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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금융,부동산,투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경제사 여행

by Casey,Riley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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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브레이스 교수와 함께 떠나는 경제사 여행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차례

  옮긴이의 말
  머리말
  1. 대변동
  2. 분수령
  3. 혼란의 뿌리
  4. 채무, 인플레이션 그리고 케인즈
  5. 미국경제화 고전파 경제학
  6. 투기의 열풍
  7. 대폭락
  8. 대공황
  9. 뉴딜 정책
  10. 케인즈 혁명
  11. 보다 넓은 세계
  12. 제2차세게대전
  13. 영국 그리고 그 건너편
  14. 평화I
  15. 평화II
  16. 좋은 시절
  17. 탈식민지화
  18. 케네디의 경제정책
  19. 가난과의 전쟁 그리고 전쟁
  20. 우울한 시절
  21. 패배로부터의 승리
  22. 레이건의 업적
  23. 대통합
  24. 불확실한 기적
  25. 더 큰 평화를 위하여

    A Journey Through Economic Time

  제1차대전의 패전국 독일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어디에 있는가? 제 2차대전 직후 열강들이 식민지를 포기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영국에서 태동한 자본주의는 왜 미국에서 전성기를 맞게 되었으며, 부동산 투기 열풍은 국가의 분위기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가 전쟁과 평호, 이데올로기와 무지로 얼룩진 경제사의 뒤안길을 낱낱이 파헤치면서, 백여년의 자본주의 역사를 면밀하게 추적, 진단한 새로운 경제사 입문서!
  21세기를 맞이하는 역사적 전환기에 서 있는 지금, 세계 경제의 현주소와 그 종착지는 과연 어디인가?
  탁월한 경제사적 안목과 독자를 사로잡는 매혹적인 문장으로 경제시대의 구비구비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갤브레이스 교수의 흥미진진한 경제사 여행!

  
    머리말

  이 책은 내가 경제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예순 한 번째 되는 해에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이 세월 동안, 다시 말해 20세기의 3분의 2정도
되는 기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경제정책의 입안에도 빈번하게 참여했고, 경제생활에 대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비평하고 해설했으며, 그 밖의 모든 경제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왔다. 이 책은 그러한 배경으로부터 탄생되었다.
  이 책은 일반적 의미의 경제사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사상 및 사건들의 내적 관계에서 일어난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것이 가치 있고 유용한 노력임에는 분명하지만, 적어도 여기에서는 나의 관심 밖에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최근 수년 동안 경제생활의 핵심에 대해 보고 배운 것에 대해 설명했다. 이 책은 나의 청년시절 초기에 많이 들었던 사안들, 특히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기묘한 비극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다음에야 그 전쟁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 연구했다. 처음  몇장은 기왕의 다른 연구와 저술에 많이 의존했다.
  예를 들어, 나는 증권시장 대투기가 한창이던 192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은 아니엄ㅆ다. 뒤따른 대공황의 절박한 경험과 비교하면 확실히 사소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다음해에 나는 금융 과잉과 광기로 뒤덮인 이 고전적 사례를 되짚어 검토했다. 나는 이 책에서 그 결과물, 특히 내가 쓴 역사책 "1929년 대공황The Great Crash, 1929"을 이용했다. 이 책은 1955년에 처음 간행된 이래 지금도 계속 인쇄되고 있다(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이 책은 시야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라질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은혜로운 사건이 일어나 이 책의 시의성이 회복되곤 했다). 그리고 꽤 용량이 크다고 자부하는 기억력에 의존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해설한 다음에 지식과 경험에 맞추는 것은 불가피한 경향이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대부분의 회고록 집필자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이 점을 솔직히 시인한다.
  몇 가지 사안들에 대해서는 여러 해에 걸쳐 '풍요한 사회The Affluent Society' '새로운 산업국가The New Industrial State' '경제학과 공공목적Economics and The Public Purpose' 같은 책들에서 미진하게나마 경제, 사회적 배경에 대해 현대적 해석을 부여하려 노력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그런 노력을 다시 깅루이지 않았다. 그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연구를 하리라고 생각한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경제, 사회적 사상데 대한 나의 공헌은 보다 사심이 없고 엄격한 관찰자들에게 돌리고자 한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 책은 내가 보고 배운 것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온전히 옮겨 쓰지는 않았다. 대신 경제적 행위의 주요 요소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내가 의도적으로 주의를 돌리지 않은 덜 중요한 문제들이 있음을 밝혀둔다.
  여러 해 전에 나는 '타임Time' '포츈fortune' '라이프Life'의 설립자이며 (지금은 합병, 매수라는 괴물에게 잃고 말았지만), 전무후무한 위대한 저널리스트이자 편집자인 헨리 로빈슨 루스Henry Robinson Luce밑에서
일했다. 글을 쓸 때면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듯하고, 그의 연필이 여전히 내 원고에 내려와 글씨를 쓰는 듯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이건 빼게.'
  세부적인 것이 견고하고 본질적인 핵심 행세를 할 위험이 있다. 그것은 또한 독자를 산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의욕을 꺽어놓기까지 한다. 나는 여기에서 경제적, 사회적 사조들을 내가 관찰한 대로 혹은 내가 이해한 대로 신중하고도 군더더기 없이 설명하려고 애썼다. 혹시 군더더기가 있다면 그것은 고의라기보다는 개인적 탐닉의 산물이다.
  앞으로 나올 책 "삶의 보다 가벼운 측면Lighter Side of Life"(가제)에서는 오랫동안 인간의 삶을 특징짓고 위무해온 오락과 정신 이상 및 세련된 광적 행위들에 대해 쓸 예정이다. 이 책에서도 그러한 부분을 언급했다. 처음 몇 장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경제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현상은 고매한 어리석음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기본 주제를 고수했다. 기본 주제란, '경제는 수십년 동안 어떻게 작동해 왔는가' '전쟁과 평화, 정부와 시장, 이데올로기와 무지의 영향들이 경제의 도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저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전문적인 경제학 논문 특유의 용어나 설명은 피하려고 했다. 때로 전문용어라고 불리는 이런 어법에 의지하게 되는 현실을 개탄할 생각은 없다. 영어 교수들에게도 그들에게만 통용되는 전문용어가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전에도 종종 밝혔듯이, 명쾌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다시 말해 문자를 깨친 관심 있는 독자들을 이해시킬 수 없는) 경제적 과정이나 문제는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러한 취지가 실수나 지나친 단순화를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일반 독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해서 논거와 결론이 부정확해도 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하나의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즉 혼합경제-형태상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현재의 유일한 체제이다-와 변화의 지배적 동안에 대해서는 제1장에서 설명하겠다. 경제학에서도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과오는 경제를 안정적이고 불가변적인 구조로 파악하는 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믿음이 나의 이 책 그리고 내가 신앙하는 바의 지침적 고백이다.
  J.K.Galbraith


    1. 대변동

  자본주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산업자본주의는 봉건적 농업에 의해, 그리고 경제정책 면에서는 상인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18세기 후반에 등장했다. 여기에서 상인들이란 단순하고 기초적인 생산물을 획득하여 판매하는 사람들로서, 직물류와 옷가지 및 향신료를 주로 팔았다.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 후에 등장한 경제체제는 본질적으로 기술의 소산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어쨌든 직물산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산방식이 확산되었다. 추운 기후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나 온화한 기후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나, 식과 주 다음으로 요긴한 것이 의였기 때문에 직물산업은 굉장히 중요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지 오늘날에도 의복은 학문과 지성을 훨씬 능가하는 사회적 지위와 우월성의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처음에는 수력이 직물 생산의 기계화를 뒷받침했지만, 점차 북과 직기를 작동시키는 증기와 기계가 등장하면서 이러한 기계의 중요한 소재를 공급하는 제강 공장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철도 운송이나 수운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지원 매뉴팩처들도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새로운 종류의 산업들이 발전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두드러진 그리고 일반적인 특징은 설비와 기계를 소유하거나 혹은 그것들을 획득할 수단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체제가 권위를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는 봉건적인 지주는 자신의 권위를 토지 소유권에 의존했다. 초기의 대규모 무역회사들-인도, 중국, 미국에 이르는 원거리 상업 종사자들-을 포하만 상인들은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배와 돈을 제공하는 것에 의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흥 산업자본가들은 외관상 구별되는 뭔가가 있었다. 기존의 토지소유계급이나 상인과는 달리 그들은 무대에 갓 등장한 상태였고, 경제적 이익에 헌신적이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천한편이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해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을까? 그들에 대한 좋지 않은 사회적 평판은 전통적으로 부유하고 혜택받은 사람들의 적대적 태도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정도를 넘어선다.
  또한 공장 소유주들이 가시적으로 지배한 노동자와 비교해 보아도 분명히 다른 점이 있었다. 봉건주의 혈통을 물려 받은 대토지 소유주가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자신의 소작농들에 대해 누린  위는, 최대의 산업자본가가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누리는 권위에 결고 뒤지지 않았다. 단지 그의 권위는 보다 덜 가시적으로 관철되었을 뿐이다. 대토지 소유주는 소작농에게 전통적인 그러나 공식적으로 정해진 양 이상의 금전을 강요했다.
  18세기에 잉글랜드와 남부 스코틀랜드에서 발전한 산업 자본주의는 위치의 변천을 겪으며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새로운 체제는 백년에 걸쳐서 영국으로부터 독일과 프랑스로, 보다 제한된 양식이긴 하지만 스칸디나비아와 이탈리아로,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정착했다. 미국의 새로운 강도귀족들Robber Barons은 그 이름에 걸맞게 우선 뉴욕시에 근거를 두었으며, 토지를 가진 귀족계급과 심각한 경쟁을 초래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자본주의적 권위의 가장 두드러진 징표였다.
  그 운동은 계속되었다. 금세기 초까지 가장 완강한 봉건 열강이었던 러시아에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또한 봉건 권력과의 경쟁을 통해 일본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 운동은 우리 시대에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태국, 중국 심지어 인도에까지 계속되어왔다.
  영국에서 태동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발전은 부분적으로 단순하고도 소박한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즉 재화와 교통, 통신 및 전기와 같은 고도로 조직화된 용역이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됨으로써, 인간의 노력을 최소화하면서도 훨씬 낮은 비용으로 훨씬 풍부한 공급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산업 생산의 기본적 동인들에 의해 발전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보다 연륜이 있고 경험도 많으며, 더욱 잘 조직화되고 자본주의화된 산업이 유리했다. 지난 세기에는 독일이, 그 다음에는 미국이 자신들보다 더 효율적으로 생산된 영국 제품이 보호받기를 원했다(이것이 유치산업 관세의 옹호론이다. 즉 취약한 신흥산업은 기존의 연륜 있는 산업에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대변동을 겪으며 신흥산업의 장점이 명백해졌다. 예외란 늘 있게 마련이지만, 기성국가들의 산업, 기업 경영은 자만에 빠져 있고 관료화된 데 반해, 신흥국가들은 열성적이고 정력적이며 내핍적인 경영을 하였다.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기성국가들은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조차 꺼려했다.
  보다 중요한 점은 노동력 공급의 문제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봉건적이고 악랄한 약탈에서 벗어나려는 농민들이 신흥국가의 공장과 그 밖의 기업에 줄줄이 흘러 들어갔다. 도시의 새로운 사회 환경뿐 아니라, 가장 소박하고 심지어 빈한하기까지 한 도시 노동자의 생활 수준도 그들이 떠나온 농촌의 궁핍과 억압 그리고 사회적 소외에 비하면 꽤 훌륭한 편이었다(실생활의 관점에서 시골의 신선한 공기만큼 심하게 과장된 것은 없다). 자본주의의 대변동 속에서 기초산업은 새롭고 열성적이며, 경제적인 노동력으로 움직이게 된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기성국가의 기초산업은 그러한 노동력이 내부적으로 보충되었을 때에만 유지된다. 미국에서는 산악지대의 가난한 백인들과 남부 흑인들로, 그리고 유럽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로 보충했다.
  신흥국가는 노동력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매우 유리하므로, 기성국가들은 경제적 태도를 조정할 수밖에 없다. 유치 산업 보호라는 초기의 요구는 저임금 신흥국가들에 맞선 기성국가들의 노쇠 산업 보호 요구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이보다 더 가차없이 작용하는 자본주의의 동인은 자본주의의 대국가관계 속에 있다. 이 관계는 지금까지 이 체제가 야기한 토론과 논쟁의 가장 큰 부분이기도 하다.
  봉건체제에서는 사실 대가신들이 곧 정부였다. 왕과 귀족 계급은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단지 즐기기 위해서도 광범위한 논쟁을 치렀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우월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당연하게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봉건적 지배 하에서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권력과 권위를 차지한 상인들은 국가를 자신을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거기에는 독점이라는 하사품도 있었다.
  국제무역에서는 대부분의 경쟁이 규제되었다. 신흥자본가들은 경쟁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았다. 사회역사가들에게 중상주의로 알려져 있는 이 규제장치를 신흥 산업자본주의의 대변자 아담 스미스는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공격해 마지 않았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영어권 국가에서 강한데, 그 이후로 국가와 산업은 빙탄지간이라는 확신까지 생겼다.
  그런데 독일과 일본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들 중 가장 성공적인 이 두 나라에서는 국가와 관료집단이 민간산업,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인자하고 필수적인 지원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다른 나라,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정부는 원칙적으로도 또 실제적으로도 사기업의 천적으로 간주된다. 물론 많은 예외는 있을 것이다. 모든 나라에서 산업과 정부의 관계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크게 변해왔다. 이것이 자본주의 대변동의 중심이다. 다음에서는 이 주제를 주로 다루려고 한다.
  물론, 기초 산업 혹은 전통적 산업이 기성국가들로부터 신흥국가로 이동된다 해도 기성국가는 좌절하지 않는다. 다른 경제활동이 살아남아 번창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도의 혁신적 기술에서는 여전히 유리하다. 물질적 소비재가 풍족하면 사람들은 시각적 즐거움과 오락을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후자-더 좋은 디자인, 더 좋은 건축술, 연예물과 텔레비전 프로그램, 패션, 예술, 지적 작업들-는 제강 공장이나 자동차 공장과 똑같은 경제적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이것은 경제적 측면이 아니라 역사적, 전통적 태도에 근거한 사실이다.
앞서 만들어진 제강 공장은 경제생활의 견고한 토대가 되었다. 경제성장은 자본주의의 가장 큰 동인이다. 현대로 들어와서 경제성장-통계치로 표시된 재화와 용역의 총계적 생산량의 증가-은 경쩍 성취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 수단으로 인정되었다. 하나의 경제는 건강한 젊은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성장한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다음 분기에는 4.1p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는 등의 예측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대의 어떤 통계도 독보적인 권위를 누리지는 못한다.
  그런데 경제학자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성장률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의 동인이다. 그러므로 경제성장과 그에 따르는 특별한 사회, 정치적 효과는 매우 중요하다. 주요하기로는 경제성장의 엄청난 비신뢰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의 심각한 불안정성의 경향이다. 자본주의의 건축 재료는 황폐화라는 순환적 삽화들이다. 성장이 둔화되면 절대적 쇠퇴에 길을 내준다. 확신과 안심은 두려움과 걱정에 길을 내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변변히 인정되지 못했다. 지난 세기에 미국에서는 그런 사태들을 (위기Crises)나 (공황Panic)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 용어들이 공포감을 조성해 사업 의욕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됮, 곧이어 훨씬 부드러운 용어인 (불경기Depression)를 사용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이렇게 위로했다.
  (이건 공황이 아니고 단지 불경기일뿐이야)
  그런데 (불경기)가 1930년대의 잔인한 경제적 체험이라는 지극히 불길한 함축을 얻게 되자, 훨씬 덜 불안한 용어인 (경기 후퇴Recession)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불경기가 아니고 경기 후퇴일 뿐이야)
  그 다음에는 (경기 후퇴)마저 불유쾌한 의미를 확립하게 되자 대신 (성장 조정Growth Adjustment)이라는 말을 사용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그것이 무엇으로 불리든 불경기, 경기 후퇴, 성장 조정 혹은 가장 심각한 현대적 개념인 (지속적 불완전 고용 균형Enduring Underemployment Equilibrium)과 그 원인은 현대 경제에 대한 어떠한 경해에서도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둘째, 평가할 만한 경제성장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생활수준은 점차 악화되기만 하는 지역이 이 지구상에는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아프리카, 중앙 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의 일부 국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일반적인 경제 토론에서 이 지역의 문제는 아주 관심 밖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적 가치와 인간적 고통에 관심을 갖는다면 이 지역의 문제는 우리네 관심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현대 경제생활에서 이루어진 성장의 반대편에 이 지역의 실패가 놓일 게 틀림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알아보기로 하자.
  경제학 교과서에는 전통적으로 (비교경제체제론)이라는 부분이 포하뫼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일반적으로는 공산주의라고 불리는 포괄적 사회주의  릐 계획 및 통제 체제에도 주의를 돌린다. 이 체제에서는 모든 혹은 대부분의 생산자원을 국가, 더 자주 쓰는 말로 표현하자면, 인민이 소유한다. 따라서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 발의하고 지도하는 일을 국가가 담당한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최근 몇년 사이에 이 마지막 장들이 쓸모 없게 되었다. 고의나 강제에 의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사회주의는 현대, 아니 모든 시대를 통털어서 가장 큰 경제적인 변화를 겪으며 대안의 체제로 나왔지만, 결국에는 중국, 코바, 북한이라하는 멀리 떨어진 모호한 세계로 내좇겼다. 20세기의 경제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다러다 이 변화는 매우 크게 확대되어 보일 게 틀림없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너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 막 언급한 공산주의의 붕괴 탓이긴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한 때는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칼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이제 경멸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를 너무 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태도이다. 우리가 경제결정론이라는 개념을 알고, 인류 역사에서 경제 세력들이 수행한 강력하고 결정적인 역할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은 대부분 마르크스 덕분이다.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 체계가 형성되던 한 세기 반 전에는 그의 주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며, 오늘날에도 그 가치는 여전하다. 그의 개념은 전문 경제학자들의 연구 이상으로 주의를 끈다. 현대 역사가 경제적 변수들 내에서 규정되지 않는다 해도, 경제적 맥락의 형성과 제어에 대해 모른다면 그 역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경제학과 경제적 변화가 어떻게 그보다 큰 사회적, 정치적, 군사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지배하는지를 알아내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책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의 범주 안에 있다.

    2. 분수령

  나는 1908년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나는 여섯 살이었다. 당시에 내가 어떤 깊이 있는 경제적 인식을 지녔다고는 말할 수 없다. 4년 후 전쟁이 끝났을 때나 좀더 자라서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도 사정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이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세월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죽음과 슬픔은 내가 살던 온타리오의 시골까지 미쳤다. 전쟁과 학살에 대한 반대는 아주 뚜렷이 나타났다. 사태의 책임은 나쁜 사람들에게 있으며, 그들은 타고난 멍청이라는 정서가 확산되어 있었는데, 촌스러운 스코틀랜드인들(우리는 그렇게 불렸는데 맞는 말이었다)사이에서 특히 강했다. 이러한 생각은 다음에 내가 전쟁에 관해 다시 읽고 연구한 다음에도 바꾸지 않은 결론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현대 경제상의 대전환점, 다시 말해 다른 어떤 전환점보다 더 확실히 현대의 경제시대Modern Economic Era를 예고해주었던 전환점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대전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대전Great War이란, 제1차세계전쟁을 한층 부드럽고, 덜 신랄하고, 덜 자극적으로 순화시켜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 전쟁은 수세기 동안 유럽을 지배해오던 정치구조를 파괴했다. 그리고 세계경제 무대에서 미국의 위치를 크게 바꾸었다. 미국은 전에는 경제 논문의 보론이나 부록에 있었지만, 이제 주요 항목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런던과 파리의 불빛이 어두워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뉴욕이 더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던 것뿐이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좋은 나쁘건 위험한 것은 사상이지 기득권이 아니다"(주:John Maynard Keynes, The General Theory of Emploment Interst and Money (New Yok:Harcourt, Brace, 1936), p.384 원래는 제목에 콤마가 없었는데 주석자들이나 그들의 선의의 편집자들은 변함없이 콤마를 참가해왔다.)라고 말했다.
  나도 다른 학자들처럼 사상이 지배적인 요소라고 믿고 싶지만, 여기에서는 외적인 힘을 강조하고 싶다. 게다가 전쟁은 오랫동안 제자리를 지켜왔던 정치, 경제 구조를 파괴하고, 크고 작은 부유하고 빈궁한 나라들 사이의 관계를 재편성했다. 그 변화는 명쾌하지도 못했고 과단성도 없었으므로 그 후 몇년간 경제적, 정치적으로 일관성이 없었다. 하지만 그 변화가 기념비적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의지가 없을 것이다. 사실 제1차세계전쟁을 대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제2차세계대전은 그 마지막 전투에 불과했다.
  유럽에서 종식된 것은 하나의 정치, 경제 체제였다. 그것은 독일과 서유럽 및 제정 러시아에서는 쉽게 눈에 띄었고, 영국에서는 덜 분명했으며, 늘 그럿듯이 프랑스에서는 보다 모호한 체제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의 정치적 권위는 토지소유권 혹은 토지 소우 귀족의 전통과 관계가 있었다. 군사적 권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더욱 두드러졌다. 이 지배계급 밑에 기존의 상인계급과 자본가들이 위채했다. 그들은 알려진 대로 재화의 대량 생산과 유통 및 운송 용역을 공급하면서 초기의 장인들을 대체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치는 여전히 토지소유계급이나 봉건계급의 의무로 간주되었다.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위신은 수세기 동안 토지소유권 및 토지 수입에 대한 특권적 접근 능력과 일치했다. 그러므로 지배계층은 토지 소유 세력이 건재하다는 표현이었고, 군의 장교계급은 더욱 그랬다. 유럽의 주요 열강들 가운데 가장 민주적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상거래에 종사)하는 것이 사회적, 정치적 부적격의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다. 실업가나 금융업자는 제 갈 길만 갔다. 그러한 일은 통치자가 되거나, 의회에 진출하거나 혹은 군대의 장교로 복무할 수 있도록 보장된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직분이 아니었다.
  많은 저술과 논의에서 권력의 이미지를 선도적 자본가들-철도 등의 산업시설을 소유하거나 자금을 댄 사람들-에게 돌렸지만, 이는 유럽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히려 칼 마르크스의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아담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케인즈를 제외한 경제학의 어떤 인물들보다 더 많이, 그의 저술을 전혀 읽어본 적 없는 많은 사람들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타궐성을 지녔다.
  튼튼한 기반을 구축한 영국의 자유당원들조차 여전히 토지소유계급과 관계를 가지거나 경의를 표하는 이들이 있었다. 상원과 세습계급의 권력이 효과적으로 제어된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4년 전이었다. 영국 군대 내에서는 지배계급과 장교계급이 거의 동일했다.
  베를린, 비엔나, 세인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구세력인 토지소유 귀족들이 여전히 정부와 군 조직을 철저히 장악하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나 산업자본가가 아닌 그들은 참전을 결의했으며, 특히 독일을 경우에는 전쟁 수행을 위한 신중한 계획을 마련했다. 독일에서는 마르크스의 영향 아래서구지배계급을 넘어 크루프A.Krupp와 같은 현대 산업세력에게 시선을 돌리는 공인된 경향이 존재했으나, 권력의 실체는 여전히 토지 소유 엘리트였다.
  구봉건계급의 이와 같은 계속적인 역할은 주목할 만한 결과를 낳았다. 그 하나는 전쟁은 기본적으로 영토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아주 오래된 심오한 깨달음이었다. 한때는 이것이 사실이었다. 전통적으로 영토 정복이 부와 권력의 기반이었다. 영토와 함께 경제적인 생산을 담당한 소농들과 공, 사적 수입, 그리고 주인을 위해 무장 전투를 치를 부하들이 따라왔다. 따라서 전쟁은 더 많은 영토의 획들이라고 하는 무척이나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치러졌다. 그리하여 방어적 군사 개념에서 변방에 병력을 배치하고 요새를 구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알자스와 로렌의 장악이 불, 독 관계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동쪽 끝에서는 폴란드 장악이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토지를 장악하려는 탐욕이 (물론 통상권을 획득하고 유지하려는 탐욕도 함께) 아프리카와 아시아 및 중동에까지 미쳤다. 그처럼 아무런 비평도 야기하지 않으면서 그처럼 인간 영혼에 깊숙이 뿌리 박혔던 관념은 없었다. 이 구식 태도에는 강한 메아리들이 계속적으로 따랐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 아돌프 히틀러의 '레벤스라움Lebensraum(나치스의 생활공간)' 요구 속에서도 울렸고, 전쟁 후 동유럽과 발트 제국 사이에 이루어졌던 영토의 조정과 획득 고정에서도 울려 퍼졌다. 전쟁이 영토의 방어나 취약한 변방의 보호 등과 관계가 깊다는 봉건적 관념은 오늘날까지도 연전히 군사 마인드 저 깊은 곳에 혹은 일반적인 표명의 후미진 부분에 잠복해 있다.
  더 많은 토지를 차지하려는 욕구를 줄이는 것이 현대적인 자본주의적 태도와 업적이며, 보다 환영받을 승리들 가운데 하나이리라. 싱가포르나 홍콩과 같은 번영을 구가하는 도시국가에서는 토지는 전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비쳐졌다. 그리고 보다 넓은 세계에서도 토지가 경제발전과 관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에서는 주변적 관계밖에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여러 해 동안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도 모두 식민지를 포기했다. 그렇지만 그 국가들의 경제적인 안녕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간혹 식민지 시대가 조언을 고한 것은 식민지 민족들의 거부와 봉기 그리고 식민주의 열강들의 한층 세련되 태독 덕분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식민지가 더 이상 경제적인 가치를 잃었단 약간은 단순하지만 설득력 있는 사실에 주의 돌려야 한다. 영토는 더 이상 중요한 대상이 아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이야기하겠다.
  조상 전래의 토지 소유 및 그 전통은 인간 지성의 중요한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상속은 정신적 능력이나 자질보다는, 권리에 의해 이루어졌다.
  앞에서 말했듯이 아는 캐나다의 시골에서 스코틀랜드께 씨족들 한가운데서 성장했으므로, 많은 것을 듣고 자랐다. 유럽에서 빚어진 갈등과 캐나다의 참전에 대해서 그리고 그렇게 말려든 군부와 민간 지도자들의 명백한 어리석음에 대해서 어른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어른들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런 미친 짓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종의 지역적 합의마저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양친과 함께 마을회관에서 열린 지역 회합에 참석했다. 제복을 입은 두 명의 모병장교들이-그때는 징병이 시행되기 전이었다-회합에 참가한 젊은 농부들과 농장 일꾼들에게 입대를 설득하는 연설을 했다. 농부들은 (우리가 없으면 농사는 누가 짓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나라를 구하자는데 이 나라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뒤덮은 잡초 속에서 자란다 한들 그게 무슨 문제이겠습니까)하고 열띤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식량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아버지를 통해서 얻게 된 생각이지만, 이 문답을 지켜보면섬 나는 참전자들의 어리석음과 지역에 대한 나의 믿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무지와 어리석음 통속적으로 언급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치적, 역사적 타당성을 위해서는 목적과 합리성의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너무도 명백하게 그런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전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정신적 편협성과 불구서을 떠올리지 않고 초연하게 전쟁을 (또한 그 여파를) 관찰 할 수는 없다. 귀족의 토지 소유 전통은 지극히 무능한 지도자들이 정부와 군대를 장악하도록 보장하는 거의 완벽한 계획이었다. 지성보다는 상속에 의해 모든 자격이 주어졌다. 아무리 지적인 결함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자격에 의해 민이든 군이든  권력의 요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러시아는 그 극단적 사례였다. 이미 고인이 된 바바라 터치맨Barbara Tuchman은 전쟁의 배경에 관한 고전적 해설에서 짜르 니콜라이 2세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전제군주로서 모든 사람들을 지배했으나, 자신은 머리 나ㅃ고 고집만 가한 아내에게 지배당했다.'(주:Barbara W. Tuchman, The Guns of August(New York:Macmillan, 1962))
  지능이 모자랐던 독일 카이저 빌헬름은 니콜라이 2세에 대해 '시골집에서 살면서 무나 재배하면 어울릴 것' (주:lbid)이라고 했다.
  제정 러시아의 국방상이었던 블라드미르 수호믈리노프Vladmir Sukhomlinov는 게으르고 우둔했으며, 젊은 아내의 성적 욕구를 위해 다소 지나칠 정도로 정력을 보호한다고 알려졌다. 그는 어떠한 새로운 군사적 혁신에 대해서도 강한 반대 입장에 섰다. 이와 같은 입장과 군에 관한 그 밖의 견해 및 조치들로 인해 그는 짜르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광대한 영토 획득의 결과, 인종, 종교, 언어 집단들의 응집력 없는 결집체로 남아 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오랫동안 해소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프란츠 오제프Franz Josef의 노쇠한 지도력 하에-그는 당시 80대 중반이었다-있던 이 나라는 러시아와 함께 구질서의 가장 취약한 발현이었다. 이 나라의 중심지 비엔나는 파리처럼 문화적, 지적 생활로 유명했지만, 그 탁월성을 군대에도 국가에도 확장시키지는 못했다. 이 지역에서는 다시 한번 상속에 의하여 무지한 자들의 독점 비슷한 것이 판을 쳤다. 그토록 취약한 지도력과 군 통솔력으로 큰 전쟁을 감행한 사실은 정신적 공허의 경이로운 사례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참전국들에서도 정치적, 군사적 지도력은 지적 능력의 최저 수준까지 전락했다. 영국 수상 애스퀴스H.H.Asquith는 사회적 평판은 좋았지만 결국 부적격함이 너무도 명백히 드러나서 전쟁의 와중에 더 유능한 (그리고 더 프롤레타리아적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해군 대장직과 전략기획상의 요직은 영국 명문가의 귀공자인 젊은 처칠winston Charchill에게 주어졌다. 그의 지적 능력은 시비의 여지가 없었지만 경험과 판단력은 그렇지 못했다. 그 중요한 귀결로서, 처칠은 그 전쟁의 가장 빛나는 실패를 기록한 다르다넬즈 작전을 기획했다. 그 책임은 무능한 장군들과 제독들도 나누어야 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말이다. 처칠은 정치적 노련함으로 결국 찬란한 보상을 받았지만, 시막한 경제적 일탈이 벌어진 후의 일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곧 다시 언급하겠다.
  영국 육군 대신 키치너Horatio Herbert Kitchener 워수는 비밀 임무를 띠고 비운의 순양함 햄프셔호에 몸을 실어 1916년 6월 러시아로 떠났다. 그러나 결과는 매우 좋지 않았다. 함선 상실에 대한 영국 정부의 비감은 키치너를 잃은 슬픔에 비하여 별 것 아니었다. 프랑스 주둔 첫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존 프렌치John French경의 부적격성은 당시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지적으로 한층 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던 당시 군 인사를 가운데 한 사람인 더글러서 헤이그Douglas Haig경 역시 마찬가진다. 그는 전후 영국으로 귀환한 후 까맣게 잊혀졌다가, 한때 모습을 드러내 다음 전쟁에서는 기병대 돌격으로 승리하리라고 우겨대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힌덴부르크Paul von Beneckendorff unt von Hindenburk원수가, 프랑스에서는 페탱Henri Philippe petain원수가 똑같이 찬란한 무공을 세웠다고 추켜세워졌으나, 나중에는 두 사람 다 민간 정치에서 시험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의 조국에게도 크나큰 재난이었다.
  참전국들의 전통적이며 지배적인 역할은 전쟁 수행 과정에도 반영되었다. 해전은 전통적 군인 집단의 영역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으므로 기술적으로 고도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로써 전함들은 수마일 거리에서도 놀랄 만큼 효과적으로 서로를 격침시킬 수 있게 되었고, 잠수함이라는 매우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혁신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여전 전통이 지배했다. 정찰기, 중포, 독가스 등이 모두 출현했고 뒤늦게 탱크까지 등장했지만 병사들은 수세대 도안 지녀왔던 소총과 총검으로 서로를 공격했다. 이전보다 전투를 위험하게 만든 것은 자주 심하게 파손되는 기관총 정도였다. 병사들과 함께 굉장히 많은 말들이 프랑스 전쟁과 그 주변에서 이용되었는데, 그것들이 단한 방의 구식 총알에도 취약했던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낡은 정치, 경제 구조에 속한 사람들의 관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일반 사병들에 대한 태도에서였다. 그들은 여전히 지주의 토지로부터 대규모로 모집되었다. 고대 이래로 지주들의 마음속에서 그들은 가축으로 연상되었다. 즉 가축과 마찬가지로 처분이 가능한 재원이었다. 독일, 프랑스, 영국에서는 전쟁에 앞서서 밀집된 도시 프롤레타리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일과성 이상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어서(영국에서는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지만) 징볍이 오랫동안 지체되었다. 농민들은 토지 곳곳에 산재해 있어도 완벽하게 통제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구 귀족인 담당관들에게 그들의 학살은 산술적 의미밖에 없었다. 즉 군대의 관례적인 계산에 의해 전사자를 얼마만큼 감수할 수 있는가 혹은 그렇지 못한가, 또는 용납할 수 있는가 혹은 용납할 수 없는가를 판단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확실한 죽음에 직면한 일반 사병의 억제된 고민은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
  적어도 유럽에서도 이러한 태도가 일반적이었다. 통계가 그런 사실을 확인해준다. 미 육군성이 1924년 정리한 통계를 보면, 모든 참전국들에서 동원된 병력이 이미 6,500만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850만이 피살되거나 죽었고, 2,120만이 부상당했으며, 770만이 포로가 되거나 실종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사히 살아남을 확률은 50p를 밑돌았다. 이것은 분명히 무지의 인적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영토가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에서 물리적인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던 사실이 종종 거록된다. 제1차세계대전 때에 미국의 참전 기간은 1년 반으로, 짧은 편이어싿.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미국이 위기에 처한 경제체제 및 그와 연관된 정치체제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랑스나 영국과 비교해 보아도 그 정도가 덜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및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보면 매우 대조적이 다. 토지소유권은 북서부에 광범위하게 산포되어 있었으나, 토지소유계급 혹은 지주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쉽사리 화인할 수 있는 군사적 전통도 없었다. 특히 미국은 이미 대자본가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특권적 귀족계급이나 기성 지배계급이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전쟁 수행 책임은 전문가들에게 맡겨졌고 그들은 대체로 자신의 임무를 적절하게 수행하는 듯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봉건적인 결함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슬프게도, 구연합의 국가들에게서 명백히 드러났다. 봉건 세력의 가장 적나라한 유산이었던 노예제는 반세기 전에 폐지되었지만, 그 계승자인 플랜테이션 체제가 이전의 노예들을 물납 소작인으로 바꿔 의미 심장한 규모로 살아 남았다. 그들의 노예들과 흑인 혹은 혼혈 후손들은 투표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방식으로 정부에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유진 제노비스Eugene D.Genovese는 노예 경제에 대해 쓰면서, 그 제도가 지연되는 원인을 언급했다. (저수준의 자본 축적, 농자우의 높은 소비 성향, 자금의 꾸준한 역외 유출로 악화된 유동장본 부족, 노예 노동의 저생산성...유럭 농장주들의 반산업, 반도시 이데올로기)등과 노예들의 최저 구매력이 최장의 원시적 정체 경제를 보장했음을 예증했다.(주:Eugene D. Genovese. "The Signifcance of the Slave Plantation for Southern Economic Development", in The Political Economy of Slavery:Studies in the Economy and Society of the Slave South(New York:Panteon Books, 1965). 
  미국의 경제, 정치가 모두 남부와 같았다면 미국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혹은 그 문제에 관한 다른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봉건적 토지 소유 세력의 열할이 경제적으로 무력함을 보여주는 징표가 드러났다. 반세기 전에도 무책임하게 촉발된 갈등이 있었다. 남부가 섬터Sumter 요새를 포격함으로써 산업적으로 훨씬 발전되고 강력했던 북부와의 전쟁을 개시한 것은 독일이 1917년 1월 31일 무제한 잠수함전을 무모하게 선언한 것과도, 그리고 지극히 전통주의적인 일본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한 것과도 놀라우리만큼 유사하다.
  산업 민주주의Industrial Democracy는 미국에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유럽에서 봉건 잔재가 했던 것보다는 더 나았으니까. 미국 병사들이 적을 만난 것은 전쟁 막바지 몇 달 동안뿐이었다. 미군 전사자 총수는 많이 잡아 11만 6,000명(주:The Veterans Administration Office of Public and Consumer Affairs에 따름)으로 프랑스군 135만 명, 대영제국군 95만명, 독일군 160만 명, 오스트리아, 헝가리군 145만 명, 그리고 러시아군의 늘려 잡은 추정치 230만 명(주:Marc Ferro, The Great War, 1914--1918(London:Routledge and Kegan Paul, 1973), Table 4)에 비해 적은 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산업의 공헌은 크지도 결정적이지도 않았다. 또 시간적인 제약은 미국에서 이루어졌던 산업적 지원이 매우 비효율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군의 총이나 함포에 전사한 독일군은 한 명도 없었다. 로이드 조지는 회고록에서 산업적으로는 그토록 중요한 나라가 유용한 무기류와 물리적 병기는 그토록 조금밖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고 썼다. 그가 너무 편협하다고 생각한 저줄가들도 있지만, 여기에서 그 문제를 다시 거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이 재난에서 주변적 역할에 머물렀다.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이-마찬가지로 제2차세계대전이-대공화국(미국)이 세계적 지위에 어떤 역할을 했느냐 하는 점이다. 현대 미국의 경제적 위업은 유럽(그리고 나중에는 일본) 지배계급의 실수 위에 건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전쟁과 전시 재정에 관한 그리고 수년에 걸쳐 내가 알아낸 지극히 비논리적인 여파에 과한 기초적인 경제학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3. 혼란의 뿌리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나는 제2차세계대전 전후에 가격통제 책임자로(한때는 배급 담당자로도) 일했다. 내 직책은 어떻게 보더라도 전시 경제운영에서 3--4위 아니면 적어도 6위 안에는 드는 핵심 요직으로 매우 큰 과업의 한부분이었다. 당시에는 경제정책의 유무가 전쟁 수행의 중추적 사항이었다. 나는 초기에 다른 사람들과 합동 여구를 했는데, 그 연구는 제1차대전 당시 산업 지원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몇 명, 특히 책임자였던 버나드 바루크Bernard Baruch의 직접적인 충고와 지도 그리고 나의 독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 과정은 전적으로 피해야 할 실수들에 대한 단련의 기간이었다.
  뒷날의 사상에 영향을 주거나 혹은 사상을 지배한 제1차 대전에 관한 수업을 계속하기 전에, 전시의 태도와 정치, 경제적 영향을 주는 더 큰 힘들을 지적하려고 한다. 경제학과 경제적 의사 결정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것은 경제학자의 직업적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전쟁에 관한 한 정치학과 인류학의 영향이 더 크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대전 후 수년 동안 경제적 방향 상실과 무질서가 판을 쳤다. 러시아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여타 동유럽 국가들이 받은 패배의충격은 낡은 정치구조의 파괴와 결부되어 있었다. 무엇이 기존의 구조를 대체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미결 상태였다. 이로 인해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한 극력하고 폭력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지도력에 대한 분명한 경험자들 중에서 정치적으로 성숙하고 깨우친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 혹은 자본주의적 프롤레타리아들이었다. 그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가장 특별하게는 러시아에서 일시적인 승리를 맛보았다. 숫적으로 제한된 편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정치, 사회적 공백 상태를 만든 구질서에 대항하여 효과적으로 체제를 이끌었다. 다른 곳의 사회주의자들은 실행할 만한 경제 계획과 충분한 정치적 토대를 갖지 못했다. 따라서 정치, 경제, 군사적 지지 세력도 없었다.
  국가에 의한 산업의 총체적 운영이자 통제인 사회주의는 수사와 문학 및 신념의 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모습으로 존재했지만, 행정적인 복잡성이나 시민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식의 요구와 관련된 면에서 보면 살아남을 수 있는 계획이 아니었다. 극심한 패배의 혼란 속에서 더더욱 그랬다. 따라서 자발적인 동기유발이 가능한 기업과 지주 및 시장에 대해서는 실행성 있는 대안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레온 트로츠키Leon Trosky의 군이 권력의 필수적 토대를 구축한 러시아에서조차 레닌은 경제상황이라는 결정적 힘에 눌려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에 의거한 시장경제로 후퇴해야만 했다. 이는 뒷날 스탈린 Josepf Stalin에 의해 역전될 운명이었고, 그 다음에는 심각한 혼란을 거치며 우리 시대에 다시 한번 역전될 운명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기성 질서에 대한 도전은 분명히 있었지만, 심각한 혁명 활동은 없었다. 미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민주적 절차에 의해 조절된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더 안정된 경제체제라는 것이 드러났다.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예언했던 자본주의의 취약성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직면하게 될 본질적인 위협은 분노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경제적 보상에 대한 불평등 경향과 투기 과잉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그러한 불평등과 투기 과잉은 경제적 박탈과 정치, 사회적 반응이 불가피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쟁이 끝난 후에 전쟁의 직접적 여파 속에 깃든 비경제적 힘을 파악하는 데 한층 중요한 분야가 인류학이다. 이것은 역사적 체험의 한 부분임에는 틀림없지만, 형식적인 분석 비평이 거의 필요없는 사안이다.
  부족공동체 사회에서는 근처 숲속에서 북이 울리면 구성원들이 자동적으로 반응한다고 한다. 부족민들은 전쟁 분위기와 추장의 신비한 선동에 따라 결집한다. 승패가 결정나면 곧이어 반응이 따른다. 그리고 이성을 회복한다. 이때 고려되는 것은 무엇을 획득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유지했느냐 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비난받고 매도된 뒤에 거부당한다. 이러한 절차는 현대 세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승패를 불문하고 현대에 이르러 죽거나 다친 사람들 중에는 전쟁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은 건강과 위신이 날로 쇠약해지는 가운데 국제조약과 국제연맹에 대한 제안을 내놓았으나, 의회로부터 거부당했다. 1920년 그의 당이 거부당했던 것처럼. 로이드 조지는 정진 직후 곧바로 자신이 요구한 선거에 의해 일시적으로 구제되었으나, 나중에는 별 수 없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1917년부터 실의에 빠져 있는 프랑스를 맡아 활약했으며, 베르사유 강화회의-여기에서 회의Conference란 말은 부정확하게 사용되었다. 조약의 조건이 독일 대표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시된 것을 고려하면 말이다-에서 인과응보론을 가장 강력히 주장했던 클레망소Georges B. Clemencean는 곧 공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실패한 정치가들에게 무엇이 일과가 될것인지를 예상하면서 미국 여행에 대해 말하곤 했다. 캐나다군 지도자 아서 커리Arthur Currie경은 전장에서 돌아와 영웅 대접을 받고 맥길 대학교 총장직을 맡았지만,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려는 사적 욕심에서 전쟁 막바지 수시간 동안에 마지막 공격을 함으로써 부하 병사들을 죽게 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는 이 비난에 맞서 출판물에 의한 명예 훼손으로 큰 송사를 치러야 했다.
  상대편의 지도자들의 훨씬 더 지독한 악평에 시달렸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카이저 빌헬름은 독일이 전범자의 본국 송환에 반대했기 때문에 폴란드로 영구 망명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구지배계급인 합스부르크가 일족은 비엔나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독일에게 일찌감치 패전한 러시의 짜르는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즉결 총살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처칠은 가장 유력하고 성공적인 전시 지도자였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즉시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찍 죽음으로써 이 무자비한 전쟁의 인류학을 벗어났던 것을 생각하면, 최소한 흥미는 느껴진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도 그리고 일본 군부의 이름 모를 지도자들도 패배를 딛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전쟁 내내 수동적 역하레 머물렀던 히로히토 천황까지도 전쟁 직후 다소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었따. 그러나 그는 미국의 지지 덕택에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직접 전투를 치르며 고생하는 사람들은 일반 사병들이다. 하지만 전쟁의 인류학은 책임자들을 가장 엄하게 다룬다. 이것은 모두에 대한 경고다.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이 이 불행한 의식을 더 가까이에서 보았더라면, 베트남에서의 승리 후에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페르시아만에서 외관상 승리를 거둔 직후의 조지 부시George Bush도 마찬가지다.
  아무튼 인류학적 반응은 강력하다. 이제 대전과 뒤이은 무질서에 기여했던 경제적 요소들에 대해 알아보겠다.
  적당히 위협적인 느낌을 주는 소위 '전시 경제 동원'이라는 용어는 경제학과 같이 상대적으로 분명한 용어이다. 이 말에는 이런 저런 계획에 따라 인력과 재료, 설비 및 생산물을 민수용에서 군수용으로 이동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이전에 생산적 고용에서 배제되어 있던 개인들을-남성은 물론이고 특히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는 여성까지-전쟁을 지원하는 직장으로 이동시키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 직장에는 군대로 동원된 개인들로 인해 자리가 빈 직장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이동을 조정하는 방법으로는 세 가지가 있는데, 모두 제1차세계대전에 이용되었던 방법들이다. 제2차세계대전 때에는 모든 나라에 꽤 합리적인 경제 동원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제1차대전 때에는 계획이 전혀 없었으므로 경제활동은 엄격히 임시변통적으로 이루어졌다. 즉 경제는 순간의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듯했고, 시간의 정치학Theo Politics of Time이 허용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인력과 물리적 설비 및 자원을 전시용으로 전환하는 방법은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강제에 의한 방법, 둘째는 세금에 의해 모인 기금으로 필요한 전환에 지불하는 방법, 셋째는 찍어내거나 그 목적을 위해 새로 만든 돈으로 지불하는 방법, 일반적인 용어로는 인플레이션에 의한 방법이다.
  제1차세계대전 때에는 국고 수입의 하나인 병력을 경제적으로 이용했다. 전쟁을 위해 규합된 거대한 군대는 주로 차출에 의해, 즉 강제에 의해 임무를 수행했다. 유럽의 전투병들은 미미한 보수를 받았다. 전시 재정을 다룬 문헌들을 보면,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쟁 비용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미군과 캐나다군은 그들의 봉사에 대해 더욱 적절한 보상을-하루 약1달러라는 겉보기에는 사치스러운 수준-받았다. 매우 놀랍고도 불행한 사실이다.
  다시 말하지만, 일반 사병들은 경제적 희생과 지상의 희생9죽음) 두 가지를 모두 감수했다는 것은 이 전쟁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가운데 하나다. 그들이 불만을 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1917년 프랑스군은 휴가와 편의시설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켰다. 보다 나은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더 자각된 러시아의 사관생도들과 독일 해군 하사관들은 1917년 페트로그라드와 1918년 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혁명 덕분에 그들은 무보수 근무 대신에 고향에 돌아가 땅을 일굴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군 신병들은 제발로 가서 투표를 함으로써 자신들과 조국의 참전을 종식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경제적 부담을 일반 사병에게 지우는 상대적 용이성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다. 애국심은 많은 것을 요구했다. 누가 이 대의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징세는 훨씬 더 어려운 문제였다. 징세는 가계의 지출과 소비를 충분히 억제해서 인력과 자원을 군사적 목적에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혹한 징세로 인해 국민의 사기에 심각한 문제가 빚어질 우려가 있었다.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내는 국민들이 전쟁에 대한 열의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제2차세계대전 동안에도 그런 우려는 여전히 존재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세 징수를 통해 얻은 수입을 2만5,000달러로-원래는 약25만 달러였다-제한하자는 프렝클린 루스벨트의 제안은 분연히 심지어는 감정적으로 거부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의 모든 교전국들은 일관된 계획도 없이 소득세, 이익세, 초과이익세, 소비세와 같은 다양한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미국은 홪아실 물품, 껌, 전화 및 전보, 화물과 속달 요금에 세금을 부과했디.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대통령이 이끄는 공화당이 발의하여 새롭게 징수하게 된 소득세는 이제 전쟁이 사용되었다. 기본 세율은 1913년 정률 4p였던 것이 1918년에는 누진세율이 적용되어 처음 4,000달러에 대해서는 6p, 그 액수를 넘는 소득에 대해서는 12p라는 외관상 고통스러운 세율로 인상되었다. 부가세율은 1913년에 2만 달러 초과소득 1p, 50만달러 초과 소득 6p에서 1918년에는 100만 달러 초과 소득에 대해 65p까지 높아졌다. 1913년 1p였던 법인 소득세는 1918년까지는 12p로 올랐다.(주:Catherine Ruggles Gerrish, "Public Finance and Fiscal Policy, 1866--1918", in The Growth of the American Economy 2nd ed., edited by Harold F. Williamson(New York:Prentice Hall, 1951), p.639)
  군수품 제조업자들이 내는 많은 이익이 특별세를 유혹했다. 미국의 총 전쟁 비용은 대연합국 차관 90억 달러를 포함해서 350억 달러를 조금 밑돌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니까 260억 달러에 달하는 직접 지출의 약 3분의 1을 세금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차용금으로 충당했던 셈이다. 매우 다양하지만, 유럽의 교전국들도 징세로 거둬들인 액수와 차용한 액수 사이에 이와 비슷한 구성비를 형성했다.
  차용금 때문에 전비 지불의 세번째 방법이 필요해졌다. 가장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한 이 방법이 바로 인플레이션이다. 다시 말해, 순수하게 창출된 정부 구매력이 전시 수요를 조달하기 위한 경제에 침투해 들어갔다.  이러한 방법으로 물가에 영향을 미쳤고, 민간에서 재화와 노동력이 나오도록 명령하는 것이었다. 재무장관 샐먼 체이스가 남북전쟁 기간의 재정난에 대응하여 한 일이라곤 미국 군대의 지원에 필요한 자금을 대기 위해 화폐를 찍어내라고 지시하는 것뿐이었다. 1914년에는 훨씬 치밀한 계획이 세워졌다. 그러나 정부에 의한 무조건적 화폐 발행의 경향은 여전 남아 있었다. 사실 그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보다 새롭고 세련된 조치는 민간 지출을 디해하면서 국민들에게 채권을 파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저축의 증대를 유도할 수 있으며, 재화와 용여에 대한 총수요를 증가시키지 않고도 정부의 전시 구매가 이루어질 수 있는 여력이 확보될 터였다. 여기에 필요한 노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대단한 애국적 열정과 설득이 동원되었다. 이것은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고도 전비를 충당할 수 있으리라는 깊은 믿음에 대한 응답이었다. 사실, 정부의 발해의 '자유공채Liberty Bond'와 절약표 및 전시 저축증서를 사는 데에 드는 많은 돈이 절약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될 수 있다. 공채는 또한 차용 및 그에 따른 담보이기도 하므로 차용자금의 지출에 따라 경제에 대한 영향력도 증대했다. 결과적으로 한층 상냥한 형태의 공공연한 사기가 범행자들의 마음을 옽오 사로잡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은행,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갖 창설된 연방준비은행들에 대한 공채 판매였다. 이렇게 해서 저축은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이러한 배경 하에 전비가 마련되었다. 이와 같은 방식에 의해 돈, 다시 말해 구매력은 과거에 체이스가 인쇄기에 호소하던 방식만큼이나 확실하게 확보되었다. 은행 잔고에 근거한 정부의 구매권은 발해된 화폐와 똑같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화폐가 인쇄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다. 늘어난 예금 가운데 일부는 직접 지불하기 위해 현금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현금이 필요한 경우에 예금을 현금으로 전환할 것에 대한 유동량을 준비하는 일이 정부의 보조적인 혹은 정규적인 기능으로 남아 있었다. 미국에서는 1917년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국이 된 후에는 이러한 정부 창출 구매력과 더불어 유렵 참전 우방의 구매자금 충당을 위해 막대한 양의 금이 유입되었다. 미국은 금을 유입함으로써 향후 지속적으로 세계 금 재고의 효과적인 저장고가 되었다.
  이와 같이 중앙은행으로부터 차용한 돈을 지출함으로써 확보하게 된 넘치는 새 구매력은 인력, 설비, 재료, 무기류를 전쟁요으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일은 고정 수입이 있는 사람들과 전에 축적한 저축에 의존해서 살던 사람들의 소비를 부정하고, 물가를 올림으로써 가능했다. 고물가가 가계 소비를 효과적으로, 심지어는 가혹하게 억제했다. 박탈된 소비는 전쟁에 기여했고, 고물가 덕에 판매가와 수입이 올라간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마지막에는 인플레이션은 지출되지 않고 미래를 위해 남겨진 금액을 은행계좌와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슬픈 일이지만, 이 돈과 그 궁극적 지출은 인플레이션이 평화의 도래와 함께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증해 주었다. 아니, 인플레이션은 더 악화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예견은 1919년 이후 모든 나라에서 현실화되었다. 미국에서는 도매물가가 종전까지 대략 두 배로 올랐다. 프랑스에서는 이보다 훨씬 큰 폭으로 올랐고, 영국과 독일에서도 이보다 조금 작은 정도에 불과해싸.
  그후 여러 해 동안 전시 재정의 중요한 유증이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대미 금 유입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 금유입과 그것에 의한 차입이 뉴욕을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확히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공적, 사적으로 크고 작은 채무자들이 월 스트리트로 몰려 들었다. 1920년대 10년 동안 특히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구매력 창출을 위한 용이한 방법인 저시 재정방식은 미래까지 기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전쟁의 직접적인 여파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빚어졌다. 전쟁에 기여했던 것이 평화가 찾아오자 본격적으로 이용되었다.
  은행 차용에 의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창출된 예금의 지출에 의해 촉발된 인플레이션은 징세를 피하려면 어쩔 도리가 없는 대안이긴 했지만, 긴 안목에서 보면 적잖은 고통이었다. 이전에 부은 저축이 무가치해지는 걸 목도한 사람들, 돈을 빌려주고 더 줄어든 가치만을 돌려받은 사람들, 수입이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그 고통을 기억할 것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이 임박했을 무렵, 미국에서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두려움과 예방에 대한 필요성이 무기 조달 못지핞게 강조되었다. 1941년 내가 가격통제를 맡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두려움과 일찍이 전후 금융의 무질서와 혼란에 대해 연구했던 덕택에 높아진 나의 인플레이션관이 놓여 있었다. 이제 나는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경제적인 예측이 불가능했던 세월에 대해 주의를 돌리고자 한다.

    4. 채무, 인플레이션 그리고 케인즈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독서와 궁극적으로는 내게 주어진 정부의 일을 통해 제1차세계대전의 전시 동원과 그 영향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두 권의 책으로 뒤에 벌어진 찬란 대사건들에 연루되었다. 지정 필수 교과서의 계통을 벗어나서 내가 읽은 최초의 진지한 경제학 서적들 가운에 하나가 존 메이너드 케인즈Jone Maynard Keynes의 "평화의 경제적 귀결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주:New York:Harcourt, Brace and Howe, 1920)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1920년대 초기 독일의 대인플레이션에 대한 고전적 연구서(주:Frank D. Graham, Exchange, Prices, and Production in Hyper-inflation:Germany, 1920--1923(Princeton::Prncetion University Press, 1930))와 그 저자 그리이엄Frank D. Graham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오랫동안 프린스턴 대학 경제학과의 길잡이 역할 해온 등불과 같은 조재였다. 그는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으나 적잘한 치료를 받지 못하다가, 프린스턴 대학 풋볼 경기를 구경하는 도중 경기장 담벽 너머로 끝내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날까지 그는 나의 가장 가깝고 존경하는 친구 가운데 하나였다.
  세계사의 수많은 사건 중에서 1919년의 베르사유 강화회의만큼 참가자 각자의 역할 및 제2차세계대전까지 연장된 귀결 등에 대해서 신중하게 연구된 것도 없다. 그러나 넓게 보아 선결되어야 할 기본 문제는 다음의 네 가지였다.
  첫째, 영토의 획득과 상실 및 그와 결부된 민족공동체들에 대한 오랜 관심의 강력한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독일은 알자스와 로렌을 프랑스에 양여했고, 벨기에와 덴마크에도 영토를 내주었다. 한편 동부에는 신생 폴란드가 세워졌다. 독일의 해외 영토였던 독일령 아프리카 및 태평양 도서 식민지들도 모두 빼앗겼다. 구오스트리아-허가리 제국의 분할과 귀속에 대해서도 강한 관심이 표명되었다. 따라서 전쟁이 토지의 획득과 관계가 있다는 정서와 심층적인 의식이 철저히 신봉되었다.
  둘째, 독일이 군사강국으로 재등장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결저에 따라 독일 해군은 영국으로 넘겨졌고(거기에서 밑에 구멍을 뚫어 가라앉혔다). 독일 육군은 앞으로 규모를 제한해야 했으며, 라인란트에 독일군의 접근이 금지되었다.
  셋째, 미국에서는 큰 논쟁거리로 떠올랐던 문제로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창설이 제기되었다. 평화를 지키고 새로운 분쟁과 재앙을 막아보자는 취지였다.
  넷째, 나와 같은 세대의 경제학자들에게 기본적인 사항인 돈 문제를 들 수 있다. 베르사유 강화회의 참석자들과 함게 돈 문제를 비롯한 세부 사항을 다루기 위해 설치된 배상특별위원회는 신기하리만큼 단순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회의 주창자들에게는 어울리는 견해인지도 몰랐다.
  전쟁을 개시한 나라는 독일이었다. 벨기에를 침략했고, 계속해서 대규모 파괴를 자행하면서 프랑스로 진격하였으며, 엄청나게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영국과 미국 및 이탈리아 국민들을 전쟁에 몰아넣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회의에 참석하게 된 거이다. 독일은 저쟁에 대해 배상해야 하며, 다른 국가들은 전쟁 배상 청구서를 독일에 건네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했다. 배상 총액은 적지 않았다. 주요 교전국들이 독일에 청구한 배상액은 약 400억 달러로서, 1992년 달러 가치로 보면 최소한 4,000억 달러에 상당하는 금액이었다. 전후 독일의 지불 능력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액수였다. 전쟁 피해-프랑스의 황폐화된 경관부터 어뢰 공격으로 격침된 루시타니아호까지 포함하는 피해-를 복구하는 데에 드는 비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음과 가은 논리가 불가피해 보였다. '독일인들이 전쟁을 개시했으며, 그 결과 많은 피해를 끼쳤다. 그들은 전쟁에서 졌다. 모든 책임은 그들이 고스란히 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한층 고려되어야 할 경제적인 요소가 있었다. 필요한 물품을 수입하기 위해 프랑스는 (이탈리아나 러시아도) 영국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들여왔으며, 영국과 프랑스는-특히 영국이 심했었다-미국으로부터 수십억 달러(약 87억 달러)를 빌렸다. 이 채무를 독일인에게 떠 맡기는 일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뒷날 독일의 채무 상환 거부와 영국 및 프랑스의 채무(연합국간 채무) 면제 문제를 가지고 워싱턴에서 긴급 회담을 열었을 때에 칼빈 쿨리지 미국 대통령은 당시의 일반적인 경제적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들은 돈을 빌렸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문제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결정되지 않은 유일한 사안은 독일이 어떻게 지불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어느 정도의 배상금은 물납이 가능했다. 프랑스는 독일 광산으로부터 상당량의 석탄을 선적할 권리를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가장 좋은 해답은 화폐, 구체적으로 말해 경화였다. 불행하게도 독일의 화폐 지불은 독일 국제수지 잉여-연부금을 감당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초과 수출에 의한 초과 수입-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와 같은 잉여는 독일 국민들이 수입 재화에 의존하지 않고, 월등한 생산성과 낮은 임금비용을 통해 해외시장에서 자국 제품의 강점을 충분히 창출했을 때에만 마련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배상금을 받아야 할 나라들은 물론 다른 모든 나라들까지 독일 시장의 상실을 감내해야 할 판이었다.
  이밖에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독일 정부는 과세를 하거나, 과세하지 않고 소득을 회복시킬 양이면 국제수지의 잉여-수출에 의해 기업체에게 돌아가고 다시 사업주와 중역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까지 돌아갈 수 있는 수입-를 전용해야 할 처지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금이 모아진 연후에야 해외 송금이 가능했다. 패배의 상처뿐만 아니라 기존의 전통적 지배자들로부터 (실제 사회주의는 아니었지만)명백히 사회주의적인 새 체제로 정권을 이동시켰던 경험까지 있는 나라에서 그러한 모든 일을 수행해야 할 형편이었다. 정권은 불가피하게 구지배계급과 광범위한 자본가 양쪽 모두와 우얼성 싱합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베르사유나 그 후의 어떤 자리에서도 논의되지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논의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독일이 서방을 침략했으니 독일이 변제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방법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외관상의 논리에 기초한 광기가 당시의 질서였다.
  그리하여 경제문제는 쓰라린 체험과 역사가들을 기다리며 남겨질 터였다. 파리, 영국 평화대표단의 한 젊은 단원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가 바로 존 메이너드 케인즈였다. 케인즈는 그때 20세기 전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경제학에 관한 두 권의 소책자들 중 첫번째 것인 "평화의 경제적 귀결"을 펴냈다. 이 책자는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그의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책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이야기하겠다.
  케인즈는 전쟁이 개시되던 해에 서른 한 살이었는데, 이톤과 캠브리지에서 수학하고 잠시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캠브리지의 특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다양한 관심사와 효율적인 생각을 지닌 젊은이로 주목받고 있었다(그는 공무원 시험에서 경제 과목 성적이 좋지 않자, 시험관들이 자기보다 더 몰랐던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 주장은 틀림없이 맞는 이야기였다). 그는 전쟁 기간을 영국 재무부에서 영국의 해외 구매를 위해 외화, 특히 달러를 유지하고 배분하고 이와 관련된 문제를 놓고 프랑스와 협상하면서 보냈다. 개인적으로 전쟁에 대한 열의는 많지 않았으며, 가장 가까운 친구들 중 몇몇-뜻밖에도 그가 구성원으로 있던 블룸스비리 그룹-은 양심적인 이의 제기자들이엇다. 그리고 입대통지서를 받고 나서 통지서를 없애버렸다.
  1919년 베르사유에서 케인즈는 지도자들과 그들의 결정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회의가 한창 진행중이던 1919년 5월 26일 영국 대표단에서 물러난 후, 방향을 바꿔 조약에 대한 공격의 글을 썼다. 믿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 책은 나오자마자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몇년 후에 그 책을 처음 읽었는데, 그때 받은 인상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케인즈의 논거를 조금도 줄이지 않고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베르사유 조약의 기본계획은 먼저 독일과 독일의 지불 능력을 파탄시키고 난 다음에야 지불을 요구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처럼 기본적 양식에서 이탈하게 된 책임을 베르사유에 모인 거물급 지도자들에게 돌렸는데, 그것은 공정한 처사였다. 여기에서 그는 학구적 논문의 불문율, 다시 말해 이미 정해져 있으며 여전히 유효한 약속을 짓밟고 지나갔다. 그 약속이란 '사람들은 지도자들에게 악의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실수를 책망할 수도 있지만, 순전한 어리석음을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케인즈는 이 일을 했다. 그는 우드로우 윌슨을 '눈멀고 귀먹은 돈키호테'(주:John Maynard Keynes, Essays in Biography(london:Mercury Books, 1961), p.20)라고 불렀으며, 클레망소에 대해서는 '하나의 환상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와 하나의 환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을 가지고 있었다'(주:R. F. Harrod, The Life of John Maynard Keynes(London:Marcmillan, 1954), p.257)고 썼다. 또 초고에서는 로이드 조지를 '염소 발을 한 음유시인, 켈트족 시대에 귀신들린 마법의 숲에서 우리 시대를 방문한 반인'(주:Lbid, p.256)이라고 불렀지만, 마지막 순간에 설복되었거나 어쩌면 스스로를 설득했을 것이다. 좀더 완곡한 묘사로 대체하도록 말이다. 여기 베르사유 조약과 그 세부 조치들에 대한 그의 우울한 비평을 들어보자.

  이 조약에는 유럽의 경제적 재건을 위한 조항이 없다. 다시 말해 패배한 중앙연합 제국을 선린으로 만들 조항, 유럽의 신생국들을 안정화하기 위한 조항, 러시아 개발을 위한 조항이 없다. 또 연합국 자신들 사이의 경제적 연대를 위한 계약도 규정하고 있지 않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혼란한 금융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혹은 구세계와 신세계의 체제를 조정하기 위한 합의가 파리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4자회담은 이들 문제에 대해 아무런 주의도 돌리지 않았다.... 눈앞에서 굶주리며 와해되어가는 유럽의 근본적인 경제적 과제들이 4자회담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그들이 경제 분야로 일탈한 주된 목적은 배상 대문이었으며, 배상의 문제를 종교와 정치 및 선거용 문제로 다루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이 운명을 좌우하고 있던 나라들의 경제적인 전망을 제외한 모든 관점에서 다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주:Keynes, Economic Consequences, pp.226-227)

  '경제적 귀결'의 영향력은 즉각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모든 나라 특히 미국에 파급되었다. 혹자는 윌슨의 국제연맹에 관한 제안이 거부당한 원인을 이 책의 탓으로 돌렸다. 신랄한 비판도 있었다. 제 조국과 연합국들을 버렸다고, 그리고 강호회의를 독일에게 넘겨주었다고 비난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찬연히 살아 남았다. 한 작가의 명성은 그가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을 때에 더욱 높아진다. 케인즈의 행운은 세계의 불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일은 강화조약을 받아들이고 나서 몇년 동안 실제로 할당된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매우 결연한 노력을 기울였다. 독일의 조세체계는 직접세 징수권이 각 주에게 광범위하게 맡겨져 있던 이전 정부의 구조에서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조세 수입은 수요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는 배상금 지불을 위한 '교환 가치가 있는 마르크화'에 대한 수요가 포함된다. 차입 외에는 대안이 없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정부 지출의 큰 부분을 이루었다. 결국 물가는 오르고 개인은 구매력 상실을 막아줄 신속한 소비를 위해 은행구좌와 저축을 포기했다.
  현금 및 그에 상당하는 물품의 산업적, 상업적 보유고도 고정자산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지출로 인해 물가의 증가 폭은 한층 커졌고, 정부는 채무 변상을 위해 더 많은 차입을 강요당했다. 차입은 제국은행에서 해야 했으나, 아무도 구매력이 급속이 떨어지고 있는 정부 공채나 증권들을 보유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세금 납입은 조금만 지체되어도 이익이었다. 물가가 오름에 따라 화폐는 더풍부해지고 그 가치는 낮아져서 싼 이자율로 조세 채무에 대한 결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긴한 공공지출을 위해 더 많은 차입이 뒤따랐다. 1923년 초 프랑스인들은 조약 조건을 집행한다는 명목으로 루르 접수를 희망했다. 이것이 그렇지 않아도 벌써 진행중이던 독일 산업의 붕괴 및 실업보상금 지불의 필요성을 부채질했다.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현대의 고전적 인플레이션으로서 완전히 궤도에 올라섰던 것이다.
  물가는 하루 단위로, 곧이어서 시간 단위로 올랐다. 유일한 방어책은 신속히 지출될 수 있는 지폐 외에 은행예금을 보유하지 않는 것이었다. 1923년 내내 독일에 있는 인쇄기에 절반 가량이 돈을 찍어내고 있었다고 한다. 마르크화를 외화로 교환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하도록 자극받았다. 결과적으로 마르크화의 교환가치는 물가가 오르는 것보다 훨씬 더 극적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1923년 여름에 미국 국회의원 앤드류 A. P. Andrew는 7달러를 주고 40억마르크를 받았으며, 나중에 식사 한 끼에 10억 5,000만 마르크를 지불하고 4억 마르크의 팁을 줌으로써 역사서에 달 조그마한 각주를 성취해냈다.(주:Modern Times:The World from the Twenties to the Eighties (New York:Harper and Row, 1983), pp.134--135에서 Paul Johnson이 한 말)
  상황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악화되었다. 제국은행의 지폐 발행고는 1921년 12월 1,136억을 나타냈다. 그리고 1923년에 이르러서는 496,507,424,800십억 마르크를 기록했다.
  인플레이션의 보다 큰 영향은 같은 기간 러시아에서 이루어진 것에 필적할 만한 부의 청산과 이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고정 혹은 준고정 이자부의 증권 보유자들이 전멸했다. 그렇지 않고 고정된 혹은 감응이 더딘 소득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실물자산 혹은 산업자산 보유자들은 신기할 만큼 부유해졌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기쁨보다 고통이 훨씬 컸다. 뒤이은 75년간의 대인플레이션에 대한 기억은 독일의 경제정책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23년 말, 화폐 역사상 대단히 주목할 만한 사건을 겪으며 독일 인플레이션은 종식되었다. 새 통화 렌텐마르크Rentenmark가 나왔고, 그것을 발행하고 지지할 새로운 은행인 렌텐방크Rentenbank가 설립되었다. 새로운 통화는 혁신적인 방식으로서, 새 공화국의 토지 재산에 의해 발권력이 보장될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을 믿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이론상으로는 다른 재화나 든든한 부동산으로 반환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발권력의 보장은 순전히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돈과 그것의 신비가 있는 곳에서는 선의의 사기를 칠 수도 있는 여지가 정부에게 열려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됙도 하였다. 정부가 예산의 균형을 엄격히 유지하고 화폐 창출의 토대가 되는 은행 차입을 삼가자, 새 통화는 물가에 의해 증명되었듯이 훌륭하게 안정되었고 존속되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화폐가 요술을 부린다고 생각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조치가 신뢰받게 된 것을 얄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박사의 공으로 돌리고 있는 점에 대해 특별히 언급해야겠다. 그는 제국 은행 총재로서 정부 재정의 긴축정책을 강력히 밀고 나갔던 사람이다. 그는 세계적 명성으로 통하는 장도에 올랐으나, 히틀러에 대한 그의 경제적 봉사가 지나치게 과장 선전됨으로써 끝이 났다. 제2차세계대전 후 그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긔 전시 역할 역시 크게 부풀려졌음이 밝혀졌다. 결국 그는 석방되었다. 나중에 이야기할 대독 공습의 경제적 영향을 조사하던 우리 조사단원들은 그가 학식이 모자라는 굉장히 감상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배상과 연합국간 채무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욱 간단히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 시대에 라틴아메리카의 채무가 그러했듯이 그들의 채무는 교묘히 치환되었다. 그 치환의 주요한 효과는 채무가 지불되지 앟을 수도 있다는, 혹은 지불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의 확고한 사실을 숨기는 것이었다.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 채무에 대한 베이커 플랜Baker Plan 및 브래디 플랜Brady Plan-두 미국 재무장관의 이름을 딴 이 계획은 실행하지 않고도 채무를 줄이는 것처럼 혹은 그 반대의 경우처럼 보였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독일 채무에 대한 도즈 플랜Dawes Plan과 영 플랜young Plan이었다. 앞의 것들과 더욱 많이 비슷한 도즈 플랜은 독일이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돈을 빌려주었다. 놀랍게도 독일 도시들에 대한 미국 차관의 붐이 일어 상당한 액수가 더 지불되었다. 그 차관 또한 당연히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어쨋든 이렇게 하여 독일 배상액 중 일부가 미국 투자가들에 의해 지불되었다.
  대공황과 함께 속보이는 행동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1931년 6월,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는 모든 배상과 연합국간 채무 지불에 대한 1년간의 지불 유예를 제안했다. 다음 해에 열린 로잔느 회의에서는 배상 요구액을 거의 30억 마르크(명목가치)로 탕감했다. 그리고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나서 독일은 모든 지불을 중지했다. 유에기간이 끝날 무렵, 영국과 프랑스도 대미 채무를 지불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반짝하는 기세이긴 했지만, 핀란드만이 지불을 계속하는 유일한 국가로 남았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독일의 태도에서 보듯이 채무와 배상에 관련된 체험은 영속적인 영향력을 가질 것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에는 렌드-리스Lend-Lease 방식(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동맹국에 대하여 대통령 권한으로 무기 등을 대여하던 방식), 즉 사실상 자금의 무상증여가 국제적 대부를 대체하게 되었다. 케인즈의 커다란 유산으로서 화폐에 의한 배상은 완전히 중지되었다. 그 이후로 배상은 물납, 즉 물리적 산업시설과 석탄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면 현금이나 국제수지 같은 복잡한 문제는 끼어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공장과 기계는 피침략 국가들의 파괴된 것들을 대체하기 위해 가볍게 들어올려져서 운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46년 이 업무를 일차적으로 책임진 국무성 관리였던 나는, 이 방식이 전후 배상의 한 형태로서는 최소한 화폐에 의한 지불만큼이나 해로우리라는 것을 알았다.
  대전 후 독일 한 나라만이 인플레이션, 신중히 말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겪었던 것은 아니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은 것은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였는데, 1922녀에는 최고조에 달했다. 초기에 재무장관으로서 이 인플레이션을 관장한 것은 나중에 나의 스승이자 동료요, 친구가 된 젊은 경제학자 슘폐터Joseph Alois Schumpeter였다. 오스트리아의 경험 역시 그 후의 역사에 결코 적지 않은 중요성을 지녔다. 그렇게 형성된 경제관이 슘폐터의 경제사상과 그 후 30년 동안의 교육 및 그를 접했던 상당수의 예민한 독자 및 청강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전쟁 전 비엔나는 유럽의 지적, 문화적 수도라고 꽤 긍지를 내세웠었다. 그러한 긍지에는 분명히 그 나라의 경제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영향력이 컸던 사람들은 슘폐터처럼 당시의 사상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의 사상들이란 인플레이션, 비엔나의 사회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투쟁, 보수적 소농과 구지배계급의 잔존 세력등을 가리킨다. 경제학자들은 모두 예외없이 제베바와 런던 그리고 미국을 향해 서쪽으로 날아갔다. 비엔나에서 방금 도착한 이들-미제스Ludwig von Mises, 하예크Friedrich von hayek, 마할룹Fritz Machlup, 슘폐터-은 자신들의 조국에서보다 이곳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의 경제사상은 대전 이후 미국에서 정부의 태도와 공공정채겡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보다 큰 경제사상적 흐름의 한 가래를 이루었다. 당시에 형성되고 있었던 이 사상이 다음 장의 주제이다.

    5. 미국경제와 고전파 경제학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던 정통 경제학을 내가 처음 접한 것은 1920년대 말이었다. 그것은 미국의 지도적 경제인이었던 리차드 일리Richard T. Ely의 교과서를 통해서였다. 동료들 사이에서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일리는 나의 먼 친척이 대표로 있던 미국경제협회의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매우 중요한인물이었다. 그의 자유주의는 19세기 말의 사회에 가장 영향력 있는 발언을 하고 있던 윌리엄 그레이엄 섬녀William Graham Sumner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다. 섬너는 로널드 레이건의 선구로서 경제체제가 부자들에게는 일반 복지에 대한 공헌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부적합성을 물어 현명하게 처벌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잦은 안락사가 인종을 개량시킨다고 믿었다. 내가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캐나다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농업의 아주 다양한 조건들을 연구하다가 나중에 부수적으로 경제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 연구는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도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그 학문 공동체의 대단히 뛰어난 성원으로 남아 있는 그레더Weald T. Grether의 지도를 받았다.
  여기에서 좀 쉬면서 경제체제를 들여다보는 렌즈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는 당대와 다음 시대의 경제학계에 대한 철저한 인상을 갖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불완전한 인상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그리고 상당한 정도는 일본에서도 이전 세기의 경제는 지금도 남아 있는 것과 같은 하나의 이중체제였다. 한편에는 일반에 잘 알려진 대기업들이 있었다. 설립자나 그 가족이 이끄는 기업이 대부분이다. 그 범위는 독일의 '크루프Krupp'와 '티센Thyssen'에서부터 영국의 '존 브라운John Brown'과 '비커즈Vickers' 그리고 더 나아가 미국의 '밴더빌트Vanderbilt' '록펠러' '모간' '멜론Melon' '해리먼Harriman' '개리Gary' 및 '듀크Duke'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대기업체는 여전히 실력자의 개성을 마음껏 표현했다.
  이와는 달리 경영자 관리Management Controlled 기업, 별로 기분 좋지 않은 표현으로는 산업관료체제Industrial Bureaueracy라 불리는 기업의 지도자들은 거의 그리고 때로는 당연히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전도가 유망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대기업을 보완하고 유지하는 이들은 수천의 소규모 제조기업, 장인, 용역업체, 상인, 기업가들과 농촌 대중들과 같이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정치, 경제적 힘에 대한 경제학의 가장 지배적인 견해는 기존의 고전파 견해였다. 그리고 이것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곧 신고전파 견해가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명시적으로 고전파 신앙이라고 불렀는데, 매우 적절한 표현이었다. 이 견해는 전통적으로 영국, 특히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이 견해의 가장 유명한 해설자인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1842--1924)의 공로를 인정하는 뜻에서 마샬 학파 경제학이라고도 불렀다.
  나는 1931년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후 마샬의 "경제원론Principles"을 읽었는데, 어느 정도 습득하고,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다. 고전적 견해는 아담 스미스 Adam Smith(1723--1790)와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1772--1823)에 그리고 나중에는 비엔나에 보다 먼 연원을 두었다. 지난 세기에 주목할 만한 학자군-프리드리히 폰 비저Friedrich Von Wieser(1851--1929)와 유진 폰 뵘 바베르크Eugen von Nohm-Bawerk(1851--1914), 훨씬 더 저명한 학자 칼 멩거Karl Menger(1840--1921) 등의 오스트리아 학파- 이 세계적 관심과 주의를 끌었던 바로 그 비엔나 말이다. 보다 진지한 미국 학생들은 전쟁 전에 비엔나로 날아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고전학파의 사상에 대한 몰입이 전반적으로 깊은 편이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는 지도원리로도 채택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상이 내가 그 사상과 조우했을 때의 상황이다.
  수차례의 정련을 거친 고전파 경제사상가들은 경제활동이 자기 고유의 한계에 구속되며, 함축적이긴 하지만 정치력을 무력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경제가 자동적으로 만족스럽게 작동한다면 국가가 개입할 근거는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고전파의 첫째 관심사는 가격의 결정이었다. 이것은 소비자의 수요에 응하려는 생산자측의 경쟁적 노력에 의해 비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
  기업이 생산을 확대하는 시점은 추가 판매가 가격에 의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비용을 필요로 할 우려가 있을 때까지이다. 전문 용어로 말해서 한계비용이 가격과 균등해지는 지점까지 생산하는 것이다. 그 지점을 초과하면, 추가 생산을 해도 수입은 더 이상 증대되지 앟고 오히려 안정가격보다 높은 비용 때문에 수익이 감소된다. 한 생산자에게 그렇듯이 모든 생산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모든 생산자들이 안정할 만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만약 개별 생산자가 가격을 올리면 경쟁자들에게 판매가 돌아가고, 그에게는 팔리지 않은 제품의 비용과 손해만이 남는다. 가격을 내리면 판매를 확대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비용이 가격을 초과하게 되고 수익은 줄어든다.
  소비자 가격이 비개인적인 균형에 의해 안정되면, 그보다는 다소 덜 확실하지만 생산비를 보상하는 가격 또한 그렇게 된다. 임금은 미숙력 노동자나 필요한 약간의 기능만을 가진 마지막 가용 노동자를 유인할 수 있는 수준이다. 만약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고 설정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있다면, 그들은 일자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직장을원하고 또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임금 요구액을 줄일 수밖에 없다. 임금은 참을 수 없을만큼 낮아질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결과는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이것이 노동시장인 것이다.
  노동력 부족이라는 보다 유쾌한 경우에는, 경쟁에 의해 새로운 균형 수준까지 임금이 오를 것이며, 가격 또한 보정 수단으로 밀어올려질 것이다.
  자본의 가격, 즉 이자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자율 역시 경쟁적인 방식으로 저축의 공급을 반영하는 수준에서 결정된다. 가용 저축이 더 많다면 이자율이 떨어지고 그때가지 무익했던 투자 기회가 이젠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새로운 균형은 늘 그렇듯 비개인적인 시장방시겡 의해 이루어진다. 만약 이자율이 너무 높으면 투자에 이용될 수 있는 자금이 용도를 찾지 못하게 되어 결국 이자율은 다시 내려간다.
  마지막으로 이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만약 이윤이 높으면 경쟁자들이 곧장 뛰어들 것이다. 만약 낮다면 많은 기업가들이 투자를 줄이거나 포기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지배적인 이윤율이 형성된다. 에너지와 지식에서는 예외적으로 좀 차이가 있지만, 이것들 역시 한 생산업체의 통제력 밖에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이 체계의 정교함은 무한대에 가깝다. 그 정교함이 경제 토론과 보다 치밀한 교육을 유지해주고, 학줄지의 주제를 제공한다. 누구나 이 체계 전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해서 성서에 있는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용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어느 정도의 드러난 한계는, 혹은 의혹까지도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엄폐적 정당화Covering Justification였다.
  이 체계가 개별 기업, 그 중에서도 특히 소유자의 권위를 박탈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경향이다. 그는 (혹은 아주 들물게는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겠지만, 소비자들이 고용자들 혹은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착취하지 못한다. 그것은 경쟁과 시장의 힘에 의해 제한당하기 때문이다. 만약 후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손해를 입는다면, 그것은 본래의 자연적 질서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고용주가 아무리 굉장한 부자라고 해도 마찬가지 경우가 적용된다.
  경영주의 정치력 또한 제한받는다. 가격, 생산량, 임금, 경비, 이윤은 시장의 원리에 의해 설정되어 통제되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할 필요나 구실이 없어진다. 국방, 몇 가지 공공사업, 우체국, 저과세 및 공공연한 사기의 예방을 제외하면 국가가 할 일은 거의 없다.
  보다 일반적으로는 동기유발의 문제가 있다.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업가에게는 어두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토지 소유자는 보다 폭넓은 공적 참여를 할 만한 여유와 의무가 있다. 그것은 그의 다연한 그리고 상속받은 의무였다. 그러나 기업가는 자기 일에 충실해야 했다.
  유럽에서는 고전파 경제학과 시장의 통제 역할이 미국에서만큼 순순하게 이론적이거나 정치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그 총체적 은혜에 대한 의심은 늘 있었다. 일찍이 1866년 매사추세츠 주는 시민 일부가 어린이들을 너무 가혹하게 시장에 유기하지 않도록 하는 일에서 선두를 달렸다. 그 해 매사추세츠 주 정부는 역사에 남을 일을 해냈다.'14세 미만' 어린이의 노동을 하루 8시간으로 제한하는 법을 제정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시장에 대한 법적 제한이 훨씬 더 폭넓게 이루어졌다. 1880년대 독일에서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백작의 요망에 따라 강제 건강보험을 규정하고, 사고, 질벙, 노령 및 기타의 장애로 시달리는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유사한 조치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여타 국가들에서 뒤따랐다. 영국에서는 1908년부터 1911년까지 로이드 조지의 후원 하에 우선은 노령의 무능에 대비한 보험이, 그 다음에는 실업에 대비한 보험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질병에 대비한 보험이 규정되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그리고 정도가 덜했지만 영국에서도 세련된 노동계급은 계급적 힘이 무력해지는 데에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권력은 기업주 즉 자본가의 것이라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마르크스(및 여타 사회주의 저술가들)의 사상이 광범위하게 읽혀지고, 광범위하게 가르쳐지고, 광범위하게 토론되었다. 전쟁의 열기에 사로잡혀 있던 제1차세계대전 중에도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강제에 의해서 혹은 강한 애국심에 의해서 여전히 보호지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스위스에서 연구활동을 하며 지내던 레닌은 회의를 소집하여-한번은 1915년 베른 근처의 짐머발트에서, 또 한번은 다음해 봄 키엔탈에서-그 전쟁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의 습격이라고 비난했다. 이 회의는 확실히 정당화된 경고의 성격을 띠었따. 짐머발트 회의는 표면상으로는 야생조류 연구가들의 모임이었다. 전쟁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획득하고 전파하기 위해 키엔탈에서 서부전선 참호까지 찾아간 두 명의 독일군 장교와 서른 두 명의 사병들은 치료 목적으로 총살되었다.
  일본에서도 그렇지만 유럽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국가가 경제, 즉 자본주의 체제에 봉사한다는 관념이 잠재되어 있다. 마르크스의 표현에 의하면,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집행 위원회이다. 현대 경제사의 진기한 일들 가운데 하나가(일본이 가장 명백한 예인데), 경제의 체계는 자치적이라며 국가나 노동조합을 모든 중요한 역할에서 배제함으로써 고전적인 규칙을 여전히 받들고 있는 나라들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의 저술을 읽은 나라가 더욱 큰 경제적 성과를 올렸다는 사실이다.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졌다. 19200--1930년대에 미국에서 접할 수 있었던 고전파의 사상은 또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한다.
  유럽에서는 자본가들의 힘과 국가의 역할이 매우 모호했지만, 미국에서는 정도가 조금 덜하거나 아예 없었다. 미국에서는 자본가들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정식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이 정치적 환경의 일부를 이루는 사람들 혹은 고전적인 체계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지극히 그럴듯한 예외가 있었다. 그 예외는 물론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었다. 시장의 원리에 의해 비개인적으로 가격이 설정되는 경쟁은 균형의 유지에 결정적인 힘을 작용했다. 경쟁이 없으면-독점으로 인해-체제에 대한 전체적인 사회적 정당화가 위협받게 된다. 이는 더 진전되어 냉혹한 결론에 이른다. 즉 독점이 있다면 국가는 그것을 해소하든 규제하든, 어쨌든 그 힘을 제한해야 한다. 고전적 체계는 이런 목적의 정부 개입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극히 실질적인 의미에서 요구하기까지 했다. 철도 수송, 전기 송출, 전화 통신과 같은 자연스런 독점들은 규제나 공유 혹은 공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 밖의 독점은 금지되고 해체되어야 한다.
  의회는 이미 1890년의 셔먼 반트러스트법-보통 트러스트는 둘 또는 몇 개의 회사를 가진 개별 기업주들이 신탁증서를 받고 자기네 주식을 양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독점이라는 더 나은 수입에 참여함으로써 가용할   있는 금전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증서였다-을 시작을 하여, 고너적 체계를 막대하게 손상시키는 것들을 금지하는 조치들을 취해 나갓다. 1914년에는 보완 입법이 뒤따랐다. 클레이턴법과 연방 거래위원회법이 그것으로, 둘 다 윌슨 행정부 기간에 통과되었다. 연방 최고재판소를 포함한 법원에서 적용을 제한했지만, 반독점 입법은 미국 경제사의 특징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보수주의자들마저 독점을 조직적으로 지켜주지는 못했다.
  반트러스트 활동은 깊은 혐오의 대상이었지만, 강한 설득력이 있는 논리는 받아들여야 했다. 지배적 교의를 고려해 본다면, 뜻밖에도 그러나 아주 그럴듯하게, 노동조합이야말로 반트러스트의 위반자인데, 법원에 의해서도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때문에 혐오감이 다소 누르러졌다.
  이 세대의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반트러스트법이 곧 광범위한 경제적 치유책이었다. 어떠한 시장 지배력의 남용에 대해서도 혹은 보다 폭넓게는 어떠한 결함이 있는 경제적 성취에 대해서도 대답은 분명헸다. 그 대답은 반트러스트법의 단호한 집행이었다. 이것은 그 후에도 빈번하게 공허한 자유주의 정신의 손쉬운 의지처가 되었다.
  그런데 강조되어야 할 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미국에서는 1920년대와 그 다음 시기까지 좌에게나 우에게나 고전적 체계가 지배적인 경제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전적 체계가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나의 첫 입문이 되었다.
  앞에서도 지적했던 것처럼, 유럽과 일본의 상황은 미국과 달랐다. 유럽과 일본에서느 고전적 체계가, 좀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반트러스트 처방이 비국과 같은 위력을 갖지 못했다. 대규모 카르텔을 포함한 독점은 용인되었고, 금지 입법은 지극히 합당하게도 고전적 체계 자체를 불법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태도는 미국의 신념과 첨예하게 상충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 미국이 독일을 점령하고 있던 시기에 미국이 새 독일에 강요한 주요 경제 개혁들 가운데 하나가 반트러스터법이었다. 동시에 일본에서는 거대산업 복합체, 즉 '자이바쯔(일본의 재벌)'를 깨뜨리기 위한, 다시 말해 해소하기 위한 조치들이 (곧 역전될 운명이었지만) 취해졌다.
  그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길이다. 이것은 또한 장래의 경제체계가 보다 낫게 작용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고전파의 규칙들은 순수하게 미국적인 취향만이 아니라, 보편적 적용력 및 영향력을 지녔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독점에 대한 우려는 감소되었다. 반트러스트법에 대한 지지가 그랬던 것처럼, 1930년대 초에는 불완전 경쟁 혹은 과점적 경쟁이라느 관념이 고전적 체계에 침투했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기업들이 서로서로의 묵계 속에서라면 가격과 생산에 대하여 하나의 생산자와 똑같은 효과를 가질지도 몰랐다. 독점 대신 과점이 등장한 것이다. 광고, PR의 설득, 심지어는 입지 때문인지 모르지만, 생산자는 감지 혹은 식별할 수 있을 만큼의 가격 통제력을 누리기 위해 자기 제품을 차별화할 것이다. 이것이 독점적 경쟁이다. 크고 작은 지배력을 갖춘 독점이 그렇게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닌 일반적인 것이 되었고, 이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산업체제를 모두 불법화하는 것은 현실적인 조치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대외경쟁이 부상했다. 비슷한 일본 제품이 밀려오는 데 미국 시장의 독점을 심각하게 걱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현대의 거대한 때로는 관료적인 법인기업과 관련해서는 시장 지배력보다는 부적응으로 인한 위험이 더 많다는 사실을 당연시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최근 들어 국가의 역할에 극히 선택적인 제한이 가해졌다. 1980년대에는 반트러스트법들을 포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들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다만 집행되지 안았을 뿐이었다. 이것이 법률가들의 구제활동을 야기하긴 했지만, 레이건 시절의 잘 알려지지 않은 진보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일은 이번 여행의 더 뒷부분에서 일어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는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경제학에 입문하던 초기에는 경쟁이 매우 은혜롭고 보편적인 힘인 동시에 조절자와 같은 체계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좀더 많은 일이 벌어졌다. 1920년대에 미국과 그 밖의 나라에서 화폐와 금융에 대한 그리고 경기순환에 대한 대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금 본위가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서로 다른 구가의 통화들이 서로간에 혹은 금과 고정환율로 교환되거나, 그렇게 기대되었다. 지금 1990년대에 유럽 국가들이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단일통화를 1920년대의 산업국가들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중앙은행과 정부의 재정정책, 다시 말해 징세 및 지출의 선차적 기능은 국제 교환 관계에서 이러한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제활동, 즉 경기순환의 상하 변동 또한 대학의 교과 주제였다. 그것은 다양하게 설명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이름 노픈 관찰자들이 그 원인을 곡물 생산량이나 보다 이색적인 요소들을 거쳐서 태양 흑점에 돌렸다. 그러나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영속적 질품'으로 인해서 기성의 노쇠한 것이 일소되고, 새롭고 위대한 업적이 도래할 길이 닦이게 되었다. 투기적 주연, 전쟁과 그 여파등이 이 현상과 관련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격국 고전파의 완전고용 공약, 즉 그 체제가 기본적인 경제적 함에 의해 회복되는 정상적 상태는 아직 남아 있다.
  이제 나는 이 체계에 대한 맹공격으로 내 주의를 돌리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학식보다는 그동안의 크고 작은 사건들에 의거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6. 투기의 열풍
  역사가들에게 1920년대의 미국은 그 전후의 연대와 비교해서 고요의 시대로 여겨졌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캘빈 쿨리지였는데, 그는 미국의 어느 대통령보다도 안정되 통치권을 행사했다. 전통적인 기준에서 보면 경제생활은 좋은 편이었다. 
  재무장관 앤드류 멜론은 멀리 1980년대에 대한 예행연습을 하는 듯했다. 상당한 부자였던 멜론은 자신이 행한 조치의 수혜자였다. 그때에는 엄격한 경제적 정당화를 위한 시도 '더 정확히 말해서 창출하는 것'가 불필요하게 여겨졌다. 세금을 조금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경제학 연구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20년대말이지만, 당시의 실정에 대해서는 별로 숙고하지 않았다  너무도 정상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으므로 왕성한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이 연대에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사반세기 후에는 앞에서 말했듯이 1929년 증권시장의 일대 붕괴에 대해 쓰게 되었다. 이전에 1920년대 영국의 연구에 몰두했듯이 나는 특히 1920년대의 미국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는 이 연구에서 이미 말했던 것을 수시로 다시 끄집어낼 것이다. 영국의 경험을 이야기할 차례지만 먼저 한 마디, 일반적인 경제적 배경에 대해 말해둬야겠다.
  1920년대는 보편적 행복의 시대는 아니었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독일과 구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등에서는 무제한적 인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후에는 퇴보적인 암울한 경제상태가 이어졌다. 정부의 지출은 수입의 한계에 맞추어 그에 따른 은행 차용과 통화 방출을 종결시켰다. 독일에서는 이 엄격한 정통적 재정이 하인리히 브뤼닝 수상 하에서 1930년대까지 연장되어 대공황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독일에서는 민주주의가 고난의 어버이와 같이 여겨졌다. 이탈리아에서 이미 그랬던 것처럼, 이로 인해 두 나라에 주축 독재 더 액시스 딕태터쉽이 이루어지고, 억압적인 정권은 살 만한 경제복지 수준에 대한 대가로 용인되어졌다.
  1920년대가 암울하기는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20 ~ 1921년에 전시 결핍이 극복되고 예산이 균형 수준으로 회복되자, 전시 인플레이션도 점점 진정되다가 결국 종식되었다. 필시 독보적인 위험성이 있는 현대의 경제 및 재정 정책의 실수, 다시 말해 이기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뒤따랐다. 영국 재무상은 파운드화의 옛 금 함량인 순금 123.27 그레인이라는 금 본위로, 그리고 파운드당 4.87 달러라는 과거의 환율로 회복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금과 달러에 대한 파운드화의 놀랍도록 신속한 평가를 의미했다. 이렇게 하여 미심쩍게 생각하던 개인들이 파운드를 갑작스레 싸진 달러나 금으로 교환하게 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한 지지 자금이 영국은행 더 뱅크 오브 잉글랜드 의해 뉴욕 연방준비은행 및 제이. 피이 모간으로부터 확보되었다. 그 금액은 각각 2억 달러와 1억 달러였다.
  그리고 수상 윈스턴 처칠의 정치적 성공이 회복되었다. 1925년 4월 28일에 있었던 하원 연설에서 처칠은 앞으로 영연방 및 전세계 국가들이 금 본위로 통합될 것이며, '갑판은 연결되어 있으면서, 파도에 따라 오르내리는 항구의 배들처럼 함께 변화할 것' 이라고 말했다. 언론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뉴욕타임스"는 다음날 '로비에서는 그의 연설이 긴 한 줄기의 가장 멋진 시 구절' 같았다고 했고, "타임스" 는 머릿기사에서 그 연설이 '의회와 영국을 열광의 꼭대기' 에 옮겨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커다란 사회 , 정치적 재앙이 닥쳐왔다. 전시의 물가 상승을 반영하여 다른 통화가 너무 많이 올랐으므로 영국의 수출업자들은 파운드화나 상품들을 살 수가 없었다. 이 돈을 다르게 사용했다면, 같은 액수의 달러화로 더 많은 석탄과 공산품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수출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영국의 유일한 해결책은 국내 가격을 낮추는 것 외에는 없었다. 또한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는 가격 중에서 그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임금을 떨어뜨리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임금 삭감에 항의해서 탄광에서는 파업이, 그 밖의 곳에서는 노동쟁의들이 일어났고, 그것은 성난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연대 내내 지속된 경기 침체와 실업이 뒤따랐다. 다시 말하지만, 단 하나의 경제적 의사결정이 그토록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예는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10년 전 윈스턴 처칠은 제1차세계대전의 가장 큰 군사적 과오였던 다르다넬스 해협 군사작전을 주도했다. 경제와 재정 방면에서도 똑같이 탁월했던 그는 나중에 눈부시게 다시 소생한다. 현대의 어떤 정치가도 절망적 과오에서 커다란 성공까지 종횡무진하는 처칠의 능력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 경우 그는 케인즈의 도움을 받았다. 경제학자들도 다시 한번 케인즈에게서 명쾌한 통찰을 얻었는데, 케인즈는 외관상 박식해 보이는 재무성과 시티 '런던의 금융, 상업 중심 지구' 의 금융계 공무원들이 큰 과오를 저질렀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파운드의 19세기적 고결성과 탁월성의 회복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케인즈는 처칠에 대해 '그가 그러한 실수를 차단할 본능적 판단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며, 그래서 그는 '진부한 금융의 떠들썩한 옹호자들에 의해 귀머거리가 되었다' 고 말했다. 1930년대에 있었던 영국의 대공황은 심각하고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미국의 불황과는 대조적으로 경기 침체, 실업 및 사회 불안의 암울한 세월이 뒤를 이었다.
  실제로 영국의 경우와 1920년대 미국의 차이는 너무도 현저했다. 1914년과 1920년 사이에 미국의 금 보유고는 18억 달러에서 28억 달러로 증가했다. 전쟁 기간 동안 대략 두 배로 상승한 물가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미국에도 인플레이션의 기억을 남겼다. 인플레이션이 맹위를 떨친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제2차세계대전이 닥친 후였다. 1920년에 물가는 안정 상태에 들어섰다. 경미한 불황 - 적어도 그때는 가장 온건한 용어였다 - 이 있었을 뿐이다. 경제는 오히려 안정되었다. 경화의 대량 유입으로 차용 및 투자기금이 생겨났는데, 그 연대 동안 수준에서 계속되었다. 경제활동 전반이 그러했듯이 1925년과 1929년 사이에 제조업체의 수는 18만 3,877개 업체에서 20만 6,663개 업체로 늘어났고, 그들의 생산액은 약 600억 달러에서 700억 달러로 증대했다.
  1921년에는 평균 67 '1923 ~ 25 = 100' 에 불과하던 연방준비 공업생산지수가 1928년 7월에는 110으로 뛰었으며, 1929년 6월에는 126에 달했다. 1926년에는 430만 1,000대의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3년 후인 1929년에는 생산이 100만 대 이상 늘어 535만 8,000대에 이르렀다. 수입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사업하기에는 정말 호시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돈이란 자동차를 사는 데에만 쓸모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희망에 자금을 대는 데에 훌륭하게 이용될 수 있었다. 즉 투기를 말한다. 투기는 가격이 오르고 있을 때에, 그리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이 추가적 상승을 예상할 때에 시작된다. 그들이 분별력 있는 사람들이 추가적 상승을 예상할 때에 시작된다. 그들이 상품을 삼으로써 생산은 증가하게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게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끌려든다. 가격이 오를 때마다 전에 샀던 사람들의 선견지명이 확인된다. 의심했던 사람들은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매도된다. 이와 같은 구매와 고무적인 분위기는 정신적으로는 취약하지만 경제적으로 강한 생활력을 지닌 구매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비축고가 고갈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나면 전망에 대한 견해가 바뀌고, 수요는 사라지며, 구매 자금을 대던 채권자들은 대부금을 받기 위하여 상품을 판매하라고 압력을 가한다. 한마디로 폭락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특징들은 여전하며, 17세기 홀랜드의 튤립 대투기 이래 수세기 동안 마찬가지였다. 그 하나가 지레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만약 투자하기 위해 빌린 돈의 이자가 고정되어 있다면, 돈을 빌린 사람은 물가 상승으로 인해 몇 배의 이익을 얻게 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보통 시류의 흐름을 잘 타고, 신선하고 영민하며, 능란한 재능을 부여받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사실 그들과 그들의 금전적 예민함은 당대의 경이로움이었다. 폭락 후에는 결국 슬픈 진실이 드러나고 말았지만.
  그들은 자신의 환상에 사로잡힌 나약한 개인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환상이 그들로 하여금 법의 한계를 넘어서게 했던 사실이 종종 밝혀진다. 돈 굴리기 천재의 전기에서 마지막 장은 대중의 강력한 비난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추방 혹은 상대적으로는 친절하나 여전히 유쾌한 것과는 거리가 먼 실제적인 용어인 투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경제학자들이 상호협력적인 방식으로 참여한 한 연구에서 투기라는 거품이 터진 외적 원인 몇 가지를 찾아냈다. 합리적 세계에서는 투기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씨앗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상상할 수 없다. 이와는 다른 어떤 것이, 다시 말해 어떤 외적 발전이나 사건이 투기를 종식시켰을 것이다.
  1920년대 미국을 강하게 특징짓는 투기 분위기는 플로리다 토지 붐에서 제일 처음 분명히 드러났다. 플로리다의 겨울 기후가 미니아폴리스나 뉴욕보다 낫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1920년대 초기 몇년간, 기분 좋은 겨울 태양 아래에서 토지 소유를 통한 무제한적 재부에 대한 환상이 움텄다. 그리하여 도로들이 설계되고, 내버려져 있던 인근의 대토지가 구획되었다. 토지들이 가장 가까운 바다로부터 10 ~ 15마일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해변에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구입자들 대다수가 자신들이 살 집을 택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점은 별로 중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10%의 계약금을 걸어놓고 재매각과 함께 찾아와서 이전 가격의 두 배쯤 되는 이익을 가져다줄 언제나 반가운 지레 효과를 기다렸다. 채무를 변제하고 나면, 원시 투자의 대략 10배 정도 되는 이익이 남곤 했다. 이윤 추구자들의 파도는 전 국토를 횡단하여 플로리다를 엄습했다. 더러는 기차로, 더러는 자동차로, 그 교통량이 워낙 커서 결국 철도는 건자재를 포함한 불요불급한 화물의 이동을 정지시킬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추측만 해봐도 알 수 있겠지만, 자재들은 부동산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았다' . 마이애미에서는 판매자들이 새 도착자들에게 바로 그 자리에서 토지를 팔기 위해 거리에 서 있었다. 이때 '매각자는 왜 땅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생기는 이익을 챙기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제기되지 않았다.
  토지 투기 붐은 북쪽으로 번져갔다. 이 붐이 잭슨빌에 이르렀을 때에 찰스 폰지의 분투가 일어났다. 불과 수년 전에 그는 나중에 투자하는 얼간이들이 공급하는 자본으로 먼저 투자한 사람들에게 풍족한 이윤을 제공하는, 목적이 불문명한 투자회사를 이용해 보스톤의 투기에 대한 무감각을 깨트렸다. 이것은 이후 폰지식 사기로 알려졌다. 잭슨빌 부근에 있는 폰지의 분양 지역은 특별히 사기성이 농후한 지역으로서 도시에서 65마일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땅 한 뙈기도 허비되지 않았다. 에이커마다 23개의 건축 부지가 구획되었다. 그의 천재성은 자신이 부자로 선택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 불가피성이 아무리 명백하더라도 금전적 자살 행위를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데에 있다.
  결국 종말은 다가왔다. 1926년 새로운 매수자의 공급이 바닥났고, 붐은 소멸되어 갔으며, 자기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 붕괴에 합리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해 가을 두 차례의 허리케인이 남쪽을 향해 불어닥쳤다. 그러자 가격은 절망적으로 떨어졌다. 어떤 토지는 지레의 보상에 의해 결실을 거두었던 몇 명의 투기자들의 손을 거친 후에 연이은 채무 불이행으로 원소유자에게 되돌아갔다. 그 땅에는 보도와 가로등 그리고 시가의 몇 배에 이르는 세금이 부과되어 있었다. 1925년 마이에미의 어음 교환액은 10억 6,652만 8,000달러였다. 1928년에는 1억 4,336만 4,000달러로 감소했다.
  플로리다에서 일었던 붐은 당시의 투기 분위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작은 창이다. 1920년대는 금세기가 진정 미국의 세기라는 때이른 확증이었다. 그러한 국가적 분위기가 수차례 표출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전적으로 정치가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정치적 표현으로서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1928년 12월 4일 의회 연설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었다.
  "합중국의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이제까지 소집된 미국의 어떤 의회도 지금의 상황처럼 낙관적인 적은 없었습니다. 국내에는 평온과 만족 그리고 수년간의 번영이라는 최고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해외에서는 평화와 '상호 이해에서 나오는 선의' 가 있다고 지적하고, 그들과 그 나라가 '현재를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 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의 공적 논의에 재현되는 두 가지 경향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그 하나는 좋은 것은 무엇이든 전적으로 미국의 특징이며, 영원하다고 간주하는 점이다. 그는 이 점을 명백히 했다. '유례가 없을 정도의 이 축복의 주요한 원천은 미국민의 성실성과 덕성에 있습니다.'
  두번째 경향은 국민들 중 운이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 모두에게도 당연히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확실히 믿지 않는 것에 비해 훨씬 자주 그렇게 말한다는 특징이 있다. 쿨리지의 연설은 부자들, 즉 당시 국민들 가운데 소수 집단에게만 적용되는 내용이었다. 일반 노동자들은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대다수는 노동조합으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다. 지극히 제한된 복지나마 받을 수 있는 것은 행운이라고 여겨졌다. 그 복지는 이전 세대를 살았던 철강왕이 '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나라의 산업을 맡기신 가치 있는 인간들' 이라고 말한 사람들의 호의에서 비롯되었다.
  소수민족들 특히 흑인들은 당연히 국가적 행운에 대한 참여에서 배제되었다. 그들은 남부 플랜테이션에서 남북전쟁 이전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고생을 했다. 봉건적이 구조는 남아 있었다. 여자들과 어린이들도 지극히 잔혹한 착취에 대해 무방비 상태였다.
  아직도 경제의 중요한 부문이었던 농업은 - 고용 인구의 대략 20%가 농업에 종사했다 - 불만의 특별지대였다. 아무도 비용과 가격을 통제하지 않는 순수하게 경쟁적인 시장에서 차별화되지 않은 제품들을 가지고 경쟁하고 있었으니, 농민들은 경제체제의 고전적 이상에 가장 가까운 근사치를 보였다. 그들은 또한 모든 생산자들 가운데 그 체제와 가장 심한 불화를 겪고 있었다. 허버트 후버 행정부는 효과는 없지만 전혀 가망이 없지만도 않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즉 연방농업위원회를 통해 농민들에게 장비, 비료 혹은 다른 물품들을 판매하는 사람들이나 수확물과 가축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누리던 거래권의 일부를 협동조합을 거쳐 농민들에게 부여하려는 노력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게 된다.
  이 모든 문제가 당대의 정규 경제학에서는 중심적 관심사로 떠오르지 못했다. 나의 농업적 배경과 농업문제 전반에 대한, 특히 농업경제학에 관한 연구 덕분에 이 문제는 이미 나의 사색 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고전파 경제학에 열중한 경ㅇ제학자들에게 이 문제는 자신들의 분야를 저만치 벗어난 특별한 경우였다. 그것이 '농업문제' 였다. 완벽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지닌 고전적 체계라 할지라도 심각한 불만과 고통에 결부될 수 있다는 사실은 거의 무시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어둡고 암울하며 보람없는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편안한 사람들은 단순하게 자신들의 상황이 모든 이에 연장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한 견해는 캘빈 쿨리지에 의해 그들에게 명확히 표명되었다. 반세기 후에 나타날 로널드 레이건의 경우처럼 순진성이 과오를 용서했다. 그러나 쿨리지가 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언사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찾아내고, 그 언사를 역사적 오락으로 바꾸려는 경제세력은 잘도 전진했다. 월 스트리트의 대투기가 강력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7. 대폭락
  월 스트리트 붐은 1920년대 미국의 경제적 상징이자 요체였으며, 뒤를 이어 나온 슬픔과 고통의 원천이었다. 이 붐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1924년에 서서히 시작되어 1925년까지 계속되다가 1926년에는 약간의 후퇴를 겪었는데, 아마 플로리다 부동산 폭락의 여파였을 것이다.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는 1927년이었다. 1928년에는 강세를 유지하다가, 1929년 3월에 일시적 폭락을 거친 다음에는 이듬해 여름철에 오름세가 절정에 접어들었다. 9월에는 급락했고, 뒤이은 수주 동안은 불확실한 장세를 보였다. 즉 며칠간은 비관적이었지만 뒤이은 며칠간은 낙관적이었다. 그리고 10월 24일 목요일부터 다음주 화요일까지 강력한 대폭락이 닥쳤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점에 대해서는 약 40년 전에 썼다. 어린 시절의 장면들을 되짚으며 초기의 인식이 얼마나 완벽하지 못한가 하고 깨닫기도 했다. 여러 해 동안 나의 관심을 끌었었던 다양한 경제적 사안들 중 결코 아무것도 대폭락과 그에 선행한 투기만큼 압도적인 사안은 없었다. 이 사안들은 우선 그 광란 상태로 인해서 경탄할 만하지만, 극적인 전개와 비극에 있어서도 대단했다. 그리고 비극은 나의 다른 저술에서도 논평했듯이, 돈 외에는 잃을 것이 없을 때 (전쟁에 대해서는 타당하지 않지만) 에는 조용히 즐길만하다. 나에게는 희석되지 않은 기쁨의 시기인 '대폭락' 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회상해보겠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그 책이 등장했을 때, 나는 매우 기뻤다. 꽤 보람 있는 일을 하는 저명한 사람들 가운데에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일어난 크고 작은 투기와 재앙들이 신중하고도 주의 깊게 자신의 주제를 골라야 한다. 반복될 역사에 특별히 유의하면서.
  나는 또한 이 책을 쓰면서 제목에 대해 세심해야 할 필요성을 배웠다. 그 선택이 지극히 직접적이고 그럴듯하게 보이더라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1950년대 중반 그 책이 처음 나오고 나서 얼마 후에 자주 다니는 뉴욕 여행길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어느 초저녁 라가디아 에어터미날 안에 있는 작은 서점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잠시 멈춰서서 그 책이 진열장에 놓여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런데 없다. 마침 시간의 여유가 있었으므로 아무렇지도 않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 짐짓 책들을 그저 구경하는 체했다. 하지만 계산대 뒤의 여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무슨 특별한 책이라도 찾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갤브레이스 책 있습니까' 하고 저자 이름을 말해버렸다. 그리고 나서 좀더 분명한 어조로 제목을 밝혔다.
  "대폭락 말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 책은 공항에서 팔 종류가 아니예요."
  대폭락에 선행해서 일어났던 붐이 어떻게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하는지, 그리고 그 대폭락이 그런 에피소드들을 지배하는 규칙들에 얼마나 고분고분 따르는지, 또 그것들을 얼마나 뛰어나게 극화하는지 관찰함으로써 더욱 깊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국가적 분위기에 대해서는 쿨리지 대통령이 탄복스러울만큼 명확하게 표현한 지속적이고도 당연한 대번영의 모델이 있었다. 그 모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산업과 기술의 신세계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 세계는 자동차 공업과 여전히 탄복을 자아내는 조립 라인에 의해, 그리고 특히 무선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세계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 시절에 투기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상은 'RCA' , 즉 미국 무선회사 Radio Corporation of America였다. 그러한 미래가 정말로 눈앞에 와 있었다. RCA는 결코 배당금을 지불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투기 붐의 자기 유지력은 이러한 국가적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는 한편, 그것에 의해 정당화된다. 플로리다 대토지의 경우처럼, 주가의 상승이 주식을 구매하여 가격을 훨씬 높이 올리는 매수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극히 설득력 있게 그들의 매수 결정을 뒷받침했다.
  이러한 경향은 1920년대 후반 수많은 (주식) 기술자들에 의해 매우 증대되었다. 그들은 그 과정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특정 주식의 가격을 올리는 데 동참하고, 거기에 주의를 끌기 위해 난잡한 사고팔기에 가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하여 순진하고 탐욕스럽고 잘 속는 사람들과 그들의 돈을 끌어들여 가격이 많이 오르면 곧바로 팔아치웠다. 이것이 이른바 투기 풀이었다.
  이 일을 유난히 능숙하게 처리했으며, 결국 이 일에 대한 광고 덕택에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장래 대통령의 아버지이며 21세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의 설립자이자 재정 후원자였던 조셉 케네디이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적당한 시기에 몸을 빼냄으로써 당연하게 여겨지던 자신의 이재 능력의 희생자 - 그렇게 되는 것이 정상이었는데 - 가 되지 않았다.
  전무후무한 지레작용 (어떤 변량의 움직임이 다른 변량의 한층 더 큰 변동으로 전환하는 것) 또한 나타났다. 이것은 주식의 투기 구매에 간단한 형태로 이용할 수 있었다. 즉 계약금만 걸고 나머지는 은행에서 차입한 브로커로부터 다시 차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증식된 모든 가치는 차입한 주식 보유자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여기에는 경계할 요소들이 있었다. 대다수 차입자들은 매수 가격을 45% ~ 50% 정도 올려놓아야 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판명될 터였다. 
  대폭락이 닥쳐왔을 때, 그 폭락을 따라잡을 수 없는 개인들은 더 큰 이윤을 요구했다. 그에 따른 판매에 의해 하향돌진을 야기하는 압력이 가해졌다. 그리하여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지렛대로서) 자금 차입을 했든 안했든 다른 투기자들의 심대한 고통이 극적으로 증대되었다.
  그러나 보다 복잡한 형태의 지레작용이 -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 배, 세 배, 혹은 그 몇 배수의 지레작용이 - 있었다. 이 작용에 관한 가장 탄복할 만한 표현이 폐쇄식 투자회사들, 즉 유가증권의 매수, 유지, 교환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설립된 회사들 속에 있었다. 1920년대라는 대단한 시절에 이러한 신탁회사 trust들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채권과 주식 및 우선주를 발행했다. 고정수익의 우선주와 채권은 구매한 주식의 가격과 함께 오르지는 않았다.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은 모두 구매 회사들의 보통주와 같은 이익을 올렸다. 이것이 일차적 지레작용이다.
  다음 단계는 그렇게 창출된 회사로 하여금 주식을 매수할 회사를 다시 또 하나 설립하게 하는 것이었다. 보통주뿐만 아니라 채권과 우선주도 이 회사에서 발행하게 했다. 그렇게 설립된 회사의 보통주에서 얻은 수익은 발기회사에서 발행한 보통주의 가치에 배타적으로 돌려졌다. 엄청나게 가치가 오른 그 주식은 계속해서 모회사의 보통주의 가치를 충실하게 올려놓는다. 이와 같은 구조는 여러 층이 될 수도 있다.
  이 지레작용의 가장 유명한 예는 '골드만 작스와 컴퍼니' 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회사는 1928년 후반에 '골드만 작스 상사' 를 설립했는데, 그 유일한 존재 이유는 다른 회사들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회사는 1억 달러, 오늘날의 가치로 하면 대략 10억 달러에 이르는 유가증권을 발행했다. 채권이나 우선주는 발행하지 않았으므로 지레작용은 아직 수반되지 않았다. 하지만 간과된 부분이 재빨리 고쳐졌다.
  그래서 이 상사는 '쉐난도' 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쉐난도사는 보통주와 우선주를 발행했는데, 후자는 고정수익주였다. 최초의 발행액은 1억 250만 달러였는데, 모집액의 약 7배가 초과 신청되었다고 한다.
  지배권은 골드만 작스 상사를 따라 모회사인 '골드만 작스와 컴퍼니'에 남겨졌다. 이어 쉐난도로부터 자본금 1억 4,200만 달러를 제공받은 훨씬 더 큰 기업 '블루리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보유 주식이 등귀함에 따라 블루리지의 보통주에서 발생한 큰 이익이 쉐난도의 보통주로 강력히 집중되었으며, 이후 몇 배로 늘어 쉐난도의 보통주로 강력히 집중되었으며, 이후 몇 배로 늘어 쉐난도로부터 상사로 흘러 들어갔다. 재계는 아연했다. 이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중에 유명인사가 된 존 포스터 덜레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유일하게 빠져 있는 것은 지레작용이 악성적으로 역순환할 수 있다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뿐이었다.
  몇년 후 워싱턴에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주는 진술이 있었다. 대폭락의 참담한 여파와 지레작용의 역전력에 대한 의회 청문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쿠젠스 상원의원 (공화당 미시간 주, 자유주의파) : '골드만 작스와 컴퍼니' 가 골드만 작스 상사를 설립했습니까?
  작스 : 예, 의원님.
  쿠젠스 : 이 회사는 자기 주식을 공매했는가요?
  작스 : 그 일부입니다. 회사는 전체 발행액의 10%에, 그러니까 총 1,000만 달           러를 원시 투자했습니다.
  쿠젠스 : 그럼 나머지 90%는 공매했겠군요?
  작스 : 예.
  쿠젠스 : 얼마지요?
  작스 : 104달러입니다. 그것은 구주고, 주식은 분활됐습니다. 
  쿠젠스 : 현재 주가는 얼마지요? 
  작스 : 대략 1달러 3쿼터 정도 됩니다.
  이것이 역지레작용이다. 폐쇄형 신탁회사들에는 이외에도 다른 예가 많이 있었는데, 규모 면에서나 구상에서 훨씬 더 방대했다. 결국 모두 복합적 영향을 남기고 침몰했다.
  지레작용은 철도와 공익시설을 사들이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수법은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클리블랜드에서는 반스월링겐 형제가 매우 작은 투자로 거대한 철도제국을 지배했다. 시카고에서는 새뮤얼 인설이 중서부에 있는 공익시설의 대복합체를 주재했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와 비슷한 수많은 모험을 벌였다. 결국 역지레 작용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비참할 지경으로 취약한 방법과 도래하는 공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보다 잘 계산된 수법을 분별하기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고급 금융의 세계는 가장 큰 감탄이 가장 큰 재앙에 이르는 길을 닦고 있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에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모두들 속았다는 말인가? 연방준비이사회는 그렇게도 후하게 주식 매수자금을 융자해준 신용대부를 단속할 수 없었는가? 물론 그에 대한 발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29년 3월, 창립 15년을 갓 넘기면서 무능하고 불합리한 연방준비이사회가 유가증권 매수에 이용되는 신용대부를 제한하는 조치를 위하리라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았다. 그러나 그 조치가 어떤 식으로 시행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시장은 약화되었다. 그렇지만 한 거창한 기념비 제막식에서 '내셔널 시티은행' 의 수장이던 찰스 미쉘이 연방준비이사회의 조치가 미칠 어떤 악영향을 자기은행의 대출로 상쇄하겠노라고 약속하자 곧 회복되었다. 그러나 적당한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시장은 계속 비등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투기 분위기와 그것에 의해 야기되는 궁극적인 붕괴의 위험이 연방준비제도의 창설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자, 나중에 당대 월 스트리트의 가장 명민한 인물이었던 폴 워버그에 의해 지적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제한받지 않는 투기' 라는 당시의 술판에 대해 언급하면서, 만약 중지되지 않는다면 '전국을 포괄하는 총체적 불황을 야기할' 비참한 붕괴가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폴 워버그는 즉시 '미국의 번영을 때려 눕히고 있다.' 고 비난받았다. 어떤 이들은 시장에 대한 사려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한 현상은 표면의 한 꺼풀만 벗기면 반유대주의와 마주치게 된다. 나는 그의 예언을 꽤나 즐겨 인용한다. 서른 다섯 해를 교소 혹은 명예교수라는 이름으로 하버드 대학의 일반 강좌를 맡아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금도 하버드 대학의 명예 경제학 교수이다). 사적인 성격의 역지레작용이 투기붐으로 가장 많은 혜잭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 불쾌한 모습으로 번져갔다. 조금 전에 말한 새뮤얼 인설은 그의 공익시설 복합체가 붕괴되자, 그리스로 도피했다가 때맞춰 돌아와 불법행위 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았다. 결국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 그 후 다시는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가장 유명한 국제적 투기꾼이며, 정크 본드라는 이름의 증권뿐만 아니라 위조증권의 기수로도 이름을 날렸던 아이버 크루거는 파리 시내에 나가 권총을 사가지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그는 자살을 했다. 위축되어 있는 시장에 대한 악영향을 피하기 위해 그의 자살 소식은 당일 거래가 끝날 때까지 비밀에 부쳐졌다.
  언론과 블랙 유머가 그 영향을 과장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새로운 역경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다들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호텔 종업원들은 새로 맞는 손님들에게 방을 취침용으로 할 것인지 점프용으로 할 것인지 묻지 않았다. 투기로 인해 두 사람이 공동계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묶고 함께 뛰어내렸다는 보도는 명백히 억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개인적 파멸의 검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중압감과 고뇌가 당대의 은행 실력자들에게까지 미쳤다. 암흑의 화요일 (1929년 10월 24일), 그러니까 그 재앙의 첫 날 '체이스' '내셔널 시티' '뱅커스 트러스트' '게런티 트러스트' 등의 대표들이 어떤 조치가 취해질 것인지 숙의하기 위해 모건의 사무실에서 회동했다. 이전에 장세가 약해졌을 때에는 자신감 있는 말들이 오갔었다.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 은행가들이 개입할 것이라고 했다. 그날은 체계적인 부양이 뒤따를 것이라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나왔다. 실제로 그랬다.
  이윽고 당시 뉴욕 증권거래소 부사장이자 모건의 수위 동업자의 형제인 리차드 휘트니가, 지극히 과시적인 일련의 매수할동을 벌이기 위해 거래소 입회장에 나타났다. 이러한 행동과 이전의 회동에 대한 보도 - 은행가들의 회동이 목격되었다는 - 가 분위기를 일변시켰다. 계속되던 하락세가 잡혔고 투기 인기주들은 반등하기 시작했다.
  아아, 그러나 이 분위기는 지속되지 않았다. 다음 화요일은 총체적인 절망의 날이었다. 그날 은행가들이 시장부양 조치로 사들였던 증권을 팔아치우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부양력 면에서 그들의 명성은 손상되었다. 장세는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행운도 따르지 않았다. 암흑의 목요일에 회심의 역전극을 연출했던 리차드 휘트니는 그 보상으로 그 후 몇달 동안 거래소 소장직을 역임했다. 그러더니 어느날 갑자기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에게 위탁했던 고객과 증권거래소의 계정에서 적지 않은 자금을 포탈했다는 혐의였다.
  미국 양대 은행인 '내셔널 시티' 와 '체이스' 의 은행장들 역시 파도에 휩쓸렸다. 일찍이 연방준비이사회의 조치라는 전혀 있지도 않은 위협으로부터 증시를 방어했던 내셔널 시티의 찰스 미쉘은 꼼짝없이 거기에 말려들었다. 소득세용으로 손실을 찾던 (그도 이 점을 인정했다) 그는 대폭락 후에 모르는 사람들과 전혀 의심하지 않는 아내에게 주식을 팔았다. 수개월 동안 불쾌한 소송이 뒤따랐던 것은 당연하다. 결국 무죄 선고를 받긴 했으나 그의 좋은 시절은 그것으로 모두 끝이 났다.
  체이스의 대표 엘버트 위긴은 대폭락 당시 자기 은행의 주식을 조금밖에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것은 그가 영민하게도 일이 잘못 풀릴 가능성 쪽에 내기를 걸고 있다가,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그 은행의 은행장, 대표이사, 운영위원회 의장 등 다양한 직함을 가졌던 사람이 할 만한 건설적인 노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위긴은 자신의 행동이 고용주의 사업에 대한 자신의 깊은 개인적 관심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신연금으로 10만 달러, 오늘날 가치로 약 100만 달러를 받고 은퇴했다. 조사 결과, 그것은 자신이 자신에게 물려준 사려 깊은 선물이었음이 드러났다.
  수는 많지만 중요도가 다소 떨어지는 일군의 인물들 - 버나드 스미스, 특별히 감탄을 자아내는 단기 투기자 엠. 제이. 미한, 월 스트리트 세계에 대한 높은 식견을 지닌 캐나다인 도래자 아서 커튼, 기왕에 잘 알려진 석유회사 경영자 해리신클레어 등등 - 은 의회에 소환되어 자신들의 공작, 특히 시세 조작을 위한 다양한 노력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야 했다.
  커튼은 심한 기억상실로 고초를 겪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신클레어는 왕년에 티폿 돔 스캔들 (내무장관 폴이 티폿 돔의 정부 유전을 비밀 대여한 사건) 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그의 증시 조작을 방해하지는 않은 것으로 나중에 드러났다.
  믿기 어려운 사실은 이 중요하지 않은 그룹이 그 시대의 영웅들이었다는 점이다. 1980년대가 끝날 무렵에도, 이와 비슷한 경제계 인사들에 대해서 이와 비슷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거물들과 사기꾼들의 몰락을 보는 것은 늘 유쾌하다. 그들의 몰락을 보면 체제 내에는 고유한 정의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전의 일탈과 사회적 손실이 대단할수록 현재의 몰락 역시 더욱 대단해진다는 견해에는 모두들 선선히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말했듯이 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소박한 환경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돈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사람들의 지능에 대해 과장된 인상을 갖는다는 점이다. 만약 그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예외적인 경우이다. 투기자들이나 일부 대은행가들이 하는 방식을 무심히 보면 특별한 재능, 즉 경제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신앙이다. 좀더 깊이 헤아려보면 결국 여실히 드러나고 만다. 사실 그들은 지능의 매개자가 아니라 환상의 매개자인 것이다.
  이제 대폭락의 여파와 그때에 형성되어 오늘날까지도 고동치며 살아 있는 경제적 태도와, 그때에 습득된 이후 슬프게도 다시 또 습득된 적이 없는 교훈들에게 관심을 돌리련다.
    8. 대공황
  일반적으로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에는 극적인 구성이 없다. 더 좋아지든 나빠지든 변화는 점진적이며, 흔히 학문적 방식에 의해 나중에서야 발견된다. 그것은 경제의 점진적 과정과 기원 및 흐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직업적 명성을 얻는다. 1929년과 그해 10월의 불행한 사건들은 이 정연하고 신비스러운 경향과는 현저히 대조를 이루었다. 증시 붕괴에 뒤이어 대공황이 닥쳐왔던 것이다. 이 불행은 1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산업계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공공정책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것이다) 에 의해 완화되기는 했지만, 결국 이 불행을 종식시킨 것은 제 2차세계대전이라는 별개의 드라마였다. 경제적 지혜가 아니고 전쟁이 공황을 끝냈던 것이다.
  경제학은 극장도 없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경제학자들은 그 적합성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오랫동안 지속된 대폭락에 대한 직업적 반응이었다. 그리고 보다 깊은 경제적 요소들에 대한 반응이었다. 당시에는 대체로 파악되지 않았지만, 이전 여름에 공업시장의 경제실적은 다소 저조했다. 이 점에 대해 증시는 모두들 찬양해 마지않는 시장의 지각력으로 반응했다. 다소 늦은 감이 있고 폭력적이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뒤이은 수개월 동안 아마도 악성 정책에 의해  악화되었을 경제 내부의 고유한 자율적인 힘들이 불황을 초래했다. 시장의 붕괴는 부수적 사건에 불과했다.
  이것은 도피주의적 넌센스 혹은 넌센스였다. 증시 붕괴, 특히 증시 붕괴를 불가피하게 만든 투기는 최고로 중요한 경제 사건이었다. 깨지기 쉬운 유리에 대한 타격처럼, 그 효력은 극히 취약한 구조였다. 그렇다고 해서 타격의 중요성이 기각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1929년 10월 직후 몇 주 동안 내구 소비재의 판매 실적은 현저히 저조했다. 라디오와 자동차가 두드러진 예였다. 이러한 현상은 잠재적 구매자들이 시장에 붙들려 있는 데서 오는, 또 다시 뭔가 한참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였다. 10월에는 111을 기록한 산업생산지수 (1928 = 100)가 11월에는 106으로, 12월에는 101로 떨어졌다. 1929년 이후 가장 급격한 하락이었다. 공황사가인 찰스 킨들버거는 정통적인 견해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다.
  경기와 상품의 가격 및 수입이 급작스레 무너져내린 점에 비추어 증권시장이 디플레이션 메커니즘의 일부가 아니라, 어떤 피상적 현상이나 신호 혹은 격발장치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대폭락과 그 원인인 투기는 경제 내부에 흐르는 심층적 추세의 수동적인 반영이 아니었다. 그리고 1980년대의 대투기가 그랬듯이 향후 수년 동안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시장 및 경제를 지탱했던 1920년대의 분위기는 확실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따. 경제학에는 지금까지 인정되지 못한 채 미적미적 오늘날로 미루어진 뭔가에 대해 길이 열려 있다. 그것은 유휴 생산능력과 지속적 실업이 온존하는 상태에서의 경제적 균형의 가능성이다. 간단히 말해서 삽화적 사건이 아닌 정상적 경제과정으로서의 불황 혹은 경기 후퇴의 가능성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앞에서 개괄한 대로 고전적 체계에서는 가동되지 않는 산업 설비와 실업은 지속될 수 없다. 만약 노동자들에게 일이 없다면, 그들의 노동은 고용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정도의 낮은 가격으로 제공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가동되지 않는 설비와 다른 생산시설이 존재한다면, 고객을 유인하기 위해서는 가격을 더 낮출 필요가 있다. 경쟁 앞에서는 이 점과 관련한 어떠한 망설임도 있을 수 없다. 경쟁은 가격 하락과 판매 및 생산의 증대를 강요한다.
 그렇게 형성된 가격에 대해서는 재화를 살 수 있는 충분한 구매력의 흐름이 언제나 존재한다. 이것은 '세의 법칙' 의 순효과이다. 세 제이. 시. 세이 (1767 ~ 1832) 는 아담 스미스의 굉장히 예민하며 때로는 다소 혼란스러운 선물에 대한 위대한 프랑스인 통역자요, 정리자이며 해석자였다. 세의 법칙은 놀랍도록 단순했다. 어떤 생산물을 판매함으로써 시장에서 그것을 살 수 있는 자금이 나온다는 것이다. 가격 안에는 불가피라게 임금비용과 이자비용, 지대 및 이윤 (혹은 손실) 이 포함되는데, 모두 합치면 그것을 사는 데에 필요한 금액과 일치한다. 가격으로부터 역순환된 소득 총액은 정확히 그 제품을 사는 데에 필요한 구매력이다. 적어도 산술적으로는 수요의 부족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전통 경제학에 계시된 진리로서 저 위의 명망 있는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세의 법칙에 의문을 제기하면 미친 사람이나, 최소한 경제학에 대한 수련이 총체적으로 결여된 사람이라는 취급을 받았다. 
  경제에  파동이 - 좋은 시기와 덜 좋은 시기가 - 존재하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인정되고 있었다. 일찍이 언급했듯이 경기순환에 관한 가치 있는 책들도 있었고, 대학의 교과목에도 경기순환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기순환은 자주적이었다. 어떻게 설명하든 하강은 일시적이었다. 다시 말해, 일시적 기분에 젖어 완전고용 균형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의 서글픈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교훈은 지속적인 실업과 지속적이고 전반적인 불황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세의 법칙은 불변의 법칙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득은 반드시 지출되거나 투자되지는 않는다. 이 말은 미래가 불안하거나 의심스러운 시기에는 현금이나 예금이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고, 은행들은 악성 채권에 의해 위협당하거나 압박을 받아 대출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아니면 적당한 지불 능력을 갖춘 차용자들을 확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또한 가격이 반드시 감소된 수요에 적응하는 것도 아니다.
  현대의 회사경제에서 가격은 모종의 경직성 혹은 안정성을 갖는다. 임금비용처럼 말이다. 따라서 수요가 감소하면 생산은 낮아지고, 노동자들은 해고된다. 그들의 감소된 혹은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소득은 침체효과를 가중시킨다. 만약 개인 소득이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것처럼) 불공평하게 분배된다면, 세의 법칙은 지출이나 투자 압력을 전혀 받지 않는 복받은 개인들의 사용되지 않는 구매력이 설치하는 커다란 장애물들에 의해 더욱 심한 좌절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소득이 작거나 중간 정도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사회 전반의 공평한 소득분배가 높은 실효성을 갖는다는 사실은 가장 덜 알려진, 그리고 풍요가 넘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매력 없는 경제적 진리들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경기가 후퇴함에 따라 새로운 균형에서 안정이 이루어진다. 그 균형은 낮은 생산과 많은 실업을 포함한다. 영향을 전혀 받지 않거나 혹은 덜 받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의 구매와 소비에 대해 의존할 수 있는 재원을 가진 사람들이 지출을 재개한다. 이들의 지출이 경제를 지지하게 되지만 더 낮은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이 새로운 균형이 유지되지 못할 기본적인 이유는 없다. 설비의 높은 혹은 완전한 가동으로 자동 복귀하리라는 믿음은 정치적 신념과 희망 및 확신에 의존하는 것이지 경제적 실재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1930년대는 불완전고용 균형의 10년 만기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재발할 것인지 알고 싶을 때마다 이 연대를 상기한다면, 역사 이용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10년간의 불황이 지나자 불완전고용 균형을 가중시키고, 때로 심화시키는 그도 아니면 유지시키는 다른 요소들이 등장했다. 중요한 문제는 금융 위기보다 미국 은행들의 제도적 취약성이었다. 미국의 은행 제도는 지금도 대체로 그렇듯이 고도로 분산되어 있었는데, 부분적으로는 돈의 위력에 대한, 그리고 금융자원이 금융 중심지 특히 월 스트리트로 과도하게 집중하는 것에 대한 잠재되어 있는 대중적 의구심의 반영이었다. 대폭락 이전부터 은행들은 대략 하루에 둘의 비율로 파산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일이 6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붕괴되는 은행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1933년 초에는 예금인출 소동이 전염병처럼 번졌다. 2월에는 미시간, 메릴랜드, 오하이오 등에서 주 내의 은행들에게 휴업령을 내렸으며, 다른 주들도 고 뒤따랐다. 3월에는 신임 대통령 루스벨트가 은행 휴업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공포로 이어지는 이 불안감이 소비 지출과 생산 투자에 강한 역효과를 미쳤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불황 균형의 지속을 보장한 또 다른 요소는 농업 부문에서 찾을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농업은 아직도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1920년대에는 고부채와 저가격이 병존했다. 불황기에는 농산물 가격이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수준으로 떨어졌다. 1909년부터 1914년까지 농산물 가격의 비용 비율은 기본가치 100으로 주어졌다. 이것이 그 유명한 패리티 가격 - 패리티란 원래 가격, 환율, 구매력, 임금의 등가를 나타내는 경제학 용어, 미국 농업경제학에서 패리티라는 용어는 농산물의 가격조절정책을 일컫는 데 사용된다. 정부는 농산물의 가격지지나 생산 쿼터를 통해 농업 부분이 기준 시점에서 지니고 있던 구매력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구매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 관계였으며, 농민들이나 농민 단체는 여기에는 본래적인 거의 신학적인 기원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농민은 원래 패리티 가격을 받게 되어 있는 거라구."
  1918년에 이 비율은 200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농산물 강격이 패리티 가격 관계의 두 배였던 것이다. 그러나 1929년에는 패리티 비율이 138로 떨어지더니, 1932년에는 57로 떨어졌다. 참담한, 가히 살인적인 수준이었다.

  또 하나의 요소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으로, 용인될 수 있는 가격으로 팔리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하는 농업의 경향성 (그것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데) 이다. 이따금 일탈적인 예외는 있지만, 대규모 자동차회사들은 가격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자동차를 시장에 쏟아 내놓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천 수만의 생산자들에 의해 분할된 농업 생산은 그러한 제한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농업은 그냥 내버려두면 생산과 가격에 의해 스스로를 파괴하게 된다. 그러한 결과의 하나로 모든 농업국가는 거의 예외없이 농업 생산의 가격, 즉 공급 관리를 위한 공적인 메커니즘을 갖는다.
  오늘날까지 이것은 정치적인 일탈, 다시 말해 어디를 가거나 강력한 농민들의 로비에 대한 굴복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경재의 이상에 - 지순한 경쟁에 - 가장 근사하게 부합되는 산업은 그 결과에 가장 취약하며, 따라서 가격 및 생산에 대한 국가의 가장 강한 통제 아래서 생존한다는 점을 유의하자.
  대공황 초기 몇년 동안, 미국에서는 다른 산업국가처럼 통제가 즉시 시행되지는 않았다. 한동안 과잉 생산의 결과인 저하된 농산물 가격과 농업 소득의 전반적인 침체 상황, 다시 말해 불완전고용 균형의 지속성과 심각성을 가중시켰다. 1929년 농업 소득은 당시 달러 가치로 97억 6,000만 달러를 나타냈다. 그러다가 1933년에는 46억 6,000만 달러로 감소했다. 그 결과, 이번에는 종업 자재와 생활용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소득 역시 마찬가지로 줄어들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 불행을 얌전히 겪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33년 1월, 농민 단체들 가운데 가장 위력 있고 보수적인 그리고 후년에는 잠시 나의 사용자이기도 했던, 미국 농업개선동맹의 대표 에드워드 오닐은 상원의 한 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 농민을 위해 무슨 조치가 위해지지 않는다면, 우린 열 두 달 안에 농촌에서 혁명을 일으키겠소이다."
  이 협박이 과장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의 말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방금 언급한 문제들과 전반적인 불황의 문제는 1933년 이래 내 삶의 한 부분이 되다시피했다. 그것은 내 개인적 체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즉 나는 1931년 봄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경제학 특별연구원 외에는 다른 일자리가 없었다. 특별 연구직도 학부에서 그 학과를 전공한 덕에, 그리고 주요하게는 온타리오주 차지농과 그들의 지극히 참담한 경제 상황에 관한 논문을 쓴 덕에 얻어냈다. 특별 연구직으로서 내가 할 일은 농업경제학 연구 담당이었다. 나는 당시 새롭게 창설된 지아니니 농업경제학 재단에서 연구 조교로 일하면서 장학금의 일부를 받았다.
  나의 최초의 연구 과제는 상당히 전문적인 주제였다. 배당 받은 과제가 캘리포니아 벌꿀의 생산과 마케팅이었으니 말이다. 양봉업 역시 상황이 나빴다.
  당시에는 불황과 그 원인에 대한 토론이 거의 매일 매시간의 업무였다. 일부 동료들은 고전파의 정통 경제학을 고수했다. 다른 동료들은 그 성과에 의해 그토록 참담한 상태의 경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 혹은 살아남아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것을 개량하거나 수정하려는 즉각적인 노력에 대한 토론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워싱턴으로부터 모든 것이 곧 좋아지리라는 언약을 들었다. 그들은 유난히 끈질지게 같은 내용을 반복했다. 그들은 늘 '경제는 기본적으로 건실합니다' 혹은 훨씬 간결하게 '기본은 건실합니다' 라고 했다. (60년 후 심각한 경기 후퇴가 지속되고 있을 때에도 똑같은 내용의 메아리를 듣게 된다)
  게다가 즉각적인 회복이라는 예언까지 만연했다. 예언은 허버트 후버와 백악관으로부터 꾸준히 흘러나왔다. 허버트 후버는 불황에 대한 적극적 조치를 요구하는 호소와 청원을  '너무 늦었다' 혹은 '불황은 몇 달 전에 끝나버렸다' 는 말로 날카롭게 비난했다. 그가 뒤늦게 취한 적극적인 조치 하나는 소득세를 낮춘 것이다. 하지만 감세 따위는 거의 무의미해진 상황이었으므로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꽤 풍족한 편인 5,000달러의 소득을 올리는 납세자는 3분의 2를 감면받았다. 16.88달러였던 세금이 5.63달러로 낮춰졌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10만 달러에 상당하는 1만 달러의 수입을 올린 사람은 120달러이던 세금이 65달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세는 과감하고 건설적인 조치로 환영받았다. 다시 한번 먼 메아리들이 울릴 터였다. 불황이나 경기 후퇴와 같은 상황에서는, 자신을 포함한 풍족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돈이 돌아가게 하면 회복의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믿음만큼 확고한 신앙도 없을 테니까. 결국, 불황은 이전처럼 계속되었다.
  나는 일찍이 1932년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만연하던 정설을 접한 적이 있다. 후버가 캘리포니아 유세에 나섰을 때였다. 나는 젊은 동료와 함께 오클랜드 철도화물역에 그의 연설을 들으러 갔다. 그 역은 아직 건설되지 않은 하수도 공사를 하기 위해 거대한 파이프들로 뒤덮인 넓은 공터 옆에 바로 접해 있었다. 파이프들은 입구를 판자로 가려서 주거용으로 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곳은 지방 후버빌들 중에서도 인구 조밀 지역으로 꼽히는 곳이었다. 그곳 주민들은 대통령의 청중으로 이용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 자신들의 지도자가 하는 연설을 들으러 온 충실한 공화당 지지자들은 수적인 열세에 밀려 꽤 먼 거리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후버는 불황의 종식에 대해 그리고 이미 도래하고 있는 호경기에 대해 말했다. 그는 야단스럽고 소란한 갈채를 받았다. 그 본질이 무엇인지 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던 갈채를 말이다.
  1932년까지는 산업생산지수가 기준년도인 1929년의 100에서 63.4로 떨어졌다.
1280만 명이 실업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노동력의 거의 25%에 이르는 인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황은 스스로 교정될 것이며, 높은 혹은 완전한 고용이 정상이라는 확고하고도 유력한 견해가 존재했다. 많은 경제 토론에서는 경기 확신을 유지하고 고무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정부의 역할은 그와 같은 목적에 국한되어야 했다. 용납이 가능한 예외는 1931년 12월의 금융재건공사 설립이었다. 공사의 기본 목적은 위험할 정도로 취약한 은행 및 여타 금윤기관들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정부의 시책은 그런 기관들을 지원하기 위한 개입이 용인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후생 지원과는 달리 그러한 시책은 짐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후버 시절, 공공사업에 대한 정상적인 지출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지출은 기록적 수준에 가까웠다. 그 결과, 연방 총지출과 적자가 상당 정도 증가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보수적 재정이라는 확립된 규범에서의 불행한 일탈로 보였기 때문읻. 경제를 자극하기 위하여 정부가 일부러 돈을 지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경제적 확신에 파괴적으로 작용하며, 그리하여 십중팔구는 불황을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1932년 선거유세에서 루스벨트도 큰 의견 차이는 없엇다. 그 역시 재정적 의무와 균형예산을 향한 강력한 조치들을 약속했다. 나중에 그러니까 1936년에 루스벨트는 노련한 조언자 새뮤얼 로젠먼에게 '어떻게 해야 1932년 피츠버그 연설에서 재정관리를 엄격히 하겠다고 했던 약속과 재임 후 첫 4년간의 지출 및 적자를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물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로젠먼은 그가 취할 유일한 조치는 그러한 연설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당선과 취임 사이의 기간 중에, 루스벨트는 허버트 후버의 요청을 받았다. 경제적 보수주의를 확약함으로써 경기 확신을 회복하고 촉진해 달라는 것이었다. 1933년 2월 후임자에게 보낸 서신에서 후버는 책임 있는 지도원리를 공유하자고 제안했다.
  즉각적인 보장을 하실 수 있다면, 나라는 크게 안정될 것입니다. 통화에 대한 어떠한 불필요한 간섭이나 팽창도 실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 증세가 불가피하더라도 균형예산을 틀림없이 유지하겠다는 보장, 정부 신용을 공채 발행에 의해 고갈시키지 않고 유지하겠다는 보장 말입니다.
  루스벨트는 요청받은 대로 응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세 기간 동안 뚜렷이 다른 의사를 표현한 적은 없다.
  여기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60년 후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후버는 불황이나 경기 후퇴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는 개인적인 대응조치보다는 침체된 경제 상황을 선호하는 지지자들이 있었다. 실업은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어떠한 악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그것은 노사관계를 용이하게 해주고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직장에 더 관심을 기울이도록, 그리고 관리자와 고용주의 규율에 보다 순종하도록 만들었다. 직업적으로 혹은 금전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경제 현실을 개인의 초연한 자세로 바라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특히 정치적 발언권과 돈 및 영향력을 지닌 많은 사람들에게는 불황이나 경기 후퇴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이 점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특별히 신중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더욱 더.
  미국에서 시작된 불황은 전세계의 산업국가로 번져갔다. 영국에서는 불황에 의해 파운드화를 과대 평가함에 따라 이미 침체되어 있던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독일에서는 불황이 계속되고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취약한 정치구조에 압력을 증대시켰다. 불황 초기에 독일은 여전히 배상을 요구받고 있었으며 (앞에서 말했듯이 배상은 결국 1933년 히틀러에 의해 종식되었다) , 브뤼닝 수상에 의해 저질러진 폐해가 큰 국내 정책들 때문에 진통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임금과 이자 및 카르텔화된 산업의 가격에 대한 직접적인 인하 압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1931년 12월 8일에 모든 임금은 1927년 1월 10일의 일반적인 수준으로 되돌려졌다. 공공사업에 관한 지출이나 경기부양도 강력히 거부되었다. 독일은 1931 ~ 1932년 겨울에 노동력의 40%에 이르는 실업률을 기록했다. 어떤 예리한 관찰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브뤼닝의 자살적 정책은 그의 총체적 철학에서 나왔다. 그는 고삐 풀린 인플레이션이라는 유령을 두려워했고, 일자리를 창출하여 실업자들을 만족시키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처럼 무정하게도 아돌프 히틀러를 위해 길이 닦여졌다. 불황은 또한 산업국가들이 중앙은행에 대한 조치를 취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연방준비은행이 포함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이야기하겠다) 그리고 수입을 줄임으로써 자국의 산업과 고용을 보호하려는 시책들을 펼쳤다. 여기에서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미 1930년 6월에 1000명의 경제학자들이 강력히 반대를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광범위한 산업제품을 보호하는 법으로서, 농업에 대한 각별한 지향을 담고 있었다.
  나머지 모든 산업세계에서 폭넓은 반응이 나왔다. 이탈리아, 프랑스, 캐나다, 쿠바, 멕시코, 호주, 뉴질랜드가 모두 유사한 혹은 보복적인 조치를 취했다. 스위스마저 감정이 상해서 스위스 시계의 증세에 대한 보복 조치로 대미 수입을 제한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실정이었다. 공통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있는 정부들 사이에서 특정한 방침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지만, 이 경우처럼 모든 사람의 처지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

    9. 뉴딜 정책
  앞의 설명들은 지금까지 어린시절 그대로의 경제세계에 대해, 그리고 그 직전에 이루어진 일들에 대해 알려고 하는 젊은 학자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약간의 개인적 관찰과 나중에 이루어진 보다 진지한 연구의 성과를 아우르고 있다.
  1934년 이 일은 시작하면서 나는 뉴딜이라는 경제 프로그램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해 봄에 나는 농업조정국에서 협력 경제학자라는 직함으로 일했다. 지방정부의 세금체납 토지 및 귀속토지를 연방정부가 인수하여 새로운 국유지에 편입시키는 방안의 실행 가능성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국유지는 방대한 규모가 예상되었다. 꽤 서둘렀지만 별무신통이었다. 나중에 나는 하버드 대학의 교직에 부여된 이런저런 연구과제 때문에 워싱턴을 자주 여행했다. 나는 정부의 경제업무에 꽤 깊숙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내 이야기에 아주 작은 변화가 있다. 자신이 참여했던 일에 대해 말할 때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일차적 중요성을 자신의 참여에 돌리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는 법이다.
  루스벨트 출범 만 1년 만에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나를 지배한 인상은 흥미진진함, 행동에 대한 깊은 의요과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큰 불확실성이었다. 그 불확실설이 흥미를 더해주었다. 그것은 거의 누구라도 필요한 조치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때로는 듣기도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들 대부분이 무척 젊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새로운 과제를 위해, 그리고 뉴딜에 필요한 일자리를 찾아주도록 나온 수백 명의 사람들에 대해 들었다. 연륜과 경험이 없다고 해서 침묵을 강요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작지만 혼연일체가 되어 약간의 규율까지 갖춘 그곳의 한 그룹은 일찍이 버클리에서처럼 기존 체제를 총체적으로 폐기할 필요성을 느꼈다. 즉 자본주의의 실패를 인정할 필요성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았던 것이다. 그 대안은 공산주의였고, 공산당은 명백한 수단이었다. 뉴딜 시기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역할은 나중에 최소화되기도 했고, 크게 과장되기도 했다. 사실 젊은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협력자들은 목소리는 컸지만 뉴딜 집단에서는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들이 피력하는 견해는 넘치는 확신 덕분에 청중을 매혹하고 위세를 떨쳤다. 워싱턴에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 그런 견해가 없었다면 오히려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시의 자본주의를 관찰하고 자본주의가 성공적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수정과 폭동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앞 장에서 말했듯이 농민 압력단체 사람들을 포함하여 책임 있는 자리의 보수적인 지도자들까지도 폭동의 가능성에 대해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선택에 의해서건, 본능에 의해서건, 혹은 정치적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련는 야욕에서건 지배세력이 된 것은 수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나는 그들과 제휴했다. 종합적 계획을 갖추지 못했으니 그들의 대답은, 아니 우리의 대답은, 일종의 행동주의적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었다. 한쪽에서는 특정한 경우에나 소용이 되리라고 역설했다. 그러한 대부분의 조치는 어느 정도 기존의 경제적 정설과 상충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은 믿을 게 못되는 시장의 자비를 믿지 않았고, 공적 지출이 있는 곳에서는 건전재정 및 균형예산에 가까운 금 본위제와 갈등을 빚었다. 당시 워싱턴의 분위기 속에서 기존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렇게 해서 격분을 일으키는 일에는 분명 현저한 기쁨이 포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통적 처방과 외관상 실용적으로 보이는 방책 사이에 가장 날카로운 대립은 NRA, 즉 국가부흥법이었다. 이 입법은 거의 모든 근엄한 역사와는 반대로 상당히 가망이 있었다. 산업경제의 심장부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들은 모두 전반적인 수요의 위축 때문에 가격을 깎아내려야 하는 실정이었다. 어떤 강요를 받으면 그들은 이번에는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가격 삭감이 임금 삭감과 실업을 불렀고, 이것들이 다시 총수요의 흐름을 제한하고 불황을 심화시켰다.
  치료 방법은 명백해보였다. 각 산업에 속한 기업들로 하여금 가격 삭감, 임금 삭감 그리고 뒤따르는 필연적인 실업을 제지하기 위해 뭉치게 하라. 이것이 그 정책의 요체인 산업법의 진수였다. 그 다음에는 노동자 세력에 대한 양보로서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을 보호하고 확고히 하기 위해 노동조합에 뭉치게 하라 (국가부흥법의 그 유명한 7A 항이다.) 그리고 흥겨운 축제를 열어 광고와 퍼레이드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세상에 알려라. 여기에서는 사업과 대중의 사기를 전작시키기 위해 노력의 상징인 블루 이글을 하늘로 날려보낸다. 오늘날도 그렇듯 그때 역시, 실업계가 자신의 사기보다 더 강조하는 것은 없었다.
  아무리 유망한 것이라도 전통적 경제이론과 심각한 마찰을 빚는 정책은 상상하기 어렵다. 경쟁적 시장은 갔다. 경쟁, 다시 말해 고전파 체계의 린치핀 (수레바퀴의 굴대 핀) 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 경쟁이 가버린 것이다. 이것이 보다 많은 경쟁에 의해 - 보다 적은 경쟁에 의해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 늘 공공선을 떠받쳐온 19세기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의 진수였다. 확실한 자유주의적인 처방인 반트러스트법이 보장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뉴딜 집단 내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한 그룹은 독점과 불완전 경쟁 및 생산에 대한 제한을 불완전고용 균형의 기본적 원인으로 보았다.
  이상의 내용이 저명한 자유주의 산업자본가 헨리 데니슨과 공저한 나의 첫번째 책 '현대의 경쟁과 경기정책' 의 주제였다. 이 책은 내가 그 주장의 유효성에 대해 회의를 품게된 무렵에 발행되었다. 그 후 수년 동안 나는 이 책을 나의 발행 저술 목록에서 조심스럽게 빼놓았다.
  1935년 5월 27일에 있는 '스케터 폴트리사' 에 대한 대법원의 NRA 폐기 판결은 별로 유감을 사지 않았으며, 뉴딜 경제연구진도 섭섭해 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그 일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는 경제학자나 역사가는 거의 없었다.
  독일과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산업 카르텔이 경제적 복리 및 경제성장과 조화를 이룬다고 여겨졌지만, 미국의 경우는 달랐다. 사실 침체의 요인은 당시에 강력히 자극을 받았던 물가와 임금의 삭감이었다. NRA 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실용주의적 적응이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퀴에스카트 (고이 잠드소서)' 다.
  농업 프로그램 또한 정통적 견해와의 날카로운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농업은 고전적 경쟁 구조가 특징이었다. 다시 말해 다수의 생산자들이 완전경쟁의 조건 하에서 전혀 차별화되지 않은 산출물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런 산출물의 구매자들 - 곡물상, 면화상, 통조림 회사, 정육업자, 농산물 가공업자, 담배회사 - 이 모두 똑같이 다수는 아니었으며, 그다지 완전 경쟁적이지도 못했다. 그러나 농업 산출을 줄이고 통제하는 정책은 전혀 실정을 반영하지 못했다. 고전적 견해에 따르면, 저가격은 스스로 내적 치료법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저가격은 생산을 줄이므로 결과적으로 가격은 안정 혹은 개선된다는 것이다. 정부 지원의 대규모 농업 카르텔은 명백히 해답이 아니었다. 그 방법이 자유시장의 정통적 이론과 조화될 수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농업 부문에서 생산 및 가격의 통제는 NRA 보다는 반대가 덜한 편이었다. 오늘날도 여전히 그렇지만 농업은 경제사상의 주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933년에는 (나중에도 그랬지만) 농업이 전문화된 경제학과 경제학자를 - 따로 떨어진 농업경제학과 농업경제학자들을 -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핳 만하다. 농업 프로그램을 입안하고 지휘한 이들은 농무장관 헨리 애가드 월리스의 만족스런 지원을 받은 농업경제학자들이었다. 경제학계는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우리들을 특이한 것을 연구하는 다소 별난 사람들 정도로 여겼다.
  당시 정통적 태도의 든든한 수호자였던 대법원은 원래의 농업 입법 중 많은 부분을 징세권의 남용과 주 권한의 침해라는 논거로 무효화시켰다. 하지만 대체 입법이 신속히 입안되었고, 가격 보장과 생산 통제는 계속되었다. 오늘날까지 그러고 있듯이 말이다.
  제 3차 뉴딜 개혁에는 화폐가 포함되었다. 공황중의 금융정책만큼이나 그 결과는 불투명했고 연구되 사안도 없었다. 금융정책에는 정통적 형태와 지극히 비정통적인 형태가 있었는데, 둘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즉 그 두 가지는 모두 전망은 밝아 보였지만, 결과는 심히 실망스러웠다는 사실이다.
  금융정책의 정통적 시책은 연방준비에 의한 저리와 나중에 이름이 붙여진 공개시장 조작을 요구했다. 후자는 연방준비은행에 의한 정부 공채의 매입을 포함했는데, 상업은행들에게 막대한 대부자금을 공급하도록 고안되었다. 상업은행들은 이 자금을 돈의 효용은 물론 저리로 인해 끌려들게 될 기대에 찬 열성적 차용자 무리가 이용할 수 있게 하려고 했다.
  이 정책은 후버 시절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중앙은행과 화폐가 지니고 있는 마법은 자유주의자들보다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더욱 큰 효력을 발휘했다. 사실 뉴딜 하에서 이자율은 인하되었으며, 은행들은 엄청난 규모의 대부자금 준비금을 축적했다. 초과 준비금 - 준비 요구액을 초과한 은행 자금 - 의 규모는 결국 통상적으로 인용되는 당시의 통계치에 이르렀다. 아아, 그러나 차용자들은 오지 않았고, 혹시 그들이 왔다 하더라도 은행들은 통제적 경제상황에서는 심히 불안스럽고 어두울 것이라고 스스로 전망했다. 경기 확장을 위한 연방준비은행의 정책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것은 처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마지막도 아닐 터였다. 줄은 당길 수는 있지만 밀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보다 색다르고 비정통적인 방향의 조치가 있었으니, 1933년 루스벨트식 금 매입 프로그램이 바로 그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다채로운 금융정책의 역사에서 보다 극적인 조치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계획의 기원 역시 아주 기묘하게도 농업에 있었다. 코넬 대학의 농업경제학자인 조지 위렌과 프랭크 피어슨은 한 세기 동안 금 가격과 물가 수준 사이의 연관관계를 관찰하여 개괄했다. 특히 물가에는 농업 불황의 결정적 요인인 농산물 가격이 포함되어 있다. 그 관계는 새삼 놀랄 만한 것도 아니었다. 금 가격은 물가 앙등 기간 동안에 오르는 뚜렷한 경향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사람들이 믿음직한 경화에서 피난처를 찾던 남북전쟁 시기에 그러했다. 물가 침체 시기에는 금 가치가 안정적이거나 내려갔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을 피난처로 간구하지 않았다. 두 학자는 여기에 착안했다. 금 가격을 올리면 과거에 그랬듯이 다른 가격들도 올라갈 것이다. 루스벨트와 일부 측근들은 납득했다. 그것은 특히 농업지대에는 매력적인 정책이었다. 농업지대에서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시절 이래 금의 억제와 관련하여 가격이 아주 형편없었던 것이다.
  1933년 10월, 일찌감치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금을 정부에 신고하라고 - 그렇지 않으면 기가막힌 횡재가 될 것이었는데 - 요구해 놓고 대통령과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 구매 대행사인 금융재건공사 사장 제시 존스 이 세 사람은 매일 아침 회동했다. 갓 캐닌 금에 새롭게 더 높은 가격을 설정하기 위해서였따. 나중에는 외국이 보유한 금도 판매의 유혹을 받았다. 달러화는 외화에 대해 평가절하되었는데, 영국과 프랑스가 비슷한 효과를 갖는 정책을 뒤따라 시행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심화되었을 것이다. 특히 영국은 이제 달러 및 금에 대한 파운드화의 불변 평가를 폐지했다. 케인즈가 그토록 웅변적으로 비난해 마지않던,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그토록이나 심한 사회적 황폐화를 자행해왔던 고정 평가였다.
  금 수매는 계속되었다. 수출품에는 약간의 혜택이 주어졌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결과는 극히 실망스러웠다. 1933년을 마감하는 몇 주 동안 가격지수는 훨씬 더 내려갔다. 금 수매 정책은 종식되었고, 1934년 2월 1일 금은 온스당 35달러로 안정되었다. 이 가격은 그 후 수년 동안 유지되었다.
  다음과 같은 가정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금 수매가 없었더라면, 더 높은 금 가격과 그것이 달러 환율 및 국내 가격, 특히 농산물 수출가에 미친 절하 혹은 안정화 효과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들이 자기네 통화를 절하하고 수출품의 단가를 떨어뜨려서 미국 수입품 가격만 크게 올려놓는 동안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에도 이 점에 대해서는 아주 드물게 언급되었고, 그 후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금 수매 실험은 뉴딜 시책들 중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고, 옹호자도 가장 적었다. 아니 아무도 옹호하지 않았다. 뉴딜파 중 잘 알려진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비난하거나 멀리했다. 재무성의 두 고위관리, 딘 애치슨과 폴 워버그의 뛰어난 아들 제임스 워버그는 이 시책에 항의하여 사임했다. 충실한 자유주의자였던 워버그는 나중에 그의 결정을 후회했다. 40명의 경제학자들이 1930년대의 가장 탁월한 금융통인 프린스턴 대학의 케머러 휘하에 모여서 '전국 경제학자 금융정책 위원회' 를 구성했다. 위원회의 유일한 목적은 금 수매라는 미친 짓과 투쟁하는 것이었다. 뉴욕의 재계로부터는 훨씬 강력한 비난이 쏟아졌다. 현대사의 가장 심각한 불황과 가장 고통스런 가격 디플레이션 속에는 임박한 인플레이션의 위험에 대한 긴급한 경고가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금융에 대한 폐쇄적인 사고가 드러난 경우였다.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처음 교편을 잡은 젊은 학자였던 나는 금 수매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그것에 대해 강의하면서 심각한 갈등에 사로잡혔다. 한편에는 당시 내가 받고 있던 존경이라는 자리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루스벨트에 대한 나의 반사적인 지지가 있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금 수매에 관한 모든 것을 몰아냄으로써 결국 그 문제를 해결했다. 이것은 크게 보아 금 수매가 지닌 역사적 숙명이었다.
  뉴딜 정책의 중추적인 지주인 네번째 사항이 남아 있다. 그것은 계획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하여 실업자를 직접 고용하는 것이다. 이 일은 PWA, 즉 공공사업촉진국을 통해 수행되었다. PWA 의 정당성은 사무용 빌딩, 교량, 여타의 공공 구조물 등을 건설하는 것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WPA의 정당성은 WPA 가 창출하는 일자리에 있었다. 성공의 우선적인 기준은 무엇을 건설했느냐에 있지 않고 그 일에 고용된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느냐에 있었다. 예상한 대로 보수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붙들고 매달렸다. 그리하여 일 만들기 (정부가 빈민 구조를 위해 일부러 일을 벌이는 것) 와 낙엽 긁기 (실업자 구제를 위한 공연한 일거리) 에 대한 언급이 그 시대의 중요한 언어가 되었다. 실제로 극장과 예술에 이르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색다르게 유용한 일이 행해졌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뉴딜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그 지도자들의 면모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PWA를 담당한 해롤드 이키스와 WPA를 담당한 해리 홉킨스는 루스벨트의 주요측근이었다. 아직 젊고 워싱턴이 처음이었던 우리들에게 그들은 윌리스 장관과 더불어 루스벨트 프로그램의 살아 있는 심장을 이식했다.
  거듭 말하지만 이러한 노력의 주요 초점은 고용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불완전고용 균형의 지배적 특징이 실업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실업에 필요한 것이 고용 창출이라는 사실은 명명백백하다.
  대부분의 뉴딜적 발상은 PWA와 WPA 라는 두 프로그램 주변에서 이루어졌다. 그 두 가지 프로그램은 뉴딜의 견고한 본체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똑같은 문제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확립되어 있던 경제이론 및 실천과의 명백하고도 화해 불가능한 갈등이었다. 이론과 실천 모두 공히 재정적 의무를 강조하고, 심지어는 당연시하고 있었다. 이 말은 정부가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수입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전쟁의 중압 아래에서는 약간의 일탈이 허용될 수 있었다. 많은 유감이 따르겠지만. 평화시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불황시에 고용창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것은 분명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층의 본능은 그것이 디플레적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고용 프로그램들은 돈을 필요로 했다. 그 점은 산술적으로 명백했다. 루스벨트의 선거전 약속을 포함해서 공인된 정설에서는 모두 돈을 부정했다. 어떻게 해야 실업에 대한 확실한 치유책을, 명백히 필수적인 것에 대한 완강한 부정과 화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관찰하고 혹은 열중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그 문제는 불가피해 보였다. 두 개의 실재가 충돌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른 곳에서 - 일찍이 말했듯이, 어쩌면 독점과 그의 공급업체에서 - 과실과 치유책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NRA는 그것을 배제했다. 틀림없이 어딘가에 해답이 있을 것이었다. 명야관화한 것은 고용창출이 빈 돈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금의 차용은 공인된 정설과 전적으로 상충되었다.
  아니, 정말로 그랬을까? 그 문제는 1930년대 중반 당시 경제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발언자가 구원에 나서자, 시원스럽게 해결되었다. 재정적 정설과 경제적 필요성 사이에 개재된 갈등에 대한 그의 해결책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최근의 보수적 재정 시책에도 적잖이 반영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세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돌아볼 것이다. 우선 또하나의 독특한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뉴딜의 이니셔티브인 '사회보장' 에 대해 언급해야겠다.
  1935년에 통과된 사회보장법은 소박한, 심지어 원시적 수준이긴 했지만 노령연금과 실업보상을 규정했다. 법안은 토마스 엘리엇이라는 한 젊은 변호사가 기초했다. 이 법안의 입법 및 정치 이력에 대한 그의 매혹적인 설명은 1991년 그의 사망 직후에 발행된 '뉴딜의 회상 : 인민이 문제일 때' 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넓은 시야에서 세계의 경제적 사건들을 일별해보면, 미국사회보장법의 입법을 대단히 혁신적 조치라고 볼 수는 없다. 노인과 실업의 보호에 대한 필요성은 산업 발전과 불가피하게 연관되어왔다. 농업사회는 자기 고유의 내적 사회보장 체계를 가지고 있다. 농장과 소작농의 토지점유권은 자손에게 계승되며, 자손은 흔히 엄격히 강제적인 관습에 따라 어른들을 돌본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농촌 인구가 증가하는 주요한 이유는 들에서 일을 하고 연로한 부모를 책임질 아들을 확보하기 위한 필요성 때문이다. 실업보상에 대하여 말한다면, 농장에는 진정한 실업은 없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약간 혹은 많은 부분을 현물로 받기도 하는 유효임금을 낮춤으로써 약간의 일자리는 언제든지 제공되고 창출될 수 있다.
  노령연금과 실업보상 두 가지 모두가 사회적으로 필수화되는 것은 공업화와 도시화 때문이다. 가족 구조가 많이 느슨해져서 노인들이 의탁할 곳을 잃고 실업자들이 소득을 얻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현대의 냉혹하지만 불가피한 현실에 더 오래된 산업국가들은 오랫동안 적응해왔다. 언급한 대로 비스마르크 치하의 독일이 1880년대에, 로이드 조지 치하의 영국이 20세기의 첫 10년 동안에, 그리고 여타 유럽 국가들이 이러저러한 시기에 그렇게 했다. 그것은 논쟁과는 반대의 조치였다. 영국에서는 사회보장을 규정한 법안 때문에 상원 통과를 포함해서 커다란 헌정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미국에서의 반대 역시 신랄했다.
  의회의 한 보수파 의원은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세계 역사상 한번도 경기 회복을 가로막고, 노동자를 노예화하며, 사용자들이 국민을 위해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도록 간교하게 기획된 법안이 여기에 상정된 적은 없었습니다."
  또 다른 의원은 간결하지만 보다 극적으로 표현했다.
  "독재자의 채찍이 느껴집니다."
  오하이오 상공회의소의 역사에 취미가 있는 한 임원은 유사한 조치들이 로마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사실, 자본주의의 미래를 보장하는 데 이보다 더 많은 도움이 되었던 조치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사회보장은 사회체제의 가장 공격적인 잔인성 - 실업으로 인한 빈곤화, 노령으로 인한 빈곤화 - 을 완화시키고, 그에 따른 분노를 가라앉힌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보장은 경기 후퇴를 철저히 방지하고, 어려운 시절에는 제한적이나마 경제를 안전히 지키는 소득, 총수요, 구매력의 신뢰할 만한 흐름에 기여한다.
  반대측은 이 모든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경젱체제에서 행운을 잡은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행운을 자신과 기존 체제의 미덕으로 돌린다. 그리하여 모든 변화는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개인의 복지와 개인의 비용에 대한 어떠한 호소도 먹혀들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버릇없는 짓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대신 그 체제와 그 기능의 완전무결함이 보호되고 심화된다. 변화하지 않는 몇 가지가 있다. 그래서 신세 편한 사람들은 이 책에서 살펴본 것과 비슷한 주장을 60년 후에도 펴게 된다.
  사회보장은 성공했다. 내가 말했던 대로 1935년에 필수적인 법안이 통과되었다. 그것은 당대의, 실은 금세기의, 정통 경제사상에 대한 가장 큰 세계적 규모의 침탈보다 1년 앞서 이루어졌다. 경제정책이나 경제학이나 다시는 똑같은 것일 수가 없었다. 이 변화를 보고 겪은 사람들은 아무도 그 영광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창조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10. 케인즈 혁명
  공공사업과 일자리 구호말고도 뉴딜이 돈을 써야 할 곳은 많이 있었다. 그 밖의 긴급한 프로그램들이 모두 많은 현금을 요구했다. 후버 대통령에게서 물려받은 연방긴급구호국, 농업 프로그램들,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 농촌 전화, 그리고 특히 중요한 것으로 젊은이들을 길거리에서 숲으로 가게 한 민간 산림보호단 (매릴랜드 산지의 대통령 휴양지 캠프 데이비드는 이전에 CCC캠프였다) 등이 모두 그러한 프로그램들이었다.
  이러한 것들에 의해 정규적 국가 지출은 더욱 가중되었고, 1930년대의 정상적 정부 기능을 위한 정부 수입은 당시 경제의 어둡고 침울한 실정을 반영하고 있었다. 1929년의 연방 지출은 당시 가치로 31억 달러, 수입은 37억 달러였다. 1933년에 지출이 46억 달러, 수입이 19억 9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빚어지는 정통적 재정 규법과의 갈등은 충분히 강조되어왔다. 이에 대한 우려가 경제학계와 뉴딜파 자신들에게까지 심각하게 파급되었다. 당시의 적자를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경험에서 효용은 물론 장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불황이 심화되고 경기순환의 자기보정 경향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어감에 따라 경제적 결점과 치유책을 찾으려는 노력에 관심이 기울여졌다. 독점의 가능한 역할과 시장경제의 훨씬 일반적인 불완전성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증가된 공공 지출, 즉 증가된 재정 적자에 힘입어 회복될 수 있을지의 문제는 이미 책임 있는 사유의 영역을 저만치 벗어나 있었다. 적자는 기껏해야 엄혹한 필요성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그것은 긍정적 가치라고는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다. 적어도 케인즈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는 그랬다.
  1933년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목소리는 이미 무시하지 못할 존재가 되어 있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케인즈의 반응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거니와, 윈스턴 처칠과 지금은 모두들 인식하고 있는 1925년 영국 금 본위 복귀의 과오를 향한 그의 공격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는 정치적, 재정적인 종교의 고위 성직자들을 힐책했는데, 사람들은 그의 비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경제학계 전체를 상대로 가장 막강하고 신성한 신앙을 두고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적자는 경제적 미덕을 지녔으며, 그것은 더욱 커져야 합니다. 적자를 증대시키는 것이야말로 회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전통적 태도에 미친 충격이야 아무리 말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꽤 충실히 단련된 웨스트민스터 정부에게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총명한 사람으로, 그러나 불편하고 괴팍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어느 누구도 전적으로 신뢰받지는 못하는 법인가보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의 주요 침로를 경제적으로 결정하고, 어쩌면 보다 열린 마음을 가진 미국의 정치 및 정책에 돌렸다.
  사건은 1933년 10월 31일, 뉴딜 정책 10개월의 마지막 날에 일어났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공개 서한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것을 '뉴욕타임스' 에 기고했는데, 꼼꼼히 따져보고 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그 서한에서 그는 워싱턴 행정부가 '차입에 의해 재원을 조달하든 정부 지출에서 나오든 국민적 구매력의 증대에 최대의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 서한과 뒤이은 수차례의 루스벨트 방문은 뉴딜의 역사에서 결코 간과될 수없다. 그러나 사실 당시에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존의 견해는 단순한 한 장의 편지에 의해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2년 후의 일이었다.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 이후 사상의 역할에 대해 케인즈 자신은 평가절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그 사상은 공적 태도와 조치에 그만한 영향을 미친 적이 없었다.
  그의 생각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 에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복잡하고 비체계적이며 종종 모호한 서술로 되어 있는데, 그의 영향력은 그 책을 읽고 그 중심 테마들을 대중과 정치계에 전파한 젊은 경제학자들의 중개 역할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책은 복잡하고 비체계적이며 종종 모호한 서술로 되어 있는데, 그의 영향력은 그 책을 읽고  그 중심 테마들을 대중과 정치계에 전파한 젊은 경제학자들의 중개 역할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책의 일차적이며 기본적인 주안점은 이미 강조한 것처럼 불황은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것이 아니며, 경기순환의 자기보정적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정상적 균형, 즉 완전고용 균형의 일시적 일탈도 아니었다. 케인즈는 지속적 불황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을 때에는 경제가 실업과 유휴설비가 존재하는 균형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품의 판매 가격을 구성하는 임금, 이자, 지대, 이윤에서 되돌아온 소득 가운데 일부는 사실 지출이나 투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불황이 진행중일 때에는, 케인즈의 용어대로 말하면 유동성 신호 - 현금이 들어오면 그대로 그 위에 앉아 있고 싶은, 혹은 지출되지 않고 대부되지 않는 그의 등가물로 은행에 보관하고 싶은 강력한 욕망 - 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면 생산은 나선형으로 낮아지다가, 필요가 필수적인 소비 및 투자 지출을 강요하는 수준에 머물고 만다.
  임금 삭감 - 고용 유지를 위한 전통적 수단 - 은 이제 오히려 실업을 가중시키게 된다. 고전파의 구도에서 보면, 임금이 저하됨에 따라 노동자를 늘리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되었다. 생산은 증대되고 더 많은 양이 더 낮은 비용과 가격에 팔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임금을 삭감하면, 노동자의 소득과 지출은 낮아지고, 그 영향으로 수요와 판매고가 줄어들며, 보다 많은 실업을 초래할 수도 있다. 주의를 돌려야 할 것은 곧 평범한 관심사가 될 만한 경제발전이나 구매력의 보다 큰 흐름에 대한 - 뒷날의 소위 총수요에 대한 - 공적 조치의 효과이다.
  경제학은 지금까지 시장의 미시경제학 - 가격에 대한 임금 및 비용의 조정 또는 그 역 - 에만 전념해왔다. 여기에다 거시경제학, 즉 체계 전체의 구매력의 총체적 흐름이 도입되었다.
  케인즈의 두 번째 공헌은 그의 첫번째 공헌에서 파생된 것이다. 불완전고용 균형을 깨뜨리고 생산과 고용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총수요, 즉 구매력을 보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기 위한 유일하고 확실한 방도는 정부로 하여금 지출되지 않은 자그, 보다 정확히 말해서 그 상당액을 차용하여 지출함으로
써 총수요와 고용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냉혹한 현실이 이미 요구했던 것에 대한 엄청난 정당화였다.
  케인즈의 견해를 채택하고 해석하며 응용한 경제학자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힘입어서 자신들의 세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될 수 있었다. 케인즈의 견해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시작되어 미국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의 하버드 대학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워싱턴으로 건너간 것도 상당 정도는 그곳 대학 덕택이었다. 대학이 그토록 적극적으로 혁명에 몰두하는 일은 결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항상 그렇지만 한 개인의 역사적인 역할에 대해서 언급할 때에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따라서 케인즈에 관한 이러한 비평은 다른 무엇에 관한 것보다 더 객관적이고 날카로와야 한다. 하지만 나는 하버드 케인즈파의 꽤 주목받는 구성원이었다. 1936년 '일반이론' 을 읽고 난 다음해에 나는 영국의 케임브리지로 갔다. 몇 학기 동안 스승으로부터 틱접 지도를 받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 때 케인즈는 처음으로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그 해에 대학 강의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젊은 후학들 - 나중에 칸 경이 된 R. F. 칸, 내 평생 친구가 된 존 로빈슨, 트리니티 대학에 묶고 있던 총명한 이탈리아인 경제학자 삐에로 스라파, 그리고 뛰어나게 혁신적이던 폴란드 경제학자 칼레키 - 사이에 케인즈파의 테제와 그 정치적 의미에 대한 토론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물론 나도 그 토론의 자리에 끼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중심적 사상들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눈앞에 드러난 진실을 깊이 있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또한 케인즈파 정책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연구하기 위해 독일과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케인즈파 정책에 대한 토론이 미국에서 훨씬 더 열정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1938년 가을 하버드로 돌아왔다. 토론의 많은 부분이 앨빈 하비 한센 교수의 지도로 이루어졌다. 그는 처음에는 케인즈의 비판가였으나, 나중에는 그의 가장 강력한 미국인 옹호자가 된 사람이었다. 이제 하버드의 청강생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케인즈에 열중하고 있었다. 책임 있는 자리의 관리들이 한센의 세미나에 참여하러 워싱턴에서 왔고, 나와 나의 동료들은 동조적인 혹은 접근하기 쉬운 관리들에게 조언하거나 그들과 의논하기 위해 야간열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갔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39년 나는 워싱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나는 공공사업 및 공적 고용의 경험에 대한 중요한 회고적인 연구를 지휘했다. 논쟁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토론은 매우 첨예했다) , 나는 보고서를 통해 이 경험에 대한 케인즈파의 해석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증해주었다.
  "불황을 그냥 내버려두면 스스로 보정한다는 견해는 결코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가 다시 공공정책의 토대가 될 만한가에 대해서는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이론' 이 출현하기 전에 이 분야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있었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마리너 에클스와 이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참모 로클린 커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비슷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금융정책의 너무나 명백한 한계 - 아무도 빌려가지 않는 값싼 대부 자금 - 를 인정하고, 직접적인 재정 자극과 정부의 구매력 부양이 긴요하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머리가 살짝 돈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필이면 다른 곳 다 놔두고 중앙은행이 거론되었으니, 괴이한 발상이 아닌가 ! 그런데 케인즈의 높은 권위에 의거하여, 케인트파와 경험의 중압에 의해 실제 정책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졌다. 대통령의 경제수석 보좌관으로서 백악관으로 자리를 옮긴 키리는, 자신의 직위와 권세를 믿음직한 케인즈파 사람들을 다양한 정부 부처의 경제 요직에 기용하는 데 이용했다. 내가 나중에 가격통제 업무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렇게 해서였다.
  그것은 언젠가 말했듯이 뉴딜 내에 마르크스주의 결사가 존재하는 정도의 다소 의미 있는 일이었다. 케인즈파 협회는 실제로 존재했다. 케인즈적 견해를 받아들이고 역설하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비공식적인 그러나 긴밀한 연합이 있었던 것이다. 이 협회의 영향력이 온전히 평가되었더라면, 칼 마르크스의 그것에 못지 않게 위험하게 취급되었을 것이다.
  케인즈 사상이 인정받고 추종 세력을 획득하고 있을 때, 정통파에 대한 편집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에 의하면 케인즈파는 위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점잖고, 인격이 고결하며, 조심성이 있는 학자들은 멀리했다.
  루스벨트의 첫번째 시기가 지나자 경제는 천천히 호전되었다. 농산물 가격과 농업 소득이 다소 회복되었으며, 공업활동도 활발해졌다. 1936년에는 모든 생산활동의 총화인 국민소득이 1929년 수준으로 복귀했다. 경제적 성과가 고르게 좋아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뉴딜의 경제적 조치들은 점차적으로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뜻밖에 케인즈의 주요한 논문 (일반이론) 이 나오기 전에 시행되었던 하나의 조치도 좋은 효과를 보았다. 그 조치란 제 1차세계대전 참전 퇴역자들에 대한 20억 달러의 위로금을 국채로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위로금 지급은 대통령의 비토에도 불구하고 1936년 의회에 의해 통과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직 보수적 재정옹호론을 귀담아 듣고 있었으므로, 의안 통과 후 퇴역자들에게 보상을 현금화하여 지출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따랐다.
  이어지는 수개월 동안 붐이 - 실업과 여타의 불황 요소들이 있기는 했지만 - 과열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정부 최고위층에까지 미쳤다. 강력한 긴축 조치가 취해졌다. 1937년 적자는 크게 감축되었고 경제는 다시 한번 곤두박질쳤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경기 후퇴였다. 본래적 정의에 따르면, 그것은 경제가 불황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도중에 일어난 매우 불행한 경기 퇴행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강력한 경기 부양과 함께 온 회복, 그리고 그 부양의 삭감과 함께 온 급속한 하강의 역사를 본다면, 누구라도 케인즈적 구도를 압도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완전고용 균형은 전쟁의 발발과 함께 그리고 그레 따른 막대한 정부 지출과 함께 결정적으로 깨져버렸다. 몇년 후 공화당의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우리는 이제 모두가 케인즈라다' 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은 순진하게 그 근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채, 정부의 재정적 지원엥 대한 케인즈파의 인정을 극단적으로 위홈한 상태로까지 끌고 가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1930년대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상과 사건이 그토록 결정적으로 결합되어 설득한 예는 역사상 흔하지 않다.
  케인즈파 체계는 불황 치유책에 필적할 만한 호황기 정책도 제공했다. 세수가 증대하고 사회적 빈곤이 감소하던 당시에는 적자를 줄여야 했다. 불황에는 하나의 재정적 치유책이 있었는데, 경기가 좋을 때에는 그 반대로 하면 되는 것이었다.
  방향을 역전시켜야 했던 것은 결국 케인즈파 재정정책 이래 소위 거시경제 정책의 어두운 부분일 것이다. 적자 문제에 대해 정통파 의견이 저항하기는 했지만,. 적자를 줄이기 위해 부과되는 정치적 문제들에 비하면 그 저항은 하찮은 편이었다.
  증세의 요구와 지출 삭감은 강력하고 결연한 반대에 부딪혔다. 보다 많이 지적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케인즈는 호황에 대한 부수적이고 진부한 낙관론의 예언자보다는 경기 후퇴와 불황의 예언자가 훨씬 더 잘 어울렸던 것이다. 불황에서든 호황에서든 케인즈 재정정책의 남다른 특징은 그 정책이 싸워야 할 세력들의 정치력과 지적 경직성이다.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본질적으로 영국인이었다. 그러나 이미 주장되어온 것처럼 그리고 나중에 그가 말한 것처럼, 그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추종자들은 미국에 가장 많았다. 케인즈파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도 바로 미국에서였다.
  하지만 1930년대는 다른 나라들에게도 생산적인 연대였다. 스웨덴, 캐나나, 영국, 독일, 일본 등등. 나는 일본을 제외한 이 모든 나라에 머물면서 관찰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11. 보다 넓은 세계
  루스벨트가 취임한 진 세달 하고 며칠이 더 지난 1933년 6월, 당대 주요 산업국가의 지도자들 (혹은 그들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 이 극소수의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 함께 런던에 모였다. 눈앞에 닥쳐온 명백한 세계적 위기를 완화시키고, 공동의 행동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뒤이은 회담은 유난히 지리멸렬했다. 그 후 한 세대가 넘도록 경제학자들과 경제사가들은 그 회담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주장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무엇을 말했는지 이해하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 한가한 탐구였다. 실제로는 단 두 가지 진짜 주제가 있었는데, 명백하고도 평범했다.
  불황 개시 이래 각국 정부는 금 본위를 폐지하고 국제환에 대한 자국 통화의 가치 저하를 허용함으로써, 수출은 장려하고 수입은 막으려고 애를 썼다. 그들의 계획은 일반화된 형태의 보호를 제공하기 위해 수출품은 싸게 수입 재화는 보다 비싸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계획은 다른 나라들의 보복조치를 초래했다.
  영국은 케인즈가 그토록 비판하던 파운드화에 대한 과거의 금 함량 및 달러 평가를 폐기했으며, 미국은 금 수매 프로그램을 개시하려고 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몇몇 나라들에서도 경제적 입지를 개선하기 위해 자국의 통화를 비슷하게 평가절하했는데, 그 영향으로 다른 나라들이 적잖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두번째 관심은 노골적인 관세 보호였다. 불황을 겪고 있는 나라들은 관세를 부과하다가 인상함으로써 자국의 산업과 고용을 보호하는 일련의 조치들을 취했다. 미국은 전술한 스무트 홀리 입법을 통해 그렇게 했으며, 영국은 근 한 세기 동안 지켜오던 자유무역 정책을 과감히 버리고, 1932년에는 모든 통상적 관계들을 위해 대영제국 주위에 관세고리를 둘렀다.
  런던 경제회의의 목적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각국이 관세, 통화 평가절하 및 전반적인 경제정책을 혼자서 수행해 나갈 것인가, 아니면 어느 정도 세계시장의 흐름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통화 안정 및 관세 제한의 공동협정에 가입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사안을 결정한 것은 루스벨트와 미국이었다. 각국 특히 미국은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야 했다. 그들은 국제적인 이해나 동의 때문에 제한을 받지는 않았다. 루스벨트는 '회의' 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한 나라의 건전한 내부 경제체제는 그 나라의 복지에 있어서 자국 통화의 가치보다 더 중요한 요소이다. 소위 국제은행이라는 낡은 미신에 양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또한 주요 국가 수반이 공식 행사에서 한 가장 명쾌한 정책 설명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최선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발언은 파국을 가져왔던 것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회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파국이 찾아왔다.
  현대 산업자본주의는 나중에 보게 되는 것처럼 필연적으로 국제적인 체제였지만, 1930년대는 보다 날고, 보다 폭력적인 민족주의의 복귀를 목격해야 했다. 미국 혹은 전세계가 따를 정책 모형이 수립되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주장되었다' 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 기조는 국제적이지 않고 독자적이었다. 공동 책임의 실천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문제는 각국이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1937 ~ 1938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유럽을 두루 -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스칸디나비아 - 여행하려면 통화제한, 세관 검색, 저리자금과 가솔린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여행 허가라는 미로를 통과했다. 대규모 국제무역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작은 징표들을 모두 통과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조치들이 순전히 경제적인 조건들에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다가올 시기에 군사적으로 충돌하여 곤두박질치레 될 무대를 마련해주는 것은 정치적 극단주의, 다시 말해 강렬하고 심지어는 광적인 민족주의였다.
  1932년이 되자, 영국의 경제는 조금씩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실업과 산업 생산은 어느 정도 1929년의 수준으로까지 복귀했다. 국내 투자, 특히 주택건설 분야의 투자가 증가했다. 이 분야에서는 금융정책이 조금은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잉글랜드 은행은 대출금리를 매우 낮은 수준인 2% 까지 낮추었으며, 공사금리는 거의 유명무실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생산과 고용을 자극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이 기울여진 것도 아니었는데, 공공 지출 역시 소폭으로 증가했다.
  보호 조치가 취해지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영국은 여전히 개방교역 경제였다. 이것은 약간 어쩌면 상당 정도의 재정적 자극이 수입품의 구매 증가로 인해 외국인에 의해 유실될 것임을 의미했다. 어쨌든 정부는 그런 조치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전술했듯이 웨스트민스터에서는 케인즈의 목소리가 워싱턴에서보다 훨씬 더 희미했다.
  1929년 수준으로 회복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1920년대의 최저 상태였다. 1930년대의 나머지 기간 동안 영국의 경제적 성과는 보잘것없었다. 따라서 수많은 노동자들에게는 여전히 실업수당이 곧 생계 수단이었다. 실업은 다만 서서히 줄어들 뿐이었다. 1932년 17.6%에서 1935년에는 12 ~ 13% 로 줄어들었다. 
  당시에 영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확실히 나와 같은 경제학도에게 불황은 여전히 절박한 문제였다. 모든 경제학이 불황의 원인과 치유책에 대한 토론으로 전락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군비 지출과 동원 및 전쟁에 의해 획기적으로 고양되기만을 기다렸다. 
  유럽의 큰 나라들 가운데 불황의 폐해를 가장 적게 받았던 프랑스는 불황에 대한 대응 또한 가장 온건했다. 그 원인은 프랑스의 사회적 성격과 정치 행태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이 점은 충분히 인식되지 않은 상태이다.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특히 미국에 있어서 경제학과 경제는 생활의,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정부와 정치의 중심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거의 유일무이하게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다. 프랑스에서 경제학은 사회적, 문화적 관심사에 비해 2차적이며, 특히 국사와 부딪쳤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 사소한 역할밖에 못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경제생활은 여타 주요 국가들이 누리지 못하는 고유한 안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기에 단순하고 명백한 수정 조치와 압도적 실용주의가 가능하다.
  어쩌면 보다 분명한 것은 경제적 전망과 변화에 대한 프랑스의 침착한 대응이다. 미국, 영국, 일본 등의 특유한 투기 분위기가 프랑스에서는 훨씬 적었다. 월 스트리트나 시티와는 달리 프랑스의 어느 지역도 고급  금융 및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과열 양상을 보이지 않았다. 1719년 존 로에 의해 뀅깡뽀아 가와 플라스 방돔에 투기 열기가 불어닥쳤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자신들의 정조를 '미시시피사' 의 주식과 교환하러 왔다고 한다. '미시시피사' 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루이지애나의 막대한 금 보유자였다.
  프랑스인들은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배웠다. 1719년 이후 금융 도취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원인이 되어 프랑스인들은 1929년의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불황을 겪으며 프랑스에서는 정권이 교체되었고, 프랑화는 마지못해 평가절하되었으며, 임금과 고용에 영향을 주는 각종 법령이 시행되었다. (임금 인상은 구매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으로 곧잘 여겨졌다.) 그리고 정부의 건설 공사와 궁극적 재무장은 경기부양의 수단을 제공했다. 프랑스에서 이 시기가 딱히 좋은 시절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불황이 그렇게 부드럽게 압박해오지 않았다. 어떠한 가혹한 정책도 겪지 않은 데다가 본래 경제가 안정되어 있었으므로, 프랑스 국민들은 이웃 나라 국민들보다 훨씬 잘 이겨냈다.
  반면 독일은 불황 초기에 경제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였다. 독일은 또한 경제 회복을 촉진하기 위한 정부의 조치가 가장 뚜렷한 나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억압과 대량 학살 및 극단적인 전쟁광의 정권 하에서 업적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돌프 히틀러에게서 건설적인 것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실제고 독일경제는 불황기에 주목할 만한 회복을 이루었다. 그 결과, 독일에서는 1936년에 불황이 효과적으로 종식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대체로 일반적인 역사의 영역 외부에 남겨져 있다.
  1933년 루스벨트보다 몇 주 전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에 독일의 경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이미 말한 대로 브뤼닝의 정책은 큰 고통과 디플레이션을 통한 회복이었다. 경제는 시장력에 맡겨지지 않았다. 이미 지적했듯이 모든 임금, 산업 카르텔 가격, 이자율의 삭감을 지시하는 법령이 시행되었다. 고전파는 이 조치가 고용을 증대시키리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실업은 일시적으로 소폭 감소되더니, 그 다음에는 한층 더 증가했다. 1932년 초 몇 달 동안 실업자는 600만을 넘어서고 말았다. 다른 경제 부문들 - 소기업과 특히 농업 - 도 똑같이 곤란한 지경이었다. 거기에는 민족주의가 살아남을 수 없는 경제적 긴장이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약한 구조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듯이 취약점이 많았다. 브뤼닝은 훨씬 더 몰인정한 인물로 간단히 교체되었다. 이 절망적인 민족에게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는 해답으로 보였고, 협소한 경제적 조건 속에서는 실제로 그랬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입에 대해 국경을 붕쇄하고, 엄격한 통화 관리를 마르크화가 비등하는 것을, 그러니까 외국 판매자에게 상실되는 것을 철저히 억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국내 공공 지출이 증대되고 남자들은 일터로 보내졌다 (남자들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여자들은 집에서 교회와 아이들 및 요리에 신경쓰도록 기대되었다) . 공공 지출은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모두가 차용, 대부분 은행에서의 차용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돈이 민간 부문 공공사업에 대규모로 들어갔는데, 가장 가시적인 예가 '아우토반' 이었다. 
  루스벨트가 재선되 1936년에 이르러 독일의 불황은 효과적으로 끝났다. 실업은 명목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1933년에 이미 비용압박 인플레이션을 억제시키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노동조합이 간단하게 폐지된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모든 제품의 가격에 상한선을 부과하는 추가 조치가 취해졌다.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려고 하는 기업들은 생산을 확대할 수 있었지만, 제품의 가격은 올릴 수 없었다.
 나는 1938년 독일 경제정책의 진행 과정을 직접 익히기 위해 독일에 가 있다가, 행진 중인 갈색 셔츠대 (히틀러 돌격대) 와 군복을 입은 내 동년배들을 보았다. '하이 히틀러 !' 인사 구호가 울려 퍼졌다. 교수들과 심지어 임시정부 인사가 국가사회주의와 나찌당에 대한 순전히 사적인 혐오감을 표현하는 것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한 불황에 대한 언급이 완전히 과거시제가 되어버린 경제체제도 보았다. 그곳에는 경제 회복이 이루어진 방식에 대해, 특히 공공 차입 및 지출에 대해 크게 우려하는 보이지 않는 흐름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흐름은 지난 시절의 엄혹한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났다는 전반적인 만족감에 비하면 부차적이었다.
  해외의 정통적 금융 중심지, 특히 미국에서 제기된 독일에 대한 비판은 훨씬 더 웅변적이었다. 모든 권위 있는 비평에서 독일의 회복을 비참한 금융 붕괴의 서곡일 뿐이라고 했다. 히틀러는 자신과 제 나라 경제 모두를 파괴할 도정 위에 제3제국 Third Reich을 세웠다. 재앙이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경제정책 때문은 아니었다.
 결국, 국가사회주의 시책들의 불리한 경제적 측면이 하나 나타났다. 미국과 영국은 대규모의 유휴 노동력 및 유휴 설비를 가지고 제 2차세계대전에 임했다. 그러나 독일은 유휴 인력 없이 민간 생산이 최고 수준에 이른 상태에서 전쟁에 임했다.
  미국과 독일 그리고 캐나다와 그 밖의 영연방 국가들에게도 전쟁은 설비 이용과 고용의 확대를 의미했다. 그러나 독일에게는 결핍 상태와 경제적으로 극히 비효율적인 외국인 및 노예 노동에 대한 의존을 의미했다. 불황에 의해 창출된 실업 노동자들과 유휴 자원의 축적은 서구 연합국들에게는 전쟁 수행력의 주요 원천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하겠다.
  당시 세계 무대에서 작은 나라에 속했던 일본이지만, 불황을 처리하는 방식 때문에 언급할 가치가 있다. 일본은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심한 진통을 겪었다. 세계 불황이 일본열도, 특히 일본의 농업에 강력하게 상륙했다. 그 하나의 귀결은 질서 있는 나라의 현저한 정치적 불안과 약간의 실제적 폭력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에 이르자 회복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1936년에는 완전고용이 달성되었다. 엔화의 평가절하는 세계시장에서 일본 수출품의 값을 싸게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지원, 즉 군비 생산과 전쟁을 위한 정치적으로 퇴보적인 지출에 의한 지원이었다. 또한 1931년에는 만주를 장악했고, 3년 후에는 명목상으로만 독립국인 만주국과의 대중전쟁이 있었다. 일본 정부와 산업 간의 확고부동한 결합 때문에 일본 산업의 확장 또한 정부에 의해 장려되고 지원되었다. 한때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직물로부터 퇴각하여 다른 부문으로 많은 투자를 돌렸다. 이것 역시 공적 조치에 의한 불황의 균형 깨뜨리기였다.
  스웨덴의 불황에 대해 더 작게,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훨씬 더 부드럽게 공격해 들어갔다. 나는 일군의 주목할 만한 스웨덴 경제학자들 - 뮈르달, 오올린, 린달, 룬트베르크 및 함마르스퀘트 - 을 알게 되면서 스웨덴의 불황 대처 방안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전의 보수적 전통과 절연하고, 불황의 어려움과 실업의 완화는 오직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로부터 나올 수 있다고 결론 지었다.
  그들은 통화의 실질적인 평가절하와 더불어 정부의 차입과 공적 고용을 제안했다. 그 제안은 회복에 대한 보다 보수적인 자금 조달의 약속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들은 농산물 가격에 대한 지원과 크게 강화된 사회보장제도 - 노령연금과 실업수당 - 를 믿었다.
  이 프로그램은 케인즈의 약속이 나오기 훨씬 전인 1930년대의 10년 동안 시행되었다. 세계의 그 어떤 나라도 스웨덴만큼 경제학자들이 실제의 정책에 대해 큰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다. 공적인 일에 적극적이던 스웨덴 경제학자들은 사실 상당한 정도로 정책 입안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의 조치 덕분에 스웨덴은 1930년대 후반에 불황을 끝낼 수 있었다. 케인즈로부터는 이론을 얻었지만, 스웨덴 사람들로부터는 실제성이 강한 그리고 민주적인 체험을 얻을 수 있었다.
  스웨덴은 군비나 전쟁에 의존하여 회복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이 작은 나라가 성취한 것에 대한 개인적 관찰은 한 경제학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교훈적이고 계몽적인 체험 가운데 하나였다. 정당한 세계에서라면 케인즈 혁명이 아니라 스웨덴 혁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12. 제 2차세계대전
  제 2차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경제생활에서는 세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첫째는, 불황에 의해 창출되었지만, 이제는 군사적 목적과 전시 경제의 폭넓은 지원에 이용할 수 있게 된 설비 및 인력의 막대한 보유고가 부여하는 결정적인 경제적 이점이 있었다. 이 점은 영국과 캐나다 및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황은 계획에 없던 예기치 않은 선물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의 지배적인 요소는 제 1차세계대전의 명백한 경제적 과오와 그 귀결을 피하기 위한 필요였다. 특히 피해야 할 대상은 인플레이션과 그 여파였다. 미국에서는 20년 전 물가가 두 배로 올랐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게다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하이퍼 인플레이션과 그 후의 재앙이 늘 상기될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일이 모든 나라의 전시 태도에 있어서 중심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 - 군함, 항공기, 총, 탄약, 군복 - 의 조달을 조직하고, 필요하다면 민간경제에서도 이것을 생산할 여유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업에 대한 미국의 전시 역사에는 짙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행운, 확실한 지성, 정력이 현저한 무능, 저항, 권태에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결코 적절히 언급되어본 적이 없다. 그러한 현실에 대해서는 당시 조금이라도 지각 있는 워싱텉 사람이면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1939년 가을 나찌의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은 불가피해졌으며, 다음해 프랑스 함락으로 최소한 미국의 개입이 유력해졌다. 미국은 유휴 인력과 새로 노동력에 유입된 여성 인력 그리고 완전 가동을 밑돌지만 생산 확대에 이용 가능한 산업 설비 등 물자 면에서 전쟁을 지원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독창적이고 유눙하며 과묵하고 겸손한 학자 사이몬 쿠즈네츠의 선창과 지도로 중요한 통계적 기획, 즉 국민총생산을 처음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경제 내에서 이루어진 재화와 용역의 연간 총생산에 대한 산정액이었다. 이러한 산술로부터 경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그 경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까지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나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군비생산이 가능한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우리들에게 쿠즈네츠 방식은 길잡이 불빛과 같았다. 1939년과 1944년 사이에 미국의 재화와 용역의 총생산은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민간경제는 나쁘지 않았다. 막대한 전시 청구에도 불구하고 민간 소비는 2200억 달러에서 2550억 달러로 증가했다.
  물론 어떤 재화 - 자동차, 타이어, 가솔린, 여타 금속제품, 몇 가지 직물류 - 는 손에 넣을 수도 없을 정도로 공급이 감소했으며, 소비는 처지가 편한 사람들에게서 이전의 실업자들에게로 이동했다. 이 행운을 설명해주는 결정적인 통계치는 실업이었다. 1939년의 실업률은 민간 노동력의 17.2 % 를 나타냈다. 1944년에는 극히 명목적 수준인 1.2 % 로 떨어졌다. 미국 역사상 국가의 이익과 전체적으로 크게 개선된 경제적 복지를 위한 희생에 대해 그토록 말이 많았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제 1차세계대전에 대한 기억은 인플레이션이 중심이었다. 그러므로 1940년 프랑스 함락 이후 첫번째 재무장 조치들을 개시할 때에는 가격이 또 급등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당시에는 약간의 인플레이션이 있는 것을 약간의 임신을 하는 것과 같다고 매우 부적절한 은유로 표현하곤 했다. 낙태를 입에 담을 수도 없었던 세계에서 말이다. 사실 약간의 인플레이션은 중지시킬 수 있지만, 그것을 입에 올릴 수는 없는 처지였다.
  1940년 여름, 나는 로클린 커리에 의해 워싱턴으로 불려가 레온 헨더슨이 총 책임을 맡고 있는 물가 정책의 초기 기본적 조치들에 관여하였다. 그런데 물가는 여전히 침체되 채 안정을 이루고 있어서 할일이 거의 없었다. 나는 새 방위산업체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맡았다. 워싱턴에서는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에 - 사회주의 TVA 에 - 이 문제의 책임을 맡긴다는 사실에 대해 기업 경영자들의 반대가 새롭게 제기되었다. 내게는 이런 태도에 맞서서 새 공장들을 이미 산업 과잉이 빚어지고 있는 지역이 아닌 농촌 지역 특히 남부에 배치하도록 종용하는 일이 맡겨졌다. 이 일에 있어서 나는 꽤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다음해 봄에 물가가 통제하라는 추가 재촉이 떨어졌다. 이후 나는 전반적인 물가 통제 업무를 맡게 되었다. 
  진주만 공습 후인 1941년 말, 의회는 대통령에게 가격을 설정하고 위반 행위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몇 가지 농산물의 가격은 제외되었다. 1942년 4월, 이들을 제외한 모든 가격이 일반 상한선, 즉 '일반적 최고 가격 규제령' 아래에 놓였다. 나는 1943년 여름까지 이 일을 계속 담당했다. 임대료는 견결히 통제되었다. 그런데 임대료는 뉴욕 및 여타 지역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철폐하기 어려운 통제였다. 임금 또한 협상에 의해 다소 완만한 제한을 받았다.
  가격 통제를 보완한 것이 통조림, 육류, 설탕, 신발, 자동차 타이어 그리고 특히 가솔린에 대해 실시한 꽤 포괄적인 배급제도였다. 배급제도는 상당히 독창적이었으나, 행정상의 막대한 노력을 필요로 했다. 특별히 공급이 부족하거나 특별히 가난한 곳에서는 그렇게 해서 수요를 공급에 강제적으로 균형을 맞추었다. 소매가격지수는 1939년과 1945년 사이에 총 29.5 % 상승했을 뿐이었다. 1946년 통제가 풀리자 지수는 현저히 급등했지만, 제 2차세계대전 시기에 대한 기억과는 달리 인플레이션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가격 통제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사회적 불안과 불만을 막기 위해 실시되었지만, 그것은 또 하난의 중요한 효과를 낳았다. 전비 조달의 요구가 경제에 집중되었을 때에 수익을 높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가능했다. 하나는 가격을 올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산을 늘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격 통제와 그에 따른 임금 제한으로 인해 활용 가능한 방도는 생산의 증대밖에 없었다. 수익 극대화는 전시에도 부차적 목표가 아니었다. 그런데 더 많은 생산에 의해 수평적으로 만족되기는 했으나, 더 높은 가격에 의해 수직적으로 달성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크게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가격 및 임금의 통제는 전시 생산을 확대하는 데 있어서 강력한 실제적 역할을 수행했다.
  지금 나는 가격과 배급에 관한 정책이나 업무 수행이 완벽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결과와는 대조적으로 세부적인 문제에 너무 많은 주의가 기울여졌다. 이런 사실은 질 저하에 대한 터무니없는 우려에서도 잘 드러난다. 완두콩 통조림에 부족하게 들어 있는 두 알의 콩, 구하기 힘든 실크를 대체해 나가고 있는 레이온 스타킹의 저하된 내구성, 높은 목표에 대한 행정관료들의 오만한 자신감은 정치적으로 해롭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과업의 무게를 고려해볼 때, 그러한 태도는 그들의 젊음으로도 호감을 사지 못할 태도였다. 나는 대중의 인식도 좋고, 정치적으로도 축복받은 적절한 사례였다. 경제적으로도 성공했고 대중에게 인기도 있었지만, 그 집행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거슬렸다는 사실은 민간 통제의 주목할 만한 성취였다.
  가격, 임금의 제한과 배급은 경제정책에 대한 보다 폭넓은 전략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 절반은 미시경제적 노력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총수요의 관리, 즉 거시경제적 노력이었다. 전자는 물가관리국의 임무였고, 후자는 - 조세 및 재정 정책과 금융정책은 - 재무성과 연방준비제도의 임무였다.
  이상하게도 전쟁 기간 동안 금융정책은 방치되어 있었다. 이자율은 낮게 유지되었다. 연방준비은행의 대출이자는 전쟁 기간 내내 1 % 로 동결되어 있었다. 제 2차세계대전의 예외적인 그리고 현명한 판단 가운데 하나가 금융정책의 수상쩍은 마법에 전혀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전쟁으로 인한 차입이 최저 이자율에서 이루어졌으며, 실질적인 전비는 아주 낮은 이자와 불로소득 계층에 대한 극히 작은 양의 보상 덕분에 훨씬 적었다.
  그러나 재정정책, 즉 징세와 국채 판매에 대한 거시경제적 의존은 강했다. 이들 노력은 성공적이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3110억 달러가 넘는 총 전시 지출 중에서 대략 43 % 가 조세로 충당되었다. 이전의 전쟁 기간보다 형편이 훨씬 나았던 것이다. 주요한 수단은 소득세였으며, 부당한 전쟁 이득을 환수하기 위해 고안된 초과소득세도 있었다. 최고 소득계층의 소득세는 91 % 까지 끌어올렸지만, 이것이 가시적으로 해당 부자들에 대한 의혹을 감퇴시키지는 않았다. 징세로 감당하지 못하고, 무력화시키지 못한 지출 중 상당한 부분은 저축되었다. 총저축은 1939년 소득의 4.1 % 에서 1945년 16.7 % 로 올라갔다 (1991년에는 다시 4.1 % 로 되돌아갔다). 사람들은 불황의 어려움을 기억하며 그것이 다시 오리라고 짐작했으므로, 전례 없는 액수를 현금이나 현금에 상당하는 물건으로 보유했다. 차를 살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살 수 있는 날은 대비해서 돈을 저축했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물가 역시 저축의 장려에 일조했다. 즉 여러 형태의 유동자산을 보유하는 것이었다. 물가가 오르고 있었다면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민간 투자에 착수할 수 없는 기업들 역시 적립금을 축적했다. 이 모든 것에 의해 나중에 주목할 만한 결과를 맞게 된다. 전쟁 동안 사람들은 승전 후에는 불황이 재개되리라고 여겼다. 불황은 이전의 10년 동안을 지속했으니 전시의 자극이 사라지기만 하면 경제새할은 암울했던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호경기가 앞에 놓여 있었다. 그 기초가 된 것은 전시 축적분의 지출과 투자였다. '이것은 예상된 일이다' 혹은 '이것은 통찰력 있는 전후 계획의 산물이다' 라고 기록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었다. 경제적 성공이 지적 통찰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빈번히 예상할 수 없는 행운에 의존하기도 하는 것이다.
  전술한 대로, 물가관리국에서 미시경제적 조치가 나오고 재무성에서 거시경제적 조치가 나왔다. 둘 사이에 우호적인 협력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나는 미시경제학에 책임 있는 경제학자로서 재무성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그리고 자주 표명했다. 재무성 역시 마찬가지로 업무 수행의 견실성과
엄밀성에 대해 의문을 표명했다. 거시경제학에 대해 말한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나 역시 케인즈가 제안한 개인 강제저축이라는 발상 때문에 관심이 끌렸다. 나는 그때 처음 케인즈를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으며, 이따금씩 나의 통제 업무와 당시의 보다 큰 경제문제들에 대해 토론했다. 강제저축 계획에 의한 특별 징수의 대가로 시민들은 전후 현금화하거나 지출할 수 있는 채권을 받게 될 것이었다. 나는 재무성에 이 제안을 강권해보았지만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가능성 있는 제안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한 전시 경제정책, 즉 미시경제적 통제와 거시경제적 징세의 즉각적인 혹은 장기적인 효과들이 당시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전시경제의 추가적, 중심적 요구는 전술한 대로 탱크, 군용기, 군함, 총, 탄약, 제복 그리고 이들을 생산하기 위한 민간경제 내의 필요한 여유를 확보하고 조달하는 것이었다. 강철은 자동차용과 탱크용이 모두 부족했고, 알루미늄은 요리기구용과 비행기용이 모두 충분치 못했다. 고무는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곧이어 가솔린 역시 부족해졌다. 민수를 감축하든지, 원료의 공급을 늘리든지, 아니면 두 가지를 다 하든지 해야 했다.
  조달은 군이 전권을 행사했다. 군수품 조달은 유능한 관리로 이름 난 브리한 서머벨과 루시어스 클레이가 지휘했다. 그들의 재능과 경험은 군사 훈련과 전술을 훨씬 능가했다. 서머벨은 이전에 뉴욕에서 뉴딜의 WPA 업무를 다루었으며, 클레이는 나중에 전후 독일의 관록 있는 미국인 주둔자로서 큰 공을 세운다. 그들은 미국경제의 잠재력을 앞에 두고 시방서를 작성하여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하청해주었다. 쿠즈네츠와 한때 그의 제자였으나 이젠 상급자가 된 로버트 나단이 가르쳐주는 대로였다.
  그렇게 하청된 계약이 지나치게 후한 것으로 판명되면, 재조정의 형태로 초과수익을 환수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만약 노골적인 횡령이나 수뢰가 생기면, 상원의원 해리 트루먼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에 회부되었다.
  대체적으로 대규모 조달사업은 능률적으로 수행되었으며, 두드러진 부당이득 행위나 횡령은 없었다. 그러나 호감을 주지 못하는 측면도 있었다. 이러한 조달을 위한 여유 확보 - 재료 공급의 보장, 그것의 민수에서 군수로의 배정, 시설용량의 확장, 재료와 인력 및 막대한 관련 활동을 놓고 경합을 벌이는 민간 공장의 조업정지 등 - 는 몇 가지 예외가 있었다 하더라도 적절하지 못하게 다루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알파벳 순서로 된 일련의 기관들 - 국방자문위원회, 생산관리국, 공급우선 순위 및 할당위원회 - 에 임무가 맡겨져야 했다는 사실은 이들 업무의 수행이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될 것임을 예고했다.
  문제는 경제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었다. 기업 경영자들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 필요했다. 주역을 기업인에게 돌리지 않고 산업을 동원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렇게 모셔온 기업 경영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에대한 심각하게 분열된,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그럴듯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견해란 두말할 나위없이 부분적으로 무기 생산을 늘리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 일부는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그것은 또한 루스벨트와 그의 8년 묵은 반기업적 태도 및 공격에 맞서 산업계를 지키는 것이었다. 많은 기업인들에게 첫번째 과제 못지 않게 두번째 과제도 중요했다. 여기에 이류의 사업 자질밖에 갖지 못한 사람들만이 정부와 함께 일하기 위해 자원하거나 보내졌다는 슬픈 현실까지 결부되었다. 일류들은 공장과 사무실에 남아서 사업에 열중했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사업적 수사나 지난 시절과 과거 워싱턴에 대해 옹호하려는 이들뿐이었다.
  그 옹호는 특히 루스벨트와 뉴딜에게는 적대적이었다. 이제 산업계에 대한 정부의 대규모 침입을 맞아 주의와 경고 및 빈번한 저항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던 것이다. 강력한 지도력이 요청되는 곳에 기본적으로 적대 본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진주만 공습 훨씬 전에 더 많은 제강 능력이 필요하게 되리라고 파악되었다. 하지만 대규모 제강공장들은 이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지난 10년 동안 초과 생산을 안고 지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산업 확대에 대한 반대는 워싱턴에 강력히 전달되었다. 따라서 생산 증가를 주도적으로 대비한 것은 소규모 신설 공장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 개시 후의 자동차 공장 조업정지에 대한 산업계의 적극적 저항 역시 워싱턴에 비슷하게 반영되었다. 희소 원료의 할당을 위한 제한은 빈번히 다음과 같은 대답에 부딪쳤다.
  "이것은 관련 산업계의 양식이나 자율적인 협력에 안심하고 맡길 수 있소,"
  수년의 준비 기간 동안과 미국 참전 후에도 계속해서, 워싱터에는 보다 절박한 또 하나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뉴딜에 적극적이었던 우리들에게 그 전투는 굳건하고 정의롭게 수호된 무위의 옹호자들에 의해 벌어진 것으로 보였다. 결국, 지연, 자율주의, 무위를 부추기던 자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병기고가 되었던 것이다. 자신과 연합국들을 위해 8만 6338대의 탱크, 29만 7000대의 비행기, 1740만 정의 라이플, 막대한 양의 포대 장비와 탄약, 행상함 6만 4500척, 수천 척의 함정과 화물선 및 수송선들이 1940년 6월 1일부터 1945년 7월 31일 사이에 생산되었다. 비용은 당시 ㅊ통화로 1860억 달러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24시간마다 화물선 수척이 진수되었고, 다소 터무니없는 얘기지만 캘리포니아의 카이저 조선소는 하루만에 선박 한 척을 건조하여 진수시켰다.
  전쟁 동안 미국의 산업은 이상하리만큼 분열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잘 알려진 원 달러 맨Dollara-Tear Men(사실상 무보수로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민간인)들이 경계와 저항의 전형이었다. 이와는 달리 공장에서는 사람들이 모종의 활력과 창의력, 불황의 터널에서 살아나온 기쁨, 작게는 공장과 크게는 이 나라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은 크나큰 열망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의 커다란 생삱거 업적은 워싱텅의 사람들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의 정신과 에너지에 의해 이루어졌다.


    13 영국 그리고 그 건너편
  비록 유휴 노동력, 설비, 원료의 막대한 보유가 전쟁 승리의 결정적 요소이긴 했지만, 미국의 전시 경제활동의 긍정적 측면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영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프랑스 함락 후 영국 국민들만큼 한 국민이 자신들의 에너지를 집중한 경우가 이전에는 결코 없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노는 인력과 설비를 군사적 목적에 동원할 수 없었다. 이제 여자들도 직장에 나갔꼬, 미국의 경우보다 훨씬 많이 영국의 민간 소비는 전시 요구에 희생되었다. 고소득 계층에서 세금은 몰수의 수준으로 올랐으며, 광범위한 영역의 소비재에 대해 물가 통제와 배급, 특히 배급이 시행되었다. 과세와 배급은 둘 다 특별히 너그럽게 받아들여졌다. 아니 환영받았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히틀러의 큰 위협이 해협을 건너 으스스하게 다가왔다. 자신들이 희생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시민들은 공동의 노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조세(늘 그렇듯이)와 물가 통제가 그리고 정도가 조금 덜하긴 했지만 배급도 크나큰 논쟁의 대상이었다. 가격 통제를 관장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렇게 통제받는 이들의 더 많은 돈에 대한 강력한 욕구에 대해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배급은 특히 가솔린의 배급은 불만과 기피의 근원이었다. 영국에서는 격력한 항의도 거의 없는 채로 이 모든 조치들이 받아들여졌다.
  제1차세게대전의 경제적 재앙이 제2차세계대전의 타산지석이 되었다는 점은 충분히 언급되어왔다. 제1차세계대전의 어떤 유산도 전쟁 필수품을 구입하느라 발생한 영국과 프랑스의 대미 채무보다 더 지속적으로 번민을 안기지는 못했다(배상금 지불로 인해 빚어진 유사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언급하겠다). 교전중인 민주국가들을 돕기 위해, 그리고 제2차대전 후 결국 제기될 채무 문제에 대해 먼저 손을 쓰기 위해, 1941년 1월 렌드-리스lend-lease라는 역사적 개념이 나왔다. 채무에 대한 전후의 귀결은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그리고 증여와 양도가 어의상으로나 정치적으로 너무나 명백했기에, 약간의 비행기, 선박, 원료 등이 영국에 그리고 나중에는 대량으로 소련에 이전될 수 있으며, 그 나라들은 궁극적으로 현물로도 보상, 변제받을 수 있다는 관념뿐이었다. 렌드(자금 대부)와 리스(무기 대여)사이에 명확한 구분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3년 OPA를 떠난 후 내가 잠시 속했던 상당한 규모의 관료기구가 워싱턴에 세워졌다. 그 기구는 다양한 무기류 및 원료의 이전을 감독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론상으로는 그것의 차후 최수를 살피기 위해서 세워졌다. 말할 필요도 없이 후자의 업무는 국민의 기억 뒤안에서 사라져갔다. 렌드-리스의 지원으로, 그러나 훨씬 많게는 결연한 시민들의 지원에 의해, 영국은 엄청난 무기 생산자가 되었다. 이미 1941년-상당히 놀라운 일인데-영국은 주요 군수품의 생산에 있어서 독일보다 앞서 있었다. 다음해 내내 여여국은 우세한 지위를 유지했다. 독일의 전시 경제 운용이 놀랄 정도로 열악하고 무능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가고 있을 무렵, 내 개인적으로 터득하게 된 사실이다.
  나는 미국 전시 겨 제의 계획과 관리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독일경제 운용의 전후 심사를 지도하도록 차출되었다. 미국 전략폭격조사단 단장의 자격으로 그 일을 맡게 되었다. 조사단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안과 육군 장관 헨리 스님슨Henry l. Stimson의 지시에 의해 설치된 기구로서, 연합군의 장거리 혹은 전략 폭격이 독ㅇ리 및 일본의 전쟁 수행 노력에 끼친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국 경제의 모든 측면에 대해 체계적ㅇ르ㅗ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의(그리고 몇 명은 영국의) 경제 및 통계 방면 실력자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이 대규모 조사와 독일에서 이루어진 나의 임무에 합류하였다. 전쟁 마지막 며칠 동안 동료들과 나는 적절한 독일 문헌과 사람들을 찾기위해 미군 및 영국군과 함께 갔다. 헤르만 괴링Hermann Goering으로부터 이어지는 나찌의 고위 정치인들, 특히 독일의 경제 동원과 무기 생산을 담당했던 알베르트 슈페르Albert Speer에 대한 수일에 걸친 심문이 있었다. 그것은 흥미 있고 특권적인 수업이었다.
  독일의 전시 경제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전시 생산에 끌어들일 고용되지 않은 인력과 유휴 시설에 중심을 두었다. 1930년대 말에 재무장하기 시작했으나, 궁극적인 군수품과 관련해서는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앞에서 말했던 대로, 독일은 완전고용 경제와 산업 생산 능력의 높은 민간 이용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던 것이다. 따라서 무기 생산의 청구는 민수품 생산을 희생해야만 가능했다.
  영국이나 미국과 비교해도 무기 생산 청구는 훨씬 신중히 집행되었다. 전통적으로 영국과 미국에는 국민과 정부 사이에 민주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부는 국민이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고,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프랑스 함락 후 영국의 분위기와 진주만 피습 후 미국의 분위기 속에서 희생 의지는 더욱 강력해졌다. 미국에서는 실제보다 말이 앞섰지만 말이다. 독일에서는 국가와 국민 사이에 이와 비슷한 의사소통이 없었다. 따라서 정부는 희생의 부과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것은 이전에는 인식되지 못했던 독재의 불리한 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극히 실제적인 수준에서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제한과 결부되어서, 여성들과 하인들은 독일 노동력에 유입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인들은 새로이 정복한 나라들에서 데려온 일꾼들로 인해 전쟁 동안 서열이 높아져 다. 힘을 쓰는 데에도, 솔선해 나서는 데에도 이 노동력은 그다지 열성적이지 못했다. 전시 동원된 공장의 충원을 위해서 민간 고용을 급속히 줄이는 대신 외국 노동력을 대대적으로 수입했다. 조선소와 몇몇 다른 기업체들은 예외였지만, 독일의 공장들은 전쟁 기간 내내 단지 1교대로만 일했다. 여기에서도 평화시의 관행이 만연했던 것이다.
  제한된 동원과 고용은 히틀러의 제한된 전쟁관의 결과였다. 전쟁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의 서부전선 방식과 같이 질질 끌며 오래 지속될 성질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배적인 군사 개념은 블리츠크리크Blitzkrieg(전격전)-병력의 신속한 동원, 강력한 공격, 승전과 항복, 즉각적 동원 해제-였다. 이것은 1940년 춘절기에 저지대 국가들Low Countries(북해 연안의 벨기에 등) 및 프랑스 침공에서 전형적인 정확성을 보여주었으며, 1941년 러시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블리츠크리크 개념은 또한 군사적 회전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까지 확장되었다. 무기 생산은 군사적 공격을 지원하도록 조정되었고, 그 후에는 이완과 민수품 제조로의 복귀가 기다리고 있었다. 생산은 단기적 전투를 대비한 것이었지 장기적 전쟁을 대비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프랑스 함락 후 이완이 뒤따르게 되었고, 이런 태도는 독일 전시 경제의 의사결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동부 블리츠크리크가 러시아의 경울과 예상 외로 강력한 소비에트군을 만났을 때에야, 무기 생산은 항구적이고 확고한 토대 위에 올려졌다. 결국 무기 생산은 1944년 정상에 도달했으나, 그때는 패배-승리가 아니고-의 전망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독일의 그러한 행동은 관념적 계획이나, 전술한 문제 즉 국민의 반응을 평가하고 고취시키는 독재의 탓만은 아니다. 심한 행정적 무능에는 책임은 있었다. 1942 ㄴ 2월에 독일의 무기 생산을 맡았던 알베르트 슈페르는 머리가 좋고 야망이 있는 사람으로서, 원칙이나 양심의 진지한 제한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제3제국은 슈페르와 그 밖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고위직을 경제적으로나 일반적으로나 적절하지 않은 사람들로 채웠는데, 그 가운데에는 두드러지게 무능력한 사람들도 있었다. 전시 동원과 운용에 있어서 기본적인 문제들은 그들의 장악력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슈페르는 심문에서 다음과 같은 다소 시사적인 사실들을 밝혔다.
  (폐색이 짙어가면서 내가 처리해야 했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너무도 쉽게 술통에 빠짐으로써, 다가오고 있는 재앙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도피처를 찾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전시 동원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전시 견해는 판이했는데, 이는 군사전략과 그 귀결에 중차대한 의미가 있었따. 전쟁 초기부터 연합국은 널리 알려진 대로 독ㅇ리 도시와 산업시설 및 철도 수송 시설에 대한 고습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전투의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적인 데에 있었다. 흔히 듣는 미국의 비유에 의하면, 독일경제는 (북처럼 팽팽)했다. 수송기관은 물론이고 무기 공장과 조선소가 목표였을 때에도 산업시설을 약간만 제고해도 총체적인 생산과 전쟁 수행력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터였다. 실제로 공습은 독일인들이 아직 동원되지 않았던 자원을 전쟁용으로 동원하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전쟁 막바지 몇 달까지도 계속된 무기 생산의 증대에서 입증된 사실이다.
  경제적 과오의 두드러진 사례 하나를 들어보겠다. 1944년 2월의 마지막 며칠 동안, 무기산업의 가장 큰 구성요소인 독일의 항공기 공장들이 대규모 공습의 표적이었다. 3월과 그 후의 몇 달 동안 항공기 생산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3월에는 전투기 생산이 2월보다 48퍼센트 더 늘어났다. 공장 건물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기본적인 기계 공구들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기 때문에 곧 다시 이용되었다. 새로운 조립 라인이 근처 건물에 설치되었다. 항공기 산업은 괴링과 루프트바페(나찌 독일의 공군)의 무능한 지도를 벗어나, 알베르트 슈페르와 그의 부서의 보다 효율적ㅇ니 지도를 받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폭격의 효과는 항공기 생산의 증대였다.
  공습은 또한 평화시 목적으로 전시 목적으로 자원의 이동을 가져왔다. 질소가 농업에서 탄약으로, 가솔린이 자동차에서 항공기와 군용차로 바뀐 거싱 그 단적인 예이다. 도시 지역에 대한 영국 공군의 공습마저도 자극 효과를 일으켰으리라. 1941--1942년 독일의 런던 공습은 영국 국민들의 사기를 돋구어주었다고 여겨졌다. 그에 못지 않게-폭격에 대한 조사한 결과를 보면-(1943--1944년의 대독 공습, 특히 영국 공군의 공습은 국가적 위기감을 유지시켜주고, 희생을 위해 필요한 환경을 조성했을 것이다.)
  공습이 얼마나 많이 사기를 진작시켰는지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있지만, 공습의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 점이 필연적으로 중요해지리라는 것이 전시 교의의 일부였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결정적인 것은 경제력이었던 것이다. 폭격기가 가격한 것은 바로 경제였다. 사실, 현대의 풍요한 경제는 고도의 복원력을 지녔다. 한 지역의 낙심스러운 결핍은 다른 지역의 불요불급한 용도로부터 필요 물품을 끌어옴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은 장거리 폭격기나 전략 폭격기에 의해 이긴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유럽에서 전쟁을 단축시켰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역사의 도움을 호소한다. 군인들에게도 그와 결부된 민간인들에게도, 공군의 결정적 역할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우리는 비행기를 가졌다. 고로 그것들은 틀림없이 효과적이리라. 실제로 이렇게 수상쩍은 교의는 없을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후 몇년 동안 미국의 한국 및 베트남 상공에 대한 제공권 장악은 완벽했다. 그렇다고 그 나라들에서 벌어진 전쟁을 이기거나 그 도정에 명시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전쟁은 여전히 지상에서 치러졌고, 지상에서의 승리가-혹은 패배가-결정적이었다. 그레나다와 파나마에서 실시된 소규모 적전의 여파 속에는 공습의 공헌에 대한, 특히 공습이 불필요하게 야기한 참사에 대한 심각한 의혹이 있었다. 심지어 걸프전 이후에도 폭격의 정확성과 효과에 대한 본질적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공군력의 효능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강력하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은 희미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경제학이 하는 역할이나, 평화시 외교정책 수단으로서의 경제학의 역할에 대해서는 과장과 과오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략폭격기의 목표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군대에 대한 활발한 경제적 지원을 못하게 하려는 것이 그 진정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폭격기는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현대 경제의 풍요로운 민간 생산에서 비롯된 것은 평화시의 목적에서 전시 목적으로의 이전 기회만이 아니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결코 치명적이지 않은, 어쩌면 결코 고통스럽지 않은 희생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이것이 현대에 들어와서 제재나 보이콧 혹은 못 보는 이유이다. 그러한 방법은 군대의 활용이나 그 밖에 정치적으로 곤란하거나 위험한 조칠ㄹ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다루기 힘든 정권을 치유할 매력적인 수단으로 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원의 재배분과 불요불급한 것들의 희생이 뒤따른다. 제재는 큰 희망을 갖게 하지만, 그 고유의 특성은 실망인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 경제학과 경제적 효과에 대해 당연하게 여겨진 중요성에 부응해서, 소위 경제전쟁이라는 것에 보다 진지한 관심이 돌려졌다. 미국의 BEW, 즉 경제전쟁위원회Board of Economic Warfare는 헨리 윌리스Henry A. Wallice-그렇지 않았으면 그는 부통령이라는 부적절한 자리에 기용되었을 것이다-가 이끄는 명망 있는 기구였다. 이제는 그 존재 자체가 역사에서 사라져버리고 없다.
  내가 연구한 바 있는 일본의 전시 경제는 정말로 잘 동원되었다. 카르텔, 즉 대자이바쯔(대재벌)는 전력을 다해 과업 과업을 완수했으며, 바른 규율이 몸에 밴 프롤레타리아 역시 효율적으로 복무했다. 일본의 동원은 독일보다 더 광범위하고 엄정하게 이루어졌으며, 가용 자원 면에서는 미국보다도 훨씬 더 그러했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나라였으며, 그런 나라가 크나큰 전쟁에 말려든 형편이었다. 일본이 자국 산업을 제 아무리 잘 이용했다. 하더라도 이 부등성은 어찌해볼 수 없는 요소였다.
  일본에 대한 공습, 특히 파괴적이고 무자비한 도시 공습은 독일이 겪은 어떤 것보다 더 격렬했다. 일본의 산업 또한 독일의 산업보다 더 취약했을지 모른다. 어쨌든 피해는 신속히 복구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본의 궁극적 항복을 가져온 것은 육상 및 해상 전투(독일의 패배와 함께)였지, 폭격을 통한 군사물자의 경제적 상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의 실정은 극히 불리한 군사적, 전략적 상황에 의해 악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일본은 아시아 대륙 깊숙이 그리고 섬들의 긴 연쇄를 따라 저 아래 과달카날에까지 미치고 있는 영토를 방어할 필요가 있었떤 것이다. 이 영토는 압도적 공격이 어떤 연결 고리에 가해지더라도 전체가 취약해지는 구조였다. 전략폭격조사단은 원자폭탄이 전쟁 종식을 몇 주 정도밖에 앞당기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는데, 우연만은 아니었다. 일본의 지도층은 이미 패배를 인정했다. 항복결정은 이미 진행중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독일과 일본에서 경제 문제가 군사, 정치적 결정에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군사, 정치적 결정은 무능한, 아니 광적인 고위층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힡ㄹ러의 결정이 그러했는데, 그는 러시아와 전쟁을 개시하여 러시아의 겨울이 닥치기 몇 개월 전에 러시아 평원으로 군대를 보낼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하와이를 공습함으로써 전면전이고도 파괴적인 미국의 반응을 자극하려 한 일본의 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직후 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는 미구그이 주의와 힘이 유럽에서 태평양으로 돌려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전시에 있어서의 효과적인 결정에 대한 평가는 얼마나 정치적, 군사적 과오를 범했는가 하는 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역사의 도정을 형태짓는 데 있어서 다시는 이러한 어리석음이 저질러져서는 안되리라.


    14 평화 1
  1945년 미국은 전쟁에서 벗어난 어떠한 나라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행복한 경제 여건을 맞이했다. 예산은 신속히 감축되었다. 1945년 9천2백6십9만 달러에서 1948년 2천9백7십7만 3천달러로 줄었으니, 엄청난 규모의 평화 배당금이었다. 전쟁에서 놓여난 군인들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세련된 조치들 가운데 하나를 통해, 그동안 잃었던 세월을 보상할 수 있는 학비를 면제한 학교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았다. 기뻐서 감동하는, 아니 감지덕지하는 반응들이었다.
  1946년 산업계의 육중한 로비에 눌려 가격통제가 걷힘으로써 가격이 급등했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한층 더 중요한고 보다 놀라웠던 것은 전체 경제의 실적이었다.
  일찍이 관찰했듯이, 전후 전망에 대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암담했다. 10년 동안의 불황이 전쟁에 선행했으니, 불황이 정상이라는 걸 누구라서 의심할 수 있겠는가? 보다 나은 경제세계에 대한 연설들이 행해지긴 했지만, 암울한 현실을 호도하기 위한 공허한 수사로만 여겼다. 그러나 불황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분명했다. 전쟁에서 남은 것은, 전에 논의했던 지출되지 않은 구매력의 대규모 비축이었다. 보통 때 같았다면 자동차, 여타의 내구재, 주택 그리고 심지어 옷가지 등에 돌아갔을 돈이 현금이나 은행 예금 혹은 전시 공채의 형태로 수중에 유효하게 남아 있었다. 민간투자 역시 미루어졌다. 이 모든 것이 이제 시장에 나오는 구매력의 대규모 비축고를 이루었다. 게다가 전쟁 채무가 대규모로 변제되었다. 1947년과 1948년 연방정부는 각각 3천4백5십3만 2천달러와 2천9백7십만 3천달러의 지출을 하고도 3백8십6만 2천달러와 천2백만 천달러의 잉여를 남겼다. 우리가 보았듯이 1939년 노동력의 17.2퍼센트이던 실업률이 1947년에는 3.9퍼센트로 떨어졌다. 전쟁의 고통은 그 여파가 특히 격심하다는 게 지금까지의 통념이었다. 유례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이것은 당시 미국의 경험이 아니었다. 그보다 사정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떠도는 경제적 재앙에 대한 인상, 즉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경제조치가 뭔가를 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은 존재했다. 그것이 전쟁의 으뜸가는 교훈으로 보였다. 전시 완전고용을 이루어낸 정부의 대대적 개입과 지출 및 투자는 결국 케인즈에 대한 확인이었다. 이제 결론에 이르렀다. 그토록 잘 배운 교훈을 지속적으로 응용하라!
  필요한 조치는 경제학 역사상 거의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어떤 것, 즉 두터운 신망을 지닌 새로운 경제학자들과 결부되어 있었다. 전문 경제학자들은 전시 동원에서 탁월했다. 그들은 새로운 국가 회계-현재의 그리고 잠재적인 국민소득과 국민총생산-를 개발했으며, 그 결과 어떠한 전시 생산이 가능한지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가격을 통제하고 임금을 제한하는 미시경제 정책의 창출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에 성공적으로 공헌했으므로, 평화시에도 그렇게 공헌하리라는 것이 당시로선 분명했다.
  이러한 우호적 태도로부터 1946년의 고용법이 나왔다. 그 법은 대통령이 발의한 것이 아니었다. 주로 몬타나 주 상원의원 제임수 머레이James Murray의 후원을 받아 의회로부터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했다. 처음에는 완전고용법이라는 이름을 달았는데, 보수적인 입법자들과 압력에 의해 완화되었다. 그리고 매년 지출과 과세,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할 여타의 정책에 대한 프로그램을 마련하도록 요구한 원안의 몇 가지 조항들은 수정되었다. 대신 법안에는 진보적 경제정책에 대한 최고의 배려를 얻기 위해 경제학자들의 특별 자문단을 백악관 내에 신설한다는 규정을 넣었다. 의회의 양원 합동위원회가 자문단의 메시지를 접수, 검토하여 의회에 통보나 권유만 하면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경제자문위원회Conucil of Economic Advisers와 합동경제위원회가 탄생했다. 그리고 전문 경제학자들이 자문위를 구성하고, 합동위에 대거 포진하게 되었다. 높은 고용과 왕성한 경제성장을 위해 마련된 요구를 반영하는 폭넓은 정책에 대한 약속은 절대적이었다.
  제정된 법률의 완화된 요구보다는 바로 여기에 (고용법)의 진정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거시경제적 관리에 대한 책임을 정부에 확실히 요구했다. 만약 실업이나 불만족스러운 경제적 실적이 있다면, 정부의 실패이며 정부의 책임이었다. 앞으로 나올 대통령이 민주당 출신이든 공화당 출신이든 마찬가지이다.
  트루만 대통령이 처음에는 새 법에 대해 시큰둥했다. 그의 첫 자문위원장 지명자 에드위 노스Edwin Nourse는 케인즈 경제학의 새로운 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구학파의 저명한 경제학자였다. 짐작하건데 그는 케인즈의 저술을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곧 레온 키설링Leon Keyserling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키설링은 경제학자가 된 변호사이자 노동자, 노동운동과 강력히 제휴하고 있는 열렬한 행동주의자로서, 똑똑하고 호전적이며, 종종 무례했다. 그는 정부의 경제 지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추고 있었다. 전문 경제학자들은 키설링이 전문가로서 적절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했지만, 그의 유능함에 대해선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지도 하에 자문위는 다가올 시기에 명확히 드러날 경제정책에서 명성을 드높였다. 미국 자본주의의 호시절이라는 이 시기에 대한 그들의 공로 또한 온전히 인정되어야 한다.
  전후 수년 동안,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몇몇 운좋은 나라들과 일본과 유럽의 황폐화한 나라들 사이에 놓인 경제적 격차는 너무도 컸다. 우선, 물리적 파괴가 극에 달했다. 영국 도시에서는 뚜렷했고,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으며, 이탈리아는 보통이었으며, 독일, 일본, 동유럽, 소비에트연방에서는 처참했다. 이는 육상 전투의 유산이기도 했지만, 공습의 광범위하고도 무작위적인 파괴가 가장 결정적이었다. 이전의 적국들에서 이런 파괴의 복구는 먼저 배상 정책에 의해 위협받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배상 문제보다 경제세계를 괴롭혔던 것도 없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패전국 특히 독일이 배상금의 지불 자금을 구하는 문제였다. 지불 자금은 오직 경화나 수출 초과에서만 나올 수 있었는데, 이런 것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배상을 위한 노력은 모든 정상적 경제 교류를 교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2차세계대전 후의 현금 배상은 분명히 회피할 문제로 보였다. 다시 케인즈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베르사유에서 귀국한 그는 배상 문제의 어리석음에 대해 경고했다.
  보상은 이제 현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석탄과 여타 필요 물자를 적국으로부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승전국에서 선적함으로써, 그리고 전쟁 기간 잃었던 것을 대체할 산업 기계류 및 장비를 획득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렇게 함으로써 승리자들의 손상된 시설은 대체되었고, 그들의 산업 생산은 다시 가동하게 되었다. 반복하지만, 현금 배상이 아니라 현물 배상이었다. 이는 또한 징벌적 분위기에 호응하여,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그들 전쟁 수행력의 경제적 기초를 앗아오고, 장래 그들의 평화적 태도는 그렇게 해서 보장될 것이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현물 배상은 전원화Pastoralization라는 보다 폭넓은 개념을 제공했다. 독일을 강제적으로 농경생활의 평화로 복귀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워싱턴에는 이에 대한 유명한 옹호자인 재무장관 모겐소 2세를 기념하여 모겐소 플랜이라는 말로 알려졌다.
  전쟁 종식 후 수개월 내에 이 이미지는 한켠으로 제쳐놓아야 했다. 현금 배상이 불가한 것이었다지만 현물 배상은 훨씬 더 악랄했으며, 사회적인 영향 면에서 보더라도 훨씬 더 많이 사기를 저하시켰다. 나는 독일 및 일본의 경제 업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국무성 관리로서 이 점을 지극히 명확히 이해했다. 내 의견에 동의하는 다른 사람들의 협조를 받아 이 과오를 종식시키는 것이 이 기간 동안 내가 노력해야 할 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석탄 형태로 이루어진 독일의 배상은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경제에서만-광부들에게 생산과 생활의 필요 물자, 특히 당시에는 충분한 식량을 공급하는 경제에서만-나올 수 있었다. 배상으로 가져간 산업 장비는 접수국에게 거의 가치 없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기존 시설에 맞지 않았던 거이다. 필요한 대체 부품은 손에 넣을 수 없었으며, 보수 기술 또한 없었다. 말하자면 일본의 많은 산업시설은 필리핀과 같은 후진국에는 부적합했던 것이다. 소비에트연방에 의해 일부 산업시설이 제거된 독일의 경우, 이미 박살난 공동체의 시민들로서는 자신들의 살림이 제복의 외국인들에 의해 부숴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절망적이고 잔인한 일도 없었다. 곧 이 정책은 독일과 일본에서 종식되었다. 이러한 배상이 현금 배상보다 우월한 점은 보다 일찍 과오가 드러났다는 것밖에 없다.
  이 시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또 하나 있다. 그 중요성에 비해 평가는 아직도 미진하다. 그것은 기본적 농업지역을 군사적으로점령하는 것과 현대의 얽히고설킨 복합적 산업사회를 접수하는 것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기본적으로 전자는 가능하다. 그렇지만 후자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가장 무거운 짐을 그렇게 하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지우게 된다.
  군사적 성공의 결과로 점령하게 된 소농 경작 지역 혹은 훨씬 현대적인 농업지역은 피정복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승리자에게도 소용이 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생산은 지속된다. 기본적 결정 가운데 관리에 필요한 필수 사항들은 농민이나 농장 소유주에 의해 처리된다. 실제적 필요를 넘는 생산물은 여전히 판매되며, 세금은 여전히 납부되거나 필요한 경우 가차없이 거두어진다. 새로운 영토는 정복자의 재산과 위신에 보탬이 된다. 그곳의 인력까지도 봉사를 강요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새 지배자는 분노를 살지는 모르지만, 지배는 할 수 있게 된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일찍이 말했듯이 고대부터 지속되어온 일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의 산업과 산업생활은 군사적 점령과 통제 하의 성공적 운용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 교훈은 제1차세계대전과 전체적으로 불운했던 프랑스의 루르 지배 직후의 시기에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직후에 독일과 일본에서 공히 명백하게 드러났다. 현대의 산업경제는 무한히 복잡한 창조물로서 거기에는 원료, 부품, 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 수송 기관, 금융, 세심한 경영, 시장 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의 시시콜콜한 정부 역할이 있어야 한다. 실업은 군사적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율성을 가져야 하며, 어떠한 군사정권이나 외국 정부도 제공할 수 없는 정부 지원을 받아야 한다.
  제2차세계대전에 뒤이은 몇 개월 동안 연합국은 산업 생산의 관리와 그에 결부된 정부의 필수적인 임무가 독일 국민과 일본 국민에게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종전 후 1년 남짓한 기간이 흐른 1946년 9월,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James F. Byrnes는 독일 스투트가르트에서 연설을 통해 경제생활의 운용을 독일안에서 성과적으로 되돌려 주었다.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하여 흥미를 가지고 그리고 동의하는 마음으로 그의 연설을 들었다. 내가 그것을 기초했으니까.
  그러나 패배한 열강에게는 자율과 책임만으로 불충분했다. 운전 자본과 생산 의욕이 또한 있어야 했던 것이다.

    15 평화 2
  제1차세계대전 시기에 저질렀던 경제적 과오를 피하기 위해 적국들이 제2차세계대전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언급했다. 인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해 물가가 통제되었고, 식량 및 여타 필수 소비재가 배급되어싿. 배급은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조금씩 실시되었으나, 유럽과 일본에서는 대대적으로실시되었다. 대대적으로 배급이 실시된 지역에서는 색다르고 그리고 한층 더 마비적인 형태의 인플레이션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잘 인식되지 못했다.
  특히 무기와 전쟁 경비에 지출되기 위해 차입된 돈이 배급제도 뒤켠에 쌓였다. 배급되지 않아서 사야 할 물건은 거의 없었다. 배급되지 않는 것 가운데 확보할 수 있는 물품은 무용한 통화를 보유하고 있는 것보다 어쨌든 물건을 사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굴복되었다. 그리고 돈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무엇 때문에 돈을 얻으려고 물건을 팔겠는가? 생산은 왜 해? 돈을 벌려고 일해? 이러한 생각은 돈이 풍족하게 있고, 엄격한 배급 경제가 실시되는 경우의 극단적인 사례였다. 전후 수년 동안 독일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으며, 미미한 정도이기는 했지만 여타의 유럽 교전국들과 일본의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에서는 지폐와는 달리 보유 가치가 있던 담배가 교환의 맥개로 많이 사용되었다. 담배꽁초는 회수되어 소중히 간직되었다. 베를린에 있는 루시어스 클레이Luxius Clay's 장군의 사령부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남자 화장실의 벽 한쪽에는 인쇄된 종이가 하나 붙어 있었다. (담배꽁초를 변기에 넣지 마시오.) 그 밑에다 어떤 생각 깊은 미군 병사가 이렇게 써놓았다. (물에 젖어서 피우기가 힘들어집니다.)
  명백한 해결책은 기존 지폐를 더 적은 그러나 기능적으로는 보다 효율적ㅇ니 수로 교환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지불되지 않은 정규통화를 줄이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특유의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이 방법을 전후의 초기 몇 달 동안에 실시하였다. 그 결과 이전의 암시장 투기업자들과 비시Vichy 정권 하에서 특권을 누렸던 자들을 과거의 정치적 보상에서 나오는 혜택에서 제외하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거두었다. 퇴장통화를 교환하겠다는 것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이 훨씬 심각했던 독일에서 1946년, 미국인 지배층 사이에서 통화 교환의 제안이 고려되었다. 게르하르트 콤Gerhard Colm과 레이몬드 골드스미스Raymond Goldsmith는 두 사람 모두 유럽계 미국인으로서 뛰어난 경제학자였다. 이들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콤 다지 골드스미스 계획을 입안하기위해 당시 독일의 금융업무에 관여하고 있던 디트로이트의 은행업자 요셉 다지Joseph Dodge와 손을 잡았다. 도소 주변적인 역할이기는 했지만 나도 국무성에서 그 작업에 관계했다. 계획은 1948년이 되어서야 좀더 보수적인 형태-원인에는 자본과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부동산과 같은 면세고정자산을 가진 사람들은 현금이나 은행예금의 형태로 유동자산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손해를 입게 되어 있었다. 자본과세라는 발상은 비국 보수주의자들의 장려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전례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로 독일 경제장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에 의해 실행되었다.
  즉각적이고도 인상적인 반응이 일었다. 과거엔ㄴ 남아 넘치던 통화 때문에 받고 팔기보다는 오히려 보유하고 있던 재화가 이제 시장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전에 황량한던 가게들이 갑자기 상품들로 가득찼다. 화폐를 얻기 위한 생산도 이젠 할 만해졌다. 매일 에르하릍가 이룬 기적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계획 창안자들의 역할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동반적 노력이 없었더라면 (기적)도 더욱 작아졌을 것이다. 동반 작업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정책과는 현저히 대조적이었다.
  독일과 일본이 항복한 후 몇 년 동안은 군사행동에 의해 파괴된 산업들을 보수하거나 원상 복구해야 했다. 이 문제는 다른 문제들에 비해서 별로 어렵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는 생각하는 것보다도 심각하지 않았다. 일찍이 언급했듯이 실제적인 파괴는 황폐한 도시 풍경이 시사하는 것보다는, 그리고 공습에 대한 공인된 견해가 주장하는 것보다는 훨씬 가벼웠다. 하지만 많은 산업장비가 퇴화나 마모,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의 결과로 대체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이 존재했다. 이것은 한 세기 전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에 의해 관찰되었으며, 조제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자본주의 과정 가운데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의 한 측면이었다. 전쟁은 단순히 가 과정을 가속화시켰을 뿐이다. 산업시설의 물리적 파괴는 전후ㅡ이 유럽과 일본에게 결코 최악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보다 곤란한 문제는 생산에 필수적인 운영 자본-식량, 원료, 기계 부품, 기계 그 자체 및 여타 필요 물자-을 어떻게 구해서 (지불)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문제의 본질상,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은 미국에서, 그리고 미미한 정도는 아직 식량과 원료를 댈 수 있는 그 밖의 나라들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어떤 경우든 달러나 그에 상당하는 물건이 지불되어야 했다. 팔 만한 물건이 없는 한, 아무리 필요한 물건이 있어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가능성 있는 방법 한가지는 황폐화된 나라들이 회복하는 데 필요한 필요 물자를 살 수 있도록 미국이 충분한 금액을 대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다시 이전의 경험이 경고하며 끼어들었다. 할부 상환액ㅇ르 지불하는 (그리고 결국은 탕감하는) 국제 채무의 짐이 이렇게 해서 창출될 터였으며, 정확히 이것이 랜드리스를 통해 회피하고자 도모했던 대상이었다. 유일한 해결책은 돈을 (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마샬 플랜이 제시되었다. 이 계획은 국무장관 조지 마샬George C. Marshall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1947년 6월 하버드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유럽을 위한 도움의 손길을 제안함으로써, 스스로 기대했던 것보다 더 인상적인 조치에 착수하게 되었다.
  덜 알려졌지만, 이보다 먼저 대응이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1945년 10월 케인즈 경이 주역이었던 협상이 끝난 후, 미국은 영국에게 37억 5천만 달러에 2퍼센트 이자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약정했다. 상식을 뛰어넘는 조치로서, 아직까지도 전시 통제 하에서 엄격하게 사용이 제한되는 파운드화를 차관협정 체결 후 1년 내에 바꾸게 되리라는 점이 규정되었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이것은 재앙이었다. 정당하게든 비양심적으로든 전쟁 동안 파운드화를 비축해 두었던 사람들은 달러로 바꾸려고 앞을 다투었다. 막대한 보상이었다.
  차관 수령액은 순식간에 탕진되었다. 영국경제에 미친 효과는 매우 미미했다. 그러나 먀살 플랜은 이러한 실수를 피하려고 했다. 대체로 정상적인 경제생활로 보다 신중하게 복귀할 것이다. 외환 통제를 포함한 통제 조치들이 필요에 따라 연장되었다. 자유화는 궁극적인 목표이긴 했지만, 당장 달성해야 할 목표는 아니었다.
  또 하나 특별히 중요한 경제, 정치적 문제는 마샬 플랜에 의해 이용할 수 있게 된 돈을 유럽의 가난한 국가들에게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아주 미묘한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설득력 있는 경제논리가 동원되었다. 각국은 복구 목표를 제시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 목표를 향한 전진을 뒷받침하고 거기에서 초래된 국제수지 적자를 보전하는데 필요한 수입 산정치도 함께 요구되었다. 국제수지 적자는 마샬 플랜에 의한 원조로 보전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경제적 책임을 진 미국인들ㅇ르 가장 확실히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은 터키 사람들이 제일 먼저 균형 잡힌 대외계정을 제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들은 도리어 새로운 경제체제 하에서 지혜로운 방침은 그러한 균형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고, 설득력 있는 적자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엄한 충고를 받았다. 하룻밤 내내 터키의 계정들은 수정되었다.)
  그 돈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지출될 것인가 하는 데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변명의 여지 없이 필수적 경제계획으로 여겨진 것, 즉 계획된 복구를 위해 워싱턴과 파리에 상당한 규모의 기구가 창설되었다. 마샬 플랜과 그 지도자들-워싱턴의 폴 호프만Paul G. Hoffman, 유럽의 에이버렐 해리만W. Averell Harriman-그리고 특히 관련 경제학자들에게도 부여된 중요하고 품격 높은 역할이 다시 한번 보다 깊은 진실을 은폐했다.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어야 나머지 것들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돈이 어떻게 이용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데 일조한 경제학자들에 대한 소중한 신뢰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세 명의 탁월한 인사들-프랑스의 로베르 마졸렝Robert J. Marjolin, 나중에 롤 경이 된 프랑스 주재 영국인 에릭 롤Erick Roll, 그리고 워싱턴의 리처드 비셀Richard Bissell-은 직업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모두들 혀 소한 국가적 이해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언급했는지 모르겠지만 마졸렝과 롤은 각자 조국에서 유망한 직업으로 바꾸었으며, 리차드 비셀은 마샬 플랜 이후에도 중앙정보국에서 공직 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그곳에서 U_2정찰기 개발을 지도했다. 그의 경력은 1961년에 불과 수시간으로 끝났다. 그때 그가 피그즈 만 공작의 책임자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다. 마샬 플랜에서 최초로 지출한 금액은 60억 달러를 조금 밑돌았는데, 결국 총 130억 달러(오늘날 달러로는 거금 530억 달러)가 이 프로그램을 감독하기 위해 설치한 워싱턴 쪽 기관인 경제협력국ECA를 통해 나갔다. 절반을 조금 넘는 액수가 기본재-식량과 산업원료-에 쓰였고, 17퍼센트는 연료에, 그리고 또 17퍼센트는 기계류에, 나머지 7퍼센트는 선적 비용으로 쓰였다.
  효과는 대만족이었다. 마샬 플랜을 운용한 3년 반 동안 지원을 받은 국가들의 국민총생산은 25퍼센트 증가했다. 그리고 공업 생산은 64퍼센트, 농업은 24퍼센트 상승했다.
  물론 이 가운데 일부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상적 진행 과정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ECA가 가동되면서 동시에 복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마샬 플랜이 영예의 큰 몫을 받았다. 실제로도 그러했듯이 그것은 가장 성공적인 경제적 발안으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마샬 원조의 효과 가운데 많은 부분이 식량과 원료 및 자본재의 구매를 위해 미국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그리하여 미국경제의 강력한 자극제였으며, 전후 시기 훌륭한 성과를 낳게 만든 주원 요소들 가운데 하나였다. 보다 큰 범주의 생활에서 다들 믿고 있듯이 경제학에서도 선을 행함으로써 성공하는 것이 가능하다.
  역사가들이 마샬 플랜을 현실이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은 일본의 경우에서 시사받는 점이 크다. 일본의 황폐화는 유럽보다 컸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박살난 경제를 재건하는 일에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자이바쯔)가 그랬듯이 말이다. (자이바쯔)는 더 작은 기업들과 온 국민이 그런 것처럼 복구를 강력히 뒷받침했다. 이처럼 일치된 결연한 노력이 있었기에 서유럽에 못지 않은 극적인 복구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은 외적 지원과 내적 결단의 상대적 중요성에 대한 중요한 논평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마샬 플랜은 연합국과 적국 양측 모두에 대한 선의와 배려가 주요한 동기였다. 하지만 1947--1948년까지는 또 다른 요소가 여실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반세기에 걸쳐 경제적으로 중요한, 아니 절대적인 요소로 자리잡을 것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이었다. 전쟁중에 세계는 두려움과 함께 경탄 내지는 깊은 안도감을 가지고 적군이 아돌프 히틀러 군대를 맞아 어떻게 격퇴시키는지 지켜보았다. 그들을 뒷바침해 준 무장력의 일부는 렌드 리스로부터 나왔으며, 보다 큰 부분은 소비에트 경제 자원을 강력하게 동원함으로써 가능했다. 적에게 영토와 이동 가능한 산업장비 및 원료를 막대하게 상실하고도 그와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동유럽 전체가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과 통제 아래 떨어졌다. 스탈린이라는 위압적 인물에 의해 엄청난 힘에 대한 인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그는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라는 연합국 세 거두의 마지막 인물로서, 자기 나라의 지도자로 여전히 건재했다. 공산주의 혁면의 목표는 실제로 그 불가피성이 항상 충분히 세상에 알려져서 대체로 프롤레타리아 대중보다 보수주의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다라서 마샬 플랜이 등장했을 때, 그 창안자들에게 동기가 되었던 것은 경제적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심 없는 동정심과, 그렇지 않으면 불경기를 겪고 있는 취약한 서유럽을 소비에트 연방이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깊고도 끈질긴 우려 둘 다였던 것이다. 선의와 깊은 두려움의 결함이 계획적인 대규모의 금전적 비용을 용인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선의는 명백히 존재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 가난한 나라들을 돕는 문제에 관한 한 미국의 경제정책은 동정심과 이상주의 그리고 공산주으에 대한 편증적인 두려움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상주의자들, 다시 말해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차관과 원조뿐만 아니라 평화봉사단 같은 온건한 사업들까지 지지한 사람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의회의 승인과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는 데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문제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16 좋은 시절
  1946년 말 가격통제가 폐지된 후 수개월 동안 미국에서는 이미 언급한 대로 물가가 급등했다. 그런데 물가의 급등은 오히려 전쟁을 상대적 안정기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 후 상당한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정도는 아닌 인플레이션이 빚어졌다. 소비자 물가지수가 1946년 8. 5퍼센트에서 1947년 14. 3퍼센트로 인상되었다. 생산은 확대되고 있었으며 실업률은 매우 낮았다. 수요는 갇혀 있던 전시 구매력의 해방뿐만 아니라 상품교역수지의 호조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 미국의 수출은 공급이 크게 달렸고,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오는 수입은 미미한 실정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마샬 플랜의 자금은 미국의 상품 및 제품 대금을 치르기 위해 미국으로 환류되고 있었다. 미국경제는 세계경제의 중심축이었다.
  1948년, 상황은 다음과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해리 트루만이 루스벨트의 네번째 임기 중 3년 반 이상의 잔여 기간을 채우고 나서 다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을 때였다. 그가 토마스 듀이Thomas E. Dewey를 누르고 승리했다. 해서 사람들이 많이 놀랐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크게 놀랄 정도로 의외의 일은 아니었다. 미국의 유권자들은 평화와 번영을 주재한 대통령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으로  ㄴ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는 지속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북한의 남침과 우리의 신속한 개입은 소비시장에 일시적인 수요 폭발을 가져왔다. 인플레이션이 재연될지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가벼운 전시 물자 부족과 가격 상승이 유발되어 옛날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이 방어 조치를 초래했는데, 이때쯤은 벌써 대응의 필요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의회는 필요한 법률을-1950년 9월의 국방생산법-제정했으며, 가격 통제는 제자리로 복귀했다. 소비시장은 다시 한번 안정되었다. 실업률은 낮아졌으며, 민간의 생활수준은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예외는 있었지만 계속해서 조금씩 향상되었다.
  1953년은 민주당이 20년에 걸쳐 지켜오던 대통령직을 내놓은 해이다. 민주당 행정부는 명백히 필요한 전쟁을 이끌었지만, 이젠 점차 염증의 대상이 되고 이는 전쟁을 부담으로 안게 된 처지였다. 이런 사정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trher의 너무나 무책임한 행동에 의해 악화되었다. 그는 중국인들의 개입을 자초했는데, 그로 인해 궤멸적 패배를 겪었다. 게다가 전쟁의 확대를 촉구했다가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한국에 가서 평화를 도모하겠따고 한 약속은 미국 국민들에게 올바른 해결책으로 보였다. 대통령들이 호경기에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과 그들의 당은 인기 없는 전쟁에서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정치적 성공의 중심은 분명 경제적 실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은 전쟁에 깊이 종속될 수도 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민주당 후보 애들라 스티븐슨Adlai E. Stevenson은 소위 현대 거시경제학에 힘있게 보조를 맞추어 나가지 못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그의경제학 수업은 거의 대부분 엄밀히 고전적인 전통-균형예산, 금본위제-속에서 이루어졌다. 심각한 실업의 시기에 정부는 총수요의 흐름을 부양하기 위해 적자 재정을 운용해야 한다는 케인즈의 견해를 부당한 임의적 재정에 대한 변명으로 생각했다. 좋은 정부란, 항상 수지의 균형을 맞추는 정부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이 심각한 결점이라는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경제 연설은 현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 대부분의 연설문을 내가 썼다. 나는 연설문에서 완전 고용의 유지에 있어서 재정정책의 역할ㅇ르 축소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극히 우호적인 논쟁에 빠직는 했지만, 스티븐슨은 여전히 못 미두워 하면서도 동의해주었다. 아이젠하워나 다른 공화당 연설자들도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전을 걸어오지 않았다. 요셉 맥카시Joseph MaCarthy를 통해서였지만 유세의 주요 발언자는 마르크스였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견해는 매우 일반적으로 수용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선거전은 순조로운 경제환경 속에서 그리고 정부가 이를 유지할 책임이 있음을 동의한 상태에서-수년 후도 마찬가지겠지만-대부분 사회문제를 놓고 이루어졌다. 주요한 관심사는 노동조합 조직과 단체교섭 과정에 대한 상대적으로 온건한 제한이라고 할 수 있는 태프트 히틀리 법이었다.
  경제 토론보다는 농업 프로그램, 사회보장 강화 그리고 그 밖의 사회문제들이 더 많이 등장했다. 문제는 전체 경제의 운용이 아니라, 그 결과물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배분되어야 하는가였다. 부자들이 자신들의 많은 재산을 내놓아야 한다는 점을 선뜻 받아들였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네 한계 소득세율은 94퍼센트였는데, 1952년까지도 여전히 92퍼센트였다. 인센티브의 역효과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경제적 성과가 순조로운 상태라면, 납세 후 소득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적극적인 겨 제적 영향력으로 강조될 법도 했다. 경영자와 기업가의 큰 노력을 강제하는 영향력으로서 말이다. 1940년대 후반 내가 (포츈)지의 편집자로 있을 때에 이 점이 역설된 적이 있었지만, 기껏 편집위원회의 보다 보수적인 성원들 가운데 한두 명을 성가시게 할 뿐이었다. 유세 기간과 1950년대 초 전반에 걸쳐 토론의 중심은 어려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도움, 즉 복지국가에 있었다. 전반적으로 순조로운 경제 운용이 약간 가정되어 있었다.
  1953년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공화당원 중에서는 가장 이데올로기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한국전의 속박은 종식되었다. 그밖에는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호경기는 계속되었다.
  영국에서는 노동당 정부가 전시 배급 및 가격 통제를 해제하기 위해 신중하게 움직였다. 공급 증대가 가능해졌을 때에야 시장의 균형이 회복되었다.
  한편 전쟁중에 윈스턴 처칠이 약속하고 1942년 비버리지 보고서가 촉구한 대로, 복지국가를 강화하고 일반 노동자와 시민들에게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정도의 복지를 보장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전역의 대가로 평화시 보상이 주어지는 셈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영어 통용권에는 영국이 공인된 셈이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및 유럽의 여타 나라들에서는 마샬 플랜 원조가 끝남에 따라 자활적 복구가 계속되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와 베넬룩스 경제동맹Benelux Economic Union의 결성으로 장기간에 걸쳐 진행될 경제통합ㅇ르 향한 조치들 가운데 첫째 과정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이 조치는 국경을 넘어 가장 효율적인 생산자에게 생산을 배분함으로써 경제적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과 궁핍을 수반하는 두 차례의 전쟁을 야기했던 격심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안된 문명화 조치였다. 그 지도자들은 커다란 신뢰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장 모네Jean Monnet와 그의 긴밀한 협력자 미국의 조지 볼George Ball은 이 전망을 강력히 추구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다시 강조되어야 할 점은 보다 근본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숙한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국제적인 체제다. 국경을 넘어 제품이 거래될 뿐만 아니라 기업 스스로가 경계를 확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국가의 기업은 응당 그 시설과 고용을 다른 나라들에까지 연장한다. 그렇게 해서 초국적기업Transnational Corporation 혹은 국제기업International Corporation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특정한 나라나 정부에 대한 동일시가 감소된다. 따라서 경젭라전과 보조를 맞추어 정치통합의 요구가 제기되고, 국가적 정체성이나 국민 감정은 그러한 발전과 더불어 불가피하게 축소된다.
  국가적 긴장 또한 마찬가지이다. 초국적기업은 둘 이상의 민족국가 사이에 적대감을 선동할 수 없다. 그것은 두 나라 혹은 모든 나라에 있는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것은 국가간의 친선을 추구하고, 사람과 부분품 및 제품들의 가장 큰 이동의 자유를 추구한다. 커뮤니케이션, 여행, 금융이 결합의식을 고취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정부뿐만 아니라, 자기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정부뿐만 아니라, 자기들을 고용하고 급료를 주는 국제적 실재에도 의존을 하게 된다.
  국가적 혹은 민족적 호소에 믽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과 혜택을 적게 받는 사람들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현대 자본주의의 업적들 가운데 하나는 많은 사람들을 편협되고 폭력적이며 호전적인 상황을 뛰어 넘을 수 있도록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제2차세계대전 후 수년 동안 서유럽의 실정은 이 극단적인 힘에 의한 가장 가치 있는 사례였다. 거듭 말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통합을 역설하는 사람들은 일단 신뢰해야 한다. 여기에는 물론 마샬 플랜의 수혜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통합을 요구했던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들이 경제발전의 거대한 조류를 타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양식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행운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정치가의 회의나 협상이 아니라 그들의 양식이었다.
  1950년대에는 동유럽과 소비에트 연방에서도 복구 작업이 이루어졌다. 1958년에 나는 시찰 및 강의를 목적으로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했고, 다음해에는 소비에트를 방문하여 타슈켄트에서 키예프까지, 그리고 트빌리시에서 (당시의) 레닌그라드까지 여행하였다.
  당시 그곳에서 산업 발전에 이용되고 있는 활력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방문객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분명한 성과들을 대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운송, 발전, 철강 및 대규모 공업과 관련된 부문 등의 발전 양상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산업이 탁월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필요한 원료, 부품, 인력이 손쉽게 추산될 수 있었으며, 그 운용과 지도가 군대식으로 수행되었다. 계획생산은 개념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가능했던 것이다. 제강공장, 발전설비, 석유화학과 같은 분야에서 경제적 진보의 가사적 본질을 찾는 경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앞의 이유 때문에도 소련 및 그 위성국가들에서는 경공업보다 중공업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
  소비재 산업은 별로 발전하지 못했고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소비재 산업에서는 불안정한 소비 수요, 스타일, 디자인의 역할, 자원 서비스의 증대 등의 요소들이 모두 형식적인 계획을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젠가는 정치적으로 심각하고 비참한 실패가 초래되리라고 예상되었다.
  이후의 사태 발전에 비추어 소비에트의 소비재 산업과 농업에서의 궁극적이고 총체적인 파탄을 예견했었노라고 말한다면, 개인적으로는 기분이 좋을텐데.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더 많은 것이 성취되리라는 소련인들의 확신에 그리고 그 결의에 감동했다.
  미국을 여행하는 경제학자들은 공자의 내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에서 나는 (우리 인민들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일하고 있는지 혹은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지 공장 내부를 조사해달라고, 아니면 그냥 봐달라고) 하는 요청을 매일 받았다. 호텔에 돌아와 넋이 나갔거나 나태한 웨이터들 앞에서 어떤 메뉴를 주문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경험했을 때에 그리고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보고 놀랐을 때에만 소비에트 발전의 열악한 측면을 경험했다. 이 점을 나는 심사숙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가올 어려운 시절의 맹아적 원인들은 호경기 속에 늘 잠복해 있었다. 그 중 두드러진 사례가 이미 관찰했던 금융 투기로서, 이것은 이후에 대폭락을 야기했다.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의 호경기 속에는 곧이어 미국에 출현한 절망의 세 가지 원천이 있었다.
  첫째는 금융정책의 마법에 대한 신앙의 부활이었다. 1951년 연방준비은행은 기나긴 전시 휴지 상태에서 풀려났다. 금융적 조치가 인플레이션과 경기 후퇴에 대항하는 무기로 다시 사용될 터였다. 전시의 난국에서는 신뢰받지 못했지만 평화시의 덜 절박한 문제들에서는 자신의 역할을 다시 맡을 참이었다. 어떠한 방침의 정부 조치라도 그 유효성에 대한, 심지어는 그의 즉각적 실패에 대한 실망을 이겨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또한 노동조합의 강화, 그리고 노동조합과 기업 세력이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로부터 임금과 가격의 악순환-이 위협하게 될 것이다. 미시경제가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서 거시경제에 강력히 침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호경기가 계속되면서 산업국가들이 일반적인 복지에는 어두운 측면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미국에서는 함께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애팔래치아 고원의 계곡과 분지에, 남부 농촌 지역에, 그리고 인구가 조밀한 도시 슬럼가에 고립된 사람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점점 분명해지고 있는 것은, 이렇게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보다 폭넓은 생활수준의 불균형이었다. 사적인 재화와 용역은 탄복할 만큼 풍족했지만, 공공 부문의 용역은 그에 훨씬 못미쳤다. 텔레비전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지만, 많은 학교들은 여전히 열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은 불결한 거리의 깨끗한 집에서 살았다. 자동차는 스타일이 고급화되고 기계의 성능도 뛰어났지만, 무질서한 노점상과 상업미술로 흉칙해진 도로를 운행해야 했다.
  나는 1958년 (풍요로운 사회The Affluent Society)를 통해 공적인 생활수준과 사적인 생활수준 사이에 놓인 복지의 불균형 등에 대해 세상에 알렸다. 그 책과 신중하게 만들어낸 나의 조어인 (전통적 지혜The Conventional Wisdom)-복지의 불균형을 정당화하려는 힘-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전세계에 걸쳐 수백만 권이 팔렸으며, 이 조어는 제목과 함께 통용어가 되었다. 그 책에 의해 많은 것이 변화되지는 않았지만, 책 한 권의 성공적인 간행은 내 영혼에 매우 바람직ㅎ나 영향을 끼쳤다. 일부 독잗르에게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보다 큰 사회적, 정치적 귀결은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경기가 좋아지자 소련경제와 그것이 뒷받침하고 있는 경제적, 과학적, 공학적, 군사적 힘이 부활되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호를 궤도에 진입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 시민들에겐 놀랍고도 매우 간담 서늘한 일이었으며, 저만치 뒤처져 있던 우주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더욱 예외일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성취는 그 체제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그리고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보수주의자들 특히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그때 이후 공산주의의 성공과 그것은 세계적 호소력 및 위협에 얽매어 지냈다. 여기에서 평화시 군비 지출을 위한 지속적 압력과 무기 증강, 우주 경쟁 및 결코 작지 않은 냉전의 소산들이 출현하게 된다.

    17 탈식민지화
  20세기의 눈부신 정치적 발전들 가운데 하나가 제2차세계대전 직후에 이루어졌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미국이 지구 전체에 걸친 식민 점령지들을 전반적으로 포기한 것이다. 영국이 인도를, 미국이 필리핀을, 영국 및 프랑스가 중동 지역을 포기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포르투갈이 아프리카를, 독일이 인도네시아를, 프랑스가 베트남을, 일본이 한국을 포기했다. 조그마한 섬이나 여타의 지역들도 독립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이전 점령자들도 자기 정체성에 대한 천부적 권리, 즉 어떤 나라라도 스스로를 통치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선진 산업국가들의 현명하고 동정적인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식민지 스스로의 극히 끈질긴 압력이 있었다. 그 압력을 막기에는 너무나 강력하고 많은 비용이 필요했으므로 그들을 평화롭게 놓아주었다.
  이 모든 것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지만, 잘 인식되지 않은 보다 결정적인 요소가 있다. 식민지들은 이제 더 이상 점령을 정당화할 어떠한 경제적 이익도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한때는 내놓은 적도 있었다. 식민지는 원료와 다양한 소비재의 풍부한 원천인 동시에 기초 제품의 중요한 시장이었다. 상당한 과장을 무릅쓴다면,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이 식민지 인민의 등에 업혀 산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밖의 다른 요소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부와 권력의 획득에 필수적인 요소인 영토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었다. 경제적인 복지의 엔진은 이제 선진 사업국가들 내부에, 그리고 그 국가들 사이에 있었다. 국내의 경제성장이 이전의 식민지 무역보다 훬신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식민지 세계는 이처럼 주변화되어 있었으므로 놓아주는 편이 서로에게 유리했다.
  필리핀의 독립을 보장하고 미국이 얻은 경제적 효과는 별로 없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이탈은 경제적인 면에서 영국에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경제학자들은 인도네시아의 대화란제국을 상실하고 받게 되는 경제적 영향이 전호 2--3년간의 국내 경제 성장에 의해 보전되었다고 추산했다. 역사 책에는 식민지 시대의 종식이 이전 식민지의 민족적 열망이 승링한 것인 동시에, 열강의 인자한 양식과 선의의 승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경제적 이해의-이 경우는 무익의-강한 조류가 그 밑을 숨어 흐르고 있었다.
  식민지는 사라졌지만, 일찍이 식민지에서 벗어난 라틴아메리카처럼 그들의 영토뿐만 아니라, 복지에 대한 책임감은 남아 있었다. 부유한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들은 미약하나마 복지가 비슷한 수준에 이르도록 이 나라들을 돕고 지도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탈식민지 시대에는 경제발전이라는 관념이 탄생했다. 식민지 국가들은 한때 고유의 안정적인 가난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독립을 했으니, 그들도 전진해야 했다.
  사실 첫번째 조치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 그러니까 1944년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자본금 900억 달러의 국제부흥개발은행(세계은행)이 다소 작ㅇ느 규모의 국제통화기금과 함께 계획되었을 때에 취해졌다. 이것은 경제발전의 하드 플랜트(기계설비 등 하드웨어 부문)에 투자할 자금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두번째 조치는 신구 국가들이 국제수지 적자-발전에 따르는 수출에 대한 수입 비용의 초과액-를 극복하도록 돕고, 불균형을 시정할 수 있는 내부의 경제체제와 기율을 규정하는 일이었다. 세계은행과 통화기금은 모두 워싱턴에 있었는데, 평판이 좋은 금융계를 경제발전의 여러 과제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주선했다.
  그리고 조치는 더 있었다. 국제연합은 초창기부터 가난한 회원국들의 경제적 개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특화된 기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종종 문제에 대한 토론이 조치를 대신하여 광범위하고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미국도 마찬가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49년, 트루먼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원조를 제안했다. 그것은 (제4항 프로그램Point Four Program)으로 원조 프로그램들로 발전하여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원조는 냉전 기간 동안 지금까지 말한 동정심과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의 결합에의해 고무되었다.
1951년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여 후배들과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부적합하고 복잡한 현대의 선진 경제 모델을 공부하고 있는 가난한 나라 출신의 하버드 학생들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경제적 문제들과, 바람이지만 그 학생들이 각각 나라로 돌아가서 다루게 될 해결책에 관한 과정을 하나 개설했다. 빈곤과 경제발전을 다루는 경제학 과목들 중 미국 최초로 개설된 과목이었다. 그 후 인도 주재 대사로 근무할 때는 물론 푸에르토리코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 인도, 파키스탄 및 실론에서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저술할 때도, 나는 대량의 빈곤과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방책에 진지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나는 그때 벌써 인도에서 경제발전을 위한 우리의 노력들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야심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는 AID(국제개발처)의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 종합적인 노력은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성공을 거두었다. 환태평양의 한국, 대만, 싱가포르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말레이시아와 태국에서 커다란 진전이 이루어졌다. 개선된 농업 기술과 관개 시설 및 농산물 가격은 인도가 식량을 자급하도록, 더 나아가 인구가 두 배를 넘더라도 그 상태를 유지하도록 도왔다. 그 밖의 나라들에서도 현대 경제생활의 보상 가운데 일부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발전의 양상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전세계에 걸쳐 부유한 나라들이 더 부유해지는 동안 대다수의 가난한 나라들은 여전히 비참할 정도로 가난했다. 부국과 빈국의 차이는 여전히 컸으며, 실제로는 증폭되어왔다. 원조 프로그램은 운좋은 나라들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중요한 일을 해냈지만, 절망을 줄이는 일은 조금밖에 못했다. 앞에서 언급한 발전한 국가들, 특히 환태평양 국가들은 고유의 내적 추동력이었다. 그러한 내적 에너지와 기율과 조직이 결여된 곳에서는 대중의 빈곤을 완화하기 위한 원조 프로그램도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프로그램들이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는 경제 발전을 내적 통제 변수를 갖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과오는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가 공유하고 있었다. 어떤 나라에서든 경제발전의 첫째 요건은 교육받은, 그리고 그 결과로 능력을 갖춘, 사회적, 경제적인 동기가 부여된 국민이다. 이 점의 중요성은 기존 선진 산업국가들이 초기에 철저히 인식했던 사항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무상 의무교육이 경제적 진보의 선차적 필요조건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유한 나라들은 예전부터 안정적이며, 책임감 있고, 정직한 정부 아래에서 내적인 평온을 이루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당시에 소위 경제적 진보라는 것이 공인된 기초는 바로 이것이다. 성공적인 발전에 있어서 무능하고 무책임하며 부패한 정권보다 더 해로운 것인 없다. 다시 말해, 발전을 내적 갈등만큼 효과적으로 끝장낼 수 있는, 아니 그토록 효과적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것은 달리 없다는 말이다.
  역사상의 큰 과오 가운데 하나는 신생국들이 자발적으로, 심지어는 손쉽게 식민 지배로부터 안정된 자치체제로 나아가리라는 믿음이었다. 그 이행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는데도 불구하고, 인도와 같은 소수의 정치 선진국을 제외한 많은 나라들이 최소한의 준비만으로, 아니 아무 준비없이도 수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안정된 민주주의는 어느 저도 자동저긍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했다. 혼란, 정치적 갈등, 내적 침략, 경제적 침체와 퇴보, 갖가지 인간 살육이 식민 지배의 대안이 되리라고 예견하는 사람은 없었다.
  현대에는 부유한 나라들은 모두 서로서로 평화롭게 지낸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들은 잃을 것이 없기에 그렇지 못하다. 민족 분쟁은 가난에 의해 격화된다. 종교 분쟁도 마찬가지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정치적 발언권이 어느 정도 경제적 성취에 의해, 그리고 그와 관련된 문화적, 교육적 성취에 의해 획득된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런 과정이 없다. 너무나 손쉽게 권력이 요란스럽고 목소리가 크며 병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에게 장악되는 것이다.
  도움을 주었던 부유한 나라의 과오는 가난한 나라의 역경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첫째는 선진 경제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것들이 가난한 나라들에 전이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가난한 나라는 경제적으로 발전하리라고 가정한 것이었다. 제강공장, 발전설비, 화학시설 등 발전된 자본주의의 무거운 가구들은 그렇게 이전되고, 발전은 완수될 터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현실적인 요구에 크게 상충되었다. 가난하고 숙련된 기술도 없고 근자마저 모르는 사람들은 식량과 의복 및 기초적 의료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들은 일상 생활과는 관계없는 공장과 번지르르한 공항을 받았던 것이다.
  인도에서 나는 이 문제에 깊이 관여하면서, 최상의 선의를 지닌 사람들 사이에 자신이 미국에서 가졌던 특별한 이권이나 직업만이 그 지역 환경에 유일하게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사람이 미국에서 기업의 경영이나 축산, 가정경제학 혹은 수으사였더라면, 그 생각은 인도에서도 자연스럽게 타당성을 획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과오가 있었다. 그것은 선진국의 경제, 사회 체제들-시장자본주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을 가난한 나라의 발전 전략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가난한 나라와 발전의 초기 단계에 있는 나라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둘 다 지극히 부적합하다. 두 체제 모두 교육된 인적 재능과 공적 훈련을 전혀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가능하다는 믿음은 특히 해로웠다. 이 믿음은 여러 나라에 정부가 허가를 통제하는 머리만 큰 기구를 만들어냈다. 그 기구는 백해무익했다. 인도에서는 농업 생산에 있어서 비료, 곡물개량종, 관개를 마련해주고는 대부분의 과정을 생산자 주도 하에 맡기는 방식을 취했는데, 기가막히게 성공적이었다. 반면 공업 발전은 정부 통제라는 무리한 짐을 지고 있었는데, 통제는 사회적 유형의 발전을 달성하는 데에 효과적이었다. 초국적기업 지배 하의 새로운 식민 통치에 대한 두려움이 통제를 뒷받침해주었다. 최근 인도에서는 산업 자유화를 위해 정부이 귀찮고도 광범위한 통제를 철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관료집단의 저항에 직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관장하는 규제에 대해 예외를 묵인해줌으로써 쏠쏠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발전을 위한 사회적 계획이란ㄴ 개념이 농업 혹은 농민에 대한 적극적 차별을 불렀다. 공업 발전은 도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 노동력은 사회운동의 중요한 축인 프롤레타리아다. 여기에서부터 도시 대중에 대한 편애가 시작되었다. 정부 시책에의해 농산물 가격을 낮게 유지한다는 지나치게 단순한 결정이 내려지게 된 것이다. 그 다음엔ㄴ 낮은 식량 가격과 손상된 인센티브로부터 낮은 혹은 낮추어진 농업 발전과 식량 부족이 초래되었다. 경제발전의 보다 폭넓은 과정에서는 농업이 식량과 일부 의류에 대한 기초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므로 다른 어떤 것 보다 수위를 점해야 한다. 이 점 역시 현재 발전된 나라에서는 과거에 인정되었던 경험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일찍이 세계의 보다 많은 혜택을 받은 지역(서구)에서 경제적 진보를 가로막았던 봉건계급들이 가난한 나라들 중에서도 더 불운한 나라에서는 여전히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필리핀, 중앙아메리카의 많은 나라와 남아메리카의 일부 나라, 파키스탄 등등이 그러한 나라들이었다. 그런 식을 권력을 부여받은 자들은 특히 발전을 원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는 아니라고 해도 본능적으로 그들은 발전을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와 경제적 안녕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경제발전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발전은 지주과두세Landed Oligarchy의 해소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요구는 곧 혁명을 일으키자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공산주의에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해소가 촉진되지는 못했다. 남은 것은 경제적 진보와 경제적 정체의 용인 사이의 지속적 대화였다.
  게다가 커다란 상충 요소로서 군사 관련 문제들이 있었다. 이미 강조된 바와 같이 제2차세계대전 후의 원조 노력은 두 가지 요소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었다. 고결한 동정심과 공산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이 그것이었다. 후자는 경제발전을 위한 지원을 요구했지만, 훨씬 더 다급하게는 군사적 지원을 그리고 때로는 군사적 개입을 요구했다. 혹은 요구하는 듯 보였다.
  결과는 경제적 진보와는 완전히 상충된 것이었다. 군사 우너조가 민간경제 원조를 대체했다. 가난한 나라들은 내적 자원을 군에, 그리고 희소한 외적 자원-수출로 벌어들인 경화-을 무기 구입에 돌리도록 독려받았다. 그 결과 막대한 규모의 군수품 교역이 따랐으며, 이 교역은 민간 상업을 압박했다. 그로 인해 많은 나라에서 군사정권이나 군사적으로 통제된 정권이 득세하기도 했다. 이들 정권은 경제발전의 요건들을 오해하거나 무시하도록, 호긍ㄴ 경제적 진보에 효과적으로 저항하는 데 있어서 봉건세력과 동맹을 추구하도록 잘 설계되어 있었다. -이 점은 루스 레거 시버드Ruth leger Sivard에 의해 지적되었다. 그녀는 꼭 필요한 책자 World Military and Social Expenditures, 1991의 저자이다. 현재로서는 이 책자가 이 주제에 관한 그녀의 최신 연차보고서다. 나는 그녀의 자문단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가난한 나라들의 인구 증가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인구문제는 가장 많이 논의된 사회문제였다. 그 원인들은 매우 분명하다. 기본적인 성 충동은 그 가운데 하나인데, 선진화된 사회에 맞는 레크레이션이나 기분 전환의 대상이 없어서 강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라리아, 장티푸스, 성병 및 여러 가지 형태의 인간 파괴 요소에 대한 치유 능력 역시 그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AIDS는 기본적인 예외지만, 또한 부모에게 자식들을 무한정 낳도록 허용하는 인구정책도 하나이 원인이다. 이 모든 것이 타당하다.
  내가 인도에 있을 때에 또 다른 원인이 분명해졌다. 부모의 경제적인 형편으로 보면 지극히 합리적이고 타당하지만, 사회적 목적에는 상충된다. 가난한 농촌사회에서 자식들은 초로의 시련을 이기는 기본적인 보호장치이다. 농촌의 아이들은 그들의 연장자들이 휴식과 그늘을 찾을 때가 되면, 태양과 열기와 노역을 견뎌야 한다. 소작농 생활에서 무자식이란, 곧 노년의 위험을 감내햐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주가 소작 박탈권을 가지는 경우에는 특히 그랬다. 인도의 출생률은 전 인구의 약 4분의 3이 사는 농촌 지역보다 도시가 훨씬 낮았다. 인도와 여타 농업국가에서는 딸보다 체력이 월등히 좋은 아들을 훨씬 선호한다(중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딸이 태어나면 원하지 않은 짐으로 여겨 처치한 적도 있었다). 가족계획과 피임이 가난한 농촌사회에서는 별 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난이 계속되는 한 계속해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일반화에는 항상 위험이 따른다. 탈식민화 이후의 시기에 경제 발전의 몇가지 아주 중요한 사례들이 나타났다. 한국과 대만을 비롯한 여타의 태평양 국가들에 관한 사례가 여러 차례 지적되어왔다. 때로 기적이라거나 녹색혁명이라고 불리는 인도 농업의 성공 또한 언급되어왔다. 때로 기적이라거나 녹색혁명이라고 불리는 인도 농업의 성공 또한 언급되어왔다. 중국은 사회주의를 견뎌내고 고속 발전기에 접어들었다. 시장 유인에 의존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최근 들어 이전의 과오에 대한 약간의 인식이 이루어졌다. 공업에 대한 커다란 부담감을 경제적 진보의 기본적인 상징으로 보는 경향이 많이 줄어들고, 교육의 중요성이 보다 폭넓게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발전, 아니 문명사회의 적 가운데 하나는 국가 주권이 경제와 국민을 파괴하는 내적 갈등을 온존시키고 있는 경우에도 관여하지 않는다는 신성불가침의 관념이었다. 마지못해서이긴 하지만 국가들의 공동체가 이런 사실을 인식해가고 있다. 내전에 대한 유엔의 개입이 여전히 불명확하고 미미하지만, 일정한 인정을 얻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발전의 선차적 필수 요건은 안정된 정권이다. 교육 및 농업 생산의 증대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것들은 성공적 발전을 중심 축으로 하여 돌고 있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이런 문제들이 인식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멀고도 험한 도정의 입구에 있다.


    18 케네디의 경제정책
  이제 관심을 미국으로 되돌려 케네디John F. Kennedy와의 오랜 교제에 대해서, 특히 경제학과 관련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은 1930년대였다. 그때 그는 하버드의 학생이었고, 나는 젊은 교수였다. 당시 우리의 관계는 역시 하버드 학생이던 그의 형 요셉 P. 케네디 2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존 케네디와 나는 전쟁중에는 떨어져 지내다가 그가 하원의원이 되고 뒤이어 상원의원이 되었을 때,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다시 만났다. 나는 그의 연설문 집필자는 아니었다. 나는 스티븐슨의 집필자였기 때문이다. 보다 젊은 전문가들이 채용되었다. 하지만 나는 자주 도움을 요청받았다.
  나는 그의 경제 관련 직책들과 적잖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묘하게도 요셉 케네디 1세의 지원을 받았다. 한번은 뉴욕에서 존 케네디가 경제 분야 편집인들과 지방 언론사 기자들 앞에서 할 연설을 준비해주고 있는데 케네디 1세가 자기 아들보다 훨씬 더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나를 지원해주었다.
  케네디는 경제적 사안들에 대해 아무때나 자문을 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연구중인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치가로서는 다소 예외적으로, 아니 특이하게 경제 토론과 격렬한 논쟁을 즐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 말기에 물가가 약간 오르자, 연방준비 은행의 이자율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실업은 1957년 4. 3퍼센트에서 1958년 6. 8퍼센트로 증가 추세를 보였다. 1959년에는 5. 5퍼센트로 떨어져서 선거가 치러졌던 1960년까지 계속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불안정한 이 실적은 리처드 닉슨과 그의 정치적 동지들에게 이어졌다. 그들은 8년간의 공화당 대통령 지배를 종식시킨 선거 패배의 원인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선거 결과와 깊은 관련을 맺기에는 그 영향력이 너무 작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케네디가 개인적, 정치적으로 닉슨보다 훨씬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경제문제들은 두 사람 사이의 선택에 많이 끼어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이 새 정부에서 경제학자와 경제학의 역할을 축소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존 F. 케네디 행정부부터 린든 존슨Lyndon Johnson에 이르는 시기만큼 경제 전문가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적은 없었다. 특히 미네소타 대학 월터 헬러Walter W. Heller, 예일 대학 제임스 토빈James Tobin, 윌리엄스 대학 커미트 고든Kermit Gordon이 그랬다. 경제자문위원회에 참여한 헬러와 그의 동료들은 학문적으로 탁월했으며 실제적 경향이 강했다. 그들은 대통텰의 돈독한 신임을 받아 경제정책 및 정치정책의 입안을 주도했다.
  케네디 취임 후 처음 몇 개월 동안 백악관에서, 나중에는 인도에서 그리고 인도에 있으면서 워싱턴에 방문할 때마다 나는 경제 정책 논의에서 구경꾼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결정권은 두말할 필요 없이 보다 직접적으로 관계된 사람들에게 있었다.
  케네디의 경제학자들은 세 가지 본질적 문제들에 직면해 있었다. 일부는 이미 경험하고 언급되어온 것으로서 그 당시보다는 회고를 통해 더 분명해졌다. 첫째, 거시경제 정책과 미시경제 정책의 상대적 역할이 있었다. 그리고 거시경제 정책 내에 금융정책 각가의 역할에 대한 문제가 있었으며, 재정정책 내에 공공 지출 대 과세의 문제가 있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격렬하면서도 매우 교양 있는 토론이 벌어졌다.
  돌이켜볼 때, 거시와 미시 논쟁은 인플레이션의 통제와 관계가 있었다. 경제 운용이 보다 나은 수준이라면 인플레이션은 물가를 인상시키는 재화와 용역에 대한 총수요에 의해 거시경제적으로 촉발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물가를 밀어올리는 임금 요구를 자극하는 고물가에 의해, 즉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에 의해 미시경제적으로도 촉발될 수 있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전반적인 경제정책을 보았을 때, 거시 경제 정책-총수요의 관리-은 높이 추앙받을 만하다. 그러나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미시경제 정책은 그렇지 못하다. 영어 통용권의 경제적 전통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시장행위에 대한 시장 가격과 임그므이 셜정에 간섭한다. 정통적ㅇ니 경제적 입장에서 시장은 신성불가침이며, 그러한 신학적인 믿음에 덜 영향을 받은 경제학자들까지도 개입하기를 꺼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법인 기업과 강력한 노조의 경제-1960년대에도 여전히 뚜렷한 제도적 유형이었는데-에서는 임금과 물가가 상호작용하여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이는 자유시장에 대한 고전적 개념이 아니므로 정부 개입을 정당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임금과 물가의 상호작용은 많은 명망 있는 토론 자리에서는 무시되거나 사려 깊은 논의가 억제되었다. 따라서 선호된 견해와 경제적 현실 사이에는 완강한 충돌이 빚어졌다.
  그러나 케네디 행정부 초기에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은 제지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받아들여졌다. 경제정책에 관한 첫 회의가 취임 직후에 각의실에서 열렸다.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하여 행동을 촉구했는데, 회의는 주로 이 문제에 집중되었다. 뒤이은 수개월 동안 주요 산업의 노조, 특히 자동차와 철강 노조들이 요구를 완화하라는-임금 요구액을 기존 물가에 의해 허용 가능한 수준에 맞추라는-권고를 받았다. (유나이티드 스틸) 노조가 1962년 4월에 협조적인 자세를 보이며 당시 진행중이던 협상에서 임금 요구액을 엄격히 제한했다. 이것이 다른 노조들에 본보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 직후 유나이티드 스테이트 스틸사의 회장 로저 블로우는 철강 가격을 상당한 폭으로 인상할 것을 선언-이것은 당시에 지적으로 가장 빈한한 조치였다-하고 친절하게도 대통령을 방문해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 케네디는 격렬하게 반응했다.
  (내 부친은 늘 내게 사업가들이란 죄다 망할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 말씀을 결코 믿지 않았소.)
  나중에 그는 한 기자회견에서 사려 깊게도 부친의 비난을 철강인들에만 국한시켰다.
  무거운 압력과 반트러스트 조치에 의한 다양한 위협, 세무 감사 및 여타의 보복에 밀려, 그리고 현명하게도 더 작은 철강회사들이 동조하지 않는 바람에, US 철강은 가격 인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당분간은 통제 원칙이 분명해 보였다. 즉 고용과 생산의 높은 수준에서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서는 임금 및 물가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럽과 일본의 임금 및 가격 설정에서 일반적으로 가정되던 것이 이제 미국의 정부 정책에서도 일시적으로나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제한을 이루어내려는 노력들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지루하며, 논쟁의 여지가 많다는 점은 분명했다. 게다가 그와 관련된 협상은 확실히 시간이 많이 걸리고 종종 실패하기도 한다. 경제학자들은 이것과 재적적, 금융적 조치의 훨씬 고결한 통치권을 비교했을 때-이전투구에 가까운 그 무엇과 초연하며 관조적ㅇ니 거시경제적 의사결정을 비교했을 때-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거시경제 정책이 중앙 무대로 옮겨갔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케네디 시절의 정책은 명백히 케인즈적이었다. 거기에는 완전고용에 가까이 접근하기 위한 총수요의 흐름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 완전고용은 경제가 생산할 수 있는 정도로 한계를 둔다. 생산성은 중심 문제가 아니었다. 인력의 교육 수준, 자본, 설비의 공급과 질, 기술 및 기술 진보의 역할 등이 활력을 잃었다. 그것들은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케네디 시절이 지나가자, 경제정책의 기본 구도가 명백해졌다. 임금과 물가에 대한 미시경제적 제한 혹은 시장 통제는 타당성은 있었으나, 그에 대한 강조는 시들해졌다. 반면 거시경제 정책이 주요 초점으로 부각되었다. 이 시기에 거시경제적 골격 내에서 독자적으로 주장된 금융정책의 역할 역시 축소되었다. 연방준비이사회 의장 윌리엄 매체스니 마틴William McChesney Martin 2세는 대가 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백악관 회의에서 연방준비이사회의 독립과 이사회 주요 성원의 역할을 주장해놓고도, 이자율을 안정된 수준으로 유지하라는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유효한 정책 수단은 과세와 공공지출, 즉 재정정책만 남았다
  1961년 경제가 호전되었다. 하지만 최적 경제성장률로 생각되는 것, 다시 말해 대통령과 그의 조언자들이 강하게 집착하는 전망을 보장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국민이 자신의 경제적 처지를 살펴보고 전년보다 확실히 개선된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확실히 사회적 평온과 정치적 성공 및 대통령 재선에 기여할 것은 없었을 것이다. 경제는 재화와 용역의 총생산을 매년 5퍼센트씩 확대한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금융정책은 제쳐놓았으니 정부가 할 수 있는 적극적 방법은 경제를 성장 및 완전고용으로 내몰기위한 정부 지출, 혹은 보다 많은 소득을 가계 지출에 풀어놓음로써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조세 삭감,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후자의 방향에 대한 보잘것없고 수사적ㅇ니 지원 속에는 조세 삭감이 기업가 및 경영자의 에너지를 재화와 용역의 생산에 풀어놓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에너지는 필시 높은 한계속득세율에 의해 제한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2년 초, 당시 경제정책에 대한 가장 첨예한 논쟁이 벌어져 지속적 효과를 갖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조제 삭감을 통해 경제를 자극하자는 것이었다. (조세 수입이 지출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세금을 줄여라!) 조세 삭감에 대한 자극적인 대안은 보다 큰 폭의 사회적 지출, 특히 최빈층을 위한 지출이었다. 사회적 필요는 늘 그렇듯이 분명하고 긴급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세 삭감은 보수적 방책이었으며, 미래의 보수주의자들이 행복하게 끌어안을 방책이었다.
  내 목소리가 재야에서 들린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나의 의견은 멀리 인도에서 전달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무력하지는 않았다. -그 후 전해오고 있는 바에 의하면, 조세 삭감 옹호자들은 내가 워싱턴에 돌아갔을 때에 그 문제에 관한 주요 회합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국무성에는 갤브레이스의 복귀를 경계하기 위한 준비가 갖춰졌다. 껏은 갤브레이스 조기 경보체제Galbrath Early Warning System라 불리웠다-최종 결정을 얼마간 연기시킨느 것은 가능했다. 나는 재문장관 더글러스 딜론의 후원을 받아 그렇게 했다. 그는 보다 전통적인 보수적 논거를 가지고 어떠한 조세 삭감에도 반대했다. 그는 조세체계가 개혁되기를 원했다. 그는 예산이 완전히 균형을 이룰 때까지는 조세를 삭감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뻔했으며 재무장관이 동조의 입장으로 돌아선 다음에는 특히 그랬다. 1963년 11월 22일 대통령 암살 당시에는 그 결정이 벌써 확고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다음해에는 조세 삭감이 단행되었다. 그것은 미국 경제정책의 분기점이었다. 이전엔ㄴ 정부의 경제 부양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면 뉴딜 시기처럼 모든 사고와 행동이 공공지출로 쏠렸다. 이제부터 그것드르은 자극제로서의 조세 삭감에 압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1980년대에는 케네디의 조세 삭감이 풍족한 사람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보상을 내포하는 레이건의 조세 시책에 대한 선구로 간주되었다. 케네디 경제학자들은 최고의 그리고 정확하게는 가장 정평 있는 공급 중시 경제학자Supply-Side Economist로 간주될 터였다.
  케네디 시절에는 그 밖에도 중요한 경제적 이니셔티브가 있었다. 하나는 국무차고나 조지 불이 주도한 국제무역 자유활ㄹ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유럽의 경제적, 정치적 통합에 대한 지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조치들은 역사의 큰 흐름을 따르고 있었으며, 몇 가지 요소들은 선진 산업국가들 사이의 보다 긴밀한 협력을 지향했다. 하지만 교역 문제에 관해서는 그 주제의 특이한 수사법을 따랐다. 늘 그렇듯 사전에는 통상협상의 결과가 열심히 논의되어 중요하다고 주장되지만, 사후에는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통상협상이란 보통 더 큰 조류에 실린 작은 파도들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또한 내가 이미 말한 가난한 나라들ㅇ르 돕기 위한 프로그램이 새로이 활발하게 주장되었다. 나는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인도로 건너갔다. 라틴아메리카의 협조적인 세력인 (진보를 위한 동맹Alliance for Progress)과 세계 무대에서 아프리카 신생국들의 역할에 대한 솔직한 인정 역시 새 행정부의 사고와 행동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결과는 관심에 못미쳤다.
  여기에서 정부의 상징적인 행동과 실제적인 행동은 구분되어야 한다. 케네디 시절의 전혀 알려지지 않은 국제적 이니셔티브는 평화봉사단의 전개였다. 가난한 나라달에게 언어 교육에서 수의학에 이르는 다양한 봉사를 제공하기 위해 열성적이고 재능 있는 젊은이를 파견함으로써 좋은 홍보 효과를 거두었음은 물론이고 좋은 인식을 심어주었다. 봉사단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 도움은 적잖은 혜택이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평화봉사단이 세계에 심어준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 및 미국에 대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전체 청년 중 이 경험에 참여하고, 거기에서 가르침을 얻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글너 식으로 도움받고 봉사받은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의 비율이 그렇듯이 말이다. 평화봉사단은 (또한 진보를 위한 동맹도) 상징적으로는 화려했지만, 처치하기 곤란한 큰 문제들에 대해서는 제한된 효과밖에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커다란 경제적 중요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점이 거의 인식되지 못한 국내 행동이 케네디 시절에 개시되었다. 그것은 인권운동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내가 충분히 강조했듯이, 경제사의 긴 도정에서 봉건주의-주민의 혹은 대부분의 농촌 지주에 대한 봉사의 고립화-만큼 성공적으로 경제발전에 저항한 세력은 거의 없다. 봉건주의는 그렇게 속박된 사람들에게 경제적 진보의 실질적 바탕인 개인적 창의와 책임의식, 보다 폭넓은 공업적 기회 및 보상, 필수적 교육 등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본질저으로 현재와 과거 양쪽 모두의 포로였다. 그리고 상당 정도는 그들의 고용주나 상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포로 생활은 일하는 사람들이 인종이나 피부색으로 인해 정치적 권리의 행사에서 비롯되는 변화의 기회를 부정단한는 경우에 더욱 효과적이다. 요체는 명확하다. 남북전쟁은 노예제 자체는 종식시켰으나 봉건구조는 끝장내지 못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 체제는 무너지고 있었다. 농업 생산의 기계화, 특히 목화 재배의 기계화에 의해 초래된 경제적 변화가 일꾼들을 이전의 사회, 경제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북부의 산업지대로 향했다. 그리고 이제 인권운동-양질의 교육 기회 추구, 법적으로 보장된 분리와 차별에 대한 공격, 투표권 요구, 구토지계급과 그 후손ㄷ르의 자기 중심적인 정치적 지배의 종식-이 메이슨 딕슨선Mason-Dixon Line(자유주와 노예주의 분계선으로 간주되던 주경계선) 이남에 공업적 기회의 확대와 발전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운동은 또한 남부의 주들, 보다 특별하게는 셰어크로퍼(남부의 물납 소작농)들이 과거의 노예들처럼 도망쳐간 북부 대도시의 가난에 빠져 있는 노동계급을 처음으로 가시화시켰다. 미개한 주거 상태에서 교육받지 못하고 근근히 생활하며, 인권도 무시당한 채 시골에 분산되어 있었을 때에는, 남부의 가난한 사람들은 시야에서도 관심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오늘날 농촌 지역의 비특권층과 같다. 이제 대도시에 사는 이상 그렇게 호락호락 무시당할 수는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언급하겠다.
  하지만 요점만큼은 강조해두어야겠다. 인권운동이 인간화, 문명화 효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정당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경제적 혁명이었다. 오늘날에는 당연시되고 있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이전 시대에 남부 주들의 경제는 매우 되쳐져 있었다. 그들이 공화국의 나머지 지역에 비해 가난한 주로 남아 있으리라는 생각이 당연시 되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남부 도시들-애틀랜타는 그 두드러진 예이다-은 강력한, 그리고 증강되어가는 경제적 동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경제학은 과세, 공공지출, 이자율, 시장체제와 관련된 분야를 다루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2세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그의 경제적 직관 혹은 영향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케네디와 존슨 시절의 경제적 향상에 대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명백한 공헌은 제2의 해방과 그에 따른 흑인들의 보다 폭넓은 경제, 사회적 참여 운동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부 봉건 경제, 정치 구조의 쇠퇴와 몰락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교훈이다. 경제문제들에 있어서는 어떠한 이니셔티브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의 궁극적 효과를 알기 위해서는 선언된 목적 그 너머를 잘 살펴야 한다.
    19 가난과의 전쟁 그리고 전쟁
  린든 존슨이 정식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취임하던 1965년에 미국의 경제문제 및 미국의 안녕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교역 상대국들의 경제문제가 해소된 듯한 조짐이 보였다. 경제는 건전한 속도로 확대되고 있었으며, 실업은 노동력의 5퍼센트로 감소하고 있었다(그 당시에 누군가가 지적했듯이 이는 95퍼센트가 일자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읽혔다). 물가는 조금씩 오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빚어질 전망은 없었다.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심각하면서도 성공적인 그 해의 노사 협상이 이 위험을 제압하는 듯 보였다. 케네디 행정부의 막바지에 국제수지에 부정적인 추세가 뚜렷해졌으며, 그에 따른 금 유출도 빚어졌다. 나는 인도에서 돌아온 후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우려를 표명하는 논문을 썼다. 그러나 행정부의 다른 경제학자들은 그 경향을 사소한 것으로 보았다. 나중에 신중히 검토한 결과, 실제로도 그렇다는 것이 밝혀졌다. 해외의 경제회복과 함께 미국이 간구하던 수출의 회생이 주요 원인이었다.
  앞 장 말미에 언급했던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전반적으로 번창하는 상황 한가운데에서 여전히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사는 매우 많은 미국인들 말이다. 달리 구제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폭력적으로 거리로 뛰쳐나올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근년에 몇몇 도시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가난은 경제학과 경제정책의 주류에서는 중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학 교재에서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지 못하며, 학술지들에서도 많은 관심을 얻지 못한다. 주요한 경제 토론의 단골 메뉴는 소폭의 이자율 변화나 재정 적자이지, 도시와 농촌에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가난은 아니다. 경제학자들은 여기에서도 자기네 업종의 보다 지저분하고 까다로운 문제는 회피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드러낸다. 가장 유력한 경제학의 전통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동정이 우아하게 표현되어 있을지 모르나, 그 주류에서는 그들을 돕기 위한 정책과 조치가 논의되지 않는다.
  린든 존슨은 존 케네디 이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민감했다. 케네디는 가난을 직접 겪어본 적이 없었지만, 린든 존슨은 젊은 시절에 가난을 폭넓게 목도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케네디 대통령 서거 후 몇 주가 지난 1963년 10월, 나는 워싱턴에서 행한 한 연설에서 당시의 일반적 복지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에 그 일부분을 인용해보겠다.

  분명 기본적 논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한 가족의 가장이 컴벌랜드 고원에서 깊은 궁지에 빠졌다면, 혹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면, 혹은 쓸 만한 기술이 없다면, 혹은 건강을 상했다면, 혹은 어린 시절을 (한 도시의) 슬럼가에서 보내야 했다면, 혹은 니그로(아직도 공인된 어법)라서 기회가 허용되지 않았다면, 그러면 그와 그의 가족은 가난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아무리 풍족해지더라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내나 그의 아이들을 구제하는 수단, 즉 자원을 개조하고 개발하기 위한 투자, 노동자들의 재배치 지원, 새로운 산업에 대한 지원, 교육의 대폭적인 개선, 훈련과 재훈련, 의료와 정신적 치료, 청년들의 고용, 카운셀링, 도시의 레크레이션 시설, 주택, 슬럼 축소, 공민권의 완전한 평등 보장 등이 공적인 노력과 공공 기금을 필요로 하리라는 점도 분명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가난은 퇴치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단순히 성장률을 높이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그것이 주문이나 의식의 발닦기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같습니다.
  내가 아는 한, 세상 어디에도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정말로 가난한 곳은 없습니다. 내년부터 가장 소득이 낮은 군(혹은 도시 슬럼 지역의 경우 같은 인구이더라도 더 한정된 지역들)100개를 선정하여 그곳들을 교육 특구로 지정합시다. 그곳에 아주 우수하고 포괄적인 학교 시설을 갖추어(아니면 다시 갖추어)놓습니다. 초등 및 중등 학교와 교통시설 그리고 최고의 레크레이션 시설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 사업에 필요한 건설 인력의 고용은 환영받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평화봉사단 방식으로 하되, 보수를 듬뿍 주면 젊고 우수한 교사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근무할 자세를 갖추고, 최악의 슬럼가도 맡을 수 있을 만큼 강인하고 잘 훈련되었으며, 할란 군이나 할렘에 가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 말입니다.

  린든 존슨은 내 의견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비록 앞서 언급한 자신의 관찰을 포함해서 그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여타의 요소들이 있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문제들에 있어서 너무나 쉽게 독창성이나 설득력을 요구한다. 
  1963년 말, 백악관 참모진의 경제학자들이 빈곤을 물리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검토하기 위한 시안을 짰다. 시안만큼 낮은 비용으로 자유주의의 경제적 양심을 달래줄 수 있는 것도 없으리라. 존슨 대통령은 이 제안을 기각하고, 대신 10억 달러를 도시와 농촌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 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에 돌릴 것을 제안했다. 나는 평화봉사단 본부의 사전트 슈리버와 함께 일하는 작은 기구에 들어갔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계획을 편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중에 입법 명령에 의해 (경제기회보장국Office of Economic Opportunity) 이 정식으로 조직되자 나는 감독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직책은 내가 베트남전에 반대함으로써 더 이상 위원으로 있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 끝이 났다. 존슨이 임명을 철회했던 것이다. 그것은 국내 목적과 군사훈련 사이의 갈등에 대한 상징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곧 더 이야기하겠다.
  소위 구빈 프로그램이란 것은 일종의 잡탕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혹은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한 불확실성은 많은 것들 중에서 어떤 일을 함으로써 부분적으로 해소되었다. 아니면 지역사회 활동 프로그램들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행을 완화하고 궁핍에서 탈출할 것을 보장하는 제안을 내놓도록 유도함으로써, 부분적으로 그들 자신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다. 필요한 자금- 아동들의 초기 학교 교육 및 기본적 실용 기술을 포함한 교육에 소요되는 그리고 사회 시설들의 획득에 소요되는 자금- 은 연방정부에서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나중의 시행 과정에서는 이 자금의 흐름이 지방 정상배들을 부당하게 끌어들인 것으로 밝혀진다. 그들이 자치적인 빈민들로 광범위하게 대체된다.
  구빈 프로그램은 초보적, 기본적 작업 기술의 훈련을 위한 직업훈련단 job Corps 으로 확대되어갔다. 궁핍한 학교들과 그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이전의 내 제안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는 교사단을 포함해서 또 다른 이니셔티브들도 있었다. 모두가 목적은 가상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불행하게도 가난은 여전했다. 
  극히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원인이 되었다. 첫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제공하는 데 대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뿌리깊은 반대였다. 둘째는 베트남 재앙에 대한 도움을 포함한 배려와 자원에 대한 군부의 선차적 요구였다. 그토록 분명하게 우선 순위가 뒤죽박죽된 적은 거의 없었다.
  가난에 관한 한 소득보다 더 뚜렷한 대안은 없다. 반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돈이 악영향을 끼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불로소득이 불행한 이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하면서 기껏해야 고결한 동정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도덕적 위험뿐만 아니라 실제적 위험도 인식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일보다는 공공 재원에서 나오는 돈을 선호할지 모르며, 그것은 경제체제의 사활적 핵심을 뒤흔들어놓게 될 의타심만 조장하리라는 것이다. 
  이 위험은 풍족한 사람들이나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위험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게으름, 소위 레저라는 것이 개탄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는 유한계급을 형성함으로써 격이 높아진다. 노련하게 레저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동정을 받을지언정 비난은 받지 않는다. 그들은 멋진 인생을 사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후원자로서 국가의 예술적 혹은 문학적 우수성에 기여한다. 그리고 새로움과 다양성, 거침없음으로 인해서 칭송받는, 아니 축복받는 스타일과 개인적 행위의 모범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들의 방종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 있다 하더라도 많지 않다.
  가난한 이들의 처지는 아주 다르다. 그들에게는 불로 소득이 도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유해하다고 간주되며, 그들의 소득이 허락할지 모르는 개으름은 더더욱 그렇다. 이 소득과 개으름은 대안이 될 만한 고용 기회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한데도 용서받지 못한다. 풍족한 사람들에게는 칭송의 대상이던 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경제학이 보다 운좋고, 똑똑하며,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회 성원들의 요구와 기분에 순응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충분히 지적되어왔다.이 점은 여기서 더욱 명백해진다. 1960년대의 (구빈 프로그램)-널리 통용된 용어로는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의 공헌에 대해서는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 많다. 그러나 한 사람의 미국인도 참을 수 없는 빈곤 상태에 방치되지 않으리라는-다른 산업국가들처럼 아무도 추락하도록 방치하지 않을 믿음직한 안전망이 설치되리라는-보증은 종적을 감추었다.
  비용은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수혜자들은 그런 도움을 더 많은 보수가 보장되는 고용에 대한 대안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비용이나 도덕적 손상도 (위대한 사회)와 린든 존슨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한 군사적 모험의 금전적 비용과 심각한 정신적 유산에는 전혀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성공했더라면 불가피하게 경제적 궁핍과 관계 있는 도시의 폭력에 대한 안전판이 보상으로 주어졌을 것이다.
  베트남 개입과 그에 따른 재앙이라는 현재 인정된 과오에 이르게 된 요인은 한 가지가 아니다. 군사적 오도와 과실은 산재해 있었다. 특히 울창한 열대 정글에서 전투를 치러야 하는 유례없는 난관은 예견되지 못했다. 이것이 1962년에 내가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실정 조사 임무를 부여받고 베트남에 갔을 때에 군사 브리핑을 통해 받은 인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에서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던 공군력 유효성의 한계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냉전의 흐름과 그것의 빈번한 정신병적인 현상 속에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구소련, 중국, 동유럽의- 가진 목적의 불변성에 대한, 그리고 공산권 동아시아를 향한 그들의 집착에 대한 과장된 견해도 놓여 있었다. 여기에는 불멸의 도미노 이론이 나왔다. 그것은 사상을 지배하는 메타포였다. 게다가 어떤 동기이든 베트남에 대한 외국의 개입은 베트남이 전에 겪고 이겨낸 외세- 중국, 일본, 프랑스- 지배 시절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미국은 그것을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모든 과오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가혹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경제적, 정치적 판단이었다. 공산주의, 즉 포괄적인 사회주의는 가장 미개한 행정기구를 가진 최빈국에서는 가능한 것일 뿐 아니라 미래의 파도로 생각되었다. 자본주의를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들에게 공산주의는 불가항력으로 여겨졌다. 분명히 군사적 대항력에 의해 서만 저지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우익 편집증의 토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래 전에 확립되어 있었다. 감정이 사상에 침투해 들어가는 방식을 고려해보면, 이는 어쩌면 불가피했다. 그러나 공인된 경제적,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치경제적 견해는 광범위한 지지와 동의를 얻고 있었다. 어떤 경제, 정치 체제도 1960년대 중반의 공산주의가 향유했던 정도의 경외와 존경을 누린 적이 없었다. 베트남이 이 엄청난 체제에 들어간다면 동남아시아의 나머지 지역도 무너질 것이었다. 이 위협은 계속해서 인도와 파키스탄 및 아프리카로 확산되어 나갔다. 
  상대적으로 미개한 나라일수록 상대적으로 초보적인 무기를 가지고 전쟁을 치르게 된다. 정글에서는 특히 그렇다. 여기에 대해서는 수세기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의 경제생활은 훨씬 더 정교하고 복잡하다. 공산주의는 자질을 갖춘 공장 경영인과 훈련받은 노동자가 없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그 점에 관해서라면 산업시설이 없어도 마찬가지이다. 미개한 나라들은 사회주의가 요구하는 복잡한 공적 행정기구를 가지지도 못했고 창출하지도 못했다. 이 모든 것이 무시되었다. 가난한 나라 문제들에 대해 꽤 많은 경험을 지닌, 또는 문제 제기를 좋아하는 우리들의 이의 제기 역시 무시되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판단에 대한 회의와 결론에 대한 기탄 없는 거부가 혼합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는 과오를 저지름으로써 초래된 보다 큰 귀결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구빈 전쟁에 돌아갔을 정치적 활력과 재원을 모두 군부가 요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 대단히 중요한 사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전자에 바쳐졌을 연설과 에너지가 베트남전 반대에 돌려졌다는 점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원조를 회피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책은 전쟁에 대한 보다 높은 요구를 내세우는 것이다. 베트남전 이전에도 이런 현상들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에 연방거래위원회와 클레이턴법 그리고 여타의 기본적 개혁을 가져다준 우드로우 윌슨 Woodrow Wilson의 시대를 마감하게 만들었다. 제2차세계대전은 뉴딜 프로그램에 쏠려 있던 국민적 관심을 앗아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Franklin D. Roosevelt 의 연설 속에서 뉴딜 박사 Dr. New Deal 가 승전 박사 Dr. Win-the-War 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국내 개혁을 제한하고, 수많은 개혁가들을 공산 음모의 공작원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데에,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에 열중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데에 한국전쟁은 기여를 한 바 있다. 이제 베트남 전쟁이 똑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공공연한 폭력과 죽음은 동반하지 않지만, 레이건 행정부의 군비 증강과 함께 그대로 반복될 것이었다. 그 군비 증강은 장래에 대국민 사회 지출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예산 적자를 유산으로 남기게 된다. 거액의 군사 지출, 특히 정밀 무기에 대한 지출이 국민들 가운데 안락하고 풍족한 계층에 보답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빈곤층의 성질을 나쁘게 만드는 지출보다야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주장한다. 
  나는  1968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유진 맥카시 Eugene McCarthy 상원의원의 지지자로 적극 참여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의 플로어 매니저(후보자를 유리하게 이끄는 진행자) 로서 그의 후보 지명을 도왔다. 그 논쟁적이고 여러 모로 중차대한 행사에서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논의의 중심이었던 빈곤층 문제의 해결책들은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이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뿐 아니라 자유주의 성향의 사람들에게서도 그러한 관심을 제거해버렸던 것이다. 사회 논리와 군사 논리의 대립에서 후자가 완벽하게 승리했다.
  전쟁이 잦아들던 1972년 선거에서는 빈곤 문제가 조지맥거번 George McGovern 상원의원에 의해 일시적으로 공적 토론에 복귀되었다. 민주당 후보였던 그는 밀턴 프리드만 Milton Friedman 교수가 처음 주장한 부의 소득세 수정안을 제안했다. 이 안은 미국인에게 소득의 기본 토대를 제공한 것이었지만, 부결되고 말았다. 어느 정도는 민주당 내부에서 가해진 공격에 의해서였다. 자유주의 신임장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우위에 두었던 전 부통령 허버트 험프리 Hubert Humphrey 는 그 안을 예비 선거의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한때 많은 가능성이 있는 듯이 보였으며, 여타의 선진 산업국가들에 파트너를 가졌던 그 제안은 영원히 매장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지비는 계속해서 지급되었지만, 사회적 권리라기보다는 제한적이고 어정쩡한 적선이었다.
  마침내 베트남전은 종식되었다. 미국의 패배가 비교적 솔직하게 인정되었다. 그때는 이미 (위대한 사회) 는 죽은 지 오래였다. 창시자 린든 존슨 역시 죽었다. 케네디 이니셔티브를 훨씬 능가한, 그리고 지금은 명백한 경제적 보상을 만들어낸 인권운동에 대해 지속적이고 설득력 있는 지원을 한 그는 사회적으로 가장 영민하며 정치적으로 가장 유능한 현대의 대통령들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린든 존슨도 그리고 그의 역사적 지위도, 가장 큰 과오의 산물이었던 한 전쟁에 의해 무너졌다.

    20 어두운 시절
  역사가들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에서 1960년대 후반에 이르는 시기를 세계경제의, 더 구체적으로는 풍요한 산업국가들의 호황기였다고 주장한다. 앞 장에서 말했듯이 심각한 불평등이라는 문제가 특별히 미국에 계속해서 존재했지만, 역시 그 장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기존의 경제적 관심에서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에는 경제적 실적에 대한 자비로운 평가가 종말에 이르렀고, 성공적 실적 그 자체도 끝이 났다.
  큰 폭의 실업과 상대적으로 낮은 경제성장 및 지속적 인플레이션이 미국의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스태그플레이션)- 심각한 실업과 고통스러운 물가 상승을 동반하는 정체 경제- 이라는 말이 하나의 통용어가 되었다. 게다가 세계경제 무대에서 미국이 눈에 띄게 쇠락하기 시작한 시기를 정한다면, 그것 역시 1970년대라는 우울한 10년 안에 있을 것이다. 
  네 가지 요소가 미국의 경제적 안녕에 상충되었다. 첫째는 물가에 대한 임금의 압력과 임금에 대한 물가의 압력- 이제는 상투어가 된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 과, 이를 성과적으로 다루는 권위적인 경제학에 대한 염증이었다. 임금과 가격에 대한 직접적인 관여가 정치적으로 성가시기 때문에, 이와는 상반되는 거시경제 정책- 조세, 공공지출 및 특히 금융적 조치- 이 선호되었다. 전자에 대한 열의는 1960년대 말에 시들해졌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는 아예 방치되어버렸다. 
  둘째, 에너지 가격이라는 극히 구체적인 문제였다. 중등에서의 정치적, 군사적 재난과 석유수출국기구 OPEC 의 돌발적 세력 과시로 에너지 가격은 달러 가치로 대략 세 배가 되었으며, 이는 다시 전체 경제에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했다.
  그 영향은 자세하게 인식되었다. 그래서 당시에 (오일 쇼크) 에 대한 언급이 두드러지게 논의되었다. 미국경제의 저조한 성과에 대한 책임을 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편의가 절대적이었다. 아랍인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 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책임 회피의 유일한 길은 아니었다. 인플레이션이 린든 존슨의 적절하지 못한 과세로 베트남전에 대한 시의적절한 대응의 실패로 위세를 얻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인플레이션은 고약한 바이러스 전염처럼 체제 내에 들어가도록 방치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도피주의적 넌센스였지만, 널리 받아들여졌다.
  셋째로 1970년대에는 연방정부에 대한 국민의 태도에 현저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케네디와 존슨 시절 워싱턴은 국민의 복지에 있어 강하고 현실적인 영향력으로 간주되었다. 1969년 리처드 닉슨이 취임했을 때, 그리고 특히 1972년 그가 재선된 후에 이런 인식을 바꾸는 것이 그가 지닌 요지부동의 재주였다. 그것은 때로는 연설에 의해, 또 때로는 행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워터게이트 추문과 백악관 테이프 등을 비롯한 닉슨 정부의 추잡한 과정에 대한 막대한 양의 정보는 정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다. 그것은 이제 국민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부정하고 진부하며 그리고 공익에 대한 음모의 면모를 지닌 것이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1976년 지미 카터 Jimmy Carter가 워싱턴의 정치, 관료적 기성 체제로부터 조국을 구하겠노라는 약속을 한 후에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그 뒤를 이어 레이건 시절에는 정부에 대한 보다 강력한 공격의 길이 열렸다.
  마지막으로 그 10년간 세계경제에 있어서 미국의 경쟁적 지위가 축소되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드러났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이야기하겠다.
  이 시절에는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이 인플레 압력으로 널리 인식되지 않았는데, 극적인 예외가 한 있었다. 그의 첫 재임 기간 초기에 상당 폭의 물가 상승을 겪은 다음에, 그리고 1972년의 재선을 맞이한 시기에, 리처드 닉슨은 그의 보수적 조언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망설이지 않고 행동했다. 재선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받으며 망설이지 않고 행동했다. 재선에 대한 그들의 열의는 대단히 강했다. 따라서 1971년 여름 모든 가격과 임금을 철저히 동결했다. 이 조치는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당면 목표에 훌륭히 기여했다. 1971년과 1972년 사이에 소비자 물가는 안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1973년 선거에서 이겨놓은 참이었으므로 통제는 신속히 철폐되었다. 백악관 안이나 가까운 곳에 있는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동기를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선거는 결판났으니 자유시장을 회복하겠다는 의도였다. 그것은 최근의 가장 냉소적이며 성공적인 정치 행위들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졌다. 
  이로 인해 정치학이 명망 있는 경제학을 극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아무튼 이 행위는 리처드 닉슨과 그의 시대에 관한 결코 적지 않은 역사책들에서 거의 관심을 얻지 못하고 있다. 1972년 선거전에서 조지 맥거번은 앞에서 보았던 대로 빈곤층에 대한 최소한의 소득을 제안했다는 이유로 격렬하고 효과적인 공략을 당했다. 리처드 닉슨이 자유시장을 방치해둔 데 대해서는 아무런 비난도 없었다.
  1976년에는 워터게이트 추문, 진부한 부정으로 인한 부통령 스파이로 애그뉴 Spiro Agnew 의 해임, 탄액을 피하기 위한 리처드 닉슨의 사임과 후계자 제럴드 포드 Gerald Ford 에 의한 그의 사면 등의 여파 속에서 민주당이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통제에서 풀린 물가는 꾸준이 오르고 있었고, 생산, 즉 국내총생산은 1963년부터 1975년까지 실질가치 면에서는 본질적으로 변화가 없었다. 추문들과 함께 경제의 빈약한 실적이 공화당 패배에 기여했다. 그 후 지미 카터 시절에는 모든 것이 악화되었다. 
  카터 대통령은 최소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이래 그 어떤 대통령보다도 더 적은 경제학 지식 보따리를 들고 워싱턴에 왔다. 그러므로 그의 귀는 거의 우레가 없을 정도로 자신의 자문단에 있는 경제 전문가들에게 열려 있었다. 이들은 높은 전문가적 위신을 지닌 학자들로서 당시 포스터케인즈파의 정설에 몰두해 있었다. 임금과 물가의 안정 상태로부터 가격에 의한, 구체적으로는 에너지 가격의 인사에 의한 강한 상승 압력을 저지하기 위해, 그들은 변함없이 조세 및 지출 정책과 보조적으로 (당시로서는 특별하게) 금융정책에 의존했다.
  임금과 가격의 안정화를 향해 몇 가지 공헌한 제스처가 취해졌다. 당시의 소위 임금 물가 가이드 라인이란 것을 향해서 말이다. 이것들은 효과가 없었다. 유류를 배급해서 유제품의 국내 가격을 통제하자는 제안은 임바고와 외부 공급통제에 대한 당연한 대응이었으나, 즉석에서 기각되었다. 나는 유가 위기가 절정에 다다른 1979년 여름,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경제학자 회의에서 간단한 가솔린 배급 계획을 내놓았다가,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당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단체들 주의 하나인 컨퍼런스 보드 Conference Board에서 온 한 저명한 경제학자는 그날의 모임에서 1980년 여름과 가을 동안 보정적 후퇴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언했다. 그는 이 시기가 대통령 선거 유세 및 선거와 겹친다는 사실에 유의하지 않았거나, 혹은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 같다.
  소비자 물가는 1978년 12월에서 1979년 12월 사이에 13.3%가 올랐으며, 다음해에는 12.4%가 올랐다. 금융정책에 극히 중요한 역할이 맡겨졌다. 은행들에게 자금을 대부하는 연방준비은행의 할인율은 1979년에 11%로 인상되었으며, 선거가 실시된 다음해에는 12%에 접근했다. 연방준비은행이 그렇게까지 의미 있고 강력해 보인 적은 결코 없었다. 실업은 1979년 노동력의 5.8%로 보통 수준이었지만, 다음 해에는 7.1%로 치솟았다.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카터는 재선에서 확실하게 패배했다. 그를 지도한 경제학자들은 명망이 손상당하지 않은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훌륭한 경제학자란 경제정책의 확정된 한계 내에서도 좋은 평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정치적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대통령으로서 지미 카터는 고결하고, 본능적으로 동정적인 사람이었다. 인권에서 중동 평화에 이르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그의 영향은 매우 강력했으며, 그의 기본적 성실성과 휴머니티는 퇴임 이후에도 변함없이 확연하다. 그는 자신의 조언자들로부터 더 나은 운명을 부여받았어야 마땅했다. 
  어디에선가 경제생활의 많은 부분이 분위기 문제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 적이 잇다. 공적 분위기가 낙관적일 때- 흔한 말로 상승무드일 때- 사람들은 지출하고, 기업은 투자하며, 결과적으로 경제는 성장한다.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고 침울할 때에는 투자, 생산, 고용 및 증권시장 가격에 심한 위축 효과가 미친다. 측정된 소비자 신뢰도는, 그 결과에 대해 주의 깊고 엄숙하며 두렵기까지 한 청중들에게 공표된다.
  하나의 결론은 공직자들은 지위의 고하를 불문하고 경제적 전망에 대해 의무적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긍정적으로 논평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논평은 경제정책의 가장 일반적인 수단이 되어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경제 운용에 어떤 평가할 만한 효과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의 이용이 방해받는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초의 오랜 경기 후퇴 겸 불황 동안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경제적 전망에 대한 낙관적 평가를 내놓았으나, 알아볼 수 있는 긍정적인 반응은 전혀 없었다. 1930년대 초에 후버 대통령이 기울인 비슷한 노력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반응은 역시 부정적이었다. 상황이 악화될 것 같지 않다면, 그토록 빈번하게 역겨울 정도의 낙관론을 펼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이런 맥락에서 지미 카터는 주목할 만한 예외였다. 1970년대 후반 경제적 전망이 어두워졌을 때, 그는 경제의 빈약한 실적에 대해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의 발언에서 (경제적 불쾌감 Economic Malaise) 이라는 말이 유행되기도 했다. 낙관적 논평이 경제적 실적을 개선시킨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듯이 그의 인사가 그것을 약화시켰다는 증거도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사는 공적 정직성에 대한 기억할 만한 공헌으로 남아 있다. 경제생활이 불만족스러웠을 때, 어떤 대통령도 어쩌면 한번도 그 비슷한 말조차 하지 않았다.
  1970년 후반의 경제정책은 국내에만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었다 외부의 교역 무대에서 국민의 경제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데 그보다 더 훌륭한 방도도 없었을 것이다. 연방준비은행의 조치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잇다. 우대금리-최우량 차입자들에게 적용하는 금리-는 1979년 12.5%를 조금 웃돌았고, 1980년에는 평균 15.3%를 기록했다. - 레이건 시절에는 그 위에 대폭적인 추가 인상이 있었다.
  그 같은 비용의 결과는 늘 뻔했다. 경제적 목적을 위한 차용, 특히 설비의 교체 혹은 개선을 위한 차용은 더할 나위 없이 비쌌으며, 그로 인해 전국 산업체의 기계 장비는 퇴화가 촉진되었다. 이런 현상은 미국이 외국의 보다 효율적인 제조업체들로부터 가중된 경쟁에 직면해 있는 시기에 빚어졌다. 1970년대 초에 석유제품이라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 수입품의 달러 가치가 다소 완만한 증가세를 보였다. 1977년을 시발로 강력한 상승 쇄도가 있었다. 자동차 수입이 크게 증가했으며, 수많은 여타 수입품들이 가속적으로 늘어났다.오랫동안 자신이 사용하고 소비하는 산업제품의 1차적 공급원이던 미국은 자구 시장에서 이제 더 이상 경쟁력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갈수록 더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다소 극적인 일로서 새로운 경쟁국들 중에는 제2차세계대전에서 우리의 적이었던 나라들도 들어 있었다. 독일과 일본은 이제 세계 경제 무대에서 강자가 되었으며, 이탈리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산업대국들과 그들의 힘의 원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다. 하지만 일단은 1970년대 미국의 경제정책에 대한 각주는 달아놓아야 하겠다. 
  이 기간과 이후의 레이건 시절에 공적 정책으로서 정부규제 철폐라는 개념이 발달했다. 국가의 역할이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진전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시장은 이전의 지위와 권위를 회복해야 할 것이었다. 닉슨 대통령이 선거 때 필요로 했던 조치는 논외였다. 미국의 경험에서 이 개념은 신학에 가까운 조잡한 원칙 때문에, 항상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타당한 사상으로 대체하는 가운데 빚어진 과오의 확실하고도 특별히 해로운 본보기가 된다.
  은행, 투자은행 그리고 당시 악평이 나 있던 저축대부조합에 적용된 규제 철폐라는 지상의 교의를 이처럼 전반적으로 채택함으로써 초래된 귀결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다루겠다. 여기에서는 그것을 1970년대 말부터 항공기 산업에 처참하도록 혁신적으로 적용한 데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미국은 재정적으로 안정되었고, 요금은 꽤 경제적이었으며, 체계적이고 효율적이며 기술적으로 진보된 항공여행 산업을 발전시켰다. 요금과 노선 배치는 공적 기구인 민간항공 이사회에 의해 통제되었다.
  이러한 규제는 기성의 세련된 경제이론과 완전히 부합되었다. 산업의 생리상 적은 수의 기업들만 경쟁하는 분야에서는 독점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가격과 서비스의 암묵적 설정이나 제멋대로의 통제되지 않은 경쟁에 의해 야기된 파멸적 가격 인하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항공산업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규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교의가, 보다 정확하게는 하나의 도그마가 개입했다. 경쟁 구조에 어떠한 결함이 있을 지라도, 따라서 행동을 예측할 수 없거나 착취적일지라도, 궁극적으로 시장은 자비롭다는 교의였다. 요란한 팡파르와 함께, 항공사들은 노선에 대해서건 요금에 대해서건 정부의 제한에서 놓여나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기본적 양식에 대한, 심지어는 기존 경제이론에 대한 도그마의 승리였다.
  몇 가지 즉각적인 효과는 유리하게 보였다. 난관적이고 정신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설립한 새로운 회사들이 업계에 진출했다. 새 항공로가 공표되었고 일부 요금이 인하되었다. 일부 새 고객들은 항공여행의 명백한 장점들에 이끌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규 항공사들은 파산하거나 흡수되었다. 그 회사와 투자자들이 자상 교의의 첫 희생자였던 것이다. 곧 기존 항공사들도 곤경에 빠졌다.
  설립된 지 오래된 회사들-(이스턴 에어라인스)(판 아메리칸)-은 하릴없이 파산하여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살아남은 항공사들 사이에 파산은 풍토병 같은 것이었다. 파산을 면한 회사들은 커다란 손해를 보게 되었는데, 어떤 경우에는 재정적 후원자로 외국 항공사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구출되었거나 살아남은 항공사들은 독점이 결국 자신들에게 부여되리라는 초보적인 희망을 가졌다.
  한동안은 노선도 요금도 난장판이었다. 경쟁이 없는 단거리 여행의 항공권 구입비는 착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둘 이상의 항공사들이 취항해 있는 장거리 요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지경으로 낮았다(거리가 멀수록 요금이 낮은 것이 일반적인 규칙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항공사에 대한 신규 투자는 손해를 보았다. 파산이나 그것의 위협은 자본의 지출에 명백한 역효과를 깨쳤다.
  항공산업의 한 측면에 대해서는 개혁에 제한이 가해졌다. 지상의 교의에 어긋나는데도 불구하고 안전 기금은 여전히 정부에 의해 강제되었다. 가장 헌신적인 이데올로기들은 비행기를 타고 다닌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들은 안전 문제에 대한 권한만큼은 국가에 위양하는 것을 선호한다.

  [주]
  1)Economic Report of the President(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92), Table B-58, P. 364.
  2)Economic Report of the President(Washington, D.C.: U.S. Gevernment Printing Office, 1982). P. 271.


      21

    패배로부터의 승리
  최근에 미국경제가 처한 어려움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 되어왔다. 이와 함께 독일과 일본의 월등한 성과도, 그리고 이탈리아의 꽤 두드러진 경제적 성과도 충분히 논의되어왔다. 미국을 비롯한 영어 통용권 나라들의 불충분한 실적과 그들의 이전 적국들의 성공에도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취향에 딱 들어맞는 요소들에 대해 강조하는 경향, 아니 충동은 성취의 원인을 모두 고려했을 때에 가장 훌륭하게 불식된다.
  맨 먼저 자세와 열망의 문제가 있다. 미국과 그 연합국들은 제2차세계대전으로부터 승자의 우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독일과 일본은 참담한 패배 속에 깊이 빠져 있었으며, 좀더 갑작스러운 일이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에게 명백히 너무도 명백히 필요한 것은 성공의 지속이었으며, 독일과 일본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와 개선이 있다. 그러니까 한편은 만족의 심리였고, 다른 편은 열망의 힘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실적에 차이가 있게 한 그 밖의 원인들은 지난 세기를 조금 넘어선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날짜들 중 최소한 하나 정도는 정확이 알 수도 있다. 영어 통용권 국가들에게는 1776년이 결정적인 해였다. 이 해는 영국에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간된 해였다. 스미스는 중상주의 시대의 수없이 많은 교역상의 제한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국가는 경제생활에 천부적으로 위협적인 존재라는 영속적 인상을 심어놓았다. 당시에 유난히 많은 개입을 했던 국가는 실제로 그랬다. 스미스 이후, 영어 통용권 국가들에게는 정부와 실업계가 원래부터 상충되는 관계로 여겨졌다. 따라서 경제적 성공의 과정에서 사기나 꺾어놓는 정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영국과 미국의 현대 정치는 수사적으로는 물론 실제적으로도 이 문제를 중심으로 돌고 돌았다. 적절한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사람들과 기업을 그 고유한 최적 목표를 성취하도록 방임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요란스러운 대립 관계에 놓였다.
  독일과 일본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통이 지배했다. 일본에서는 특히 그랬다. 두 나라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칼 마르크스의 영향력, 특히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집행위원회'라는 그의 불멸의 공식이 갖는 영향력을 반영했다. 경제에 기여한다는 의미보다는 더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했다. 정부는 경제생활, 실업계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에게 조직적으로 속해 있다. 일본의 대학에서는 아담 스미스의 혈통인 고전파 경제학자들보다 마르크스가 훨씬 더 잘 읽힌다. 독일의 경제, 정치, 문화, 사상에 있어서도 헤겔과 마르크스로부터 강한 역사적 전통이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은 주요 경제적 역할을 국가에 부여한다.
  실제적 관점에서 이것은 정부가 공공사업-다소 경망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소위 하부구조-에 대한 지원 투자의 필요성을 예견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정부는 시장 지향적인 기업체로서는 너무 많이 드는 비용이나 가망성 없는 수익으로 인해 수지가 맞지 않는 연구 및 개발에 투자해야 한다. 소위 산업정책이라는 것이 가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와 실업계 간의 전반적으로 협력적인 태도 역시 가정되어 있다.
  미국은 그런 정책에 대해 요지부동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사실 특정한 경우에 대해서는 미국이 개철자였다. 지난 세기 초에 대규모 재원이 정부에 의해 농업에 돌려졌다. 그것은 농장 확장 사업을 포함한 다양한 연구 및 교육에 사용되었다. 보다 최근에는 농산품 가격의 지지를 통해 농민에 대한 투자 수익이 보장되었다.
  이러한 개입의 가장 주된 이유는 농업 부문에서의 시장체제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농업이라는 산업은 이미 지적했듯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고전파와 신고전파의 순수 경쟁 모델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 산업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델은 개별 농민에 의한 높은 비용의 연구를 허락하지 않는다. 정부의 개입이 없을 때에 빚어지는 시장 가격의 불안정과 그에 따른 위험이 값비싼 현대적 장비와 토지 자양제에 대한 농민 투자의 주요 장애물이다.
  농업에 관한 산업정책은 미국에서 두드러지게 성공했다. 농업의 생산성 증대는 그 수년에 걸쳐 공업의 생산성 증대를 훨씬 능가했다. 미국의 농산물은 세계시장에서 강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유급 피고용다들의 몫인 농장의 필요 노동력은 너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산업정책 일반에 대한 토론에서는 농업의 성과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어디에선가 언급했듯이, 일반적인 경제적 견해에서 농업은 외딴 세계다. 정부 산업정책의 유익함을 옹호하는 사람들까지도 농업을 토론의 주제로 삼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농업에만 독특한 것이 일본이나 독일에서는 많은 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정부의 지원, 특히 장기적으고 사적 지출로부터 가능한 것보다 산업적으로 더 광범한 효과가 있는 투자를 통한 지워은 우선적 중요성을 갖는다. 이것이 이들 두 경제가 누리는 경제적 장점을 설명해 준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산업정책의 보다 강력한 적용의 예가 있었다. 그것은 군수산업이다. 군수산업에서의 효과는 농업 혹은 독일 및 일본의 산업 전반의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역효과를 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대패한 독일과 일본은 군사적 모험이나 군비 지출을 할 엄두를 못냈다. 직접적인 전쟁의 여파속에 두 나라에는 양자 모두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효과적으로 금지되었다. 전후 수십 년 동안 독일의 군비 지출은 평균 국내 총생산의 약3퍼센트, 일본은 1퍼센트 미만이었다. 반면 미국의 군비 지출은 1952년부터 1986년까지 평균 7.7퍼센트였다. 그것은 대략 연방정부 총지출의 26.5퍼센트였다. 이들 숫자의 배후에는 극히 상이한 자원 배분이 있었다. 독일과 일본이 평시 산업에 이용할 수 있었던 것-자본, 인력, 산업의 연구와 개발, 교육, 하부구조 지원-을 미국은 군비, 특히 점증하는 신형 무기의 개발에 돌렸다. 몇몇 평자들에 의하면, 미국의 전체 공학 및 과학 분야 인재 가운제 3분의 1이 그 분야에 고용되었다. 이러한 관행은 1980년대의 군비증강 기간 동안 강력히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군사적 목적을 위한 돈과 인재의 배분은 어떤 의미에서도 민주적 의사결정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1961년 퇴임을 맞아 행한 그의 가장 오래 남을 대통령 논평을 통해, 군산복합체-정치 과정의 통상적인 민주적 권한 부여와 제한에서 독립되어 있는 군부와 산업세력의 동맹-의 점증하는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그의 경고는 정당화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뒤이은 수년 동안 군은 자신들이 개발하고 배치할 무기와 달성할 군사력의 수준을 선택하게 되었다. 문민 권력의 상층부는 동조하고 지지하는 입자이었다. 펜타곤의 문민 지도부는 자신의 기능을 군부의 결정에 대한 제한의 행사로 보지 않고, 지지와 옹호로 보았다. 의회는 군부의 위세와 군비 지출 및 그 혜택을 본 산업체의 고용에 걸린 특정 이해에 좌우되어 필요한 구매력을 공급했다. 자유주의자들은 군사적인 목적과 효율적인 지휘를 인정함으로써 자신들이 실제적리며 견실하고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해썼다.
  만약 어떤 사회적 실체가 무엇이 생산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밖에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에 대한 통제권, 그리고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자금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면, 그 권력은 완전하다. 그것에 불편한 제한을 가하는 민주주의는 거절된다. 미국의 군산 세력이야말로 그러했다.
  독일과 일본은 이러한 종류의 세력으로부터 거칠 것 없이 자유로웠다. 군비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제한되었으며, 그 대가는 방금 언급한 경제적 이점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미국경제의 커다란 확장력이었던 군비 지출은 이제 미국경제의 장기적 발전에 대한 강한 제한 요소였다. 독일과 일본 국민들은 자신들의 패배에 대한 명백한 경제적 수혜자들이었다. 독일과 일본이 지닌 강점의 또 다른 요소는 현대법인기업에 있어 경영의 동력이 가지는 성질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연륜이 생기고 경영 규모가 커지면서 법인기업의 경영권이 주주들로부터 경영자들에게 넘어가는 것은 오래 전부터 관찰되어온 사실이다. 명목상 주주들의 대변자인 이사회는 실제 그것을 선택하는 경영진의 수동적 도구가 된다. 그 다음에는 놀랄 것도 업이 수익 극대화가 시장체계의 공인된 동기가 되므로 경영진은 고유의 목표인 수익 극대화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수익의 극대화는 타당한 직접 목표로서 힘도 없고 얼굴도 없는 명목상의 소유자인 주주들의 이해보다 우선된다. 경건한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체제 내의 개별행위자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충심으로 동의해야 한다.
  스스로를 책임지고 자신의 지위를 보호하는 자기 이해의 종복 경영자들은 보수와 직책의 안위 및 자격 요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흡수를 노리는 적대적인 공격에 대항해서 사적 보상에 대한 경영자의 이익을 지키고, 합병이나 매수를 통해 경영권을 확대하는 일이 회사의 효율적 운영보다 우선된다. 
  경영자의 관심이 효율적 경영으로부터 멀어지면, 현대의 대규모 법인기업은 관료적 정체 상태와 내부 지향적인 관료적 부동상태에 빠지게 된다. 사고와 필요한 변화는 기존정책에 종속된다. 주도권은 조직을 통해 확산된다. 그리고 그 효과보다는 이전 사례와의 합치성이 검증받는다. 
  또한 기업 관료주의는 일거에 번성하는 냉혹한 경향이 있다. 사고라는 골치 아픈 과정은 부하들에게 떠넘기고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하는 것만큼 유쾌한 일도 없다. 그리하여 경영 기구가 자기를 확대하는 경향은 불가피하다. 
  여기에 기술된 사멸적 경향이 미국에만 특유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적절한 사례라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의 법인 기업체들은 전반적으로 노화된 상태로서 특히 일본에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훨씬 앞서서 무력화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독일과 일본 두 나라에서는 경영자의 이해와 금융 및 소유자의 이해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은행 통계를 통해 드러나며 경영은 엄중한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므로, 이기적 형태로 전락하는 경향은 대체로 불식된다. 실적과 수익에 강한 관심을 갖는 외적인 힘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공인된 명망 있는 경제학은 저항했다. 1967년 이래 수십 년간 나는 현대의 대규모 법인기업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이론과 실천적 귀결 모두에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설득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론은 이윤 극대화가 중심 과제이다. 다른 어떤 동기도 그만큼 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표를 추구할 권리를 광범위하게 부여받은 경영자에 의한 사적인 이윤 극대화와 그 귀결은 공식적인 경제 교의에서 입지가 두텁지 못하다. 공인된 경제학에 수용되지 못하면 체계적으로 무시되는 것은 여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독일과 일본 두 나라가 유리했던 또 다른 요인은 노동력 공급이라는 심각하게 오해된 문제였다. 일본의 산업적인 성공에 대해 언급할 때면, 으레 유례 없이 높은 교육 수준과 자발적 노동력을 강조한다. 미국의 교육 투자에 대한 더 큰 관심을 촉구할 때에는 언제나 일본의 이러한 장점을 언급한다.
   교육, 즉 기본적 어학 및 수학적 교양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풍부하고 극히 명백한 증거에 의해 확인되었듯이 대량 생산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이전의 경험과는 대조적으로 도시의 산업 생활에서 만족과 보상을 찾는 사람들의 훈련과 에너지이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자발적이고 순종적인 노동자가  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그러한 노동력은 원시적 농촌생활의 커다란 억압으로부터 최근에 벗어난 사람들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지적되어왔다. 즉 소농으로 일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가혹한 학대자일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그렇다. 게다가 지주의 강제적인 착취까지 있을 수 잇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외로운 생활이기 십상이다. 보수가 더 나은 공장 고용은 어쩌면 육체적 수고도 적고 도시의 사회적 지위도 월등할 테니, 말할 수 없이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이 모든 조건이 결합하여 이상적인 산업 노동인력을 창출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사황도 달라진다. 그 밖의 것들에 대한 더 큰 요구가 제기된다. 
  육체적으로는 덜 까다롭고, 정신적, 사회적으로는 보다 가치 있는 직장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세대들은 더 나은 직업을 찾아 작업대를 떠난다. 남은 사람들은 농촌의 가난에서 갓 벗어났던 이들이 생각하고 소망했던 거을 훨씬 뛰어넘는 임금과 혜택을 요구한다. 
  여기에 기술된 일련의 과정은 미국의 대량 생산 산업들에서 매우 분명하게 아타났다. 디트로이트는 그 극명한 사례다. 한때 이곳의 자동차 조립 라인과 차체 공장들은 미시간과 온타리오 주변의 농장들로부터, 그리고 더 멀리는 폴란드와 동유럽의 농촌으로부터 인원을 충당했다. 그렇게 모집된 사람들은 디트로이트 시에서 이제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육체적으로나 금전적으로 보다 매력적인 직자을 찾아 옮겨갔다. 새로운 이주의 물결이 그 자리를 메웠다. 이들은 애팔래치아 고원-가난한 백인들-에서, 다음으로는 디프 사우스(조지아, 루이지애나 등 미국 최남부의 주들)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디트로이트는 흑인들의 도시가 되었다. 자동차 공장들에는 더이상 저임금 노동력이 없었다. 이전의 이주민이 없었더라면, 노동력은 훨씬 더 임금이 높았겠지만, 이주는 이제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 독일의 산업은 터키와 유고슬라비아에서 오는 열성적인 노동자들에 의해 충원되고 강력히 지지되었다(이외의 유럽 국가들-프랑스,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까지-에서도 그 밖의 기피 업종들뿐만 아니라 대량 생산 산업까지 외국인 채용자들에게 의존했다). 이 노동력은 고령 노동자들이 귀향하고 다른 이들이 그들의 자리에 들어옴에 따라 일신되었다. 일본은 보다 초기 단계에 있었다. 밀집한 농촌 지역 출신의 풍부한 자발적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독일과 일본은 활발한 노동력의 공급에 의해 훌륭히 뒷받침되었으며, 국내 이주민에 의해 뒷바침된 미국보다 나았다.
  이것이 계속해서 독일과 일본에 이점으로 작용하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다. 외국인이 대규모로 존재하는 현실은 이제 독일로서는 사회적 긴장의 원칙이다. 그 적대감이 산업시설에서 일하는 기존의 가스트아르바이터 Gastarbeiter(외국인 노동자)보다는, 최근에 동유럽에서 온 정치적 에미그레 emigres(정치적 망명자)들을 더 많이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현대의 가장 흥미 있는 사례는 일본이다. 일본의 농촌에서는 보충 인력의 공급이 바닥났으며, 섬나라로서의 위치와 민족 중심적 집착 때문에 합법적 이민을 장려하지 않는다. 노동력 부족에 대해 일본에서는 이미 많은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자국의 소농층에 아직도 상당한 (산업)예비군을 보유하고 있는 여타의 태평양 국가들-한국, 대만,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은 이전의 일본 시장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에서는 그리고 어쩌면 독일에서도, 노동력의 공급과 관련된 이전의 산업적 이점이 고갈되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지난 수십 년 동안 큰 도움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하나의 전시 열강이었던 이탈리아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독일과 일본이 그러했듯이 이탈리아도 제2차세계대전 후에 눈에 띄는 경제적 성공을 히루어냈다. 성장률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편이었고, 현재의 생활수준은 영국의 그것에 육박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성취의 원인을 이탈리아 정부의 경제정책이 정확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유난히 협조적인 노동조합들에게 돌리지도 않는다. 대규모 국영 콩글로머릿-IRI, INI-을 포함한 대산업체들의 특별히 유능한 경영자들에게 돌리지도 않는다. 이탈리아 성공의 원칙을 찾으려면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한다. 
  그 원천은 세 가지가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언급한 나라들처럼 새롭게 보충되는 자발적인 산업 노동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경우, 남부의 농촌 지역에서 오는 이전의 소농들, 즉 메조기오르노 Mezzogiorno가 산업 노동자가 되었다. 이들이 북부 산업 지역의 노동력을 크게 메웠으며, 지금은 북아프리카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주요 노동력이 되고 있다. 인종적인 긴장으로 간주되는 문제가 후자의 경우에서 발생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대규모 산업에서는 둔감하고 관료적인 경영의 경향을 다른 나라 못지 않게 겪고 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효율성 높은 소규모 기업들이 두드러지게 번성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수가 관의 조세와 정규 경제로부터 벗어나서 운영된다. 사실 이탈리아에서는 다른 어떤 유럽 국가보다 더 뚜렷이 칭송이 자자한 강력한 기업가 정신이 부활했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의 예술적 전통이라는 가장 중요한 점을 지적해야겠다. 이 굉장한 유산을 이용하여 이탈리아의 소비재는 디자인에서 현저한 우위를 차지했다. 또한 이 점에 의해 보편적이면서도 불충분하게 인식된 하나의 추동력을 설명할 수 있다. 소비재는 일단 내구성과 기능성이 갖추어지면, 그 다음에는 보기가 좋아야 한다. 다시 말해 시각과 패션 감각에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술자 다음에는 예술가가 필요하다. 이탈리아가 성공할 수 있었던 진정한 원칙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예술이 즐거울 뿐만 아니라, 산업적으로는 고도로 기능적이라는 사실을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다.
  예술의 기능적 역할은 열성적인 지방 출신 노동자들, 점증하는 북아메리카로부터의 이민 등과 더불어 스페인에서 현대 산업이 부활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여기에 더 오랜 산업국가들을 위한 교훈이 있다. 뉴욕, 파리 그리고 할리우드와 같은 값비싼 경제활동의 중심지들 역시 예술적 열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것이 없다면, 이 나라들은 더 작아지거나 가난해지며 혹은 존재조차 없어질 것이다. 
  모든 경제적 태도에는 경제생활에 대한 확립된 견해가 존재한다. 대중을 위해 생산한다는 것은 연기나는 굴뚝을 가진 기업체들의 견해다. 그러한 기업들이 보다 높은 기술수준으로 옮겨간 사실이 인정된다. 그러나 공장은 경제적 성취의-경제적 과정과 진보의-공인된 목표이다. 디자인과 흥취가 핵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다음 단계가 있다는 사실은 아무런 주의와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러한 제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경박하다고 간주된다.
  그런 사람들은 경제가 실제적 생산 혹은 실제적 작업하고만 관계가 있다고 본다. 다른 점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경제학은 강력하게, 아니 어쩌면 오만하게 자신의 사양화를 확인한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에서 과거의 성공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과를 보장하지 못했다. 모두 다 1980년대의 낙관주의로부터 현저한 퇴보를 경험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정부와 기업의 부패는 다양하고 때로 창의적이며 늘 그심하게 나타났다. 독일은 이전에 둘로 나뉘어 있던 국가들의 통합에 따르는 문제들과 결부되어 경기 후퇴에 직면해 있다. 최악의 경우로서, 일본은 유사 이래 가장 두드러졌던 투기 국면의 갑작스런 종식을 겪었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거대한 투기 거품이 터졌다고 표현했다. 부동산 가격, 증권 시장, 공산품 시장은 모두 청산할 날을 맞았다. 이것은 다행중의 전형적 사례였으며, 언제나 예측할 수 있는 여파였다. 장기적 영향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직접적 귀결은 유례 없이 참담했다. 
  이야기가 너무 앞섰다. 1980년대의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다.

  [주]
  1)John Kenneth Galbraith, The New Industrial State(Boston:Houghton Mifflin, 1967;4th edition, 1985).


      22

    레이건의 업적
  루스벨트와 뉴딜 시기를 제외하고 나면, 미국사와 세계사를 통털어 봐도 1980년대보다 경제, 사회적 관점에서 더 면밀히 검토된 시기는 거의 없었다. 그에 따른 판단은 전체는 아니지만, 대부분 부정적이다. 부유층 지향의 조세 삭감과 부당하게 인상된 방위비 및 연방 예산의 대규모 적자는 과오의 1차적 징표였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채권국에서 최대의 채무국, 그것도 단연 독보적인 채무국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지속적인 대규모의 국제수지 적자와 관련되어 있었다. 국가의 경제적 경쟁력은 침식되었고, 대도시에서는 사회적 긴장이 조성되었으며, 절도는 광범위하고 공공연하게 저질러졌다. 그 결과, 1990년대 초의 고통스런 경기 후퇴겸 불황으로 확대된 금융 투기와 부정 조작이 벌어졌다. 그 정치적 결산은 이렇다. 레이건의 당과 그의 직무 후계자가 권좌에서 밀려났다는 것이다. 
  전술한 내용은 '자유주의적 견해'라고 말해도 좋다. 맞는 말이다. 사실 그만한 설득력을 가진 견해도 없다. 레이건 행정부와 그 지지자들의 목적을 전제로 했을 때에 그것이 성취한 결과를 매우 과소평가한 것이다. 
  로날드 레이건과 그의 밑에 있는 사람들이 경제학과 경제정책에 대한 일관되고 명료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80년대의 경제적 과오를 지켜보기만 했다는 주장은 크게 오도된 것이다. 사실 이 시기의 경제정책은 신중히 고려되었으며, 자신들의 말에 의하면 성공적이었다. 물론 보다 깊은 목적은 은폐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현혹될 사람은 없다. 근본적인 목적은 명백했으며, 또 그것은 대체로 달성되었다.
  새 연대에 출범한 새로운 행정부의 목표가 지지자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놀랄 것이 못된다. 그들은 내로라 하는 부자들을 포함해서 경제활동에서 부족함 없이 보상 받고 사는 사람들로 구성됨으로써 다른 집단과는 뚜렷이 구분되었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개선 일로에 놓여 있던 10년간의 경제적 복지의 당연한 소산으로 등장했으며, 돈에 의해 상승된 정치적 발언권과 권력으로 인해 이제는 미국 정치에서 강력한 세력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지속적인 안정에 위협이 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국내의 현실적인 것이었고, 하나는 대외적인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둘 다 활용되었다.
  국내의 위협은 연방정부, 구체적으로는 혜택받은 집단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행사될지도 모르는 과세권이었다. 공화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많이 드는 짐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누진소득세가 부유층의 개인 수입에 대해 고통스런 요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시절, 정부는 때로는 진실로 때로는 말로만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복지를 약속했다. 
  이 약속은 이미 상당한 소득세와 관련하여 혜택받은 사람들의 안녕에 결정적인 위험을 의미했다. 혹은 그렇게 인식되었다.
  보다 깊이 제도화된 혹은 종교적인 두려움은 공산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공산주의는 사적인 재산과 소득을 공공연히 그리고 용의주도하게 파괴하고 불법화했다. 한때 공산주의는 국내에서도 가능하게 여겨졌다. 일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는 아직도 자유주의자로부터 혹은 좌파로부터 올 궁극적 위험이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력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컸다. 그것과 대등해지거나, 그것을 능가해야 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공산주의가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약해 보이는 나라들을 접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되면 미국은 심각한 위협에 놓이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든 그런 위험에 처한 국민은 보호되어야 한다. 자유세계의 지도자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이러한 가능성의 배후에는 이전에 민족해방 전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소비에트 연방이 있었다.
  레이건의 국내 프로그램은 과거 조세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미래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견지에서 비롯된다. 그것도 현저하게 일관된 모습으로 존재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능한 한 철저히 공적 책임감에서 놓여나야 한다. 그들을 위해 가능한 한 무거운 세금은 금지되어야 하고, 현재의 세금은 삭감되어야 한다. 상위소득층 때문에 망설여서는 안 된다.
  미국 정치사에서 그보다 더 성공적인 시도는 거의 없었다. 조세는 삭감되었고, 1980년대의 10년 동안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모두 증세에 대한 발언은 정치적 자살로 여겼다. 
  한편, 정부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보다 큰 국제적 두려움에 대응하는 데에 긍정적으로 사용했다.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기본적 수단은 군대라고 여겨졌으므로 군은 병력과 무기면에서 유례 없이 증강되었다. 그렇게 요구된 지출 역시 이미 풍족하게 사는 미국인들을 위한 보상으로 돌아간 것은 우연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지출이 증세를 정당화해 준다고는 생각되지 않었다. 오히려 정부 회계의 상당한 적자를 용인하는 편이 나았다.
  이번에는 적자가 사회복지비의 저하에 스스로의 권리를 가진 독립된 힘이 되었다. 그것은 아직도 여전하다. 사회복지비는 군사비와는 달리 미국을 한층 더 큰 채무 속으로 꼼짝없이 밀어넣고 있다고 주장되었다. 민간 지출의 다른 두부분은 신성불가침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파산한 금융 기관들, 특히 저축대부 조합들을 구제하고, 사회보장제도-고령연금의 준비와 보증-를 유지하기 위한 지출이었다. 두가지 모두 미국이라는 국가공동체의 풍족한 부분, 혹은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정치적으로도 발언권이 강한 부분에 봉사했다. 따라서 그것들은 어떠한 삭감 노력에서도 면제되었다. 그런 지출들은 그것들이(방위비, 조세 삭감 등)적자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한 우려를 제거하는 영예로운 역할을 부여받고 있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레이건의 경제정책 및 프로그램 전반을 고찰해보면, 형태와 목적에 있어서 그것의 일관성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풍족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정부는 눈에 띄게 효과적이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관찰되어야 할 상징적, 의식적 제한들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미국에서 시행되는 어떠한 조치가 부자들에 대한 시혜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것이 용인된다고-현대적 표현에 의하면 정치적으로 타당하다고-여겨지지는 않는다. 중간층을 거드는 것이라면 고결하게 침묵해야만 한다. 그 반대의 공인된 목적이 제한 몸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도움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공공연히 적대적인 태도 혹은 무관심하거나 무정한 태도마저도, 사회적으로 온당치 못하며 정치적으로 부적절하다. 따라서 부유층을 위한 정책이나 빈곤층에 적대적인 정책은 모두 엄폐용 교의를 갖추어야 한다. 이 엄폐물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것의 역할은 말과 상징일 뿐이라는 사실이 널리 인식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인식되어 있다 해도 위장은 여전히 위장이다.
  부자들에 대한 지원-1981년의 대폭적인 한계세율 인하-를 위해 사용된 레이건의 엄폐물은 더 많은 활력과 창의성 및 투자를 자극할 필요가 있다는 선언이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노력이 높은 한계세율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보다 극단적으로 정형화된 형태는, 조세 삭감에 의해 자유로워진 에너지가 경제활동을 고양시키고 정부 수입을 증대시키며 재정 저자를 감소시키리라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유명한 래퍼 곡선 Laffer Curve의 공헌이었다. 래퍼 곡선은 조세가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경제활동과 소득 및 조세 수입을 감소시킨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어떠한 경험적 증거도 없이, 미국은 그 한계를 넘어섰으므로 이제는 보다 낮은 세금이 많은 수입을 의미하게 되리라고 주장했다.
  아서 래퍼 Arthur Laffer 교수의 곡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래퍼 곡선의 기능은 풍족한 사람들의 세금을 낮추기 위한 목적의 위장물로 봉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를 위한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위장일지라도 그 누구에게도 별로 바람직스럽지 못했다. 래퍼 교수를 보완해준 조지 길더 George Gilder의 유명한 저술 '부와 빈곤 Wealth and Poverly'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한다.
  '물질적 진보는 불가피하게 엘리트주의적이다. 즉 그것은 부유한 사람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며 그들의 수를 증가시킨다. 그 부를 소비하는 민주적 대중들을 초월하여 부를 생산할 수 있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을 찬양하면서.'(주1.)
  그러나 이 주장 역시 널리 수긍되지 않았다. 아무리 명쾌한 책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또 하나의 엄폐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 성공적이었던 점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도움과 관련한 위장이었다. 여기에서는 소득, 아니 거의 모든 형태의 도움이 성격과 창의 및 노력에, 그리고 궁핍한 사람들의 복지에 해롭다고 주장된다. 부자들에게 더 많은 돈이라는 동기가 필요하듯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 적은 돈이라는 동기가 필요하다. 
  래퍼 교수와 길더 씨가 부자들에게 보다 큰 수익을 돌리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섰듯이, 저명한 찰스 머레이 Charles A. Murray 박사는 폭넓은 경제, 사회적 용어들을 동원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원조의 삭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고령 노동자들을 위한 연방정부의 복지 및 소득 지원체제를 전체를'폐기처분하는 것이 이상적 방침이라고 생각했다. 그 또한 다소 가혹하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실업 보상은 유지될 수 있으며 개인적인 자선 활동이 장려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얼마간의 동정의 표시는 필요했던 것이다.
  길더가 여기에 귀에 익은 자신의 목소리를 보탰다.
  '성공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이라는 박차를 있는 대로 가할 필요가 있다.'
  보다 깊은 목적이라는 망토들 위에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의 것을 덧씌웠다. 때로는 더 생생하게.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정부란 사회문제위 해답이 아니며 정부가 바로 문제다. 일화적 증거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도움이 소용없음을 말해준다. 집이 없는 사람들 중에 일부는 정말로 집 밖에서 자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그들의 독자적 자기 표현형태이다. 그는 흔연히 한 여자의 예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재원으로는 보드카 한 병에 투자하고, 식품구입권으로는 가족이 먹을 식량을 구입하더라는 것이다. 또 한번, 실질적 엄폐화는 대조적인 상징적 엄폐이다.
  레이건 대통령과 그의 경제학자들은 그의 지지자들에게 잘 알려진 또 하나의 봉사를 했다. 그 봉사에는 노동조합 세력의 격파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으로 인해 이전 시기에 인플레이션의 무던히도 골치아픈 원인이었던 물가에 의한 임금의, 임금에 대한 물가의 미시경제적 압력은 효과적으로 종식되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시도는 직접적이고 단도적인적이었다. 새 행정부의 초기 몇 달 동안 주요 공항의 항공 관제사들이 파업을 벌였다. 그들의 임무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새 행정부는 신속히 움직여 파업 노동자들을 대체시키고, 그들을 확실히 처벌했으며, 동시에 비행기가 계속 운항되도록 하겠다고 맹세했다. 행정부는 이 일을 두드러지게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난공불락으로 여기는 노조 세력이 실제로 어떻게 저지되고 격파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인상적 시위였다. 그 교훈은 다른 사용자들에게, 그리고 노조들에게도 분명했다.
  새 행정부가 금융정책과 관련하여 취한 조치는 더욱 일반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이미 카터 시절부터 긴축적이던 금융정책은 1981년과 1982년에 더욱 강력하게 조여졌다. 이자율이 급상승했으며 은행 차입은 격감했다. 1982년 총생산은 극적으로 저하되었으며, 실업도 똑같이 극적으로 증가했다. 여기에 금융정책의 효과적 역할이 있었으나, 바로 끈조이기였다.
  이것은 철저히 의도된 결과는 아니었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는 일시적으로 통화주의의 절정기에 말려들었다. 밀턴 프리드만 Milton Friedmon 교수에게서 나온 이 사상은 만약 은행여신과 그에 따른 예금 창출에서 비롯되는 통화 공급이 완강하게 통제될 수 있다면, 물가는 안정되고 경제는 모든 게 순조롭게 풀리리라는 것이었다. 차입과 예금창출을 억누르는 억제 금리-긴축통화-가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었다.
  대신 급격한 경기 후퇴를 달성했다. 프리드만 교수의 낙관적인 구상은 무대 뒤로 사라졌다. 하지만 경기 후퇴의 실제적 귀결이 있었으니, 그것은 노조의 임금 요구에 대한 더욱 강력한 견제였다. 이런 귀결은 실업에 의해 노조의 사기도 또 유효성도 약화된 마당에, 기업들은 자신들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서 임금 상승을 저지할 수밖에 없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강력한 노조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사용자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한번도 충분히 평가된 적이 없었다. 사용자를 존속시킬 필요성만큼 노조의 요구를 약화시키는 것은 없다.
  여기에서 결합된 노동 및 금융 정책은 이전에 거시경제정책을 괴롭혔던 임금 물가의 악순환을 종식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노동조합 운동 역시, 다시 말해 오랫동안 레이건 지지자들에게 위협이 되어왔던 노동조합 운동 역시 정치적 암영 속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언급했듯이 일부 회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레이건 행정부는 그의 친구들 가운데 일부의 희생을 막지는 못했던 것이다.
  경제학에서 정책과 그의 귀결 사이의 관계는 종종 매우 독자적이다. 그러나 레이건 시절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즉 원인과 결과가 긴밀하고도 뚜렷한 관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언급했듯이 사회적 지출에 그토록 효과적으로 저항했던 적자가 군사 목적에는 별로 거역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군비 지출이 경제에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경제성장률은 2.5퍼센트에서 1983년 6.2퍼센트로 꽤 착실하게 올랐으며, 실업률은 여전히 높았지만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공공 지출의 부양적 역할에 관한 한 레이건 대통령은 케네디 시절 이래, 아니 존 메이너드 케인즈 이래 가장 눈에 띄게 충실한 케인즈파였다. 만약 케인즈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 대해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적자재정에 그토록 출실한 정책 입안자들이 왜 그의 견해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제적 조치이다. 이 시절 정부 지출의 자극 효과는 의심의 효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장기 효과, 다시 말해 정부 채무와 그에 따르는 이자 비용이 문제화될 수 있다는 점은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운만 따라준다면, 다른 많은 문제들과 같은-그 두드러진 예가 환경에 대한 위협인데-장기적 영향이 이 문제에서는 없으리라는 것이 레이건 정책의 기본 신조였다. 레이건이 재임한 8년 동안은 실제로 그러했다. 또 한번, 이론 혹은 사건이 열망하던 결과를 빚어낸 것이다.
  그러나 레이건 정책의 현저한 성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소홀했지만, 풍족하고 부유한 사람들의 재산에만 보태준 개선이었다. 그 결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레이건 자신의 지지자들에 대한 맹세를 지켰다는 데 대해 근거 있는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물론 장기적 영향은 나타났으며, 조지 부시는 레이건 시절 유산의 불행한 상속자였다, 그것은 행운의 유산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 말하기 전에, 보다 넓은 경제, 정치 세계에서 이루어진 극히 중요한 사태 발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소비에트 연방 및 동유럽의 공산주의 붕괴와 그 국민들의 민족적, 경제적 정체성의 재확인이었다.
  [주]
  1)George Gilder, Wealth and Poverly(New York:Basic Books, 1981). P. 259.
  2)Charles A, Murray, Losing Ground:American Social Policy, 1950--1980(New York:Basic Books, 1984),p. 227.
  3)Gider, Wealth and Poverty, p. 118.

 
      23

    대통합
  서방 혹은 비사회주의 세계의 1980년대는 앞에서 살펴본 문제들, 다시 말해 다음 연대의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문제들의 축적기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다. 하지만 그것들은 동유럽과 소비에트 연방에서 동시에 발생한 믿기지도 않고 또 전혀 예상도 못했던 대변동과 비교하면 단지 사소한 문제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 부분에 있어서 세계의 경제, 정치 생활에 대한 나의 흥미와 관심은, 소비에트 연방의 대학과 연구소에 종사하는 동료 경제학자들을 방문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루어졌던 나의 탐구 여행이 실시된 1959년 이래 계속되어왔다. 나중에 몇 번 더 방문하였는데, 한번은 모스크바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기 위해서였다.
  나는 소련의 저명한 경제학자 스타니슬레이 멘쉬코프 Stanislay Menshikov와 함께 양 체제의 경제 문제들에 대한 학술논문을 썼다. (주1)
  하지만 이것은 결코 나에게 종국에 벌어질 사태의 극적성격에 대한 준비가 되어주지 못했다. 나는 라이프치하와 부다페스트에서 강의하고 있던 1989년 초가을에야 최소한 동유럽에서는 사정이 다소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독일민주공화국(구동독)의 저명한 경제학자 한 분과 라이프찌히의 내 초청자는 학생들이 동일연방공화국으로 떠나는 사태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겐 여전히 극히 적절한 청강자들이 있을게요'
  이 엄청난 사태의 발전을 예견했노라는 그 어떤 주장도 심각하게 의심받게 될 것이다. 철의 장막 배후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한 광범위하고 치밀한 첩보활동은 매우 부적절했다. 정보기관들은 사태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알아내지 못했다. 거기에 투자된 수백만 달러는 정보를 알아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최근에 일어난 혁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지극히 완벽하게 예견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견이  불가능했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서방 세계가 공산주의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은 특히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한편에는 사회주의가 취약한 경제체제이며 자본주의에 비해 훨씬 열등하다는 명백한 일반적 믿음과 단언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는 사회주의 생래적 힘과 호소력으로 인해 결국 세계를 매혹시키고 집어삼키며 지배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후자의 가능성은 은밀한 군사적 노력과 많은 지적 기득권을 강력히 동반하였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서방 세계의 머릿속에 항상 성공적이지 못한 이미지와 동시에 위험스럽게 성공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다.
  둘째, 경제발전의 동반자이자 공산 세계에서 활발하게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힘들을 이해하는 데 거의 총체적으로 무능했다는 것이다. 이들 문제 각각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소련과 동유럽 아콜라이트(원래는 기독교의 견습승을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에서는 위성국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들의 경제체제는 강하면서 동시에 나약했다. 그 체제의 분석에 있어서 기본적인 과오는 일반화에 있었다. 여기에서는 앞에서 이미 다루었던 내용을 반복해야겠다. 그들의 강력함은-특히 소비에트 연방에서는-기초 공업 혹은 중공업, 즉 철강, 석유, 전기, 운송, 화학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무기산업에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래 40년 넘는 기간 동안 소비에트 연방은 스스로 미국 다음 가는 산업 및 군사 대국으로 확립시켜왔다. 이로써 세계에는 두 개의 초강대국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은 분명 그 중 하나였다.
  그것은 적잖은 성취였다. 중공업과 무기산업에 대해서는 소련의 명령 및 통제 체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했다는 점은 앞에서도 강조한 바 있다. 모스크바로부터 지시가 내려오고, 필요 물자와 부분품들이 할당되고, 제품이 완성되어 소비자가 사용하게 된다. 산업계획은 잘 들어맞았고, 그 결과 세계의 나머지 부분의 시선을 끌었던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발전이 이룩되었다. 그리고 외부 세계는 소비에트 연방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뒤에 남아 있는 부적절하고 실패한 영역들과 그것들이 소비에트 연방의 공적 태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돌이켜 보건대, 중요한 실패는 소련의 소비자들이 제기한 요구에 대한 대처돠 농업에 있었다. 성공적인 소비경제는 많은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거나 필요로 한다. 재화는 수가 엄청날 뿐만 아니라 품질과 스타일 및 디자인이 다양하고, 수요는 불안정하다. 요구되는 용역은 훈련과 준비 과정이 다양하고, 그 이용은 불안정하다. 공산주의 중앙계획 체제가 철강, 화학제품, 탱크, 핵무기에는 적절히 작동되었지만, 소비제에는 적절하게 작동되지 못하였다. 너무 경직되고 완고했기 때문에 다양성과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 따른 제품과 용역, 즉 의복, 가구류, 식당, 수리업, 오락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것들에 대해 적당하게 작동하지 못했다.
  소비재는 대중적 견지에서는 중공업 제품들과 비교했을 때 가볍고 심지어는 하찮은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들은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은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비재 공급의 결함은 소련 경제체제에 대한 서방의 많은 논의에서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그리고 현대 주민들의 소비재 경제에 대한 열의는 적잖이 과소평가되었다.
  이것은 심각한 과오였다. 하찮든 그렇지 않든 다양하고 실용적이며 보기 좋고 풍부한 소비제품과 거기에 짝을 이루는 용역이야말로 인민이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재화와 용역을 공급하는 서방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극히 명백한 능력에 의해 강화되었다. 텔레비전과 신문 그리고 엄청나게 발달한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이 서방 체제의 성공을 대내적으로 전했던 것이다.
  반복하지만 현대의 생활수준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게 공적 심리 Public Psyche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자신들의 일상적인 생활방식에서 나타난 명백한 낭비와 빈번한 어리석음을 지켜본 서방인들은 동유럽과 소비에트 연방에서 요구되는 긴급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또한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농업에서 보다 명시적인 실패가 빚어졌는데, 이것 역시 불충분하게 이해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농업은 전통적으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 가족들이 스스로에 의해 효과적으로 착취될 때에만 하나의 경제적 기업으로서 제대로 작동한다. 보다 광범위한 문화가 일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강화시킨다. 고업에서는 오래 전부터 규정된 시간과 꽤 양호한 노동 조건이 필요하다고 여겨져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노업에서는 동틀 녘부터 해질 녘까지 수고하는 미덕이 가정되었다. 그렇게 자신과 아내를 비롯한 가족 그리고 고용인을 얽어매는 사람이 '좋은' 농부였다.
  소비에트 연방은 이러한 착취를 철폐하고, 국영 및 집단 농장의 보다 여유 있고 사회적으로 보다 우예가 있으며 보다 문명화된 노동 조건으로 대체했다. 이러한 보다 느긋한 생활이, 비료와 기계류 및 기계 부품을 공급하고 농산물을 시장까지 효율적으로 옮기는 데 있어서 지속적이고도 심각한 그리고 풀리지 않은 난제들과 결합하여, 한때는 유럽의 빵 바구니로 불리던 러시아를 항구적이고 대규모적인 곡물 수입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농업 부문에 만연된 부적합성은 소비재의 희소성과 더불어 사회주의의 또 다른 실패작이 되었다. 개인의 책임과 개인 및 가족의 착취가 유지되는 자영지와 시장민이 성공적 생산자였다. 그것들이 시장 출하된 충생산에서 각자가 차지하는 몫들이 크게 불균등한 이유였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대 경제계에서 문제투성이인 농업은 일반적인 경제적 이해에서 훨씬 벗어나 있다. 농업은 늘 그렇듯 농업 전문가들의 몫이다. 그리고 농업의 경제학은 농업경제학자들의 몫이다. 소련 농업의 실패는 명명백백했고 풍부한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한 보다 깊은 이유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드물게 언급되었다.
  공산주의의 붕괴에 기여한 결정적인 요인은 소위 인권 분야에 있었다. 여기에서도 심각한 오해가 있었다. 현대 산업세계에서 인권-표현의 자유, 개인의 안전, 정부의 의사결정 및 (집행)과정에의 참여-은 그 자체가 목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인권은 선하고 문명화된 사회가 제공하는 것으로서, 모든 정부의 동등한 의무이며 모두에게 똑같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일부 정부가 반대하고 있으며, 설령 반대하지는 않더라도 꽤 까다롭고 억압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인권의 허용 혹은 억압과 경제발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경제적 성취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인권은 권리일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필요의 산물이다. 최소한 외면적으로는 그렇다. 경제적 결정론, 다시 말해 인간사에 있어서 경제의 절대적 역할이 이 분야보다 더 가차없이, 그리고 그토록 눈에 띄지 않게 작용하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은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본질적으로 경제 발전은 침묵을 가요당한 채, 그리고 공적 생활에서 배제된 채 살기에는 너무나 많이 교육받은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작가와 시인들, 예술가들, 과학자와 공학자들, 저널리스트와 텔레비전 해설자들, 대학 교수들과 특히 그들의 학생들, 변호사와 의사 및 여타 전문직 종사자들, 기업 경영자들,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성스러운 이상과 대망을 품은 정치가들, 이들 모두가 경제발전에 의해 생겨나고 뒷받침된다.
  그들은 경제발전이 필요로 하는 존재인 동시에 공급하는 존재다. 일단 그들이 생겨나서 수가 많아지면, 실제적인 문제로서 그들의 발언권을 거부할 수 없게 된다. 국가의 일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결코 그들을 배제할 수도 없다. 그들이 발언하고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러므로 공적 표현과 공적 참여를 허락해야 한다.
  모든 나라에서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실제로 그래왔다. 최근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한국, 대만에서, 그리고 상당한 정도로 태국과 말레이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예상한 대로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에서도 그랬다. 정부의 참여에서 배제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린 이해와 사고를 가지고 있거나, 교육적, 전문적, 예술적인 재능이 있어서 더 이상 침묵 속에 묻혀 있을 수 없는 사람들만이 그 과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가난한 노업국이나, 산업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 혹은 원시적 수준에서 산업화가 이루어진 나라에서는 압제나 독재가 가능하다. 그러한 나라에서는 일상적 생존 투쟁이 표현 욕구보다 더 중요하며, 그러한 상태는 실제적으로 독재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해감에 따라 그러한 일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공산주의는 경제발전과 억압을 결합시키려 했는데, 이러한 결합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자본주의의 매우 부정적인 경제 요소들 역시 억압과 전체주의를 빚어내고 조장할 수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이것은 특히 제1차세계대전 이후 수십년 동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뚜렷이 볼 수 있는 현상이었는데, 결국 무솔리니와 히틀러에게 귀착되었다. 혁명 후 러시아의 경제적 혼란 속에도 그런 위험이 존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경제적 성공은 인권의 토대를 이룬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일어난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의 대혁명에서 인명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1917년 혁명은 유례가 없는 유혈사태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나중의 것은 평화스럽게 치러졌다. 더러 일어난 사망 사건들은 공산주의에서 대안적 경제체제로의 이행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었다. 그 사건들은 이제 자기 표현의 권리를 부여받은 인민들 사이에서 빚어진 국가적, 민족적, 종교적 갈등의 결과였다. 이러한 혼란의 초점은 공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아니라 위와 같은 원인에서였다.
  경제발전은 보통 물질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필요 물품과 편의를 제공한다고 여겨진다. 경제발전은 실제로 어느 정도의 안전과 함께 생활 그 자체를 제공한다. 1917년의 러시아는 가난한 나라였다. 가난했기에 사람들은 단호하게 서로를 학살하도록 설득당했다. 1989년과 그 후 몇 개월 동안, 불완전하나마 소련의 경제적 진보가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에 대한 위협적인 행위를 불법화하였다.
  이 글을 쓰고 있던 당시에 제2의 러시아 대혁명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했던 다른 나라들의 혁명도 마찬가지였다. 이 혁명은 인간의 지성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는 점은 현시점에서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자제와 신중한 분석 그리고 무엇보다도 깊은 사려가 필요한 이행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 대신 상징과 교조주의에 따른 행동이 빚어졌다.
  희망은 갑자스런 극적 변화-충격요법-에 의해 자본주의로 마술적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일시적 고통이 지나면 새로운 체제가 성공적으로 자리잡고 있으리라. 서방의 조언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 체제는 서유럽과 미국 및 발전된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같은 혼합경제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Friedrich von Hayek와 루드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밀턴 프리드만 Milton Friedman이 내세웠던 이상화된 자유기업의 자본주의여야 한다고 믿었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동기유발된 서방의 학자들은 동방의 열렬한 새 개종자들에게서 동맹자를 찾았다.
  나의 의도와 목표는 이것이 아니었다. 1990년 브뤼셀에서 유럽 사회주의자들을 만났을 때, 혹은 그 밖의 덜 공식적인 여러 자리에서 나는 그러한 주장에 강력히 반대했으니까. 나는 그토록 거당한 변화는 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사숙고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장에 우선적으로 복귀되어야 할 것은 소규모 소비재 공업들과 용역 그리고 농업이었다. 이 모두가 사회주의에서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했던 분야들이다. 여기에는 이미 경영을 맡고 있던 열성적인 기업가들의 핵심 그룹이 인수할 준비를 갖추고 대기중이었다.
  대규모 공업들은 소유와 지도의 대안적 형태가 고안된 연후에 보다 점진적으로 시장에 복귀되어야 한다. 한편 임대료는 통제되어야 하고, 기본적 생활 비용은 제한되어야 하며, 이행의 고토을 최소화하기 위한 착실한 노력이 기울여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과거와 그리고 현재의 과도한 냉전적 군비 지출로부터 확보할 수 있는 강력한 국제적 지원이 따라야 한다.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제안과 실제로 일어난 사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오명을 선사하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것이었다. 대규모의 반공 폭동에 의해, 냉전시대의 적대 체제에 내재되어 있는 가공할 위협이 전세계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겪어야 할 그리고 이야기해야 할 보다 어두운 측면이 몇 가지 남아 있다.

  [주]
  1)John Kenneth Galbraith and stanislay Menshikov, Capitalism, Communism and Coexistence:From a Bitter Past to a Better Prospect(Boston:Houghton Mofflin,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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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확실한 기적
  1990년대 초는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의 혁명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불완전한 경제 체제가 산산조각난 후에는 어떠한 체제로도 대체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주요한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한마디로 공산주의는 실패했으며, 중국처럼 살아남은 곳에서는 대전환을 겪고 있다. 자본주의, 다시 말해 시장체제는 승자였다. 
  하지만 미국은 물론 서유럽 및 일본에서 발현된 자본주의는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했듯이 곤란에 직면해 있다. 그곳에서는 그 밖의 많은 것들과 함께 지속적인 경기 후퇴가 진행되고 있다.
  후퇴가 지속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인지도 모른다. 후퇴란 정상으로부터-일할 의사가 있는 노동자들의 완전에 가까운 고용과 경제적 산출의 꾸준한 확대로부터-의 일시적 이탈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최근에는 정상적이지 못하다. 1990년 여름을 시발로 미국은 불경기와 높은 실업을 겪었다. 실업은 노동력의 7퍼센트를 웃돌았는데, 구직을 포기하여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후퇴는 서유럽과 일본에까지 번져갔다. 나는 인생의 적지 않은 부분을 의회의 위원회에서 보냈는데, 경기 후퇴를 맞아서 다시금 소환이 있었다. 후퇴의 원인은 무엇인가? 해결책은? 나는 경제를 그냥 내버려두면 모든 것이 곧 좋아지리라는 생각에 굴복하지 않았다.
  현대 경제가 불완전고용 및 저조한 실적의 균형에 접어들 수도 있다고 시사한 것은 경제사상에 대한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중요한 공헌이었다. 이것은 대공황의 생생한 진실이었다. 이제 60년이 지난 세계 풍경을 조망해보면, 역사의 보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전에 일어났던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은 명백하다.
  공인된 경제적 규준은 높은 고용, 만족할 만한 경제성장률이다. 다른 경향에 대해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비관주의이며, 경제적으로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정치인들과 심지어는 학자들까지도 자신감을 보여주어야 한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경제를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 경제적 비관주의(불완전고용 균형이라는 관념보다 더 비관주의적인 것도 없다)는 자신감을 말살하여 소비 수요와 산업 투자를 가로막는다. 그것은 악의는 없지만 파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1993년에는 '경기 후퇴'가 3년 이상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불황적 균형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 원인들 사이에서 명백히 일시적인 것과 어쩌면 항구적인 것을 구분할 필요는 있다.
  1980년대로부터 물려받은 경제 유산들은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그것들은 경기 후퇴를 촉진함과 동시에 심화시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침체 효과로부터 경제를 풀어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는 금융시장에 대한 그리고 특히 부동산에 대한 대규모 투기의 시기가 되었다. 1920년대의 플로리다 부동산 붐이 미국의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 재등장했다. 크고 작은 은행들이 자금을 대기 위해 가담했다. 투기 국면이 붕괴할 때는 언제나 그렇듯이 이 투기가 붕기한 후에는 그 경제적 잔해-텅빈 사무실, 유휴건설산업, 악성 담보물 및 새롭게 발견된 경영의 과실들로 충만한 은행들, 신규 은행 대부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남았다.
  금융체제와 거기에서 자금을 조달받은 투기에서 초래된 침체 효과에 저축대부조합(약어로는 악명 높은 S&L)들의 그것이 훨씬 더 선명하게 첨가되었다. 이 조합들은 항공사들이 그랬듯이 주도적 원리에 따라 몇년 전에 규제에서 풀려나 있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어떠한 사회적 행위, 심지어는 사회주의까지도 허용하는 차별적인 사회배려로, S&L은 예금의 공적 보증을 통해 정부 기금에 대해 극히 효과적인 접근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러한 특혜를 통해 그들은 투기의 향연 속에 흥청댔다. 정신적 비행과 의연한 절도가 한데 어우러진 향연이었다. 규제를 재설정하자는 제안들은 레이건 행정부의 관리들에 의해 응당 거부되었다. 
  그에 따른 붕괴와 추문의 불가피한 경제적 귀결은 신규 건축과 주택 구입을 위한 대부의 축소였을 뿐만 아니라, 채무제용으로 정부가 인수한 기업들에 딸린 부동산의 대량 시장 잔류였다. 시간이 흐르면 부동산 투기와 금융 곤란 및 S&L 재앙에 따른 침체 효과는 종식되고, 투기적 다행증의 다음 국면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확신이 도래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간의 치료 효과에 의존하는 것이 합병 매수광, 즉 차입금 의존 매수광이다. 이것 역시 강력하지만 비항구적 침체 효과이다.
  현재 대규모 법인기업에서는 권력이 통상 경영자에게 속한다는 점은 충분히 강조했다. 그리고 공인된 모든 경제적 교의들에서는 기업의 기본 목표가 수익의 극대화라고 가장한다(의심할 여지 없이 지당한 가정이다). 1980년대의 대대적인 합병 매수의 광기는 이윤은 물론 경영자의 위신과 권력을 지키고 또 높이기 위한 욕구의 결과였다. 마찬가지로 차입금 의존 매수는 기업 침입자로부터-자신의 부와 강화를 좇아 이미 경영권을 해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지위와 위신 및 수입을 위협하는 사람들로부터-기존 경영진을 방어해 준다. (이것도 이 과정을 고무하고 재정 지원 혹은 지도하는 투자은행 및 변호사들에게 풍부한 보상을 제공했다)
  합병 매수와 차입금 의존 매수라는 양자의 공통적 귀결은 부채의 지분 대체였다. 인수할 기업의 주식을 사들이고, 침입자들에게 경영권과 그에 부수되는 보수 및 위신을 넘겨줄 위험에 처해 있는 주식을 사기 위해 자금이 차입되었다. 두 경우 모두, 지분 매도자에게 일시적 화폐 수입이 돌아갔다. 보다 지속적으로 신규 합병된 기업들과 자신의 경영자에 의해 매수된 기업은 집행에서 초래된 채무를 졌다. 이번에는 채무에 대한 이자 지급이 강력한 침체 효과를 가져왔다. 투자 지출은 감축되어야 했으며, 연구.개발처럼 장기간의 보상이 필요한 투자 지출은 특히 그랬다. 가망성 없는 단위기업은 매도되거나 폐쇄되었다. 종업원들은 너무도 많이 감축되어 이미 늘어나고 있던 실업을 더욱 가중시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역효과들 역시 위력을 상실할 것이 틀림없다. 채무 요구는 감소하고, 새로운 투자가 촉진되며, 고용과 소득은 증대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 정크본드 Junk-Bond 사태의 여파도 짧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짧았다. 이 일탈에서 두드러진 점이라곤 전혀 없다. 간단히 말해서, 돈을 풍족하게 혹은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개인이나 회사는 이자 수입이 충분히 높으면 위험에도 불구하고 증권을 사려 한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정크본드의 수입은 아주 높아서 15퍼센트는 충분히 상회했다. 손실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에 이것은 아주 매력적인 수준이었다. 당시에는 손실의 가능성이 무시되었다. 투자회사들, 특히 당시 잘 나가던 '드랙셀 번함 램버트' 상사는 채권을 샀다. 그들은 대체로 순진해 빠진 일반 대중들에게 팔기 위해 그 채권이 필요했던 것이다. 늘 그렇듯이 정크시장은 결산일이 되자 붕괴하고 말았으며, 운이 없는 사람들에겐 이젠 쓸모없어진 종이만 남았다. 드랙셀 번함 램버트 상사는 파산했으며, 이 회사의 가장 탁월하고 많은 보수를 받던 경영자 마이클 밀켄Michael Miken은 감옥에 들어갔다. 새롭게 궁핍해진 사람들의 추가적 침체 효과가 경제발전에 까지 미쳤다. 하지만 이것 역시 다른 많은 것들처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다. 
  1990년대 초 경기 후퇴의 가장 직접적이고 분명한 원인들 가운데 하나는, 후퇴를 일시적 현상으로 낙관했던 것이다. 대투기 사태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금융 마인드 혹은 막연히 그렇게 표현되는 것은 과거의 성공으로부터 그 다음 성공으로 옮겨간다.
  보다 실제적으로는, 채무는 불이행에 의해 혹은 파산 절차가 진행됨에 따라 청산된다. 텅빈 사무용 건물들은 결국 입주자를 구한다. 은행들은 악성 여신을 말소하고는 대부를 재개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기존의 경험 가운데 일부이다. 이러한 과정이 대체로 경기순환이라는 개념에 의미를 부여한다. '경기 후퇴'라는 말이 보다 나은 규준에서의 '일시적' 이탈이라는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
  그러나 1980년대의 여파와 1990년대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 가능성은 별로 많지 않다. 어쩌면 미국경제는, 그리고 미미한 정도지만 세계경제 역시 경제발전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정부의 강력한 조치가 없다면, 앞에서 말한 대로 경제가 완전고용과 높은 성장률이 아닌 높은 수준의 실업과 최저 성장률에서 균형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능성의 연원은 소든 분배에까지 이른다. 사회적 관심사라는 견지에서 볼 때, 전통적으로 상당 수준의 공정한 소득 분배가 촉구된다. 그것은 평등의식에 기여하며, 사회정의의 표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보다 보수적이며 정치적으로 조심스러운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강한 비난과 의연한 저항을 받게 된다. 그들은 그것이 '개인은 인권이나 동기유발 둘 중의 하나를 받게 된다는 원칙'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시장체제의 주요한 원리들 가운데 하나를 침해하고 무시한다는 것이다.
  지속적이고 때로는 격렬한 이 논쟁에서도, 지극히 불공평한 소득 분배가 경제체제의 운용과 관련해서 역기능으로 작용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최근의 미국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지 모른다. 특히 소득이 공정하게 분배된다면, 소득의 궁극적 처분에 관해서는 거의 문제가 없다. 그것은 지출되거나 저축 혹은 투자라는 형태로 지출된다. 쓸데없이 남아도는 대규모 자금 같은 것은 없다. 그러한 저축을 뒷받침할 만큼 충분한 소득을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체증적으로 불공평한 소득 분배가 이루어졌다. 1980년대에는 전체 소득 증가분의 대략 70퍼센트가 소득 취득자의 상위 1퍼센트에서 발생했다. 상위 1퍼센트의 가족이 전체 소득의 12퍼센트를 벌어들였으며, 전체 순자산의 3분의 1이상을 차지했다.(주1)
  소득과 부의 집중, 그리고 그것의 사용과 관련된 불확실성은 동반자 관계에 있다. 정통 경제학에서는 저축이 슈퍼마켓에 가는 돈만큼이나 확실하게 투자되거나 지출된다. 그것은 유동적 형태로 보유될지 모른다. 그 일부는 1980년대처럼 합병 매수나 차입금 의존 매수와 같은 쓸데없는 채무 창출에 의해 흡수될 수도 있다.
  경기 후퇴 때에는 소비와 실질 투자에 더욱 심각한 악영향이 미친다. 그러면 경제적 불확실성의 산물로서 사적 유동성에 대한 욕구가 더 강해진다. 소득은 지급되지만 그와 짝을 이루는 소비자 구매나 실질 투자로의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호경기든 불경기든 구애받지 않고 그들이 받은 것을 지출한다. 중간 소득자들도 비슷하다. 그러나 부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있다. 그들이 지출도 투자도 않는다면 새로운 균형은 감소된 수요에 의해 설정된다. 경제를 완전고용에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부양적 지출밖에는 대안이 없다. 한마디로 적자인 것이다.
  이것이 1980년대의 의도되지 않은 역사였다. 조세 삭감과 투기는 부자들에게 소득을 풍부하게 돌려주었다. 기능상 그토록 쓸데없는 소득을 보상하기 위해, 연방정부는 1,280억에서 2,210억 달러에 이르는 적자를 냈다(카터 대통령 하에서는 400억 2,000달러와 790억 달러 사이의 적자를 냈다). 적자 재정의 수행보다 더 극명하게 레이건 대통령을 그의 전임자들과 구분 짓는 것은 없다. 지출되지 않은 유휴소득의 벌충으로 정부의 이러한 경기부양-상당한 부분이 방위비 증강이었는-이 없었더라면, 경제성장은 훨씬 낮았을 것이고 실업은 훨씬 높았을 것이다. 또 레이건 시절을 7년간의 호경기로 회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부양이 없었더라면, 1980년대 투기 붐의 뒤이은 경기 후퇴는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결코 많이 논의되지 못했다. 반복하지만, 완전고용 혹은 높은 고용의 규준에 대해서는 공적인 면에서 그리고 전문적인 면에서 깊은 경제적 집착이 남아 있다. 경제는 언제나 스스로 이 규준에 복귀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종종 비유적으로 진술된다. '경제가 애써 후퇴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것이 회복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소득 분배를 기능적 관점에서, 다시 말해 경제적 성과에 의존하는 요소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한 저항이 따른다.
  구매력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의 적자를 이용할 때에 발생하는 문제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단기간에는 적절한 부양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지만, 길게 보면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 더 많은 재정 수입을 국가 부채의 이자를 지불하는 데에 돌리도록 요구하게 된다. 본질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낳지 못하는 요구가 사회적으로 보다 유용한 국가의 기능들보다 우선된다. 혹은 우선되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의 부양이 없는 상태에서 현대 경제가 생산과 고용의 부적절한 수준에서 균형을 이루는 경향을 보인다면, 보다 깊은 원인들과 그에 대한 적절한 처방을 찾아야 한다. 소득의 분배와 그 결과인 지출은 불가피하게 공적 관심을 끌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소득 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할 사회적 근거는 충분하다. 그러나 공평한 분배는 기능적인 면에서도, 다시 말해 현대의 시장경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1990년대의 경기 후퇴 겸 불황은 먼저 미국에 들어왔고, 여기에서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사실에 놀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득의 광범한 분배와 그로 인한 믿음직스러운 지출-현대 경제의 첫번째 필수요건-에 관한 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면 가능성 있는 일이 또 있는데, 이점 또한 우리 시대에는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현대 정치에서 경기 후퇴라고 할 수 있는 지속적 실업및 전반적으로 낮은 경제성장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특히 정치적 발언권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한층 활발한 경기 확대, 특히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보다 선호된다.
  현대 경제에서는 국민의 보다 영향력 있는 부분은 소득 및 수입 면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 있다. 그곳에는 거대한 회사관료체제가 자리잡고 있다. 어려운 시절에는 탈락한 노동자들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지만, 그러한 탈락을 자행한 사람들의 안락한 처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체제는 거대한 공적 관료체제와 대단히 광범한 전문직 계층을 포함한다. 대표적으로 의사, 변호사, 아카데미션(학술이나 예술원의 회원), 회계사들을 들 수 있으며, 그 명단은 거의 무한대로 계속 열거할 수 있다. 이들에게도 경기후퇴는 심각하게 느껴지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환경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문가로서의 지위와 보수는 안전하며, 경기 후퇴 시기의 안정된 생활비는 결코 경원의 대상이 아니다. 
  '사회 보장'이나 현금에 의존해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으며, 그들은 경기 후퇴나 침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니면 오히려 유리한 영향을 받는다. 고정 소득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인플레이션은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 실업은 유감스런 것이긴 하지만, 미지의 타인들이 겪을 때에는 별로 그렇지 않다. 보다 큰 실업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용자들은 열성적이고, 순종적이며, 자기 주장이 적고, 보다 안정적인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경기 후퇴와 불완전고용은 이것들을 물리치기 위한 조치들보다 선호된다. 정부 지출은 적자를 증대시켜서, 앞으로 조세 증가라는 망령을 출현시킬 수도 있다. 저금리는 경기 후퇴와 지속적인 실업에 특별히 효과적이지는 않지만, 불로소득 생활자들의 수입에는 불리하다. 저금리에 의해 은행들은 대출금의 가격을 낮추게 된다. 은행 및 중앙은행의 영향력은 외관상 중립성의 가호 아래 통상적으로 소위 '쉽게 번돈 Easy Money'이 되지 않는다. 소득 분배의 역기능을 시정하기 위한 장기적 조치들은 그러한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달갑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경기 후퇴에 찬성하거나 경제성장에 반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공공연히 그렇게 주장했다가는 아주 얼빠진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다. 현대 산업국가 국민 가운데 재력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경기 후퇴와 정체 및 불완전고용 균형은 불리한 현상이 아니며, 적절한 시정조치보다 훨씬 선호되리라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이 점 역시 현대 자본주의의 기적에 드리워진 그림자이다.

  [주]
  1)Paul R. Krugman. "The Right, the Rich and the Facts", The American Prospect, Fall 1992, pp.19--24.


      25

    더 큰 평화를 위하여
  이제 이 여행의 종착역에 이르렀다. 동시대 풍경을 살펴보면, 완전히 어둡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슴푸레하지도 않다. 지구 전체에 걸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거대한 대립은 과거지사다. 그리하여 세계가 어떤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는지,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은 물론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상호간의 포괄적 절멸을 위한 몇 가지 전략에 대한 세련된 견해에 자신들의 높은 지위를 의탁했었는지 알고싶다면, 덜레스와 케네디 시절의 역사를 다시 읽기만 하면 된다.
  아이젠하워와 케네디 양 행정부 시절에 원자탄 제조와 낙진 대피소 건설에 대해, 그리고 묵시록의 날에 대해 교육받았던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렸는가? 나는 케네디 대통령의 요청으로 뒷뜰 대피소 파는 방법과 보트를 이용하여 핵위협으로부터 탈출하는 훌륭한 미국인 가족을 그리고 있는 삽화가 든 작은 간행물의 출간을 거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3층짜리 빈민 아파트 고층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90년대 중반, 혁명의 여파 속에 놓여 있는 동유럽과 구소련의 궁핍과 정치적 혼란은 심각한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다. 이것은 앞으로 그곳과 보다 넓은 세계 모두에게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 게다가 이 혹성의 가난한 나라들에서 평화를 이루기란 여전히 규칙만큼이나 예외적이다. 운이 좋은 나라들과 그렇지 못한 나라들 사이의 계약은 오늘의 세계에서는 지배적 현실이다. 최소한 부유한 나라들의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원조가 그 계약에 의존하고 있는 한, 그러한 현실은 더욱 뚜렷해진다. 과거의 원조, 특히 미국의 원조는 부분적으로는 냉전의 귀결이었다. 그것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망상증에 빠진 사람들 사이의-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진지한 바람을 가진 사람들과 그런 도움 속에서 소련의 영향력과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어하려는 사람들 사이의-우아하지 못한 동맹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이러한 동맹이 영웡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 대한 원조는 이제 오직 관심과 양심의 문제일 뿐이다. 그것은 만족의 문화(필자가 규명한 미국 지배층의 특성)를 침식하며 중과세의 위험을 제기한다. 곧 중요하게 부각될 문제이다.
  이미 언급한 몇몇 운 좋은 나라들-대만, 한국,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상당한 정도로는 중국, 어느 정도로는 인도-은 과거의 황량했던 빈곤에서 벗어났다. 다른 나라, 특히 아프리카 나라들의 전망은 여전히 두렵고 섬뜩하다.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지원을 계속하도록 압력을 행사해야 하며, 그리고 그것은 이전에 지적했듯이 특별히 교육-인적 투자-이 강조된 지원이어야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망령이 없는 상황이니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동시에 냉전의 보다 파멸적인 유산들 가운데 하나인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무기 공급 및 무기 교역 전체가 종식되어야 한다. 소련의 패권주의 공산주의에 대처하는 수단으로서 가난한 나라들을 무장시킨 것은 언제나 매우 부적절했다. 두드러진 예를 든다면, 파키스탄의 군대는 딱히 적군을 막는 보루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무기지원의 부적합성은 총체적이다. 게다가 그것은 경제발전에 긴급히 필요한, 그리고 기아를 위한 대안으로서 더 긴급한 자원을 장악하고 있다. 무기는 국민들에게도, 그리고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진보에도 심각하게 파괴적인 국내 갈등을 조장한다.
  후자에 대해 말한다면, 지금까지 그리고 특히 탈식민지시대에 신성하게 여겨졌던 개별 국가의 주권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정립되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권은 잔인하고 사회적인 참화를 부르는 내분에 대한 방패 역할을 했다. 모두가 지상의 권리로서 자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내부의 학살을 중지시킬 필요가 있을 때에는 국제적 권위에 의해 주권을 정지시켜야 한다. 이 일은 물론 국제연합을 통해 수행되어야 한다. 이 일은 미국을 포함한 어떤 한 나라의 권리나 의무는 아닌 것이다. 소말리아에서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는 발칸제국에서도 이러한 국제적 책임이 이 글을 쓰고 있는 때에 이미 출현하였다. 이 출현은 예외로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내분에 대한 정상적 대응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물론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한 나라의 주권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나라도 제 나라 국민을 학살하거나 착취할 권리는 없다. 
  내부의 적대와 학살을 중지시키기 위한 지원과 국제적 개입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차이는 엄연할 것이다. 다시 보다 혜택받은 세계로 돌아가겠다.
  확립된 자본주의, 다시 말해 유럽과 미국 그리고 여타 영어 통용 국가들 및 태평양 국가들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평화 체제이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경제 불황에서 표출되는 긴장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 체제는 계속적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현대의 선진 경제가 평화적인 것은 운 좋은 사람들의 뭔가 잃을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들이나 특별히 어려울 게 없는 사람들은 성경의 낙타와 바늘귀를 앞에 놓고, 사적인 양여에서 초래되는 위험을 기꺼이 감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보다 기꺼이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다.
  많은 혜택을 받은 미국 대학생들은 베트남전 당시에 저항의 핵심이었다. 그들은 지금 군 복무에 별로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군 복무는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과 소수 민족 및 가난한 사람들이 할 일이라고 여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얼마간 관심을 기울여왔다.-특히 지상군의 겨우, 백인 상위 소득 집단의 대표자들은 거의 없다. 1991년, 나는 당시 하원 의워이던 레스 애스핀 Les Aspin 으로부터 이문제에 대해 하원 군사위원회에서 증언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처음에는 나의 출석이 연기되더니, 다음에는 취소되었다. 당시에는 걸프전의 발발로 군대의 사회적, 인종적 구성에 대해 적절하게 논의될 수 없었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현대의 경제생활은 국경선을 넘나들면서 공격적으로 퇴행적인 민족주의에 대해 강력한 용해제인 포괄적이고 복잡한 관계를 형성한다. 무역, 투자, 대중매체, 여행, 초국적 기업과 같은 모든 것이 여기에 기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 시대의 대립 중 첫번째 것이 출현한다.
  한편, 보다 긴밀한 경제, 정치적 통합이 광범위하게 추진되고 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유럽에서 이루어진 가장 발전된 형태이며 브뤼셀에 다소 초보적인 정부까지 갖춘 EEC(유럽경제공동체)이며,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혹은 태평양아시아 국가들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아주 초보적인 움직임도 있다.
  그런데 현대 국가의 사회, 경제적 여할은 이러한 조류에 역행한다. 의료, 교육, 주택 그리고 이외에 많은 것들의 공급, 예산, 과세, 미시경제 정책, 고용 수준의 유지 같은 것은 이제 개별 정부의 의무이다.
  이 노력은 적용 범위와 비용 및 능력, 그리고 지불 방식과 예산 적자를 포함한 보다 큰 재정적 효과 면에서 크게 다르다. 그러므로 변증법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한편에는 보다 큰 공동체의 강한 정치, 경제적 요구가 있다. 실질적으로 서로간에 그리고 여타의 유럽 국가들과 갈들 관계에 있지 않고, 아주 긴밀하고 조화로우며 세련되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관계를 이룬 영국, 프랑스, 독일의 요청이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개별 국가의 과제와 임무 그리고 예산, 조세, 지출, 적자와 관련된 다양한 거시경제적 임무가 있다.
  보다 큰 연합의 요청에 반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국가 및 언어의 정체감이다. 이것들은 보다 먼, 어쩌면 정형성이 보다 덜한 대연합체의 관리에 쉽게 위향되지 않는 사안들이다.
  연합의 옹호자들과 개별 국가 옹호자들 사이의 갈등이 현재 유럽에 격렬한 논쟁과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 가장 첨예한 대립점은 단일통화 계획에 관한 것이다. 이 목표는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개별 국가의 경제, 사회 정책 및 재정정책의 조정을 기다려야만 하는 목표다. 그러한 조정이 없다면 공동통화는 꿈이나 몽상에 불과할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NAFTA에 대한 논쟁은 국내의 사회적 관심사들 특히 고용과 환경 및 여타의 국가적 문제들이 보다 크고 정치적으로 문명화된 연합에 어느 범위까지 희생되어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큰 영향력을 지닌 경제적 이해 관계에서 비롯되는 명확한 경제적 이점과 함께 전개되었다. 이 논쟁은 바람직한 결론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기본적 대립-긴밀한 통합에서 얻는 이익에 대한 개별 주권의 대립-은 여러 가지 형태로 계속될 것이다.
  이 연대의 두번째의 그리고 보다 깊은 대립은 현대 국가 내부에 존재한다. 한때는 자본과 노동, 사용자와 노동자 대중 사이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속적 투쟁이 있었다. 이 갈등에서 민주주의는 얄팍한 가장이었다. 정치적 발언권은 이편에나 저편에 잇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자본가들 편에 있었다. 칼 마르크스의 수염 기른 얼굴과 긴 팔은 양편 모두에게 받아들여졌고, 인식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존재했다. 자본과 노동, 자본 대 노동, 달리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자본가는 거대한 회사 관료체제에 휩쓸려 들어갔다. 국제적 경쟁은 한때 분명한 독과점을 이루었던 세력들을 약화시켰다. 과거에 기업 세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미국, 캐나다, 영국 그리고 그 밖의 오래된 산업국가는 이제 기업의 무능과 나약성에 대해 깊은 우려를 하고 있다. 이것이 과거 계급투쟁의 조건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에도 지적한 바 있다. 강력한 노동계급 운동, 특히 강력한 노동조합은 강력한 사용자를 필요로 한다. 후자가 약화되면, 노조도 따라서 약해진다. 더 이상 요구하거나 착복할 만한 풍족한 이득도 없다. 대신 사용자의 생존에 대한 걱정이 생기고,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 측의 재정적인 헌신도 자주 이루어진다. 계급투쟁은 과거의 창백한 망령이 되었다.
  그 대신 이제 새롭고 의미 있는 대립이 있다. 선진 경제사회의 경제적, 사회적인 안락을 누리는 커다란 집단과, 현대 경제의 주변이나 외부에 사는 사람들 간의 대립이 있는 것이다.(주1)
  현대 복리와 정치 권력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이다. 한때는 유력했고 여전히 풍족한 재력가와 실업가 집단-구시대 자본가를 대체한 경영자와 관료, 그리고 아직도 살아남은 기업가들-에 대규모의 광범위한 전문 직업인, 학자, 문화인, 연예인 집단과 현대의 커다란 불로소득 걔급 및 막대한 수의 퇴직자들이 추가된다. 이들에게는 정치적 발언권과 투표권이 있다. 또 앞에서 지적했듯이, 경제적 성과가 빈약할 때에도 어느 정도의 만족이 있다. 경기 후퇴와 불완전고용 균형으로 인한 불편은 남의 일이다.
  그 외부에는 하찮은 일을 하거나, 서비스직에 고용된 사람들, 그리고 비자발적 실업자. 혹은 구직을 포기했거나 거부당한 사람들이 있다. 부유한 집단 내부로부터 외부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명백하고도 진지하게 표명된다. 그러나 지배자는 역시 보다 큰 안락한 집단이라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거니와, 그들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이해에 따라 지배한다.
  이 집단에 의해 현대 정치가 지배되는 것은 미국에서 가정 두드러진다. 외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공직을 열망하는 사람들 사이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면 투표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회, 정치적 갈등은 이제 자본과 노동 사이에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갈등은 이제 안락하게 혜택받은 사람들과 상대적으로 혹은 특별히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빚어질 것이다. 이것은 평화스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아닐 것이다. 정치적 발언과 참여는 긴장의 해소제이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때에는 폭력이 대안이 된다.
  그러한 위험은 미국에서는 이미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유럽에서도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까다로운 일을 하기 위해 해외에서 수입되는 발언권 없는 대규모의 하층계급은, 민족적 이유나 그 밖의 이유로 이들의 존재에 분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두려움의 원천이 되고 있다.
  긴장을 완화하거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경제는 막대한 고용 기회가 제공될 수 있도록 운용되어야 하며, 필료하다면 부양할 수도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강력한 거시경제 조치-공공 투자 및 일자리 창출-가 필요하다. 그 조치가 불완전고용 균형을 깨뜨리는 데 필요하다면 말이다. 그것은 또한 경제가 잘 작동되고 있을 때는 예산 긴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
  1)최근에 갤브레이스는 이것을 The Culture of Contentment (Boston:Houghton Mifflin, 1992)에서 상세하게 다뤘다.
  역주: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나와 있다.'만족의 문화'(동아일보사,1993).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1908년 캐나다 온타리오 태생으로, 케나다 토론토 대학과 미국 캘로포니아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하버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경제적 견해들을 발표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무렵에는 물가정책 국장과 경제보장대책 국장, 케네디 시절에는 인도 대사 등 정부 관직을 두루 맡아 현실 경제에도 폭넓게 참여해왔으며, 1972년에는 미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 하버드 대학 명예교수로서 연구화 집필활도을 계속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풍요로운 사회' '새로운 산업국가' '대공황' '미국의 자본주의' '부확실성의 시대'등이 있으며, '경제사 여행'은 그의 30번째 저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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