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준 지음 / 호밀밭
21세기 대한민국, 그중에서도 노인 인구 비율이 가장 가파르게 상승하는 대도시 부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함께 기억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덴마크 제2의 도시 오르후스의 박물관에는 치매 어르
신을 위한 특별한 집이자 방인 ‘기억의 집’이 있다. ‘기억의 집’은 현재 치매를 앓고 있는 이들이
10대 혹은 20대를 보냈던 1950년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이곳은 치매 어르신이
그리워하던 풍경들, 그들이 즐겨 먹던 음식의 냄새와 손때가 묻은 집기를 제공해 의식 깊숙이 존
재한 잔존 기억을 발견하도록 안내한다.
기억의 집
우동준 지음
▣ Short Summary
2021년 4월, 음악, 연극, 사진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워킹그룹이 구성되었다. 이들은
고령화된 도시 부산에서 이웃이 마주한 ‘치매’를 함께 고민하고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어르신만의 집
을 지어 서로를 치유하고자 모였다. 낯선 주제,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이곳에 모인 각자의 이유는 서로
닮아 있었다. 중증 치매 어머니를 모시며 보호 가족으로 지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 사람부터 혹시 자
신도 치매를 앓진 않을까 막연한 두려움이 있던 사람까지, 각자의 경험은 ‘치매’라는 단어로 이어졌다.
이 책의 1장은 책 집필을 맡은 우동준 작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자는 팔순이 넘어 치매를 앓았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치매를 마주한 첫 느낌을 생생히 묘사한다. 할머니를 떠나보낸 지 2
년이 흐른 시점, 저자는 오랜 시간 이어온 지난 고민을 함께 해결해보자는 제안을 받고 여러 예술인이
모인 자리에 발을 디딘다.
책의 2장은 저자를 포함한 여섯 명의 예술인이 여러 차례 만나며 기억의 집을 차근차근 설계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억부터 시작해 ‘치매’라는 단어와 마주할 때 느껴지
는 감정, 치매 어르신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들의 기억을 꺼내는 방법 등에 대해 논의했고, 어르신과
교류한 경험이 풍부한 문화예술가, 직업적으로 많은 치매 어르신을 만나온 사회복지사 등을 만나 이야
기를 듣기도 한다. 이 책의 3장은 여섯 명의 예술가가 그동안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공
간을 구성하고 기억의 집을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여정이 담겨 있다.
이들은 ‘기억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4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첫 번째 프로그램〈슬로우 고고〉는 사
상구 학장동 문화공간 세이브트리와 구덕천 산책로에서 열렸으며, 치매 어르신과 가족 등이 음악으로
예술가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감성과 기억을 나눌 수 있게 기획했다. 두 번째 프로그램 〈사라져 버린,
사라져 버릴 것들에 대하여〉는 수영구 수영동 바람길작은도서관에서 열렸으며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무는 참여형 연극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번째 프로그램 〈오늘, 내일 그리고 어제〉는 영도구 동삼동의 한 주택에서 진행되었으며, 단절로 인
식되는 치매의 부정적 이미지를 지우고 나이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해
기획되었다. 마지막 네 번째 프로그램 〈순자 씨의 북청화첩〉은 해운대구 중동 북청화첩 갤러리에서 열
렸으며 경증 치매를 겪는 해녀 인터뷰를 바탕으로 시각예술과 미술체험을 결합하여 구성하였다. 각 프
로그램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이 책의 4장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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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 차례
추천사
프롤로그 - 세심히 초대하는 시도
Chapter 1. 오래된 나의 집
우리 할머니는 잠이 많아요 / 그 요양병원에선 웃음소리도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왜 치매는 각
자가 고민해야 할까 / 기억의 집을 시작하다 / 이건 도시와 벌이는 한판 승부 / [Cover Story] 이제 치
매를 이야기해야 할 때
Chapter 2. 기억의 집을 설계하다
기억이란 무엇일까요? / 이 프로그램이 정말 공감받을 수 있을까요? /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까
요? / 우선 각자의 기억부터 나눠보아요 / 우리, 기억의 집을 위해 더 많은 분과 만나봐요 / [Cover
Story] 치매 어르신을 케어하는 두 사회복지사와의 대담
Chapter3. 조금씩 지어지는 기억의 집
어르신과 함께 하는 것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어떤 태도로 어르신을 대해야 할까요? / 어르신, 만
나서 반가워요! / 너무 어려워요...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 [Cover Story] 치매와 사회적 관계망 - 치
매 환자의 실종 이슈
Chapter 4. 기억의 집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첫 번째 기억의 집(슬로우 고고) / 두 번째 기억의 집(사라져 버린, 사라져 버릴 것들에 대하여) / 세 번
째 기억의 집(오늘, 내일 그리고 어제) / 마지막 기억의 집(순자 씨의 북청화첩)
에필로그 - 기억의 집을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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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기억의 집
우동준 지음
오래된 나의 집
우리 할머니는 잠이 많아요
유달리 꾀가 좋던 우리 할머니는 나이 팔순을 넘긴 해부터 치매를 앓았다. 앓았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나의 할머니는 마치 친구처럼 우연히 찾아온 치매와 함께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치매는
다른 질병처럼 허리가 아프거나 심한 두통이 오듯, 뜻 모를 통증을 유발하지 않는다.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는 내가 치매라는 걸 인지했을 때가 가장 큰 두려움이지, 정작 치매 당사자에게 찾아오는 육체
적 고통은 그리 강하지 않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평안해지고, 나를 사랑했던 사람은 힘들어지는 아이러니한 질병 치매. 그렇게 어
느 날 홀로 두 딸과 한 명의 아들을 키운 나의 할머니는 치매 환자가 되었다. 노년이 되고 할머니는
자식들의 여유에 따라 감정에 따라 이모 집에서 우리 집으로, 우리 집에서 삼촌 집으로 몇 년씩 거처
를 옮기며 생활하셨다. 할머니와 함께 지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하며 아이들을
키웠던 그는 같은 시절을 통과하는 여느 노인이 그렇듯 살아남기 위해 뾰족하고 날카로운 성격을 가져
야만 했다. 우리 집에서 보내는 6년 동안 툭툭 던지는 언어와 날카로운 고함, 일상적인 안부에도 별다
른 응답이 없는 무뚝뚝함 때문에 성장기의 나와 동생은 많은 상처를 받기도 했다.
내게 할머니는 늘 화가 나 있는 사람, 그뿐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먼저 건네는 말은 언제나 두 가지였
다. ‘밥은 먹었느냐’는 질문과 ‘엄마는 언제 오냐’는 질문, 서로를 향해 별다른 질문을 잃자 관계는 느슨
해졌고, 할머니도 우리도 서로를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나이가 될 때
까지 홀로 살아가겠다 고집을 부리셨다. 다들 차갑고 습진 골방에 계시지 말고 함께 살자고 했지만,
할머니는 기어코 고집을 부리셨다. 그러다 할머니가 우리에게 돌아온 건 미끄러워 넘어져 꼬리뼈를 심
하게 다친 이후, 급격하게 의미해진 기억 때문이었다. 치매 초기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진단, 그날
이 시작되었다.
어제와 별다른 것 없는 하루였지만, 기억이 희미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머니는 많은 일에 불안해
했다. ‘이 나이 되면 가물가물한 게 당연하지!’라며 호통을 치던 당당한 할머니는 사라지고, 리모컨을
어디 두었는지 모르겠다면 불안해하는 할머니, 내가 아까 가스레인지 불을 껐냐며 불안해하는 할머니
의 모습만이 남았다. 치매보다 앞서 찾아온 불안, 자연스럽던 일상의 모든 여유가 이젠 불안한 기업의
빈틈이 되었다. 치매는 늘 다른 가족의 아프고 불행한 이야기였지만, 이젠 나와 가족의 구체적인 도전
이 되었다. 치매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할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치매의 가장 큰 아픔은 나를 계속 의심하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 자연스럽게 행하던 모든 움직임과 하
루의 습관에 더는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주는 상실감 말이다. ‘의심’은 일상을 두렵게 만들었고, 모
두를 위해 이것이 안전하다는 빈약한 근거로 할머니는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우리도 할머니의 하루를
긍정하지 못했고, 할머니 당신조차도 자신의 일상을 더는 신뢰할 수 없었다. 결국 누구나 그렇듯 일상
을 단조롭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하고야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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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요양병원에 등록한 할머니는 씩씩했다. 여기서 밥도 주고 간식도 때마다 챙겨준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할머니는 고스톱 하나를 챙겨 들고 매일 병상에 앉아 색색이 꽃 모양을 맞추는 일만 하셨다. 나도 시
간이 날 때마다 할머니에게 찾아가 함께 고스톱을 쳤다. 동전을 한 가득 벌어도 당장 쓸 곳이 없던 할
머니였지만, 망설임 없이 패를 맞추고 기뻐하는 얼굴이 좋았다. 손에 쥐여 드리는 동전이 할머니를 향
한 격려이자 곁에 늘 함께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대한 보속이었다.
보호사 선생님께 들은 할머니는 내가 없어도 늘 고스톱의 패를 맞추는 놀이를 홀로 하셨다고 한다. 아
마 당신 스스로 나의 기억을 짐작하는 지표로 꽃의 모양으로 삼지 않았나 싶다. 매일 그리고 매주 고
스톱을 치며 불안을 잠재우셨겠지만, 할머니의 활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갈수
록 할머니의 눈꺼풀은 무거워지기만 했다. 그렇게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던 짧은 고스톱 시간마저 사
라지고, 할머니는 낮엔 낮대로 꿈을, 어두운 밤이 되면 밤대로 꿈을 꾸었다.
혹여나 오늘은 피로가 풀리셨을까 찾아가 보아도 할머니는 주무시기만 했다. 할머니 곁에 있는 다른
입원 환자도 깨어나지 않았고, 그 옆에 있는 할머니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너무 깊은 잠에 빠져있
었다. 똑같이 수많은 침대가 있는 산부인과는 아기의 울음소리로 가득했지만, 수많은 노년이 누워있는
요양병원은 그 어떤 소리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배도 고프지 않으신지 점심시간에 찾아간 할머니도, 주말 저녁 시간에 찾아간 할머니도 눈을 감고 계
셨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할머니 곁에서 가져간 책을 읽는 사이 할머니가 불현듯 깊은 잠
에서 깨 나를 보고 반갑게 불렀다. ‘오랜만이네, 우 서방.’ 할머니는 더 이상 나를 보며 ‘동준아’라고 부
르지 않았다. 밥은 먹었느냐고 살갑게 묻지도 않았다. 남은 기억 속 아버지를 찾아 나를 부르거나, 오
늘 아침에 만난 무서운 복지사 선생님으로 부를 뿐 나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나도 할머니에게 나를
알아보겠는지,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미소와 함께 오늘도 만나서 반갑다는 표
시만 할 뿐, 할머니 앞에선 나도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기억의 집을 시작하다
많은 이가 어쩔 수 없이 요양병원을 선택하는 걸 보았다. 그리고 요양병원이라는 공간에서 많은 치매
환자를 기계적으로 관리한다는 것도 똑똑히 보았다. 적당한 약물에 의해서, 깊은 수면에 의해서 누구
도 불편하지 않도록 어르신을 천천히 수동적 존재로 만드는 곳임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아흔을 넘긴
나의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자존을 잃지 않고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마지막 표정을 기억할수
록 그가 보냈던 시간이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했는지를 되새긴다. 치매 진단 이후에도 머리의 기억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기억까지 함께 사용하던 할머니. 다양한 감각을 사용하며 이따금 재생되는
기억을 통해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을 전하고 뒤늦게 자녀와 화해를 시도했던 할머니였다.
우리가 마주한 기적 같은 시간을 단순히 한 사람만의 특별한 경험으로 남길 순 없었다. 나는 할머니와
같은 침상을 사용했던 어르신의 이야기도 궁금했고 매주 면회로 찾아오던 가족들의 고민도 궁금했다.
모두 각자가 통과한 시대에 맞는 고유한 이야기와 추억이 있을텐데, 우린 그저 속수무책으로 너무 많
은 기억을 잃어가고만 있다.
우리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치매로 고통 받는 다른 가족도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 더 많은 기억의 나
눔이 치유와 공감, 상처받은 정서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도시 부산에
서 기억이란 단어를 꺼내길 너무 어렵다. 더 이상 골목을 기억하지 않는 이곳은 서둘러 어제를 지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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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오래된 것을 거리에서 치운다. 조금도 새롭지 않은 모습의 건물들이 하늘 높이 오르고 또 오르는 도시
에서 기억은 값비싼 사치품일 뿐이다.
가난한 이들의 공간은 위협받고, 부유한 이들의 공간은 넓어진다. 누군가의 기억이 위협받는 동안, 누
군가의 기억은 보존되는 것이다. 육중한 포크레인이 부수고 있는 지금 저 주택 낡은 베이지색의 2층짜
리 주택은 누구의 보금자리였을까? 저 공간엔 어떤 기억이 담겨 있을까? 눈부신 미래를 만든다는 이
유로 너무 많은 골목과 집이 사라지지만, 저 공간엔 누가 살았고, 어떤 기업이 담겨 있을지 고민하는
이들의 숫자는 너무나 적다.
하나의 공간엔 하나의 기억이 있기 마련일 테니 오늘도 수십의 기억이 무너지고 있다. 구체적인 과거
는 사라지고 아직 도달하지 않은 미래만 남은 도시, 기억을 떠올려줄 골목, 지난 추억이 담긴 숲길, 어
린 시절의 그리움이 담긴 강변이 사라지는 나의 도시에서 우린 모두 저마다의 기억을 하나씩 잃어간
다.
기억에 집중한 탓이었을까. 나는 자연스레 주변의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동세대 청년의 고민
부터 세대 간 격차까지 내가 만나는 주변 사람들의 언어를 하나씩 기록해갔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
도, 기록한다면 언젠가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매일을 기록으로 채워가던 내게 어느 날 한 통의 전화
가 걸려왔다. 오랜 시간 이어온 지난 고민을 함께 해결해보자는 제안이었고, 나는 급히 차 시동을 켜
고 부산문화재단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난 각자의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다섯 명의 문화예술인을
만났다.
우리를 한 곳에 불러 모은 부산문화재단 문화공유팀 김연진 주임. 그는 고령화된 도시 부산에서 이웃
이 마주한 ‘치매’를 함께 고민해보자 했다. 문화예술로 치매를 바라보고,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어르
신만의 집을 지어 서로를 유지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해보자 했다. 오랜 시간 고민해왔던 주제 ‘치매와
기억’. 이들과 함께라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지의 시간. 앞으로 우리의 1년을 가득 채울 프로젝트의 이름은 바로 ‘기억의 집’이었다.
조금씩 지어지는 기억의 집
어르신과 함께 하는 것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치매 당사자를 향한 예술적 접근’이 고민의 시작이었지만, 우리의 대상이 치매 초기 증세를 겪는 한
사람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치매 당사자는 ‘치매 진단을 받은 이’와 ‘스스로가 의심스러운 이’, 나의 어
머니와 이모처럼 ‘혹시 나도 치매이지 않을까’ 염려하는 모든 사람이기도 했다.
우리가 초대할 프로젝트 대상은 분명했지만, 폭넓은 예술 접근을 위해 그보다 넓은 범위의 어르신을
만나보기로 했다. 영어 공부를 시작할 때 가장 기본적인 문법부터 꺼내듯 전반적인 프로그램 흐름을
잡기 위해선 노년 세대와 함께 하는 작업의 의미부터 하나씩 되짚을 필요가 있었다.
시야를 넓히기 위해 각 분야 전문가들을 모셔 이야기를 청해 듣기로 한 후, 가장 먼저 섭외한 분은 반
달 님이다. 반달은 다양한 지역 축제를 진행하며 청년예술가와 어르신의 교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예술을 통해 어르신 내면에 담긴 고유한 이야기를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는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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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저도 지금 여러분의 고민하시는 것처럼 음악의 힘으로 이야기를 꺼내본 경험이 있어요. 어르신과 그림
책 하나를 꺼내 들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내게 익숙한 음에 담아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보는 것
이죠. 그런 차원에서 여러분도 어르신과 함께 그림책을 봐도 좋겠어요. 부산분들 특유의 거칠고 투박
한 언어 속에서도 그림책이 보여주는 부드러운 색채가 내 과거의 기억을 하나둘 떠오르게 하거든요.
그때 할머니들은 자신이 잊고 있던 지난 기억과 이야기를 되찾기 시작하면서 삶이 새로 시작하는 것
같다고, 새로 살아가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특히 제 기억에 남는 분이 있어요. 가벼운 치매 초기 증상이 있던 어머니였는데, 약간 삐딱하게 걸으
셔서 바로 알 수 있었죠. 매번 수업 시간이 마칠 때마다 따님이 모시러 왔어요. 그런데 하루는 따님이
어머니가 훨씬 젊어지셨다고, 전과 다르게 총기가 생겼다고 하시더라고요. 알게 모르게 함께 시도했던
예술적인 접근과 체험이 영향을 미쳤던 게 아닐까 싶어요. 한 번에 성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지속해서
반복한다면 개인의 만족도도 높아지고 다양한 신체 감각도 되살아난다고 생각해요.
2015년도에 탱고가 파킨슨병과 뇌졸중에 효과가 있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다른 춤도 효과는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탱고의 치매 예방 효과가 높았던 이유는 도파민이 나오기 때문이었어요. 탱고는 마주한 사
람과 포옹하고 가까이 눈을 맞대고 있으니 설레는 마음, 즉 도파민이 나온다는 거죠. 탱고 춤을 보면
서로 몸을 맞댄 상태로 진행하는 여러 동작이 있잖아요. 타인과의 밀접한 교류와 긴장감이 뇌를 계속
쓰게 한다는 여러 연구 결과도 있으니 여러분들은 예술을 통해 어르신들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초대했으면 좋겠어요.
반달은 예술적 접근이 완벽한 치료법이 될 순 없겠지만,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감각과 기억을 다시 꺼
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의 그림책을 같이 읽고, 어느 때엔 나만의 그림책을
함께 만들기도 하면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과거의 정면과 기억을 마주하는 것이다. 거칠게 끌어낸 기억
이지만, 함께 하는 예술가들의 협업을 통해 미술로, 시로, 또 음악으로 아름다움을 덧붙여 나의 기억을
긍정하는 것. 예술의 힘은 이처럼 나의 오늘과 어제를 긍정하게 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예술이 긍정하는 또 다른 하나는 ‘나도 쓸모 있는 존재’라는 감각이다. 어르신을 향한 문화 예술적 시
도가 경험의 질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해 사회적 소속감을 높여주는 데 기여한다. 일
상의 만족감이 높아지는 만큼 줄어드는 건 우울함이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어제와 다를 때 찾아오는
‘우울함’과 ‘늙으면 죽어야지’로 대표되는 노년 세대의 거부 반응이 예술을 통해 작은 성취를 맛보며 완
화된다.
많은 이가 예술은 언제나 문제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는다며 비난한다. 하지만 예술의 본질적 가치
는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세대를 떠나 누구나 타인에게 애정을 쏟고, 또 되돌려 받으며 나의 존재 이
유를 확인받는 것. 예술을 통해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주관적 판단을 넘어 내면의 성취감을 맛보
게 하는 것. 이것이 어르신에게 예술적 시도가 필요한 궁극적 이유이자 우리가 어르신과 함께 하는 것
의 의미였다.
어떤 태도로 어르신을 대해야 할까요?
노년 세대를 향한 예술 시도의 필요를 정립한 우리는 ‘실버문화’를 주제로 활동하는 예술인과 만나 치
매 어르신과의 교육 경험을 물었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숱한 경험을 쌓은 그가 기억하는 어르신은 이
제 막 치매 증세가 시작된 74세의 할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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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저는 맞춤형 실버문화복지 사업에 참여했어요. 18년도부터 어르신과 활동을 했고요. 제가 지금까지 많
은 홀몸 어르신을 만났는데, 돌이켜보니 초기 치매 증상이 아니었나 하는 분들이 있어요. 70대 할아버
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늘 댁에 찾아뵈면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뒷모습이 가장 먼저 보였어
요.
하루는 어르신과 ‘건강 팔찌 만들기 체험’을 하려고 재료를 준비해서 댁으로 방문했는데 진짜 몇 년 만
에 만난 가족처럼 저를 반가워하시더라고요. 그러다가 딱 15분 뒤 ‘어디서 무당같이 구슬 들고 왔냐’면
서 막 화를 내시고, 반가워해 주셨던 것도 잊으신 채 너는 누구냐며 무섭게 다그치시더라고요. 그러다
잠시 후 조금 진정되시고 나니 ‘우리 마누라에게 예쁜 거 만들어줘서 고맙다’며 다시 저를 칭찬해주시
는데 그때 짐작했었죠. 함께 체험했던 할머니도 처음 팔찌를 보고는 좋아하셨지만 두 번째 수업부터는
저를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아픈 모습이 누군가에게 보이고 평가받는 것이 민
망하니까 할머니도 같이 숨으시더라고요.
많은 이가 치매를 떠올리면 서서히 ‘과거의 기억’을 상실해 가는 걸 상상한다. 하지만 치매 당사자의
아픔은 단순한 기억의 상실만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규범의 상실에서도, 특정한 상황에 대한 예의
의 상실에서도 비롯된다.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거나, 불편하다고 옷을 벗는 등의 행위가 사회인으로서
지켜온 나의 자존감을 갉아 먹는다.
세상에 드러나는 대상자는 치매 증세의 할아버지였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외감과 외로움을 감당
해야 했던 건 가족이다. 과거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매사에 무척 공격적이고 집에 오는
걸 반가워하지 않으셨던 분. 그리고 그와 평생을 함께 살아온 할머니에겐 문화도 예술도 모두 어려운
단어였지만, 그저 우리 집에 다른 사람이 찾아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반가운 일이었다.
저희는 보통 한 시간씩 어르신들과 시간을 보내요. 한 시간이라고 해서 같은 교육만 진행되진 않아요.
그 시간 안에서도 기복이 심하거든요. 한 번은 할아버지와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부인분이 저를 무척
좋아하셨어요. 남편이 치매 판정받은 후 밖에 나가도 친구들과 말을 잘 섞질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가면 그나마 말동무가 된다고 너무 좋아하셨어요. 그리고 할머니도 다시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
을 갖게 되어 행복하다고 하시더라고요.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제일 어려웠던 점은 아무래도 할아버지였죠. 당신 집에 낯선 사람이 온다는 것
자체가 치매 환자를 넘어 누구에게나 두렵고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러니 치매 어르신은 오죽했을까요.
할아버지는 갈수록 저를 경계했고, 마지막엔 발길질도 하셔서 그게 조금 두려웠어요. 반가워하다가도
호통을 치시고, 막 경계하시다가 다시 반가워하시고, 두 번째 수업까지만 하고 포기할까 고민도 했거
든요. 지적장애 아동과 수업해도 물리고 맞기도 하지만, 치매 어르신은 따스했다가 불현듯 화를 내시
니까 감정적으로 맞추기가 어려웠어요. 특히 제가 섣불리 더 들어갔다가 할아버지의 나쁜 추억이나 아
킬레스건을 건드리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두려움은 함께 지내시는 할머니
도 마찬가지였어요. 할머니도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남편과 종일 함께 하지만, 여전히 소외된 느낌을 받는다던 할머니. 약속된 활동 시간 한 시간을 훌쩍
넘어서도 집에 머물렀던 건 낯선 사람과 대화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할머니 때문이었다. 가족의 돌발행
동에 염려하고 감정적으로 무너지기도 하는 가족들. 내 영역과 내 시간, 내 활동에 집중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정서적으로 메말라가는 가족 역시 치매의 당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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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기억의 집은 치매 가족의 시선에서 온전히 자기 시간을 경험하고 해소할 수 있는 예술 공간이자 누군
가에게 나의 힘듦을 이해해주고, 함께 감정을 터트릴 수 있는 문화공간이어야 했다. 무엇보다 이런 시
도를 통해 치매 당사자와 가족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치매라는 터널을 통과할 수 있길,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길게 나아갈 힘이 전해지길 바랐다.
누구를 위한 기획인지가 명확해지면 프로그램의 구체적인 내용도 달라질 것이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
가는 이들만큼 새로운 기억을 쌓아갈 기회를 잃어가는 가족과 만남이 당장 필요하다. 우리가 가장 먼
저 갖춰야 할 건 가족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태도였다. 단순히 치매 당사자의 상황만이 아닌 그를 걱정
하는 가족들의 상황까지 염려하는 열린 태도 말이다.
기억의 집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세 번째 기억의 집(오늘, 내일 그리고 어제)
오래된 섬, 영도, 오륙도가 훤히 보일 정도의 높은 언덕 위 주택으로 오른다. 따스한 햇볕이 스민 정원.
트램플린 옆으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짤랑하는 소리가 들린다. 버려진 유리그릇이 모여 만들어내는 소
리는 어색했지만 정겨웠다.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주택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에서부터 진즉
에 버려졌어야 할 청귤이 아주 소담히 쌓여 있었다. 천천히 집안을 거닐어본다. 테이블 위에 놓인 페
이퍼, 복도 가득 걸려 있는 액자, 천정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예술 작품이 저마다 누군가의 기억을 담
고 있다.
집안 곳곳에 시각화된 기억들이 놓여 있는 세 번째 기억의 집은 누군가의 기억이 기록된 하나의 ‘전시
공간’이다. 특정한 공간을 기획할 땐 무엇이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배치되어 있느냐도 중요하다.
마치 탐정영화의 한 장면처럼 공간에 머문 사람은 꼭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물건이 어떻게 놓여있
는지에 따라 우리는 타인의 습관과 메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세 번째 기억의 집에서 가장 먼저 사람들을 맞이하는 건 주방이다. 주방 한가운데 놓인 하얀 전신 거
울은 하늘을 바라보는 책상이 되어 있고, 그 위로 투명한 병들과 누군가의 일상에 대한 짧은 코멘트들
이 적혀있다.
더 이상 예전처럼 가능하지 않는 신체의 부분을 딱딱한 듯 따뜻한 듯 미세하게 움직이는 몸뚱아리.
하나씩의 기억이 담겨 있다는 기록의 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어떤 건 맑은 시트러스 향이 났
고, 어떤 건 매콤한 계피 향이 났다. 모든 향의 시작은 이곳을 찾은 치매 어르신이 그들만의 기억으로
오색의 청을 만들 때 썼던 재료들이다. 기억은 언제고 퇴색되지만, 감각은 동일하다.
진지하게 어르신과 만나온 왕덕경 작가는 그들의 기억을 재료삼아 오색의 청을 만들었다. 그 특유의
향이 공간을 찾은 이들의 새로운 기억을 회귀시킨다. 한 사람의 기억을 레시피 삼아 담근 ‘기억담금청’.
그들의 기억이 적절한 배합으로 섞여 타인과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새로운 이야기 자리
로 진화하는 새로운 시도다.
기억담금청이 어르신의 기억과 사건, 그리고 이야기를 수집해 마시고 맡을 수 있는 물체로 전환하는
작업이라면, 주방 벽면을 뒤덮은 그림은 지역의 동화작가와 협업한 어르신만의 ‘기억 레시피’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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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안에는 어르신들의 기억 속 이야기들, 학창 시절 꿈과 함께 장난치던 친구들, 어렸을 적 엄마가 해주
었던 잊지 못할 맛의 음식들, 가족들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젊은 시절의 이야기, 후회와 아쉬운 기
억 조각들이 레시피가 되어 그려졌다. 개개인의 사소한 이야기부터 누구라도 겪었을 법한 사건들까지,
<기억담금청 레시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기억들이다.
이곳에 구성된 사물은 모두 원래의 기능을 벗어나 있었다. 내 눈에 스치는 모든 사물이, 본래의 기능
으로 작동하지 않은 채 조금은 다른 의미를 부여받아 사람들의 걸음을 방해하고 시선을 사로잡았다.
구석에 놓여 있던 물건들이, 애써 신경 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을 물건들이 공간의 중심을 차지했다.
마땅한 쓸모를 마치고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모든 존재에 대한 적극적인 역할부여다.
당연했던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 그들은 켜켜이 시간이 쌓인 사물 속에 사람들의 기억이 간직
되어 있다고 말했다. 집단으로 어울려 합주를 했던 첫 번째 기억의 집, 서로에게 조용하며 함께 이야
기를 끌어갔던 두 번째 기억의 집을 넘어 이곳은 나에게 고요히 침잠하는 시간을 선사한다. 타인이 남
긴 기억의 흔적을 쫓으며 나와 편견을 짐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누구나 잃는다.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그 친구들, 그 사람, 아무도 모른다.
입안 가득 기억담금청의 단맛을 지니고, 천천히 공간을 헤맨다. 왕덕경 작가는 가족의 치매를 지켜봤
던 부산의 다른 작가들과 함께 모두 고대의 수행자처럼, 마음을 닦는 고행자처럼 자신만의 상징을 엮
어 기억을 재현해냈다. 조금도 다르지 않은 요양병원의 생김새 때문이었을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작가들의 스케치에서 나와 같은 감정이 느껴진다. 작가들이 그려낸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요양병
원 침대에 앉아 창밖만을 바라보던 내 할머니의 뒷모습과 닮았다.
그리고 할머니 곁에 누워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어르신들. 창밖의 자유로움을 바라시는 것인지, 창
너머 다가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인지 알 수 없을 표정들이었다. 요양병원에선 별다른 해법 없이 모
두가 같은 결말만을 맞기에 우리는 같은 기억, 아니 같은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작품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설치 작가는 ‘치매’를 고민하며 천조각을 뜯어내 사람이 엎드려 절하는 듯
한 형상을 만들었다. 그는 웅크린 인형의 빈틈으로 또 다른 인형을 넣어 완벽한 조각을 만들어냈고,
할머니가 머물던 요양병원의 일상처럼 고요히 잠으로 연결된 어르신들을 표현해냈다. 세상 밖의 풍경
을 바라듯 똑같은 자세로 맞닿은 사람의 형상은 창문 너머의 하늘을 만들고 꽃밭을 만들었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 새로운 세계를 초대하는 열쇠라는 듯 엎드린 사람의 형상은 어디로든 확장해나갈 수 있
었다.
또 다른 작가는 치매 진단을 받은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87세라는 연령에 집중해 87시간 동안 하나의
작업에만 몰두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신체의 자유도가 제한된 할아버지의 상황을 짐작하고 표현하
기 위해 자신의 신체 역시 극한의 상황에 밀어 넣는 작업이었다. 87시간이라는 몰입된 환경에서 그려
간 무수히 많은 원들은 마치 할아버지와의 지난 기억을 하나씩 일치시켜가는 수도의 작업과 같았다.
긴 시간 그려갔던 동그라미는 천장부터 시작해 벽과 바닥을 뒤덮고도 남았고, 덩그러니 놓여있는 목탄
만이 이 작업이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었다. 천천히 그가 기록한 시간을 바라보았다. 얼마
나 오랜 시간 달려왔는지 첫 번째 동그라미부터 마지막 동그라미까지 천천히 관찰했다. 불규칙하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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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려진 검은 점의 간격들. 갈수록 팔과 목의 피로감이 쌓였는지 검은 점의 간격도 좁아졌다. 이 연결에
서 중요한 것은 일상적인 시간의 흰색 동그라미일까, 아니면 잠시 내려놓았던 저 검은 동그라미일까.
두 작가는 웅크린 사람의 이어짐과 동그라미의 이어짐으로 어르신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고, 어르신
의 자세를 따라가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작품으로 녹여내며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를 더 많이 관
찰한 것이다. 관점은 어느 순간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하루씩의 관찰이 쌓이면서 조금씩 분명해져 가
는 것이 관점이다.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타인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기억도 달라지기에 노년과 치매에
대한 관점을 세우기 위해선 오랜 시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지난 과정의 의미와 결과를 두 작
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예술작품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절대로 되돌아갈 수 없는 장소와 시간으로 되돌아가기를 끝없이 바란다. 소외되고 고립되어 방황하는
파편화된 기억들.’
기억담금청의 마지막 공간. 왕덕경 작가는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가족이 모여 서로의
손을 바라볼 수 있도록 10일의 시간을 제공했다. 많은 가족이 손을 매개로 서로의 삶을 관찰하며 남긴
그림들. 손안에 담긴 정보는 만만치 않다. 사소하다고 생각해 머리에서 잊은 기억들, 지난 일이라고 그
냥 덮어뒀던 이들도 내 손은 모두 간직하고 있다. 굳은살과 짙게 색이 변한 피부로, 물어뜯어 짧아진
손톱과 새살이 부풀어 오른 흉터가 나의 지난 기억으로 돌아갈 이정표다. 손에 담긴 흔적과 상처로 곁
에 누가 있었는지를 돌아오며 묻혀 있던 감정도 새롭게 솟아난다.
얼굴의 주름은 가릴 수 있어도, 손의 주름은 가릴 수 없다. 그래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손
을 바라보면 미처 꺼내지 못했던 그 사람의 내밀한 아픔을 마주할 수 있다. 우리 몸에서 먹고, 만지고,
부수는 역할을 담당한 손은 곧 나의 실천이자, 역사이기 때문이다.
누구는 손에 담긴 나와 엄마를 찾아내기도 하고, 맞잡은 손에서 사랑을 느끼기도 했다. 어린 시절 사
고로 손가락이 잘리거나 굽은 채 평생을 살아왔던 이들은 전혀 가깝지 않았음에도 비슷한 상처를 지녔
다. 함께 통과한 시대의 어려움이 같은 세대의 손에 상흔처럼 남은 것이다.
10일간의 손 일기는 내게 쌓인 시간을 직면하고 긍정하는 작업이다. 주름지고, 뒤틀려져 아름답지 않
다고 생각했던 나의 손을 꼼꼼히 바라보며 내가 오랜 시간 얼마나 당당히 걸어왔는지, ‘나이 듦’에 대
한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 방에서 할머니와 손녀는 손끝을 맞추며 다르다고 생각
했던 서로의 삶에서 무엇이 가까웠는지 이야기 나눴다. 자연스럽게 손의 흔적을 쫓으며 차곡차곡 기억
의 조각을 맞춰가는 것이다.
나이 듦은 아름다움의 반대 개념이 아니었고, 소멸과 사라짐처럼 부정적인 그 무언가도 아니었다. 젊
음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무의미한 프레임을 넘기 위해선 사고의 틀을 넓힐 수 있는 시도를 함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작가들은 공간을 꾸며 각자의 기억을 꺼낼 수 있는 사건을 마련하고, 치매 어르신
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사물을 배치했다. 이 공간을 통해 ‘노년을 살아가는 이들’과 ‘노년을 바라보
는 이들’이 함께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한 것이다.
지금도 잠과 싸우는 어르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치매 어르신이 새로운 사람과 만
나 관계 맺고, 교류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시도 역시 매일 차단된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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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하지만 ‘요양보호’라는 효율적 관리 뒤로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고, 아무것도 개선시키지 않는 위험은
누구도 계산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들이 믿는 건 단순하다.
‘보이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움직일 수 없다. 양분을 섭취한다. 배설
한다. 오직 잠으로 이어진 삶.’
누군가에게 치매 어르신의 삶이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맛도 느낄 수 없고, 그저 먹고 배설하
는 오직 잠으로만 연결되는 삶일 뿐이다. 감각의 활용을 위해선 새로운 사람과의 연결로 부여된 책임
과 역할이 중요하지만, 관리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 모든 작업은 성가신 일일 뿐이다.
이 공간의 모든 물품은 자기의 기능을 잃고도 쓰임이 있었다. 거울이 탁자로, 하얀 곰팡이가 앉은 청
귤이 예술품으로, 찢긴 천이 설치 작품으로, 아무것도 쥐지 않은 빈손이 오브제가 되었다. 누구나 시간
이 지나고 나이가 들며 외곽으로 구석으로 밀리기 마련이지만, 이곳에선 용도를 잃은 물건에 의미를
넣어 공간의 정중앙, 사람들의 동선을 막는 모든 곳에 두었다. 예술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부
여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것이다.
세 번째 기억의 집도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어느 골목 한가운데 있었다. 골목은 ‘치매 어르신’이 살아
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삶의 현장이다. 전시 공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누구나 편히 찾아와 기억
담금청을 꺼내 따뜻한 차를 나누고,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대문부터 현관까지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지닌 작가들이 만나 풍성한 공간을 꾸민 것처럼 다른 사람과의 연결은 삶을 다채
롭게 채색한다. 특별할 것 없이 삶 속에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내일의 골목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냄새와 이야기가 깃드는 골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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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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