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우리가 함께 통일 감성 여행을 떠날 곳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인 경남 봉하마을이
아니라 경북 봉화군을 말한다. 봉화는 ‘하늘 아래 첫 동네’, ‘한국의 시베리아’, ‘오지 중의 오지’라
는 별칭으로 불리는 곳이지만 사실 통일의 마음을 오롯이 담아 놓은 비밀의 화원이라고 해야 할
까? 전국에서 사원이 가장 많은 곳으로도 유명한 봉화는 역사적으로 보면 공민왕의 피난처로, 정
도전의 이상 도시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태백산 사고지이기도 했다. 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바라보면 무엇보다 백두대간과 금강송이 떠오른다. 금강산에서부터 백두대간을 따라 자생하는 금
강송(金剛松)은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두와 금강을 품은 봉화를 통일의 눈으로
다시 보며 봉화만의 특별한 통일 코스를 만나 보자.
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다
▣ Short Summary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봉화라고 답하면 늘상 돌아오는 대답은 “아~~ 봉화마을이요.”였다. 그러면
“봉하가 아니라 봉화라구요.”라며 괜시리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 통일 감성 여
행을 떠날 곳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인 경남 봉하마을이 아니라 경북 봉화군을 말한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나는 지금 봉화를 쓸 수 없다. 그것은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고
지면이 모자라서도 아니다.”라고 기록했다. 봉화에 대해 ‘옛 이끼까지 곱게 간직한 살아 있는 민속촌’
이라고 극찬한 그는 “봉화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봉화의 전통 마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
다.”라며 봉화 답사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실제로 1998년 5월 14일 자 MBC 뉴스에는 <100년 만에
전기 들어온 경북 봉화군 명호면 산골마을>이라는 기사가 날 만큼 오지였다. 봉화라는 지명에서 ‘봉화’
를 봉수대에서 불을 지펴 알리던 ‘烽火’로 떠올리는 이도 있다. 그런데 봉화는 한자로 받들 봉(奉), 되
어질 화(化)라는 의미를 담았다.
전국에서 사원이 가장 많은 곳으로도 유명한 봉화는 역사적으로 보면 공민왕의 피난처로, 정도전의 이
상 도시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태백산 사고지이기도 했다. 한때 광산과 산림 자원 개발을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인구 12만 명을 웃돌았지만, 광산 쇠퇴와 산업화에 따른 이농으로 지금은 3만 2
천 명 남짓한 소도시로 후퇴했다.
봉화는 ‘하늘 아래 첫 동네’, ‘한국의 시베리아’, ‘오지 중의 오지’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곳이지만 사실
통일의 마음을 오롯이 담아 놓은 비밀의 화원이라고 해야 할까. 여느 지방의 한 농촌 마을처럼 보이지
만 봉화에는 특별함이 곳곳에 배어난다. 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바라보면 무엇보다 백두대간과 금강송
이 떠오른다. 금강산에서부터 백두대간을 따라 자생하는 금강송은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
이다. 분단의 반쪽 조국을 살아가는 분단인에게 금강산과 백두산은 ‘꿈엔들 잊힐 리야’ 노래할 만큼 그
리움의 장소다. 이제 백두와 금강을 품은 봉화를 통일의 눈으로 다시 보려 한다.
산골 오지 여행을 넘어 자연과 인간이 벗 삼고 남북한 사람들이 하나 되는 통일 감성 여행을 떠나 보
면 어떨까. 봉화만의 특별한 통일 코스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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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다
▣ 차례
1 국립 백두대간수목원 - 1,400km에 이르는 한반도의 줄기
2 금강송 군락지 - 백두를 품다
3 춘양역 - ‘억지춘향?’, ‘억지춘양?’
4 낙동강 세평하늘길 - 협곡이 숨겨 놓은 오지 트래킹
5 분천역 산타마을 - 첩첩산중 오지마을의 변신
6 비동역 - 백두대간 협곡열차(V-트레인)
7 양원역 - 압록강과 낙동강 그 기억의 편린
8 승부역 - 전쟁의 승부가 결정 났던 심산유곡
9 합소삼거리 - 두 물줄기가 하나로 만나듯
10 옥방마을 - 근대화의 열망을 이룬 100년 마을의 흔적
11 만산고택 - ‘목숨 버린 열사들은 그 얼마런가?’
12 백두미가 - 당신이 통일입니다
13 한수정과 와선정 - 길은 오직 하나로만 통한다
14 춘양빵집 - 전쟁의 포화도 비껴간 정미소
15 서동리 삼층석탑 - 나란히 선 두 개의 석탑
16 충효당 - 황해도 옹진군의 흔적
17 봉화 척곡교회(尺谷敎會) - ‘명동서숙’을 떠올리며
18 도은종택: 법전강씨 종택 - 음지마을과 양지마을
19 내성유기 - 인고의 세월을 거친 장인 정신
20 닭실마을과 청암정 -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고
21 바래미마을 - 독립운동가들의 고향 마을
22 내성천 열림다리 - 하나의 물길을 터주다
23 봉화 사과와 북한의 고산과수농장 - 철령 아래 사과 바다
24 인하원: 봉화송이와 칠보산송이 - 한 그릇에 담긴 봉화의 청정 자연
25 충혼탑과 호국동산 - 자유 민주주의를 지킨 빛나는 무공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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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다
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다
국립 백두대간수목원 - 1,400km에 이르는 한반도의 줄기
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려 마음먹었을 때 <국립 백두대간수목원>을 첫 출발지로 정한 건 순전
히 백두와 금강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경북 봉화에서 백두와 금강을 그릴 수 있다니 그저 감사할 따
름이었다. 백두대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왠지 모를 기백과 장엄함이 느껴진다. 백두산부터 시작해 지
리산까지 이른다는 한반도의 억센 기상 때문이었을까?
‘대간’은 백두산부터 함경도 단천의 황토령, 함흥의 황초령, 설한령, 평안도 영원의 낭림산, 함경도 안
변의 분수령, 북강원도 회양의 철령,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국
토의 대동맥을 이르는 말이다. 포효하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한반도 지도를 떠올려 보면 백두
대간은 호랑이의 등줄기에 해당한다. 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이르는 백두대간의 길이가 1,400km라는
안내문을 보며 그 숫자의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본다. 중국과 북한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맞
댄 북중 국경의 거리가 약 1,400km였다. 통일을 이루기 전 죽음의 띠라 불렸던 동서독 접경 길이도
정확히 1,393km였다.
한반도의 남과 북을 잇는 백두대간의 길이 역시 1,400km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남의 나라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망원 렌즈로만 겨우 바라볼 수 있었던 조국의 반쪽 땅이었다. 1,400km 북중 접
경을 달리며 언제가 되어야 북한 땅에서 압록강 건너 중국을 바라볼 수 있을까 한스러웠다. 한 발짝만
내디디면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조국이지만 강변에 내려서기조차 어려웠다. 중국과 북한 사이에 국경
의 이름으로 둘러쳐진 철조망은 분단인의 출입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정작 같은 조국
땅에 발붙이고 서 있어도 나머지 반쪽 땅에 이를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백두대간의 줄기는 끊어졌고,
포효하는 호랑이는 두 동강이 났다.
‘죽음의 띠’가 ‘생명의 띠’로 변한 동서독 접경 1,400km를 종주하며 언젠가 통일된 조국의 땅끝까지
맨발로 걸어도 소원이 없겠다는 마음이었다. 백두대간은 분명 북녘 산하로부터 남도 끝까지 하나로 이
어지는 등줄기이지만 남북한 사람만은 그 길에 닿을 수 없다. 현재까지는…. 백두대간의 길은 다시 이
어져야 한다.
한국의 시베리아 춘양 - 봄의 볕을 기다리며: <국립 백두대간수목원>이 자리한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마을은 1,000m가 넘는 고산이 4개나 에워싼 협곡 마을로 백두대간 마루금이 병풍처럼 둘러진 곳이다.
한국의 시베리아로 불릴 만큼 높은 산 아래 골바람이 억세고 차다. 그래서 춘양은 봄볕을 그리는 이름
이다. 서벽리 마을의 ‘서벽(西碧)’은 아침 햇살에 서쪽 옥돌봉이 푸르게 보인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수목원이 들어선 지역은 북쪽으로 백두대간에 속하는 구룡산, 동쪽으로는 태백산 사고지 터가 있는 각
화산, 남쪽으로는 외씨버선길이 있는 문수산, 서쪽으로는 옥석산 옥돌봉이 우뚝 서 사방으로 높은 산
을 이루고 있다. 백두대간 마루금과 연결되는 옥돌봉을 사이에 두고, 옛 보부상들이 다니던 길인 봉화
군 물야면 방향의 주실령 고개와 강원도 영월로 통하는 도래기재로 이어진다.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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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다
은 곳이라는 해발 700m에 자리해 마치 아늑한 고향 집 어머니 품처럼 안겨 온다.
백두대간의 상징, 백두산 호랑이: <국립 백두대간수목원>은 태고의 자연이 숨 쉬는 대한민국 생태계의
보고라 말하는 백두대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시설이자 세계에서도 두 번
째로 큰 수목원이다. 1,530만 평 정도 되는 면적을 가꾸는 손길마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한 애틋
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중에서도 <호랑이 숲>은 또 하나의 자랑거리다. 수목원 내에 조성된 <호랑
이 숲>은 축구장 4개 크기 규모로 국내 호랑이 관련 시설 중에는 가장 크다. 우리 땅에서 사라진 지
100년이 넘은 멸종 위기종 백두산 호랑이(한국 호랑이)의 종 보존과 그 야생성을 지키기 위해 자연 서
식지와 최대한 비슷한 환경으로 조성했다.
암석과 어울리는 고산 식물을 자연스럽게 배치해 만들었다는 ‘암석원’과 ‘야생화 언덕’을 지나 20분 정
도 언덕길을 오르면 호랑이 숲에 이른다. 관람객들의 안전을 위해 이중으로 철조망을 쳐 놓았는데 그
높이가 무려 5~8m나 된다. 호랑이는 주로 밤부터 이른 새벽까지 활동하기 때문에 한낮에는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쉬거나 잠을 잔다. 그 시간이 관람객들에게는 호랑이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다.
봉화의 깊은 골짜기에서 만난 백두산 호랑이: 현재 수목원 호랑이 숲에는 한청(2005년생, 암컷), 우리
(2011년생, 수컷), 한(2013년생, 수컷), 도(2013년생, 암컷), 무궁(2020년생, 암컷), 태범(2020년생,
수컷) 등 6마리의 호랑이가 있다. “백두산의 호랑이야 지금도 살아 있느냐, 살아 있으면 한 번쯤은 어
흥 하고 소리쳐 보라.”는 어느 대중가요 가사처럼 백두대간을 호령했을 백두산 호랑이의 기백을 다시
보고 싶다. 수목원 내 곳곳에는 호랑이 관련 조형물이 아기자기 놓여 있다.
시드볼트(SEED VAULT) - 지구의 씨앗 보관소: 수목원에서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장소지만 꼭
기억해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시드볼트(SEED VAULT)라 불리는 ‘장기종자보관소’이다. 이곳은 세계 최초
의 지하 터널형 야생 식물 종자 영구 저장 시설로서 고산 식물을 포함한 야생 식물 종자를 보존하기 위
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세계적으로 식물의 씨앗을 장기 저장하는 SEED BANK는 많지만, 영구 저장하는
시설로는 아시아권 최초의 시설이다. 국내외 야생 식물 종자 4,500여 종 9만 5,000여 점이 저장된 세
계 최고의 종자 보존 시설로서 안전한 보존을 위해 지하 터널형 구조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종자 전쟁이라 불릴 만큼 신품종의 종자 개발 및 공급을 둘러싸고 국가나 기업 간 정치적, 경제적 대
립이 격화되고 있다. 시드볼트가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세계 각국의 종자를 저장함으로써 지구 온난
화 및 급격한 기후 변화와 국가 재난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분단 70여 년의 시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DMZ(비무장 지대)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생태
계의 보고다. 백두대간에 자생하는 수많은 식물과 DMZ 안의 종자를 파악하고 보존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백두산은 세계적으로 식생의 특징이 뚜렷하며, 다양한 종자식물이 자생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
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 막혔다. 지금이라도 남북한 학자들이 공동 조사단을 꾸려
백두산 지역의 식물 종자 보존을 위한 작업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백두산 고산 지대에서만
자란다는 ‘두메투구꽃’의 종자를 직접 보고 싶다.
백두대간에 백두가 없다?: 수목원을 둘러보며 이토록 다양한 꽃과 나무들을 정성스럽게 가꾸고 키워
내는 수목원 사람들의 수고로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른 새벽부터 밤이 늦도록 새싹 하나, 나무
한 줄기 허투루 보지 않고 고이 가꾸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의 손길 덕분에 우리는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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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다
자연과의 공존을 꿈꿀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방문자 센터에 마련된 실내 전시관의 전시물을 보면 내심 마음 한 켠에 불편함이 있다. 바로
백두대간을 설명하는 한반도 지도 대부분이 북한이 잘려 나간 채 남한만의 반쪽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
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보호 지역이란, 산림청장이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정, 고시한
지역을 말한다. 강원도 고성에서 시작해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광대한 규모의 백두대간
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라고 한다.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이 있다는 것도 생
소했다. 그런데 분명 백두산부터 시작하는 백두대간인데 법령은 강원도 고성 지역부터 시작한다. 대한
민국의 법이 현재 미치지 못하는 북한 지역이라 해도, 백두가 없는 형상의 반쪽 지도를 보는 건 내심
마음이 편치 않다. 북한 지역을 빈 여백으로 두고 “통일의 그날, 백두대간의 지도를 완성하겠습니다.”
라고 포스터 하나쯤 있었으면 어떨까?
북한 지역을 담지 않은 남한만의 반쪽 지도는 사실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쉽게 볼 수 있다. 통일의 마
음을 오롯이 담기에도 부족한데, 일상의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분단의 장벽으로 마음을 닫게 만든다.
반쪽 지도가 가장 마음이 아팠던 장소는 바로 7번 국도 어느 휴게소였다. 7번 국도는 부산에서 출발해
울산, 포항, 영덕, 울진, 강릉, 주문진을 거쳐 고성까지 이르는 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길로도 알려질 만큼 그 비경을 자랑한다. 그런데 분단으로 인해 더 가지 못할 뿐, 사실 7번
국도의 종점은 강원도 고성이 아니다. 이 길은 부산에서 출발해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까지
닿는다. 한반도를 연결하는 등줄기 같은 7번 국도를 달리는데 정작 휴게소에는 반쪽짜리 지도가 걸려
있었다. 통일은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일상 공간
에서부터 통일의 마음을 담는 노력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수목원에 흐르는 작은 실개천은 수많은 협곡을 굽이굽이 돌아 낙동강에 이르러 거대한 물줄기를 이룬
다. 통일의 여정도 그러하지 않을까? 통일된 나라에서 맞는 산촌의 여름 방학과 크리스마스, 그때 우
리는 어떤 꿈을 만들고 있을까?
낙동강 세평하늘길 - 협곡이 숨겨 놓은 오지 트래킹
‘낙동강 세평하늘 둘레길’은 백두대간 협곡이 꼭꼭 숨겨 놓은 비밀의 장소 같다. 바람결에 흐르는 구름
처럼 세상 시름 잠시나마 떠나보낼 오지 트래킹으로 이만한 코스는 없을 듯하다. 분천역을 출발해 승
부역까지 이르는 12.4km 구간에 바람처럼 길이 열렸다. 험준한 협곡과 낙동강 물길이 사람에게 내어
준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다. 그 시절, 기차만 겨우 다닐 수 있었던 산골 오지에 사람들이 발자국을
내고, 강물이 내어준 만큼 소담한 길들이 서로 연결되었다.
영동선 철로를 따라 난 철길, 금강송 우거진 울창한 숲길, 출렁다리로 이어지는 협곡 길, 강변 옆으로
이어지는 자갈길, 잠수교와 철교 아래를 지나는 흙길 등으로 이루어진 길들은 다채로운 인간사의 단면
을 보는 듯하다. 길마다 홀연히 새겨진 억센 삶의 기억들을 더듬는다. 느림의 미학이라 표현하기에는
길 너머 풍경이 너무도 경이롭다.
낙동강 세평하늘길에서는 구석구석 녹아든 12선경을 만난다. 용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용관바위를 지
나면 깊은 골짜기에 암벽, 은병대가 병풍처럼 펼쳐진다. 관란담에는 잔잔한 물결이 바위를 휘감아 흘
러 못에 고인다. 거북 형상의 바위인 구암에 깃든 애절한 설화는 우리의 마음을 적시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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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다
두 봉우리의 높이와 크기가 어쩜 저리도 똑같이 닮았을까 하고 느꼈다면 그건 제5선경인 연인봉과 선
약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랑하지만 서로 1년에 한 번밖에 만날 수 없는 ‘설홍선녀’와 ‘남달’의 전설
은 마치 지금 남북한의 모습이지 않을까?
연인봉을 지나면 계곡 사이로 기차가 지나는 철교를 하나 만난다. 산허리를 휘감아 달려오는 기차가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이내 다시 나타난다. 험준한 협곡을 이어 주는 건 터널의 몫이다. 터널에 들
어서면 캄캄한 어둠 속에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터널 밖에서 바라보면 터널은 그야말로 서
로를 이어 주는 고리다.
골짜기와 산이 하나로 어우러진 백두대간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또 다른 세상이다. 분천역
을 출발해 비동승강장을 거쳐 양원역과 승부역에 이르는 굽이굽이마다 통일의 발걸음을 내디뎌 보자.
끊어져 신음하는 백두대간의 길들이 하나로 가닿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서….
승부역 - 전쟁의 승부가 결정 났던 심산유곡
<낙동강 세평하늘길> 코스 중 양원역에서 승부역까지 구간은 5.6km에 이른다. 바람의 손짓대로 느릿
느릿 걷다 보면 하늘도 세평, 땅도 세평, 꽃밭도 세평이라는 승부역에 다다른다. 승부역은 첩첩산중 깊
은 계곡에 자리해 기차가 아니면 접근이 어려운 대한민국 최고의 오지 역이었다. 옛날 전쟁이 났을 때
승부(勝負)를 결정지은 마을이라는 지역명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부를 잇는다(承富)’라는 뜻의 한자를
사용한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산과 낙동강 물줄기뿐이다. ‘승부역은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라는 글귀가 역사 옆 바위에 새겨져 있다. 1962년부터 19년 동안 이
곳에서 근무한 역무원이 써 놓은 글귀라고 한다. 세평은 워낙 산세가 험해 하늘을 올려다봐도 하늘이
세 평 정도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는 의미다. 말 그대로 세 평의 공간만 있어도 미소 지을 수 있
을 만큼 세상과 단절된 고요함에 매료된다. 심산유곡 간이역을 홀로 지켜 온 역무원의 외로움이 깊은
철학적 사유로 배어난 듯하다. 지금은 백두대간 협곡열차와 강릉역에서 출발해 분천역까지 이르는 ‘동
해산타 열차’가 다니는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손꼽힌다.
영암선 개통기념비: 승부역 뒤편 언덕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을 새겨 넣은 ‘영암선 개통기념비’가
있다. 영주에서 철암까지 이르는 86.4km의 철도 노선인 영암선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
립 후 대한민국 정부 최초의 철도 부설 공사로 착공되었다. 하지만 6ㆍ25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휴전
직후 미국의 원조 자금으로 다시 공사를 시작했다. 당시의 열악한 장비와 기술력으로 험준한 산맥을
뚫고 이으면서 교량 55개소와 터널 33개소로 만들어졌다.
험난한 산악 지형과 협곡을 이어야 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며 우리 손으로 건설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을 새겨 영암선 공사 중 가장 어려움이 많았던 승부역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
비 전면 중앙에는 자연석 판에 ‘영암선 개통 기념’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기념비 뒤편으로 놓인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투구봉 전망대를 지나 질금 전망대에 이른다. 이곳에 서면 한반도 지형을 닮
은 세평 뜰 경관이 펼쳐진다.
아버지 어머니의 청춘 시절: 영암선 개통이 1955년이라는 안내판을 보면서 문득 ‘같은 시기 북한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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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다
떠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북한 노래 <아버지 어머니의 청춘 시절>이라는 곡이 떠올랐
다. 가사 중에 “나의 어머니 청춘 시절 해주와 하성에서 흘렀네, 첫 열차 떠나보내며 울고 웃던 그 처
녀가 나의 어머니였네.”라는 가사에서 “해주와 하성에서”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바로 북한이 1958년 8월 13일 첫 열차를 개통했던 해주-하성 구간의 건설 성과를 선전하기 위해 만
든 곡이다. 북한의 언론 매체에 따르면 이 건설 공사에 1만 5천 명의 청년들이 탄원했다고 선전한다.
당시 건설장에는 “하루빨리 공사를 앞당겨 끝내고 어머니 수령님 계시는 평양으로 첫 열차를 몰아가
자!”라는 구호가 붙었다. 김일성이 직접 개통식에 참여했을 정도니 북한에서 얼마나 이 공사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2022년 지금 현재도 북한에서는 수많은 청년들이 자원해서 험지
로 탄원하고 있다며 선전한다. 그러면서 자력갱생의 모범적 사례로 해주-하성 열차 건설 공사에 동원
된 청년들의 자발적 탄원과 동일시하며 영웅으로 치켜세운다. 1950년대 북한 청년들의 짓밟힌 꿈은
2022년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옥방마을 - 근대화의 열망을 이룬 100년 마을의 흔적
봉화군 소천면 장군봉(1,135m) 남쪽 오미마을에서 샘물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 북쪽 방면으로 흘러간
다. 영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이 물줄기는 회룡천이다. 회룡천은 남회룡분교 앞을 지나면서 옥방천으로
불리다가 36번 국도를 만나는 지점부터는 광비천으로 바뀌고, 이어 영동선 승부역과 분천역 중간쯤에
가서는 승부리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쳐져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바로 그 ‘옥방천’을 사이에 두고 봉화의 분천과 울진의 광회가 서로 만나 옥방마을을 이루었다. 옥방마
을은 예전 텅스텐으로 불리던 중석을 캐내던 광산이 있었던 곳이다. 옥방광산에서 생산되는 백중석은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할 정도였다. 1950년대에는 연간 400톤 이상 생산되었으며 일본이나 독일로
수출되어 한국 경제 성장의 기틀이 되었다.
‘옥방’이라는 이름은 1913년 1월 15일 조선인 김상순과 일본인 아우랑조가 문바우골에서 옥석을 발견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941년 중석 광구가 발견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기, 6ㆍ25 전쟁 시기에 중석의 전략적 비중이 높아지고 광산이 활성화되면서 마을은 번성기를 누
렸다. 당시만 해도 1,200세대에,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만 400명이 넘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도시 같
은 광산마을 하나가 우뚝 솟아난 것이다. 하지만 마을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중석 광산이
폐광하고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잇던 사람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났다. 2022년 현재 옥방마을에는 60
여 가구가 살고 있다.
50년대의 반도체라 불리는 중석: 옥방마을의 번영을 이끈 건 텅스텐이라 불리는 중석이다. 중석은 말
그대로 무거운 돌인데, 텅스텐도 스웨덴어로 무거운 돌이란 뜻이다.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단단한 금속
으로 녹는점이 금속 중 가장 높아(섭씨 3,410도) 강한 열을 이겨 내야 하는 대포 포신이나 탱크와 같
은 무기 제조에 주로 쓰인다.
중석의 가치는 오늘날의 반도체에 비유된다. 외환 보유고가 바닥이었던 당시에 중석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금의 반도체에 비교될 만큼 비중이 높았다. 1952년 우리나라 수출 총액 3,958만
달러 가운데 68%를 중석 수출로 벌어들였으니 과히 한국 경제 성장의 기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1954년 즈음엔 전 세계 월간 수요량(1,500톤)의 3분의 1을 공급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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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다
옥방마을은 5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전형적인 광산마을로 변모했다. 옥방천을 따라 형성된 시가
지엔 약방, 당구장, 다방, 이발소, 술집, 미장원, 양복집, 구멍가게 등이 줄을 이었고 광업소 임금이 지
급되는 날이면 1km 구간 양쪽으로 장꾼들이 늘어설 정도였다고 한다.
광산 노동자들은 주로 출렁다리 근처 사택에 기거하거나 옥방천 양쪽의 산비탈 판잣집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그 시절,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이 당신들은 배곯아도 자식들만은
공부시키고 키워 내고자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 가던 때였다. 중석 수출로 나라 경제의 근간이 세워지
던 때였지만 광산 노동자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고강도의 장시간 노동과 빈번한 재해 속에 하루하
루를 이어 갔다. ‘하꼬방’이라 불리던 작은 판잣집에서 평균 6인 정도의 가족을 부양하며 혹한의 시간
을 견뎌 냈다. 당시 광산 종사자의 임금은 도시 근로자의 절반 수준(1982년 옥방 노동자 월평균 임금
이 14만 원, 도시 근로자가 29만 원)으로 삶은 고단하고 혹독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경계 위에 세워진 한 마을: 옥방천을 사이에 두고 옥방마을은 하나이지만 행정
구역상 군이 달랐다. 심지어 1963년 울진군이 경상북도로 편입되기 전까지는 도마저 달랐기 때문에
옥방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경상도(봉화)와 강원도(울진)를 넘나들며 마을을 일구었다.
황해도 연백 출신의 조인배 선생과 옥방국민학교: 옥방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자 당장 학교가 문제였다.
1953년 12월 1일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9번지에 옥방초등학교가 개교했다. 이때 학교 건축의 실무를
담당한 이는 바로 애국지사(건국 훈장 애족장) 조인배 선생이었다.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3ㆍ1 운동으
로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가 해방된 지 수년 뒤 아내와 자식을 모두
데리고 중석 광산이 있는 산촌으로 온 것이다. 당시 옥방국민학교는 처음에 3개 학급에서 1957년에는
11학급으로 확대되었다. 1962년 재학생 263명 중 180명이 광산 노동자의 자녀였다고 한다.
옥방교회: 옥방교회는 광산 노동을 위해 안동에서 이주해 온 구동방ㆍ손귀남 부부와 옥방 토박이 여운
석ㆍ김노미 부부가 1951년 4월, 전쟁이 한창일 때 옥방초등학교 옆 산 중턱에 초가집을 짓고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완전히 무너졌던 이 교회는 당시 광산 사무실로 사용되
던 곳이다.
소천중학교 옥방분교 - 여학생 하키팀이 전국소년체전 4강에: 1971년 3월 20일 옥방군 분천리 옥방초
등학교 터에서 3학급 70명으로 소천중학교 옥방분교가 개교한다. 마을에서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할
무렵인 1981년 7월, 248명이 재학, 그중에 68명이 광산 노동자의 자녀였다. 22년 동안 졸업생 1,084
명을 배출하고 1995년 문을 닫았다. 소천중학교 옥방분교의 교문은 지금 두 개의 기둥만 덩그러니 남
아 그 시절을 회상케 한다.
봉화 척곡교회(尺谷敎會) - ‘명동서숙’을 떠올리며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에 있는 척곡교회는 국가 등록 문화재 제257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곳이다. 척곡
교회를 찾아간 날은 2022년 5월 15일 주일이었다. 1907년 5월 17일에 설립되었으니 장장 115주년을
맞는 뜻깊은 날 꼭 이곳에 서 보고 싶었다. 115년 전 그날, 교회가 처음으로 세워진 그 순간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교회 창립 115주년 기념 예배를 인도하는 박영순 목사는 “첩첩 산골 교회가 세워진
특별한 의미”를 전하며 목소리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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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다
대한 제국 탁지부(오늘날의 기획 재정부) 관리로 일하던 김종숙(1872-1956)은 덕수궁에서 파견 근무
를 하던 중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를 만나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백척간두에 놓
인 나라의 운명 앞에서 그는 선교사를 보낸 나라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일제의 사슬을 끊고 나라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야소교를 믿어야 한다.”라는 하나의 신념밖에 없었다.
하지만 끝내 그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내던지고 처가가 있는 경
북 봉화군 법전면 척곡으로 낙향한다. 당시 그곳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주일이면 30리 산길을 걸
어 인근에 있는 문촌교회를 다녔다. 이후 몇몇 신도들과 함께 뜻을 모아 기도처를 만들었고, 1907년 5
월 17일 마침내 척곡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09년 3월 29일 9칸짜리 정방향 기와집 예배당과 6칸짜리 초가집 명동서숙을 건
립했다. 구한말 대부분의 교회와 학교가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것인데 반해 척곡교회는 한국인의 자발
적인 노력과 결단으로 시작되고 세워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봉화의 깊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시골 교회에 불과했지만, 척곡교회는 개신교 전파와 더불어 독립운동
의 근거지였다. 봉화 의병장과 독립투사들이 비밀 회합을 가지는 장소였고, 북간도로 보내는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척곡교회는 설립부터 독립운동과 깊이 연관돼 있었다. 김종숙의 처
남 석태산은 봉화에서 활약한 의병장이었으며, 그를 비롯한 정용선ㆍ김명림 등 독립투사들은 척곡교회
를 독립운동 자금을 만주로 전달하는 장소이자 회합 장소로 활용했다. 척곡교회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
를 받았지만 3ㆍ1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종숙은 1920년대에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해방 직전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의 대를 이어: 김종숙의 아들인 김운학은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발령받은 곳
이 봉화 인근의 <풍기보통공립학교>였다. 이곳에서 1년여 근무하다 <안동공립학교>로 전근을 갔고 그
곳에서 8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런데 이광수가 작사한 ‘대동강아 모란봉아’ 노래를 학생들에게 가르
쳤다는 이유로 일본 순사에게 체포를 당했다. 다른 곳으로 전근만 시키고 구속은 시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지인의 도움으로 <예천지보공립보통학교>로 대기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탄압은 그것으로 끝
나지 않았다. 형사가 찾아와 더 이상 봐줄 수 없으니, 당시 북조선으로 가면 신분을 보장해 준다는 제
안을 한다. 하지만 가족은 남겨 둔 채 혼자만 가라는 조건이었다.
결국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홀로 그곳을 떠나게 되었고, 평양 평원군 <동성공립보통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1년에 단 한 번 일주일 정도 휴가를 받아 고향에 와서 부모를 만나라는 것 외에는 공식
적으로 집에 찾아오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의 아들인 김영성은 해방 8년 전인 1937년 아버지가 사는
평양으로 가게 되었다.
3대에 걸친 나라 사랑: 올해 연세가 98살인 김영성 장로는 “너의 할아버지가 세운 교회를 잊지 말라.”
는 아버지 김운학 장로의 유언을 받들어 척곡교회와 명동서숙 복원에 평생을 바쳤다. 2009년 문화재청
이 관리하는 근대 유산으로 지정되어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다. 담벼락은 당시 일본 순사를 감시하기
위해 뚫은 구멍까지 섬세하게 복원했다. 현재 이곳을 관리하는 김영성 장로는 115년 전 척박한 산골
땅에 세워진 교회가 나라를 살리고, 숭고한 신앙의 유산을 이어 갔던 것처럼 다음 세대들을 다시 세우
는 꿈을 꾼다. 100세를 앞둔 그는 여전히 청년이다. 그러니 우리 또한 생을 마치는 그날까지 통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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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다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국내 유일의 ㅁ자형 교회 - 생명이 된 뒷문: 척곡교회는 설립 역사뿐만 아니라 건축 형태도 각별하다.
예배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15평 정도 되는 미음(ㅁ)자의 기와집 형태다. 초창기 한국 교회가
대부분 기역(ㄱ)자 또는 한일(一)자 형태로 이루어졌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평가
받는다. 교회 건물을 미음(ㅁ)자로 지은 건 뒷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뒷산으로 연결된 뒷문은 예배
인도자가 드나드는 문이자 독립운동가들이 발각될 경우 피신하기 위한 용도였다. 교회 출입문은 왼쪽
과 오른쪽에 작은 솟을대문처럼 지어졌다. 남자와 여자의 출입구를 구분했기 때문이다. 교회 살림은
가난한 산골 신자들의 성미 쌀로 유지되었는데 지금도 예배당 양쪽 벽에 성미 자루가 걸렸던 못들이
남아 있다. 1990년 앞쪽에 현관을 만들면서 붉은 벽돌로 증축하였지만 내부의 강단과 아치형 나무 장
식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명동서숙 - 동방을 밝힌다: 예배당 앞에 있는 초가 건물 명동서숙은 일제 강점기 후진 양성을 위해 지
은 교육 기관으로서 신교육을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전파해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주로 성경과 국어, 산수, 한문을 가르쳤는데 그 당시 이 지역 사람들 대다수가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
고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시대에 빛을 발하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큰 몫을 감당하였다. 규암
김약연 선생이 북간도에 세운 명동서숙과 이름이 같다. 봉화 독립투사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북간도로
전달했다는 사실을 비춰 보면 일부러 동일한 이름을 썼던 것 같다.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은 1899년에 자신의 식솔과 김하규, 문병규, 남도전을 포함한 네 가정의 가
족 142명을 이끌고 고향 함경도를 떠나 두만강을 건너 중국 지린성 허룽현으로 이주했다. 그곳이 바로
북간도이다.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도 1년 뒤 그곳에 자리를 잡았고, 이들은 ‘동방을 밝힌다’는 뜻으
로 마을 이름을 ‘명동촌’이라고 지었다. 명동촌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들은 이주
지에서 땅을 경작하고 수확물을 거두면 3분의 1은 먹고사는 데 쓰고, 3분의 1은 후손 교육에 썼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군사력을 키우는 데에 썼다고 한다.
명동서숙은 1906년 12월 북간도 용정에서 이상설의 주도로 설립되었다가 헤이그 특사로 떠난 뒤 일제
의 탄압으로 1년 만에 폐교된 서전서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래서일까? 척곡교회 마당에 서 있노라
면,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고 말한 김약연의 굳은 결의가 다시금 떠오른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을 떠올리게 되고, 시인이 “어머니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를 읊조리며
눈물짓는 모습이 전해 온다.
필자가 북중 국경 답사를 가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바로 도문시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생가다.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는 명패를 달고 아픈 역사를 말해 주는 곳이다. 그리고 두만강 너머 북한 남양
과 마주한다. 회령에서 이주해 온 명동촌은 다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는 윤동주 시인에게 그저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는 ‘쉽게 쓰여진
시’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 나라 잃은 현실에서 시가 너무 쉽게 쓰여져 죄스럽다고 읊었다. 그의 고백대
로라면 오늘의 분단 시대를 너무 쉽게 살아가는 것 같아 죄스럽다. 북간도에 계시는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윤동주의 식구처럼 아직 북한에 계신 어머니를 애타게 그리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이 고향
에 돌아갈 날은 언제일는지, 그들의 고향 길 더듬어 줄 하늘과 바람과 별이 되고 싶다.
북한 동포를 위한 밥 한 그릇의 기도: 척곡교회에서 드리는 이 식사 기도문은 북간도의 명동교회ㆍ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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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다
동서숙에서 드렸던 식사 기도와 같았다고 한다. ‘식기도 소고’에서 김영성 장로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
다. “그리고 여유 있는 시간에서의 식기도 때에는 굶주리는 북한 동포의 밥 한 그릇을 위하여, 더 시간
이 있을 때의 식기도에는 굶주리는 세계의 인류를 생각하며 진정한 감사의 식기도를 드리기를 부탁한
다.” (<봉화 척곡교회 문헌 사료집>, 427쪽)
충혼탑과 호국동산 - 자유 민주주의를 지킨 빛나는 무공 훈장
봉화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라면 누구나 충혼탑에 대한 한두 가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봉화 읍내
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동산에 자리 잡은 충혼탑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외진 곳이었다. 현
충일을 비롯해 특별한 행사가 열리는 날을 제외하면 이곳은 우리의 생활 저편에 머무를 뿐이었다.
충혼탑을 새롭게 세우고 월남참전비와 참전 용사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추모비 등을 정비하면서 이곳
은 말 그대로 호국동산으로서 자리매김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뜻깊
은 장소로 남아 봉화의 또 다른 상징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
다의 마지막 여정을 호국공원에서 마무리하며 봉화의 가치를 되새겨 본다.
백척간두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고자 임진왜란 의병부터 항일 독립투사까지 수많은 민족의 영웅을 잉
태한 특별한 기운이 봉화에 있다. 6ㆍ25 전쟁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 앞에 기꺼이 목숨을 내던
진 의로움은 봉화의 기백이다. 베트남 참전 유공 전우회 봉화군 지회의 이름으로 새겨진 비문에는 “평화
는 개인의 생명보다 우선하기에 나라의 명령을 받은 우리는 비장한 가슴을 안고 멀리 험한 남지나해를
건너 폭염의 전장으로 달려갔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결연한 의지가 바로 봉화의 정신이다.
호국동산에서 봉화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남은 자의 몫이 무엇인지 다시금 가다듬어 본다. 여전히 끝
나지 않은 전쟁 속에서 분단의 질긴 쇠사슬을 끊어 내기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국가보훈
처 지정 현충 시설로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봉화군 지회에서 관리하는 전공비에 새겨진 비문은 그 답
을 명확히 말해 주는 듯하다.
대한민국 무공수훈자 전공비: 비극의 6ㆍ25 전쟁으로 풍전등화에 처한 조국을 구하고 월남 전쟁으로
세계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를 지킨 그 빛나는 무공 훈장과 보국의 충성심을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전
공비를 세운 호국동산이다. 나라를 위해 산화하신 호국 영령의 숭고한 희생을 교훈으로 삼아 안보 의
식을 굳건히 하고 경건한 추모의 장소가 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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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눈으로 봉화를 다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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