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덩 밍다오] 도인 1,2

by Casey,Riley 2023. 1. 8.
반응형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덩 밍다오

제 1부
유년 시절
1. 타이산의 축제
1929년, 관 사이훙은 가족들을 따라서 가파른 타이산()순례 길에
올랐다. 그들은 도교의 최고신인 자미대제()의 축제에 참석하기
위하여 정상에 있는 자운궁()을 향하고 있었다. 수주일 동안이나
계속되는 그 축제는 자운궁 마당에서 헌물을 바치는 종교의식이었다. 부
유한 무사 가문인 관씨 집안의 식구들은 도교의 독실한 신자이자 후원자
였기 때문에 그들의 고향인 산시성()에서 산둥성()의 타이
산까지 8백 킬로가 넘는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그들은 자운궁에 한 달
간 머무를 예정이었다.
타이산으로 오르는 가마의 속도는 대단히 느렸다. 하늘을 찌를듯한 타
이산의 절벽들은 하루 만에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었다. 소나무 숲속에 있
는 산골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한나절을 올라 갔을 때에야 비
로소 그들은 목욕 재계할 수 있었다. 여인숙에서는 채소로 만든 음식들
만 제공했다. 동물의 살코기 냄새를 씻어 버리고 명상을 해야 마음을 평
화로이 가다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이산은 이미 그 자체로도 순례자들의 마음을 개끗이 씻어 주는, 중
국의 오악()중에서도 으뜸가는 명산이었다. 타이산은 다른 모든 산
과 골짜기들을 우습다는 듯 내려다보면서 넓디넓은 산둥성의 하늘을 향
해 우뚝 치솟아 있었다. 구름은 산봉우리 중턱에서 한가롭게 흘러가고,
하늘처럼 넓고 큰 타이산은 황제와 같은 고고함과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
다.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사람의 기척은 보이지 않고, 차갑고 희박한 공
기만이 절벽의 바위들을 감싸고 있었다. 참으로 자미대제가 거처할 만한
곳이었다.
중국인에게 [황제]란 하늘의 천제()뿐만 아니라 지상의 천자(
)도 보통 사람들은 결코 보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황제]는 신비한 존
재였으며, 기()였고, 접근할 수 없는 지배적인 [힘]이었다. 그러나 매
년 한 번 열리는 이 축제에서만은 그 [황제]가 세속으로 내려와 백성들
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어린 사이훙은 장난꾸러기에다 호기심이 강한 소년이었다. 그는 종교
의식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할아버지 관 주인과 할머니 마 쓰
싱, 그리고 고모인 관 메이홍은 사이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요
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사이훙이 도교 순례자의 경험을 할 때가 되었다
고 느꼈다.
사이훙의 가족들은 타이산의 사찰로 향하는 마지막 진입로에 다다랐
다. 이제부터는 18번을 굽이쳐 돌아가면서 올라가야 하는 구불구불한 산
길이 남아 있었다. 그 길은 7천개의 돌로 짝을 맞추어 놓은 좁은 계단으
로 이어져 있었다. 기암괴석들 사이의 거대한 틈을 따라 길이 나 있었지
만, 관목들과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울퉁불퉁하고 험악한 절벽에
비하면, 그 오솔길은 대체로 다닌 만 했다. 그 길은 인공적으로 만들어
진 것으로, 대자연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타이산은 보잘
것 없는 오솔길을 간신히 참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른들은 가마
를 타고 갔고, 사이훙은 하인의 등에 업혀서 갔다. 사이훙은 수많은 돌
로 만들어진 층계를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차가웠다. 사이훙은 긴 갈색 무명옷 위에 깃이 높
은 호랑이 가죽 외투를 입고 있었다. 다리에는 각반을 하고, 무릎 부분
에 단추가 달린 짧고 헐렁한 바지를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외투자락 밖
으로 살짝 보이는 사자 모양의 돈주머니는 비단으로 만들어 섬세하게 수
를 놓은 것이었다. 신발도 역시 비단으로 만들어 수를 놓은 뒤 펠트로
밑창을 댔고, 양쪽 옆엔 하얗고 파란 구름 모양의 장식을, 코끝에는 사
자머리 모양의 장식을 달아 놓았다. 사이훙이 입고 있는 옷들은 인격을
함양시켜 주고 그를 악으로부터 보호하면서도 남성적인 면이 돋보이도록
세심히 신경을 쓴것이었다. 가족들은 모두 그러한 호신용 물건에 각별히
신경을 썼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사이훙에게는 부적으로 호랑이 이빨을
목에 걸어 주었다.
외투 외에도 사이훙은 두 가지를 더 걸치고 있었는데 너무 거추장스러
워 짜증이 날 정도였다. 막 계단을 뒤어올라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사이훙은 너무 더워서 모자를 벗어 던졌다. 모자 역시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것으로 양쪽에 귀덮개가 달려있고, 정수리 부분에는 사자 귀모양의
장식물이 달려있었다. 사이훙은 그 장식물을 가장 싫어했다. 또 하나는
벙어리 장갑이었다. 그러나 그건 벗어 버릴수 없었다. 장갑은 외투 소매
끝에 비단실로 튼튼하게 꿰메어져 있기 때무이다. 모자를 벗어버리고 장
갑가지 벗은 뒤 사이훙은 이제야 해방되었다는 듯이 층계를 뛰어올라갔
다. 정수리 가운데만 남겨놓고 깨끗이 밀어 버린 그의 머리가 잠깐씩 보
였다가 사라지곤 했다.
층계는 끝없이 계속되는 것 같았다. 사이훙이 먼저 올라와 쉬고 있자
집안의 충복들이 뒤따라 올라왔다. 행렬의 선두에 선 가마의 창을 통해
할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른어른 비치고 있었다. 가마 안에서 사이훙을 유
심히 살펴보시던 할아버지는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이훙, 네 모자는 어디 있느냐?]
사이훙은 순진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올려다 보았다.
[여인숙에 두고 왔나 봐요, 할아버지.]
가마안에서 가벼운 탄식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때 하인 한 사람이 모
자를 가지고 왔다. 사이훙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면서 하인의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다시 날카로운 목소리로 사이훙을
불렀다. 사이훙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모자를 뒤집어썼다. 앞으로 뛰
어가면서 사이훙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있으며 할아버지가 엄격하기는 해도 정이 깊은 분이라는 것을 사이훙은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항상 그를 용서해 주셨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도관의 정문 앞에 이르렀다. 주지스님이 직접 나와 그
들을 맞이했다. 주지스님은 할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다. 주지스님은 가족
들이 머무는 동안 거처할 사찰을 별채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할아버지가 제일 먼저 가마에서 내렸다. 할아버지는 이미 70대에 접어
들었으나 여전히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180센티미터나 되는
장신이었기 때문에 체격만으로도 남들과 쉽게 구분되었다. 의복에서 드
러나는 신분과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할아버지의 비범한 위풍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소매없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장삼과 바지는 가죽을
대서 만든 것이었다. 수를 놓은 검은 조끼, 사과색의 옥장식이 달린 검
은 갓, 백설같이 하얀 수염, 그리고 단정하게 땋아 내린 머리카
락.......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진중하면서도 날카로운 무사의 풍모
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할머니 마 쓰싱은 할아버지보다 한 살 연하였으며 키도 아주 커서 할
아버지보다 약간 작은 정도였다. 할머니도 주지스님에게 인사했다. 할머
니는 전족을 하고 있었으나 보조도구 없이도 잘 걸었다. 할머니 역시 가
죽을 대서 만든 장삼과 바지를 입고, 긴 앞치마와 승모 모양의 머리덮개
를 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밝은 색깔의 금속사로 독특하게 수놓아
져 있었다.
할머니의 옷은 장미, 국화, 작약, 그리고 붓꽃을 복잡하게 수놓은 눈
부신 것이었다. 길고 숱이 많은 하얀 머리카락은 뒤로 넘겨 보석이 달린
비녀로 단장하였다. 높은 광대뼈와 달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강조해주는
머리모양이었다. 둥글고 커다란 두눈은 사슴의 눈처럼 온화하게 빛났으
나, 그 눈빛속에는 강렬한 정신력이 숨쉬고 있었다.
할머니는 비록 나이가 들었으나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축제기
간 동안 할머니를 훔쳐본 다른 여인들은 모두 할머니의 아름다움에 질투
를 느꼈을 게 틀림없다. 할머니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와 옥팔찌외에도
언제나 가죽으로 만든 긴 채찍을 왼쪽 어깨에 말아서 갖고 다녔는데, 그
채찍은 할머니의 무기였다.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사이훙의 고모 관 메이홍은 할머니보다도 훨
신 더 평범한 외모였다. 50대에 접어든 고모는 푸른 벨벳 옷을 입고 있
었다. 고모의 머리덮개와 앞치마에도 수가 놓여져 있었지만, 고모는 단
순한 것을 좋아해 어두운 색조의 옷을 즐겨 입었다. 고모는 최근에 와서
야 전족을 풀었는데,목발을 짚고 걷는 일조차도 대단히 고통스러워했다.
사이훙은 주지스님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드렸다. 주지스님이 할아
버지,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사이훙은 살며시 빠져 나와
사찰의 대문을 지나 마당안으로 들어갔다.
사찰의 마당은 밝은 색깔로 꾸며져 있었으며 사람들이 매우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청동 기와로 덮인 사찰의 지붕과 다채로운 처마가 보였
고, 비단으로만든 수천 개의 등과 풍차들, 그리고 풍경들이 바람에 흔들
리고 있었다.
음악가, 곡예사, 인형극단의 사람들, 마술사, 그리고 힘을 자랑하는
역사들이 마당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다 헤어져 여기저기 기운 회색
도복을 입은 도사들이 향과 부적, 봉납물 따위를 팔여 사람들 사이를 돌
아다니고 있었다.
어떤 도사들은 조언을 해주고 있었고, 또 어떤 도사들은 점을 쳐주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이훙의 관심을 끈 것은 김이 무럭무럭 나
는 신선한 음식들과 맛나고 달콤한 사탕들이 진열되어 있는 음식상이었
다.
사이훙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군것질과 장난을 치며 돌아다니는 것이
었다. 하지만 장난치는 것보다도 군것질이 훨씬 더 좋았다. 돌아다니며
축제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맛난 음식 냄새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는
사탕을 여러개 사서 그 자리에서 몇 개를 먹고 나머지는 주머니에 넣었
다. 때마침 꿀을 발라구운 사과가 보였다. 그것은 사이훙이 가장 좋아하
는 것이었다. 그는 그 사과까지 사 먹고나서야 축제들은 둘러보기 시작
했다.
사이훙은 사람들을 헤치고 마당 한가운데로 비집고 들어갔다. 높은 단
상위에서는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은 음악가들이 가극과 대중적인 노래,
고전음악을 번갈아 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류트와 하프, 바이올린, 플
루트,심벌즈 등 여러가지 악기들은 연주하고 있었다. 막강해 보이는 그
악단은 축제분위기에 들떠 함성을 질러대는 사람들의 소음에는 전혀 신
경을 쓰지 않았다. 공연을 하기 전에는 항상 선전이 있었다. 공연을 펼
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환상의 묘기가 펼쳐질 것이라고 큰소
리로 외쳐 대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사이훙은 마술사에게 마음이 끌렸다.
[오세요! 오세요! 아저씨들 아주머니들! 형제 자매 여러분! 노인장도
어린이도 오세요! 오세요! 와서 놀라운 묘기들을 보시라. 신도 놀라고
질투할 마술, 당신이 믿지 못할 마술입니다! 오세요! 오세요!]
사이훙은 눈썹을 과장되게 치켜올리고 있는 키가 크고 거무튀튀한 남
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붉은 비단 옷을 입은 마술사는 무대 가장자
리로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관중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손에서 비단 손
수건들을 꺼내 보였다가는 이내 사라지게 했다. 뒤에 놓여 있던 작은 꽃
다발에서 부채와 사발과 화분들을 꺼내는가 하면, 옷소매에서 불길을 뿜
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지금까지 한 것들이 어린애 장난에 불
과하다는 듯 무대 위의 마술 상자를 팽개치듯 치워버리고는 관중들에게
소리쳤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리고 어린이 여러분! 저는 50년간 마술사 노릇
을 했습니다. 저는 불사신과 도사들, 마법사와 은사()들과 사귀며
지내왔소이다. 그래서 신비로운 비밀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최면술만큼
신비로운 것은 없소이다.
마술사는 관중들 가운데서 지원자를 물색했는데, 의심스럽다는 듯이
반문하던 한 뚱뚱한 사내를 앞으로 불러냈다. 마술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있는 그 사내의 두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관중들은 조용해졌다. 팔짱을 끼고 있던 사내의 두 팔이 완전히 풀려 아
래로 떨어졌다.
[이 멍텅구리 같은 촌뜨기!]
마술사는 저주하듯 소리쳤다.
[너는 촌닭으로 태어났어야 했어!]
그러자 사내는 갑자기 양팔을 닭처럼 퍼덕거리며 모이 쪼는 시늉을 하
며 돌아다녔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관중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다른 무대에서는 또 새로운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여러분, 와서 몽고의 장사들을 보십시오! 와서 힘의 경연을 보십시
오!]
사이훙은 사납고 난폭해 보이는 장사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장사
들은 서로 손가락질을 해대면서 뭐가 그리 우스운지 폭소를 터뜨렸다.
그때 그들 중에서 가장 몸집이 큰 거한이 앞으로 나왔다. 붉은 가죽 조
끼와 하얀 팬티만을 입고 큰 장화를 신은 그는 근육을 꿈틀거려 보이면
서 구릿빛 팔과 가슴을 기괴하게 부풀려 보였다.
그는 단단한 철봉을 하나 주워서 엿가락처럼 비틀었다가 다시 펴 보였
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장사는 부러진 누런 앞니를 드
러내면서 의기양양하게 웃더니 조용히 팔을 치켜들었다. 그는 여러 층으
로 쌓아 놓은 한 무더기의 벽돌 앞으로 가서 자세를 잡았다. 기합을 지
르며 머리로 벽돌을 들이받자 벽돌들은 모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사이훙은 힘차게 박수를 치면서 하나 남아있던 사탕을 까서 깨물어 먹
었다. 다음에는 무엇을 구경할까? 사이훙은 잠시 망설였다. 아직 곡예사
들의 공연과 서유기 인형극, 삼국지 공연이 남아 있었다. 안 먹어 본 것
들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훙의 머리를 누군가
가 쥐어박았다. 그는 화를 내며 고개를 돌렸으나, 낯익은 지팡이를 보고
는 얼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 도망가더니 여기 있었구나!]
고모였다.
[아, 고모님도 저 장사들을 보셨나요?]
[사이훙, 말 돌리지 마라. 혼자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아무리 멍청이라도 네가 부잣집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단 말이
다. 귀족 집안의 아이라는 것을 말이야. 건달 패거리들도 있고, 너 같은
아이를 유괴하려는 사람들도 있단 말이다.
사이훙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모를 쳐다보았다.
[좀 얌전히 굴어라, 사이훙. 아마 칼을 가진 사람들은 무섭지 않겠지.
그러나 마귀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고모가 다시 야단쳤다. 사이훙은 고모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고향에
계신 숙부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고모는 그의 표정을 재치있게
간파했다.
[알겠지, 사이훙? 마귀들은 너같이 통통하게 살이 찐 장난꾸러기 아이
들을 기다리면서 그늘 속에 숨어 있단다. 너 같은 아이가 가까이 오면,
마귀들은 아이를 자루에 담아서 동굴에 거꾸로 매달아 놓는단다. 큰 가
마솥에 넣어 요리할 준비가 끝날 때까지 말이야.]
사이훙은 얼른 고모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다행히 아직 낮이었다. 사
이훙은 고모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렇게 순순히 길들여질 사이훙이
아니었다.
[고모님, 저는 축제를 마저 보고 싶어요.]
사이훙은 고모를 애처롭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시간은 많이 있단다, 사이훙. 우리는 여기서 며칠 묵을 거란다.]
[하지만 저는 지금보고 싶은 걸요.]
[할아버지께서 너를 찾으신단다. 돌아가야만 해. 하지만 돌아가는 도
중에 조금은 볼 수 있을 게다.]
[좋아요. 고모님?]
[왜?]
[먹을 게 없는데 뭐 좀 사주시겠어요?]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2. 우연한 만남
다음날, 사이훙은 고모와 함께 있는다는 조건으로 축제의 나머지를 볼
수 있었다. 사찰은 이제 그의 놀이터이자 극장이 되었다. 사이훙은 사찰
에서 만난 새 친구들과 어울려 맛있는 음식과 신나는 구경거리를 끊임없
이 찾아 다녔다.
그러나 타이산의 축제는 종교 행사였다. 축제와 함께 일상적 종교 행
사가 매일 벌어졌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북두무()였다.
북두무는 사찰의 가장 신성한 곳에 설치된 무대에서 49일 동안 공연되
었다. 이 춤의 목적은 인간과 우주를 합치시키려는 것으로 - 이는 도교
의 기본적인 관심사이다 - 북두칠성의 일곱 별들에 살고 있는 성주들을
지상으로 불러오는 춤이었다.
그 일곱 별은 완전한 세계였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신들이 자발적으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도사들
이 북두무를 추며 주문을 외우면 그 신들을 불러올 수 가 있었다. 지상
에 내려온 신들은 인간들을 축복하고 도움을 주었다. 신들이 직접 내려
와 현존해야만 그 축제는 참된 영적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도사들은 몸을 정화하기 위하여 7일간 단식했다. 사찰 중앙 건물 앞에
세 개의 장대와 제단이 세워졌고, 제단에는 향로와 붉은 초, 성화와 등
잔, 공물들이 놓였다. 큰 원이 제단 둘레에 새겨져 있었는데, 원 안에
북두칠성의 모양대로 일곱 개의 점들이 표시되면 비로소 신들을 맞아들
일 준비가 끝나는 것이다.
사이훙이 북두무 의식을 보러 간 날에는 주지 스님이 역경에 나오는
음양 기호와 육효()가 수놓아진 도복을 입고 사찰에서 나왔다. 축제
기간 동안에 왔다갔다하던 도사들은 대부분 낡고 헤어져서 여러번 기운
너덜너덜한 도복을 입고 있었으나, 지위가 높은 도사들은 깨끗한 도복을
입고 있었다. 주지 스님의 긴 머리카락은 검은 천으로 만든 모자 아래
늘어져 있었다. 기다란 소매로 가려진 손에는 축문이 새겨진 야자나무
판과 버드나무로 만든 목검이 들려 있었다. 주지 스님은 10센티 정도 되
는 밑창이 달린 검은 벨벳 신발을 신고 점잖게 제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신성한 원안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제단 앞에서 경배했다.
사람들은 그 춤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서로 밀치며 원둘레에 빙 둘러
섰다. 무술 동작으로 구성된 북두무는 그 자체로 검술이 된다. 주지 스
님은 북두칠성을 표시하는 각각의 점 위에 차례로 섰다. 인간은 감히 신
들을 정면으로 마주볼 수 없기 때문에 나무판을 얼굴 앞에 바짝 대고서
축문을 외운뒤 각각 신들의 이름을 외웠다.
사이훙은 그 춤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사이훙이 신성한
원 속으로 달려들어가 리듬에 맞춰 주지 스님의 비비꼬인 보법을 흉내내
면서 따라 걸었다. 그러자 모여 있던 많은 신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
다.
[사이훙!]
깜짝 놀란 고모가 소리치며 아주 조심스럽게 원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
다. 목발에 의지해서 불안하게 걸어 들어온 고모는 재빨리 사이훙을 원
밖으로 끌어냈다.
[아니,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는 거냐?]
고모는 차갑게 야단쳤다.
[저 원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신성 모독이란 말이다. 처신을 잘하도록
해라. 너는 참 문제아로구나. 차라리 건달들이 너를 잡아갔으면 좋겠
다!]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대는 소리를 무시하고, 고모는 사이훙의 손목을
꽉 잡고 다시 의식을 보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고모님, 저는 잘 보이지 않아요.]
고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이훙은 고모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고모는 사이훙에게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그의 손목을 더 꽉 잡았다. 그것은 그가 고모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사이훙은 순간 우울해졌다. 고모는 정말
화가 난 것일까? 고모는 정말 건달들이 나를 잡아가기를 바라는 것일까?
잠시 뒤 고모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유
쾌해져서 웃고 있었다. 고모는 목발을 잡기 위해 사이훙의 손목을 놓으
면서 그에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고모는 다시 춤을 보
는 일에 정신을 빼앗겼고, 그 틈에 사이훙은 살그머니 빠져나갔다.
백단나무의 진한 향기가 사이훙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찰에 머무르
는 동안에 그 냄새가 항상 났었는데, 오늘은 유달리 냄새가 강한 것 같
았다. 그는 그 향기가 어디서 나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사이훙은 번쩍이는 청동기와로 지붕을 얹은 사찰의 중심 건물에 이르
렀다. 웅장한 자태로 서있는 그 건물은 3층 높이로 지어져 있었다. 단청
으로 장식된 처마에는 용과 불사조 그림들이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짙은 색깔의 나무판들과 붉은 칠을 한 기둥들에 씌어진 금색 글자들이
냉랭하고 어두운 실내로 들어가는 입구를 장식하고 있었다. 실내에서 향
연기가 흘러 나왔다.
사이훙은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 돌문턱 앞에 멈춰섰다. 아이들을 잡
아먹는 마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사이훙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이훙은 마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한번 보고
싶기도 했다. 순례자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틈을 타 용기를 내어 안
으로 들어갔다.
내실에 들어서자 금도금된 제단에 사람 만한 옥황 상제의 상이 놓여
있었으며, 우측으로는 황후, 그리고 좌측에는 벽운공주()의 상
이 있었다. 그들은 화려하게 조각된 커다란 티크나무 탁자 뒤쪽에 세워
져 있었는데, 그 제단에는 필요한 공물들이 모두 진열되어 있었다. 큰
향로와 촛불들, 기름 등잔, 꽃이 가득 꽂힌 도자기 화병, 밥그릇, 차와
술, 온갖 과일과 사탕, 그리고 5방(:동,서,남,북,중앙)과 5원소(
:나무, 흙, 물, 쇠, 불)를 나타내는 청, 황, 흑, 백, 적색의 다섯
가지 약초들. 이것은 지상에서 난 모든 것들이 공물로 바쳐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순례자들이 향로에 향을 사르고 여러 신들 앞에 무릎
을 꿇고 기도하며 경배를 올리는 것은 이러한 정신에서 나온 경의의 표
시였다.
사이훙은 경건한 마음으로 계단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옥황 상제를 경건한 마음으로 올려다보았다. 옥황 상제는 비단으
로 만든 황금빛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왕관 위에 수평을 달린 평평한
판에 꿰어진 13줄의 구슬들이 옥황 상제의 머리 앞뒤로 늘어져 있었다.
옥황 상제는 호랑이 가죽 위에 모셔져 있었으며, 손에는 예전()을
들고 있었다. 질흙으로 빚어 구워낸 옥황 상제의 손과 얼굴은 살아 있는
실물처럼 보였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진짜 사람의 것으로 만들어져 있어
서 예술적으로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사이훙은 상제의 자비로운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조각상이란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옥황 상제는 도교의 신 가운데 최고의 신으로, 모든 신과 우주를 지배
한다. 상제는 하늘의 궁전에 거처하면서 가족과 조종의 신하들에 둘러싸
여 우주의 일들을 결정하고, 필요한 경우엔 악과 맞서 싸우도록 하늘의
군대에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다른 신들과는 달리 옥황 상제의 조상
이나 두상은 일반 가정에 모실 수 없었으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신성
모독으로 간주되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사찰
로 순례를 와야만 했다.
사이훙은 상제 앞에서 엎드려 절한 뒤 황후상 앞으로 갔다. 황후의 얼
굴은 장밋빛 홍조를 띄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귀한 보석으로 만든 비녀로
잘 단장되어 있었다. 황후는 하늘의 과수원에서 연회를 베풀어 신들과
천도를 먹고 있었다. 천도는 3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 하늘의 복숭아
로, 한 번 깨물어 먹을 때마다 수명이 만 년씩 연장된다는 신들의 과일
이었다.
마지막으로 사이훙은 벽운 공주에게 예배했다. 상제의 따님인 벽운 공
주는 비단옷을 입고 날개를 펴고 있는 세 마리의 새를 묘사한 왕관을 쓰
고 있었다. 벽운 공주는 부녀자들을 보호하는 여신이었기 때문에 자식을
얻고 싶은 여성들은 벽운 공주에게 소원을 빌었다.
병을 고치고 싶다거나, 풍년을 바라거나, 또는 아기를 갖고 싶어하는
신도들은 모두 타이산의 가파른 산길을 올라 여기까지 와야만 했다. 그
들은 공물을 바치고 소원을 빌면서 은총을 기대했다.
사이훙은 특별히 바라는 건 없었지만, 독실한 신도들 틈에 끼여서 기
도하는 흉내를 내고 참배를 마쳤다.
사이훙은 제단을 떠나려고 막 일어서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다.
가운데 키가 큰 사람은 길게 수염을 길러 자상히 보이는 도교의 장로였
다. 은처럼 하얀 머리칼을 상투 틀어 비녀를 꽂은 그의 뒤에는 두 명의
젊은 시승이 따르고 있었는데, 나이 어린 그의 제자들 같았다. 회색 옷
을 입고 상투를 튼 그들의 얼굴을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사이훙은
그들에게로 가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절을 했다.
갑자기 부드럽고 흥겨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사이훙은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근처에는 제단 앞에 서 있던 순례자들밖에
없었다. 그때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사이훙은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진 사이훙은 그 늙은이가 자기를 속인
것에 화가 나 그를 걷어차려고 재빨리 일어섰다. 두 명의 시승이 사이훙
을 제지하려 앞으로 나섰다. 사이훙은 떼를 쓰면서 그들을 계속 발로 걷
어차며 몸부림쳤다.
문간에서 요란한 비명 소리가 날 때까지 신도들은 그 장면을 보지 못
했다. 사이훙의 고모는 사이훙이 유괴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내를 가
로질러 달려왔다. 앞에 있는 사람들이 도사와 두 시승이라는 건 전혀 중
요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아이를 유괴해서 노예로 팔아먹
거나 몸값을 요구하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도와줘요! 포졸! 포졸!]
고모는 사이훙을 구해 내려고 소리치며 그 도사를 때리려고 목발을 들
어올렸다.
하지만 그 도사는 그저 유쾌하게 웃기만 하다가 긴 소매를 들어 고모
의 얼굴 앞에서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갑자기 고모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면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도사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사이훙에게로 돌아왔다. 사
이훙은 그가 축제에서 공연하던 마술사인지, 마귀인지, 아니면 진짜 도
사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자기도 고모처럼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았
다. 한 순간, 도사와 사이훙 사이에 신비로운 영적 대화가 이루어졌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이훙은 깊숙한 내면에
서 조용히 불타오르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사이훙은 천천히 상황을 의식하게 되었다. 깜박이는 노란 촛불 아래
천천히 혈색을 되찾아 가는 고모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
도 없었다는 듯, 황홀경에서 깨어나서는 사이훙의 손을 잡고 그곳을 빠
져 나왔다.
사이훙과 고모가 거처에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별채의 한
쪽에서 차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사이훙의 고모는 부모님과 한쪽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손님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 손님들은 아까 보았
던 도사와 시승들이었다.
할아버지는 쩔뚝거리며 걸어오는 고모를 조용히 불렀다.
[메이홍, 얘기는 모두 들었다.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이분은 산
시성 근방의 화산파 장문인이시다. 내 오랜 지우이자 나의 정신적 스승
이시지.]
할아버지는 그 도사를 향해 돌아섰다.
[대사님, 만약 제 딸이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제가 대신 사과
드리겠습니다.]
메이홍은 곧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대사는 메이홍을 다시 일으켜 세
웠다.
[그저 사소한 사건이었을 뿐이오.]
대사는 웃으며 사이훙에게로 돌아서서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대
사는 매우 사려 깊은 눈길로 사이훙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관 선생.]
[네, 대사님.]
[이 아이가 당신의 손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이 아이의 이마에 푸른 별이 하나 있군요. 이 표시는 대단히 특별한
것이오.]
사이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도 없었
으며, 할아버지가 그 도사에게 이례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도사의 너털웃음과 자상한 눈빛에는 사이훙도 호
감을 느꼈다.
가족들은 대사의 말이 이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잠깐 뒤 대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아이의 정신은 먼지로 뒤덮인 속세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
다. 그는 자발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한 가지 임
무가 주어지죠. 만약 이 아이가 자신의 과업을 완성하려고 한다면 오랜
시간 훈련을 받아야 할 겁니다.]
[대사님, 당신께서 그 훈련을 맡아 주시겠습니까?]
할아버지가 말했다.
대사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맑은 두 눈은 붉게 타오르는 석양
의 빛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었다.
[글쎄요.......나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출가한 사람입니다. 이제 와서 내가 제자를, 특히 저렇게 어린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어려운 일입니다.]
사이훙은 다음날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다. 할아버지를 따라 타
이산에서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일출봉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 봉우리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했다.
산동성은 아직 어둠과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광포하게 소용돌이치는
구름들이 창백한 빛살을 받아 조금씩 밝아져 갔다. 창백한 빛은 곧 붉어
져 막 밤을 지난 눈부신 태양을 불태우고 구름까지 붉게 물들였다.
사이훙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축제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
새겨 보았다. 야외극, 도교 의식, 그리고 어제 만난 대사....... 타이산
에서 일어난 축제의 풍요로운 이미지들은 떠오르고 있는 태양의 열기 속
에서 하나로 녹아들고 있었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3. 관가보
산시성에 위치한 관가보()는 60명의 대가족이 사는 씨족사회의
중심지였다. 관가보는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250만평에 이르는
숲과 농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주위의 풍경과 조화를 이룬 고전적인 중
국식 건축물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하나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관가보는 관씨 집안이 무사 계급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씨 집안이 답답하거나 유쾌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무사 집안이면서도 정치가와 학자로 활동했으며, 예술적인 풍취까지 갖
추고 있었다. 관가보는 하나의 성역()이었고 조용한 나무 그늘과 졸
졸 흐르는 시냇물, 아름다운 꽂들이 피어나는 장원()이었다. 그곳에
는 나무와 기와, 동과 금등으로 솜씨 좋게 만든 누각들이 있었고, 우아
한 격자무늬 창문이 난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주택들의 내부에는
명품으로 칭찬 받는 가구들과 값비싼 골동품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관씨 일가는 4대가 넘게 이 관가보에서 살아왔다. 고색 창연한 관가보
의 구조는 대단히 기묘했다. 성은 산기슭을 돌면서 뱀처럼 구불구불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한쪽 벽과, 강철못이 박힌 대문 하나만이 드러난
전략적 이점도 돋보였지만, 도교의 풍수지리에 따라 설계된 관가보의 구
조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 관가보를 세웠던 관씨 집안의 옛 어른이
도사에게 성의 위치와 외형적 모습을 결정해 달라고 요청했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바람과 물과 땅, 그리고 우주의 힘들을 고려하여 위치와
방향이 서로 주고받는 복잡한 영향들을 계산하는 지관()의 조언에
따라 주택을 건축한다. 관씨 집안은 가문과 우주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
록 고심했으며, 기의 흐름을 따름으로써 집안이 번영할 수 있도록 하였
다. 관가보의 자리를 잡아 둔 도사는 용의 형상을 이루는 산의 가장자리
가 가장 이상적인 장소라고 말했었다.
그리하여 관씨 집안의 60명의 식구들과 백여 명의 하인들은, 폭포가
개천이 되어 가로질러 흐르고, 하늘을 찌를 듯한 지붕들이 연이어 보이
는 요새에서 살게 되었다.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지역은 그 자체가 천연
의 요새였으며, 사이훙의 할아버지와 그의 직계 가족들이 그곳에 모여
살았다. 친척들은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서 살았으며, 하인들과 마
구간, 강당과 연무실()은 용의 등과 배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
다. 청기와를 얹은 관가보의 지붕들은 가까이서 보면 용의 비늘을 연상
시켰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독특한 건축술과 푸른 나무들에 가려 관가
보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청나라가 멸망하던 1911년, 할아버지는 정계와 학계, 무림에서 은퇴하
여 성벽으로 둘러싸인 관가보에서 생활하였다. 한때 황후의 섭정체제 아
래서 문부성 장관을 지냈으며, 사회에서 존경받는 학자이자 무림의 고수
였던 할아버지가 이제 고독을 벗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은퇴한 뒤 할아
버지는 우아한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평소 시화를 즐기고 도교의
경전 공부를 낙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부유하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귀족 가문의 어른이었기 때문에 세상일과 완전히 떨
어질 수 가 없었다. 비록 관가보안에 은둔해 살았지만 할아버지는 언제
나 적에게 둘러 싸여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책임질 일들도 많았기 때문
에 중국 사회의 혼란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을 수 없었다.
관가보는 거의 정기적으로 여러 도적과 적들, 암살자들의 공격을 받았
다. 1920년대 까지 중국은 아직도 혼란스러운 무법 천지였다. 엄청난 무
리의 산적들이 정기적으로 마을과 부유한 농가를 습격했다. 관가보 사람
들은 무사로 구성된 악당들을 싸워 물리쳐야만 했기 때문에 모두들 무술
을 익혀야 했다. 그 당시엔 총이 널리 사용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런 개인적인 재주가 생존을 보장해 주었다.
당시에는 권력자들과 가문들 사이의 적대관계가 흔한 일이었으며, 해
결이 안 된 문제는 음모로 이어지곤 했다. 할아버지는 은퇴한 몸이었지
만, 공직자 생활 당시 백성을 보호하던 청렴결백한 관리였기 때문에, 아
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부와 권력과 명성을 놓
고 두 가문이 경쟁할 때면, 통상적으로 암살을 계획하여 우위를 차지하
려고 하였다.
관씨 집안은 약간 특이한 이유때문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가지고 있었
다. 중국에는 중원 9대 문파로 대표되는 [무림()]이 있었는데, 관씨
가문은 무사집안으로서 무림에서 쟁쟁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무림에는
나름대로 규칙과 예법이 있었는데, 그 규칙들중의 하나는 일 대 일의 대
결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무림의 무인들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
기 위해서도 서로 도전하고 싸웠다. 자신이 쓰러뜨린 상대가 많을수록
무인으로서의 위신이 높아졌기 때문에 사이훙의 할아버지 같은 사람은
좋은 목표가 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신체적 모멸보다도 중국사회의 혼란상을 더 고통스
럽게 받아들였다. 경호원들과 하인들이 꽤 있었으나, 할아버지는 항상
무술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적 공격은 그가 간
단히 눌러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내부의 사회적 부패, 근
대화의 물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내전, 군벌들
의 횡포, 그리고 젊은이들의 가치관의 변화 같은 일련의 사회적, 시대적
문제들은 무시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큰 것이었고, 개인이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일이었다.
그는 관가보의 문을 잠가 그 같은 문제들을 잊어버리려고 했지만, 마
지막 문제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성벽은 관가보 내부의 젊은 세대
에 의해 무너져 가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대립하던 사람은 바로 그의 아
들이며 사이훙의 아버지였던 관 완홍이었다.
관 완홍은 교양 있는 인품을 갖춘 그의 부친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
다. 격렬하고 무모한 성격에다 지나치게 야망이 큰 그는 중국 군부의 장
군이었다. 그는 오로지 부귀와 권력과 명성만을 추구했다. 완홍은 시화
에 대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으나 부친이 그토록 열심히 수집하는 전통
시화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근대 중국 사회
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질과 잘 맞는 군인이 되었
으며, 그것을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할아버지 자신은 무인이었으나 완홍이 군대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시 중국인들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무사가 되는
것과 군인이 되는 것이 반드시 같은 일은 아니었다. 무사는 무술적 기예
를 완벽하게 닦아 자기 완성을 이루는 데 힘썼을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
의 기사처럼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지키는 정의의 옹호자였다. 무사의
유일한 관심은 완전한 무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며 정의를 위해 싸우
는 영웅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나 군인의 길은 그렇지 않았다. 군인은 도덕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학살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군인은 자기와 싸울 만한
상대를 찾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무분별하게 살상하였
다. 자기 자신의 숭고한 원칙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막강
한 권력을 가진 지휘자의 수중에서 조종되는 도구일 뿐이다. 할아버지에
게 군인이란 용병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권력자의 꼭두각시였고, 삼류
정치인이자 청부 살인 업자였다.
아버지와 아들은 수년 동안 그렇게 싸웠다. 그 긴장감은 갈수록 더욱
심해져 갔고 마침내는 서로 만날 때마다 말다툼을 하게되었다.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의 갈등은 관가보 안의 거주지를 재배치하는 물리적 조치까
지 가져왔다. 할아버지는 완홍과 그의 가족을 할아버지의 처소와 멀리
떨어진 별채로 쫓아 버렸으며, 군복을 입거나 총을 휴대한 채로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것은 낡음과 새로움, 고전과 현대
사이에 일어난 갈등이었다. 어쨌든 완홍은 아직까지는 부친에게 복종하
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가문의 최고 어른이었으
므로, 완홍은 부친 앞에 나타날 때는 언제나 전통적인 복장을 갖추었다.
그러나 완홍이 보여 주는 진보적 세계는 소리 없이 중국적 이상들을 잠
식해 가고 있었다.
사이훙은 이 두 사람의 갈등 속에서 자라야 했다. 완홍은 사이훙을 자
신의 뜻대로 키우려고 했다. 사이훙의 모친은 미술과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으나, 남편의 뜻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이훙이 학문을
닦기를 원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가 아버지처럼 군대에서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 네 살 때부터 사이훙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부모의 압력은 강력했지만 사이훙은 순종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부모는 사이훙이 고집세고 다루기 어려운 아이라고 단정해 버
렸다.
사이훙은 할아버지의 생활방식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을 알
고 있었던 할아버지는 사이훙을 눈여겨보았다. 어느 날, 사이훙이 술에
만취한 아버지에게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자 할아버지는 기회를 포착
하고 선제권을 잡았다. 가문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할아버지는 사이훙을 데려다가 자신의 거처에서 살게 하였다. 사이훙은
가끔 부모님에게로 가서 놀다 오기도 했지만, 그때부터 계속해서 할아버
지와 같이 살게 되었다. 사이훙이 일곱 살 되던 해부터 할아버지가 그를
키우게 된 것이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4. 장난꾸러기 학생
[작은 주인님. 선생님을 뵈러 가야 할 시간에 늦겠는데요.]
바위로 꾸며진 정원에 있던 사이훙은 이 말에 온몸이 굳었다. 사이훙
은 종복 비운이를 향해 돌아섰다. 비운이는 사이훙의 친구이자 놀이 동
무인 열두 살 난 아이다. 사이훙과 비운이는 관가보의 외진 곳을 찾아
다니며 놀기를 좋아했다.
만약 할아버지가 아시면 얼마나 야단을 치실까?
할아버지는 동남아산 마이너 새를 대나무 새장에 넣고 사이훙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마당을 산책했다. 할아버지는 검은색의 우아한 깃
털을 가진 마이너 새를 두 마리 갖고 있었으며, 다른 중국 신사들처럼
아침이면 새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곤 했다. 새들이 신선한 공기를 마시
며, 야생 새들의 노랫소리를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섭섭하
게도, 그 마이너 새들이 잘하는 말은 [배고파! 배고파!] 라는 말처럼 들
렸다.
산책을 하던 할아버지는 사이훙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한 손엔
새장을 높이 들고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매부리코에 하얀 머리칼을 길
게 땋아 늘어뜨린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의 성품은 손에서
도 풍겨 나왔다.
할아버지의 손은 강하고 묵직하며 굵은 마디에 독수리 발톱 같은 손톱
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손은 응조권법을 익힌 무술가의 표정이었다.
[사이훙, 선생님께 가거라.]
할아버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네, 할아버지.]
[그리고 비운아.]
[네, 보주()님.]
[사이훙이 선생님께 가는지 따라가서 알아보거라.]
깡마른 사이훙의 늙은 선생님은 반색을 하며 제자를 반갑게 맞았다.
그 선생님에겐 자신이 높이 받들던 고전을 이 아이를 가르치며 다시 공
부할 기회를 갖는다는 게 대단히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도 사이훙은 고전강의나 그 선생님에게서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했다.
한 마디로 연로하신 그 선생님은 사이훙이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지 못
했다. 대부분이 학자가 아니라 무사였던 집안 식구들과 비교해 보면, 노
선생님은 신체에 대해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의 작은 체구는 의복
을 걸치기 위한 옷걸이 정도로, 혹은 머리를 지탱하기 위한 골격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정말 순수한 의미로 그저[존재]하고 있을 뿐이었
다.
사이훙의 선생님은 해골의 윤곽이 그래도 드러날 정도로 얇은 살가죽
에 핼쑥하고 주름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다 빠져 버린 희
끗희끗한 머리칼은 변발이었고, 뾰족한 턱에는 얼마 안 되는 턱수염이
힘없이 달려 있었다. 선생님이 짓는 얼굴 표현 중에 가장 정열적인 것은
두 눈을 둥그렇게 떠보이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철테 안경을 끼고 있었
는데, 푹 꺼져 내려간 코 끝에 걸려 있기가 어려운 듯 자꾸만 아래로 흘
러내렸다.
단조로운 일과로 매일 아침이 시작되었다. 강의는 언제나 경문들을 암
송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필기 시험과 서예로 이어졌다. 선생님이 가진
유일한 지식의 원천은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였다. 고전은 어린
아이가 이해하기 쉬운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은 도덕을 함양하는
군자의 덕목들과, 사회와 가정의 위계질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동
들, 그리고 효도를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사이훙에게 강조하면서, 쉬운
문장들을 선택해 가르쳐 주었다.
강의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루했을 뿐만 아니라, 사이훙의 마음속
에 경멸까지 불러 일으켰다.
선생님의 강의 중에 하나를 예로 들어 보면, 어떤 아이는 부모님이 모
기장속에서도 매일 밤마다 모기에게 물린다는 것을 알고는 먼저 모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아이는 모기를 몇 마리 잡기는 했지만 모기가 너무
나 많아서 다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는 모기들이 부모님을 물지
않도록 자신의 피를 충분히 빨아먹게 했다는 것이다. 아이의 희생 덕택
에 부모님은 편안히 잠을 잘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이훙은 그걸 바보 같은 짓이라고 여겼다. 그 아이는 지나치
게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이훙은 그런 예들은 모두 무시
해 버렸다.
정작 사이훙의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 선생님이 가르쳤던 이
같은 새부사항들이 아니라, 유교의 가치관에 따른 조부모님들의 인격적
태도였다.
사이훙은 강의를 듣고 경문을 암송하는 일보다는 서예를 더 좋아했다.
비록 고전을 다시 한번 복습해야 했고, 확실하게 암송하기 위해서 반복
해서 써야 했지만, 사이훙은 글씨 쓰는 것을 그림 그리는 것처럼 생각했
다. 먹물을 흠뻑 머금은 붓을 휘드르는 것은 일종의 미술적 탐험이었던
것이다.
늙은 선생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사이훙에 붓 쥐는 법을 가르쳐 주었
다. 손에 힘을 빼고 손 안에 작은 호두 하나가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남
겨 둔 채 붓을 수직으로 가볍게 잡아야 했다. 먼저 먹물에 붓을 담가 적
신 다음 벼루에 붓끝을 다듬은 뒤 수직으로 세워서 써야 했다. 글자는
한 획 한 획씩 써야 하며 각각의 획은 순서에 따라 정확한 위치에 비례
를 맞춰 가며 긋는다. 운필에는 일정한 속도가 가장 중요했다. 너무 빨
리 붓을 움직이면 먹이 골고루 종이에 묻혀지지 않고 붓이 그냥 끌려왔
다. 반대로 운필의 속도가 너무 느리면 먹이 변져 종이가 부풀어 올랐
다.
서예를 배우는 시간이면 사이훙은 항상 사건을 일으키고 싶었다. 그
시간에 늙은 선생님은 자주 잠이 들었다. 오늘도 평상시처럼 노선생님은
무슨 생각에 잠긴 듯 천장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의 명상은 낮잠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사이훙은 24개의 획으로 된 복잡한 글자를 다 썼다. 늙은 선생님이 잠
들때마다 사이훙은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놀러 나갈 것인가 갈
등에 빠지곤 했다.
중국의 전통에서 학습을 끝내고자 할 때는 예의와 형식을 갖추고 헛기
침을 해서 선생님을 깨워야 했다. 그러나 사이훙은 오늘따라 유난히 강
한 유혹을 느꼈다.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자 유혹이 점점 더 커졌다. 기회는 곧 행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조심스럽게 선생님 뒤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늙은 학자의 변발이
사이훙을 유혹하듯 축 늘어져 있었다. 사이훙은 그 변발을 살그머니 붙
잡아서 의자에 묶었다.
문간으로 가서 바깥을 살펴보았따. 비운이가 밖에서 인내심 있게 기다
리고 있었다.
[노선생님, 노선생님!]
사이훙은 문간에서 선생님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선생님은 성인들을 만나고 계신 게 틀림없어.]
사이훙은 비운에게 속삭이고는 돌아와서 두 손을 입에다 대고 다시 한
번 선생님을 불러 보았다.
늙은 선생님의 눈꺼풀이 망설이듯 껌벅거렸다. 하지만 곧 제자의 좌석
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한 그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노선생님!]
사이훙과 비운은 노한 늙은 선생님의 호통을 들으면서도 계속 선생님
을 부르며 정원으로 뛰어나갔다.
[작은 주인님, 벌 받는 것이 겁나지 않으세요? 선생님께서 분명히 할
머님께 말씀드릴 텐데요.]
비운이 사이훙과 함께 낄낄거리다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사이훙은 사탕을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면서 장난꾸러기처
럼 웃었다.
[내가 할아버지 옆에 있는 한 할머니는 나를 때리시지 못해.]
그날 하루는 놀이와 관가보의 재미난 곳을 돌아다니는 일로 다 지나갔
다. 두 소년은 딱지치기를 하고, 소녀들을 놀려먹고, 군신인 관우의 신
위를 모신 사당에서 숨바꼭질을 하였다. 사이훙과 비운은 숨바꼭질을 하
며 관우 신상과 조상님들의 축문이 새겨진 위패들을 모두 밀쳐 넘어뜨릴
뻔하기도 했다.
사이훙의 애완동물인 팬더 새끼에게 먹이를 주고, 할머니의 애마인 흰
갈기를 가진 검은 색 말도 구경했다.
정신없이 뛰놀고 웃던 그들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가다듬으며 할머니
의 연무장앞 돌층계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
사이훙이 물었다.
[할머님께서 여자들을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한번 보자. 우리도 몇 가지 무예들을 배울 수 있을 거야.]
비운은 반대했다. 사이훙에게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 그
의 임무였다. 의기양양하게 공자님의 말씀을 외운뒤 비운은 위엄있게 말
했다.
[그것은 허락되지 않은 일입니다, 작은 주인님.]
사이훙은 비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마치 안경을 끼고 수
염을 기른 말라 비틀어진 늙은 학자처럼 보였다.
[할머님께서 방문을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작은 주인님.]
비운은 평탄한 어조로 낮게 말했다.
사이훙은 웃었다.
[물론 그럴테지. 그러나 할머니께서 눈치채지 못하신다면 괜찮지 않
아?]
비운의 공자님 같은 표정은 곧 놀란 어린아이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군요, 작은 주인님.]
사이훙은 웃었다. 비운의 학자적인 벽을 조금이나마 깨뜨려 버린 것이
다.
그러나 아직도 얄팍한 학자적 태도가 남아 있었다.
[저 지붕 위로 올라가자.]
사이훙은 장난꾸러기답게 말했다.
[작은 주인님!]
사이훙은 <저 샌님 보게나. 그래도 어린 아이는 어린아이로구나.>하고
생각했다.
연무실 정원으로 통하는 문들은 잠겨 있었고 격자무늬의 창틀에 끼워
져 있는 유리창에는 성에가 끼어 있었다. 지붕 꼭대기로 올라가 기와를
들어낸 뒤 그 틈새로 훔쳐보는 수 밖에 없었다.
사이훙은 근처에 있는 나무에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비운은 금지
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판단과, 사이훙이 가는 곳엔 어디든 따라가
그에게 변고가 생기지 않도록 돌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갈등
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비운은 사이훙을 따라 낮은 행랑 지붕을 조심스럽게 가로
질러 높은 지붕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의 오래된 기왓장들은 그리 단단
하지 못했고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붕 꼭대기의 열
지어 있는 기왓장들을 붙잡고서 약간 평평한 곳으로 움직여 갔다. 비운
은 떨고 있었으나, 사이훙은 지붕의 높이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들은 지붕 꼭대기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몇 장의 기와를 들어 냈다.
할머니는 대타()를 연습하고 있는 여자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재상의 따님이었던 할머니는 쓰촨성()의 어메이산()에 있
는 불교사찰의 비구니로부터 무술을 배웠다. 중국 역사를 돌이켜 볼때,
고립된 산간에 살며 수도하는 불교의 승려들은 산적과 맹수로부터 자신
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무술 동작들에 형이상학적
인 해석을 덧붙여서 절묘한 무예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독특한 무예 기법들을 문파의 전통으로 전수
하면서 실용적 체험을 쌓았으며, 드물게는 속가의 제자들을 받아들여 기
법을 전수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절에서 지내면서 권법뿐 아니라 적을
붙잡아 뼈를 비틀어 꺾는 기술인 [금나수법()], 그리고 공중으
로 솟구쳐 몸을 유연하게 하여 마음대로 몸을 가볍게 할 수 있는 [경공
()]과 병기술까지도 모두 통달한 분이었다.
할머니의 기술은 여성에게서 여성에게로 전해지면서 발전된 것이었다.
어메이산의 비구니들은 여성의 약한 저항력과 유연함을 항상 염두에
두고 신체 내부의 힘을 이용하는 독특한 훈련 방법을 개발해 냈다. 그
방법들은 여성의 신체 내부의 화학적 특성에 입각하여 정교한 내공법(
)으로 발전했다.
남자들은 절대로 볼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는 이 훈련을 받은 여성은
강철 같은힘과 기예를 지니게 되어 아무 두려움이 없이 어떤 난폭한 공
격자와도 맞서 싸울 수 있었다.
할머니의 병기는 여성적 특징을 보여 주는 것이었지만, 대단히 무서운
것이었다. 할머니의 병기는 23개의 마디로 된 긴 날가죽 채찍이었다. 채
찍의 마디마디에는 작고 둥그런 칼날이 달려 있었으며, 그 칼날들은 서
로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즐겨 사용하는 또 다른 병기는 할머니의 허리에 감긴 띠였
다.
강철선을 섬유처럼 짠 것으로, 양쪽 끝에는 쇠로 만든 공이 달려 있었
다. 매우 유연하여 언제든 사용할 수 있었으며, 조르거나 채찍처럼 후려
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머리 장식은 표창으로 사용
할 수 있었고, 예리한 단검은 소매 속에 숨겨져 있었다.
사이훙은 훈련생들의 대부분이 소녀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는 한밤
중에 하녀들이 침입자들과 격투 끝에 강철 섬유 끈으로 그들의 목을 졸
라 죽였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었다. 이제 그는 권법형의 연무와 대타,
모래주머니를 차거나 나무 인형들을 가지고 연습하는 소녀들의 훈련 방
식을 상세하게 볼 수 있었다.
연무실 한가운데에는 경공을 공부하는 훈련 기구가 있었다. 작은 질그
릇 밥공기들을 5개씩 묶어서 이층으로 쌓아 놓은 것들로, 모두 108개가
있었다. 그 각각의 훈련 기구들은 4개의 밥공기를 바닥에 사각형 모양으
로 뒤집어 놓고, 그 위에 1개의 밥공기를 엎어 놓은 형상을 하고 있었
다. 그 109개의 그릇 묶음은 한 걸음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전체
적으로 보면 연무실 바닥에 꽃송이가 크게 그려져 있는 것 같았다.
두 명의 소녀가 경공을 연마하기 위해 그 밥공기 기둥 위에 올라가서
걸음을 내딛거나 뛰어오르면서 기예를 겨루고 있었다. 작은 밥공기 위를
밟아야 했으므로, 서로 몸의 균형을 맞추느라 다리에 한껏 힘을 주고 있
었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급소만을 노리며 공격과 수비를 주거니 받거니 하
고 있었따.
두 사람 모두 경공 실력이 대단했기 때문에, 밥공기들의 위치를 흐트
러뜨리거나 깨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한순간 실수를 저지르자 연무실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던 할머니는 대나무 회초리를 휘두르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5미터가 넘는 거리를 단숨에 날아가 크게 호통을 쳤다.
수련이 끝나자 수련생들은 모두 해산했다. 사이훙은 할머니의 연무 광
경을 구경하기 위해 열심히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가 버렸다. 할머니가 연습하는 것은 누구
도 보아서는 안되었다.
저녁이 되자 사이훙은 할아버지가 머무르는 누각으로 갔다. 어스푸레
하던 초저녁의 하늘은 곧 진한 암청색으로 물들며 점점 암흑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점점 커져 가는 달 주위에는 분무기로 뿜어 놓은 듯 별들이 점점이 박
혀있었다. 밤공기는 쌀쌀했고, 잔잔한 바람은 노랗게 물든 단풍잎을 조
용히 흔들고 있었다.
호수 가운데에는 연꽃으로 뒤덮인 작은 섬이 있었다. 거기에는 경치를
감상하며 휴식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정자가 있었다. 붉은 칠을 한 나
무 기둥에 첨탑이 있는 기와 건물로, 창문은 없이 창틀만을 내놓은 정자
였다. 관가보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건물의 윤곽도 알아볼 수 없을 정
도로 희미했다. 정자 안에는 등불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사이훙은 깜박이는 등불 속에서 홀로 정자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고
있었다.
할머니 옆에는 비파가 놓여 있었다. 혼자 앉을 만한 좁은 공간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사람처럼 보였다. 할머니의 짙은
갈색 비단옷에는 거북이와 낙엽들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주위 배경과 메
아리처럼 잘 조화되고 있었다. 할머니는 일과에서 벗어나 조용히 휴식을
취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윽고 할머니는 상아로 깎아
만든 듯한 그 고운 손으로 조용히 비파를 들었다.
할머니는 악기의 현을 손 끝으로 퉁겨 보며 음을 조절했다. 이어서 할
머니의 노랫소리가 조용한 정원의 밤공기를 흔들었다. 날카롭게 끊는 짧
은 음들이 단검처럼 밤공기를 찢는가 하면 낮고 부드러운 선율이 호수의
수면 위로 잔잔히 퍼져 나갔다. 끝날 때는 현 하나가 곡조의 끝을 알리
듯 길게 떨리며 여운을 남겼다.
할아버지는 자택의 서재에서 소동파의 얇은 시집을 읽고 있었따. 마침
비파의 곡조는 시의 운율과 딱 들어 맞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평화로웠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든간에, 저녁에는 조용히
홀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때로 아내와 시를 짓기도 하
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썼다. 무예에 관한 지식을 서로 교환하기도
하고, 같이 책을 읽기도 했다. 무슨일을 하든 그는 아내와 손자와 함께
하는 시간을 무척이나 귀중하게 여겼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옆에 앉아 있는 사이훙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해주세요, 할아버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으냐?]
사이훙은 할아버지의 손을 바라보면서 [혈창()]을 연무하던 할아
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혈창은 할아버지가 스스로 창안해 낸 창술이었
다.
[백미도인()에 대해서 듣고 싶어요.]
사이훙은 재빨리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웃으시면서 책을 내려놓았다.
[사이훙, 잘 들어 보아라. 지난번엔 하얀 눈썹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백미도인에 관해서 막 이야기를 꺼냈을 뿐이었단다. 그는 훌륭한 도사였
다.
휼륭한 내공을 몸에 지녔기 때문에 주먹이나 병기로는 그의 몸을 상하
게 할 수가 없었지. 그는 또한 독특한 권법을 창안해 냈는데, 그것은 철
학적 사상에 바탕을 둔것도 아니었고 동물의 동작을 본떠서 만든 것도
아니었단다. 그의 무술은 인간의 동작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것이었지.
백미는 진정으로 세상을 떠나 출가한 사람이었으나 세상은 그를 가만
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가 어디를 가건, 사람들이 그를 쫑아갔지. 그
이유는 모두 백미 도인이 갖고 있는 무학()에 관한 지식 때문이었단
다. 한 무리는 청조의 통치자들이었고, 또 다른 무리는 그 청조를 무너
뜨리려는 모반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백미를 자기편에 두고 그에게 무
술을 배우려고하였지. 양편 모두 그에게 자기 편에 들어오도록 협박을
가했고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백미는 그 어느 편에도 관심이 없었지. 자존심과 신념을 가지고 있던
그는 마침내 자금성을 직접 공격함으로써 권력자들의 압력에 정면으로
맞섰단다.
백미는 72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황제의 자금성을 기습 공격했다. 그러
나 결과는 참패로 끝났지. 미리 정보를 입수한 황제의 친위대가 매복해
있다가 그들을 함정에 몰아넣은 것이다.
하지만 현명한 황제는 백미와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에게 복종한다면
사면해 주겠다고 말했지. 거기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리하여 백미
는 황제의 개인 수행원이 되었단다.
황제는 자기가 암살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단다. 왜냐
하면 그 자신이 뛰어난 무사였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조종술이 매우 뛰
어났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백미보다도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을 궁 안에 많이 거느리
고 있었단다. 그들 중에는 외국인들도 많았는데, 티베트와 페르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한편, 모반자들은 청조를 전복시킬 계획을 짜고 소림사()에 숨
어 있었단다. 승려로 변장하고 소림사에서 무술을 닦고 있던 그들은 기
회만 노리고 있었지. 그들은 모두 뛰어난 무사였기 때문에 황제는 그들
은 모두 섬멸하기로 작정했단다.
황제는 백미와 황제의 친위대를 소림사로 보냈지. 그리하여 소림사의
주지는 백미와의 대결에서 패하여 목숨을 잃었고, 소림사는 불타고 거의
모든 승려들이 살해되었단다.
그때 살아 남은 승려가 둘 있었는데, 소림 백학권법()의 사범
과 후권()의 사범이었다. 그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 30년간 무공을
연마한 뒤 백미를 추적했단다. 두 승려는 무공을 쌓으면서 백미에게 한
가지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단다. 백미의 갑옷 같은 신체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지. 그러나 그 문이 있는곳은 사람마다 다르단다.
결투가 벌어졌을 때 두 승려는 그 문을 발견할 수가 없었단다. 백미를
협공해 사타구니를 걷어찼지만 백미는 음낭을 하복부 속으로 빨아들이는
흠음법()이라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 백미의 눈을 찔러 봤지만
그의 눈꺼풀은 마치 강철처럼 단단했다. 그러는 동안에 백미는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지. 그 두 명의 고수들은 심한 부상을 당
해 피를 토하고 있었다.
마지막 필사적인 공격에서 후권사는 백학권사가 공중으로 높이 뛰어올
라 솟구칠 수 있도록 그는 받쳐 주었지. 백학권사는 내려오며 백미의 정
수리를 힘차게 내려쳤다. 그러자 백미의 방어망은 사라졌다. 그곳이 백
미의 급소였던 거지. 그리하여 세 사람은 용호상박의 결전을 벌였다.
백미는 아직 그 두사람을 물리칠 정도의 여력은 충분했기 때문에 용케
도망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며칠 뒤에 죽고 말았단다. 그 소림사
의 두 고승들 역시 중상을 입었지. 백미가 그들의 육체를 못쓰도록 망가
뜨려 놓았던 거지. 그들은 죽는 날까지 10년간을 침대에 누워 고통을 받
으며 살아야만 했단다.]
사이훙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정신을 집중해서 듣고 있
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백미 도인처럼 무림의 영웅이 되고 싶어요.]
할아버지는 사이훙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이훙, 인생에는 그런 것들보다도 가치 있는 일들이 참으로 많단다.
너는 단순하게 무사나 군인이 되겠다고 결정하면 안 된다. 진정한 영웅
이 되려면 먼저 교양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단다. 너는 반드시 도()를
배워야 한다. 명예라든가 행운은 다 팔자가 정해 놓은 것이란다. 권모술
수나 부리느 마음씨를 어디다 쓸 수 있겠느냐? 언제나 진리를 찾고, 자
신의 원칙을 준수하며, 위엄을 잃지 말도록 해야 한다.
도를 닦아라. 물을 역류해 가려 하지 말아라. 물의 흐름을 타며 헤엄
쳐야만 재난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모두 팔자대로 살아야 한
다는 것이 이 험한 세상의 생리란다. 때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싶어도
반대로 서쪽으로 휩쓸려 갈 수도 있고, 북쪽으로 가고 싶어도 남쪽으로
밀려갈 수도 있는 것이란다. 선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지. 이 진리를
찾는 것이 곧 도란다. 길이 곧 도인 것이지.
도는 우주의 흐름이며, 신비로운 것이다. 그것은 평형을 뜻하는 데,
평형 상태란 깨지기 쉬운 것이란다. 악에 의해 방해 받을 수도 있는 것
이지. 악은 우리가 때로 머리를 맞대고 싸워 이겨야만 하는 것이다. 악
은 반드시 파멸되어야만 하는 것이고, 도를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악과
맞서 싸워야만 한단다. 만약 네가 도와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운다면, 그
리고 악과 맞서 싸우는 일에 너의 재주를 사용한다면, 그떼 너는 진정한
영웅으로 칭송받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사이훙의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거려 준 뒤에 일어섰다. 사
이훙은 말없이 그대로 있었다. 가르침을 받을 때는 그 가르침에 관해서
명상하고 깨달음이 올 때까지, 때로는 깨달음이 온 뒤에도 오래도록 그
선물을 음미해야 한다. 사이훙은 조부모님들의 지혜를 믿었다. 그들의
세계는 자연의 맥박과 가까웠으며, 과거와 현재가 이음매 없이 연결된
것이었다. 기억의 혼합체요 신화였으며, 경험이자 전통이었다. 그것은
사이훙이 보기에 완전한 세계였고, 거인의 세계였다.
할아버지는 대나무로 만든 퉁소를 집어 들고 문가로 걸어갔다. 할머니
가 마지막으로 퉁긴 비파 소리가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자 할
머니는 소리없이 정자를 빠져 나갔다. 할머니의 비단 옷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호숫가로 걸어갔다. 백발을 날리며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하얀 눈이 쌓인 나무 같았다.
할아버지가 퉁소를 들어 입술에 대자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제
비처럼 노랫가락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박자가 점점 느려지는가 싶더
니 음정은 낮게 떨어졌고,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떨림이 수면 위를
떠돌았다.
어두운 하늘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던 호수의 조용한 수면이 퉁소 소리
에 응답하듯 잔잔히 흔들렸다., 동심원의 잔물결이 호수 건너 편으로 퍼
져 나가고 있었다. 물고기들이 할아버지 앞에 나타나서 수면 위로 머리
를 들고 최면술에 걸린 듯 춤을 추었고, 관가보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
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5. 두 시자와의 여행
다음날 아침 일찍이 할아버지는 사이훙을 서재로 불러들였다. 하인 하
나가 할아버님이 곧 나오실 것이라고 귀엣말을 해주면서 그를 큰 방으로
안내했다. 사이훙은 옷깃을 여미고 정숙한 태도로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
갔다. 전에는 할아버지 방에 들어와 본 일이 거의 없었다.
서재에는 할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물건들이 있었다. 벽을 따라 각각
다른 양식으로 만들어진 최고급 책장들이 있었다. 어떤 것들은 들쭉날쭉
한 선반이 있는 직사각형 모양이었으며, 어떤 것들은 선반의 외곽선 모
양이 큰 표의 문자가 되도록 배열되어 있었다. 열대산 자단목으로 만들
어진 기이한 선반 위에는 값비싼 책과 두루마리, 청자, 당나라 때 만들
어진 마상, 그리고 조각하는 데만도 수십 년이 걸렸을 옥으로 만든 조각
품 등 진귀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 방에서 가장 돋보이는 물건들이 윤기 있는 자단목 매듭걸이 위에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질흙으로 빚은 신장()들과 성인들의 상이 있
었고, 높이가 150센티나 되는 그림이 그려진 화분이 몇 개 있었다. 유명
한 산수화와 초상화, 절묘한 필체의 두루마리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
곳에 진열된 물건들 중 상당수는 계절에 따라 바뀌었다. 사이훙은 그중
에서도 기묘한 풍경을 담은 산수화 한 점을 제일 좋아했다.
방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그 불멸의 예술작품을 만든 장인의 예술적
성취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중의 대부분은 수백 년씩 된 물건들이었으
며, 전문가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보전되어 온 것들이었다. 옥이라든가
도자기라든가 그림들이 고대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담은 책들과 함께 아
름답게 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런 예술품들과 고서들이 그 방을 탁하
고 천한 세상과 차단시켜 주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작게 들리더니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화려하게 조
각해 자개를 박은 자단목과 이탈리아제 대리석으로 만든 책상에 앉은 할
아버지가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하인들이 두 젊은이를 서재로 들
여보냈다.
두 젊은이는 사이훙이 타이산의 축제에서 보았던 도교 수련자의 옷차
림을 하고 있었는데, 검은색 바지에 흰색 각반을 하고 그 위에 긴 소매
가 달린 회색 장삼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이 신은 짚신은 험한 자갈길을
걸어온 탓에 해어져서 발 아래 깔린 값비싼 양탄자와 너무나 대조되었
다. 두 젊은이는 상투를 튼 머리에 투박하게 기운 검은 모자를 쓰고 있
었으며, 모자 아래로 드러난 용모는 모두 준수하고 침착해 보였다.
할아버지는 사이훙을 그들에게 인사시켰다. 한 젊은이는 호리호리하지
만 근육질의 몸매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하는 태도가 진지했다. 그의 이
름은 린 쭝우()였다. 그의 동료는 몸집이 더 크고 건장했는대, 마
치 미소를 지으려고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할아버지 그를 칭 수이셩(
)이라고 소개했다. 사이훙은 그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나는 너를 당분간 이 젊은이들과 함께 떠나 보내겠다. 네 외조부님께
서 당분간 너의 교육을 돌봐 주실 것이다. 너는 새 사람들을 만나고 새
재주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사이훙은 크게 기뻐했다. 그 소식은 새 놀이친구들이 생기고, 재미난
일들이 많아진다는 것과, 또 공부할 필요도 없고 야단 맞을 필요도 없다
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세 사람은 관가보를 떠났다. 말을 타고 간다는 것은 분에 넘
치는 사치였기 때문에 걸어가야 했다. 두 시자들은 친근하고 관대했으
며, 사이훙을 잘 돌보았다. 사이훙은 실컷 놀고 싶어했고 사탕도 먹으려
했으며, 그 여행을 대단히 재미있게 생각했다. 그는 산시성과 주민들과
드넓은 농토를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자들의 등에 업혀 이것저것
구경도 했다. 열여덟 살 난 두 시자들과 이제 아홉 살 난 소년이 함께
길을 가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특히 봇짐과 딸랑이 장난감을 든
사이훙의 모습은 더욱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며 시
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시자들의 의복과 상투 지팡이 등이 그들의 신
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도사를 가로막는 것이 중대한 죄였던 자미대제
의 축제를 기억하면서 사람들은 그들을 공경했다. 시자들은 많은 이방인
과 군인들 사이를 지나갔지만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사이훙은 두 시자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린
쭝우는 조용하고 침착했으며 진지했다. 그는 큰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처럼 넓고 멀리 보았다. 그는 중국 악기 대부분을 다룰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였으며, 언제나 대금을 가지고 다니며 휴식시간마다 그것을 연주
했다. 길을 가면서도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공손한 태도로 친절
하게 대했다.
칭 수이셩은 재주 있는 목수였으며, 실용주의자 였다. 린 쭝우가 이지
적인 데 반해 그는 맹렬하고 적극적이며 세속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
다. 두 시자는 모두 출가한 사람이였기 때문에 사회적인 문제에는 관심
이 없었다. 때때로 다른 여행객들이 노상에서 그들의 앞길을 방해하기라
도 하면 린 쭝우는 상관치 않았지만, 칭 수이셩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 번은 어떤 못된 사람이 뱃사공과 뱃삯을 가지고 옥신각신하
면서 출발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승객들은 그 사람 때문에 뜨거운 태양
아래서 마냥 기다렸다. 잠시 참고 있던 칭 수이셩이 눈을 부라렸고 칭
수이셩은 그를 강제로 밀어내 비켜 세웠다.
그 와중에도 린 쭝우는 한 쪽에서 조용히 있었다. 비록 그는 칭 수이
셩과 성품이 달랐으나, 칭 수이셩의 공격적인 성향도 역시 도교적인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단짝으로, 언제나
함께 있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린 쭝우는 행동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암묵적으로 칭 수이셩의 견해에 동의하곤 했다.
밤이 되면 그들은 시골의 여인숙에 머물렀는데, 세 사람이 모두 한 방
에서 잠을 잤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장작으로 불 때서
덥혀 놓은 온돌 침상에서 잠을 잤는데, 사이훙은 여러 겹으로 된 비단이
불을 덮고 시자들 가운데서 잠을 잤다. 시자들은 고향을 멀리 떠나 온
사이훙의 마음을 편안히 해주려고 자기들 사이에 재웠다. 사이훙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이쪽 품에 안겼다 저쪽 품에 안겼다 하면서 잠을 잤다.
어느 날 밤, 린 쭝우는 사이훙이 일어나 방안을 두리번 거리는 것을 보
게 되었다.
[무슨 일이니, 사이훙?.]
사이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두려움을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얇은 창호지 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와 벽을 긁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귀신이나 식인귀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게했다. 사이훙은 더
욱 무서워졌다. 따지고 보면 두 시자도 아직 소년들이었다. 귀신이 자기
들을 모두 잡아먹으려고 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게...... 이게 귀신이예요?]
사이훙은 겁에 질려서 속삭이듯 물었다.
[어디?]
린 쭝우가 물었다.
사이훙은 소리 나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칭 수이셩은 역시 일어났다.
[이봐, 그렇게 속살거리고 있으면 어떻게 잠을 자겠어?]
칭 수이셩은 사이훙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벌떡 일
어섰다.
[안 돼! 오, 악마야!]
칭 수이셩이 외쳤다.
사이훙은 그들의 등뒤로 숨었다.
[다행히도 대사님께서 우리에게 악마를 막을 수 있는 부적을 주셨지.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밖에 지켜주지 못해.]
사이훙은 칭 수이셩의 말에 겁을 먹고 자기 목에 걸린 호랑이 이빨 부
적을 꼭 붙잡았다.
[사형은 그놈이 보여?]
사이훙이 물었다.
[물론 나는 볼 수 있지.]
칭 수이셩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안 보이니? 저기 있잖아! 그놈이 지금 창문을 넘어서 들어오고
있어. 빨간머리를 하고 있꼬 시퍼런 얼굴에 큰 혹이 달렸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단 말이야. 그 놈은 큰 황마포대를
가지고 있어.]
[포대라구?]
[그래, 알잖아, 어린아이를 잡아 갈 포대말이야. 그런데 사제와 나는
너무 껄끄럽고 질기단 말이야. 저놈은 살이 포동포동 오른 부잣집 어린
아이를 먹고 싶어하는 것 같아.]
사이훙은 비명을 질렀다.
린 쭝우는 벌떡 일어서서 사이훙을 침상에서 끌어냈다. 사이훙은 린
쭝우가 자기를 창문의 그림자로 끌고 가려고 하자 미친 듯이 저항했다.
[넌 악마를 본 적 있니?]
린 쭝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없어. 하지만 사형은 볼 수 있잖아!]
[잘 들어봐, 사이훙.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이나 몹시 아픈 사람만이 악
마를 본단다. 너는 그 어느 쪽도 아니지 않니?]
그는 창문을 열어 제쳤다.
[밖을 봐라. 이 나뭇가지들이 창문에 어른대는 그림자를 만들고 벽을
긁어댄 거야.]
사이훙은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럼 악마는 없다는 말이예요?]
린 쭝우는 확신시켜 주듯이 웃었다. 사이훙은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사이훙은 칭 수이셩이 웃고 있는 잠자리로 다시 돌아와서 화를 내며
그에게 올라탔다.
[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을 했어!]
이젠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칭 수이셩을 때리면서 소리쳤다. 칭
수이셩은 뒤로 드러누우면서 더 크게 웃어댔고 사이훙은 계속 그를 걷어
차고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들이 관가보를 떠난 지 열흘쩨 되던 날 아침에는 하늘에 구름이 잔
뜩 끼고 어두었다. 가을이 깊어져 거센 추위가 닥쳐오고 있었다. 산시성
의 곡창지대에 인접한 삼림지대의 나무들은 오색찬란한 무지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람이 옷 안으로 스며들자 사이훙은 겉옷을 단단히 여
미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지평선 저 끝에 화산의 산등성이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잇었다.
화산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평지보다 훨씬 높게 솟아오른 산이었다.
거칠고 경사가 수직에 가까워서 보통 사람들은 올라가 보려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절벽 산이었다. 화산은 웅장했고, 접근 할 수 없는 위용을
갖춘 무적의 산이었다. 그 탈속의 장암함은 도교의 성지로 손색이 없었
다.
그러나 어린아이인 사이훙에게 화산은 접근이 금지된 거대한 성처럼
보였다. 그는 겁에 질려 집으로 돌아가자고 졸라댔다.
[사형, 이건 별로 재미있지 않아요. 이제 그만 돌아가서 다른 놀이를
찾아보자구요.]
사이훙은 잠깐 쉬는 사이에 화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시자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칭 수이셩은 사이훙의 봇짐에서 딸랑이 방울을 끄집어 냈다.
[자, 동생, 잠깐 여기서 재미있게 놀다가 저 위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가자.]
[나는 집에 가고 싶단 말이야.]
사이훙이 칭 수이셩에게 등을 돌리며 말했다.
[사탕이 열리는 사과나무는 어떠니? 사람들이 그러는데 저 산꼭대기에
는 제일 맛난 사탕사과들이 열린다는 거야.]
[아니야, 아니야. 이제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아.]
두 시자는 떼를 쓰는 사이훙을 당황한 듯 바라보았다. 칭 수이셩은 낙
담해서 한숨 쉬며 물러났다.
[아, 참 사이훙, 우리가 너에게 비밀을 말해 주지 않았지?]
린 쭝우는 사이훙의 어깨위에 친근하게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현명했다. 사이훙은 금방 호기심이 발동했다.
[무슨 비밀인데?]
칭 수이셩은 린 쭝우의 말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쉬! 얘한테는 말해 주지 마. 대사부님께 약속했잖아.]
[말해 줘! 말해 줘!]
[안 돼! 말하지 마!]
칭 수이셩은 린 쭝우의 입을 가로막았다.
[아니야, 우리는 사이훙에게 말해 줘야만 해.]
린 쭝우가 칭 수이셩을 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그래! 그래! 말해 줘!]
사이훙이 린 쭝우의 옷자락을 잡고 재촉했다.
[사이훙, 우리는 너를 놀라게 하려고 말하지 않고 있었던 거야. 이제
어쩔 수 없이 네게 말해 줘야만 할 것 같애. 너의 외조부님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도 저 꼭대기에서 너를 기다리고 계시단다.]
[정말?]
[그럼, 정말이고 말고. 이제 가자꾸나. 우리는 오늘 밤까지 여관에 도
착해야 한단 말이야. 우리는 내일 산을 오르기 시작할 거야. 그것만도
이틀은 걸릴걸?]
[좋아.]
사이훙이 다시 흥겨워져서 말했다. 그는 칭 수이셩에게로 얼굴을 돌렸
다.
[사형, 나 업어 줄 거야?]
[내가?]
칭 수이셩은 등을 돌렸다.
[절대로 안 돼. 너는 몸무게가 거의 30킬로나 나간단 말이야. 너를 업
으면 내 등은 휘어지고 말거애.]
[나는 이제 사형이 싫어! 나는 큰 사형한테 부탁할 거야.]
사이훙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 돌아볼 것 없어. 큰 사형은 벌써 저 아래로 내려가고 있으니까.]
칭 수이셩은 웃으며 사이훙을 쳐다보았다.
[나는 걷지 않을 거야.]
사이훙은 고집스럽게 주저앉았다.
[마음대로 해.]
칭 수이셩은 봇짐과 지팡이를 들고는 앞서 걸어가 버렸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어!]
사이훙은 소리를 질렀다.
칭 수이셩은 곧 그의 사형을 따라잡았다. 수백 보도 못 가서 세 사람
은 다시 나란히 길을 가고 있었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6. 신선계에 들다.
다음날 세 사람은 화산 기슭에 당도했다. 깎아지른 듯이 하늘로 치솟
아 오른 절벽은 보통 사람들이 감히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였다.
화산의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로는 비좁은 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산등성이들이 서로 만나는 아름다운 소나무 숲속에 위치한 청가평(
)에 도달하기까지는 네 시간이 걸렸는데, 두 번이나 높은 산비탈과
깊숙한 골짜기를 넘어야만 하는 길이었다. 거기에는 작은 도관()이
있었는데, 그들은 거기서 하룻밤을 묵고 기운을 차렸다. 거기에는 다른
도사들과 시자들도 머무르고 있었으며, 린 쭝우와 칭 수이셩은 그들과
친밀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청가평의 도관은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곳에 있었다. 노송들의 그림
자 너머로 보이는 화산은 마치 하늘에 세워진 성처럼 훌륭했다. 폭포의
물소리는 마음을 평온하게 달래 주는 음악처럼 들렸으며, 차갑고 깨끗한
공기는 활기를 불러일으켰다. 화산에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대자연
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인간이 화산을 범한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
었다. 화산은 태초의 순수한 상태로 서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세 사람은 화산의 다섯 주봉 가운데 첫번째 주봉인 북봉을 향
해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날카롭게 솟은 북봉은 화산을 지키는 수
문장처럼 서 있었고, 나머지 네 개의 봉우리들이 그 뒤로 펼쳐져 있었
다. 그 길만이 화산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었는데, 올라가기가 대단
히 힘들었다,
[마음을 바꾸어라.]라는 문구와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라는 문구
들이 멋진 필체로 새겨진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
다. 린 쭝우와 칭 수이셩은 [부모님을 생각하라.], 그리고 [용감하게 앞
으로 전진하라.]는 글귀가 새겨진 지점을 지나서 회심석()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는 곳으로 사이훙을 인도했다.
그들은 너비가 60센티밖에 안되는 좁은 길을 따라 세 곳으로 나뉘어
있는 북봉으로 올라갔다. 그 길은 바위를 깎아 만들어 놓은 돌층계로 길
게 이어졌으며, 길 가장자리에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천척동의 계
단을 올라가 백척협을 지나 상천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간이 걸렸으며,
그들은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북봉은 수직으로 뻗어 솟아오른 칼날 같은 바위산이었다. 깨끗하게 깎
은 듯한 측면에는 아주 작은 틈새가 하나 있었는데, 그 틈새로 드문드문
작은 관목들과 소나무들이 나 있었다. 산꼭대기의 길은 발 디딜팀도 없
을 정도로 비좁았다. 건물 입구의 두 개의 돌문으로 이어지는 돌층계만
이 양쪽 절벽 위에 좁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암자의 기반은 절벽 경사면의 양쪽을 의지하고 있었고, 폭은 5미터
가 좀 넘었다. 암자의 벽은 벽토를 쌓아 회를 바른 것이었으며, 진흙으
로 경사지게 만들어진 지붕은 두 개의 붉은 기둥을 떠받치고 있었다. 높
이가 각기 다른 암반에 세워진 작은 건물들이 연이어 붙어 있었다. 지붕
들은 암반의 차이를 고려하여 높이를 일정하게 맞추어 놓았기 때문에 마
치 절벽 위에 걸쳐진 말안장처럼 보였다.
길의 폭이 좁아 그들은 한 줄로 걸어서 암자에 이르렀다. 사이훙은 고
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려 가면서 가파르게 깎인 양쪽 절벽의 모습을 자세
히 살펴보았다. 주랑(, 여러 개의 기둥만 있는 복도)앞으로 가서 사
이훙은 손으로 빚은 모양이 제 각각인 벽돌들로 만든 건물의 기초 부분
을 볼 수 있었다. 사이훙은 그 건물이 전혀 안전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
이 들었다.
문간에 이르자 싸늘한 바람이 그들을 감쌌다. 바둑판 모양의 논들이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는 산시 분지는 노을빛 아래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힘찬 도약을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있는 맹수의 잔등처럼 구
름이 둥실둥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더 먼 곳을 바라보니 은빛 리본처럼
구불구불 흘러가는 황하의 모습도 희미하게 보였다. 이제 황혼녁의 태양
은 둥그렇게 빛나는 시뻘건 불덩어리가 되었다. 화산이 온통 금빛으로
빛났다. 그들은 신선의 세계의 들어 온것 같은 황홀함을 느꼈다.
화산의 대사부가 그들을 맞아들였다. 세 사람은 모두 일제히 엎드려
큰 절을 했다. 사이훙은 큰절을 하며 타이산에서 처음 보았던 대사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대사부의 모습은 마치 조각상 같았는데, 지금 대
사부의 모습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사부는 그들을 일으킨 뒤에
반가운 미소로 답했다.
대사부는 화산파의 도관과 도사들, 수련자들을 관장하는 장문인(
)이었다. 날씬하고 키가 큰 대사부는 새처럼 우아하고 가볍게 움직였
다. 그의 꼿꼿한 자세에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으며, 활처럼 휜
그의 흰 눈썹은 마치 백설이 내린 듯했고, 수염은 폭포가 흘러내리는 듯
아름다웠다. 눈썹 언저리에는 주름살이 거의 없었고, 두 눈은 안광(
)을 감추려는 듯 평안한 모급으로 반쯤 감겨 있었다. 한 쪽 입가에는
찢어졌던 흉터가 있었다. 흉터만이 화려한 그의 무술 경력을 말해 주고
있었다. 대사부는 늙어 보였지만, 여전히 강렬한 영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화산의 성품을 그대로 담고 잇는 화신()이었다. 마치
태초에 화산과 함께 태어난 듯이 보였다.
린 쭝우와 칭 수이셩은 도관의 무거운 문을 닫았다. 멀리 집을 떠나
도관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니 사이훙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두 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사이
훙은 대사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도 역시 침묵하고 있었다. 대사부
는 지난 한 달간 독거와 침묵의 생활을 끝내고 막 돌아오나 터였으므로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호흡은 생명의 기()이기 때문에 낭비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디 계셔요?]
사이훙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단다.]
칭 수이셩이 대답해 주었다.
[또 나를 속였군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요.]
사이훙은 큰소리로 악을 쓰고는 자신도 속으로 깜짝 놀랐다. 전 같으
면 두 시자는 사이훙을 놀려 주었을 텐데 지금은 모두 진지한 표정을 하
고 있었다.
[나를 집에 데려다 줘요! 집에 데려다 달란 말이예요!]
사이훙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책상이 부서질 정도로 힘껏 걷어찼
다. 도관의 가구를 만드는 칭 수이셩은 눈에 띌 정도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사이훙은 칭 수이셩의 표정을 보고는 일부러 더 세게 의자를 걷
어찼다. 시자들은 도자기와 가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황급히 다가와 얼른
그를 에워쌌다. 사이훙은 비명을 지르고 울면서 그들을 걷어차며 바둥거
렸다.
대사부는 시자들이 사이훙을 달래도록 내버려두고 혼자 조용히 방을
나갔다.
사이훙은 목이 쉴때까지 한 시간이 넘도록 울어댔다. 울고 바둥거리느
라 완전히 탈진한 사이훙은 모퉁이에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오랜 여정
과 등산에서 온 피로, 그리고 대성통곡은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이제 앙탈을 부리기엔 너무나 지친 사이훙은 심하게 채찍질당한 동물
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그때 대사부가 돌아와서 그의 앞에 섰다. 대사부
는 손을 뻗어서 검지를 사이훙의 이마에 가볍게 갖다 댔다. 그러자 사이
훙은 갑자기 마음이 텅 빈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사부는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너는 이제 다른 세상에 들어왔다. 오늘부터 너의 인생은 완전히 변하
게 될 것이다. 나는 너를 그릇으로 만들어 주겠다. 너는 도교에 들어온
것이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제 2부
화산에서의 어린 시절
7. 장엄한 화산
화산은 고립되어 있는 종교 공동체이자 교육 공동체였다. 또한 화산
자체가 경배의 대상이었으며, 전설이었다. 도사들은 화산에서 특수한 지
식을 연구하며 보존해 왔고, 그 지식을 전수자들에게 교육시키면서 명상
과 수련을 주로 하는 은둔자의 생활을 추구했다.
다섯 개의 주봉에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도관과 별채가 있었는데, 곳
곳마다 도사들과 제자들이 있었따. 비록 그들 모두가 대사부의 지도 아
래 있기는 했으나, 각각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도교의 여러 분파
들은 상당한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분파는 경전 연구와 주술,
무술을 강조했지만, 사이훙이 들어간 분파는 양생법과 내공법, 고행을
강조했다. 그러나 분파를 막론하고 도교의 도사들에게는 공통되는 기본
원칙이 있었으며, 서로간에 많은 토론과 교류가 있었다.
이 같은 다양함이 화산을 풍요롭고 이상적인 교육기관으로 만들어 주
었다. 교육을 받는다는 일이 특권이었던 그 시대에, 화산의 도교 사찰들
은 대학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아홉 살난 아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 아이들 중의 일부는 도사의 길을 걸었으나, 대다수는 화
산 교구 내의 전통적인 교육장소로 보내졌다. 사찰 안에 살고 있는 수백
명의 소년들은 전문 분야를 맡고 있는 여러 학자들로부터 전과목을 학습
했다.
도사가 되기 위하여 화산에 들어오는 학생 수는 대단히 적었다. 도교
의 어떤 분야를 추구하든 간에 수도자는 스승을 정신적 아버지로 모시며
공부해야만 했다. 스승은 자신이 직접 가르침을 전해 줄 뿐만 아니라 자
기 제자를 다른 스승에게 보내어 공부하게 하기도 했다. 화산의 스승들
은 거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일단 제자로 삼으면 도교의 모
든 전통을 그 제자들을 통해 전수했다.
가르침과는 별개로, 화산에서 가장 걸출한 수련자들은 그들 스스로 연
구하고 실천하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도교는 무한정한 것이며, 더욱더
높은 지식을 일생토록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도사들은 약초나
의약을 연구하기도 했고, 어떤 도사들은 시와 서예, 음악 연구에 일생을
바치기도 했다. 또 불사를 추구하여 내공법에 몰두하는 도사들도 있었
다.
반면 은둔해 살거나 세속에서 은퇴하여 만년을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
도 있었다.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출가한 사람들중에는 이미 불사의 신
선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
이 거의 없었다.
화산의 도관들은 모두 출가와 고행이라는 철학을 공통으로 갖고 있었
다. 그 가운데 특히 화사뉴ㅏ는 일심도()와 자아 완성의 철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사이훙을 도교의 풍부한 전통에 입문시켜 장난꾸러기 소년에서 완전한
영적 인간으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사부는 현명
했다. 사이훙이 도교를 공부하는 것이 어려우리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
에, 사이훙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 지금 그 훈련을 시작해야만 했다.
어린이에게는 자유롭게 커나갈 수 있는 자유와 동시에, 바르게 이끌어주
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크게 자랄 나무는 떡잎부터 잘 돌봐 주어야
하는 것이다. 대사부는 시자들에게 사이훙을 천천히 이끌어 가도록 명했
다.
대사부는 사이훙이 화산의 생활을 차츰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믿었
다. 화산은 너무나도 깨끗한 곳이었고 깨달음을 성취한 도사들의 광채로
짙게 물든 곳이었으므로, 틀림없이 사이훙에게 강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이훙이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이훙은 도교의 전통을 아주 자연스럽게 흡수할 아이였다.
사이훙이 화산에 도착한 지 꼭 하루가 되자 린 쭝우와 칭 수이셩은 사
이훙을 화산의 정상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사이훙에게 도교 교육이 시작
된 것이다.
북봉의 산등성이에 나 있는 길은 자미대제의 길로, 다른 네 개의 봉우
리들로 갈 수 있는 통로였다. 자미대제의 길은 아주 좁았으며, 거의 수
직으로 뻗은 절벽 속에 선반처럼 나와 있었다. 어떤 곳은 암벽 때문에
거의 통과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절벽은 안개에 가려 있었으며 절벽 아
래는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사이훙은 칭 수이셩의 손을 꼭 잡고 따라갔
다.
뒤틀린 듯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는 중간 높이의 봉우리까지 급히 떨어
져 내려가는 절벽이었다.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 사이로 작은 도교
사찰들이 있었다. 소나무 숲을 지나 그들은 창룡령()으로 올라가
는 중봉의 아래쪽에서 다시 급경사를 만났다.
깎아지른 듯한 그 절벽에는 돌을 깎아 만들어 놓은 계단들이 있었다.
도사들의 풍수지리학에 따라 설계된 계단은 상당히 가파르고 올라가기
어려웠다. 화산의 외곽선을 따라 이어져 있는 길들은 화산의 경치를 망
치지 않고 오히려 등산객과 화산이 조화를 이루도록 해주었다. 창룡령은
곧바로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등산객과 화산과의
신비로운 조화를 보여 주는 길이기 이전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
다. 계단은 풍화되어 형태를 할수 없게 되었고, 난간도 없었다.
북봉으로부터 창룡령을 지나 금쇄관()으로 이르는 고개는 두 시
간이 걸리는 등반길이었다. 그 동안 그들은 여러 도사들과 제자들을 만
났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으며, 어떤 사람들은 명상하
며 산책하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도관으로 식량을 운반해 가느라
고 몹시 바빴다. 금쇄관에서 길은 오른쪽으로 중봉, 동봉, 서봉, 그리고
금쇄관으로 돌아가는 길 등 다섯 방향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소나무 숲과 큰 도교 사찰이 있는 중봉에서 나와 동봉으로 갔
다. 동봉은 조원동()이라고 불렸는데, 정상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
을 볼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동봉에 있는 도교 사찰은 하얀 회벽에 기와지붕이 얹혀져 있었고 사각
형의 건물들이 큰 사변형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는 또 나무에 진흙을
발라 지은 작은 오두막들이 있었다. 쇠로 만든 큰 종을 걸어 놓은 종각
과 이슬을 받아 모으는 돌컵 뒤를 지나 오두막에 이르렀을 때 사이훙은
버드나무 가지처럼 가느다란 몸을 가진 어떤 남자가 테라스에서 일광욕
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회색빛 장삼을 입고 사각형의 옥을 앞
에 매단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 시자들은 그가 법술사라고 알려 주었
다. 사찰들마다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강
인하게 보였다. 그들 가운데는 시자들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린 쭝우
와 칭 수이셩은 자기들도 언젠가는 이 동봉에 와서 그들처럼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자들과 사이훙은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 박태()라고 불리는
흙 위로 노출된 바위 봉우리에 이르렀다. 박태라는 곳은 너무나 높고 외
진 곳이었으며 뒤쪽은 절벽이었다. 10세기경 송나라의 태조는 군사적,
전략적 가치 때문에 화산을 원했다. 그러나 도사들은 화산을 신성한 곳
으로 지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진둔]이라는 불사의 신선은 황제에게 바둑을 두자고 제의했
다. 승자가 화산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그 외딴 박태의 꼭대기에서 바둑
을 두었으나 황제는 연전연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그 신선은 황제가 놓
는 수를 모두 예측할 수 있게 되었고, 황제는 패배를 시인했다. 박태라
는 이름은 그때 생긴 것이고, 이후로 화산은 그대로 도교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세 사람은 낭떠러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가장
위험한 곳인 장공기()라는 통로 앞에 이르렀다. 그 길은 가파른
절벽면에 강철심을 박아 거기에 나무판들을 깔아 놓은 길이었다. 거기에
는 1천 미터가 넘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 줄 난간도 없었다.
오직 쇠사슬들만이 벽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칭 수이셩은 사이훙을
그의 등뒤에 묶었다. 그들은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갔다. 널빤지들이
흔들거리면서 삐거덕 소리를 냈따. 암벽을 향해 몰아쳐 오는 찬바람에
사이훙의 땀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두 눈을 꼬옥 감았다. 공중에 떠
있다는 생각에 겁에 질린 사이훙은 온 힘을 다해 칭 수이셩만 붙잡고 있
었다.
남봉은 화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양 옆은 완전히 수직을 이루
는 절벽이었기 때문에 나무도 잘지 못했고 눈조차 쌓이지 못했다. 이 왕
관 같은 봉우리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중원이 멀리 보였고 황허와 뤄허,
웨이허가 지평선까지 늘씬하게 뻗어 있었다. 남봉에는 화강암으로 이뤄
진 움푹 팬 분지가 있는데, 그곳에는 겨울에도 얼지 않고 솟아 나오는
샘물이 있었다. 시자들은 앞으로 사이훙이 살게될 남봉의 도관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봉우리는 서봉이었다. 거친 돌길이 산등성이까지 이어져 있었
고, 그 봉우리의 줄기를 따라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을 만큼 높이 솟은
도관이 있었다. 이것도 역시 풍수지리설에 따른 것이었다. 도사들은 땅
의 중심이 되는 용맥()을 중요하게 여겼다. 인체에 있는 경혈과 마
찬가지로 길은 혈()이라고 불리는 몇개의 힘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비
록 혈의 위치가 북봉과 서봉처럼 산꼭대기가 될지라도 도사들은 그 힘점
들 위에 도관과 사찰을 세웠따. 건물들은 언제나 벽돌과 돌, 나무등의
천연 건축자재들로만 만들어졌으며, 주위를 둘러싼 자연과 절묘한 조화
를 잘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서봉
에 있는 사찰이 바로 그런곳이었다. 약 60도 가량 되는 경사면위에 세워
진 소봉의 사찰은 암석들과 나무들에 가려져 있었다.
서봉은 기묘하게 외떨어져 있었다. 어떤 낭만적인 사람들은 전설에 따
라 서봉을 연등봉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전설은 옥황 상제
의 일곱 따님 중의 하나와 어떤 잘 생긴 목동 사이에 있었던 사랑에 관
한 것이었다. 인간 세계의 목동과 사랑에 빠진 옥황 상제의 따님은 아버
지 몰래 목동과 함께 살았다. 목동과 함께 살던 그녀는 아이까지 낳았는
데, 이 사실을 안 상제는 그녀를 소봉속에 감금했다. 후에 그녀의 아들
은 자라서 도교의 도사를 찾아가 법술을 가르쳐 주기를 청한다. 때가 무
르익자 도사는 그에게 하늘의 도끼를 준다. 그는 그 도끼를 가지고 하늘
의 군대를 무찌른뒤 서봉을 가른다. 그러나 그 하늘의 장수가 천군을 이
끌고 다시 돌아와 모자상봉은 무산되고 만다. 아들은 하늘의 도끼를 들
고 싸웠고, 그의 모친은 아들과 함께 천군을 무찌르기 위해서 연등을 무
기로 해서 술법을 썼다. 옥황 상제는 그들의 정성에 감동해서 마침내 모
자를 용서해 주었다. 그때부터 서봉은 도끼로 내리쳐 생긴 틈과 함께 연
등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화산의 경치와 전설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사이훙에게는 화산이 수직
으로 솟은 절벽으로만 보였다. 화산은 구름들로 가려져 있었다. 전설과
신화, 비범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도사들, 그리고 선반같이 비좁은 틈에
위치한 작은 도관들, 화산은 신비로운 곳이었고 성스러운 곳이었다. 비
록 강제로 화산에 살게 되었지만 사이훙은 그 아름다움에 외경심마저 느
꼈고,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으며, 화산에 압도적으로 가득
차 있는 위엄에 감동을 받았다.
시자들은 사이훙을 남봉의 앙천지()라는 연못 아래에 있는 대사
부의 거처로 안내했다. 대사부의 거처인 금천궁은 흙으로 구운 벽돌을
쌓아 회를 바른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여러개의 건물과 정원을 갖
춘 금천궁은 전통 건축술로 지어진 것이면서도 평면적으로 보면 약간 비
대칭을 이루었다. 시자들은 방과 건물들이 별자리의 모양에 따라 배열되
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금천궁의 주실은 대사부의 거쳐였다. 앞에는 청동으로 만든 큰 향로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화산의 상징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대문
으로 이어졌다. 머리에 등을 단 청동으로 만든 두 마리의 학이 돌계단
아래 세워져 있었으며, 건물의 기둥과 대문을 받치고 있는 대들보는 조
각이 되어 있었고, 붓글씨로 씌어진 현판이 문간에 걸려 있었다. 두 개
의 현판에는 [모든 세속의 생각들을 잊으라.] 그리고 [오로지 채식하는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다.]라고 씌어 있었다.
화산에 있는 다른 도관들과 마찬가지로 금천궁 역시 평범한 모양을 하
고 있었다. 돌은 세월에 닳아 있었고, 나무는 바람과 비에 삭아 있었다.
주실은 물질적으로는 빈곤해 보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충만한 느낌을 주
었다. 좋은 향내가 복도 전체에 흘러 넘쳤고, 누군가가 경문을 외우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 왔으며, 창문들은 먼산들을 볼 수 있게 높이 만들
어져 있었다.
도관은 도사들이 관리했다.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서부터 건
물을 고치는 일까지, 몸으로 해야 하는 모든 일은 도사들이 각각 분담해
서 하고 있었다. 대사부를 빼고는 모든 도사들이 함께 노동하며 도관을
관리했다. 크고 작은 모든 노동이 도사들의 화합을 강화시켜 주는 촉매
제였다.
수개월 동안 두 시자는 사이훙이 도관의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같은 침상에서 잠을 잤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아침
일과를 시작했다. 도관의 하루는 기상하자마자 시작되는 종교적인 의무
와 도관을 보수하는 의무로 채워졌다. 사이훙이 매일 아침마다 제일 먼
저 해야 하는 일은 창문을 열고 1년 내내 냉기가 감도는 음습한 방에 햇
빛을 비추어 습기를 말리는 것이었다.
세수한 뒤에는 푸른 새벽빛을 헤치며 주실로 갔다. 아침을 먹기 전에
도관의 모든 수도사들은 그곳에 모여 기도하며 경서를 외웠다. 음식은
야채와 나물로만 만들어졌고, 지극히 간소했다. 한 사발의 쌀죽과 식초
에 절인 채소 한 접시, 차 한잔이 전부였다.
사이훙의 아침 일과는 도교의 전통적인 교육을 받는 일로 시작됐다.
사이훙은 시자들에게서 교육을 받았지만 때로는 다른 도관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읽기, 쓰기 등의 과목뿐만 아니라 맨손체조와 곡예까지 배
웠다.
점심을 먹기 전에 또 한 번 경전을 암송하는 시간이 있었다. 경전을
암송하는 일은 도교에 귀의 하는 마음과 호흡력을 키우는 두 가지 목적
을 가진 것이었다. 암송하는 것 자체가 기()를 기르는 일이었기 때문
에, 아직 어린 사이훙을 제외한 모든 수도사들은 열심히 암송에 임했다.
사이훙은 조용히 앉아 있는 것 조차 힘들었다. 그는 암송이 한 번 끝날
때마다 웃고 두리번 거리며 뭐라고 흥겹게 종알대곤 했다. 사이훙은 다
른 수도사들처럼 그렇게 경문을 암송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점심 식사로는 주로 국수와 야채가 나왔는데, 때로는 빵을 먹기도 했
다. 음식을 먹는 동안에는 모두가 침묵을 지켜야 했으며, 옆사람이나 앞
사람을 쳐다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린 쭝우와 칭 수이셩이 대사부로부터 직접 가르침
을 받았고, 그 동안 사이훙은 치우고 닦는 일을 했다. 이러한 일들을 통
해 사이훙은 책임감과 인내심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책임감은 쉽게 얻
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이훙은 재미도 없고 진지하고 덤덤한 수도생활
이 무료하기만 했다. 천성적으로 놀기를 좋아하는 사이훙은 그에게 주어
진 허드렛일들을 흥겹게 해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종종 불미스러운
결과들을 만들어 냈다.
사이훙은 창호지를 바른 섬세한 격자무늬 창문들을 발로 걷어차서 열
어 제쳤다. 겅둥대면서 총채를 휘둘렀고, 꽃에 물을 줄때는 위에서 아래
로 양동이째 퍼부었다. 경전을 외우다가 경문 구절이 생각나지 않을 때
에는 자기 마음대로 지어내서 중얼거리기도 했다. 병풍처럼 접어 만든
경전들에 바람을 쐴 대는 책의 한쪽 끝을 잡고 아무렇게나 펼쳐서 마당
까지 책장이 널려 있곤 했다.
사이훙이 맡은 일들을 제멋대로 해버리면, 언제나 반드시 응분의 징벌
이 따랐다. 때때로 저녁을 굶어야 하기도 했고 또 경전들을 함부로 다루
었을 때는 칭 수이셩이 그를 심하게 때리기도 했다. 칭 수이셩은 사이훙
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잘못에 대
해서는 엄하게 징벌했다.
사이훙이 도관 생활에 익숙해지자 더 어려운 임무들이 주어졌다. 온실
에서 야채를 재배하는 일, 손님들과 몸이 아픈 수도사들이 먹을 병아리
와 물고기를 키우는 일, 그리고 땔감을 모으는 일들이 주어졌다. 그는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다른 도사들에게
가르침을 청해야 했다. 스스로 배움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동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대사부의 교육 방뻠이었다.
늦은 오후에는 시자들을 따라 산을 산책했다. 화산을 돌며 그들은 사
이훙에게 화산과 자연에 관해서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기도 했고, 때로
는 그저 묵묵히 산책만을 하기도 했다.
사이훙은 저녁 암송이 끝나면, 야채와 국수, 그리고 찐빵으로 식사를
하고 또 학습을 했다. 그 뒤에 체조를 연습하고, 허드렛일들을 했다. 취
침시간은 10시였다.
이러한 일과는 어느 하루도 쉬는 날 없이 계속 되었고, 사이훙은 어느
덧 도관의 수도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는 엄격한 수도생활의
분위기를 흥겹게 만들어 보기 위해 농담을 하고 장난도 치고 노래도 부
르면서 수도 생활을 즐겼다. 도관의 많은 수도사들은 사이훙의 어린아이
다운 밝은 모습에 기쁨을 느꼈으며, 사이훙의 명랑하고 자유분방한 성격
을 좋아했다. 도교는 또 하나의 제자를 키워 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그 제자는 비밀스러운 도관에 밝은 웃음을 가져다 주었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8. 자연으로부터의 배움
사이훙은 자연 곳곳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두 시자는 사이훙에게
세상에 관해 설명해 주거나 도교의 기본 개념들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사이훙은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도관 안에 있을 때나 화산 주위를 산
책할 때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을 수없이 발견했다. 시자들의
설명은 그에게 지적인 만족감과 도교 수행을 위한 준비를 갖춰 주었다.
어느 날, 세 사람은 청아한 종소리에 눈을 떴다. 린 쭝우는 자신이 데
리고 있는 고양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관에서는 쥐를 잡기 위해서
고양이들을 많이 키웠는데, 갈색과 흰색 털이 어우러진 그 고양이는 세
사람을 잘 따랐다.
[도사들은 위대한 자연주의자들이란다, 사이훙. 그들은 동물들이 어떻
게 건강하게 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영성()을 보전
하는지 알기 위해 동물들을 연구한단다. 우리가 이 산 꼭대기에서 하는
일 또한 단순하고 자연적인 것이며, 동물들이 하는 것보다 더 특이할 것
은 없단다. 그러나 동물들이 하는 것들에 관해서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도사들이 관찰하는 것은 때로 아주 다르단다.]
그 암코양이는 푸른색 깔개 가장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팔짱을
끼듯 겹쳐 놓은 두 발 사이에 코와 꼬리를 파묻고 있었다. 린 쭝우는 설
명을 계속했다.
[옛날의 도사들은 건강하게 살며 노화현상을 늦추기를 바랐단다. 그들
은 사람들이 늙는 이유를 몸 속의 기가 빠져 나가기 때문이라고 믿었단
다. 기를 몸 속에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을 찾는 동안 그들은 이 고양이
같은 동물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단다. 그들은 동물들이 몸 속에 기를 가
두어 둘 수 있는 이유는 몸을 웅크려서 기가 빠져 나갈 수 있는 항문과
다른 구멍들을 잘 닫고 잠을 자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단다. 고양이
가 바로 그렇단다.
자, 완만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고양이의 배를 봐. 호흡이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이지 않니? 도사들은 오랜 연구 끝에 하복부 전체를 가득 채우
는 깊고 순조로운 호흡이 아주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린 쭝우가 그 고양이를 쿡 찌르자 고양이는 즉시 잠에서 깨어났다..
고양이는 눈을 뜨고서 귀를 곧추세웠다.
[이 암코양이는 게으르고 뻣뻣한 사람들과는 달리 즉시 깨어난다. 저
기지개 켜는 모습 좀 보려무나. 고양이 조차 체조를 할 줄 알고 자기 몸
을 관리할 줄 안다는 증거지. 도사들은 저런 체조가 건강을 지키는 데에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단다.
만약 고양이가 병이 들면 어떻게 할 것 같으냐? 물론, 저놈은 집쥐나
들쥐 같은 몸이 작은 동물들을 잡아 먹고 살지만, 자기가 병이 들면 스
스로 몸을 다스리기 위해서 약초나 풀 같은 것도 먹고 산단다.
끝으로 고양이는 신령한 동물이라는 것을 알아둬라. 저놈은 명상을 한
단다. 저놈이 창가나 쥐구멍 앞에 조용히 앉아 있을 때는 우리 사부님처
럼 움직이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때란다. 저놈이 들쥐를 기다리
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저놈의 정신을 흐트러뜨릴 수가 없단다. 저놈의
마음이 오로지 한 점 위에 있기 때문이지. 저놈은 쥐가 구멍에서 나올
때까지 거의 하루 종일 앉아서 기다렸다가 쥐가 나타나면 잡아 버리지.
음과 양, 완벽한 정적과 집중, 완벽한 행위와 힘.
고양이는 스승이 필요 없단다. 고양이는 스스로 배우지. 저놈은 호흡
하는 방법을 알아 기를 보존하고, 스스로 병을 치유하고, 명상으로 정신
을 집중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 고양이를 연구해 보거라. 사이훙. 네
가 배워야 할 것은 고양이도 알고 있단다.]
그날 오후 시자들은 사이훙을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는 곳으로 데리
고 갔다. 시자들은 사이훙을 절벽 꼭대기로 데리고 갔는데, 절벽 끝에는
소나무가 이리저리 휘고 비틀린 뿌리에 의존해서 매달려 있었다. 푸르른
소나무에는 커다란 학 한마리가 움직이지 않고 한쪽 다리로 서 있었다.
학은 사람들의 출현을 알고 있는 듯했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화
산에 사는 동물들은 도사들이 자기들을 결코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학 역시 그것을 믿고 있는 듯 품위를 지키며 서 있었다.
그 학의 자세에 대해 칭 수이셩이 설명을 해줬다.
[옛날의 도사들은 동물들이 제각기 가지고 있는 비밀들을 배우려고 했
단다. 그리고 그렇게 연습해 보았지. 처음에는 모든 것을 한 번에 알 수
없었지. 네가 오늘 아침에 고양이를 보았듯이, 몇 가지 의혹을 느꼈을
뿐이었어.
저 새를 보아라. 얼마나 소용없는 짓인가! 새들은 저렇단 말이야. 건
방진 태도, 저 자세. 그러나 다시 보아라. 사이훙. 저놈은 아주 몸집이
크단다. 그런데 저놈이 어떻게 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놈이 가냘픈 한
쪽 다리로만 저렇게 서 있을 수 있을까? 문제는 기에 있어. 기를 담은
호흡이 저놈의 몸을 날아오를 수 있을 만큼 가볍게 만들어 준단다. 자기
자신을 공기로 가득 채워 날아오르거나 한쪽 다리로 서 있을 수 있는 것
이지.
그러나 저놈은 왜 한쪽 다리로 서 있을까? 그 이유는 고양이와 마찬가
지란다. 저놈도 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몸을 봉쇄하고 있는 것이지. 도사
들은 학의 세 가지 특징 있는 봉쇄기법들로 몇 가지 명상자세를 만들어
내어 도교의 양생론을 완성했지. 학은 머리를 뒤로 젖혀서 두부를 막고
있고, 눈은 위로 치켜 떠서 이마에 있는 정신의 중심부를 본다. 가슴은
풍만하게 부풀려서 횡경막을 잠그고, 한쪽 다리를 들어올려서 항문을 닫
는단다.
다른 동물들도 이와 같이 기를 보존하기 위해 몸의 곳곳을 잠가 놓고
있단다. 사이훙. 개는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고, 사슴을 잠잘 때에 한쪽
발굽으로 항문을 막고 잠을 잔단다. 잘 관찰해 보거라. 사이훙. 어리석
은 인간을 제외한 자연의 모든 것들이 기를 보존하는 방법인 차페술(
)을 잘 알고 있단다.]
사이훙이 나이가 들어가자, 칭 수이셩은 더 이상 그를 데리고 다니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이훙은 화산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혼자서 올라
다녀야만 했다. 그런 일은 힘이 들었으므로, 그는 쉽게 피곤해졌다. 두
시자는 사슴과 호랑이를 예로 들어 가르쳤다.
[언덕을 올라가거나 내려갈 때 넌 피곤함을 느낄 게다, 그렇지 않니?]
린 쭝우가 물었다.
[움직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지. 사슴들을 여러 번 보았겠지? 그놈
들이 언덕을 올라갈 때는 발굽이 거의 당에 안 닿는 것처럼 보여서 마치
떠다니는 것 같지. 사슴들은 몸 속의 기를 상승시키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사슴이 달릴 때는 모든 에너지가 극한에 달해서 발굽들과 꼬리와 뿔,
모든 곳에까지 기가 도달한단다. 사슴은 아주 힘이 센 동물이지. 자신의
몸에 있는 기를 봉쇄함으로써 기를 보존하고 그 기를 바깥쪽으로 순환시
킨단다. 이 기가 겉으로 뻗쳐 나온 것이 꼬리와 뿔이다. 사슴의 뿔과 꼬
리는 강력한 생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아무리 노쇠한 사람이라 해도
그것을 먹으면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란다. 사슴은 모든 에너지를
위로 상승시켜 보낼 수가 있기 때문에, 언덕을 쉽게 뛰어 올라갈 수 있
는 것이란다.
네 몸 속에 있는 기를 순환시키는 방법은 나중에 배울 수 있을 게다.
그러니 지금 산 위로 올라가면서는 오직 사슴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거
라. 그놈들에게서 어떻게 힘을 안 들이고 올라갈 수 있는지 배워 보도록
하려무나.]
린 쭝우의 설명에 이어 칭 수이셩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산을 내려가는 데에도 역시 특별한 방법이 있단다. 산을 내려갈 때
가장 나쁜 것은 뼈가 시큰거리는 느낌이지. 도사들은 이 점을 주목하고
호랑이에게서 영감을 얻었지. 그 누구도 호랑이처럼 산을 내려갈 수는
없다. 호랑이는 서두르지 않으며, 동작이 여유 있어 보인다. 그놈은 조
용하고 은밀하게 산을 내려간다. 그놈의 발걸음은 힘 하나 안들이고 자
리에서 떨어진다. 기우뚱거리며 볼품없이 산을 내려가는 사람과는 달리,
그놈은 유연하고 미끈하지.
호랑이는 뼈와 힘줄이 튼튼한 동물이다. 산을 내려올 때 호랑이는 이
완된 힘과 유연한 관절들을 사용하면서 아주 편안하게 내려 오지. 그놈
은 결코 뼈가 시큰거리는 일이 없단다. 왜냐하면 호랑이는 탄력성을 가
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튼튼한 뼈를 가지고 있지.
그래서 호랑이 뼈는 강장제로 쓰이기도 한단다.
산을 내려갈 때는 호랑이처럼 느슨한 힘을 사용해서 속도를 늦추거라.
그리고 뼈를 보호하기 위해서 관절들을 부드럽게 유지하거라. 산을 올라
갈 때는 사슴처럼 힘을 안들이고 올라갈 수 있도록 상승하는 기를 사용
해서 몸을 가볍게 해라.]
점심을 먹기 위해서 호숫가에 멈춰 섰을 때 시자들은 사이훙을 약초
캐러 다니는 킬로 데리고 갔다. 때는 늦은 봄이었고, 호숫가는 잠자리,
새, 나비, 개구리, 거북이등으로 생동감이 넘쳐 흘렀다.
사이훙은 두 시자에게 물방울을 튀겼다. 그러자 그들은 사이훙을 호수
로 밀어 버렸다. 사이훙은 중심을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곧 진흙탕 속으
로 넘어졌다. 사이훙이 화난 표정을 지으며 옷에서 진흙을 털어내는 동
안 두 시자는 내내 큰소리로 웃어댔다. 사이훙은 벌거벗은 채 햇빛이 따
사로운 바위 위에서 의복이 마르기를 기다려야 했다.
사이훙은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긴 갈대를 꺾어 늙은 거북이
한마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그 거북이는 머리를 움추렸다. 사이훙은 네
발이 다 움츠러들 때까지 쿡쿡 찔러댔다. 거북이는 마지막으로 꼬리까지
안으로 감추었다. 거북이는 사이훙의 장난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
른 바위로 어기적어기적 기어 올라갔다. 사이훙은 그놈이 튼튼한 걸음걸
이를 살펴보았다.
[저 늙은 놈을 보아라. 어린아이가 자기를 찔러대는데도 품위를 유지
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거든. 저 거북이는 아마 너보다도 더 오래 살 것
이다. 거북이란 놈은 대단히 오래 사는 동물이지. 저놈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우리 사부님들이 언제나 한가롭게 거니시는 것도 서두르는 것이
곧 명을 재촉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란다.]
칭 수이셩이 속삭이듯 얘기해 주었다.
[북봉에 있는 도관의 궁주님은 어떤데요? 그분의 머리는 너무나 나이
가 들고 주름이 잡혀서 벌써 거북이처럼 보이는 걸요!]
사이훙은 그 모습을 떠올리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시자도 폭
소를 터뜨렸다.
[그래, 그분은 정말 그렇게 보여. 우리 그분은 앞으로 거북 사부님이
라고 부르자.]칭 수이셩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거북 사부님이 숙소에 불이 났을 때 과연 달려나오실 것인가 아닌가에
관해서 시끌벅적하게 웃고 이야기 한뒤에 칭 수이셩은 강의를 계속했다.
[저기 일광욕을 하고 있는 다른 거북이를 보렴. 저놈은 머리를 길게
내놓고 눈을 한데 모아 위를 바라보고 있지? 저놈은 명상을 하고 있어.
저놈의 모든 기가 상승하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저 늙은 거북이가 잠자
는 것을 봐. 저놈은 모든 것을 껍질 속으로 집어 넣고 있어. 자, 이젠
알 수 있겠지? 저놈은 몸의 세 곳에 자물쇠를 잠그고 있는 거야. 저놈은
모든 기가 저 딱딱한 껍질 속에 가두어져 있단다.]
사이훙은 두 마리의 거북이를 연구해 보았다.
[그래도 나는 거북이처럼 곱사등이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 또
저 개구리들처럼 뚱뚱하고 못생긴 아이가 되기는 더 싫구요.]
사이훙은 불만을 나타냈다.
[뚱뚱하다구?]
칭 수이셩은 소리를 질렀다.
[오호! 저 개구리들은 뚱뚱하지도 않고 못 생긴것도 아니란다. 오히려
도사들은 저놈들을 대단히 칭찬한단다!]
[윽!]
사이훙은 비명을 질렀다.
두 시자는 사이훙 옆에 앉았다. 날씨는 화창했고 오후의 햇빛은 뜨거
웠다. 그들은 모두 신발과 각반을 풀고 차갑고 맑은 물에 발을 담갔다.
린 쭝우는 반짝이는 푸른색 피부에 검은 점들이 정교하게 박힌 큰 황소
개구리 한 마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크기가 주먹만한 그 개구리는
쭈그리고 앉아, 하얀 목을 엄청나게 부풀리고 있었다.
[저 개구리는 기공의 사범이란다. 저놈은 언제나 자기 몸을 잠그는 것
을 수련하고 있지. 쭈그리고 앉는 것은 항문을 막기 위한 동작이고, 가
슴을 부풀리는 것은 횡격막을 막는 동작이다. 두 눈은 한 점에 모으고
있는 것은 머리의 기가 빠져 나가는 정문을 잠근거야. 저놈은 기공을 연
마할 때 마음으로는 신령한 것은 명상하고 몸에는 자물쇠를 채워 기가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단다. 개구리의 기공은 가장 훌륭한 기공법
중에 하나란다. 개구리는 엄청난 거리를 뛰어 넘을 수 있을 뿐만 아니
라, 엄청난 양의 기를 쌓을 수 있단다.]
린 쭝우는 개구리의 기공을 설명한 뒤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번 첨벙거리며 실패를 하더니 간신히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았다. 그는 개
구리를 가지고 사이훙에게로 돌아와서는 개구리의 어깻죽지를 잡아 보였
다. 그 개구리는 가냘프게 축 늘어져 버렸다.
[봐라, 사이훙. 개구리란 놈은 뚱뚱하지 않단 말이야. 개구리가 뚱뚱
해 보이는 것은 이놈의 기공 능력 때문이야. 도사들은 이 개구리 흉내를
내지. 이놈은 기공의 대가인데다 명상하는 힘이 아주 안정되어 있기 때
문이란다.]
동물들이 기를 어떻게 보존하는 가를 깨달을 때까지 비슷한 강의를 몇
번이나 들었다. 사이훙이 청년기를 접어 들자 시자들은 그에게 성과 독
신생활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
사이훙은 봄철에 교미하는 동물들을 본적이 있었는데, 그놈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시자들은 재생산의 순환회로를 충분하고 솔
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인간의 성적 기능들을 책과 그림으로 보
여 주기도 했다. 교미는 자연스러운 사건이었고 도사들은 자연적인 것은
어떤 것이든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자들은 절제도 역시 자연적인 것임을 지적했다. 그들은 교미
에 관해서 충분하게 설명한 뒤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들려주었다.
[동물들은 오로지 봄철에만 교미를 한단다. 어떤 동물들은 암수가 자
주 섞이지 않기도 하자. 그러니까 모든 동물들은 독신생활을 하는 셈이
지. 동물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생명력을 보존한단다.]
린 쭝우가 말했다.
[우리 사부님들이 성취하신 경지를 보거라. 만약 네가 건강을 유지하
고 장수하며 생명의 신비를 꿰뚫어보고 싶다면, 너는 반드시 세 곳의 문
을 봉쇄하고 성의 정수인 정액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을 보존하고 순환
시키는 기공과 명상을 수련해야만 한단다.]
칭 수이셩이 말을 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인체의 해부도를 더 많이 보여주었다.
[신체에는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여러가지 중심부들이 있단다. 각각은
몸통 밑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배열되어 있는데, 그 중심부가 바로
수련자에게 힘을 주는 곳이란다. 이러한 중심부들을 열기 위해서는 기가
필요하자. 가장 높은 곳은 정수리인데, 기를 정련해서 그렇게 높이 상승
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란다. 정()은 숨과 반응하여 기가 된단다. 기는
순환하여 신으로 변화하는 것인데, 이 신기()가 정수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란다. 초를 비유로 들어서 말한다면, 초의 몸체는 정이요, 불
꽃은 기이며, 촛불의 빛은 신이라고 할 수 있단다.
동물들은 우리가 이미 얘기했듯이 수련과 독신생활을 통해 정을 보존
하고 신령한 상태에 남아 있게 된단다. 만약 네가 성생활에 탐닉하게 되
면 너는 정을 고갈시키게 된다. 정이 없으면 기가 있을 수 없고, 기가
없으면 신령스러움도 있을 수 없다.]
린 쭝우가 그림을 보며 설명해 주었다.
두 시자는 사이훙은 도관의 학당으로 데려가 앞으로 일어날 육체적 변
화를 미리 알 수 있도록 여러 나이층의 소년들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사이훙이 순조롭게 사춘기의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바랐으므로 충분하고
철저하게 준비하도록 도와주었다. 축제일이 되면, 그들은 사이훙을 유일
하게 대중에게 공개되는 북봉 사찰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결
혼한 속세의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독신 생활의 중요성을 또다시 설명해
주었다.
[저 사람이 얼마나 쪼글쪼글하게 늙었는가를 보아라. 40세도 안된 것
같은데 벌써 얼굴에는 주름이 잡히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 버렸잖니?
더군다나 그나마 많이 빠져 있고. 왜 그럴까? 정이 적기 때문이다. 그는
기가 몸 밖으로 새는 것을 막는 차폐술과 기를 위로 상승시키는 행기법
을 알지 못해서 정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거야. 등이 벌써 굽었고 숨결
은 얕으며, 몸은 뻣뻣해서 부서질 것만 같구나. 그는 80살 먹은 화산의
도사들만도 못하구나.]
사이훙은 도사들과 보통 사람들의 차이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직
사춘기도 안 된 어린아이였으나, 독신을 지키며 수도하는 것이 더 좋게
생각되었다. 그는 이제 서로 상충하는 유혹 없이 순수한 도교의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시자들의 가르침을 하나씩 깨우치게 되었다. 사이
훙은 곧 사부님들이 성취하신 높은 정신세계를 동경하게 되었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9. 순환의 지혜로움
사이훙이 시자들과 생명의 순환, 즉 윤회에 관하여 토론 할 즈음 그의
나이는 열 한 살이었다. 때는 정신을 잃은 정도로 무더운 한여름이었고
공기는 서봉의 꼭대기조차 후덥지근했다. 사이훙은 오르락내리락하며 지
평선 끝까지 이어진 화산의 푸른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또한 빛나는
하늘 아래 드러난 화산의 산등성이를 따라 눈을 옮기며 깊은 골짜기를
둘러보았다.
린 쭝우는 지금까지 사이훙에게 대화로 자연스럽게 가르쳐 주었던 것
들을 정리하기 전에 사이훙이 화산의 장관을 음미하며 즐길 여유를 주었
다.
[모든 것은 순환한단다. 세계는 계절을 좇고, 사계절은 차례로 이어진
다.
동물들은 사계절과 조화를 이루며 살지. 동물들은 봄철에 교미를 하
고, 여름에는 새끼를 낳고, 가을에는 어린 것들을 키우며 겨울을 준비한
단다. 겨울에는 조용히 지내거나 사는 곳을 옮겨 가는 데, 동물이 하는
모든 일은 생존을 위한 것이지. 설치류는 땅을 하고, 거북이와 곰은 겨
울잠을 자며, 병들고 노쇠한 것들은 죽는다.
너도 역시 사계절을 따라야 해. 봄은 새로운 성장과 운동, 신선한 활
동을 위한 때이며, 여름은 힘을 충분히 끌어내면서 많은 노력이 들어가
는 일들은 해야 할 때다. 가을은 추구하는 때이지만, 동시에 겨울을 준
비하는 때이기도 하지. 겨울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때다. 모든 것들
이 땅속으로 숨어 들어가거나 죽는다. 그때는 너도 너 자신에게로 들어
가서 명상을 해야 할 때란다.
너의 생명도 역시 계절을 따르는 것이다. 지금의 너는 네 인생에서 봄
철에 해당한다. 지금은 자꾸 발전해서 꽃나무의 꽃봉오리처럼 꽃을 피워
야만 한다. 그리고 어떤 식이든 네가 느끼는 대로 움직여라. 너는 아직
어린아이다. 만약 네가 장난꾸러기나 개구쟁이 짓을 하지 않는다면, 너
는 정상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봄은 네 미래를 위한 씨앗을 심기에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네 인생에서 여름에 해당하는 때는 강하고 자부심이 넘치고 능력 있는
젊은이의 시기이다. 너 자신을 계발하고 목표들을 성취하며, 시작해 놓
고 마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모든 것을 행하고 모든 정서적 감
정들을 만족시켜라. 그러나 중도를 지키며 자신의 철학적 바탕에서 벗어
나지 않아야 한다. 앞으로 네가 위대한 인물이 되든지 평범한 사람이 되
든 간에, 또는 선인이 되거나 심지어 악인이 된다 해도, 너는 네 인생의
여름철에 최고의 일들을 해내야만 한다.
가을이 되면 너는 네가 뿌린 것들을 거두게 될 것이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게 되면, 너는 네 인생의 진로를 설정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네
가 앞서 행한 행동과 결정의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런 후
회 없이 이러한 단계에 도달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중년이 되면 너는
남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네 자신이 행한 일들의 인과응보를 받기 위하
여, 그리고 노년을 준비하게 위하여 서서히 너의 속도를 줄이기 시작해
야 할 것이다.
노년은 겨울이라고 할 수 있지. 너는 조용해지게 된다. 머리칼은 눈처
럼 하얗게 되고, 너는 명상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고찰하며 죽음을 준비
해야 한다.]
이번엔 칭 수이셩이 주제를 골랐다. 사이훙은 차분한 태도로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칭 수이셩은 조용하고 느릿느릿한 속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단다. 죽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
이 언제 찾아올지를 모르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죽음이 그저 종말일 뿐
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 죽음이란 변형의 과정이야. 생명
은 멈추는 것이 아니고 계절처럼 순환하는 것이란다.
너의 가족들 중에서는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지. 그러나 너는 죽음을
본 적이 있어. 쓰러져 죽은 나무를 보았고, 말라 비틀어진 들꽃을 보았
고, 눈길에 쓰러져 얼어 죽은 동물들의 시체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삶에 종말을 고하더냐? 죽음이란 단순히 움직이지 못하고 썩어 가
는 상태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냐? 아니, 죽음이란 껍질을 벗어 던지는
것일 뿐이란다.
너의 존재, 나의 존재, 동물들의 존재, 이런 것들은 우리가 만져 볼
수도 없는 것이고 파괴될 수도 없고 형체도 없는 것이란다. 과거, 우주
의 흔적과 뒤섞인 기억의 집합일 뿐이지. 우리는 정신체들이고, 우리 각
각의 영체는 태초부터 있어 왔단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우주 공간을 계속 이동해 갈 것이다. 변화하고 진화하며 그
렇게 무한히 계속 나아갈 것이란다.
네가 동물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도 항상 동물이었던 것은 아니고, 또
언제나 동물로 남아 있을 것도 아니란다. 그것들은 다만 금생에서 동물
의 껍질을 뒤집어 쓰고 있을 뿐이지. 그것들은 각자에게 중요한 무엇인
가를 배우기 위하여, 그리고 신성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나타난 영체()들이지. 그것들이 이 세상에 나타나려면 껍질 같은 것
이 필요한데, 그것이 육신이다. 그러므로 육신은 진정한 자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그릇일 뿐이거든. 또 다른 현실 체로 몸을 바
꾸어야 할 때에는 이미 그릇으로 사용되었던 육체는 버려지고 영체만이
남게 되지.
너는 두 벌의 옷을 걸칠 필요가 없겠지. 한 건물 안에 들어 앉아 있으
면서 동시에 다른 건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육체라는 껍질은 완전히 사
용되어야만 하는 것이란다. 육체는 낡고 부서지고 파괴되는 것이야. 그
러나 영은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것이란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겁을
먹을 필요는 없을 거야.
사람들은 죽음이 언제 닥쳐 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한단다.
이것이야말로 신들이 인간에게 걸어놓은 저주 가운데 한 가지란다. 인간
의 변태적 성향과 사악함 때문에 내려진 천벌이지. 신들은 죽음이 임박
해 오는 때를 인간이 알 수 없도록 차단하여 그 벌을 대신했지.
그러나 동물들은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단다. 동물들은 언제
나 신과 합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신들은 인간과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슬픔과 무지와 교만함, 환영 속에서 살기
때문에 더 높은 차원과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는 거란다. 오로지
순수한 생활을 영위함으로써만 우리는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있단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사이훙. 오히려, 죽음이 다가올 것
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며, 사는 동안 다음 생애에서 너를 더 높은 차원
으로 이끌어 갈 올바른 지식을 찾으려무나. 그러면 죽음의 순간에도 너
는 아무 두려움 없이 육체를 벗어 던지고 다음 생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10. 장생불사의 신선들
자연으로부터도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았으나, 사이훙은 그가 이제 막
배우기 시작은 도술을 몸으로 그래도 구현시키는 화산의 도사들에게 완
전히 매료되었고 깊은 영감을 받았다. 도교의 모습은 도를 따르는 사람
과 그의 개성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도사들은 중국과 도교의
은자적인 전통을 잘 보여준다. 도술을 완성시키고 높은 차원의 지식을
얻기 위하여 세속의 환상과 위험에서 스스로를 이탈시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부도 명예도 권력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
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거미줄처럼 연약하고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았
다.
도교의 수련자들 중에는 먼 옛날부터 살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름도 없이 안개 낀 골짜기에 숨어 살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크나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적으로
는 같은 전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이뤄 놓은 일들은 모두 마
음속을 탐구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고대 삼황()중의 하나인 황제(
)는 황제소문내경()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것은 오늘날까
지도 읽히고 있다. 신농씨()는 수천 가지의 약초들을 직접 자기
몸에 시험해 보았는데, [창문을 가진 위()]라는 말은 그의 명상적 능
력을 비유해서 하는 말이다. 복희씨()는 팔괘()를 배열한 선
천도()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역경과 점술 학의 근간이 되
었다. 화타()라는 의사는 외과의술을 완성했으며,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오금희()라는 체조 법을 창안해 내었다. 노자와 장자는 도
교의 경전들을 저술했다. 이 세상을 아무도 모르게 떠났거나, 또는 큰
업적을 남기고 갔거나 간에 도교의 수련자들은 자신의 학문과 도술을 위
해 세상을 떠나 은둔해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도교의 은자들 가운데서 특이했던 자들은 내금단()을 연구해서
장생불사하는 방법을 찾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은자들 가운데 포박자
()를 쓴 갈홍()같은 사람은 장생불사하게 만들어 줄 금과 진
사(), 그리고 수은과 납을 섞은 혼합물을 연구하다가 이 세상을 떠
났다. 화산의 도사들은 아직까지도 그러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선
대 도인들과는 달리 독성을 지닌 금속원소들은 버리고, 기공과 명상, 약
초들을 사용했다.
화산의 사부들 중 몇몇은 이미 죽지 않는 신선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
들은 평판이 매우 높았으며, 모양새도 전혀 나이든 사람처럼 보이지 않
았다. 그들에게 붙여진 칭호는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그 사부들은 장
수와 해탈, 생명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였다. 또한 육신
을 이탈하여 유체()로 여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수백 권에 달하는
도교 경전들을 모두 암송하기 위한 비법을 이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한 경지에 오른 불사의 신선들은 장문인의 권위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장문인도 그런 신선들이 자기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사부는 사이훙을 오랫동안 자기 옆에 데리고 있었다. 사이훙은 사부
님의 머리를 빗겨 드리고 발을 씻어 드렸다. 글을 쓰실 때는 먹을 갈아
드렸고, 사부님이 여행하실 때는 약상자를 들고 따라다니며 사부님의 시
중을 들었다. 대사부로서는 사이훙을 잘 관찰해 볼 수 있는 기회였고,
사이훙에게는 사부님의 생활방식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또한 사이훙
은 사부님을 따라다니며 화산에 기거하는 고승들을 만나 볼 수도 있었
다.
어느 날 오후, 사이훙은 사부님을 찾으러 갔다가 화산에 사는 불사의
신선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사이훙은 기쁜 듯이 사부님께로 달려
올라갔다.
[공공! 공공!]
그는 사부님을 마치 할아버지를 부르는 것처럼 불렀다.
[나 여기 있단다!]
사부님은 돌아서서 한 손을 사이훙에게 올려 놓으며 웃었다.
[공공, 제가 공공의 귀에다 새로 만든 쥐노래를 들려 드릴께요. 여기
계신 아저씨들처럼 저도 동물들한테서 노래를 배웠어요. 들어보세요!]
사부님이 허리를 굽히자 사이훙은 그의 귀에 대고 노래를 불렀다. 그
의 사부는 노래를 듣고 즐겁게 웃었다.
[아주 좋은 노래로구나, 사이훙.]
사이훙이 노래를 다 부르자 사부님이 말했다.
[또 있어요.]
사이훙은 흥분한 듯이 말했다.
[나중에 듣자꾸나. 나는 지금 만나 뵈야 할 분이 있단다.]
[태극권 사부님이신 양 아저씨 말씀이세요? 그분이 돌아오셨나요?]
[아니다, 사이훙. 지금 뵐 분은 네가 아직 뵙지 못했던 분이란다.]
사부와 제자는 한 시간을 넘게 걸어서 벽에 회를 바른 작은 건물에 도
착했다. 몇 개의 사각형 창문들과 오래된 기와로 덮여 있는 건물은 평범
했다. 여름이면 화산의 모든 건물은 햇볕이 들도록 창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이 건물의 창문들만은 꼭 닫혀 있었다. 그들은 약간 틀이 어긋나
맞지 않는 문을 두드려 꼭 닫은뒤,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대단히 어둡고 조용했으며, 안으로 들어서니 차가운 기운이 담
긴 바람이 불어왔다. 갑자기 어두운 곳으로 들어서니 왕이 전혀 안 보였
다. 한참 뒤에야 사이훙은 그곳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아주 검소했다.
낮은 사각형 탁자와 표주박이 달랑 있었으며 그 사이에 큰 관이 하나 있
었다.
사이훙은 사부님이 큰절을 하는 것을 보고 얼른 따라서 큰절을 했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사부님이 큰절을 하는 경우는 제가를 지낼 때뿐이었
다. 그러나 여기에는 제단이 없지 않은가? 더욱이 관에다 대고 큰절을
하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절을 마치고 위를 올려다보자 그들 앞에는 키가 큰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서서 약간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들의 절을 받고 있었다.
[이것 봐요! 당신은 왜 절하지 않는 거예요? 당신은 이분이 얼마나 높
은 분인지 모른단 말이예요?]
사이훙이 외쳤다.
[사이훙!]
사부님이 날카롭게 호통쳤다.
[무례하게 굴지 말아라. 이분이 사부님이시지, 내가 사부가 아니다.]
사부님은 그 사람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박쥐 신선께 문안 드립니다!]
박쥐 신선이라는 사람은 가볍게 웃었다. 큰 키에 가냘픈 몸매를 가졌
고, 여자처럼 움직였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땋아서 리본으로 묶었다. 얼
굴은 작고 피부에는 주름살 하나 없었으며, 핏기도 없이 창백했다. 쑥
들어간 눈 언저리가 검게 죽었으며 두 눈은 거의 감겨 있었다. 그러나
가늘게 내리뜬 눈에서 감춰진 내부의 빛을 엿볼 수 있었다.
[저는 경전들의 요점을 여쭈어 보러 왔습니다.]
사부가 말했다.
박쥐 신선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와 승낙을 대신했다. 그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조차 피했으며, 발걸음도 소리가 없었다. 박쥐 신선이 사
이훙 앞에 멈추어 섰다. 눈꺼풀이 약간 올라가자 그의 눈에서 쏟아져 나
오는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이 아이가 당신이 말했던 그 아이인가?]
박쥐 신선이 가늘고 속이 빈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사부가 대답했다.
박쥐 신선은 사이훙을 향해 돌아섰다. 사이훙은 박쥐 신선을 올려다보
는 순간 그가 눈을 감고도 자기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
이훙이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의식을 찾았을 때 박쥐 신선은 이미 저만
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사부는 사이훙에게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사부님은 한 시간쯤 뒤에 밖으로 나오더니 곧장 걸어갔다. 사이훙은
그의 뒤를 따랐다. 30분정도 침묵을 지키며 걷기만 하던 사부님이 박쥐
신선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박쥐 신선은 태음공()을 연마하고 계신다. 저분이 박쥐 신선이
란 이름을 얻게 된 이유지. 저분은 관 속에서 주무시면서 태양빛을 피하
고 찬 곳에서만 기거하시지. 결코 더운 음식을 드시지 도 않는단다. 저
분은 태음기()를 쌓고 계시며, 그것이 바로 저분의 영성()의
원천이 되고 있다.]
[검은 동그라미가 그려진 옷을 입고 귀신처럼 움직이셔서 악한 사람같
이 보여요.]
사이훙이 말했다.
[저분을 약하다고 하지 마라. 저분이 보통 사람과 같지 않아서 네가
겁을 먹은 것일 게다. 당연한 일이지. 저분은 불사의 신선이시란다. 저
런 분을 만나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
사부님은 주의를 주었다.
[그렇지만 공공, 저는 공공께서 왜 그분께 절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공공께 절을 하지 않습니까?]
[사이훙, 언제나 더 훌륭한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분들께
언제나 경의를 표해야 한단다.]
[저분은 왜 훌륭한 분입니까?]
[박쥐 신선은 경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최고의 권위자 중의 한 분이
란다. 저분은 도장()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해명해 주실 수
있단다. 실제로 저분은 도장의 경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계시
단다.]
사이훙은 학당에서 소리내어 읽으면서 외워야 했던 수백 권의 경전들
을 생각해 냈다. 그런 도교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공공, 공공께서는 이미 경전들을 다 배우시지 않았어요?]
[나는 저 박쥐 신선에 비하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단다. 도사는 끊임없
이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가르침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가르침을 찾아
야 한다.
자, 내 설명을 들어보렴. 우리가 처음에 너에게 온실을 관리하라고 맡
겼을 때, 너는 온실 가꾸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너는 먼저 일
을 시작해야 했을 테고,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 봐야만 했다. 그렇지?]
사이훙은 사부의 말에 동의했다.
[마찬가지로 사부라 해도 끊임없이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서 노력해야
만 한단다. 우리는 모두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지식
을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우리는 노사부님께 물어야 한다. 만약
그분이 모르고 있다면, 더 나이가 많으신 스승님이 항상 계시지 마련이
다.]
사이훙은 나중에 두 분의 신선을 더 만났다. 그들은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이 서로 달랐을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화산의 공개 토론회에서 다
른 사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두 신선은 작은 도관에 살고 있었으며
서로 단짝을 이루어 음양 신선이라고 불렀다.
한 번은 대사부가 사이훙을 그들의 강연에 데리고 갔다. 음양신선은
강단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작고 가무잡잡했으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큰 키에 뽀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꿰뚫을 듯한 시선으로 청중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참으로 기묘한 한 쌍이군요!]
사이훙은 탄성을 질렀다.
[이 쥐방울 같은 녀석아! 경의를 표하도록 해라.]
사부님이 사이훙의 뒤통수를 치면서 야단을 쳤다.
사이훙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젊어 보이는 음양 신선에게 눈길을 돌
렸다.
음신선은 전혀 중국인 같아 보이지 않았다. 피부는 상당히 검었으며,
검은 곱슬머리는 상투를 틀어 올렸고, 수염 역시 곱슬곱슬했다. 그는 헐
렁한 회색 장삼을 입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으며, 왼쪽 어깨에서부
터 대각선으로 흰 띠를 두르고 있었다. 사이훙은 그렇게 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인도를 방문하고 나서야 사이훙은 음신선의 조상을
알게 되었다.
반면, 양신선은 키가 크고 건장했으며 얼굴이 붉었다. 그의 굵고 구불
구불한 머리카락은 칠흑처럼 검었으며, 커다란 얼굴에 수염은 기르지 않
았다. 그의 회색 장삼은 가슴의 단단한 근육 때문에 거의 터질 지경이었
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던 사이훙은 양신선이 화산의 절벽 사이를 성
큼성큼 걸어 올라가는 것을 본 적이 있음을 기억해 냈다.
사부님은 사이훙에게 음양 신선들만큼 도가 나아갈 길을 잘 설명해 주
는 신선은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도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
다.
음선인은 명상의 나날을 보내면서 가장 깊은 의식의 세계를 탐구한 뒤
에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돌아왔다.
양선인은 화산을 돌아다니며 별과 자연, 날씨에 관한 모든 현상들을
관찰한 뒤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상세하게 강연해 주었다. 둘
다 자신들의 특별한 능력을 경전과 잘 결합시키면서 도교 전체의 지식을
설명하고 또 탐구를 계속했다.
토론의 열리기 직전, 사부님은 사이훙을 음양 신선들에게 소개 시킨
뒤 두 시자에게 돌려보내며 말씀하셨다.
[너무 서두를 것은 없다. 도교에 입문한 사람은 단계적으로 전진해야
한다. 준비가 될 때까지는 결코 다음 단계로 나가면 안 되지. 너무 초조
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단다. 자기가 맡은 일을 성실히 하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훈련을 한다면 도는 자동적으로 상승되어 간다. 사이훙, 너는 아
직 나이가 어리니까 지금의 너로서는 음양 신선 같은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부님은 키가 크고 힘이 센데다 다리가 길었기 때문에 사이훙에게는
사부님과 함께 다니는 일이 더 고되고 지루했다. 그러나 사부님을 따라
다니면 배울 게 많았다. 시자들 역시 자연에 널려있는 사물들에 대해 가
르쳐 주었으나, 사부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과는 아주 달랐다.
한 번은 사부님이 어떤 흔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신비로운 궁전이 나타나지. 하지만 네가 감
히 저 길의 흔적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면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이다.]
어떤 때는 안개로 뒤덮인 작은 협곡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길은 장생불사로 가는 길이니라.]
또 사부님은 이마에 큰 혹을 달고 고독하게 혼자 있는 도사를 가리키
며 사이훙에게 말했다.
[저분은 태양신선이시다. 여러 왕조가 흥망 하는 것을 봐오신분이시
지.]
어느 날 사부님은 사이훙을 남봉에 있는 앙천지()로 데리고 갔
다.
거기에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
었다. 이 신선은 지금가지 사이훙이 본 신선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신선인 것 같았다. 손을 앞으로 뻗어 땅을 짚고 머리를 치켜든 채 쭈그
리고 앉은 그의 모습은 거대한 개구리를 연상시켰다. 두 시자가 개구리
도 명상을 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이 사람은 그저 잠만 자고 있
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사부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사부님은 합장하고 존경을 표시하며 옆으로 비켜 섰다. 깨어나길 기다
리는 것이었다.
사이훙은 그 개구리 같은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몇 분 정도 지나
자 사이훙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봐, 이봐! 우리 사부님이 당신을 만나러 오셨단 말이야! 당신은 왜
일어나지 않는 거야, 이 멍텅구리야!]
[사이훙, 너 정말 버릇이 없구나!]
사부님이 호통을 치셨다.
[그렇지만 공공, 저 사람은 저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있잖아요! 저 사람은 정말 큰 개구리 같아요. 얼마나 큰지 한번 보
세요! 공공, 저렇게 큰 개구리는 어떻게 요리해 먹죠?]
[사이훙, 버릇없는 말을 삼가거라!]
사이훙은 그 사람에게로 더 가까이 갔다. 얼마나 큰 머리인가! 턱은
늘어지고 얼굴은 넓적했다. 코는 크고 뭉툭했으며, 얄팍한 입술은 양쪽
귀밑까지 찢어질 듯 벌어져 있었고 두 눈은 꼭 감겨 있었다. 수염도 없
었으며 벗겨진 머리는 총알 같았다.
<왜 이 사람은 잠만 자고 있을까? 이 사람이 이걸 느낄 수 있을까?>
사이훙은 일부러 주먹으로 그 사람의 이마를 쿡 쥐어박았다.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그가 다시 한번 쥐어박으려고 하는데, 사부님이 그의 뒤
통수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얌전히 있거라, 이 쥐방울만한 녀석아!]
사부님은 언성을 높였다.
[사부님은 언제나 똑같은 자리만 때리신단 말이야!]
사이훙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만지지 않
고 보기만 하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아 사이훙은 다시 몸을 구부려 그 사
람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 보았다.
갑자기 그가 눈을 번쩍 뜨고 사이훙을 쳐다보는 바람에 사이훙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고무관 같은 얼굴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변하자 사이훙은 급히 뒤
로 물러섰다.
[공공! 깨어났어요! 이 사람은 눈동자가 초록색이예요!]
사부님이 조용히 무릎을 꿇자 사이훙도 그래도 따라서 했다.
[개구리 신선께 문안드리나이다.]
사부님은 경건하게 예의를 표했다.
개구리 신선은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목에서 끄륵끄륵 하는 소리를 내
면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귀찮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곧 다시 잠들어 버렸다.
기나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도사가 저분과 같은 경지에 올라가면, 그 도사는 영원한 정신을 가지
게 된단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게 되고 감각의 자각도 없어지게 되
지. 우주적 정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란다. 개구리 신선께서는 기
공과 명상의 행공법()을 수련하셔서 도교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셨단다. 저분은 허공과 같으신 분이다. 저분이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항상 깨달음의 상태에 계시기 때문이란다.]
사부님은 사이훙에게 속삭이듯 말해 주었다.
개구리 신선이 다시 눈을 떴다.
[이 아이가 제 제자입니다.]
사부님은 절을 하면서 말했다.
개구리 신선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5미터도 넘게 펄쩍 뛰어 올
랐다가 다시 아까와 똑같이 개구리 자세로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다시
뛰어 올라 눈을 둥그렇게 뜬채 멍청히 서 있는 사이훙 앞에 가볍게 내려
앉았다. 그는 사이훙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네가 나를 보기 위해서 찾아왔단 말이냐?]
그는 전혀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신,신선님]
사이훙은 엉겁결에 말까지 더듬으며 말했다.
[흐음! 너는 이것을 이해 못하겠지.]
[기묘한 일처럼 보입니다.]
[기묘하다고!]
개구리 신선은 무시하듯이 소리쳤다.
[기묘하다고? 이게 바로 나의 명상이야! 나는 아주 높이 날아 오를 수
있어. 나의 몸은 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지! 나는 공기보다 가벼워질
수 있단 말이야. 이렇게 이 호숫가에서 명상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위에 떠있는 나뭇잎에서도 명상을 할 수가 있다. 물의 나의 일부분이
지. 물은 전기를 가지고 있어. 육체도 전기를 가지고 있지. 바깥의 전기
가 몸 속의 전기를 일깨우는 것이야. 알겠니?]
[네, 알겠습니다.]
[아니야, 너는 모르고 있어!]
개구리 신선이 말했다. 사이훙은 어쩔 줄 몰라하며 뒤에 있는 사부님
을 돌아다 보았다. 개구리 신선은 잠깐 사이훙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곧
가엾다는 듯이 말했다.
[꼬마야, 언젠가 너에게 몇 가지 가르쳐 줄 만한 것들이 있을게야.]
그는 그 말을 내뱉은 뒤 다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사이훙은 자신이 음양 신선들과 박쥐 신선, 개구리 신선
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사이훙의 꿈에
규칙적으로 나타나 그가 기억해 낼 수 없는 어떤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사이훙은 그들이 자기를 이끌어 주고 있다고 느껴서 그 이야기를 시자
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그러한 현상에 관해서는 알지 못했
다. 그래서 사이훙은 사부님께 그 신선들이 자신의 꿈속에 나타날 수 있
는가를 물어 보았다. 그러나 사부님은 무뚝뚝하게 등을 돌리고는 조용히
자리를 떠나 버렸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11. 화산의 사부님들
사부님과의 관계는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처럼 가까웠지만, 사이훙에게
사부님은 여전히 권위와 지혜를 갖춘 외경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는 친절
하고 인내심이 있었으나, 때로는 매우 엄격했다. 중국의 여느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사부님은 제자의 잠재력을 계발시켜 주는 일에 끊임없이 주
의를 기울이며, 단계에 맞게 사이훙을 키웠다. 사부님의 권위에 대한 질
문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훙은 사부님의 배경에 대해서는 질문
할 수 없었다. 도교에서는 사부님에 대한 개인적인 행동이나 인생 사를
묻거나 캐내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제자들이 사부님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그에 관한 이야기들
을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부님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을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보거나 사부님을 가까이 모시면
서 살펴보아야만 했다. 사부님은 자신의 출생이나 나이, 학식에 대해서
는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다. 아무런 말씀도 없이 몇 달이나 어디론가
다녀오셔도 말씀을 해주시는 법이 없었다.
사부님이 자신에 관해 사이훙에게 말해 준 것이라고는 사부님 역시 화
산에서 자랐다는 사실이었다. 사이훙은 나중에 다른 늙은 수도사와 이야
기 하던 중에 사부님이 다른 곳에서 오셨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놀랐다.
사이훙은 그 늙은 수도사와 도관의 부엌에서 일하면서 사부님에 대해
수다를 떨고 있었다.
[공공께서 그러셨는데, 그분은 어릴 때부터 여기 화산에서 자라셨고
지금은 벌써 90세가 되셨대요!]
[쉿! 우리가 그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을 그분이 눈치채시면 안 된
다.]
그 수도사는 사이훙에게 조용히 하라고 일렀다.
[그렇지만 공공께서는 멀리 나가 계셔요.]
[아니야! 그분은 뭐든 다 알고 계셔! 너는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여
기 계시는 사부님들을 모든 것을 아실 수가 있단 말이다!]
그는 사이훙을 쌀가마와 약초들이 쌓여 있는 부엌 구석으로 데리고 갔
다. 그는 사방을 조심스럽게 살펴본 뒤에 허리를 숙여 나직하게 말했다.
[절대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는 것을 사부님께 말하면 안 된
다. 사실 그분은 다른 곳에서 오셨단다.]
[정말이예요? 분명한가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화산에서 자랐지. 나를 보렴. 머리가 희끗희끗하
고 백발이 성성하지? 네 사부님께서 이곳에 오셨을 때 이미 그분의 머리
는 새하얀 백발이셨단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무 살 밖에 되지 않았고 이
제 나는 나이가 들어 늙었지만 너의 사부님은 옛날의 그 모습 그대로란
다.
대사께서는 중국 전체를 돌아다니셨고 인도와 티베트, 페르시아까지도
다녀오셨다고 하더구나. 다만 그분이 도인이신지 아니면 무사인지는 알
수 없단다. 그분께서 쌓으신 위업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그러나 어쨌든 그분께서 수십 년간 방랑하신 것은 틀림없어.]
그 늙은 수도사가 너무나도 조용히 속삭였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들으려
면 얼굴을 바짝 갖다 대야 했다.
[잊지 말아라. 절대로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들었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 만약 너의 사부님이 이것을 아셨다가는 분명히 역정을 내실 게 틀
림없으니까 말이다.]
늙은 수도사는 낮은 목소리로 사이훙에게 신신 당부했다.
사이훙은 나중에 시자들에게 물었다.
[공공께서 진짜 도교의 사부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지요?]
사이훙이 질문했다.
[사부란 자신에게 떠오르는 많은 질문들에 해답을 얻은 분이며, 또한
제자의 물음에 대답해 주실 수 있는 분이지. 사부란 반드시 자신의 해답
에 대해서 증거를 댈 수 있어야 한단다. 또한 자신이 가르친 것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항상 제자들에게 보여 주셔야만 한다. 아주 건강한 사
람이어야 하며 밝고 분명한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단다. 또 제자가 스스
로 스승과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스승으로서 이끄는 힘
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부님은 이기적인 마
음 없이 제자를 가르치고 도와주며, 제자에게 끝없는 가르침을 줄 수 있
어야만 한다. 그런 사람만이 스승이라고 할 수있지.]
린 쭝우가 차근차근히 대답해 주었다.
[그렇지만 공공이 하시는 일이라고는 돌아다니시는 일밖에는 없는걸
요.]
사이훙이 반박했다.
[사이훙, 너는 몰라. 그분께서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시단다. 그
분은 다만 겸손하게 그것을 감추고 계실 뿐이야.]
칭 수이셩이 말했다.
[그게 뭔데요?]
[네가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지.]
린 쭝우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사부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몇 가지 해주지.]
칭 수이셩이 기억을 되살리며 얘기를 시작했다.
[그분의 경공은 정말 대단하시단다. 축제일이었어. 많은 순례자들이
북봉으로 참배를 왔었지. 비가 와서 바위들이 아주 미끄러웠어.
그런데 한 어린 소녀가 절벽 끝에서 놀다가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바로 그때 사부님이 그 소녀의 뒤를 쫓아 몸을 던지셨
어. 그분은 절벽에서 뛰어내리셔서 그 아이를 붙잡아 품안에 안으시고는
절벽 아래 약간 튀어나온 바위 위에 사뿐히 내려앉으셨지. 그리고는 다
시 기어올라 오셔서 그 아이를 엄마 품에 안겨주셨단다.]
린 쭝우가 덧붙여 말했다.
[우리는 사부님이 공중에 떠 계시는 것도 보았어. 일정 기간 동안 사
부님은 매일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명상을 하셨는데, 명상을 하실
때면 그분의 몸속에서는 엄청나게 열이 나곤했지. 우리가 할일은 때때로
들어가서 새로 향을 피우고 표주박에 신선한 샘물을 가득 채워 놓는 일
이었어.
우리는 조용히 사부님의 방으로 들어갔지. 방은 어두웠는데, 그분이
보이지 않아 침대를 살펴보았지. 침대는 비어 있었어. 위를 올려다보니
사부님께서 가부좌를 하고 공중에 떠 계시지 않겠어!
우리는 속임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손으로 사부님 아래
를 휘저어 보았어. 심지어 칭 수이셩 사형은 목수 일을 할 때 쓰는 자를
가지고 사부님이 떠 계신 높이를 재보려고 했지. 그러나 자를 가지러 가
기 전에 사부님께서 웃음을 터뜨리시며 서서히 내려오셨지. 사부님은 우
리를 쥐방울만한 놈들이라고 하시면서 물을 달라고 하셨지.]
[그러니까 공공은 법술사이시군요!]
사이훙은 알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아니야, 아니야, 법술사는 아니야. 그런 법술들은 우리 파에서 금지
되어 있어. 너는 이걸 알아야 해. 법술사는 저승에서 귀신들을 불러와서
부려먹지. 그럴 때마다 법술사는 자기의 일부분을 팔아먹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 완전히 사도()로 떨어지고 만단다.
사부님은 초자연적인 일들을 해내실 수가 있는데, 그것은 그분의 정신
력이 뛰어나시기 때문이란다. 그분의 능력은 신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
이지, 귀신들에게 자기를 팔아서 얻은 것이 아니란 말이야.]
린 쭝우가 말했다.
[공공께서 어떻게 공중에 몸을 뜨게 했는지 설명해 주셨나요?]
사이훙이 물었다.
[아니, 그분은 그런 말씀은 안 하신단다. 우리가 그분의 힘을 직접 경
험했을 때에도 그분은 어떤 설명도 해주시지 않으셨어.
한 번은 사부님과 인체의 모든 경락을 열어주는 약초를 캐러 나갔었
지. 우리는 동물들이 그 약초들을 캐먹기 전에 손에 넣어야 했어. 동물
들도 그것을 약으로 쓰거든. 그래서 우리는 동이 틀 무렵에 길을 떠났
지. 그 약초는 어둑어둑할 무렵에만 보이는 신비로운 빛을 내기 때문이
란다.
이른 아침이었어. 비가 몹시 많이 왔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 건너 다니
던 강물이 불어나, 물살은 대단히 세차고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떠내려
가고 있었지. 강을 건널 때는 언제나 우리가 사부님을 보호해 모셨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우리가 떠내려 갈 것같았단다.
사부님은 우리가 강 앞에 멈춰서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앞장서서 강을
건너기 시작하셨지. 푸른 새벽빛 아래 강을 건너서는 그분의 모습은 더
없이 신비로웠단다. 사부님은 우리 보고 당신이 밟은 길을 그대로 따라
오라고 소리를 지르셨지. 그분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셨던거야. 우리는
망설임 없이 그분의 뒤를 따랐지.
어둠 속에서 우리는 사부님의 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한 줄기의 빛을
보았는데, 그 빛은 우리의 배꼽으로 연결되었어. 우리는 몸이 젖었지만
물의 압력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어. 그리고 나뭇가지들은 우리를 비켜
갔고,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사부님께 물어보았지. 그러나 사부
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않으셨어.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빗줄기가 거센 강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었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어.
칭 수이셩의 말을 들은 사이훙은 사부님에게 새로운 존경심을 갖게 되
었다.
사부님은 무림의 고수였다. 사부님은 도관의 마당에 혼자만 사용하는
연무장을 가지고 있었다. 사이훙은 사부님이 무술을 연습하는 모습을 몰
래 훔쳐보곤 했다.
사부님은 기립명상으로 내공을 끌어올리시고는 무술을 연습하시기 시
작했다. 기립명상은 몇 가지 발과 손동작으로 이루어진 고요한 동작이었
다. 명상을 하면서 몸 속의 응결되어 있는 기를 풀어주는 굴신()동
작과, 근육을 풀어 주는 운동이 끝나면 사부님은 곡예 같은 체조를 연습
했다.
중국에서의 싸움은 공중제비돌기, 공중회전, 공중돌아뛰기, 공중에서
몸 퉁기기 같은 것이 빠질 수가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무사라면 당연히
수련해야 하는 것들로, 공격과 방어에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 옆으로
재주를 넘는다거나 땅짚고 재주넘는 것 같은 동작은 병기의 공격 권에서
벗어나는 기술이었으며, 돌기나 구르기 같은 것은 공격에 힘을 더해 주
는 것이었다. 그러한 기술은 손발의 권법과 결합되어 사부님의 동작을
더욱 위력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180센티미터나 되는 큰 키에 60킬로 밖에 안되는 날씬한 체격의 사부
님은 숨막힐 듯이 이어지는 격투기 동작들을 계속하며 권법을 연무(
)했다. 크게 휘두르는 발동작과 힘찬 도약, 발놀림은 눈에 보이지 않
을 정도로 빨랐다. 앞차기는 수직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 꽃혔으며, 독특
한 발동작은 한쪽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연속적으로 휘몰아치는 돌풍처
럼 이어졌다.
장법()이란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기술이었다. 장법은 내공이 손바
닥에서 나와 겉으로는 상처하나 없이 오장육부를 파열시킬 수 있는 것이
었다. 사부님은 다섯 가지 장법을 알고 있었는데, 호접장법, 버들장법,
음양장법, 뇌장(), 그리고 오행장법이 그것이었다.
사부님은 그 다섯 종류의 장력을 야간에 연습했는데, 그것들은 곧 구
별할 수 있었다. 호접장법은 나비가 날개를 접듯 두 손바닥을 붙여 공격
하는 것이었다. 버들장법은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동작이 비
비꼬였다. 음양장법은 위와 아래를 교대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뇌장은
허리를 축으로 해서 번갯불처럼 직선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오행장법
은 몸 중심에서부터 끌어낸 기로 공격하는 것이었으며 모든 장법중에서
가장 신속한 장법이었다. 연무가 절정에 도달할 때쯤이면 사부님의 형체
는 마치 소용돌이 바람처럼 보였다.
사부님은 언제나 도전을 받았으며, 결코 그 도전을 거절하지 않았다.
사부님은 정해진 장소로 가서 적을 무찌르고 조용히 돌아왔다.
도전자들은 여러 부류였다. 단순히 자기 무예의 기량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도전자도 있었으며, 목숨을 걸고 도전해 오는 사람도 있었다. 시합
은 대체로 지상 3미터 높이에 설치된 단 위에서 벌어졌다. 단에서 떨어
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고 때로는 치명적이기도 했다. 시합을 하는 사
람은 땅에서 단 위로 뛰어 오를 수 있을 만큼의 경공을 갖추고 있어야만
했는데, 이러한 조건은 실력없는 경쟁자가 도전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
이었다.
단을 만들 때에도 여러 가지 덧붙여지는 것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
은 찻잔들을 뒤집어 쌓아 놓은 1.5미터 높이의 네모난 탁자위에서 시합
을 벌였다. 시합하는 사람은 컵 위에서 중심을 잡고 움직여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실격이 되었다. 또 어떤 때는 높이가 3미터나
되는 나무기둥 49개를 꽃 모양으로 세운 뒤 땅에는 수많은 칼들을 거꾸
로 꽂아 놓았다. 그런 곳에서 대결하는 사람들은 나무기둥 꼭대기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싸워야 했다.
가장 독특한 단은 사부님에게 도전했던 오독()도사들이 사용한 것
이었다. 사이훙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 시합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 시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몇 달 전, 사부님은 쓰촨 지방에 계율을 어기는 다섯 명의 도사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오독도사라고 불렸는데, 첩을 거느릴 뿐
만 아니라 매춘을 알선하고, 의약품과 노예를 매매하고 밀수하며, 도박
을 일삼았다. 사부님은 공개적으로 그들을 비난했으며, 만약 그들이 개
과 천선하지 않는다면 조정에 탄원문을 내겠다고 위협했다.
오독 도사들은 정식으로 사부님께 도전해 왔다. 사부님은 그 도전을
받아들였지만 시합은 화산 아래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신성한
화산을 더럽히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단을 세울 사람들을 보냈다. 그 사람들은 북봉 아래에 5미터
높이의 나무기둥들을 둥그런 모양으로 땅 위에 세운뒤 거미집 모양으로
밧줄들을 걸었다.
사부님은 하얀 평상복을 입고 그의 유일한 무기인 그물을 가지고 결전
장으로 나갔다. 오독 도사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독극물 때문에 시퍼렇게
독이 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온통 검은 복장을 한 그들은 기세등등하
게 기둥위에 올라섰다. 사부님도 곧 그 거미줄의 중심부로 뛰어 올라갔
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오독 도사들은 8괘형으로 만들어진 진법()으로 공격을 펼쳤다. 연
합해서 공격하기도 했고, 또 때로는 일 대일로 공격해 오기도 했다. 사
부님은 이 결투를 오래 끌 생각이 없었으므로 속전속결로 적들을 처리했
다. 오독 도사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도교 성직자의 상징인
말갈기채를 미친 듯이 휘둘러대면서 공격해 왔다. 그러자 사부님은 그물
로 말갈기채를 잡은 뒤 무서운 발길질로 적을 처리했다. 그 도사는 앞으
로 몇 걸음 비칠비칠 걸어 나오더니 입에서 푸른 독을 뿜어냈다. 사부님
은 옷 소매로 독을 막고 그 도사를 단 아래로 내팽개쳐 버렸다.
밧줄위에서 날렵하게 움직이며 사부님은 나머지 네 명의 도사들 중 두
명의 도사와 정면으로 맞부딪쳤는데, 한 사람은 독이 묻은 쇠솔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사부님의 얼굴에 태양빛을 반사하기 위해 둥근
거울을 들고 있었다. 사부님은 먼저 첫번째 도사를 붙잡았으나 다른 도
사가 거울을 던져 그물의 일부분을 찢어 놓았다. 사부님은 신속하게 앞
으로 뛰어나가 붙잡은 도사의 팔을 후려치면서 그의 독솔을 다른 오독
도사에게 던졌다.
나머지 두 명의 도사들 중에 한 사람은 독바늘이 꽂힌 접는 부채를 무
기로 쓰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독물을 묻힌 쇠가시들이 뾰족하게 솟
은 창을 쓰고 있었다. 창을 쓰고 있던 사람은 사부님의 급소를 공격하기
전에 두 팔부터 못쓰게 만들 궁리를 했다. 사부님은 공중으로 높이 솟구
쳐 빙글 돌아 창과 부채에서 나온 12발의 금침공격을 피했다. 사부님이
공중에서 부채 도사의 목을 걷어차자 그 도사는 그만 한 방에 죽고 말았
다. 그리고 나서 사부님은 그물로 창잡이 도사를 옭아맨 뒤 몸을 날려
그 도사를 땅바닥으로 내팽겨쳐 버렸다.
사이훙은 그 싸움을 이야기로만 전해 들어 몹시 실망했지만, 곧 사부
님의 격투 장면을 목격할 기회가 왔다.
어느 날, 사이훙은 물을 붓고 먹물이 걸쭉하게 될 때까지 힘겹게 먹을
갈고 난 뒤 부채처럼 접힌 긴 종이를 준비했다. 사부님이 글을 써나가면
사이훙은 끝에서 글씨가 마르도록 책상 아래로 길게 펴나갔다. 사이훙은
사부님의 힘찬 붓놀림과 멋진 초서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두 젊은이가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몰래 북
봉과 남봉 사이에 자리한 사부님의 처소로 숨어 들어왔던 것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줏빛 옷에 주황색 허리띠를 두르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
고 있었으며, 양날검은 들고 있었다. 뒤따라 들어 온 사람은 같은 옷차
림에 검은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직경이 50센티나 되는 커다란 강
철 방망이를 들고 있었다.
[우리는 무술 비급을 얻기 위해 왔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이 그 비급
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칼을 든 사람이 사부님에게 건방진 태도로 말했다.
[그 비급을 우리에게 넘겨라. 너는 이제 늙은이에 지나지 않아. 저항
하지 않는다면 너를 해치지는 않겠다.]
방망이를 든 사람이 덧붙였다.
사부님은 긴 옷소매가 아직 마르지 않은 글씨들은 스치지 않도록 조심
스럽게 붓을 놓았다.
[인생사에서 쉬운 일이란 없지. 원한다면, 와서 가져가거라. 만약 너
희의 운명의 별이 제대로 운행하고 내가 오늘 죽게 되어 있다면, 너희들
은 그 비급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너희들의 별이 옳지 않
다면 나는 너희들이 오늘 죽어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해주겠다.]
사부님은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그들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사부님
은 양팔을 세 번씩 휘둘러서 긴 소매를 손목 둘레에 감았다. 그리고는
탁자 위를 걸어서 바로 그들의 앞에 차분히 내려선 뒤 둘둘 말았던 옷소
매를 다시 풀어 채찍처럼 휘둘러서 모욕적으로 그 두명의 뺨을 동시에
후려쳤다.
침입자는 곧 정신을 차리고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부님이 그 검
을 피하면서 긴 옷소매로 칼을 둘둘 말아 버리자 사내는 칼을 뺄 수가
없었다. 사부님이 한 번 걷어차자 그 사내는 격자무늬의 창을 버리고 밖
으로 나가 떨어졌다.
또 다른 침입자가 공격해 왔다. 사부님은 그의 방망이를 살짝 피하여
그가 자기 동료와 부딪치게 만들었다. 사부님은 조소를 머금은 뒤에 무
서운 장력으로 그들을 무력화시켰다.
갑작스런 소동에 놀라 뛰어들어온 두 시자가 그들을 끌고 나갔다. 탁
자 밑에 숨어있던 사이훙이 뛰어나와 사부에게 수많은 질문을 해댔지만,
사부는 언제나처럼 침묵을 지키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12. 열두 살의 전환기
사이훙의 열두 번째 생일 날, 사부님은 그를 거실로 부르셨다. 화산에
서 보낸 3년 동안 그는 많이 변했다. 그의 고집스러운 성격과 수다스러
움이 조금 사라졌으며, 사부님의 지혜에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시자들
은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격려해 주었으며 사부님이 베푸시는 모든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사이훙은 기대감에 부풀어 사부님을 뵈러 갔고 사부님은 편안하게 말
씀하셨다. 이제는 사이훙이 자신의 훈련에 대해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
다.
[인생은 12지에 따라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란다. 사람들은 인간이
교육이나 사회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믿지. 그러나 사실상 인간을 만드는
것은 계절과 별자리와 운명이란다. 인생은 하늘에 의해 이미 내정되어
있는 것이다. 너의 운명은 이 세상에서 수명을 다해 사는 것이지만 아직
도 선택해야 할 것들이 많을 것이다. 너는 인생은 사는 동안 수없이 결
단과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너를 시험하는 방
식이다. 너는 어떻게 응답하겠느냐?
인간은 수레바퀴와 같고 인생은 수레바퀴의 빗살과 같은 것이다. 수레
바퀴가 돌에 부딪치면, 바퀴는 멈추거나 부서지거나 또는 뒤집어질 것이
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너는 인생사에 맞서야만 한다.
반드시 수레바퀴의 빗살이 움직이듯이 차례차례 인생의 단계를 거쳐
가거라. 각각의 단계마다 새로운 지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지식을
사용하고 네 인생이 변화하는 대로 따라야 네 운명을 충족시킬 수 있다.
떠날 때는 슬픔을 느낄 수도 있지.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그러
나 떠나는 것, 변화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한 곳에 괴어 있지는 말거
라. 후회하지 말아라. 감정이란 네가 이산에 올 때 가지고 온 것 같은
장난감 같은 것이다. 한때 너는 그 장난감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
지. 하지만 이제 그것은 필요 없게 되었잖니? 언젠가 또 너는 네 소년기
에 해당하는 다른 것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슬퍼할 필요는 없
다. 왜냐하면 네가 자라는 것은 올바른 일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단계가 끝날 때쯤 되면, 너는 영감과 호기심과 탐구심을 느끼
게 될 것이다. 너는 지식을 바라게 될 것이고, 일단 지식을 얻게 되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갈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른 일이다.
너는 인간이고 지식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망설이지 말고 지식을 추구하고 그 지식을 따르거라.
그러나 정교하게 맞춰진 수레바퀴의 빗살처럼 인생의 한 단계에서 다
음 단계로 전환해 가는 시간은 정밀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네
가 어떤 단계를 건너뛰거나 대충 넘어간다면, 너의 인격은 뒤틀려 버릴
것이다. 또한 네가 한 단계에만 머무른다면 네 발전은 지체될 것이다.
성장의 단계를 회피해서도 안되고 서둘러서도 안된다. 너는 반드시 그것
들을 하나하나 밟아 가야만 한다. 이 과정에는 안내자가 필요하다. 오로
지 스승만이 너를 인도하여 네가 가야 할 단계를 밝혀 줄 것이며, 스승
만이 완벽한 경지로 너를 이끌어 줄 수 있다.
사이훙, 이제 너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너는 이제 소년기에
들어선 것이다.
그날 이후로 사이훙은 남봉의 도관에 있는 기숙사로 보내져 그곳의 많
은 학생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다른 소년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여러 선
생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다른 도관에서 행해지는 특별 강좌들
에도 참석했다. 그는 남봉의 도관에서도 여러 허드렛일을 모두 해냈다.
일거리의 양도 늘어났고 그에 따라 책임도 늘어났다. 나무를 패고 물을
긷고 바느질이나 세탁, 요리를 하고 사부님의 시중을 드는 것이 사이훙
이 하는 일들이었다. 사이훙은 더 이상 장난을 치지도 않았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을 싫어하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도관의 생활에 한
몫을 하고 있었다. 오로지 협동에 의해서만 산악 생활의 궁핍함과 어려
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사이훙도 깨달았다.
그러나 사부님은 일의 중요성에 관해서 한층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해주었다. 어느 날 저녁, 사이훙이 사부님께 저녁을 가져다 드리자 사부
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예전에는 일상의 잡일들을 안 하려고 그렇게 꾀를 내더니....... 때
때로 버릇없이 굴어 그 벌로 저녁을 굶기까지 했지. 하지만 이제는 이해
하겠지? 일하지 않으려면, 먹지도 말라는 의미를 말이다. 일과 보답은
함께 가는 것이다.
도관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반드시 일해야 한다. 그러면서 겸손함이
길러지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은 건방진 태도를 보이지
않지. 이것이 중요한 점이다. 네가 최상의 지식을 얻어 네 힘을 옳게 사
용한다면, 그때는 남들을 도울 수 있게 된단다. 너는 일과 근면을 통해
서 자비를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네가 산을 내려갔을 때 속세에서 만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생계를 유지
할 만한 재주도 가지게 될 것이다. 일은 네 수련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이
다. 네게 협동과 겸손, 자비심과 재주를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니 일을
열심히 하도록 하려무나, 사이훙.]
그가 하는 일들은 대부분 지저분했다. 그러나 사이훙에게는 고전과 윤
리학을 배우는 일이 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5백명의 소년들과
함께 학습에 참석했다. 그들은 모두 도사들로부터 엄격한 통제를 받았
다. 수업 시작은 도관의 종소리로 알 수 있었다. 소년들은 종소리가 나
면 강당으로 들어가 제갈공명의 사당에 참배하고, 열지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야 했다. 서로 대화할 수도 없었으며, 앞만 보고 있어야 했다.
선생님들은 교단에 앉아 강독, 서법, 역사, 지리, 수학, 고전, 그리고
윤리학 등을 공부하는 지루한 시간동안 학생들에게 집중할 것을 엄격히
명령했다.
고전과 도교의 경전이 학과목의 중심이었는데, 사이훙이 매일 읽고 베
끼고 암송하고 토론했던 유고의 교과서들은 사서오경이었고, 황정경(
)같은 도교의 경전들은 도교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도사들은 도교와 유교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두
학파가 효()라는 주제에 있어서 만큼은 일치한다고 강조하면서 두 학
파의 고전들을 모두 완벽하게 익힐 것을 요청했다.
[거짓말하지 말아라. 왜 거짓말하면 안 되는가? 성인들께서 말씀하시
기를 <남들이 네게 잘못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네가 먼저 남들에게 잘못
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를 들어 보겠다.
너희들이 밤에 화산을 산책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너희는 등불을
가지고 있는데, 너희가 만난 어떤 길잃은 소년은 등불을 가지고 있지 않
았다. 그런데 너희가 장난으로 그에게 길을 틀리게 알려주어서 그 아이
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면, 너희들은 거짓말을 한 것이다.
사악한 생각을 하지 말아라. 그러면 잘못된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
다. 사람들이 못된 짓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유혹에 항복해 버리기 때문
이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유혹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것에도 항복할 필요가 없게 된다.]
윤리학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사이훙은 그것 참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
다.
사이훙은 고향에서 선생님의 변발을 의자에 묶었던 일을 떠올렸다.
[사이훙!]
선생님의 호통이 들려 왔다.
[너 또 무슨 나쁜 생각을 하고 있지?]
윤리학 강의는 강의실 밖까지 연장되었다. 도관은 24시간 내내 수업이
진행되는 폐쇄된 교실이었다. 도관 안에는 글자 그대로 유혹이란 있을
수 없었다. 도사들은 세상사에 초연했고, 완전한 깨달음과 정신적 능력
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읽어 가며, 오로지 제자들을 올바로 키워 내는 일
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도사들은 예를 들어 가르치거나 설득하는
방법을 썼으나, 거짓말쟁이나 사기꾼, 도둑, 그리고 남을 때리면서 못살
게 구는 학생들에게는 엄한 벌을 주었고, 심하면 파문시켜서 내쫓기도
했다.
이 같은 엄격한 감독과 철저한 가르침은 대부분의 학생들을 지적이고
조숙한 소년들로 성장시켰다. 사이훙은 그의 잠재적인 재능을 키워가며
빠르게 피어났다.
사부님은 사이훙과 이야기를 할 때에는 겸손에 관해 자주 말씀하셨다.
[네가 많은 것을 배울수록, 너는 남들을 위하여 네 지식을 더 많이 사
용해야 한다. 현명해질수록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단다.
너의 경험이 깊어질수록, 그리고 네가 점점 겸손해질수록 깊이를 알 수
없는 지식을 얻게 될게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도인들과 비교해 보면 너
의 능력이 얼마나 미미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결코 교만하
고 편협한 마음을 가질 수 없지.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에 너의 지식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
두거라. 그러나 보답을 바라지는 말아라. 너의 노고에 대해서 결코 보답
을 찾지 말거라. 왜냐하면 그것은 곧 죄악이기 때문이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13. 108나한, 약초, 그리고 기공
도사들은 정신적인 것은 육체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육체적
훈련이 내공을 연마하는 전주곡이 된다고 믿었다. 몸과 마음이 하나다.
정신은 두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정
신의 중심점들에 있는 것이다. 육체는 수련자가 초월하기 위한 기초이
며, 건강한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사부님은 이러한 개념을 사이훙에게
철저히 알려주었다.
[너 자신은 언제나 지금 보이는 대로의 너였던 것은 아니며, 앞으로도
언제나 지금의 너로만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너는 전생에 저지른 잘
못들로 인한 징벌과, 금생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해야 한
다.
모든 세속적 야망들에 얽매인 집착과 욕망을 버려라. 그리고 지식을
향한 갈증을 식히도록 하거라. 어떠한 경험도 거절하지 말고 너의 모든
장애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렇게 한 뒤에야 너는 이 세상의 의무를 만족
시키고 더 높은 차원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과 업보를 깨끗이 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
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가 필요로 하는 만큼 건강한 상태로 살아야만
한다. 너는 네가 전생에 저지른 일들에 대한 업보를 불사르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지, 새로운 고난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
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를 정화하고 정신적인 무()의 세계로 들어
가야 한다. 처음에 시작해야 할 일은 육체적인 훈련을 쌓는 일이다.]
[대사님.]
사이훙은 이제 성숙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사부님을 공식적인 칭호로
불러야 했다.
[대사님께서는 왜 이 세상에 머무르고 계시는 것입니까? 대사님께서는
이미 환골탈태해서 끝없는 자유를 얻고 등선의 경지에 오른 분이 아니십
니까?]
[어떤 도인들은 그들이 전생의 업보에서 벗어나는 바로 그 순간 이 세
상을 떠난다. 그러나 도사들은 자기들의 지식을 보존하고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 이 길을 잘 따라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단다.]
[그러면 떠나실 수도 있었겠군요?]
[아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그건 네가 내게 내린 저주일지도
모른다.]
사부님은 농담을 던졌다. 사부님이 농기 어린 농담을 하며 웃음을 짓
자 두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사이훙은 얼굴을 붉혔다.
[정말이에요, 대사님?]
사부님은 폭소를 터뜨리면서 사이훙의 마음이 편해지도록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내가 너를 가르치는 것은 나의 의무란다. 나는 평생토록 의무를 가지
고 있지. 나는 그 의무가 끝난 뒤에야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단다.]
[저도 의무를 가지고 있나요?]
[물론 가지고 있지.]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는 너무나 성급하구나. 넌 벌써 그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만
약 네가 그것을 알고 싶다면 너는 수행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부님은 흥겨운 듯 말했다.
사이훙이 해야 할 육체적 훈련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108나한이었고, 다음은 곡식과 약초들을 날로 먹는
벽곡법, 그리고 마지막은 기공이었다. 그 과정들은 사이훙을 정신적, 육
체적으로 훈련시켜 더 높은 단계로 향할 수 있게 그의 몸에서 독소를 빼
내 육체적 구조를 조정해 주었다.
108나한은 체조와 몸을 가볍게 하는 방법, 반사작용의 훈련, 호신술,
그리고 혼자서 연습하는 권법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단히 힘겹고 어려운
훈련 과정이었으며, 완전히 익히는 데만도 2년이 걸렸다. 화산의 도사들
은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 108나한의 동작들이 근육의 공동 운동과 신
축성, 힘을 길러 주며 체내에 산소를 풍부하게 해줘 소년들에게 적합하
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108나한은 불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당나라 때 화산에 전해졌
다. 그 당시 분파에 얽매이지 않았던 힌두교와 불교의 승려들, 도교의
도사들은 지식을 나누기 위하여 종종 함께 모였다. 힌두교의 쿤달리니
요가와 도교의 행공법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깨달은 도사들과 힌두교
의 수행자들은 함께 육체를 훈련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도사들은 불교의 수행자들에게 오랜 동안의 좌선에서 생긴 두통과 치
질을 치료할 수 있는 명상법과 행공법을 가르쳤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불교의 승려들은 도사들에게 외공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108나한이었다.
108나한은 체조로 시작했다. 전설에 따르면 불교의 성자들인 108나한
들이 각각 한 동작씩 만들어 냈다고 한다. 108나한은 마치 놀이처럼 재
미있는 것이어서 어린 소년기부터 연마할 수 있었다.
[이 동작을 따라할 수 있겠니? 저 동작은 아주 어려울 걸.]
108나한을 가르치는 사범은 새 동작을 가르쳐 주기 전에 언제나 이런
말로 소년들을 자극했다. 그러면 소년들은 사범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듯이 열심히 따라했다.
도마뱀의 움직임을 본뜬 운동은 두 손을 둥글게 휘저으면서 엉덩이를
빙글빙글 돌리는 것으로, 척추를 유연하게 만들어 주었다.
고양이의 동작을 모방한 운동은 허리를 숙이고 양팔을 쳐든 뒤 두 다
리에 곧게 힘을 주고 왼쪽 팔과 오른발, 그리고 왼발을 맞추어 동작하는
것인데, 근육을 이완시키고 등의 근육과 무릎 뒤의 힘줄을 단련시켰다.
원숭이를 모방한 운동은 원숭이처럼 쭈그리고 앉아서 등을 긴장시키고
두 팔을 옆으로 벌리고 걷는 동작으로, 다리를 튼튼하게 하고 평형감각
을 키워 줬다.
악어를 모방한 운동은 팔 굽혀 펴기를 하는 자세로 엎드린 뒤 손만을
움직여서 기어다니면서 팔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소년들이 이 108나한
을 모두 배우고 나면 그들의 근골과 오장육부와 관절들은 튼튼하게 다듬
어지고, 신진대사가 원활해지고, 지구력은 강해졌다.
다음 단계는 몸을 가볍게 하는 운동이었다. 이 제주는 도약과 공중회
전의 바탕이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발전도 돕는 것이었다. 도사들은
몸이 가벼워야 축적되는 지방과 독소, 그로 인한 둔중함과 체력의 낭비
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가벼운 몸은 내공법을 연마하기 위한 전제조
건이기도 했다. 108나한의 사범들은 이것을 철저하게 믿었으므로 제자들
을 훈련시킬 때 절벽 아래로 밀어 뜨렸다.
높이는 2미터에서부터 시작해서 나중엔 5미터로 높아졌다. 사범들은
제자들을 사정없이 밀어 떨어뜨렸는데, 바닥에는 충격을 흡수할 만큼 푹
신하지는 않았지만 몇 장의 매트리스들이 깔려 있었다.
[누가 제일 먼저 뛰어 내리겠느냐?]
사범이 물었다.
<내가 먼저 해서 다른 제자들을 압도해야지. 만약 내가 완벽하게 성공
한다면, 모두 나를 부러워할 거야.>
사범은 사이훙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의미 있게 웃으면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사이훙을 떠밀어 버렸다. 사이훙은 소년들의
웃음소리 속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듯 떨어졌다. 그러나 잠시 후엔 웃고
있던 소년들도 삐고 다친 무릎을 만지면서 신음 소리를 내야 했다.
사범은 언제나 그들에게 발을 단단히 딛고 착지하도록 가르쳤다. 사이
훙은 그렇게 할 수 있기까지 며칠이 걸렸으나, 결국 그렇게 해냈다. 그
는 피나는 수련을 통해 모든 종류의 낙하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사범은 사이훙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는 높이를 30센티 정도 더 높
였다. 그 높이에서 낙하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사이훙은 다시 자원해서 손을 들었다.
[정말 이것을 해낼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좋아. 이번에는 손을 합장하고 해보거라.]
사이훙은 기분 좋은 듯 두 손을 합장했다.
[하강 준비.]
사이훙은 자신감은 가지고 하강 지점에 섰다.
[그리고 한쪽 다리로만 착지해 보거라.]
겨울이 오자 수업은 실내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모든 소년들이 5미터
높이에서 편안하게 뛰어내릴 수가 있었다.
다음에 그들은 탁자 위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을 받았다. 소년들은 모두
그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서 낙하하는 동안 몸의 균형을 잡는 훈련을 쌓았다. 그러나 탁자에서 사
범이 밀었을 때는 몸의 균형을 잡을 여유가 없었다. 재빨리 군형을 잡기
가 대단히 어려웠던 것이다.
사이훙은 가부좌를 하고 낙하하는 법과 한쪽 다리로 착지하는 법, 물
구나무서서 착지하는 법을 터득하였다. 그가 터득한 기술 중에는 마룻바
닥에 착지하는 법을 터득하였다. 그가 터득한 기술 중에는 마룻바닥에
부딪치기 전에 튀어 놀라 몸을 뒤트는 것도 있었다. 사이훙은 체조를 통
해 근력을 조화시켜 속도와 시간차를 맞출 수 있었다.
반작용의 시간을 맞추는 것은 세 번째 단계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했
던 곡예 같은 낙하 훈련과는 약간 달랐는데, 사이훙은 손과 눈의 협력
체계를 개발하기 위하여 그에게 날아오는 물건들을 피하거나 붙잡았다.
세 번째 단계의 훈련을 시작하던 날, 소년들은 모두 검은 도복을 입도
록 지시를 받았다. 사범은 끝에 백묵 가루를 묻힌 봉을 가지고 있었는
데, 제자들은 사범이 그 봉을 휘두르거나 찌를 때 그것을 피해야 했다.
그러나 사범은 봉술에 통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범의 봉을 피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사이훙은 열심히 노력해서 그의 옷에는 백묵 자국이
두 군데만 묻었다.
그들은 콩을 넣은 주머니를 잡는 훈련도 받았다. 처음에는 몇 개의 주
머니만 잡으면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곧 당황스럽게 변했다. 그들은 여
러 사범들이 한꺼번에 던지는 주머니들을 붙잡아야 했다. 그 혹독한 훈
련은 콩주머니를 어떻게 붙잡아야 하는가 하는 규정이 첨가되자 훨씬 더
어려워졌다. 사이훙은 뒤에서 던지는 주머니들을 잡으라거나 다리 아래
로 잡으라거나, 또는 두 손가락만으로 잡으라는 명령에 몹시 당황했다.
호신술은 신체를 강하게 하는 운동부터 시작되었다. 108나한은 거칠고
힘든 운동이었다. 그것은 속도와 근력을 이용하여 먼 거리의 목표물을
공격하는 발차기, 그리고 날카로운 후려치기 같은 것들로 구성되었다.
사범들은 제자들이 산적과 동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육체적
훈련으로서의 무술을 익히기 위해서 튼튼한 기초를 다질 수 있기를 바랐
다.
호신술은 커다란 환약을 붙잡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사이훙은 환약을
붙잡기 위해 빙빙 돌다가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주 쓰러졌다. 하
지만 이내 사이훙은 이 새로운 단계도 익숙하게 해냈다.
다음엔 막기 단계로 넘어갔다. 사이훙은 날아오는 환약을 붙잡지 않고
이마, 어깨, 등, 다리, 그리고 배로 막아냈다.
다음 단계는 자세와 보법 학습이었다. 중국의 모든 무술은 자세에 입
각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므로 많은 종류의 세련된 보법들이 개발되어 있
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기마세()였는데, 두 발
을 벌려서 말을 타듯 몸을 낮추고 양 허벅지를 활모양으로 만들어 서는
자세였다. 무술가의 재능은 기마세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다리의 힘을 키우기 위해 물살이 매우 센 강물 속에 들어가서 사이훙
은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를 강의 상류 쪽으로 번갈아 놓으면서 기마
세를 포함하여 궁세(), 학세()등의 여러 가지 자세를 연습했다.
하지만 호신술은 실제로 상대가 있어야만 익힐 수 있는 것이었다.
[너는 이미 대표적인 기법들을 보여 주는 권법형 들을 모두 배웠다.
그러나 호신술은 홀로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그 기법들을 완전히
익힐 때까지 반드시 약속된 동작들로 구성된 약속 대련과 자유 대련을
수련하면서 실력을 완전히 양성해 나가야 한다. 권법형의 이론적 근거를
이해해야만 그 권법을 계속 배워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나면 완성 단계
는 쉽게 온다. 어떤 권법들은 인간의 움직임에 입각한 것들이고 또 어떤
것들은 동물들의 움직임에 근거한다. 108나한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 움직임에 따라 만들어진 권법에 익숙해
질 때까지는 동물들의 모양을 본뜬 상형 권법을 연습하지 말아라. 상대
와 더불어 익히는 호신술이 바로 무술의 시작이니라.]
호신술에 대해 사범은 이렇게 말했었다.
호신술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사이훙은 그때까지 배웠던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이미 얻은 힘과 평형감각에 의해 사이훙은 막
기, 치기, 차기 등의 기법과 공격과 방어 동작을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사이훙이 처음부터 무술을 완벽하게 갈고 닦을 수 있었던 것은 초창기
훈련에서 닦았던 튼튼한 힘과 기초 덕택이었다.
눈물겹고도 고된 네 단계를 거치고 맞은 마지막 단계는 사이훙을 몹시
흥분시켰다.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 권법형과
기법들을 배웠다. 이 권법들은 반복해서 똑같은 형식을 되풀이해 연습하
는 것이었다. 묵직한 주먹을 뻗는 장중한 나한 권법에서부터 오행장법과
같이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권법도 있었다. 대부분은 나포술이라든가 손
바닥으로 후려치기, 똑바로 내지르기, 위로 올려치기, 팔꿈치 공격, 발
차기등의 여러 가지 공격법을 포함하는 것들이었다.
하나의 권법형에는 여러 가지 자세가 들어있었는데, 어떤 것은 천 가
지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권법형은 공격과 방어의 기본들을 가르치
면서 정력과 내기()를 양성시켜 건강을 증진시켜 주었다.
사이훙은 정확한 힘으로 시간을 조절하면서 낱낱의 격한 동작들을 계
속 이어 나가 마치 돌개바람처럼 보였다. 그는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면
서 스스로 훈련 과목을 잘 마쳤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는 전 과정을
마쳤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꼈다.
졸업하는 날 사이훙은 사범들의 평가를 듣기 위해서 앞으로 나갔다.
[괜찮은 편이야.]
그것이 사범들의 평가였다. 그들은 수련생들을 끝까지 밀어붙이려 했
다. 칭찬이나 찬사는 아직 해줄 때가 아니었다.
사부님과의 대화에서 사이훙은 어릴 때 열심히 육체를 단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뼈와 근육이 아직 부드럽고 유연하기 때
문이다. 육체의 외형을 이상적으로 만들고 그렇게 형성된 골격을 평생토
록 유지하기에 가장 적당한 때가 바로 유년기였던 것이다.
오장육부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도관 사람
들은 채식을 주로 했는데, 식물성 음식은 사이훙의 기질을 조용하고 청
결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채식만으로는 고된 육체적 훈련을
견뎌내기에 충분치 못했다. 사이훙은 매일 약초를 달여 만든 차를 마셨
는데, 그 차는 양생을 돕고 운동을 보강시켜 주었다.
이러한 보약들은 산에서 채취된 것들로서, 풍부한 비타민과 영양분을
공급하여 신체의 특정 부분을 집중적으로 강화시켜 주었다. 도관의 사부
님들은 사이훙의 신체에서 어느 부분이 강화되어야 하는가를 판단해서
그의 신체적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적절한 약들을 처방해 주었다. 도교
의 의약학은 치료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양생을 위해
서 연구된 것이기도 했다. 먼저 그들은 신체를 강화시키고 다음에 신체
를 최적의 상태로 만들 수 있도록 정화시켰다.
계절약초로 만든 보약을 외금단()이라고 불렀는데, 이 약은 사
이훙의 신체를 잘 조절해 주었다. 이것은 우주의 흐름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사는 도교 철학의 실용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특히 내부 기
관인 오장에 손상을 준다는 것이었다. 신체는 지난 계절에 쌓인 독소를
제거하여 청결히 함으로써 다음에 닥쳐올 계절을 준비해야 했다.
불행하게도, 도교의 의약학 이론과 철학은 아직 사이훙의 구미에 맞지
않았다. 뜨겁기만 한 탕약은 시커먼데다 때로 참을 수 없을 만큼 맛이
썼다. 사이훙은 보약을 먹으면 언제나 더 강해지고 힘이 용솟음치는 것
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보약의 맛이 싫었고, 보약을 먹을 때마다 매번
사부님께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때마다 사부님은 사이훙을 타이르셨다.
[이 약들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보약들은 너의 육체를 변화시켜 줄
것이다. 네가 훈련을 다 마치면 너는 보통 사람의 육체와는 다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제가 이 약을 먹어야 하나요?]
[물론 먹어야지!]
사부님은 웃었다. 그는 사이훙에게 허리를 굽혀 말했다.
[사이훙, 옛날에 도인들은 딱딱한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단다. 그들은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만큼 몸을 가볍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약초
만을 먹었단다.]
사이훙은 신선이 되기 위해서 평생토록 쓴 약을 먹어야만 한다는 말인
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 약들의 효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때로 사부님은 사이훙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정신을
맑게 해주는 보신비약()을 지어주셨고 사이훙은 그것들을 즐겁
게 먹었다. 비록 장생불사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이훙은 그 약들이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은 틀림없다고 믿었다.
108나한의 수련과 탕약들은 기공이 향상되도록 도와주었다. 기공은 신
체의 생명력을 순환시켜 기를 증강시켜 주었으며, 백회혈을 개통하는 개
정대법()의 행공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부님은 기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주가 시작되던 태초에는 오로지 순수한 생명력인 기만이 있었단다.
기는 응결되어 금, 목, 수, 화, 토(쇠, 나무, 물, 불, 흙)의 오행이 되
었으며, 오행은 다시 음과 양으로 합해졌다. 음과 양은 인간의 성품을
만들어 내었으며, 음양은 다시 합쳐져서 궁극적인 것, 즉 태극이 되었
다. 태극은 무극이 되었으며, 무극은 그야말로 무()였다. 그리고 무는
고요함이 되었다. 그 다음에 모든 과정은 다시 반복되어 다시 시작이 있
게 되었다. 이렇듯 우주는 항상 팽창과 수축을 거듭해 왔다.
우리 인간은 작은 우주다. 우리는 이러한 우주의 과정을 기공으로써
다시 만들어 낸다. 먼저 너의 정()은 태양신경총으로 모여, 호흡을 통
해 들어온 우주의 기와 하나가 되어 몸 속에 머무르는 기가 된다. 그 기
는 배꼽 아래에 있는 단전으로 내려가서 음과 양으로 나뉜다. 음과 양은
정신이 모이는 곳인 세 번째 눈으로 올라오는데, 그 세 번째 눈은 너의
미간에 있다. 그리하여 그 음과 양은 인간에게 궁극적이고 신령스러운
정신이 되며 정신은 상승하여 무()가 된다.
우리는 도교에 몸담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도는 어디에서 시작한단
말이냐?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든 먼 곳에서든 도를 찾을 필요가 없다.
도는 몸밖의 다른 어떤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는 바
로 여기, 태양신경총에서부터 시작한다. 도는 곧 한 인간의 생명과 우주
의 보편적인 기가 만나 하나가 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반드시 기를 양성해야만 한다. 그 살아 있는 기의 끝없는
흐름과 축적을 확실히 믿고 행해야 한다. 너는 기가 너의 몸을 가득 채
운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 너는 온 우주를 마셔 버리게 될 것이
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기를 이끄는 행기법()을 수련해야 한다. 기
는 보편적인 정수()이다. 기는 너의 몸을 강하게 만들어주며 병든
곳을 고쳐줄 것이다. 여러 가지 행기법의 자세들은 기를 순환시켜주므로
어떤 곳도 기가 부족하거나 도달하지 못해 끊기는 일이 없을 것이다.
셋째로, 너는 반드시 모든 혈들을 개통시켜야만 한다. 우주의 기는 막
힘 없이 흐른다. 인간의 에너지는 반드시 그 우주의 기와 똑같이 흘러야
만 한다. 원래 인간의 몸에 에너지가 흐르는 통로들은 완전히 열려 있었
다. 인간은 날아다닐 수도 있었고,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적
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잘못 사용
했다.
신은 벌로 인간의 몸에 세개의 문을 만들어 놓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삼관()이라고 부른다. 이 문들은 척추의 꼬리뼈에 있는 미려혈과 견
갑골, 그리고 해골의 기저부에 있는데, 기의 흐름을 제한하며 인간의 잠
재력이 개발되는 것을 막는다. 너는 온몸의 혈도를 열기전에 반드시 기
공을 수련해서 이 문들을 깨뜨려야만 한다. 그래야만 너는 충분한 에너
지를 받아들여서 신령스러운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게 된다.
사이훙과 그의 동문 사형제들은 기공 사범이 거처하고 있는 도관으로
파견되었다. 기공 사범은 각각의 자세들이 가진 이론적 근거를 설명한
뒤에 시범을 보여 주었다. 사이훙은 일주일에 하나씩 자세를 배워 108개
의 자세를 모두 익혔다. 기공은 그의 폐활량을 증대시켜 주었다. 사부님
이 말씀하셨듯이 그는 정문()을 열어 삼관을 깨뜨려 나갔다. 2년간
의 수련 뒤에 기공 사범은 각각의 수련생들에게 일생토록 신체를 유지할
수 있는 10개의 자세들을 가르쳐 주었다.
기공은 허리에 큰 띠를 두르고 시작해야 했는데, 여기엔 몇 가지 이유
가 있었다. 허리띠는 열세 번 계속 숨을 들이쉰 뒤에 한 번 숨을 내쉬는
열장흡열법()을 수련할 때, 단전 부위의 점점 커지는 엄청난
압력으로부터 오장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또한 허리띠는 목구멍에서 단전으로 내려가는 기도인 임맥을 여는 것
을 도와주었다. 임맥을 열지 못하면 기공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보
통 기는 혈액의 흐름과 오장을 따라 아래쪽으로 지그재그 모양으로 움직
이며 내려갔다. 허리띠는 기가 항문으로 가라 앉지 않도록 하면서 하단
전으로 내려가도록 밀어주는 작용을 했다. 단전까지 기를 밀어 넣는 호
흡을 해야 미려골까지 기를 연결시키고 척수로 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
다.
끝으로, 허리띠는 몸을 움직이면서 동공()을 수련할 때, 기를 사
지에 운행해서 흐트러뜨리는 산기행공법()을 보조해주었다.
태양 신경총에서 기가 생성될 때 띠의 압력은 기를 극한 상태로 밀어내
는 일을 도와주었다.
첫 번째 자세는 신체 중앙의 임맥을 개통시키는 행공법이었는데, 사이
훙은 두 손으로 하단전 부위를 누르면서 턱을 가슴까지 당기는 비둘기
발 자세를 배웠다.
[이 자세에 주목하거라. 여기에는 중요한 원리들이 내포되어 있다. 먼
저 삼관을 주의하거라.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 그리고 발가락을 끌어당
겨서 꼭 오므리고 힘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봉쇄한다. 어깨를 둥글게
하고 척추를 곧추세우고 가슴을 동요시키지 말아라. 이것은 가슴을 비우
고 기를 단전으로 가라앉히는 방법이다. 기를 삼켜라. 그리고 혀를 가볍
게 차서 기도의 압력을 풀어라. 2년정도 수련하면, 기가 곧바로 단전까
지 내려가게 된다. 이 수련 뒤에는 신체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기를 삼킬 때 개통된 임맥을 따라 뱃속에서 기가 구르는 소리가 들리고,
진짜 임맥이 피부 위에 푸른 선으로 나타나게 된다.
기공에서는 다른 모든 도교의 수행법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징조를
찾아야 한다. 기공을 수련할 때에는 반드시 온몸에 열기를 느끼게 되는
데, 이것이 바로 에너지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 에너지가 삔 손목 같
은 곳으로 옮겨가면 너는 열기와 진동을 느끼면서 기가 그 부분에 집중
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징후를 느끼지 못한다면 수련을 잘
못하고 있는 것이고, 기공 수련의 효과를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몸을 다치게 된다.
기공 사부의 가르침을 따라 기공을 수련하는 사람은 상처를 받지 않도
록 극히 주의해야만 한다. 수련을 잘못하게 되면, 가슴에 통증을 느끼게
되고 속이 메스꺼워져서 구토증이 나거나 어지럼증이 생기고 내출혈을
하게 된다. 자세를 조심해서 똑바로 하도록 해라. 숨을 깊이 들이쉬고
에너지를 잘 이끌도록 정신을 집중해라.]
사이훙은 기공 사부의 가르침을 따라 각각의 자세를 배운 뒤에 기를
중화시키는 행공법을 수련했다. 행공법은 기공 사부가 경고한 상처를 받
지 않도록 해주는 것으로, 기가 지나치게 강력해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수련생은 많은 양의 기를 흡입했는데 그렇게 쌓은 기는 몸 속에 괴어
있지 않고 배출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강하게 숨을 내뿜고 난 뒤에 어
깨를 굴려 폐 속에 생긴 기포들을 풀어버리고 다시 깊이 숨을 들이쉬었
다가 마지막으로 내뿜는 것이었다.
단전으로 기를 삼켜 내려보낸 뒤에 중화시키는 것은 각 자세의 시작과
끝에 이루어졌는데, 자세들은 광범위한 목적을 위해 조합되어 있었다.
그것들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바로 뜻을 알 수 있는 것들로, 기를 모으
는 자세, 독소를 제거하는 자세, 기를 피부로 운행하는 자세, 기를 사지
로 보내는 자세, 기를 심장에 모으는 자세, 기를 폐로 보내는 자세, 그
리고 기를 횡격막으로 보내는 자세가 있었다. 오장과 육부를 조화시키는
자세도 있었고, 또 기를 배꼽으로 보내서 신체를 청결하게 하는 자세도
있었다. 또 어떤 자세는 12경락과 연결되는 기경팔맥을 개통시키는 자세
였다. 이렇게 해서 전체의 자세는 108개가 있었는데 모두가 필수적인 것
들이었다.
수련생들이 앓고 있던 모든 질병은 2년간의 수련으로 치료되었다. 기
공 사범은 행공 자세들이 많은 고질병들을 낫게 해 줄 수 있다고 말했
다. 전립선으로 기를 보내는 행공은 전립선염을 예방하거나 완화시켜 줄
수 있었다.
개 걸음 모양의 구보법()은 허리로 혈액을 보내 주어서 결장암
을 막아 주었으며, 기를 골수로 보내는 행공은 루머티즘을 완화시켜 주
었다. 머리로 기를 보내는 행공은 신경계의 이상과 신경쇠약을 치료해
주었으며, 기억력을 증진시켰다.
기공과 약초로 만든 외금단과 108나한은 육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
모두에 걸쳐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정신과 육체를 결합시켜
주었으며, 사이훙의 인격이 완전한 전체성을 성취하여 더 높은 단계에
이르도록 고양시켜 주었다.
사이훙은 자신이 변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사이훙은 이제 보통 사람
들이 부러워하는 건강한 신체를 뛰어넘어 자기 자신이 감탄할 정도로 완
벽한 신체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그는 도교에서 말하는 건강이 무엇인
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오장을 지구와 연결시키고 모든 경락을 별들의
운행에 맞춰 움직이게 하며, 모든 신체의 동작을 태양계의 행성들처럼
운행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신체는 청결해졌으며, 그의 마음은 상쾌해졌
으니, 사이훙은 진정한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얻은 것이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제 3부
전쟁, 방랑, 명상
14. 우당산
십대 초반에 이른 사이훙은 무술가들로부터 무학수업을 받기 위해 각
지를 두루 여행했다.
[그 사람들은 뭔가 독특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무술의 고수들이야. 그
러나 그들은 후계자도 없이 죽어 가고 있어. 이제 네가 그들에게 가서
무술을 익히는 게 좋겠다. 권법을 익히는 것은 너의 정신력이나 실전 기
법을 모두 향상시켜 줄게다.]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사이훙은 무학을 배우기로 하였다.
사부님과 사이훙의 할아버지는 무림의 고수이자 높이 존경받는 분들이
었다. 덕택에 사이훙은 무림의 유수한 고수들로부터 무학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무술 공부는 사이훙이 가장 강렬하게 흥미를 느꼈던 분야인
데, 나중엔 도교 공부보다 더 더 중요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사이훙은 자주 지방 무술 대회에 출전했다. 사이훙에게 권법을 가르친
사범들은 그를 대단히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사이훙은 개인 지도든 단체
지도든 가리지 않고 유명한 사범이라면 모두 쫓아가서 사사 받았다. 그
가 무술 수업을 쌓으면서 여행했던 곳 중에서 가장 영험한 곳은 우당산
()이었다. 우당산은 도교 무학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도교의
북두궁 분파에서 신성하게 받드는 산이다. 북두궁 분파가 중심으로 추구
했던 것은 내공법과 무술이었다. 수세기 동안 무수한 권법가들과 심오한
내공력을 성취한 사람들이 72개의 봉우리가 첩첩이 쌓인 우당산에서 배
출되었는데, 14세기의 유명한 고수이자 태극권을 창시해 냈던 장삼봉(
)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또한 한때 소림사에 원한을 쏟아 부었던
복수의 화신 백미도인도 우당산 출신이었다. 실전 위주의 우당파 무술을
사이훙은 네 사람의 권법가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네 명의 무술 사범은 도사가 아니라 무사였는데, 다만 우당산에 은둔
하여 생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과거에 무림에서 저질렀던 무수한
살인을 참회하고 도교에 귀의하게 위해 우당산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
들은 자신들을 받아준 도사들의 관용에 대한 보답으로 철나한권(
), 백학(), 후권(), 사형도수()를 도교의 제자들에
게 가르치고 있었다.
철나한권을 가르치는 사범은 40대의 남자였는데, 실전에 통달한 무사
였다. 소림사의 승려였던 그는 근육질의 체격과 이상적인 기질의 소유자
였다. 그 사범은 항상 영웅적인 무사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
야말로 방랑하는 정의로운 무사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상도, 자비심
도 없이 오로지 살생만 일삼는 무사들은 그를 깔보았다. 그러나 철나한
권 사범은 자신의 원칙에 따라 약자를 도와주었으며, 제자들에게 권법과
아울러 영웅적인 심성을 심어 주려고 노력했다.
철나한권은 단가 권법과 장권(), 철사권(), 그리고 108나한
권으로 구성되며, 강인한 근력을 강조하였다. 그 사범은 온몸이 강철처
럼 거칠고 단단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가장 중요한 곳은 팔의 하박골
이라고 하였다. 만약 하박골이 튼튼하지 못하면 방어를 제대로 할 수 없
고, 상대방을 붙잡는 힘이 약해지며, 권법에도 힘이 없게 된다.
하박골을 단련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사이훙은 양팔을 옆에 붙이고
두 개의 의자 등판 꼭대기에 머리와 발목만 걸친 채 공중에 떠있는 훈련
을 했는데, 점점 더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두 손목에 매달아 훈련의 강도
를 높여 갔다. 그뿐만 아니라 넓이뛰기, 높이뛰기, 주먹힘 기르기 훈련
도 쉴 새 없이 해야만 했다. 철나한권 사범은 탈진할 정도로 엄격한 훈
련을 매일 계속해야 건강한 힘을 갖출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백학권을 가르치는 사범은 지독하게 깡마른 50대의 사나이였다. 그의
얼굴은 길쭉하고 턱은 뾰족했으며, 흰자위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눈동자가 컸다. 숯이 적은 머리는 변발은 하고 있었다. 두 팔은 풀
잎처럼 가늘었으며, 긴 다리에 발가락을 내놓고 마치 학처럼 걸어다녔
다.
백학권은 기와 자세를 최대한으로 사용하는 권법이었다. 몸의 균형과
기의 순환은 중요한 문제였다. 철나한권 사범이 근력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백학권 사범은 기를 품고 사지를 넓게 펼치며 정확한 자세를 잡으
라고 가르쳤다.
그 사범은 끝없이 대련을 시키면서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요점을 직
접 실습해 보였다. 사이훙은 철나한권으로 자신 있게 돌격했다. 그러나
그는 백학권 사범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다. 그 사범은 사이훙
의 공격을 막지 않고 다만 새처럼 우아하게 계속 자세를 바꿔가면서 사
이훙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그는 날아가는 학처럼 보였고, 한쪽 다리
로만 서서도 사이훙의 공격을 피했다.
이윽고 사범은 강의를 시작했다.
[학은 새다. 새들은 자부심이 있고 도도하다. 새들은 자세 잡기를 좋
아한다. 날씬한 몸을 자랑하는 것이지. 이것이 바로 백학권의 특징이다.
적이 공격해 온다고 치자. 그러나 너는 가장 아름다운 자세를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면 된다. 그가 공격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너는 오로지
자세를 잘 잡는 일에만 신경 쓰면 된다. 만약 적이 네 날개 곁을 스치다
가 네 부리에 쪼였다면, 그것은 네 자세 때문인 것이다. 먼저 공격 방법
을 구상해 놓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백학권 사범은 곧 파괴적인 공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다섯 손가
락은 한데 모아 새부리처럼 만든 학권을 좋아했다. 공격 방식은 아주 교
묘했다. 모든 힘이 아주 적은 범위에 집중되어 충격의 강도를 높인 것이
었다. 학권은 급작스러운 돌려 치기라든가 지그재그 공격법 같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모든 공격이 전혀 예상치 못한 각도로부터 이어졌
다. 백학권 사범은 갑자기 방향을 바꾸며 사이훙의 방어망을 뚫고 들어
와 눈, 귀, 목, 혈도등을 쪼아댔다.
원숭이의 동작을 본뜬 후권을 가르치는 사범은 광대처럼 보였다. 그는
진지해 보이는 적이 거의 없었으며, 쉬지 않고 웃고 떠들어댔다. 그는
외로운 원숭이처럼 작고 음습한 숲속에 진흙으로 지은 허술한 집에서 살
았다. 다리는 짧고 굵었으며, 팔은 괴상하게 길고 축 처져 있었다. 유쾌
해 보이는 넓적한 얼굴은 짧게 깎은 머리 때문에 더 크게 보였다. 그는
농담을 즐겼으며, 자주 원숭이를 흉내내며 재주를 넘어 수련생들을 즐겁
게 해 주었다.
후권은 곡예, 기공, 유연한 몸, 집중력, 그리고 체력이 기본 조건이었
는데, 유연함이 특히 중요했다. 사범은 유연성이 신체와 정신 상태뿐만
아니라 영성계발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원숭이
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도교의 문하생들아, 봐라.]
사범은 언제나 킬킬대며 말했다.
[언젠가 너희도 커서 어른이 되고 오랜 명상의 세월과 더불어 도교의
법사가 될 테지만, 원숭이들은 너희들 보다 명상을 더 잘한단다. 원숭이
들은 이미 명상하는 방법을 알고 있거든.
숲속을 조용히 돌아다니다 보면 개울가에 앉아 있는 원숭이나 망연히
물을 바라보고 있는 원숭이를 만날 수 있을 게다.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것도 안 하면서 그냥 앉아 있을 뿐이지. 원숭이는 완전한 정적 속에 있
다. 다만 생각할 뿐이다. 자기를 가르쳐 줄 도사도 필요 없다.
또 너희는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완전히 자기를 잊어버리고 앉아 있는
원숭이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땅에서 30미터는 됨직한 높이에도 떨
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가 똑똑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원숭이는
전략을 알고 있다. 그는 <나는 적보다 나중에 움직이지만 적보다 먼저
도달한다.>는 격언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원숭이를 때려보거라. 그놈
은 굴러서 도망가면서 경계하는 자세를 보일 것이다. 그놈은 상대가 또
다시 움직일까 봐 거기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그대로 앉아서 상대방의
거동을 살핀다. 원숭이가 정신을 놓고 있는 틈을 노려 그놈을 붙잡으려
고 해도 소용이 없단다. 너희가 움직이면, 그놈은 너희가 예상했던 것보
다 훨씬 잽싸게 반응한다.]
후권의 공격 방법은 양주먹 동시에 뻗어 치기, 깨물려고 하다가 꼬집
기, 따귀 때리듯 손바닥 치기, 손가락을 갈퀴처럼 만들어 할퀴기등 독특
하고 다양했다. 사이훙은 이상한 원숭이 보법도 배웠다. 다리를 활처럼
벌리고 중심을 잡지 않고 걷고 뛰는 것이었다.
[원숭이는 똑바로 설 수가 없기 때문에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너희는
이러한 동작을 반드시 시합에서 사용해야 한다.]
후권 사범과 대련하는 것은 웃기면서도 무서운 것이었다. 매번 대련이
시작되기 전에 그는 사이훙이 먼저 공격하도록 허점을 보이면서 정신없
이 사이훙의 주위를 뛰며 돌아다녔다. 그는 자신의 주전자 같은 머리를
흔들어대며 언제나 원숭이처럼 겅중거리면서 사이훙을 놀려댔다. 그러나
사범이 한번 공격하고자 결심하면 참으로 두려웠다. 사이훙은 거의 예외
없이 도망조차 칠 수가 없었다. 사범은 가혹하게 그를 추적했고, 마치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는 듯이 원숭이처럼 펄쩍뛰면서 사이훙을 잡
아먹을 듯이 덮쳤다.
사이훙이 네 번째로 사사한 우당산의 무술가는 사형도수를 가르치는
차갑고 사악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존경하기를 바라지도 않
고 인정()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무서운 사람으로 남기를 바랐으
며, 다른 사범들조차 모두 그를 피했다. 큰 키에 비석처럼 단단한 신체
를 가진 그는 언제나 어두운 그늘에 몸을 숨기고 파충류 같은 살벌한 눈
빛으로 사람들을 쏘아보았다. 그는 음식도 차가운 음식만 먹었다.
그는 화산의 박쥐신선이 연마하던 태음공과는 또 다른 음공()을
쌓았다. 그의 음공은 어둡고, 축축하며, 지옥과 같은 것이었다. 그의 영
혼은 저승의 귀신들과 내통하고 있었다. 힘말고는 모든 것이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는 춥고 깊숙한 곳에서 자신을 고수로 만들어준 살인적인
권법과 잔인한 신념을 이끌어 냈다.
사이훙은 여러 스승을 대해 봤지만 이 사람만큼은 정말 두려웠다. 사
형도수 사범은 대련할 때에도 아주 잔인했다. 그는 무덤의 묘비명 같은
침묵을 깨고 칼로 자르듯이 짧게 말했다. 겉으로 보면 제자를 가르치면
서 잘못을 고쳐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제자들의 인격이
나 자세에서 결함을 발견해 내었다. 그의 됨됨이와 무술은 모두 잔인하
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사형도수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공격 방식은 손을 펴서 손가락 끝으로
찌르는 것이었다. 철나한권은 주먹으로 치는 것이었고, 백학권은 손으로
쪼는 것이었고, 후권법은 손가락을 갈퀴처럼 만들어서 할퀴는 것이었다.
사형도수 사범은 말은 안 했지만 사이훙을 믿는 눈치였다. 사범은 때때
로 문하생들을 이끌고 도살장으로 가서 소의 옆구리에 손을 찔러 넣는
것을 보여 주었다.
[꿰뚫는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공을 쌓아야만 한다. 내공은
풀잎처럼 연약해 보인다. 풀잎은 바람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태풍조차
풀잎을 꺾거나 뿌리뽑지 못한다. 풀잎은 너무나 유약하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풀잎은 너희들의 손을 벨 수가 있다. 너희들이 찾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유약한 힘이다. 적이 공격해 오면 너희들은 힘을 굽히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몸을 흔들어 그의 공세에 길을 열어 주어라. 그의 힘
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그 힘을 흡수하고, 바로 그 순간 가차없이 휘둘
러 쳐라.]
사이훙의 공격을 유도하는 사범의 두 눈은 번쩍거렸다. 그는 마치 뱀
처럼 몸을 휘두르면서 공격을 피했다. 사이훙은 사범을 붙잡고 꺾어 조
르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사범의 두 팔은 마치 고무 같았다. 사범
은 경멸하듯, 그 상황에 쾌감을 느낀다는 듯 사이훙을 반격해 왔다. 사
범의 팔이 사이훙의 머리 언저리를 감돌며 칠 듯 말 듯 놀려대다가 순식
간에 사이훙의 온몸이 멍들도록 손가락 끝으로 쑤셔 버렸다.
[네 방어법은 너무 열려있다.]
사범이 냉소하듯 알려 주었다. 그는 사이훙의 아픈 곳을 주무르는 모
습을 곁눈질로 보면서 말했다.
[만약 내가 너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면 너는 어디를 공격받았는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네가 지금 맞은 곳이 네가 가진 약점이다. 이제
그곳을 방어하는 것을 잊지는 않겠지.]
사형도수 사범은 치명적인 급소들만 공격했다. 그의 공격은 상대방을
불구로 만들거나, 오장육부를 상하게 했으며 심지어는 죽게도 만들었다.
사이훙은 열심히 손가락으로 땅을 짚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딱딱한 모래
주머니를 손가락 끝으로 찌르며 부단히 연습을 했다. 사범은 손가락이
적의 몸을 3센티 정도는 꿰 뚫을 수 있어야만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다
고 강조했다.
[뱀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적을 살해한다. 뱀은 물거나, 몸을 감아 졸
라서 질식시키는데, 언제나 적의 급소를 공격한다. 뱀은 먹이를 몸으로
감은 뒤, 먹이가 몸부림치는 동안에 먹이의 급소를 꼬리로 공격한다. 사
형도수는 이것을 관찰하여 얻은 기술이다.
사형도수의 공격은 신체적으로 근육의 힘을 사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
라 내공 또한 사용한다. 손가락이 목표물을 찌를 때 기를 손가락 끝에
모아라. 정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된다.]
그는 사이훙을 가볍게 쳤다. 그러자 사이훙은 곧 숨이 막혔고, 필사적
으로 숨을 들이쉬기 위해 헐떡였다. 사범은 사이훙이 한참 동안이나 고
통스러워하면서 몸부림치도록 내버려두었다. 잠시 뒤에 그는 추궁과혈법
()을 사용해서 사이훙의 몸을 마사지해 주고, 등을 두드려서
사이훙의 막힌 혈도를 풀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사형도수다. 사형도수는 적은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다.]
사형도수 사범은 정신병자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도사들은 그를 우
당산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가 더 많은 죄를 짓지 않도록 통제하고, 좋은
뜻으로 무술을 전승시킬 수 있도록 만들려고 했다. 화산의 사부님이 사
이훙을 가르칠 때 반복해서 강조한 것이 있었다. 무술사범의 기술을 배
워서 받아들이는 것은 현명한 일이지만 전체적인 인격까지 모두 모방하
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점이다. 사이훙은 우당산에서 가르치는 모든
무술을 배우면서도 자신의 도교철학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사이훙은 이제 대단한 무술 실력을 쌓았으며, 그 기술은 급한 성질과
결합되어 호전적인 기질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언제나 잘 살펴보
고 있던 도관의 사부님들은 그에게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
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그와 동문 사형제들은 우당산을 떠나서 화산으
로 돌아오는 여정에 올랐다.
길가의 어느 찻집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그들을 인솔하던 도사 한
분이 다음과 같이 도교의 입장을 설명해 주었다.
[무술을 배우는 것은 자신감을 얻으면서도 교만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서이다. 너희들의 자신감은 너희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온화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만약 너희가 무술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너희들은 그들은
무시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힘없는 이들이 너희들
에게 해코지할 수는 없단다. 그들이 너희들을 상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스스로 잘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을 드러내지 말거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하
는 것이다. 위험한 사람은 무사가 아니라 소인배들이다. 그들은 힘이 없
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들이 <힘이 없다고 보여 주어야만>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나약함과 무지는 그들을 교만하게 만든다.]
[여러분, 저 도교의 나이 어린 시자들을 좀 보소!]
찻집에 있던 어떤 사람이 떠들었다.
[여자 맛도 보지 못한 애송이들이잖아!]
그의 옆에 있던 동료가 맞장구치며 웃어댔다. 사이훙의 기질이 즉시
불붙었다. 그러나 사이훙 일행을 인솔하던 도사는 그 사람들을 훑어보더
니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적대적인 장면에서 초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버리는 것은 그를
더 강한 사람으로 만든다. 너희들은 누군가를 살상하기 위해 무술을 배
웠던 것이 아니며, 유명해지기 위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또한 종교적
으로 높은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 배운 것도 아니다. 너희들에게 무술을
가르쳤던 목적은 극기()와 자기 방어를 위해서였다.]
[저 애송이들이 전부 다 숫총각들이란 말이야?]
그 남자가 동료에게 말했다.
[그런 것 같아. 사실 말이지. 저 송사리 같은 애들은 불알도 가지고
있지 않을 거야! 이것 봐, 꼬맹이 도사님들, 불알이나 달고 있나?]
그의 동료가 큰소리로 합세했다.
[뭐 달려 있다고 해도, 저 애들 것은 요 복숭아 씨보다도 작을 거야!]
[저 애들이 여자를 본적이나 있는가 몰라?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고나 있을까?]
[하! 저놈들은 아마 여자를 놓고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모를거야!]
사이훙은 금방이라도 뛰어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근육은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그는 도사의 허락하는 눈빛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사는 한가로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웃고 있는 두 사람을 온화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사의 집요하고도 그윽한 시선에 붙잡히자 그 두 사람은 당혹스러웠
든지 점차 조용해졌다. 잠깐 침묵이 흐른 뒤에 도사는 사이훙 일행에게
떠나갈 채비를 하라고 신호를 주었다.
[무지함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싸움질을 하면 안 된
다. 너희들은 자신의 실력을 알고 있으니, 그들이 너희에게 당하게 될
고통을 먼저 생각하고 이해해 주어야 한다. 그들을 미워하는 대신 자비
심을 가져야 한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15. 양 청푸와 태극권
사이훙은 계속해서 사부와 할아버지의 소개로 무림의 곳곳을 돌아다니
며 권법의 고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무림의 대표적인 고수들
로는 형의권()의 쑨루탕()과 바오 톈이(), 팔괘장(
)의 푸정쑹(), 장 자오동(), 그리고 태극권의 양청푸
등이 있었다.
사부는 사이훙에게 무림을 두루 다니며 내공의 기초를 닦으라고 일렀
다. 기술과 기교로 싸우는 외공에 비해 내공 무술은 기공과 명상을 응용
해 내적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데 더 주안점을 둔 무술이다.
형의나 팔괘, 태극은 그 내공이 각기 독특해 나름대로 한 유파를 이루
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태극권은 최상승의 내공법으로 널리 알
려져 있었다. 당대 태극권의 최고수인 양 청푸는 베이징에 개인 도장을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양 청푸가 화산에 들렀기 때문에 사이훙은 어릴 적부
터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사이훙은 그를 <양 아저씨>라고 불렀고,
양 청푸는 사이훙을 <꼬마 원숭이>라는 애칭으로 불렀었다. 그런데 그
꼬마 원숭이가 벌써 혼자 여행을 다니고, 마냥 재롱을 떨며 달라붙던 아
저씨를 사부라고 부를 만큼 장성한 것이다.
양 청푸는 사이훙을 따뜻하게 반겼다. 양 청푸는 180이 넘는 거한으
로, 뾰족한 정수리가 드러나도록 깎은 머리와 강인한 얼굴은 바늘로 찔
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이 단단해 보였다.
양 청푸에게 가르침을 받는 동안, 사이훙은 양사부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이훙이 어려서부터 알고 있던 양사부의 모습은 온화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안경까지 걸친 그의 모습은 일생을 책 속에서 파묻
혀 지낼 서생처럼 보였다. 사이훙은 그런 양사부의 모습을 좋아했다. 하
지만 양사부가 일단 싸움을 시작하면 잔인하고 악랄한 초수를 펼친다는
것이다.
베이징에 있는 양 청푸의 도장에 도착한 사이훙은 곧 양 청푸의 제자
가 되었다. 고명한 고수의 손자로서, 또 화산파의 제자로서 태극권 대가
의 몇 안 되는 수련생 반열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몇 주 뒤에는 양사부와 사형으로부터 태극권의 기초를 전수 받기 시작
했다. 태극권은 내공을 증진하기 위한 체조와 명상, 그리고 실전에서 쓰
이는 무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권법이다. <최상의 권법, 궁극의 권
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수련 자세와 수련 기구를 이용하였다.
사부와 사형은 먼저 물 흐르듯 유연하게 움직이는 몸 동작과 태극권 고
유의 내공 수련 자세를 가르쳤다. 기립 명상과 가부좌 명상 자세는 물론
이고, 효과적인 수련을 위해 태극봉(양 끝에 손잡이가 달리고 가운데 구
멍이 파진 나무 막대)과 태극구(직경 1미터의 둥근 돌과 작은 구슬)를
사용하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이 모든 방법은 수련자들이 스스로
정문()과 심문()을 열 수 있게끔 내공을 단련시키고 증강시켜
주었다.
사이훙이 기본 동작을 익히자 태극권의 자세는 운기행공()으
로 넘어갔다.
행공에는 소주천()을 따라 기()를 상반신에서 수직으로 환류
시키는 것과, 대주천()을 따라 사지 전체로 골고루 순환시키는 것
이 있었다. 이 같은 운기 과정을 통해 모인 내공은 자연스럽게 정문을
쳐 올리고 심문을 뚫어 주어 인간 내면에 잠재된 에너지를 물 흐르듯 모
아주었다. 기를 순환시켜 증강된 내공은 심적 안정과 근육 이완 효과를
가져왔으며, 신경 및 장기, 골격 등에 생긴 이상을 회복시키는 치유 기
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상대의 몸에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적을 물
리치는 투기로서의 기능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태극권의 고수
가 내공을 사용하여 적을 공격하면 그의 몸에서 나간 기가 주먹으로 직
접 때린 것보다 훨씬 큰 힘으로 상대의 몸 구석구석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태극권이 가진 특성은 이런 파괴와는 거리가 멀다. 다른
권법이 힘과 강한 타격을 기본으로 하는 데 반해 태극권은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강조했다. 태극권을 수련한 자들은 공격에 대해 유연하게 반응
한다. 머릿속의 잡념을 지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근육이 긴장되어 기
의 흐름을 막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싸우는 동안에도 편안한 자세와
냉정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신체의 긴장이 풀리면 오히려 적의 공격 방
향과 공격 강도를 쉽게 알아챌 수 있으며, 동시에 몸을 움직이는 것도
훨씬 수월해진다. 그러니 이 부드러움이야말로 내공 무술의 정수인 것이
다.
기본 훈련과 행공을 거친 사이훙은 태극추권()을 수련하면서
더욱 심화된 태극권을 맛볼 수 있었다. 이는 민감한 손을 회전시켜 공격
해 오는 상대의 가격을 막고 동시에 내공으로 그를 밀쳐내는 권법으로,
수많은 대련 과정을 통해 동작을 완벽하게 익혀야 한다. 태극권은 그야
말로 <최상의, 궁극의>권법이었고 양 청푸는 수십 년에 걸친 수련으로
그 사실을 충분히 입증해 주었다.
사이훙은 의외로 빨리 양사부의 냉혹함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양사부는 가족과 제자들을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양 청푸
는 식사를 마치고 식구들보다 앞장서 식당을 나섰다.
[뒤로들 물러서라!]
식당을 나서던 양 청푸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고 동시에 두 명의 괴한
이 나타나 돼지 잡는 바구니를 양 청푸에게 뒤집어 씌웠다. 등나무 줄기
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폭이 좁은 바구니가 양사부의 팔과 몸통을 꽉 죄
었다. 양사부가 바구니를 벗으려는 순간, 괴한 중의 하나가 바구니를 식
당 아래 언덕으로 차버렸다.
아마도 양 청푸를 꺾어 무림의 명성을 얻고자 하는 자들인 듯 싶었다.
바구니가 굴러 내려가기 시작하자 두 괴한은 칼을 빼들고 언덕 아래로
줄달음을 쳤다. 언덕 아래에는 동료로 보이는 또 다른 두 명의 괴한이
칼을 치켜들고 바구니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놈들이 다냐?]
바구니가 멎자 양사부가 물었다.
언덕에서 달려 내려온 자들까지 가세해 모두 네 명이 된 괴한들은 대
답 대신 칼을 치켜들며 바구니로 다가섰다.
[좋았어!]
양사부는 혼쾌히 외치고 나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부드러운 손동작
하나로 바구니는 쉽게 벗겨졌다.
양 청푸는 괴한들 앞에 우뚝 섰다. 거리의 어슴푸레한 빛에 드러난 그
의 모습은 이미 험상궂은 신상()의 모습이었다.
[나를 죽이고 싶다 이거지?]
양사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것 참 안됐군. 그럴 수가 없을 테니. 주위나 한 번씩 둘러봐. 오늘
저녁이 네놈들의 제삿날이 될 테니 말이야.]
네 명의 괴한은 양사부를 향해 재빨리 칼을 내 찔렀다. 양사부는 느릿
한 동작으로 칼을 피하더니 두 사람의 심장에 각기 한 초를 펼쳤다. 거
의 같은 동작으로 몸을 돌리며 다른 두 명의 목을 가볍게 틀어 쥐었다.
네 명의 괴한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양사부는 아무 일도 없
었다는 듯 손을 툭툭 털고 언덕을 올라왔다.
무림계에서 최상의 무술이란 없다. 단지 고수에 의해서 증명될 뿐이
다. 태극권도 수많은 도전자들을 물리치면서 무림의 독특한 유파로 자리
잡았다. 양사부는 물론 그의 아버지, 숙부, 할아버지, 동생까지도 모두
태극권의 고수였고, 이들은 태극권의 이름을 꺾어 고수의 반열에 들고자
하는 도전자들을 수없이 물리쳐 왔다. 경쟁 상대는 형의권과 팔괘장 뿐
이었다. 당시 <내공 무술>로 지칭되던 형의나 팔괘, 태극은 서로 나란히
어깨를 견주고 있었다.
양사부의 도장 별채에는 한 남자가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는 거의 종일
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남자는 형의권의 고수인데, 넉달 전 양사부
에게 도전했다 패하여 부상을 치료하는 중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결투는 특이했다. 싸움이 시작되고 한 식경이 지나도록 양
청푸는 형의권 고수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상대의 공격이 워낙 세차
계속 관찰만 한 것이었다. 공격자 역시 내공이 뛰어난 고수인지라 약점
을 찾는 일이 그리 쉽지가 않았다. 한 사람은 차고 찌르고, 한 사람은
이리저리 피하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형의권의 고수가 양 청푸의 머리를
향해 손을 내리치는 순간 양 청푸는 얼른 꽃병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막
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상대는 미처 손을 거둘 새도 없이
꽃병을 내리치고 말았다. 잠시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양 청푸의 손에 들린 꽃병이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랗게 부서져 내렸
다. 양 청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바닥을 펴서 앞으로 쭉 뻗자 형의
권 고수는 문 앞까지 날아가 문을 부수며 쓰러졌다. 그의 입, 코, 귀 등
모든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양 청푸는 제자들에게 그를 별채에
눕히고 내상을 치료해 주도록 지시했다. 형의권의 고수는 아직 회복을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내공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죽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사이훙은 태극권을 익히다 문제가 생길 때 마다 양사부의 도장에 들르
곤 했다. 양사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사이훙은 양사부의 도장에 발
길을 끊지 않았다. 사이훙이 태극권 수련을 어느 정도 마무리짓고 처음
도장을 떠나기 전 날, 팔괘장의 장문인인 푸 정쑹이 양사부에게 도전했
다.
푸 정쑹은 땅딸막한 체격의 젊은 사람이었다. 그는 용형팔괘장(
)의 자세를 갖추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양 청푸의 주위를 끊임
없이 돌았다. 양 청푸는 두 눈을 감고 꼼짝 않고 서서 내공을 끌어올리
고 있었다. 30분이 넘었지만 푸 정쑹의 도는 자세나 속도는 조금도 변함
이 없었다. 양 청푸도 일체 움직임이 없었다. 순간 갑자기 푸 정쑹이 손
을 내밀며 양 청푸를 향해 돌진하자 양 청푸는 눈을 번쩍 뜨더니 그의
손을 맞받았다. 푸 정쑹의 몸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자 양 청푸는 상대의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가슴을 향해 한 초를 다시 내질렀다. 내공으로
단련된 사람이었으므로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푸 정쑹은 큰 상
처를 입고 양 청푸의 도장을 떠났다.
이 두 대가의 싸움에서 사이훙은 명상을 통한 내공의 힘과 태극권의
우수성을 알 수 있었다. 사이훙은 자신의 권법에 태극권을 접합시켜야되
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태극권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려면 25년이 걸리
니, 사이훙이 양사부의 도장에 묵었던 그 짧은 시간은 겨우 태극권의 맛
을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16. 사부와의 대결
사이훙은 열 다섯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상당한 경지의 무술을 지니게
되었다. 도장을 떠나 속세에 내려와서는 지방 무술 대회에 나가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각 지방을 유람하는 사이훙의 모습은 멋지고 낭만적이었다. 영민하고
준수한 외모와 늘씬한 체격, 잘 발달된 근육으로 인해 사이훙은 나이보
다 성숙한 장부로 보였다. 또한 매끈한 피부와 화산에 들어가면서부터
기른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사이훙을 한층 돋보여 주었다.
사이훙은 자신감이 넘치는 젊은이였으며, 다소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무술을 시험하고 싶어했다. 한 번은 당랑권()의 두 제자에
게 도전해 그들을 꺾기도 했다. 두터운 옷 아래 숨겨 깐 철판 덕분이었
지만 사이훙은 그들을 꺾었다고 큰소리쳤다. 다른 지방에 가서 더 대담
한 도전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사이훙은 한 마을을 지나다가 광장 한 가운데 걸린<백학촌(
)>이라는 팻말을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그 팻말에는 큰 글씨로 <백학촌 - 하늘 아래 우리가 최
고다. 우리가 여기 있으므로 둘째란 없다.>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사이훙은 바로 붓을 꺼내 그 글귀 아래 첨언을 했다.
<이제 내가 왔으므로 너희들은 둘째다.>
다음날 팻말에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만일 용기가 있다면 내일 이곳에 나타나거라.>
<물론.>
사이훙은 다시 글을 보탰다.
다음날 광장에 얇은 비단 장삼을 입은 청년 다섯이 나타났다. 사이훙
은 성긴 베로 지은 회색 도교 법복을 입고 있었다.
[뭐야, 저건. 어린애잖아.]
그중 우두머리인 듯한 스물 여덟쯤 돼 보이는 청년이 사이훙을 손가락
질하며 비아냥 거렸다.
[저놈이 뭘 믿고 그렇게 큰소리를 쳤지? 더구나 도사 복장까지 하고
말이야. 나는 스님들과 싸우지 않아.]
[나는 중이 아냐. 산천을 유랑하는 은자이자 무인()이지.]
[버릇없는 놈. 난 눈감고도 네놈을 처치할 수 있어.]
[그래. 꿈속에서는 가능하겠지.]
[입닥치지 못해!]
제일 키가 큰 청년이 으르렁 거리듯 소리를 질렀다.
[몇이나 덤빌 거지?]
사이훙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하긴 몇이 덤벼도 상관없기는 하지만.]
[건방진 녀석. 몇은 몇이야, 나 하나면 충분하지. 어이, 꼬마 중놈,
너 어디서 왔어? 그걸 알아야 냄새나는 시체라도 돌려보내지.]
[그럴 필요 없어. 입만 나불거리지 말고 사내라면 어디 덤벼봐.]
사이훙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키가 큰 청년이 돌진해 왔다. 사이훙
은 가만히 기를 끌어올린 뒤 그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쯤 몸을 빙글 돌며
엉덩이를 걷어차고, 휘청거리는 청년의 발목을 다시 한번 걷어차 무릎을
꺾었다. 청년은 마치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 고통을 참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된다고 말했지?]
사이훙은 조롱 투로 한마디 내뱉고는 유유히 일어섰다. 그는 승리를
만끽했으며 자신의 무공에 대해 진실로 자부심을 느꼈다.
화산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사이훙은 망설였다. 속세에서 만끽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즐거움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사이훙은 관씨 가문의
부와 영예를 향유했다. 훌륭한 저택과 멋진 옷, 생산과 거위 요리, 웅담
으로 만든 산해진미를 두고 산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사이훙은 결투 때마다 승리를 거두러 소년 영웅으로서의 명예
도 막 쌓아 가고 있었다. 화산파의 검소함과 철저한 극기가 요구되는 수
련 생활을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사이훙은 다시 산으로 가야 했다. 산을 오르는 그의 발걸음은
한숨으로 시작되었다.
산에 도착하자마자 사부님은 훈계를 시작했다.
[얘야, 넌 이제 너의 무공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사이훙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단다. 운이 조금 좋았을 뿐이야. 정말 훌륭한 무공을 터득
하려면 명상을 더 해야 한다. 너는 기본이 잘되어 있어. 기본은 힘을 내
기 위한 원천이기는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란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
깊이 연마하고 네 신체 전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저는 무술 대회에서 우승도 했고 여러 번 도전자들을 꺾고 승리를 거
두었습니다.]
[실제로 기를 쓰는 것보다는 키우는 게 더 바람직하단다. 그래야 상상
할 수 없는 엄청난 폭발력이 생기는 거지.]
[저는 벌써 내공을 익혔습니다, 사부님. 싸울 수 있어요.]
[하지만 너는 무념의 명상을 통해 영성()을 지니는 단계에는 이르
지 못했어. 사이훙, 영성을 지니는 것이 싸워 이기는 것보다 훨씬 고귀
한 일이란다.]
[저는 그런데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 아래 세상을 보세요. 재미
있는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흥미로운 일들
을 많이 겪었습니다. 경극()도 보고 서커스도 보고 또 여러 무인들
과 결투도 벌여 많은 걸 배웠습니다.
만일 제가 도관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런 일들을 겪어 보지 못
했을 겁니다. 평생 예전()만을 떠받치고 사느라고 생생한 무림의 기
술을 배우지도 못할 거고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무예를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이 산 위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같아요.]
[네 무술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생각하느냐?]
사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나와 한번 싸워 보련? 만일 네가 이긴다면 내 속세에 있는 여러
고수들을 소개해 주마. 그때는 네 마음껏 가서 배우고 또 싸워도 좋다.
그렇지만 네가 지면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거다. 알겠지?]
사이훙은 사부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장엄한 산을 배경으로 두 사람
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이훙은, 이 고독
한 장소에서 편안하게 은둔하시는 분과 무슨 얘기를 하겠다고 헐떡이며
산을 올랐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사부님은 이제 여느 노인네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머리속
으로 사부님의 몸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자신보다도 훨씬 가벼울 것 같
았다.
[네, 알겠습니다.]
사이훙은 자신감에 차서 엷은 미소까지 띠며 대답했다.
[그래, 한 번 덤벼봐라.]
사이훙은 사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무섭게 강하게 한 초를 출수했다.
속도가 너무 빨라 다른 사람 같으면 도저히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부는 태연히 슬쩍 몸을 비켜 피해 버렸다. 사이훙은 그때까
지 배운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사부를 공격했다. 그러나 수십 차례 출수
를 했지만 사부님의 몸은 커녕 옷자락에도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이훙은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했다.
사이훙은 내공을 끌어 모아 다시 한번 주먹을 내질렀다. 사부는 학처
럼 우아한 자태로 훌쩍 몸을 날리더니 사이훙의 어깨를 뛰어 넘었다. 사
이훙이 놀라 몸을 돌리는 순간 얼굴 쪽으로 세찬 기운이 불어오는가 싶
더니 뭐가 철썩하고 뺨을 때렸다. 사부님의 옷소매가 슬쩍 얼굴에 스친
것이다.
사이훙은 연신 팔을 내두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사부님의 번쩍이는 눈
빛과 함께 옷소매가 끝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휘두르던 팔이 사부
님의 소맷자락에 맞자 팔이 마비되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사이훙은
팔을 들 수가 없었다. 사부님의 손바닥이 다시 보인다고 느낀 순간 사이
훙은 자갈이 깔린 좁은 길로 날아가 길게 나자빠지고 말았다.
사이훙이 맥을 놓고 쓰러져 있자 사부가 걸어왔다. 번쩍이던 눈빛은
이미 사라지고 다시 미소 띤 인자한 얼굴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사이훙
은 안아 일으키고는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졌다. 네가 진 이유는 집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나는 완벽
하게 집중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긴 것이고. 명상 없이는 집중력을 얻
을 수 없단다.]
사이훙은 일어나 숨결을 가다듬었다.
[저는 그래도 떠날 겁니다. 행자로 떠돌며 살겠어요. 사부님 모습을
한 번 보세요. 그래요, 사부님은 훌륭하신 분이죠. 하지만 그래서 얻으
신 게 뭐죠? 사부님은 늘 배고픈 상태로 이 외로운 산꼭대기의 습기찬
방에서 살고 계십니다. 이게 성공하신 겁니까? 신들이 사부님의 말을 듣
고 있나요? 천상으로 가신다고 하셨죠? 대체 천상 따위가 있는지 어떻게
아신다는 겁니까?]
절규에 가까운 사이훙의 물음에 사부는 차분하게 답을 해주었다.
[사이훙, 이 세상을 다 알아야 신과 하늘도 알 수 있는 거란다. 이곳
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면 그때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지.]
[천상이 보여야 믿지요. 설사 믿는다고 해도 어떻게 하늘로 올라갈 수
가 있습니까? 몸이 떨어질 텐데.]
사부는 싱긋이 웃었다.
[몸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란다. 네 영()이 올라갔다 오는 것이지.]
[영이라고요? 그게 몸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겁니까?]
[그럼. 하지만 먼저 오감()을 다스려야만 한다. 이 세상이 환영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오감을 다스리고 세상 이
치를 터득하기 시작하지.]
[세상이 환영이라고요?]
[그래. 세상이란 실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곳이란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실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뇨? 여기 이렇게
산도 있고, 저도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단다. 그게 바로 환영이야. 네가 일단 오감을 다스리고 다
섯 가지 원소의 이치를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단지 환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저는 사부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감을 다스린다느니 세상
의 이치를 터득한다느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
까?]
사부는 사이훙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자, 이런 것이 네가 궁금해하는 사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사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제단에 놓인 향다발을 가리켰다. 순간 마른
향에 불이 붙더니 흰 연기와 함께 백단향의 내음이 바람에 실려 왔다.
사부의 손길은 다시 2미터쯤 떨어져 있는 탁자 위의 청동 주전자로 옮
겨 갔다. 그러자 주전자가 공중으로 서서히 떠오르더니 옆의 탁자로 자
리를 옮겨 앉았다. 사이훙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
보고만 있었다.
[다섯 원소를 지배하면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단다. 하지만 그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련을 더 해야만 한다. 잘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리거
라. 말년에 성취를 맛보려면 젊을 때 시작해야 하는 일이 있단다. 마치
큰 나무가 작은 씨앗에서 자라듯이 말이다. 물론 이런 일들을 믿기 어렵
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얘야, 너는 아직 어려서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과실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네게 그 열매를 보여 준 것이란다. 하지만 사
이훙, 무슨 일을 시작하면서 언제나 완벽한 증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어야 하는 일들도 있는 법이지. 신은 초월적인 존
재이고, 네가 모든 것을 스스로 알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17. 수련
[명상은 명상 하나만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다른 훈련들이 보완 작용을 해줘야만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지.]
사부님의 가르침은 은은하게 이어졌다.
[명상에 필요한 힘과 생기는 무예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지만, 진정
한 명상에 몰입하려면 그 정신이 음악, 서예, 회화, 철학 등으로 닦여져
있어야 한다.
음악은 영혼과 성스러움을 이어주는 구실을 한다. 사람의 육신은 속이
빈 갈대와 같은 데 음악은 그 빈곳을 신의 노래로 가득 채워 준단다. 음
악은 너를 편안케 하고 곤두선 신경을 진정시키며 다른 세계의 존재를
체험케 할 것이다. 아무리 시끄럽고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안을
느낄 수 있지. 어느 누구도 음악 없이는 살 수가 없단다. 음악을 연주하
는 법을 배우거라. 듣기에도 좋지만 육신의 건강에도 도움을 주기 때문
이다. 가령 피리를 불게 되면 마음의 평정을 얻고 기도 조화를 이루지
만, 동시에 피리를 잡고 있는 손가락을 통해 정문을 자극하기도 한다.
음을 듣고만 있든지, 혹은 직접 연주를 하든지 간에 음악은 네 영혼을
맑게 해준다. 음악이란 평화요, 감동이요, 표현이며 성스러운 소리다.
서예라는 것은 고요함과 통일성을 의미한다. 붓은 손이 연장된 것으
로, 그 놀림에 따라 정문이 자극되며, 신경도 안정된다. 또 시와 경을
반복해서 쓰면, 읽으면서는 느낄 수 없었던 어감과 미묘한 의미를 깨닫
게 된단다. 시경을 한 획 한 획 따라 쓰다 보면 시인들과 현인들이 본래
가졌던 의도를 알 수 있게 되지. 글씨를 직접 쓰거나 잘 쓴 글씨를 감상
하는 것은 고요하고 점잖은 성품을 길러 주어 너를 이성적이고 지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회화 역시 이러한 두 가지 의도를 다 지니고 있다. 회화는 한 예술가
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인 동시에 외부 세계와 영적 세계를 연결
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름다움에는 감사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단
다. 화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그림을 통해 표현하
지. 눈에 보이는 자연을 영혼 속에서 녹여 내는 것이다.]
사이훙은 기본 과목인 철학, 인류학, 고고학, 천문학, 상학뿐만 아니
라 음악과 서예, 회화까지 학습하였다. 모든 교육과정은 사이훙의 정신
세계를 확대시키고, 육신을 단련시키며, 기질을 정화시키기 위해 계획되
었다. 사부는 또 부적의 추상예술, 초혼(), 점()에 대해서도 강의
를 하였다. 영적 수련을 주축으로 예술과 형이상학에 대한 학습이 사이
훙의 명상 수련에 기초가 되었다.
역학()은 사이훙에게 도가의 우주관을 친근하게 느끼도록 해주었
고, 신의 언어를 받아 들일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었다. 사부는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 하는 사이훙의 기질을 이해하였다. 그
런 것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
든 것을 통해 신과 영적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주역은 우주의 원리를 음과 양의 교류 및 8괘의 변형을 통한 변화로
규정하였는데, 이는 우주의 모든 상태를 표현해 놓은 64괘로 설명되었
다. 주역 자체는 복희씨에 의해 창안된 우주 구조를 성문화한 경전이다.
5천년 전에 살았던 이 전설적인 현인은 극지의 힘인 음과 양을 끊어진
선과 끊어지지 않은 선으로 나타냈다. 무의식 속에서 그는 희미하게 거
북의 껍질을 보았고 그것을 8괘로 구체화시켰는데, 이것은 여덟 개의 끊
어진 선과 끊어지지 않은 세개의 선들을 조합시킨 패였다. 각각의 괘는
각기 다른 자연, 즉 하늘, 땅, 천둥, 물, 산, 나무, 불, 호수의 힘을 나
타내었다. 바로 이 같은 추상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도가에서는 자연에
의해 창조된 움직임과 정체의 개념을 예언하고 설명하였다.
후에 8괘는 이 여덟 개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64괘를 구성하여 주역의
기본으로 자리잡는다. 주문왕()은 기원전 12세기에 감옥에 갇혀
지내는 동안 이 경전을 완성하였다. 문왕의 사후, 그의 아들 주공()
이 64괘의 각 효()에 주석을 달았다. 이들 두 사람의 작업이 주역의
내적 구조를 형성하였고 공자를 포함한 후대의 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여러 세기에 걸쳐 보완되면서 점차 완성된 구조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현명하게도 사부는 그 어렵고 오래된 경전을 사이훙에게 아무
렇게나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사부는 사이훙이 점술과 주역의 철학을
보다 직접적으로 이해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산 증인을 보여 주기 위해
사이훙을 데리고 먼 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하는 동안 사부는 그들
이 찾아가는 성인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5백년 전 화산의 도인들이 거의 다 죽어 가는 어떤 사람을 발견했단
다. 아무도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몰랐고, 그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밝
히지 않았지. 다만 도교와는 관련이 없다고 했다. 그는 너무나 쇠약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다른 장소로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도인들은 그
를 그가 있던 산꼭대기에서 간호를 해주었고 마침내 그는 건강을 되찾았
다.
건강을 회복한 그 사람은 밑도 끝도 없이 도술을 수련하기 위해 그곳
에 머물겠다고 했단다. 그의 도술이 무엇인지 모두들 궁금해 했지. 그날
부터 그는 높은 벼랑 끝에 있는 큰 편백나무 아래 앉더니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도인들이 그에게 음식과 물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입에 대
지 않았지. 그의 머리카락이 점점 자라서 나무 속으로 파고 들었다. 머
리카락을 통해 나무로부터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았던 거지. 그는 절대
로 자기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고 했다. 머리카락은 자기 생명 줄이라
고.
그런데 어느 날 호기심 많은 수련생 하나가 벼랑을 기어올라가 그의
머리카락을 몇 올 잘라 냈단다. 그러자 그 사람은 마술을 써서 그 수련
생을 얼려 버렸단다. 그 후 그 사람은 심하게 앓았으며 그 사이 나무도
시들어 버리고 말았지.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른 수련생에게 <네가 내 말을 어기고 장난
을 쳐서 내 생명을 빼앗으려 했으니, 하는 수 없이 너를 쓸 수 밖에 없
도다.>라고 말하더니 그 수련생을 나무로 변하게 했단다. 수세기가 지난
뒤에도 그의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 소년이 변한 나무 속으로 파고 들었
단다. 지금도 도인은 그곳에 있고, 도인을 보호하고 있는 나무는 바로
그 수련생의 화신이라고들 말한단다.]
사이훙과 사부는 풀과 나무가 무성한 길을 따라 산 위로 계속 올라갔
다. 그곳에는 정말 편백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도인이 있었다. 함께
간 사람들이 모두 도인 앞에 엎드렸다.
사이훙은 늙고 쭈글쭈글한 도인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감겨 있었
고, 피부는 말라 있었으며, 수염도 자르지 않아 까칠해 보였다. 누군가
표범 가죽을 그의 어깨와 무릎에 덮어 주었고, 그의 낡고 누더기가 된
옷을 다시 걸쳐 주었다. 벌거벗은 손과 발에는 길게 자란 손톱과 발톱이
지저분하게 구불거리고 있었다. 사이훙은 사부의 말대로 도인의 치렁치
렁한 백발이 나무 속으로 파고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
다.
도인이 눈을 뜨자 사이훙은 역()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
는 잠깐 사이훙에게 말로써 괘와 그 변화를 설명해 주었다. 그의 설명을
통해 사이훙은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사이훙은 여러 번 그곳에 들렀다. 그 도인은 사이훙이 들를 것을 미리
알았을 뿐만 아니라 사이훙이 할 질문도 미리 알고 있었다. 사이훙이 찾
아갈 때마다 도인은 답변을 준비해 놓고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사이훙은 스스로 주역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고, 일상의 삶에
역을 적용하는 실용적인 수련을 하게 되었다. 사이훙이 동전의 앞면을
양으로, 뒷면을 음으로, 또는 앞면을 음으로, 뒷면을 양으로 정한 다음
동전을 던져 괘를 얻으면, 주역은 바로 해답을 주었다. 사이훙은 복희씨
가 예전에 했던 그대로 거북 껍질 위에 세 개의 동전을 올려놓았다. 그
리고는 동전이 땅에 떨어질 때까지 거북 껍질을 흔들었다. 동전이 떨어
지는 형태에 따라 선이 그어졌고, 그 선은 각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
다. 그 선은 음일 수도, 양일 수도, 또는 장영음()일수도, 장영양
()일수도 있었다. 여섯 번을 던져 6효가 정해지자 사이훙은 얻어
진 효와 변효()를 역경에 대입해 보았다.
이 같은 학습과 수련을 통해 사이훙은 역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교훈
을 배웠다. 변화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어떤 일이든지 정점에
올라서면 반드시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사부는 사이훙에게 기본적인 명상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모든
수련 과정이 그렇듯이 사부의 가르침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점진적으로 옮겨 갔다. 사부는 모든 과정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사이훙이 다음에 해보겠다고 미루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부는 수련 방법을 설명하면서 수련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문제
점들을 미리 경고해 주었다. 사이훙에게는 언제나 명상을 통해 성취해야
할 과업이 주어졌다. 사이훙은 명상 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사부에게
말했다. 사이훙의 말을 신중히 들으면서 사부는 발전의 징후는 인정하였
지만 환상은 거부하였다.
[우리의 전통에서 보면 명상은 순수한 신체, 개방된 성격, 기 이 세
가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네가 어릴 적부터 내 입버릇처럼 말했다만,
기가 없다는 것은 영혼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명상을 하는 수련생들은
성정을 순화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수련중에 입마()의 화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자신과 세상에 대해 뚜렷한 생각을 가져
야 한다. 그것만이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니까 말이다. 너는 이 세 가지
기본을 명심하고 명상을 시작해라.
명상법엔 세 가지가 있다. 동체()명상, 기립명상, 가부좌 명상이
그것이다. 이미 형의권과 팔괘장, 또 태극권과 오금희()를 배워서
알겠지만, 동체 명상이란 신체를 격렬하게 움직이면서도 내면은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기립 명상은 몸은 조용히 서 있으되 내부는 움
직이는 것이다. 너는 기립 명상부터 시작하거라.]
기립 명상은 고요한 가운데 몇 가지의 정교한 손동작이 연속해서 이어
졌다. 사이훙은 미세한 동작으로 장기를 자극하고, 고요함으로 기를 운
행하여 정문에 이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물론 신체 동작도 몇 가
지 있었지만, 훈련의 주안점을 내부에 맞춰져 있었다.
기립 명상은 아주 미세한 부분에까지 정확하게 집중할 수 있는 정신력
을 키워 주었다. 정신을 집중시키는 능력은 심상()훈련과 호흡, 기
도에 의해 그 능력이 강화된다. 기립 명상에서는 배꼽과 태양신경총(
:위 뒤편에 있는 교감신경 집합처)과 이마에 단전()을 만들
었다.
사이훙은 각 단전에 힘을 모으고 입으로는 신의 이름을 쉬지 않고 부
르면서 마음속에 신의 모습을 떠 올렸다. 자신의 수련이 제대로 진행되
고 있는가 자문할 겨를도 없었다. 그 대답은 명상 중에 저절로 나타났
다. 사이훙의 몸은 점점 뜨거워졌고 손바닥은 붉은 색으로 변해갔다.
명상이 막바지에 이르자 사이훙은 일련의 분산()을 수행했다. 이
는 도가들이 명상 훈련 중에 집적된 기와 피를 분산시키는 과정이다. 명
상 중에는 여러 곳에 기와 피를 집중시키게 된다. 기와 피가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머리였다. 만약 축적된 기와 피를 분산시키지 않고 평상시
의 상태로 되돌아 오게 되면, 몰린 피로 인해 두통이 생기고 머리칼이
빠지며,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고 심장에 문제가 생기거나 치질을 앓기
도 했다.
명상은 오랫동안 준비하여 신체적으로도 완벽히 건강을 갖춘 뒤라야
수행할 수 있는 훈련이다. 신체 내부에 흩어져 있는 거대한 힘을 자유롭
게 움직이게 하고 기의 순환을 촉진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건강한
신체가 아니면 그 충격을 견딜 수가 없다. 때로는 명상 도중에 호흡이
느려지다가 갑자기 멈출 수도 있다. 그래서 기공 훈련의 기본이 되어 있
지 않은 사람은 명상을 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한다.
[자, 이제 네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거라.]
사이훙이 명상 훈련을 시작한 지 1년 정도가 지나자 사부가 말했다.
[네가 이전에 배웠던 세 가지 공부가 명상 훈련을 할 때 매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이제 조용한 기질을 갖게 되었
다. 명상이 너를 그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네가 쌓은 훈련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제
너는 내재자()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했을 것이다.
외부 세계는 이제 비교할 사물이 없다. 이제 명상은 네 삶의 기본이며
앞으로 그것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제 4부
탈적
18. 출가
수행을 마친 사이훙에게 스스로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 보통 그 정
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수도 생활에 입문한다. 그러나 사이훙은 다
른 졸업생들과는 입장이 달랐다. 그는 특별한 신분이었고 가끔 속세를
여행하도록 허락도 받았다. 할아버지 관 주인은 사이훙을 특별히 화산
에서 교육시켰지만 수련을 마친 뒤에는 속세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
다. 그리고 사부 역시 까다로운 소년을 잘 길러 관씨 가문의 기준대로
교육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지 출가를 시키려던 건 아니었다. 이제 수련
과정은 끝났고 사이훙의 결정만 남아 있었다. 사회로 돌아갈 것인지 아
니면 고행의 길로 들어설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중국에서는 열 여섯이면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성인이다. 할아버
지와 사부는 그가 신뢰하는 분들이었지만 두 분 다 그에게 영향을 미치
고 싶어하지 않았다. 사이훙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었다.
사부는 사이훙은 하산시키며 가족에게 돌아가 신중히 생각해 보라고
일렀다.
화산의 도인들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신비롭고 그 깊이를 헤아
릴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도교 신자들은 금욕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사
회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까지도 그들에게
는 하나였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과의 결별은 도인들에게는 두렵고
도 매력적인 일이었다.
사이훙은 지금 두 개의 평행선이 갈라지는 지점에 서 있었다. 사이훙
은 고행의 길과, 가족과 사회가 추구하는 세속적인 길을 모두 경험해
보았다. 예전엔 어려서 그런 문제를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장성한 지
금 사이훙은 자신의 미래를 선택해야 할 시기를 맞은 것이다.
사이훙은 산시성()의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수련으로 얻은 건
강과 자신감을 몸 전체로 발산하며 걸어가는 사이훙의 모습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열띤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쟁과
가난으로 찌든 평원에 그처럼 건강한 젊은이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1930년대에 산시성은 대격전지였다. 북부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전투
이후 복구도 안 된채 방치되어 있었다. 대지는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였다. 전에도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의 참혹한 광경
에 좌절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사이훙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그
모든 광경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리고 자신이 과연 이 참혹한 세상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해 보았다.
산시의 평원은 중국 문명의 싹이 텄던 곳이다. 기다란 줄기 끝에서
꽃이 활짝 피어나듯이 역사는 수세기 동안 산시의 종착지인 실크로드로
부터 뻗어나와 번영을 거듭했다. 황폐한 대지에 일어난 황허의 범람은
냉혹했다. 산시 지방은 문화, 정치, 전쟁뿐만 아니라 자연재해도 황허
처럼 그렇게 들이닥치곤 했다. 그 뒤 며칠 동안 사이훙은 간접적으로
전해진 역사가 아니라, 사람의 판단이 가해지지 않은 격동의 현장을 직
접 보고 느꼈다. 중국 사회에 박혀 있는 비정상적인 역설, 즉 지혜와
무지, 부와 가난, 자비심과 노예근성, 풍요로움과 기아, 힘과 무기력의
양극단이 그의 마음속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사회로 돌아가면 자신의 운명은 어찌 될까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의문이었
다. 농부로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근과 징집으로 열
에 하나는 죽었고, 남은 사람들 역시 매춘, 도박, 노예 매매 등의 불법
활동을 일삼고 있었다.
농부들의 생활을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그들은 바짝 타버린 토지를
일궈 조금이라도 수확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정 안되면 다른 사람
들을 속이거나 착취하며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농부들은 조상들이 남긴 땅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그 땅은 이미 척박
하게 변해 있었다. 토담집도 쓰러졌다. 군인들이 땔감으로 쓰려고 방에
달린 문짝까지 떼어 가 버린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식구들이 북적
대며 모여 살던 작은 방마저 비바람에 허물어져 버렸다. 뱀, 바퀴벌레
들만이 제 세상을 만난 듯 기어 다녔다. 필사적으로 먹이를 찾는 쥐새
끼들에게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진 아이들이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도둑
을 막기 위해 안으로 들여 놓은 돼지와 가축들은 여기저기 오물을 늘어
놓았다. 불결한 환경 때문에 질병이 만연했다. 그렇게 비참한 환경 속
에서도 아직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공산당과 국민당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물건
을 공출해 갔다. 공산당은 반일 감정에 호소하며 농지 개혁이라는 이상
론을 폈고, 국민당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며 현재의 중앙 정부가 이룬 영
광을 찬양했다. 그런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새파란 젊은이 들뿐이었
다. 노인들은 이미 그런 약속에는 식상할 대로 식상해 있었다.
어떤 점에서 보면 공산당이 국민당보다 나았다. 공산당은 이상적인
계획을 반복해서 선전하곤 했지만, 국민당처럼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일은 없었다. 당원들 대신 군인들이 들어왔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공산주의자건 국민당원이건, 전제 군주이건 간에 고통스
럽기는 마찬가지 였다. 집과 식량을 강탈하고 겨우 자라난 곡식을 짓밟
는 것도 모자라 사찰에까지 군인을 배치시키고 법당을 마구간으로 쓰기
도 했다. 더 끔찍한 일은 자신들의 적뿐만 아니라 양민들 까지 닥치는
대로 강간, 약탈하고 고문하며 살인까지 저지르는 만행이 비일비재하다
는 사실이었다. 군인들의 변태적인 즐거움을 위해, 사람들은 너무 끔찍
한 일들을 당해야 했다. 급기야 생존자들은 그 정도의 공포쯤은 당연하
게 여길 정도로 감각이 마비되고 말았다.
생물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게 마련이다. 사람들 역시 이 끔찍한
상황에 적응해 보려고 애를 썼다. 사이훙은 사람들의 비인간적인 행동
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노예를 얻기 위해 갓난아이를 내다 파
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인육을 돼지고기라고 속여 파는 사람들도 있
었다. 온갖 추하고 역겨운 일들이 난무했다. 속임수를 쓰는 장사꾼, 부
패한 관리, 제멋대로 날뛰는 군인들, 지나치게 열성적인 백인 선교사
들, 유럽에서 온 노예 매매상들.......모두가 썩은 사회에 기생하는 자
들이었다. 미덕과 정의를 수호해야 할 사람들마저도 자신의 안락을 위
해 백성들을 이용했다.
전에는 정의의 표본처럼 보였던 학자와 귀족이 이제는 가장 위선적이
고 경멸스러운 족속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웃의 비참함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고급 비단옷을 걸치고 우아한 부채를 펄럭이면서 거리를 활
보했다. 그들은 거리에 득실거리는 거지들과 빈민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이훙은 그들이 백성들의 불행을 즐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
막힌 생각마저 들었다. 거지와 빈민들이 많아질수록 그들의 지위는 높
아지고 이익을 챙길 기회도 많아졌다.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이기
적인 자들, 그들에겐 착취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 아무것도 걱정
할게 없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사이훙은 제 살을 파먹는 한심한 사회를 목격하고
아연실색했다. 그 자신도 이 광란의 축제의 한 일원이었다. 가도 가도
시체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개와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시체를 파먹고
있었다.
환락가로 팔려 가는 소녀들, 강요에 못 이겨 결혼하는 여자들, 터진
상처, 불거진 종기, 잘려나간 팔과 다리, 곱사등이, 일그러진 얼
굴....... 사이훙은 가진 돈을 몽땅 털었지만 그 모든 사람들을 돕기에
는 너무 적은 돈이었다. 고향집에 도착할 때까지 공포 속에서 허우적대
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눈에 밟혔다.
육중한 문이 등뒤에서 닫혔다. 가족과 하인들이 그를 반갑게 맞았다.
드디어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관가보는 친
숙하고 편안했다. 아름다운 건축물, 정적이 깃들인 정원, 높은 담, 모
든게 떠날 때 그대로 였다.
사이훙은 등나무가 얽혀 있는 아치 밑은 지나 정교하게 조각된 돌다
리를 건넜다. 네 세대 전 조상들이 심은 나무 사이를 지나면서 사이훙
은 자신이 변한 것인지 세상이 달라진 것인지 도통 할 수 가 없었다.
사이훙은 지금까지 지나쳐 온 전쟁의 소용돌이와 낙원 같은 이 집을 연
결시켜 보려고 애를 썼다. 전에도 그 둘을 연결해 본 적이 있었나? 아
니면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겐 의미 없는 일이라 의식하지 못했을 뿐인
가?
사이훙은 자신이 인생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
달았다. 할아버지가 정해준 길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은 아니다. 사이훙은 부와 빈곤, 명분과 실제, 단념과 세속적 욕망이라
는 양극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훈련에 몰두할 때도, 특
별히 허락된 여행길에서도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한 관심을
기울지 않았었다. 화산에서는 새로운 지식을 얻는 기쁨을 맛보았고, 집
에서는 좋은 의복, 혈통 좋은 말, 진수성찬, 진귀한 예술품들을 즐겼
다.
이제껏 그는 자기의 특별한 양육 과정에 있는 모순점이나 부모의 요
구, 가문의 책임 등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모든 책임을 회피해 온 것
이다.
사이훙은 어린 시절 조부모님과 함께 자주 연못의 전망대 앞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야만 했다. 사이훙은 여러 가능성들을 샅샅이 검토해
본 후에, 집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조부모님께서는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계속 자신을 뒷받침해 주실
것이다. 사이훙은 두 분을 존경했다. 하지만 그분들의 시대는 기울고
있었다. 부모님은 분명히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사이훙은 부모님의 기
준을 혐오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생각은 지워버렸다. 삼촌과 고모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벌이는 하찮은 말다툼과 가족간의 음모에 신물이 난
터였으므로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사이훙은 자신의 결정이 몰고 올
가족의 분노에 대비했다. 조부모님이야 결국 그의 결정을 허락하실 테
지만, 다른 가족들은 전부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속세를 떠나 종교로 출가하는 것이 가족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출가한 사람은 문자 그대로 가족을 버린 사람이었다. 효를
으뜸으로 여기는 중국 유교 사회에서 출가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죄
악이었다.
가족을 떠나면 그는 비개인적인 존재가 된다. 가족에게 있어 사이훙
이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름, 호적, 사찰에서의 자리
등 신분을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은 모두 지워진다. 후손을 낳아 가문을
유지하고 재산을 늘릴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가족은 그를 철저히 부
정해 버리는 것이다.
사이훙은 할아버지를 만나러 서재로 가서는 자신의 결심을 조용히 밝
혔다. 관씨 집안의 어른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생각에 잠긴 채 수
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한참 동안 손자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조심스럽
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힘을 기르고, 흔들림 없는 원칙과 의지를 가지기를 바랐
기 때문에 산으로 보냈다. 하지만 모든 공부를 마치면 다시 가족들에게
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이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수련을 마친 뒤 학
자나, 예술가, 무술가, 또는 기이한 방랑자가 되기 위해 속세로 돌아간
많은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비범했지만 속세와 인연
을 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산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지만 고행의
길을 선택한 자는 드물었다. 어쩌면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춘 이가 드물
었던 것일 게다. 솔직히 사이훙도 망설여졌다.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너는 대단한 가문의 자손으로서 부와 명예, 권력을 가지고 태어났
다. 그 모든 것이 권리이기도 하지만 네가 지켜야 하는 의무기도 하다.
너는 아니라고 할 지 모르지만 네 마음속에도 그것들을 좋아하는 마음
이 있을 게다. 네가 집에 머무른다면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지. 그런데
도 정말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싶은 게냐?]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언덕에 누운 저택의 영광이 한 순간 사이훙의
머리를 스쳤다. 다시 한번 자신의 판단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후회
보다는 자신이 내린 결정이 초연하고 당당하게 느껴졌다. 사이훙은 떨
구고 있던 시선을 올려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할아버지.]
관주인은 한숨과 함께 그의 요청을 허락했다.
사이훙이 집을 떠난다는 소식은 바로 퍼졌다. 그는 정원에서 많은 시
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가족들의 따가운 시선이 너무도 괴로웠다.
그렇다고 부모님과의 대면을 피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들은 매일 사
이훙과 충돌했다. 관씨 집안의 어른이 이미 사이훙의 결정을 지지했으
므로 그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부
모님들은 끝까지 사이훙의 결정에 반대했다. 어머니는 학자가 되라고
했고 아버지는 군인이 되라며 사이훙에게 화를 냈다. 그들은 사이훙이
출발하는 날까지도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사이훙은 견디다
못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저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안 쓰시는군요. 제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진짜 이유는 제 성공이 가문과 부모님께 명예를 가
져다 드리기 때문이죠.]
그러자 어머니가 반박했다.
[우린 다만 네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불효 막심한 녀석 같으니, 너는 네 본분이 무엇인지를 잊었느냐? 너는
가문의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해. 네가 무시하고 있는 책임들을 좀 생
각해 보거라.]
아버지도 드디어 감정을 터뜨렸다.
[그래, 너도 한 번 생각해 봐라. 해야 할 일들은 모두 팽개쳐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 더러운 도사 짓이나 하고 싶다니, 말이 되는 소리냐? 산
을 떠돌며 되지도 않는 이야기나 꾸며대는 비쩍 마른 영감이나 따라다
니는 게 뭐 그리 좋단 말이냐? 온종일 현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체하며
앉아 있는 일 외에 하는 일이 뭐가 있어? 그 밑에 있는 자들도 모두 마
찬가지지. 그들은 사회의 짐 밖에 안되는 굼벵이 같은 자들이라구. 일
도 안 하며 놀고 먹는 거지 같은 것들 말이다. 수행하는 체 하며 다른
사람들의 선의에나 의존하며 살아가는 거지. 중이란 다른 사람들의 노
동의 대가를 갉아 먹으며 살아가는 자일 뿐이다.]
[네가 출가를 하면 네 가족들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니?
너는 키워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바꿔 먹으렴.]
어머니가 다시 당부를 했다.
사이훙은 벌떡 일어났다. 그의 부모는 굳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사이훙은 감정을 억누르고 싶었지만 재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머릿
속이 터질 것 같아 그는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쏟아 내고야 말았다.
[어머니, 아버지, 저는 작별 인사를 드리러 온 것뿐이에요. 제가 두
분 이나 다른 식구들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말 한마디 하러 이곳까지 돌
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냥 혼자 수도 생활을 하면서 세속적인 기회
주의자들은 모두 지옥으로 꺼지라고 내버려 두었을 거란 말입니다. 하
지만 저는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들로서의 의무는 다했습니다. 저
는 집을 떠날 겁니다. 결심을 바꿀 순 없어요.]
사이훙은 성난 아버지의 저주를 뿌리치며 방에서 나왔다. 곧 집을 떠
나고 싶었지만 아직도 벗어야 할 책임의 굴레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약혼녀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야 했다. 사이훙은 다섯 살 때 그보다 두
살 아래인 소녀와 약혼을 했었다. 소녀는 장래의 시댁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 아홉 살 때 이 집으로 들어왔다. 시집 식구와 잘 지내게 하려는
중국의 전통이었다. 그녀는 사이훙이 작별을 고하려고 들어오자 흐느끼
기 시작했다.
[나를 버리시면 이대로 늙어 죽고 말 거예요.]
약혼녀는 말을 마치고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사이훙은 그녀를 바라
보았다. 여자는 성장을 하고 단정히 빗은 머리에 꽃을 꽂고 깨끗한 응
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세계는 그 방 밖을 넘지 못했다. 약혼녀는
권세 좋은 장군의 딸이었다. 그들의 결혼은 정략 결혼이었다. 사이훙은
그녀가 원하는 거이 자신의 아내가 되는 것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정 교육은 신부 교육뿐이었다.
[저는 벌써 열 여덟 살이에요. 이제 저를 원하는 남자는 아무도 없을
거예요. 당신이 떠나면 당신 가족의 보호도 잃게 될 거고요.]
[미안해. 하지만 당신은 언제든지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어.]
[나는 나이가 너무 많아요. 한번 당신과 약혼도 했고요. 어떻게 그처
럼 잔인하게 우리의 약혼을 깰 수 있는 건가요?]
사이훙은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요동을
쳤다. 사이훙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가 정상적으로 살았
다면 열 다섯 살에 잘 알지도 못하는 소녀와 벌써 결혼했을 것이다. 설
명을 하려고 했지만 약혼녀는 계속 울기만 했다.
사이훙은 여러 분야의 학문을 배웠지만 울고 있는 소녀를 어떻게 달
래야 할지를 배운 적은 없었다. 약혼녀에게 연민을 느꼈지만 빨리 떠나
야 한다는 생각이 더 절박했다. 사이훙은 제발 울지 말라고 간청했지만
소녀는 막무가내였다.
드디어 사이훙은 체념하고 내뱉었다.
[나는 당신 몸에 손도 안 댔어! 다른 남자와 자유롭게 결혼하라구.
난 당신이 그 남자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구!]
사이훙은 방에서 뛰쳐나와 격자무늬 문을 쾅하고 닫아 버렸다. 찢어
질 듯한 여자의 울음소리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사이훙은 바로
물건을 챙기러 자신의 방으로 갔다.
가족들의 저주와 비웃음, 비난을 들으며 사이훙은 집을 도망치듯 뛰
쳐 나왔다. 그를 축하하거나 성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육중
한 문들이 다 닫혀 버리자, 사이훙만이 홀로 남겨졌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19. 입문
사이훙은 남봉사원()의 대웅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
웅전에는 도교의 삼신인 노자, 옥황상제, 태초신이 모셔져 있었다. 천
장이 높고 널찍한 대웅전의 실내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으며, 가느
다란 수백개의 촛불이 켜져 있었다. 대웅전을 떠받치고 있는 밋밋한 나
무 기둥에는 하늘 나라 원왕()이 악마를 무찌르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고, 기둥 뒤에는 다른 많은 신들에게 둘러싸인 삼신의 모습이 그려
진 두루마리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은 천장과 바닥 중간 정도 높이에 걸려 있었는데, 마치 하늘에서
천사의 무리가 내려오고 있는 듯, 웅장하고 압도적인 장관을 이루었다.
사이훙은 그곳에 무릎을 꿇었다.
자단()으로 만든 육중한 제단 위에는 여러 가지 제물들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보통 제단과는 달랐다. 출가의 상징인 조롱박, 도교의
달인을 상징하는 말총으로 만든 솔, 의식을 올릴 때 쓴 빗 등이 그 위
에 놓여 있었다. 벽면에는 다른 두루마리들이 걸려 있었다. 붓글씨가
씌어진 것들과 고행자들과 역대 대사부들의 초상화를 그린 것도 있었
다.
삼신, 옥황 상제, 여덟 명의 불사신, 관음, 일곱 명의 공주, 도교의
지옥에서 온 신등 우주의 신들이 전부 모여 사이훙의 출가 의식을 지켜
보았다.
사이훙은 입문식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때 남
봉사원 사람들, 사부님, 두 명의 사형사이로 조부님이 언뜻 보였다. 사
이훙은 겁이 날 때 마다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조부
모님들이 처음부터 자신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적이 안심이 되었다.
사이훙은 자신이 그 의식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기를 빌었다. 나이
든 분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중요한 행사이기도 했지만 사
이훙의 내면에서 일고 있는 갈등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직
젊은 두 명의 사형만이 사이훙에게 연민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들은
미소를 띤 채 은밀히 사이훙을 격려해 주었다. 두 사형만은 사이훙의
내면에 일고 있는 갈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드디어 식이 시작되었다. 종과 징, 목어를 치는 소리가 멈추자 사부
가 경전을 암송했다. 향 연기가 대웅전 안을 가득 메웠다. 등과 촛불에
서 불꽃이 일렁이더니 대웅전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경전을 암송하는
동안 사이훙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향을 올리면서 제단에 아홉 번 절을 하고, 과서 속세 사부님께
절을 한뒤 화산의 대사부에게 아홉 번 절을 올렸다. 그리고 나서 음식,
차, 포도주를 바쳤다.
대사부님은 사이훙 뒤로 걸어와 길게 자란 검은 머리를 빗겨 주셨다.
이것은 과거의 삶에 대한 집착인 명환()을 떨어낸다는 뜻이었다.
사부님은 사이훙의 머리카락을 둥글게 말아 올려 나무 비녀를 꽂아주었
다. 이로써 사이훙은 가족을 떠난 것이다.
사부님은 사이훙에게 <천자경()>에서 따온 이름을 지어 주고,
법명()도 따로 내렸다. 법명을 글자 순서를 따르기 때문에, 다른
신자들도 그의 이름만 알면 서열까지 곧 알 수 있게 된다. 법명을 사이
훙이 출가인이며 사이훙이 속한 분파 내에서의 서열과 계급, 그리고 분
파 자체의 서열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두 사제가 단정히 개켜진 회색
법복(), 면혜(), 기도용 방석, 동발()과 경전을 선물해 주
었다. 앞으로 사이훙이 12년 동안 사용할 것들이었다.
경전 암송을 마친 뒤에, 사이훙은 삼신, 불사신, 그리고 분파와 관련
돼 있는 고행자들을 모신 다섯 개의 다른 사당에서 혼자 의식을 치렀
다. 그 후, 사이훙은 다시 성대한 채식축제()에 참석했다.
그 모든 의식을 사이훙은 열심히 치렀지만 마음속에는 의심과 두려움
이 가득했다. 자신이 꼭 이 길을 택해야 했는지 불안하고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과 자신의 가족이 사는 집을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은 둘 다 사이훙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택한 길
만이 유일한 선택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다짐했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20. 불사신의 동굴에서 꾼 꿈
사이훙은 먼저 자신이 속한 화산파의 비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
비법은 자기 치유, 명상 등을 통해 내면에 변화를 일으켜, 아주 특별한
절정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자들은 정신적 성장에 장애가 되는 독소를 신체에서 씻어 내
어 몸을 정화시켰다. 아주 꼼꼼하게 짜여진 식단과 기공 수련에도 불구
하고 도교 신자들은 아직도 몸에 독이 쌓여 있다고 생각했다.
[매일 숨을 쉬는 동안에도 너의 몸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와 티
끌, 다른 더러운 입자들을 끌어들인다. 수면중일때는 그 물질들이 폐속
에 그대로 남아 핏속으로 흘러들어가지. 게다가 인체는 자체 내에서 독
소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니 그 모든 것들을 매일 씻어 내야 하는 것이
니라.]
사부는 사이훙이 더 열심히 기공 훈련을 하도록 가르치고 몸에 정기
가 일게 하는 특별한 약초를 소개해 주었다.
다섯 가지 꽃잎으로 만들어진 차는 그의 소화 기관을 깨끗이 해주었
고, 뿌리와 잎으로 만든 차는 혈액을 정화시켰다. 그 밖의 다른 차들은
응고된 피를 용해시켰고, 모여 있는 기를 분산시키거나 균형을 잃고 불
안정해져 있는 기관이 평형을 이루게 했다.
인삼과 다른 약초들을 사용하자 강장 효과와 함께 정화 작용이 생겼
다. 새로운 약초들은 사이훙이 전에 훈련받을 때 먹었던 약초보다 약효
가 훨씬 강했다. 약초들은 몸을 유지시키거나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이훙의 체질을 영구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목적으로도 쓰였다.
약초를 사용하는 것과 더불어 명상 훈련은 내부의 변화를 실행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필수 요소가 되었다. 인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영원
불멸의 생명을 얻는 데 관심을 쏟고 있는 도교의 뿌리 깊은 전통이었
다. 분파가 다르면 그 방법도 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고기와 빵, 곡
물은 절대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금, 적색 황화 수은,
납 등 여러가지 금속들을 섞어 만든 금단()을 섭취하면 영원한 생
명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12세기 북부 학파의 시조였던 전설적인 왕제()같은 사람은 육신
의 호흡을 대신하는 신성한 호흡을 주장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감각
을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을 피하라고 가르쳤다. 수면을 절제하고 완전한
명상에 잠길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 밖에도 죽지 않는 것은 단전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진 배()가 자라면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사
람들은 마침내 불멸이란 모두 상징적인 것일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즉,
납은 양을 뜻하고 수은은 음을 뜻하며 배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태초
의 정신으로 돌아가면 얻는 깨달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분파든 내부의 변화가 명상과 화학적 변화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내부의 변화를 시도하던 많은 사람들
이 불사의 생명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도교 신자
들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주장했다.
수많은 방법들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는 사부의 지도를 따랐다.
사이훙의 사부는 광적인 것은 모두 반대했다. 그는 화학적 요소인 약초
는 단전의 큰 솥에서 용해되며 연금술적인 변화는 약초의 힘과 명상을
통해 완성된다고 강조했다.
사부는 진정한 의미의 불멸은 없다고 말했다.
[불멸은 장수를 뜻한다. 수련에 정진하며 생명을 또 다른 한계로 연
장시킬 수 있고, 병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조차도 죽어야 하느니라.
우리는 장생불사하는 것이 아니라 장생불사의 맛을 볼 뿐이다. 그렇
다고 해서 수련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너의 몸을 무시하지 말라. 마음
을 훈련하되 육체를 하찮게 여기면 발육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육체와
정신은 하나이다. 사람은 죽음을 뛰어 넘기 위해 육체와 정신의 에너지
를 함께 모을 수 있느니라. 또한 그것이 바로 장생불사의 맛을 보는 비
결이니라.]
명상자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작은 오두막에서 사이훙은 내적인 변화
를 수련하고 있었다. 그는 소주천을 따라 자신의 정문을 열기 위해 49
일 동안 오두막에 머물 생각이었다. 오두막은 기와 지붕에 창문 한개,
야트막한 문 하나, 그리고 진흙으로 바른 벽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안에 있는 가구라고는 침대, 촛대, 그리고 의자 한 개가 고작이었다.
처음 사부가 이 오두막으로 자신을 데려왔을 때, 사이훙은 폐소공포
증에 걸리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방은 너무 비좁아서 중앙에 서서 팔
을 뻗으면 사방의 벽이 손에 닿을 지경이었다. 사이훙은 의자 위에 밀
짚 모자를 얹어 놓고 그 위에 사슴 가죽과 무릎 깔개를 내려 놓았다.
밀짚모자는 절연체 구실을 할 것이며, 사슴 가죽은 영적 에너지를 나눠
줄 것이고, 무릎 깔개는 명상할 때 사용 할 것이다. 사이훙은 49일 동
안 매일 그 자리에 몇 시간씩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부는 사이훙에게 올바르게 정좌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사부가
가르쳐 준 대로 발을 바닥에 내려놓고 의자 끝에 앉은 뒤, 긴장을 완전
히 풀고 등을 곧게 폈다. 그 다음 턱을 바짝 잡아 당겨 머리를 들고 나
서 기도하는 자세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사부는 향을 주면서 향내음
이 감각을 풀어주고 집중력을 모아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이훙은
향내란 항상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것을 받
지 않았다.
그는 사부가 주신 책자들을 보았다. 거기에는 목표 달성을 도와 줄
지시문과 도해()가 실려 있었다. 특히 사이훙은 몸의 중심선에 위
치한 두 개의 정문에 대해 공부했다. 해부학과 정문, 혈도에 대해서도
자세히 공부해야 했다.
사부는 각각의 그림을 설명해 주었고, 지시를 내리기도 하면서, 사이
훙이 그 오두막에서 처음으로 명상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가
명상을 끝내고 경험한 것을 자세히 이야기 하자, 사부는 그가 명상을
정확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확인해 주고는 방에서 나갔다.
그런 다음 사부는 문을 닫고 문 아래쪽 테두리에 종이 띠를 붙였다.
악령을 쫓는 동시에 사이훙이 나가거나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부적이었다. 사이훙은 햇빛을 쬐거나 음식물을 들이고 그릇을
내보내기 위해 문의 윗부분만 열 수 있었다.
소주천은 중심선에 있는 두 개의 정문을 연결시키고 기의 흐름을 정
신적으로 조종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개의 정문이 열리면 숨을 들이쉬
고 내쉬는 한 주기 동안 한번의 운기를 끝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호흡 회로가 완성되면 두 개의 정점과 여덟 개의 영적 회로를
통해 계속해서 기를 보낼 수 있다. 만일 그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의 몸
은 깨끗하게 씻길 것이고, 육체의 병도 치유될 것이다. 더 나아가 기를
정신으로 변형시키는 법을 배우고 정태와 동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게 된다.
명상은 배꼽에서 시작되었다. 사이훙은 심상을 떠올리고 주문을 외우
며 배꼽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반 시간쯤 후 윙윙 소리가 나며 진동이
시작되었다. 따뜻한 기운이 돌면서 심하게 팔딱거렸다. 그는 배꼽에 모
인 기를 회음부의 다음 지점으로 보내려고 애썼지만 무척 어려웠다. 사
이훙은 정신을 완전히 집중시켰다. 극심한 고통이 찾아오면서 정문이
열렸다.
그는 첫 시도가 성공을 거두자 적이 안심했다. 너무 깊은 정점을 갖
고 있거나 명상은 별로 하지 않는 어떤 수행자들은 기의 흐름을 원활하
게 하기 위해 약초나 마사지, 침술 혹은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기까지
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49일 동안 사이훙은 수련 단계를 차츰 높여 나갔다. 꼬리뼈에서 콩팥
사이로 뜨거운 기를 밀어 올려 견갑골 사이의 한 곳으로 모았다. 다시
그 기를 정수리까지 한 부분씩 밀어 올린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윗입술
의 종착지로 밀어내었다. 혀를 입천장에 밀착시켜 앞뒤 정점을 연결시
키고 등과 배꼽을 연결하는 마지막 통로가 열리면 순환이 끝난다. 기를
순환시키는 동안 열이 나면서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과 함께 기가 모
인 곳에서는 소용돌이 치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등뼈에는 율동적으
로 당기는 듯한 느낌이 났다.
도교적 명상은 실재한다는 감각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이훙은 모든
수련 과정이 성공하자 무척 행복했다. 침묵 속에서 생활하며 경전을 일
고 운동도 하였다. 절제된 식사와 약초를 섭취하면서 명상을 하는 생활
이 사이훙은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처음 걱정했던 것처럼 폐소공포증에
걸리지도 않았다.
탈진할 정도로 힘든 수련을 마치고 내면의 상상력을 갖게 된 사이훙
은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내면으로 향하는 세계였다. 그
의 앞에 열린 내면의 세계는 무한의 경지였다.
사이훙은 소주천을 마친 뒤에도 계속해서 수련을 했다. 그렇다고 그
가 초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련은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한층 키워 준다. 사이훙은 이상하게도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안
내서에는 이 상태가 바로 금강불괴지신(), 즉 질병이나 자
연의 재앙도 침범할 수 없는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발육시키는 과정이
라고 씌어 있었다.
49일째가 되는 날 오후, 사이훙은 산 속의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앉
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보답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는 변했고, 그의 내면은 크게 도약했다. 날아갈 듯
한 기분이었다.
오두막에 올라온 사부가 위쪽에 난 문을 열어주자, 그곳을 통해 햇빛
이 비쳐 들었다. 사부는 문을 봉했던 부적을 뜯고 사이훙을 해방시켰
다. 두 사람은 반가운 미소를 교환하며 서로 손을 굳게 잡았다. 사이훙
은 몇 주일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고 자신의 경험담을 낱낱이 털어 놓
았다. 사부는 이따금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은 오두막을 나와, 산으로 올라갔다. 화산이 지닌 아름다움이
다시 한번 그의 마음속으로 밀려들었다. 숨이 막힐 듯한 거대한 바위와
소나무, 구름, 웅장한 폭포와 상큼하게 부는 산들바람으로 화산의 풍치
는 더욱 돋보였다.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그에게 축하를 보냈다. 사이
훙은 자신의 성취를 소중히 여겼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자
신만의 것이었다.
사부는 사이훙을 데리고 동쪽 봉우리에 난 문을 통해 <두 불사신의
동굴>로 들어갔다. 사이훙은 그 깊은 동굴 속에서 꿈을 얻어야 하는 것
이다. 이 두명의 불사신들은 원래 화산파 제자였던 장난꾸러기 소년들
이었다.
어느 날 아침, 길에서 놀던 두 소년은 농부 차림을 한 근육질의 탄탄
한 남자를 만났다. 백발이 성성한 그 남자는 어깨 위로 큰 복숭아가 몇
개 달린 나뭇가지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북해 불사신의 제자인 동방삭()이었다. 불사신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도둑이었던 동방삭은 도둑질에 대한 충동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엄격한 생활에 지치고, 내적인 변화를 기다리다 못해, 동방삭
은 서왕모()의 뜰에서 천도()를 몇 개 훔쳐냈다. 도둑질을
하고 오던 동방삭이 우연히 두 소년을 만났던 것이다.
동방삭은 이내 쾌활하고 영민한 두 소년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 소년들의 재치와 영민함에 흥미를 느낀 동방삭은
어려운 수수께끼를 하나 냈다. 놀랍게도 그들은 문제를 간단하게 풀어
냈다.
[너희들이 참 마음에 드는 구나. 뭘 좀 주고 싶은데 특별히 줄 만한
것이 없구나. 이 천도 하나 가질 테냐? 한 입만 먹어도 4만년을 살 수
있단다.]
동방삭의 말을 듣고 소년들은 기뻐서 손뼉을 쳤다. 그가 떠나자 두
소년은 복숭아를 다 먹어 치웠다. 두 소년은 그 즉시 불사신이 되어 하
늘로 올라갔다. 옥황 상제는 그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깜짝 놀라 물었
다.
[너희들은 어떻게 불사의 생명을 얻게 되었느냐?]
[한 낯선 사람이 저희 에게 천도를 주었습니다.]
소년들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에겐 틀림없이 운명을 정한 별자리가 있을 것이다.]
옥황 상제는 대신들을 시켜 그들의 운명을 조사하게 했다. 대신들은
두 소년이 불사신이 될 운명으로 성부()에 올라 있음을 확인했다.
[너희들이 불사의 생명을 얻도록 허락하노라.]
옥황 상제는 이렇게 선언했다.
[너희들은 어린 나이에 불사신이 되었으니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게
될 것이다. 또 둘이 좋은 친구 사이이니 두 명의 불사신이라 부를 것이
니라.]
옥황 상제는 소년들의 세 번째 눈을 만져 인식의 눈을 뜨게 하고 신
의 지혜를 내렸다. 그런 다음 성전을 주고는 지상으로 돌아가 인간을
가르치도록 명했다.
두 불사신은 화산으로 돌아와 사이훙이 지금 스승과 함께 찾아 온 바
로 그 동굴에서 갈았다. 도교 신자들은 불사신들이 거기에 남겨 놓은
기나 그들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것 때문에 그곳이 다른 제자들의 탐
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깊고 드넓은 동굴은 수세기 동안 자라난 종유석과 석순들로 꽉차 있
었다. 섬뜩하고 기이한 형상들이 광물질로 인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지개빛 종유석에 의해서만 빛을 발하는 밤의 동굴이었다.
사이훙은 횃불을 들었다. 굽이치는 불꽃이 들쑥날쑥하게 동굴안에 그
림자를 던졌다. 그러나 횃불을 켰음에도 불구하고 동굴 끝은 보이지 않
았다. 거대한 암석층으로 걸어 들어가자 희미한 영상이 물에 비쳐 보였
다. 지하로 흐르는 강은 너무도 깊고 맑아서 종유석 천장을 거울처럼
비춰 주었으며 잔물결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둑에 있던 대나무로 만든 뗏목에 올라탔다. 사이훙은 횃불을
뗏목 머리에 고정시킨 다음 기다란 노를 들고 강으로 뗏목을 밀어냈다.
노젓는 소리가 동굴 속의 정적을 갈랐다. 동굴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바위 때문에 소리가 막혀 사면이 고요했다. 강물은 완전한 정적 속에서
거대한 동맥처럼 흐르고 있었다.
강물이 갈라지면서 여러 동굴로 나뉘어 흘렀다. 하지만 사부는 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횃불, 어른거리는 그림자, 그리고 영롱한 빛을 내
는 바위에 그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뗏목을 한 석굴에 대었다. 강가에서 50보쯤 떨어진 석
굴 끝을 향해 걸어가자 널찍한 반석이 나왔다. 측면에는 이상한 형태의
신 같기도 하고 인간 같기도 한 형상이 조각되어 있고, 흘려 써서 읽기
조차 어려운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사부가 사이훙에게 손짓을 했다. 사이훙은 사슴 가죽과 무릎 깔개를
내려놓고 반석 위에 드러누웠다. 사부가 그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사이훙은 왼팔을 굽혀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워 왼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리고 오른손은 생식기에 댔다. 왼쪽 다리를 곧게 편 다음 오른쪽 다
리는 구부려 발목을 왼쪽 무릎에 기댔다. 꿈을 꾸기 위한 자세인 것이
다. 이런 자세를 하고 사이훙은 꿈속의 환상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사부는 떠났다. 다음날 아침에 돌아와 꿈을 해석해 줄 것이다. 그때까
지 사이훙은 잠을 자면서 꿈을 꾸면 되었다.
그 반석 위에 누운 사람은 누구나 다 꿈을 꾸었다. 꿈을 꾸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데 꿈은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타났다. 어떤 사람은 금
욕적인 훈련으로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으니 사회로 돌아가라는 계시
를 꿈속에서 받았다. 또 어떤 사람은 앞으로 닥칠 끔찍한 위기를 보기
도 했다. 몇 사람에게는 특별한 임무가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계시가 내리면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제자와 사부는 그
계시를 따라야 했다. 대개의 경우 개인의 꿈은 달인의 삶을 받아들이는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꿈은 보물과 다름없다. 그를 위해서만 빛을 발
하고 어두운 삶속에서 길잡이가 되어주는 보석이었다. 사이훙은 깊고
고르게 숨을 쉬며 고요히 누워 있었다. 신비로운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싸자 사이훙은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사부가 혼자 뗏목을 저으며 쪽빛 물 위에 그 모습을 나
타냈다. 사이훙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자 사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너의 꿈이다, 사이훙. 몇 년간 애쓴 끝에 절정에 이른 것이
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것은 너의 비밀의 근원이다. 그 꿈은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 동안 너를 이끌어 주고, 어려울 때는 너를 지탱
시켜 줄 영감이 될 것이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21. 본초학을 배우다
사이훙은 다른 도량을 거처를 옮겨 나이와 학습 정도가 엇비슷한 동
료들과 함께 기거했다. 그곳에서도 문파의 여러 가지 공동 작업에 참여
하기는 했지만, 그의 최우선 과제는 수행에 정진하는 일이었다. 사이훙
은 경전을 비롯해 많은 서적을 섭렵하고 신체를 단련하며 치유법을 배
우는 한편, 명상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체적으로 사각형을 이룬 도량의 건물들은 진흙으로 만든 두툼한 담
장을 따라 늘어서 있었고, 담장 너머로는 널따란 풀밭이 말발굽 형상으
로 펼쳐져 있었다. 건물과 풀밭 전체는 높은 화강암 절벽에 둘려 싸여
있었는데, 절벽 여기저기에서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이 위태로운 모습으
로 자라고 있었다. 바위가 침식되면서 생긴 도랑에는 맑은 샘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고 절벽에는 뛰어난 솜씨로 씌어진 글씨가 이곳 저곳에 아
로새겨져 있었으며 명상을 할 수 있게 된 동굴도 간간이 보였다.
몇몇 수석 도인들이 도관의 살림을 주관하면서 수련생들을 지도 감독
했다. 그들은 낮에는 수련생을 가르치고, 밤에는 경전이나 과거에 수련
을 했던 도인, 혹은 수련생의 수행 진척도등을 주제로 살아 토론을 주
재했다.
수련생들은 각각 다른 사부를 모시면서 각자에게 가장 알맞는 방식으
로 수련을 쌓아 나갔으며, 사부들은 정기적으로 수련생들을 방문해 가
르침을 베풀곤 했다. 도관의 목표는 기본적인 과목을 가르치는 동시에
수련생들간의 동료 의식과 협조 정신을 고취시켰다. 그러므로 수련생들
사이에는 곧 강력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그들이 배우는 중요한 과목 중의 하나가 본초학 이었는데, 그 과목을
가르치는 사부는 펑쉰()이었다. 호리호리한 몸매, 햇빛에 그은 피
부, 하얗게 센 머리카락, 새까맣고 커다란 눈동자를 지닌 펑쉰 사부의
가볍고도 고매한 모습을 볼 때마다 사이훙은 한 마리 사슴을 연상하곤
했다. 펑쉰 사부의 식사는 언제나 약간의 약초와 한 줌의 쌀뿐이었다.
펑쉰 사부는 항상 약실 한쪽에 설치된 신농씨()사당에 절을 하는
경건한 자세로 맡은 일에 임했다.
수업을 듣다 보면 펑쉰 사부가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
었다. 수많은 서적을 외우고 있었으므로 수업 도중에 책을 들여다 보는
일은 전혀 없었다.
장기(), 혈도(), 신체구조등에 대한 지식에 뿌리를 두고 있
는 본초학은 완벽할 정도로 명상과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었
다. 명상은 우리 몸에 산재한 경락()들과 관련이 있으며, 약초는
바로 그 경락을 자극하여 치료 효과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초학계에 전해 내려오는 격언 가운데는 [아는 게 있어야 남을 가르
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 옛날 신농씨가 자신이 직접 각종 약초의
효용 여부를 알아보았듯이, 가슴속에 청운의 뜻을 품은 수련생들 역시
본초의 효과를 몸소 체험해 보았다. 사이훙도 다른 동료의 몸에, 혹은
자신의 몸에 실시한 실험 실습을 통해 안마, 본초학, 침술 등의 지식을
쌓아 나갔다.
사이훙은 먼저 안마부터 배웠는데, 그 이유는 안마란 몸과 몸이 부
딪치는 <비교적 단순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약초나 침 같은 도
구를 함께 사용하며 안마를 익혔다. 안마를 이용해 병을 치료하는 것은
약초나 침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치료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나
중에 명상만으로 병을 치유하는 단계에 이른다해도 그 기본을 사용하는
것은 똑같았다.
사이훙은 안마를 통해 해부학, 압점(), 혈도 등을 익혔다. 또한
기를 손끝에 모아 물건을 꽉 움켜쥐는 훈련을 거듭했다. 그런 훈련은
환자의 몸을 완전히 장악하여, 규칙적인 움직임으로 환자의 경직된 부
위를 풀어 줄 때 필요한 훈련이었다. 환자가 달가워하지 않거나, 혹은
긴장하거나 두려워할 때 재빨리 근육과 뼈를 열어 안마의 효과를 받아
들이기 쉽게 만드는 데도 필요했다.
어느덧 사이훙은 삐거나 부러진 뼈를 맞추는 것뿐만 아니라, 타박상
과 출혈, 근육통, 혈맥이 꼬이는 것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핏
속의 독소를 제거하고, 응고된 피를 풀고, 신경통을 치유하고, 제자리
를 잃은 내장 기관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등의 많은 병을 안마만으로도
고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또한 영양실조로 인해 생기는 몇몇 사
형들의 가벼운 근육 이상 증상을 치료하는 광경을 몇 차례 목격하기도
했다.
안마의 두 번째 단계를 성취하려면 우선 자기의 기를 환자의 몸에 주
입하는 매우 어려운 기술을 터득해야만 했다. 환자의 몸 속 깊은 곳에
있는 독소라든가 응고된 피를 피부 가까운 곳으로 이동시켜 제거하고,
또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꺼져가는 생명을 되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펑쉰 사부가 그 방법을 설명하며 사이훙의 몸에 기를 주입하자 그는 전
류 같은 에너지가 자신의 몸으로 흘러 들면서 온몸이 따뜻해지며 따끔
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사이훙은 동료에게 기를 주입해 보려 했지만 웬
일인지 그런 에너지가 몸밖으로 흘러 나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러
자 펑쉰 사부는 동료의 몸에 두 손을 대라고 한 다음 자신의 두 손을
사이훙의 어깨에 갖다 대어 사이훙을 통해 그의 동료에게 기를 주입했
다. 그때 사이훙은 기가 흘러들었다가 팔을 통해 빠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펑쉰 사부는 그 느낌을 되살려 기를 몸밖으로 흘러 나가게 하
라고 일러주었다.
치료에 꼭 필요한 요소 중 하나는 진단이다. 진단은 진맥을 보는 것
에서 시작된다. 펑쉰 사부는 최소한 10년 이상 진맥을 보아야 비로소
올바른 진단을 내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 진맥을 보아 진단을 내리는
일은 인간의 신체를 부분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오장 육부의 상태가 건강 여부를 결정한다는 가르침을 배운 한
의사들은 손목에서 감지되는 열두 개의 서로 다른 맥(오른쪽 손목의 여
섯 개, 왼쪽 손목의 여섯 개)을 통해 오장 육부의 상태를 알 수 있다.
그 열두 개의 맥은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손목에서 느껴지는 미세
한 압박감을 통해, 그리고 치료자의 손끝에서 환자의 핏속으로 주입되
는 기를 통해서만 감지될 수 있다. 환자의 핏속으로 주입된 기는 수중
음파탐지기 같은 역할을 한다. 치료자는 자신이 내보낸 기가 일으키는
반향과, 혈관 속에서 반동하는 방식을 분석해 진단을 내린다. 치료자는
음()인가 양()인가, 딱딱한가 부드러운가, 안인가 바깥인가, 뜨거
운가 찬가, 혹은 단순한가 복합적인가를 살핀다. 그리고 나서 오장 육
부 각 기관의 상태를 분석 판단하며 질병의 유무와 질병의 정체를 진단
하는 것이다.
펑쉰 사부는 엄격한 표정으로 환자의 진맥 결과만을 알려주고는 수련
생들에게 진단을 내려보라고 요구하곤 했다. 그러나 주관적 판단과 객
관적 판단이 절묘하게 절충되어야 올바른 진단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수
련생들은 실수를 범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펑쉰 사부는 얼굴
을 잔뜩 찡그리고는 거짓말과 상상은 집어치우라고 호통을 쳤다. 펑쉰
사부는 무술의 고수이기도 해서 손끝이 매서웠다. 사이훙은 일찍이 들
어보지 못했던 바보 천치라는 욕을 먹기 일쑤였으며, 어린 시절에도 잘
맞지 않던 매를 맞곤 했다.
사이훙은 본초학을 철두철미하게 배워 나갔다. 종종 펑쉰 사부는 사
이훙에게 약초 도본()과 목록을 내주면서 그 약초들을 캐어 오라고
지시했다. 짧은 웃옷에 바지, 끈으로 묶는 납작한 가죽신, 어깨까지 가
릴 만큼 옆으로 퍼진 등나무 모자, 괭이 한 자루, 약초 담을 자루 하
나, 조롱박으로 만든 물병 하나, 칼 한 자루. 약초 채집에 나서는 사이
훙의 복장과 휴대품은 언제 똑같았다. 가끔 밤새워 동료들과 함께 여행
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혼자 약초를 수집하러 다녔다.
수련생들이 채집해 온 약초는 모두 깨끗이 다듬고 분류해서 보관했
다. 펑쉰 사부는 약초들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한편 효능이 있는 부분
과 가공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약초는 말리고, 또 어떤 약초는
잘게 부수었다. 음식을 익히듯이 열을 가하거나 가루로 만드는 약초도
있고, 뿌리를 얇게 썰어두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만든 약초들은 도자
기나 금속, 나무로 만든 용기에 넣은 다음 조심스럽게 저장해 두었다.
약을 조제할 경우에는 열 가지에서 열 두 가지의 성분이 들어가도록
약초를 배합해 몸의 모든 부분을 동시에 치료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도
교 계통의 한의사들은 우리의 몸이 내적으로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균
형을 유지해 나가는 조직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처방할 때 아픈
부위만을 치료하는 법이 없었다.
예컨대 감기 치료제에는 폐로 들어가 작용하는 약초, 재채기를 멎게
하는 약초, 폐의 기능을 강화하는 약초, 머리를 맑게 하는 약초, 창자
를 세척하는 약초 등이 골고루 들어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중국의 한
의사들은 8천가지 약초에 들어 있는 성분을 조심스럽게 혼합해 복잡 미
묘한 증상들을 치료하는 것이다.
도인들은 병을 고치기보다는 원기를 돋우어 주는 약초를 이용해 병을
예방하고자 한다. 권위 있는 여러 의학 서적들을 보면 병에 걸린 뒤에
고치는 행위는 <목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물을 파는 행위>, 혹은
<폭동이 시작된 뒤에야 진압에 나서는 행위>와 같다고 표현한다.
사이훙은 날이 갈수록 예방 의학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환자
의 병세가 위중할 경우에는 예방 의학 이전에, 침술, 수술, 부적등 모
든 치료 방법 가운데 가장 우수하고 효과적인 치료 방법을 먼저 썼다.
어느 날, 뚱뚱 한 중년 사내가 화산에 실려 왔다. 그는 한마디로 죽
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얼굴엔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돌고, 혀가 퉁
퉁 부어 질식사할 위험까지 있었다. 그 남자는 매우 부유한 귀족이었지
만 병을 고쳐 줄 수 있는 용한 의원을 찾아내지 못했고, 절망 끝에 화
산에 와서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었다.
펑쉰 사부는 즉시 용태를 살펴보았다. 그 사람은 독약에 중독된 상태
였다. 그의 경쟁자의 음모로 해를 입은 것이다. 펑쉰 사부는 진단을 내
렸다.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질식사하거나, 독기운이 심장에 퍼져 심장마
비로 죽게 될 겁니다.]
도인들은 회의를 열어 그의 병을 고쳐 주기로 결정했다.
펑쉰 사부는 남자의 등에 두 손을 얹은 다음 정신을 집중했다. 두시
간 가량이 흘렀을 때 펑쉰 사부가 갑자기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창
백한 얼굴로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고 두 손바닥은 검게 변해 있었
다.
두 의원이 그를 부축해 바위 옆으로 데려가자 펑쉰 사부는 자세를 바
로잡은 다음 두 손을 바위에 대고 빨아들인 독을 발산시키기 시작했다.
이윽고 펑쉰 사부가 바위에서 손을 떼자 놀랍게도 그곳에는 검은 손자
국이 뚜렷이 찍혀 있었다. 수련생들은 곧 그 바위를 땅속에 묻어 버렸
다.
기진맥진한 펑쉰 사부는 그 후 생기를 회복하기 위해 3개월 동안 사
당 안에서 칩거하며 명상에 전념했다. 물론 목숨을 건진 환자는 약초
치료를 통해 건강을 회복해 나갔다.
사이훙은 펑쉰 사부의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훗날 더욱 높은 수
준의 도를 터득하고 훌륭한 능력을 얻은 뒤에도 사이훙은 펑쉰 사부의
사심 없는 자세를 돌아보곤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사부가 보
여 준 헌신적인 의료인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곤 했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22. 상승명상법
사이훙이 배운 명상법 중 최상의 단계는 몸의 모든 영문()을 여
는 영구() 이었다. 엉치위의 천골문()에서 시작하여 척추를
따라 생식문(), 단전문(), 심문(), 후문(), 삼안
문(), 황문()등의 영문이 있는데, 그 영문은 각기 고유의 치
유 기능과 영력()을 가지고 있었다. 영구 명상법은 모인 기를 일직
선으로 끌어올려 각각의 영문을 통과시켜 황문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
다. 인도의 쿤달리니 명상과 마찬가지로 도교도 들도 적정()에 이
를 때까지 영문을 여는 명상을 지속했다. 힌두교에서는 사마디 Samadhi
라 하고, 불교에서는 열반이라 일컫는 상태를 도교도들은 적정이라고
했다. 사이훙도 적정에 이르기 위한 명상 수련을 시작했다.
해부학적 구조로 보면 각 영문은 영력을 일으키는 동시에 위치에 따
라 인접한 기관, 즉 생식기, 배꼽, 심장, 목, 눈, 뇌를 제어하는 기능
을 가지고 있었다. 명상을 통해 영문이 단련되면 관련된 기관들은 무한
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사부는 사소한 성취로 이루어진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줄곧 사이훙에게 경계하였다. 많은 고행자들이 영구
명상에 실패하는데, 그 이유는 영력이 아직 완전하게 개통하지 않은 상
태에서 단기간의 수련으로 얻어진 힘을 남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영문을 열기 위한 명상에 몰입하기에 앞서 사이훙은 우선 도해
를 보면서 영문의 구조를 살피고 생김새를 관찰하는 한편, 기도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구했다. 기도가 계속됨에 따라 연꽃의 봉오리로 연상되
는 영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꽃봉오리들에는 저마다의 색깔과 형태가
있었다. 사이훙이 각각의 꽃봉오리에 정신을 몰입하고 명상을 시작하자
봉오리의 윗부분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봉오리마다 향기를
내뿜었다. 사이훙은 몸 전체에 소용돌이 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기가
영문을 지날 때만다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사이훙이 명상
을 마치자 영문들은 다시 닫혔고 몸을 들썩거리게 하던 기운도 점차 수
그러들었다.
척추가 끝나는 부분에 있는 첫 번째 영문은 외부의 기를 받아들여 내
공으로 바꾸는 기의 원천이었다. 그곳을 통해 모여진 기가 천골과 생식
문을 거쳐 가면 단전문에서는 활력을 불어넣었다. 명상이 계속되면 육
신이 가벼워지면서 몸에서 힘이 솟구치고 성적 욕구도 강해졌다. 사부
는 사이훙이 그 상태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었다. 많은 수련생
들이 천골과 생식문에 비정상적으로 기를 모아 두기 때문에 힘과 성욕
이 용솟음쳐 진정한 명상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영문을 열기
위해 명상을 거듭하면서 사이훙은 사부의 말이 사실임을 경험했다. 두
곳의 영문에 기가 모이면 성에 대한 깊고 강렬한 욕망과 상승 무공을
성취할 수 있다는 유혹이 끊임없이 생겨나 수련을 방해하고는 했다.
일단 단전문이 열리자 욕망을 참아야 하는 고통도 그쳤다. 몸에는 활
력이 샘솟았으며 병에 대한 치유 능력이 생겼다. 본초학을 강의하던 펑
쉰 사부가 병의 치유와 단전문의 관계를 말했었는데 그 말이 옳았다.
심문은 미적 감각과 관련이 있는 영문이었다. 사부는 아름다움을 지
각하는 능력과 창조성이 심문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사이훙의 사형인
린 쭝아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지니게 된 것도 모두 심문을 열었기 때
문이다.
후문을 여는 것은 목소리 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통찰력과도 관련이
있다. 사물에 대한 인지 능력은 후문과 삼안문이 상호작용을 하며 발달
되는 것이다.
삼안문, 즉 상단전()은 다른 차원의 세상을 인지할 수 있는 능
력을 개발시키는 곳이었다. 사부의 말대로 사이훙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의 눈으로 보는 것, 즉 실재하는 것만을 인식한다. 하지
만 존재하는 것이 모두 사실인 것은 아니다. 세상은 여러 차원의 세계
가 마구 뒤섞인 환영에 불과할 따름이다. 사이훙은 삼안문이 열리자 환
상의 세계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존재를 바라볼 수 있었다.
명상이 깊어질수록 사이훙의 수련은 도가 깊어졌다. 사이훙은 육신의
힘을 길러 무공을 연마하고, 문학과 예술과 과학에 대한 안목을 넓혀
갔다. 또한 마침내 존재의 실체를 인지해 정신적 지혜를 한껏 늘렸다.
사이훙의 명상은 이윽고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많은 세월에 걸친
수련 생활과 고통의 연속은 황문을 열기 위한 걸음마 였던 것이다. 마
침내 수천 수만의 연꽃잎들이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사이훙의 정신
은 아득한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곳에는 외부의 존재도, 내부의 존
재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 생각도 아무 감정도 존재하지 않
았다. 사이훙의 완전한 무()의 경지에 몰입되었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23. 영생
그날 새벽에는 짙은 안개가 끼었다. 안개는 풀밭을 어루만지고 도량
의 지붕에 부딪히면서 영롱한 이슬을 빚어 냈다. 매일 새벽이면 햇살이
퍼지기 전부터 소리 높이 지저귀던 새들도 모두 어디로 갔는지 사방이
고요하고, 바람조차 숨을 죽이고 있었다.
사이훙과 동료들은 샘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샘
가까이 몸을 굽혀야 물을 퍼올릴수 있었다. 샘물은 맑고 아주 차가웠
다. 힘차게 솟구치는 샘물에 팔을 적신 사이훙은 벌에 쏘이기라도 한
듯 그 시원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동료 한 명이 사이훙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키 큰 사람 하나가 천천히 풀밭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전통 의상을 걸친 도인이었다. 몹시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두 발로는 이 세상을 밟고 있지만 영혼은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노닐
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걸음걸이 또한 매우 가벼워 마치 땅을 밟지
않고 걸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안개에 가려 흐릿한 모습을 자세
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뜬 사이훙은 그의 이마에 난 혹을 볼 수 있
었다. 바로 불사(불사)의 태양 신선이었다! 사이훙은 7년전 멀리서 그
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이훙 일행은 급히 도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을 들어서니 태양
신선이 사부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이훙 일행이 우
르르 몰려가 꾸벅 인사를 하자 태양 신선은 사이훙 일행을 데리고 여기
저기를 거닐면서 각자의 자질과 능력을 살폈다.
새벽 햇살이 퍼지고 있었다. 사이훙은 태양 신선을 찬찬히 살펴보았
다. 굵고 빳빳한 하얀 머리칼은 뒤로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턱수염은
뻣뻣한 실뭉치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억세 보였다. 피부에는 잔주름이
나 있었고, 매부리코와, 얇은 입술에는 날카로움이 어려 있었다. 이마
에 돋은 큰 혹은 괴상망측한 종양처럼 보였다.
태양 신선은 걸을 때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있는 겉옷
도 길고 헐렁해 다리의 움직임을 전혀 볼 수 있었다. 사이훙은 그에게
다리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양 신선은 잠시 걸음 을
멈추고 사이훙을 바라보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태양 신선은 사이훙을 포함해 세 명의 신출내기를 선택했다. 태양신
선이 문가에 서 있는 동안 사부 중의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태양 신선께서는 진정한 불사의 경지에 도달하셨다. 태양 신선께서
지금처럼 도관에 오시는 일은 거의 없다. 저 분께서는 화산파의 제자들
가운데 너희 셋을 택해 당신의 제자로 삼으시려 하신다. 제자가 되면
불사의 도를 배우게 되지만, 일단 태양 신선을 따라가면 너희는 세상에
서 잊혀진 존재가 되어 다시는 인간 세상을 볼 수 없게 된다.]
사이훙은 고민했다. 영생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왔으나 막상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니 안 마신 술까지 깨는 느낌이었다. 사이훙은 진정으로
영생을 원하는지를 스스로 물어 보았다.
첫 번째 문제는 태양 신선에 대한 느낌이었다. 사이훙은 자신의 사부
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랐지만, 웬일인지 태양 신선에 대해서는 호감
이나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 번째 문제는 태양 신선의 외모였
다. 태양 신선은 정자를 몸 밖으로 배출시키지 않는 몇몇 도인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오줌에 섞인 정자를 걸러 내는 능력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런 반면 몸 속 어딘가에 모아 둘 수밖에는 없었다. 태양
신선의 이마에 있는 혹은 바로 그 정자를 축적한 곳이었다. 옷으로 가
린 몸 여기저기에는 더 많은 혹이 있을 게 뻔했다.
[자, 이제 마음을 정했으면 한 발 앞으로 나서도록 하거라.]
사부의 목소리가 사이훙의 귀를 파고 들었다.
<아니야, 나는 아직 자격 미달이야. 모든 신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내게는 추악한 면이 너무 많아. 혹투성이 몸으로 더러운 냄새를 풍기면
서 영생할 수는 없잖아? 차라리 이대로 살면서 명상을 수련하는 편이
낫지.>
사이훙은 두 동료와는 달리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사이훙은 두 동료
가 태양 신선과 함께 자욱한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태양 신선 일행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 날 이후 사이
훙은 그들을 보지 못했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24. 전쟁 속으로
1937년에 발발한 중일 전쟁의 소식이 매달 올라오는 생활용품에 섞여
화산에 전해졌다. 식량을 구하러 산을 내려갔던 동료들도 속속 산으로
귀환하여 전쟁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일본군이 얼마 전 베이징 외곽에
있는 마르코폴로교를 기습하여 장악한 다음 철과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
된 산시 지방의 산악 지대로 진격했고, 이제는 톈진에서 난징에 이르는
전선에서 2차 공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군
은 서서히 해안 지대를 벗어나 비교적 궁벽한 내륙지방으로 밀려들었
다.
중국 군대와 국민은 나름대로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기만 드높
을 뿐 훈련이 불충분한 데다가 장비마저 부족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
한 채 패주를 거듭했다. 특히 북쪽 지방의 소규모 비정규군과 주민들은
탱크와 비행기로 무장하고 돌진하는 잘 훈련된 일본군에 의해 전멸되고
있었다.
전투와 일본군의 잔학한 행위를 알게 된 화산파 사람들은 놀라 움을
감추지 못했다. 분노와 증오심이 애국심으로 이어졌고, 화산에 있는 모
든 도관에서 연일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사부와 사형과 수련생들이 각
기 다른 의견을 펼쳤다. 어떤 이들은 흥분한 나머지 감정을 앞세웠고,
얘기가 전쟁과 일본군을 비난하는 대목에 이르면 너나 없이 한 가지로
입을 모았다.
마침내 전쟁은 화산의 일상생활마저 뒤흔들기 시작했으며, 얼마 뒤에
는 전쟁 소식에 귀를 기울일 필요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멀리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머리 위로 전투기가 날아다니더니, 백 킬로 떨
어진 시안 쪽에서 불그스레한 불길과 함께 거대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많은 도인들이 전쟁에 휩쓸리면 안 된다고 외쳐댔다. 집과 가족을 등
진 수도자는 더 이상 세상일에 관여해선 안 되며, 오랫동안 갈고 닦아
온 청정한 마음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속세는 전
쟁, 속임수, 거짓말, 돈, 살인, 정치 등의 위험 요소가 가득한 곳이니
수도자에게 부여된 계율을 엄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애국심에 불타는 도교인들은 즉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만약 중국
땅에 도적이 들끓는다면 마음놓고 수도에 전념할 수 있는 장소조차 없
을 것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정의감에 불타는 그들은 제한적으로나마
전쟁에 참여해야 하며, 자신들이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이든 아니든 간
에 국가와 국민은 자신들을 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논쟁이 거세지면서 내분의 조짐이 엿보이자 화산의 대사부는 전원 회
의를 소집했다. 화산의 다섯 봉우리에 기거하던 모든 사부들과 수련생
들이 남봉에 있는 도관으로 모여들었다. 도관의 뜰로 들어서는 사람들
의 얼굴에는 수심이 어려 있었지만, 입에서는 여전히 찬반의 열변이 쏟
아져 나왔다.
사부는 뜰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본청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등뒤의 고색 창연한 도관 건물 때문인지 그날 따라 유난히
사부의 키가 커 보였다. 대사부는 카랑카랑하면서도 묵직한 소리로 입
을 열었다.
[우리는 도교를 신봉하는 사람들로,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입니다. 우
리는 세상을 등졌고 다라서 소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그 동안 이 신성한
산에서 갈고 닦은 청정한 마음을 잃게 될 겁니다. 속세에 기거하면서
몸과 마음을 더럽히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우리 역시 중국인입니다. 지금 외적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있느니, 모든 국민이 나라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맡은 일을 충실
히 수행해야 합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필요합니
다. 정신 수양 외에도 그만큼 중요한 요소들이 더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총이나 칼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각
자 가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공헌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모두들 자
신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십시오. 산을 내
려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만한 것을 구해 줄 수도 있고, 또 아픈 사
람을 치료해 줄 수도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전통 기법을 익히고 보존
할 수도 있겠지요.
다시 말하거니와 적군을 죽이지 않고도 나라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또 여러분 중에는 권법등 무술을 익힌 사람도 있는 줄 압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술로 나라를 지키십시오. 전사가 할 일은.......]
사부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사이훙의 머리는 벌써 전쟁터로 달려
가고 있었다. 아직 젊기만 한 사이훙의 혈기가 들끓었다. 사이훙은 당
장 싸움터로 달려가 위기에 처한 국가와 국민을 구하고, 힘없는 사람들
을 상대로 만행을 저지른 자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돌려주고 싶었다.
그날 저녁, 사이훙은 두 사형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우리는 지독할 정도로 고된 수련을 쌓았고, 덕분에 제법 출중한 무
예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무예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
니다.]
사이훙은 저도 모르게 뜨거운 입김을 내뿜었다.
그러나 두 사형은 진지한 자세로 귀를 기울였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
이지 않았다. 린 쭝우는 좀처럼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으
며, 칭 수이셩은 일단 말을 꺼내면 숨김없이 툭 털어놓기는 하지만, 마
음속으로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
런데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칭 수이셩이 갑자기 하산을 선언했다.
[우리는 무술을 배웠으니 싸워야 해. 여자와 어린아이와 노인들이 당
한 비인간적인 행위가 생각날 때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울화가 치밀
어. 더 이상 수수 방관할 수 없어. 그놈들을 죽여 버리고 말겠어.]
[저도 그럴 작정입니다.]
사이훙이 사형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사이훙과 칭 수이셩은 동시에 린 쭝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린
쭝우는 두 사람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이훙과
칭 수이셩은 평소 논쟁을 싫어하던 린 쭝우가 곧 자리를 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종단()에 적()을 둔 채 참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
다. 전쟁터에서 계율을 지키기란 불가능 할 테니까요. 또 하산하면 이
런저런 세상사에 휘말릴 수밖에 없으니 아예 종단을 떠날까 합니다.]
사이훙의 말이 끝나자마자 린 쭝우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사이훙, 탈적()은 안 돼.]
[저는 어느 도관에도 속하지 않는 떠돌이 도인이 되겠습니다. 이제야
솔직히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가끔 이곳 생활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배불리 먹지도 못하며 온종일 수련에 매달리다 보니 의기소침해 진
거지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경전을 외고, 아침 먹고 경전을 외고, 점
심 먹고도 경전을 외고, 저녁을 먹고도 경전을 외고, 심지어 잠자리에
가서도 경전을 외고....... 저에게는 떠돌이 도인이 더 어울린다고 생
각합니다.]
그러자 칭 수이셩이 사이훙에게 과거의 일을 깨우쳐 주었다.
[자네 스스로 서약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생 도인의 길을 걷겠습니다.
그렇지만 전쟁터에서도 계율을 암송한다면 위선자가 될 뿐입니다. 저는
살아남기 위해 계획을 세워 싸우고, 고기를 먹고, 악한 일도 불사하고,
살인까지 할 생각입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싸움에 전념해야 할 판국에
어떻게 계율을 지키란 말입니까?]
두 사형은 서로 멀거니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사이훙.]
린 쭝우가 침통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산을 내려가더라도 계율을 지키도록 노력할 생각이네.]
[나 역시 그렇게 할 작정이네.]
칭 수이셩이 린 쭝우에 동의를 표했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 까요? 두분 께서도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하
게 될 겁니다. 두 분은 사부님께서 미쳐 날뛰는 살인자를 응징해야 한
다는 말을 듣지 못하셨나요?]
사이훙은 또다시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
[그분 말씀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은 죄악이라는 뜻이네. 인간으로
서 어찌 그렇게 잔악한 짓을 저지르겠다고 마음 먹을 수 있겠나?]
칭 수이셩은 잘 들으라는 듯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었다.
칭 수이셩이 말을 마치자 린 쭝우가 덧 붙였다.
[사이훙, 우리는 악을 물리쳐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하네. 즐기기 위해
생명체를 죽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해치려는 산적과 산짐승에 대항해 싸
움을 벌인 적은 있네. 성인이라 해도 자기 몸을 보호할 필요는 있으니
까. 우리 모두 이유 없는 공격에 응전을 한 경험이 있지. 자신을 지키
는 일은 권리이니까 말이야.]
다음날 사이훙은 사부를 찾아갔다. 사부는 길고 헐렁한 평상복 대신
손목과 발목 부분을 동여 맨 검은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사이훙은 절
을 한 다음 안으로 들어갈 것을 청했고 사부는 허락한다는 표시로 조용
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산하고자 합니다.]
사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이훙을 주시했다. 사이훙은 사부가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않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영영 종단을 떠나고자 합니다.]
사부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힘껏 내리치고는 사이훙을 노려보았다. 사
부가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본 사이훙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뻔뻔스러운 놈! 지금 네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느냐?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말아라!]
[전쟁터에서 계율을 지킬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네놈에게 하산해도 좋다고 허락하더란 말이냐!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줄 아느냐? 어떻게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변
덕스러운 생각을 쫓아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돼. 잠자코 수련에 힘을
기울이도록 하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참전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참전을 하면 세상 음
식을 먹을 수 밖에 없습니다.]
[계율을 지키거라!]
[우리 몸이 바로 신들이 거주하는 도관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
까?]
사이훙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한다면 도관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양분을 섭취해 몸을 보존해
야 합니다. 신들도 낡아빠진 <도관>에는 머무르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릿속이 불량한 생각으로 꽉 차 있구나. 한 마디로 주제 넘는 놈이
란 말이다!]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조차 없다면 배추나 무와
똑같다고 해야겠지요.]
사부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무시무시한 눈길로 사이훙을 바라보았
다.
[이놈, 혈기에 의지해 너무 천방지축이로구나! 후회할 짓을 하기 전
에 잘 생각해 보도록 하거라!]
[저는 떠돌이 도인이 될 생각입니다. 이곳을 떠나면 그 어떤 도관에
도 적을 두지 않겠습니다.]
사이훙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했다.
[이제 떠나면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말거라.]
사부의 최후 통첩이 떨어지자 사이훙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할 얘기는 모두 마친 셈이었다.
[사부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사부는 다시 자리에 앉아 골도 보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화산파의 무예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어, 화산 출신의 제자들은 크
게 환영을 받았다. 산을 내려온 사이훙과 린 쭝우와 칭 수이셩은 각기
다른 게릴라 부대에 들어갔다. 그들이 정규군 대신 게릴라 부대를 선택
한 이유는 정규군은 상급 부대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만 게릴라 부대는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
이훙이 소속한 게릴라 부대의 우두머리는 차이 딩지에()와 바이
쑹지()였다. 사이훙 부대는 적의 후방을 배회하거나 정찰 부대처
럼 최전방 지역을 들쑤시면서, 적군을 공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군의
장비를 파괴하며, 적군의 기밀을 몰래 빼내기도 했다. 무술이 뛰어났던
사이훙과 동료 대원들은 총보다는 전통 무기를 선호했다. 정규군과 함
께 전투에 참여할 경우에만 총을 사용했다.
사이훙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는 한쪽 날이 선 칼과 창이었다. 검정색
무사복에 짚신을 신고 땋은 머리는 위로 감아 올려 두건 속에 집어 넣
었다. 사이훙은 높은 이상을 가슴속에 품은 채 성난 종마처럼 적을 무
찔렀다. 그는 특히 단독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적군을 하나씩 쓰러뜨리
길 좋아했다. 사이훙은 새벽이나 황혼 무렵, 때로는 훤한 대낮에도 풀
숲에 몸을 숨기고는 지나가는 적병을 몰래 쓰러뜨렸다. 창에 목을 찔린
적병은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접근전이 벌어지면 사이훙은 칼을 휘두르면서 상대방에게 바싹 다가
가 상대방이 총 대신 대검을 사용하도록 했다. 차가운 소리를 내며 칼
집을 나온 사이훙의 묵직한 칼은 어김없이 위력을 발휘했다. 사이훙은
몸을 빙글 돌리거나 펄쩍 뛰어 공격을 피하면서, 번쩍 칼을 휘둘러 상
대방의 사지를 잘라버렸다. 사이훙은 찌르고 베고 피하고 휘두르는 법
을 가르쳐 준 무인들의 철학을 명심하고 있었다.
<고통을 주려면 슬쩍 베고, 자비를 베풀려면 목을 자르라.......>
사이훙은 시간이 날 때마다 온 힘을 기울여 권법을 수련해 왔기 때문
에 손발의 위력이 마치 쇠뭉치를 휘두르는 듯 했다. 그 동안 금욕 생활
을 한 덕에 기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으며 피나는 수련을 계속 한 탓
에 여러 가지 무예도 시간이 갈수록 나아졌다. 사이훙은 무시무시한 전
사가 되었다. 손과 발을 한 차례만 휘두르면 적군이 죽어 넘어졌고, 목
을 비틀어 적군을 죽이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날이 가고 달이 지남에 따라 사이훙은 여지껏 품어 온 이상이 사라지
는 대신 증오심이 커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처참한 전쟁 속에서
지성은 마비되고, 동정심은 철저히 상실되었다. 사이훙은 화산에서 많
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일본군의 잔혹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그는
사람을 증오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적들이 유린한 마
을에 들어설 때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의 극한을 낭자한 선
혈과 함께 목격했다. 찢겨진 시체, 강간당한 여자들, 호되게 구타당한
육신, 총검에 찔린 어린아이들, 사지가 달아난 소년들, 성기에 말뚝이
박히고 불살라진 몸뚱어리. 사이훙은 신물이 날 정도로 그런 끔찍한 장
면들을 보았다. 잔인한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사이훙은 그런 증오
심을 키웠으며 예리한 칼날을 곧추세웠다. 전쟁의 잔혹상은 동료들의
감성도 모두 마비시켜 버렸다. 그들은 단호하고 냉정해졌다. 사이훙은
아직 그러질 못했다. 명분을 따르느냐, 들뜬 광기를 따르느냐를 놓고
갈팡질팡했다.
계속된 전투로 정신이 흔들렸다. 전쟁터의 폭음과 비명소리에 몸과
마음은 상처를 입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전쟁 소리와 마주쳤다. 폭
탄의 불길한 굉음, 자동 소총의 미칠 듯한 소리, 심지어는 자신의 칼날
이 살점을 도려낼 때 내는 희미한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이훙의 영혼을 직접 파고든 것은 인간의 소리였
다. 갈피를 못 잡고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의 흐느낌, 죽어 가는 동료의
비명, 적의 마지막 신음....... 그 속에서 사이훙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사이훙은 전쟁터가 잠잠해지는 그런 순간을 동경했다. 파
괴의 불협화음이 잠잠해지면 사이훙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이제껏
배워 온 것과 실제 전쟁 사이의 기묘한 딜레마를 해결해 보려고 했다.
엄격하고 절대적인 금욕에 초점을 둔 화산의 순결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기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화산에서는 죄를 지을 만한
유혹이 없었다. 그곳은 헌신적인 인간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다. 도인
이든 견습생이든 모두가 영적인 상태로 몰입하기 위해 힘을 썼다. 화산
에서 가장 싫었던 것은 지겹도록 규칙적인 금욕 생활뿐이었다.
화산은 전쟁터의 더러움과 타락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전쟁터에서는
산과 천국이 너무 멀어 닿을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이제 사이훙은 분
노로 인해 살인과 모함을 일삼는 망가진 생활을 하고 있었다. 훔칠 수
있는 건 뭐든지 훔쳐 먹어야 했으며, 생물을 죽이기 위해 덫을 설치하
는 일에 온갖 머리를 다 써야 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영적인 모습은 완전히 제쳐두어야 했다. 옛 도인들의 말이
옳았다. 속세에 뒤엉키지 않고 살아가는 일은 정말 어렵고도 순결한 일
이었다.
사이훙은 세상사에 완전히 얽혀 들었다. 까마귀 밥이 되어버린 썩은
육신을 볼 때마다 그는 복수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전쟁터의 비명 속에
서는 경전의 속삭임도 덧없는 일이었다. 격분은 이제 일상사가 되어 인
내심을 밀어냈다. 사이훙은 백성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살생은 영원한 천벌을 가져온다고 배웠다. 그는 그 교훈
을 받아들였다. 후회 없이 지옥에 갈 것이다.
화산에 대한 생각도 점점 씁쓸하고 냉소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도인
들이 그토록 위대하다면 그들은 왜 전쟁을 중단시키지 못하는가? 물론
대답은 있었다.
<도인들은 속세와 인연을 끊은 사람들이다.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이 아닌가? 그들은 중국인이 아닌가? 그들은 왜
그들의 특별한 능력으로 무의미한 침략 행위를 중지시킬 수 없는가? 문
답 끝에 사이훙은 도인들이 할 수 있다 해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깨달았다. 누구나 자신의 운명이 있고, 선과 악을 어
차피 선택해야 했다. 전쟁은 운명이고, 운명은 신으로서도 어찌해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영혼은 분명한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 영혼은 인간의 열망이 구체화
된 것이지만 그것이 기적을 낳지는 않는다.>
도교도들도 결국 인간이라는 점을 사이훙은 슬픈 마음으로 깨달았다.
평범한 인간.......
흔히 사람들은 도교도를 일컬어 자기 파괴적이고 자기몰입적이라고
한다. 물론 도교도들이 타인의 비극에 등을 돌렸던 것은 사실이다. 하
지만 도교의 길을 걷는 사람은 자신의 완성을 모색하는 동시에 타인의
완성을 위해서도 모든 것을 다한다. 문제는 인간 사회가 각각의 개인들
로 구성되어 있고, 개인들은 고상한 의식을 위해 희생할 것이냐 타락의
길로 빠져들 것이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와 기회를 갖추고
태어났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의무이자 인간이라는 사실의
의미이다. 악이 없다면, 결과도 선택도 없을 것이다. 인간성에는 늘 선
택이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는 꾸준하고 지속적인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다. 도교도들이 나라 전체와 지구 전체를 구할 수 있는 능력
은 없다. 그런 행위는 최상의 자비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런 일
은 옥황 상제의 능력도 벗어난 영역일 것이다.
사이훙은 명상을 통해 통찰력을 얻었다. 인간의 생활은 고상한 의식
과 막연한 느낌의 중간이다. 인간은 아직 진화 단계상의 이러한 딜레마
를 해결하지 못했다. 진화 단계의 한 순간에 일어난 전쟁이 사이훙에게
갑자기 하찮고 의미 없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런 철학적 비약이 불행하게도 전쟁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사이훙은 그곳에 있었다. 그를 둘러싼 현실적 죽음과, 철학적 고뇌는
그곳에서는 해결될 수 없었다. 싸움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는 죽고 싶
지 않았고 살해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이훙은 화산과 신과 인간에 대
해 진지하게 성찰한 뒤에 결론은 아주 단순하게 내렸다. 자기를 죽이려
는 자는 누구라도 죽일 것이라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현재 자신의 임
무를 다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25. 귀향
전사로서 생활하는 동안 항상 끔찍스러운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
다. 전쟁중 사이훙은 베이징에서 광둥으로, 허난에서 쓰촨으로 중국 전
역을 돌아다녔다. 전쟁의 참화도 중국의 장엄한 경치와 황홀한 아름다
움을 가리지는 못했다.
지인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었다. 다른 부대가 지나가거나 부대가 서
로 합치게 되면 사이훙은 친구들을 찾았으며, 두 명의 사형과 재회하는
기쁨도 누렸다. 운이 엄청나게 좋은 날 이따금 보게 되는 닭 한 마리도
전쟁터에서는 행복이었다. 닭이 보이면 사이훙과 동지들은 행복한 미소
를 짓고는 닭에 진흙을 발라 굽는 <거지식 닭구이>요리를 했다. 그렇게
만들어 먹는 음식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 준 성찬이었으며, 그렇게 먹
는 물 한 모금은 천 년된 포도주보다도 달콤했다.
언제나 일본군을 죽이는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사이훙과
부하들에게 같은 편인 장 제스 사령관 집에 침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
다. 장 제스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장군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거나 징
계를 주어야 할 경우, 인질을 잡아 가두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시안 사건(군벌 장 쉐량()이 마오 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합작을 종용하기 위해 시안에 들른 장 제스를 감금한 일) 후, 장 제스
는 북로군을 이끌고 있는 장군의 열 살 먹은 손자를 인질로 자신의 집
에 데려다 놓았다. 사이훙 부대의 사령관인 차이 딩지에는 이 일에 크
게 분개했다. 내전이 다시 벌어지려 했고 북로군은 국민당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분열을 막고자 하는 차이 딩지에가 사이훙
에게 내린 명령은 난징으로 가 인질을 구출해 오는 일이었다. 물론 그
계획은 총사령관에 대한 반항이자 모반이었지만 차이 딩지에는 사이훙
이 일을 잘 처리하리라 믿고 있었다.
사이훙은 난징에 도착하자마자 지하 스파이를 통해 장 제스가 살고
있는 집의 도면을 입수했다. 장 제스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의 저택
에는 높은 담이 둘러쳐져 있었고, 군인들과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스파이는 그 집의 도면을 주면서 경계를 뚫고 잠입하는 일은 불가능하
다는 말을 덧붙였다.
총사령관 장 제스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도전이었고, 사이훙은 언제
나 도전을 좋아했다. 사이훙은 초승달이 뜨는 날을 잠입 날짜로 잡고
부하들과 함께 작전을 세웠다.
그날이 되자 사이훙은 부하 한 명과 함께 어린 인질이 갇혀 있는 건
물 바깥의 수풀 사이에 미리 몸을 숨겼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사이훙
의 다른 부하들은 정원의 맞은편에서 짐짓 취한 체하고 싸움을 벌였다.
밖이 웅성거리자 많은 경호원들이 소리나는 쪽으로 모여들었고 사이훙
은 소란을 틈타 담을 넘어 정원으로 잠입했다. 바깥에서는 싸우는 소리
가 한층 더 커지고 있었다.
건물 입구에 두 명의 보초가 보였다. 사이훙은 나무 틈을 살며시 헤
치고 나가 보초들이 그를 발견하기도 전에 둘의 혈도를 눌렀다. 보초들
이 거꾸러지자 사이훙은 그들에게서 열쇠를 꺼내 건물 안으로 들어섰
다.
건물 안에는 보초가 몇이나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은 융단
이 깔린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멀리 복도 끝에 보이는 전등빛으로
보아 안에 두 명의 경호원이 더 있는 것 같았다.
사이훙이 들어온 문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보초들은 그쪽에
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없이 접근한
사이훙은 단 두 주먹으로 보초들의 급소를 찔렀다. 보초들이 쓰러지자
사이훙의 부하가 문을 부수었다. 안에는 소년이 잠들어 있었다.
시안에 돌아온 사이훙은 소년을 아버지에게 보냈고 북로군은 다시 사
기를 되찾았다. 장 제스로서는 빼앗긴 인질을 다시 데려올 방법이 없었
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겠지만 자존심 강한 장 제스는 인질을 놓쳤
다는 사실을 떠 벌일 형편도 아니었다. 더욱이 일본에 전면적으로 대응
하기 위해 내전을 그치겠다던 장 제스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북로군
사람들은 활기를 되찾아갔다.
끔찍스런 2년 동안의 전쟁은 사이훙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화산에서
받은 수련과 후천적으로 길러진 무자비함으로 살아 남을 수는 있었지만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사이훙은 사태를 가늠해 보고 미래를 생각
하기 시작했다.
1939년경 진격하는 일본군에 쫓겨 내륙으로 들어간 군대가 야산과 계
곡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자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부대 훈련도 시키고 위협도 할 겸 방어선 지대에서 소규모 전투만을 계
속 벌였다. 그들은 전선 깊숙이 침투했다가 퇴각하면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중국군은 그런 소규모 전투에서 언제나 물러섰고, 퇴각하는
일본군을 괴롭히는 정도의 대응밖에 하지 못했다. 철통 같은 일본군 진
지는 물론이고 양 진영 사이에 넓게 자리한 대치 공간도 그들에게는 넘
지 못할 벽으로 자리잡았다. 일본군은 시도 때도 없이 방어선 주변에
출몰했다. 도시들이 하나씩 파괴되어 갔으며 농부들은 수천 명씩 죽어
갔다. 황폐한 대지는 흥건한 그들의 피로 마를 날이 없었다.
사이훙은 지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개인참호 속에서 무감각하게 다
음 공격을 기다리며 상처를 치료했다. 열병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전
쟁은 점점 의미를 잃어갔다. 사이훙은 그제야 전쟁과 무관한 세상이 아
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곳이야말로 아직도 배
울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허가 바다와 만나는 산둥의 끝자락에서 사이훙은 자신이 이끌던 유
격부대를 해체했다. 화산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사이훙의 마음 뒤켠에는 산에 돌아가도 환영받지 못하리라라
는 불안감이 있었다. 도량을 뛰쳐 나올 때 사부는 다시 돌아올 생각은
말라고 했었다. 재입산이 허락될지 의심스러웠다.
화산으로 가는 길에 관가보에 들렀다. 조부모님들은 전쟁 직후 화산
으로 피난을 가셨으며, 지금은 벌목꾼의 오두막에 두 분 다 몸져 누워
계시다는 걸 알았다. 사이훙의 아버지는 아직도 전장에 있었고, 다른
가족들은 내륙 깊숙이 피난을 떠나고 없었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사이훙은 저택을 버리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
만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는 선조들이 살아 온 집에 도착했다. 그
를 맞이해 주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이훙이었지만 폐허가 돼버린 집을 보니 애절한
슬픔이 밀려왔다. 넓은 대지, 정원, 장려한 건물로 우뚝 섰던 관가보는
불에 탄채 잔해만이 산산이 흩어져 있었다. 관가보는 관씨 4대가 영화
를 꽃피웠던 곳이었다.
일본 군대가 저택을 습격했던 게 확실했다. 총탄 구멍이 나무벽 군데
군데 시커먼 흉터를 남겨 놓았고, 포탄에 맞아 생긴 구멍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수려했던 격자무늬 창살은 격렬한 총격으로 산산
조각이 났으며, 정자와 고목들은 이미 불에 타버리고 없었다. 냇물과
우물은 독약이 뿌려져 폐쇄돼 있었고, 사당은 마굿간으로 사용되고 있
었다. 부귀영화의 상징이던 예술품들도 모두 약탈되었거나 부서져 있었
다.
부서진 벽의 틈새로 새어 나온 희미한 불빛이 마당에 널려 있는 수십
구의 시체를 비춰 주었다. 일본군과 중국군의 시체도 더러 보였지만,
대부분은 집에 있던 종들이었다. 그들은 사지가 뒤틀린 채 죽어있었다.
몇몇은 사이훙이 어렸을 때부터 잘 아는 이들이었다. 한쪽 그늘에 널브
러져 있는 강간당한 소녀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허리 부위에 피가
그대로 응고되어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이가 부러졌으며, 벌거벗
은 다리를 쭉 뻗고 있었다. 사이훙에게 말 타는 법을 일러주던 나이 든
마부는 서까래에 매달려 있었다. 살점이 거의 없어 몽둥이를 끈으로 매
달아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모든 시체의 얼굴에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
져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자신들의 마지막 순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이훙은 천천히 정원을 거닐며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애를
썼다. 소용없었다. 살 썩는 냄새가 가족들이 거닐던 뜰의 재스민 향과
맑은 공기의 추억을 압도했다. 다채로운 색으로 치장된 날렵한 기둥들
대신 까맣게 그을은 채 뼈만 남은 폐허만이 한때 영화롭던 관가보의 멸
망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곳에는 생명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산다면 아무런 도움도, 아무런 동정도 받지 못한 채 이 가련
한 시체들의 썩는 냄새만을 맡아야 할 것이다.
사이훙은 정자가 있던 곳으로 갔다. 할아버지가 피리를 불던 장소였
다. 독약이 뿌려진 연못에는 죽은 물고기들만이 허연 배를 하늘로 드러
낸 채 둥둥 떠 있었다. 그의 가족이 살던 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
다. 사이훙은 발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울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하늘의 뜻이었다.
사이훙은 화산에 이르는 가파른 길을 올라갔다. 바람은 잦나하고 공
기는 신선했다. 햇빛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화산은 얼마나 성스러운
가! 화산의 엄숙한 고요와 전쟁터의 추악한 더러움이 뚜렷한 대조를 이
루었다. 사이훙은 산을 오르는 동안 시냇물에서 두번이나 몸을 씻었지
만 참담하고 씁쓸한 마음까지 씻어 내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산의 성스
러움을 더럽히는 느낌이었다.
사이훙은 비감한 마음으로 산길을 올랐다. 전에는 화산의 의미를 제
대로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꾐에 빠져 그곳에 갔었다. 다음에는 그곳
을 지긋지긋한 기숙 학교처럼 여겼다. 나중에는 조금 동기를 찾긴 했지
만 여전히 불완전한 신념이었다. 사이훙의 마음속엔 언제나 의심이 가
득 차 있었다. 이제야 사이훙은 엄숙함과 깨달음에 헌신할 준비를 하고
돌아올 결심을 한 것이다. 손에 피를 묻히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의지할 곳을 찾아 온 것이다. 화산만은 그를 받아줄 것 같았다.
몇몇 수련생들이 먼 발치서 사이훙을 발견하고 그를 맞기 위해 다가
왔다. 사형과 사제들은 기뻐하며 사이훙과 자신들의 경험담을 나눴다.
몇몇은 자신들의 맹세 때문에 산을 내려가지 않았었다. 또 몇 명은 치
료를 위해서, 혹은 싸우기 위해서 산을 떠났었다. 사이훙은 사부의 안
부를 물었다. 사부의 분노가 단순히 형식적이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런 얘기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도량의 나이 든 주방장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분도 자주 모습을 감추셨어. 가시는 곳은 말하지 않고 항상 <일이
있네.>라는 말씀뿐이셨지. 그리고 몇 달 동안 나타나시지도 않았네. 하
지만 나는 그분이 종종 산 밖으로 나가 싸움에 참가하셨다는 걸 알고
있지.]
[그걸 어떻게 아시죠?]
사이훙이 노인에게 물었다.
[매달 올라오는 신문에 지팡이를 든 도인에 관한 기사가 주기적으로
실렸거든. 대사님만이 그런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시지. 그 기사에 대해
대사님께 물어본 적도 있었는걸. 물론 그분은 모든 것을 부인하셨지
만.]
[그 기사에 뭐라고 씌어 있던가요?]
[일본 무사들의 도전을 받기 위해 상하이와 베이징을 가셨다고 나와
있었네. 마지막 기사가 난 게 1936년이었지.]
[전 그때 여기에 있었는데 왜 절 데려가지 않았을까요?]
[자네의 고약한 성깔때문에 자네가 직접 링에 뛰어 올라가 죽게 될까
봐 그러셨던 게지.]
[아하.]
[일본놈들이 우리를 동양의 환자라고 불렀다네. 그래서 대사께서 그
들의 도전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신거고. 그분은 두 손가락만으로 황소
처럼 커다란 스모 선수의 목을 공격해서 쓰러뜨리셨지. 베이징 시합에
서는 손목과 손바닥만을 사용하셨어. 그때는 가라테 유단자 두 명, 검
도 사범 한명, 그리고 유도 사범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했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사부께서도 몸소 싸움판에 끼여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
지 않으신 거네요!]
사이훙이 소리쳤다.
[분명히 그렇지. 그런데 또 다른 시기에 똑같은 도인이 쓰촨에 나타
났어.]
[쓰촨에? 우리 사부님이오? 그분이 거기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같은 일이지. 그곳에 일본군대가 점령한 찻집이 있었네. 그들의 사
령관이란 작자는 가라테 4단으로 알려져 있었고. 사령관은 찻집에 있었
고 대사께서 곧장 안으로 들어가서 차를 마시기 위해 점잖게 자리를 잡
고 앉으셨지. 중국인이 들어왔으니 큰일 났다며 겁에 질린 채 종업원들
은 차를 대접했네. 그 사령관은 자신의 기술을 뽐냈고 중국 무인을 경
멸하고 얕잡아 보았지. 그때 대사께서는 찻잔을 내려놓고 가소롭다는
웃음을 날렸네. 그러자 사령관이 대사님을 공격했지. 하지만 대사님은
한 손으로 그를 던져 버렸네. 아주 큰 싸움이 벌어졌어. 물론 그 찻집
을 걸어 나온 사람은 대사님뿐이었다지만.]
[나쁜 노인네 같으니라구. 그랬으면서 나한테는 그 난리를 쳤단 말이
에요? 가서 앙갚음을 해야겠어요.]
사이훙은 짐짓 화가 난 듯 대꾸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사이훙. 자네가 가서 싸워봐야 최후의
승리자는 언제나 대사님이시니까.]
노인은 낄낄거렸다.
[그건 사실이에요. 이번에도 확실히 그분이 이기셨으니까.]
사이훙은 미소지으며 그 말에 수긍했다.
그들은 남봉 사원에 당도했다. 수도승들이 그를 안으로 인도했다. 사
이훙은 서재에 있는 사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부는 그를 무덤덤하게 내려다 보았다. 사부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깜박거림 없이 차분하게 주시하는 눈,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수염,
똑바른 자세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사이훙은 사부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 돌아왔느냐?]
사부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습니다, 사부님.]
[왔으면 다시 수련을 해야지.]
그게 다였다. 사부는 돌아온 제자를 받아들였고 부드러운 미소로 지
난 일을 용서했음을 알렸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제 5부
진정한 자아를 찾아서
26. 미로
화산으로 돌아와 일주일 뒤 사이훙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동굴에서
홀로 지내며 금욕 생활을 하기로 맹세했다. 사이훙과 사부는 길일을 택
해 화산의 서봉으로 향했다. 그들은 동굴 입구 옆에 있는 넓적한 바위
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사부가 사이훙은 향해 돌아서면서 말했다.
[바로 이곳이다. 여기에 머물면서 네 참모습을 깨닫도록 해라.]
그들은 동굴 안의 비탈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곳곳에 수많
은 샛길과 방 같은 공간이 있어 사이훙은 마치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동굴 깊숙이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더 차가워졌고,
발자국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간간이 비좁은 길을
지날 때마다 몸을 옆으로 틀어 지나가야 했다. 동굴 속은 숨이 막힐 정
도로 어두웠으나 가끔 반짝이는 광석 덕분에 제법 환한 곳도 있었다.
암석이 녹아 내려 생긴 듯한 수많은 종유석은 밑에서 솟아오른 석순과
닿을 듯 말 듯했다. 한동안 꽤 큰 개울물을 옆에 기고 걷던 두 사람은
마침내 횃불과 기름등으로 밝혀진 다섯 개의 석실에 도착하였다. 그곳
이 바로 사이훙과 사부의 목적지였다.
석실 부근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복도와 웅덩이들이 수없이
많았다. 천장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구멍들은
통풍구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 구실도 했다. 사
이훙은 빛을 받아 모습이 드러난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돌침대, 향로,
기름등, 몇 권의 서적, 호리병 물통, 물시계, 악기, 필기구, 일기장과
여벌의 옷.
그곳에는 명상에 전념할 수 있도록 분리된 석실이 있었다. 개울물이
그 방 안으로 흘러 들어 중앙에 깊은 웅덩이를 거친 뒤 밖으로 흘러 나
갔다. 석실 한쪽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명상용 제단이 있었다. 용의
발톱 모양을 한 바닥에는 고대의 암호가 새겨져 있었고, 학 모양을 한
두 개의 철제 향로가 제단 좌우에 놓여 있었으며, 모래로 덮인 돌바닥
에는 커다란 원이 새겨져 있었다.
사이훙은 풀로 엮어 만든 방석과 표범 가죽과 명상용 깔개를 제단 위
에 깔았다. 사부는 사이훙에게 팔괘경()을 건네주고 목에 부적을
매주며 마지막 훈시를 하였다.
[많은 도인들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네 사형들 역시 이 곳을
거쳤다. 정진하고 인내하거라, 사이훙. 너 또한 성공하리라 믿는다.]
사이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사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사이훙은 외톨이가 되었다.
사이훙은 매일 아침 명상을 하고, 별자리를 관찰하며, 경전을 암송하
고 저녁 명상을 통해 수련을 쌓아 갔다. 그 외의 시간은 동료가 가져오
는 세 번의 식사와 무술 수련, 악기 연주, 서예, 그림 그리기, 동굴 답
사 등을 하며 보냈다.
사이훙은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목욕으로 몸을 청결히 한 다음
체력을 단련하였다. 그러고는 명상용 석실로 가 신성한 원형 속의 제단
위에 앉아서 모래 위에 특이한 그림을 그렸다. 원, 사각형 등으로 이루
어진 복잡한 그 그림은 천지의 모든 힘과 열 방향, 다섯 원소를 상징하
는 도형이었다. 사이훙은 각각의 신을 나타내는 한 획 한 획을 신에게
호소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려 나갔다. 자신을 보호해주고 지원해주는
도형을 힘들게 만들어 낸 뒤 사이훙은 그 중심부에 들어가 앉았다.
그 도형과 목에 매단 부적은 사이훙의 정신이 신체를 떠났을 때 외부
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런 보호막이 없으면 사이훙
의 육신은 들어앉을 육신을 찾아 헤매는 수많은 악령과 악마에게 침해
를 받을 것이다. 악령과 악마들은 육신의 아홉 구멍으로 들어와 정신이
회복되는 것을 방해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사이훙은 24가지의 손 동작을 하며 생각을 중단하
고 집중력을 심화시켜, 마침내 정신이 육신을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했
다. 그러한 동작들은 바로 우주가 진화해 온 전체 과정을 상징하고 있
었다. 사이훙의 명상은 우주 생성의 최고점에 올라 있었다.
사이훙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으면서 조용히 앞에 있는 받침대 위
에 놓인 경전을 읽었다. 힘을 지닌 경전의 각 단어들은 사이훙의 영혼
이 여행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사이훙은 경전을 암송해 신들에게 기도하였다. 사이훙이 여행 중에
모든 신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도교의 삼신을
비롯한 하늘의 모든 신들이 사이훙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이훙의 영혼은 육신을 떠나 용을 타고 하늘로 향했다. 하늘에 도착
하면 사이훙은 일단 신들 앞에 자세를 낮춘 다음 계시를 기다리면서 명
상의 자세를 취했다. 신들이 입을 열지 않을 경우에는 사이훙이 신들에
게 궁금한 사항을 질문하였다.
두 시간 뒤, 그는 경전의 다른 부분을 암송하면서 의식 상태로 되돌
아왔다. 그는 환영을 사라지게 하는 동작을 하며 도형의 한 획 한 획을
지웠다. 도형을 지우며 도형에 의해 불려 온 신들을 놓아 주기 위하여
경전을 암송하였다.
경전을 읽는 일 또한 중요한 일과였다. 매일 점심을 들기 전에 사이
훙은 신들을 향해 과거에 맺은 인연의 끈을 깨끗이 없애 달라고 호소하
는 경전을 암송하였다. 신들은 하루에 두 번 내려왔는데, 양()신은
낮에, 음()신은 저녁에 강신하였다.
동굴 속의 신비를 탐험하는 자유시간 무렵의 정오 경이면 사이훙은
재차 명상에 돌입하였다.
동굴 안의 구조는 매우 복잡하고 불규칙했다. 어떤 곳은 비좁은 바위
틈새를 통과해야만 했고, 어떤 곳은 물밑을 헤엄치거나 자연적으로 생
긴 돌다리를 지나야 도달할 수 있었다. 앞서 수행했던 은자()들이
동굴 속에 은둔하며 많은 곳을 탐험하고 표시를 해 놓았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밝혀 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 중에는 매우 위험스러워 보
이는 곳들도 있었다. 어떤 곳에는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판이 있었다.
특별히 마음에 들어 즐겨 찾는 곳도 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낯선 곳
으로 갈 때면 새로운 경험에 따른 신비감과 경이로움을 느끼곤 했다.
동굴에 머무른 지 얼마 안 되서 사이훙은 바위를 타고 내려가 긴 복
도를 찾아냈다. 복도 안쪽으로 몇 미터 들어가 보니 바닥 아래쪽으로
또 다른 동굴이 뚫려 있었다. 그 동굴 속을 살피다가 무너진 고대의 계
단과 벽에 박힌 쇠사슬을 보았다. 사이훙은 횃불을 손에 쥐고 아래쪽으
로 내려갔다.
사이훙은 아래로 걸어 내려가면서 발자국 수를 세었다. 아래로 내려
가면 갈수록 위쪽 동굴에서 비치는 빛이 희미해지더니 마침내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횃불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사이훙은 계속 발자국 수를 세었다.
발자국 소리는 사이훙에게 최면을 걸었고, 어둠은 사이훙을 더욱 당
황하게 만들었다. 단단한 동굴 벽에 의지해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 속
으로 이끌려 갔다.
그가 5백 번을 세었을 때였다.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사이훙은 천을 세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1천 2백을 세었다. 그것이
목소리였던가? 1천 3백을 세었다. 틀림없이 목소리였다.
이상하게 억눌린 비명소리와 울음소리였다. 위쪽을 쳐다보았지만 칠
흑같은 어둠만이 보일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엎드린 자세로 1천
5백보까지 내려갔을 때 비로소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는 누군
가 자신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얘기 하는 것을 들었다. 자신
이 지나온 곳을 돌아보았지만 계단과 쇠사슬마저 어둠속으로 사라져 보
이지 않았다. 목소리가 그에게 가까워졌다. 놀란 사이훙은 재빨리 몸을
돌려 위쪽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동굴을 벗어날 때까지 사이훙
은 멈추지 않았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사이훙은 다시는 그 동굴 근처에 가지 않았으며, 두려움은 곧 사라졌
다. 다음에는 동굴의 크기를 알아보기 위하여 답사를 해보았다. 그는
화강암 사이에 난 비좁은 틈새로 흘러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향해 전진
했다. 바위 틈바구니 끝에 이른 그는 맞은 편 출구를 통하여 밝은 빛과
안개를 보았다. 사이훙은 화산을 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급
히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사이훙은 화산의 봉우리 대신 지평선 너머로 펼쳐져 있는 숲
을 보았다. 사이훙은 어리둥절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쪽 방향에
숲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설사 그가 가보지 못한 장소가 있다 해도 화산
부근에 그처럼 광활한 지역이 존재하기란 지형상 불가능했다.
사이훙은 동굴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가기가 내키지 않았기 때문
에 그저 동굴 입구에서 풍경 하나 하나를 세세히 살펴보기만 했다. 대
부분의 나무는 굵고 비틀어진 소나무들이었다. 넓은 잎사귀를 가진 나
무들이 전혀 없어서 마치 원시 상태의 숲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새소
리, 바람소리, 물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원시의 숲은 그지없이 조용하기
만 했다.
사이훙은 발걸음을 돌려 비좁은 틈새를 지나 그의 거처로 되돌아갔
다. 그는 그날 본 것은 모두 일기에 적었으며 나중에 사부에게 질문하
였다. 질문을 받은 사부는 자신도 무한한 숲을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숲의 끝을 보지는 못했고, 이전에 득도한 사부들 조차
그곳을 답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했다. 사부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을 그곳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날 오후, 사이훙은 우연히 전에는 보지 못했던 출구를 발견했
다. 그 출구는 좁은 동굴의 높다란 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는 출구까
지 기어올라가 햇빛이 비치는 바위 위로 나갔다. 그곳은 깎아 지른듯한
절벽 표면이 움푹 패면서 생긴 곳이었는데 몸을 뻗고 늦은 오후의 따사
로운 햇살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그는 바위 틈으로 꼭대기에 숲
이 있는 또 다른 절벽을 보았다. 그는 느긋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곳곳
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바위 틈새 저편에서 이상한 동물이 나타나더니 사이훙 앞으
로 다가와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는 조랑말 같이 생겼으
나 전에는 보지 못한 동물이었다. 조랑말과 같은 발굽과 형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슴 머리에 솜털 같은 꼬리가 달려 있었고, 몸에는 비늘이
있었다. 그 동물은 껑충껑충 뛰면서 원을 그리는가 하면 감춰진 다리로
진흙을 긁으며 때때로 말처럼 낑낑거렸는데, 마치 사이훙에게 같이 놀
자고 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이훙은 그럴 수가 없었다. 커다란 바위가
둘의 만남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동물은 모습을 감추었다가는 나
무 뒤에서 다시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고 엿보았으며, 그러다가는 다
시 사이훙 앞으로 껑충껑충 뛰어나왔다.
사이훙은 해가 질 때까지 그 동물이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저녁
수련을 하기 위해 돌아섰다. 그 동물은 몹시 실망한 듯 슬픈 모습으로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사이훙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동물을 바라보았
다. 동물이 반짝이는 햇빛 아래 머리를 흔드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
웠다.
사부가 방문하자 사이훙은 사부에게 그 동물에 관해 물어보았다.
[사부님, 평범해 보이지 않는 동물들을 봤습니다. 이틀 전에는 이상
한 조랑말이 보이더니 오늘은 토끼를 봤습니다.]
사이훙은 그 동물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사부가 대답했다.
[네가 접한 풍경과 동물은 너에게 다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그 의미
를 알아내느냐 못 하느냐는 전적으로 너 자신에게 달려있다.]
[조랑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토끼는 더욱 이상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저는 매일 어떤 작은 동굴을 지나가는데 그 동굴 바닥에는 잔디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그곳에 한 무더기의 버섯과 토끼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동굴을 떠났다가 채 5분도 안 되어 되
돌아가 봤는데 토끼와 버섯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토
끼가 버섯을 먹어 버렸을까요? 토끼가 버섯을 먹었다면 잔디 위에 버섯
이 있었던 자국과 토끼가 버섯 줄기를 씹다버린 흔적이 있어야 하지 않
겠습니까?]
[아마 신들이 너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모양이다.]
[신들의 신호라구요? 그렇다면 그 신호는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요?]
[스스로 알아보거라. 만약 알아내지 못하면 명상을 통해 직접 신들에
게 물어보거라.]
6개월이 지나는 동안 사이훙은 일기를 쓰면서 그간의 경험들을 평가
했다. 그는 이제 진정으로 명상을 즐기고 있었다. 즐거움으로 자신도
모르게 웃으며 생활했다. 화산에서 10년동안 수련한 끝에 마침내 그런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평온하고 즐거우며 건강하다는 느낌, 새로운 배
움에 대한 기대감으로 사이훙은 도취되어 있었다.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명상은 그를 예민하게 만들었으며 인간에 대
한 그리움 대신 고독을 즐기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명상으로 계발된
그의 감성과 감정은 동굴 곳곳에서 자극을 받았다. 사이훙은 그림과 음
악을 통해 기분 전환을 하였고 자아를 발견하며 안목을 넓혀 나갔다.
실재이건 환상이건 간에 그의 경험은 놀라운 경험임에 틀림없었다.
사이훙은 각각의 경험들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들은
수수께끼였고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어느 동굴에서 들려 온 목소리, 무
한한 숲, 조랑말, 토끼....... 그것들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환상
의 소산인가? 광란의 상태에 빠져서 그런 것들을 본 것일까? 그의 인지
능력에 의해 나타난 것인가? 아니면 그의 인지 능력과는 상관없이 나타
난 것일까? 어쩌면 잘못된 것은 단지 그의 견해뿐인지도 모른다. 혹은
실재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경전들은 한결같
이 서로 다른 물체들은 환상의 소산이라고 강조하였다. 어쩌면 시간적
으로나 공간적으로 차원이 겹쳐 있는 까닭에 개개의 실체가 동시에 여
기저기에 나타나는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모든 것이 동시에 같은 곳에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시 조랑말 같은 동물은 실재하는 반면 인간
은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사이훙은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 오던 동굴과 지평선 너머로
뻗어 나간 숲속으로 빠져 들거나, 조랑말 같은 동물을 만난 암석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경험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는 기이한 동물
과 풍경이 자신의 존재와 상관없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영혼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한지에 대해 끝없는 의문을 던졌다. 깊은 인상을
심어 준 몇몇 경험들 때문에 사이훙의 생각과 판단은 날이 갈수록 모호
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실재의 근원이 어디에 있든 사이훙은 그것
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 영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
었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27. 유혹
처음 동굴에 들어올 때는 그곳에서 9개월 동안 머물 예정이었다. 그
러나 9개월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났고, 이제는 언제 떠나느냐고 더 이상
묻지도 않았다. 사부의 대답은 늘 같았다.
[아직 공부가 끝나지 않았다.]
사부는 매주 동굴을 방문하여 사이훙을 계속 수련시켰다. 사부는 사
이훙에게 도덕경(), 황제내경(), 다경()등을 읽게
하고, 보다 깊은 명상법들을 소개하였다. 그는 사이훙에게 자신의 힘으
로 끊임 없이 내면의 세계와 맞닥뜨릴 것을 강조하였다. 사부는 마음을
열고 영적 경험들을 받아 들일 것을 지시했으나 진정한 인식과 수련에
방해가 되는 경험은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사부는 종종 사이훙에게 무엇이 문제인가를 상기시켰다. 사이훙은 사
부의 말을 통해 동굴 생활에 대한 긴장감으로 정신을 잃고 일생을 동굴
속에 갇혀 사는 몇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고독과 그릇된 명상법
으로 정신적 균형을 잃었는지, 혹은 말하기 어려운 외부 요인에 의하여
균형을 잃었는지는 모르지만 몇몇은 자살을 했다고도 하고 또 다른 몇
몇은 미로의 터널을 헤매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부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사이훙을 격려하였다.
1년 반이 조용히 흘러갔다. 사이훙은 그 사이 동굴 안에서 친구까지
사귀게 되었다. 사이훙은 음식을 아껴 새들에게 먹이를 주었고, 저녁
식사인 과일을 아껴 원숭이를 친구로 삼았다. 그들은 매우 가까워졌다.
원숭이는 사이훙의 넓은 어깨를 차지하고 앉아서 있지도 않은 이를 잡
는 흉내를 내곤 했다.
어느 날, 사이훙은 단상에서 명상을 하다 단 아래의 물을 쳐다 보았
다. 그곳에는 한 남자의 얼굴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길쭉하고 빗질도 하지 않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덥수룩한 그 얼굴은
도교 관상학자들이 <음상()>이라 부르는 얼굴이었다. 얼굴 한쪽은
초록빛이었으며 눈은 비정상적으로 크고 검어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으
나, 다른 한쪽은 인간의 모습으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
상은 초자연적인 훈련을 거쳐 인간의 형태에서 진화된 동물을 의미하였
다. 그러나 어떠한 창조물도 그 원래의 형태를 벗어날 수는 없었으므로
일부는 사람의 얼굴로 있고 남은 반쪽은 파충류의 형상을 지니게 된 것
이다. 사이훙은 그 얼굴이 유령일 뿐이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 얼굴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사이훙을 쳐다보았다. 사이훙 역시 고집
스럽게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그 얼굴이 말했다.
[나는 이 동굴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
지?]
[나는 금욕을 수련하는 수도자입니다.]
[네가 어떻게 금욕을 수련할 수 있어? 너는 어린아이일 뿐이야. 너는
별로 알고 있는 게 없어. 나는 여기서 벌써 5백 년을 수련해 왔는데 아
직 5백 년을 더 수련해야 해.]
[나를 유혹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한 방에 너를 납작하게 해줄 테니
까.]
사이훙이 크게 소리를 지르자 기이한 얼굴의 눈이 놀라 더 커졌다.
그 사람은 연못에서 솟아 나오더니 단숨에 바위 위로 올라앉았다.
그의 몸은 작고 야위었으며, 덜렁덜렁하게 붙은 팔에 손가락이 길게
나 있었다. 머리카락은 무릎까지 덮여 있었다.
그 사람은 서서 웃고 있었다. 사이훙은 그가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금세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원을 그리며 돌아
서서 즉시 도교의 법복으로 자신의 몸을 덮었다. 그가 낄낄거리며 웃었
다.
[나는 박해받는 두꺼비 도인이다. 너는 누구냐?]
[나는 관 사이훙이며 화산정일파의 제자다.]
[정일파라고? 네 스승이 누구지.]
[화산의 대사이다.]
[누군지 알고 있어.]
두꺼비 도인이 웃었다.
[멍청하고 바보 같은 늙은이지. 너는 왜 이런 멍청한 짓을 그만 두지
않고 계속하고 있지?]
[닥치지 못해? 너는 존재하지 않잖아!]
두꺼비 도인은 발작하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이훙은 그를 무시하고
경전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두꺼비 도인은 네 시간 동안이나 사이훙을
조롱하고 웃어댔으며 모욕하였다. 그렇게 떠들면서도 전혀 숨가빠하지
않았고 오히려 목소리가 바위에 부딪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아무리 해도 사이훙이 요동을 않자 그는 점차 물러나기 시작했다. 사
이훙이 마지막 암송을 마치자 두꺼비 도인은 그에게 회유하는 듯한 목
소리로 말했다.
[좋아, 어느 누구도 운명이 정해 놓지 않는 한 나를 만날 수는 없어.
너는 무엇을 원하지?]
[아무것도 없어.]
사이훙이 대답하자 두꺼비 도인은 다시 웃었다. 그는 두꺼비 같이 물
위를 뛰어넘더니 사이훙 바로 앞에 내려앉았다. 사이훙은 일어섰다. 두
꺼비 도인은 그의 뒤로 다가섰고 사이훙과 같은 자세로 서서 다시 조롱
하기 시작했다. 사이훙은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도 따라했다.
사이훙은 원을 그리며 걸었다. 그 사람은 그림자처럼 정확히 따라했다.
사이훙이 걸을 때마다 그 두꺼비 도인도 사이훙의 움직임을 똑같이 따
라했다. 화가 미친 사이훙이 뒤를 돌아보자 두꺼비 도인은 히죽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사이훙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꺼비 도인은 사이훙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쳐다보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얼마 뒤 그가 다시 말했다.
[너는 잘 배운 애로구나. 내가 인정하마.]
그렇게 말하면서 두꺼비 도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쨌든 정일파가 똘똘한 놈을 제자로 두었구나. 잘 들어 둬, 꼬마
야. 너는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아느냐?]
[아니.]
[수세기 전 나는 큰 싸움을 벌였지. 그래서 벌로 이 동굴에 천년 동
안 갇혀 있어야 한단다. 이제 벌을 반 정도 마쳤는데 아직도 나는 끊임
없이 수련을 하고 있다. 자, 너는 어떠냐? 뭘 수련하고 있지?]
[나는 도교의 비법과 명상을 수련하는 중이다.]
[그래?]
두꺼비 도인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천천히 말했다.
[그러면 반드시 영구 명상을 해야 한다.]
[나는 벌써 그렇게 하고 있다.]
[아까도 말했듯이 성부에 정해지지 않는 한 그 어느 누구도 나를 만
날 수 없다. 너는 나를 만날 운명이었던 게 틀림없지. 내 그 선물로 말
해 줄 것이 하나 있다.
네가 도교 명상의 수도자라면 영구 명상이 수련을 진보시키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하지만 너는 명상으로 기를 보내는 그
영문()들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그것들은
사실 네 신체 어디쯤에 있으리라고 추측한 형태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네가 알고 있듯이 어떤 영성의 중심이 아니고 단순한 상상에 불과해.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겠어? 사람에게는 정신이 전부야. 무엇이든 상
상할 수 있는 정신이 모든 것이라는 말이지.]
그는 사이훙에게로 다가와서 부드러운 동작으로 손을 사이훙 앞으로
내밀었다.
[자, 여기 그릇이 있다. 그리고 과일이 있다. 귤, 포도, 복숭아, 보
이지?]
사이훙은 조심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과일들을 만져 보았
다. 진짜였다. 그렇지만 의심이 들었다. 두꺼비 도인이 사이훙에게 선
물한 것은 수수께끼였다. 사이훙은 다시 되돌려 생각했다. 잠시 자신의
얼이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사이훙은 머리를 흔들어 두꺼비 도인의
형상을 지워 버리려 했다. 두꺼비 도인이 다시 허리를 굽혀 사이훙에게
무슨 말을 하려 하자 사이훙은 도인을 향해 말했다.
[그 포도는 나뭇가지다.]
사이훙이 이렇게 말하자 포도가 즉시 나뭇가지로 바뀌었다.
[귤은 바위이고 나머지 과일들은 잎사귀이다. 그 그릇은 널찍한 바위
에 지나지 않아.]
그러자 과일들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고 두꺼비 도인의 손에서
떨어졌다.
[네가 영리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두꺼비 도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정신이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게다. 너는 그 과
일들을 먹을 수도 있었다. 정신이 그것을 결정하지. 이 동굴도 그 자체
로 인식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 동굴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강력하게 그렇지 않다고 여기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둘에 무슨 차이가 있지? 영문이란 존재하지도 않고 움
직이지도 않는 것이야!]
두꺼비 도인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가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머
리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몸이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 그는 사이훙
에게 말했다.
[명심해라, 꼬마야, 무()만이 참된 실재다.]
그 뒤 두꺼비 도인은 사이훙을 규칙적으로 방문하고 했으나 늘 이상
한 방법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어느 날 사이훙은 방을 나와 물 위에 있는 돌다리를 건넜다. 다리 건
너편에 노인과 늙은 여인이 서 있었다. 옷차림이 시골 사람 같았다. 노
인은 흰 머리카락은 상투를 틀어 올렸고 손에 긴 담뱃대를 쥐고 있었
다. 여자는 발목까지 머리카락을 늘어뜨렸으며 짚으로 엮은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사이훙이 다가가자 그들은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2천년이 넘은 대나무들이야.]
[2천 년된 대나무는 있을 수 있지만 2천 년이 지났다고 대나무가 사
람이 될 수는 없다.]
사이훙의 말에 여인이 대꾸했다.
[네 옷차림과 부적을 보니 도교도로구나. 도교도들도 그런 일이 가능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해.]
이번에는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득한 옛날에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모든 사물이
고정되어 있을 필요가 없었던 거지. 너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해.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살 수 있겠어? 백 년? 아니, 150년? 너는 옛날에 존재
했던 것들의 힘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인이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말을 건넸다.
[너는 도인이지? 우리는 도교도가 불멸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
다. 우리는 네게 불멸을 줄 수 있어. 그렇게 되면 너는 고대에 존재했
던 것들의 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상상 속에서조차 할
수 없던 것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것이다.]
[그 대가는 무엇이죠?]
사이훙의 질문에 노인이 탄성을 질렀다.
[그래, 정직한 친구로군! 우리가 보살펴 줄 테니 잠시 동안만 대나무
가 되어주면 된다. 너는 건강하기 때문에 커다란 대나무가 될 수 있을
게야. 그 대나무는 다시 대나무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온 땅
을 대나무 숲으로 덮을 수 있을 거야. 네가 대나무를 도처에 증식시키
고 나면 너는 불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을 날 수도 있고, 형체
를 바꿀 수도 있으며, 눈에 안 보일 수도 있지. 다른 크기로도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신의 경쟁자도 될 수가 있지. 우리를 따라와. 그러면
너는 불멸할 수 있어.]
사이훙은 웃으면서 조롱하듯이 응답했다.
[저를 즐겁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기간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장수는 신이 주는 선물이지 흥정거리가 아니
지요. 난 당신들의 힘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것들은 단지 환상일 뿐입
니다.]
노인은 갑자기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와 사이훙을 공격했다. 사이훙은
노인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반격을 하였으나 노인은 사이훙의 주먹을 피
했다. 잠자코 있던 여인도 사이훙에게 뛰어올라 얼굴을 할퀴려 들었다.
사이훙은 다리에서 뛰어내려 그의 앞에 있는 모래에서 부적 하나를 꺼
냈다.
격노한 노인은 담뱃대에서 기다란 빨대를 꺼내더니 사이훙에게 뿌연
연기를 내뿜었다. 여자는 비를 휘둘러 연기를 사이훙 쪽으로 보냈다.
[너희들은 악마로구나! 내 악마 잡는 경을 암송할 것이다!]
사이훙은 그들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사이훙의 말에 화들짝 놀라 동작을 멈추더니 경소리가 입에서
나오자마자 달아나기 시작했다.
석달 뒤, 사이훙이 다시 그 다리를 건너는데 방망이 같이 생긴 커다
란 물체가 다리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사이훙이 가까이 가서보니
그 물체는 소년이었다.
사이훙이 쳐다보자 소년은 다리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소년은 동물과
식물을 합쳐 놓은 듯한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는 120센티 정도
였으며, 창백한 얼굴에 가느다란 눈과 뚜렷한 콧구멍, 날카롭게 벌어진
입을 가지고 있었다. 소년은 입술만을 달싹달싹 움직이며 말을 하기 시
작했다. 자기 이빨을 감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소년은 무인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옷이 너무나 잘 어울려 사이
훙은 소년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소년은 비단으로 짠 옷과 푸른색 바지
를 입고, 흰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그림을 그린 곤봉을 지니고 있었으며
별과 꽃을 수놓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 위에 진한 청색 망토를 입고
있었으며 옥구슬과 단백석()부적을 가지고 있었다. 사이훙은 아
름다운 구름을 수놓은 소년의 파란 신발을 황홀한 듯 쳐다보았다.
[나는 놀고 싶어요. 나와 같이 놀아 줄 수 있어요?]
소년이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나는 할 일이 있어.]
[제발 나와 함께 놀아 주세요. 나는 당신이 놀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
고 있어요. 나는 숲속의 모든 곳을 알고 있어요. 어떤 인간도 보지 못
한 장소를 당신에게 보여 줄 수 있어요. 상상할 수도 없는 보물들을 당
신에게 줄 수도 있구요. 제발 내 놀이 상대가 되어 주세요!]
[미안해, 오늘은 놀수가 없구나.]
소년은 낙심한 듯이 바위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양손에
묻은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신은 몰라요.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이해 못해요. 어떤 때는 몇십
년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나는 여기에 몇 세기 동안 있었어요.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당신은 상상할 수 있어요?]
사이훙은 떠나려고 일어섰다.
[기다려요, 기다려! 당신은 무술을 좋아하지 않나요?[
사이훙은 그 말에 흥미를 느꼈다.
[보세요.]
소년은 사이훙이 전에 보지 못했던 특이한 자세를 취했다. 그것은 감
동적이기까지 했다. 소년의 장력은 사부와 견줄 만 했고, 공중 회전과
곡예 기술, 경신술은 마치 나는 듯이 가벼웠다.
소년은 시범을 마무리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보고 싶어한다면 어떤 무술도 보여 줄 수 있어요! 나의 동료
가 돼주세요. 그러면 당신은 경쟁자가 없는 영웅이 될 겁니다. 나는 어
둠 속에서도 악마를 볼 수가 있어요. 나와 함께 있어요. 우리는 친구가
되어 영원히 재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거예요. 어때요, 흥미 있지요?]
[흥미가 있다면?]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당신이 유한하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내게는 꿀을 바른 사과가 하나 있어요. 그 사과를 먹으세요. 그러면 당
신은 영원할 거예요.]
[사양하겠어.]
소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소년은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그럼 이것은 어때요? 시합을 합시다. 내가 이기면 당신은 이 사과를
먹고 나의 놀이 상대가 되어야 하고, 내가 지면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
겠어요.]
그가 사과를 꺼냈다. 사이훙은 그것을 차서 소년의 손에서 떨어뜨렸
다.
소년은 성이 나 소리질렀다.
[이래선 안 되는데. 내 요청을 거절한 사람은 누구든지 목숨을 잃
지!]
소년은 뛰어오르면서 사이훙을 공격했다. 소년의 기술이 사이훙보다
훨씬 나았다. 사이훙은 한 번도 반격할 수가 없었다. 사이훙이 돌아서
는 곳마다 소년의 손바닥이 막고 있었다. 사이훙은 발놀림조차 제대로
못하고 소년에게 보기 좋게 반격당했다.
[자, 이제 사과를 먹는게 좋을 거야.]
소년은 사이훙의 몸을 팔로 죄면서 말했다.
[그게 뭐 그리 잘못됐어? 먹으면 불멸하는데!]
사이훙이 강력하게 뒷발질을 해 소년을 떼어냈다. 소년이 다시 공격
해 오자 사이훙은 옷 속에 있는 팔괘경을 꺼내 들어 소년을 비췄다. 거
울을 본 소년은 흐느끼면서 얼굴을 가리고 도망쳐 버렸다.
거처로 돌아온 사이훙의 몸은 땀에 젖어 싸늘했다. 그는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전에 들었던 낮은 목소리가 다시 부드럽게
윙윙거리며 들려 왔다. 사이훙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젠가 저 윙윙거리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밝혀 내고야 말겠어.]
기회는 곧 왔다. 사이훙은 물살로 가려진 동굴의 입구를 발견했다.
그 앞에서 윙윙거리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물을 헤엄쳐 건너보니 위쪽
으로 가파르게 뚫린 통로 하나가 보였다. 사이훙은 위쪽에 있는 작은
원형 동굴로 기어 올라갔다. 눈부신 방이었다. 천장에 뿌리를 박고 있
는 거대한 산삼이 보였다. 산삼은 천장에서 밝은 빛과 함께 윙윙 소리
를 내고 있었다.
산삼의 몸체는 황갈색이었고 머리카락만큼이나 많은 잔뿌리가 달려
있었다. 찬찬히 살펴보자 잔뿌리들이 가늘게 떨면서 노래부르듯 윙윙거
리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이훙은 뿌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산삼이야. 네가 와서 아주 기쁘구나.]
산삼에게서 나온 목소리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이곳에 천 년동안이나 매달려 있었어. 이렇게 매달려 있는 동
안 내 뿌리는 상처를 받았고, 새들은 내 몸통을 쪼아 먹으려 해. 지금
까지는 잎과 가지가 나를 보호해 주었지만 이제 그것들마저 벌레들이
갉아먹어 버렸어. 네가 나를 구해 주지 않으면 나는 죽게 될 거야.]
[하지만 내가 어떻게 당신을 구할 수 있나요? 당신은 화산의 육중한
바위를 뚫고 자라고 있잖아요. 더구나 가느다란 뿌리들이 너무 많이 달
려 있어 자칫 잘못하면 그것들을 부러뜨릴까 봐 걱정이 돼요.]
[네가 나를 구해 주려고만 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네
가 바위를 잘 모르기 때문에 단단하다고 생각할 뿐이야. 사실 바위는
많은 틈과 수백 개의 갈라진 줄기를 가지고 있어. 막대기를 하나 들고
내가 말하는 곳을 두드려 봐.]
사이훙은 산삼의 지시에 따라 두 시간 이상 바위를 두드렸다. 바위는
놀랍게도 부드러운 조각들로 되어 있었다. 산삼은 계속해서 사이훙에게
바위의 약한 곳들을 지적해 주었다. 충분한 공간이 생기자 사이훙은 살
며시 산삼을 끌어내렸다. 그는 잎과 가지들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산
삼을 천으로 감쌌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구원을 받은 산삼을 감격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제발 나를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줘. 그러지 않으면 나
는 말라 죽을 거야.]
사이훙은 산삼을 어둡고 차가운 곳으로 가져온 다음 산삼의 몸에 둘
렀던 천을 풀었다. 산삼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산삼은 생명을 주는 약초야. 네가 나의 생명을 구했으니 나도 너에
게 주고 싶은 게 있어. 나는 도인들이 불멸을 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명상에 들어갈 때 나를 네 머리 위에 놓아두면 내가 네 몸속에서
자랄 수 있어. 그러면 우리의 삶은 영원히 지속될 거야.]
[식물의 본성은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이고요. 만일 내
가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다시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되지
요.]
[그러나 불멸할 수 있잖아.]
[당신은 인간이 아니지만 나는 인간입니다. 당신은 내가 불멸에 대해
서 아무런 욕심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무들은 천 년간을
생존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지만 움직일 수는 없어요.]
산삼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시간 낭비를 했구나.]
사이훙이 위협하듯이 말했다.
[난 당신을 먹을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산삼은 몸을 떨면서 우는 소리를 했다.
[나는 살아 있어. 제발 나를 먹지는 마. 나는 도인들이 살아 있는 것
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해! 내 요청을
받아들여. 우리는 영원히 같이 살 수 있어.]
[안 되겠어요. 나는 수련을 하고 있어요. 이제 그 시간도 거의 끝나
가고 있답니다. 사부님이 곧 올 거예요. 그가 당신을 발견하면 아마 당
신을 먹는 것을 별로 주저하지 않을 거예요.]
[너의 스승이 누군데?]
산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산의 대사입니다.]
[뭐라구? 그 늙은 여우가 아직도 돌아다녀?]
[그래요. 그러고 보니 사부께서 산삼 하나를 어딘가에 잘못 두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세상에! 이럴 수가! 제발 나를 자유롭게 해줘! 내가 천년 동안 봐왔
던 일들을 너에게 말해줄게. 그리고 본초학의 역사도 얘기 해 줄께. 그
러니 제발 나를 살려 줘.]
사이훙은 산삼의 제의에 동의하였고 그들은 그날 밤을 얘기를 하면서
날을 지새웠다.
아침에 사이훙은 풍부한 토양과 햇빛, 작은 샘이 있는 동굴을 찾아가
산삼을 심었다. 그는 가끔씩 찾아와 물을 주었고, 산삼이 새로운 싹을
틔우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어느 날 저녁, 사이훙은 명상대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동굴속에서
2년 동안 지내자 이제는 경전 전체를 거의 외울 수 있었다. 밝은 등불
아래서 묵상에 몰두 하고 있던 사이훙의 눈에 갑자기 사람의 모습이 보
였다. 명상대의 반대편 둑에 바구니를 든 여인이 하나 나타났다. 여자
는 가냘 퍼 보였고 복숭아 빛 비단옷에 투명한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여자의 존재는 거친 동굴과는 대조적으로 풍요로워 보였다. 사이훙은
더 자세히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커다란 갈색 눈을 가졌는
데, 눈에서는 최면이라도 걸 듯한 요염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여자의
살갗은 비단같이 부드러웠고 홍조 띤 뺨이 붉은 입술과 함께 야릇한 음
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말끔하게 단장한 윤기 나는 여자의 검은 머리카
락에 금비녀가 구름에 걸린 듯 꽂혀 있었다.
사이훙을 보자 여자는 바구니를 옆으로 내려놓으며 소매에서 장미빛
스카프를 꺼냈다. 여자는 몹시 부끄러운 듯 코와 입을 가리고 물가로
다가서서는 큰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당신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군요. 길을 잃을까
봐 두려웠어요.]
사이훙은 놀라서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수도자임을 알리기 위해
손을 수도자의 가슴에 모았다.
[선생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여자가 계속 말을 걸자 사이훙은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경전을 암송
하였다. 여인은 뒤로 물러나면서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경전을 외죠?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당신을 해치지 않을 거에
요. 춤으로 당신을 즐겁게 해주겠어요. 아마 춤을 추게 되면 당신도 내
가 순수한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실 거예요.]
여자는 높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우아한 춤을 추기 시작
했다. 노래와 춤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그녀는 여성 자체를 표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자가 정중한 인사와 함께 춤을 마쳤을
때까지도 사이훙은 움직이지 않고 계속해서 경전을 암송하고 있었다.
[아, 당신은 금욕주의자군요. 당신이 그런 데 흥미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이룬 성취를 말해 주겠어요. 나는 다섯 원소를 조절할 수 있어요.
바람과 비도 움직일 수 있지요. 나는 무한한 부를 갖고 있으며 항상 젊
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어요. 그리고 끝없는 사랑의 기쁨을 즐길
수 있고요.
그런 것들이 당신이 지키는 전통보다 훨씬 낫지 않은 가요? 도교도들
은 항상 가난하고, 가까스로 불멸을 성취하였다해도 아름다움과 젊음을
잃게 되지요. 당신들의 또 다른 못된 전통은 독신주의를 내세운다는 것
이에요. 금욕생활이 생명력을 유지한다고 믿으면서 말이죠. 그러나 나
는 사랑으로 병약해지는 것을 이길수 있어요. 나의 연인들이 그랬듯이
말이에요.
당신 자신을 보세요. 당신의 근육은 강건하고 얼굴도 미남이에요. 헝
클어진 머리카락에 누더기 회색 장삼을 걸친 수도승보다는 멋진 왕자가
분명히 당신의 운명일 거예요. 내게 와서 연인이 되어 줘요. 여자와 사
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사부를 능가하는 힘
을 가지게 될 거예요.]
사이훙은 암송을 계속했다. 여인은 한숨을 지었다.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계속하나요, 선생님? 저를 믿지 못하나요?
아니면 당신은 오로지 자신이 보는 것만을 믿는 그런 사람인가요?]
사이훙은 땀을 흘리면 힘겨운 암송을 계속했다. 그는 두려운 눈길로
여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결심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여자는 그에게서 뒤돌아 서더니 비녀를 뺐다. 비녀가 어둡고 깊은 폭
포로 떨어졌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매혹적인 행수 내음을 풍기며 가까
이 다가오자 사이훙은 그 향그러움에 흥분되어 나머지 숨을 들이쉬었
다. 여자는 망토를 벗더니 속옷만 남을 때까지 나머지 옷들을 벗었다.
이윽고 여자는 시선을 사이훙에게서 떼지 않으면서 천천히 속옷 끈을
풀었다. 사이훙은 여자의 목 아래로 길게 뻗은 나체의 투명한 살갗을
보았다.
여자의 몸은 완벽했다. 부드럽고 완만한 어깨로부터 풍만한 가슴, 날
씬한 엉덩이를 넘어 길고 모양새 있는 다리까지, 여자는 마치 금과 옥
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으로 몸을
가렸으나 그것은 장막이 아니라 대담하게 열려져 있는 문이었다. 여자
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나는 이런 얘기를 듣곤 했어요.]
여자는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남자들은 모든 종류의 여성을 원한다구요. 어떤 여인이 당신이 가지
고 있는 환상에 딱 들어맞을까요? 어떤 여인이 당신 육체의 갈망을 폭
발하게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어떤 여자로도 될 수 있어요. 나는 당신
의 모든 환상을 만족시켜 줄 수 있어요. 보세요!]
여자는 자신의 모습을 힌두 여자로 바꾸었다. 가느다란 타원형 눈은
마치 마노 같았고 피부는 매끄럽게 빛났다. 여자의 가슴은 욕망으로 충
만해 있었다.
[아니면 당신은 이런 쪽을 좋아하나요?]
여자는 다시 긴 머리와 풍만한 모습의 페르시아 여인으로 모습을 바
꾸었다. 그녀의 피부는 희고 보드라웠으며 움직임은 빛과 그림자처럼
부드럽고 유혹적이었다.
[모든 남자들은 힌두여인들과 페르시아 여인과 사랑을 나누길 원하
죠. 그들이 대단한 사랑의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여자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모든 형태의 사랑을 알고 있어요. 이리 와서 나를 안으세요.
영원한 젊음을 가지세요. 당신은 굉장한 힘을 휘두를 수 있어요. 나를
소유하세요. 나를 가지세요. 나는 영원히 당신 것이에요. 내 안으로 들
어오세요. 나를 사랑해 주고 또 사랑해 주세요. 당신은 언제나 처녀처
럼 순수한 여인과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느낄 거예요. 또 최대한의 기
교를 발휘해 당신을 즐겁게 해드리겠어요. 당신께 타오르는, 내적인 갈
망을 만족시켜 주는 사랑을 드릴께요. 무한한 사랑을 갈망하여 당신 자
신 까지 잊게 하는 즐거움을 가져다 주겠어요.]
사이훙은 고집스럽게 목석같이 앉아 양손을 마주잡고는 입으로 끊임
없이 경전을 암송하고 있었다.
사이훙이 꼼짝도 않는 것을 보고 여자는 버럭 화를 냈다.
[어떻게 감히 나를 경멸할 수 있어! 어느 누구도 그러진 않았어. 너
는 멍청한 수도승이야. 모두 네 것인 세상의 부와 권력과 즐거움을 다
른 사람이 다 차지하는 동안 너는 거기에 앉아 헛소리나 중얼거리고 있
어라. 그 모든 바보 같은 지껄임은 너를 어떤 곳에도 이르게 하지 못할
것이며 너를 보호하지도 못할 거야.]
여자는 춤을 추며 사이훙의 주위를 빙빙 돌았고, 관능적인 여자의 나
신이 서 있던 곳에는 이제 기분 나쁘게 떨고 있는 녹색 기둥 같은 물체
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기둥은 천천히 원을 그리기 시작했고 기둥의 꼭대기엔 여인의 얼
굴이 있었다. 여자의 얼굴도 녹색으로 변하면서 길어지기 시작했다. 눈
이 점차 튀어나오고, 머리카락은 비늘로 변해갔다. 발이 나타났다. 여
자는 180센티나 되는 도마뱀으로 변하였다.
도마뱀은 뒷다리로 서서 쇳소리를 내면서 혀를 내둘렀다. 도마뱀은
위협적으로 사이훙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경전의 힘을 침투할 수는 없었
다.
사이훙은 두려움과 무능으로 인해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손을
땀에 젖었으며 옷도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암송만은 계속 하였다.
경전 암송을 그치는 것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다.
도마뱀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어둠 속에서 한 점이 나타났다.
그 점이 점차 여자의 얼굴로 확대되었다. 아름답던 그 얼굴은 이제 잔
인하게 웃소 있었다. 여자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이제 뱀처럼 여자 주
위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여자는 쏘는 듯이 그를 쳐다보며 주위를 돌
았다. 여자가 주변에 다가올 때마다 사이훙은 단전에 통증을 느꼈다.
여자가 한 시간 정도 공격을 계속하자 사이훙은 열이 올랐다. 독경 소
리와 울부짖음이 석실을 가득 채웠다. 그는 메스꺼움으로 한순간 현기
증을 느꼈다.
갑자기 여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사이훙은 감히 암송을 멈추질 못했
다. 여자가 사라진 곳에서 바람이 일더니 기름등이 일렁거렸다. 곧 등
의 유리가 깨지고 기름이 흘러 걷잡을 수 없는 불로 번졌다.
불기둥이 세차게 솟아 올라 동굴 주변에 퍼졌다. 그것은 파도처럼 사
이훙의 주변에서 일렁거렸고 그의 보호막을 계속 공격하였다. 사이훙은
불기둥의 공격이 명상대 앞의 원을 침투해 점점 자신에게 다가옴을 느
꼈다. 신경은 머리끝까지 곤두서고 두려움이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불기둥이 사이훙 앞에서 폭발하더니 여자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밤 공기 속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여자는 조롱하듯
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댔다. 여자는 그를 향해 다가서며 입을 점점
더 크게 벌렸다. 여자는 그를 삼키려 들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도관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여
전히 여자는 그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사이훙은 동물의 체취와 뜨거운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줄기 서광이 내려와 여자의 얼굴을 강렬하게 내리비쳤다. 여자는
물러섰다. 여자의 얼굴은 처음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바뀌었다. 동
굴을 밝아졌고 여자는 신음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사이훙은 환한 대낮이 되어서야 독경을 멈추었다. 그는 안도감을 느
끼며 일어섰다. 팔이 몹시 아팠으며 다리는 마비될 정도로 굳어 있었
다. 사이훙은 깜짝 놀라 자신을 내려다 보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부끄
럽게도 바지가 젖어 있었다.
사이훙은 옷을 벗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쪽 구석에서 뭉툭한 코
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두꺼비 도인이었다. 두꺼비 도인은 사이훙
쪽으로 헤엄쳐 다가와 말했다.
[여자가 너를 가지려고 하는 것을 봤지.]
사이훙은 자신이 시련을 극복했음을 상기하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
를 끄덕였다. 두꺼비 도인은 낄낄거리며 물을 그에게 튀겼다.
[너는 강인한 정신을 가졌더라.]
두꺼비 도인은 사이훙을 물 속에 처박으며 축하했다.
[좋은 일이지. 언젠가는 세상 전체를 휩쓰는 위기가 올 것이다. 선과
악의 대립이지. 살아남으려면 힘이 필요하게 될 거야.]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박 태 섭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28. 완성
사이훙은 자신의 신체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 모두가 투명했다.
명상은 결코 고요함이 아니었다. 신체는 항상 움직이고 있었다. 심장
은 박동하고, 피는 흐르고 열정은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또한 기는
영문을 통하여 순환하고, 내장 기관은 서로 연관되어 움직이고 있었으
며, 폐는 조용한 가운데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은 계속 움직이
면서 변화해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우주이며 신비한 진화의 산물로 놀라
울 정도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사이훙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몸과 마음을 다해 내면
에 몰입하였다. 내부와 외부가 하나가 되었다. 그는 내면 깊숙이 잠겨
완벽한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내부와 외부의 것이 합쳐져 무한이
되었다.
그는 한 점에 이르렀다. 우주의 한 점, 무한함이 운동과 경험의 집적
으로 응결된 곳, 끼는 오행이 되고, 음과 양이 되고, 한 인간이 되었다.
그는 영원히 존재하는 소우주였다.
사이훙은 북두칠성을 상상하였다.
침묵. 공간. 모든 것이 진실이다. 동시에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다.
양쪽 다 동일하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겹쳐서 쌓여 가고 마침내 각각의
특성이 없어진다. 진실이면서 동시에 진실이 아닌 이 이중성을 누가 뛰
어 넘을 수 있겠는가?
북두칠성이 없어져 버렸다.
인간은 우주 속의 소우주이다. 우주와 소우주는 하나이다. 하나는 모
든 것이다. 행성은 내장 기관이다. 영성의 중심은 바로 초신성()
이고, 각 영문들은 별이다. 그 영문들은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북두칠성이 그에게 왔다. 사이훙은 그것을 불렀다. 그렇게 하고 싶었
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북두칠성은 높은 구름을 지나 어둡고 매
끄러운 밤하늘로 사이훙을 들어올렸다. 별을 제외하곤 모두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우주의 밤 속에서 낮이 폭발하여 불타고 있었다.
그는 하늘에 매달려 떠나갔다.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사이훙은
별들을 자신 속에 집어넣었고 별과 함께 자신에게 몰입하였다. 사이훙의
신체는 하나의 행성이었다. 유성. 태양.
그러나 더욱 깊어져야 하는 상태가 있었다. 그는 아직도 한 신체였다.
왜 그것이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을까?
그의 몸은 소리 없이 폭발하면서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완
벽한 신체 구조가 상처 하나 없이 천 갈래 방향으로 흩어졌다. 신체는
사라지고 없었으나 정신은 남아 있었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기억이 있었다. 이상한 한 줄기 빛이 우주를 떠다니고 있었다.
그 빛은 무한한 공간에 놓여 있는 것들을 꿰뚫으며 별과 행성과 모든
차원 너머로, 그리고 주마등 같은 모든 실재 너머로 흩어져 갔다. 오로
지 무()만이 있었다.
사이훙은 동굴 속에 앉아 있었다. 그는 왜소함과 초라함을 느꼈다. 그
는 아무것도 아닌 작은 점이었다.
사이훙이 바라는 바는 고독과 묵상뿐이었다. 왜 돌아와야만 했는가?
신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수행해야 할 과업이
있었다. 그 과업을 마칠 때까지 그는 이 세상에 얽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들은 그에게 잠시나마 다른 측면을 보게 하였다. 그는 그것을
보았다. 만약 돌아오지 않아도 되었다면 그는 그곳에 머물렀을 것이다.
사이훙은 이곳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실
재가 아니다. 문명이란, 즉 완벽을 향한 거대한 문화적 탐색이라 일컬어
지는 것은 단지 괴상한 인간의 자아 도취를 위한 축제일 뿐이었다. 또한
감정이란 타락을 향한 본능적인 수련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사이훙은 정적의 상태를 유지하며 앉아 있었다. 자신에게 과업이 있다
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바로 그 과업 때문이
었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어린 시절의 추억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연민이었다. 자신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 그리고 남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는 돌아와야 했다.
사이훙은 기척 소리를 들었고 움직이는 횃불을 보았다. 사부였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사부는 사이훙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으며 미소를 지었다.
사부는 햇빛으로부터 사이훙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가리개를 씌운
다음 사이훙을 밀폐된 사당으로 데려갔다. 사이훙은 약초를 넣은 목욕물
에 들어가 굴 속에서 지내면서 광천수로 목욕한 탓에 푸르게 변한 몸을
씻어냈다. 사부는 사이훙의 눈이 햇빛에 적응할 수 있도록 눈에 약을 넣
어 주었다. 한 달이 흐르는 동안 사부는 사당 천장에 있는 채광 창문의
폭을 서서히 넓혀 갔다. 그러나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색뿐
이었다.
드디어 사이훙이 사당 밖으로 나갈 시간이 되었다. 그는 사부가 봉인
을 뜯어내고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어두컴컴한 오두막 속에서
사이훙은 사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너는 완벽한 시험을 거쳤고 오랫동안 단식을 하였다. 오늘에서야 도
()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되었구나.
도인의 유일한 과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본성이라는 면에
서 볼 때 사람은 하늘과 땅같이 넓으며, 해와 달같이 밝으며, 사계절과
같은 규칙성을 지니고 있다.
도를 깨달은 사람이 하늘보다 앞설지라도 하늘은 그 사람의 뜻을 거스
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늘이 행하려는 것처럼 행하기 대문
이다. 도의 순환을 따라 공격적인 성향을 피하고 과다한 기의 방출을 피
하면서 행한다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힘과 역량을 얻기 위한 노력
은 작은 성공은 가져다 줄 수 있지만 그런 성공은 결국 죽음만을 재촉할
뿐이다.
도덕경()은 분명히 말했다. 어떤 사물이 절정에 다다르면 노쇠
하기 시작한다고. 지나친 힘은 도와는 반대되는 것이며, 도에 반대되는
것은 금방 끝을 보게 된다.
이런 연유로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힘을 기르려 하지 않고 도와 결
합하려고 한다. 그 사람은 공격적이기도 않고 힘이 세지도 않으며 오히
려 겸손하고 평화스럽다. 그 사람은 세상 사람의 길을 가지 않고 자연의
순환을 좇으려 한다.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재생의 기쁨을 맛보게 된
다. 그 사람은 되돌아옴과 앞으로 나아감, 팽창과 수축을 통해 무한함과
불멸을 알게 된다. 이때 그 사람은 도와 결합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끊
임없이 자신의 생명력에 집중하며, 가장 유순한 방법으로 반응한다. 그
렇게 해서 그 사람은 새로 태어난 갓난아이 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부는 문을 열었다.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사당 안이 눈부시
게 빛났다. 사이훙은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도 인 1권 THE WANDERING TAOIST 끝.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2권 SEVEN BAMBOO TABLETS OF
THE CLOUDY SATCHEL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이 인 복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1. 사부와 제자
관 사이훙은 화산의 도관 안에서 도()에 귀의할 가능성이 가장 적어
보이는 학생이었다. 갈등과 불안감 속에서도 장난기가 넘치는 청년이었던
사이훙은 우울해하다가도 금세 행복감에 젖어 희희낙락하거나, 안하무인
격으로 굴다가도 수줍어하며, 화를 내다가도 금방 공손해지는 등 변덕이
죽 끓듯 하였다. 무술을 사용해 결투를 하고픈 생각은 간절했지만 그가
시자로서 한 약속은 그런 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사부는 사이훙이 완성의 경지에 이르기를 소망하면서 계속해서 그를 수
련시켰다. 사이훙이 보기에 개개인의 내면에는 인간의 영혼을 차지하려고
신과 악마가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공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
신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사이훙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이훙의 경우는 그
어느 쪽의 승리도 쉽게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서 선이 나타날지
악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깜깜한 밤이 어스름한 새벽빛에 물들기도 전에 사이훙은 조롱박 물병을
움켜쥐고 우물로 갔다. 세상은 곧 어둠으로부터 기지개를 켤 것이다. 산
시성()에 있는 화산의 도관도 곧 도사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
활기를 띨 것이다.
1941년 초 중국은 내란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또다시 세계대전에 휘말
려 들 판이었다. 또 한 번 혼란과 갈등의 나날을 맞을 중국의 새벽은 아
직 적막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사이훙은 일편단심으로 자신의 임무에
만 몰두하였다. 그는 칠흑같이 깜깜한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떨어뜨렸다.
쨍 하고 얼음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깼다. 깊은 산 속의
밤은 맑은 샘물을 밤새 꽁꽁 얼어붙게 했다. 그는 두레박을 들어 올린 후
다시 내려뜨렸다.
두레박 속에 물이 가득 차 올랐다. 물을 퍼 올리자 찰랑찰랑한 두레박
의 수면에 등롱의 가느다란 노란 불빛이 비쳤다. 사이훙은 잠시 물위에
그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형체는 희미했지만 넓적한 턱, 매끄러운 피부,
반짝이는 두 눈, 상투를 튼 긴 머리는 알아볼 수 있었다. 고관대작 아니
면 학자, 장군 정도는 됐을 것이며 하다 못해 산적 두목이라도 됐을 것이
다. 그것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그의 권리였다. 그는 장군의 아
들이었고 조정 대신의 손자였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왕조를 모셔 온 귀
족 가문의 자손이었다. 그러나 귀족의 후예로 남는 대신에 그는 도가에
입문했다. 9살 때의 일이었다. 지금 사이훙은 20대 중반이 되었건만 아직
화산의 대사부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갈색의 큰 조롱박 물병에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찬 우물물을 퍼
담았다. 물병을 몸에 찼다. 사부를 위해 장작 더미와 새 옷을 넣어 둔 광
주리를 집어 올리는 순간, 물병에서 손등으로 물이 떨어져 손가락의 감각
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사이훙은 우물 정자 처마 밑에 되는 대로 매놓은
등롱을 다시 들고 사부의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나무 손잡이
끝에 매달린 등롱 속의 촛불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사이훙은 깎아지른 듯 높이 솟은 봉우리를 끼고 도는 산길을 걸었다.
주위는 칠흑같이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듯한
노송들의 윤곽 사이로 멀리 있는 산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산봉우리
들은 어둠으로 물들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울퉁불퉁하고 들쑥날
쑥해 보이는 땅과 아직 별들과 초승달이 떠있는 하늘은 쉽게 구별되었다.
사이훙은 높은 산들이 첩첩이 둘러싸인 화산에서 벌써 수년 동안 지내
왔건만, 산을 모두 답사해 본 적도 없거니와 속속들이 알지도 못했다. 그
러한 끝없음이야말로 지구상에 있는 무수히 많은 산들보다 더 광막한 도
교의 세계에서 그가 경험한 내용이었다.
도교는 하늘과 땅에 대해 말한다. 시공의 4차원적 세계를 논하고 그 밖
의 모든 것들이 사유의 대상이 된다. 단순 소박한 인간적 도덕은 물론,
무도덕 적인 자연도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도교는 미신, 마술 또는 종교
적 제전으로 변질될 수도 있었다. 또 턱없는 금욕주의나 천상의 여행으로
솟아 오를 수도 있었다. 추상적인 형이상학이기도 하지만 그저 한 토막
나무에서도 똑같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면 그
끝은 무한의 경지까지 뻗어 있었다. 반면에 압축시키면 원자보다 더 작은
입자로 줄어들었다.
도교를 한쪽으로 밀어젖혀 보라. 그러면 그것은 가공할 정도로 크게 확
대되어 다가온다. 도교를 찬찬히 숙고해 보라. 그러면 그것은 사정없이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도교는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만물이 바
로 도교인 것이다. 우주 전부 일수도 있고, 우주가 아닌 것 전부일 수도
있고, 동시에 양쪽 모두 될 수 있다. 도교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하지만
도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꼬리를 감추어 버린다.
사이훙은 바위투성이인 가파른 오솔길을 급히 올라갔다. 숨을 내쉬자
바로 눈앞에서 입김이 수증기가 되어 피어 올랐다. 서둘러 가야 했다. 지
금쯤 사부는 하룻밤의 긴 명상을 다 끝내 가고 있을 것이다.
사이훙은 돌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 조그마한 사부의 거처로 갔다.
<불사신의 전당>이라는 문구가 문 위에 새겨져 있었다. 육중한 문들은 사
람 키보다 두세 길은 높았다. 문 위쪽의 반은 격자 무늬로 되어 있고, 아
래쪽은 꽃 무늬를 아로새긴 상감 세공이었다. 사이훙은 힘을 주어 문을
밀고 사부의 방 쪽으로 난 돌이 깔린 복도를 따라 살금살금 걸었다. 이윽
고 육중한 나무문에 이르러서 숨을 가다듬었다.
[사부님!]
사이훙은 자신이 와 있음을 알리기 위해 크게 소리쳤다. 언제나처럼 안
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사이훙은 문지방에 서 있었다. 등불을 비추자 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벽돌 벽과 돌 마루는 싸늘한 밤공기를 머금고 있고, 커다란 놋쇠 화로의
불은 다 꺼져 가고 있었다. 방의 벽 틈새를 뚫고 아침 안개가 새어 들고
있었다. 책상, 서가, 침대 그리고 묵상대가 각각 한 개씩 단상을 향해 놓
여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사부는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아 있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명멸하는 불빛 아래 안개의 소용돌
이가 이는 석실 속의 사부는 마치 고대의 신비스런 봉납물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사이훙은 조용히 서서 사부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열린 채광창을
통해 조금씩 들어오는 동녘 빛이 희디흰 순백색으로 부서졌다.
사부의 야윈 몸이 조금 움직였다. 순간 사이훙은 자기 이외의 딴 사람
이 쉬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부가 하루를 시작할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사이훙은 깨끗한 도복을 내놓고 일상적인 일과를 민첩하게 해나
갔다. 조심스럽게 격자 무늬의 창문을 열어 나무 막대로 받쳐 놓았다. 장
작과 석탄을 화로 속에 넣고 부채를 부쳐 조그맣고 강렬한 불꽃을 피웠
다. 사이훙은 소리 안 나게 방을 가로질러 가서는 정교한 솜씨로 조각된
신장 위에 쳐진 휘장을 경건한 마음으로 열어 젖혔다. 그 안에는 아름답
게 채색된 세 개의 인물상이 놓여 있다. 중앙에는 도교의 성인이자 사부
의 개인 수호신이 있고 그 양쪽에는 성인의 시자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
은 법도()를 들고 또 한 명은 인장을 들고 있었다. 세 인물상은 밝게
타오르는 유등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
사이훙은 꽃과 과일이 싱싱한지, 잔에 차와 포도주가 가득한 지, 제단
위에 먼지가 쌓여 있지나 않은지 잘 살펴보았다. 다시 휘장을 예쁘게 잡
아맨 후 향불을 피웠다. 백단향 향기가 방에 가득 찼다. 연기는 푸른 빛
을 내며, 서로 쫓고 쫓기는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용이 되어 이리저리 몰
려다녔다.
[제단은 약한 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니라.]
사부가 사이훙 뒤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최근에 사부는 새벽에 사이훙
은 만나도 직접 말을 건네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말을 하는 경우라도 짧
게 몇 마디를 건넬 뿐이었다. 종종 차나 책을 가져오라든가 아니면 여행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는 정도였다. 그 밖에 큰 소리로 독경을 하거나 그
저 몇 가지 철학적인 견해를 말하는 일도 있긴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사부가 좀 더 많은 말을 꺼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불충분한 사람만이 외부의 상()에다 자기 정
신을 묶어 둔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사는 이 지상, 바로 우리
각자의 내부에 있는 것이니라.]
사이훙은 감실로부터 몸을 돌렸다. 설명을 기대했으나 사부의 입술은
꽉 물린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사부가 부드럽고 느린 동작으로 나무 팔걸
이 위에 오른팔을 올려 놓자 무덤 속 같은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사부의
머리를 풀어 주기 위해 걸어오는 사이훙에게 사부는 고개를 끄덕여 신호
를 보냈다.
숱이 많고 긴 백발이 바닥 위에 다발로 떨어져 내렸다. 사이훙은 부드
럽게 머리를 빗어 내렸다. 사이훙의 나이 16살 때 도교 입문식을 위해 사
부가 해주었던 일을 이제는 사부를 위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사이훙
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사부가 그의 머리를 빗어 주었
다. 그 의식에는 세속에 대한 집착을 씻어 낸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
었다. 사부는 사이훙의 상투를 틀고 비녀를 꽂아 주었었다. 사이훙이 상
투를 틀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그 후로도 수없이 사부의 머
리를 빗겨 주었다. 그때마다 사이훙은 그의 인생의 길잡이인 사부와 강하
게 연결된 느낌을 가졌다.
대사부는 젊은 시절 한때는 상당한 미남인데다 용기까지 겸비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었다. 사부는 무예와 병법에 밝았으며 학식도 깊었
다. 마침내는 베이징에 있는 청 왕조의 궁정까지 가게 되었다.
금단의 도시에 입성한 사부는 황제의 신하가 되기 위해 과거 시험을 보
았다. 높다란 붉은 담장과 환상적으로 꾸며진 수 많은 방들로 겹겹이 에
워싸인 궁궐에서 몇 번씩 시험을 치렀다. 사부는 글을 짓고 역사, 수학,
문학, 천문학, 통치학과 그 밖에 수십 과목을 시험 보았다. 그는 시작(
)과 서예, 승마, 궁술, 무술 경연에서 높은 기량을 과시했다. 수일간
시험을 치른 끝에 그는 문무 양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매우
뛰어난 성적이었다. 사부는 황실 교사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사부는 황실에 드나들게 되었다. 사부는 황실의 예의 범절을
익힌 후 왕자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궁정에서 일을 맡은 얼마 후 그는
귀족 가문 출신의 아리따운 낭자와 성혼을 맺고 일생 일대의 전성기를 맞
이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비극이 밀어닥쳤다. 그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렸다. 사이훙은 사부의 인생을 크게 뒤흔든 이 엄
청난 사건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을 좀처럼 누를 길이 없었다.
하지만 궁금증은 결코 풀리지 않았다.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준 사람
은 하나도 없었다. 궁중에서 일어난 암투 때문이었을까, 사악한 환관들의
모략이었을까? 평판이 나쁜 파당을 지지하다가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된 것
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경쟁 관계에 있는 무사가 사부의 가족을 살해한
것일 수도 있겠지. 속사정이야 어떻든 그것 때문에 사부는 치유 불능의
정신적 충격을 받아 세상을 등진 것이다.
사부는 속세와 동떨어져 살면서 위안을 찾았다. 그는 두 분의 스승 밑
에서 학문과 무술을 연마한 끝에 도인이 되었고 도가에 입문하였다. 그의
앞에는 두 가지 수행의 길이 열려 있었다. 하나는 도관에 기거하는 도사
가 되어, 의식, 점술, 결혼과 같은 온갖 공적인 임무와 장례에 관한 업무
를 관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가하여 완전히 탈속하는 도인의 전통
을 따르는 길이었다. 사부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했다.
사부는 도인이 밟는 여러 단계의 과정 속에서 차츰 부상하여 마침내 현
재의 위치에 도달하였다. 사부는 단순히 특별한 도교 종파의 우두머리만
이 아닌 화산에 있는 도관 전체를 통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직
책은 도교의 교리와 금욕적 수행의 최고 경지에 도달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속적인 권리까지도 암시하고 있었다. 대사부는 그 권리
를 획득하는 데 수십 년이나 걸렸다. 그래서 그의 나이가 100살은 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다.
사부가 발 딛고 선 전통은 독특한 사회 구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세계사에게서도 그런 독특한 예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러나, 검, 마
법, 교회, 연금술이 공존 했던 중세 유럽과 신들이 우주를 다스리고 철학
자들은 자신의 학파를 이끌며 강철 같은 스파르타인이 무사의 표본으로
꼽히던 고대 그리스의 초현실적 결합을 상상해 본다면, 사부가 걸어온 문
화를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우주에서 정말 파괴
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고대와 현대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가장 오
래된 농사법에서부터 시작해 최신 기술의 발명품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광
대무변함속에 각자의 위치를 갖고 있다.
대사부는 전통, 역사, 문화와 종교의 바다를 스스로 체험했다. 그는 순
수주의자였고 철두철미한 종교학자였다. 대사부는 그의 확고하고 넓은 도
량에서 나온 방법으로 도관들을 관리했다. 또한 그는 수련생들에게 자신
이 오랜 세월 닦아 쌓은 지혜와 강한 질서의식, 목표 의식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호리호리하게 큰 키에 바짝 말랐지만, 활기 넘치는 근력과 사슴 같은
우아함을 지닌 사부는 위풍당당한 풍모를 보여주었다. 수염은 비단결 같
았고 산 속의 폭포수처럼 굽이쳐 흘러내렸다. 커다란 두 눈은 광채로 번
쩍였다. 사부의 윗 입술 오른쪽에는 칼로 벤 상처가 있었다. 그 상처만이
동화 속 인물처럼 보이는 사부 역시 과거 속세에서 사무치게 절절한 행로
를 걸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사이훙은 종종 자신과 사부를 비교하곤 했다. 그 역시 깡마른데다 엄숙
한 표정, 위엄있는 모습을 지녔고 근육은 역도와 무술로 우람하고 탄탄하
게 다져져 있었다. 검은 머리는 숱이 많고 뻣뻣했다. 그리고 피부는 몇
년간 햇볕에 노출되어서 검게 그을어 있었다. 그러나 사이훙은 자신이 사
부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성마르고 충동적이며 사부
가 가진 깊은 고요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
이훙의 눈으로 볼 때 사부는 고매한 인물이었다. 영감을 불러 일으키며
결코 그가 쫓아갈 수 없는 살아 있는 이상형이었다.
빨래를 하기 위해, 사부가 벗어 놓은 옷을 광주리에 말없이 챙겼다. 방
에는 이미 온기가 돌고 안개가 걷혀 있었다. 그는 기뻤다. 열이 달아오르
는 명상을 끝낸 사부의 갈증을 풀어 주기 위해 샘물이 든 조롱박을 그의
옆에 놓았다. 사이훙은 문으로 가다가 잠시 서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사부는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두 손을 함께 모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조각상 같은 부동 자세로 돌아간 것이다. 드디어
산상에 새벽이 밝아 오자, 사이훙은 새벽을 알리는 최초의 빛이 채광창으
로 들어와 사부의 얼굴을 환하게 밝히는 것을 보았다.
사이훙은 빨래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아침 수련에 참석하고 난 후 동
료 수행자들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사이훙은 줄곧 사부가 낮게 속
삭이던 몇 마디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고 있었다. 천국과 지옥이 이 지상
에 있는 것이라면 보답도 응징도 있을 수 없는 일. 만일 그렇다면 선이나
악도 있을 수 없다.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그는 신을 경배하고
지루한 의식을 올리는 것일까? 사이훙은 부엌으로 걸어가면서 사부에게
더 자세히 여쭈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부엌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어린애를 목욕시킬 수 있을 정도로 큰 가
마솥이 활활 타오르는 화덕 위에 얹혀 있었다. 젊은 수행자들은 불이 계
속 타오르도록 불을 지폈다. 그 동안 다른 이들은 쌀이 끓도록 짓고 있었
고 몇몇은 채소를 썰어 소금에 절일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고
참 요리장으로만 알려진 노도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일을 했다.
등뼈와 어깨뼈가 하나로 보이는 고집불통의 요리장은 정원에 있는 비석
만큼이나 두툼하고 땅딸막했다. 요리장은 단단해 보이는 큰 머리, 통통한
뺨에 까맣고 동그란 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이훙을 보자 낯선 사람을
본 멧돼지처럼 우거지상을 썼다. 그는 참을성이 부족했다. 도관의 어른들
은 그의 불 같은 성질을 잠재우느라 애를 썼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며 나
쁜 본보기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교의 교리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너, 늦었구나.]
고참 요리장이 으르렁거렸다.
[음식이 다 식어버렸잖아. 사부께서 배가 무척 고프시겠다.]
[다 못난 놈의 죄입니다.]
사이훙은 사죄를 올렸다.
그는 뚜껑이 달린 고리버들 광주리에 딸그락 소리를 내는 접시를 담아
들고 사부의 방으로 내달았다. 지위가 높은 도사는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제자의 시중을 받았다.
[사부님!]
사이훙은 문 앞에서 사부를 불렀다. 그러나 응답이 없는 침묵 뿐. 안으
로 들어가니, 사부가 그를 보고 웃고 있었다. 사이훙은 절을 하고 광주리
를 내려놓았다. 뚜껑을 덮은 접시들을 꺼내 식탁을 차렸다. 요리는 버섯
과 땅콩,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빵과 채소들을 한 번 살짝 튀겨낸 것이었
다. 강하고 깨끗하고 상큼한 향기가 접시마다 뭉게구름처럼 피어났다.
음식냄새를 맡은 사이훙은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차를 따르고 접시
위에 젓가락을 올려 놓는 동안 그의 입가에는 군침이 돌았다.
[수련은 잘 되고 있느냐?]
사부가 음식을 들면서 이렇게 물었다. 사이훙은 정신을 차렸다. 사부는
며칠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론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자기를 완성시킨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사이훙은 공손히 답했다.
[이런 격언이 있느니라. <성인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 꽉 부여잡지도
않고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는 마음이다. 받아서는 돌려주는 마음. 성인
은 이런 마음가짐으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세상을 끌어 안는다.> 이
런 마음이야말로 네가 노력을 통해 추구해야 하는 것이니라. 너는 자신을
정화시켜야 한다. 사소한 일에다 마음을 붙잡아 두지 말거라.]
[사부님, 선하면서도 악한 것, 옳으면서도 그른 것, 그런 것이 있는지
요.]
[왜 그걸 묻느냐?]
[사부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저희 스스로 하는 것이라 하셨고, 천
국과 지옥은 이 지상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오는
권위의 힘은 전혀 없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옳고 그른 것을 규정짓는
것은 누구란 말입니까?]
[너에게 얘기를 하나 들려주겠다. 아름답고 값비싼 옷을 차려 입은 여
인이 어떤 집에 나타났다. 집주인은 당연히 그 여인을 반겼지. 그는 여인
이 내뿜는 천상의 아름다움에 아찔할 정도로 현혹되었다. <실례지만, 누
구신가요?> 하고 집주인이 묻자 <나는 행운의 여신입니다. 불행한 아이들
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고, 환자를 치료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에게
아이를 주고,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고, 온갖 소망과 탄원을 충족시켜 준
답니다.>라고 여신이 말했다. 집주인은 즉시 옷차림을 바로 하고 여신 앞
에 머리 숙여 절을 했다. 그리고 몸소 그녀를 집안으로 모셨지.
잠시 뒤에 또 다른 여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허리가 굽었고 다리를 절
었다. 얼굴을 말라 비틀어져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고, 주름살이 겹겹이
잡혀 있었지. 머리카락은 마른 볏단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악취까지 났다.
주인은 분노하여 왜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냐고 항의했다. 그러자 여인
은 <나는 어둠의 여신이라고 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부자는 파산하고,
관리는 치욕적인 망신을 당하고, 병든 자는 죽고, 힘센 자는 힘을 잃어버
리고, 여자들의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고, 남정네는 죽음을 애도하는 눈
물을 흘린답니다.>라고 얘기했다.
집주인은 곧장 지팡이를 들고 그 여인을 몰아내려고 했지. 그때 행운의
여신이 그를 말렸단다. <내 말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어둠의 여신의 말도
역시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 어둠의 여신이 따라다니는 것
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림자가 몸에 붙어 다니듯이 우리 둘은 불가
분의 관계랍니다.> 집주인은 즉시 그 말을 이해했고 두 여신이 함께 머무
를까 봐 크게 염려를 했단다. 그래서 집주인은 그들에게 빨리 떠나 달라
고 재촉했지. 성인은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니라.]
사부는 사이훙이 우화를 이해했는지 보려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제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부는 젓가락을 집어 들고 조용
히 식사를 하였다. 사부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선과 악은 존재하느니라. 밝은 길과 어두운 길이 있으며, 선인과 악인
이 있느니라. 하지만 자연이나 별자리나 동물에게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점에 주목하여라. 이것들은 도()와 맺어져 있으며 독자적인 의지
력은 갖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저항하지 않고 도를 따라간다. 움켜잡거
나 저항하지 않는 거울, 사물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 인식을 되돌려 보내
는 거울이 바로 이렇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인간과 신은 별이나 동물과는 다르다.
인간에겐 지능이 있다. 인간과 신은 합리적이며 계산적인 정신을 소유하
고 있으며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느니라. 사람들이 선과 악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은 그들이 교활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택을 할 수 있는데 만일 선과 악이 둘 다 없다면, 선택할 것
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음과 양은 우주의
기본이 되는 것이니라. 둘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어둠이 존재하기 때
문에 밝은 빛이 있는 것이다. 낮이 있으면 그 이전에 밤이 있게 마련이듯
정()이 있으면 반드시 사()가 있느니라. 이것이 우화 속에 들어 있는
첫 번째 중요한 의미이다.
인류는 음과 양에서 창조되었다. 그러니 우리들은 음과 양의 존재인 것
이니라. 반대되는 양극단 사이에 긴장과 상호작용이 없다면, 인간의 내부
나 우주에는 움직임이 있을 수도 없느니라. 따라서 완전한 침체를 부를
것이며 피의 흐름은 완전한 정지 상태에 빠져 버릴 것이다. 오로지 불모
()만이 실재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상대성을 인정해야 한다. 창조
의 기본 과정의 일부로서 선과 악을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이러한 이치
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내가 한 가지 다른 것을 얘기해 주마. 네
자신 속에 있는 선과 악을 받아들이거라.
[사부님, 저는 도인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기 위해 각고의 노
력을 기울였습니다. 저 자신을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선을 얻어
경건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을 키우고 싶을 뿐입니다.]
사부는 그 말을 듣고 냉소적으로 웃었다.
[경건한 사람이라고! 경건함보다 더 역겨운 것도 없느니라.]
[이해가 안 됩니다. 어릴 때부터 제가 사부님으로부터 배운 것이 성스
럽게 사는 것 아닙니까? 도덕적으로 사는 것에 반대하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제가 정의를 지키는 영웅이 되어 살려고 염원하는 것이 왜 안
된다는 건가요?]
[도덕과 윤리는 어리석고 생각 없는 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니라. 그런
자들은 식별력이 없다. 성인들은 오로지 그런 어리석은 자들을 다스리기
위해 도덕을 창안했다. 도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도덕과 윤리 따위를 추종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이훙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사부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
했다. 분명 도덕과 부도덕을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사부님 말씀이 확실히 들어오지 않습니다. 제발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
오. 악을 행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 테지요?]
[나는 단지 도는 식별이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경건하고 도
덕적인 사람은 행여 잘못을 저지를까 두려워하면 산다.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해 달라고 신에게 간청하기 위해 사원으로 달려간다. 죄진 것을 생각
하면 천벌을 받고 지옥에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그래서 그는
경전을 읽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를 베풀고 선을 행하려고 항상 노심
초사하며 살아간다. 이 모든 기도와 중얼거림은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신들은 아첨하는 자들에겐 조금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그럼 기도하는 일을 그만둬도 될까요?]
사이훙은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못된 놈 같으니라구!]
사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사이훙은 움찔했다.
[너는 수도자다. 기도는 일종의 예의범절이고 수행자로서의 의무이다.
너는 마음속으로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실제 의미를 이해하고 있어야
만 한다. 중생을 위해 너는 중요한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너 자신으
로는 극기와 자기 수양을 위해 수도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니라. 이런 과
정을 통해 선을 재차 확인하고 악을 편드는 일은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네 운명은 앞으로 성인이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서로 상충되는 요소들을 한 그릇에 담아 내는 것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들이 선을 고수하는 동안에라도 자신들은 어쩔 수 없이 나쁜 일을 저지
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나쁜 일을 할 때도 스스로
를 이해한다.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면 안 된다.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오늘 나는 내
몫의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말은 입에 담지도 말거라.
오히려 행동으로 실천하기 전에 상황을 이해하도록 항상 노력해야만 하느
니라. 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하고 나서 실행에 옮겨
라. 또한 그것이 사소한 도덕성과 맞든 맞지 않든 너는 반드시 그 일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성인이 가야 할 길이니라.
집주인은 두 여신을 멀리 쫓아버렸다. 상대성을 이해하고 상반된 것들
의 불가분성을 충분히 인식한 것이다. 그는 성인의 길을 택했다. 말하자
면 선도 악도 선택하지 않고 초월적인 길을 택한 것이다. 약삭빠른 자는
자신이 동시에 선이요 악이 된다는 가르침을 듣고 그것은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허가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양극 사이에서 영원히 왔다갔
다 하게 된다는 점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를 예로 들어 보자꾸나. 너는 능히 악마 백 명이 들어앉았다고 할 정
도로 장난을 잘 친다. 나는 이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한다. 하지
만 너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도교를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네가 의도적으로 무모한 행위에 뛰어들기 때문에 너는 여전히 이원
()의 세계에서 달아나지 못하는 것이다. 성인은 이원성을 초월하고자
한다.]
사이훙은 당황하여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장난
기로 똘똘 뭉쳐 있었다. 사이훙은 화제를 자신에게서 다른 대로 돌려보려
고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사부님은 선과 악이 인간의 내부에 존재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
고 신조차도 이원성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인 선과 악이 있단 말씀입니까? 만일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우리 스스
로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선과 악이 의지력을 지닌 존재의 내부에만 존
재한다면, 선과 악은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고 또 천벌도 있을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둘을 식별하는 더 높은 권위란 있을 수 없겠
지요.]
[네가 교활한 놈이란 걸 알겠다. 하지만 그런 궤변으로는 아무 것도 얻
지 못할 것이다. 내가 설명해 주마. 선과 악은 경극()의 주인공이나
악한이 되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선과 악은 운명과 숙명처럼
형이상학적 존재다.]
[운명과 숙명이라니. 둘 다 같은 것이 아닌가요?]
사이훙이 놀라서 물었다.
[아니, 같지 않다. 운명은 일생 동안 완수해야 하는 것이니라. 너는 임
무를 부여받고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임무를
확인하고 세세한 것까지 완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단다. 이 일은 간단한 심
부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라. 그것은 각자가 서서히 결실을 맺게 되는
아주 복잡하고 독특한 수수께끼 같은 과제이다. 더 높은 상태로 다시 태
어나거나 아니면 이 모든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생의 업보를
뛰어 넘는 것, 이 힘겨운 과제를 떠맡은 것이 바로 운명이다.
숙명은 오로지 네가 운명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존재하는 적
극적인 동인()이다. 그것은 너와 투쟁을 벌이고 네가 발전하지 못하
게 방해한다. 숙명은 환상을 통해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를 현혹하는
신기루도 다 숙명 탓이다. 숙명은 너를 속이고 웅대한 관념과 자만심으로
너의 마음을 채운다. 숙명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저지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나쁜 일을 하거나 속임수를 쓰려는 자신을 의식할 때마다 너는
순간적으로 숙명을 발견할 것이다. 굴복하라. 그러면 숙명이 승리한다.
거부하라. 그러면 숙명이 패배한다. 그러나 숙명은 다시 한번 더 너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쉬지 않고 기다리면서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바로 지상에 있다.>는 의미는 바로 이렇다. 천국에 가
게 될지 지옥으로 떨어질지 외양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네 속을 들
여다보거라. 운명을 추구하면 천국이 가까워진다. 그러나 숙명에 굴복하
면 지옥으로 미끄러질 것이다. 마지막까지 운명에 충실하면 인간의 존재
를 추월할 수 있게 된다. 숙명에 먹히면 미망과 무지의 수렁에 빠져 고통
을 받게 된다.
신과 악마가 너와 우주를 관리한다고 순진하게 생각지 말아라. 다시 말
하건대 그것은 미신일 뿐이다. 신은 존재하지만 제단 위의 신장상들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또한 신은 인간들에겐 거의 관심이 없다. 신은 인간의
악취를 참지 못한다. 신에게 의존하지 말고 악마를 두려워해서도 안 된
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신들도 운명과 숙명을
놓고 투쟁을 벌여야 하니까.
이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
이다.. 선과 악을 운명과 숙명으로 이해한다면, 너의 행위만으로 너는 운
명 또는 숙명을 향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어떤 요소를 너의 인생에서 고려할 필요는 없다. 운명의 숙제를 조금이라
도 풀고 나면 너는 승리할 수가 있다. 미망속으로 발을 헛딛게 되면 전망
은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너는 앞서 말한 격언을 형이상학적 권위에 반박
하기 위해 이용하더구나.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다.
네가 나쁜 일을 할 때, 너를 벌할 악마는 없다. 네가 믿지 않는 한 사
후의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은 네가 마음속에서 그리는 내용을 똑
같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차원 속에 너
의 존재 전체를 영구히 옥에 가두어 놓을 수도 있다. 응보는 인과라는 기
계적 틀 안에만 존재할 뿐이다. 인과는 존재가 아니다. 정신성도 아니다.
사물도 아니다. 그것은 힘이다.
모든 행동은 인과를 낳는다. 불 위에 물을 얹으면 물이 끓는다. 물이
뛰어 오르면 다시 내려와야 한다. 모든 동작에는 동시에 상응하는 반작용
이 있게 마련이다. 인과의 끈은 한 인간의 삶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뒤
얽혀 촘촘한 거미줄 안에 그를 가둔다. 그런 인간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끈으로 그물을 만들 수도 있다. 그
그물로 물고기를 낚는다. 선()을 낚는다. 이것이 독실한 인간의 인과
다. 과거의 선행이 짠 거미줄이 계속 커져서 더 많은 선을 낳는다. 그러
나 그는 여전히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최고의 경지는 선과 악을 초월하고 인과를 모두 지워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인생의 수레바퀴를 영영 떠난다. 그래서 신의 응보라는 것
이 생겼다. 그것은 옥황상제나 염라대왕이 내린 벌이 아니다. 하늘의 응
보는 네 안에서 운명과 숙명과 인과가 벌이는 상호작용이니라. 그것이 전
부다.]
사이훙은 그 말을 기억에 담고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너무 애쓰지는 말거라. 너는 아직도 악동이 아니더냐?]
사부가 조용히 말했다.
[이해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사이훙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됐다, 됐어. 계속 노력하거라.]
사부는 큰 소리로 웃었다.
평소의 습관대로 사부는 새 모이만큼의 기장과 음식을 조금 먹었을 뿐
이다. 사이훙은 더 드실 것을 권했다.
[나는 속세와 연결된 끈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만 먹으면 된다. 나는 공
기를 먹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이슬 몇 방울만 마시고도 살 수 있다. 하지
만 인간으로서의 내 자신을 포기할 준비는 안 되어 있다. 음식을 먹지 않
는 현인들의 절반은 이미 신의 경지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작 신
성을 곁눈질 했을 뿐이다. 지상에서의 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아직
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내 육체가 문드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육체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균형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다. 육체가 정신의
매개체 역할을 하려면 최고의 건강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육체를 만족시
킬 만큼만 먹는 것이다. 이 음식을 치우고 부엌에서 네 할 일을 끝내려무
나.]
사이훙은 절을 하고 식탁을 치운 뒤 방에서 물러 나왔다. 모퉁이를 막
돌아서면서 사이훙은 덩그러니 서 있는 도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격
자 무늬 창으로 쏟아져 내리는 흰색 불빛을 받아 고리버들 광주리가 반짝
였다. 그는 광주리를 내려놓고 그것을 열었다. 접시 뚜껑에 손을 댔다.
청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부드러운 자기의 촉감이 손에 느껴졌다. 사이훙
은 뚜껑을 열어 소리 안 나게 옆에 놓고 음식을 꺼내 먹었다. 야채 무침
과 땅콩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부엌으로 돌아가기 전에 광주리 속에 조
금씩 남은 음식을 모조리 게걸스럽게 먹어 버렸다.
[사부께서 흡족해 하셨느냐?]
고참 요리장이 물었다. 보통 요리사들처럼 그도 자기가 만든 음식이 환
영받기를 원했다.사이훙은 말없이 빈 접시들을 의기양양하게 보여주었다.
고참 요리장의 환한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다 드셨구나!]
요리사는 탄성을 질렀다.
[내일은 더 많이 보내드려야겠다. 너무 야위셨어! 배가 고프게 해드려
서야 되겠니. 안 되고 말고!]
[그러시지요.]
사이훙이 공손하게 말했다.
사이훙은 화산에 서 있는 웅장한 도관의 하나인 삼청전()을 향해
가파른 화강암 계단을 경건한 마음으로 올라갔다. 돌이 너무 단단해서 끝
없이 행렬이 이어져도 계단 끝을 닳게 하지는 못했다. 계단과 주랑 현관
은 불과 한 시간 전에 물로 깨끗이 씻어 내렸기 때문에, 여기저기에 작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도관의 정면은 대들보가 천장을 받치고 서 있는 주목
()의 위세에 눌린 형상이었다. 삼청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지붕의
용두머리는 그 높이가 50자나 되었다. 형형색색으로 칠해진 삼청전은 태
양 빛을 받아 현란하게 빛났다. 방마다 문 위에 가로 쳐진 상인방(
)의 기하학적 무늬 가운데에는 작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옻칠한 문
위에 있는 거대한 검은 색 현판에는 도관의 이름이 금색 글씨로 멋지게
써져 있었다.
도관의 문들은 육중했고 사이훙이 어른을 무등을 태워 걸어가도 될 만
큼 높았다. 문의 격자 무늬에 손이 닫지 않게 조심하면서 문 중앙에 손바
닥을 올려 놓았다. 상감으로 아로새겨진 꽃 무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부분이었다. 문을 힘껏 밀어서 활짝 열었다. 찬 공기가 밀려 들었다.
솟을 대문은 삼청전 내부의 웅장함과도 조화를 이루었다. 대다수 중국
의 성전()들처럼 지붕의 마룻대는 현관과 나란히 평행선을 이룬다.
삼청전은 깊숙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폭이 넓었다. 밑으로 기울어진 지붕
의 선들과 아래로 내려갈수록 길이가 짧아지는 받침 기둥들은 전체적으로
보면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보였다. 도톰하게 높여진 신단과 실물보다
큰 신상들이 함께 어우러져 생긴 환상적인 분위기 때문에 삼청전은 초현
실적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숨막힐 듯한 건축의 웅대한 규모는 현란한 색깔들과 아주 잘 어울렸다.
대들보는 하나하나 조각이 새겨지고 밖에 있는 대들보보다 훨씬 더 정교
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무늬들이 너무 정교해서 한눈에 관찰하기가 벅찰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들은 복잡 미묘한 영상과 만화경으로 본 풍경처럼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세 개의 신단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신단마다 높은 금박의 아치가 둘
러쳐져 있고 그 안에 신이 모셔져 있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줄이
섬세하게 쳐진 칸막이 아치는 손가락 크기 정도의 수천 개의 인물상으로
뒤덮여 있었다. 신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었
다. 법복 아래의 단단한 근육이나 부풀어 오른 가슴을 보면, 그 바로 밑
에 살아있는 실체가 숨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굴은 살색이었고 눈
과 입술은 아주 완벽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삼신의 손은 놓인
모양이 각각 달랐다. 왼쪽의 태상노군()은 부채를 들고, 중앙의
원시천존()은 우주를 표현하는 천체를, 오른쪽의 옥황상제는 제
왕의 권표를 들고 있었다.
세 신들이 입은 옷은 아주 교묘하게도 진짜 주름이 잡힌 옷처럼 조각되
어 있었다. 도복과 기도용 무릎 깔개는 아름다운 문양이 그려진 값비싼
비단이었다. 금실로 수놓은 잎사귀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신들이 가부좌상으로 앉아 있는 자리인 왕자는 황제에게 어울
릴 만했다.조각가가 칼로 한 번씩 새길 때마다, 화가의 붓이 한 번 스칠
때마다 바쳐졌을 헌신적인 몸짓이 눈에 선했다.
다른 맥락에서 보더라도 도교의 삼신은 최고 수준의 조각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문가라면 단번에 상상력, 생명력 그리고 놀라운 솜씨 뿐만
아니라, 모든 위대한 예술의 구성 요소인 초자연적 형상을 알아 보았을
것이다. 삼신은 존경심과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며, 사고와 자기 성찰을
자극하는 신비스러운 능력이 있었다. 그들은 페인트칠을 한 나무를 뛰어
넘는 생동감을 지니고 있었다.
예술의 힘은 인간과 하늘 사이의 간격을 메웠다. 사원, 경전, 풍경화는
모두 자연과 하늘의 웅장함 속에서 일을 꾀하는 인간의 위치를 대변했다.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는 예술을 창작하면서 예술가들은 하늘에 이르는 거
리를 메워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한눈에 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긴 두루
마리의 그림을 그렸다. 단 몇 걸음에 올라갈 수 없는 높은 탑을 세웠다.
예술가들의 노력은 모두 인간을 비천한 현실에서 이상적인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목적에서 세워진 삼청전은 무수히 많은
인간의 예술적 기교와 헌신이 빚어 낸 무대였다. 간절한 소망을 빌고 신
앙 생활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소였다.
사이훙은 높은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제단에는 이미 노랗고 빨간 꽃들
이 꽂힌 큰 꽃병, 알이 굵은 과일, 제물용 음식, 향기로운 백단향이 놓여
있었다. 유등에는 벌써 불이 켜져 있었고, 의식에 쓰이는 많은 도구들인
종, 나무 문고리, 징과 옥으로 된 제왕의 홀()도 놓여 있었다. 빨간 촛
불들은 환한 빛으로 밝혀져 있었다.아직 켜지지 않은 수백 개의 다른 초
들이 한쪽에 놓여 있었다.
사이훙은 사부가 도교의 지고한 삼신 앞에서 의식을 행하기 위해 몸을
깨끗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곧 삼청전은 엄숙한 성인들과 도관의
수백 개의 불만큼 밝게 타오르는 기도의 불꽃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사이훙은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꾸며 놓은 사건이 일
어나기를 기다리면서 구경하기에 좋은 자리를 찾았다.
높이 25자쯤 되는 마루 위 대들보에 올라가면 삼청전의 구석구석을 전
부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들보로 올라가는 길은 삼신을 안에 모신
금박 아치 위로 올라가는 길 하나뿐이었다. 사이훙은 재빨리 조각물을 손
가락으로 잡았다. 발가락으로 더듬거려 다른 틈새를 찾아 아치 위로 올라
가서는 장수신(), 자비신(), 불사신, 용왕, 악마의 머리를
밟고 지나갔다.
희열에 들떠서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리니 넓적한 대들보 위였다. 칠도
안되어 있는 지붕에는 수십 년 동안 쌓인 먼지와 향불 검댕이 더럽게 켜
를 이루고 있었다. 깨끗한 청색 도복 위로 짙은 회색 먼지가 묻었다. 손
도 더러워졌다. 그러나 사이훙은 개의치 않았다. 흥분이 그의 전신을 휘
감았다.
사이훙은 몸을 살짝 움직여 대들보의 중심으로 가서 행렬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장엄한 청동 종소리가 산 전체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돌 하나, 소나무 한 그루, 심지어 흐르는 시냇물까지 산 속의 모든 자연
은 웅장한 종소리에 맞춰 일제히 화답하였다. 오늘은 화산에서 가장 성스
러운 날이었다. 이 성스러운 날 아침에는 수업이나 허드렛일 따위는 없었
으며 목욕 재게만 하면 되었다.
사이훙은 징소리와 박()소리가 부드럽게 울리는 가운데 낮게 깔리는
찬가 합창과 행렬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어린 도사들이 문을 열었
다. 정식 도사들이 먼저 입장하였다. 그들은 모두 푸른 도복과 바지를 입
고 흰색 대님을 매고 짚신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오직 모자만은 서로 모
양이 달랐다. 둥근 모자를 썼는가 하면 사각모도 있고, 챙이 두 개인 모
자를 쓴 도사들도 눈에 띄었다. 이렇게 각기 다른 모자를 쓰는 이유는 도
사들의 계급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화산의 도사들은 엄숙하고도 질서
정연하게 줄을 맞춰서 들어왔다. 그들은 보폭까지 똑같았다. 한편 두 손
은 수련의 표시로, 성스러운 기()를 보존하는 표시로 꼭 모아 합장을
하였다.
지위가 높은 도사들이 입은 도복은 형형색색이었다. 도관의 내부를 장
식하고 있는 다양한 빛깔들처럼 색의 가짓수가 많았다. 대사부는 지도자
답게 가장 화려한 태상화의()를 입고 있었다. 검은 색 모자에는
아홉 개의 챙이 달려 있었다. 그것들은 도교 수행자의 서열상 사부가 최
고위직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타원형으로 된 푸른 옥이 모자의 정면에
박혀 있었다. 숱이 많은 수염은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흰색을 띄
고 있었으며, 가슴 아래로 강물처럼 굽이쳐 흘러내렸다. 사부의 도복은
자주색과 붉은 색,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밖에 학, 박쥐, 만 가지
변화 중의 하나인 장수라는 단어, 주역()의 팔괘 등이 다른 색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대사부는 우아하게 여덟치 높이의 문지방을 넘어 발을 내디뎠다. 길게
질질 끌리는 소매와 넓은 옷자락을 모양이 튀지 않게 살짝 집고 끌어 올
린 다음 삼신에게 다가갔다. 사부는 한 번도 문지방이나 깨진 바닥에 시
선을 주지 않았다. 마음과 영혼을 다해 철저히 집중하여 신앙의 대상에만
열중했다. 사이훙은 사부의 눈이 조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분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대사부는 종교의 무아지경에
빠져 반쯤 미소를 띤 채 황홀경 속에서 가볍게 미끄러지듯 그렇게 걷고
있었다.
촛불이 모두 환하게 켜졌다. 어두웠던 삼청전 내부는 수백 개의 가느다
란 황금색 불꽃이 어우러져 붉은 색으로 빛났다. 중앙의 신단에서 타오르
는 향 연기는 뭉게뭉게 휘돌아서 구름처럼 올라갔다. 사부는 세 개의 긴
향에 불을 켜고 세 개의 신단을 차례로 돌며 앞에 납작 엎드린 수 산 전
체를 대표해서 향불을 하나씩 공양했다.
사부의 뒤에서는 도사들이 낮게 부르는 찬가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긴
찬가 소리는 물줄기처럼 흘러 향 연기와 뒤섞였다. 정녕 그것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를, 그리하여 하늘과 땅이 이어지기를 도사들은 간절히 빌
었다.
대사부는 중앙의 신단으로 다시 돌아가 경전을 펼쳤다. 도교의 신은 각
각 경전을 하나씩 갖고 있는데, 도인들은 나무 위에 칠을 입힌 신들이 자
신들의 독경으로 깨어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독경을 하는 사람들이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그리고 제물이 향긋하면 향긋할수록, 장소가 깨끗
하면 깨끗할수록 신들을 감동시켜 더 잘 설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대사부의 비음 섞인 음성은 흡사 당적()소리처럼 들렸다. 처음에는
갈대 피리 소리처럼 들리다가 점차 깊고 섬세한 공명음으로 변하였다. 그
모습은 연주의 한 장면 같았다. 징과 박은 경전이 봉독되는 동안 절정에
맞추어 일정한 박자로 연주되었다. 사부의 목소리가 커져가면서, 향불은
맹렬한 기세로 타올라 길이가 반으로 줄었다. 의식의 신성함은 갑자기 터
진 무시무시한 소리 때문에 끊어져 버렸다.
아주 끔찍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통에 도사들은 그만 집중력을 잃고 말
았다. 신들과 대면하는 그들의 관심을 빼앗아갈 만큼 위력을 가진 소리는
아니었지만, 무심결에 그들은 돌아서고 말았다. 나무문 하나가 차가운 마
룻바닥에 쿵 하고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닥의 틈새에서 먼지 구름이
풀풀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문은 번개가 갈라지듯 세로로 쪼개져 버렸
다. 문 입구에는 세 남자가 서 있었다.
남향의 문들을 통해 들어온 빛에 눈이 부셨다. 도사들은 어둠과 연기로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시야가 흐렸다. 보초를 서던 도사들이 돌
풍 같은 기세로 뛰어든 반면, 다른 도사들은 공포에 질려 신단 쪽으로 몸
을 움츠리고 피했다. 지금 도관에 쳐들어온 세 남자는 무사임이 분명했
다. 그들은 결투 동작을 취했다. 소매 사이로 무사들의 근육이 툭 불거졌
다. 그들은 사악한 눈을 번득이며 무방비 상태의 도사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변발이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무사들의 변발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된 청 왕조에 충성한다는 상징이지만, 그들은 지배 계급의
표시로 땋아 늘인 것이었다. 세 남자는 신단 앞에 우뚝 서더니 목에다 끈
을 감았다. 싸우기 위해 왔다는 신호였다.
[누가 대사부냐?]
키가 제일 큰 자가 청천벽력같이 큰 소리를 질렀다.
[바로 나요.]
대사부가 점잖게 말했다. 대사부는 앞으로 나가 공손하게 절을 했다.
[우리가 훌륭한 수호신들의 기분이라도 언짢게 해드렸습니까?]
[빌어먹을 놈 같으니! 네놈이 이것을 우리에게 보내지 않았더냐?]
한 무사가 짙은 자주빛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까만 글씨체가 반투
명한 종이 위에 드러났다.
[내가 읽어주마. <너희 셋은 스스로를 감히 하늘, 땅, 인간이라고 불렀
다. 이 거만하기 짝이 없는 칭호를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세속의 풍
진 속에서 떠돌기를 수년, 나는 이 보다 더 불쌍한 인간들은 본적이 없었
다. 어린애들과 고작 말다툼이나 하는 정도 가지고 스스로 무술가라고 칭
하는 후안무치한 자들이여, 고소를 금할 길이 없구나. 너희들이 조금이라
도 진정한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아래에 지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도전을 받아라. 세상에서 제거하는 것만이 너희 같은 더러운 존재를 깨끗
이 치울 수 있으리니.......>]
[나는 결코 그 편지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소이다.]
대사부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비천하고 불쌍한 수행자이외다. 여러분 같은 영웅들과 감히 겨룰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뭔가 크게 오해하셨소.]
[닥쳐라! 이것은 너의 서명과 봉인이 아니더냐?]
사부는 마룻바닥에 던져진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사이훙은 사부가 충격
받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노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래졌다.
입을 크게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서명은 그의 것이었다. 봉인도 진
짜였다.
<하늘>이라는 키 큰 남자는 사부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죄를 인정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공격 자세를 방어 자세로 바꾸었다. 사부는 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부의 얼굴이 갑자기 험악해지더니, 경계 태세
에 돌입했다. 심지어 그의 도복조차 기로 부풀어 올랐다.
짙은 청색 웃옷과 바지를 입은 <하늘>은 표범처럼 날쌔게 몸을 놀려 금
강세()를 취했다. 그렇다면 그는 주먹과 발을 쓰지 않고 단지 손바
닥만 이용해 싸울 것이다. 그의 어두운 얼굴에는 깊게 주름이 패어 있고
다소 일그러져 있었다. 코는 젊은 시절에 부러진 듯 비뚜러져 있었다.
[오늘이 너의 장례식인 줄이나 알아라, 이 영감아.]
그가 으르렁 거렸다.
[생과 사는 신이 예정하시는 것이외다.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나는 기
꺼이 신 앞에서 죽겠소이다. 그러나 그대가 나를 염라대왕에게 보내지는
못할 것이외다.]
대사부는 사나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항복을 해라. 무방비 상태의 영감을 죽였다고 소문이 나는 것은 싫으
니까.]
[그대는 왜 존재도 없는 명예에 집착하시오? 원커든 언제든지 공격하시
오. 내가 그대를 이기기 위해 세 번 이상 움직이면, 나는 스스로 명예를
지키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오.]
[그럼, 죽어라!]
<하늘>이 낮게 함성을 지르며 돌진해 왔다. 그러나 수백 차례의 시합에
서 승리했던 대사부는 단 한 차례 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자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사이훙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킬킬거
리고 웃기 시작했다. 대사부는 얼굴을 들었다. 싸움을 하느라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하지만 사부가 입을 떼기도 전에 <땅>이라
는 자가 그를 공격해 왔다.
<땅>은 뚱뚱하고 얼굴에 마마 자국이 있는 상스러운 인간이었다. 소림
권()을 이용한 그의 동작은 서툴고 단순했다. 그러나 힘에 체중을
실으면 언제든지 기술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체중이 보통 사람 보다 훨씬
더 나가는 그는 웅크리고 숨어 있는 복병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사정없이 대사부에게 달려들었다. 가냘픈 체격의 사부는 살짝 비
켜섰다. 그가 다시 덤볐다. 대사부의 얼굴에는 후회의 빛이 잠깐 스쳐갔
다. 백정 앞에 돼지 한 마리가 놓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무사의 법도상
싸움을 완전히 끝내야만 했다. 사부는 홱 몸을 피하더니 앞으로 나아갔
다. 펄럭펄럭 나부끼는 옷소매가 태풍 속에서 윙윙 소리를 내는 깃발처럼
휘날렸다. 사부는 손바닥을 날카롭게 세워서 상대의 신장을 찌르고 한쪽
발로 그의 무릎을 탈구시켜 버렸다.
<인간>이라는 자는 철사줄 같이 야위고 뻣뻣하게 생겼다. 네모진 얼굴
오른쪽에 보기 흉한 상처가 그어져 있었다. 인사를 하는 것을 봐서는 무
당권()을 쓸 것으로 보였다. 이번에도 대사부는 적이 먼저 공격하
도록 기회를 주었다. 공격자는 양동 작전을 펴 한가운데를 찌르는 듯하다
가 잽싸게 눈을 찔렀다. 대사부는 커다란 옷소매에서 미끄러지듯 슬쩍 손
을 내밀더니 손목을 잡고 비틀어서 바닥에 <인간>을 내 꽂아 버렸다. 한
차례 발을 날려 걷어차니 그는 완전히 의식을 잃어 버렸다.
대사부는 뒤로 물러나 에워싼 사람들에게 세 사람을 들어서 밖으로 내
가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을 회생시키고 빠진 뼈를 맞춰 주도록
의원 일을 맡아 보는 도사들을 보냈다. 대사부는 단지 그들을 얼마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사부는 그들이 속아서 공격을 벌
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짐승 같은 놈! 썩 이리 내려오지 못할까!]
사부는 사이훙을 보고 버럭 고함을 쳤다. 사이훙은 조용히 기둥을 타고
내려왔다.
[네 방에 가서 부를 때까지 기다려라.]
그로부터 3시간이 지나서야 두 시자가 사이훙을 대사부의 방으로 호송
하여 데려갔다. 대사부는 아직 태상화의를 입은 채였다. 그는 천천히 책
상을 돌아오더니 사이훙을 마주 보았다. 사이훙은 순간 사부의 몸에 급속
한 가속도가 붙는 것을 감지했다. 사부가 그의 뺨을 세차게 갈겼다.
[무릎을 꿇어라!]
대사부가 명령했다.
[이 나쁜 놈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런 불경스런 짓을 꿈도
못 꿀 것이다. 네놈이 웃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내 이름을 사칭해서 나를
함정에 빠뜨린 놈이 너라는 것을 알았다. 늘 장난칠 궁리만 하는 네놈만
이 그런 음모를 꾸밀 수 있을 것이다.]
사이훙은 침묵했다. 감히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 모든 일을 흥분에 들떠 한껏 즐기고 있었다.
[너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너는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고, 나의 명예를
더럽히고, 신에게 봉헌하는 신당의 신성함을 모독했다. 네 죄는 실로 엄
청나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당해도 싼 자들입니다.]
사이훙은 능글능글 웃었다.
[도교의 삼신 앞에서 패주는 것 이상으로 그들에게 수모를 줄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도교의 삼신은 그런 놈들보다는
훨씬 높은 위치에 있으니까요.]
[또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을 보니 네 죄를 모르고 있구나! 너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보다 먼저 어떻게 이런 부끄러운 사건을 꾸몄는지 그
동기를 내게 밝혀라.]
사이훙은 자세히 설명했다.
[제가 그들의 도장을 지나가다가 시주를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
은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직접 그들에게 도전하러 갔으나. 제 힘으로는
그들을 당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편지를 보냈습니
다. 높은 칭호를 갖고 있으면서 거만한 자들은 누구나 한 두 단계 강등을
당해야만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대사부는 사이훙을 크게 꾸짖었다.
[네가 틀렸다. 부끄러워할 사람은 바로 너다. 사이훙을 데려가거라.]
두 시자는 멀리 있는 지하 동굴로 사이훙을 데려갔다. 공기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차고 습했다. 친절하게도 그들은 솜을 누빈 옷을 가져다
주었다. 세 사람은 모두 말이 없었다. 두 시자는 너무도 엄숙했고 사이훙
은 여전히 기쁨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들은 물이 가득 찬 방으로 갔다.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서 생긴 이 동굴은 수세기 전에 파괴 되었다. 그 결
과 직경이 다섯 자쯤 되는 둥근 고원 위로 뾰쪽하게 튀어 나온 장소가 생
겼다. 지하의 호수 중심부에는 평평한 바위가 솟아 나와 있었다. 수면 위
로 열 자쯤 되는 높이였다. 육중한 널빤지가 그들이 서 있는 고원에서 그
바위까지 뻗어 있었다. 시자들은 사이훙의 손에 옷과 물이 든 조롱박을
쥐어주고 건너가라고 지시했다. 사이훙이 건너가 앉자 그들은 널빤지를
치워 버렸다.
사이훙은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손에 든 횃불이 어
둠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사이훙에게 내려진 판결은 지은 죄를 각성하며
49일 동안 명상에 잠겨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동안 그는 묽은 죽과 물
만 먹게 될 것이다. 사이훙은 눈을 감았다. 너무 추워서 몸이 덜덜 떨리
고 기침이 나왔다. 물이 좔좔 흐르는 소리에 신경이 계속 거슬렸다. 위에
서 박쥐가 날개를 찍찍 끌고 다니는 소리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사이
훙은 동굴 생활이 고통스러울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날 벌어진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쿡쿡 터져 나왔다. 장난의 결과가 너무 통쾌했기
때문에 반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머리 위 높은 곳에 있는 뾰족뾰족 들어간 구멍들에서 희미한 불빛이 나
왔다. 그 빛은 수면 위로 창백하게 쏟아졌다. 삐죽이 나온 암석층의 그림
자와 무지갯빛의 괴상한 광석의 그림자가 살짝 수면에 비칠 뿐이었다. 검
은 색 물이 깊은 곳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사이훙은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도망 갈 출구를 찾았지만, 도피처라곤
옛날의 기억밖에 없었다. 물 속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니, 어린 시절 뛰놀
던 소나무 수풀에 있는 반짝반짝 빛나던 푸른 호수가 생각났다. 소년 시
절에 수영을 어떻게 배웠던가도 생각났다. 셋째 삼촌은 그가 물에 뜰 수
있도록 굉장히 큰 조롱박 두 개를 그의 몸에 묶어 주었다. 그때의 경험은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추억의 하나였다.
고통스러운 기억도 물론 있었다. 일곱 살에 가정 수업을 보충할 목적으
로 마을의 학교에 보내졌을 때 그는 매일 같이 얻어맞았다. 반격도 해봤
지만, 공격자들이 마법을 부리듯 기습을 해와 도저히 그들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창피해서 남에게 말도 못하고 고통을 참았다. 그런데 수영을 하
다 셋째 삼촌은 사이훙이 온통 퍼렇게 멍이 든 것을 보았다.
[싸워 봤지만, 그놈들은 손과 발로 이상한 동작을 하며 싸우기 때문에
내가 지고 말아요.]
사이훙은 애처롭게 말했다.
[이 어리석은 녀석아, 그놈들은 권법을 이용하는 거야.]
셋째 삼촌은 그를 책망했다.
[그게 뭔데요?]
사이훙이 물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무술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실 하
나를 알게 되었다. 그의 가족은 무사 계급이며 청 왕조의 만주족 후예이
고 전쟁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관공의 후손이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사이훙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모든 무술과 병기류는 가족의 어린 구
성원에까지도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무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사이훙은 자신이 가문의 깊은 갈등 속에 빠
져든 것을 알았다. 음악 교사를 하던 어머니는 장군인 남편의 직업을 잘
모르는 어린 사이훙을 학자로 키우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어머니는 무술
은 무엇이든 금했다. 그러나 셋째 삼촌으로부터 그가 물려 받은 유산에
알게 되면서 사정을 바뀌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에게 무사 교육을
시키는 데 열심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이훙은 전사는 대포와 군대를 다루는 현대적 군인과
19세기의 할아버지처럼 되는 무사,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보다 할아버지와 같은 전통적인 영웅이 되는 길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할아버지는 신사이며 시인, 서예가, 음악가였다. 반면에
아버지는 술에 만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폭군이었다. 양친과 멀어
지면서 사이훙은 할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가 무사 정신
에 눈을 뜨게 되자 어머니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군
국주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못마땅했다. 부모님은 사이훙이 하인들이
나 가족들에게 장난치는 것이나 좋아한다고 매우 언짢아 했다.
사이훙은 장난을 즐겼다. 부엌에서 음식을 훔치기도 하고, 벽돌로 사람
을 치기도 했다. 크게 구경거리가 됐던 사건도 하나 일으켰는데 먹으면
방귀를 뀌게 하는 가루를 입수했던 것이다. 그는 이 무기를 써서 재산 문
제로 그에게 항상 잔소리를 해대던 삼촌 한 분에게 복수를 했다.대저택에
왕자님이 오시는 날, 사이훙은 아저씨의 차에 그 가루를 탔다. 이 불쌍한
삼촌은 그만 참지 못하고 방귀를 뀌어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사이훙은
이 광경을 아무런 내색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
다.
장난치는 것이야말로 사이훙의 최대 기쁨이었다. 친척들이 그의 희생물
이었는데 그들은 그때마다 그에게 벌을 주면서 장난질은 그만하고 개과천
선하라며 혼쭐내곤 했다. 거의 매일 벌어지는 못된 행동을 보고도 직접
나무라신 적이 없던 할아버지까지 젊은 신사로서의 의무와 역할에 대해
몇 번이고 타이르셨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역할의 문제가 복잡해졌다. 어느 날 셋째 삼촌이 잉
어가 수놓아진 긴 비단옷을 그에게 입히고, 굽이 높은 신발, 공작의 깃털
이 꽂힌 이상한 모자와 구슬을 꿴 줄을 가져오셨다. 그는 그때 자신이 귀
족의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잘 몰랐고 또한 하인들이 그를 보고서 왜 부
들부들 떨며 엎드리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할 것없이
무릎을 꿇고 그의 신발을 만졌다.
[왜들 이러죠?]
사이훙이 삼촌에게 물었다.
[그냥 내버려둬라.]
삼촌은 신경쓸 것 없다는 듯이 대답해 주었다.
셋째 삼촌은 그를 데리고 유배 중인 푸이()황제를 알현했다. 1927
년 이었다. 청 왕조는 1911년에 몰락했다. 그러나 사이훙의 가족들은 여
전히 자녀들을 황제에게 인사를 시켰다. 귀족들은 모두 왕정 복고를 소망
하면서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삼촌은 사이훙도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가족들로부터 가해지는 압박감을 느끼면서 사이훙은 가문의 위대한 유
산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사이훙이 무사든 장군이든 귀족이
든 수양을 쌓고 높은 교육을 받아 훌륭한 젊은이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총명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성숙의 표시는 하나도 나
타나지 않았다. 사이훙 자신은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그분의 모범적 품행
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다른 가족들이 그를 통제하려고 하
면 피해 버렸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장난이 너무 짓궂어지자 부모
는 의절까지 할 각오를 하였다. 그때 중대 조치를 취하신 분은 할아버지
였다.
할아버지는 사이훙을 데리고 타이 산으로 순례 여행을 갔다. 거기서 그
는 대사부를 처음 만났다. 사이훙은 그 만남이 특별했던 것으로 기억한
다. 주변의 분위기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적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친화감을 느꼈기 때문
에 사이훙이 사부의 최연소 학생이 될 수 있게끔 주선해 주셨다. 그것은
가문의 압력으로부터 아홉 살 난 손자를 구하려는 할아버지의 배려였다.
사이훙은 가끔 집에 다녀가긴 했지만 대부분을 도관에서 생활했다. 사
부와 두 사형이 그를 키웠다. 사이훙에게 사부의 존재는 제 2의 아버지와
다름없었다. 사형들과 대사부의 제자들은 사이훙보다 최소한 12년 위였는
데 마치 친형들 같았다. 장난꾸러기 짓은 여전했지만 한 가족이라는 안전
한 방패가 있음을 깨달은 것은 화산에 있을 때뿐 이었다.
도관의 생활은 단조로왔다. 그래서 사이훙은 마음이 초조해지면 옛날
버릇이 다시 살아나곤 했다. 때때로 그저 재미 삼아 장난을 치기도 했지
만, 대부분은 자신이 멸시를 받았다고 느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그보
다 더 많이 성취했다고 주장하는 도사들의 음식에 방귀뀌는 가루를 듬뿍
넣고, 박쥐 신선에게는 약초를 써서 잠이 들게 하고, 개구리 신선은 끈적
끈적한 아교로 돌에 꼼짝못하게 붙여 놓고 막대기로 두들겨 팼다. 사부는
사이훙이 못된 짓을 할 때마다 벌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사이훙에게
는 오락의 일부였다. 그의 가족과는 달리, 사부는 나중에 항상 그를 용서
해 주고 스스럼없이 대하며 사이훙을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이훙은 점점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나갔다. 무술뿐만 아니라,
학문과 정신적 기량도 어느 경지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3년 동안 동굴
속에 갇혀 지내면서 극도의 금욕 생활을 실천했다. 그리고 1년 동안은 신
탁을 받았다. 그는 약초만을 먹었고 몸무게는 40킬로밖에 안 되게 줄었
다. 사형들이 그를 들어서 옮겨 가야만 했다.
이 모든 과정은 사이훙을 신의 영매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의
식을 수행 했을 때 그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서 신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
작했다. 신에게 자신을 열어 놓는 데 최소한의 육체적 힘밖에 들지 않는
다는 사실은 이상했다. 수 차례에 걸쳐 영혼이 사이훙 안으로 들어와 얘
기를 했지만, 직접 영혼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었다. 완전히 영혼에 사로
잡혀 있는 동안에 자신의 의식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 신과 영적인 교섭을 하던 사이훙은 1937년 일본
이 중국을 침략하자 또 다른 극한 상황으로 떨어졌다. 사이훙은 애국심
때문에 산에서 내려와 싸우고 살인을 했다. 하지만 2년 후 그의 애국심은
목적 의식을 잃고 말았다. 전쟁은 양쪽을 모두 패배시켰다. 사이훙에게는
처절한 고통을 수반했던 잔혹 행위가 마치 애들 장난같이 어리석게 보였
다. 또 그는 정치가 허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일 전쟁은 그의 가문
을 송두리째 삼켜 버렸다. 가족들 중 몇몇은 생명을 잃었다. 한때 떵떵거
리던 관가보와 토지는 폐허로 변했다. 사이훙은 화산의 공동체로 돌아와
칩거하면서 온갖 풍상을 겪고 난 후 느낀 환멸을 달래느라 몇 년 동안 애
를 써야 했다.
명상과 차가운 정적 그리고 향 연기 그윽한 사당이 자아 내는 평화스러
움에 힘입어 마음의 상처는 얼마간 치유되었다. 영혼의 훈련을 통하여,
사이훙은 다른 퇴역병들보다 빠른 속도로 전쟁의 상흔을 지워 갈 수 있었
다. 심약한 민족주의가 강대한 허무주의와의 전쟁에서 전투를 벌이면 어
떻게 되는지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활기 차게 살 수 있도록 그에게 마법
의 힘을 주었던 남성다운 호전성을 잃어버린 적은 없었다. 가문의 요구와
잔혹한 전쟁 때문에 더렵혀졌던 사이훙은 도교의 전통을 실천하며 더욱
결의를 다짐으로써 깨달음의 본질을 찾아 구도의 길을 걸었다.
도관에는 선각자들의 해답이 보존되어 있었다. 사이훙에게 고대의 지혜
는 고고학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빛과 영감을 주는 보물이었다. 고
대의 미술품에서 그는 편안함을 느꼈다. 안정과 생존의 힘이 느껴졌다.
하늘에 닿을 듯 절벽 위에 높이 지어진 낡은 건물들을 보면 영혼 속에서
고대의 음향이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고대 문명의 흘러간 영광을 반추할
수도 있고, 생명체들이 사라져 간 흔적들을 묵상하고, 초자연적인 노력의
영원함을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다. 도교는 영생 불사를 논하는 종교이
다. 그러나 사이훙은 장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갈등과 부패와 덧없음을
초월할 수 있는 영생의 시학()을 발견하기 위하여 도교 연구에 몰두
해 왔다.
그러나 죄의 대가로 당분간은 동굴에 갇혀 지내야 할 신세였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동굴 속에 떨어지게 됐을 뿐 아니라, 목표 달성에도 차질
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기간을 정식으로 단식과 명상의 시간이 되게 하려던 사이훙의 첫 시
도는 절반 정도의 시간을 헛되게 흘려 보냈다. 이제 그는 허영을 부릴 처
지가 아니었다. 몹시 춥고 배가 고팠다. 생각은 꼬일 대로 꼬였다. 사이
훙은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때웠다. 깨어 있어도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
는지도 몰랐다. 딱딱한 바위 위에서도 얼마든지 잠들 수 있었고, 뺨에 먼
지를 가득 뒤집어 쓰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이 사실에 묘하게도 흥미가
동했다.
49일 후, 그의 의식은 꽁꽁 얼어붙은 극한 속에서 마비되어 무감각해졌
다. 사이훙은 그 작은 세계의 바닥에 나무 널빤지가 걸쳐지는 것을 어렴
풋이 보았다. 소복한 먼지가 그의 앞으로 밀려왔다. 널빤지에서 찍찍 긁
히는 소리가 났다. 신경이 거슬렸다. 위를 올려다 보았다. 두 눈의 초점
을 한 곳에 모으기가 힘들었다. 불꽃이 번쩍번쩍 빛났다.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사이훙의 손을 꽉 붙잡는 것이 있었다. 비트는 힘이 너무 강해서
손이 아팠다. 사이훙이 한때 그 위력을 과시했던 근육은 너무나도 나약해
져 있었다.
사이훙은 기침을 했다. 목구멍이 탈 정도로 침이 말라붙어 있었다. 매
운 연기 냄새에 더욱 세차게 기침이 나왔다. 널빤지가 휘청대자 마음이
쏠렸다. 지하에서 흐르는 검푸른 물은 밤하늘이 녹아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물이 반짝 거렸다. 수면에 반사된 횃불은 저물어가는 태양 같았
다.
가스가 다 빠진 듯 꺼져 가는 불꽃은 강물을 이루고 그 강물 속에 다시
가스와 불꽃이 녹아 잇는 것처럼 보였다. 소멸돼 가는 별들에게서는 신음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이훙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소
리는 나무 널빤지가 삐걱거리는 소리였다. 그는 불안정 했다. 근육이 말
을 잘 듣지 않아 동작이 아주 불안했다. 부신 호르몬이 오래 전부터 분비
되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사이훙은 두 사형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는 가까스로 웃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동안 사형들은 친절하게도 부축을 해주었
다. 추운 새벽이었다. 그러나 잘게 이는 바람도 지하의 공기보다는 따뜻
했다.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어 입을 열었지만, 바보처럼 턱이 어긋나
고 말았다. 사형들은 그저 잠자코 있으라고 그에게 일렀다. 사이훙을 간
호해서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들의 방으로 데려갔다.
더러운 머리카락은 시든 풀뿌리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얼굴은
먼지가 뒤덮여 회색 빛이었다. 수염은 엉망으로 엉켜 있었다. 그는 굴 속
에서 나온 장난꾸러기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비참했다. 탈진
상태에 놓인 한 마리 짐승이었다. 고집 세고, 반항적이고, 자신만만하던
그를 이 꼴이 되게 한 장난질이 아직도 뉘우쳐지지 않는 것이 그를 괴롭
게 했다.
사이훙은 화산 주변에 깔린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시 보았다. 높이 솟은
산의 전경들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창공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삼각
대 모양의 화산이 주는 영감으로 생긴 전설들은 이 산들이야말로 푸른 하
늘을 떠받치는 버팀목이라고 전해왔다. 사이훙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쓰디쓴 강장제를 씹으면서 웅장한 자연 속에 묻혀 곧 정상 생활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2권 SEVEN BAMBOO TABLETS OF
THE CLOUDY SATCHEL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이 인 복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2. 두 나비
화산은 중국에 있는 모든 시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산들 중에서도 으뜸
가는 산이었다. 하지만 강한 생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살아갈 수 없는
산이었다. 강한 바람에 시달린 소나무들은 마구 비틀어져 혹이 붙은 모양
이었다.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은 잔가지를 부러뜨렸고 솔잎을 쳐냈다.
그나마 남아있는 가지들은 약해진 바람을 맞으며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
었다. 비는 예리한 날을 세우고 화강암을 쪼아 점점 더 깊게 홈을 파나갔
다. 마침내 바위는 닳고 닳아 흰색이 되었고 돌의 결이 햇빛에 환히 드러
났다.
화창한 날이면 햇빛은 뜨겁게 작렬하였다. 어떤 생물들은 이 빛을 자양
분으로 잘 자라나기도 했지만, 강한 빛에 무자비하게 화상을 입는 약한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거친 풍토 때문에 산은 청결하고 완벽하리 만치
준엄하였다. 그래서 산의 갈라진 틈새에서 겨우겨우 연명하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수도자들에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산세가 험하고 척박하여 고생밖에 할 것이 없는 화산에서 도교의 금욕
주의는 싹텄다. 불모 속에서도 도교는 무성하게 뻗어 나갔다. 역설적인
현상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인간의 업적이라도, 아무리 보편적인 지혜일
지라도 이런 악조건 속에서라면 지탱할 수 없으며 위대해질 수도 없을 것
이다. 그럼에도 도교는 이런 환경 속에서 거침없이 자랐다.
화산, 이 장엄한 산은 중국의 5대 성산의 서쪽 봉우리였다. 중국 고대
의 두 도시, 뤄양()과 시안()을 잇는 높다란 산맥의 한 부분에
속했다, 다섯 개의 큰 화강암 봉우리가 원형을 이루고 있어서 단 하나 밖
에 없는 험난한 오솔길로만 다닐 수 있었다. 강, 폭포수, 삼림, 동굴 그
리고 특히 눈에 두드러지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 이것들은 화산을 이
세상이 아닌 별천지로 만들어 놓았다.
도인들은 각 봉우리마다 학당, 수도원과 제사를 올리는 신당을 세웠다.
건물들은 모두 산에서 구할 수 있는 나무, 돌, 진흙이나 7천 자에 달하는
산비탈 위로 사람이 힘들여 운반한 재료들을 써서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삼청전 같은 몇몇 건물을 빼고 대부분의 건물은 멀리서 보면 흙 빛깔과
분간할 수 없게 위장 되어 있고, 작은 언덕들과 소나무들 뒤에 숨어 초라
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실내는 덕지덕지 낡은 바닥과 엷게 회반죽이 칠해진 벽, 비바람과 뜨거
운 열기에 의해 파손된 나무창틀로 꾸며져 있었고, 가구는 보통 커다란
나무 하나뿐이었다. 석탄 난로와 조그만 난로가 내장되어 난방이 되는 딱
딱한 벽돌 침상이 고작이었다.
도인들은 온실과 손바닥만한 밭뙈기를 일구어 자신들이 먹을 채소들을
직접 재배하였지만 나머지는 이웃 사람들에게서 샀다. 하지만 5백 명이
사는 화산 공동체의 전 식구를 먹여 살리는 일은 항상 큰 문젯거리였다.
대부분의 도사들은 불쌍할 정도로 말라 있었다. 이따금씩 신자들이 내는
기부금과 도사들이 서예가, 강사, 점성가, 화가나 본초 학자로서 벌어들
이는 약간의 돈이 수입의 전부였다.
도관은 원로 도사들과 수도원장들의 감독 아래 조직되어 있었다. 그리
고 도관들은 모두 대사부가 의장으로 있는 원로회의 관할 하에 모여 있었
다. 도관의 일상 생활은 죽비 소리와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동종()소
리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통제되었다. 상승음을 타는 5박자의 음조 -세 번
은 느리게, 두 번은 빠르게 - 는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수련생들을 깨웠
다. 젊은 도사들은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장작과 물을 가져오거나
삼청전을 청소하거나 아침 식사 준비를 하거나 사부들의 시중을 드는 것
이었다. 그 사이에 더 높은 도사들은 목욕을 하고 그날 하루를 준비하기
위해 몸치장을 했다.
6시 30분 이전에 도사들은 대부분 아침 참배를 위해 신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거기서 동종과 목어()소리에 맞춰 고음의 단조로 경전을 노
래했다. 도관의 규칙적인 생활로 돌아온 사이훙은 여전히 아침 참배가 지
루했다.
사부께서 말씀을 하실 때면 무척 흥미로왔다. 사부님의 말씀에는 생동
감이 넘치고 내용의 연관성이 적절했다. 그와 반대로 경전을 중얼거리는
소리는 아주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경전에 쓰인 말들은 도사들을 도교의
신의 경지까지 이끌어 주기 위해 복잡한 형식을 다서 성인들이 만들어 놓
은 수백 년이나 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사이훙에게는 그저 아침 식사에
방해가 되는 웅얼거림일 뿐이었다.
종소리를 들으며 식당에 들어가서는 사이훙에게는 경건한 마음이 거의
들지 않았다. 침묵은 절대적 불문율이었다. 말이 금지되어 있을 뿐 아니
라, 서로 눈을 마주치는 행위도 지팡이로 세게 맞는 벌을 불렀다. 그와
동료 수도자들이 기도하며 서 있는 동안 도관의 부원장이 사발에 음식을
담았다. 그리고 그것을 성인의 신단에 바쳤다. 신단의 양쪽에는 무거운
목재로 만들어진 두 개의 긴 식탁이 놓여 있었다.
사이훙은 큰 나무통에서 죽을 한 사발 퍼내서는 자리에 앉았다. 절인
양배추 한 접시, 순무와 오이 몇 개가 두 명의 도사에게 나눠졌다. 그는
정확히 식사의 반을 먹었다. 한 사람에게 허용된 최대의 양인 죽 두 그릇
을 먹고는 그릇을 끓는 물로 씻었다.
[오늘이 축제일이었으면.......]
사이훙은 혼자 말로 한탄했다. 만일 축제라면 기름에 튀긴 빵 한 조각
은 얻어 먹을 수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사이훙은 목욕을 하러 갔다. 옥외에는 밑바닥에 물이 빠
질 수 있게 구멍이 있는 엄청나게 커다란 항아리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이
것들은 욕조로 이용되었다. 동관과 나란히 연결된 두 개의 긴 대나무가
항아리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른쪽은 따뜻한 물이 나오는 관이고, 왼
쪽은 우물물이 직접 나오는 관이었다. 두 명의 어린 수행자가 불을 지펴
서 물을 끓인 후 그 물을 파이프로 돌렸다.
사이훙은 옷을 벗고 항아리 속으로 들어갔다. 바닥은 차갑고 공기는 이
가 딱딱 부딪칠 정도였다. 그는 물을 몸에 끼얹고 백단향 비누를 칠했다.
근육이 아직 단단한 것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정의를
내렸다. 철학은 고상하다. 그러나 육체의 건강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
큼 구체적이다.
더운 물은 너무 뜨거웠다. 사이훙은 어느 쪽이 더 나쁜지 판단할 수 없
었다. 덜덜 떨리도록 추운 아침에 하는 냉수욕? 아니면 뜨거운 물로 정반
대의 고통을 당하는 것은 또 어떨까? 사이훙은 항아리 밖으로 나와서 몸
을 말리고 옷을 입은 후 두 소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오늘 아침
그는 강의를 들을 계획은 없으나, 두루미 신선에게서 봉과 검을 쓰는 법
을 배울 예정이었다. 수업에 대한 기대뿐 아니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는 기대감이 그를 학당으로 이끌었다.
대사부에게는 13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 중에서 사이훙이 가장 어렸으
며 그 다음이 후디에()이었다. 그는 20대 후반이었다. 그 밖에 다른
제자들은 사이훙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그들은 모두 성직자가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학생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성직의 여러 소양 교육을 끝
마친 상태였다. 학생들은 사이훙이 나이가 어리다고 특별히 관심을 두지
는 않았지만, 대사부의 핵심 그룹에 끼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받아들였
다. 그와 나이 차가 일곱 살 미만인 학생은 오직 후디에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이 몇 년간 함께 지내면서 우정을 키워 왔다. 사이훙에게
대사부가 아버지 같은 존재라면 후디에는 형과 같은 존재였다.
후디에는 사이훙이 속세의 집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었던 형제였다. 후
디에는 따뜻하고, 베풀 줄 알고, 염려해 주는 형이었다. 사이훙의 친형들
은 모두 철두철미하게 경쟁적이었다. 부모님의 기대가 커서 형제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형제들은 서로 떨어져 최고의 출세길로
줄달음치기 위해 다른 스승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애시당초 그는 형제
애 따위를 기대할 수 없었다. 가족들 사이에는 질시와 무지막지한 경쟁만
이 존재했다. 사이훙은 집에 있을 때 항상 자신을 작고 못생기고 어리석
다고 생각하였다. 형들은 위대한 학자이며 탁월한 군인, 아니면 부유한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사이훙만이 도사였다. 그래서 그만이 부모님과 그
의 가문에 위신과 명예를 선사할 수 없었다. 사이훙은 이제야 마침내 그
를 하나의 개체로 인정해 주는 대사부와 대사부의 13제자를 찾을 수 있었
다. 후디에야말로 그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사형이었다.
우연의 일치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이훙의 법명 또한 후디에()였
다. 사부는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그 법명을 붙여 주었다. 첫째, 사이훙이
미()에 흠뻑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이훙의 가정 환경 때문이기
도 했다. 그는 집에 있을 때부터 미술품, 자연의 경관, 이국풍의 꽃들에
매혹 당해 있었다. 둘째, 그는 쉽게 싫증을 내었다. 이 주제에서 다른 주
제로, 또 여기에 마음을 주었다가 저기에 홀딱 빠지는가 하면 분위기에
약했다. 마지막으로는, 나비들이 그를 아주 좋아하는 듯이 보였다. 나비
들은 그의 주변을 맴돌다가 몸 위에 내려앉곤 했다. 대충 이런 연유로 해
서 그의 법명은 <호접 도인>이었다. 꽃가루를 옮기며 이 꽃 저 꽃으로 날
아다니는 나비처럼 사이훙은 아름다움에 이끌려 다녔다. 하지만 그는 결
코 인생의 한 단면에 오래 머무르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화산에는 두 마
리의 나비가 있었다. 사이훙은 아름다움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형
후디에는 그 자신이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후디에는 동생이 성취하고자 열망하는 것을 이미 전부 구현한 듯하였
다. 총명하고, 재치 있고, 발음이 또렷또렷한 그는 학식이 최고 경지에
오른 학자에서 세속의 대신에 이르기까지 누구와도 토론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박식했다. 그는 자유시 경연 대회에 참가할 정도로 문장력도 좋았
다. 문학, 역사, 철학에 능통하다는 암시였다. 음악가로서의 기예 또한
소문이 자자했다. 세속적 자극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노도사들초
자 후디에가 피리 연주를 할 때는 미소를 지었다.
후디에는 수년 동안의 무사 생활로 완벽한 육체를 다져 놓은 미남자였
다. 매끄러운 얼굴은 신체 단련을 한 결과 발갛게 상기된 빛을 띠었다.
두 눈은 항상 방심을 허락치 않을 만큼 날카로왔다. 그는 보통 만나는 사
람 모두에게 매력적인 미소를 보냈다. 사람들은 길을 걷다가도 그에게 경
탄의 눈길을 보내며 돌아봤고 어른들은 그가 성격이 좋고, 언제든지 건전
한 충고를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는 젊은이로 생각했다. 화산의 젊은 수
행자들은 후디에가 수행자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더욱 더 그를 숭배하
였다. 그는 대사부가 양자로 삼은 고아였다. 그는 도관과 세속적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을 지니고 있었다.
사이훙이 작은 잔디밭에 도착했을 때, 후디에는 벌써 와서 일곱 명의
다른 학생들 속에 끼여 있었다. 그는 손에 봉을 들고 동급생들을 가르치
고 있었다. 그는 배우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따라서 친구들을 돕는 일에
도 인색하지 않았다.
[나는 이 봉술을 이해 못 하겠어.]
산시성()출신의 날씬한 젊은 학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산둥()지방의 강한 악센트를 가진 다른 학생이 이렇게 불평을 했
다.
[나도 이 봉술을 이미 배웠거든. 그런데 대사부께서 동작들 중 일부를
바꿔 버렸어. 두루미 신선은 아마 그 일을 잊어버렸겠지.]
[그래 맞았어. 두루미 신선은 노쇠했어. 망령이 들었을지도 모르지.]
산시성 출신이 맞장구를 쳤다.
[두루미 신선은 한창 젊은 우리들보다도 활력이 넘치시는 분이지. 사부
는 시작 대회에서 당선한 적도 있고 과거 시험에도 급제하셨어.]
후디에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우리도 다 아는 사실이잖아.]
산시성 출신 학생이 불만스러운 듯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끼여들지 않았다면, 이 봉술은 진작 끝났을거야.]
[끝났을 거라고? 자네들은 고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군.]
후디에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고전? 이 시대에? 그리고 이 나라에?]
산둥에서 온 친구가 비꼬는 투로 말했다.
[잠에서 깨어나라구, 사형. 지금은 1941년이야!]
[옛날 속담도 몰라?]
후디에가 참을성 있게 말했다.
[<지식의 바다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면 육지에 닿을 수 없다.>라는 속
담이 있지. 사부님께서는 여러 가지 다른 변형을 다 기억하고 계셔. 그런
데 지금은 너희들에게 여러 발전 단계를 다 거쳐가도록 지도하고 계시지.
한 가지 기술을 섭렵하고 나면, 그때는 그것을 더 세련되게 다듬고 그 다
음에는 더욱더 갈고 닦는 것이야. 이어지는 과정은 똑같지만, 그 동작들
은 깊이가 더해지면서 더욱 정교해지지. 이런 식으로 하여 동작이 새로워
지니 너희가 흥미를 잃지 않게 될 것이고, 다음에 어떤 동작이 올지 정확
히 모르니까 호기심이 동하게 될 터이니 너희는 지루하지 않게 배울 수
있거든.
무릇 모든 인간의 활동은 다양성을 지니고 있지. 무용, 음악, 회화, 물
론 운동도 포함해서 말이야. 대주제를 고수하면서도 개인의 특성과 순간
적인 생각까지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지. 사부님은 너희의 이해 정도에 맞
추어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봐야겠지. 너희가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신단다. 그리고 그 동작이 진부해 지는 때를 알
아차리고 앞으로 전진하도록 새로운 작은 회전 동작을 가르칠 태세를 갖
추는 거야.]
[쉿!]
다른 학생이 후디에의 말을 끊었다.
[사부가 오신다!]
학생들은 급히 줄을 맞춰 섰다. 서둘러 줄을 서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사이훙은 두 명의 어린 학생들을 눈 여겨 보았다. 후디에의 말에 그들이
감명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사부를 본 순간 사이
훙의 심장은 쿵하고 내려 앉아 버렸다. 사부는 신경질적인 표정이었다.
60초반의 두루미 신선은 몇 가닥 안되는 뻣뻣한 머리카락을 줄로 엮어
서 상투를 틀고 있었다. 구릿빛 피부는 회색 수염과 대조를 이루었다. 작
은 입술 사이로 깨진 이빨이 드러났다.
두께가 얇은 매부리코는 붓으로 획을 그은 것 같은 두 눈을 갈라 놓았
다. 곁눈질을 할 때는 예리하게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눈밑살이 처
지지는 않았지만, 낮에는 햇빛을 받고 밤에는 등잔 아래서 몇 시간씩 독
서를 하느라 주름살이 잡혀 있었다.
사부의 법명은 그의 외모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몸은 너무 말라
막대기 같았으며, 등은 살짝 굽은데다 움푹 팬 동굴 같았다. 목은 보통
사람보다 길어서 눈에 금방 띄었다. 사실, 그의 외양은 허수아비 같았다.
하지만 사이훙은 근육의 움직임을 느껴 보기 위해 사부의 몸을 만져 본
적이 있었다. 살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아무리 손에 힘을 주어
도 뼈를 만질 수 없었다.
두루미 신선은 습관적으로 뒷짐을 지고 다녔다. 도복의 긴 소매가 양손
을 덮으면 팔이 없는 모습이 되어 흡사 조용히 서 있는 두루미 같았다.
머리와 몸뚱이를 가늘고 긴 다리 위에 얹고 서 있는 그런 형상이었다. 사
부는 수업에 들어가지 전, 앞에서 학생들을 하나하나 주시하면서 왔다갔
다 했다.
[안녕하십니까? 사부님.]
학생들이 일제히 인사를 했다.
[흥! 나를 사부라고 부르지도 말아라! 그렇게 잡담이나 하고 떠들다니
도대체 규율이 서지를 않았어! 산길을 올라오면서 너희가 떠드는 소리를
다 들었다.]
학생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사부님, 모두 저의 잘못입니다.]
후디에가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섰다.
그 순간 붓으로 그린 것 같은 두 눈에 불이 붙었다. 손이 가볍게 밑으
로 내려섰다. 후디에는 아주 인내심이 강했지만 얼굴이 벌겋게 상기 되었
다.
[감히 네놈이 말을 하다니!]
두루미 신선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후디에가 절을 하며 말했다.
[이 일은 전적으로 이 못난 놈의 죄입니다.]
[네놈이 제일 연장자이니 네 책임이니라.]
[그렇습니다. 제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비난을 받아야 할 사
람은 바로 접니다. 저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사부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사이훙은 감탄하여 사부를 쳐다보았다.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저 놈은 이 늙은이가 자기를 너무
좋아해서 벌을 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다. 교활한 놈! 좋다. 준비,
시작!]
사부가 명령했다.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나가 일제히 봉을 휘둘렀다.
봉의 동작을 모두 끝냈을 때 두루미 신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는
칭찬도 꾸지람도 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성취한 정도를 본 후 그 수준에
서 교수를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 이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니라.]
사부는 봉을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봉을 손으로 꽉 쥐면 안된다. 손바닥과 손가락을 이용해 조정해야 한
다. 봉을 아래로 내려칠 때는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그 동작에 힘을 집
중시켜야 한다.]
사부는 사이훙을 바라보았다.
[사이훙, 이리 나오너라. 이 부분을 시범 보여라.]
사이훙은 있는 힘과 기량을 다하여 동작을 연기했다. 그는 자신이 있었
다. 도시에 있을 때 무술 경기에 나가 우승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련의 동작 자체는 번개 같이 빠른 속도로 발을 움직여 공세를 취하
는 것으로 사이훙에게는 진부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 하나의 동작은 변
형 동작의 최고 수준으로 인정된 기술들을 한데 모은 것으로 아주 탁월했
다.
사이훙은 자랑스럽게 봉술 동작을 끝냈다.
[겨우 봐줄 만하군. 그 정도 밖에 안 되냐?]
사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두루미 신선은 잔디밭 가운데로 힘차게 뛰어올랐다. 기괴한 자세, 익살
스러운 걸음걸이, 애처로울 정도로 야위었다는 인상을 온데 간데 없이 사
라져 버렸다. 모든 근육들은 날쌔게 움직였다. 팔다리의 근육이 생동감
있게 꿈틀꿈틀 움직이는 게 손에 잡힐 듯이 확실하게 보였다. 봉은 성난
휘파람 소리를 내며 창공을 갈랐다. 봉의 끝이 휘휘 돌아가며 그 추진력
으로 자유자재로 휘었다.
사부는 신기에 가까운 동작을 보이고서도 숨을 헐떡거리는 기색 조차
보이지 않았다. 두루미 신선은 신사가 방금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는 일을
끝낸 것처럼 아주 자연스런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분기탱천하던 그 무
서운 괴력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동작 준비!]
사부가 사이훙에게 말했다. 사이훙은 자세를 낮추었다. 사부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섬뜩했다. 사이훙은 몸의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
며 동작을 취했다.
두루미 신선이 사이훙의 몸을 스치면서 팔꿈치로 찌르기도 하고 밀기도
하면서 사이훙의 팔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사이훙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
직여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대신, 사부의 살아서 꿈틀대는 힘이 사이훙
의 몸 속으로 들어왔다.
[그것 봐라. 더 좋아지지 않았냐?]
사부가 이렇게 물었다. 섬세한 움직임을 따라가면서 몸 안으로 뭔가가
밀려드는 느낌이 일었다. 사이훙은 무술 동작이 발전하고 깨달음이 새로
워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사이훙은 봉을 향한 자신의 자세가 새로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봉을 쥐면서 봉의 부드러운 표면을 느꼈다. 여러 방
향으로 봉을 돌리면서 보이 압력을 받아 회전하고 변화하는 것을 알았다.
그의 손아귀에 들어온 봉은 딱딱하고 굽힐 줄 모르는 저항력이 있었지만,
그 길이대로 자유롭게 구부러졌다. 사이훙이 봉에 힘을 쓰면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정도로 봉이 떨리면서 그의 힘에 대한 반응을 보였다. 나무 작대
기와의 대화 - 한편으로는 그의 명령에 복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무게에 저항하면서 이루어진 - 는 사이훙에게 자신의 신체에 대해 더 많
이 깨닫게 해 주었다. 몸 밖에 있는 무거운 봉을 돌리면서도 몸 안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것 같았다.
사이훙은 팔과 어깨 근육의 수축과 이완 그리고 가슴의 힘이 어떤 역할
을 하는지를 깨달았다. 폐에는 풀무가 움직이는 것 같은 리듬이 있으며
일련의 봉술 동작의 요구에 부응하여 가속도가 붙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쨌든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전에 알고 있던 지식에 다시 변화가 일어
난 것이다.
사이훙은 두루미 신선과 과연 접촉이 있었는지도 의아스러웠다. 지식이
직접 전달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바로 그런 현상
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사이훙은 잠깐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었
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오늘 배운 봉술을 완성하고 새로 터득한 깨달음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 연무를 계속했다. 재검토하고 완벽하게 다듬고,
동작들을 하나하나 섭렵해 나갔다. 두루미 신선은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
면서 교정을 해주고 학생 개개인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침내 그들이 피곤
해 하는 것을 보고 유쾌한 듯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내가 너희에게 철학을 얘기해야 겠구나. 재미있지? 성직자 지
망생에게도 철학이 더 필요하다니 말이다.]
농담이었다. 그러나 수업 중 웃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대담한 학
생 몇몇 만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봉과 검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해 주마.]
사부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봉의 핵심적 본질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한 가지 이미지를 만들어 주겠
다. 봉은 우산에 비유될 수 있다.
사이훙은 당황했다. 봉이 어떻게 우산과 같을 수 있을까?
[상상력을 좀 발휘해 봐라.]
사부가 재촉했다.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는 즐거워했다. 다른
학생들 보다 경험이 풍부한 후디에조차 일찍이 그런 비교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두루미 신선은 그 비밀을 털어놓았다.
[봉을 적절히 활용하려면 봉을 몸에서 여러 각도로 변경시켜야 한다.
수련자를 중심으로 펼치는 것이다. 봉이 미치는 범위가 있다. 신체는 우
산 자루와도 같으며 봉 자체는 움직이고 펴지는 우산의 살에 비유할 수
있단다. 우산은 펴지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 봉은 몸 가까이 있기도
하고 밖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그러나 우산과 똑같이 손의 지레 작용에
의해 나오는 움직임이니라. 우산 자루와 살은 명백히 서로 분리되어 있
다. 그것들은 서로 반대되는 각도에서 작용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봉의
원리인 것이다.
이제 검()의 철학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 보자. 역시 거기에도 적
절하게 부합되는 이미지가 있다. 검은 용에 비유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
다. 검의 특징은 봉과는 정반대이다. 봉은 늘 별도의 도구에 불과하지만,
검은 검사와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 인간과 무기 사이에 차이점이란 있
을 수 없는 것이다. 둘은 한 몸이니까 말이다. 구름 속에서 하늘로 올라
가는 용처럼 몸을 뒤틀고, 방향을 틀고 비비꼬고, 껑충 뛰어 오르거나 비
상한다.
자, 이제 너희의 칼을 잡아서 들어라. 다루는 법은 봉과는 다르다. 너
희와 칼은 한 몸이다. 따라서 수족은 그 단위의 일부인 것이니라. 모든
집중력을 환히 밝혀서 칼날 끝에 모아라. 칼날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게
하여라! 여기 길을 찾고 있는 용이 있다! 시작!]
사부가 강조했던 대로 검은 사방으로 뻗어 나가지 못했다. 칼이 닿는
범위는 확실히 봉이 미치는 범위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검을 쓸 때
는 칼날을 몸에 붙여 세우고 빠르게 선회시킨다. 전투에 임해서는 짧은
거리에서 살짝살짝 피해 가면서 몸과 다리를 휘휘 돌리고 칼날로 비스듬
히 얇게 저미는 것이 검법이다. 칼이 바깥쪽으로 밀릴 때는 뒤로 빼내기
만 할 것이 아니라, 각도를 다르게 잡아 크게 베면서 제자리를 다시 찾아
준다. 그 일련의 동작은 뱀이 꼬불꼬불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생동감이 넘쳐 흘렀다.
이 특별한 검법은 양손을 다 쓰는 동작이 거의 없다. 비워 둔 한 손은
결코 휘두르고만 있어서는 안 되게 되어 있다. 그 손 역시 취해야 할 정
교한 동작들이 있다. 검지와 중지는 쫙 펴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둥글게
구부려 엄지 손가락 밑에 대고 있어야 한다. 이 손 모양은 단순히 좌우
균형을 취하려고 검을 모방하는 동작이 아니다. 이 동작을 마력적인 수호
신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의 검객들은 칼날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날 때마다 검의 신비한 힘이 영혼을 상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
고 손 동작을 하면 검법을 쓰는 사람은 해를 입지 않는다고 믿었다.
검은 인생의 총체적인 한 단면이었다. 황제와 관리는 항상 보석이 박힌
상감 세공의 아름다운 칼을 지니고 있었다. 귀족들은 철퇴나 도끼 같은
거친 무기보다 검을 가지고 싸움을 벌였다. 고대의 유명한 시인 중에 검
의 전문가가 많았다. 검에는 개인의 성품과 초 자연적인 힘, 그 소유자의
운명까지 담겨 있다고 믿어졌다. 배나무로 만든 칼은 신비한 마력이 있다
고 믿어졌기 때문에 도인들이 굿을 할 때 사용하였다.
사이훙은 칼을 잡는 것이 다른 물건을 잡는 것과는 다르게 느꼈다. 검
은 수련용 도구 그 이상이었다. 그는 칼에 얽힌 수많은 전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또한 그에게 진짜 살인용 칼은 없었으므로 그것은 단순한 무기라
고 할 수 없었다. 보검()은 정말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칼을 잡아보면 즉시 느낄 수 있었다. 보검이 사용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
같았다. 검객들의 표현대로 <살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쥐고 있
는 칼은 의식, 전장, 충성, 마법, 그리고 종교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사
이훙은 검도와 인생의 진수를 칼을 만지며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훌쩍 뛰어 올라 칼 쓰는 동작을 해보았다. 느낌이 아주 좋았다.
단지 칼을 세게 내리치기만 하지는 않았다. 검의 본성은 섬세하기 때문에
우아함과 특별한 감각을 요구하였다. 칼의 성질로 보아 여러 가지 다른
근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봉을 쓸 때처럼 길이가 긴
근육이나 덩치가 큰 근육이 아니었다. 칼은 팔과 몸 속에 깊이 들어 있는
수십 개의 작은 근육을 필요로 한다. 힘의 정교한 조정이 있어야 했다.
봉술은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검술은 교묘하고 우아한
달필로 수필을 쓰는 것과 같았다.
사이훙은 검의 뿌리가 자기 몸속에 내려 있다고 느꼈다. 그가 한 번 숨
쉴 때마다 칼끝 뾰족한 곳까지 그의 숨결이 전달되는 듯했다. 사이훙은
전속력으로 칼을 휘두르며 온 힘을 다 바쳤다. 두 발이 자유자재로 움직
였다. 전에 어떤 기예를 펼치거나 운동을 해봤어도 이런 희귀한 순간을
맛볼 수는 없었다. 힘을 쓰지 않는데도 저절로 몸의 동작이 흘러나왔다.
두루미 신선은 사이훙의 검술을 주목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칭찬은 자만심을 키워 준다. 그래서 단지 이렇게 말했다. [나쁘
지는 않군.] 그리고 학생들에게 여러 번 반복하여 재 복습하라고 지시했
다.
봉과 칼을 써서 수련하는 이 일련의 특수 동작들은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체 단련에 그 목적이 있었다. 사실 중국은 오락용 스포츠가 거
의 전무한 중세 상회였다. 황소 없이 쟁기를 끄는 농부나 일대 일로 시합
을 하고 싸움을 벌이는 무사가 있었다. 이들은 축구 같은 스포츠를 하려
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운동은 중국인의 일상 생활에서 저절로 우러나
는 행위였다. 별도의 인간 활동으로 생각되는 일은 없었다. 정작 젊은이
들에게 체육 교육을 시켜야 할 필요가 생겼을 때, 중국인들은 생활 속에
서 친숙했던 두 가지 무술을 골라 건강 증진에 이용했을 뿐이다.
봉술은 검술과는 달랐다. 봉은 수련자에게 신체의 양면을 구사할 수 있
는 법을 가르쳐 준다. 봉은 움직여 뻗치는 길이에 따라 각도를 맞추어야
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번갈아 돌리면서 뻗치는 길이에 따라 봉을 찌
른다. 보통 15분간 지속력으로 전속력을 내서 봉을 휘두르면 세찬 저항력
이 일어나 근육이 단단해지면서 조각처럼 다듬어진다.
검은 우아한 몸가짐, 마음가짐, 그리고 태도를 가르쳐 준다. 검술은 봉
만큼 육체적으로 강한 힘을 낼 수는 없다. 그 대신 칼끝에 집중력을 모아
정교하게 베고 피하는 도형에 역점을 둔다. 보검은 무기를 차단하기 위해
쓸 수는 없다. 그것은 쉽게 부러지기 때문이다. 이런 몇 가지 칼의 특징
은 여러 가지 검법에 영향을 미쳤다. 무릇 검술가는 몸을 비틀고, 회전하
고, 차고 오르며, 몸을 낮게 웅크리는데 이는 가장 작은 틈새를 노리는
날쌘 검객을 모방한 것이다.
교육에 쓰이는 이들 무기의 무게는 다양했다. 처음에 배울 때는 가벼운
나무로 만든 무기를 쓴다. 수련생의 실력이 늘면 무기의 무게 적응훈련제
에 따라 더 무거운 무기를 제공받았다. 가장 무거운 것은 그 무게가 11킬
로 이상 나갔다. 최고의 무게까지 다 통과한 학생은 2킬로 정도의 가벼운
무기를 받았다. 그 다음에는 극적 효과와 표현을 섞어서 아주 힘있게 그
리고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빨리 그 일련의 동작들을 펼쳐 보일 수가 있게
된다.
두 시간이 지난 후 두루미 신선은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에게 휴식을 허
락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산으로 산보
를 나갔다.
도인들은 활동을 할 때마다 철저하게 이론적 근거를 생각했다. 산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산보는 힘과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 주므로 몸에
좋았다. 다리의 힘을 키울 뿐 아니라 순환계와 호흡계의 작용을 자극한다
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물론 산보에는 종교적 의미도
함축되어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걸을 때라도 식물이나 곤충을 밟아서는
안 되었다. 완벽한 침묵을 지키고 걸으면서 그들이 지나치는 자연의 미와
담겨진 뜻을 성찰하도록 하였다. 자연과 도()는 완전한 동일체는 아니
었다. 그러나 자연은 도의 좋은 본보기였다. 따라서 예리한 인식력으로
자연의 미묘한 내적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학생이라면 자연을 보고 도에
대한 깨달음을 고양시킬 수도 있으리라.
산보를 시작하면서 사이훙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 짚신은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자갈길 위에서 저벅저벅 소리를
냈다. 다리의 근육이 굽혀졌다 펴졌다 하는 느낌이 왔다. 허벅지에 찬 긴
각반이 줄었다 늘었다 하고 그가 한 발짝 두 발짝 내딛으면 오금이 움직
거렸다. 마침 언덕받이로 통하는 길이 시작되었다. 대퇴부의 사두고근까
지 합쳐져 모든 근육들은 상호작용을 하며 서로서로 변화에 상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이훙은 산을 구경하고픈 열망 때문에 발걸음을 재촉했
다.
길 옆에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풀, 덩굴의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서로 내기라도 하듯 땅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조그만 붉
은 파리들과 햇빛을 받아 얼룩덜룩 눈이 부신 반점 모양의 각다귀들이 빙
빙 나선형을 그리면서 윙윙거렸다. 그는 가슴 가득히 숨을 들이마셨다.
화산은 특히 봄날씨가 따갑지만, 오늘은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어와 따
스한 느낌을 주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되어 기뻤다. 벌판에서 풍기
는 풀내음이 향긋했다. 풀과 잡초, 지천으로 깔린 초목들, 작은 청록색
이파리들과 그 속의 자줏빛 꽃잎들, 짧은 줄기 위에서 물결치는 수많은
노란 꽃잎들, 이 모든 것이 한데 모이니 나무, 산, 시냇물만큼이나 장엄
한 한 폭의 풍경화가 되었다. 누구든 감사의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
다.
산마루를 향해 올라가노라니 시야를 가로지르는 그림자가 떨어지기 시
작했다. 나무들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사이훙은 가문비나무, 전나
무, 소나무 그리고 그 일대에 우거져 있는 활엽수에서 새싹이 돋는 것을
보려고 고개를 쳐들었다. 곧게 뻗은 장미가 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
다. 더러는 가지가 부러져 있고, 폭풍우에 쓰러져 넘어진 가지, 모양 없
이 베어진 가지도 있었다. 그러나 자연 그대로이기에 더더욱 아름다운 풍
경이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아치처럼 뒤덮은 나무들, 그러나 햇빛을 받
아 희게 드러난 나뭇가지들은 하늘을 덮는 숲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둘
레가 너무 커서 팔로 안을 수 없는 아름드리 나무들, 땅에서 솟아 나온
나무의 근육인 양 툭툭 불거져 나온 몸통 큰 나무들은 수세기가 넘는 나
무들이었다.
사이훙은 물소리를 들었다. 산길 옆, 바위 너머에 세차게 흐르는 시냇
물이 있었다. 시냇물 소리에는 무언가 특이한 게 있었다. 시냇물 소리를
하나하나 구별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들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시냇물이 바위 위로 떨어질 때마다 쏴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마치 악단의 대 연주 같았다.
새들이 하늘에서 큰소리로 노래했다. 새들의 합창 소리는 좔좔 흐르는
물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들은 탁탁 부딪치는
타악기였다. 수천의 나뭇잎들이 일제히 소리내어 박자를 맞추었다. 합창
이 뒤에서 받치는 가운데 이따금씩 독주도 있었다. 애처롭게 울어대는 곤
충과 윙윙 거리는 벌들.
사이훙은 시냇물이 흐르다 끊어진 곳에서 축축이 젖은 땅덩어리가 뿜어
내는 흙 냄새를 맡았다. 공기는 나무 밑이 더 차거웠다. 소나무, 가문비
나무와 삼나무 냄새가 흙과 바위 냄새와 뒤범벅되었다. 냄새는 그의 본능
을 자극하였다. 그 냄새들은 원시적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인간이 정교하
게 가꾸고 생활의 수단으로 만든 감각 중에서 또는 인간이 질식시켜 버린
감각 중에서 후각이야말로 가장 단련이 덜된 마지막 감각이다.
시각은 회화, 예술, 미를 숭배함으로써 채워진다. 청각은 음악을 듣고
즐거워한다. 미각은 음식을 대하면 굽실대며 아첨한다. 사람들은 촉각으
로 수천 가지 관능의 희열을 맛본다. 또한 모든 감각은 금욕적이고 점잖
은 체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그만큼 작아졌다. 시각은 회색 담장 때
문에 무디어질 때로 무디어졌다. 청각은 침묵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촉각
은 두꺼운 옷에 덮여 죽어갔다. 미각은 간단한 음식에 맛들이는 곤욕을
치렀다. 오로지 후각만이 억압받지 않고 자유를 누렸다. 일찍이 코를 틀
어 막은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렇게 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에 다름 아니었을 테니 코는 자유로워야 했다. 그렇게 해서 후각은 마음
대로 감각을 발휘했다. 코가 더러운 악취를 탐지하면, 온 몸은 경련을 일
으킬 수도 있다. 또 우리 몸이 사향과 향료를 감지하여 쾌락을 추구할 수
있게도 한다. 심지어 성인들도 극기를 추구하기 위해 후각을 승화 시킬
수 없었다. 도저히 냄새를 맡지 않고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맑은 산
공기와 코끝은 자극하는 향내음을 맡으며 후각을 달랬다. 후각은 혼자서
쾌락을 맛보고 기억의 목록을 만드는 강한 감각이다.
젖은 땅 냄새가 송진 냄새와 함께 코를 찌르자 퍼뜩 지나온 과거가 생
각났다. 사이훙은 다양한 식물들, 곤충들의 기괴한 짓들, 폭풍이 남기고
간 잔해들을 새로이 발견하고 나서 세속을 파헤치며 느끼던 흥분을 되살
렸다. 사이훙은 숲속을 거닐면서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평생 한 번도
숲이 달라진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무한한 변화가 일어났지만 숲은 항상
계절의 순환에 순종했다. 자연에서 그 점이 기이한 현상이었다. 만물은
자연의 질서에 엄격히 복종했다. 그러면서도 만물은 하나 하나가 다 달랐
다. 그는 햇빛을 받으며 우아하게 활처럼 굽어 있는 가느다란 가지들을
보았다. 나뭇잎들은 서로 달랐지만 다 같은 녹색이었다. 그러나 가지의
뒤틀림, 엽맥들의 모양, 또는 잎의 톱날처럼 뾰족뾰족한 면들은 다 제각
각 이었다. 자연은 규칙적인 동시에 천태만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더 높이 올라갔다. 거대한 옥석들, 그 밑바닥에 끼여 있는 이끼
류, 알알이 몸을 드러내어 깨끗해진 돌들이 땅을 덮고 있었다. 키 작은
잡목은 말라 죽기 직전이었다. 바위와 메마른 땅 사이에 비옥한 토양이란
없었다. 그래서 키 큰 나무와 식물만이 바위 틈새를 비집고 땅속 깊이 뿌
리를 내릴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들은 쑥쑥 자라났다. 더 불리한 환경이
더라도 충분히 살아 남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몇몇 다른 식물들에겐 이점도 있었다.다른 물체에 붙어 사는 담쟁이 덩
굴이 그랬다. 하지만 대부분 잘 자라고 있는 식물은 키 큰 나무였다. 나
무들은 탑보다 키가 더 컸다. 가지들은 힘차게 뻗어 나갔다. 그러나 낮은
계곡에서처럼 하늘을 뒤덮지는 않았다. 하늘은 크게 조각난 추상의 아름
다움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하늘의 짙푸른 청색은 색조가 너무 선명해서
나무의 전경이 아닌 하늘의 전경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곧장 가서 산마루가 나오는 길목에 이르렀다. 산을 따라 올라가
면 지구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도인들의 믿음이었다. 침술가들이
혈도를 연결해 정문()의 과학을 수립한 것과 같이 도인들도 땅속에
숨어 있는 지맥들의 학문적 체계를 완성했다. 이런 종류의 길을 <용의 정
문>이라고 불렀다. 옆모습이 몸을 뚤뚤 만 용을 닮은 산등성이에 그 정문
이 있었다. 주요 맥은 당연히 용의 등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엇갈려 올
라가는 산길은 산의 이런 흐름을 침범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기()의 자
연스런 흐름을 따라가면 조화를 깨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어려운 산행이었다.
어려운 산행이지만 걸음을 재촉해서 올라가니 비길 데 없이 웅장한 먼
산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민둥 바위산 위로 더 높이 올라갈수록 오면서
볼 수 없었던 지평선이 시야 가득히 장엄하게 뻗어 있었다. 발밑에 깔린
구름은 짐승의 무리처럼 떼를 지어 몰려가고 있었다. 왼편에서는 산맥이
줄지어 달리다 마침내 안개 낀 푸른 하늘 속으로 숨어 버렸다. 사이훙은
아래 쪽에 폭포의 흰 물줄기가 끊어지는 곳마다 울창한 숲이 우거진 작은
언덕이 있는 것을 보았다. 오른편에는 인간의 흔적을 말해 주는 여러 잡
동사니들과 들판이 있었고, 수십 킬로쯤 되는 곳에 몇 개의 마을이 보였
다.
정상을 향해 올라가노라니 사이훙의 모습은 우스울 정도로 왜소했다.
산의 위용은 아래에 있는 문명 세계를 아주 하찮게 만들었다. 끝까지 올
라가 정상에 서 있으면 무언가 그가 천국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
이 있었다. 사회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정상에
서는 사회의 자취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중국 본토를 뱀같이 휘어 횡단하는 갈색의 황하조차 작게 보였다. 그리
고 속세는 그 힘찬 강물에 비하면 훨씬 더 미약하였다. 바위산에 올라 먼
곳에 있는 속세를 내려다보노라니 사이훙은 마음이 툭 트여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수련 장소로 다시 내려올 때까지 1.5킬로 정도 더 걸었다. 정오
가 다 된 시간이었다. 사이훙은 덥고 갈증이 났다. 먼 길을 걷느라 피곤
해진 허리와 다리가 쑤셔왔다. 늙은 소나무 밑으로 다가갔다. 나무껍질과
솔방울이 있는 부드러운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루미 신선이 말을
시작했다. 산행 이후 입 밖으로 낸 첫마디였다. 그러나 별 관심이 없던
사이훙은 때마침 바짓가랑이 위로 기어오르는 무당 벌레를 관찰하고 있었
다.
[특별한 식물을 발견한 사람 있느냐?]
사부가 물었다.
[접니다, 사부님.]
산시에서 온 젊은이가 말했다.
사이훙은 혼자 생각했다. <좋아, 당신들은 강의나 다시 시작해라. 나는
좀 쉬어야겠으니까.>
사이훙은 따뜻한 햇볕을 쬐려고 다시 앉았다. 산행 끝에는 항상 토론이
열린다. 두루미 신선은 질문을 던지거나 학생들의 관찰 결과를 듣고 싶어
했다. 그는 학생들이 예리한 관찰을 했다는 확인을 원했다. 산시 출신의
수련생은 몸은 허약했지만 열변가였다. 제자들은 그가 사부의 마음을 기
쁘게 하기를 바랐다.
[사이훙!]
사부가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깜짝 놀란 사이훙은 자기가 얼마나 깊이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를 곧 알아차렸다.
[네, 사부님.]
그는 재빨리 대답했다.
[노란 귤잎 하나가 우리가 지나다니는 길에 떨어졌다. 그것을 말해보아
라.]
떨어지는 잎이라고? 봄에? 사이훙은 필사적으로 생각을 더듬어 봤다.
하지만 어떤 잎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것을 못 봤단 말이냐?]
두루미 신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투사가 되는 것을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네게 만일 화살이라도 날아
왔더라면 어쩔 뻔 했느냐?]
사부는 사이훙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당장
떠오르는 것은 자신이 이처럼 바보 같은 꼴이 된 게 너무 싫다는 생각뿐
이었다. 하지만 사이훙은 겸양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산에 갔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 그는 자존심을 누르고 사부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자 사
부는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이런 것들은 눈으로 봤어야지. 사물을 보면 왜라는 질문을 꼭 해야 한
다. 그것은 겨울을 살아 넘긴 것일까? 나무는 병이 들었을가? 물이 부족
했을까? 무엇 때문에 쓰러졌을까? 나뭇잎이 떨어졌을 때 그 절묘한 색을
관찰하려고 노력이라도 했다면 녹색과 갈색의 무리를 배경으로 귤잎과 황
금빛이 나풀거린 것을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은 감
각이 둔한 것이다.
우리는 자연 속에 있기 위하여 이 산 위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부정한
행동, 불쌍한 행동, 잘난 체하며 문명이라고들 하는 정신적 오염을 피하
는 것이다.우리는 시끄러운 소음, 인간의 악취, 음탕한 웃음과 자기 연민
속의 한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를 순화하고 성스러운 삶을 영위하
기 위해, 자연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자연과 동물들은 순진 무구하다.
우리는 사슴의 시체를 발견하거나 뇌우에 찢겨진 나무를 보면 자연을 잔
인하고 무자비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길이요
자연의 논리이다. 자연에는 인간이 갖는 희망적 관측과 어리석은 감상 따
위는 없다. 이 순수함과 천진함은 신과 신성과 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결과이다. 만약 우리가 도와 조화를 이루고 싶다면, 본질적으로 도와 일
치하는 곳에 자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선물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자연 속에 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종종 놓치고 못 본다해도 자연은 말씀으로 가득 차 있
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도 이해할 수 없다 한들 눈이 닿는 곳마다 너희를
위한 수만 개의 성스러운 말씀이 들어있다. 단지 너희들이 볼 수 있는 눈
을 갖지 못했을 뿐이다. 그 나뭇잎은 신이 주신 말씀의 암시일 수도 있
다. 그러나 너희가 그만 놓치고 말았구나.]
수업이 끝나고 사이훙은 정오의 기도와 점심 식사를 위해 산 중턱을 오
르기 시작했다. 그는 후디에와 동행하는 것이 기뻤다.
[얘야, 나는 며칠 후에 또 하산할 거란다.]
[그렇게 빨리, 형? 여기 온 지 한 달밖에 안 됐잖아.]
사이훙은 불안감을 느끼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마음이 점점 좌불안석이야. 게다가 베이징에 가서 신경
써야 할 일도 있고.]
[물론 형의 여자 친구겠지.]
[그래 여럿이 있지만 그녀가 제일 특별한 존재거든.]
후디에가 미소를 지었다.
[형이 부러워. 형은 모험을 찾아서 온 중국을 떠돌아 다니는군. 부자도
미인도 만나면서 말이야. 사람들은 형을 찬미하고 존경해 형의 인생은 너
무나 충만해 있어.]
[그런 생활은 너에겐 안 맞어. 너의 운명은 수도자가 되는 것이란다.
그 때문에 의미도 잇는 것이고. 너는 타고난 수도자라고 모두들 말하고
있단다.]
[그러나 이건 인생이 아니야. 나는 춥고 배가 고파. 하루 하루가 철저
히 규제되어 있어. 경전 암송과 명상은 지겨워. 신체 단련은 단조롭고 고
될 뿐이야. 게다가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항상 반대에 부닥치고 말아.
어느 것 하나 선생님들을 만족시킨 게 없어. 그들은 칭찬할 줄을 몰라.]
[너에게 이 생활을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말은 맞아. 나는 16살 때 도인으로 예정되었어. 내가 한 선택이지
만 아직도 속세의 생활이 생각나. 내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
해. 형도 혹시 의심해 본 적 있어?]
[그렇단다. 물론 있고 말고. 모든 사람은 회의를 품는단다. 내가 의미
를 찾아서 이처럼 혹독하게 여행을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란다. 나는
현명한 도인들에게 배울 수 있을 만큼 많이 배우고 있지. 그리고 바깥 세
상에서도 가능한 한 충실히 산단다.]
[형은 행운아군. 양쪽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것을 취하고 있으니. 형이
쉬고 싶거나 자신을 찾고 싶거나 상처를 치유 받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
곳으로 돌아오고. 그러다 다시 비단옷을 입고 값비싼 보석을 차고 값 나
가는 말을 타고 흥청망청한 연회에도 가고 밤새도록 도박도 하고 여인들
의 사랑도 체험하는군.]
[아, 너를 홍작약루()같은 곳에 데려가 쾌락을 알게 하질 말걸
그랬다. 사부가 아신다면 우리 둘 모두를 벌하실 거야.]
후디에가 웃으며 말했다.
[데려가 달라고 청한 쪽은 나였는데 뭐.]
[내가 동의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이훙은 몇 번이나 후디에와 함께 여행을 했던 때를 회상했다.
사이훙은 금을 입힌 조각물, 밝은 등롱, 물이 첨벙이는 분수대, 향긋한
녹나무와 백단으로 된 병풍이 있는 번쩍거리는 넓은 홀을 떠올렸다. 관능
적인 여자들이 염색된 값비싼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꿈결 같은 악기 선
율 또한 그의 영혼을 흔들었다. 향긋한 음식 냄새, 사향 향기, 꽃이 핀
난초, 아름다운 양귀비꽃의 혼을 빼놓는 듯한 선정적 향기가 다시금 그를
충동질 했다. 손끝에 닿던 마작의 느낌이 다시 살아났다. 촉각으로 느낄
수 있는 아프리카 흑단과 버마산 자단의 냉랭하고 둥근 조각품들의 느낌
이 다시 돋았다.
순결의 맹세가 떠오르면 오로지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던 때였다.
[그런 장소를 구경한 것이 기뻤어. 형이 말하는 온갖 신나는 일들을 들
었어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더라면 충분치 못했을 거야. 하지만 그런
세상은 나에겐 맞지 않았어. 나는 술 마시는 걸 싫어해. 아편도 싫어. 독
신의 약속을 깨뜨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제와 극
기의 엄격한 생활이 최선인지가 궁금해.]
[나는 네가 세속에 흥미가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어. 그러나 너는 그
세계가 너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을 해야 해. 일본인은
이 나라의 엄청난 땅을 차지했어. 장 제스()와 국민당은 충칭(
)의 정부를 다스리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일본과 싸우면서 동
시에 공산당의 등뒤에다 칼을 꽂고 있단다. 아시아 너머의 독일은 폴란드
를 침공했고, 전세계는 전쟁 속으로 빠져 들고 있어. 사람들은 셀 수 없
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서로 죽이고 있어.]
[나는 2년 전 중일 전쟁에 참전했었어. 끔찍한 일을 경험했지. 내 나라
를 위해 싸웠어.]
[그 잔학 행위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단다.]
[형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지? 옌안()의 마오 쩌둥()에게
가담할까? 형처럼 군벌들과 손을 잡을까? 나는 출가인이야. 그리고 정치
는 영원하지 않아.]
[네가 살아오면서 중국에서 하루라도 전쟁이 없는 날이 있었니? 그걸
부정할 수 있어? 이젠 중국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판
이라고. 유럽 전체가 전쟁에 휘말려 들고 있어. 급기야 이 싸움은 미국,
심지어 남미까지 파급될지도 몰라. 전 세계가 파괴되어 있는데 너는 앉아
서 명상만 하고 있다니.......]
[도교는 가슴의 철학이야.]
사이훙이 변함없는 태도로 말했다.
[도교를 근절시킬 수는 없지. 도는 영속적인 것이야. 이 지구가 멸망한
다 해도 도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어. 나에겐 보고 배울 사람들이 있어.
사부님과 사형들이 그래. 그들이 이룩한 수준을 알게 되니 그 수준에 도
달할 수 있는 힘이 한결 더 솟아나고 있어. 물론 나는 그들이 성취한 것
들이 전쟁이나 기타 역경에 영향을 받을 수 없다는 것 알고 있어. 왜냐하
면 그것들은 내적인 승리이니까. 나는 혼자서 의혹을 품고 있을지도 몰
라. 그러나 정치로 씻어 낼 수는 없는 거야.]
[네 신념은 확고부동하니?]
[그래, 확고해.]
[세상은 최후의 계시로 다가갈지도 모르는데 네 생각은 변함이 없구
나.]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통해 나는 좋은 효과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통 사람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아. 더 크고 더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
어. 사람들은 숙명의 장난에 희롱 당하는 불쌍한 인생을 영위하고 있어.
나의 인생은 그렇게는 안 돼. 나는 내 스스로 완성에 이르고 싶어.]
[나도 역시 그래.]
[알아. 형은 완벽 주의자잖아. 우리 둘은 통찰력과 능력을 얻기 위해
희생하지 않으면 안 돼. 단지 목표가 다를 뿐이야. 나는 사부님과 도인의
길을 굳게 믿고 있어. 그런데 형은 어떤지 모르겠어.]
[나 역시 완전함과 고행을 신봉한단다. 그렇지 않고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야. 내 인생의 바깥에 보이는 장식품을 보고 판단하지는 말거
라. 여자와 도박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니까. 너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침착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위인들은 이 혼탁한 지구
상 곳곳에다 질서를 심을 거야. 나는 그 위인들 중 한 사람이 되고 싶단
다. 그러려면 고행과 용기, 지성, 완벽을 향한 매진 그리고 어느 정도의
정화가 수도 생활에 필요한 만큼이나 많이 요구될 것이다.]
[형은 우리가 똑같다고 말하는 거야?]
사이훙이 물었다. 그는 둘을 같게 비교하는 것이 흡족했다.
[용기를 내어 열심히 정진하도록 해라. 수도 생활과 세속 생활은 칼날
의 양면인 것이다.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한 면이 없으면 다른 면도 존재
할 수 없는 것이지. 어느 면이 더 낫다고도 못 한단다. 하지만 우리의 운
명을 이해하는 것은 각자의 의무란다.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길을 따라가
는 것만이 성공의 길이란다. 너는 계속 수도 생활에 정진하거라. 육체적,
사회적 욕구가 가차없이 부정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너의 영혼
은 만족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너는 좌절감에 빠져 주춤거려서는 안 된
다.]
[형, 형의 말은 너무 감동적이야. 형은 왜 수도자로 입문하지 않는 거
지?]
사이훙은 깊이 감동되어 이렇게 물었다.
[아마 나도 그럴 거야. 내가 세속적인 방랑을 끝낼 때쯤이면 말야. 내
경험을 완수하기 위해 여행을 해야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란다. 사부님
들은 말씀하시지. <출가하지 전에 세상을 맛보아라.> 세속 생활을 실컷
경험하고 나면, 다시 돌아와 이곳에서 영원히 머무를 거란다.]
[그러면 그때는 우리 둘이 함께 살 수 있겠네, 항상.]
[그렇단다, 언제든지.]
도관의 동종 소리가 힘차게 산 중턱으로 울려 퍼졌다. 기도할 시간이었
다. 그들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사이훙은 오래된 청동 향로 옆에 서서
형이 뜰을 나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사이훙은 후디에가 과연 세속을 떠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했다. 후디에
는 세상에서 오래 살면서 추문도 많이 뿌리고 다녔다. 비밀 단체의 회원
과 군벌의 경호원 그리고 마약 밀수 조직에서 호위대의 일원으로 활동하
기도 했다. 그러나 대사부는 잠자코 있었다. 사이훙은 이 점에 몹시 당황
했다.
사이훙 자신은 농담과 못된 장난을 하고 게으름을 피운 것 때문에 수
차례나 벌을 받았던 반면에, 후디에가 벌 받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
었다. 대사부는 후디에의 사생활에는 반대했지만, 그것은 그들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에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두 사람 간에는 그것이 토론이든
질책이든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공개되지 않았다. 대사부와 다른 도사들
은 그를 계속해서 아들처럼 사랑했다. 후디에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도 한
결같았다. 후디에는 화산에 돌아오면 그를 양자로 맞은 가족들의 흔들림
없는 성원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훌륭한 성취 결과를 가정 교육 때문으
로 생각하고, 화산에 정기적으로 성금을 납부했다. 그러나 그 지역 원로
들은 여러 번 화산에 올라와 그의 비행을 고발하고 그를 체포하라고 주장
했다. 사이훙은 후디에의 기부금 납부가 비행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는
지 정말 의아스러웠다.
사이훙은 연달아 서 있는 문을 지나서 풍옥천()이 있는 남봉 사
원으로 갔다. 그는 들어가서 청색 도복을 입은 도사들 사이에 끼여 기도
를 올렸다. 맨 앞줄에는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기도를 주관하는 도사들이
큰 소리로 경전을 낭송하고 있었다. 연주자들이 찬가를 반주하였다.
정교하게 꾸민 신단 저쪽에 그들이 모시는 신이 보였다. 평생 동안 자
기 수련을 통해 불사신이 되신 과거 화산에 살던 선각자들의 모습이었다.
멀리서 봐도 그 성상에는 먼지가 덮여 있었다. 하지만 찬가와 경전 낭송
이 열을 더해가자 사이훙은 신이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신의 두 눈이 크게 열려 응답을 주는 것처럼 보였다. 절절한 진심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왔다. 이 금욕주의자가 수련을 통해 구원에 도달했듯
이 그렇게 그와 후디에가 함께 운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기를, 사형
후디에가 새 사람이 되기를 사이훙은 기원했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2권 SEVEN BAMBOO TABLETS OF
THE CLOUDY SATCHEL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이 인 복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3. 대집회
천 명의 도사들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대강당에서는 화산의 전체 대집
회가 한 달에 한 차례씩 열렸다. 이번 대회에서는 영적 탐구에서 중대한
발견을 이룩한 도인들이나 성인록에 나오는 비법들의 구문들에 대해 새로
운 통찰력을 획득한 도인들이 그들의 성찰을 나누기 위하여 초청 받게 될
것이다. 아마 어떤 도사는 새로운 약초에 대한 실험에 성공했을지도 모르
고, 누구는 인체의 정문을 열기 위한 보다 빠른 길을 찾았거나, 천체 여
행을 하는 중에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에 크
게 축복 받은 사람들이 누구이든 간에 그들은 공동의 선을 위해 사심 없
이 토론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화산에는 많은 도교 분파들이 있었다. 각 분파는 소분파로 나누어졌고
그것들은 더 작게 분류되었다. 사부들마다 제각각 도교에 대한 해석이 달
랐다. 어떤 도인은 만 개나 되는 경전들 중 한 경전의 단 한 문장에 상세
한 주석을 다는 일에 평생을 바치기도 했다. 또 다른 사부는 해석과 같은
개념화를 완강히 거부하고 전력을 기울여 명상에 몰두하기도 했다. 과거
수십 년간의 일을 회상시켜 주는 꿈을 꾸며 강한 흥분을 느끼는 도인이
있는 반면, 육체 단련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도인도 있었다.
그뿐인가. 스승과는 다른 길을 걸으면서 도교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는
제자들의 수행법도 전폭적으로 용인되었다. 화산의 원로들은 이런 태도를
혼쾌히 받아들였다. 그들은 도교의 다양성을 확인하고 넘치는 생동감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라면 불화의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였다.
사이훙은 일찍 대강당으로 갔다.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들 사이에 앉아
얌전히 기다렸다. 딱딱한 나무 의자 위에 앉은 사이훙은 두 명의 다른 수
도자 사이에 꼭 끼여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개회식을 기다리
는 동안 몇몇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눈 여겨 보았다. 그들 중에는 린 쭝
우와 칭 수이셩, 두루미 도인, 후디에 그리고 대사부의 제자 13명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진엔니아오와 츠쑹도 끼여 있었다. 사이훙은 이 두 사
람이 고위 도사들의 지정석에 앉은 것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 전에 사이
훙은 그가 동료 수련생들로부터 얼마나 감동 받았는지를 후디에 형에게
말했었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단 말인가! 이 두 사람이 지금 그를
당혹시키고 분노케 하는데도 말이다.
진엔니아오()와 츠쑹()은 대사부의 자리를 노리는 도전자들
이었다. 사부가 고전주의와 정통 주의를 옹호하는 데 반해 그들은 근대주
의와 사회적 활동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이전에 열렸던 집회에서 그들
은 공개적으로 사부에게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었다. 대신 젊고 혈
기왕성한 사람을 앉히라고 주장했다. 아주 끔찍한 일이었다. 사부에게 공
공연히 비판을 가하는 이 두 명의 나이 많은 제자들의 행위는 하극상의
배신 행위와 맞먹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당황스런 일은 그들의 지지자들
이 꽤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교육을 맡고 있는 사부들로 그
만큼 영향력이 컸다.
사이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진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왜
사부님은 진엔니아오와 츠쑹의 도전을 물리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일
까? 사이훙은 강단의 상석을 올려다 보았다. 대사부가 화산의 원로들 사
이에 앉아 있는 것을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대사부는 확실히
그의 제자들에 비해 훨씬 고매한 존재로 보였다. 사부의 양쪽에 앉아 있
는 도사들도 두 도전자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높은 계급이었다. 생
김새와 어울리는 괴짜 이름을 가진 저 이상한 사람들 - 개구리 신선, 박
쥐 신선, 거북 신선 -은 그들의 지혜 때문에 널리 존경받고 있었다. 대사
부 또한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분이었다. 하지만 사이훙은 도무지 실감
이 나지 않았다. 13명의 제자들은 더 이상 한 가족도 아니요, 그에게 더
이상의 위로도 주지 못했다.
그들은 대사부의 골칫거리였다. 그들에게는 일사분란한 통일된 모습이
없었다. 양극으로 갈라져 이제 화산을 두 동강 내고 있었다. 정치가 종교
에 개입되었다. 세 명의 무사를 때려눕혔던 대사부는 새벽의 어둠 속에서
그에게 성인의 가르침을 낮은 소리로 전해 주셨다. 그런데 이제 대소동이
벌어진 상황에서 이에 대응하고 싶어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징소리의 부드러운 울림과 약하게 들리는 큰 북소리에 묵상을 하던 사
이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화산의 원로들이 문신()인 문창제군(
)에게 경의를 표하는 동안 참석자들과 함께 서 있었다. 붓과 <하늘
은 문()의 공()을 기약한다.>라는 말이 새겨진 책을 들고 있는 실물
크기의 화상을 정중하게 올려다 보았다. 상냥하게 생긴 주름살 없는 얼굴
이었다. 숱이 많은 검은 색의 긴 머리카락은 진짜였다. 신 앞에는 잘 차
려진 신단과 그의 거처인 큰 곰자리에 기도자들이 닿을 수 있도록 해주는
향로가 놓여 있었다. 신이 되기는 얼마나 쉬운 일이란 말인가. 사이훙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높고 맑은 마지막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대사부는 모두들 착석
해 달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날의 의장인 바이투 은자()를 소
개했다. 대사부의 소개에 따르면, 바이투 은자는 최근 수십년에 걸친 각
고의 노력 끝에 사업 하나를 완성했다. 명상 중에 감각을 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문(만뜨라mantra:명상의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한 짧은 말,
긴 것은 다라니 dharani) 들의 이론과 그 사용 기법에 대한 책을 저술했
다. 이 책은 이제 화산의 장경각에 남을 것이다.
바이투 은자는 모여 있는 청중들을 위해 이제 중요한 사항들을 요약해
줄 것이다. 그는 연구 결과를 설명할 채비를 갖추고 도사들 앞에 나와 섰
다. 그는 두 손을 포개 잡고 조용히 서 있었다. 얘기를 끝낼 때까지 손을
풀지 않을 것이다. 그 자세는 집중력과 명상의 완수를 나타내는 정교한
신호이므로, 작은 키에 풍채가 좋은 그는 타원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
다. 큰 코와 분홍빛 두 뺨이 인상적이었다. 말끔히 면도를 하고 눈송이
같이 흰 백발은 잘 빗어서 상투를 틀고 있었다. 얇은 입술 주위에는 미소
가 감돌았다. 상냥하고 인자해 보였다.
[원로 여러분, 수련생 여러분, 그리고 입문생 여러분, 저는 오늘 오랜
기간 동안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선배들이
물려준 가르침과 저의 조수들, 제자들과 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 결론을 얻었습니다. 오늘 저의 발표를 들으시고 부디 지도 편달이 있
으시길 바랍니다.
명상은 최고의 영적인 노력입니다. 명상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무지의
껍질을 벗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본성을 터득할 수 있습니
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 내면의 자아와 분리되어 있으며 사실 우
리 가까이에 있는 것을 놓고 멀리 탐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훌륭하신 도사들 중 많은 분이 상이한 목표들, 가령 천둥 마술, 팔괘의
교묘한 술수, 천체 여행 또는 기도 등을 강조한다고 알고 있는데 저는 우
리 모두에게 있어 명상이야말로 영적 삶을 이루는데 중요한 것임을 삼가
지적하는 바입니다. <모든 길은 정상으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당연한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정상은 내면의 관조를 통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우려하는 점은 분파가 너무 많아 자칫 산만하다는 것입니다. 바깥
으로 끌려 나가기는 아주 쉽습니다. 인류는 그들이 방향을 바깥으로 틀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늘날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극장에서 경
극 감상에 열중하는 관객 같다고나 할까요. 흠뻑 취한 나머지 식별력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연극을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때문
에 인생을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생긴 일이라고 가정합니다. 밖으로 나간
그들은 곧바로 직접 행동에 나섭니다. 어쨌든 자신들의 행동이 뭔가를 크
게 달라지게 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서 사업, 여행, 정부, 전쟁터로 뛰어
듭니다. 정말 개탄스런 현상입니다. 의지를 밖으로 돌리면 돌릴수록 더욱
멀리 뽑혀져 나가게 됩니다. 마침내 내적인 개념은 전부 상실되고 맙니
다.
인류는 명상가의 길과는 아주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물론 그 누구도
이런 노력의 결과가 아주 인상적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상하이의 빌
딩들은 탑보다도 더 높고 크게 지어졌습니다. 이제는 힘센 동력 자동차와
강철로 만든 선박도 있습니다. 여기 산 위에서조차 때때로 하늘에서 사람
을 실어 나르는 기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런 놀라운
업적들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를. 각 나라들은 이제껏 전례가 없는 대
단한 규모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때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여행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본이 지금은 항공기, 선박, 탱크를 동원해 아시아
의 반을 쑥밭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또 다른 섬나라인 영국은 결코 태양
이 지지 않는 나라라고 떵떵거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에너지를 밖
으로 쏟은 까닭입니다. 다른 나라 일에 간섭하는 이 모든 짓들은 바로 도
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명상가는 다릅니다. 그의 목적은 안으로 향합니다. 그의 목적은 도와의
합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의 적은 군벌과 국가가 아닌 고통과 무지입
니다. 우리는 <성인은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하늘과 땅을 안다.>라는
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성인의 명상의 힘은 너무 위대해서 그
투시력으로부터 비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이 우주상에 하나도 없다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은 이 인식력이야말로 명상의 위대한 결실이라고 생
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말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함정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지식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그것이 내적인 명상의 결과이긴 하지
만 그것도 해를 끼칩니다.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젊은 수행자 여러분
들은 명상력은 해가 되는 골칫거리이니 내면세계로 더욱 깊이 밀고 들어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로 발견한 영혼의 힘에 전율한다고 해서 그 누구도 여러분
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가 오고 있다는 것
을 알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앞날을 예감하게 될 겁니다. 또 다른 사람
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지난 날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정신을 더욱 집중시켜 저변에 깔린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처음에는 이 새로운 각성에 대해 열광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명상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분수가 넘칠 정도로 뽐내며
여러분은 그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보다야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여
기고 문 밖에 나가지 않고서도 하늘과 땅을 정말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겁
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정신을 쓸데 없는 일로 낭비했다는 것을 깨
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멀리 있는 것들을 보여주면서 그것들을 어처구니
없이 크게 확대시키는 망원경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명
상가는 공포에 질려 타인이 축복이라 부르는 이런 사물들에게서 도망을
가버립니다. 그들이 새로 발견한 능력은 저주가 되고 원하지 않는 자극제
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제서야 더 깊이 뛰어들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흡인력에서 벗어나는 자유와 평화는 더 깊은 명상
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명상가는 두 가지 중대한
장애물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 그 자체와 성적 충동입니다. 사
실, 마음은 밖으로 끌립니다. 그리고 성적 욕구는 감정과 욕구 속에서 마
응과 뒤섞입니다. 하나씩 차례로 완전히 정복되지 않는 한, 진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정신은 우리에게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하는 크
고 작은 모든 것을 조정합니다. 위대한 공적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인체
의 기능을 자동적으로 수행합니다. 감각 중추의 기능을 통해 우리의 생존
을 보장하기 위해 필수적인 모든 정보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
은 점점 횡포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쾌락과 고통을 구별하고 자연히 쾌락
을 더 좋아합니다.
곧 더 많은 쾌락을 경험해 보는 쪽으로 모든 존재가 기울어집니다. 약
간 만족을 하면 계속 경험하고 싶은 더 큰 욕망이 생깁니다. 실망을 증오
의 씨앗을 생산하며 기분 나쁜 것을 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근원을 파
괴하려는 결심을 합니다. 악순환은 계속됩니다. 결국 완전히 욕망에 휘말
리고 맙니다. 정신과 감각의 노예가 됩니다. 원한을 품은 생물은 만족 추
구를 좌절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대항합니다. 똑같은 사본을 복제하
여 다른 사람에게도 재생산하는 양상이 빚어집니다. 모든 행동, 사고와
집착은 10배로 재생산됩니다. 끝없이 그 결과가 발생하고 사람의 갊을 옭
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이 세속 세계에 우리 소유의 노예를 생산합
니다.
영적인 인물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많은 지식 때문에 그리고 정
신력 때문에 마음을 악용하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그는 지식의 추구와
영적인 경지에 도달하려는 강한 욕망을 정당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
람은 아편과 미색에 빠져 인생을 방비하는 친구와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
다. 정신은 영적 탐구를 하는 데 이용될 수 있지만, 또한 장애물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정신력이 가장 강한 사람조차 성적 충동에는 약합니다. 사람
은 누구나 다 성욕이 강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은 생명의 힘 그 자체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이 없으면 인류의 영
속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성은 억압될 수 없습니다. 그래 봤자 성적 욕구
는 더 강해질 뿐입니다. 여자를 멀리하는 것도 도움이 안 됩니다.
화산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수행자들은 이런 방법으로는 완벽하게 성적
충동을 다스리기는 미흡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무시무시한 상상에 빠져 들게 됩니다. 충동에 이끌려 욕구를 풀기 위해
부끄러운 짓을 저지릅니다. 더러는 인위적 수단을 써서 이 문제를 해결하
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고행은 그 해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방
법은 몸을 해치고 궁극적으로는 정신을 연마할 수 없게 합니다. 깨달음도
없고, 단지 잔인함과 맹목적인 육체의 훼손이 있을 뿐입니다. 그 결과는
비통함과 증오, 무지에서 비롯된 신앙심만 남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정신적 해탈을 하는데 도움이 안 됩니다. 진정으로 영생불사의 고지에 오
르고 싶다면, 성적 충동과 싸우지 말고 성 충동을 대신할 만한 어떤 것을
건전한 인격체에 제공함으로써 성 충동의 제어 방법을 개발해야만 합니
다.
외부로 쏠린 마음과 성적으로 충동받는 유기체의 구도는 파괴되어야 합
니다. 욕망은 근절되어야 합니다. 망상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감각은 순
화되어야 하고 관능에 한번 짜지면 계속 빠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
해 감각을 내면화해야 합니다.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은 주문입니다. 주
문은 감각을 달래 줍니다. 그것은 감각의 자리를 대신하는 대체물이고 정
상적으로 작용할 수 없을 만큼 감각을 분주하게 만들어 감각을 내면으로
유도해 줍니다. 이 주문은 보통 우리가 쓰는 말이 아니고 성인이 깊은 명
상 속에서 들었던 신의 음성입니다. 신을 자각함으로써 직접 듣는 음성입
니다. 세속적 기원도, 세속적 의미도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소리는
세속적 결과에 다시 연결될 수도 없습니다.
주문은 단순히 어떤 소리가 아닙니다. 감각을 만족시키고 마음을 내면
화할 수 있는 소리 또는 그것의 집합체입니다. 사부들은 이 소리를 발견
하고 스스로에게 실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소리를 이렇게든 저렇게
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무의미하거
나 목적에 도움이 안되는 소리는 버렸습니다. 마음의 바람직하지 못한 성
향을 깨끗이 씻어주는 소리들만 간직해서 선한 쪽으로 마음을 돌렸습니
다. 가장 주요한 면 중 하나는 애초에 사부가 그 소리를 듣고 깨달았던
그 마음의 상태로 수련생을 인도해 주는 말의 독특한 힘이었습니다.
현인들은 말의 이런 면을 <실을 이용해 미로를 빠져 나가는 기술>이라
고 부릅니다. 꾸불꾸불한 깊은 동굴을 탐험하다가 마침내 보물이 있는 방
을 발견하는 사람에 비유합니다. 동굴 속의 그 장소를 다시 찾기 위해서
는 실패의 실을 뒤로 풀어가며 입구까지 다시 나옵니다. 그가 일단 나오
면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도 보물이
있는 방을 찾기 위해 실을 따라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실은 수행자를 고조된 의식 상태로 이끌 수있는 낱말입니다.
건강에 이로운 다른 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소리는 각각 고요의
진동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인들은 음성이 되어 나올 때 특별한 소리들
이 특정 기관 속에서 공명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기관은 자극을
받으면 강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건강은 보호될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말의 힘은 육체나 명상을 초월합니다. 성격에
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성격은 지나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격은 정신적으로나 구두로 말을 반복함으로써 보상
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 같은 성격이라면 사부는 그의 인품
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수어()를 줄수 있습니다. 정반대의 경우에 야
심이 없고 수동적인 학생이라면 의지력과 성격을 단련시키기 위해 화어
()를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문은 수행자가 노력을 더 많이 쏟을
수 있도록 대비시키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합니다.
우리는 주문을 가지고 실험해 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주문들 안에서
가능한 효력의 광범위한 범위를 확실히 탐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연구
는 불완전할 것입니다. 주문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희박한 공기에서
금을 불러낼 수 있고 광막한 거리를 가로지르며 우리 스스로를 비물질화
하고 또 재물질화할 수 있습니다. 구름보다 높이 솟아오르고 하계()
에서 온 악마를 노예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걸맞지 않은 일을 강제로 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세대를 위해 우리의 탐구 결과를 문서로
작성합니다만, 그 결과를 이용해서는 안 되는 엄숙한 경고를 덧붙입니다.
세속적인 일에 다시 말려 들고, 주문의 효력을 남용하고 싶은 불가항력적
인 유혹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문은 부적과 같은
용도로 쓰여야 합니다. 즉 치유와 보호, 그리고 영적인 경지에 이르기 위
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혹 이윤을 추구한다는 기미라도 보이면 그 수행자
는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당대의 도인들의 주문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두루 대
표단을 파견하여 방문하고 탐색하고 다른 도관과 수도원에서 연구를 하게
했습니다. 나의 동료들은 인도, 티벳,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주문들을
수집했습니다. 철저히 연구를 수행하느라 온갖 시도를 다 했습니다. 후속
연구는 여러분 모두에게 맡기렵니다. 하지만 많은 주문들은 그 주문이 원
래 속한 연구에서는 아무런 뜻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소리들은 어떤
언어학적 사고에서 비롯되지 아니하였고 신적이며 우주적인 인식에서 나
왔다는 점을 필히 주목해야만 하겠습니다.
언어에 관한 논의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인데, 제가 말씀드린 주문은 경
전이나 기도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습니다. 신의 소리는 경전이
나 기도문의 형태로 나타날지는 몰라도, 경전이나 기도문은 반드시 주문
과 동의어는 아닙니다. 그것들은 기도를 하는 데는 중요할 지 몰라도 반
드시 예측 가능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기도가 바로 그
렇습니다. 그것은 정신을 집중시키고 의지가 약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
한 심리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정신을 안으로 향하게 하고 명상가가 자기 완성으로
갈 수 있게 이끌어 줄 목적으로 주문을 구두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사용
하는 데 찬성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주문의 사용법입니다. 우리를
신에게 더 가까이 데려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힘이든 소요, 기원 또는 기
도이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주문들은 구두의 전통을 통해 전달되
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책을 저술했지만, 영적 전통의 진정한 전달
은 사부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사슬임을 인정합니다. 여러분 중 누구든 이
기법을 더 탐구하고 싶으시다면, 이 성스러운 노력을 함에 있어 우리에게
동참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원로들이 우리의 연구를 검토하신 후, 예의
를 차리실 필요 없이 우리의 잘못을 꾸짖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동료
도인 여러분, 저는 연구 결과를 겸허한 마음으로 기증합니다.]
바이투 은자의 14살 난 시자가 다섯 권의 연구서를 내놓자, 청중들에게
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은자는 양손으로 책을 받쳐 들고 대
사부에게 절을 올렸다. 원로들은 모두 기립해서 최대한의 예의를 표하였
다.
[내가 화산 전체를 대표해서 받겠소. 여러분의 뜻 깊은 노고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겠소.]
대사부가 인사말을 했다.
대사부는 원로들에게 자리에 앉도록 권고했다. 그리고 단상에서 토론을
개시했다. 이때쯤이면 공개 토론이 벌어진다. 누구든 화산과 도교의 발전
을 위해 아이디어를 내놓고 토론할 수 있었다. 몇 분동안 다른 도교 분파
의 회의 결과가 발표되자 사이훙은 지루해졌다. 바이투 은자의 발표는 아
주 흥미 진진하게 들었지만, 행정 문제는 싫었다.
사이훙은 진엔니아오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사부는 당당한 자세를
취했다. 다른 수도자들은 조용히 기대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들고 바라보
았다. 진엔니아오는 또렷하게 말했다. 경극 대사처럼 과장되고 화려한 베
이징 사투리를 썼다.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허락합니다.]
대사부가 응답했다.
[여러분, 중국은 5천 년 역사상 최악의 전쟁 와중에 놓여 있으며 사회
의 불안도 극에 달했습니다. 지금처럼 우리 조국이 열등국의 군대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수모를 당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정신적인 활력
이 쇠하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참석자들 사이에서 동의하는 웅성거림이 일었다.
진엔니아오는 계속 말을 이었다.
[도교가 어디에서 이처럼 부패에 직면해 있더란 말입니까? 유일한 중국
의 토속 종교는 시대보다 더 먼저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도교의 가장 큰
경쟁자는 불교입니다. 그들은 웅장한 사찰을 짓고 극락을 약속하며 수많
은 중생들에게 포교하였습니다. 게다가 기독교는 북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서양 선교사들이 직접 중국인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야만적 종교의식을 벌이고 아기를 구워 먹는다는 소
문이 나도는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기독교로 더 많이 개종했습니다. 대
다수 수행자들은 최근에 베이징과 상하이에 세워진 성당과 교회들을 보고
중국이 유럽인에게 한 번 더 항복을 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인류에게 영혼의 등불을 밝히
겠다고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산 위에 떨어져서 우리 자신
만의 성공을 찾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않으면서요!]
강당엔 순식간에 대 혼란이 일었다. 진엔니아오의 감정이 표출되어 도
사로서의 눈빛이 흐려졌다. 대사부는 좌중에게 정숙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떠드는 소리가 완전히 가라앉기도 전에 츠쑹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우리의 원칙은 사회에 대한 불간섭입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동의했다. 그들은 평생 사회를 멀리하기로 약속
한 출가인들이었다. 진엔니아오는 자신만만하게 청중들을 응시했다. 척척
박자가 맞아 돌아갔다. 그는 꼿꼿이 서서 부드럽고 운기 흐르는 수렴을
쓰다듬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합당합니
까? 아니면 그저 고루한 전통주의자들의 멍텅구리 같은 방침에 불과합니
까? 우리가 도교를 영광스럽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엄밀히 말해 보수주의
때문입니다.]
사이훙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주장들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진엔니아오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소리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
은 그를 지지했다. 사이훙은 사부가 진엔니아오에게 반박하기를 기대했
다. 하지만 대사부는 침착하게 집회 광경을 구경할 뿐이었다.
<왜 사부님은 반격을 하지 않을까?>
사이훙은 이렇게 반문했다. 가장 나이 많은 제자가 공개석상에서 사부
를 공격하다니 완전히 하극상이었다. 그것은 부친 살해만큼이나 죄악시되
는 일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아무런 처벌도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의 말에 찬성합니다!]
츠쑹이 일어서며 크게 외쳤다. 그의 찌든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그러
나 흥분해서 긴 옷소매를 흔드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도의 본질적 원리는 변화입니다. 우리는 변화하고 적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업적을 성취했습니다. 그리고 가공할 만큼의 지식을 수집
했습니다. 이제 그 지식을 이용해 인류를 구원할 때가 왔습니다! 세계는
지구를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전쟁 속에 빠져 들고 있습니다. 행동을 보일
때가 왔습니다. 수도 생활로는 안 됩니다!]
이어서 진엔니아오가 교활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험에 이르렀는데 도교
는 어째서 그냥 있단 말입니까? 궐기해서 나라의 정세를 안정시킵시다.
만일 원로들이 현실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다
면, 그때는 보다 젊은 세대를 위해 그들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네 신분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화산 전체 도관의 명예 원장인 거북 신선이 청천벽력처럼 호통을 쳤다.
작달막한 거북 신선이 비분강개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사이훙은 깜
짝 놀랐다. 그러나 안심이 되었다. 결국 원로들이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
다. 주름진 얼굴이 팽팽히 긴장하더니 두 눈에 벌겋게 불이 붙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겠느냐? 분명, 너는 도교를 참되게 깨닫지도 못한 주
제가 아니더냐? 네가 제안한 의견은 금욕주의의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
다!]
거북 신선은 화산에 있는 전체 도관의 원장이었는데 현재의 대사부를
위해 사직했었다. 그러나 과거의 원장으로서 여전히 무시 못할 정도의 위
엄이 있었다. 좌중은 조금 가라앉았다.
그런데 도인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이훙은 전에 그를 동봉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잘 알지는 못했다. 그 남자는 호리호리한 장신이었다.
잘생긴 얼굴은 안색이 깨끗했다. 옷차림은 단정하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
했다.
[금욕주의가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우리들 중의 상당수는 그와는 다른
계율에 따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논쟁을 벌인들 무슨 소용이 있습
니까? 서로간의 갈등은 우리의 소명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거창한
논리를 앞세우지 말고 동정심을 보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만 말합시
다. 이런 암흑기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 것은 같이 수영하다가 물
에 빠진 친구를 구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잔인한 짓입니다.]
그가 말을 끝내자 거북 신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토론은 뒤죽박죽입니다. 그대들 젊은이들은 신념이 없습니다. 도는
우리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신조는 훌륭하군요. 그러나 나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의 권
한에 속한다는 것을 아시겠죠? 당신이 물러난 것처럼 지금은 대사부가 물
러날 때 입니다. 시대가 변했으니까요.]
동봉에서 온 도인이 말했다.
[화산의 정책을 지시하는 것은 당신 소관이 아닙니다.
거북 신선이 날카롭게 반박했다.
[우리 이 문제를 표결에 부칩시다.]
츠쑹이 감히 이렇게 대항했다.
[천부당 만부당합니다]
거북 신선이 큰소리를 질렀다.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원로들이 이 문제를 의논할 것을 약속합니다.
다음 집회 때까지는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의 토론
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급자로서 명령하는 데 모두 앉으시오.]
셋은 거북 신선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도전하는 회의가
되게 더 이상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거북 신선은 폐회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사이훙은 아무래도 경전이나 중얼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속이 부글부
글 끓었다. 배신감을 느꼈다. 대사부는 그에게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
그는 진엔니아오의 무례한 도전이 무척 거슬렸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충성심을 최고 덕목의 하나로 가치 있게 생각하고 있었다.
행사가 끝났다. 사이훙은 많은 젊은 도사들이 진엔니아오 주변에 모여
드는 것을 보았다. 그가 새로운 지지자들과 함께 중앙 통로를 따라 내려
가는 것을 보니 화가 났다. 사이훙은 열이 올랐다. 목구멍에서 쓴 맛이
치밀어 올랐다.
[나쁜 놈의 자식 같으니!]
사이훙은 소리를 지르면서 젊은 도사 하나를 떼밀고는 진엔니아오 앞으
로 뛰어들었다.
[네가 말썽을 피우고 싶다면, 여기서 나와 한판 붙어 보자!]
진엔니아오는 아주 침착했다. 변함없이 당당한 위엄을 보였다. 그의 기
도하는 자세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것은 죄악이다. 사이훙.]
그는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이 비열한 놈아, 천벌이나 받아라. 네놈을 작살내서 지옥으로 떨어 뜨
릴테다.]
[성미가 급하구나. 불덩어리 같은 머리나 식히려무나.]
진엔니아오가 조용히 말했다.
[너를 죽이고 말겠다!]
[한 번 해볼 테면, 덤벼라.]
진엔니아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사이훙은 돌진했다. 그러나 두 시자가 재빨리 그를 말렸다. 그는 그들
을 뿌리쳤다. 이번에는 후디에가 달려왔다. 세 명이 힘을 합쳐 그를 붙들
었다. 진엔니아오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왔다. 사이훙은 그가 말할 때 씨
근거리는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망나니 같은 자식! 진정하는 게 네 신상에도 좋을 것이다. 너 같은
놈은 붓이나 잡고 있는 게 제격이지.]
[죽여 버릴 테다, 이 나쁜 놈아!]
사이훙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진엔니아오는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싸움을 멈추어라, 사이훙. 오늘 너는 큰 죄를 범했다.]
사형인 칭 수이셩이 말했다.
[나는 사부님을 공격하는 저런 괴물은 두고 볼 수 없어!]
[우리도 참을 수 없어. 그러나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다. 대집회는 누
구든 공개적으로 의견을 말해도 보복을 받지 않는 공개 토론회니까.]
린 쭝우가 말했다.
[붙잡지 마!]
[먼저 마음을 진정시켜라.]
칭 수이셩이 말했다.
[못 해! 당장 저놈의 숨통을 졸라 놓겠어!]
후디에는 사이훙을 뒤로 힘껏 밀었다.
[너 미쳤구나. 이제 그만 생각 좀 해봐라. 바보 같으니라구. 그의 무술
이 너보다 몇 배는 더 세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는 너를 묵사발 낼 수도
있었어.]
[나를 내버려둬!]
사이훙이 씩씩 거렸다.
[안 되겠구나! 그놈을 내 방으로 끌고 가 벌을 주어야겠다.]
대사부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사이훙을 밖으로 강제로 끌어 낸 뒤 남봉 사원을 향해 가파른
비탈길을 올랐다. 대사부는 길을 가는 도중에 말을 못 하게 했다. 사이훙
은 아직 분이 가시지 않았다. 죄를 지은 자는 진엔니아오였다. 그런데도
왜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사부의 서재에 당도해서야 그들은 사이훙을 풀어 주었다. 사부는 책상
앞에 앉았다. 그것은 줄지어 선 책꽂이를 제외하곤 이 휑뎅그렁한 방에
있는 유일한 가구였다. 불빛은 대사부의 등뒤에 복잡한 격자 무늬 창을
붉게 타오르게 만들었다. 사부가 지친 듯 모자를 벗어 내려놓자 백발이
불꽃처럼 작열하였다.
[무릎을 꿇어라!]
사부가 명령했다.
[사부님, 저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너는 원로들과 <문신>이 보는 앞에서 신성모독의 발언을 했다. 그런데
도 죄가 안 된단 말이냐?]
[저는 사부님을 보호한 것입니다.]
[이런 식의 보호는 내겐 필요 없다.]
[사부님, 왜 반격을 가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는 사부님께 도전을 했습
니다. 왜 스스로 방어하시지 않는 겁니까?]
[왜 내가 그런 사소한 문제에 영향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나는 믿음과
성실로써 평생 동안 수련해 왔다. 나의 업적과 생각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승인을 받을 필요는 없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신을 대하는 데 한 점 부
끄럼 없이 살 수 있는 한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
[사부님은 당신의 제자가 사부님께 반기를 드는 것을 보시지 않았습니
까? 어떻게 이것을 허락할 수 있으신가요?]
[그들 역시 수행자다. 모두들 각자의 관점에는 장점이 있다. 그들은 성
실하게 의견을 나타내려고 노력했을 뿐인 것이니라.]
[아닙니다. 그들은 사부님을 타도하려고 했습니다.]
[굳이 내가 이 자리에 연연할 필요가 있단 말이냐? 얼마나 어리석은 짓
이더냐? 만일 그들이 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 그러
나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단 말이다. 나를 공개적으로 비난 하는 것은
내가 그들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그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세속적인 권력에 동기를 두고 있다. 그것이 틀렸다는 거야. 도교를 이용
해서 이득을 취하려 하는 한 내가 그들의 최대 장애물이라는 사실이지.
나는 그들을 반대하지만, 함께 싸워야 할 필요는 없다.]
[사부님, 그래도 이해가 안 갑니다.]
대사부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언젠가는 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날이 있을 것이니라. 그것
역시 도이니라. 지금으로서는 진엔니아오, 츠쑹과 멀리할 것을 너에게 명
한다. 너 혼자서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말거라. 내 말 알아듣겠느냐?]
[네, 사부님.]
[좋아. 그만 가봐라.]
후디에는 사이훙을 따라 나왔다.
[기숙사까지 같이 걸어가자.]
그는 위로를 하려는 듯 말을 꺼냈다.
[동봉의 그 자는 누구야?]
사이훙이 물었다. 그는 위로 받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법명은 투오구이()란다. 나는 그를 알아. 사실, 나는 그에게
서 몇 가지 기술을 배웠지.]
후디에가 불쑥 이 말을 했다.
[어떤 기술인데?]
[네 마음에 들지는 않을 텐데. 남녀가 하나가 되어 깨달음을 구하는 상
합()의 기술이란다.]
[오, 성적 유희의 기술을 훈련하는 거로군. 진엔니아오와 츠쑹이 그처
럼 사악한 동맹의 회원의 모집을 하고 있는 줄 내가 진작 알았어야 했는
데.]
사이훙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 점을 잊지 말거라. 상합은 승인을 받은 도교의 일부분이라는 사실
을. 그 나름의 경전, 의식과 계율이 구비되어 있단다. 그 기술을 익힌 사
람으로서 나는 그 효험을 입증할 수 있다.]
[형은 도사가 아니잖아. 그런데 왜 도사같이 사는 거야?]
사이훙이 쌀쌀맞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도사지.]
[그의 분파는 여자만 보면 환장하는 변태 영감들이 모여드는 데야. 그
짓만 하다간 죽을 것 같으니까 그런데 갇혀 지내는 거지.]
[언제부터 그렇게 고상해지셨나. 흥분하지 마.]
[빌어먹을! 형은 사부가 가르치시는 걸 알잖아. 그런 방법은 사악하고
교리에도 어긋난다는 걸 말야.]
[그들은 사부의 분파에만 역행하고 있는거야.]
[됐어, 형. 그 정도로도 나한텐 충분해.]
[너는 시도해 본 적도 없구나.]
[제발 어리석은 짓은 그만 둬. 형. 나는 평생 독신으로 살기로 맹세했
어.]
[그 길이 너를 하늘나라로 인도하기를 바라자꾸나. 너는 확실히 성을
전혀 경험해 보지 않을 테니.]
[제발 그만 둬! 말만 하는 것도 신물이 나.]
후디에는 말을 뚝 끊었다. 사이훙은 기숙사로 돌아가 침상에 앉았다.
도관에 사는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 어슬렁 올라오더니 그의 다리에 기
대어 등을 활처럼 구부리고 비벼댔다. 사이훙은 잠자코 있었다. 출가인에
겐 가족이 하나도 없었다. 출가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가족을 떠난
사람>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껏 완전히 외톨이가 된 적이 없었
다. 대사부와 12명의 동급생이 늘 그의 가족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지금
그 가족 구조도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최대의 상처임을
깨달았다.
그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런 일은 왕왕 일어나는 거니까. 사이훙은
변화의 여러 단계에 대해 배운 것들을 검토했다. 모든 것은 그 정점이 있
다. 그러나 모든 정점은 무정하게도 바닥을 향해 나아간다. 흥하는 것이
있으면 망하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화산과 그이 배움터는 그에겐 완벽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세계는 중국의 미래만큼이나 불확실한 것이
되었다. 그가 배운 바에 따르면 쇠퇴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
기가 싫었다. 기분이 언짢을 때 철학이 그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기분을
더 나쁘게 하는 것밖에 없었다.
사이훙은 저녁 종이 울릴 때까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저녁 수업에 가기
위해 일어났다. 사부는 무사태평한 모습이었다. 사이훙은 자신이 할 일이
라곤 학습에 복귀하는 것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때때로 의무는 위안이 되
었다. 그것이 시절이 불확실할 때 어떤 역할을 제공했다. 아마도 중국 사
회가 의무를 그처럼 강조하는 이유도 생의 기이한 불확실성 때문이었으리
라. 의무는 그의 분노와 좌절감, 혼란 상태를 감출 수 있게 해줬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2권 SEVEN BAMBOO TABLETS OF
THE CLOUDY SATCHEL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이 인 복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4. 탁발
집회가 열리고 나서 일주일이 지난 후, 사이훙과 두 사형은 대사부를
모시고 화산 밖으로 여행을 떠났다. 어느 날 새벽 행장을 꾸리라고 사부
가 넌지시 일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점이 아주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사부는 화산의
지배권을 진엔니아오에게 양도하지는 않겠지? 아마도 그렇게 된다면 그것
은 도교 수행자의 겸허한 의미를 되새기는 하나의 방법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이훙은 사부가 어쩌면 반대운동을 벌일 목적으로 다른 도관들을
규합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전혀 알 길
이 없었다. 등짐을 메고 흔들거리는 시안행 기차에 오르면서, 사이훙은
여행의 목적을 공적인 것으로 단정지었다. 그들은 지금 탁발 여행을 가는
길이라고.
탁발이란 일 년에 최고 네 차례 모든 도교 수행자가 다니는 여행을 이
르는 통칭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여행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도교
수행자들은 행렬을 지어 근처 마을을 돌곤 했다. 때로는 소그룹을 짜서
또는 도교 수행자 혼자서 장거리 여행에 오르기도 했는데, 다른 도관을
방문하고 후원자들에게 기부금을 내도록 간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걸은
사회적으로 용인 받은 일이 못 되었다. 근면하고 실용적이며 양심 바른
사람들은 자립 생활을 못하는 자들을 거지로 간주했다. 그들은 자기들 눈
에 게으른 부랑자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굳이 자선을 베풀 필요성을 느끼
지 못했다. 도교 수행자 차림의 거지를 대한다고 해서 그들의 판단이 달
라지지는 않았다. 더러는 대문에 <불교 승려, 도교 수행자 절대 사절>이
라고 쓰인 팻말을 붙일 정도로 불만이 컸다.
아시아 다른 지역의 종교인들과는 달리 화산의 도사들은 하루하루 끼니
를 청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시 사발은 하나의 상징물이었다. 탁발은 현
금, 곡물, 기름 또는 다른 선물을 기부해 주도록 간청하는 것으로 발전하
였다. 종종 탁발의 규모는 그저 한 공기의 시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도
사들은 과거의 연줄이나 소개를 통해 부유한 후원자를 방문하여 도관 건
축, 개축 또는 다른 대규모 사업에 필요한 기금을 모금하였다. 화산은 이
탁발에서 나온 수익금에 거의 의존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귀족 가문의 아들로서 사이훙은 구걸에 대한 선천적인 혐오감을 지니고
있었다. 문전걸식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자신이 서민들 앞에서 순한
양이 되어 애걸하는 입장이 된다는 사실이 정말 끔찍했다. 하지만 시주
여행은 대모험으로도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여행 중에 친구를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훙은 마을로 내려올 때마다 도관에 헌금하도록 요청
하면서 어슬렁거리며 다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이든 말을
걸고 나서 그에게서 부탁을 받게 되면 도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곤 했다.
점, 굿, 한약 처방, 안마 요법, 서예, 결혼식, 장례식과 기타 잡다한 축
수 등등이 있었다. 화산에 기부금을 준 대가로, 사이훙 자신에게 성찬을
베풀어 준 대가로 봉사하는 것이었다.
사이훙은 자유롭게 여행하기를 좋아했다. 이 홀가분한 느낌은 어느 정
도 걸식하는 괴로움을 덜어주었다. 탁발 도교 수행자로 있는 동안 여행할
수 있는 장소에 제한은 없었다. 탁발 도교 수행자로 있는 동안 여행할 수
있는 장소에 제한은 없었다. 사이훙은 힘들여 얻은 것들을 작은 노새에
싣고 중국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다. 방랑하는 도인은 엄격한 도교 수행
자의 계율을 준수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여행 온 김에 중국의 풍
부한 요리를 시식하고 혼자서 무술을 탐구하였다.
마을을 하나씩 돌면서 포교를 하곤 했다. 하지만 동시에 후원자의 대저
택이나 사치스러운 찻집, 무술을 함께 익힌 친구들의 집에서 부자들의 취
향을 음미하곤 했다. 산에 있을 때 그는 불쌍한 수련생이었다. 하지만 도
시에 오면 존경받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시내에서 사이훙과 같은
계급의 도교 수행자를 만나는 것은 아주 드물었다. 대사부를 만나는 일은
더더욱 희귀했다.
기차 안의 많은 사람들이 하산한 도인들을 알아보았다. 하산이라는 말
을 하면서 사람들은 마치 사이훙이 하늘로 가는 길목인 신선의 집에서 내
려온 특별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민속에
는 신비한 방법으로 자신을 연마한 초자연적 존재에 관한 전설과 신화가
많이 있다. 초자연적 존재는 미신적 경외감과 존경심을 흠뻑 불러일으켰
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인을 성인으로 볼 뿐 아니라 세상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괴력을 부릴 수도 있는 신비스러운 존재로 보았다. 화산
에서 온 대사부의 출현은 아주 특별한 사건으로 간주되었다. 살아 있는
성인이 산에서 내려왔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그러나 경외심
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호기심을 채우려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들이었다.
뤄양발 열차의 종착역인 시안은 더러운 곳이었다. 시안역은 인파로 들
끓었다. 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네 사람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동
화 속에 나오는 듯한 도인들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몇몇은 뻔뻔스럽게도 시자들의 옷을 손가락으로 만
졌다. 광목에 불과했지만, 그곳 사람들은 대개가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올이 아주 고운 천이었다. 네 사람이 역을 빠져 나오려고, 하자 여러 명
이 축수를 원하거나 자신들의 앞날에 관해 물었다.
두 사형은 대사부의 양쪽으로 붙었다. 그리고 팔을 내밀었다. 걸어가는
동안 노사부의 몸을 받쳐 주는 것이 관례였다.
[사부님, 허락해 주십시오.]
린 쭝우가 말했다.
대사부는 이 말을 듣고 모욕감을 느꼈다.
[너희들, 내가 이런 관례를 싫어한다는 걸 알지.]
사부가 낮게 말했다.
[이것은 전통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칭 수이셩이 말했다.
[내가 늙었단 말이냐?]
[사부님, 역을 떠날 때까지만이라도 제발.......]
린 쭝우가 사부에게 매달렸다.
[이제는 나를 가지고 놀려 드는구나! 하긴 저들을 실망시킬 수도 없
지.]
사부는 시자들의 부축을 받아들이고 앞을 내다봤다. 발 디딜 틈조차 없
이 시안역을 메운 엄청난 군중의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사부는 한숨
을 내쉬었다.
[도관의 문이 닫히기 전에 도착하려면 이 군중 속을 뚫고 나가야만 하
겠구나. 사이훙은 풀어야겠어.]
사부가 말했다.
[네, 사부님?]
사이훙은 힘이 솟았다. 대사부는 손짓을 했다. 사이훙은 기다렸다는 듯
이 사부 앞으로 뛰어나와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도인의 모자를 건달
패처럼 비스듬히 썼다.
[미안합니다만, 우리는 가야만 합니다. 내일 시내에 가면 그대 우리를
보러 오십시오.]
이렇게 소리치면서 사람들을 떠밀어 군중 속으로 길을 뚫었다.
사부와 두 시자는 사이훙 뒤를 바짝 쫓았다. 밀려드는 구경꾼들의 물결
을 뚫을 방법은 그 방법뿐이었다.
<서쪽의 평화>를 의미하는 시안()은 전에는 <영원한 평화>라는 뜻
을 가진 장안()으로 불리던 도시였다. 이 아름다운 고도는 고색창연
한 중세의 성벽과 그 성벽을 둘러싼 해자 너머까지 뻗어 있었다. 이 도시
는 마치 자체의 역사와 문화를 안에 다 담아 낼 수가 없었다는 듯, 천천
히 팽창하여 마침내 중국 북서부 최고의 중심 도시로 도약하였다. 중국
고대 8대 수도의 하나로서 11개 왕조의 중심지 역할을 단속적으로 수행해
왔다. 11개 왕조중에는 주, 진, 한, 수, 당이 포함되었다. 시안은 번창한
상업, 제국의 힘, 기름진 옥토를 배경으로 다민족이 모여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시안은 다른 수도들과는 달리 비옥한 황하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초기 원시 부족사회였던 곳이 평원의 기름진
침적토에 자리잡아 거대한 강으로부터 힘을 얻어 번성한 것이다. 마침내
정착 인구가 늘어나면서 세계 최대 도시의 하나로 발전했다. 시안은 북부
사막을 거쳐 인도와 페르시아로 통하는 길인 그 유명한 실크로드의 종착
지가 되었을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지리적인 비옥함과 이 지역
에 거주하는 이슬람인, 인도인, 페르시아인들의 문화적 다양성으로 인해
도시의 인구는 크게 불어났다. 그들은 독특한 예술품, 종교, 생활양식을
가지고 들어와서는 문화의 울림이 깊은 도시 시안을 건설하는 데 크게 공
헌하였다.
시안은 3대 종교가 공존하는 도시였다. 도교와는 별도로 회교 인구도
상당히 많았다. 회교 신자들은 머리에 흰 천을 두르기 때문에 확실히 구
별할 수 있었다. 시안에는 회교도들이 고대에 세운 모스크 사원이 있었
다. 모스크 사원은 한자 옆에 나란히 쓰여진 아랍 문자를 제외하면 중국
의 전통 사원처럼 보였다. 불교 역시 수많은 사원을 축조했다. 가장 유명
한 기념비적인 건축물은 홍안탑()이었다. 이 탑은 독실한 불교 승
려인 삼장()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오면서 가져온 경전을 보관하
기 위해 지은 것이었다.
황토 먼지로 뒤덮인 채 수세기 동안 자리를 지켜 고대 사원과 탑은 도
시의 건축과 외형상 나타난 특징중에서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였다. 진흙
이나 벽돌로 지어진 단층의 대형 건물 역시 수백 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
져 온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들이었다. 또 수많은 길들은 복잡한 미로를
형성하였다. 낮은 성벽 가운데 웅크리고 앉아 있는 짧은 길들은 만화경
속의 풍경 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의 민족들이 다니는 통행로였다. 노인과
젊은이가 지나갔다. 행인은 모두 생김새와 키, 얼굴이 제각각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이훙은 수염을 기른 페르시아인, 얼굴이 네모난 시골 여인,
턱이 각진 몽고인, 가냘픈 모습의 도시 여인과 기형적인 생김새의 거지
들, 커다란 흰 터번을 두른 회교도 그리고 뺨에 장밋빛이 감도는 어린이
를 보고 완전히 매료당했다. 거리를 인간의 물결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들은 상청관()에 당도했다. 인파로 북적거리는 빈민가 중심부
에 위치한 자그마한 도관이었다. 태양은 저물어 어느덧 지평선과 맞닿아
있었다. 불타오르는 황금빛이 도관의 정문을 밝게 비추었다. 아직은 따스
한 기운이 감도는 산들바람은 석탄과 장작불 위에서 지글대는 저녁 식사
의 열기로 인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들의 도착을 전해 듣고 도관의 주직()과 시자가 문 밖으로 마중
나왔다. 주직은 진지해 보였고 숱이 적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그
들은 높은 신분의 대사부를 보고 경의를 표하기 위해 고개를 깊이 숙여
절을 했다. 야위었지만 자세가 꼿꼿한 주직은 긴 소매가 마루까지 닿는
푸른 도복에 이르기까지 빈틈이 없었다. 그는 상냥하게 일행을 안으로 맞
아들여 마실 차를 대접했다.
사이훙은 감명을 받았다. 이 도관의 주직은 도시에 살면서 신도들의 종
교적 요구를 보살피는 일차적인 임무를 수행했지만, 그 어떤 수행자보다
도 엄격하고 고결했다. 그 점이 사이훙의 마음에 친숙하게 와 닿았다. 자
신의 종교와 결코 타협하지 않는 절대적인 신념이 몸에서 우러나왔다.
사이훙은 대사부가 밤을 새우면서 철학에 대한 토론을 벌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중히 차를 마신 후, 적당히 둘러대고
마구간의 문이 닫히기 전에 노새를 빌리기 위해 사원을 떠났다. 대사부는
혈기 왕성한 청년을 붙잡아 앉혀 두지 않을 정도의 이해심은 있었다.
허락을 받은 사이훙은 기뻐하며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근처에서
음식점을 찾아냈다. 커다란 바구니에서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있었고 큰
기름통에서는 기름이 끓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콤한 콩
으로 속이 채워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빵을 샀다. 향긋한 냄새를 코끝
으로 음미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빵을 한 입 덥석 깨물었다.
달착지근한 콩가루의 감촉을 혀로 느껴 보았다. 그는 동전을 몇 닢 더 꺼
내서 빵 세 개를 더 샀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흥분한 나머지 그
만 두 남자와 충돌할 뻔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웃옷의 단추를
풀고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있어서 보기 민망했다. 팔 소매는 거리낌없이
둘둘 말아 걷어붙이고 있었다. 한 명은 비뚤어진 얼굴에 긴 코가 찌부러
져 있었다. 뾰족한 턱 밑에 난 상처는 귀까지 이어져 있었다. 다른 한 명
은 잘 생긴 얼굴에 이빨도 희고 가지런했다.
[앞을 잘 보고 걸어라, 이 빌어먹을 도사야.]
잘 생긴 사람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사이훙은 분기가 왈칵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재미 삼아 이 두 놈을 좀 패줄까?>
속으로 생각했다.
[그만둬라, 그만둬.]
이번에는 험상궂은 사람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도사를 때리면 재수가 없단 말이야.]
[너 미신에 푹 빠져 있구나. 그 따위 미신을 믿고 있니?]
[아니 그렇지만 그만두자. 지금은 배가 고프니까.]
[좋아. 당장 여기서 꺼져 버려.]
잘 생긴 사내는 사이훙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사이훙은 싸움을 일으키면 바로 옆에 있는 도관의 명예가 크게 손상된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존심을 꿀꺽 삼켜 버렸다.
[젠장. 저 자식은 귀머거리가 분명해.]
사이훙은 그 자리를 떴다. 비참했다. 맞서 싸우지 못했다는 생각이 밤
새 그를 괴롭힐 것이다.
사이훙은 음식점 몇 곳을 더 들렀다. 많이 먹으면 화가 풀어질지도 모
른다. 몇 달 동안 겪었던 금욕의 고통을 보상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과자 조금, 기름에 튀긴 빵, 호두 몇 알과 말린 과일까지 그는 닥치는 대
로 조금씩 급하게 먹어치웠다. 그래도 배는 반밖에 안 찬 것 같았다. 하
지만 서두른다면 돌아오는 길에 마저 반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고, 도관
의 식사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얘, 야오야.]
사이훙은 마구간에서 일하는 말구종에게 인사를 건넸다.사이훙은 노새
를 세내기 위해 항상 이곳으로 왔다. 마구간 사람들은 그를 잘 알고 있었
고 도사에게는 삯을 깎아 주었다.
[아버지 안에 계시니?]
[그럼요. 안에 계세요.]
키가 큰 아이가 대답했다.
[아버지! 아버지! 화산에 계신 그 도사가 또 오셨어요.]
아버지가 나왔다. 구운 거위같이 피부색이 검은 주인은 기골이 장대했
다. 그러나 이빨은 부서진 성벽처럼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아! 친절도 하셔라! 오랜만에 이렇게 방문해 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
다.]
[산으로 올라가야 했거든요.]
사이훙은 격식을 차려 말했다.
[독실하시군요. 이제 곧 신선이 되시겠소!]
늙은 마구간 주인이 말했다.
[아저씨는 너무 친절하신 분이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저의 사부님도 함
께 하산하셨어요.]
[정말 놀랍군요! 경사가 났으니 틀림없이 성좌()들이 조화를 맞추
었겠지요. 사부님을 위해 튼튼한 노새가 필요하시겠습니다그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요즈음은 노새가 조금 야위었지요. 기르기가 예전 같지 않아서요. 하
지만 살찐 놈으로 한 마리 아껴두었습죠. 달구지를 끄는 데 빌려주지는
않았거든요. 그 놈을 가져가십쇼.]
그는 아들을 돌아보고 큰소리로 노새를 데려오라고 했다. 오래지 않아
갈색 노새가 시끌벅적하고 비좁은 마구간에서 끌려 나왔다. 사이훙은 노
새를 보고 더할 나위 없이 만족했다. 병이 났을 때 붙이는 큰 헝겊 조각
도 없는 것을 보니 금상첨화였다. 그는 노새에 안장을 달게 했다. 그리고
노인의 손에 동전 몇 닢을 쥐어 주었다.
[몇 주일 후에 가지고 오겠습니다.]
[좋으실 대로 하십쇼. 그저 일일랑 너무 많이 시키지나 마시고요. 아시
다시피 도관에서는 노새를 너무 혹사시키거든요.]
[그걸 리가 있겠습니까.]
[자, 출발하시죠.]
[복 받으세요.]
[저도 행운을 빕니다.]
사이훙은 계획을 착착 실행에 옮겼다. 도관으로 돌아와서는 노새를 들
여놓기 위해 옆문으로 갔다. 문을 두드리려다가 도관의 남쪽 벽에 기대고
서 있는 남자 두 명을 보고 깜짝 놀랐다. 빵집 앞에서 자기에게 모욕을
준 자들이었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다가 사이훙을 보더니 외면했다. 사이
훙은 살짝 도관으로 들어가 문지기에게 물었다.
[여보게, 전에 저 두사람을 본 적있나?]
[전혀 본 적이 없어요.]
문지기가 대답했다.
[그런데 형님이 들어올 때 그들도 함께 오던데요.]
사이훙은 그에게 노새를 넘겨주고 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두 사람
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베이징에서 떠들썩한 강도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쉰 목소리를 가진 자가 물었다.
[몰론이지. 누가 범인인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하지만 무술은
기가 막히게 뛰어나다더군.]
[신문에서는 그를 가리켜 비천지주(:하늘을 나는 거미)라고 대
서특필하지 않던가?]
[맞아. 이 지붕에서 저 지붕으로 뛰어넘기도 한다는군. 경찰이 두 번씩
이나 덫을 놓았지만 오히려 범인한테 당했어. 권총까지 차고 있었는데 말
이지.]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두()의 부하들 중 하나라는 거야. 그 놈
의 악당은 북부 지방에까지 큰 세력을 떨치고 있거든.]
쉰 목소리가 말을 마쳤다.
거리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 어서 가자. 준비를 해야 하니까.]
쉰 목소리였다.
사이훙은 안타까웠다. 그 얘기를 좀 더 들을 수 있었으면 했는데.
사이훙, 대사부 그리고 두 시자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했다. 날은
아직 어둑했다. 시안의 봄 날씨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운데 고맙게도
오늘은 서늘했다. 그는 기울어 가는 초승달을 쳐다보았다. 동트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박쥐의 작은 그림자들이 초승달에 스쳐 지나갔다.
잠이 덜 깬 사람들이 어두컴컴한 새벽 거리를 배회했다. 몇몇은 손에
등롱을 들고 더듬더듬 걸었다. 상점 주인들은 가게문을 열고 있었다. 도
처에 널려있는 음식점은 난로에 불을 피우고 있었다. 개들이 잠시 기웃거
리며 코를 킁킁거리고 짖어대다 도시의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광장에서
는 남자 여자들이 모여 아침 체조와 태극권 수련을 하고 있었다. 한 뚱뚱
한 남자가 봉을 들고 결연한 자세로 몸을 한 바퀴 휙 돌리면서 뛰어 올랐
다. 그러나 동작이 너무 형식적이고 무기력해서 배의 노나 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른 새벽 거리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보면서 대사부는 계속 침묵을 지
켰다. 사부가 올라선 정신적 득도의 경지에서는 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다. 희뿌연 새벽빛 속에서도 사부는 환하게 빛났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사람들
에게 자신을 드러내려는 태도가 엿보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책임이
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다가오면 도인은 봉사할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베풀었고, 신
자들이 내주는 기부금도 되는 대로 받았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시주로는
충분치 않았다. 사람들은 헌신적인 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해서 많은 액
수의 돈을 기부할 수 없는 처지였다. 거액의 헌금은 도인과 만나기를 요
청한 부자들에게서 나왔다.
사이훙은 사부가 올라탄 노새를 끌었다. 그리고 두 사령은 대사부의 양
쪽에서 호위했다. 그들은 소안탑()을 지나서 천천히 걸어갔다. 홍
안탑을 통과할 즈음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여기저기 깎이기는 했어도 아
직은 우아한 7층 뾰족탑 위로 붉게 물든 태양이 환하게 떠올랐다.
사이훙 일행은 남쪽 교외에 사는 부호의 대저택에 당도했다. 높은 벽돌
담이 저택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경비원들이 철제 대문 앞에서 경비
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네 도사가 저택으로 들어가도록 즉시 허락하고,
거대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정원은 푸르게 우
거진 나무, 흐르는 시냇물과 엄청나게 큰 암석 등으로 생동감 넘치게 가
꿔져 있었다. 그들은 녹색 광택이 나는 자기 지붕을 얹은 널따란 방으로
안내되었다. 기둥에는 용과 영조()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라고 자랑스럽게 쓴 문패가 문 입구위에 붙어 있었다.
주인 리()의 수염은 마치 염소의 수염같았다. 뚱뚱한 체구에 얼굴에
는 마마자국이 나 있었다. 그는 깃이 올라온 푸른색 비단 가운을 입고 있
었으며, 화려하게 보이는 사각형의 큰 옥반지가 왼손 검지에서 번쩍번쩍
빛났다. 그는 손님들을 극진히 맞았다.
[직접 마중을 나가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리가 말했다.
[천만에요. 너무 격식을 차리지는 마시오.]
대사부가 소꼬리로 만든 홀을 우아하게 흔들며 말했다.
[자, 앉으시지요.]
그들은 조각이 새겨진 자단 의자에 앉았다. 의자들 사이로 방 한가운데
로 길이 나 있었다. 주인의 의자는 방 중앙에서 문을 향하고 있었다. 시
중드는 여자들이 손님들의 원기 회복을 위해 차를 내왔다.
[이렇게 찾아 주시니 그지없는 영광입니다, 대사님. 어서 드시죠.]
리가 찻잔을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대사부는 접시 옆에 놓인 찻잔을 들고 찻잔 주위를 한 손으로 감쌌다.
다른 손으로는 뚜껑을 쥐고 아직 물 위에 떠 있는 차잎을 걷어냈다. 한
모금을 마신 후 긴 소매를 이용해 입을 닦았다. 리는 눈치 빠르게 그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대사부님은 예의와 교양을 함께 갖추신 분이로군요. 오늘날에는 제대
로 된 예절을 아는 사람이 아주 드뭅니다.]
[쓸모 없는 은둔자에게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송나라 자기로 차를 드시
는군요. 아침 이슬이 마르기 전에 채집한 값비싼 용정차를 아낌없이 이
시들어 빠진 도사와 하찮은 제자들에게까지 대접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
르겠습니다.]
[놀랍습니다! 차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천만에요. 당치않습니다.]
[어서들 드십시오.]
잠시 후 주인은 찻잔을 내려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장께서는 슬퍼하실 만한 일이 없으실 것 같은데요.]
대사부가 말했다.
[존경하는 사부님, 제가 책임질 일이 있다는 걸 모르시겠지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입니까?]
주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얼굴을 쳐 들었다. 우연치 않은 도움을
받게 되어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지어낸 표정이었다. 모
두들 그가 손님을 초청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격식
을 차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주인이 말을 꺼냈다.
[제 아들놈이 하나 있습니다. 분별이 생길 나이고 유럽에서 교육까지
받았는데도 아직 결혼을 못했습니다. 몇 번 짝을 맺어 주려고 노력을 해
봤지만, 중매는 구식이라며 영 제 말을 듣지 않는군요. 그런데 짝을 맺어
야 하는 그 녀석 꼴이 어떤지 아십니까? 말씀드리자면, 제 자식은 외모가
좀 처졌습니다. 존경하는 사부님, 부적이나 주문의 능력을 발휘하셔서 그
놈을 미남으로 만들고 이상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실 수 있겠습니
까?]
[주인장, 이건 특별히 부탁할 만한 문제는 아닙니다. 못생긴 애를 미남
으로 만들기 위해 쓸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은 없습니다. 또 부모가 요청한
다 해도 그 애에게 마법을 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가
지 조언을 드리지요. 댁의 아드님이 미남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가지 유혹
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아드님에게 무엇이 가능할지
그걸 생각해 보시지요. 미색(])저주가 될 수도 있고 추색()오히
려 축복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늘은 우리 모두에게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
에 없는 슬픔을 상쇄하도록 그만큼의 복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타고난 재
능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우리한테 달려 있습니다.]
대사부가 대답했다.
[제 마음은 무겁습니다만, 사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주인이 슬프게 말했다.
대사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원을 산책합시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어야겠군
요.]
그들은 정원으로 나왔다. 주인은 많은 재산을 자랑할 수 있게 되어 힘
이 솟아났다. 중요한 건물들을 모두 보여 주겠다고 고집했다. 가족이 기
거하는 거처, 조상의 사당, 특별히 정원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게끔 세워
진 정자등이었다. 지붕을 이어놓은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다가 갈지자로
축조된 몇 개의 다리를 건넜다. 산책을 하면서 그들은 호수 위에 떠 있는
연잎, 타이후()에서 가져온 바위, 그림자가 휘영청 늘어져 두 배로
커 보이는 버드나무등을 구경할 수 있었다. 주인은 그들과 함께 정원을
둘러친 담으로 갔다. 담에 있는 쪽문을 나서니 아들이 사는 집이 나왔다.
대사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인장, 앞뜰에 있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내 아들이 유럽에서 교육을 받게 된 것은 저에게는 큰 은혜였지요. 그
러나 그놈은 유럽에서 배웠는지 이상한 데 흥미가 있더군요. 귀국하더니
5대조 할아버지께서 조성한 정원을 온통 파헤쳐서는 서양식으로 바꿔 버
렸습니다. 저는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저의 말을 듣지 않고 아들놈은
끝내 화분에 심어 놓은 나무와 관목을 옮겨서 서양식으로 만들었지요. 프
랑스에서처럼 나무 밑에 그늘을 만들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외국인이 나
무를 치는 방식은 아주 무시무시하더군요. 그런데 그곳에서는 이게 유행
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정원은 법도에 어긋납니다.]
대사부가 중얼거렸다.
[존경하는 사부님, 외국인을 모방하는 것도 아주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제 말은 이렇습니다. 믿으시든 말든 그것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아드
님의 집은 남향입니다. 전에는 흐르는 시냇물과 연못을 굽어보고 있었습
니다. 드넓은 뜰에 둘러싸여 있었죠. 이제는 뜰에 키 큰 나무들을 빼곡이
심었습니다. 이 나무들 때문에 햇빛이 가려질 뿐 아니라 부귀영화가 들어
오는 입구가 막힌 셈이 됐어요. 문 옆의 작은 화단에 심었던 노간주나무
들은 다 뽑히고 말았습니다. 연못의 전경도 앞이 흐려져서 잘 안 보입니
다. 제 의견으로는 이런 연유로 이 댁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존경하는 사부님, 전 철저히 옛 중국의 관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
나 오늘의 젊은이들은.......]
주인이 공손히 말했다.
[제 말을 믿으시든 말든 그건 별 관계가 없습니다.]
[믿습니다! 믿고 말고요! 단지 동과 서가 하나로 융합되기가 쉬운 일은
아니라서요.]
주인은 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 가족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그려.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릴까
요? 중국인이고 서양인이고 모두 확고히 정해진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동과 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
다고 해서 세계관을 변경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늘날 중국인
가운데 일부가 서양의 사고방식을 배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댁
의 아드님처럼 중요한 공적을 쌓을 수 있는 기술을 얻기도 했죠.
비슷한 얘기지만 서양인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깨
닫게 될 날도 언젠가는 있을 것입니다. 더러는 음과 양의 미묘한 이중성
을 관찰하고 결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양식의 정원은
서양인의 자연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연을 지배하고 점령하고
자연의 비밀을 벗기고 억지로 기하학적 도형을 취한 발명품으로 변화시킵
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은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을 것입니
다.]
[저를 망친 주범은 이 저주스러운 외국식 정원이군요.]
주인은 슬픈 듯이 말했다.
[잠깐요. 저는 외국인을 싫어하는 독단론자는 결코 아닙니다. 이 나무
들의 위치가 이 가문의 번영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재배된 나무
이건 야생으로 자란 나무이건 이 나무들이 복을 짓밟아 버릴 겁니다.]
[존경하는 사부님께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아드님과 갈등을 빗고 있는 것은 이해합니다. 한편으로 그는 서양의
관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
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롭기 대문에 주인장께서는 받아들이시는 것이죠.
그러나 주인장은 전통주의자이십니다. 아들이 너무 지나치게 나오면 반대
하시는 거죠. 주인장은 아들의 외모에 실망하고 있지만, 그이 내면적 성
품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십니다. 이 댁의 문제점은 나쁜 정원만이 아니
라 부자간에 서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저는 중국 본래의 아름다운 문화에 대해 무지한 외국인의 권위는 인정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을 때, 우리
중국인은 방대한 문명을 지니고 세련된 생활을 하고 있었죠. 제 아들은
중국 방식대로 결혼을 해야 합니다. 우리 집안은 상속자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주인의 의지는 결연했다.
[동양과 서양이 다르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서양인은 단단한 바위에 뿌리를 내린 다음 생존을 위해 바위를
뚫고 살아가는 산에 있는 소나무와 같습니다. 즉 그들은 얻을 수 없는 것
을 얻고자 끊임없이 싸우고 투쟁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중국인은 바위
를 덮으며 흐르는 시냇물처럼 그 뿌리로 바위를 감싸안는 보리수에 비유
됩니다. 보리수는 바위에 길을 내주고 바위 사이에 벌어진 공간으로 뿌리
를 내립니다. 바위를 꽉 움켜잡고 바위와 하나가 됩니다. 동양은 있는 그
대로의 인생을 받아들여서 인생과의 조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서양인처
럼 땅을 이용하고 정복하고 싶어하는 우둔한 중국인도 있습니다. 언젠가
는 성스러운 산사의 정적을 찾는 서양인의 움직임이 나타날 것입니다.]
[존경하는 대사부님, 동양과 서양이 만나게 된다는 말씀인가요?]
[서양은 7년 동안 더 시끄러울 겁니다. 여전히 갈등은 깊어지고 있어
요. 다른 나라들은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되고 인류는 마치 태양이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끔찍스러운 신무기의 출현을 구경하게 될 겁니다. 동양
은 앞으로 30년 동안 더 깊은 파국으로 치달을 겁니다. 인류가 평화를 찾
게 되려면 앞으로 30년은 더 걸리게 됩니다.]
주인은 두 손을 합장하고 절을 했다.
[대사부님의 혜안이 저로서는 무척 난해하군요. 진정 도는 이해하기 어
렵습니다.]
대사부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이 노인이 그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
다는 걸 알았다.
[망상에 빠진 수행자가 한 넋두리이니 용서하십시오. 아드님 얘기를 하
다가 화제가 빗나갔군요. 저의 충고는 간단합니다. 뜰을 깨끗이 치우십시
오. 문으로 들어오는 행운을 막지 마십시오. 동시에 아드님을 이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주인장의 전통을 굽히지 마십시오. 그러나 갈등은 깊게 성
찰하십시오. 해결책은 아드님의 외모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오후 반나절 동안을 머물면서 리가의 여러 식구들을 만나고 그
들의 환대를 받았다. 사이훙은 대사부를 위해 베푼 향연 때문에 아주 흐
뭇했다.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잘게 썬 차가운 해파리, 해삼, 바싹
바싹 구운 오리고기, 거위고기로 만든 불고기, 기름에 노랗게 살짝 튀긴
생선, 향긋한 민물 가재, 사슴고기, 꿩과 신선한 야채가 나왔다. 포도주
향기에 곧 취할 것만 같았다. 식탁에서 풍기는 포도주 향기가 사이훙의
코끝을 자극했다. 대사부는 그를 위해 만든 야채요리만 먹었다. 하지만
관대하게도 수련생들에겐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허락했
다.
모두들 시안의 도관으로 돌아오면서 행복했고 만족스러웠다. 그들은 그
가문을 도와주었고 자신들은 배불리 먹었으며 기부금을 내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저녁 공기는 아직도 푸근했다. 두 사형은 허드렛일을 하러갔다.
린 쭝우는 물을 길어 오기 위해 샘으로 갔다. 칭 수이셩은 통풍을 시키기
위해 받침대를 대고 봉창을 열었다. 사이훙은 사부의 상투를 풀었다. 숱
이 무성한 백발로부터 자단 비녀를 부드럽게 빼냈다.
대사부가 사이훙에게 말을 건넸다.
[단지 정원과 부적을 얘기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구나. 도인으로
서 우리들은 조직체의 구성원이 지닌 문제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나는
그의 문제점을 두 가지 차원에 접근하였다. 하나는 집의 정원을 고쳐야
했다. 다른 하나는 문제가 대부분 부가간의 갈등에 있었다. 그래서 정원
을 구실 삼아 가족이 문제에 처한 진짜 이유를 지적하고 관련되어 있는
고민 거리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도인은 운명에 지나치게 간
섭해서는 안 되느니라. 사람은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에만 반응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도인은 시적인 비유법을 쓴다. 만일 그가 이해하지 못하
면, 그것은 그의 운명이니라.]
[사이훙, 노새가 병인 난 것 같은데.]
물을 긷고 돌아온 린 쭝우가 말했다.
[뭐라고요? 오늘 저녁만 해도 건강했는데.......]
[열이 심한 것 같애.]
칭 수이셩이 말했다.
[사부님, 제가 노새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사이훙을 데려가면 안
될까요?]
린 쭝우가 물었다.
[그래라. 가서 문제를 해결하거라.]
데사부가 동의했다.
밖으로 나와 노새의 상태를 살펴본 사이훙은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별로 나쁜 것 같지 않은데. 왜 나를 밖으로 끌어냈지요?]
사이훙이 물었다.
[조용히 해. 노새때문이 아니야. 얼굴에 검은 두건을 쓴 남자가 담벽에
서 나를 공격했어. 둘이서 몇 차례 치거니 받거니 하다가 그놈은 도망쳤
어.]
린 쭝우가 속삭였다.
[잘 싸우는 놈이었어?]
칭 수이셩이 물었다.
[꽤 잘하더군. 나를 죽이려 했지만 죽이지 못했어. 내 생각에는 놈이
다친 것 같았어.]
[뭐하는 놈일까? 강도일까?]
사이훙이 물었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 그놈이 도관을 털려고 했다면 보물이
있는 본당()이나 장경각()으로 갔을 거야. 하필 왜 이 작은 손
님방으로 찾아왔겠어?]
린 쭝우가 말했다.
[그렇다면 딱 한가지 결론밖에 없어. 그놈들은 대사부를 죽이려 한 거
야.]
사이훙이 말했다.
[그럴 가능성 높아.]
린 쭝우가 말을 마치고 칭 수이셩을 돌아보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듣고 보니 그럴듯한 이유여서 겁이 나는데. 도대체 어떤 자가 대사부
를 은밀히 해치려는 걸까? 이유야 어쨌든 밝혀낼 수 있는 단 한가지 길은
함정을 파는 거야.]
[찬성이야.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어. 조
심하지 않으면 안 돼.]
린 쭝우가 이렇게 말했다.
대사부는 밤 11시에 명상을 시작했다. 제자들이 행동을 개시하는 때는
그 시간이었다. 린 쭝우가 세운 계획에 따라 사이훙은 등불을 들고 다른
사람 눈에 잘 보이도록 뜰을 걸어갔다. 그는 반대편으로 가서 문을 지나
변소로 들어갔다.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면서 옷소매를 묶었다. 악취가 코
를 찔렀다. 다행히 단 하나의 무기인 부채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기다릴
수 있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린 쭝우가 정확히 예언한 대로 암살자는 사이훙에게 다가왔다. 목표가
대사부라면 공격자들은 그의 제자들이 모두 무술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들은 제자를 분리시켜 하나씩 쓰러뜨리려고 할 것이다.
발자국 소리가 들려 사이훙은 변소 밖으로 훌쩍 뛰어나왔다. 그때 어둠
속에서 창살 하나가 날아왔다. 그러나 쏜살 같은 동작으로 부채를 확 폈
다. 부채는 그의 얼굴을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했다. 사이훙은 부채를 빙
빙 돌리면서 잽싸게 옆으로 피했다. 창살이 비껴 나갔다. 사이훙은 부챗
살 속으로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상대에게 주의 하면서도 이쪽의 의도를
숨길 수 있었다.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단도를 양손에 들고 절의 담위에서 풀썩 뛰어내
렸다. 뾰족한 두 개의 칼끝이 사이훙을 베기 위해 움직일 때마다 달빛이
잘게 부서지는 것처럼 흰 칼날에서 번쩍번쩍 섬광이 일었다. 사이훙은 찰
칵 소리를 내고 부채를 접었다. 그는 좋은 기회가 올 때까지 교묘한 솜씨
로 피했다. 그러다가 한 순간 돌진하면서 상대방의 왼손을 부채 끝으로
힘껏 내리쳤다. 칼을 쥔 긴장감 때문에 곧추선 섬세하고 가는 뼈들이 충
격을 받아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그러나 아직 다른 손에 단도가 남아 있었다. 암살자는 다시 힘을 냈다.
그는 칼을 휘두르기 전에 정신이 산만해지는 걸 막으려는 듯 번개같이 날
쌔게 사이훙을 발로 가격했다. 그는 사이훙의 최대 약점인 팔목과 눈, 목
을 능숙하고 유연한 솜씨로 찔렀다. 사이훙은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야만 한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사이훙은 공격자에게 미끼를 던지려고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섰다. 그자
가 한 걸음 성큼 다가오자 사이훙은 부채를 빠른 속도로 돌리면서 하늘
높이 던졌다. 부채는 나선형을 그리다 되돌아오는 부메랑처럼 날아갔다.
암살자가 위를 올려다보는 찰나 사이훙은 데굴데굴 구르면서 앞으로 내달
아갔다. 떨어지는 단도를 잡아챈 후, 그 칼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몇 겹
의 옷 속으로 푹 찔렀다. 번쩍이는 칼날은 피로 범벅이 되었다. 칼날의
홈으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사이훙은 한 걸음 더 움직이며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 척하다가 다시 베고 찔렀다. 칼날을 위로 세우고 흉골 밑
을 베고 나서 심장을 찔렀다. 근육이 꿈틀거리며 저항했다. 얇은 횡격막
은 질겼다. 그러나 사이훙은 손잡이를 탁 쳐서 정통으로 그를 찔렀다. 그
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사이훙은 훌쩍 뛰어올라 부채가 땅에 떨어지
기 전에 바로 전에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사이훙은 재빨리 그자를 수색했다. 가면을 벗기니 피부가 매끄러운 얼
굴이 나오고 툭 불거진 두 눈이 나왔다. 사이훙은 자객의 옷을 벗겼다.
목에 걸린 옥으로 된 부적을 빼고 나니 홍작약루에서 발행한 30킬로 짜리
금값을 지불한 약속어음 한 장뿐이었다.
도관의 종소리가 자정을 알렸다. 화산에서 울리는 종보다 훨씬 작고 종
의 울림도 떨어졌다. 사이훙은 대사부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두 사형이 각
자 맡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이훙은 뜰에 있는
문으로 가서 칭 수이셩이 망토를 걸친 키 큰 사람을 호위하는 것을 보았
다. 그는 대사부의 모자를 쓰고 소꼬리 만든 홀을 가지고 있었다. 칭 수
이셩은 봉을 들고 옷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조급한 듯 걷고 있었
다. 급히 도주하는 인상을 주려고 애쓰면서, 문도 제대로 닫지 않았다.
사이훙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그의 본능이 행동 개시를 명령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비호같이 뜰을 가로질러 가서는 소리 안 나게 살살 발을
끌며 도둑 고양이처럼 걸었다. 바로 그때 또 다른 두 명의 암살자가 근처
의 지붕 위에서 뛰어 내렸다. 그들은 곧장 사부의 방으로 나아갔다. 사이
훙이 할 일은 그들을 따돌리는 것이었다.
사이훙은 두 공격자가 무기를 빼들지 못하게끔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
다. 첫 번째 난타전을 벌이면서 사이훙은 둘 다 무술이 능란한 무사라는
걸 알았다. 한 놈은 키가 크고 몸이 약했다. 그래서 사이훙은 그를 집중
공략했다. 사이훙은 그자의 팔을 꽉 잡고 레슬링 자세로 덤비는 다른 놈
쪽으로 냅다 던졌다.
한 번 더 계략을 쓸 시간이 되었다. 사이훙은 적들과 문 가운데 있는
지점으로 갔다. 건물로 통하는 길이 이제는 확실히 드러났기 때문에 위험
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한 손을 높이 쳐 든 채 현란한 포즈를 취했
다. 다른 손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것은 무사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자
세였다. 무사가 실력이 없음을 비웃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생
각해 낼 수 있는 온갖 상스러운 욕을 다 퍼부었다.
사이훙의 경험에 따르면 몸이 약한 무사는 늘 성급하게 덤볐다. 그의
계산을 과연 딱 맞아 떨어졌다. 키 큰 암살자는 날이 넓은 칼을 빼들고
성급하게 달려들었다. 놈은 손으로 명치를 가격하고 팔로 목을 죄다가 잽
싸게 메어쳤다. 그리고 그 다음 문을 통과했다. 그때 기다리고 있던 칭
수이셩이 봉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러나 암살자는 용하게 피했다. 정
신이 아찔할 정도로 빨리 회전하는 큰 칼과 봉이 맞서서 한판 대결을 벌
였다.
함정의 전모가 이제는 확실히 드러났다. 린 쭝우의 전략은 단순히 대사
부를 미끼로 삼아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암살자들로 하여금 서투른 연극이 벌어지고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사이훙이 죽은 것으로 믿고 두 시자들이 그들을 유인한다고 생
각한 암살자들은 대사부가 무방비 상태에 빠졌다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사부를 죽이려고 뛰어들면 그때 사이훙이 그들을 문 밖으로 몰아서 사부
도 모르게 그들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이때쯤 마지막 암살자는 치밀한 전략에 속아 그가 함정에 빠졌다는 사
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삼십육계 줄행랑 뿐이었
다. 그는 직선형의 긴 칼을 칼집에서 빼내 사이훙에게 휘둘렀다. 그는 칼
을 몇 번 휙휙 휘둘러 베는 검법을 쓰고 두 번 찌른 다음 문에서 도망쳐
벽을 따라 달렸다. 속도를 내서 빠르게 달리더니 훌쩍 뛰어서 담벼락 위
를 손으로 움켜 잡고 몸을 한 바퀴 빙글 회전시켰다. 사이훙은 문을 지나
계속 달렸다.
칭 수이셩은 여전히 상대와 교전 중이었다. 그는 봉을 아래로 내리쳐
어깨의 견갑골을 박살내고 쇄골을 뚝 부러뜨려 버렸다. 부러진 뼈끝이 살
점사이로 삐죽삐죽 삐져나왔다. 두번 더 봉으로 찔러 칭 수이셩은 놈을
해치웠다.
다른 암살자는 도망치려 했지만 린 쭝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된 것을 알
아차렸다. 린 쭝우는 자기 소유의 특이한 칼 하나를 갖고 있었다. 두 손
을 이용해 휘두르는 칼날이 아주 넓은 직선형 칼이었다. 칼에 피가 흘러
내리도록 홈이 없는 대신에, 가운데에 밑으로 U자형의 홈이 패여 있었다.
이 칼은 아주 무자비한 무기였다. 몸속으로 깊숙이 찌르고 나면 칼날 둘
레에 있는 빨판에 살이 흡수되어 박혀 버렸다. 칼을 잡아 빼면 큰 살점들
이 떨어져 칼에 묻어 나왔다.
암살자의 직선형 칼은 너무 섬세해서 린 쭝우의 칼과 직접 충돌하면 견
딜 수 없었으므로 그는 자줏빛 칼날을 피하려고 회전법을 썼다. 팔목, 배
꼽, 목등의 신체 부위는 전술상의 요충지였다. 무거운 칼을 든 린 쭝우는
몸의 회전이 둔하긴 해도 정확성은 높았다. 암살자는 용기를 내서 맹렬한
기세로 공격했다. 린 쭝우는 자줏빛 칼이 밑을 향하게 잡고 그를 놀리면
서 공격했다. 화가 난 암살자는 앞으로 돌격했다. 그때 린 쭝우는 뒤로
물러서서 무릎을 꿇었다. 린 쭝우의 칼날이 돌연 솟구치자 그자는 몸을
추스리지도 못하고 칼에 꽂히고 말았다. 린 쭝우는 위로 뛰어올라 그 자
의 몸속으로 칼을 깊게 찌르고 칼날을 복부까지 끌어 당겼다. 린 쭝우는
암살자의 목에서 피가 샘솟아 소리 없이 죽기를 바랐다.
세 명의 수련생은 시체를 전부 수색했다. 사이훙이 예상했던 대로 검객
은 상처가 난 그 남자였다. 하지만 불교의 승려를 발견하고는 모두 놀랐
다. 그가 진짜 승려인지 단지 변장만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옷속에서 편지 한 장이 나왔다. 불교도와 도교도 사이에 터진 새로운 종
교 분쟁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또 화산이 그 승려를 제거하는 것을 경
고하였다. 편지는 그들이 모르는 이름으로 사인이 되고 봉인까지 찍혀있
었다. 누군가 그 승려를 조정해서 싸움을 시킨 것이었다.
사이훙은 약속 어음을 꺼냈다. 홍작약루는 후디에와 함께 전에 가 본적
이 있는 곳이다. 도대체 사부의 목숨을 노리는 이 일과 그곳은 무슨 연관
이 있는 걸까? 사형들은 곧 둘의 관계를 연결시켰다.
[홍작약루는 진엔니아오의 수제자 소유라는 얘기가 있어.]
칭 수이셩이 말했다.
[이 사건 배후에 대사부의 제자가 도사리고 있군.]
린 쭝우가 말했다.
[정말 말도 안 돼!]
사이훙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가 통솔권을 얻으려고 그처럼 필사적이
되었나? 충성심 같은 건 다 잊어버렸을까?
[네가 더 오래 살다보면 다른 사람들의 변절에 그렇게 놀라지 않게 될
거다. 그런데 이 사건은 소문과도 맞아 떨어지는군. 진엔니아오는 몇몇
군벌들의 자문역이라는 소문이 있어. 그것때문에 그는 화산의 지배권을
넘보는 거지. 성스러운 화산 전체를 흔들고 나서 이 나라의 통치권을 삼
키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러자면 당연히 자금과 영향력이 필요
할 테지. 홍작약루는 지하에 숨은 부자들과의 연락로가 되어 줄뿐 아니라
거액의 자금줄이거든.]
칭 수이셩이 말했다.
[그것 참 안전한 전략이로구만. 결국 상하이의 지하 세계와 거액의 아
편 거래 대금이야말로 장()을 계속 집권하도록 해준다는 말이 사실이로
군.]
린 쭝우가 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부를 죽이려 하다니! 가증스런 짓이야.
내가 그 깡패 놈을 죽이고 말겠어!]
사이훙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간단치가 않단다.]
린 쭝우가 차분한 어조로 얘기를 시작했다.
[진엔니아오는 도인이고 최고의 전략가야. 그리고 우리가 사실을 입증
할 수 있니? 홍작약루는 그의 제자 소유야. 사실 진엔니아오는 암살범들
의 실패에는 개의치 않는단다. 그는 우리가 그 쪽지를 보게 하려는 의도
였어. 그것으로 충분히 암시가 될 테니까. 그러니 우리는 조심해야만 해.
진엔니아오는 우리 주변을 경계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한다지? 대사부는 가만히 계시는데.]
사이훙이 의문을 제기했다.
[사부님은 사정을 다 헤아리고 계셔. 사부님은 현명하시거든. 우리가
할 일을 일러주실 거야. 지금 당장은 이 세 놈을 치우고 사부님께 돌아가
자. 사부님을 지켜드려야 하니까.]
사이훙과 두 사형은 시체를 도관에서 끌어냈다. 전쟁과 빈곤이 겹쳤던
그 당시에는 길거리에서 매일 죽어 가는 사람이 많았다. 시체 세 구가 새
로 늘어난다 해도 경찰은 미궁의 사건으로 처리할 것이다. 그들은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일을 다 마치고 나니 새벽 1시쯤 되었다.
그들은 사부의 방으로 들어가 향을 갈고 물을 가져와야 했다. 경건한 마
음으로 방에 들어가니 사부는 진흙으로 만든 침상에 가부좌상을 하고 앉
아 있었다. 사부가 눈을 떴다.
[일은 다 처리했느냐?]
사이훙과 두 사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네, 사부님. 오늘일은 다 끝냈습니다.]
사이훙이 대답했다.
[됐어.]
그뿐이었다. 그러나 눈을 감을 때 이마에 주름이 지는 것을 보고 제자
들은 사부가 노새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2권 SEVEN BAMBOO TABLETS OF
THE CLOUDY SATCHEL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이 인 복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5. 야간 수업
4명의 도교 수행자는 화산의 은거지로 돌아왔다. 그들의 목숨을 빼앗으
려는 시도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여행 중 일어났던 사건
에 관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사이훙은 약속 어음과 편지를 지니고 왔
다. 그것들은 말없는 증거인 셈이었다. 사이훙은 북쪽 봉우리 문에서 양
식, 보석, 천, 헌금, 약속 문서 등을 수행자들에게 전달하고 수도 생활에
복귀할 준비를 했다.
여행은 사이훙에게 강장제가 되었다. 새로운 결의를 다지면서 절식을
하고, 하루 네 차례의 경전 암송, 여러 과목의 수업과 힘든 노동, 그리고
강도 높은 명상을 할 채비를 했다. 그는 입산 수도를 하며 부딪치는 힘든
도전을 극복하고 스스로 불굴의 의지와 영적 인식력 - 도관의 고독한 수
도 생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믿는 - 을 쟁취하기 이해 몸과 마음
을 다 바쳐 다시 헌신했다. 속세에서 돌아온 후로 그의 내면 세계에는 일
시적이지만 뭔지 모르게 충만한 만족감이 생겼다.
대사부는 항상 그에게 가르쳤다.
[생에서 누릴 것은 다 누려 보아라. 그 다음에는 은둔하라.]
대사부는 사이훙이 인생으로부터 맛볼 수 있는 최선의 것을 경험한 후
점차로 철학적 통찰력을 얻음으로써 영혼의 성장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
을 단념하기를 원했다. 이렇게 사이훙은 지나온 과거를 아무런 후회 없이
버리고 떠나면서 인생의 몇 단계를 거치면서 성장할 것이다.
대사부는 유능하고 양심적인 스승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제자들을 지도
했다. 그가 지식을 전수하는 데 중요한 비중을 두는 저녁반에는 수강생이
단 몇 명밖에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며칠 뒤의 어느 날밤, 사이훙, 두
사형, 그리고 다른 제자 하나가 사부의 방에서 만나 수업을 했다. 사부는
명상대에 앉았지만, 제자들은 마룻바닥에 앉았다. 사부는 우아하게 옷소
매를 말아 올리고 명상대의 팔걸이에 오른팔을 걸치고 있었다.
이윽고 대사부가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 밤은 수업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시작할까 한다. 항상 너희들이
나에게 질문을 했지만 이 시간에는 내가 질문을 던지겠다.]
그 질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도교는 무엇인가? 사이훙, 너는 아홉 살 때부터 계속 나와 함께 여기
서 살았다. 분명히 너는 올바른 답변을 할 수 있겠지. 자, 네가 대답해
봐라.]
사이훙은 얼굴이 빨개졌다. 극도의 긴장감 때문에 죽을 것만 같았다.
답변을 논리 정연하게 엮어 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모든 사물에 배어있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막강해서 신
들조차 그 밑에 종속되어 있는 광대한 우주를 향한 운동이요 힘이요 전진
일 뿐입니다. 이 힘은 너무 거대하여 인간은 고작 일부분만 인식할 수 있
을 뿐입니다. 별자리, 사계절, 자연의 변화, 문명의 역사, 이 모든 것은
도를 드러내지만 자체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주의 형이상학적 요소 - 만물, 5원소, 음양-는 도의 일부분 일뿐 전
체는 아닙니다. 인간은 도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지만, 도의 원리를
배울 수 있고 도와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이
삶의 흐름을 좇아가면 불사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도는 신, 현인, 도를 깨달은 인간들에 의해 전해져 왔지만 도에 무지한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헛일이었습니다. 현인들은 우리를 해방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도의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도교는 신자들이 계속 탐
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내면적인 연금술과 외적인 연금술을 개발하고 경
전과 명상을 발전시켰습니다. 이상은 제가 이해한 도교를 간단히 요약한
것입니다.]
대사부는 눈을 감고 앉아 사이훙의 설명을 경청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
다 눈을 뜨고 그의 젊은 제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것이 전부냐?]
사부가 물었다.
[지금 이 시간에, 이제껏 제가 터득한 것을 모아 말씀드릴 수 있는 것
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사이훙은 머뭇머뭇 대답했다.
[네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마도 도를 이해하는 정도가 그
리 깊지 않은가 보구나. 우리는 도 자체를 먼저 다루어야 한다는 네 의견
에 동의한다. 하지만 도는 우주 전체의 진정한 뼈대임을 먼저 확실히 해
두자. 우선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현상의 세계에는 질서가 있느니
라. 별과 위성과 사계의 규칙적 순환을 보면 우주를 깨달을 수 있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여기서 말한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더욱 심오하게 질문을 해봐
야 한다. 우주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주의 모든 것은 어디에
서 왔는가? 누구는 대답하기를 신이 우주를 창조했으며 우주를 지배하고
있다고 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만족스럽지 못한 답변이다. 왜냐
하면 그 다음으로 우리는 <신들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의문을 피할 수
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전이나 단순한 민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신 자신도 인과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의 기초적인 힘을 탐구하다 보면 신을 능
가하는 어떤 힘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질적인 사물의 근원과
관련이 있는 어떤 힘이 틀림없이 존재한다.
내가 힘을 거론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거라. 우주는 물질로 환원될 수 없
다. 바위를 아무리 곱게 빻아도 인생, 움직임, 시간, 차원등을 설명할 수
는 없다. 경전에 이르기를 <존재는 비존재가 낳는다.>고 한다. 이 말을
되새겨 봐라. 우주의 유일한 가능성이요, 전적으로 환원이 불가능한 우주
의 기원은 비존재일 수 있다. 단지 비존재만이 환원될 수가 없는 것이다.
태초에는 무였다. 무에서 하나의 우연한 생각이 터져 나왔다. 생각은
무의 정지 상태 속에 움직임을 일으키고 그 결과 무한한 파문이 일어났
다. 움직임은 기를 발생시켰다. 이것이 생명의 원천이 되는 호흡이니라.
호흡은 5원소로 응결되었다. 금속, 물, 나무, 불, 흙이 그것이다.
그 다음 이 혼돈 상태는 음과 양에 의해 조직화되었다. 호흡은 들숨과
날숨이다. 우주는 그 원칙과 질서로 정돈되었다. 양극단 사이의 상호작용
과 긴장 속에서만 운동과 진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호
작용은 마침내 신, 인간, 무수한 현상들을 낳았다. 처음에 떠오른 생각은
원시 상태의 잔잔한 연못 속에 돌 하나를 떨어뜨린 것과 같은 효과를 냈
다. 그 뒤에 나타난 모든 것을 도라고 부를 수 있느니라.
따라서 도는 전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것은 사실 아니다. 전적으로 환원
불가능하다는 정의에 합당한 것은 오직 무()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
나 도는 무와 약간 떨어져 있을 뿐이다. 도는 무와 밀접한 상호작용을 벌
인다고 말할 수 있겠다. 도의 변화와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도의 변환 작
용 - 연못 위의 파문들 - 으로 하늘과 땅과 만물이 생겨났다. 그것들은
여전히 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말은 신비의 지혜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길을 암시하
고 가리킬 수 있을 뿐. 너희들 스스로가 이것을 인식해야만 하느니라. 내
말이나 앞서 깨달은 이들의 말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의 경험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은 명상을 하면서 내가 직접 체
득한 것이다. 성인들이 <문 밖에 나가지 않고서도 현인은 하늘과 땅을 안
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느니라. 너희가 그것을 깨달았다면 명
상을 해야만 한다.
그러면, 도교가 뜻하는 바는 무엇이냐? 도교는 연구하고 우리 스스로
도와 화합하는 방법인 것이다. 나아가서는 도 그 자체와 하나가 되기 위
한 과정이니라. 현인들은 말한다. <도는 영원하다. 그리고 도를 소유한
자는 비록 육신이 사그러진다 해도 파멸되지 않는다.> 그러나 단순 명쾌
한 한 가지 방법은 없다. 사람들은 다양하고 도는 결코 정적이지 않다.
인생의 다양한 면모는 개개인의 필요와 운명에 따라 재단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죽서칠판()에 360가지 수양법을 실어 놓은 이유이니
라.
도교는 다단계로 분류된 영적 체계이다. 보통 종교가 타종교는 배척하
고 전적으로 자신의 신앙만을 규정지으려고 기를 쓰지만 도교가 드넓게
뻗어 가는 영역은 전 우주를 품고 있다. 도교의 철학적 기원의 가장 기본
적인 요점 가운데 하나는 인류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라.
먼저 인류를 놓고 보자. 도인은 인간 고유의 특성을 간파하였다. 즉 죄
와 소망, 비열함과 고귀함, 야만과 기예, 감정과 지성, 억지와 순결, 그
리고 가학성과 동정심, 폭력과 평화주의, 자기본위와 초월 등등을 간파하
였다. 다른 현인과는 달리 도인은 인간의 악마적 충동을 거부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양성은 둘 다 받아들여져 함께 작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
문이다.
이원론의 양면이 받아들여졌을 때 도인은 선과 악이 여러 가지 비율로
혼합되어 있는 것이 인간임을 확실히 깨달았다. 따라서 도교는 다양한 사
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거대한 체계로 발전하였다. 도인은 범인
에게 도덕과 경건함을 선사하였다. 영웅에게 신의와 충성을, 권력에 굶주
린 자에게 무예와 마법을, 지식인에게는 지식을 선사하였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구하고자 하는 극소수에게는 명상과 초월의 비법을 선물하였
다. 그 다음 그들은 내면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밖으로 표출시켰다. 그리
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들은 속인의 일부분일뿐 아니라, 소우주와 대우
주의 질서에 따르는 모든 개인의 내적 실제이기도 하다.>
도인은 이상주의자가 아니고 항상 실용주의자니라. 그의 관심사는 현실
에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데 있기보다 늘 자신의 앞에 있는 존재의 처
리에 있었다. 아마도 이렇기 때문에 종종 도교의 정의를 간파하기 어렵다
는 비난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자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할 것이
다. 도교는 기회주의자의 교리라고. 하지만 실제로 앞에 놓인 상황에 어
떻게 대처할 것인지가 도교의 관심사의 전부이니라. 그 눈앞의 상황이 늘
변하는 것 또한 도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도교에 앞선 다섯 가지의 중요한 흐름이 있다. 샤머니즘,
철학, 양생술, 연금술과 봉래파는 대대적인 정신운동으로 발전하게 될 요
소들이다. 샤머니즘은 도교의 시초이니라. 원시 종족들은 신, 악마, 조상
의 혼령,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정한 존재로 다가온 전능한 자연을 신봉했
다. 원시 종족들은 병든 자를 치료하고 숨은 것을 예언하고 결과를 통제
하기 위해 마법을 쓰는 그들의 지도자 즉 샤먼의 힘에 의존했다. 샤먼은
자기를 떠받드는 백성과 백성에게 괴로움을 끼치는 세계 사이를 개인적인
힘으로 파고든 것이다.
신을 숭배하자 인생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그중 최고로 꼽히는 숭배
는 조상 숭배 - 농사의 공동 작업이 가족 단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기에
- 와 땅, 산, 호수, 나무, 추수등의 자연신 숭배였다. 사실 자연물과 농
경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전부 그 속에 신성이 들어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황허()는 많은 강 중에서 <강의 백작>이라고 불렸
다. 그 강은 거북이가 끄는 마차를 타고 있다고 믿어졌다. 사람들은 아주
잔인하게도 인간을 희생시킴으로써 끔찍하고 일시적인 강의 범람을 달래
려고 애썼다.
사람들의 의식이 차츰 발전하였던 것은 뛰어난 현인들의 중재 덕이었
다. 황제()는 약에 대한 가르침 때문에 유명해졌다. 복희씨()
는 점을 가르치고 팔괘의 체계를 세웠다. 신농씨()는 자신의 몸에
다 약초를 실험했고 우()임금은 홍수를 다스렸다. 이들 선사시대의 임
금들은 샤머니즘을 한 단계 끌어올렸고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는 도교의
여러 요소들을 창안했다. 자연 숭배, 점, 흙점, 부적, 액풀이 그리고 성
령의 계 등의 유래는 기원전 수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교 학파의 하나로 순수 이론에 치중하는 대화파는 주 왕조 시대에 발
생했다고 볼 수 있다. 노자는 이 학파의 도인이었다. 그는 세속을 떠나
출가하기 위해 뤄양()을 떠났을 때 한동안 화산에 와 있었다. 그러나
왕실에서 나눈 공자와의 대화 때문에 그의 철학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 갈래는 도교의 분파가 되었고 다른 한 갈래는 세속 철학이 된 것이다.
3세기경, 장자, 열자 계열의 사고를 앞세운 학파는 논쟁 부재, 덕치, 대
립의 상대성, 명상을 통한 도의 탐구 등을 강조하는 도교를 주창하였다.
이 시대에 태동한 학파들은 점복, 샤머니즘, 신체 단련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지적인 부류의 도교를 추구했던 것이다.
신체 단련은 양생술에서 생겨났다. 우리 분파는 크게 보아 양생술의 전
통을 물려받고 있다. 이 계통의 핵심적 가설은 육체와 정신은 훈련을 받
아야 하고 영적인 득도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연마되어야 한다는 것이니
라. 소위 육체적이라 함은 순수한 정신주의로 확대시키는 그 연장선상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단다.
양생파는 기원전 4세기 경에 발생했다. 그러나 5백 년이 지나는 동안에
도 크게 명성을 떨치지는 못했다.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이 분파의 가르침
은 처음에 <<황정옥경()>>에서 나중에 <<대동진경()>>으
로 성문화 되었다. 초기에는 단전의 세 개의 생명력의 중심으로부터 교리
가 생겨났다. 그 교리는 호흡의 순환, 식사, 명상과 무술이었다. 이 모든
것은 인체 내의 3만 6천 신들의 존재를 주장하는 원리로 집대성 되었다.
사람을 신이 담긴 그릇으로 가정해 보면 어째서 인체는 청결하고 강인해
야 한다고 믿게 되었는지 이해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건강하지 않은 몸은
신들이 단념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욕주의 경향이 강해진
것이다. 포도주와 약 등 모든 외적 수단은 거부되었다. 사람의 몸 안에
있는 신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양생파의 목표는 초
기에는 육체적 영생이었다. 하지만 점차 환생의 교설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우선 순위는 육체의 껍데기 속의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불사의
영혼을 창조하는 쪽으로 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연금술사들은 육체의 영생을 계속 믿었다. 연금술
학파는 추연()의 오행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추연은 기원전 325
년경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방법의 대가, 즉 방사()들은 항상 불사
의 공식을 찾으려고 실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단다. 그들은 약초,
광물, 화학 재료와 그 밖의 모든 것을 섞어서 용해시키는 과정을 끝없이
계속했다. 초기에 기울인 노력은 대부분 수은, 유황, 납같은 광물에 집중
되었는데 불행히도 그 광물은 건강에 해가 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
의 연구를 - 단지 자기 보존을 위해서만 - 약초의 사용, 의식, 성적 연금
술, 명상과 마술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조정하였다. 연금술파는 악귀 다스
리기와 마법과 같은 초기 샤먼들의 관심사를 물려 받았다. 연금술사가 외
적인 방법을 제안한 반면, 양생술사는 내면적 수단을 고수했다는 점에 양
자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
마지막으로 봉래()의 숭배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 분파는 단순히
육체적 영생에만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뻔뻔스럽기 그지없다. 기원전 4세
기쯤 언젠가 태평양의 어느 이상한 섬에 불로초가 자라난다는 전설이 있
었다. 수차례의 탐험끝에 그 섬을 드디어 발견하였다. 그때가 기원전 221
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 시절이었다. 그는 화산에서 불과 10킬로 거리
에 있는 지역까지 통치했다. 화산은 연금술과 마법을 병행하는 봉래파를
신봉하였지. 연금술사와 마법사는 영혼을 소유하는 기술, 마법의 기술과
함께 봉래파를 지지했다.
진시황제는 영생불사가 소원이었다. 만리장성의 축조를 명했던 황제는
봉래파와 연금술의 광신도가 되었다. 황제는 성공하지 못하면 처형하겠다
는 칙명을 내려, 봉래섬을 찾도록 만 명의 소년 소녀를 파견했다. 그들은
일본 섬을 발견하였지만, 불사의 버섯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죽음을
택하느니 차라리 그 섬에 머무르기로 했다. 결국 자신의 옥체를 연금술로
써 보존하려던 황제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실은 황제가 독
약 처방전을 복용함으로써 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기도
하다.
4세기부터 현재까지 이 다섯 가지 기본 국면들이 서로 복잡한 상호작용
을 일으켰던 것이니라. 1천 6백년에 걸친 도인들의 운동은 끝없이 결합을
거듭해왔다. 수천에 이르는 도교의 후기 분파들과 형식들은 좌파의 도교
와 우파의 도교로 구분될 수 있다. 왼쪽에는 마술, 연금술, 방중술과 악
귀 다스리기의 도교가 있다. 대충 보면 외적 방법을 신봉하는 길이니라.
오른쪽은 금욕주의, 독신, 명상을 주창한다. 대략 내적인 길이라고 하겠
다. 양쪽에 공통점이 있다면, 경전 연구, 숭배, 명상, 점, 주문과 불로장
생의 추구, 흙점, 부적술, 그리고 영상 탐구등이 있다. 표면상으로 볼 때
이들은 모두 도와의 합일을 추구한단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방법론과 도
교 원리의 해석에 있느니라. 모두 타당성도 있고 정통적 방법도 갖춘 것
으로 생각된다. 모든 도교 분파는 그 결과를 산출한다. 어떤 분파는 고위
사부들이 초자연적인 힘을 과시할 수 있고 위대한 정신적 통찰력을 증명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엄격히 좌파의 길은 반대한다. 거기에는 너무 많은 유혹이
따르기 때문이다. 고행을 진실되고 정직하게 수행하면 만족감, 정적 그리
고 경건함만은 확실히 얻을 수 있느니라. 물론 시련에서 벗어날 수는 없
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직하게 얻은 것이 아니다. 일련의 건전한 가치관
으로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한 힘든 투쟁을 겪지 않고 어떤 경지에 오른 사
람은 유혹에 너무 쉽게 빠져 힘을 남용하고 싶어진다. 공중 부양, 변신,
예언술, 악마를 조종하는 것 모두를 좌파의 방법으로는 순간적으로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에 공짜는 아무것도 없느니라. 어두운 측면과 조화를 이루
려면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유일한 교환의 형식은 인간의 영혼이니라.
어두운 도교의 힘이 들어갈 때마다 도는 인간의 본질은 조금씩 마모한다.
온전한 인간은 궁극적으로 어두운 도를 위한 대리자로 변신한다. 영생과
커다란 능력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된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얻기 위해 영
혼을 희생시켰다.
결론적으로 도는 두려운 것이고 인간의 개념을 초월한 것이다. 수 세기
동안 위대한 정신들이 매달렸던 도교는 크게 팽창하려 서로 다른 교리와
종파가 난마처럼 얽혀 있다. 비록 이런 현상은 도의 부정적 측면이지만,
도의 다양한 측면 때문에 도인들도 종류가 다양하다. 그러나 어마어마하
게 쏟은 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며 불가사의
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과 운명을 냉혹하게 둘러싸고 있다.]
대사부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질문 있느냐?]
[사부님, 어떻게 하면 도를 제대로 쫓아갈 수 있습니까? 방법이 너무
많아 망설여집니다.]
사이훙이 질문했다.
[사실 그렇다. 사이훙, 너는 죽서칠판의 내용을 완전히 통달하고 초월
해야만 한단다. 그런 후에야 너 자신이 갈 실을 확실하게 생각할 수 있
다.]
[그러나 저는 그 책을 본 일도 없고 내용에 관해 들은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것들을 익힐 수 있나요?]
[책이 아니다. 말도 아니야. 가르침이니라.]
[왜 저는 볼 수가 없나요?]
[준비가 아직 덜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에는 계속해야 할 연구의 과정이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안다면 더 능률적이지 않을까요?]
칭 수이셩이 물었다.
[과정이라고? 뭘 한다고?]
대사부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에 정해진 길이란 없다! 너는 너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혼자만의 길
을 정해야 한다. 어떻게 끝내느냐는 자신이 하기 나름이니라. 충동적으로
행하라. 네가 어떻게 느끼든 다 옳다. 은둔자가 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도이니라. 너는 대도시에서 살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도
이다. 세속에서 행복을 누리고 싶다해도 그것은 도이다. 화가 났다면 그
것도 도이다. 너는 인생을 깊게 통찰하는 중이다.]
[그럼, 사람이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습니까?]
린 쭝우가 물었다.
[왜 안되겠느냐? 도는 정해진 틀이 없다. 도는 자유롭다! 유연하다! 항
상 변화한다! 그래도 역시 길을 따르는 자는 따라가야 한다.]
대사부는 어리둥절해하는 제자들을 보고 껄껄 웃었다.
[그것이 비록 도인의 규범에서 파생된 것이라도 어떤 엄격한 틀을 지우
려는 것은 잘못이다. 도복을 입고, 상투를 틀고, 경전을 낭송하고, 매일
기도를 올리는 것은 다 쓸데 없는 짓이니라. 날마다 향불을 피울 수는 있
지만 하늘이 너의 기도를 듣고 있지 않으실 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벌어
지게 만드는 자는 오로지 너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왜 저는 스스로 탐닉에 빠지면 안 됩니까?]
사이훙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탐닉도 역시 도이니라. 그러나 그것은 목적이 없다. 동기도 없다. 따
라서 도에 비교해보면 자기방종은 죽어있다.]
<그것은 또 다른 함정인 셈이로군.>
사이훙은 생각했다. 대사부는 말을 이어 나갔다.
[사람은 목적, 신념과 목표가 있어야만 하느니라. 방종도 역시 도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이냐? 방종에 빠지면 너는 완전히 만신창이로 자멸할
수도 있다.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뭔가 하고픈 충동이 생길 수는
있다. 그러나 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성취할 수는 없을 것
이니라. 따라서 너는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내 판단은 단순한 방탕
의 생활보다 자유가 더 좋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도 생활을 빠져 나올 길은 없습니까?]
사이훙이 물었다.
[만일 목표를 달성하고 싶다면 없는 것이지. 천박한 본능을 채우려고
몰두하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면, 뭔가 위대한 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해야
만 한다. 목표를 세우면 저속한 것은 기꺼이 희생하고 보다 고상한 것을
추구해야 할 것이니라.]
[도인의 삶은 희생의 삶인 것 같군요. 역설적인데요.]
린 쭝우가 의견을 말했다.
[그저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맹목적인 자기 부정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순수한 고행이 불균형 상태가 되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불행
해질 수도 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강장 약초를 쓰지 않는 채식주의는
옳지 않다고 본다. 이것은 네가 달성한 경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즉, 어
떻게 균형을 얻을 것인가? 너는 항상 이 문제를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금욕주의는 단지 잠재 능력을 발휘하려는 것일 뿐이다. 엄격함은 너희
들을 신속히 특별한 인간으로 발전하게 한다. 그러면 너희는 자신들의 운
명을 완수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입장이 된
다. 그것 또한 도이다.]
대사부는 제자들을 보고 미소지었다.
[도교 수행자들을 위해서 한 말이지만, 너무 장황해졌구나. 말이 아닌
행동이 정말 중요한 것이니라. 사색이 아닌 변화가 목표이다. 너희들의
발전의 중요한 부분은 육체적 정서적 안녕을 확보하는 데 있다. 오늘 밤
에 나는 너희에게 육어기공()을 가르쳐 주고 싶구나.
이것은 장기를 보존하기 위해 개발된 방법이니라. 몇 주전에 너희는 주
문에 대한 바이투 은자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오늘 나는 장기를 자
극하고 유지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간단하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겠
다.
방법은 이렇다. 너희는 지시를 받은 소리를 내는 동시에 그 소리와 연
관된 부분을 소주천()운행 중에 마음으로 추적하면서 암시된 동작
을 수행한다. 여섯 개의 낱말이 쓰인다. 즉 슈, 케, 후, 쉿, 치, 시 이니
라. 이 말들이 영향을 미치는 기관은 각각 간장, 비장, 심장, 페장, 신장
과 삼초()이니라.]
대사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련생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동작은 서
서히 근육을 이완시키면서 마치 수중 발레를 하듯이 행해졌다. 간 운동은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나서 팔을 접는다. 다음 힘을 주면서 두 팔을
밑으로 내린다. 팔을 올리면서 동시에 숨을 들이마신다. 팔을 내릴 때는
숨을 내쉰다. 날숨은 <슈 우우우우우우>소리를 내면서 숨을 오랫동안 내
뿜는다. 숨쉬기와 동작을 끝내면서 소리도 멈춘다.
대사부는 그들에게 하나 하나의 소리와 동작을 가르치고 각각의 동작을
일곱 번씩 행하도록 지시했다.
그들이 동작을 다 배웠을 때, 대사부는 상상을 하기 위한 소주천 운행
법을 가르쳤다. 숨을 내쉬고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소주천 운행을 시작했다. 종착지에 도달할 때까지
약 10초의 시간이 지났는데 소리와 숨쉬기가 끝났다. 마침내 전체의 선을
찬란한 불빛이 엮어진 것처럼 상상할 수 있었다.
도교와 내공술은, 정신적인 내용과 유리된 단순한 물리적인 기술은 헛
되다고 강조한다. 모든 기술은 표출된 동작말고도, 에너지의 흐름을 조정
하는 정신적 진행 순서를 가지고 있다. 기는 몸의 형태에 따라서 일정한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기는 또한 그 기술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 정
신을 필요로 했다.
많은 서양인들은 진정한 <과학적> 기술은 운동인의 마음의 상태와는 무
관한 채로 작용한다고 믿는다. 육체와 정신의 건강은 신비함을 덧씌우지
않고 명쾌한 운동에 의해 개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
해는 도인들이 인간의 참된 본성이라고 믿는것 - 사람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이며 정신은 육체의 문제를 통제한다 -를 간과하고 있다. 그
들에게 있어서 육체는 그 자체가 단지 우주의 정신을 조잡하게 나타낸 것
이었다.
[이 방법은 너희가 장기를 조정할 수 있게 해준다.]
대사부는 인체 해부도가 그려져 있는 두루마리를 풀면서 말을 계속했
다.
[소리는 전기적 충격처럼 소주천 행로로 들어간다. 에너지는 막힌 점들
을 뚫고 가면서 건강과 균형을 회복한다. 그것은 침술의 바늘과 똑같은
효과를 낸다. 수련자는 바늘 대신 소리와 마음의 집중을 이용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막히지 않는 소주천 행로만이 에너지를 적절히 각각의 장기
로 운반한다. 적절한 자세와 소리에 의해 장기는 사실상 잔잔하게 떨리면
서 어루만져지는 것이다. 이것이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 도인이 가야 할
길이니라.
장기는 감정의 거처로 믿어지고 있다. <<황제내경()>>은 기원
전 2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762년 왕평()에 의해 24권의
책으로 확대, 증보되었다. 그 책에는 장기와 감정 사이의 일치점이 기술
되어 있다. 간은 노여움, 비장은 동정심, 심장은 기쁨, 폐는 슬픔, 신장
은 두려움 그리고 오장육부 작용의 실질적인 조직체인 삼초는 보정기관으
로서 여타 장기들을 강화하는데 활용할 수 있다. 감정은 장기와 상호관계
에 있기 때문에 장기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감정이 장기의 통제를 받을 수도 있다. 도인들은 육체의 기관을 감정을
다스리는 데 이용할 수 있느니라.
육어()는 수행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전하기 위해 유용한 수단이 된
다. 육체의 보존은 정신적 성취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지나치
게 연구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하면, 장기와 육체는 허약해질 수
있다. 너희들이 매일 충실하게 운동을 하면 육어는 너희를 지켜줄 것이니
라.]
대사부는 도관에서 울리는 종소리의 낮은 떨림음을 들었다. 그는 기도
와 함께 수업을 마쳤다. 학생들은 처소로 갔다.
밤공기는 차고 약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끼 냄새와 소나무 냄새가
한데 어우러진 가운데 나무들이 숨을 쉬고 있었다.사이훙은 지붕이 덮여
있는 도관의 보도를 따라서 조용히 걸었다. 기둥들이 세워진 사이사이의
공간은 정원을 균형이 잘 잡히고 시적인 완벽한 전경들로 분리시켰다. 사
이훙은 고독한 명상의 방으로 들어가 촛불을 켰다.
색이 바랜 나무 차양 너머로 사원에 칠흑같은 어둠이 몰려오면서 이윽
고 밤이 찾아왔다. 사방은 캄캄하고 정적이 깃들었다. 하루의 모든 힘든
모든 일과는 끝났다. 아직 남아 있는 걱정거리는 다음 날로 미룰 수 있
다. 근심거리가 있었지만 걱정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외로움과 갈망
도 있었지만 그는 그것들을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계획도 떠올랐지만 그
저 마음 속의 몇 마디 중얼거림에 그쳤다. 구체적인 말로 표현 할 수는
없었다. 적막했다.
아마도 침묵을 고집 하는 스승들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인간이 불
순하고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면 신들을 쫓아내게 된다고 말했다. 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충분한 정적은 침묵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는 마음
의 초조함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외면했다. 그것조차 의무이며 책
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 없이 의식 속에서 연달아 떠오르는 기억을
지워 버렸다. 할아버지 집에서 정원을 걷던 일, 언젠가 가본 적이 있는
북경의 어느 식당, 야간 학습, 사부의 친구들 중 한 명이 짓던 미소, 암
살자의 결투, 사이훙은 자기 인생의 흔적과 그림자를 몰아내고 대신 내면
을 들여다 보았다.
사이훙은 누구라도 자신의 운명을 감지할 수 있는지, 혹은 누구라도 더
높은 수준의 충동을 이겨낼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몇 년 동안 몸에 밴 자세를 찾아 척추가 자동적으
로 곧게 뻗었다. 방의 우중충하고 어두운 빛깔이 확실한 평온함으로 바뀌
었다.
자신과의 대화는 내성에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내성은 명상에 자리를 내
주었다. 그러자 하루에 대한 집착이 희미해졌다. 명상은 부드러운 리듬을
타며 밀려왔다 밀려가는 호흡에 집중되었다.그는 맥박의 움직임을 느꼈
다. 심지어 피의 흐름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어느 방향인지는 몰라도
신경이 흥분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사이훙은 그 순간 내면 더 깊은 곳
으로 쿵하고 떨어졌다. 의식은 신체의 기능을 초월했다. 영성은 육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부드러운 비장, 얼얼한 체액, 끈적
이는 혈액, 뒤엉킨 정맥, 나뭇결 모양의 뼈, 그리고 더러운 배설물 속에
서 영성이 일어났다.
사이훙은 인간 정신의 근원은 등뼈 끝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머릿속이
나 어떤 다른 감상적인 지점이 아니었다. 신경의 끝이 모여 있는 늪지,
사타구니, 생식기와 항문 가까이 파묻힌 곳이었다. 검고 어둡고 신비스럽
고 모든 것을 감추고 있는 우물의 밑바닥이었다. 그는 깊은 심연으로부터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 내듯이 계속해서 부드럽게 한 오라기의 가는
실을, 한 줄기 빛을 뽑아 내야만 했다. 그 다음에 인체의 최하위 요소들
을 머리의 정문을 향해 뿜어내면서 등뼈의 통로를 따라 위로 에너지를 끌
어올릴 수 있었다. 그 정문은 천엽연()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불렸다. 명상 속으로 깊이 침잠한 사이훙은 팽창하는 에너지에 강한 자극
을 주어 위로 밀어 올리려고 노력했다.
사이훙은 에너지를 더 높이 밀어 올려 연꽃을 정문에서 만개시키고 싶
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 자신의 신성이 담긴 연
꽃을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운 속세의 삶과 자신의 불완전한 생체에서 끌어
내는 것이었다. 그는 존재의 깊은 어둠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가없는 무
의식의 정신을 초월하고 마침내 샘물의 밑바닥에 당도한 다음, 존재의 중
심인 본질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잠재 의식의 저 깊은 곳에서 사부님이 오래 전에 말씀하시던 그 무언가
가 솟아 올랐다.
<완벽한 인간의 가슴은 순수하다. 그가 늪 속에 빠진다 해도 더렵혀지
지 않는다. 벼락이 떨어져 산이 무너진다 해도, 4대양에 폭풍이 휘몰아친
다 해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구름 속을 날아다니고 태양과 달
위에서 유영하고 이 세상을 초월한다. 생과 사는 세상에 대한 그의 일체
감을 단절시킬 수 없다. 그의 가슴은 이 모든 것과 함께 하지만, 그는 그
것들의 일부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가물거리는 의식이 밝은 빛 속으로 녹아 내렸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2권 SEVEN BAMBOO TABLETS OF
THE CLOUDY SATCHEL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이 인 복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6. 추적
어느 날 대사부는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는 준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탐색대가 필요한데 누구 자원할 사람 있느냐?]
[제가 해보겠습니다, 사부님!]
사이훙이 재빨리 지원하였다.
[사실은 내가 사로잡아야 할 놈이 하나 있단다. 그런데 너를 보내도 될
지 확신이 서지 않는구나.]
[무술 원정이면 훨씬 좋겠는데요!]
사이훙은 열에 들떠 말을 이었다.
[그자가 누구입니까?]
[내가 아홉 번이나 용서했던 자이다. 그렇지만 그놈을 더 이상 용서할
수가 없구나. 실은 나도 강제로 이 일을 맡게 되었단다. 성주가 직접 나
를 찾아와서 내가 그자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화산에 있는 도관
이란 도관은 전부 파헤쳐 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단다.]
대사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사이훙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자에게는 비천지주()라는 명칭이 붙어 있단다.]
사이훙은 순간 지난번 여행중에 엿들었던 건달들의 대화가 생각났다.
[그자는 최근에 정부의 황금 수송 호위대를 강탈하고 많은 경비원을 살
해했지. 이 지붕 저 지붕으로 또, 담을 넘어 날아다닐 수 있는 곡예사 같
은 기술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야. 두 개의 단도로 싸우면서 <응조권법(
)>을 구사하는 무사지.>
사이훙은 사부의 말씀을 모아 머릿속에 도표를 그려 보았다. 그는 사냥
감을 완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그는 악명 높은 난봉꾼이란다. 뚜쟁이인데다가, 마약 밀매꾼, 녹원회
()의 일원이다. 사실 성주가 그자를 쫓고 있는 이유를 정확히, 말
하자면 이 난봉꾼이 그의 아내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베이징에
있는데 신문의 지면들이 그에 관한 기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매주
그의 범죄 행각이 뉴스 거리가 되어 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왜 그런 자에게 관심을 쏟으십니까?]
사이훙은 공손히 물었다.
대사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대한 결단을 앞둔 듯 사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나는 그 녀석을 어릴 때부터 키웠다. 그는 바로 너의 사형인 후디에란
다.]
사이훙은 엄숙해졌다.
[네 개인적 감정을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겠느냐? 성주
조차도 사적인 감정으로 공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대사부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네, 사부님. 그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사부님과 우리 분파를
배반했으니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겠습니다.]
[젊은이다운 말이로구나.]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부님.]
[그렇다면 떠나거라. 내일 감시 업무를 맡고 있는 우잉과 우콴과 함께
떠나거라. 너는 후디에를 쫓아가서 신속히 그를 데려오너라.]
[하지만 사부님, 진엔니아오는 어떻게 할까요?]
사이훙이 질문했다.
[그 일은 내가 할 일이다. 그러니 너는 어서 네 사형을 데려오너라. 빨
리 가거라. 더 이상 묻지 말고.]
그로부터 일주일이 채 못되어 사이훙, 우잉, 우콴은 서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사이훙은 부유한 무술가의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떠
났다. 목깃이 달린 아름다운 문양의 비단옷을 입고, 양끝에 수를 놓은 검
은색 비단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고, 검은색의 천의 신발을 신었다. 허리
띠에 매달려있는 값비싼 둥근 옥은 그가 귀족계급 출신임을 상징해 주었
다. 사이훙은 긴 머리를 한 줄로 따서 늘어뜨렸다. 변발은 중화민국에서
는 불법이었다. 그래서 사이훙은 긴 변발을 몸에 지닌 다른 무기처럼 옷
속으로 숨겨야 했다.
사이훙은 화산을 떠날 때마다 북부 산시성에 있는 관가보()에 들
렀다. 비록 그가 형식적으로는 가족과의 관계를 단절하기는 했지만 가족
들은 귀가할 때마다 항상 그를 반겨주었다. 사이훙 소유의 방들과 개인
서재가 저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관에서는 금지 사항이지만 특별히
주문 제작된 사이훙의 무기들이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신분은 가난한 도교 수행자가 아닌 부자에다 귀족, 협객으로 상승하였다.
사이훙의 가문은 바로 <전쟁의 신>의 후손이었기에 그에게는 막대한 재산
이 떨어졌다. 집에서 그는 비단옷을 걸치고, 옥으로 만든 갖가지 장식품
으로 쓰면서 황금으로 비용을 조달하고, 강철로 무장하고 낭만적인 것을
즐길 수 있었다. 사이훙은 이곳에선 강철 사자가 되었다.
사이훙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우잉과 우콴 형제를 바라보았다. 둘다
40대인 그들은 속세와 인연을 끊고 도교에 입문하기 위해 화산에 왔었다.
두 사람은 무뚝뚝한 성격에다 미련해 보일 정도로 거구이고 신분 또한 비
천했다. 사이훙은 저들은 세상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제는 살아오다가 언제부터인가 서글픈 이름들을 얻게 되었고
도관에 와서도 그 이름을 떼어 버릴 수가 없었다. 우잉은 <쓸모 없는>이
란 뜻이고, 우콴은 <무력한>이란 뜻이었다.
형인 우잉은 머리 생김새가 마치 늙은 참외 같았다. 피부는 어린 시절
앓은 병때문에 몹시 거칠었다. 때때로 눈가가 팽팽하게 긴장할 대는 시름
에 잠긴 듯 우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의 몸은 아주 단단한 근육질
이었으며 어깨는 황소처럼 딱 벌어져 있었다.
우콴은 형보다 훨씬 더 네모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짙은 갈색 얼굴은
청동 가면처럼 보였고, 두 눈은 떴는지 감았는지 모를 정도로 가늘고 그
늘이 져 있었다. 호전적인 성격을 그의 얼굴과 몸 구석구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호전성을 지울 만한 자비의 흔적이라곤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갈색과 회색의 옷은 그 거구를 가려 주기에는 턱없이 모
자랐다.
이들 형제의 관계는 아주 거칠고 냉담하였다. 피를 나눈 형제끼리 맺은
무언의 동맹이요, 생과 사를 함께 해온 사나이들의 연합이었다.
수년간의 전쟁은 슬픈 눈의 우잉을 미신적으로 만들었다. 우콴은 형과
는 달리 다소 냉소적이었다. 그들은 좀체 서로 말을 건네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고용된 전사였다. 사이훙은 대사부가 모험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대사부는 발빠른 자를 쫓도록 두 명의 무시무
시한 킬러를 보낸 것이다.
그들은 밤낮을 기차 속에서 보내며 시달렸다. 딱딱한 의자, 계속되는
기차의 흔들림, 기차 바퀴가 선로에 부딪쳐 나는 듣기 싫은 쇳소리, 여행
객들이 크게 떠드는 소리를 견뎌내야 했다. 기차역마다 으깨어질 듯 가득
찬 사람들의 냄새,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 고통스럽게 비틀어대는 몸뚱어
리들과 온갖 짐들로 좁은 기차 안이 빽빽이 들어찼다.
사람들은 서로 밀고 찔렀다. 차창 밖으로 몸을 내놓고 덜덜거리는 기차
아래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세 명의 전사들만
은 피해 다녔다. 그들은 세 사람이 입은 옷을 보고, 이어 귀족임을 상징
하는 사이훙의 기장을 본 뒤 싸놓은 칼에서 시선을 멈췄다. 청 왕조가 무
너진 지 거의 20년이 다 되었건만, 상류층 귀족과 전사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여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옛
격언을 알고 있었다. <검객은 죽이기 위해 칼을 지니고 다닐 뿐이다. 칼
은 피 맛을 보지 않고는 다시 칼집에 꽂히지 않는다.>라는.
사이훙 일행은 베이징 - 상하이 열차편으로 갈아탔다. 기차를 갈아 타
는 역은 선로 여기저기에 쓰레기들이 널려 있는 불결하고 번잡한 곳이었
다. 사이훙은 증기기관차를 타게 되어 무척 기뻤다. 란 남자가 태연히 철
로를 따라 걸어가서는 망치로 기차 바퀴를 탕탕 두드리는 것을 본 사이훙
은 은근히 적정이 되었다. 아무렇게나 두드려대는 것처럼 보이는 망치질
이 새로운 발명품을 더욱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만들 것만 같았다. 우콴은
연결봉들이 제자리에 다시 들어맞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사이훙에게 설명
해 주었다.
그들이 탄 기차는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몇 시간 뒤 기차는 일본 점령
지역을 통과했다. 후디에의 갱단이 전쟁 지역에서 활약하기 때문에 그를
사로잡기가 더욱 힘들 것 같았다. 사이훙 일행은 그의 일당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일본 순찰대와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사이훙이 탄 기차는 선로 위를 흔들거리며 진흙 벽돌로 지은 집, 농장
과 과수원, 마을을 지나쳐갔다. 그러나 사이훙은 오래된 포탄 구멍, 전혀
복구가 안 된 채 내버려진 마을, 먹이가 될 만한 시체를 찾아 헤매는 피
둥피둥 살이 오른 개들도 보았다.
어느덧 전쟁은 중국과 일본 모두의 진을 빼놓는 소모전으로 굳어졌다.
전투 지역은 일본군 행정병, 중국의 관료, 병사, 게릴라와 갱원의 잔류자
들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전투는 우울한 권태를 불러일으켰다. 일본
점령군은 중국의 갱단, 기회주의자들과 자유롭게 거래를 트고 지냈다. 아
편과 헤로인은 주요 상품이 되었고 수천 파운드의 마약은 양측 모두를 부
자로 만들어 주었다. 황하에서 해안까지 죽음과 잔혹함, 마약 거래, 서투
른 군국주의가 초현실적으로 뒤섞여 난무하고 있었다. 영웅주의는 오래
전에 실종되고, 불한당들이 활개치는 곳으로 변해 버렸다.
오후가 되어서 사이훙 일행은 산둥성()의 취푸()로 가는 역
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하늘은 짙은 회색과 자주색 물을 먹인
듯 몹시 어두웠다. 한 차례의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지만 공기는 여
전히 후끈했다. 잠시 후 비가 그쳤다. 그러나 벌써 도로는 황토빛 진흙탕
이 되어 있었다. 취푸까지는 아직 15킬로나 더 남아 있었다. 아마도 이곳
이 공자의 탄생지이며 그의 무덤이 모셔진 곳이기 때문에 위대한 성인을
추모하는 심정으로 철도를 연장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사이훙은 생각했다.
세 사람은 지나가는 농부의 마차를 세워 올라탔다.
그들은 돌로 만든 아치 아래를 지나갔다. 그것은 오래된 망루였다. 부
서진 거리와 좁은 골목길을 지나 대사부가 일러준 주소지를 찾아갔다. 그
곳은 자극성 강한 약초 향기가 물씬 풍기는 한약방이었다. 주인은 50대의
땅딸막한 남자였다. 대머리에다 안경을 썼지만, 열정적이고 힘이 세어 보
였다. 그는 계산대 뒤에서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뭘 사고 싶으신지요?]
한약방 주인이 물었다.
처음 오는 손님들이라는 사실을 안 듯 주인은 한약이 있는 곳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의 뒤로는 한약재를 담는 수백 개의 작은 서랍들로 들어
찬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높이가 마룻바닥에서 천장까지 이른 서랍장에
는 약재를 분류하는 라벨은 없었지만, 그는 어느 서랍에 어떤 한약이 들
어 있는지 하나하나 알고 있었다.
건너편 진열장에는 인삼, 호랑이 뼈, 코뿔소 가죽, 영지버섯, 사슴뿔,
말린 도마뱀, 염소 앞다리와 곰, 사슴, 강치의 말린 장기들이 전시돼 있
었다. 그 옆으로 중년의 두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거기 있
다는 것 자체는 의심을 살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약재상에는 종종 친구들
이 찾아와서 한나절씩 떠들어댔다. 그러나 왠지 이 두 사람은 분위기가
살벌하게 느껴졌다.
[소개장을 들고 왔습니다.]
사이훙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한약상은 어물쩍 넘어가려는 듯 대답했다.
사이훙이 편지를 내밀었다. 주인은 편지를 받아 읽었다.
[내일 다시 오십시오. 당신들의 사부님은 지위가 아주 높으시군요. 댁
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편지를 다 읽은 뒤 주인이 말했다.
다음 날 사이훙은 다시 찾아가 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한약상은 요구 사항을 논의했고 동의를 얻어냈다. 이틀 후
평의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사이훙 일행은 <무술계의 원로들>을 배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국에는 두 개의 거대한 암흑 세계가 있었다. 지하 범죄 조직과 무술
가들의 세계인 무림()이 그것이었다. 선의로든 악의로든 간에 그들은
스스로 무사의 명예와 원칙에 매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원로 평의회
와 왕에게 복종하고 자신들의 법에 따라 스스로 치안을 유지해 나갔다.
특히 범법 행위를 저지른 무술가들은 아주 흥미로웠다. 이들은 스스로를
정의의 사도라고 여겼다. 충성에 보답하고, 배반자에게 벌을 내리고, 자
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관대하게 도와주는 것이 이들의 독특한 정서였다.
범죄자였지만 한편으로는 무림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 중 일부는 제 2의 암흑 세계로 빠져 들었다. 제 2의 암흑 세
게는 녹원회(), 홍건단(), 삼지창회(), 백련교(
)등과 같은 비밀 조직의 통제를 받았다. 이 같은 갱 조직의 상당수는
사부, 도관, 제자나 명예의 전통 중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들은
순전히 건달패들이었다. 탐욕적인 아첨꾼이며 오로지 학자와 부자를 울리
는 폭력의 배후 조정자들이었다.
홍건단 같은 대다수의 비밀 조직들은 처음에는 청 왕조를 타도하는 데
몸을 바친 반만주()계의 애국주의 단체로서 출발했었다. 하지만 수
년 동안에 걸쳐 지하세계는 아편, 헤로인, 매춘, 도박, 금품 강탈 및 암
살과 정치적 조종 등의 일에 더욱 깊게 관여했다.
이들 양대 암흑계는 중국 전역에 걸쳐 십자망의 연결 조직을 구축하였
다. 그리고 중국 동포들이 있는 세계의 전지역으로 세력을 뻗어 나갔다.
사이훙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두 암흑 조직은 없어서는 안 되
는 필수 조직이었다. 지금 사이훙이 무술계와 함께 일을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만이 사이훙이 후디에를 잡을 때까지 화산에 관용을 베풀어
주겠다는 보장을 해줄 수 있었다.
무술계는 지역마다 대표 원로와 원로의 통치를 받았다. 그리고 모든 무
술가는 평의회의 명령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었다. 원로들은 분쟁을 해결
하고 결투를 허가하고 집단 활동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사의 규정
을 어긴 자들은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사이훙 일행이 청원을 넣기 위해
간 곳이 바로 이 평의회였다.
회의는 무덥고 습기 찬 오후에 어느 개인 저택에서 열렸다. 저택에는
안뜰과 정원, 흐르는 시냇물과 웅장한 정자가 있었다. 어두운 홀 내부에
극장처럼 열을 맞춰 좌석이 마련되었다. 무술계의 다양한 회원들이 좌석
에 앉았다.
기둥으로 떠받쳐진 홀 앞에는 10명의 원로들이 앉는 둥근 탁자가 놓였
다. 두 명을 제외한 원로들은 긴 중국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중국 의상
을 입지 않은 두 사람 중의 하나는 하얗게 센 머리에 국민당 군대의 짙은
황록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불교의 법복을 입은 50대 남
자였다. 한데 모인 열 명의 원로는 무술계뿐 아니라, 종교와 정부를 대표
하였다. 무술계는 모든 권력에 손을 뻗치고 있었다. 불교 승려가 무술계
의 총대표였다. 그의 법명은 준치()로, <순수한 정신>이란 의미를 지
니고 있었다. 비록 얼굴은 주름이 잡혀 쪼글거리고 눈은 약간 튀어나왔지
만, 깨끗하게 삭발한 머리는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준치 법사의 수염은 염소 수염처럼 짧고 숱이 적었지만, 어깨는 한 때
벌어졌던 흔적이 엿보였다. 녹회색 법복 위로는 벽돌 사이의 모르타르처
럼 금색 문양이 있는 짙은 갈색 가사가 가슴과 어깨 너머로 비스듬히 내
려와 있었다. 법사는 목에 108염주를 걸고 있었는데 찬란한 제왕의 옥이
36개 염주알마다 하나씩 끼여 있었다. 손가락에는 작은 염주알 하나가 끼
여 있었다.
법사가 개회를 선언했다.
[화산에서 온 세 명의 도사를 소개합니다. 앞으로 나오시오.]
그들은 일어나 탁자 가까이 걸어갔다. 몇몇 원로들은 그들을 쳐다보며
그저 무관심하게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말하시오.]
[저는 화산의 호접 도인으로 대사부의 제자입니다.]
사이훙은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저는 여러 원로분들이 산시성()성주의 청을 거두어 주십사 탄원
하러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유혹한 저의 사형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즉각 그를 넘겨 주지 않는다면 성주는 화산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
도록 군에 명령할 것입니다.]
준치 법사는 국민당의 장교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조롱하는 듯한 미
소를 흘리며 타들어 가는 담배 끝은 바라보았다. 왜 하필 여자 문제 따위
의 시시한 문제냐는 기색이었다.
사이훙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저의 사부님의 의견으로는 이 일은 화산이 풀어야 할 내부 문제입니
다. 우리는 무림의 범위 내에서 이 문제를 풀겠습니다. 원로 여러분이 우
리를 위해 중재해 주십시오.]
법사는 탁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고개
를 끄덕이거나 손짓을 할 뿐이었다. 사이훙은 한 사람이 고개를 젓는 것
을 보았다. 나머지는 찬성이었다.
법사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세 분에게 꼭 100일을 허락하겠소. 그 후에는 여러분을 보호해
줄 수 없소이다.]
[원로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사이훙은 절을 올리며 말했다.
회의장을 나선 사이훙 일행은 여행 준비를 하기 위해 급히 여관으로 돌
아왔다. 사이훙은 만족스러웠다. 그는 원로들이 막강한 힘을 발휘해 법을
집행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군의 장교는 정부에 정식으로 명령을
하달할 것이고, 기업가들은 후디에의 조직에 대한 돈과 물품의 지급을 보
류할 것이다. 사이훙은 화산이 100일 동안 군대로부터 안전할 것이라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는 사부가 진엔니아오와 대항해서도 버
텨낼 수 있기를 기원했다.
세 사람을 태운 기차는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태양은 대지를 뜨겁게 달
구었다. 건조해진 밭에서는 흙이 떨어져 나가 곳곳에 땅이 패어 있었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전쟁과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땅에 대한 애착을 버리
지 못하고 진흙덩이로부터 옥수수, 밀, 기장, 감자 따위를 긁어 모으기
위해 몇 시간 동안이나 땀 흘려 일했다. 허리를 굽힌 채, 다리를 절뚝거
리며 농부들은 푹푹 열이 오르는 땅에 모을 수 있는 물을 모두 모아 군데
군데 뿌렸다. 그들은 사막의 거친 돌풍이 뿜어내는 강한 모래 먼지까지
견뎌내야 했다.
왕조가 바뀌고, 몇 세대가 지나고, 수없이 해가 지나갔지만, 베이징은
원래 선택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매우 이상적
인 땅이며 세계의 중심지인 베이징의 실제 상황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뜨거운 황토의 먼지 구름이 마치 대군이 몰려오듯 시내 전역에 온통 먼지
바람을 일으켰다. 태양은 대기를 바싹 건조시켜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입술 사이와 눈가에는 빠른 속도로 왕모래가 쌓였다. 나무, 양곡, 짐을
싣는 동물과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베이징의 건조한 기후에 쇠약해지고
시들해졌다. 중국 문명의 중추를 확립하기 위해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했
던 연()의 창건자들이 이용했던 비법은 사라져 버렸다. 사이훙은 수세
기에 걸쳐 이 도시를 약탈하고,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해 대평원을
누비고 다녔던 수많은 군대들을 생각했다. 행진하는 군대의 발길에 짓밟
히고, 말발굽에 채고 으깨어지는 모습이 중국의 장구한 역사와 함께 눈앞
에 펼쳐졌다. 북쪽에서 쳐들어온 오랑캐, 남부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군,
지구 저쪽에서 횡단해 온 유럽 군대 그리고 대양을 건너온 일본의 침략자
들은 자금성()의 주홍색 성벽을 무너뜨리려고 애를 썼다.
기차의 종착역은 옛 도시의 성벽 외곽에 자리잡고 있었다. 세 사람은
도심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장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좋았
다. 군중을 이용해 일본군의 눈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항상 감시
의 눈을 게을리 하지 않는 암흑가의 첩자들로부터 모습을 감출 수 있었
다. 그들은 발 디딜 틈 없이 번잡한 거리를 헤쳐 나갔다. 비만 한번 좍
쏘다져도, 지진만 일어나도 땅속으로 함몰될 것 같이 보이는 진흙과 벽돌
로 지어진 집들이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사이훙은 마치 미로 속에 빠져든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자금성보다 더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포고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옛 사람들은 땅
에서 멀어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낮은 건축물과 포장되지 않은 좁은
길들이 마구 뻗어 있었다.
낮고 초라한 담장은 베이징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가옥과 건물에는 담이 둘러처져 있었다. 벽돌을 쌓고 틈새에 황색 모래와
석탄 가루를 발라 만든 담장들이었다. 어떤 담장은 회 반죽과 벽돌은 불
규칙하게 조각조각 덧대어 만든 것이었다. 창에는 대개 반투명 종이를 발
라 붙이거나 먼지가 잔뜩 껴서 건물 내부를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화창
한 햇살도 음침한 담장에는 생동감을 불어 넣지 못했다.
옴이 올라 상처 투성이인 개들이 통로를 기웃거리며 다니다 쓰레기 더
미에 코를 쑤셔 박았다. 사람과 짐승이 모두 오줌을 휘갈겨 담벽은 더럽
기 짝이 없었다. 깨진 기와들이 쌓여 있는 먼지 구덩이에서 잡초와 풀이
자라나 담장을 덮었다.
문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따금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석탄처럼
시커먼 방이 들여다 보였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어서 담장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추측할 도리가 없었다. 어떤 일이든 감춰질
수 있었다. 십중팔구 그 안에서는 굶주린 가족들이 비좁고 불결한 칸막이
속에서 갇혀 지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이 작고 야트막한 담들이 도시의 기초를 형성한다면,
시 전체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나라 최초의
황제가 나라 전체에 성벽을 쌓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허황하게 들리지
않았다. 고대의 성벽은 여전히 이 도시에 서 있다. 각을 이룬 높은 벽돌
담의 꼭대기는 벌어진 이빨처럼 없어진 벽돌이 만든 틈이 여러 개 있었
다. 고대의 성벽은 근접을 불허하는 당당한 자태로 여전히 군림하고 있어
원래의 규모를 짐작하게 했다. 역사와 흘러간 시간을 성벽에 음각이라도
하려는 듯 1900년 동맹군의 기습 공격에 포화를 맞아 벌어진 구멍들이 미
복구 상태로 남아 있었다.
베이징의 성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여행객들은 시 치안 판사에게 신고
해야 했다. 여행객들은 붉은 기둥의 벽돌 건물로 직행했다. 연단이 마련
된 텅 빈 접대실에는 무거운 자단목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2마리
학의 벽화는 방에 완벽한 균형미를 주었다.
높은 자리에 놓인 빨간 북은 문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노란색의 팽팽
한 북가죽 중앙에 커다란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사이훙은 막대를 집어
들고 큰소리가 나게 북을 쳤다. 이렇게 하면 치안 판사와 면담을 할 수
있었다.
황록색의 서양식 제복을 입고 총을 멘 군인들이 방 끝의 문 입구에서
줄지어 나왔다. 그들은 묵묵히 걸어가 계단을 내려갔다. 군인들이 돌아서
서 서로 마주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청색 옷을 입은 수행원이 나왔다. 수
행원은 작은 안경을 끼고 염소처럼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베이징의 치안 판사님!]
수행원의 말에 사이훙과 그의 동행자들은 무릎을 꿇었다. 돌바닥은 딱
딱하고 차가웠다. 치안 판사는 오페라의 주인공처럼 입장했다. 땅딸막하
고 드세고 근엄한 표정을 한 판사는 검은색 비단옷과 조끼를 입고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 그는 등뼈를 수직 각도에 맞춰 꼿꼿한 자세로 자리
에 앉았다. 그의 불그레한 얼굴은 곰을 연상시켰다. 수염은 솔처럼 뻣뻣
해 보였고, 둥근 눈은 무겁게 눈꺼풀이 내려와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느낌
을 주었다. 사이훙, 우잉과 우콴은 3번 모두 고두하며 예의를 다했다.
[요구 사항을 말해 보시오.]
수행원이 지시했다.
[우리는 이 도시에 들어와 한 사람을 추적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를 요청합니다.]
사이훙은 말하면서 바닥을 쳐다보았다. 치안 판사를 마주보는 것은 무
례한 짓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서류는?]
수행원이 오만하게 물었다.
사이훙은 머리 위로 올려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는 계속 아래를 보았
다. 수행원이 계단을 내려와서 그들을 치안 판사에게 데려갔다. 치안 판
사는 사이훙의 통행증을 펴 보았다. 좁고 가는 주름이 잡힌 긴 종이가 두
장의 딱딱한 종이 사이에 묶여 있었다. 한쪽에 사이훙의 주소, 서명과 함
께 타원형 사진이 있었고 그의 여행 목적을 알리는 화산의 대사부가 서명
한 글이 있었다. 끝에는 엄청나게 큰 화산의 봉인이 대사부의 봉인과 함
께 찍혀 있었다. 통행증 외에도, 여행중에 관청에 등록하기 위한 등록 명
부들이 있었다.
치안 판사는 이상야릇한 불만을 나타냈다. 수행원과 경비원들이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 말과 행동 하나 하나에 다
뜻이 담겨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의사 소통을 했다. 치안 판
사는 자신에게 간청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나 아랫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
이 거의 없었다.
치안 판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기더니 붓을 잡았다. 수행
원을 알랑대며 백옥문진을 통행증에 힘있게 놓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
인 5개의 잉크병으로 눈길을 돌렸다. 치안 판사가 무엇을 쓰든 그것은 별
로 중요하지 않았다. 잉크의 색깔이 그의 명령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
다.
검은색은 승낙할 수 없다는 뜻이고 녹색은 승낙한다는 뜻이었다. 청색
은 그 문제를 고려해 보겠다는 뜻이다. 흰색은 그 요청은 중요하지 않으
므로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며, 빨간색의 증서의 수속이 완료되었다
는 의미이다. 사이훙은 근심스럽게 잉크병 위로 움직이는 붓끝을 주시했
다. 다행히도, 붓끝은 녹색 잉크로 떨어졌다. 수행원은 뭐가 그리 못마땅
한지 통행증들위에 봉인을 찍는 동안 뿌루퉁해 있었다.
치안 판사는 수행원을 손짓으로 불러 뭔가를 속삭였다. 치안 판사는 몹
시 화가 난 듯 책상을 손바닥으로 쳐가며 수행원에게 뭐라고 해댔다. 수
행원은 몸둘 바를 몰라하며 애처롭게 대답했다. 잔뜩 겁을 먹은 수행원이
세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안판사님께서는 당신들의 사부님을 잘 알고 계십니다.]
수행원의 목소리에는 사부의 명령에 대한 비겁한 복종과 야릇한 혐오감
이 함께 담겨 있었다.
[판사님은 더할 나위 없이 당신들의 추적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계
시오.]
치안 판사는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구성원은 그 뒤를
졸졸 따라갔고 군인들은 줄을 서서 나갔다. 단 한 명만이 뒤에 남아 사이
훙 일행에게 통행증들을 돌려주었다.
그들은 찻집으로 갔다. 비싼 차값을 내고서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시가지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수많은 벽돌집과
안개 사이로 붉은 성벽과 금색 기와를 얹은 자금성의 윤곽이 보였다. 공
기는 숨막힐 듯이 무더웠다. 하지만 백단향의 격자 무늬 창문들에서 향긋
한 내음이 풍겨 나왔다. 급사가 급히 올라와서 무슨 차를 들겠냐고 묻고
주문을 받아갔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사이훙은 어떻게 형을 찾아야 할까
궁리를 했다.
그들은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적당한 곳에 와 있었다. 찻집은 일반적인
만남의 장소였다. 새벽부터 늦은 밤시간까지 문을 여는 찻집에서 사람들
은 사교모임을 갖고 시간을 보냈다. 차와 음식은 계속 내올 수 있었다.
더 환상적인 곳에서는 어여쁜 여성 음악가들이나 떠돌이 이야기꾼들이 여
흥을 북돋워 주었다. 손님들은 중국 일반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맹목적으로 차에 열광하는 학자, 결혼을 주선하는 중매인, 손님을 대접한
다면서 거북스러워하는 친척들,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학생들, 은퇴해서
여생을 느긋하게 지내는 노신사들이 주된 손님들이었다.
무사들은 보통 손님들과는 매우 달랐다. 그들 중에는 거의 돌연변이에
가까운 거인들도 있었다. 어떤 무사들은 옷을 보고 만주에서 왔는지 산둥
에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언제든 벌떡 일어날 수 있도록 그들은 발을
넓게 벌리고 자리 위에 힘있게 앉았다. 무기는 숨겨 놓지 않는 게 예의였
다. 칼, 부채, 단도, 곤봉과 같은 길이가 짧은 무기들은 테이블 위에 올
려놓았다. 쇠몽둥이, 창, 봉처럼 큰 무기들은 테이블에 기대어 놓았다.
무사들은 바야흐로 멸종이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청 왕조가
복귀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크고 작은 전쟁에서 무사들
이 일본군을 상대로 그 얼마나 멋진 활약을 해왔는가. 무사도와 작위는
사라졌는지 몰라도 무사의 막강하고 독특한 전형들은 아직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사이훙은 바로 그런 무사로 늙어 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우잉은 옛 친구를 만나 그의 테이블로 갔다. 온통 검은색 옷을 입은 야
윈 남자가 손이 쉽게 닿는 곳에 날이 넓은 칼을 놓고서 우잉을 열렬히 환
영했다. 대화를 좀 나누더니 그들 사이에서 은화가 오고 갔다. 그 마른
남자는 우잉이 자리로 돌아올 때는 더욱 노골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
다.
[나는 뇌물을 싫어해.]
사이훙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정보 제공자에게 준 차값 정도로 생각하면 돼.]
우잉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어쨌든 우리가 그를 만난 건 행운이야. 괜찮은 정보를 얻었거든.]
[무슨 정보인데?]
우콴이 물었다.
[후디에는 30대 초반의 부유한 애인과 살고 있대. 그 여자는 암호랑이
란 뜻의 핀후()란 이름을 가진 가공할 만한 무사라는 거야. 손가락이
꼭 강철 못처럼 몸을 꿰뚫어 버린다지. 그녀의 아버지는 소림의 무사였
고, 핀후의 동생은 10살 짜리 소년이래. 핀후가 손위여서 아버지는 자신
의 무술을 주저하지 않고 딸에게 먼저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핀후는 아버
지부터 거의 모든 걸 배웠다고 하더군. 그리고 후디에가 그녀의 무술 기
법을 더 키워 줬을지도 몰라. 하지만 동생은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무술을 제대로 못 배웠나 봐.]
[그 여자 집으로 가지.]
우콴이 성급히 말했다.
[그렇게 빨리는 안 돼.]
사이훙이 우콴을 말렸다.
[우리는 더 많이 알아내야 해. 남자보다 무서운 여자 무사도 많이 있으
니까.]
[맞아. 내일 우리가 검시관의 사무실로 가는 이유도 바로 그거야.]
우잉이 동의했다.
세 사람은 그날 유명한 백운관()에서 밤을 보냈다. 백운관은 도
교에 있어서 매우 성스러운 사원이었다. 백운관은 드넓은 자리에 정확히
남북을 축으로 지어져 있었다. 백운관은 당나라 순종()에 의해 그 자
리에 처음 세워졌다. 1202년 도관이 불탄 후, 몽고의 징기스칸이 도교의
현인 치우 창춘()을 초빙하여 도관을 재건했다. 백운관은 명과 청
왕조에 이르러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교리면에서 전적으로 은둔
적 도교를 지지해 온 백운관은 장문인들의 전국적인 대집회가 벌어지는
장소였다. 중국의 모든 도교 수행자와 도사의 법명은 수임식이 끝나기에
앞서 이 도관의 기록부에 먼저 올려졌다.
도관의 정문은 잿빛 기와 지붕이 얹어져 있었고, 문에는 금색과 붉은
색, 청색을 많이 써 매우 화려했다. 대리석 기둥과 철문 뒤에 넓은 뜰이
있고 세 개의 아치 길과 심홍색의 벽돌 대문이 있었다. 화강암으로 된 수
호 사자들과 구름 기둥들이 바깥 세계와의 경계를 지어 주었다. 도관 전
체는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안쪽의 대문은 산문()이라고 불렸
다. 산문에 들어섰다는 건 속세를 떠나 정화된 성지로 들어 왔다는 의미
를 포함했다.
주요 사당들은 양 측면에 있는 보다 덜 중요한 다른 사당들과는 달리
중심선을 따라 세워져 있었다. 백운관의 중심축에는 도교의 수호신을 모
신 영관전(), 옥황전(), 치우 창춘 조사를 모신 구조전(
), 사어전(), 노율당(), 삼청각(), 운집산방(
)등이 들어서 있었다. 동쪽 축에는 양진당(), 수진당(),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모신 두부궁(), 진무전()과 화타를 모
신 화조전() 그리고 오조전()이 있었다. 서쪽 경내에는 여동
빈을 모신 여조전(), 여덟 신선을 모신 팔선전(), 도교의 여
신들인 낭랑신()들을 모신 원군전() 그리고 북과 종을 치는
고루()와 종루()도 있었다. 사원 곳곳에 백운관의 후원자였던 제
왕들의 찬사와 경구가 기록돼 있었다.
도인들은 평신도들에게 어려운 철학적 개념을 전하려고 실제 대상물의
단순한 은유를 이용했다. 탁 트인 아름다운 정원과 도시와 떨어진 적막한
도관의 위치가 신도들에게 엄숙한 분위기를 전해 주었다. 봉래의 교설은
사원 뒤의 바위, 정원에 의해 상징화되었다. 신의 세속적 권능은 음양의
상징을 부여받음으로써 현시되었다. 즉, 신의 손에 전 우주를 담는 그림
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도관은 종교를 위한 정교한 극장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백운관은 감
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영혼의 울림을 주었다. 여러 세대에 걸
쳐 성인들은 백운관에서 깨달음에 도달했다. 사이훙 같은 사람에게 사원
은 혼란스런 도시를 떠나 새로운 기분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
었다. 차가운 여조전에 들어서자 사이훙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 같
은 기분이 들었다.
사이훙은 여동빈의 신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먼지 나는 평신도복을 입
은 채 사이훙은 무사와 도교 수행자 사이에 나란히 앉아 안식을 찾았다.
그는 무엇을 할까 생각했다. 기도를 할까? 기도를 올릴 자격이 있을까?
승리를 위해? 아니면 앞으로 그가 저질러야 할지도 모를 살인에 대한 용
서를 구하기 위해?
사이훙은 찻집에서 봤던 사람들을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는 다른 길을 걸어가는 자신이 못내 처량하게 생각되었다. 이제까지 그는
자신의 참다운 본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이훙은 어머니가 바라던 학자
고, 아버지가 원하던 군인도, 사부의 시자도 원치 않았다. 그가 원한 것
은 확실성뿐이었다. 영혼의 진실이 제시하는 확실성, 무술의 확실성, 고
결한 미래의 확실성이었다. 그러나 사이훙은 지금 불확실성과 맞닥뜨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무사들은 현대 앞에서 그 빛을 잃어버렸고 사이훙은 어차피 자신은 무
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벽한 영혼의 진리 또한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사이훙은 확신할 수 없었다. 도전자
모두가 그보다 힘이 더 셀지도 모른다. 그는 어떤 싸움이 마지막 싸움이
될지 몰랐다. 사이훙은 수백만이 사는 나라에서 사형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를 붙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무릎을 꿇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사이훙
은 자신이 과연 성스러움에 다가갈 수 있을지 의아해 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자신의 의혹에 저주를 퍼부었다. 신념 없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무사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불확실성은 약점이다. 그는 앞으로
있을 싸움을 위해 자신의 심약함을 확인해 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추적에 필요한 힘을 기르기 위
해 자신을 더 깊이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사이훙 일행은 다음 날 아침 임시 시체 안치소로 갔다. 그곳은 음산한
벽돌 건물이었다. 검시관에게 서류를 보여 주고 이틀 전 들어온 시체를
보게 해달라고 설득했다. 검시관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마와 두
눈은 흐리멍덩한 반면 입술은 아주 신랄한 풍자를 터뜨릴 듯한 미소를 흘
리고 있었다. 검시관은 쾌활했다. 또 자신의 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임
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사이훙 일행의 관심이 합법적임을 확인
한 뒤 검시관은 그의 최대 업적을 자랑한다는 흥분에 휩싸여 그들을 복도
아래로 안내했다. 검시관은 긴장보다는 기대감으로 들떠서 가죽처럼 질긴
두 손을 꽉 움켜 쥐고 있었다.
검시관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길을 안내했다. 포름알데히드 냄새와 해부
된 창자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사이훙은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계단은
둥근 천장을 한 작은 방으로 이어졌다. 방에 놓인 관들이 유등에서 나오
는 희미한 불빛을 받고 있었다. 조수가 한 여자의 시체를 막 해부하려는
참이었다. 검시관은 그를 내보내고 기름때가 묻은 천으로 시체를 가만히
덮었다. 그는 사이훙 일행을 어두운 구석으로 안내했다. 검시관은 그들이
찾는 시체를 찾아 관을 열어 보았다. 시체 썩는 악취가 진동했다.
[다행히 아직 석회로 봉하지 않았죠. 조사가 있을 것 같아 하루를 더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해됐다고 해서 요즘 신경 쓰는 사람이나
있습니까.]
사이훙은 시체를 살폈다. 건장한 체구의 불교 승려였다. 삭발을 한 머
리가 포탄만큼이나 컸다. 눈썹은 짙고 숱이 많았다. 자줏빛으로 변한 입
술이 벌어져 있었다. 입 안 가득 깨진 이빨에 피가 엉켜 있는 것이 보였
다. 목에 건 무거운 쇠염주는 알 하나하나의 직경이 4센티는 되어 보였
다. 우콴은 칼집에서 칼을 빼내 칼끝으로 승려가 입고 있는 옷을 한쪽으
로 밀쳤다. 오른쪽 쇄골 아래와 왼쪽 귀밑에 반점이 있었다. 가장 분명한
상처는 심장 부위에 난 손바닥 모양의 자줏빛 타박상이었다.
[우리는 누가 그를 죽였는지 모릅니다.]
검시관이 전문가다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짧은 순간에 일어난 살인 같습니다. 갖고 있던 무기는 부서져
버렸어요.]
그들은 깨진 무기를 보았다. 시체 옆에 되는 대로 내팽개쳐져 있었다.
불교승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다루는 무기인 철장()이었다. 한쪽 끝에
삽처럼 생긴 큰 날이 달려 있었다. 그것은 약초를 캐는 데 쓰는 삽에서
유래되었다. 다른 끝에는 초승달 모양의 날이 붙어 있었다. 양끝에는 강
철 고리가 늘어져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차르랑차르랑 쇳소리가 났다. 억
센 티크 나무 손잡이가 괴력에 의해 쪼개져 있었다.
사이훙은 검시관에게 잠깐 자리를 비켜 달라고 청하고 우잉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보 제공자가 뭐라고 했으며, 이 일과 후디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하던가?]
우잉은 램프를 집어들어 관의 끝에 올려 놓았다. 시체 위로 노란 불빛
이 쏟아져 보기 흉한 시체를 밝혀 주었다.
[얘기는 이렇게 되지. 이틀 전 이 승려는 우리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베이징으로 상경했던 거야. 그는 후디에와 그의 애인이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던 거야. 무림의 법을 자네도 잘 알잖아. 선
인과 악인은 반드시 맞부딪치게 되어 있지. 그는 핀후의 남동생을 이용해
핀후를 끌어내려고 했지. 이 승려는 암흑가의 정보원에게서 소년은 보통
정해진 시간에 집을 나선다고 들었지. 미리 가 기다리다 소년을 만난 승
려는 길을 가로막고 두 개의 납공을 땅에 던졌어. 납공은 그 힘과 무게
때문에 진흙탕 속 깊이 박혀 버렸지. 승려는 두 개의 공 위로 뛰어올라
도전장을 던졌지. 만일 소년이 그를 이긴다면, 소년에게 한수 가르쳐 주
기로 한 거지. 소년은 자기 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다른 무술인으로부터
더 배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경솔하게 공격을 가했지. 불교승은 그의
심장을 손바닥으로 철썩 쳤지. 소년은 피를 토하고 도망가 버렸어.
소년이 누이에게 상처를 보여 주자, 핀후는 철사장()이 남긴 흔
적임을 곧 알아차렸지. 목표물을 손바닥으로 가격하는 훈련을 하고 특수
약초에 손을 담근 사람만이 그런 상처를 입힐 수 있었던 거야. 그녀는 즉
각 복수하러 갔지. 불교승은 핀후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는 먼저
맨손으로 그녀와 대적했지. 하지만 그녀의 힘과 능력에 깜짝 놀라 무기를
써야만 했어. 목격자들의 말로는 핀후는 아주 쉽게 그로부터 철장을 뺏어
버렸다더군. 동생을 상처 입힌 불교승에게 화가 난 핀후는 동생이 입은
상처와 똑같은 상처를 그에게 돌려주었지. 그녀는 그에게 손을 뻗어 공포
의 손가락으로 그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네.]
사이훙은 뻣뻣이 굳어 있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상처와 부풀어 오른 부
위가 우잉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었다. 그것은 그녀가 암호랑이라고
불릴만한 가치가 있는 무사임을 말하는 명백한 증거였다.
[가자. 후디에는 벌써 우리가 베이징에 도착한 사실을 알고 있을 지도
몰라. 오늘 오후에 핀후의 집을 습격하자구.]
사이훙이 말했다. 우잉과 우콴은 동의했다.
그들은 검시관에게 감사의 뜻으로 약간의 은화를 집어 주고 나서 후디
에가 사는 북서부를 향하기 시작했다.
[결투가 벌어지는 날 시체 안치소에 가다니 기분이 나빠.]
우잉이 투덜댔다.
[그런 생각에 누가 신경이나 쓴대? 시체 썩는 냄세, 그게 바로 진실이
란 말이야.]
우콴은 형의 미신적인 생각을 비난했다.
[악취와 비교해보면 도시 냄새가 좋긴 좋군.]
사이훙이 말했다. 우잉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석탄 냄새가 대기 중
에 가득했다. 우잉은 기침을 했다.
[제기랄, 크게 다를 것도 없군.]
그가 불평했다.
세 사람은 베이징의 가장 오래된 구역으로 들어갔다. 회색 건물들과 부
서진 담장들은 꼬불꼬불한 좁은 길을 만들었다. 베이징은 한대 정확한 격
자 모양 위해 풍수지리의 원리에 따라 주도면밀하게 설계된 곳이었지만,
이젠 개인주의의 지저분한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사이훙 일행은 모퉁이를 돌아서서 길게 이어진 광활한 회색 돌담을 보
자마자 부유한 핀후의 집이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핀후의 저택에 둘
러쳐진 벽은 그 높이가 10미터도 넘었고 꼭대기는 윤기나는 녹색 기와로
장식되어 있었다. 대문 양쪽에 붉은 기둥들이 서 있고 주홍색의 문은 탱
크도 너끈히 이겨낼 만큼 단단해 보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은 전부
멋들어진 회색, 붉은색, 녹색이었다. 어디에도 쉽게 열고 들어갈 만한 곳
이 안 보였다. 세 사람 중 누구도 후디에의 도약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
다. 밧줄을 사용해서 올라가야만 했다.
사이훙은 난공불락의 울타리 안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보고 감탄을
했다. 현란한 빛들이 단색조의 고대 도시에 화려한 무늬를 짜넣고 있었
다. 정원과 가옥의 아름다움은 장구한 문명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었다.
고상한 취미와 건축과 풍경의 세심한 균형은 수많은 세월에 걸쳐 완성된
듯했다. 핀후의 아버지는 틀림없이 이 보물을 황제에게 숨겼을 것이다.
만일 통치자가 알았다면 시기심 때문에 죽여 버렸을 테니까.
인공 연못이 집 앞에 있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시냇물은 안채의 서쪽
뒤로 흘러갔다. 충충한 녹색의 불투명한 수면 위로 여러 그루의 수양버들
이 어른거렸다. 연못가에는 기암괴석이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마
치 그 유명한 <원난성()의 바위 정원>이 색다른 형태로 변해 있기
라도 한 듯 바위 정원은 동화 속의 산맥을 그리고 있었다.
명상을 하며 자연 속에 파묻힐 수 있게 꾸며진 정원이었다. 정원사들은
이론적인 원근법이나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원에 지붕이
있는 산책로를 길게 닦아 놓았다. 각 구역마다 기이하게 꺾인 산책로의
각도는 조화나 균형보다는 산책자의 편의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결과였다.
그러나 녹색의 기와 지붕과 붉은 기둥들은 자연과 섬세한 조화를 이루어
자못 경이롭기까지 했다. 포플러, 소나무와 삼목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은
무수한 점이 되어 흩어졌다. 연못 위에 떠 있는 연꽃은 불꽃처럼 붉게 타
올랐다. 노란색, 자주색, 적갈색의 국화들이 다소곳이 바위 정원이 드리
워진 나무 그늘도 가히 환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정원은 천상의 우아함
과 초현실적인 엄숙함을 느끼게 했다.
그들은 벽돌로 지어진 저택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거대한 2층 집은
전통적인 버드나무 무늬를 새긴 튼튼한 기둥과 맵시 있게 뻗은 지붕으로
단단히 지어져 있었다. 선인장 화분이 주랑 끝에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
다. 빨간 문에는 바다를 연상시키는 진주들이 박혀 있었다. 사이훙은 거
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었다. 한쪽 끝에 칼이 달린 밧줄을 몸에 묶었다. 사
이훙은 동료들을 보고 칼을 뽑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부드럽고 둥근 선이 돋보이는 칼날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당
나라의 학자 이관()이 <무기는 불길한 도구>라고 한 말이 옳다고 생
각했다. 칼은 사용해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다시 문을 마주보고 섰다. 그들은 어쨌든 자신들의 출현을 알
려야 했다. 사이훙은 거칠게 발로 문을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 아름다운 빨간 문이 떨어져 나갔다. 사이훙과 동료들은 방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잡이에 장식을 조각하고 비단으로 쿠션을 대어 만
든 의자들이 탁자 주위에 두 줄로 놓여 있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꽃 모
양의 대형 비단 양탄자가 깔려 있고 벽은 값비싼 두루말이 그림과 도자기
로 장식되어 있었다. 홀의 상단에 붉게 빛나는 작약꽃들이 옆으로 길게
있고 두 개의 의자가 문을 향하고 있었다. 방의 불빛은 흐릿하고 실내엔
곰팡내가 스며들어 있었다. 사이훙 일행은 다급하게 뛰어다니는 소리와
여자가 하인들에게 나가라고 명령하는 소리를 들었다.
핀후가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 금색과 청색의 비단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중키에 날씬한 몸매였지만, 운동으로 단련되어 단단해 보였다.
발도 튼튼하고 전족이 아니었다. 피부는 희고 매끄러웠다. 마치 백옥 같
았다. 두 눈은 크고 눈썹은 짙었다. 눈꼬리가 가늘고 길게 뻗어 있었다.
핀후의 용모는 섬세하게 그려진 그림 같았다. 잠깐 동안 사이훙은 자신이
방에 들어온 이유를 잊었다. 잔잔한 향기에 취해 버린 사이훙은 핀후 같
은 여인에게 유혹을 받으면 자기도 수도 생활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겠
다고 생각했다.
핀후의 뒤를 이어 동생이 들어왔다. 머리를 삭발하고 호기심이 많은 눈
을 가진 그는 말라깽이 10대 소년이었다. 얼마 전에 입은 상처 때문에 불
편한 것 같지는 않았다. 붉은색 비단옷을 입은 그는 조심스럽게 웃옷의
가장자리를 검은 허리띠 속으로 밀어 넣어 신속하게 발을 움직일 수 있게
했다. 그는 자기 키만한 창을 들어 사이훙 일행에게 겨누었다.
남매는 방의 한 가운데로 나왔다. 누군가 문가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후디에였다. 평소에 으스대며 자신만만하던 후디에가 아니었다. 과묵해
보였고 사이훙은 보는 눈길은 마치 숙명론자 같았다.
[우리가 너를 잡으러 왔다, 후디에!]
사이훙은 방 건너편에서 크게 소리쳤다.
후디에는 고개를 들어 외면했다.
[사부님이 너를 찾으신다. 너는 사부님의 포용 한도를 넘어섰다. 자,
우리와 함께 가자!]
[여기는 내 집이다. 너는 명령을 할 입장이 아니다.]
핀후가 말했다.
[이 일에서 손을 떼라.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화가 난 사이훙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뒤로 물러서는 후디에를 쳐다
보았다.
[공격 개시!]
사이훙은 크게 소리치면서 앞으로 돌진했다.
핀후는 거뜬히 그의 기습을 받아냈다. 사이훙은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깨달았다. 핀후의 기술은 그보다 몇 수위였다. 단순히 힘의 문제가 아니
었다. 사이훙의 체중과 완력이 핀후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핀후는
사이훙의 공격을 민첩하게 잘 빠져 나갔다. 방어할 생각도 안했다. 그녀
가 반격을 가할 때는 사이훙이 필사적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손가락 끝을
이용한 핀후의 가격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사이훙이 옆으로 껑충 뛰어올라 조용히 물러서 있는 후디에에게 달려들
었다. 핀후가 사이훙을 향해 뛰어 올랐다. 사이훙은 옆으로 살짝 피했다.
그녀는 사이훙을 뒤쪽으로 몰아붙이고 마침내 그의 가슴을 무섭게 걷어찼
다. 순간 금속의 섬광이 번뜩했다. 사이훙과 핀후는 순간 놀라서 멈칫했
다. 그녀는 신발 끝에 칼을 넣어 두고 있었고 사이훙은 가슴에 강철판을
대고 있었다.
[겁쟁이 같으니.]
그녀는 경멸조로 말했다.
사이훙은 어색하게 웃었다. 만용을 부릴 수야 없는 것 아닌가. 눈 깜짝
할 사이에 그는 밧줄의 매듭을 잡아당기고 빙빙 돌렸다. 사이훙은 그것을
핀후를 향해 냅다 던졌다. 핀후는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사이훙은 적어
도 그녀가 균형이라도 잃게 하고 싶었다.
밧줄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흐느껴 우는 듯한 소리였다. 밧줄을 팽팽
히 만들어 공격을 하고 나면 밧줄은 다시 되돌아와야 했다.
밧줄이 되돌아오면 사이훙은 그것을 손목이나 팔목, 다리에 감았다가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날려 보냈다.
핀후는 사이훙의 묘기에도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더욱 밀어붙였다.
사이훙은 5미터 길이의 밧줄과 그 끝에 달린 날카로운 면도칼로 간신히
핀후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는 우잉과 우콴이 잘 싸워 주기를 바랄 뿐이
었다.
우잉과 우콴은 소년보다 60센티 더 컸다. 그러나 소년은 빠른 속도로
창을 내 찌르며 열세를 극복하고 있었다. 두 검객은 소년에게 손쉬운 상
대에 불과했다. 빙글빙글 도는 동작과 정확한 찌르기는 특수한 소년의 무
기에 의해 반격을 받았다. 창자루는 야생 덩굴을 잘라 만든 것으로 특수
기름에 오래 담가 두었기 때문에 탄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사이훙은 핀
후의 동생이 고수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핀후는 사이훙에게 달려들었다. 사이훙은 무섭게 되받아 치면서 밧줄을
그녀의 정면에다 던졌다. 핀후가 재빨리 옆으로 비꼈으나, 밧줄은 살짝
그녀의 어깨를 베었다. 밧줄이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되돌아오자 사이훙
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밧줄은 손 안에서 힘있게 감겼다. 사이훙은
밧줄을 계속 움직여 방향을 돌려야만 했다. 사이훙은 여자에게서 등을 돌
리면서 밧줄을 맹렬히 회전시켰다. 핀후가 사정 거리 안에 들어오자 사이
훙은 뒤로 돌아 호랑이 꼬리치기로 그녀를 가격하고 밧줄을 잽싸게 날렸
다. 밧줄은 소년에게 정통으로 맞았다. 사이훙은 앞으로 뛰어올라 잽싸게
소년의 목에 밧줄을 휘감았다. 우잉과 우콴은 때를 놓치지 않고 즉각 칼
날을 깊숙이 박아 그를 죽여 버렸다.
핀후는 슬픔과 분노로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제 더 이상의 양보는 없었다. 치밀한 전략도, 우아한 동작도 그녀의 안
중에는 없었다. 핀후는 방심을 불허하는 엄청난 괴력을 뿜어냈다. 남자라
고 느낄 만큼 강력한 힘으로 사이훙을 가격했다. 사이훙은 몸을 비틀어서
그 힘을 분산시켰으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가 비틀비틀 뒤
로 물러서자 핀후는 손가락 하나를 그의 목에 겨냥하고 다가왔다. 사이훙
은 증오심과 눈물이 뒤범벅이 되어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녀의 두 눈을 바
라보았다. 그녀가 기를 모아 전력을 다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방
향을 잡는 동안 쉿쉿거리는 숨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러나 핀후가 찌르기 바로 전에 사이훙의 눈 앞이 번쩍하면서 우콴이
그녀의 손을 댕강 잘라버렸다. 숨소리는 이내 단말마의 비명으로 변하고
그녀의 귀중한 손이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잘려진 손목에서 뜨거운 피가
콸콸 쏟아졌다. 그녀는 포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
다. 사이훙 일행은 일단 한숨을 돌렸다.
핀후는 있는 힘을 다해 숨을 가다듬고 일어섰다. 그리고 죽은 동생을
바라보았다. 방 안을 한 번 둘러보더니 애인이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것
을 알았다. 설상가상으로 핀후는 손까지 잃었다. 치욕을 당한 것이다. 그
녀의 명예는 천길 나락으로 추락해 버렸다. 핀후의 손가락은 유명했으며
그녀의 무술을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제 핀후는 모든 것을 잃었
다. 무술의 영웅은 결코 자존심을 더럽히는 법이 없었다. 게임은 끝났다.
이제 핀후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꼿꼿한 손가락으로 살인을 할 수 있는 핀후는 힘을 어떤 식으로든 쓸
수 있었다. 신체의 어디로든지 기와 혈액의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제 핀후는 기와 혈액을 전부 혓바닥으로 올려보냈다.
생명의 힘을 다 바쳐 이곳으로 기를 밀어 올리면서 그녀는 혓바닥을 깨물
어 장렬한 최후를 장식했다.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핀후의 영혼은 스스
로 입힌 상처를 통해 분출했다. 사이훙은 그녀의 몸뚱어리가 빙글빙글 돌
다가 사냥꾼에게 당한 동물처럼 꼬꾸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
지막 춤은 아름다운 암호랑이가 빙빙 선회하다가 심홍색 핏방울의 분수
속으로 묻히면서 막을 내렸다.
사이훙은 소년에게서 밧줄을 풀었다. 시체는 무거웠다. 사이훙은 피묻
은 줄을 감아 올린 뒤 조심스럽게 칼날을 닦았다. 피 냄새가 온 방안에
진동했다. 사이훙은 문으로 걸어갔다. 유등이 있었다. 사이훙은 유등의
기름으로 양탄자에 불을 붙였다. 두 남매의 육신은 양탄자 위에서 불꽃으
로 타올랐다.
며칠 후 사이훙, 우잉, 우콴은 암흑가의 대규모 첩보망을 통해 후디에
를 추적하였다. 사이훙은 <<손자병법()>>에서 따온 한 구절을 떠
올렸다.
<지혜로운 장군이 이룬 업적은 그 선견지명 문에 평범한 사람을 능가
하는 것이다. 선견지명은 영혼, 신, 과거 사건의 유추에서 얻을 수 없으
며 계산으로 얻을 수도 없다. 적의 정세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얻어낼 수
잇는 것이다.>
첩자는 손자가 말하는 <신의 실타래>였다. 누군가 끈을 당기는 법을 알
면, 그물의 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뜬소문만을 쫓다가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도시와 시골을 닷
새 동안 뒤지고 다닌 후, 그들은 후베이성()의 다훙이라는 마을로
갔다. 그러다가 어느 초라한 주점에서 정보 제공자를 찾아냈다. 그는 시
시한 사기꾼에다 좀도둑이었다. 두둑하게 돈을 지불하자 마침내 그는 사
이훙 일행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들려주었다.
[당신들의 친구는 호북삼호()모임에 끼여 있소. 한 명은 리
()라고 불리는 팔괘장()의 사부지요. 그의 스승은 선종의 도교
수행자이며 그의 계보는 인 푸가 시조랍니다. 인 푸는 1900년 황태후가
베이징을 탈출할 때 그를 보호했었지요. 또 한 명의 이름이 왕()입니
다. 그는 유명한 순 루탕()의 제자인데 형의권()과 육합검
()의 대가요. 나머지 한 명은 페이마오()라고 부른답니다. 자
그마한 사람이지만 힘은 정말 무섭습니다. 청 황조의 마지막 기사들 중
한 사람인 비성표자(:날으는 성스러운 표범)에서 무술을 철저히
전수 받았답니다. 이들은 모두 50대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무술은 최고
전성기를 맞고 있습죠. 댁들은 너무 젊어서 그들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들을 찾을 수 있는지 제발 말해 주십시오.]
우콴이 사기꾼에게 요청하였다.
도둑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소리내어 웃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이리 가십시오. 댁들을 위해 어디로 관짝을 보내야
할지 제가 아니까요.]
그들은 능글능글 웃어대는 사기꾼과 헤어져 계획을 세웠다. 이 문제는
이제 실질적으로 무림의 문제가 되었다. 그 자체로서 유일한 방법은 개인
적인 도전이었다. 그리고 단 한 사람만이 세 사람에게 도전장을 낼 수 있
었다. 그들 모두가 호북삼호 각자에게 집단으로 대항한다면 불명예가 될
터였다. 사이훙은 자원해서 즉각 도전장을 냈다.
날씨는 점점 더 무더워졌다. 사이훙은 후디에를 잡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이틀 후 사이훙은 리와 왕을 만나, 두 사람 모두 묵사발을 만들
어 버렸다. 팔괘장을 구사하는 리는 우아하고 교묘하게 잘 빠져 나갔지만
사이훙은 리를 번쩍 들어 바닥에 꽂아버리는 몽고 씨름으로 결판을 냈다.
리는 딱딱한 땅바닥에 수 차례 던져지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사이훙은 왕을 대적할 때는 리의 권법을 이용했다. 두 번 다 적을 죽이
지 않았다. 이번 결투는 무사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후디에를 순전히 우정 때문에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사이훙은 왕이 패배를 인정하고 난 후, 오해를 풀어 주었다. 그때야 비
로소 두 사람은 후디에가 곤경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사이훙에
게 서둘러 남쪽으로 가라고 말해 주었다. 페이마오는 후디에를 호위하고
양쯔강으로 가고 있었다.
사이훙 일행은 허겁지겁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기차를 놓쳐 버
렸다. 우잉은 기차를 놓친 일이 매우 불길하다고 투덜거렸다. 다음 기차
가 올 때까지 4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기다리다 못해 난징행 열차를 탈수
밖에 없었다. 24시간이 걸려서야 양쯔강 북쪽 강가에 당도했다. 강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폭이 넓은 만에는 건널 다리가 없었다. 다서
배로 실어 나르는 데 몇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세 사람은 급히 둑으로 달
려가 건너갈 작은 배 한 척을 세냈다.
난징 부두는 임시용 범선, 증기선과 화물선을 타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농산물이 담긴 광주리와 오리와 거위를 담은 상자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선창은 가솔린, 기름, 쓰레기와 땀냄새가 섞인 악취가 진동
을 했다.
꼭두새벽인데도 날씨는 찌는 듯이 더웠다. 사이훙은 옷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땀이 흠뻑 젖어 들었다. 태양을 피하느라 눈을 옆으로 뜨는 데
후디에가 보였다. 부자들이 입는 하늘색 비단옷을 입고 갑판 위에 서 있
는 후디에의 자태가 눈부셨다. 겉옷 밑으로 앞가슴이 트인 깨끗한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띤 채 한가로이 걸어다녔다. 그 옆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사이훙은 사람들 속으로 마구 헤집고 나갔다. 사이훙이 사람들을 밀치
자 여기저기서 투덜대는 소리가 났고, 페이마오는 즉각 신경을 곤두세웠
다. 사이훙이 마지막 구경꾼을 밀쳐내자 바람을 가르는 휘파람 소리가 그
에게 날아들었다. 밧줄 창살의 명수인 페이마오가 무기를 날린 것이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피했다. 그러나 아주 멀리 흩어지지는 않았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사이훙과 페
이마오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공수 자세를 취했다. 페이마오는 바짝 경
계하며 사이훙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마르고 키가 작았다. 얼굴을 올
리브 씨처럼 생겼고 피부는 질긴 가죽 같았다. 두 눈은 가늘고 날카로웠
으며 새까만 머리칼엔 포마드를 잔뜩 칠했다. 밧줄 창살이 날카롭게 날아
들었다. 그러나 사이훙은 강철 부채를 펴서 자신을 방어하고 반격을 감행
했다. 사이훙은 날렵하게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놀랍게도 페이마오는 그
의 주먹을 피했을 뿐 아니라, 근사한 기계체조 기술을 동원하여 사이훙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그는 허공에서 사이훙을 발로 차고 나서 다시 한
번 밧줄 창살을 날렸다.
사이훙은 널빤지에 넘어졌다. 나뭇조각들이 손바닥을 할퀴었다. 사이훙
은 재빨리 날아드는 밧줄 창살을 피했다. 페이마오는 그 동안 창살을 회
수하지도 않았다. 그는 밧줄을 따라 뛰어오르고 공중에서 고리를 만들어
폭탄을 투하하듯 아래로 던졌다. 그가 다시 뛰어오르자 사이훙은 부채를
뒤로 젖히고 페이마오 앞에다 부채를 찰칵하고 폈다. 사이훙은 부채의 바
깥 살에 붙은 비밀 단추를 눌렀다. 사이훙이 빠른 손놀림으로 쏘아보낸
13개의 가는 바늘은 페이마오의 다리에 명중했다.
우잉과 우콴이 합세했다. 구경꾼이 꽉 들어차서 칼을 빼낼 수가 없자,
그들은 맨손으로 싸웠다. 상처를 입긴 했어도 페이마오는 용감하게 싸웠
다. 그러나 사이훙 일행은 곧 그가 부둣바닥에서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사이훙은 사람들 속을 비집고 나가서 부두 끝으로 달려갔다. 후디에는
벌써 배의 갑판 위에 올라탔고 배는 떠나고 있었다.
[내가 너를 쫓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너는 하늘로도, 땅속으로도
숨을 수 없다! 내가 꼭 잡고 말 테니까! 꼭 잡고 말거야!]
사이훙은 무섭게 소리쳤다.
사이훙은 후디에의 무표정한 모습에 놀랐다. 후디에는 그런 얼굴로 사
이훙은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이훙은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며
무슨 대답이라도 들어 보려고 안달을 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뭐라고 조언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
인가?
후디에를 추적하기 위해 사이훙 일행이 탄 증기선을 승객으로 만원이었
다. 사이훙은 난간에 서서 물살을 구경하고 있었다. 양쯔강은 수로를 따
라 힘차게 흘러갔다. 이 수역은 너무 광활해서 강이라는 호칭이 우습기까
지 했다. 양쯔는 깊고 위험하고, 드넓고 힘찬 거대한 바다였다. 불투명한
진흙빛 수면 위로 배에서 나온 온갖 종류의 쓰레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배가 부두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자 갈색의 광활함은 점점 더 확대되었다.
자유를 얻은 느낌이었다. 매끄럽게 펼쳐지는 강을 표류하노라면, 대모험
이 벌어질 것 같았다.
사이훙은 배의 옆에서 물결이 일어났다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
얀 물거품이 겨우 일어날까 말까 하였다. 세상은 아주 간단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수평으로 펼쳐진 푸른 하늘, 신록의 들판, 갈색의 강 속
에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사이훙은 들판의 그림자들이 강을 따
라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때때로 그것은 완만한 둑을 이루었고 때로
는 그다지 크지 않은 덩어리들이 물로 떨어지기도 했다. 들판을 지나고
진흙 벽돌로 지은 가옥들도 지나갔다.
다른 증기선 한 척이 그들을 지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증기선은
점령 지역에서 빠져 나온 난민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사이훙은 그들
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거칠어 보였고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놀
랄 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친척을 찾아서, 일자리를 찾아서 하류로 내
려가고 있었다.
[요즘은 일자리가 귀해 점령지에 있는 게 차라리 낫지.]
누군가 난민들을 보고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갑자기 배 위가 술렁거렸다. 한 구의 시체가 배 옆으로 둥둥 떠다녔다.
얼마 안 있어 또 한 구가 내려왔다. 물살은 아주 빨랐다. 하지만 시체들
은 그대로 있었다.
[자네 봤어? 불길해!]
우잉이 들뜬 소리로 말했다.
[그래. 맨 마지막 시체가 여자였어, 여자였어?]
사이훙이 물었다.
[어떻게 구별하는지 알아? 얼굴이 밑으로 가라앉아 있으면 대개는 남자
야. 얼굴이 위로 향해 있으면 대개 여자이고.]
우콴이 말했다.
[그런 이상한 얘기를 어디서 주어들었지?]
사이훙이 물었다.
[여행을 하다가 어디에선가 들었지. 여자는 엉덩이가 더 무거워서 아래
로 처지고 얼굴은 위로 올라오지. 하지만 남자는 머리가 무겁거든. 그래
서 얼굴이 내려가는 거야.]
곧 또 한 구가 떠내려왔다. 그들은 우콴의 말을 시험해 보려 했다. 불
행히도 이번의 시체는 머리의 반이 달아나고 없었다. 사이훙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비집고 뱃머리로 나아갔다. 이따금씩 물안개가 끼었
지만 거대한 삼각형을 이룬 강의 하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파도는 최
면술을 부렸다. 사부님이 언젠가 말씀하셨지. 물은 특별한 요소이므로 제
대로 성찰하려면 수면을 잘 주시하라고.
사이훙은 베이징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그가 살아오면서 몇 명이나 죽
였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는 전사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살인 기술은 그
가 물려받은 유산인 셈이다. 그는 도적떼들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
린 시절부터 싸움을 해야 했다. 무사들의 도전을 받아 결투를 벌였고 게
릴라병으로도 싸웠었다. 게다가 사이훙과 모든 무술가들이 이해하고 있듯
이, 핀후와 그녀의 동생도 싸움이 남긴 최후의 대가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죽음이 사이훙에게는 비극적이고
헛된 것이었으며 충격적인 것이었다.
사이훙은 후디에 사형의 연인을 죽인 것이다. 이제 사이훙은 영웅이 아
니라 파괴자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사이훙은 자신의 추적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죽여 버린 무사였다. 더 이상 이상주의적인 도교 수행자가 아니
었다. 그 대신 그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도전을 받아들인 사나이였다.
사이훙은 도전에 또 다른 윤리가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성공이었다. 도전은 그가 묶여 있는 무사도 규정의 심장부
였다. 그러나 의기()속에는 다른 모든 원칙들을 희생하는 슬픔이 감
춰져 있었다. 사람은 내내 탐구를 하며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음유시
인들은 소년이 어른 되는 진짜 이유를 결코 말하지 않았다. 즉 도덕과 현
실의 아이러니를 이해하는 것은 고상함과 우아한 이상을 포기함으로써 가
능했다.
무술가로서 현대적 기사로서 사이훙은 자신이 도전을 좋아하고 있음을
알았다. 원칙과 상황 사이에 그가 열망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사
이훙은 도전을 떠맡게 될 때마다 새로이 희생과 타협의 똑같은 교훈을 배
워야 했다. 사이훙은 갑판에 서서 그가 살인을 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받
아들였다. 그의 영혼이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으리라는 것도 인정했다.
사이훙은 사형을 잡기 위해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임을 받아들였
다. 그는 배의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최후의 종말을 느꼈다. 마치 무사
도의 수호자가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사이훙은 유유히 흘러가는 갈색의 강물을 바라보았다. 사이훙은 자신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위()의 개념을 이해했던 10년
전의 질문을 회상했다.
[무위가 무슨 뜻입니까?]
사이훙이 물었다.
[그 말의 뜻은 네가 하는 일은 모두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고 완벽하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너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단다. 네가 끊임없이 갈고
닦아 온 귀중한 정적을 방해하게끔 감정을 들쑤시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사부님에게 영향을 주지 않나요?]
[그런 것은 없다.]
[사부님이 명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사부님을 죽이려고 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사이훙이 물었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내가 먼저 죽여 버릴 테다.]
[그 다음에는요?]
[그리고는 다시 앉아 명상을 하지.]
[그게 전부인가요?]
[그렇다.]
[다른 사람을 죽인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으시겠죠?]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먼저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나는 단지
그들을 훼방놓았을 뿐이다.]
[속으로도 사부님은 괴로워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단다. 그게 무위이니라.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면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네가 진정 무위를 이해한다면 그때 너는 평온해질 것이다.]
사이훙은 당황했다. 대사부는 결국 이런 식으로 그 점을 해명해 주었
다.
[무()는 없다는 것이니라. 위()는 <위해서>와 <대해서>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결과를 뜻하기도 한다. 무위는 너의 행동이 형이상학적으
로나 네 자신 속에서 어떤 결말도 갖지 못하는 것을 뜻한단다.]
[또 사부님의 내면에서도.]
사이훙은 흔들리는 배의 난간에 기대어 낮게 읊조렸다. 명상 속의 정적
은 이제 아주 먼 곳에 있었다. 사이훙은 산에 있을 때는 그것을 알 수 있
었다. 하지만 추적을 벌이는 이곳에서는 감정의 장막에 감춰져 버렸다.
또 한 구의 시체가 흘러갔다. 이번에는 여자였다. 양쯔강은 시체들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사이훙은 죽은 자들의 행렬을 바라보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와 시체는 양쯔 강 하구의 똑같은 지점으로 가고 있었
다. 바로 상하이()로.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2권 SEVEN BAMBOO TABLETS OF
THE CLOUDY SATCHEL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이 인 복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7. 상하이
여기가 지옥인가? 사이훙은 상하이의 선창에 서서 스스로에게 물어 보
았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이국적이고 너무 놀라워서 차라리 지옥
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사이훙은 흔들거리는 이를 데 없는 사람들 속
에 펼쳐진 상하이의 지평선을 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들이 긴 성벽으로 유명한 부두를 따라 늘어서 있
었다. 빌딩들은 이제껏 그가 본 어떤 건물보다도 높았다. 쭉쭉 뻗은 빌딩
의 선들, 네모반듯한 창문들, 그리스 로마의 건축 양식을 본뜬 건물들 그
리고 위풍당당한 회색 기둥과 마천루는 사이훙이 본 어떤 것보다도 기이
하였다. 그것들은 하늘을 뾰족한 선으로 그어 놓고 유럽의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한때 상하이는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푸른 하늘엔 구름이 둥실
둥실 높게 떠다니고 대양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넓게 펼쳐진 상공으로
불어왔다. 황푸 강과 우쑹 강이 상하이를 관통했으며 조금 북쪽으로 올라
가면 양쯔강이 있었다. 기름진 옥토가 상하이 서쪽으로 끝없이 펼쳐졌다.
전쟁으로 인해 농토는 많이 유실되었지만, 여전이 그 땅은 신선한 농산물
과 녹색의 아름다움도 가져다 주었다.
<바닷가>라는 뜻을 가진 상하이는 맑은 햇살이 비추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러나 시계탑과 호텔, 빌딩이 들어선 상하이는 더 이상 아름
답지 않았다. 사이훙이 보기에는 추했다. 선창의 생선 냄새와 노동자들의
땀 냄새로 상하이는 불쾌하기까지 했다. 모터 소리, 경적 소리, 고함 소
리가 나무하는 상하이는 결코 천국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바위 같은 건
물들 속에서 인간의 물결에 묻혀 상하이의 일부분이 되어 갔다.
선창에 발을 딛고 서니, 사이훙과 두 동료는 인파에 파묻힌 어린아이들
같았다. 사람들이 어찌나 밀어대는지 신경질이 났다. 걸어갈 수조차 없었
다. 사이훙은 팔꿈치로 밀며 군중 속을 헤집고 나갔지만, 몇 걸음 떼어놓
기가 쉽지 않았다. 거리의 모퉁이까지 간신히 갔을 때, 그의 감각은 냄새
와 소음으로 완전히 마비 상태가 되었다. 강에서 들이 마셨던 그 신선한
공기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제 그는 기름 타는 냄새밖에 맡을 수 없었
다.
사이훙은 거리를 바라보았다. 나이든 남자들이 삼륜 자전거를 끌고 거
리를 누볐다. 사이훙은 자동차에 치여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기름 타는
냄새는 바로 그것들 때문이었다. 부르릉 소리를 내고 연기를 뿜어내며 광
택을 발하는 검은 자동차들은 잘 차려입은 사람들을 태우고 번잡한 대로
를 마구 달리고 있었다.
사이훙과 우잉, 우콴은 식민 세력의 거대한 전초 기지인 도시의 감각적
이미지에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홍콩과 상하이 방파제의 빗장 걸린 창
문, 롤스로이스에서 야하게 걸어나오는 러시아 여인, 찻집에 가면 성공한
선박 중개상들이 있었고 시궁창에는 뻣뻣한 시체가 버려져 있었다. 몹시
여윈 늙은 도붓장수가 사과를 팔았다. 동양인 은행원이 멋진 비단 모자에
서양 코트를 입고 있었다. 코를 킁킁대는 헤로인 중독자, 만취한 군인들,
사이훙은 난징 거리에서도 보았던 도시의 혼탁한 모습을 거슬러 길을 재
촉해 갔다. 사이훙이 본 거리의 모습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정도가 심해져
갔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갱들이 보였다. 그들은 원하면 누구든 괴롭힐 수
있는 젊고 건방지고 상스러운 자들이었다.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은 그들
은 거리낌없이 웃옷의 단추를 풀고 밑에 받쳐 입은 옷을 꺼내 놓았다. 보
통 사람들은 옷소매를 풀어 내리는 데 그들의 옷소매는 감아 올려져 있었
다. 그들은 전통 중국 의상을 입고 약간 서양식으로 멋을 부렸다. 사과모
자, 선글라스, 넓은 가죽 벨트, 가죽신이 요즘 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옷 밑에는 전통적 암살 도구가 있었다. 칼, 쇳조각, 가죽
곤봉과 피스톨이었다. 어딜 가나 깡패가 있었다.
사이훙은 이 건달패들에게 크게 관심을 두었다. 상하이에서는 무슨 일
을 하려면 지하 세계를 통하지 않고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동의가 없이
는 어떤 일도 불가능했다. 그들은 도시를 장악하고 은행, 정부, 경찰을
전부 통제하였다. 유럽인 거주지와 전시에 와해된 사회의 틈바구니에서
몸을 보전하였다. 양쯔강보다 더 세차게 흐르는, 도시에서 유통되는 엄청
난 액수의 달러는 지하 세계에 의해 완전히 오염되었다. 그것이 산업이
든, 운송이든, 아편이든, 헤로인이든, 노예 거래이든 갱조직이 모든 돈을
관할했다.
상하이에서는 그 누구도 홍건단과 녹원회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수가 없
었다. 쑨 원(), 마오 쩌둥(), 저우 언라이()같은 유명
인사들이 이런 저런 식으로 모두 연루되어 있었다. 장 제스는 정확히 말
해 자금과 음모 그리고 상하이의 대부인 두 웨선()의 폭력 때문에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두 웨선의 세련된 감각을
따라올 자가 없었고 그의 방탕함 역시 극치에 이르렀다.
사이훙 일행은 호텔에서 나오는 음악과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향긋한 음식 내음도 맡을 수 있었다. 빵 굽는 냄새와 고기 냄새 그리고
바다에서 바람이 불면 가끔씩 아편 냄새가 묻어났다. 그리고 거리의 더
자극성 있는 냄새도 섞여 있었다. 직접 다가가서 코로 확인한 것은 아니
지만 외국인한테서 다른 냄새도 난다고 우잉은 말했다. 이를테면 꽃 냄
새, 후추 냄새, 가죽 냄새, 나무 냄새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사실 사이훙이 외국인을 구경할 수 있는 몇 번 안 되는 기회였
다. 관가보에서 대규모 연회가 열리는 동안 몇 사람의 외국인을 보았지만
소수에 불과했었다. 이제 상하이는 도시 전체에 외국인이 득실거렸다.
그는 여러 가지 끔찍한 소문을 떠올리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에
겐 꼬리가 달렸을까? 그들의 몸은 전부 털로 덮여 있을까? 어린애를 잡아
먹을까? 외국인은 정말 자신이 원숭이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사이훙이 상하이에서 외국인의 역사를 더 많이 알게 된 것은 간이 숙박소
에서 우콴이 해준 설명 덕택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외국인은 계속 사이
훙 일행을 당황시켰다.
수십 년을 지나오면서 외국인이 이 도시에 유명한 외국인 조계()를
만들었다고 우콴이 설명해 주었다. 영국은 부두의 끝에 있는 최고의 땅을
점령한 반면, 프랑스는 영국령과 그 남쪽의 고대 성곽 도시 사이의 지대
를 차지하였다. 우쑹 강 건너 북부 지역은 미국 조계였다. 그러나 미국은
별짓을 다 해도 그 땅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영국과 합동으로 <국제조
계>를 만들었다.
<국제조계>는 시의회를 두었는데 의회는 유력 인사의 하수인들이 지배
했다. 프랑스도 유사한 통치 기구를 만들었다. 양쪽 다 자체 경찰 병력을
보유했지만, 그것은 식민 통치의 정신적 상징물에 지나지 않았다. 조계는
범죄를 부추겼다. 자국 법망을 피해 이곳으로 쉽게 피신할 수 있었던 것
이다. 범죄자들은 끊임없이 이것을 이용했다. 경찰은 상하이를 지배하는
범죄 조직과 협력하면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외국인의 위용은 1937년 일본이 이 도시에 쳐들어와서 대다수 서양인을
상하이맨션이라 불리는 추한 고층 빌딩으로 몰아넣었을 때 크게 손상되었
다. 일본은 한번 정착하고 나서는 부정부패, 사악함과 타협을 했다. 식민
정책은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썩어 들기 시작했다. 도시는 이제 정치가,
암살자, 첩자, 군국주의자, 갱과 자본가의 손에 넘어갔다.
일본군은 여전히 들볶고, 흥청대고, 강간하고, 약탈하는 위험한 존재였
다. 수행자는 주의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상하이에 오
면 누구나 상하이의 방식을 추종하게 만드는 상하이의 무시무시한 괴력을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약과 섹스는 도시의 근간이 되었다. 격정과 정치와 장삿속 그리고 드
물지만 때로는 사랑마저도 나름대로 이 둘과 함수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마약과 섹스를 지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돈이었다. 육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건 마약 중독자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건, 아편이든 모르핀이든
헤로인이든 모두 구할 수가 있었다.
아편굴과 사창가에서는 <꽃과 향기>, 즉 여자와 아편 연기를 구할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는 어떤 여자든 돈을 주고 살 수가 있었다. 고급 살롱
의 창부나 기생에서 골목길에서 값싸게 살 수 있는 매춘부까지 있었다.
동성 연애자들도 무시를 당하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은 자기 취향에 맞는
미소년을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뭐든 돈이든
살 수 있었다. 이 모든 활동이 갱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사이훙 일행은 거리 모퉁이의 건달패들과 접촉을 했다. 뇌물
을 주고 감언이설로 속여 범죄자들의 위계 조직 속으로 파고들었다. 경극
장에서 배우들 꽁무니를 좇고, 다방에서 놀고, 자신들의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다가 마침내 그들은 <회색 백조>와 함께 온 청중과 말싸
움을 벌이게 되었다. <회색 백조>는 상하이 지하 세계의 두목 중 한 사람
이었다. 그러나 <회색 백조>는 암살을 두려워하여 몸조심을 하는 여자였
다. 그녀는 꼭 한 사람만 만났다. 사이훙은 자신이 그 한 사람이 되겠다
고 마음먹었다.
사이훙이 약속한 날은 화창했지만 후덥지근했다. 프랑스 조계를 통과하
는 동안 사이훙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땀방울이 목덜미에서 뚝뚝
떨어졌다. 사이훙은 연도에 심어 놓은 나무들이 만들어 주는 그늘을 따라
걸었다. 공기는 눅눅하여 숨쉬기도 어려웠다. 별장에는 회색 벽토를 바른
담장이 솟아 있었다. 별장들이 있고 그 뒤에 규모가 상당히 큰 목재와 벽
돌로 지은 저택들이 있었다. 저택의 양식이 사이훙에게는 이국적으로 보
였다. 그는 아직까지 파리, 런던, 베를린에 가본 적이 없었다. 외국의 도
시에서라면 이런 것들이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경비가 삼엄한 구내로 갔다. 철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전부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무기를 찾으려고 조심스럽게 사이훙의 몸을
수색한 다음 모양이 흉한 벽돌 건물의 굽은 진입로 아래로 호위해 갔다.
건물의 정면은 오직 견고함과 화려함만을 고려하여 지어진 듯했다. 가짜
돌기둥들이 육중한 나무 문의 테두리를 두르고 있었다. 카펫이 깔린 현관
복도로 들어서자 역겨운 냄새가 났다. 곰팡이 냄새 같았다.
6명의 남자가 사이훙과 함께 거실로 갔다. 거실은 중국식으로 아주 세
련되게 장식되어 있었다. 사이훙은 놀랐다. 많은 갱들은 인정받는 자리를
차지하고 난 후엔 예술과 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취미
는 야하고 거들먹거리는 천박한 경향을 띠었다. 그런데 여기 놓인 도자기
와 장식용 옥 조각품들은 박물관에 놓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것들
은 방에 빙 둘러서 있는 험악한 남자들과 커다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회색 백조님이시다!]
경호원이 회색 백조의 등장을 알렸다.
예술품과 살인자들이 가득한 미색의 방 위쪽에 가냘픈 여인 하나가 앉
아 있었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검은 담비 색깔의 스카프에는 은과 금,
옥으로 만든 핀을 꽂고 있었다. 불거진 뺨과 활처럼 휜 눈썹, 얇은 입술
은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두껍게 화장한 얼굴은 여자의 전성기를
살짝 지났음을 말해 주었다. 어깨는 조금 넓었지만 가슴은 균형미가 있고
풍만했다. 몸에 달라붙는 비단 드레스의 길게 벌어진 틈으로 드러난 다리
는 길고 미끈하게 뻗어 있었다. 그녀는 흔들거리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리
며 장난하고 있었다.
[야! 아주 잘생긴 미남이시네!]
회색 백조가 말했다. 사이훙은 얼굴을 붉혔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네! 정말 근사한 체격이
야! 오, 오! 내 입에서 군침이 도는 것 좀 봐!]
그녀는 곰처럼 거대한 체격의 경호원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 마음에 들어. 피부도 부드러운 게 너희들 무법자들의 피부와는 다
르군!]
경호원은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사이훙은 그의 이빨이 여러 대 나
간 것을 보았다.
[이것 봐요. 나랑 놀러 왔나?]
그녀는 환심을 사려는 듯 알랑거렸다.
[미안하지만, 그게 아니라.......]
사이훙은 말을 더듬거렸다.
[저는 녹원회의 일원인 사형을 찾고 있습니다.]
[저런 갑갑한 친구 봤나!]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저러니 남자들은 골치가 아프단 말이야. 항상 곧바로 사업부터 하고
싶어한다니까! 물론 댁이 여기 온 이유는 알겠어요. 그 남자가 그렇게도
필요하다면,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줄 수도 있어. 그런데 그 보
답으로 청년은 나에게 무엇을 줄 테야?]
[무엇을 원하십니까?]
[당신과 단 둘이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면 정말 황홀할 텐데! 얼마나
황홀한지 상상이 되고도 남아. 하룻밤의 쾌락을 나에게 준다면 청년의 사
형을 넘겨줄게.]
회색 백조가 이렇게 말했다.
사이훙은 흥분하여 목 양쪽에 있는 정맥이 쿵쾅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미안하지만, 저는 출가인이고 지금 수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도교 수행자입니다.]
사이훙이 말했다.
[그래서? 왜 도교를 위해 기둥서방이 되면 안 된다는 거지?]
그녀는 수줍게 미소지었다.
[말도 안 됩니다!]
회색 백조는 소리내어 웃었다.
[저렇게 솔직한 청년을 볼 수 있다니, 정말 신선해. 골목대장들은 생김
새도 훌륭하다니까. 상하이에서는 저런 사람을 볼 수가 없어.]
경호원들이 빈정거리듯 킬킬댔다.
사이훙이 다시 얘기를 꺼냈다.
[당신한테 내 사형이 없기 때문에, 어쨌든 공평하게 거래를 하지 못할
거요.]
[맞아요. 미남이기도 하지만 약삭빠른 사람이군.]
그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가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겠습니다. 떠나도록 허락해 주세
요.]
[내 허락이 내리기 전에는 떠날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 문제에 관심
있는 다른 사람이 있는데, 소개해 드리지.]
회색 백조가 정답게 말했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두 웨선.]
사이훙은 멈칫했다. 두는 상하이 암흑가의 왕이었다. 그가 관심을 기울
인다고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이훙은 상하이에서 일어나
는 중요한 일을 두가 모를 리 없다는 걸을 알았다.
[그를 만나게 해주는 대가는 뭐죠?]
[당신과 나는 둘 다 무림의 일원이에요. 그것으로 족해요.]
[정말입니까?]
[그래요. 내가 본심을 오로지 탐욕에만 두고 있다고 멋대로 추측하지
말아요.]
[상하이의 법도로군요.
[맞아요, 맞아.]
회색 백조가 웃었다.
사이훙은 속으로 욕했다. 사이훙은 아마도 두가 빈틈없이 지시를 내린
모양이라고 추측하였다.
[가도 좋아요. 내일 두를 만나라고. 그들이 당신을 안내해 줄거야.]
그녀가 말했다.
사이훙은 그러마고 말하고 돌아서서 나왔다.
[행운을 비오!]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사이훙은 몸을 돌렸다. 경호원이 감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사이
훙은 회색 백조의 웃는 얼굴을 보려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것은 틀림없
는 남자의 웃음이었다. 회색 백조는 여장 남자였던 것이다.
[내가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반복했다.
[오, 오! 너를 침실로 데려갈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사이훙과 우잉, 우콴은 눈을 가리운 채 리무진에 태워져 발코니가 있는
3층 저택으로 갔다. 저택은 콘크리트와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창틀과 난
간은 베니스풍으로 붉게 칠해져 있었다. 집 앞의 좁은 안뜰에 리무진이
몇 대 더 주차되어 있었다. 사이훙은 주위를 슬쩍 살폈다. 벽들은 거의 4
미터 높이나 되었다. 대문은 무거운 철판이 씌워져 있었다. 한 구석에 시
들어빠진 작은 정원과 붉은색과 녹색으로 칠해진 중국식 전망대가 있었
다. 담장 너머로 프랑스 풍의 건물이 몇 채 더 보였다.
그들은 몇 걸음 올라가 현관으로 갔다. 선인장, 야자수가 줄줄이 늘어
서 있었다. 넓은 현관 입구는 니스를 칠한 참나무 격자에 비스듬히 유리
판이 끼워져 있었다. 어두운 실내는 마호가니의 벽과 딱딱한 나무 마룻바
닥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루 끝까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칙칙한
빛깔의 옷을 입은 경호원들은 마치 유령의 집에 갑옷을 입고 서 있는 기
사 같았다. 거리를 오가는 뚜쟁이와 도둑, 바람둥이와는 달리 이 사람들
은 반백의 머리를 한 엄격한 직업인이었다. 옷이 부풀어 오른 것은 그 속
에 근육과 총이 들어 있다는 신호였다.
경호원 한 명이 이중으로 된 참나무 문을 열자 큰 방을 빙 둘러선 더
많은 남자들이 있었다. 서양식 소파와 의자가 놓여 있었고 한결같이 똑같
은 갈색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사진과 어두운 유화 몇 점이 벽을 장식했
다. 로코코식 금색 틀 속의 거울은 싸늘한 흑색 벽난로 위에 걸려 있었
다. 창가에 길게 뻗은 야자수 화분이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휘장이 반쯤
내려져 있었다. 수정 샹들리에가 높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방 끝의 녹
색 램프 옆에 두 웨선이 앉아 있었다.
두는 사이훙 일행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사이훙은 그를 자세
히 뜯어봤다. 바짝 친 상고머리가 사각형 얼굴을 반원을 그리듯 살짝 덮
고 있었다. 이마는 조금 튀어나와 있었고 숱이 무성하고 짙은 눈썹은 활
처럼 휘어 있었다. 두 눈은 본능적인 냉혹함이 번들거렸다. 콧날이 우뚝
했고 커다란 콧구멍은 벌어져 있었다. 입술은 관능적이고 매우 컸다. 귀
는 벌어져 있는데 이것 때문에 그가 싫어하는 별명인 <당나귀귀 두>가 생
겼다. 피부는 탱탱했지만 몇 년간 아편을 한 탓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때 두툼했을 두 어깨가 지금은 가냘펐다. 깃이 세워진 가운 밑에 있
던 옛날의 근육은 온데 간데 없었다. 단지 툭툭 불거지고 단단한 육체밖
에는 없었다. 두 웨선은 노련했고 나름대로 성공도 거두었다. 45살인 두
는 권력의 정상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홍콩에서든, 충칭()에서
든, 상하이에서든 그는 아편 수송에서부터 장 제스 집권과 관련된 정치적
음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다.
두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그 많은 인생의 역사를 알아내기란 정말 어려
웠다. 그는 황푸 강 건너편 푸동()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시시한 마
약 밀수업자와 뚜쟁이로 시작했다. 상하이가 한창 쾌락과 부패에 젖어있
던 시절이었다. 그는 황 진룽()의 부하가 되어 곧 녹원회의 대열에
서 급부상하였다. 그는 아편 거래와 모든 범죄 활동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일을 도왔다. 또 다른 갱조직과 협정을 맺거나 아니면 송두리째 제거해
버렸다.
1927년까지 두의 조직은 장 제스가 중국 정부를 장악하도록 도왔다. 두
는 헌신적인 반공주의자였다. 1927년의 유명한 대학살을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그대 두의 부하는 상하이 거리에서 5천 명(혹자는
십만 명이라고 말한다) 이상을 살해했다. 살육을 하는 데는 불과 몇 시간
밖에 안 걸렸다. 그러나 시체를 실어 나르는 데는 몇 날 며칠이 걸렸다.
그와 동시에 두는 금융계의 대부가 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에 반드시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다. 부패와 부와 권력의 남용은 상하이 금융가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는 멋진 비단옷, 턱시도, 비단 모자를 걸
치고 다녔다. 자가용 운전사를 고용해 두 가지 색의 비싼 리무진을 타고
다니면서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았다. 그는 상하이 도시 연합의 대표이고
중국 은행의 이사였다. 통화 준비위원회의 일원이 되었고 청년 학교를 설
립하고, 성실 협회라 불리는 동업 조직을 결성했다.
두는 열성적인 국민당원이었다. 게다가 일본인을 증오했다. 비록 문어
발식으로 뻗어 가는 일부 갱조직의 점령군과의 마약 거래를 막지는 못했
지만, 1937년 일본이 상하이를 침략했을 때 두는 그의 선박들을 모두 침
몰시켜 항구를 폐쇄할 것을 제안했다. 그의 부하중 일부는 일본에 저항하
여 지하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의 여러 면모를 한데 조화시키기가 어려웠다. 잔혹한 살인
자, 아편 밀매업자, 저명한 은행가, 파렴치한 호색가, 헌신적인 국민당
원, 마약 중독자, 경극 애호가 그리고 부유한 명사가 그의 모든 모습이었
다. 두의 성격을 푸는 열쇠는 무림 규약에 대한 그의 신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양쯔강 계곡을 무대로 한 무림 분파의 원로이자 대부로서 그는
<이기()>를 신봉했다. 그것은 번역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함축된
뜻은 정의, 명예, 원칙, 기사도와 관용이었다.
두는 자신을 무술가요, 정의의 수호자로 간주하였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우하고 그의 규정을 어긴 자들에겐 징계를 한다고
생각했다. 무사는 자신이 떠받드는 주인에게 질문을 하지 않는 법이다.
단지 도전자들을 죽일 뿐이다. 두가 떠받드는 주인은 권력과 아편, 돈의
삼위일체였다. 그는 그것들을 위해 싸우는 무사였다.
두의 정의감은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면서 순수했다. 아무리 비뚤어져 있
어도 명예 의식은 그를 갱 이상의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후세 사람들은
두 웨선을 악당 만화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지만, 두라는 인간은 관대함
과 조직 범죄, 이상주의와 기회주의가 어우러진 아주 무한한 복합체였다.
그러나 두가 무시무시하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사이훙은 그
를 바라보면서 두의 잔인성을 느낄 수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두
였다.
[자네가 사람을 찾고 있다고?]
두는 짧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무림의 이름으로 그를 찾을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시겠습
니까?]
사이훙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긴 침묵이 흘렀다. 사이훙은 두가 생각에 잠겨 있는지 몽롱한 환각 상
태인지 알 수 없었다. 모두들 공손히 둘러서 있었다. 위인은 영광과 권위
의 빛을 발산한다. 하지만 두 웨선의 첫인상은 달랐다. 그는 창백한 모습
으로 꼼짝 않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그러나 두 눈은 생기 있고 또렷했
다.
[너는 무술가지?]
아까와 달리 두의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사이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번 해봐라.]
사이훙은 옷자락을 걷어 올렸다. 사이훙은 자신의 장기 중의 하나인 유
엽장()을 펼쳐 보였다. 사이훙이 동작을 마무리짓자마자 두의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이 보였다. 사이훙은 두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어야만
했다.
사이훙은 근육이 구부러지는 것을 느꼈다. 발은 회오리 공격술을 펼치
기 위한 기본 자세를 취했다. 그의 허리가 세차게 비틀어졌다. 어깨는 재
빨리 포물선을 그리는 양팔에 힘을 붙였다. 사이훙은 기쁨과 몸 안의 열
기가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랑스럽게 독전극()에 몰입했
다.
[최고야! 최고!]
두는 사이훙이 짧은 무술 시범을 마치자 이렇게 환호했다.
사이훙은 깜짝 놀랐다. 두는 송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자네 둘은 어떤가?]
두가 우잉과 우콴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미리 정해 놓은 형의권의 연
습 대련을 시범 보였다. 내공 무술인 형의권은 무서운 파괴력을 뿜어내는
직접 공격법이었다. 후퇴는 없고, 단지 옆으로 피하거나 회전하는 것 뿐
이었다. 모든 동작을 하나하나 직접적이고 맹렬하게 퍼붓는 공격 기술이
었다. 상대의 공격에 대한 반응은 역공뿐이었다.
두는 점점 흥분하더니 수연통()을 가져오도록 수행원에게 손짓을
보냈다. 수행원이 검은 타르 방울 같은 것을 가득 채워서 그에게 주었다.
두는 성냥불을 붙였다. 검은 아편이 빨갛게 타들어 갔다. 그가 숨을 들이
마시자 파이프에서 물이 꾸르륵 흐르는 소리가 났다. 푸르고 흰 연기가
그를 둘러싸며 올라갔다. 아편 특유의 향긋하고 달콤하고 맛있는 연기가
방을 가득 메웠다.
두 형제가 무술 연기를 끝냈을 때쯤 두는 원기가 왕성해져 흥분하고 있
었다. 그는 무술 광신자였다.
[젊은 영웅들에게 내가 인사해야겠군.]
두는 인사의 표시로 두 손을 모아 쥐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는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시범을 보여 주지!]
경호원이 칼집에 든 두 개의 칼을 가져왔다.
두 웨선은 손잡이를 쥐고 두 개의 번쩍이는 칼을 꺼냈다. 사이훙은 쓸
어 내는 듯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칼집에서 나는 날카로운 쇳소리였
다. 날이 넓은 칼은 잡아 빼거나 넣을 때면 칼날에서 날 가는 소리가 났
다.
[팔괘쌍검()!]
두가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독특한 검법을 선보이기 위해 앞으로 나섰
다.
두의 검법은 두 팔을 나란히 들면서 시작했다. 칼날들은 양쪽으로 베고
선회하고 다시 베었다. 자르고, 지르고, 여러 방향으로 꿰뚫기 시작했다.
한 칼이 차단을 하면 다른 칼은 공격을 했다. 때대로 동시에 두 칼로 베
어 넘겨 버리기도 했다. 두의 긴 팔은 큰 새의 날개처럼 끝에서 끝까지
거의 3.5미터나 되는 범위까지 닿을 수 있었다.
두는 가공할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는 무사였다. 어떤 적이든 프로펠러
처럼 선회하는 두의 칼날들을 피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
할 수 있다고 해도 발로 차기, 뛰어오르기, 날아서 차기와 공중에서 자르
기 검법은 거의 모든 노련한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두의 칼들은 속도가 아주 빨랐다. 사이훙은 드릴 넘치는 두의 얼굴 표
정을 볼 수 있었다. 연기가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자 피가 얼굴을 붉게 물
들였다. 저미는 칼날의 힘은 두에게 확실히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빙글
빙글 선회하는 칼날이 흐려졌다. 너무 빨리 베기 때문에 공중에서 나오는
칼소리는 마치 천이 단번에 찢어지는 소리 같았다. 노련하게 찌르는 검
술, 정확한 방어, 발레를 하듯 발로 차면서 위 아래로 움직이는 두 개의
가위날 공격등은 순간적으로 번쩍이는 섬광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우아
함, 스피드와 힘이 하나로 결합되어 완벽한 살인적인 힘으로 변했다. 그
의 얼굴에서 물방울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두는 만족하여 입을 벌리고 씩
웃었다.
이번에는 사이훙이 흥분할 차례였다. 그는 혼자서 팔괘검법을 배웠었
다. 그러나 날이 넓은 칼이 하나밖에 없을 때 쓰는 검법이었다. 두의 기
술을 놀라웠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하는 잔인한 기술이었다. 사이
훙은 그것을 배우고 싶었다.
시범을 끝낸 두는 사이훙의 눈에서 열광적인 무술가에게서 볼 수 있는
낯익은 광기를 보았다.
[마음에 드나?]
두가 물었다.
[네, 그렇고 말고요!]
사이훙이 대답했다.
[배우고 싶은가?]
[몰론이지요!]
잠깐 동안 사이훙은 후디에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대화를 다시 현
실로 되돌린 사람은 오히려 두였다.
[자네는 후디에를 원하지. 내가 내 영토에서 그를 찾게 해 주지. 그런
데 반대 급부가 필요하다네.]
[그게 무엇입니까?]
사이훙이 물었다.
[화산의 무술은 자고로 유명하지. 자네들 셋이 방금 보여준 대로야. 나
는 다섯 권의 비법 입문서가 있다는 걸 알지. 죽서칠판을 완전히 통달한
사람이 쓴 책 말이야. 내면의 에너지 배양을 통한 치명적인 무술 기법이
나와 있지. 그 책을 나에게 주게. 그러면 후디에를 갖게 해 주지.]
사이훙은 잠시 머뭇거렸다.
[사람을 보내서 가져와야만 할 겁니다.]
사이훙은 걱정스러웠다. 너무 비싼 값인데다 화산에서 동의할지도 알
수 없었다.
[좋아. 일주일 안에 내 손에 넣어 줘. 그 동안 자네는 이 검법을 배울
수 있을걸세.]
특사를 통해 책이 상하이에 도착한 날은 흐리고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
었다. 윤기 흐르는 비단옷 위에 떨어진 진한 먹물처럼 구름은 큰 폭풍우
가 아닌 음울한 이슬비를 몰고 올 것 같았다. 사이훙은 네모 탁자 위에
짐꾸러미를 올려놓고 짐을 풀었다. 천으로 된 상자는 색 바랜 자주색 실
크 뚜껑으로 덮여 있었다. 안에 다섯 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사이훙이
책을 펼치자 희미한 불빛이 노란 종이 위의 검은 글씨를 비췄다.
상하이의 두 웨선이 화산의 도인들이 보관하는 비법 소책자에 대해 어
떻게 알았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것은 두의 지위뿐 아니라 소문과
무림의 정보망을 통한 것임을 가늠케 했다. 사이훙은 책자를 읽기 시작했
다. 곧 두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책에는 내적인
배양에 대한 심오한 이론적 원칙이 적혀 있고 어떻게 하면 싸우는 동안
내부기관을 터뜨리기 위해 적의 몸에 초인적인 힘을 투사할 수 있는지 적
혀 있었다. 두 같은 살인자의 손에 이 살인 기술을 넘기는 것은 위험천만
한 일임이 분명했다. 사이훙은 화산의 원로들이 후디에를 잡으려는 마음
이 너무 절실해서 죽서칠판을 걸고 도박을 한다고 생각했다.
사이훙이 삼륜 자전거를 타고 두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두는 평소의 습
관대로 아편 흡입에 열중하고 있었다. 천식기가 있는 두는 숨쉬기가 어려
운 것 같았다. 그리고 눈가가 충혈 되어 눈물이 글썽했다.
아편은 그에게 쾌락이자 악습이었다. 그러나 또한 숨을 쉴 때 씨근덕거
려 호흡이 짧아지는 괴로움을 덜어 주었다. 아편을 빨지 않고서 두는 그
의 무술 실력을 불러낼 수 없었다. 많은 무장 경호원들이 어디서나 그를
수행하고 두가 늘 아편에 절어 지내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두는 상자를 열면서 음침하게 사이훙을 보았다.
[여기에 든 책은 세 권 뿐이군.]
[저를 순진하다고 생각지는 않으셨겠지요?]
사이훙이 감히 이렇게 대꾸했다.
[확실히 믿기 때문에 세 권은 드립니다. 그러나 제 사형은 어디 있습니
까? 제 손에 잡히면 나머지 두 권을 드리겠습니다.]
[네가 나를 배반하지는 않겠지.]
두가 험악하게 나왔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거래는 거래입니다. 후디에와 책의 거래이지요.
상품이 없는데 대금을 지불하지는 않으시겠죠?]
[좋다.]
두는 사이훙을 유심히 살피고 나서 말했다.
[네가 원정을 끝내는 그때 마지막 두 권을 나에게 넘겨라. 그렇지 않으
면 우리의 우정은 없을 것이다. 너를 찾아내어 너의 도관에 불을 질러 버
리겠다.]
[알겠습니다.]
사이훙은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였다.
[이제 어디 가면 그를 찾을 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산둥성.]
두가 털어 놓았다.
[그는 덕망 있는 스승인 투즈선()의 집에 있다. 이것이 세 권의
책대신 내가 줄 수 있는 정보의 전부이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밤 충칭으로 떠나겠다. 일본인들이 수상쩍은 짓을 하고 있
다. 곧 돌아오게 될지 또 우리가 다시 만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기억
해라. 녹원회는 중국 전역에 퍼져 있다. 그러니 나는 어디에도 있는 것이
다. 내가 그 책들을 원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거래는 거랩니다. 제가 산둥성에서 후디에를 잡으면 원하시는 것을 얻
게 될 겁니다.]
[그래. 나는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나는 탐나는 것은 항상 차지하
고야 마니까.]
두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이훙은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급히 우잉과 우콴이 기다리고 있는 호
텔로 돌아갔다. 그들은 짐을 챙겨 그날 오후에 출발했다. 그러나 사이훙
은 후디에가 산둥에 나타났다는 말만 해주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이훙은 갈라지는 게 어떠냐고 그들에게 제안하고 중국의 5대 성산의
최고봉인 타이 산()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그 산은 도인들에게는 성
지로 간주되고 있었다. 도인이라면 평생 한 번이라도 성지 순례를 하고
싶은 곳이었다. 그곳은 회교도들이 메카를 순례하는 것과 흡사했다. 도교
수행자로서 두 형제는 타이 산 정상에 올라가 본 적이 없었으므로 사이훙
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들은 사이훙이 후디에의 은신처를 알고 있으리라
고 결코 생각지 못했다.
투즈선의 집은 산둥 중심부의 산 속에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담장 안
에 지어진 궁전 같은 별장이었다. 산봉우리들은 화산처럼 금욕적인 거대
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그것들은 오랜 세월의 비바람
에 모서리가 둥글게 마모되고 부서져 있었다. 쪼개지고 부서져서 바윗덩
어리와 흙 더미로 변해 버린 산봉우리들은 안개가 자욱한 숲 속에 묻혀
있었다. 산의 경관은 진짜 요새가 될 만한 천혜의 배경을 형성하였다. 높
은 담장은 유령 같은 산 속에서 고독한 존재였다.
투즈선은 사이훙 할아버지의 친구였다. 그래서 그는 사이훙을 따뜻이
맞아 주었다. 투즈선 할아버지는 강한 어깨와 손을 가지고 있었고 손가락
은 철도에 쓰는 못 같았다. 하얀 수염으로 덮인 얼굴은 쪼글쪼글했다. 앞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콧등이 다소 넓적한 매부리코였다. 두툼한 눈썹 사
이는 좁았고 노려보는 듯 긴장감이 감도는 두 눈은 어둡고 불안해 보였으
나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사이훙의 편지를 받았었다. 문제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후
디에에게 도망치지 말고 그대로 남아 있다가 사이훙을 만나보라고 권했
다. 계속 도망가 봤자 아무런 이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투즈선의 의견
이었다. 두 형제가 원만히 문제를 해결하면 모두에게 이로울 터였다.
2개월간 계속된 추적이었다. 그 동안 사이훙은 중국을 위 아래로 왔다
갔다 했다. 마침내 사이훙은 후디에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몸을 씻고
어두운 색의 비단옷으로 갈아입고 정원으로 나갔다.
깨끗이 회반죽을 바른 담에 난 반달문의 틈으로 풍상에 깎인 바위들이
작약꽃에 둘러싸여 완벽하게 배치된 것을 보았다. 사이훙은 문을 지나 오
른쪽으로 돌아가 육각형의 아치 길에 이르렀다. 그 위에는 <고대의 영원
한 향기>라고 새겨져 있었다. 아치 길을 따라 가면 녹음진 정원이 나왔
다. 정원에는 터키 옥으로 장식된 풀장, 회색빛 바위 정원, 수양버들 그
리고 늙은 소나무가 있었다.
사이훙은 길을 따라 다른 벽이 하나 더 있는 위쪽으로 걸어갔다. 정자
옆의 타원형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직경이 5미터쯤 되는 인공섬이 있는
커다란 연못이 흐린 빛 속에 가물거리고 있었다. 등뒤에 손을 마주잡고서
파란 비단옷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후디에가 먼 곳의 산봉우리를 응시하며
서 있었다.
연못의 다리는 30센티 두께의 견고한 화강암 석관으로 만들어져 있었
다. 전망대의 화려한 색과 후디에의 정지된 모습이 버드나무와 함께 연못
위에 비쳤다.
[결국은 내가 형을 따라 잡았어.]
사이훙이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후디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우아
한 동작이었다. 사이훙은 그의 피부가 여전히 매끄러우며 변함없이 미남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조금도 고민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
고 침착했다. 그는 활짝 미소지었다.
[형은 그 이유를 잘 알겠지. 대사부께서 형을 찾고 계셔. 형이 크게 문
제를 일으켰으니까.]
[내가 말이냐?]
후디에는 둘 사이에 놓인 팔각형 대리석 탁자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결
이 부드러운 우윳빛 대리석 의자 4개가 북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북
가죽에 박힌 못과 손잡이 따위가 아주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명 왕
조에서 내려온 멋진 그림이 그려진 자기 쟁반에 소나무 그루터기 모양의
찻잔이 있고 두 개의 작은 컵도 있었다.
[차 좀 마셔라.]
사이훙과 후디에는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후디에는 찻잔을 멋들어지게
내려놓고 수선화 향기가 나는 차를 따랐다.
[형은 이 문제를 간과하고 있어.]
사이훙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형은 죄를 많이 지었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형의 재주를 남용한
거야. 내가 형의 잘못을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 일거
야.]
[너도 살인하지 않았니? 너는 나의 애인과 그녀의 남동생을 죽이지 않
았니?]
[그들은 무술가였어. 우리는 모두 무림의 일원으로서 결투를 벌이다 죽
을 가능성을 인정했어.]
[너도 도인이라서 잘 알겠지만 무슨 이유를 갖다 붙이더라도 사람을 죽
인 건 죽인 거야.]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마. 형은 자꾸 관심을 형으로부터 돌리게 하려는
거야.]
[내가? 난 숨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도 없다고? 형은 정말 뻔뻔스럽군! 형은 정원에 서서 형이 유혹했
던 여자들을, 사창가에 팔아 넘긴 여자들을 모르는 척하는 거야. 마약으
로 형이 망쳐 놓은 사람들, 단지 형을 방해했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야 했
던 무고한 사람들을 까맣게 잊고 있어. 형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
아? 죄의식도 없느냐고?]
후디에는 생각에 잠겨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사이훙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죄의식?]
후디에가 반문했다.
[너, 아주 현란한 화술의 웅변가가 다 되었구나. 넌 정말 죄가 뭔지나
알고 있니?]
그 질문에 사이훙은 말이 막혔다.
[죄는 열등한 자의 피신처란다. 그들은 범죄라고 말하는 것을 저질러
놓고 죄의식을 느낀다며 우는 소리를 한다. 죄의식이 잘못을 깨끗이 씻어
준다고 생각하니?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말하고 똑같은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거야. 그들의 죄는 더욱 무거워지는데 말이야.
스스로 변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게 되어 계속 죄의식을 느끼기
때문에 열등감에 빠진단다. 자기들이 지은 죄 뒤에 숨어서는 다른 사람들
로부터 멀어져서 은밀히 그 고통을 즐기는 거야. 이게 바로 그들이 사는
방식이 되어 그 사람들을 완전히 불구로 만들어 버리지.]
사이훙은 혼란스러웠다. 전에는 이런 문제가 아주 확실한 것이었다. 사
이훙은 지금 그게 왜 이리 복잡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후디에의 주장은
논리적이었지만, 결과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죄는 그의 행위가 틀렸다고 사람이 인정할 때 성립되는 거야. 하지만
죄는 병이지. 죄를 다스리는 유일한 약은 앞을 내다보고 참아 내는 것뿐
이야. 밧줄을 타고 산에 올라갈 때는 오직 정상만을 바라보고 도중의 모
든 것은 무시하는 거지. 죄는 불필요하다. 올라가는 것을 방해하니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얼마간의 잘못을 범하는 것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
다. 보통 사람은 죄의식을 가지고 죄 뒤에 숨어 버린다. 하지만 똑똑한
사람은 행위의 잘못된 점을 인정하고 나서 두번 다시 그 잘못을 저지르지
않지. 그런 사람은 약점을 깨끗이 씻을 뿐만 아니라 죄의식의 필요성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 봐, 형.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워. 이제 형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게 어때?]
[이제 네가 나를 재판하는구나. 죄를 재판하는 너는 과연 누구냐? 누가
다른 사람을 재판할 권리가 있단 말이냐?]
[법이 있고 규칙이 있잖아.]
[법은 인간이 만든 개념이야. 그것은 인위적이고 독단적인 기준이란다.
나는 법의 멍에를 인정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대중들이나 법을 가지라고
해. 상상력 없이 관습을 따르게 내버려둬라. 무리에게는 구속이 필요하니
까. 그러나 나는 도덕과 같은 어리석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형은 괴물이 다 되었군. 올바르게 사는 생각들을 악용하다니.]
사이훙은 성을 냈다.
[너는 고작 하는 일이 거기 앉아 비난이나 퍼붓는 것뿐이구나. 만일 네
가 나의 인생을 산다면, 너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난하고 판
단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들보다 더 고매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너무 빨리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려 들지 마라.]
후디에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인생을 깊이 있게 경험하고 내 운명에 충실
하는 것뿐이란다.]
후디에는 조용히 말했다.
사이훙은 잠시 생각했다. 그것은 후디에에게 아주 타당성 있는 목표 같
았다.
[우리는 모두 운명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났단다.]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후디에에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운명을 완수하는 것이지. 그것은 완전한 정적성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불량한 사람이 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것
이 바로 내가 죄를 열등한 자들의 피신처로 경시하는 이유다. 그들은 단
지 자신으로부터 숨어 있을 뿐이다. 나는 그렇지 않단다.
나는 나를 수용한다. 나 자신에게 어떤 인위적 개념을 속임수로 쓰지는
않는다. 나는 현인이나 죽서칠판 같은 책에서 이상적인 생활 양식을 취하
지도 않거니와 눈이 멀어 그 속에 빠지는 일도 없다. 나를 거기에 매이게
하지도 않는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 경전은 신이 쓴 것이 아니라 인
간이 쓴 것이다. 내가 왜 그 말을 인정해야 한단 말이냐?
나는 정직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개념을 빌어 나의
본성을 거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운명을 받아
들이련다. 오로지 나 자신의 주체성을 따라 살아갈 것이다. 그 기준이야
말로 나의 유일한 옳고 그름의 기준이다.
내가 그것을 탐구하고 심사숙고하여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내버려 두어
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주지 않을 것을 내가 이해하고, 오늘의 나를 있
게 한 본질의 의미를 해독할 수 있게 내버려 두어라.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나는 망상에 속지 않고 진짜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단다.]
[형, 형의 말은 정말 훌륭해. 그렇다고 해서 형이 저지른 살인과 강도,
매음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해.]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내 운명을 회피해야 한다
는 거냐? 아니면 내 운명이 멋지고 존경받을 만하지 못한다고 해서? 나는
이 역할에 대해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시한 드라마에 불과하
니까. 극의 막이 내리고 나면 나는 다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살인은?]
[나는 살인에 대해 이처럼 까다롭게 구는 무술인은 거의 만난 적이 없
구나. 아니다. 내 그 말을 취소하마. 전설은 감상적인 검객들의 얘기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항상 일찍 죽는다.]
[형, 나는 형이 하는 말에 동의할 수 있어. 그러나 너무 늦었어. 그리
고 형의 말은 악한 인생에 대한 합리화에 불과해.]
[너는 어리구나. 너무 어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여자에게 반해
서 여자를 유혹한 적이 없다는 거야. 나는 나를 죽이려 하지 않은 사람을
살해한 적도 없고, 독직과 부패를 통해 황금을 취하지 않은 사람의 것을
빼앗지도 않았어.]
사이훙은 침묵했다.
[이제 너의 그 잘난 도덕을 만족시켰니?]
후디에가 비꼬는 투로 물었다.
사이훙은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스스로 인정을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디에는 사이훙에게 호소하는 눈길을 보냈다.
[얘야, 너는 내 생명을 손에 쥐고 있다. 제발 나를 놓아줘. 만약 내가
화산에 갇히고 나면 나는 결코 편히 쉴 수 없을 거야. 나의 혼은 파괴되
고 말 거야.]
사이훙은 가슴이 뭉클했다. 이 사람은 사형이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생각 좀 해봐라, 얘야. 사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있니? 계절의 변화가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별들은 우리에게 방향을 지시한다. 환경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운명은 우
리를 인도한다.
너의 인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으니까, 너는 지금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너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대개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
지 않다. 즉 네가 경험하는 모든 것 중에서 너는 너에게 적절한 것을 실
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나에 대해 생각해 봐라. 도의 다른 물결이 나에
게 흘러왔다. 여인들이 나와 사랑에 빠졌다. 부는 나에게 쉽게 찾아왔다.
무사의 용맹은 나의 강점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들을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운명의 일부로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운
명에 대한 책임감을 인정했다. 우리는 둘 다 이름이 후디에야. 우리는 자
유롭게 날아다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운명인 것이다. 나에게 훨
훨 날아다닐 수 있는 기회를 다오. 내 운명을 추구할 수 있게 해줘.]
[그러다간 죽게 될 거야.]
[그건 촌부들이나 갖는 생각이야. 너와 나는 영웅처럼 살려고 노력해야
만 한다. 우리는 어차피 모두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너에게 너의 역이 있듯이 지금 내가 맡은
역할은 이것이다. 내 역을 끝까지 맡아서 할 수 있게 해다오.]
사이훙은 시간을 벌기 위해 차 한 잔을 더 따랐다. 그는 후디에의 의견
에 동의했다. 형의 통찰력에 거듭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후디에처럼
특별한 인간의 생명을 단축시켜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후
디에는 독특하고 특별한 사람이다. 이 혼탁하고 속된 세상에는 그런 웅대
한 인간이 필요한 것이다.
사이훙은 자리에서 일어나 형을 마주보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고독과
정적을 맛보았다. 사이훙은 자신이 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달았다.
사이훙은 형의 손을 움켜잡고 조금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죄를 지으며 살지는 않을 테지?]
[이제 내 사정을 이해하는 구나. 그만두겠다는 것을 보장한다.]
[형, 제발 몸조심해. 당분간 숨어 있도록 해봐.]
[그렇게 하마.]
[내가 먼저 갈게.]
[조심해서 걸어라.]
사이훙은 다리를 건너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흔들리는 웅장한
나무들의 꼭대기 위로 눈을 돌렸다. 멀리 있는 산맥의 청자빛 봉우리가
짙어가는 자줏빛 하늘을 배경으로 뚜렷이 윤곽을 드러냈다. 사이훙은 이
를 수 없는 산의 정상, 저 먼 곳에 있는 사부님을 생각했다. 그는 얼마나
먼 곳에 있는가. 산 위의 그의 삶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얘기 같지 않
은가. 사이훙은 평원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사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사부에게 있는 대로 말씀드리기로 결심했다. 확실
한 것은 그들에게 하나의 대안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이훙은 정자 모퉁이에 있는 정원의 담에 이르렀다. 화단에서 막 장미
꽃봉오리가 터지려 하고 있었다. 짙은 녹색 가지 끝에 붉은 색과 분홍색
의 장미 봉오리가 이슬처럼 매달려 있었다. 산들바람이 한들한들 가지를
흔들었다. 사이훙은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사이훙은 타이 산의 기차역에 당도했다. 터덜거리는 버스를 타고 태산
의 자락까지 갔다. 후디에와 만난 지 4일이 지났다. 그는 문제가 해결되
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남은 것은 우 형제들을 모아 화산으로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사이훙은 이번 원정을 아주 흡족하게 여겼다. 여행도 많이 했고 견문도
많이 넓혔으며 유별난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몇 번의 어려운 결투에서
승리하였다. 이것이 사이훙이 사랑하는 인생이었다. 진실로 스스로 무술
인이 된 느낌이 들었다. 모험을 위해 사는 사나이, 정의를 위해 싸우는
기사가 된 느낌이었다. 조만간 그도 사부나 베이징의 찻집에서 만났던 사
람들처럼 유별난 사람들의 독특한 관계에 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안개와 구름이 낀 흐린 날이었다. 타이 산의 정상은 안개에 가리어져
흐릿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훙은 여전이 타이 산의 전설적 위용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국의 5대 성산 중 최고봉인 타이 산은 거대한 화강암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해발 1,525미터가
넘었다. 신비한 장소로서의 그 명성은 일찍이 진 왕조까지 거슬러 올라갔
다. 진 시황제는 11번씩이나 몸소 찾아와 하늘의 옥황상제에게 경의를 표
했다. 장구한 역사를 볼 때 중국의 황제들은 나라를 위해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기 위해 타이 산에 찾아 왔다. 기록을 보면 역대 왕조 가운데
72명의 황제들이 타이 산에 올라갔다는 문서가 남아있다.
수많은 사당과 도관들이 울퉁불퉁한 경사면에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상징적인 장소들의 대다수 - 불사신의 다리, 8인의 불사신의 다리, 태양
수도원과 달 수도원 - 가장 도교적인 장소였다. 정상에 있는 사원들은 오
로지 도교를 위해 세워졌다. 이 산은 도교의 신인 옥황상제가 땅에 세운
집이라고 전해졌기 때문에 그의 신당은 타이 산의 정상에 세워졌다.
사이훙은 정상이 아닌 작은 봉우리에서 우잉과 우콴을 만나기로 했었
다. 사이훙은 타이 산으로 올라가는 동쪽 길에 있었다. 우 형제들을 만나
후디에와의 만남을 전하기로 한 곳이 바로 거기였다. 이제 그들은 돌아갈
수 있다. 화산은 안전했다. 그들은 준치 법사가 정한 시한인 2개월을 조
금 초과했을 뿐이다.
[너 미쳤니?]
우콴은 사이훙의 설명을 듣고 버럭 화를 냈다.
[그 자식을 네 손아귀에 잡아 놓고서도 그냥 놓아주다니!]
[큰 실수를 저질렀군.]
우잉도 거들었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사이훙이 반문했다.
[그건 오해였어. 그는 변명도 제대로 못한 채 비난만 받았던 거라구.
게다가 그는 나에게 눈에 띄지 않게 살겠다고 약속까지 했단 말이야.]
[이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 그는 결코 달라지지 않을 거야. 그놈에게
홀렸구나.]
우잉이 욕을 했다.
[나를 홀렸다고? 당치 않아. 나는 수년 동안 명상을 해왔는데, 내 정신
은 강인해.]
[눈 좀 떠라, 이 얼간아.]
우잉이 빈정거렸다.
[너는 아직 흑과 백도 구별하지 못하고 있어. 우리에게 내려진 명령은
그를 잡아오는 것이었다. 네가 실수해서 망쳐 버렸어. 이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만 해.]
[안 돼!]
사이훙이 소리쳤다.
[그에게 기회를 줘야 해. 그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야. 나는
어릴 때부터 그를 잘 알라. 그는 거짓말 안 할거야.]
[정말 순진하군!]
[그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그래도 그 놈은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해
벌을 받아야 한단 말이야.]
[다 지난 일이야.]
사이훙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에겐 달라진 게 없어. 나는 명령을 수행해야만 한다.]
우잉이 응수했다.
[나도 동의해.]
우콴이 말했다.
[가서 대사부에게 결정을 맡겨 보자.]
사이훙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빈 손을 내밀라고? 그러면 벌을 받는다는 걸 너도 알잖아!]
우잉은 비꼬는 투로 물었다.
[그리고 두는 어떻게 하지?]
우콴이 물었다.
[너는 그와 거래를 했잖아. 이제 그가 우리 뒤를 쫓아올 거야.]
[나는 그에게 책을 세 권밖에 안 줬어. 그리고 투즈선의 저택에서 후디
에를 데려오지 않았잖아. 그건 중요하지 않아.]
사이훙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책을 가지고 있어.]
[내가 다른 두 권을 보관해 두었어. 여기에 기술이 담겨 있어. 처음 세
권은 그저 이론일 뿐이야. 나는 그 책들을 원로들에게 돌려줄 거야. 우리
가 잃은 것은 많지 않아.]
[시간과 후디에를 잃어버렸잖아. 이 얼간아! 네가 일을 크게 망쳐버린
걸 알기나 해?]
우잉은 마침내 폭발했다.
사이훙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처음으로 후디에를 놔
준 것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에 있을 때는 그렇
게도 분명해 보였는데 지금은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우잉은 사이훙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조금 누그러졌다.
[자, 이렇게 하자. 녹원회의 조직을 통해 후디에를 추적해 보자. 그가
개과천선한 것 같아 보이면, 돌아가서 대사부님과 의논하자.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땐 다시 정해진 시간 안에 그를 잡는 거야.]
우콴은 동의했다. 사이훙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 생
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우울했다.
다음 며칠 동안 행운은 그들을 외면했다. 기차 운행이 예정표에서 벗어
나 후디에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가 녹원회쪽으로 끌리고 있을지
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가정을 따라 양쯔강을 통해 남쪽으로 정처 없이 길
을 떠났다. 그런데 이 추적 방법은 많은 정보를 얻게 해줬다.
중국은 떠돌이들의 나라였다. 사이훙이 중국인에 대해 늘 증오해 왔던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 점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다.
시골은 사람들로 북적대었다. 그들 속에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나
누군가의 행동거지를 낱낱이 목격할 수 있는 사람이 항상 있었다. 지하
세계에서 그런 호기심은 정보를 얻는 데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그 정보는
돈만 주면 다시 살 수 있었다.
이윽고 후디에가 개과천선은 커녕 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세 사람에게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후디에
가 상하이에서 몇 명의 정치인을 암살했는데 도망갈 목적으로 아편 수송
선을 이용하여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사이훙의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이제 더 이상 낭만은 남아 있지 않았
다. 사이훙은 후디에가 단순한 갱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했다.
사이훙은 처음 후디에를 추적하면서 정의로운 성전에 뛰어든 것으로 생
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경찰의 업무 수행과 같은 느낌 뿐이다. 세
속적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끔찍한 현실로 추락시켰다. 사이훙은 자
신이 자기 도취에 빠져서, 이상주의에 사로잡혀서 본연의 의무를 망각했
던 경솔한 젊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디에는 충칭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일단 충칭에 들어가면 그를 사로잡
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두 웨선과 장 제스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세 수
도자는 그 도시에서 죽임을 당할 터였다. 그들은 후디에를 당장 잡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첩자들은 후디에가 난징에서 하룻밤 묵을 것이라고 말
해 주었다. 사이훙 일행은 난징에서 매복하기로 하였다.
난징은 양쯔강 남쪽 기슭에 있는 대도시였다. 그곳은 공산품 해상운송
의 중심지였다. 또한 역사적으로 위대한 수도였다. 중국의 8대 고대 수도
들 중 하나인 난징에는 도시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 있었고 명조의 왕릉이
가까이 있었다. 또한 얼마 동안 장 제스 정부의 수도 역할을 하기도 했
다. 비록 일본군이 1937년 12월 잔혹한 유혈 전투에서 그를 몰아내기는
했지만.
베이징과는 대조적으로 난징은 제국적인 완고함과 엄격한 분위기가 전
혀 없었다. 날씨는 더 화창했고 음식도 더 풍부했다. 집과 상점들은 햇빛
과 맑은 공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사람들이
걸어가는 속도는 느렸다. 황사 현상도 없고 물도 풍부했다. 시골 여기저
기에 연못이 있고 푸른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사람들의 얼굴은 북
부 사람들과 달랐다.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더 육감적이고 근육과 뼈대도
덜 단단했다. 그들의 나른한 기풍은 건축에까지 이어졌다. 건축물은 둥글
고 유연했으며 담도 물결 무늬를 이루었다. 난징은 계곡의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식어 드는 19세기 초엽의 강변 도시였다.
그러나 도시의 대부분은 이제껏 베이징도 당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폐
허 상태였다. 도시 전체가 전쟁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전쟁의 잔해와 시
체가 여전히 눈에 띄었다. 완전히 타버린 빌딩, 흙먼지와 막대로 변한 집
들, 철조망이 쳐진 다리와 철로 그리고 포탄에 맞아 조각난 나무들이 아
직도 여기저기에서 뒹굴고 있었다. 사지가 절단된 채 절뚝거리는 불구자
들, 얼굴에 진흙을 뒤집어쓰고 이빨은 다 깨진 아이들, 말라붙은 눈물이
한 꺼풀 덮인 노인들. 그러나 누구 하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폐허로 변한 난징에는 몸이 성한 자가 없었다. 이곳은 바로 전쟁 지역
이었다. 아직 일본군이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리를 순찰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누구든 희생물로 삼았다. 무사의 미덕도, 정의로움도,
영웅주의도 더 이상 이곳엔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의 영웅들은 불쌍한 낙
오자가 되어 거리를 배회하고 다녔다. 정의로운 자들은 공동묘지 속에 누
워 있었다. 미덕을 갖춘 자도 겁에 질려 무관심하게 살아갔다.
중국은 변해 가고 있었다. 세계도 변해 가고 있었다. 청 왕조는 완전히
타락하여 몰락했다. 썩기 시작하자 악취가 진동했다. 국가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사이훙은 이 죽어 가는 중국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난감했다.
운명의 장난이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무사로서의 꿈을 키우다가 도
인 수련을 받은 그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확실히 지독한 장난이었
다. 귀족은 벼락부자에게 암살 당하고 무사는 총을 갈겨대는 무지막지한
군인 앞에서 죽어가고 현자는 자기 제자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있
었다.
사이훙은 여인숙의 숨막힐 듯한 2층 방에서 몇 시간 동안 기다렸다. 이
추적은 원래 성전으로 시작했었다. 사이훙은 고귀한 명분을 위해 무림에
탄원을 낸 화려한 전사였었다. 취푸에서 일찌감치 깨달았어야 했다. 무림
의 반은 사업가였다. 군인도 있었다. 상대가 자기와 같은 세계에 속해 있
을 때 사이훙은 용감하게 영웅적으로 싸웠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세상이
두 웨선과 같은 인물에게 속해 있다는 걸 알았다. 총과 대포를 든 무리가
이제는 전사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이훙은 잡념을 떨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발코니가 있는 안들을 가
로질러 맞은편으로 눈을 힐끗 돌렸다. 여관의 담장은 한때는 흰색이었으
나, 지금은 빗물과 검댕으로 줄이 그어져 있었다. 사이훙은 우잉과 우콴
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냉혹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칼
집에서 칼을 빼놓고 있었다. 후디에는 길 건너편 방에 있었다.
해질 무렵 몇 명의 남자가 허둥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한 사람은 후디
에였다. 사이훙은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들은 소리없이 빠져 나와 발코니 벽에 바짝 붙었다. 사이훙은 1미터 20
센티 길이의 화살통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그는 형을 보고 잠시 멈칫했
다. 그 다음 오랫동안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횡경막이 긴장하고 목이 조
여드는 듯했다.
사이훙은 모든 회한과 이상, 감정이 화살과 함께 폭발하였다. 시위를
당긴 화살이 튀어나와 소리 없이 하늘을 가르고 후디에의 목에 맞았다.
다른 남자들은 소리를 지르며 혼비백산하였다. 사이훙은 재빨리 2발을 더
쏘았다. 그때 우잉과 우콴이 비호같이 튀어나갔다. 즉시 권총이 발사되었
다. 사이훙은 일제 사격을 피하려고 몸을 납작 엎드렸다. 그는 격자 무늬
틈새를 통해서 재빨리 살펴보았다. 우 형제는 얼른 갱들을 처치했다. 사
이훙은 후디에가 걱정이 되어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형은 발코니
의 난간 끝에 서 있었다. 후디에는 창살을 꺼냈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휘청거렸다. 우잉과 우콴이 덮치자 후디에는 뛰어내려서 달아나려고 했
다. 그러나 곧 의식을 잃고 정원 아래로 떨어졌다.
화산으로 돌아가면서 사이훙은 후디에와 심하게 언쟁을 벌였다. 배신당
한 사람의 울분이었다. 한때 사이훙은 후디에를 숭배했었다. 지금은 그에
게 화살을 쏘아 재판을 받도록 끌고가는 중이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니?]
후디에가 물었다.
사이훙은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등뒤로 묶
여 있었다. 두 발 역시 어깨 넓이 간격을 두고 묶여졌다.
[전에 형은 좋은 말을 많이 해줬지. 나는 형을 믿었어. 하지만 형은 계
속 살인을 저질렀어.]
[우리는 각자 선택을 해야만 한다.]
창 밖을 보면서 후디에가 말했다.
[때때로 그건 틀리단다. 현실은 천국이 아니란다. 우리 모두가 불사조
처럼 행동할 수 없지.]
[인생은 항상 시험이야. 천국에 들어가려면 올바르게 행동을 해야 해.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네가 나의 삶을 산다면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거야. 나처럼 되지는 마
라. 나의 실수를 보고 배워라. 열심히 공부하고 훈련해라. 선하고 바르게
살거라.]
[나는 믿을 수가 없어. 형은 나쁜 행동을 하고선 나를 바로잡아 주려고
하는 거야?]
[네가 나의 동생이기 때문이란다.]
[[형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거야? 투즈선의 집에서 나를 홀렸던
값싼 감상은 아니겠지? 다시는 형의 얘기를 듣지 않을 테야!]
[고집 부리지 마라. 언젠가 너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닫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가 오더라도 죄의식은 느끼지 말아라. 그러나 스
스로에게 죄를 숨기지는 말아라. 앞으로 더 잘할 생각만 하고.]
[그 말은 형한테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사부님은 형의 능란한 화술에
말려드시지 않을 거야.]
[나는 벌이 두렵지 않아.]
[기다려. 다 왔으니까.]
기차는 천천히 멈췄다. 우콴은 후디에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여기가 화인()역이다. 가자, 이 나쁜 놈아.]
우콴이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화산의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 늦은 오후에 남봉 사원에 도착했
다. 도관 생활은 정말 도시와 대조적이었다. 공기는 깨끗하고 땅은 쓰레
기, 배설물, 시체 따위에 오염되지 않았다. 늙은 소나무는 구름 아래 웅
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고 학과 제비들이 하늘에 점점이 떠 있었다. 아름
다운 새소리가 감미롭게 들려 왔다. 비록 가난하고 초라했지만 도관은 청
결하고 조용했다. 평화로운 느낌이 사이훙을 감쌌다. 그는 질서와 정적을
음미했다.
도관 안에서 사이훙이 어린 시절 이후 들어온 찬가 소리가 울려 퍼졌
다. 사이훙이 몹시도 싫어했던 소리가 지금 그를 감상에 젖게 할 줄이야.
사향과 백단향이 은은하고 부드럽게 배어 있는 찬 공기를 마셨다. 화산에
돌아오니 참으로 좋았다.
대사부와 사형들이 재판관들처럼 본당에 일렬로 앉아 있었다. 사이훙은
진엔니아오와 츠쑹이 빠진 것을 흥미롭게 눈 여겨 보았다. 사이훙과 우
잉, 우콴은 무릎을 꿇었다. 후디에의 반항적인 태도를 보고 우콴이 그의
발목을 묶은 밧줄을 잡아 당겨 억지로 그를 앉혔다.
조용했다.
대사부는 그에게 본당 옆의 작은 방으로 가도록 손짓했다. 그들은 그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창이 하나뿐이고 작은 제단이 있는 조그만 방이
었다. 의식 중간에 도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방으로 다른 장식은 하나도
없었다. 두 시자만이 대사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대사부는 눈을 똑
바로 뜨고 후디에 앞에 섰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 손이 꽁꽁 묶인 후디
에는 고개를 당당히 쳐들었다.
침묵은 사이훙에게 아주 고통스러운 긴장감을 안겨 주었다. 그는 후디
에를 바라보았다. 반쯤 스며든 주홍빛 햇살이 그의 등뒤에 내리쬐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자줏빛 그늘을 만들었다. 산을 올라오느라 땀이 흘러
피부가 촉촉했다.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사이훙은 후디에가
자기를 길러준 분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대사부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검은색 도복을 단정히 입고 있었다. 반
듯하게 주름이 잘 잡혀진 모자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사부의 흰
수염은 검은 도복과 눈부신 대조를 이루었다. 한 올의 머리카락도 흐트러
지지 않았다. 사이훙은 사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당신
의 제자가 이렇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실까? 슬프거나 화가 나 있을까? 과
연 사부는 후디에를 용서할 것인가?
두 시자는 완전한 금욕주의자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감정이 하나도 없
었다. 눈에도 움직임이 없었다. 운명적으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어야 하는
두 조각상 같았다.
갑자기 대사부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오더
니, 손바닥으로 후디에의 심장을 세차게 내리쳤다. 무사가 된 지도 오래
되었지만 사이훙은 심장이 터지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후디에의
입과 코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눈은 완전히 뒤집어져 흰자위만이 남아
있었다.
[안 돼! 안 돼!]
사이훙은 비명을 질렀다.
시자들도 쓰러지는 후디에의 시신을 붙잡으면서 깜짝 놀랐다.
[왜 그랬어요?]
칭 수이셩이 소리쳤다.
[왜 그랬어요? 왜?]
사이훙은 비탄에 젖어 쓰러진 후디에의 시체 옆에 무릎을 꿇고 메아리
처럼 외쳐댔다.
대사부는 단지 두 손을 포개었을 뿐 무뚝뚝하게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사부는 본당을 홀로 떠났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2권 SEVEN BAMBOO TABLETS OF
THE CLOUDY SATCHEL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이 인 복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8. 한 줌의 재
아직도 향 연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초는 환하게 불꽃이 되어 타올랐
다. 촛물이 녹아 핏방울처럼 떨어졌다. 꽃들은 화려하고 싱싱하여 마음까
지 즐겁게 했다. 하지만 사이훙에게는 꽃들이 곧 시들어 마르고 나면 노
랗게 변색되리란 생각만이 들었다. 그는 들고 있던 항아리 속에 엄숙한
마음으로 손을 넣었다. 먼지 같은 재와 뼛가루가 손에 잡혔다. 그는 길
잃은 유령처럼 비탈길을 올라오면서 화장한 사형 후디에의 마지막 유해를
천천히 산에 뿌렸다.
모든 것이 현실 그대로였지만, 사이훙은 후디에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사이훙은 직접 뻣뻣하게 굳은 후디에의 무거운 시신을 깨끗이
씻기고 옷을 입혔다. 그는 시신에 기름과 참깨를 뿌리면서 부풀어오른 차
가운 살을 만졌다. 사이훙은 장례를 치르면서도 살아서 움직이던 후디에
를 생각하며 오랫동안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땅으로 내려가
한 줌의 흙을 보탤 뿐이었다.
통곡 소리도 사이훙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슬픔도 느끼지 않았다.
단지 운명의 법칙이 가진 절대성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는 기진맥진해서
허탈감에 빠졌고 피곤했다. 사이훙은 오랫동안 고군분투하였다. 그리고
지금 모든 것은 끝나버렸다. 무사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몸을 가다듬었지
만, 그 추적의 영향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 추적에 너무 깊이 몰입
했기 때문에 추적을 다하자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대투쟁의 일부는 진엔니아오와의 싸움이었다. 사이훙은 돌아와서 그 도
전에 응하려고 했다. 그런데 원로들은 은밀한 회동을 갖고 진엔니아오와
츠쑹, 투오구이를 화산에서 추방시켰다. 사이훙은 불합리하게 자신의 충
성심이 거절당했다고 느꼈다. 그는 사부를 위해 싸우고자 했다. 그의 용
맹과 정의감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사부는 사
이훙 없이도 승리를 쟁취했으며 반란은 이미 진압된 것이다.
사이훙은 산 밑에서 나는 자동차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화
산의 성스러운 고독을 방해하는 사건은 어떤 것이든 사소한 일 일리 없었
다. 후디에의 납골 단지를 꼭 움켜쥔 채 사이훙은 머나먼 하산 길을 떠나
는 세 여행자를 보았다. 푸른색 도복을 입은 그들이 떠나가자 야유와 돌
아오라는 절규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그들은 추방당하는 도전자들이었
다. 사이훙은 그들의 떨리는 걸음걸이에서 패배의 쓰라림을 보았다. 진엔
니아오, 츠쑹, 투오구이는 너무 기고만장해서 날뛰었다. 대사부의 총명함
은 그들의 거만한 날개를 녹여 버렸다. 이제 그들은 땅으로 떨어졌다.
하늘의 제단인 화산을 떠남으로써 그들은 도교 수행자들만의 고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영광을 잃었다. 사이훙은 그들을 증오했다. 그는 고분고분
하지 못한 그들을 때려눕히고 싶었었다. 그러나 지금 사이훙은 그저 서글
펐다. 따지고 보면, 갈등과 싸움, 심지어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가
시 돋친 장난들이 오히려 정상적이었고 그것들은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을
편하게 했었다. 그렇게 라도 하면 최소한 관계는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이
다.
사이훙은 한때 사형들에게 굉장한 사랑을 느꼈다. 그들의 도전 때문에
생긴 증오심은 그 사랑의 감정과 밀착되어 있었다. 이제는 사랑도 미움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부와 제자들의 완벽한 공동체가 이제는 회복 불능의
상태로 파손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사태였
다. 사이훙은 자기가 없을 때 사형들이 원로들에게 한 도전에 대해서 더
알아내려고 신경을 쓰지도 않았고 그들을 다시 찾으려고도 않았다. 그들
의 추방이 그에게 처절한 외로움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
다.
대사부는 후디에도, 쫓겨난 수도자들도 다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리고 사이훙으로서는 감히 물어 볼 수 없는 수많은 의문을 남겨 놓았다.
사부는 하늘이나 땅에 대해 무엇이든 명쾌한 답변을 해주곤 했었는데 개
인적 문제를 질문하면 최고 권위자의 고고함을 방패 삼아 슬쩍 물러나 버
렸다. 사이훙은 아무리 터무니 없는 얘기라도 사부에게 얘기하려면 할 수
도 있는 관계였지만 이젠 노인의 침묵에 소외감을 느꼈다.
그 뒤 몇 주일 동안 사이훙은 도관 생활에 다시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착잡한 마음과 실망이 그의 노력을 가로막았다. 내핍 생활을 하는
금욕주의자의 명상은 사이훙의 용기를 꺾어 놓았다.
그는 나이 많은 도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굶고 스스로를 희생하고
청정한 생활에 열성적으로 몸을 바쳤지만, 성공한다는 확신은 아직 없었
다. 그들은 건강이 나빠 보였다.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굽었지만, 줄어
들지 않는 신앙심으로 해가 갈수록 수행에 정진했다. 그러나 사이훙은 더
이상 그들의 방식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산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이훙은 여행을 하고 모색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표가 있어야 하고 길
잡이별과 역할이 필요했다. 그는 무술을 생각해 봤다. 그러나 더 이상 무
사는 없었다.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귀족의 삶도 퇴색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이훙은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은 그저 혼자
떠돌면서 예술과 인생을 감상하는 것 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목표가
생긴 것이다.
사이훙은 자신의 마음을 궁전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순화된 궁전의 최
대 목표는 아름다움이었다. 마음의 궁전은 평온하게 감상하며 한가롭게
거닐 수 있는 광막한 장소가 될 것이다.
사이훙은 마음의 궁전에 정원을 만들고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고 환상적
인 예술품과 전문 공예가의 우아한 가구를 들여놓을 것이다. 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초대할 것이다. 각각의 방은 특
별한 활동을 위해 할애될 것이다. 어느 방이든 아름다운 가구들로 아주
균형 있게 채워질 것이다. 방마다 명상에 필요한 예술품이 가득 찰 것이
다.
사이훙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세상의 평범함을 초월하였다. 만일 그가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면, 보통 사람들이 <행복한 생활>이라고 부르는 평범
한 삶의 늪에 빠지는 것이다. 그는 풍부한 아름다움이 없는 삶을 혐오했
다. 사이훙은 인류 최고의 업적과 예술과 지식의 최대 성취를 감상하고
흡수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사이훙은 양자를
모두 소유하고 그것들을 수집하고 보존하고 자신의 궁전에 배열하고 싶었
다.
예술품은 구입할 수 있다. 훌륭한 도자기, 귀한 골동품, 회화, 고서,
수공예 가구 - 모두 살 수 있는 것들이며 정돈된 실내에 기술적으로 배치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은 약간 달랐다. 그것을 소유하려면 배우고 경험
을 해야만 한다. 지식은 잘 빠져 나간다. 간수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수 있다. 반면에 물건은 먼지밖에 낄 것이 없었다. 사이훙은 그런 자극이
필요했다.
인생의 모든 조각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다양한 관심
사를 조직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사이훙은 모든 것이 어떻게 인생
에서 적당한 비율을 차지하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신체는 풍
경이 될 것이고 그의 생각은 주홍색 담이 되며 두 눈은 하늘로 가는 평화
의 문이 될 것이다. 정자와 안뜰에서 그는 무술을 훈련할 수 있을 것이
다. 높은 탑에서는 명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의 탁월함 속에는 또한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다. 사이훙을 특별히
도왔던 사람들, 여행 중에 만나서 함께 살려고 데려온 사람들, 각자는 자
신의 정원과 정자를 소유할 것이다. 사부와 사형이 있을 것이다. 그의 궁
전 한 곳에 화산 전체가 있게 될 것이고 그의 가족들은 다른 곳에 있게
될 것이다.
두 웨선과 같은 사람들은 독특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사이훙의 궁전
에 있을 것이다. 후디에, 핀후 그리고 당나라의 시인들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예술품과 개개인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이훙은 사부에게 도관을 떠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나서 공식적으로 사부를 찾아 뵈었다.
[저는 속세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저의 영혼은 평화롭지
못합니다. 화산에 있을 수 없고, 신과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합니다.]
사이훙은 겸손하게 말했다.
[사람의 인생에는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에게 강한 소명 의식이
있다 해도 여전히 걱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감정을 고려하는 것이 현명
한 것이다. 소명을 지닌 사람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속세로 나갈 수도
있다. 그는 항상 기댈 곳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철학 없이 배회하면 안 된다. 네 청춘의 튼튼한 기반을
유지해라. 너의 의도는 한 곳에 고정시켜 놓아라.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
고 밖으로 나가라.]
대사부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아마도 저는 헌신적인 수도자는 결코 못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도교를 이해도 못 한 채 마음이 끌렸습니다. 수련은 앞으로도 제
생활의 중요한 일부가 되겠지만 저는 거기에 평생 매달릴 수가 없습니
다.]
[성직의 화려한 장식에 오도되어선 안 된다. 경전의 암송은 좋다. 그러
나 사람은 살아가면서 선행을 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너의 인생이다.
하늘이 너를 심판할 때는 너의 인생이 기준이 된다. 너는 항상 선을 위해
살도록 열심히 노력해야만 하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공포심 때문에 선량하게 산다. 다른 사람들은 단
지 위신과 그것이 제공하는 자부심을 얻기 위해서 자선을 베푼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선행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선행
을 연기하는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성인의 역할에 집착하지 말아라. 집착은 너를 다른 사람들과 똑같게 만
든다. 선행은 그저 진실된 동정심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제게 무엇이든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느낌이 안 듭니다. 다른
사람에게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현명치 못한 것이니라. 뭔가를 입증하려고 애쓰지 말아
라. 그냥 원하는 대로 행하되 위선자는 되지 말아라. 완벽한 사람은 아무
도 없느니라. 불사신도, 신도 결코 완벽하지 않다. 심지어 원왕()도
품행이 나빴단다. 동방삭()도 도둑질을 했잖느냐. 북해의 불사신도
한때 악행을 저지르고 벌을 받아 하늘에서 쫓겨나기도 했지.
중요한 것은 네가 열심히 분투하기 위한 목표를 채우는 것이다. 정직하
게 도전하다 보면 수련을 하게 될 것이다. 단지 순결함을 목표로 취해라.
만일 네가 진정으로 그것을 원한다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다른 것은 모
두 제쳐놓을 것이니라.]
[사부님, 저는 확신이 안 섭니다. 저는 실망스럽습니다.]
대사부는 잠시 침묵했다.
[너한테는 평범함을 인정하는 면이 하나도 없구나.]
[사실입니다.]
사이훙이 동의했다.
[그렇다면 어려운 과제를 주마. 순결을 너의 목표로 삼아라. 그것이 너
를 특출 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의지력, 불굴의 정신
과 힘이 결여되어 있다. 특별한 사람은 최고의 결단력을 가진 자다.
일단 정신으로 최고의 결단력을 발휘하게 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느
니라. 현인들은 바위에 완전한 믿음을 받쳐 숭배하면 바위도 살아 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정신력이니라. 방랑할 때는 그 힘을 하나의 목표,
즉 순결에 쏟아라.]
[무엇을 위한 순결 인가요?]
사이훙은 우울하게 물었다.
[선인이건 악인이건 결과는 같은 것 같습니다. 죽어서 묻히는 겁니다.
수도자는 여기 화산에 올라와 순수해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껏 신을 만난 적이나 있습니까? 그들은 절대적인 신앙 속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이 보답을 받으리라는 쥐꼬리만한
증거도 없습니다.]
[신을 위해 선량해지려고 하지 말아라.]
대사부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너 자신을 위해 선량해지거라. 그러면 신들이 네 속에 있기 때문에 너
는 성인을 위해 저절로 선행을 하게 될 것이니라. 최고의 신성은 우리 모
두의 내부에 존재한다. 그것을 밖에서 구하지 말아라. 안을 들여다 보아
라. 그러나 불량함, 탐욕, 욕망과 집착으로 오염되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
야 하느니라.
명심해라.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한다는 것을. 신들은
간섭하지 않는다. 너는 네가 원하는 그대로 될 수 있다. 성스러움을 얻으
려 하지 말고 단지 한 개인의 목표로서 특별한 사람이 되어라.]
[왜 제가 무엇이든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까? 왜 저는 그토록
종교적이어야만 합니까?]
[나는 종교에 대해서 말한 것이 없다. 종교는 역시 네 인생 행로에 다
른 사람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너를 질질 끌고 갈 것이다.
너는 너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상을 추종하는
것은 거부해야만 한다. 너 자신을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채워 넣으면 너
는 제한을 받게 된다. 너는 혼자 힘으로 너의 본성을 터득해야만 하느니
라. 혼자 수련을 하며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한 열쇠이다. 너는 네 스
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 뿐이다. 너는 너 자신을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내부에 든 것이 결실을 맺을 수 있느니라.
내 목적은 단 한가지, 네가 네 인생을 성취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너
는 성직의 체제가 없는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나는 너에게 내부의 구조
를 보여주고 싶다. 즉, 혼란스럽게 넘쳐나는 세속의 영향력에 맞서는 방
법이니라.]
[사부님, 제발, 계속 말씀해 주세요.]
사이훙은 사부의 얘기를 더 듣고 싶었다. 뭔가 이해가 되는 느낌이 들
었다.
[인생은 놀이이고 한 편의 연극이다. 이 서사극의 무대는 무수한 인물
들로 꽉 채워져 있다. 각자에게는 구성과 줄거리가 있다. 그들은 시시하
고 애처로운 상황에 처해 있느니라. 너는 어떻게 이 영원한 연극에서 길
을 찾아 나아갈 것이냐? 광대가 될 테냐? 영웅이 되고 싶으냐? 비극의 왕
자? 아니면 얼간이가 될 것이냐? 너는 원칙과 철학을 지켜야만 하느니
라.]
[저는 원칙이 있는 남자가 되겠습니다.]
사이훙은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
[철학은 싫다는 거냐?]
대사부가 물었다.
[너는 인생의 실상을 참되게 인식하고 인간의 정서를 이해하는 철학을
가져야만 한다. 어떤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기 전에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라. 결정을 내리기 전에 신중하여라. 너의 이성과 분별력을 발휘
해라. 선과 악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해해라. 어떻게 해서 둘 다 파괴할
수 없으며 선과 악이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지 알아야 한다.
융통성을 가져라. 너의 철학이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하여라. 너의
사고가 발전하면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형태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인식하여라. 단지 현재가 아니라 너의 인생 전체에 비추어서 생각하여라.
네가 하는 것은 평생 동안 지속될 것임을 확신하여라.]
대사부는 사이훙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꼭 한 가지 인생에서 새겨둘 것이 있다. 너는 너의 존재 구조를 깊이
통찰해야만 하느니라.]
[충고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이훙은 진심으로 대사부에게 감사드렸다.
사이훙은 자신의 방랑이 한없이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
었다. 그의 결정은 옳았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아직 머리가 내린 결정을
쫓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대화를 매듭짓기로 다부지게 마음먹었
다.
[제가 산을 내려가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오냐.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느니라.]
휴! 사이훙은 속으로 절망했다. 언제나 나를 옭아매려 드신다니까.
[모든 사람은 인생에서 과업을 가져야만 한다. 특히 화산을 떠나는 사
람에겐 일생 동안 완수해야 하는 과업이 있다.]
그 말은 사이훙에게 탐구하라는 말처럼 들었다. 다 잘될 것이다. 자신
의 마음에 궁전을 지었으므로 그것을 요새로 이용하면서 탐구를 활발히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신나는 일이 될 거야. 사이훙은 혼자 생각했
다. 화산이 주는 즐거운 마지막 기념품!
[과업이란 무엇입니까?]
사이훙이 물었다.
[나는 너에게 죽서칠판으로부터 과업을 하나 주겠다. 너는 그것을 완수
할 것을 맹세하느냐?]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를 타협할 줄 모르는 철저한 무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무엇
인지 곡 알아야겠단 말이냐? 그것을 수용할 만한 용기가 네겐 없단 말이
냐?]
이건 속임수다. 사이훙은 생각했다. 제자를 통제하려는 또 다른 시도
다. 그러나 호기심도 생겼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 정
말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입니다.]
[좋다. 고통받는 자를 만나면 너는 네 힘이 닿는 데까지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그들은 도와야만 하느니라. 이것이 너의 과업이다.]
사이훙은 기다렸다. 대사부는 말없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게 전부인가요?]
사이훙은 무례한 말투로 물었다.
[그래.]
대사부는 조용히 대답했다.
사이훙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것은 전혀 매력적인 과업이 아니었
다. 그것은 수집가, 예술품 감정가, 무술가가 되려는 그의 목표를 방해하
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수억이 비참하게 살고 있는 중국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면, 자신의 목표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 분명
했다.
[기억해라. 너는 이 과업을 받아들였으니 네 마지막 날까지 그것을 완
수해야만 한다.]
대사부는 의자에 깊숙이 앉으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고통당하는 자들을 만날 때마다 너는 그들을 도와야만 하느니라.]
산에서 내려온 사이훙은 빙글빙글 정신없이 돌아가는 속세에 합류했다.
화산을 떠난 이래 수개월 동안 급류에 정신없이 휘말리느라 모험은 해보
지도 못했다. 그는 사부의 충고를 훌훌 털어버리고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
기로 결심했다.
가족에게 돌아간 사이훙은 풍요로움과 사치스러운 예술품 속에서 편안
하게 보냈다. 그는 예술품과 희귀한 서적을 수집하느라 많은 재산을 썼
다. 그러나 사이훙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는 모험을 원했다. 인생을 경
험하는 대 경기장에서 그의 기술을 시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이훙은 상
하이로 갔다.
사이훙은 후디에를 추적하는 동안 상하이가 색다른 곳으로 보였었다.
위험, 오락과 악이 뒤섞인 미궁 같았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본 상하이는
거대한 도시였다. 돈이 많고 혼잡한 세계적인 도시였다. 유럽식 빌딩은
이국적이었다. 화강암과 강철로 지은 거대한 건물들. 그것들은 도시의 성
벽보다 거대했고 정확한 크기의 창문과 높이 치솟은 그리스풍 둥근 기둥
들이 기하학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태평양과 황푸에서 불어
온 바람에 깃발이 휘날리는 돔과 탑들이 마음에 들었다. 빌딩은 중국 건
축물처럼 여러 빛깔로 세심하게 칠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이훙은 모
서리, 부벽(), 아치 길, 아치 천장의 쐐기들에 완전히 매료당했다.
멀리서 보니 광활하고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선 건물들이 요새처럼 보
였다. 중국 건물은 금이 많이 가 있고 혼란스럽게 마구 뻗어 있었다. 적
갈색의 벽돌, 진흙, 점토와 나무로 된 중국 건물은 사람들로 번잡하고 시
끄러웠다. 요리하고, 소리지르고, 세탁하고, 장사하느라 분주했다.
유럽 건물의 위풍은 장엄하고 화려했다. 서양 도시를 중국에 그대로 접
붙여 놓은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조금씩 자기를 드러내 마침내는 이상한
도회적 공생 관계가 나타났다.
상하이에는 동서양의 이색적인 만남이 조화를 이루었다. 돈 많은 은행
가, 꼭두각시 정치인, 무자비한 군인, 탐욕스런 갱, 아편 중독자, 섹시한
여자, 불행한 노동자, 성실한 학자, 부패 관료, 강인한 부두의 인부와 평
범한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돈과 권력, 흥
분과 쾌락, 독직과 마약의 기름진 혼합 상태에서 상하이는 번성하였다.
사이훙이 존재를 탐구했던 곳은 바로 이 부유한 도시 속에서였다.
사이훙은 값싼 하숙집에서 묵었다. 6명의 다른 남자들과 같이 방을 썼
는데 그들은 하루 종일 들락거렸다. 사이훙은 트렁크에 자물쇠를 채워 두
었다. 그것은 도인으로서, 귀족으로서의 과거를 잠가 둔 것이었다. 사이
훙은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내성을 단념했다. 그의 인격은 포위 상태에
빠지고 독재자의 지배를 받았다. 그 독재자는 바로 젊음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처럼 그 역시 경험의 시간을 맞이하였다. 쉽게 버는 돈과
손쉬운 기회에 이끌린 사이훙은 카지노에서 마작과 도미노 딜러로 일했
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곳에서 벗어났다. 다음에는 도박과 아편 소굴에
서 경비원으로 일했다. 사이훙은 돈 지불을 거부하는 말썽꾸러기와 손님
을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이 일은 더욱 재미가 생겼다. 그는 다양한 무
기에 의존하는 잔인하고 사악한 무사가 되었다. 방어용 쇳조각은 사이훙
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였다.
사이훙은 자신도 모르게 무술 지도자들의 심미관으로 빠져 들어갔다.
예를 사람을 질식시킬 때는 그가 피를 쏟고 혓바닥을 늘어뜨릴 때가지 계
속한다. 갈비뼈를 주먹으로 치면서 뼈 부서지는 소리에 쾌감을 느낀다.
비틀고 졸라서 근육에 심한 고통을 준다. 신음 소리를 듣는다. 몸의 기관
이 끊어지는 소리가 나기를 기다린다 등등. 매일 그곳의 매점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하숙집에서 잠깐 눈만 붙이고 나왔다. 사이훙은 아편 연기
자욱한 뒷골목에서 싸움이 터지기를 간절히 기대하며 돌아다녔다.
사이훙은 자신이 냉혹하게 변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것이 마음에 들었다. 사이훙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느끼
는 두려움을 존경심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했
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를 방해하는 자들은 무자비하게 끌려
갔다.
상하이는 사이훙의 암자였다. 고층 건물은 산맥이었고 아편 연기는 신
비로운 안개였다. 술은 맑은 시냇물처럼 성스러운 강이었다. 네온과 백열
등이 별과 태양과 달을 대신했다. 뚜쟁이, 마약 중독자, 도박꾼, 매춘부
들이 사이훙의 사형이자 사부였다. 그의 육체는 사원이요 다리는 기둥이
며 강력한 손은 무거운 대문이 되었다.
하루하루 사이훙은 계속 해 나갔다. 결코 도전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경비를 서면서 못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인생을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었다. 사이훙은 자신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생
각하곤 했다. 비록 내부에선 감정의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고 현재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사이훙은 싸움의 유혹이 생기면 물러서
지 못했다. 그것은 단순한 생존의 문제였다. 상처를 입히느냐 당하느냐.
겨울이 되자 추워지기 시작했다. 사이훙은 하숙집과 멋없는 생활에 싫
증을 느꼈다. 사이훙은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옮겨 온 옛날의 무술 스승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왕 쯔핑()의 저택을 방문한 날은 첫눈이 내렸다. 하인이 그를 안
뜰로 안내해 주자 사이훙은 중년의 스승이 웃옷을 벗고 쇠와 돌로 된 역
기를 들고 이두박근을 비틀고 있는 것을 구경했다. 사이훙은 물결 무늬를
일으키는 근육과 단호한 표정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사이훙은 왕의 193
센티의 단단한 체구가 그대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동안 턱수염이 자랐
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에서 유머 감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 둘째로구나. 여기는 웬일이냐?]
왕은 사이훙의 가족이 쓰는 명칭을 사이훙에게 썼다. 왕은 사이훙의 가
족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사이훙을 둘째 아들로 알고 있었다.
[함께 일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다시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왜 화산에는 안 가느냐?]
[저는 경험을 얻기 위해 산을 내려왔습니다.]
왕은 특유의 우렁찬 소리로 크게 웃었다.
[좋다, 좋아. 네 할아버지를 봐서 특별히 너를 받아들여 주마. 내가 너
를 돌봐주지 않으면, 할아버지께서 나를 용서치 않으실 것이다. 가서 짐
을 챙겨 오너라.]
[감사합니다, 사부님.]
사이훙은 안심이 되었다. 지금 그에겐 정신적인 사부가 절실히 필요했
다. 비록 그가 한때 방황하고 반항하면서 독립하기 위해 분투하기도 했지
만 사부가 다시 지도해 준다고 하니 마음이 매우 편안해졌다.
사이훙은 이렇게 해서 얼마 안 왕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왕의 집
에서 숙식하는 제자들과 함께 배우며 왕의 정골 요법의 보조사로 일하고
왕이 회원으로 있는 경무운동협회()에 참석했다.
1909년 창설된 이 협회에 왕 쯔핑은 회장으로 있었다. 1918년 이 협회
는 우한(), 광저우(), 바오산(), 샤먼()에 지부를 두었
다. 사이훙이 가입했을 때에는 42개의 지부와 40만이 넘는 회원이 중국과
동남아 전역에 퍼져 있었다. 급진적 혁신을 추구하는 경무운동협회는 무
술의 발전을 저해해 온 엄격한 양식주의를 타파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스승들은 그들의 스타일에 대해 비밀을 지키고 제자들이 다른
운동체제의 기법을 익히지 못하게 금지시켰다. 반면 경무운동협회는 중국
무술 양식의 최고 장점들을 모두 취합하여 하나로 모을 것을 주장했다.
수십 명의 사부들이 상하이에 있는 경무운동협회의 건물에서 학생들을 지
도했다. 학생들은 수십 가지의 양식을 통달하고 많은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법을 배웠다.
경무는 최초이자 제일의 무술학회였지만, 중국의 싸움 기술에만 그치지
않았다. 사부들은 곧 서양의 복싱과 레슬링, 축구, 역도 그리고 수영과
체스를 교과 과정에 통합시켰다. 그 기원에 상관없이 모든 기술의 장점을
수용하려는 의지는 곧 미종권(종)의 품질을 보증해 주었다.
미종권은 경무회 무술 체제의 중심이자, 이 학회의 창설자의 전문 기술
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무술 양식의 합성체인 미종권은 그 자체로 기법
의 총집합체였다. 미종권은 숙련도를 얻기 위해서 50가지의 기술을 섭렵
해야만 했다. 미종권의 특징은 아주 교묘하게 빠져 나가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동작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왕의 수제자 5명 중의 하나인 사이훙은 미종권의 독자적이고 비밀스러
운 전통을 배웠다. 왕 쯔핑의 이 비장의 무술을 배우기 위해선 108개의
무기를 통달하고 두 가지의 기술을 섭렵해야 했다. 그 첫 번째 기술은 천
보섭운()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천 가지 무술 가운데 최고 기법
을 취한 것으로 아주 유명하고 포괄적인 기술이었다.
두 번째는 만보파산()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기술이었다. 이 기
술은 아주 복잡하고 긴 체제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 기술
을 익힌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제자들은 각자 소
책자에서 한 부분을 선택하여 일생 동안 그 부분을 전공했다. 만보파산의
원조는 청조 시대의 3명의 사부이며 10대를 거친 끝에 비로소 성문화되었
다.
사이훙은 종종 왕 쯔핑이 가르쳐 준 기법을 시험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
다. 그는 사과 모자를 즐겨 썼다. 말썽꾸러기처럼 모자를 한쪽으로 비뚜
름하게 쓰고 다녔다. 그러나 사이훙은 때로 싸움에 지고 나서 왕에게 찾
아가 그의 기법이 비실용적이라며 불평을 터뜨리곤 했다. 싸움에서 패한
학생으로 인해 항상 불쾌한 악담이 일자 왕은 재도전을 하도록 사이훙을
지도했다.
사이훙의 유일한 사교 생활은 전영()이라고 불리는 발명품을 즐기
는 것이었다. 그것은 영화였다.
빨간 벨벳을 씌운 좌석과 호화로운 로코코풍의 금박으로 장식된 극장으
로 최근의 할리우드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상하이에서는 가장 유행하는
취미 활동이었다. 불행히도 젊은이 혼자 극장에 입장할 수가 없었다.궁여
지책 끝에 사부를 동반해서 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사이훙은 왕 쯔핑에게 엄숙하게 말했다. 미국인의 삶을 보여주는 <교육
용 영화>가 있는데 미국의 전사들이 싸우는 방법도 보여 준다고 둘러댔
다. 그래서 사부와 제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자막이 나오거나 더빙이 된
영화를 보러 갔다. 그 영화들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제임스 캐그니, 커
크 더글라스와 험프리 보가트가 주인공이었다. 최신 영화와 2차 세계대전
의 뉴스 영화도 보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미국을 갱과 해적, 로빈 후
드, 인간 늑대, 카우보이들의 이상한 나라로 생각했다.
캐그니는 사이훙이 제일 좋아하는 배우였다. 연기에서 나타나는 거친
말투와 강하고 약삭빠른 성격은 사이훙의 성격과 아주 비슷했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이었지만 영화의 세계는 기이하게 보이지 않았다. 갱들이 하
는 짓, 돈, 남자들의 허세 그리고 이상한 사람들의 거리, 완벽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과 번지르르한 리무진은 상하이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들
이었다. 아마도 시카고와 뉴욕은 상하이와 비슷한가 보다고 사이훙은 추
측했다. 또한 바로 그 점이 할리우드가 사악할 정도로 세련된 도시의 본
질을 알고 있는 이유일 것이며, 젊은이는 거칠어야 한다는 캐그니 같은
사람이 있는 이유겠지.
사이훙은 왕 사부를 모시고 이 극장 저 극장을 돌아다녔다. 재상영화든
무성영화든 상관하지 않았다. 왕과 사이훙은 영화관에 가기를 좋아했다.
때로는 다른 어른들을 설득해서 서양에서 들어온 이 놀라운 발명품을 직
접 시사해 보도록 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시사회에서 사이훙은 류()를
만났다. 뚱뚱한 체격의 류는 소림의 무사에다 사부와 동갑이었다.
불이 희미해지자 류는 자리에 평화롭게 석가처럼 앉았다.
그는 완전히 명상에 잠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뒤 괴물이 화면에
나타나자 깜짝 놀란 류는 벌떡 일어나 도리깨질을 하듯이 옆 사람들의 얼
굴을 연타하여 묵사발을 만들어 버렸다. 극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
었다. 그러나 사이훙은 즐거웠다.
[바로 내가 다음 번에 도전할 사람은 바로 저 사람이다.]
사이훙은 류를 보고 중얼거렸다.
류는 도시에서 크게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그는 늙고 뚱뚱했으며 시골
뜨기였다. 만일 서부의 총잡이들처럼 사이훙이 그를 이길 수 있다면, 사
이훙은 무사로서 더 큰 명성을 쌓아 올릴 수 있다.
사이훙은 다음 날 정식으로 류에게 도전장을 냈다. 답장은 짧았지만 신
속했다. 그는 다음 날 사부의 학교에 도착해서 계속 낄낄대고 웃었다.
[아, 네가 왕의 제자로구나.]
류가 말했다.
[네.]
사이훙은 공손히 대답했다.
[제 도전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무모합니다. 그리고 충고를 해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나 사이훙의 속마음은 달랐다.
<준비나 하시지, 돼지야. 내가 여기 있다.>
[좋다. 싶은 대로 공격을 하려무나.]
[선생님은 사부님입니다. 제가 조심할 필요는 없겠는지요?]
[그렇게 한다면 내가 아주 실망할 텐데.]
사이훙은 씩 웃었다. 그는 두 개의 예리한 단도를 꺼냈다. 류 사부는
옷의 가장자리를 걷어 올리고 몇 가닥 안 남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
의 두꺼운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는 당당하게 서서 자기가 쓸
무기를 찾으려고도 안 했다.
<긍지가 무슨 소용이람.>
사이훙은 혼자 생각했다.
류 사부가 처음부터 쉽사리 단도를 쳐내자 사이훙은 놀랐다. 류 사부는
큰 주먹을 휘둘러 사이훙의 복부를 치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
나 한 번의 강타로 수년간 쌓은 훈련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사이훙은
후퇴했다. 사부는 열심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사이훙은 힘을 다해 몇 번
그를 가격했다. 그러나 고래를 건드리는 편이 오히려 나았을 것이다.
초조해진 사이훙은 일부러 시간을 끌기 위해 탁자 뒤로 달려갔다. 사이
훙은 탁자 위로 뛰어올라 구르는 류의 뚱뚱한 몸에서 거대한 포탄처럼 힘
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사이훙은 레슬링을 이용해야 자기가 이
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류 사부의 옆으로 비껴선 후 사이훙은 뒤에서 류
를 꼭 눌렀다. 이제 그는 사부를 이길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갑자기 류 사부가 강한 폭발음 같은 방귀를 뀌었다. 사이훙은 그보다
더 심한 악취를 맡아 본 적이 없었다. 메스꺼워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
다. 사부는 쉽게 방향을 틀더니 주먹으로 사이훙을 쳐서 쓰러뜨렸다. 그
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사이훙이 개어났을 때 오만상을 찌푸린 왕 쯔핑이 그의 상처에 약을 바
르고 있었다. 뒤에는 걱정과 환희가 엇갈린 얼굴을 한 류 사부가 서 있었
다.
[이제 왕 사부는 제자가 패했으니 며칠 동안 속이 타게도 됐다.]
류 사부가 이죽거렸다.
[이 멍청아, 류 사부는 너보다 한참 위란 말이다. 너는 내 명예에 먹칠
을 하고 말았다.]
왕이 꾸짖었다.
[너무 심하게 꾸짖기 말게, 이 친구야.]
류가 위로했다.
[그는 훌륭해. 나는 내 비장의 무기를 할 수 없이 쓰고 말았네.]
[아니, 그럴 수가!]
왕이 놀라 크게 소리쳤다.
[사실은 얘야, 나는 그 기술을 숙달하느라 몇 년간 훈련을 했단다. 나
는 고기, 달걀과 특수 약초를 무진장 먹는단다. 네가 원하면 너에게 그
기술을 가르쳐 주마.]
류는 사이훙의 위로 몸을 굽히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사부님은 굉장히 친절하시군요.]
사이훙은 간신히 중얼거렸다. 아직도 토할 것만 같았다.
[이 점을 명심해라.]
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사부는 항상 속임수를 몰래 준비해 두어야만 한단다.]
두 사람은 문으로 가서 소년들처럼 킬킬거렸다.
류는 어슬렁거리며 나가면서 말했다.
[극장에서 또 만나자.]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2권 SEVEN BAMBOO TABLETS OF
THE CLOUDY SATCHEL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이 인 복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9. 나비의 꿈
화산을 떠난 지 거의 2년이 지난 어느 날 사이훙은 극장의 무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세상의 여러 방면에서 인생 경험을 쌓으면
서 많은 곳을 여행해 보고 싶었다. 사이훙은 경극단의 일원이 됨으로써
자신의 소망을 성취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쟁이 한창 벌어지
고 있던 시기에 배우란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경극()은 연기자의 표현력과 문학성이 고도로 요구되는 종합예술이
었다. 배우의 창조성을 사랑했던 사이훙은 극단이 전국을 순회하는 동안
재미있는 관객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배우의 창조성은 관객에게 흥분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충격을 준다는 점에서 영성()과 유사한 면이 있
었으며, 사이훙이 가장 싫어했던 평범함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사실 배
우로서의 창조성은 수도 생활이나 무림과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었으며,
창조성의 주체만 달리한 것에 불과했다.
사이훙은 여러 신장()과 장군들의 배역을 맡았다. 대부분의 경극은
종교적인 주제를 가진 것이었다. 사이훙은 경극에서도 무술을 구사해야
했다. 그는 장생불사의 선인()들과 연금술, 은둔자(특히 관직을 내던
지고 산 속으로 들어간 역사적 인물들), 천상의 여러 신들과 노자()
등의 인물이 등장하는 극에 많이 출연했다.
자신이 맡은 역을 소화하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씩 무술을 연마해야 했
던 사이훙은 덕분에 무술에 대한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었다. 많은 경극
계의 거장들이 사이훙에게 연기와 가창 기술 그리고 경극에 사용되는 특
수한 무술을 가르쳐 주었다. 사이훙은 경극의 소재가 되는 고전문학에 깊
이 빠져 들었다.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양문여장등과 같은 전쟁을 주
제로 한 고전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이훙은 극중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무술을 사용해야 할 때도 종종 있었다. 관객들 중에는 무사 역을 하는 배
우가 정말 무술 솜씨가 좋은지 시험해 보려는 짓궂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
기 때문이다.
경극 배우로서의 삶은 사이훙 스스로 원했던 것이었다. 그의 마음 속에
는 지칠 줄 모르는 모험심과 상상력이 불타고 있었다. 그는 스타였다. 사
람들은 그가 연기를 펼쳐 보일 때마다 환호를 보냈다. 수없이 좌절하고
속박을 당하며 매일매일 자신의 결점을 찾고 이를 고쳐 나가야 하는 도관
의 수도 생활과는 달리 사이훙은 경극단에서 끊임없는 찬사를 받았다.
사이훙은 아름다운 추억 거리를 만들고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과 기술
을 쌓으려는 자신의 목표를 실현해 나가고 있었다. 그의 마음의 궁전은
많은 별채와 넓은 정원을 갖춘 대저택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자금성
()의 삼층 무대와도 같이 그의 생활은 화려한 구경거리와 환상적인
무대 의상, 아름답고 달콤한 음악 그리고 가수들의 매혹적인 노랫소리로
가득 찬 경극 주위를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이훙은 경극이 주는 즐거움에
푹 빠져 들었다.
영성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만약 사이훙에게 심경의 변화
가 온다면 초야로 돌아간 관리들이나 사부와 같이 그도 고산준령의 은둔
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가 올 때까지 사이훙은 자신의 가슴속에 아름다
움으로 가득 찬 황금기 인생의 추억 거리를 새겨 넣을 것이다. 경극의 무
대 위에는 모든 사람들의 눈을 눈부시게 하며 휘둥그렇게 만들 모든 것이
있었던 것이다.
캄캄한 무대 가운데 휘황찬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배우는 서 있었
다. 담배 연기 자욱한 허공을 파랗게 물들이며 무대 중앙을 비추는 한 줄
기 광선 밑에는 화려한 반사광을 사방으로 뿜어내는 무대의 상을 입은 배
우가 있었다. 그는 짧고 재빠른 걸음으로 무대 한가운데로 옮겨 갔다. 순
간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으며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와 환호성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배우는 장자 역을 맡고 있었다. 그는 장자라는 인물을 상징적인 의상으
로 연출해 내고 있었다. 배우는 금실 은실로 팔괘를 수놓은 밤색 장삼을
입고 있었다. 장삼의 소매는 하얀 꽃 소매로 되어 있었다. 턱에는 말총으
로 만든 긴 수염을 달았으며 하얗게 분장한 얼굴은 붉은 연지를 바른 뺨
으로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주홍색 아이새도를 바른 눈 위에는 둥근 눈
썹을 그렸다. 그리고 왼손에는 용의 머리를, 오른손에는 말총으로 만든
채를 들고 있었다.
[나는 용의 머리를 들어올리고 있습니다.]
장자가 말했다.
[나의 말은 사람들의 가슴에 두려움을 심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을 때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지만 일단 그가 죽으면 <무덤아, 빨리 말
하라.>하고 부채질만 해댑니다.]
그는 위엄 있게 보이려는 듯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은 바로 볼 수 있지만 감춰진 가슴은 볼 수가 없습
니다.]
그는 자기 가슴을 가리키다 말고 갑자기 머리를 들어올리며 청중을 쳐
다보았다. 날카로운 박()부딪는 소리가 그의 몸짓을 더욱 돋보이게 했
다,.
[나는 죽었습니다. 진짜 죽었습니다. 나는 도사입니다. 장자는 일단 죽
은 체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어둠 속에서 말총채를 유성처럼 날리는 동작에 맞춰 악단은 또 한
차례 효과 음악을 연주해 주었다.
중국 경극의 줄거리는 청중들에게 친숙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원작을
보러 극장에 가지는 않았으나 대신 똑같은 주제의 경극들을 수도 없이 보
러 다녔다. 따라서 배우들의 연기는 관객들의 주된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관객들은 자유롭게 의사 표시를 하며 극의 내용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
들은 심지어 배우가 대사를 틀리게 외면 그걸 수정해 주기까지 했다.
<나비의 꿈> 역시 관객들에게 친근한 내용이었다. 이 극에서 학자이며
술법가인 장자는 스승에게 허락을 얻어 그의 처 티안 시와 재결합 하기
위해 산을 내려온다. 그는 집으로 가는 도중 무덤에다 부채질을 하고 있
는 여자를 만난다. 이유를 묻자 그녀는 죽은 남편에게 남편 무덤의 흙이
마를 때까지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장자는
술법을 써서 무덤을 말린다. 감사의 뜻으로 여인은 부채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건네준다.
<나를 불쌍히 여긴 방랑하는 도인에게
그대 부인에게 말해 주시오. 나뿐 아니라 그대 부인 역시 덕스럽지 못
하다고>
집으로 돌아온 장자는 부채를 자기 아내에게 건네준다. 장자의 아내는
영원히 정절을 지키겠다고 맹세한다. 장자는 그녀를 시험해 보기 위해 술
법을 써서 죽은 척한 뒤 멋있게 생긴 학자를 만들어 내었다. 학자와 사랑
에 빠진 장자의 아내는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
나 그 남자는 첫날 밤 혼수상태에 빠지고 만다. 이때 장자가 종이 인형으
로 만들어 낸 하인이 나타나 죽은 지 얼마 안 된 가족이나 친척의 썩지
않은 뇌로 만든 약만이 그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 장자는 죽은 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꺼려했지만 결국 전 남편의 관을
열기로 결심했다.
이상은 누구나 알고 있는 줄거리였다. 2장이 끝나갈 즈음 하얀 비단 옷
을 입은 티안 시가 단촐한 제단 앞에 서 있었다. 단 위에는 촛불 두개,
향로 하나 그리고 장자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이 놓여 있었다. 그 뒤에 관
이 있었다.
[안 돼!]
티안 시는 찢어질 듯한 소리로 외쳤다.
[그이는 나의 남편이었어.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단 말이야? 안 돼.
난 결코 그런 끔찍한 짓은 할 수 없어.]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관에서 몇
발자국 물러섰다.
[나의 죽음은 얼마나 비통한 것인가?]
무대 뒤에서 죽은 애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오! 첫 남편을 잃은 내가 이제 두 번째 남편마저 잃어야 하다니! 이
관을 열어 젊은 부군의 생명을 구해야겠구나!]
티안 시가 사라지자 무대는 장자가 독백했을 때처럼 다시 어두워진다.
막 뒤에는 무대 담당원이 대나무 막대를 잡고 있었다. 막대의 조종을 받
으며 종이 나비가 장자의 관 위에서 펄럭거렸다. 종이 인형에 술법을 걸
어 만들었던 하인이 부채를 들고 무대 위에 나타났다. 곡예와 무술 동작
을 하면서 무대 앞으로 다가온 그는 꼭두각시 흉내를 내며 나비를 쫓기
시작했다. 하인은 손을 뻗어 나비를 잡으려 했으나 나비는 재빨리 달아났
다. 손목을 휙 쳐서 부채를 접은 그는 쪼그리고 앉은 채로 나비가 앉아
있는 곳까지 살살 기어갔다. 하인은 숨을 죽이고 두 손으로 나비를 잡으
려 다시 한번 시도했다. 그러나 관객을 향해 양손을 벌린 그를 허공을 움
켜쥐고 있었다. 더욱 세련된 동작을 관객에 선보이고 난 하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화를 버럭 내었다. 한쪽 다리를 올린 그는 부채를 휙
펼치고는 거친 동작으로 부채를 좌우로 휘저으며 나비 잡기를 또다시 시
도했다. 그러나 하인은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하인은 과장된 동작
으로 부채를 접은 뒤 꼭두각시 걸음으로 무대 밖으로 사라졌다.
이 장면은 관객들이 너무 잘 알고 있어 대사나 변사의 설명 없이 진행
되는 장이었다. 이 이야기는 장자가 한때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세상의
이곳 저곳을 날아다니며 즐거움을 누리다가 꿈에서 깨어나서는 다음과 같
은 유명한 말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을 꾸어 장자가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나비를 잡으려다 실패하는 장면은 인생의 허무함과 분별 의식을 풍자한
것이었다. 그러나 풍자의 초점은 나비를 쫓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종이
인형이라는 점에 있었다.
사이훙은 뒷무대의 분장실로 걸어갔다. 그는 온갖 종류의 의상을 입고
있는 배우들 곁을 지나갔다. 극장의 어두컴컴한 분장실 통로에 서 있는
그들 중에는 갑옷을 입고 얼굴에 색칠을 한 장군, 아름다운 여인들(실제
로 그들은 모두 남자 배우들임.), 거북이와 새우 같은 옷을 입은 기묘한
모습의 어릿광대들, 눈썹을 매달아 놓은 익살스런 스님, 수많은 연기용
무기를 들고 있는 곡예사등이 있었다. 모든 색깔은 선명하게 눈에 띄는
것들이었다. 남청색, 강렬한 주홍색, 짙은 녹색, 석양의 심홍색 등 다양
하고 풍부한 색조로 물들인 비단옷에는 무수한 작은 은거울이 빛을 반사
하고 있었으며 금실과 진주가 매달려 있었다. 호화로운 색깔은 인물을 더
욱 생동감 있게 만들어 주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여
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음정을 맞추는 소리,
지나간 시대의 시()를 읊는 소리들, 특히 시는 몇 구절씩 인용하여 필
요한 자리에 넣어 부르면 한층 경극의 흥취를 돋우어 주었다.
사이훙은 자신의 분장 테이블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은
무대 위에서는 큰 자신이 되었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넓적한 얼굴은
전형적인 무사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세심한 학자의 배역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베이징 경극의 배역에는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져 있다. 주역(),
여자역(), 어릿광대(), 호걸.악한(), 단역()으로 나뉘고 각 유형
은 문인과 무인으로 또 나뉜다.
주역은 남자역으로 노인, 어린이, 학자, 무사가 있었다. 학자역은 완벽
한 말솜씨와 뛰어난 가창력이 요구되었으며, 무사역은 곡예술과 무술 동
작이 강조되었다. 학자나 관리, 퇴역 장군들이 대부분인 노인역은 길다란
수염을 달고 위엄 있는 연기를 하며 가창력이 매우 뛰어나야 했다. 어린
이역은 세련된 용모에 가성을 써서 어린이 흉내를 잘 내야 했다.
여자역은 경극단원으로 여자는 쓰지 않는다는 오랜 전통 때문에 남자가
맡아야 했다. 사이훙은 여자역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이 전통도 서서히
변해 가고 있었으며 여자 배우들도 점차 베이징 경극단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여자역은 다섯 종류로 나뉘어졌다. 점잖은 중년 부인, 충실한 아
내, 효성스런 딸과 같은 부류와 활달한 성격의 하녀 또는 문제 있는 여자
(나비 꿈의 티안 시 같은 여자)와 같은 부류, 그리고 악한 여자, 여류 무
사, 나이 많은 할머니등으로 나뉘었다.
어릿광대역은 언제나 하얀 얼굴을 하고, 자신의 특성을 나타내는 두어
개의 까만 선을 얼굴에다 그리고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물론 관객을 웃
기는 것이었으며, 얼굴의 선은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았으며 때로는 외설
스러운 것도 있었다.
사이훙은 호걸.악한 역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많은 의상을 껴 입고
위엄 있게 행동하며 성량이 풍부한 음성으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뚱뚱한
배역의 조건을 완벽하게 맞출 수 있었다. 이 역에는 문인과 무사역이 있
었는데 사이훙은 무사역을 선택하였다.
호걸.악한역의 배우들이 자신의 얼굴을 분장하는 형태에는 개인적인 차
이가 있었지만, 여러 가지 색깔은 배우가 나타내고자 하는 극중 인물의
특성을 강조해 주었다. 적색은 용기와 정열을, 흑색은 거칠고 난폭한 성
격을 나타내었다. 청색은 잔인함과 변태 성욕, 흰색은 배신, 금색과 은색
은 신장의 얼굴을 나타내는데 쓰였다. 그리고 동물의 영혼과 불교의 108
나한, 색다른 인물을 묘사하는 데도 금은색이 사용되었다.
사이훙은 언제나 이러한 도상()에 따라 분장을 하였다. 그날 밤 사
이훙은 천군()을 지휘하는 장수의 하나인 어랑역을 하기로 되어 있었
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어떻게 어랑이 자미대제
의 조카가 되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어랑은 어느 여신의 아들이었으나
인간의 몸이었으므로 천상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어랑은 천견
()한 마리를 데리고 천상의 변방에 살고 있었다. 경극에서 어랑의 역
할은 하늘의 사자()역이었다. 극단에서는 어랑의 두 가지 특이한 점
을 중요시 하였다. 첫째는 그의 옷의 등뒤에 붙어 있는 네 개의 군기(
)였는데, 군기는 장수가 군령을 내릴 때 사용되는 것이었다. 둘째는 그
의 이마에 있는 제3의 눈이었다. 그것은 어랑에게 투시력과 초능력이 있
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이훙은 먼저 머리 끈을 단단히 묶었다. 이렇게 해야 눈썹을 더욱 격
렬하게 위아래로 흔들 수 있었으며, 눈을 더 크게 뜰 수도 있었다. 격렬
한 노여움이나 강력한 힘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방법은 날카롭고 강렬한
안광을 쏘아 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이훙은 이어 기초 화장으로 얼굴 전체에 흰 크림을 발랐다. 흰 크림
은 그의 붉은 피부와 까만 눈썹을 가려 주었다. 이마와 눈 주위에는 하얀
색을 칠했다. 그런 다음 하얀 파우더를 발랐는데 그것은 하얀색을 균일하
게 해주며 윤기를 없애 주었다. 이어서 그는 기름칠한 금박을 이마와 코,
양뺨, 턱에 입혔다. 다른 부위에는 번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는 코팅
을 마쳤다. 그의 모습은 금으로 만든 신상()처럼 되었다. 이어서 박
쥐의 날개처럼 눈썹을 그린 사이훙은 뾰족한 붓으로 까만 수염을 그렸는
데, 윗입술까지도 까맣게 칠해 놓았다. 까만 물감은 마치 면도 후에 남아
있는 까무잡잡한 얼룩처럼 그의 금빛 얼굴 위로 퍼져 나갔다.
사이훙은 얼굴을 앞으로 기울이고 자신의 작업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
다. 얼굴에 바싹 달라붙은 물감은 제2의 피부처럼 원래의 피부 위에서 말
라가고 있었다. 이제 거의 마무리되었다. 그는 붓을 들어 붉은 물감을 찍
어 아랫입술을 칠했다. 붉은 아랫입술은 까만 윗입술과 어울려 개가 으르
렁거리며 짓는 모습을 연상시켜 주었다.
분장을 하는 데 엄청나게 긴 시간이 소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배우로
서의 삶을 준비하는데 있어서도 엄청나게 고된 훈련이 필요했다. 일반적
으로 정식 배우가 되는 데는 7년이 걸렸다. 그러나 연기 지도자와 연출가
들은 그의 배경을 인정하고, 사이훙이 1년만에 스타로 부상하는 데 큰 도
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 1년은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그는 하루에 몇 시
간씩 노래 연습을 해야했다. 오랫동안 결투를 벌인 뒤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연기는 호흡 조절도 제대로 못 할만큼 힘들었다.
곡예 담당자의 주문은 그에게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경극에서는 모든
종류의 공중 낙법과 재주넘기, 공중제비와 도약을 하였다.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얼음 위를 목발로 걷는 훈련도 있었다. 배우들 사이로 표창이
나 무기를 던질 수 있는 정교한 투척 솜씨도 요구되었다. 분장 전문가로
부터 세심한 분장 기술도 배워야 했다.
작은 돔 모양의 금속체를 집어든 사이훙은 접착제를 바른 다음 양미간
에 붙였다. 그곳은 제 3의 눈이 열리는 곳이다. 사이훙은 화산에서 수행
했던 시절을 생각했다.
<투시력을 얻는 일이 이렇게 쉬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이훙은 머리에 달라붙는 속모자를 쓰고 청색과 주홍색의 갑옷 같이
생긴 의상을 입었다. 등에 4개의 깃발이 달린 그 옷은 무게가 9킬로나 되
었다. 4킬로가 넘는 투구에는 청색, 주홍색, 금색, 적색의 인조 진주 수
십 개가 달려 있었으며 가벼운 털로 만든 동그란 장신구는 조그만 움직임
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몸을 떨었다. 사이훙은 이런 거추장스러운 장
신구를 단 채 결투를 벌이고 노래를 불렀으며, 제자리에서 공중으로 뛰어
올라 몇 바퀴 회전하고는 단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묘기를 펼쳐 보였다.
악단의 격렬한 연주가 극의 절정을 알려 주자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극은 끝났다. 장자의 관을 부숴 열어 제친
티안 시는 아직도 살아있는 까만 장삼의 시체와 마주치게 되었다. 정조를
버린 자신을 비난하는 장자의 노한 음성을 들은 티안 시는 애인의 모습이
환영이 되어 나타나자 스스로 자신의 목을 도끼로 잘라 버렸다.
관중들의 박수 갈채는 사이훙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흥분으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이훙이 무대 위에서 좀처럼 놀라
지 않고, 부담 없이 관중 앞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얼굴에 물감을 발라
자신의 본 모습을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산의 거의 모든 수도자들
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줍음을 탔던 사이훙은 분장을 통해 수줍음을
털어 버릴 수 있었으며 무대는 그에게 자유로운 공간이 되었다.
한숨을 쉬며 무대 앞에 달려나온 장자역의 사이훙은 제자리에 멈춰 선
다음, 앞에 선 사람에게 말총채를 던지고 수염을 뜯기 시작했다. 다섯 명
의 하녀는 급히 무대 밖으로 사라졌다. 사이훙은 창을 뽑아 들고는 무대
앞으로 걸어갔다.
이 경극은 허베이 경극 <요술등>을 각색한 것이었다. 이야기의 줄거리
는 다음과 같다. 셍무라는 아름다운 여신<화산에도 그녀를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사이훙은 경극에 나오는 것과는 좀 다르게 알고 있었다.>이 뤼
안창이라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에 격분한 어랑은 그들의
결합을 방해하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셍무에게는 그를 피할
수 있는 요술등이 있었다. 어랑을 피한 셍무는 뤼 안창과의 사이에서 아
들을 낳는데, 애기의 백일 잔칫날 어랑은 자기가 기르는 천견을 그곳으로
보낸다. 힘이 부족한 여신은 천견을 물리칠 수 없었다. 어랑은 화산 기슭
에다 그녀를 감금시킨다. 쫓겨난 셍무의 남편은 아들 첸시앙을 천둥 도사
에게 맡긴 후 결국 죽음을 맡게 된다. 아들은 무술을 배우며 법술을 터득
하게 된다. 마침내 도사는 그의 어머니가 처해 있는 곤경을 알려 주며 그
에게 마술 도끼를 선사한다. 첸시앙은 화산을 박살내고 그의 어머니를 구
출한다.
사이훙은 어두운 무대 가장자리에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
다. 그는 관객 앞에 있는 셍무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악단의 불
협화음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관중은 어둠 속에 혼자 서 있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가 천국 밖에서 영원한 세상을 기다리는 하늘의 무사 어랑
이란 말인가? 그가 지난 사대의 장군과 영웅 그리고 신장 역을 하는 배우
란 말인가? 그가 타락한 수도자란 말인가?
북과 징으로 한바탕 요란한 화음을 연주한 악단은 곧 이어 잔잔한 멜로
디를 내보냈다. 몇 차례 종이 울렸다. 그것은 사이훙이 무대에 오른다는
신호였다. 그는 그것이 도관의 종소리라고 생각하며 무대 위로 나갔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는 언제나 그를 흥분시켰다.
사이훙이 이번에 출연한 경극은 자운화()라는 무술 경극이었다.
이 극은 비교적 관객들에게 덜 알려진 것으로서 인간의 삶을 가장 풍자
적으로 묘사한 극이었다. <백사전()>이라는 유명한 경극을 조금 변
형시킨 이 극은 자운화라는 미모의 여검객이 중병에 걸린 애인을 구하기
위해 화산 꼭대기에 있는 약초를 구하러 나서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그
약초는 다른 데서는 구할 수 없는 희귀한 풀이었다. 오랜 여행 끝에 그녀
는 화산에 도착하지만 약초를 지키는 도사들은 그것을 줄 수 없다고 말한
다. 그 약초는 아주 희귀한 것이며 은자들과 속세인은 무관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녀는 공격을 개시한다. 도사들도 뛰어난 검객이었지만, 그녀
는 많은 도사들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아무리 뛰어난 자운화였지만 숫적
으로 밀리는지라 쌍방의 결투는 교착 상태에 빠져 사흘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간다. 배우들은 이 대목에서 자신의 무술 솜씨를 마음껏 뽐낸다.
주직은 마침내 약초를 주는 대가로 자운화의 독특한 검법을 가르쳐 달
라는 제안을 한다. 이 부분이 극의 절정에 해당한다. 도사들에게 무술을
가르쳐 주고 약초를 건네받은 자운화는 집으로 돌아가 애인을 구한다. 이
경극에는 많은 호기심을 자아 내는 주제가 들어있다. 첫째, 뛰어난 무술
을 가지고 활동을 벌이는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이다. 둘째,
화산과 같은 특별한 곳에서 기르는 약초는 도사들이 연금술을 통해 이루
려 하는 불로장생의 반향이라는 점이다. 셋째, 약초가 아무리 귀한 것이
라 해도 도사들은 성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그것을 내준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세속적인 일에 전혀 무관한 듯이 보이는 도사들도 인간의 생
명을 구하는 일만은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제는 무림과 도사들 세계에도 세속의 즐거움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요소가 많이 있음을 암시해 주었다. 이러한 주제는 전설이나 신화에
그칠 뿐이지 영적 구원을 찾아 나서라는 유혹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남
다른 영적 배경을 갖고 있는 사이훙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받아들였
다. 수많은 경극이 도사들을 주제로 한 것이지만 이번 경극은 그의 인생
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이 경극은 사이훙으로 하여금 자신이 걸어온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날 밤 사이훙은 안후이성()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사
이훙은 자신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여러 번 도사의 역을 맡아 연기를 하
였다. 파우더를 바른 하얀 얼굴에 아치 모양의 까만 눈썹, 무겁게 느껴지
는 속눈썹 화장, 자줏빛 아이새도 그리고 빨간 볼 화장을 한 사이훙은 회
색 무명 장삼을 입고 연기용 검을 휘두르며 자운화와 결투를 벌였다. 그
는 그때까지만 해도 무대 위에서 도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진짜 도사가
맞이하게 될 기막힌 삶의 전환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관중은 유난히 시끄러웠으며 들뜬 분위기였다. 극은 저녁 때부터
상연되었으나 가곡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문학적인 경극은 부유한 사람들
이 많이 오는 늦은 시간대에 주로 공연되었다. 그래서 공연의 초반부는
언제나 대사나 노래가 거의 없는 액션이 주종을 이루었다. 무식하고 불량
기가 많은 초저녁의 관객들은 잠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잡담을 하거나
노래를 불러댔다. 극장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가 하면 바닥에 참외 씨와
땅콩 껍질을 버리고, 배우들에게 외설스런 소리를 지껄여 댔다. 언제나
그런 소리를 무시하고 연기를 해왔던 사이훙은 자기 차례가 되자 무대 가
운데로 걸어갔다.
악단은 빠른 템포로 북을 치며 징을 몇 차례 울려 분위기를 한껏 고조
시켰다. 사이훙은 거만한 자세로 무대 한가운데 서서 자운화를 바라보았
다. 그녀는 이름에 걸맞게 화려하고 사치스런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사
이훙의 거만스러운 태도에 지지 않으려는 듯 왼발을 한 발짝 앞으로 내디
딘 채 서 있는 그녀의 등뒤에는 비단 장식이 달려 있는 검이 꽂혀 있었
다. 검법의 자세를 취한 그녀의 두 손은 사이훙을 향하고 있었다. 얼굴에
는 물감을 칠한 채 서로를 응시하고 선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두 개의
인형처럼 보였다.
[우리 도사들은 세속을 떠난 은자()들이다. 우리는 하찮은 세상사
에 관여하지 않는다.]
사이훙은 이렇게 말하면서 말을 알아들었으면 속히 이곳을 떠나라는 손
짓을 하였다. 악단은 그의 동작에 맞춰 한 차례 효과음악을 연주했다. 자
운화는 자세를 바꾼 다음 원을 그리며 한 바퀴 걷고 나서는 다시 손을 뻗
어 사이훙을 가리켰다.
[여하튼 나는 약초를 가져가야 해.]
자운화가 소리쳤다.
사이훙은 무대 위의 각광()이 그의 눈동자를 비추게끔 전방으로 발
걸음을 옮긴 다음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두 눈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우리는 사흘 동안이나 싸웠다.]
사이훙의 음성이 실내에 울려 퍼졌다.
[우리 중 어느 쪽도 상대를 제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한 차례의 음악이 나왔다.
[그러니 흥정을 하는 게 어때? 당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 즉 당신
의 검술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면 우리도 그 약초를 당신에게 주겠다.]
[그게 정말이야?]
자운화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렇다. 우리는 도를 닦은 은자들이다. 우리는 세상사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당신의 지극한 정성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 거야.]
[이보게, 배우 양반.]
사이훙은 관객의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당신이 은둔이 뭔지 알기나 해?]
관객석에서 다시 한 음성이 들려 왔다.
사이훙은 급히 얼굴을 돌려 관중석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운화의 대사
를 기다리는 것보다 그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은둔이란 세상을 버리는 것이지만 깨달음은 세상을 방랑하는 데서 얻
어지는 것이야.]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낸 사이훙은 즉시 고개를 돌려 연기를 계속 했
지만 한편으로는 그 두 사람을 유심히 관찰했다. 경극 공연 중에 현인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진기한 일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경극을 보러 오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상투를 꽂고 긴 수염을 기른
그들은 짙은 청색 장삼을 입고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결코
다른 사람들과 혼동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하였다.
한 장면이 끝나자 사이훙은 급히 무대 뒤로 달려가 무대 보조원에게 그
들을 공연 후 식사에 초대하겠다는 전갈을 보냈다.
자정이 조금 지나서야 사이훙은 공연을 끝낼 수 있었다. 짙은 청색 외
출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다시 한번 얼굴을 닦아 내었다. 분장을 닦아 내
는 것은 아주 성가신 일이었다. 파우더는 조금만 지나고 나면 땀구멍과
주름 속으로 들어가 쌓였다. 모든 베테랑 배우들의 얼굴은 마치 송장 같
이 핼쑥했다.
사이훙은 극장 로비에 있는 두 도사를 찾아내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올
렸다. 두 도사는 답례의 표시로 합장을 하였다. 어둠과 담배 연기가 깔려
있지 않으니 사이훙은 그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사람은 매우 야위었으나 키는 큰 편이
었다. 그는 자신은 시후 신선()이라고 소개했는데, 세()자를
쓴 이유는 외모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달걀형으로 생긴 얼굴은 하얗고 매
끄러웠으며, 커다란 두 눈은 평온해 보였으나 사물을 보는 눈은 날카로울
듯했다. 하얀 턱수염을 길게 뻗어 있었으나 숱은 적어 보였으며 꼭 다문
두 입술에는 자상함이 배어 있었다.
또 한 사람은 뚱뚱하지도 야위지도 않았다. 시후 신선과는 달리 징취안
()은 쾌활하였으며 얼굴에는 익살스런 표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무슨 일에나 웃음을 터뜨리고 미소를 지었으며 장난기 있는 눈을 깜
박거렸다. 수염은 풍부하고 안색은 붉었으며 행동 하나 하나에는 힘과 장
난기가 넘쳐 흘렀다.
두 도사를 근처의 음식점으로 안내하는 동안 사이훙은 내내 기억을 되
살려 내고 있었다. 그는 이 두 신선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두 도사
는 그들이 이룬 높은 차원의 영적 성취를 인정받아 신선이라는 칭호를 듣
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두 사람은 서로의 진정한 영적 우정을 발견하
고는 2백년이 넘도록 친구로 지내오고 있다고 하였다. 그들의 머리는 하
얗게 세어서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칠십 중반 정도 되어 보였다. 외관상
으로 추측하는 나이는 실제의 나이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지만 사이훙은
원래 현실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전설 따위에는 회의를 품었다. 그는 그
저 이 두 사람이 태도나 하얗게 센 머리카락으로 보아 나이가 좀 들어 보
인다는 것만 인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모든 점에서는 그보다
도 훨씬 젊고 정력적인 것 같았다.
세 사람이 이층 조용한 방에 자리를 잡고 나자 이번에는 두 도사가 그
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자네는 도교에 관심이 있다고 했지?]
시후 신선이 물었다.
[예.]
사이훙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 상당 기간 공부를 못했습니다.]
[글세....... 인생 자체가 공부지. 그렇지 않아?]
징취안 신선이 말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대사님.]
사이훙은 경의를 표하며 그 말에 동의해 주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두 분께서는 굉장한 경지에 올라
있는 것 같습니다.]
[아, 그야 물론이지.]
징취안 신선은 도사답지 않게 터무니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는 이빨
이 드러나도록 싱긋 웃으며 사이훙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수많은 비법을 터득했지.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우리는 신비의
문을 찾았지. 우리는 몸을 감출 수도 있고 공중을 비행할 수도 있어. 그
리고 우리는 언제나 천국에 가 있지. 어때? 이만하면 괜찮지 않아?]
사이훙은 시후 신선을 쳐다보았다. 그는 잔잔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사이훙에게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사이훙은 그들이 자기를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보게 젊은 양반, 전에 날개 없이 나는 걸 배운 적 있나?]
징취안 신선이 계속 말을 이었다.
[예, 있습니다. 날 수가 없다면 어떻게 천국에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그렇고 말고]
징취안 신선은 키득키득 웃으며 대답했다.
시후 신선이 몸을 앞으로 당기며 말을 꺼냈다.
[그건 어떤 술법이지?]
[날개 없이 난다는 건 물론 비유로 한 표현입니다.]
사이훙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나 징취안 신선의 낄낄 거리는 웃음이
사라졌다.
[그것은 사람의 기를 척추로 끌어올리는 걸 말합니다.]
[장신술()의 비결은 무엇이지?]
[그것은 고요히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도마뱀처럼 움직이지 않음으
로써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겁니다.]
[천국에 가는 법을 말해 보아라.]
시후 신선이 명령하듯 말했다.
사이훙은 이마를 만지며 대답했다.
[천국은 두개골에 있는 영문을 비유해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자네의 머릿속에 노자가 있는 걸 아느냐?]
징취안 신선이 물었다.
사이훙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 성인 역시 뇌하수체와 연관된 영문을 상징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노자의 외단()을 먹어 본 적은 있느냐?]
시후 신선이 물었다.
[불행히도 아직 먹어 보지 못했습니다. 저의 도는 아직도 미천합니다.]
시후 신선은 다시 허리를 뒤로 기대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징취안 신선
은 사이훙을 쳐다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자네의 상태를 솔직히 말해 주었어. 도를 닦는 친구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야.]
징취안 신선은 결론을 짓듯 말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사이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식이 나오자 테이블을 조용해졌다. 신선한 야채 요리는 그들의 식욕
을 돋우어 주었다.
[자네는 정말 친절하군.]
징취안 신선이 말했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제 초대를 받아 주셔서 정말 감사
합니다.]
사이훙은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그들은 조용히 식사를 하였다.
[두 분의 전력()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잠시 후 사이훙이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그런 거 없어.]
징취안 신선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나 사이훙은 신선들이 결코 자
신의 행적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이훙은 그들의 행적에 대해 알아보겠다는 생각이 부질없는 짓임을 깨
달았다. 그들에게 질문은 필요치 않았다. 그는 가장 정확한 방법, 즉 순
수한 느낌으로 그들이 이룬 영적 성취를 이해해야 했다.
사이훙이 영적인 인물과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두
신선과 마주앉아 있는 시간은 사이훙에게 있어서 축복과 평정의 시간이었
다. 그는 두 사람으로부터 뿜어 나오는 영력을 느낄 수 있었다. 화산을
떠난 지 수십 개월이 지난 그 즈음 사이훙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영력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단순히 지나치기만 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순간
적인 즐거움이나 활력을 가져다 줄 뿐 아니라. 행복의 눈물을 흘리게 할
수도 있었다. 지금 두 신선과 함께 있는 사이훙은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신선들과 같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두 신선들이 맛있게 식사를 마치기까지는 꽤 시간이 흘렀다. 사이훙은
마치 고향에 온 듯한 행복감을 느꼈다. 그는 그러한 감정이 단순히 도사
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그는 아홉 살
때부터 도사들과 같이 생활해 왔다. 사이훙은 이 도사들과의 만남을 계기
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에서 너무 벗어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대사님들과 같이 도를 닦고 싶습니다.]
사이훙이 말했다. 두 신선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도관에 살고 있지 않아. 방랑자들이지.]
시후 신선이 대답했다.
[그런 건 관계없어요.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우리 생활은 매우 가난해. 일류 배우들의 생활과는 아주 딴판이지.]
그는 사이훙의 결심을 시험하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난 무대를 알기 전에 이미 신단을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오늘 밤 떠나려 한다.]
징취안 신선이 말했다.
사이훙의 마음은 확고하였다.
[좋습니다. 소지품을 챙기고, 극단에 통보하고 오겠습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동문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한 시간 안에 그리고 가겠습니다.]
사이훙은 극장으로 급히 달려갔다. 유흥 생활을 즐기는 배우들이라 거
의 다 밖으로 나가고 몇 명만 자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잘된 일이었
다. 잠시 생각을 한 그는 편지를 써 놓은 다음 소지품을 챙기기 시작했
다.
떠날 채비를 끝낸 사이훙은 얼마 동안 분장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그
는 쪽빛 조명 아래서 자신의 모습을 유령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분장용
접시들은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접시 가장자리에는 빨간
색, 황금색, 검은색, 자주색, 녹색 등 갖가지 물감이 묻어 있었다. 사이
훙은 자신이 조금 전에 쓴 편지를 들여다 보았다. 반투명의 하얀 종이 위
에는 자신의 인생 전환을 알리는 까만 글씨가 적혀 있었다. 테이블의 옆
에는 장군역에 쓰는 투구가 놓여 있었다. 은거울들은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으며 빨간 아닐린과 주홍색 물감을 들인 가벼운 털로 만든 동그란 장
신구는 미동도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1미터나 되는 꿩의 깃털을 만져
보았다. 그는 깃털을 잡아 아래로 당겼다. 그는 손끝에 깃털의 부드러운
탄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관중의 박수 소리가 그의 귓가에 희미하
게 들려 오는 듯했다. 사이훙은 깃털을 놓고 용수철처럼 그곳을 뛰쳐나갔
다.
밤공기는 차가왔다. 등불이 없는 사이훙에게 만삭이 되어 가는 밝은 달
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추위로 몸을 떨었지만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
빛은 그의 마음을 희망으로 가득 채워 주었다.
사이훙은 어렵지 않게 두 신선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따뜻이 사
이훙은 맞아 주었다. 세 사람은 곧바로 길을 떠났다. 얼마 가지 않아 긴
나무 다리를 만나게 되었다. 사이훙은 다리를 건너면서 이 다리가 현재의
상황에 참 적절한 상징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다리를 되돌아가지 않
겠다고 굳게 마음을 다졌다.
세 사람이 다리를 절반 이상 건너갈 즈음 징취안 신선이 갑자기 큰 소
리로 웃기 시작했다. 좀처럼 웃지 않는 시후 신선이 사이훙을 향해 이해
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들어 봐.]
징취안 신선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우리 발자국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요.]
[우리라고? 다시 들어 봐.]
징취안 신선이 말했다.
사이훙은 그때서야 자신의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 두 신선에게는 발자
국 소리가 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사이훙이 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 그들은 유쾌하게 웃었다.
[자네는 갈 길이 많이 남았어.]
징취안 신선은 웃으며 사이훙의 등을 두드렸다.
그들은 한 폐찰()에서 밤을 보냈다. 폐찰은 두 신선이 매우 좋아하
는 곳이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그곳은 그들에게 이상적인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사이훙은 열성을 다해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그는 새벽같이 일어나 조
롱박에 물을 길어 놓고 땔나무를 주워 모았다. 한때 일류 배우였던 그의
두 손은 이제 차가운 아침 물에 적셔졌고 매끈한 피부는 쪼개진 나뭇가지
에 긁히었다. 그러나 그는 행복했다. 화산에서는 그렇게 일하는 걸 싫어
했던 자신이 지금은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는 생활을 하다니 스스로 생
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두 신선이 그에게 일용품을 사오라고 했을 때도
그는 즉시 제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이훙은 이제서야 종교인의 헌신
적인 마음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먼동이 채 뜨기 전이었지만 길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
터 각자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많은 어른들과 아이들로 거리는 생기가
넘쳐 흘렀다. 당나귀에 잔뜩 짐을 싣고 가는 농부들도 있었고 믿기지 않
을 정도로 많은 나무를 지고 가는 나무꾼도 있었다.
사이훙은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불현듯 자신이 매우 어리석
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이훙이 화산을 떠난 지도 3년이 지났다. 그 3년
은 양심의 속삭임을 애써 외면하고 영적인 삶에서 벗어난 기간이었다. 그
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뛰어난 무술을 과시했으며 그로 인해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는 예술의 영광, 관중들의 환호에 깊이 빠져서 많은 사람
들 앞에서 연기를 펼쳤던 배우였다. 그리고 그는 젊고 부유한 신사가 되
었으며 마음 속에 아름다운 궁전을 수없이 지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와
서야 그런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사이훙은 앞날을 내다볼 줄 몰랐던 자신을 책망했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결점이 충동적이고 성급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화산에서 다른 수행
자들과 같이 수업을 받았을 때 그는 주의가 무척 산만했었다. 스승들은
결코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이훙이 제대로 배우지 못했
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사이훙은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서 이제 그 귀중한 여러 비법을 영영 배울 수 없게 되었으며, 화산을 떠
난 후 보냈던 3년이란 세월도 자신의 영적 수련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
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사이훙은 대사부가 그에게 당부한 과업을 떠올렸다. 그러나 대사부의
당부와는 달리 사이훙은 거지에게 동전 몇 닢을 던져 준 것 외에 다른 사
람의 고통을 덜어준 일이 없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변덕스런
욕구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의 명성과 성취에 사로 잡혀 있었다.
실패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의 친척이나 동료, 나아가 스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심정에서 사이훙은 대사부가 그에게 준 마지막 선물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사이훙은 이제 다시 수행을 할 수 있는, 다시 제자가 될 수 있는, 자신
을 도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는 어떤 용서나 사과도 자
신의 실수를 덮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
는 것이었다. 지난 일은 잊어 버리고 더욱 정열적으로 앞날을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사이훙은 후디에가 옳았다고 생각했다. 후디에가 그에게 기친 불행에도
불구하고 투즈선의 별장에서 했던 말을 옳았다. 죄의식에 대한 유일한 처
방은 앞날을 내다보고 인내하는 것뿐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운명을 쫓아
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 영적 구도자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
다.
물건을 구입한 사이훙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절은 걸어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그는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을
고행의 발걸음으로, 한 번의 들숨과 날숨을 하나의 염주알로 생각했다.
신시()가 되어갈 무렵 시후 신선은 사이훙을 그늘진 마당 귀퉁이로
데리고 갔다. 폐찰의 마당에는 부서진 건물 조각들과 잡초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나와 징취안 모두 너를 지도해 줄 것이지만 나는 우선 도()를 닦는
방법의 윤곽을 잡아 주겠다.
어젯밤에 가르쳐 주었던 것에 이어 말하겠다. 자네는 신비의 문을 찾
아내야 해. 그러나 그 문은 신장들이 지키고 있지. 자네는 먼저 신장들에
게 줄 공물을 마련해야 하고 다음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곳을 통
과할 수 있도록 몸을 감추는 능력을 가져야 할 거야. 그와 함께 하늘가지
날아갈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해. 그리고 방 안에 있는 노자를 놀라게 해
서 그가 갖고 있는 금단()의 병을 낚아채야 돼. 그리고 그곳을 지키
는 신장들을 죽이고 궁전의 담을 허물어뜨린 다음 신선이 되어 지상에 되
돌아 올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배워야 해!]
[<손오공>이란 경극과 비슷하군요. 저는 거기서 원숭이 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경극이 아니야.]
사부는 준엄하게 말했다.
[자리에 앉아서 내 말을 계속 들어. 첫째 할 일은 신장들에게 줄 공물
을 준비하는 것이야.]
[그게 뭔데요?]
[금이나 보석 따위로는 신장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그건 인간의
영혼이야. 그건 자네를 이 지상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금단을 얻
고, 자네가 그 비결을 제자에게 가르쳐 주어 도맥()을 이어 놓기 전
에는 영원한 세계로 떠나지 않겠다는 맹세야.]
[맹세하겠어요. 성스러운 길을 걸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사이훙이 말했다.
[성급하게 굴지 말아라.]
시후 신선이 주의를 주었다.
[자네에게 결단력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언제나 변함없는 마음, 항심
()을 가져야 해. 항심이 없으면 우주를 날 수 없어. 우주를 난다는
것은 무중력 상태가 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자네는 지나치게 성공에
집착하고, 실패할까 우려하고 있어. 그런 마음은 오히려 커다란 장애가
될 뿐이야. 자네는 그런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안 돼. 내 말 알아듣겠
지?]
[예, 사부님.]
[몸을 안 보이게 한다는 것은, 어젯밤 자네도 말했지만, 명상의 적정
()상태를 의미하는 거야. 그 상태가 되어야 신비의 문을 미끄러져 통
과할 수가 있다. 이 문은 눈썹 사이의 제 3의 눈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제
3의 눈을 통해 자네는 언젠가 신성한 빛을 볼 수 있을 거야. 정(), 기
(), 신()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그것들은 신비의
문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때 자네는 하늘을 날수 있는 거야. 금단을 낚아
챈다는 말은 경락이 열려 자네의 기가 신비의 문을 깨뜨리며 지나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야. 그러나 그 마지막 단계에서 그곳을 지키는 신장들이
나타나는 데 자네는 그들을 죽여야 하는 거야.]
[그 신장들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망상의 대리인들이지. 자네는 가아()는 자네가 영적 성취
를 얻는 걸 원치 않아. 왜냐하면 자네가 깨달음을 얻게 되면 가아를 부정
하게 되기 때문이지. 가아는 자네와 싸워 자네가 바라는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게 할 거야.]
[가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군요?]
[가아는 가고 오는 것이며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지. 하지만 진아()
는 영원한 것이야. 그것은 변하지도 않고 형체도 없는 것이지.]
[그러면 가아를 죽인다는 것은 진아가 가아를 제압한다는 걸 의미하는
군요.]
시후 신선은 빙그레 웃었다.
[사실은 가아는 존재하지 않는 거이야.]
[가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온갖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겁니까?]
[거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자네 스스로 그 답을 찾아라. 그 온갖 문
제가 누구에 대한 것이냐? 가아는 상상의 산물이야. 그런데 우리는 가아
에 실체를 부여하고 있어. 그 결과 우리는 고통과 쾌락을 경험하게 되지.
그래서 우리는 가아의 포로 상태에 있는 거야. 만약 우리가 가아의 본질
을 탐구해 들어간다면, 그것이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것임을 알게 된다
면 그 순간 가아와 고통과 쾌락은 사라지게 될 것이니라.]
[그러면 괴로움도 상상으로 인한 것입니까?]
[그렇다. 자네는 자신을 실제의 자네와 다른 인물로 상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거야. 사실 자네에겐 진아 하나밖에 없어. 자네는 어떤
인간적인 속성도 없는 진아, 즉 <본래의 나>야. 그것은 이름도 형체도 없
는 거지. 자네가 그런 사실을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형체와 감정과
생각 따위에 매달려 있는 거야. 가아가 생기면서 자네에게 형체를 준 거
야. 지혜로운 사람은 단순히 존재할 뿐이지. 그는 생각에 매달리지 않는
다. 그는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이 하나의 신이라는 걸 알고 있지.]
[전 아직 가아를 죽이는 법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자네는 아직도 두 개의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나? 정신차려! 가아는 단
지 상상물일 뿐이야. 자네 자신밖에는 아무것도 없어. 자네는 망상을 벗
어 던지고 상상적인 형체를 버리기만 하면 돼.]
[그러면, 그 망상을 벗어 던지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본래의 나>가 망상을 벗어 던지는 거야. 그러면 <본래의 나>만 남게
되지.]
.그 <본래의 나>가 나를 망상에 묶어 두는 상상의 가아를 벗어 던지는
거군요.]
[그렇다. 우리 모두는 망상의 무지에 빠져 있는 거란다. 네 자신이 좋
은 예가 아니야? 우리는 무대 위에 서 있던 자네를 보았지. 그것처럼 완
벽한 예가 어디 있느냐? 자네는 관객들이 보고 그대로 믿는 극중 인물의
역을 하는 배우였지. 배우와 관객은 연극이 끝날 때까지 내내 환상의 희
생물이 되었어. 그것은 우주의 연극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연극이었어. 그
것이 자네의 지난 삶이었지.
명상 중에는 자네의 개체 의식에 매달리면 안 돼. 인생이라는 이 애처
로운 작은 연극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단순히 배우의 역을 하
고 있을 뿐이야. 어떤 이유로 한 장면에 등단하지만 역이 끝나면 무대에
서 내려와야 해. 하지만 분칠한 얼굴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아의 의식을 진정한 본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자아의 의식, 그
신장을 죽여야 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이제 한 가지 과제만 남게 된다.
마음의 궁전을 허물어뜨리는 것 말이다.]
사이훙은 불현듯 어떤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불안감으로 이어
졌다.
[궁전의 벽은 반드시 허물어뜨려야 한다. 그것은 자네와 자네 본체 사
이에 놓인 마지막 장벽이기 때문이야. 이 벽을 무너뜨려야만 우리는 우리
의 본체로 돌아갈 수가 있어. 일단 우리가 명상 중에 우리의 본체와 한순
간이라도 합일되기만 하면, 우리는 세상과 우리의 개체성에 대한 모든 의
식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포기라구요?]
[자네 같은 무사에게 포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자네도 결국
은 그렇게 해야 될 거야. 그것은 모든 행위와 욕구, 결정 따위를 포기하
는 걸 의미한다. 명상의 형상까지도 초월하는 것이야. 궁전의 벽은 형상
의 세계인 거야.]
[어떻게 궁전의 벽을 포기로써 허물어뜨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망상을
그런 식으로 극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망상은 헛된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의 활동적인 면이라고 보아야
해. 이러한 활동성은 형상을 만들어 내지. 그 다양한 형상으로부터 망상
이 오게 되는 거야. 하지만 모든 형상과 변화는 모두 마음 속에 있는 거
야. 자네는 나를 쳐다보기도 하고 도관과 산들을 쳐다보기도 하지. 이런
것으로 인해 자네는 자네 본질을 잊어버리고 있는 거야.
형상을 버리고 의식에 초점을 맞추어라. 그러면 다양하고 분리된 형상
은 한 편의 꿈과 같이 부서져 버린다. 마음의 움직임을 그치고 적정(
)으로 들어가라. 활동성에서 물러나와 무위()로 들어가라. 근본으
로 물러나 있을 때 모든 망상은 스스로 그치게 될 것이다.
그대 자네는 노자와 금단과 신장과 궁전의 벽이 단지 자네 마음 속에
존재 하는 것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야. 유일한 진실은 자네 자신을 형
체 없는 하나로서 깨닫는 데 있는 것이야. 하지만 말로써는 아무 것도 이
루지 못한다. 노력 없이는 어떤 성공도 있을 수 없다.
시후 신선은 사이훙에게 올바른 명상 자세를 가르쳐 주고는 명상에 잠
겨 있는 사이훙을 남겨 두고 그곳을 떠났다.
조그만 폐찰의 방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가구도 없었다. 회반죽을 바른
벽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더럽다는 느낌마저 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풍스런 멋이 배어 있었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 왔다. 백단향의 엷은
향기는 마치 옛날의 추억처럼 마당 가득 퍼지고 있었다. 바람 한점 없는
맑은 대기가 코끝으로 느껴졌다. 정적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무
겁게 깔려 있었다. 사원의 경계선에는 깊은 정적의 웅덩이가 패어 있는
것 같았다. 사이훙은 그 웅덩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물 속 가장 깊은
곳까지 침잠해 들어간 그는 거대한 피라미드 같은 자세로 깊은 휴식을 취
하기 시작했다.
사이훙은 실제로 물에 빠진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의 코,
입, 그의 모든 구멍으로 물이 들어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며 얼마 후에는
뼛속까지 물로 적셔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이훙은 그곳에서 유동성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묵직한 도관의 공기를 호흡했다. 그는 바위가 되었
다. 고요의 바다 밑바닥에서 성스러운 커다란 바위가 되어가고 있었다.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가 하나로 되어갔다. 내면은 외부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명상의 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은 우
주의 주기인가? 아니면 그의 척추를 타고 올라가는 기()의 박자인가?
그는 그의 스승들이 인간의 몸은 소우주라고 한 말이 사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 자신이 우주가 아닌가?
태초의 어둠 속에서 수천 개의 태양과 수백 개의 은하를 만들어 낸 것
은 그의 생각이었다 우주를 움직인 것은 그의 숨결이었다. 그의 우주는 5
대 원소와 만 개의 물질로 진화해 갔다. 그 많은 것 중 몇 개만 이름이
붙여지고 대부분은 이름도 없이 그 마음속에서 경이로움을 자아내고 있었
다.
사이훙은 자신의 몸이 기능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신경 조직이
정보를 전달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으며 미묘한 전기 에너지의 흐름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여러 다양한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어떤 냄새
는 향기가 났으며, 어떤 것은 악취가 풍겼는데, 그런 냄새는 몸의 각 기
관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액체와 가스의 흐름도 감지할 수 있었
다. 그 우주는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천한 인간이 만든 가련한 발명
품에 비유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유기체도 아니다. 그것은 영원
한 것이지만 신성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것은 생각과 비()생각, 존재와
비존재를 모두 다 포용한다. 그러한 모든 정의와 비유는 모두 뒤집어야
할 것이다. 그 우주는 무한히 컸다. 그는 소우주였다.
스승들은 세상은 망상이라고 했다. 단순한 논리로 생각한다면, 인간이
외부 세상의 소우주라면 사이훙 역시 존재하지 않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환영, 즉 망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명상이 어떤 상태이기도 하지만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단이라고 알고 있었다. 자신이 존재하는 실체이건
존재하지 않는 망상이건 그런 것은 그에게 관심 밖의 문제였다. 사이훙은
내부의 모든 힘을 집중시켜 한 점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망상도 실체
를 갖고 있었다. 그는 그 막을 꿰뚫고 이 문제의 해답을 구하기로 결심하
였다.
사이훙의 몸 속에서는 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는 더욱 정신을 집중시키면서 호흡을 깊이 가져갔다. 그의 마음은 몸
속 깊은 곳까지 잠수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몸의 가장 밑바닥까
지 내려가서 정액을 휘젓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명상 생활을 해왔던
그는 쉽게 정(), 기(), 신()을 하나로 합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액상의 빛 덩어리 같은 기의 정수를 위로 끌어올렸다.
명상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기의 상승이 곧 높은 영적 차원으
로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의 움직임은 정교한 것이었다. 그는
영문()이 빙빙 돌면서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엄
청난 힘이 솟구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전에 까마득하게 보였던 스승들의 모든 능력들이 그의 손바닥 안에 들
어와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그런 능력들은 알고 보면 너무 쉬운 것들이
다. 그것들은 어린애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처럼 쉽게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황홀경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자존심과
자아 의식이 날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비한 능력에 마음을 빼앗길
수록 그러한 유혹은 더욱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고전압의 인간 에너지의
가느다란 기둥 위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사이훙은 거기서 떨어지는
것 또한 너무나 쉬운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핵융합으로 생성되었던 태양이 스스로 타면서 빛을 발산하는 것처럼
정.기.신이 합일된 기()의 정수가 내뿜는 광채 또한 점점 커져 갔다.
여기 신비의 문을 미끄러져 통과해 나가는 금빛 찬란한 빛이 있다. 그러
나 거기에는 영원의 흐름을 막는 무엇이 있다. 그것은 엄청난 긴장감이었
다. 그것은 자신이 곧 맞게 될 와해를 방해하는 가아였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으나 어떤 것이 그를 뒤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빛은 깜박거
리고 있었다.
사이훙은 신비의 문을 물밀듯 통과해 가는 빛을 다시 보았다. 그것은
커다란 힘이었다. 사이훙이 해야 할 일은 그저 그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것 뿐이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그 빛이 자신의 존재를 접수해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뿐이었다. 사이훙은 이번에는 잠깐 동안만 망설였다. 그는
그 다음 순간 올라오는 광채 속으로 자신을 송두리째 밀어 넣었다.
사이훙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떤 강력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폭발로 인해 자신의 몸이 찢겨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
나 그 순간이 지나가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 이상 무엇을 느낄
자아가 없었다. 거기에는 오직 금빛 찬란한 빛과 자아가 굴복한 흔적뿐이
었다.
사이훙이 다시 인식 속으로 돌아오기 가지는 몇 시간이 걸렸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생
각하려고 할수록 점점 더 죽음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모든 정수는 빛의 흐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한 그
의 몸 전체는 어둠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사이훙은 내면에서 생명감 넘
치는 한낮을 창조해 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자신에게 춥고 외
로운 밤을 남겨 주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갇혀 있었던 그의 영혼은
밝은 빛 가운데로 떠올라 마치 잠에서 깨어난 아름답고 새하얀 백조처럼
마음껏 호흡하며 즐거워했다. 그의 영혼의 황금빛 찬란함과 기()의 자
취는 길다란 천국의 깃발 같았다. 그러나 그의 몸은 시들어 가기 시작했
다.
사이훙은 기를 흐트러트리는 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현실 세
계로 돌아오기 위해 그의 소우주를 다시 작동시키고 있었다. 그는 49일간
의 명상으로 영적 죽음 - 열반을 맞이 했던 도사들을 알고 있었다. 사이
훙은 이제까지의 명상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자신이 하는 것과 같은 49일
간의 명상은 자신을 완전한 영적 존재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그의 육체는 죽어갈 것이다. 그 긴 시간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견딘다는 것 또한 경이로운 일이라 생각되었다.
금욕 생활과 식이요법, 휴식, 운동등을 하는 이유는 바로 에너지의 낭
비를 막기 위해서였다. 사이훙은 이제 그것들이 수도 생활의 겉치레가 아
니라 깨달음을 향한 구도 생활 도중에 죽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처절한
수단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제 명상과 더불어 약초와 식이요법, 운동
을 균형 있게 맞춰 나가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사이훙은 이제 남을 돕기
로 굳게 맹세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다 영원의 세계로 들어
간다면 지상에 남아 가르쳐 줄 사람도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사이훙은 얼마 동안 휴식을 취했으나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 같지는 않
았다. 저쪽에 불을 쬐고 앉아 있는 두 사부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사
이훙이 명상 중에 일어났던 일을 말하자 미소를 지으며 곧 몸과 마음의
균형을 되찾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명상은 더욱 부드러워질 것이고
몸도 기의 급격한 흐름에 적응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시후 신선은 사이
훙이 죽음에 대해 느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것이 사이훙
이 탐구하는 목표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징취안
신선은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궁극적인 목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죽
음은 우리 인생에서 유일하게 확신한 것이지. 어떤 면에서 도사들은 죽음
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어.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사는 죽음의
차원을 초월하여,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야.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죽음에 연연해 하지 않아. 그들은 죽음을 단지 변화의 한 주기로
보기 때문이야.
노상강도의 희생자에 대한 우화가 있지. 자기 지갑에 금덩어리가 가득
차 있다고 믿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강도를 만날까봐 줄
곧 공포에 싸여 있었어.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 지갑에 금이 없다는 걸
깨닫기만 했다면 두려운 마음도 갖지 않았을 것이고 지갑은 던져 버렸을
거야. 사실 지갑에는 낙엽만 가득 차 있었지. 지갑은 인간의 육체와 같은
것이야. 낙엽은 개체성의 환영이지.
인간에겐 진실한 것이 있어. 그것은 금덩어리보다도 훨씬 귀중한 것이
야. 하지만 그건 우리의 소유물은 아니야. 그것은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
터 시작된 것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처럼 자라지도 않아. 그리고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에도 살아 있단다. 도사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아무것
도 아니란다.]
[저는 사부님이 저를 버릴까 두려워요.]
사이훙이 말했다.
[호접 도사!]
징취안 신선은 웃으며 사이훙의 법명을 불렀다.
[자네는 나비의 우화를 모르는가? 자네 극단에서 공연했던 경극에도 나
오던데.]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관련이 있죠?]
[내가 말해 주지.]
징취안 신선이 말했다.
[나, 장자는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나는
내가 나비 꿈을 꾼 장자인지, 나비였던 내가 꿈에서 장자가 되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저도 그 설화는 잘 알고 있어요.]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징취안 신선은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걸 지켜본 관객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사이훙은 당황했다. 그는 단순히 장자와 나비의 역설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모르겠어요.]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관객들도 달리 보지 않았을 게야.]
사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사이훙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변화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야.]
시후 신선이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나 모든 변화의 바탕에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법칙이 있어. 물을
예로 들어 보자. 물은 증발하여 구름이 된다. 구름은 비나 진눈깨비, 눈
이 되어 내리지. 호수의 물은 얼음이 되기도 하지. 그러나 이 모든 변화
에도 불구하고 물은 그 본질적인 성질을 잃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물이
얼음이 되면, 물이 <죽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또 물이 증발해도 물이
<죽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말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단순한 형태의 변화일 뿐 종말은 아닌 것이야. 우리는 죽음에 대
해 공포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 사실 우리가 갖는 감상적인 감정 같은 것
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야.]
징취안 신선은 잠시 쉬었다가 덧붙여 설명했다.
[자네는 이렇게 생각할지 몰라. 장자 자신이 잘 몰랐을 수도 있고 아니
면 우리에게 영적인 유희를 주려고 한 말인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는 장자도 아니고 나비도 아니야. 그는 둘 다야. 중요한 것은 장자가
이 사람이 아니면 저 사람이냐 하는 이원적인 질문에 속지 않고 그 모두
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핵심을 깨닫는 것이다.]
[명상 중에 느끼는 감각에 대해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된다.]
시후 신선은 모든 결론을 짓듯 말했다.
[명상중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오고 가는 대로 내버려두어라. 죽음조차
도 그런 망상의 한 부분이야. 그런 현상에 동화되지 말고 도와 그 근본에
대해 깊이 탐구하도록 하여라. 분리된 존재의 망상을 잊어버려라. 자신과
도를 분리시키는 그 상상의 한계를 집어던져라. 자네의 유한성을 무한성
과 합일되도록 하여라. 자신을 비하시키지 말고 영원한 존재가 되도록 하
여라. 이런 인식을 가질 때 자네는 현자들의 참된 비밀을 알게 될 것이
다. 근본으로 돌아간 사람의 마음은 근본 자체가 되는 것이다.]
방랑하는 수도자 관사이훙의 구도기
---------------------------------
도 인 2권 SEVEN BAMBOO TABLETS OF
THE CLOUDY SATCHEL
저 자 : 덩 밍다오()
역 자 : 이 인 복
발 행 인 : 김 낙 천
발 행 처 : (주) 고려원미디어
10. 황금태
사이훙은 두 신선과 함께 몇 달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들은 마치
유목민처럼 광활한 중국 대륙을 누볐다. 어떤 사건, 어떤 장소를 접할 때
마다 그들은 거기서 영감을 얻어냈다. 안개에 싸인 신비한 산봉우리, 북
부 사막의 삭막한 평야, 인파로 북적거리는 도회의 한복판, 그 어디에서
건 두 신선은 사이훙에게 모든 것은 도의 일부라고 설파했다.
사람이 우주와 합일되었다고 느낄 때 우주는 현실이 된다. 우주를 자기
밖에 있는 것으로 여길 때 우주는 비현실이 된다. 환영과 현실은 음과 양
이며 따라서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주의 흐름 속에서 헤엄치는 것은 고요
한 명상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생을 맛보고, 배움이나 철학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배움과 철학을 검증하고, 명상 안에서 샘솟는
결실을 확인하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인생의 체험은 단
순한 독서나 수도원 세계의 인위적 생활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이라고 두
신선은 가르쳐 주었다.
틀에 얽매이지 않은 방식과 깊은 통찰력을 앞세우는 그들의 가르침은
확실히 달랐다. 그들은 사이훙의 귀에 익은 도교의 경구도 가끔씩 원용했
지만 그 해석 방식은 완전히 새로웠다. 그들은 <문 밖을 나서지 않고도
현인은 하늘과 땅을 알 수 있다.>는 구절에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구도의
길을 보았다. 사이훙은 이 구절을 명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두 신선은 그게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들은 이 경구를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해석했다. <문 밖을 나서지 않고도>는 너무 빨리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을 알 수 있다>는 인생의 과업을 완성
하고 전생의 모든 결과를 씻어 버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 표현
에서 간파한 의미는 사람은 한 번 목숨을 받고 태어났을 때 자신의 지상
적 운명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관에서 구도 생활만 해 가지고는
그러한 목표를 이룰 수가 없다. <하늘과 땅을 안다>는 것은 개인적 탐구
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정작 자신들도 교육을 받았고 독서량이 풍부한 지식인이었음에도 불구
하고 그들은 전통적인 책 속의 지식과 학문적 연구 결과를 우습게 여겼
다. 이론이란 타인이 행한 한가로운 사변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그
럴듯한 이야기도 생생한 모험에는 비교할 수 없고 아무리 주옥 같은 글도
스승이 직접 전수하는 가르침에 견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학파와 학풍을
가르는 분파와 파벌은 헛된 짓거리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 검증되고
증명된 지식만이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책을 통한 배움은
인간 본성에 어긋난다. 예의범절은 인간의 자발성에 멍에를 씌운다. 사회
적 의무는 생기발랄한 정신을 무디게 만든다. 윤리는 억압이라고 두 신선
은 설파하였다.
중국을 떠도는 그들의 발길은 중국의 산간 오지 마을까지 닿았으며, 때
로는 그보다 더욱 원시적으로 살아가는 소수 민족의 생활을 접하기도 했
다. 유교의 엄격한 사회하에 세뇌 당하지 않은 이 무지한 사람들 속에서
그들은 순수하고 깨끗한 이상적 인간상을 발견했다. 정직, 만족, 느긋함,
대지와 절기에 바탕을 둔 소박한 생활은 이 사람들의 아름다운 덕목이었
다. 두 신선은 이들의 때묻지 않은 본성은 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그
럼에도 이 단순한 사람들은 지혜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혜가 필요한 것은 인간이 추론하고 더 깊이 배울 수 있는 타고난 능
력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혜가 필요한 이유는 적절한 이해가 정신
적 해방을 낳기 때문이다. 도인이 요구하는 수준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방
대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러나 두 신선은 기술과 이해를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균형추로서 <깎이지 않은 덩어리>를 강조했다. 완성을 향
한 지난한 탐구 과정에서 이상적인 상태는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
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멀건 가깝건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하여 두 신선은 역설의 가르침을 주었다. 그들은 교육을 비웃었지
만 그러면서도 사이훙에게는 스스로 배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도관 생활을 거부했지만 명상을 위해 매일 조용한 곳을 찾아 다녔
다. 그들은 순결함을 강조했지만 복잡한 기예를 닦았다. 그들은 각계 각
층의 세상으로 떠돌면서도 음식, 사고, 몸가짐, 행동면에서 조금도 흐트
러지지 않았다.
[우리는 지식의 극단적 한계에 서 있을 때만 역설과 마주친다.]
징취안 신선이 입을 열었다.
[전통적 논리는 사물은 언제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못박는다. 사람
은 수도자 아니면 보통 사람 그 둘 중 어딘가에 속해 있다. 머리가 텅빈
바보든지 아니면 매사를 삐딱하게만 보는 먹물 둘 중의 하나다. 유교와
불교가 독단적 교리의 감옥에 갇힌 것은 이런 이분법적 사고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도인을 싫어한다. 우리의 비순응주의를 거북해한다. 그러
나 그들은 경직된 세계간으로 인해 우리네 수행법의 본질과 거기에 잠재
된 창조성을 보지 못한다.]
[결국, 역설을 깨닫는다 함은 유위()이면서 동시에 무위()인
경지에 올라섬을 뜻한다.]
시후 신선이 가세했다,.
[그렇다. 둘 다라야 한다. 음양이니까. 음과 양은 서로 대립하지만 서
로를 정의 내리고,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를 파괴한다. 깨달음을 얻으려
면 너 또한 그러해야 한다. 역설을 끌어안으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머지않아 모순에 직면한다.]
징취안 신선이 말했다.
[뭐라고 하셨죠?]
사이훙이 물었다.
[모순! 모순과 역설을 혼동하면 안 된다. 그걸 구분 못하면 지금 하는
얘기가 다 부질없다.]
[죄송합니다. 설명해 주십시오.]
[내 말은 지식 안의 역설을 끌어안지 못하는 사람은 합리적, 논리적 추
론에서 불가피하게 떠오르는 모순의 덫에서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고정된 틀 안에서 모순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니까 그
런 사고는 무익한 사고가 된다.]
지식과 지식의 역사는 전통을 구성한다. 그리고 우상 파괴를 지향하는
도인에게도 전통은 유용한 것이다. 전통적 지식은 초심자의 서투른 수행
을 가다듬는 데 쓸모가 있다. 전통은 검증된 모든 과정과 개선된 방법들
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실패로 끝난 탐구의 기록까지도 간직하고 있다. 전
통은 인간 상상력의 한계를 보여 준다. 그 한계선 안으로 떠나는 자발적
인 여행을 권유하거나 혹은 한계선을 넓히려는 자연스러운 시도를 허용함
으로써 전통은 개인적 발전의 모체가 된다.
전통적 지식은 어떤 개인의 지식보다도 크기 때문에 수행자에게 수많은
선례를 제공한다. 두 신선은 사이훙에게 전통은 분명히 초심자나 무지한
사람의 자기 노력보다는 한 수 위에 있다고 말했다. 현실의 변경에 도달
하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지식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과
정에서 남겨둔 창조적 역량은 미지의 세계로 도약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배우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아무리 천재라고 할지라도 백과사전
적 지식을 가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 개인의 머리에 인간
의 지식을 모두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록에 남아 있는 약초만 해
도 1만 2천가지가 있지만 아무리 뛰어난 한의사도 그것을 모두 쓰지는 못
한다. 한자의 수는 1만 개가 넘지만 아무리 실력 있는 학자도 그 뜻을 모
두 풀이하지는 못한다.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은 굽이돌아 자시 자신으로
돌아오고 결국에 가서는 역설과 모순으로 귀결되는 무한한 우주를 탐구한
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이훙이 배우고 경험을 쌓는 노력
을 계속하되 개별적 내용에 고착되지 않고 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배움과 단련에 대한 두 도인의 입장은 <마술을 알되 마술을 멀리하라.>
는 말로 집약되었다. 그들은 사이훙에게 마술이 실재한다고 가르쳤다. 사
람은 마술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하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 무지한
사람은 피해를 당한다. 지식은 방어 수단이 될 수 있다. 사람은 마술을
알아야만 마술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논리를 비단
마술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지식, 전통, 무술, 정치학등 온갖 분야에까지
확대시켰다.
사이훙은 두 신선과 함께 있는 동안 한 번도 위험에 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 철학의 진실성을 절감했다. 산적도 출몰하지 않
았고 짐승도 공격해 오지 않았다. 그들을 불러 세우는 군인도 없었다. 두
신선과 같이 다니면 아무런 갈등이 생기지 않았고 따라서 싸울 필요가 없
었다. 사이훙의 두 사부는 유위()와 무위()를 초월해 있었다. 그
들은 마치 다리를 사뿐히 건너듯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도의 길을
걸어갔다. 그들은 두려움 없이 마음대로 떠돌아다녔다. 그들은 배움의 극
치에 도달했으면서도 완전한 자발성과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그들이 마술을 알면서 그것을 멀리 했기 때문이었다. 사이훙이 자
기 생각을 말하자 두 신선은 멀리 떨어진 도관 하나를 가리켰다.
[마술은 얼간이를 위한 것이고 우상은 머저리를 위한 것. 진실은 미묘
하고 포착하기 어렵다. 네가 방금 깨달은 것은 지식의 산물이 아니고 그
보다 더 큰 무엇의 단초다. 지식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궁극 목적은 아니
다.]
징취안 신선이 말했다.
[지식이란 무엇일까?]
시후 신선이 거창하게 물었다.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이 세상은 아니다. 결국 이 세상은 헛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화려한 의상과 눈부신 무대장치, 사람을 홀리는
음악, 매혹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한 편의 연극이다. 그것은 비애와 비극,
행복과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한때 배역을 맡았던
경극보다도 현실적이지 않다. 네가 경험하는 모든 것, 네가 보는 모든 것
은 보이지 않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다섯 가지 색을 보고, 다섯 가지 맛을 느끼고, 다섯 음조를 듣
고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마술을 알되 마술을
멀리하라.>고 우리는 너에게 말했다. <세상을 경험하라.> <도를 따르기
위해 여행하라.> 결국 이런 말들도 잠정적인 가치밖에 못 갖는다. 이 익
살맞은 무대에서 네가 맡은 배역을 충실히 연기할 수 있게끔 도움을 줄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소극(), 다채로운 명암과 색상과 반
사광이 어지러이 뒤섞인 만화경이다.]
징취안 신선의 말이 이어졌다.
[모든 지식은 무한하다.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와 비교하면 그것은 부정
확한 근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을 멀리하기 위해서 지식을 알아라.
너의 내관()밖에는 믿을 것이 없다. 믿음의 토대를 신에다 둘 것인
가? 그러나 우리는 신에 대해 하는 바가 거의 없다. 우리 눈앞에 나타나
는 신은 신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도관과 경전은 범인()을 위한 종
교적 극장일 뿐이다. 신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진실의 토대는, 아
무리 숭고한 이상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이상에 두어서는 안 된다. 무언
가 다른 것이라야 한다.]
[하지만 경전은 성스럽습니다. 경전은 진실이 아닌가요?]
사이훙이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시후 신선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경전은 인간이 쓴 것이다. 대략적인 길잡이로서는 유용하지. 경전에
담긴 진실은 일반인의 몽매한 상태와 견줄 때 대단히 높은 수준에 있으니
까. 그러나 깨달은 자에게는 경전이 하찮은 부조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다.]
[화산 시절에 사람들은 저더러 죽서칠판에 통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
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읽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나아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끝까지 읽었다고 하더라도 저의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는 말씀인가요?]
[전설에 따르면 죽서칠판은 장수신()이 지상에 보낸 것이다. 아
득한 옛날에도 지구는 영적 정화 상태에 이르지 못했었고 신들은 지구로
밀사를 보내 사람들을 도왔다. 밀사는 이따금 경전을 가지고 와서 가치
있는 사람이 지침으로 삼을 수 있도록 그것을 남겨 두고 갔다. 죽서칠판
은 그런 선물이었다.
신은 그것을 쿤룬 산맥에 있는 한 고봉의 동굴에다 두었다. 인간이 스
스로의 가치를 입증하려면 영웅을 보내 그것을 가져와야 했다. 현자들은
한 아이를 선택했다.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너는 그 거룩한 선물을 찾
아와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 아이는 숲에서 나무를 하던 농부가 발견한 알에서 태어
났다고 한다. 농부와 아내는 알을 집으로 갖고 왔다. 알이 부화하고 준수
한 소년이 나타났다. 모험에 나서야만 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 소년이었
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한 과거에 죽서칠판을 가지고 돌아왔다. 원래
의 것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영국과의 아편 전쟁 기간 중에 마오산 어딘
가에 숨겨졌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권위자들
이 많은 주석을 달아 놓은 사본이다. 가문이나 분파에 따라 각기 다른 판
본이 존재한다.
한마디로 죽서칠판은 깨달음에 이르는 360가지 방법을 상술한 책이다.
360이라는 수는 원의 360도에 대응하는 숫자이다. 별의별 분야에서 쓰이
는 방법론이 여기 총망라되어 있다. 고도로 금욕적이고 명상적인 방법에
서 상호 절정에 이르는 성교 기법 같은 물의를 일으킬 만한 내용도 있다.
철학, 호흡법, 연금술, 약학, 제례, 의식(), 기도등 인간을 의식의
고양 상태로 이끌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논의하고 분석하고 미래의 세대를
위해 기록으로 남겼다. 심지어 무술도 격투기로서가 아니라 자기 수련에
이르는 완벽한 방법으로서 진지하게 검토된다.
죽서칠판은 네가 익혀야 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완
전히 숙지했다고 해서 기고만장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너의 영적
과제를 완수하는 것이니까.]
이번에는 시후 신선이 입을 열었다.
[이 책 너머를 보아라. 여기 360가지 방법이 수록되어 있듯이 너는 다
재다능하고 모난 데 없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편협한 이론을 고집하지
말아라. 이론은 오직 틀로, 발판으로 삼아라. 전통으로 되돌아가더라도
다시 하늘 높이 솟구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징취안 신선이 말했다.
[죽서칠판을 네가 읽고 안 읽고는 중요하지 않다. 너는 그것을 사전처
럼 지루한 느낌을 가지고 읽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을 다 읽으려면 상
당한 의지력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읽고 난 다음 너는 거기서 성분을 추
출하여 마치 합금이라도 만드는 사람처럼 인생의 용광로에 그것을 녹여
너의 독특한 개성으로 변모시켜야 한다. 교조적으로 어떤 책을 따르지 말
아라. 아무리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책을 놓고 신의 말씀
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기다렸다는 듯이 시후 신선이 말했다.
[진리는 결국 배움에 있지 않다. 사람은 불가피 하게 자기 기예의 한계
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자아의 초월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명상을 통해 사람은 영성()과 융합된다. 최고 단계에 이르면
자아는 더 큰 의식 안으로 흡수된다. 개체성은 상실되고 기예를 통한 성
취는 있으나마나한 것이 된다. 지식의 추구는 수행자의 지속적인 성장과
건강에 꼭 필요하며, 타인을 돕고 완전론(인간이 현세에서 완전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유익하다. 그러나 인간이 궁극
적으로 이루려는 것은 명상의 최고 경지다. 모든 기에를 넘어서는 그런
경지다.]
진리. 사이훙 내면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이제까지 그는 지식을 축
적하느라 발버둥쳤고 방법론을 완성하느라 골머리를 앓았으며 고대의 문
헌을 수집하고 수많은 스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도관의 울
타리 속에서 그가 지난 세월 동안 쌓은 경험과 지식은 공허하기만 했다.
사이훙은 노상강도와 지갑의 우화를 떠올렸고 죽서칠판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스승들은 그의 지갑에 낙엽밖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
었다. 현자들의 그 모든 지식은 지식과 기예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깨
달음으로 제자를 이끌기 위한 방편이었다. 모든 문명은 그림자 인형극이
었다. 개념화할 이유도 구조화할 이유도 없는 진리의 빛이 닿은 조잡한
투영물이었다.
사이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러나 평생
부끄러움을 맛보느니 잠시 곤혹스러움을 겪는 편이 낫다고 자신을 다독거
렸다. 그는 산마루로 나갔다. 그리고 화산에 있는 대사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사이훙이 여기까지 온 것은 그 분 덕택이었다. 사부는 사이훙
이 이렇게 성장할 때까지 오랜 세월 말없는 도움을 베푸셨다.
산 속에 있으면 사이훙은 늘 마음이 차분했다. 평지에 있을 때와는 전
혀 다르게 삶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수많은 인간들이
바글거리며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는 저잣거리가 산 속에 들어 앉아 있으
면 그렇게 왜소해 보일 수가 없었다. 드높은 산봉우리에 있으면 이 세상
의 변경에 와 있다는 느낌, 천상의 세계가 코 앞에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드넓은 지평선을 바라보노라면 모든 갈등과 정신적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그의 영혼은 날아가기를, 두둥실 떠오르기를, 저 산과
하늘의 좁은 틈새로 빨아 들여지기를 갈구했다. 포근하고 화창한 날이었
다. 그는 위엄 있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시후 신선의 말에 귀를 기울였
다.
[몸과 상상력과 호흡은 영적 수련을 하는 수행자가 곧바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심오한 상태에 즉시 이를 수는 없다. 우리는 의식의
통제 아래 가장 쉽게 둘 수 있는 우리 안의 부분들을 먼저 활용해야 한
다. 그리고 나서 좀 더 특수한 기능들로 서서히 접근해야 한다.
몸과 상상력과 호흡을 그대로 방치했을 경우 그것들은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이것이 바로 역설이다. 우리의 몸은 아예 수련을 쌓기 어려울 정도
로 상태가 악화된다. 우리의 상상력은 멋대로 흘러 우리의 참모습을 가린
다. 잠재의식의 기계적 통제 아래 놓인 호흡은 육체라는 껍질에 단순히
산소만을 공급하는 기능으로 전락한다.
영적 수련의 첫 단계는 실재적인 것과 더불어 시작된다. 몸은 손발 뻗
기, 자세, 약초, 무술, 명상을 통해 단련된다. 몸이라는 기초 재료가 튼
튼해야 수행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
상상력은 목표를 제시하고 보통 때는 의식으로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의
운동을 이끈다. 상상력의 강력한 힘은 몸과 마음을 모두 압도할 수 있다.
호흡은 우리의 의식적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일차적 대상이지만 동시에
마음과 육체를 연결하는 고리다. 호흡의 리듬, 비율, 강도, 빠르기에 따
라 마음도 제각각 다른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규율은 완성을 앞당긴다. 재갈이 사나운 말을 길들이듯 규율은 정신을
길들인다. 활 시위를 팽팽히 당기면 화살은 가장 억제되고 긴장된 상태에
서 조준된다. 시위를 놓으면 화살은 정확히 과녁에 가 박힌다. 오늘 나는
네가 발전하는 데 아주 중요한 수행법 한 가지를 가르치겠다. 황금태(
)를 만드는 일이다.
황금태는 복부에 만든 강한 역장()을 말한다. 황금태는 몸을 강화
하고 장기()를 튼튼히 한다. 머리가 빠지고 주름살이 늘고 관절이 굳
고, 눈과 귀가 어두워지고 기억력이 감퇴하고 근육이 약해지고 생기가 사
라지는 것은 우리 몸의 내분비선과 장기 기능이 저하 되어 생기는 현상이
다. 열심히 수련을 쌓으면 황금태는 몸에 활기를 다시 불어넣는 생명력의
보고가 된다.]
[그럼 죽지 않게 되나요?]
사이훙이 물었다.
[그렇다. 하지만 언젠가 썩어 없어져야 하는 이런 육신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지. 내 말은 너의 호흡과 수명이 깨달음을 얻기에 충분할
만큼 오래도록 존속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바로 영적 죽음이다.]
[영적 죽음이 도교의 전유물은 아니다.]
징취안 신선이 끼여들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니르바나>라고 부르고, 힌두교에서는 그것을 <마
하사마디>라고 부른다. 도교에서는 이것을 <공()과의 융합>이라고 부른
다. 황금태를 설명하려면 죽음도 다루어야 한다.]
그들은 사이훙에게 모든 인간은 세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육체의 자아는 본능, 충동, 정욕이다. 탄생과 함께 몸 안에 갇혀 있다가
몸과 함께 서서히 퇴락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유체의 자아는 유전적 자아다. 부모를 빼다 박은 부분인데 신체적으로
도 닮았을 뿐 아니라 심리적, 성격적으로도 닮았다. 이 물려받은 개성이
한 개인의 운명을 상당 부분 좌우한다. 부모의 형이상학적 자질이 여기
담겨 있고 잠재적 발전의 기본적 토대 또한 여기 있다. 교육, 부모의 가
르침, 개인 스스로의 노력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나머지 부분들이다.
유체의 자아는 이 밖에 판단, 추리, 학습 기능을 담당한다.
영체의 자아는 어떤 물리적 힘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불멸의 정신이다.
영체의 자아가 갖는 유일무이한 목적은 우주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다. 전일자()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배우고 정화하고 모든 부정
성을 털어 내야 한다.
이 세 자아들은 평상시에 모두 활동한다. 행동이 필요할 때 이들은 재
판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자아 도는 저 자아가 결정을 주도하여 개인
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두 신선은 사이훙에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영적 죽음을 맞이하는 것,
즉 공과 융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려면 사람은 윤회의 사슬에서 벗
어나야 한다. 지상에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아이를 낳게 되
면 윤회의 사슬에 자동적으로 편입된다. 자신의 형이상학적, 형이하학적
유전자를 후손에 전함으로써 사람은 업을 영속화한다. 깨달은 자가 생물
학적 후손을 두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모든 자격을 구비한 수행자는 이 세 자아를 융합시켜 새로운 역동적 자
아를 만든다. 새로운 자아는 지상의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 높이 상승하
여 또 다른 새로운 존재의 평면에 도달한다. 현자 중에서도 우주의 근원
으로 곧바로 되돌아간 사람은 극소수다. 그 대신 더 이상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모든 것이 생각만으로 이루어지는 천계에서 머물다가 더 큰
변화를 거쳐 마침내는 공과 합일되기에 이른다.
여러 자아를 묶어 현실 지평을 넘어서는 것은 초인적인 작업임에 틀림
없지만 두 신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사이훙에게 말했다. 사
람은 무로 돌아가기 위해서 39가지의 존재 단계를 거쳐야 한다. 지상의
삶은 가장 낮은 단계였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사부가 죽으면서 자신의 황금태를 제자의 몸에 집
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자는 사실상 사부의 자식이 되는 셈이었
다. 제자는 놀라운 힘을 전수 받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좋은 것이든 나
쁜 것이든 사부의 운명까지도 물려받는다. 제자가 좀더 큰 힘을 가지고
운명을 극복하면 사부는 지상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그런 기술을 거
의 사용된 적이 없었다.
황금태 수행법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사이훙은 복잡한 기공, 즉 호흡
조절법을 완전히 익혀야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소주천 운행, 열두
경락 명상, 기를 통해 기경팔맥()열기 등등. 사이훙은 화산에서
이미 그것들을 터득했다. 그들은 모두 12정경()과 기경팔맥을 열었
다.
그러자 사이훙은 신비의 문의 빛을 그저 상상이 아니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순수한 생명력의 빛이었다. 사이훙은 그 빛을 단전()으로 끌
어내려야 했다. 그런 다음 단전에서 심장 바로 밑의 강궁()까지 끌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이 에너지의 흐름에서 황금태가 만들어졌다.
사이훙이 이 새로운 명상법을 처음으로 연습한 것은 어두운 밤이었다.
그는 일행이 임시로 기거하던 폐허가 된 도관에서 빈 방을 하나 찾아냈
다. 어떻게 이 신성한 장소가 파괴되고 구도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
을까? 어떤 미신과 위험이 이곳을 이토록 황폐하게 만들었을까? 그러나
주인 없는 건물이기에 그들이 머물기에는 오히려 좋았다. 사이훙은 앞서
살았던 이들의 구도를 향한 열망이 배어 있는 허름한 방에서 명상에 들어
갔다.
그는 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양탄자와 사슴 가죽을 깔고 앉았
던 화산 시절의 호사스러움은 간 데 없었다. 사지를 정확한 위치에 놓고
두 손은 정해진 방식대로 깍지를 꼈다. 사이훙은 이상적인 자세를 취했
다. 일상의 어지러움에 길들어 있던 몸과 마음은 점차 안정된 구조를 되
찾았다. 사이훙의 개성은 정확한 조화의 집합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생명의 뿌리까지 깊숙이 숨을 쉬었다. 풀려난 에너지는 그가 열어 둔 통
로로 올라갔다.
사이훙의 명상은 고유한 기하학적 구조에 따라 진행되었다. 몸에 있는
영적 중추들은 직선상에 있었다. 그것들은 고유한 빛깔과 내적 얼개를 갖
고 있었다. 그의 에너지는 선으로 흘러 들어가 경락을 통과했다. 선은 점
을 이어 주었다. 연결망이 움직이면서 높은 에너지로 찬연히 타올랐다.
체계에 연속성이 등장했다. 펼침이 시작되었다.
사이훙은 에너지의 흐름을 통제하기 위하여 정확히 사부가 지시한 바대
로 했다. 일상 생활에서는 에너지, 몸 속 점들 사이의 거리, 마음이 항상
맴돌고 바뀌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개성 구조를 특정한 형태 안에 묶
어 두자 집중력이 강화되었다. 도교는 물질과 정신을 가르지 않았다. 육
체적이고 가시적인 세계에서 시작하여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로
넘어갔다.
사이훙은 힘을 느꼈다. 가슴 뿌듯했다. 그것은 자신감과 확신이었으며
동시에 위기의식이기도 했다. 그는 명상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영적 성숙
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몸 속에서 끌어올린 에너지는 그에게 탐
구를 완수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편입된 기하학적 틀은 도
덕과 무관했다. 점과 선의 얼개는 윤리를 몰랐다. 사이훙은 명상을 통해
힘을 얻었지만 선악의 선택은 여전히 그의 손에 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
명상은 악한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무기를 손에 쥐게
되면 아무리 선한 사람도 유혹을 느끼게 된다.
사이훙은 엄청난 힘과 능력을 확보할 수 있는 영역에서 머물고 싶은 유
혹을 억누르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더 높이 끌어 올렸다. 그는 스스로를
심장보다 높은 영역으로, 외부 세계와 감각 세계에 무관심해질 수 있는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움직임도 이 아
슬아슬한 진로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사이훙은 정수리로
들어가는 문, 즉 정문을 열고 라오쯔의 작은 동굴로 들어섰다. 그의 영혼
은 황금빛에 잠겼다. 사이훙은 생명을 주는 태양의 광휘처럼, 수많은 별
들의 신성한 불꽃처럼, 그 빛을 받아들이고 끌어안고 그것에 녹아 들고
그것을 사랑했다. 그는 지고의 행복을 맛보았다. 거기에 신이 있었고, 선
()이 있었고, 거룩하고 신성한 힘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 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완전한 평온과 불멸성이었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사이훙의 사부들은 너무나 당연한 말을 했었다!
그는 사부들을 우둔하고 현실 감각이 없고 가르침에 인색한 별스런 인간
들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사부들은 너무도 자명한 가르침을 이해하
지 못하는 제자를 오히려 안타까이 여겼음에 틀림없다. 신성과 불멸성은
우리 모두의 안에 있었다. 그것은 <문 밖을 나서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진리였다.
당신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것을 입으로 설명하느라 스승들은 얼마나 애
를 먹었을까. 이제 사이훙은 보았다. 이제 그는 외부 세계의 그 어떤 것
도 이것과 견줄 수 없음을 알았다. 무술도, 아름다운 도자기도, 위대한
문학도, 명성도, 행운도 이 활활 타오르는 생명력에 비할 수는 없었다.
이 순수한 에너지, 활력의 정수는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우주의 운행을 최초로 야기한 움직임이었다. 어두운 혼돈
의 세계를 처음으로 베어 내어 거기서 현실을 이끌어 낸 빛줄기였다. 이
제 그 빛줄기는 그의 몸을 따라서 단전까지 내려왔다. 그것은 태양의 따
사로운 햇살처럼 반짝거렸고 수분으로 적셔진 영혼의 비옥한 흙을 매만졌
다. 그것은 계곡을 덥혀 주었다.이제 그는 창조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황
금태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말은 헛되다. 그것은 영적 완성의 오묘함을 그리지 못한다. 감정 또한
헛되다. 그것은 탄생의 심오함을 담아 내지 못한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아이를 만들 때 두려움과 경이에 젖는다. 영적인 탄생을 이해하기란 그보
다 몇백 배 더 어렵다. 결국에 가서는 지식도 헛되다. 이 육신의 껍질 또
한 헛되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이 육신의 고치에 의지하여 산다. 우리는 피와
살로 된 이 그릇을 사랑한다. 그것은 숭배와 욕망의 대상이지만 질병과
폭력으로 파괴되기도 한다. 다른 생명체로 주린 배를 채우고 어떨 때는
순수한 사랑을, 어떨 때는 추잡한 사랑을 나눈다. 젊었을 때는 그것을 흥
청망청 소진한다. 나이 들어서는 그것이 나를 배신했다고 원망한다. 결국
은 평생 동안 점점 썩어 문드러지는 육체의 기둥에 갇혀 살아왔음을 깨닫
게 된다.
도인들은 인간의 잠재성을 찾아냈다. 그들은 인간의 가능성과 생명력을
찾아냈다. 그들은 불멸의 것을 육신의 껍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게끔 그
생명력을 변형시키고 인도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불멸의 영혼이 온전하게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육신을 보존하는 것, 이것이 바로 황금태 명상법의
목적이었다.
사이훙은 새롭게 태어났다. 탄생을 알았고 창조를 알았다. 그러나 죽음
없이는 삶도 없다. 사이훙은 삶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죽음도 알아야 한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해 말, 추분이 막 지났을 때 세 사람은 장쑤성()의 마오 산으
로 향했다. 그들은 산으로 들어가서 외부와 격리된 아늑한 동굴을 찾아냈
다. 아침 저녁 하루에 두 번씩 안개가 산허리를 휘감아 돌았다. 그러면
산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외로운 산정에는 인적이 없었다. 새가 울고 작
은 시내가 졸졸 흐르고 바람은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어 대었다. 사이훙은
두 신선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머지 않아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시후 신선이 말했다.
[이 풍진()을 떠돌아다니기 벌써 몇 해인가. 아, 덧없도다.]
징취안 신선이 옆에서 거들었다.
[저자에 가서 물건을 좀 사오너라. 그리고 나서 우리를 위해 장작 더미
를 쌓아 다오.]
시후 신선이 말했다.
사이훙은 절을 하고 산 밑으로 내려왔다. 말없이 물러 나오기는 했지만
마음 속은 어지러웠다. 그는 화산에서 다른 사부들이 육신을 떠나는 모습
을 보았고 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를 두 눈으로 목격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자기의 사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시후 신선과 징취안 신선이 이 세상을 하직한다는 소리에는 가슴
이 철렁했다.
그들은 죽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공부를 통해 사이훙은 정상인의 죽음
은 단순한 변형이며 영적 죽음은 더 높은 의식의 차원으로 올라서는 것임
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갑자기 밀려오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들은 이제 사이훙을 홀로 남겨두고 떠나려 한다. 사이훙은 그의 행동을
하나하나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던, 하늘 같이 믿었던 사부를 잃게
된다. 이제 겨우 사부를 모시는 일에 익숙해져 있건만.
사실 사이훙은 한 번도 그 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가 했던 반항
도 사실은 자신이 거부한다던 권위와 긴밀히 얽혀 있었다. 사부가 곁을
떠나면 이제부터 어떻게 지낼지 사이훙은 걱정스러웠다. 화산, 경극단 아
니면 왕 쯔핑한테로 돌아갈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어떤 행태로건
늘 영적 탐구와 관련을 맺고 지내리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덧없고
불안정했다. 여러 날 동안 나무를 하여 장작 더미를 쌓으면서도 사이훙은
인간이 만드는 모든 것은 언젠가 종말을 맞이한다는 생각을 했다.
약속한 날이 밝아왔다. 냉랭하고 안개가 자욱한 이른 새벽이었다. 동굴
속의 두 신선은 앉아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모닥불 옆으로 그
들을 훔쳐 보았다. 비쩍 말랐으면서도 대꼬챙이처럼 꼿꼿한 시후 신선은
좀 더 늙어 보였고 주름도 많아진 것 같았다. 불빛에 반사된 그의 백발은
하늘을 가르는 번갯불 같았다. 맑은 눈동자는 영롱한 보석처럼 반짝거렸
다. 징취안 신선은 더욱 침착해 보였다. 동굴 어귀를 담담히 응시하는 그
의 얼굴은 평정을 잃지 않는 영웅의 모습이었다. 불과 몇 시간 뒤에 이
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사이훙은 믿을 수가 없었다. 미지의 세계로 떠
나는 여행을 앞두고 그들은 어떤 감정이나 그리움을 느끼고 있을지 사이
훙은 궁금했다.
[현자는 자신의 영혼을 저 너머의 위대한 세계로 보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시후 신선이 속삭였다.
[그는 이미 존재의 더 높은 지평들을 보았다. 그리하여 죽음을 앞두고
도 자기가 떠나고 싶어하는 곳에다 마음을 단단히 묶어둘 수 있다. 죽으
면 그의 영혼은 그리로 간다.]
이번에는 징취안 신선이 입을 열었다.
[보통 사람은 세 자아가 뿔뿔이 흩어져서 삶의 수레바퀴로 다시 말려든
다. 새로운 형식을 부여 받지만 슬프게도 그가 떠났던 악마 같은 세상으
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마라. 그래야 이 필멸의 지평
에서 너 자신을 구할 수 있다.]
다시 시후 신선이 정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아직 젊다.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우리는
살만큼 살았다. 구도의 길을 계속 걸어라. 화산의 네 사부 곁으로 돌아가
라. 너를 자상하게 이끌어 줄 분이다.]
[우리가 떠난다고 섭섭해 하면 안 된다.]
사이훙이 눈시울을 붉히는 것을 보고 징취안 신선이 말했다.
[이것은 육신의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벗어 던지는 옷가지와도
같다. 우리의 참된 자아는 순수한 빛으로 나타날 것이다. 슬퍼하지 마라.
우리의 승리를 기뻐해 다오.]
[잘 있거라.]
시후 신선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저 너머 세계를 보아라.]
징취안 신선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역시 눈을 감았다.
사이훙은 꼼짝 않고 있는 두 육신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 부동성의
내부에서 역동적인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사이훙은 알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이제껏 어떤 인간이 보여 주였던 에너지보다도 더 강한 에너
지의 흐름이 정수리를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서서히 그들의 몸은 어둠
으로 접어들었다. 동맥은 힘을 잃어 갔다. 장기는 기능을 멈추고 말라 갔
고 신경들은 무디어 갔다. 생명의 모든 자취가 위로 몰렸다. 거기서 끝이
났다. 육신은 기울었다. 태양은 머릿속에 갇혔다. 세 자아는 하나가 되고
그 강력한 융합 속에서 영혼은 스스로 떠나갔다.
지켜보는 사이훙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0분쯤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시간이 사이훙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
들은 세상을 하직했는가? 아니면 가만히 있는 것인가? 사이훙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아까부터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그래야 기운을
조금이라도 차릴 수 있는 것처럼.
드디어 사이훙은 알아보기 위해 일어섰다. 숨도 맥박도 없었다. 그들은
죽어 있었다. 그들은 삶을 초월했다. 초인적으로 죽었다. 마치 우주의 윤
회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사이훙에게 남은 것은 두 신선의 비범한 삶에
대한 기억뿐이다. 사이훙은 이제 부상, 사고, 질병, 운명의 장난, 성격적
인 약점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길 잃은 아이처럼 여겨졌
다. 어른들이 모두 떠나간 집에서 알 수 없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갇혀 있
는 아이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영웅은 패배하지 않으며 은둔자는 불멸의 육체를 가진
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들은 죽음을 모면할 수 있다는 증거를 갖고 싶어
한다. 전설과 종교, 심지어는 어린아이가 읽는 동화를 보아도, 죽음에 대
한 즉물적인 공포와 죽음이라는 절대 법칙을 깨뜨릴 수 있는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가 나타나 있다. 영웅의 경지에 올라서지 못한 사람들이 마
지막 적수를 쳐부수는 누군가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얻는 심리적 위안, 이
것이 바로 영웅의 존재 이유였다.
어느 시대에서건 사람들은 쓰러진 인간을 신화를 통해 절묘하게 포장했
고 죽음을 교묘하게 숨겼다. 사실은 적에게 참수 당한 구안 공이 불멸의
존재로 떠받들어졌다. 수많은 도인들이 용의 등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존재라고 미화되었다. 수없이 많은 연금술사들이 - 심지어는 진시황까지
도 - 자기들이 불사()의 영약()이라고 믿은 물질을 먹고 죽어갔
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영웅을 쥐어짜 냈다. <보살>, <예수>, <불사신>을
원했다. 자기의 육신으로 전 인류의 어마어마한 죄를 감내하려는 인간을
애타게 갈구했다. 죽음의 형벌로부터 누군가가 자기들을 구해주기를 바랐
다.
그러나 사이훙은 여기 혼자 있었다. 스승들은 가버리고 이제 그는 자신
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나약함을 혼자 힘으로 극복해야 한다. 그들은 사
이훙의 세상살이와 초월을 모두 그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으로 남겨두고
말 없이 떠났다. 그들은 종교라는 익살극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자
기 자신을 위해서 죽음을 초월하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사이훙은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고통과 질병을 견뎌내고 자신의 유한성에서
갖가지 고난을 이겨내어 마침내 고독하고 순결하게 이 세상을 떠나야 한
다는 것을 알았다.
사이훙은 자리에 앉았다. 그가 온몸으로 빨아들이려고, 생생한 증인이
되려고 애썼던 순간을 기리기 위해서. 나도 죽는다는 생각에 사이훙은 자
기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두 도인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들
은 이미 작아져서 인간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촛불과 향만 있었더
라면 사이훙은 산 속의 작은 사당에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그들은 깎아 놓은 상처럼 단단히 그 자리에 박혀 있었다. 2년을 함께 보
냈건만 그들을 처음 만난 날 밤 이후 그들이 살아온 내력이나 배경에 대
해 새로 알게 된 것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사이훙은 묻
고 싶은 질문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들은 사이훙에게 아무런 답도 주지 않
고 이승을 떠났다.
사이훙과 두 도인 사이에 쳐진 장막은 거둬 낼 수가 없었다. 그 장막은
불투명했다. 죽음의 장막 뒤에서 그들이 말을 걸어 오면 얼마나 좋을까,
사이훙은 턱없는 기대를 걸었다. 죽음 너머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그들의
입에서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이훙은 한숨을 내쉬었다. 산
자에게 죽음은 끝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동굴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사이훙은 그제서야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깨
달았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할 일을 가졌다는 것은 다시 없는 복이라고 그
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죽음이 나타나면 인간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
들지만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 무서운 마비 상태에서 헤어나오는 것이
다. 사이훙은 한 사람씩 동굴에서 꺼내 관 위에 눕혔다.
사이훙은 불이 잘 붙도록 참깨 씨를 두 도인의 몸에다 뿌렸다. 어쩌면
그들이 돌아올지 모른다. 사이훙은 왠지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생각
이 들었다. 잠시 꿈나라에 간 것처럼 너무도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
지만 그것은 사이훙의 감상이었다. 두 도인은 영원히 가버렸다.
사이훙은 동굴에서 횃불을 가져온 다음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처음
에는 점잖게 조그맣게 타올랐다. 그러나 얼마 뒤 겹겹이 쌓인 장작을 단
숨에 타고 오른 불길은 두 시체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솟아 오르는 화
염을 보니 와락 겁이 났다. 육신이 불에 타는 광경은 너무나도 충격적이
었다. 사이훙은 달려가서 불을 끄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눌렀다. 무력
하게 허물어지는 인간 앞에서 느끼는 정의감은 과연 뿌리깊은 것이었다.
육신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불길은 순식간에 옷을 집어삼켰다. 불
꽃이 더 높이 치솟고 나무가 갈라지고 불꽃이 튀었다. 연기가 솟아 올랐
고 사이훙은 뜨거운 열기를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야 했다. 안개는 여
전히 자욱했다. 태양은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이훙은 바닥에 주저앉
았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용한 아침은 온통 불꽃으로 물들었다.
이틀 뒤 사이훙은 재를 수습하고 조각난 뼈를 바수어 숲에다 뿌렸다.
그는 동굴로 돌아와서 자신이 머물렀던 흔적을 주의 깊게 없앴다. 모닥불
을 피웠던 자리의 흙은 뒤집고 바위는 물로 깨끗이 씻었다.
그 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
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사이훙은 깎아지른 벼랑 위에 서서 은빛 안개를
내려다 보았다. 지금껏 살아온 삶이 꿈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꿈이라면
지금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한때 도에서 벗어났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것을 다시 찾아낸 그 자신이
었다. 도를 추구하는 사람은 혼돈과 감상주의 그리고 도와의 합일을 방해
하는 모든 것을 물리쳐야 한다. 반평생을 살아오면서 사이훙은 그의 가
문, 장난기, 우유부단한 성격, 호전성, 미적 도취, 규율에 대한 반감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거기에 굴복할 때마다 그는 도에
서 멀어졌다. 화산을 떠나 상하이 거리로 나섰을 때 그는 한 마리 부유하
는 나비와 다를 바 없었다.
시후 신선과 징취안 신선은 사이훙의 시야를 감정 너머로 열어 주었다.
그들의 가르침 덕분에 사이훙은 자신이 격정과 맹목적인 반항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개 없이도 정말로 날 수 있게 감정을
두고 떠나는 방법을 배웠다.
두 신선은 단순한 기술적 지식과 주지주의, 심지어는 경전도 맹종해서
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신전은 바로 그의 몸이었고 신성은 그의 안에 깃
들여 있었다. 그런 간단한 이치를 파악하게 된 연후에는 모든 배움은 번
거롭게 된다.
사이훙은 진리를 향한 도정에서 자꾸만 발을 헛디뎠다가 다시 돌아오기
를 밥먹듯이 되풀이했지만 그것은 그가 성장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할 피
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그는 노력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기어 올랐다. 사
이훙은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성장하는 것을 절감했다. 그것은 수행을 통
해 얻을 수 있다던 단순한 신체적 에너지의 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본성의
발현이었다.
원래의 참된 자아가 마침내 싹이 터서 만개한 것이다. 사이훙은 <깎이
지 않은 덩어리>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것은 감정적 동요와 오해와 사
회화로 손상되지 않은 청정무구함이었다. 도를 통해서 그의 안에서는 빛
과 순결의 황금태가 자라나고 마침내는 그것이 진리에 닿게 될 것이다.
날이 밝자 사이훙은 하산하기 시작했다. 파릇파릇한 나뭇잎들은 하얀
줄기와 대비되어 더욱 선명해 보였다. 빨갛고 노랗게 물든 잎들도 있었
다. 숲은 떨어진 단풍잎으로 덮여 있었다. 앙상한 줄기는 하늘로 뻗어 있
었다. 사이훙은 깊은 숨을 들이 마셨다. 촉촉한 흙냄새가 맡아졌다. 식물
도 숨을 쉬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해가 나왔다. 사이훙은 웃었다. 그는
떠나고 싶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