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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by Casey,Riley 2021.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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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윤리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 아리스토텔레스가 리케이온 학원에서
제자들에게 강의를 하기 위해 지은 저서이고, 아들
인 니코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 내용을
정리해서 편집한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어떤 덕목이 필요하고 어떻게 행동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니코마코스 윤리학
(Ethica Nico mache a)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 저자 아리스토텔레스(BC 384

BC 322)

그리스 철학자이다. 스승인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중시한 데 반해서, 아리스토텔레스
는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세계를 중시하고 이것을 지배하는 모든 원인을 인식하고자 하는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철학은 학문으로서의 확고한 방법적 기초를 갖게 되었고, 이
것에 의해 그리스철학의 여러 요소가 종합되어 후대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지표가 마련되었다. 아리
스토텔레스는 에게해 북단 칼키디케반도의 스타기라에서 출생하였다. 의사인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왕
가와 친교가 있었다. 17세 때 아테네로 나와 플라톤의 제자가 되었으며 플라톤이 죽은 뒤에는 소아시
아의 아소스와 레스보스섬의 미틸레네에서 연구와 교수생활을 하였다. 또한 마케도니아왕 필리포스 2
세에게 초빙되어 후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의 교육을 맡았다. BC 335년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
에 자신의 학원을 열었다. 그러나 BC 323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고 아테네에 반마케도니아운동이
일어나 아테네에서 추방되었으며, 이듬해 어머니 고향인 에우보이아섬의 칼키스에서 죽었다.
『형이상학』,『니코마코스 윤리학』,『천체론』,『자연학』,『시학』,『범주론』,『동물의 생성에 관하
여』,『분석론 전서』,『분석론 후서』,『기억에 관하여』 등의 저술을 남겼다.

▣ S ho rt S umma ry
무엇이 선이고 선한 행위인가? 라는 물음은 모든 윤리학이 던지는 근본 물음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좋은 선, 즉 최고선(最高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함께 던지는데, 이 물음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윤리학 전체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물음이기도 하다.
이 물음에 대해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고선은 바로 행복이라는 것에 일치된 의견을 보인다고 주
장한다. 그리고 최고선인 인간의 행복은 이성 활동과 그 능력을 발휘하고 실현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덕을 실천해야 하는데, 덕에는 도덕적인 덕(절제, 관용, 인내, 용기, 관
후, 정의)과 지적인 덕(학문적 인식, 기술, 실천적 지혜, 철학적 지혜, 이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덕
을 무조건 실천하는 것만으로는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찾아낸 것이 바로
덕의 중용, 즉 가장 적절하게 덕을 실현하는 중간 상태이다. 중용의 덕을 지닌 사람은 이성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이성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하
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의 덕은 옳은 행동이 습관이 될 때까지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므
로,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가 책임을 가지고 올바르게 교육하고 배워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
게 사회에서 개인과 개인이 서로 마땅한 때에, 마땅한 것에 대하여, 마땅한 사람들에게, 마땅한 목적
을 위하여, 마땅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중용을 지킬 때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이 행복해질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윤리학의 진정한 내용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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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 차례
1. 인간을 위한 선
2. 도덕적인 덕
3. 지적인 덕
4. 자제와 자제하지 못함, 쾌락
5. 우애
6. 쾌락·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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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Ethica Nico mache a)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인간을 위한 선
행복의 정의
선이란 다른 모든 것이 그것 때문에 행해지는 그런 것이다. 의학에서는 건강이, 병법에서는 승리가,
건축에서는 집이, 다른 어떤 영역에서는 이와 다른 어떤 것이, 그리고 모든 행동과 추구에서는 그 목
적이 바로 선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 때문에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
리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목적이 있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행동하
여 달성해야 할 선이다. 그중에서 궁극적인 목적, 즉 언제나 그 자체로 모든 사람이 바라고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추구되는 일이 절대로 없는 무조건적인 목적이 최고의 선이다. 그런데 다른 어느 것보다도
이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행복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행복을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
고 결코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선택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명예나 쾌락이나 이성이나 또 이
밖의 모든 덕은 그것들 자체 때문에 선택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이런 것들로부터 아무 결과가 생
기지 않을 때에도 이것들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결국 우리는 이런 것들을 통하여 행복하
게 되리라 생각하여, 행복 때문에 이것들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자족(自足)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똑같은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자족이라는 것을 그것만으로 생활
을 바람직한 것이 되게 하며, 또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정의하는데, 행복이야말로 바로 이런
것으로서 궁극적인 선은 자족적이어야 한다는 점에 부합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행복이란 모
든 것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것이므로, 다른 여러 가지 선 가운데 한 선으로 여겨질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행복은 궁극적이고 자족적인 어떤 것이고, 또 행동의 목적이다.

덕의 종류
행복은 완전한 덕을 따른 정신의 활동이다. 따라서 우리는 덕의 본성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렇게 함으로써 행복의 본성을 더욱 잘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가 고찰해야 할 덕은 분명
히 인간적인 덕이다. 우리가 찾고 있던 선도 인간적인 선이요, 우리가 찾고 있던 행복도 인간적인 행
복이었으니 말이다. <인간적인 덕>이라는 말은 신체의 덕이 아니라 정신의 덕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덕은 여러 종류로 나뉜다. 즉 우리는 덕 가운데 어떤 것을 지적인 덕이라 부르며, 다른 어떤
것을 도덕적인 덕이라고 부른다. 철학적 지혜나 이해력이나 실제적 지혜는 지적인 덕이고, 관후라든가
절제는 도덕적인 덕이다. 지적인 덕은 대체로 교육에 의하여 생기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한다. 그러므
로 그것은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편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긴다. 어떤 사람의 성격
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그가 현명하다거나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고, 성품이 온화하
다거나 절제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현명한 사람의 정신 상태에 관해서도 칭찬한다. 우
리는 칭찬 받을 만한 정신 상태를 덕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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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도덕적인 덕
중용의 덕
도덕적인 덕은 그 어느 것이나 본성적으로 우리에게 생기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본성적으로 존재
하는 것치고 그 본성에 반대되는 습관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이것은 <에티
케>(도덕적, 윤리적)라는 말이 <에토스>(습관)라는 말을 조금 고쳐서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더
라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도덕적인 덕들은 본성적으로 우리 속에 생기는 것도 아니요, 본성에
반하여 우리 속에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본성적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으
며, 또 그것들은 습관에 의하여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덕은 인간이 그 고유한 기능을 잘 발
휘할 수 있는 착한 습관을 통하여 먼저 실천함으로써 생긴다. 즉, 집을 지어봄으로써 건축가가 되고,
거문고를 탐으로써 거문고 타는 악사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옳은 행위를 함으로써 옳게 되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절제 있게 되며, 용감한 행위를 함으로써 용감하게 된다. 성품은 제 각각 거기
에 대응하는 활동에서 생기는 것으로서 행위가 성품을 결정하는 까닭에 우리는 옳은 규칙에 따라서
행위하여야 한다.
사람들이 나쁘게 되는 것은 쾌락과 고통 때문이다. 즉 이것들을 추구하고 회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
하면 추구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되는 쾌락이나 고통을 추구하거나 회피하며, 혹은 추구와 회피의 때
를 잘못 잡고, 혹은 그릇된 방법으로 추구 내지 회피하고, 혹은 이 밖에 이와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덕은 이러한 쾌락과 고통에 관하여 최선의 행위를 하기 마련이고 악덕은 이와 반
대이다. 이러한 이유로 덕과 정치학의 온 관심사는 쾌락과 고통이다. 이것들을 잘 처리하는 사람은 선
한 사람이 될 것이고, 잘못 처리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덕은 쾌락과 고통에 관
계되고,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행위에 의하여 덕은 조장되고 그렇지 않은 행위에 의하여 상실되며, 그
리고 그것을 생겨나게 한 행위는 덕이 그 속에서 스스로 활동하는 행위이다.
무릇 덕이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은 상태에 이르게 하고 또 기능을 잘 발휘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덕은 인간을 선하게 하며 그 자신의 일을 잘하게 하는 성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덕은 중간을 목표로 삼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하여, 마땅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것은 중간적이며 동
시에 최선의 일이요, 또 이것이 덕의 특색이다. 과도와 부족은 일종의 실패인 데 반하여 중간은 칭찬
받는 것이요, 일종의 성공이다. 그리고 칭찬받는 것과 성공한다는 것은 둘 다 덕의 특징이다. 그러므
로 덕은 일종의 중용(中庸)이다. 그것은 두 악덕, 즉 과도로 말미암는 악덕과 부족으로 말미암는 악덕
사이의 중용이다. 덕은 그 본체에 있어서나 그 본질을 밝히는 정의에 있어서 하나의 중용이요, 최선이
라든가 옳다고 하는 점에서는 정점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중용으로서의 도덕적인 덕에는 용기, 절
제, 관후, 긍지, 정의 등이 있다.
<용기>는 비겁과 무모함의 중용이요, <절제>는 금욕과 방종의 중용, <관후함>은 인색과 낭비의 중용,
<긍지>는 비굴과 오만의 중용이다. <온화>는 성마름과 성질없음의 중용이요, <진실함>은 허풍과 거짓
겸손의 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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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용기
용기(勇氣)란 태연한 생각이나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들에 관하여 취하는 중용이다. 즉, 두려워할 만한
것을 당연한 동기에서 당연한 모양으로 당연한 때에 두려워하고, 또 태연한 마음을 가지는 일도 이와
같이 하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이다. 용감한 사람은 인간으로서 가능한 만큼 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
므로 그는 초인간적인 것이 못 되는 일을 두려워하는 수도 있지만, 이런 일을 당하여도 그의 태도는
어엿하고 순리를 따르며 명예를 위주로 한다. 빈곤이나 사랑이나 이 밖에 무엇이든지 고통스러운 것
을 피하기 위하여 죽는 것은 용감한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 오히려 겁쟁이가 하는 짓이다. 골치 아픈
일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마음이 약한 탓이요, 이런 사람이 죽음에 나아가는 것은 그것이 고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해악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이다.

절제
절제(節制)는 쾌락에 관한 중용이다. 쾌락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정신
적 쾌락이란 명예를 좋아하는 것, 혹은 학문을 좋아하는 것 따위이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학문
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기쁨을 느끼지만 이 기쁨은 육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다만 정신만이 맛보는 것이다. 이러한 쾌락(정신적인 쾌락)에 관계하는 사람은 절제 있는 사람이
라고도 방탕한 사람이라고도 불리지 않는다. 즉, 절제는 육체적 쾌락에만 관계하는 것인데, 그중에서
도 촉각에서 오는 실제적 향락, 즉 음식물이나 성교 같은 향락에 대한 것이다. 절제에 대한 과도인 방
종은 쾌락에 의하여 생기고, 부족인 비겁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인데, 쾌락은 우리가 선택하
는 것이고 고통은 우리가 피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종이 비겁보다 더 유의적이다.

관후
관후(寬厚)는 재물에 관해서의 중용이다. 관후한 사람이 칭찬을 받는 것은 군사적인 일에 있어서도 아
니고, 절제 있는 일에 있어서도 아니며, 또 판단을 잘함으로써도 아니라, 재물을 주고받는 일, 특히 주
는 일에 있어서이다. 그리고 방탕과 인색은 재물에 관해서의 과도와 부족이다. 방탕은 취하는 일에 있
어서가 아니라 주는 일에 있어서 과도하고 취하는 데 있어서 부족한 반면, 인색은 작은 일에서 예외
는 있지만, 대체로 주는 일에 있어서 부족하고 취하는 데 있어서는 과도하다. 관후한 사람은 취해서는
안 될 데에서는 취하지 않으며, 걸핏하면 청하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취할 만한 데, 즉 자
기 자신의 소유물 가운데서 취하는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소유물 가운데서 취하는 것
은 취하는 일 자체가 고귀한 일이어서가 아니라, 남에게 줄 수 있기 위하여 부득이 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소유물로써 남을 돕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소유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긍지
긍지(矜持) 있는 사람이란 자기 자신을 큰일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며, 또 사실 그러한 사람이다. 자기의
가치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자기의 덕에 의거해서 그렇게 생각
하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요, 이성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작은 일에 합당하고 또 스스로 그렇
게 생각하는 사람은 절제 있는 사람이기는 해도 긍지 있는 사람은 못된다. 긍지에는 큰 것이라 할까
위대성이라 할 것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긍지 있는 사람이 관심을 두는 것은 주로 명예이다. 긍
지가 그만 못한 사람은 비굴하고, 그보다 지나친 사람은 허오(噓傲)한데, 이 양자도 악한 사람은 아니
고(악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다만 생각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허오보다는 비굴이 긍지
에 더 반대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굴이 더 흔하고 더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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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의
정의(正義)란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게하며, 옳은 태도로 행동하게 하며, 또 옳은 것을 원하게
하는 성품이다. 정의는 완전한 덕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적으로는 아니고, 우리의 이웃에 대한 관
계에서만 그렇다. 그리하여 정의는 가끔 모든 덕 가운데 가장 큰 덕이라 생각된다. 정의는 그것을 소
유하고 있는 사람이 그 덕을 자기 자신 속에서만 아니라 또한 자기의 이웃 사람에 대해서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충만한 의미에 있어서의 완전한 덕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모든 덕 가운데 정의만
은 <타인의 선(善)>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최악의 사람이란 자기의 사악함을 자기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의 친구들에게도 미치는 사람이요, 최선의 사람이란 자기의 덕을 자기 자신에게 미
치는 자가 아니라 타인에게 미치는 사람이다. 이러한 정의는 그 연원, 적용범위 등에 따라 자연적 정
의, 정치적 정의, 법적 정의, 일반적 정의, 분배적 정의, 시정적 정의(차등을 통한 분배의 균형을 추구),
호혜적 정의, 형평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지적인 덕
지적인 덕
앞서 말한바와 같이 정신의 덕은 도덕적인 덕과 지적인 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도덕적인 덕은
선택에 관계된 성품의 상태이고, 선택이란 숙고한 욕구이므로 좋은 선택을 하려면 이치도 옳아야 하
지만 욕구도 바른 것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지능과 진리는 실천적인 성질의 것이다. 실천
적이거나 제작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관조적인 성질의 지능에서는 좋은 상태는 진리이고, 나쁜 상태
는 거짓이다(이것이 결국 모든 사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므로). 한편, 실천적이고 사유적인 부분에서,
좋은 상태란 올바른 욕구와 일치하는 진리이다. 행위의 단초는 선택이고, 선택의 단초는 욕구와 목적
적 이치이다. 그러므로 이성과 사유가 없거나, 또는 윤리적인 성품이 없다면 선택은 있을 수 없다. 한
편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기지만, 지적인 덕은 대체로 교육에 의하여 발생도 하고 성장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지적인 덕에는 기술, 학적 인식, 실천
지, 지혜, 이성이 있다.
지적인 덕의 의미 :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지적인 덕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지적인 덕은 꾸준한 가르침과 성찰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지식 같은 것이다. 지적인 덕은 성찰
의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예를 들어 자기 집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에 대
비하고 배려하는 사려일 수도 있고,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경륜 (포부를 가지고 어떤 일을 조직적으
로 계획함)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자연과 우주의 근본 원리를 사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성찰의 대상이 크면 클수록 거기에 따른 지적인 덕의 정도도 더욱 크고 훌륭해진다. 만일 누군가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면, 그 사람은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
라, 나라를 다스리는 수단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곧 사려나 경륜 같은 실천적 지식은 어떤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적 지식으로, 유용성으로서의 지식, 기술로서의 지식에 불과하다. 여기
에 비해 자연이나 우주의 근본 원리를 연구하는 것 같은 순수한 사색으로서의 지식은 그 자체가 목적
일 뿐, 그밖에 어떤 다른 목적도 지니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우주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애쓰는 천
문학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천문학 지식을 통해 무언가 다른 목적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앎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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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를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천문학자는 순수한 사색적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는 가장 탁월한 지적인 덕을 갖춘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적 지식을 낮춰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실천적인 지식
없이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즉 그는 실천적인 지식은 순수한 사색적 지식에
는 못 미치지만,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지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적인 덕을 논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에 또는 도덕적인 규
범에 대해서만 논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조건, 더 나아가 인간이 삶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논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기술
기술이란 참된 이치를 따라 제작할 수 있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모든 기술은 생성에 관계한다. 즉 그
것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리고 그 단초가 제작에 있고 제작되는 물건에
있지도 않는 것들>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는가 궁리하고 살피는 데 관심을 둔다. 기술은 <참된 이
치를 따라 제작할 수 있는 상태>요, 이와 반대로 기술이 없는 것은 <그릇된 이치를 따라 제작할 수
있는 상태>이다.

학적 인식
학적(學的)으로 인식되는 것은 <다른 식으로도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도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것>들에 관해서는, 그것들이 우리의 관찰 범위 밖에서 일어난 경우에는 실
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학적 인식의 대상은 필연적이며
따라서 영원한 것이다. 한편 모든 학적 인식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요, 그 대상은 배워서 알 수 있
다고 생각된다. 어떤 사람이 일정한 방식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고 또 모든 근본 전제가 분명히 그에
게 인식되어 있을 때 그는 학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실천지
실천지(實踐知)를 가진 사람의 특징은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에 관해서 잘 살필 수 있는 것
>이라 생각된다. 더욱이 그것은 어떤 특수한 점에서, 가령 어떤 것이 건강과 체력에 유익한가 하는 것
따위의 것들에 관해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좋은 생활에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훌륭하게
살피고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실천지란 <인간적인 선에 관해서 참된 이치를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실천지는 그 자체가 탁월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탁월성의 우위가
존재하는 기술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실천지는 일종의 덕이지 기술이 아닌 것이다.

지혜
지혜(智慧)는 모든 학적 인식 가운데 가장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자(知者)는 근본 명제
들로부터 도출된 것을 알 뿐 아니라, 또 근본 전제들 자체에 관한 진리를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지혜는 이성과 학적 인식이 합쳐진 것이요, 가장 고귀한 일들에 관해서 소위 머리가
되는 학적 인식이다. 지혜는 최고의 것을 지향하고 있는 최고의 덕으로 간주되며, 실천지보다 우월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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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성
모든 학문을 성립시키는 근본 명제는 지각하는 능력이며, 이는 학적 인식이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
다. 또한 기술이나 실천지가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더 분명하다. 이러한 근본 명제
자체에 전적으로 관계하는 것이 이성(理性)이다. 즉, 우리로 하여금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없는 것들
> 혹은 심지어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있는 것들>에 관해서 진리를 얻게 하며, 절대로 잘못 생각하
지 않게 하는 것이 학적 인식, 실천지, 지혜 및 이성이라고 하면, 이 중 실천지, 학적 인식, 지혜는 그
어느 것이나 그런 것일 수 없으므로, 결국 근본 명제들을 파악하는 것은 이성뿐이다.

자제와 자제하지 못함, 쾌락
자제와 자제하지 못함
방종한 사람은 뉘우칠 줄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선택에 충실하다. 그러나 자제력이 없는 사
람은 뉘우칠 줄 아는 것이 보통이다. 방종한 사람은 고쳐질 가망이 없으나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고
쳐질 가망이 있다. 왜냐하면 악덕은 마치 수종(水腫)이나 폐결핵과 같은 질환인 데 반하여, 자제력이
없는 것은 간질병과 같기 때문이다. 사실 전자는 지속적인 불행이고, 후자는 지속적이 아닌 불행이다.
또 자제력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폭발적인 사람들>이 <이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따르
지 않는 사람들>보다 낫다. 왜냐하면 후자는 아주 약한 정념에도 넘어가고, 또 전자와는 달리 미리 숙
고함이 없이 행동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대부분 사람들보다 훨
씬 적은 양의 술을 마시고도 빨리 취하는 사람들과 같다. 그러므로 자제력이 없다는 것이 악덕이 아
님은 자못 명백하다(물론 어느 의미에서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왜냐하면 자제력이 없다는 것
은 선택에 반대되는 것인 데 반하여 악덕은 선택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확신이 없어 올바른 이치에 어긋나는 지나친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기가
쉽고, 방종한 사람은 본래 그런 쾌락을 추구하도록 된 사람인 까닭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전자는 쉽사리 마음을 돌리고 태도를 바꿀 수 있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결국 방종은 자제력이 없
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다.
자제는 좋은 상태이고, 자제력이 없는 것은 좋지 않은 상태임은 분명하다. 어느 의미에서는, 자제하는
사람은 어떠한 억견에든지 따르고,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따르지 않는 것이지만, 무조건적으로는 참
된 억견을 따르는 것이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다. 사려(실천지)가 있으면서 자제하지 못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려있는 사람은 그저 알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실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실천할 힘이 없다.
자제력이 없는 것과 자제력이 있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상태가 지나친 데로 나아간 것과 관계한
다. 즉, 자제력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 이상으로 자기가 결심한 바를 잘 지켜나가는데, 자제
력이 없는 사람은 그 결심한 바를 지켜나가는 능력이 대부분의 사람들 이하이다. 또 여러 형태의 자
제력이 없는 것 가운데 흥분하기 쉬운 사람은 숙고를 하되 자기가 결심한 바를 지켜나가지는 않는 사
람보다는 고치기가 더 쉽고, 또 습관으로 말미암아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제력이 없는
사람보다 고치기가 더 쉽다. 본성을 고치는 것보다는 습관을 고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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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쾌락
쾌락과 고통의 고구(考究)는 우리가 반드시 고찰해야만 할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덕과 악덕은 고통 및 쾌락에 관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은 쾌락을 수
반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쾌락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즉, 어떤 이
들은 선과 쾌락은 같은 것이 아니므로, 어떤 쾌락이나 선이 아니다 - 그 자체에 있어서나 또는 수반적
으로나- 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약간의 쾌락은 좋은 것이지만 대부분의 쾌락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셋째로 모든 쾌락이 선이기는 하지만 쾌락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일 수는
없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쾌락은 선이 아니고, 또 최고선도 아니라는 귀결이 반드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쾌락은 필연적으로 하
나의 선이다. 설사 어떤 쾌락이 나쁜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어떤 쾌락이 최고선이 되지 말
라는 법은 없다. 마치 인식 가운데에는 나쁜 인식도 있으나 어떤 인식은 최고선이 될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쾌락이 선이 아니라고 하면 행복한 사람이 즐거운(즉, 쾌락 있는) 생활을 한다고 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쾌락이 선이 아니고 행복한 사람이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는 수도 있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그에게 쾌락이 필요하겠는가? 쾌락이 선도 악도 아니라면, 고통도 역시 선도 악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고통을 피할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만일 선한 사람의 활동이 더 즐거운
것이 아니라면, 그의 생활 역시 다른 어느 사람의 생활보다도 더 즐거운 것이 못 될 것이다.
육체적인 여러 가지 선에는 지나침이 있을 수 있고, 또 나쁜 사람은 필수적인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나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그것을 추구함으로써 나쁘다(누구나 어느 모로는 맛있는 음식이나 술이나
성교를 좋아하지만, 누구나가 알맞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의 경우에는 사정이 이와
반대이다. 왜냐하면 그는 고통의 과도를 피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이면 덮어놓고 피하기 때문이다. 사
실 쾌락의 과도에 반대되는 것은 고통만이 아닌데, 이런 과도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도 쾌락의 과도가
아니면 고통밖에 없다.
사람들에게 육체적 쾌락이 가장 바람직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쾌락이 고통을 몰아내며 격렬한 것으
로서 다른 쾌락에서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짐승들과 어
린 아이들은 좋지 않은 종류의 쾌락을 추구하고, 사려있는 사람은 이런 것들로부터 조용히 해탈하여
고통 없는 상태에 이르기를 추구한다. 즉 짐승들과 어린 아이들이 추구하는 쾌락은 욕정과 쾌락이 따
르는 쾌락, 즉 육체적 쾌락(바로 이 쾌락이 그런 성질을 띤 것이기에 말이다)과 과도한 것들이다. 그리
고 이런 것들이 바로 방종한 사람으로 하여금 방종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들이다. 이런 까닭에 절제
있는 사람은 이런 쾌락을 피한다. 그는 또한 자기 나름의 쾌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애
우애(친애)와 친구
친애는 하나의 덕이 아니라 덕을 내포하는 것이며, 또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것이다.
사실 누구나 친애하는 사람들이 없다고 하면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나 또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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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는 사람들에게도 무엇보다 <친애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서로 친애하는 사람들 간에
는 정의가 새삼스레 필요하지 않지만, 이에 반하여 옳은 사람들 간에는 정의 외에 또한 친애도 필요
하며, 또 정의의 가장 참된 형태는 친애의 성질을 띤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친애는 그저 필수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고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친구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으며, 또
친구를 가장 많이 가진 것은 훌륭한 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또한 좋은 사람이라 하면 동시에 친
애하는 친구라고도 우리는 생각한다.
완전한 친애는 선하고 덕이 서로 닮은 사람들의 친애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대방이 선한 사람인 한
에서 서로 상대방에게 좋은 것을 원하며 또 그들 자신이 선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의 친
구를 위해서 좋은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참된 의미에서의 친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러한 친애가 흔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그런 사람은 드물다. 더군다나 그러한 친애는
시간과 친숙함을 요한다. 또 피차 사랑할 만하다고 생각되고 피차 상대방에게 신뢰를 받게 될 때까지
는, 서로 마음을 허락하여 친구가 될 수도 없고 친애하게 될 수도 없다. 친애의 정을 서로 급히 표시
하는 사람들은 친구가 되기를 원하지만 양자가 모두 사랑할 만하고 또 이 사실을 알고 있지 않는 한
친구가 아니다. 친애를 바라는 것은 금방 생기지만, 친애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들은 쾌락이나 유용성 때문에 친구가 되지만 - 이런 점에서 그들은 서로 비슷하니까- 선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 때문에, 즉 그들이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친구가 된다. 그러므로 후자는 무조건적
인 의미에서 친구인데, 전자는 다만 수반적으로 또 후자와 유사함으로써 친구이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명예욕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더 원
하는 것 같다. 아첨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아첨하는 사람이란 상대방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친구, 혹은 이런 친구인 척하면서 자기가 사랑받는 이상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척하는
사람 인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존경을 받는다는 것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며, 또 존경을 받는 것은
대개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그 자체 때문이 아니고 다만 수
반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권세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로부터의 존경은 여러 가지 기대 때문에, 선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들로부터의 존경은 자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확보할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좋
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예를 얻고서 기뻐하는 것은, 그들에 관해서 말하는 사람들의 판단에 힘입
어 자신의 선함을 믿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에 반하여, 사람들이 사랑을 받는 경우에는, 사랑을 받는
것 자체 때문에 이것에 기쁨을 느낀다. 이런 까닭에 그것은 존경을 받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요, 또
친애는 그 자체가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친애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사랑하는 것에 깃들어 있는 듯 싶다. 사랑하는 것을 기
쁨으로 삼고 있는 어머니들이 그 증거이다. 따라서 사랑한다는 것이야말로 친구의 특색을 이루는 덕
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런 것을 충분히 간직한 사람들만이 영속적인 친구요, 또 이런 사람들의 친애
만이 영속할 것이다.

우애의 필요 - 왜 행복한 사람은 친구를 가져야 하는가
흔히들 말하기를 더할 수 없이 행복하고 자족적인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필요 없다고 한다. 이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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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들은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고 또 자족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행
복한 사람에게는 모든 좋은 것이 있다고 하면서 외적인 선들 가운데 최대의 것인 친구가 그에게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까 싶다. 확실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사람을 고독하게 한다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다. 혼자 있다는 조건에서 온 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아무도 이것을 선택하지는
않겠기에 말이다. 사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요, 그 본성이 남과 함께 살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행
복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그는 본성상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
고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보다는 친구들과 선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것임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므로 행복한 사람에게도 친구가 있어야 한다.

쾌락·행복
쾌락
누구나 살기를 바라는 까닭에 또한 쾌락을 욕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활
동이요, 또 사람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에 관해서 가장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고 활동한다. 가령
음악가는 여러 가지 음률에 관해서 자신의 청각을 가지고 활동하고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론적인
문제에 관해서 자신의 이지(理知)를 가지고 활동한다. 그런데 쾌락은 이러한 활동을 완전하게 하므로
또한 사람들이 욕구하는 삶도 완전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쾌락을 찾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쾌
락은 모든 사람의 삶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고, 또 삶은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쾌
락 때문에 살기를 택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산다는 것 때문에 쾌락을 택하는가 하는 것은 여기
서 문제 삼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산다는 것과 쾌락은 사실 활동이 없으면 쾌락이 생기지 않으며, 또
모든 활동은 거기 따르는 쾌락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뻔히 추한 것을 쾌락이라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아주 타락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좋다고 생각되는 쾌락들 가운데 어떤 종류의 쾌락이 그리고 어느 쾌락이 인간에게 고
유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쾌락은 활동에 수반하는 것이므로 거기 대응하는 활동에서 명백해지
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완전하고 다시 없이 행복한 사람의 활동이 한 가지이건 혹은 그 이상이건,
이러한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쾌락이야말로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고유한 쾌락이요, 나머지 쾌락
은 제2차적이고 부분적으로 그렇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
행복이야말로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행복은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들에 속
하고, 다른 어떤 것 때문에 바람직한 것들에 속하지 않는다. 행복은 아무 것도 결여되어 있지 않고 자
족적인 것이다. 행복한 생활은 덕 있는 생활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덕 있는 생활이란 노력을 요하는
것이요, 오락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들은 재미있는 오락적인 것들 보다 더
좋으며, 또 무엇이든지 두 가지 것 가운데 보다 좋은 쪽의 활동에 좀 더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
떤 것이든지 그것에 고유한 것이 본성상 그것에 가장 좋고 즐거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는 이성을 따르는 생활이 가장 좋고 즐거운 것이다. 이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활이 또한 가장 행복한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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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자기의 이성을 따라 활동하고 그 이성을 가꾸고 자라게 하는 사람은 최선의 정신 상태에 있으며 또한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만일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신들이 인간의
여러 가지 일을 조금이라도 살펴준다면, 가장 좋은 그리고 가장 그들을 닮은 것(즉, 이성)을 그들이 기
뻐하고 이것을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보답해 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사람이
신들에게 소중한 일에 마음을 쓰고 또 옳게 그리고 고귀하게 행동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속성을 누구보다도 많이 지니고 있는 것은 철학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신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그리고 철학자는 또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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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 더 깊이 있게 알기 위하여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갖는 의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는 이론적인 부분과 실천적인 부분, 그리고 제작적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론적인 부분은 자연학과 형이상학으로 구성되어 있고, 실천적인 부분은 윤리학과 정치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작적인 부분은 수사학과 시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는
이론적인 부분을 기반으로 하여 실천적인 부분에서 완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에 관한 철학이
라고 일컬어지는 실천적인 부분은 인간의 선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개인적 차원에서의 선
을 탐구하는 윤리학과 국가적 차원에서의 선을 탐구하는 정치학으로 나뉘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관한 저작은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대윤리학』 그리고 『에우데모스 윤리학』이 있다.
『대윤리학』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전자의 내용은 후자에 망라되어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관한 이론을 가장 완결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 10권으로 구성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제1권에서 인간적 선의
본성과 덕의 종류를 분석하고 있고, 제2권에서 제5권까지는 도덕적 덕으로서의 용기, 절제, 정의 등을
분석하고 있으며, 제6권에서는 지적인 덕으로서의 지혜와 실천적 지혜를, 제7권에서는 자제와 쾌락을,
제8권과 제9권에서는 우애를, 제10권에서는 쾌락과 행복을 설명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도덕적인 덕과 지적인 덕으로 구분한다. 도덕적 덕은 정념과 관계한다. 그럼으
로써 정념과 행위에 관계하는 덕은 중간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중간은 과도와 부족의 중간으로서
중용(中庸)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중용은 이성적 원리에 의해서 실천지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이치
를 따라 결정되는 행위 선택의 성품이다. 이 점에서 도덕적 덕 가운데 지적인 덕이 있음을 암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으로서 용기·절제·관후·긍지 등의 덕을 들고 있다. 이러한 덕들은 모
두가 중용을 선택하려는 심적 경향을 갖고 있다.
또한 그는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함에 있어서 요구되는 덕목으로 정의와 우애를 들고 있다. 정의는
덕의 전체이다. 따라서 정의는 이성의 보편적인 이상인 동시에 개인적인 미덕이다. 뿐만 아니라, 정의
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성립하므로 <타인의 선(善)>이라고 한다. 또한 우애하는 사람들 간에는 정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우애는 정의를 포용하고 초월하여 공동체 생활의 기초를 이루면서
선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목적을 실현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인 덕으로서 기술, 학적 인식, 실천지, 지혜, 이성을 말하고 있다. 이들 중
실천지와 지혜가 중심이 된다. 실천지는 인간을 위해서 좋고 나쁜 것에 관해서 참된 이치를 따라 행
위 할 수 있는 상태로서 일종의 덕이다. 지혜는 이성과 학적 인식이 합쳐진 것이요, 최고의 것을 지향
하고 있는 최고의 덕이다. 이런 점에서 지혜는 실천지보다 우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인류 문화의 최고봉의 하나를 이룬 BC 5세기의 아테나이에서 소크라테스는 고매한 인격을 가지고 깊
은 철학적 사색을 끈기 있게 전개하였다. 이 철학적 사색은 플라톤에 의하여 극적(劇的) 형식으로 집
대성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학문적 체계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
토텔레스는 그리스 정신문화의 3대 지주이며 원천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만한 학문적 체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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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13세기 내지 19세기까지 나타나지 못했다.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서양 문화는 다시 한
번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못지 않은 광범하고 심오한 학적 체계를 얻었는데, 아퀴나스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철학의 방법과 정신을 자기의 철학 및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문의 체계화에 아주 크게 공헌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생물학·물
리학·형이상학·정치학·윤리학·논리학·시학 등이 그에게서 고전적으로 체계화되었을 뿐 아니라,
그 중 어떤 것은 2천여 년에 걸쳐 그 방면의 최고 권위의 자리를 지켜 왔고, 그의 영향은 그 자신의
시대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철학 속에 여러 가지 학문의
술어의 정의와 구별 및 후대의 과학의 기초를 이루는 신념들이 내포된 때문이었다. 이 기초적인 정의
들과 구별들은 일찍이 그의 가르침을 따른 학파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학문에 광범위하게 또 솜씨 있
게 적용되었다. 그의 영향은 13세기의 스콜라 철학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의 정
신과 방법을 소중히 여기고 따르는 철학자들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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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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