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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다니엘 스틸] 여름의 끝

by Casey,Riley 2023.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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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끝
      
      
                            다니엘 스틸 
      
      
  
      
      
      여름의 끝
      
      여름은 찾아왔네
      그녀의 머리칼 속에서
      춤추는 속삭임처럼
      사랑으로 꿈을 꾸는
      그녀의 여린 눈물을 멈추어주길 바라면서
      그가 웃어주길 바라면서
      여름은 찾아왔네
      너무 늦기 전에
      그들의 사랑 멈출 수 없음을
      깨닫기를 바랐네.......
      그러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네
      결코 기다려주지 않네
      그리하여
      그녀는 자유로워졌네
      모래성을 쌓고 꿈에 젖을 수 있도록
      여름은 꾸며내는구나
      감미로움과
      새로움을
      그리고 되돌려 받을 수 없는 시간을.
      여름의 끝이 찾아올 때까지
      그들의 사랑은 계속되리
      사랑은 계속되리
      
      다니엘 스틸
      
      
      
      
      지은이 소개 / Danielle Steel 다니엘 스틸
      
      출세작<약속(The Promise)> 이후 <러브 체인지(Changes)> <반지
    (The Ring)> 등 매년 한 작품씩을 발표하는 미국의 현존하는 최고 
    인기 여류작가. 그녀의 작품을 발표될 때마다 <뉴욕타임즈 북리뷰
    > <퍼블리셔즈 위클리>지의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500만부 이상
    이 팔리고 있다. 그녀는 특히 여성의 애정 모랄, 심리 묘사 그리
    고 스토리텔링이 뛰어나 시드니 셀던보다 더 많이 읽히는 작가이
    다.
      <여름의   끝>과  더불어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크로싱즈
    (Crossings)>는 국내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1988년 KBS-TV에서 
    미니시리즈 3부작으로 방영, 여성 시청자들의 인기를 모은 바 있
    다.
      
      
      .... 그녀의 소설은 본 <뉴욕타임즈>에 300주 이상 베스트셀러
    로 올라 있으며, 전작23권의 소설로 9,000만부 이상의 판매기록을 
    세워 월드 리워드사의 기네스북에  오른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이
    다.
                                                   - 뉴욕타임즈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 둥의 한 사람이다.
                                          - 로스엔젤레스 타임즈
      
      그녀의 존재는 하나의  문학적인 사건으로.... 야심적이고.... 
    다작이지만.... 결과를 뻔히 알수 있는 그런 종류의 소설을 쓰는 
    작가는 아니다.
                                              - 디트로이트 뉴스
      
      독자글은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한다. 이 소설
    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다음에 일어나는 일을 알고 싶어지므로, 
    독자들은 이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 새크라맨토 비이
      
      그것은 시간을 쉽게 잊어버리게 하고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만
    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 피츠버그 프레스
      
      다니엘 스틸은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데 매우 능하다, 작가는 이 
    소설 속에서 이전에는 한 번도 직면해 보지 못한 문제들에 부딪쳐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발버둥치는 남녀들의 얘기를 빠른 터치
    로 그려나가고 있다.
                                                  - 내쉬빌 배너
      
      
      
      
    
      
      

      
                                  1
      
      
      디나 듀라스는 한쪽 눈을 뜨고 탁상시계를 보았다. 커튼 밑으로 
    희미한 아침 햇살이 숨어들어 오고 있었다. 6시 45분이었다. 지금 
    일어난다면 아직도 한 시간 가량 자기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필라가 공격을  가해오거나 괴롭힐 수 없는 
    조용한 시간이고, 브뤼셀이나 런던이나 로마에서 마르크 에두아르
    에게 전화도 걸려오지 않는 시간이었다. 혼자서 숨을 쉬고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녀는 침대의 저쪽 끝에서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마르크 에두
    아르를 곁눈질로 보면서 시트 밑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남편은 
    침대의 가장 먼 곳에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와 마르크는 
    각기 침대 양쪽 끝에서 자왔기 때문에 그 중간에는 서너 명은 족
    히 잘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전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직도 이따금씩 그렇게 
    한다....... 마르크가 시내에 있거나, 그가 피로하거나, 너무 늦
    게 귀가하거나 하지 않았을 때는 가물에 콩나듯 가끔은 합쳐진다.
      디나는 조용히 옷장문을 열고 길다란 아이보리색 실크 실내복을 
    꺼냈다. 이른 아침의 햇빛 속에서 그녀는 젊고 섬세해 보였다. 그
    녀의 검은 머리칼이 담비 쇼올처럼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고 있었
    다. 그녀는 슬리퍼를 찾으려고 몸을 구부렸다. 보이지 않았다. 필
    라가 또 가져간 것이 틀림없다. 디나에게는 심지어 슬리퍼 한 켤
    레까지도 자기 것인게 없었다.
      그녀는 맨발로 두터운 카페트 위를 살금살금 걸으면서, 미소를 
    머금고 아직도 태평스럽게 자고 있는 마르크를 다시 한번 힐끗 바
    라보았다. 잠을 자고 있을 때의 남편은 그녀가 19년 전에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젊어 보였다. 그녀는 문턱에 서서 그를 지켜보았
    다. 남편이 몸을 뒤척이며 깨어나서  졸리운 듯이 미소를 띄우고 
    양팔을 내밀며 아주 오래전에 한 것 같이 속삭여주기를 바라고 있
    었다.
      [이리와 여보. 침대로 다시 오라니까. 내 사랑 디나, 아름다운 
    디나!]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있어 단순한 디나에 불과했
    다.
      [디나, 화요일 만찬에 올 수 있겠어? 디나, 차고문이 제대로 닫
    혔는지 알고 있어? 디나, 내가 런던에서 맞춘 캐시미어 상의가 세
    탁소에서 엉망이 되었어. 디나, 나는 오늘 저녁 리스본(혹은 파리
    나 로마)으로 떠날 거야.]
      이따금 그녀는 남편이 <아름다운 디나> 시절의 일들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녀의 다락방에서 해가 중천에 떴을 때에
    야 일어나 웃고 떠들면서 커피를 마시던  일, 결혼하기 전 몇 달 
    동안 그녀의 집  지붕 위에서  발가벗고 일광욕하던 일  같은 것
    을....... 그들은 몇달 동안 황홀하고 황금같은 시간을 함께 지냈
    었다.- 그녀는 그의 비서인 것처럼 동행하여 아카풀코에서 주말을 
    보내고 마드리드에서 4일간을 보냈다. 그녀의 마음은 자꾸 그 오
    래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이른 아침의 시간은 언제나 그녀에
    게 과거를 생각나게 해주었다.
      [디나, 내 사랑, 침대로 돌아와주겠어?]  그 말들을 생각해 낼 
    때마다 그녀의 눈은 빛났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18세였고 항상 
    침대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수줍어하기는 했으나 너무나 
    그를 사랑했었다. 모든 시간이, 아니 모든 순간이 그녀가 느끼는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녀의 그림 역시 그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그림들은 사랑의  광채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화실에 앉아서 무릎 위에 회사의 서류를 얹어놓고 메모를 하
    면서 가끔 미간을 찌푸리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들고 매혹적인 미
    소로 [안녕하세요, 마담 피카소. 점심 먹을 시간이 아직 안 됐나
    요?] 하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잠깐만요, 거의 끝나가니까요.]
      [한번 보아도 괜찮을까?] 그는 그녀가 여느 때처럼 펄쩍 뛰면서 
    항의하기를 기다리며 이젤 주위를  맴돌며 훔쳐보는 시늉을 하곤 
    했다. 그녀는 그것이 장난인 줄 알면서도 번번이 속아 넘어갔다.
      [제발 고만두세요! 내가 끝내기 전에는 당신도 볼 수 없다는 것
    을 알지 않아요!]
      [왜 볼 수 없다는 거지? 당신이 깜짝 놀랄 만한 나체화라도 그
    리고 있단 말이야?]
      [그럴지도 모르죠. 나리,  그런 것을 보시며  쇼크를 받으십니
    까?]
      [물론이지. 당신은 나체화를 그리기에는 너무나 나이가 어리단 
    말씀이야.]
      [내가 어려요?] 그녀의 커다란 초록색  눈이 동그래진다. 어떤 
    때는 그의 말에 심각한 빛을 뛸 때도 있다.
      그는 너무나 여러가지 면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마
    르크는 그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
    녀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  사실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었다. 
    마르크 에두아르가 갑자기 그녀 앞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하늘이 
    내려준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은 뒤 외삼촌
    과 이모와 함께 살아왔으나, 그들 중의 누구도 디나가 그들 가운
    데 끼어사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어머니쪽의 천척 사이를 전전하던 방랑 생활을 끝내고 독립
    을 하여 낮에는 양장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다. 무엇보
    다도 그녀의 정신에 생기를 불어넣어준 것은 미술공부였다. 그녀
    는 오직 그것 만을 위해서 살았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녀는 열
    일곱 살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애착을 가지고 조종해 오던 비행기
    의 추락사고로 즉사했다. 그녀의 장래를 위한 계획은 전혀 마련되
    어 있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이 천하무적일 
    뿐만 아니라 불사의 인간이라고 믿고 있었던 셈이다. 디나의 어머
    니는 그녀가 열두살 때 죽었다. 따라서 몇 년 동안 그녀의 인생에
    는 아버지 이외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어머니의 친척들은, 그녀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믿고 있는 
    이기적이고 낭비가 심한 디나의 아버지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어지
    고 잊혀지고 차단되어졌다.
      디나는 <엄마가 죽었다>고 하는 사실 외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
    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엄마가 죽었다. 그 추운 날 아침 아버
    지가 내뱉은 그 한마디는 평생을 두고 그녀의 귀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자신을 단절시켜 버렸던 어머니, 자기 침
    실에 술병과 함께 숨어 있던 어머니, 디나가 침실문을 노크할 때
    마다 항상 [얘야, 조금만 기다리렴]  하고 약속했던 어머니. [얘
    야, 조금만 기다리렴] 이라는 말이 그녀의 생애 12년 가운데 10년
    이나 계속되었으며, 디나는 아버지가 비행기를 조종하거나 친구들
    과 함께 갑작스런 사업 여행을 떠나고 없는 동안 혼자 복도나 자
    기 방에서 놀도록 내버려졌었다. 어머니가 술을 마셨기 때문에 아
    버지가 집을 비우고 출장을 떠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항상 
    집을 비우기 때문에 어머니가 술을 마셨는지는 오랫동안 판단하기
    가 힘들었다. 이유야 어찌됐건 어머니가 죽기까지 디나는 혼자였
    다.
      그 뒤 아버지는 자주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에 관해 말이 
    많았다. [빌어먹을! 나는 어린애에 관해서, 특히 계집애에 관해서
    는 조금도 아는 것이 없단 말이야.] 그는 딸을 <경치가 아름답고, 
    새로운 친구들이 많이 있는 멋진>  학교로 보내기를 원하고 있었
    다. 그러나 그녀가 워낙 의기소침해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도 
    결심을 누그러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멋진 곳도 필요 없
    고 단지 아버지와 함께 있기만을  원했다. 아버지야말로 바로 그 
    멋진 곳이었고 비행기를 가진 마술적인 인간이었으며, 먼 나라들
    로부터 매혹적인 선물을 가져다주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야말로 몇 
    년을 두고 그녀가 자랑해 온 사람이었으며, 그녀가 끝내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제 그는 그녀가 가진 전부였고-침실문 뒤에서 
    술병을 끼고 앉아있던 어머니가 죽은 후도-그는 그녀에게 남겨진 
    모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딸과 함께 살았다. 가능할 때는 딸과 함께 돌아다
    녔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친구들에게 맡기고 떠났다. 그리고 
    딸에게 인생에서 멋진 것들을 즐기도록 가르쳤다. 도쿄의 제국호
    텔, 파리의 조지 5세호텔, 뉴욕의 스토크클럽 등에서 그녀는 바아
    의 스툴에 앉아 <셜리템플>을 마셨을 뿐만 아니라 성숙한 여인으
    로서 대접을 받았다. 아버지는 화려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
    리고 디나도 한동안 그런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온갖 것들을 보
    고, 모든 것을 손에 넣고. 사교계의 여성들, 흥미진진한 남자들, 
    엘 모로코에서의 댄스, 비버리 힐즈에로의 주말 여행 등등.......
      아버지는 한때 영화배우였고, 또 오래전에는 경주용 자동차 선
    수였으며, 전쟁 때는 조종사였고,  도박사였으며, 인생과 여자와 
    비행기 조종에 정열을 불태운 인간이었다. 그는 디나도 역시 조종
    을 익히기를 바랬다. 딸에게 1만 피트 상공에서 세계를 내려다보
    며 구름을 가르고 날아가면서 꿈속에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
    를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것과는 전혀 다른 자기자신만의 꿈을 가지
    고 있었다. 조용한 생활, 두 사람이 항상 머무를 수 있는 집, [잠
    깐만 기다리렴]하는 말을 하면서 잠근 문 뒤에 숨어있지 않을 계
    모. 열네 살이 되자 그녀는 엘 모로코에 싫증이 났고, 열다섯 살 
    때는 아버지의 친구들과 춤을 추는데 진저리를 냈다. 그럭저럭 학
    교를 졸업한 그녀는 밧사르 여자대학이나 스미스 여자대학에 가기
    를 열망했다. 아버지는 그것을 따분한 일이라고 우겨댔다. 그래서 
    그녀는 학교를 택하는 대신 그림을 그리게 되고 두 사람이 어디를 
    가든 간에 그녀는 스케치북과 캔버스를 들고 다녔다. 그녀는 프랑
    스의 남부에서는 종이 식탁보에 그림을 그렸고, 자기자신의 친구
    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의 친구에게서 온 편지의 뒷장에 그림을 그
    렸다. 그녀는 자기 주변의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것에 그림을 
    그렸다.
      베니스에 있는 한 화랑의 주인은 그녀의 솜씨가 꽤나 훌륭하므
    로, 계속 그림을 그린다면 그녀의 작품을 전시해 주겠노라고도 말
    했다. 물론, 그는 그녀의 그림을 전시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한 
    달뒤에 베니스를 떠났으며, 두 달 뒤에는 플로렌스를, 6개월 뒤에
    는 로마, 그 후 한 달 뒤에는 파리를 떠나 마침내 미국으로 돌아
    갔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그녀에게 이번에는 진짜로 가정과 어쩌면 계모까
    지도 갖게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는 로마에서 만난 미국 여배
    우에 대해 [너도 좋아하게 될 여자야]  라고 말하며 L.A. 근교에 
    있는 그녀의 목장에서 주말을 보내기 위해 짐을 챙기며 약속을 했
    던 것이다.
      이번에는 디나에게 함께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이번 만은 그도 
    혼자 가고 싶어했다. 그는 현금으로 4백 달러를 주며 사흘 있으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샌프란시스코의 페어먼트호텔에 혼자 
    남겨두고 떠났다. 그러나 그는 세  시간 후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고 디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이번에는 영원히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멋진 학교>로 보내겠다는 위협을 지닌 이전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위협도 전혀 의미가 없었다. 돈이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든, 다른 무엇이든 할 돈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지불할 길이 없는  산더미같은 빚만이 남아 있었
    다. 그녀는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어머니의 친척들에게 전
    화를 걸었다. 그들은 호텔에 도착해서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그
    녀를 데리고 갔다.
      [몇 달 밖에는 함께 살 수가  없구나. 디나, 너도 이해하겠지? 
    우리도 그럴 능력이 없단다. 직업을  구해서 일을 하다가 독립할 
    수 있게 되면 집을 마련하고 혼자 살 생각을 해야 한다.]
      직업. 무슨 직업?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우
    피찌와 루브르 미술관에 있는 거의 모든 그림들을 알고 있으며, <
    죄 드폼므>에서 몇 개월을 보냈고 아버지가 팜프로나에서 황소들
    과 함께 달리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엘 모로코에서 댄스를 했고 
    리츠호텔에서 체제했다는 것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누
    가 콧방귀나 뀌겠는가? 그렇다. 아무도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3개월 뒤에 그녀는 외삼촌과 함께 살다가 다른 이모 집으로 옮겨
    갔다. [잠깐동안 만이다, 너도 이해하겠지?] 그녀는 그러한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고독, 고통, 아버지가 저지른 일의 심각성
    도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도박을 해 온 것이다. 물론 재
    미있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때서야 그녀는 어머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또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동안 그녀는 그토록 사랑해 왔던 아버지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
    는 그녀를 아무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는 무시무시한 세상에 홀
    로 남겨두고 떠났다.
      하늘의 도움은 프랑스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라는 형태로 찾
    아왔다. 프랑스의 법정에서 조그만 채권 소송이 계루 중에 있었는
    데 그녀의 아버지가 승소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6,7천 달러의 
    소송이었다. [변호사로 하여금 프랑스의 법률사무소로 연락을 취
    하도록 조치해주시겠습니까?] 무슨 변호사? 그녀는 이모 중 한 명
    으로부터 얻은 법률가의 리스트에서 한 사람을 골라 전화를 걸었
    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녀에게 국제문제를 다루는 법률사무소를 
    추천해 주었다. 그녀는 월요일 아침 9시에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
    에서 산 검은 드레스를 입고 그 사무실로 찾아갔다. 검은 디올 드
    레스에다 아버지가 브라질에서 사다 준 검은 악어 핸드백을 들고 
    목에는 어머니가 유일하게 남겨준 진주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그
    러나 그녀는 디올이건 파리건 리오이건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준다는 6,7천 달러의 돈은 그녀에게 엄청나게 큰 돈
    이었다. 그녀는 직장을 집어치우고 낮이건 밤이건 미술학교에 다
    니기를 원하고 있었다. 2, 3년 내에 그녀는 미술계에서 확고한 명
    성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생활에 쫓기
    지 않고 미술에만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 6천 달러를 가지
    면 일 년간은 생활을 꾸려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거대한 법률사무소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처음으로 마르
    크에두아르를 만났을 때 그녀가 바라고 있던 것의 전부였다. [마
    드무아젤.......] 그로서는 그녀가 가져온 것과 같은 사건을 취급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의  전문 분야는 회사법으로 국제적인 
    사업상의 분쟁사건이었지만, 비서가 그녀의 전화를 연결시켜 주었
    을 때 그 일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겁을 집어먹은 듯한 그녀를 
    보았을 때 그는 황홀해졌다.
      그녀의 몸놀림은 신비스러운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눈
    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그
    는 그녀를 책상 맞은 편에 있는 의자로 안내하고 매우 심각한 얼
    굴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그리고 얘기를  나누는 한 시간 동안 
    그의 눈은 그녀의 몸놀림 하나하나를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역시 우피찌 미술관을 사랑했으며, 한때 루브르 미술관에서 
    며칠씩 보낸 적도 있었다. 또한 상파울로와 카라카스와 도빌에도 
    가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그녀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
    는 자신을 발견했으며 영원히 닫혀져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던 출구
    가 활짝 열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에 관해서 설
    명했다. 그가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빛나는 초록색 눈을 가진 
    그녀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끔찍한 얘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32세가 되어가고 있어서 그녀의 아버지 정도
    로는 늙지 않았으며, 또 그의 감정이 분명 부성애적인 것도 아니
    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자신의 날개 속에 감쌌다. 3개월 뒤 그
    녀는 그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결혼식은 조촐하게 시청에서 행해
    졌다. 신혼여행은 안티프에 있는  그의 어머니의 집에서 지냈다. 
    그리고 파리에서 2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한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
    는 한 남자와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한 국가와 결혼했던 것이며, 
    또 하나의 전혀 다른 생활양식과 결혼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해력
    이 풍부하고 동시에 침묵을 지키는 완벽한 여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그의 고객과 친구들을 매료시키고 만족하도록 대
    접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여행을 할 때에는 외롭게 집을 
    지켜야만 했고, 미술 분야에서 명성을 날려보겠다는 그녀의 꿈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남편이 찬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하
    던 초기에는 얼마간 흥미로워 했으나, 아내가 미술계에 진출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마담 듀라스가 되었으며 그것은 마
    르크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그녀는 많은 꿈들을 포기해  왔으나 그래도 마르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독과 기아로부터 그녀를 구원해 준 사람이
    었으며, 생활의 안정과 모피 코트를 제공해 주는 사람이었고 그녀
    의 감사하는 마음과 애정을 사로잡은 사람이었으며, 나무랄 데 없
    는 매너와 훌륭한 취미의 소유자인 등이  항상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
    었으나, 지금은 그전처럼 그것을 표현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애
    정의 표현은 어린애들에게만 필요한 거야.] 그는 변명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일 년이 채 못
    되어 첫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남편은 얼마나 아기를 갖고 싶어했
    는지! 그는 자기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기회있을 때
    마다 나타내보였다. 아들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마르크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는 아들임을 확신했고, 디나도 그랬다. 그녀는 오
    로지 그것만을 원했다. 그의 아들, 아들이 아니면 안되었다. 그것
    은 그가 존경받을 수 있는 길이었고, 아마도 인생에 대한 그의 정
    열을 불러일으키는 유일한 길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정말 아들
    이 태어났다. 조그만 갓난애였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사제가 
    불리워져왔고 사제는 갓난애에게 세례를 주고 필립 에두아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네 시간 뒤 갓난애는 죽었다. 마르크는 여름휴
    가 때 그녀를 프랑스로 데리고 가서 어머니와 숙모들 손에 그녀를 
    맡겼다. 여름 동안 그는 런던에서 일을 하면서 보냈으나 주말이면 
    돌아와서 마침내 그녀가 다시 임신하게 될 때까지 그녀를 끌어안
    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두번째 아이 역시 사내아이였으나 죽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
    르크의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강박관념이 되어버렸다. 그녀
    는 오로지 아들에 관한 꿈만을 꾸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것
    마저도 중단했다. 세번째로 임신을 했을  때 의사는 아예 그녀를 
    침대에 눕게 했다. 마르크는 그 해 밀라노와 모로코에서 처리해야 
    될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전화를 걸고 꽃을 보내오고는 
    했다. 그리고 집에 있을 때는 그녀의 침대 옆에 붙어앉아 있었다. 
    다시 한번 그는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이번에
    는 그 예언이 빗나갔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상속자는 계집애였으나 아버지의 
    푸른색 눈과 금발을 그대로 물려받은 건강한 아이였다. 그 아이는 
    디나의 꿈이었다. 마르 조차도 아들을  바라던 것을 단념하고 그 
    조그만 금발의 계집애에게 넋을 잃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필라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녀를 그의 어머니
    에게 보여주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듀라스 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을 한탄했으나 마르크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갓난애는 그
    의 것이었으며 그의 피가 흐르는 혈육이었다. 어린 필라는 프랑스
    어밖에는 쓰지 않게 되고 매년 여름을 안티브에서 보내게 되었다. 
    디나는 가슴 속에 어렴풋한 공포의 고동을 느꼈으나 모정의 기쁨 
    속에서 만족을 찾았다.
      마르크는 모든 여가를 필라와 함께 보냈으며 친구들에게 딸 자
    랑을 했다. 필라는 항상 웃거나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였다. 그녀
    가 처음에 한 말은 프랑스 말이었다. 열 살이 되자 그녀는 미국에
    서보다 파리의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필라가 입
    는 옷, 필라가 하고 노는 게임, 필라가 읽는 책은 모두 마르크에 
    의해 신중하게 선택되어 프랑스에서 반입되어진 것들이었다. 그녀
    는 자신이 듀라스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과, 자신이 프랑스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열두 살이 되자 그녀는 그느노블에 
    있는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그때가 되자 이미 디나는 자신이 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필라에게 있어 디나는 외국인이었고 분노와 원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프랑스에 살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잘못이었으며, 필라가 
    프랑스의 친구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도 그녀 때문이었다. 아들
    을 그처럼 그리워하는 할머니와 함께 아빠가 파리에서 살지 못하
    는 것도 그녀의 잘못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또다시 그
    녀를 이기고 말았다.
      
      디나는 남편이 이란에서 가져온 페르시아  융단이 깔린 계단을 
    맨발로 살금살금 걸어 내려갔다. 그녀는 습관처럼 거실 안을 힐끗 
    들여다보았다. 모든 것이 단정하게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렇지 
    않은 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소파의 미묘한 초록색 실
    크는 완벽하게 손질이 되어 있었다.  루이 14세 시대의 의자들은 
    병사들처럼 각기 제자리에 꼿꼿하고 반듯하게 서 있었다. 오부송 
    융단은 연한 청자색 초록과  퇴색한 빨간색의 꽃무늬때문에 더욱 
    우아해 보였다. 은제 장식품들도 모두 반짝이고 있었다. 마르크의 
    자랑스런 선조들의 초상화들은 정확한 각도로 단정하게 걸려 있었
    고, 커튼들이 금문교와 샌프란시스코 만의 완벽한 조망을 액자처
    럼 둘러싸고 있었다. 이 시간에는  아직 범선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안개조차 끼어 있지 않았다. 완벽한 6
    월의 화창한 날씨였다.
      디나는 잠깐동안 멈춰서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강물을 내려다보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그러나 
    소파의 실크를 구겨놓는다거나, 융단을 밟는 것은 물론 방 안에서 
    숨을 쉰다는 것조차 신성 모독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차라리 그녀
    가 그녀 자신의 세계인 집 뒤켠의  화실로 도망쳐가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녀는 식당 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쳐 집 뒤쪽으로 이어
    지는 길다란 복도를 소리없이 걸어 내려갔다. 짧은 계단이 그녀의 
    화실로 통하고 있었다. 검은 마룻바닥이 그녀의 발에 차갑게 느껴
    졌다.
      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뻑뻑거렸다. 마르크는 문을 어떻게 
    해서라도 고쳐보라고 그녀에게 몇 번 얘기를 하다가 그만 포기해 
    버렸었다. 그녀가 오히려 그런 것을 좋아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의 그런 판단이 옳았다.
      문은 열기는 힘들지만 닫힐 때는 재빨리 [쾅]하고 닫혀버렸다. 
    그것은 그녀가 스스로를 삭은 누에고치 속에 가두고 안락함과 포
    근함을 느끼고자 하는 하나의 몸부림일  수도 있다. 화실은 그녀 
    자신의 소중한 세계였고, 집의 나머지 부분이 지닌 딱딱한 절제로
    부터 보호되는 자유로움과 포근함, 그리고 이상에 대한 분출구였
    다. 이곳에는 오부송 융단도, 은제  장식품도, 루이 14세 시대의 
    의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곳의 모든  것은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녀의 파레트에 담긴 그림물감, 이젤 위에 놓인 
    캔버스, 감미로운 노란색의 벽, 그녀가 휴식을  취할 때 그 팔에 
    몸을 맡기는 큼지막하고 안락한 의자. 그녀는 의자에 앉아 방 안
    을 둘러보면서 미소지었다.
      어제 아침, 그녀는 그곳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떠났었지만 마
    음은 편했다. 그곳이야말로 그녀가 작업을 할 수 있는 행복한 장
    소였다. 그녀는 커튼을 열어젖히고 프렌치 도어를 밀어서 열고 조
    그만 테라스로 나갔다. 반짝이는 타일이 그녀의 발 밑에서 얼음처
    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 시간에 종종 이곳에 서 있곤 했다. 이따금 안개가 낄 
    때에도 보이지 않은 항만 위로 을씨년스럽게 걸려 있는 금문교를 
    보고 미소지으면서 부엉이 울음소리같은 무적소리에 귀기울였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안개가 끼지 않았다.
      오늘 아침은 태양이 너무나 강렬해서  밖으로 나서자마자 눈을 
    가늘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항해를 나거거나 해변가로 
    자취를 감추기에 안성맞춤인 날이었다. 그 생각이 그녀에게 웃음
    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그녀가 떠나버리면 누가 마가레트에게 무
    엇을 닦으라고 지시를 할 것이며, 누가 편지에 답장을 쓰며, 누가 
    필라에게 그날 밤 그녀가 외출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는 
    말인가?
      필라! 오늘이 바로 필라가 떠나는 날이었다. 필라는 여름을 보
    내기위해 안티브로 할머니와 숙모들과 숙부들과 사촌들을 찾아간
    다. 그들은 이미 파리에서 그곳으로 가 있었다. 디나는 기억을 되
    살리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몇 년 동안 그 숨막히는 곳에서 여
    름을 보내고 나서 그녀는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었
    다.
      마르크 일가의 그녀에 대한 변함 없는 미움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증오와 분노를 감춘 겉으로의 정중함이었
    으며, 사람의 살을 파고드는 보이지 않는 가시와 같은 것이었다. 
    디나는 그들의 신임을 받은 적이 없었다. 마르크의 어머니는 그것
    을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표현했다.  결국 디나는 미국인이었으며 
    그들과 맞서서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나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미움의 원인은 낭비벽이  심했던 방탕아의 빈털털이 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그녀에게나 도움이 되었을 뿐, 마르크의 지위
    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친척들은 그녀가 그
    를 함정에 빠뜨린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
    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적어도 일 년에 두 번 이
    상은.)
      그러나 디나에게는 그것마저도 벅찼다. 그래서 그녀는 여름마다 
    안티브로 가는 것을 중단했다. 이제는 필라만이 가게 되었고 필라
    는 그곳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그들 부류 중의 한 사람이
    었으니까.
      디나는 테라스의 난간에 팔꿈치를 얹고 손등에 턱을 고였다. 항
    구속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오는 한 척의 화물선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있으면 춥지 않아요, 엄마?] 그 말은 마치 테라스의 타일
    만큼이나 냉랭한 것이었다. 필라는 실내복 차림에 맨발인 채로 그
    곳에서 있는 엄마가 마치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을 걸어
    왔다. 디나는 배에 다시 한번 시선을 던지고 천천히 미소를 뛴 채
    로 돌아섰다.
      [아니, 별로 춥지는 않구나. 나는 여기 나와 있는 것을 좋아한
    단다. 게다가 내 슬리퍼는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어.]
      디나는 딸의 반짝이는 푸른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디나와는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 그녀의 머리칼은 짙은 금발이고, 
    눈은 재기가 번뜩이는 푸른 색인데다가 피부는 발랄한 청춘의 광
    채를 지니고 있었다. 키는 그녀보다  거의 머리 하나만큼이나 더 
    컸고, 거의 모든 면에서 마르크  에두아르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
    다. 그리고 아직은 그의 권력의  후광을 갖추고 있지는 못했으나 
    그것도 나이가 들면 갖게 될 것이었다. 만일 할머니와 숙모들에게
    서 잘만 배운다면 필라도 그들처럼 디나에 대한 증오심을 은폐하
    는 방법까지도 배우게 될 것이다. 마르크 에두아르에 대해서는 그
    렇게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남성이었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
    었던 것이다.
      필라를 그들로부터 떼어놓는 일을 빼고는 디나가 어떤 것을 변
    화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거의 없었으나 그것 역시 그녀의 힘
    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필라, 마르크, 마르크의 어머니. 그들
    은 모두 필라가 더 많은 시간을 유럽에서 보낼 수 있도록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필라가 지닌 할머니와의 유사성은 단순한  모방 이상의 것이었
    다. 그것은 그녀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는 그 무엇이었다. 디나로
    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
    었다. 그러한 실망감을 느낄 때마다 그녀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
    러운 것인가를 알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항상 필라를 빼앗긴 느낌
    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띄운 채 딸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필라는 그녀의 
    없어진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네가 찾아낸 모양이구나] 디나의 
    말은 장난기를 담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은 인생의 고통을 담고 있
    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엄마?] 아침 7시 30분도 채 안되
    었는데 벌써 필라의 얼굴에는 도전적인 빛이 서려 있었다.
      [내 스웨터는 모두 어디 갔죠? 그리고 검은 스커트는 어머니의 
    양장점에서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다구요.] 필라는 큰일이라도 난 
    듯이 금발의 머리칼을 흔들어대면서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었다.
      디나는 필라의 어처구니없는 분노에 언제나 놀라곤 했다. 10대
    의 반항일까? 아니면 단순히 엄마와  함께 아빠를 공유하고 싶지 
    않은 탓일까? 하여간 디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
    다. 적어도 당분간은 말이다. 그러나 아마 한 5년쯤 지나면 그녀
    는 딸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잡게되고 그녀와 다시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죽기를 거부하고 살아있는 이유일런지
    도 모른다.
      [스커트는 어제 양장점에서 가져왔다. 옷장 안에 있어. 그리고 
    스웨터는 모두 가방 속에 넣어놓았단다. 이제 네 문제는 전부 해
    결된 거니?] 디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필라는 어떻든 간에 그녀의 꿈을 간직한 아이였다. 그 꿈이 아
    무리 흉하게 산산조각이 난다하더라도 말이다.
      [엄마! 엄마는 내게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아요!] 그 잠깐동
    안 디나는 당황했다. 필라의 눈은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내 여권은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디나의 초록색 눈은 필라의 푸른 눈과 맞부딪친 채 오랫동안 그
    대로 있었다. 그녀는 따끔한 말을 한마디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
    작 이렇게 밖에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네 여권을 가지고 있어. 
    공항에서 네게 줄 생각이었지.]
      [나도 여권쯤은 스스로 챙길 수 있다구요.]
      [물론 그렇겠지.] 디나는 딸의 표독스러운 시선을 피하면서 화
    실 안으로 되돌아갔다.
      [아침식사를 하겠니?]
      [나중에요, 지금은 머리를 감아야 하니까요.]
      [마가레트를 시켜 아침식사를 보내주마.]
      [알았어요.]
      그리고서 필라는 방을 나가버렸다. 번쩍이는 딸의 화살이 다시 
    한번 디나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상처를 입히는 데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말들은 모두 자질구레한 것들이었으나 
    그 말들의 공허함이 그녀를 가슴 아프게 했다. 이래서는 안된다. 
    분명히 일반적인 부모들은 그들의 아이들과 이런 식으로 끝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가끔씩 아들이 태어났어도 이랬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
    다. 아마 그것은 필라만의 특수한 경우일런지도 모른다. 두 개의 
    나라, 두개의 세계가 잡아당기는 힘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벅찬 것
    인지도 몰랐다.
      디나가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자 책상 위의 전화가 부드럽게 울
    렸다. 그것은 옥내 전화로써 틀림없이 마가레트가 <화실로 커피를 
    가져갈까요> 하고 묻는 전화일 것이다. 남편이 없을 때 디나는 자
    주 이 방에서 혼자 식사를 하곤 했다. 남편이 집에 있을 때는 함
    께 아침식사를 하는 것이 의식처럼  되어 있었다. 때때로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유일한 식사이기도 했다. [예.] 디나의 목소
    리는 부드럽고 밝은 빛을 띄고 있어서 언제나 그것이 그녀의 말에 
    우아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디나, 나는 파리에 전화를 걸어야 하니까 앞으로 15분 정도는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가 없어. 그러니까 마가레트에게 계란을 너
    무 익히지 말라고 전해줘. 그리고, 당신이 신문을 그곳으로 가져
    갔어?]
      [아니예요. 아마 마가레트가 당신 식탁 옆에 가져다놓았을 거예
    요.]
      [알았어. 그럼 부탁해.]
      [잘 잤어?] 라는 말도, [기분은 어때, 잠은 잘 잤어?...... 사
    랑해] 라는 말도 없었다. 남편은 그저 신문만을 찾고, 딸은 검은 
    스커트와 여권만을 찾고....... 디나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
    였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그러
    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애당초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왜 그들은 그
    녀의 검은 스커트가 어디에 있는지, 그녀의 슬리퍼가 어디에 있는
    지, 그녀의 최근의 그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화실의 문을 닫으면서 어깨 너머로 무
    엇인가를 기대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이렇게 그녀의 하루가 시
    작되고 있었다.
      마가레트는 식당에서 그녀가 신문을 넘기는 소리를 듣고 관례적
    인 미소를 뛴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사모님.]
      [잘 잤어. 마가레트?]
      언제나처럼 정확성과 품위를 지켜가면서 일은 진행되었다. 상냥
    한 미소와 더불어 명령들이 내려진다. 신문들은 중요성의 순서에 
    따라 차례로 놓여진다. 커피는 시어머니의 소유인 섬세한 리모쥬 
    주전자 바로 옆에 놓여진다. 커튼이 열려 있어서 바깥 날씨를 알
    아볼 수가 있다. 그리고 모두들 자기 위치를 차지하고 앉아 가끔
    씩 창 밖을 내다보며 각자의 가면을 쓰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디나는 신문을 들고 꽃무늬가 그려진 청색 컵으로 커피를 마시
    면서 테라스의 타일때문에 차가워진  발을 녹이기 위해 카페트에 
    문질러대고 있었으나, 테라스에서 생각한 일들은 까맣게 잊고 있
    었다. 아침의 그녀는 무척 젊어 보였다. 어깨 위로 자연스레 헝클
    어져내린 검은 머리, 커다란 눈과  피부는 필라의 것처럼 티없이 
    맑고 깨끗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섬세하
    고 주름이 없었다. 그녀는 서른일곱 살의 중년이라기보다 오히려 
    20대 후반의 여성처럼 보였다. 이야기를  할 때의 그녀는 얼굴을 
    들고 눈을 반짝이면서 미소를 지었는데, 무지개처럼 화사하게 번
    지는 그 미소가 그녀를 아주 어리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오후 늦게, 완전히 보수적인 스타일로 머리를 묶고 근엄한 태도
    로 행동할 때의 그녀는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그러나 오전 
    중에는 어떤 신분의 상징도  그녀를 압박하지 않았으므로 본래의 
    그녀 자신으로 있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이층의 층계참에서 젖은 머리를 하고 있는 필라에게 즐
    거운 듯이 프랑스 어로 말을 건네며 내려오는 남편의 목소리를 듣
    고 있었다. 니스 근처에는 가지 말고 안티브에서 얌전히 지내라는 
    내용의 얘기인 것 같았다. 디나와 달리 남편은 여름 동안에 몇 번
    이나 딸을 만날 예정이었다. 그는 파리와 샌프란시스코를 몇 차례 
    왕복할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언제든지 주말을 안
    티브에서 보낼 수가 있을 것이다. 오랜 관습을 깨뜨리기란 좀처럼 
    쉬운 일도 아닐 뿐더러 또 딸의 유혹도 물리치기가 쉽지 않을 것
    이다. 두 사람은 항상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안녕. 마 셰르.]
      <마 셰리>가 아니라 <마 셰르> 이고, <마이 다알링>이 아니라 <
    마이디어>라는 것을 디나는 주목했다. 그것은 벌써 오래전부터의 
    일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특별히 아름다워 보이는군.]
      [고마워요.]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면서 그쪽으로 얼굴을 
    돌렸으나 남편은 이미 신문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칭찬은 진실보다는 형식적인 것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그것
    은 프랑스식 사교술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파리에서 새로운 일이라도 있나요?] 그녀의 얼굴은 다시 심각
    해졌다.
      [내일 그곳으로 떠나. 잠시동안이지만.......] 그의 말투 속의 
    무엇인가가 잠시동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잠시동안이 얼마동안 인데요?]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는 자
    기가 그와 사랑에 빠졌던 이유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 있었다. 
    남편은 여위고 귀족적인 얼굴의 굉장한 미남자였다. 그리고 그의 
    푸른 눈은 필라의 눈조차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양쪽 관자놀이께에 난 흰머리도  짙은 금발 머리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젊고 다이내믹해 보였으며, 특
    히 미국에 있을 때는 항상 즐거운 듯이 보였다. 그는 미국인들이 
    <재미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테니스와 스카시 게
    임에서 그들을 이겼을 때 그것이 그를 즐겁게 만들었으며, 브리지
    나 백가몬 게임에서 이겼을 때도, 특히 법정에서 이겼을 때 그는 
    더욱 즐거움과 흔쾌함을 느꼈다. 그는 게임할 때의 방식으로 일을 
    했다. 저돌적이고 재빠르면서도 능률적으로  항상 최고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행동했던 것이다.
      그는 모든 남성들이 부러워하고, 여성들은 모두 꼬리를 치게 만
    드는 그런 종류의 인물이었다. 그는 언제나 승자였다. 승리가 그
    의 스타일이었다. 처음에 디나는 그의 그런 점을 사랑했다. 그가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였을 때 그것은 대단한 승리였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을거냐고 물었어요.] 그녀의 목
    소리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이삼일 동안이겠지. 왜, 무슨 일이 있어?]
      [물론이지요.] 디나는 쏘아붙였다.
      [우리 사이에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던가?] 그는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수첩을 검토해 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
    다.
      [무슨 일인데?]
      [아니예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나중에 알려줄께. 오늘 회의가 끝나보아야 구체적인 날짜가 나
    올거야. 선박 문제로 큰 문제가 생겼거든. 어쩌면 파리에서 아테
    네로 직접 가게 될지도 몰라.]
      [또요?]
      [그럴 것 같아.] 그는 마가레트가  식탁 위에 계란을 갖다놓을 
    때까지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
      [당신이 필라를 공항까지 데리고 나갈 거야?]
      [물론이죠.]
      [그러면 제발 그 애의 옷을 제대로  입혀 가지고 나가도록 해. 
    만일 또 다시 그 애가 그런 망칙한 옷을 입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가는 어머니가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이 틀림없으니까.]
      [왜 당신이 직접 그 애에게 말하지 않는 거죠?] 디나는 초록색 
    눈으로 남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것이 당신의 영역인 줄로 믿고 있었는데?]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이를 벌주는 것을 말하는 건가요, 그 애의 옷 문제에 대해서 
    인가요?] 두 가지 모두 달갑지 않은 임무라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어느 정도까지는.] 그녀는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어느 한계까지 그녀가 그것에 
    관여할 수 있단 말인가, 남편이 말한 의미는 어디까지일까? 마르
    크는 계속했다.
      [내가 필라에게 여행에 드는 비용은 주었으니까 당신이 돈을 줄 
    필요는 없어.]
      [얼마나 주었어요?]
      그는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뭐라고?]
      [당신이 여행 비용으로 그 애에게 얼마나 돈을 주었느냐고 물었
    어요.] 그녀는 매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중요해?]
      [내 생각에는 중요한 것 같아요. 아니면 나의 영역은 벌주는 것
    과 옷 문제에 한정되어 있나요?] 18년 동안의 결혼생활의 불만이 
    그녀의 말투에 담겨 있었다.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아. 하여간 충분히  쓸 만큼 주었으니까 
    염려 말아.]
      [내가 걱정하는 것은 모자랄까봐서가 아니라구요.]
      [그럼 무엇을 걱정하는 거지?]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불쾌한 듯
    이 높아졌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강철같이 굳었다.
      [나는 그 애가 돈을 너무 많이 갖고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필라에게는 많은 돈이 필요 없다구요.]
      [필라는 책임감이 매우 강한 아이야.]
      [하지만 아직은 채 열여섯 살이  되지 않은 어린애예요. 여보, 
    돈을 얼마나 주었지요?]
      [겨우 천밖에는 안 주었어.] 그는 마치 거래를 마무리지을 때처
    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렇게 많이요!]
      [그럴까?]
      [당신도 그것이 큰 돈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또한 그 
    애가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구요.]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하고 놀겠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
    고 말이야.]
      [그렇지가 않다구요. 그 애는 그렇게도 갖고 싶어하던 오토바이
    를 살 거예요. 그러나 나로서는 절대로 오토바이를 사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무능함을 강조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필라는 지금 디나의 영역 밖으로 
    벗어나서 <그들>에게로 가는 것이다.
      [나는 그 애가 그토록 많은 돈을 가져가는 것에 반대예요.]
      [그렇게 어거지 쓰지 말아.]
      [제발 부탁이에요, 여보.......]
      그녀가 흥분해서 장황하게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을 때 전화가 
    울렸다. 그것은 밀라노에서 남편에게로 걸려온 전화였다. 그는 출
    근하기 전에 더이상 그녀의 잔소리를  들을 시간이 없었다. 아침 
    10시 30분에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시계
    를 들여다 보았다.
      [너무 신경쓸 필요 없어, 디나. 그 애는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
    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러나 의논할 일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문제는 너무나 많았
    으나 그들에겐 시간이 없었다.
      [하여간 오늘 저녁에 얘기합시다.]
      [오늘 저녁식사 시간에 돌아올 건가요?]
      [글쎄, 모르겠는 걸. 도미니크에게 전화를 걸라고 하지.]
      [고맙군요.]
      그것은 냉랭하게 얼어붙은 짤막한 말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식
    당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마 뒤 그녀는 남편의 재
    규어 자동차가 차고에서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또한
    번 싸움에서 패배를 한 것이다.
      그녀는 필라와 함께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다시 그 문제를 끄집
    어냈다. [아버지가 그러는데 휴가  비용으로 돈을 많이 주었다면
    서?]
      [왜 또 그러시죠,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에요?]
      [너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오토바이 
    말이다. 긴 말 하지 않고 간단하게 말하마. 만일 네가 오토바이를 
    사게 된다면 너를 당장 집으로 끌고 오겠어.]
      필라는 [그걸 어떻게 알죠?] 하고 어머니를 비웃어주고 싶었으
    나 꾹 참았다.
      [좋아요. 오토바이를 사지 않으면 될 것 아니예요?]
      [타는 것도 안 돼.]
      [알았어요. 타지도 않을께요.]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디나는 오래 간만에 처음으로 인내를 잃고 약
    을 쓰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운전을 하면서 잠시 
    딸을 돌아다보고 다시 얼굴을 정면으로 향했다.
      [왜 우리들은 이래야만 하지, 너는 3개월 동안 집을 비우게 되
    고 우리는 서로를 못 보게 되지  않니, 오늘만은 좀 즐겁게 대할 
    수가 없겠니? 도대체 왜 서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걸까? 
    이렇게 해서 무슨 도움이 된다고.]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예요. 어머니가  오토바이 문제를 들고 
    나왔잖아요?]
      [왜 이렇게 되는지 너는 모르겠니? 그건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
    문이고, 너를 걱정하기 때문이야. 네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을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네게는 그것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거냐?]
      [물론 이해하구 말구요.]
      두 사람은 아무말 없이 공항까지 차를 몰아갔다. 디나는 또다시 
    눈물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으나 필라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
    지 않았다. 그녀는 완벽해야 하고 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
    이 남편의 태도이고, 그것이 그 빌어먹을 프랑스의 친척들이 거드
    름을 피우는 태도이고, 필라가 배우고자하는 태도였다. 디나는 주
    차계를 불러 차를 세워두고 짐꾼을 따라 공항 건물 안으로 들어갔
    다. 필라가 그곳에서 체크인을 했다. 직원이 여권과 탑승권을 돌
    려주자 필라는 어머니에게 돌아섰다.
      [탑승구까지 올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반기는 기색보다는 빨리 혼자 되고 싶은 반
    항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좋을 것 같구나. 왜, 싫으니?]
      [아뇨.] 필라는 뾰로통해서 볼멘소리를 했다. 망할 계집애 같으
    니라구. 디나는 뺨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도대체 이 계집애
    는 누구란 말인가, 대체 어떤 인간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그녀를 
    사랑하던 명랑한 어린 소녀는 대체 어디로 가버렸다는 말인가?
      두 사람은 모든 사람들의 선망에 찬 눈길을 받으면서 각기 자신
    의 생각에만 매달린 채 탑승구를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두 사람
    은 인상적인 짝이었다. 멋지게 재단된 검은 울 드레스에 검은 머
    리를 틀어올리고 한 손에 빨간 자켓을 든, 검은색으로 통일된 디
    나의 아름다움. 금발에 늘씬하고 우아한 몸매를 흰 린넨 양복으로 
    감싼 필라는 눈부신 젊음의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있었다. 미국적
    인 디자인이긴 하지만 아마 그녀의 할머니조차도 그녀의 차림새를 
    칭찬할 것이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여객기는 이미 탑승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래서 디나는 잠깐밖에 딸을 포옹할 시간이 없었다.
      [오토바이에 대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해, 필라. 꼭.......]
      [알았어요, 걱정마세요.] 그러나 필라는 듣는 둥 마는 둥 디나
    의 어깨 너머로 열심히 비행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전화를 하마. 그리고 조그만 문제라도 생기면 엄마에게 전
    화하렴.]
      [문제가 어딨어요?] 필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으면 오죽 좋겠니.] 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디나의 얼굴은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딸을 포옹했다.
      [사랑한다. 필라. 즐겁게 놀다오렴.]
      [고마워요, 엄마.] 필라는 어머니에게 잠깐 웃어보이고는 금발
    을 흔들며 통로 쪽으로 사라져 갔다.
      디나는 갑자기 맥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필라는 또다시 디나
    의 품을 떠나가 버렸다. 사랑스러운 아기....... 곱슬곱슬한 금발
    을 가진 어린 딸....... 매일 밤 끌어안고 키스를 해 달라고 천진
    하게 팔을 벌리던 내 사랑....... 필라. 디나는 라운지의 의자에 
    앉아 747 여객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기 위해 기다렸
    다. 그리고 마침내 비행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느릿 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걸어갔다. 주차계는 그녀
    가 내민 팁을 받고 절을 하면서 자동차에 오르는 그녀를 지켜보았
    다. 그녀는 드물게 보이는 미인이었다. 그는 그녀의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서른여덟, 서른 둘, 서른다섯, 아니면 마흔? 
    딱 집어서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얼굴은 젊었으나 그녀의 다
    른 부분, 그녀의 몸 동작, 눈에 담긴  표정은 더할 수 없이 늙어 
    보였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머리에 빗질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이 계단
    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10시 10분이었다. 그는 하루종일 전
    화를 걸지 않았다. 그의 비서인  도미니크가 정오에 듀라스 씨는 
    저녁식사 때 돌아갈 수 없다는 메모를 마가레트에게 남겼을 뿐이
    다. 그녀는 스케치를 하면서 화실에서  혼자 식사를 했으나 전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계속 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남편이 방에 들어오자 그녀는 몸을 돌려 미소지어 보였다. 그녀
    는 정말로 남편이 그리웠다. 집안은 온종일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다녀오셨어요, 힘들었죠?]
      [그렇지 뭐. 당신은 어땠어?]
      [평화로웠어요. 필라가 없으니까 집안이 너무 조용해요.]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
    는걸.] 마르크는 벽난로 옆에 놓인 푸른 벨벳 의자에 앉으면서 아
    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저도 놀랐어요. 회의는 어떻게 되었어요?]
      [따분하기만 했어.] 그는 별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
    다. 그녀는 의자를 돌려서 남편을 마주보고 앉았다. [내일 파리로 
    떠나는 것은 변동이 없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이 길게 다리를 뻗으
    며 의자에 파묻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날 아침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미 또다른 날을 시작할 준
    비가 거의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따분하다>고 부른 
    회의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남편은 의자에서 일어나 미소를 머
    금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래, 내일 파리로 가야돼. 안티브에서 필라와 우리 어머니와 
    합류할 생각은 전혀 없는 거야?]
      [전혀 없어요. 내가 왜 그곳에 가겠어요?]
      [이곳은 지나치게   조용하다고  했잖아?  내  생각에는   아마
    도.......]
      그는 잠시 그녀의 뒤에 멈춰서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무래
    도 여름내내 집을 비우게 될 것 같아, 디나.]
      그의 손 안에서  삐긋하고 그녀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여름 내내라구요?]
      [대충 그럴 것 같아. <살코> 선박 사건은 너무나 중요해서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둘 수가 없어. 여름 내내 내가 파리와 아테네 사
    이를 왕복하면서 일을 해결해야 될 것 같아. 도저히 여기 앉아서
    는 일이 해결될 전망이 없거든.]
      그는 이미 미국을 떠나기라도 한 듯이 악센트를 강하게 주어서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필라를 감시할 기회가 많아져서 당신은 
    좋아하겠지만, 당신과 함께 있을 시간이 전혀 없어지는 것이 걱정
    이야.]
      그녀는 정말로 그것이 마음에 걸리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만두
    었다.
      [그 사건은 약 석 달, 그러니까 여름의 대부분을 잡아먹어야만 
    해결이 될 것 같아.]
      그녀에게는 그것이 사형선고와 같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석 
    달씩이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었다.
      [이제는 내가 왜 당신에게 안티브로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지 이
    유를 알겠지, 이래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작정이야?] 디나는 느릿
    느릿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나는 가지 않겠어요. 그리고 당신도 그곳에는 가지 마세
    요. 필라는 내게서 멀리 떨어진 생활이  필요한 것 같아요. 다시
    는.......]
      그녀의 말소리는 꼬리가 점점 흐려졌다.
      [우리 어머니 말이야?] 마르크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
    다.
      [알겠어. 그럼, 좋아! 여보, 당신은 여기서 혼자 여름을 나겠다
    는 말이군.]
      왜 남편은 그녀에게 자기와 함께  가자고 하지 않는가? 둘이서 
    파리와 아테네 사이를 왕복하면 얼마나 즐겁겠는가? 한순간 그녀
    는 남편에게 그것을 부탁해 볼까 하고 생각해 보았으나 거절하리
    라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남편은 일을 할 때는 자유스러운 
    것을 좋아했다. 단 한번도 사업상의  출장에 그녀를 동반한 적이 
    없었다.
      [혼자서 지낼 수 있겠어?]
      [다른 방법이 있나요? 내가 못하겠다고 대답하면 당신은 떠나지 
    않을 건가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남편을 쳐다보았다.
      [당신도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
      [그렇죠, 알고 있어요.] 그녀는 잠깐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어렴
    풋이 웃어보이면서 어깨를  추스려 보였다.  [어떻게든 해보겠어
    요.]
      [나도 당신이 그렇게 대답해 줄줄 알고 있었어.]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어떻게 그것을 알아, 내가 
    못하겠다면 어떻게 할 거지, 당신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할 거야?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은 정말 착한 아내야, 디나.] 잠시 그녀는 남편에게 감사
    를 해야 할지, 남편의 뺨을 때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무슨 뜻이죠? 내가 심하게 불만을 털어놓지 않아서 인가
    요? 이제라도 불만을 털어 놓아야겠군요.] 그녀의 미소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숨겨주었고 그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피하
    도록 해주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지금 그대로 당신은 완전하니까.]
      [고맙군요, 신사 양반!] 그 그녀는 몸을 일으켜서 남편이 얼굴
    을 볼수 없도록 돌아서버렸다. [당신이 짐을 챙기겠어요, 아니면 
    내가 짐을 챙겨주기를 바라나요?]
      [나 혼자 챙기겠어. 당신은 먼저 가서 자구려. 나도 잠시 후에 
    갈테니까.]
      디나는 남편이 자신의 의상실을 거쳐 아래층의 서재쪽으로 사라
    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침실의 불을 끄고 침대의 한쪽 구
    석에 누웠다. 얼마 뒤 남편이 돌아왔다.
      [당신 잠 들었어?]
      [아뇨.] 그녀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잔잔한 울림으로 들려왔
    다.
      [좋아.]
      좋다? 무엇이? 그녀가 자거나 깨어있거나  그에게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그녀에게 얘기를 할 셈일까, 그녀를 사랑하고 있
    으며 혼자 버려두고 가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그가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남편이 좋아서 하는 일이며, 그는 전 세계를 설치고 돌아
    다니면서 수완을 발휘하여 자신이 성취한 일과 그에 걸맞는 평판
    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남편은 그것을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사
    랑하고 있었다. 남편은 침대로 들어와서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조
    용히 누워 있었다.
      [내가 그처럼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게 됐다고 당신 화났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슬퍼서 그래요. 
    당신이 무척 보고 싶을 거예요.]
      [석 달은 금세 지나갈 걸.]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한쪽 팔꿈치를 세우고 어둠 속에
    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미안해, 디나.]
      그는 한 손 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 미소를 지어보
    였다. 그러자 그녀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남편을 마주보았다.
      [당신은 아직도 눈부시게 아름다워.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어? 
    당신은 처녀 때보다 지금이 훨씬 아름다워. 정말 굉장히 아름답다
    니까.]
      그러나 그녀는 아름답고 싶지가 않았다. 옛날처럼 그의 것이 되
    고 싶었다. <그의 디나>가 되고 싶었다. [필라도 역시 조금 있으
    면 아름다워지겠지.]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애는 지금도 아름다워요.] 디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당신 그 애한테 질투하고 있는 것 아냐?]
      남편은 그 생각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그 자신
    을 중요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일까, 아니면 젊다고 느끼
    게 만들어주기 때문일까?
      [그래요, 나는 이따금 그 애에게  질투를 느껴요. 다시 그렇게 
    젊어지고 싶고, 그렇게 자유로워지고 싶고, 인생이 내게 주는 것
    을 모두 확실하게 움켜쥐고 싶다구요. 그 애의 나이 또래에는 모
    든 것이 너무나 명백하거든요. 최고의  것을 원하고 최고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나이죠.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디나? 인생이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었
    나?]
      [일부는요.]
      그의 눈과 마주친 그녀의 눈은 일종의 비애를 담고 있었다.
      몇 년 만에 그는 그의 사무실에서 검은 디올 드레스를 입고 맞
    은편에 앉아있던 18세의 고아 처녀를  생각해 냈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진정으로 불행하게 만들었는지, 그녀가 더이상의 것을 원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보석이며 자
    동차며 모피 코트며 가정과 같은 많은 것을 주지 않았는가? 대부
    분의 여성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주었다. 더이상 
    그녀가 무엇을 바랄 수 있단말인가?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갑작
    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정말로 아내를 이해
    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디나......?] 그는 물어보고 싶지 않았지만 갑자기 그렇게 해
    야 할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담겨져 있었
    기 때문이다. [당신, 불행해?]
      그녀는 남편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웠다. 남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를 버
    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그녀는 남편을 잃고 싶지가 
    않았다. 그를 매우 원하고 있었다.
      [당신, 지금 불행해?] 그는 질문을 되풀이하고 그 대답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때로는 그래요. 그리고 때때로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 대부
    분의 시간,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는 않죠. 나는 
    그리워요....... 우리들이 처음 만났을 때, 우리들의 젊었던 옛날
    이 그리워져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이는 듯했다.
      [우리는 이미 장년이 되었어, 디나. 당신도 그걸 바꿀 수는 없
    는 거야.] 그는 아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키스라도 하려는 것처
    럼 손으로 그녀의 턱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생각이 달라진 듯 손
    을 내렸다. [당신은 참으로 매력적인 소녀였지.]
      그는 그때 자기가 느낀 감정을 생각해 내고 미소지었다. [나는 
    당신을 그런 곤경 속에 버리고 간 당신 아버지를 증오했었어.]
      [나도 그랬어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어요. 그렇
    게 생각하고 체념을 했었죠.]
      [그랬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랬어?]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왜냐하면 나는 이따금 당신이 아직도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다
    는 생각을 하는 걸. 당신이 계속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그것 때문
    이라고 생각했어. 그럴 필요가 있다면 지금도 혼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말이야.] 
    그는 그녀를 더욱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아? 나는 당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와 같은 상황 속에 당신을 버려두고 떠
    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그런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당신이 잘못 
    알았어요.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그것이 나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거라구요.] 그는 
    그 말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의 예술 작품이 그녀 영혼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한참동안 대답을 하
    지 않았으나 벌렁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에 싸여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여름 내내 집을 비우는 것이 그렇게도 섭섭해?]
      [그렇지 않다고 말했잖아요. 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친구들을 만날 거예요.]
      [외출을 많이 할 생각이야?] 그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
    녀는 재미가 있었다. 남편은 그런 것을 물어보기에는 지나치게 신
    사였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외출할 때는 당신에게 알리도록 하겠어
    요. 만찬과 자선파티, 음악회, 전람회 등 여러가지 모임들이 있겠
    죠.]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크 에두아르, 당신 질투하는 거예요?] 그녀의 눈에는 웃음
    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
    자 큰 소리로 웃었다. [여보, 제발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마세요! 
    지금 결혼한지 몇 해가 되었는데 그래요?]
      [나이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웃기는 소리 그만 하세요, 여보. 그런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
    라구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사람이란 모르는 거니까.]
      [어떻게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죠?]
      [아름다운 아내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 제정신이 박힌 남자라면 
    아마 당신에게 사랑을 느끼지 말라고 하면 미쳐버리고 말 걸.] 그
    것은 지난 십여 년 동안에 그가 한 말 가운데서 가장 멋진 찬사였
    다.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고?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알았다고? 천만의 말씀. 디나, 그건  말도 안돼, 당신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야.]
      [좋아요. 그렇다면 그리스에 가지 마세요.] 그녀는 남편을 쳐다
    보며 소녀처럼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 전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미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꼭 가야만 돼. 당신도 잘 알고 있으면서.]
      [좋아요. 그럼 나를 함께 데리고 가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
    반은 농담이고 절반은 심각한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한참동
    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때요, 나도 갈 수 있어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당신은 갈 수 없어.]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이 질투한 것으로밖에는 생각이 안되는
    군요.] 두 사람이 이런 농담을 하며 즐겨본 것은 참으로 오랫만이
    다. 석달 동안 집을 비운다는 것이 두 사람에게 기묘한 감정을 불
    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너무 궁지에 몰아넣고 싶
    지는 않았다.
      [여보, 사실대로 말하면 당신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
    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마르크! 제발 그만해요!] 그녀는 몸을 내밀고 손을 뻗어 남편
    의 손을 잡았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도 잘 알고 
    계시죠?]
      [그래. 당신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그를 똑바로 들여다보는 사이에 그녀의  눈은 차츰 심각해져갔
    다.
      [이따금 그것을 의심할 때가 있어요.]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보이기에는 너무나 시
    간이 부족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런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그의 정곡을 찔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
    는 남편을 지켜보면서 깜짝 놀랐다. 남편은 모르고 있었을까, 자
    기가 해 온일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스스로 둘러쳐
    놓은 벽을, 사업과 업무에 의해 쳐진  벽을 모른단 말인가? 며칠
    씩, 몇 주일씩, 그리고 지금은 몇 달씩 집을 비우려 하면서도 자
    기편은 필라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미안해요, 여보.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줄 믿고 있었어요. 하
    지만 때때로 나는 그 사실을 자신에게 상기시키곤 하니까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그걸 알아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두 사
    람이 함께 한 순간들과 그 순간들마다 느낀 행복을 떠올리면서 그
    것을 깨달았다. 그것들이 그녀가 아직도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 이
    유들이었다.
      그는 한숨을 지었다. [하지만 당신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
    어. 안 그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젊어지고 용감해
    진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나의 애정뿐만이 아니라 나의 시간
    까지 요구하고 있어. 당신은....... 결국 내가 쪼개줄 수 없는 것
    을 요구하고 있는거야.]
      [그건 사실이 아니예요. 당신은 자신의  시간을 얼마든지 가질 
    수가 있어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옛날에 했던 일들을 다시 할 수
    가 있어요. 그렇게 할 수가 있다구요.]
      그녀는 떼를 쓰는 어린애처럼 어리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그
    러한 자신을 증오했다. 그녀는 마치 아버지에게 어딘가 데려가달
    라고 조르는 철없는 아이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
    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인간들을 증오했다. 그녀는 오래전에 다시
    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미안해요, 여보. 알겠어요.]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후회를 했
    다.
      [이해해 주겠어?] 그는 디나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아아 나의 디나.......] 그녀를 품  속에 끌어안는 그의 눈은 
    고통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눈
    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남편이 다시 <나의 디나!>라
    고 불러주었다.

      
                                  2
      
      
      [내가 없는 동안에 쓸 돈은 은행에 충분히 있어. 만일 더 필요
    하면 도미니크에게 사무실로 전화해. 그러면 그녀가 돈을 대체해 
    줄 테니까. 셜리반한테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당신에게 
    들러달라고 말을 해 놓았고, 그리고.......]
      디나는 놀란 듯이 남편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들르라고 짐에게 
    말했다고요, 왜요?]
      짐 셜리반은 마르크 에두아르의 미국인 동업자였고, 그가 정말
    로 드물게 좋아하는 미국인들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당신이 정말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그리고 필요한 모
    든 것을 갖기를 원하기 때문이지.]
      [고맙지만, 짐을 괴롭히는 건 어리석은 일 같군요.]
      [그는 좋아할 거야. 그에게 당신의 최근 그림을 보여주고 식사
    도 함께 해요. 나는 그를 믿으니까!] 그는 미소를 띈 얼굴로 아내
    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싱긋이 미소로 답했다.
      [나도 믿으세요.] 18년의 결혼생활 동안 그녀는 남편을 속여본 
    적이 없었고 새삼 속이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은 진짜 믿지.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전화할께. 내가 어디
    에 있을건지 알고 있지?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해. 아주 바
    쁘지 않는 한 될 수 있으면 빨리 당신에게 달려올 테니까.]
      디나는 아무말 없이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작은 한숨
    을 내쉬었다. <재규어>의 침묵 속에서  그는 그녀를 보려고 몸을 
    돌렸다. 일순간 그의 눈에 근심이 어렸다.
      [괜찮을 거야, 디나. 그렇지?]
      그녀의 눈은 그의 눈을 찾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 괜찮아요. 하지만 무척 당신을 그리워할 거예요.]
      그는 이미 길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시간은 금방 지나갈 거야. 
    생각이 바뀌면 언제라도 캡  드안티베스로 가서 어머니와 필라와 
    같이 있어요.] 그는 새삼 그녀를 보고 미소지었다.
      [그러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안 그럴 거예요.] 그녀는 미소로 답했다.
      [테투, 바. 이런 고집쟁이. 그래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도 
    모르지.]
      [그것 때문인가요? 종종 고민했어요.] 흠잡을 데 없이 잘 생긴 
    그의 옆모습을 골똘히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장난기 어린 빛을 띄
    었다.
      [몸조심하도록 해요, 네? 너무 지독하게 일하지 말고.]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진소리임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지.]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꼭요?]
      [그러지.]
      [그리고 매순간마다 즐겁게 보내고요.] 그들은 그것도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
      [살코 소송이 당신에게 유리하게 되기를 바래요.]
      [그렇게 될 거야.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음 푹 놓아도 돼.]
      [마르크 에두아르 듀라스 씨, 당신은  정말 지독하게 거만하군
    요. 누가 오늘 그런 말을 해주던가요?]
      [오직 내가 사랑하는 여인만이.] 공항으로 빠지는 옆길을 들어
    서면서 그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었고, 그녀의 손은 그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그녀는 지난 밤의 일, 
    그녀가 무척이나 소중히 여기던, 오랫만에 둘의 육체가 섞여진 일
    이 생각났다. 나의 디아느.......
      [사랑해요, 여보.] 그녀는 그의 손을  입술로 가져가서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래. 조만간에 시간이 날 거야.]
      그렇다....... 하지만 언제일까? 그녀는 손깍지를 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자동차 시트에 내려놓았다.
      [당신이 돌아오면, 어디론가 함께 놀러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어린아이처럼 그를 바라다보았다. 그
    녀는 여전히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와  같이 있기를. 그의 것이 
    되기를.
      [어디가 가고 싶은데?]
      [아무데나요. 단지 함께 있을 수 있기만 하다면. 그리고 단 둘
    만이 있는다면요.]
      터미널 밖에 차를 주차시키면서 그는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
    다. 그리고 일순간 디나는 그의 눈에서 후회의 빛을 보았다고 생
    각했다.
      [그러도록 하지. 내가 돌아오는 즉시 말이야.] 그리고 나서 그
    는 숨을 멈추는 듯하였다 [디나, 나는.......]
      기다렸지만, 그는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팔을 벌려 
    그녀를 꼭 껴안았을 뿐이다. 그녀는  자기의 팔이 그를 감싸고는 
    꼭 껴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이 그녀는 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눈물이 천천히 뺨
    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가 자기의 팔 앞에서 떨고 있을을 느끼
    고 그는 놀라서 그녀를 밀어내고 바라보았다.
      [띠 플레르 (울고 있어)?]
      [엥 페 (조금).]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프랑스 어로 대답을 하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당신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단지 그가 머물러 있기만 한
    다면, 둘이서 필라 없이 시간을 가질 수만 있다면.......
      [나도 그래.] 하지만 둘은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시동장치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며 짐꾼에게 신호를 보냈다.
      디나는 자기자신의 생각에 빠진 채 조용히 그의 곁에서 걸어갔
    고, 그들은 마침내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가 가끔 숨어버리는 
    일류 라운지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는 웃
    어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의 그가 아니
    었다. 차 안에서의 순간들은 잊어버렸다. 그는 가방에 있는 서류
    들을 검토하더니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직 10분이 남아 있었
    다. 그는 갑작스레 안절부절하며 떠나기를 기다리는 듯이 보였다.
      [알로르. 차 안에서 빼먹은 이야기 없어? 필라에게 전할 말은?]
      [그냥 사랑한다고 전해줘요. 아테네로 가기  전에 그곳에 들릴 
    건가요?]
      [아니, 오늘밤에 필라에게 전화를 할 거야.]
      [그리고 나에게도요?] 그녀는 벽에 걸려 있는 굉장히 커다란 시
    계의 초침이 똑딱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당신에게도. 외출하지 않을 거야?]
      [아뇨. 작업실에서 끝마치고 싶은 일이 좀 있어요.]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해봐. 그러면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테니
    까.]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난 외로움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그녀는 
    구태여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무릎
    을 내려다보면서 한쪽 발을 꼬아  앉았다. 그녀는 그가 홍콩에서 
    사온 연자주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감청색 귀
    걸이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다른 일들에 가 있었다.
      [디나?]
      [네?]
      그녀는 자기 옆에 서 있는 그를 찾기 위해 위를 올려다보았다. 
    손에는 서류가방이 들려 있고 눈에는 낯익은 승리의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는 지금 전쟁터로 가 있었다. 또다시, 저돌적으로 자기
    의 승리를 위해 결투할 것이다.
      [시간이 되었어요?]
      그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가 일어섰을 때 그의 커다란 몸때문
    에 그녀가 작게 보였지만 그들은 멋지게 어울리는 동반자였다. 그
    들은 놀랄정도로 어울려 보이는 한  쌍이었다. 그들은 항상 그랬
    다. 차가운 눈을 가진 그의 어머니 듀라스 부인조차도 그 점만은 
    인정했다. 딱 한번.
      [탑승구까지 배웅할 필요는 없어.] 그는 벌써 마음이 어수선한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러고 싶어요. 괜찮죠?]
      [물론이지.] 그가 아내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고, 그들은 터미널
    의 혼잡 속으로 밀려 들어가서 순식간에 가방과 선물꾸러미 그리
    고 기타를 짊어진 한 무리의  여행자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너무 일찍 탑승구에 도착했고, 그는 몸을 돌려 미소를 지으며 그
    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늘밤에 전화할께.]
      [당신을 사랑해요.]
      그는 대답 대신에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려고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거나 손짓도 없이 탑승구쪽으로 성큼성큼 걸
    어갔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던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
    서 걸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자기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
    쳤다. 하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이미 가버렸다.
      길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 안으로 들어간 후, 그녀는 잠시 한
    숨을 쉬며 자동차 열쇠를 돌리고 집을 향해 몰았다.
      
      디나는 옷을 갈아 입으려고 윗층으로 올라가서는 오후 내내 작
    업실에 틀어박혀 자기자신만의 생각 속에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스케치를 하다가 잠시 바람을 쐬려고 테라스로 
    나간 순간 마가레트가 부드럽게 작업실 문을 노크하였다. 가정부
    가 주춤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놀라서 몸을 돌렸다.
      [듀라스 부인....... 저, 저, 죄송합니다.......]
      그녀는 디나가 작업실에서 방해를 받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디나가 작업실 전화선
    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뭐가 잘못 됐나?]
      디나는 혼란을 느낀 듯 쳐다보면서,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흩뜨
    리고 양손은 진바지 주머니 속으로 찔러넣은 채 서 있었다.
      [아닙니다. 셜리반 씨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짐이?] 그러자 그녀는 짐이 그녀를 방문할 거라는 남편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언제나 확실히 약속을 지켰다. 항상 그의 동료의 
    교활한 명령에 헌신적이었다.
      [곧 내려가겠어요.]
      마가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디나가 작업실에 있을 때 
    누군가 방문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얼음처럼 투명한 녹색 거실로 그를 안내하고 차를 한 잔 권했지만 
    그는 싱끗 웃으며 거절했다. 그는 마르크 에두아르와는 아주 많은 
    부분이 달랐다. 마가레트는 언제나  그를 좋아했다. 그는 꾸밈이 
    없는 미국인이었고, 일을 쉽게  처리하며, 그의 눈의 어딘가에는 
    항상 부유한 아일랜드 인 특유의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디나가 윗층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창가에 서서 부두 위를 서서
    히 떠다니는 여름 안개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부풀어오
    른 하얀 목면이 눈에 안 보이는 끈에 이끌려서, 다리의 뾰족한 끝 
    사이를 둥둥 떠다니다가 돛단배를 넘어서 하늘 중간 쯤에 걸려 있
    는 듯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짐.]
      [부인.]
      그는 약간 고개를 숙인 후에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려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깔깔 웃으며 손짓을 하여 그의 동작을 거절하고는 
    그녀의 볼을 내밀었고, 그는 아무런 격식 없이 볼에 입을 맞추었
    다.
      [이러는 편을 훨씬 더 좋아한다고  말해야겠군요. 아직은 손에 
    입을 맞추는 기술을 능숙하게 익히지 못했거든요. 사람들이 악수
    를 하려는지 아니면 입맞춤을 원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몇 번
    인가는 하마터면 악수를 하려고 내민 손에 코를 부러뜨릴 뻔 했었
    죠.] 그녀는 그를 보고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남편에게 교습을 받아야겠군요. 그는  그런 일에 천재랍니다. 
    그가 갖고 있는 프랑스 인 기질이 아니면 육감이죠. 뭣 좀 마시겠
    어요?]
      [좋습니다.] 그는 음모를 꾸미는 듯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
    다.
      [마가레트는 내가 차를 마셔야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요.]
      [눌랍군요.]
      그녀는 또다시 웃었고, 그는 자그마한  상감 캐비닛을 열고 잔 
    두 개와 스카치 한 병을 꺼내는 그녀의 모습을 감사하는 듯이 바
    라보았다.
      [술을 마시나요, 디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을 했지만 
    놀라고 있었다. 그녀가 스카치를 마시는  모습은 처음 보는 일이
    다. 아마도 마르크 에두아르에게는 자기에게 집에 들르라고 할 만
    한 충분한 속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고개를 
    젓고 있었다.
      [얼음물을 좀 마실까 생각했어요. 걱정되시나요?] 그의 잔을 따
    르면서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약간.]
      [걱정마세요. 아직까지 술을 마신 적은 없으니까요.] 한 모금을 
    들이키는 그녀의 눈은 갑자기 무언가를 동경하는 듯이 보였으며, 
    술잔을 조심스럽게 대리석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번 
    여름은 무척이나 지루할 거예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미소
    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부드럽게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알아요. 하지만 나중에 영화관에 갈 수도 있을 거예요.]
      [마음이 따뜻하시군요. 하지만 하실 일이 이보다 더 나은 일은 
    없나요.?] 그녀는 더 나은 일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4년 전
    에 이혼을 한 후 몇 달 전에  뉴욕에서 이사온 한 모델 아가씨와 
    동거중이었다. 그는 그런 타입을 좋아했고 모델들은 언제나 그를 
    사랑했다. 훤칠하고 미남인데다 체구도 좋고, 아일랜드 인의 푸른 
    눈과 칠흑처럼 검은 머리에는 거의 회색빛이라곤 없었다.
      그는 모든 가능한 방면에서 마르크 에두아르와는 완벽한 대조를 
    이루었다. 마르크가 격식을 차릴 때에 그는 쉽게쉽게 일을 처리했
    으며, 마르크의 유럽식 매너와 달리 그는 미국인 그 자체였다. 그
    리고 마르크 에두아르의 전혀 숨기지 않는 거만함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놀라울 정도로 겸손했다. 마르크가 짐을 그의 동업자로 선택
    한 일은 언제나 디나에게 기묘한 일로 여겨졌지만 그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마르크 자신의 독특한 재치는 짐의 그것과 조화를 이
    루었다. 그들의 별은 단지 다른  모양으로 빛났고 듀라스 가문의 
    사람들은 짐을 사교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았지만, 그는 자기자신
    의 생활과 모델들을 고르는 일로 바빴다. 짐은 결코 한 여자에게 
    오랫동안 집착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당분간 한 명뿐이었
    다.
      [요즘에는 무슨 일을 하세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일하고, 놀고, 늘 그렇죠. 당신은요?]
      [마찬가지로 늘 그렇듯이 작업실에서 빈둥거리죠.] 그녀는 항상 
    상대방의 말에 자기를 맞추었다.
      [이번 여름은 어때요, 무슨 계획이라도 세웠나요?]
      [아직은요. 하지만 세워보아아죠. 아마도  산타 바바라에 있는 
    친구들을 방문한다거나 아니면 다른 일을 하겠죠.]
      [맙소사!] 그가 끔찍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려보이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왜요, 잘못됐어요?]
      [당신이 그런 일을 즐기려면 80세는 되어야 해요. 비버리 힐즈
    로 내려가지 않겠어요? 영화배우처럼 가장하고, 폴로 라운지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서비스를 받아봐요.]
      [당신은 그렇게 하나요?] 그녀는 그 생각에 웃음이 났다.
      [물론이죠. 매 주말마다 그러죠.]
      짐은 낄낄대고 웃으면서 빈 잔을 내려놓고는 시계를 들여다보았
    다.
      [들러줘서 고마워요. 지루한 오후였었거든요. 둘다 떠나버리니 
    기분이 이상하군요.]
      그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는 자기의 아내와 두 아들이 처음에  집을 나갔을 때의 기분을 
    떠올렸던 것이다. 당시에는 단지 침묵때문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
    었다.
      [전화 드리죠.]
      [좋아요. 그리고 잠시 그녀는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고마워
    요.]
      짐은 그녀의 길고 검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키스를 하고
    는 떠나갔다. 그는 검은색 폴세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며, 그
    녀에게 손을 흔들면서 마르크가 미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디나 듀라스는 그가 꽉 잡아두기 위해  어떠한 것이라도 거의 다 
    주어버릴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이다.  물론 그는 그러한 종류의 
    불장난을 저지르지 않을 만큼 현명하였지만, 여전히 듀라스는 미
    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 주여!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미녀인지 그는 알아채지조차도 못하였다. 아니, 알고 있을 지도. 
    짐 셜리반은 차를 몰고 가면서 혼자의 생각에 잠겼고 디나는 부드
    럽게 문을 닫았다.
      그녀는 시계를 힐끗 쳐다보면서 짐이 들러준 것에 고마움을 느
    끼며 남편이 언제 전화를 해줄까 생각했다. 그가 그날 밤에 전화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대신에 
    아침에 전보 한 통이 왔을 뿐이다.
      
      아테네로 출발. 전화할 시간이 여의치 않음. 만사형통.
      필라는 건강함.
      
      간단하게 요점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왜 전화하지 않았을까? <
    전화할 시간이 여의치 않음> 그녀는  다시 읽었다. 여의치 않음. 
    여의치 않음....... 남편의 전보를 되풀이하여 읽고 있을 때 전화
    벨 소리가 디나의 생각을 끊어버렸다. [디나?] 밝은 목소리가 그
    녀의 환상을 깨뜨리자 귀에  거슬렸다. 킴벌리 휴튼이었다. 킴은 
    그녀와 단지 몇 블럭 떨어져 살고  있었지만 그녀의 생활은 좀더 
    색다른 면이 있었다. 두 번 결혼에 두 번 이혼, 그녀는 이제 영원
    히 독립해서 즐겁고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녀는 디나와 함께 
    미술학교를 다녔었지만 지금은 광고계에서 독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결코 진정한 의미의 예술가는 못되었었다. 
    그녀는 디나와 유일하게 친한 여자친구였다.
      [안녕, 킴! 새로운 일이라도 있니?]
      [별로. 로스앤젤레스에서 고객 중의 한  사람과 친하게 지냈는
    데, 그녀석이 벌써 계좌를 빼내려 하고 있단 말야. 그건 내 계좌
    라고.] 그녀는 자기가 광고를 맡은 호텔들의 전국 체인의 이름을 
    말했다. [점심식사 안할래?]
      [할 수 없어. 스케줄이 꽉 짜였어.]
      [뭘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의심하는 빛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항상 디나가 거짓말을 할 때를 꼬집어 낼 수 있었다.
      [자선파티야. 가야만 해.]
      [내버려둬. 나에게 자선을 베풀어봐. 조언이 좀 필요하거든. 우
    울하단 말야.]
      디나는 웃었다. 킴벌리 휴튼은 절대로 우울한 적이 없었다. 이
    혼조차도-그것도 두 번씩이나-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녀는 금세 더 좋은 것을 찾아내었다. 대개 일주일 이내로.
      [디나, 사랑해. 어디론가 점심식사하러 가자고. 한숨 돌리고 싶
    어.]
      [나도 마찬가지야.] 디나는 우울한 기분을 쫓아버리려고 애쓰면
    서 푸른색 실크와 벨벳으로 호화롭게 꾸민 침실을 한 바퀴 둘러보
    았다. 무방비 상태 속에서 그녀의  맥빠진 소리가 전화기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무슨 말이야?] 킴이 물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참견하기 좋아하는 친구야, 남편이 떠나
    버렸어. 필라는 이틀 전에 떠났고, 남편은 어제 아침에 떠났어.]
      [맙소사! 그럼 기회를 즐겨봐. 그렇게  한숨 돌릴 기회가 자주 
    있는건 아니잖아. 내가 너라면 발가벗은 채로 거실을 뛰어다니면
    서 친구들을 모조리 불러 들이겠다.]
      [옷을 벗은 채로? 아니면 옷입고 나서?] 디나는 의자 끝편에 다
    리를 쭉 펴서 올리면서 웃었다.
      [아무렴 어때. 들어봐, 그런 처지라면  점심 이야기는 잊자구. 
    오늘 밤에 저녁식사가 어때?]
      [그렇게 하지. 그렇다면 오늘 오후에 작업실에서 일을 좀 할 수 
    있으니까.]
      [자선파티에 나가야 한다며?] 디나는 킴이 이를 가는 모습을 보
    는 듯했다.
      [이럴 수가!]
      [지옥에나 떨어져라.]
      [고맙구나. 7시에 트레이더 빅스에서 저녁식사다.]
      [그래 거기서 봐.]
      [이따가 보자.] 그녀는 디나를 미소짓게 만들고는 전화를 끊었
    다. 킴의 전화가 더할 수 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눈이 부시구나. 새 드레스야?] 킴벌리  휴튼은 술을 마시다가 
    디나가 도착하자 올려다보았고, 두 여자는 오래된 친구들 간의 미
    소를 나누었다. 적당히 몸에 달라붙어서 그녀의 검은 머리와 커다
    란 초록빛 눈을 돋보이게 하는 하얀 캐시미어 드레스를 입은 디나
    는 정말로 사랑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너도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킴은 남자들이 사랑하는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풍만하고 여유있으면서도 또 
    반면에 당차게 보였다. 킴의 푸른  눈은 춤추듯 일렁였고 그녀의 
    미소는 시선을 던지는 모든 이들을  유혹했다. 그녀는 지난 20년 
    동안 해 온 그대로 금발의 곱슬머리를 짧게 커트하고 있었다. 디
    나가 지닌 놀라우리만치의 우아함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녀에겐 
    나름대로 거절할 수 없는 온화함과 옷을 입는 독특한 방식이 있었
    다. 그녀는 항상 10명의 남자들을 그녀의 발꿈치에 달고 다녀야만 
    할 것처럼 보였고 대개 그랬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한 명이나 
    두 명쯤은.
      오늘밤의 킴은 푸른색 벨벳 블레이저 코트와 헐거운 바지를 붉
    은 실크 셔츠와 함께 입고 있었다. 커다란 젖가슴 사이의 오목한 
    부위를 드러낼 정도로 단추를 풀어놓고 있었고, 가느다란 금줄에 
    매달린 다이아몬드 하나가 그녀의 풍만한 가슴사이로 교묘하게 늘
    어뜨려져 있었다. 한 명의 <매혹적인 여자>가 마치 누군가의 도움
    을 필요로 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앉아 있었다.
      디나는 마실 것을 주문하고 의자 위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그
    녀의 밍크 코트를 의자에 내려놓았다. 킴은 그것에 흥미를 느끼지
    도 않았고 감동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런 세계에서 자라났고 더
    이상 돈이나 밍크 따위에 욕심이 없었으며, 오로지 독립과 즐거운 
    시간만을 필요로 했다. 그녀는 항상 자기가 그 두 가지 모두를 충
    분히 갖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래, 무슨 일이니? 너의 자유를 잔뜩 만끽하고 있니?]
      [약간은. 실은 이번엔 적응하기가 좀  힘들어.] 디나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맙소사! 내 생각에는 지금쯤은 네 남편의 여행에 대해 적응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어느 정도의 독립은 너한테도 
    좋다구.]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이는 석 달 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구. 영원히 안 올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석 달 씩이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지?] 킴의 목소리는 갑
    작스레 어둡게 가라앉았고, 눈동자에는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파리와 아테네 사이를 오가는 커다란 소송 건수가 있는데, 그 
    일때문에 집에 안 온다니 이해가 안돼.]
      [네가 건너가면 안돼?]
      [무슨 그렇게는 안될 거야.]
      [무슨 말이야, 물어 봤어?]
      그건 마치 엄마에게 대답하는 기분이었다. 디나는 미소를 지으
    며 친구를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는. 그는 일에 바쁠 거고, 만일 
    내가 건너간다면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야 하거든.]
      [꼬이는군.] 킴은 디나의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들을 낱낱이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거야. 비록 내가 그런 식으로 남편에게 말을 하지는 않
    았지만 말이야. 그래서 말이야, 여름 동안은 나 혼자야.]
      [그리고 단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모든 순간순간이 지겨
    워져.]
      [어디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는 건 어때?]
      [어디로?]
      [이런, 디나! 아무데나 말이야. 분명히 네 남편은 신경쓰지 않
    을 걸.]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혼자서 여행하는 건 싫어.] 그녀
    는 혼자 여행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아버지와 여행을 했었
    다. [게다가 말이야, 내가 어디로 가겠어? 짐 셜리반 말로는 산타 
    바바라는 지겨울 거라고 하던데.] 그녀는 쓸쓸해 보였다. 킴벌리
    가 웃었다.
      [그 사람 말이 맞아. 이 가엾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야. 나와 함
    께 카멜로 가는게 어때, 내일? 주말 동안 고객을 만나러 내려가야 
    하거든. 너는 그냥 같이 가기만 하면 돼.]
      [킴, 그건 바보같은 짓이야. 내가 네 일에 방해가 될 거야.] 그
    러나 그녀는 그 제안에 솔깃했다. 오랫동안 카멜에 가보지 못한데
    다가 그곳은 별로 먼 곳도 아니었다. 시에서 차를 타고 딱 두 시
    간 거리였다.
      [어째서 내 일에 방해가 되니? 맹세코 그 친구와는 아무런 관계
    가 없으니 괜찮아. 동반자가 있다면 나도 즐거울 거야. 나 혼자라
    면 지겨울 거라구.]
      [오래는 못 있어.] 디나가 날카롭게 쳐다보자 킴이 웃었다.
      [제발, 내 명예를 생각해줘!] 그녀는 디나를 보고 여유있게 미
    소를 짓고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면서 부드러운 금발의 곱슬머
    리를 흔들어댔다.
      [난 심각해. 올 거니? 난 정말 함께 갔으면 좋겠어.]
      [생각해 볼께.]
      [안돼, 너는 오는 거야. 그렇게 결정해, 알았지?]
      [킴벌리.......] 디나는 웃기 시작했다.
      [5시 30분에 데리러 갈께.] 킴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3
      
      
      킴이 집 앞에 차를 주차시키면서 경적을 두 번 울리자, 디나는 
    가방을 들고 계단을 달려 내려가기 전에 침실 유리창으로 힐끗 내
    다보았다. 그녀는 다시 소녀가 되어  친구와 함께 주말의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킴의 차도 어른들이  몰고 다니는 것과 같이 
    보이지 않았다. 그 차는 화사한 붉은  색칠을 한 구식 엠지였다. 
    잠시 후 현관에 나타난 디나는 회색빛의 헐거운 바지와 회색빛 자
    라목 스웨터를 입고 큼지막한 갈색 가죽가방을 들고 있었다.
      [제시간에 왔구나. 오늘은 어땠어?]
      [소름이 끼쳐. 묻지마.]
      [알았어. 묻지 않을께.] 그들은 다른  모든 일에 대해, 카멜과 
    디나의 최근 그림들, 필라와 그녀의 친구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마침내 그들은 편안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카멜에 거의 
    도착했을 때에 킴벌리는 그녀의 친구를 흘낏 보고는 그녀의 눈에 
    깃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보았다.
      [1페니 짜리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것밖에 안돼? 이런 젠장! 적어도 5센트나 10센트 정도는 된
    다구.] 그녀는 웃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쫓아버리려고 애를 썼지만 
    킴은 넘어가지 않았다.
      [알았어. 10센트라고 쳐주지. 하지만 한번 알아맞혀 볼께. 마르
    크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지?]
      [맞았어.] 바다를 바라보는 디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정말로 그 정도로 그를 그리워하고 있니?] 그들 부부의 관계는 
    항상 킴을 당황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편의에 의한 결혼처럼 보였
    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디나는 그를 사랑했다. 
    지나칠 정도로.
      디나는 다른쪽을 바라다보았다. [그래, 그만큼 그를 그리워하고 
    있어. 그게 너한테는 바보스럽게 보이니?]
      [아니. 어쩌면 존경스럽다고 할까, 뭐 그런 느낌이야.]
      [무슨 소리야, 존경이라니? 그거 하곤 아무런 상관이 없어.]
      킴은 웃으면서 머리를 저었다. [이 친구야, 18년 동안 한 남자
    와 같이 산다는 건 나로서는 존경의 대상 그 이상이야. 지랄맞을 
    만큼 영웅적이라구.]
      디나는 그녀의 친구를 보고 미소지었다. [뭐가 영웅적이라는 거
    야?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 그는 멋지고, 지적이고, 유머감각이 
    있는 매력적인 남자야.] 그리고 그가 떠나기 전날 밤의 정사는 그
    녀의 가슴속에 있는 어떤 감정을 새롭게 되살려주었다.
      [맞아, 그래.] 킴은 대꾸를 하면서  줄곧 차도를 바라보았지만 
    그외에 뭐가 더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마르크듀라스에게 아무도 모르는 일면이 있다면? 따뜻한 면, 사랑
    스러운 면, 끝이 없는 아름다움과 매력을 지닌 또 다른 남자의 차
    원이 있다면? 웃고 울고 진실한 인간적인 면. 그렇다면 그 사람은 
    킴이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무척 지루한 여름이 될 거야.] 디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상대하는 고객에 대해서 말해 줄래, 새로운 사람이니?]
      [그래. 그 사람이 카멜에서 회의를 하자고 고집을 부렸어. 샌프
    란시스코에서 살지만 집은 여기에 있어. 로스앤젤레스에서 올라오
    는 길인데 여기가 그 계좌를 토론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더군.]
      [무척 교양있는 사람인가 보구나?]
      [그래, 매우.] 킴이 디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거의 8시가 다 되어서 그들은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킴벌리는 
    차밖으로 몸을 빼면서 곱슬머리를 흩날리며 디나를 힐끗 바라보았
    다.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확신하건데 이건 여행에 적
    합한 부드러운 수레가 아니라구.]
      [난 살아날 거야.] 디나는 눈에 익은 광경을 한 바퀴 둘러보았
    다.
      신혼의 주말에 그녀와 마르크는 종종 카멜로 내려오곤 했었다. 
    그들은 상점들의 안팎을 휘집고 다니며 행복을 느꼈고, 촛불을 켠 
    저녁식사를 먹고 나서는 해변을 몇 마일씩이나 걷곤 했었다. 그가 
    없는 지금, 여기에 다시 왔다는 것이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느낌이
    었다.
      호텔은 아담한 정취가 있었으며, 프랑스 시골 풍의 건물과 화려
    한 그림들이 그려진 창문 아래의 화초 상자에는 환한 빛깔의 꽃들
    이 가득차 있었다. 안쪽에는 낮은 목재 대들보와 구리 단지로 틈
    을 만든 넓직한 벽난로가 있었고,  아담한 하얀색 디자인이 들어 
    있는 웻지우드 도자기처럼 푸른 빛깔의 벽지가 발라져 있었다. 남
    편이 좋아할 만한 종류의 호텔이었다.  매우 프랑스 풍으로 보였
    다.
      킴벌리는 접수대에서 숙박부에 서명을 하고 나서 디나에게 펜을 
    넘겨주었다. [옆방을 달라고 했어. 괜찮지?] 디나는 고개를 끄덕
    이며 좋다고 했다. 그녀는 혼자 있고 싶었던 것이다.
      [좋아.] 카드에 이름과 주소를 적고  나서 그들은 짐꾼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5분이 지나서 디나의 방문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콜라 마실래, 디나? 아래 홀에 있는 자판기에서 두 개를 뽑아
    왔어.] 킴은 디나의 침대에 가로질러 벌렁 드러누우면서 얼음처럼 
    차가운 깡통을 내밀었다.
      디나는 콜라를 받아 한 모금 길게 마시고는 의자에 몸을 던지면
    서 미소와 한숨을 지었다. [여기에 있으니까 기분이 무척 좋구나. 
    오기를 잘했어.]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없었다면 지루했을 거야. 내일 일이 끝
    나면 상점에 들러 쇼핑을 할 시간도 있을 거야. 아니면 너는 내일 
    오후에 시내로 돌아가든지. 계획 있어?]
      [전혀. 그리고 여긴 천국이야.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어. 남편
    과 딸이 없는 집은 마치 무덤같아.]
      킴벌리는 그들이 있어도 마찬가지로 무덤같을 거라고 생각했지
    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디나가 그 집을 
    사랑한다는 것과 그녀 가족의  안전을 무척이나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이 그녀를 무일푼으로 외롭게 만들어놓은 
    직후의 미술학교에서 디나를 만났었다. 그녀는 디나가 일을 해서 
    적은 돈으로 생활해 나가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았었다. 마르크
    가 디나의 변호를 맡았을 때, 디나가 그를 점점 의지하게 되다가 
    급기야는 그 없이는 스스로 어떻게도 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도 보아왔다. 그녀는 마르크가 자기의  친구를 그의 날개 밑에 
    부드럽게, 저항할 수 없이, 그리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듬직한 
    남자의 모습으로 그녀를 감싸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
    는 디나가 그곳에서 거의 20년 동안이나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꼭꼭 숨어서, 그리고 자기가 행복하다고 주장하면서 둥지를 트는 
    모습을 보아왔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킴은 절대
    로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저녁식사하러 갈 만할 특별한 곳이  있니?] 킴이 남은 콜라를 
    마시면서 물었다.
      [해변.] 디나는 창문을 통해서 갈망하듯 바다를 보고 있었다.
      [해변이라고? 거긴 모르는데.] 킴은 애매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디나는 웃었다.
      [아냐, 식당이 아니라. 해변을 산책하고 싶다구.]
      [지금, 이 시간에?] 아직 8시 30분밖에 안 되었고 땅거미가 서
    서히 지고 있었지만, 킴은 배가 고파서 저녁식사를 하고 싶었다. 
    [내일 새로운 고객과의 회의를 끝내고 난 뒤로 미루는 것이 어떻
    겠니?] 킴은 분명히 파도와 모래사장에 매혹되지 않았지만 디나는 
    달랐다.
      그녀는 굳게 마음먹은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콜라를 내려놓았
    다.
      [아니야,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는 없어. 저녁식사하러 나가기 
    전에 옷을 갈아입을 거니?] 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렇
    다면 네가 옷을 입는 동안 나는 산책하러 나가겠어. 나는 그냥 입
    고 있는 그대로 나갈래.] 그녀의 캐시미어 스웨터와 헐거운 바지
    는 자동차 여행후에도 구김살 한점 없이 말쑥했다.
      [해변에서 길 잃어버리지마.]
      [걱정마.] 디나는 킴을 보고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지었다. [어린
    애가 된 기분이야. 나가서 노는 것을 연기할 수가 없어.]
      석양을 바라보라, 바닷바람을 한숨 깊숙이 들이마셔 보라, 그리
    고 마르크와 내가 손에 손을 잡고 저 해변을 거닐던 시절을 기억
    해 보라....... [30분 안으로 돌아올께.]
      [서둘지 말아. 나는 뜨거운 물로 근사하게 목욕을 해야겠어. 급
    할것 없다구. 저녁식사는 9시  30분이나 10시에도  할 수 있으니
    까.] 킴은 소나무 여관의 빅토리아 풍의 레스토랑에 예약을 해 둘 
    생각이었다.
      [이따가 봐.] 디나는 자켓을 걸치고 손에는 스카프를 들고서 손
    을 흔들며 사라져버렸다. 해변에는 바람이 불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반으로 한걸음 발을 내밀자 벌써 밤
    안개가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카멜의 중심가를 따라 걸으면서 아
    직까지 식사 테이블이나 호텔에 자리를 잡지 않은 채 여기저기 흩
    어져 있는 여행객들 사이로 꾸불꾸불 나아갔다. 그들의 아이들은 
    발뒤꿈치에서 재잘거리고 있었고, 팔에는 상점에서 산 전리품으로 
    가득차 있었고, 긴장이 풀린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런 
    광경은 그녀와 마르크가 필라와 함께 이곳에 왔던 때를 생각나게 
    했다. 필라는 한창 발랄한 아홉살이었고, 해변가에서 저녁산책을 
    하는 둘을 따라오면서 떠내려온  나뭇가지와 조개껍질을 주으며, 
    그들을 앞질러 뛰어가다가는 되돌아와 마르크와 그녀가 이야기하
    는 동안 자기가 발견한 것들을 보여주곤 했었다.
      그것이 마치 오랜 옛날이야기같이  생각되었다. 그녀는 거리의 
    끝에 다다르자 갑작스레 멈추어서서 끝없이 펼쳐진 설화석고와 같
    은 해변을 내려다보았다. 마르크조차도 프랑스에는 그와 같은 절
    경이 없다고 인정했을 정도였다. 완벽할 정도로 하얀 모래알과 해
    변으로 밀려오는 수많은 파도의 무리들과 함께 갈매기들이 천천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조수가 밀려
    가고 밀려오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해변에는 매력이 있었다. 그녀가 알지 못했던 어떤 매력이. 
    그녀는 주머니에 스카프를 찔러넣고는 신발을 벗어던지고서, 그녀
    의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밀려 올라오는 감촉을 느끼면서 해변을 
    향해 달려가다가 밀려들어 오는 해수 바로 앞에서 멈추어섰다. 바
    람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지나갔다. 그녀는 눈을 감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녀가 너무나 오랫
    동안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세계였다. 왜 그렇게 오랜 세월을 이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을까, 왜 진작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까?
      다시 한번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나서 디나는 해변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양손에 신발을 한 짝씩 들고서. 그러자 그녀의 발가락
    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모래  위에서 간지러워 꼼지락거리고 있었
    다. 오랫동안 걷다가 그녀는 멈춰서서 수평선에 걸려있는 마지막 
    노을의 황금빛 띠를 바라보았다. 하늘은 엷은 자주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짙은 안개가 해안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끝없이 바
    라보다가, 길게 자란 잔디가 깔린  언덕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 
    무릎을 세우고 턱을 고인 채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렇게 양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눈을 감고서 바다로부
    터 밀려 들어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영혼 속에 스며드
    는 기쁨을 느꼈다.
      [완벽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디나는 꿈결처럼 들려온 뜻밖의 음성에 놀라 움찔했다. 눈을 뜨
    자 큰 키에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가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잠시 그녀는 겁에 질렸지만, 그의 미소가 너무나 부드러워 그 눈
    이 따뜻하게 그녀를 감싸는 동안 경계심이 사라져버렸다. 그 눈동
    자는 바다처럼 깊은 청록색이었다. 그의 체격은 대학시절에 축구 
    선수였을 것 같은 몸집을 하고 있었다. 디나의 머리만큼이나 짙은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런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하루 중에서 이맘때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가 말했다.
      [나도 그래요.] 그녀는 자신이 그의 말에 너무도 쉽게 대답하였
    음과 그가 옆에 앉는 것이 귀찮게 생각되지 않은 것에 놀랐다.
      [해변에 나혼자 있는 줄 알았어요.] 그녀가 수줍은 듯 살짝 올
    려다 보자 그가 미소지었다.
      [그랬을지도 모르죠. 나는 당신 뒤를 따라왔습니다.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는 다시금 솔직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로 여기 뒷편에 내 집이 있죠.] 그는 어깨 너머로 
    바람에 구부러진 나무에 가려진 곳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항상 저녁 때면 이곳으로 나오죠. 지난 3주 동안은 이곳에 있
    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밤에야 먼 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돌
    아와보면 나는 항상 내가 얼마나 이것들을 사랑하는지를, 얼마나 
    내가 이 해변을 걸으며  이것들을 바라보기를 원하는지를 느끼곤 
    한답니다.] 그는 곧장 앞쪽을 바라보았다. 바다를 향해서.
      [일년 내내 이곳에서 사시나요?] 디나는 그와 마치 오랜 친구인 
    것처럼 말을 건네는 자신의 모습에 놀랐지만, 그만큼 그에게는 친
    숙한 면이 있었고 거북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닙니다. 주말에 내려올 수 있을 때 내려오죠. 당신은요?]
      [꽤 오랫동안 이곳에 오지 못했어요. 친구와 함께 내려왔죠.]
      [읍내에 머무르십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생각난 듯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러
    니까 생각이 나는군요. 돌아가시겠어요. 해변을 걷다보니 이곳까
    지 내려왔군요.]
      시간은 이미 9시 30분이 되어  있었고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하루의 마지막 빛이 달아나버렸다. 그녀가 일어서서 그를 내
    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 때나 원한다면 여기에 올 수 있으
    시다니 참으로 운이 좋으시군요.]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듣
    고 있다기보다는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의 시선을 쫓아오고 있었
    고, 디나는 그가 자기 옆에 앉은 후 처음으로 그녀의 뺨에 야릇한 
    온기가 밀려옴을 느꼈다. 그가 말을  건네자 그녀는 자신이 무척 
    당황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바람이 부는 
    이곳에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앤드류 웨스의 그림처럼 보였습니
    다. 당신이 언덕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생각
    이 났습니다. 그의 작품에 대해서 아십니까?]
      그의 시선은 마치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의 짙은 정도를 재는 
    듯 굉장히 열중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미소를 짓고 있었
    다.
      [무척 잘 알고 있어요.] 그것은  그녀의 어릴 적의 열망이었으
    며, 인상파가 그녀의 스타일에 맞는다는 것을 발견하기 이전이었
    다. [그가 그린 작품은 모두 알고 있었어요.]
      [모든 작품을 말입니까?] 그 바다빛 눈동자는 갑자기 놀리는 듯 
    하였지만 여전히 온화하였다.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해변가의 여인을 그린 작품을 아시나요?]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는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밝은 눈을 
    가진, 무척이나 신이 난 소년처럼. [보시겠습니까?]
      [저, 저 정말로 돌아가야 해요. 하지만, 고마워요.......] 그녀
    는 당황해서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무서워해야 할 사람처럼 보이
    지는 않았지만, 해변에 나타난  낯선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기가 어둠 속에 혼자 서서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도대체가 약간 미친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에요. 그럴 수가 없어요. 혹시 다음 기회라면.]
      [알겠습니다.] 그의 눈 속의 불길은 약간 누그러졌지만 미소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름다운 작품이지요. 그리
    고 그 그림 속의 여인은 무척이나 당신을 닮았구요.]
      [고마워요, 아주 고마우신 말씀이군요.] 그녀는 어떻게 떠날지
    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곧장 집으로 돌아갈 의사가 없어
    보였다.
      [제가 모셔다드려도 될까요? 혼자서 가시기에는 너무 어두워졌
    는데요.] 그는 바람 속으로 곁눈질을 하면서 그녀를 보고 씨익 웃
    어보였다.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말을 걸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대답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바다쪽으로 되돌아
    서 좁은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말해보세요. 어떻게 그렇게 웨스를 좋아하게 되었습니까?]
      [그는 내가 본 미국 화가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생각
    했었어요. 하지만 그리고 나서] 그녀는 사과를 하는 듯이 그의 눈
    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모든  프랑스 인상파들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리고는 내가 그를  잊어버리지나 않았나 걱정스러웠
    죠.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실은 약간  사랑에서 벗어났던 거예
    요.]
      그들은 편안하게 나란히 걸어갔다. 해변에는 그들 뿐이었으며, 
    파도가 옆에서 달려들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카멜의 해변을 거닐면서 이 낯선 사람과 미술을 토론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킴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과연 킴에게 얘기를 해야 하나, 일순간 그녀는 아무에게도 
    자기의 새로운 친구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단지 조용한 석양의 해변에서 생긴 우연한 만남에 불과했다. 
    거기에 뭐 말할 것이 있겠는가?
      [당신은 항상 그렇게 쉽게 사랑에서 물러섭니까?] 그것은 어리
    석은 물음이었다. 무언가 더 나은 것이 없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 
    간에 물어보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대개는 안 그래요. 프랑스 인상파들에 관한 것이라면.]
      그는 사려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해가 됩니다. 그림을 
    그리십니까?]
      [약간요.]
      [인상파들처럼요?] 그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그림을 보고 싶은데요. 전시회는 
    가졌었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최초의 달빛을 받아 진주빛으로 일렁이
    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아뇨, 더 이상은요. 딱 한번,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에요.]
      [그림 그리는 것으로부터도 사랑에서 벗어났습니까?]
      [천만에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모래를 내려보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림은 내 인생이에요.]
      [그러면 왜 보여주지 않는 겁니까?]
      그녀는 그의 반응에 당혹했지만 그저 어깨만 움찔거렸다. 그들
    은 그녀가 해변으로 걸어갔었던 그 장소에 도착했다.
      [여기서 저는 가 보겠습니다.]
      그들은 달빛을 받으며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일
    순간 미친듯이 그의 튼튼하고 편한 팔에  안겨서 그가 입고 있는 
    스포츠용 잠바에 그와 함께 감싸여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말을 건네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이상
    스럽게 진지해졌다.
      [내 이름은 벤입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디나예요.] 그는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하고 난 뒤에 돌아서서 해변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 넓은 어깨와 탄탄한  등 그리고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머리. 그녀는 [안녕] 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바람결에 사라
    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대신에 그가 돌아섰고, 그녀는 그가 어둠 
    속에서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4
      
      
      [도대체 어디 있었니?] 디나가 돌아왔을 때, 로비에서 킴이 걱
    정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 위로 헝
    클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올리고 친구에게 웃어보였다. 그
    녀의 뺨은 바람때문에 홍조를 띠고 있었고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
    다. 디나가 말문을 터놓기 시작하자 킴은 자신의 마음 속까지 디
    나의 눈부신 아름다움이 비추는 것 같았다.
      [미안해, 생각한 것보다 멀리까지 걸어 갔었어. 돌아오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리더군.]
      [그럴 줄 알았어. 그래도 늦으니까 슬슬 걱정이 되던 걸.]
      [미안해! 그 디나는 진정으로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킴의 얼굴이 부드러워져 웃음이 떠올랐다.
      [괜찮아. 하지만 세상에, 아이를 해변에 내놓아 봐. 그러면 그 
    아이를 잃어버리고 말 걸. 난 네가 우연히 친구를 만났을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었어.]
      [아니야.] 그녀는 잠깐 멈추었다.
      [그냥 걸었어.] 디나는 킴에게 벤에  대해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자기가 해변에서 한 낯선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예술을 논했다고? 그런 이야기는 우스꽝
    스럽게 들릴 것이 틀림없다. 어린애같이. 혹은 더 나쁜 경우에는 
    어리석은 거짓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했을 때, 문득 
    그녀는 자기가 그순간을 혼자만 간직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발견
    했다. 그녀는 어쨌든 그를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구태
    여 설명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저녁 준비는 됐니?]
      [그럼. 예약해 두었어.] 그들은 상점의 진열창을 힐끔힐끔 넘겨
    보면서 친구들에 대해 수다를 떨며 파인 인까지 두 구역이나 걸어
    갔다.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침묵의 교환이었으며, 침묵 속에서 
    디나는 늘상 혼자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녀는 벤이 
    가지고 있노라 암시했던 미지의 것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는 자신
    을 발견했다. 그는 정말로 그것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니면 단지 
    포스터에 불과했을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었을까? 그녀는 스스로
    에게 아니라고 말했다.
      [오늘밤은 아주 대단히 조용하구나, 디나.] 그들이 저녁식사를 
    끝냈을 때 킴이 말했다. [지쳤니?]
      [약간.]
      [남편이 생각나서?]
      [응.] 그것이 가장 편한 대답일 것 같았다.
      [그가 아테네에서 너에게 전화를 걸까?]
      [시간이 난다면. 시차때문에 어려울 거야.]
      그가 아주 끔찍히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지 이틀 만
    에 그는 벌써 또 다른 생애의 일부분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
    다. 아니면 그건 아마도 카멜에 있었던 때문일지도 모른다. 디나
    가 집에서 그의 의복들과 서적들과 함께 있거나 침대에서 그의 곁
    에 있을 때는 그가 좀더 가깝게 느껴졌다.
      [내일 만날 너의 고객은 어떻지, 어떻게 생겼어?]
      [몰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거든. 그는 예술품 거래상이야. 톰
    슨화랑들을 경영하는. 사실은 너에게 그 약수에 함께 가지 않겠느
    냐고 물어보려던 참이야. 그의 집을 보고 싶어할 수도 있으니까. 
    난 그가 자칭 <오두막집>이라고 부르고 있는 자기 집에 대단한 수
    집품들을 가지고 있다는 얘길 들었어.]
      [네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킴벌리는 새삼 확인시켜주려는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계산을 치르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니 어느새 11시 30
    분이 되어 있었다. 디나는 침대에 눕게  된 것이 기뻤다. 그녀가 
    잠이 들었을 때 그녀는 벤이라는 이름의  낯선 사람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녀가 미처 잠이 덜 깨어 누운 채로 일어나야 할지를 망설이고 
    있을 때 침대 옆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킴과 같이 가기로 약속
    했었지만 다시 잠들고 싶은 유혹을 받고 있었다. 한숨 더 자고 나
    서 해변을 산책하고 싶다는 강한 유혹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자기가 해변에 나가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았고, 그녀의 마음 속에 
    떠돌고 있는 그 남자에 대한  감정은 이상하고 불편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만일 다시 만난다 
    해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때 가서는? 전화벨이 다시 울리고 그
    녀는 수화기를 들었다.
      [태양이 중천에 떴다구.] 킴이었다.
      [지금 몇 시니?]
      [9시 5분.]
      [이런 7시나 8시쯤 되었는 줄 알았는데.]
      [그랬니? 그나저나 우리 모임은 10시야, 일어나. 그러면 아침식
    사를 가져다 줄 테니까.]
      [룸 서비스를 시킬 수는 없을까?]  디나는 남편과 여행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여긴 리츠호텔이 아니야. 내가 커피와 덴마크식 아침을 가져다 
    줄께.] 디나는 갑자기 자신이 얼마나 버릇이 없어져 있는가를 깨
    달았다. 마가레트와 완벽한 아침식사가 없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
    운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좋아, 그것도 근사하겠군. 30분  후면 나도 준비가  다 될 거
    야.]
      디나는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만진 다음 하얀 바지 위로 수레국화
    빛같이 짙푸른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었다. 그녀는 킴이 자신의 방
    문을 노크하기 이전에 간신히, 신선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다.
      [어머나, 이렇게 아름답고 화려할 수가!] 킴이 그녀에게 뜨거운 
    김이 나는 커피 한 잔과 쟁반을 넘겨주었다.
      [너도 그런데 뭐.  좀더 사무적인 복장으로  갈아입어야 할까? 
    너, 끔찍할 정도로 어른스러워 보이는데.] 킴은 감색 실크 블라우
    스에 베이지색 개버딘 정장을 입고, 대단히 아름다운 밀짚모자에 
    작은 밀짚 손가방을 팔 밑에 끼고 있었다.
      [굉장히 세련되어 보여.]
      [그렇게 놀란 것처럼 쳐다보지 말아.] 킴은 미소지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만나는 남자는 좀 쉬운 상대였으면 좋겠
    어. 토요일 아침에는 사업 얘기로 왈가왈부할 기분이 아니니까 말
    이야.] 그녀는 하품을 하고 나서 디나가 자기 잔의 커피를 다 마
    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대체 내가 누구로 되어 있는 거니? 네 비서, 아니면 샤
    프롱?] 디나의 두 눈이 컵 너머로 반짝거렸다.
      [둘다 아니야, 이 멍청아. 그냥 내 친구라고 했어.]
      [친구를 데리고 가는 걸 그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너무나 안 된 일이지 뭐.] 킴이 다시 하품을 하
    고 나서 일어섰다.
      [자아, 슬슬 일어나볼까?]
      [알았습니다, 마님.]
      디나가 킴에게 지시사항들을 읽어주는 동안, 겨우 5분 만에 목
    적지에 도착했다. 주소에 적힌 집은 주택들이 모두 길에서 다소간 
    들어가 있어 나무들로 가리워져 있는 아름다운 거리에 있었다. 그
    들이 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는 그 집이 아담하고 쾌적한 집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정교하지도 않고  허세와는 거리가 먼 
    집. 그것은 비바람에 닦이어  자연스러운 외양을 지니고 있었다. 
    작고 검은 외국산 자동차가  밖에 주차되어 있었는데 근사하지는 
    않지만 편리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곳의 어떤 것도 결코 그 약속
    된 예술 수집품들이 인상적이거나  희귀품일 거라고 암시해 주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가정부의 앞치마를 두른 자그마하고 단정한 
    여인이 문을 열어줬을 때, 집 내부는 전혀 딴판의 분위기를 연출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두 번 오는 사람처럼, 따뜻하다
    기보다는 능률적인 듯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톰슨 씨께서 밀실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윗
    층에서 전화중이십니다. 런던으로요.] 그녀는 마치 그 통화가 충
    격적인 지출이기라도 한 것처럼 마지막 말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이 덧붙였다. 그러나 그건 저 벽들에 걸린 그림들만큼 그렇게 큰 
    지출은 아니야 라고 디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가정부를 따라 밀실
    로 가는 동안 그 그림들을 경이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 남자
    는 영국과 초기 미국 회화들로 이루어진 엄청난 수집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의 어느 것도 디나가 수집했었을 만한 것은 없지만 
    바라보기에는 기쁨을 주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작품 하나하나를 
    연구할 수 있도록 머물고 싶었지만, 가정부는 그림들을 재빨리 지
    나쳐버리고 나서 밀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그들을 오랫동안 주
    시한 다음 중얼거리듯 [앉으세요]라고  말하고는 자기 일을 하러 
    나가버렸다.
      [세상에나, 킴! 그 남자가 벽에 무얼 걸어놨는지 봤어?]
      킴벌리는 모자를 고쳐쓰며 씩 웃었다. [아름다운 물건이야. 안 
    그래? 내 홍차잔 말고. 그는 대단히 훌륭한 작품들을 가졌단 말이
    야. 그것들 전부가 그의 것이 아니지만.] 디나가 의아하다는 듯이 
    눈꼬리를 치켜떴다.
      [그 사람은 화랑을 두 개 가지고 있어. 하나는 샌프란시스코에, 
    또 하나는 로스앤젤레스에 내 생각엔 그가 이 그림들 중의 일부는 
    자기 화랑에서 빌려온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워. 하지만 어쨌든 아
    름다운 작품이야.]
      디나가 재빨리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계속 둘
    러보았다. 그들은 바다쪽이 내다보이는 대형 전망창이 있는 방에 
    앉아 있었다. 가구라고는 단순한 소나무 책상 하나, 소파 두 개, 
    그리고 의자하나가 전부였다. 집의 외장이나 검소한 자동차와 마
    찬가지로 그것은 인상적이라기 보다는 기능적이었다. 그렇지만 예
    술 수집품이 그것을 충분히 보충하고도 남았다. 여기에도 그는 두 
    장의 매우 훌륭하고 완벽하게  표구된 흑백 스케치들을 걸어놓았
    다. 그녀는 서명들을 보기 위해 더 가까이 몸을 기울이다가 자기 
    뒤에 걸린 그림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그것은 완전히 아무
    것도 없는 새하얀 벽에 걸린 유일한 장식품이었다.
      그것을 보려고 몸을 돌렸을 때 그녀는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
    다. 바로 그 그림이었다. 와이드의  작품. 얼굴을 무릎에 기대고 
    있어 부분적으로 얼굴이 가리워져 있는 해변 모래언덕 위의 여인. 
    그리고 디나조차 그 여인이 놀랍게도 자기와 닮았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자기 머리카락의 길이와 색깔, 자신의 어깨, 미소
    지을 때의 표정까지도. 그녀는 황량하고 늪지같아 보이는 해변에 
    둘러싸여 지나가던 한마리의 외로운 갈매기만을 벗삼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 그림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 직전에 그녀는 등 
    뒤에서 그의 음성을 들었다. 그녀의 두 눈이 놀라움 속에서 그의 
    눈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벤 톰슨입니다. 휴튼 양?] 그의 시선에는 
    말하지 않은 의문이 있었지만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저어보이고는 
    킴벌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킴은 미소를 띠고 손을 내밀면서 앞으
    로 걸어나왔다.
      [제가 킴벌리 휴튼이에요. 그리고 이쪽은 제 친구 디나 듀라스
    이구요. 우리는 당신의 수집품에 대해서 아주 뛰어난 이야기를 들
    었기 때문에 친구를 데리고 와야만 했어요. 그녀도 놀랄 만큼 재
    능이 많은 화가거든요. 본인은 그걸 인정하려고 들지 않지만요.]
      [아냐, 난 그렇지 않아.]
      [보세요!] 킴의 두 눈은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잘 생긴 남자를 
    방문하는 동안 내내 춤추듯 했다.  그는 삼십대 후반쯤 되어보였
    고, 비극적이리 만큼 아름다운 눈을 지니고 있었다.
      디나는 그들 둘 모두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젓고 있었다. 
    [정말이야. 난 재능이 없다구.]
      [저의 와이드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디나의 두 눈
    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디나의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저어...... 아주 굉장히 훌륭한 작품이에요. 하지만 당신도 그
    건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자기가 얼굴
    을 붉히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확신이 없
    었다. 전에 그를 만났었다고 고백해야만 할까, 한번도 만난 일이 
    없는 척해야 할까, 그도 그럴까?
      [그 그림이 마음에 드십니까?] 그의 두 눈이 그녀의 시선을 옭
    아매었다. 디나는 그의 뜨거운 시선에 점점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단히요.]
      그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알아차렸
    다. 그녀는 해변에서의 일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그녀는 미소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
    했다. 킴보다 먼저 그녀가 <새 고객>을 만났었다는 것. 아직도 알
    아야 할 것이 더 많은 낯선 사람과의 사이에 이러한 비밀을 간직
    한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숙녀 여러분, 커피 드시겠어요?] 그들 둘다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그가 가정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홀로 걸어 들어갔다. 
    [보통으로 하나, 두 잔은 블랙으로.]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그들에게 씨익 웃었다. [전부 보통이
    거나 전부 블랙일 거예요. 매컴 부인이 용납하지 않으니까요. 하
    지만 내가 외출했을 때 집안 청소를 맡길 정도로는 신뢰할 수 있
    는 사람이랍니다. 그녀 생각에는 이 물건들 전부가 쓰레기일 뿐이
    죠.] 그는 공중에 대고 방 여기저기를 가리켜 보였는데, 그 제스
    처에는 그들이 들어오는 길에 보았던 작품들은 물론 와이드의 그
    림과 스케치 두 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킴과 디나는 둘다 소리내
    어 크게 웃었다.
      도착한 커피는 세 잔 모두 블랙이었다. [완벽하군요, 고맙습니
    다.]
      가정부가 방을 나갈 때 그가 소년처럼 웃어보였다.
      [미스 휴튼.]
      [킴벌리라고 불러주세요.]
      [좋아요, 킴벌리. 우리가 지난 해에 낸 광고들을 보셨죠?] 그녀
    가 수긍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충분한 스타일은 아니던데요. 적당한 표정도 아니구요.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 시장을 겨냥한 것도 아닌 것 같구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디나쪽으로 돌
    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뒤쪽에  있는 와이드의 그림 속에서 
    여전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그녀를 지켜보는 동
    안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고, 그가 킴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
    지를 정확히 전달했다. 그는 신속하고  눈치가 빠른 데다가 몹시 
    사무적이었으며, 그들의 만남은 한 시간도 채 못되어 끝났다. 그
    녀는 이주일 이내에 그에게  신선한 아이디어들을 제공해 주기로 
    약속했다.
      [디나가 그 문제로 상담을 해 줄까요?] 그가 장난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디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
    며 어이가 없다는 듯 한 손을 들어올렸다.
      [말도 안돼! 아니예요. 난 킴이 어떻게 그렇게 굉장한 아이디어
    들을 생각해 내는지 전혀 알지 못해요.]
      [피와 땀과 많은 블랙 커피만 있으면.] 킴벌리가 싱긋 웃었다.
      [당신은 무얼 그리십니까?]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전날 
    밤 해변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부드러운 눈길이었다.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도 무척 부드러웠다.
      [아직까지도 인생살이, 젊은 여자들 따위를 그려요. 인상파 화
    가들의 평이한 주제죠.]
      [그리고 무릎에 아기를 올려놓고 있는 어머니들?] 그 눈길은 언
    제나 놀리는 듯했지만 무뚝뚝하지 않고 친절했다.
      [꼭 한 번은.] 그녀는 자기와 필라의 초상을 그렸었다. 그녀의 
    시어머니가 그 그림을 파리의 아파트에 걸어놓았었는데, 12년 동
    안 그 사실을 거의 잊고지냈나 보다.
      [당신 작품들을 좀 보고 싶은데요. 보여주시겠습니까?] 여전히 
    그들의 전날 밤 일을 드러내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녀는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아니예요. 그럴 순 없어요. 몇 년 동안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
    이 없어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걸요.]
      [지금 그건 쓰레기예요. 당신 가정부 말을 빌자면요.] 킴벌리가 
    처음에는 벤 톰슨을 그리고 나서는 디나를 바라보았다. [이 분에
    게 네 작품들 몇 점을 보여드려.]
      [바보같은 소리하지 말아.] 디나는 당혹해 하며 먼 곳에 시선을 
    던졌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그녀의 작품을 본 사람이 없
    었다. 남편과 딸 그리고 때때로 킴뿐이었다.
      [언젠가는요, 하지만 아직은 아니예요.  하지만 어쨌든 감사해
    요.]
      그녀의 미소는 그의 친절뿐만 아니라 그가 지켜준 침묵에 대해
    서도 감사하는 의미였다. 그 역시 해변에서의 그들의 만남에 대해 
    입을 봉한 채로 있고 싶어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대화는 가정부가 걸레질을 하면서 얼간이같이 빤히 쳐다보는 가
    운데, 일상적인 분위기에서 그의 수집품을 간단히 둘러보는 것으
    로 끝났다. 킴벌리는 그 다음 주에 그에게 전화해 주겠다고 약속
    했다.
      그가 디나에게 한 작별인사에는 이상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손을 지나치리 만큼 꽉 잡지도 않았고 그의 눈길에 메시지
    같은 것도 담겨 있지 않았으며, 단지 있다면 그녀가 이미 알아차
    린 그 따뜻함과 문을 닫으면서 그들에게  남긴 그의 미소 정도였
    다.
      [얼마나 멋진 남자니!] 킴이 소형 엠지 자동차의 시동을 걸면서 
    말했다. 엔진이 부르릉거리며 생기를 얻었다. [그와 함께 일하게 
    되면 즐거울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킴이  그들이 묵고 있는 호텔 
    밖에 차를 끼익하고 세울 때까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도대체 왜 그에게 네 작품을 보여주지 않으려 드는 거니?] 디
    나의 신중함은 언제나 킴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녀는 미술학교 학
    생들 가운데서도 주목할 만한 재능을 가진 유일한 존재였고, 또한 
    거의 20년 동안이나 그 재능을 수줍어하며 매장시켜온 유일한 사
    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성공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
    패를 하고 말았다.
      [말했잖아. 준비가 아직 안됐어.]
      [빌어먹을! 만일 네가 그 남자에게 직접 전화하지 않겠다면, 내
    가 네 전화번호를 그 사람에게 가르쳐주고 말 테야. 지금이야말로 
    네 스튜디오 안에서 벽을 마주보고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그 산더
    미같은 걸작품들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할 때란 말이야. 그건 일
    종의 범죄야. 디나. 그건 정말 옳지 못한 일이라구. 제기랄! 내가 
    팔아먹기 위해 휘갈긴 그 쓰레기들을 생각하면.......]
      [그건 쓰레기가 아니야.] 디나가 그녀를 친절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 둘다 그것들이 대단히 좋은 작품은 아니었다는 걸 알
    고 있었다. 킴은 예술적인 재능보다 광고 켐페인, 헤드라인, 레이
    아웃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데 훨씬 재능이 있었다.
      [그건 분명히 쓰레기였어. 그리고 난 이제 더이상 그런 것엔 관
    심없어. 지금 하는 일이 좋아. 하지만 너는 어떻지?]
      [나도 내가 하는 일이 좋아.]
      [그래, 그게 뭔데?] 킴벌리는 지금 그녀를 설득시키기 시작했고 
    그녀의 음성에 그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들은 디나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언제나 그런 식으로 시작했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냐구?]
      [너도 내가 무얼하고 있는지 알잖아.  난 그림을 그리고 있어. 
    남편과 딸을 돌보고 살림을 하지. 난 계속해서 바쁘고 말이야.]
      [그래,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돌보고 있겠지. 그러면 너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지? 네 작품이 화랑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어딘가 
    네 남편 사무실이 아닌 다른 곳에 걸려 있는 것을 보는 것이 네겐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그림이 어디에 걸려 있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야.]
      디나는 차마 킴에게 그 그림들이 더이상 남편의 사무실에 걸려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여섯달 전에 새 
    실내장식가를 고용했는데, 그가 그녀의 작품에 대해 <활력이 없고 
    침울하다>고 선언한 다음 모두 벽에서 떼어내버렸다. 그때 남편은 
    필라의 소형 초상화를 포함하여 유화들을 집으로 가져와버렸는데, 
    그래도 그 초상화만은 홀에 걸려 있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린다는 거야. 그 그림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구.]
      [그건 마치 줄 하나 없는 바이올린을 켜는 것과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구.]
      [내겐 말이 돼.]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단호해서, 차에서 
    내리던 킴은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 내가 보기엔 네가 약간 돈 것 같아 보인다구. 하지만 어
    쨌든 난 너를 좋아하니까.] 그들이 다시 호텔 안으로 걸어 들어가
    는 동안 디나가 미소지었다.
      그들 여정의 나머지 부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버렸다. 그들은 
    실컷 주점부리를 했고, 파인 인에 한  번 더 가서 저녁식사를 했
    다. 일요일 오후에 디나는 해변으로 다시 한번 산책을 나갔다. 그
    녀는 이제 그가 어디 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숲 뒤에 가려져 
    있는 그 집을 힐끗 보았을 때 그것을 알았다. 그녀는 자기가 와이
    드의 집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걸었다. 그녀는 그를 다시 보지못했으며, 혹시 그가 해변에 나와 
    있을까 싶어 어슬렁거리는 자신에 대해서조차 스스로에게 화를 냈
    다. 그가 왜 거기 있겠는가, 설사 거기있다고 해도 그에게 무어라
    고 말할 것인가, 그들이 이미 만났었다는 것을 킴벌리가 알지 못
    하게 한 데 대해 감사한다고?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그게 왜 중
    요하단 말인가? 그녀는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5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녀는 이미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캔버스
    로부터 뒤로 물러앉아 아침에 그린 작품을 평가해 보고 있던 중이
    었다. 그것은 열린 창문을 통해 힐끗 보이는 짙푸른 하늘을 배경
    으로 하여,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 꽃잎을 뚝뚝 떨구고 있는 튤립
    이 가득한 꽃병을 그린 그림이었다.
      [디나?] 그의 목소리를 듣자 그녀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
    다.
      [벤,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어요?] 그녀의 뺨에 발그레하게 
    홍조가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런 기분을 느낀 데 
    대해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킴이?]
      [물론이죠. 킴은 내가 당신 작품을 전시하지 않으면 우리의 계
    산을 사보타주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럴리가요!] 그녀 볼의 홍조가 더 깊어졌다.
      [그래요. 그녀는 단지 당신이 대단히 우수하다고만 말하더군요. 
    이야기를 하자면, 난 당신 작품 가운데 하나와 내 와이드 그림을 
    바꾸겠소.]
      [당신 미쳤군요! 그리고 킴도 마찬가지이구요.]
      [내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어떨까요. 정오쯤에 방
    문해도 되겠습니까?]
      [오늘. 지금 말이에요?] 그녀는 시계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고
    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11시가 넘어 있었다.
      [안돼요!]
      [나도 압니다. 당신은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것을. 화가들은 언
    제나 준비가 되어 있을 때가 없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해변
    에서 처럼 부드러웠다. 그녀는 전화기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정말이에요. 그럴 수 없어요.] 그것은 거의 속삭임이었다.
      [그럼, 내일.]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벤, 정말로...... 그런 게 아니예요, 나는.......] 그녀의 목
    소리가 잦아들자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부탁해요. 난 정말 당신 작품을 보고 싶소.]
      [왜죠?] 디나는 그렇게 물은 것이 어리석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당신 작품을 보고 싶고. 간
    단합니다. 말이 안되는 것 같소?]
      [조금은요.] 그녀는 더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점심에 바쁜가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그녀가 다시 슬프게 한숨지었다.
      [그렇게 혼자 버려진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 당신 작품에 대
    고 혹평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정직하게. 날 믿으십시오.]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에게서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건 그가 
    말하는 방식과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시선 속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좋아요, 점심에.]
      단두대로 가야 하는 사람이라도 그렇게 단호하게 말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벤 톰슨은 전화를 끊으며 혼자 가만히 웃었
    다.
      
      그는 정확히 정오에 거기에 서 있었다. 프렌치 롤빵, 커다란 브
    리이치즈 조각, 그리고 복숭아 여섯 개. 뿐만 아니라 백포도주 한 
    병이 담긴 가방 하나를 들고.
      [이거면 충분할까요?] 그가 자신의 선물들을 그녀의 책상 위에 
    늘어놓으면서 물었다.
      [꽤 근사하군요. 하지만 정말로 오시지 말았어야 했어요.] 테이
    블너머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는 풀이 죽은 것 같아 보였다. 그녀
    는 청바지와 물감이 튀어박힌 셔츠를 입고 머리를 헐렁한 고리로 
    묶어올리고 있었다.
      [난 정말로 평가 현장에 놓여지는 걸 싫어해요.]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진정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잠시 그는 과일을 늘어놓던 손을 멈추었다.
      [당신은 그런 자리에 놓여지지 않았습니다, 디나. 나는 진심으
    로 당신의 작품을 보고 싶을 뿐이오. 하지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
    는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죠. 킴 이야기는 당신이 재능이 있
    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재능이 있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당신은 
    해변에서 그림이 당신 인생이라고 말했잖소. 아무도 그걸 가지고 
    놀릴 수 있는 사람은 없죠. 나는 더욱 그럴 생각이 없구요.]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좀더 부드러운 어조로 계속했다.
      [디나, 카멜의 오두막집에 있던 내 애장품들 가운데 몇 점을 보
    았죠? 그것이 내가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 것들이오. 이것은 당신
    이 좋아하는 것이고. 만일 당신이  나의 와이드 그림을 좋아한다
    면, 그 사실이 나를 기쁘게 만들어주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
    도 그것때문에 그 그림의 아름다움이 내게서 줄어드는 것은 아니
    예요. 내가 보는 어떤 것도 당신이 하는 일이나 그것의 중요함을 
    바꾸어놓지는 않을 거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손댈 수 있는 사람
    은 결코 없을 거란 말입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스무 장의 그림이 숨겨지
    고 무시된 채 기대어 세워져 있는 벽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하
    나, 하나. 그녀는 유화들을 돌려 세워놓으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
    은 채 그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마침내 [그만!] 이
    라고 말할 때까지 그를 보지 않았다.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
    었을 때, 그녀는 그가 두 눈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그
    녀의 책상에 기대어 있는 것을 보았다.
      [와이드의 그림을 보았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었죠, 디나?] 그
    는 그녀의 얼굴을 탐색하듯 바라보며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많은 것을 느꼈어요.]
      [어떤 것을?]
      [우선은 놀라움, 내가 당신 집에  있다는 걸 깨닫구요. 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 그림을 보고난 일종의 경외감, 기쁨같은 것. 나는 
    그림 속의 여자가 마치 내가 알고  있는 누구인 것처럼 그녀에게 
    끌리는 것을 느꼈어요. 나는 와이드가 내게 말하고 싶어했으리라
    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느꼈어요. 잠시동안 나는 그의 언어의 주
    문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내가 당신 그림들에서 느낀 그대로군요.  당신이 이 그림들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집어넣었는지, 혹은 이 그림들이 실제로 얼마
    나 아름다운지 알기나 합니까? 당신이 그림들을 돌려 세워놓는 동
    안 시시각각으로 마음이 끌리고 감동을 느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소? 그 그림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요, 디나. 그것들이 얼마
    나 훌륭한지 모른단 말입니까?]
      그는 그녀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심하게 쿵쾅
    거렸다. [난 그 그림들을 좋아해요. 하지만 그건 그것이 내 작품
    이기 때문이에요.]
      그녀의 얼굴은 이제 환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최상의 
    선물을 주었고, 그녀는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
    른 사람이 그녀의 그림을 보고 좋아해준 것은 너무나 오랜만의 일
    이었다.
      [그것들은 당신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로군요.] 그
    는 유화들 중의 한 작품에 좀더  가까이 걸어가서 조용히 응시했
    다. 그것은 욕조에 기대어 있는 어린 소녀, 필라의 그림이었다.
      [그 소녀는 내 딸이에요.] 그녀도 이제 여유있는 태도로 그것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좀더 그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작품이군요. 좀더 보여주십시오.]
      그녀는 자기의 그림 전부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기쁨으
    로 거의 탄성을 지를 지경이었다. 그가 자신의 그림들을 좋아한다
    니. 그는 그녀의 작품을 이해했다. 그녀는 그의 목에 자기의 팔을 
    두르고 환호성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포도주 병
    을 여는 중이었다.
      [당신도 이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고 있군요, 그렇죠?]
      [뭘 말이죠?] 그녀는 갑자기 조심스러워졌지만 그리 긴장할 필
    요는 없었다.
      [당신이 화랑에다 서명을 해줄 때까지 내가 당신을 괴롭힐 것이
    라는 것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녀는 그에게 활짝 웃어보였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왜 안된다는 거죠?]
      [그건 나를 위한 것이 아니예요.] 그리고 남편이 노발대발할 것
    이다. 그는 그런 일을 상업적이고 저속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었
    다. 비록 톰슨 캘러리가 저속과는 거리가  먼 평판을 얻고 있고, 
    벤의 가족들도 여러 해 동안 예술의 세계에서 명망을 누려왔다고 
    해도 말이다.
      디나는 카멜에서 돌아왔을 때 그에 대해 조사해 보았었다. 그의 
    조부는 런던의 최고급 화랑 가운데 하나를 소유했었고, 부친은 뉴
    욕에 멋진 화랑을 갖고 있었다. 벤 톰슨은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도 불구하고 예술세계에서 백지 위임을 받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벤. 그럴 수는 없어요.]
      [이런 젠장! 그럴 수 없다구요? 디나, 고집부리지 말아요. 화랑
    에 나와서 좀 둘러보십시오. 거기에  있는 그림들을 보면 기분이 
    좀 바뀔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가  갑자기 너무나 젊어 보여 
    디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녀도 거기  어떤 그림들이 걸려 있는지 
    알고 있었다. 피사로, 샤갈, 캐서트, 아주 작은 르느와르 한 점, 
    찬란한 모네 그림한 점, 코로의 것 몇 점. 또한 신중하게 감추어
    진 폴록스의 작품 두세점, 달리의 것 한 점, 그리고 그가 거의 전
    시해 놓지 않은 드 쿠닝의 것 한 점도 있었다. 그는 최고의 것만
    을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두세명의 잘 선택된 미지의 젊은 화가
    들의 것도 있었는데, 그는 그녀가 그런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이상 어떤 것을 그녀가 원할 수 있었겠
    는가, 그러나 남편에게 뭐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예요.] 남편은 쉽게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필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필라는 그런 일을 비위 상해 하
    고 과시욕에 사로잡힌 행위하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당신은 거기에 적격이오.] 그가 프렌치빵 한 조각과 브리이치
    즈를 내밀었다. 스물두 장의 그림들이 방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
    다. 그리고 그는 그 그림들 전부를 좋아했었다. 그에게서 빵을 받
    아드는 그녀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다락방에 서른 점이 더 있어요. 그리고  킴의 집에 다섯 점이 
    있구요.]
      [당신, 바보로군.]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가 복숭아를 건네주었다.
      [아니, 당신은 바보요. 하지만 당신 의사에 반해서 고집부리지
    는 않겠소. 내일 밤에 있을 우리의  오프닝 행사에 오지 않겠소? 
    싫지 않을 거요, 그렇죠?  그것조차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겠죠?] 
    그는 이제 그녀를 부추기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이 좋은 것인지 
    어떤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내가 두려워한다고 누가 그래요.] 물 많은 복숭아를 베어무는 
    그녀는 무척 젊어 보였다. 그녀는 미소지었다.
      [누가 그랬을까요? 왜 전시하고 싶어하지 않는 거죠?]
      [말도 안 되기 때문이에요.]
      [당신 말이 말도 안되는군요.] 그러나 그때쯤에는 그들 둘다 소
    리내어 웃으며 석 잔째의 포도주를 들고 있었다.
      [어쨌든 당신이 좋소.] 그가 선언했다. [나는 당신같은 미치광
    이들과 거래하는데 이력이 났어요.]
      [난 미치광이가 아니예요. 그냥 고집이 좀 셀 뿐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내 와이드 그림과 꼭 닮았소. 당신도 그걸 느낄 
    수 있었소?]
      그의 시선이 또다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잠깐동안 망설이고 나서 수긍했다. [그랬어요.]
      [나만이 당신의 눈을 볼 수 있어요.] 그가 오랫동안 그녀의 두 
    눈을 사로잡고 있다가 눈길을 비꼈다. 그 눈은 그림 속의 여인이 
    가졌음직하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 눈이었다. [아름다운 눈을 가졌
    군요.]
      [당신도요.] 그녀의 음성은 방 안에서 부는 한줄기 부드러운 미
    풍같았고, 그들은 서로 카멜에서의 산책을 떠올리고 있었다.
      잠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그림들을 바라보며 
    그냥 조용하게 앉아 있었다. [당신은 그 아이가 딸이라고 말했는
    데 사실이오?] 그는 좀더 알고 싶어서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요. 그 아인 열여섯 살이 됐어요. 이름은 필라구요. 그리
    고 굉장히, 굉장히 예쁘죠. 그림에서  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요. 
    난 그 아이그림을 몇 장 그렸어요.] 디나는 마르크가 고용한 실내
    장식가가 거절했기 때문에 홀 안에 걸어야 했던 그림 한 점을 곰
    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가운데 몇 점은 정말 잘됐어요.] 그녀는 이제 그와 무관하
    게 자신의 감상에 빠져들었다. 자기자신의 작품을 주관적인 애정
    을 가지고 좋아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 아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 있나요?]
      [아니예요.] 디나는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프랑스 남부에 
    있어요, 그녀의...... 남편은 프랑스  인이에요.] 그녀는 그에게 
    남편도 멀리, 그리스에 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배신 행
    위인 것 같았다. 왜 그에게 그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가 이 
    남자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는 이미 그녀에게 그녀
    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더이상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겠
    는가?
      디나는 그에게 결혼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옳
    지않은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일들이 무엇때문에 중요하단 
    말인가? 그는 그녀의 작품때문에 여기에 와 있다. 깊은, 바다처럼 
    푸른 저 두 눈이 아무리 샹냥하다고 해도.
      [당신도 알겠죠.] 그가 유감스러워하며 시계를 보았다. [이 말
    을 하기는 싫지만 난 사무실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3시에 사무실
    에서 약속이 있거든요.]
      [3시라구요.] 그녀의 두 눈이 재빨리 시계쪽으로 달려갔다. 이
    미 2시 45분이었다.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갔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상당히 많은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두 눈에 아쉬워하는 표정을 담고 일어섰다.
      [내일밤에 와주겠소?] 그녀가 오기를 바란다는 것을 그의 눈길
    이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노력해 볼께요.]
      [제발, 디나. 꼭 와줘요.] 그가 그녀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고 
    감사의 미소를 띄운 채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서 
    스튜디오 밖으로 걸어나가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 내려갔다. [나가
    는 길을 찾을 수 있겠죠. 내일 봅시다.]
      그의 말이 사라지자 그녀는 의자에 주저앉아 방을 둘러보았다. 
    필라를 그린 유화는 네다섯 점 있었지만 마르크의 그림은 한 점도 
    없었다. 완전히 미쳐버릴 것 같은 한순간 동안, 그녀는 그의 얼굴
    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6
      
      
      디나는 화랑 건너편에 짙푸른 재규어 승용차를 주차시켜놓고 천
    천히 길을 건넜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가야 하는지, 그것
    이 현명한 일인지 확신이 없었다. 이것이 지각있는 일일까. 킴이 
    와 있으면 어떻게 하지? 그렇게 되면 그녀가 바보처럼 생각할 텐
    데. 만일....... 그러나 그때 그녀는 그의 아름다운 눈을 생각해 
    내고 무거운 유리문을 밀어 열었다.
      문 가까운 곳에 검은 상의를 입고 선 두 명의 바텐더가 스카치
    와 샴페인을 교대로 따르고 있었다. 아름답고 젊은 한 여인이 손
    님들을 맞고 있었는데, 손님들은 모두 부유한 예술가처럼 보였다. 
    디나는 재빨리 그것이 나이 지긋한 남자의 작품 전시회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득의만만하고 자랑스럽게 서 
    있었다. 그의 그림들은 잘 진열되어  있었고 반 고호같은 냄새가 
    났다. 그녀는 벤을 발견했다. 그는 방의 외진 구석에 서 있었는데 
    가는 세로줄 무늬가 있는 짙은 남색 정장을 입고 있어 무척 핸섬
    해 보였다.
      그의 시선 안에 그녀가 들어왔다. 곧 그가 미소를 지으며 함께 
    서있던 무리로부터 빠져나와 그녀 곁에 와서 섰다.
      [와주었군요, 고맙습니다. 정말 기쁘군요.]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동안 거기 서 있었다. 그녀는 미소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가 억제할 수 없었던 미
    소였다. 그녀는 그를 다시 만나서 행복했다.
      [샴페인?]
      [고마워요.] 그녀는 바텐더가 내민 손으로부터 잔을 받았다. 벤
    이 가만히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내 사무실에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에칭 작품들 말예요.]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끔찍한 일이람, 그 이야기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걸 알고 계십니까? 하지만 아니예요. 보여드리려는 건 어젯
    밤에 구입한 르느와르의 소품이오.]
      [세상에, 어디서 그걸 구하셨어요?] 그녀는 그를 따라 베이지색 
    카페트가 깔려 있는 긴 홀을 내려가고 있었다.
      [개인소장가로부터 사들였어요. 멋진 노인이더군요. 그는 한번
    도 그 그림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하더군요. 하느님의 축
    복인지 믿을 수 없을 만한 가격에  구입했죠.] 그가 사무실 문을 
    열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문 저편 벽에 기대어진 채로, 서명
    을 확인할 필요도 없을 만큼 확실한 스타일로 그려진 사랑스럽고 
    섬세한 누드화가 있었다. [아름답죠?]
      그는 그 그림을 마치 자랑스러워 견딜 수 없는, 새로 태어난 아
    기인 것처럼 바라보았다. 디나는 그의 두 눈에 나타난 광채를 보
    고 미소지었다.
      [아름다워요.]
      [고맙소.] 그리고 그는 마치 그녀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더 있
    는 것처럼 디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대신 
    그는 미소를 띠고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그 미소는 마치 그녀에게
    도 똑같이 해보라고 초대하는 듯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와이드의 
    또 다른 그림이 있었는데, 이번 것은 잘 알려진 작품이었다. [저 
    그림도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지난 번 것만큼은 아니예요.]
      [나도 그래요.] 그들의 생각이 곧바로 카멜로 되돌아갔다. 노크
    소리에 침묵이 깨졌다. 입구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었던 그 젊은 
    여인이 홀에서 벤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여어, 샐리. 무슨 일
    이지? 오, 이쪽은 디나 듀라스 양이오. 우리의 신진 화가들 가운
    데 한 사람이 될 분이시지.] 샐리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미
    소를 지으며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정말 멋진 소식이군요!]
      [저어, 잠깐만요! 그 디나가 당혹해  하며 벤을 보았다. [그런 
    말 한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요.]
      [없지요. 하지만 당신이 그래 주기를 기대하고 있소. 샐리, 우
    리가 얼마나 멋진지, 그림들을 뒤집어 걸거나 누드화에 콧수염을 
    그려놓은 일같은 건 하지 않고 우리 화가들을 속이는 일도 없다는 
    걸 그녀에게 말해줘요.]
      디나는 이제 깔깔거리며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
    기는 내게 적합한 화랑이 아니네요. 난 내 누드화에 콧수염이 그
    려진 걸 항상 보고 싶었거든요. 그걸 내가 직접 그릴 용기는 없었
    어요.]
      [우리가 당신을 위해서 그 일을 하게 해줘요.] 그들을 다시 홀 
    안으로 안내해 들어가는 동안 벤은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으며, 그
    러다 샐리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전시회에는 벌써 세 사람의 원
    매자가 있었으며, 그녀는 그림들 가운데 하나의 가격을 그와 의논
    하려고 돌아왔었던 것이다. 화가는 더 받고 싶어했다.
      [내가 그에게 적절한 가격으로 조정해주겠다고 말하지. 그는 그 
    그림값으로 그 가격에 동의했었거든. 하느님, 구스타프를 돌보소
    서....... 그 사람때문에 흰머리가 다 생겼다오.]
      [내 흰머리는 말도 꺼내지 마세요.] 샐리가 자기의 순수한 금발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벤이 디나를 손님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화가들과 수집가들을 
    만나면서 화랑 안으로 돌아다니는 동안 놀라우리 만큼 편안한 기
    분을 느꼈다. 그리고 킴이 보이지 않아서 놀랐다. 벤이 그녀에게
    로 왔을 때 그녀가 그 이야기를 했다.
      [킴은 여기 오지 않았나요,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아니오. 분명히, 그녀는 요구르트를 위한 새 광고를 만드느라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을 거요. 솔직히 나는 그녀가 우리를 방해하
    지 않는 편이 더 좋소. 그녀는 예술을 시작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요구르트를 얻어내는 편이 더 나을 거요. 전해주지 않겠소?] 그가 
    그녀에게 샴페인을 또 한 잔 건네줄  때 그녀가 깔깔거리고 웃었
    다. [당신도 알겠지만]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난 어제 하루를 
    엄청나게 즐겼어요. 당신작품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훌륭했어요. 
    그리고 난 당신이 <예스>라고 말할 때까지 당신을 조르는 일을 그
    만두지 않을 작정입니다.] 디나는 샴페인 잔 너머로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녀가 항의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그들은 벤을 필요로 
    하는 몇 명의 수집가들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그는 거의 9시가 다 
    될 무렵까지 그들때문에 겨를이 없었다.
      디나는 가능성이 있는 구매자들을 지켜보고 구스다프의 작품에 
    감탄하면서 천천히 화랑 안을 돌아다녔다. 그녀가 어떤 그림 앞에
    서 멈추어섰을 때 바로 등 뒤에서 친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
    가 놀라서 돌어섰다.
      [기법을 연구하시는 중인가요, 디나?]
      [짐!] 그녀는 소리내어 웃고 있는 에이레 사람의 두 눈을 들여
    다보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묻지 말아요. 내, 짐작에는 문화를  수집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요.] 그가 문가에 있는 그룹쪽에다 대고 모호하게 손을 흔들었다.
      [저 사람들이 나를 여기로 끌고 왔어요.  독주를 몇 잔 마시고 
    난 상태이지만요.]
      [존경받을 만한 예술 애호가로군요.] 그녀는 평상시처럼 온화한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그녀 내부의 어딘가에는 결코 편안하지 못
    한 동요가 있었다. 그녀는 설마  여기서 짐 셜리반을 만나리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벤을 만나러 왔을 뿐이다. 아니면 정말 
    그랬던가, 그녀는 단지 화랑을 둘러보기 위해서만 여기 와 있었던
    가? 그녀는 사실 확신할 수가 없었고, 그리고 짐도 아마 알 것이
    었다. 아마도 그는 그녀의 얼굴에, 그녀의 두 눈에, 영혼에 나타
    나 있는 무언가 다른 표정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거의 방어적으
    로 그녀는 친밀한 주제를 찾았다.
      [제 남편에게서 소식이 있었어요?] 그가 한동안 그녀를 조심스
    레 바라보았다.
      [당신은 들었나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떠난  그 다음날, 시간이 없어서 
    전화 걸 수가 없었다는 전보를 한 통 받았을 뿐이에요. 그리고 나
    서 나는 주말을 보내러 카멜로 갔어요. 킴벌리와 함께요.] 그녀는 
    자신을 변호라도 하려는 듯 재빠르게 불필요한 말들을 덧붙였다. 
    [아마 그때 내게 전화하려고  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쯤 그 
    사람은 아테네에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셜리반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고개를  돌려 자신의 친구들쪽을 
    바라보았다. 디나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곧 번쩍이는 은색 옷
    을 일고 밤색 머리카락을 가진 굉장한 미인에게 시선을 떨구었다. 
    짐의 모델,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틀림없이 아테네에 있을 거예요.] 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음, 이제 난 가봐야겠어요.] 그녀의 뺨에 키스하면서 그는 그 자
    리를 피하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그녀에게서 얼른 몸을 떼어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와 함께 저녁식사 하지 않으시겠어요.]
      즉각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 없어요....... 난 집
    에 돌아가야 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고마워요.] 망할 것. 그녀
    는 왜 그다지 불편한 감정을  느꼈을까? 숨길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러나 다행히 그는 그녀에게서 색다른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럴 이유가 있겠는가, 무엇이 
    색달랐기에?
      [정말요?]
      [그래요.]
      [좋아요, 전화드릴께요.] 그는 재빨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는 
    친구들에게로 되돌아갔다. 잠시 뒤에 그들은 모두 돌아갔다. 그녀
    는 공허하게 그들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가 마르크의 소식
    을 들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신 그녀에게 그의 소식을 들었는지 물어봄으로써 그녀의 질문
    을 막아버렸다. 그녀는 그 이유가 의아스러웠다.
      [당신, 아주 끔찍할 정도로 진지해 보이는군요. 디나, 우리와의 
    계약에 서명하는 일을 고려하는  중인가요?] 속삭이는 듯한 벤의 
    음성에는 장난기가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로 돌아
    섰다. 그녀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아녜요.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벌써 말입니까?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게다가 당신은 식사도 
    하지 않았잖소.] 순간 그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당
    신을 어떤 저녁식사에 관심을 갖게 만들 수 있을까요, 당신 남편
    이 반대할까요?]
      [그러기는 힘들 거예요. 그 사람은 여름 동안 그리스에 가 있으
    니까요.]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가 그대로 엉겨 있었다.
      [저녁식사는 근사할 것 같군요.] 안될 이유가 뭐 있겠는가? 그
    녀는 미소를 지으며 애써 짐 셜리반을 생각 밖으로 몰아냈다.
      벤이 샐리에게 나간다는 신호를 한 다음 그들은 마지막까지 남
    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유리문을 통과해 시원한 
    여름 밤안개 속으로 나섰다.
      [가끔 이걸 보면 런던 생각이 나요. 어렸을 때 런던으로 할아버
    지를 만나러 가곤 했었죠. 할아버지는 영국인이시거든요.]
      [차를 가져왔소?] 하고 벤이 물었다. 그녀는 짙푸른 재규어 자
    동차를 고개로 가리켰다.
      [저런! 감동스럽군요. 난 여기 있는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는 
    독일제 소형차를 몰고 있어요. 그 차라면 실질적으로 가스도 필요 
    없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데려다주죠. 그렇게 단순한 
    차에 타고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면 창피할까요? 싫다
    면 당신 차를 타죠.] 잠깐동안 그녀는  마르크의 차를 타고 나온 
    것에 당황했지만, 이미 저녁에 외출했을 때 그 차를 몰고나온 터
    였다. 그건 단지 습관문제였다.
      [당신 차로 가는 편이 훨씬 좋겠어요.]
      [에트와르(역자주 : '별'이라는 뜻) 식당까지 말이오?]
      [난 당신 차보다 더한 곳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조용
    하고 단순한 곳이라면요.] 그가  웃어보임으로써 승낙을 알렸고, 
    그러자 그녀도 소리내어 웃었다.  [난 당신이 예술을 제외하고는 
    겉치레를 싫어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어요.]
      [바로 맞혔어요. 게다가 우리집 가정부는 어느 날 내가 롤스로
    이스를 타고 나타난다면 당장 그만두고 말 거요. 그녀는 이미 벽
    에 걸린 그 모든 <쓰레기>들이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한때는 
    아름다운 프랑스 풍의 누드화를 걸어놓았는데, 내가 카멜을 떠나
    자마자 그 여잔 그 그림을 떼어내버렸죠. 돌아왔을 때 그것이 담
    요에 싸여 있는 걸 발견했어요. 난 그걸 도로 시내로 옮겨놓아야 
    했고요.]
      그가 안내한 곳은 만 근처의 옆골목에 틀어박힌 이탈리아 풍의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그들은 저녁시간의  대부분을 예술에 대해 
    토론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유럽과 미국을 떠돌면서 가는 곳
    마다 박물관을 섭렵했던 시절을 그에게 들려주었고, 그는 그녀에
    게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미술을 배운 것하며 런던, 파리, 뉴
    욕에서 대대적인 경매 광경들을 본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난 한번도 내가 이런 사업에 뛰어들게 되리라고는 생각
    지 못했습니다.]
      [왜요?]
      [난 그보다 좀더 흥미로운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로데오경기에 
    참가하거나 스파이가 되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최소한 아홉 살 
    때까지는 스파이가 되려는 꿈을 꾸었지요.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그것이 존경받을 만한 직업이 못된다고 우기셨죠. 가끔씩 나는 우
    리 사업도 그것과 마찬가지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어요. 실제로 
    대학에 다닐 때는 예술품 중의 모조품들을 추적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한동안 연구도 해보았지만 위조품들에게 언제나 당하기만 
    했어요. 이제는 좀더 잘하리라 기대하지만요.]
      디나가 미소를 지었다. 화랑과 카멜에 있는 집에서 보여준 표정
    으로 부터 그녀는 그가 확실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느렸다.
      [말해줄 수 있겠어요?]
      그가 불쑥 말했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됐죠?] 그녀는 갑작스런 
    개인적인 질문에 놀랐다. 아직까지 그런 건 한번도 물은 적이 없
    었기 때문이었다.
      [18년 되었어요. 그때 난 열아홉 살이었어요.]
      [그 때문에 당신은.......] 그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천주교적 
    의식을 끝마치자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당신은 어때요, 결혼했던 적이 있었나요?]
      [한 번. 잠깐동안이었지만.]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비껴났다. 
    [유감스럽게도 난 거기에서도 모조품을 찾아내는데 그다지 뛰어나
    지 못했소. 그 여자가 나를 멋진 여행에 데려가주어서 난 한때 멋
    진 시간을 보냈죠.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죠.] 그가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그녀의 시선을 맞받았다.
      [아이는 없었나요?]
      [하나도. 그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아쉬워하는 일이오. 아들을 
    가졌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도 그랬을 거예요.]
      그녀의 음성에는 그로 하여금 그녀를 주시하게 만드는 동경같은 
    것이 암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사랑스런 딸이 있잖아요?]
      [아들도 두 명 있었어요. 그 아이들은 둘다 태어나자마자 죽어
    버렸지만요.] 그것은 비교적 낯선 사람과 저녁 식탁에서 주고받기
    에는 무거운 내용이었지만, 그는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고만 있었
    다. 그는 그녀의 눈 속에서 무언가 알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유감이군요.]
      [나도 그랬어요. 그리고 어리석게도 필라가 태어났을 때는 일종
    의 충격을 받았죠. 프랑스 가정에서는 딸을 환영하지는 않으니까
    요.]
      [당신은 환영받기를 원했나요?] 그는 즐거워 보였다.
      [최소한은요.] 그녀도 드디어 웃었다.  [그리고 브래스 벤드와 
    퍼레이드도요.]
      [아무도 당신을 비난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 아이가 그럼 세번
    째 아이였나요?] 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은 사이가 아주 
    좋은가요.] 그는 당연히 그러리라고 상상했다가 그렇지 않다는 이
    야기를 듣고 놀랐다.
      [지금은 그렇지가 못해요. 하지만 다시 괜찮아질 거예요. 한동
    안 그아이는 자신이 미국인인지 아니면 프랑스 인인지 갈피를 잡
    지 못해 몹시 시달렸어요. 그런 종류의 문제는 힘든 것일 수 있어
    요.]
      [열다섯 살 짜리들은 모두 문제덩어리죠.] 그는 똑같은 나이 때
    의 자기 누이동생에 대해 공포감을  가진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당신과 닮았나요?] 그로서는 디나의 그림들 속에서 먼 
    발치로 힐끗 보아 가지고는 알 수가 없었다.
      [전혀 닮지 않았어요. 그 애는 아버지의 이미지 그대로예요. 굉
    장히 예쁜 아이죠.]
      [그 아이의 어머니도 그래요.] 잠시 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
    다가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고마워요.]
      화제가 다시 예술로 돌아갔다. 그는 가끔씩 말하며 그녀의 이야
    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그녀는 그가 듣고 있기나 한 것인가 의아
    해졌다. 그는 시종일관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고, 눈으로
    는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드디어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한 밤중이었다.
      [아주 근사한 저녁이었어요.]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 곁으로 다
    가갔을 때, 그녀가 행복한 듯이 그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나도 그렇소.] 그는 더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차
    를 출발시키자 그는 손을 흔들어보인 다음 멀어져갔다. 그녀가 후
    면경으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무언가 곰
    곰히 생각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자기 차쪽으로 걸어가고 있
    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녀는 이미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 있었
    다. 그러나 전화선의 다급한 발신음이 그것이 장거리 전화임을 말
    해주고 있었다.
      [디나?] 마르크였다.
      [어머나, 여보. 어디 있어요?]
      [로마에. 필요하면 해슬러호텔로 전화해,  잘 지냈어?] 그러나 
    접촉이 좋지 않은지 알아듣기가 몹시 힘들었다.
      [괜찮아요. 왜 로마에 가 있어요?]
      [뭐라구? 잘 안 들려.......]
      [왜 로마에 가 있느냐고 물었어요.]
      [업무가 있어서. <살코> 문제로. 하지만 이번 주말에는 필라를 
    만나게 될 거야.]
      [안부 전해주세요.] 그녀는 어둠 속에 일어나 앉아 목소리가 잘 
    들리도록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잘 들리지가 않아.]
      [안부 전해달라고 했어요.]
      [알았어, 좋아. 그러지. 돈 필요해?]
      [아뇨, 난 괜찮아요.] 잠깐동안 그녀가  들은 거라고는 정적과 
    횡설수설이 고작이었다.
      [사랑해!] 어떤 이유로도 그녀는 그 말을 그에게 하고, 또 그가 
    말해주는 것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그와의 연결고리가 필
    요했지만, 그는 영원히 닿지 않을만큼 먼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을 사랑해요, 여보!] 그녀는 자신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원했
    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당신을 사랑해
    요!]
      [뭐라구?]
      그리고 그때 전화가 끊겼다. 그녀는 재빨리 국제전화 교황에게 
    전화를 걸어 로마와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러기까지
    는 또다시 25분이 걸렸다.  해슬러호텔의 교환이 [프론트입니다] 
    라고 짤막하게 대답하자 디나는 <시뇨르 듀라스>를 찾았다. 교환
    이 그의 방에 신호를 보냈다. 대답은 없었다. 로마에서는 이미 오
    전 10시였다. [죄송합니다. 시뇨르께서는 외출하셨습니다.]
      그녀는 다시 어둠 속에 누워 벤과 함께 보낸 저녁시간을 생각했
    다.

      
                                  7
      
      
      마르크 에두아르 듀라스는 로마의 비아 베네토 거리를 따라 걸
    으면서 상점의 유리창을 흘끗 들여다보며, 가끔씩 스쳐 지나가는 
    매력적인 여자들에게 흠모의 눈빛을 던지곤 하였다. 날씨는 화창
    했고, 여자들은 가느다란 끈이 달린 티셔츠와 각선미가 돋보이는 
    흰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으며, 붉은 매니큐어를 칠한 발가락이 드
    러나보이는 샌들을 신고 있었다. 그는  팔 밑에 서류가방을 끼고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다. 이탈리아에 잠깐동안만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잠시만 머무르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는 약속을 해버렸다....... 약속
    을. 때로는 그 자신이 너무나 쉽게 약속을 해버린다는 생각을 했
    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인 것이다.
      그는 귀족적인 풍채에 티 하나 없이  깨끗한 회색 수트를 입고 
    있었다. 기관총으로 발사하듯 튀어나온 로마의 차량이 그를 지나
    쳐 사방으로 달려가고, 또 다시 날아갈 듯 급하게 달려와 보행자
    들을 내려놓고 사라져갔다. 그는 한 나이 많은 여자가 양산을 흔
    들며 야릇한 몸짓을 해대는 것을 바라보았다. 에코, 세뇨라. 그는 
    길 반대편에서 살짝 머리를 숙여주었고, 그녀도 똑같은 몸짓을 해
    보였다. 시계를 들여다보고 그는 서둘러서 카페로 향했다.
      로마, 그곳은 마술의 도시였다.
      어쩌면 약속은 결국 지킬 만한 가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잠시
    동안 디나와 나누었던 어설픈 대화가 그의 마음 속에서 맴돌았다. 
    전화 상태가 좋지 않아 그녀의 말소리를 듣기가 거의 불가능하였
    는데 그로서는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 그녀와 집으로부터 떠나 
    있어서 그녀를 다를 수 없다든지, 아니면 그녀의 어떤 일에 영향
    력을 뻗칠 수 없다든지, 그녀의 눈에 깃든 아픔을 상상하거나 목
    소리에 스며 있는 외로움을 들을 수 없는 때가 종종 있었다. 거기
    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게 되더라도 그것은 때로 그가 다룰 수 
    있는 이상의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통
    해서 잘 다독거려줄 수 있지만,  해외에서 업무상의 위기로 인해 
    고민에 빠져 있다거나, 아니면 프랑스에 있는 집에 있을 때 그리
    고......이곳, 로마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그는 귓가에 맴도
    는 그녀의 목소리를 털어버리려는 듯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지
    금은 디나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없다. 안돼! 지금은 안
    돼!
      그의 눈동자가 거리의 사람들 사이를  떠다니고 있을 때, 그의 
    마음은 이미 그녀로부터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갔다. 매혹적인 금
    발머리의 여자, 키가 큰 브루넷의 여자, 가벼운 린넨 수트를 입은 
    검은색 머리의 로마 인처럼 보이는 두 명의 남자, 마치 르네상스 
    풍의 그림에 나오는 여자같이 보이는 키가 큰, 플로렌스 지방에서 
    올라온 듯한 여자, 그리고 그는 그녀를 보았다.
      쾌활하고 독특한 걸음걸이로 그녀가 거리에 나타났다. 늘씬하게 
    뻗어오른 그녀의 다리는 보도를 따라 춤을 추는 듯 했고, 눈부신 
    청록색 스커트는 그녀의 허벅지를 애무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엷은 자주빛 실크 셔츠를 입고 눈을 가릴 정도의 커다란 밀짚 모
    자를 쓰고 있었다. 눈은 거의 가려졌지만 완전히 가려진 것은 아
    니었다. 아무것도 그녀의 눈이나 아니면 그녀의 모든 분위기에 따
    라 변하는 그 사파이어빛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 빛은 활활 타오
    르는 불길로부터 신비스러운 심해의 푸른빛으로 변해갔다.
      [알로르, 쉐리.] 그의 앞에 바짝 다가선 그녀의 육감적인 입술
    이 오로지 그만을 위하여 미소를 보내왔다. [늦어서 미안해요, 저
    런 얼치기 팔찌들을 보려고 또 상점에 들렸었어요.]
      잠시동안 그가 느끼고 있던 마르크  에두아르 듀라스의 냉랭한 
    침묵은 완전히 녹아버렸다. 그는 사랑에 푹 빠져버린 소년의 얼굴
    을 하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샹딸 마틴, 디오르 
    회사의 모델이었다. 그녀는 6년 반 동안이나 특급 모델이었다.
      [팔찌는 샀어?] 그의 눈은 그녀의  목주위를, 그리고 몸전체를 
    애무하고 있었다. 그녀가 머리를 흔들자 그녀의 밤색 머리카락이 
    아침에 그가 사준 모자 밑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대단치 않은 동
    작이었지만 황홀하였다. 그리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글쎄요.] 그녀의 눈이 그의 푸른 눈 속으로 웃음을 던졌다. 그
    녀는 또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안 샀어요.] 예기치 않게 
    그녀가 그의 무릎 위에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대신에 당신 것을 샀어요.] 그녀는 뒤로 물러나 앉아 그가 그 
    꾸러미를 열기를 기다렸다.
      [나를 들뜨게 만드는군. 바보같이......!]
      [당신은 어떻고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웨이터에게 
    손짓을 했다. [세냐!......까메레르!] 웨이터는 즉시 밝은 표정으
    로 다가왔고, 그녀는 캄파리와 소다수를 주문했다.
      [당신은요?]
      [나도 술파티에 초대하는 건가?] 그녀는 한번도 그가 주도권을 
    잡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샹딸은 그녀 자신이 쇼를 도모하기를 
    좋아했다.
      [아, 입다무세요. 뭘 드시겠어요?]
      [스카치.]
      그녀는 그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그것을 주문하였고, 그렇게 파
    라솔밑에 앉아 있는 동안 그는 오래오래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점심식사를 하러 몰려오는 손님들이  가지각색의 옷을 입고 그들 
    주위에서 혼잡하게 서성댔다.
      [계속 이렇게 독립해 있을 건가, 내 사랑?]
      [언제나요. 이제 선물을 열어봐요.]
      [당신은 구제불능이야.]
      그녀는 불가사의한 존재다. 그녀는 항상 그로 하여금 그녀에 대
    해 꿈을 꾸게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사랑했다. 마치 카마르그의 
    평원을 자유롭게 누비는 숫사자처럼.......  그들은 함께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프랑스 목동들과 그 아름다운 야생의 백마가 뛰
    노는 곳으로.
      그 후로 그는 항상 그런  식으로 그녀를 떠올렸다. 길들여지지 
    않고 손에 닿지 않는 작은 부분으로. 하지만 그녀는 어느 정도는 
    그의 것이었다. 어느 정도는. 그는 그 가능성이 작은 것만은 아니
    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둘 사이는 그런 식으로 5년 동
    안 이어져왔다.
      그녀는 이제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들이 만났을 때 그녀는 스물
    네 살이었다. 그때는 디나가 프랑스로  그와 함께 가기를 거부한 
    첫번째 여름이었다. 그녀 없이 혼자서 여름을 보내기가 어려웠고, 
    가족들에게 그녀가 같이 오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난처했지만 
    그녀는 여행하기에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가족들을 설득시켰
    었다. 아무도 그말을 믿지 않았고, 그의 등 뒤에서는 그녀가 혹시 
    마르크를 떠나려 하는 게 아닌가 라든가, 미국에 애인이 있는 것
    은 아닌가 하고 의심들을 하였다.
      그들은 전혀 진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그녀가 거북하게 느낀다는 것을, 디나가 혼자 집에 머무르
    면서 그림을 그리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녀는 그들과 함께 마르크
    를 공유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행동하
    는 방식을 거부하였고, 필라가 그들처럼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
    는 것조차도 거부하였다.
      디나가 프랑스로 오기를 거부한 것은 마르크 에두아르로서는 충
    격이었고, 그녀가 더이상 프랑스에서 그의 가족들과 여름을 지내
    지 않으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마음을 바꾸라는 편지와  함께 무언가 아름다운 선물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오래전에 그의 사무실에 앉아 있
    던 열여덟 살의 꿈많은 미인에게 무언가 선물하기 위해 디오르 상
    점으로 찾아갔다.
      그는 모든 의상들을 쭈욱 훑어보면서  표시를 해두고 모델들을 
    보면서 주의깊게 옷들을 살펴본 후에 어떤 것이 그녀의 스타일에 
    맞을지 결정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 그의 관심은 끊임없이 의상으
    로부터 모델들에게로 옮아갔고, 그 중에 특히 흥미를 끄는 한 여
    자에게로 쏠렸다.
      그녀를 쳐다보면 어지러울 지경이었고, 그녀가 걷는 모습은 그
    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가 하는 일에 천재였
    다. 빙글돌기, 회전, 손동작-그 모든 것이 그를 유혹하는 듯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쇼가 끝나고 그녀에
    게 데이트를 신청했을 때, 잠시  어색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그녀가 그를 만나기 위해 대담하게 
    패인 검은색 저지 드레스를 입고 걸어나올 때, 그녀의 다갈색 머
    리카락은 사랑스러운 어깨위에서 흩날렸고, 그 독특한 푸른 눈은 
    번갈아서 그의 전체를 유혹하고 애무했다. 그는 그녀를 꽉 붙잡아 
    끌어안고 그녀가 그의 품 속에서  녹아버리는 걸 느끼고 싶었다.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힘과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
    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샹딸의 모든 것은 그를 놀라게도 하고 황홀하게도 만들었지만, 
    샹딸은 자신이 갖고 있는 매력을 무척  잘 알고 있는 듯 하였다. 
    그녀는 그것을 우아하게, 그러면서도 압도적인 위력을 가지고 휘
    둘러댔다.
      디나에게 드레스를 사주려던 마르크는 디나 대신 샹딸에게 술을 
    한잔, 또 한 잔, 그리고 또 한 잔을 사주었다. 그들은 조지5세호
    텔 바아에서 샴페인을 마지막으로 끝냈고,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같은 방을 잡지 않겠냐고 묻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쿡 웃으면서 그 길다랗고 섬세한 손길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져줄 
    뿐이었다.
      [아직은 안돼요.]
      그러면 언제? 라고 그녀에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
    다. 대신에 그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많은 선물을 보냈고, 
    마침내 그녀는 짐짓 빼면서 수줍은 듯이, 묵묵히 따라와 그의 심
    장과 영혼과 육체를 그녀의 손길아래 불같이 뜨겁게 달구어 놓았
    다. 그들은 포크가에 있는 친구의 아파트를 빌려 주말을 보냈다. 
    그곳은 멋진 주변환경에 자리잡은, 놀랄 정도로 로맨틱한 침실이 
    딸려 있고 나무그늘 아래로 발코니가 나 있는 집이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그 주말의 모든 소리와 냄새, 그리고 모든 순
    간들을 회상하곤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샹딸 마틴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마법을 걸어 그를 고갈시켰고 그가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욕망을 불러일으켜 그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신비스럽
    고 이국적이며 우아한 샹딸. 그들의 관계는 5년 동안이나 계속되
    었다. 파리와 아테네, 그리고 로마에서. 그는 유럽의 어디를 가든
    지 그녀를 동반하였고-물론 그녀는 호텔과 식당과 상점에서 <듀라
    스 부인>으로 소개되었다-해가 지날수록 그것에 익숙해졌다. 그녀
    는 이제 그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동업자인 짐 셜리반은 그것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고맙게도 
    디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말할 하등의 이유가 없
    었다. 그것이 그녀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지 않는다고 그는 믿고 있
    었다.
      디나에게는 샌프란시스코와 그녀 자신만의 작은 세계가 있었고, 
    그에게는 샹딸과 보다 넓은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샹딸을 갖고 
    있는 한 그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그저 그것이 일생동안  지속되어 주기를 기도했지만 샹딸은 
    결코 그러한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오, 내 사랑. 선물 말이에요, 선물. 그것 좀 열어봐요!] 그녀
    의 눈이 놀려댔고, 그의 심장은 둥실 떠올랐다. 그는 뚜껑을 잡아
    당겨 상자를 열었다. 선물은 그가 그날 아침, 해변으로 여행갈 때
    와 캡 드안티베스에 머무르는 동안 차고 있으면 아주 신날 것이라
    고 말했던 잠수용 시계였다.
      [하느님 맙소사! 당신 미쳤군, 샹딸.] 그 시계는 엄청나게 비싼 
    것이었지만, 샹딸은 가격 따위에는 흥미  없다는 듯 그의 반대를 
    일축시켰다. 그녀는 더이상 디오르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충
    분히 살 수 있었다. 3년 전에  그녀는 사랑의 도피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모델업소를 개장하였다. 그녀는 그가 자기를 파리의 아파
    트에 묶어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머리나 만지고 손톱
    이나 다듬으며 그가 오기를 기다리도록 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샹딸은 누구에게도, 무엇보다도 마르크에게 의존하기를 거부했
    다. 그것은 때때로 그를 성가시게 할 뿐만 아니라 놀라게 만들었
    다. 그녀는 그를 자신에게만 붙잡아두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사
    랑했다.
      [마음에 드세요?] 그녀는 수줍은 듯이 캄파리 위로 살며시 그를 
    바라보았다.
      [응, 마음에 들어. 하지만 당신을 더 사랑해.]
      [어머나, 그러십니까. 나리?] 그녀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그는 
    가랑이 사이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증명해 보일까?]
      [글쎄요....... 좋은 생각이 있으세요?] 그녀의 눈이 모자 밑에
    서 빛났다.
      [어딘가 교외로 나가서 점심식사를  하자고 제안할 계획이었지
    만, 아마도.......] 그의 미소가 그녀의 미소와 마주쳤다.
      [룸 서비스로 할까요, 우리?]
      [아주 좋은 생각이야.] 그는 손짓으로 까메레르를 부르고는 재
    빨리 계산을 치뤘다.
      그녀는 느릿느릿 일어나서 그의 마음을 애타게 만들려는 듯 일
    순간 그녀의 몸을 그에게로 휘청거리며 기울이더니, 복잡한 테이
    블 사이로 꾸불꾸불 걸어나가며 이따금씩 어깨 너머로 그를 흘낏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호텔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
    지만, 그녀는 그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마르크 에두아르 듀라스
    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스타일과 속도에 
    맞추어서 걷고 있었다. 그는 열에 들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면 그녀를 갖게 될 것이다. 그의 품 안에서, 침대 위에서.
      방에 들어가자 그는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빠른 속도로 풀기 
    시작했고, 그녀는 장난치듯 그를 떨쳐내면서 그가 그토록 원하는 
    그것을 들춰내기를 미루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그를 어루만지며 
    그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마침내 그녀의 스커트의 단추를 찾
    은 그는 스커트 단추를 풀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핑크빛 레이스 
    속에서 그녀의 살결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는 이제 블라우스를 거
    의 잡아찢고 있었다. 그녀의 알몸이 그의 앞에 드러나자 그는 부
    드러운 신음 소리를 뱉아냈다. 그녀는  그의 옷을 재빨리 그리고 
    숙달된 솜씨로 벗겨갔고 그들은 함께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
    들의 정사는 한층 더 완숙해져 갔으며 항상 처음의 것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그는 만족스런 기분을 느꼈지만 언제나 또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그녀는 그의 한쪽 팔꿈치를 배고 누워 침대 위를 뒹굴었고, 머
    리는 헝클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
    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가슴사이를 타
    고 천천히 복부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녀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사랑해요, 당신도 알죠?]
      그의 눈빛은 강렬하게 그녀의 눈을 찾았다. 그녀를 주시하였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 샹딸.   너무 깊게   사랑하는지도 모르
    지....... 사랑해, 나의 샹딸.]
      마르크 에두아르 듀라스같은 사람이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은 경
    이로운 일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디나는.
      샹딸은 웃으면서 눈을 감고 드러누웠다. 그의 눈에 근심의 빛이 
    어렸다. [당신 괜찮아?]
      [괜찮구말구요.]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어, 나는 알아. 진지하게 말해 봐요. 
    괜찮아, 샹딸?] 거의 광적인 근심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아요.]
      [오늘 인슐린은 제대로 먹은 거야?] 그는 지금 조금 전의 열정
    은 잊어버린 채 아버지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예, 먹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욕조에서  새 시계를 시험해 
    보지않을래요?]
      [지금?]
      [왜 안돼죠?] 그녀가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이자,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면 다른 무슨 생각이라도 있나요?]
      [나는 항상 무언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 하지만 당신은 지쳐
    버렸는 걸.]
      [당신을 위해서라면 결코 지치지 않아요, 내 사랑.] 그도 그녀
    를 위해서라면 결코 지치지 않았다.  그가 그녀와 또다시 사랑을 
    나누는 동안 둘 사이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그들이 다시 조용하게 나란히 옆에  누웠을 때,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가 되었다. [그럼, 오늘 오후는 다 지나갔군요.] 그녀는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었고 그도 씩 웃어보였다.
      [또 다른 계획있어요?]
      [아니, 없어.]
      [물건들을 좀더 구경하고 싶지 않아?]  그는 그녀와 함께 있으
    며, 그녀를 사랑하고 즐겁게 하고 그녀를 들이마시기를 좋아하였
    다. 그녀의 향기와 몸놀림, 그녀의 모든 숨소리는 그를 흥분시켰
    다. 그녀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상점으로 다시 가고 싶은 유혹도 있기는 하지만요.]
      [잘 됐군.] 로마로의 여행은 어쨌든  간에 그녀를 위한 것이었
    다. 그는 이번 여름 동안에  열심히 일할 생각이었기에 아테네는 
    그녀에게 지루한 장소가 될 것이었다. 그녀가 로마를 얼마나 좋아
    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그녀를 잊지 않고 데
    리고 왔다. 단지 그녀를 기쁘게 해주려고, 게다가, 그는 이번 주
    말 동안에 그녀와 떨어져 있을 예정이었다.
      [뭐가 잘못되었나요?] 그녀는 아주 가깝게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냐, 왜?]
      [잠깐 걱정하는 듯한 빛이 스친 것 같아서요.]
      [걱정은, 무슨......] 하지만 그녀에게 털어놓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냥 불행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이삼일 가량 당신과 
    떨어져 있게 될 것 같아.]
      [예?] 그녀의 눈이 겨울 서리처럼 차갑게 떨어졌다.
      [그리스로 가기 전에 안티베스로 가서 어머니와 필라에게 들러
    봐야 해.]
      그녀는 침대 위에  올라앉아 화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나는 어쩌라구요?]
      [그런 소리 하지마, 응? 나도 어쩔 수가 없으니까. 당신도 그걸 
    알잖아.]
      [필라도 이젠 내가 있다는 충격을  소화시킬 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어요, 아니면 내가 아직까지도 소개되어질 만한 자격이 없다
    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당신도 아다시피, 나는 더이상 디오르 출
    신의 마네킨이 아니라구요. 나는 파리에서 가장 큰 모델업소를 경
    영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 뜻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필라는 아직 어
    린아이야.] 그는 무엇이든 필라와  관련된 일은 이상하게 고집을 
    부렸다. 그것은 샹딸을 무척 괴롭혔다.
      [그럼 당신의 어머니는요?]
      [그분을 설득시키는 것도 불가능해.]
      [그렇군요.] 그녀는 그 긴 다리를 침대 한쪽 끝으로 던져 일어
    나서는 방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으면서 손에는 담배를 피워 물
    고, 반대편 창가에 다다르자 화난  듯이 돌아섰다. [나는 당신이 
    가족을 방문할 때마다 <방해를 하지 않는 장소>에 털썩 남겨지는 
    데에 이젠 진력이 났어요, 마르크 에두아르.]
      [나는 세인트 트로페즈를 <방해를 하지 않는 장소>라고 부를 생
    각은 추호도 없다구.] 그는 귀찮아 하는 듯했고, 몇 시간 전의 열
    정은 그의 어조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번에는 어느 곳을 생각해 두고 있지요?]
      [아마 상 레모가 될 거야.]
      [무척 편리하군요. 하지만 나는 가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여기에 머무르겠다는 건가?]
      [아니예요.]
      [또 다시 우리가 이런 식으로  나가야만 하나, 샹딸? 질려버릴 
    지경이야.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나는 이해가 안돼. 5년 동안 
    나 없이도 리비에라에서 지내는데 아무런 불만이 없던 당신이 왜 
    갑자기 이 문제를 들먹거리는 거지?]
      [그 이유를 알고 싶으세요?] 갑자기  그녀의 눈에 불꽃이 튀었
    다.
      [왜냐하면 나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서른 살인데 아직까지도 5
    년전에 당신과 벌였던 똑같은 게임을 계속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
    리고 이제 진저리가 나요, 내 처지에. 지구의 반쪽에서는 <듀라스 
    부부>로 가장하고 문제가 되는 그 장소들-파리, 센프란시스코, 안
    티베스-에서는 숨어 있다가 살며시 사라져버려야만 해요. 이젠 지
    긋지긋 하다구요. 당신은 자신이 편리한 대로만 하기를 원하고 있
    어요. 당신은 내가 반 년 동안 파리에 죽치고 앉아 있다가 당신이 
    명령하면 새장속에서 나오기를 바라고 있어요. 더이상은 그럴 수
    가 없어요, 마르크에두아르. 더이상은요!]  그녀가 말을 멈추자, 
    그는 아연실색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감히 진담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잠시동안의 끔찍한 순간 속
    에서 그는 그것이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지?]
      [아직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요즘 그 문제에 대해서 무척 많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런 경우 미국인들이 즐겨쓰는 말이 있더군
    요. <일을 보던가 아니면 변기에서 떨어져라.>]
      [유쾌한 말은 아니군.]
      [상 레모도 유쾌하진 못해요.]
      맙소사! 쓸데없는 짓이었다. 작은 한숨소리가 그에게서 나왔고, 
    그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샹딸, 안티베스에는 데
    려갈 수 없어.]
      [안티베스에 데려가지 않겠다는 말이죠? 말은 확실히 해야죠.]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불평 속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언급하였다. 
    그는 그 말의 충격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이전에 한번도 
    미국으로 가고 싶어한 적이 없었다.
      [무엇때문에 이러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서른번째 생일날때문에 
    그럴 리는 없고. 아직 넉 달이나 남았으니까.]
      그녀는 등을 뒤로 돌리고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숨을 돌렸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돌아서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떤 남자가 청혼을 해왔어요.]
      한순간 시간은 멈추어버렸다. 마르크  에두아르는 소름이 끼친 
    듯 흠칫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8
      
      
      [디나?]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부터 전화벨이 울리고 있
    었다. 벤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그녀가 잠에 취한 목소리를 내자 벤이 씽긋 웃었다. [미안해요. 
    잠자는 사람을 깨웠나요?]
      [그런 셈이네요.]
      [외교관같은 대답을 하시는 군요! 당신을 좀더 귀찮게 해주려고 
    전화를 걸었어요. 나는 조만간에 당신의 반대를 물리쳐버릴 것이
    고, 당신은 그저 내가 트집을 잡지 못하도록 하려고 화랑에서 서
    명을 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어요. 점심식사 어때요?]
      [지금요?] 그녀는 아직도 반쯤 잠든 상태에서, 얼마나 늦게까지 
    자기가 잠들어 있었는지 보려고 시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벤은 
    또다시 웃음보를 터뜨렸다.
      [아뇨, 아침 8시에 점심을 먹을 수는 없겠죠.] 12시나 1시쯤이 
    어떨까요? 싸우살리토에서.]
      [거기에 뭐가 있는데요?]
      [햇빛이 있죠. 다리 이쪽 편에서는 항상 누릴 수 없는 것 말입
    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어느 정도는요.] 그녀는 전화기에 대고 웃었다. 도대체 아침 8
    시에 전화를 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점심은 또 
    왜 그렇게 일찍? 그들은 지난 밤에  저녁식사를 같이 했었고, 그 
    전날에도 그녀의 작업실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했었다. 그녀는 자
    기가 그녀 작품의 열렬하고도  잠재적 거래업자인 새로운 친구를 
    만난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어떤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그렇
    게 빨리 또다시 그를 만나는 것이 과연 현명한 행동일까.
      [그럼요, 현명한 판단이죠.]
      [뭐가요?]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당신은 나랑 점심을 함께 하는 것이 좋은 생각인가 하고 묻고 
    있고, 그건 그렇다는 말이죠.]
      [믿을 수가 없군요.]
      [그러면 시내에서 들기로 할까요?]
      [아뇨, 싸우살리토가 근사할 것 같아요.] 그녀는 더이상 생각하
    지 않고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전화기에 대고 이야기하는 동
    안 천장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하
    루 중 이맘때에는 쉽게 승낙해 버리죠. 아직 커피도 안 마셨고.]
      [좋아요. 그렇다면 내일 아침 화랑에서  서명하기 전에 커피를 
    안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화를 끊어야 할 것 같군요,  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고, 
    하루를 웃음으로 시작하는 기분은 아주  상쾌하였다. 몇 년 만에 
    있는 일이었다.
      [점심식사 이야기를 마저 하기 전에는 끊을 수 없어요. 정오쯤
    에 모시러 갈까요?]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어떻게 하라고, 이 남자와 점심식사를 
    하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녀는 그가 좋
    았다. 그리고 싸우살리토에서 하는 점심식사도 흥미있을 것 같았
    다.
      [진바지를 입도록 하세요.]
      [좋아요, 정오에 봐요.]
      
      그는 정확하게 12시 2분에 그녀의 집 앞에 차를 댔다. 그는 터
    틀 스웨터와 진바지를 입고 있었다. 디나는 차에 올라타려다가 그
    의 옆좌석에서 붉고 하얀색의 천에 싸여진 광주리를 발견했다. 한
    쪽 끄트머리에서는 병 한 개가 목을 내밀고 있었다. 벤이 문을 열
    어준 후에 광주리를 뒷좌석으로 옮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인.] 그녀가 차  안으로 미끌어져 들어가
    자, 그는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피크닉을 가려고 하는데, 어
    떻습니까?]
      [아주 그럴 듯하군요.] 아니면 진짜로 피크닉이었던가, 이 남자
    와 함께 피크닉을 가도 괜찮은 걸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안된다 
    라고 말했지만, 한편으로 디나의 가슴은 햇빛 속에서 오후를 보내
    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할 수 있었
    던 일은 그외에도 있었고, 정말로  햇빛을 쬐고 싶었다면 작업실 
    밖의 테라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벤은 차에 시동을 걸면서 그녀를 힐끗 바라보다가 그녀의 양 미
    간에 어렴풋이 주름살이 지는 것을 보았다. [무순 문제가 생겼나
    요?]
      [아니예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을 하는  동안 차는 연석 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혹시나 마가레트가 그들을 보았으면 어
    쩌나 걱정이 되었다.
      눈부시게 번쩍이는 금문교를 가로질러 차를 몰면서 그는 화랑에 
    있는 보다 다채로운 화가들의 이야기로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서 잠시동안 그는 아무말이  없었다. 그들은 둘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멋진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고 그가 물었다. 그녀는 미소
    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질문을 해도 되겠어요?] 그녀는 잠시 놀란 것 같이 보
    였다.
      [물론이죠.]
      [프랑스가 아닌 이곳에서 사는 게  어떻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프랑스 인들은 대체적으로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던데요.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녀는 웃었다. 그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여기에서 할 일이 
    무척 많아요. 그리고 남편은 어쨌든 간에 여기에 그렇게 많이 있
    지 않아요. 대부분 돌아다니죠.]
      [당신으로서는 외로운 생활이겠군요.]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서
    술이었다.
      [이젠 적응이 되었어요.] 그는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혼자 있을 때는 무엇을 하십니까?]
      그들은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합창을 하였다. [그림을 그리죠.]
      [그게 내가 생각한 거예요.]
      [무슨 일로 카멜에 내려갔었죠?] 그의 눈은 수수께끼같은 질문
    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모두 대답하기에 용이한 
    질문들이었다.
      [킴때문이었어요. 함께 여행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거든요.]
      [그녀의 말이 맞았나요?] 다리 건너편에 있는 군사지역으로 들
    어가는 길로 차를 꺾으면서 그가 슬쩍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행이 필요했습니까?]
      [그랬다고 생각해요. 카멜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 잊고 있었어
    요. 몇년 동안 그곳에 가보지 못했었거든요. 당신은 주말마다 가
    시나요?]
      그녀는 그에게 질문을 돌리고 싶었다. 그에게 남편에 대한 이야
    기를 하기는 정말로 싫었다.
      [갈 수 있을 때마다 가죠. 자주 갈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좁은 시골길을 따라서 버려진 벙커와 군용 건물들을 지
    나쳐가고 있었다. [벤, 이건 뭐예요?] 그녀는 호기심으로 가득차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것은 마치 전후의 세상을 촬영하고 있는 영
    화의 세트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길 양편에 늘어선 막
    사들은 거의 무너져내릴 듯이 널판지로 기대어져 있었고 야생화와 
    잡초들은 길 위로 기어 올라 오고 있었다.
      [지난 번 전쟁 때 세워진 오래된 군사기지죠. 지금은 텅 비었지
    만, 몇 가지 이유때문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어요. 이쪽 끝으로
    는 아름다운 해변이 있죠. 때때로 생각할 게 있을 때 이곳으로 온
    답니다.]
      벤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돌아보았고, 다시 한번 그녀는 그
    와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안한  느낌을 주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좋은 친구가 갖고 있는 모든 요소를 갖추었다. 남은 
    길을 지나면서 그들은 편안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섬짓하지 않아요? 해변은 너무나  멋진데 사람은  한 명도 없
    고.]
      바로 해변가에서 차를 멈추었을 때 주위에는 그의 차밖에 아무
    런 인기척도 없었다.
      [언제나 아무것도 없죠.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해주지 않았습니
    다. 여긴 혼자 오는 것이 좋거든요.]
      [그런 식으로 종종 고독을 즐기세요? 카멜의 해변가를 혼자 산
    책하던 것처럼?] 디나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뒷좌석
    에 놓아둔 광주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아주 가까이에서 그녀를 바
    라보았다.
      [그날 밤 해변에서 만난 이후로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나도 그랬었죠. 나란히 걸으면서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이상한 기분을 느꼈어요. 꼭 몇 년 동안 알고 지내온 친구처럼 
    느껴졌었어요.]
      [그랬었죠. 그것은 당신이 웨스의 그림 속에 있는 여인과 흡사
    하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 다음 날 내 초라한 집에서 당신을 보게 되었을 때, 우리가 
    만났던 사실을 인정해야 할는지 아닌지 어떻게 할 바를 몰랐습니
    다.]
      [왜 인정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게 되었죠?] 그녀는 매우 희미
    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당신의 왼쪽 손에 끼워진 반지  때문이었어요. 내가 그랬다간 
    당신이 매우 난처해질 것 같았거든요.]
      그다운 행동이라고 디나는 생각했다. 명민하고 생각이 깊고. 그
    녀는 그가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의자 깊숙이 몸을 밀어넣고 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가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면 당신은 좀 난처하게 되지 않겠어요?] 그가 물었다.
      [그럴 이유를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진실보다 
    허세가 깃들어 있었고, 그는 그것을 보았다. [당신 남편이 뭐라고 
    할까요, 디나?] 그의 말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고, 그녀
    는 자기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짐짓 걱정
    이 되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점은 그녀가 정말로 염려하고 있다
    는 점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모르겠어요. 그런 질문은 아직 받아본 적이 없거든요. 나는 사
    람들과 함께 그리 자주 식사하는 편이 아니예요.]
      [당신 작품을 전시하기를 원하는 그림 거래업자들과는요?] 벤은 
    그녀에게 미소를 던졌다. 그들은 아직 자동차 안에 앉아 있었다.
      [아뇨. 적어도 그림 거래업자들과는 아니예요. 그들과 점심식사
    를 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왜 그랬죠?]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남편이 
    내 작품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림 그리는 것은 좋은 취미이고 기
    분전환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예술가들은 히피들이고 바보들> 이
    라고 생각해요.]
      [그건 분명 고갱과 마네를 두고 하는 말 같군요.] 그는 잠시동
    안 생각에 잠겼다. 그가 말을 할 때 그녀는 마치 그의 눈이 자신
    의 영혼을 불태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말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당신에게 필요한 
    일면을 부정하도록 억누르지는 않나요?]
      [꼭 그런 건 아니예요. 나는 아직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까.] 하
    지만 둘은 모두 그녀의 부정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디나는 자
    기가 간절히 원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포기하도록 강압받아 왔었
    다.
      [나는 결혼이란 일종의 교환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계속 말
    을 이었다. [서로가 무언가를 보상해 준답니다.] 하지만 마르크는 
    무엇을 보상해 주었는가, 그는 무엇을 포기하였는가? 벤은 슬픔에 
    잠긴 듯이 보이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결혼할 때 잘못 생각한 부분일 거요. 나는 
    그 보상을 망각했었습니다.]
      [당신은 아주 강압적이었나요?] 디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
    보았다.
      [그랬을런지도 모르죠. 너무나 오래된 일이라서 확신할 수는 없
    지만. 나는 항상 그녀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어주기를 원했었
    죠.......]
      그의 목소리는 파도를 타듯 흘러갔다.
      [당신이 원하던 것이 뭐였는데요?]
      [아, 그건!] 그는 엷고 쓴  웃음을 지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충실하고 진실하고 쾌활하며, 나만을 사랑해 주기를 바랬죠. 대
    개들 다 그렇듯이.]
      그들 둘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피크닉 광주리를 손에 
    쥐고는 디나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가져온 담요를 그
    녀를 위해 모래 위에 조심스럽게 펼쳐놓았다.
      [어머나, 세상에! 당신이 이런  점심을 준비하셨어요.] 그녀는 
    그가 광주리에서 꺼내고 있는 음식들을 지켜보았다. 사과 샐러드
    와 파이, 불란서빵, 자그마한 과자  상자와 와인이 있었다. 조금 
    작은 광주리에는 체리가 가득 섞여 있는 과일들로 꽉 차 있었다. 
    그녀는 체리를 들어 그녀의 오른쪽 귀에 매달았다.
      [체리를 달고 있으니까 멋지게 보이는군요, 디나. 포도를 달아
    본 적은 없나요?] 그가 작은 포도송이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웃으
    면서 왼쪽 귀에 그것도  달았다. [코르뉴코우피아의 뿔에 과일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요....... 마치 전원 속의 축제에서 
    처럼.]
      [그러지 마세요!] 그녀는 등을 대고 누워서 활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짜릿한 젊음과 억누를 수 없는 행복을 느꼈
    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식사 준비됐습니다.] 그는 한 손에  사과 샐러드 접시를 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검은 머리 사이로 귀에 매단 과일이 살짝 드러나보이는 채
    로 담요 위에 편안하게 기대고 있었다. 벤의 미소를 보자, 그녀는 
    체리와 포도송이가 생각났다. 귀에서  그것들을 떼어버리고 한쪽 
    팔꿈치로 기대어 일어나 앉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매우 배가 고파요.]
      [좋습니다. 나는 식성이 좋은 여자들을 좋아하지요.]
      [그리고 또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적절하지 못한 질문이었
    지만 상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좀더 많은 
    것을 알고 같이 나누고 싶었다.
      [글쎄요? 생각해 봅시다...... 춤추는 여자를 좋아하고....... 
    타이핑을 하는 여자들도 좋아하고...... 책을 읽고, 그리고 글을 
    쓰는 여자들...... 그림을 그리는  여자들...... 푸른 눈을 가진 
    여자들!] 그는 말을 멈추고 다시 그녀를 둥그런 눈으로 내려다보
    았다.
      [그리고 당신은요?] 그의 목소리는 소근거림 같았다.
      [내가 어떤 종류의 여자들을 좋아하냐구요.] 그녀는 그를 보고 
    웃었다. [아, 그만해요. 여기 뭐 좀 먹읍시다.] 그가 그녀에게 불
    란서빵 한 조각과 파이를 건네주었고, 그녀는 부드러운 고기를 맛
    있게 먹어치웠다.
      더할나위 없이 좋은 오후였다. 태양은 하늘 높이 떠있고 파도는 
    부드럽게 해안으로 몰려와 선선한 미풍을 싶어왔다. 이따끔씩 새 
    한 마리가 날아다니곤 하였다. 그들 뒤로 내버려진 건물들은 아무
    런 느낌도 없이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들만의 세계였
    다.
      [저기.] 그녀가 주위를 보다가 그에게로 눈길을 되돌렸다. [가
    끔가다 이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져요.]
      [한번 그려보지 그래요?]
      [웨스처럼 말인가요?] 디나는 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내가 아니예요. 우리는 서로가 아주  다른 방법으로 일하고 있어
    요.] 그는 그녀가 좀더 말하기를 기다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벤, 
    당신도 그림을 그리나요?]
      그는 입가에 냉소를 떠올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노력은 
    해봤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파는  편이 내 인생의 운명인 
    것 같더군요. 그래도 예술작품 하나는 정말로 만들어봤죠.] 부두
    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꿈을 꾸는 듯이 보였다. 여름 바
    람이 그의 머리를 흩날리게 만들었다.
      [그게 뭐죠?]
      [집을 한 채 지었어요. 아담한 집이었는데 너무나 근사했어요. 
    친구 한 명과 함께 직접 지었죠.]
      [놀랍군요.] 그녀는 감동했다.
      [어디에다가요?]
      [뉴잉글랜드 지방에. 나는 그때 뉴욕에 살고 있었는데, 내 아내
    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녀가 그것을 좋아했나요?] 그는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부두
    를 바라보았다.
      [아뇨. 그녀는 그 집을 보지  못했어요. 그녀에게 처음으로 그 
    작품을 보여주려고 데려가려던 날, 사흘 전에 그녀는 떠나버렸어
    요.] 디나는 잠시동안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둘다 인생
    에 대해 절망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팔아버렸죠. 얼마간은 붙들고 있었지만 결코 즐겁지가 않았습
    니다. 그것은 너무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죠, 그리고 나서 이곳
    으로 이사해 왔습니다. 그리고 카멜에 그 집을 샀죠.] 디나를 바
    라보는 그의 눈길은 부드러우면서도 애조를 띄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은 멋진 일
    이었습니다. 내가 그 집을 짓고 난 후처럼 근사한 기분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분이란, 그건 정말로 업적이었
    죠.] 그녀는 귀를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알아요.] 잠시의 침묵이 있은 후 그녀가 말했다. [내가 필라를 
    낳았을 때 그런 기분이었어요. 비록 아들은 아니었지만.]
      [그게 그토록 문제가 됩니까?] 그는 괴로운 듯이 보였다.
      [그때는 그랬어요. 사내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마르크에게는 굉
    장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더이상 그이가 신경을 쓴다고는 생각하
    지 않아요. 그이는 필라에게 푹 빠져있으니까요.]
      [나는 아들보다는 딸을 갖고 싶었는데.......] 벤이 말했다.
      디나는 놀란 것 같았다.[왜요?]
      [딸들은 사랑해 주기가 더 쉬워요. 조그만 정성으로도 그녀들을 
    감동시킬 수 있죠. 그리고 다른 모든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아도 
    되고요. 그저 사랑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는 마치 아이를 갖지 않
    은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녀는 혹시 그가 재혼할 마음
    이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아닙니다. 안할 겁니다.] 그 말을 할 때 그는 그녀를 보고 있
    지 않았다.
      [뭘 안하겠다는 거죠?]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녀가 묻지 
    않은 질문을 대답해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가 머릿속으로만 
    물어본 질문을.
      [재혼말입니다.]
      [놀랍군요. 이유가 뭐죠?] 그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그가 
    알고 있다는 것에 여전히 깜짝 놀라고 있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필요한 것을 갖고 있고 화
    랑일로 너무 분주해요. 나처럼 어떤  일엔가 몰두해 있는 사람이 
    재혼한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10년 전에는 내 사업
    에 흥미가 없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그 일에 빠져 있어요.]
      [하지만 아이를 원하잖아요. 그렇지 않으세요?] 그녀는 그만큼 
    그를 이해하고 있었다.
      [비엔나 근교에 부동산을 갖는 것도  원하고 있죠. 마찬가지로 
    그것 없이는 못 살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때요?]
      [나는 이미 아이가 있어요. 아이를 더  갖고 싶냐고 묻는 건가
    요?]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뇨, 혹시 그것도 포함될지 모르죠. 하지만 재혼하게 될 거라
    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까?] 그는 그의 깊고 푸른 눈으로 그
    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결혼했는 걸요.]
      [행복합니까, 디나?]
      그 질문은 직선적이었고 그녀에게는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 그
    녀는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멈추었다.  [때로는요. 하지만 나는 
    지금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왜죠?]
      [왜냐하면 그이와 나는 많은 어려움을 함께 해왔으니까요.] 그
    녀는 벤에게 남편의 이름을 말하려하지 않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것을 바꾸거나 아니면 부정하거나 버릴 수는 없어요. 우리에
    겐 과거가 있답니다.]
      [추억인가요?]
      [때로는요. 그 게임의 규칙을 깨달았거든요.] 그녀는 잔인할 정
    도로 솔직하였다. 그녀 자신에게조차도.
      [어떤 것인가요?]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그에게로 손을 뻗치고, 마
    르크에 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벤은 지
    금 그녀의 친구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이상의 권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오직 그의 우정뿐. 그들이 마르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
    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규칙이란 무엇이었죠?]
      그녀는 한숨을 쉬고 나서 어깨를 움찔거렸다. [언제나 거듭되는 
    <그러지 말아라!> 라는 거예요. 그대는 그대 남편의 바램을 거역
    하지 말아라, 너무 많은 질문을 하지 말아라, 적어도 화가로서의 
    당신 자신의 생활을 원하지 말아라....... 하지만 그이도 나에게 
    매우 친절한 적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나는 의지할 데 
    없는 고아였어요. 겁이 났었죠. 마르크가 나를 구출해 주었어요. 
    그가 해준 만큼의 구제를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그는 많은 
    것을 주었어요. 그는 나에게 위로와 가정과 가족 그리고 안정을, 
    나아가서는 필라를 주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사랑은 말하지 않았
    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나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디나는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지금
    껏 곁에서 기다렸어요.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그를 사랑합니까?] 미소는 천천히 사라져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합니다, 디나. 물어보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왜 그러세요? 우린 친구잖아요.]
      [그래요.] 그는 다시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우린 친구죠. 
    해변가를 걷고 싶지 않소?] 그가 일어서서 손을 뻗어 그녀가 일어
    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들의 손이 잠시 스친 후에 그가 돌아서
    서 빠르고 큰걸음으로 해안으로 걸어가며 그녀에게 따라오라는 손
    짓을 하였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말들을 생각하며 천천히 걸었
    다. 한 가지, 그녀가 마르크를 진실로 사랑하고 있음은 분명하였
    다. 적어도 지금은 벤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한두 순간 
    그녀는 그것을 두려워 했었다. 그에게는 그녀가 몹시 좋아하는 무
    언가가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바닷조개 껍질을 건네주고는 무릎까지 물이 차는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신발은 이미 벗어버렸었다. 그는 파도 속
    에서 놀고 있는 행복한 소년의  모습이었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미소지었다. [우리 경주할까요?] 그는 장난기 섞인 얼굴로 
    그녀 옆으로 돌아와서 쳐다보았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그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만일 필라가 그녀의 어머니와 한 남자가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해변에서 경주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하지만 그녀는 소녀가 되어 축축하게 젖은 모래사장을 따라 뛰어
    가며 숨을 헐떡였고 머리는 바람에 헝클어져 있었다. 마침내 그녀
    는 숨이 차올라 멈추었고 그가 번개같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항복?] 그가 소리쳐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는 
    해변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되돌아와서 그녀가 모래 속으로 파묻혀 
    들어가 있는 옆자리에 멈추어섰다. 태양은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 
    가득히 붉은 빛을 비추었다. 그는 그녀 옆에 주저앉아 숨을 죽이
    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들어 무언가를 갈구
    하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눈을 기다리고 있는 그 바다빛
    의 눈동자를.
      [디나.......]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끝없이 기다리다가, 천천
    히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바람이 쓸고간 그녀의 검은 머리칼 
    사이에 속삭였다. [오, 디나. 당신을 사랑해요.......] 억제할 수 
    없는 듯 그는 그녀를 껴안고 그녀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부
    드럽게 포갰다. 그녀도 어느새 그를 껴안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
    도 그의 것만큼이나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서로를 껴안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뜨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처음 한 말외에는 더이상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이 멈춘 세계 안에서 서로를 소유하
    고 있었다. 벤이 일어섰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일어서서 조
    용히, 천천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함께 손을 맞잡고 
    해변으로 돌아서서 걸어갔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지만, 디나! 그렇지가 않군요.]
      [나도 그래요.] 그녀는 충격을 받은 듯한 소리를 내었다. [하지
    만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럴 필요가 없는 건지도 모르죠. 우리는  계속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서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지
    만, 그녀의 눈에는 오직 어떤 상념에 매달린 듯한 어두움만이 깔
    려 있었다.
      [배신감은 없어요. 적어도 당신에게는.] 그녀는 그가 그만큼이
    나마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원했다.
      [자신에게 말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 뿐이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좀전에 당신의 인생을 얘기했을 때 당신은 
    아주 명백했으니까. 당신이 이해해야 하거나 설명할 것은 아무것
    도 없어요.]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상냥했다.
      [잊어버릴 수 있어요. 그러리라고 확신해요.]
      하지만 그녀의 내부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은 감정이 일어나 그
    녀 자신을 놀라게 했다. 그녀는 절대로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한말 진심이었어요?] 그녀는 그가 <당신을 사랑해요> 라
    고 한 말을 의미했고, 그도 그걸 알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느껴
    요. 그건 정말이지 약간 미친 짓이에요.]
      [단지 미친 짓일 뿐이에요!] 그는 이번에는 소리높여 웃으면서 
    부드럽게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아마도 아주 미쳐버린 건지도 
    모르죠.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 간에 당신의 인생은 망치지 
    않겠어요. 당신은 당신이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고, 나는 지금 당
    신의 안전한 배를 흔들어버리고 싶지 않으니까. 단지 그것이 당신
    의 지난 18년의 세월과 그 생활을 잘 절충시켜 주었는지 의심스러
    울 뿐이죠.]
      그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약속해
    요, 디나. 당신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겠소.]
      [하지만 우린 뭘 해야 하죠?] 그녀는 그의 품 속에 안긴 어린아
    이 같았다.
      [아무것도. 우리는 둘다 커다란 아이가  된 거요, 그리고 좋은 
    친구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나요?]
      [그래야만 하겠죠.]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후회는 물론이고 
    구원의 의미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충실이란 그녀에게 상당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집을 향해 차를 몰기 시작했고 돌아오는 동안 아무
    런 말도 없었다. 그날은 그녀가 쉽사리 잊지 못할 날이었다. 그들
    이 그녀의 집에 도착하기 전의 시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가끔 내 작업실에 들러서 점심식사를 하시겠어요?] 그녀의 너
    무나도 쓸쓸한 목소리는 그의 아픔을 더욱 쓰라리게 하였지만, 그
    는 미소를 지었다.
      [언제든지요. 오래지 않아 전화하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에서 미끌어지듯 빠져나왔다. 그녀
    가 뒤돌아 보기도 전에 그가 차를 몰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서 침실로 들어가 침대 위에 누웠다. 
    그리고 나서 전화기를 슬쩍 보는 순간, 그녀는 남편에게서 온 전
    화 메모를 보았다. 마가레트가 그날 오후에 온 전화를 받은 것 같
    았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메모를 읽었다. <듀라스 씨에게 전화 
    해주세요.> 지금은 그에게 전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해변에서의 몽상으로부터 빠져나와 강제로라도 그녀 자신의 
    인생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전화를 걸려고 결심하는 데는 반 시
    간이나 걸렸다. 드디어 로마를 연결해 주는 국제전화 교환수에게
    로 다이얼을 돌려서 호텔에 있는 마르크의 방을 부탁했다. 이번에
    는 그가 방에 있었다.
      [마르크? 저예요.]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차가웠다.
      [디나예요.] 그는 잠시동안 그녀가 누군지 모르는 듯했다. 그리
    고 나서야 시간을 계산했다. 지금 로마에서는 새벽 2시였다. 의심
    할 것도 없이 그는 깊은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응, 알아. 잠자고 있었어.]
      [미안해요. 지난 번 얘기한 후로는 전화를 통 안했는데, 마가레
    트가 메모를 남겨두었더군요. 중요한 일일 거라고 생각되어서요.]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그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잠자고 있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맞아. 어디에 있었지?] 맙소사! 왜  그렇게 차갑게 말을 하는 
    거지, 왜 지금? 그녀는 전화를 붙들고 있을 구실이 필요했다. 벤
    과 사랑에 빠질 구실이 아니라 충실하게 있어야 할 구실이었다.
      [외출했었어요. 쇼핑 좀 하려고요.] 거짓말하기는 정말 싫었지
    만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해변에서 벤 톰슨과 키스하고 
    있었다고? [로마 일은 잘 돼가요.]
      [좋아, 저어.] 그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였다.  [다시 전화 할
    께.]
      [언제요.] 그녀는 알아야만 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의 
    머릿속에 간직해야 했다. 그러는 것이 그녀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아픔을 무디게 만들어줄 것이다. [언제 전화하실 건가요?]
      [내일, 이번 주말에. 전화할 테니까 걱정 말아. 알았어?]
      [네, 괜찮아요. 좋아요.] 그녀의 딱딱한 말투때문에 말을 빨리 
    끊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 말은 그를 떠보려 해 본 애원이었
    다. 그는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나도 그렇소.] 그리고 나서 더이상의 말없이 그가 전화를 끊었
    고 디나는 멍하니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디나는 그날 저녁 혼자 식사를 하고 난 후, 타일이 깔린 아담한 
    테라스로 나가 반 시간 가량을 부두 위로 지고 있는 노을을 바라
    보며 서있었다. 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그와 함께 그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그를 보냈을까. 그렇다고 지구의 저쪽에 있
    는 마르크에게 전화를 했을 때 지조있는 여자라고 느꼈던가? 눈물
    이 뺨 위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현관문의 벨이 울리자 그녀
    는 움찔하였다. 나가보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지만 혹시나 킴이 자
    기를 보러 왔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킴이라면 작업실에 켜진 
    불빛을 보고 자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입고 
    있는 셔츠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낸 다음에 뒷쪽 계단을 맨발로 달
    려 내려갔다. 누구냐고 물어볼 생각도  없이 그냥 문을 열어주었
    다. 그녀의 모습은 맨발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어깨위에 늘어뜨린, 
    지쳐버린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킴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들어 
    올려다본 그녀는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놀라 주춤 뒤로 물
    러섰다. 벤이었다.
      [찾아오기에는 안 좋은 시간인가요?] 그가 물었다. 그녀는 머리
    를 흔들었다. [얘기 좀  할까요.] 그도 그녀만큼이나 고통스러운 
    듯이 보였고, 그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하자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작업실로 올라가세요. 거기에 있었어요.]
      [일하고 있었소?] 그가 그녀의 눈을 살펴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도 그랬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등 뒤의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의자를 몸짓으로 가리켰다. [커피, 아니면 와인?]
      [둘다 됐어요, 고맙소.] 그는 자기가 온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이 갑자기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서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내가 미쳤군! 오지 말
    았어야 하는 건데.]
      [와 주셔서 기쁜 걸요.]
      [그렇다면] 그는 눈을 뜨고 짐짓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도 그
    래요. 디나, 나는 미친 짓인 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기
    랄, 당신을 사랑하오. 그리고 마치 제멋대로 구는 어린애가 된 기
    분이오. 여기에 오지조차도 말았어야  하는 건데. 진실은 아무런 
    말이 필요 없어요. 해변에서 당신에게 해준 말을 제외하고는.] 그
    는 목소리를 떨어뜨려 낮게 속삭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단지 당
    신을 사랑한다는 말 외에는.]
      그녀가 그를 쳐다보았을 때 아주 오랫동안  방 안은 고요 속에 
    잠겨 있었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녀의 한숨소
    리가 들렸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는지 알아요?] 그가 물었다. [무엇이
    든지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한 순간, 하루 저녁, 한 번의 여름
    이라도. 그 다음에는 당신을 방해하지 않겠소. 떠나겠어요. 하지
    만 우리가 갖고 있어야만 했던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차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적
    신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려 물감이 여기저기 묻어 있는 셔츠 위로 
    천천히 떨어졌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한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민 손을 꽉 붙잡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지 않소.]
      [그래요, 굉장히. 그리고 여름이 가버리면?]
      [헤어집시다.]
      [그럴 수 없다면요?]
      [그래도 그렇게 해야만 해요. 그러는 것이 당신의 마음에 평화
    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럴 겁니다. 당신은요?]
      [나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팔이 그의 몸을 감았다. [그때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어요. 나는 단지 당신을 사랑할 뿐이에요.]
      그는 그녀를 꼭 껴안으면서 활짝 웃었다. 바로 그 말을 듣고 싶
    었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생기를 되찾았다.
      [집에 한 번 오겠어요, 디나?  집안이 엉망이지만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과 내 생활, 그리고 내 화
    랑과 일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어요. 카멜의 해변을 당신과 함께 
    걷고 싶고 그리고...... 오, 디나, 내 사랑, 내 사랑, 당신을 사
    랑해요!] 그가 그녀를 두 팔로 안아올려  계단 밑으로 내려갈 때 
    그들은 둘다 웃고 있었다. 잠시동안 디나는 마가레트가 그날 저녁 
    비번임을 감사히 여겼지만 그 이상은  감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단지 잠시 뿐이지만 마르크와 지낸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녀는 지금 벤의 것이었다. 여름 동안은 벤의 것이었다.

      
                                  9
      
      
      [잘 잤어요?] 디나의 귓가에 벤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그녀는 한쪽 눈을 떴다. 그 방은 낯설었다. 그녀는 담황색의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밖으로 만이 보이는  넓은 창문의 셔터가 전부 
    열려져 있었다. 창문 바로 밖에는 나무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디
    선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날은 더운 여름인데도 6월이라
    기 보다는 9월처럼 느껴지는 멋진 날씨였다.
      디나는 담황색의 벽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다가 이내 해변의 물
    빛에 빨려 들어갔다. 그 다음에는 더 작은 파스텔과 오일에도. 그 
    예술작품은 매우 미묘하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벤 자신과도 닮아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팔꿈치에 괸 채 하품을 하고 몸을 뻗치면
    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새로운 사랑의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
    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아예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걸!] 그가 갑자기 애인이라기 보다는 작은 소년처럼 말했다. 
    그녀가 웃었다.
      [좀 피곤했었나 봐요.] 그녀가 다시 미소지으며 시트로 미끄러
    져 되돌아가며 한쪽 손으로 그의 다리를 잡았다. 지난 밤에는 그
    의 팔 안에서 길고 달콤한 밤을 지새우며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
    했다.
      [그래서 불만이오?]
      [어, 어?] 그녀의 입술이 재빨리  그의 다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히프에서 멈췄다. 그녀는 그 소정맥이 고동치는, 하얗고 부
    드러운 피부에 키스를 했다. [안녕,  내 사랑!] 그녀는 고동치는 
    그 생명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벤이 그녀를 가볍게 들어 팔
    에 안았다.
      [오늘 아침,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을 했던가.] 그
    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그녀가 
    꿈꿔왔고 그려왔으나 아직 보지 못했던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일
    종의 정염이고 구속받지 않는 사랑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오래전
    부터 갈구했으나 이제는 그 존재가 없으리라 체념했던 바로 그것
    이었다.
      [당신을 사랑해, 디나...... 당신을 사랑해.......]
      그날 아침, 처음에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했을 때 그의 말이 그
    녀의 입술로 녹아 내려갔다.  그녀가 어렴풋이 저항했으나, 그가 
    그녀를 끌어들이며 껴안았을 때 웃으며 머뭇거릴 뿐이었다. [반대
    하고 싶소?] 그는 우스꽝스럽고 놀랍게 보였다.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꺾이지 않았을 것이다.
      [난  양치질도   하지   않았다구요!  머리도   빗지   않았고, 
    또.......] 디나의 말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의 키스에 압도당하
    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가 킬킬 웃으며 손으로 그의 빗질되지 않
    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벤...... 해야 돼요.......]
      [아니야, 할 필요 없소. 이대로의 당신이 좋아.] 그 말은 진심
    인 것같았다.
      [하지만 나는.......]
      [쉬이잇.......]
      [벤! 그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의 치아와 머리칼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다. 그 순간의 그녀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의 온몸이 
    그녀의 영혼으로 들어온 것처럼 열락의 바다를 표류하는 것 같았
    다. [졸립소?] 마침내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목소리가 속
    삭였다. 거의 두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그의 팔에 행복하게 감싸
    여 있었다. 한쪽 다리는 그의 다리 사이에 꼬여져 있었다.
      [음, 흠...... 벤?]
      [음.] 따뜻한 여름 아침, 그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어린애의 것과 같았다. [나도 당신을 사
    랑해. 다시 눈을 붙여봐요.]
      그리고 그녀는 잤다. 거의 두 시간 동안.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침대 끝에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가 놀라서 일어났다. 
    그는 샐러리맨 풍의 청색 줄무늬 옷을 입고 있었다.
      [뭘 하는 거예요.] 놀란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의 머리카
    락을 만졌다. 갑자기 발가벗은 느낌이  들어 화들짝 놀라 일어나 
    자신이 단정치 못한 모습임을 깨달았다. 그때 그들의 사랑으로 인
    한 달콤한 냄새가 침대로부터  피어나왔다. [내가 얼마 동안이나 
    잤어요?]
      [별로 오래 자지는 않았소. 내가 화랑에서 점심을 먹지 않는다
    면, 나도 그런 모습인 채로 있었을  거야. 어제 취소했고 오늘도 
    이것을 취소하면 아마도 샐리가 그만두고 말 걸. 하지만 오래 걸
    리지는 않을 거요.] 그녀가 커다란 더블 침대에서 베개에 몸을 기
    대자 그녀의 무릎 위에 쟁반을 올려놓아 주었다.
      [그렇게 되길 바래요.] 쟁반에는 크로와쌍, 과일, 카페오레, 삶
    은 달걀 한 개가 있었다.
      [아침에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가 매우 젊어 보였다.
      디나가 놀란 눈초리로 아침상을 보곤 그를 쳐다봤다. 그녀가 무
    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카멜의 해변가에서 그녀의 인생에 
    등장하여 이제는 아침식사로 찐 계란과 크로와쌍을 만들고, 게다
    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고   미안해 하다
    니....... 그들은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었고 아침에도 거의 그랬
    다. 그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줬고 그녀도 그에게 그렇게 말
    했다.
      디나는 남편과 18년 동안이나 함께 했던 자신의 침대가 아닌 그
    의 침대에서 깨어난 것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
    늘 아침에는 남편을 탓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행복과 젊음을 느꼈
    고 사랑받는 느낌에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원했던 모든 
    것을 벤과 함께 나누어가졌던 것이다. 그녀가 황홀한 미소를 지으
    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크로와쌍을 집으며 한숨을 지었다.
      [경고하겠는데요, 신사 양반. 나를  이렇게 버릇없는 사람으로 
    만들다가는 일주일도 못되어 후회하게 될 걸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요, 절대로.] 또렷한 어조로 그가 재밌다
    는 듯이 말했다. 갑자기 그가 다시 어른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게 될 거예요.] 그녀는 빵을 먹으며 행복에 겨운 듯 
    눈을 지긋이 감았다. [나는 매일 아침 크로와쌍, 삶은 달걀, 카페
    오레를 기다리게 될 텐데.......] 그녀가 다시 눈을 떴다. 그들의 
    얼굴에는 밝고 장난기가 가득 넘쳤다.
      [또 매일 당신이 사무실로부터 집으로 와서 머물러 있게 되기를 
    기대할 거예요. 마치 우리가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아뇨, 당신은 그렇지 않을 거요.]
      [어머나. 아니라구요, 왜요?]
      [왜냐하면 내일 아침에는 당신이 아침상을 차릴 차례이기 때문
    이지. 민주적으로 말이오. 디나, 우리 여기서 함께 살아요. 번갈
    아가며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말이오. 우리 서로를 버릇없게 만
    들어버리자구. 서로에게 달걀을 준비해 주자구요.] 그는 몸을 기
    대며 그녀에게 마지막 키스를  했다. [나는  프라이한 달걀이 좋
    소.]
      [명심할께요.] 그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가 일어섰다. [당신에게 일깨워줄 거요.]
      [좋아요.] 그녀는 아주 행복하고 편한 마음으로 아침을 먹었다. 
    그녀는 비록 수년 간은 아니지만, 몇 개월쯤 그와 함께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노란빛의 찻잔으로 카페오레를 홀짝
    일 때, 그가 그녀의 알몸을  행복에 겨워 바라보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모든 것이 편안하고 
    안락하며 실제적이었다. 그녀의 집에서 길들여졌던 형식이나 의식
    과는 전혀 다른 생활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벤의 생활방식을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 안의 노란 찻잔이 부드럽게 느
    껴졌다. 시어머니가 보내준 강렬하고 단단한 청색 꽃모양의 리모
    쥬와는 전혀 달랐다.
      [오늘은 뭘 하고 지내겠소?]
      [목욕부터 해야겠어요.] 그녀가 코를 찡긋거렸다. 둘은 웃었다.
      [난, 당신의 그 모습이 좋은데.]
      [이런 짓궂은 장난꾸러기!]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두 팔을 
    그의 어깨에 올렸다. 그가 다시 키스했다.
      그가 팔을 내리면서 아쉬운 듯 [아이쿠, 결국 그 점심을 취소해
    야할 것 같군.]
      [훗날이 있어요. 혹은] 그녀는 그날  밤에 자기도 같이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기 전에 그의 눈에서 이미 대
    답을 볼 수 있었다.
      [디나, <혹은>이 아니오. 5시에 화랑에서 끝날 거요. 저녁에 조
    용한 곳에 함께 갈 수 있을 거야. 마린 근처라면 어떨까?]
      [좋아요.] 그녀가 함빡 웃으며 베개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근심의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뭐가 잘못 
    됐소?]
      [내가 아니라, 저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의문이에요. 
    밖으로 나간다는 것. 당신편에서 어떤 어려운 상황을 겪게되지나 
    않을까 해서요.] 그녀에게는 또 다른 삶이 있음을 그에게 일깨워
    야 했다. 그녀가 완전히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빌린 
    몸인 것을, 마치 외국 박물관으로부터 빌려온 걸작품일 뿐, 결코 
    그의 것이 아니어서 자신의 화랑 벽에는  걸어놓을 수 없는 것처
    럼. 그러나 그들이 함께 할 때 그녀는 매우 값진 존재였다.
      [우리가 함께 나가면 당신이 불편하게 될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요.]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커다란 초록
    빛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렇지 않소.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며, 어떻
    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괜찮을  거요.] 벤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가 조
    용히 손을 잡고 다시 침대 위에 앉았다.
      [훗날 당신에게 해로울 일은 하고 싶지 않소.]
      [당신은 그렇지 않을 거예요. 걱정 말아요. 모든 것이 잘 될 거
    예요.]
      [하지만 진심이오, 디나. 훗날 나와의 사랑때문에 당신이 고통
    을 당한다면 이 시간을 증오하게 될 거요.]
      [우리 둘다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지 않아요?]
      그가 놀란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오?]
      [내 말은 지금이 내 생애 중  가장 아름다운 여름이 될 거라는 
    거예요. 당신도 그렇기를 바라구요. 이 여름이 끝나, 다시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우리 둘다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지 않
    아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 안에 꼭 쥐고 있던 그녀의 단
    아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결심한 것을 후회하지 않겠소?] 디나는 맑게 웃으며 머
    리를 뒤로 젖혀 그의 뺨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요.] 그런 다음 그녀가 다시 심각해졌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훗날 고통받지 않을 거라면 우리는 미쳐버리
    고 말거예요.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다면, 아름다운 것이라면, 정
    말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고통받게 될 테구요. 우리는 그 고
    통을 기대해야 할 거예요.]
      [그래요, 나로서는. 하지만.......]
      [하지만 뭐예요? 나도 고통받길 원치 않아요, 내가 그것을 느끼
    길 원치 않나요, 혹은 당신을 사랑하길 원치 않나요? 근심하지 마
    세요, 벤. 그럴 가치가 있어요.]
      [그건 알고 있소. 그러나 신중해야 하오. 당신과 마르크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
      디나는 마르크라는 이름을 듣자 몸이 오싹해졌다. 벤은 다시 그
    녀에게 몸을 기울여 짧게 키스하고는 일어섰다. [하루 아침의 대
    화로는 충분한 것 같지?] 그는 여름이 끝날 때 일어날 일을 생각
    하기 싫었다. 그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금방 시작되었을 뿐인데. [5시에 어디에 있을 거요?] 그는 
    문쪽에서 어깨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집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내가 데리러 갈까?] 그가 잠시동안 의심스럽게 보였다.
      [여기서 만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그녀는  잠시 후에 그 작은 
    독일제 차가 출발하는 소리를 들으며 방 안을 걷고 있었다. 그리
    고 벗은 채로 침대 끝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피식 웃었다. 그녀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얼
    마나 사랑스러운가, 얼마나 신사적이며 신중하며 현명한가, 그는 
    얼마나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는가.......  그는 웃기를 좋아하고 
    터무니없는 얘기를 즐겼고 끊임없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만들
    어냈다.
      그토록 소중한 지난 밤에는 그의 어렸을  적 얘기로 몇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아이적 앨범을 그녀에게 보여줬다. 거기에는 
    그의 부모, 누이,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극작
    가, 소설가였다. 그 앨범이 아직도 마루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안락하고 작은 집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카멜에 있는 별
    장과는 달랐다. 카멜에 있는 집은 더 크고 해변과 같은 모래빛의 
    부드러운 색깔로 되어 있었으며 재목은 흰색, 베이지색, 회색, 담
    황색들이었고 카페트는 부드러운 회색빛을 띤 흰색이었다. 그 도
    시의 집은 언덕 위에 높게 자리잡은 작은 <장신구>였고 거기에는 
    그림과 책들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  거실에는 붉은 가죽으로 된 
    두 개의 푹신푹신한 카우치가 놓여  있었고, 주위에는 잘 정돈된 
    책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예술에 관한 것이었다. 벽은 부드러운 베
    이지색으로 되어 있어 그가 걸어둔 두 개의 그림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고, 마루는 오랫동안 광택을 낸 목재로 되어 있었다. 카페트
    는 동양제였으나 그것은 수년 전에 마르크가 이란에서 가져온 것
    만큼 좋지는 않았다. 벤의 작은 집은 전시실이 아니었다. 그곳은 
    포근함과 아름다움이 있는 안식처였다.  예술가나 친구들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그곳에는 그가 프랑스에서 발견한 
    황동 난로받침이 있는 중고 벽난로가 있었고, 한쪽 구석에 베이스 
    바이올린이 기대어져 있었다. 그는 작은 피아노와 기타를 갖고 있
    었고 말끔하고 오래된 영국제 책상과 세잔느의 청동 흉상도 갖고 
    있었다.
      그의 집은 전체적으로 안온한 분위기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우아하고 고풍스러웠다. 그 물건 중에는 값어치 있는 것도 있었으
    나 대개 그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그 값어치를 인정할 수 있
    는 것들이었다. 그 거실은 바로 벤의 모습이었다. 예쁘고 조그마
    한 노란빛의 침실처럼. 만 위로 동쪽을 향해 있어서 아침의 햇살
    처럼 밝은 이 침실의 자랑은 작은 테라스에 활짝 피어 있는 꽃나
    무들과 빛바랜 캔버스 의자가 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부엌과 여
    분의 방이 있는데 그곳에는 희귀한 몇 점의 그림, 많은 파일, 책
    상 등과 같은 잡동사니를 쌓아놓았다. 그 여분의 방에서는 편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도 그의 차처럼 편리하나 사치스럽
    지는 않았다. 디나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그에 대해서 다시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는 편안함과 더불어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 두 가지가 적절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디나는 그의 청흑색 실크 실내복을 가볍게 걸치고 테라스
    로 올라가 빛바랜 캔버스 의자에  앉았다. 그것은 예전에는 밝은 
    앵무새 초록빛이었으나 이제는 햇빛에  바래 매우 엷은 라임빛이 
    된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동안 다리를 쭉 펴고 앉아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그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벌써 
    화랑에 갔을까, 점심을 들고 있을까, 샐리와 함께 수표에 싸인하
    고 있을까, 구스타프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그녀는 그의 삶의 
    방식을 좋아했다. 그가 하는 일, 주위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 그
    녀를 다루는 방법을. 아침식사를 교대로 준비하자는 그의 생각까
    지도 좋았다. 그는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그것은 매우 유
    쾌한 삶의 방식인 것 같았다.
      디나는 옷을 늘어뜨려 앞자락이 조금 열리게 하였다. 그리고 태
    양의 밝은 온기를 느끼며 미소지었다. 잠시 후 그녀는 집으로 돌
    아가 그녀의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
    니다. 디나는 태양 아래에서 고양이처럼 앉아 벤을 생각하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듀라스 부인.] 해슬러호텔의 도어맨
    이 샹딸과 마르크에게 격식을 차려 인사를 했다. 그들은 그 호텔
    을 떠나면서 그에게 적정한 것 이상의 팁을 줬다. 호텔 밖에는 벌
    써 차 한 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가방은 트렁크 안
    에 실려졌고, 운전기사는 그들을 공항까지 모시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샹딸은 공항으로 가는 동안 이상하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
    내 마르크가 창문으로부터 그의 시선을 떼어 그녀의 눈동자를 탐
    색하였다. [꼭 그렇게 하고 싶어.]
      [물론이에요.]
      그러나 그는 염려스러웠다. 예전의 그녀는 이렇게 완고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상 레모나 리비에라의 다른 도시에 숨어 있으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녀는 파리로 돌아가 그가 캡 드안티베스의 가족
    을 만나는 동안 그곳에서 기다리고 싶어했다. 그러면 그녀의 다른 
    애인과 주말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애인은 그녀에게 구혼했
    던 그 남자일까? 마르크의 마음 속에서는 그럴 가능성에 대한 위
    협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살인적인 질투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
    꼈다.
      [그럼, 온 주말을 뭘 하며 지낼 계획이야?] 그의 목소리는 단호
    하고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녀는 차가 혼잡한 거리를 헤치며 나아
    갈 때 그의 시선을 태연하게 되받았다.
      [나는 사무실로 들어갈 거예요. 모든 것을 마리 앙게의 어깨에 
    떠넘길 수는 없다구요. 우리가 여행을  할 때마다 그녀의 무릎에 
    쌓아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구요. 내가 시간을  낼 수 있을 때는 
    그곳에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하는 것이 당연
    하죠.]
      [사업에 대한 당신의 열정에 감동하겠어.  예전에 없던 새로운 
    일인걸, 그렇지 않아?] 샹딸은 돌려서 이야기 하는 적이 거의 없
    었다. 그러자 그녀의 억양도 그에 똑똑히 대응했다.
      [아뇨, 새롭지 않아요. 당신은 자주 오지 않아서 모를 텐데요. 
    당신은 내가 뭘 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어제, 당신이 한 말을 그냥 흘려보낼 수가 없었어, 샹딸.]
      [누가 나에게 청혼해 왔다고만 했지 받아들였다고 말하지는 않
    았잖아요.]
      [태연하군. 하지만 그가 두 번의  점심식사와 티파티를 전제로 
    부탁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로 그보다 더 잘 아는 사
    이일 것같은 걸?] 샹딸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르크 에두아르가 질
    투심을 억누르며 그녀의 얘기를 분해하고  있을 때, 샹딸은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제기랄! 샹딸은 나에게서 뭘 기대하는 걸
    까? 그는 예전보다 자주 그녀와 함께 할 수 없다. 그리고 구혼도 
    하지 못할 처지다. 그에게는 디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샹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걱정마세요.]
      [고마워.] 마르크는 한숨지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을 때 자
    신의 어깨가 축 쳐지는 것 같았다. [당신을 사랑해. 제발, 날 이
    해해줘.]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견디기 쉽지 않다는 것, 나도 알아. 나도 마찬가지니까. 하지
    만 최소한 당신과 필라, 나의 어머니 간에 어떤 경쟁심을 느끼지
    는 말아줘. 그건 공정치 못해. 난 그들도 만나야 해.]
      [그래요. 내가 못난 여자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서글프게 느껴
    져 그는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좀더 이성적이지 못하다면 
    그의 부정을 인정하고 집 안으로 그녀를  끌어들일 수도 있을 텐
    데.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미안해!]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는 끌어당겼다. 전혀 저항이 없었다.
      [우리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볼께, 됐지?] 그녀는 아무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히자 그의 가
    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단지 며칠 동안 뿐이야. 일요일 밤에 집에 있을께. 그리고 아
    테네로 가기 전에 맥심에서 저녁을 들자구.]
      [우리, 언제 떠날 거예요?]
      [요일이나 화요일.] 그녀가 다시 끄덕였다. 그는 공항으로 가는 
    길 내내 그녀를 꼭 안고 있었다.
      
      디나는 문에 열쇠를 꽂고 잠시 멈춰서서 마가레트가 있는 기척
    이 나는지 살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마가레트는 돌아
    오지 않은 것이다. 그럴 수 있을까,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았나, 혹
    은 몇 달 아니면 몇 년, 지난 밤에 처음으로 벤과 사랑하기 위해 
    나갔을 뿐이란 말인가, 집을 떠난 지 단지 16시간밖에 지나지 않
    았단 말인가?
      현관문을 닫는 그녀의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벤의 집에서 목욕
    하고 옷을 입을 때는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그녀는 테라스 위에서 
    놀고 있던 두 마리의 새를 지켜보았고,  그의 레코드 중 한 개를 
    틀고 침대를 정리했다. 그녀가 그곳을 떠날 때쯤에는 부엌에서 큰 
    과일 바구니 안의 서양 오얏을 쥐었었다. 마치 그곳에서 수년 동
    안 살아왔고 그것이 그의 것이며 동시에 그녀의 것인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그런데 이제 다시 이곳에 있는 것이다. 마르크의 집에, 듀라스 
    부부의 집에. 그녀는 은제 사진틀 속에 있는 그들 부부의 사진을 
    힐끗 보았다. 그것은 캡 드안티베스에서 첫 여름을 보낼 때 찍은 
    것이다. 저것이 자신이란 말인가? 그녀는 백포도주 잔을 손에 쥐
    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남편은 큰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그의 
    어머니와 잡담을 하고 있다. 그것을 보자 새삼 부자연스러워 보였
    다. 이 방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디나는 연두빛 카페트가 깔린 거
    실 입구에 서있었다. 너무나 차가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이것은 나의 집이다. 이곳이 내가 속한 곳이다. 지난 밤 
    낯선 남자와 함께 보냈던 언덕 위의  작은 집은 내 집이 아니다. 
    도대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샌들에서 비끌어지듯 발을 빼내어  한기가 도는 연두빛 
    방에 맨발로 들어와 카우치에 앉았다. 그녀는 무엇을 했던가? 그
    녀는 18년 만에 처음으로 마르크를 속였는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너무나도 평범하게 행동했다. 밤이 새도록 그녀는 마르크라는 사
    람의 존재는 잊고 마치 벤과 결혼한 것처럼 보냈다. 또 다른 은제 
    사진틀 속에 있는 필라의 작은 사진에 손을 뻗었다. 순간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필라는 테니스복을 입고 있는데, 이 사
    진은 남부 프랑스에서 찍은 것이었다. 디나는 그것을 멍청히 바라
    보고 있었다. 벨이 줄기차게 울리는 데도 들을 수 없을 만큼. 2,3
    분이나 지난 후에야 누군가 문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깜
    짝 놀라 일어나서 필라의 사진을 내려놓았다.
      디나는 밖 나가며 두근거림을 억제할 수 없었다. 누굴까, 누가 
    알아챘을까, 벤이라면 어떻게 하지? 지금은 그를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이 한 일은 잘못된 일이었다. 그녀는 말해야 한
    다. 멈추자고, 더 늦기  전에. 그녀의 짜여진  삶이 파괴되기 전
    에...... 그전에.......]
      [누구세요?]
      한 목소리가 물건 배달을 왔다고 말했다. 마지못해 그녀가 문을 
    열자 한 배달소년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주문한 것이 없는데] 
    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는 알아차렸다. 벤으로부터 꽃이 온 것이
    다. 잠시 그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다시 보내서 지난 밤에 아무일
    이 없었고 다시는 없을 것으로  가장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팔을 뻗어 꽃다발을 받아 들고 카드를  뽑아 읽기 전에 잠시동안 
    쥐고 있었다.
      
      서둘러요, 내 사랑. 5시에 만납시다.
      당신을 사랑하는 벤으로부터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벤. 그녀의 눈동자가 그의 글씨를 한자
    한자 되짚어 읽으며 눈물이 맺혔다.  당신을 사랑해요, 벤. 이미 
    늦었다. 그녀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디나는 자신의 방으로 들
    어가 작은 가방을 꾸려 스튜디오로  갔다. 그것이 가져갈 전부였
    다. 한 두 개의 캔버스, 어느 정도의 물감, 이것으로 얼마간 해낼 
    것이다. 그녀는 며칠 이상은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전부
    였다.
      그녀는 마가레트에게 친구와 지내겠다는 메모와 전화번호를 적
    어두고 5시 30분에 그의 집에 도착했다. 그녀는 재규어를 한 블럭 
    떨어진 곳에 주차시켜 놓고 문을 향해 급히 걸어갔다. 도대체 나
    는 지금 뭘하고 있는 걸까? 그녀가 벨을 울리기도 전에 그가 미소
    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한쪽 팔을 덥썩 잡으면서,
      [들어와요. 몇 시간 동안 당신을 기다렸소.] 그가 그녀 뒤로 부
    드럽게 문을 닫았다. 잠시동안 그녀는 그곳에 서 있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 눈을 꼭 감은 채.
      [디나, 괜찮소?] 그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그가 팔로 그녀를 감싸안았다.
      [두려워요?] 디나가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벤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그래요.]

      
                                  10
      
      
      [자아, 엉덩이를 들라구. 이제 당신  차례야.] 벤이 그녀의 등 
    뒤에서 허리쪽을 살짝 찔렀다. 그러자 디나가 신음소리를 냈다.
      [그게 아니라, 어제는 내가 아침을  차렸잖아요.] 디나가 베개 
    밑으로 기어들며 얼굴을 덮었다.
      [당신이 거짓말장이라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알기나 
    해? 내가 어제 아침, 이틀 전, 그  전에 4일 동안 아침을 차렸으
    니, 규칙대로라면 당신이 연달아 세 번을 차려야 한다구.]
      [거짓말이야!] 그녀가 깔깔댔다.
      [맙소사, 정말이야. 내가 말했잖아, 이건 민주적이라구!] 그도 
    따라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그녀의 벗은 몸을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민주주의가 싫어요!]
      [설마. 나는 커피, 후렌치 토스트, 달걀을 원해.]
      [내가 하지 않으면?]
      [그러면 오늘밤 당신은 테라스에서 잠을 자야 하지.]
      [알았어요. 마가레트를 데려와야 하는 건데.]
      [삼각 관계라? 매혹적으로 들리는데. 마가레트는 요리를 할 줄 
    아오?]
      [나보다 잘 하죠.]
      [좋아, 오늘 그녀를 오도록 합시다.]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침
    대에서 몸을 굴렸다. [그동안 당신의 엉덩이를 들어 나에게 뭔가 
    먹여줘요.]
      [당신은 버릇이 나빠졌어요.]
      [난 이런 식이 좋거든.]
      [당신은 뚱뚱해질 거예요.] 그녀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살찐 것
    과는 거리가 먼 그의 몸을 보고 있었다. [게다가 달걀은 당신에게 
    좋지 않아요. 거기에는 탄수화물이나 콜레스테롤, 또 염색체같은 
    것들이 함유되어 있고 또.......]
      그가 손가락을 들어 부엌을 가리키며 짐짓 찌푸려 보였다. 디나
    가 일어섰다. [당신이 미워요.]
      [알아.] 웃으면서 그녀가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두 주일간 함께 지냈다. 일생으로 봐서는 한 순간에 불
    과하다. 그들은 함께 요리와 잡일을 하였다. 일주일에 두 번, 우
    습게 생긴 작은 키의 늙은 여인이 와서 세탁을 해줬다. 그러나 벤
    은 스스로 그런 일을 하고 싶어했고, 디나도 그와 함께 그런 일을 
    하는 것의 즐거움을 깨달았다.
      함께 시장에 가고 저녁상을 차리고 황동제품에 윤을 내고 테라
    스에 있는 화분의 잡초를 뽑았다. 그녀는 그가 새로운 경매를 위
    한 카탈로 그를 짜는 것을  지켜봤고, 그는 그녀가 스케치하거나 
    파스텔과 오일로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디나가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남에게 보인 것은 그에게가 
    처음이었다. 그들은 함께 추리소설을 읽고 텔리비전을 봤으며 드
    라이브를 즐겼다. 또, 함께  한밤중의 해변가를 걸었으며 카멜에 
    있는 그의 집으로 내려가 밤을 지내기도 했다. 그녀는 새로 열게 
    된 그의 화랑에 갔고 거기서 신진 예술가들을 만나 그의 부인으로
    서 행세하였다. 그것은 마치 이전에 아무것도 없었고 앞으로도 아
    무것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에게는 함께 공유하는 시간
    과 함께 공유하는 삶이 존재할 뿐이었다.
      디나가 그의 아침식사와 신문을 들고 들어왔다. [알고 있어요?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말예요. 정말이에요.]
      [당신은 민주주의가 당신을 지치게 할까봐 두려운가 보지?]
      [그런가 보죠.] 그녀가 앉으면서 조그맣게,  행복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오랫동안 나나 타인을 돌본 적이 없어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의무를 져야 하지만 몇 년간 누구를 위해서 아침을 
    차린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나는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지. 하녀같은 이들에게. 
    근본적으로 매우 단순한 삶을 좋아하지.]
      그녀는 씨익 웃으면서 그가 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샀던 굉장히 
    비싼 그림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치스러운 것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로서는 어렸을 때 많이 봐온 일이다. 할아버지 집에서 그리고 
    아버지 집에서, 그는 샌프란시스코 언덕 위의 작은 집에서 더 행
    복했고, 카멜의 허세 없는 별장에 있을 때 더 행복했다. 그가 몸
    을 기울여 그녀의 콧방울에 키스하고 다시 베개에 기대어 앉아 아
    직 쟁반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가 차린 아침상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사랑해, 디나.] 그가 짖궂게 미소지었다. [자, 언제 화랑
    에 싸인할 거요?]
      [또 그 얘기예요? 이 모든 것이 그것 때문이었군요. 그럴 줄 알
    았다구요, 알았어욧!] 그녀가 그의 머리를 향해 던진 베개를 그가 
    막아내며 웃었다. [보통 사람들이 신진 예술가들에게 계약서에 서
    명하도록 하기 위해 하는 일들이라!]
      [그럼, 된 거야?]
      [당연히 아니예요! 그보다 더 잘 해야 할 거예요!]
      [더 잘?] 그가 그녀를 의아한  눈빛으로 보면서 아침상을 옆에 
    내려놓았다. [도대체 <더 잘>이란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이지? 왜 
    내가.......]
      그가 그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에 가까이 대며 손을 그녀에게 
    뻗었다.
      [더 잘......?] 그들은 이제 서로 웃었다. 반 시간 후에야 그들
    은 엉킨 몸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 이제 더 좋았어?] 벤이 
    물었다.
      [무척.]
      [좋아.] 그가 누운 채로 행복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서명할 거요?]
      [글쎄....... 그녀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대며 가볍게 하품을 
    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마  당신이 그것을 다시 훑어보기만 
    한다면 또 모르죠.......]
      [디나!] 그가 몸을 굴려 그녀의 몸을 덮쳤다. 두 손을 위협하듯 
    목에 대며 말했다. 예약에 서명해 주길 원한다니까!] 그의 목소리
    가 상기되었다.
      그녀가 달콤하게 미소지었다. [좋아요.]
      [뭐라구?] 그가 놀란 얼굴로 일어나 앉았다.
      [좋다고 했어요, 좋다구!]
      [그게 정말이오?]
      [그래요. 아직도 나를 원하세요? 화랑을 위해서 말이에요.] 그
    녀가 웃으면서 의아해 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마 이 모든 것들
    이 그의 게임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는 그녀가 미치지나 않았나  하고 바라보았다. [물론 
    아직도 당신을 원해요. 이 괴짜! 15년  동안 내가 발견한 예술가 
    중에서 당신은 가장 탁월한 신진 미술가란 말이오!]
      그녀가 다시 몸을 굴려 고양이같이  조그맣게 미소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지난 15년 동안 당신의 <손 안에 있던> 예술
    가는 누구죠?]
      [내 말의 뜻을 알잖소. 구스타프같은 사람 말이오.] 그 말에 둘
    다 웃었다. [진심이오, 디나? 계약에 서명할 거요?] 그녀가 끄덕
    였다.
      [그럴 필요 없소, 알잖소. 당신의 작품을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해도 당신을 사랑해요.]
      [알아요. 몇 주일간 당신이 일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래서 더 
    참을 수 없어요. 나도 그것의 일부분이  되길 원해요. 내 자신의 
    전시회를 원해요.] 그가 웃었다. [당신 자신의, 응? 좋아요, 당신
    이 이겼어요. 언제?]
      [당신이 괜찮을 때는 언제나.]
      [샐리와 함께 스케줄을 점검하겠소. 몇 주일 지나면 가능할 거
    요.]
      그는 함빡 웃으며 저녁식사를 급히 해치웠다. 그의 표정은 마치 
    그녀가 방금 자신의 아들을 낳아주기라도 한 듯 기쁨에 들떠 있었
    다.
      [다시 만들어 드릴까요.] 그가 차디찬 후렌치 토스트를 삼키는 
    것을 보면서 디나가 물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당신의  그림을 갖고와서 나에게 보이는 
    일이오. 지금부터 내가 아침상을 볼  거요. 매일, 아니 일주일에 
    다섯 번. 당신은 주말에 하는 거요. 어때?]
      [좋아요. 양보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안다구요.] 
    그녀가 시트를 턱쪽으로 끌어당겼다. [벤,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전체에 
    의심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후퇴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입 다물어요. 다시 시작하면 다음 주에  전시회를 열 수 있을 
    거요. 당신은 굉장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디나, 기가막힐 정도
    라구. 당신은 이 도시에서 최고의 젊은 화가요. 아마 로스앤젤레
    스 전체에서 최고일 거요. 그냥 가만히 있어요. 내가 전시회를 열
    도록. 됐지?]
      [좋아요.]
      잠시동안 그녀는 조용했다. 남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
    침내 전시회를 열게 됐다고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아냐, 그
    에게 알릴 의무는 없잖아? 그는 수년 전에 예술가로서의 꿈을 아
    예 제쳐놓으라고 그녀에게 말했었다. 듀라스 부인은 <히피 화가>
    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로선 그런게 아니었다. 제
    기랄, 그에게 무슨 권한이 있어서.......
      [뭘 생각하고 있소?] 벤이 아직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요.] 그녀가 미소지었다. [남편에게 어떻게......? 어
    떻게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래야 하오.] 벤이 순간적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당신이 듣기에는 이상하게 들릴 테지만, 
    그에게 숨기고 싶지 않아요. 꼭 말해야 된다는 것보다도.]
      [이상하게 들리는군. 하지만 당신의 말뜻을 이해할 것 같소. 그
    는 전시회에 대해 좋아하지 않겠죠?]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에게 말을 해야죠.]
      [만일 그가 반대한다면?] 벤은 상심해 보였고 디나는 눈을 내리
    깔았다.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둘다 그가 반대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마르크는 조용히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샹딸 없이 떠난 건 
    이번이 두번째 주말이었다. 하지만 남부 프랑스에서 가족과의 주
    말을 함께 보내는 것이 그의 의무처럼 되어 있었다. 전에는 항상 
    그녀도 이해했었다. 왜 이제와서 새삼 문제를 제기하는 걸까? 금
    요일, 그가 떠날때 그녀는 거의 말을 안했다. 그는 문 앞에 가방
    을 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집에 없었다. 하지만 벌써 9
    시가 넘지 않았는가. 도대체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밖에? 밖이라
    면 누구와? 그는 카우치에 앉으면서 피곤에 지친 긴 한숨을 내쉬
    었다. 주위를 흘끗 보았다. 그녀는 메모도 남겨놓지 않았다. 손목
    시계를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전화기로 손을 뻗쳤다. 샌프란시스
    코는 지금 정오일 테니 디나에게 필라의  소식을 알려줄 수 있는 
    좋은 시각이었다. 그는 직접통화 식으로 다이얼을 돌리고 신호음
    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그는 일주일간 그녀에게 아무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 바빠서 전화할 수 없었고, 한 번 했을 때는 마
    가레트가 디나는 외출 중이라고 했다.
      [여보세요?] 디나는 스튜디오 계단을 급히 올라와 허겁지겁 전
    화를 받았다. 벤이 방금 그녀를 데려다준 후였다. 그녀는 집에 와
    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스물다섯 점을 챙기기로 약속했
    다. 그것때문에 며칠간 그녀는 바쁠 터였다. [네?] 그녀는 아직도 
    헐떡이며, 처음에는 장거리통화 특유의 윙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했
    다.
      [디나?]
      [여보!] 그녀는 그가 과거로부터 온  유령인 듯 놀라 전화기를 
    응시했다.
      [그렇게 놀랄 건 없어. 우리가 통화한 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
    았는데.]
      [아, 네. 미안해요. 난 단지...... 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
    어요.]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소?]
      [아니예요, 물론 아니죠. 필라는 어때요?] 그녀의 목소리는 무
    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모호하게 들렸다. [요즘 그 애
    를 봤어요?]
      [바로 오늘 만났어. 방금 안티베스에서 떠나는 길이야. 그 애는 
    잘있어.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라더군.] 그것은 거짓말이
    었다. 하지만 그는 가끔 거짓말을 했다. [어머니도 당신에게 안부 
    전하셨어.]
      디나는 이 말에 미소지었다. [필라에게 별일 없는 거죠?] 마르
    크와 말을 하게 되자 갑자기 그녀의 의무가 뇌리에 떠올랐다. 벤
    과 있을 때는 그와 자신만을 생각했었다. 그녀의 그림과, 그의 화
    랑과, 함께 보내는 밤, 좋은  시간들만을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여성이 되고 소녀가 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역할을 생각하도록 하였다. 잠시동안 그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응, 별일 없었어.]
      [오토바이를 사지는 않았겠죠?] 긴 침묵이 흘렀다. 너무 긴.
      [디나.......]
      [마르크, 샀어요?] 디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무래도, 그랬
    군요! 그럴 줄 알고 있었어요.]
      [오토바이에 대한   얘기가  아니야,  디나.  그보다,   그보다 
    음.......]
      그는 할 말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피곤하였다. 그런데 샹딸은 
    어디에 있는 거야? 9시 45분인데. [정말, 당신은 걱정할 필요 없
    어. 그 애는 괜찮을 거야. 그 애가 타는 걸 봤어. 매우 주의깊게 
    신경써서 타더군. 어머니도 그 애가  조심하지 않으면 못타게 할 
    거야.]
      [당신 어머니는 필라가 집 밖으로 타고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해
    요. 어머님은 당신만큼 신경쓰실 수 없다구요. 마르크, 당신에게 
    분명히 말하겠는데요.......] 눈물이 그녀의 두 눈을 시리게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그들에게 진 것이다. 번번히 진다.
      [속상해 죽겠어요, 당신은 왜 항상 내 말은 들은 척도 않는 거
    죠.]
      [진정해. 필라는 괜찮다니까. 그건 그렇고, 당신은 뭘하고 지냈
    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대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
    을 알고 있었다. 필라와 오토바이 얘기는 이로써 끝이 난 것이다.
      [별로요.] 디나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한 번 걸었는데 당신은 외출 중이더군.]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집에서 일할 수는 없어?] 마르크의 목소리에는 초조함과 당혹
    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디나가 눈을 감았다. [내가 일하기 편한  곳을 한 군데 찾았어
    요.]
      그녀는 벤을 생각하자 가슴이 울렁임을 느꼈다. 마르크가 눈치
    를 채면 어떻게 될까? 둘이서 있는  걸 누군가 봤다면 어떻게 하
    지? 만일.......]
      [우리가 없는데도 집에서 그리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
    군. 그리고 왜 이제와서 새삼 일에 열광적인 거지?]
      [열광적이라니요? 평소처럼 그리고 있을 뿐이에요.]
      [디나,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
    조는 갑자기 그녀의 얼굴을 철썩 갈기는 것 같았다.
      [나의 일을 즐기고 있어요.] 그녀는 그를 화나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꼭 <일>이라고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는 
    한숨을 내쉬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다음 달에 화
    랑에서 전시회를 갖게 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반항조로 울
    렸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더욱더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
    는 대답이 없었다.
      [당신이 무엇을?] 하고 그가 되물어왔다.
      [화랑에서 전시회를 갖는다구요.]
      [알았어.]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노여움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잠시동안 그를 증오했다. [우리는 이번 여름에 보헤미안적인 계절
    을 보내고 있군. 그렇지? 글쎄, 어쩌면 그것이 당신에게 좋을지도 
    모르지.]
      [아마 그럴 거예요.] 빌어먹을...... 넌 결코 이해하지 못해!
      [꼭 전시회를 열어서 당신을 내보여야겠어?  그렇게 안하면 안
    돼? 당신의 다른 스튜디오에서 일할 수 있잖아. 그쯤 해두라구.]
      고맙군요, 파파! [그 전시회는 저에게 중요해요.]
      [그럼 일단 보류하라구. 돌아가서 의논해 보지.]
      [마르크......] 나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됐어요...... [난, 
    전시회를 열 거예요.]
      [좋아. 그저 가을까지만 미루란 말이야.]
      [왜요, 집에 와서 못하게 설득시키려구요?]
      [그렇지 않아. 그때 얘기하잔 말이지.]
      [기다릴 수 없어요. 이미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 온 거니까.]
      [잘 알잖아, 여보. 당신 너무  비이성적인 것 같아 보이는군.] 
    자신을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그를 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건 일방적인 대화였다. 자신을 필라와 마찬가지인 것처럼 대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옳을지도 
    모르죠. 당신에게 한 마디 할까요. 아테네 건은 당신이 이겼어요. 
    내 예술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하겠어요. 그리고 가을에 만나
    요.]
      [당신의 그렇게 말하는 태도는 나의  사업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가?]
      [아아, 그래요.] 그녀는 지난 세월보다 훨씬 용감해져 있었다. 
    [아마, 우리 둘다 서로에게  당장 필요한 것을 해야  할 것 같아
    요.] 오,  맙소사.  넌 뭘하고   있는 거야?  그에게 말하고   있
    어......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좋아, 어떤 경우든 당신은 남편의 말을 들어야 해. 당신의 남
    편은 이제 수면을 취해야 하니까 잠시동안 이 모든 것을 젖혀두고 
    쉬지 않겠어? 며칠 후에 얘기하자고.  됐어? 그동안 전시회는 안
    돼. 이해됐겠지?]
      그녀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졌다. 적어도 그녀는 아이가 아니었
    다.
      그런데 그는 항상 똑같이 대했다. 필라는 오토바이를 갖게 됐고 
    디나는 전시회를 여는 것에 관해 그와 의논해야 할 것이다. <내가 
    시간이 있을 때> 그의 방식, 항상 그의 방식대로였다. 이젠 더이
    상 안돼. [알아들었어요, 마르크. 하지만 동의할 수 없어요.]
      [당신은 결정할 수 없어.]
      그렇게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그답지 않았다. 그가 매우 피곤한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디나는 깨달았다.  그도 그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신경쓸 것 없어.] 그가 말했다. [미안해, 다음에 얘기하지.]
      [좋아요.] 그녀는 조용히 스튜디오에 서서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잘 자.] 그리고 사라졌다. 굳 나잇! 이번에는 그
    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전시회
    는 안돼.> 그 말이 머리에서 울렸다. 전시회는 안돼!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에게 반항하면 어떻게 
    될까, 어찌됐든 전시회를 연다면?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용감한가, 못할 이유
    가 있나? 그는 멀리 있는데. 그리고 그녀에게는 벤이 있다. 그러
    나 이것은 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녀
    는 오랫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일평생이 저 벽에 맞대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캔버스에 숨겨져서. 지금 그녀가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결코 보지 못할 캔버스에 
    가려져서. 마르크는 그녀를 멈출 수 없고 벤은 그녀를 충동질 할 
    수 없다. 그녀는 이제 해야 한다. 혼자의 힘으로.
      
      마르크는 수화기를 놓고 다시 시계를 봤다. 거의 10시에 가까워
    져 있었다. 디나와의 통화도 그의 신경을 누그려뜨리지는 못했다. 
    제기랄! 그는 오토바이에 대해서  말해버렸다. 그럴 뜻은 없었는
    데. 그리고 그녀의 열정적인 전시회. 도대체 왜 그녀는 그따위 일
    을 포기하지 않는 거지, 그리고 대체  샹딸은 어디에 있는 거야? 
    스카치를 퍼마시는 그의 내부를 질투심이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했
    다. 벨소리가 들리자 문으로 달려가 1인치쯤 열었다. 옆 집의 작
    은 노인이었다. 무슈 모티에. 샹딸이 말했지. 그는 좋은 사람이라
    고. 그는 딸과 하녀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는 변호
    사였으나 이제 여든 살이 되었다. 그는 샹딸을 귀여워 했고 한 번
    은 샹딸에게 꽃을 보내기도 했다.
      [무슨 일이세요?] 그가 몸이 불편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마르크는 
    의아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가 이 시각에 문 앞에 있는 걸
    까?
      [내가 잘못됐나요?]
      [난...... 아니, 이런...... 애석한데. 똑같은 것을 묻고 싶은
    데. 아가씨는 어때요?]
      [아주 좋아요, 고맙습니다. 오늘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 말고는
    요.]
      그는 노인에게 미소지었다. 그는 틀림없이  그의 딸이 만든 것 
    같은 실내용 상의와 존으로 뜬 레이스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안
    으로 들어오시겠어요?] 마르크는 옆으로 비켜섰다. 스카치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가기를 원하면서, 그러나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노인은 슬픈 눈으로 마르크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심정을 잘 
    알았다. 항상 여행을 하느라 그곳에  없던 남자. 그도 그랬었다. 
    그의 아내가 죽고 난 후에야 그는 그것을 깨달았지만 너무 늦었었
    다. [그녀가 늦는 것이 아니라오, 선생. 어젯밤에 병원으로 후송
    되었다오.] 그는 마르크의 얼굴에 충격이 퍼지는 걸 응시하고 있
    었다.
      [샹딸이, 맙소사! 어느 병원입니까?]
      [아메리칸 병원이오, 선생. 그녀가  충격을 받았다고 앰뷸런스 
    운전기사가 말하던데.......]
      [이런, 맙소사!] 마르크는 공포에 질려 노인을 힐끗 봤다가 안
    으로 들어가 의자 위의 자켓을 거머쥐었다. 그는 급히 노인에게로 
    돌아와 아파트로 향하는 문을 꽝  닫았다. 노인이 옆으로 비켜섰
    다.
      [가야 해요.]   오,  맙소사......  오,  샹딸......  오,   안
    돼....... 그렇다면 그녀는 다른 남자와 나간 것이 아니야. 층계
    를 급히 내려가는 그의 가슴은  방망이질 쳤다. 마르크는 거리로 
    뛰어나가 택시를 불렀다.

      
                                  11
      
      
      택시는 파리 교외의 한적한 고장인 네일리의 불르바르드 빅토르 
    위고 92번지에 멈추었다. 마르크는 운전 기사의 손에 지폐를 쥐어
    주고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면회시간이 지난 지 오래 되었
    지만 불쑥 안내창구로 걸어가 샹딸에 관해 문의하였다. 401호실입
    니다. 인슐린 쇼크를 받았는데 현상태는 양호합니다. 마르크는 놀
    란 눈초리로 간호원을 응시하였다. 그는 더이상 지체하지 않고 승
    강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한 간호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 마르크가 승강기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샹딸을 면회하러 왔습니다.] 그는 위엄있게 말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위축감을 느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그는 그녀를 남겨두고 안티베스로 가버린 사실에 갑작스런 죄의식
    을 느꼈다. [그녀를 꼭 만나봐야 하겠습니다.]
      간호원이 머리를 저었다. [내일 만나보세요.]
      [잠들었습니까?]
      [내일은 만나보는 것이 좋습니다.]
      [제발 만나게 해주세요. 전 말이죠.......] 그는 프랑스 남부에
    서 왔다고 말하려다가 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지갑을 열
    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왔습니다.  소식을 듣고 첫번째 
    비행기로 날아왔습니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좋아요. 2분 동안 입니다.] 이상은 안됩니다. 선생님은...... 
    그녀의 부친되십니까?] 마르크는 고개를 저었다.
      간호원은 그리 멀지 않은 병실로  그를 안내했다. 병실 내에는 
    희미한 불빛이 비추고 있었다. 간호원은 마르크를 병실 입구까지 
    안내하고 가버렸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샹딸?]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였다. 침대에 누워있는 샹딸은  매우 창백하고 어려보였
    다. 그녀의 팔에는 불길해 보이는 정맥주사 튜브가 꽂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되새기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 
    소녀를 떠맡아 자기 생활의 일부만을 그녀에게 주었었다. 그는 자
    신의 모친과 딸과 아내와 때로는 자기자신으로부터 샹딸을 은폐시
    켜야만 했었다. 무슨 권리로 그녀에게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
    가? 마르크는 그녀 곁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손을 잡았다. 그의 눈
    은 너무 밝았다.
      [샹딸, 무슨 일이야.] 육감으로도 그는 이 인슐린 쇼크가 결코 
    사고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샹딸의 당뇨병은 경미한 것이 아니었
    다. 그렇지만 지속적으로 인슐린을 복용하고 음식물을 잘 섭취하
    고 숙면을 취하면 되었다. 임신만 하지 않으면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이다.
      눈을 감은 그녀의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배어나왔다. [죄송해
    요.......]
      그녀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인슐린을 먹지 않았어요.]
      [일부러?] 그녀의 끄덕임을 보고 그는 누군가 심장에 일격을 가
    한 것처럼 뜨끔했다. [오, 하나님. 샹딸이...... 어떻게 그런 일
    을.......]
      그는 갑작스런 공포에 사로잡혀 그녀를 보았다. 샹딸이 죽었다
    면 어떻게 되었을까? 샹딸이  죽었다면....... 그는 샹딸을 잃는 
    것은 견딜수 없었다. 문득, 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그녀의 
    따스한 손을 꼭 쥐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 그
    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내 말 알아듣겠어?] 샹딸은 다시 끄덕였다. 잠시 후 그의 얼굴
    에도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그녀 옆에 앉았다.
      [샹딸 없이는 살 수 없어. 알고 있어?]
      그녀의 눈은 응답이 없었다. 아니  그녀는 그러한 사실을 몰랐
    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자신도 그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
    았던 것이다. 이제 두 여인이 생겼다. 디나와 샹딸. 이 두 여인에
    게 그는 일생을 바쳤지만 그는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디나 없이 
    살 수 없었고 샹딸 없이도 살  수 없었다. 그러한 사실이 도끼에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그는 샹딸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거의 반백이 되어 있었다.
      [샹딸, 널 사랑해. 제발, 제발,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 
    약속해!] 그는 그녀의 섬세한 손을 강하게 잡았다.
      [약속해요.]
      그 말은 마치 어두운 방 안에 갑자기 수천 볼트의 전기로 불을 
    밝히는 것과 같은 속삭임이었다. 마르크는 가슴 속에서 북받쳐오
    르는 슬픔을 짓누르며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 날이 끝날 무렵 디나는 열한 점의 그림을 골라내었다. 나머
    지 그림을 골라내는 작업은 힘든 일이 될 것이었다. 열한 점의 그
    림들을 한구석에 세워둔 후 집  안으로 향하였다. 그녀는 여전히 
    마르크와의 대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르크가 필라에게 오토바이
    를 사지 못하게 하였더라면 자신이 이 전시회를 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들이 어렵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결
    혼생활은 사소한 불만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윗층의 침실로 올라가 옷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욕의, 청바지, 아니면 벤이 좋
    아할 샴페인 빛의 슈에드 스커트? 이런, 나는 남편의 침실에서 다
    른 남자와의 생활을 계획하고 있군! 내가 갱년기에 접어든 걸까, 
    아니면 마르크가 말했듯이 유치해진 걸까, 아니면 단지 미친 것일
    까? 생각에 잠겨 멍하니 옷장을 쳐다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
    다. 그녀는 마르크에게 말할 때 이외에는 더이상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때 이외에는 자신이 벤의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
    다.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
    녀는 이미 그곳을 떠나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망설이면서 전
    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데리러 가도 될까, 준비가 되었소?] 벤이었다. 시간은 4시 30
    분 밖에 되지 않았다.
      [벌써요?] 그녀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할 일이 남았소?] 마치 그녀의 일이 중요한 것처럼, 그녀의 일
    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물었다.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예요, 끝났어요. 전시회용으로 오
    늘 열한 점을 골라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의욕에 차 있었다. 그는 미소지었다. [당신이 
    자랑스러워. 난 더 못 견디겠어. 오늘 샐리에게 전시회에 관한 말
    을 했소. 우린 대대적으로 광고를 할 예정이라구.]
      하느님 맙소사, 광고라니? 킴은 어떻게 하고. 그녀는 숨이 차는 
    듯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광고를 하셔야만 
    하나요?]
      [내 일은  나한테  맡기고  자신이  할 일만   해요. 말하자면 
    난.......]
      그의 목소리가 매우 부드러웠다. 디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만 둬요!]
      [왜?]
      [당신은 자기 사무실이지만, 전....... 전 이곳에 있잖아요.]
      [그 점 때문이라면 그러지.] 답답한  곳에서 빠져나와요. 10분 
    내로 갈 테니. 준비됐지?]
      [네, 물론이에요.] 그녀는 더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 집에 
    있는 순간순간이 견디기 어려웠다.
      [카멜까지 갈 정도로?]
      [가고 싶소.]
      [가정부는 어떻게 하고?]
      [매컴 부인? 그녀는 떠날 거요.] 이런 식으로 몰래 만나는 것은 
    못마땅했지만 디나에게는 딴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자유로운 몸이 아닌 것이다. [아무튼 매컴 부인 걱
    정은 하지 말아요. 10분 내로 가죠. 그런데, 디나?]
      벤은 그녀가 그의 말을 기다리는  동안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신중하다고 생각하며 무슨 말을 하려는 걸
    까 궁금해했다. 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사랑해!]
      그녀는 그의 입가에 떠오른 부드러운 미소를 보는 듯 했다. 그
    녀는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눈을 감았다. [저두요.]
      
      카멜에서의 주말은 멋진 것이었다. 7월  4일이었다. 두 사람은 
    사흘내내 해변을 거닐고, 일광욕을 하고, 조개껍질을 줍고, 유목
    을 모으며 여전히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이따금씩 수영을 하며 시
    간을 보냈다. 벤이 차가운 물에서 나와 몸을 떨며 그녀 곁에 누워
    있을 때 그녀는 혼자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는 햇볕 아래서 피부
    를 황갈색으로 태우고 있었다.
      [잠자는 미녀께서 왜 미소를 지으시나요?]
      그의 몸은 차갑고 축축하였다.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 그의 팔
    의 감촉이 감미로왔다. [신혼여행을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니면 멋진 결혼이거나.]
      [난 잘 모르겠는걸. 신혼여행도 멋진 결혼도 해 본 적이 없으니
    까.]
      [신혼여행은 가봤을 것 아녜요?]
      [아니. 우린 신혼을 뉴욕에서 보냈소.] 그녀는 배우였고 브로드
    웨이에서 공연 중이라.] 그래  우린 뉴욕의 플라자에서 하룻밤을 
    보냈지. 그 공연을 마친 후에야 뉴잉글랜드로 올라갔소.]
      [그 연극이 장기 공연되었나요?] 그녀의 크고 푸른 눈은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벤은 미소지었다.
      [사흘 동안 공연되었지.]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벤은 몸을 돌
    려 디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마르크와 행복했소?]
      [행복했던 것 같아요. 가끔 몹시 외롭기도 했지만. 우리 부부는 
    이런 관계가 아니예요. 어떤  점에서는 친구가 아니라는 뜻이죠. 
    서로 사랑하기는 하지만 이런 일은 사랑과는 다른 문제니까요.]
      그녀는 마르크가 전시회를 열지 못하게 하던 마지막 대화를 상
    기했다. 그는 여전히 권위적인 목소리로 말했었다. [그는 당신이 
    내게 하듯 나의 작품과 나의 시간과 나의 아이디어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아요. 그렇지만 날 필요로 하고 돌봐주지요. 그는 자기 
    방식대로 날 사랑해요.]
      [당신도 남편을 사랑하나요?] 벤의 눈은 그녀의 얼굴을 탐색하
    였다.] 그녀는 잠시 후에 대답하였다.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해요. 이  여름은 우리의 것이니까
    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책망이 서려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생활이 아니오. 알아야 할 몇 가지 사실들이 있
    소.]
      벤은 이상하게도 진지하였다.
      [이미 알고 있잖아요, 벤.]
      [무슨 말이지?]
      [그가 나의 남편이라는 사실 말예요.]
      [그에게서 떠나지는 않을 거요.]
      [모르겠어요. 지금 그런 질문을 꼭 해야 하나요.] 그녀의 눈은 
    가을의 슬픔을 머금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만 가지면 되잖
    아요.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땐?]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벤.]
      [묻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점점 궁금해지는군.]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그래요. 제 마음이 이번 여름이 끝나
    는 시점으로 표류해 가곤 해요. 전 그 해답을 알려줄 어떤 기적을 
    끊임없이 바라고 있어요.]
      [나도 마찬가지요.] 그는 그녀에게 미소지은 후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
      [나도 그렇다구요!]

      
                                  12
      
      
      [벤?] 그는 디나의 목소리가 그의 스페어 룸에서 들려오자 혼자 
    미소지었다. 늦은 일요일 밤이었고, 두 사람은 카멜에서 일주일을 
    더 보내고 방금 돌아온 참이었다.
      [무슨 일이요, 도와줄까?] 그가 들은 것은 한마디 외침과 웃음
    소리였다.] 그녀는 한 시간이 넘도록 그곳에 있었다. 그는 침대에
    서 일어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갔다. 그가 자신이 이따금 
    사용하는 스페어 룸의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벽 옆에 세워둔 산
    더미같은 상자 위로 미끄러지기  시작한 캔버스 더미를 끙끙대며 
    붙들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갑자기 생긴 일이에요!] 그녀는 조그만 붓을 입에 
    물고 양팔을 높이 들어 그림들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애쓰면
    서 그를 쳐다보았다.
      [서명이  빠진  몇   작품에 서명하려고   이  방에   들어왔는
    데.......] 벤은 그녀의 팔에서 그림들을 들어올려 한구석에 차곡
    차곡 쌓았다. 그래도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산더미같은 그녀의 작
    품들이 들려 있었다. 벤은 머리를 숙여 그녀의 콧방울에 키스하였
    다.
      [입에서 붓을 빼내요.]
      [뭐라구요?] 그녀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직 서명
    하지 못한 그림 두 장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붓을 입에서 빼내라고 했소.] 그는 그림들을 조심스레 옆에 
    놓으면서 한 손으로 붓을 잡았다.
      [왜요? 이렇게 하면 손이 자유로운데.......]  그러자 그는 곧 
    키스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이게 그 이유요. 자, 이제 침대로 가지.] 그는 그녀를 끌어당
    겼다. 그녀는 미소지으며 그에게 안겼다.
      [금방 끝낼 수 있겠지?]
      [물론이죠.] 그는 책상 옆의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그녀가 서명
    하지 않은 캔버스를 찾아 다시 그림더미 속을 헤매는 것을 지켜보
    았다. [당신도 나만큼 전시회에 흥분하고 있는 거요?] 목요일까지
    는 4일밖에 남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그녀를 미술계에 데뷔시킬 
    것이다. 그는 기쁨과 보람에 찬 눈으로 그녀가 다시 손을 자유롭
    게 하기 위해 붓끝을 머리에 꽂는 것을 지켜보았다.
      디나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는 입가뿐만 아니
    라 눈가에도 번져나갔다.
      [흥분하고 있냐구요, 놀리는 건가요? 난  반 미친 상태라구요. 
    며칠 동안은 잠도 못 잤어요.]
      그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사랑
    이 끝난 후 그녀의 눈에는 졸음이 가득했지만 아침이 되면 정신이 
    번쩍 들어 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 아침을 준비해 주
    고는 자신의 작품들을 놓아둔 스페어 룸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녀
    는 자신의 보물들을 전시회 전까지 그에게 맡겼다. 전시회 전날까
    지도 화랑에 놔두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마지막 작품에 서명을 한 후 환히 웃으며 그를 돌아다보
    았다. [목요일까지 해낼지 모르겠어요.]
      [해낼 거요.] 그녀를 보는 그의 얼굴이 빛났다. 얼마나 아름다
    운 여인인가. 그녀는 요즘 들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의 얼
    굴에는 부드럽고 밝은 아름다움이  있었고 그녀의 눈은 열정적인 
    불꽃을 뿜었다. 그녀에게는 벨벳의 부드러움과 불꽃의 정열이 공
    존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하는 시간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
    한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카멜의 작은 별장은 방 안을 꽃으
    로 장식하고, 별장 밖의-모래사장 위에 피운 불꽃 옆에서 발을 쬐
    일 때 기대었던 커다란-유목들을 별장 안으로 가져오는 그녀의 존
    재로 인하여 활기를 띄었다. 그녀는 그의 꿈과 그의 팔과 그의 생
    활을 가득 채웠다. 그는 그녀 없는 생활을 더이상 생각할 수 없었
    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죠?] 그녀는 고개를 한쪽으로 숙이고 그림
    더미에 기대었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어머나!]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의 눈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나도 그 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요.]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그가 미소짓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래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두
    요. 당신이 오기 전까지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매우 풍족한 삶을 누리며 아침식사 따위는 준비하지도 
    않았지.]
      [두려워요.] 그는 그에게로 다가선 그녀를 당겨 무릎 위에 앉혔
    다.
      [전시회때문에 흥분하여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이야. 한 달 혹
    은 두 달만 기다리면.......] 그는 고통스럽게 말을 멈추었다. 그
    는 1년이라고 말할 뻔 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에겐 1년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5주일 내지 6주일이 남았을 뿐이었다. [당신은 아침
    식사 준비에 진력이 나고 말거요. 당신도 곧 알게 될 테지만.]
      그녀는 한 달이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지내고 싶었다. [결코 싫
    증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었다. 따사로
    움과 안온함을 느끼면서.
      두 사람은 카멜에서 보낸 주말 덕분에 구릿빛으로 그을렸고 바
    닥을 걸어가는 그녀의 발에는 여전히 모래가 묻어 있었다.
      [당신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
      [뭔데요?]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머리의 신선한 향기를 맡았다. [우리는 
    매우 운이 좋은 것 같소. 이 이상의 행복이 또 어디 있겠소?] 그
    는 미래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무릎 위에 앉
    아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이를 더 낳을 생각을  해 본 적
    은?]
      [내 나이에요?] 그녀는 놀란 것 같았다. [필라가 열여섯 살이에
    요.]
      [그게 무슨 상관이오.] 그리고 <내  나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
    오? 삼십 대에 아기를 가지는 부인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지만 전 서른일곱이나 되었는 걸요. 말도 안돼요.]
      그는 머리를 저었다. 디나는 다소 놀란 듯이 보였다. [서른일곱
    은 남자에게 많은 나이가 아니야. 여자라고 많은 나이가 될 이유
    가 뭐지?]
      [남자와 여자는 달라요. 당신도 아시잖아요.]
      [모르겠소. 우리 아이를 갖고 싶어요. 그리고 난 당신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진 않아.]
      아이를, 이 나이에? 그녀는 당황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
    주 진지하였다. 그의 팔은 여전히 그를 감싸고 있었다.
      [진정이에요?]
      [그래요.] 오랫동안 그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으나 확신할 수
    는 없었다. 당혹함과 놀라움, 슬픔과 고통이 있었다. [더이상 아
    이를 갖지않을 생각이오, 디나?] 그는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
    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갖지 않을   생각이에요.  아이를  갖지  못할  이유는   없지
    만....... 다시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필라는 두 사
    내아이가  죽은 후 얻은 아이에요. 그런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진 
    않아요.]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 사람이 있소?]
      [단지 운이 나빴다고만 말하더군요. 설명할  수 없는 비극이지
    요. 한 가정에 그와 같은 일이 두 번씩이나 생기다니.]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디나는 
    그에게서 몸을 빼냈다.
      [저를 설득해 아이를 갖게 하려는  건가요?] 그녀의 눈은 매우 
    커졌고 안색이 차분해졌다.
      [나도 잘 모르겠소. 아마 그런 것 같은 걸. 그렇게 들렸소?] 그
    는 미소를 짓고는 머리를 숙였다. 잠시  후 그는 머리를 들었다. 
    [당신은 내가 그럴 생각이었다고 여기오?]
      그녀는 갑자기 매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 설득하려 
    들지마세요. 전 너무 늙었어요. 게다가 아이도 있고 남편도 있잖
    아요.]
      [내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이 바로 그 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이제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리둥
    절했다. 그녀가 나이가 많든 적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요. 제 나이 사십이 다 되었어요. 지금 이런 일은 미친 짓
    이지요. 다시 어린애가 된 기분이에요. 전 서른일곱 살이 아니라 
    열일곱 살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어요.]
      [그게 어쨌단 말이지?] 그는 그녀의  눈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굴복하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그게 좋아요.]
      [좋아. 그러면 침대로 갑시다.] 그는 그녀를 안고 옆 방의 커다
    란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침대 커버가 그들이 카멜에서 돌아왔을 
    때의 그대로 구겨져 있었다. 침실에는 조그마한 스탠드가 있을 뿐
    이었다. 부드러운 색조가 다사롭고 포근했으며, 그녀가 테라스에
    서 옮겨놓은 데이지 화분이 목가저인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그
    녀는 그의 집에 특별한 일을 해주었다. 그녀는 그가 수년 동안 갈
    망하던 분위기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는 자신이 갈망하는 것이 무
    엇인지를 알지 못했었지만 그녀를 알게 되자 깨닫게 되었다. 그토
    록 원했던 것은 푸른 빛의 눈과 검은 머리, 침대에서 빠져나오는 
    사랑스런 다리, 꽃에 둘러싸인 자신의 책상 위에 다리를 꼬아올린 
    채 앉아 있는 디나였던 것이다.
      그리다만 그림들에 둘러싸여 입에 붓을 물고, 페인트로 얼룩진 
    셔츠를 입고 수많은 사려깊은  행동을 하는-그녀가 세탁한 타이, 
    그녀가 치워버린 옷들, 그녀가 사준 자그마한 선물들, 그가 좋아
    하리라 생각하고 그에게 사준 책들,  모든 것들을 포용하는 눈과 
    웃음과 장난-디나였던 것이다.
      디나는 마치 꿈처럼 그의 생활로 스며들었다. 그는 결코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옆에 디나가 없다면.......
      [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악
    평을 받으면 어떡하죠?] 그녀는 마치 겁먹은 아이 같아서 웃음이 
    나왔지만 웃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두려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요.] 그는 침대 시트 밑에서 그녀를 다시 안
    았다. [좋은 평가를 받을 거라고 장담해.]
      [어떻게 장담하세요?]
      [당신 작품이 매우 훌륭하니까.] 그녀의 목에 키스하는 그의 다
    리에 그녀의 살이 닿자 전율하였다. [또한 내가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바보처럼!]
      [뭐라고?] 그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당신에게 사랑
    한다고 말했는데 당신은 날 바보라고? 요런.......] 그는 그녀를 
    더 꼭 껴안고 그녀의 입에 키스하면서 침대 시트 밑으로 숨어들었
    다.
      
      그녀는 다음 날 아침 6시에 일어나 즉시 스페어 룸으로 사라졌
    다. 그녀는 잘못 놓여진 그림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제자리에 놓
    여지지 않은 그림을 생각해 보았다. 커피를 마신 후, 그녀는 서명
    하지 않은 그림 두 장을 더 기억해 냈다. 그녀는 전시회때문에 신
    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전시기간 동안 벤은 그녀를 편안함
    으로 감싸주었고 사랑으로 다독거려 주었다. 그는 그녀를 식당과 
    극장으로 데리고 다녔고 해변으로도 데리고 갔다. 그는 강제로 그
    녀에게 수영을 시켰고 밤늦도록 사랑을 하였다. 목요일에 그는 그
    녀를 데리고 점심식사를 하였다.
      [전시회에 대한 평을 듣고 싶지 않소?] 그는 한 손을 들었다.
      [그렇지만, 벤! 만약.......]
      [걱정말아요. 내일까진 전시회에 대한 평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걱정말아요!] 그는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 위에 얹었다. 그녀는 
    근심어린 한숨을 쉬며 그의 손가락을 떼어냈다. 그는 웃기만 하였
    다.
      [그 술이 어떻소?]
      [무슨 술인데요?] 그녀는 움찔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그
    녀의 술잔을 가리켰다.
      [당신이 마시지 않는 그 술 말이야. 술이 어떻소?]
      [모르겠어요.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는 양쪽 손가락을 귀에 대었다.  그녀는 나직히 그를 꾸짖었
    다.
      [벤, 그만둬요!]
      [뭘!] 그는 탁자 너머의 그녀에게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제 말 좀 들어봐요! 오늘밤에 관하여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는 여전히 손가락으로 귀를 막은 채 점잖게 웅얼거렸다. 디나
    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쁜 사람, 미워요!]
      [천만에, 당신은 날 미워하지 않아.  당신은 내게서 손을 떼지 
    못하지. 나를 끌어내어 때리고 싶겠지?]
      [정말이에요, 그런 말을 하니까.......] 그녀는 웃으며 술을 한 
    모금 삼켰다. 두 사람은 점심 내내 장난을 쳤다. 그림들은 디나의 
    전시회를 위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샐리가 화랑을 지키고 있었
    고, 그는 디나가 마음을 바꾸거나 중간에 떠나버리기 전에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오후에 그녀를 놀래줄 
    일이 있었다. 점심식사 후 자동차를 향해 걸어가면서 그는 시계를 
    보았다.
      [디나, 색스에서 내리면 어떨까?]
      [지금 말이에요?] 그녀는 놀란 것 같았다. [좋아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 그는 색스 상점 앞에 정차하며 슬
    며시 미소를 지었다. [들어오겠소?]
      [아니예요, 기다리겠어요.]
      [정말?] 그는 그녀가 오늘은 잠시라도 혼자있고 싶어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강요하지 않았다.
      [좋아, 곧 돌아올께요.] 상점에서는 할인 판매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 옆을 지나 상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슨 볼일인데요?]
      [옷을 한 벌 사야겠소.] 그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옷이라니요?]
      [샐리가 입을 옷을 사야 하오.]  그녀가 시간이 없다고 부탁을 
    해서 말이오. 그래서 내가 오늘밤 그녀가 제때에 갈아입을 수 있
    도록 옷을 사서 화랑으로 가져다 주겠다고 말했거든. 그런데 당신
    은 어떤 것을 입을 예정이오? 그녀는 서명과 액자에 신경을 쓰느
    라고 옷에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모르겠어요. 검은 드레스를 입을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집에
    서 약식 야회복을 두세 벌 가지고 왔었다. 그 옷들은 그의 옷장에 
    그녀의 진과 페인트 묻은 셔츠,  개버딘으로 만든 헐렁헐렁한 옷 
    몇 벌과 여섯벌의 캐시미어 스웨터 들과 함께 걸려 있었다. 그는 
    그녀의 옷들이 자신의 옷 옆에 걸려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초록빛 드레스를 입는 게 좋지 않을까?]
      [너무 야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잠깐만요. 
    어떤 평론가가 오는지 알고 있나요?] 그녀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
    다.
      [별로 야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는 즐거워 보였다. [제가 묻
    는 말을 들은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아니. 초록빛 드레스가 어떠냐고 했소.]
      [옷 얘긴 집어치우세요! 묻고 싶은  것은.......] 그는 그녀의 
    입에 강렬한 키스를 퍼부어서 이층에서 승강기를 내릴 때 그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벤!] 그렇지만 주위에는 벤이  한 행동을  본 사람은 없었다. 
    [제말 들은 거예요?]
      [아니.]
      그는 이미 여판매원과 말하고 있었다. 여판매원이 드레스를 가
    지고 왔다. [완벽하군.] 그는 여판매원에게 미소를 보낸 후 디나
    를 쳐다보았다. [어때요?]
      [네?] 그녀는 멍한 상태였다. 그 드레스가 갑자기 그녀의 의식 
    속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그 드레스는 히이드꽃과 같은 청색의 울
    로 만든 것이었다. 목깃이 높고 소매가 길며 등판이 깊게 패인 것
    이었다. 더군다나 그 드레스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코트도 있었
    다. [아름답군요, 샐리의 옷인가요.] 그녀는 그 얇은 울을 만져보
    기 위해 한 걸음 다가갔다. 프랑스 제 모직에 프랑스에서 디자인
    한 것이므로 상당히 비쌀 것 같았다. [아름답군요.]
      여판매원과 벤이 서로 눈웃음지었다.
      [당신, 이 드레스를 입으면 어떻겠소?] 그는 디나가 당황할 정
    도로 천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샐리의 옷을 입다니요? 말도 안돼요.]
      [그녀에게는 당신의 초록빛 드레스를 빌려주면 되잖소.]
      [당신 정말, 정신나갔군요.] 그녀는 여판매원에게 웃어보이고는 
    걸어나가기 시작하였다. 벤이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잡으며 그녀
    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도 제 정신이 아니야. 당신의 새 옷을 입어봐요.]
      그녀는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놀리시는 거예요?] 그는 머리를 
    저었다. [그럼 이 옷이 내 옷이란 말이에요?] 그는 만족스런 미소
    를 띄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맘에 들어?]
      [어머나, 벤! 믿을 수가 없어요. 너무너무 멋져요!] 그녀는 몸
    을 돌려 그 옷을 다시 보았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옷은 아름다
    웠지만 아마도 엄청나게 비쌀 것 같았다. 벤이 그녀에게 이런 옷
    을 사 주다니, 이름 없는 독일차를 몰고 캐비어보다는 스파게티를 
    즐겨 먹는 이남자가? 그의 할아버지가 수많은 하인들에 둘러싸여 
    살아왔었고 자신의 부친이 로마 근처의 저택으로 은퇴했지만, 일
    주일에 한두 번씩 찾아오는 세탁부 외에는 하녀를 고용하지 않는
    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끼는 이 남자가? 그런 사람이 그녀에게 이
    런 고급드레스를 사주다니. 그 옷은 마르크가 사준다고 하여도 망
    설여지는 값비싼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이젠 그만 입어봐요. 입은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그녀가 옷을 입자 그가 살펴보았다. 디자인과 색상이 완벽하게 
    어울렸다. 팔에 외투를 늘어뜨리고 그에게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
    은 마치 여왕같았다. 그녀의 황갈색 피부가 히이드빛 청색을 돋보
    이게 하였으며 그녀의 등과 어깨가 그  드레스에 꼭 맞았다. [그 
    옷 외에 무엇을 더 걸칠 생각이오.]
      [다이아몬드 귀걸이에 검은 비단 샌들을 신고 머리는 틀어올리
    겠어요.]
      [이런 세상에! 눈이 부셔 못보겠는 걸.] 그가 너무 유쾌하게 웃
    었으므로 여판매원도 따라 웃었다.
      
      그날 밤 디나가 그 드레스를 입을 때 그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
    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미소지었다. 그는 등쪽의 지퍼를 올려주
    었다. 그녀는 귀에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달고 머리를 높이 틀어올
    렸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완벽해서 잠시동안 그는 숨을 쉴 수
    가 없을 지경이었다. 잠시 후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다이아몬드 귀
    걸이를 조심스레 떼어냈다.
      [무슨 짓이에요?]
      [귀걸이를 떼고 있지.]
      그녀는 당황한 듯하였다. [왜요, 맘에  안 드세요.] 아마도 그 
    귀걸이가 마르크의 선물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늘밤이 당신의 일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이 되길 바라
    오. 오늘밤은 당신이 미술계에서 새로이 탄생하는 밤이야. 난 모
    든 사람에게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알리고 싶소.] 벤의 눈에
    는 지금까지 보지못한 사랑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 깊숙
    이 전율하면서 그를 끌어안았다.
      [너무나 많은 것을 주시는군요.]
      [우린 서로에게 잘 대해 주는  거요.] 귀걸이는 특별한 선물일 
    뿐이야.]
      [그 귀걸이를 간직할 수 없어요.]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벤과 
    함께 지내지 않는 한 간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달 후면 남편
    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니, 간직해도 좋아요. 당신이 가지기를 바래. 무슨 일이 있
    다 하더라도.]
      그는 이해하였다. 그는 언제나 이해하였다. 눈물이 흘러나와 그
    녀의 뺨 위로 슬프게 흘러내렸다. 흐느낌으로 그녀의 어깨가 들먹
    였다.
      [그만 울어요.]
      [오, 벤....... 당신을 떠날 수가 없어요.]
      [떠나지 않아도 돼, 아직은. 현실을  향유하기만 하면 되는 거
    요.]
      그는 지금까지 그렇게 철학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그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의아스러웠
    다. [사랑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림을 감추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나도 당신을 사랑하오. 그런데, 당신
    의 전시회는 어떡하구?]
      그는 그녀를 보기 위해 몸을 떼었다. 그는 부드럽게 귀걸이 하
    나를 그녀의 귀에 걸어주었다. 그런 후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한 
    다음 또하나의 귀걸이를 그녀의 귀에 걸었다. [너무 아름답군. 이 
    전시회의 개막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자랑스러워.]
      [저는 이 모든 것이 꿈이고, 곧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것만 같아
    요. 저는 리 반 윈클이 된 기분으로, 킴이 여전히 그 호텔에서 나
    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카멜의 해변에서 깨어날 거예요. 
    그런데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주위를 둘러보면 당신이 있는 거예
    요.] 그녀는 황홀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소리내어 웃었다.
      [정말 그렇겠군.] 그는 그녀의 드레스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면
    서 다시 웃었다. [당신에게 내가 현실임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데, 
    애석하게도 시간이 없군.] 그는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팔을 뻗
    었다.
      [자아, 어떻소?]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았다.
      [좋아요.]
      
      [준비됐소?] 두 사람은 방금 화랑 앞에 도착했다.
      [어머나!] 그녀는 그에게 안겼고 그녀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그
    는 잠시동안 그녀를 안아주고 그녀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카
    메라맨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미 수많은 손님들이 와 있
    었다. 미술평론가들이 참석해 있었고  킴도 그녀의 눈에 띄었다. 
    그녀는 신문사의 한 신사와 정겹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샐리는 
    그녀의 아름다운 드레스에 놀라 그녀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든 면에서 그 개막식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작품 중 
    일곱점이 팔렸다. 잠시동안 그녀는 옛 친구들과 파티를 하는 기분
    에 싸여 있었다. 그녀는 작품들을 팔고 싶지 않았지만, 벤이 그녀
    의 작품을 칭찬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면서 팔도록 강요했
    다. 벤은 매우 훌륭히 처신했다. 항상 가까이 있으면서도 너무 접
    근하지 않았고 눈에 띄지 않게 도와주었다. 그는 화랑의 소유주인 
    벤자민 톰슨 3세로만 처신했다. 아무도 두 사람 사이를 눈치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킴과 함께 처음 그녀를 만났던 때처럼 신중
    하였으므로 그녀는 두려워 할 것이 없었다.
      잠시 디나는 마르크가 어떤 소문을 들을지에 대해서 두려워 한 
    적이 있었다. 누가 이 전시회에 왔으며, 사람들이 그들에 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그날 밤에는 커다란 화환을 보낸 킴조차도 아무 눈치를 못 채었
    다. 킴은 디나와 벤을 맺어준 점에 관하여 개인적인 책임감을 느
    꼈다. 그것은 물론 직업적인  관점에서 느끼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밖의 사실에 관해서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킴은 디나가 마르
    크에게 이 개막식을 알렸는지 궁금하였다. 후에 디나는 마르크에
    게 알렸다고 킴에게 말했다.
      [뭐라고 하든?]
      [별로 좋아하진 않았어.]
      [이해해 주겠지?]
      [그럴 것 같아.] 디나는 그 문제를 더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그
    녀는 마르크가 전시회를 금지시켰으며 그가 전화를 끊어버렸다는 
    사실을 킴에게 말하지 않았다. 마르크는 전시회를 여는 것이 천박
    하고 주제넘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결혼 이후 처음으로 자
    기 주장을 고집하였다. 너무도 그녀에게 중요한 일이라서 양보할 
    수가 없었다. 그도 필라의  오토바이에 대하여 양보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예술에 관하여 양보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오?] 벤은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
    도록 나지막이 말했다. 디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미안해요.]
      [샐리가 두 점을 더 팔았어.] 그는 소년처럼 행복해 했다. 디나
    는 그를 얼싸안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녀는 그를 조용히 응시
    하였다.
      [축하 파티에 데리고 가도 될까?]
      [피자 파티라면 가겠어요.] 그녀는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보고 웃었다.
      [피자가 아니라 정식 식사인데.]
      [햄버거 파티인가요?]
      [이런 젠장!] 그는 문득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그녀의 뺨에 
    키스하였다.
      화랑 주인이 첫 성공을 거둔 미술가에게 그런 키스를 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킴은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문득 무
    언가 그 이상의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디
    나가 벤의 귀에 무슨 말을 속삭였고, 킴은 그가 그녀의 말에 대답
    하는 말을 들었다.
      [당신이 좋아한다니 기뻐요.] 디나는 귀에 걸린 진주들을 만져
    보고는 행복하게 걸어나갔다. 킴이 이를 지켜보고 있는 동안, 어
    떤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13
      
      
      [좋아요, 난 준비됐어요. 사실대로 말해 봐요.]
      디나는 눈을 감고 주먹을 꼭 쥔 채 머리 밑에 베개를 고이고 침
    대위에 누워 있었다.
      [지진이라도 기다리는 사람같군.] 벤은 그녀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신문을 손에 들고 그녀 옆에 걸터앉아 있었다. [뭘 
    읽어주었으면 좋겠어? 주식 시세, 만화? 아아, 알 만하군!]
      [제발 좀 읽어주겠어요, 난 이제 잠시도 더 참을 수가 없어요.] 
    디나가 입술을 깨물며 말하자, 벤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전시회 기사가 실린 면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 기사의 내
    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그로
    서는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 그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기사를 흘낏 넘겨다  본 벤은 이번에도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시작할까, 준비됐어요?]
      [벤, 제발 어서 좀 읽어보세요!] 디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대
    답했다. 벤이 기사를 읽기 시작하자 디나는 겁에 질린 표정을 감
    추지 못했다.
      [오랜 연구와 노력뿐 아니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재능까지도 
    발견할 수 있는 훌륭하고  참신한 스타일.......] 벤이 느릿느릿 
    읽어가는 동안 디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 밑에서 베개를 끄
    집어냈다.
      [거짓말하는 거죠!] 벤은 신문을 뺏으려 하는 디나의 몸짓을 뿌
    리치고 그 기사를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믿을 수가 없어.] 디나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
    럴수가.......]
      [뭘 그렇게 놀라는 거지? 당신은 훌륭하게 해냈어. 내가 말했잖
    아. 나도, 그들도, 당신 그림을 사간 사람들도 모두 그걸 알고 있
    어요. 멍청하고 어리석은 당신을 빼놓고는  모두들 다 알고 있는 
    셈이지.] 벤은 손을 뻗어 그녀의 몸을 간질렀다.
      [이 손 치워요, 난 이제 유명한 사람이 되었잖아요. 내 몸에 손
    대지 말아요!] 하지만 그녀는 웃음때문에 그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만하세요, 난 이제 스타라구요!]
      [그래? 그렇다면 누가 당신을 스타로 만들어줬지, 전시회를 해
    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고, 당신 작품을 처음 보자마자 전시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누구냐구, 응? 말해 봐, 말을 해 보라
    니까.] 그들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디나가 그의 품 안으로 파
    고들자 그녀의 분홍색 나이트가운이  허리께까지 말려 올라갔다. 
    벤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자기 품 안에 안겨있는 그녀를 바라보았
    다. 이렇게 아름답고 예쁜 그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벤은 영원
    히 그렇게 그녀를 안고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멈춰
    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왜 그래요, 벤?] 디나는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
    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 잘못됐나요?]
      [천만에, 당신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오.]
      [난 당신 사람이에요.] 디나는 다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
    해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은 다음 길고 달콤한 키스를 퍼부었다. 
    이어서 그녀의 분홍색 나이트가운이 마루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들이 침대에서 일어난 것은 정오가 넘은 시간이었다. 디나는 
    졸리운 하품을 깨물며 테라스로 통하는 문 앞에 섰다. 그녀의 벗
    은 등 뒤로 갈색 냇물처럼 머리칼이 출렁거렸다. 벤은 침대 위에
    서 디나를 바라보며 그녀가 영원히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
    각을 했다.
      [당신이 내 일을 망쳐놓고 있는 것 같군.] 벤이 그녀에게 눈길
    을 준채 그렇게 말하자, 디나는 다시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녀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젊어 보였다. 그녀가 겪었던 힘든 생활이 
    그녀의 외모에는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강철처럼 
    강인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마르크와의 그 고독
    한 세월들을 결코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당신 일을 망쳐놓고 있다는 거죠? 나는 내 걸작들
    이 당신에게 행운을 안겨다준 줄 알았는데.] 그녀는 잔뜩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사무실에 나갈 수만 있었다면 당신의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 샐리에게 오늘 나가지 못할 거라고 말해두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했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말이오.]
      하지만 벤은 자신의 새로운 생활방식을  싫어하는 기미가 전혀 
    없었다. 벤은 벗어던진 가운 대신  수건으로 몸을 두르고 그녀를 
    따라 테라스로 나왔다. 두 사람은 편안한 자세로 의자 위에 걸터
    앉았다.
      [당신은 나를 게으르고 행복하고  뻔뻔한 인간으로 만들어놓았
    어.]
      [그건 오히려 내가 해야 할 말이에요.] 디나가 그를 향해 고개
    를 들어 키스했다. [난 지금 스물한  살이나 두 살짜리 아가씨가 
    된 기분이에요.]
      [좋은 일이로군. 그럼 우리 결혼해서 아이를 열두 명만 가집시
    다.]
      디나는 다시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정말로 진지하게 그런 이
    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새로운 문제점이네요, 그렇
    지 않아요?] 디나는 밝은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었고 정당한 일도 아니었다.  그대신 그녀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이번 주말에는 뭘 할 거예요?] 디나는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와 함께 살고, 카멜로 가서 휴일을 즐기고, 그의 곁
    에서 아침에 잠을 깨며 밤이면 그의  곁에서 잠드는 것들 모두가 
    행복한 일이었다.
      디나는 벤과 함께 한 시간들이 백 년 정도는 지속되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그것은 단 7주에 불과했다. 아니, 벌써 그
    렇게 됐나, 두 사람의 생활이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도 밀
    접해질 수있는 것일까?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일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벌어졌던가를  생각하면 그저 신기할 뿐이었
    다. [카멜에 가고 싶어? 혹시 그곳이 지겨워진 건 아닌가?]
      [그런 지겨움은 평생 느낄 수 없을 거예요. 그곳은 가장 완벽하
    고 가장 아름다운 곳이니까요.]
      [다행이군.]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 생각 역시 
    그래. 하지만 난 당신이 뭔가 좀더 이국적인 경험을 해 보고 싶어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어떤 이국적인 것 말이에요?]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아테네? 디나는 마르크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했다.
      [그건 나도 몰라. 비버리 힐즈 정도는  가 볼 수 있겠지. 나도 
    거기가본 지가 몇 주는 지난 것 같으니까.] 벤은 대개 당일치기로 
    내려가서 저녁식사 무렵이면 돌아오곤  했다. [아니면 며칠 내로 
    뉴욕을 다녀 올 수도 있고.]
      벤은 자신의 일, 그러니까 다른 화랑이나 다른 중개인, 경매나 
    화가 등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는  적이 없었다. 직업에 대한 
    그의 정열은 마르크와 비교해도 별로 뒤떨어지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그의 일에는 그녀의 관심과 열정이 공유되고 있다는 점이
    었다. [그나저나 당신은 이번 주말을 어떻게 보냈으면 좋겠어?]
      [말했잖아요, 카멜로 가요.] 디나는 따뜻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
    으며 눈을 떴다.
      [그럼 그렇게 할까.]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나는군요.......] 디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젖혔다. [집에 가서 잠시 할  일이 있어요.] 그녀는 이미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이따금씩 마가레트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친구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거기서 그냥 자는 것이 더 편하다고 얘
    기해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아침에 집에 들러 침대를 어
    지럽혀 놓곤 했던 것을 자신을 위해 벌써 몇 년째 일하고 있는 마
    가레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디나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듯 마가레트
    의 교활한 푸른 눈동자를 피해 버릴 뿐이었다.
      벤이 디나를 집 근처까지 데려다준 것은 오후 2시 경이었다. 우
    편물 따위의 몇 가지 체크할  것이 있었던 것이다. 마가레트에게 
    보수도 지불해 주어야 했고 부식비도 주어야 했다. 디나는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 몸과 마음이 온통 딴 곳에 가 있었
    던 것이다. 그녀는 작업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하지 않았다. 대
    신 벤의 작업장을 이용했다. 심지어 비밀스럽게 진행시켜온 작품
    들도 벤이 집에 없는 시간을 이용하여 그 집에서 하곤 했다.
      디나는 집 안으로 들어서서 누구 없느냐고 불러보았다. 마가레
    트는 집에 있지 않았다. 있을 리가 없었다. 디나가 거의 들어오지 
    않으니 할 일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렇고 그런 계산서 나부랑
    이와 달갑지 않은 초대장 몇 장이 와 있을 뿐, 필라의 편지나 마
    르크에게서의 연락은 없었다. 마르크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법
    이 없었다. 대신 전화를 이용했다. 그에게  온 우편물 역시 없었
    다. 그가 없을 때면 도미니크가 일주일에 세 번씩 집에 와서 우편
    물을 모아 다른 공식서류들과 함께 우송하곤 했다.
      디나는 한 손에 우편물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난간을 잡아가
    며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계단 꼭대기에 도착한 그녀는 
    이곳에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때문에 조금은 울적해졌다. 꿈을 버
    릴 것을 강요당하고 다시금 자신의 진짜 나이로 돌아갈 것을 강요
    당하며, 결혼해서 열두 명의 아이만 가지자고 말한 남자와의 격리
    를 강요당하는 느낌이었다.
      디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쓴 웃음을 지으며 한숨
    을 내쉴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처음에 그녀는 그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생각했지만 혹시 벤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
    제 이 세상에 그들 둘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전
    화 역시 벤이 아닌 다른 누구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실려 있었
    다.
      [여보세요?] 맙소사, 그것은 마르크였다.
      [당신이세요?] 그녀는 시간을 벌고 싶었다.
      [그래. 우스꽝스러운 전시회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도미니
    크가 막 전화를 걸었더군.]
      [얼마나 좋아요.]
      [당신에게 내 생각을 말했잖아. 그런데도 그런 짓을 하다니, 그
    럴수가 있어!]
      [하지만 저는 그것이 무척 재미있는 일이라는 점을 당신에게 확
    언할 수 있어요.]
      [글쎄, 그건 두고 봐야 될 거야. 내가 당신 전시회를 싫어한다
    는 걸 잘 알고 있잖아. 게다가 그 소문들하고는! 디나, 그걸로 말
    미암아 당신이 꼭 히피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구!]
      [그건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등골이 빳빳이 곤두서는 느낌이
    었다.
      [신문의 평은 나를 아주 진지한 예술가로 다루어 주었어요. 그
    것이 나의 본디 모습이기도 하구요.]
      [나는 우리가 꽤 오래전에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고 있었
    는데.]
      [당신은 그랬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았어요.] 제기
    랄! 남편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 마찬가지였
    지만.
      [알았어. 어쨌거나 당신이 매일같이 그런 뚱딴지같은 일을 벌일 
    궁리나 하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구만.]
      [그럴 리가 있나요. 5년마다 한 번씩이라도 그런 기회가 찾아온
    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무튼 이번 전시회를 보지 못해서 유감이야.]
      [천만에요.] 디나는 그의 빈정대는 말투에 화가 나고 말았다.
      [뭐라고 했어?]
      [전시회에 참석 못한 것을 유감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했어
    요. 나는 이제 당신의 그 위선에 지쳐버렸어요. 당신이 내 작품을 
    얼마나 하찮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단 말이에요.]
      [여보!] 마르크는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전.......] 제기랄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걸
    까? 디나는 도저히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모든 사실을 털어놓
    아 버려야 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마르
    크....... 좀 피곤한가 봐요.]
      [그럴 테지. 내가 부적당한 시간에 전화를 걸었나보군.] 마르크
    의 목소리는 신랄하면서도 차가웠다. 그는 디나의 태도가 전혀 마
    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여름 동안 캡 드안티베스에 가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아요....... 막 카멜로 떠나려던 참이었어요.]
      [또?]
      [네. 킴과 함께요.] 아, 맙소사! <또>가 아닌데. 디나는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싫었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할 일이 많아지
    거든요.] 그녀는 그 말 때문에 그가  조금이라도 더 늦게 돌아와 
    주기를 원했다.
      [글쎄, 이번에는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가 않아.]
      [얼마나요?]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멈추었다. 아, 제발 오래 
    걸려야 할 텐데, 금방 돌아오게 되면 안되는데.......
      [대략 한 달쯤.]
      디나는 말없이 끄덕였다. 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한달 뿐이었다.
      
      30분 후 그들은 카멜을 향해 낯익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디
    나는 내내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말이 없었다. 벤이 고민에 빠진 
    듯한 그녀의 얼굴을 힐끗 돌아보았다.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벤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
    다.
      [방금 집에 갔다가 좋지 않은 소식을 들은 것 아니야?]
      [아니예요.] 오랜 망설임 끝에 그녀는 스쳐 지나가는 시골 풍경
    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었어요.]
      [무슨  얘기를  했지.]   이혼하자는 말을   꺼내보지는   않았
    소......?
      [그냥 그렇죠, 뭐. 화가 좀 났어요. 전시회때문에 신경질을 내
    더군요. 그의 비서가 그 소식때문에 일부러 파리까지 전화를 걸었
    나봐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디나는 어깨만 추스려보였다.
      [아직도 그를 화나게 했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
    야?]
      디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면 그이는 아
    버지와도 같은 존재예요. 마르크는 이미 오랫동안 절대가나 다름
    이 없었거든요.]
      [그가 두렵소?]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어쩌면 그럴지
    도 모르죠. 나는 그저 내가 그이를 존경한다고 생각해 왔어요. 하
    지만...... 아, 누가 알아요.......]
      [그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무엇이지?]
      [나를 버리는 것-아니, 나혼자 그렇게 생각해 온 거예요.]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디나는 고개를 가로저었
    다.
      [아뇨.] 기묘하게도 이제 그녀는 그가 자신을 버려주기를 원하
    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문제는 무척 
    간단할 것같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필라가 있었다. 필라는 결코 
    그런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디나가 미간을 찌푸리자 벤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 다 잘 될테니.]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를 알았으면 좋겠어요, 벤. 
    난, 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건 사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벤과 헤
    어지거나 아니면 마르크의 곁을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내
    겐 필라에 대한 책임이 있어요.]
      [그렇지. 그것은 또한 당신 자신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지. 오히
    려 당신 자신에 대한 책임이 첫번째라 할 수 있어. 결국 모든 것
    은 당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까.]
      디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처음보다는 한결 가벼운 표정이 되었다.
      [참 이상해요. 나는 남편의 존재를 곧잘 잊어버려요. 18년 동안
    이나 내 인생의 중심이던 그가 한 달 반 만에 갑자기 전혀 모르는 
    타인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나 자신은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구
    요. 하지만 그의 존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요, 벤. 그는 내게 
    전화를 걸고 그는 또한 내 삶에  속해 있어요. 그는 내가 뭐라고 
    이야기 해주기를 원하지만, 웬일인지 그럴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그에게 말하지 말도록 하지.]
      아, 그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느님, 아직 그에게 확신을 
    심어 주지는 마십시오, 아직은.......
      벤이 계속 말을 이었다. [마음을 좀더 느긋하게 먹고 현실을 즐
    기는 게 어때? 나중 일은 그때 가서 걱정해도 충분할 테니까.]
      [당신은 언제나 그런 모양이죠?]
      디나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있지 않을 때, 그의 얼굴에 어리는 근심과 그의 눈가에 맺히
    는 두려움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렇죠?]
      [내가 걱정할 것이 뭐가 있어.] 벤은 자신있게 고개를 가로저었
    다. 그걸 보며 디나는 갑자기 웃음이 났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당신도 나만큼이나 걱정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더이상 캐묻지 말아요. 난 당신이 워낙 냉철해
    서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
    지 않지만요.]
      [그런가?] 디나를 바라보는 벤의 눈길에 과장된 웃음이 어렸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만큼
    은 그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이는 적어도 한 달 안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요.]
      [한 달?]
      디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4
      
      
      [그만 일어나, 이 잠꾸러기야! 10시가 다 됐다구.] 디나는 한쪽 
    눈만 뜨고 신음 소리를 낸 뒤 돌아 누워버렸다. 벤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다 몸을 숙여 키스를 했다.  [일어나, 당신은 오늘 중요한 
    고객을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잖아.  11시까지는 화랑에 도착해야 
    한단 말이야.]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건데요.] 디나는 베개 깊숙이 얼굴을 파묻
    으며 중얼거렸다.
      [난 지금 나갈 거야. 정말 안 일어날 거야?]
      [네.]
      벤도 그녀 옆에 주저앉았다. [디나, 괜찮아?] 그녀는 전시회가 
    끝난 뒤로 지난 두 주일 동안 때때로 피곤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괜찮아요.] 하지만 사실은 별로 그렇지도 못했다. 머리는 한없
    이 무겁고 몸뚱이는 마치 시멘트 더미에 묻힌 것만 같았다. 하루
    종일 침대 위를 뒹굴며 쉬고 싶어하였다.
      [요즘 들어 부쩍 더 피곤해 하는 것 같군.] 벤이 걱정스러운 눈
    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이 탓인가봐요.]
      [그야 그렇겠지. 성공이라는 것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해서는 
    안될 것 같군. 크게 한번 성공하고 나면 아예 나가 떨어질 것 같
    은데.] 벤은 그녀의 등 뒤에 대고 뭐라고 이야기하다가 부엌으로 
    나갔다. [토스트 좀 먹을래?] 별로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눈을 감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어버렸다.
      [됐어요!] 하지만 벤은 잠시 후 커피를 끓여서 다시 그녀 곁으
    로 왔다. 지금은 커피조차도 그녀의 구미를 당기지 못했다.
      [디나, 정말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게다가 마르크가 돌아
    온단 사실로 인한 부담도 적지 않았다. 아마 그것이 가장 큰 이유
    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만 하면 온몸의 기력이 다 빠져버리는 것 
    같았다. 자꾸만 남편과 딸 생각이 났다. 마지막 주까지 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을 내버려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이에요, 벤. 난 괜찮다니까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디나
    는 밝게 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커피잔의 
    따뜻한 온기가 얼굴까지 전해져  오자 그녀는 하마터면 구역질을 
    할 뻔 했다. 그녀는 눈에 뜨이게 창백해진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
    다. [당신 정말 어디가 아픈 게 틀림없어!] 두려움에 가득차 꾸짖
    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니예요, 아니라니까요! 난 괜찮아요. 건강해요. 그리고 당신
    을 사랑하구요.]
      디나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팔을 뻗자 벤은 힘껏 그녀를 끌어안
    았다. 그는 디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
    었다. 갑자기 그녀를 잃어버리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
    었다. 하루에 만 번도 더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그녀가 병이 들
    거나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파도에 휩쓸리거나 불이 나 타죽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마르크에게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
    다.
      [우리가 오늘 만나야 할 고객이 누구죠?]
      [쥬노트라는 사람이야. 스위스 사람인지 프랑스 사람인지 모르
    겠지만 좌우간 그 둘 중의 하나라더군.]
      프랑스 사람이라? 어쩌면 마르크를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벤이 먼저 대답을 해 버렸다.
      [그럴 리는 없어. 이번 주에  이곳에 도착한 사람인데, 화랑을 
    지나치다가 당신 작품이 눈에 띄었다는 거야. 우연일 뿐이야, 됐
    어.]
      [네. 당신은 남의 속마음까지 읽어버리는군요.]
      [좋아, 그럼 11시에 거기서 만나지.]
      벤은 다시 디나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손을 흔
    들며 집을 나서더니 문을 닫았다. 두 사람 다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디나는 밤에 악몽을  꾸다가 벤을 정신없이 끌어 
    안았다. 그러다가 잠이 깨면 이런 피곤과 불안이 밀려드는 것이었
    다. 그들은 똑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
    이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벌써부터 상대방에 대한 상실감에 
    사로잡히곤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2주라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 마르크가 조금 늦어지면 그 기간은 3주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누구도 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 못했
    다. 적어도 아직은. 그들이 간절히 원하고 있는 기적은 아직 일어
    나지 않고 있었다.
      
      디나는 11시 정각에 화랑에 도착했다. 크림빛의 실크 수트에 아
    이보리색 비단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신발과 백도 비슷한 바닐라 
    색깔이었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진주목걸이와 전시회 직전에 벤
    이 선물해 준 귀걸이도 하고 나왔다. <중요한 고객> 쥬노트 씨는 
    아주 인상이 좋아보였다. 말씨도  부드러웠고 자연스러운 매력이 
    풍겨나오는 그런 남자였다. 그는 디나의 작품을 가장 뛰어난 것으
    로 두 점씩이나 샀다. 그가 떠나고 나자 디나와 벤은 만족스러운 
    악수를 나누었다. 거의 8천달러에  이르는 매매가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반액 가량이 벤의  몫이었다. 일반적으로 중개인이 약 
    4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떤 중개인들은 
    50퍼센트까지 먹기도 했다. 디나는 지금까지 무척 만족할 만한 성
    과를 올린 셈이었다. 전시회 이후로 그녀가 벌어들인 돈이 거의 1
    만 2천 달러에 이르렀다.
      [그 돈은 모두 어디에 쓸 생각이지?] 벤이 다정한 눈길로 물었
    다. 디나도 행복한 표정으로 수표를 내려다보았다.
      [독립하는 데 써야죠.] 디나는 갑자기 마르크가 떠나기 전에 한 
    말이 생각나 그렇게 대답했다. 그것이 그녀가 계속 그림을 그리는 
    이유였으며, 따라서 필요한 경우 그녀는 얼마든지 독립할 수 있었
    다. 어쩌면 마르크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것만이 유일
    한 이유는 아니었겠지만, 뭔가 스스로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느낌을 갖게해 주었다.
      [당신의 독립을 증명해 보이는 의미에서  점심 한턱 사지 않겠
    어?]
      벤은 여전히 다정한 시선으로 디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눈부신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빛은 아무래도 어딘지 심상치 않
    게 보였다.
      [어때, 점심이나 먹자니까?]
      벤은 디나와 함께 나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들에게 남겨
    진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것은 하나의 집
    착과도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디나는 고개를 가로저었
    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안되겠어요. 킴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거
    든요.]
      [아쉽군. 좋아, 약속을 깨뜨리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5시에 일을 마치고 나면 당신은 틀림없이 내 곁에 있어야 돼!]
      [물론이죠.] 디나는 기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약속할 수 있겠어?]
      [그건 세상에서 가장 지키기 쉬운 약속이에요.]
      [좋아, 그럼 나중에!]
      벤은 화랑 입구까지 그녀를 바래다 주었다. 신사적인 태도로 그
    녀의 뺨에 입을 맞춘 그는 그녀가 길을 건너 자동차쪽으로 걸어가
    는 것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는 뿌듯한 자부심에 미소를 지으며 그는 안으로 돌
    아갔다.
      
      [존경하는 우리 예술가님, 오늘은 어땠어?] 디나가 자리를 잡고 
    앉자 킴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오늘도 그들은 여느 때처
    럼 트레이더 빅스에서 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디나는 거의 두 달 
    만에 와보는 셈이었다.
      [우리가 오늘 아침에 그림 두 점을 더 팔았다고 하면 믿겠니?]
      [물론 믿지. 다행스럽게도 톰슨은 때를 맞출 줄 알거든. 난 결
    코 네가 포기하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하지만 킴 역시 
    마르크가 없기 때문에 많은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마르크가 옆에서 윽박질렀더라면 디나도 전시회를 갖는 것에 동의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네가 잘 해내서 무척 기뻐. 적절한 때라는 생각도 
    들고.] 킴은 디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샴페인을 주문했다. [안될 
    게 뭐 있니? 우린 카멜 이후로  거의 만나지도 못했잖아. 게다가 
    축하할 일이 한두 가지니?] 디나는 혼자 웃음을 지었다. 킴이 모
    르는 축하할 일이 또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 네가 이제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는  사실 말고 또 다른 
    소식이 있니?] 킴이 디나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지만 디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꼭 카나리아를 잡아먹은 고양이 같은데?]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저런! 난 대충 알 것도 같은데.] 전시회 오픈하는 날 밤 그런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처음에는 확실하지가 않았었다.
      [자아, 네 입으로 이야기를 좀 해 봐. 안 그러면 난 아마 궁금
    해서 죽어버리고 말 거야.]
      [나더러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거니?]
      [농담이야, 디나. 자아, 털어놓고 얘기를 좀 해 봐.]
      킴의 말에는 어느 정도 장난기가 섞여 있었지만, 디나는 갑자기 
    심각해졌다. [벌써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뭘 그래. 그렇게 뻔한 
    일이 아니기를 바랬었는데.]
      [그게 아니야. 그날 밤, 전시회 오픈할 때 문득 그런 의심이 들
    기 시작한 것 뿐이야.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
    으리라는 느낌은 들지 않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디나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는 믿을 수 없을만큼 특별한 사람이야, 킴. 그리고 나는 그
    이를 사랑하고 있어, 아주 많이.]
      킴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무척 좋은 사람같아 
    보이더구나. 문제가 심각한 편이니?] 킴이 물었다. 디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킴은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나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도 않아.]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난 마르크에게로 돌아가야만 해. 벤도 그걸 알고 있다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잖니, 킴. 그럴 수는 없어. 난 
    그러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으니까. 게다가.......] 그녀의 목소
    리는 차리리 속삭임에 가까웠다. [나에게는 마르크와의 인생이 있
    어. 나는 언제나   그이를 사랑했고, 그리고......  필라도 있잖
    아.......]
      더이상 디나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되
    었다. 킴은 그녀에게 기적과도 같은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싶었
    다. 하지만 그런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디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벤은 어떤 생각이든?]
      디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나만큼이나 겁에 질려 있어. 하
    지만 난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새  출발을 할  수는 없어. 도저
    히.......] 디나는 절망에 빠진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너무 늙었어.]
      [만약 그것이 유일한 이유라면, 그건 그렇지 않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여자들은 육십이 되어서도 남편이 죽고 나면 새로운 인생
    을 시작한다구. 서른일곱의 나이에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무엇인
    가를 내팽개쳐 버린다면 그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그게 언제나 옳은 것은 아냐, 킴. 난 너무 늙어버렸다
    구. 벤은 아이를 원하고 있고, 내게는 이미 다 자란 딸이 있어.]
      [그건 이유가 안돼. 필라도 언젠가는 네 곁을 떠날 거야. 네가 
    새로 아이를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더 가질 수 있어.]
      [너도 벤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니구나.] 디나는 미소를 지어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남은 2주의 시간들이 자신의 눈 
    앞에서 물거품처럼 스러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디나, 벤과 함께 있으면 행복하니?]
      [난 지금까지 이렇게 행복해 본 적이 없어. 그런데 난 그걸 이
    해할 수가 없어. 난 마르크와 이십 년 가까이를 함께 살았어. 서
    로를 너무나 잘 알지. 그런데 갑자기....... 아, 킴! 난 이제 마
    르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목소리가 어떤지조차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처음에는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지. 난 지금 엄청난 일을 저
    지르고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이제는 심지어 불편한 기분조차 들
    지가 않아. 나는 벤을 사랑한다구.]
      [그걸 포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킴은 친구에게 벌어지
    고 있는 일이 너무나 슬프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계속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
    면....... 킴!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건 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벤이 그런 식으로 오랫
    동안 디나를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사람이 아닐 것 같았다.
      [남편에게 얘기할 거니?]
      디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인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야. 충격을 받겠지. 난, 아니 우린 좀더 두고 보는 수 밖에 없
    을 것같아. 벤은 9월의 몇 주 동안 뉴욕에 가 있어야 하거든. 그 
    시간을 이용해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좀 봐야 될 것 같아.]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 수만 있다면, 디나...... 도움이나 의지
    할 데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언제나 옆에 있어 줄께. 네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알고 말고.]
      두 사람은 따뜻한 미소를 교환한 뒤 헤어졌다. 킴은 디나와 헤
    어진 후에도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이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킴과 헤어진 디나는 천천히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우편물을 
    점검하고 세금도 내야 했다. 5시 전까지는 벤을 다시 만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들은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잠시 
    산책을 하거나 영화를 볼 것이다. 아이들이나 혹은 특별한 부담이 
    없는 사람들 혹은 시간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처럼 시간을 보낼 것
    이다. 디나는 남은 2주를 지난번에 벤과 함께 보낸 두 달처럼 보
    내고 싶었다. 조용하고 소박하게. 물론  벤과 함께. 그것은 바로 
    벤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모님이세요?] 디나가 열쇠로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
    가레트가 달려나왔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는데, 디나는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가레트, 왜 그래?]
      디나는 그녀가 약간 창백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홀에 놓여 있는 
    테이블로 가 앉던 디나는 그때까지도 마가레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가레트, 무슨 일이 있었어?]
      디나의 목소리가 한층 굳어졌다. 그녀는 파란 유니폼을 입은 마
    가레트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벤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함께 있는 것을 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무슨 일이냐니까?]
      [두 번 전화가 왔었어요.......] 마가레트는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말끝을 흐렸다. 그녀  자신도 확실하지가 못했다. 자신에게는 
    디나를 걱정한 권리가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느껴지는 것은 있었
    던 것이다.
      [마르크에게서 전화가 왔었던 말이야?]  디나는 허리를 빳빳이 
    세우며 물었다.
      [아뇨. 선생님의 어머님이신 듀라스 부인에게서요.]
      [뭐라고 하셨는데?] 디나의 미간이 눈에 뜨이게 좁아졌다. [무
    슨일이라도 생겼대?]
      [저도 모르겠어요. 파리의 교환수를 통해서 전화를 걸었으니까
    요. 부인이 돌아오시는 대로 곧장 전화를 하라고 하더군요.]
      [파리에서? 혹시 안티베스 말하는 거 아니야?] 마가레트에게는 
    그거나그거나 같은 것일 터였다. 하지만 마가레트는 굳은 표정으
    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파리라고 했어요. 여기 전화번호도 일러주더군요.] 마가
    레트는 파일에서 쪽지를 찾아내어 디나에게 건네주었다. 역시 그
    녀의 말이 옳았다. 파리의 루 프란시스 프리미어에 있는 시댁 전
    화번호였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시어머니
    가 병에 걸려서 필라를 예정보다 일찍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것인
    지도 모른다. 아니, 마르크! 마르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
    른다. 갑자기 엄청난 불안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디
    나는 허겁지겁 2층 침실의 전화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파리 시
    간으로는 자정이 좀 넘었을 것 같았다. 너무 늦었나, 내일 아침까
    지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해외 교환수는 재빨리 전화를 연결시켜 주었다. 이내 프랑스 전
    화선의 귀에 익은 잡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그것
    이 통화중 신호음인 줄  몰랐었지만 이제는 거기에도 익숙해져서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게 되었다.
      [조금 기다리셔야 될 거예요, 대단히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교환수는 캘리포니아 억양의 느긋한 말투였다. 잠시 후, 시어머
    니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어머님이세요?]
      디나에게 있어서 시어머니에 대한 애정의 표현은 그리 쉬운 문
    제가 아니었다. 거의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디
    나는 그녀를 듀라스 부인이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어머님?]
      연결 상태가 그리 양호한 편은 못되었지만 디나는 상대방의 목
    소리를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크게 하기 위해 자신의 소리부터 높였다. 듀라스 부인의 목소리는 
    졸리운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유쾌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하긴 
    그녀의 목소리가 유쾌하게 들린 적은 거의 없었지만.
      [디나예요. 너무 늦게 전화를 드려서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무
    슨......]
      듀라스 부인은 불어로 떠들어댔다. 이런  빌어먹을! 이런 전화 
    상태에서 불어로 이야기하면 어떻게 알아들으라고! 하지만 듀라스 
    부인은 아랑곳 하지 않고 유창한 불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디나
    는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깐, 잠깐만요!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영어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무슨 일이 있으신 거예요?]
      [그렇단다.]
      그 목소리는 고통스러운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는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그래, 마르크
    에게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필라 말이다. 그 애에게 사고가 
    생겼어. 자동차에 그만......] 디나는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필라가?] 이제 디나는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하고 있었다. 
    마가레트가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
    였다.
      [필라가?] 잡음이 한층 심해지는 바람에 디나는 고함을 질렀다.
      [어머님, 들리세요? 뭐가 어떻게 됐다구요?]
      [필라가...... 머리와 다리를......]
      [어머나 세상에!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디나의 뺨 위로 눈물
    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하
    려고 최선을 다했다. [어머님, 그래서 아이는 괜찮아요?]
      [다리가...... 마비되었다는구나. 그리고 머리도...... 아직 우
    리도 자세히는 모르고 있어.]
      [지금 아이는 어디에 있어요.] 디나는 거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
    리로 물었다.
      [아메리칸 병원에 있단다.] 이제는  듀라스 부인까지 흐느끼고 
    있었다.
      [마르크에게는 연락했나요?]
      [찾을 수가 없구나. 그리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의 
    동료들이 지금 그를 찾고 있는 중이다. 내일 정도면 연락이 닿아
    서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구나. 아, 디나! 너도 와줄 수 있겠지.]
      [오늘 밤에, 아니 지금 당장 가겠어요.] 시계를 내려다보는 그
    녀의 팔이 온통 떨리고 있었다. 4시  10분 전이었다. 디나는 7시 
    30분에 떠나는 비행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르크가 언
    제나 이용하는 시간이었다. 시차를 계산해 보면 파리 시간으로 4
    시 30분쯤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오후에 도착하도록 하겠어요....... 병원으로 곧장 갈께요. 담
    당 의사가 누구예요?] 손이 떨려서 그의 이름을 받아 적기조차 어
    려웠다.
      [어떻게 연락하면 되죠?] 듀라스 부인이 그의 전화번호를 일러
    주었다.
      [아, 에미야.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 아이가 타기에
    는 오토바이가 너무 크다고  마르크에게 몇  번이나 이야길 했는
    데.......]
      [어머님, 지금 누가 그 애 옆에 함께 있나요.]
      그것이 가장 먼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 불쌍
    한 아이가 파리의 병원에 혼자 누워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간호원을 옆에 있게 했지.]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이
    야기였다.
      [다른 사람은요?] 디나의 목소리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여긴 지금 자정이 넘은 시간이란다.]
      [그렇다고 아이를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요.]
      [그야 물론이지.] 그래 지금 안젤린을 거기로 보냈단다. 아침이 
    되면 나도 가봐야겠지.]
      안젤린이라면 하녀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닌
    가, 그런 여자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되도록 빨리 달
    려가겠어요. 그 아이에게 내가 사랑하고 있다고 전해 주세요. 그
    럼 안녕히 계세요, 어머님. 내일 뵙겠어요.]
      디나는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교환수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특
    정인 지명 호출로 허버트 커쉬만  박사를 부탁합니다. 무척 급한 
    일이에요.]
      하지만 커쉬만 박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메리칸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렇게 
    가벼운 상처가 아니기는 하지만 듀라스 필라  양은 편히 쉬고 있
    다. 의식도 있다. 어쩌면 내일 아침에  수술을 하게 될지도 모른
    다. 아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바로 오늘 저녁에 
    칸느에서 비행기 편으로 이곳에 도착했다. 부인께서는 내일 아침
    에 박사님께 전화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빌어먹
    을! 필라가 아직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라니, 지금 상
    태에서 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행기를 타는 
    것밖에는.
      디나가 잠시 눈물을 참기 위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꼼
    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마침내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오
    열이 북받쳐 이르기 시작했다.
      [가엾은 필라....... 아, 하느님!]
      그때 마가레트가 그녀에게 다가와  양팔로 그녀를 감싸안았다. 
    [상태가 좋지 않대요?] 조용한 방  안에 그녀의 조그만 목소리가 
    나직히 퍼져나갔다.
      [나도 모르겠어. 다리가 마비되고 머리에도  뭔가 이상이 있는 
    모양이야. 하지만 아무도 정확한 답변을 해주지 않는군. 다음 비
    행기를 타고 가야겠어.]
      [짐을 꾸릴께요.]
      디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노력했다. 벤에
    게 전화를 해야 했다. 도미니크에게도. 그녀의 손가락은 본능적으
    로 마르크의 사무실로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가 별로 좋아
    하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가  총알처럼 흘러나왔다. [듀라스 씨는 
    지금 어디 있죠?]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그걸 모르다니. 우리 딸이 사고를 당했
    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그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죠? 
    도대체 어디로 갔기에 모르죠?]
      [부인....... 최선을 다해서 그분을 찾아보겠습니다. 내일 아침
    까지 부인께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난 오늘밤에 파리로 떠나요. 그리로 오라고 전해 주세요. 어머
    님께 전화 먼저 하고 말이에요.  필라는 파리의 아메리칸 병원에 
    있어요. 그러니 제발 다시 한번  부탁해요, 도미니크. 가능한 한 
    빨리 그를 좀 찾아주세요.] 디나의 목소리는 여전히 몹시 떨리고 
    있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부인, 정말 죄송합니다. 상태가 심각한
    가요?]
      [그건 나도 몰라요.]
      디나는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 좌석을 예약했다. 마가레트가 짐
    을 꾸리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녀는 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화실에서 출발하기 전에 통화를  해야 했던 것이다. 앞으로 
    한 시간 후에는 공항으로 떠나야 할 것이다. 마침 벤이 직접 전화
    를 받았다.
      [전 오늘 밤에 이곳을 떠나야 될 것 같아요.]
      [아니, 무슨 일이 있었어, 은행을 털기라도 한 거야.] 벤의 목
    소리에는 장난기와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잠시 후 그녀를 만나게 
    되리라고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벤도 이내 무
    언가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필라가 사고를 당했어요. 아, 벤.......]  그 말을 하고 나자 
    눈물과 고통과 두려움이 새삼 북받쳤다. 필라에게 오토바이를 사
    준 마르크에 대한 분노도 끓어올랐다.
      [진정해, 디나! 내가 지금 곧 그리고 달려가겠어. 집으로 찾아
    가도 괜찮겠지?]
      [그럼요.]
      그로부터 정확히 7분 후, 마가레트가 벤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
    다. 디나는 자신의 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점심 때 
    입고 있던 옷차림 그대로였으며, 따라서 벤이 선물해 준 귀걸이도 
    그대로 하고 있었다. 벤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디나를 힘껏 
    껴안았다.
      [괜찮아, 디나. 괜찮다니까. 필라에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디나는 필라의 다리가 마비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건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어. 당신도 아직 
    자세한 것은 모르고 있잖아,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
    한 지경은 아닐 테니 걱정하지 말아. 뭣 좀 마시지 않겠어?]
      디나는 무척이나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벤
    은 그녀의 얼굴에 쓰인 고통의  흔적을 바라볼 뿐이었다. 디나는 
    다시금 눈물을 지으며 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언젠가 한 번은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
    어요.]
      [무슨 소릴! 당신도 아직 아무 것도 모르잖아. 병원에 가서 직
    접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라구.] 벤은 조심스러
    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함께 가 주어도 
    될까.]
      디나는 한숨을 내쉬며 간신히 어렴풋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
    될거야 없죠. 하지만 그러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이야기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요.]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 금방 달려갈 테니까. 약
    속해 줄 수 있겠어?] 디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킴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사실을  좀 알려주시겠어요. 전화를 
    했더니 지금 나가고 없더라구요.]
      [내가 전화를 하면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벤은 잔
    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디
    나에 대한 걱정이었다.
      [괜찮아요.] 디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벌써 눈치채고 있더라구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저한테 묻지 마세요. 전시회 오픈때 그런 느낌
    을 받았다나요. 하지만 킴은 당신을 무척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
    하고 있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구요.]
      두 사람은 다시 한번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어쩌면 당분간 
    벤의 이런 따스한 품을 느껴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한번 집에 가 볼 수 있는 기회를 원했었어요....... 
    거기에 가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마음이 편해질 수 없어요.] 그
    녀가 말하는 집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벤의 집이었다. 벤 역시 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곧 다시 돌아오게 될 거야.]
      [정말로 그럴까요?] 두 사람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정말이잖고. 자아, 이제 그만 가보는 것이 좋겠어. 필요한 것
    들은 다 챙겼어?] 벤이 물었다. 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
    아버렸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괜찮아요.]
      디나는 벤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문을 나서기 전에 그녀는 
    잠시 마가레트와도 포옹을 나누었다. 디나와 벤은 앞으로 한 시간 
    이내에 공항까지 도착해야만 했다. 45분 후면 그녀는 비행기 안에 
    앉아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12시간 후에는 파리의 필라 곁에
    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디나는 제발 필라에게 아무 일이 없기
    를 기도하는 마음 뿐이었다.

      
                                  15
      
      
      [도미니크, 그게 사실이야?]
      [물론입니다. 선생님. 선생님 어머님께도 제가 전화를 드렸습니
    다. 그리고 담당 의사에게도요.]
      [그 의사 이름이 뭐라던가?] 도미니크가 이름을 불러주자 마르
    크는 급히 연필을 찾는 시늉을 해 보였다. 옆에 있던 샹딸이 자신
    의 연필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언제 수술을 했다고 하던가?]
      [파리 시간으로 오늘 아침에 했답니다. 제 생각으로는 지금부터 
    약 세 시간 전이었을 것 같아요. 수술결과 상태가 조금 좋아졌다
    고는 하지만 아직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지는 못했나 봅니다. 머리
    의 상처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는 모양이더군요. 물론 다리의 상처
    도 그렇고요.]
      도미니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마르크 에두아르의 두 뺨 위로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먼저 전보를 치고 오늘밤까
    지 도착하도록 하지.] 그는 급히 수위를 불렀다. 그의 지시는 간
    단했다. [나 듀라스일세. 파리행 비행기를 예약해 주게, 지금 당
    장.] 수화기를 내려놓은 마르크는 얼굴을 닦으며 샹딸을 바라보았
    다.
      [필라 일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마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다쳤대요?] 마르크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아직 모르겠다는군, 모르겠다고.......] 마르크는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 오토바이는 바로 자신이 필라에게 선물해 준 것
    이라는 이야기도 할 수가 없었다. 오열이 그의 온몸을 엄습해 왔
    다.
      디나는 피로와 공포와 구토증에 시달리며  샤를르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그녀는 두 손을 맞잡아 쥔  채 꼬박 뜬 눈으로 온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전화를 해 보았
    지만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디나는 공항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택시를 잡아타고 말없이 병원으로 향했다.
      역시 프랑스 인답게 운전수는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라주었다. 
    스쳐지나가는 길가의 파란 나무들도 디나의 눈엔 한낱 파란 점으
    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운전수가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피하
    기 위해 핸들을 꺾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나는 자신의 심장
    이 심하게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빨리, 조금더 빨리 달릴 
    수 없을까. 빅토르 위고가를 지나  마침내 병원의 거대한 이중문 
    앞에까지 도착하는데 수없이 많은  시간이 흘러가버린 것만 같았
    다.
      디나는 얼른 지갑에 손을 넣어 아까 공항에서 바꾼 프랑을 꺼냈
    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100프랑 짜리  지폐 한 장을 운전수에게 
    건네준 그녀는 서둘러 자동차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운전수가 이상하다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말없
    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에게는 거스름돈 따위에 신경쓸 여유
    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굳게 다물어진 두 입술에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운전수는 처음에 그녀가 병원 주
    소를 건네주었을 때부터 대충 짚히는 바가 있었다.
      [남편 일이십니까?]
      [아뇨, 딸이에요.] 다시금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어리기 시작했
    다.
      운전수도 안타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는 디나의 
    조그만 갈색 여행가방을 집어들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는 그 
    가방을 든 채 잠시 디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더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에게도 딸이 있었으므로 디나의 눈가
    에 떠오른 근심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아들
    을 잃을 뻔한 사고를 당했을 때 자신의 아내도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다. 그는 마침내 그 가방을 디나에게 건네주었다. 잠시, 
    아주 잠시 디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병원을 향해 서둘
    러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별로 정답지 못한 인상의 간호부장이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필라 듀라스의 입원실이 어디죠.] 아, 제발 아무소리 말고 방 
    번호만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는데.......
      [425호실입니다.]
      디나는 한숨이라도 길게 한번 내뱉고 싶었다. 대신 그녀는 얌전
    하게 고개를 끄덕여보인 후 표지판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엘리베
    이터 안에는 두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여자가 타고 있었다. 그
    들은 극히 사무적인 표정의 유럽인들처럼 보였다. 어쩌면 환자의 
    친구, 혹은 남편이나 아내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특별히 고통스
    러운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다.
      디나는 엘리베이터가 4층에 도착할 때까지 부러운 눈길로 그들
    을 바라보았다. 몹시 불안한 상태에서의 오랜 시간의 비행은 확실
    히 힘에 겨웠다. 한잠도 자지를 못하고 필라 생각, 벤 생각에 몸
    을 뒤척였던 것이다. 벤과 함께 왔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디
    나는 벤의 튼튼한 두 팔에 편안히 안겨 있는 자신을 그려보았다. 
    그의 그 부드러운 목소리만 들어도 한결 힘이 날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4층에 도착하자 디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걸음을 
    옮겨놓았다. 간호원들이 부산히 오가는가 하면 좀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몇몇 남자들이 모여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문득, 디나는 광활한 벌판에 혼자 내버려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지금 집에서 무려 6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이
    미 숨이 끊어져버렸을지도 모를 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디나는 자신이 불어를 할 수 있는지, 혹은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과연 필라를 찾을 수 있을런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디나의 눈가에 새로운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어지러움과 구토
    증을 간신히 참으며 안내창구를  향해 다가갔다. [필라 듀라스를 
    찾고 있습니다. 나는 그 아이의 어머니예요.] 디나는 미처 불어로 
    이야기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도저히 불어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누군가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누군가 나서서 모든 것을 자세히 안내해 주길 바랐다. 필라가 있
    는 곳까지 데려다주기도 하고, 그 아이에게 아무일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할 것 같았다.......
      [듀라스?]
      간호원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디나를 바라보더니 미간
    을 찌푸리며 차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디나의 몸 속에든 모든 
    것이 흐물흐물 풀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지는 느낌이었다.
      [아, 그렇지.]
      간호원은 디나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문득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로 두려움에 벌벌 떨며  자기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듀라스 부인이신가요?]
      [네.]
      디나는 간신히 모기 소리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오랜 
    여행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마르크라도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
    다.
      [듀라스 부인, 괜찮으세요?]
      하얀 유니폼을 입은 젊은 간호원이 억양 강한 영어로 물어왔다. 
    디나는 촛점 없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듀라스 부
    인>이 맞는지 아닌지도 헛갈리기 시작했다. 마치 의식이 마비되기
    라도 한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난, 저...... 생각을...... 좀 앉아도 될까요?]
      멍한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던 디나는 주위의 모든 것들이 희부
    옇게 변했다가 이내 조그맣게  움츠러드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
    다.
      성능이 신통찮은 텔리비전으로 화면이 점점 희미해지는 순간을 
    보고있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화면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마침내 윙하는 소음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잡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듀라스 부인, 듀라스 부인?]
      아까 그 간호원의 목소리였다. 디나는 혼자 미소를 지었다. 저 
    여자는 저렇게도 상큼한  목소리를 지녔구나......  저렇게 상큼
    한....... 디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졸음을 느꼈다. 이대로 쓰
    러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주고 있었다. 갑자기 목과, 이어서 머리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화면이 되살아났다. 수많은 얼굴들이 둥그렇
    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디나는 일어나 앉아보려고 했지만 
    누군가의 손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두 명의 젊은 남자들이 
    저희들끼리 무언가 불어로 다급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디나를 응급실로 옮기려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
    어 거기에 반대했다.
      [아니예요. 난 괜찮아요. 정말입니다.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너무 
    오랫동안 비행기를 타고 왔어요. 게다가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를 못해서 무척 피곤할 뿐이에요.......]
      다시금 디나의 눈가에 눈물이 샘솟았다. 그녀는 주위의 모든 사
    람들을 쫓아버리고 싶었다. 내가  무엇때문에 응급실로 실려가야 
    된단 말인가! [나는 딸을 만나야  해요. 필라...... 필라 듀라스
    를.]
      그 말이 확실히 효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두 젊은이는 한동안 
    디나를 바라보더니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양팔에 각각 
    한 사람씩의 부축을 받으며 디나가 몸을 일으키자 젊은 간호원이 
    그녀의 옷매무새를 바로 잡아주었다. 누군가가 의자를 가져다주었
    고 아까 그 간호원이 물 한 컵을 가져다주었다.
      잠시 후, 모든 사람들은 각각 흩어져 가고, 젊은 간호원과 조금 
    더 나이든 간호원 두 사람만이 남았다.
      [죄송해요.] 디나가 말했다.
      [천만에요. 무척 피곤하신가 보군요. 오랫동안 비행기를 타셨다
    니 그럴 수도 있겠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필라 양을 만나게 해드
    릴 테니까요.] 두 사람의 간호원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나이
    든 간호원이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디나는 다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컵을 돌려주었다.
      [커쉬만 박사님이 여기 계신가요?] 디나의 질문에 간호원이 고
    개를 가로저었다.
      [아까 퇴근하셨어요. 밤새 팔라와 함께 있었거든요. 수술을 한 
    건 알고 계시죠?]
      [다리 말인가요.] 다시금 디나의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뇨, 머리예요.]
      [경과는 괜찮은가요.] 그에 대한  대답이 나오기까지 엄청나게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훨씬 좋아졌어요. 이리 오셔서 직접 보세요.]
      간호원이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옆으로 다가왔지만 디나는 이제 
    완전히 회복된 듯한 느낌이었다. 방금 쓸데없이 낭비한 시간때문
    에 자기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간호원들은 그녀를 부축하여 길다란 복도를 따라 가더니 마침내 
    하얀 문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간호원이 디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몇 걸음 병실 안으로 들어서던 디나는 공기가 온통 
    자신의 폐속에서 얼어붙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숨을 쉬기조차 힘
    들었다.
      필라는 각종 기구와 고무관에 둘러싸인 채 온몸에 붕대를 감다
    시피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심각한 표정의 간호원 한 사람이 
    말없이 앉아 있었고, 세 개 가량의 모니터가 알지 못할 신호들을 
    끊임없이 내보내고 있었다. 필라는 붕대때문에 거의 앞도 보지 못
    할 것 같았고, 얼굴은 갖가지 고무 호스때문에 몹시 일그러져 있
    었다.
      하지만 디나는 이번에는 기절하지 않았다. 대신 디나는 그 자리
    에 가방을 내려놓고 단단한 걸음걸이로 미소를 머금고 필라를 향
    해 다가섰다.
      디나를 데리고 온 간호원이 말  없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간호원이 처음부터 방 안에 있던 다른 간호원과 미소를 교환했
    다. 그녀가 몇 발 앞으로 다가섰지만 디나는 그녀에게 신경쓸 여
    유가 없었다. 디나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참으며 필라의 
    침대에 한발한발 다가섰다.
      [필라, 엄마가 왔다.]
      필라의 침대에서는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이의 눈길이 디나의 발걸음을 좇고 있었다. 필라가 어머니를 알
    아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있단다. 아무 걱정할 필요없어.......]
      디나는 침대 옆에 서서 붕대를 감지 않은 필라의 한쪽 손을 가
    만히 잡았다. 혹시나 조그만 고통이라도 주게 될까봐 무척이나 조
    심스러운 동작이었다. 디나는 두 손으로 필라의 손을 잡고 그 손
    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괜찮아, 필라. 곧 회복될 거야.]
      필라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쉿....... 좀더 있다가  나중에 이야기 하자꾸나.  지금은 안
    돼.] 디나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말투는 단호했
    다.
      필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난......]
      [쉿.......] 디나는 엄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필라의 
    눈은 하고 싶은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었다. [뭐 필요한 게 있니?] 
    이제는 필라의 눈에서도 대답할 기미가 사라졌다. 디나는 간호원
    을 힐끔 쳐다보았다. 필라는 아직도 고통을 느끼고 있는 걸까? 간
    호원도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두 여인은 함께 필라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엄...... 마가 와 주어서...... 기뻐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가느다란 쇳소리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디나의 가슴에는 새로운 눈물과 사랑이 복받쳐 올랐다. 두 눈 가
    득 눈물이 고였다. 디나는 필라의 손을 꼭 잡은 채 미소를 지어보
    이려고 노력했다.
      [엄마도 기뻐, 필라. 이제 말은 그만 하렴. 조금만 있으면 얼마
    든지 이야기할 수 있어. 우린 할 말이 무척 많잖아.]
      이번에는 필라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눈을 감았다. 간호원
    이 디나를 복도로 데리고 나오더니, 마취상태와 수술할 때를 빼고
    는 마치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 전혀 잠을 자지 
    않던 필라였다며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당신이 온 것이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있어요, 부인.]
      필라의 담당 간호원은 흠잡을 데 없는 영어를 구사했으며 강인
    한 인상을 풍기는 여자였다. 디나는 그녀의 말을 듣자 한결 마음
    이 놓였다. 필라가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을 쏟아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디나는  사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필라가 자신을 거부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필라의 태도
    로 미루어볼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아니, 혹시 필라가 
    진정으로 기다리던 사람은 아빠가 아니었을까? 그건 아무래도 좋
    았다. 디나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병실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
    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에 잠을 깬 필라는 침대에 누운 채 한순간
    도 디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참동안이나 서로 마주보
    고 있던 필라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디나
    는 다시 침대 곁으로 다가가 필라의 손을 잡았다.
      [사랑해, 필라! 넌 지금 상태가 무척 좋아지고 있대. 잠이나 좀
    더 자두는 게 어떻겠니?]
      하지만 필라의 눈은 <싫어요>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필라는 무려 
    한시간 동안이나 디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말할 
    기력이 없어 눈으로 할 말을 대신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한 시간 
    가량이 지나자 필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강아지.......]
      디나가 언뜻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필라
    는 좀더 자세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내 강아지...... 가지고 왔어?]
      이번에는 디나도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강아지 인
    형. 그것은 필라가 꼬마였을  때의 보물이었다. 너무 낡아빠지고 
    더러워져 이미 오래전에 집안 어느 구석의 선반 위에 올려져버린 
    인형이었던 것이다.
      디나는 결코 그 강아지 인형을 내버릴 수 없었다. 그 강아지가 
    이제 디나로 하여금 꼬마시절의  필라에 대한 기억을 봇물터지듯 
    돌이키게 해주었다. 디나는 그런 필라를 바라보며 혹시 그녀가 지
    금 이곳이 어디인지를 모르고 있는가, 혹은 그녀가 그 인형에 몰
    두하던 어린시절로 돌아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강아지는 집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필라는 보일듯 말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
    어.......] 가느다란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것과 동시
    에 필라는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강아지  인형. 그 인형은 이제 
    좁은 의자에 쪼그리고 앉은 디나로 하여금 필라가 세 살, 네 살, 
    다섯 살, 그리고 아홉 살이었을  때의 추억들을 되새기게 해주었
    다. 필라는 아홉 살이 지나더니 금방  열두 살이 되어버렸고, 또 
    순식간에 지금은 거의 열여섯 살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필라, 금빛 곱슬머리와 파란 눈동자를 가진 필라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조그맣고 귀여웠었다. 그 아이가 조그만 입으
    로 지껄이던 그 귀여운 말들,  이따금씩 부모를 위해 추어보이던 
    그 귀여운 춤들, 인형들을 초대해 놓고 개최하던 티파티, 그 아이
    가 쓴 이야기와 시들, 어느 해인가 디나의 생일을 맞아 직접 만들
    어준 블라우스....... 디나는 아주 진지한 마음으로 그 블라우스
    를 입고 성당에 간 적도 있었다.
      [듀라스 부인!]
      디나는 어디선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어느 낯선 여인의 목소리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네?]
      [좀 쉬지 않으시겠어요? 바로  옆 방에  침대를 마련해 드릴께
    요.]
      처음 보는 이 간호원은 아주 상냥한 인상과 똑똑해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디나의 팔을  툭툭 두드려주며 다시 말했
    다.
      [너무 오랫동안 이러고 계셨어요.]
      [지금 몇 시나 됐죠?] 디나는 벌써  몇 시간째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11시가 다 됐어요.]
      샌프란시스코는 오후 2시일 것이다. 따져보면 집을 떠난 지 24
    시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마치 그동안 몇 년의 세월이 흐른 것처
    럼 느껴졌다. 디나는 일어나 허리를 폈다.
      [아이는 좀 어때요?] 디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침대쪽을 바
    라보며 물었다.
      간호원이 잠시 망설인 끝에 대답했다. [별로 차도가 없어요.]
      [의사 선생님은 언제 돌아오시죠?]
      디나가 필라 곁에 있은 지 5시간이 지났지만 그동안 의사는 그
    림자도 비치지 않았었다. 게다가 마르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
    까, 오기는 오는 걸까? 그가 오면 이 허술한 병원도 좀 제대로 돌
    아갈 것 같았다.
      디나는 여전히 알지 못할 그림들을 그려내고 있는 모니터를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사 선생님은 몇 시간 내로 오실 거예요. 부인도 이제 좀 쉬
    셔야죠. 밤에는 집에 가 계셔도 됩니다. 아가씨에게는 새로 주사
    를 놓았으니 한참동안 깨지 않을 거예요.]
      디나는 필라의 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아무래
    도 시어머니의 집에 얼굴이라도 비춰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았다. 
    거기에 가보면 마르크에게 연락이 닿았는지, 이놈의 의사는 도대
    체 어떻게 된 작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담당 의사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도대체 그
    는 필라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것인가?
      디나가 알고 있는 것은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뿐이었다. 디나는 
    몇시간 동안이나 누군가의 설명을, 좋은 소식을 기다리며 앉아 있
    었지만 극도의 무력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다가와서 별
    일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갈구했었다.
      그러나 설사 누가 별일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도 디나에
    게는 곧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부인!] 간호원이 동정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방을 집어드는 디나의 모습은 필라만큼이나 기운이 없어 보였
    다.
      [연락처를 가르쳐드리고 가겠어요. 금방 돌아오기는 할 거지만
    요. 아이가 얼마나 더 잘 것 같아요?]
      [최소한 네 시간, 어쩌면 대여섯 시간 정도는 잘 거예요. 하지
    만 3시 전에는 절대로 깨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약속 드릴께
    요....... 만약 문제가 생기거나 그  전에라도 잠을 깨서 엄마를 
    찾으면 곧장 연락드리도록 하겠어요.] 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
    댁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눈길로 다시 한
    번 간호원에게 당부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전화를 주세요....... 금방 달려올 테
    니까요.]
      디나는 뭐라고 더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간호원은 그것만
    으로도 그녀의 의사를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녀는 디나의 전화번
    호를 차트에 부착하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꼭 전화할께요. 하지만 그보다도 부인께서도 잠을 좀 주무셔야 
    할것 같군요.] 디나는 지금까지 이토록 피곤해 본 적이 없다는 생
    각을 하기는 했지만, 잠을 자는 것은 가장 나중에 계획된 일이었
    다. 벤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고, 의사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으
    며, 마르크를 찾아야 했다.
      마음이 바빠지자 다시 현기증이 일어났다. 디나는 간신히 벽에 
    몸을 의지해 이번에도 기절만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런 상태로 꽤 
    오랫동안 필라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
    만 디나는 한손에 가방을 들고 코트를 걸쳐 든 걱정스러운 마음으
    로 병실을 나섰다. 병원 건너편  도로에서 택시를 집어탄 디나는 
    좌석에 몸을 기대며 너무나도 깊은, 그래서 차라리 신음 소리처럼 
    들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 구석구석이 피로와 고통에 찌들어 
    있었고, 잔뜩 지친 온몸의 신경은 여전히 바짝 긴장해 있었으며, 
    머릿속은 필라의 과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기 때의 필라......   작년의 필라...... 일곱  살  때의 필
    라...... 자기 방 안의, 학교에서의, 공항에서의 필라.
      필라의 새로운 헤어 스타일, 그녀가 처음 신은 스타킹, 빨간 리
    본.
      그것은 하루종일 보고 있어도 끝나는 법이 없는 한 편의 영화였
    다. 어떤 때는 음향이 있기도 했고, 어떤 때는 없기도 했다. 택시
    가 파리시내를 가로질러 달리고 있는 데도 디나의 눈에 비친 영상
    은 바로 그 영화뿐이었다.
      그곳은 마침 크리스챤 디올과 이웃하고 있었다. 거리는 파리의 
    여느 거리만큼이나 산뜻했다. 샹젤리제와 아주 흡사한 면모도 있
    었다. 좀더 젊었던 시절의 디나는 쇼핑을 한다는 명목으로 이 거
    리에 나와 시어머니의 그 엄격한 생활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카페
    에서 커피 한 잔을 즐기는 여유를 가지기도 했지만, 그 시절의 기
    억들은 이미 디나의 머릿속에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디나는 물에 
    젖은 솜처럼 완전히 지쳐버린 몸을 간신히 가누고 있었다.
      운전수는 연신 담배를 피우며 흘러간 옛노래를 불러댔다. 그는 
    무척 기분이 좋은 듯 뒷자리에 앉은 손님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
    하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두 사람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운전
    수가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였으나 디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녀는 요금만 지불하고는 곧장 차에서 내렸다. 운전수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보이고 차를 몰고 사라졌고 디나는 입구를 향해 다가
    섰다
      시어머니는 오후 내내 병원에 한 번 들러보기조차 하지 않은 것
    이 분명했다. 간호원의 말에 의하면 아침에 한두 시간 정도 필라
    와 함께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두 시간, 겨우? 그리고는 그 지
    경에 처한 아이를 줄곧 혼자  내버려뒀단 말인가? 그것은 디나의 
    평소 생각을 한층 분명하게 해주는 처사였다. 듀라스 부인은 정이
    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짧고 날카롭게 두 번 초인종을 눌렀더니 묵직한 나무문이 덜컥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디나는 등 뒤로 문을 닫고 서둘러 조그만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평소의 그녀는 이 엘리베이
    터가 사람이 사용할 것이  아니라 카나리아가 탔으면 알맞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생각도 없이 7층 단추를 
    눌렀다. 듀라스 부인이 그 건물의  7층 전체를 소유하고 있었다. 
    디나가 엘리베이터에서 걸어나오자 유니폼을  입은 낯선 하녀 한 
    사람이 디나를 맞아주었다. [어서오세요.] 그녀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표정으로 디나를 맞았다
      [마님 계시죠?] 디나의 불어는 자신의 귀에도 형편없이 들렸으
    나 그런 것 따위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네, 마님께서는 살롱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팔자 좋군. 차
    라도 마시고 있나? 하녀를 따라  거실로 들어서는 디나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태연하고 자연스러웠다. 외관
    상으로 보아서는 에두아르 듀라스 부인의 손녀가 불과 2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병원에서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중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디나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 역시 완벽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디나의 시어머니는 초록색 실크 드레스에, 나무랄 데 없
    는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디나를 발견하고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그녀의 발걸음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단지 눈
    빛만이 그녀의 걱정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디나와 약
    수를 나눈 뒤 그녀의 두 뺨에 입을 맞추고는 며느리의 안색을 살
    피며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지금 도착하는 길이냐?] 그녀의 눈길은 방을 빠져나가는 하녀
    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아뇨, 저녁 내내 필라와 함께 있었어요. 그런데도 아직 의사를 
    만나지 못했어요.] 디나는 코트를 벗으며 쓰러지듯 의자 위에 주
    저앉았다.
      [무척 피곤해 보이는구나.] 듀라스 부인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
    으로 디나를 바라보았다. 오직 교활해 보이는 눈만이 그녀가 살아
    있는 한 인간임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제가 피곤하고 않고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예요. 도대체 그 
    커쉬만이라는 사람은 누구예요, 지금 어디에 있죠?]
      [그분은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란다. 오늘 오후에도 늦게
    까지 필라와 함께 있었어. 몇 시간 내로 다시 필라를 보아 줄 게
    고....... 디나!]
      듀라스 부인은 잠시 망설인 후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
    다.
      [그분도 이제 자신으로서는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더구
    나.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좀더 기다려 봐야 한대. 하지만  필라는 반드시 회복될 거야. 
    꼭 살아날 거라고.......] 듀라스 부인은 자신이 한 말에 상응하
    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디나는 다시금 눈가에 물기를 닦아
    내야 했다.
      [뭘 좀 먹어야 되지 않겠니?]
      디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샤워를 하고 좀 쉬어야겠어요. 제
    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어머님, 제겐 지금 그럴 여유가 없군요.]
      [그래, 안다.]
      정말일까? 하지만 디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 역시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일단 뭘 좀 먹어야 될 것 아니야.] 듀라스 부인이 
    말했다.
      [안색이 몹시 창백하구나.]
      디나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설사 피곤하지 않다 해도 적어도 오늘밤만큼은 아무 것도 먹을 수
    가 없었다. 그렇게 가련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엄마의 손을 잡
    을 기력조차 없이 인형의 안부를 물어보던  필라를 보고 온 마당
    에, 어떻게 음식을 삼킬 수 있단 말인가!
      [샤워하고 옷이나 좀 갈아 입어야겠어요. 그나저나 마르크에게
    서는 연락이 있었나요?] 자신도 모르게 디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듀라스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 후에 도착한다더구나.] 한 시간, 한 시간이라....... 
    디나는 필라에 대한 걱정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테네에서 곧장 이리로 온다더구나, 무척 놀란 모양이야.]
      [그랬겠죠.] 디나는 시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반대를 했는데도 그인  결국 필라에게 오토바이를 사주고 
    말았어요.]
      듀라스 부인의 반응은 금방 드러났다. [디나, 그렇다고 애비를 
    비난할 수야 있겠니. 자신도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텐데.]
      [그야 물론이죠.] 디나는 눈길을 거두며 몸을 일으켰다.
      [한 시간 후에 비행기가 도착한단 말씀이죠?]
      [그래, 마중을 나가려고?]
      디나는 아니라는 대답을 하려 했으나 마음 속의 그 무엇인가가 
    그러지 못하게 했다.
      필라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마르크가 병실로 들어서서 처
    음 필라를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혼자 병실로 들어서
    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받은 충격을 그 역시 고스란
    히 느껴야 할 테니까. 필라는 마르크에 보물과도 같은 아이였다. 
    그에게 있어 필라는 차라리 하나의 신이었다. 디나는 그런 그에게 
    자신과 똑같은 충격을 강요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공항으로 나
    가보아야 될 것 같았다.
      [비행기 번호를 아세요?] 시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가 보죠. 얼굴이나 좀  씻구요. 옷을 갈아입을 시간은 
    없을것 같군요. 택시 좀 불러주시겠어요?]
      [그러마.] 듀라스 부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가 준다
    니 기쁘구나. 플로레트가 샌드위치를 만들어줄 게야.] <플로레트>
    는 작은 꽃을 뜻했다. 그 뚱뚱한 몸집의 요리사와는 너무나 어울
    리지 않는 이름이라 언제나 웃음이 나오곤 했지만 오늘밤만은 예
    외였다. 지금 상태에서 그녀가 웃을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디나는 시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서둘러 홀로 내
    려갔다. 그녀가 객실을 향해 막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어두컴컴
    한 한쪽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이 눈에 띄었다. 작가에게서 잊혀진 
    채 원하지 않는 곳에 걸려진 그림이었다. 디나와 필라가 함께 그
    려진 자화상이었던 것이다. 듀다스 부인이 특별히 그 그림을 좋아
    할 리가 없었다. 디나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이번에 돌아갈 때
    는 저 그림을 가져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낯익은 객실에 들어선 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은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
    고, 가구는 하나같이 루이 15세 때 작품이었다. 하지만 디나에게
    는 언제나, 심지어 마르크와 함께  신혼여행 중에 들렀을 때에도 
    차가운 느낌을 준 방이었다.
      디나는 머리를 매만지며 남편을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를 
    다시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손을 만진
    다.......
      지금에 와서 오히려 벤의 존재가 한층 더 실감있게 다가오는 이
    유는 무엇일까, 아니 벤은 오히려 꿈에 불과한 것일까, 이 객실에 
    다시 발을 들여놓고서는 끝내 돌아설 수 있을까?] 그녀는 벤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시간 맞춰 
    공항에 도착해서 출구를 빠져나오는  마르크를 찾지 못하면 서로 
    길이 엇갈리기 십상이었다. 자신이 마중을 나간다는 사실을 알릴 
    방도를 궁리해 보았으나, 그것 역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다지 
    효과적인 방법이 되지 못했었다. 가느다란 목소리의 한 사나이가 
    공항 내의 한쪽 구석에서 혼자 중얼거리다시피 [듀라스 씨...... 
    듀라스 씨.] 하고 방송을 하는 동안 마르크는 미처 그 소리를 듣
    지 못하고 지나쳐버릴 것이다.
      설사 그가 그 소리를 듣는다 해도 그럴 경우에는 정말로 필라에
    게 엄청난 일이 생겼으리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디나는 최소한 
    그와 함께 고통을 나누어가져야 했다.
      하녀가 객실 문을 두드리더니 택시가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었
    다. 그녀는 햄샌드위치 두 개와 닭고기 한 조각이 든 조그만 봉투 
    하나도 함께 건네주었다. 어쩌면  마르크도 배가 고플지 모른다. 
    배가 고프다. 이런 상태에서 누가 음식을 삼킬 수 있단 말인가?
      아까 병원으로 갈 때와는 달리 이번에 공항으로 가는 데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디나는 밤거리를 달리는 택시 뒷
    좌석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이 꾸벅꾸벅 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
    다.
      그녀의 머릿속은 필라와 벤과 마르크에 대한 생각들이 서로서로 
    뒤엉켜 한없이 복잡했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듯한데 택시는 
    이미 멈춰서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디나는 무심코 [고마워요] 하고 대답하고는 요금과 함께 두둑한 
    팁을 쥐어준 다음 서둘러 공항 청사 안으로 뛰어갔다.
      한 일주일 동안 옷을 갈아입지 못한 느낌이었지만 머릿속이 너
    무나 복잡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디나는 비행기 번호를 쭉 나열해  놓은 안내판을 쳐다본 다음, 
    마르크가 나오게 될 출구를 향해 달려갔다.
      비행기가 막 착륙한 모양이었다. 이제 1,2분 후면 승객들이 비
    행기에서 내릴 것이다. 그나마 늦지 않게 도착한 셈이었다. 일등
    석 손님이 언제나 가장 먼저 내리곤 했다. 마르크 역시 언제나 그 
    일등석 손님중의 하나였다.
      디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다가 하마터면 누군가의 가
    방을 엎을 뻔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맨처음 승객이 출구를 
    빠져나올 즈음에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서서 나오는 사람들
    을 살펴볼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마르크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
    다. 이번 여름에 그의 의사를  따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관심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도 했다. 필라에 대한 걱정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마
    르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싶었다. 그녀는 남편과 어깨를 나란
    히 하고 미소를 지으며 걷게 될 것이다.
      디나는 아직도 그에게 한순간의 쾌락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신의 스커트를 내려다보았다. 벌
    써 예닐곱 사람이 출구를 빠져나갔지만 아직 마르크의 모습은 보
    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하고 말쑥한 차림새의 키가 크
    고 늘씬한 마르크가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의 표정이 꽤나 태연스러운 것 같아서 오히려 조금은 놀라울 정
    도였다. 그래, 저인 아직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줄을 모르고 있는 
    거야....... 디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막 한 걸음을 내딪는 순간, 
    디나는 심장이 얼어붙은 듯한 충격을 맛보았다.
      마르크는 느긋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리고 있었
    다. 디나는 그가 웬 젊은 여인의  손을 잡는 장면을 보고 말았던 
    것이다.
      그 여인은 졸리운 듯 억지로 하품을 참는 모습이었고 마르크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아 한층 가까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여인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며 그의 팔을  건드렸다. 디나는 말문이 막혀 
    그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여자가 누구일까 하는 의문조차 일지 않았다. 그제서야 디나
    는 평생에 걸친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잡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것
    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 여인을 그가 비행기 안에서 사귀
    었을 확률도 전혀 없었다. 그녀는 마르크가 굉장히 잘 알고 있는 
    친숙한 사람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이 함께 있는 것, 이야기하는 것, 움직이는 것을 보고 디나
    는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디나는 한 손으로 반쯤 벌어진 입을 가린 채 붙박은 듯이 공항 
    한 귀퉁이에 서서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디나는 고개를 푹 숙
    인채 앞도 쳐다보지 않고 거리로 뛰어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16
      
      
      숨이 차고 미쳐버릴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디나는 택시 운전수
    에게 병원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좌석에 고개를 기대고 두 
    눈을 감았다. 자신의 귀에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하는 거
    라고는 도망치는 것, 되도록 공항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다는 것이 
    전부였다. 순간적으로 광란의 파도에 휩쓸려버린 듯한 기분이, 누
    군가의 침실로 걸어 들어갔다가 남편이 벌거벗고 있는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그리고 한번도 보려고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정말 그럴까, 만일 
    그 여자가 남편과 우연히 비행기 옆자리에 앉게 된 여인일 뿐이라
    면? 만일, 자신의 감정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 비정상적인 결론
    을 내린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다. 그보다 더한 확신이 
    분명히 있었다. 그 두 사람을 본 순간, 디나는 알 수 있었다. 심
    장 제일 깊숙한 곳으로부터 디나는 그러한 관계를 감지했던 것이
    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일까,  그들의 관계는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을까. 일주일, 한 달, 일 년? 그들의 관계는 이번 여
    름에 일어난 것이었을까  아니면 더  오래된 것이었을까? 그보다 
    더, 훨씬 더 오래전부터......?
      [다 왔습니다. 마담.] 택시 운전수는 미터기를 보면서 디나에게
    로 얼굴을 돌렸다. 디나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
    의 마음은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져 달리고 있었다.
      공항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오는 동안 그녀는 단 한 순
    간도 벤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똑같은 짓을 했었다는 
    생각을 그녀는 하지 못했다. 디나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
    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장면을 보았다는 사실뿐이었다. 디나는 
    아직도 마르크를 좋아하고 있었다. 몹시도! 그녀는 놀라움과 고통
    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마담......!]
      택시 운전수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안경을 쓴 눈으로 모호
    하게 또다시 미터기를 바라다보았다.
      [아, 죄송해요.]
      디나는 재빨리 택시비를 건네준 다음  주위를 둘러보며 차에서 
    내렸다. 디나는 병원에 다시 돌아와 있었지만 어떻게 거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제 운전수에게 주소를 일러 
    주었던가? 디나는 아파트로 돌아가  정신을 가다듬을 생각이었지
    만, 그 대신 병원으로 와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르크는 그의 물건들을 내려두고 또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집으
    로 갈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필라에게 올 것이다. 디나로서는 
    시간을 좀 번 셈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만날 준비가 아직 되어 있
    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서 남편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남편의 어
    깨에 기대어 있던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그 미지
    의 여인의 손은 남편의 팔에 끼워져 있었고, 남편이 그 여자의 어
    깨에 한 팔을 두르고 있는 동안  그들 둘의 시선은 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너무나도 젊었다.
      무거운 유리문을 통해 병원 로비로  되돌아오는 디나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디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병원에서는 이미 
    친숙해진 냄새가 났다. 아무런 생각 없이 디나는 엘리베이터의 단
    추를 눌렀다.
      디나는 이미 하나의 로보트,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은 자동화된 
    신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
    을 느꼈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얼굴, 남편의 곁에 붙어 서 있던 얼굴뿐이었다. 그
    리고 그 얼굴옆에서 마르크는 무척 행복하고 젊어 보였다.
      
      [당신 괜찮아.] 마르크는 피곤한 눈으로 샹딸을 바라보고는 외
    투를 집어들었다. 샹딸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괜찮겠죠, 뭐. 제 걱정말고도 생각할 일들이 너무 많으시잖아
    요.]
      그러나 그 여자는 자신이 피곤해 할 때를 마르크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샹딸이 죽음과 직면했던 이후로 의사는 그에게 
    그녀를 지치게 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그 뒤로 항상 마르크는 
    그 여자를 마치 연약한 아기를 보살피는 과잉보호적인 아버지처럼 
    대해 오고 있었다. 마르크는 샹딸이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잘 먹
    고 조심해서 당뇨병이 걷잡을 수 없게 악화되는 일이 절대로 없게 
    되기를, 그리고 의사가 주의시켰던 불행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결코 현실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당신이야말로 괜찮으시겠어요?]
      샹딸이 마르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가 떠나는 것을 보
    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적
    은지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그와 같이 병
    원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병원에는 디나가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  캡 드안티베스에  데려가 달라고 우기는 
    것, 고집을 세우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지금 그와 같이 간다면 
    미친 짓일 것이다. 지금은 그런 투정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샹딸
    은 그것을 이해했다. 샹딸은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아는 여
    자였다.
      [필라의 상태가 어떤지 전화해 주시겠어요?] 샹딸의 두 눈에는 
    정말 근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이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는 금방 그
    녀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을 느꼈다.
      [모든 일을 내가  알게되는 즉시로 전화하지.  약속할께. 그리
    고.......]
      그는 앉아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 당신이 없었더라
    면 이 여행을 해낼 수가 없었을 거야. 내 생애 중 지금이 가장 힘
    든 밤이야.]
      [필라는 괜찮을 거예요. 정말 그럴 거예요. 내기해도 좋아요.] 
    마르크는 그녀를 더욱 꼬옥 껴안았다. 몸을 일으켜 그는 눈 밑을 
    훔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믿고 싶어.]
      [그래요. 나는 알아요.]
      그러나 어떻게 그녀가 그걸 알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만일, 
    그녀의 예측이 빗나간다면?
      [나중에 가방 가지러 올께.]
      [제가 잠들어 있으면 깨워주시겠지요?] 샹딸의 눈에는 고양이같
    은 미소가 숨어 있어서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고 말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마르크의 마음은 이미 
    그녀의 곁을 떠나 있었다. 그의 마음은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었
    다. 그들이 공항을 나선 지 10분도 채 안됐는데도 그는 이미 너무 
    오래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르크는 레인코트
    를 입었다.
      [마르크 에두아르!] 샹딸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마르크는 이미 문에 서 있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잊지 마세요.]
      [나도 역시 그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은 소리없이 닫혔
    다.
      
      마르크는 샹딸의 소형 르놀트 자동차를 몰아 병원으로 가서 길 
    밑에 세워두었다. 택시를 타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했지만 마르
    크는 잠시라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거기에 빨리 
    가고 싶었다. 필라의 곁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지켜
    보고 이해하고 싶었다. 비행기로 돌아오면서 그는 마음 속으로 그
    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되뇌이었다. 왜, 어떻게, 언제? 그 가
    운데 어느 것도 도대체 말이 되지를 않았다. 마치 아무런 일도 벌
    어지지 않았고, 그가 그리스에서 사업 모임을 끝내고 여느 때처럼 
    파리로 돌아가는 길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모든 일
    들이 또다시 수정처럼 확실해지면서 그는 필라를 기억해 내곤 했
    다. 샹딸과 함께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결코 비행기 편으로 올 수 
    없었으리라.
      로비는 한적했다. 전화통화를 했을 때 도미니크가 이미 필라의 
    입원실을 가르쳐 주었었고, 그가 아테네를 출발하기 전에 커쉬만 
    박사와 직접 통화를 하는데 성공했었다. 모든 사실을 알아보기에
    는 너무 이른시간이었다. 필라의  두개골 손상은 심각했고, 다리 
    부상으로 어쩌면 평생토록 장애자가 될지도 모른다. 비장이 파열
    되었고 한쪽 신장도 상처를 입었다. 그녀는 매우 중태였다.
      마르크는 심장이 터질 듯한 기분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 4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
    었다. 위잉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그는 멍하니 걸어나왔
    다.
      마르크는 길을 잃고, 무기력하고 두려운 기분으로 필라를 어디
    서 찾아야 할지 의아해 하면서 주위를 힐끗거렸다. 수간호원이 책
    상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침울하게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필라 듀라스요?] 간호원이 필라의 병실로 가는 길을 그에게 설
    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설명을 제지하였다. 
    [그보다도 우선 그 애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치명적이에요, 선생님.] 간호원의 시선이 심각했다.
      [그렇지만 처음보다는 조금 차도가 있겠죠?] 그 대답으로는 부
    정적인 고갯짓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커쉬만 박사는요? 그
    분은 여기 계십니까?]
      [얼마 전까지 계셨지만 다시 나가셨어요. 곧 돌아오실 겁니다. 
    박사님은 상황을 매우 주도면밀하게 살피고 계십니다. 환자는 완
    벽하게 모니터되고 있구요....... 우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마르크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는 목을 가다듬
    고 손수건으로 눈주위를 눌러 닦고는 초조한 모습으로 걸어갔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필라에게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고 그녀를 
    더 사랑할 것이며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겠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샹딸의 일은 잊혀졌다. 마르크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유일한 것은 그의 작은 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조금 열려져 있는 문 틈으로 마르크는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안은 온갖 기계들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다. 간호원이 두 명 있
    었는데 한 명은 멸균소독이 된 푸른색의 수술복을 입고 있었고 다
    른 한 명은 흰 가운 차림이었다.
      간호원들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조용히 그가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아이 아버지입니다.]
      그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다. 그가 병실을 훑어보자 간호원들은 
    고갯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마르크는 금방 필라를 발견할 수 있
    었다. 필라는 숨을 쉴 때마다  정확하게 뛰는 튜브와 모니터들에 
    에워싸여 왜소해 보였다. 필라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잠시 
    한기를 느꼈다. 필라의 얼굴이 너무나도 창백해서 그가 아는 사람
    같이 보이지 않았지만 마침내 그는 좀더 가까이 걸어가서야 자기 
    아이의 일그러진 모습을 알아보았다. 튜브와 붕대들 때문에 필라
    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게 변해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딸 필라였
    다.
      마르크는 그녀가 눈을 감은 채 거기  누워 있는 동안 오래오래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가만가만 가까이 다가가서 한 
    번도 그렇게 조심스럽게 해본 적이 없을  만큼 가만히 손을 뻗어 
    딸애의 손을 만졌다. 그 손은 아주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필라
    가 눈을 떴다. 그러나 미소는 없었다. 단지 아주 희미하게나마 알
    아보는 기미가 있을 뿐이었다.
      [필라, 내 사랑스런 아가, 아빠다.] 마르크는 돌아서서 울지 않
    으려고 필사적으로 자신과 싸워야만 했다. 그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 찬란한 푸른 눈을 다시 한번 감을 때까지 
    거기 그냥 선 채로 그녀를 응시하고 손을 붙잡은 채 지켜보고 있
    었다. 그에게는 마치 그 방 안의 모든 공기가 빨려나간 것처럼 느
    껴져서, 생각하고 보고 호흡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어쩌다가! 하필이면 자신
    의 딸에게? 그는 무릎이 떨리는 것을  느꼈고, 잠시 기절할 듯한 
    고통을 느꼈지만 가까스로 자세를  유지하고는 창백한 작은 손을 
    감싸쥐었다.
      필라는 손톱까지도 이상하게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호흡이 곤
    란해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는 거기에 서 있었
    다. 미동도 하지 않고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딸을 
    지켜보기만 하고 서 있었다.
      디나는 조용히 구석진 자리에서 남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
    는 그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마르크
    도 그녀가 마치 거대한 기계들에게 가리워져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보지 못했다.
      마침내 마르크가 그녀의 친밀한 얼굴과 눈길을 발견한 것은 거
    의 20분쯤 지나서였다.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는 그 
    얼굴을. 디나를 보았을 때 그는 마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디나는 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을까, 왜 
    거기에 그냥 앉아있기만 했을까,  디나는 언제부터 와 있었을까, 
    단지 충격이 커서 그랬을 뿐일까? 디나의 얼굴은 필라의 얼굴만큼
    이나 창백해 보였다.
      [디나.......]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속삭임이었다.
      디나의 두 눈은 한번도 그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여보, 
    오셨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시선을 다시  필라에게로 옮겼다. 
    [언제왔어?]
      [5시에요.]
      [밤새 여기에 있었어?]
      [네.]
      [차도는?] 침묵이 흘렀다. 마르크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똑같은 질문이 반복되고 있었다.
      [조금 더  나빠진 것   같아 보여요.  잠깐 나갔다   왔었어요. 
    난...... 난 어머님 댁에 가방을 갔다두러 갔었어요. 두 시간 정
    도 다녀왔어요. 그리고...... 그리고 내가 돌아와보니 호흡이 곤
    란해져 있더군요. 굉장히 고통스러워  하는 것 같았어요. 그때는 
    커쉬만 박사님이 여기 있었어요. 그분 말씀은 만일 몇 시간이 지
    나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으면 재수술을 해야 할 것 같대요.]
      디나는 한숨을 쉬고 눈을 내리깔았다.  디나로서는 그 두 시간 
    동안에 그들 둘을 모두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딸과 남편 
    두 사람을.
      [나는 방금 도착했어.]
      <거짓말장이. 당신은 방금 도착한 것이 아니예요. 당신은 이미 
    두시간 전에 도착했어요. 어디에 갔었죠?> 그러나 디나는 아무말
    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간호원이 잠시 밖으로 나가달라고  부탁할 때까지 거의 
    한 시간 동안을 그렇게 있었다. 드레싱을 약간 바꾸어주어야 한다
    고 했다. 디나가 천천히 일어나 병실을 나갔다.
      마르크는 자신의 아이를 떠나기가 싫어서 잠깐동안 머뭇거리고 
    있었다. 디나의 마음은 공항에서의 일로 돌아가 방황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낯선 광경이었다. 그녀는 두 달 동안 그
    를 보지 못했었고 아직까지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디나로서
    는 재회를 기뻐하는 척 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그러기에는 너무
    나 늦었다. 그러나 그도 마찬가지로 그런 척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필라의 걱정에 너무 골몰해 있어서 그런 것 뿐인지
    도 모른다.
      디나는 고통에 빠진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어렸을 적 
    알았던 기도문의 단편들을 떠올리면서 병실 안으로 나왔다.
      디나에게는 이제 마르크를 위해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모든 에너지를 필라에게 쏟아부어야 했다. 그녀는 바로 등 뒤에서 
    그의 발소리를 들었지만 돌아다보지 않았다. 디나는 계속 앞으로 
    걸어 마침내 복도 끝에 다다르자, 벽밖에 보이지 않는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유리창에 반사되는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가 등 뒤에 와서 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디나, 내가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의 목소리는 피로하고 
    침울하게 들렸다. 디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군.] 그의 음성이 메이면서 그가 울기 시작했다. [내 
    잘못이야. 그 아이에게.......]
      [그런 건 이제 문제가 아니예요. 사고는 이미 일어났어요. 그것
    이 만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지라도 어떻게든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던 거예요. 필라는 이미 사고를 당했다구요. 여보, 이
    제와서 누가 그 아이에게 오토바이를 사 주었는지, 그 사고가 누
    구 잘못인지가 무슨 소용이에요?] 디나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아, 하느님 맙소사!] 그녀는 그가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다
    시 고개를 드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가 깊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
    를 들었다. [필라가 모든  고통을 딛고  일어나 회복되기만 한다
    면....... 필라가 만일 걷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지?]
      [그때는 우리가 그 아이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살아가도
    록 가르쳐야겠죠. 그것이 지금 우리가  그 아이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필라가 직면해야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사랑, 
    힘, 그리고 믿음 따위도요.]
      <우리가 그럴 기회를 가질 수 있기만 한다면 말이지만요.> 거의 
    이십 년만에 처음으로 디나는  소름끼치는 공포를 느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디나는 마르크의 두 손이 어깨에 와 얹히는 것을 느꼈다. 그가 
    천천히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의 눈은 필라의 것과 똑같았지만 그
    의 얼굴은 몹시 늙고 지쳐 있었다.
      [날 용서해 주겠어.]
      [무엇에 대해서 말이죠?] 그녀의 목소리는 거리감이 있고 차가
    운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말이야. 우리 딸아이에게 내가 저지른 잘못
    에 대해서. 당신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데 대해
    서. 그리고.......]
      [난 오늘밤 당신을 공항으로 마중 나갔었어요, 마르크.]
      디나의 시선에 담긴 무엇인가가 그녀가 이미 무감각해져 있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내부가 꽁꽁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이 어긋났군.]
      그러나 마르크의 목소리에는 의혹이 담겨 있었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그게 아녜요. 내가 당신을 피한 거예요. 난....... 그 광경은 
    내게 아주 많은 것을 설명해 줬어요, 마르크. 내가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오래전에 말이에요. 미처 모르고 있었어요.] 그녀가 슬쩍 
    미소를 짓고 나서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바보였던 것 같아요. 
    당신을 축하해 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젊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디나의 목소리에는 비애와 비장함이 스며 있었다.
      [디나!]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혀져 있던  손에 힘이 주어졌다. 
    [당신, 아주 이상한 결론을 내리고 있군. 당신이 이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러나 그건 모두가 서투른 이야기같이 들렸다. 그는 너무나 지
    치고 당황해서 적당한 변명을 꾸며낼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의 
    인생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비행하는 동안 내내 
    걱정을 하고 있었어. 당신도 잘  알겠지만 필라 걱정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구. 그러다보니 그 젊은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던 거야. 정말이지.......]
      [마르크, 그만 두세요. 그런 거짓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그녀
    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녀는 거짓된 
    재확인 같은 것은 원하지 않았다. [제발요, 오늘밤은 그만둬요!]
      [디나.......] 그러나 그는 더 계속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다
    른 때에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
    는 적당한 이야기를 꾸며댈 수가 없었다. [제발!] 그때 그가 돌아
    섰다. 그는 그녀의 눈에 떠오른 고통스런 표정을 바라볼 수가 없
    었다.
      [정말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그러나 마르크는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싫었다. 그것은 모든 의
    미에서 그녀가 생각했던 바로 그대로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샹딸
    의 존재를 부인하면서 배반감을 느꼈다.  그가 어떤 길을 택하든 
    이제 그는 비난받아 마땅했다.
      [그렇지 않다구.]
      [그건 사실이에요, 마르크. 그건 너무나도 명확한 일이라구요. 
    당신이 나에게 어떤 변명을 한다 해도  그 사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내가 보고 느낀 사실을 지워버릴 수는 없
    다구요!] 그것은 마치 그의 가슴에 정통으로 날아든 화살과 같았
    다.
      [최근 몇 년 동안 당신은 나를 형편없는 바보로 취급해 온 것이 
    분명해요.]
      [어째서 내가 수년 동안이나 그녀를 알고 지냈다고 생각하고 있
    는 거지?] 빌어먹을 어떻게 그녀가 그걸 알았을까?
      [당신이 그녀와 함께 하는 행동, 함께 걷는 태도, 당신이 그 여
    자를 바라보던 눈길 때문이에요. 짧은 시간 내에 그런 종류의 편
    안함을 얻기란 힘든 법이니까요. 당신은 나하고 보다도 차라리 그
    녀와 더욱 부부같아 보이더군요.]
      그러나 그녀는 문득 의아해졌다. 자신도 벤과 결혼한 사이처럼 
    보이지 않았었던가?]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에 이렇게....... 그
    날밤 공항에서 돌아오는 동안  그녀는 깨달았었다. 그의 부재들, 
    거리감, 계속된 여행들, 청구서에 지나치게 자주 등장했던 파리의 
    어떤 전화번호, 한번도 딱 들어맞았던 적이 없던 몇 가지 이상한 
    이야기들. 그리고 오늘밤 그의 눈에 나타나 있는 표정. 만일 그것
    이 그 여자가 아니라 다른 사랑이었다면...... 그러나 디나는 확
    신할 수 있었다.
      [내가 뭐라고 하기를 바라는 거지?] 그가 다시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말도 원치 않아요. 할 말이 아무말도 남아입지 않을 테니
    까요.]
      [내게 이제 끝났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떤 여자와 공항
    에서 같이 있는 걸 보았다고 해서 내게서 떠나겠다고? 당신, 제정
    신이 아니군, 디나. 이봐, 당신 미쳤군!]
      [내가요,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에  그렇게 행복해 했나요? 당
    신, 나를 동반하는 걸 즐겼나요, 마르크? 멀리 떠나 있을 때면 당
    신, 집에 돌아올 날을 고대했나요? 아니면 우리가 깊고 의미있는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의 욕구와 장점, 감정같은 것들을 존중해 
    주고 있었나요?]
      [난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는 마르크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디나는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그건 더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이젠 너무 늦어버렸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디나?] 그의 얼굴이 갑자기 핏기를 
    잃고 있었다.
      [완전히 확신이 선 것은 아니예요. 우선 필라의 문제를 매듭짓
    도록 해요. 그리고 나서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겠죠.]
      [우린 다시 좋아질 거야.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난 알고 있어.]
      마르크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
    는 피곤이 파도처럼 전신을 씻어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왜 우리가 다시 좋아져야 하냔 
    말예요.]
      [내가 원하기 때문이지.] 그러나 그도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것
    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정말요, 왜요? 당신이 정부뿐만 아니라 와이프도 갖는 걸 좋아
    하기 때문인가요? 난 당신을 비난할 수가 없어요. 그건 틀림없이 
    아주 기분좋게 마련된 것이었을 거예요. 그 여잔 어디에 살죠, 마
    르크? 병원 맞은편인가요? 그렇다면 완벽하게 진행될 개 틀림없군
    요.]
      바로 그것이 그가 그리스로의 여행에 디나를 같이 데리고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이유였을 것이다.
      [디나, 그만 둬!]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지만 
    그녀는 몸을 빼냈다.
      [나를 혼자 내버려둬요.] 평생 처음으로 그녀는 남편을 증오했
    다.
      그의 직업,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것, 그리고 그가 이해하지 못했
    던 모든 것들을.
      고통스런 한 순간, 디나는 벤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
    다. 그러나 마르크가 정말로 그렇게 나빴을까, 그녀는 조금이라도 
    달랐던가, 조금이라도 더 나았던가? 그녀의 마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오늘밤은 당신과 이 일로 다투고 싶지 않아요. 우린 필라 문제
    만으로도 벅차요. 필라가 위기에서 빠져나온 뒤에라도 이 문제를 
    의논할 수 있으니까요.]
      마음이 조금 놓이는 듯 마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시
    간이 필요했다. 생각을 해야만 했다. 그는 적당한 변명을 찾게 될 
    것이다. 일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의 그 순간 간호원이 복도 저쪽에서  그들 둘에게 손짓을 했
    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는 깨끗이 잊고 간호원쪽으로 서
    둘러 달려갔다.
      [차도가 조금 있습니까?] 마르크가 먼저 물었다.
      [아뇨. 하지만 따님이 깨어났어요. 그리고 부모님을 찾고 있어
    요. 따님과 조금 이야기를 하시면 어떠실지요. 하지만 지치지 않
    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따님에게는 작은 힘밖에 남아 있지 않습
    니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디나는 필라에게서 미묘한 차이를 눈치챘
    다. 안색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지만 눈동자는 좀더 초롱초롱해 
    보였다. 그 눈은 한 사람의 얼굴에서 다른 사람의 얼굴로 신경질
    적으로 돌아다니며 누군가를 찾고, 탐색하고, 여기저기를 재빨리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필라야, 엄마가 여기 왔다. 아빠도 여기 계셔.] 디나가 딸에게
    로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하게 손을 다독거
    려주었다. 필라가 눈을 감았을 때, 그녀는 필라가 여전히 아주 작
    은 아이라고 상상할 수가 있었다.
      [멋진......기분.......이에요.......] 필라는 시선을 아버지에
    게로 옮겨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숨쉬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따
    금 눈을 감았다.
      [안녕, 아빠...... 그리스 여행은...... 어땠어요?] 필라는 예
    전보다도 현재의 사건들을 훨씬 더 잘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갑
    자기 부산해진 것 같기도 했다. [나...... 나는...... 목이...... 
    말라요.......]
      디나가 간호원을 힐끗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손
    으로 안된다는 신호를 만들어보였다.
      [물을 주세요.]
      [잠시 후에 마시자꾸나, 얘야.]
      디나가 계속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동안 마르크는 
    그녀 곁에서 몹시 힘들어 하며 서 있었다. 그는 말할 기력을 잃어
    버린 것처럼 보였으며, 디나는 그의  그렁그렁한 두 눈과 떨리는 
    입술로부터 그가 눈물과 계속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떠니?] 드디어 그가 말을 했고, 그러자 필라는 또다시 웃으
    려고 애썼다. 필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러나 그 아이가 처해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모든 
    일이 잘 되어갈 수가 있겠는가? 그때  마치 그가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필라는 그를 바라보며 할 말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제가......너무 지나치게......빨리......달렸어요......제 잘
    못이에요, 아빠......아빠 잘못이 아니예요.......] 필라가 눈을 
    감고 디나의 손을 꼭 잡았다. [죄송해요.]
      마르크의 얼굴에서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필라의 두 눈은 꼭 닫혀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얘야. 누구의 잘못이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
    니란다. 하지만 네 엄마가 옳았어.] 그가 디나를 바라보았다.
      [엄마......?] 그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것처럼 보였
    다.
      [쉬잇! 더 말하지 말아요.......]
      [제가 전에 가졌던 그 작은  놀이집 기억나세요....... 정원에 
    있던 것말이에요. 난 계속...... 그  집과...... 내 꼬마 강아지 
    꿈을......꾸고 있어요. 오거스틴 말이에요.]
      그건 아주 우스꽝스런 새끼 테리어였다.  디나는 기억해 냈다. 
    그 강아지는 푸그로 바뀌었다가 다시 고양이로, 다시 새로 바뀌었
    다가 마침내 더이상 애완 동물을  기르지 않게 되었었다. 마르크 
    에두아르는 집안에 동물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디로......거스틴을...... 보내셨어요?] 그들은 그 숫강아지
    를 시골의 한 농가에 주었었다.
      [그건 시골로 갔지. 내 생각에 그  강아지는 아주 행복했을 것 
    같구나.] 디나가 계속 이야기를 했지만 이제 그 아이의 눈은 마르
    크의 눈을 찾았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호전된 것인가, 아니면 
    악화된 것일까?] 그녀는 갑자기 죽기 몇 시간 전에 그의 품 안에
    서 요동을 쳤던 꼬마 사내아기가 떠올랐다. 필립 에두아르를. 이 
    몸부림도 그것과 같은 경우일까. 아니면 이것이 저 아이가 호전되
    고 있다는 증거일까? 그들 가운데 누구도 진실을 알지 못했다.
      [엄마...... 제게  다시...... 오거스틴을  돌려주실  수 있어
    요?......엄마가 아빠에게 부탁해 보세요.......]
      그것은 이제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디나는 눈을 감고 재빨리 
    숨을 들이켰다. [내가 아빠한테 말해보마.]
      마르크의 눈에 갑자기 두려움이 가득찼다. 그는 필라를 바라보
    다가 다시 디나를 보았다.  [우리가 네게 개를  갖게 해줄께, 얘
    야...... 너도 보게 될 거야. 귀가 늘어지고 꼬리를 잘 흔드는 멋
    진 새끼 강아지를 말이야.] 그는 무엇이든 할 말을 찾아내려고 머
    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필사적으로 더듬고 있었다.
      [하지만 난...... 오거스틴이...... 갖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필라의 음성은 거의 숨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
    자 간호원은 그들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했다. 필라는 또다시 정신
    이 혼미해져서 그들이 병실을 나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번에는 나란히 맞추어 계단을  내려왔다. 처음에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디나가 마르크의 손을 찾았다.
      [이 망할 놈의 커쉬만 박사는 언제 돌아오는 거예요?]
      [곧 올 거라고 하더군. 필라가 더 나빠진 것 같아?]
      디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조하고 고통스러워 보였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했잖아.  그건 고무적인  신호일지도 모른다
    구.]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디나가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
    에는 공포가 있었다. 그들이 홀을 나란히 걷는 동안 그의 팔이 그
    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그녀도 그를 물리치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는 그가 거기 있어주는 것을 필요로 했고 그도 그녀를 필요로 
    했다. 그는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유
    일한 인간이었다.
      [마르크.] 디나는 그를 불렀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수 있을 뿐이었다. 눈물이 그녀의 얼굴에서 쏟아져내리자 그가 가
    만히 그녀를 품에 안아들였다. 그는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의 눈물이 그녀의 눈물에 더해졌을 뿐이었다.
      그들은 기나긴 복도를 끝에서 끝까지 반복해서 계속 걸었다. 그
    러다 마침내 나무 의자에 앉았다. 디나의 두 눈이 피로때문에 충
    혈되어 있었다. 그녀는 몹시 구겨진 자기의 크림색 치마를 내려다
    보았다.
      [필라가 다섯 살이었을 때 강아지를 사주었던 걸 기억해요?]
      디나는 그 일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지었다. 그들은 그 작은 강
    아지를 장화에 숨겨서 딸의 옷장에  넣어둔 다음, 필라에게 당장 
    옷장문을 열고 옷들을 끄집어내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 강아지
    가 장화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고 있었다. 필라는 기
    뻐서 비명을 질렀었다.
      마르크도 미소를 지었다. [난 언제까지나  그때의 얼굴을 잊지 
    못할거야.]
      [나도 그럴거예요.] 디나가 웃음을 그치고 웃음을 띤 얼굴로 그
    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눈물을 닦으려고 그의 손수건을 찾았
    다. 이상한 일이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그들은 싸우고 있
    었고 그녀는 이혼을 암시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고 단지 그들의 
    딸만이 중요한 문제였다.
      그들 사이에 어떠한 고통이 지나갔건  그들은 여전히 필라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는 마르크야말로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녀는 그의 두려움을 함
    께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살아 있는 영혼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서
    로를 꼬옥 끌어 안고 놓을 수 없도록 만들었고, 그들을 함께 움직
    이고 이야기 하고 희망을 갖고 기구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필라
    는 여전히 여기 있을 것이고 결코 죽을 수가 없었다. 디나가 다시 
    마르크를 올려다보자 그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긴장을 좀 풀어보도록 해.]
      디나는 한숨을 쉬면서 한 손을 이마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녀
    가 말도 하기 전에 간호원이 그들 옆에 와 있었다.
      [커쉬만 박사께서 두 분을 만나뵙고 싶어 하십니다. 들어오셔서 
    따님과 함께 계세요.]
      그들이 벌떡 일어나 거의 뛰다시피 병실로 걸어 들어가자, 의사
    는 침대 발치에 서서 환자와  기계들을 교대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병실에서 나간 지 몇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박사님!]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마르크였다.
      의사는 침울해 보였다. [난 환자에게 시간을 좀더 주고 싶습니
    다. 한 시간 내로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 것 같으면 환자를 다시 
    수술실로 데려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르크는 의사에게서 약속이나 보장같
    은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했다.
      [모릅니다. 환자는 계속 버티고 있습니다. 나도 그 이상은 말씀
    드릴 수가 없군요. 두  분께서는 잠시 환자와  함께 있고 싶은가
    요?]
      [그럼요.] 디나가 필라의 머리맡에 다가가 섰다. 마르크도 그녀
    를 따랐다.
      그들은 필라가 숨쉬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고 
    가끔씩 몸을 뒤척이면서 잠들어 있는 동안, 거의 한 시간 동안 그
    렇게 거기에 앉아 있었다.
      마르크는 한 손을 침대 위에 얹고  삭고 연약한 몸을 가까이에 
    느끼면서 결코 그 아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디나
    도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기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희망을. 한 시간이 거의 지났을 때 드디어 필라가 깨어났다.
      [아, 목 말라요.......]
      [조금만 더 참으렴, 얘야.] 디나의 말은 부드러운 속삭임 같았
    다. 그녀는 아주 가볍게 딸의 앞이마를 쓰다듬었다. [조금 있다가 
    마셔. 내 귀여운 아가. 지금은 잠을 좀 자렴. 엄마와 아빠가 여기 
    있으니까. 푹 자렴. 금방 기분이 좋아질 거야.]
      그러자 필라가 빙그레 웃었다. 얼굴이 튜브에 연결되어 있었지
    만 진짜 미소였다. 마르크와 디나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나......이젠......기분이 더......좋아졌어요.]
      [기쁘구나, 얘야. 내일이면 훨씬 더 좋아질 거야.]
      [엄마의 말씀이 옳단다.] 마르크의 음성은 마치 한여름의 미풍
    처럼 부드러웠다. 필라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보인 다음 두 눈
    을 감았다.
      의사가 다시 돌아와 그들에게 나가달라고 고개짓을 한 것은 잠
    시 후였다.
      그들이 병실에서 나가려고 하자 의사가  속삭였다. [지금 당장 
    수술 준비를 하겠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들어오셔도 좋습니다.] 
    그들 부부는 밖으로 나갔다. 디나는 필라와 마찬가지로 숨이 가빠
    서 헉헉거리며 가까스로 숨을 들이켰다. 복도는 너무 냉랭하고 습
    습했다. 디나는 마르크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때가 새
    벽 네 시였다. 둘 모두 이틀 동안 한잠도 자지 못한 것이었다.
      [필라는 기분이 나아졌다고 했어.]  마르크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중얼거렸다. 디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도 조
    금 더 나아진 것 같아 보이지 않았어.]
      디나가 막 뭐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기다란 복도를 따라 
    내려오는 커쉬만 박사의 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은 필라와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하잖아. 웃기는 의사
    로군! 우리는 뭣하러 찾아, 필라나 잘 돌보지.] 마르크는 의사쪽
    으로 걸어가려고 했지만 디나는 그  자리에 못박혀 섰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더이상 한 걸음도 걸을 수가 없
    었다. 한 세계가 이제 막 종말을 고했다. 필라가 죽은 것이다.

      
                                  17
      
      
      태양이 막 솟아오를 무렵 그들  부부는 병원을 떠났다. 서류에 
    서명을 하고 수속을 밟는데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렸다. 마르크는 
    장례식을 프랑스에서 치르겠다고 결정했다.  디나는 개의치 않았
    다. 그녀의 갓난아기들 가운데  하나는 캘리포니아에 묻혔고, 또 
    하나는 프랑스에 묻혔다. 이제 그런 것은 더이상 디나에게 중요하
    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필라 자신이 프랑스에 묻히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커쉬만 박사는 매우 동정적이고 친절했다. 그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필라를 프랑스 남부로부터 데려왔을 때는 
    이미 상태가 절망적이었다. 머리에 가해진 충격은 몹시 심한 것이
    었고, 그는 필라가 사고 직후에 죽지 않았다는 데 놀라워할 정도
    였다.
      누군가 그들에게 커피를 권했지만 그들은 사양했고, 겨우 모든 
    일이 끝났다. 마르크가 그녀의 팔을 잡고 조심스럽게 거리로 안내
    했다. 그녀는 마치 그 마지막 시간에 뇌가 기능을 멈춰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느낄 수조차 없었
    다. 그녀는 모든 수속을 기계적으로 끝마치긴 했지만, 자신도 시
    체가 되어버린 듯이 느껴졌다.
      마르크가 디나를 짙푸른 소형 르놀트  자동차까지 안내한 다음 
    자동차 문을 열었다.
      [이건 누구 차인가요?] 그것은 그런 날 아침에 묻기에는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그녀의 두 눈은 그렇게 말하는 동안 그를 빤히 바
    라보고 있었다. [누구 차면 어때. 자아, 타라구. 집으로 가자구.] 
    그는 한번도 그렇게 피곤하고 혼란스러우며 외로운 느낌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모든 그의 희망이 산산조각이 났다. 모든 기쁨과 꿈
    까지도. 그에게 디나와 샹딸이 있다는 것도 이젠 중요한 것이 아
    니었다. 그는 필라를 잃어버렸다.  차가 앞으로 나아가자 눈물이 
    다시 그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그도 그대로 흘러내
    리게 두었다.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디나는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가슴 
    속에서 매듭 하나가 지어지는 것을, 그리고 목에서는 덩어리가 치
    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일생의 울음이 머물러 있었지
    만 그것은 좀처럼 밖으로 터져나오지 않았다.
      거리 청소부들이 청소를 하고 태양이 포도 위에서 아주 밝게 빛
    나고 있는 동안 그들은 천천히 차를 몰아 파리를 달렸다. 하루종
    일 비가 내리고 짙은 안개가 끼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았다. 밝은 태양때문에 그 끔찍한 일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
    다. 이렇게 이름다운 날, 어떻게 필라는  가버릴 수가 있단 말인
    가! 그러나 그건 엄연한 현실이다. 영영 가버렸다....... 그런 생
    각이 마르크 에두아르의 머릿속에서 계속하여 흐르는 동안, 디나
    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들이 듀라스 가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하녀가 엘리베이터 소리
    를 듣고는 무슨 일인지 알기 위해 잠옷 바람으로 달려나왔다. 마
    르크 에두아르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녀가 조용
    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마님을 깨울까요?]
      마르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와서  어머니를 깨워 어쩌잔 
    말인가! 나쁜 소식은 천천히 전해도 된다.
      [커피 좀 드릴까요.]
      이번에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가만히 문을 닫았다. 그동
    안 디나는 한 옆에 멍청히 서 있었다. 마르크는 잠시 그녀를 바라
    보다가 눈물을 닦아내고는 한 손을 내밀었다. 더이상 아무말도 하
    지 않은 채 디나가 그 손을 받아쥐자, 그들은 그들 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커튼이 내려 있어 어두웠고 침대도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디나
    는 전혀 잠잘 기분이 아니었다. 디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
    었다. 침대에 누워 생각한다는 것을, 필라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
    정해야 한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르크는 의자에 주저앉아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천천히 또다시 흐느낌이 찾아왔다. 디나가 
    그에게로 가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
    은 더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마침내 그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녀가 그를 침대에 눕혔다.
      [여보, 잠을 좀 자 보세요.] 그녀는 필라에게 말해야 했던 것처
    럼 똑같은 이야기를 그에게 속삭여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
    었다.
      [나도 그럴께요, 나중에. 당신, 가방 가져오지 않았어요?] 그녀
    가 놀라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의 물건들은 그곳에 한 가
    지도 없었다.
      [나중에 가져오지.] 그가 눈을 감았다.  가방을 가져온다는 건 
    샹딸을 만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샹딸에게 필라에 대해서 이야
    기해야 할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그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얘기한다는 것은 그 사실을 현실로 만들 것이다. 눈물이 
    또다시 그의 눈 구석구석에서 솟구쳤다. 드디어 그가 간신히 잠들
    었다.
      커피가 왔을 때 디나만이 그것을 마셨다. 그녀는 커피잔을 살롱
    으로 가져가서 거기에 혼자 앉아 파리의 지붕 꼭대기들을 내려다
    보며 저 세상으로 떠난 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금테를 두
    른 아침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차츰 마음을 가
    라앉힐 수 있었다. 필라는 최근 몇 년 동안 너무 변덕스러웠었고, 
    종종 다루기가 쉽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어른이 되었을 것이었다. 
    그들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될 수가 있었을 텐데. 상
    상하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마치 필라가 바로 거기, 가까이에 있
    고 전혀 잃어버리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디나가 딸과 더이상 이야기를 나누거나 소리내어 웃거나 논쟁을 
    벌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필라가 더이상 말갈기같이 
    긴 금발을 흩날리지도 않고,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기 위해 그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지도 않을 것이며, 더이상 슬리퍼를 빌려 신
    는 일도, 그녀의 립스틱을 가져가는 일도, 그녀의 가장 좋은 코트
    와 함께 그녀가 아끼는 화장옷이 사라지는 일도 없으리라는 것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마침내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그녀는 드디어 필라가 더이상 없다는 것을 알았다.
      [디나!] 시어머니인 듀라스 부인의 목소리였다. 얼음처럼 차가
    운 푸른 화장옷을 입고 방 한가운데  서 있는 그녀는 조각상처럼 
    보였다. [필라는?] 디나가 고개를 젓고  두 눈을 감았다. 듀라스 
    부인은 의자 위에 침착하게 앉았다.
      [하느님, 맙소사!]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갯짓을 하는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마르크는 어디 있니?]
      [잠들었을 거예요. 침실에 있어요.] 그녀의 시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디나는 그녀가 노력조차 해 보지 않은 데 대
    해 다시 한번 그녀를 증오했다. 그것은 그녀에게도 손실이었겠지
    만 그녀는 최소한 디나에게 위로의 말을 빚지고 있었던 것이다.
      발꿈치로 걸어서 디나는 그들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마르크
    를 깨울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아주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그는 
    가볍게 코를 골며 그때까지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 전체가 비
    통함때문에 일그러진 것처럼 보여 잠들어 있으면서도 평화롭지 못
    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그를 지켜보며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들이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앉아 있었다. 엄청난 변화가 하
    루 동안에 일어났다. 필라의 죽음, 그리고 공항에서 남편과 다정
    하게 걷던 여자.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그가 차를 가져오고 그의 
    가방을 남겨둔 곳이 그녀의 집일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디나는 
    남편을 증오해야 할 것같았지만 이젠, 관심이 없었다. 문득 디나
    는 벤에게 전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르크의 시계를 힐끗 
    바라보자 이미 8시 30분이 넘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한밤중일 
    것이다. 벤은 아직까지 깨어있을지도 모른다. 디나는 지금, 전화
    를 걸 수 있을 때 전화를 걸어야했다.
      디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대충 매만지고 나서 자켓을 걸친 다음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전화가 없는  파리쟝들이 전화를 거는, 반 
    블럭쯤 떨어진 우체국으로 가서 전화를 할 작정이었다. 그녀는 시
    어머니 앞으로 나오는 전화요금 청구서에 그의 전화번호가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디나는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무감
    각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우체국까지 반 블럭을 걸
    어갔다. 그녀는 빨리 걸을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발걸음을 마냥 
    늦출 수도 없었다. 디나는 우체국에 도착할 때까지 기계처럼 똑같
    은 속도로 걸어 전화박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벨이 두 번 울리고 금방 연결이 되었다. 기다리는 동안 디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
    소리는 졸리운 듯했고, 그때서야 그녀는 그가 이미 잠자리에 들었
    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벤?]
      [디나? 그래, 당신 좀 어때.]
      [난.......]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더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
    었다.
      [디나?]
      그녀는 격렬하게 떨고 있어서 여전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디나...... .그건......? 아이는 어때? 당신이  떠난 뒤로 난 
    매분 매초마다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어.]
      디나가 대답으로 한 유일한 소리는  경련하듯 흐느끼는 외마디 
    소리였다. [디나! 제발, 제발, 진정을 좀 하고 내게 이야기를 해 
    봐.] 갑자기 두려움이  파도처럼 그의  등줄기를 따라 올라왔다. 
    [아니, 그럼 그 아이가....... 디나!]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아주 
    부드러워졌다.
      [아, 벤! 그 아인 오늘 아침에  죽었어요.] 디나는 그 말을 한 
    다음 또다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런 세상에, 안돼! 디나, 혼자 있어, 지금 어디야?]
      [우체국이에요.]
      [저런, 하느님 맙소사!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당신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어요.]
      [그가...... 그도 파리에 와 있어?]
      [그래요.] 그녀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다.
      [어젯밤에 이리로 왔어요.]
      [유감이로구만. 당신 둘 모두에게 말이오.]
      디나는 또다시 흐느꼈다. 벤과 함께  있으면 그녀는 긴장을 풀 
    수가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얼마나 절실
    히 그를 필요로 하는지 그에게 보여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마르
    크와 있을 때는 언제나 부자연스런 태도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녀
    는 그가 바라는 인생을 살고, 그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
    는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내가 그곳으로 갔으면 좋겠어? 아침 첫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녀는 의아스러웠다. 그래 
    보았자 필라에게는 너무 늦어버렸다.
      [당신이 그래 주면 좋겠지만, 그다지 좋은 생각인 것 같지는 않
    아요. 이틀 후에는 집으로 돌아갈 걸요.]
      [확실해? 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는 편이 당신
    에게 도움이 된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겠어. 그럴까.]
      [그래요.] 그녀가 웃음을 그치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만 
    두시는 편이 더 도움이 되겠어요.]
      [그럼...... 다른 일은?] 그는 자기의 음성이 염려스러워 하거
    나 당황한 것처럼 들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잘 모르겠어요. 
    우린 이야기를 더 해 봐야만 해요.]
      그는 그녀가 마르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
    다. [그럼, 이제 더이상은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이 일을 끝내도록 
    해. 그리고 나면 우리가 나머지 일에  대해 같이 걱정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여기서 할 생각인가?]
      [장례식 말인가요?] 그 단어를 말했을  때 디나는 죽고만 싶었
    다. 그녀의 손이 끔찍하게 떨렸다. 그녀는 수화기를 잡은 손에 힘
    을 주었다.
      [아니예요. 마르크가 여기서 하고 싶어해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내 생각에는 필라도 아마 그 편을 더 좋아할 것 같아요. 
    어떤 경우에도 이삼일 후엔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그 모든 일을 당신과 나누어 할 수 있었으면 좋을텐데.]
      [그건......] 그러나   그녀는 잠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중요하지 않아요. 난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나 과연 그
    럴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평생 한
    번도 이렇게까지 혼돈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럼, 기억해 둬. 만일 당신이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라도 
    달려간다는 것을. 내일부터 이삼일 동안은 어딜 가든지 꼭 전화번
    호를 남기겠어. 그러니 언제든지 내게 연락이 닿을 거야. 알았지, 
    디나?]
      [네, 알았어요.] 그 말을 하며 그녀는 웃어보려고 했지만, 그런 
    노력은 그녀를 더욱 소리내어 울게 만들 뿐이었다. [벤......! 전
    화해 주시겠죠?]
      [킴벌리에게?]
      [그래요.] 그것은 슬프고 작은 쉰 목소리였다.
      [지금 당장 전화하지. 이제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서 조금이라도 
    휴식을 좀 취했으면 좋겠군. 이런 식으로 계속 밀고나갈 수는 없
    어. 쉬어야 한다구. 어서 들어가서 좀 쉬도록 해. 그리고 당신이 
    돌아오는 즉시 함께 카멜로 가자구.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상관하지 않아. 나와 같이 카멜로 가는 거야. 
    우리는 해변을 산책하고 그리고 함께 있게 될 거야.]
      디나는 이제 격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다시는 함께 
    있지 못할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는 그 해변이나 다른 어떤 해변
    도 산책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 악몽에 영원히, 혼자서만 휘
    말려 있게 될 것이다.
      [디나, 내 말을 들어.] 벤이 말하고 있었다.
      [이 일을 치르는 동안 당신, 줄곧 카멜에서 보낼 생활을 생각하
    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 주겠어?]
      그녀는 슬픈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그 말들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내 사랑, 난 매순간마다 당신과 함께 있어. 힘을 내, 디나! 사
    랑하고 있어!]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나 디나의 음성은 속삭임에 불과했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나서 카운터로 걸어가 통화료를 받는 데스크의 여자에게 돈을 지
    불했다. 그리고는 냉정하게 그곳을 떠났다.

      
                                  18
      
      
      [도대체 어디에 갔었지?] 그녀가 돌아왔을 때 마르크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엉망으로 지쳐 있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외
    출했었어?] 그것은 일종의 비난이었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을 하
    고 커피잔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그보다 나아보
    일 게 없었고 사실은 상당히 더 나빠 있었다.
      [어디 갔었냐니까?]
      [산책을 나갔어요. 미안해요. 신선한  공기가 좀 필요했어요.] 
    그녀가 핸드백을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어머님은 어떠세요.]
      [당신이 상상할 수 있잖아. 내가 30분 전에 의사를 불러드려서 
    주사를 한 대 맞으셨지. 정오 때까지  아마  깨어나지 못하실 거
    야.]
      잠깐동안 디나는 시어머니에 대한 질투가 일었다. 얼마나 손쉽
    게 빠져나가는 방법인가. 그녀는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
    았다. 그러는 대신 물었다. [그리고 당신은요?]
      [우린 오늘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 그가 애도의 눈초리로 그
    녀를 바라보다가 치마의 얼룩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있었어? 
    당신, 넘어졌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외면을 했다.
      [너무 지쳤었던가 봐요. 비틀거렸어요. 대수롭지 않아요.]
      그러자 그가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에게 팔을 돌렸다. [당신이야
    말로 좀 자야 해.]
      [그럴께요. 하지만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나요?]
      [내가 맡아서 하지. 당신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나도.......] 그녀는 여지껏 발언권을 갖지 못했던 것
    처럼 이 일에서도 역시 자신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안돼. 난 당신이 잠시라도 눈을 붙이기를 바래.] 그가 그녀를 
    침실로 이끌고 들어가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의사를 불러줄까?] 
    그녀는 고개를 흔든 다음 누워서 그의 가슴을 도려내는 실연한 듯
    한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디나.......]
      [당신 친구는 어떤가요? ]
      그가 일어나 돌아섰다. [그 일은 신경쓰지 말아.]
      [아마도 지금은 그런 일에 신경쓸 때가 아니겠지요. 하지만 조
    만간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를 해야만 할 거예요.]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건 무슨 뜻인가요?] 그녀가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보았다.
      [그건 그 문제가 당신 일이 아니라는 뜻이야. 그리고 내가 최선
    을 다해서 그 일을 처리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구.]
      [영원히 말인가요?]
      그는 한동안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 두 눈은 그녀의 시선을 결코 비키지 않았다.
      [그래.]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샹딸은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프랑소와 프러미에 거리의 그 집에 감히 전화를 걸 수 없
    었고, 그녀가 익명으로 병원에 건 마지막 전화는 필라가 마찬가지 
    상태라는 소식만을 전해주었을 뿐이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고 나
    서 바로 다시 병원에 전화를 걸 작정이었는데 마르크가 도착한 것
    이다. 그는 지난 밤에 한잠도 자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샹딸은 
    욕실문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미소지었다. 미색 타월로 그녀는 다
    리를 닦아내고 있었다.
      [오셨어요, 필라는 어떤가요?]
      그녀가 한 손에 타월을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의 
    눈에는 갑자기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
    가 그 눈을 감고 한동안 한  손으로 가리고 서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가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앤....... 필라는 영원히 떠났어. 오늘 새벽 4시에.] 그가 
    거실의자에 주저앉자 샹딸은 욕실 벽에 걸려 있던 연한 핑크빛 가
    운을 당겨내리면서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 마르크...... 가엾게도.] 그녀는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그를 부드럽게 품 안에 안아들이고는 그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고 
    그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꼭 안아주었다. [오, 불쌍한 사람...... 
    마르크! 얼마나 가슴 아팠어요.......]
      이번엔 그도 울지 않았다. 그렇게 앉아 있기만 해도 거기 있다
    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을 느꼈다. 샹딸은 그에게 그밖의 다른 일도 
    잘못됐는지 묻고 싶었다. 그날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
    면, 어리석은 질문이 될 테지만 그녀로선 그가 달라보였다. 아마 
    그냥 지치고 충격을 받은 때문일 거야. 샹딸은 그에게 커피 한 잔
    을 부어줄 동안만 그를 혼자 내버려두었다가  다시 그의 발 밑에 
    주저 앉았다. 그녀의 몸은 새하얀 양탄자 위에서 물결치고 핑크빛 
    화장옷은 꼭 필요한 부분만을 가린 채 그녀의 길고 부드러운 다리
    를 그대로 내보여주고 있었다.
      샹딸이 담뱃불을 붙여주는 동안 그는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샹딸, 어젯밤에  디나가 우리를 보았어. 
    그녀는 나를 공항으로 마중 나왔었다가 우리 둘이 비행기를 내리
    는 걸 보았다더군. 우리 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더군. 아무튼 여자
    들이란 그런면으로는 예민해. 당신과 나의 태도를 보고 우리가 오
    랫동안 알아온 사이라는 걸 알았다는 거야.]
      [틀림없이 굉장히 지적인 여자인가 보군요.] 샹딸은 그가 다음
    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런 여자지. 그녀 나름대로의 조용한 방식으로.]
      [그리고요. 또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별로, 다른 얘긴 한 것이 없어, 아직까지는. 원체 충격적인 사
    건을 당한 뒤라서 그렇겠지만. 하지만 그 여자는 미국인이야. 그
    녀는 이런종류의 문제를 잘 받아들이지  않아. 그들은 모두들 그
    래. 그들은 영원한 순결, 완벽한 결혼, 접시를 씻어주는 남편, 자
    동차를 세차하는 아이들 같은 걸 믿고 일요일에는 식구들이 같이 
    교회에 나가지. 그리고 모두들 <백아홉 살>이 될 때까지 언제까지
    나 행복하게 살거든.] 그의 목소리가 비장하고 지친 듯이 들렸다.
      [그리고 당신은요, 당신도 그걸 믿나요?]
      [그야 어쨌든 멋진 꿈이니까. 하지만  그다지 현실적이지가 않
    지. 나뿐만 아니라 당신도 그건 알고 있잖아.]
      [그래서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좀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
    은 어쩔 셈이지요?]
      샹딸은 <디나와 나 중에서 누굴 선택할 건가요?> 라고 묻고 싶
    었지만 결과적으로 마찬가지의 질문이라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
    다.
      [아직은 너무 일러, 샹딸. 너무나도 끔찍스러운 일에 충격을 받
    아서 그녀는 처참한 상태에 처해 있어. 그녀는 내부의 분노를 모
    두 억누르고 있다구.]
      [그래요? 그렇긴 그렇군요.]
      마르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외면해 버렸다. 그는 샹딸에게 작
    별인사를 하고 그들의 관계를 끝내기 위해서, 더이상 디나를 배신
    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었다. 그들은 
    방금 외동딸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샹딸의 곁에 앉아 그녀를 바
    라보는 동안 그가 원하는 것이라고는 그녀에게로 손을 뻗어 그녀
    를 품에 안아들이는 것, 두 손으로 그녀의 온몸을 애무하고 꼬옥 
    끌어안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자신이 사
    랑하고 그토록 절실히 원하는 존재를 어떻게 놓아보낼 수 있단 말
    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죠, 마르크?] 샹딸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고통스런 표정을 읽었다.
      [당신 생각] 그가 손을 내려다보며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어떤 생각요?]
      [나는......] 그가 다시 눈을 들어 그녀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지금 당장 다른 
    어떤 일보다도 당신을 사랑해 주고 싶다는 생각도.]
      오랫동안 샹딸은 마르크를 응시하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 한 손
    을 내밀었다. 그가 그 손을 받아쥐고 조용히 그녀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서 그 핑크빛 화장옷을 벗겨냈을 때 
    샹딸은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샹딸, 당신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결코 알지 못할 거야.]
      그다음 두 시간 동안 그는 자기가 아는 모든 사랑의 방법을 그
    녀에게 보여주었다.

      
                                  19
      
      
      장례식은 간결하고 형식적이었으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디나
    는 소박한 검정색 모직 드레스와 베일이  달린 검은색 모자를 썼
    다. 시어머니 역시 몸 전체를 검은 옷으로 감싸고 스타킹도 검은 
    색으로 신었다. 마르크도 어두운 색 양복과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이 장례식은 프랑스 제7구역 내의 작은 성당에서 가장 전
    통스런 격식에 맞추어 치뤄지는 것이었다. 교구내 학교 성가대의 
    <아베 마리아>가 울려퍼졌다. 그  어린이들의 음률이 울려퍼짐에 
    따라 디나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전혀 피할 수가 없었다.
      마르크는 이 모든 것을 프랑스 식으로  하였다. 손님 접대, 음
    악, 송덕문, 그리고 또 한 명의 사제, 집으로 친구와 친척을 초대
    하는 일. 그것은 하루종일  지속되는 일과였다. 끝없이 돌아가는 
    악수와 애도의 말, 슬픔을 함께 하고 위로하는 말. 어떤 사람들에
    게는 이런 식의 애도가 마음을 가라앉혀줄지 모르지만 디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필라를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마지
    막 때가 온 것이다.
      그녀는 겨우 벤에게 전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미안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냥 당신에게 말하고 싶
    었어요. 난 시댁에 있어요.]
      [견딜만 해?]
      [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정신이 없어요.  모두 서커스 같아요. 
    맙소사, 난 관을 열어놓는 것에  대해서까지 그들과 싸워야 했어
    요. 최소한 그 싸움에서만은 내가 이겼다구요.]
      그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흥분
    되어 있었고 피곤하고 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전혀 놀랄 것이 없었다. [언제 돌아올 거지, 디나?]
      [제 생각 같아서는 이틀쯤 후가 될 것 같아요.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순 없어요. 오늘밤에 그것에 대해 의논을 할 거예요.]
      [스케줄이 잡히면 꼭 전보를 해주기 바래.]
      디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럴께요. 이젠 그 귀신딱지같은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사랑해, 디나!]
      [저두요.] 그녀는 그 말을 할 때 두려웠다. 누군가가 방으로 들
    어오지 않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상황을  그도 이해했을 것 같았
    다.
      그녀는 시어머님의 방에 몰려 있는 50명 내지 60명쯤 되는 조문
    객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필라에 대한 이야기로 잡담을 하며 마
    르크를 위로하고 있었다. 디나는 너무나도 마르크가 낯설게 느껴
    졌다. 몇 시간 동안 마르크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마르크는 문
    득 부엌에서 벽에 기대어 창문 밖을 보고 있는 디나를 발견했다.
      [디나,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아무것도요.]
      디나의 크고 슬픈 눈이 마르크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꽤 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날이 안색이 나빠
    져갔다.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것을 마르크에게 말하지 
    않았고 지난 4일 동안 두 번이나 기절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
    다.
      [그냥 숨 좀 돌리려고 여기에 있는 거예요.]
      [미안해, 너무 오래 걸렸지?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하려고 했다
    면 우리 어머님이 이해하지 못했을 거야.]
      [알아요, 이해해요.]
      남편을 보면서 그녀는 문득 그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녀가 감내하는 희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르크, 언제 집으로 돌아갈 건가요.]
      [샌프란시스코로?] 그가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
    르겠어. 그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 당신, 빨리 가야 해?]
      [돌아가고 싶어요. 여기서는...... 견디기 힘들어요.]
      [좋아, 하지만 여기서 끝내야 할 일이 있어. 최소한 2주일은 걸
    릴거야.]
      이런 세상에, 그럴 순 없어! 디나는 시어머님과 함께, 벤과 떨
    어져서 앞으로 2주일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그렇잖은가요?]
      [그게 무슨 말이야, 혼자서 집으로 가고 싶단 말인가?] 그가 괴
    로운 눈빛을 보였다. [당신이 그러지 않기를 바래. 나와 함께 가
    자구.]
      그는 이미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가 그 집에 
    혼자 있으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필라의 방에는 그녀의 물건으
    로 가득차 있을 텐데....... 디나는 그가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
    려야 했다.
      [난 2주일을 기다릴 순 없어요.] 그녀는 그 생각에 필사적이었
    다.
      그는 그녀가 얼마나 지치고 과로했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좀더 두고 생각해 보지.]
      [마르크, 집으로 가야 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떨렸
    다.
      [알았어. 그러면 먼저 나를 위해 뭔가 해주겠어?]
      [뭘요?] 디나가 의아하다는 듯 마르크를 쳐다봤다. 그는 무엇을 
    원하는 거지? 내가 원하는 것은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인데.
      [이틀간 나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지 않겠어? 주말에 어디로든. 
    좀 조용한 곳, 우리가 쉴 수 있는  곳으로. 여기서는 쉴 수가 없
    어. 그리고 우리가 화해하지 않고 당신이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
    지 못해. 조용히 단 둘이서 떠나보자구.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겠
    어?]
      디나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그를 바라보았
    다.
      [모르겠어요.]
      [제발 부탁해!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 뿐이야. 이틀뿐이라구. 
    그다음에는 집으로 가도 돼.]
      그녀는 돌아서서 다시 지붕 꼭대기를 응시했다. 그녀는 벤과 카
    멜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만 편하자고 그에게 급
    히 달려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비록 이틀간이라도 그들의 결혼생
    활에 대한 어떤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마르크를 향해 돌
    아서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할께요.]

      
                                  20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는군. 나한테 도대체 뭘 기대하는 거
    지, 딸이 삼일 전에 죽었는데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란 말이야? 
    좀 경솔한 것 같지 않아, 샹딸? 당신이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불리한 상황을 이용한다면 어땠을 것 같아?]
      마르크는 두 여인,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찢겨지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삼 그는  샹딸에게서 이상한 압박감을 느꼈다. 
    샹딸은 만일 자신이 손해 보면 비극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 같은 
    압박을 가해왔다. 두 여인이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고
    통스런 선택을. 이번 주에는 그것을 더 느끼고 있었다.
      디나는 지금 자기 곁을 떠나면 무척 행복할 거라는 듯한 태도였
    다. 필라가 죽은 날 밤 공항에서 그녀가 본 것에 대해 아직도 그
    를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는 아내를 잃고 싶지 않
    았다. 디나는 그의 아내고, 그는 그녀를 필요로 하며 그녀에게 익
    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필라와 연관되는 마지막 끈이었다. 
    디나를 떠나는 것은 가정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샹딸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즐거움, 열정, 
    기쁨이었다. 그는 샹딸을 격한 감정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머리칼
    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이해해 줄 수 없어?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아!]
      [5년이 됐어요. 그리고 이젠 그녀도 알게 되었구요. 성급한 것
    이 아니예요. 지금이 가장 적시일지도 모른다구요.]
      [누구를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이봐, 샹딸! 조금만 참으라구. 
    내가 생각 좀 할 수 있게 말이야.]
      [그러면 얼마나 걸린 것 같은가요,  또 5년간? 당신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살면서? 당신은 2주일이 지나면 돌아가기로 되어 있
    죠. 그런 다음에는 뭐죠, 나는 어떻하구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두 달간 기다리란 말인가요, 그 다음에는? 우리가 만났을 
    때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어요. 지금은 서른 살이에요. 다음엔 서
    른다섯 살이 되겠죠. 그리고 서른일곱, 마흔다섯. 세월은 빨라요. 
    특히 나같은 경우에는 너무너무 빨리 간다구요.]
      그는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저 그럴 기분이 아니
    다.
      [자, 잠시동안 이 문제를 제쳐놓을 수 없을까? 약간의 예의상으
    로라도 딸을 잃은 그녀가 기운을 차릴 때까지는 그녀의 삶을 망가
    뜨리고 싶지않아.]
      순간적으로 샹딸이 증오스러웠다. 그것은  그녀를 아끼고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녀가 우세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왜 당신은 그녀를 떠나는 것이 그
    녀의 삶을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녀에게도 애인이 있을지 
    모르는데.]
      [디나에게? 웃기지 말라구. 사실 이  모든 문제에 대해 당신은 
    좀 정신이 없는 것 같군. 난 주말에 어디 좀 다녀올 거야. 그녀에
    게 말하지. 의논할 일이 많아.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자구. 
    그러는 동안에 적절한 대책이 나오겠지.]
      [어떤 대책이요?]
      그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폭삭 
    늙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지경에까지 빠지다니.......
      [당신의 뜻대로 되는 거지.]
      그러나, 두 시간 후에 디나가 기다리고 있는 그의 어머니의 아
    파트로 가기 위해 택시를 부르면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샹딸은 떼를 쓰는 건가? 처음에는 
    함께 어머니집에 들리겠다는 고집을, 그 다음에는 인슐린을 먹지 
    않은 그 끔찍한 밤, 그리고 이번의  일.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하필이면 왜 지금! 그는 도대체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디나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앞으로 잔인하게 변할 세
    상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 싶었다.
      그날 아침 그들은 도시를 떠났다.  도시를 빠져나올 때 디나는 
    이상하게 침묵을 지켰다. 그녀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디나를 마음이 평정되는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필라에 대한 기
    억을 씻어낼 수 있는 곳으로. 그들 둘은 어머니의 집에서 그런 기
    억을 충분히 이겨냈다. 한 친구가 드류 근처의 그의 시골집을 제
    공해줬다.
      마르크는 괴로운 심정으로 디나를 흘낏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시선을 도로쪽으로 옮겼다. 하지만 자신이 다시 샹딸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떠나기 전, 그날 아침에 샹딸은 말
    했었다.
      [이번 주말에 디나에게 말할 건가요?]
      [모르겠어. 상황을 봐서 이야기하지.  내가 그녀를 정신적으로 
    파멸시키면 우리에게도 좋을 것이 없어.] 하지만 샹딸은 성급하고 
    어리석게 말했다. 수년 동안을 참다가  갑자기 그녀도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난 5년간  그녀는 그에게 의지처가 되어왔다.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디나를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그는 다시 아내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눈을 감고 아무말이 없다. 그는 그녀를 사
    랑했을까? 그는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샹딸과 이번 여름을 지낸 후
    에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을  가늠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샹딸이 그를 밀어부치고  있는 것이다. 이틀 전만 
    해도 디나에게 약속했었다. 샹딸과의 관계를 청산하겠다고. 그런
    데 똑같은 약속을 정부에게도 한 것이다.
      [먼가요?] 디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으나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며칠 동안 그녀를 짓눌렀던 똑같은 피로가 그녀를 지치게 
    했다.
      [아냐, 한 시간쯤 걸릴 거야. 아주 멋진 곳이야. 어렸을 때 그
    곳에 가 본 이후로는 가 보지 못했는데, 늘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
    을 잊지않고 있었지.] 그가 그녀에게 미소지었다. 그녀의 눈동자 
    밑에 둥그런 그늘이 생겼다.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군.]
      [그래요. 이번 주에는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어머니의 주치의한테 수면제 좀 받아오지 그랬어.] 의사가 집
    에 왕진왔을 때 디나에게 수면제를 처방했었다. 디나가 고개를 저
    었다. [제 힘으로 견뎌내겠어요.] 오랫만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디나는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
    다. 그곳은 정말 아름다운 장소였다. 위풍당당하면서도 자연과 미
    묘한 조화를 이룬 석조 건물이었다. 거의 샤토 식이었다. 그곳은 
    훌륭하게 손질된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저 멀리에는 수 마일
    이나 뻗어 있는 과수원이 보였다.
      [아름답지.] 그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두 사람의 눈
    동자가 마주쳤다.
      [대단히요. 이런 배려, 고마워요.] 그리고 그가 가방으로 손을 
    뻗칠 때 그녀가 들릴락말락하게 말했다. [오게 되어서 기뻐요.]
      [나도 그래.] 마르크가 디나를 살피듯 뚫어지게 들여다보자 둘
    은 미소지었다.
      마르크는 가방을 들어 커다란 홀에 들여다놓았다. 가구는 대부
    분 영국 제와 프랑스 풍이었고 방안의 모든 것은 그 집을 지었을 
    당시의 17세기 풍에 충실했다. 디나는 긴 복도를 걸으며 아름답게 
    장식된 마루를 보았고 정원쪽으로 눈을 돌려 큰 창문을 내다보았
    다. 그녀는 마침내 복도의 끝에 멈춰서 일광욕실로 갔다. 그곳에
    는 꽃나무와 두 개의 안락의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 중의 하나에 
    앉아 조용히 뜰을 응시했다. 잠시 후 마르크의 발자국 소리가 울
    려왔다.
      [디나?]
      [이 안에 있어요.]
      그는 방 안에 들어와 잠시동안 문지방에 서 있었다. 밖을 내다
    보면서 슬쩍 그의 아내를 보기도 했다. [훌륭하지?] 그녀는 건성
    으로 말하는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아름다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겠어요, 
    마르크?] 그녀는 묻고 싶지 않았으나 물어야 했다. 그가 달가워하
    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당신 친구는 어떻게 되었어
    요?]
      오랫동안 그는 대답이 없었다. [무슨 뜻으로 묻는 건지 모르겠
    군.]
      [아니, 당신은 알아요.] 디나는 그의 눈동자를 보고 메스꺼움을 
    느꼈다. [어떻게 처리하기로 했어요?]
      [그것을 의논하기엔 너무 빠르지 않을까? 우린 이제 막 차에서 
    내렸잖아.]
      그녀가 그에게 미소를 보였다. [매우 프랑스 식이군요. 주말을 
    산뜻하게 보내고 일요일 밤, 돌아가는 길에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그 의논을 하자고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것은 아니야. 우리 둘
    다 빠져나와야 했어.]
      디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요, 맞아
    요.]
      그녀의 마음은 곧 필라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
    도 함께 얘기해야 해요. 왜 우리가 결혼한 상태로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게 되었어요.] 그녀가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방
    으로 들어와 천천히 앉았다.
      [여보,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어쩌면 그럴지도.]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었다.
      [디나, 제발......!] 그가 그녀를 흘낏 보면서 코를 풀었다.
      [뭐라구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마르크? 우리는 그럴 수 없어요.]
      여름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녀는 벤과 함께 있었고 
    마르크에게도 정부가 있는 것이다. 마르크의 경우는 아마 수년 동
    안 진행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신이 걱정할 것이 못돼.]
      [언제가 더 좋은 때죠? 우리는 이미  그 고통 속으로 들어갔어
    요. 종기 전체를 잘라내버려야 한다구요. 만일 그대로 두면 곪아
    서 영원히 상처가 될 거예요. 그 종기가 있다는 사실에 눈감아 버
    리려고 한다면 계속 상처가 커지게 될 거예요.]
      [그렇게 오랫동안 당신은 행복하지 않았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보았다. 그녀는 벤을 생각
    하고 있었다. [이번 여름이 되어서야 내가 그동안 얼마나 혹심하
    게 외로웠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얼마나 외로웠는지....... 
    우리는 거의 함께 할 시간이 없었고 이야기 한 마디를 나눌 시간
    도 없었죠.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구요.]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지?]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낮고 부드러웠다.
      [당신의 시간, 애정, 웃음, 함께 해변가를 산책하는 것.......] 
    그녀는 마지막 말을 생각 없이 내뱉았고 그를 보면서 스스로 놀라
    움을 억누를 수 없었다.
      [당신이 나에 관해서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나에게
    는 매우 중요해요, 마르크. 이젠 필라도 없는데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몇 개월 동안 여행할 것이고 나는 그동안 혼자
    서 뭘 하죠, 거기에 앉아서 기다려요?] 그러한 존재에 대한 생각
    때문에 그녀의 가슴이 오싹하게 떨려왔다. [더이상 그렇게 살 수 
    없어요. 그럴 순 없다구요.]
      [그럼 어쩌자는 거요?] 그녀가 말하기를 원했다. 그녀가 이혼을 
    요구하기를 바랬다.
      [글쎄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요. 결혼한 상태를 지속
    하려면 달라져야 할 것 같아요. 당장부터 말이에요.] 맙소사, 무
    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그와 함께 있으면 벤과 함께 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사람은 남편이다. 18년간을 함께 산 남자
    이다.
      [나와 함께 여행을 하겠단 말인가?]  그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
    다.
      [왜 안돼죠, 그녀는 당신과 함께  여행하지 않았나요.] 디나는 
    마침내 알게된 것이다.
      [왜 나는 안돼죠?]
      [왜냐하면...... 왜냐하면 타당하지  않고 비실질적이고, 그리
    고...... 그리고 비용이 많이 들고.......] 그리고 샹딸을 데리고 
    다닐 수 없고.
      [비용이 많이 든다구요?] 디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빈정거리듯 
    웃었다.
      [그래요?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비용을 부담하나요?]
      [디나, 당신과 함께 이것을 의논하지 않겠어!]
      [그러면 우리가 왜 여길 왔지요?]  그녀의 눈동자는 커다란 눈 
    속에서 사납게 변했다.
      [우리는 쉬기 위해 여기 온 거야.]  그것은 군주, 왕의 말이었
    다. 그 문제는 이것으로 일단락된 것이다.
      [알았어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말을 쉬면서 보내는 거예요, 
    정중하게. 그러고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파리로 돌아가는 거
    예요. 당신은 그 작은 친구에게 돌아가고 2주일 후 미국으로 향하
    며, 모든 일들은 예전처럼 진행되는 거죠. 이번에는 얼마동안 머
    무를 건가요, 마르크? 3주, 한 달, 6주? 그다음 다시 당신은 떠나
    고 그동안 나는 우리가 사는 박물관에 처박혀서 당신이 돌아올 때
    까지 기다리고, 다시 고독하고. 제기랄, 혼자서!]
      [그렇지 않아.]
      [그래요, 당신도 알잖아요.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충분히 
    내가 겪었던 거예요. 이젠 끝났어요.]
      디나는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발을 옮기려
    고 할 때 심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대로 서서 밑을 본 
    채 의자를 잡았다. 그는 그녀를 지켜봤다. 처음에는 아무런 눈치
    를 채지 못했으나 다음 순간 눈동자에 걱정이 서렸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녜요, 아무것도.] 그녀는 몸을 추스리며 서 있던 곳에서 그
    를 노려봤다. [그냥 매우 피곤할 뿐이에요.]
      [그러면 가서 쉬어. 방으로 데려다 줄께.] 그는 그녀가 똑바로 
    설 수 있을 때까지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아줬다. 그들은 가장 큰 
    침실을 택했다. 침실 곁에 붙은 방은 나무딸기빛과 크림빛의 실크
    로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디나, 잠시 누워 봐.] 그녀의  안색은 계속 나빠지기만 했다. 
    [나는 잠시 산책하고 오겠어.]
      [그리고 그 다음에는요?] 그녀는  침대에서 절망적인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그 다음에 우리는 뭘 하죠? 난, 더이상 이런 식으로 살지는 못
    하겠어요. 마르크, 게임을 할 수는 없다구요.]
      그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게임이라구?] 모두를 부정하기 위해
    서 그는 아무말이 없었다. 디나는 말하면서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난처해 보였고 너무 크게 보였다.
      [당신이 어떤 것을 느끼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쩔 셈인지 
    알고 싶다구요. 나에게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이젠 우리에게 필라
    도 없으니, 당신이 계속 당신의  정부를 만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요. 당신이 말하기 싫어하는  모든 것들을 알고 싶다구
    요. 지금 말해줘요, 마르크. 알아야 겠어요.]
      마르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창쪽으로 걸어가 창 밖의 언
    덕을 내다보았다. [그런 문제는 말하기가 쉽지 않아.]
      [알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매우 부드러웠다. [반편생을 우리는 
    같이 살았는데 당신이 나를 사랑했는지 모르겠군요.]
      [항상 그랬어.] 그는 등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녀가 본 것은 
    그의 등뿐이었다. [항상 당신을 사랑해 왔어, 디나.]
      그녀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왜요?] 그
    녀는 간신히 그 말을 할 수 있었다. [왜 나를 사랑했나요? 당신의 
    아내이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아니면 정말 아끼기 때문에?] 그러
    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격심한 고통이 나타나보였
    을 뿐이다.
      [우리가 꼭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어야 하나? 지금...... 필라
    가 죽은지도 얼마 안된 지금.......] 디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
    다. 마르크가 필라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을 때 그의 온 얼굴에 경
    련이 일고 있었다.
      [디나, 난...... 난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
      더이상 아무런 말 없이 그는 방을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그녀가 
    그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머리를 떨군 채 정원으로 향했다. 
    그를 지켜보며 그녀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였다. 지난 며칠간은 
    그녀에게 있어서 인생의 끝인 것 같았다. 잠시동안 그녀는 벤까지
    도 잊고 있었다. 마르크만을 생각했다.
      그는 한 시간 동안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돌아왔을 때 
    디나는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눈 밑은 거무스름하니 아직도 피로
    의 기색이 남아 있었다. 수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화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은 나무딸기빛 실크 시트와 대조되어 거의 녹
    색으로 보였다. 그는 다시 중앙 홀의 복도로 나와 그 너머에 있는 
    서재로 갔다. 잠시 동안 거기에 앉아 전화기를 응시했다. 그리고 
    의무이기라도 한 듯 다이얼을 돌렸다.
      세번째 벨이 울렸을 때 샹딸은 전화를 받았다. [마르크예요?]
      [응.] 그가 침묵했다.
      [어때요?] 디나가 깨면 어떻게 하지, 왜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당신 목소리가 이상해요. 뭐가 잘못됐어요?]
      [아니야. 그냥 매우 피곤할 뿐이야, 우리 둘다.]
      [그렇겠죠. 그녀에게 말했어요?] 그녀는 끈질겼다. 이것이 그가 
    전혀 모르는 샹딸의 다른 면이었다.
      [전부는 아니고, 약간.]
      [쉽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그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냐, 그런 것이 아니야.] 그는 멈칫했다. 홀에서 발자국 소리
    가 들렸던 것이다. [자, 다음에 걸께.]
      [언제요?]
      [나중에, 당신을 사랑해.]
      [좋아요. 저도 그래요.]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들리자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놓았다. 
    하지만 그는 관리인이었다. 아무일 없는지 돌아보는 중이었다. 그 
    남자는 도와줄 일이 없다는 것을 알자 돌아갔다. 마르크는 천천히 
    의자 깊숙이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의 행동을 지속시
    킬 수는 없었다. 샹딸을 부르고 디나를 달래고 캘리포니아와 프랑
    스를 왔다갔다 하고, 숨기고 변명하고 그 둘에게 죄책감때문에 선
    물을 퍼붓고. 디나가 옳았다. 수년 동안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는 물론 디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어서 
    모는 것이 달라졌다. 그것이 그를 더욱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마음은 곧장 필라게게로 돌아갔다. 마
    지막으로 봤던 그 모습. 그들은 해변을 걷고 있었다. 필라가 그를 
    약올리자 그가 웃었다. 그때 그녀에게 오토바이를 조심하라고 일
    렀다. 다시 그녀가 웃었다....... 눈물이 다시 목구멍까지 차올라 
    갑자기 그 방은 그의 흐느낌으로 가득찼다. 그는 디나가 들어왔는
    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흔들리
    는 어깨를 잡아줬다.
      [괜찮아요, 마르크. 내가 여기 있어요.] 그녀의 얼굴에도 눈물
    이 흘렀다. 그녀의 뺨을 그의 등에 대었을 때 따뜻하게 젖어옴을 
    느꼈다.
      [괜찮아요.]
      [내가 필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기만 한다면....... 
    왜 내가 그랬지? 빌어먹을 오토바이를 사주다니, 내가 미친 짓을 
    했지!]
      [이젠 문제가 되지 않아요. 과거에는 중요했죠. 당신 평생동안 
    그 생각을 하면서 살 수는 없어요.]
      [하지만 왜?] 그가 아내를 돌아보며 고통에 의해 떨리는 음성으
    로 말했다. [왜 그 애가, 왜 우리가? 우린 이미 두 아들을 잃었는
    데 이제 외동딸마저. 디나, 당신은 어떻게 이 고통을 참을 수 있
    는 거지?]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어요. 내가 생각
    하기에...... 내가 생각하기에 두 아이가 죽었을 때 나도 자살했
    어야 했는데....... 그땐 더 살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매일 포기
    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할 수 없었어요. 계속....... 여하튼 한편
    으로는 당신때문에, 또한편으로는 나때문에, 그 다음 필라를 갖게 
    되자 그 고통을 잊었지요. 내 생각에는...... 내 생각에는 다시는 
    그런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은  당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러나 이제 그때의 고통이 어떠했는지 다시 기억이 났어요. 이번
    에는 너무 심해요.] 디나가 머리를 떨구었고 그가 그녀를 팔 안으
    로 끌어당겼다.
      [나도 잘 알아. 그 아들들이 지금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우리
    에게는...... 우리에게는 이젠 어떤 아이도 없구만.] 디나는 조용
    히 끄덕였다. 그의 말로 인한 고통보다 더많은 고통을 느끼면서.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 껴안고 앉아 있었다. 마침내 둘은 산책하
    러 나갔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저녁 시간이었다. [마을로 내려
    가서 식사하지 않겠어.] 그가 슬픔과 피로의 기색을 띄우며 그녀
    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내가 만들면 어떨까요, 뭐가 좀 있을까요?]
      [관리인 말로는 그의 아내가 우리를 위해서 빵과 치즈, 달걀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더군.]
      [그걸로 때우면 어떨까요?] 그가 무관심하게 끄덕였다. 그녀가 
    산책할 때 입었던 스웨터를 벗어서 루이 14세 풍의 큰 의자에 걸
    쳐놓은 후 부엌으로 향했다.
      그녀는 20분 후에 돌아왔다. 스크램블드 에그, 토스트, 브리이 
    치즈 그리고 두 컵의 뜨거운 블랙 커피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식
    사를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떤 변화가 
    생길까. 그 주간 내내 이 집 주인들은 그들이 싫다고 해도 먹기를 
    권했다. 그러나 그녀는 먹는 일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
    녀는 마르크를 위해 저녁을 준비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일거
    리를 마련해 주었기때문이다. 할 말이 쌓였는데도 아무도 먼저 말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그들은 먹었다. 식사 후에 그들은 따로따로 행동했
    다.
      그녀는 긴 홀의 복도, 많은 그림들이 있는 화실 쪽으로 갔고 그
    는 서재로 향했다. 11시에 그들은 침묵 속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그녀가 뒤척이자 그도 침대에서 나왔다. 11시가 되
    어서야 한쪽에서 말을 꺼냈다. 디나는 방금 일어나서 탈의실 의자
    에 앉아 메스꺼움과 싸우고 있었다.
      [기분이 나쁜가 보지?]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아뇨. 아뇨, 좋아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걸, 커피 좀 갖다 줄까?] 그 말에 그녀는 
    메스꺼워졌다. 그녀는 거의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정말 괜찮아요.]
      [어디가 이상한 것 같아. 요즘 늘 좋아보이지 않는데?]
      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그것은 헛수고였다. [말하고 싶지는 않지
    만 당신도 마찬가지로 보여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당신  궤양인 것 같지 않
    아, 디나?] 그녀는 첫 아이가 죽었을 때 궤양이 있었으나 재발되
    지는 않았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고통이 없어요, 종일 피곤할 뿐이죠. 가끔씩 메스껍구요, 지쳐
    서 그런 것이겠죠.] 그녀는 억지로  웃었다. [이상할 것 없어요. 
    우리 둘다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못했어요. 우리 둘다 비틀거리며 
    시간의 변화에 대응해 왔고 건 여행길, 그리고 충격.......우리가 
    서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러나 
    마르크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녀가 일어설 때 비틀거리는 것
    을 봤다.
      디나가 샤워하러 가자 다시금 샹딸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그녀
    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고하기를 원하고 새로운 
    소식을 원했다. 그는 아무것도 전달할 것이 없었다. 주말을 그의 
    아내와 보내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그것도 둘 다 지옥처럼 보낸다
    는 것을.
      샤워하면서 디나는 물이 얼굴 위로부터  등으로 쏟아지게 하였
    다. 그녀는 벤을 생각하고 있었다. 샌프라시스코는 지금 새벽 2시
    일 것이다. 그는 아직 자고 있겠지. 그녀는 잠자리 속의 그를 분
    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헝클어진 짙은 머리, 한 손은 그의 가
    슴에 또 한 손은 그녀 몸의 어떤 곳에....... 아니야, 그는 카멜
    에 있을지도 몰라. 그녀는 자신이 그곳에서의 둘만의 주말을 생각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마르크와는 전혀 다른 생활이었
    다. 마르크와 그녀 간에는 이제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이 함께 한 
    것은 과거였다. 그녀는 마침내 샤워꼭지를 잠그고 서서 잠시 생각
    에 잠겼다. 짙은 나무딸기빛 타월로 몸을 말리면서 열려진 창문으
    로 정원을 봤다.
      이 집은 카멜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프랑스의 샤또, 
    카멜의 별장, 나무딸기빛의 실크, 포근하고 오래된 모직 타월. 그
    녀는 다른 방에 있는 주름장식의, 실크를 흘끗 보다가 벤의 시골 
    침대에 있던 아늑한 격자무늬의 시트를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의 
    두 가지 삶을 대조시킨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단순하고 편안함, 
    벤과의 실질적인 삶이 있었다. <민주적>이라면서 아침상을 번갈아 
    차렸고 쓰레기를 뒷문밖에 버렸는데, 여기서 마르크와 함께 하는 
    삶은 영원히 공허한 호사였다. 그녀는 황급히 머리를 빗질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침실 건너편에서 마르크는 얼굴을 찡그리며  신문을 읽고 있었
    다.
      [성당에 함께 가겠어?]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자 신문 너머로 그
    녀를 보았다. 그녀는 몸을 말리며 옷장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은색 스커트와 스웨터를 꺼냈다. 그들은 둘다 
    정식 상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상복을 입는 것은 프랑스에서는 
    아직도 지켜지고 있는 관습이었다. 그녀가 빠뜨린 유일한 것은 그
    녀의 시어머님도 신고 있었던 검은색 스타킹이었다.
      디나는 온통 검은색으로 몸을 감싸고  목덜미께에 머리를 묶고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소박해 보였다. 
    이젠 전혀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이 보였다.
      [당신은 지독하게 창백해 보이는군.]
      [이 모든 검은색과 대조되어 보여서 그렇겠죠.]
      [그럴까?] 그들이 집을 떠나기 전 그가 잠시동안 그녀를 응시했
    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죽을까봐 걱
    정하는 체했다. 어쩌면 그는 그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들 
    둘은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두 사람은 세인트 이사벨이라는 작은 시골 성당으로 아무말 없
    이 들어갔다. 디나는 조용히  마르크 옆자리의 신도석에 앉았다. 
    그 성당은 작고 아담하며 따뜻했고 농부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리고 그들처럼 파리로부터 내려온 주말 관광객도 끼어 있었다.
      디나는 갑자기 지금이 여름임을 기억해 냈다. 8월의 끝이 아니
    라 미국에서는 곧 노동절이 오고 그것은 가을을 알릴 것이다. 지
    난 주부터 시간 관념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미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카멜, 벤, 마르크, 그다음 필라를 생각하고 있
    었다. 그리고 어렸을 적 시골길을 걷던 것을 생각하며 어떤 사람
    의 뒷통수를 뚫어지게 보았다. 이 작은 성당은 통풍이 나빴고 신
    부의 강론이 단조롭게 계속 윙윙거렸다. 그녀가 마르크의 팔을 살
    짝 쳤다. 그녀가 너무 덥다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얼
    굴이 그녀의 눈동자 앞에서 현기증을  일으켰고, 모든 것이 암흑 
    속으로 묻혀버렸다.

      
                                  21
      
      
      [마르크.......] 마르크와 다른 남자가 그녀를 차에 싣자 디나
    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쉿! 아무말도 하지 말아, 여보.] 그도 하얗게 질린 채 식은 땀
    을 흘리고 있었다.
      [내려놔요. 정말 난 괜찮아요.]
      [신경쓰지 말아.] 그는 그녀를 차에 싣는 것을 도와준 남자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가까운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실내가 너무 후덥지근 했을 뿐이라구
    요.]
      [후덥지근하지 않았어. 너무 서늘했소. 그리고 더이상 얘기하지 
    말아.] 그는 그녀 곁의 문을 쾅 닫고 옆좌석에 올라탔다.
      [마르크, 병원에 가지 않겠어요.] 그녀가 그의 팔에 손을 올려
    놓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그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불투명한 회색빛을 띄
    고 있었다.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당신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다
    시 병원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병원 특유의 그 냄새와 소리를 가
    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결코...... 결코 다시는. 가슴이 두근거림
    을 느꼈다. 심각한 상태라면 어떻게 하나, 그녀가 중병이라면? 만
    일....... 그는 공포를 숨기면서 다시금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러
    나 그녀는 시골길을 보며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옆
    모습, 어깨, 손을 흘낏 봤다. 몸 전체가 검은색에 감싸여져 있었
    다. 준엄한 상황,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 그들이 말한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왜 그들은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가, 왜 이
    것이 단순한 시골에서의 주말이 될 수는 없는가, 느긋하고 행복하
    게 돌아가면 필라가 눈부신 미소를 함빡 머금고 맞아줄 수는 없는
    가? 그는 다시 디나를 흘낏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같은 소리 말아요, 마르크. 정말 난 괜찮아요.]
      [봅시다.]
      [차라리 파리로 가는 것이 어때요?]  그의 손을 붙잡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가 다시  날카롭게 그녀를 봤다. 파리-샹
    딸. 그래, 그는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디나가 괜찮은지 
    알아야했다.
      [의사에게 한번 보이고 파리로 가지.] 그녀가 다시 억지를 부리
    려고 했지만 다시금 강한 현기증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가 머
    리를 의자에 기댔다. 그가 초조하게 그녀를 보다가 속력을 냈다. 
    그녀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럴 힘이 없었다.
      또 10분이 지난 후, 그들은  세인트 제럴드 병원이라고 씌여진 
    작은 건물에 도착했다. 그는 아무말 없이 차에서 내려 그녀 곁으
    로 급히 갔다. 문을 열었지만 디나는 나올 기력조차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걸을 수 있겠어?] 다시 그의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 이것이 
    발작의 시초라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녀는 마비가 될 것이고 그는 항상 그녀 곁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는 디나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던가? 그
    녀를 차에서 내려놓으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막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
    렇지 못하다는 것을 둘다 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다. 그저 긴장
    했기 때문일 뿐인 것을. 잠시 병원으로 들어갈 때는 괜찮은 것 같
    았다. 왜 병원에 왔는지 잊어버릴  정도여서 평소와 같이 가볍고 
    편안하게 걸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마르크에게 그런 기분
    을 말하려고 할 때 한 늙은 남자가 그들 곁을 뛰어 지나갔다. 그
    는 늙었고 불결한 냄새가 났으며 얼굴의 주름살이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마르크에게로 쓰러졌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팔로 그녀를  휘감았다. 두 명의 간호원과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달려왔다. 1분이 채 못돼서 그들은 그녀
    를 작은 소독실로 옮겼다. 그녀는 다시 깨어나 당황해 하며 주위
    를 둘러 보았다. 마르크를 봤다. 그가 구석에서 떨고 있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 남자가.......]
      [괜찮아. 그만!] 마르크가  한 손을 올리며  조용히 다가왔다. 
    [그 남자때문이 아니야. 그 교회의 공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그
    녀 곁에 서 있었다. 매우 크고 엄격해 보이는 그가 갑자기 늙어보
    였다.
      [왜 그런지 진찰을 받아보자구. 원인이 무엇인지.]
      의사가 마르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는 침착성을 잃고 복도를 배회하면서 전화기를 힐끗 봤다. 그
    녀에게 전화를 걸어도 될까, 왜 하면 안되지, 뭐가 문제인가, 누
    가 볼까? 그러나 지금은 그녀에게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
    었다.
      그의 관심은 디나에게 있었다. 그녀는  18년 동안 그의 아내였
    다. 얼마 전에 하나 있던 자식마저 잃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는 그 생각에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전화기를 지나쳤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몇 시간 후에야 젊은 여의사가 그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알게 되었다. 디나에게 어떤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매우 사소한 거짓말. 그러나 과연 그 사실을 그가 
    그녀에게 말해야 하는지 의문스러웠다. 그가 알았다고 말해야 할
    까....... 아니면 반대로 디나가 그에게 뭔가를 고백해야 할까.

      
                                  22
      
      
      디나는 그녀의 머리 뒤에 있는 흰  벽보다 더 창백한 모습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짓말 말아요!] 마르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매우 잔잔한 미
    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너무도 차분하였다.
      [결코 거짓말이 아니야. 지금부터 6개월 후면 당신은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느라 고생 깨나 하겠지.]
      [그렇지만 임신은 불가능해요.]
      [왜 못한단 말이야.] 그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임신하기에는 너무 늙었어요.]
      [서른일곱 살이 늙었단 말이야? 당치도 않아. 앞으로 15년 동안
    은 언제라도 임신이 가능하다구.]
      [그렇지만 너무 나이가 많아요.] 그녀는 그에게 악을 썼고 눈물
    이 금방 떨어져내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왜 사람들이 자신에게 
    먼저 말하여 그 충격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이곳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환자에게 맨나중
    에 알려주는 것이다.
      디나는 마르크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부인의 
    상태를 최초로 알아야만 하는 중요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아내를 
    당황시킬 생각이 없었다. 두사람은 너무 많은 비극을 겪은 후였기 
    때문이었다.
      [여보, 어리석은 생각하지 말아.] 마르크가 말했다. 그는 자리
    에서 일어나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자신의 손을 다정하게 아내의 
    머리에 얹은 후, 길고 비단같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당신은 전
    혀 늙지 않았어. 앉아도 되겠지?] 그가 물었다. 그녀가 머리를 끄
    덕이자 그는 침대 한 모퉁이에 앉았다.
      [그런데......2개월 되었나요?] 그녀는  포기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이가 벤의 것이기를 원했다. 그녀는 잠들기 
    직전에 처음으로 임신에 대한 생각을 하였었다. 그런 생각이 그녀
    의 뇌리에 문득 떠올랐고 그녀는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했지만, 
    잠이 들 무렵 그녀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어지럽고 구역질이 나
    고 계속 잠자고 싶은 것을 보면 임신인 것 같았다.
      벤의 아이가 분명했다. 그녀는 마르크의 아이가 아니기를 원했
    다. 그녀는 실망과 고통스런 마음으로 마르크를 보았다. 임신 2개
    월이라면 벤의 아이가 아니라 마르크의 아이인 것이다.
      [내가 떠나기 전날 밤에 임신된 것이 분명해.]
      [좋아하실 것 없어요.] 눈물이 그녀의 눈에 가득찼다.
      마르크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는 그녀보다 정확히 알고 있
    었다. 마르크는 자신의 아내에게, 단순한 남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잊을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몇 달 동안 해야 할 일
    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마르크에게 아들을 못 낳아 준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여보, 고지식한 생각은 버려.]
      [수년 동안 임신을 하지 않다가 왜 이제와서야 임신이 되었죠.]
      [때때로 그런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 어쨌든 그건 중요하지 않
    아.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가 온 거야. 새 아이와 새 가정을 꾸밀 
    기회가.]
      [이미 아이가 있었잖아요.] 그녀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병원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모습은 초조
    해 하는 작은 소녀 같았다.
      [아이를 더 갖고 싶진 않아요.]  당신의 아이가 아니라면 몰라
    도. 이제는 디나도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만일 그녀가 진실로 그
    를 사랑했다면 그의 아이를 원했을 것이다. 마르크는 기뻐 어쩔줄 
    모르면서도 꾹 눌러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겠지.  모든 여인이 다 
    그렇지. 하지만......필라 일이 생각나.]
      [그래요, 필라 생각이 나요. 다른 아이들도요. 마르크, 그런 일
    이 있었잖아요.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요. 무엇때문에, 
    더 큰 충격과 고통을 받기 위해서요?  이 나이에 혼자 애를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반은 미국인이고 반은 프랑스 인인 
    아이를 키울 셈이에요? 당신과 아이에 대한 사랑 문제로 다투면서 
    지내는 일을 다시 겪으란 말인가요, 싫어요!]
      [당신은 분명히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
    였고 강철처럼 단호하였다.
      [그럴 의무는 없어요!] 그녀는 이제 그에게 악을 썼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예요, 내가 원하면 유산시킬 수 있어요!]
      [유산시키면 안돼!]
      [도대체 왜요!]
      [디나! 당신과 더이상  대화하지 않겠어. 당신은  지금 흥분했
    어.]
      그녀는 베개를 껴안고 울면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흥분했다>
    라는 말은 그녀의 마음 상태에 관한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다.
      [당신은 곧 익숙해져서 기뻐하게 될 거야.]
      [당신의 말은 내게 아무 선택권이 없다는 얘기죠, 그렇죠.] 그
    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유산시키면 저를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
    혼할 건가요?]
      [쓸데없는 말 하지 말아.]
      [그렇다면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괴롭히는 것이 아니야. 난 행복해.]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
    를 쳐
      다보고 팔을 뻗었다. 그렇지만 그의  눈에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가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양손을 번갈아 자신의 입술에  대었다. [디나, 당신을 사랑
    해. 그리고 우리의 아이를 갖고 싶어.  당신과 나의 아이를 말이
    야.]
      그녀는 눈을 감고 몸을 움추렸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
    는 아무말이 없었다. 그는 일어서서 그녀를 안은 후 그녀의 머리
    를 잠시 어루만졌다. 그후 그는 떠났다. 그녀는 슬프고 혼란한 모
    습으로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둠 속에 혼자 남게되자 디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흐느껴 
    울었다. 임신이 모든 일을 변화시켰다.  왜 그 사실을 몰랐을까, 
    왜 그생각을 못했을까? 자신이 사전에 알아챘어야만 했다. 그녀는 
    신경과민인 줄로만 알았다. 전시회 개막식이 있었고 벤과 끊임없
    이 사랑을 하였으며, 그 후 필라의 소식이 있었고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 모든 일이 2주일 동안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벌써 2개월이 지났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렇다
    면, 그녀가 벤과 함께 있는 동안에 마르크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
    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것은 벤과의 모
    든 일을 부인하여야 함을 의미했다. 이 아이는 마르크와의 결혼을 
    확인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밤새도록 침대에서 잠들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마르크
    는 그녀를 퇴원시켰다. 그가 아테네로 떠나기 전날, 두 사람은 곧
    바로 파리의 마르크의 어머니 댁으로 차를 몰고 있었다.
      [닷새 혹은 엿새 동안 머물 예정이야. 그 후 그리스의 일을 정
    리해 버릴 작정이야. 일주일 후 파리를 떠나 집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겠어.]
      [그곳에 머문다는 것이 무슨 뜻이죠, 난 그곳에 있고 당신은 여
    행한다는 뜻인가요.]
      [아니야. 될 수 있는 한 그곳에 머물겠다는 뜻이야.]
      [한 달에 5일, 일 년에 5일, 그런 건가요?] 그녀는 창 밖을 내
    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아내로서의 18년의 생활을 다
    시 하여야 한다는 선고를 받은 느낌이었다.
      [언제 당신을 보게 되나요, 마르크?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는 
    한달에 두 번씩 저녁을 같이 먹고, 다른 곳에 있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건가요?]
      [그렇게 하지 않을 생각이야, 디나, 약속할께.]
      [왜요? 언제나 그랬잖아요.]
      [이젠 달라. 이젠 무언가를 알게 되었어.]
      [정말이에요, 그게 뭔가요?] 도로만을 쳐다보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애처롭게 들렸다.
      [난 인생이 얼마나 짧으며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 것인가 하는 
    사실을 깨달았어. 우린 이전에 두 번이나 그런 사실을 깨달았지만 
    난 잊고 있었던 거야. 이제는 알겠어. 다시 깨우치게 되었다구.]
      디나는 머리를 숙이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성공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필라도 없는데 정말 이 아이를 유산시킬 
    생각이야?]
      그가 그녀의 생각을 알아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그녀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난 확신할 수 있어. 유산은 당신을 망칠 거야.] 그의 목소리의 
    억양이 그녀를 놀라게 하였다.  [죄의식과 감정적 고통으로 인해 
    당신은 파멸하고 말 거야. 다시는 생각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 거라구, 분명히.] 그 생각이 그녀에게 공포심을 
    주었다.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렇게 냉혹한 사람이 못돼.]
      [말을 바꾸자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로군요.] 그녀가 한
    숨지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날 밤 9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고 더이상 아무말
    도 나누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남겨두고 떠나면서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하였다. 그는 공항까지 택시를 탈 예정이었다.
      [매일 밤 전화할께.] 그는 진지해 보였지만 기쁨을 숨길 수 없
    었다.
      그의 눈에는 그 커다란 근심이 사라져 있었다. 단지 필라에 대
    한 슬픔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약속해, 여보. 매일 밤 전화할
    께.]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그녀는 외면하고 말았다.
      [그녀가 놓아 줄까요.] 그는 그 말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침대에서 뚫어지게 그를 쳐다보았다.  [내 말 들으세요, 마르크. 
    그녀가 당신과 동행할 거죠, 맞아요?]
      [놀리지 말아. 이건 사업차 떠나는 여행이야.]
      [지난 번의 여행은 업무상의 여행이 아니었던가요?]
      [당신 흥분했군. 그만 둡시다. 떠나기 전에 말다툼하기 싫으니
    까.]
      [왜요, 유산시킬까 봐요.] 흥분한 김에 그 아이가 마르크의 아
    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임신 2개월이라면 어쩔 수 없이 
    그의 아이였던 것이다.
      [디나, 내가 떠나 있는 동안 푹  쉬고 있어.] 그는 아버지같은 
    상냥함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키스를 한 후 부드럽게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잠시동안 누워 자신의 시댁의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아
    직 아무도 그녀의 임신을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은 마르크의 말대
    로 두 사람만의 비밀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집안은 조용하였다. 
    그녀는 어떻게 할까 생각을 굴리면서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
    다. 그녀는 마르크가 그리스에 있는 동안 샌프란시스코로 갈 수도 
    있었고 아이를 유산시켜 자유로와질 수도 있었지만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유산은 마르크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
    만큼 파괴시킬 것이다. 이미 너무나 많은 손실을 경험하였다. 그
    의 말이 맞다면, 이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면, 만약...... 이 아
    이가 벤의 아이라면?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 반짝이다 사라졌다. 
    마르크의 말도 그렇고 젊고 수줍은 듯이 보이는 의사의 말도 그랬
    다. 벤의 아이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디나는 이 베이지색 비단 보호막 속에서, 마르크가 돌아
    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 다시 똑같은 생활을 시작하기를 기다리
    면서 일주일 동안 누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디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문득 도망치고 싶
    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현기증을 잠시 가라
    앉힌 후 조용히 옷을 입었다. 그녀는 밖에 나가 산책을 하며 생각
    을 정리하기로 했다.
      거리로 나서니 그녀를 유쾌하게 해주는  정원과 광장과 공원이 
    있었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거리의 행인들과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있는 웃음이 나오도록 자그마한 나이든 숙녀들, 체스를 하고 
    있는 노인들, 친구들과 재잘거리는 아이들 그리고 이리저리로 유
    모차를 끌고 있는 한 소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 소녀는 스물한 살이나 스물두 살쯤으로 보였다. 디나는 쉬면
    서 지켜보았다. 의사는 그녀에게 마음을  편히 하고 산책을 하는 
    것이 좋은 휴식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외출을 하더라도 집에 돌아
    와 잠을 자고 식사를 거르지 말며, 밤늦도록 잠을 자지 않는 일이 
    없으면 몇 주일 내로 건강이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파리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벤에 
    관해서이다. 며칠 동안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녀가 마침내 우체국 앞에서 걸음을 멈춘 것은 오후 늦게였다. 
    더이상 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여직원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었
    고, 놀라서 [미국이에요?] 라고 묻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무한한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
    만 사실은 1분도 되지 않았다. 벤이 있는 곳에서는 오전 8시였다.
      [아직 자고 있었나 보죠?] 6천 마일 떨어진 거리지만 그녀의 목
    소리는 힘이 있었다.
      [그런 셈이지. 방금 깼어.] 벤은 미소지으며 침대로 다시 갔다. 
    [언제 돌아올 예정이야?]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눈물을 삼켰다. [곧 가게 될 거예요.] 마
    르크와 그의 아이와 함께 말이예요. 그녀는 목구멍에서 슬픔이 북
    받쳐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눈물이 조용히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
    기 시작하였다.
      [난 당신보다 더 보고 싶어.] 그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녀가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었다. 
    [괜찮아?] 그는 그녀가 여전히  필라때문에 상심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무언가 딴 일이 더 생긴 것 같았다. [괜찮
    으냐구? 대답해줘.]
      그녀는 전화박스 속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아무 대답을 하
    지 않고 있었다.
      [디나, 여보세요?] 그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녀가 아
    직 그곳에 있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다.
      [저 듣고 있어요.] 침울한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했다.
      [오, 디나.......]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
    다.
      [내가 그리로 가면 어떨까, 그래도 될까.]
      [아니예요.]
      [다음 주말을 카멜에서 보내는 것이 어떻겠어? 노동절이 낀 주
    말이야. 돌아올 거야.]
      그것은 몇 광년쯤 떨어진 먼 곳에서 비춰오는 서광과도 같았다. 
    그는 가지 못한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멈췄다. 다음 주말을 카멜에
    서....... 못 갈 이유가 없었다. 오늘 밤 출발하면 일요일까지 같
    이 지내게 될 것이고 마르크가 돌아오기 전까지 하루 더 같이 있
    을 수도 있을 것이다. 카멜에서. 두 사람이 알고 있듯이 두 사람
    이 관계는 그후 끝나는 것이다. 여름이 끝나는 것이다. 그녀의 마
    음이 조급해졌다.
      [내일 도착할께요.]
      [내일? 오, 내 사랑....... 몇 시에?]
      그녀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하였다. [당신 시간으로 내일 오
    전 6시쯤에요.]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환해졌다.
      [확실하지.]
      [그래요.] 그녀는 그에게 항공편을  알려주었다. [그 비행기를 
    못 타게 되면 전화하겠어요. 전화가 없으면 그 비행기를 기다리세
    요.] 그리고 그녀가 전화기에다 소리내어 웃을 때 다시 눈물이 자
    신의 눈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집으로 갈께요, 벤.] 떠난 지 일
    주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얼마나 긴 시간처럼 느껴졌던가.
      
      그날 밤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메모를 남겼다. 그녀는 단지 샌프
    란시스코로 돌아오라는 전화를 받았으며,  이렇게 갑자기 떠나게 
    되어 죄송하다고만 적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과 필라의 초상화
    를 돌려달라고 말해야 할 필요성을 강렬히 느꼈다. 그녀는 시어머
    니가 이해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녀는 하녀에게 마르크에
    게서 전화가 오면 외출했다고 전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면 충분
    하였다. 그것으로 적어도 하루는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리스의 일을 정리해야만 했던 것이다.
      디나는 집으로 향하는 비행기 속에서 그 일을 생각하였다. 마르
    크는 그녀를 일주일 동안 혼자 있게 내버려두었다. 그럴만한 이유
    가 없었다. 그는 그녀가 파리에서 집으로 갔다는 사실에 화를 낼 
    것이지만 더이상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자유로왔다. 
    일주일 동안. 그녀는 그 이상은 생각할 수 없었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 한 시간 동안 그녀는 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을수가 없었다. 그녀는 매우 어린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때때
    로 일어나는 멀미도 그녀의 기분을 악화시키지 못했다. 잠시동안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으면  멀미가 사라지곤 하였다. 그녀는 
    벤 생각을 하였다.
      비행기가 주위의 모든 것을 분홍색이나 금빛으로 만드는 태양과 
    경주하면서 구름을 뚫고 하강한 후 샌스란시시코에 착륙했을 때, 
    그녀는 먼저 비행기를 빠져나오는 사람들 틈에 끼었다. 아름다운 
    아침이었지만 그것조차도 그녀의 마음을 벤에게서 떼어놓지 못했
    다. 비행기가 출구에 정지했을 때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
    로지 벤뿐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빨리 떠나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그녀가 흰색 바지와 흰색 실크 셔츠 위에 검은 벨벳 자켓을 
    입고 어깨를 추스릴 때, 얼굴에는 이미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녀
    의 상아빛 얼굴과 칠흑같은 머리가 흑백의 의상을 돋보이게 하였
    다. 그녀는 미국을 떠날 때보다 더욱 창백해 보였지만 그녀의 눈
    은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였고, 문으로 걸어가는 동안 두 눈은 춤
    추고 노래했다.
      그 후 그녀는 벤이 팔에 상의를 걸치고 미소를 띤 채 오전 6시
    에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문을 통과하
    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달려갔고 그녀는 곧  그의 팔에 안겼다. 
    [오, 벤!] 그녀의 눈에는 웃음과 눈물이 어렸지만 그는 아무말이 
    없었다. 그는 단지 그녀를 꼭 안을 뿐이었다. 그가 팔을 풀기 전
    에는 그것이 영원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당신 걱정을 많이 했어, 디나. 당신이 돌아와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저도 그래요.]
      그는 그녀의 눈을 살폈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고통이 어려있다는 것 뿐이었고, 그 이상의 것은 알 수
    가 없었다. 그녀는 단지 그에게 달려와 꼭 안겼을 뿐이었다.
      [집으로 가겠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였다. 
    일주일 동안을 위해 집으로 가는 것이다.

      
                                  23
      
      
      [괜찮아?] 디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고 벤의 침대에 누
    워있었다. 집에 온 지 4시간이 지났고 내내 그와 함께 침대에 있
    었다. 오전 10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비행기 속에서 한잠도 
    자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이  긴 여행때문인지 혹은 필라의 
    죽음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인지를 확
    신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짐을 풀어 그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었
    다.
      [디나, 괜찮아.]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벤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기분 좋은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그녀의 미소는 
    그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었다. [언제 카멜로 떠나죠?]
      [내일이나 모레, 당신이 원하는 날에.]
      [오늘 떠날 수 있나요?]
      그녀에게는 어딘가 숨겨져 있는 절망의 그림자가 있었지만 그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그럴 수도 
    있겠지. 샐리와 상의해 봐야겠어. 우리가 떠난 후 그녀가 혼자 화
    랑을 돌볼 수 있으면 떠날 수 있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지막하지만 진지한 말이었다.
      [그정도로 몸이 안 좋아?]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만을 끄덕
    였지만 그는 이해하였다. 그는 식사를 준비하러 나갔다. [내일은 
    당신 차례야.]
      그는 부엌에서 그녀에게 말했고, 그녀는 벌거벗은 채로 방안을 
    가로질러 문에서 그를 보며 웃었다. 이제는 마르크의 아이를 임신
    한 채 사랑을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름 내내 사랑을 하
    였으면서도 그녀는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벤과 사랑하고 싶었다.
      [디나!]
      그녀는 미소지으며 머리를 들어올렸다. [왜요?]
      [나쁜 일이 있었어? 필라 일 말고 또 다른 일. 그랬어?]
      그녀는 아무일도 없었다고 말하려고 하였으나 그에게 숨길 수가 
    없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요.]
      [내가 알아야 하는 건가?] 마르크처럼 그도 그녀의 건강을 걱정
    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 연약해 보였던 것이다. 그는 선 채로 그
    녀를 면밀히 관찰하였다.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 아이에 관하여 알 필요
    는 없었다. 그 아이가 벤의 것이라면 달랐을 것이다.
      [달걀을 어떻게 요리해 줄까? 프라이로 할까 아니면 스크램블로 
    할까.] 그는 물으면서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스크램블드 에그로 해주세요.] 프라이는  생각만 해도 신물이 
    올라올 것 같았지만 스크램블드 에그는 그럭저럭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달걀을 보자 속이 메스꺼웠지만 강한 커피 냄새를 맡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스크램블드 에그를 가까스로 먹어치웠다.
      [커피는 먹지 않겠어요.]
      [웬일이지.] 그는 놀란 듯이 보였다.
      [사순절을 위해서 먹지 않기로 하였어요.]
      [6, 7개월 빠르군.]
      7개월...... 7개월. 그녀는 그 생각에서 빠져나와 그의 농담에 
    미소지었다.
      [그런가 봐요.]
      [그렇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저어...... 모르겠어요.]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가 그를 감싸안
    고 그의 등에 기대었다.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제 생활이 좀더 단순
    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그것 뿐이라구.] 그는 몸을 돌려  레인지 앞에 벌거벗은 채로 
    서서 그녀를 보았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것뿐이에요.] 지금 이런 말을 해야 하나, 
    왜 이렇게 빨리 고백해야만 하는 건가? 그녀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찼지만 억지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건이 제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아요.]
      [그것이 쉬울 거라고 생각했었나.] 그의 눈은 그녀의 눈을 떠나
    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그렇지만 이렇게 어렵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그를 떠날 수가 없어요, 벤.] 마침내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말
    았다. 오, 하느님 맙소사! 그에게 말해버렸어. 그녀는 끝없이 그
    를 쳐다보았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왜, 이유가 뭐지?]
      [떠날 수가 없어요. 지금은요.]
      그리고 그 후에도 안돼요, 벤. 그의 아이를 가진 한 그럴 수가 
    없어요. 또다시 여지껏 해 온 생활을 되풀이해야만 해요.
      [남편을 사랑해, 디나?]
      그녀는 또 한번 고개를 저었다.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어요. 
    지금은 한때 사랑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어떤 점에서는 여전
    히 사랑하고 있어요. 그는 자기방식대로 18년 동안 내게 무언가를 
    주었어요. 그렇지만 그것은...... 그것은 수년 전에 끝났어요. 이
    번 여름까지도 몰랐어요. 지난 일주일을 보낸 후 더욱 선명히 깨
    달았어요.] 그녀는 숨을 쉬기  위해 잠시 멈춘  후 말을 이었다.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마르크와 헤어져야 할지를 확신하지 
    못했어요. 내게 아무런 권리가 없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아직도 
    그를 조금은 사랑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구요.]
      [그렇다면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래요.] 그녀는 목이 메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손으로 눈
    물을 닦았다. [며칠 전에서야 겨우 깨달았어요. 어떤 일이 있었는
    데....... 그래서 깨닫게 되었어요.] 내가 그의 아이를 원하지 않
    고 당신의 아이를 원했기 때문이에요! 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럼 왜 그와 함께 있는 거지, 필라때문에?] 그는 너무도 차분
    하게 아버지가 딸에게 말하듯이 물었다.
      [필라 외에 다른 이유도 있어요.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요. 단지 
    떠나지 않을 뿐이에요.] 그녀는 다시 고통스런 눈빛으로 그를 보
    았다.
      [제가 떠나버리기를 원하세요.]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가 조용히 방을 떠났다. 그녀는 그가 잠시 거실에 머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침실문을  힘껏 닫는 소리를 들었
    다. 그녀는 잠시동안 놀라서 멍하니 부엌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제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카멜에는 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옷은 전부 그
    의 방에 그의 옷과 함께 잠겨  있었다. 그녀는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한 시간 후에 그가 나왔다. 그는 눈이 
    충혈된 채 슬픔에 잠겨 문가에 서 있었다. 잠시동안 그녀는 그가 
    화가 난 것인지 단순히 흥분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정확히 무슨 뜻이지, 디나? 끝났다는 얘기인가?]
      [아니...... 아니예요, 아, 어쩌면 좋을까요!] 잠시 그녀는 자
    신의 의사가 분명치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
    다. 그녀는 깊은 숨을 두 번 쉬고는 길고 호리호리한 다리를 우아
    하게 바닥을 향해 늘어뜨리면서  소파에 앉았다. [아직 일주일은 
    시간이 남았어요.]
      [그 후에는 어떻게 할 거지.]
      [떠나야죠.]
      [그 삭막한 생활 속으로, 혼자만의  생활 속으로, 필라도 없는 
    그 무덤과도 같은 곳으로.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 그는 고통스러
    워보였다.
      [달리 방법이 없어요, 벤.]
      [이해하지 못하겠군.] 그는 침실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멈춰서 
    그녀를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디나, 당신에게 우리의 사랑은 
    여름 동안만이라고 말을 했기 때문에......이해할 수는 있어. 그
    렇게 말을 했으니 이제 와서 변경시킬 권리가 내게는 없는 것이겠
    지.]
      [당신이 화를 내고 상심하는 것도 당연해요.]
      그녀는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를 쳐다보는 그는 결코 
    동요하지 않았다.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해. 그건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
    이야.]
      디나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금 그의 품에 안겼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떨어졌
    다.
      
      [오늘 카멜로 갈까.]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엎드려 누워 
    있었다. 그녀는 3시간 동안 잠을 잔 후 방금 깨어났고 시간은 거
    의 5시가 다 되었다. 벤은 한번도 화랑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그
    녀에게 일주일 내내 화랑을 비우는 동안 샐리가 관리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정말 어떻게 할 작정이지, 디나.]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눈에는 잔
    잔한 행복이 어려있었다.
      [어떤 곳이라도?]
      [그래요.]
      [그렇다면 타히티로 갑시다.]
      [카멜로 가고 싶어요.]
      [진정으로?] 그는 손을 그녀의 허벅지에 얹어놓았다. 그녀는 미
    소지었다.
      [진정이에요.]
      [좋아, 그렇다면 카멜로 가지. 그곳에서 저녁을 먹지.]
      [그래요. 파리 시간으로는 오전 2시지요.  저녁을 먹을 즈음에 
    파리에 있었더라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겠네요.]
      [맙소사! 난 시차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어. 몹시 피곤하지?]
      그녀는 매우 피곤해 보였지만 혈색은 더 좋아보였다.
      [아니예요, 기분도 좋고 행복해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내 사랑의 절반도 안될 걸.]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고 그녀를 안고 애무하
    고 싶었으며, 남은 며칠 동안 그녀의 모든 것을 갖고 싶었다. 문
    득 그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당신 작품은 어떻게 하지?]
      [내 작품이라니요?]
      [우리 여전히 동업자로 남는 건가.] 그는 그녀가 <물론이에요>
    라고 대답하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이제 그
    는 알게 되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럼 서로 만나야 하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가 있겠는가, 마르크의 아이때문에 배가  부를 텐데 어떻게 그를 
    만나러 화랑에 갈 수 있겠는가?
      [그런가?] 그러면 하는 수 없지.] 그가 말했다.
      그의 눈에 어린 고통을 보는 것을 그녀로서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은 도가 지나칠 만큼 격해졌
    다.
      [왜 이러는 거지.]
      [당신은 나를 옛날에 결혼했던 여자처럼 겉치레나 좋아하는 여
    자로 생각하는가 보군요.]
      그는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당신은 그런 여자가 아니야, 디
    나. 당신에게 그런 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 우린 어려운 약
    속을 하였고 이제 그 약속에 따라 행동해야만 하겠지. 쉽지는 않
    지만 그것이 공정한 거야.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해, 당신
    이 그 사실을 항상 기억해 주기를 바래. 혹시라도 돌아오고 싶다
    면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어, 언제라도. 내 나이 아흔세 살
    이 되었을지라도.] 그는 그녀를 미소짓게 만들려고 하였으나 실패
    하였다. [이제 새로운 계약을 맺지 않겠어?]
      [무슨 계약을 말인가요.] 디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
    았다. 그녀는 마르크가 미웠고 자기자신은 더 미웠다. 벤과 함께 
    있기위해서는 유산을 시켜야만 했다.  그녀가 자초지종을 그에게 
    말한다면 그가 그 아이를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에게 
    결코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 새로운 계약을 맺자구. <일주일 동안 뿐>이라는 말을 하
    지않기로 해. 단지 하루하루를 즐기고, 하루하루 사랑하며, 매순
    간을 즐기면서 그때를 맞이하는 거야. 그 말을 하게 된다면 우리
    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될 거야. 약속할 수 있겠지?]
      벤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
    스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얼굴 주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약속해.]
      [약속해요.]
      [좋아.]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에게 다시 키스한 
    후 방을 떠났다.
      두 사람은 한 시간 후에 카멜로 향했지만 어두운 그림자를 숨길 
    수없었다. 상황이 이전과는 달랐다. 이제 거의 끝난 것이며, 구태
    여 끝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 끝이 
    너무 가까워졌다. 여름은 가슴 아픈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
    다.

      
                                  24
      
      
      [준비됐어?] 노동절인 월요일 밤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집
    으로 가야 할 시간인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거실을 둘러본 
    후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불들은 이미 꺼졌고 와이드의 작품 
    속에 있는 해변의 여인도 달빛 속으로 얼굴을 감췄다. 그녀는 그 
    집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그 여인을 쳐다보았다. 날씨는 차가웠
    지만 달이 밝았고 하늘에는 별이 총총 박혀 있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가 조용히 차 속으로 들어갈 때 속삭인 
    말이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안고 키스하였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 두 사람은 웃었다. 갑자기 슬픈 분위기
    가 사라졌다. 두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도 기쁨과 평화와 사랑을 
    나누었고, 그것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들의 것이었다. 평생 동안. [나만큼 행복해, 디나?] 그가 물었다. 
    그녀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이유는 당신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항
    상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야. 어떤 경우라도.]
      [당신도 제게 그렇게 해주었잖아요.] 그녀는 자기 생애의 긴 겨
    울밤에 대한 기억에 빠지곤 하였다. 그녀는 배 위에 손을 얹고 아
    이를 만질 때마다 마르크에 관하여  생각하곤 하였다. 그 아이가 
    벤의 아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벤의 아
    이였기를 바랐다. 갑자기 그러한 바램이 무엇보다 강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오전 
    2시까지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날은 늦도록 잠을 잔 후 아침식사
    를 하고 그가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마르크와는 그날 
    오후로 약속되어 있었다. 화요일 3시로.  그의 전보 내용에는 그 
    말밖에 없었다. 그녀가 집 안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전화했을 
    때 마가레트가 전화로 그 전보 내용을 그녀에게 읽어주었다. 화요
    일 3시라고 적혀 있다고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물었어.]
      [조금 전에 당신의 아들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요.]
      그녀는 어둠 속으로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내 딸도, 당신도 딸을 원해.] 두 사람은 미소지었다.
      [몇 명이나 생각하고 있나요?]
      [마음에 드는 만큼. 한 다스 정도.]
      그녀가 소리내어 웃으며 운전하고 있는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녀는 그가 그런 말을 처음으로 한  전시회 후의 아침을 떠올렸
    다. 그날 아침과 같은 때가 또 있을까?
      [전 둘만 낳고 싶어요.]
      그는 그녀가 사용한 시제가 증오스러웠다. 그녀의 말은 그가 알
    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언제부터 나이가 젊다고 생각하게 되었지.]
      [아직 그렇게 늙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꿈꾸는 것은 쉬
    운 일이잖아요.]
      [당신 마치 임신한 사람처럼 보이는군.]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피곤해.]
      [약간요.] 그녀는 일주일 내내 너무 자주 피곤했었다. 긴장때문
    이겠지만, 그는 그녀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어두운 안색과 눈 
    밑의 기미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오늘이 지나면 더이상 걱정해 
    줄 수도 없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기적적으로, 다
    음 날이면 그의 걱정도 끝나는 것이다.
      [지금 무슨 생각하고 계세요?] 그녀는 진지하게 그를 쳐다보았
    다.
      [당신에 대해서.]
      [그것 뿐이에요?] 그녀는 그의 눈빛에 어려 있는 그 무엇을 알
    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물어보았으나 그가 받아주지 않았다.
      [그것뿐이야.]
      [뭔데요?]
      [난 내가 아이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었어.]
      그녀는 슬픔으로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머리를 돌렸
    다.
      [벤, 제발 그만둬요.]
      [미안해, 디나!] 그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겨 한쪽 어깨에 기
    대게 하고서 계속 차를 몰았다.
      
      [그게 무슨 뜻이죠?] 샹딸은 방 건너편에서 마르크를 쏘아보았
    다.
      그는 여행가방을 잠그고 마루로 내던졌다.
      [말 그대로야, 샹딸. 이제 장난은 그만둬. 이번 여름 3개월 가
    까이를 이곳에서 지냈으니 이젠 그곳에서 일을 해야 해.]
      [얼마 동안요.] 창백해 보이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의 흔적이 있
    었다.
      [잘 모른다고 말했잖아. 이제 고집 그만 부리고 떠나게 해줘.]
      [싫어요, 그러기 싫단 말예요. 당신이  비행기를 놓쳐도 할 수 
    없어요. 그런 식으로 저를 떼어놓을 생각일랑 마세요. 저를 어리
    석은 여자로 생각하세요? 당신은 그녀에게 돌아가려는 거예요. 딸
    을 잃어 상심하고 있는 가엾은 부인을 이제 사랑하는 남편이 위로
    하러 가는군요. 그것으로 그만이에요, 난 어떻게 하구요?] 그녀는 
    위협적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턱근육이 수축되었다.
      [그녀가 아프다고 말했잖아.]
      [어디가 아파요?]
      [어디가 아프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샹딸. 그냥 많이 아프
    다구.]
      [그래서 지금은 그 여자하고 헤어질 수 없단 말이죠?] 그럼 언
    제 헤어질 수 있겠어요?]
      [젠장, 일주일 내내 그 얘기로군. 비행기를 타러 가는 사람한테 
    꼭 그런 얘길 해야 되겠어.]
      [얼어죽을 비행기! 누가 당신을 보내기나 한대요?] 그녀는 격앙
    된 목소리로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보내줄 수 없어요. 절대
    로!] 그녀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는 한숨을 쉬며 주저 앉았다.
      [샹딸, 제발!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말했잖아. 제발 울지 말
    아. 나를 좀 이해해줘. 전에는 안 그랬잖아. 꼭 그렇게 억지를 부
    려야 하는 거야.]
      [지쳤기 때문이에요! 어쨌든 당신은 그녀의 남편인 걸요. 아무
    리 세월이 흘러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지겹단 말이에요!]
      [하필이면 지금 꼭 따지고 들어야  해?] 그는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어젯밤에 말했듯이 시간이 걸릴 것 같으면 당신을 그곳으
    로 부를께. 이제 됐어?]
      [얼마나 오래 걸려요.]
      [오, 샹딸!] 그는 필라에게만 보였던 성난 모습을 하였다. [사
    태를 관망하자구. 샹딸이 미국에  오면 잠시 머무를  수 있을 거
    야.]
      [잠시라는 게 얼마 동안이냐니까요?] 이제 그녀는 말꼬리를 잡
    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마르크는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눈을 
    부라려 보였다.
      [내키는 대로야. 이제 됐어? 이제 그만 가겠어. 거의 매일 전화
    하지. 일주일 내에 돌아오도록 노력할께. 그게 안되면 샹딸이 건
    너와. 만족해!]
      [거의 만족해요.]
      [거의.] 그는 그 말을 되뇌었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키스를 요
    구했다.
      그는 그녀에게 키스하였고 두 사람은 서로 엉켜 침실쪽으로 가
    면서 소리내어 웃었다.
      [비행기를 놓치겠어.]
      
      벤은 도중에 차를 세웠다. [여기요.] 그녀는 마치 세상이 끝나
    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누군가 그들에게 요한 
    계시록을 선포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
    을 알고 있었으며 그날이 언제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벤없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카
    멜에서 나누었던 순간들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
    침을 준비할 사람이 벤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생각하면서 침실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
      디나는 앉아서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유심히 그를 쳐다보다가 
    그를 꼭 껴안았다. 누가 보더라도  상관 없었다. 볼테면 보라지. 
    사람들은 그녀가 그를 껴안는 것을 다시는 못 볼 것이다. 사람들
    은 신기루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몇 년 동안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인가 잠시 생각하였다.  모든 것이 꿈처럼 사라질 
    것인가?
      그녀의 말이 그에게는 속삭임이었다.  [늘 건강하세요. 사랑해
    요.......]
      [나도 사랑해.]
      두 사람은 아무말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마침내 그는 그녀의 
    문을 열었다.
      [보내고 싶지 않아, 디나. 그렇지만 더 지체하면 당신을...... 
    당신을 보내지 못하게 될 것 같군.]
      디나는 벤의 눈이 너무 밝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눈은 눈물
    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다가 곧 그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그를 보아야만 했다. 그가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그녀는 다시 그를 껴안았다.
      [벤, 사랑해요!] 그녀는 그에게 꼭 붙어 있다가 서서히 떨어져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이 여름의 몇 개월이 내 
    생애를 가치있게 만들었다고 말해도 될까요.]
      [그럼.] 그는 미소지으며 그녀의  콧방울에 키스했다.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내 차에서 빨리 내리라고 말해도 될까?] 그녀는 놀
    라 그를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지 못할 거예요.]
      [당신을 내리게 할 방법이 없으니 소리내어 웃기나 하자구.] 그
    녀는 소리내어 웃다가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기분이 엉망진창이에요.]
      [그런 것 같군.]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에 슬픈 빛
    을 띠웠다. [나도 그래. 솔직히 말해서 지옥을 헤매는 기분이야.] 
    그는 씩 웃으면서 몸을 숙여 다시 그녀에게 키스한 후 그녀를 유
    심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가야지.]
      그녀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 자
    신의 손을 맡긴 채. 그녀는 차에서 내려 한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녀가 몸을 돌려 가방에서 열쇠를 찾는 동
    안 그가 사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
    다. 그녀는 그를 마음 속에 묻어둘  뿐이었다. 그리고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제 그녀는 마르크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25
      
      
      [안녕, 여보. 잘 잤어?] 마르크는 침대 속에 있는 그녀를 내려
    다보았다.
      [비행기를 놓치셨어요?] 지난 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녀가 
    파리에서 도망친 사실에 대해서는.
      [그랬었어, 멍청하게도. 택시를 잡을 수가 있어야지, 작은 사고
    가 수천 개나 일어나서 길이 막히는 바람에 다음 번 비행기를 타
    는 데 6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구. 기분은 어때?]
      [친절하시군요.]
      [그 말 말고는 없나?]
      그녀는 어깨짓으로 대답했다. 그것이 지옥같이 느껴졌고 죽어버
    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사람은 벤밖에 없었다. 하
    지만 이런 꼴로는 그와 지낼 수가 없다. 마르크의 아기를 임신한 
    채로는.
      [오늘 병원에 가보도록 하지.] 마르크가 말했다. [도미니크 양
    에게 약속을 해놓으라고 할까, 아니면 당신이 직접 하겠어?]
      [아무렇게나 하세요.]
      왜 이렇게 무기력할까? 그는 자기가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창백하고 수척해 보였고, 신경이 곤
    두서 있고 불쾌해 보였으며, 그의  말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 의사를 한번 만나보도록 하라구.] 그는 되풀이하여 말했
    다.
      [알았어요. 혼자 갈까요,  아니면 도미니크 양을  보내실 건가
    요?]
      [그건 신경쓰지 말아. 오늘 가기는 갈 거지?]
      [글쎄요. 그런데 당신은 오늘 어디로  가시죠. 아테네, 아니면 
    로마?] 그녀는 그를 지나쳐서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살며시 닫았
    다.
      즐거운 8월이 될 것이라고 마르크는 생각했다. 디나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한 달 늦게 아이가 나온다면 그는 그저 시간이 더 걸렸
    을 뿐이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항상 그런 일은 있게 마련이고, 갓
    난아기들이 3주쯤 늦게 태어나는  것은 보통이라고. 그는 비행기 
    앞에서 줄곧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화장실로 가서 닫혀진 문에 대고 안을 향해 크게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사무실에 있겠어. 의사한테 가는 것을 잊지 말
    아, 오늘말이야. 알았지?]
      [네, 명심할께요.] 그녀는 울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누르며 말했다. 이 상태로는 더이상 나아
    갈 수 없다. 아기를 갖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도나도 
    부담스러웠다. 벤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이 망할 아
    기가 있든 없든간에 남편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생각
    이 있었다. 현관문이 꽝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화장실
    에서 나와 곧장 전화기쪽으로 갔다. 간호원이 의사 선생님은 바쁘
    시다고 대답했지만 자기가 누구라고 밝히자 곧 의사가 전화를 받
    았다.
      [디나예요.] 그는 놀란 것 같았다. 그녀의 전화는 너무나 뜻밖
    이고 오랫만이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의 목소리를 듣자  그녀는 안심한 듯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는 자기를 도와줄 것이다. 그는 옛날에도 
    항상 그랬었다.
      [문제가 생겼어요. 아주  커다란 문제가. 만나뵈러  가도 될까
    요?]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일의 긴급성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때문에 그러는 거죠, 디나? 오늘 오겠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말한다면 나를 미워하실 건가요?]
      [미워하지는 않겠지만 밀린 일을 급히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그동안 기다릴 수 있겠어요?]
      [안돼요. 미쳐버릴 것 같은 걸요.]
      [알겠어요. 그럼 한 시간 내로 이곳으로 오도록 해요.]
      한 시간 후에 그는 그녀가 그를 생각할 때면 항상 떠올렸던 그 
    커다란 가죽의 그이 몸을 깊숙이 틀어박고 앉아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임신을 했어요.] 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 표
    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임신에 대해서 어떤 기분을 느끼십니까?]
      [두려워요. 때가 안 좋아요....... 그리고 그에 관련된 모든 일
    들이 잘못 되었어요.]
      [마르크도 그런 기분을 갖고 있나요?] 그가 임신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무슨 상관이지?  하지만 그녀는 솔직하게 말해야만 
    했다.
      [아뇨. 그는 기뻐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
    하는 이유는 천 가지 정도나 돼요.  내가 너무 늙었다는 것도 그 
    중 한 가지죠.]
      [기능적으로는 그렇지 않은데...... 하지만 당신은 작은 어린애
    를 기르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고 느끼나요?]
      [그 정도는 아니예요, 하지만...... 또다시 출산 과정을 겪기에
    는 단지 나이가 너무 들었다는 말이죠. 만일 아기가 죽으면 어쩌
    죠, 만일 그와 같은 일이 또 생긴다면?]
      [부인께서 걱정하시는 것이 그 점이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부
    인도 알고 있잖아요. 그 두 번의 사고는 전적으로 무관하고, 단지 
    비극적인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디나, 
    당신이 이 아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유들은 신경쓰지 말
    아요. 혹시 나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는 건 아닌가요?]
      [나는......예, 난......난, 마르크의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
    요.]
      그 마음씨 좋은 의사는 잠시 당혹감을 느껴 침묵을 지켰다. [무
    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요, 아니면 일순간의 변덕인가요?]
      [변덕부리는 것이 아니예요. 여름 내내 그이를 떠나는 것을 생
    각하고 있었어요.]
      [알겠습니다. 남편도 알고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
    개를 저었다.
      [그러면 정말로 일이 복잡해지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기는 그의 아이입니까?]
      10년 전이라면 그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일이 
    명백히 달랐고, 그는 그녀가 거북해 하지 않을 만큼이나 상냥하게 
    물어보았다.
      [그이의 아기예요.] 그녀는 망설이다가 계속하였다. [임신 2개
    월째 이니까요. 달수가 적다면 그이의 아이가 아니겠지만요.]
      [임신 2개월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죠.]
      [프랑스에 있는 병원에서 말해주었어요.]
      [그들도 틀릴 수는 있지만 아마 그렇지 않겠죠. 어째서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죠, 마르크의 아이이기 때문입니까?]
      [일부는 그래요. 그리고 더이상은 그에게 묶여있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에요. 아이가 있으면  쉽게 털어버리고  떠날 수는 없잖아
    요.]
      [쉽지는 않지만 그럴 수는 있죠. 하지만 어쩔 작정인지.......]
      [글쎄요, 마르크의 아기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남자에게 
    돌아갈 수는 없겠죠.]
      [그럴 수도 있죠.]
      [아녜요, 선생님. 그럴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의 아기를 갖고 있다고 해서 마르크에게 억지로 머물
    러 있을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스스로 나을 수는 있는 거
    죠.]
      [어떻게요?]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길을 찾게 될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예요. 나는...... 난 뭔가 다른 것
    을 원해요.]
      그리고 나서야 그는 이해를 하였다.
      [나에게 말하기 전에, 부인의 딸이 이런 경우에 어떤 처지가 될
    는지 생각해 보세요. 부인이 또 다른 아이를 갖는다면, 어찌됐든 
    간에 따님은 어떤 기분일까요.]  그러나 디나는 우울하게 그녀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건 더이상 문제거리가 안돼요. 딸애는 이주일 전에 프랑스에
    서 죽었거든요.]
      잠시동안 모든 것이 멈추어졌다. 그리고 나서 그가 몸을 앞쪽으
    로 숙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 이런! 디나, 미안해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그렇게 되었는데도  다른 아이를 원치  않는단 말입니
    까?]
      [그럴 수가 없어요. 지금은 안 돼요. 그냥 그럴 수 없을 뿐이에
    요. 낙태수술을 받고 싶어요. 그것을 하려고 여기에 왔어요.]
      [그 수술을 받고 나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잘 
    아시겠지만,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건 항상 비애
    와 죄책감과 후회를 갖게 만들죠. 매우 오랫동안 그런 감정을 갖
    게 될 겁니다.]
      [내 몸 속에서요?]
      [부인의 가슴과...... 머릿속에서요. 수술을 받고난 후에 편안
    한 마음을 가지시려면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만일 
    프랑스 의료진들이 오진을 하였다면 어떻게 하죠, 그리고 이 아기
    가 다른 남자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낙태
    를 원하실 건가요?]
      [가능성을 생각할 수는 없어요. 아이가 마르크의 것일 경우라면 
    지워버려야 해요. 게다가 그들이 오진을 했다고 생각할 이유도 전
    혀 없어요.]
      [사람들은 실수를 합니다. 나 자신도 때로는 실수를 하죠.] 그
    는 자비로운 표정을 짓더니 다른 생각이 떠오르자 이맛살을 찌푸
    렸다. [단순히 필라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하시더라도 지금 이 수
    술을 받으실 수 있으리라 느끼시나요?]
      [해야만 해요. 그래 주시겠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하지만 먼저 진찰을 해 보고 나서 내가 동의
    를 해야만 합니다. 나참, 때로는 임신을 하지 않은 경우도 있답니
    다.]
      그러나 그녀는 임신으로 진단되었고 그도 동의를 하였다. 임신 
    초기중에는 정확하게 진단을 내리기란 항상 힘든 일이었지만, 약 
    2개월 가량으로 나왔다. 이제는 빨리 수술을 하는 일만 남았고 디
    나는 매우 결심이 굳은 듯이 보였다.
      [내일요.] 그가 물었다. [아침 7시에 오세요. 그러면 5시까지는 
    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남편에게 이야기할 건가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유산을 했다고 말하겠어요.]
      [그리고는요?]
      [모르겠어요. 일을 풀어나가야 하겠죠.]
      [혹시 마르크에게 머물러서 또 다른 아이를 갖기로 결정한다면 
    어쩌죠, 그런데 이번 수술때문에 더이상 임신을 할 수 없다면? 그
    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디나? 스스로를 죄책감에 의해 파멸시키게 
    되고 말텐데?]
      [아니예요. 그런 상상은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저 그렇게 살아야 하겠죠.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할 거예요.]
      [정말로 확신하십니까?]
      [그래요.] 그녀가 일어서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가 찾
    아가야 될 병원의 주소를 적어주었다.
      [수술은 위험한가요?] 그녀는 그때까지 그 말을 물어볼 생각조
    차도 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녀
    는 단지 지금 마르크의 아이를 낳게 된다면 죽어버릴 것 같은 생
    각만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죤스 의사는 고개를 저으면서 그녀의 팔을 툭툭 두드렸
    다.
      [아뇨, 위험하지 않아요.]
      
      [이 시간에 어디를 가는 거지.] 그녀가 침대를 미끄러져 나가자 
    마르크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잠에서 깨어난 것
    이 짜증스러운 듯이 보였다.
      [작업실요.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침대에 누워있어야 해.] 하지만 그의  눈은 이미 감겨져 있었
    다.
      [오늘은 침대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거예요.] 적어도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알았어.]
      하지만 그녀가 옷을 입기 전에 그는 다시 잠들어 있어서 그녀가 
    나가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메모를 남겨두었다. 밖에 외
    출했다가 오후에 돌아오겠다고 적었다. 그가 귀찮아 하겠지만 절
    대로 그 일을 알지 못할 것이고,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어버리게 될 것이다. 자동차의 시동을 걸면서 그녀는 자신의 샌
    들과 진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지난번 카멜에서 벤과 있을 때 입었
    던 옷이었다.
      차가 시동이 걸리기를 기다리면서 그녀는  자기가 또다시 그의 
    생각에 잠겨 어슴푸레한 아침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
    했다. 이런 하늘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녀는 벤과 함께 있었
    다. 그리고 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의사가 물어본 말이 기억에 
    떠올랐다. 아기가 벤의 아기라면?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어떻
    게 그렇게 될 수가 있겠는가? 2개월 전에 그녀는 마르크와 사랑을 
    나누었었다. 하지만 6월 말경에는 벤도 만났다. 벤의 아기일 가능
    성도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이유로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던가, 2
    개월이 아니라 만 1개월 전에 임신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어쩌지!]
      디나는 큰 소리로 한 마디를 내뱉고는 엑셀레이터를 밟고 후진
    을 해서 거리로 나섰다. 만일 그의 아이라면 어떡하지, 그래도 낙
    태수술을 원할 것인가? 그녀는 갑자기 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졌다. 그건 미친 짓이었다. 그녀는 곧장  병원을 향해 차를 몰았
    다. 그녀의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도착한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죤스 
    의사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이 침착하고 상냥하
    게 디나의 팔을 잡아주었다.
      [마음의 준비는 되었나요.] 그가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
    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가 마음에 거리끼는 무언가가 있었다. [들
    어가서 얘기하죠.]
      [아니예요. 그냥 시술해 주세요.]
      [좋습니다.] 그는 간호원에게  주의사항을 일러주었고, 디나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어져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지하실로요. 하루종일 내려가 있을 겁니다. 낮동안에는 이곳으
    로 돌아오지 못하죠.] 갑작스레 그녀는 공포심을 느꼈다. 만약 다
    치기라도 한다면, 만약에 죽는다면, 집으로 가는 길 위에서 하혈
    이라도 한다면? 만약에....... 간호원은 디나에게 계속해서 호흡
    요령을 설명해 주었고, 디나는 자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아시겠죠?]
      [예.] 디나가 생각해 낼 수 있었던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녀
    는 갑자기 절망적으로 벤이 보고 싶어졌다.
      [겁이 나세요.] 간호원은 상냥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는 표정이
    었다.
      [약간요.]
      [두려워하실 것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나는 세 번씩이나 
    했었는 걸요.] 맙소사! 놀랄만한 일이로군. 수술비 할인이라도 받
    았었나?
      디나는 그 작은 방에 앉아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는 지하실로 
    안내되어져서 수술실로 들어가 살균된  수술대 위에 누워 등뒤로 
    발이 묶여졌다. 방은 마치 그녀가 그 두 사내아기를 낳고, 마지막
    으로 필라를 낳을 때 있었던 분만실과 흡사했다. 그때는 분만실이
    었지 낙태실이 아니었다. 그녀는 땀에 흠뻑 젖는 것을 느꼈다. 그
    들은 그녀를 반 시간 가량이나 혼자 누워 있게 하였다.
      디나는 거기 누워서 다리가 들어올려진 채로 울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면서 금방 끝날 거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끝난다. 지워진
    다. 기계로 아기를 끄집어낼 것이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저 
    기계들 중에서 어떤 험악하게 생긴 것이 <그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모든 것들이 똑같이 끔찍스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녀는 다리가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죤스 의사가 돌아오기
    까지는 몇 시간이나 지난 것 같았고, 그녀는 몸이 튕겨져 일어나
    려고 하는 것을 느꼈다.
      [디나, 기분이 좀 편안해지고 아픔을 느끼지 않는 주사를 놔줄
    께요.]
      [저어,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똑바로  일어나 앉으려고 애를 
    쓰면서 허공에서 다리를 저었다.
      [주사를 맞지 않겠단 말인가요? 하지만  맞고 나면 수술받기가 
    굉장히 편해질 텐데요. 나를 믿어요. 이런 수술은 무척 힘이 들어
    요.] 그는 매우 사려깊게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 않겠어요. 주사 말고요, 낙태수술 말이에요. 난 할 수 없
    어요. 혹시 벤의 아이라면 어떡해요?]
      그 생각이 아까부터 그녀는 괴롭히고 있었다. 아니면 그것만이 
    아이를 가지겠다는 변명이었을까? 그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결심한 겁니까, 디나? 아니면 단지 두렵기 때문인가요.]
      [둘다. 전부 다....... 난 모르겠어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
    득 고였다.
      [만일 아이가 당신 자신만의 것이고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만일 관련된 남자가 아무도 없다면요. 만일 당
    신이 혼자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아
    이를 가지시겠습니까?]
      그녀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면서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녀의 다리를 풀어주었다. [그렇다면 집에 가세요. 그리
    고 일을 풀어나가 보세요.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혼자서 그 아이
    를 가질수 있어요. 아무도 당신에게서  아기를 앗아갈 수 없습니
    다. 아기는 전적으로 당신의 것이죠.]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디나가 집에 도착했을 때 마르크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없이 작업실로 올라가서 문을 걸어 잠그었다. 그녀는 무슨 일
    을 하였던가? 그녀는 아기를 갖기로 결정을 내렸고, 의사가 해 준 
    말은 사실이다. 그녀는 혼자서 아기를 가질 수 있고 단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아니면 아이
    는 마르크의 것이 될 것인가? 필라가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그녀
    는 자기 절대로 도망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이는 
    마르크의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는 혼자서 아이를 가질 용기
    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무슨 문제거리인가? 그녀는 이미 벤을 잃
    어버리고 만 것이다.

      
                                  26
      
      
      [안녕, 디나!] 마르크가 자기 의자에 앉으면서 그녀를 슬쩍 쳐
    다보았다. 신문은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고, 
    커피는 뜨거웠고, 디나는 달걀을 먹고 있었다. [오늘 아침엔 배가 
    고픈가 보지.] 그녀가 먹는 모습을 본 지가  몇 주는 된 것 같았
    다.
      [많이 고프지는 않아요. 여기, 내  토스트 좀 드세요.] 그녀가 
    레이스가 달린 푸른 빛의 리모쥬 접시를 그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
    았다. 그날 아침의 식탁보도 마찬가지로 섬세한 하늘색이었다. 그
    건 그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마르크는 그녀가 달걀을 뒤적이는 모습을 주의깊게 지켜보았다. 
    [아직도 아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잠시 후에 올려다보았
    다.
      [아뇨.]
      [의사를 불러야 될 것 같은데.]
      [어쨌든 다음 주에 의사를 만나볼 예정이에요.] 그녀가 의사를 
    마지막으로 본 지 3주가 지나갔다. 낙태수술을 할 수도 있었던 그
    날 아침에 도망쳐 나온 지 3주가 지나갔다. 그녀가 벤을 본 지 3
    주가 지나갔다. 그리고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다시는 소식을 
    못 듣게 되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언제, 어디, 어느 장소에서 그와  우연히 마주치게 될 것이고, 
    그들은 잠깐동안 오래된 친구처럼 말을 주고받을 것이다. 그리고
    는 그것이 끝이다. 그들의 관계는 끝나버렸다. 그들 중의 어느 한
    편이 아무리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하자 그녀는 몸 안의 
    기운이 전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 침대로 돌아가고 싶
    은 생각밖에는 없었다.
      [오늘은 뭘하고 지낼 거지?] 마르크는 건성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걱정의 빛을 보였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요. 아마도 잠시동안 작업실에서 일하겠
    죠.]
      하지만 그녀는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앉아서, 벤이 
    처음에 그렇게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랑에서 되돌려받은 산더
    미같이 쌓인 그림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로 하여금 그녀의 작품을 모두 팔게 하고 그를 보지 않
    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 자기
    가 임신한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에게는 선
    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샐리에게 자기 작품을 돌려달라고  간청했었다. 지금 그것들은 
    쓸쓸하게 얼굴을 돌리고 그녀의 작업실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그
    녀가 매일마다 몇 시간씩이나  쳐다보는 그녀와 필라의 초상화를 
    제외하고는.
      [나와 함께 어디가서 점심식사라도 하지 않겠어.] 그녀가 걸어
    나가다가 식당에 앉아 있는 그를 보려고 돌아서자 왕처럼 앉아 그
    가 말했다. 그는 지금 그녀의 왕이었고, 그녀는 노예였다. 이 모
    든 것이 그녀가 겁장이처럼 지워버리지 못한 뱃속의 아기때문이었
    다.
      디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나가지 않겠어요.] 그녀
    는 미소를 지어보이려 했지만 그것은 겨울철의 한줄기 햇살도 될 
    수 없었고, 눈 위에 희미하게 비추는 빛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
    와 함께 점심식사하러 가기는 싫었다. 그와 함께 있는다거나 아니
    면 같이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벤이 그들
    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그런 생각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세게 가로젓고 그녀의 도피처인 작업
    실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무릎을 감싸쥐었다. 뺨 위로 눈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화벨 소리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인 것처럼 느껴졌다.
      [얘, 너니? 뭘하고 있니?] 킴의 전화였다. 디나는 속으로 한숨
    을 내쉰 후에 미소를 끌어올려 억지로 웃어보려고 애썼다.
      [아무것도. 작업실에 앉아서 은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
    야.]
      [지옥같은 얘기군. 전시회를 열어 멋진  찬사를 받고난 후에는 
    그럴수 없지. 벤은 어때, 네 작품 또 판 것 없대?]
      [없어.] 디나는 자기의 목소리가 그녀가 느낀 감정을 배반하지 
    않도록 애썼다. [그는 그는 정말이지 기회가 없었어.]
      [그렇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 사람이 런던에서 돌아오면 팔
    아줄 거야. 샐리 말로는 거기에 일주일 더 있을 예정이라던데.]
      [아, 나는 몰랐어. 마르크가 3주 전에 집에 와서 정신 없이 바
    빴었어.] 킴벌리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최근 필라
    가 죽은 후로 그들은 어디에도 가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디나의 말로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것이 그때였다고 했었다.
      [점심식사하러 작업실에서 나오라고 꼬셔볼까.]
      [안돼. 난...... 정말이지...... 난 그럴 수 없어.]
      갑자기 킴은 그 말을 듣고 꺼림칙해졌다. 그녀는 디나의 고통으
    로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겁이 났다. 그건 너무나도 생소하게 들
    렸다.
      [디나?] 하지만 대답은 없었고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지금 내
    가 집에 가봐도 되겠니.]
      그녀는 안된다고 대답하고 싶었고 그녀를 보기가 꺼려졌지만 그
    럴 힘이 없었다.
      [디나, 내 말 들었어? 지금 그리로  갈께, 2분 후면 도착할 거
    야.]
      디나는 자기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도 전에 킴이 작업실 계단
    을 밟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벽쪽을 향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그림들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킴은 노
    크를 한 번 하고서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는 자기가 지금 보고 있
    는 게 뭔지 몰라서 경악스런 모습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스물 내지는 서른 점의 그림들이 벽에 줄지어 늘어져 있
    었을 것이다.
      [이게 다 뭐니?]
      신작들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가려져 있는 그림
    들을 들춰내면서 눈에 익은 제목들이 보이자 그녀는 놀란 눈을 하
    고 디나에게 돌아섰다.
      [화랑에서 철수한 거니?] 그녀가 물었다. 디나는 고개를 끄덕였
    다.
      [하지만 왜? 전시회도 훌륭하고 평가도 좋았잖아. 지난 번에 내
    가 벤이랑 얘기할 때 네 작품 중의 절반 정도는 팔았었다고 말했
    었어. 왜 그런 거니?]
      그리고 나서 그녀가 알겠다는 듯이 말을 했다. [남편때문에 그
    랬어?]
      디나는 한숨소리와 함께 주저앉았다. [그냥 철수해야만 했어.]
      킴은 걱정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며  마주앉았다. 디나의 얼굴은 
    창백하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욱 안 좋은 것은 그녀의 
    눈 속에 감돌고 있는 비극적인 그 무엇이었다.
      [디나, 난...... 난 네가 필라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
    지 알고 있어. 아니면 어떤지 실감할 수는 없다고 해도 추측은 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것으로 네 전 생애를 망쳐버릴 수는 없어. 네
    가 성공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는 분리되어져야 한다구.]
      [하지만 그건 그렇지가 않아. 왜냐하면...... 왜냐하면 벤때문
    이야.]
      그녀의 얼굴을 가린 손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때문에 그 소리
    는 가냘프게 들렸다. 킴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팔을 
    굳게 쥐었다.
      [그냥 실컷 울어.]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디나는 그렇게 하였다. 그녀는 킴의 팔
    에 얼굴을 묻고 필라와 벤과 혹은 마르크까지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마르크를 그의 정부에게 빼앗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
    가 차지한 유일한 것은 그녀가  원하지 않았던 그 아기뿐이었다. 
    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자기 팔에서 눈물을 흘리
    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녀가 마침내  눈물을 그치고 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 킴, 미안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겠어.  난 그
    저......]
      [이런 맙소사! 제발 사과하지 말아. 그걸 마음 속에 꼭 붙잡아
    두고 있을 수는 없어. 정말 그럴 수는 없다구. 커피 한 잔 할래.]
      그녀는 머리를 내젓더니 갑자기 조금 밝아졌다. [차 한잔 정도
    는.]
      킴은 수화기를 들어 주방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산
    책하러 나갈 수도 있을 거야. 그거 어떻겠어?]
      [너는 어떻게 하고? 일을 포기한  거야, 아니면 나때문에 오늘 
    하루 쉬기로 했어?] 디나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웃었다.
      [제기랄! 네가 화랑에서 물러섰다면 난 그저 일을 그만둬야 할
    지도 모르지. 그 정도는 말이 된다구.]
      [아냐, 네가 틀렸어. 내가 한 짓은 옳았다구.]
      [하지만 왜? 난 이해할 수가 없어.]
      디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무언가를 말해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그저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더이상 벤을 만나고 
    싶지 않아.]
      [벤하고는 끝장났단 말이야?]
      그 두 여자가 서로의 눈속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 방의 모든 
    시간이 오랫동안 멈추는 듯했다. 디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크에게 머물러 있을 생각이니?]
      [그래야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마가레트가 문  밖에 내려놓은 접시를 
    들여왔다. 그녀는 킴에게 커피를 건네주고 찻잔을 들고 앉아서 한 
    모금 마신 후에 눈을 꼭 감고는  마침내 다시 말했다. [마르크와 
    나는 아이를 가질 예정이야.]
      [뭐라고, 농담하는 거니?]
      디나는 다시 눈을 떴다. [나도 농담이었으면 좋겠어. 프랑스에 
    있을 때 알았어. 장례식이 끝난 후 며칠 시골에서 쉬는 동안 성당
    에 갔다가 쓰러졌지 뭐야. 마르크가 그 동네 병원으로 끌고 갔어. 
    내가 무슨 치명적인 병에라도 걸린  것으로 생각했던 거지. 우린 
    그때 둘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었거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병
    원에서 진찰받은 결과 임신 2개월이라는 거야.]
      [그럼 지금 몇 개월째란 말이니?]
      [정확히 3개월 되었지.]
      [그렇게 보이지가 않는데.] 아직까지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킴
    은 시선을 내려서 진바지 밑으로 지퍼에 감추어진 밋밋한 그녀의 
    복부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 아기가 작은 
    것같아. 게다가 요즘 너무나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체중도 
    많이 줄었고.]
      [맙소사! 벤이 알고 있니?]
      디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줄 수는 없었
    어.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그건 말이야....... 지워버
    리는 것이었어. 그리고 시도를 해 보았지. 모든 준비를 다 해놓고
    서는 수술대 위에 누웠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거야. 두 명의 
    아이가 죽고 필라까지도 그렇게 된  상태에서 말이야. 아무리 이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해도 그냥 그럴 수가 없었어.]
      [그리고 마르크는?]
      [그 사람은 신바람이 났어. 마침내 아들을 갖게 될지도 모르니
    까. 아니면 필라 자리를 채워놓게 될 테니까.]
      [그럼 너는, 디나.] 그녀의 목소리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드러
    웠다.
      [내가 뭘 얻게 되냐구? 별로.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한 남자
    를 잃게 되고, 수년 동안 감옥과도 같았던 결혼생활에 다시 얽매
    이게 되고, 살지도  죽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아이를  갖게 되
    고....... 그리고 만일 살게 된다면 아이는 마르크의 것이 될 거
    고, 그 사람은 아이를 다시 한번 나에게서 멀어지게 해서 이천퍼
    센트 프랑스 인으로 만들어놓고 말겠지.  하느님은 알고 계실 거
    야, 킴. 내가 그런 속에서 지내왔다는 것을. 하지만 내가 어떤 선
    택을,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니.]
      [넌 아이를 혼자서 키울 수도 있어, 네가 그 아이를 원한다면. 
    벤도 그것을 원할지 몰라, 비록 자기 아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마르크는 절대로 날 가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가로막을 거야.] 그건 애매한 협박처럼 보
    였지만, 그녀는 자기자신의 말에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킴은 
    자기 친구의 눈에 맺힌 고통을 지켜보았다.
      [그 사람이 어떤 짓을 할 것 같은데.]
      [나도 몰라. 무슨 짓이든 하겠지. 난 절대로 피하지 못할 것 같
    은 느낌이 들어. 내가 그걸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는 나를 
    멈추게 하려고 모든 짓을 다할 거야. 그리고 어쨌든 간에 그 사람
    은 내 자신감을 흔들어놓고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
    고 있어.]
      [말좀 해봐, 디나.] 킴은 오랫동안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요즘 그림은 그리고 있니.]
      디나는 머리를 저었다. [무슨 소용이 있겠니? 전시회도 못 갖는
    데.] 그녀는 무기력하게 어깨를  추스렸다가 내렸다. [20년 동안 
    전시회를 갖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림은 그렸잖아. 왜 이제와서 새
    삼 중단하는 거야?]
      [모르겠어.]
      [마르크가 그만두라고 했기 때문이야? 그가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하고 너와 네 예술 작업을 하찮게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니?] 
    킴의 눈은 이제 불길을 뿜어내고 있었다.
      [모르겠어, 아마도....... 그 사람이 그냥 모든 것들을 아주 하
    잘데 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야.]
      [그럼, 벤은?]
      디나의 목소리는 갑자가 아주 부드러워졌고 그녀의 눈에는 또다
    시 킴에게 너무나도 생소하게 보이는 그런 빛이 어렸다. [벤은 전
    혀 다르지.]
      [그 사람이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니?]
      [나는 모르겠어.] 디나는 현실로 돌아와 오랫동안 굳은 표정으
    로 킴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에게 물어볼 수가 없어. 내가 그 사
    람과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에 마르크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는 것
    을 알고 있니? 그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지 생각해 보라구.] 디나
    는 잠시동안 자신이 원망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제발 부탁인데 너무 그렇게 자신을 자책하지 말아. 넌 임신하
    고 있는 줄 몰랐잖아. 안 그러니?]
      [몰랐어. 물론이지.]
      [알겠어? 이런 제길. 디나, 벤의 아기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디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1개월의 차이가 있단 
    말이야.]
      [그사람들이 오진을 할 수도 있지 않니?  당사자인 네가 알 수 
    있잖아.]
      [그래. 내가 정확히 알 수 있어야 할 텐데 가려내기가 좀 힘들
    어. 나는 생리가 불규칙해. 그래서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구. 내 짐작보다는 병원 사람들의 결론에 의존해야 돼. 그리고 그
    들 말로는 내가 6월 중순에서 말경에 임신했다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벤의 아기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아.]
      킴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디나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하기 전에 
    그녀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모두 그렇게 중요한 질문
    들이 아니었다. [디나, 너는 아기를 원하니? 내 말은 말이야, 만
    일 이런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만일 그들 둘다 이 일에 
    무관하고 단지 너 혼자만의 일이라면 넌 이 아기를 원하겠니? 대
    답하기 전에 잠시 생각해 봐.]
      하지만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죤스 의사가 똑같은 질문을 
    하였었다. 그녀는 작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킴을 올려다보았다. 
    [대답은 예스야. 그래, 나는 원해. 내 아이이기를 원해. 내 아이 
    말이야.] 그녀는 눈물이 고인 눈을 돌렸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아이는 벤의 것이라고 항상 말할 수 있어?]
      킴은 한숨을 쉬고 컵을 내려놓았다. [그러면 말이야, 이런 제기
    랄. 디나! 아이를 낳아, 그리고 사랑을 퍼부어 주라구. 잘 기르라
    구....... 하지만 너 혼자서 말이야.  남편을 떠나. 적어도 네가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럴 수는 없어. 난 두려워.]
      [뭐가.]
      그녀는 수치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걸 나도 모르겠어.]

      
                                  27
      
      
      [나는 모르겠소, 킴. 기획도 마음에 들지 않고 전체적으로 세련
    되어 보이지 않아요.]
      벤은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멀리 떨어진  벽을 멍하니 바라보았
    다. 그는 오전 내내 일을 손에 잡을 수가 없었다. 킴은 그를 바라
    보는 동안에 무엇때문에 그가 정신집중을 시킬 수 없는지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지난 밤에 런던에서 날아온 다음에  잠을 좀 잤더라면 조금은 
    좋아보였을 텐데요.] 킴은 애써 가볍게 말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
    었다. 그는 사실 디나보다 더 절망적인 것처럼 보였다. 견뎌내기
    가 무척 어려운 듯해 보였다.
      [그냥 얼버무리려고 들지 말아요. 내가 원하는 디자인을 잘 알
    고 있잖소.]
      [알았어요. 다시 노력해 보죠. 그걸 다시 검토해 보려면 이삼주
    일 걸리 텐데, 그 정도로 오래 여기 있을 건가요? 아니면 또 도망
    쳐버릴 건가요?]
      벤은 최근에 잦은 출장을 다니고 있었다.
      [다음 주 화요일에 파리로 떠납니다. 하지만 이삼주 내로 돌아
    올 거요. 집을 좀 처리해야 하거든요.]
      [다시 지으려구요?]
      [이사를 가려구요.]
      [왜요?] 집을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몇 달 동안 킴이 계좌를 다루는 동안 그들은 친구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와 디나 사이의 관계는 그들 사이에 덤으로 유
    대 관계를 맺어주고 있었다.
      [더이상은 그 집에 있을 수가 없소.] 갑자기 그의 눈이 킴의 눈
    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를 만난 적이 있소.] 킴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지내던가요?]
      [잘 있어요.] 당신처럼 애간장을 끓이며 가슴 아파하면서요.
      [잘 됐군요. 나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킴, 
    난...... 나는 이 심정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난 
    미쳐버릴 것만 같소. 견뎌내기가 너무나 힘들다구요. 이런 감정은 
    처음이오. 내 아내가 나를 떠났을  적에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오. 정말 도저히 말이 안되요. 우리 사이는 모든 일이 잘 되어가
    고 있었소. 디나에게 약속을 했었죠...... 단지 여름행이라고, 그
    녀에게 부담을 주지는 않겠다고. 하지만, 킴! 그녀는 자기자신을 
    그 남자에게 매장시키고 있어요. 그남자가 그녀를 사랑하는지조차
    도 나는 알 수가 없소.]
      [내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도 마르크가 디나를 사랑한
    다고 생각한 적은 결코 없어요.]
      [하지만 우리들의 착각일 거요. 그녀는 그래도 그 사람에게 머
    물기로 결심한 걸요. 당신과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입니다. 디
    나는 행복해 보이던가요, 그림은 그리고 있구요.]
      킴은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뇨, 
    행복해 보이지도, 그림을 그리고 있지도 않았어요.]
      [그렇다면 왜 남편 곁에 있는 걸까요, 필라때문에? 나로서는 도
    저히 이해가 안되는군요. 그녀가 나에게 머물러달라고 했다면, 나
    는 기꺼이 그녀를 받아들였을 텐데 말이오. 그녀는 잠시동안 남편
    과 지내다가 돌아올 수도 있었을 거요. 나는 절대로 부담을 주지 
    않았을 거요. 그 남자는 도대체 어떤 수단을 써서 디나를 붙잡고 
    있는 걸까요.]
      [사람들 사이의 관계란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는 법이에
    요. 타인들로서는 알기가 힘들죠. 나는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50년 
    동안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어요.]
      [재미있는 이야기로군요.] 그렇게 말하는 벤의 얼굴은 매우 배
    타적으로 보였다.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싶지만, 그러면 안될 것 
    같아서.......]
      [당신은 어때요, 벤.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고통으로 가라앉아 오히려 부드럽게 들렸다.
      [바쁘게 일 속에 파묻혀 지내고 있죠.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요. 디나는 나한테 어떤 선택권도 남겨두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에게 그 일을 잊어버리게 될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인 것 같았다. [내가 어떻
    게든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디나를 납치하는 것을 도와줘요.] 그는 다시 눈길을 
    돌렸다. [알다시피 나는 와이드의 그림까지도 더이상 볼 수가 없
    소. 그 그림의 여인은 너무나도 디나를 닮았거든요.] 벤은 자기자
    신의 집착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긴 한숨을 지으며 일어섰
    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소, 킴. 나는 정말 어떻게 할지 모르
    겠단 말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도와줄 수 있
    으면 좋겠지만 나도 마찬가지예요.  도와줄 방도가 없어요. 우리 
    점심이나 함께 하러 나가기로 하죠.]
      킴은 서류 가방에 화랑 광고포스터를 집어넣고 다시 마루에 내
    려놓았다. 벤의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킴에게는 차라
    리 고문과도 같았다.
      [내 심정 알겠소? 나는 우연히 디나와 마주치기를 바라고 있어
    요. 내가 가는 모든 식당, 상점, 우체국에서조차도 두리번거리곤 
    하죠. 혹시나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지나 않을까 하고요.]
      [디나는 요즘 외출을 잘 하지 않아요.]
      [건강은 괜찮아요? 혹시 병이난 건 아니겠죠, 그렇죠?] 킴은 묵
    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계속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계속해서 돌아다
    니며 여행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 뿐이오.]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잖아요.] 킴이 일어서서 그의 뒤를 따
    라 문 앞으로 갔고, 벤은 자신의 개인 감옥과 같은 벽 뒤에서 그
    녀를 슬프게 쳐다보았다.
      [노력은 해봐야겠죠.]

      
                                  28
      
      
      [의사가 오늘 뭐라고 그랬어?] 마르크가  집에 왔을 때 디나는 
    벌써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상이래?]
      [4개월 치고 놀랄 정도로 아기가 작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건 
    단지 내가 신경쇠약이고 체중이 줄은  때문인 것 같대요. 이주일 
    후에 다시 오라더군요. 그러면 확실하게 아기의 심장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래요. 아기가 너무 작기는 하지만 오늘쯤은 아기 
    소리가 들려야 한다더군요. 아마  2주 후에는 들리겠죠.] 하지만 
    마르크는 어떤 소식에도 걱정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당신은 어
    땠어요?]
      [엄청나게 피곤해. 하지만 새로운 소송 건수가 들어왔어.]
      [어딘데요?]
      [암스테르담이야. 하지만 짐 셜리반과 함께 가기로 했어.]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에게 밖에 나가 있지는 
    않겠다고 말했었지. 어때, 내가 그 말을 지키고 있지.]
      [그렇군요.] 이번에는 그녀도 미소를 지었다.
      그는 두 달 동안 집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었다. 주말 여행으로 
    파리에 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
    다. 어떤면에서 그녀는 구제를 받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의 말
    로는 그 여자와의 관계를  청산하였다고 했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그 소송을 맡지 않을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요. 언제 법정
    에서 그 소송을 다루게 되는데요.]
      [글쎄...... 아기가 태어난 다음이 되겠지.] 아기. 그건 아직까
    지도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아니었다. 오직 
    마르크에게만 현실인 것이다.
      [뭐 먹을 것 좀 가져다줄까? 간식 좀 먹으려고 아래층에 내려갈 
    건데.] 그가 방문 앞에서 뒤를  돌아다보며, 그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지금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들의 아기였고, 그
    들의 아들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건강을 염려했다. 때때
    로 그것은 그녀를 감동시켜 주었지만 거의 언제나 그녀를 짜증나
    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런 행동이  자기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친절한 마음은 아기때문이었다. 그의 상속자인 
    아기.......
      [뭘 드실 건데요. 피클이나 아이스크림?]
      [당신은 어떤 게 좋아, 디나? 캐비아랑 샴페인? 그것도 준비해 
    줄 수 있어.]
      [크래커 몇 개면 돼요.]
      [입맛이 별로 없는 모양이군. 아기는 먹성이 좋은 놈이면 좋겠
    는데.]
      [그럴 거예요. 분명해요.]
      마르크는 몇 분 후에 그녀의 크래커와 자기가 먹을 샌드위치 한 
    쪽을 들고 돌아왔다.
      [딸기도 없고, 피자도 없고, 타코스도 없어요.]
      몇 달만에 그는 그녀의 유머감각을  보게 되었다. 그날 그녀는 
    즐거운 하루를 보냈었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그녀는 킴과 점심
    을 먹으러갔었다. 킴은 그녀가 이렇게 낮설고 외로운 나날 속에서 
    정신건강을 지키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그리고 디나는 그녀에게 
    자기가 얼마나 벤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솔직히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 아픔의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중이었
    다. 그래도 지금까지 누그러지는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마르크가 자기 샌드위치 한 입을 권하고 있을 때 그녀 옆에 있
    던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받을까요? 당신 전화같은데.]
      [이 시간에?] 그가 자기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에서는 지금 아침 8시였다. 그 전화는 정말이지 그에게 온 것 
    같았다. 그가 다시 침대로 올라가서 그녀 옆에 앉았다. 다시 한번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해외에서 걸
    려온 전화에서 들리는 특이한 소음이 들리는 동안 그는 자기 고객
    들 중 누가 전화를 걸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마르크?] 절망에 빠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갑자
    기 자기자신이 창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샹딸. 디나는 그
    의 등이 약간 뻣뻣해지는 것을  보았고,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디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응, 무슨 일이오.] 왜 집으로 전화한 거지? 이미 이삼주 후면 
    유럽으로 돌아갈 거라고 그녀에게  약속했었다. 추수감사절 바로 
    다음에는 디나에게서 떨어질 수 있을 거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
    다. 그때까지면 자기가 한 약속 기한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달 반 동안 미국에서 그녀 곁에 있기로 한 약속을. [뭐가 잘못 
    됐나요?]
      [그래요.] 그녀가 길게 억눌려진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는 공포가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난-난 다시 입
    원했어요.]
      [그랬습니까......?] 디나는 그가 눈을 감으며 이마를 찌푸리는 
    것을 보았다. [왜 이런 시간에, 똑같은 일입니까?]
      
      [아뇨. 인슐린을 섞어버렸어요.]
      [결코 그걸 섞는 경우가 없잖아요.] 마르크는 그녀가 일부러 그
    러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병원에서의 그날 밤과 자기가 당
    황했던 일을 기억에 떠올렸다. 이렇게 세월이 지났으면 확실히 알
    고 있어야만 하잖아요.......] 제기랄!  옆에서 디나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거기에 앉아서 그녀와 말한다는 것이 너무나 거북하
    였다. [하지만 괜찮겠지요?]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서 침묵이 흘렀다. [아, 마르크. 당신
    이 필요해요. 제발 집으로  돌아와주세요!] 이런 제기랄, 어떻게 
    그 문제를 지금 여기서 얘기할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 그 상황을 통보할 정식 서류를 갖고 있지 않아요. 내
    일 내 사무실에서 얘기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는 전화를 들고 방
    을 가로질러 의자쪽으로 걸어갔다. 디나는  다시 책을 읽고 있었
    다. 전화 내용은 지루하게 들렸고 마르크는 짜증을 내는 듯 보였
    다. 내일 그의 사무실에서 얘기하자고 한 그의 제안에 샹딸은 비
    명소리를 질러댔다.
      [안돼요, 나를 계속 따돌리지는 못해요!]
      [따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언제 할 수 있을지 스케줄을 잡
    을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당신한테로 가겠어요. 떠나기  전에 만일 당신이 
    올 수 없으면 내가 그리로 가도 좋다고 약속 했잖아요. 왜 그렇게 
    하면 안 돼죠?]
      [내일 서류철을 보면서 그 문제를 토론해야만 해요. 10분 있다
    가 내가 전화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이제 강철같이 차갑게 말했
    다. [어디로 할까요?] 그녀가 개인병원의 이름을 대주었고, 그녀
    가 이번에는 적어도 미국인 병원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감사를 느
    꼈다. 그곳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해야만 했다면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무조건 다음 번 비행기를 타버릴 거예요.]
      그녀는 버릇 없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그리고 위험한 아이처
    럼. 그는 더이상 디나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아기가 태
    어나기 전에는. 그리고 난 다음에는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다. 하
    지만 그의 국적때문에 아이는 미국인은 물론이고 법적으로는 프랑
    스 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에 있을 때는 프랑스 법률의 지
    배를 받는다. 아이는 그의 것이 될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아이
    를 프랑스로 데려가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을 막기 위해서 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러한 생각은 다음 
    7개월 동안 그를 들뜨게 만들어줄  것이다. 아기가 생후 1개월이 
    되면 할머니에게 인사드리러 프랑스로 데려갈 것이다. 디나도 물
    론 가야겠지만, 그녀 자신이 선택할 것이다. 그녀는 갈 수도 있고 
    머무를 수도 있다. 하지만 갓난아기는 다시는 그 나라에서 돌아오
    지 않을 것이다. 만일 필요하다면 아기는 마르크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될 것이고, 마르크는 더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도록 신
    경을 쓸 것이다. 그 아기는 그의 것이었다....... 필라가 전적으
    로 그렇게 되었을 뻔했던 것처럼....... 디나가 아니었다면 그렇
    게 되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날 아기에 대한 생각은 그의 마음을 필라에게서 멀어
    지게 만들었다. 이 아이는 완벽하게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디나가 필요하였다. 그녀가 아이를 분만하기 전까지는 
    그녀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후에
    는 그녀와 계속 결혼한 상태로 있는 것이 아주 완벽하게 그를 행
    복하게 해줄 것이다-만일 그녀가 아기와 함께 프랑스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그는 그 모든 일을 잘 풀어갈 수 있었다-모든 일을. 그
    리고 지금은 샹딸이 그 보트를 흔들어버릴 시기가 아니었다.
      [마르크 에두아르, 내 말 들었어요? 당신이 건너오지 않는다면 
    난 무조건 다음 번 비행기를 타버릴 거라고 말했어요.]
      [어디로 말입니까?] 그의 말투는 얼음처럼 냉혹했다.
      [물론 샌프란시스코죠. 당신은 어디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결정을 내리도록 해줘요. 그리고 내일 알려주겠소, 내일. 
    알겠소?]
      [좋아요, 그리고 마르크.]
      [네?] 그는 약간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요.]
      [나도 그것이 절대적으로 상호동의라고 확신합니다.] 잠시동안 
    그는 거의 미소를 지을 듯하였다. [몇 시간 있다가 다시 얘기합시
    다. 잘 자요.]
      마르크는 한숨 소리와 함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디나가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불만스러운 고객인가요.]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이야.]
      [당신이 할 수 없는 일도 있나요?]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
    의 눈을 쳐다보았다. [나도 그렇지 않기를 바래, 여보. 진심으로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구.]
      그는 반 시간 후에 침대에 누웠다. 디나는 그의 곁에서 잠들지 
    않고 누워 있었다.
      [여보.]
      [응?] 방 안은 어두웠다.
      [뭐가 잘못됐어요?]
      [아니, 물론 아냐. 잘못될 것이 뭐가 있겠어.]
      [몰라요. 그 전화...... 좀더 돌아다녀야만 하는 건 아니예요?] 
    하지만 그녀는 그 질문의 대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잘 처리할 수 있어. 당신을 혼자 내버려두고 싶
    지않아.]
      [나는 괜찮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디로든 꼭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경
    우가 아니라면 떠나지 않겠어.]
      [그 말 고마워요.]
      그건 몇 달 만에 그녀가 그에게 던진 상냥함이었다. 그녀가 그
    의 손등을 어루만지는 동안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그녀
    의 손을 감싸쥐고 키스를 하며 그녀를 <사랑하는 디나!>라고 불러
    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미 샹딸에 대한 생각으
    로 그의 마음은 꽉 들어차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 디나.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그는 그녀의 손
    을 툭툭 두드리고는 침대 가장자리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게 무슨 미친 짓이야, 한밤중에  집에다가 전화를 하다니?] 
    마르크는 대륙과 대양 너머 샹딸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만일 그
    녀가 전화를 받았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
      [그래서요. 그래서 어쨌단 말예요! 웃기시네, 정말. 그녀도 알
    고 있잖아요!] 아니다. 그녀는 알았었다. 과거시제이지 현재시제
    가 아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지만 당신은 그런 짓을 
    할 권리가 없어. 내가 그러지 말라고 말했잖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할 권리가 있어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그의 귀에 대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쩔 수가 없어요, 마르크. 계속 지탱해 나갈 
    수가 없어요. 두 달이나 지났잖아요. 제발, 마르크!]
      [정확하게 두 달하고 이틀째야.] 하지만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
    도 못하고 있었다. 만약에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든 조
    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이번 겨울에는 두 여
    자 사이를 뛰어 다니면서 아주 힘들게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제발.......] 그녀는 그에게 애걸하는 자신이 싫어 죽을 지경
    이었지만 너무나도 그가 필요했다.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또다
    시 그의 부인에게 그를 뺏기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들이 항상 그
    녀를 상대로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다. 필라의 죽음까지도. 그와 
    디나를 좀더 가깝게 해 준 일들,  그들이 서로를 필요로 한 순간
    들, 이제 그녀에겐 그가 더욱더 필요했다. 다시는 빼앗기지 않을 
    작정이었다. [마르크!] 그녀의 목소리  밑에는 협박이 깔려 있었
    다.
      [내 사랑, 샹딸!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줘.]
      [안돼요. 그럴 수가 없어요. 만약  당신이 당장 어떻게 해주지 
    않으면 끝장이에요. 나는 더이상 이런 식으로 살아나갈 수가 없단 
    말예요. 미쳐버리고 말거라구요.]
      하느님 맙소사, 그녀를 어떻게 달래야 한담! [다음 주에 건너갈
    께.]
      [안돼요, 당신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 구실을 찾고 말 거예요.] 
    갑자기 그녀의 말투가 굳어졌다. [내 친구가 병원에 데려다주었어
    요, 마르크. 남자친구가요. 이번 여름에 당신에게 말한 남자예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내가 당신에게 가지 못하도록 한다면, 나는-]
      [나를 협박하지 말아, 샹딸!] 그녀의 말 속에는 그의 심장을 뒤
    집어놓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 남자와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러지 못할 게 뭐가 있어요, 당신도 기혼인데 나라고 그러지 
    못하라는 법이 있나요?]
      맙소사! 진심이라면 어떡하지, 만약에 자살 시도처럼 정말로 일
    을 벌인다면? [당신이 이쪽으로 온다면] 마르크가 말했다. [마음
    대로 도시를 돌아다닐 수 없단 말야. 숨어서 다녀야 되고, 그러다 
    보면 금방 싫증이 나고 말 걸.]
      [그 결정은 내가 내리도록 해주겠어요?] 샹딸은 그가 두려워하
    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을 끝낸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문제는 일으키지 않을께요, 약
    속해요.]
      그러자 그도 겨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항상 잘 해왔지. 잘 하는 정도가 아니지, 비범하다구. 
    알았어. 당신 마음대로 해. 이 협잡꾼 아가씨야. 오늘 비행기표를 
    예약해 놓지.]
      그녀는 승리와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언제 갈까요.]
      [언제 병원에서 퇴원할 수 있는데?]
      [오늘밤에요.]
      [그러면 내일 와.] 그들은 이제 둘다 활짝 웃고 있었다. 불만이 
    사라져버리자 갑자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물밀듯 일어났다.
      [저어, 샹딸!]
      [네, 내 사랑?] 그녀는 힘과 순진함 그 자체였다. 마치 핑크빛 
    비단에 감싸인 핵미사일처럼.
      [당신을 사랑해!]

      
                                  29
      
      
      샹딸은 전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여인이었다. 자신을 향해 다
    가오는 샹딸의 모습을 지켜보는 마르크의 얼굴에는 함빡 웃음꽃이 
    번졌다.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녀는 엷은 샴페인 빛의 
    슈에드를 걸쳤고, 모자는 넓은 스라소니 모피 칼라와 썩 잘 어울
    렸다. 그녀의 적갈색 머리카락이 모자 밑에서 출렁이며 그에게 고
    갯짓 했으며, 그에게로 달려오는 그녀의  눈동자는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그에게  키스하려다가 뭔가를 생각해 
    낸 듯 멈칫하더니 키스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휘
    파람을 불며, 웃으면서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키스하고 서로의 옷
    을 급히 벗겨나갈 것이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녀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특별한 여자인 것을 그는 거의  잊고 있었다. 전화로만 통화하며 
    지낼 때는 격식 없는 무분별함이 그녀의  큰 매력임을 거의 잊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빌린 리무진에 올라 탈 때에야 겨우 그녀로
    부터 손을 떼었다. 결국 그 안에서  다시 그의 손은 그녀의 몸과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를 꼭 안으면서 그녀의 입을 자신의 입 안
    으로 빨아들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은 나를 황홀하게 하는군.] 마르크는 
    숨을 헐떡이며 샹딸을 안고 있었다. 샹딸이 미소지었다. 이제 다
    시 그녀가 우세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그녀의 위력이 그를 미소
    로 휘어감고 있었다.
      [바보같은 사람! 일 년 동안이나 나를 멀리 하다니요.]
      [아니야 나는....... 도저히 일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
      그녀는 눈을 흘기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있잖
    아.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자구.] 한순간  그는 그녀가 얼마 동안 
    머물 예정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그는 결코 그녀에
    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녀를 안고서 남은 생애 동안 
    사랑하고 싶었다.
      차가 헌팅톤호텔 밖에 멈춰섰다. 마르크가 그녀를 도와 차에서 
    내리도록 해줬다. 그가 이미 호텔을 10일 동안 머물 수 있도록 예
    약해 두었다. 그들은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는 사무실에 연락하여 하루종일 밖에 있을 것
    이라고 말해두었다.
      
      [마르크?] 디나가 어둠 속에서 졸면서 미소지었다. 새벽 2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그녀는 두 시간 동안 잠을 잔 것이다.
      [아니, 군주야. 누군줄 알았지?]
      [당신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는  전화도 걸어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디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다른 고장에서 고객이 왔거든. 우리는  하루종일 비밀 회의를 
    했지.]
      [매우 따분했겠군요.] 그녀는 어둠 속에서 미소지으며 침대 주
    위를 둘러보았다.
      [기분은 어때.] 그가 옷을 벗으면서 아내에게 등을 보였다. 이
    제 그녀가 있는 집으로 온 것이 이상했다. 그는 그날 밤 거의 밖
    에 있었는데 그것을 위해 무대를 준비해야 했다. 그는 주말을 낀 
    며칠 동안을 샹딸의 곁에 있어주기로 약속해 놓았던 것이다.
      [졸려요, 고마워요.]
      [좋아. 나도 졸립군.] 그는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가 그녀의 뺨
    을 만지며 머리 위의 어딘가에 키스를  했다. [잘 자요.] 이것은 
    샹딸을 떠날 때 한 말이다.  하지만 샹딸에게는 [내 사랑]이라고 
    덧붙였었다.
      
      [나는 상관하지 마세요.] 샹딸이 말했다. [나는 떠나지 않겠어
    요. 만일 당신이 지불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호텔 비용을 치르든
    지 아파트를 찾겠어요. 내 비자를 보면  6개월간 머물 수 있던데
    요?]
      [그건 말도 안돼!] 마르크가 방  건너쪽에서 그녀를 노려봤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이나 다투고  있었다. 그리고 샹딸의 가냘픈 
    턱이 성급하게 화를 내며 삐죽댔다. [당신에게 말했잖아. 2주 후
    에 파리로 돌아간다구.]
      [얼마 동안요? 5일, 1주, 그 다음은요? 다시 두 달간 당신을 못
    본다구요. 안돼요, 안돼, 안된단 말예요! 계속 함께 있든가 아예 
    끝장을 내든가 해야 돼요! 당신이 택하세요. 내가 여기에 머물까
    요, 아니면 여기서 꺼져버릴가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란 말예
    욧!]
      우아한 실내장식과 어울리지 않는 앙칼진 목소리였다. [내쪽에
    서는 이런 게임을 더이상 못하겠어요. 더이상 안돼요! 내가 오기 
    전에 말했죠. 당신이 왜 그녀와 결혼한 상태로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이젠 변명거리였던 필라도 없어요. 하지만 난 상관 없어
    요. 영원히 당신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절대로 안돼요. 아
    니, 기다리겠어요. 아니면.......]
      샹딸은 섬짓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 영원히 이 
    세상에서 떠나버릴 거예요.]
      [당신의 비자 기간인 6개월 후는 어때? 그때까지는 당신을 이곳
    에 머무르게 할 수 있을 거야.] 그는 마음을 졸이며 그녀의 대답
    을 기다리고 있었다....... 6개월이라.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는 샹딸이 집으로 갈 것이고 몇 주 후에 그가 뒤따라 갈 수 있
    을 것이다. 그런 다음 디나와 아기는 프랑소아 1번가에 있는 어머
    님께 맡기고. 그렇게 되면 그는  거기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미국으로 왕래할 것이지만 가정의 터전은 파
    리가 될 것이다.
      [저 말이야, 샹딸!] 그가 말을 꺼냈다.  [일은 잘 풀려나갈 거
    야. 내년에는 생활 근거지를 파리로 옮길 생각이라구, 어때? 여기
    에 사무실을 계속 두고, 여행은 이곳에서 파리로 가는 것이 아니
    라 그 반대로 하는 거야. 파리에서 살겠단 말이야.]
      [당신의 아내와?] 그녀가 의심스럽게 노려보았다. 그가 무슨 생
    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건 아니야, 샹딸. 절대로 그렇지 않아. 내년에는 많은 변
    화를 계획하고 있어.]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서는 뭔가가  빛났다. [파리로 가겠다구요? 
    왜죠.] 그녀는 <나를 위해서?>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전혀 없었다.
      [여러가지 이유때문에 돌아가려는 거야. 하지만 최소한 그 이유 
    중에 당신이 끼지는 않아.]
      [정말이에요.] 그녀는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그래.]
      [그러면 그 동안에는요?]
      [당신을 여기에 머무르게 하는 거야.]  그는 반쯤 웃어보였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달려가 그의 품
    에 안겼다.
      [정말이에요?]
      [그래, 요 깍쟁이 아가씨야!]

      
                                  30
      
      
      마르크는 그의 재규어를 구석에 주차시켜 놓고 옆좌석에서 평범
    하게 포장된 큰 상자를 끌어냈다. 꽃은 벌써 그녀에게 보냈다. 그 
    상자는 들기에 거북하게 포장되어  있어서 신중하게 들어야만 했
    다. 그는 놉힐에 있는 대저택들 사이에  불쑥 나와 있는 좁은 집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초인종을 눌렀다. 그 집은 여러 개의 얕은 
    계단 위에 있는 조용한 플래트식 공동주택이었다. 바닥은 흰색과 
    검은색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설비재는 전부 윤이 나는 황동
    이었다.
      그녀가 문쪽으로 달려나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구가 비치되어 있는 이 집을 11월부터 
    6월까지 전세냈다. 집을 찾기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확히 이틀 동안 이 집에서 지냈으나 그와 같이 
    저녁을 함께 하기는 오늘이 처음이 될 것이다.
      그는 자기쪽으로 향해 오는 급한 발자국 소리를 듣자 미소를 억
    누를 수 없었다. 이런 결정은 잘 한 것이었다. 비록 그녀가 강요
    하긴 했지만. 하지만 겨우 내내 그녀가 그곳에 있으면 좋을텐데. 
    디나는 요즘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 거의 스튜디오에 숨어 있었
    다. 그곳에서 그녀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앉아 있
    는 것이다.
      [빨리 열어줘!]
      그가 초인종을 다시 눌렀다. 갑자기  문이 확 열리면서 그곳에 
    그녀가 나타났다. 하얀 모슬린으로 된 원피스와 은빛 샌들을 신은 
    모습은 너무나도 눈부셨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녀는 무릎을 낮춰 인사한 후 장난스럽
    게 생긋 웃어보였다. 아파트 안의  불빛은 희미했고 뒷방에 있는 
    작고 둥그런 식탁 위에는 꽃과 양초가 놓여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답군!]
      마르크는 한쪽 팔로 그녀를 휘감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은제품
    들과 불켜진 양초......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집은 작지만 아름다운 집이었다. 그 집의 소유주는 실내 장식가인
    데, 그 겨울을 프랑스에 있는 연인과 함께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완벽한 장식이었다. 그가 그녀를 가까이 끌어안았다.
      [당신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샹딸!  게다가 당신에게선 천상의 
    향기가 나지.] 그녀가 웃었다. 그 전날에 그가 커다란 죠이 향수
    를 선물했었다. 그녀가 가까이에 있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그는 점심때 사무실에서 달려올 수 있고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잠시 들러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아침
    에 키스할 수 있으며, 때때로 오후에도 사랑을 나눌 수가 있는 것
    이다.
      [저 상자는 뭐예요?] 그녀는 호기심이 잔뜩 어린 즐거운 표정으
    로 커다랗게 포장된 상자를 보고 있었다. 그가 한 손을 천천히 그
    녀의 다리 위로 미끄러뜨렸다. [그만해요! 저 상자에 뭐가 있죠?] 
    그녀가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벗겨진 다리를 어루만지
    고 있었다.
      [무슨 상자? 상자에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그가 그녀의 무릎 위에 입술을 갖다대고 천천히 허벅지 안쪽으
    로 향했다.
      [그 하찮은 상자보다 당신이 훨씬 흥미롭다는 걸 발견했는 걸, 
    내 사랑!] 그녀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옷들은 잠시 후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빌어먹을!] 갑자기 그녀가 그의 팔에서 뛰쳐 일어났다. 그들은 
    침대에서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거의 반 시간 동안이
    나 누워있었던 것이다. 마르크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빌어먹을? 무슨 말이야?]
      그가 자신의 긴 다리로 침대를 가로질러 뻗으며 불쾌한 표정을 
    지으려 했다. 그는 매우 길고 매우 핼쓱한 고양이처럼 보였다. 하
    지만 그녀는 이미 방을 가로질러  절반쯤 가고 있었다. [칠면조, 
    그걸 잊고 있었지 뭐예요!] 그녀가 전속력으로 부엌으로 달려가자 
    그는 침대에 기대면서 씩 웃었다. 잠시 후 그녀가 안도하며 돌아
    왔다.
      [괜찮아?]
      [네, 네. 거의 6시간을 조리하고 있는데 아직도 괜찮아보여요.]
      [그건 항상 그렇다구. 그저 스튜 같은 맛이야. 그런데 왜지? 미
    국에 체류한 지 3주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어느새 칠면조 요리를 
    시작한 거야?] 그가 일어나면서 그녀에게 웃었다. 그녀가 침대에
    서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왜냐하면 내일이 감사절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매우 감사함
    을 느끼고 있거든요.]
      [그래, 뭣 때문에?] 그가 그녀의 적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다시 누웠다. 그의 손이 이제는 그녀의 어깨와 섬세한 얼굴 윤곽
    에 닿았다. [무엇이 그토록 고맙지, 예쁜 아가씨?]
      [당신이 여기서 사는 것이. 내가 미국에 온 것이. 인생은 아름
    다운 것이예요, 내 사랑.]
      [그래?] 그러면 가서 상자를 열어봐.] 그가 웃음을 숨기려고 애
    쓰며 말했다.
      [오, 당신이. 오, 당신!] 그녀가 다른 방으로 달려들어가 갈색
    의 종이로 포장된 상자를 들고 왔다. [이게 뭐죠?] 그녀는 크리스
    마스 선물을 받은 소녀처럼 보였다. 그는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뭐죠?]
      [열어 보라구!]
      샹딸이 갈색 포장지를 찢을 때 그녀만큼이나 마르크도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책략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가 상
    자를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그것을 열기를 주저하면서 아직도 그 
    놀람을 즐기고 있었다.
      [집 안에서 필요한 거예요?]
      그를 보는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그녀
    의 깊게 계곡이 진 가슴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
    는 큰 상자를 안고 침대 위에 벗은 채로 꿇어 앉아 있었다.
      [어서 열어 봐.]
      그녀는 뚜껑을 열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포장지 
    속으로 손을 더듬거리며 넣었다. 그녀는  손을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 뒤로 빼며 물러났다.
      [아, 어머나! 마르크!]
      [네, 아가씨?]
      [오.......]
      [튼l 상자 안에 손을 넣어  그것을 천천히, 섬세하고 주의깊게 
    펼쳐드는 그녀의 눈동자는 더욱더 휘둥그래졌다. 그것을 들어올리
    는 그녀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다음, 손을 그 가죽옷의 위아
    래로 가볍게 쓸어보았다. 그것은 매우 아름답고 달콤한 초콜릿색
    의 러시아 제 검은 담비 코트였다.
      [어머나, 세상에!]
      [입어 봐.]
      마르크가 옷을 잡아 그녀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올려놓았다. 그
    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그 안으로  들어가 턱까지 단추를 잠궜다. 
    그것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와 앙증맞은 히프선으로 매끄럽게 흘
    러내려 매우 멋지게 보였다.
      [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데, 샹딸!] 그녀가 발을 세
    우고 한 바퀴 돌자 코트 사이로 벗은 다리가 미묘하게 드러났다. 
    그는 놀라움과 즐거움이 섞인 감정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런 것은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
    여다보며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그리곤 그를 돌아보았다. [마르
    크, 이건-이건 믿을 수 없는 선물이에요!]
      [당신도 그래.] 그는 아무말도 없이 방을 나가 샴페인 병을 들
    고왔다. 그는 병과 두 개의 잔을 들고와 그것을 내려놓고 그녀를 
    팔로 안았다.
      [우리 축배할까, 달링?]
      함빡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팔 
    안으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왔다.
      
      [네 남편은 오늘밤 무슨 일이 있대?]
      [항상 그렇지 뭐. 사업 모임이야.] 디나가 킴에게 미소지었다. 
    [요즘 유럽에서 온 고객을 만나고 있거든. 그를 만나본 적은 없지
    만.] 킴의 저녁식사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 참으로 오래간만이었
    다. 필라가 죽고 임신을 하게 되면서  디나는 몇 개월 동안 아무 
    곳으로도 외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소 때처럼 트레이더 빅스로 
    결정했다.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나오니까 기분이 좋구나.] 
    그리고 여기에서는 벤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았
    다. 벤이 이런 장소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컨디션은 좀 어떠니?]
      [그저 그래. 벌써 5개월이나 되어 간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
    아.]
      그러나 이젠 임신이 드러나보이기 시작했다. 검정 모직 드레스
    의 앞이 약간 불록해졌다. 오늘밤에는 디나의 눈동자에 분노나 고
    통이 서려있지 않았다. 킴은 최근 일주일간 그녀가 이렇게 평화롭
    게 보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의 유머감각도 돌아오
    는 듯 했다. [그런데 감사절에는  뭘 할거니,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어?]
      [별로. 몇몇 친구들과 저녁식사나 할까  하고 계획 중인데, 너
    는?]
      [보통 때처럼 지낼 거야. 아무런 계획도 없어.] 디나가 어깨를 
    으쓱대며 말했다. [마르크는 일이 있을 거야.]
      [나와 함께 식사에 가지 않을래?]
      [아냐. 그를 억지로 끌어내서 어디 가서 저녁을 함께 할지도 몰
    라. 필라가 있을 때는 그 애와 함께 외식을 했었지.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너는 그런 것을 진정한 감사절이라고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괜찮아. 그리고 최소한 2주간씩이나 칠면조 샌드위치에 들
    러붙어 있진 않겠어.]
      그러다 갑자기 자신이 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
    달았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카멜에 갔을까 아니면 아직도 
    동부에 있을까. 그러나 킴에게 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두 사
    람의 화제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마침내 그들이 일어섰
    을 때는 10시 30분이었다. 그들은  느긋하게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한 잔 하러 가지 않겠니?] 킴이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
    서는 더이상 저녁 시간을 밖에 있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엿보였다. 
    디나는 피곤했다.
      [다음에 가면 어떨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가 없어. 아직
    도 하루종일 노곤해.]
      [언제 멈출까, 멈추기나 할까?]
      [보통 정확히 4개월이면 끝나는데 이번에는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애. 지금 4개월 반인데 아직도 종일 피곤해.]
      [그럼 그것을 즐겨봐.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
    고.]
      그러나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랬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는 동안 뭔가 생각할 것이 있을 텐데 아직도 자신의 일
    을 시작할 수 없었다. 뭔가 그녀를 자꾸 주저앉게 하였다. 디나의 
    마음은 문득 문득 필라나 벤을 향해 달려가곤 했다. 또는 뱃속의 
    아기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품기도 하였다. 그녀가 아무것도 하
    지 않고 멍하니 벽만 쳐다보고 있는 동안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킴의 작은 자동차가 문 앞에 대어져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
    며 디나가 차 안으로 들어갈 때 킴이 보이에게 팁을 건네주었다.
      [두 달 동안은 네 차에 타는 걸 포기해야겠어.] 그녀의 두 다리
    가 거의 턱까지 구부러졌다. 그 말을 하며 웃자 킴도 웃었다.
      [그래. 그런 배를 갖고  이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고역일거
    야.] 둘은 다시 웃었다.
      킴벌리가 차를 출발시켰다. 코스모  플레이스의 좌측을 돌아서 
    다시 좌회전 했다. 그다음 거리를 차단하고 있는 어떤 건설 공사
    를 피하기 위해 존스에서 급히 우회전시켰다.
      [놉 힐을 지나가는 것이 좋겠어.]  킴이 미소를 지으며 디나를 
    힐끗 봤다. 두 사람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디나는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녀가 그들을 봤을 때, 차는 신호 정지때문에 멈추어 있었다. 
    잠시 동안 그 남자가 너무 마르크와 닮은 것에 놀랐다. 그다음 바
    로 남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숨이 가빠옴을 느꼈다. 킴이 날
    카롭게 디나를 쳐다보곤 그녀가 응시하는 쪽을 직시했다. 디나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멋진 담비 코트를 걸친 우아한 여인과 걸어가
    는 마르크였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있을 때
    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그녀는 굉장히 아름다워 보였다. 숱이 많
    은 머리가 치렁치렁 늘어져 있고 코트 사이로 빨간 드레스가 살짝
    살짝 드러났다. 그녀가 머리를 젖히며 웃고 있었다. 마르크가 그
    녀의 입에 깊은 키스를 하였다.  디나는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었
    다.
      그 여인이 몸을 젖히자 디나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필
    라가 죽던 날 밤 공항에 마르크와 함께 있던 바로 그 여자였다.
      디나는 갑자기 그녀 주변의 모든 공기가 혼탁해져서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헐떡이며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디나가 
    킴의 팔을 꽉 잡았다.
      [시동을 걸어. 제발 빨리 가자구. 그가 우리를 보지 못하게 말
    이야.]
      디나는 창으로부터 머리를 돌려 더이상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반사적으로 킴이 속력을  내었다. 차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달렸다. 디나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만으로 향
    했다. 이게 웬일이지,  왜 그  여자가 그곳에  있지? 그것이었구
    나...... 그랬었구나...... 그가 그랬었구나....... 곧 그녀는 모
    든 해답을 알게 되었다. 킴도 그랬다. 그들은 작은 자동차 속에서 
    5분 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처음 말을 꺼낸 것은 킴이
    었다.
      [디나. 저어, 미안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킴은 디나를 힐끗 
    보았다. 디나는 어둠 속에서도 무섭게 창백해 보였다. [마음이 가
    라앉을 때까지 우리 집으로 가지 않겠니?]
      [참 이상한 것 같지 않니?] 그녀가 그 크고 빛나는 초록빛 눈동
    자를 킴에게 돌렸다. [나는 침착해졌어.  모든 것이 갑자기 멈춘 
    기분이야. 모든 소용돌이, 혼란, 두려움, 절망이....... 모두 끝
    났어. 사라졌어.] 디나는 차창 밖으로 안개가 자욱한 밤풍경을 응
    시했다. 그리고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킴에게 말했다.
      [이젠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단 말이
    야.]
      [뭐라구?] 킴은 친구가 걱정되었다. 이것은  또 한번의 지독한 
    충격이었다. 그녀도 아직 떨고 있었다.
      [남편을 떠나겠어. 킴.]
      잠깐동안 킴은 응답도 못하고 디나의 옆모습만 보고 있었다. 밤 
    불빛에 비친 디나의 표정은 날카로웠다.
      [나머지 인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어. 이미 수년 간을 
    이렇게 살아왔어. 그이가 그녀와 있는 것을 파리에서도 목격했었
    어...... 필라가 죽던 날 밤....... 그이와 함께 아테네에서 오던 
    걸. 웃기는 것은 말이야, 9월에 집에 올 때는 그녀와의 관계를 청
    산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사실이야.]
      [그 관계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니.]
      [모르겠어. 그게 문제가 아닐지도. 문제는......] 이윽고 그녀
    가 친구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어쨌든 나는 
    항상 혼자였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함께 나누지 않았어. 이 아
    이도 그럴 거야. 그는 아이를 뺏아갈  거야. 필라를 그랬던 것처
    럼. 왜 내가 그와 함께 살아야 하지? 의무때문에, 겁장이기 때문
    에, 또는 수년 동안 내가 끌려다녔던 그 어리석은 충성심 때문에, 
    무엇때문에? [오늘밤 그의 모습 봤니? 행복해 보였지, 킴? 젊어보
    였어. 18년 동안 나와 함께 있을 때는 한번도 그렇게 보이지 않았
    어. 그가 그런 면이 있었나 의심스러워. 아마 그녀가 그에게 마술
    을 걸었나봐.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그녀는 주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게 뭣이건 그것은 그의  문제야. 나는 이제 빠져나오겠
    어.]
      [왜, 좀더 생각해 보지 그러니.] 킴이 조용히 말하며 디나를 보
    았다.
      [지금은 시기가 나쁠지도 몰라. 아이가 태어난 후면 어떨까? 임
    신중에 혼자 있으면 곤란하지 않을까.]
      [넌 눈치채지 못했나 보구나. 나는 이미 혼자야.]
      킴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디나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표정이 두
    려웠다. 예전에는 한번도 그렇게 불타는 결심에 내비친 눈동자를 
    본 적이 없었다. 두렵기조차 하였다. 이윽고 그녀의 집 앞에 도착
    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갈까.] 마르크가 집에 없으리라는 것쯤은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디나가 머리를 저었다.
      [아니, 혼자 있고 싶어. 생각 좀 해야겠어.]
      [오늘 밤 그에게 말할 거니.] 그녀가 대답 없이 오랫동안 킴을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눈동자에 고통이 서려 있었다. 상
    처를 받은 것이다. 그녀의 내부 어느 곳에서는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 못할 것 같아. 그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으니
    까.]

      
                                  31
      
      
      침실에서 디나는 천천히 드레스를 벗은  다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어떤 점
    에 있어서는 아직도 젊었다. 얼굴의 피부는 나긋나긋하고 피곤했
    으며 목은 백조처럼 우아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커다란 눈, 바
    짝 치켜올려진 눈썹, 늘어지지 않은 턱. 가슴은 여전히 탄탄하고 
    다리는 늘씬했으며 엉덩이도 작았다. 실제로 나이가 들었다는 표
    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오늘밤 그녀는 그 여자보다 최소한 십 년은 
    늙은 느낌이었다. 그 여자는 미혼 여성의 홍조와 매력, 그리고 열
    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과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르크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던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었던
    가,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 때문이었을까? 그 여자가 프랑스 인이
    라는 것, 그 여자가 그 자신의 소유 가운데 하나라는 것 때문이었
    을까....... 아니면 단지 마르크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디나는 의아스러워하며 화장옷을 입었다. 그녀는 그에게 
    그 모든 질문들을 하고 싶었고, 그에게서 그 모든 대답을 듣고 싶
    었다. 만일 그가 그녀에게 대답해 준다면 그리고 그가 집에 언제
    고 돌아온다면.
      그러나 디나는 그것을 물어보기 위해  밤새도록 그를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지금 당장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와 
    그 여자가 시내로 외출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가 한없이 오
    래 끄는 협상에 관계했었으며 그래서 밤새 한잠도 못잤다고 주장
    하면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동틀 무렵일 때가 많았다.
      디나는 갑자기 그의 이야기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거짓
    말이었는지, 그리고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어져 왔는
    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의자에 기대어 부드러운 조명
    을 뒤로 한 채 두 눈을 감았다. 필라가 죽었는데도 그는 왜 결혼
    생활을 계속했던 걸까? 파리에 있을 때 그는 그녀에게 그들의 관
    계가 끝났다고 말하고 그녀의 곁을 떠날 완벽한 기회를 가졌었다. 
    그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는 왜 그대로 남았었을까, 그는 
    왜 머물러 있고 싶어했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갑자기 깨
    닫게 되었다. 마르크가 원하는 것은 아기였다. 그의 아들!
      그러자 그녀는 혼자 미소지었다.  그것은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함께 살아온 지 거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
    가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것 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들,  필라가 가버렸으므로 딸이어도 좋을 
    것이다. 마르크는 그녀가 낳아줄 아기를 원했다. 정말로 미친 짓
    이었다. 그는 그 여자와도 살림을 차린 것 같았으므로 그 여자와
    의 사이에서도 아기를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
    에서인지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를 즐겁게 했다. 어떤 
    의미로는 그녀는 이제 그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목을 붙잡고 
    그녀는 그에게서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도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에게 억지로라도 그 여자와의  관계를 청산해 버리도록 만드는 
    것까지도 가능할지 모른다. 아니면 그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적어
    도 그런 척하게 할 수는 있었다.  그는 연에 사건이 끝난 것처럼 
    그녀가 생각하도록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한숨을 쉬며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눈을 떴다. 그녀는 너무 오
    랜 세월을 두 눈을 감은 채 살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방에
    서 나와 어두워진 집 안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디나는 어두운 거실에 앉아 항구의 불빛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더이상 머물지 않는다면, 이 집을 떠난다면...... 그를 떠
    난다면 그것은 이상할 것이다. 혼자가 된다는 것, 자신을 혹은 새
    로 태어날 아기를 돌봐줄 사람을 아무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모두가 끔찍하고 낯설 것이었다. 그
    러나 적어도 그렇게  하는  편이 깨끗할  것이다. 그  편이 오히
    려...... 적어도 거짓된 생활은 아닐 테니까.
      디나는 날이 밝을 때까지 거기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를 기다
    리면서. 디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가 문을 여는 소리를 들은 것은  마악 5시가 지났을 때였다. 
    그녀는 가만히 거실 문으로 걸어가 새하얀 비단옷을 입은 환영처
    럼 거기 서 있었다.
      [굿 이브닝!] 디나가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니면 굿 모닝 
    이라고 해야 할까요?] 새벽 미명이 항구 위의 하늘에 걸려 불연속
    적인 핑크와 오렌지색을 드리우고 있었다. 안개도 끼어 있지 않았
    다. 그녀가 그에게서 처음으로 본  것은 그가 취했다는 사실이었
    다. 그렇게 역겨울 정도는 아니지만 꽤 취해 있었다.
      [벌써 일어났어?] 그는 몸을 가누려고 노력했지만 조금 앞으로 
    비틀거리다가 의자의 등받이용을 의지해 섰다. 그는 그녀와 이야
    기를 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때문에 전혀 기분이 편안치 못한 
    것 같았다.
      [꽤 이른 시간인데.]
      [아니면 지독하게 늦었거나요. 즐겁게 지냈나요.]
      [물론 그럴 리가 있나, 어리석게 굴지 말아요. 우린 새벽 4시까
    지 회의실에 앉아 있었어. 그리고 나서 술을 마셨지. 축배를 들었
    단 말이야.]
      [너무나 멋진 얘기처럼 들리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에 얼
    음장같이 차갑게 퍼졌다. 그는 마치 열쇠를 찾기를 기대하는 것처
    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얼 축하하고 있었나요.]
      [새로운...... 거래를 축하했지.] 그는 거의 <코트>라고 말했지
    만 제때에 걸맞은 변명을 둘러댔다. [소련과의 모피 무역협정 말
    이오.] 그는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 같았고, 디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디나는 따라 웃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조각상 같았다. [그건  굉장히 아름다운 코트더군
    요.]
      그 말이 그들 사이에 바윗덩이처럼 굴러 떨어졌다.
      [무슨 뜻이지?]
      [내 생각으로는 우리 둘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완벽하게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난 그것이 아름다운 코트였다고 말했어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러나  그의 두 눈은 그녀의 
    시선에 동요하고 있었다.
      [난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믿어요. 오늘밤 당신이 친
    구와 함께 있는 걸 보았어요. 난 이것이 지속적인 연애 사건이라
    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는 움직이지도 않고 붙박이 장식장처럼 
    서 있었고, 그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 그가 디나에게
    서 몸을 돌려 항구쪽을 내다보았다.
      [그 여자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상대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겠어. 요
    즘은 내게 있어서 어려운 시기였어. 필라 일이나......당신 걱정
    이나.......]
      [그 여자, 이젠 여기 사나요?] 디나는 그 커다란 푸른 눈을 치
    켜떴다.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 여자는 이삼주 동
    안 여기 왔을 뿐이야.]
      [오, 멋지군요. 내가 이 일을 나의 장래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
    야 하나요, 아니면 당신이 결국 선택을 하시겠어요? 내 생각으로
    는 그여자도 마찬가지 질문을 할 텐데요.  사실 지금 당장 난 그 
    선택이 내 쪽일 수도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어요.]
      [그럴 수 있겠지.] 한동안 그는 동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등을 똑바로 펴고 섰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야, 디나. 
    당신과 난 문제가 되는 것이 너무나 많아.]
      [정말인가요, 뭐가 그렇게 많아요?] 그러나 그녀는 그가 말하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는 것들이 더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밤 이후로 아기
    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것이었다.
      [당신이 정확히 알고 있잖아, 우리 아기 말이오.] 그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노려보는 것 같을 뿐이었다. [그 아
    기는 나의 인생의 전부라는 의미야. 우리들에게.]
      [우리라구요?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 마르크. 난 <우리> 관
    계를 믿지 않아요. 당신이라는 사람이 있고 나라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는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이 <우리>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관계는 그 여자와의 관계뿐이에요. 난 오늘밤 당신 얼굴에
    서 그것을 알 수 있었어요.]
      [난 취해 있었어.] 한동안 절망감이 그의 눈에 피어올랐다. 디
    나는 그것을 보았지만 더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신은 행복해 했어요. 당신과 나는 여러 해 동안 같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습관때문에, 두려움때문에, 의무감에
    서, 고통으로 서로에게 매달려 있는 거예요. 난 필라가 죽은 다음 
    주말에 당신을 떠나려고 했어요.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이젠 분명하게 결정을 내렸어
    요.]
      [그렇게 하도록 당신을 내버려두지는 않겠어. 당신은 굶어죽을 
    거야!] 마르크는 이제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그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그가 관심을 쏟는  것 한 가지 즉, 아기를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었다.
      [난 당신이 어떻게 살아가든, 죽든,  그런 것에는 관심 없어.] 
    그것이 허세라는 것을 그들은 둘다 잘 알고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할 거지, 그림을 그릴 건가, 스케
    치 소품들을 거리에 내다 사람들에게 팔 건가, 아니면 당신의 애
    인에게로 돌아갈 건가?]
      [어떤 애인 말인가요.] 디나는 마치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
    다.
      [당신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군. 이 독선적이고 앙큼한 암여
    우같으니라구! 기어코 나에게 말을 하게 만드는군.......] 그 말
    들을 그녀의 머리에 내던지는 동안 그는 약간 동요했다.
      [당신도 백합처럼 순결하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녀가 갑자기 창백해졌다. [무슨 뜻이에요?]
      [당신이 내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대로야. 내가 
    아테네로 떠났을 때 당신은 시시껄렁한 연애 소동을 벌였지. 누구
    와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관계없어. 왜냐하면 당신은 내 아내이
    고 그건 내 아이이기 때문이야. 난 당신을, 당신과 아이 둘 모두
    를 소유하고 있어. 알겠어?]
      그녀 내부의 모든 것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터져나왔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내게 할 수 있는 거죠! 전에는 나를 소
    유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그리고 앞으
    로도 그러지 못할 거예요. 당신은 절대로 이 아이를 소유할 수 없
    을 거구요. 난 당신이 필라에게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하도록 내버
    려두지는 않겠어요.]
      그가 미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당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어, 여보.   그 아이는   내 것이니
    까...... 내것이라구. 왜냐하면 내가 그 아이를 받아들이고 그 아
    이의 아버지가 되기로 선택했고, 당신이 무슨 짓을 했건 상관없이 
    당신을 계속 아내로 두기로 결정했으니까 말이야. 내가 알고 있다
    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라구. 당신이 아무리 순결한 척해도 나
    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어. 꼭 기억해 둬.]
      그가 잠시 휘청거렸다.
      [당신 아이를 사생아 신세에서 구해줄  사람이 바로 나란 말이
    야. 그 아이에게 내 성을 붙여주겠어. 그 애가 내 아이이기 때문
    이 아니라 내가 그 아이를 원하기 때문이야.]
      디나의 음성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서서 
    마르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 아이는 당신 아이가 아니군요, 마르크?]
      그가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몸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
    다.
      [분명하게.]
      [어떻게 알죠?]
      [왜냐하면 당신이 지독하게 질투하고 있는 그 여자는 당뇨병 환
    자거든. 만일 내가 그 여자를 임신시킨다면 그 여자는 목숨이 위
    독해. 그래서 난 몇 년 전에 정관 절제 수술을 받았단 말이야.]
      그는 비밀을 털어놓은 것에 만족해서 디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
    고, 디나는 그 충격으로 의자의 등받이에 의지해 몸을 가누었다.
      [잘 알았어요.] 그들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왜 이제와서 
    이 이야기를 하나요?]
      [왜냐하면 이제 당신의 가련하고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는 그 얼
    굴과 내게 강요된 당신 감정에 싫증이 났기 때문이지. 난 당신에
    게 강요하지는 않았어. 난 당신에게 친절을 베풀었지. 난 당신의 
    그 섬짓한 작태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당신 아이를 지켜왔어. 당신
    이 바람을 피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그리고 이제 그 녀석은 
    떠나버렸고 당신에게는 남편인 나외에는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
    어. 당신은 내 것이야.]
      [당신이 선택한 것을 참아내라 그  말인가요, 마르크.] 그녀의 
    두눈은 그를 증오하고 있었지만 그는 너무나 취해서 그것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정확히 알아맞혔어. 그리고 이제 당신에게 내 아들과 함께 잠
    자리에 들라고 권하겠어. 그러면 나도 자러 갈테니까. 내일 아침
    에 만나지.]
      그는 자신의 고백의 효과가 어떤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엄숙
    하게 윗층으로 행군해 갔다. 디나는 자유로와진 것이다.

      
                                  32
      
      
      부엌 뒤편으로 나 있는 뒷문은 잠겨 있었지만 디나는 열쇠를 가
    지고 있었다. 그녀는 킴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에게 스테이션 왜건
    을 세내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식료품상에다 상자 열두 개를 
    주문했다. 그녀 스튜디오에 있던 장비들은 상자 세 개 안에 모두 
    들어갔다. 나머지 그녀의 사진들과 앨범들은 다섯 개의 상자에 넣
    기에 충분했다. 그림들은 모두 뒷계단  옆에 차곡자곡 쌓여 있었
    다. 옷 상자만 꾸려지면 되는 것이다. 디나는 수화기를 들어 마가
    레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  혼자서 일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더이상 혼자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6시부터 시작한 일이 9시
    가 되도록 끝나질 않았다.
      마르크는 벌써 집을 떠났을 것이다.  그녀가 그들의 방을 나온 
    뒤로 그는 그녀의 스튜디오까지 따라오지 않았다. 집 안에 떠도는 
    정적이 귀를 멍멍하게 만들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조용히 종말이 
    다가왔다. 이제는 열두 개의 상자와 가방 몇 개에 과거를 담아 내
    던져버릴 수가 있었다. 그녀는 그밖의  다른 것은 모조리 그에게 
    남겨두기로 했다. 그것들은 전부 그의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가져
    온 가구들, 그림들, 카페트, 시어머니의 것이었던 은제품들. 거의 
    모두가 프랑스에서 부쳐진 것들이었다.
      디나가 여러 해에 걸쳐 수집해 온 모든 것들은 그녀의 스튜디오
    에 있었다. 화첩과 붓, 물감, 두세  가지의 장신구. 그녀가 아끼
    는, 그러나 전혀 값어치가 없는 몇몇 단편과 조각들. 그리고 그녀
    는 옷과 보석들도 가질 것이다. 그녀는 직업을 구할 때까지 의식
    주를 해결하기 위해 그걸 팔기로 했다.
      디나는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챙겼다. 그건 그에게는 아무런 의
    미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도 팔 수 있을 것이다. 그
    녀 자신과 필라를 그린 것 한 점만을 제외하고. 그것은 팔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의 보물이었다. 그 나머지는 남편에게 남겨
    둘 것이다. 그는 그것들을 전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스튜디오의 계단 아래쪽에 있는  문을 열고 주저하면서 
    집을 통과했다. 만일 그가 아직까지 거기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
    인가, 그가 만일 기다리고 있다면? 만일 그녀가 어떤 일을 얼마나 
    재빨리 처리하려고 하는지 그가 안다면?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제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전날 
    밤에 그녀가 알 필요가 있는  것들을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기는 그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벤의 것이었다. 그동안 그
    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마가레트.......]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8시 30분에 사무실로 출발하셨어요.] 마가레트의 눈
    이 눈물로 가득했다. [사모님....... 제발 우리에게서 떠나지 마
    세요, 나가지 마세요.......]
      그것은 마르크가 했어야 하는 이야기였지만  그는 이미 자신이 
    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젯밤에는 너무 취해 있어 완전히 끝
    을 맺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스튜디오에 숨도록 내버려둔 대신 멋진 보
    석과 사과의 말 그리고 거짓 핑계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고 
    모든 일이 다시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이번만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디나는 마가레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난 가야만 해. 마가레트가 나를 만나러 오면 되잖아.]
      [내가요?] 그 나이든 여인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디나가 울음
    을 그치고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이제 그를 위해서가 아
    니라 자신을 위해서 울고 있었다.
      그들이 두번째의 수트케이스를 꾸렸을 때 현관의 벨이 울렸다. 
    디나는 놀라서 펄쩍 뛰어 일어났고, 잠깐동안 마가레트는 발작을 
    일으킨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디나가 재빨리 계단 아래로 내
    려갔다. 방문객은 킴이었다.
      [난 제일 큰 스테이션 왜건을 가지고 왔어. 마치 보트 같다구.]
      킴은 웃으려고 애썼지만 디나가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고 있었다. 그녀의 눈 밑엔 짙은 빛깔의 원이 그려져 있고 두 눈
    은 가장자리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머리도 어깨 위에 아무렇
    게나 헝클어져 있었다.
      [대단한 밤이었던 게 틀림없는 것 같구나.]
      [아기는 그의 것이 아니야.] 그것이 그녀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
    할 수 있었던 첫번째 말이었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그녀는 킴에
    게 미소를 지었다.
      [아기는 벤의 아이야. 그리고 난 몹시 기뻐.]
      [어머나 세상에!] 한동안 킴은 웃어야 할지 아니면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굉장한 안도감을 느꼈다. 디나는 
    홀가분했다.
      [확실한 이야기야?]
      [절대적으로.]
      [그래서 떠나려는 거야?]
      [응, 당장.]
      [나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졌었어. 아이때문이니?]
      그들은 그때까지도 현관에 서 있었다. 디나가 천천히 계단쪽으
    로 걷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렇고, 다른 이유도 많아. 그 여자 그리고 아기. 이건 
    결혼생활이 아니야, 킴. 그리고  결혼생활이든 아니든 간에 이젠 
    끝났어. 난 어젯밤 그걸 확실히 알았어.]
      [벤에게 말할 거야?]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녀
    는 디나가 그러리라는 걸 알았다. 적어도 디나가 고개를 가로저을 
    때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농담하는 거야, 왜 않겠다는 거야?]
      [왜 내가 마르크의 집에서 곧장 벤의 집으로 달려갈 수 있다는 
    거니, 그래서 그가 나도 돌봐줄 수 있고? 난 그를 떠났어, 킴. 내
    가 걸어나온 거라구. 난 내 발로 걸어서 마르크에게 돌아왔고, 그
    에게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한번도  하지 않았어. 이제 와서 
    내가 무슨 권리로 그에게 전화를 걸겠니?]
      그녀의 두 눈이 너무 커보였다. 킴은 지금 그들이 나누고 있는 
    이야기들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서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넌 그의 아기를 가졌어. 더이상 무슨 권리가 필요하다
    는 거야?]
      [나도 몰라.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전화하지 않겠다는 
    것 뿐이야.]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거야?]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하자 킴이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여기서 떠나는 것. 아파트를 하나 구해서 스스로 돌보며 살 거
    야.]
      [이런 세상에! 그렇게 고상하게 굴지마. 도대체 생활비는 어떻
    게 조달하겠다는 거야?]
      [그림을 그리고, 일하고, 내 보석을 팔겠어.  너도 보게 될 거
    야. 자아, 윗층에서 할 일을 얼른 끝내야 해.]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킴은 침울해 보였다. 디나가 
    마르크에게서 떠난다는 것은 그녀가 한 생각 중에서 가장 현명한 
    것이었지만 벤에게 전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옳지 않는 것 같
    았다.
      마가레트는 막 마지막 가방을 꾸리는 일을 끝낸 참이었다. 마르
    크에 속하는 물건들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작은 장신
    구들과 사진들, 하잘  것 없는  기념품들, 보석상자,  그리고 책
    들....... 모든 것들이 꾸려졌다. 그녀는 문지방에서 잠시동안 멈
    추어 서 있다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킴이 무거운 가방들을 
    전부 차에 싣는 동안 마가레트는 끊임없이 훌쩍였다. 디나는 자신
    의 그림들만을 옮겼다. 그것들은 가벼웠던 것이다.
      [그건 손대지 말앗!] 디나가 막 가방을 들려고 했을 때 킴이 디
    나에게 외쳤다. [넌 임신 5개월이야, 이 멍청아!] 디나가 미소지
    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아마도 4개월  조금 넘었을거야.] 그러자 
    그들 두 사람은 싱끗 웃었다. 디나는 새벽에 그림붓들을 전부 씻
    어서 치우는 동안 그것을 대충 계산해 보았었다. 그는 그녀가 6월 
    말쯤에 임신을 했고, 그때는 자신이  집을 떠나 있었을 때였다고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7월말이었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그때는 그녀가 벤과 함께 지내던 때였다. 그렇다면 의
    사가 당연히 들었어야 했다고 생각한 뒤로 1개월이 될 때까지 아
    기의 심장뛰는 소리를 듣지 못한 이유와 그녀가 그렇게 여위었던 
    이유도 설명이 가능했다. 또한 그녀가 아직까지도 그렇게 피곤한 
    이유까지. 그녀는 아마도 임신 4개월인 것이 확실했다.
      [하느님 맙소사.] 그녀가 갑자기 킴벌리를 바라보았다. [오늘이 
    추수감사절이지?]
      [그래.]
      [왜 나한테 이야기하지 않았어?]
      [네가 아는 줄 알았지.]
      [어디 가야 되는 것 아니야, 너?]
      [늦게까지는 아니야. 우리가 너를 이사시키는 것이 먼저야. 넌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나서는 옷을 차려입고 칠
    면조 요리로 저녁식사를 할 거구.]
      [미쳤구나! 넌 마치 나를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주일 동
    안 계획을 세워온 것처럼 구는구나.] 두 여자는 마지막 그림을 차 
    뒷편에 실으면서 미소를 주고 받았다. [너도 아다시피, 나는 호텔
    에 머무르려고 해.] 차 안의 그림들과 짐꾸러미들을 바라보며 그
    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냐. 그러면 안돼.] 킴도 마찬가지로 단호했다. [넌 나랑 함
    께 있어야 된다구. 이사 나갈 준비가 될 때까지는 말이야.]
      [그 문제는 나중에 의논하기로 해. 잠깐 안으로 들어가서 둘러
    보고 싶어.]
      [마르크가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오늘은 
    어쨌든 공휴일이니까 말이야.]
      그러나 디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는 추수감사절에도 일을 한다구.] 그리
    고 그때 그녀가 반쯤 웃어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프랑
    스 식이 아니거든.] 디나가 집 안으로 사라지자 킴은 고개를 끄덕
    이며 자동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가레트가 주방에 있어서 한동안  디나는 혼자였다. <그녀의> 
    집이었던 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위해서-그러나 그곳은 진
    정한 의미에서는 한번도 그녀의 집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의 것이
    었으니까. 아마 모피 코트를 입은 그 작은 프랑스 여자라면 그 집
    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에게는 전부 의미가 있
    는 것일 테니까.
      디나는 홀에 서서 거실을 뚫어보다가 마르크 에두아르의 조상들
    의 초상화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8년 동
    안 그집에서 살았으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가져왔던 것만큼의 적은 물건들만을 가지고 떠나려 하는 것이다. 
    몇 개의 상자와 유화 몇 점, 옷들만을 가지고. 옷들은 이제 훨씬 
    고급이었다. 보석들은 그녀가 살아가는 것을 도울 것이었다. 그림
    들은 더 좋아졌고 미술재료 공급품들은 더 뛰어났다. 그러나 그것
    은 모두 자동차 한 대로 족했다.
      18년의 세월이 그와 똑같은 수의 상자와 가방에 실려졌다. 그러
    자 그녀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
    것은 웻지우드 도자기 같은 파란색에 흰색이 섞여 있었고, 편지지 
    우측 상단에는 마담 마르크 에두아르 듀라스라고 박혀 있었다. 그
    녀는 펜을 꺼내 한동안 생각한 다음 간단히 두세 마디 적었다.
      
      여보, 당신을 사랑했었어요.
      안녕히 계세요.
      
      디나는 편지지를 접고,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 다음 그 
    쪽지를 홀 안에 있는 거울에 붙여두고 나왔다. 몸을 돌렸을 때 그
    녀는 마가레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물이 그녀
    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디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
    냥 그녀에게로 가서 한참 동안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러자 
    또다시 디나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문으로 걸어갔다. 떠나면서 그녀는 오직 한 마디 만
    을 했는데, 그것은 너무나 부드러운 목소리여서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문을 닫으며 미소지었다.
      [아듀!]

      
                                  33
      
      
      [왜 가지 않겠다는 거야?] 킴은 낭패한 것 같이 보였다. [오늘
    은 추수감사절이야, 난 너를 혼자 지내게 내버려둘 수가 없어.]
      [그래도 그렇게 하게 될 거야. 난 초대받지 않았을 뿐더러 아주 
    지쳐 있어. 정말로 난 지독하게 피곤한 것 뿐이야. 날 여기에 내
    버려둬. 그러면 내일까지는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그것은 킴도 역시 확신할  수가 없었다. 지난 24시간은 
    그들에게 매우 힘들었다. 디나는 기진맥진하고 초라해 보였다. 킴
    은 디나에게 들리지 않는 부엌 전화로  죤스 박사에게 전화를 걸 
    정도로 걱정했었다. 그녀는 의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설
    명했다. 그의 충고는 디나를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것 뿐이었다. 
    그녀 자신의 의사대로 원하는 것을 하게 내버려두라고. 그는 그녀
    가 괜찮아지리라고 확신했다. 의사의 조언대로 킴은 그녀를 그대
    로 두었다.
      [좋아. 하지만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겠지?]
      [전혀, 아마도 나는 곯아떨어질 거야.] 그녀는 친구에게 피곤하
    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하품을 참았다.
      [난 올해의 추수감사절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아 두 여자는 마주
    보고 웃었다. 디나는 킴이 떠나기도 전에 잠이 들어버렸다. 킴은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빠져나와 열쇠로 문을 잠궜다.
      
      그날밤 11시 경에 열쇠가 꽂혀졌고 한동안 마르크는 숨을 죽인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전화하지 않은 것이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
    었지만, 그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그녀에게 그
    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이미 내뱉은 말을 어떻게 
    되돌릴 수가 있었을까? 그는 그녀에게 무언가 예쁘고, 그녀의 마
    음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을 사주고  싶었지만 상점들의 문이 모두 
    닫힌 뒤였다. 추수감사절. 그야말로 감사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
    는 그날의 반나절을 책상에서 일을 하며 보냈고 나머지 반은 샹딸
    과 조용히 지냈다. 샹딸은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을 눈치채기
    는 했지만 그것이 정작 어떤 일인지는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그
    는 아주 기괴한 방식으로 그녀와의 정사에 빠져 있었다.
      마르크가 문을 열고 올려다보았다. 집  안에는 불빛도, 소리도 
    전혀 없었다. 디나는 분명히 잠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차는 차고
    에 있었다. 그는 홀 아래편에 있는 마가레트의 방에서조차 불빛을 
    볼 수 없었다. 집 안 전체가 정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작
    은 등불 하나만을 켜고 코트를 걸었다. 그러자 문 가까이에 있는 
    거울에 붙여놓은 종이쪽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디나가 외출한 
    것일까, 친구랑 어딘가로 가버린 것일까? 그가 그쪽으로 손을 뻗
    어 집어들었다. 갑자기 그의 심장을 강타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
    분이 들었다. 그는 마치 계단에서  나는 그녀의 목소리나 발걸음 
    소리를 들으려고 기다리는 것처럼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르크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들리는 것이라고는 침묵뿐이었
    다. 마침내 그는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그것을 읽는 그의 시선은 
    물결쳤고 머리는 둔기에 두들겨맞는 듯했다. <여보, 당신을 사랑
    했었어요. 안녕히 계세요.> 왜 <사랑했었다>고 했을까, 무슨 이유
    에서 과거시제로 썼던 것일까?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녀가 결코 알 수 없었던 일 하나를 이야기해 주었다. 뱃속의 아이
    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이제 그가 아기에 관
    하여 그녀에게 거짓말을 해 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샹딸에 
    대해서도....... 그녀는 그의 다른 생활을 알았다. 그녀는 샹딸과 
    함께 있는 그를 파리에서 그리고  전날 밤에는 이곳에서 또다시] 
    목격한 것이다. 그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려고 했지만 발이 납덩이
    처럼 무거워져서 그럴 수가 없었다. 윗층에 디나가 있을 것 같았
    다. 그녀가 그들의 침대 안에 잠들어  있을 것 같았다. 하루종일 
    그는 자신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 그냥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으로 무시해 버렸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하면 곧바로 현실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
    이고 싶지가 않았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침대로 달
    려가는 것 뿐이었고, 그러면 그곳에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발견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침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이 두려워했던 상태가 벌
    어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침실은  텅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버렸다. 디나는 떠나버렸던 것이다.
      
      마르크 에두아르는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죽은 듯이 
    서있었다. 그리고는 울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전화기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에게는 그녀가 필요했다. 죽을 만큼, 절대적으로. 그녀
    는 이제 그를 위해서 거기에 있어야만 했다. 그는 그녀가 그러리
    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샹딸이 대
    답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들렸다.
      [샹딸...... 나는...... 난 당신을 만나야겠어. 곧 거기로 가겠
    어.]
      [무엇이 잘못됐어요?]  그녀는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그
    래....... 아니...... 그냥 그대로 거기에 있어. 지금 거기로 가
    는 중이니까.]
      샹딸은 그에게 서두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
    다. 그리고 불과 몇 분 뒤에 그가 도착했을 때 샹딸은 그때까지도 
    혼돈에 빠져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는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급하게 그녀를 품에 
    안았을 뿐이었다.
      [당신, 무슨 일이에요? 아픈 것 같아 보여요.]
      [나는...... 나도 모르겠어....... 그녀가 가버렸어!]
      가엾은 사람. 또다시 필라 때와 같은 일을 겪다니! 그는 아직까
    지도 그때의 충격에 그렇게 사로잡혀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 
    일을 그렇게 갑자기 터뜨리게  할 만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았어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내가 있잖아요?] 샹딸은 그를 꼬옥 
    안아주었고, 그들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하지만 아기는......] 그리고 그때 그는 그 이야기를 불쑥 끄
    집어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기라니요.] 그는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녀는 깜짝 놀
    란 것처럼 그에게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아니야...... 난 그냥  당황해서...... 디나 이야기
    야. 그녀가 가버렸어.]
      [아주 말인가요, 그녀가 당신을 떠나갔다구요?] 그가 멍하니 고
    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샹딸이 활짝 웃었다. [그건 절망할 일이 아
    니라 축하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샹딸은 더이상 생각하지도 않
    고 소파에서 일어나 불과 이삼일 전에  사놓은 샴페인 병 가운데 
    하나를 찾으러 주방으로 갔다. 그녀는 병과 두 개의 잔을 가지고 
    돌아와서는 마르크의 얼굴에 떠오른 고뇌의 표정을 보고 멈추어섰
    다.
      [그래서, 당신 그렇게 불행해요?]
      [난 모르겠어. 난 몇 가지  일들을 이야기했었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난......나는 내 힘에 부치는 일을 한 거
    라구.]
      샹딸이 냉랭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 당신이 그녀를 
    당신곁에 붙들어두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노심초사하는 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젠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녀를 되돌아
    오게 하기 위해서 싸우실 건가요?] 샹딸을 지켜보며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디나가 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
    었다. 그녀를 영원히 그에게 묶어놓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기에
    게서 떠나버리게 하는 한 가지 사실을 그녀에게 말해버렸었다. 아
    기가 그의 아기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그건 그렇고.] 샹딸은 잠깐동안 멈추었다. [당신이 방금 아기
    라고 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예요.]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
    다. 그는 샹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응시할 뿐이었
    다. 사라져가는 희망을.
      [그녀가 임신하고 있었나요, 마르크?] 그녀의 이야기는 마르크
    의 목에 걸린 조임쇠 같았으며,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것이 당신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나요.]
      [어젯밤까지는 아니었어.]
      [알겠어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이제까지 그녀 곁에 머
    물러 온 이유였군요.  당신 아이가  아닌 아이라도  얻고 싶어서
    요.......]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리는 장례식 종소리처
    럼 떠돌았고, 실망감이 그 여자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아기가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어
    요.]
      [그건 그렇지 않아.] 그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 여자를 
    품에 안으려고 했다.
      [아녜요, 그래요.] 샴페인 병은 마개가 열리지 않은 채로 그대
    로 세워져 있었다. 절망에 휩싸여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래요, 사실. 분명히 그래요.]
      [우린 양자를 들일 수도 있어.] 마르크가 말했다. 천천히 샹딸
    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만일  아기의 존재가 그에게 그토록 
    많은 의미를 갖는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만 그녀에게는 아기가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한번도 아기를 갖고 
    싶어한 적이 없었다.
      [그래요, 그렇게 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때 갑작스럽게 떠
    오른 생각때문에 그녀가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젠 뭘 하실 생각
    인가요?]
      [당신과 결혼해야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지어보이려
    고 애썼지만 그 말은 그의 입 속에서 마치 납덩이처럼 느껴졌다. 
    [당신도 원한다면.]
      [그래요.] 그녀의 이야기는 엄숙하게 들렸지만 그녀의 눈 속에
    는 근심스러운 빛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난 오늘밤을 이야기한 거예요.]
      [모르겠어. 여기 있어도 될까.] 그의 집으로 혼자 되돌아간다는 
    생각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고, 디나가 불과 하룻밤 전에 비워놓
    은 침대로 샹딸을 끌어들이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았다.
      [저녁식사하러 나가는 것이 어떻겠어요.]
      [지금?] 그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샹딸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러고 싶지 않아. 지난 몇 시간 동안 내게는 아주 많은 일들이 벌
    어졌어. 그리고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와는 무관하게 적
    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구.]
      한동안 그에게는 자신이 충격을 채  흡수하기도 전에 샹딸에게 
    그렇게 급히 달려온 것이 실수가 아니었던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
    다. [그냥 여기서 먹을 수는 없을까?]
      [안돼요. 외출하고 싶은 걸요.] 여자는 마치 급한 일이라도 되
    는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그렇게 말했고, 갑자기 그는 그녀가 이미 
    저녁식사하러 나가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처럼 까만 실크 드레스
    를 입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전화했을 때 어디 나가는 길이었어?] 그는 이해할 수 없
    다는 표정이었다.
      [그저 어딘가 저녁을 먹으러 나갔으면 하고 생각 했어요.]
      [혼자서?] 그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물론이죠.] 샹딸이 깔깔대며 웃었지만 그것은 공허한 웃음소리
    였고 그 여자가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현관 벨이 울렸다. 샹딸
    은 재빨리 마르크를 바라보고 나서 서둘러 현관쪽으로 갔다. [곧 
    돌아오겠어요.]
      그가 앉아 있는 소파에서는 현관을 잘 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한 걸음 비껴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그의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끓어올랐다. 그가 그녀의 뒤를 따라 방을 가
    로질러 성큼성큼 걸어가서 거의  닫혀져 있는 현관문에 도착했을 
    때, 그 여자가 상대방에게 나긋나긋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르크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샹딸은 숨을 들이쉬며 펄쩍 뛰
    어 약간 옆으로 비켜섰다. 샹딸은 그의 동료인 짐 셜리반과 이야
    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짐도 마르크와 얼굴이 마주치자 다소 놀란 
    것 같았다.
      [내가 방해가 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안으로 들어오는 편이 좋
    겠나?] 그는 자신의 동료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에
    게 하는 것이었다. 아무말 없이 세 명은 아파트 안으로 걸어 들어
    왔다. 샹딸이 현관문을 닫았다.
      [이건 정말로...... 짐은 그저 내게 추수감사절 저녁식사를 대
    접하면 내가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뿐이에요. 내 생각에는 
    당신이...... 집에 있을 것  같았고.......] 샹딸의 얼굴은 잔뜩 
    긴장되어 짐짓 명랑한 체해 보아도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알겠어. 매혹적인 일이로군.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내게 말하
    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할 뿐이지만.]
      [미안합니다. 마르크.] 그들이 거실 중앙에 어중간하게 서 있는 
    동안 짐은 그를 침울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더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네.] 마르크
    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짐은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을 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고, 잠시 후에 마르크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를 들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샹딸과 마주보았다.
      [이것이 당신이 그동안 해 온 짓인가?]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
    래지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과는 저녁식사를 두 번쯤 한 것 뿐이에요. 당신이 기분 나빠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들 모두 그것이 거짓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나를 용서한다구요. 그러면 당신에게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 
    없을 거라고 말하겠어요.]
      샹딸이 가만히 그의 품 안으로 미끌어져 들어와 그를 꼬옥 끌어
    안았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그의 얼굴에 그녀의 비단같은 
    머리결이 느껴졌다. 그가 그녀를 알았을 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솟구쳐 흘렀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34
      
      
      킴벌리는 싸우살리토의 비좁은 거리를 내려가서 만으로 향한 작
    은 샛길로 들어섰다. 그녀는 좌석 옆자리에 있는 종이로 힐끗 눈
    길을 준다음,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시 한번 회전을 하면 한쪽이 막힌 골목길이 나오고 거기에 그녀
    가 있었다. 작은 흰색 담장과 데이지꽃들로 뒤덮힌 넓은 숲, 그리
    고 그 위로 작은 집 한 채가  숨은 듯 자리잡고 있었다. 그 집은 
    마치 보석과도 같다고 디나가  일전에 묘사했었는데 킴벌리도 그 
    집을 보자마자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팔에 꾸러미들을 잔뜩 안
    고 씨름하듯 간신히 초인종에 손을 뻗었다. 잠시 후 디나가 문을 
    열었다.
      디나가 청바지와 밝은 미색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로 기다란 빨
    간 스웨터를 걸친 채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위로 묶여져 있었고 
    두 눈에는 친구를 맞는 따스한 미소가 담겨져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마담, 와주셔서 너무너무 기쁩니다.] 그녀가 
    킴에게로 팔을 내밀어 끌어안았다. [겨우 두 주일 전에 너한테서 
    떠나왔는데도 난 벌써 향수병에 단단히 걸려 있어.]
      킴이 디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실내를 둘러보았다. 디나는 부
    엌을 칠하고 마룻바닥을 닦아내는 중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은구
    슬과 반짝이 전구들이 달린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져 있었
    다. 트리 밑에는 세 개의 꾸러미가 있었는데, 그것들에는 모두 <
    킴>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래, 정말 이 생활이 마음에 들어?] 씨익 웃는 디나의 모습은 
    마치 작은 소녀 같았다. 오랜만에  그녀는 행복하고 평온해 보였
    다. 겨우 이삼주일 만에 그녀는 스스로에게서 중요한 것을 발견했
    었다. 작고 밝은 방은 가구가 그다지 많지 않아도 안락하고 마음
    을 끄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새로 하얗게 칠을 한 버드나무 세공
    품과 그녀가 하늘색으로 바꾼 근사한 낡은 소파가 있었다. 그리고 
    사방에 꽃들로 가득한 낡은 병과 화분들이 있었다.
      그녀가 아끼는 그림들 가운데 몇 점은 벽에 걸려 있고 바닥에는 
    근사한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벽난로 장식 위에는 구리 주전자가 
    있었고 꼭 두 사람이 앉을 만한 넓이의 나무로 된 작은 식탁 위에
    는 놋촛대가 있었으며, 방에는 아담한 청동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
    다.
      디나는 트렁크에서 찾아낸 풀먹인 레이스  천으로 커튼을 직접 
    만들었다. 그녀는 마치 몇 년 동안 그 집에서 살아온 것처럼 보였
    다. 온화한 회색 장미가 그려진 멋진 복고풍 벽지를 직접 바른 작
    은 침실이 하나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흔들 말 하나와 버드나무
    로 짜여진 요람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작은 침실이 있었다.
      킴은 감상하듯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는 의자에 편안히 자리잡았
    다.
      [이 집이 마음에 드는 걸. 더 머물러 있어도 되겠니, 디나?]
      [최소한 일 년쯤은.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네가 몇 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 같은데. 뜨거운 물은 나왔다 안 나왔
    다 하고 오븐은 달구어지는 데  대략 일주일쯤은 걸리고, 창문은 
    열리지 않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고 말이야.......] 그녀가 씨
    익 웃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좋아. 이건 마치 작은 인형의 집 
    같지 않니.]
      [정말 그대로야. 난 여기가 우리집보다도  훨씬 더 맘에 들어. 
    그 집은 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까.]
      [네 집은 더 고급스럽잖아. 하지만 난 이곳으로 만족해.] 한 달 
    전에는 그녀가 대저택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믿지 않
    을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있는 곳에서 그럴 수 없이 행복해 보
    였다. [커피줄까?] 그녀가 물었다. 킴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나가 
    사라졌다가 김이 무럭무럭나는 커피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래, 새 작품은 어떤 거니?]
      부엌 한 구석에 세워놓은 이젤이 그녀가 긍금해 하던 것을 말해
    주었다. 디나는 어느새 일로 돌아가 있었다.
      [다시 그리고 있어.] 그녀는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런 것 같구나. 그림들을 그려서 어떻게 하려는 거야?]
      [팔아야겠지. 이미 두세 점 팔았으니까. 그 돈으로 가구랑 접시
    랑 침대보같은 걸 샀어.] 그림 석  점과 비취와 다이아몬드로 된 
    귀걸이를. 하지만 그녀는 킴에게  그것들을 다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제 아기를 빼놓고는 필
    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나머지들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
    다. 전혀.
      [그림들을 어디에서 거래하고 있니?] 마음 속에 어떤 의도를 가
    지고 그녀를 바라보는 킴의 마음을 디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일은 신경쓰지 말아, 킴.] 그녀가 활짝 웃으며 차를 한 모
    금 마셨다.
      [왜 벤에게 네 그림들을 팔도록 해주지 않는 거야? 굳이 그 사
    람을 만나지 않아도 될 텐데.]
      킴은 지난 주에 벤을 만났었는데, 그는 마치 지옥에 있는 것처
    럼 끔찍해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슬쩍 디나의 주소를 흘려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그런 
    일을 했다면....... 킴은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디나는 
    혼자만으로도 매우 행복해 보였다.
      [벤에게 전화를 걸어서 작품 이야기라도 하지 그래?]
      [바보같이 굴지 말아, 킴.] 결과가 어떻겠어? 난 그럴 수 없어. 
    만일 내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내 작품을 파는 걸 주선해 달라고 
    하면 그는 아마도 내 얼굴에 침을 뱉을 거야.]
      [그럴 것 같지 않은데.]
      그러나 아마 그녀가 옳을 것이었다. 그는 더이상 킴에게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묻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 사이의 암묵적인 
    동의였다. 아무도 디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킴은 이해했
    다.
      [마르크에 대해서는 어때, 그에게서 무슨 소식 들었어?]
      디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쪽 변호사에게  말한 다음에 한 
    번 그에게 전화했어. 그 사람은 이해하고 있어. 정말 아무런 논쟁
    도 벌이지 않았으니까.]
      [마르크가 그 여자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니.]
      디나가 한숨을 쉰 다음 미소를 띄우고 올려다보았다.
      [아마 그럴 테지.] 여자는 그 집에서 마르크와 같이 살고 있으
    니까.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미소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내 생
    각에는 이번 일이 모두에게 일종의  충격이었던 것 같아. 올해엔 
    우리 둘 모두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거든.]
      한동안 킴에게는 디나가 그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
    심이 일었다. 그녀는 그런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건 단지 습관 
    문제인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라고 해도 그녀는 분명히 머나먼 길
    을 떠나 온 것이다.
      [그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니?] 그
    것은 마르크가 한 것 치고는 드물게 정직한 고백이었다.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려고 어느날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마가레트가 말해주었어. 마가레트는 다음  달에 그만둘 것 같
    아. 당연한 일이지. 그 사람에게는 자기 주위에서 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우리 모두 산뜻하게 
    출발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게 네가 요즘 하고 있는 일이니?]  킴이 물었다. 디나가 또 
    다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야. 하지만 내겐 쉬워. 집안일때문
    에 난 계속 바빠. 그리고 그림 작업도 그렇구. 다음 달에는 아기 
    방을 만들어놓고 싶어. 몇 가지 감탄할 만큼 멋진 천을 발견했거
    든. 그리고 벽에 걸어둘 몇 가지 우스꽝스런 동화 속 인형들을 만
    들고 싶어.]
      킴이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편안하게 앉아 수다를 떠들어
    대려고 다시 자리를 잡았다. 디나가 마침내 일어나 등불을 켠 것
    은 5시가 넘어서였다.
      [세상에, 우리가 캄캄한 데서 여지껏 앉아 있었구나!]
      [그리고 나는 이제 집에 가야만 돼. 난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
    거든. 그런데 크리스마스에 뭘 할 생각이니?] 그러나 그녀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킴은 확신할 수 있었다.
      디나가 고개를 저었다. [올해는 정말로 아무것도....... 조용히 
    여기에서 즐겁게 지낼 생각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킴에게는 가책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스키를 타러 산에 올라갈 생각이야, 같이 가고 싶어?]
      디나는 깔깔거리며 이젠 제법 불룩해진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그녀는 드디어 5개월째로 접어들었고, 이제 그 불룩해진 배가 날
    짜와 맞아떨어졌다. 그녀는 블라우스 밑으로 작고 둥그스런, 멋진 
    배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배를 가볍게 두
    드린 다음 킴을 바라보았다.
      [올해에는 스키를 탈 형편이 아닌 것 같아.]
      [나도 알아, 하지만 어쨌든 갈 수는 있을 거야.]
      [그리고 얼어버리라구? 여기 있는 편이 훨씬 더 좋아.]
      [좋아. 하지만 전화번호를 남겨둘께. 내가 필요하면, 알고 있겠
    지만 내게 전화해.]
      [알아, 알았다구.] 그녀는 킴의 선물들을 품에 안고서 킴이 그
    녀의 트리 밑에 남겨준 물건들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멋진 새해가 되기를 빌어줄께.]
      킴이 친구의 점점 불어나는 허리둘레를 내려다보며 웃음띈 얼굴
    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될 거야.]

      
                                  35
      
      
      크리스마스는 흥분됨이나 축하파티 하나 없이 그렇게 지나갔다. 
    필라의 선물, 그 아이가 골라  아버지의 구좌에서 값을 지불하게 
    했던 값비싼 실내복도 없었다. 크리스탈 병에 담긴 프랑스 제 향
    수도, 다이아몬드 귀걸이도, 모피도 없었다.
      디나가 생전 처음으로 혼자 맞은 크리스마스 이브 자정에 개봉
    된 킴의 선물 네 상자 뿐이었다. 디나도 처음에는 두려웠었다. 혼
    자라는 것이 주게 될 느낌, 그 고독과 고통을 견뎌내지 못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전혀 고독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
    저 약간 서글플 뿐이었다.
      디나는 자신이 마르크와 필라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
    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그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
    대한 파티, 그 소란스러움, 햄이나  거위나 칠면조 요리, 주방의 
    마가레트, 트리 밑에 쌓인 산더미같은 선물 상자들. 그녀가 그리
    워하는 것은 그 풍요로움이 아니라 그런 행위들이었다. 그것은 늦
    은 밤 그녀가 그리워한 것들이었다. 필라의 빛나는 웃음, 그리고 
    오래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마르크의 얼굴. 그러나, 이제 그들
    에게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러나 마르크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목소
    리를 듣고 싶다는 충동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면서 트리 옆에 앉아  있었다. 문득 벤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그가 카멜에 있을 것 같았다. 
    벤도 나와 마찬가지로 혼자일까?
      그녀는 사람들이 캐럴을 부르며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
    는 자신이 <고요한 밤>을 허밍으로 쫓아부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
    다.
      그녀는 옷을 벗고 누웠다. 지난 수 개월 동안보다 덜 피곤했고 
    기분은 지난 세월 동안 느껴왔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그러나 생
    활은 이제 훨씬 더 단순해졌다. 디나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재정적
    인 것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조차 잘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
    갈매기>라는 작은 화랑을 찾아내어 거기에 작품을 팔았다. 작품당 
    고작 이삼백 달러밖에 받지 못했지만, 그 정도면 집세를 내고 그
    녀에게 필요한 다른 것들도 전부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했다. 그녀
    에게는 비취와 다이아몬드로 된 귀걸이를 팔아서 만든 돈이 약간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직 팔 수 있는 보석들이 가득 들어있는 금
    고도 있었다. 아기가 태어날 때쯤에는 더 내다 팔아야 할 것이고, 
    그들이 법정에 다녀온 뒤에는 마르크도 그녀에게 무엇이든 주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침대 속에서 혼자 미소를 지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
    가야.> 디나는 가만히 배를 쓰다듬고는 똑바로 누웠다. 한동안 필
    라를 생각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아마도 또 딸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다른 아이일 것이다.

      
                                  36
      
      
      2월의 어느 날 아침 9시였다. 벤은 자기 사무실에 앉아서 새로 
    제작한 광고물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책상 위의 벨을 누르고 
    샐리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들어왔을 때 그녀의 손에는 
    서류가 한아름 들려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
    다.
      [이 광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샐리? 효과가 있을 것 같
    아?]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녀는 약간 주저하였다. [그런데 너
    무 화려한 것 같지 않으세요.]
      벤은 고개에 힘을 주어 끄덕이면서 광고를 그의 책상 위로 던져
    놓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킴 휴튼에게 전화연락을 해줘. 나
    는 11시에 싸우살리토에서 화가를  만나야 하니까 12시15분 경에 
    우르친 해변에서 나를 만날 수 있는지 알아봐줘.]
      [싸우살리토에서요?] 샐리가 물었다.  그가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사무실을 나갔다. 샐리가 사무실 문에 다시 고개
    를 내민 것은 거의 10시가 다 되어서였다.
      [12시 30분에 우르친 해변에서 만나겠대요.] 그리고 광고물들을 
    가져오겠다고 말하더군요. 선생님께 보여드릴 여러가지 후보물들
    이 한아름 있는데 그것들을 전부 가져오겠다고 하더군요.]
      [좋았어.] 벤이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샐리를 올려다보고는 책
    상 위의 광고물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때때로 그건 끝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벤은 그해 겨울에 4명의 신인 화가들을 명부에 올
    려놓았지만 정말로 그들의 작품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 작품들
    은 그가 본 것 중에서는 그래도 뛰어난 것들이었지만 독특한 맛은 
    없었다. 디나 듀라스의 작품 수준 정도의 것은 없었다.
      고객들은 끊임없이 디나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고 그는 설명을 
    해주려고 애를 썼다. 그녀가 <은퇴>하였다. 일에 몰두하는 그에게
    서 또다시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디나를 잊기 위한 연습을 
    9월부터 시작했지만 거의 효과가 없었다. 거의 늦은 밤과 이른 아
    침을 제외하고는.
      이제 그는 그녀에게 있어 필라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다시 만질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또한 말소리도 들을 수 없고, 그들과 더불어 웃을 수 없고, 그들
    에게 농담을 걸고 그들이 웃는 모습을  바라볼 수도 없는 것이었
    다.
      벤은 잠시 일을 중단하고 그런  생각들을 쫓아버리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이제 이별에 능숙해져 있었다. 5개월 동안에 걸쳐 
    숙달된 것이다.
      벤은 정확하게 10시 15분에 화랑을 떠났다. 그 시간이면 다리를 
    건너 싸우살리토로 차를 몰고가 주차를  시킬 수 있었다. 적어도 
    오늘 만나는 화가는 그가 좋아하는  화가였다. 그는 색채에 대한 
    놀라운 눈과 일종의 마법적인 재능을 지닌 젊은 청년이었다. 그의 
    작품은 디나의 것보다 훨씬  현대적이지만 수준은 조금 떨어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에게 제의를 해 보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그
    의 그림을 사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지껏 그 젊은 화가는 그
    가 사는 곳 근처에 있는 화랑에서 작품을 선보였는데, 그곳은 다
    양한 작품들을 다루는 작고  안락한 싸우살리토에 있는 화랑이었
    다.
      벤은 그곳에서 그 화가의 작품들이 어떤 것들은 좋고 어떤 것들
    은 나쁜 것들 사이에 매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작품들
    이 끔찍스런 값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175달러가 그의 작
    품의 최고가격이었다. 벤은 처음부터 2천 달러로 값을 올려주려고 
    하였다. 그는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화가
    는 감격하게 될 것이다.
      그는 정말 감격해 했다.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메어리에게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 화가는 활짝 핀 얼굴로 웃어보이
    면서 벤의 손을 잡아 마구 흔들어댔다. [이제서야 겨우 음식다운 
    음식을 사먹을 수 있게 되었군요.]
      벤은 기분이 유쾌해져서 함께 웃었다. 그들은 천천히 문가로 걸
    어갔다. 그것은 헛간으로 쓰여졌던 것 같은, 바람이 잘 통하는 작
    업실이었다. 지금은 주택들과 빅토리아 풍의 대용물들로 둘러싸여
    졌지만 아직까지는 일하기에 근사한 장소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난 여름에 다루었던 그 여류 화가는 어떻
    게 된거죠, 듀라스 부인이라든가?]
      [다루었다고.] 흥미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아무도 
    모른다. [더이상 그녀의 작품은 전시하지 않아요.] 벤은 매우 침
    착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그 말을 백 번은 했었다.
      [압니다. 하지만 누구 알고 있는 사람을 모르십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녀는 은퇴했거든요.] 벤은 각본대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청년 화가가 머리를 저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확실한 이야기입니까?]
      [거의. 그녀가 자기 작품을 철수시킬 때 은퇴하겠다고 말했거든
    요.] 하지만 그 남자의 눈에는 그를 얼떨떨하게 만드는 무엇인가
    가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겁니까?]
      [갈매기 화랑에서 요전날에 그녀의 작품들 중 하나를 보았습니
    다. 틀림없어요. 아시겠지만, 내 작품을 전시했던 그 장소 있잖아
    요? 확인해 볼 시간은 없었지만, 제가 보기에는 확실해 보였어요. 
    아름다운 나체화였죠, 그런데 터무니없는 가격을 받고 있더군요.]
      [얼마던가요?]
      [어떤 사람이 160달러라고 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작품에 대한 그런 가격은 정말 범죄라고 해야 합니다. 당신이 한
    번 가서 그녀의 작품인지 확인해 보시는게 어떻겠어요?]
      [그래야 할 것 같군요.]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11시 
    30분밖에 안되었다. 킴과의 점심식사  약속까지는 시간이 충분했
    다.
      두 남자는 다시 악수를 했다. 그는 감사하다는 말을 수 없이 하
    고 그곳을 떠났다. 벤은 그의 차로 미끌어져 들어가서 빠른 속력
    으로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갔다.
      벤은 그 화랑이 있는 장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길모퉁
    이에 차를 주차시켰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
    럴 필요가 없었다. 문 근처에 걸려있는 그녀의 작품이 눈에 띄었
    던 것이다. 그는 길에 다리가 붙어버린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정말 디나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 청년 화가의 눈은 정
    확했다.
      벤은 잠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어떻게 할 바를 모른 채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돌아가려고 결정하는 순간, 무
    엇인가가 그를 화랑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그 자신의 삶이 정
    지된 것 같은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야만 했다. 그녀가 그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7월 초순에 테라스에서 그 그림을 그
    렸다. 갑자기 그는 여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어서 오십시오, 뭘 도와드릴까요?] 샌들에 진바지를 입은 어여
    쁜 금발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평범한 유니폼 티셔츠를 입고 있었
    고 구멍이 뚫린 귀걸이를 하고 넓은 가죽끈으로 머리를 묶고 있었
    다.
      [저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어요.] 그는 디나의 작품을 
    가리켰다.
      [160달러입니다. 이 고장 화가가 그린 작품이죠.]
      [이 고장이라고요? 샌프란시스코겠죠, 당신이 말하는 건.]
      [아닙니다. 싸우살리토를 말하는 겁니다.] 그녀는 틀림없이 착
    각을 하고 있었겠지만 따지고 들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또 있습니까?] 그는 더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습니다. 두 점 정도 더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전부 네 점이나 있었다. 여름에 그린 작품 하나와 그녀가 초기
    에 그린 두 점의 작품이었는데, 그 어느 작품이나 이백 달러가 넘
    지 않았다.
      [이 작품들을 어떻게 구입하셨죠?] 그는 자신이 그 작품들이 도
    난 되어진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점밖에 
    없었다면 그에게서 작품을 산 누군가가 돈에 쪼달려 팔아버린 것
    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했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또한 그
    들이 디나의 작품을 여러 점 취급한 것처럼 보이므로 그런 경우는 
    거의 아닐 것이다.
      그 작은 금발의 아가씨는 그의 질문에 놀란 것 같았다.
      [저희는 화가로부터 위탁받아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번에는 벤이 어안이 벙벙해질 차례였다.
      [왜죠?]
      [죄송합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는 이해를 하지 못
    했다.
      [내 말은 왜 여기에 위탁을 했느냐는 말입니다.]
      [저희 화랑은 아주 명성있는 화랑이랍니다.  당연한 일 아닙니
    까?]
      그녀는 그의 말에 심히 불쾌해 했다. 그는 애써 미소로써 그의 
    실수를 덮으려고 하였다.
      [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없었습니다. 난 그저...... 난 저 화가
    를 알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녀의 작품을 보고 놀란 것 뿐입니다. 
    난 그녀가 다른 데로 간 줄 알았거든요....... 해외로요.]
      그는 너무나 당황해서 뭐라고 사과를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
    다. 순간적으로 내친 김에 그는 또다시 미소를 지으며 그 금발의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가져갈 테니까요.]
      [어떤 작품을 원하십니까?] 그는 틀림없이 미쳐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혼이 빠졌거나.
      [전부 다 주세요.]
      [넉 점 다요.]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라 미쳤다.
      [네, 그래요.]
      [하지만 그러면 거의 800달러 정도나 될 텐데요.]
      [좋습니다. 수표를 써 드리죠.] 그 금발의 아가씨는 고개를 끄
    덕이고는 들어갔다. 지배인이 벤의 은행에 확인을 하였고, 그 결
    과는 좋았다. 10분 후에 그는 그 화랑을 걸어나왔다. 디나와 화랑
    측은 각각 440달러의 득을 보았다.
      자동차 안에다 그림들을 다 실을 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그 그림
    을 구입한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이 그녀의 작품을 갖고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것밖에 몰랐다. 
    그리고 가격들도 너무 터무니가 없었다.  그의 화랑에서 팔면 더 
    큰 이득을 디나에게 남겨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과연 무엇을 증
    명하고 싶었던 걸까?
      벤은 킴과 점심식사를 하러 우르친 해변에 차를 세울 때 자기자
    신에게 신경질이 났다. 그림 넉 점을  다 산 것은 엄청난 일이었
    다. 그녀가 알면 아마도 몹시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일
    련의 사건들 중에 무언가가 그를 질리게 만들었다. 그건 어떤 의
    미였을까, <이 고장> 싸우살리토의 화가라니?
      킴은 창이 딸린 테이블에 앉아서 벤을 기다리며 부두 건너편의 
    도심전망을 즐기고 있었다. [앉아도 될까요?]
      그녀가 그에게로 몸을 돌리며 웃었다. [잠시 당신을 난봉꾼이라
    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씩 웃자 그도 따라 웃었
    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멋져보였다. 짜임새있는 몸매에 블레이저 
    코트와 헐거운 바지, 그리고 줄무늬 셔츠를 일고 있었지만 그녀가 
    생각하기로는 그의 눈가에 뭔가  고통스러운 것이 스며있는 듯했
    다.
      [그런 운은 없습니다. 휴튼 양. 난봉꾼들은 유행에 앞서 가죠. 
    아니면 요즘에는 여자들이 전부 난봉꾼인지도 모르고.]
      [어머머.]
      [음료수 좀 드시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
    자 블러디 메어리 두 잔을 주문하였다. 잠시 그가 부두를 쳐다보
    았다.
      [킴?]
      [예, 알고 있어요. 광고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시려는 거죠?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다른 아이디어들이 몇 가지 있어요.]
      벤은 고개를 젓고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건 신경쓰
    지 말아요, 당신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면 되겠죠. 나는 좀 다른 것에 대해서 묻고 싶소.] 오랫동
    안 말을 멈추고 있는 그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갑자기 이것이 자기
    가 그의 눈에서 보았던 것일까 하고 의아해하였다.
      [무슨 일인데요?] 그는 너무나도 고민에 싸여보여서 손을 내밀
    어 잡아주고 싶었다.
      [디나.]
      킴의 심장은 하마터면 멈출 뻔하였다. [ 그녀를 만났어요?]
      하지만 그는 또다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뇨, 당신은요?] 
    킴은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마을 화랑
    에서 그녀의 그림 넉 점을 발견했는데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왜 
    그녀가 그곳에다 그림을 팔아달라고 위탁했는지. 160달러, 175달
    러. 그건 자살 행위예요. 말도  안된다구요. 그리고 그 화랑에서 
    그녀를 이 고장화가라고 말하더군요. 싸우살리토 마을의. 정말로 
    그건 말도 안됩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겁니까.]
      킴은 꼼짝 않고 앉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말 없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날 오후 점심식사 바로 후에 디나
    와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그녀는  싸우살리토에서 점심을 들기로 
    한 약속에 기뻐했었다. 이렇게 하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디나에
    게 들려볼 수 있었다. 하지만 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을까?
      [킴, 제발 말해줘요. 알고 있습니까?] 그녀에게 애원하는 그의 
    눈은 걱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서 그림을 산 후에 그 화랑에 되판 것은 
    아닐까요.]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 전에 먼저 디나에게 물
    어보아야만 했다. 사실 그래야만 했지만 그녀로서는 차라리 그에
    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닙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예요.] 여자 말로는 분명히 위탁받
    아서 팔고 있다고 하더군요. 왜죠? 왜 그런 화랑에다, 그리고 왜 
    이런 곳에서, 남편 몰래 그림을 팔려고 하는 건가요? 곤경에라도 
    빠져 있습니까, 현금이 필요한 겁니까?]  그의 눈은 킴이 말해줄 
    것을 애원하였고, 그녀는 길게 고통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아, 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디나의 생활은 많이 
    변했어요.]
      [하지만 명백한 것은 나에게 전화를 할 만큼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겠죠.]
      [아마 전화를 할 거예요, 조만간에. 그녀는 아직까지도 필라때
    문에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
    덕였다. 그들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오늘은 사업적인 대화는 논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디나뿐이었다. 그는 무언가 끔찍스러울 정도로 잘
    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다시 킴을 올려다보았고, 그의 눈을 바라보아야 하는 그녀
    는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어떤 곤경에라도 처해 있는 겁
    니까?] 하지만 킴은 머리를 흔들어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잘 있어요, 벤. 정말이에요. 어떤 면에 있어서는 난생 
    처음으로 행복하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녀는 자기가 한 말에 대
    해 자기 혀를 자르고 싶었다. 디나는 지난 여름에 더욱 행복했다
    는 걸 알지만 킴은 자신이 방금 한 말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몰랐
    다.
      [많은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리고 행복하고.] 그는 부둣가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킴에
    게로 향했다. [그 사람과 함께.......] 하지만 킴은 갑자기 그 말
    을 참지 못하였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이죠?]
      [그 사람은 프랑스로 돌아갔어요.] 디나가 그녀에게 바로 한 달 
    전에 그 말을 했었다. 마르크는 마침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버렸
    다.
      [영주 귀국인가요?] 벤은 멍하니 보았다. 킴은 그저 고개만 끄
    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남고요?] 킴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리고 이제 그의 눈에는 절망이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전화를 하
    지 않았다. 마르크가 떠나버렸는 데도 전화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그의 잔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는 킴의 손이 부드럽게 자
    기 손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기회를 주세요, 벤.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어요. 
    그것들을 다 정리하자면 몇 개월은 더 걸릴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살고 있는 겁니까,  싸우살리토예요?] 그 어느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들의  집에서 살고 있지 않는 걸
    까, 그 사람이 가버리면서 그녀를 남겨둔 걸까?
      [그들이 이혼 절차를 밟는 중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겁니까?]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네, 맞아요.]
      [그 사람이 하자고 그런 겁니까, 아니면 그녀가? 킴, 말해줘야
    만 합니다. 나는 알 권리가 있어요.]
      [나는 전적으로   당신의 말에   동의해요, 벤.   하지만 그녀
    의...... 그녀가 이혼을 제기했고 마르크가 동의했어요. 그 사람
    은 정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녀는 어때요? 적응은 하고 있습니까, 괜찮아요.]
      [그녀는 좋은 상태예요. 아담한 집에서 살면서 새로운 그림들을 
    준비하는 중이예요.] 그리고 나서 그녀가 말을 멈췄다. 너무 많은 
    것들을 말했다.
      [무슨 준비를 하고 있단 말입니까.] 가뜩이나 혼란스러워진 그
    를 킴벌리는 더욱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킴. 
    그 인색한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려고 하는 겁니까.]
      벤은 몹시 성이 났다. 어떻게 감히 그들이? 갑자기 킴이 큰소리
    로 웃었다. 그녀는 밝은 빛을 띈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아세요? 이건 미친  짓이에요. 우린 여기 이렇게 
    앉아서 디나가 어떤지에 대해서 스무 고개를 하고 있어요. 그녀가 
    필요로 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직 당신 뿐인데요.]
      킴은 핸드백에서 펜을 하나 꺼내고는 광고 포스터들 중에서 종
    이 한장을 손에 쥐었다. 그녀는 주소를 적고 그에게 건네주었다. 
    [가세요, 그게 주소예요.]
      [지금요?] 그녀의 손에서 종이쪽지를 받아쥐고는 어안이 벙벙한 
    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 그녀가 나를 보기를 
    원치 않는다면?]
      [보고싶어 할 거예요. 지금부터는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그녀
    가 웃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든다면 그냥 
    주먹으로 입을 한 방 먹여버리세요.] 그는 웃어보이면서도 혼란스
    러운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점심은 어떡하죠?] 그가 하고 싶은 것은 지금 당장에 그
    곳에서 나와 디나에게 가는 것이었다. 그는 정말이지 일 분도 더 
    킴과 같이 앉아 있을 수가 없었고, 그녀도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 
    미소를 지었다.
      [없던 일로 하세요. 광고에 대해서는 다음 번에도 얘기할 수 있
    잖아요. 가보세요.]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를 해주고는 
    그녀의 어깨를 꽉 껴안았다.
      [언젠가는, 킴. 꼭 한턱 낼께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는 마
    침내 미소를 돌려주었다. [뛰어가야겠어요. 말해 봐요, 문을 부숴
    버릴까요, 아니면 그냥 굴뚝으로 기어 들어갈까요?]
      [창문에다 의자를 집어던져요. 그건 항상 효과가 있으니까.]
      차에 올라타면서도 그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고, 킴을 떠난 지 
    5분만에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다. 그는 다시 종이쪽지를 꺼내 그 
    집이 울창한 데이지 수풀에 가려져 있고, 작달막한 말뚝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는 디나가 지금 집에 있을까 생
    각해 보았다. 혹시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겁이 나 있었다.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할까, 자기가 온 걸 보고 화를 내면 어떡하
    지? 그는 지금 그녀가 자기에게 화를  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
    다. 긴 꿈의 세월이 지난 후에는.
      그는 차에서 나와 천천히 문가로  걸어갔다. 집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라디오에서는 부드러운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는 벨을 울리고 나서 문을 두드렸다. 그가 생각했
    던 것보다 빨리 집 뒤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킴. 문 열렸어. 들어와!] 그는  입을 열어 자기는 킴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기가 집 안에 
    들어가서 직접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녀에게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벤은 한 손으로 문을 밀었다. 밝고 아담한 실내가 보였지만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왔어?] 그녀는 뒤쪽에서 크게 소리쳤다. [반대편 침실에서 그
    림을 그리는 중이야. 금방 나갈께.]
      5개월 만에 처음으로 디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이 녹아내
    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저 붙박힌 듯 서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
    다렸다. 그는 무언가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온 몸에 힘이 다  빠져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이내 
    그녀가 다시 소리쳤다.
      [킴, 너 맞니?]
      이번에는 말을 해야만 했다.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
    다.
      [아냐, 디나. 아니야.]
      그리고 나서 침묵이 흘렀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자리에 서서 조용히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오
    지 않았다. 아무일도 없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천
    천히 그가 집 뒤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몇 발자국을 옮기자 아담한 침실이 보였다.
      [디나?] 그녀는 거기에 서서 한 손을 유모차 위에 올려놓은 채 
    마지막 남은, 칠이 덜 된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그녀의 눈을 찾
    는 그의 눈은 부드러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미안해요, 난.......]
      그리고 나서 그는 보았다. 그녀의  눈이 커지면서 뺨이 떨리고 
    있는 것을.
      [하느님 맙소사, 당신이...... 디나.......]
      그는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
    랐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그리고 누구의 아기인지? 그러나 그
    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게로 달려가 끌어안았다. 그녀가 그
    림을 팔고 혼자 지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우리 아기지,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눈물 방울이 
    그의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그는 더욱 그녀를 껴안았다. [왜 나
    한테 말하지 않았지, 왜 전화하지  않았지?]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몸을 떼었을 때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럴 수가 없었어요. 나는 당신에게서 떠났어요.] 그런 식으로 
    다시 당신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어요. 나는 아마도...... 아기가 
    태어난 후에.......]
      [당신은 미쳤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해. 왜 아기가 태어난 다음
    이지? 나는 당신과 함께 그곳에 있고 싶고. 나는...... 오, 디나. 
    우리 아기라구!] 온 세계를 다 얻은 듯한 기쁨에 넘쳐 그녀를 끌
    어당겼다. 웃음과 눈물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나를 찾아냈어요?] 그녀는 기쁨에 겨워 그를 꼭
    껴안으면서 훌쩍거렸다.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는 알아챘다.
      [킴?]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당신의 그림을 팔던 그 작은 화
    랑일 수도 있지. 디나, 도대체 어떻게.......] 그가 말끝을 잇지 
    못하자 그녀는 씩 웃어보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더는 그러지는 말아요.]
      [두고 봐야죠.]
      [나보다도 갈매기 화랑이 더 좋은가?] 그는 그 생각을 하자 웃
    음이 나왔고 그녀는 힘껏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나 혼자서 꾸려보고 싶었어요. 독립을 했다구요. 해낸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건 당신이 굉장하다는 거구 내가 당신을 흠모한다는 뜻이지. 
    이혼절차를 밟는 중이오?]
      벤은 품 안에 그녀를 껴안고는 부드럽게 그녀의 복부를 어루만
    졌다. 아기가 발로 차자  그는 깜짝 놀라  물러났다. [우리 아기
    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 눈물이 그의 눈에서 반짝거렸다. [예, 
    그리고 이혼수속 중이에요, 5월이면 끝날 거예요.]
      [그럼 아기는?]
      [4월에 태어나고요.]
      [그럼, 그렇게 된다면, 이런 얼빠진, 정신없는 여자야. 우리도 
    5월이면 끝나게 되겠군.]
      [무슨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 그녀는 웃고 있었고 그도 마찬가
    지였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지. 그리고] 그는 야릇한 모습으로 방
    을 둘러보았다. [짐을 싸시죠, 부인. 댁으로 모셔드리겠습니다.]
      [지금요, 난   아직 아기방을   다 칠하지도   않았는데, 그리
    고.......]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부인, 집으로  모실 테니
    까.]
      [지금 당장요?] 그녀는 그림붓을 내려놓고 활짝 웃었다.
      [지금 당장.] 그는 또다시 그녀를 끌어안고 지난 5개월 동안의 
    갈망으로 가득찬 입술로 그녀에게 키스했다.
      [디나, 다시는 당신과 떨어지지 않겠어, 절대로. 알겠어?] 그의 
    손이 천천히 그들의 아기쪽으로 움직일  때, 그녀는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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