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토무라 료지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이 책은 ‘역사는 우리 삶에 나침반이 되고 돋보기가 되어주는 실용적인 학문’으로, 제대로 된 역사
지식을 가진 자가 향후 세계를 이끄는 리더가 될 것이라면서, 역사지식을 키워 주는 7가지 핵심
코드를 통해 지난 5,000년간 인류가 어떻게 혹독한 환경에 맞서 싸우며 문명을 건설하고 번영과
쇠퇴를 겪으며 역사를 이루어왔는지 날카롭게 분석하고 통찰한다.
천하무적 세계사
모토무라 료지 지음
▣ 저자 모토무라 료지
1947년 구마모토현에서 태어났다. 기타타마고등학교를 거쳐 1973년 히토쓰바시대학 사회학부를 졸업
했다. 1980년 도쿄대대학원 인문과학 연구과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1984년부터 도쿄대학 교양학
부에서 조교수를 지냈으며, 1994년 교수로 승격했다. 1996년부터 도쿄대대학원 종합 문화연구과 교수
로 활동했고, 2014~2018년 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에서 특임교수를 지냈다. 도쿄대학을 정년퇴직한
뒤 도쿄대 명예교수가 되었다. 퇴직 후 전임직에서 벗어나 지금은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잡지 《KODAI》의 편집장으로 일본 고대 서양사 연구를 해외에 소개하고 있으며, 일본 서양 고전학회
위원과 지중해 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대 로마 사회사 전문으로, 산토리 학예상, 지중해 학회
상, JRA마사문화상(일본 중앙 승마회에서 문학, 평론, 예술 등 문화 활동을 통해 승마문화 발전에 공헌
한 사람에게 1987년부터 수여하는 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다신교와 일신교』,『로마제국 인물 열전』,
『애욕의 로마사』, 『지중해 세계의 로마제국』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서 자라고 번성하다가 쇠퇴의 과정을 거쳐 죽고 소멸해간다. 이는 자연의 이치이
며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마치 생명체처럼 탄생과 발전, 번영과 쇠퇴를
거쳐 몰락하고 사멸해간다. 이것이 우리가 쉼 없이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은 역사는 우리 삶의 현장에 살아 숨 쉬며 나침반이 되고 돋보기가 되어주는 실용적인 학문으로,
제대로 된 역사지식(세계사 문맥력과 통찰력)을 가진 자가 향후 세계를 이끄는 리더가 될 것이라면서,
세계사 문맥력과 통찰력을 키워 주는 7가지 핵심 코드인 관용, 동시대성, 결핍, 대이동, 유일신, 개방
성, 현재성 등을 통해 지난 5,000년간 인류가 어떻게 혹독한 환경에 맞서 싸우며 문명을 건설하고 번
영과 쇠퇴를 겪으며 역사를 이루어왔는지 날카롭게 분석하고 통찰한다.
나아가 저자는 역사학이 실용적인 학문일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모여 이루어지는 지식 마차
의 중심축이라고 말하면서, 중심축 없이 제대로 된 마차가 완성될 수 없듯이, 역사학이라는 중심축 없
이 인간의 지식체계도 완성되기 어렵다고 강조한다. 또 모든 역사는 현재사이며, 역사는 한 장면의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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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세계사
절도 없이 지금 이 순간으로 이어지고 확장하며 현재성을 획득해 간다면서, 역사가 학문의 중심축이며
역사에 문리가 트이면 모든 세상사에 문리가 트인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라고 말한다.
▣ 차례
서문 - ‘세계사 문맥력’과 ‘통찰력’을 가진 자가 변화무쌍한 향후 세계를 이끌게 될 것이다
Prologue ‘역사에서 배운다’라는 말의 의미 - 어리석은 사람은 경험에서 배우고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
서 배운다
01 Tolerance 로마는 ‘관용’의 힘으로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 로마는 어떻게 번영을 이루었으며 쇠퇴하
고 멸망했는가
02 Simultaneity ‘동시대성’이 역사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 - 한제국과 로마제국, 공자와 소크라테스,
석가모니와 조로아스터의 탄생
03 Deficiency ‘결핍(건조화)’이 문명을 탄생시켰다 - 문명 태동부터 도시국가를 거쳐 민주정 탄생에 이
르기까지
04 Huge Migration ‘대이동’하며 세계지도를 다시 그린 민족들 - 게르만족ㆍ몽골제국의 드라마틱한 역
사, 대교역시대부터 난민 문제까지
05 Monotheism ‘유일신교’는 왜 항상 분쟁의 씨앗이 되는가 - 세계사를 바꾼 3대 유일신교(유대교ㆍ기
독교ㆍ이슬람교)의 탄생과 발전
06 Openness ‘개방성’이 국가와 시대의 운명을 결정한다 - 왜 아테네나 스파르타가 아닌 로마가 강국
이 되었나
07 Nowness ‘현재성’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진다 - 모든 역사가 ‘현재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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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세계사
천하무적 세계사
모토무라 료지 지음
Tolerance 로마는 ‘관용’의 힘으로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로마는 어떻게 번영을 이루었으며
쇠퇴하고 멸망했는가
로마를 강대국으로 만든 두 가지, ‘관용’과 ‘패자부활전을 가능케 하는 문화’
고대 지중해 세계에 1,000개가 넘게 존재했던 수많은 도시국가 중에서 왜 유독 로마만 제국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로마인에게 모스 마이오룸(Mos maiorum) 개념이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
고 생각한다. 모스는 ‘관습 혹은 전통’, 마이오룸은 ‘선조’라는 뜻이다. 즉, 선조의 훌륭한 가르침을 가
슴에 새기는 동시에 스스로 선조의 명예가 부끄럽지 않도록 당당히 살아가겠다는 강한 다짐이다.
로마가 제국을 이루고 경영하던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목적을 달
성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는 일이었을 것이다. 로마인들
은 자신이 참전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자신이 남보다 좀 더 돋보이는 공을 세우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했다. 명예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기본 욕구 중 하나다. 그러나 명예를 대하는 관점과
사고방식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게 뭘까? ‘관용’과 ‘패자 부활 가능성’의 유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를 비교해서 살펴보자. 명예를 중요시한 고대 그리스에서 전쟁에 패한 장수
는 두 번 다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패하고 살아서 돌아갈 경우 운이 좋으면
추방, 운이 나쁘면 사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반면 로마는 전쟁에 패한 장수나 병사라도 조국에 귀환할
수 있었다. 당당히 적에 맞서 싸웠다면 설령 패배했더라도 로마인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이 차이는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그리스의 패전 장수는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패배하고 비루하게 목
숨을 부지한 경우 다른 나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로마의 패전 장수는 전쟁에서 맛본
쓰라린 치욕을 떨쳐내기 위해 다음 전쟁에서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했다. 그런 로마인의 가
장 대표적인 인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4년)를 꼽을 수 있다. 카이사르는 자신도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경험이 있어서인지 부하 장수나 병사들의 실수나 실패를 무조건 질책하지 않고 관대하게
대하며 스스로 만회할 기회를 주고자 항상 노력했다.
무자비함과 관용의 두 얼굴을 가진 영웅 카이사르
세계제국으로 불릴 정도로 성공을 일군 나라 중 처음부터 관용이 넘쳐나는 나라는 한 나라도 없었다.
로마 역시 이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나라나 세력을 얻고 강대해질수록 처음에는 자신이 굴복
시키고 복속시킨 다른 나라를 군사력을 동원해 힘으로 제압하려 들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의 통
치는 처음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겠지만 오래갈 수 없고 반드시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다.
지배당하는 나라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맞서 싸울 힘이 부족하므로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굴욕을 참고 견딘다. 그럴수록 점점 더 불만이 쌓여갈 수밖에 없다. 결국 불만과 저항정신이 한데 모
여 거대한 저항의 불길로 번져간다. 그러므로 그런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 지배자들은 조금씩 관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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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서 ‘이 정도는 너희에게 맡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는 식으로 태도와 정책이 변하게 된다.
로마 역시 오랜 시간을 지나고 그 과정에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겪으며 패권을 이루고, 그 패권을 오
래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관용’이라는 점을 체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한한 관용만이 정답일
까? 그렇지는 않다. 나라를 떠받치고 경영하는 자들이 매사에 지나치게 관용을 보이다가는 자칫 사회
통합을 해칠 우려가 있다. ‘관용’과 ‘규제(혹은 절제)’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가치관 사이에서 마치 줄타
기하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과연 어디까지 허용하고 관대해질지 가늠해야 한다.
로마는 절묘한 방법으로 관용을 베풀고 정책으로 활용했다. 예로 로마는 속주에 라틴어 사용을 강요하
지 않았다. 로마에 패배하고 복속 당한 나라와 민족에게 오랫동안 써왔던 자기 언어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어를 사용하라고 하면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와는 반대로 자기 언어를 사용하며 자유롭게
생활하도록 허용하되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그로 인해 얻는 혜택이 많아지
게 한다. 그렇게 하면 속주민들은 강요하지 않아도 알아서 라틴어를 배우고 사용하게 된다. 마치 오늘
날 영어가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널리 퍼져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로마제국에서 관용 정책을 가장 탁월하게 활용한 지도자는 카이사르다. 라틴어에 ‘클레멘티아 카이사
리스(카이사르의 관용)’라는 말이 널리 회자하고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
렇다면 카이사르는 과연 뼛속까지 관용으로 가득 채운 관용의 화신 같은 인물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카이사르가 관용적인 사람인 것은 일면 맞지만 그가 관용을 베푼 대상은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과 로마
에 철저히 복종하는 사람뿐이었다. 반대로 그는 로마에 끝까지 맞서고 저항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짓
밟았다. 내 생각에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풀 대상을 의식적으로 선별해 행동한 것 같다.
Simultaneity ‘동시대성’이 역사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 한제국과 로마제국, 공자와 소크라
테스, 석가모니와 조로아스터의 탄생
일란성 쌍둥이 같은 두 세계제국, 한과 로마
세계사를 연구하다 보면 교류가 전혀 없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동일한 사건이 동일한
시간대에 발생하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종종 접하곤 한다. 기원전 202년, 드넓은 바다를 사이에 둔 동
양과 서양에서 각각 거대한 세계제국이 탄생했다. 바로 ‘한제국’과 ‘로마제국’이다. 두 제국은 마치 서
로 약속이나 한 듯 거의 같은 시기에 탄생했다.
나는 로마제국이 제국으로서의 조건을 충족하게 된 시점을 카르타고를 상대로 펼친 제2차 포에니전쟁
의 승패를 가른 자마전투 때라고 본다. 이 역사적인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기원전
202년에 로마가 비로소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마전투야말로 로마
의 향후 방향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았으며 운명을 결정지은 터닝포인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원전 202년 유라시아 동쪽, 즉 오늘날 중국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해하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항우와 유방 사이에 벌어진 세기의 결전으로 ‘사면초가’라는 고사성어로 잘 알
려져 있다.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 군대와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의 대결은 초반에는 항우 쪽이 유
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항우의 독불장군 같은 성격이 화를 부르면서 부하의 배신과
하극상이 끊이지 않다 보니 차츰 유방의 군대가 바짝 숨통을 조여 왔다. 결국 유방의 계략에 말려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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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는 겨우 몇몇 부하만 거느린 채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피신했다. 그러나 끝내 도망치지 못하고
우장강에서 스스로 목을 베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항우의 죽음은 한제국 탄생을 결정적으로 뒷받
침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해가 바로 기원전 202년이다. 이처럼 기원전 202년은 한제국과 로마제
국이라는 동서 유라시아 세계제국이 거의 동시에 출사표를 던진 역사적인 해다.
로마제국과 한제국을 동시에 덮친 3세기의 치명적 위기
로마제국과 한제국은 존망의 기로도 같은 시기에 겪었다. 로마제국은 자마전투로부터 400년이 지난
뒤 ‘3세기의 위기’라고 부르는 극심한 혼돈의 시기를 맞이했다. 한제국도 2세기 말에 일어난 황건의 난
(184년) 이후 군웅할거 하는 ‘삼국지 시대’로 돌입했다. 참고로 3세기 거의 동시에 찾아온 절체절명의
위기를 로마제국은 위태위태하게 넘어간 반면 한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같은 해에 등장한
동양과 서양의 세계제국이 거의 같은 시기에 존망의 기로를 맞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흥미롭고
주목할 만한 ‘역사의 동시대성’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왜 ‘역사의 동시대성’에 주목해야 할까
‘역사의 동시대성’을 얘기하면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슷한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굳
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나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지적이다. 실증사학의 관점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사를 통찰하는 안목’을 기르고 싶다면
얘기가 다르다. 관점을 달리 하면 역사의 동시대성은 충분히 깊이 궁리하고 탐구할 만한 주제다. 무릇
사람은 자신과 직접 관계가 있는 대상에만 관심을 보이기 쉬운 존재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중동 문제
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석유’ 때문이다. 이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석유는 현대인에게 중요한 연료이자 도구다. 그
런 석유가 대부분 중동 지역에서 생산되고 우리는 비싼 비용을 치르고 그걸 수입해다 쓴다. 그러다 보
니 국가나 개인 모두 중동 관련 이슈에 무관심해질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리고 우리는 미
국 뉴욕이나 프랑스 파리, 혹은 영국 런던처럼 귀에 익숙한 도시에서 테러가 일어나면 역시 관심을 기
울인다. 이유가 뭘까? 그 나라나 도시 역시 중동의 ‘석유’처럼 나의 삶에 직ㆍ간접적으로 중대한 영향
을 미치는 뭔가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본능적으로 믿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역사를 대하는 관점과 태도를 바꿔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나’를 기준으로 시간과 공간이 멀어질
수록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무관심해지거나 흥미를 잃기 쉽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고
대 이야기조차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
는 각각 그 나라의 지나간 시간 위에 세워진다. 마치 벽돌 위에 새로운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튼
튼한 집을 짓듯 역사라는 건축물도 시간 위에 시간이, 사건 위에 사건이 쌓여가며 완성된다.
그렇게 지어진 각 나라와 민족의 역사라는 건축물들은 ‘교집합’이 생겨나고 마치 도시의 광장처럼 누구
도 독점할 수 없는 공공의 영역이 만들어진다. 예컨대 로마사는 이탈리아반도가 중심이기는 해도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 여러 나라의 역사가 뒤얽혀 있으며 공통분모를 가진 수많은 사건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교집합을 갖는다. 우리가 로마사를 제대로 공부하면 유럽사는 물론이고 아프리
카사와 중동사까지 두루 꿰고 통찰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한편 오늘날 세계는 국경이 큰 의미를 갖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국가의 틀을 벗어나 국제사회라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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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고 어울리며 살아가자면 그들의 역사를 기꺼이 배우려는 적극
적인 자세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와 접점이 거의 없어 약간 생경하게 느껴지는 타국의 역
사, 그중에서도 먼 과거의 역사에 흥미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Deficiency ‘결핍(건조화)’이 문명을 탄생시켰다: 문명 태동부터 도시국가를 거쳐 민주정 탄생
에 이르기까지
문명은 도시, 문화는 농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문명(Civilization)과 자주 혼동하는 단어가 있다. ‘문화(Culture)’가 그것이다. Culture은 라틴어 Colere에
서 유래한 단어로 ‘경작하다’라는 의미다. 이로써 문화는 특정 지역의 자연과 풍토의 영향을 강하게 받
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문명은 지역적 영향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전파된다. 즉, 지역성을 초월해 보편성을 획득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문화는 자연과 풍토의
영향을 받아 그 땅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통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문명은 농촌보다 도시와 관련이 깊다. 왜 그럴까? 인구가 밀집한 지역이 도시다. 이런 곳에 사
는 사람들은 편의성을 추구한다. 한데 다른 도시에 사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쓸모 있지 않는 한 진정한
편의성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명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대규모 ‘건조화’는 어떻게 문명 태동으로 이어졌나
문명이란 무엇인가? 학자마다 다양한 기준과 방식으로 문명을 정의하는데, 나는 ‘문자’를 기준으로 문
명을 정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본다. 문명은 문화와는 달리 지역성을 초월해 보편성을 획득한
개념인데, 그 보편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에 문자가 수행하는 역할이 매우 크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런데 문자 못지않게 중요한 문명 조건이 있다. 바로 ‘건조화’다.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
면, 세계 4대 문명이 태동한 기원전 5000년 무렵부터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 ‘건조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아프리카 북부에서 중동, 고비사막을 거쳐 중국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에서 ‘건조화’
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지구가 건조화해가는 열악한 환경에서 인류는 어떻게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룩했을까? 먼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 ‘물(강)’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크고 작은 마
을이 만들어지고 그 마을들이 통합되며 차츰 도시라고 부를만한 규모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 마을과
마을, 집단과 집단 사이에 물을 둘러싸고 분쟁이 자주 벌어졌다. 도시나 국가의 통치자는 이런 물 분
쟁 문제를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 필요에 따라 물 분쟁을 방지하는 ‘물 사용 시스
템’이 개발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졌으며, 통치자와 지배 계층은 이런 사실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생
각했을 것이고 기록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문자가 탄생했을 것이다.
제대로 역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왜?’라는 질문을 던
지는 일이다. ‘왜 문명이 탄생했는가? / 왜 도시가 생겨났으며, 문명은 어떻게 도시의 발달로 이어졌는
가? / 왜 사람들은 한곳에 모여 살았는가?’ 이런 식의 ‘왜’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문
명 태동과 발전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의 본질이 ‘건조화’에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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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ge Migration ‘대이동’하며 세계지도를 다시 그린 민족들: 게르만족ㆍ몽골제국의 드라마틱
한 역사, 대교역시대부터 난민 문제까지
‘입력’과 ‘출력’ 개념으로 통찰하는 민족이동
민족이동은 인류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후 영토를 상실한 유대인의 방랑, 영
국인ㆍ프랑스인을 비롯한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대이주, 노예무역, 전쟁 난민 등 다양한 형태
로 오늘날까지 민족이동은 이어지고 있다. 민족이동은 왜 일어나는 걸까? ‘출력’과 ‘입력’ 개념으로 살
펴보면 이해가 쉽다. 먼저 출력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민족이동의 가장 큰 부
분을 차지하는 요인은 ‘식량 부족 문제’였다. 식량 부족은 왜 생기나? 여기에는 단 한 가지로 압축해서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원인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갑작스러운 인구 폭증과 한랭화나 건조화
와 같은 이상기후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기후 변동에 따른 이동은 처음에는 소규모 인원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건조화가 일어날 때
는 물이 풍부한 곳을 찾아, 서서히 한랭화가 일어날 때는 따뜻한 곳을 찾아 소규모 집단 형태로 이동
한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극심한 가뭄이 들고 기근이 찾아오면 한자리에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그야말로 민족이동이라 부를 만한 대규모 이주를 하게 된다. ‘출력’에는 기후 변동 외에도 신
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는 이동, 노예매매처럼 인위적인 강제 이동, 전쟁 난민 등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 온 난민을 받아들이는 쪽의 상황도 제각각 다르다. 그들을 수용할 충분한 공간이 있는
지, 정치가 안정적인지, 종교적으로 관용성이 있는지 등 구체적인 환경에 따라 허용 범위는 크게 달라
지는데, 대규모 이동은 많은 경우 분쟁으로 비화하곤 한다. 한편 다른 지역이나 나라에서 이주해온 사
람 중에는 어디에서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 이리저리 떠도는 사람도 생긴다. 말하자면 그들은 정
착민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기원전 12세기 무렵 기승을 부린 바다 민족처럼 뭍을 벗
어나 바다에서 주로 생활하며 그때그때 필요한 물자를 도시를 침범하여 약탈하는 민족도 있었다.
어떤 경우든 민족이동은 전쟁의 불씨가 될 소지를 안고 있다. 개중에는 노동력이 부족한 지역에서 이
들을 받아들여 다방면의 이득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아메리카 대륙은 개척지 개발과 금광 채굴
등에 굉장히 많은 일손이 필요했으므로 이주자를 두 팔 벌려 맞아들였다. 19세기 감자 역병으로 인한
참혹한 대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이주한 사건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일구어낸 영국의 바통을 이어받아 급속히 공업화를 이루고 있었고, 상당 부분 아일
랜드 등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의 땀과 노력에 힘입어 눈부신 성장과 번영을 달성했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1776년 무렵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흥망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이 명저
로 인정받는 데는 뛰어난 문장력과 방대하고 체계적인 지식이 기여를 했지만, 나는 균형 잡힌 시각과
통찰력 면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책이 가진 뛰어난 ‘현재성’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뒤에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모든 역사는 현재사다. 아무리 오래된 역사적 사실이라도, 정치
인 등의 리더나 오피니언 그룹뿐 아니라 지금 땅에 발을 디딘 채 숨 쉬고 서로 부대끼며 일상을 살아
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만한 혜안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당시 식민지 미국이 힘을 키워 독립하자 영국인은 자국의 힘이 쇠퇴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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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세계사
버리지 못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영국인은 서로 앞다퉈 로마제국 흥망사에서 깨달음과 통찰을 얻고자
했고, 기번의 책은 인쇄하기가 무섭게 팔려나간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사실 미국의 급속한 성장은
영국에 행운으로 작용했다. 그때까지 영국으로 밀려들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가난한 사람들이 미
국으로 돈벌이에 나섰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탓에 영국에서 만성적으로 벌어지던 이런저런 혼란을 대신
흡수해준 까닭이다. 한편 오늘날까지도 미국은 세계에서 찾아오는 이민자들을 받아들인다. 그 덕분에
국가는 크게 성장했으나 인종 차별, 빈곤층과 부유층의 경제적 격차, 언어 장벽 등의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당대의 영국인은 대영제국의 말로를 로마제국의 종말과 겹쳐서 보며 우려
했지만, 사실 나는 오늘날의 미국이 로마에서 배울 게 더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로마와 미국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영토를 확장하고 제국을 완성해가는 과정과 방식의 차이가
그것이다. 로마는 주변국과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지속해서 확장해 제국을 일구었다. 그에 반
해 미국은 이미 보유한 광대한 영토를 개척해 착실히 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일손이 필요해지자 그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대규
모 이민은 미국에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했고 인구 폭발로 골머리를 앓던 주변의 여러 국가에는 남아도
는 일손을 수출함으로써 한숨 돌릴 여유를 마련했다. 이제 그 광대한 미국도 더는 개발할 곳이 없어
이민이 오히려 독이 되는 상황에 맞닥뜨려 있다. 앞으로도 미국이 계속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이야말로 미국이 로마의 흥망사에서 배워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Monotheism ‘유일신교’는 왜 항상 분쟁의 씨앗이 되는가: 세계사를 바꾼 3대 유일신교(유대
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의 탄생과 발전
극심한 종교 대립은 일신교의 숙명인가
유대교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 유대교에서 파생한 기독교는 주류 종교로 성장했다. 기독교도 처음에
는 비주류였다. 그러나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제국 국교로 공인되면서 흐름이 크게 바뀌었다. 고
대 기독교의 교부로 추앙받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활약으
로 주류로 편입되고 다수파를 점한 기독교는 반대로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을 ‘이교도’라 부르며 박
해했다. 히파티아의 일화는 그 시대상을 잘 전해준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신자는 지금도 “우리는 박해를 당했다”라고 하소연한다. 그렇게 박해를 당하던
사람들이 불과 100년 만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탄압하는 가해자가 된 셈이다. 기독교도들이 이교
도를 박해한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중세 마녀재판이지만 실제로 기독교 신자는
그보다 훨씬 이른 단계부터 이교도를 탄압하고 괴롭혔다. 슬프게도 일신교가 종교적 주류가 되자 종교
박해가 빈번히 발생했다. 이와 유사한 일이 이슬람교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 원리주의
자의 대립 외에 이슬람교 내부에서도 시아파와 수니파로 종파가 갈라져 서로 대립한다.
이러한 종교적 대립은 어쩌면 일신교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일신교는 오직 하나
의 절대신만을 믿는 까닭에 다른 신의 존재를 일절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로 인한 대립은
대부분 일신교 사이 혹은 일신교 내부에서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일신교는 항상 문제의 씨앗을 안
고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원리주의가 왜 대립과 분쟁으로 귀결되는지 생각해보자. 개신교도가 많
은 미국에는 원리주의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이 나라에서는 지금도 진화론을 믿지 않는 사람이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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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센트가 넘는다고 한다. 특히, 전형적인 기독교 원리주의자로서 ‘아미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
이 있는데, 이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독일계 이주민 집단이다. 그들은 여전히 이민 당시의 생활양식을
철저히 지키며 생활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컴퓨터와 전자기기는 물론 전화기와 전기조차 사용
하지 않고 농경과 목축 중심으로 자급자족 생활을 한다. 이들도 일종의 원리주의자다.
2006년 아미시 초등학교에 총기를 지닌 남성이 난입해 다섯 명의 어린이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비참한 사건 앞에서 아미시 사람들은 성서의 가르침대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그리스도의 말
씀을 실천하기 위해 행동을 보여주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공개석상에서 범인을 용서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심지어 사건 후 자살한 범인의 장례식에 몇몇 아미시 사람이 참석하기까지 했는데, 이 사건은
어마어마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용서를 실천한 아미시
사람들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 자식을 죽인 사람에게 분노하지 않는 모습은
정상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었다. 찬반양론은 접어두고 미국에는 지금도 많은 기독교 원리주의자가 있
다. 원리주의자까지는 아니어도 원리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찬성하는 사람도 많다.
동시에 미국은 툭하면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 중 하나다.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는 기독교가 어째서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전쟁을 없애기는커녕 분쟁과 다툼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은
걸까? 기독교 신자 이시카와 아키토는 “당시 일부 기독교 신자의 잘못”이라는 관용적 변명에 기대지
않고 이 문제를 철저히 규명하려 했다. 『기독교와 전쟁』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그는 이 책에서 만
약 기독교가 예수나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원리주의 가치관을 철저히 고수하며 살았다면 기독교는
이미 멸종했거나 설령 살아남더라도 극소수파로 전락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Openness ‘개방성’이 국가와 시대의 운명을 결정한다: 왜 아테네나 스파르타가 아닌 로마가
강국이 되었나
왜 아테네나 스파르타가 아닌 로마가 강국이 되었나
권위를 중시한 로마인과 달리 평등을 중시한 그리스인은 겉으로 드러내놓고 신분을 구별하지 않았다.
물론 그리스에도 귀족과 평민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엄연한 신분 차이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리스인은 대놓고 신분을 과시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스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과정(기원전
5세기 전반)에 많은 부작용이 생겨났다. 너무 철저하게 민주정에 집착하다가 선거가 아닌 제비뽑기로
대표를 뽑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거를 치르다 보면 물밑에서 이런저런 공작을 벌여 결과를 조작하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아예 제비뽑기에서 뽑힌 사람에게 정치를 맡기자는 식이었다.
기원전 451년 아테네 정부는 부모가 아테네 시민이 아닌 사람에게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정
을 내렸다. 철저한 직접 민주정을 실천하려는 의식이 높아지면서 민주정을 내세운 페리클레스의 지휘
아래 단행된 조치였다. 그 이전에는 아버지가 아테네 시민이면 인정해주던 시민권을 어머니까지 아테
네 출신이어야 인정하겠다는 얘기였다. 이처럼 아테네는 점점 더 폐쇄적으로 변해갔다.
한편 스파르타는 옛날부터 엄격한 쇄국 정치로 일관했는데, 이 시대의 쇄국 정치는 외부인을 받아들이
지 않는다는 좀 더 원초적 의미에서의 쇄국 정치였다. 스파르타의 총인구 중 스파르타 시민권(18세 이
상 성인 남자)을 획득한 사람은 고작 1~2만 명에 불과했다. 5~10배에 달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결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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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혹은 예속민이라는 구성원이었다. 스파르타에도 평등과 민주주의가 자리 잡기는 했다. 그러나 그
것은 어디까지나 시민권이 있는 1~2만 명에게만 주어지는 권리였다.
아테네는 스파르타만큼 철저한 쇄국 정치를 표방하지 않았지만, 역시 평등과 민주주의는 시민권이 있
는 사람에게만 적용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특히 외부인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서
외부에 상당히 폐쇄적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는 시민 요건을 까다롭게 관리해 집단의 질을 높였다. 그
리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들은 그 폐쇄적인 시민 집단 안에서 평등을 실현하고 유지하려 했다.
반면 로마는 로마 시민권을 이방인에게도 개방했다. 즉 로마는 외부인을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였는데,
이 개방성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강화되었다. 공중목욕탕 카라칼라 욕장으로 잘 알려진 카라칼라
황제(재위 211~217)는 212년 로마제국의 자유민을 모두 로마 시민으로 인정한다고 공표했다. 이 조
치로 로마에서는 노예를 제외하고 자유인이면 누구나 로마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로
마제국 시대에는 로마 시민이라고 해서 직접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원로원
이 주도하는 공화정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민주정의 반대는 독재정(군주정)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수백 수천 개에 달하는 폴리스 중 왜 유독 로마만 강국이 되었을까? 아테네와 스
파르타는 왜 로마처럼 강국이 될 수 없었을까? 여기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다. 나는 여러 요인 중 ‘개
방성’에 주목한다. 말하자면 다른 폴리스는 모조리 폐쇄적이었고 오직 로마만 개방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로마가 개방정책을 표방한 데는 국내의 엄격한 신분 구별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시민들 사이의
평등을 중시한 그리스는 외부 집단에 빗장을 닫아걸었다. 반대로 국내적으로 특권 계급 존재를 인정한
로마는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외부인을 받아들였고 자신과 같은 로마 시민으로 인정했다.
Nowness ‘현재성’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진다: 모든 역사가 ‘현재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
‘정확하게 쓰는 것’보다 ‘이해하기 쉽게 쓰는 것’이 왜 더 중요한가
역사학자는 옛날 사람들의 감수성을 이해하기 위해 그 시대 고유의 감성과 의식에 최대한 동화하려고
애쓴다. 이처럼 학자로서 시대적 감수성을 이해하려는 자세는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일반인을 대
상으로 한 책에서까지 그런 입장을 견지하면 곤란하다. 자칫 독자에게 외면당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쓴 역사서가 자주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쓰카 히사오는 “정확하게 쓰는 것과 이해하기 쉽게 쓰는 것 중 어느 쪽
이 더 중요합니까?”라는 질문에 “이해하기 쉽게 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정확하게 써도 사람들
이 읽고 들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해낸 해결책은 처음부터 ‘역사는 모두 현재
사다’라는 관점으로 글을 쓰는 방식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언제나 ‘지금’이
라는 필터로 들여다보게 된다. 즉, 지금 시점을 의식하면서 이를 강조해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미래를 예측하고 싶다면 역사를 배워라
‘모든 역사는 현재사다’라는 관점을 가지면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사실이 있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짊어지고 나
갈 젊은 인재들이 역사를 올바르게 공부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안타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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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도 오늘날 많은 젊은이가 역사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역사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역사 지식을 갖추려면 다양한 지식이 필
요하다는 점이다. 예로 철학과 종교의 경우 역사와 비교하면 그다지 다방면의 방대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지만, 역사에서는 지식의 양이 그대로 이야기의 깊이와 정비례한다. 가령 현재의 중국 공산당 정책
을 이야기한다고 가정해보자. 20세기 역사밖에 모르고 말하는 사람과 중국의 기나긴 역사를 알고 말하
는 사람의 깊이와 수준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중국은 항상 권력자가 절대적 힘을 거머쥐고 통치해
온 나라이고, 현재의 형법도 역대 권력자가 민중의 복종을 끌어내기 위해 만들어낸 처형과 처벌의 연
장선에 있기 때문에, 켜켜이 쌓여온 역사를 알아야 지금의 중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가 재미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시대별로 역사 지식을 나열
해 달달 외우는 방향으로 흘러왔기 때문이다. 즉, 지금까지의 교육과정에서는 오늘날은 이렇지만 과거
에는 어떠했는지, 지금 이렇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등 현대의 관점으로 고대를 살펴보는 사고와 인과
관계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고대사는 고대사고 중세사는 중세사’라고 생각하며, 지식을
통째로 암기하는 재미없는 학문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역사는 끊어지지 않고 우리가 사는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 일어나는 문제의 배경
에는 반드시 그 문제와 관련된 역사가 존재한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로마 역사 속에는 인류 경험의
총체가 담겨 있다”라는 말이 상징하듯, 인류가 현재 직면한 문제는 대부분 과거의 인류가 이미 경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공부하면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하고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유럽은 과거 게르만족이 로마로 유입되었을 때 어떤 일
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면 앞으로 유럽에서 일어날 일을 얼추 예측할 수 있다.
과거에 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이 들어왔을 때 가진 땅이 없는 그들을 군대에서 병사로 일하게 했고, 군
대에 들어간 게르만족은 시간이 흐르면서 높은 계급의 요직을 차지했다. 그러자 로마인 중에서 게르만
족 고위 간부를 인정하는 사람과 이에 반발하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국내가 혼란스러워졌다. 앞으로 유
럽에서 이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로마제국으로 들어온 게르만족은
지금의 독일인 선조다. 게르만족의 후예인 독일인이 이번에는 이민족 유입으로 고심하고 있으니 아이
러니하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물레방아처럼 돌고 도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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