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찰스슈왑 코퍼레이션의 창립자인 저자가 50년간 마켓 사이클을 타고 넘으며 얻은 통찰들을 소
개한다. 저자는 ‘성장은 이익을 이끌고 이익은 주가 상승을 이끈다.’라는 기업가적 교훈, ‘개인의 재정
적 운명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라는 삶의 원칙, ‘투자자로 성공하려면 항상 낙관적인 태도가 필요하
다.’라는 마인드까지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변하지 않는 진실들을 알려 준다.
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찰스 슈왑 지음
▣ 저자 찰스 슈왑
미국의 가장 큰 금융 서비스 회사 중 하나인 ‘찰스슈왑 코퍼레이션’의 창립자이자 CEO를 지냈고 현재
회장을 맡고 있다. 찰스 슈왑은 1970년대 월스트리트의 잘못된 관행을 깨고 고객 이익을 최우선으로
둔 할인 증권사를 설립했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주식 투자를 투기라고 생각하고 노후 대비를 위한
투자에도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찰스 슈왑은 개인 투자자가 보다 저렴하고 손쉽게 투자할 수 있는 서
비스를 개발함으로써 급여 소득자 등 보통 사람이 투자를 통해 기업의 주인이 되고 주식으로 경제적
자유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이에 미국인들은 그를 투자의 대중화와 민주화에 이바지
한 ‘개인 투자자들의 영웅’, ‘미국 금융계의 거인’이라 부른다.
▣ Short Summary
증시가 활발할수록 변동성 또한 커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런 변동성에 타격을 입는 것은 언제나 개
인 투자자, 특히 투자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인데, 이는 시장의 사이클을 머리
로는 이해하지만 경험치가 적기 때문에 불확실성에 대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투자를
오래한 사람들, 예로 50년간 투자를 해 온 찰스 슈왑이라면 지금 같은 시장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1970년대 찰스 슈왑은 월스트리트의 관행에서 벗어나 고객 이익을 최우선으로 둔 증권사를 설립하여
미국인들이 보다 저렴하고 손쉽게 투자할 수 있도록 하여 ‘투자의 대중화, 민주화’에 이바지했다고 평가
받는다. 그는 업계 최초 24시간 전화 시세 조회 서비스, 판매 수수료 없는 뮤추얼 펀드 슈퍼마켓, 인터
넷 트레이딩 서비스 등 가장 현대적인 시스템을 선보이며 개인 투자자들의 저축과 투자를 도왔다.
이 책은 찰스슈왑 코퍼레이션의 창립자인 저자가 50년간 마켓 사이클을 타고 넘으며 얻은 통찰들을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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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개한다. 저자는 ‘성장은 이익을 이끌고 이익은 주가 상승을 이끈다.’라는 기업가적 교훈, ‘개인의 재정적
운명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라는 삶의 원칙, ‘투자자로 성공하려면 항상 낙관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라
는 마인드까지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변하지 않는 진실들을 알려 준다.
또 시장의 불확실성을 견디려면 투자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분산, 시간
그리고 비용’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첫째 ‘분산’은 분산 투자를 말하며, 이는 특정한 투자 대상이나 자
산군으로 인한 손실 위험을 줄이고 이익이 발생한 투자 대상의 성장을 일부 공유하는 효과가 있고, 둘
째 ‘시간’은 경기가 성장하기 위해 발돋움할 때를 포착하는 것인데, 이는 장기적으로 보면 주기처럼 반
복되는 경기 침체와 불황을 극복하는 데 유용하며, 셋째는 ‘비용’인데, 투자에 드는 비용이 적을수록
내가 맡긴 돈의 더 많은 부분이 운용되므로 비용을 낮게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주가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은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그는 좋을 때나 힘들 때나 끈기를
가지고 원래 계획을 따르고 당황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물론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본성을 극복할 때 비로소 투자자가 된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주가의 등락이 감정을 뒤흔
들 때는 한발 뒤로 물러나 시야를 넓히고,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 차례
감수의 글
들어가며
제1부 시작
제1장 메이데이
제2장 인생 초반에 배운 교훈은 평생을 간다
제3장 경제적 독립을 준비하다
제4장 세상에 ‘쉬운 일’은 원래 없다
제5장 투자란 성장의 한 조각을 갖는 것이다
제6장 투자와 인생은 불확실성과의 싸움이다
제7장 찰스슈왑이라는 실험을 시작하다
제2부 급상승
제8장 금융계의 아웃사이더
제9장 우리는 상품을 권유하지 않습니다
제10장 첫 지점을 열다
제11장 혁신을 위한 무기를 준비하라
제12장 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제13장 자본과 신뢰는 성장의 필수 요소다
제14장 행동하라 그리고 설득하라
제15장 위기의 조짐
제16장 반란을 꾀하다
제17장 새로운 찰스슈왑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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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제18장 행운을 과신하지 마라
제19장 쓰나미의 한가운데에서
제3부 호황과 붕괴
제20장 지속적인 혁신만이 해결책이다
제21장 변화와 도약의 길
제22장 온라인 트레이딩의 시대를 열다
제23장 숫자 넘버 미래를 보라
제4부 반등
제24장 재기하려면 대담하게 도전하라
제25장 우리는 해낸다
제26장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하라
제27장 척과 이야기하세요
제28장 전략적 인수로 규모를 키워라
제5부 결국 시간이 증명한다
제29장 장기 투자에는 낙관적 태도가 필요하다
제30장 준비는 되어 있다
제31장 재도약
제32장 척의 성공 비결
마치며
감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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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찰스 슈왑 지음
시작
메이데이(May Day)
누구에게나 운명의 날이 있다: 나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립해서 세 번째 도전하는 창업
을 했다. 당시 나는 수십만 달러의 빚을 지고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 동업자 한 명이 내놓은 지분을
인수하기 위해 자금을 빌렸고, 이혼 후 상당한 신용 대출도 떠안았다. 이후 재혼을 했지만 이렇다 할
자산은 없었다. 아내 헬렌과 함께 딸 케이티를 키우고 있었다. 헬렌은 부동산을 판매하는 일을 했고
나는 증권거래위원회가 수수료 관련 규제를 시범적으로 완화하면서(1974년 4월부터 적용되었다) 가능
해진 주식 거래 수수료를 할인하는 실험을 1년째 하고 있었다.
금융 서비스 업계 사람들에게 메이데이로 기억될 그날의 하루 전인 1975년 4월 30일 수요일, 정말로
중요한 질문 하나가 머릿속을 내내 맴돌았다. ‘메릴린치’는 어떻게 할 것인가? 1년간의 시범 운영이 끝
나면 완화된 규제의 법제화가 추진될 것이므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내 계획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1914년 찰스 메릴이 ‘월스트리트를 대중 곁으로’라는 기치 아래 설립한 메릴린치
는 리테일 브로커리지(소매 위탁 매매) 부문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였다.
찰스 메릴은 중산층에게 투자 세계를 개방하겠다며 회사를 설립했다. 나는 그 목표를 높이 샀다. 그는
1940년대에 이미 수수료가 아닌 급여 형태로 브로커에게 보상을 지급하는 실험에 최초로 나서며 기존
시스템이 안고 있는 심각한 이해 충돌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다. 그러다 1970년대 초반 도널드 리
건(1971~1980년 메릴린치 이사회 의장 겸 CEO로 재임) 체제가 되면서 과거 방식으로 회귀했다. 수
많은 브로커들에게 동기를 부여한다는 이유였다. 아무튼 메릴린치는 엄청나게 성공한 기업이었고, 모
두들 이렇게 말했다. “메릴린치가 네가 하는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나서면 그땐 뼈도 못 추릴 거야.”
걱정은 됐지만, 메릴린치는 월스트리트 기득권층의 확고한 일원이었다. 메릴린치의 사업은 수많은 수
수료 기반 브로커와 고수익 투자 은행 부문, 리서치 부문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모든 것
을 단번에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메릴린치도 규제 완화에 대응해 조금이라도 수수료를
낮춰야 했고 그렇게 된다면 내 사업은 시작하자마자 이미 실패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수요일 아침, 이런 고민을 하며 몽고메리 스트리트 120번지에 도착했고,《월스트리트 저널》을 집어 들
자 1면에 “메릴린치가 5,000달러 미만의 거래 대부분에 대해 위탁 매매 수수료를 인상하기로 했다.”라
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일까? 수수료를 인상하기로 했다고? 나는 메릴린치가 보수를 낮추고 수
수료를 우리 수준으로 낮춰 우리의 기회를 가로챌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메릴린치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가격을 올리고 대형 기관에 할인해 주는 방식으로 규제 완화를 활용했다. 나는 일단 충
격이 가라앉자 절로 웃음이 났다. 나는 기회를 발견했고 제대로 활용하기로 작정했다. 이제껏 험난하
고 먼 길을 걸어왔지만 그날 찰스슈왑의 진정한 시장 기회를 찾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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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불만에서 시작된 혁신의 씨앗: 어린 시절, 아버지 덕분에 지역 신문에 실린 주식 시세표를 처음 접했
을 때부터 나는 투자라는 개념이 좋았다. 나는 투자야말로 재정적 독립에 이르는 수단이라고 확신했다.
투자는 단순히 노동으로 소득을 얻는 것을 넘어 성장하는 경제에 참여하는 수단이다. 나는 낙관주의자
이며, 이 낙관주의를 바탕으로 한 궁극적인 행위가 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 찰스슈왑을
설립하면서 투자 시스템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투자자들은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했다.
참고로 투자자들이 시장에 접근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었는데, 평균 수수료와 스프레드(spread) 비용
만으로도 투자자들의 자금이 무려 10퍼센트 가까이 잠식됐기 때문이다. 펀드 매니저가 투자자들에게서
자금을 모아 뮤추얼 펀드에 투자할 때는 대개 9퍼센트의 판매 수수료가 부과됐는데, 이는 투자금 대비
9퍼센트 수익을 올려야 비로소 손익 평형을 이룬다는 뜻이다.
한편 월스트리트는 1792년 출범한 날부터 수수료를 관리했다. 그곳에 모인 회원들이 뉴욕증권거래소
를 설립해 회원끼리만 주식을 사고팔 수 있으며 수수료는 개별적으로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데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새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증권거래위원회는 100여 년을 이어 온 월스트리트의 카르텔
을 해체하기 위해 과감한 실험에 나선 것이다. 참고로 옛 제도 아래서는 규제로 위탁 매매 수수료가
고정돼 있어 주식을 거래하려면 높은 비용을 치러야 했고 그 비용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증권업계의 규제 완화가 가져올 중대한 변화를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 찰스슈왑을 설립했고 초
점은 개인 투자자에게 있었다. 내가 쓴 책 『직접 하는 주식 거래』에서는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
한다. “이제 모든 투자자는 진정으로 독립할 수 있다. 불공정, 부풀려진 수수료, 잘못된 조언을 하는
브로커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다.” 수많은 전통적 증권 회사는 규제 완화가 가져올 결과를 두려워했다.
규제 완화 이후 1975년에 30곳이 넘는 뉴욕증권거래소 회원사가 문을 닫았고 100개 이상의 증권 회
사가 사업을 접거나 합병됐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기존 시스템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개혁의 명분
을 진전시키고 개인 투자자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며, 주식에 대한 소유권을 더 많은 대중의 몫으로 돌
리는 과정에서 사업을 키울 기회였다. 나는 이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라 믿었고 ‘스킨 인 더 게
임’(skin in the game)을 할 본격적인 시도였다.
투자란 성장의 한 조각을 갖는 것이다
성과에 대한 열망이 클수록 위험도 커진다: 경영대학원 2학년 때 생활비를 벌 일자리가 필요해서 포스
터 인베스트먼트 서비스라는 금융 자문 회사에서 시간제 일자리를 구했다. 학교에 다니며 저녁 시간과
주말에 근무했고 학교를 졸업한 6월부터는 정규직으로 합류했다. 이 회사는 특정 금융 회사에 소속되
지 않고 독립적으로 투자 자문 서비스를 판매했는데, 우리는 소식지를 발간했고 자금 운용도 했다.
우리는 서비스의 대가로 높은 비용을 청구했다. 먼저 8퍼센트 선취 수수료를 제한 뒤 매년 2퍼센트 수
수료를 제하고 고객의 계좌에서 거래가 발생할 때마다 일반적인 위탁 매매 수수료를 부과했다. 고객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수수료가 아깝지 않을 만큼 훌륭한 보석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성장 기
업에 투자했다. 연평균 성장률이 최소 30퍼센트인 회사가 목표였는데, 복리 기준으로 10년간 30퍼센
트 이상의 연평균 성장률을 기록하는 회사라면 투자 원금의 10배 이상을 회수할 수 있다는 게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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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기본 전제였다. 나는 그 전제가 마음에 들었고 내 회사도 그렇게 키우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바람대로
훗날 찰스슈왑 코퍼레이션은 최초 투자자들에게 훌륭한 성장주 역할을 했다. 1987년 상장 이후 배당금
을 재투자한 찰스슈왑의 주가는 S&P 500 상승폭 두 배에 이르는 연평균 19퍼센트 성장률을 기록했다.
만일 최초 투자자들이 주식을 계속 보유하고 배당금을 재투자했다면 그들의 최초 투자 원금은 상장 이
후 31년간 수백 배 증가해서 약 2만 1,000퍼센트 수익률을 기록했을 것이다. 다시 포스터 인베스트먼
트로 돌아와, 우리는 주로 소형 성장 기업에 투자했기 때문에 1962년 주식 시장 폭락은 고객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하나같이 30퍼센트, 40퍼센트에 이르는 포트폴리오 가치 하락을 경험했고 내 개인
계좌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고객들이 불행에 빠졌고 그중에는 내 아버지도 있었다.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는 부를 쌓는 법 / 성장은 이익을 이끌고 이익은 주가 상승을 이끈다: 포스터
인베스트먼트 서비스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열성적으로 성장주를 찾았다. 그러나 진정한 성
공은 일을 하고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업을 하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1962년 둘
째 딸 버지니아가 태어났다. 그리고 2년 뒤에 아들 샌디가 태어나 빠르게 뭔가를 이뤄야 했다. 내가
원하는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는 부’를 쌓으려면 창업이 최고의 시도라는 걸 알았다.
1962년 11월 나는 존 모스와 함께 포스터 인베스트먼트 서비스를 나와 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나는
데즈먼드 미첼을 설득해 투자 소식지 『인베스트먼트 인디케이터』를 발행할 자금 대부분을 조달했다.
그렇게 ‘미첼 모스 앤드 슈왑’이라는 회사가 세워졌고, 지분은 모스와 내가 각각 20퍼센트씩, 미첼이
나머지 60퍼센트를 갖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20대 중반에 내 사업과 기업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우리는 『인베스트먼트 인디케이터』를 격주로 발행해서 고객들이 직접 투자 대상을 선정하도록 했는데,
엄선한 상장주에 투자할 시점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물론, 투자자들이 주식 시장의 순환 주기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도록 경제 전반에 관한 큰 그림을 제공했다. 맨 처음 연간 구독료는 60달러였으며
나중에 72달러로 올렸다. 가입자는 최대 3,000여 명에 달했다.
1963년 3월 발행된 『인베스트먼트 인디케이터』 창간호를 다시 보면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첫째, 그
때 이미 우리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똑똑하고 호기심 많은 개인 투자자들을 목표 고객으로 삼
았는데, 훗날 찰스슈왑에 계좌를 개설한 사람들은 정확히 이런 투자자들이다. 둘째, 성장 기업에 일찍
부터 관심이 있었다는 증거들인데, 참고로 창간호에서 나는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이익이 증가하는
기업이 성장주로서 장기적으로 더욱 큰 수익을 낸다는 근본적 신념(역사적 사실)을 고수합니다.” 이후
모스는 학교로 돌아갔고 나는 그의 지분을 아주 싼값에 인수했다. 여전히 60퍼센트 지분을 보유한 미
첼은 회사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기 시작했고 아울러 동업자들이 흔히 그렇듯 충돌도 있었다. 1968년
마침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보유한 주식을 사서 지배 지분을 확보하고 싶습니다.” 그
는 지분을 팔겠다고 동의했다. 꽤 높은 프리미엄을 요구했지만 상관없었다.
투자와 인생은 불확실성과의 싸움이다
침체 속에서 도전한 퍼스트커맨더: 금융 서비스 사업가로서 맞이한 첫 환경은 좋지 않았다. 짙은 먹구
름이 업계 전체에 드리웠으며 빚 문제도 심각했다. 미첼에게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크로커뱅크에서
10만 달러를 빌렸지만 미첼과의 거래가 끝난 직후 시장이 폭락하면서 회사의 가치도 하락했고 수입도
줄었다. 사업에 현금 투입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나는 윌리엄 슈왑 삼촌으로부터 10만 달러 투자
를 받았고, 다른 동업자도 영입해 사업을 재편하고 퍼스트커맨더(First Commander)를 설립했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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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는 필라델피아증권거래소에 회원사로 등록하고 샌프란시스코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때는 일과 가정
모두 엉망이었다. 수전과 2년 동안 별거한 끝에 1972년 초 이혼했다. 결혼한 지 13년 만이었다.
혼자서라도 바닥을 찍고 다시 시작하라: 30대 중반에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으며 이렇다 할 자신도
없었다. 가진 것은 빚뿐이었다. 그때 고등학교 친구인 휴고 쿼큰부시와 자주 어울렸는데, 그의 여자 친
구가 헬린 오닐을 내게 소개해 주었고, 우리는 1972년에 결혼했다. 헬렌과 내가 결혼하자마자 약세장
이 시작되었다. 불황은 1973년과 1974년에 극에 달했다. 퍼스트커맨더의 사업이 부진하자 지친 삼촌
은 손을 떼고 싶다고 말했다. 삼촌은 자신의 퍼스트커맨더 지분 전체를 10년 만기 채권으로 교환했고,
지분의 대부분은 나와 동업자들이 나눠 가졌다. 그해 말 나는 다른 동업자 지분마저 사들였는데, 지분
에 대한 대가로 지불할 현금이 없었기 때문에 삼촌에게 갚아야 할 약 10만 달러의 부채를 내가 떠안기
로 합의했다. 그리고 나 홀로 (그리고 극히 소수의 직원들만) 남았기 때문에 1973년에 회사를 찰스슈
왑 앤드 컴퍼니 주식회사(Charles Schwab & Company, Incorporated)로 다시 법인화했다.
찰스슈왑이라는 실험을 시작하다
변화를 기회로, 생각을 행동으로 바꿔라: 1974년 4월 나는 슈왑을 주식 거래 전문 증권사로 재정비했
다. 더 이상 투자 은행 업무는 하지 않았다. 투자 은행 업무와 대중을 상대로 한 주식 영업이 업계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이해 충돌 문제의 근원이라고 여겼고 그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서
치 업무도 그만두었고 뮤추얼 펀드와 헤지 펀드도 접었다. 소식지 발행도 중단했다. 잡다한 비용을 모
두 줄여 전례 없이 낮은 가격, 즉 기존 증권 회사가 부과하는 것보다 최대 75퍼센트 저렴한 가격을 투
자자들에게 제시하고 싶었다. 이는 몇 달 뒤 광고를 시작할 때 투자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요소였다.
규제 완화가 이룬 중대한 진전과 시장의 의미 있는 변화, 실질적인 기회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난 것
은 남김없이 없애고 싶었다. 커다란 기회가 눈앞에 있었고 절대로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급상승
금융계의 아웃사이더
나아가려면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한다: 메릴린치의 설립자 찰스 메릴은 “주식은 고객이 사는 것이 아니
라 우리가 파는 것이다.”라는 말로 영업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로 접근했다. “안녕하십니
까? 찰스슈왑입니다.” “계좌번호 12105002입니다. 모터스 2,000주, 57달러에 지정가 매수.” 그리고
클릭. 그게 전부다. 우리의 거래는 브로커가 아니라 고객으로부터 시작된다. 밖에 나가서 고객에게 점
심 식사를 대접하거나 골프를 치지도 않으며 좋은 정보가 있다며 전화를 돌리는 일도 없다. 고객의 요
청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역할은 고객이 원하는 걸 실행에 옮기는 것뿐이다. 이
런 우리의 거래를 홍보하는 광고를 몇 건 내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루에 20건, 30건씩 처
리하던 거래 건수가 곧 100건이 됐고 계속해서 늘어나기 시작했다.
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내게 없는 능력을 갖춘 인재를 찾아라 / 현실의 장벽에 압도되지 마라: 1980년에는 우리는 14개 주에
22개 지점, 9만 명의 고객, 13만 개 계좌, 6,000만 달러의 고객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작은 반항아
였던 우리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고 이제 나이에 걸맞게 행동할 때였다. 그것이 바로 래리 스툽스키를
채용한 이유였다. 그는 지점장으로서는 형편없었지만 정확히 내가 찾던 미래의 COO였다. 당시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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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끝없이 자본을 구했고 끝없이 좌절했다. 궁극적으로 현금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만큼 충분한 거래 수
수료가 발생해야 했지만, 새로운 계좌에서 곧바로 수익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이는 성장이 지속되길
원한다면 쉬지 않고 자본을 조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
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1980년 초, 마침내 상장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회사의 가치에 관한 외부 의견이 필요했
다. 물론 내게도 꽤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주당 4달러에 120만 주를 팔아서 480만 달러를 조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후 가격 산정 회의에서 한 사람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는데, 나는 숫자를
들여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달러 75센트. 나는 그대로 일어나 회의실을 나왔다. 찰스슈왑
의 첫 상장 시도는 그렇게 끝났다.
섣불리 절망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할인 증권 업계에서 내 입지는 안전했다. 이미 상장을 대체할 자
금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젊은경영인협회에서 만난 친구이자 기업가 토니 프랭크가 나를 구했다. 그는
내셔널스틸의 이사직을 맡고 있었는데, 나는 내셔널스틸이 투자 기회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
는 프랭크에게 전화를 걸었고 직접 만나서 부탁했다. “자본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회사가 맹렬한 기세
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회사 지분 20퍼센트를 400만 달러에 팔 용의가 있습니다.” 프랭크는 즉시 “좋
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찰스슈왑 코퍼레이션은 훗날 싸우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셔널스틸은 단기 투자로 엄청난 수익을 거뒀다.
자본과 신뢰는 성장의 필수 요소다
가장 필요한 것을 가진 자의 손을 잡아라: 내셔널스틸의 투자로 도움을 받았지만 한시름 놓은 것도 잠
시였다. 현금 압박은 계속 가중됐다. 우리는 미래를 염려하며 늘 자본을 구했고, 캘리포니아에 있다는
지리적 조건은 우리를 BOA로 이끌었는데, 우리는 기존에 임페리얼뱅크에서 조달한 후순위 대출에 더
해 추가로 후순위 대출을 얻을 수 있는지 여부를 BOA와 논의했고, BOA는 우리가 계산한 자본에 더해
완충 역할을 할 자본까지 추가로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1981년 9월, BOA는 검토 과정에서 우리
가 마음에 들어 아예 슈왑을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나는 슈왑을 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BOA처럼 존경받는 기업에 회사를 매각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신뢰를 유지하면 언젠가 기회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핵심 사항들이 빠르게 구체화됐다. 먼저 정확한
주식 수는 나중에 정해지겠지만, BOA가 180만~220만 주를 우리에게 발행하는 주식 맞교환 방식이 선
택됐다. 둘째, 나는 BOA 이사직을 맡기로 했다. 셋째, 글래스-스티걸법에 최초의 도전이 될 이 결합
에는 규제 당국의 승인이 필요했으므로 양측 모두 합의를 마무리하기까지 수개월이 걸릴 것을 알고 있
었다. 따라서 BOA는 후순위 대출 형태로 우리에게 즉각 700만 달러 자본 투입을 제의했는데, 이는 우
리에게는 엄청난 액수였고 앞으로 새로운 모회사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게 해 주는 제의였다.
한편 합의서에는 또 다른 세부 사항이 있었다. 내 이름과 얼굴에 대한 소유권과 관련된 문제로 몇 년
뒤 중요한 영향을 미칠 사항이었다. 참고로 《저널》에 내 사진이 들어간 광고를 수년째 실어 온 당시
에는 어디까지가 개인으로서의 나라는 사람이고 어디서부터가 회사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나인지 정확
히 구분 짓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BOA가 장차 슈왑을 재매각하기로 결정할 경우 내 이름과 얼굴을 거
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즉 소유권은 내게 귀속된다는 것이 중요했다. 참
고로 이는 이혼을 대비해 특정 자산을 보호하려고 작성하는 혼전 합의서 조항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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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주어야 한다: 우리는 계약 조건에 동의하고 1981년 11월 말 이 거래를 발표
했고, 즉시 증권업협회가 후원하는 소송에 휘말렸다. 글래스-스티걸법에 따라 합병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송이었다. BOA와 우리는 법원과 규제 기관의 결정을 기다렸다. 대법원은 1983년 여름에야 비로소
우리의 합병을 최종 승인했다. 그런데 그 18개월 사이에 거래의 양상을 바꾸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
데, 대부분 BOA에 불리하고 슈왑에는 상당히 유리한 일들이었다. 약속된 700만 달러 후순위채가 즉
시 투입됐고 그 자금은 우리의 운영에 즉각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자금 덕분에 1982년 봄 시장
이 다시 한번 상승세로 들어서며 발생한 성장의 기회를 활용할 수 있었다.
이후 사업이 번창하면서 슈왑은 창출한 이익을 활용해 자본 요건을 충족했고 확장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는 BOA로부터 추가로 한 푼도 받지 않고도 1982년에만 텍사스에 6곳, 뉴올리언스와 오
클라호마 시티, 호놀룰루에 각각 한 곳을 포함해 총 16개 신규 지점을 추가했다. 홍콩에도 첫 해외 지
점을 열었다. 우리 고객은 1982년 37만 4,000명을 기록해 85퍼센트 급증했다. 매출은 1억 달러를 넘
어섰고 계좌 자산은 2배 이상 증가해 2,310억 달러를 넘었으며 이익 역시 2배 이상 증가한 520만 달
러를 기록했다.
반면 BOA는 상황이 악화됐다. 장기간 지속된 분기별 이익 성장세는 아마코스트가 합류하자마자 막을
내렸다. BOA의 위기는 한창 진행 중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심각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
가 아는 것은 합병을 하기로 하고 악수를 나눈 1981년 11월에 24달러였던 BOA 주가가 계약을 최종
적으로 마무리한 1983년 1월에는 20달러로 하락했다는 것뿐이었다. 아무튼 BOA 주식의 가치 변동을
반영해 합의 조건을 일부 조정하는 것이 허용됐다. 덕분에 총 5,200만 달러 상당의 주식을 260만 주
발행하는 것으로 최종 조건이 정해졌다. 결과적으로 BOA는 예상보다 큰 가치를 지닌 회사에 예상보다
적은 금액을 지불한 셈이었다. 우리 쪽에서는 누구도 반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찰스슈
왑은 BOA가 지분을 100퍼센트 소유한 완전 자회사로서 새로 시작하게 됐다.
행동하라 그리고 설득하라
주식을 사는 것은 이해관계를 사는 것과 같다: 슈왑은 BOA의 100퍼센트 자회사로서 상당한 발전을
이뤘다. 그 일부는 BOA의 자본과 신용도 덕분이었다. 하지만 시대적 결과이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금융 서비스 업계는 위탁 매매업 부문에 우호적이었다. 다우 지수는 상승을 거듭한 끝에 1982년 말
1,000포인트를 기록하며 20년 가까이 이어 온 미국 주식 시장의 횡보 장세를 마무리했고, 1987년에
폭락으로 쉬어 가기까지 상승세를 이어간 강세장의 시작을 알렸다.
또한 규제를 간소화하고 개인 퇴직 계좌(IRA) 가입 자격 요건을 완화해 가입 대상을 확대하는 법안이
1982년 발효되어, 직업이 있는 70세 미만의 모든 미국인이 IRA에 납입한 금액에 대해 소득 공제 혜택
을 받게 됐다. 그러자 IRA 납입금은 1981년 50억 달러 미만에서 1982년 280억 달러 이상으로 급증했
고, 강세장이 맹위를 떨치면서 엄청난 돈이 주식 시장에 유입되고 주가를 더욱 끌어올렸다. 아무튼 돈
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에 중요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고, 이는 슈왑의 건전성에도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회사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그 변화를 최대한 활용했다.
위기의 조짐 / 반란을 꾀하다
새로운 시각을 가지려면 틀 밖의 인물을 영입하라 / 모든 것을 걸고 홀로 책임을 진다는 것: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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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후반 즈음에는 BOA가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982년 1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BOA는 165개 캘리포니아 지점을 폐쇄했으며 직원을 11.5퍼센트 줄였다. 반면 BOA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슈왑에서는 강세장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일평균 거래 건수가 급증해 1980년 초 대비 네
배로 증가해서 약 8,000건을 기록했다. 총 계좌 수(1985년 8월 기준 100만 개)와 계좌 자산(1986년
11월 기준 100억 달러)은 중요한 임계점을 돌파할 태세였고 모기업과 달리 이익을 내고 있었다.
나는 두 기업 사이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BOA에 슈왑을 매각했다. 강력한 두 기업이 결합해 각자
혼자일 때보다 더 많은 것을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결과가 실망스러
웠다. 우리는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BOA의 실물 지점을 활용해 새로운 고객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은행 지점에 슈왑의 단말기를 설치했다. 물론 신규 계좌를 일부 얻기는 했지만 많지
않았다. 또 BOA와 슈왑이 결합한 IRA 상품에도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규제 검열을 통과해 실제
상품을 출시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또 BOA가 비용을 절감하는 긴축 경영
에 집중하면서 우리도 자본 투자와 사업비 지출은 물론 거의 모든 행위에 은행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우리는 지금과 같은 성장세에서 비용 절감이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업가가 규제라는 장애물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 BOA와 연관돼 누렸던 장점은 단점으로 바뀌었다.
1985년 여름 나는 더 늦기 전에 순자산의 일부라도 지킬 수 있기를, 가능하다면 슈왑을 되사는 데 도
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BOA 주식을 처분했다. 24달러에서 출발한 BOA 주가는 11달러가 됐다. 나뿐
만 아니라 슈왑을 일구는 데 도움을 준 직원들의 재산이 증발했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맞서 싸워야 한다 / 옳은 일이라면 언젠가는 흐름이 바뀐다 / 준비를 하고 행동
에 옮겨라: 1986년 8월 13일 나는 BOA 이사직을 사임했다. 무엇보다 내 회사를 되찾을 방법을 생각
하기 시작하면서 발생할지 모르는 이해 충돌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면 과거와는 다른 싸움에 나서야 했다. 이후 결국 내가 직접 차입 매수를 추진할 수 있다
면 나와 경영진 그리고 우리 직원들에게 훨씬 더 좋은 거래가 될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BOA가 내 제
안을 받아들일지가 문제였다. 한편 1986년 10월 7일, 내가 이사회에서 사임한 지 두 달도 지나기 전
에 이사회는 샘 아마코스트를 해고했다. 나는 내 주장의 정당성이 입증됐다고 느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BOA는 아마코스트의 전임자였던 톰 클로센을 복귀시킬 수밖에 없었다.
1986년 할로윈에 아무런 정보 없이 클로센과 함께한 점심 식사 자리에서 다행히도 그의 처분 자산 목
록에 슈왑이 올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클로센과 만난 지 닷새 만에 BOA가 공개 입찰을
통해 최고 입찰자에게 슈왑을 팔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희망은 불안으로 바뀌었다. 이제
슈왑의 주인만 바뀔지도 모르는 끔찍한 가능성을 걱정해야 했다.
새로운 찰스슈왑의 탄생
최고의 조언자는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BOA가 살로몬브라더스를 매도 대리인으로 내세운 것을
보고, 오랜 친구인 조지 로버츠에게 협상에서 내 편에 세울 좋은 투자 은행가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
다. 로버츠는 몇 사람을 떠올리고 조사를 마친 뒤 아널드와 나를 불러 앉혔다. 그리고 첫마디는 기꺼
이 자금을 대겠다고 나서는 회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살로몬브라더스는 평가액으로 2억
5,000만 달러에서 3억 5,000만 달러를 제시했다. 불과 몇 년 전 내가 5,200만 달러에 판 회사에 그렇
게 많은 돈을 지불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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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그래서 톰 클로센과 BOA의 CFO 프랭크 뉴먼과 접촉해 2주간 독점적으로 제안할 수 있는 기회를 요
청했다. 클로센은 경쟁 입찰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쨌든 동의했다. 그는 BOA에서 자산을 줄이
고 자본을 조달해서 파산을 막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슈왑을 현재 경영진에 매각하는 것은 그 목
적에 부합했고 게다가 간단하다는 이점도 있었다. 그는 이를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가진 지렛대는 무엇인가: 돌이켜보면 BOA에 회사를 매각하면서 신중을 기해 내 이름과 초
상을 매각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천재적이었다. 물론 애초에 그 조항의 결정적인 역할을 예측한 것은
아니었다. 계약서에 따르면 현재 BOA가 협박하듯 하루아침에 슈왑을 제3자에게 매각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 나는 길 건너편에 또 다른 찰스슈왑을 얼마든지 열 수 있었다.
BOA는 내 회사를 매각할 수 있어도 나 자신이나 내 경영진은 처분할 수 없었다. 결국 협상 끝에 나는
BOA에게 2억 8,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추가로 미래 이익의 일정 지분을 보장하는 데 합의했다.
승리의 기쁨 속에서도 다음 행보를 준비하라: 50세 생일을 몇 달 앞두고 매듭지은 찰스슈왑 재인수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열심히 하면 보상이 따른다는 사실을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에 분명히 보여 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할 때 좋은 결과가 따르지만, 이는 신념을 위해 기꺼
이 싸우려는 의지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행운을 과신하지 마라
IPO를 다시 추진하다: 처음 상장을 시도한 지 7년 그리고 BOA를 상대로 차입 매수를 마무리한지 불
과 며칠 만에 나는 슈왑 주식의 상장을 다시 추진했다. 돌이켜보면 첫 번째 IPO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분명했다. 대부분의 관찰자들이 우려한 것처럼 우리가 종사하는 신생 산업에는 아직 사람들에
게 확신을 줄 만큼 충분히 쌓인 실적이 없었다. 물론 나는 할인 증권업 전반, 특히 슈왑의 미래가 밝다
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비전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못했고 그 이유도 이제는 알 수 있다.
첫 번째 시도 이후 7년이 지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영역이라는 이미지
를 탈피하고 성장한 할인 증권업은 전통적인 증권 회사들로부터 꾸준히 시장 점유율을 빼앗았다. 1986
년 매출은 50퍼센트 증가해 3억 달러를 넘어섰고 순이익은 세 배 가까이 늘어 3,000만 달러 이상을
기록했다. 오랫동안 공격적으로 광고한 덕분에 어디에 있는 투자자든 우리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는
지 알게 됐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앞에 언급한 것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도 있었다.
1987년 월스트리트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1982년 8월에 시작된 강세장이 5년 가까이 이어졌고
하락 징후는 전혀 없었다. 다우 지수가 2,500선을 돌파하며 급등했고 많은 기업들에게 높은 밸류에이
션이 부여되면서 유례없이 많은 기업이 상장했다. 그러나 우리만큼 뛰어난 평판과 높은 수익성, 빠른
성장세를 갖춘 회사는 드물었다.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나를 IPO로 강하게 이끌었다. 또 내부
요인들도 나를 몰아붙였다. 비록 선순위 채무와 후순위 채무를 활용해 유리하게 구성했지만 부채 규모
는 여전히 엄청났다. BOA로부터 자유를 찾은 만큼 가능한 한 빨리 부채를 상환할 작정이었다.
지금의 부는 수많은 노력의 결실이다: 9월 초 로드 쇼(기업 설명회)에 나섰다. 스툽스키, 아널드와 함
께 일주일 동안 미국 전역 주요 도시의 기관 투자자들을 상대로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이어서 콩코드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갔다가 런던, 프랑크푸르트를 잠시 방문했다. 설레는 일이었다. 심지어 각각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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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른 도시에서 다른 이들에게 하루에 세 번씩 같은 내용을 발표한 날에도 그랬다. 그리고 마침내 1987
년 9월 22일, 퍼스트커맨더 파트너들의 주식을 전부 사들이며 무작정 희망을 품고 회사를 설립해 걸음
마를 시작한 지 15년 만에, BOA로부터 슈왑을 되찾은 지 6개월 만에 찰스슈왑 코퍼레이션은 뉴욕증권
거래소에서 티커(ticker) ‘SCH’로 거래를 시작했다. 주가는 처음 상장을 고려했을 때 예상했던 12.14달
러를 훨씬 웃도는 주당 16.50달러로 출발했다. 공모한 총 800만 주의 가치는 1억 3,200만 달러(종가
16.625달러 기준)였다. 그리고 우리는 24시간이 지나기 전 8,700만 달러를 시큐리티퍼시픽뱅크에 송
금했다. 대출금 전부는 아니었지만 부채 부담을 줄이기에는 충분했다. 이로써 부채로 인한 심적 부담
이 크게 해소됐고, 동시에 개인 순자산이 다시 크게 증가해 내가 개인적으로 보유한 슈왑 지분의 가치
는 1억 달러가 됐다. 상상해 본 적 없는 큰돈을 벌었고 이 정도면 부자였다.
호황과 붕괴
온라인 트레이딩의 시대를 열다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라: 몇 해 전 우리는 기술이 우리 사업에 혁명적인 역할을 할 것을 인지
하고 직원들뿐만 아니라 고객들에게도 우리가 기술에 전념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슈왑 테크놀로지
(Schwab Technology)라는 독립적인 조직을 출범시켰다. 기술 팀은 서비스 담당자들의 책상 위 컴퓨터
를 고도로 복잡한 중앙 처리 장치 시스템에 쉽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직접 연결할 방법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고, 월드 와이드 웹(WWW)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결국 해냈다. 주식의 호가를 구하고, 마
진 거래 계좌 잔고를 확인하고, 고객의 매매 주문을 입력하는 과정을 모두 없앴다.
그러다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월드 와이드 웹이 서비스 담당자의 일을 대신할 수 있다면
고객의 일을 대신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란 생각이었다. 엄청난 비용을 절감할 가능성이 보였
다. 우리는 매매가 인터넷으로 옮겨 가면 우리가 부담하던 접속 비용이 고객에게 옮겨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객들이 이미 개인 인터넷 서비스 사용료를 지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와 고객 모두
추가로 부담할 비용은 없었다. 게다가 우리의 소프트웨어와 통신 관련 비용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결
국 인터넷 접속만 가능하다면 고객은 24시간, 일주일 내내 세계 어디에서도 계좌 정보와 시장 데이터
에 접근할 수 있고, 그러면 시장 내부자와 일반 투자자 사이의 격차를 좁힐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기술 개발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마침내 1996년 2월 말 즈음, 실제로 작동하는 응용
프로그램이 우리 손에 쥐어졌고 3월 말 마감 시한에 맞춰 프로그램이 공개됐다. 첫 달에는 광고도 하
지 않았다. 시스템은 여전히 불안정했고 과부하도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0만 명의 고
객이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거래를 시작했다. 하지만 로그인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로그인에 성공
한다고 해도 느린 처리 속도와 씨름해야 했다. 시스템은 계속해서 지연됐다. 앞으로 몇 달 동안 발생
할 일이었기에 만일을 대비해 늘 전화를 대기시켜 고객을 지원했다.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시스템을
갖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하지만 우리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개선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처리 능
력을 늘리고 기능을 더하고 이용 편의성을 높였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기능이지만 당시에는 그
과정이 곧 발명이었다. 고객들도 단순한 컴퓨터 사용법부터 시작해서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그리고 가격 책정이 문제였다. 이트레이드 같은 신규 업체들이 촉발한 가격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우리의 가격은 경쟁 업체의 최저 가격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나중에는 비용이 훨씬 줄어들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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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알았기에 인터넷을 이용한 주식 거래에 70달러보다 낮은 수수료를 부과했고, 비용이 실제로 줄어들면
서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훨씬 낮은 수수료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한때 높은 고정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던 주식 거래는 본질적으로 범용화됐고 이 변화는 인터넷 거래가 등장한 이후
30년 동안 급속도로 빨라졌다. 오늘날 주식 거래 수수료는 대부분 ‘무료’다.
그러나 예전 모델을 기반으로 한 사업도 여전히 잘되고 있었고, 그 사업을 그냥 내던질 수는 없었기에
2단계 요금제 도입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전체 요금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고객은 여전히 옛 방식대로
지점에서 대면 거래나 전화를 이용한 거래가 가능했다. 그리고 전화 상담원과의 무제한 통화 등 우리
가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한편 부가 서비스를 포기하는 대신 온라인 거래 전용인
29.95달러 요금제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요금제 상품의 이름을 ‘e.슈왑’으로 정했다.
수준 높은 e.슈왑 고객들은 전화 통화를 거의 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때문에 이 요금제가 등장했는
데, 그들이 원하는 것 대부분, 즉 호가 조회, 거래 확인, 잔액 조회 등은 온라인으로 충분히 가능한 업
무였고 궁금한 점은 이메일로 문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큰 실수였다.
개념은 훌륭했지만 실제는 끔찍했다. 머지않아 이메일을 통한 고객 지원이 전화 한 통보다 서너 배 더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고객들은 이메일로 ‘배당 기일이 언제인가요?’ 같은 간단한 질문
을 보내왔다. 대체 어떤 배당이란 말인가? 그러면 또 다른 이메일이 오가야 한다. 또 법률적인 이유로
모든 답변은 미리 정해 둬야 했고 미리 정해 둔 답변은 질문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았다. 게다가 시스
템 용량은 상업적 규모의 이메일을 처리하기에 부족했다. 한마디로 e.슈왑 고객들은 온라인 투자를 좋
아했지만 e.슈왑으로 인한 제약은 싫어했고, 고객들은 서비스의 취약 지대로 내밀렸다고 느꼈다.
게다가 이트레이드나 아메리트레이드와 같이 서비스는 좀 더 제한적일지 몰라도 제약이 덜하고 비용도
저렴한 소형 증권 회사들에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고 포트럭도 마찬가지
였다. 1997년 12월 사장 겸 COO인 포트럭을 공동 최고 경영자로 임명했다. 포트럭은 자기 팀을 이끌
고 변화를 옳은 방향으로 되돌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포트럭 역시 나처럼 마케팅 전문이었다. 그도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해서라면 매출을 희생시키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1997년 우리는 29.95달러 온라인 요금제 고객의 서비스 이용에 적용되는 제약을 없애는 것을 논의했
다. 회사의 앞날이 걸린 중요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인터넷 주식 거래로 고객이 대거 이동하면서
매출이 감소하고 주가가 하락할 수도 있었다. 비용이 많이 들 것은 모두 알고 있었고 여기엔 이견이
없었다. 전략 팀의 추산에 따르면 1년 동안 수억 달러의 매출을 잃을 수 있었다. 단기적으로는 수익성
이 없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수익성이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마침내 1998년 1월 1일 우리는 e.슈왑
의 구분을 없애고 모든 고객에게 저비용 온라인 주식 거래 서비스를 제공했다. 슈왑의 고객이라면 누
구나 지점 방문과 전화 문의를 비롯한 모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온라인 투자는 더 이상 특
별한 것이 아니라 표준이었다.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아는 한 미래는 여기에 있었다.
본격적인 투자의 대중화가 시작되다: 시기적으로도 완벽했다. 1997년 6만~7만 건 정도였던 고객들의
일평균 거래 규모는 1998년 약 10만 건으로 급증했다. 고객 계좌의 자산은 1997년 3,540억 달러에서
4,900억 달러로 39퍼센트 급증했다. 온라인 계좌 수는 1월 말 130만 개를 돌파해 전년 대비 63만
8,000개 증가했다. 게다가 업계 환경도 우호적이었다. 슈왑은 전환점을 맞았다. 1998년 12월 28일 고
객 총자산 규모가 급증해 1조 달러 가까이 이르렀다. 획기적인 기록이었다. 투자를 하는 대중이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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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회사에 부여하는 가치의 척도인 시가 총액은 255억 달러로 메릴린치를 뛰어넘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늘 대중이 투자에서 힘을 갖는 게 옳다고 믿었다. 그래
서 슈왑은 주식 시장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최선인 것을 잘 알고 있어 직접 거래를 선호하는 수
준 높은 개인 투자자들을 위한 위탁 매매 증권 회사로 출발했고, 온라인 거래가 등장하면서 이런 개인
투자자들이 대거 우리를 찾았다. 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개인적이고 효율적으로 제공되고 리서치 자료
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우리의 새로운 서비스에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이 서비스는 우연하게도 역사
적인 주식 시장의 호황기 한가운데서 세상에 나왔다. 다우 지수는 1994년 11월에 5,000포인트, 1996
년 10월에 6,000포인트, 1997년 2월에 7,000포인트를 돌파했고 2001년 초에는 거의 12,000포인트로
새로운 고점에 도달했다. 새로운 투자자들이 시장에 몰려들었고 슈왑은 최고의 수혜자였다.
결국 시간이 증명한다
장기 투자에는 낙관적 태도가 필요하다
투자자들이 시장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2007년 초 마침내 많은 것들이 자리를 잡았고 잘되어 가고
있었다. 고객의 신규 자산 증가율은 1년 전에 비해 거의 두 배 수준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의
경쟁 회사보다 훨씬 더 높은 이자를 지급하는 새로운 당좌 예금 계좌를 출시했고, 인베스터 퍼스트라
는 신용카드를 선보일 계획이었다. 두 상품 모두 투자자들에게 원스톱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고안된 상품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2004년 이후 가격을 계속 인하했는데, 슈왑 뮤추얼 펀드 계좌의 최
소 유지 잔액 조건을 100달러로 낮춰 새롭게 투자를 시작하는 젊은 투자자들의 고객 기반을 구축했다.
경영진도 강했다. 월트 베팅어는 일을 훌륭히 해냈고 얼마 전 사장 겸 COO로 승진했다.
한편 나는 공공 정책과 투자자를 위한 열정에 쏟을 시간이 많아졌는데, 부시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
여 금융 문맹 퇴치를 위한 대통령 직속 자문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개인 재무관리법을 아는 것은
국민 모두에게 중요한 역량이었다. 재무적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금 흐름을 관리하고 부채의 역
할과 복리의 힘을 이해하며 투자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한데, 학교의 교과 과정에서도 이런 기
초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보다 더 일상생활에 필요한 역량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한편 미국 자본 시장 경쟁력에 관한 회의에서 발언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개인 투자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관해 발표했다. 개인 투자자들이 시스템에 원하는 것은 공정성, 공평한 경쟁의 장, 저렴한
비용과 효율적인 시장 접근, 투자 결정에 도움이 되는 정보,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는 조언 등 몇 가
지 기본적인 것들이다. 다시 말해 투자자의 확신은 시장에서 이런 것들을 기대할 수 있는지 여부와 직
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머지않아 그 확신이 혹독한 시험대에 오를 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돈 너머에 ‘사람’이 있다: 2008년 9월 29일 다우 지수는 777포인트 하락했다. 역대 최대 하락폭이었다.
그 후 몇 차례 반등하는 듯했지만 6개월 동안 하락세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알지만 주식 시장이 바
닥을 친 것은 2009년 3월 초였다. 그 피해는 엄청났다. 2007년 중반부터 2009년 3분기까지 약 12조
6,000억 달러에 이르는 가계 자산이 사라졌다. 신용 위기와 금융 위기,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불황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원인을 파헤치는 수십 권의 책과 수백 개의 기사가 나왔고, 유혈이 난무했던
당시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다른 사람들의 몫으로 넘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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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많은 경우 ‘유동성 경색’, ‘파생 상품’, ‘거래 상대방 문제’와 같은 난해한 개념을 들어 위기를 초래한 원
인을 기계적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간단한 답은 금융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다루는 게 단순한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우리가 다루는 돈 너머에는 ‘사
람’이 있다. 돈은 그렇게 접근해야 한다. 레버리지(차입 자본)의 활용은 부적절한 수준의 위험을 야기
했다. 비록 취지는 좋았으나 너무 많은 금융 서비스업 종사자가 분별없이 융자 조건을 완화하며 대출
을 받도록 부추겼다. 너무 많은 금융 소비자들이 그 기회를 부여잡았고 능력 이상으로 빚을 늘렸다.
나는 슈왑의 은행가들에게 ‘갚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돈을 빌려줄 것’을 강조한다. 당연한 것 같아도
중요한 문제다. 과거의 위기는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돈을 버는 데만 지나치게 집중했
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신청서 작성과 신용 조회로 수수료를 벌었고 주택 담보 대출을 재판매했는데
(주택 담보 대출을 대출 장부에 남겨 두는 은행은 거의 없었음), 주택 담보 대출은 결합해 점점 더 복
잡하게 상품화한 후 재판매했다. 각각의 대출에서 돈을 빌린 사람의 상환 능력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
았었다. 신용 시장과 금융 서비스 산업의 1차 기능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익과 수익을 끌어올린
다거나 국가의 번영으로 가는 길을 설계하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 성장을 지원하고 위험을 신중하게
관리해 대중의 신임과 신뢰를 유지하는 것이다. 신임과 신뢰가 없으면 시스템은 무너진다.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 아니라 시간이다: 위기를 지나는 내내 슈왑의 상황은 양호했을 뿐만 아니라 오
히려 잘해내고 있었다. 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10월 신규 계좌 수는 전년 대비 88퍼센트 증가한 3만
개를 기록했다. 2008년 지점이 달성한 고객과의 상호 작용은 500만 건에 이르렀다. 아무튼
2004~2006년 동안 조직을 개편하며 실행한 모든 일 덕분에 우리는 꿋꿋이 폭풍우를 버텨 냈다. 한편
금융 위기를 끝내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모든 대책과 고객들을 위한 업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투자자
들은 공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 고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점과 전화 서비스 센터에는 무엇
을 해야 하는지 묻는 질문이 쏟아졌고 심지어 전부 팔아 달라는 주문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영상 메시지 몇 편을
녹화했다. 감독은 내게 대본에 적힌 글을 장면 단위로 끊어 읽게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진
심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장 알아듣기 쉽고 진심 어린 방법으로 고객들에게 말을 건
네고 싶었다.
나는 대본을 던져 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을 다음과 같이 했다. “탈출구를 향해 달려가는 것은 본
능입니다. 그런데 회복할 때까지 버티려면 ‘팔자, 전부 팔아치우자.’라는 감정과 싸워야 합니다. 이 일
을 해 오면서 과거에도 지금과 같은 일을 겪었고 그때마다 늘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약 4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시장에는 이런 균열이 아홉 차례나 있었습니다. 현명한 투자란 한 해, 한 해 균열을 견뎌 내
는 것입니다. 힘들겠지만 더 나은 날을 기대하면서 시장의 불확실성에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참고로 시장에서 최적의 시점을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흔히 말하듯 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시점이
아니라 시간이다. 다우 지수는 2010년 말에 2008년 9월 29일 급락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만일 우리
가 텔레비전 광고를 촬영한 그날 다우 지수나 S&P 500, 슈왑 1000 지수에 투자했다면 5개월 동안 시
장이 추가로 하락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1년 내로 25퍼센트에 가까운 수익률을 기록했을 것이다. 불행
히도 고통스러운 18개월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시장에서 뛰어내렸고 그 후 찾아온 시장의 전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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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누리지 못했다. 과거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시장은 예고 없이 방향을 전환했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투자자로 성공하려면 항상 낙관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만드는 혁신을 믿어야
한다.’ 투자는 결국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변하지 않는 진실이지
만 진실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부작용을 겪는다.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낙관적인 태도가 필요하고 미
래는 과거보다 더 나아진다는 점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때도 믿었고 슈왑을 시작할 때
도 믿었으며 지금도 믿는 사실은 성공적인 투자가가 되려면 ‘낙관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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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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