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어린 정조는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하였다.
영조는 나가라고 엄히 호령하고
사도세자는 잘못했다고 애원했지만
뒤주에 들어가야만 했다.
사도세자 영화 포스터 1956년
혜경궁 홍씨 지음
한중록
혜경궁 홍씨 지음
▣ 저 자 혜경궁 홍씨
한중록을 쓴 혜경궁 홍씨(1735~1815)는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궁중문학의 진수를 보여준 뛰어난 작
가다.
궁중 여인의 한 많은 삶과 문학적 승화
뒤주 속에서 최후를 맞은 사도세자의 아내, 평생동안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비운의 여인, 혜경궁
홍씨는 인고의 삶을 살았던 조선시대 궁중여인의 대명사다. 그러나 고통스런 삶과는 달리 그녀는 출
중한 문장력을 가진 뛰어난 작가였다.
혜경궁 홍씨(1735~1815)는 1735년(영조 11) 본관이 풍산인 영의정 홍봉한의 딸로 태어났다. 1744년(영
조 20) 10세라는 어린 나이에 장조(莊祖) 즉 사도세자의 빈으로 책봉됐다. 입궐 후 원자를 낳았으나 어
린 자식을 일찍 잃는 슬픔을 겪고 나서, 다시 1남 2녀를 낳았다.
그 1남이 후에 조선문화의 부흥을 일으킨 정조임금이다. 왕손이 귀하던 때라 혜경궁 홍씨는 시아버지
영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1762년(영조 38) 부군인 사도세자가 죄에 몰려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고, 그 결과 7일간 쌀뒤주 속에 갇혀 죽는 비극을 겪은 후 혜경궁 홍씨는 '혜빈(惠嬪)'이라
는 호를 받고 한 많은 생애를 보내게 된다.
부왕의 명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어야만 했던 남편의 참화를 눈앞에서 겪은 혜경궁 홍씨는 그 헤
아릴 수 없는 심정에 또 한번의 아픔을 겪는다.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왕위에 오른 정조는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수를 갚겠다며 한 차례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여파로 급기야는
뒤주 속의 참사사건을 간과한 자신의 외가식구들 즉 혜경궁의 친정인 홍씨 일문을 처단하고 나섰다.
이때 혜경궁은 자신의 혈육간에 벌어지는 이러한 참사를 피눈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정조는 다시 홍씨 일문을 예우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애석하게도 정조는 51세의 나이에 세
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11살의 어린 손자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섭정을 맡는데 이로 인하여
다시금 홍씨 일문이 불운의 늪으로 몰리게 되고 혜경궁 홍씨는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혜경궁 홍씨는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할 때 궁호(宮號)가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99년(광무 3) 남
편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敬懿王后)에 함께 추존되었다. 그녀는 1815년(순조 15)
12월 15일, 81세로 기구하고도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저서 『한중록』은 남편 사도세자의 참살사건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자신
의 한 많은 생애를 사소설체로 적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계축일기』『인현왕후전』과 더불어 여인
의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는 궁중문학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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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 ho rt S umma ry
혜경궁 홍씨는 1735년 영의정 홍봉한의 딸로 태어나, 아홉 살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그 이듬해부터
궁중생활을 시작한다. 영조와 웃어른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아들까지 낳아 부러울 것이 없는 생
활을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기가 죽는 일이 벌어진다. 슬픔을 겪고 나서 다시 곧 아기
를 낳는데, 그가 바로 정조다. 이제 세손까지 낳아 고귀한 몸이 되어 총애가 더욱 극진해졌지만, 혜경
궁의 남편인 사도세자는 영조의 미움을 점점 더 받을 뿐이었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는 총명하고 성품
도 출중했으나, 영조의 애정을 받지 못하자, 공부를 소홀히 하고, 영조 앞에서는 신하처럼 고개도 못
들고 벌벌 떨었다. 이로 인해 영조는 사도세자를 점점 더 미워하게 되고 마침내 사도세자에게 병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영조가 극진히 사랑하던 화평옹주가 죽자 그 미워함이 극에 달해, 무
슨 일만 일어나면 사도세자의 짓이라 믿고 호통을 치곤 했다. 그리하여 사도세자의 병이 점점 심해지
고, 급기야 총애하던 신하도 못 알아보고 살인까지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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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혜경궁 홍씨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혜경궁 홍씨
영의정 홍봉한의 딸.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세자빈에 간택되지만 남편인 사도세
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모습을 본다.
영조
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4~1776년. 탕평책을 기본정책으로 삼아 당쟁을 눌렀다.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
사도세자
영조의 둘째 아들. 이름은 선( ). 어머니는 영빈 이씨, 부인은 혜경궁 홍씨. 신
임사화에 대한 진상을 오해하여 그 복수를 공언함으로써 당시 집권층인 노론의 미
움을 산다. 기이한 언행으로 왕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 갇혀 아사하는 비운의 왕세
자.
홍봉한
혜경궁 홍씨의 부친이자 사도세자의 장인. 하지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날 한
강에 나가 대신들과 뱃놀이를 한다.
혜경궁 홍씨의 어린 시절과 궁중 생활
선왕조 을묘년 유월 십팔일 오시에 선비께서 나를 반송방 거평동 외가에서 낳으시니, 전
날 밤에 선친께서 흑룡이 선비 계신 방안 반자에 서려 있는 꿈을 보셨는데⋯
나(혜경궁 홍씨)는 영조 을묘년 유월 십팔일 오시(오전 11~1시)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기 전날 밤 아
버지(홍봉한)는 꿈속에서 흑룡이 아내가 있는 방안 반자(방이나 마루의 천장을 평평하게 만든 시설)에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언니가 있었으나 일찍 죽어, 하나뿐인 딸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면
서 자랐다.
집안은 예부터 청렴했는데, 이 때문에 살림이 궁핍할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비록 재상가의 맏며느리
였으나 일년에 한 번도 비단 옷을 입은 적이 없으며, 상자에 단 몇 개의 패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외출의복도 단 한 벌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옷에 때가 묻으면 밤에 손수 빨았으며, 길쌈과 바느질로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나 또한 이러한 어머니에게 배운 바가 많아 어린 나이에도 남의 고운 옷을
탐낼 줄 몰랐다.
계해년(癸亥年)에 왕세자의 간택으로 단자(單子- 처녀 집에서 하는 신고)받는 명이 내렸다. 집이 가난하
니 단자를 내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나라에서 녹봉을 받는 신하의 예로써 나도 단자를
하였다. 뜻하지 않게 구월 이십 팔일 초간택이 되어, 수망(首望)(첫번째로 뽑힘)에 들고, 마침내 세자빈
으로 간택됐다.
내가 입궁해서는 영조와 인원왕후, 정성왕후 세 분 윗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나는 정월 초아흐
렛날 빈에 칭해져 열 하룻날 가례(결혼)했는데, 마침내 부모님 떠날 날이 임박하여서는 종일 울음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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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궁중에 들어와 본 남편(사도세자)은 기품이 훌륭하고 효성이 지극하셨다. 남편의 친모인 선희궁
은 천성이 엄숙하고 인자하셔서 자녀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면서도 가르침을 엄숙히 하셨다. 세자도
어머니를 매우 사랑하고 존경하셨다. 선희궁은 나도 세자와 다름없이 사랑하셨다.
나는 일찍이 임신하여 경오년에 의소(擬訴- 사도세자의 1남)를 낳았으나, 임신년 봄에 죽고 말아 세 분
의 윗전과 선희궁이 모두 애통해 하셨다. 그해 구월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으니 바로 정조임금이다. 정
조는 풍채가 훌륭하고 골격이 기이해서 진실로 용과 봉황 같은 모습이며, 하늘의 해와 같은 위풍이었
다. 신미년 시월에 세자의 꿈에 용이 침실에 들어와서 여의주를 희롱하는 것을 보고 이상한 징조라
하며 그 밤에 곧 흰 비단 한 폭에 꿈에 본 용을 그려서 벽에 걸어놓았는데, 그때 나이가 십칠 세였다.
그 해에 홍역이 크게 번졌는데 세자 또한 많이 앓았다. 병이 나은 후 나의 아버지가 세자에게 글을
읽어주었는데, 그 후로 세자는 장인의 가르침을 받았다.
세손(정조)이 홍역을 앓은 후에도 잘 자라 돌 즈음에는 글자를 능히 알고 어른같이 점잖고 책을 놓고
읽는 것이 보통 아이와 아주 달랐다. 여섯 살 때에는 유생이 전강(殿講- 성균관 유생을 대궐에 모아 임
금이 직접 행하던 시험)할 때, 대왕이 불러 용상 머리에서 글을 읽도록 하였다. 글 읽는 소리가 맑고
청아해 보양관 남유용(南有容)이 신동이 내려와서 글 읽는 소리라 하고 아뢰니 영조는 크게 기뻐했
다.
나는 갑술년에 청연(淸衍- 사도세자의 장녀) 을 낳고 병자년에는 청선(淸璿- 사도세자의 차녀)을 얻었는
데, 청연은 기질이 부드럽고 너그러우며 청선은 온화하고 아담하여 보배 같았다. 이때 나는 누구도 부
럽지 않은 해를 보냈다.
을해년 팔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병자년 이월에 선친이 광주유수(廣州留守)를 하였다. 그해 윤구월에
청선을 낳았다. 그해 동짓달 세자가 마마를 앓았는데, 그후 백일이 못 되어 정성왕후가 승하하셨다.
그때 슬퍼하는 효심이 거룩하여 모든 사람들이 감복했다. 정성왕후가 승하한 이듬해에 인원왕후도 승
하하셨다. 나를 사랑해주던 두 분을 하루아침에 잃으니 애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사도세자의 탄생과 불우한 어린시절
무신년 후로 왕세자가 오래 비오시매 영조께서 주야로 초조하시다가 을묘년 정월에 선희
궁께서 경모궁을 탄생하시니 영조께서와 인원, 정성 두 성모께서 종사의 큰 경사를 기뻐
하심이 비할 데 없고 나라의 신민이 또 뉘 아니 기뻐 춤추었으리오.
왕세자의 자리가 오래 비어있던 차에, 을묘년(영조 11년) 정월에 선희궁이 세자(사도세자)를 낳으시니
모두 큰 경사로 생각하고 기뻐하셨다. 세자는 천성과 용모가 비범하고 특이하셨다. 영조임금은 슬기롭
고 총명하여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민정을 자세히 살피는 성품이셨지만, 세자는 말없이 침중하여 행
동이 날래지 못하고 민첩치 못하니, 덕과 기풍은 거룩하나 모든 것에 있어 부왕의 성품과는 다르셨다.
묻는 말에 항상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대답하셨다. 자기의 소견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하며 곧 대답하지 못하여 영조임금이 늘 갑갑하게 여기셨다.
영조임금은 한 번 갑갑하고, 두 번 갑갑해 하다가 결국 격분도 하고 참기도 하셨다. 이럴수록 가깝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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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서 직접 가르쳐야 지극한 정이 생기게 되는데 영조임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항상 멀리 떼어 두고
스스로 잘 알아서 자기 마음에 맞기만을 기다리셨다.
세자가 병진(丙辰,영조 12)년 삼월에 동궁에 책봉되고 일곱 살 때 글을 배우고 여덟 살 때 종묘에 배
례하고 삼월에 입학하셨으니, 뛰어난 기질을 흠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계해(癸亥, 영조 19)년 삼월
에 관례(남자는 갓을 쓰고, 여자는 쪽을 찌고 어른이 되던 예식)하고 갑자년 정월에 가례하셨다.
궐내에 세 분의 대비가 계시지만 법이 엄하고 예가 중하여 털끝만큼도 사사로운 정이 없었다. 그리하
여 두렵고 조심스러워 마음을 잠시도 놓지 못했다. 세자는 부왕에게 친한 마음보다는 무서운 마음이
앞서서, 열 살 된 아기이지만 감히 부왕 앞에 마주 앉지도 못하고 신하들처럼 몸을 엎드려서 보셨다.
세수를 일찍 하는 일이 없고 늘 글 읽을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하시더니 을축(乙丑 영조 21, 사도세자
11세)년 즈음에 병을 얻으셨다.
화평옹주는 성품이 어질고 덕이 있어 오빠(사도세자)를 귀중히 여기며 친하게 지내셨다. 영조임금은
화평옹주를 지극히 사랑하여 특별히 너그럽게 대하고 즐거워하셨으므로 그 덕으로 세자의 두려워하는
마음이 점점 나아지셨다. 정묘년에는 글공부도 착실히 하셔서 근심 없이 지냈는데 시월에 창덕궁의
화재로 경희궁으로 옮기게 되면서, 화평옹주와 처소가 멀어지자 세자는 다시 공부를 멀리하고 놀이에
만 빠지셨다.
무진(戊辰,영조 24년)년 유월에 화평옹주가 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영조는 각별히 귀여워하시던 딸을
잃고 매우 애통해 하셨다. 선희궁께서도 그 슬픔이 커서 세자의 생활을 돌볼 겨를이 없으셨다. 이때
세자는 꺼릴 것 없이 놀았는데 주로 활쏘기, 칼쓰기, 기예붙이 등이었다. 또한 경문 잡서를 좋아하여
점치는 이가 쓴 글을 외우는 등 잡일에만 신경을 쓰고 경서공부는 멀리하셨다.
깊어져만 가는 부자간의 갈등
밖에서 정사하시고 들어오실 제 입으신 채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오셔, 밥 먹었느냐? 하고
물으셔 대답하시면 그 대답을 들으신 후에 그 자리에서 귀를 씻으시고 씻으신 물을 화협
옹주 있는 집 광장 대궐 담 너머로 버리셨다.
영조임금은 한번도 세자를 친근히 앉히고 가르친 적이 없으셨다. 도리어 남에게 맡겨 아는 체 하지
않다가 남들이 모인 때면 항상 흉보듯이 말씀하셨다. 영조임금은 조정에서 안 좋은 일을 말할 때에는
세자를 불러 듣게 하셨다. 화평옹주와 화완옹주가 방에 들어올 때는 옷을 갈아입고 세자를 볼 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밖에서 정사를 마치고 들어올 때 입던 채로 와서 세자를 부르고는, 밥 먹었
냐 고 묻고 세자가 대답을 하면 그 대답을 들은 후에 그 자리에서 귀를 씻고, 씻은 물은 대궐 담 너머
로 버리셨다.
영조임금은 가뭄이나 천재 이변이 있어도, 세자에게 덕이 없어 그렇다고 하며 꾸중하셨다. 그러므로
세자는 날이 흐리거나, 겨울에 천둥이 치거나 하면 또 무슨 꾸중이 내릴까 근심 걱정을 하여 일마다
두렵게 여기고 겁을 내게 되어 마침내 병이 드는 징조를 보이셨다. 그러나 영조임금은 세자에게 이런
병이 생기는 줄은 깨닫지 못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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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는 15세가 되도록 조상의 능을 찾아가는 행차에 한 번도 따라가지 못하셨다. 교외 구경을 하고
싶어 늘 영조임금의 행차에 따라가는 것이 허락될까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번번이 못 가게 되면,
처음에는 서운하게 여기다가 점점 성화가 되어서 울기도 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마침내 병
이 되어 화를 잘 내게 되었는데 화가 나면 내관과 나인에게 풀고 심지어는 아내인 나에게까지 화풀이
를 하셨다.
경오(영조 26년)년 팔월에 내가 의소를 낳으니, 영조임금이 매우 기뻐하셨다. 그러나 영조임금은 며느
리인 내가 순산 득남한 것이 기쁘기도 하지만 딸 화평옹주가 그렇지 못한 것을 더욱 애달프게 여기셨
다. 그래서 내가 순산 생남한 것에 대해 기특하다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 때문에
득남한 기쁨도 모르고 도리어 황송해했다. 세자는 아들이 생겨서 나라의 기틀이 굳어짐을 기뻐하셨으
나 부왕이 덜 기뻐하는 것에 대해 슬퍼하시고, 자기 하나도 어려운데 아이가 나서 어쩔까하며 근심하
셨다. 그러던 차 임신년 봄에 세손이 세상을 떠났다.
신미년 섣달에 다시 임신하여, 임신년 구월에 득남하니 곧 정조임금이다. 세자가 기뻐하신 것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온 나라의 즐거움이 경오년(영조 26년에 의소를 낳은 일)보다 백 배나 더하였다.
홍준해가 올린 상소 때문에 영조임금이 대단히 화가 났다. 세자가 선화문에 엎드려 대죄를 하셨는데
이 때 세자는 큰 병을 앓고 난 직후였다. 마침 설한이 혹독하여 엎드린 몸에 눈이 쌓였는데도 세자는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인원왕후께서 일어나라고 하여도 듣지 않다가 영조임금이 화를 진정한 후에야
일어나셨다.
영조임금은 그 후에도 노한 마음이 풀리지 않아 여러 차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셨다. 그
럴 때마다 세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며, 시민당 손지각 뜰의 얼음 위에 짚자리를 깔고 엎드려
대죄하시다가 창의궁에 걸어가 또 짚자리를 깔고 엎드려 대죄하시고 머리를 돌에 부딪쳐 망건이 다
찢어지고 이마가 상하셔서 피가 나기도 했다.
십여 세부터 병이 나 식사와 행동이 예사롭지 않더니 도교의 주문인『옥추경』읽은 후로 아주 기질이
변화하여 공연히 무서워하시고, 옥추 두 글자를 입에 담지도 못하셨다. 임신(영조 2)년 겨울에 그 증
세가 나타나서 계유(영조 29)년에는 경계증이 생기고, 갑술(영조 30년)년에도 그 증세가 점점 고질이
되었다. 세자의 증세가 더 심해져 문안도 안하고 강연에도 전념치 못하셨다. 마음의 병이라서 늘 신음
이 잦고 병폐한 모양이 되셨다. 어느날 영조임금이 숭문당에 들렀다가 갑자기 세자의 처소에 들르셨
다. 이때 세자는 세수도 안하고 의대 모양이 단정하지 않은 상태셨다. 그때는 금주가 엄한 때인데 혹
시 세자가 술을 먹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크게 화를 내셨다. 그리고 술 드린 사람을 찾아내라 하고,
누가 술을 가져왔냐고 엄하게 물으셨다. 세자는 술 먹은 일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너무 두려워 감히
변명을 못하셨다. 게다가 영조임금이 하도 강하게 물으니 하는 수 없이 먹었다고 하셨다. 또 누가 주
었냐는 물음에 소주방 큰 나인 희정이가 주었다고 하시니 영조가 때리며 엄책하고는 쫓아내었으며
희정이는 멀리 귀양을 보냈다.
때때로 화재가 났는데 그럴 때마다 영조는 세자가 홧김에 불을 지른 것이 아닌가 하고 화를 내시며
신하들이 있는 데서 호통을 치셨다. 그때 설움이 가슴에 복받쳐 거기서 그 불이 촉대가 굴러서 난 불
인 줄을 여쭙지 않으시고 또 변명을 않고 스스로 방화한 듯 하시니 절절이 슬프고 갑갑하였다.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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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을 지내시고 기가 막히셔서 청심환을 잡수셔서 울화를 내리시고 아무리 하여도 못 살겠다. 하
시고 저승전 앞 뜰의 우물로 가서 떨어지려고 하시니, 가을에 어머니를 잃고 서러운 정이 이를 데 없
는데 세자의 병까지 점점 심하니, 내 근심이 더하였다.
세자는 22세가 되도록 능행을 따라가지 못하시니, 언제나 갈 수 있을까 기다리다가 그 일 때문에 마
음에 병을 얻으셨다. 드디어 병자 팔월 초에 처음으로 명릉(숙종대왕의 능)에 가시게 됐다. 그때 세자
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서 목욕하고 정성을 다하여 요행히 탈없이 다녀오셨다. 다녀오시는 사이에
인원왕후, 정성왕후, 선희궁과 자녀에게까지 편지하셨는데 그 내용을 보면 조금도 병이 있는 것 같지
않고 순조롭게 환궁한 것을 스스로 큰 경사같이 여기셨다.
그해 윤구월에 청선이 태어났으나, 병이 더 심해진 세자는 들어와 보지도 않으셨다. 그해 동짓달 열흘
께 세자가 마마병에 걸리셨다. 영조임금은 세자가 병에 걸렸는데도 한번도 찾아보지 않으셨다.
정축(丁丑) 이월 십삼일에 정성왕후의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손톱이 모두 푸르고 토한 피가 한 요강
이나 되는데, 빛이 붉은 피도 아니고 검고 괴이한 것이었다. 세자가 피를 토한 그릇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영조임금께 미처 아뢰지도 못한 채 그릇을 들고 중궁전 장방(관아에 서리가 쓰던 방)에 친히
나가서 의관에게 보이며 우셨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정성왕후가 기절하니 세자가 망극해하며
우시던 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날이 밝은 후에야 영조임금이 알고 왔는데 아버지를
본 세자는 또 황공하여 몸을 움추리시고는 차마 울지도 못하고 전신을 움츠리고 고개도 들지 못하셨
다. 그러니 영조임금은 세자가 아까 울고 서러워하던 일은 모르시고 옷 입은 것, 행전(무릎아래 묶는
천)친 모양까지 꾸짖으셨다. 천지간에 터질 듯 갑갑함에 아까 그 지극하시던 모양은 다 감추어졌다.
정성왕후 승하하셨다. 영조임금은 더운 날씨에 여러 가지로 세자를 꾸짖으시니, 그대로 격화가 되어
세자의 병이 점점 더해갔다. 그래서 내관들에게 매질하는 일이 그때부터 더해지고 그 유월부터 화병
이 더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셨다.
임오화변 - 비운의 왕자, 뒤주 속에서 죽다.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짐승을 죽이거나 하여야 마음이 낫노라
어찌하여 그러하냐?
마음이 상하여 그러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마음이 상하는가?
사
랑치 않으시므로 슬프고 꾸중하시기로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합니다.
하루는 영조임금이 세자를 불러 사람 죽인 것을 추궁했다. 세자는 부왕 앞에서 자기가 한 일을 바로
아뢰었다.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짐승을 죽이거나 하여야 마음이 낫습니다.
어찌하여 그러하냐?
마음이 상하여 그러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마음이 상하는가?
사랑치 않으시
므로 슬프고 꾸중하시기로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합니다. 영조임금도 이때는 일시적으로 마음이 측은
해져서 크게 역정을 내지는 않으셨다. 그리고 내게 세자의 말이 사실이냐고 하문하셨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세자가 어려서부터 사랑을 입지 못해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병이 되었다고 하니 영조임금이
조금은 세자를 이해하시는 듯 했다. 국상후 세자가 홍릉 참배에 따라갔는데 그해 장마가 지루하다가
거동하는 날 큰비가 왔다. 영조는 날씨가 이런 것을 세자 탓이라 하고 능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로 들
어가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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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영조 37)년이 되니 세자의 병이 더욱 심해져 미행도 하시고, 화가 나면 사람을 다치게 하셨다. 한
번은 미행하려고 옷을 갈아입다가 발작하여 옷 시중드는 어미를 쳐서 죽이셨다. 세자는 아버지가 자
신을 미워하여 자신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하고 세손을 세울까 두려워하셨다.
세손빈을 간택한 후 인사를 받으러 가시는데 세자의 의대증이 발작하여 옷을 여러 번 갈아입으셨다.
망건도 역시 여러 번 갈았는데 망건의 옥간자가 마땅치 못하여 안타깝던 중 그 날 공교롭게 통정옥관
자(通政玉貫子,정3품 관원에게 붙이는 옥관자)를 붙이고 가셨다. 사현합에서 대소조가 만났는데, 그 통
정옥관자가 호반(무관)의 관자같이 크고 괴이하여 왕세자답지 않으셨다. 영조임금은 그 관자를 보자마
자 세손빈이 들어오기도 전에 보지 말고 돌아가라고 꾸중하셨다. 그래서 세자는 며느리를 보지도 못
하고 돌아가셨다. 세자는 날로 슬퍼하시고 날로 병이 더하였다.
삼월이 되자 병이 더욱 위독해져서 화병이 나면 내관 나인들에게 감히 못할 말을 시키니 그것들이 죽
을까 두려워서 큰 소리로 해괴망측한 말을 했다. 맹인들을 불러 점을 치게 하다가 그들이 말을 잘못
하면 죽이기도 하고, 의관이며 역관이며 마음에 안 들면 죽이니 하루에도 대궐에서 사람 죽은 것이
여럿이었다.
오월이 되자 동궁은 홀연 땅을 파고 집 세 간을 짓고 사이에 장지문을 해 닫아서 마치 광중(壙中 구
덩이 속·주로 시체를 묻는 구덩이) 같이 만들고 나드는 문을 위로 내고 널빤지로 뚜껑을 하여, 사람
이 겨우 다닐만 하게 하고 그 판자 위에 떼를 덮었다. 그리하여 땅 속에 집 지은 흔적도 없게 되자
묘하다 하고, 그 속에 옥등을 켜 달고 앉아 있기도 하셨다.
그날 아침에 선희궁이 영조임금에게 가 울면서 아들의 병과 세손 모자를 부탁하는 말을 하시자, 영조
임금은 세자의 처소로 거동하겠다는 명령을 내리셨다. 세자는 스스로 위태함을 느끼고 아무 소리 없
이 기계와 말을 다 감추어 두고 교자를 타고 경춘전 뒤로 오셔서 나를 부르셨다. 그때가 오정쯤 되었
는데 홀연히 무수한 까치떼가 경춘전을 에워싸고 울었다. 세자는 장한 기운을 보이며 언짢은 말도 없
이, 고개를 숙여 깊이 생각하고 양 벽에 기대어 앉았는데 놀란 듯 핏기가 없는 얼굴로 나를 보시며,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들이 무서워. 라고 하셨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
없이 앉았는데 이때 영조임금이 세자를 부른다는 전갈이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자는 피하자는
말도 달아나자는 말도 않고 좌우를 치지도 않으셨다. 화난 기색이 조금도 없이 용포를 달라 해 입으
면서 세손의 휘항을 가져오라 하셨다.
의대병환으로 무수히 여러 가지를 입으시다가 어찌하여 생무명 한 벌이나 입으셨는데, 그날도 생무명
옷을 입고 계셨다. 대조께서 항상 뵈어도 도포를 입고 계시다가 그날 처음으로 무명 옷 입은 것을 보
시고 그 병환은 모르시고, 세자가 나가자 영조의 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 나를 없이하고자 한들 생
무명 거상을 어찌 입었느냐? 세자는 벌써 그 앞에서 용포를 덮고 엎드려 계셨다. 신시(오후 3시와 5
시 사이)전후쯤 내관이 들어와서 밖 소주방(궐의 부엌)에 있는 쌀 담는 궤를 내라 하였다. 이것이 어찌
된 말인지 당황하여 내지 못하고 있는데 세손이 망극한 일이 있는 줄 알고 문정 앞에 들어가,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하였다. 영조임금은 나가라고 엄히 호령하고 세자는 잘못했다고 애원하셨지만 궤에 들
어가야만 했다.
세자는 이미 폐위되었다. 나도 따라서 서인이 되어 세손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돌아갔다. 이십일 신시
- 9 -
쯤 폭우가 내리고 뇌성도 쳤다. 평소에 우레 소리를 두려워한 세자는 비바람에 천둥치던 그날 밤 뒤
주 속에서 한 많은 젊은 생을 마치셨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당쟁의 고리
동궁께서 비록 아드님이시나 그때 오히려 어린 나이시니 나만큼 자세히 모르실 것이니
모년에 속한 일은 무슨 일이든지 저에게 물으시고 외인의 시끄러운 말은 곧이 듣지 마십
시오. 그것들이 일시 총애를 얻으려고 상감께 별 소문을 들어다가 아뢰도 모두 괴이한 말
이옵니다.
정조임금이 승하하시고 세손(정조)이 등극했는데도 나는 걱정이 많다. 뒤주사건에 대하여는 당색에 따
라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하는데 한 편은 그 처분이 옳았다고 하며 영조임금의 성덕 대공을 칭송하여
조금도 애통망극해하지 않았고 세자를 불효한 죄로 돌리고 영조임금의 처분이 무슨 적국을 소탕하거
나 역변을 평정한 것처럼 주장했다. 또 한 쪽은 세자가 본래 병이 아닌데 영조임금께서 참언을 듣고
그런 지나친 처분을 한 것이니 복수를 하여 원통한 치욕을 씻자는 주장이었다.
나는 두 가지 논의가 모두 영조임금과 세자에게 누덕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세자의 병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종사를 보전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영조임금이 그러한 처분을 내리게 되었다 본다.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화려한 궁중생활에 가려진 인간적 갈등
『한중록』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실존인물이다. 그것도 평범한 사대부나 일반백성이 아닌 왕실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외형적으로는 완벽함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항상 온화하고 부족함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그러나 『한중록』에서 그려지는 왕실의 모습이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엄숙하고 완벽할 것 같은 궁중의 생활, 특히 왕과 왕자의 삶이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화려하거나 부
러운 것만이 아님을 이 작품은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사에서 늘 일어나는 불안과 갈등, 시기와 음
모가 그 고요한 왕실에서도 끊이지 않음을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사도세자나 영조는 부자간이지만 그 성격이 매우 달랐다. 사도세자는 성급하고 과격한 영조와 달리
말이 적고 매우 신중했다. 게다가 궁중에 갇혀 살아야 하는 숙명적인 사회적 제약과 어머니에 대한
남다른 그리움, 소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오는 본능적 증오감이 끔찍한 부자간의 비극을 낳은
것이다. 사도세자의 반항과 알 수 없는 괴이한 행동을 현대의학으로 보자면 신경증과 조울증, 강박신
경증 등의 증세다. 그 원인은 유전성과 어렸을 때의 환경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작가인 혜경궁 홍씨도 작품 내의 인물로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사가(私家)와 왕가를 서로 이동한다.
그녀가 10세라는 어린 나이에 평온하지만은 않은 왕실의 식구가 되면서부터 그녀는 일반 사대부가 여
인네의 그것과는 너무나 다른 길을 걷는다. 가장과 시아버지 사이의 피를 부르는 갈등과 그것을 간과
할 수밖에 없었던 친정에 대한 미묘한 감정. 더불어 아들과 친정 사이의 또 다른 긴장감. 남편의 죽음
과 친정의 몰락 앞에 그 누구의 편에서도 당당히 설 수 없었다는, 그래서 비극의 방관자 내지 동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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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도 불행한 운명의 피해자라는 피해의식, 그 깊은 한을
자식 대에서 아니 손자 대에서라도 풀어보고자 했던 보상심리가 상반되어 재현되는 이중적 구조가 작
품의 전체를 이룬다. 이때 불열, 불효, 부자, 불우의 자화상이 추출되며, 결국 심층적인 의식에서는 완
전한 나 를 향한 주체의식이 나타나고, 나 의 존재의식은 결국 왕권확립으로 귀착되어 죄인의 자손으
로서의 나 를 벗어나고자 함에 있다.
또한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 사건 전·후의 역사적 현장에서 한 인간으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어머니로서 자신의 효가 충과 일치하며 윤리에 어긋남이 없음을 강조했고, 사도세자를 법도에
따라 예로 섬겨 아내의 도리를 다하면서도 병에 시달리는 남편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야 했고, 남편의
난폭한 행위를 두려워한 나머지 경원하게 되며 남편의 모든 것을 체념해야 하는 복합성을 보여준다.
또한 세손인 정조를 위해 남편과 거리를 두어야 했고 시누이 화완옹주에게도 몸을 굽히는 등 강인한
모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궁중생활사의 보고,『한중록』의 문학적 진면목
『한중록』의 공간배경은 바로 궁중이다. 따라서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모두 당시의 궁중생활사
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또한 작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드러내는 유려한 문체는 만
연체의 전형이며, 그 저류에 흐르는 한의 미학이 문체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고어와 아름다운
궁중어를 보유하고 있는 점이『한중록』의 중요한 가치이다. 『한중록』은 복합문을 많이 쓰고 있으
며 수식어보다 요약적이고 정지적인 체언형의 문장이 많다. 그리고 확장된 직유법보다는 단순한 직유
법을 많이 쓰고 강한 직유를 통해 전달의 효과를 꾀하고 있다. 종결어미에서도 슬픔이나 탄식, 하소연
이 서술형과 의문형의 간접적 표현을 채택하고 있다.
『한중록』에 기술된 중요사건들의 내용들을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들과 비교해 볼 때 일치하는 부분이
너무도 많고, 때로는 실록에서 간략하게 다룬 내용을 충실히 보완하는 경우까지 있다. 이는 『한중
록』을 단순한 회고록이나 궁중소설이 아닌 또 다른 역사자료로 볼 수 있는 증거가 된다.
『한중록』이 우리 문학계에서 가지는 특성은 높은 신분의 여성이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의식적으
로 남긴 작품이라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한 관련 인물의 증언으로서 글
쓰기가 인간에게 가지는 의미를 살펴 볼 수 있게 한다. 크게 둘로 나뉘는 『한중록』의 그 첫번째가
단순회고담이라면 나머지 세 편은 적극적인 변호문에 가깝다. 혜경궁은 이 후반부의 독자로 순조를
염두에 두었으며, 글을 쓰는 동안 험난한 인생을 반추해 정리하면서 고통스런 기억을 확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중록』은 한(閑)가한 글이 아니라 대단히 진지하고 치밀한 글이다. 왕의 친조모로서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지위에 있는 한 인간이 구태여 흐릿한 정신을 집중하면서까지 집
안 문제와 관련하여 이 글을 썼다는 점은 글쓰기가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역사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여성 실기 문학의 정수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이 이루어진 임오화변(壬午禍變)을 중심으로 혜경궁 홍씨가 자
신의 기구한 일생을 엮은 자서전적인 장편회고기록이다. 이 작품의 주된 목적은 사도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임오화변의 생생한 목격자로서, 당시의 진상을 밝히고 장차 순조에게 보여 억울하게
죽은 친정의 한(恨)을 풀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당시의 정치풍토가 잘 나와 있으며 또한
- 11 -
궁중의 생활과 조선 여성의 이면사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풍부한 작품이다.
『한중록』은 영조의 며느리이자 장조(사도세자)의 아내, 그리고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가 1795년
(정조 19)부터 1805년(순조 5)까지 대략 10여 년 동안 4편으로 나누어 쓴 글을 후대에 합한 작품이다.
대체로 첫번째 글은 혜경궁 홍씨가 회갑인 해에 친정의 조카인 한수영의 요청으로 일생을 회고하며
썼다. 혜경궁의 출생에서 사도세자의 죽음, 그리고 홍국영의 몰락까지 사정, 순조 탄생 및 혜경궁의
회갑연의 기쁨 등등을 기록했다. 나머지는 친정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쓴 글이다. 이 글에서
혜경궁은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한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
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된다. 후반부에는 정적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
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
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두번째는 작가가 67세 때(1801, 순조 원년) 정조 승하 직후 아버지 홍봉한의 실각, 숙제 홍락임의 죽음
등에 충격을 받고 쓴 글이다. 임오화변 후 시누이 화난옹주 모자(정처·정후겸)의 전권시대가 열림으
로써 바뀐 정국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친정 경주 김씨들이 합류하고, 여기에 개인적 원한풀이
를 겸해 홍국영·김종수가 합세하여 홍봉한 형제가 몰각한 경위를 밝혔다.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 사건의 배후에는 홍국영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
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며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세번째는 작가가 68세 때 순조의 효성에 호소하며, 김귀주 일파의 모함의 내막을 밝힌 글이다. 정조가
살아있을 때 작가에게 한 효도를 회상하면서 홍국영의 세도정치에 속아 정조가 외가에 했던 일들을
후회하고 갑신년에 풀어주겠다고 약속했음을 술회하고 다시금 홍봉한에 대한 음모를 반박했다. 혜경
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
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했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
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마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
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네번째는 작가가 71세 때, 부친 홍봉한이 영조에게 뒤주를 드렸다는 모함을 해명하기 위해 임오화변
의 진상을 밝힌 글로, 전적으로 사도세자 사건의 내막을 파헤친 글이다. 이 글은 순조가 알고 싶어해
서 그 생모이자 정조의 후궁인 가순궁이 써내라하므로 쓴다고 서문에 적혀 있다. 제 여기에는 을측
4월일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가 죽은 해이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 나인들
과 세자 생모인 영빈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
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사
- 12 -
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하게
생활했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유배시
켜, 9일 만에 절명케 했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와 벽파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했기 때문이다. 작자는 양쪽 의논
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 라며 분노한다.
『한중록』의 골자가 되는 사건은 영조 46년(1770)에서 정조 2년(1778) 사이에 왕비(정순왕후)의 친정
경주김씨와 전세자빈의 친정 풍산홍씨의 정권다툼으로 작자의 지친이 화를 당한 일을 말한다. 즉 한
유(韓鍮)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이 실각하고, 삼촌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원인이 된 정조
초,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류혐의를 해명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홍봉한의 사도세자사건 배후설이다. 홍봉한은 당시 좌의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넘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주의 후예로 명문 친
정이 자기 때문에 망했다는 죄책감으로 써낸 것이다. 『한중록』도 정계야화로서 역사의 보조자료가
된다. 임오화변의 이유 및 홍봉한 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한중록』은 소설로 볼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으며, 문체는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과거를 회상해 종래의 양반집과 궁중생활의 이모저모를 세세히 묘사
하고, 평생토록 가슴에 맺혔던 통한을 호소했으며, 우아한 문체로써 사도세자를 싸고도는 자신의 기박
한 일생을 여실히 묘파하고 있다.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어, 궁중풍
속 등의 보고라 할 수 있다.
▣ 혜경궁 홍씨의 생애와 작품
1735
영조 11년 6월 18일, 풍산인(豊山人) 홍봉한(洪鳳漢)의 4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743
9세 되던 해 가을, 세자빈 후보로 간택됐다.
1744
영조 20년, 10세 되던 해 정월 국혼을 치르고 입궁했다.
1762
영조 38년, 28세 되던 해 부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을 겪고, 혜빈의 칭호
를 받았다.
1776
정조 즉위 원년에 혜경궁의 칭호를 얻었다.
1795
정조 19년 회갑되던 해에 친정조카의 요청에 따라 『한중록』제1권을 썼다.
1801
순조 원년 67세 때, 정조 승하 직후 둘째 동생 홍락임의 사사, 이미 고인이 된 부친의 역적
누명 등에 충격을 받고 『한중록』 제2권을 썼다.
1802
순조 2년 68세 때, 정조의 지극했던 효성을 되새기고 손자 순조의 효성에 호소하기 위해
『한중록』 제3권을 썼다.
1805
순조 5년 71세 때, 임오화변의 진상을 폭로하여 부친이 뒤주를 바쳤다는 누명을 벗기고자
- 13 -
『한중록』 제4권을 썼다.
1815
순조 15년 12월 15일, 81세의 장수를 누리고 창경궁 경춘전에서 별세했다.
1899
광무 3년, 남편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로 함께 추존되었다.
【세계도(世系圖)】
현종
제19대 숙종
명성왕후
인경왕후 김씨(3녀, 早死)
인현왕후 민씨(無子)
인원왕후 김씨(無子)
희빈 장씨
제20대 경종
성수(女)
숙빈 최씨
영수(女)
제21대 영조(연잉군)
?(女)
명빈 박씨
연령군
숙종
제21대 영조
숙빈 최씨
정성왕후 서씨(無子)
정순왕후 김씨(無子)
정빈 이씨
진종(眞宗:孝章世子)
화순옹주(和順翁主) = 월성위(月城尉)
영빈 이씨(宣喜宮)
장조(莊祖:思悼世子) =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화평옹주(和平翁主) = 금성위(錦城尉)
화협옹주(和協翁主) = 영성위(永城尉)
화완옹주(和緩翁主) = 일성위(日城尉:鄭致達) → 양자:
정후겸(鄭厚謙)
귀인 조씨
숙의 문씨(폐)
화유옹주(和柔翁主)
화령옹주(和寧翁主)
화길옹주(和吉翁主)
영조
장조(장헌〈사도〉세자)
영빈 이씨
제22대 정조
혜빈 홍씨
효의왕후 김씨(無子)
의빈 성씨
문효세자(文孝世子, 早死)
수빈 박씨
제23대 순조(純祖)
숙선옹주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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