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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리더라면 정조처럼

by Casey,Riley 2020.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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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라면 정조처럼 

 
▣ Short Summary 
 
오늘날 우리는 융복합 시대에 살고 있다. 다양한 문화와 사상이 소통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 시대는 소통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기도 하다. 계층 간의 불화, 지역 간의 불화, 정치의 불화, 나아가 남북 간의 불화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융복합의 시대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불통의 시대라고 한다. 우리는 소통이 원활한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소통하여 근원적 불신을 해소하고 서로를 돕고 살아갈 수 있는 시대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내야 할 진정한 과제다. 그 목표를 위해 한 역사적 인물의 소통 방법과 리더십을 배우고 익힌다면 이 어려운 시기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데, 그에 가장 들어맞는 모델은 바로 조선 후기의 개혁군주 정조이다. 
 
정조는 소통을 중요시했고, 군신공치(君臣共治)를 내세우며 신하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국왕으로서 사적인 이익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공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며, 누구보다 따스하면서도 친인척과 측근들의 잘못은 추상같이 다스리는 위엄도 보여주었다. 특히 그는 군주로서 엄청난 양의 정무를 소화하면서도 학문에 소홀하지 않았고, 신체 단련도 충실히 했다. 아울러 길을 나서서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외세의 침입을 막고 강력한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 병법과 무예를 익혔다. 이러한 솔선수범과 소통의 리더십은 관료와 양반사대부, 그리고 백성들을 감동시켜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경문화의 시대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정조는 늘 우리에게 존경의 대상이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이들의 모델이 된다. 
 
- 2 - 리더라면 정조처럼 
 
▣ 차례 
 
1장 공부하는 군주 01 엄청난 독서를 통해 지식을 넓히다 / 02 끊임없이 공부하여 군사(君師)의 지위를 얻다 / 03 무예 수련으로 신체를 단련하다 / 04 검소함을 실천하다 
 
2장 시대의 변화를 읽다 05 국가 개혁의 이념을 명확히 밝히다 / 06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탕평의 시대를 열다 / 07〈자휼전 칙〉제정으로 사회복지를 강화하다 / 08 금난전권을 혁파하여 경제를 개혁하다 / 09 공(公)과 사(私)를철저히 구분하다 / 10 민주주의 제도의 기반을 마련하다 / 11 먼 미래를 내다보고 식목정책을 추진하다 / 12 백성을 위해 새로운 법전을 만들다 
 
3장 인재등용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다 13 신분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다 / 14 정치적 조율을 위한 핵심 인물을 발탁하다 / 15 개혁을 책임질 핵심인재를 중용하다 / 16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를 양성하다 / 17 규장각 건립과 초계문신 임명으로 인재 육성의 기반을 마련하다 / 18 시골 유생의 의견도 깊이 새겨듣다 / 19 지역차별을 철폐 하여 인재를 키우다 
 
4장 강건한 군주 20 끊임없이 함양하고 성찰하여 분노를 통제하다 / 21 친인척을 멀리 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다 / 22 9가지 좌우명으로 자신의 뜻을 명확히 밝히다 / 23 호방함과 유머를 보여주다 / 24 정통성을 확보 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다 / 25 개혁저항세력을 과감히 척결하다 / 26 군사훈련을 진두지휘하다 / 27 국왕의 행차를 백성과 함께하다 / 28 천재지변에 적극 대응하다 / 29 강고한 기득권 세력에 강력하게 맞서다 
 
5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다 30 참된 효를 실천하다 / 31 자신을 따른 이들을 끝까지 보호하다 / 32 사랑하는 여인에게 최선을 다하다 / 33 측근의 실수를 단호하게 처리하다 / 34 역대 국왕의 계승자로서 위상을 만들다 / 35 진정한 소통을 위해 비밀편지를 주고받다 
 
6장 포용의 정치를 추구하다 36 창덕궁 내원에서 군신동행을 열다 / 37 혁신도시 건설로 경제발전 기반을 마련하다 / 38 북벌론을 통해 자주의식을 고양시키다 / 39 백성들을 존중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다 / 40 공자를 내세워 학문의 정통성을 드러내다 / 41 전문 기술자들을 존중하다 / 42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반 잔 술도 입에 대지 않다 
 
7장 조선의 진경문화시대를 열다 43 활자 주초 활성화로 문예를 부흥시키다 / 44 창조적 사고를 지니고 첨단 기계를 사용하다 / 45 조선의 음악으로 혜경궁의 잔치를 열다 / 46 훈민정음을 활성화하다 / 47 무예를 발전시켜 국방력을 강화하다 / 48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다 / 49 진경문화로 새로운 문화시대를 열다 
 
- 3 - 리더라면 정조처럼 
 
리더라면 정조처럼 


 
공부하는 군주 
 
엄청난 독서를 통해 지식을 넓히다 정조는 천성적으로 책을 통해 지식 얻기를 좋아한 것도 있지만, 스스로 노력도 엄청나게 했다. 신하들은 정조가 건강을 해칠까 염려하여 더 이상 책을 보지 말라고 건의하자고 했다. 그러나 정조는 환관이나 궁녀들과 노닥거리기보다는 사대부들과 더불어 경전을 논의하고 함께 책읽기를 즐겼고, 책을 읽다 보면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말을 발견하곤 했는데, 이때마다 피곤함을 잊고 다시 책을 보았다. 
 
그렇다면 정조의 독서법은 어떠한가?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반드시 책을 두 번씩 보았다. 이는 정조와 혜경궁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정조는 일단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한 번 익히고, 두 번째로 다시 정독을 해서 그 책이 갖고 있는 내용을 깊이 파악하는 방법을 취했다. 정조는 독서를 함에 있어 글 뜻을 깊이 음미하려면 참을성 있게 독서를 해야 하는데, 이를 잘 기억하려면 반드시 기록해 놓아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대목에 감동받았는지, 혹은 깊이 생각할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을 했는데, 그 기록들의 상당수가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정조는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밀하고 치밀하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신기한 것을 보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평상적인 것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정밀하고 치밀하게 읽다 보면 절로 환히 깨닫는 곳이 있고, 평상적인 내용 중에 자연히 오묘한 부분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정조는 당대의 사대부들이 대부분 많이 보려고만 들고 치밀하게 읽는 데는 힘쓰지 않으며, 신기한 것만 좋아하고 평상적인 것은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도(道)를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많은 책보다도 한 권을 깊이 있게 읽어 그 안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세상의 진리를 얻는 것이 중요하 다고 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조는 책을 읽을 때는 먼저 대요(大要)를 평가하라고 했다. 대요를 파악하면 만 가지 현상이 하나의 이치로 꿰어져서 반만 노력하고도 효과를 배로 거둘 수 있지만, 대요를 파악하지 못하면 모든 사물이 서로 연관되지 않아서 종신토록 힘써 외우고 읽어도 이루는 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독서에 대한 이치를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책을 읽는 시대가 아니라 유튜브를 통해 지식을 얻는 시대로 변했다. 이것이 시대의 대세이니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유튜브를 통해 영상으로 만나는 지식과 깊은 밤 홀로 앉아 종이책을 읽으며 깨닫는 지식은 비교할 수 없다. 세상을 이끌어나가고 싶은 리더들은 반드시 정조처럼 역사공부를 기본으로 실용적인 책을 선택하고 정밀하게 책을 읽고 자신이 읽은 것을 기록하여 그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바란다. 그리고 그 지식을 세상을 위해 사용하기 바란다. 
 
무예 수련으로 신체를 단련하다 리더가 건강이 좋지 않으면 조직이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관리가 되는데, 이때 원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운영될 수가 있다. 그래서 리더는 항상 건강한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 4 - 리더라면 정조처럼 
 
운동이 필수이고,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모습 역시 리더십의 중요한 기본이다. 정조는 공부도 많이 했지만 신체단련을 위한 운동도 중요시했다. 정조가 가장 많이 한 신체단련은 단연코 활쏘기이다. 그러나 활쏘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정조는 검술과 창술도 함께 연마했다. 기초적인 체력훈련을 지속 적으로 한 것이다. 정조가 이처럼 검술, 창술, 활쏘기 등의 훈련을 집중적으로 한 것은 사도세자의 영향도 있다고 본다. 사도세자는 무예광이었다. 실제로 엄청난 무예의 고수이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18기 무예’라고 하는 것이 바로 사도세자가 정리한 무예이다. 
 
정조가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에게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할 것을 명령한 것도 본인이 이 무예에 정통했었기 때문에 지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정조는 보통의 무예인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무예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국왕이 무사들보다도 더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일반 문반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무반들 역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정조가 이렇게 무예 실력을 기를수 있었던 것은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운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늘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에는 반드시 무예를 수련했다고 한다. 현대의 리더들 역시 시간을 정해놓고 운동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는 매우 효율적인 것이다. 오늘날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는 리더들은 반드시 건강을 위해 시간을 정해 놓고 운동을 하기 바란다. 그도 아니라면 짜투리 시간에라도 걷기를 통해 신체의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을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다. 
 
시대의 변화를 읽다 
 
국가 개혁의 이념을 명확히 밝히다 건국할 때나 창업할 때, 그리고 사회를 위한 조직을 만들 때는 반드시 명확한 이념과 목표가 서야 한다. 대의명분이 올바르게 서 있지 않으면 비록 조직은 창립될 수 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망가진다.
정조는 정치를 함에 있어 명분을 충분히 마련하고 이를 재위 내내 실천하기 위해 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그가 국왕이 된 후 천명했던 명분, 즉 4대 개혁정책은 정조 시대 가장 중요한 정당성이었다. 
 
1778년 1월 1일은 정조가 국왕이 된 지 햇수로 3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전 국왕들과 달리 새해 첫날 백성들을 위한 특별 신년사인 윤음을 전국에 하교했다. 사실 정조는 자신이 아무리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국왕이 되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노론이 권력을 독점해 온 상황에서 자신이 국왕이 된 지만 2년도 안 되어 개혁을 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개혁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정조는 스스로가 부족한 국왕임을 이야기하며 바로 지금이 국가 개혁을 추진할 때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아, 내가 정사를 시작할 때 책임지고 잘해 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선왕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독실하지 못하고 크게 변화시키는 아름다움이 드러나지 않아 풍속이 어그러져서 인재(人才)가 흥기하지 못하고 기강이 무너져서 재용(財用)도 고갈되었다. 게다가 반역의 무리들이 연이어 생겨나 국세(國勢)가 안정 되지 않으니, 오늘날의 정세를 옛날과 비교하면 어느 때에 해당하겠는가. 과인은 부덕하여 큰일을 하기에 부족하다 하더라도 아, 너희 모든 직위에 있는 백관들은 어찌 감히 각기 너희의 직위를 공경히 지키고 맡은 직분을 생각하여, 나 한 사람을 받들지 않는가. 더구나 지금 새해가 되어 봄기운이 돌아 만물이 모두 소생하고 있다. 천도(天道)는 만물을 발육시키는 계절에 이르렀고 왕정(王政)은 유신(維 新)해야 할 기회이니, 시기에 맞게 만물을 발육시켜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 5 - 리더라면 정조처럼 
 
개혁의 의지를 천명한 정조는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경제활성화 정책을 제시했다. 농업과 잠업을 활성화 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만들고, 국가의 토목공사에 강제로 노동하는 각종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해주는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가혹하게 수탈당하는 고통을 없게 하고, 백성들의 살림을 넉넉하게 하여 안정된 생활의 즐거움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을 국왕 혼자 할 수는 없는 일이니 중앙의 관리들과 지방의 관리들이 모두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 다. 
 
몇 달 뒤 영조의 삼년상을 마치고 정조는 1778년 6월 4일에 처음으로 대소신료들을 모아놓고 인정전 에서 조회를 개최했다. 정조는 이 자리에서 국왕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4가지 개혁의 방향을 이야기했다. 이른바 ‘경장대고’(更張大誥)라는 것이다. ‘경장’은 개혁을 말하는 것이고, ‘대고’라는 것은 백성들에게 크게 고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대고’는 원래 중국 고대 이상국가인 주나라의 문왕이 백성들에게 자신이 국왕이 되고 나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을 천명한 것을 말한다. 그러니 정조는 주나라 문왕을 계승한 이상적인 군주라는 것을 조정 관료와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정조는 당시의 조선은 큰 병이 든 사람이 진원(眞元)이 허약해져서 혈맥이 막히고 혹이 불거진 상황과도 같다고 인식했다. 언제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이를 고치는 것이 국왕이 할 일이 라고 정조는 생각하고 개혁을 선언한 것이다. 정조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면서 불평등 관계에 있는 하층민의 소외정책을 개선하고 인권을 보호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싶었다. 아울러 기득권층의 특권을 분산시키고 싶었다. 정조는 양반사대부 중심의 사회에서 ‘민국’(民國)의 주체인 백성 중심의 사회로 만들고 싶었다. 더불어 백성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노론 위주의 기득권층을 압박하여 조선의 변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정조는 이를 위하여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4대 과제를 제시했다. ‘민산(民産), 인재 (人才), 융정(戎政), 재용(財用)’ 개혁이다. 이는 백성들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고, 인재를 육성하여 나라 발전의 기반이 되게 하고, 국방을 개혁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다. 
 
오늘날 리더들 역시 새로운 창업을 시작하거나 조직을 구성할 때 조직이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힘있는 명분을 정확히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제시 없이 시작하면, 개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사심(私 心)만 읽혀질 뿐이다. 반드시 올바른 명분을, 즉 정명(正名)을 만들어야 한다. 
 
인재등용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다 
 
신분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다 조선이 건국되고 처음부터 서얼제도가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들과 동생들은 조선 건국의 주체였고, 할머니가 천민이었던 정도전도 조선 건국의 주체이자 총재가 되었다. 그러나 제1
차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은 정도전 같은 이들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정실부인 이외의 자식들은 조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서얼제도의 시초이다. 서얼차별은 이후 계속 정치적 으로 문제가 되었고, 차별을 철폐하자는 서얼허통 논의도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허통논리는 사람의 재능과 품성이 출생처의 귀천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등용하되, 청요직(淸要職)은 주지 말자는 제한적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림파들은 신분질서와 관련하여 반대했다. 그 요지는 첫째, 존비(尊卑)의 등급을 엄격히 해야 하고, 둘째, 선왕의 법을 지켜야 하며, 셋째, 이들을 등용하면 명분이 문란해진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지키겠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가 지배세력들에게 만연해 있었으니 조 
 
- 6 - 리더라면 정조처럼 
 
선이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인 조광조나 율곡 이이 같은 이들은 서얼을 반드시 허통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해결되지 못했다. 결국 조선 후기까지 서얼 허통 문제가 논의되었지만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777년(정조 1) 3월 21일 조선 역사에서 가장 큰 신분제 개혁안이 발표되었다. 바로 ‘서얼허통’에 대한 정조의 결단이었다. 
 
정조는 즉위 후 발표한 4대 개혁과제의 두 번째가 인재 육성이었기 때문에 서얼허통을 통한 인재 찾기가 매우 중요했다. 그 과정에서 정말 뛰어난 인재들을 두루 찾을 수 있었고, 성균관에 서얼 출신들이 입학을 했다. 성균관에서 서얼출신들을 뒤로 앉게 하여 배척하려는 적자들의 횡포에 대해 정조는 성균관 안에서는 적서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모두 나이 순서대로 앉게 했다. 정조의 평등사상과 인재육성 계획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조의 서얼허통은 현실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정조는 1785년 2월 17일에 서얼허통을 강력하게 시행하라는 특별 명령을 다시 내렸다. 이러한 정조의 강력한 의지로 서얼허통은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백성들과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다. 정조가 능력 있는 인재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했듯이 오늘 이 사회의 모든 분야의 리더들도 사사로운 인연으로만 사람을 선발하지 말고 능력과 인품을 갖춘 이를 뽑아 나라와 사회를 위해 일하게 했으면 한다.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회전문 인사라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 좋은 인재를 찾아 기용해야 진짜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강건한 군주 
 
끊임없이 함양하고 성찰하여 분노를 통제하다 정조와 같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깊이 배워야 할 것이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잘 알다 시피 정조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았다. 그 한이 가슴 깊숙이 배어 있기 때문에 그는 평생을 고생했다. 여기에 더해 동궁 시절부터 자신을 해치고자 하는 이들이 늘 염탐하여 이들에 대한 분노의 마음도 컸다. 그러니 정상적인 사람으로 자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조는 겉으로 드러나 지는 않지만 화가 심각하게 올라오는 기질이 있었다. 화를 잘 내는 국왕은 신하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고, 이는 군주권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정조는 신하들의 옳지 못한 태도를 보면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정조 역시 자신의 이러한 부분을 정확히 알았고, 이것은 제왕의 본색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화가 날 때 그대로 화를 내고 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정조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에 집중했다. 바로 함양 공부(涵養工夫)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함양 공부가 가장 어렵다. 나는 함양 공부가 부족해서 언제나 느닷없이 화를 내는 병통이 있다. 함양은 바로 정양할 때의 공부이고, 성찰(省 察)은 바로 행동할 때의 공부이다. 그러나 본체가 확립된 뒤에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므로 학자의 공부는 당연히 함양을 우선으로 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함양만 중요한 줄 알고 성찰에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러기에 덕성을 존중하고 학문을 하는 것 중 어느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된다.” 
 
정조는 함양공부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자세를 성찰하는 훈련도 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훈련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지만 이를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정조의 일기 이름이 『일성록』인 것이다. 정조는 증자가 말한 ‘오일삼성’(吾日三省)의 의미를 담아 자신도 하루에 3번씩 성찰하고자 한 것이다. 스스로가 매일같이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게 되면 이후에 나타날 잘못된 말과 행동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 
 
- 7 - 리더라면 정조처럼 
 
어려운 처지에서 일을 시작해서 온갖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분노를 참고 사람들을 배려하며 그들의 실수나 무능력을 비난하지 않고 부드럽게 깨우치는 리더야말로 세상을 제대로 이끌어갈 리더이다. 정조처럼 말이다. 
 
군사훈련을 진두지휘하다 리더가 조직을 장악하는 힘이 없다면 리더가 계획한 원래의 방향과 달리 엉뚱한 곳으로 갈 수도 있다.
그래서 리더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은 민주사회인 21세기에서는 조직 장악력이고, 전근대 국왕들 에게 있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었다. 참고로 조선 후기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국왕은 군사적 힘이 없었다. 인조반정의 주체들이 중앙오군영의 대장 임명권을 자신들에게 달라고 요구하면서 국왕의 군사력 장악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서인들에 의한 군사권 장악은 국왕의 힘을 미약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고, 이후 국왕들은 군사력을 장악하기 위해 서인정권과 각을 세우기도 하고 타협을 하기도 했다. 
 
정조는 국왕이 되면서 군사제도 개혁을 추진하면서 군영 대장들에 대한 임명권을 되찾았다. 이는 정조 시대 새로운 정치의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조는 군영 대장 임명권만으로는 군대를 장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추진한 것이 바로 자신이 대규모 군사훈련을 주도하며 국왕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는 이전의 국왕들에게서 볼 수 없는 정조만의 특별한 군권 장악 방법이었다. 정조는 수도권 일대의 선대왕 능행 시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항상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는 수도권의 방위 상황을 점검하고, 국왕을 수행하는 중앙군의 무예를 단련시키는 기회로 활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능행 시 궁궐을 출발할 때부터 융복을 갖춰 입고 이동할 때는 말을 이용했다. 따라서 백성들이 보는 국왕의 모습은 전장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그리고 각 군영 깃발인 영기(營旗)를 점검한 이후, 각 영문 대장에게 휘하의 군대를 인솔하여 언덕에 진을 치게 했다. 그런 다음 경기감사와 광주목사에게 수백 척의 선박을 정렬시키고 청심루에서 올린 봉화를 따라 일제히 북과 징을 치게 하여 신호를 주었다. 이때 관람한 백성들이 만 명이 넘을 정도였 으니, 정조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통해 백성들로부터 국왕의 지엄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정조는 1788 년 4월 4일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에 작헌례를 한 뒤 장용영, 훈련도감, 어영청의 3군영이 합동으로 진법 훈련을 하여 곡진(曲陣), 방진(方陣), 직진(直陣) 등 진법을 익히고, 일본 군사들의 복식을 입은 가왜군(假倭軍)을 출동시켜 모의전투를 치르게 했다. 한편 정조는 각 군영의 대장들에게 평소에 자신이 지휘하지 않는 타 군영에 소속된 군사를 지휘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했다. 어영대장은 훈련도감군을, 훈련대장은 어영군을, 장용대장은 총융청 군사를 지휘하도록 했다. 
 
오늘날 리더들은 군사력을 갖고 그것을 지휘할 여건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유사한 일들은 있을 수 있다. 조직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회의와 워크숍을 진행할 때 외부 기관에 맡겨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리더가 직접 기획하고 운영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직원들이 리더의 역량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믿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조직의 기강도 생기게 된다.
따스한 리더이면서 강력한 힘이 있는 리더의 모습을 만드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다 
 
참된 효를 실천하다 
 
- 8 - 리더라면 정조처럼 
 
수원 사람들은 수원을 효원(孝園)의 도시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바로 정조의 효심이 수원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수원 화성이 정조의 효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효심 때문에 국가의 전략이 투여될 성곽을 쌓는 다는 것은 아무리 조선이 봉건체제였다 하더라도 실행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매우 뛰어난 효자이지만 사적인 효심으로 공적인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행할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화성은 왜 만든 것일까? 정조의 효심이 진정 담겨 있기는 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는 이런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당연히 정조의 효심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 효심은 사적인 효심이 아니라 공적인 효심, 즉 유교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사회적 윤리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효를 통해 충을 발현하고, 충을 통해 사회의 모든 윤리와 기강을 반듯하게 하고, 이를 통해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는 공적인 효로부터의 출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원 화성에 담겨 있는 정조의 효인 것이다. 
 
유교에서 효는 개인적 기능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와 정치, 인류애와 자연사랑에까지 확대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대동사회의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 부모로 여기지 않으며, 자기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유교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근본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국가를 소유한 사람은 백성이 적음을 근심하지 말고 고르지 못함을 근심하며, 가난함을 근심하지 말고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한다. 고르면 가난이 없고 화하면 적음이 없고, 편안하면 기울어짐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유교의 이상적인 정치와 경제의 이념을 잘 인식한 정조는 효에 기반한 정치와 경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리와 교육에도 힘쓰면서 효의 본질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효를 통한 대동 사회를 지향한 정조의 효사상은 그의 통치이념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한다. 
 
진정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를 생각하는 효성스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만약 이러한 마음이 없다면 노력과 훈련을 통해서라도 익혀야 한다. 효를 훈련을 통해서 익힌다는 것을 슬프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시대적 흐름이기 때문이다. 다만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에게 하는 개인적인 효의 실천과 많은 노인들을 공경하는 사회적 효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포용의 정치를 추구하다 
 
창덕궁 내원에서 군신동행을 열다 정조는 자신이 흠모했던 세종과 달리 취약한 왕권으로 출발했다. 그래서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여 본인이 추구하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정책을 만들고, 군사론(君師論)과 황극 탕평론(皇極蕩平論) 등을 제시하며 신하들에게 우월한 존재임을 전달하려 했지만, 결국 군신공치론(君 臣共治論)을 바탕으로 사림과 관료들과의 조화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군주로서 신하들로부터 초월적 존재이고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군신동락(君臣同樂)이 현실적인 정국 운영에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정조가 맹자의 이야기를 통해 강조한 ‘여민해락’(與民偕樂)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군주의 것을 신하들과 공유함으로써 신료들을 북돋우는 것이 자신을 지지하게 하는 최고의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조는 이전의 국왕들과 차별되는 정치적 행위를 했는데, 그것이 바로 군주의 공간인 창덕궁 내원을 신하들과 공유하는 내원(內苑) 연회 정치였다. 국왕의 은밀한 사적 공간이었던 내원은 국왕의 종친들과의 연회, 왕권 유지를 위한 친위군사들에 대한 격려 차원의 활쏘기 같은 무예시험이나 호궤 같은 연회에 개방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내원의 아주 일부 공간에서 진행된 것이지 정조처럼 내원 전체를 공유한 것은 아니었다. 
 
- 9 - 리더라면 정조처럼 
 
공간을 공유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아랫사람들은 윗사람들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지지를 하게 된다.
정조는 이러한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조선시대 어느 국왕도 하지 않은 창덕궁 내원의 옥류천 계곡을 신하들과 산책함으로써 ‘군신동락’의 의지를 다지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주도해갔다.
정조가 자신의 공간을 신하들과 함께 사용함으로써 신하들은 정조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가 제시하는 개혁정책을 받아들이고 실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들로 인하여 정조는 왕권을 안정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개혁정치를 펼쳤기에 오늘날 개혁의 시대로 평가받게 된 것이다. 
 
리더는 바로 이렇게 해야 한다. 자신의 것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자기 것이라고 해서 자기만 사용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만 이익을 얻으려 하면 존경 받을 수 없고, 조직을 이끌어 갈 수도 없다.
국왕이 모든 것을 통치하던 200여 년 전의 봉건시대 국왕인 정조도 이렇게 자신의 것을 신하들과 더불어 사용했는데, 21세기 사회에서 자신의 것을 나누지 않으려 해서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조선의 진경문화시대를 열다 
 
진경문화로 새로운 문화시대를 열다 정조시대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를 바탕으로 조선 문화의 수준에 자신감을 가졌다. 이런 시대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강력한 문화정치를 추구했으며, 여기에 청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 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는 기존의 시대와 다른 문화적 특성이 한껏 드러나고 있기에 다른 말로 진경시대(眞景時代)라고도 한다. 진경시대라는 것은 조선왕조 후기 문화가 조선의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난만한 발전을 이룩했던 문화 절정기를 일컫는 문화사적인 시대구분 명칭이기도 하다. 
 
정조는 조선 전체가 평화롭고 평등하며 그 어떤 외세의 침입도 받지 않는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한 의지의 발현 속에서 조선의 문화와 중국 문화의 차별성을 분명히 두고자 했으며, 그 결과 이전 시대의 문화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나는 문화의 장르가 나타났다. 도화서에서 규장각으로 이관된 자비대령화원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등장하여 정조의 뜻과 희망에 따라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냈다. 더불어 음악에서도 중국의 당악이 아닌 우리 고유의 음악을 만들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판소리의 원형이 정조시대부터 비롯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불어 이 시대에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국학(國學)운동이 일어나고 새로운 역사관 정립과 역사 서술이 시작되었다. 
 
이전 시대까지 조선 역사의 한 부분으로 평가받지 못하던 발해의 역사가 정조의 지시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하고,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했다. 또한 정조는 문화의 한 장르였던 조선의 무예도 정립했다. 『무예도보통지』를 저술하여 신라시대 황창랑으로부터 시작된 본국검을 비롯한 지상무예 18가지와 마상무예 6가지를 정리하여 우리 역사상 최고의 무예서를 편찬했다. 
 
우리 고유의 색을 찾아가는 진경문화는 정조시대 이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실제 가장 역량 있는 문화의 발현은 정조시대였고 그 문화적 공간은 화성(華城)이었다. 화성은 성곽만이 아닌 도시 전체를 일컬음이니, 화성이 정조의 문화적 기반이라 함은 수원이 당시의 문화기반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화성에는 조선, 중국, 일본의 성곽들의 장점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동서양의 모든 문화를 수용하여 
 
- 10 - 리더라면 정조처럼 
 
그것을 조선화 하고자 했던 정조와 당대 학자들의 포용력이 보여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남의 것을 배척하지 않는 열린 마음이 화성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중국식 건물인 듯 하면서 조선식이고, 일본식 성벽인 듯 조선식인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정조시대에 우리 산천을 고민하고 우리 민족의 삶을 고민하는 진경문화가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고, 조선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조선중화주의가 나타난 것도 바로 이러한 사상에 대한 포용과 관용 덕분이었다. 
 
정조시대 문화예술이 가장 발달한 분야는 회화 분야이다. 회화 분야에서는 김홍도(1745~1806)와 이인문(1745~1824), 김득신(1764~1822), 김석신(1768~?) 등이 출현하여 겸재 세대를 계승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화원화가들이었다. 이들이 화원화가라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진경시대 초기문화를 주도하면서 조선의 고유색이 짙은 화풍을 창안해 내던 인물들이 한결같이 조선성리학 이념에 투철한 사대부 화가들이었다는 사실과 대조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진경산 수화풍을 창안해 낸 겸재 정선과 풍속화풍의 시조인 관아재 조영석이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다. 새로운 양식의 창안이라는 것은 그 뿌리가 되는 바탕 이념에 대한 선구적 이해를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에 이념집단 중에서도 선두주자만이 감당해 낼 수 있다. 그러나 화원화가들은 정조에 의해 성장한 왕실 전속 전문화가이니 왕실이나 궁척들의 주문에 따라 기존의 화풍을 활용하여 보다 훌륭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그들의 몫이었으므로 회화사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한편 이들이 이처럼 진경풍속화풍의 계승 발전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절대적인 후원자이던 영조와 정조가 진경문화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들의 양성에 앞장섰던 같은 세대의 정조대왕(1752~1800)은 비록 국왕이지만 당대를 대표할 만한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로 『홍재전서』184권 100책이라는 문집을 남기고 <파초>나 <국화> 같은 그림도 남긴 분이었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리더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리더가 조직을 잘 이끌고 경제 활동을 통해 돈을 많이 벌어 직원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한 차원더 높은 일을 하려면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상과 문화를 만들고, 그러한 문화와 사상을 통해 우리나라를 널리 세계에 알려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약성을 극복하고 세계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문화 인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시대 리더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정조시대 진경문화의 계승이 바로 방탄소년단이고, <기생충>이고, 영화감독 봉준호이고, 소설가 한강이다. 이들은 바로 그들과 함께하는 리더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거나 스스로가 자신감을 가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세계의 중심에 서고, 이를 통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릴 수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힘을 믿는 리더, 그러한 리더가 바로 새로운 힘을 가진 리더가 된다. 


- 11 - 리더라면 정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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