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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각자의 요가

by Casey,Riley 2022.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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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요가 기능 해부학 강의를 통해 안전하고 즐거운 요가의 길을 안내하고 있는 요가
강사이자 퍼스널 트레이너 이우제의 첫 번째 요가 에세이다. 저자는 “소셜 미디어와 피트
니스 시장에서 쉽게 접하는 요가는 과일 가게에 진열된 사과들처럼 모두 비슷해” 보이지
만, 한 그루의 사과나무에 모양도 빛깔도 크기도 제각각인 열매가 열리듯 요가도 “사람마
다 전혀 다른 모습과 양상으로 우리 곁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다.

각자의 요가
BYTT 기능 해부학 지도 강사. 퍼스널 트레이너. 복싱, 주짓수, 케틀벨 운동처럼 격렬한 훈련을 주로
하던 시절, 요가를 하면 남다른 파이터가 될 수 있으리라는 엉뚱한 오해 덕분에 덜컥 요가에 입문했다.
요가 강사이자 퍼스널 트레이너로서, 아사나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적용, 그리고 이를 관통하는 인체
움직임의 원리에 집중하며 수련과 공부를 이어 가고 있다. 저서로 『남의 체력은 탐내지 않는다』가 있
다.

▣ Short Summary
전설의 파이터 힉슨 그레이시의 영상을 보고 강한 파이터가 되기 위해 요가를 시작한 청년, 완벽해지
겠다는 욕망으로 쇠질(근력 운동)과 고난도 아사나를 동시에 밀어붙이다 심각한 허리 부상을 당해 수
술대에 오른 요가 강사, 부상에서 회복하면서 앉기나 서기 같은 기본으로 돌아가 평생 모를 뻔했던 깊
은 지혜를 마주하게 된 진지한 수련자…. 이 책은 요가 기능 해부학 강의를 통해 안전하고 즐거운 요
가의 길을 안내하고 있는 요가 강사이자 퍼스널 트레이너 이우제의 첫 번째 요가 에세이다.
저자는 ‘삶을 위한 요가’를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엄격한 채식을 고집하다 짝과의 갈등
이 깊어지자 ‘간헐적 육식주의자’로 전격 전향하는 것. 그랬더니 열렬한 육식 애호가이던 짝이 ‘간헐적
채식주의자’로 돌아서는 신기한 변화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런 예도 있다. 요가 지도자 과정에 비싼
돈을 내고 학생 신분으로 참가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매일 밤 조용히 수련실을 혼자 청소하는
것. 이른바 ‘카르마 요가’를 한 것인데,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이런 실천을 이어 나가자 행복과 만족이
마음에 깃들고, 자신을 기르고 봉사를 업으로 삼고 지내는 어머니가 이전보다 더 대단해 보이기 시작
했다. 그리하여 저자는 넓은 마음과 평온이 주름살에 자리 잡은 멋있는 요가 할아버지가 되는 꿈을 품
게 되었다.
“오늘의 요가 수련이란 그동안 쌓여 형성된 자기 몸의 역사로부터 시작하는 것.” 저자는 “소셜 미디어
와 피트니스 시장에서 쉽게 접하는 요가는 과일 가게에 진열된 사과들처럼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한
그루의 사과나무에 모양도 빛깔도 크기도 제각각인 열매가 열리듯 요가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모습과
양상으로 우리 곁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다. “어떤 모습, 어떤 방식이든 당신의 요가
를 응원한다.”는 저자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차례
여는 글: The Journey of Life
격투가의 비기를 찾아서
지금 같은 동작 하는 거 맞죠?
혼자 수련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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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요가

호흡과 바나나
치앙마이에서 배운 것
꼭 새벽에 수련해야 할까
몸에 남은 카르마 알아차리기
다시 기본으로, 타다아사나
드롭백 컴업의 추억
늘 돌아가는 집 같은, 아도무카스바나아사나
다리뼈가 한 뼘 더 미끄러지는 느낌
교묘한 집착이 되지 않도록, 사바아사나
방귀가 내게 가르쳐 준 것
간헐적 육식주의자
다리 펴고 앉는 것의 새로움, 단다아사나
부상이 가져다준 선물
통증이 건네는 말
앉는 자세를 회복하며 알게 된 것, 파드마아사나
이마와 정강이 사이에서, 전굴 자세
요가만 하면 요가를 잘할 수 있을까
꿈의 아사나가 내게 가르쳐 준 것
두려움이 가로막을 때, 살람바시르사아사나
욕심내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걱정
수영, 주짓수, 요가의 공통점
밀어내기와 당기기, 반다
주름살이 멋있는 요가 할아버지가 되고 싶어
기쁨의 요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 카르마 요가
요가의 마지막 시리즈
닫는 글: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요가를 하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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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요가

각자의 요가
격투가의 비기를 찾아서
요가를 처음 시작하면서 기대하던 바가 있었다. 흔히 요가 하면 맨 먼저 떠올릴 법한 고무처럼 쭉쭉
늘어나는 유연한 몸,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한 몸매는 아니었다. 나는 시작이 좀 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나는 격투 스포츠에 매료되어 있었다. 복싱, 무에타이, 레슬링, 유도 등
격투 스포츠 방송이라면 가리지 않고 보았다. 그 가운데 종합 격투기, 복싱, 브라질리언 주짓수는 그냥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법 오래 수련하기도 했다. 수련하는 동안 늘 갈증을 느꼈다. 흔한 훈련법을
반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정말 강한 파이터들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이른바 ‘비기’를 배우고 싶
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찾아보고 파고들었다. 그러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영상 하나와 만났다.
‘이거라면 가능하겠다!’ 영상의 주인공은 힉슨 그레이시. 브라질리언 주짓수 마스터로 무패의 전적으로
은퇴한 전설의 파이터다. 내가 본 영상에서 힉슨은 격렬한 호흡을 보여 주었다. 가슴을 리드미컬하게
부풀렸다가 꺼트리면서 코로 강하게 쉭쉭 소리를 내며 숨을 마시고 뱉기를 반복했다. 또 배를 쏙 당겨
서 마치 장기가 사라지기라도 한 듯 뱃가죽과 등가죽을 딱 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배 안에서 코브라가 지나다니듯 왼쪽 옆구리에서 시작해 오른쪽 옆구리까지 차례로 한 부위만
내밀었다가 당기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복부의 움직임은 마치 큰 태풍에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같았
는데, 가부좌로 앉아 두 눈을 감은 얼굴은 고요했다. 그는 이뿐 아니라 유연하지만 에너지 넘치는 특
유의 몸풀기 동작들도 보여 줬다.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좀 더 찾아본 끝에 요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요가가 힉슨의 비기였구나!’ 착
각이었을지 몰라도, 나에게 요가의 첫인상은 이토록 강렬했다. 나도 요가를 하면 남다른 수준의 파이
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들과 달리 몸 안에서부터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요가
를 시작했다.
지금 같은 동작 하는 거 맞죠?
요가를 좀 더 진지하게 배우겠다고 결심하고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요가 지도자 과정에 처음으로 참여
했다. 이미 몇 년간 퍼스널 트레이너로 일하면서 신체 움직임과 기능 해부학에 익숙했고 몸도 제법 유
연했기에 자신만만했다. 자기소개를 한 뒤에는 치솟는 자신감을 꾹꾹 눌러야 할 지경이었다.
수업 동기들은 회사에 다니다 몸이 아프기 시작해서, 허리를 다친 뒤에 요가가 좋아져서 요가 지도자
과정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으니까. ‘다들 그냥 일반인이구나.’라는 마음이 들면서, 좀 더 큰 뜻이 있어
서 거기까지 갔으며 직업이 운동인 데다 이미 요가를 한 지 몇 년 된 나는 그들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첫 번째 빈야사 수련을 마치고 큰 충격에 빠졌다. 정말 무더운 여름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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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요가

대 1 트레이닝 수업을 마친 뒤 버스를 타고 부지런히 달려가 수업을 들은 날이었다. 현대적인 요가원
이라 폭염의 날씨를 고려해 냉방기를 약하게 돌리고 있었다.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피부에 와 닿았
다. 하지만 나는 땀을 주룩주룩 쏟아 냈다. 어디 땀뿐인가. 다리는 왜 그리 속절없이 흔들리며 팔뚝엔
왜 경련이 나는지. 또 마음과 달리 몸은 어쩜 그렇게 뻣뻣한지. 힘들어도 너무 힘들었다.
나는 무거운 케틀벨을 100번씩도 거뜬하게 들어 올릴 만큼 체력이 좋았고, 다리도 앞뒤로 찢을 수 있
을 만큼 유연했다. 게다가 힉슨 그레이시를 보고 영감을 얻어 나름 명상을 흉내 내며 요가스러운 자세
를 준비해 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빈야사 수련 한 번에 자신감은 땡볕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
려 사라졌다. 숨을 쉬고 있는데도 숨찬 느낌, 자세를 버티고 있는데도 무너져 내리는 느낌,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천근만근 무거운 몸…. 나를 지도하던 선생님은 짓궂은 농담까지 던졌다. “지금 같은
동작 하는 거 맞죠?”
비슷한 시기에 아쉬탕가 빈야사 요가 워크숍에 참가한 적도 있었다. 편백나무로 마감된 수련실에 쭈뼛
쭈뼛 들어갔더니 이모라고 불러도 하나 이상하지 않을 수련자들이 앞줄에 서 있었다. 열정적으로 사는
분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얕잡아 봤던 것 같다.
선생님의 산스크리트어 구령에 맞춰 수련이 시작되었다. 에캄(하나), 드웨(둘), 트리니(셋)… 판차다샤
(열다섯). 숫자가 높아질수록 나와 그분들의 움직임엔 큰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그분들은 그냥 고수였
다. 붕붕 날아다녔다. 체중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다들 몸은 어찌나 유연한
지 다리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몸을 비틀어 등 뒤에서 양손을 맞잡기도 하고, 두 발을 머리 뒤로 넘겨
교차한 상태에서 양손으로 몸을 들어 올리기도 했다.
팔 굽혀 펴기나 턱걸이라면 내가 더 잘할 텐데, 왜 나는 동작이 무겁고 저분들은 가벼울까? 100미터
달리기라면 내 기록이 훨씬 좋을 텐데, 왜 나는 느리고 저분들은 민첩할까? 내가 동경한 힉슨 그레이
시에는 나보다 그분들이 더 가까워 보였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만 했
다.
여기서 나의 짝을 소개해야겠다.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단 운동을 정말 싫어한다. 하면 잘하
는데 이상하게 안 한다. 집에서 같이 운동하면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드러누워 소파와 일체가 되는 사
람이다. 그런데 이런 짝이 신체적으로 나를 압도할 때가 있다. 바로 쇼핑할 때. 그녀는 쇼핑센터 전체
를 다 돌아도 전혀 지치지 않는다. 다리도 안 아파하고 피곤해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어떤 날에는 쇼
핑센터를 몇 바퀴 돈 뒤에 오히려 에너지가 충전된 것처럼 팔팔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난 쇼핑센터의 공기를 맡기 시작해서 15분쯤 지나면 급속도로 지치기 시작한다. 마치 200미터
달리기를 전력으로 연거푸 네다섯 번은 반복한 느낌이 든다. 쇼핑 막바지에 이르러 짝이 마지막으로
한 바퀴를 더 돌겠다고 하면 나는 그러라고 하고 카페인을 수혈하러 커피숍으로 향한다. 그렇게 잠시
쉬어야 간신히 집으로 돌아갈 힘이 생긴다. 이렇게 운동과 쇼핑을 비롯해 어느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
라 우리 둘의 체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거나 강해지기를 반복한다.
요가 지도자 과정에 참여하기 전, 나에게 익숙한 움직임은 내 몸을 고정해 놓고 외부의 물체(쇳덩이나
사람)를 밀거나 당기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요가는 중력을 견디며 내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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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요가

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몸은 계속해서 중력을 견뎌야 한다. 그런데 숙련된 요가 수련자는 중력을 잘
이용한다. 중력을 타고 논달까! 그분들은 몸의 무게 중심을 적절히 옮겨 가며 힘을 덜 써도 잘 버티고
움직일 수 있는 곳에 둔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몸이 유연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몸이 더 두
껍고 뻣뻣한 나는 중력에 덜 저항할 수 있는 자리에 몸을 두려면 힘을 더 써서 몸을 접거나 비틀어야
했다. 당연히 더 힘들고 더 빨리 지칠 수밖에.
쇳덩이를 들어 올리는 속칭 헬스와 요가는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인다. 이 양쪽에 모두 발을 담그고 수
련하려 안간힘을 쓰다 보니 몸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선이 차츰 내 안에 자리 잡았다. 그러
면서 강하고 저력 있는 사람들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무시해 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부상이 있으면
있는 대로 자기 수련을 이어 가는 사람, 신체 조건이 상대적으로 불리해도 자신이 몸담은 분야에서 꾸
준히 연마하는 사람, 삶이 넉넉하지 않아도 나약해지지 않고 부지런히 살아가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
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어설프고 힘들어 보이겠지만 나름 괜찮
아.”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이 가장 강해질 수 있는 순간과 만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질문이 내 안에 화두로 자리 잡은 뒤 요가가 내 삶에 더 깊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호흡과 바나나
요가를 시작하면 크게 두 가지 수련 방법에 주목하게 된다. 명상 수련과 아사나 수련이다. 물론 더 광
범위하고 폭넓은 수행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다만 평범한 한국인들이 ‘요가 한번 해 볼까?’ 하고 인터넷
을 검색하거나 요가원을 수소문하다 보면 대체로 이 두 가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고 마음이 괴로워 자신을 돌보고 싶은 생각에 요가를 찾은 사람이라면, 요
가를 산들바람이 부는 숲속의 잔잔한 호숫가에서 담요나 매트를 정갈하게 깔고 차분히 앉아 눈을 감고
명상하는 수련자의 이미지로 그려 낼 법하다. ‘요가’와 ‘명상’이란 단어가 주는 기대감이랄까. 내게도
그런 기대 속에서 요가를 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땐 일단 요가를 하기만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습
관적으로 버럭버럭하는 모습도 줄어들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시기를 떠올리면 부끄러운 장면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짝과 연애하던 시절에 짝이 유명한
애니메이션을 예매한 적이 있었다. 나는 자막 버전이 아니라 더빙 버전이라는 이유로 못마땅해서 투덜
대다가 짝이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어느 명절에는
결혼과 취직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게 기분 나빠서 집을 나가 버린 적도 있다.
아침부터 계획대로 움직이지 못한 날엔 세상이 나를 못나게 보는 것 같아서 지나가다 어깨가 부딪힌
사람에게도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 줘야 직성이 풀리고는 했다. 일종의 감정 노동이 필요한 퍼스널 트
레이너로 일하면서 매너 있고 친절하며 이야기 잘 들어 주는 미소 가득한 공적 페르소나가 강화되는
만큼,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그림자도 따라서 더욱 짙어졌던 것 같다.
“회원님, 오늘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차근차근 몸 풀면서 시작하시죠.” 겉으로 이렇게 말
하면서도 속으로는 ‘어떻게 매일 골골대고 징징대기만 하지. 돈 내고 운동을 이렇게 하고 싶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회원님, 잘하셨어요. 그런데 조금 더 견고하게 움직여 주셔야 해요.” 이렇게 응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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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요가

지만 ‘몇 번을 말하는데 도대체가 바뀌지를 않네. 기대를 하지 말자.’라고 포기한 때도 있었다.
애당초 진심이 아닌 말들은 나를 더 억압할 뿐이었다. 도움 되는 강사가 되고 싶었던 초심과는 다르게
진상 회원을 가려내는 교만과 시간을 때우려는 태만이 차오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
니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시고 죄 없는 의자에 화풀이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는 경각심이 들어 다음 날 정신과를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은 반문했다. “요가 하신다면서요? 그럼 도
움이 좀 될 텐데요.”
허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던 그 말. “요가 하신다면서요?” 내가 한 요가에는 무엇이 빠져 있던 것
일까? 그리고 정신과 선생님이 생각한 요가는 무엇이었을까? 어느 날 짝이 말했다. “아휴… 난 오빠처
럼은 요가 못 할 거 같아.” “엥? 왜?”
짝은 요가란 게 조용히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거라
고 생각했다 한다. 그런데 나는 집 한구석에서 열을 끌어 올리며 다스베이더의 숨소리와 비슷한 소리
를 내며 숨을 쉬고(우자이 호흡),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위로 뛰고 뒤로 넘어가고 거꾸로 섰다. 이렇게
격하게 움직이니 짝이 질색할 수밖에. “아니, 요가에 이런 것만 있는 건 아냐.” 황급히 수습했지만 속
으로는 부끄러웠다. 명상을 하기는 했지만, 다리를 잘 찢고 몸만 쭉쭉 늘리면 요가를 잘하는 거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현타’가 왔기 때문이다. ‘아, 내 수련에 빈구석이 있구나!’
이런 일들을 계기로 탐문 조사하듯 요가에 대해 아름아름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명상’이라는 요
가의 또 다른 면에 주목해 나갔다.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에 따르면 명상이란 마음이 한곳에 계속
모이는 것이라 한다. 우리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에 익숙하다. 스마트폰으로 소셜 미디어에 접속하고
있다 보면 순식간에 시간이 사라지고, 소파 위에 늘어져서 드라마를 1화부터 정주행하기 시작하면 하
루 이틀은 거뜬히 삭제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집중하면 거북목과 늘어나는 체지방이 따라붙는다는
부작용이 따르긴 하지만. 이런 집중도 『요가수트라』에서 말하는 명상에 들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부
작용을 낳는 집중을 명상으로 권하진 않을 테니까.
그럼 어떤 집중이 계속되어야 명상일까? 일단 명상을 하겠다고 바닥에 앉아 보자. 그럼 십중팔구 5분
내로 오만 가지 감각이 떠오른다. ‘다리가 불편하네.’ ‘허리가 뻐근한데.’ ‘발에 피가 안 통하는 것 같아.’
‘아, 졸려.’ ‘언제까지 하지?’ … 이렇게 앉아 있는 순간을 불편하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장되기 시작한다. 특히 일과를 마치고 밤에 명상을 하려고 앉으면 아침 출근길에 있었
던 일을 시작으로, 점심으로 먹은 음식의 맛과 식당에 대한 평가, 퇴근길에 친구와 술 한잔 못 한 아쉬
움 같은 것까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그러다 생각이 다음 날 다시 출근해야 한다는 것과 업무 목록으
로 이어지기라도 하면 고뇌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다.
명상을 하면서 생각을 멈추기란 정말 어렵다.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라고 가르치는 세상에 사는
데 익숙해서 더 그런 것도 같다. 그래서일까. 생각을 멈추고 살라는 말은 돈 한 푼 쓰지 말고 살라는
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명상에 갓 입문한 시절(여전히 나는 명상이라는 거대한 세계의 아주 작은 부
분만 경험했겠지만 편의상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는 데 깊은 자괴감을 느끼며
답답해했다. 한편으론 나만 안 되는 건 아닐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지만 타박하는 마음이 더 컸
다. 그러다 우연히 한 스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운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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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요가

“여기 길길이 날뛰는 원숭이가 있습니다. 원숭이를 얌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줄로 묶는다
고 매질을 한다고 원숭이가 가만히 있을까요? 원숭이를 달래려면 바나나를 주면 됩니다.” 폭발하는 생
각들과 요동치는 마음을 원숭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 원숭이는 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더 길길이 날
뛴다. 이제 그 생각 안 하겠다고 외치는 순간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짝사랑할 때를 떠올려 보자. 그
사람 생각이 멈추질 않으니 마음을 달랠 수 없어 얼마나 괴로운가. 그럴 때는 이 생각이란 원숭이에게
바나나, 다시 말해 집중할 대상을 주면 된다. 다만 명상에서는 집중할 대상을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
처럼 어지러운 바깥 대상에 두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둔다. 나는 아주 기초적이고 단순하게 실천해
보기로 했다. ‘호흡’이라는 바나나를 내 안의 원숭이에게 던져 주기로 한 것이다.
호흡은 누구나 하고 언제든 한다. 도구도 필요 없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집중하기에 이만한 대상도 찾기 어렵다. 눈을 감고 있노라면 코끝으로 공기가 와 닿고, 그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와 차갑던 것이 따뜻하게 데워지면서 가슴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들이마신 숨이 가슴을 부
풀리고 배와 허리 뒤쪽까지 지긋이 밀어낸다(이때 척추가 한결 편하게 세워지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
다). 들숨의 끝에 굳이 애써 멈추는 순간 없이 숨을 들어온 길로 자연스럽게 내보낸다. 이제 부풀어 두
꺼워졌던 배와 허리가 다시 얇아지고, 잠시 완만하게 부풀던 가슴이 가볍게 내려앉고, 코끝으로 스르
륵 공기가 나가면 한 번의 호흡이 끝난다.
호흡을 이렇게 관찰하는 동안, 짧은 시간이지만 다른 생각은 멈추게 된다. 과거에 했는데 아쉽거나 후
회되는 일들도, 지금 당장 해야 하는데 미뤄 두어서 마음이 쫓기던 일들도 잠깐 동안 생각의 울타리에
서 나가 있는다. 이렇게 호흡을 한 번 관찰하는 사이 짧지만 명상을 시도해 본 셈이다. 이 짧은 집중이
쌓이고 모여서 이어지면 명상이 된다. 영적 지도자 오쇼 라즈니쉬의 표현에 따르면 물방울이 똑똑 떨
어지며 끊어지는 것과 비슷한 찰나의 집중이 마침내 끊임없이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기름처럼 이어질
때 명상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이론이 그렇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퍼스널 트레이너이자 쇠질에 여념 없던 청년이던 나는,
명상을 시작한 뒤 오히려 이 호흡에 걸려 덜컥거렸다. 요가 호흡법은 내가 익숙하게 구사해 왔던 방식
과 다른 것도 많았고, 그때의 내 상식으론 납득이 안 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숨을 마시는데 왜
배를 당겨야 하지?’ 이상하게 요가 수련에서는 배를 당기란 말을 많이 한다. 반면 이른바 헬스 보이들에
게 배는 빵빵하고 딴딴하게 만들어서 무게를 힘차게 들어 올리도록 버텨 주는 에어백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배를 당기면서 움직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정말 의아했다.
나름 경력 있는 퍼스널 트레이너의 자존심에, 요가 선생님들이 해부학은 공부 안 하고 배운 대로만 가
르쳐서 저런 식인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남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말로 꺼내 놓지 않았으니 망정
이지, 무식한 오만함에 입이 조금만 가벼웠더라면 밤새 이불킥은 기본이고 분명 평생 후회할 일을 수두
룩하게 저질렀을 터였다.
여하튼 다행스러운 건, 혼자 수련하면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는 동시에 여러 선생님의 같지만 다른
언어와 맥락으로 풀어내는 가르침을 들으면서 얼른 알을 깨고 나왔다는 점이다. 겉으로 보기엔 다 똑
같은 호흡을 하면서도 방식에 따라 몸을 다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아 가면서, 내가 알던 호흡의
세계란 그냥 작은 열쇠 구멍을 통해 바라본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열쇠 구멍을 더 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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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요가

힐 수 있지만 아예 없애 버릴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명상을 할 때 호흡을 집중의 대상으로 삼으면 몸 상태나 감정에 따라 호흡이 미세하게 다름을 볼 수
있게 된다(최근에 읽은 해부학 책에는 백 가지가 넘는 호흡 방식이 있다고 나와 있었다). 명상 초기에
는 오래 앉아 있는 게 불편해서 누워서 자주 시도해 봤는데 아주 흥미로웠다. 스트레스가 많거나 감정
이 격양되었을 때는 숨을 아무리 크게 마셔도 보통 때처럼 배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없었다. 호흡이
얕다고나 할까.
빗장뼈와 가슴 윗부분만 움직이는 호흡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반대로 너무 늘어지고 게으른 날엔 나무
늘보처럼 몸이 바닥에 쩍 달라붙어 호흡도 느리고 아주아주 잔잔했다. 어디가 부풀고 어디가 내려가는
지 느끼기 힘들 만큼. 처음엔 누워서 연습하다가 깜빡 잠들기도 했었다(불면증으로 고통받는 분들에게
추천).
호흡을 바라보는 게 익숙해지고 다양하게 숨 쉴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시작한 뒤로는, 앉아서도 호
흡을 관찰해 보고 아사나 수련에서도 호흡을 관찰해 보았다. 나는 이렇게 소박하게 명상의 세계로 들
어섰다. 어떤 날엔 정말 몰입이 잘되어 눈을 떠 보니 30분, 한 시간이 지나 있기도 했다. 혹시 잠들었
던 건 아니냐고 의심하는 마음이 드는 분께는, 정말 잠들지 않고 명상을 했다면 내가 잠들었던 게 아
닐까 하는 의심이 아예 들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잠들었던 거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면 정말
로 졸았던 거라고도.
명상을 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색깔을 보거나 놀라운 형상을 마주하기도 한다는데 나는 아직도 수련이
부족해서 그런지 그런 경험은 없다. 누군가의 경험담을 듣고 나면 나는 왜 저런 경험이 없는지 궁금증
이 들면서 조급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방법이나 방향을 안내하고 조언해 줄 수 있지만
명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경험은 그 사람의 수련이 낳은 결과일 뿐,
나의 경험은 다를 수 있고 남의 경험과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경험에 빗대어
나의 수련을 기대한다면 생각이란 원숭이가 더 날뛰게 될 수도 있고.
명상에 관한 다양한 후기는 내 수련 또한 방대하게 확장될 수 있음을 뜻하는 가능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명상을 시도했다는 것부터 이미 남다른 수련에 발을 내디딘 큰 도약이다. 이게 맞을지, 잘하고
있는 건지 걱정하고 의심하기보다는 어제의 명상은 어제의 일로 흘려보내고 오늘 집중할 순간에 머무
를 뿐이다.
간헐적 육식주의자
한국에서 채식을 실천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밖에 나가서 주위를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동물이
재료로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파는 식당을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쯤 되니까. 기껏해야 분식점에서
채소 김밥 정도나 주문할 수 있을 것이다(아주 천천히 정말 조금씩 채식당이 늘고 있기는 하다). 게다
가 고기 먹고 술 한잔해야 모양새가 나는 우리의 외식 문화에서 “저는 고기를 먹지 않는데요.”라고 말
하기란 생각만으로도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이 역시 요즘엔 진짜 조금 편해지기는 했다).
그래도 나는 혼자 일하는 사람이니 무얼 먹을지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혼자 먹는 때가 많
기 때문이다. 또 몸 챙기고 몸 만드는 게 일인 사람이 채식한다고 하면 당연히 좋은 이유가 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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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요가

라 생각하는지, 고기 안 먹으면 힘들지 않느냐고 묻거나, 그러다 몸 상한다며 걱정하거나, 왜 갑자기
그렇게 하느냐며 캐묻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나만 채식하기로 결심하면 일사천리로 채식판이 벌어질
셈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소리 소문 없이 채식을 시작해 아주 엄격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커다란
난관에 부딪혔다. 바깥이 아니라 집에서. 일단 본가에서 가족이 모이면 어머니는 고기를 먹지 않는 아
들을 세상 불안한 표정으로 안타깝게 바라보셨다. 어릴 적에도 고기 안 먹고 김치만 좋아한다며 한의
원에 데려가 진맥을 하고 한약까지 지어 먹이던 그 정성은 30년이 넘도록 변함이 없는가 보다. 또 명
절에 처가에 가면 할머니가 솥 한가득 채워 주시는 삼계탕을 앞에 두고 채식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
릇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걸 넘어서는 장벽이 있었으니, 바로 내 짝이다.
짝은 열렬한 육식 애호가다. 일단 고기를 잘 먹고 많이 먹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끔 체할 때도 있지
만 핏줄을 이어받아 고기도 잘 먹고 상당한 대식가다. 스케줄이 달라 마주 앉아 밥을 먹기 애매할 땐
운 좋게 피해 갈 수 있지만, 늦은 저녁 한 끼를 같이 앉아 먹을 땐 보통 눈치 보이는 게 아니었다. 같
은 식탁에서 한 사람은 치킨을 뜯어 먹고 맞은편에서는 두부와 현미밥을 퍼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끝
내 짝의 분노와 서운함이 폭발하고 말았다.
“식구가 뭐야. 같이 맛있는 거 먹고 행복하게 사는 거지! 그 재미가 얼마나 큰데. 난 이제 그런 것도
없네!” ‘아이고, 내 신세야.’까지 이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
었다. 평소 내 라이프 스타일과 선택에 꾸준히 지지를 보내 준 짝이지만, 채식하는 사람 앞에서 고기
먹는 게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처음에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말로 설
득해 보았다.
영양학적으로 채식이나 육식이나 크게 차이가 없으니 이는 선호의 차이일 뿐이라고 했더니, 그럼 나는
내 선호에 따라 그냥 고기를 먹겠다는 대답으로 튕겨 돌아왔다. 공장식 축산업이 화석 연료를 쓰는 교
통수단보다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그렇게 식탁에 오른 고기는 항생제를 많이 써서 몸에도 해
롭다는 말에는, 사실 나도 체감이 잘 안되었는지 힘이 실리지 못했다. 결국 장을 볼 때부터 주말 밥상
에 이르기까지 계속 실랑이를 반복하면서 우리 둘은 점점 지쳐 갔다.
내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좋은 게 많은 채식을 왜 이렇게 거부하는지 답답하고, 짝 입장에선 결혼 전엔
같이 고기 잘 먹어 놓고 갑자기 채식을 들이대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논리와 팩트가 아니라 감정 문제
였다. 어떻게든 짝을 바꾸고 싶은 마음에 책장에 모여 있는 요가 책들을 펼치고 채식에 관한 내용을
찾아봤다. 그러다가 유명한 아쉬탕가 요가 지도자인 키노 맥그레거의 책에서 나를 흔들어 놓은 문장을
만났다. “채식을 강요하는 것 또한 폭력이 될 수 있다.”
특정 종교에 감화해 삶이 행복해져서 열심히 포교하는 사람들에게 그 종교는 너무나 당연하고 탁월한
선택이다. 하지만 종교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거부감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종교를 믿으라 반복해서
외친다면, 처음엔 불편할 것이고 중간엔 괴로울 것이며 끝내는 강압적인 폭력으로 느낄 것이다. 저 문
장을 읽고서, 내가 채식을 포교하듯 말했던 건 아닌지 돌아보았다. 미안한 마음이 밀려오며 번쩍 정신
이 들었다. 그리고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나도 예전에는 채식이 불편했는데,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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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요가

내게 처음 채식을 역설하던 분들의 그 강력한 주장과 어조가 기억났다. 거기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도.
인터넷에서 자연 식물식이나 채식을 검색하면 수많은 후기를 볼 수 있는데, 채식을 한 뒤로 좋은 효과
를 보았다는 글만큼이나 부작용 때문에 채식을 중단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채식을 중단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을 비하하거나 불편할 정도로 비판하는 글도 있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채식을 마치 하나의 종교처럼 여기는 듯했다.
어느 스님이 한 토크 쇼에서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조언을 했는데 상대가 이걸 안 들어요.
이때 답답하고 화가 나고 불편하면 이건 참견이에요. 하지만 상대가 내 말대로 안 했더라도 아무렇지
않으면 순수한 조언이 되는 겁니다.” 밥상 앞에서 계속되는 나의 참견에 짝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
을까. 가뜩이나 운동하라고 습관적으로 잔소리하는 남편인데…. 짝이 아니라 내가 달라져야 했다.
나는 타협하기로 했다. 일단 내가 편하게 메뉴를 선택할 수 있을 때는 엄격한 채식을 한다. 김밥을 먹
더라도 달걀을 빼 달라고 부탁한다든지, 라떼에 우유 대신 두유를 넣어 달라고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아예 과일 도시락을 싸서 출근하기 시작했다. 도시락 싸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바쁜 날엔 미숫가루를 두유에 타서 마시는 걸로 대신하기도 했다.
그다음, 내가 메뉴를 선택하기 어려울 때는 내 기준을 일절 말하지 않는다. 배달 음식을 주문하거나
외식을 할 때 내 기준에 맞는 음식을 선택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므로 나 하나 때문에 모두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고기나 회로 한 끼 먹는다고 해서 내 몸이 바닥없이 망가지는 것도 아니
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대신 고기를 양껏 먹었다면 다음 한두 끼니를 거르거나 아주 가벼운 채식을
했다. 소화가 충분히 이루어져 편안해질 때까지 내 몸에 시간을 주고 싶었다.
내가 잔소리를 줄이자 짝은 즐거워했다. 내가 한발 물러서자 짝도 한 걸음 물러나 나를 지지해 줬다.
장을 볼 때 더 많은 과일과 채소를 사기도 했고, 고기를 넣은 카레와 넣지 않은 카레를 따로 만들어
식탁에 올린 적도 있다. 강요와 설득은 우리 사이에 북풍한설을 몰고 왔지만, 존중은 따듯한 햇살을
비추었다. “간헐적 육식주의자인 오빠도 오늘은 즐겁게 같이 먹었답니다!” 짝이 근사한 곳에서 외식을
한 후 인스타에 우리 사진을 올리며 남긴 글이다. 간헐적 육식주의자라! 마음에 쏙 들었다.
채식은 명상과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매 순간 깨어 있는 상태로 내 선택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둘은 나의 선택이 그 누구의 선택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지도록 하기
도 쉽다. 한때 나는 명상을 꾸준히 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요가 수련과 거리가 먼 사람들보다 더 우
월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종일 일터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답답함을 수업에 와서 하소연하듯
털어놓는 사람들을 보며 한심해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명상은 이런 우월감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이런 착각과 오만한 에고를 깨우치게 하는 연습이
다. 채식도 마찬가지. 내가 채식이라는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건 결코
아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비판할 자격이 내게 주어지지도 않는다. 비윤리적으로 생산된 육류만큼
이나 땅을 혹사하여 생산되고 화학 약품에 절여진 채소도 많고, 비건이란 타이틀만 붙은 가공식품도
즐비하단 사실을 떠올려 보자. 어쩌면 그저 다른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채식주의자가 아닌 간헐적 육식주의자로 나를 바라보게 되자 더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고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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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요가

먹게 되면 죄책감이나 자책은 미뤄 두고 나에게 좋은 식사를 마련해 준 모든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특히 돼지, 소, 닭, 물살이들에게 제일 고마워한다. 음식을 남기면 이들을 헛되이 죽게 만든 셈이니 먹
을 수 있을 만큼만 주문하게 되었다. 먹어야 하는 상황에선 정말 감사히 먹고 남기지 않기로. 다른 선
택을 할 수 있을 땐 기꺼이 그러기로. 단순하고 손쉬운 실천 방법이다.
내가 간헐적 육식주의자가 되었듯 짝은 간헐적 채식주의자로 나아가고 있다. 가끔은 집에 있는 식재료
만 가지고 가볍게 먹기도 하고, 주말 아침엔 원숭이처럼 과일만 쌓아 놓고 까불거리며 먹기도 한다.
새롭게 쌓아 올린 채식이라는 상식이 나의 에고가 되지 않게 흔들어 준 짝은, 이제 자신의 상식과 다
른 삶을 천천히 받아들여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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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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