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 에코리브르
이 책은 냉전에 관한 진정한 지구사의 관점을 보여준다. 저자는 20세기 후반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이 제3세계에서 이뤄진 변화 과정에 어떻게 반복적으로 개입했는지를 보여주면서, 미국과 소련의 개입은 여러 국가뿐 아니라 국제 문제를 지배한 여러 운동과 이데올로기를 부채질했으며,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대표적인 충돌도 지난 세기 진행된 지구적 차원의 냉전에 기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냉전의 지구사 -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 저자 오드 아르네 베스타
1960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 런던정경대학교 교수와 동 대학의 냉전 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하버 드대학교 케네디스쿨 교수를 거쳐, 현재 예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케임브리지대학교, 홍콩대학교, 뉴욕대학교 방문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2006년 『냉전의 지구사』는 저명한 역사학 저서에 수여하는 밴크로프트상을 수상했다. 그는 3권으로 완간한 『케임브리지 냉전사』시리즈의 책임 편집을 맡기도 했다. 우리말로 번역 출판한 베스타의 저작으로는 『잠 못 이루는 제국』(문명기 옮김, 까치, 2014), J. M. 로버츠와 함께 쓴 『세계사 ⅠⅡ』(노경덕 외 옮김, 까치, 2015)가 있다.
▣ Short Summary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냉전을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이 군사력과 전략적 통제를 둘러싸고 유럽 지역에서 벌인 경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기존의 시각과 달리 냉전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은 군사나 전략, 유럽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제3세계의 정치ㆍ사회적 발전과 관련이 있다. 탈식 민지화와 제3세계의 급진화는 냉전의 직접적 산물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 냉전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두 가지 과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많은 부분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참고로 충돌의 과정에서 보면 냉전은 주로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통제와 지배에 초점을 두었고, 이를 위해 초강대국과 현지 동맹국이 취한 방법은 유럽 식민주의의 최종 국면에서 나타난 양상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즉, 거대한 사회ㆍ경제 사업으로 지지자에게는 근대성을 약속하고, 반대자나 그 진보의 길에 방해가 되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냉전에 관한 진정한 지구사의 관점을 보여준다. 저자는 20세기 후반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이 제3세계에서 이뤄진 변화 과정에 어떻게 반복적으로 개입했는지를 보여주면서, 미국과 소련의 개입은 여러 국가뿐 아니라 국제 문제를 지배한 여러 운동과 이데올로기를 부채질했으며,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대표적인 충돌도 지난 세기 진행된 지구적 차원의 냉전에 기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편 옥스퍼드대학교의 고전학자 재스퍼 그리핀은 “우리가 역사를 들여다보는 데에는 두 가지 동기가 있다. 하나는 과거를 알기 위한 호기심으로 우리는 무엇이 일어났으며 누가 무엇을 왜 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또 다른 동기는 현재를 이해하려는 희망이다. 역사 공부의 이유는 우리의 시간과 경험을 해석하고 이를 통해 미래의 희망을 찾기 위해서이기도 하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리핀 교수의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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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에 비유하자면 이 책은 오늘날의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쓰였다고 할 수 있다.
▣ 차례
지도 목록 한국어판 서문 감사의 글
서론 01 자유의 제국: 미국 이데올로기와 대외 개입 02 정의의 제국: 소련 이데올로기와 대외 개입 03 혁명가들: 반식민주의 정치와 그 변환 04 제3세계의 형성: 혁명과 대립하는 미국 05 쿠바와 베트남의 도전 06 탈식민지화의 위기: 남부 아프리카 07 사회주의의 전망: 에티오피아와 아프리카의 뿔 08 이슬람주의자의 도전: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09 1980년대: 레이건의 공세 10 고르바초프의 철수 결정과 냉전 종식 결론: 혁명, 개입 그리고 초강대국의 붕괴
약어표주옮긴이의 글참고문헌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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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지구사 -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서론
이 책은 20세기 후반의 초강대국 아메리카합중국(이하 ‘미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하 ‘소 련’)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 이뤄진 변화 과정에 어떻게 반복적으로 개입했는지를 다룬다. 이들의 개입은 여러 국가뿐 아니라, 국제 문제를 지배한 여러 운동과 이데올로기를 부채질했다. 이책에서 사용한 개념의 정의는 단순하다. ‘냉전’은 미국과 소련의 지구적 대립이 국제 문제를 지배했던 1945~1991년의 기간을 의미한다. ‘제3세계’는 유럽(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한다면 범유럽이라는 표현도 가능)의 지배를 받았던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나 반(半)식민지 국가를 의미한다. ‘지 구적’이라는 말은 거의 동시에 각기 다른 대륙에서 벌어진 과정을 말한다. ‘개입’은 타국을 향한 일국의 국가 차원의 준비된 행동을 뜻한다. 이는 간단한 조작적 정의로서 이 책에서 사용한 특정 맥락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당연히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이와 같은 정의에 대한 비판은 가능)
이 책은 미국과 소련을 제3세계로 이끈 동인이 두 나라의 정치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한다. 유럽적 근대성 개념을 둘러싼 투쟁 속에서 두 나라는 모두 자국을 유럽적 근대성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여겼다. 한편 미국과 소련은 자국의 이데올로기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세계를 바꾸고자 했는데, 미국과 소련에 있어 신생 독립국의 엘리트는 매력적인 경쟁 대상이었다. 한편두 국가는 제3세계에서 자유나 사회 정의를 확장해 세계사의 자연적 방향과 자국의 안보를 일치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모두 자국이 제3세계를 위한 특별한 사명을 지녔다고 여겼고, 그들 국가만이 그 사명을 이룰 수 있으며, 만약 그들의 개입이 없다면 현지인이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남반구에서 진행된 냉전을 단순히 유럽 식민주의의 개입이나 유럽이 제3세계 민중을 통제하고자 하는 시도로 파악하는 시각은 일면적이라 할 수 있다.
또 냉전과 유럽 식민주의의 차이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소련의 지배를 ‘제국’으로 유형화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오히려 냉전은 하나의 특수한 시기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근대 초기에 시작된 유럽의 팽창과 달리 소련과 미국의 목표는 착취나 정복이 아닌 통제와 개선에 있었다. 이와 같은 구분은 개입의 대상이었던 측에서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냉전 담론 그 자체를 이해 하는 데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다. 유럽 제국주의가 제3세계 사회의 개선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을 지배하던 도중에 덧붙인 것에 가까웠으나, 냉전은 처음부터 제3세계 사회의 개선을 고려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진심으로 유럽 제국주의를 비판했으며, 이러한 비판은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했다.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나타난 냉전기 개입의 폭력성은 소련과 미국이 지켜내고자 했던 이 민중과의 동일시를 통해서만 설명 가능하다. 대부분의 냉전기 개입은 이데올로기를 두고 진행된 내전의 확장판이었으며, 그 쟁투는 내전만이 야기할 수 있는 폭력성과 함께 이뤄졌다.
자유의 제국 - 미국 이데올로기와 대외 개입
1890년대, 미국이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대륙 너머를 식민화할 준비를 마치자, 미국인들은 공화국이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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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제국이 될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에 돌입했다. 190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필리핀 식민화 정책이 미국 공화주의의 근간을 훼손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비판했다. 하지만 브라이언의 대권 도전은 연이어 실패했다.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브라이언의 감정에서 나타나는 복잡 미묘함은 미국 외교정책 결정의 주요 순간에 자주 반복해 등장했다.
이분법을 좋아하는 역사가들은 1890년대와 브라이언의 연이은 패배를 자유를 중시한 공화주의자와 돈과 이익에 강한 열망을 보인 공화당(Republican)의 대립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적어도 19세기 미국 외교 정책의 전환은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미국 이데올로기의 지속적 형성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국면이었다. 참고로 1785년 토머스 제퍼슨은 국내의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미국의 원칙을 찬양했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 회피는 “미국의 위정자가 따를 수 없는 이론”일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근간이었다. 제퍼슨은 “우리 미국인은 항해와 상업에 관해서는 확실한 애호를 지니고 있습니다.”라고도 말했는데, 19세기와 20세기 초 미국의 국가 형성 과정 속에서 이렇게 ‘이론’과 ‘애호’는 우월적 지위를 향해 서로 경쟁하는 동시에 점차 혼합되며 상호 조정되어갔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이 되자 자유라는 ‘이론’과 이익이라는 ‘애호’는 미국 외교정책 이데올로기로 자연 스럽게 통합되었다. 자유와 이익이라는 두 가지는 결합되어 하나의 상징이자 미국의 보편주의적 사명의 핵심 인식으로서 기능했다. 이러한 냉전기 미국적 가치의 역할이 다른 서구의 ‘보통’ 국가와 달랐던 점은 미국의 상징과 미국이 지닌 일련의 표상(자유로운 시장, 반공주의, 국가 권력을 향한 경계, 기술을 향한 믿음)이 목적론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즉, 미국의 오늘은 세계의 내일이 될 예정이었다. 미국의 보편주의와 목적은 미국 혁명기에 그 기원을 둔다. 그러나 서로 다른 관념 간에 타협이 필요했기에 미국이 보편주의와 목적론을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선언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미국의 제3세계 개입의 역사는 이와 같은 미국의 이데올로기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발전했으며, 미국 외교 정책 엘리트의 정책을 형성하는 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와 관련한 역사라 할 수 있다. 외교 정책을 둘러싼 국내의 강력한 반발이 있기도 했지만, 적어도 미국의 기준에서 냉전기 미국의 외교 정책에는 당면한 목표와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과 관련해 놀라울 정도의 합의가 존재했다. 외교 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상대적으로 적었기에 학자들은 미국의 국제 정책 수행에서 이데올로기와 드러난 행동 간의 관계를 단순하게 파악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대외 관계 기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냉전기 미국 외교 정책을 둘러싼 합의는 민주공화국이 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무슨 역할을 하고, 어떤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두고 이루어진 치열한 논쟁 끝에 나온 결과물이었다.
‘외부인’과 반공주의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과 주요 서구 열강이 비참하고 비합리적인 수준으로 추락했다는 사실을 보여주 었다. 그러므로 이제 미국이 승전국이자 종전 이후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모든 것을 고쳐나가야 할 차례였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사명이 강대국 간 전쟁을 방지하는 국제 질서의 형성에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윌슨은 민족주의와 혁명이라는 두 가지 주요 문제에 집중했다. 전후 중ㆍ동부 유럽의 민족주의 구상이 결실을 맺는 데 윌슨의 민족자결권 지지는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윌슨은 급진주의나 사회주의가 국가 건설의 주된 원동력이라고 여겨지는 지역을 지원하는 데는 주저했다.
한편 1920년대 초 비유럽 지역의 불안정과 이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면 어떤 나쁜 결과가 나타나는 지에 대해 미국인은 우려했다. 이와 같은 우려는 러시아 혁명과 그 여파를 보면서 더욱 커졌다.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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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몰락했는데, 차르 체제를 유럽의 정치체 중 가장 반동적인 형태라고 여긴 많은 미국인은 초기에 러시아 혁명을 환영했고, 새로이 등장한 러시아 체제가 미국 독립혁명과 같은 정책 궤도를 따르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볼셰비키가 권위주의적 집단주의, 영구 혁명과 국제주의를 강조하자 미국 엘리트 집단은 소련 체제를 향한 호의를 거두어들였다. 오히려 소련의 등장 이후 전개된 일련의 사건은 소련 공산주의가 아메리카니즘의 극명한 경쟁자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혁명은 스스로를 대안적 근대성으로 선포했으며, 가난하고 탄압받는 민중이 미국 모델을 모방하지 않더라도 현상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일찍이 1918년부터 다른 제국주의 강대국과 함께 볼셰비키에 맞서는 군사 개입을 전개했다.
한편 전시 미국의 대(對)중국 개입은 미국이 개혁에 필요한 능력, 교육, 도덕적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동맹국을 어떤 방식으로 지도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중화민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미국과의 동맹이 우선적으로 일본에 맞서기 위한, 그리고 일본 패망 이후에는 중국 공산주의자에 대항하기 위해 맺은 일종의 정략결혼이라 생각했다. 이에 반해 많은 미국인은 미국-중화민국 협력을 중국의 사회ㆍ국가를 개혁하기 위해 장제스에게 수여한 백지수표라고 여겼다. 그리고 국가 운영에서 장제스가 미국인의 지도와 교육을 따르려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미국은 중국을 포기하 기보다는 장제스를 미국의 조언에 좀 더 순응하는 반공주의자로 대체하려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실패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 형식은 이후 20세기의 절반 동안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되풀이되었다.
‘세계는 하나의 시장’ 19세기 경제의 경이로운 성장(이는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으로 미국은 이미 경제 대국이었다. 군사ㆍ 정치 영역에서 대국으로서 역할을 하기 전에도 말이다. 미국의 연간 총생산량은 유럽의 주요 강국인 영국, 독일, 프랑스의 연간 총생산량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19세기 미국은 자본의 순수입국이었지만, 1918년 세계 최대의 자본 수출국이 되었고 이러한 지위를 1981년까지 유지했다. 이처럼 거대한 미국 경제는 무역뿐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도 전 세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890년대와 1900년대 초 뉴욕과 런던 사이의 금융망을 통해 최초의 국제 자본 시장이 탄생했다. 이금융망은 영국과 여타 외국 회사를 거쳐 미국 자본을 세계와 연결했다. 1897~1914년 미국의 해외 총투자는 5배 증가했으며, 그중 상당 부분은 제3세계와 관련이 있었다. 그 형태는 식민지를 착취하는 유럽 기업과 관련된 투자이기도 했으며, 멕시코ㆍ쿠바ㆍ중앙아메리카에 대한 직접 투자, 또는 소규모이 지만 그 밖의 다른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향한 투자였다. 미국의 제3세계 투자는 상대적 규모 면에서 제일 높았던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더 다양한 국가와 산업, 그리고 상품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이전보다 더욱 확장된 형태를 띠었다.
이러한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경제 제국주의를 추구하기를 망설였다. 미국 국내 시장은 부유하고 사회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이동성이 확보되어 있으며 정치적으로 안정된 반면, 해외 시장(특히 제3
세계)은 이러한 이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냉전 시기 미국 정부는 영향력과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항상 기업이 해외, 특히 제3세계 투자를 확대하도록 촉구했으나 이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튼 냉전 초기에 미국은 점진적으로 세계 경제를 위한 체계적 책임을 졌으며, 이를 위해 세계 경제 구조 속에서 유럽과 제3세계의 위치를 새로이 정의하려고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와 전략은 조화를 이루었다. 제3세계가 시장을 선택해야 하는 부분적 이유는 주변부인 제3세계가 과거 제국의 중심부인 서유럽과 일본을 지탱해야 했기 때문이고, 이를 통해 공산주의를 봉쇄하는 동시에 이들 국가의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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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진입 요구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3세계에 대한 원조는 이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한 방법 이었다. 1950~1960년대 동안 소련의 공세에 맞서는 상황에서도 제3세계 원조의 약 90퍼센트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가 제공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의 원조 중 60~70퍼센트를 미국이 부담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제3세계의 많은 국가가 독립하면서 원조를 어떻게 사용할지를 두고, 원칙과 우선순위 문제가 제3세계 지도자들에게 또 다른 문제로 대두했다.
미국 입장에서 볼 때, 냉전기 전략과 동맹의 쟁점 배후에는 미국의 성공 경험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의 관세와 금수 조치에 대해서는 일말의 모순점도 발견 하지 못한 채, 미국인은 ‘지구적 차원의 발전 교육’을 통해 세계가 스스로 시장을 개방하도록 가르치고, 그 모범은 미국과 미국의 자유 기업이었다. 해외 전시회에서 미국 상품은 미국이 거둔 성공의 징표였다. 당대에 이를 기록한 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전시회를 방문한 이들은 “세탁기, 식기세척기, 진공청소기, 자동차, 냉장고가 제공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무역이 상품을 확산하듯 미국 상품을 따라 미국의 이데올로기도 확산되리라는 것은 미국인 관찰자에게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근대화, 기술 그리고 미국적 지구주의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진행된 민주주의의 확대로 인해 제3세계를 둘러싼 정책 담론은 두 가지 방향으로 분화했다. 대외 정책 담당 엘리트 계층에게 그 답은 냉전을 통해 해외에 대한 관여를 더욱 심화하고, 미국의 자유를 국내뿐 아니라 해외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반면 많은 소수자들이 스스로의 지위와 평등을 미국 내에서 확보하는 데 성공한 이후, 그들은 미국의 권력에 대항해서 똑같은 목적을 위해 싸우고 있는 외부인에게 연민을 느꼈다. 언제나 소수 의견으로 남은 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미국 내 비판 담론은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동시에 제3세계 국가와 대화를 통해 관여를 표방하는, 새로운 관념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미국의 공식 대외 정책과 관련한 목표를 상징하는 건 지구적 차원의 냉전이었다. 이는 20세기 후반 미국이 영위하고 있던 이데올로기와 권력에 부합하는 지구적 시각이었고, 스스로를 대중적이고 현대적이며 국제적이라고 표방하는 공산주의에 맞서 대항하는 것이었다. 18세기 후반부터 미국 대외 정책의 핵심에는 어떠한 조건하에서 이데올로기적 연민이 개입으로 이어져야 하는지를 둘러싼 고민이 놓여 있었다. 냉전은 미국이 다음과 같은 극단적 결론을 내린 계기였다. 즉 어디든지 공산주의가 위협 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면 미국은 개입해야만 했다. 그렇게 냉전은 제3세계로 확산되었다.
정의의 제국 - 소련 이데올로기와 대외 개입
20세기는 여러 국가가 러시아와 미국을 주권 원칙에 기반을 둔 국제적 상호관계에 맞추어 사회화하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몇몇 경우 이런 노력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대개는 실패했다. 사회화가 성공한 경우는 주로 소련이나 미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국제 체제 내의 위기와 관련될 때뿐이었다.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종결은 미국이 다른 국가의 이익을 좀 더 고려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경우 1905년과 1917년 혁명 사이의 기간, 1941년 독일의 침공 이후, 그리고 고르바초프-옐친 시대가 그런 타협의 신호를 주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두 강대국은 점차 발전하고 있는 국제적 상호 작용의 규범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개입하곤 했다.
미국과 러시아(적어도 소련이었던 기간 동안)가 20세기에 취한 정책으로 미루어보면 국가 주권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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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미국 및 소련이 추구한 지구적 이데올로기는 조화될 수 없었다고 보는 편이 설득력 있다.
이 장은 러시아라는 국가의 특수하고 독특한 형태가 소련의 대외정책에서 나타난 대부분의 개입주의 정책의 원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러시아 두 경우 모두, 개입을 정당화한 이데올로기는 이전 세기에 형성된 관심사로부터 출발해 전혀 다른 제도 아래에서 발전했다. 러시아 공산주의자가 볼 때소련의 건국은 인구의 절반 이하만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다문화적 공간을 상속했다는 의미뿐 아니라, 차르가 비(非)러시아인 신민에게 두 세대에 걸친 러시아화와 근대화 정책을 시도했던 국가를 공산주의 자들이 비로소 접수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19C 후반과 20C 초반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러시아인은 그들이 아시아적 야만을 일소하고 동방의 민족을 문명화할 특별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는 그 배경과 기획에서 많은 점을 공유했다. 그러나 이 둘은 근대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서로 다른 정의를 내세웠다. 대부분의 미국인이 시장을 찬미했다면, 소련 엘리 트는 시장을 부정했다. 심지어 유럽을 팽창할 수 있도록 한 기제가 시장이라고 인식하면서도, 레닌 추종자들은 시장이 평등과 정의에 호의적인 계급 기반의 집합 행동으로 대체되는 과정 중에 있다고 믿었다. 아무튼 근대성은 두 단계로 왔으며, 이는 각기 다른 혁명의 반영이었다. 하나는 자본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형식의 혁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주화와 혜택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개선을 반영한 공산주의 형식의 혁명이었다. 공산주의는 근대성의 한층 높은 단계였으며, 러시아 노동자는 공산주의로 향하는 길을 이끌어갈 임무를 부여받았다.
개입 정의하기 - 이란, 중국, 한반도 소련의 전후 세계 계획은 1942년 독일의 공세가 둔화하자마자 개시되었는데, 스탈린은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결정적으로, 이는 소련 서쪽 국경의 인근 지역을 의미했다. 그리고 가능하 다면 소련은 중유럽과 독일에서도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스탈린은 한편으로는 영국ㆍ미국과의 동맹에서 마찰을 최소화해 영국ㆍ미국이 소련을 독일이라는 늑대에게 내던지려는 시도를 막아야만 했다.
다른 한편, 스탈린은 동쪽에서 일본이 소련을 공격할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했다.
한편 1943년 소련은 코민테른을 공식적으로 해체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영국과 미국에 보여주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하부 조직은 살아남아 훗날 소련공산당 국제부의 중추로서 제3세계 정책을 전개하는 데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스탈린의 야욕은 동부 전선에서 소련이 승리를 거두면서 더욱 커졌다. 이제 스탈린은 소련의 서쪽 국경 지대에 외교 정책을 소련에 의존하는 국가들로 구성된 안보 지대를 구상했다. 또 스탈린은 유럽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후 독일이 사회주의를 선택하고 소련과 동맹을 맺으리라 기대했다. 또 소련은 약화한 일본을 공격해 전후 중국과 식민지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제 소련은 다른 식민지에서도 전후 진행될 재분할에서 권리를 주장할 터였다. 스탈린의 이와 같은 낙관적 시각은 주요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과 미국이 전후 전리품을 두고 지속적으로 경쟁하리라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런데 1944~1947년 스탈린은 점차 전후 세계 재분할을 두고 제국주의 국가 간 경쟁이 일어나리라는 예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강대국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았으며, 영국을 포함한 약한 유럽 국가들은 미국에 의존하면서 안보와 세계 자본주의 자체의 이익 보호를 꾀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보기에 미국 지배하의 세계는 소련이 제국주의 강대국끼리 싸움을 붙일 수 있는 체제보다 훨씬 더 위험했고, 자본 주의 패권이 등장해 사회주의 국가를 목 졸라 죽이려는 합동 전략이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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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련의 군사 지배하에 있는 동유럽 국가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것은 1945~1948년의 일이다.
이는 상당 부분 전후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를 두고 새롭고 훨씬 비관적인 전망에 기초한 반응이었다.
소련의 동유럽 지배는 제3세계를 바라보는 소련의 사고방식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소련은 공산 당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장악하는 전략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고, 소련군은 소련이 점령한 독일 일부 지역에서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데 일조했다. 스탈린은 동유럽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전략은 오직 소련과 붉은 군대가 지지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한편 현지 공산주의자들은 그들과 소련 자문단이 아는 유일한 방법(공포 정치와 모든 독자적인 반대 세력의 말살)을 통해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유럽에서 소련의 대외 정책이 뒤죽박죽되면서 이는 제3세계에서 소련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터키 같은 나라에서 소련의 목표는 안보적 관심사, 무엇보 다도 흑해 입구의 통제권에 집중되었다. 1945년 소련은 중동 지역의 호르무즈해협에 해군 기지를 설치 하고 터키 동부 국경을 ‘재조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국 영토를 사수하겠다는 터키의 결단에 직면하자, 스탈린은 이미 1946년 가을 터키에 지속적 압력을 가할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전후 제3 세계에 소련의 영향력을 투사하겠다는 스탈린의 욕망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추축국의 아시아ㆍ 아프리카 식민지로까지 확장되었다. 소련 지도자들은 이탈리아의 옛 식민지이던 리비아의 서쪽 절반인 트리폴리타니아가 소련의 확장에 특히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6년 말 스탈린은 미국의 강경한 정책으로 인해 북아프리카에서 소련의 직접적 역할 수행이 어려워졌다고 결론지었다.
한편 1941년 소련은 서방 동맹국과의 합의 아래 독일의 지배로부터 이란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란 북부를 점령했다. 이때 영국은 이란 남부 지역을 점령했다. 외국의 점령이라는 충격적 경험은 이란 내에서 새로운 정치 집단과 이념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들은 전통적인 권위주의 왕정에 저항했을뿐 아니라, 황제 샤의 권력이 놓여 있는 사회ㆍ종교적 기반까지 공격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는 투데당은 이 나라의 가장 크고 가장 잘 조직된 정치 집단이었으며, 점차 커져가는 공업 및 농업 노조 운동의 대변인이었다. 이란 내 소수 민족(아제르바이잔인, 쿠르드인, 아랍인) 지도자들은 자치 및 완전 독립을 향한 운동을 시작했고 이란의 종교적 중심 도시 쿰에서는 젊은 성직자 집단이 외세와 외세의 대리자인 샤에 맞선 저항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도 있었다.
투데당은 소련에 보내는 전언을 통해 이란에서 즉각적인 혁명적 봉기가 일어날 잠재력이 있다고 강조 했으나, 스탈린은 이와 같은 주장에 반대했다. 이란에서 스탈린의 관심은 방어적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란 북부 유전에 제국주의자가 접근하는 일을 막고, 이란의 좌익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와의 조약을 유지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1944년 이란 북부의 21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땅을 소련-이란 유전 탐사를 위해 떼어달라는 소련의 요구에 반대하며 이란 내 모든 민족주의자들이 결집했다. 스탈린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북부의 민족 분리주의자를 활용하기로 했다.
수령은 아제르바이잔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미르 바기로프 서기장의 요청을 수락 하며 그에게 “남부 아제르바이잔(이란령 아제르바이잔)과 북부 이란의 다른 주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조직”하고 “남부 아제르바이잔 투데당 지부를 개혁해 ‘아제르바이잔민주당’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분리주의 운동의 지지자를 끌어들이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의 의도는 소련이 이란 분할을 노리고 있다는 의사를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이란 부르주아 정권이 석유 및 소련의 영향력을 다루는 거래에 나서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와 같은 조치에 이란 공산주의자들은 당연히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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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탈린과 바기로프는 포기하지 않았다. 1945~1946년 소련은 타브리즈를 중심으로 이란 내 아제르바이잔 자치 정권을 세우고 지도하는 일을 계속했다. 1946년 초 이란 엘리트는 이란의 분단뿐만 아니라 소련과의 군사적 충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란 의회는 북부 이란 출신의 지주이자 정치적 급진주의에 가담한 경력이 있는 73세의 아흐마드 카밤을 총리로 선출했는데, 카밤 총리는 여러 번 충돌한 적이 있던 영국의 미움을 받았으며 미국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한편 1946년 2~3월 진행된 소련과 이란의 협상은 제3세계를 향한 스탈린식 접근법의 한계를 보여준다.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카밤이 석유 협상에서 양보하고 어떤 형식으로든 아제르바이잔의 자치에 동의하기를 바랐다. 2가지 안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수용한다면, 소련은 북부 이란의 통제권을 장악할 수있었다. 그러면 몰로토프는 아제르바이잔 문제를 다루는 데 ‘유연한’ 선택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카밤은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냉전적 논리에 동의하지 않았다. 카밤은 소련이 철군을 약속하는 대가로 이란 의회에 아제르바이잔의 제한적 자치와 소련과의 정치ㆍ경제적 관계를 둘러싼 포괄적 대화를 제안할 수 있다고 제의했다. 그러자 몰로토프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아제르바이잔의 제한적 자치 계획(이는 소련이 피셰바리가 이끄는 아제르바이잔 정권의 전반적 운명에 관심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 제안이었다)과 소련이 51퍼센트의 지분을 지닌 석유 탐사 및 생산 합작회사(이 회사는 이란-소련의 합작 회사였다)에 북부 이란의 석유를 넘기는 협상의 즉각적 시행이 그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소련의 요구와 협상 전략에 직면한 카밤이 교활한 외교를 통해 미국의 지원을 얻고자 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붉은 군대를 북부 이란에서 철수시키라는 미국의 압력이 거세지자 카밤 총리는 소련의 철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석유 양도 관련 조약 체결을 스탈린에게 약속했다. (카밤은 1946년 5월 중순까지 소련군 철수 완료, 양국 합작 석유 회사 설립, 이란 국내 문제로서 북부 자치 정부의 위상을 확인하는 교섭을 소련과 타결했다.) 그는 1946년 5월 말 마지막 소련군이 이란에서 철수한 다음, 3명의 투데당 인사를 신정부 각료로 입각시켰다. 서방과 맞서고 있는 카밤과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서방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 소련과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다고 굳게 믿고 있던 스탈린은 그제야 아제 르바이잔 분리주의 정권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스탈린의 오랜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은 수령이 소련의 안보를 위해 현지 공산주의자의 관점을 꺾지 못한 유일한 제3세계 이웃 국가였다. 이란 공산주의자가 패배한 데 반해, 중국 공산주의 자가 성공한 이유는 마오쩌둥의 결단력에 있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당이 미래에 위험할 수 있다는걸 감수하면서까지 소련의 지시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중국이 스탈린의 전략적 천재성과 소련의 경험을 구체적 사안에서 모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했다. 한편 제3세계를 향한 스탈린의 마지막 모험주의적 정책인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말년에 얼마나 이론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고수 했는지 잘 보여준다. 스탈린은 한반도 북반부만의 사회주의는 장기적으로 생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일성 지도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이 소련의 이웃 국가이자 소련의 원조를 받고 있었지만, 스탈린은 1950년 초 “남한이 북한을 향해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공격을 막는 일이 중요합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스탈린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한 정권을 공격하겠다는 김일성의 제안을 허락하며 “동방 사회주의 진영의 주목할 만한 강화, 즉 중국 혁명의 승리, 소련과 중국 간 동맹 조약 체결, 그리고 소련의 핵폭탄 보유”뿐 아니라 “반동 진영의 명백한 취약성, 즉 중국 문제에 개입한 미국의 수치스러운 패배, 동남아시아에서 직면한 서방 진영의 문제, 그리고 남한 괴뢰 정권과 그 주인인 미국이 남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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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ㆍ경제ㆍ정치적 상황을 호전시킬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지적했다. 스탈린이 보기에 김일성의 전쟁을 간접적으로 지원한다면 이는 “유럽, 발칸반도, 중동 특히 그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 결정에서 보여준 미국의 부정직하고, 배반적이고, 오만한 행동”을 향한 앙갚음이 될 수 있었다.
소련의 대외 정책을 맡고 있던 많은 공산주의자가 깨달았듯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제3세계에서 스스로 사회주의로 이끌어갈 사회적 과정을 향한 희망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걸 보여주었다. 심지어 북한 같은 가장 좋은 지리ㆍ정치적 상황에서조차도 제3세계 공산주의의 주요한 목표는 지구적 냉전에서 소련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종속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성공적인 사회적 전환을 이끌어낼 수 있는 확실한 환경은 제3세계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일국사회주의의 길을 오르기 시작한 스탈 린이 고의적으로 다른 이들이 따라올 수 있는 사다리를 걷어찬 것과 같았다.
소련의 제3세계 재발견(1955~1960) 1960년대 초의 소련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제3세계에서의 영향력을 위한 경쟁은 이미 사회주의의 생존에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미국에서처럼 소련 엘리트는 그들의 사명을 주어진 목표를 향한 세계사적 진보의 일부라고 여겼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바라보는 소련 엘리트의 시각은 마르크스-레닌 주의 정치 이론뿐 아니라, 러시아예외주의와 1917년 이래 소련 지도부의 경험이 혼합되어 있었다. 소련 엘리트는 좌절과 후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가 한 세대 내에 주요한 국제 체제로서 자본주의를 대체하리라 굳게 믿었다. 스탈린의 계승자들은 이러한 이행이 지구적 전쟁 없이도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국주의자들이 그들 경계 밖에 있는 제3세계 사회 혁명을 분쇄하려는 개입이 더 이상 성공할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이제 소련의 역할은 혁명을 추구하는 세력에 안보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인류의 진보를 돕는 일이었다.
쿠바와 베트남의 도전
1960~1970년대 냉전적 대립의 원동력은 넓게 보면 쿠바와 베트남이라는 신생 혁명 국가의 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쿠바와 베트남은 그들의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미국에 도전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설정해놓은 과정(이는 사회주의 발전 단계 및 공산 진영의 대외 개입과 관련이 있었다)에도 도전했다.
1960년대까지 지속해온 냉전에 도전함으로써 쿠바와 베트남은 좌익 국가와 제3세계 운동(그리고 유럽 국가와 미국의 일부 조직)에 영감을 제공했다. 체 게바라와 호치민의 말을 혁명 구호로 외쳤던 제3세계 운동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실은 쿠바와 베트남의 혁명이 미국의 군사적 지배나 소련의 정치적 교리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혁명의 선례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1960년대 초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국-소련 분쟁(이하 ‘중소 분쟁’)이 없었다면, 냉전을 향한 쿠바와 베트남의 도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스로를 ‘제3세계의 우두머리’라고 부르길 좋아했던 마오쩌둥은 소련의 권위를 무시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논했다. 이는 세계 각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더 많은 재량권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오쩌둥이 좌파의 관점에서 소련을 비판한 사례는 제3세계 혁명가들에게 특히 더 유용했다. 중국의 행보는 제3세계 혁명가들 역시 중국을 따라 사회주의 건설에 속도를 높이는 그들 나름의 길을 찾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중소 분쟁과 국경을 넘어선 쿠바와 베트남의 적극적 행동은 소련에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이는 제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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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의 탈식민지화라는 조건 속에서, 유럽 지역 바깥에서 사회주의가 진전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소련의 제3세계 정책이 일종의 압력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흐루쇼프뿐 아니라 그를 승계한 1964년 10월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알렉세이 코시긴,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3두 체제를 포함해 1960년대 소련 지도부가 제3세계를 바라보는 사고방식은 크게 세 가지였다.
먼저 소련 지도부는 중소 분쟁(그리고 1966년 이후에는 소련 안보를 해치는 중국의 위협)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편 소련 지도부는 제3세계 혁명이 지닌 잠재력을 서서히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료에서 드러난 소련 지도부의 입장은 미국과 대결하고자 하는 쿠바와 베트남의 의지에 짜증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이 모든 요소가 결합해 오랫동안 소련의 제3세계 정책은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1958~1962년 동안 소련이 제3세계에 자기도취적으로 개입했다면, 이후 1960년대 소련의 제3세계 정책은 의심과 실망으로 가득했다. 소련이 적극적인 신외교 정책을 추진한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반면 미국의 제3세계 정책은 소련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 일관성을 보여주었다.
비록 미국의 제3세계 정책이 베트남 전쟁의 그늘 속에서 진행되긴 했지만 말이다.
1964년부터 미국이 베트남 내전에 점점 더 깊이 개입하면서, 제3세계의 사태 전개가 미국에 즉각적 위협을 준다는 히스테리적 반응(이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후반기와 케네디 행정부 내내 존재했다)은 역설적으로 점차 완화되었다. 1960년대 중반 제3세계에서 발발한 정치적 사건이 소련과의 동맹이라는 위험한 관계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완화된 입장이 가능했다. 인도네시아, 알제리, 가나(이들 국가는 모두 제3세계를 위한 전투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역이었다)는 군사 쿠데타를 통해 소련의 영향권을 벗어나 미국과의 연대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존슨 행정부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실은 이와 같은제3세계에서의 ‘승리’가 미국의 대규모 공개 개입이나 비밀 작전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공의 밑바탕에는 CIA가 이끈 소규모 작전과 미국의 오랜 인내가 있었다.
물론 베트남처럼 소련이나 중국이 작전 능력을 지니고 동맹국을 지원하기 위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지역은 논외였지만 말이다. 1960년대의 성공은 그러나 1960년대 말까지 그대로 유지되지 않았다. 존슨 행정부의 일부 정책 보좌진은 반공 쿠데타(베트남에서는 매우 파괴적인 효과를 낳았다)를 통해 성취감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지만, 도처에서 진행되는 불온한 움직임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로버트 S.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제방을 막아야 했지만 우리가 지니고 있는 수단은 너무 적었습니다.” 미국은 이들 지역에서 진전을 이루어내기보다는 현상 유지를 원했다.
이와 같은 감각은 당연히 미국이 베트남에서 겪은 악몽에서 비롯되었다. 존슨 행정부 임기 마지막에 오직 맥나마라 같은 인물만이 깨어나고 있었다. 제3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베트남’에 대한 공포는 미국의 자기 충족적 예언이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제3세계의 여러 정치 활동가 집단과 멀어지고 있었다. 또 베트남을 향한 미국의 집착으로 인해 존슨 행정부의 제3세계 빈곤 완화 정책과 무역 조건 개선 정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제3세계에서도 존슨 행정 부의 정책은 존슨이 하고자 했던 사회 개혁보다는 차라리 전쟁과 억압의 동의어에 가까웠다.
고르바초프의 철수 결정과 냉전 종식
아프가니스탄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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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말, 고르바초프와 그의 주요 보좌진 모두에게 공세적인 아프가니스탄 전략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무자헤딘에 무기를 거의 무제한 공급하겠다는 미국의 의지, 게릴라 조직의 개선, 그리고 파키스탄과 아랍인 중심의 외국 출신 전투원들이 아프가니스탄 저항 운동에 합류하기 시작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전 전쟁에서 좀 더 우위를 차지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소련의 전쟁 비용은 높아지고 말았다. 1987년 2월 고르바초프는 거의 절망한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소련과 소련의 국제적 위상에 미친 영향에 사로잡혀 있었다. 1986년 말과 1987년 초에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 철수의 ‘대안’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직접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20만 명의 군대를 추가로 아프가니스 탄에 파견한다면 모든 정책(즉 페레스트로이카)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다시 곤경에 처한다면 우리는 큰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바로 그게 서방이 원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우리가 곤경에 빠져 추락하는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우리의 외교 정책이 아니라 사회주 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입니다.” 이렇게 고르바초프가 마음을 굳히고 있는 동안, 궁극적으로 철수를 가능케 한 몇 가지 조건이 무르익고 있었다. 제27차 당대회 이후 소련공산당과 소련 내에서 고르바초 프의 입지는 점차 강화되었다. 당대회에서는 개혁의 일반적 개념과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구조 조정안이 승인되었다. 서방과의 관계도 서유럽 지도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점차 탄탄해졌다.
1987년 중반 고르바초프가 좀 더 용이하게 소련군 철수를 결정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서방 세계가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곤경에 처해 있었다는 데 있다. 1987년 니카라과와 레이건 행정부의 대립은 서유럽에서 인기 있은 적이 없고, 미국조차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1986년 11월 레이건은 미국 정부가 (레바논의 친이란 단체에 붙들려 있는 미국 인질을 석방하기 위해)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팔아 그 매각 자금을 (의회가 엄격하게 제한한)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는지 밝혀야만 했다. 소련은 1987년 5월부터 8월까지 이어진 이 의혹에 관한 텔레 비전 청문회를 면밀히 검토했다. 그리고 많은 정책 결정자들은 앞으로 미국이 직접 개입을 자제할 것이며,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그러하리라고 확신했다. 마지막으로, 소련은 비합리적이라고 판단하던 바브 라크 카르말을 아프가니스탄 비밀경찰의 수장이던 모하마드 나지불라(당시 38세)로 교체하는 데 성공 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단계적 철수를 향한 길이 열렸음을 의미했다.
1986년 11월 13일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는 처음으로 동료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이 과정을 끝내야 한다”고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1985년 말 정치국에서의 토론이 ‘군사ㆍ정치적 방법의 혼합’에 중점을 두었던 반면, 1986년 11월에 열린 중요한 회의에서 고르바초프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 소련군을 1988년 말까지 전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르바초프의 동료들은 이 관점에 대부분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1987년 초 소련의 철수 전략이 드디어 개시되었다. 이 전략은 세바르드나제가 위원장을 맡은 정치국급의 특별위원회에서 수립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철수 논의 전반을 책임졌다. 하지만 주된 실무는 KGB가 맡았다. 1989년 2월 15일 추운 겨울 아침, 소련군의 마지막 사령관 보리스 그로모프 중장은 아무다리야강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아프가니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귀환했다.
제3세계의 종식 1980년대 말에 이르면 제3세계는 더 이상 의미 있는 정치ㆍ경제적 개념이 아니었다. 1970년대부터 아시아ㆍ라틴아메리카ㆍ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는 서로 다른-대부분 상반되는-방향에서 여러 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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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몇몇 동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는 제조품을 앞세운 세계 시장 참여를 통해 급격한 자본주의적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반면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엄청난 부채와 사회적 불평등이 증가하면서 경제 성장이 정체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의 경제는 재난 상태에 가까웠으며, 국민소득이 급격하게 하락해 대부분의 사람을 빈곤 상태로 내몰았다. 정치적으로 라틴아메리카는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는 병행한다는 미국식 믿음에 따라 군부 독재를 청산하고 민주화의 길에 들어섰다. 몇몇 동아시아의 비공산주의 국가도 느리지만 이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프리카, 발칸반도, 남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종족 정체성이 정치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고 분쟁의 중심에 섰다. 제3세계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대서양부터 아프리카, 태평양의 아시아 지역까지 펼쳐진 무슬림 세계에서는 정치적 이슬람이 대두해 때로는 세속 정치를 대체하기도 했다. 냉전 종식 무렵 제3세계는 분열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상상했든) 3개의 세계 대신 1990년대에는 ‘지구화’라는 개념이, 아니 더 정확하게는 ‘미국화’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특히 금융 시장을 비롯해 전 세계적 시장은 홀로 남은 초강대국 미국을 중심으로 확장하는 자본주의 세계와 밀착했다. 소비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새롭게 대두하는 지구적 중산층의 핵심 가치로 여겨졌다. 서방에서 교육받은 개혁가들은 적어도 얼마 동안은 자유로운 시장자본 주의가 지구촌의 유일한 게임의 법칙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새로운 지구적 도시 계층에게 환영받은 전자 네트워크의 변두리이자 지구촌 바깥 ‘마을’에는 냉전에 희생된 제3세계인이 존재했다. 그중 대다수는 그들이 어떻게 자기를 규정하고 도시 안에 살든 바깥에 살든, 미국화에 분노하거나 저항하는 경향이 있는 빈곤한 마을이나 빈민굴에 살든 농민이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분열은 새로운 갈등의 씨를 뿌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나지불라 정권이 1992년 최종적으로 붕괴했을 때, 급진 이슬람주의 정당인 이슬람당-헤즈비이슬라미-이 정권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이슬람당은 여러 부족과 정치ㆍ사회 문제에서 덜 극단적이던 이슬람주의 집단의 반발을 샀다. 그리고 계속된 내전을 거치면서 카불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아프가니스탄은 1995~1996 년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은 탈레반 운동이 등장하기 전까지 부족별로 쪼개지기 시작 했다. 참고로 탈레반의 성공 비결은 전쟁과 불안정 속에서 많은 사람이 지극히 갈구하던 평화와 안정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또 탈레반 지도부가 급진 이슬람주의자보다는 좀 더 전통적인 인사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2001년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90퍼센트를 통제했다.
한편 냉전이 파괴적 결과를 낳은 인도차이나에서는 냉전 종식으로 나아가는 협정이 맺어졌다. 포괄적인 협정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1986년에 이미 베트남은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을 철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과 미국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크메르 루즈와 그 동맹 세력을 지원하자 베트남군의 철수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베트남은 1980년대 말까지 모든 베트남 병력을 캄보디아에서 철군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중국과의 협상에 매우 적극적이고,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의 개방을 통한 경제 성장을 꾀하던 베트남의 입장이 합치되어 베트남군의 철군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1989년 5월 고르바초프가 중국을 방문(소련공산당 최고 지도자로서는 30년 만의 일이었다)하기 직전, 베트남은 그해 9월 말까지 모든 병력을 철군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은 이에 대응해 처음으로 비(非) 크메르 루즈 세력에 대한 지원을 늘려 베트남과 동맹을 맺은 캄보디아 정부(캄푸치아인민공화국)에 맞서 싸우도록 했다. 그리고 1991년 말에 이르면 동남아시아국가연합(베트남과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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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자국의 침체된 경제를 회복시켜줄 거라고 기대했다)이 국제연합 감시 아래 협상 안을 선포했다. 그러나 1998년 폴 포트가 사망할 때까지 크메르 루즈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한편 아프리카에서는 냉전 종식 국면의 변화가 더욱더 거셌다. 냉전 이후 가장 현격한 변화를 보여준건 남아공의 아프리카민족회의였다. 1980년대 후반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국제적 제재, 날이 갈수록 커지는 미국의 무개입, 앙골라에서의 군사적 패배로 후퇴하고 있었다. 남아공의 유명한 백인 정치가들은 이제 아프리카민족회의와 비공식적인 대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남아공공산당 안팎에 있던 아프리카민족회의의 젊은 세대는 국유화와 사회주의로의 급격한 전환이 그들의 목표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혔다. 소련에서 훈련을 받기도 했던 타보 음베키는 더 이상 마르크스와 레닌을 인용하지 않았으며, 아프리카민족회의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사업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거라고 기업인에게 보증했다. 이제 음베키는 더 많은 흑인 자본주의자가 시장 경제에서 백인 자본주의자와 경쟁하길 바란다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 그리고 P. W. 보타의 후계자 데클레르크가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고 (1994년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승리를 거둔) 자유선거를 허용하자 훗날 넬슨 만델라의 후계자가 된 음베키는 안정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남아공을 보증하는 인물이 되었다.
한편 니카라과 정부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조직한 콘타도라 평화 협상에서 제기된 형식을 따라 반대파와의 협상에 돌입했고, 1989년 2월 협상을 통한 합의와 골격이 잡혔다. 산디니스타는 콘트라 반군이 군사 활동을 중단하는 데 동의한다면, 그로부터 1년 후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치르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1990년 2월 산디니스트가 선거에서 패배하자, 중미의 다른 좌익 운동도 무장 투쟁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한편 1991년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은 여전히 엘살바도르를 우익과 군부가 통제했지만 국제연합이 보증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 평화 협정은 엘살바도르에서 발생한 인권 침해를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을 합법 정당으로 인정해 엘살바도 르의 가난한 사람들과 농민이 정치 체제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했다. 게릴라에게 친화적인 토지 방위위원회 회원이던 한 여성은 1992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자문했다.
‘과연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요? 그건 토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걸 확신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승리했습니다. 더 높은 소득요?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노예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승리한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냉전의 종식과 제3세계의 종식을 요약해준다. 이 책에서 다룬 많은 정치ㆍ경제적 충돌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사람은 식민주의와 냉전이 그들로부터 앗아간 인간적 존엄성을 일부라도 되찾기 위한 행동에 나서고 있다. 제3세계라는 개념(이는 서로 다른 입장과 체계, 신념이라는 다중적 개념으로 변모해가고 있다)은 성취한 것보다는 그것이 어떤 비용을 초래했는지를 더 잘 보여준다. 과거 교리 중심적이고 통합되어 있던 제3세계는 이제 좀더 관용적이고 다극적인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다. 과거의 확실함이 새로운 확실함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민중이 노예가 아니라는 점은 모두에게 똑같이 이득을 줄 게 분명하다.
결론 - 혁명, 개입 그리고 초강대국의 붕괴
많은 사람은 냉전을 두 초강대국이 군사력과 전략적 통제를 둘러싸고 유럽 지역에서 벌인 경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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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 이 책은 이런 기존의 시각과 달리 냉전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은 군사나 전략, 유럽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제3세계의 정치ㆍ사회적 발전과 관련이 있었다고 본다. 탈식민지화와 제3세계의 급진화는 냉전의 직접적 산물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 냉전의 영향을 받았다. 이 두 가지 과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많은 부분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냉전의 영향 중 일부는 단순한 우연이었지만, 그중 많은 부분은 초강대국의 직접 개입을 통해 형성되었다. 냉전기 혁명과 개입은 오늘날의 파국적 결과로 이어진 범유럽 국가와 세계 다른 지역과의 관계 유형을 형성했다.
역사적으로, 특히 남반구의 시각에서 보면 냉전은 방법을 조금 달리한 식민주의의 연장이었다. 충돌의 과정에서 보면 냉전은 주로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통제와 지배에 초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초강대국과 현지 동맹국이 취한 방법은 유럽 식민주의의 최종 국면에서 나타난 양상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거대한 사회ㆍ경제 사업으로 지지자에게는 근대성을 약속하고, 반대자나 그 진보의 길에 방해가 되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선사하는 방식 말이다.
냉전사의 비극은 제3세계와 초강대국이 서로 얽혔을 때, 본질적으로 반식민주의라는 출발점을 공유했던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역사적 기획이 지배의 형태면에서 옛 식민주의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해졌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는 충돌의 강도, 이해관계의 대립, 상대가 이겼을 경우 예상되는 결과를 둘러싼 묵시록에 가까운 공포가 영향을 주었다. 비록 냉전기 내내 미국과 소련이 식민주의라는 형식에 반대해 왔지만, 이 두 국가가 자국의 근대성을 제3세계에 부과하는 방식은 이전의 유럽 제국, 특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의 영국과 프랑스 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의 방법은 제3세계 사회의 문화ㆍ인구 그리고 생태의 변화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고, 저항하는 사람에게는 가혹한 군사적 조치가 뒤따랐다. 사회 정의와 개인의 자유라는 창설 이념은 자기 지시적 이데올로기로 위축되었고, 그 출발점은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이 데이비드 하비의 개념을 따라 명명했듯 “고도 근대성”으로 나타 났다.
우리의 미래는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폭력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의 행동을 어떻게 성찰하는 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냉전의 큰 교훈 중 하나는 이렇다. 일방적 군사 개입은 이점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국경의 개방, 문화적 상호 작용과 공정한 경제 교환이 모두에게 이점을 준다는 사실이다. 이는 평화주의자의 주장이 아니다. 나는 공격받았을 때의 자위권을 강력하게 옹호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더욱더 다양해지고 있으며, 소통이 우리를 더 가까이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충돌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행동을 국제적으로 조직하고, 필요하다면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다자적 차원의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점이다. 냉전은 지구적 개입을 주도했던 체제가 정확히 이 반대 방향으로 행동한 비극적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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