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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by Casey,Riley 2020.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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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술치료사이자 박서보의 딸인 저자가 박서보의 삶과 예술을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박서보가 평생 작가로만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끔찍하게 여겼던 아버지의 성격을 알고 보니 아버지 개인만의 것이 아니고 박서보가 살아낸 시대가 박서보에게 남겨놓은 흔적이고, 그 시대 모든 어른이 조금씩 나누어 가진 특성이었다고 말한.

 

 

Short Summary

2019518일부터 9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박서보의 회고전이 열린다. 70여 년의 화업을 정리하는 이번 회고전에서는 1950년대 초기작부터 신작 2점까지 총 16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박서보는 한국 현대미술의 태동과 변화의 중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이다. 그는 표현적 추상회화로 시작하여 원형질 시리즈, 유전질 시리즈, 묘법 시리즈 등을 발표하며 우리나라 단색 회화 흐름을 주도해 왔고, 80년대 이후 본격화된 후기 묘법에서는 한지를 사용하여 작업해 왔다.

 

박서보는 그 유명세에 비해 작품은 영 안 팔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었는데, 2014~2015년에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0억 원을 넘겼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자 신문마다 스포츠 갱신 기록처럼 박서보와 단색화 작가라고 묶인 동료 화가들의 경매가를 앞다투어 소개하기 시작했고, 미디어는 연일 단색화 열풍을 떠들어댔고 누구는 한국 미술이 세계적 브랜드를 낳았다고 칭송했다. 한편에서는 그 거품을 걷어내려고 관련 작가들을 매섭게 비평하고 재조명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 책은 미술 치료사이자 박서보의 딸인 저자가 박서보의 삶과 예술을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박서보가 평생 작가로만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끔찍하게 여겼던 아버지의 성격도 알고 보니 아버지 개인만의 것이 아니고 박서보가 살아낸 시대가 박서보에게 남겨놓은 흔적이고, 그 시대 모든 어른이 조금씩 나누어 가진 특성이었다면서, 이제라도 아버지가 인정한다’, ‘인정 못 한다로 세상을 나누지 않고, 조금이라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법을 배워,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부분으로 토막 내는 대신 전체로서 재통합해내기를 바란다.

 

차례

작가의 말

프롤로그: 광기의 시대를 건너는 법 / 단색화 열풍 / 행위의 반복성과 무목적성 / 세상을 다시 담다

 

1부 나를 찾아가다

꼬마 재홍: 큰 인물이 될 거요 / 편애는 차례대로 / 걱정스런 녀석 / 게으름을 깨닫다: 전재의 충격 / 국민방위군 / 홍대 전시학교 / ‘는 누구인가?: 다시 배지를 달고 / 도망자, 서보 / 수덕사에서 김일엽을 만나다 / 발동을 걸다: 사이다 발언 / 안국동파 / 뭉치고 갈라지고 시끄럽고

 

2부 기회를 잡다

운명의 여인: 그녀가 서보 앞에 / 얼결의 프러포즈 / 번갯불에 콩 볶듯 / 가장으로서의 책임: 준비되려면 너무 먼 당신 / 파리로 가다 / 창피한 옐로: 일이 꼬이다 / 그래도 작업은 계속되고

 

3부 나만의 것을 만들다

혈기지분: 나를 위한 친구, 김창열 / 좌충우돌 깃발 경쟁 / 아내를 함부로 하지 마라 / 유일한 어른, 김환기 / 체념과 포기를 배우다: 묵묵한 그대 덕에 / 나만의 작업을 찾아서 / 서로 필요했던 사람, 이우환 / 개천에서 들키다 / 모순 속 총화단결 / 시그니처를 작성하다 / 현대미술 운동을 하다: 가족의 변화 / 박서보 사단

 

4부 색을 발견하다

최루탄과 함성 속에서: 한지를 만나다 / 홍대에 발이 묶여 / 사방으로 뻗는 힘 / 풍토성과 한국적인 것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사실은 형님이던 정창섭 / 정겨운 친구, 윤형근 /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평생의 작업실 / 색을 구하다

 

에필로그: 삶의 가치와 행복 / 온전함과 완벽함의 사이에서 / 눈물을 허락한 아버지 / 권태를 모르는 노동자

 

/ 작품사진 출처 및 소장처

 

 

나를 찾아가다

 

꼬마 재홍

박제훈은 뒤늦게 독학으로 공부해 공무원이 되었고, 예천으로 발령 받아 한의원집 딸 남기매를 처로 얻어 세 살 터울로 아이들을 낳았다. 둘째 아이가 폐렴으로 일찍 세상을 뜬 그해 1115일 셋째가 태어났는데, 훗날 서보라는 예명으로 알려진 재홍이다. 제훈은 재홍이 경기중학교를 거쳐 법대에 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재홍은 아버지가 볼 때는 공부하는 척하다가 아버지가 나가면 몰래 빠져나가 종일 연을 만들며 놀았고, 결국 서울의 삼류학교에 들어갔다.

 

물론 재홍이 잘하는 것도 있었다. 당시 안성에서 나름 살 만한 가정은 이당 김은호의 그림을 집에 하나씩 걸어놓고 있었다. 재홍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 그림들을 따라 그리면 보는 사람마다 혀를 내둘렀는데, 그 재능은 제훈에게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제훈은 아들 중 누구도 환쟁이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재홍이 중학교에서 포스터를 그려 전국 1등 상을 타와도 모른 체하고 칭찬하지 않았다.

 

제훈은 재홍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뺀질대기만 하니 대학에 보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재홍은 야밤에 금고를 털어 서울로 도망을 갔고, 한참 뒤 그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에 제훈은 아들 친구들 집을 샅샅이 뒤져 재홍의 멱살을 끌고 집으로 왔다. 그런데 재홍은 아버지 앞에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동양화과에 합격했다는 증서를 내놓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기에 결국 첫 등록금을 내주기로 했다. 그렇게 재홍은 1950년 홍대 문학부 미술과 23명 중 1명으로 입학했다.

 

는 누구인가?

다시 배지를 달고: 1953년 휴전이 되었고, 홍대는 서울 종로구 누상동으로 자리를 잡았다. 미술과는 얼마 안 있어 종로2YMCA 뒤에 있는 큰 창고 건물을 빌려 다시 이전했다. 학창 시절 재홍은 모딜리아니와 고갱을 좋아했다. 당시 미술계에 입문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당선되는 것이었다. 1954년 가을 어느 날, 교수들이 전 학년을 불러 그동안 작업한 그림을 전부 가져오라고 했다. 국전에 낼 작품을 뽑기 위해 사전 심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김환기 교수는 재홍의 그림 3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나는 대각선으로 누운 여인의 누드 그림이었고, 또 하나는 테이블에 비스듬히 앉은 나체 여인의 그림이었다. 후자는 모델이 삐쩍 마르고 피부가 거무튀튀해서 보이는 그대로 색감을 살려 그렸는데, 비리디언계의 짙은 녹색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그 물감을 툭툭 안으로 밀어쳐 윤곽선 안쪽의 거무튀튀한 살색과 자연스럽게 섞이도록 해 입체감을 냈다. 김환기가 그 점을 알아보고는 잘 그렸다고 칭찬했다. 또 다른 하나는 정물 그림이었다. 의자에 흰 보자기를 씌우고 마른 해바라기를 여러 개 아무렇게나 던져서 그린 그림이었다. 스승의 반응을 보고 용기를 얻은 재홍은 국전에 세 작품 모두 출품했다. 그중 테이블에 앉은 나부해바라기가 입선이 되어 홍대에서는 유일하게 재홍 혼자 신문에 이름이 올랐다.

 

도망자, 서보: 휴전 후 유엔군 대부분이 철수한 상태에서 병력 증가가 시급했던 남한은 20대 남자들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장교 요원도 확보해야 해서 정부는 각 대학에서 징집했는데, 장교 훈련 6개월 중 전반기 훈련 3개월만 받으면 전쟁이 났을 경우 현역으로 동원되고 전쟁이 나지 않으면 소위로 복무하다가 제대하게 될 것이라고 선전하여 재홍과 친구들은 지원서를 내고 1954년 가을 광주 육군보병학교에 입대했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가 약속을 어겼다. 지원서를 받아갈 때 했던 말을 뒤엎고 휴전 중인데도 육군보병학교 수료생들을 현역으로 바로 데려가 버리곤 했다. 그래서 재홍은 졸업식 전날 이원용과 함께 도망을 갔다. 도망 중 재홍은 가짜 이름을 만들어 사용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친구 맹인재에게 아호로 쓰게 이름을 2개만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인재는 수헌(樹軒)’서보(栖甫)’를 지어준 뒤 알아서 골라잡으라고 했다. 재홍은 서보를 택했다. 그렇게 재홍은 서보가 되었다.

 

한편 19616, 박정희 군사정권은 내각 공고 제1호로 병역의무 불이행자 자수 신고 기간을 정해 10일간 접수했다. 이듬해 초 제2차 신고 기간을 정했고, 그 기간 중 신고한 사람이 41만 명에 육박했다. 그해 육군보병학교 수료생들은 정부를 상대로 단체 소송을 걸어 승소해 일등병 만기 제대로 제대증을 받았다. 프랑스에 가 있어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서보는 귀국하자마자 진정서를 내고 국방부의 담당자를 찾아갔고, 간신히 3년 뒤에 만기 제대 통지서를 받았다.

 

발동을 걸다

안국동파: 1956년 홍대 강사 이봉상이 서보를 찾아와 누가 그림을 가르쳐달라는데 자기는 시간이 없으니 대신 맡아보겠냐고 의사를 물었다. 용돈이 궁해서 승낙을 하고 그 사람이 오라는 안국동 건물로 찾아가니 동덕여자대학교 창립자의 자제였다. 그때 서보는 건물 2층에 큰 교실 2개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탐이 나서 봉상에게 미술연구소를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이름만 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서보는 자기 학생에게 잘 말해 교실 2개를 무상으로 빌려 이봉상회화연구소로 이름을 내걸고 학생들을 받기 시작했다.

 

서울대, 홍대, 이대의 미술과 학생들이 찾아왔다. 하지만 다들 가난했던 때라 첫 달만 수강료를 내고, 다음 달에는 친구를 한 명 끌고 와 그 친구가 수강료를 내는 사이 은근슬쩍 묻혀 배우는 식으로 연구소를 다녔다. 서보는 물감 살 돈이 없으니 작업을 계속할 새로운 방안을 강구해야 했고, 값싼 안료 가루와 정제되지 않은 누런 린시드 오일을 사서 수제 유화물감을 만들어 그림을 그렸다. 서울대 학생이었던 윤명로, 김봉태, 김종학, 이만익은 서보가 알려준 대로 물감을 만들어 연지동에 있던 자신의 학교에 가져갔는데, 그들은 서울대에서 안국동파혹은 안료파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뭉치고 갈라지고 시끄럽고: 1956년 서보는 홍대 친구 문우식, 김충선, 김영환과 함께 국전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따로 ‘4인전을 열었다. 1년 뒤인 1957, ‘한국현대미술가협회(현대미협)’라는 새로운 동인이 결성되었고, 이 자리에 ‘4인전의 친구들이 합류했다. 그런데 서보에게는 아무 말이 없었다. 서보는 자존심에 친구들에게 따지지도 못하고 혼자 속을 끓였다. 현대미협의 첫 동인전은 미국 공보원에서 열렸다. 서보는 그 전시회를 보고 와서 510세계일보<허식과 성실의 교차: 현대미술협회전의 인상>이라는 비평문을 썼다. 그 기사를 보고 김창열, 하인두, 장성순이 서보의 작업실로 찾아와 동인에 참여해주면 좋겠다고 말해주어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자기를 배신한 친구들과 더는 한데 묶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다시 김창열과 하인두가 찾아왔다. 서보는 그러면 몇 가지 조건을 걸겠다고 했다. 우선 세 친구를 동인에서 빼달라고 요청했다. 김창열과 하인두가 서로 눈치만 보면서 곤란해 하자, 그러면 문우식만큼은 얼굴 부딪히고 싶지 않으니 탈퇴를 요구해달라고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전시를 봄가을 두 번 개최하는 것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전시회명도 그냥 현대전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도 냈다. 두 사람이 알겠다고 말하고 돌아갔고, 결국 문우식이 빠지고 서보가 들어갔다. 마침내 화신백화점에서 제2현대전이 열렸다. 1958년 개최된 현대전’ 3회와 4회는 세간의 주목을 유독 많이 받았다. 4회전 이후 현대미협은 앵포르멜의 대표 주자로 인식되었고, 그 움직임은 서보에게서 시작되었다.

 

여전히 구상을 그리던 서보는 3회를 준비하며 석불상의 얼굴이 마모된 것처럼 인간상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 작업이 지겹고 하기가 싫어졌다. 도대체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회의감까지 들었다. 짜증이 나서 캔버스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칼 가는 거친 숫돌에 비누칠을 해 그림 위를 마구 문질렀다. 그랬더니 속에 칠해놓은 빨간색이 숫돌에 긁혀 툭툭 튀어나왔다. 창열과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나가야 하는데 작품 꼴이 그러하니 서보는 에잇!’ 하고 캔버스 위에 물감통을 던졌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캔버스를 발로 홱 걷어차고 방을 나갔다. 외출 후 들어와 서보는 불을 켰고, 한쪽 벽에 처박힌 캔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서보는 깨달았다. ‘저거였구나. 내가 하려던 게!’ 캔버스 위에 흩뿌려진 물감이 주인 없는 방에서 스스로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거기에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서보는 그 작품을 제3회 현대전에 냈다. 화신백화점 화랑으로 전시회를 보러 온 이세득이 서보를 불러 말했다. “이런 식으로 작업하는 작가를 유럽에서는 앵포르멜이라고 부른다네.”

 

당시 서보는 서구의 동시대 미술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세득이 미셸 타피에의 선언이 일본 잡지에 번역되었다면서 보라고 한 권을 가져다주었다. 서보는 자신과 닮은 정서로 비슷한 행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급히 펼쳐보았다. 그 선언을 수첩에 베껴놓고 창열에게 넘겨주었다. 워낙 귀한 자료다 보니 동료들이 한 명씩 돌려가며 보았고, 서보 손에 다시 돌아온 건 6개월 뒤였는데, 그때는 이미 동료들이 모두 앵포르멜 작가가 되어 있었다.

 

4회 현대전은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제4회 현대전이 앵포르멜 일색으로 전시되자 현대미협 내부에서는 서보를 내쫓자는 모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김창열과 전상수가 반대해 결국 무산되었지만 서보로서는 기분이 나빴다. 그해 말 서보는 윤명숙과 결혼식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동료들의 뒷담화에 실망해 제5회 현대전에는 아예 참여를 하지 않았다.

 

서보는 모든 것을 잊고 작업에만 몰두하고자 마음을 가다듬었다. 캔버스에 자기를 내동댕이치는 앵포르멜 방식은 어린 치기처럼 느껴져서 좀 더 내향적으로 스며드는 작업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진행 중이던 캔버스의 색이 너무 난잡해 보여 일단 검정색 물감을 덮어보았다. 아래에서 붓 자국이 재미있게 드러나자 이것 봐라 싶어 서보는 뭉쳐 엉긴 검은색 물감 위로 나이프를 툭툭 쳐보았다. 바닥에서 흰색이 슬쩍슬쩍 올라왔다. 알베르토 부리의 작품들에서 본 게 있으니, 서보도 그 위에 마대천을 꿰매 붙여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부었다. 마대천의 올 사이로 콘크리트가 들어가면 오일 위에 그냥 붓는 것보다 오래 붙어 있을 것이다. 마른 뒤에 다시 채색을 했다.

 

창열의 주선으로 서보는 제6회 현대전에 다시 참여했고 시멘트 작품도 출품했다. 김환기가 유독 시멘트 작품을 눈여겨보고 갔다. 다음해 갑자기 파리로 가게 된 서보는 현대전에 전시했던 대작들을 둘 곳이 없어 창열과 의논 끝에 경찰전문학교 분교에 작품을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6개월마다 집을 이사하느라고 찾으러 가지 못했다. 창열도 얼마 후 유럽으로 떠나버려 같이 맡긴 작품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중 서보의 시멘트 작품만 돌고 돌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기자이자 한국근대미술연구소 소장인 이구열이 소장하게 되어 나중에 서보도 그 작품을 다시 만났다.

 

나만의 것을 만들다

 

체념과 포기를 배우다

나만의 작업을 찾아서: 서보는 파리 세계청년작가회의에서 돌아왔을 때, 앵포르멜이 포화 상태에 도달했다고 인지하고 있었다. 서보는 한 인터뷰에서 추상이라는 하기 쉬워 보이는 예술에 너무 많은 사람이 덤벼들고 있기 때문에 이제 예술은 좀 더 정신화되어 작가의 내적 정신생활의 표현이 됨으로써 차별화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아울러 서보는 우리의 토착성을 먼저 정신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그 토착성은 성실하게 자기에게 귀의하다 보면 나올 것이니, 우선 자기부터 시끄러운 화단 행적을 지양하고 작업에만 매진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서보는 학교에 사표를 냈다. 모처럼 집에 있으니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져 좋았다. 어느새 첫째 아들 승조는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둘째 아들 승호는 네 살이 되었다. 어느 날 형이 학교에 가자 승호는 형이 두고 간 방안지 공책을 몰래 펼쳐 글씨를 써보려고 했다. 연필을 들고 네모 칸에 글씨를 썼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삐뚤빼뚤 써서 그런지 칸 밖으로 글씨가 튀어나갔다. 형이 쓴 것과 비교해보더니 다시 시도했지만 여전히 잘 되지 않았다. 어린 것이 홧김에 쓴 것을 지그재그로 휘갈겨 덮어버렸다. 연필심에 걸려 종이가 구멍이 나자 울상이 된 승호는 형이 했던 대로 지우개를 들었다. 힘 조절이 안 되자 지우개질에 종이가 찢어졌고, 결국 어린 것이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방안지의 칸 속에 글자를 넣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그것이 안 되니까 체념과 포기를 하고 만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보에게 옛날 수덕사에서 김일엽을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자신을 닦고 비워내라더니, 저렇게 내가 한 짓을 체념으로 다시 지우고 포기하면 나 자신이 닦이고 비워질 수 있는 것일까?’ 서보는 당장 캔버스를 준비해 방안지를 그리고 그 위에 승호가 했던 것처럼 연필질을 했다. 아직은 인위적인 느낌이 나서 이게 맞나 싶었지만, 일단 탐색을 계속해보기로 했다.

 

서보는 아직 어느 것에도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승호 따라하기는 그것대로 시도하면서, 재미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닥치는 대로 탐색하고 실험에 옮겼다. 한번은 캔버스를 벽에 걸어 어린 승호를 앞에 세운 뒤 환등기 불을 비춰 실루엣을 땄다. 무엇을 할까 하다가 띠를 둘러보니 사람이 토막 난 것 같아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아내의 이미지도 실루엣으로 그려 색띠를 두르는 작업을 했다. 그러다 점차 강렬한 원색 줄무늬의 기하학적 화면 구성으로 그림이 바뀌었다. 그렇게 탄생한 그림들에 유전질(遺傳質)’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유전질 작품은 1968년 도쿄국립미술관 한국현대회화전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1970년에는 서울화랑에서 10점을 골라서 유전질 개인전도 가졌다.

 

서보는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작품을 했던 1960년대 후반기를 헛발질하던 시기라고 회고한다. 서양미술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자부했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일 뿐 자신도 모르게 서양미술 속에 깊이 빠져 있었던 때였다. 다시 서보는 나는 누구인가?’를 물으며 계속 반성하고 고민했다. 그러는 중에 승호 따라하기가 손에 익기 시작했다. 여러 방식으로 시도하면서 보니,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생체 에너지가 손의 움직임을 따라 그대로 물성으로 체화되는 가장 자기다운 회화였다. 서보는 나중에 자기 고백이자 체험적인 작업에 이우환의 제안을 따라 묘법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서로 필요했던 사람, 이우환 / 개천에서 들키다: 서보와 우환은 작가로서 사실 정반대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우환은 개념 미술을 했고, 항상 차분하고 서늘한 미술 비평과 이론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반면에 서보는 책상 대신 화실 바닥에서,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으로 화폭에 자기를 뜨겁게 던지는 작가였다. 그렇지만 둘은 네트워크를 공유하며 현실적으로 서로를 도왔다. 한 사람은 지식과 논리로, 한 사람은 감성과 직관으로 부추기면서 정신적으로도 강하게 유대했다. 그러다가 서보와 우환은 작업실에서도 함께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우환은 1972년 명동화랑에서 개인전을 할 때 캔버스 위에 전구를 끼우고 에어브러시로 회색 그림자의 농도를 점차 빼 불이 들어온 것처럼 보이게 작품을 제작했다. 우환이 에어브러시에 익숙하지 않자 허상 시리즈로 단련된 서보가 대신 스프레이 작업을 도와주었다.

 

1973년 서보는 묘법의 첫 개인전을 무라마쓰화랑에서 열었다. 전시장에 작품을 걸고 시간이 남은 서보는 골목 뒤에 있는 화방을 찾았다.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다양한 미술 재료에 눈이 휘둥그레져 신나게 구경하는데, 문득 8B9B 연필이 보였다. 서보는 그때까지 4B가 세상에서 가장 진한 연필인 줄 알고 있었다. 깜짝 놀라 냉큼 그 연필들을 집어온 서보는 곧장 3미터짜리에 작업을 해보았다. 그렇게 힘차고 진한 연필은 처음 보았다. 서보는 완전히 흥분해 작업했고 결과에도 굉장히 만족했다. 다시 같은 해, 그 작품들을 포함해 명동화랑에서 묘법을 선보였다.

 

시그니처를 작성하다: 1975년 서보는 도쿄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5가지 흰색전에 권영우, 서승원, 이동엽, 허황과 함께 작품을 출품했다. 훗날 이 전시는 단색화라는 이름으로 해외에 이름을 알리게 된 한국 화가들의 첫 해외 소개로 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 전시에 출품했던 서보의 묘법 4점이 모두 판매되었다. 야마모토 다카시는 1년 반만 지나면 서보가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를 것 같다며 뉴욕으로 가서 작업할 것을 권했지만 서보는 그 제안을 따르지 않았다.

 

1970년대에 서보는 엄청나게 작업했고 많은 전시에 출품했다. 서보의 작업은 노동에 가까웠다. 캔버스를 만드는 것부터 힘이 들었는데, 묘법 작업은 바닥에 놓고 하는 데다 계속 선을 긋는 일이기 때문에 바짝 조여서 탱탱하게 만들지 않으면 프레임에 연필이 걸렸다. 그래서 화방에서 파는 것을 그냥 갖다 쓸 수 없어 일일이 나무틀부터 만들어 캔버스를 제작해야 했다. 돈이 있으면 일본에서 뒤틀리지 않게 잘 쪄서 나오는 가구용 향나무를 구입할 텐데, 넉넉하지 않으니 건축용 나무를 구입해 바람에 말려 썼다. 캔버스 천은 값싼 마대를 사서 쓰거나 국산 캔버스 천을 구입해 썼다.

 

캔버스가 완성되면 밑칠을 여러 차례 했다. 마르면 바닥에 캔버스를 눕혀 놓고 특별 제작한 바퀴 달린 작업대를 걸쳐놓고 그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몇 시간씩 연필을 그었다. 철근으로 만들었어도 작업대가 워낙 길다 보니 서보의 무게를 못 이겨 늘 출렁출렁했다. 서보는 신들린 사람처럼 무릎걸음으로 옮겨 다니며 출렁대는 리듬에 맞춰 캔버스 위에서 손을 움직였다.

 

현대미술 운동을 하다

가족의 변화: 아들 승조가 서울대 미대 입학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홍대를 가면 학비가 면제되었지만 명숙은 두 아들을 모두 서울대에 보냈다.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면 친구를 사귀는 데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서보와 같이 끊임없이 구설수에 오를 것이라서 그 정도 학비는 자신이 댈 수 있다고 우겼다. 당시 서보는 한국미술협회에서 임원이 되어 권력이 생기자 가난한 깡패 화가의 이미지를 벗고 박서보 사단이라는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박서보 사단: 1970년부터 서보는 한국미술협회의 부이사장으로 일했다. 8년의 연임 후 1977년에는 이사장이 되었다. 지금도 서보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꼭 해야 했던 운동이었다고 회고하는 세 가지를 그때 실천했다. 한국 현대미술을 전국 단위로 널리 확산시키고, 재능 있는 신인을 제대로 발굴하며,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작가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시키는 일이었다. 서보가 현대미술 운동을 한다고 이렇게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사이, 화단에서는 박서보 노이로제가 생겨나고 있었다. 어디서나 박서보, 매사에 박서보라서 화단에서 그의 이름을 안 들을 수 없으니 불만이 커져가는 것 같았다. 분명 좋은 취지로 시작된 일이지만 진행 과정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서보의 강한 말투와 배려심 없는 성격도 불평을 만들어내는 데 한몫했으리라.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서보의 남다른 가족주의였을 것이다. 그의 강력한 울타리 의식은 높은 지위와 힘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위험한 성향일 수 있다.

 

결국 화단의 중론은 박서보 집단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한국미술협회 임원으로 근 10년간 서보와 같이 일했고, 예전처럼 의견이 달라도 티격태격하지 않고 잘 지낸 친구 하인두마저 현대미술의 획일화 경향과 세력화로 치닫는 그 일사불란의 집단의식이 싫어서서보를 몰아내자는 쪽으로 돌아섰다. 물론 서보와 그의 동지들이 일으킨 국제적 경향에 대한 집단적이고 실험적인 발전은 나무랄 수 없는 공적이라고 높이 샀지만, 그래도 화단은 여러 가지 복층적 구조로 병존해야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마침내 서보는 이사장 선출에서 고배를 맛보았다.

 

색을 발견하다

 

최루탄과 함성 속에서

한지를 만나다: 한국미술협회의 수장 자리에서 내려온 서보는 내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고, 이후 협회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안성에 새 작업실을 짓기 시작했다. 공사 중에 최명영이 안성에 들렀고 명영의 제안대로 한서당(寒栖堂)’이라고 현판을 만들었다. 1981년 봄 작업실이 완공되었다. 가급적 학교 수업은 모두 주초로 몰고 주중에 일찍 안성에 내려와 일요일까지 작업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일부러 작업실에는 전화를 놓지 않았다.

 

시작은 호기로웠으나 적막한 환경에서 오는 공포감이 서보를 덮쳤다. 반 년 정도 지나서야 낯선 환경의 충격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지만 다음에는 떨쳐내기 어려운 고독감이 몰려왔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 만한 나이에 자신과 정좌하고 앉아 있으니 그 침묵이 너무 아리고 차가웠다. 하지만 그 또한 시간 속에 흘러 어느 순간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당연히 작업에 큰 차이가 생겼다. 수시로 작업 중에 문 밖에 나와 자연의 공기를 마시니, 호흡이 길어져 연필 동작이 더 리드미컬해졌다. 자연 채광에서 컬러톤을 봐가며 작업을 한 덕에 흰색이 더 밝고 경쾌해졌다.

 

그런데 안성 작업실에 수장되어 있던 작품들이 사람이 있다 없다 하고 추위와 더위가 오락가락하는 중에 표면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서보는 환경 변화에도 오랫동안 불변할 성질의 재료가 어디 없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TV에서 ()500, 종이는 1,000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길로 인사동으로 달려간 서보는 옛날 종이를 잔뜩 사왔다. 물에도 불려 보고, 찢어도 보고, 긁어도 보면서 종이의 질과 강도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해방 전 초등학교를 다닐 때 펄프로 생산하는 양지(洋紙)가 이미 보급된 터라 서보는 방바닥에 깐 장판과 문에 바른 창호지 정도로만 한지를 경험했다. 하지만 서보가 자란 안성 보개면에는 예부터 한지가 유명해 궁에 종이를 납품하는 제작소가 있었다.

그때쯤 드로잉을 재조명하는 열풍이 불었다. 서울의 견지화랑과 진화랑에서도 종이 작업전이 연달아 열렸다. 로스앤젤레스의 아트코어 미술관에서도 비슷한 전시회가 열려 서보는 아르슈라는 이름의 수입지에 연필로 드로잉해 놓은 작품을 출품했다. 서보는 비슷한 드로잉을 한지 위에도 시도해보았다. 양지에서와 달리 한지에서는 연필이 자신의 신체를 도드라지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 느낌이 좋아 서보는 흰색 제소를 묽게 타서 바탕을 밝게 만든 뒤 그 위에 드로잉을 했다. 물감이나 잉크를 뱉어내지 않고 깊이 머금고 흡수하는 성질의 닥지를 보고 서보는 그것이 한국의 자연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1년 가을, 일본 교토 세이카대학의 교수 구로사키 아키라가 안성 작업실에 불쑥 찾아왔다. 자신이 집행위원으로 있는 일본국제종이회의에서 종이와 현대 조형에 관한 토론을 할 계획인데, 서보가 아시아 대표로 그 토론에 동참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행사로 종이 조형전을 개최하는데, 한국과 일본도 비슷한 전람회를 공동 개최해보면 어떻겠는지 의사를 물었다.

 

서보는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던 이경성과 논의해 전시회를 준비했다. 구로사키 아키라가 강원도의 한지 제작자 한 명을 소개해주어, 서보는 원주시에 있는 김영연이라는 장인의 공장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며칠 동안 닥지 만드는 것을 보고 실습도 해본 서보는 김영연에게 3겹지를 주문해 받아서 썼는데, 닥 껍질이 김 조각처럼 박힌 거친 갈색지와 하얀 닥지 두 종류를 받아서 썼다.

 

서보는 일단 한지로 바닥지를 만들어보았다. 방의 온돌을 뜨끈하게 해놓고 한지를 원하는 폭으로 접어 물칠을 해서 찢었다. 한 장 한 장 오공본드를 칠해 3겹지 3장을 배접하고 따끈한 온돌에 잘 펴서 말렸다. 안료 색이 강조되는 것이 싫어 자연스런 발색이 가능한 재료를 고민하다가, 을지로 시장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파는, 곰방대에 넣고 피우는 장수연이라는 담배를 사왔다.

 

장수연을 물에 끓여서 액을 냈다. 안성 작업실 주변에서 뽑은 쑥도 삶아 물을 내 그 두 액을 큰 통에 섞고 먹물을 뿌려 물감 대신 써보았다. 먹을 직접 갈지 못하고 먹물을 사다 썼더니 나중에 썩은 냄새가 났지만 색감은 좋았다. 서보는 준비된 바닥지에 한 번 더 오공본드를 바르고 3겹지 한 장을 담배 혼합물에 적셔 그 위에 다시 얹었다. 그런 다음 하얀색 호분(胡粉)을 붓으로 털어서 뿌렸다. 준비가 다 끝나면 종이가 마르지 않게 분무기로 계속 물을 뿌려가면서 젖은 상태에서 연필로 선을 그었다. 아래 방향으로 힘이 들어가니 종이가 찢어져 뭉쳤는데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어느 날 김수근이 서보의 새 작품들을 보고 잡지 공간에 서보의 특집을 꾸미게 하고 공간 화랑에서 열 종이와 묘법전을 기획했다. 한지 전지로 제작한 30호 소품 위주로 김수근의 화랑에서 1983년 개인전을 열었다.

 

한지 작품은 손에 들고 비행기를 탈 수 있어 해외 전시에 출품할 때도 운반비가 들지 않았다. 그래서 1983년 일본 전시 때 서보는 직접 출품작을 들고 갔다. 하지만 도쿄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가 캔버스에 붙이지 않으면 종이 작품은 수채화값밖에 받지 못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서보는 하는 수 없이 캔버스에 한지를 배접하는 작업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82년 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종이의 조형전: 한국과 일본전이 개최되었다. 일본 교토에서는 다음 해 초 미국 작가들의 전시와 때를 맞춰서 교토시립미술관에서 종이의 조형전: 일본과 한국전을 열었다. 세미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서보는 미국의 로버트 라우션버그, 영국의 데이비드 호크니, 일본의 이다 쇼이치와 함께 종이와 종이 조형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서보는 양지와 한지의 특성을 비교하여 물성을 그대로 받아들여 흡수하는 한지 작업이야말로 한국의 자연관과 정신성을 담고 있는 고유한 작업이라고 주장했다.

 

사방으로 뻗는 힘: 캔버스에 연필로 긋는 묘법과 한지 작업을 병행하던 서보는 1986년부터 초기 묘법을 완전히 멈추고 한지로만 작업했다. 그즈음 서보는 한지로 만든 500호 대작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서보의 에너지는 사방으로 지그재그 뻗어나갔다. 한지에 완전히 익숙해진 서보의 손은 한지와 만나면서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방향을 정해나갔다. 그때그때 자신의 기분과 느낌이 즉발적으로 표현되자 연필 묘법과 달리 서보 자신이 더 많이 드러나는 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 힘에 부치는 노동이었다. 1988년 서보는 제43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되었고 국제관 전시실 2곳에 한지 묘법을 전시하게 되었다. 캔버스에 폴리로 3겹지를 배접해 150호짜리 작품을 전력을 다해 제작했다. 동교동 반지하에서 새벽 내내 웅크리고 그림을 그렸다. 198912월 진화랑에서 로스앤젤레스 아트페어에 서보의 한지 묘법을 들고 나가 개인전을 선보였다. 그 전시회를 위해서는 돈을 좀 들여 동양화 물감에 호분을 섞어 작품을 제작했다. 광택 없이 한지에 색상이 잘 스며들어 뽀얗게 올라오는 발색이 좋았다. 하지만 동양화 물감은 색상이 다양하지 않고 값도 비싸서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1990년대에는 아크릴물감에 대해 알게 되자 작품 채색을 전면적으로 바꾸었다. 아크릴은 윤기가 나는 것이 흠이었다. 서보는 물과 함께 색을 잘 개서 통에 넣고 오래 놔두었다. 그렇게 하면 아크릴의 접착도가 물에 희석되어 강도가 떨어지면서 윤기가 줄었다. 이즈음부터는 캔버스에도 아크릴을 바르기 시작했다. 빨간색, 보라색, 녹색 등 다양한 색을 칠하고 가장자리를 비워둔 채 한지 조각을 올려서 캔버스가 부분적으로 드러나게 제작했다. 작게 자른 종이들을 붙일 때도 종이 사이의 공간을 더 띄워서 캔버스 밑색이 곳곳에서 화면 위로 올라오게 변화를 주기도 했다. 나중에는 작업 중에 언제든지 중단하고 다시 작업을 재개할 수 있도록 아예 손바닥만 한 작은 조각 종이를 붙여 작업하기도 했다.

 

풍토성과 한국적인 것: 1992년 영국 리버풀의 테이트갤러리에서 서보, 창열, 우환, 창섭, 형근, 이강소로 이루어진 단색화 화가의 그룹전을 기획했다. 그들의 작품은 한국의 모노크롬이라고 소개되었다. 서보는 자신들의 작품을 차별화하는 것은 한국의 자연관이므로 전시명을 자연과 함께 작업하다(Working with Nature)’로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미술관 측에서는 전시명이 너무 길어 좋지 않다고 이야기했지만, 결국 서보의 주장대로 그렇게 타이틀을 내걸었다. 테이트갤러리의 명성 때문에 그 전시는 한국 화단 내부에서 여태껏 없던 해외의 관심으로 읽혔고, 한국적인 그림이 서양에 수출된 것처럼 평가되었다. 이제 한국 현대미술이 영국의 중심부로 뚫고 들어갔으니 세계시장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라고 서보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1994년 연말 송년회 겸 저녁식사를 하고 들어온 서보와 명숙은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서보는 새벽에 잇몸이 아프고 가슴이 조여와 잠에서 깼다. 집에는 부부밖에 없었다. 바닥에 엎어져 엉금엉금 기면서 자고 있는 명숙을 부르자 서보의 증상을 알아본 명숙이 재빨리 차를 운전해 서보를 응급실로 싣고 갔다. 급성심근경색이었다. 의료진은 1차 관동맥 풍선확장술을 바로 시행해 서보의 목숨을 살렸다. 의사가 겁을 주자 서보는 매일 3~4갑씩 피우던 담배를 한 방에 뚝 끊고 술도 거의 손대지 않았다.

 

그때부터 서보는 자유분방해서 힘이 많이 드는 지그재그 작업을 줄이고 직선을 내려 긋는 작업으로 바꾸었다. 한지를 찢으면서 밑으로 내려와 맨 끝에 물방울처럼 종이가 뭉치는 작품이 한동안 지그재그 작업과 겹쳤다. 하지만 종이 뭉친 자국이 괜한 첨언(添言)처럼 느껴져서 그 작업은 조금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대신 한 줄로 일정하게 내려 긋는 작업은 계속 이어갔다. 몇십 번을 왕복해서 긋자 종이가 양옆으로 밀려 골이 패이고 밀린 종이는 선()이 되었다.

 

내려 긋는 것은 가로로 긋는 것보다 팔의 움직임을 조절하기 어려워서 서보는 캔버스를 90도 돌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선을 그었다. 겹친 한지가 연필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지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붙였고, 한 줄씩만 조금씩 붙여 물을 뿌려가며 작업했다. 1999년부터는 화이트 계통의 작업이 섞였고, 레드는 2000년부터 등장했다. 2003년부터 블랙은 제작을 멈추었다. 25년 가까이 묘법을 했던 작업대 위에서 처음으로 균형을 잃고 땅으로 떨어진 날, 서보는 남모를 트라우마를 안게 되었다. 신체와의 일체감을 중요하게 여겼던 서보가 신체와 정신이 따로 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 것이다.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색을 구하다: 서보는 200111월 그랜드호텔에서 200명이 넘는 하객을 모시고 칠순 잔치 겸 출판기념회를 치렀다. 그런데 이때부터 서보가 이상해졌다. 어디서든 앉아만 있으면 졸기 시작했고, 명숙이 제대로 누워서 자라고 하면 버럭 화를 내며 자기는 절대 안 잤다고 잡아뗐다. 나중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횡설수설 지껄였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심근경색 이후 계속해서 혈관성 치매가 진행된 것 같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보는 조수들에게 더 많이 의지하기 시작했다(윤성준, 이영하, 길현, 강승원, 최현식, 정재철, 권혁준, 최지이, 정아롱, 안희성, 김태령, 김한나, 박지호, 양경선 등이 2년 이상씩 조수로 일을 도왔다.) 서보는 줄줄이 기획된 전시들을 혼자서 소화할 자신이 없었다. 머리도 팽팽 돌아가지 않았고, 몸도 전보다 굼떠졌다.

 

서보는 대신 다른 작업에 몰두했다. 책상에서 묘법을 디자인했다. 예전처럼 혼자 작업하면서 즉각적인 감에 따라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전에 미리 전체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이 필요했다. 승호가 컴퓨터로 만들어준 모눈종이를 판화공방으로 보내 4절보다 조금 더 큰 아르슈 지에 석판으로 찍게 했다. 그런 다음 묘법의 구도와 형태와 명암을 상상하면서 그 위에 연필로 초벌 그림을 그렸다. 볼펜 지우는 화이트 용액을 사와 모눈종이의 선들을 지우며 물감 대신 썼다.

 

에스키스라고 불리는 이 설계도는 서보의 또 다른 작품 형태가 되어 독립 전시에도 걸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딱 그만큼이 70대의 서보가 작업할 수 있는 양이었고 크기였다. 거대한 몸짓 대신 이제 서보는 작고 섬세한 손짓으로 제 화면을 통제해나갔다. 이제 온전히 자기 손을 거친 것은 이 에스키스뿐이었기 때문에, 서보는 똑같은 것을 3~4장씩 만들어 아내와 아이들에게 물려줄 에디션을 만들었다.

 

에스키스를 그리면서 머릿속에 떠올랐던 색 조합이 있었기 때문에 서보는 색을 개는 일에는 누구도 참견하지 못하게 했다. 전동 드릴을 사용했기 때문에 서보가 하기에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아니었다. 서보는 자신이 상상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여러 종류를 섞어가며 감으로 색을 만들었다. 개면서 보는 것과 발라서 말랐을 때의 색이 차이가 커서 신중히 몇 번이고 확인하며 색을 찾아야 했다. 완성되면 자신의 색상 차트 수첩에 샘플을 올리고, 물감통에 일일이 이름표를 만들어 붙였다.

 

캔버스의 한지 고랑에 밑색까지 다 발라지면 이제 섬세한 색 작업에 들어갔다. 고랑의 색이 은은히 한지에 흡수되어 발색되게 붓으로 반복해 정리하고, 이랑에도 조금 더 도드라지게 색을 칠해주었다. 한지 전체에 바르는 바탕색과 고랑, 수평선 날에 바르는 색이 각각 달랐기 때문에 두 톤 혹은 세 톤이 정해졌다. 2007, 경기도미술관에서 박서보의 오늘, 색을 쓰다란 전시회가 열렸다. 참고로 서보는 1972년 첫 개인전 때부터 묘법의 영어 제명을 에크리튀르(ecriture)’ 라는 프랑스어로 대신했다.

서보와 동료들은 힘과 권력이 난무하던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지나오면서, 재야에 남아 표현 아닌 표현을 계속하며 묵묵히 저항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작품들이 도리어 현대인의 아우성과 고통을 담아내고 빨아들이는 흡인지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보는 처음으로 자기 개인을 위한 수신이 아닌 세상 사람들에 대한 치유적 효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 있었다. 한때 서보가 매달렸던 백과 흑은 사실 진실한 언어가 아니다. 삶 전체에는 다양한 색채가 펼쳐지기 마련이고, 과학적으로 살펴볼 때 색과 색 사이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경계나 구분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훈련된 사람들만이 모든 것을 흑백 논리로 이분한다. 서보도 늙어가니 점점 더 원시적이 되고 어린아이가 되어 그림의 색채가 풍부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노화되면서 생각의 구분과 경계가 뭉개져 더 많은 것들을 반영하고 담아내기 시작한 것일 수 있다. 가까운 사람들을 잃고 아내와도 헤어질 뻔하면서 뼛속 깊이 헛헛함을 알게 된 서보는 반다이산의 단풍에 반하고, 한강의 밤풍경에 마음이 설레며, 제주도의 탁 트인 수평선에서 멈춰섰다.

 

한평생을 자기와만 싸우던 서보가 노쇠해져 힘을 잃자 혈기기 빠져나간 자리에 아름다운 세상이 다시 들어찬 것이다. 그것은 서보에게 치유적이었고, 서보에게 작용한 것과 똑같이 남들에게도 치유적으로 다가가는 것 같았다. 서보는 자신이 공기색이라고 부른 묘법 작품 앞에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세상만사 헛헛해도, 자신이 사라진 뒤 작품은 그래도 남아 있을 것이기에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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