 하길 빌면서....아나운서의 인사말이 끝나고  연이어  애국가가 
  조용히 연주되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아사 우리 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애국가를 모두 들었다. 그 내 나라의 노래는 엄숙
  하고 다감했다. 한참 동안을 내 살 속에 스미어 보이지 않는 힘과 믿음이 되
  어 주었다. 이제는 이른 아침, 우울해 하지 말 것. 그러나 깊은 생각도 버리
  지 말 것.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속이 텅 빈 
  시게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지난 밤의 허무를 되씹으면서 오래도록 방 가운
  데 멍하니 서 있었다.

    비는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생각컨데 마지막 가을비가 될 거였다. 
  이 비가 끝나면 날씨는 싸늘해지고, 그러면 겨울이 오는 것이다.
    나는 품 속에서 쇠붙이 하나를 꺼내었다.  그것은  식어 가는 새벽 형광등 
  불빛에서도 순금의 광채로 번쩍이고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훈장이었다. 나
  는 그것을 부드러운 헝겁으로 닦기 시작했다.





                            勳章(하편)


                                                  이 외수


    [3]幻生集

    어느  날, 낯선 녀석 하나가 아주 퇴폐적인 모습으로 우리 대학 회화과(繪
  畵科) 삼 학년 강의실에 나타났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카락, 색 바랜 청바지, 낡아빠진 가죽 잠바, 다
  부진 어깨, 까무잡잡한 얼굴, 담배불로 지진 자국이 여기저기 보이는 팔뚝-- 
  뭐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유랑극단 기도로나  취직하면 아주 잘 어울릴 모습이었다. 특히 눈이 까투
  리를 노리는 치악산 삵괭이 눈처럼 날카로와 보여서, 만약 그가 유랑극단 기
  도를 실제로 맡게 된다면  어느 마을 불량배도 시비를 걸어 올 엄두도 못 낼 
  것 같았다.
    처음 우리 과에 나타난 그날,  녀석은 강의 시작 오 분 전을 이용하여, 누
  가 권유치도 않았는데 스스로 강단에  올라가, 우리에게 허리를 굽히고 정중
  한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노 철환이라고 합니다. 작년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한 일 년 애들한테 
    사기 좀 치다가, 싫증도 나고 눈꼴 사나운 것고 많고 해서 이 대학에 편입
    해 버렸습니다, 앞으로 잘들 친해 봅시다....
  어쩌구 하면서 대충 자기 소개를 끝낸 뒤 채연자약하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녀석은 어딘가 자신만만한 데가 있었고 또 어딘가 좀 성질 사나운 데가 있
  어 보였다. 강의실 안은 잠시 웅성거렸다. 그리고 그 웅성거림  속에서 누군
  가,
    저치 더럽게 건방진데, 이따가 한번 볼까.
  라고 말하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 왔다.
    그날 강의가 끝나고, 체격이 좋은 우리 과 학생 하나가 녀석의 팔을  잡고
  서  도서관  뒷산 숲으로 들어 갔고, 그 뒤를 역시 성질이 그렇고 그런 동료 
  몇 명이 스적스적 따라서 들어 갔다.
    나는 대출했던 <르  끌레지오>를 반납하고 나오는 길에 그들을 보았다. 그
  리고 문득 호기심이 일어 나도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녀석은 당당하게도 팔짱을  끼고  약간 두 다리를 벌린 채 돋게 서 있었고 
  그 앞에 녀석을 끌고 왔던 몇몇이 실실 웃음을 흘리며 녀석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그래서 형씨께선 우리가 우습게 보인다 이거지.
    별 말씀을.
    겁도 없으시군. 가지고 있는 이빨 다 솎아 내도 서른 두대야. 한 대에 얼
    마씩으로 지불해 드릴까.
    별 말씀을.
    녀석은 조금도 굽히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끌고 온 쪽이 약간 밀리는 
  추세였다. 그러나 홈 그라운드의 이점이라는 게 있고,  응원군이 있고, 텃세
  가 있다.
    깟버려!
    누군가 야무지게 뱉았다.
    원 별말씀을.
    녀석은 팔짱을 낀 채 여유 있게 두어 걸음 물러 섰다---가 아니었다. 물러 
  서는 듯했지만 녀석은 번개같이 몸을 날려 이단옆차기로 앞에  있는 놈의 면
  상을 걷어차 버리고, 동시에 한 놈의 팔을 나꿔 채더니 재빨리 비틀어  꺽어 
  버렸다. 대단한 솜씨였다.
    좋아.
    내가  말했다.  그림 그리는 녀석 치고 이럴 때 흥분 안 하는 녀석이 어디 
  있을까. 나는 조금씩 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못놔.
    팔을 잡힌 놈이 이를  한번  빠드득 갈아 붙이며 소리쳤다. 그러나 녀석은 
  상대편이 움직이는데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면서 절대로 그 팔을 놓지 
  않았다.
    한 놈이 휙하고 녀석에게로 몸을 날렸다. 순간 녀석이  휘청 한번 몸을 움
  직였고 녀석의 등어리에 발자국 하나가 퍽 찍혔다. 녀석은  차츰  내 곁으로 
  밀려 오고 있었다.
    이거 못 놔.
    그러나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팽팽한 
  긴장감만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약간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였다. 
  녀석이 빠르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순간적으로 내눈에 비쳤는가 하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번쩍 내 눈에 불똥이 튄 것은. 망할자식!
    녀석은 돌려차기로 나를 후려버린 거였다. 볼이 얼얼했다. 아니 대단히 아
  팠다. 망할자식,
    자식아. 관객을 까버리면 어떻게 해!
    녀석이 나를 흘깃 돌아보았다. 확실히  소름끼치는 눈빛이었다. 녀석의 모
  든 촉수가 곤두서서 적의 숨소리 하나까지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좀처럼 
  공격의 틈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녀석은 침착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팔을 비틸어 쥐고 있던 포로를 왈칵 앞으로 
  밀어 버렸다. 사이, 녀석은 휙 돌아서더니 쏜살같이 숲을  헤치고 도망쳐 버
  렸다. 그러나 아무도 쫓아가려 하지 않았다. 다만 팔을 비틀렸던  친구를 제
  외하고는 모두 기분좋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저 자식 아주 멋진데.
  라고 말하면서. 확실히 이 때부터 나는 녀석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며칠 후 나는 바로 그 숲에서 녀석을 만났고, 나는 녀석에게 빛을 
  갚았다.
    우리 아버지께서 네게 맞은 것만큼 돌려주고 오라고 해서.
  말하면서 나도 녀석의 볼을 돌려차기로 후려버린 것이다.


    쟤들 왜 저러지.
    녀석이 강의실 구석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한 패의 학생들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데모....
    병신같이...
    녀석은 약간 경멸하는 듯한 눈초리로 다시 그쪽을 돌아본 뒤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우린  꺼지자, 하는 시늉을 보였다. 그러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우리가 강의실을 나가려 하자 누군가 적의에 찬 목소리
  로 말했다.
    빠지는 거야? 이거 왜 이래.
    정말 이러지들 마 괜히...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었다. 한 명이 불쑥 나서더니 녀석의  멱살을 잡고 파르르 떨었다. 야릇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나이 한 두 살 더 먹었다고 늙은 채 하는 거야?
    침묵이 오래 흘렀다. 무슨 일이든지 벌어지겠다는  듯한 그들의 살기 등등
  함 앞에서 녀석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곧게 서 있었다. 누군가 쾅 하고 의자
  를 걷어 찼다. 하나 둘 주변을 에워 싸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무섭게 빛나
  고 있었다.
    쳐봐!
    녀석은 멱살을 잡힌 채 낮게 그러나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새끼!
    누군가 주먹을 날렸고 연거푸 여러 명이 녀석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녀석
  은 반항하지 않았다. 쳐봐... 녀석은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흐르고, 녀석의 옷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녀석의 
  사지가 강의실 바닥에 나자빠질 때까지 그들은 구타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나였다. 나도 조용히 맞아 주었다. 주먹과 발이 연거푸 
  내 몸으로 날아 들었다. 오래도록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야, 시간 됐어. 빨리들 나와!
    강의실 밖 복도에서 누군가  외쳐대었을  때야 그들은 나를 팽개쳐 버리고 
  우루루 밖으로 몰려 나갔다. 나는 그대로 한참을 누워 있었다.
    녀석이 일어나 옷을 털며 내게로 왔다. 녀석의  얼굴에서  떨어진 피가 내 
  목덜미에 몇 방울 느껴졌다. 나는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자식들. 고작 이까짓 증오를 가지고.
     우리는  창 밖을 잠시 내다보다가 다리를 절며 강의실을 나왔다.  여학생 
  몇 명이 우리 곁을 스쳐가며 협오에 찬 목소리로 빈정거려 주었다.
    꼴좋다!
    나는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그녀석들을 똑바로 노려 
  보았다. 그들이 무엇을 아느냐. 우리들의 이상이 아무리 절대적인 것이라 하
  더라도, 우리들의  투쟁이 아무리 순수하고 정의롭다 하저라도, 우리들의 밖
  에서 현실은 현실 스스로를 조금도 파괴당하지 않고 오히려 냉혹하게 우리들
  을 파괴 하면서 차츰차츰 제 나름대로 형성되어 가고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한
  다. 분노와 용기만으로는 그 무엇도 이룩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분노와 용
  기 그 이상의 것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나도 중계 방송이 있을 때는 라디
  오를 틀고 언제나 우리편을 응원했었다. 우리 편이 지면 애석해 했었고 우리 
  편이 이기면 크게 감격했었다. 분노와 용기보다 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
  엇이냐.
    나는 강의실 본관을 나서며 땅바닥에 세차게 침을 뱉았다. 본관 벽에도 뱉
  아 놓았다. 그것은 침이 아니라 피였다.

    밤에 준희의 아파트를 찾아 갔다. 준희는 원고지를 앞에 놓고 앉아 있다가 
  놀라는 얼굴로 나를 맞았다.
    웬일이야, 이 아저씨. 얼굴이 형편 없네요, 싸웠어요?
    나는 말도 하지 않았다.
    방바닥에는 수없이 많은  원고지들이 찢기거나 구겨져서 산재되어 있었다. 
  책꽂에는 수없이 많은 책들이 정돈되어 있었고 또한 수없이 많은 원고지드리 
  철해져 있었다. 수없이 많은.
    그녀는 며칠간 학교에 나오지  않았었다. 혼신을 다하여 장시(長詩) 한 편
  을 쓰고 있는 중이라는 엽서가 있었다.  그 엽서 속에는 요즈음 날마다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으로 산다는  내용과 함께, 그녀가 무엇을 
  버릴 수가 있는지를 생각하고 있노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지금 절감하고 있었다. 그 무엇에겐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러나 버림받은 것이 나 자신뿐만은 아닌 줄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들 젊
  음이  버림받고,  우리들 슬기가 버림받고, 우리들 과거가 버림받고, 우리들 
  미래가 버림받고, 버림받고, 버림받았다는 것을.
    그러나 아직은 내가 젊기  때문에 내 심장과 정신과 쓸개 위에 박테리아가 
  부식하기 전까지는 미워하고,  증오하고, 도전하고, 거부하며, 나를 버린 것
  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것이다.
    얼굴이 왜 그래요?
    비겁한 놈으로 오해 받았지.
    해명하시잖구.
    나도 그 쪽을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여간 학문을 연마하긴 힘들
    어. 졸업장을 따기는 쉬워도.
    유명 인사 같은 말투로 이야기하지 마세요. 졸리우니깐.
    졸릴 땐 커피를 마시라더군. 잠 안 올땐 상치쌈을, 졸릴 땐 커피를.
    끓여 드리죠 지금.
    입술이 이렇게 터져 버려서 어디 마실 수가 있겠어.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사신댔어요.  입으로 드시기 거북하시면 코를 사
    용하세요.
    좋아. 그런데 그건 폐로 들어가는 거야, 위로 들어가는 거야.
    아저씨 마음 속으로.
    준희는 전기 곤로 위에 올려 놓은 뒤 찻잔을  씼었다. 나는 방안을 눈으로 
  한 바퀴 둘러 보았다. 한 쪽 벽에 해골 한 개가 걸려  있었다. 눈이 퀭한 그 
  해골은 이를 그 어디엔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준희의 방에서는  처음 대하는 
  물건이었다.
    시체 유기죄야.
    인스탄트 커피를 저어서 내게 권하는 준희에게, 해골을 가리키며 내가  말
  했다.
    고발 하세요.
    혼식 먹고 싶은 모양이군.
    혼식이라뇨?
    콩밥.
    아직 안 풀려났죠. 법대생들.
    혼식 중이야. 그런데 저 해골은 뭘 결심했다는 거야. 이빨을 단단히 악물
    고 있는데 말야.
    결코 죽지 않겠다는 것을. 
    해골의 잠꼬대로군.
    나는 준희가 저어 준 커피를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늦가을 가
  랑잎  타는 냄새가 커피 소게 섞여 있었다. 이것이 내 마음 속으로 들어간다
  는 말이지,나는 터진 입술로 준희의 우정을 두어 모금 마신 뒤 잔을 놓았다.
  아무래도 식은 뒤에 마셔야 될 것 같았다. 입술이 쓰리고 아파서였다.
    해골.....  저  멋진 걸 어디서 구했지. 방안이 완전히 저것 하나 때문에 
    거실 같아 보이는군.
    자세히 보세요.비누 덩어리를 깍은 거예요. 노 환철씨 방에서 훔쳐 왔죠.
    
    그 자식, 여러 가지로 폼 나는군.
      

    苞  


     크리스마스가 왔고 도시는 더욱 밤에 휘황하게 살아 오르고 있었으나, 그
  러나 나는 작업실에서 계속 백 호짜리 캔버스에 내 숨소리를 밀어 넣는데 더
  욱 전념했다.
    준희와 녀석에게서 카드가  왔으므로 나는 덜 삭막하였고, 그 카드들은 벽
  에 붙여서 나의 기나긴 작업을 지켜보게 하였다.
    녀석의 애인은 중태인 모양이었다.  카드 속에 들어 있는 쪽지 맨 아래, <
  하느님은 아마도 나를 버리실 것 같다>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빌었다. 그의 애인과 그를 위해 신이여 은혜로우소서.
    한 달이 되어도 내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다. 나는 입술이 허옇게 부르트고 
  턱수염이 꺼멓게 자라 있었다. 그러나 내  가슴  속에는 차츰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그리운 물살로 퍼져가고 있었다.

    추웠다. 
    어제는 진종일 싸늘한 진눈깨비가 내렸고, 이 아침 길바닥은  아주 단단하
  게  얼어 붙어 있었으나, 얼어 붙은 길바닥 표면에는 식어빠진 햇볕이  양은 
  색으로  흐리게  도금(鍍金)되어 있었다. 이따금 철사줄 같은 바람이 불어와 
  모질게 귓전을 떄리고 스쳐 갔다. 발가락은 모두 얼어서 사금파리에 찔린 기
  분이었다.
    한 무리의 차량이 쇠사슬을 철컥거리며 지나간 뒤, 나는 횡단 보도를 건너 
  번화가로 접어 들었다. 번화가는 번화하지 않았다. 대개의 상점들이 문을 닫
  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약간 썰렁해 보였다.
    어디로 갈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극장이 바라다 보였다. 극장에는 만국기가 줄줄이 매
  달려 나부끼고 있었으며 선전 간판은 다른 때보다 몇 배나 더 요란스럽게 부
  산을 떨고 있었다.선전문구 끝마다 느낌표가 한 개씩 찍혀 있었고, 오후에는 
  복잡하오니 되도록이면  오전을 이용해 달라는 신신당부까지도 적혀 있었다. 
  권총을 든 촬스 브론슨이 날카롭게  눈독을 세워 나를 노려 보고 있었다. 영
  화 구경을 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권총으로 네 심장에 팍 구멍을 
  뚫어 주겠다.
    그러나 촬스 브론슨이여, 죄송하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 아침부터 고작 극
  장 구석 등받이 의자에 몸을 쑤셔박고 그대의  권총 놀음이나 구경할 정도로 
  내 정서가 빈곤하지는 않다. 그대는 눈에서 독기를 제거하라. 시력이 나빠지
  는 수가 있으니까.
    나는 극장을 외면해 버리고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한눈을 팔기 시
  작했다. 오늘 대개의 사람들은 얼굴에 덕지덕지 달라 붙어 있던 근심을 의식
  적으로 뜯어내고 대신 기대라는 이름의 화장품을 듬뿍 바른 뒤 집을 나선 것
  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은 하느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적어도 자기에게만은 
  한 양재기쯤 행복이라는 것을 내려 주시리라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복을 입은 사람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던 끝에 나는 중앙시장 뒷골목을 생각해 내었다.  언제나 싸고 푸짐
  한 음식들이 허이연 김을 뿜어 내고 있는 곳, 그 서민의 거리로  가서  국밥 
  한 그릇을 사 먹고 싶어졌다.그리고 이 흑심한 추위를 녹여버리고 싶어졌다.
  나는 시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시장은 여전했다. 순대를 삶는 가마솥에는 물씬물씬 김이 솟아 올랐고, 주
  점가의 휘장들은 싸고 푸짐한 순대국과 안주들의 이름들이 줄줄이 달고 늘어
  져  있었다. 모든 것은 큰댁처럼 넉넉해 보였다. 큰댁의 인심처럼 넉넉해 보
  였다. 우리나라 큰댁의.....
    나는 거기서 국밥 한 그릇과 왕대포 한 잔을 시켜 맛있게 처분했다.
    다시 거리로  나왔다. 조금만 추웠다. 큰댁처럼 넉넉한 인심의 국밥 한 그
  릇과 왕대포 한 잔이 나를 조금만 춥도록 만들어 주었다.
    어디로 갈까....
    녀석만 곁에 있어도  오늘 내가 이렇게 삭막한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 거였
  다.그러나 녀석의 편지 몇 장에 의하면 녀석의 애인은 가망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문득 한 곳을 생각했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동행을 가지고  있었다. 동행이 없는 나는 이 뜻 깊은 날을 
  삭막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무엇에겐가 버림
  받으며 동행을 잃고만 살아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사진관을 찾아 갔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을 천연색 필름에  담았다. 기념하기 위하여. 이날의 나
  를. 그리고 다시 갈 곳이 없어졌다. 나는 낯선  거리를 방황하는 가출아처럼 
  목적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모처럼의 외출이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 갔다.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 보았다. 거
  기에는 내가 찾는 곳의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나는 수첩에 주소만 
  기입한 뒤 전화는 걸지 않고 그냥 나왔다.
    가까운 담배 가게에서 나는 은하수 두 보루를 샀다. 더 사고  싶었으나 돈
  이 닿지 않았다. 호주머니 속엔 천 원 정도가 남아 있었지만 따로  쓸  데가 
  있었다. 나는 담배를 두껍게 과자상자 속에 꽉 끼이게 채워 넣은 뒤 과자 상
  자  겉에 풀을 대충 바르고 종이를 한겹 발랐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두껍고 
  깨끗한 종이로 정성껏 포장했다.
    그 다음  나는 수신인란에 아까 적어 가지고 나온 주소를 적고 발신인란에 
  내 이름을 대신 <외아들이 보냅니다>라고 단정한 글씨로 적어 넣었다.
    우체국으로 가서  소포로 붙여 줄 것을 부탁했다. 우체국에는 재수 없게도 
  오늘 근무조에 들어간 직원들이 입맛 쓴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내용물이 뭡니까?
    담뱁니다.
    양로원으로 가는 건 거의 다 담배로군.
    담당 직원은 내게 영수증을 떼어 주었고, 나는 우체국을 나와 집으로 향하
  는 버스를 탔다.
    준희는 보고 싶었지만  이 도시에 없었다. 그녀의 시는 신춘문예에서 낙선
  되었고, <밋치겠어요> 한 마디를 던진 뒤 여행을 떠나 버렸다. 겨울 바다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 을씨년스러운 작업실에는 완성되지 않은 화폭이 나
  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탄  난로가 잘 피고 있었고 난로 위의 물주전자가 식
  식거리며 김을 내뿜고 있었다.
    실내는 무척 지저분해 보였다. 그러나 치울 수는 없었다. 분위기가 달라지
  면 작품에 아무래도 영향이 미칠 것이다. 작품이 끝나는 날은 아주 깨끗하게 
  치워 놓으리라, 마음 먹으며 나는 다시 붓을 들었다.


    신(神)은 기어코 나를 버렸다.
    어제 나는 그녀를 땅에 묻었다. 내 힘이며 눈물이며 꽃이었던 그녀의 이름
  도 땅에 묻었다. 그녀와 함께 나누었던  모든 것을 땅에 묻었다. 지금 내 심
  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다만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떨어져 나와 비
  어 가는 가슴을, 이 미칠 것 같은 공허를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다. 작품은 
  완성되었는지. 앞으로 한 달 정도 안정을 가진 다음 올라 갈 예정이다. 오직 
  술, 내 아픈 곳마다 술을 부어 주고 있다. 건강하기를 빈다.          환철.

    아, 나는 녀석의 엽서를 읽으면서 한 없는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리고 녀
  석의 아픔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고 다만 나 혼자 안스러워하였다.
    나는  더욱 혼신을 다하여 캔버스와 맞섰다. 내 모든 피부가 내가  색깔로 
  물들어 가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수시로 현기증이  내 이마를 휘젓고 관절이 굳어서 아파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제 나는 비로소 코피를 쏟기 시작했다. 아침마다였다. 아침마다 세
  수대야 속에는 새빨간 핏방울이 떨어져 내리곤 했다. 나는 성욕 같은 설레임
  에 젖으면서 내게 부여된 한 폭의 공간과 교합(交合)하고 있었다. 밤에도 낮
  에도 내 시간들은 발 밑에 천 근의 무게로 죽어 나갔다.
    무엇에건 패배하고 싶지  않았으며  무엇에건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발 붙인 이 황무지에서, 이 냉혹한 사람들과  기계들과 돈의 시대에서, 아버
  지가 겪으면서 그 무서운 고독까지 모두 짊어지더라도  나는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버림받은 내 살과 뼈를 녹여 또 하나의 빛나는 훈장을 가지고  싶었
  다.
    확인하라. 날마다 확인하라. 이 텅 빈 네 주변을. 그러나 외로움을 두려워 
  말라. 외로움은 껴안으면 껴안을수록 더욱 외로운 것이다. 그러나 더욱 있는 
  힘을 다해 껴안으라. 마침내 헐벗은 네가 보일 때, 이 냉혹한 기후의 황무지
  에서 홀로 살아온 네 알몸이 보일 때 비로소 네 그림은 빛날 것이다.
    나는  이제 거의 그림 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연탄은 꺼져 버렸
  고 나는 그  옛날의 한 청년이 이 집에서 버섯을 기르며 생 라면을 먹었듯이 
  세 개씩의 라면을  먹으면서 물감을 녹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손질을 할 때가 왔다.
    새벽이었다. 밖에는 몹시  심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겨울 냉기가 내 살에 
  부딪치며 전신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손발을 깨끗이 씻었다. 머리도 감았다. 물은 차고도 찼다. 다시
  금 코피도 쏟았다.
    나는 머리카락이 마를 때까지  계속 손바닥에 수건을 싸서 마찰해 주었다. 
  그리고 새옷을 갈아 입은 뒤 그 위에 가운을 걸쳤다. 이미 가운은 온통 물감 
  칠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빠레트를 왼손에 받치고 물감들을  알맞게 짜 놓았다. 빠레트는 미리 
  깨끗하게 닦아 놓았으므로 참으로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그림 구석구석까지 훑어 보았다. 그리고 
  붓을 기름에 적셔 깨끗한 헝겊에 가볍게 닦아 낸 다음, 몇 가지의 물감을 혼
  합했다. 그리고 천천히 붓을 캔버스로 옮겨 갔다.
    일순 시간이 정지해 버리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정물들이, 
  벽이, 천장이, 공기가 일제히 숨을 쉬는 것은  캔버스와  물감과 붓, 그리고 
  켄버스 속에 들어 있는 승냥이와 하늘과 구름과 바위뿐, 그 아무  것도 살아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오랜 시간을 무서운 고요의 공간으로 들어가 떠다니
  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 동안 붓을 놓고 일어섰다. 현기증이 났다. 다리도 
  약간 후들거렸다. 나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 갔다. 도시가 보였다. 도시는 바
  람 속에 잠들어 있었다. 마당을 가로 질러 휴지며 지푸라기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몇 시나 되었을까....
    여전히 벽시계는  껍질 뿐, 속이 텅 빈 채 걸려 있었다. 시간을 자꾸만 거
  슬러 올라가면 나의 무엇과  만날 수 있을까. 계집애가 기르던 흰쥐, 아버지
  의 술 냄새, 계모의 기도 소리,  이런  것들과 만날 수 있을까. 이런 것들과 
  함께 살던 나의 안스러운 시절, 나는 아직도 그 기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몇 번이고 머리를 가로 저으며 나는 잊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어떤 보
  이지 않는 끈에 묶여 항시 나는 그 시절과 통화(通話)하고 있었다.
    다시 캔버스 앞으로 와 앉았다. 나는 이 모든 공간 속의 것을 이제는 모두 
  알 것 같았다. 이 모든 공간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이  내게  속삭이는 소리의 
  뜻을.
    나는 다시 붓을 잡았다. 붓에는 체온이 있었다. 그 붓의 체온은  손가락을 
  통하여 내 피를 따뜻하게 적셔 주었다. 나는 다시 그 공간 속으로 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공간 속에 있는 구름과 검은 바위와 승냥이의 숨소리를 오래
  도록 듣고 있었다. 차츰 내 몸 안에는 또 하나의 공간이 밝아 오고 그 또 하
  나의  공간 속에서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밀려 옴을 의식했다. 나는 제일가는 
  붓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진실과 순수의 이름으로 내 싸인을 적
  어 넣었다.
    어느 새 해가  뜨고  있었다. 창틀에는 햇볕이 노오랗게 묻어 있고 실내는 
  완전히 밝아 있었다. 형광등이  하얗게 사위어 있었다. 나는 일어섰다. 휘청
  거리며 일어섰다. 미간이 찡 하는가  하는 순간 다시 코피가 쏟아졌다. 그것
  은 방울방울 떨어져 무슨 꽃잎처럼 시멘트 바닥에 수놓아졌다.
    적당한 거리로 물러서서 그림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대낮이었다. 그림 속의 하늘은 대낮이었다.  구름들이 벗꽃같이 환
  하게 피어서 어디론가 멀리 흘러가고 있었다. 그 하늘 아래  산과 바위는 밤
  이었고, 밤의 검은 바위산 위에 한 마리 승냥이가 버티고 서 있었다. 승냥이
  의 털은 검고 윤기 있었으며 그 약간 야위고 눈빛이 날카로운 승냥이는 하늘
  을 향해 길게 울부짖고 있었다. 다리는 세 개였다. 그 세 개의 다리는  어두
  운  밤의 바위산을 단단하게 밟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개의 다리는 찢
  겨져 깃발처럼  펄럭거리고 있었다. 대낮 같은 하늘. 화창한 구름. 고요. 하
  늘에 있는 모든 것은 고독이었다. 그러나 승냥이는 고독을 정복하고 홀로 바
  위 산에 오른 고고한  모습이었다. 바위 틈마다 뱀들이 서륵서륵 기어다니고 
  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바위산 전체를 자세히 보면, 그것은 
  프러시언 불루와 암바 계열로  혼합시켜 만들어 낸 어두운 색깔의 거대한 아
  버지의 얼굴이었다.
    나는 점점 긴장이 풀어짐을 의식했다. 그러나 마지막 힘을 모두 모아서 그
  림에 틀을 죄어놓고 벽에다 못을 박은  다음 단정하게 걸었다. 끝났다. 그러
  나 그 곁에 나는 못을 또 하나 더 박았다. 그리고 그 다른 못에 걸릴 물건이 
  그림과 알맞은 높이가 될 것인가를 보기 위해 멀찌기 몇 걸음 물러섰다.
    나는 비로소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 다른 한 개의 못은 알맞
  은 자리에 박혀 있었고, 나는 그 못에 걸 물건을 품 속에서 끄집어 냈다. 그
  것은 아버지의 훈장이었다. 나는 그것을 소중하게 받쳐 들고 벽 앞으로 걸어
  갔다. 그리고 발돋음을 하여 그것을 못에 걸었다.  이 아침, 모든 공기는 차
  고  맑았으며 밝은 햇빛 속에서 훈장은 순금의 광채로 눈부시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오래도록 나의 그림과 아버지의 훈장을 바라
  보고 있었다.      
               

     
                                                           맑은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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