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드라
이우혁
프롤로그
레르네(Lerne)의 물뱀인 하이드라를 퇴치하는 것이 에우리스테우스(Euristeus)가 부과한 헤라클레스(Heracles)의 열두 과업 중 두번째였다.
그 뱀은 머리를 열두 개나 가지고 있었는데, 머리 하나는 영원히 죽지 않았으며, 다른 머리는 하나를 베어내면 두 개씩 새로운 머리가 돋아나는 뱀이었다.(그리이스 신화, 헤라클레스의 전설에서)
1. 의심
남편이 출근하고 나가면, 집안은 그야말로 조용하니 바닷속과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꼭 밤과 마찬가지다. 다만 창에서 환한 빛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
라디오를 틀어 보는 것도 싫고, 음악을 듣는 것도 귀찮을 뿐이다. 다만 피곤하다.
매일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나는 남편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출근해버리고 나면 한 두 시간씩 가면을 취하곤 했다. 그러나 더욱더 피곤할 뿐이다.
해가 있을 때에 잠들면 꿈을 꾸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다고 피로가 풀리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밤은-- 밤에는 영락없이 꿈을 꾼다. 아아, 꿈이라고 믿고 싶다. 차라리 악몽이었다는 것이 확인만 된다면 다시 밤에 잠드는 것이 그다지 두렵지 않을 텐데-- 그러나 꿈이 아닐까 봐, 꿈이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피곤을 지워보려고 화장실로 가서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본다. 그야말로 세상 갈 데까지 다 가본 듯, 피곤에 지쳐보이는 여자 하나가 거기에 서 있다.
바로 나였던가? 저것이 신혼 6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남들이 행복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처지에 있는 여자의 얼굴이란 말인가?
얼굴빛은 파리하고, 눈가에는 검은 자취가 깊숙히 박혀 있다. 입술 색깔마저도 푸른 빛이 도는 듯하다. 보기가 싫다. 눈동자를 아래로 돌리자 남편이 급히 내던지고 나간 면도기가 보인다.
면도날을 갈아 끼우는 구식 면도기다. 요즘은 안전한 이중날이 붙은 면도기도 많이 있는데, 왜 굳이 날을 갈아끼우는 면도기를 쓸까? 면도기의 끝에 비죽한 면도날이 엿보인다-- 아아-- 그날 밤--!!
나는 막 잠에서 깨어났었다.
무언가에 얻어 맞은 듯 머리 속이 욱신거렸다. 아니, 나도 어안이벙벙하여 처음에는 꿈속에 있는 것으로 알았다.
나는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멀쩡히 침대에서 자고 있던내가 왜 이런 곳에 넘어져 있을까 하고 이상하게 여겼었다.
도대체 설명이 되질 않았다. 비몽사몽간에 화장실에 가려다가 졸도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나는 용변을 볼 생각이 그때까지도 없었고, 그렇다고 실례한 흔적도 없었다.
그냥 이상하게 생각하여 몸을 일으키려는데 우리들의 침실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었다. 남편의 발자국소리...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손가락 끝이 얼얼한 것을 느꼈다.
손끝이 여기저기 베어 있었고 핏자욱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바로 저 면도날이었다.
면도날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침실로 갔다.
그러나 남편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면 그 발자국 소리는 누구였단 말인가? 나는 무서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상황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그냥 잠들어 버렸다.
나는 내가 몽유병 증상이 있나 생각했었다--
이상한 일들은 계속 생겼다.
전에는 아침에 침구를 정돈하다가 칼 한자루가 침대 속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기절할 뻔 했다-- 절대, 절대 부엌의 물건을 침대만으로도 꽉 차는, 좁은 침실로까지 들이는 적은 없었다.
더우기 그 칼은 보통의 과도 정도가 아니었다. 얼은 고기를 썩썩 잘라내는-- 톱과 같이 생긴 무척 잘 드는 칼... 나는 무서워서 그 칼을 다시 부엌으로 가져다 놓는 데에만도 한 시간 이상이나 고민했었다.
그리고 그 칼을 비롯한 모든 칼들을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궈버렸다--
내가 이상한 것일까?
아니야. 내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몽유병? 아니다--. 나는 그런 증상이 없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아니다. 전에 정신과에 다녀왔었다.
내가 마구 우겨서 최면에 들어 갔었는데, 최면 중에도 내게서는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오히려 남편에 대해 묻는 것을 도망쳐 나오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남편의 짓이 틀림없었다. 왜 그럴까?
평상시의 남편은 온화하고 화도 내지 않는다. 항상 다정다감하고-* 아아** 그럴 사람이 아니다. 나에게 겁을 주거나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아냐-- 잘 생각해 보자... 차근차근--
다시 지난일이 생각난다.
잊고 싶지만 기억은 다시 또 몸서리쳐지게 새로 와 진다.
며칠 전, 날씨가 몹시 추웠던 날, 우리집 카나리아가 죽었다.
남편이 예뻐하던 새였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남편이 구슬픈 눈으로 죽은 카나리아를 들고 있었다.
목이 축 처진 카나리아는 불쌍도 했지만 보기조차 역겨웠다. 내가 말했었다.
"어쩐 일이죠? 얼어 죽었나요? 아니면 병일까요?"
남편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나는 그런 남편의 눈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나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눈매--. 남편이 말했다. 음산한 목소리--.
"몰라서 물어?"
남편은 죽은 새를 탁자 위에 놓아두고 출근 했다.
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처음에 나는 내가 밤에 문단속을 잘못하여 새가 얼어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나는 새를 별로 예뻐하지 않았다. 그 뱀 껍질 같은 발톱만 보면 소름이 끼친다.
죽은 새의 차가워진 몸**. 그건 깃털 속으로 비참하리만치 앙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대롱거리던 목--. 그때의 남편의 그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 저녁, 남편은 나를 불러내어 외식을 했고 자상하게 내가 힘든 면이 없느냐고 위로해 주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는데--.
가만! 그러고보니 어제 새장을 안에 들여 놓는 것을 잊었었구나! 큰일이다. 가뜩이나 심경이 불안한데--.
서둘러 나가보았으나 그 가엾은(내가 예뻐하는 것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불쌍하다.) 것은 이미 죽어있다.
저런저런--. 남편이 또 화를 낼텐데--. 남편의 그런 눈을 두 번 다시 마주 대하고 싶지는 않다.
어서 치우고 비슷한 새를 사 놓으면 남편이 모르지 않을까? 그러나 만지고 싶지는 않은데--.
굳게 마음먹고 죽은 새를 꺼내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앙상하고 차가운 느낌은 전과 그대로다.
내 기억력이 그렇게 좋았던가? 아니,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대롱거리던 모가지의 감촉만은--.
그런데 이 새는 그렇지 않다. 뻣뻣하기가 마치 돌과 같다--. 돌과 같다--. 분명 전번에 죽은 새와는 다르다. 이게 무얼까? 무슨 일일까?
목! 그렇다. 전번에 죽은 새는 얼어죽은 것이 아니다. 목이 부러져 죽은 것이다. 새건 다른 무엇이건, 죽고 난 후에는 근육 경직이 일어나서 목이 뻣뻣해 진다--. 뼈가 부러지지만 않았다면--. 아아아--.
다리에 맥이 풀리면서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손에는 여전히 죽은 새가 들려있었다.
남편의 짓이 분명했다--. 그래--. 분명했다--. 나는 절대 몽유병자가 아니다.
피곤하고 지치기는 했어도 몽유병자는 아니다--. 그러나 전번의 그 새는 분명 목이 부러져 죽은 것이다. 남편의 짓이 분명하다--.
눈에서 마구 눈물이 흘러 나온다--.
그래--.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눈초리, 그 음성--. 그건 남편이 예뻐하던 새였다. 그러나 그런 새도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죽여버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내 남편이었다.
남편의 그 목소리--. 몰라서 물어!!--.
그래--. 남편은 이중인격자다-. 틀림없는 이중인격자다--.
나를 왜 화장실까지 들어서 옮겼을까?
면도날로 내 얼굴을 조금씩, 아니 온 몸을 조금씩 그으려 한 것일까? 그러다가 내가 잠을 깨어 일어나려 하니 방으로 도망쳐서 잠들어버린 척 했던 것일까? 왜 아예 죽이지 않고--!
침실로, 침대 속으로 칼을 숨겨 들어와서 무엇을 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리고 가지고 들어온 다음에는 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아--. 아니야--. 아니야--. 내가 미친 것이 아닐까? 내가 몽유병자인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아니야--.
의사는 나를 최면에까지 걸었었어--. 그리고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째서--.?
조금씩--. 조금씩 가지고 놀려는 것일까? 아주 조금씩 갉아내고, 살을 발라내고--. 아아--. 내가 왜 이런 생각을! 생각하기 싫어--! 무서워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어쩌면 좋지? 도대체--.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나는 울고 또 울었다. 설움은 걷잡을 수 없이 복받쳐 올라와 내 전신을 통해 사방에 메아리지는 듯 했다--.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죽어 버릴까? 그러나 어떻게--. 어떻게 죽는단 말이야--.!
남편을 병원으로 보낼까? 아니야--. 아니야--. 무슨 증거로? 평상시는 멀쩡한데! 아니, 멀쩡하지 않더라도--. 그걸 어떻게 증명해낸단 말인가!
어떻게--. 아니아니, 아직은 내가 틀렸는지도 몰라--. 그래--.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자다가 몸이 공중에 떠서 화장실까지 갈 수도 있고, 칼이 혼자 걸어와서 침실로 들어 올 수도--. 아아아아악!!! 아냐아냐! 내가 뭐하는 거지? 미쳐가고 있는 걸까? 나는 침대에 뛰어 들었다. 미친 것은 나일까? 아니면 남편일까? 아니면 온 세상일까--.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시간이 이대로 정지해버렸으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책상머리에 작은 노트 같은 것이 보인다. 남편의 일기장--. 그래--. 남편은 꼭 일기를 쓴다고 했다. 아니, 요즈음은 남편이 일기를 쓰는 것을 못 보았는데? 호기심이 생겨서 떨리는 손으로 남편의 일기장을 집어든다. 허나 그건 일기장이 아니고 빈 노트일 뿐이다. 젠장!!! 노트를 집어 던지자 남편의 작은 책상에 맞고 떨어진다--.
'그래! 남편은 하여간 일기를 쓰고 있어! 그건 틀림없어! 그걸 봐야 해! 봐야 해!'
나는 남편의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아니면 여기에--?
한참을 뒤진 끝에 나는 가죽으로 싸인 남편의 두꺼운 노트 한 권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남편의 일기는 우리들의 결혼 이후, 1달 뒤 정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4월 17일
아내가 요즘은 퍽 피곤한 듯이 보인다.
집안 일이 영 쉽지 않은가 보다. 하기는 언제 그런 것을 해보았을까.
좋은 집에서 금지옥엽처럼 길러진 외동딸일 텐데--. 그래도 잡소리 하나 하지도 않는 아내가 고맙게 여겨진다.
사실 결혼이라는 것이 꽤 힘든 면이 있다는 것을 요즘에야 슬슬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좋은 말들이지만--. 이때부터 남편은 뭔가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었구나. 결혼이라는 것이 힘든 면이 있다고--.?'
-5월 6일
오늘은 내가 너무 피곤하다. 직장에서 쓸데없이 조대리와 다투었다. 분명 내가 옳은 말인데도 바득바득 우기는 것이 영 짜증--.. 망할 녀석 같으니! 아니아니--. 그래고 안 보이는 데서 욕을 할 수는 없지--.-
'그래도 이미 욕은 해 놓고도--.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괜히--.'
나는 남편의 일기가 흥미롭게 여겨졌지만, 지금 일상의 잡다한 일들에 신경을 계속 쓸 계제는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여러장의 책장을 한꺼 번에 넘겼다. 이거다! 맞아 바로 이 다음날이었다.
-6월 2일
어제의 일이 계속 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어젯밤 나는 왜 그랬던가?--. 아아--. 모르겠다. 하루종일 그 생각에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무섭다--. 무섭다--.-
'맞아--. 6월 2일의 일기--. 내가 화장실에서 면도칼에 손을 벤 채 쓰러져 있다가 깬 날이 6월 1일이었어. 남편--. 남편의 짓이었다!'
나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아--. 믿고, 사랑했던 남편이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이제는 막막하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이건--. 이건 도대체--.
'아냐. 어제의 일이라 한 것이 꼭 내가 겪은 그 일이 아닐 수도 있어. 다른 일로 뭔가 심한 충격을 받은 것인지도--. 아아, 도대체 뭘까?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찾아내야만 했다.
남편의 6월 2일자 일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고, 그 뒤로 며칠간은 일기를 쓴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다음 페이지는 쓸 데 없는 동그라미와 선들로 이루어진 낙서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별 것 아닌 것들이었고, 무슨 내용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 낙서들을 보자 나는 공연히 몸에 소름이 쫙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굵은 선들, 마구 그어진 사선들, 그로테스크한 동그라니의 연속 집합들--. 문득 지우려 했던 것처럼 박박 선이 몰려 그어진 밑에 희미하게 다른 형체가 보였다.
나는 눈을 가까이하여 그 밑의 형체를 알아보려 애썼다. 그렸다가 지운 그림--. 사각형, 그 형체의 외부는 사각형, 조금 길쭉한 직사각형인 듯 했다. 그리고--.
나는 남편의 책상 위에 있는 거의 투명한 트레이싱 페이퍼 한 장을 집어다 그 위에 놓았다.
그림을 지우고자 선을 박박 그어도 그 선들은 일정한 한 방향을 향해 그어지게 되어 있는 법이다.
비록 눈에 잘 보이지 않더라도, 그어진 선들과 다른 방향에 있는 선의 자취를 따라 이으면, 밑에 있는 그림의 윤곽을 밝혀낼 수 있는 법이었다.
나는 조금씩 남아 있는 그림의 작은 부분들, 그 감춰진 선의 토막토막을 주의깊게 이어갔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허망감이 계속 머리 속을 스쳐 갔지만 나는 계속했다.
믿었던 사람과의 결별이 이루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눈물이 흘러내려 트레이싱지를 군데군데 적셔갔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무서웠지만--.
아주 짧은 선들이 이루어지자, 나는 천천히 그 선들의 방향을 잇기 시작했다.
직사각형의 외부에 조금 파먹은 둥근 형태가 나왔다. 반대 쪽에도, 그리고 중앙에도 길다란 타원의 형체가--.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남편의 일기장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펜과 트레이싱지와 그리고 배게와--. 손에 닿는 것을 모두 집어 던졌다.
울음이 복받쳐 올라와 걷잡을 수 없었다. 나는 마치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면서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어댔다.
그 그림은 바로 면도날의 그림이었다--.
바로 남편이었다--.
아아 남편이--. 남편이--. 목이 부러져 대롱거리던 카나리아, 그리고 얼은 고기와 뼈를 써는 칼--. 면도칼로 베인 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끈끈하고 미지근한 피의 환영--.
그 영상들이 미친 듯 뇌리에서 반복되어 지나갔다. 남편의 그 말소리--.
"몰라서 물어?"
아아 그 눈 빛--. 나는 남편을 사랑했고,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사랑을 멀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게 도대체 웬일이라는 말인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꿈을 꾼 것일까? 잠이 들었던 것일까? 아니 잠--. 그것 좋다. 영원히 깨지 말았으면--. 계속 잘 수 있었으면--.
"으아아앗!"
나는 소스라쳐 비명을 올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벨소리--. 이건 벨 소리였다. 누군가 현관에 와서 벨을 누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7시 27분! 남편이었다. 남편이 퇴근하여 어느 새 돌아온 것이었다! 아아, 이 정신 나간 여자! 잠이 들고 말다니! 아아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도 만들어 놓지 않고 그냥, 그냥 잠이 들어버리고 말다니!
이제는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창문? 아니 여기는 6층이다! 아아--.
나는 서둘러 남편의 일기장을 집어 책상에 넣었다.
그리고 베개를 원래 자리로 돌려 놓고 펜을 주워 책상에 놓았다. 아, 문이 열리는 소리! 남편은 열쇠를 가지고 다녔었다.
내가 없는 것 같으니 자신이 문을 열고 들어오려나 보다. 그런데--. 내가 불쑥 나타난다면? 아냐. 어서 나가 보아야 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아아--.
막 문을 나서서 현관 쪽으로 향하는데 문이 서서히 열려 갔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에서 면도칼을 베껴 그린 트레이싱지 생각이 났다! 그 종이는 아직 침대 위에 놓여져 있는데!!!
몸을 돌릴 시간이 없었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고 출근했던 남편이 대문을 열고 막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침착해야 한다. 내가 남편에 대해 뭔가를 눈치챘다는 일말의 내용이라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위험하다. 카나리아를 잊어서는 안 된다. 무표정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남편의 웃옷을 받아 들었다. 남편의 얼굴은 태연하다.
무슨 일 있었어?
왜?
얼굴이 안 좋아 보여. 눈이 퉁퉁 붓고--. 많이 잤나보군.
눈이 부어 있었구나. 울고 울어서 눈이 부었는데--. 많이 잤다고? 그래. 좋을 대로 생각해라. 차라리 남편의 지레짐작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어쨌거나 침대 위에 놓여져 있는 면도날의 그림은 치워져야 한다. 웃옷을 받아들고 재빨리 침실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남편이 불렀다. 피가 확 몰리듯 머리 속까지 뭔가 뜨끔해진다.
잠시--.
남편이 다가온다. 뒤에서. 왜 다가오는 것일까? 아아--. 카나리아--. 아냐--. 아니다. 침착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섣부른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남편의 손이 슬며시 다가오는 것까지도 느껴진다. 아아--.내 몸을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남편의 손은 내가 들고 있던 남편의 웃옷을 잡고 뒤로 가져가버린다--.
뒤를 돌아보니 남편은 윗옷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고 있다. 얄밉게도 얼굴은 무심할 뿐이고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를 그렇게 놀라게 하고는--. 아냐.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남편의 웃옷을 잡아채듯이 가지고 침실로 뛰어 들었다.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고 일단 남편의 옷을 침대 위에 내던졌다.
아차! 남편의 옷이 펄럭 하면서 침대 위로 떨어지자 그 바람에 밀려서 면도날을 베껴 그린 종이가 침대의 구석진 곳으로 날아가서 틈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버린다.
이런! 세상에! 그러나 차라리 잘되었다. 어차피 감출 곳도 없는 판인데--.
맥이 풀린다. 나는 몸을 침대 위에 던져 털썩 하고 앉았다. 바로 옆에 있는 남편의 일그러진 모습의 윗옷. 짙은 감색의 양복 상의이다. 나하고 같이 가서 맞추었던 옷이지--. 그 옷조차가 무섭다. 그런데 내가 그 옆에 앉아 있다니! 몸을 일으키려다보니
신경질이 난다.
남편의 윗옷을 땅으로 끌어내려 놓고 발로 차려 했으나 아직 차마 발로 옷을 걷어 찰 용기는 나지 않는다. 아--. 이러다가 또 편이 방에 불쑥 들어오면--. 안 돼. 이래서는 안 돼--. 아무래도 내가 이상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남편은 여전히 온화한 얼굴이고 어떤 다른 기색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래. 밤이 되기 전까지는 안전할 것이다.
윗옷을 다시 집어든다. 옷장에 넣고 걸어야 한다--. 음? 주머니에 뭔가가 있다. 조그맣고 단단한--. 직육면체?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손에 우연히 잡힌 물건을 꺼내 보았다.
헉!
비명을 지르려다가 급하게 입을 틀어 막았다. 남편의 윗옷이 떨어지며 발치에 가서 달라붙듯이 쌓인다. 그 물건은 면도칼
뭉치--.
자그마치 20개나 한 무더기로 쌓여 있는 면도칼의 뭉치이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아아--. 왜 이게--. 왜 이것을 주머니에서 빼지 않았지? 면도칼은 욕실에 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면도칼을 주머니에 그냥 넣어둔 채로 옷을 침실에 걸게 한 걸까? 밤이 된 다음 욕실에까지 다녀오려면 내가 잠을 깰까 보아서인가?
침실에서 면도칼로 무엇을 하지? 잘 드는--. 팅팅거리는 차가운 칼날--. 아아--.
갑자기 마루에서 남편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놀라움의 소리, 아니, 화가 난 듯한 외침이다!
여보--!!
아아, 어떻게 해야 하나? 조금 잠을 자고 났더니, 그래서 마음이 가라앉았었는데--. 이 면도칼! 어떻게 남편의 얼굴을 또 볼 수 있지? 자신이 없다. 어떻게 태연한 척 할 수 있지? 아아아--.
여보---!!!
나갈 수 없다. 나가기 싫어--. 국민학교 1학년 때, 나는 예방주사 맞기가 무서워서 줄의 맨끝에 섰다. 그러다가 담임선생님의 책상 밑으로 액체처럼 숨어 들어갔었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발만 익살스럽게 보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숨을 곳도 없다.
여보--!! 뭣해!
남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지고 화가 난 듯한 기색이 더욱 더 짙어져 간다. 그래--. 예방접종이 끝나는 시간--. 나는 그때까지도 책상 밑에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왜 지금 그 일이 기억이 나는 거지? 가만,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던가? 모르겠다--. 아-. 아냐--. 접종이 끝나고 담임선생의 발이 점차 내 쪽으로 다가왔다.
책상에 앉으려고--. 나는 가능한 한 힘껏 몸을 움츠려 책상의 구석에 잔뜩 붙으려고 했다. 몸이 납작해졌으면, 풍선처럼 꺼져 버렸으면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 담임선생님의 발--. 나는 담임선생님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 발만은 평생 미워할 것 같았다--. 발은 다가오고--.
여보! 어서 나와봐!
아아--. 나는 담임선생의 발에 걷어 차이고 책상 밖으로 끌어내어졌다--. 나가야 했다. 그리고 지금도--.지금도--. 아,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더라--.
나는 무심코 몸을 돌려 침실 문의 손잡이를 돌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스텐으로 된 손잡이의 차가운 감촉.. 그건 마치 면도날의 느낌과 비슷했다. 나가야 하나--.
그렇다! 나는 책상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러면서.. 맞아--. 나는 팔을 문지르고 몹시 아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주사를 맞아서 팔을 쓰기 어렵다는 듯이--. 그리고 말했었다.
선생님--. 이 밑에 제 동전이 떨어졌어요!
나는 나갈 수 있다. 그래. 지금도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용기 있게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리고--.
남편은 침실 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나오지 않자, 자신이 직접 나에게로 오려 한 모양이다. 그의 얼굴--. 아, 왜 그럴까? 왜 남편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지? 무섭다. 왜?
아아--. 그의 손에는 죽은 카나리아가 들려있다. 얼어죽은 새--. 나의 실수--. 아니 그건 공동의 실수였다. 그러나 남편의 차가운 질타의 눈빛은 나에게로 향하고 있다. 나에게로--.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아아, 다시 옛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왜 이 일이 지금 자꾸 생각나는 것이지? 왜?
주사를 맞은 척 하기 위해서 나는 자리로 돌아간 다음에 다른 아이들의 눈을 피해서 뾰족한 연필로 팔을 찔렀다. 몇 번이고--. 주사를 맞은 것처럼, 팔에 구멍을 내기 위해서--. 다른 아이들은 서로 주사를 맞아 얼마나 부었나 내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사를 맞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성공이고 작은 승리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연필로 내가 내 팔을 찔러대는 것은 주사보다 더 아팠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오래 걸렸고, 용기가 필요 했다. 이 정도면 될까? 아니, 왕주사라던데--. 너무 작아--. 더 크게--. 의심받지 않게 더 크게--. 아팠다. 그래도--. 그래도--. 용기를 내어 연필을 힘있게 쿡 찌르자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따가웠다.
눈물이 핑 돈 채 무심결에 연필을 다시 빼는데 심이 딱 하고 부러져 버린다--. 아아아--. 이걸--. 이걸 어째? 주사를 맞았다고 한 그 자리에 시커먼 연필심이 음흉스럽게 박혀 버린 것이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주사에 의해 난 생채기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 때, 그래. 바로 그 때, 난생 처음 벌거벗고 남 앞에 선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카나리아--. 그리고 면도칼--.
남편의 눈길이 내 얼굴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막 무슨 말인가가 새어나오려 하는 중에도 나는 멍하니, 미칠 듯이 새롭게 살아나는 어릴 때의 기억을 머리로 보면서 죽은 카나리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남편의 얼굴은 아직도 온화한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것이 더 무섭다. 저 온화한 얼굴--. 왜 남편은 화난 얼굴을 나에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 기억 저 건너편으로 멀어지려는 생각들 사이로 남편의 목소리가 칼처럼 비집고 들어왔다.
또 죽였군.
죽였다고? 아니다. 내가 죽였다고? 아니야, 아니야!
미안해요--.
아, 이 바보! 그런 말이 어디에 있어? 내가 죽인 게 아니라고 외쳐야 하는 건데! 왜, 왜 말이 그렇게밖에 되어 나오지 않는 것이지?
당신 무슨 일 있었소? 목소리가 왜 떨리지?
아, 안돼! 내가 뭔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이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아-. 아니에요.. 너무 가엾어서--.
당신은 새를 싫어했잖아?
아, 그래서 저것도 내가 죽인거라고 말하고 싶은건가? 아냐. 내가 죽인 것이 아니었어. 당신! 당신이 죽였잖아!
새--. 목이 뻣뻣하군요--.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오고 말았다. 아, 그 말은 아직 해서는 안 되는 건데. 남편의 눈매가 조용히 나를 향한다. 얼어 붙을 것 같다.
그래--. 얼어 죽었나보군.
남편의 눈매가 번쩍 빛난 것 같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남편은 그대로 몸을 돌려 죽은 새를 테이블 위에 던져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이다. 일단은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왜 죽은 새를 그냥 놓고 간거지? 또 나보고 치우라는 말인가?
죽은 카나리아의 몸, 마치 언제 살아 있었냐는 듯이 차갑고 뻣뻣하다. 손끝만 닿아도 그 죽음의 감촉이 전신에 퍼질 것 같아서 끔찍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참아야지.
어디다가 버려야 하나? 묻어 주어야 하나? 아니면 쓰레기 통에?
죽은 새를 들고 잠시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다. 남편의 말-. 얼어죽었나 보군--. 그래. 이번에는 분명히 얼어죽은 것이 맞다. 내 실수였다. 그러나--. 저번에는 그러면 남편도 그 새가 얼어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죽은 새를 툭 떨어뜨렸다. 그러나 다시 집을 생각은 나지 않는다. 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전번에 죽은 새를 보고 내가 왜 죽었냐고 물었을 때, 남편은 몰라서 물어? 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면 남편도 분명 그 새가 목이 부러져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연하지. 자기가 죽인 거니까. 그런데 그때 왜 호통을 쳤을까? 자기가 그래 놓고는, 마치 자기가 그러지 않았다는 듯이 넘어가려는 단순하고 작은 속임수 였을까? 아냐.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어.
다시 옛날의 기억이 난다. 연필심을 팔에 꽂고 아픔을 참으면서 다른 아이들이 그러하듯 팔뚝을 문지르고 있었다. 속임수--. 다른 아이 하나가 나에게 물어 보았다. 많이 아프지? 큰일이었다. 내가 주사를 맞은 것이 아니라 연필을 팔에 꽂아서 상채기를 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럴 수는 없었다. 다시 주사를 맞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발가벗겨지는 기분을 다시 느끼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속임수, 그런 뻔한 속임수만으로는 부족했다--.
침착해야 해--.
나는 마음을 다시 다잡아 먹었다. 남편이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렸다. 목에서 넥타이를 풀어내리는 스으윽 하는 소리, 그 소리가 마치 면도칼로 살을 그어내리는 소리처럼--. 앗!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아아, 그래. 면도, 면도칼. 남편이 윗주머니를 뒤져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자기가 가져왔던 면도칼이--.
나는 주머니에 집어 넣어두었던 두둑한 면도칼 뭉치를 다시 움켜쥐었다. 그리고 죽은 카나리아도 다시 집어들었다. 양 손에 쥐인 두 개의 상이한 감촉이 익살스럽게 무거운 무게로 어깨를 잡아당긴다.
면도칼을 어떻게 할까? 모르는 척 할까? 아니면 지금 남편에게 가져다 줄까?
남편의 와이셔츠가 벗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 갑자기 좋은 수가 떠올랐다. 욕실! 욕실에 가져다 놓으면 된다. 그러면 나중에 남편이 뭐라 하더라도 변명을 할 수가 있고 의심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 묘안이다!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욕실로 발을 옮기는데 다시 옛날의 생각이 떠올랐다--. 팔에 박힌 연필심. 하루종일 팔을 문지르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필 여름이어서 반팔을 입고 있었고, 오른 손으로는 글씨를 써야 했다. 방법--. 그래, 나는 지금처럼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어린 시절에 사내아이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연필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각각 한 자루씩의 연필을 놓고 손가락으로 튕겨서 책상 밑으로 떨어뜨리는 놀이. 떨어진 연필은 사망이다. 카나리아처럼.
그리하여 주인의 손을 떠나 다른 아이의 필통 속에 제물로서 눕혀진다. 아,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지. 나는 두 아이가 주사를 맞아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팔을 휘둘러대며 신들린 듯 연필따먹기를 하는 책상의 옆으로 다가갔다. 기회가 중요했다. 나의 온 신경은 연필따먹기를 하는 아이들의 손끝에 모아졌다. 팽팽하게--.
욕실 문을 열고 남편의 구식 면도기를 꺼냈다. 그렇게 해두는 편이 더욱 안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예 날까지 갈아주자. 그래야 더더욱 훌륭하게 변명을 하는 것이다--.
한 아이가 마치 제사장과 같은 심각한 얼굴로 최후의 일격을 자신의 연필에 실었다. 그리고 주인의 얼굴처럼 일그러진 듯한 상대의 연필을 강타하고--. 연필은 마치 총에 맞은 개처럼 책상 밖으로 호선을 그리며 떨어져 갔다.
그때였다. 나는 그 옆으로 무심히 걸음을 옮기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태도로 몸을 돌려 날아오는 연필의 궤도에 맞추어 가리고 있던 팔뚝을 내밀었다. 내가 얼마나 긴장하였는지! 조그마한 오차도 허용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해냈다!
연필은 나의 팔에 힘없이 맞고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준비했던 비명을 질렀다. 크게, 아주 크게. 온 반의 아이들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쳐다 볼 만큼이나 크게 질렀다. 그리고 쓰러지듯 땅에 앉으며 떨어진 연필을 다른 손으로 덮쳐 눌렀다. 그 연필심이 내 팔로 들어간 것처럼 보이게 하려면 이 연필의 심은 꺾어져야만 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죽은 카나리아를 세면대 위에 올려놓고 면도날 뭉치의 포장을 풀었다. 그리고 남편의 면도기를 열었다. 삐걱거리며 익살맞은 소리가 들린다. 서둘러야지. 남편이 이제쯤이면 옷을 다 갈아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기억--. 기억이 계속 난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연기라는 것을 해 본적은 없지만, 여자는 모두가 배우가 될 수 있다. 아마 나의 일생일대의 연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떳떳하게, 모두에게 연필심이 박힌 자리를 내보이면서 아무 죄도 없는 심 부러진 연필을 작은 도박판이 벌어지던 책상 위에 내던지듯 올려 놓았다.
아이들의 동정 어린 이야기들--. 물론 사내아이들은 그 까짓게 뭐가 아프냐고 빈정댔다. 그러나 나의 단짝이었던 그 착한 성숙이는 그런 아이들에게 마구 소리를 질렀다.
너도 주사 맞은 곳에 연필심이 박혀봐! 안 아플 것 같아? 내가 찔러줄까?
평상시의 온화했던 성숙이는 오히려 나보다도 훨씬 사나와져 있었다. 모든 것은 그렇게까지 잘 되어나갔다. 그래--. 그랬을
것이다.
갑자기 시큰한 통증이 온다. 앗! 손가락을 베었다! 막연한 옛날 생각을 하면서 익숙하지도 않은 기계를 만지니 그렇지--. 면도날은 역시 너무나도 에리했다. 피가 방울방울 떨어져서 죽은 카나리아의 얼굴을 범벅으로 만든다. 끔찍하다. 머리가 어지럽다. 반창고, 반창고가 있을텐데?
재빨리 욕실의 작은 장을 뒤져서 반창고를 꺼냈다. 그리고 피가 튀지 않도록 일견 조심하면서 반창고를 잘라내려 하는데 잘 잘라지지가 않는다. 아, 이게!! 손이 미끄러지자 피가 반창고와 욕실 벽에까지 튄다. 가뜩이나 잘 떨어지지 않던 반창고가 더더욱 엉망이 되어 버렸다!
울음이 나올 것 같다! 이런! 잘되는 줄 알았는데 또 왜?
아아--. 그때도 그랬다. 잘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성숙이--. 나 때문에 성숙이는 남자아이 하나와 싸우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내 아픔을 동정해 주려다가--. 그래. 남자아이가 성숙이의 뺨을 때렸다.
여자 아이들은 모두 같이 분개했다. 싸움! 그때는 어렸었다. 남자 여자의 구별이 그다지 두드러진 것이 아니었다. 주먹이 오가고 욕설이 난무했다. 아아아--. 그래--. 아아! 그것만은, 그 기억만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때.. 그때 나는 무엇을 했지? 어떻게 했지?
눈물이 나오는 것을 삼키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남편이 눈살을 찌푸리고 반 쯤 입을 벌린 채 욕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눈이 마주쳤다.
2. 논쟁
남편의 눈매가 조금씩 일그러지면서 그 눈길은 욕실의 여기저기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르며 한 손에는 면도칼, 한 손에는 짓이겨진 반창고를 들고 망연히 서 있었을 뿐.
남편의 시선은 세면대 위에 놓여 있는 죽은 카나리아에게로 가서 멎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심코 내 시선도 널부러져 있는 카나리아에게로 향해진다. 내 손가락에서 흘러내린 피--.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날 듯한 핏방울들이 카나리아의 대가리와 깃털들을 처참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남편의 눈길이 다시 내 손을 향했다. 면도칼--. 그리고 반창고. 아니! 면도칼을 들고 있는 오른손이다. 피가 묻어 있는 면도칼--. 남편의 반 쯤 벌어진 입--.
남편의 벌어진 입이 서서히 다물어진다. 아아, 나는 저런 입모양을 언젠가 본 듯하다. 언제 보았을까? 언제?
그렇다. 성숙이. 성숙이였다. 사내아이에게서 뺨을 맞고 구석에 제정신이 아닌 듯 멍한 눈을 하고 서 있던 성숙이. 다른 여자아이들은 욕을 하면서 남자아이들과 채 이유도 모르는 채 싸우고 있었다.
그 와중에 구석에 얻어 맞아 부어오르고 있는 뺨에 손을 댄 채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멍하니 서 있던 성숙이의 입--. 그 입도 서서히 다물어져 갔었다. 틀림 없었다. 지금처럼--. 지금 남편의 입모양처럼--.
남편의 입이 다물어져 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웬지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세상이 빙글빙글도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아니, 착각이 아니라 정말 세상이 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난 눈을 감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감을 수가 없었다.
"여보!! 뭐하는 짓이야!!!"
이게 도대체 어디서 울려나온 소리인지 나는 채 짐작할 수도 없었다. 어느 미친 녀석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지? 아니? 이건! 남편--. 내 남편--.
"이--. 이런 세상에--.. 당신, 당신은 지금 도대체--."
아아,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나는 아무 것도 한 짓이 없다. 지금 남편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 본다.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그러나 남편의 얼굴은 냉정하다. 여전히 냉정할 뿐이다. 다만, 뭔가 무서운 것이, 번개와 같고 서릿발과 같은 무서운 것이 남편의 얼굴에 가득 차 있다!
"썩 그만두지 못햇! 이 잔인한!!!"
머릿속이 빙글빙글 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왜 내가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성숙이--. 성숙이의 입이 천천히 닫혀지면서 그 아이의 얼굴에도 지금의 남편과 비슷한 기운이 감돌았었다. 천천히--. 아니, 빨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나도 천천히--. 그 입은 닫혀졌고, 그 아이의 눈에는 푸른 불꽃 같은 것마저도 번득였었다.
아무도 그럴 줄은 몰랐었다. 그래, 나조차도. 어쩌면 성숙이 자신조차도 몰랐을지도 모른다. 성숙이는 석고상처럼 서 있다가 어느 순간에 모습을 바꾸었다. 그 애의 손에 들려있었던 꼬챙이--. 그건 옛날 조개탄을 때던 난로에 항상 꽂혀 있던, 벌겋게 달아오른 쇠꼬챙이 였다.
그 쇠꼬챙이가 어느 순간에 성숙이의 손으로 날아 들어갔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나도 보지 못했으니--. 성숙이의 손에서 쇠꼬챙이가 날아 갔다--..
남편이 내 어깨를 잡아 뒤로 확 밀치는데도 나는 어떻게 저항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몸을 비틀거리면서 벽에 다친 손을 짚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었다.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원망스러웠다. 고개를 돌리는데, 다친 손이 벽에 붉은 손자국을 남기고 그어져 갔다.
남편은 죽은 카나리아가 마치 소중한 보물이나 되는 양 조심스럽게 그 뻣뻣한 고기덩어리를 들어올리고 있는 중이다. 아, 나는 상처입고 이렇게 피를 흘리고 있는데--. 남편은 그 새의 시체에만 눈이 팔려있다.
썩 그만두지 못햇! 이 잔인한!
잔인한 것은 남편이 아니었던가? 전번에 저 새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린 것은 남편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면도칼을 뭉치째 사와서 주머니에 감추어 놓았던 것도 남편이 아니었던가? 내가 잔인하다고? 왜? 왜?--..
성숙이가 던진, 불에 달구어진 쇠꼬챙이--. 그건 다행스럽게도 사내아이의 뺨만 살짝 스치고 지나가서 교탁 위로 굴러떨어졌다. 교탁의 나무가 지지직 소리를 내면서 모호한 연기를 신음처럼 토해냈고, 사내아이의 기세등등하던 표정은 금시에 얼빠진 얼굴로 일그러져 갔다.
모두가, 주먹질을 하고 멱살이며 머리 끄댕이를 잡아당기던 아이들 모두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 자세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성숙이--. 마치 올림픽의 투창 선수인 듯한 자세를 그대로 취하고 있던 성숙이의 얼굴도 뭔가에 놀란 듯이 경악하듯 굳어져 갔다.
그리고 나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남편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나는 이제 알았다. 남편은 죽은 카나리아를 들어올려서 거기에 묻은 피를 손으로 문질러 닦아내고 있던 거였다.
아하, 남편은 내가 죽은 카나리아에 칼질을 해댄 줄로 생각했던 것이 틀림 없다.
원 세상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나는 그런 것은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놀라는 바람에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면도칼을 떨어 뜨렸다.
탁 하는 소리에 남편이 뒤를 돌아본다. 나는 부들부들 온 몸을 떨고 있을 뿐이다. 남편의 눈은 공허함에 가득차 있다. 연민의
표정! 남편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남편의 눈길은.. 지금 이겨져 붙은 반창고를 들고 있는 내 다른 손에 멎어있다.
남편의 눈매가 흔들린다. 아아, 저건 저건 고통의 표징, 반성, 속죄, 아니--. 그 모든 것! 아아, 그런데--. 그런데 내 심정은 왜 지금의 남편이 아까의 기세 등등한 남편보다도 더욱 무서워 보이는 것일까? 왜 그럴까?
"여보--. 다쳤군--. 미안해--."
"으아아악!"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면서 욕실을 뛰쳐 나왔다. 아아, 내가 왜 이러는 것일까? 왜 나는 나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낯익은 집안의 정경이 마치 지진에 휩쓸린 것처럼 흔들려가고 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졌다. 남편의 그 눈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성숙이는 몰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나는 그보다도 더욱 더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 이름도, 자세한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아이--.
그 아이는 데이고 검댕이 묻어 시커멓게 된 뺨의 상채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아, 더 이상은 기억하기 싫은데--. 왜 자꾸--. 잊고 있었던 기억이 왜 자꾸!!!
싸움은 끝이 났다. 혼돈은 가라 앉았고, 급기야 마구 울음을 터뜨려대는 성숙이를 아이들이 한 쪽으로 몰아 앉혔다. 교탁에서는 연기가 솟아나고 있었고, 어쩌면 그 교탁은 방금 보았던 사내아이의 쓰러진 모습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사내아이는 뺨을 문지르면서 히히- 하고 넋나간 듯이 웃었다.
마치 백치와 같은--. 나면서부터의 백치와 같은 웃음이었다. 그 웃음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으면--. 그랬었다면--.. 아아악!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나는 계속 피를 흘리면서 마루의 큰 유리문에 버티어서서 까닭없이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편의 그 동정--. 그 이해심--. 그래. 아무 것도 아닐지 몰랐다. 면도칼을 사올 수도 있었다.
남편의 면도기는 날을 갈아끼워야 하는 구식이었으니까. 그리고 카나리아를 대하는 그 모습으로 볼 때, 남편이 카나리아의 목을 비틀어 댔다고는 절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침실의 칼, 욕실에 쓰러져 있던 내 몸--. 모두 아니었다.
그 눈빛! 그 눈빛 한 번 때문에 세상은 뒤집혀져버렸다.
몸이 마치 학질에 걸린 것처럼 부들부들 떨려온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러면 앞서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그건 내가 한 짓이 분명했다--.
나는--. 나는 그 때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종이 울리고, 담임선생님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들어왔고, 아직도 조금씩 김이 나고 있는 교탁을 발견했다. 반장 아이가 종이 울리자 재빨리 쇠꼬챙이를 도로 난로에 가져다 넣고 물을 끼얹어 교탁에 붙으려하는 불은 끈 것이었다.
그리고 성숙이는 내내 흐느끼고 있었고, 뺨에 상처를 입은 아이는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 아이의 짝은 이 소동을 은폐하기 위해서 몸으로 그 아이를 선생님의 시야에서 거의 필사적으로 가리고 잇었다. 그런데--. 나는 무얼하고 있었던가? 어디에 있었던가?
나는 맨 처음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연필심을 팔에 꽂은 바로 그 자리에.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는 않았고, 나 또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종이 치고 선생님이 들어오신 후에도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선생님의 화난 듯한, 그리고 무언가 불안감을 짙게 느끼는 듯한 눈빛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에게서 시작하여--.
그리고 교실 안을 한바퀴 돈 후, 다시 선생님의 눈길은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떨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 지금처럼 떨고 있었다.
선생님의 입에서 말이 떨어졌다.
"민정아--. 무슨 일이지?"
그때의 선생님의 말투가 야단치거나 엄한 것이었다면 나는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바보처럼 선 채로 흐느낌을 터뜨려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어조는 퍽이나 부드럽고 그 안에는 동정심과 제발 상황을 가르쳐달라는 간곡한 마음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치 지금--.지금의 남편의 목소리처럼!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누구를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는 놀라움에 그때까지도 흐느끼고 있었던 성숙이가 그럴 수 있었겠는가?
눈이라도 꿰뚫려서 죽었을지도 모르는 그 아이가 말을 해줄 수 있었겠는가?
아니, 모든 아이의 눈은 나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아,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까지도--..
죄인은 나였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유래된 것이 분명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것이 분명했다. 욕실에서 남편이 천천히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보, 많이 다쳤소?"
남편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왔으나 그쪽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냥 흐느끼고 싶은 기분으로 다만 창밖을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악 해가 넘어간다. 오늘따라 석양빛이 유난히 붉어 보인다.
그리고 그 빛은 내 얼굴에, 몸에, 상처에서 흘러 나오는 붉은 피에 반사되어 더더욱 붉어진다. 남편의 목소리--. 얼굴을 보지 않으니 다만 귀로 들려만 오는 그 목소리는 갈데 없는 타인의 형체를 띄고 있다. 마치 그 때, 선생님의 목소리 처럼--.
"민정아.. 왜들 그랬지? 말해 보렴--."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었던가? 가끔가끔 몸서리를 치면서 나를 잠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던 그 때의 일. 내가 그 때 무슨 말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기억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런지-.
"아까 내가 실언을 했던 것 같아. 그러나 내 생각엔 당신은 정말.."
생각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내가 이상하다고? 갑자기 고개를 돌리자 내 눈 앞에는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저 사람이 내 남편이다. 나의 평생의 동반자.
막상 마음이 약해지니,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연민 같은 것이 고개를 드는 듯 하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래--.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아무 것도 아닌 듯, 넘어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눈에 띄었다. 남편의 얼굴은 처연 했으나, 남편의 눈동자는 유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왜 저러지? 마치 먹이를 앞에 둔 짐승의 눈빛처럼, 남편의 눈은 번들거리는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지금--. 내 손! 아니 내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고 있다! 탐욕스러운 듯이!
뭔가 찾아내려는 듯한 그 눈빛! 난로가에서 몸을 떨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나를 안경 너머로 쳐다보던,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번득거리던 선생님의 그 눈빛!
문득 눈에 빛이 번득하면서 지나갔다. 남편의 손에서. 남편의 손에 들려져 있던 가위가 빛났다. 커다란 가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가까이 오지 마!"
"왜--? 왜 그러는거야--?"
남편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래도 내게로 다가오려 하고 있다. 물론 저 사람은 내 남편이다. 벌써 꽤 오랫동안 알아온--. 그러나 왜 이 순간에만은 남편이 완연한 타인으로 보이는 것일까?
"오지 마! 오지 맛!"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때 마침 옆에 놓여 있던 꽃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과거에 성숙이가 마치 고대의 투창 선수처럼 달아오른 꼬챙이를 던졌듯이--. 온 몸의 근육이 후들후들 떨려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꽃병을 냅다 집어 던졌다.
남편은 멈추어 선 채 고개만 약간 옆으로 눕혀서 날아간 꽃병이 그냥 지나가게 만들었다. 꽃병은 벽에 부딪혀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깨어져버렸고 병에 꽂혀 있던 반쯤 시든 장미들이 사방으로 튀며 다시 붉은, 어딘가 우울한 붉은 궤적을 허공에 그려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꽃들은 부서지면서 흐느끼듯 사방으로 흩어져 간다. 벽에서 되팅긴 물방울들이 저녁햇살에 반사되어 붉은 별처럼 빛나고 있다.
남편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원위치로 돌아오면서 가위를 들고 있지 않은 왼손을 서서히 뺨에 가져다 대었다. 붉은 자국. 펜으로 그은 듯한. 그 때 그 이름모를 아이의 뺨에 났던 상처와 흡사한 자국이 남편의 뺨 위를 달렸다. 날아가던 화병 속에서 팔을 길게 뻗은 장미가 남편의 뺨은 긋고 지나간 것이 틀림없다.
마치 영원 같은 시간. 내 손에 엉킨 피, 그리고 남편의 뺨에 점점이 맺혀가는 방울들, 아직도 흩날리는 시든 장미, 그리고 온 세상을 가득 채운 붉은 저녁햇살--. 모든 것이 붉었고, 모든 것이 그 순간에는 영원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마치 꿈속을 거닐듯 몽롱한 기분으로, 나 스스로가 남편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나의 남편, 나의 그이. 남편. 분명 남편이었다. 나를 욕실로 끌어다 놓고 면도칼을 쥐어 준, 우리의 침대 사이에다가 고기 써는 칼을 놓아둔, 그리고 카나리아의 목을 비틀어 팽개친,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한다던 남편.
안경알 너머로 가위같이 붉은 빛을 번득이는 눈을 한 선생님이 물었다.
"민정아, 무슨 일이지? 네가 말하렴--."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지금까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네가--. 네가--. 네가--. 네가--. 네가--."
선생님의 마지막 말은 메아리가 되어 귓전에서 날뛰고 있다. 네가? 내가. 래 내가. 왜 내가 아니면 안되는가? 왜 나만이 말을 해야 했던가? 그런데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었지? 아아, 정말 그 것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신! 내 말 들어요! 거기 서서! 꼼짝하지 말아요! 가까이 오지 말고 들어요!"
"여보--.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왜? 왜??? 왜냐고? 그걸 왜 나에게 묻지? 당신이야말로 왜 그랬어요! 카나리아--. 예전의 그 카나리아는 목이 부러져서 죽었어요. 오늘 얼어죽은 저 카나리아와는 달라요! 왜 그랬죠?"
"카나리아--. 아니--."
남편이 더듬대면서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내 입에서 갑자기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말의 홍수는 나로서도 걷잡을 수 없었다. 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부엌에 있던 칼! 그게 침대 속에 있었어요! 왜? 왜 그랬죠? 그리고 전에 나는 왜 자면서 욕실로 끌어내어져야 했죠? 내 손을 봐요--. 그때도 지금같이--. 지금같이 피로 젖어 있었어! 오늘 당신은 왜 그리 마음을 써주죠? 그리고 그 때는 왜 아무 말이 없었죠? 왜? 왜?"
"여--. 여보!"
아아, 남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을 것처럼 일그러져 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무슨 말을--. 아아, 내가 미친 것은 아닐까? 나로서도 나 자신을 걷잡을 수 없다. 아아, 내가.. 내가 미친 것이 틀림없어--. 저 가련한 남편--. 남편이--.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내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내 입과 내 호흡기는 마치 다른 자가 조종하는 것처럼 쉴새없이 독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도 마치 누가 옆에서 불러주는 것처럼 놀랄 만큼 순간적으로 흘러 나오고 있었다. 틀림없다. 나는 미친 것이 분명했다.
"면도칼 뭉치! 당신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면도칼 뭉치는 무엇 때문에 사가지고 온 것이지? 그리고 당신의 일기장에 있던 면도날의 그림! 왜 그렇게 칼에 관심이 많아졌지? 그리고 왜 내 피를 보고 그리도 눈빛이 빛나는 거지? 왜?"
"여--. 여보--.!"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내 말이 터무니가 없어서 일까? 아니면 정곡을 찔러서 일까? 쓰러지고 싶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일들--. 그러나 분명히 이유가 있을 그 일들. 남편이 이상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답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온 몸을 떨면서 남편은 마치 무의식적인 것처럼 가위를 들고 있던 오른손을 들었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서 또 다른 내가 멍멍할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위험!
"저리 갓!"
내 몸은 나 자신마저도 믿어지지 않는 빠른 동작으로 소파의 뒷 쪽으로 뛰어들어갔다. 본능이었을까? 갑자기 나는 온 몸에 독이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뱀의 뜨거운 독. 가위가 남편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지면서 다시 한 번 번득였다. 무의식 중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태연을 가장한 것일까?
독이 오른 고양이처럼 내 눈꼬리가 위로 치켜져 올라가는 것이 느낌으로 쏘아져 왔다. 남의 일처럼. 소파를 움켜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자 소파가 약간 기른 내 손톱에 눌려 투투툭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가빠오며 입에서 단내가 난다. 차라리 모든 것을 잊고 쓰러져 눕고만 싶었다.
그러나-. 한가지 만은 분명했다. 나는 원래부터 새를 싫어했다. 하물며 예전의 카나리아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아--. 당신--. 이제 알겠어. 나를.. 나를 어쩌려고--. 서서히 가지고 놀려고? 아주 서서히--. 본 적이 있어. 개미를 갖고 노는 아이--. 서서히.. 조금씩!!! "
"아아--."
남편이 한숨 소리 같은 것을 내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무슨 의미일까? 그러나 약해져서는 안 된다.
"나를--. 나를 어쩌려고 그래? 응? 제발.. 제발 가까이 오지 맛! 카나리아.. 카나리아는 싫어--. 싫어--. 왜 울어? 왜!!! 웃어! 웃으라구! 만족하잖아!"
거의 악을 쓰다시피 점점 언성을 높여가고 있는 나 자신은 이제 내게서 저멀리 떨어진 또 다른 나, 그림자의 나였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이제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직도 흘러내리는 눈물. 나는 그 눈물이 이제까지 내가 알았던 나 자신과의 고별을 슬퍼하는 눈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의심의 그림자가 이겼다. 나는 진 것이다.
이제 내가 무슨 짓을 하여야 하나?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내 몸과 내 마음을 나 스스로가 조종할 수 없으니--. 지금 남편이라고 불리우는 한없이 낯설어 보이는 얼굴을 앞에 두고 나는 발광난 고양이처럼 몸을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눈에서는 줄줄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그래도 느껴진다.
남편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저 눈물은 무엇을 위한 눈물일까?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사실 내가 겪은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새 한 마리가 죽고, 욕실에서 넘어지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남편이 정말로 나를 어쩌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야--. 아닐 거야--.
나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미칠 것 같고, 아니 어쩌면 이미 미쳐버렸는지도 모르는 이 순간! 그러나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러나--. 그러나 무엇으로?
그때의 그 일. 선생님의 빛나는 안경알. 시커멓게 타버린 교탁. 심술궂게 박힌 연필심. 그리고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뒤통수를 따갑게 쏘아대는 아이들의 시선--. 나는 벌겨벗겨진 채 사람들 앞에서 있었다. 어떤 옷도, 생각도 나를 가려 주지는 못했다.
모든 것을 털어 놓아야 했을까? 아니, 그 때의 나는 그런 분별력이나 사려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다만 나를 휘어잡고 서 있을 수 있게 한 것은 다만 본능. 어떻게든 벗어나고 살아나야만 하겠다는 한줄기의 본능뿐.
도움이 필요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지금 나에게 계속 속삭여서 마침내는 나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간 의심을 메워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짧은 시간, 그러나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나의 입에서 말이 마쳐지고, 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던 그 짧은 사이에 지나간 생각들. 나는 과거의 그 순간에 어떤 말을 했던가? 그것, 그것만이라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그러나 온갖 생각과 사고와 기억이 폭풍우처럼 걷잡을 수 없이 몰아치는 그 순간에도 그 기억만은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갈피를 잡을 수조차 없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여야 하나?
모든 것을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하는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선택--. 선택을--. 그러나 갑자기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단서마저도 선택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나는 죽이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미친 것인가?
그러나 도대체 어느 편이 맞는 것이라는 말인가? 아아--. 하나라도--. 아주 작은 하나라도 확실한 것이 있다면--. 단 하나의 작은 것이라도 있다면, 내 의심을 부정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단서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의 눈물--. 아니, 그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 거짓으로 우는 것일 수도 있다. 남편의 발 밑에 떨어져 있는 가위의 날이 다시 번쩍인다. 저 가위의 날이 내 몸 속으로 부드럽게 쑤욱 파고드는 상상이 된다.
지금은 비어 있는 새장, 그것은 어쩌면 내가 살고 있던 이 집의 다음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삭아버린 장미들..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나의 꿈과 달콤함의 추억들--.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더 이상 참을 수는 없다.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12층의 붉은 하늘이 왈칵 뛰어들라고 자꾸 눈짓을 한다. 그래-. 그게 지금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남자--. 그 남자가 나를 없애려 하고, 나는 그 이유조차도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막 넘실거리는 붉은 구름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남편이 손으로 눈물을 닦는다. 아아--. 그런데 남편의 오른손에 무언가 흰 것이 보인다. 그건 바로 반창고의 토막--. 남편은 내 손의 상처를 보고 손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내 대신 상처를 붙여 주려 한 것이 틀림없다. 아아아!!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갑자기 몸에서 활기가 솟는다. 남편은 나를 위해주려 한 것이다. 그렇다. 단서. 그것이 단서가 된다. 갑자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흐릿해지다가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위--.
그건 반창고를 자르다가 남편이 엉겁결에 들고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 면도날.. 그래. 남편의 면도기는 아직도 날을 갈아끼우는 구식이다. 그리고 남편은 그것만은 사용한다. 아아 그래. 기억이 났다. 그 면도기는 내가 사준 것이다. 연애 시절의 자그마한 선물로--.
갑자기 온 몸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남편은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하나의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아아--. 내가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이제는 이겨낼 수 있다. 틀림없이! 틀림없이!
입이 떨려서 잘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힘을! 질 수 없다. 나를 사랑해주는 저 남자가 있는데, 나 때문에 저렇게 울고 있는데.. 아아 저리도 마음이 고운 남자인데! 져서는 안 된다. 내 몸 속에 남아 있는 광기와 부끄러움과 주저함을 모두 몰아내야 한다! 말--. 말 한마디만 해낸다면!! 해낸다면!!
"여--. 여보--.."
남편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지며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도는 것이 일렁이면서 보인다. 왜 저렇게 모습이 파도치면서 보이는 것일까? 아직도 나에게 더 남은 눈물이 있나? 그러나 지금 솟아나는 눈물은 이제 더 이상 차갑지 않다--.
"그래--. 괜찮아. 괜찮아--."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눈을 감자. 저 남자는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것이다. 미친 광기에 번득이던 내 모습마저도 지우개로 말끔히 지워주듯이..
남편의 따스한 손길이 내 양 어깨를 감싼다. 이제 내 어깨는 아까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지 않다. 촉촉한 입술이 이마에 와 닿으며 머리 위로 뜨거운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기분 좋은 안온함이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당신만 괜찮다면. 나는--."
남편의 중얼거림이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마음속에 울린다. 나도 이제는 자신있다. 나의 덧없는 의심을 이길 수 있다.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화장실에서 쓰러진 것은 빈혈 증세로 어지로워 져서였을 것이고, 침대에서 발견 된 칼도 다른 무언가에 잘못 끼워져 들어왔던 것이 틀림없다.
"여보. 미안해요--. 이젠..이젠 그러지 않을게--."
남편이 나를 마구 포옹하는 동안 나도 중얼거린다. 그건 남편과 나 둘 다에게 하는 약속이다. 남편이 내 몸을 번쩍 안아들고 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무래도 좋다. 지금의 기분은 마냥 행복할 뿐이다--.
방문을 넘어서는데 남편의 책상 위에 우연히 펼쳐진 책에 그림 하나가 언뜻 눈에 들어온다. 남편이 회사에서 읽다가 던져 놓은 것이 우연히 펼쳐진 모양이다. 무슨 신화나 전설의 이야기인지 머리가 많이 달린 공룡 같은 것이 사납게 보인다.
더 자세히 볼 틈도 없이 남편은 내 몸을 들어 침대 위에 살포시 놓는다. 조금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남편을 거부할 생각은 없다. 나도 기분이 좋다. 아주.
잠시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막연히 그 그림 속의 괴물의 이름을 전에 알았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히--. 히크--. 아니다. 하이드라. 그래. 머리가 많이 달리고, 머리 하나를 잘라내면 두 개가 솟아나는 괴물이라 했다. 생각하기도 징그럽다.
그런 것과 싸운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남편의 몸이 내 위로 굽혀진다. 따스하고 단단한 감촉. 기분 좋은 나른함으로 남편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주자. 남편의 손길은 절대로 거칠어지지 않는다. 몹시 마음이 약한 사람. 아아--.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온다.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았고, 남편의 숨소리도 아직 귓전을 간지럽히고 있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한 날이었다. 아아--. 내 몸 속에서도 불덩이 같은 것이 솟구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자야 할 것 같다. 육체의 잠이 아니라 의식의 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그냥, 그냥 이대로 있었으면..
3. 타인의 목소리
이건 꿈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무서웠다. 어둠, 그리고 적막. 분명히 나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는데도 무서웠다. 적막과 그리고--. 어둠 저너머에서 뭔가 쉿쉿하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씩 들려 온다. 조금씩 크게--.
사방을 둘러 보아도 보이는 것은 없다. 아니 있다. 불에 타서 구멍이 뚫린 교탁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리고 아직도 식지 않고 불에 달아 올라 있는 부지깽이. 그로테스크한 주사기를 들고 성숙이가 나타난다. 그리고 선생님의 빛나는 안경.. 고개를 돌리면 그 사이에 보이지 않고 있던 물건들이 마치 땅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쑥쑥 나타난다. 이지러진 물건들.
이것들은 환상이다. 환상일 뿐이라고 소리치려고 하는데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발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면도칼날이 아롱거리면서 주변에 울타리를 친다. 그래. 면도칼--. 잊고 있었다. 웬지 모르게 남편의 주머니를 연상시키는 어둠 속에서 면도칼들이 계속 날아와서 주위에 울타리를 친다.
'너는 이제 달아날 수 없어. 절대로--.'
위를 보니 목이 대롱거리는 거대한 카나리아가 부옇게 큰 눈을 내게로 향하고 이야기 하고 있다.
'달아날 생각없어. 전혀--.'
무섭다. 그러나 웬지 모르게 반항심 비슷한 기분이 든다. 입으로 눈을 부라리는 그 카나리아에게 쏘아붙이고 싶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니 고개도 움직일 수 없고,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데 어째서 주변의 여러가지 모습들이 보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건 꿈이야! 꿈! 모두 물러서! 달아나지 않아!'
마음 속으로라도 소리를 질러야 한다. 지고 싶지는 않다. 저쪽에서 망령과 같은 아이들이 걸음을 맞추어 다가온다. 보통 보다도 두 배 이상이나 큰 눈을 번득이며 걸어오는 아이들--.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하나같이 상채기가 나있다. 불에 달구어진 쇠꼬챙이가 붕붕 날아 다닌다. 번득이는 눈--. 나는 다시 조마해져서 난로 옆에 서 있다. 팔이 아프다. 연필심이 심술궂게 박혀 있던 바로 그 자리. 성숙이가 무섭게 커다란 주사기를 들고 내 팔을 찌르고 있다.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옆에 서 있던 난로가 연기를 푹푹 토하면서 뒤뚱거리며 다가온다.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눈을 감는다고 생각해도 주변의 모든 것은 그대로 보인다. 몸 주변에 뜨거운 열기가 확확 끼치면서 카나리아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 물러서! 이건 꿈이야! 꿈!!'
나 자신에게 계속 두번 세번 다짐을 지으면서 기력을 잃지 않으려 온 몸을 떤다. 선생님은 간 곳이 없고 안경테도 없는 빛나는 안경알 두 개만이 앞에서 깔깔거린다.
'너였구나! 너! 너!'
와아아아 하는 함성소리--. 뒤에서 아이들이 웃고 있다. 이제 아이들의 눈은 아까보다도 더욱 커져서 거의 얼굴을 뒤 덮고 있다. 눈 두 개와 입 하나 만이 보인다. 그리고 볼에 나 있는 불에 그을린 상채기--.
면도날들이 움찔거리며 춤을 춘다. 번득이는 얇은 강철의 예리함--.
익살맞은 빛의 깔깔거림이 느껴진다. 그 중앙에는 커다란 칼날도 하나 대장처럼 끼어서 춤을 춘다. 얼은 고기를 자르는, 톱날같이 삐죽삐죽한 날.
모든 것이 하나의 연극무대를 이룬다. 연출 카나리아, 주연 이민정, 조연 기타 수많은 사람과 물건들의 군상들--.
질 수 없었다. 모두가 나를 쳐다 보고 있는 그 순간.. 아아, 그러나 나는 대사를 까먹은 것이 분명했다. 그 때, 그 때 나는 무슨 말을 했더라? 모두가 쳐다보고, 선생님의 안경알이 질문을 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나는 그 때--. 그래.. 바로!!
갑자기 목에 무언가 묵직한 감촉이 눌러 오는 바람에 눈을 떴다. 가위에서 깨어나듯, 몸에 차가운 물 같은 기분이 쏴아악 흘러서 온 몸 속을 훑고 가는 듯하다. 목에 얹힌 것은 남편의 팔--. 그래. 낯익은 침실의 천장의 모습.
그리고 약간 쌀쌀한 방 안의 풍경. 남편은 깊이 잠든 듯, 깊고 규칙적인 숨 소리만이 들린다. 평화롭다. 조금 쌀쌀한 것은 방의 창문이 열려서였겠지. 방의 창문이 열려서 방 안이 좀 쌀쌀한데도 나는 맨몸에 이불조차 덮고 있지 않았다.
보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웬지 부끄럽다. 한쪽 구석에 밀려서 뭉쳐 있는 이불을 집으려 손을 뻗었으나 손이 닿지 않는다. 남편의 팔이 조금 목에 거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움직여서 남편의 단 잠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은데--. 약간 움직여서 이불을 간신히 집었다. 남편도 그대로 자고 있다.
남편이 나를 해칠 것이라 생각하다니 얼마나 황당한 생각이었던가? 구태여 면도날을 쓸 것도 없다. 이렇게 내 목에 팔을 감고 있는 순간에 약간 힘을 주면 끝일텐데--. 한 2-3분만--. 그러면 간단한 것을 그렇게 난리를 쳤을 이유가 없다.
카나리아가 목이 비틀어진 이유는? 까짓 새 한마리--. 죽었으니 가엾지만 이젠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나에겐 이 남자가 있다. 나를 위해주고, 나를 지켜줄 남자. 목을 조금 움직여서 남편의 팔을 더 깊이 목으로 끌어 들인다. 따뜻하다.
목을 조르는 것은 뱀같이 차가운 팔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훗--. 남편의 팔이 내 목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턱으로 남편의 팔을 누르는 것일지도--. 이불을 덮으니 몸이 조금 따뜻해진다. 기분 좋은 안온함. 남편이 다시 몸을 뒤척이며 팔을 뗀다. 답답한 것은 가셨지만 웬지 허전하고 섭섭한 기분이 든다.
다시 자고 싶다. 아까의 꿈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오래 전의 기억을 다시 일깨울 수 있었는데--. 그래도 남편의 팔이 그립다. 다시 잠이 들어도 무섭지 않다. 잠이 들면 또 남편이 깨워주겠지. 점점점 몸이 목욕 물 속에 들어가는 듯 나른하게 풀린다. 다시 잠이 오는 가보다.
신기하게도 잠이 들어가는 동안에도 생각은 말짱하다. 아니 말짱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잠--. 귓전에 남편의 숨소리가 들린다. 음? 그리고 다른 말이--.
"자--. 어서--."
이상하다. 저건 남편의 목소리가 아니다. 아니, 맞나? 아니다. 역시 아닌 것 같다.
"어서--.. 자아--. 천천히--."
남편의 목소리는 낮고 울림이 있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톤이 높고 날카롭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 아니 이게 무얼까? 도대체 누가 이 침실에 있다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단 말인가? 그러나 결코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아니다.
그리고 나 자신 어찌 할 수 없이 나는 잠 속으로 더더욱 파고 드는 것이다. 자면 안 되는데--. 저 목소리.. 분명 처음 들었는데도.. 귀에 익은 목소리.. 도대체.. 아, 잠이 들면 안 되는데--.
마치 가위에 눌리다가 잠시 깨어났을 때처럼, 갑자기 무서운 피로와 졸려움이 온 몸에 퍼져 온다. 아아.. 잠들면 안 될 것 같은데.. 잠이 들면..
"눈을 감아--."
막막한 어둠만이 다시 주위를 감싸고 있다. 몸은 움직이고 있다. 다만 춥다. 차가운 것이 아니라 썰렁한 느낌. 주위에는 아무 것도 없고, 뭔가가 나를 쳐다보는 듯한 기분만이 든다. 뒤!! 돌아보니 거기에는 목을 대롱거리는 카나리아가 이죽거리는 듯 서 있다. 아아!! 저것이 또!!!
카나리아는 눈을 빛내더니 갑자기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놀라서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서다가 뭔가가 손에 잡혀서 얼른 걸음을 멈춘다. 손에 뭔가가 잡힌다.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
카나리아는 이제 새의 모습이 아니다. 게속 부풀어가고 있는 그 몸은 이제 흉악한 용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새의 대롱거리던 대가리가 주욱 늘어나면서 여러 개로 갈라진다. 번갯불 같은 혓바닥이 날름거린다. 하이드라! 바로 책에서 보았던 하이드라다.
갑자기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좌우측이 모두 마찬가지다. 그 벼랑이 이루는 외줄기 길 위에 내가 서 있고, 그 반대편에는 전설에서 보았던 괴물이 있다.
뱀대가리가 쉬익쉬익 소리를 내며 넘실거린다. 대가리가 너무 많다. 무섭다. 마구 반대편으로 뛰어 달아나려는데 뒷전에서 괴물의 음성이 들린다.
'달려! 어서!!!'
괴물이 시키는 대로 하기는 싫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미친 듯 몸을 돌려 벼랑 길을 아슬아슬하게 뛰어 달린다. 감감히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 괴물은 아직도 처음과 같은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괴물의 대가리들이 하늘로 솟구치며 미친 것처럼 웃어댄다.
"어서 달려! 더! 더! 호호호호호!!!"
괴물의 웃음소리는 남자의 목소리인지 여자의 목소리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무섭다. 길을 마구 달려가는데 갑자기 앞에 길이 끊긴 것을 느낀다.
"더 달려가! 더 달려가 봐!"
어느새 괴물이 내 뒤로 성큼 다가오고 있다. 주변은 어둠에서 붉은 핏빛으로 가득하다. 괴물의 대가리들은 시뻘건 안개를 입에서 토해내고 있다.
"오지맛!!!"
소리를 쳤으나 뱀대가리들은 계속 꾸준히 내게로 다가든다. 앞을 막으려 양손을 내미는데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양손에 느껴지는 차가움과 뜨거움. 한 손에는 차가운 면도칼이, 한 손에는 뜨거운 쇠꼬챙이가 들려 있다.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옛날 이야기를 읽어주던 목소리. 누구일까? 하여간 또 다른 목소리--. 그래.. 저건 아까 들린 그 목소리였다.
"레르네의 물뱀 하이드라를 퇴치하는 것이 영웅 헤라클레스의 두번째 과업이었다--."
영웅? 헤라클레스? 들어 본일이 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괴물은 다가오고 있다. 남편이 있었으면--. 그러나 남편은 보이지 않는다. 어찌해야 하나? 이제 더 이상은 물러설 곳도 없다.
엉겁결에 왼 손에 들고 있던 면도날을 휘두르니 마악 나에게 뻗쳐 나오던 머리 하나가 싹둑 잘라져서 떨어져 버린다. 오히려 내가 기겁을 하고 하마트면 뒤가 벼랑이라는 것을 잊고 물러서다가 떨어질 뻔했다.
"하이드라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헤라클레스가 머리 하나를 쳐 떨어뜨리면 곧 이어 두 개의 머리가 돋아나는 것이었다--."
정말 괴물의 머리는 마치 허공중의 목소리가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징그럽게 쑤욱 두 개로 늘어서 돋아나고 있었다. 아아--.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알아?'
하나 더 늘어난 괴물의 머리들이 중얼거린다. 여러 개의 입에서 동시에 울려 나오는 목소리들은 허공 중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자의 목소리와 어울려 기괴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주변은 괴물이 토해낸 안개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 마치 석양 빛처럼--.
"--. 그러나 헤라클레스가 하이드라의 머리를 쳐 떨어뜨리고 그 자리를 불로 지지자 머리는 다시 돋아 나지 않게 되었고--."
그렇다--. 불!! 내 손에는 벌겋게 달아오른 쇠꼬챙이가 있다. 거기에 스쳐서 그어지던 남자 아이의 생채기 자국.
왼손의 면도날을 다시 휘두르고 오른 손에 들고 있던 달구어진 쇠꼬챙이를 내밀자 하이드라의 머리가 잘려 나간 자리에서 푸른 연기가 솟아오르며 아이의 얼굴에 남아 있던 것과 같은 상채기만이 남아 있다. 징그럽지만 그래도 자신감이 솟아 오른다.
"이길 수 있어! 이길 수 있다구!"
괴물은 아직도 물러서지 않는다. 다시 대가리를 내미는 괴물에게 양 손으로 번갈아 타격을 주자 생채기 자국이 다시 하나 허공에 커다랗게 그려진다. 괴물의 잘린 목 부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눈 앞의 허공에 생채기가 그려지지만 분명 하이드라의 머리는 줄어들고 있고 그것으로 만족스럽다.
"이길 수 있어! 잘 해 낼 수 있어!!"
잘 해낼 수 있다. 그래! 맞아 그렇다! 선생님의 안경알이 다시 눈 앞에서 차갑게 번뜩인다. 주변의 붉은 안개 속에서 반 아이들의 얼굴이 다시 나타난다. 다시.. 난로와 주사기와 심술궂게 박혀 있는 연필심과 그리고--.
"민정아--. 왜 그러지--.? 무슨 일이지--?"
나는 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답했었다. 모두의 시선 앞에서--. 그리고 모두의 당혹 속에서 나만이 분명히.. 분명하게--.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갑자기 들려오는 하이드라의 음성에 날 듯 말 듯 하던 생각이 저만치 사라져버렸다. 주위를 둘러 싸고 있던 아이들의 얼굴과 선생님의 안경알이 다시 사라져 버리고, 허공에서 울려 오던 목소리가 다시 백코러스처럼 말을 이었다.
"--. 그러나 하이드라의 머리 하나는 절대로 죽지 않았다. 어떤 방법을 써도 죽일 수 없는 불사(不死)의 머리 하나를 하이드라는 지니고 있었다--."
하이드라의 머리 하나가 주욱 뻗어 나오며 나머지의 머리들은 작아져서 어느새 몸 안으로 말려 들어가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하나의 머리. 죽지 않는 머리는 눈을 번들거리며 비죽비죽 촘촘히 돋은 이빨들을 드러내었다.
"나는 너의 의심이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
괴물의 머리는 금세라도 나에게 덮쳐 들 것 처럼 모가지를 주욱 늘리며 다가 들었다. 허공에서 들리던 목소리도 깔깔거리며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목을 대롱거리는 카나리아가 푸득거리며 날고 있다--. 속았다는 느낌. 나는 저 카나리아 놈의 장단에 맞추어 놀아나고 있었다는 말인가?
"너의 의심이 시작된 이상 결코 거기에서는 자유로워질 수 없지--. 결코--. 결코--.
메아리같이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하이드라가 한 발자국 다가든다. 괴물은 시뻘건 입을 벌리고-. 그 입 속에 아우성치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모두가 나를 다그치는 소리-. 다그치고 협박하고 움추러들게 하고 마음을 쥐어짜는 듯한--.
물러서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결심이 어느덧 흔들리기 시작한다. 언뜻 뒤를 보니 더 이상의 길은 없다. 막다른 벼랑 위의 길. 그러나 그 한끝은 지금보다는 오히려 평온해 보이는 낭떠러지--. 그 밑에는 아직도 믿음직한 남편의 팔이 있다. 손짓하는 듯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다. 그리로 가고픈 충동-. 그러나-.
"저리로 가--."
하이드라의 얼굴이 바로 코 앞에까지 다가와서 나직이 말한다. 거기에는 나직한 남자의 음성과 여자의 음성이 섞여 있다. 얼른 고개를 돌려서 밑을 내려다 본다. 밑은 까무라칠 듯 아득하게만 보이는 깊은 심연--.
아아--. 그러나 거기에는 남편의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팔목이 있다. 내가 아까 보았듯이, 아니 보았다고 믿었듯이 흔들리고 있다. 그리로 가야 한다. 가야 한다.
나는 고개를 돌려 괴물에게 한마디를 내 쏘았다.
"나는 갈거야--. 저기엔 그 이가 있어.."
괴물의 얼굴이 흉하게 입을 쩍 벌리며 웃는다. 입안에 얼굴을 내밀고 있던 모든 자들이 같이 웃는다. 면도날이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뿜어져 나오고 머리 위의 목이 대롱거리는 카나리아도 깔깔거리듯 날개짓을 한다.
"그래! 가! 거기에 너의 그 이가 있지! 가! 하하하."
아우성치는 듯한 웃음소리.. 나는 다시 벌거숭이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참을 수 없다.
"비웃지마! 갈거야! 그 이가 나를 받아 줄 거야!"
"그래! 그래! 푸하하하!!"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다. 감히 비웃다니! 나는 심각한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갈거야!"
다시 나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바뀐다. 허물을 벗듯 나의 온몸이 다시 국민학교 시절로 되돌아 가는 것이 느껴진다. 멋진 다이빙-. 나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밑에는 물 대신 안온한 남편의 팔목--. 어서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손짓을.
"잘 가--."
나는 도약판 위에서 뜀을 뛰는 다이빙 선수의 자세처럼 우아한 자세를 잡아갔다. 더 이상 무섭지 않다. 하이드라도--. 카나리아도--. 면도날도--. 오히려 그 많은 놈들이 전송하는 듯한 소리를 내는 것이 겸연쩍다.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뭉쳐간다. 남자와 여자가 뒤섞인 듯한 하나의 목소리로--. 아아--. 그런데? 그런데?
"자아아아아아알--."
나의 몸은 이미 허공에서 멋지게 맴을 돌고 있다. 10점 만점.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왜 저 목소리가 낯설지 않게 들리는 것일까?
"가아아아--.--."
그렇다! 나는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적어도 두 개의 섞여 들리는 목소리 가운데의 하나만은--. 두 목소리 중의 남자의 목소리--. 그건--. 그건--.
"자알 가아--. 여보--."
그건 남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나의 몸은 이제 멋진 호선을 그리며 아래쪽에서 손짓하는 남편의 팔을 향하여 막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이게 아니었다. 남편이 내게 이별을 고하다니!!! 갑자기 폭풍과 같은 바람이 아래 쪽으로부터 몰아쳐와서 온 몸을 휩싼다.
그리고 세상이 이상하게 빙그르르 도는 느낌이--. 눈--. 아아. 내가 눈을 감고 있었단 말인가? 눈을 뜨자! 이상하다! 이건
아무래도--. 그리고 이건--.
"안 돼!!!!"
4. 추락
쏴아악하면서 거친 바람이 나의 머리결을 뒤로 휩쓸면서 나는 피가 머리 꼭대기로 쏠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눈 앞에는 어느새 기이한 풍경이 다가오고 있다. 하늘이 둥글게 돌고 있다.
새까만 속에 번쩍거리는 것이 와르르 한바퀴 맴을 돌아머리 뒤로 흘러가고.. 그에 이어 나타나는 저 모습들은 뭐지? 그렇다. 저건 바로 위에서 똑바로 아래를 내려다 본 풍경--. 부정형으로 납작하게 보이는 나무, 그리고 자동차, 타일들의 규칙적인 무늬, 검은 아스팔트.. 그리고 내 눈과 그것들 사이에 있는 검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빈 공간.
나는 추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래로, 똑바로 머리를 아래로 한 채..정신이 없고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공중을 날고 있다는 비상의 기분, 그러나 나의 귓전에 그 순간 들려오는 소리.. 이건 꿈이 아니었다. 분명 꿈이 아니었다.
"잘 가.. 여보--. 아기야--."
그건 분명 남편의 목소리--. 그리고 아까 꿈에서 듣고 있었던 어느 여자의 목소리--. 이건 꿈이 아니었다. 헛 것이 아니었다. 환청이라고? 헛것이라고? 내 몸은 꿈에서와 그대로 떨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아니다. 남편이 내게 작별을 하다니--. 작별을!!! 그것만은.. 그것만은 안돼!!!!
"아아아아---!!!!!"
내가 지를 수 있는 최대한의 고함을 지르면서 나는 허공중에서 막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모든 힘을 다 주면서 사지를 똑바로 뻗었다. 내 생각과는 달리 목소리는 하나도 숨으로 바뀌지 않고 입 안에서 작고 허망한 울림으로 사그라져버렸을 뿐이었다.
들이킨 숨이 없는 상태에서 소리를 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잔뜩 뻗어 낸 양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이 다만 빈 허공만이 움켜 쥐어졌다. 그리고 발은--.
몸 뒷 쪽에서 갑자기 강한 아픔이 밀려 들면서 아래로 떨구어지던 몸의 자세가 그대로 공중에 못박혀져 버렸다. 덜컥하면서 다리와 허리의 관절들에 왈칵 통증이 밀려든다. 뒤로 젖혀졌던 머리칼이 우르르 앞 쪽으로 다시 쏟아져 내려 시야를 가리고 그리고--.. 암흑 속이다.
그리고 나는 분명 무언가에 발목이 걸려서 떨어지던 자세 그대로 허공중에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나-. 아아 어쩌다가 이꼴이!!! 아니, 아니-. 침착해야 한다. 잠시 시간이 있다.
몇 초 뒤면 내 걸려 있는 발목이 미끄러지고 나는 다시 돌덩어리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릴지도--. 아아 그건 너무 끔찍하다. 안 돼! 안 돼! 그러나--.
그러나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모든 공포보다도 앞섰다. 나는 몽유병 환자인가? 그래서 창 밖으로 뛰어 내리게 된 것인가? 아니다--. 내 꿈--. 모든 것은 나의 꿈에서와 똑 같았다. 마찬가지였다.
내가 떨어져 내리면서 몰아쳐오는 바람 결에 마악 잠이 깨어 정신이 들었을 때에 들린 음성. 그건 분명 꿈에서 듣던 음성과 마찬가지의 것이었고, 그 음성은 바로 남편의 음성이었다. 아니, 그 중의 하나는! 그러면 그 여자의 음성은 뭐야!
아아-. 꿈에 나타난 하이드라는 그것이었다. 그것이 나의 의심이었다고? 아아-.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 꿈속에 내가 들은 소리는 거짓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들려 온 소리들--.
그렇다면 남편은 내가 잠든 시간마다 나에게 주문과 같은 말들을 속삭여 왔단 말인가? 발목의 아픔이 갑자기 배가 되며 저려드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분명히 살이 짓눌려서 통째로 벗겨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아니다. 남편이 나를 해칠 리가--. 마음만 먹으면 그건 몹시도 쉬운 일일 텐데데--. 그런데--. 이렇게 힘을 들여--.
아니다.. 이거야 말로 완벽하다. 물론 나의 생명이 끊어지고 나면 나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은 그렇지 않을지도--. 조사받고 추궁당하다보면 발각될 우려가 있다. 남편은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여 나를 없애버리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틀림없이 혼자 창문을 올라서서 아래로 향해 뛰어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나의 모습을 분명 누군가는 보게 될지 모른다. 분명 나 혼자의 짓이다. 먼발치에 있는 사람이 남편과--. 그 여자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리가 없다. 나는 스스로 자살한 것이다. 아아--..
아니야. 침착하자. 발목의 살은 이제 허물어져 조금씩 긁어지고 미끄러져 떨어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몇 초의 시간이 남아있다. 지나간 생애보다도, 앞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던 모든 시간보다 더 귀중할지도 모르는 몇 초. 알고 싶다.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
그러면 여태까지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은 어찌되는 것인가? 남편은 밤마다 내가 잠이 들고 나면 나에게 지시를 내려왔단 말인가? 지시--. 방금의 꿈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 스스로 잠을 깬 것이 아니라, 꿈이 끝나서 잠을 깬 것이 아니라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몸이 휘돌려지는 느낌 때문에 잠을 깬 것이니--. 지시-라고까지 생각했나?
그렇지. 지시--. 죽으라는 지시였을 것이다. 맨 처음의 그 날--. 그래--. 면도칼로 동맥을 베라고 했을 것이다. 스스로--. 화장실로 걸어가서 내 지문을 묻히면서 면도칼을 집어서--. 그러나 눈을 감은 상태에서 그것이 제대로 될 수 있었을까?
결국은 손만을 베이고 나는 깨어난 것이다. 그 다음의 고기 써는 칼은? 그래--. 내 목을 찌르라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 시퍼렇고 우툴두툴한 톱날 같은 자국이 나 있는 그 칼로--. 그러나 나는 바보 같이 그것을 들고 잠자코 침실로 돌아왔을 것이다.. 아아--. 그래서 잠을 자고 난 다음에도 그렇게 피곤 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도--.
카나리아는? 카나리아는? 그래--.목을 매달라는 말--. 그래--. 목을 매달아 죽으라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냥 카나리아의 목을 비트는 것으로 대신 했겠지.
그 때는 어떠한 꿈을 꾸었기에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러나 꿈이라는 것은 사람이 바라는 양상대로 나타나지는 않는 법이다. 걸맞지 않게 우습다. 웃음이 터지려고 내 몸속에서 오장을 간지럽히고 있다.
왜 우스울까. 비명을 지르고 발악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렇게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떨어질 순간만을 초조히 세고 있는 꼴을 하고는-. 그러나--. 좌우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아니 모든 것일까? 아니다.
적어도 거의 모든 것을--. 그리고 보니 그 모든 이상한 짓을 했던 범인은 바로 나였다. 그리고 먼 발치에서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나 자신을 마치 인형처럼 조종하여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고 했던 것은 바로--.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한다던 남편이었다.
남편이! 바로 나의 남편이--.
갑자기 다시 옥죄는 듯한 통증과 함께 미끈 하면서 몸이 아래로 조금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발목의 살이 주르륵 벗겨진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살을 좀 더 빼놓는 건데--.
후후후--. 양 손에 집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딱 알맞는 중간에 매달려서 발목만이 발코니 난간의 틈 사이에 기적처럼 끼어있을 뿐, 손에 닿을 곳은 밋밋한 콘크리트들 뿐이다. 여기는 12층. 떨어지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후후후--.
결국 모든 것의 주동은 남편이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떨어지면서 들려 온 남편의 목소리--. 아아, 그러나 그 여자의 목소리는 무엇일까? 누군가가 남편과 내가 자는 방에 숨어 있었다는 말인가? 마치 밤 그늘처럼, 깊은 구석에서 어두운 눈만을 반짝거리면서--.?
남편은 나를 배신한 것인가? 후후후--. 그러면 나는 그야말로 희극의 주인공, 깨끗하게 음모의 발에 밟혀 뭉게지는 비극의 어릿광대가 되는 것이겠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발목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 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아마 몸에까지 흘러내려 전신을 적시고 있는 지도 모른다. 또 피구나.. 피.. 미끄러워져서 조금 더 빨리 떨어질 수도 있겠지? 후후후--. 그러나 아쉽다. 뭔가 석연치 않다. 남편이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것은 이제 확실하다. 그러나 왜? 왜 그랬을까? 의심이 든다! 하이드라-. 하이드라는 나를 보고 자신은 나의 의심이라고 말했다. 자르려고 해도 잘라지지 않고,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는 나의 의심--.
나를 죽이는 것은 하이드라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혹시 나의 의심이 나를 죽게 만든다는 어떤 예지는 아니었을까?
나의 의심.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늘 뭔가에 골몰하고, 풀어내고 생각하고 앞 뒤를 맞추어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남편은--. 아아아--. 논리적인 것은 싫다. 남편이 나를 죽이려 했고, 결국은 성공하고야 말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이제 확실하다. 그러나 논리는 나의 의심이다.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의심-. 나는 짓눌리고 짓눌려서 막 스스로 찌그러져 가고 있다. 어느 쪽으로 퉁겨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의심이 싫은 것처럼 이런 귀결이 싫다. 남편--. 나의 남편--.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이런 식으로 결말을 맺게 될 수 있을까?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남편은 분명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나보다도 더--. 아까, 바로 아까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모든 것을 잊고--. 그 때는 정말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우리 둘은 석양빛 속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짐승같이 웅크리고 발톱을 세운 나를 남편은 자신의 눈물로 포근히 도닥거려 줄 수 있었다. 그것도 연기였을까?
나는 조금만 있으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 남편의 얼굴이 보고 싶다. 불러 볼까? 소리쳐 볼까? 하하하.. 살려 달라고 구걸하고 싶지는 않다. 남편 스스로가 나를 죽이려 한 것인데 살려 줄 이유가 없지. 그러나-. 솔직한 심경으로 그 이가 보고 싶다. 그래. 그 이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한 번 보았으면.. 불러나 보았으면--.
"여보--!"
작은 목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오자 참고 있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것 같다. 다리는 이제 너무나 아파서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고 피가 흘러서 몸을 적셔서 그런지 몸이 와들와들 떨려 온다. 외롭고 힘들다. 죽기도 쉽지 않구나. 너무나도--.
"여--. 흐흑--. 여--. 여보!! 당--. 흐흐흑--. 당--. 당신!!"
왜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일까? 바보같이 비웃을 지도 모른다. 깔깔거리면서 조롱하는 표정으로 손가락질을 할 지도 모른다. 아아--. 소리를 낸 것이 후회 된다.
차라리 빨리 떨어뜨려 주기라도 했으면--. 너무나 고통스럽다. 초라해지고--. 그리고 그 고통이.. 참아야겠다 생각해도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설움이--.
"아--.흐흐흑--. 어--.어서!--.흑--. 여보!!!"
갑자기 침실의 창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남편의 억눌린 듯한 외침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나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여보--!!!! 다--. 당신!!!"
정신이 혼돈 스럽다. 고통은 이제 극에 달하는 듯, 무감각한 느낌만이 최면처럼 온 몸을 휩싸고 있다. 남편은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내가 소리를 낸 정도는 아무도 듣지 못했을 텐데.. 그냥 떨어지게 놓아두었어도 될텐데--.
남편의 억센 손--. 남편의 손이 내 몸으로 뻗쳐 오는 것이 느껴진다. 위험한 곡예다. 내 손목이 남편에게 잡혔다. 남편은
신음소리 같은 것을 내면서 내 몸을 위로 끌어 올리고 있다. 믿을 수 없다.
난간 틈으로 손을 밀어 넣고 조금씩 조금씩 내 몸을 잡아 올리는 느낌과 힘을 쓰고 있는 거친 숨소리와 신음성.. 믿을 수 없다. 왜 남편이 나를 살리려고 하는 것인가? 죽게 해 놓고 다시 살려 주고--. 가지고 노는 것인가?
아아--. 저항할 기운도 없다. 생각도 하기 싫다. 발목의 고통은 더더욱 심해지고 있다. 남편이 나를 끌어 올리느라 몸을 한 바퀴 뒤집을 때의 고통과 발목에서 나는 듣기 싫은 우지직 하는 소리 때문에 나는 그만 메스꺼움을 느끼며 정신을 잃고 까무라쳐 버렸다.
5. 회상
정신을 차려야 할까? 아, 그러나 그 생각을 하는 순간에 이미 정신은 후다닥 돌아와버렸다. 아깝다. 참으로, 참으로 오래간만에 꿈없이 잠들었었는데--. 꿈 없이--. 편안하게--.
아? 내가 뭘 하고 있는거지? 나는 살았나? 갑자기 우르르르 조금 전의 기억이 돌아온다. 아니 오래전의 기억인지도.. 아니아니, 생전의 기억이거나 전생의 기억은 아닐까?
몸을 서둘러서 일으키려는데 날카로운 아픔이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갑자기 낯선 곳에 뚝 떨어져 내린 듯한 기분.. 분명 주위의 모든 것은 내가 아는 나의 집 안의 것들이었고 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는 것은 남편이다. 남편--. 남편은 나를 죽이지 않았구나. 목격자가 근처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애써서 몸을 비틀어 조금이라도 남편에게서 떨어지려 했으나 발목의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보니 발목은 엉성한 솜씨로 붕대가 감겨져 있다. 이건 도대체 뭘 하려는 수작이지?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겐 접골을 할 재주가 없어. 미안해--. 병원에 연락할까 했었지만--.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하! 눈 앞에 보이는 남편은 정말 자주도 운다. 오늘 하루 사이만도 벌써 2번째나 우는 걸 보았으니--.
"더 이상 뭘 바라지?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내 목소리가 내가 듣기에도 좀 차가웠나보다. 남편은 움찔한다.
"그, 그냥? 그냥 두라니? 무슨 말이야? 당신.. 당신 정말로? 왜?"
"그 여자 누구였지? 아까 방에서 분명 목소리를 들었어!"
"여자? 무슨 여자?"
"시치미 떼지마! 나를--. 나를 죽게 만들려고-. 둘이 짜고-."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간다.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남편이 저런 얼굴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정말 남편은 명배우다. 갈채를 받아 마땅하다.
"당신--. 미쳤군! 당신--. 왜 뛰어 내린거지? 왜?"
화가 난다. 죽이려 하더니.. 이제는 가지고 놀기까지? 내가 스스로 뛰어 내리려 했다구? 나는 막 내 몸이 떨어지려는 그 순간에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원망스러운 마음이 갑자기 봇물처럼 밀려 올라온다.
"뭐? 그래! 난 미쳤어! 그러나 당신이 떨어뜨리려 한 거잖아!"
"내가?"
"그래! 당신의 짓! 나는 들었어. 들었어!"
내 목소리도 떨려서 제대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그건 차라리 하나의 신음성, 억눌린 비명 소리와 같다.
"아아--. 나를 잠에 빠트리고--. 내 귓가에 속삭였지--. 나더러 뛰어내리라고, 아니지! 우선 창가로 가게 하고, 뒤에서 하이드라가 쫓아온다 하고, 그리고--."
"하이드라? 그게 왜?.."
남편의 얼굴이 조금 긴장된다. 밉다. 너무너무 밉다!
"그리고는 뛰어내리라 했지! 그래서 나는 뛰어내렸어! 뭘 더 바래? 뭘? 뭘?"
"도대체 무슨 말이야? 아아. 당신. 당신 정말 이상해..이상해진거야--. 병원-. 병원--!"
정신 나간 듯이 남편이 중얼거리면서 전화기를 향한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이제는 정신병원에 처박으려고?
"그만 뒀!!!!"
내 목소리가 사방에 쩌렁거리면서 울려서 마치 텅 비고 그 순간 무한정의 크기로 넓어져 버린 듯한 공간 속에서 한참 동안 울렸다고 여긴 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편은 얼빠진 듯한 얼굴로 그 순간 동작을 정지했다.
그 모습은 정말--.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조금은 측은해 보이기도 한. 갑자기 나는 다시 혼돈 상태에 빠졌다. 나의 의심. 하이드라는 자신이 나의 의심이라고 했다. 아니, 그 말 조차가 맞는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조차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면 일들이 풀린다. 나는 방금 전 기적적으로 발코니에 거꾸로 매달린 채, 삽시간에 모든 일을 논리적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나의 이성, 나의 의심에 의한 것이었다. 지금 남편의 저 멍한 동작 한 번에 나는 다시 깊은 회의에 빠지고 있다.
미칠 지경이다. 하이드라의 죽지 않는 머리--. 그것이 바로 나의 의심의 모습이다. 절대로,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나를 죽이는 것은 바로 나의 의심일지도 몰랐다. 남편이 아니라--. 짓눌려 터질 것 같은 압박감 속에서 나는 있는 힘을 다 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왜 그랬어--. 왜? 왜 나를--?"
남편의 머리가 설래설래 좌우로 흔들린다. 자신은 절대 아니라는 무언의 강력한 의지가 몸짓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니라고? 분명 그것은 남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여자--. 여자! 여자의 목소리--. 그건 누구였던가?
"그 여자는 누구였지?"
이게 실마리이다. 그것만 알면--.
"여--. 여자라니?"
"방에서 당신과 함께 나보고 뛰어내리라고 했던 여자 말야! 그리고--."
기억이 난다. 그래. 그 여자는 나보고 아기야--라고 했었다. 아기--?
"여보. 나는 잠들어 있었어. 그리고 바람이 들어와서 추워져서 눈을 뜬 거고, 그리고 당신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그래서--."
나의 생각은 다른 혼돈에 빠져 있다. 아기야--? 나를 왜 아기라고 불렀지?
"그래서 바깥을 보고 당신을 발견한 거야. 여보! 내가 당신을 뛰어내리라 하다니! 나는 그런 적 없어! 절대!"
"아기--. 아기야--. 라고 한 여자가--. 누구죠? 어느 여자가--. 나를 아기라고 부를 수 있죠--?"
"아기--? 당신을--?"
남편의 눈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들었다는 듯 크게 벌어진다.
아기--. 분명히 부모님이다. 다 큰 어른을 계속 아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남편도 그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그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부를 때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남편의 말은 진지했다.
"여보--. 우리--. 아니 내 어머님은--. 당신과 결혼하기 직전에 돌아가셨어--. 당신 잊었소?"
그랬다. 잊고 있었다. 나와 그 이와의 결혼을 그렇게도 반대하셨던 그 이의 어머님은--. 이제 돌아가신 지 1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무엇일까? 햄릿에서와 같은 망령의 조화란 말인가?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의심하게 되는 사실. 내가 들은 목소리는 과연 누구의 목소리였단 말인가?
나는 생전에 시어머님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전혀. 그러나 나를 아기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시어머니 말고는 누가 있단 말인가? 누군가 다른 여자의 목소리는 아니었을까? 아냐. 그건 내가 생각해도 지나친 비약이었다.
다른 여자를 남편이 끌여들였다면 내가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것도 이상했고, 또 남편이 나를 구해줄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아니-. 만약 내가 잘못 들은 것이라면 남편 또한 아무 죄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내 눈 앞에 카나리아와 면도칼들이 다시 회오리치며 날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다시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5. 회상 (2)
"어머니--. 어머니라니.. 왜 지금 그런 소리를--."
남편이 넋이 나간 소리로 중얼거린다. 가만--. 가만히--. 입장을 마꾸어보자. 침착해야 한다. 나는 항상 침착하고 냉정할 줄을 알았던 아이였다.
그때에도, 국민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에 그러한 넘어갈 수 없을 것 같던 상황 속에서조차도 나는 침착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위기에서 모면하여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냉정할 수 있었다. 그래--. 그랬었다. 아--. 아니야. 그러나--. 그건 과연 정말이었을까?
내가 그 때 침착하고 차분하게 그 상황을 모면했었다는 기억은 아직 남아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어떤 말을 했었던 것이지? 어떻게 둘러대었기에 그 한없이 복잡했던 상황이 무사히 넘어갔던 것일까? 가만--. 그런데 왜--.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그것은 기억이 나지를 않는 거지?
왜? 그렇다면 혹시 그때에 무사히 잘 넘어갔다고 기억하고 있는 것 자체가 잘못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그때 무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 때에 내가 뭔가 기억할 만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또 다른 잘못된 기억의 반향은 아닐까?
그래-. 그리고 나는 그 당시의 아픈 기억을 간직하지 않으려 모든 게 잘 되었다는 식으로 넘어갔던 것은 아닐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나도 믿지 못하고.. 나를 사랑한다던 남편도 믿지 못하고--. 이제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까지도 믿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나 자신은 믿을 수 있나? 아니-. 아냐. 나의 의심. 그것은 나를 무너뜨리고 내 주변의 모든 것을 무너 뜨리고--. 그리고 마지막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을 다시금 무너뜨린거지. 내가 틀려. 내가 모두 잘못한거야--. 나를 죽이는 것은 바로 나의 의심-. 베어도 베어도 끝없이 돋아나오는 하이드라의 머리--. 그리고--.
"그래--. 어머님--.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그리고 지금 이런 광경을 본다면 뭐라고 말씀을 하실까--."
남편은 애써 태연한 듯이 말을 하면서 내 발목에 달라붙은 붕대를 다시 한 번 매만지는 듯 하더니 나를 보고 허탈한 듯한 미소를 지어보내고 있다. 미소--. 왜 웃는 것일까?
"뭐가 우스워요?"
"여보--. 이젠 그만 정신 차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어. 왜 어머님 이야기까지 하는 것이지?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인데--."
"그러나--."
뭔가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잠시 목이 메이는 듯 하여 잘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그래--. 남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목소리가 방에서 들려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목이 부러진 카나리아--. 얼은 고기를 써는 칼--. 면도칼 뭉치--. 그 모든 것은 정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정말이라고 해도 이것 한 가지만은 믿을 수가 없다.
사진으로밖에 얼굴도 뵙지 못하고, 목소리 한 번 들은 일이 없는 나의 시어머님--. 어떻게 그 어머님이 나를 창밖으로 뛰어내리라고 꿈에서 사주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 나 자신이 겪어 왔던, 내가 몸서리쳐 하고 이상하게 여겨왔던 다른 모든 일들 또한 있었던 적이 없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다면-. 내가 미친 년이겠지-. 그렇지만 난--. 난--. 미친 년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지만--.
"흐--. 흐흑--. 이잉--."
내 입에서 울먹거리며 마치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런 소리를 직접 내면서도 무대 밖에서 배우의 목소리를 듣듯이 듣고 있을 수도 있다니--. 그래--. 더 이상 괴로움을 주지 말자.
나를 사랑하고 있는 저 남자에게 더 이상은.. 나는 순교자는 아니다. 그래. 어차피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일지도 몰라. 당사자인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인 걸.. 그냥--.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 그냥--.
"아아--."
남편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나를 꼭 안아준다. 포근하고 편안하다. 그래--. 그러면 됐다. 더 이상 따지고 싶지도 않다. 하이드라가 무슨 소리를 했건, 내가 어릴 적에 선생님에게 무슨 소리를 했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냥--. 그냥 이대로만 있을 수 있다면--.
나는 계속 어린아이처럼 끙끙거리며 우는 소리를 내고는 더더욱 남편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피곤하고--. 지친다. 그리고 다시 발목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남편. 그래. 좋다. 누군가 내가 이토록 힘들 때 내 옆에 있어준다는 것은.. 비록 그 남편이 나를 죽이려 했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고 해도--. 아니 그렇지도 않을 것이지만--. 아니--. 아니--. 어쨌든--. 어쨌거나--.
"어머님은 당신을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지--. 그러나 그걸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돼. 모르시고 한 말씀이야.. 그리고--. 그리고--."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간에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내 남편--. 그 남자를 사랑한다. 무미건조한 일상과 낭만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모든 생활의 지겨움이 있더라도, 그보다도 더욱 끔찍한 내 의심이 있더라도 나는 그 이를 사랑한다. 그런데 뭐가-. 대체 뭐가 우리 사이를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나도 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내 입술이 벌어진다. 그 이에게 묻는다.
"그리고 뭐죠?"
"어머님이 당신을 싫어하고 미워했을지라도 나는 그러지 않아--. 응? 정말이야. 나는 그러지 않아--. 이미 어머님은 이 세상 분이 아닌 걸--. 그런 걸--."
남편의 열에 조금은 들뜬 듯한 말이 갑자기 내 귀에 확하고 들어온다. 이런 바보! 왜 그 말을 또 고깝게 생각하는 거지? 바보야! 그러나 나는 이미 들어버렸고 고깝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데--.
남편은 말했다. 나는 그러지 않아.. 라고--.
불행하게도 나의 아이큐는 150대를 항상 넘어서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이하는 되지 않았다.
아이큐 측정을 한다는 시험지에 아무리 적당히 답을 써 넣으려고 애를 써도, 그 수치가 100도 안 되게 나오면 어쩔까 하는 나의 턱 없는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그 때마다 두어 문제만을 일부러 틀리고 나머지 문제에 성심성의를 다하는 양상으로 행동을 취하게 만들었고 그럴 때마다 나오는 결과는 담임선생으로 하여금 아이큐 테스트의 시험결과를 반 전체에 통보하는 것조차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애당초 공부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이큐는 반에서 제일 높은 아이가 성적은 얼추 중간 남짓에 불과 했으니까. 나는 그런 것은 바라지 않았다.
남편은 어머님이 이 세상 분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러지 않는다고 말했다.
좋은 성적을 내어서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시험문제의 답을 미리 추구하고 무엇에 쓰는지 어린 나이로서도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단지 한가지 이유만을 따진다면 타성적이고 복종적으로 이러한 쓸모없는 일일지라도 권위가 시키는 일이라면 하라!!!'고 외치는 말을 계속 사방에 울리게 하는 목적 이외의 다른 것은 찾을 수 없는 것들을 외우는 데에 그 머리를 쓰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머리가 둔하다고 남들이 믿게끔 만드는 데에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머리를 써 왔으니까. 그래서 나는 성공이었다. 남들보다 나은 존재로 한 번도 부각 된 적이 없으니까--.
남들보다 나아짐으로써 뭔가 얻기는 커녕 더욱더 혹사 당하고 피를 빨리게 된다고 믿어 왔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이 놈의 머리가 작동을 하는 걸까--. 이미 오래 되어서 모두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모든 걸 다 과거의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가동 시키는 일은 없을 것으로 알았는데--.
내 사랑하는 남편은 어머님이 이 세상 분이 아니기 때문에 남편은 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고 말 한 것이다--.
나는 그런 머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 그래서 나는 그 당시의 위험한 상황을 무난히 넘겨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힘들었던 순간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카나리아와 면도칼과 그리고--. 얼음을 써는 칼과--. 또--. 그리고--. 잠결에 귓전에 들리던 목소리까지도--. 아니야. 이게 뭐야! 아냐! 그건--. 그건 도움이 아니야! 왜 나는 남편의 아무 생각 없이 내 뱉은 말 한마디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거지? 왜?
만약 어머님이 이 세상에 아직 계셨으면 내 사랑하는 내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도, 용납해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야!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것만은--. 그것만은!! 그러나 내 생각은--.
'어머님의 목소리--. 그게 어째서--. 어째서 들렸지?'
난 듣지 않았어! 그건 단지 잠 들었을 때의 환청에 불과했을 뿐이야! 아냐.. 갑자기 내 입이 벌어진다--.
"여보--. 당신 만약--."
안 돼! 말을 해서는 안 돼! 그러나--. 아아--. 그러나--.
"만약 어머님이 계셨다면--."
내 마음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아아--. 만약에 세상에 악마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내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왜--. 왜 나는 내가 원치 않고 해서는 안 되는 그런 말을 남편에게 해대는 것일까!!! 그런데도!!!
"나를--. 어떻게--."
애써서 말을 끊었는데도 나를 품 안에 안고 있던 남편의 몸이 뻣뻣해 지는 것이 느껴진다. 남편의 슬픈 듯 다정한 듯 보이던 눈이 다시 놀라움과 경악.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것을 머금으며 딱딱하게 굳어져 간다. 흡사 그건 죽어서 썩어가는 동태--. 아니 카나리아의 눈알--. 아 저건--. 저건--.
"뭐라고 했어!"
남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저 소리--. 아아--. 저 소리는 무엇일까--. 귀를 떼어버리고 싶다. 저건--. 저것 만은..
"아--. 다--. 당신--."
"아기야--. 너--. 너--."
아아--. 아기야--. 저게--. 저게 과연 내 남편의 말이란 말인가? 그래--. 그렇다--. 나는--. 나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선생님에게는 공부하기 싫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남자 아이들에게는 네가 제일 약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여자 아이들에게는 네가 못생겼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그리고 내 남편에게는 시어머님--. 남편의 어머님에 대한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한 번도 경고 받은 적은 없었지만 그 말들만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나--.
"나는.. 난 말이다--."
아아--. 저것이 내 남편의 목소리란 말인가? 아니다. 저건 내가 아까 들었던--. 베란다 난간 너머로 곤두박질 칠 적에 들었었던 그 목소리--. 그 여자--. 아니. 지금은 분명하다. 내 시어머니의 목소리--. 바로 그것--.
"나는 네가 싫어! 미웁다.. 미웁다아--."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겨, 발목이 박살이 난 처지에서 들려오는 그 남자의 톤 높은 그 목소리--. 남편의 양쪽팔에 힘이 들어가고 나를 거칠게 자신의 몸 쪽으로 당겨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카나리아. 얼은 고기를 써는 톱같이 생긴 칼날. 그리고 면도날. 허공을 날던 불에 달궈진 쇠꼬챙이. 빙글빙글 허공을 떠돌던 그 선생님의 안경--. 나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던 그 하이드라--.
"여보!!!"
"너는.. 너는 말이야--.."
아아--. 남편의 음성은 계속--. 계속!!
"내 아들을 내게서 빼앗아갔어--."
갑자기 남편의 팔이 꿈틀거리고 움직인다. 내가 믿었고, 내가 든든하다고 여겼던 그 팔--. 그 손이 내 목을 감싸고 서서히 조여온다.
숨이 막혀 온다. 그리고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 눈에 비치는 내 남편의 모습은--. 그렇다. 처연하게 얄궂은 미소를 띄고 있는 그 것은 바로 여자의 얼굴.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었고, 이름조차 들은 적이 없었던 그 여자의 얼굴.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를 미워하고 그이와의 결합을 그 누구보다도 반대해 왔다고 하던 바로 그 시어머니의 얼굴--. 내 남편은 나의 남편이기 전에 그 여자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나--. 그렇지만--.
"나는--. 나는 네가 미워!!"
6. 실마리
"여, 여보! 뭐, 뭐하는--."
나는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남편의 손은 억세기만 하다. 두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 없이 서럽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남자의 손에 의해 세상을 하직하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보다도 내게 느껴지는 것은 배신감--.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이렇게 끝나버릴 수는 없어!'
나름대로 힘껏 용을 쓰면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쳐보아도 남편의 힘에는 당할 수 없다. 거기다가 나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발목 한 쪽이 완전히 뒤틀어지고 부러진 상태에서는 아픔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힘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숨이 막혀서 눈앞이 아른거리며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지니 다급해진다. 침착--. 냉정--. 아니 빌어먹을--.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일단은 어떤 일이 있어도 벗어나야 한다. 이제 얼마 더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남편의 손을 풀려고 덧없이 버둥거리던 팔을 옆으로 뻗어서 더듬거리자 뭔가 싸늘한 것이 손에 잡힌다. 그래! 가위! 남편이 내 발목에 붕대를 감아줄 때에 썼던 가위임에 분명하다!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은 없다.
눈 앞에서 일그러지며 용을 쓰고 있는 얼굴은 남편의 얼굴이 분명할 테지만 자꾸 그게 늙수구레한 어느 여자의 얼굴로도 보였다가 주둥이가 심술궂게 튀어나온 카나리아도 되어 보이고 한다. 그 모습이 카나리아로 동공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힘껏 가위를 휘둘렀다.
그리고 무언가 긴 비명소리 같은 것이 끝이 없을 것 같이 이어지는 속에서 나는 다시 정신을 잃어갔다. 무언가 축축하고 붉은, 따뜻한 것이 얼굴을 덮어 더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없다--.. 벌써 몇 번째 정신을 잃는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그리고 눈을 떠서 또 지금 같은 꼴을 당해야 한다면 차라리 깨어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퍼뜩 스쳐 지나갔다--.
발목이 아프다. 아파도 이건 너무 심하게 아프다. 일어설 수도 없고 그냥 차라리 까무라쳐 버렸으면 좋겠다. 그런데도 그럴 수는 없다. 등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기야--. 난 네가 싫어! 네가 미워! 사라져버려!
아픔을 무릅쓰고 몸을 벌떡 일으키니 너무도 아파서 온 몸이 배배 꼬이는 것 같다. 그냥 이 자리에 다시 쓰러져 버렸으면.. 그러나 저 쪽에서 중얼거리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방은 온통 피같이 붉다. 벽도 천장도 바닥도 없는 텅텅 빈 공간 같은데도 온통 붉다.
마치 붉은 액체 속에 빠져서 둥둥 떠 있는 듯한 기분. 그 속에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건장한 남자의 체격에 얼굴만 늙은 할머니 같은 모습. 거기에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있다. 그 노파가 뼈만 남은 손가락을 들어서 나를 가리킨다.
네가--. 네가 내 아들을--. 내 아들을--.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발목이 아파오는 것도 잊고 반대 쪽으로 달음질 치려고 하자 이번에는 발이 땅에 찰싹 붙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 있는 힘을 다해서 달라 붙은 발목을 떼어내려고 용을 쓰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땅에서 발은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이 급해서 뒤를 돌아보니 벌써 남자의 체격을 가진 노파는 손에 닿을 듯 다가와서 다시 한 번 길게 소리를 친다.
도로 돌려줘! 아니-. 내가 가져간다-. 내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노파의 머리가 쑥 하며 뱀처럼 목에서 빠져나온다. 그러더니 그 옆에서는 남편의 머리가 돋아난다. 역시 뱀과 같이 길게 목을 꿈틀거리면서-. 그리고는 카나리아의 목이 돋아난다.
비명을 지르면서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움켜쥐고 땅에서 떼어내기 위해 있는 힘껏 당긴다. 저건 하이드라다. 그리고 저 머리는 계속 돋아날 것이다. 내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니 내 의심도 아니다. 분명히 보이는데--. 분명히 저렇게 보이는데.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린다. 아니다. 눈이 아니다. 번득이는 면도칼들이 하늘에서 펑펑 나부끼고 있다. 쏟아져 내리다가 솟구쳐 올라가기도 한다. 그리고 하늘 꼭대기에서는 빛나는 안경알이 그윽한 소리로 말을 건다.
"민정아--.. 무슨 일이지?--. 왜들 그랬지? 말해 보렴--."
"안 돼!"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내 발목은 우지직 소리를 내면서 땅에 발을 남겨주고 뜯어져버리고 나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저만치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저 쪽에서는 하이드라가 달려오고 있다. 머리를 산발한 노파의 얼굴이 하나--.
그리고 얼굴이 피범벅이 된 남편의 얼굴이 세 개--. 그리고 촛점없는 멍한 눈의 카나리아들.. 모두가 소리내어서 깔깔 웃는다. 그리고 날아가던 내 몸은 춤추는 면도칼들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리고 조각조각으로 잘라져서 사라져간다--.
이번에는 무언가 차가운 것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눈을 떴다. 차갑지만 축축한 것은 아니다. 찬바람.. 그래-. 누가 문을 열어 놓았나보다. 무심코 눈을 뜨려고 하다보니 아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든다. 남편은 지금 무얼하고 있지? 그리고 나는--.
무심코 몸을 일으키려니 다시 무서운 통증이 느껴진다. 바로 발목-. 잠시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말 발목이 잘라졌겠구나 생각하다가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생각하고 눈을 떴다.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다. 천장이 온통 하얗고--. 밝은 빛이 누운자세에서 간신히 보이는 창 밖에서 들어오고 있다. 여기가 어딜까?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목을 간신히 돌려서 아래쪽으로 눈을 돌리자 하얀 침대시트가 보인다. 그리고 작은 테이블과 몇 개의 의자, 산소호흡기와 석션필터 같은 것들도 보인다. 그렇다면--.
다시 눈을 돌려서 옆쪽을 바라본다. 내 팔목에는 링겔주사가 꽂혀져 있고 저만치에 걸려 있는 링겔병에서 맑은 액체가 똑똑 떨어지고 있다.
'병원--. 내가 병원에 와 있구나..'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집이 아닌 곳에 와 있고 무서운 순간이 모두 지나가버린 것 같아서 일단은 안심이다. 한 번 한 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가 뜨자 다시 남편의 생각이 든다. 남편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래-. 인제는 괜찮다. 시간이 있다. 차근차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이 이상한 정신병자라는 생각은 이제는 들지 않는다. 그러나 남편은--. 그렇다. 남편이 확실히 이상한 것이다. 나는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연애를 하고 결혼 약속을 하면서, 그이(결혼하기 전에는 나는 남편을 그런 식으로 불렀었다.)가 매우 우리의 결혼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을 느꼈고 나 자신도 매우 고민을 많이 했다.
그이는 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지만 그이의 우울한 안색이나 어쩌다가 술을 마셨을 때나 밤 늦게 전화할 때에 가끔씩 새어나오는 몇 마디의 말로 그 정도는 다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별반 예쁘거나 특이 할 것도 없고, 학벌이 좋거나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그야말로 혈혈단신인 며느리를 탐탁하게 여기는 시어머니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홀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역시 혼자뿐인 그이와 일종의 유대감을 가지게 되고 그러다보니 사랑하게 된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시어머님의 반대가 극심할 것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아무리 반대가 심하더라도 내가 지금의 남편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채 시어머님의 환심을 사기도 전에 시어머님은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로 인해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고, 나는 그 때 하필이면 당시 다니던 직장일 때문에 며칠 동안 연수를 받고 오는 바람에 장례식이 끝난 이후에 조그마한 삼베 리본을 달고 있는 그이밖에는 만날 수 없었다.
아직 그 집의 식구가 된 것도 아니었고 인사 한 번 드리지 못한 채였으니 문상조차 가지 못했던 것이 외적으로는 걸릴 일도 아니었고, 아주 먼 몇몇 친척들 외에는 피붙이도 없는 그이에게 그런 일을 가지고 뭐라 따지고 들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우리는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1년 후에 결혼식을 올렸지만 남편은 그 이후로 눈에 보이지 않게 우울해졌고 나는 그런 남편의 심기를 혹시라도 건드릴까 싶어서 시어머니의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다시 남편의 그 노파같아 보이던 그날 밤(어제인지 그보다 오래 전인지도 아직 알 수 없지만)의 얼굴이 떠 올랐다. 그런데 남편이 정신병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분명 그건 이중인격 증상임이 분명했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가 생각이 난다. 그래. 그것과 놀랄만큼 흡사하다.
이중인격--. 죽은 어머니의 성격을 자신이 스스로 받아들이고 아들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심리를 아들이 그대로 물려받아 마음 속에서 두 사람의 인격이 공존하게 되는--.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영화에서는 잠이 들었거나 깨었거나 상관 없이 이중인격이 공존했는데 내 경우에서 남편은 잠이 들었을 때에만 그렇게 행동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카나리아를 죽이고 칼을 침실로 가지고 오고--. 그래-. 남편은 정신병자다. 분명하다. 이젠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니 막막한 기분이 든다. 남편을 입원시켜야겠지. 남편이 정상적이 아니라고 해서, 나를 해치려고 했다고 해서 남편을 미워하거나 싫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성심껏 보살펴 주자. 그리고 얼른 회복되어서 다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아아-. 몹쓸 사람-. 아직도 남편을 다시 보기가 두렵기는 하나 그런데도 자꾸 생각이 나는 이유는 뭘까? 불쌍한 사람--.
그래. 분명 내가 생각한 것이 맞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님이 나를 어지간히 싫어하셨나보다. 그리고나서 시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별반 문제없이 결혼을 하게 되자 그 죄책감이 쌓여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음? 그런데 혹시--?
갑자기 내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시어머님의 돌연한 죽음.. 그것이 혹시 남편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아냐. 그럴 리는 없어! 그건--."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다가 퍼뜩 입을 다물었다. 방 안은 텅텅 비어있고 조용하지만--. 아아--. 나는 도대체 무슨 방정맞은 생각까지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그럴 리는--. 그렇지만--.
'남편은 그 우연한 사고를 가지고 죄책감을 느끼고 그렇게 이중인격자가 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건 아무래도 좀--.'
그러나--. 그렇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방정맞은 생각을 하다니--.
하이드라의 새로 계속 돋아나는 머리--. 바로 의심이 그런 것이라고 꿈속의 그 괴물이 이야기 했었지?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말자. 그럴 필요도 없으니--. 그나저나 남편은 괜찮은지 모르겠다. 내가 분명 그 때 가위로--. 아--.
"그렇지만 할 수 없었는 걸--. 그러지 않았으면.."
나 자신을 타이르듯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다가 나는 문득 내 발 아래쪽을 보았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며 뭔가 차가운 것이 몸 속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불로 덮여 있는 나의 두 발--. 이불 위로 불룩한 자국만을 보이고 있는 내 다리--. 두 발--. 그런데 그 두 발의 길이가 달랐다. 이건--..
"내--. 내 발!! 내 발이!!"
놀라서 소리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놀랍게도 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몸이 왜--. 아니--. 내 몸은 침대에 꽁꽁 묶여 있다. 아니--. 줄로 묶인 것이 아니다. 이불 밑에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줄로 어디 한 곳이 묶인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결박되어 있는 것 같다.
황급히 링겔주사가 꽂혀 있는 팔을 꼼지락거려서 교묘하게 덮여져 있는 이불을 들춰냈다. 거기 나타난 것은 옷소매가 봉해져 있고 끝에 줄이 달려서 침대에 붙들어매어져 있는 옷--. 분명 증상이 심한 정신병 환자들에게 입히는 구속복임에 틀림없다! 왜? 도대체 왜 나를--!! 아니--. 그것보다도 내 발은 절단 되었단 말인가?
이제 나는 다리 하나가 없는--!! 너무도 어이없는 사태에 놀라서 머리 속이 텅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허둥거리며 안간힘을 쓰자 침대가 들썩들썩한다. 이건--. 이건 아니다--. 왜 내 발목을 자른 건가! 그리고 왜 나를 정신병자처럼 침대에 묶어 놓고 있는 거란 말인가! 왜!
내 비명 소리가 들렸는지 병실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소리가 귀로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 할 수가 없었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내 손이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먼 곳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나는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7. 심문
눈앞이 흐릿해진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의식을 잃거나 기절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분명 깨어 있었고 계속해서 무언가 비명소리 같은 것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입으로 소리를 질러대면서도 무슨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지는 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도 계속해서 할 수가 없었다. 배반감--. 배신감--. 아까 언뜻 보았던 이불 밑의 내 발의 모습..
내 발은 분명 내 동의도 없이 잘라져 나가서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나는 정신병자처럼 구속복을 입고 침대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럴 수는 없었다. 정신이 나간 것은 내가 아니다. 정신이 이상한 것은 남편이다. 남편이 또 그 사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그래-. 남편은 분명 처음에는 잠이 든 상태에서만 시어머님의 인격을 나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남편과의 마지막 순간, 그 때에는 남편은 잠들어 있거나 의식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목을 조여왔었다.
그러면 남편이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어떤 짓을 했다는 말인가? 차라리 그냥 고히 죽여없앨 것이지. 나에게 더욱 더 고통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란 말인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혼돈--. 그리고 무서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 것 같은 불확실성만이 내가 있는 전 세계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나 자신도 알고서 지르는 것이 아닌 소리를 계속 질러대면서 몸을 얽어매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이대로 그냥 끝낼 수는 없다--. 아니, 아직도 끝난 것은 아니다.
분명히--. 그리고 나는.. 내 사랑하는 남편과 그리고 나를 죽이려고 했던 그 남편, 아니 시어머니의 그림자와 하이드라와 그리고 또--.
"진정제 주사! 어서!"
귓전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누군가가 묶여 있는 내 팔을 다시 꽉 잡는다. 팔에 잠시 따끔한 것 같은 촉감이 오고--. 그리고--. 온 몸이 물먹은 솜과 같이 나른하게 늘어지기 시작한다. 저들은 누구인가? 의사들? 아니--. 또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조금 다친 정도였던 내 발목을 잘라 없애 놓고 이번에는 또 어디를 잘라내려고 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눈꺼풀이 무거워 진다. 감은 눈 사이로 희미하게 남편의 웃는 모습이 떠오르다가 사라져 간다. 그 모습에 내 떨어져 나간 발 하나가 같이--. 그리고는 어두움--. 온통 모든 것이 어두움뿐인 그--..
정신이 좀 드십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갑자기 감은 눈이 부심을 느낀다. 잠든 사이 동공이 돌아가 있다가 목소리를 듣고 다시 홍채가 제 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 눈을 뜰까?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체 할까--. 나는 도대체 누구지?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리고 어째서 까닭모를 불안감이 이렇게--.
"깨어나신 모양입니다."
그렇지--. 나는 지금--. 그래 꽁꽁 묶여서 병원으로--. 그리고 남편은--. 시어머님은--. 그 목소리, 하이드라, 카나리아는--. 그리고 내 발--. 내 발은--.
"으아악!"
나는 갑자기 밀어닥쳐오는 기억들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비명을 질렀다. 이번의 내 비명 소리는 내 귀에도 들려왔고 내가 지르는 비명이면서도 나 자신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나는 눈을 번쩍 뜨면서 몸을 일으키려했으나 여전히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내 몸을 내가 누워있는 곳에 꼭 붙들어 매 놓고 움직이게 놔주지를 않는다. 그래--. 나는 묶여 있는 것이고--. 그리고--.
"진정하십시오. 진정--. 충격을 받으신 것은 알고 있지만--."
"갑자기 여러가지를 묻지는 마십시오. 환자는 아직 충격에서 회복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귓전으로 굵직한 것 같은 두 사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 쪽을 돌아보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다. 갑자기 너무나 많은 것들이 궁금해진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내--. 내--. "
"자자--. 진정하세요--. 진정--.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나--. 남편은요? 남편은--."
이상하게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들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못하는 것일까 안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입안이 바싹 말라붙은 것 같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나--. 남편--. 그--. 그 이는--."
"자자--. 차근차근 말씀 하세요. 그리고 먼저 진정을--."
"아--. 아--. 이--. 이건--."
갑자기 눈물이 왈칵 앞을 가린다. 그러면서 눈 앞의 형상들이 뿌옇게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내 쪽을 내려다 보고 있다. 두 사람--.
"내--. 내--. 발--. 발--."
"민정 씨의 오른쪽 발목은 절단 수술을 받았습니다. 놀라셨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거짓말! 거짓말!!! 믿을 수가 없다. 발목이 심하게 다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지만 요즈음 같이 의학이 발달한 세상에서 고작 그 정도의 상처를 가지고 절단 수술을 하다니!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건 뭔가 음모가 있어! 분명히 이건--.
"아아--."
마음속과는 달리 갑자기 내 입에서는 흐느낌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티브이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여자 주인공의 처절하고도 억눌린 오열. 그것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광경을 마치 눈 앞의 티브이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슬프다.
그러나 울고 있는 나와 그 우는 모습을 보고 있는 나와는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그러나 그건 단지 생각일 뿐 나는 몸 하나,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가 없다. 그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소리를 내어 우는 일 뿐--. 아--.
눈 앞에 있던 두 명의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 손수건 같은 것으로 내 얼굴을 닦아 내 준다. 친절하게 하려 한 행동이었겠지만 그런 사실이 나를 더욱 더 비참하게 한다. 내 발은 잘려져 나갔다. 그런데 손까지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나고 더더욱 슬퍼진다.
한참을 운 다음에, 의사인 듯,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두어 번이나 더 눈물을 닦아 내 준 후에야 나는 흑흑 거리면서 다소 울음을 추스릴 수가 있었다. 목이 메어서 말하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간신히 말은 할 수가 있다.
"남--. 남편이 보고 싶--어요--. 그 이가--."
간신히 꺼낸 말인데도 두 명의 남자의 안색이 다소 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상하다. 하긴--. 남편은 그럼--.
두 명 중 사복을 입은, 의사같지가 않고 어딘가 몹시 피곤이 배어있는 것 같은 체격 좋은 남자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내는 것을 듣고 나는 자지라질 듯이 놀랐다.
"모르시고 계시단 말입니까? 저희는 민정 씨에게 사건의 경위를 듣고 싶어서 이렇게--."
"무--. 무슨 사건?"
이 남자가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낸다는 듯 의사인 듯한 남자가 그 남자를 제지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나 그 남자는 의사의 손짓을 무시하고 계속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유기표 씨의 변사사건 말입니다. 남편이신 유기표 씨는 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벌써 3일 전의 일이지요--."
"뭐--. 뭐라고요? 그--. 그--."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나는 갑자기 온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듯, 간신히 보이고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암울한 회색으로 번져가기 시작했고.
그 이--. 그 이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도대체 또 무슨 이유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멍한 상태에서 마구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는 요란해지면서 무언가가 내 몸을 잡고 꾹 내리 누른다.
내가 또 발작을 하는 건가? 그래-. 아무렇게나 되라지-.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도 이렇게 생각에만 잠겨서 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 자신은 무엇이지? 우스웠다. 슬프고 비통하면서도 우스워서 할 수만 있다면 깔깔 웃어대고 싶었다.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니, 그 때보다도 훨씬 나쁜 상태로--. 남편도 없고--. 발도 없고--. 이렇게 꽁꽁 묶여서--.
여러 사람들이 다급하게 와르르 뛰어 들어오는 듯한 소리와 두 사람이 무언가 높은 소리로 언쟁하는 소리, 그리고 나 자신의 비명과 발악 같은 고함소리들이 마구 귓전으로 울리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또 다시 눈 앞이 캄캄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또 진정제 주사였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속에서 그것 한 가지밖에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8. 변신
구해줘--. 나를--. 나를--.
남편이 울부짖고 있다. 어떨 때는 등에 칼이 꽂힌 채, 어떨 때는 목에 밧줄을 매단 채, 어떤 때는 머리가 깨어져 으깨진 채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애원하고 있는 남편을 칼로 찌르고 밧줄을 끌어당기고 머리를 쳐부수는 것은 나의 시어머니-. 그리고 그 하이드라--. 아니,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남편의 모습은 시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잘려진 발목이기도 했고 나 자신이기도 했다.
남편이 나를 죽이고 있었고 시어머니가 남편을, 남편이 시어머니를, 내가 남편을--. 다시 남편이 내 발을--. 그리고 내가 나를 죽이고 있었다. 죽지 않는 것은 오로지 하나. 뱀대가리이기도 하고 낯익은 얼굴이기도 한 하이드라 하나뿐--. 그 놈만은 항상 죽이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바깥이 환하다고 느꼈을 때가 두 번--. 그리고 바깥이 어둡다고 느꼈을 때가 한 번--. 그 이외에는 기억할 수 없다. 지금 기억이 나는 것이 그만큼이니 실제로 눈을 떴던 것은 훨씬 더 여러 번이었을 것이다. 나는 눈만 뜨면 항상 울고
몸부림치며 아우성을 쳤고, 눈을 감고 있을 때는 항상 악몽에 시달렸다.
어떤 꿈들을 꾸었는지조차가 혼돈 속에 헝클어져서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벌써 몇 번이나 소리를 질러대고 발작처럼 울부짖다가 다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진정제 주사의 따끔한 감촉을 느끼고는 수렁 같은 악몽 속으로 빠져 들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나는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목이 조여지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는 몸부림치다가 번쩍 잠을 깬 것이다. 그리고 목을 조이고 흔들어대던 그 보이지 않는 검은 것도 어디론가 사라져서 목은 그리 답답하지 않다. 눈을 뜰까? 아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귀찮다. 울고 싶을 뿐이다--.
이번에는 바깥이 어둡다. 눈을 감았지만 알 수 있다. 그러니 적어도 이틀 이상을 나는 이런 상태를 계속해온 것이다. 다시 눈물이 터지려고 한다. 또 악몽을 꾸었다. 이만하면 지칠 때도 되었으련만 그 빌어먹을 악몽은 잘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매번 새롭고 다양한 레파토리로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다시 소녀 때의 어린 나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남편은 죽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악몽을 꾸고, 시달려서 지치고 지쳤는데.. 그런 나를 다독여줄 따스한 손길조차도 더 이상은 없다. 그 사실이 더 슬프다. 슬프고 슬프고 더욱 더 슬퍼서 헤어날 수가 없다.
꼬리부터 먹어들어가는 두 마리의 뱀처럼 남편에의 불신과 죽음이 얽혀 있고, 또 잘려져 없어진 내 발과 내 불안이 얽혀 있고, 다시 그 두 개가 다시 얽혀있다. 그래. 그걸 전번에 꿈에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눈을 뜬 상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상한 도형을 그리면서 그것들이 내 눈앞에서 몸부림치면서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울리고 있었다. 그래. 무서워하자. 무서운 것이 슬픈 것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은가?
다시 내 입에서는 흐느낌 소리가 흘러 나오고 내 이 비참한 몸뚱이가 산산히 부서지도록 마구 몸부림을 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몰려 나온다. 아냐. 그래서는 안 돼. 아니--. 아냐. 카나리아--. 카나리아의 희번득거리는 눈알이 허공에 있다. 저건-. 저건-.
아냐! 정신차렷! 네 상상일 뿐이야! 너는 눈을 뜨고 있지 않아!
아냐--. 칼--. 면도칼날들--. 그리고 잘려진 발--. 남편의 음산한 웃음..
아냐-. 아냐-. 너는 쇠약해. 지금 제 정신이 아냐--. 힘들겠지만 정신을 차려--. 차려야 해--.
희한하게도 나는 두 생각을 대화하듯이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화는 보통 때처럼 번갈아 스스로를 채찍질 하듯 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같은 방에 두 사람이 들어서 이야기하는 것 같이 동시다발적이다. 어찌되었건 나에게 냉정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고 있는 또 하나의 생각이 고마울 뿐이다. 그러나 그러면 지금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생각은 무엇이지?
남편이 나를 죽이려고 했어--. 시어머니도 나를--. 나를--.
아니야! 너는 죽지 않았어! 너는 정신을 잃었었고, 남편이 너를 정말 죽이려고 했다면 죽이는 것은 쉬웠을 거야!
그러나 남편은 죽었어--. 죽었어--. 내가 그랬을지도 몰라--. 내가--.
나는 그러지 않았어! 정신을 잃고 있었던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는 몽유병자가 아니야. 그건 정신과에서 검진을 받은 바 있고--. 그리고--.
나는 미친 년이야--.
미친 년이 아니야. 그러나 미친 년이 되어가고 있어. 그래서는 안 돼--. 안 돼--.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 속이 편하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버티라는 거지? 어떻게--.
사실대로--. 사실대로--. 사실대로--.
그래-. 그렇다-. 사실대로-. 사실대로--.
갑자기 눈 앞이 훤해지는 듯 하면서 기억이 난다. 그래. 아주 또렷하게--. 또렷하게 난다--. 왜 이제서야 기억이 나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 기억이 나는 걸까?
민정아--. 말해 보렴--.
그래--. 담임 선생님이 물었다. 하필이면 나에게--.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렴--.
그래-. 그렇게 물었었다. 선생님의 안경알이 번득하고 빛났다. 사실대로-.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나에게는 바로 최상의 방법이었다.
장난을 치다가 저 때문에 둘이 싸웠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그래-. 아주 간단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어린 나는--. 슬픈 것도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아주 담담했지만--. 나는--. 나는 그냥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은 이야기할 수 없었다. 팔뚝에서는 시커멓게 박힌 연필심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 소리를 막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내가 말한 사실을 오로지 사실로 만들기 위해서--.
선생님은 그때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래--. 불에 탄 자국이 있는 교탁을 보고--. 그리고 땅에 굴러다니고 있는 쇠부지깽이를 보고는 흔히 있을 법한 아이들의 장난을 생각했을 것이다. 절대로 그 고지식했던 선생님은 그 두 가지 상황에서 하나의 아이가 다른 아이를 향해 불에 달궈진 쇠부지깽이를 창처럼 날렸다는 사실을 유추해 내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냥 있는 흔한 장난--.
아이들은 어렸다. 물론 나도 어렸다. 그러나 그 순간--. 아무도 말을 할 수 없고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순간--. 모든 주도권을 잡은 것은 나였다. 그건 어쩌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작은 일인지도 몰랐지만 그건 나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래--. 생각이 난다.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나는 그 때로 되돌아가고 있다.
과거,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칠십년대 초반에는 그래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선생님도 화장실에 갈까하는 궁금증을 대부분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듯이--.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 나는 항상 잘생긴 남자 선생님이 바지를 까내리고는 용을 쓰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곤 했다. 일부러--. 아무리 그럴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들려고 해도 눈을 꽉 감고 그 사실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었다. 그도 사람이었고--. 그 사실을 약해지려는 나에게 정확히 인지시키고 나를 굳게 만드는 일이 필요했다. 나는 어렸지만 어린 나는 더욱 더 그런 거대한 존재들과 동등--. 아니 그 이상이 되고 싶었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울었다. 섦고 섦게 더더욱 울어댔다. 그러나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다. 주루룩--. 긴 눈물방울이 꼬리를 물고 이어서 흘러내리게--.
고지식했던 선생님은 머리 좋고 똑똑했던, 전교에서 가장 아이큐가 높았던 애제자의 눈물 앞에서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반 안에서의 소동은 문제성이 있다. 누군가를 벌주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스스로 울음으로써 모든 것을 떠맡고 나선 것이라고 선생님은 느꼈다.
아니 느끼지 않으면 안 되도록 내가 만든 것이다. 겁먹은 아이들의 분위기가 나에게로 뭉쳐가고 있었고--. 신과 비슷했던 담임선생님을 향해 가련한 그들을 감싸주기 위해서 피뢰침 처럼--. 아니 강한 전파를 발사하는 방송탑처럼 눈물을 쏘아보낸 것은 바로 나였다.
나는 거짓말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승리였다. 하늘을 소용돌이치게 만들고 땅을 갈리지게 만들 수 있는 듯한 승리였다. 그래--. 그러니까 그때 나는--. 선생님은 그래도 나에게 다시 안경 너머로 번득이는 탐색 비슷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용납해주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신이었다. 그래--. 나는 다시 한 번 원망하는 눈길을 섞어 또 다른 눈물줄기를 방출했고 그 눈물이라는 '사실' 앞에서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익사해 버렸다. 내 눈물이 바로 사실이었다. 말이 필요없었다.
그래--. 반아이들은 스스로 보았던 악몽 같은 일들을 거짓말처럼 잊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원 이유가 나에게, 나의 꾸밈과 가장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결코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선생님 앞에 스스로 나아가 자신이 본 전모를 밝힐 만큼 대담하지도 못했다.
그전까지는 선생님이 신이었더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새 종교에 의해 몰락해 가고 비판 받고 사악한 물로 둔갑해버리는 쇠락해 버린 고대의 신들.. 무엇보다도 그 가짜 신이 아닌 진짜 신인 내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실한 신자들처럼 끝내 수긍하는 태도로 침묵을 지켰고 스스로 본 것들을 분위기 그대로 바꾸어서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간혹 그 때의 일이 언급되더라도 모든 아이들은 그 때의 일을 그 때의 내 말 그대로 '그냥 장난치다가 싸운거지--.'로 기억한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뒤의 일이었고, 나는 그 당시에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모두 느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의 조절과 생각에 따라 그 모든 존재들이 내 의도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흘러나가게끔 만들 수 있었다. 무대의 주연은 나였고 나머지는 모조리 엑스트라들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신이었으니까--.
이러한 일들을 합당한 언어로 옮겨 생각해 낼 만큼 당시의 내 어휘력이 풍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때의 느낌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 찬란한 승리, 모든 것을 지배한 듯한 숨막힐 듯한 도취감 때문에 나는 그 사실을 잊고 기억하지 않도록 했었다. 그런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승리는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승리 이후에 패배를 겪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 나를 내맡길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나는 다시 보통의 아이가 되어갔었다. 그래--. 자연스럽게--. 나는 신이었었으니까--. 그래서 잊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울어서는 안 된다. 또 다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려서는 안 된다. 지금 갑자기 왜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나는--.
나를 죽이려다가 변사체로 발견 되었다는,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한다던 남편. 그리고 나를 증오하여 남편의 꿈과 마음 속에서 망령처럼 되살아난 시어머니. 잘려져 나간 발. 증오. 불신. 회의. 그리고 의심--. 하이드라--.
드디어 한 가지는 알아냈다. 이 모든, 내가 기억하는 한에 있어서는 단 하루 사이에 평범한 주부에서 보통으로서는 도저히 버텨내기 힘든 이 많은 일들을 몰아서 겪은 사람은 신이 되었다가 다시 인간으로 떨어져버린 내가 겪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계속 버티고 서서 무너져 내리려는 나를 채찍질한 것은 신이었던 나 자신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 그러면 이길 수 있다--. 신이 되자--. 나를 버리자--. 나는 이겨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버틸 수 없을 거야--. 절대로--.
마음 속에서 또 하나의 음산한 소리가 들리는 듯 해서 몸이 저절로 다시 흠칫해진다. 그건 바로 내가 하이드라라고 불렀던--. 그 목소리--. 남편과 시어머니와 꿈에서 보았던 괴물의 목소리--.
아냐--. 해낼 거야--. 이겨 낼 거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괴롭지 않아? 아직 반의 반도 안 나왔어--.
소름이 끼친다. 이 목소리는 또 어디서부터 나와서 울려오는 것일까?
너 따위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는 너 자신일 뿐이야. 네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나도 강해지는 거야--. 나는 네 자신이야--.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나--.
"의사선생님!!!"
나는 소리쳤다--. 더 이상은 발작이나 공포에 떠는 흐느낌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명령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어떤 사실을 더 알고 있는 것은 의사였고--.
나는 의사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아내기로 마음 먹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이드라 따위가 도사리지 않는 그 시간으로--. 나는 그때의, 내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신이었다.
나는 울 줄 알았으니까--. 눈물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이드라가 다시 몸 안에서 발버둥치면서 뭐라 떠들어대는 듯 했으나 나는 다시 소리쳐 의사를 불렀다. 내 명령에 따르라고--. 신의 명령에 따라 나에게 사실을 알려주러 오라고--.
하이드라가 나 자신이라면, 나 자신의 의심이고 나 자신의 망상이라면 나 자신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나는 나여서는 안되었다. 어쩌면 그 때 겪고 소중하게 마음 속으로 간직해 두었던 그 기억은 운명에서 이때를 위해 예비되어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하--.
"의사선생님!!!"
어서 오라--. 와서 나의 명령을 들어라--.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약하고 왜소한 주부로서의 이민정이 아니다--. 신으로서의 이민정--. 하이드라를 퇴치할 영웅이자 용사이자 신인 이민정이다--. 유쾌하다--. 아니, 유쾌하여야 했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래야만 버텨낼 수 있다.
위에서 한없는 무게로 짓누르는 이 상황에서 위로 마주버티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럼--. 그렇고 말고--. 나는 다른 길을 찾아낸 것이다. 나에게는 눈물이 있다. 그것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예전에 그랬던 것 처럼--. 나는 다시 신이 되는 것이다.
그때 막연한 두려움으로 감추어두었던 그 희열을 꺼내어 간직하고--.
인간이자 평범한 주부였던 이민정은 이 압박을 이기지 못해 벌써 찌그러져서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의 나는--. 바로 그 때의 만물을 움직이는 그--. 무대 위의 주연. 연출가--.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하하--.
하이드라.. 아니 남편의 일그러진 얼굴--. 시어머니의 얼굴--. 아니, 내 자신의 다른 의심의 얼굴이 지르는 소리--. 나는 맞설 것이다.
정말 그 정도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너야--. 못 벗어나--. 못 벗어나--.
벗어날 수 있다--. 옆길로--. 위에서 누르면 옆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듣고--. 모두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는 맞서는 것이다--. 나는 신이다--. 하이드라는 신과 맞서는 괴물이다--. 불사에다가 무적의 괴물--.그 괴물은 신의 그림자이고 신으로서의 나밖에는 상대할 수가 없다. 이제는 인간이고 나약한 주부인 이민정의 투쟁이 아닌 것이다.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는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그제서야 눈을 떴다. 미친 듯이 비웃으며 또 다시 내 속으로 잠시 몸을 숨기는 그 웃음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면서--.
내 명령을 듣고 온 의사의 흰 가운과 놀란 듯, 안도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는 듯한 얼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명령을 내렸다. 아니--. 저 바보 같은 사람에게 내 정체를 밝혀서는 안 된다--. 아직은 안 된다--. 내 진짜 정체를 밝히면 놀라서 제대로 이야기 못할지도 모르니까--. 저 자에게는 주부 이민정으로서의 가면을 쓰고 이야기 해야 한다..
"말해줘요--."
의사의 눈썹이 찡긋하고 치켜올라가더니 금세 평정을 찾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씁쓸히 웃으며 다시 말했다. 신의 음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다니--. 어리석은 인간--. 그 때문에 내가 이렇게 가면을 써야 하다니--.
"어서--.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말해 주세요--."
8. 변신 (2)
인간의 언어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다들 믿고 있지만, 또 그러한 언어 말고는 의사소통의 방법이 없다는 것도 인간이 스스로에게 지어준 하나의 한계가 아닐까? 사고는 분명 언어와 다른데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사고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언어로 묘사되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게 되는 것들은 분명한 그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느껴진다.
바로 그러한 나약성과 단순함, 힘든 고개 중턱에서 의례 주저 앉으며 '이 길은 아무도 가지 못했으니 나도 갈 수 없다. 내가 못 갔으니 아무도 갈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중얼거리는 그 왜소함이-. 내가 분명 저리도 나약하고 믿음과 신뢰와 자신이 없는 종족이었단 말인가
의사에게 말해달라고 할 필요는 없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으니까--. 아까 보였던 그 허술한 차림의 남자도 의사의 뒤를 이어 달려왔고, 나는 그가 온 것을 보자 정신을 잃은 척 했다. 분명 그 바보 같은 남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의사에게 물을 것이고, 나는 그냥 정신을 잃은 채 듣고만 있으면 되는 것이니까--. 하하--.
의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 저 의사는 감히 나를 동정하고 있다. 그러기에 저토록 슬픈 눈매를 지어보이고 거의 눈물을 흘릴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병신--. 소중한 눈물을 아무 데에나 뿌려대니 정말 울어야 할 때에는 울지를 못하는 것이다. 눈물은 나의 무기란 말이다. 벼락이 제우스 신의 무기였던 것처럼, 눈물은 또 다른 나만의 무기란 말이다. 그런데도 참으로 흔하기도 하군--. 하하
그렇지만 그 눈물 너머에 나름대로의 탐색의 눈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나는 잘 안다. 저 인간은 의사이다. 그것도 정신과 의사임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나의 현재 상태를 비정상적이라고 보고 나에게 나타나는 여러가지의 소위 '비인간적인' 증상들을 그들의 말에 따르면 '치료' 하여 다시 과거의 끔찍하고 나약했던 나로 되돌려 놓으려고 할 것이다. 가소로운 것. 내가 그 정도를 모를 줄 아는가?
의사를 속이려고 할 필요는 없다. 거짓은 옳은 일이 아니니까. 다만 나는 그에게 구태여 진실을 설명해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의사는 나에게 이상이 있다고 여기고 있고 상상을 초월한 여러가지 일들을 당하여 내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나를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나도 아직까지 내 안에 있으니까--. 내 눈가에 난 작은 점이나 손가락 끝의 갈라진 허물처럼 나에게 붙어 있는 것이니까. 그것을 버릴 필요는 없다. 유용한 것이니까--. 그리고 지금 나는 의사에게 그가 원하는 것만을 보여줄 수 있었다. 나는 신이니까--. 후훗--.
그가 속으로 보기를 기대하고 보기를 원하는 것, 즉 내가 아무 것도 듣고 보지 못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자 그 또 하나의 바보 같은 남자는 의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서 나를 그래도 조사해 보아야 한다고 따지는 것이었고 의사는 조금 망설이다가 나에 대해 조사한 것들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병원으로 실려 온 것은 이미 4일 전이었다. 그 4일 전, 남편의 직장에서부터 실종신고가 들어왔으며 그 2일 전에 남편의 썩어버린 시체가 난지도의 쓰레기 매립지에 반쯤 파묻힌 채 발견 되었다--. 그에 따라 경찰이 먼저 아무리 벨을 울려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내 집의 문을 따고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발목에 심한 상처를 입고 혼수상태가 된 채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내 발목의 상처는 (비록 내가 지금은 아무 감정도 없지만) 너무 오래 방치해 두어서 이미 거의 썩어 버린 상태였고 내 생명까지도 위독한 상태였다고 했다. 나는 슬쩍 오늘의 날짜를 물어 보았다.
6월 18일--. 그래--. 남편과의 그 일이 있던 날은 6월 9일이었다. 그러니 나는 5일간을 혼수상태, 심한 상처 그리고 지독한 탈진 속에서 죽지 않고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내 발목이 절단 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이 흰 가운을 입은 바보 같은 멍청이는 몇 번이나 강조했고 수술을 마치고나자 나는 조금씩 힘을 회복하기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심하게 정신적으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다고 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민정 씨 스스로가 이미 남편을 살해했다고 믿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기운을 돌리면서 그런 잠꼬대를 수도 없이 하셨죠. 그러나 경찰은, 이민정 씨가 그런 짓을 했다고는 믿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여자분이 남편을 살해하여 그 먼 난지도까지 시체를 옮겼겠습니까--. 그렇지만--."
저런 바보 같은 작자들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 남편--. 그래--. 내가 남편을 해쳤을까? 그래--. 기억이 난다. 가위--. 나는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한다던 남편에게 목을 졸리면서 엉겁결에 가위를 들어 남편의 몸 어딘가를 찌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그러면 남편은 그 가위에 찔려서 죽은 후 다시 난지도까지 가서 죽음을 맞았단 말인가?
"이민정 씨에게 구속복을 입히기까지 한 것은 죄송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민정 씨는 무의식 상태에서 이미 여러 번의 자살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상하게도 남자의 의식상태와 노파의 의식상태를 같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다중인격 증상이 분명하고 현재 민정 씨의 마음 속은 3개의 마음이--."
그래--. 남편--. 그리고 시어머니--. 남편이 죽은 것을 나는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의 그런 마음이 이번에는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는지도--. 그건 바로 하이드라다--. 잘라도 잘라도 다시 나타나는, 날름거리는 혓바닥을 지닌 대가리들--. 그 놈이 다시 왔다. 내 마음 속으로--.
"절대 이 환자를 병원 밖으로 내보내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병원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면, 이 환자는 하루 이내에 자살해 버릴 것입니다--."
병신 같은 놈--. 그래.. .그러나 그렇게 볼 수밖에 없겠지. 저 의사선생은 아직 모르니까--.
그는 아무리 나약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의사다. 그것도 정신과 의사.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는, 나의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킨다는 명목하에 나를 더욱 더 큰 고통 속으로 보내버릴지도 모른다. 바로 과거의 나, 그 비참한 인간 이민정으로 나를 다시-.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돌아 갈 수 없다. 저 의사는 지금 내 몸을 묶어 놓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도 한 가지 방법은 있다. 영웅은 어떤 일을 당해서도 난국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하--.
저 의사가 나를 관찰하고 내 마음을 읽어낸 것은 적어도 한참 전까지의 나뿐이다. 지금 저 의사는 내가 신으로, 영웅으로 변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절대! 절대!
"기다려 주십시오. 저 환자는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조사를 하셔야만 합니다. 일반적인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환자 입니다. 이해를--."
치료? 하하--. 치료?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말인가? 좌우간--. 좌우간--.
나는 속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하이드라--. 그것은 이미 내 몸 속으로,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이 세상에 괴물이 없다고 그 누가 말을 하는가? 이빨을 드러내고 불을 뿜어야만 괴물인가? 마음을 갉아 먹고 속을 태우는 괴물이야 말로 이 시대의 진짜 괴물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첫번째의 제물--. 그러나--. 그러나--.
남편을 과연 내가 죽인 것인가?
남편은 과연 나를 사랑한 것인가?
나는 남편을 사랑한 것인가?
그리고 나는 하이드라에게서 풀려나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남편과의 문제--. 그것을 매듭짓지 않고는 하이드라를 이길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남편과의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고 하이드라라는 의심의 괴물은 우리들 사이의 사랑에서 고개를 든 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의사라는 작자는 간신히 얻어진 내 안정을 다시 치료라는 명목하에 빼앗아 가버릴 지도 몰랐다. 그러면 나는 패배다. 그 이외의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서둘러야 했다.
8. 탈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시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다. 내 나약함, 내 안이함, 내 비굴함. 그 모든 짐을 그대로 짊어지고 싸울 수는 없다. 그래..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자. 나는 신이다. 그러나 반쪽의 제한 된 신. 무기가 필요하다. 지금 나는 묶여 있다. 생각이 난다. 먼 옛날에 읽었던 책. 그때는 단순한 신화이고 재미있는 과거의 이야기라고 읽었던 것들이.
프로메테우스는 사슬에 묶였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그대신 자신의 몸은 사슬에 묶이고 매일같이 그의 간을 독수리에게 쪼아먹혔다. 그리고 쪼아먹힌 간은 다시 게속해서 새로 돋아나는 것이었고--. 프로메테우스를 해방시켜 준 것은 헤라클레스였다--. 그리고 하이드라와 싸운 것도 헤라클레스--. 지금은--. 바로 나--. 그리고 나는 지금 묶여 있다--. 그럴 수는 없다. 독수리! 독수리!
방 안에는 다시 아무도 없다. 그리고 육중한 쇠문은 닫혀져 있고--. 나는 구속복에 꽁꽁 묶여져 있다. 주사바늘이 찔려 있는 오른쪽 팔만을 조금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 아니다. 몸도 조금씩은 움직일 수 있다. 비록 발 한 쪽은 잘려져서 없어졌지만 꽁꽁 묶인 구속복 사이로 몸은 조금씩 움직여진다.
왜 일까? 그래. 내가 이 곳에 온 지 며칠 이상 지난 상태이고, 그 사이 계속 고통 속에 지냈다. 나는 지금 무섭도록 수척해져 있는 것이 분명했고, 뼈만 남은 내 놈은 의사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마른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불쌍해서 구속복을 너무 꼭 묶지는 않은 것일까? 바보들--. 불쌍한 게 누군데? 이제 나는 불쌍하지 않다. 이민정은 불행하고 불쌍했지만 나는--.
오른손을 좀 더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좀 더--. 살을 헤집고 들어온 주사바늘. 그리고 그 주사바늘에 연결되어 있는 가느다란 비닐 줄. 그리고 그 반대편에 연결되어 있는 링겔병. 그래. 저거다. 독수리, 나는 독수리가 필요해--.
오른손을 억지로 움직여 주사줄을 잡고 손가락 주위로 칭칭 감아간다. 그래. 나는 손재주가 좋아. 독수리--. 독수리다--. 응? 독수리가 되어 날아 올라라--. 날아 올라--.
주사줄이 점점 팽팽해지며 흔들리자 링겔병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래--. 고무줄 놀이--. 줄의 탄력--. 링겔병에 연결되어 있는 줄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줄을 당겼다가 늦춰주었다가 튕겨내기를 반복한다. 그래--. 독수리--. 줄넘기 놀이를 할 때의 혹은 팽팽하고 혹은 헐겁기도 하던 줄의 촉감.
모든 것은 이유가 있고, 모든 것은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링겔병은 반원형의 철사고리로 그냥 걸려 있을 뿐이다. 당기고--. 늦추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몸을 흔들자. 있는 힘껏--. 내가 묶여 있는 이 무거운 침대마저도 들썩대도록-. 프로메테우스가 묶인 바위마저도 흔들리도록--. 흔든다--. 흔든다--. 그러면서도 섬세함을 잃지 않도록, 줄을--. 더--.
됐다! 링겔병의 고리가 드디어 풀어져서 독수리 같이 내 팔 위로 떨어져 내린다. 잡았다. 그리고--. 그러면--.
내 침대가 있는 곳의 창가--. 보통의 유리창보다도 훨씬 작은 창문에 블라인드까지 쳐 놓고 있어서 먼 회상 같은 가느다란 햇빛 밖에 들어오지 않는 콘크리트 창가--. 부서져라--. 그리고 날아라--. 너야말로 프로메테우스의 독수리--.
링겔병이 내 손 안에서 산산히 부서진다. 링겔병 안의 액체와 함께 따뜻하고 낯익은 붉은 액체들이 사방에 날린다. 아름다워--. 그래--.
내 손 안에는 날개를 펴고 부서져 버린 독수리의 투명한 잔해들이 쥐어져 있다. 독수리는 이제 죽었고, 나는 사슬에서 풀려나야 한다.
유난히 날카로워 보이는 링겔병의 유리조각 하나를 들어 일단 오른팔 어깨에 그어대기 시작한다. 날이 잘든다. 독수리의 부리였음이 틀림 없다. 묶인 끈. 구속. 속박--. 나는 프로메테우스는 아니지만.. 사슬에서는 풀려 나야 한다. 어서--. 나를 묶은 자가 독수리가 죽은 것을 알기 전에--.
사슬 가닥들이 끊어진다. 어서--. 어서--. 해방이 눈 앞에 있다. 조각조각난, 간혹가다가 붉게 물들기도 한 구속복의 조각들이 사방에 뿌려진다--. 그리고--. 그리고--. 아--. 힘이 든다. 그렇지만--. 하하--. 나는-. 나는 말이야.. 영웅이야.. 그리고 힘의 상징-. 발 하나 정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 전혀--.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잡으면서 일어난다. 그래-. 힘들고-. 사실 온 몸에 아픔이 온다. 자유의 대가.. 독수리의 부리는 사슬을 끊어주면서 무수히 내 피를 빨아 마셨다. 그러나 어떠랴-.
껑충껑충 뛰어서 나는 문 옆으로 가서 몸을 붙였다. 문 밖에서 누가 걸어다니는 듯한 소리-. 아, 한가지 좋은 점이 있다. 나는 정신병원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곳은 적어도 수많은 의사나 간호원들, 그리고 병문안 온 가족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는 그런 곳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 나가야-.
나는 머리가 좋다. 그래. 이제 세상은 변했다.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영웅은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도끼와 곤봉을 휘두르면서 싸우는 것은 이제는 야만적이고 비참한 자들뿐이다. 나의 이성.. 나의 논리.. 나의 지능-. 이것이 내 힘이다. 그리고 하이드라도-. 놈을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절대-. 그러면 어떻게?
아까의 기억이 난다. 그래. 정신병원이라고 해도 모두가 남자 간호보조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미 묶여 있는 상태로 되어 있고, 아까 (라고 해도 어제인지 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내게 진정제 주사를 놓은 것도 여자 간호사였다.
그래. 나는 머리가 좋다고 했다. 나는 다시 절뚝거리며 침대로 돌아간다. 부서진 독수리의 잔해도 치우고-. 침대 시트를 폭 덮어서 찢어진 옷들이 보이지 않게--. 선입관에만 잡혀있는 바보 같은 간호원이 무엇을 알겠는가-.
아마도 누군가가 링겔병을 치우고 이불을 폭 덮어준 것으로 생각하겠지.. 좌우간 한발로, 그리고 몹시 쇠약해진 몸으로 움직이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참을 수 있다. 참아야 한다--. 자-. 됐다. 이제는 비명을 지르자.. 너무 심하지 않게-. 그러나 담당 간호사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랜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역시 예상대로다. 간호사가 들어온다. 여자다. 문 밖으로 언뜻 휠체어 같은 것이 보인다. 누군가가 밀고 가다가 앞에 세워둔 모양이다. 잘 됐다. 그리고 그 뒤로 문이 꼭 닫힌다. 스프링 잠김장치.. 잘 봐두자. 나는 다시 한 번 신음소리 같은 것을 내며 몸을 떤다. 젠장. 더러워라. 저런 여자나부랭이 앞에서 위대한 내가 이런 꼴을 보여야만 하나?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내 예상대로다. 간호사는 뭔가 주사기를 들고 왔다. 진정제 주사겠지-. 그래--. 간호사는 주사기를 들고 주사바늘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주사기 안의 공기를 뺀 후 약의 눈금을 맞춘다. 그래-. 잘하고 있어--. 그리고 내게로 몸을 굽히고--. 이 때다!
내가 난데없이 간호사의 목을 틀어쥐자 간호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비명을 지르려고 한다. 간호사가 받쳐 들고 온 철제 접시가 침대 위에 떨어진다. 있는 힘껏 간호사의 목을 조르면서 내 침대 위에 넘어뜨리는 것 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
반항을 한다. 이 여자는 나보다도 젊고, 오랜동안 혼수상태이지도 않았으며 발도 잘라지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힘! 힘이 딸린다. 팔이 후들후들 떨리고.. 꽤나 힘이 세다--. 내가 밀린다-. 안 돼! 간호원이 정신을 차리고 나를 밀어내고 소리를 지르려고 한다. 안 돼!
간호사의 입을 있는 힘껏 틀어 막으며 뻗친 손에 뭔가가 잡힌다. 간호사가 주사기를 받쳐 들고 온 철제 접시.. 있는 힘껏 그것을 휘두르자 펑 하는 소리대신 퍽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난다. 쟁반 복판이 아니라 모서리로 때렸나보다. 재미있다-. 그다지 큰 소리도 아니다-. 한 번 더-. 한 번 더--.
간호사의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 같다. 언뜻 올려다보니 얼굴이 붓고 피까지 흐르고 있다. 내가 좀 심했나? 그러나 할 수 없다. 좀 아프기는 하겠지만 죽은 것은 아니고, 또 언제 정신을 차릴 지 모른다. 간호사의 손에는 아직 진정제 주사기가 꽉 잡혀 있다. 그것을 빼앗아서.. 됐다. 나 대신 이 간호사가 잘 잠들어 있어 줄 것이다.. 그러나 옷은 필요하다--.
온 몸에 기운이 없고 입에서 단내가 난다. 몸이 예전 같지가 않다. 당연한 것일까? 그러나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 할 일이 많다--. 나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팔에 억지로 힘을 주어서 간호사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8. 탈출 (2)
서둘러서 간호사의 옷을 입고 나니 어질어질 해지고 속이 메슥거려오기 시작한다. 미친 사람이 속이 메슥거리기도 하다니. 그렇다면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테지--.
내게 중요한 것은 지금은 이곳에서 빠져 나가는 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 알지 못하는 여자를 쳐서 쓰러뜨렸다. 하나의 작은 승리.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곳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오히려 하이드라의 조롱거리만이 될 뿐이다. 나가자.
비록 간호사의 옷을 바꿔 입었다 하더라도 내게는 그 간호사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과 간호사는 가지고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있다. 그 전자는 나의 눈물이고 후자는 나의 발이다. 발--.
절름발이에 발이 없어진 간호사를 연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문 저쪽에 있을 (정말 있을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수위나 경비원 같은 한심한 사람들일지라도 발 없는 간호사를 그럴 수도 있겠거니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당연한 해답. 발이 없으면 있게 해야 한다.
문 위에 비죽이 튀어 나와 있던 스프링 잠김장치. 비록 손가락만한 굵기의 쇠붙이로 된 것이지만 그 비죽한 모양은 사람의 발과 꽤 닮았다. 저걸 어떻게 떼어낼까? 그렇다. 나사 하나만 풀면 된다. 아니 두 개. 간호사복의 주머니에는 동전 몇 개가 들어있다. 그것 하나면--. 그리고 동전으로 나사를 돌리면--. 동전은 좀 큼지막한 나사 홈에 딱 들어맞는다. 나는 되는 대로 작은 읊조림을 흥얼거리며 나사를 끽끽거리며 돌리기 시작한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세상으로--.
나사 하나가 풀려져 나왔다. 무슨 노래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노래가락이 조그맣게 흘러나오다가 조금씩 바뀌어서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 흥얼거림 같은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
내가 해치워야 할 온갖 괴물들이 득시글 거리는 세상으로--.
무언가가 툭툭 얼굴을 넘어 아래로 떨어진다. 언뜻 보니 맑은 물--. 눈물일까? 아니다. 나의 소중한 무기를--. 그래. 그냥 땀일 뿐이지--. 땀. 눈물은 낭비할 수 없다. 나의 소중한 무기인 나의 눈물--. 스프링이 바닥에 구르며 잠김장치가 손아귀에 꼭 쥐어진다. 좋다.
초췌하고 파리한 얼굴의--.
나의 몸을 묶었던 붕대 부스러기들은 여기에 얼마든지 있다. 그것으로 저걸 감자. 아니 그보다 먼저 내 발목에 그 쇠막대기를 묶는 것이 우선이겠지? 이미 없어져 어느 곳에서 썩었는지 파묻히거나 태워져 없어졌는지 모를 내 발. 도마뱀에게 꼬리가 생기는 것처럼 발도 새로 돋아 날 수는 없는 것일까?
아--. 눈 앞이 희미해 진다. 그렇지만--. 그래. 아무 일도 아니겠지?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병원에서 며칠을 보냈다고 해도 요만큼 움직이다가 기절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귓전에서 또다시 웅웅거리는 울림이 들려온다.
정말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병신--.
눈에서 불이 번쩍 비치는 듯한 느낌이다. 놈--. 하이드라다. 몸 속을 칼로 헤집다 보면 혹시 놈이 죽어버리지는 않을까?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살아야 한다.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너무나--.
네 꼬락서니를 좀 봐. 완전히 미쳤군. 그러고서 뭘 할 수 있단 말이지? 네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정말 간호사로 믿어줄 것 같아? 가짜 발을 달았다고 네가 휘청거리지 않고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쇠막대기에 붕대를 감던 내 손이 덜컥 멎는다. 가짜 발을 만들어 달았다고 정말 사람들이 속아 넘어갈 만큼 유연하게 걸을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도 먼저 나같이 초췌하고 파리한 얼굴의 간호사, 그것도 얼굴을 전혀 모르는 간호사가 돌아다닌다고 하면 의심을 품지 않을까?
의심--. 그건 하이드라의 또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 괴물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괴물의 하수인들. 괴물에 신들리고 미친 작자들이 감시의 눈빛을 번득이고 있다. 그곳을 빠져 나갈 수 있을까?
또 다시 정신이 가물거려진다. 하이드라의 손길은 세상 어디에나 뻗쳐 있다. 어디에나--. 그리고 나는--.
아니다! 여기서 말 수는 없다. 아직 채 놈과의 싸움은 시작도 안았는데! 나는 신이 아니었던가? 신에게 불가능은 없다. 생각해 보자.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방법이--. 머리--. 머리를 쓰자. 잘-. 잘 생각해 보는거다.
가쁜 숨이나마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그래--. 머리 속에서 뭔가가 떠오른다. 차근차근--.
그래--. 모르기는 몰라도 이곳은 꽤 큰 병원일 것이다. 그리고 관에서 주도하는 병원임이 틀림없다. 전혀 가족도 없는 내가 경찰에 의해 발견되어 실려 왔다면 그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관에서 주도한 병원이라면 당연히 규모도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직된 사고를 지닌 공무원들--. 그래. 얼굴을 모르는 간호사가 하나쯤 돌아다닌다고 그게 말단 경비원에게 뭐 그리 대수로울 일이겠는가? 침착하면 된다. 새로 왔다고--. 새로 온 사람일 뿐이라고 이야기 하면 된다. 아! 그래! 그리고-.
쓰러져 있는 간호사의 입가에서 조금 맺혀 있는 핏방울. 나의 것을 쓸 수는 없다. 지금도 어지러워 죽겠는걸? 미안하지만 신에게 공물을 조금 바쳐라. 유리조각을 다시 집어들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간호사의 입술가를 스윽 긋자 선혈이 아름다운 장미빛을 띄고 솟아 올라온다. 하하--. 예쁘다. 그러나 지금 이 것은 쓸모가 있다.
피를 되는 대로 손가락으로 훔쳐 내서는 내 가짜 발목에 문지른다. 좀 더--. 좀 더--. 그래--.
나는 지금 다친 것이다. 다쳐도 좀 많이--. 발목을 다쳐서 잘 걷지를 못하는 것이고 급히 치료를 받으러 가야 하는 것이다.
치료? 그런데 이곳은 병원이 아니던가? 아니. 아니다. 이 곳은 정신병원이다. 나는 외과에 가 보아야 한다. 종합병원이라 할지라도 정신병동과 외과 병동이 같은 곳에 있지는 않을테니--. 그래--.
언뜻 몸을 일으키다가 파리한 내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 거울? 거울은 없다. 그래. 그대신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저 철제 쟁반이 있다. 그걸 집어들고는-.
얼굴을 쟁반에 비쳐보니 푸른 기가 도는 것이 역력하다. 놀라서 그런 것으로 할까?
간호사의 입술가에서 공물을 좀 더 짜내어서 얼굴에 바르면 좀 나아질까? 아니. 됐다. 더 이상 정신을 차리고 있기가 힘들다. 몸이 후들후들 떨려와서 잘 가눌 수조차 없다. 아니. 오히려 좋다. 최적이다. 그리고 나의 무기--. 눈물을 보이자--.
비틀거리면서 문을 열고 나가자 예상대로 어느 경비원인 듯한 사람 하나가 달려 온다. 다행히 다른 간호사는 보이지 않는다. 침착--. 아니 침착할 필요가 없지. 나는 제정신이 아닌 멍청한 간호사이니까--.
저--. 저 방의 여자 환자가--.
예? 무슨 일이?
발--. 발작을 해서 내 발목을--.
예? 아니--.
경비원은 놀란 듯이 방 안을 들여다 본다. 경비원이 방 안에 묶여 있는 환자의 얼굴을 기억할 리는 없다. 좌우간 누군가가 있으면 그만일 테지. 내 예상이 맞았다.
"진정제 주사를 놓았어요. 그러나--. 난--. 다쳤어요! 대강 수습은 했지만 어서--."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하려다가 이크 싶어서 말을 다시 삼켰다. 늙수구레한 경비원의 눈이 내 발목을 향하는 것이 보인다.
몸은 마구 떨려서 쓰러질 것 같지만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내 솜씨기는 했지만 내 발목께는 아주 그럴 듯 하게 붕대로 대강 감아 피에 물든 상처를 감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 경비원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 바보--.
"아니--. 어째서--."
이크. 이건 아니다. 실수--. 경비원의 눈빛이 야릇해진다. 내 얼굴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표정.
"아--. 너무--. 너무--. 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나는 몸을 한 번 휘청 해보인다. 경비원은 더 이상 생각할 틈도 갖지 못하고 나를 부축한다. 그래. 이거다. 경비원의 얼굴이 다시 걱정스러운 듯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두 눈에서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자--. 보아라--. 그리고 내 말을 들어라--. 내 명령을 들어라--. 너는 나를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는 것이다. 어서--. 어서--.
"도와드릴까요?"
"아.. 부축을 좀.. 음--."
어서 나를 데리고 나가라. 서둘러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어쩌고 할 틈이 없다. 세상은 나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다. 지배받기 위해서-. 그리고 하이드라의 독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음하고 있단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한때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남편의 죽음까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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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혁-하이드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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