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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주디스 마이클 호텔 비콘힐 (1)

by Casey,Riley 2023.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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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비콘힐 1
주디스 마이클


  1권  차례

  옮긴 이의 말
  제1부 사랑의 위험
  제2부 잔인한 계절
  제3부 새로운 만남


    **

  사랑, 재산, 행복이 보장된 미래를 단 한순간에 빼앗겨 버린다면 어떤 심정이 
될 것인가? 더 나아가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파렴치한 도둑으로 오해하고 
있다면? 가족처럼 사랑하고 사랑받던 사람들 면전에서 억울하게 빈 가방을 들고 
쫓겨 나가야 한다면? 요술봉 덕택에 무도회에서 왕자와 춤을 추던 신데렐라가 
종치는 소리에 호박마차로 달음질치는 모습과 똑같은 상황일 것이다. 그래도 
왕자는 그녀를 사기꾼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호텔 비콘 힐)의 여주인공 로라는 타의에 의해 왕궁에 모든 것을 둔 채 
맨발로 쫓겨나게 된다. 주디스 마이클의 소설적 재능이 여기서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휘두르는 필봉이기에 그만큼 줄거리는 두 배로 
꼬이고 두 배로 재미 있게 마련이다. 그들 소설의 특징은 쌍봉낙타처럼 이야기 
라인에 굴곡을 자주 두는 데 있다. 처음부터 끝나는 길목까지 곳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방망이가 튀어 나온다. 예상을 뒤엎는 작가의 반전속에 독자들은 쉽게 
그 길목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길목 속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사랑은 받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주는 것이 더 행복한가? 사랑에 눈 뜬 
여자가 아니라도 여성이라면 한두번쯤 자문해 본 과제일 것이다. 로라가 택한 
사랑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다른 길에서 찾은 부와 새로 나타난 남자속에 
과거를 묻은 뒤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디스 마이클은 완벽한 구성력과 멋진 반전을 통해 로라로 하여금 
진정한 사랄을 쟁취하게 만들고 있다. 사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다. 부가 
뒷받침된 사랑을 받아 들여 다시 일어서긴 하나, 그녀의 마음은 오직 하나, 
왕궁에 남아 있는 왕자에게 가 있다. 그 사랑을 찾아가는 로라의 이야기는 강한 
흡인력으로 독자를 매혹시킨다.
  소설이긴 하지만 이 속에서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나타나는 인물들을 볼 수 
있다. 인위적인 사랑보다는 곁가지를 모두 다 쳐버린 채 한 사람을 원하는 
남자와 여자. 명예와 재산만을 탐내 부친, 아내, 가족 등을 철저히 무시해버리는 
사업가. 세계 최고 도둑이라는 환희에 빠져 있다 누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천둥 벌거숭이. 남편으로부터 인형 취급을 받다 과감히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
  이들이 엮는 드라마는 작가의 철두철미한 반전기법으로 독자로 하여금 
흔들다리에서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특히 후반부에 펠릭스가 완전히 
백기를 드는 장면은 로라의 멋진 승리와 비교돼 마지막까지도 눈을 떼지 못하게 
된다. 호텔 경영을 배경으로 한 긴박감 넘치는 복수, 로라와 폴의 극적인 
재결합, 벤과 알리슨의 아름다운 사랑, 벤과 폴을 좌우날개로 달고 펠릭스와 
대결하는 로라...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읽는 소설이라면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 사랑, 오해, 음모, 
배신, 복수, 승리 등 로라를 중심으로 펼쳐진 (호텔 비콘 힐)은 그런면에서 모든 
요소를 골고루 갖춘 아주 재미난 이야기다. 누구나 한번쯤 꿈꿔볼 수 있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바로 (호텔 비콘 힐)이다.

     1 사랑의 위험
    1장
  로라와 폴은 누가 먼저 끝내나 내기를 해 가면서 침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졌다. 도저히 로라는 못 당하겠어."
  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자들은 침대를 정리하기 위해 태어났고, 남자들은 그 침대에 눕기 위해 
태어났노라!"
  "그게 아니라 침대보를 더럽히기 위해 태어난 거겠죠."
  로라는 폴의 말을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
  "결혼해봐요. 금세 이것저것 배울 수 있을 테니까."
  "침대보는 못 갈아도 중요한 건 빨리 배울 수 있어. 순식간에 당신한테 빠져든 
거 보면 몰라?"
  폴의 말에 로라는 맑게 웃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슴 위에서 느껴지는 
그의 따뜻한 손길.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와 함께 누워 있는 편안한 기분. 깊게 
깊게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육체. 로라는 이 모든 것을 사랑했다.
  "우리 이렇게 마냥 행복해도 되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여전히 웃고 들고 있다니. 우리의 결혼식도 못 보시고 그렇게 
영영 떠나버릴 수가... 우리 둘을 맺어주려고 그렇게 애를 쓰셨는데..."
  넥타이를 조이며 양복 상의를 걸친 폴은 거울에 얼굴을 비추며 올 굵은 
흑발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고 있었다.
  "우리가 결혼할 걸 알고 계셨어. 면사포 입은 당신 모습을 보진 못하셨지만..."
  그는 가슴속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당신 알지? 할아버지가 딱딱한 의식이나 파티 같은 걸 얼마나 싫어했는지."
  그녀의 머리카락에 뺨을 댄 채 폴은 이모부 아버지이자 훌륭한 조언자였던 
오웬 샐링거의 강인한 외모를 떠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결혼식에는 즐거워하셨을 거예요."
  로라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아."
  폴은 로라의 두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두드러진 광대뼈와 짙은 입술이 
돋보이는 갸름한 얼굴은 흐릿한 빛으로 싸여 있었다.
  가끔씩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그녀의 어두운 표정으로 폴은 자신이 그녀를 
정말 잘 알고 있는 건지 회의가 일곤 했다. 만약 화가가 그녀를 그린다면 
태양빛에 붉게 빛나는 갈색 머리카락과 맑고 큼지막한 진청색 눈동자가 강조될 
것이다.
  양뺨을 따라 곱게 구부러져 내린 로라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폴은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당신 몹시 창백해 보여. 옷 색깔 때문인가? 검정색으로 입을 필요 없지 
않겠어? 장례식 가는 건 아니잖아. 파킨슨이 읽어줄 유언장 때문에 할아버지 
집에 들를 뿐이라구."
  "장례식을 또 한 번 치르는 일 아니겠어요. 유언장 공개 말이에요. 우린 지금 
할아버지를 냉정하게 우리 인생 밖으로 계속 내쫓고 있어요."
  그녀는 폴에게서 몸을 뺐다.
  "안 가면 안돼요?"
  "가야 돼."
  폴은 자신의 아파트 문들 걸어 잠근 뒤 머뭇거리는 로라를 앞세웠다. 밖으로 
나오자 보스턴의 팔월 열기가 그들을 휘감았다. 잔디밭 위에서 아이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호수의 범선들은 물결치는 파도 위에서 하얀 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날씨가 이렇게 뜨거운 걸 깜빡했네."
  상의를 벗으며 폴은 혼잣말을 했다.
  "이 더운 도시 속에서 할아버지를 생각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져. 팔월이면 
항상 케이프에 머물곤 하셨잖아."
  차에 오르자 마자 그는 시동과 함께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집사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로라는 절도 있고 힘찬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올 
오웬을 맞이하려는 듯, 자신도 모르게 대리석 로비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짙은 눈썹과 간결하면서도 묵직해 보이는 콧수염, 붉고 건강한 혈색. 오웬은 
그렇게 근엄한 모습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다스리곤 했었다. 로라의 진청색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던 오웬. 
그녀는 그의 죽음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로라는 폴을 쳐다보며 다짐 받듯 말했다.
  "끝나자마자 여기서 나갈 거죠?"
  "그래, 그럴 거야."
  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로라는 애도감을 넘어 겁을 먹고 있었다. 근심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폴은 오웬을 만나기 전 외롭게 자라왔던 로라의 
삶을 잠시 떠올렸다. 결코 헤프게 정을 베풀지 않던 오웬은 그런 로라에게 
일종의 정제된 사랑을 베풀어왔다. 주춧돌을 잃은 듯한 로라의 심정을 폴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 편히 가져요, 로라."
  집안으로 로라를 이끌며 그는 속삭였다.
  두 사람은 샐링거 일가가 모여 있는 가족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팔걸이 가죽 
소파에 깊게 몸을 묻고 앉아 있는 어른들과 달리 오웬의 어린 증손녀들은 
타브리스 양탄자 위에 앉아 있었다. 로라는 서재 맨 구석, 마호가니와 
대리석으로 꾸며진 벽난로 가까이에 앉아 오웬의 손녀인 알리슨과 이야기하고 
있는 클레이에게 미소를 던졌다. 일부러 필라델피아에서 시간을 내서 와준 동생 
클레이가 고마웠다.
  커다란 서재 책상 뒤에는 오웬의 변호사 엘윈 파킨슨이 오웬의 두 아들이자 
그가 남긴 호텔 제국을 이어갈 펠릭스 샐링거, 아사 샐링거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과 악수를 나눈 폴은 로라와 함께 납창살 유리문이 붙어 있는 책장 
앞으로 갔다. 한 팔을 돌려 그녀를 안는 순간, 폴은 그녀가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파킨슨이 입을 열기 시작할 때 폴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여기 삼년 전 팔월에 작성된 오웬 샐링거의 유언장이 있습니다. 맨 앞 부분은 
샐링거 가문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작성된 목록입니다. 첫번째로 오웬은 오십년 
넘게 가족과 집을 맡아줬을뿐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였던 아이리스가 떠난 뒤 
어둡고 침침한 세월을 이겨내도록 도와준 로자 커렌에게 오십만 달러를 
남겼습니다.
  그밖에 샐링거 호텔 체인에 오래도록 종사해 오고 있는 종업원들과 하급 
사무원들에게 각각 자그마한 몫이 배당돼 있습니다. 정원사, 이발사, 미용사, 
재봉사, 카리브해에 흩어져 있는 선박 선원들, 케임브리지 양화점 점원, 그외 
다수 여러 명이 있습니다만 시간 관계상 일일이 호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다음, 오웬이 살아 생전 무척 아끼고 애호했던 예술단체에 상당액의 
기부금이 돌아갔습니다. 하나씩 읽어보면, 보스턴 예술 박물관, 보스턴 심포니, 
이사벨라 스튜어트 기념 미술관, 케임브리지에 있는 폭시 연극단, 웰플리트 
오이스터스, 케이프 코드 머메이스(웰플리트와 케이프 코드에 있는 유명한 식당 
이름: 역자 주)등이 있습니다."
  기발하면서도 특이하게 돈을 뿌리곤 하던 오웬을 생각하며 서재에 모인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틀에 매이지 않고 독특하게 돈을 기부하곤 하던 
오웬의 방식에 샐링거 일가는 매우 익숙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 아들 
펠릭스와 아사만이 부친의 그런 익살스런 돈 씀씀이에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게 속한 샐링거 호텔 법인주식 삼십 퍼센트 중 이십팔 퍼센트를 정확하게 
똑같이 반분해, 각각..."
  "이, 이십팔 퍼센트라구?"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아사는 파킨슨 어깨 너머로 서류를 보려 했다.
  "아버지한텐 삼십 퍼, 퍼센트가 있었어. 나, 나누려면 삼십 퍼센트를 나눠야지, 
이십팔은 뭐야?"
  아사는 특유의 말더듬이 재발하고 있었다.
  "지, 지금 뭘 읽고 있는 거요? 아버지 유언장이 마, 맞소?"
  파킨슨이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하는 동안, 펠릭스는 두 손을 
굳게 깍지낀 채 변호사를 응시했다.
  "오웬은 지난 칠월 유언장에 추가 조항을 새로 넣었습니다."
  "지난 치, 칠월에?"
  아사는 성급하게 되물었다.
  "쓰러진 다음에?"
  파킨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재조정된 이 유언장 전문을 다 읽어주겠소."
  "원한다면이라니? 다, 당장 빨리 읽어요!"
  아사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파킨슨은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했다.
  "나 오웬 샐링거는 유산을 정리함에 있어, 삼년 전에 작성해놓았던 유언장 
속에 추가사항을 넣고자 한다. 내게 속한 샐링거 호텔 법인주식 삼십 퍼센트 중 
이십 팔 퍼센트를 정확하게 반분해, 아들 펠릭스와 아사에게 각각 남긴다. 
샐링거 호텔 법인주식 삼십 퍼센트중 나머지 이 퍼센트와 육십년 전 뉴욕 
시카고 필라델피아 워싱턴에서 샐링거 체인으로 시작된 호텔 네 개, 그녀가 
사년 넘게 생활했고 또 앞으로 생의 보금자리로 여기며 평생 살아 나갈 비콘 
힐의 대저택, 그리고 그곳에 소유된 부속물 전체 등 모든 것을 최근 내 인생에 
사랑과 기쁨을 가져다 준, 나의 사랑하는 로라 페어차일드에게 유증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유산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로라는 새로운 
계획을 세울 때마다 매번 내게 도움을 주었던 바, 내가 못다 이루고만 그 꿈을 
완성시키고 더욱더 발전시켜나갈 것을 굳게 믿는다. 사랑하는 로라, 유언장에 
남긴 내 작은 선물을 기쁘게 받아주기 바란다."
  무거운 침묵이 실내를 짓누르고 있는 동안, 로라의 감긴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라는 클레이의 흥분된 눈길을 애써 외면했다. 그의 눈동자는 춤을 추듯 
생동감 있게 반짝거렸는데, 입술은 흥분을 그대로 쏟고 있었다.
  "와우! 대단한데, 누나. 해냈구만!"
  그의 환호에 로라는 아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녀의 표정을 재빨리 읽은 폴은 미간을 찌푸리며 클레이를 노려보았다. 
파킨슨이 소란스런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황동 나이프로 책상 위에 놓인 
잉크병을 두드려 댔지만, 소란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마, 말도 안돼!"
  아사는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몇 년 동안 우리가 머, 머, 먹고 살 집을 제, 제공해 왔으면 됐지, 더 이상..."
  "우리가 아니라 오웬이 로라를 받아들였죠."
  펠릭스의 부인 레니가 말했으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내 생각엔 아주 잘된 것 같은데."
  알리슨이 소리쳤다.
  "로라가 할아버지를 정성껏 보살펴드린 건 사실이잖아요. 로라에게 그런 
선물을 남긴 건 당연한 일이에요. 게다가 할아버지가 원한 일인데요, 뭐."
  "아버진 당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셨던 분이다!"
  펠릭스의 격노한 음성은 서재의 두런거리는 소음을 일시에 잠재웠다. 엄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펠리스는 가족들이 자신을 주목하도록 말없이 
기다렸다. 그들은 아사가 아닌 펠릭스가 비어 있는 샐링거 왕좌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 정말 모르셨던 분이었어."
  펠릭스는 말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되풀이 말했다.
  "환자였으니까 조종당하셨던 거야. 쓰러져 침대에 누워 계신 몇 달 동안 우리 
재산을 교묘하게 빼내기 위해 꼬리를 쳐댄 사악하고 더러운 계집."
  "이모부!"
  폴의 노기 서린 목소리가 펠릭스를 잡아챘다. 폴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합니까?"
  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클레이가 으르렁거리며 펠릭스에게 다가왔다.
  "도대체 무슨 증거로 그런 소릴 함부로 해요?"
  "입다물고 있어!"
  클레이의 말을 받아친 펠릭스는 조금 전의 말을 이어나갔다.
  "쓰러진 후 아버지는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건 물론 말도 한마디 못하..."
  "이모부!"
  폴은 다시 강하게 제동을 걸었다.
  "말씀하실 수 있었어요!"
  로라가 일어나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말씀을 하셨어요. 우린 서로 말을..."
  남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제대로 말을 하신 건 아니었지. 게다가 
움직이시지도 못했어. 누가 보더라도 아버지의 정신상태는 정상이 아니었어? 
그랬기 때문에 저 젊은 것한테 이용당한 것일 테고. 변덕 심한 양반이었으니 
당신 인생 속으로 기생충처럼 기어들어온 배곯은 거지를 애지중지 하셨겠지.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저애가 어땠을 것 같애?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둔 채 
보물단지를 휘어잡기 위해 병실 밖으로 간호사들을 교묘히 쫓아낸 뒤 
단독면담식으로 유언장 내뇽을 고치도록 유도했지."
  "지금 제 정신으로 그런 소릴 하는 겁니까? 도대체 나중에 어떻게 수습을 
하려고 그래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도무지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로..."
  "할아버지는 간호사를 원치 않으셨어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한기로 로라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분은 낯선 사람들을 원치 않으셨어요."
  "그분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상태였어."
  "그만두라니까요!"
  폴은 고함을 쳤다.
  그러나 펠릭스는 날카로운 콧날을 약간 아래로 내리며 로라를 노려보았다.
  "그 교활한 입술로 대답을 해봐. 네개 전과가 있다는 사실, 오빠를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아버지가 알고 있었다곤 말 못하겠지. 우린 모두 널 
친절하게 받아들여 없는 것 없이 다 주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사년 동안 내내 아버지를 속여? 언제까지 우릴 그렇게 교묘히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거지?"
  갑자기 주위가 물 속처럼 조용해졌다.
  "너는, 무려 사년 동안 우릴 감쪽같이 속였어."
  펠릭스는 망치로 내려치듯 마디마디를 강하게 끊었다.
  "사년 전, 너와 네 동생이 우리집 문간에 발을 들여놨던 그해 여름, 값을 따질 
수 없는 보석이 없어진 사실을 우리 모두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제기랄,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야. 우린 아무 짓도 안했다구!"
  클레이는 몸을 틀며 말했다.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뜻이 확실치 않은 펠릭스의 뒷말을 기다렸다.
  "아무 짓도 안했다는 소릴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하나? 나한테 증거가 있는 걸. 
처음엔 단순히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여길 찾았겠지. 도둑질을 하기 위해서 
말이야. 하지만 보석을 훔치고 보니까 또 다른 욕심이 생겼어. 아주 사악하고 
교활한 욕심 말이야. 독기 서린 촉수를 감춘 채 내 아버지 주변에서 어른거린 
이유를 대신 말해볼까? 죽기 전에 네게 재산을 남겨줄 나이 들고 병든 노인을 
또 한명 잡았다 싶은 마음 아니었어? 이 집에서 사년 넘게 얼쩡거린 이유였지."
  가족들의 웅성거림 속에 펠릭스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후 부잣집 젊은 청년을 방패 삼아 더욱 교묘하게 몸을 숨겼겠지. 프로급 
도둑이 기회를 놓치다니, 말이 안되지. 안 그런가?"
  "아니예요. 난 할어버지를 사랑했어요."
  그러나 로라의 음성엔 힘이 없었다.
  "그리고 난 폴을 사랑해요. 그렇게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할 권리가..."
  "권리? 네가 감히 나한테 권리 운운해? 우리 가문에 기생하기 위해 스멀스멀 
기어들어와 아내가 아끼는 보석들을 훔치고 우리 아버지를 거의 죽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너, 로라 페어차일드야!"
  "미친 소리 그만해!"
  클레이는 악을 썼다.
  "우린 그걸 안 훔쳤어. 처음 계획을 바꿨..."
  칼이라도 맞은 듯 말을 멈춘 클레이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어느새 
눈물이 말라버린 로라의 얼굴도 납빛으로 변해 있었다.
  "계획을 바꿨다구? 천만에!"
  클레이가 결정적인 말을 뱉아내자 펠릭스는 두 눈을 별처럼 반짝거렸다.
  "둘 다 범죄꾼들이더구만. 그짓밖에 내세울 것이 없지. 안 그래? 다른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알아볼 작정이다. 법정으로 나가 그 추가 
유언조항을 없애버리겠어. 샐링거가 어떤 가문인데 너희들한테 호락호락 
넘어가? 아버지 유산의 일전 한푼도 너희들에게 넘길 수 없다. 빈손으로 여기에 
발을 들여놨듯이 빈털터리로 나가게 할 것이다. 지금 당장 떠나. 두 번 다시 
우리 가문, 그 누구와도 상종할 생각하지 마!"
  로라는 휘청거리며 폴을 찾았다. 그러나 폴은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년 동안 내내 그녀 주변을 맴돌던 악몽이 현실로 
나타난 순간이었다.

    2장
  "꽤나 어렵게 보이는데."
  클레이는 케이크 코트 대저택 회색빛 지붕을 보며 중얼거렸다.
  "경비실, 담장, 개도 한 마리 봤어..."
  열일곱 살의 클레이는 낯선 동네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전문가처럼 보이기 위해 
짐짓 여유 있는 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라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바닥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도 마찬가지였지만 표정만은 침착했다. 
클레이보다 한 살 위인 로라는 동생보다 대범했다. 임대한 차로 벤이 샐링거의 
여름 별장을 서서히 돌고 있는 동안 뒷좌석의 클레이는 로라에게 바짝 
다가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가 우글거릴 걸."
  "그럴 수도 있겠지."
  벤은 푸른 바다와 샐링거 가문 전용 선착장에 정박되어 있는 범선과 
모터보트들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넌 걱정할 필요없어. 날 들여보내기만 하면 돼. 그 뒤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깨끗하게."
  "배로 쫓아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클레이는 못 믿겠다는 듯 벤에게 바싹 몸을 붙였다.
  "왜 하필이면 이런 델 골랐어?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요새 같은 곳이잖아?"
  "그만둬, 클레이."
  로라는 동생의 불평을 간단히 잘라버렸다.
  "할 수 있을 거야. 이번이 마지막이다. 오빠한테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구 
얘기했어. 너도 마찬가지야. 이걸 끝으로 손떼야 돼. 알았지?"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자동차로 오스터 빌까지 오며 바라본 송림과 야생 
잔디밭 그리고 부드러운 사구 등을 생각하며 로라의 목소리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무섭긴 정말 무섭다. 모든 게 우리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것 같고..."
  그녀의 말에 벤은 백 미러에 비친 그들을 보며 히죽 웃었다.
  "내가 늘 뭐랬니. 자신감을 갖는 게 중요하다, 그랬지. 오, 나의 똑똑한 
동생들아. 용기와 자신을 가져주세요! 너희들이 못 들어갈 곳이 어디 있다고 
그래? 철통 같은 성벽도 너희들 때문에 넘어 들어갔지 않니."
  "뉴욕이니까 가능했지."
  클레이는 여전히 볼멘소리를 했다.
  "우리가 손바닥 보듯 훤히 아는 뉴욕이니까 잡히지 않았다구. 뉴욕은 골목길과 
전철, 붐비는 인파 속으로 들어가 숨을 수 있었지만, 백만 에이커 대지로 들어가 
죽자사자 하는 맹견들과 달리기를..."
  "백만이 아니라 오 에이커."
  벤은 부드럽게 큼레이를 달랬다.
  "샐링거 여름 별장은 백만이 아니라 오 에이커라구. 경비실 한 채, 오 에이커 
위에 흩어져 있는 대저택 여섯 채,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탄탄한 담. 
하지만 아직 그것밖에 모르잖니. 자세한 걸 알아내려면 너희 둘이 그곳으로 
들어가 일자릴 찾는 길밖엔 없어. 클레이 널 믿는다. 로라, 너도 마찬가지야. 
모든 게 너희들 손에 달려 있단 소리야."
  벤의 자신감 있는  목소리는 로라에게 늘 용기를 주었다. 그는 로라의 
이부(異父)오빠였다. 벤이 막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재혼한 그의 어머니는 결혼 
일년 뒤 로라와 클레이를 차례로 가졌던 것이다. 퀸스 주변에 있는 작은 
전셋집에서 클레이와 로라에게 벤은 영웅이었다. 그들은 게딱지만한 벤의 
다락방에 진을 치곤 했고, 그가 외출을 할때마다 졸졸 따라다녔다.
  그 뒤 열네 살의 로라가 차 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 이후, 
여자친구들을 꾸러미로 데리고 다니던 스물세 살의 미남청년 벤 가드너는 
졸지에 로라와 클레이의 보호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때부터 그는 두 사람에게 
이부형이나 오빠보다는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러나 동시에 벤은 그들에게 도둑질하는 일도 가르쳤다.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갖가지 경험을 한 벤이 가장 흥미를 니끼는 일은 도둑질이었다. 
도둑질로 맣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었고, 전문적인 털이꾼이 되지 못하는 것을 
늘 속상해하면서도, 그는 갱단에 가입하거나 뉴욕을 장악하고 있는 전문털이범 
그룹ㅇ에 낄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벤은 
부업식으로 가끔 도둑질을 하곤 했다. 웨스트 앤가 부근의 작고 어두컴컴한 
싸구려 아파트로 집을 옮겼지만, 세 사람이 쓰는 생활비는 여전히 바닥을 
밑돌았다. 그래서 벤은 계속 부업을 버리지 못했는데, 얼마 후 두 명의 보조자를 
둔 탓에 그의 도둑질은 예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클레이와 로라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날쌘 몸놀림, 번개같은 손가락, 
벤보다 겁이 많긴 했지만 그들은 매우 유능했다. 빗물받이 홈통이나 늙어 
거북등이 된 단단한 등나무 줄기를 타고 소리없이 캄캄한 창문으로 기어올라간 
두 다람쥐들은 벤을 위해 창문을 열어놓은 뒤, 다시 소리 없이 밑으로 내려와 
낙서로 얼룩진 이름 모를 전철역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모든 것을 빠르게 습득한 그들은 배운 것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 스스로 
거듭 발전해 나갔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닫는 식이었다. 경찰 
발자국소리가 어떻게 들려오는지, 그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번 둘러본 방모습을 사진기처럼 정확하게 기억했다. 
전기기구들, 액자, 예술품등이 어느 곳에 있는지 귀신처럼 외웠다. 새털처럼 
가벼운 손끝은 그들을 투명인간처럼 만들었다. 상점에서 물건을 훔친다거나, 
지하철역이나 월스트리트 주변 등지에서 택시 잡는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데는 프로급이었다.
  스릴 넘치는 도둑질은 그만큼 위험했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뒤 무사히 
빠져나오는 일, 세 사람은 완벽한 팀워크로 그일들을 해냈다. 그들은 
공동운명체였다. 그래서 로라는 그만두고 싶어도 도둑질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말을 감히 벤에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과 클레이를 사랑하며 돌보아온 벤을 
미워한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았다.
  로라는 차츰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세상이 점점 비틀려 보이기도 했다. 
고교 졸업생인 그녀의 친구들은 방과 후 집으로 애들을 초대해 같이 뒹굴며 
재미나게 밤을 보내기도 했고, 학교 운동장 구석에 모여서 깔깔거리며 
남학생들을 초대하는 토요일 파티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러나 로라는 그 
누구하고도 친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토요일 밤의 
열기에 휩쓸릴 수도 없었고, 밤을 새워가며 한 침대에서 재잘거릴 여자친구를 
가질 수도 없었다. 두 개의 방 중 하나는 벤의 차지였기 때문에, 로라는 
오차드거리 쓰레기 하치장에서 주워온 침대보를 둘러쓴 채 클레이와 한방을 
사용해야 했다. 친구들과 학교 복도벽에 붙어 학과 공부나 텔레버전 연속극 
얘기 등을 가볍게 말할 수는 있어도 마음속 깊이 간직한 느낌이나 미래에 대한 
꿈 등을 주고받을 순 없었다. 그녀는 늘 혼자였다.
  하지만 외로움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두려움이었다. 열네 살때 클레이와 
함께 경찰에 체포된 후 그녀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결코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악몽이었다. 그들을 잡기 위해 쫓아오는 경찰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 음침한 
경찰서 분위기, 지문을 찍기 위해 검정 잉크판 위에 손가락을 잡아 올리던 
경관의 거친 손길, 사진을 찍던 경관이 무서운 얼굴로 으르렁거리던 소리, 
"왼쪽으로 돌려봐, 오른쪽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라니까, 이 꼬맹이 
도둑놈 같으니라구..." 그 경관은 사진을 다 찍고난 뒤 로라의 엉덩이를 비명이 
나올 정도로 세게 꼬집기도 했다.
  벤은 변호사를 통해 보석금을 내고 둘을 경찰서에서 꺼내주었다. 유죄로 
판결이 났지만 집행유예에다 멜로디 체이스라는 여자의 보호관찰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두 꼬맹이 도둑은 감옥문 바로 앞에서 발을 돌릴 수 있었다. 법정의 
배심원들이 결코 두 아이들을 독신남인 자신에게 맡기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했던 벤은-더군다나 실제로 두 동생들과 법적으로 연결돼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에-여자친구인 멜로디와 함께 법정에 출두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로라와 클레이의 이모로 소개하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네 사람은 
법정문을 나설 수 있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법정 사람들은 미성년자인 
그들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어했다. 마치 쓸데없는 물건을 넘기듯.
  결국 그들은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경찰서 컴퓨터 속에는 두 사람의 
사진과 지문이 기록되어 있었다. 로라는 몇 주동안 내내 그 생각을 뇌리에서 
지우지 못했다. 전과 내용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로라는 마침내 벤에게 더 이상 돕지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 도둑이 되고 싶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을 
뿐이었다. 학교 연극에서 여러 배역을 맡은 적이 있었던 그녀는 연근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아니, 배우가 아니라도 좋았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떳떳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하고 싶었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크게 언쟁을 벌여야 했다. 벤은 그녀가 소매치기 일을 
몹시 꺼려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라는 지갑에서 돈을 빼낸 뒤 항상 훔친 
지갑을 우편으로 주인에게 돌려보내곤 했다. 감동적인 시구, 영수증, 주소, 
전화번호, 회원카드, 보험카드, 그녀에게는 소용도 없을 신용카드, 특히 그들이 
분명 소중하게 여길 가족 사진들.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속상해 있을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로라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그녀가 훔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나왔을 때, 벤은 정에 
여린 로라가 지갑을 훔치는 일 때문에 일시적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로라의 결심은 벤의 생각처럼 일시적이지 않았다. 그년느 
샐링거 집을 마지막으로 손떼겠다는 약속을 자신에게 수없이 되풀이했다. 절대, 
절대로 두번은 없을거야.

  "형이 우릴 믿는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야."
  뒷좌석의 클레이는 로라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하지만 이런 곳은 정말 처음이잖아. 세상에 웬 집이 이렇게 넓어. 창문은 왜 
저렇게 많은거야."
  벤은 경비실로부터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약속시간 오분밖에 안 남았다. 빨리 가봐. 침착해야 된다, 둘다. 절대 
성급하게 굴지 말고. 연습했던 대로 하면 아무 문제없을거야. 알았지? 걱정 마. 
합격될 거야, 부잣집 여름 별장엔 항상 일손이 모자라는 법이니까. 여기서 
기다릴게."
  "왜 맨날 우리만 시켜."
  경비실을 지나 경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물을 향해 걸어가던 클레이가 
툴툴거렸다.
  "우리가 구석구석을 살피는 동안 편하게 앉아 있다가 다 준비해놓으면 슬며시 
들어와 터는 식 아니냐구, 우린 여전히 범죄 현장에 있을 텐데."
  "아냐. 그렇겐 안할 거야."
  로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빤 우리한테 알리바이가 생기기 전까진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어."
  고개를 돌려 클레이의 찌푸린 얼굴을 살피던 로라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짙은 숲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드넓게 뻗어 있는 대지였다. 그녀는 
융단 같은 잔디밭과 저택 창문들, 오색의 찬란한 빛을 뿜는 꽃밭, 분수가 있는 
연못, 푸른색 온실들을 재빠른 눈길로 하나씩 훔쳐보았다. 그림엽서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낙서나 쓰레기, 오물 하나 없었다.
  "어쨌거나 오빠가 일 끝낸 뒤 여기 오래 있을 필요는 없잖니. 잠깐이야. 
보석을 훔친 장본인이 우리라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테고."
  "훔친 뒤에도 남아 있어야 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클레이는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동생이 화가 나 있지 않다는 것을 로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벤을 우상처럼 여기고 있었다. 열여섯 살 때까지 그를 
학교에 묶어 둘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벤 덕택이었다. 벤이 뭘 시키든 
클레이는 신이 내린 명령처럼 따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뭘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대학갈 돈을 마련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훌쩍 
떠나가버리면 동생 클레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따 봐. 누나 만나러 오는 것 같으니까."
  키 큰 여자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던 클레이가 로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난 온실지기를 만나볼게."
  여자가 로라 옆에 가까이 왔을 때 클레이는 온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로라 페어차일드? 레니 샐링거예요. 현관 앞에 앉아서 얘기할까요? 여긴 
경비를 맡고 있는 조나스가 살고 있어요. 우리 집이긴 해도 관리인이 사는 
숙소라 그런지 들어가기가 뭐하네. 더군다나 비나 오면 모를까 안보다 밖이 
나을 것 같아서... 날씨가 참 좋죠? 여기 유월은 조금 변덕스러워요. 봄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름 날씨도 아니고, 하지만 오늘은 진짜 날씨가 좋네요. 휴양객들이 
몰려들긴 하지만 여기 유월은 아주 조용해요. 전해 듣기론 이력서를 갖고 
온다고 했다는데..."
  "아, 참."
  레니의 잔잔한 음성에 매료된 로라는 자신이 왜 그곳에 와 있는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네, 갖고 왔어요..."
  그녀는 검정색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레니 샐링거의 흰 밀집모자에 비해 
유월에도 칙칙한 검은 가방을 든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만 했다. 꼭 맞는 바지, 
아이보리빛 단추가 박혀 있는 면남방, 길고 매끄럽게 색친된 손톱,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음성과 행복한 표정. 늘씬하고 호리호리한 레니 샐링거는 
로라와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난 평생 저렇게 되지 못할 거야. 뭐 하나 제대로 된 구석이 있어야지.
  "로라?"
  레니는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긴장할 필요없어요. 까다롭게 묻지 않을 테니, 그렇게 바짝 얼지 말라니까. 
야단도 안 칠게요. 우리 식구 모두 일하는 사람들을 편히 대하는 성격이니까. 
하지만 그전에 몇 가지 좀 알아야 될 것 같아서 전에 했던 일을 묻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부인이 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걱정할 게 
전혀 없는 분 같다는 생각도 했구요. 아니, 제 말은 너무 행복해 보이기 때문..."
  말을 채 잇지 못한 로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에 애처럼 굴다니. 다른 
생각하느라 엉뚱한 얘길 곧잘 하던 로라는 문법 선생님 앞에서도 여러번 그런 
실수를 해 시선을 받기도 했다. 전혀 실수할 것 같지 않은 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로라는 몹시 두려웠다. 자신감을 찾기 위해 얼굴에 힘을 주며 
로라는 그녀에게 벤이 직접 타자를 쳐 사인한 서류를 넘겼다. 레니가 그것들을 
읽는 동안 그녀는 심호흡을 했댜.
  "세상에, 놀라워요. 열여덟이란 나이로 이렇게 많은 경력을 쌓다니. 이렇게 
완벽한 추천서는 본 적이 없어요. 대강 성의 없게 써 놓거나,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전화번호조차 빼먹어요. 오하라, 스톤, 필립스. 세상에 추천인 이름까지 
다 써 놨네. 이 추천인들 전화번호 기억해요?"
  "아뇨."
  로라는 벤이 가르쳐준 대로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알 순 있어요. 제 말씀은, 원하신다면 전화번호책을 찾아 그 이름과 
같은 사람들한테 일일이 전화를 걸겠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전화번호를 알아내 
부인께 드리겠습니다. 그럼 제가 그 집들을 돌아가며 일한 걸 확일할 수 있으실 
거예요. 여기에서 꼭 일하고 싶어요. 뭐든지 시키시는 대로 다..."
  "글쎄 임시직이긴 하지만... 일손 구하는 게 어렵긴 해요. 더군다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는 더욱 힘들지. 생각해볼게요."
  레니는 로라를 깊게 응시했다.
  "자신에 대히 좀 말해볼래요? 지금 어디 살아요?"
  "뉴욕입니다."
  벤은 그녀에게 사적인 질문을 잘 넘기라고 충고한 바 있었다. 똑바로 
상대방을 응시하며 대답하되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런 질문들을 피해 나가라고 
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지금은 친척분들이 저와 동생을 돌아가며 
돌봐주세요. 그런데 우릴 집에 들이길 싫어하는 것 같아 일년 전부터 독립해서 
살고 있어요. 전 지난주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대학에 갈 생각은 없어요?"
  "제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이에요. 돈을 벌 수 있다면..."
  레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일자릴 찾는 거군요. 하지만, 왜 하필 여길까? 뉴욕에서 찾는 게 더 
빨를텐데. 여기 케이프까지 오게 된 이유가 있어요?"
  로라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부분에 관해선 연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떠나보고 싶었어요.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우린 아주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요. 여름에는 열기 때문에 방은 찜통같고, 그런 곳에 갇혀 
있으려니까... 학교 친구가 여기가 근사하다고 해서 이쪽을 찾았어요."
  그녀는 숲 사이로 하얗게 반짝이는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에요."
  레니는 더욱 가까이에서 그녀를 뜯어보았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차가 있어요?"
  로라는 밀려오는 불안감을 느꼈다. 왜 자꾸 질문을 하는 거지?
  "친구가 태워다줬어요."
  불안했지만 로라는 대답을 늦추진 않았다.
  "돌아갈 땐 어떻게 가려구?"
  "돌아갈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능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수줍게 속삭였다.
  "제 말은, 부인께서 우리 두 사람을 고용해주시면, 그렇게 되면... 여기 머무를 
수 있지 않겠어요?"
  "여기 어디에?"
  레니의 음성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잔잔했다.
  "어머, 벌써 찾아냈는걸요. 오는 길에 신문을 샀어요. 거기 보니까 오스터 빌과 
센터 빌에 셋방이 있더라구요. 제발 저희들에게 기회를 주세요. 무슨 일이든지 
잘 해낼 자신이 있어요. 염려하시는 건 이해하지만,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독립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앞가림을 철저히 합니다. 폐 끼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히요. 일도 잘 할 것 같고..."
  그녀능 말끝을 흐렸다. 로라에게서 고개를 돌린 레니는 딸 알리슨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로라 나이 또래의 여자였다. 키 크고 호리호리한 레니의 자태와 매우 
흡사했지만 짧게 파마한 레니의 모습과 달리 그녀의 긴 금발은 생머리로 
아름답게 빛나 보였고, 레니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오만함이 젊은 여자의 
생기발랄한 모습과 어우려져 이"있었다.
  "알리슨, 왜 그러니?"
  "테니스 파트너가 없어서요. 파트리샤가 치기 싫대잖아요. 나랑 칠래요?"
  "내 딸, 알리슨이에요."
  레니는 로라에게 눈을 돌렸다.
  "알리슨, 여긴 로라 페어차일드양이다. 로자 조수로 일자리를 구하러 왔단다."
  "주방장 로자는 기가 막히게 좋은 사람이에요. 주방을 주름잡는 폭군이긴 
하지만... 일주일 내로 아가씨를 쫓아낼지도 모를테니 조심하는 게 좋을걸요. 
그렇지 않으면 오른쪽 팔에 끼고 애지중지 할 거예요."
  로라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던 알리슨은 레니에게 얼굴을 돌렸다.
  "로자가 너무 말랐다고 할 것 같지 않아요?"
  "내가요?"
  면 드레스와 재고점에서 산 검정색 구두, 케이프의 소금기 섞인 바람을 맞고 
있는 창백한 얼굴과 초라하게 매달린 머리묶음. 로라는 자신의 그런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로라는 자신이 말랐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내가 진짜 
말라깨이라면 일자린 생각지도 말아야겠구나. 예쁜 여자들만 하녀로 
고용하나보지.
  벤과 클레이가 늘 예쁘다고 칭찬을 하긴 했지만 그들은 한 가족이었다. 
로라는 갑자기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초조하게 귓바퀴 뒤로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로라는 푹신한 의자 위에서 허리를 꼿꼿이 하고 다리를 
가지런히 모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이 흔들린 이유는 외모에 대한 자신감 결여가 아니었다. 
알리슨과 레니 사이에 흐르고 있는 따스함 때문에 로라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태껏 한번도 대히 보지 못했던 감정으로 로라는 두 사람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털려 하다니...
  벤이 내린 경고가 또 한가지 떠올랐다.
  -목표대상은 모르는 게 낫다. 피할 수 없다면 절대 가까이 하지 말고 거리를 
두어라.
  로라는 괴로웠다. 알리슨과 레니는 아무리 봐도 좋은 사람인듯싶었다.
  "로라 외모가 어쨌다고 그러니?  그건 걱정할 필요없어요. 살이 약간 더 찌면 
좋을 듯싶기도 하지만, 요즘 아가씨들이 어디 그래. 통통한 걸 싫어해서 살을 
빼는 판인데. 다들 영양분이 부족해 제대로 줄기를 뻗지 못하는 식물이나 
죽어가는 갈대처럼 한들한들 거리고 싶어하잖니. 내 말대로 몇 킬로 찌면 더 
나아 보일 것 같은데... 제대로 갖춰 먹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 아침마다 
식사는 꼬박꼬박 해요?"
  로라와 알리슨은 순간 서로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깔깔거리는 딸을 
레니는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여간해서 웃음을 보이지 않는 도도한 알리슨이 
쉬지 않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씩 딸의 차가운 침묵을 
걱정해오던 레니는 낯선 아가씨와 미소를 주고받는 알리슨을 바라보며 비록 
자신 손에 쥐어진 어력서가 가짜랄 할지라도 로라 페어차일드를 샐링거의 
케이프코트 여름별장 주방조수로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로라가 주방에서 로자를 도와주고 있는 동안, 클레이는 온실과 정원의 
식물들을 돌보았다. 여섯 채의 별장 중에서도 펠릭스 내외의 저택은 가장 크고 
웅장했다. 벤은 로라에게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뒤 평면도를 그려내라 했지만, 
케이크에 도착한 지 이주가 지난 후에도 평면도는 켜녕 레니의 보석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디너 파티나 무도회 등지에서 찍은 
사진을 통해 레니의 목에 걸렸던 보석들을 구경하긴 했어도 그녀가 그것들을 
어느 곳에 보관하는지는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뭘 그렇게 우물거리고 있는 거야?"
  울타리 내 저택들 위치와 대지 모양을 자세히 그린 평면도를 내려다보며 
클레이가 물었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센터 빌 근처에 빌린 방 두 개짜리 
창고집이었다. 클레이는 경비관에서 레니의 침실까지 거리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로라를 다그쳤다.
  "누나 때문에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
  "애쓰고 있어. 하지만 로자가 어디 놔줘야 말이지. 항상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니까."
  "그 여자 독재자구만."
  벤이 사준 두 대의 자전거에 각각 올라 아침에 출근을 한 뒤 오후 늦게 센터 
빌로 돌아갈 때까지 하루 종일 로라가 대하는 사람은 주방장 로자와 고용인 몇 
명뿐이었다. 샐링거 일가 중 부쿡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레니뿐이었다. 매일 오후 
주방에 모습을 나타내는 그녀는 로자와 함께 다음날 메뉴를 의논했다. 
단풍나무로 만든 탁자 위에 지난 여름에 올랐던 음식들을 다시 살피기 위해 
요리책자를 펼친 뒤, 마치 대접전을 앞둔 장군들처럼 두 여인은 다음날을 위해 
스케줄을 짜곤 했는데, 대체로 점심식사 때는 손님수가 적었고, 저녁식사엔 
열다섯 명 이상 초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레니 외에 부엌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탓에 두 주일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로라는 누가 
왔는지, 또 누가 그 케이프 별장을 떠났는지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알리슨이 안 보이는데 어디 갔어요?"
  로라는 지나가는 투로 로자에게 물었다.
  "메인에 갔어. 가족들 모두 여행을 좋아하거든. 아마 지금 온 세계에 다 퍼져 
있을걸. 가문 전체가 모이는 건 지구가 망해도 힘들 정도일거야. 다 있다 싶으면 
누가 떠나고, 그 떠난 사람이 돌아오면 또 다른 사람이 떠나고 하니까."
  "집을 비워놓고 떠나기도 하나보죠?"
  깔끔하게 잡아맨 머리모양에 흰색 유니폼까지 갖춰 입은 로라는 마치 자신이 
로자와 동급의 요리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더블로 된 대형 설거지 기계 속에 
아침식기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로라는 이 집 식구들에 관한 궁금한 점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어 있는 집도 있지. 어떤 집은 고용인들만, 또 어떤 집은 지붕 꼭대기까지 
손님들만 묵는 경우도 있구. 처음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저택 여섯 채엔 항상 
손님들이 끊이질 않아. 호텔사업을 하는 양반들이라서 그런지 침대가 남아돌면 
무슨 큰일이 나는 줄 안다니까."
  로자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로자와 함께 있으면 늘 편안하게 느껴졌다. 육십칠 
세의 나이임에도 로자는 기운이 왕성한 마음씨 좋은 할머니였다. 둥글고 
작달막한 키의 로자는 쉴새없이 손을 움직였다. 잘 익은 빵을 대리석 
판으로부터 파이 접시 위에 날렵하게 옮겨 놓는 기술, 수프통을 저어가며 
동시에 야채를 칼질하는 묘기, 반죽해놓은 밀가루가 부풀거나 빵이 익기를 
기다리며 조카에게 줄 조끼를 짜고 있는 그녀의 손놀림은 거의 신기에 가까울 
정도였다. 조끼를 다 짜고나면 로라의 수웨터도 짜주겠다고 약속했다. 무슨 일을 
하든 그녀는 한시라도 입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쉴새없이 그러나 과장된 
어조가 아닌 찬찬한 어투로 샐링거 가문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오웬님이 아이리스님을 이곳에 데려온 것은 그러니까 1920년이었을 게다. 
아이리스님은 아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분이었지. 일년 뒤 펠릭스가 태어났어. 
그러니까 내가 이집에 들어온 해지. 그땐 그렇게 세 사람밖에 없었단다. 난 
요릴하고, 청소를 하고 애기를 돌봤지. 일년 뒤 아사가 태어났고, 나는 결혼할 
나이가 돼 결혼했지만 운명이 그렇게 만들어진건지 얼마 후 과부가 됐단다.
  그뒤 아이리스님이 병이 들었어. 정성껏 간호했지만 결국 애들을 남겨두고 
아이리스님은 다른 세상으로 떠났지. 그렇게 십년이 훌쩍 흘러가버렸어. 지금 
생각해보니까 내가 재혼 못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아. 엄마 역할을 해가며 
펠릭스와 아사를 키우느라 너무 정신이 없었던 게야. 슬픔에 빠져 몇 년 동안 
방황하던 오웬님도 보살펴야 했으니, 바빠도 한참 바빴지."
  "지금은 식구들이 굉장히 많던데, 다들 어떻게 되는 관계죠? 너무 많아서 
이름도 외우지 못하겠어요."
  점심상에 오를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 야채를 자르는 칼질에 박자를 맞춰 가며 
로자는 이름들을 하나씩 짚어갔다.
  "샐링거 호텔 체인 설립자인 오웬 샐링거에겐 펠릭스와 아사 두 아들이 있다. 
펠릭스에겐 알리슨이라는 딸이 하나 있고, 둘째 아들 아사는 첫번째 결혼에서 
파트리샤를 얻었다. 결국 오웬님에겐 호텔사업을 이끌어 나갈 손자가 한 명도 
없는 셈이지. 조카도 없어. 남자는 없고 여자들만 있는 가문을 상상해봐. 
호텔사업에 관심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니, 이 집안도 정말... 오웬님의 
자부조카가 하나 있긴 하지. 폴 젠슨이라고 레니 언니 바바라의 아들인데, 
그자도 틀렸어. 폴은 엄청난 바람둥이에다가 한곳에 잠시도 진득하게 앉아 있질 
못하니. 설사 억지로 정착을 시킨다 해도 호텔에 눈 돌릴 인물이 아니야. 사진에 
미쳐 있으니 말이야. 펠릭스와 아사가 은퇴하고 나면 누가 호텔들을 경영할지 
진짜 감이 안 잡힌다니까."
  로라가 물어볼 때마다 로자는 한 사람 한 사람에 관해 세세하게 결점, 장점, 
버릇 등을 눈에 보이듯 설명했다.
  "일곱 살 때 미끄럼틀에서 손가락이 부러진 뒤로 알리슨은 죽어도 그네 같은 
곳 근처엔 가질 않으려 했어. 펠릭스가 백 달러를 주겠다고 꼬셔도 
어림없었다니까."
  로자는 펠릭스가 부친을 위해 건축한 집 얘기도 했다.
  "긴 화랑을 사이에 두고 이 건물과 붙어 있는 집인데, 그 집 현관은 회랑 저 
끝에 나 있단다. 이 저택을 오웬님에게서 선물받은 펠릭스와 레니가 여름 
한철을 이곳에서 보내자고 했지만, 오웬님은 혼자 지낼 자그마한 별장을 따로 
짓겠다고 우겨댔지. 된다, 안된다, 싸움 끝에 누가 이겼을 것 같애? 칠십팔 세 
노인 양반이었어. 돌보는 사람하고 같이 살아야 하는 나인데도 어찌나 
프라이버시를 외치는지, 아주 혼들이 났었다니까."
  로자는 로라에게 가족들이 여름 휴가를 보내는 케이프 주변과 여름별장을 
떠나 뉴욕, 캘리포니아, 보스턴에 사는 샐링거의 가족과 친척들에 관한 사항들을 
시시콜콜 얘기했다.
  결국 로자 덕분에 그녀는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가족들의 성품과 생김새 
등을 사진기처럼 그려낼 수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캐나다에 가 있는 
오웬, 보스턴에서 일주일을 더 보낸뒤 돌아올 아사와 그의 가족들, 유럽으로부터 
이주일내에 저택을 방문할 레니 언니인 바바라와 그녀의 남편 토마스 그리고 
그들의 아들 폴, 케이프에 짐을 풀었지만 쇼핑, 보토놀이, 경비행기 조종연습 
등으로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사는 다른 식구들 얘기 등 로라가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는 듯했다. 그들이 저녁 파티에 모이게 되는 날, 자신이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는 사실도 귀띔받았다. 주방 밖으로 나가 다른 하녀들과 
음식 시중을 들지 않으면, 주방에 남아 구정물에 손을 담그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했다.
  "다들 마음에 들어 하실 게다."
  로자는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로자는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너는 괜찮은 용모를 가지고 있어. 단정하고, 몸놀림 빠르고, 헤프지 않게 
미소도 지을 줄 알고. 누가 뭐라 하면 꼭 잊어먹지 않고 잘 따라하니까 모두들 
이뻐할 게다. 기억력이 어쩜 그렇게 좋니. 언젠가 레니에게 내가 그랬다. 
부엌일하면서 가르쳐준 걸 하나도 까먹지 않고 따라한다고. 여태껏 너같이 기억 
잘 해내는 애는 본 적이 없다고 그랬지."
  로라는 얼굴을 붉히며 등을 돌렸다.
  "하지만 아직 미완성의 그릇 같긴 해. 가만 보아 하니, 속으로 성깔이 여간 
아닌 것 같애. 로라, 많은 걸 배워야 한다. 여긴 형식과 규율이 있는 집안이란 
걸 명심하도록. 손님 어느 쪽으로 고기 접시를 놓고, 어느 쪽으로 음료를 내고, 
깨끗한 칼을 원할 때 손님이 하녀를 어떻게 부르는지, 물컵에 물을 채우는 
타이밍 등등 모든 걸 하나하나 배워둬야 한다. 널 추천해준 사람들이 그렇게 
멋진 소개서를 써준 이유가 아직도 안 풀리는 수수께낀걸. 그 아름다운 미소에 
깜빡 속았나보지."
  또다시 얼굴로 피가 가득 몰려드는 것을 느끼며 로라는 말없이 빨간 고추를 
썰었다.
  "음식 시중은 들어보지 않았어요. 주방에서만 일했거든요."
  "내가 보기엔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로자는 짓궂게 웃었다.
  "주방에서도 일해본 솜씨가 아니예요, 로라 아가씨. 마룻바닥을 닦거나 접시를 
닦았다면 모를까. 소개서에 있는 경력이 전혀 안 나타난다구."
  그녀는 로라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이런 말 해서 화났니? 걱정 마. 아무한테도 얘기 안할 테니까. 뭐 했느냐고 
묻지도 않겠다. 나도 너와 비슷했다. 아주 오래 오래 전에, 춥고 배고프고, 무슨 
일을 주든 닥치는대로 하고 싶었지. 그 사람들 집에서 뭘 했든 열심히 일했을 
줄 믿는다. 널 좋아했고 신임했기에 그런 글을 써줬겠지."
  로라의 손이 미끄러지는 순간 칼날이 손가락을 스쳤다.
  "망할 놈의 칼 같으니라구!"
  로라는 악을 버럭 쓰며 칼을 싱크대 위로 내동댕이쳤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로자의 푹신한 팔에 안겨 실컷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보여준 
신뢰, 따스한 정, 부드러운 목소리를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들을 목구멍속으로 삼켜야 했다. 레니와 알리슨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꼭 그래야만 했다.

  조용한 복도는 시원했다. 좌우 양쪽으로 나 있는 방들을 살피기 위해 날랜 
솜씨로 문을 여닫는 로라의 발걸음 소리가 경쾌하게 복도로 울려 퍼졌다. 이미 
로라는 일층의 구조를 훤하게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파악해냈다. 
그러나 회랑 맨 끝쪽에 있는 오웬의 집만은 포기해야 했다. 그곳에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대신 반대편 끝에 위치한 주방과, 창문의 넓이, 현관 앞으로 길게 
나 있는 지붕, 저택 뒤로 길게 이어져 있는 회랑의 통 넓은 유리창, 아늑한 
거실과 화려한 식당 등은 머릿속에 자세히 담아두었다.
  이제는 제2단계로 이층을 살필 차례였다.
  뉴욕에 있는 그녀의 집보다 훨씬 큰 샤워실과 각각 독립적으로 구비된 손님용 
객실과 집 뒤쪽을 길게 차지하고 있었다. 동쪽면 전체가 하나로 된 거대한 방은 
알리슨을 위한 방이었다. 그 다음으로 펠릭스의 서재, 침실, 욕실이 있었고, 
서쪽면은 레니를 위해 꾸며져 있었다.
  소리를 죽이고 침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로라는 딱딱한 아무바닥 위에서 
빛을 뿜고 있는 흰 거품 같은 상아색의 두꺼운 양탄자와, 두 방이 하나로 
연결된 공간에 놓여 있는 침대를 보았다. 옆방의 양탄자 색깔과 같은 흰 
거품빛과 상아색 레이스 실크 침대보가 침대 위에 우아하게 깔려 있었다. 
온도가 알맞게 조절된 방들은 레니처럼 우아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로라는 잠시 
레니의 침칠, 그 포근한 침대 위에 누워 엄마에게 얘기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헛꿈이야. 내가 어떻게 이런 방에서... 하지만 상관없어, 이젠 나도 엄마 없이 
살 수 있는 어른이야.
  서둘러야 했다. 그녀능 빠르게 레니의 방안을 살폈다. 응접실 책상, 탁자, 장롱 
등 서럽은 곳곳에 있었다. 침실과 옷 갈아입는 황장실 안의 옷장 네 개와 
화장대, 침대 옆에 있는 스탠드장, 벽장 등을 차례차례 지나며 로라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재빠르게 놀렸다. 서랍이란 서랍을 다 열어 깨끗하게 접혀 있는 
실크와 면제품 의복 등을 샅샅이 뒤졌다. 나중엔 가구 밑까지 들여다보고, 
비뚤어지지 않게 조심해 가며 벽에 걸려 있는 그림 뒷면까지 조사했다. 없어... 
어디다 숨겼을까... 로라는 마지막 하나 남아 았는 벽장을 향해 다가갔다. 굳게 
문이 잠긴 벽장이었다. 잠겨 있었지만 수없이 해본 일이었기에 하등 문제될 
일은 없었다. 벤이 생일선물로 준 날카로운 바늘 세트상자를 꺼내기 위해 
로라가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거실문이 활짝 열렸다.
  "누구야!"
  알리슨의 커다란 목소리가 날아왔다. 로라를 발견한 순간 문간에 서 있던 
알리슨의 눈빛이 달라졌다.
  "세상에, 로자 조수 아냐. 그때 그..."
  로라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가벼운 현기증으로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녀는 떨리는 몸을 벽장에 기댄 채 잠시 정신을 모았다. 목구멍은 바짝 
타들어가고, 심장은 동작을 멈춘 듯했다. 바늘상자를 감추기 위해 로라는 주먹을 
꽉 쥔 채 흰 제복 호주머니 깊숙이 두 손을 찔러 넣었다. 로자를 통해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알리슨은 메인에서 분명 내일 돌아올 예정이었고, 이층에 머문 
손님들도 펠릭스의 요트에 올라 집안은 비어 있어야만 했다.
  "도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야... 로라라 했지? 나 없는 동안 주방이 이층으로 
옮겨진 건가? 아니면, 오스트리아에서 우리 증조모님이 가져오신 은식기를 
찾으시나? 로자한테 아직 다 주방일을 배우지 못했나 본데, 그건 식당 찬장에 
진열돼 있어요. 아가씨."
  로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찾느 게..."
  목소리가 자꾸 기어들어가는 바람에 로라는 헛기침을 해야 했다.
  "그걸 찾는 게 아니라..."
  로라는 벽장 앞에서 한두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래층에 있어야 하는 건데..."
  "그래, 여긴 로라가 함부로 올라올 곳이 못 돼. 도둑인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우리 같이 얘기 좀 나눌까?"
  문간으로부터 방을 가로질러 들어온 알리슨은 로라의 팔을 잡고 방 밖으로 
나와 넓은 홀 맞은편 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여긴 내방이야. 내 허럭 없인 아무도 못 들어오는 곳이니까 앉아."
  알리슨의 당당한 모습에 로라는 의자에 앉을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뭐해, 앉으라니까."
  로라는 알리슨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꽃무늬 무명 쿠션이 등받이 돼 있는 
흰 등나무 의자는 그녀의 흰 주방 유니폼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밝고 
상쾌하게 꾸며진 내실은 곳곳에 놓인 백금빛 전등과 남청색 바닷빛 벽지로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케이프의 모든 빛깔이 다 그곳에 모여 있는 
분위기였다. 저택 동쪽에 위치한 알리슨 샐링거의 여러 방들을 품위 있고 
고귀하게 빛내기 위해 특별하게 조성된 잔디공원, 대양과 해변을 비추는 흰빛 
태양... 모든 것이 천국의 모습이었다.
  한바퀴 돌아 제자리에 돌아온 로라의 눈길이 내실 구석에 쌓여 있는 여행가방 
꾸러미에 떨어졌다.
  "일찍 왔어. 지루해서 말야."
  거실과 침실, 열린 창문 밖 풍경에 정신이 팔린 로라에게 알리슨이 말했다. 
말은 스스럼없이 던지고 있었지만 로라를 살피는 알리슨의 눈길은 날카로운 
빛을 뿜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여기 처음 올라온 게 아닌 것 같은데."
  창백해진 로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말이 맞지?"
  로라는 소리 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무서워서 그래? 왜 그렇게 떨고 그래? 남의 방 구경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나한테도 경험이 있다구. 친구들 방을 훔쳐본 경험 말이야. 나하고 
나이가 같은 것 같은데, 로라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어? 내가 
누구한테 이를까봐 그런다면 걱정 안해도 돼. 사실 그쪽이 뭘하든 나하곤 상관 
없는 일이니까. 로자 조수지 내 하녀는 아니잖아. 안 그래? 터놓고 지내도 되는 
사이라구. 하지만 조심해, 로라. 엄마 옷장은 내 물건들하곤 다르니까. 경보가 한 
번 울리면 그땐 인생 끝이야."
  로라의 가슴은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귓속으로 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생각을 못하다니... 그걸 알았어야 하는건데... 만약 내가 
걸려들었다면, 세상에...
  "경보기?"
  로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물었다.
  "사이렌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댄다구. 엄마 보석 때문에 설치한 거야. 엄마의 
외할머니가 오스트리아에서 은식기와 함께 가져와 선물한 건데, 엄마 말론 값을 
따질 수 없다는 물건이래. 아빠는 자꾸 보스턴 금고에 넣어두자고 하지만, 
엄마는 쓰지 못하는 보석이 무슨 소용이냐구 여름에도 여기까지 갖고 오거든. 
나도 엄마 생각과 같긴 해. 정말 중요한 거면 몸에 지니고 다녀야지. 안그래? 그 
보석들을 엄마가 얼마나 애지중지 하는지 로란 아마 모를 걸. 엄마 할머니가 
남겨주신 물건이거든. 언젠가 나한테 물려주겠지만. 나도 엄마처럼 하고 다닐 
생각이야. 그건 그렇고, 엄마 침실에서 또 뭘 보셨나, 우리 아가씨께서?"
  로라는 순간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긴장된 이래 처음 화가 치밀었다. 
고양이가 쥐덫에 걸린 생쥐를 놀리듯 알리슨은 그녀를 갖고 놀고 있었다.
  "일하러 가봐야 돼."
  짧게 끊어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는 로라를 알리슨은 강하게 잡아챘다.
  "조금만 더 있어."
  그녀의 음성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로자 밑에서 일한다 그랬지. 뭘 제일 좋아하니? 요리하는 게 재미 있어?"
  로라를 꼼짝 못하게 잡아둔 알리슨의 음성은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호기심이 
무척 많은 눈빛이었다.
  "좋아하는 것 같애. 오래 해보진 않았지만."
  "오래 안 해봤다구? 엄만 그런 말 안 하던데? 오히려 반대야. 지금껏 내내 
그런 일만 했다고 그러던데. 경력서도 그렇구."
  "그래. 많이 했지."
  로라는 자신의 실수를 능숙하게 되받아넘겼다.
  "몇 년씩 했어. 난 여기서 요리하는 걸 묻는 줄 알고. 여기 너희 집 말이야."
  "그래, 여기서 요리하는 게 좋아?"
  "좋으니까 있는 거지."
  "요리 말고 좋아하는 거 있어?"
  "왜 없어. 독서, 음악감상. 왜 그런 거 있잖아. 우리 또래 애들처럼... 그리고 
여기 해변도 좋은 것 같애."
  "남자 친구는?"
  "아니."
  "에이. 괜히... 몇 살이니?"
  "열여덟."
  "그럼 나하고 똑같은대. 근데 남자친구가 없어? 거짓말 같은데. 심각한 사이 
말고 데이트 정도는 해봤겠지. 데이트 싫어하는 애가 있다니..."
  "그게 뭐 어때서?"
  로라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가 너희들하고 똑같은 줄 아니? 난 음식이나 만드는 로자의 주방 조수야. 
내가 데이트를 하든 안하든 무슨 상관이야?"
  "화났다면 미안해."
  알리슨은 즉시 사과했다. 그리고 로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 있는 것 같애. 네 눈 말야. 마치 꼭 한꺼번에 두 가지를 생각하는 눈빛 
같아.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구. 네가 뭘 생각하고 있나 
알아맞춰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은데. 날 바라보는 눈빛이...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니?"
  "아니."
  로라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내 눈이 틀림없어. 여기 출신이 아냐. 여름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여기 
안 산다구."
  "뉴욕 출신이야."
  "아직도 뉴욕에 있니?"
  "응."
  "뉴욕생활 좀 얘기해볼래?"
  로라는 머리를 가볍게 한 번 옆으로 흔들었다.
  "대학생 다섯 명하고 데이트 해. 단순한 친구 사이긴 하지만 그중 어떤 
애하고는 자주 만나기도 하고, 주말마다 이애 저애 골라가면서 데이트하다 
걔네들 아파트 침대 위에서 실컷 뒹굴기도 하구 그것도 싫증나면 동시에 둘 
불러서 함께 즐기기도 했어. 이제 됐니? 나 가도 되지?"
  뚫어지게 자신의 눈을 응시하는 알리슨의 시선을 피해 로라는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두 남자와 동시에? 그때 기분이 어땠니?"
  알리슨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듬뿍 배어 있었다. 로라를 믿을까 말까 
망설이는 기색도 보였다. 머뭇거리는 로라에게 알리슨은 두 눈을 반짝였다.
  "난 별로더라구. 넷까지는 안 갔지만 세명하고 한꺼번에 해봤는데 영 
아니었어. 난 잘 모르겠어. 내 눈에 남자애들은 다 어려보이는 것 같구. 
대학생들하고 사귄다니, 넌 아주 행운아구나. 걔네들은 좀 낫겠지. 나랑 사귀는 
애들은 영 형편없어. 한마디로 웃기는 애들이야. 좀더 배우고 와야 한다니까. 
팬티 벗고 들어오면 뭐하니? 손가락만 밀어넣으면 다 된 줄 착각하는지, 
들어오자 마자 침을 게게 흘리지 않으면 혼자 응얼거리는 소리만 낸다니까. 
모두 다 바보 천치 같은 놈들이야. 나한테도 느낌이 있고 감정이 있는 건데, 
도대체가 걔네들은 날 인형으로 아나봐. 장난감 인형하고 노는 줄 안다니까. 
상대 감정은 눈꼽만치도 생각을 안해. 내 생각엔 걔네들은 차라리 메론 갖고 
다니는 게 나을 것 같애. 메론 구멍에다 그걸 꽂고... 애무 같은 거 해달라는 
사람도 없고 얼마나 편하겠어."
  로라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알리슨도 깔깔거렸다. 
레니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은 쉬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파고들어올 때 진짜 남자처럼 되고 싶었을 거야. 하지만 네가 무슨 얘길 
속삭여달라고 할 때 이상한 소릴 낼까봐 두려웠던 걸거야."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알리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애들이 메론 갖고 다닌다는 얘기 들어봤니?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소문인데, 물어볼 사람이 있어야지. 얘기할 사람이 없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줄 
아니? 내 말은 보스턴에 있는 사람이든 여기 있는 식구들이든 날 지랄같은 
요조숙녀로 본다는 얘기야. 정숙하고 단정하고 남자 앞에선 새침해야 하는 그런 
요조숙녀 말이야. 더군다나 끼리끼리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바늘 
하나만 떨어져도 한 시간 안에 짜하게 소문 나는 판에 내가 무슨 소릴 하겠니? 
걱정거리가 좀 있다, 기분이 별로다 그런 내색만 해도 가족들뿐 아니라 안면 
있는 사람들 모두가 소란을 피워대니... 내 신세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어. 
그러니 내내 외롭고 우울할 수밖에. 내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알겠지?"
  "그래, 아무한테나 얘기할 수 없는 얘기 같긴 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렇게 너한테 말할 수 있다니. 그래, 그 대학생들하곤 
어땠어. 침대 얘기 말야. 끝내줬어?"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뭐."
  "절대 친구로 생각해선 안돼... 마음을 주면 안된다구. 몇 주 뒤면 죽을 때까지 
몰라라 할 사이가 될 테니."
  그러나 로라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침대 위에서 남자랑 뒹구는 기분이 어떤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 올라와서 나랑 자주 얘기 나누자. 이 방 멋진 방이지? 보스턴 방에 
익숙해서 그런지 여길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 그쪽은 내 취향대로 꾸며졌어. 
벨벳, 사틴, 뜨거운 침대 등등 말이야. 하지만 이젠 여기도 괜찮은 것 같애. 편한 
것을 조ㅔ외하면 특이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그냥 저냥 마음에 들어. 
하나님만이 내 불만을 알지 누가 알겠니?"
  "불만스럽다구? 이렇게 기막힌 방에다 엄마까지 옆에 있는데?"
  "엄마를 사랑하긴 해. 그건 그렇지만... 네가 엄마를 잘 몰라서 그래. 물론 좋은 
분이지. 하지만 엄만 너무 완벽해. 그렇게 완벽한 사람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 엄마, 나 남자애들한테 먹혔다! 그러라구?"
  "완벽한 분이라면 분명 이해해주실거야."
  로라의 말에 알리슨은 깔깔거렸다.
  "그래, 맞아. 완벽하다면 이해해주겠지. 내가 말을 잘못 했나보다. 완벽한 게 
아니라 꽉 막혀있는 분이야."
  두 사람은 서로 미소를 주고받았다. 알리슨의 환하고 부드러운 미소 속에서 
로라는 따뜻함을 느꼈다.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조심해 가며 다가서야 할 필요가 있긴 했지만, 우정에 굶주려 있던 로라로선 
차갑게 마음을 닫아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방에 들어와 
앉아. 여자들에게만 국한된 비밀스런 얘기를 주고받는 기분이 꽤나 그럴싸 했다. 
거짓말을 많이 하긴 했지만 모두 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거짓말이라 해도 
남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솔직히 다시 한 번 이런 시간을 갖고 
싶기도 했다. 비록 보석을 훔치기 위해 몇 주 머무르는 기간이긴 했지만, 
그동안만이라도 진짜 친구를 사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알리슨은 마음을 읽어내려는 듯 로라의 얼굴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너랑 많이 얘기하면서 친해지고 싶어. 괜히 좋아진 것 같다니까. 엄마방에서 
뭐하고 있었나 얘기해줄래/ 분명 뭔가 할려고 그랬지?"
  로라에게 날아오는 알리슨의 목소리엔 차가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느긋하게 
마음을 풀고 있던 로라는 순간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어쩐지 부드럽다 싶더니만, 
내 이럴 줄 알았지.
  눈을 아래로 내리깐 로라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오해 받게도 됐지만, 정말 아무 뜻도 없었어. 그냥 방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둘러보던 참이었어. 로자가 집에 아무도 없다고 그러길래... 내가 여기 
올라온 거 모르니까 로자한테 제발 비밀로 해줘. 따로 그분 불러서 야단치지도 
말구. 아무 잘못 없는 분이니까... 이런 집은 진짜 난생 처음이었어. 그래서 잠시 
구경만 한다는 게 그만 너한테...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집 같더라. 동화 속의 
집안을 한번 거닐어 보는 게 꿈이었어. 이 집 주인이 된 기분으로 돌아다니면 
어떤 느낌이 들까 하는 것도 궁금했고, 또 언젠가 나도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으면..."
  눈을 들어 알리슨을 바라본 로라는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눈치챘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정말 모르겠는걸. 명배우처럼 표정 연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구. 아무튼 좀더 두고 보면 알겠지."
  로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 시 다 된 것 같은데, 이만 가봐야..."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문을 열고 이층 홀로 나간 로라는 거의 뛰다시피 층계 
쪽으로 달려갔다. 로라의 등에 대고 알리슨은 큰 소리로 외쳤다.
  "두고봐, 로라. 서로 잘 알게 될 날이 있을 테니!"
  얼어붙은 듯 층계 맨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춘 로라에게 알리슨은 다시 말을 
덧붙였다.
 "널 철저히 조사해볼 거라구."

    3장
  센터 빌 우체국 앞에 있는 우체통에 누런 봉투를 밀어넣은 클레이는 앞서가는 
로라를 따라잡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형이 저걸 받아보면 대지하고 건물 위치 등은 알 수 있을 거야. "
  오스터 빌을 향해 걸어가며 클레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벽장에 설치됐다는 그 경보장치 얘기도 썼어. 아, 참 그 경비원 이름이 
뭐였더라... "
  "조나스. 밤 근무는 빌리하고 알이란 사람이 맡고 있어. "
  "그래, 맞아. 누나 기억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경비 있어도 겁낼 것 
없어. 다 형식으로 세워놓은 거니까. 근데 그 경보건은 어떻게 할 거야? 레니 
옷장에 있다는 그 경보기 어떻게 죽이는지 안 알아볼 거냐구? 알리슨이나 
로자를 살살 꼬셔보래니까. "
  "레니라니! 너한텐 샐링거 부인이야. 알았어? "
  로라는 목소리를 높였다.
  "제발 좀 내버려둘 수 없니? 물어볼 기회가 안 잡혔으니까 못 물어본거지. 
기회 있으면 안 놓칠거야. 염려 마. 여태껏 오빠 실망시킨 적 없잖아. "
  그녀는 속력을 냈다. 클레이가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날쌔게 접어든 뒤 
로라는 해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른 아침이라 해변에는 인적이 없었다. 
드넓은 바다와 흰 모래사장이 그녀를 조용히 맞았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끼륵거리는 갈매기 소리 속에 파묻혀 그녀는 모래 위로 자전거를 끌었다. 
여태껏 그녀는 한적한 해변보다 기념품 가게, 과자점, 양초 가게, 식당, 
잡화점들이 늘어서 있는 센터 빌의 메인가와 오스터 빌의 중심가 쪽에 더 
마음을 두어 왔다. 규모가 작긴 해도 지금껏 살아왔던 뉴욕시와 비슷했기 
때문에 그곳이  해변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한쪽으로만 구부러진 초원 위의 잡초들과 
케이프만에 넓게 깔린 모래언덕, 송림, 너도밤나무, 떡갈나무, 녹나무, 키가 오십 
피트 가량 되는 감람나무들은 그녀에게 괴이한 인상을 주었다. 
  무성한 숲이 로라는 두려웠다. 누군가 소매치기 당한 걸 느끼고 쫓아올 때 
날렵하게 숨어버릴 수 있는 구멍이나, 비 피할 차양이 있는 뉴욕 도심, 낯익은 
보도 블록, 빌딩이 주는 아득한 그림자, 동서사방을 가리키며 길잡이를 해주는 
길 표지판. 그러나 숲속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다.
  숨을 곳이 없기는 해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늘 아침, 로라는 편안함과 
고요함을 해변에서 느끼고 있었다. 생전 처음 해변이 주는 평안함을 맛보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 걸어오는 낯선 사람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공연스레 
속상했다. 홀로 해변을 차지했다는 생각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나이든 노인이었다. 키 크고, 마른 노인이었는데 어깨까지 길게 
내려온 백발이 흰 콧수염과 함께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굵고 숱 짙은 눈썹에 
비해 감각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입술은 매우 얇았다. 말라붙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주 얄팍한 입술이었다.
  "이런 조개 껍데기 본 적 있소? "
  로라가 그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노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침 산책을 하기 위해 해변을 거닐고 있는 오랜 친구처럼 노인의 
음성은 친숙하게 들렸다.
  "여기 이 바닷가에선 볼 수 없는 무늬요. 이런 조개는 처음봐. "
  걸음을 멈춘 로라는 노인이 건네주는 조개껍데기를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분황과 흰색이 어우러진 소용돌이 무늬의 조개는태양빛에 강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로라는 손가락으로 껍데기의 무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조가비였다.
  "저도 이런 무늰 처음인데요. "
  여태껏 조개무늬를 눈여겨본 적이 없다는 말대신 로라는 노인의 말에 박자를 
맞추었다.
  "사람하고 똑같아요. "
  노인은 로라의 대답에 뒤이어 조가비를 설명했다.
  "사람 손가락에 있는 지문처럼 조개들도 각각 무늬를 갖고 있다오. 아니, 그냥 
가져요. "
  로라가 조가비를 돌려주려 하자 노인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물건의 진가를 아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게 내 취미라오. 이른 아침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겐 더 더욱 뭔가를 주고 싶은걸. "
  큰 키를 굽히며 노인은 로라를 깊게 응시했다.
  "근데 내가 아가씨 고독을 깬 것 같은데, 그래요? 혼자서 이 멋진 시간을 
즐기고 있는데, 내가 불쑥 나타나 방해를 한 게 아니오? "
  주변에 펼쳐 있는 광대한 해변을 둘러본 로라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온 것 같은데, 물론 서로 혼자 걸을 수도 
있지만 함께 즐거움을 나눠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 않소? "
  로라는 노인의 구식 말투에서 언젠가 읽었던 책 속의 구절을 생각해냈다. 
그의 음성은 따뜻한 미소와 함께 로라에게 특별하게 와닿고 있었다.
  하지만 로라는 자신의 마음을 거두어들여야만 했다. 해변에 홀로 있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을 노인은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 주변에서 얼쩡거릴 도둑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전거 핸들 위에 
손을 올리며 로라는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만 가보는 게 좋을 듯 싶은데요. 여긴 개인용 해안이거든요. 허락없이 
들어오면 안될 거예요. "
  "걸리면 어때. 벌써 이렇게 들어와 있는 걸. 조용하게 고독을 즐기겠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소. "
  위엄 있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로라는 그의 진지한 회색 눈빛에 
걸려들었다.
  "아가씬 보물을 혼자 싸두고 있는 모양이군. 그래서 누가 다가서기만 해도 
몸을 움츠리는 것 같은데. "
  "아뇨, 잘못 보셨어요. "
  로라는 딱부러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남의 속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거야? 그녀는 다시금 그에게 등을 보였다.
  "가진 게 있어야 감추죠. "
  그녀는 고개만을 돌린 채 말했다.
  "소유한 게 없긴, 아가씨 자신이 있는데. "
  노인도 조용하게 응수했다.
  "자신을 소유하는 것이 제일 큰 소유 아닐까? "
  로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가씬 자신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본데. "
  그녀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 "
  "난 생각해 봤소. 내 자신에 대해서 말이야. 난 얼마만한 가치가 있을까. 내 
스스로 자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까 하고 말이오. "
  날지 못해 파닥거리는 어린 새처럼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로라를 노인은 
신중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보기엔 아가씬 스스로 자신을 낮게 보는 것 같소. 물론 자신을 
사랑하기야 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진심으로 소증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은걸.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도록 뭔가가 막고 있는것 같애. 본인 스스로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아가씨를 사랑해주지 않을 거요.스스로를 신뢰해봐요. "
  로라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자기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것같은 노인의 
통찰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일년 넘게 간절히 마음속으로만 원했던 일을 노인은 
몇 분만에 알아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계속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열 여덟 가량 됐을까. 살이 좀 더 
올라야겠는 걸. 여인이 되려면 좀 있어야겠고... 하지만 큰 키에 탄력 있게 잘 
빠진 다리구만, 자전거를 타서 그렇겠지.
  리본으로 머리를 질끈 묶은 로라는 헐렁한 흰색 무명 원피스에 샌들을 신고 
있었다. 면보다는 실크옷을 입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던 그는 왜 자신이 
평범한 소녀에게 관심을 두는지 스스로에게 반문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평범한 미모의 소녀일뿐이었다. 
그는 그 이유가 부드러우면서도 여위어 보이는 얼굴에 비해 과장스럽게 
큼직막한 진청색 눈동자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방향과 목적을 알지 못한 채 
흔들리긴 했지만 그 눈 속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물론 시간이 걸리 테지. 우리 속에 믿음을 키우는 일 말이오. 난 내 자신을 
믿기 위해 칠십팔년 동안 애를 써오고 있다오. 하지만 아가씬 달라.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걸. 얼마 안 가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믿게 
될거요. "
그는 로라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되면 방해꾼이나 침임자들로부터 아가씨 자신을 스스로 지켜낼 수 
있을거요. "
  로라는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노인에게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실은 많이 생각해보긴 했어요. 저의 인생 전체를 바꿔볼 생각이에요. 
그러기위해 애를 쓰고 있구요. 힘들긴 하지만 끝까지 해 볼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지금 이 모습도 마음에 안 들어요. 완전히 바꾸고... "
  "나 지금 아가씨 모습이 좋은데. "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로라는 머리를 흔들었다. 친절한 말이었지만, 그리고 고맙긴 했지만 상대는 
나이 많은 노인이었다. 노인이 뭘 알겠는가?
  "예쁘지도 않고, 매력도 없잖아요. 옷 입는 법도, 또 여자로서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도 모르는걸요. "
  "한 발씩 내디디면 되지 걷는게 뭐 그리 어렵겠나. "
  "글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그걸 알면 그렇게 쉽게 말하지 못하실 거예요. 
부자들은 걸음걸이부터 다르잖아요. 모든 걸 다 가진 양 자신만만하게 행동하고, 
원하는 게 있으면 어렵지 않게 그걸 꼭 손에 넣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불행이란 게 먼지 모를 거예요. 하고 있는 일이 잘못될까 걱정 같은 
것도 안하구요. "
  "그 사람들이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소리요? "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니겠어요? "
  로라는 대답을 흐렸다. 부자들의 인생살이를 어떤 단어로 표현 해야 할지 
몰랐다.
  "돈이 있으니까 자신 있게 행동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안은 어떨까? 그들이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갖고 있다고 봐요? 사랑이라든가 우정, 건강, 사업, 등등 
부자들한테도 여러 가지 근심걱정이 있을 텐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요? "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과 다르겠죠. "
  "그런 부자들을 많이 만나긴 했어요? "
  "아뇨. 별로요. "
  침묵이 흘렀다. 어리긴 어리구만. 이마를 찌푸리는 로라를 주목하며 노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잘만다듬으면 훌륭한 여인이 되긴 되겠어.
  "해변가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뭐가 특히 마음에 드는지 말해 보겠소? "
  "영원성을 생각했어요.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여긴 계속 바닷가로 남아 
있겠죠. "
  로라는 태양빛에 희게 빛나는 모래를 밟으며 뒤돌아섰다. 발자국이 깊게 
파였던 모래사장은 끝없이 파도에 의해 지워지고 있었다.
  "거대한 저택처럼 해변은 무한하다는 해변은 무한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음껏 이방, 저 방을 드나들 수도 있고. 이 넓은 바다가 다 내 집이라고 
생각해보세요. "
  순간 노인의 눈에서 밝은 섬광이 번득였다.
  "꼬마였을 때 난 해변을 나만의 성이라 부르곤 했지. 불행하고 외로울 때, 
아빠한테 꾸중을 듣고나 뒤라든가, 뭔가 고민스러울 때마다 난 이 해변가를 
찾았소. 보이는 곳까지가 내 왕국이었고, 그 왕국에서 나 언제나 행복한 왕이 돌 
수 있었지. 친구도 가려서 데려올 정도로 나는 무척 아니 이 바닷가를 사랑했소. 
"
  "저 같으면 아무도 데려오지 않을 거예요. "
  로라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아무도? 친한 친구도? "
  "아무도 없는걸요. 필요하지도 않지만. "
  물끄러미 자신을 지켜보는 노인에게 로라는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친구도 물론 필요하겠죠. 도움을 받기 위해선. 하지만 강한 사람은 친구 같은 
건 필요없어요. "
  로라는 마치 대들기라도 하듯 노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필요로 해라. 아까 그렇게 말씀하신 거 아니예요? 내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
  "내가 말한 뜻은 그런 것만이 아닌데. "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로라의 말을 받았다.
  "행복을 나눌 사람이 한 명도 없단 소린가? "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세요! "
  로라는 불에 데인 듯 강하게 튀어올랐다.
  "그런 눈으로 보지도 말구. 누군가 저를 불쌍하게 본다는 게 얼마나 치욕적인 
줄 아세요? 나 그 잘난 놈의... "
  로라는 순간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전 누구랑 뭘 나눈다거나, 그런 걸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에요. 누구도 
여기에 데려오고 싶지 않은 게 뭐가 그렇게 이상하세요? 혼자만의 비밀스런 
장소가 소중한걸요. "
  아주 가볍게, 마치 그녀가 옳은 말을 했다는 듯 노인은 그녀에게 가벼운 
목례를 했다.
  "그럼 다른 사람 말고 나만 초대해보면 어떻까? 그 혼자만의 비밀스런 아가씨 
집에 들어가보고 싶어서 그래. 나는 여기 좀 앉았으면 좋겠는데. "
  노인은 손가락으로 잡풀이 덮여 있는 모래언덕을 가리켰다.
  "최근엔 쉽게 피로를 느낀단 말이야. 그러니 아가씨 소파에 좀 앉게 해주요. "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인은 농담을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대접할 차가 없어서. "
  노인도 로라의 우스갯소리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모래 위에 자전거를 눕힌 뒤 로라는 노인과 함께 흰 모래사장에 앉았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진회색 빛으로 길게 이어진 바다와 규칙적인 리듬으로 해변가에 
부서지는 흰 파도를 바라보았다.
  "난 바닷가에 있는 내 왕국 얘기를 단 한 번도 가족들에게 하지 않았지. 내가 
좀 조숙하게 놀았던 탓인지, 식구들은 내가 씩씩하고 강한 아이라고 믿었던 것 
같애. 물론 내 노력도 작용했을거야. 모래구릉 주변에 수없이 흩어져 있는 내 
방들을 혼자 상상하며 거닐곤 하는 비밀을 나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지. 이상하게 식구들이 내 꿈을 아는 게 두려웠어. 더군다나 내가 
침묵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하기도 싫었고. 우리 가족은 원래 모든 걸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거든. 정말 소란스런운 집안이었어. 여기서 느낄 수 
있는 침묵은 고요함 그 자체아닌가. 아주 멋진 침묵이지. 평생 가도 물리지 않을 
평온함이나 고요함 말이야. "
  "저한텐 안 그런걸요. 괴상하게 느껴져요. 마치 날 삼켜버릴것 같기도 해요 "
  "그래,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지. "
  노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한적한 해변가는 으레 그렇게 보이기도 해. 한꺼번에 날 삼켜버릴 것 같은 
기분. 그런 고요함이 싫은지, 사람들은 머리 깨지는 라디오를 시끄럽게 
틀어놓고... 그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더라..."
  "폭파족들이요, "
  "그래, 폭파족들. 천국의 고요함을 부수고 다니니 그런 별명이 붙었겠지. "
  "그 사람들 일부러 그러는 걸 거예요. 아예 무시해버리는 게 더 나을 때가 
많아요. 시끄럽다고 괜히 펄펄 뛰면 더 시끄럽게 떠들거든요. 그 사람들 목표가 
바로 다른 사람들 화나게 만드는 일이니까요. 존재 자체를 무시해 버리면 제 
풀에 나가떨어지는 거죠. "
  노인은 그녀를 세심히 뜯어보았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보통이 아닌데. "
  로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 위에 서야 한다는 말이었어요. 그렇지 못할 경우엔 
대부분 그 환경에 지고 만다는 소리죠. "
  도시에서 자란 애 같은데. 노인은 속으로 생각하며 계속 로라를 주시했다.. 
그렇다면 바다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어디서 살지? "
  "센터 빌에요. "
  "여름이 끝나면? "
  로라는 잠시 주저했다.
  "뉴욕으로 가야죠. "
  "뉴욕이 집인가 보지? "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큰 원을 그렸다. 그 
안에 또 하나의 원이 침묵 속에서 그려졌다. 
  얘기를 해? 여태껏 칼 외의 다른 사람에게 표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칼은 
죽었고, 서점도 그의 죽음과 함께 문을 닫았다. 얘기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낯선 노인이었지만 로라는 그의 미소와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그의 눈빛을 
어느새 좋아하고 있었다. 게다가 오래전부터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는가?
  "그곳은 고향과 같아요. 여기 오기 전까지 뉴욕을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었어요. 여름 휴가 때도요. 차곡차곡 잘 개켜놓은 듯한 건물들과 꾸역꾸역 
밀려다니는 사람들을 좋아해요. 어느곳을 가든 표지판이 잇기 때문에 길 잃을 
염려도 없구요. "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뉴욕에서 멀리 나간다는게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
  "여기 있는 게 외롭게 느껴지나요? "
  "외롭다곤 하지 않았어요. "
  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가고 싶은 곳을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잘 모른다는 뜻이었죠. 하지만 마음 
먹은 곳엔 꼭 도달하려고 해요. 누구도 날 막진 못할 거예요. 꼭 이루어낼 
거예요. "
  약간 거리를 둔 자리에서 노인은 엷게 미소지었다.
  "나도 젊었을 땐 아가씨 같았지. 운이 좋았어. 아무도 날 막아내지 못했으니까. 
"
  두 사람은 물결 치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뉴욕이 마음에 드는 이유 또 없나? "
  "소음요. "
  로라는 주저없이 얘기했다.
  "창문을 닫아도 소음은 죽지 않고 집으로 들어와요. 그래도 기분은 괜찮아요, 
내 자신이 소음의 일부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
  "여기 이 해변가의 정적처럼 그곳의 소음도 아가씨를 삼켜버린다는 
소리겠구만. "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로라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참 멋진 말씀이네요. 소음이 날 삼겨버린다, 정말 괜찮은 표현이에요. 친구가 
있었어요. 칼이라고. 갑자기 칼생각이 나네요. 항상 새로운 방향에서 사물을 
바라보라고 이르던 분이었죠.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에서 헌 책방을 운영하던 
분이셨는데, 서고 뒤에 있는 그분 방으로 날 데려가 고서들을 읽어주신곤 했죠. 
무지무지 그분을 좋아했었는데... "
  노인은 로라의 음성에서 그리움을 읽어냈다.
  "나도 한때 고서점을 즐겨 드나들곤 했지. 그뒤 사는 게 바빠 발길을 끊긴 
했지만. 그러나 요즘 다시 그곳들을 찾기 시작했어. 고서적과 새 아이디어라. 
아주 잘 어울리는 단어구만. 뉴욕에선 뭘해요? 아직 학생인가? 살긴 어디 살고? 
"
  "가을 학기부터 대학 생활이 시작돼요. "
  로라는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숙식은 기숙사에서 해결하고 있구요. "
  그는 그녀를 깊게 응시했다.
  거짓말인 걸 알고 있는 눈이야. 대학 가는 건 단지 내 꿈일 뿐이야. 오빠가 안 
도와주면 그 꿈은 영영... 설사 대학에 들어간다해도 클레이와 오빠 곁을 떠나진 
못할걸. 돈이 어디 있어서 기숙사를 이용해. 저분은 내가 거짓말 한다는 걸 알고 
있어.
  "난 대학을 이년밖에 안 다녔어. 이년 다니다가 회사를 차리기 위해 
그만두었지. 돈을 많이 벌긴 했지만 사람들이 나한테 대학 얘기를 할 때마다, 
그게 그렇게 싫더라구. 대학을 졸업해서 이 다음에 성공하게 되더라도 대학 
얘기는 하지 말아요. "
  "네. "
  낮은 음성으로 대답한 뒤 로라는 모래사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봐야 돨 것 같애요. 일이 있어서... "
  고개를 끄덕인 노인은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내일도 이 길을 따라 지나가면 좋겠는걸. 얘기를 좀더 나누게... 물론 난 여기 
있을 거요. 많은 생각에 잠긴 채 말이오. "
  "그럼 좋겠네요. "
  분명 나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면서도 로라는 쉽게 노인의 청에 응했다. 
남에게 절대 속을 보여주지 말라는 벤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녀의 생각에도 
일을 치르고 떠나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마을 마을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좋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알리슨이나 이 멋진 할아버지같이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영 
따돌리란 말이야? 나도 남들처럼 친구를 갖고 싶은데...
  로라는 말없이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
  평소에 늘 하듯 평범하게 인사했지만 로라에게는 그 말이 다시 보지 않을 
사람에게 하는 인사처럼 느껴졌다. 노인은 손을 내밀며 로라의 이사를 받았다.
  "다시 여기서 만나는 걸로 해요. "
  서투르게 그의 손을 잡은 로라는 그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살며시 갖다 
댔다. 로라가 자전거 핸들을 잡은 순간 노인은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나 때문에 약속시간에 늦지 않았으면 좋겠소. "
  앞으로 몸을 빼려는 로라에게 노인은 계속 인자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미소 때문에 화가 치밀었다. 왜 저렇게 친절한 거지?
  "굿 바이! "
  크게 소리친 뒤 로라는 모래 속에 파묻힌 자전거 바퀴와 싸워 가며 길을 
재촉했다.
  사람들하고 사귈 때 좀더 여유있게 굴 수 없는 거니, 로라? 공연스레 
불친절하게 대했다는 생각이 들어 로라는 뒤돌아 서서 손을 흔들었다. 노인도 
손을 위로 번쩍 들고 그녀를 향해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 두었다. 잘 가라는 
손짓이기도 했지만 노인의 손동작은 축도를 내리는 신부를 연상케 했다.

  하루 종일 주방일을 하면서도 로라의 머릿속에선는 노인의 독특한 미소와 
그녀를 향해 팔을 흔들고 있던 모습을 계속 떠올렸다. 다시 한 번 그 노인을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벤, 클레이와 함께 일을 끝마쳐야 했다. 그리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자신의 가족인 오빠, 동생과 함께.
  "로라. 내 말 듣는 거니? 오늘 밤 야근할 수 있냐구? "
  로자의 커다란 목소리에 로라는 화들짝 놀랐다.
  "네, 그러죠. "
  "늦게 끝날 것 같다, 오늘밤. "
  로라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차고 위 조그만 다락방에 않아 경비원과 개 
얘기를 해댈 클레이와 함께 있는니, 차라리 따스하고 아늑한 로자의 주방에서 
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진짜숙녀는 그렇게 어깨짓을 하지 않는 건데... 조심해요, 미래의 숙녀 
아가씨! "
  또다시 어깨짓을 하려던 로라는 고개를 꼿꼿이 한 뒤 몸가짐을 바로 했다. 
숙녀가 어깨짓을 하지 않는다는 소리는 난생 처음 듣는 말이었다.
  로라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로자는 집안 얘기를 하고 있었다.
  "오웬님도 캐나다에서 돌아오셨고, 아리슨도 메인에서 왔고, 또 누가 있나... 다 
온 셈이네. 올 여름 처음으로 모든 식구가 다 모였구만. 대강 세어봐도 스물넷이 
넘는구나. "
  "유럽에서 누가 왔다구요? "
  비어 있던 집에 하나 둘씩 사람들이 몰려드는 게 로라는 공연스레 불안했다. 
벤이 영영 기회를 놓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로자가 들려준 샐링거 
가문에 대한 얘기를 클레이와 벤에게 함구하고 있었던 것도 후회스러웠다. 옷장 
속에 있는 보석들과 경보장치를 그들에게 얘기해주고 난 뒤, 그녀는 너무나 
두려운 마음에 그 뒤로 들은 얘기에 대해선 아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로자가 
뭐라고 한 것 같아 로라는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그러셨어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못 들었거든요. "
  "꿈꾸는 아가씨, 세 번 씩이나 말했는데 못 들었다구? 젠슨 부부가 아들 
폴하고 유럽에서 돌아왔어. 복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모시고 있는 식구들한테 
관심 좀 보여야지. 안 그러면 어떤 일자리든 성공 못해."
  "맞아요. "
  고개를 흔들며 롤빵을 장식하기 시작한 로라는 스물네 사람이 모여 있는 
가족은 어떤 것일까 상상했다. 그 가족의 일원이 되어보고도 싶었다.
  그날 저녁, 식사 후 술을 한잔씩 들던 샐링거 가족들이 바다로 향해 있는 
현관 베란다 쪽으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나둘씩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는 순간, 로라는 다시금 그들에게 속하고 싶은 열망에 휩싸여야 했다. 
레니와 펠릭스―클레이는 펠릭스를 만난 직후 "그 작자 웃음소리 뭐 같은 줄 
알아, 누나? 꼭 손톱끝으로 칠판 긁는 소리 같더라니까. "라고 했다―의 낯익은 
음성 뒤로 알리슨의 신선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냉수프가 나간 뒤, 통닭을 
담을 대형접시를 식기실에서 가져오라는 로자의 지시에 식당을 지나던 로라는 
부드러운 바람에 앞뒤로 흔들거리는 식당 문 틈을 통해 안쪽을 훔쳐볼 수 
있었다. 
  순간 로라는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해변가에 있던 그 노인이 식탁 맨 
꼭대기에 앉아 왼쪽에 있는 펠릭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던 것이다. 
로라는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족들과의 식사중 식탁 맨 윗자리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그 가문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오웬님이 돌아오셨단다. 로자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했다. 
그는 분명 오웬 샐링거였다.
  샐링거 가문의 그 누구와도 가까이 하지 말라는 벤의 명령이 있었건만, 
그녀는 그 명령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목표로 설정한 가족 중 제일 우두머리를 
잘도 골라 재잘거리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만의 하나 노인이 그녀를 의심할 
경우, 일도 치르지 못하고 도망쳐야 할 상황이었다. 바보 같은 것. 칠칠치 
못하게끔. 어떻게 해야 하나? 오빠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뭐라 그러까?
  "로라, 접시 어떻게 된거야? "
  로자의 외침이 있었건만 로라는 계속 그 자리에 선 채 빠르게 눈을 돌렸다. 
몇 초만에 식탁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그녀의 뇌리 속에 영상처첨 찍혀 
들어왔다. 알리슨 옆에 앉아 있는 젊은 청년에게 눈이 닿은 순간 로라는 꼼짝 
않고 그 사람을 주의깊게 보았다. 짙은 눈썹 밑의 눈동자는 진밤색이라기보다는 
거의 검정색에 가까웠고, 짧게 미소짓는 긴 입술, 가늘고 곧게 뻗은 콧대와 함께 
얼굴 생김새는 날렵한 인상이었다. 버릇인지 그는 계속 앞이마로 흘러내리는 숱 
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있었다. 레니의 주의 깊은 눈빛과 알리슨의 
도도함이 섞인 듯한 미남자였다. 접시 세 개를 들고 뛰어들어오는 로라에게 
로자는 어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로라, 어떻게 된 거야? "
  "아무 일도 아니예요. 어디 있는지 몰라서 한참 찾았어요. "
  진열대 위에 접시를 늘어놓는 로라에게 주방장은 계속 눈길을 주었다.
  "모르다니요, 아가씨? 그저께 점심 먹을 때 사용하고나서 직접 갖다두고선. 
정신이 온통 딴 데 가 있어. 하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그 나이에 뭔 
고민은 없겠니. 하지만 로라, 잠깐 동안만이리도 그 생각들을 접어주련? 지금은 
눈코 뜰새없이 바쁘단 말이야. 알아듣겠어? "
  로자는 순간 로라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주인 오웬이었던 
것이다.
  "오, 세상에. 뭐 필요한 게 있으세요? 아니면 뭐 잘못된 거라도? "
  "왜 그렇게 생각하나?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로자. "
  로라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부드러움과는 달리 오웬 샐링거의 얼굴에선 
위엄이 흐르고 있었다.
  "식탁이 잘 차려졌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 왔다든지, 뭐 그런 방식으로 
말일세. "
  "그렇다면 저야 영광..."
  로자는 로라르 바라보는 오웬의 눈길을 읽었다.
  "이 아가씬 제 조수예요. 로라 페어차일드라구. 인사드려, 로라. 오웬 
샐링거님이셔. "
  오웬은 손을 내밀었다.
  "잘 왔어요, 페어차일드양. "
  그의 눈을 직시하며 로라는 그가 자신과 게임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변가에서 느꼈던 거처럼 로라는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애쓴는 
오웬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 식구들을 만나봤소? "
  로라의 손을 잡은 채 오웬은 물었다.
  "아니면 우리 이 엄하신 로자 마님께서 계속 일만 시켰나? 그렇다면 쉬기도 
해야지. 적어도 얼굴들만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어? 로자, 페어차일드양에게 시간 
좀 주겠지? "
  로라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오웬에게서 살며시 손목을 뺐다. 
  "그냥 로자 옆에 있겠어요. 바쁘거든요. "
  "로라! "
  로자는 당황한 얼굴로 로라를 불렀다. 오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단기간으로 들어와 일하는 고용인을 식구들에게 소개하는 오웬이 결코 
아니었기에―그녀로선 자신의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가 감히 오웬 샐링거씨에게 
말대답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오웬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샐링거씨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무례하게 말대답을 하다니. 어서 사과해요,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
  "죄송합니다. 벌써 가족들을 뵈었습니다. "
  로라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게 좋겠지. 로자, 지금 아니라도 좋으니까 
며칠 안으로 시간을 만들어줄 수 있겠지? 오래는 아니고 몇 시간이면 될거요. "
  로라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는 동안 오웬과 로자는 날짜와 시간을 의논하고 
있었다. 오웬은 계속 몇 번씩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처음 느낌과 달리 
오웬이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음주 어때요? "
  오웬은 정중하게 로라에게 물었다. 벤 오빠를 위해서 해보자. 식구들에 관해 
자세히 알아두면 일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모든 분을 뵙고 싶어요. "
  "좋아요. 아, 참, 로자! "
  잊어버렸던 것이 생각난 듯 오웬은 시선을 로자에게 돌렸다.
  "서재를 새로 정리할 생각인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요. 일주일에 여덟 시간 
내지 열 시간 정도 시간 낼 사람이 있으면 좋은데. 카탈로그하고 책꽂이 
정리하는 일이니까, 책 읽기 좋아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면 될 
거예요. 로자가 추천해줄 수 있겠소? "
  로라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슨 소릴 하려는 걸까?
  "일은 고되지만 수당은 꽤 괜찮을 텐데. "
  로자는 입술을 오므린 채 눈동자를 굴렸다.
  "일자릴 구하는 사람들이 근처에 많긴 하지만 책정리라면... 좀 시간을 주셔야 
하겠는걸요. "
  "제가 해보고 싶습니다. "
  로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해보고 싶어요. 책에 대해서도 좀 알고 있어요. "
  환한 미소가 오웬의 얼굴 전체로 피어 올랐다.
  "아주 좋은 생각이오. 정말 생각 잘했소. 내일 당장 시작할 수 있을까? 어때? 
오후 두 시부터 네 시 사이로 하지. "
  "저기, 오웬님... "
  로자가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오웬을 쳐다보았다.
  "진짜 로라를 쓰실려고... ? 아니, 제 말은 로라가 빨리 배우고, 또 일러준 것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똑똑하긴 하지만, 네, 그래요.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움직일 줄도 알아요. 그렇지만 가끔... 이 애를 깎아내리려는 뜻이 
아니예요. 저도 로라를 귀여워하고 있거든요... 막 자란 애처럼... 아무튼 이애가 
원하시는 만큼 그 일을 해낼지 정말 의심이 드는걸요. 책을 안다고 했지만 진짜 
그런지도... "
  "정말 책은 많이 대해봤어요. "
  로라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책방에 오래 근무했어요. 그리고 가끔씩 서고 목록도 정리해 봤습니다. 책에 
대해서라면 어느 정도 안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
  "난 아가씰 믿어요."
  오웬은 당당하게 얘기하는 로라를 바라보며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로라와 
마찬가지로 패기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새벽 해변가에서 로라의 근심어린 
얼굴을 발견했을 때, 오웬은 그녀의 당돌한 태도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저녁에 다시 보게 된 그년느 그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펠릭스와 얘기를 
하던 오웬은 문틈 사이로 엿보는 눈길을 의식했고, 흔들거리는 문틈으로 잠깐 
바라본 얼굴이었지만, 큼지막한 눈동자는 해변의 소녀와는 달리 사랑에 굶주린 
표정을 머금고 있었다.
  새로운 존재야.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매일 같은얼굴 들만 보고 살지. 
똑같은 파티에 똑같은 사람들. 하는 얘기도 다같지. 새로운 걸 찾기 위해선 새 
사람이 필요해. 옛날의 내 자신을 생각하게 해주는 인물이면 더 좋겠지.
  "한번 시험해보겠네. 매일 오후 두 시부터 네 시까지 로라를 내 서재로 
보내주게. 네 시 이후에도 일할 수 있으니까 그것도 염두에 두도록. "
  오웬은 로자와 로라 그 누구에게도 반문할 기회를 허락치 않았다.
  "내일부터 시작해요. 아, 그리고 난 유니폼 같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서재 먼지 속에서 마음 놓고 그를 수 있을 만한 편안한 옷으로 입고 올 수 
있겠소? "
  로라는 로자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유니폼을 무척 좋아하는 로자는 샐링거 
저택단지 안에 있는 한 반드시 제복을 입고 있도록 로라에게 명한 적이 있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

  다음날 두시 정각, 진푸른색 청바지에 핑크빛 면셔츠를 받쳐 입고, 역시 같은 
핑크색 리본으로 머리를 뒤로 묶은 로라는 펠릭스와 레니의 저택 뒤로 길게 
이어진 회랑을 지나 오웬이 거주하는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오! "
  오웬은 전에 비해 근심기가 덜해 보이는 로라의 깊고 푸른 눈동자와 
발그스름한 볼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내뿜었다.
  "어서 와요. 먼저 잠시 둘러볼까? "
  오크나무 바닥 위에 페르시아산 양탄자가 깔려 있는 방에는 짙은 빛깔의 
쉬에드(부드러운 송아지나 새끼염소의 가죽 : 역자 주)로 뒤덮인 소파와 대형 
침댁 있었다. 벽면에는 케이프 주변을 그린 유화가 거려 있는데, 백랍으로 
만들어진 램프들과 커튼 없는 빈 창문이 그곳의 주인이 남성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거실 건너편은 서재였다. 천장까지 올라간 책장에는 온갖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는데 마룻바닥에도 책들이 그냥 쌓여 올려져 있었다.
  "정리를 좀 하긴 해야겠지? "
  "서재를 다시 정리한다고 하셨죠? "
  "그랬지. 지금 로라가 보고 있는 게 내가 정리할 서재라구. 둘이서 같이 
정리하면 아주 훌륭하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요? "
  "아무리 못해도 이것보단 훨씬 나을 거예요. "
  그녀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매일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낡은 책을 골라 새로 꾸며 넣고, 서고에 
번호를 매겨가며 카드를 작성하는 한편 알피벳순으로 모든 책들을 정돈해 
나갔다. 그러면서 틈틈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웬은 그녀에게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 그가 최초로 사들였던 호텔 네 곳―미국과 유럽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 
오십여개의 호텔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오웬은 사업 초기의 네 군데 호텔을 
가장 애지중지 했다―과 열네 살 때부터 사랑해왔던 여인 아이리스 등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내이자 두 아들의 어머니였던 아이리스를 떠나보낸 지 사십여 
년이 넘었건만 오웬은 지금도 매일 아내 생각에 젖어 있다는 고백을 스스럼없이 
털어놓기도 했다.
  로라도 조심해야 될 것들을 숨겨가며 얘기를 해따. 교통사고로 부모가 
돌아가시게 되자 친척 손에 맡겨져 동생 클레이와 함께 살았으나, 눈치가 
보여서 동생을 데리고 나와 둘이서 독립해 살고 있다고 레니에게 얘기한 것을 
로라는 오웬에게 되풀이했다. 그러나 엄마, 아빠에 대한 기억들, 클레이와 벤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운조차 떼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과목 얘기를 할 때만큼은 조금도 거짓을 섞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도 털어 놓았다. 
  "학교 때 세 편의 연극에 출연했어요. 잘 한다는 칭찬도 많이 받았어요. 
무대에 오르는 게 너무 좋아요. 내 자신을 벗어나 여러 가지 다른 신분으로 
변신할 수 있는 길이거든요. "
  할 수만 있다면 대학에 들어가 연극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순간, 
로라는 당황했다. 해변에서 했던 이야기와 어긋나게 말한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제 말은... 이번 가을 학기에 등록이 돼 있지만, 갈지 안 갈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는... "
  "거짓말했다고 야단칠 사람없는데... "
  "거짓말하진 않았어요! "
  오웬의 부드러운 음성에 로라는 강하게 항의했다.
  "언젠가는 가리라 생각했어요. 가을 학기 아니면 내년이라도... 꼭 대학에 
들어갈 거예요. "
  "그러리라 믿어요, 로라. "
  그녀는 속상한 듯 입술을 사정없이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화를 내서. 대학을 가고 싶지만 마음 먹은대로 안돼 속이 상해 
있었나봐요. 무슨 수가 있겠죠. "
  "어디 한번 그 수를 함께 생각해볼까? "
  오웬은 즉석에서 가죽 뚜껑으로 된 수표책을 열더니 수표를 한장 찢었다.
  "학비를 내가 빌려주면 어때? 원한다면 기숙사비와 용돈도 줄 수 있는 걸. "
  로라의 숨막히는 듯한 짧은 비명소리에 오웬은 머리를 끄덕였다.
  "로라가 원한다면 해줄 수 있지. 물론 그냥 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야. 
대학을 졸업한 다음 배우를 하든가 다른 일을 해서 갚아야 되는 돈이지. 하지만 
그전에 조건이 하나 있어. "
  오웬은 그 말과 동시에 로라의 이마에 잡히는 주름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편지를 써준다는 조건이야. 그리고 가끔씩 날 보러 와줘. 로라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돈을 되돌려 받지. "
  로라의 얼굴은 기쁨으로 환하게 빛났고, 뛰는 가슴으로 인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앞으로 내밀던 로라는 나쁜 일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얼른 손을 뺐다. 오웬을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그가 
화를 낼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돈을 빌려주었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꿔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돈 빌려간 사람으로부터 키스 
받는 것을 싫어할지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로라는 그냥 두 손을 허벅지에 
올린 채 눈물만 글썽거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절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어요. 기다려 보세요, 열심히 공부할게요... "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털어내기 위해 로라는 고개를 옆쪽으로 돌렸다.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편지를 쓰겠어요. "
  "일주일에 한 번이면 족해. "
  오웬은 미소를 지으며 멍하니 서 있는 로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다시 책장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부터 로라는 전과 달리 마음 편하게 주변 얘기를 털오놓을 수 
있었다. 뉴욕 생활, 좋아하는 책이야기, 칼 핸디의 서점에서 보냈던 시간들에 
관해 그녀는 오웬에게 자세히 말해주었다. 일주일 동안 오웬과 함께 보내며 
로라는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행복 속에 파묻혀 
로라는 서재 바깥의 일들을 까맣게 잊었다.
  클레이는 로라가 하루 두 시 간씩 오웬의 서재에서 일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대번에 흥분과 감탄으로 소리쳤다.
  "누나 여간 아냐! 두 달도 안돼 노인네 마음을 사로잡다니! 누나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이야. "

  점심 직후 오웬은 부엌으로 와서 직접 로라를 가족들한테 안내했다. 구식 
가스등과 철쭉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밟으며 두 사람은 여서 채의 별장을 차례로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모여 않자 오웬을 기다리고 있었다. 웬일인가 
의아해하면서도 샐링거 가족들 대부분은 부끄러움으로 말을 잃은 로라에게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직 펠릭스와 아사만이 주방 하녀를 인사시키는 
아버지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다. 아사의 아내 캐롤은 남편의 차가운 
태도와 레니의 부드러운 말 중 어느 쪽을 좇아야 할지 몰라 로라보다 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아사의 집을 나설 무렵 알리슨이 사촌 파트리샤와 함께 대문을 
들어섰다. 오웬이 로라를 그들에게 소개하려 했을때 알리슨은 가볍게 
할아버지의 말허리를 잘랐다.
  "우린 벌써 인사했어요. "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로라의 당황스런 표정과 달리 알리슨은 상쾌하게 
말했다.
  "엄마가 로라르 선택한다고 했을 때 무척 기뻤어요, 할아버지. 로자는 얄팍한 
입술에 나이든 여자들을 조수로 두곤 했잖아요. 요리라곤 양다리 볶음이나 
젤로(과일맛이나 빛깔을 낸 젤리. 상표명 Jeello가 고유명사로 정착됐음 : 역자 
주)밖에 못 만드는 솜씨지만 그런 아줌마들일수록 로자의 카드놀이 상대역으로 
안성맞춤이거든요. 작년 여름은 또 여땠는데요? 박하에 대마초를 넣어 요리한 
끔찍한 여대생을 조수로 삼았었잖아요. 라자냐(이탈리아식 잡탕면 : 역자 주)를 
해치우기 전에 로자가 그걸 알아냈기 망정이지 다들 한바탕 해롱댈 뻔했다구요. 
그런 상황에서도 할아버진 멋진 위트를 발휘하셨죠. 우리 샐링거 가문이 마약 
복용으로 금세 유명해지는 거 아니냐구 말이에요. 할아버지 농담 때문에 아빠가 
화를 내긴 했지만, 우리 아빤 원래 유머감각이 뒤 떨어지는 분이거든요. "
  "그런 식으로 아빠를 소개하면 되겠니? "
  "할아버지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서. "
  알리슨은 오웬처럼 눈썹을 찌푸리고 목소리를 굵게 깔며 흉내냈다.
  "펠릭스, 가끔 웃을 줄 알아야 한다. 유머를 즐길 줄 알면 더 오래 살 수 있고, 
네가 조금만 미소 지을 줄 안다면 우리 집이 좀 더 화목해질 수 있을 게다. "
  알리슨의 흉내에 오웬은 껄껄 웃었다.
  "또 놀러와. "
  알리슨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한다면 테니스 시합도 해. 치는 법 가르쳐줄께. 언제 만날 수 있을 까? "
  알리슨의 눈빛은 반짝거렸다.
  "저녁초대도 할게. "
  "밤에도 로자와 일해야 되는데...
  "언제? "
  "로자가 야근하자고 할 때마다. "
  "그럼 로자가 쉬는 날로 정하면 되겠네. "
  "그땐 동생하고 지내야 되는 시간이라서... "
  "하루 종일? "
  "알리슨. "
  로라의 표정을 지켜보던 오웬은 알리슨을 불렀다.
  "내켜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꾸 그렇게 일방적으로 부탁하는 게 아니다. "
  "그래? 내키지 않아? 내 초대를 싫어해? 모든 사람들이 샐링거 가문에 줄을 
대지 못해 안달을 떠는데... 더군다나 할아버지도 우리가 친구되는 걸 원하고 
계시는 것 같다구. 그런데도 내 초대를 내켜하지 않다니. 내가 싫어서 그래? "
  "바빠서 그런 거지 다른 뜻은 없어. "
  알리슨깥이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에게 로라의 말은 인사 치레로 들렸다.
  "저녁 초대해주면 가보도록 노력할게. 그리고 테니스도 배우고 싶어. "
  로라의 말에 알리슨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자에게 얘길 해봐야지. 며칠 치면 쉽게 배울 거야. 오후에 테니스 치고 
수영 하면 되겠네. "
  "수영 할 줄 모르는데. "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로라는 몹시 부끄러웠다.
  "그럼 수영도 배우면 되지, 뭐. 여름 가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야, 신난다. 내가 
선생님이 되다니. 다른 것도 하자구. 혹시 미용사놀이 해봤어? 가위로 머리를 
싹뚝싹뚝. "
  "알리슨 "
  오웬의 엄한 음성에 알리슨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언제 가르쳐줄게. 아, 그리고 올 때 테니스 신발하고 수영복 가져오도록. 
수영복 있지? "
  로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수영복 하나 빌려줄게. 열 개도 넘거든. 그럼 다음에 보자구. "
  로라가 뭐라고 하기 전에 알리슨은 순식간에 파트리샤가 있는 쪽을 향해 
달려갔다. 땅바닥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든 로라는 오웬의 눈길을 수줍게 
받아들였다.
  '내가 마치 알리슨의 새로운 연구과제물이 된 기분이에요. "
  "로라는 영리하잖아. 알리슨한테는 새로운 세계가 필요해.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싶어하고 또 그걸 원하는 아이거든. 얼마나 좋은 
일이야, 로라가 그앨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게. "
  잠시 말을 끊고 로라의 눈빛을 살피던 오웬이 디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애도 로라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걸? "
  "벌써 그런걸요. "
  로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아래쪽에 있는 젠슨가를 향했다. 
토마스 젠슨이 현관문을 열었다. 로라느 부드러운 잔디밭 한가운데 마치 연청색 
대형 젤리처럼 보이는 긴 타원형의 수영장과 배구 코트장, 말발굽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해변, 끝없이 이어진 대양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밝고 
거대한 거실로 안내되었다. 젠슨가의 모든 방들은 흰색과 푸른색의 쿠션이 달린 
연푸른색 가죽 소파들과 백색 나뭇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라피아 야자껍질 
양탄자로 통일되어 있었다. 장미를 화병에 꽂고 있던 바바라 젠슨은 토마스와 
함께 들어오는 로라와 오웬을 미소로 맞아들였다.
  "어서들 오세요. 환영합니다. 로라라 했지요? 솔직히 난 우리집 
주방사람들조차 잘 몰라요. 그런데 이렇게 내 동생네 주방요원을 만나게 됐네. 
로자, 참 좋은 사람이에요. 쉴새없이 말을 하긴 하지만... 여기 좀 않아요. 폴이 
조금 있으면 올 텐데. 에밀리하고 쇼핑 갔어요. "
  냉홍차 잔을 든 로라는 오웬 옆에 앉았다. 바바라는 금발에 늘씬한 키, 마른 
체격 등 레니와 매우 비슷했다.
  "가구들과 맞춰보려고 푸른색 장미를 교배해볼 작정이었어요. "
  바바라는 오웬에게 눈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 전에 생각을 바꿨어요. 자연스럽게 보일 것 같지 않아서요. 
자연의 조화를 깨뜨리는 일은 보통 이상으로 똑똑하거나 보통 이상으로 
교만해져야 하는데,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사람이 푸른색 장미를 교배하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죠. "
  로라는 바바라의 얘길 들으며 계속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자신을 살피는 
오웬의 눈길과 마주치기도 했고 오웬과 자신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는 토마스를 바라보기도 했다. 테없는 안경에 짧은 콧수염을 기른 키 작은 
토마스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창백하다 싶을 만큼 흰 피부인 바바라에 비해 
검은 머리의 토마스는 피부 빛깔도 검은 편이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낸다 
할지라도 전혀 딴판으로 보이는 바바라와 토마스의 잠자리를 로라는 마음속으로 
상상해보려 했다. 그러나 그 장면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서 와라, 폴. 널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
  토마스의 목소리에 로라는 시선을 돌렸다. 카메라를 어깨에 멘 폴은 현관 
입구에 서 있었다. 로라를 본 순간 굵은 눈썹을 한 차례 치켜올린 그는 미소와 
함께 로라쪽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할아버지께서 아가씰 부엌 뒤칸에서 데리고 나올 줄 알았지. 인사를 이렇게 
나누게 됐으니 앞으로 잘 지냅시다. "
  그의 길고 섬세한 손을 잡는 순간 가슴이 떨려왔다. 폴은 격의 없는 친구를 
만난 듯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모친의 뺨에 키스한 그는 부친이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에 기댔다.
  "다른 사람들은 다 만나봤어요? "
  폴이 로라에게 물었다. 로라는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웬은 로라를 
대신해 그녀가 누구를 만났는가를 얘기했다.
  "알리슨이 진짜 초대를 했어요? "
  로라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치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분명 뚱하고 무뚝뚝한 로라 페어차일드보다 말을 잘 구사하고 세련된 여자를 
좋아할 것이다.
  "로자에게 제 시간에 로라를 돌려보내기로 약속했다. "
  오웬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여기 오는 도중에 생각난 건데, 레니에게 남쪽 구석에 있는 별채를 
치워두라고 일러둬. 현재 비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로라에게 쓰라고 하면 
어떨까 ? 남동생과 함께 묵기엔 알맞을 거다. 지금 센터 빌쪽에 있는 지하 
셋방에서 산다는데 어디 그래서야 쓰겠어? 여기가 훨씬 더 편하겠지. 그게 더 
좋을 게다, 일손 필요할 때 더 오래 일할 수도 있구. "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는 로라에게 짧은 미소를 주며 오웬은 그녀의 어깨로 
손을 올렸다.
  "물론 로라가 우리 곁에 와 있기 싫다면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만약 공짜로 
들어와 살기 싫다면 임대료를 받아도 되지. 어쨌든 그걸 정하기 전에 레니에게 
먼저 물어보는 게 순서일 게야.혹 거길 사용할 생각인지도 모르니까. "
  "생각 잘 하셨어요. "
  바바라는 예의 그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잖아도 그 별채를 어떻게 쓸까에 대해 레니하고 얘길 했어요. 앞으로 
누가 됐든지 매년 여름마다 들어올 로자 조수에게 빌려주면 되겠네요. 로라가 
첫 임자가 되겠죠. 동생 이름이 클레이라 그랬지? 과수원에서 한 번 본 것 
같애요. 온실 난초를 아주 멋지게 피워 놓았더라구요 잘됐네요. 여기서 살면 
출퇴근 시간도 절약돼서 좋고. 만나서 반가워요. 그 별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여요. 요즘 젊은이들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게 프라이버시하고 
독립심이라면서? 하지만 여기서도 그런 걸 누릴 수 있을 테니 걱정 말아요. "
  토마스가 거실에서 작별 인사를 했고 바바라는 현관가지 따라 나왔다. 
토마스가 아들에게 하는 소리를 로라는 놓치지 않았다.
  "에밀리는 어땠니? "
  "뉴욕으로 데려갈까 해요. "
  폴의 그 대답을 끝으로 현관문이 닫히는 바람에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주방으로 들어가자 일을 하던 로자가 고객를 돌렸다.
  "죄송해요, 로자. 모두들 이것저것 질문하시는 통에 나도 모르게 시간이... "
  "그게 이 가문 내력인걸. "
  로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동생이 왔다가 그냥 갔단다. 오는 대로 빨리 온실쪽으로 
와달라던데. 지금 빨리 갔다오는 게 낫겠다. 오리찜 재료를 다듬기 전에 어서 
갔다 와. "
  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클레이에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로라느 온실로 뛰어들어갔다. 클레이는 수석 정원사를 피해 로라를 온실 입구로 
이끌었다.
  "잘 들어, 누나 "
  클레이는 로라에게 바짝 붙어선 채 낮게 말했다.
  "아까 오전에 전화가 왔는데 형이 더 기다릴 수 없대. 우리 알리바이도 
정확하게 생각해놨으니까 일요일로 하재. 일주일 뒤 우린 여길 뜨면 돼. 그럼 
완벽하게 끝낼 수 있어. "

    4장
  샐링거 별장으로부터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 로라와 클레이를 태운 벤은 
저녁식사를 위해 팔무스로 차를 몰았다. 선창가를 메운 관광객들을 지나 세 
사람은 클램 셰크 변두리 부두 끝에 위치한 곳에 자리 잡았다. 식당 쪽으로 
등을 돌랜 채 항구 밖의 낚싯배들을 볼 수 있는 방향을 벤은 의자 위치를 모두 
바꿔버렸다.
  "나는 바다쪽보다 사람들 구경하는 게 더 좋은데. 저쪽으로 돌려 앉아도 우릴 
알아볼 사람은 없어. 더군다나 우릴 눈여겨볼 사람이 어디 있을 까봐 그래. "
  "혹 누가알아? 주의 할 수 있는 데까진 해야지. "
  먼저 자리에 앉은 벤은 로라가 앉길 기다렸다.
  "누누이 말했지. 조심해서 나쁠 것 하나 없다구. 우리가 일을 치르고 뜬 다음 
분명 경찰이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다닐 거야. 우리 셋을 기억해낼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니? 여긴 뉴욕이 아냐, 로라. 서로 안면 없는 게 이상할 
정도란 말이야. "
  "그런데 왜 여기서 만나는 거야? "
  클레이는 벤의 심각한 얼굴이 걱정 되는 듯했다.
  "너희 둘한테 저녁 사주려고 그랬지. "
  두 동생 사이로 의자를 옮긴 뒤, 벤은 두 팔로 각각 동생들 어깨를 
끌어안았다.
  "거의 두 달 동안 너희들을 돌보지 못했구나. 허긴 어쩔 수 없었지. 너흰 여기 
있고, 난 뉴욕에 있었으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쥐 죽은 듯 고요한 
아파트에서 너희들 생각 많이 했다. "
  로라는 죄책감을 느꼈다. 샐링거 가문에 들어온 후 로라는 이부오빠 벤에 
대한 그리움을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화려하게 살아가는 
샐링거의 삶이 부러웠고, 벤을 떠나 홀로 삶을 개척해나갈 미래를 그리느라 
벤을 생각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자신과 클레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시키는 벤을 바라보며 로라는 마음속 
깊이 그에게 사과했다. 울고 싶은기분도 들었다. 두 사람에게 아주 좋은 오빠와 
형 역할을 해왔던 벤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길을 갈 수있을까?
  "대지 도면은 다 마무리했어. "
  아주 작은목소리였지만 로라는 클레이의 음성 속에 담긴 흥분을 읽을 수 
있었다. 벤이 원했던 일을 마친 클레이는 형이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길 
기대하고 있었다.
  "아주 보기 쉬우면서도 완벽해. 형이 좋아할 만큼. "
  벤은 로라를 바라봤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
  "클레이가 만든 건데, 뭐. 내쪽은 아직 안 됐어. 로자가 워낙 엄해서. "
  "그래도 수다쟁이라서 정보는 많이 얻는다며? 하루 종일 같이 붙어 있잖아. "
  "붙어서 수다만 떨란 소리니? 주방 일은 언제 하구? 너처럼 돌아다닐 시간이 
없단 말이야. "
  "오웬의 마음은 사로잡았잖아. "
  클레이는 톡톡 쏘는 로라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오웬이라니? 오웬 샐링거? "
  벤의 물음에 로라는 고개를끄덕였다.
  "그분 일을 도와주는 것 뿐이야. 중요하지도 않은 일 갖고 뭘 그러니? 
계획이나 얘기하자구. "
  벤은 말꼬리를 돌리는 로라를 유심히 살폈다. 종업원이 조개수프가 담긴 대형 
종이컵을 들고 탁자 가까이 올 때까지 로라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 머리 
위로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지나갔다. 뒤편에 앉아 있는 식당 손님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대화를나누고 있었지만 세 사람은 침묵의 섬에 갇힌 듯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 좋아. 그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자. 네 얘기부터 들어보자, 클레이. 
로라가 보석들이 어디 있는 지 찾아냈다면서? 아주 잘했어. 너희 덕분에 드디어 
이걸 만들었다. "
  벤은 호주머니에서 꺼낸 열쇠 두 개를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와우, 해냈구나, 형. "
  클레이는 흥분으로 숨조차 제대로 쉬진 못했다.
  "왁스본을 잘 떠냈을까 걱정이었는데... 너무 성급하게 했거든. 펠릭스의 
마님이 요트 놀이를 하러 나가긴 했지만 얼마나 오래 있을지 감을 잡을 수 
있어야지. 더군다나 서랍을 다 뒤져가며 이걸 찾느라 시간이 많이 걸려서... "
  "이건 경보장치를 끄는 열쇠일테고, 이건 옷장 열쇠겠지. "
  벤은 로라를 바라보았다. 한손으로 턱을 괜 채 로라는 고깃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벤은 말없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 클레이, 도면을 보자. "
  두 사람은 어깨를 맞댄 채 작은 도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거의 부딪칠 정도로 
머리를 가까이 대고 있는 두 사람의 금발을 로라는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많이 
닮은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히 다른 형제였다. 스물여섯 살의 세련된 
미남인 벤은 로라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영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열일곱 살짜리 클레이는 미남이긴 해도 벤이 가진 
부드러움과 세련미는 지니질 못했다. 엄마에게서 물려받은대로 둘 다 금발에 
둥그스름한 턱과 짙은속눈썹의 청색 눈을 지녔지만, 아버지 저드 가드너의 
태평한 성격을이어받은 느긋한 표정의 벤과 달리, 클레이는 모든 면에 두려움을 
느끼며 조심스럽던 알랜 페어차일드 아들답게 늘 초조한 기운을 눈 속에 담고 
있었다. 벤을 대할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던 로라는 자연히클레이의 부족한 
면을 메우기 위해 뒤쪽에서 애를 써야 했다. 두사람을 다 사랑하는 로라였지만, 
두 사람의 생활 방식을 따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우리 둘 다 펠릭스 요트 위에 있을 거야. "
  클레이는 신이 나서 설명했다.
  "힘쓸 일이 있는지 펠릭스가 정치인들을 초대하거든. 일요일밤이야. 레니와 
함께 요트에서 저녁파티를 열 계획이래. 샐링거 가문이 모두 보트로 몰려가고, 
우리 고용원들도 몇 명 지원식으로 불려갈 거야. "
  "그럼 너희들 알리바이가 완벽하게 세워지는 셈이 된다. 낸터켓 사운드에 떠 
있는 선상 위에서 일을 했는데, 누가 의심을 하려 들겠어? "
  클레이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기 전에 경보기를 손봐둘게. 형 말대로 타이머를 하나 사뒀어. 지하실에 
경보장치가 있더라구. 거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한 시에 작동하도록 
손볼 테니까. 형은 파티가 흥이 오르게 되 자정 무렵 들어오면 돼. 담을 넘는 
곳도 도면에 있으니까 한두 번 훑어보면 돼. 레니 방은 홀 끝 오른쪽에 있어. 
지렛대로 창문을 연 다음 들어가서 먼저 그쪽에 있는 경보기를 이 열쇠로 끄고, 
그 다음은 이걸로 옷장을 열면... 아니, 안 되겠다. 옷장은 부숴버리는게 낫겠다. 
외부소행이라고 생각하게 말야. 보석들을 챙긴 다음 눈에 띄는 대로 귀중품들도 
집어 넣으라구. 옷장, 서랍, 화장대, 보석 찾느라고 온통 다 뒤진 것처럼 해놔야 
돼, 형. 그런 다음 줄을 타고 집 바깥으로 나오면 땡, 되겠습니다! "
  벤은 클레이에게 미소를 지었다.
  "로프는 그대로 놔두고 말이지. "
  "맞았어, 할 수 있으면 담장 바깥에 난 차 바퀴자국도 그대로 두라구. 새벽 
한시쯤 경보기가 울리게 되면 경비가 경찰을 부르겠지? 그럼 우리가 요트에서 
열심히 시중을 들고 있는 사이 경찰이 집안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난리를 칠 
거야. "
  "경보장치 옆에 있는 타이머는 어쩔래? "
  "오는 대로 즉시 제거해버려야지. 백이면 백 경비는 분명 제일 먼저 경찰을 
부를 테고, 그 다음엔 요트로 연락을할 거야. 경찰이 집안 구석과 정원을 뒤지고 
다닐 동안 우릴 포함해 배 위에 있는 사람들 쪽은 조사 안 할 거라구. 도둑이 
들어왔다고 울려댄 경보기가 고장났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안 그래? 그럼 난 
일분도 안 걸려 타이머를 감쪽같이 뜯어내는 거지, 뭐. "
  "누가 널 보면 어떻게 할래? "
  "경찰들하고 돌아다니면서 얘기하느라 모두 다 정신 없을 텐데. 뒷계단은 
아무도 사용 안해. 아침식사 때문에 로자가 여섯 시쯤 이용하긴 하지만... "
  벤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았어. "
  클레이는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형이 마음에 들어할 줄 알았다니까! 이쯤이야 뭐 간단하지. "
  "클레이, 내가 몇 번씩 강조하지 않든. 그렇게 얕보는 순간부터 실수 문턱에 
들어서는 거리구. "
  "잘못했어, 형. "
  금방 풀이 죽은 클레이에게 벤은 다시 환한 미소를 보냇다.
  "어쨌든 참 잘 궁리해냈다. 아주 잘했어. 네가 아주 자랑스럽다. 그렇지 로라? 
"
  "지금 알았어? "
  로라는 아이스티 잔에서 떨어져내린 물기로 탁자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클레이, 쟤 생각해내는 덴 일류급이잖아. 오빠한테 칭찬 받으려고 밤잠 안 
자면서 연구했을 거야. "
  "근데 넌 어떻게 되거야? "
  "나 하고 싶지 않아. 부탁해 오빠, 우리 이번 일 안하면 안 될까? "
  "하지 말자구? "
  클레이는 믿지 못하겠단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지? "
  "갑자기가 아니야.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란 말야. "
  "오웬 때문이지? 누나하고 다른 세계에서 사는 그 작자들한테 마음을 뺏긴 
거지? 혹시 우리보다 그 작자들을 더 좋아하는 거 아냐? "
  클레이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들을 선택할 마음 없어. 아무도 선택 안할 거야 "
  "그럼 나와 동생을 버리겠단 소리니? "
  벤은 클레이와 달리 여전히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난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어... 내가 무슨 소릴 하는지 알면서 그래. 단지 
이번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거야. 지금껏 같이 많은 일을 했잖아. 필요하면 
다른 쪽을 알아볼게, 약속할게. 그런니까 내말은... "
  "난 샐링거를 털고 싶은데. "
  벤은 로라의 말을 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 우리한테 얼마나 친절한데 그래. 그리고... "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
  클레이가 뛰어들었지만 로라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거나,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 집에 들어가 물거 
털어내는 일과 달라. 내 말은, 책상 위난 옷장 위에 있는 가족사진을 보며 
물건을 털 때마다 그 사람들이 집에 들어와 털린 방을 보고 뭐랄 생각할까 하는 
궁금증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마, 이건 상황이 달라. 오빠, 난 알리슨, 레니, 그리고 
오웬을 알고있어. "
  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로라를 주시했다.
  "보석 몇 개 잃어버린다 해서 큰일 날 집안이 아니다. 게다가 손해볼 일 
하나도 없어. 보험금이 나올 테니까. 네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지? 네가 떠난 
다음 그들이 널 의심할까 두려운 거지? 그들이 너한테 느꼈던 좋은 감정이 
구겨질까봐 걱정 되지? 하지만 넌 영영 그 사람들을 볼 수가 없어. 달라질 게 
뭐가 있어? 그 사람들이 널 좋아하든 안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야말로 
진짜 중요하지도 않은 일 갖고 왜 그렇게 겁을 내고 있어? 일치르고 떠나면 
그만이야, 로라. 부자로 살고 있어서 그렇지, 그 사람들 다 별것 아니야. 
속물들이야. 자신들만 중히 여길 줄 알지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이란 말이야. 샐링거 가문이 아니 사람한테는 자기네들 먼지 하나라도 
주기 아까워하는 사람들일뿐이야. "
  "오빤 몰라! 그 사람들 절대 그런 분들이 아냐! 그냥 우리하고 사는 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나하고 클레이한테 얼마나 잘 해 주는데. 우리 둘을 위해 별채도 
내주고 오웬은 대학갈 학비까지 꿔졌단... "
  "뭐라구? "
  클레이는 로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깐만. "
  벤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클레이, 목소리 좀 낮출 수 없어? 펠릭스 샐링거가 너한테 보금자리까지 주고 
대학까지 보내준다고 했다구? "
  "그건 아니야. 별채 얘긴 오웬이 꺼냈어. 모두들 오웬 말이라면 꼼짝을 
못하거든. 대학 얘기도 그분이 먼저 제안하신... "
  "펠릭스가 찬성 안할걸. "
  벤의 말에 로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찬성 안할 이유가 없는걸. 다른 사람들처럼 친절하게 나오진 않지만. 아사도 
마찬가지지만 다른 사람들이 돕는다는데 왜 펠리스가 굳이 막겠어? "
  "대단하데. 샐링거 사람들 대단해. "
  벤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한테 아주 잘된 것 같다. 난 네 오빤데도 대학을 못 보내주고 있잖니. 
올해도 틀린 것 같다, 내 형편으로. 여름 내내 편히 지낼 곳도 마련됐고, 돈을 
저금할 수 있으니... "
  로라를 응시하던 벤은 머리를 무겁게 흔들었다.
  "아냐, 그럴 순 없어. 포기할 순 없어. 이번 일을 꼭 해야만돼, 로라. 해야 되는 
이유를 언젠가 얘기해줄께. 하지만 지금은 제발 묻지 마. 그냥 날 믿고 내 뜻을 
따라주기만 하면 돼. 내가 그 보석들을 빼낸 뒤, 원하면 그곳에 계속 있으라구. 
하지만 내 생각엔 그들이 널 범인으로 몰 거야. 이런 제기랄. 로라, 널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 사람들이 아냐. 부탁한다. 날 도와줘.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이야, 이 기횔 놓칠 순 절대 없단 말야. "
  "얼마나 오래? 언제부터 생각해왔던 일인데? "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했어. 여러 질문 하지 말고 
순순히 따라줄 수 없니? 난 네가 해달라고 할 때마다, 도와달라고 할 때마다, 
아무 소리 안하고 그냥 해줬잖아? "
  "난 내 뜻대로 하겠어. "
  로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대학도 가고, 존중받는 사람이 되고 싶단 말야! 날 쳐다볼 사람들이 두려워 
식당까지 와서 등 돌리고 앉기 싫어. "
  클레이는 로라를 험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그자들하고 같이 산다는 얘기며, 대학 얘기 나부랑이를 왜 진작 말 안한 
거야? "
  "너는 샐링거 별장을 털지 못해 환장한 애 같구나. "
  "내가 짠 계획을 다 뭉갤려구 하니까 그렇지. "
  클레이는 목소리를 높였다.
  "나 혼자서 멋지게 짰는데, 그걸 포기하라구? 더구나 사전에 한마디 의논도 
없이. "
  "내가 미리 말했다면 어떻게 나올려고 그랬니? "
  "형하고 똑같지. 무슨 일이 었어도 꼭 이번 일은 해야 돼! "
  "그렇게 나오면서 뭘 그래? 내가 미리 너한테 얘길 했든 안했든, 달라진 게 
뭐가 있어? "
  "누나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 알 권리가 나한테도 있단 소리야. 우리가 지금 
다로 놀고 있는 거야? 셋이서 함께 일하는거잖아!"
  "너 혼자 일했지, 난 아냐. 아까도 말했지만 난 이번 일 하고 싶지 않았어! "
  "둘 다 그만두지 못해! "
  벤이 엄하게 꾸짖었다.
  "목소릴 둘 다 죽여. 로라, 널 돕기 위해 앞으로 뭐든 하겟다. 하지만 이번 
일은 꼭 해야 돼. 무슨 소린지 알겠니? 내 가슴속에 박혀 있는 돌덩어리를 
떼내는 일 같은거야. 이 일을 치르고 네 대학 얘기며 다른 얘기들을 해보자. "
  로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날 대학 보내기 위해 오빠가 도둑질을 한다는 건 말도 안돼. 안 그래, 오빠? 
정말은 그게 아니잖아? 도둑질 하면서 스릴을 느끼기 때문이지? 그래서 다른 
일을 찾지 못하는 거지? "
  "이런 상황에서 다른 일을 찾아? 어떤 일을? "
  "훔치는 일 말고 더 보람된 일 말야. 클레이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어? "
  "내가 어때서? "
  "쟨 오빠가 위대한 줄 알고 있다구. 식당 일하면서 남의 집이나 뒤질 생각 
하는 사람이 오빤 진짜 위대하다고 생각해? 이제 그짓 그만두고 제발 다른 
일자릴 알아보자. 우리가 계속 이런 식으로 살길 바래? "
  "난 좋기만 한데. "
  클레이는 못쉰 소리를 냈다.
  "난 좋은 일자릴 얻을 수가 없다, 로라. "
  벤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대학도 못 갔고, 기술도 변변한 게... "
  "어떻게 그걸 미리 알아? 오빠만큼 똑똑한 사람이 어디 있데! 노력도 안 
해보고, 해보지도 않고 미리부터 안된다는 생각만 하고 있냐구? 사장님을 원해? 
아님 회장님이 되고 싶어? 되지 말라는 법 어디 있어? 하지만 우선 시작을 
해야지, 뭘 하든 말야. 진짜야. 오빠가 무슨 일을 하든상관 안해. 도둑질만 
빼놓구. 난 싫어, 도둑질은 절대, 절대 안할래! 옛날처럼 재미도 못 느끼고, 
희열도 없단 말이야. 다시 잡히면 난 이제 감옥엘 가야 돼. 전과2범이란 말야. 
끔직해. 정말 끔직해. 오빠가 훔친 돈으로 사는것도 지겨워. 내가 직접 그 돈을 
훔친 것 같은 기분이 들때마다 미치겠다구. 샐링거 가문을 털다니, 절대 그럴 순 
없어! 부탁이야, 오빠. 제발, 제발, 이번 일 하지 말자. 그분들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그곳에 들어가고 난 다음부터 행복이 뭔지 조금 알 것같은 
기분이었어.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들 곁에 남아 오래오래 살고 싶어, 오빠. "
  로라는 벤의 눈 속에서 분노와 아픔을 읽었다. 그 눈빛 앞에서 그녀는 가슴이 
찢어들 듯한 아픔을 느꼈다.
  "오빠, 기분 나빠하지 마. 내가 오빠 사랑하는 걸 알지? 우리들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데. 하지만 난 기회를 잡았어. 아니 날 바꿔볼 수 있는 좋은 기회야. 
이번에 놓치면 영영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기회라구. 오웬이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학교 다니면서 편지를 보내달라 그랬어. 가끔 만나자고도 했구. 
그분은 이제 내 친구란 말이야. 어렵게 얻은 친구를 잃고 싶진 않아. 샐링거 
사람들 정말 좋은 분들이야. 그 사람들한테 해 끼치고 싶지 않아. 절대로! "
  서로 다른 쪽에 시선을 둔 채 세 사람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식당 
안의 웃음소리는 조금 전보다 크게 들려왔다. 종업원이 커피를 날라오자 벤은 
뜨겁게 김이 오르는 블랙커피를 묵묵히 마시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시간을 두면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
 벤이 침묵을 깨고 양보하는 방향으로 나왔으나 로라는 그 자리에서 문제를 
결론짓고 싶었다.
  "아냐, 지금 얘기해. 안하겠다고 지금 약속해줘. 다른 일을 찾겠다구. 그럼 
뉴욕에 돌아가 오빨 도와줄게. 일주일 휴가 내서 다녀오면 될 거야. 오빠일 돕고 
우린 다시 여기로... "
  "누가 여기 계속 있겠대? "
  클레이가 대들며 나왔다.
  "넌 나랑 같이 있는 거야, 클레이. 그래야 고등학교를 다 끝마칠 수 있지. 
원한다면 대학도 생각해보는 걸로 하자. 안 그러면 네 앞날이... 
  로라는 말을 끝내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앞날이 나처럼 어둡겠지. "
  벤이 로라 대신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형처럼 되는 게 내 소원인데. "
  클레이는 계속 로라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형이 어때서? 누나도 옛날엔 그랬잖아. 누나가 그 얼어죽을 샐링거 가문 
앞에서 입 한번 다물어주면 우린 내가 완벽하게 꾸민 계획에 따라 멋지게 
한탕하고 여길 뜰 수 있단 말이야. 우리가 속해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 
뉴욕이야, 뉴욕! "
  "난 뉴욕으로 안 가. 그 별채로 숙소를 옮길 생각이야. 오빠, 우리 둘이 오빠를 
초대하면 되잖아. 헤어져 있어도 오빠와 우린 한 가족이야. 혼자 있으면 물론 
외롭겠지. 미안해 오빠, 떨어져나가겠다고 해서. 하지만 난 정말 꼭 여기 있고 
싶어... "
  로라는 벤의 손을 잡았다.
  "오빠, 제발. "
  로라에게서 손을 빼며 벤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생각해보겠다고 얘기했으면 좀 받아들이는 척이라도 해라. 지금 심정으로선 
그 말밖에 할 수 없다. 네가 샐링거를 원하는 것보다, 난 이 일을 더 원하고 
있어. "
  자리에서 일어난 벤은 지갑을 열었다.
  "센터 빌까지 태워다 주마. 난 뉴욕으로 가겠다. 며칠내로 전화줄게. "
  그의 얼굴은 몹시 굳어 있었다.
  "잘 들어, 로라. 난 아직도 네 보호자야. 내가 뭘 결정하든 넌 내 뜻에 따라야 
돼. 알겠니? "
  "당연하지. 옳은 말씀! "
  로라의 눈빛을 읽으며 클레이는 벤의 말에 박자를 맞추었다. 벤이 종업원에게 
계산을 하는 동안 클레이와 로라는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이 멋진 시간을 갖자고 이렇게 우릴 초대했는데, 이게 뭐야? "
  "네가 지금 오빠 때문에 그렇게 얼굴을 붉히는 게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 
그러니 잠자코 있으라구. 네 그 잘난 계획인지 뭔지가 무너질가봐 그런 거잖아. 
"
  "내 계획이 어때서? 얼마나 철저한데 그래? 해보지도 않고 망쳐놓겠다는 
심보는 뭐니? "
  벤이 자동차를 모는 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차들은 여름 휴가를 즐기기위해 떠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두 
다 행복한 모습들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로라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힘들여 
참고 있었다.

  로라는 일주일 내내 벤의 전화를 기다렸다. 마음이 상했을 벤을 생각하면 
실컷 울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로자 앞에선 함부로 울 수가 없었고, 클레이가 
있는 곳에서 누나로서 울음을 보이기가 싫었다. 다행스럽게도 샐링거 가문에는 
손님이 끊이기 않았다. 그들을 위해 매끼마다 15인 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던 
주방장 로자는 일요일 밤 요트 위에서 벌어질 선상 댄스파티 준비까지 완벽하게 
끝내고 있었다. 그러나 주말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로자는 더욱 더 신경이 
곤두서는 모양이었다.
  일손이 바빠짐에 따라 로자 시중만 들던 때와 달리 로라가 직접 맡아 
주관해야 할 일이 주어지곤 했다. 따로따로 모여드는 아침 손님들을 위해 
일일이 아침을 준비해야 했고, 대부분 식당이나 현관 베란다에 앉아 담소하는 
스무 명 가량 되는 손님들을 위해 일시에 점심을 날라야 했을 뿐 아니라, 그 
뒷설거지가 끝나기도 전에 재빠르게 저녁식탁을 마련해야 했다. 로자는 그녀가 
음식을 장만하고 있을 때면 일부러 자리를 비우곤 했다. 가끔 나타나 비평과 
충고를 하곤 했지만 잘한 것을 찾아내 로라를 한껏 칭찬해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벤과 헤어진 이후 로라는 로자와 음식 얘기를 나누는 것 외에 다른 모든 
접촉을 피해왔다. 알리슨에게는 바빠서 테니스와 수영을 못하겠다고 얘기했고, 
오웬에게 식당 일이 넘친다는 핑계로 주말까지 서재일은 도울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초조한 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파티를 이틀 앞둔 금요일 오후, 드디어 로라는 
벤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클레이한테 어제 전화했더니, 네가 쌀쌀맞게 군다면서? "
  "쌀쌀맞긴. 바쁜 데다가 피곤해서 그랬겠지. 그리고 걔가 어디 날 가만히 
내버려뒀어야지. 황금 같은 기회를 놓쳤다느니, 미쳤다느니 그러잖아. 내 말은 
들으려고도 안해. 그래서 내가 좀 심술이 났었나봐. "
  "아무튼 네가 한 얘기 그동안 생각해봤다. "
  로라는 심호흡을 했다.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클레이가 아직 남아 있긴 한데, 내가 알아서 
설득해보마. 할 수 있을 거야. 네가 날 미워하는 것은 어떻게 해볼 수 
없겠지만... "
  "아냐, 오빠. 내가 왜 오빨 미워해. 사랑해 오빠. 정말 고마워. 여기 조만간 
올거지? 이번엔 멋있는 저녁이 될 거야. 전번같이 어색한 기분은 잊어버려. 
약속할게. 파티 끝나면 하루 휴가 낼 수 있어. 우리 셋이서 하루 종일 신나게 
돌아다니자구. 그동안 떨어져 있었으니까 할 이야기가 많을거야. "
  "내일, 토요일 어때? 보스턴에 갈 생각이니까. 오전중에 케이프까지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토요일은 쉬지? "
  "응, 그래. 하지만... "
  로자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한 생각에 로라는 말꼬리를 흐렸다.
  "이번 주는 안될 것 같은데. 내일 모레 선상파티 때문에 할 일이 너무 많아. 
더군다나 내일 밤 젠슨씨 댁에 백 명 이상이 몰려오거든. 잔디 위에 텐트 치고 
가든파티를 하나봐. 그 다음 토요일... "
  "다른 날로 찾아보자.
  그의 목소리에서 부드러움을 찾아낸 로라는 벤의 환한 모습을 기억 속에서 
더듬었다. 사랑을 베풀 때 벤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모습이었다.
  "또 전화할게. 정신 없이 바쁘다는 그 가문이 다음 토요일엔 널 좀 놔줬으면 
좋겠는걸. "
  벤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나서도 로라의 마음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실망을 감춘 채 아무렇지 않은 듯 동생의 소원을 
들어준 벤의 속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에일 듯 아파왔다. 클레이의 실망도 
대단한 듯싶었다. 그날 이후 그는 로라에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밤에 밖으로 
뛰쳐나간 뒤 새벽녘까지 로라를 애태우게 만들기도 했다. 로라가 그를 
찾아낸것은 토요일 아침, 온실 난초화원 안에서였다.
  "클레이 이래도 되는 거니? 밤새 내내 혼자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아? 
밤새 어디 있었니? "
  "몇몇 애들하고 있었어. 그애들 차에서 잤다구. "
  "어떤 애들인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하구? "
  "안 물어봤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베스강 근처에서 저녁 먹었어. "
  "베스강 근처 어디? "
  대들던 모습과 달리 클레이는 차츰 수그러들었다. 
  "기억 안 나. 너무... 너무 많이 마셨거든. "
  로라는 그를 잡아챌 듯 노려보았다.
  "얼마나 잃었니? "
  "잃다니? "
  "돌아다니면서 말야! 오빠가 쓰는 말로 물어야 되겠어? 포커로 얼마나 
날렸냐구? "
  "젠장, 누나! 형이 한다고 내가 그걸 따라... "
  "얼마 잃었어? "
  클레이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얼마 안 돼. "
  "얼마나? "
  "한 장. "
  "백 달러나 까먹었다구? "
  "너무 그러지 마. 거짓말하는 것보단 낫지 뭐. "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벤을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동생 클레이를 함부로 
나가게 만든 것만큼은 용서할 수없을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직접 
동생을 거둘 생각이었다.
  "됐어. 끝난 일 가지고 더 이상 따지지 말자. 이미 저지른 일인데 어쩌겠니. 
하지만 지금부터는 달라져야 돼. 모든 게 변했어. 새사람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눈앞에 있잖아. 술 먹고 노름을 하거나 차 속에서 뒹구는 일은 이제 
절대 두고 보지 않을 거야. "
  "날 여기 주저 앉힐 생각은 꿈에도 하지마. 뉴욕으로 돌아갈 테니까.    "넌 
나와 같이 여기서 살아야 돼! "
  클레이가 옆에 같이 있어 주길 원했다. 샐링거 가문이 친절하긴 했지만 그들 
속에서 외톨이로 남아 있긴 싫었다. 매달리고 의논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다. 
로라는 클레이가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을 알아챘다.
  "뉴욕 간다면서 왜 당장 안 떠나? 네 그 잘난 목표가 없어졌는데 왜 지금 
당장 뉴욕으로 떠나지 못하냐구? "
  "갈 거야. 간다구. 조만간에 떠날 거야. "
  "언제? 뭘 기다리고 있는데? "
  클레이는 다시 어깨를 들썩였다.
  "파티 때문에 일손이 필요하잖아. "
  "그것 봐. 나보고 샐링거 가문에 미쳤다고 하지만 네 자신도 이 가문을 
좋아하고 있어. 그 일을 도와주고 떠나고 싶어하잖아. "
  클레이가 가만히 있는 것을 눈여겨보며 로라는 말을 더 이어나갔다.
  "좋아. 네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상관 안할게.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떠나.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니까. "
  "누날 두고 혼자 떠나긴 싫어. "
  로라는 환한 얼굴로 클레이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오, 클레이. 정말 고맙다. 네가 남길 바랐어. 나랑 함께 있는 거야. 
"
  순간 로라는 빨개진 클레이의 얼굴빛을 세심하게 살폈다.
  "왜 그래? "
  "뭘? "
  "왜 얼굴이 빨개졌나구? "
  "빨개지긴... 일이 있긴 있지만. "
  "무슨 일? "
  "알리슨이 탁자용으로 꽃을 부탁했는데, 하도 까다롭게 굴어서 어떤 꽃으로 
해야 할지... "
  "알리슨은 내가 가꾼 정원이 멋지대... "
  "그래, 잘 해봐. 꽃 가꾸기는 네가 프로급이잖아. 언제까지 여기 묵을 
생각이니? "
  "이번 여름까지만 머물 생각이었는데, 누나가 별채로 들어간다니까... 글쎄 잘 
모르겟어. "
  "나랑 같이 옮기자. 침실도 두 개니까 딱 됐어. "
  "그쪽으로 옮기면 내가 마음을 바꿔 누나랑 계속 있을 것 같애? "
  "누가 아니? 네가 더 오래 있자고 할지."
  로라는 살며시 웃었다. 새로운 삶의 공간을 클레이가 거절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어 마음이 아주 가벼웠다. 그렇게 되면 동생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 듯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홀로 있게 된다는 두려움이 날아가버려서 
좋았다.
  "알리슨한테 아무 말 안하는 거지? 내 얘기 말이야. "
  "내가? 내가 왜 그애한테 네 마음을 얘기해. 그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
  처음으로 남매간에 아름다운 비밀을 갖게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희망에 
부풀어올랐다. 가을이 되면 알리슨은 대학으로, 클레이는 마지막 학년을 마치기 
위해 고등학교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날 저녁 알리슨과 온실에서 얘길 나누고 있는 클레이를 바라보며, 로라는 
자신이 몰랐던 동생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모든 게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 같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로라와 달리 
로자는 큰 그릇에 밀가루를 쏟아 부으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내 신세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내일의 선상파티 때문에 이주 내내 꼬박 
일했잖니? 그것뿐이면 또 몰라. 그동안 손님들이 얼마나 많이 모여들었니. 호텔 
주방장도 내 일거리를 보면 깜짝 놀랄 거다. 그뿐이냐? 내일 밤 그 파티가 끝이 
아닐 거다. 밤새 놀았으니 월요일 아침엔 또 한바탕 속을 풀어야겠지. "
  "좋아하시면서 왜 그러세요? 로자주방장님을 믿으시니까 그런 거죠. "
  그녀의 칭찬에 로자는 껄껄 웃었다.
  "이런 애교덩어리 보라니까. 한 달 전까지만 해도내가 무서워 한마디도 
못하던. "
  "언제 무섭게 구셨어요?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낯이 설어서 아무 말 
못하고 지낸 거죠."
  "그게 다 오웬님 덕택 아니겠냐. 감사드려야 된다. "
  "로자 주방장님한테도 감사드려요. 진심으로요. "
  로자와 함께 케이크를 만들던 로라는 잔디 위로 크게 솟아오른 흰색 대형천막 
안에서 크린색 린넨 테이블보가 씌워진 탁자들 위에 꽃을 진열하고 있는 
클레이와 알리슨을 연신 훔쳐보았다. 클레이는 검정 바지에 흰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파스텔빛 꽃발같은 실크 원피스를 차려 입은 알리슨은 크리스탈 
꽃병에 담긴 흰 백합과 루비빛 생강꽃들을 테이블 위로 옮기며 클레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피타이저를 들기 위해 하나 둘씩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할 무렵, 인사를 
하기 위해 주방을 찾았던 오웬은 생기발랄한 로라를 보며 기뻐했다.
  좋아졌구만. 해변에선 그렇게 겁먹어 하더니. 몰라보게 달라졌어. 며칠 전보다 
훨씬 명랑해지고 마음을 풀어놓은 듯 싶어. 무슨 이유가 있을까?
  오웬은 그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그녀의 마음을 열게 만든 장본인이 누굴까? 
알리슨은 그녀에게 우정을 주었고, 로자를 통해선 엄마의 정을 느낀 듯싶었다.
  펠릭스가 케이프까지 초청한 정치인들과 사업가들을 바라보며 오웬은 
가족들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강한 야망에 적극적인 펠릭스는 그대로 
자신을 흉내내고 있었다.
  그러나 오웬은 장남 펠릭스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펠릭스는 점점 더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자신이 가문을 
이끌어나갈 장남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내세우기 위해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오웬이 보기에 교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느 유머라고 
손톱만치도 모르는 딱딱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임시로 만든 단상에서 상원의원이 연설하고 있는 동아 정중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종손자 폴을 지켜보며 오웬은 자신의 두 아들이 그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는 것이 새삼 한탄스러웠다. 레니에 대한 연민도 그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커피와 디저트를 끝낸 손님들에게 코냑을 내오기 시작할 무렵, 오웬은 조용히 
의자를 밀어내고 텐트에서 빠져나갔다. 젠슨가 현관 입구를 통해 오웬은 
주방에서 어른거리는 로라의 모습을 찾아냈다. 로자와 식기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차례롤 지켜본 뒤, 그는 펠릭스 집 뒤편에 있는 자신의 숙소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달 없이 캄캄한 밤이었지만, 그는 발밑에서 느껴지는 포석으로 손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선 오른쪽이지. 여긴 왼쪽. 레니의 장미정원을 지나 오웬은 
건물 안으로 발을 옮겼다.

  팔걸이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오웬은 펠릭스와 레니가 사는 본채에서 
약하게 들려오는 문소리에 귀를 기울엿다.
  처음엔 일하는 애들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잠시 후 오웬은 파티장으로 모두 
몰려간 일꾼들 생각을 해냈다. 파티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외에 다른 일꾼들이 
주말을 맞아 모두 다 휴가를 떠났다는 생각도 빠르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인가? 그러나 바람도 아니었다. 창밖의 나무들은 여름밤의 후덥지근한 
공기에 갇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구. 레니하고 펠리스가 온 건가. 그럼 한번 나가봐야겠구만. 문을 
빠끔히 열고 밖으로 나온 오웬은 본채와 연결된 긴 회랑 중간 지점에 선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었구만. 오웬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이상한 생각만 하는 늙어빠진 노인이라고 
자신을 비웃던 오웬은 그러나 위층 홀을 조심스럽게 밟는 희미한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레니의 방에서 나오는 발자국 소리였다. 그 소리는 층계 밑으로 
내려와 점점 오웬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이, 거기 누구나! "
  소리를 지르며 오웬은 벽에 달린 스위치를 눌렀다. 갑자기 커진 샹들리에의 
강한 불빛을 피하며 눈을 감는 순간, 그는 달음박질 치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뒤 눈깜짝할 사이에 검은 물체가 그의 몸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어이쿠! "
  오웬은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거 놓지 못해, 이... "
  오웬의 음성은 목구명에 걸려 나오지 못했다. 바닥에 얼굴을 댄 채 등을 타고 
누르는 괴한과 필사적으로 싸우려 했으나, 가슴에 느껴지는 인두불 같은 강한 
통증 때문에 그는 숨을 제대로 쉴수가 없었다. 죽는구나. 그는 캄캄한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5장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로라는 울면서 말했다.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로 전화기는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손수건으로 눈물에 젖은 콧등을 닦아내며 로라는 아예 전화부스 
속에 쪼그리고 앉았다. 유리창문을 통해 손님들로 붐비는 
식당을 바라보던 로라는 그들을 피해 등을 돌린 채 전화기를 올려놓은 작은 
선반에 팔꿈치를 고였다.
  "안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나한테, 클레이한테도..."
  "난 아무 짓도 안했다, 로라! 이런 젠장할, 말할 기회를 줘야지..."
  "말할 기횔 줬잖아. 주면 뭐해? 거짓말만 하면서!"
  "거짓말 아니야. 잘 들어, 로라. 난 절대 그 집을 털지 않았어."
  "오빨 진짜 믿었어! 신처럼 믿었는데... 근데 내 믿음을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도 되는 거야? 내가 뭘 하든 상관 않는 거지? 그저 오로지 머릿속에 
들어있는 건 도둑질뿐이야. 얼어죽을 도둑질... 오웬이 어떻게 됐는데, 심장 
때문에 병원으로 실려 갔단 말이야. 어쩔래? 어쩔거냐구!"
  "입 닥치고 내 말 들어. 난 그 개 같은 샐링거 집에 손끝 하나 안 댔어. 너랑 
케이프에서 헤어지고 난 다음부터 내내 여기 뉴욕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갔어. 난 
간밤에 친구하고..."
  "간밤이 아니야, 삼일 전 밤이지."
  "삼일 전에도 그 친구와 있었다. 그 전에도, 또 그 전에도. 일어나자마자 왜 
즉시 전화를 안했니?"
  "했어. 삼일 전부터 내내 수백 번도 더 했다구. 하지만 없었잖아. 도대체 어디 
있었어? 내가 병신이지, 묻긴 뭘 물어? 뻔한 걸. 훔쳐낸 보석들을 돈으로 
만들려고 온 바닥을 헤매고 다녔겠지."
  "난 약속을 지켜서. 제기랄, 난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아. 불켜려고 등 돌린 
사람한테 뛰어들진 않는..."
  "오웬이 불을 켰는지 오빠가 어떻게 알아?"
  잠시 짧은 침묵이 전화선으로 흘렀다.
  "네가 그랬잖아."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단지 심장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단 소리밖에 
안했어. 불 얘긴 하지도 않았어."
  "좋아, 그래. 내가 상상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 그 노인네한테 뛰어들었다면 
등을 돌렸을 때가 제일 쉬었겠지. 어쨌든 그건 개 스타일이 아니야. 너도 잘 
알잖니? 난 사람들한테 뛰어들진 않아. 몰래, 아주 깨끗하게 하지. 지저분하게 
벌여놓고 레슬링을 하진 않는다구."
 "오빠가 했어. 온통 다 뒤져놓고 경찰이 딴 곳으로 신경쓰게 만든 거야. 내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알기나 해? 내 주변 모든 것이 온통 박살 나는 
기분이었어."
  "그 짓  내가 한 게 아냐, 로라. 사람을 믿을 줄 알아야..."
  "오빠가 안했으면 그럼 누가 했단 소리야? 누가? 클레이하고 오빠가 계획했던 
대로 똑같이 일어났는데?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날짜, 시간..."
  "누가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클레이한테 물어봤니?"
  "클레이는 나하고 그날 함께 있었어. 더군다나 그앤 혼자서 일을 치를 애도 못 
돼. 거짓말은 더더군다나. 오빠가 뭔데 클리이한테 그런 누명을 씌우는 거야?"
  "좋아, 알았어. 미안하다. 클레이한테 물어봤냐구 한 소린 그런뜻이 아니었다."
  "스무 살도 안 된 막내한테 죄를 덮어씌우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 아냐?"
  "난 안했어! 삼 년 넘게 널 돌봐왔는데, 이젠 내 말도 안 믿겠다..."
  "날 돌볼 생각은 앞으로 추호도 하지마. 클레이한테도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말구.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럴 권리가 네겐 없다, 로라. 난 여전히 네 법적 보호자로 돼 있고, 내가 
하는 소릴 들어야 될 의무가 있는 거야. 뉴욕으로 와라. 명령이야. 네가 속해 
있는 곳으로 돌아와."
  "하늘이 무너져도 거긴 안가."
  로라는 가슴이 찢기는 아픔을 느꼈다.
  "여기 있을 거야. 오빠가 저지른 일을 대신 속죄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겠어."
  "이런,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니? 난 그걸 안 훔쳤..."
  "안 돌아갈 거야. 다신 그 컴컴하고 어두운 도둑 소굴로 돌아 가지 않겠어."
  "데리러 가마. 오후에 도착할 게다. 짐싸고 기다릴 줄 믿는다, 로라."
  "일하고 있을 거야. 나하텐 당당한 직장이 있어. 그리고 가족도."
  그녀는 가족이란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겐 샐링거 가문이 있다구."
  "미쳤군. 정신 나갔어. 샐링거가 진짜 널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거니, 로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너하고 클레이는 단지 그 집안에서 허드렛일 하는 
하인일 뿐이야. 따뜻한 것도 종류가 있는 거다. 네가 그들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일시적인 호기심이야. 너는 그 사람들하고 다른 부류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 그 사람들이 하인 나부랭이들을 제대로 알아주기나 할 것 같애? 
그자들 틈에 섞여 공주가 된 기분이니?
똑똑한 애가 바보같이 왜 그걸 몰라?"
  "그래, 나 바보야. 나같이 바보 같은 동생 두기 창피하지?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든 말든 상관하지 마."
  "난 상관 있어. 바보라고 한 말 용서해라. 네가 똑똑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랬던 거야. 사랑한다, 로라. 네가 무척 보고싶어. 넌 내 가족이야, 로라."
  "이젠 아냐."
  그녀의 음성엔 독기가 있었다.
  "우라질, 나쁜 년 같으니라구!"
  로라는 벤이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부탁한다, 로라. 난 안했어, 그러니까 날 믿고 뉴욕으로 
와라. 우리가 지금 나눈 이 이야기들은 다 잊어버려."
  "거짓말이야. 토요일날 보스턴에 있을 예정이니까 그날 하루 같이 보내자구 
했지? 내가 젠슨씨네 파티 때문에 바쁘다고 했을 때 옳다구나 하면서 무릎을 
쳤겠지. 레니방이 비어 있겠구나 생각한 거 아냐? 내가 왜 그 말을 했을까? 내 
잘못이야. 그런 말 안했으면 아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이제 끊어야 돼. 점심 
먹는다고 삼십 분 허락 받고 나온 거야."
  "끊지마, 꼼짝 말고 내 말 들어. 오늘 오후 케이프에 도착할테니 그런 줄 알아. 
클레이하고 짐 싸놓고 기다리지 않으면 분명 너 후회하게 될거다. 널 그곳에서 
데리고 나와야겠어. 우리 유럽으로 가자. 너 항상 가고 싶어했잖아. 벌써 
비행기표도 예약했어."
  "비행기표를 예약했다구?"
  "세상에, 정말 오빠가 했구나. 훔친 다음 여길 뜨려고 벌써 비행기까지..."
  "비행기표는 옛날에 사둔 거야. 네가 그 계획을 포기하자고 하기 전에 말야. 
샐링거를 턴 뒤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겠니? 오해 하지 마, 로라. 난 절대 
안했어. 오빨 믿어! 내 말 듣고 있는 거니?"
  로라는 수화기를 내렸다. 항상 자신에게 명령을 내렸던 벤. 로라는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어 버릇없이 전화를 끊어버린 것에 대해 용서를 받고 싶었다. 
아니 그것보다 자신을 계속 여동생으로 사랑해달라고 빌고 싶었다. 그러나 
로라는 다시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클레이는 외진 주차장 근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어디 간댄다."
  "어디로? 왜 훔쳤대? 약속해 놓구서..."
  "말 안해."
  로라는 포석 위로 자전거를 올렸다.
  "안했다는 말만 되풀이하더라."
  "다른 말은 않구?"
  "뉴욕으로 둘다 돌아오래. 다 같이 유럽으로 가재."
  "유럽?"
  "우린 아무 데도 안 갈거야."
  로라는 딱 잘라 말한 뒤 자전거에 올랐다. 앞서 가는 로라를 향해 소리소리 
지르던 클레이는 자전거에 올라 로라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샐링거 
저택 정문에 이를 때까지 내내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경비실 옆 조그마한 광에 
자전거를 두고 나오던 로라는 클레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우리 둘밖에 없다, 클레이. 싸우지 말고 서로 의지하고 지내면 모든 게 
잘 풀릴거야. 날 도와줘. 내 말 듣겠다고 약속해."
  그러나 클레이는 그녀의 손길을 차갑게 뿌리쳤다.
  "형 언제 떠난대?"
  그녀는 모른다는 투로 양 어깨를 으쓱했다.
  "유럽으로 간다는 소리만 했어."
  "형하고 같이 갈거야."
  "안돼. 나랑 여기 있어야 돼. 고등학교를 마치고 뭔가 제대로 된 기술을 배워. 
그다음엔 떠나도 돼. 클레이, 제발. 난 네가 필요해. 의지하고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구. 날 도와줘. 정 싫다면... 일 년, 일 년만 같이 있어. 딱 일 년이야. 
내가 여기 제법 익숙해질 때까지. 그런 다음 가고 싶으면 가. 그땐 아무 말 
안할게. 오히려 적극적으로 밀어줄게."
  구두코를 내려다보고 있는 클레이는 금빛 눈썹을 하나로 모으고 있었다.
  "여기 있자는 말이 뭐야? 여기 케이프에 있겠다는 소리야?"
  "샐링거 가문하고 함께. 일도 괜찮고 보수도 괜찮잖아. 모두들 우릴 좋아해.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일한다면 오빠가 한 일을 조금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생각 
안해?"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
  "아냐. 우리 잘못도 있어. 범행 계획은 네가 짰잖아. 그리고 경보기와 보석 
있는 곳을 알아낸 사람은 바로 나구. 게다가 난 그날밤 파티 때문에 모두 다 
자릴 비울 거라고 얘기했단 말이야. 우리 때문에 오웬이 세상을 뜬다고 
생각해봐. 우리가 한 짓이나 마찬가지야, 클레이."
  클레이는 여전히 구두코에 눈을 박고 있었다.
  "구월엔 어떡할 건데, 다들 보스턴으로 돌아갈 예정이잖아?"
  "모르겠어. 계속 그곳으로 가서 일할 수 있을지 누가 알아?"
  "보스턴에서?"
  "그래, 어쩌면."
  "보스턴엔 한 번도 안 가봤으면서?"
  "배우면 되지, 고등학교도, 대학도 무지무지 많을 거야."
  클레이는 로라를 한참 동안 보았다.
  "누난 진짜 그 사람들을 좋아하는구나."
  "넌 어떻구? 알리슨 말이야."
  "그렇긴 하지만 난 그것 때문에 내 인생 전체를 바꾸진 않아. 더군다나 
한쪽에서 좋아하면 뭐해. 알리슨은 날 정원사로밖에 여기지 않는걸. 누날 봐서 
그냥 여기 있을게. 하지만 언제까지 있을진 나도 몰라. 생각해보니까. 누나 없이 
형 옆에 있는 것도 그리 신날 것 같진 않아. 마음 잡고 학교 마무리 짓는 것도 
괜찮겠지. 학교 끝내는 것도 약속 못하지만 되는 데까지 노력해보지, 뭐. 제기랄, 
그놈의 학교 책상들 하며, 별 쓰잘 데 없는 걸 가르치는 선생들 이젠 안 보나 
했더니 좋다 말았네... 어쨋든 한번 해보는 것뿐이야. 또 유급당하겠지만."
  "안 그럴 거야. 내 동생이 얼마나 똑똑한데 그래!"
  로라는 두 파로 클레이를 안고 키스했다.
  "사랑한다, 클레이. 고마워. 다 잘될거야."
  그녀는 또다시 그에게 입맞춤했다.
  "나 가볼게. 너무 늦었어."
  그날 오후 퇴근시간이 임박해 로라는 오웬의 부름을 받아야 했다. 레니는 
병원까지 가는 로라를 위해 리무진을 내주었다. 심장발작 이후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던 로라는 산소 마스크를 쓴채 거의 죽어가고 있는 오웬을 생각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병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오웬은 건강한 
모습이었다. 두 눈을 감고 좁은 침대에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은 사고 전과 
조금도 다름 없어 보였다.
  "샐링거씨, 로라양이 왔습니다."
  간호사의 부드러운 속삭임에 오웬은 눈을 떴다.
  "오, 로라."
  오웬은 여린 손짓으로 간호사를 물러서게 했다.
  "밖에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간호사는 병실문을 열어놓은 채 복도로 나갔다.
  "저 간호사 얼마나 무서운지 로라는 아마 모를걸. 키스 안하고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려구?"
  허리를 구부려 로라는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이마는 시원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했다.
  "아프지 않으세요?"
  "나 꽤 대단하지? 도둑하고 결투한 노인네라, 근사하잖아. 도둑한텐 나이 같은 
게 안 통하나봐. 늙은이를 뒤에서 치다니... 누군지 모르지만 겁쟁이가 틀림없어."
  "알았으면 안 그랬을 거예... 아니, 제 말은 나이드신 분인 줄 알았다면 감히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 같다는 얘기예요."
  오웬은 사시처럼 어긋난 눈으로 로라를 살피고 있었다. 장난기 섞인 
눈길이었다.
  "글쎄 그게 아니면 그 도둑 나이가 팔십 살이었나보다. 내가 젊은인 줄 알고 
덤벼들었겠지."
  로라는 오웬의 농담에 미소를 지었다. 벤에게 화가 났지만 오빠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어쨌든 참 다행이에요. 많이 다치시지 않았으니까요."
  "그래 곧 낫겠지. 거기 좀 앉지. 올려다보기 힘들어."
  의자를 침대 가까이 당겨 와 앉은 로라는 몸을 조금 앞으로 숙였다.
  "간호사가 몇 분 동안만 허락했어요."
  그는 머릴 흔들었다.
  "아냐, 계속 있어. 할 얘기가 있으니까."
  오웬은 손바닥을 펼친 뒤 로라가 손을 내밀기를 기다렸다.
  "생각한 게 있다."
  따스하게 느껴지는 손바닥에서 그녀는 오웬의 사랑을 느꼈다.
  "무슨 생각을요?"
  "보스턴 집으로 로라를 데려가고 싶어. 어때? 따라가서 날 좀 도와주겠니?"
  로라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전 간호사가 아닌걸요. 내가 할일이 뭐가 있다고..."
  오웬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간호사로서가 아니라 동무로서 말야. 그것도 일이잖니. 나하고 얘기하고, 책도 
읽어주고, 서재 정리도 도와주고. 거기 서재는 여기보다 훨씬 커. 나 혼자선 
힘들어요."
  그는 또다시 장난스럽게 사시눈을 하며 로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학도 다닐 수 있지 않겠어?"
  로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싫은가보지."
  오웬은 짐짓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요. 정말 좋아요. 제가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는걸요. 너무 좋아요. 
하지만... 저한텐 클레이가 있어요."
  "클레이."
  오웬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레니가 클레이를 좋아하던데. 분명 뭔가 클레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줄거야. 하지만 내가 원하는 사람은 로라야. 일이 아주 힘들고 고될 게다. 
예전에 사람들을 부릴 때처럼 야단쳐가며 부려먹을 거라구. 지금도 가끔 엄하게 
굴긴 하지만."
  오웬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하겠니?"
  "그럼요. 하구 말구요. 정말... 정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병실에 들어온 로라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던 오웬은 처음과 달리 여린 
미소만을 지었다.
  "책좀 읽어주련?"
  오웬이 손으로 창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작은 꽃화분과 녹색 식물 옆에 
책꽃이가 있었다. 그가 즐겨 읽는 단편집들이었다.
  "어느 걸 읽을까요?"
  "재미있는 걸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걸로 골라봐."
  로라는 오랫동안 오웬의 뻣뻣한 뺨에 입을 맞췄다.
  "제가 보살펴드릴게요. 곧 회복되실 거예요. 약속해요, 항상 곁에 있어 
드린다고. 사랑해요."
  천천히 손을 올린 오웬은 로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사랑한다, 걱정 하지 마. 곧 일어날 테니. 여기 이렇게 누워서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은걸. 아직 죽긴 너무 이르지.할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로라, 네가 날 도와준다고 약속했으니 이젠 아무 걱정 없다."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손바닥이 천천히 침대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읽어봐. 듣다 잠들어도 화 안 낼거지?"
  뜨거운 눈물을 삼키기 위해 로라는 계속 미소를 지어가며 눈을 깜빡거렸다.
  "화 안 낼게요."
  "나 잔다고 가면 안돼. 눈 떴을 때 없으면 화낼 테니까 알아서 하라구."
  "여기 있을게요. 가라 하실 때까지 여기 이렇게 있을게요."
  고개를 밑으로 떨군 로라는 무릎 위에 놓인 책 속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흘렸다. 손가락으로 애써 눈물을 훔치며 울먹였다.
  "감사드려요. 이렇게 절 사랑해주셔서."
  오웬의 감은 두 눈에 가만히 속삭인 뒤, 로라는 해피엔딩이 나오는 곳을 찾아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2 잔인한 계절
    6장
  아침 여덟 시, 다른 코트장은 모두 다 비어 있었다. 천장이 매우 높은 거대한 
대형 테니스 홀에는 점수를 내기 우해 오래도록 코트 건너로 공을 줄기차게 
서로 넘기고 있는 로라와 알리슨의 가쁜 숨소리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젠장할!"
  라인 밖으로 공이 튀어나간 순간 알리슨은 거친 숨을 토해냈다.
  "너한테 테니스를 가르치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게?"
  "날 테니스 선수로 만들 생각 아니었을까?"
  두 사람은 또다시 정신 집중을 해가며 시합에 몰두했다. 둘 다 절대 질 수 
없다는 각오로 죽을 힘을 다해 발을 빠르게 놀리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점수를 내긴 했지만, 알리슨은 결국 로라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구석진 대각선 
볼로 마지막 점수를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져본 적이 없거든."
  코트를 바꾸기 위해 서로 스쳐 지나는 순간 로라의 팔을 잡으며 알리슨이 
숨가쁘게 말했다.
  "근데 까딱하다간 너한테 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내 제자한테. 테니스 라켓 
한번 안 잡아봤다는 말 정말이야?"
  "거짓말 아니라는 거 네가 더 잘 알면서 그래. 너한테 배우기 전까지 라켓 
구경도 못했어. 하지만 내각해도 진도가 빠른것 같긴 해. 좋아하니까 그렇겠지. 
뭔가 좋아하면 무지무지 빨리 배우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넌 타고난 운동선수 같애. 너처럼 빨리 
움직이는 애는 처음 봤어."
  어두운 그림자가 로라의 얼굴에 나타났지만, 이내 사라졌다. 로라는 부드럽게 
알리슨을 보았다.
  "다 네가 가르쳐준건데, 뭘 한 번 더 해야지?"
  알리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브를 하기 시작했다.
  코트 천장 위 유리로 된 식당벽을 통해 폴 젠슨은 아래를 굽어 보고 있었다. 
빠르고 탄력 있게 뛰어다니는 두 사람의 경기 모습을 지켜보며 사촌 알리슨의 
솜씨에 경탄하기도 했지만, 그의 시선은 일 년 넘게 보지 못했던 로라 
페어차일드의 동작 하나하나를 좇고 있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것은 친구들과 서부지역을 여행한 뒤 일주일 동안 집에 
와 머물던 지난 여름이었다. 한눈에 봐도 그녀가 집안 시국 일부로 대접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지만, 폴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눈길 외에 여태껏 
로라에게 특별한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물론 그녀가 차츰 변해가는 모습은 
폴에게도 느껴졌다. 케이프에서 만났을 때도 그녀는 불안하고 초조해 했었고 
보스턴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 자신을 지키기 위한 듯 경계하는 표정이던 그녀가 
과거의 껍질을 다 털어내고 성숙하게 여무는 과정을 폴은 가끔씩 집에 들러 
확인하곤 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거친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예쁘긴 했지만 
지나칠 정도로 자의식이 강하고 사교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폴은 그녀에게 
여자로서의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폴이 갖고 있는 
여자로서의 아름다움과 신뢰 기준에 여전히 미치지 못하는 아가씨일뿐이었다.
  스물여덟 살로 자타가 인정하는 미남청년 폴 젠슨은 세계적으로 훌륭한 
사진사가 될 재목이란 말을 여러 사람에게 듣곤 했지만, 그는 한 곳에, 그리고 
한 일에 오래 매달리지 못했다. 그는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앞길 창창한 젊은 애가 왜 그러니?"
  바바라 젠슨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방랑벽을 가진 아들에게 누누이 충고를 
하곤 했다.
  "준비됐을 때 정착을 해라""이 다음에 분명 피눈물 흘리며 후회할 
게다""너같이 좋은 시절에 창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니""그렇게 
찔끔찔끔 젊은 시간을 낭비하면 금방 노인네가 된다"라는 오웬의 충고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모 레니만은 그를 이해했다. "천천히 봐 가면서 하는 게 더 낫지. 
그래야 실수가 없는 법이란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마을 하든 폴은 한쪽 귀로 흘리기 일쑤였다. 그냥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가끔씩 조언을 받기 위해 다가간 부친에게서 "네 길은 
네가 알아서 결정하는 거야"라는 말을 들을 때 폴은 유일하게 좌절감과 절망을 
느끼곤 했다. 펠릭스가 업신여기는 투로 "잘못 자란 자식"이란 소리를 내뱉기도 
했지만, 차갑고 딱딱하기만 한 이모부에게 그 자신 아무 매력도 느끼지 
못했기에 그의 가혹한 평을 마음에 담지 않았다. 하긴 펠릭스의 그런 말을 
인정할 때도 있었다. 탄탄한 부를 지닌 가문이 뒤에 버티고 있었기에 폴에게 
돈을 버는 일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니었다. 결국 힘들이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일에 매달려 사진 찍는 일이라든가,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며 여자와 
쾌락을 추구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보스턴으로 돌아온 이유는 지금껏 하고 다니던 일이 
짜증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카지노, 술집, 멋진 레스토랑. 모든 것들이 다 그게 
그것처럼 보였다. 그 어느 것도 그에게 새로움을 주지 못했다. 그의 마음을 
끌어당길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로라를 지켜보며 폴은 강하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궁금했다. 모든 것에 냉담하던 가슴속에 호기심이 차오르고 
있었다.
  안정된 분위기와 우아한 모습, 아름답다고 하긴 뭐하지만 다른 여자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독특한 매력을 풍기도록 그녀를 변화시킨 요인이 뭘까 몹시 
궁금했다. 예술적 안목이 뛰어난 눈으로 폴은 세심하게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잘 빠진 얼굴형, 시원하고 널찍한 이마, 혀가 내둘러질 정도로 길디긴 속눈썹에 
커다란 눈동자, 알맞게 음영이 들어간 광대뼈와 두 뺨, 도톰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화장기 없는 입술 그리고 머리 꼭지 부분에 항상 묶여 있던 숱 짙은 
밤색 머리카락은 테니스 시합을 우해 이마에 두른 머리띠에 의해 뒤로 대강 
풀어진 채 휘날리고 있었다. 머리띠에서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며 
휘날릴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남자에게 보호 본능을 일으킬 만큼 작고 여리게 
변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강인해 보이는 팔다리는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약한 
얼굴과는 사뭇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두 팔은 힘 있게 공을 반대편으로 
날렸고, 근육이 탄탄해 보이는 다리는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뛰어다녔다. 
거칠면서도 부드러워 보이는 로라를 폴은 계속 주시했다.
  가족들 말을 종합해보면 로라는 분명 두 가지 면을 보이는 신비로운 여자인 
듯싶었다. 어떻게 보면 사랑의 경험이 있는 듯도 했고, 남자를 전혀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명랑하고 사랑스럽긴 하지만 자신을 너무 감추려 한다는 말도 
있었고, 금세 불처럼 활활 타오르다가도 뒤끝 없이 깔깔거린다고도 했다.
  낮게 튀는 공을 가까스로 넘기는 로라에게서 폴은 승리에 집착하는 그녀의 
자존심을 읽었다. 폴은 알리슨이 벤티지(듀스 후 먼저 1점을 득점하는 것: 역자 
부)를 이루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로라는 점수를 묶어두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네트 주변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빌어먹을!"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공을 향해 욕을 한 뒤, 로라는 누가 들었으면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사방을 얼른 휘 돌아보았다. 유리창을 통해 그녀의 
입술을 읽은 폴은 아주 큰 소리로 껄껄거렸다. 재미있는 애야.
  유리문을 연 폴은 코트 바로 위에 나 있는 발코니로 나갔다.
  "폴!"
  알리슨이 폴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한번 칠래?"
  폴은 머리를 흔들며 로라의 눈길을 좇았다. 그러나 로라는 폴의 시선을 피한 
채 수건으로 땀에 흠뻑 젖은 어깨를 닦고 있었다.
  "그럼 파티 때나 와. 오늘밤 말야."
  그러면서 알리슨은 로라를 보았다.
  "로라, 네 파티 때 폴을 초대해도 괜찮지?"
  로라가 뭐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으나 폴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였다.
  "그래, 내 파티라고 하지. 하지만 주관은 네가 하는 거잖니. 로라가 날 위해서 
멋진 파티를 꾸며주다니! 체드 월코트 삼세와 내 약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말이야. 오빠가 여기 있는 줄 알았으면 초대했을 걸. 어때, 이따 올래?"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던 폴에게 로라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 꼭 갈게. 기쁜 마음으로 가겠습니다, 아가씨!"
  알리슨에게 한 대답이었지만 폴의 눈은 계속 로라에게 꽂혀 있었다.
  오웬의 비콘 힐 저택 사층 전면을 차지한 로라의 처소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마호가니로 치장된 귀엽고 자그마한 엘리베이터가 열릴 때마다 
손님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시원하고 분위기 좋은 유월 밤하늘을 향해 모든 
창문들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문을 통해 조요하면서도 편안한 파티장의 
소음이 마운트 버논가까지 새어 나가고 있었다. 스테레오음으로 피아노 연주가 
흘러 나오는 가운데 로자의 조카 아들 알버트가 바를 맡아 칵테일 솜씨를 
발휘했고, 그녀의 또 다른 조카 퍼디는 로자가 주방에서 올려 보낸 은접시에 
담긴 전채용 요리를 나르고 있었다.
  "아주 멋진 곳이네요."
  거실을 둘러본 알리슨의 약혼자 체드 월코트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렇게 기가 막히게 바꾸다니, 굉장해요!"
  "알리슨이 도와줘서 했지 안 그랬으면 힘들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라의 눈에는 자신이 해낸 일에 대한 자부심이 기쁨과 
함께 서려 있었다. 몇 개월 동안 내내 태양빛이 가득 쏟아져 내리는 정원처럼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방을 꾸미기 위해 로라는 방 세 깨짜리 사층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낸터켓의 화가들이 그린 유화와 수채화들로 벽을 
장식했고, 몇 시간씩 재를 뒤집어쓰며 불을 붙여야 숯불이 달아오르는 골동품 
쇠다리미를 벽난로 옆에 세워 놓기도 했고, 키 높은 창문에 실크로 가장자리를 
수놓기도 했다. 오랫동안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했던 로라였지만, 이젠 
하나도 아닌 세 개식이나, 그것도 지금껏 상상으로만 꿈꿔왔던 것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크고 아름다운 방이었기에, 그녀는 잠도 설친 채 작업에 몰두했다.
  "내가 도운 건 별 것 없어요. 그냥 몇 가지 제안만 했을 뿐이에요. 나머진 다 
로라가 직접 꾸몄어요. 우리 아빠하고 작은 아빠가 여기서 자랐을 땐 
박쥐소굴처럼 컴컴한 데다 벽엔 온통 낙서 투성이와 꺼먼 코르크판으로 뒤덮여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보세요. 얼마나 멋진가! 로라한테 예술적 안목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당신을 삼 년 넘게 묶어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원래 당신은 
사람들한테 쉽게 싫증내는 타입이잖아."
  알리슨의 얼굴빛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 로라는 재빨리 둘 사이로 끼여들었다.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아서 그랬을 거예요. 알리슨이 나보다 더 적극적이고 
사근사근하긴 하지만 진짜 우린 서로 뜻이 잘 맞았어요. 알리슨한테 늘 
고마워하고 있어요. 관대하고 좋은 친구를 갖게 된 걸 하나님께도 감사드리구요. 
체드, 내 드레스 이거 낯익다고 생각 안해요?"
  몇 발짝 뒤로 물러난 체드는 그녀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터럼 타워에서 열린 패션쇼, 캐롤리나 헤레나 작품, 작년 추수감사절 
파티에서 알리슨 샐링거양이 입고 찬사를 받았던 드레스!"
  "체드는 여자 드레스 기억하는 덴 남다른 재주가 있지."
  알리슨은 쌀쌀맞게 체드를 바라보았다.
  "푸른색 실크드레스를 입은 로라 페어차일드양의 멋진 모습을 보시라!"
  체드는 로라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이것은 로라의 색이에요. 다른 색을 입으면 안돼요. 아니, 그렇지 않아..."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전번에 보니까 붉은 색도 기가 막히게 어울리던데, 에메랄드 빛도 그렇구. 
물론 흰색도 어울릴 거예요. 그리고..."
  "여자 손 잡는 기회도 절대 안 놓치는 사람이야."
  알리슨이 체드의 찬사를 자르며 로라에게 말했다. 상대가 당황하지 않도록 
주의해가며 로라는 그에게서 살며시 손목을 잡아뺐다. 로라는 자신이 언제든지 
알리슨과 그녀의 친구들 입에 오르내릴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제 다 오신 거예요?"
  로라는 대화를 바꾸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 왔어. 폴만 빼놓구."
  알리슨은 주위를 휘둘러보며 말했다.
  "올 거야, 로라. 원래 늦는 게 예사거든. 식탁도 걱정할 건 없어. 로자도 
우리가 아홉시까지 떠들고 놀 줄 알 거야. 그 다음에 먹지, 뭐. 네 
대학친구들한테 체드 좀 소개시키려 하는데 괜찮겠지?"
  "그럼 괜찮지."
  "아, 참. 나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손님들을 초대해놓구선 이렇게 한 
자리에 있다니."
  파티 여주인 노릇을 처음 해보는 로라였다. 처음으로 미드나이트 블루 
실크원피스를 입어보았고, 처음으로 방을 꾸며보았고, 처음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본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 년 전, 휠체어에 앉은 오웬과 함께 여기 비톤 힐 저택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그녀에게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웬이 손을 들자 
휠체어를 밀던 리무진 운전사는 대형 계단 옆 벽에 붙어 있는 엘리베이터 중간 
못미친 지점에서 휠체어를 멈추었다.
  "여길 다시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오웬은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로라에게 얼굴을 돌린 오웬은 한껏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내가 다시 왔지. 로라까지 데리고 말이야."
  로라는 힘들게 팔을 올리려는 오웬의 손을 굳게 잡았다.
  "이 집을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한때 여기가 싫어서 팔아 버리려고도 
했었지."
  오웬은 홀 가운데 놓인 대리석 흉상과 글라디올러스와 장미가 수북하게 꽂혀 
있는 프랑스식 원형탁자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옛날엔 웃음꽃이 만발하곤 했는데, 아주 오래전이지... 하지만 지금 난 웃음을 
되찾은 기분이란다. 소중한 것을 새로운 사람에게 나눠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겠니, 로라? 나눌 수 있다는 생각, 내게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란다. 자, 로라. 
진심으로 환영한다. 어떠니? 너도 나처럼 기분이 좋았으면 좋겠다."
  "그럴 거예요. 아니, 행복해요."
  로라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왜 나는 오웬처럼 멋지고 우아하게 얘기하지 
못하는 걸까?
  "감사합니다."
  말이나 행동이 투박하긴 하지만 로라는 오웬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기대했다.
  "로자를 따라서 한바퀴 둘러보거라. 아이리스와 내가 직접 설계한 미궁을 빠져 
나오려면 로자가 있어야 될걸. 네 집처럼 편안하게 보내. 난 좀 자야겠다. 이따 
종을 칠 테니 그때 내 방으로 와."
  운전사가 휠체어를 돌리는 순간 오웬은 또다시 로라를 보았다.
  "네가 여길 오게 돼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로라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오웬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오웬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편 홀 구석에 난 문으로 로자가 
들어왔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돌아볼까? 자세한 건 나중에 천천히 보기로 하고, 오늘은 
대강 훑어보자꾸나. 그래야 빨리 짐을 풀 수 있지. 클레이는 신경 쓰지 말구. 
펠릭스와 레니에게서 맡은 일이 끝나면 돌아오겠지."
  유월 중순 여름별장에 나타나 주방장 조수로 일을 하던 로라 페어차일드가 
돌연 오웬 샐링거의 '동무' 자격으로 동생까지 거느리고 비콘 힐까지 따라오게 
된 연유에 대해 로자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오웬은 늘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이었고,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의 가족들은 오웬의 괴팍하고 변덕스러운 
성질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웬의 그런 괴상한 취미는 그의 
부를 탐내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에게 진력이 났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도 말도 
있었다.
  "가구에 손이 닿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이층 복도를 지나 홀로 들어가던중 로자는 로라에게 주의할 것을 일렀다.
  "손자국 나면 안되니까."
  "난 손자국 같은 건 안 남겨요. 그런 건 누구보다도 잘 교육받았어요."
  "이런..."
  로자는 굳은 얼굴로 톡 쏘는 로라를 이상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난 아무 뜻 없이 얘기한 거다. 네 가정교육을 확인해보려고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가구에 사방팔방으로 손자국이 난다고 생각해봐라. 그걸 지우느라 우리 
같은 하녀들이 얼마나 애를 쓸지 생각해보라구."
  "죄송해요. 버릇없이 굴어서."
  "조심하거라. 처음 본 물건이면 사람들은 으레 호기심 때문에 손으로 만지려고 
하는 버릇이 있지."
  발끝으로 소리를 죽인 채 로라는 로자 뒤를 따라 집을 구경했다. 일층 홀을 
따라 길게 이어진 벽면에는 묵직한 표정의 남자와 실크가운을 입은 여인네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말갛게 윤이 나는 가구들, 반짝거리는 벨벳으로 부드러운 
보풀, 촘촘한 울로 짜여진 프랑스산 벽걸이 등에 로라는 몰래 손가락을 
대보기도 했다.
  그렇게 해놓지 않으면 어디론가 도망가버릴 것만 같았다. 물건을 만질 때마다 
로라는 자신이 뉴욕의 자그마한 다락방에서 더 멀리 멀리 도망쳐 나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저녁을 만들며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벤에게 
들려주었던 로라 페어차일드, 리놀륨 커버가 씌워진 탁자 위에 엄지손가락으로 
흠집을 내던 벤. 그녀는 그 조그마한 부엌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하고 싶은 
마음으로 반짝이는 가구에 자꾸만 손자국을 남겼다.
  "오웬님이 결혼기념으로 아이리스님에게 이 집을 선사하셨어."
  스물두 개짜리 방이 달린 이 거대한 저택을 말이야. 비콘 힐에 보금자리를 
꾸민 뒤 큰 파티를 열 꿈에 항상 부풀어 계셨는데, 꿈을 이룬 지 얼마 못 가 
아이리스님이 그만... 그 이후 이 무도장엔 몇 십년 동안 침묵만 흘렀단다.
  하늘이 훤히 보이도록 천장을 온통 유리로 꾸민 무도실은 맨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고, 그 아래 사층에는 펠릭스와 아사가 자라났던 방 두개와 손님용으로 
남겨둔 방 두 개가 자리잡고 있었다. 오웬과 아이리스가 함께 사용했던 방은 
삼층 홀 건너편 손님용 객실에 붙어 있었다. 이층은 저택 한면 넓이를 다 
차지하고 있는 대형 응접실과 식당, 그 뒤의 서재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층에는 주방, 식기실, 로자의 숙소, 접대실, 대형 홀과 위층으로 오르내리는 
엘레베이트 등이 있었다. 세탁실, 로자가 솜씨를 낸 과일잼 등과 양식을 
보관하는 식품 저장창고, 당구대와 벽난로, 가죽쇼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주류 
진열장 등이 모여 있는 남자들의 사교장은 지하실에 있었다.
  "아이리스님과 함께 여기 살았던 그 십년 세월을 오웬님은 가장 행복했다고 
여기신단다. 그래서인지 회사 일도 열심히 하셨지. 여기저기 새 건물을 
지어대는데, 어떨 땐 일년에 세 개, 네 개씩 마구 올라갔지. 나중엔 엄청날 
정도로 커져 보스턴의 샐링거 건물 맨꼭대기층 전체를 회사 사무실로 쓸 
정도였단다. 그 건물은 시립공원 바로 맞은편 알링턴가에 있지. 오웬님하고 
아이리스님은 파티란 파티에는 다 불려 다녀야 했고, 신문엔 거의 매일 두 사람 
사진이 실렸지. 언젠가부터 두 분은 일주일에 한 번씩 저녁 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단다. 파티가 아니라 저녁식사 말이야. 친한 친구들 열두 명 가량을 
초대했는데, 그때만 해도 부유층에도 그런 아이디어가 없었지. 매일 거창하게 백 
명 가량 불러놓고 노는게 멋과 격식이라 생각했던 게야. 하지만 얼마 안 가 
다른 사람들도 오웬님과 아이리스님식을 따랐다고 하더라. 그렇다고 품위까지 
생기겠니? 돈 주고 살 수 없는게 품위라구. 그 좋은 시절에 아이리스님이 
세상을 떠났어. 그러니 오웬님이 어떤 심정이었겠어."
  지하실에 있는 당구장에서 사층으로 올라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로자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이리스님과 함께 쓰던 침실에 틀어박혀서 나오려고 하질 않으셨지. 집을 
팔아버리겠다고 하셨지만, 막상 그렇게는 못하셨어. 아이리스님이 살았던 그 
방에 다른 사람이 와서 사는 게 싫으셨던 거야. 그뒤 오웬님은 아이리스님과 
함께 쓰던 방을 떠나 손님용 객실로 짐을 모두 옮겼단다. 옆에서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괴로워하셨어. 아이리스님을 몇 십년 동안 잊지 못한 채 
오웬님은 이 집에 아무도 들이지 않으셨지. 파티도, 손님도 없이 이 집은 쥐죽은 
듯 조용했단다. 네가 처음이야, 로라. 아이리스님이 세상을 뜬 뒤 오웬님이 들인 
손님으로 말이다."
  "난 손님이 아니에요. 일꾼이라면 모를까."
  "그래, 허긴 그렇구나. 하지만 전엔 이 집에 너 같은 일꾼이 없었어. 오웬의 
말동무라..."
  사층에 이르자 로자는  방 세 개가 연결되어 있는 방문을 열었다. 페릭스와 
아사가 어릴 때 사용했던 곳이었다.
  "자, 여기가 네 방이다."
  로라는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가요?"
  "이 방 말이다. 휼륭하진 않지. 오랫동안 사용을 안해서 손이 많이 가야 
할거야. 어쨌든 오웬님이 여길 네 숙소로 하라고 하셨으니까, 한번 둘러보렴."
  벽은 짙은 밤색 코르크판으로 도배가 돼 있었는데, 상처투성이의 호도나무 
가구들로 인해 방 분위기는 대체로 갈색톤이었다.
  "장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진 모르겠다만 펠릭스와 아사가 직접 꾸민 방이란다. 
이 집에서 아이리스님이 손 안 댄 곳은 여기 이방뿐이지. 아이들이 꾸밀 수 
있도록 철저하게 자유를 주신 거지."
  로자는 주변을 살펴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렇게 컴컴하고 을씨년스러워 어디 숙녀가 쓸 수 있겠나."
  다음날 젊은 아가씨가 쓰기엔 너무 컴컴한 방 같다는 말을 로자에게 전해 
들은 오웬은 즉시 방을 새로 단장하도록 명령했다.
  "코르크를 뜯어내고 페인트칠을 새로 해보자. 가구들도 산뜻한 걸로 들여놓구 
펠릭스와 아사 걔네들이 이 방을 생각이나 하겠니? 나도 깨끗하게 변한 방 
모습을 보고 싶으니깐 로라 맘대로 한번 멋지게 꾸며봐."
  "괜찮으시다면 기다렸다 나중에 하는게 나을 것 같아요."
  로라는 오웬의 눈치를 살폈다. 오웬의 침대 곁에 책을 펴든 그녀는 어둡다는 
단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펠릭스와 아사의 방은 어둡고 침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오웬의 방은 어둡긴 해도 그와 같은 어둠이 아니었다. 
페르시안 양탄자, 녹색과 금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실크 커튼, 구릿빛을 띤 
바닥용 램프, 포근하게 느껴지는 벨벳 소파 등에 의해 아늑한 안식처라는 
느낌을 주었다.
  "제 방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전 지금 너무 행복해요."
  로라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리고 보스턴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요. 제가 살았던 뉴욕과는 완전히 다른 
곳 같아요. 고풍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방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정리하고 
싶어요."
  "네 방이니까 마음대로 하렴."
  오웬은 로라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두려움과 초조감을 없애주고 싶었으나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스스로 얘기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녀를 도와 주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침묵을 지킨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로라가 책을 읽는 동안 오웬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는 낮게 떨리는 
로라의 음성을 좋와했다. 가끔씩 막되게 자라난 기가 엿보일 정도로 거칠게 
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러다가도 금방 부드럽게 돌아가는 로라의 음성은 마치 
영어를 새로 배우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 리드미컬한 그녀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오웬은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 착각하기도 했고, 잠들다 깨고, 
깨고 잠들다 하는 사이사이 들려오는 음악적인 운율은 청춘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들기도 했다.
  오웬의 침대 옆에는 홀 건너 손님용 객실에 묵고 있는 교대간호사 둘과 로자, 
그리고 다른 하녀 및 저택 일을 손보는 일꾼들을 부를수 있는 여러 개의 버튼이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오웬은 그 단추 중에서도 로라의 방에 연결된 것만을 
자주 눌렀다. 심지어 그녀가 보스턴 대학에서 수업을 받고 있을때도 오웬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로라을 찾곤 했다. 그래서 학교 수업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오웬 곁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침대 곁에 앉아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잠이 들면 옆자리에서 숙제를 했다.
  그녀가 대학을 다닐 수 있도록 오웬은 모든 것을 배려했다. 샐링거 기획실의 
비서를 통해 대학내 몇 사람에게 연락을 취하게 한 결과 로라는 특별 케이스로 
일주일만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자신이 대학생이라는 사실에 로라는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어떤 이들은 
대학에 다니는 것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 같았으나, 그녀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이 이루어진 것처럼 신기하기만 했다. 케이프의 강도 사건도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경찰이 계속 수사를 하고 있긴 해도 벤이 도망가버린 
이상 조만간에 미해결 사건으로 종결을 보게 될 가능성이 많았다. 그녀는 
아무런 방해물 없이 새로운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가끔씩, 자신에게 주어진 
새 생활이 금방 깨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지만-그 
여부는 전적으로 오웬에게 달려 있었다-몇 달 안 가 새롭고 기쁨이 충만한 
계획들과, 가까이 다가와준 친구들, 그리고 경영학과 일학년으로서 연극반 서클 
생활에 푹 빠져 로라는 모든 두려움과 걱정들을 잊고 있었다.
  그녀는 비콘 힐의 자갈 깔린 좁다란 골목을 너무나 좋와했다. 겨울철의 영국 
소읍을 연상시켜주는 가스등은 석양녘에 한 등씩 한 등씩 켜졌다. 좁다란 
창문들, 제라늄 꽃화분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정원이 있었다. 
오웬의 거대한 저택을 빠져나와 마운트 버논가를 따라 걸을 때마다 로라는 
가끔씩 깡총깡총   뛰곤 했다. 그것은 행복의 표현이었다.
  뉴욕이 쉴새없이 움직이는 도시인데 비해 보스턴에는 과거를 담아두는 여유가 
있었다. 작은 도시였을 때의 모습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도시가 보스턴이었다. 
너무 오래 돼 흙색으로 변한 석조식 교회당, 작은 샛길, 새장같이 모여 있는 
집들, 그 길을 따각거리며 지나는 마차들. 이 모든 것들은 뉴욕에서 자란 
로라에게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역사 깊은 묘지와 놋쇠로 된 간판, 오래된 교회, 
폴 리비어의 생가 앞에서 로라는 옛 도시를 상상하곤 했다.
  보스턴을 보기 전까지는 그녀는 역사라는 게 뭔지 생각하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를 깊게 느끼기 시작한 뒤로 로라는 
가족이란 의미를 다시금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보스턴이 도시로서의 
생년월일과 성장과정을 지니듯 가족 역시 개인적인 역사가 있었다. 그녀에게 
가족은 벤과 클레이였다. 특히 어디론가 떠나버린 벤의 모습이 그리움과 함께 
떠올랐다.
  로라는 매주마다 그렇게 보스턴의 색다른 면을 찾아 나섰다. 박물관에서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소택지 주변을 기웃거리거나 시립공원에 앉아 공상에 
빠지기도 했다. 공원 맞은편 보스턴 샐링거 건물 꼭대기에 있을 펠릭스 
사무실을 상상하다가 자신이 앉아 있는 공원 주변의 풍성한 볼거리로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오리떼나, 워싱턴 동상을 한참 들여다보기도 했고, 기가 막히게 
균형을 맞춰 다듬어 놓은 공원 꽃밭을 보며 정원사의 얼굴을 궁금히 여기기도 
했다. 보일스턴과 뉴버리가를 거닐며 진열장을 구경하다가 엉겁결에 구입한 
입장권으로 관현악을 주는 기쁨에 온몸을 맡긴 적도 있었다.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a'를 강하게 발음하거나 음절 하나하나를 빠르게 끊어 
애기하는 보스턴식 발음을 주의깊게 듣기도 했다. 입술이 벌어지고 닫히는 것 
같았지만, 입술 양 가장자리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입을 다문 해 중얼거리듯 
소릴 내는 것 같았다.
  "날카롭게 관찰했구나. 거의 비슷하게 흉내냈어!"
  저녁식탁에서 보스턴식 발음을 흉내내는 로라를 바라보며 오웬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할아버진 왜 보스턴식으로 발음하시지 않는 거죠?"
  "이곳 저곳 다니다 보니까 다 잊어버렸나보지. 펠릭스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여기식으로 발음을 한다는구만. 비콘 힐 전통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러는 거겠지. 
괜찮은 생각이지. 뭐라 할까, 전통과 함께 고상한 미가 있다고나 할까. 혈통을 
존중하는 것 같기도 하구."
  "보스턴엔 전통이 아직 많이 살아 있는 것 같애요."
  "결코 많진 않아. 범죄를 일삼는 폭도들과 가난이 득실거리는 전형적인 현대 
도시로 변해 버렸지. 뉴욕하고 비슷한 점이 많을 게다."
 로라는 머리를 저었다.
  "뉴욕은 이렇지 않아요. 모두들 뭐가 그렇게 바쁜지 항상 뛰어 다니는 걸요. 
보스턴은...  보스턴은 걸어다니는 걸요.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여유가 있는 도시죠."
  "보스턴 사람을 완전히 파악했구만."
  미소를 짓긴 했지만 오웬은 로라가 뉴욕 생활에 대해 피해 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보스턴에서 보낸 처음 몇 달 동안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의 얘기를 항상 즐겨 듣던 로라는 쉽게 학교 친구들과 사귈 수 
있었다.
  로라 방 건너편 사층 한 쪽에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클레이는 방과 후나 
주말경에 비벌리 외곽, 숲 우거진 노스쇼에 있는 펠릭스와 레니의 장대한 
저택을 찾아 시간제로 일을 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남매는 저녁을 함게 했다. 
그날 외에는 저녁식탁에서 서로 만날수가 없었다. 로라는 오웬의 방에서 그와 
단둘이 저녁을 했고, 클레이는 주방에서 로자와 함께 아니면 로라가 모르는 
친구들과 보스턴 시내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로라는 굳이 그 친구들이 누군지 
알려 하진 않았다. 즐겁기만 한 새로운 생활에 젖은 로라는 동생이 행복한지, 
일에 쫓기는지, 벤과 접촉을 하는지에 대해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일만 바쁘게 쫓아다니기에도 바쁜 하루였다.
  뭔가 항상 배우는 것을 좋와했던 그녀는 배우는 족족 머릿속에 집어 넣었다. 
식구 누군가가 표정이나 행동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지적할 때도 그녀는 한 
마디도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또한 그녀 자신에게만 있는 장점이 실제 생활에 
드러날 수 있도록 자기 계발에 힘썼다.
  "겨울색으로 한번 골라봐요."
  뉴튼가 제나 의상실의 삼면 거울 앞에 선 로라를 관찰하던 레니가 주인에게 
한마디를 건네자 제나는 암청색, 포도주색, 분홍색, 진녹색, 흰색, 아이보리, 
검정색으로 된 의상들이 걸린 바퀴 달린 행거를 잽싸게 밀며 나타났다. 로라는 
그 옷들을 일일이 레니 앞에서 한번씩 입어보며 그녀와 제나가 나누는 말들을 
머릿속에 새겨 넣고 있었다.
  "화장을 좀 하면 더 나을 듯 싶은데요."
  제나의 의견에 레니도 동의를 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그건 로라가 직접 결정할 일이니까. 옷이 
정해지면 로라도 화장 여부를 결정 짓겠지."
  로라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세심히 들여다 보았다. 의상실의 꼬마전구가 
주는 분홍빛 조명 아래였지만, 케이프의 여름 태양이 가져다 준 주근께 돋은 
얼굴빛은 몹시 창백햇다. 이마 위에 몇가닥 내려온 머리와 길고 무성하게 뒤와 
옆으로 늘어진 갈색머리도 지저분하게 보였다. 눈빛은 푸르게 빛을 냈지만 그 
속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요."
  "좀 배우면 곧 익숙해질 거예요."
  제나가 풀죽은 로라를 위로하며 옷을 매만졌다.
  "동부 해안가에서 활동하는 사진모델들을 키워냈던 실력이니 날 믿고 마음 
놓아요. 우선 모델이 좋아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로라는 탁월한 몸매를 
지녔어요. 의상을 고르는 건 깨끗한 캠퍼스 앞에서 작업을 하는 예술가의 
손길과 같아요. 경우에 따라 변화를 조금만 줘도 믿지 못할 정도로 모습이 
변해요."
  "그래, 로라가 직접 결정해보도록 해봐. 이것도 다 연습이니까."
  제나는 로라에게 계속 옷을 건넸다. 얼마 뒤 거울 속에서 맞춤 옷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던 알리슨의 인공적 세련미-곧게 뻗은 어깨, 흔들림 없이 
자신감 넘치던 시선, 목으로부터 등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 부드러운 곡선-가 
살짝 드러나자 로라는 짜릿한 희열감을 느꼈다. 레니의 동의 아래, 로라는 옷 두 
벌을 구입했다. 다음달 월급을 타면 능히 갚아낼 수 있는 가격이었다.
  옷장 정리를 한다는 알리슨에게 스커트와 드레스를 여덟 벌도 넘게 받았던 
로라는 셀름과 마블헤드 주변의 벼룩시장을 뒤지면서 아프가니스탄산 벨트, 
상아 목걸이, 넥타이핀, 술장식 달린 목도리, 프랑스에서 건너왔다는 목장식용 
레이스와 소매장식 등을 사들였다. 알리슨의 조언은 로라에게 퍽 도움이 되었다.
  "위가 풍성한 걸 입어도 키가 커서 어울릴 거야. 장식이나 주름이 있으면 
지저분하니깐 아주 심플한 걸로 골라보자. 주름 잡힌 옷은 귀엽게 생긴 
애한테나 어울리는 법이거든. 너한텐 우아하고 지적인 옷이 맞아. 그런니깐 긴 
스컷트에 재킷이나 스웨터를 골라 보자구. 넓은 밸트와 굽 높은 부츠도 
괜찮겠다. 댄서처럼 정면을 바라보며 곧게 걷는 것도 중요해."
  로라는 다리를 곧게 펴서 고개를 약간 들어 걷는 동작을 시간 날 때마다 
연습했다. 몇 주가 지나자 로라는 주위의 도움 없이 직접 자신의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달라 지고 있었다. 얇은 스커트를 
집시풍으로 두른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은 긴목과 어울려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모자를 한번 써보는 건 어떨까?"
  바바라 젠슨이 로라의 달라진 모습을 보며 말했다.
  "모자 하나만 써도 분위기가 확연하게 달라지는 법이거든. 안타깝게도 그걸 
모르는 여자가 많은 것 같긴 하지만. 모자를 잘만 쓰면 얼굴을 더욱 효과 있고 
섬세하게 나타낼 수 있는 거야. 챙이 넓고 머리 부분이 좁은 걸로 골라보렴. 
뒷부분이 조금 높은게 꼭 어울릴 것 같은데... "
  바바라의 조언을 생각하며 로라는 연신 모자 위에 깃털, 실크밴드, 레이스 
등등의 장식을 갖다 붙여보았다. 여름엔 바바라가 새 모자를 살 생각이라며 
옷장에서 꺼내준 모자 위에 싱싱한 꽃을 꽂기도 했다.

  "왜 나한테 이렇게들 잘 해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로라는 로자에게 중얼거리듯 물었다.
  "다 널 좋아하시니까 더욱 그렇지. 게다가 네가 정성으로 오웬을 모시니깐 
그럴 게다. 아마 그 이유가 가장 클 거야. 자주 여길 들르긴 하지만, 워낙 바쁜 
양반들이라 매일은 못 오시잖아. 네가 오웬 곁에 있는 까닭에 그분이 외롭지 
않다는 것을 그 양반들도 눈치챈 게야."

  첫번째 성탄절을 맞이해 로라는 오웬과 작은 선물을 서로 주고 받았다. 
벽난로가 훨훨 타오르는 서재 소파에 앉아 커피향이 짙게 풍기는 아침을 오웬과 
함께 하던 로라는 살며시 그에게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값 비싸고 귀한 건 
아니었지만 독특한 멋이 풍기는 편지 오프너였다.
  "다시 일하시게 될 때 쓰시라고 샀어요."
  오웬은 하얀 이를 환하게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다시 건강을 되찾은 것도 
물론 기뻤지만, 사랑과 정성이 깃든 로라의 선물에 오웬은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나도 준비한게 있는데."
  그는 로라에게 가죽으로 된 가방을 내밀었다.
  "학교 다닐 때 갖고 다니렴. 보석을 하나 살까도 생각했다만, 아무래도 이게 
더 실용적일 것 같아서 골랐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부드러운 송아지 가죽을 손바닥으로 매만지며 안을 들여다보던 로라는 
장난스럽게 코를 킁킁거렸다. 로라는 오웬의 어깨에 편안하게 머리를 기대고 
나직히 말했다.
  "선물 같은 거 안 주셔도 괜찮아요. 여기 이렇게 머물게 허락해 주신 것이 
제겐 매일 매일의 선물인 걸여.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필요한 게 왜 없어? 사랑과 칭찬 같은거 말이다."
  오웬은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는 로라를 따쓰한 눈으로 보았다.
   "우리 연약한 인간들이란다. 외롭고 상처 받았다고  해도 좋겠지. 신이 
아니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주 자신을 확인 해보고 싶은 욕망을 
느끼며 살아가는 거야. 자기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얼마나 사랑 받고 
있는지 등등 타인으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듣고 싶어하지.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우리가 홀로 떨어져 있을 때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염려하고 생각해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일 게다. 내가 만약 험준한 히말라야를 헤멘다고 생각하자.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네게 돌아왔을 때 내가 선물을 줬다고 상상해 보렴.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네 생각을 하며 선물을 가져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하지 않겠어? 애정을 조금이나마 함께 나눠보기 위해 선물을 고른 마음이 
중요 하다는 게지."
  "절 아예 데려가시면 되잖아요. 조금 아니라 많이 나누고 싶은 걸요. 아니 다 
갖고 싶어요. 함께 느끼면 더 좋잖아요."
  오웬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핫핫. 할 수 있다면 왜 못하겠니. 까짓것 가지 뭐. 히말라야에 가고 싶니?"
  "네, 가고 싶어요."
  "그럼 그러자꾸나. 오웬과 로라의 히말라야 등반이라, 멋진데. 같이 가도 
선물은 사줄 게다. 그 길밖에 없거든. 네가 날 얼마나 행복하게 했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이 집에 다시금 웃음소리가 나도록 만들어준 사람한테 감사할 
길은 그 길밖에 없지 않겠니?"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로자가 들어왔다. 아침식사가 끝난 쟁반을 가져오던 
그녀는 로라에게 편지봉투를 건네주었다.
  "로라, 네 편지다. 어제 도착한 성탄카드 속에 섞여 있더구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오웬님?"
  "커피 한 잔 더 할까. 브랜디 조금 하구."
  로자의 싹싹한 목소리에 오웬의 기분 좋은 음성이 겹쳐졌다.
  "쾌차하신 줄은 봐서 알지만 아직은... "
  로자는 달래는 듯한 어투에 오웬은 짐짓 어리광 섞인 목소리를 냈다.
  "의사도 한번쯤 봐 주겠지. 가져 오게나."
  "의사 지시는 누가 뭐래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히 일어 나셔서 
브랜디도 마음 놓고 드시죠."
  일방적으로 오웬의 입을 막아놓고 쟁반을 치우던 로자는 화석처럼 굳어버린 
로라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로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오웬 역시 딱딱하게 굳어버린 로라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로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오웬 역시 딱딱하게 굳어버린 로라의 표정을 유심히 보았다.
  "이른 아침부터 브랜디 마시고 싶단 소리 때문에 충격이라도 받은 게지. 내가 
잘못했다, 로라, 로자, 펠릭스에게는 몇 시쯤 갈건가?"
  "여기 치우고 난 뒤 곧바로 떠날까 하는데요. 손님이 사십 명이라 도움이 
필요한데... "
  "로라는 이따 가는 걸로 하지. 두 시경에 보낼 테니깐 자네 먼저 떠나라구."
  로자가 나가자 오웬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금전 얼굴이 굳어진 이유를 
물었다.
  "잠시 놀랐을 뿐이에요. 지금은 괜찮아요. 괜찮으시다면  전 잠깐... "
  "괜찮구 말구. 어서 가서 편지를 읽어보렴."
  "잠깐이면 돼요."
  말끝을 흐리면허 로라는 황급히 오웬의 서재를 빠져 나갔다.
  로자가 준 것은 벤의 편지였다.

  사랑하는 로라에게
  이걸 쓰면서도 마음이 몹시 편치 않다. 아직 나한테 화가 나 있는 건지 아예 
내 소식조차 원하지 않는 건지, 네 마음을 알 수 없어 두렵고 답답한 마음이다. 
너희들과 그런 식으로 헤어지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 상황으로선 다른 길이 
없을 것 같아 너희 둘을 두고 이렇게 다른 곳에 와 있구나. 네가 무척 보고 
싶다.
  로라. 네 생각 많이 하는 거 너 모르지? 우리 함께 즐겁게 보냈던 시간들도 
생각나구. 네가 뭘 하는지, 클레이와 네가 샐링거 집안과 잘 어울리는지, 둘 다 
아무 의심 받지 않고 무사하고 건강하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동봉한 주소로 편지 주었으면 한다. 난 식당 종업원과, 호텔 밸보이로 일하고 
있단다. 내세울 직장은 아니지만 앞으로 진짜 뭘 해야 할지 생각하고 결정할 
시간 여유가 있어 아주 좋다.
  언제 미국 가게 되면 연락하마. 편지 꼭 주길 바란다,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기분이 든다. 보고 싶구나. 샐링거 가문이 털린 뒤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몹시 궁금하다.

  "왜 형은 샐링거가 털린 다음이라 했을까? 내가 샐링거를 턴 다음이라 말하지 
않고 말야. 이상하게 들리지 않아 누나?"
  "오빠가 외로운가 보다."
  "그런 것 같애."
  클레이는 다리를 길게 뻗고는 구두코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하지만 우리로선 어쩔 수 없잖아. 형이 안됐긴 했지만, 이렇게 여기 일이 잘 
굴러가고 있는 판에 우리보고 도대체 어쩌란 소리야?"
  "답장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싫어, 난!"
  클레이는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누나도 쓰면 안된다구 생각해. 누나 여기서 잘 있잖아? 근데 왜 위험한 짓을 
사서 해? 난 형이 어디 있는지도 알고 싶지 않아."
  "런던에 있대. 블레이크 호텔이란 곳에. 우리 소식이 몹시 궁금한 모양이야."
  "젠장할, 내 말 못 알아들어? 너무 위험해. 미안해, 누나. 하지만... "
  "오빠가 위험하다는 거니, 아니면 오빠한테 편지 쓴 다음 우리가 위험에 
빠질까봐 그러는 거니?"
  "나도 모르겠어. 둘 다 일 수도 있겠지. 어쨌든 우리가 형하고 아예 절연을 
할까봐 겁이 나는 모양이지? 그래서 편지 달라고 그러는 것 아니겠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우리가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오빠가 모를까봐?"
  클레이는 어깨를 들썩했다.
  "어쨋든 난 한가지 생각밖에 없어. 우리 둘 다 여기서 기가 막히게 잘 살고 
있다는 거 말야. 내 말은 왜 굳이 모험을 하는냐는 거지."
  로라는 손에 든 편지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현재의 생활을 좋아하고 
있는 동생은 샐링거 가문에 뿌리를 내리리란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생활에 벤이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클레이는 벤을 만나기 꺼려할 
것이다.
  "대학 갈 생각은 있니?"
  클레이는 대학 얘기에 얼굴을 찌푸렸다.
  "누나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 아냐. 내가 공부엔 영 글러 먹었다는 것을 
말이야. 일자리 구할 거야. 그 길이 나한테 맞아. 소질도 있구."
  "무슨 일자릴?"
  "아직은 모르지. 샐링거호텔 어때? 펠릭스가 그러는데 일자리가 있을지 
모른대."
  "펠릭스가?"
  "그냥 그렇게만 말했어. 레니가 부탁을 해줬거든. 펠릭스가 그 얘길 
꺼내더라구. 그래서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어."
  "지금 다니는 학교는 어쩌구?"
  "지겨워 죽겠어. 어떻게 하든지 졸업장만 따면 될 거 아냐. 종이모자에 돌돌 
달린 졸업장을 들고 바락바락 소릴 질러야지. 야, 끝났어, 끝났너. 망할놈의 
고등학교를!"
  로라는 미소를 지었다. 클레이, 벤. 불 다 미워할 수 없는 가족이었다. 아직 
벤을 용서하지 않고 있지만 자신을 보고 싶어한다는 벤의 편지에 그녀는 답장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계속 그와 접촉을 한다고 해서 해가 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벤이 마음을 바꿔 레니의 보석들을 다시 돌려줄 수도-벤이 그걸 
팔아넘기지 않았을 경우-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성탄절 식탁 준비 거들어야 되지, 너?"
  클레이에게 말을 건네면서도 로라의 시선은 허공을 떠 있었다. 오빠는 어디서 
크리스마스를 보냈을까? 가족 없이 외롭게 어느 한 구석에서...  생전 
처음일거야. 가족 없이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알리슨하고 집주변 나무장식을 하기로 했어."
  "단 둘이서 그걸 다? 그 많은 나무들을 다 어떻게?"
  "그게 뭐 어려워?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되는 일인데. 내가 못하는 게 어디 
있어. 알리슨도 한방에 발정난 암캐마냥 큰놈들만 찾아 싸돌아다닌단 말이야"
  "클레이! 그런 말버릇을...  너 진짜... "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또 들석였다.
  "뭐 어때서? 누난 걔랑 맨날 소근거리면서 뭘 그래? 무슨 얘길 속닥거리는진 
몰라도...  난 누나가 알다시피 어린애잖우. 안그래? 꼬맹이 남동생인 내가 뭘 
알겠어? 난 아무 것도 몰라. 아직 어려서 잘 익은 암여우에 들어 맞지도 않고, 
밝히는 여자들을 몇번씩이나 까무러치게 할 줄도 몰라."
  비꼬며 나오는 클레이를 로라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여태껏 얼마나 많은 
여자와 관계를 맺었느냐고 따지듯 묻고도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조금 있으면 
성인이 되는 나이이기에 나름대로의 생활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네 나이에 맞는 앨 찾아봐. 그게 더 재미나고 멋질 테니깐."
  그녀는 가볍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오빠한테는 네 안부 전할게. 네가 보고싶어 한다는 말도 쓸 거다."
  "간지럽게 보고 싶다는 말은 뭘... "
  위험하게 편지는 써서 뭐하냐고 대들던 때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멋적은 
표정이 있었다.
  "그냥 잘 있다는 소리만 써. 형하고 같이 살 때 그 기분 다 잊어버렸으니까."
  "그 말은 뺄 거야."

  그날밤, 로라는 펠릭스가 어릴 때 사용했던 호두나무 책상 위에서 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오빠에게
  나도 오빠가 보고 싶어. 멀리서 편지로나마 옛날처럼 정을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이야. 하지만 여기 오는 것만은 안돼. 전화도 안했으면 좋겠어. 오빠에 
대해선 아무도 몰라. 클레이와 내 사정을 이해해줘야 돼, 여기는 모든 게 좋아. 
부족한 것 없이 둘 다 잘 살고 있어. 영원히 이 집에서 살고 싶은 기분이야. 
우리 스스로가 떠난다면 모를까 억지로 떠나야 되는 상황이 올까봐 두려기만 
해. 무슨 소린지 알겠지? 모든 게 다 새롭게 느껴지고 매일 매일 기쁜 마음으로 
보내고 있어... 

벤이 그녀에게 답장을 한 것은 글부터 삼개월이 지난 후였다. 런던의 다른 
호텔로 옮겨 일하게 됐다는 짧은 편지였다. 둘에게 사랑을 보낸다는 인삿말과 
함께, 서로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뒤로 로라와 벤은 몇 
달에 한 번씩 편지를 교환하기 시작했고, 서로의 생일을 기억해 축하카드를 
보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로라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앙금을 어느 정도 
걷어낼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도난사건이 뇌리에서 사라짐에 따라 벤에 
대한 분노 역시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벤을 그리워하고 예전의 
믿음직스렀던 오빠로 다시 받아 들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클레이는 로라가 넘겨주는 벤의 편지를 직접 읽으려 하지 않았다. 런던에서의 
새 직장, 그뒤 여러 곳을 전전하다 몬테카를로  호텔에서 팔 개월 가량 
지냈다는 얘기, 그뒤 또다시 암스테르담으로 가 호텔의 경비직원으로 일한다는 
소식 등을 로라는 클레이에게 읽어 줘야만 했다.
  "도둑한테 더할나위 없는 자리구만."
  로라는 클레이의 중얼거림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해가 지나 다시 
크리스마스가 찾아왔고, 대학 이년생으로 즐겁게 학교생활을 즐기던 로라는 
옛날 벤에게 지녔던 애정을 먼 추억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의존해 
생활했던 시간들, 그를 생활의 일부분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세월이 이제는 
지나간 과거일뿐이었다. 지금 그녀가 의존하고 있는 사람은 벤이 아니라 
오웬이었다.

  일년 전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오웬의 서재에서 크리스마스 조찬을 함께 
했다. 오웬의 이번 성탄선물은  백지수표가 들어 있는 하얀 봉투였다.
  "그걸로 네 방들을 꾸며보렴. 펠릭스와 아사의 그늘에서 이젠 벗어날 때가 
됐지 않아? 기다려달라고 해서 기다렸지만 왜 그렇게 오래 망설이는지 알 수가 
없구나."
  "할아버지께 잘 보이려구 그랬어요. 절 미워해 쫓아버리실까봐 예쁘고 착하게 
보일려구요."
  해변가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똑같이 오웬은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로라가 너무나 사랑하는 미소였다.
  "진짜 그런 마음 때문에 그런 거니?"
  로라는 얘교그럽게 머리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지만, 속마음은 진짜 그러했다. 
가끔씩 잊고 살긴 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항시 두려움이 있었다. 늦게라도 
벤에 관해 뭔가 알게 된 경찰이 오웬에게 연락을 보내올 가능성도 있었고, 
샐링거 가문이 뉴욕경찰로부어 컴퓨터에 기록된 자신의 전과 사실을 전해 
듣거나, 클레이가 혹 실언을 할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초조함이 덜해지긴 했어도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이른 첫새벽 쓰레기 차가 
덜컬거리는 소리나 자동차 문 닫는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 홀로 그 시간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 나갔다. 일년이 
지나 이년으로 접어들어갈 무렵에야 비로소 그녀는 한밤중에 깨어난 뒤에도 
곧바로 숙면에 취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 
경찰은 샐링거의 보석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예 수사 자체를 
포기해버린 듯했다. 강도로 인해 병원에 입원까지 해야 했던 오웬도 휠체어에서 
완전히 일어나 여름에는 골프로, 겨울에는 테니스로 건강을 과시했을 뿐 아니라, 
일주일에 몇 식간씩 샐링거 기획실에 모습을 나타내 자신의 호텔들이 어떻게 
경영되고 있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로라 역시 삼년 전의 겁먹은 소녀에서 
벗어나 우아하고 세련된 여인으로 탈바꿈했다.
  더욱 핸섬해진 클레이 역시 전에 없던 벤의 부드러움까지 빼닮은 근사한 
청년으로 변해 뭇 아가씨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고교을 졸업한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일하고 있었다. 펠릭스가 그를 필라델피아 샐링거 호텔의 
서무책임자 보조로 근무하게 했던 것이다. 학교 때 사귀었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주말마다 보스턴에 모습을 보이곤 하던 클레이는 로라가 계획한 알리슨의 
약혼 축하파티장에 버니 커크라는 금발 아가씨를 데리고 와 로라에게 소개했다.
  "여긴 버니 커크, 퍼더링길의 촉망 받는 직원이지. 그리고 여긴 
보스턴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는 로라 누나야. 두 사람 서로 야망이 굉장한 
여장부들이니까 잘 통할 거야."
  로라와 버니가 얘기를 나누는 동안 클레이는 파티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알리슨을 
발견한 순간, 클레이는 짜릿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로라 역시 몰라보게 
달라진 클레이의 모습에 뿌듯한 기쁨을 느꼈다. 언젠가 필라델피아로 숙소를 
옮기기 전 돈을 뿌리고 다니는 클레이에게 로라는 의심 섞인 눈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제기랄, 훔친 돈이 아니라니까 몇 ㅂㄴ 말해야 믿겠어! 내가 벤 형 
같을까봐?"
  "오빤 이젠 손씻었어."
  "그걸 어떻게 알아?"
  "편지에서 그랬어."
  "그랬겠지."
  로라는 클레어를 끝까지 추궁하지 않았다. 내키지 않으면 지붕이 무너져 
내려도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는 클레어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로라는 
커크에 대해서도 일체 묻지 않았다. 물어보면 그냥 좋은 친구하고 대답할 게 
뻔했다.
  일년 전 어느날 로라는 오웬에게서 남자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건강 회복을 축하하는 의미로 멋진 식당에서 저녁을 하던 때였다.
  "심장병 걸린 팔십 노인네처럼 보내는 것 같아서 묻는 게다. 네 젊음에 맞는 
남자가 필요한 법이야."
  "지금 이대로가 좋와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로라는 속으로 오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음악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폴 젠슨을 생각했던 그때를 로라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파티장에서 폴 젠슨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주인을 위해 여기 샴페인이 있습니다."
  어느새 나타난 체드 윌코트가 그녀의 잔에 샴페인을 가득 부으며 호기 있게 
소리쳤다.
  "꿈에 젖은 있는 여왕이긴 하지만... "
  "할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됐을 때 축하하는 기분으로 로치오버에서 식사했을 
때가 생각나네요. 포도주 고르는 법을 가르쳐주셨거든요."
  "재주꾼이시니깐."
  로라는 체드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 얘기를 자주 하는 것 같아요. 체드. 그 사람들을 놀려먹는 것 
같기도 하고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
  "샐링거 가족들 좋은 사람들이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닌 것 같은데요."
  "로라가 입은 드레스를 칭찬했는데, 그럼 내가 로라를 놀렸다는 소린가요?"
  어깨를 으쓱하던 로라는 즉시 어깨를 곧게 폈다. 숙녀들은 어깨짓을 안하는 
거라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가장 고치기 힘든 버릇이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체드가 사물을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알리슨만큼 체드를 이해하게 될 날이 있을 줄 믿어요."
  그의 그늘진 얼굴에 어두운 미소가 떠오랐다.
  "알리슨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안해요. 오직 날 자기 
식대로 개선시키려고만 들죠."
  "개선할 점이 있는 분인 줄은 몰랐어요."
  "그런 점이 없었다면 알리슨은 날 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가 알리슨을 은근히 비웃고 있다는 것을 로라는 눈치챘다.
  "한 가지 중요한 건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죠."
  체드는 어색해하는 로라에게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날 손에 넣고 마음대로 주물러 자기 뜻대로 만들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분명 날 자랑스럽게 생각할 겁니다."
  체드에게서 떠나 로라는 알리슨에게로 갔다.
  "로라, 참 잘 왔어. 삼년 전에 도둑 맞은 엄마 보석 중에 팔찌 한 개가 
나타났댄다. 오늘 오후에 뉴욕 전당포에서 신고가 들어 왔대. 기가 막히지? 
그렇게 오래 꽁꽁 숨어 있더니, 세상에...  아, 참, 여기 친구 소개할게. 학교 
친구야. 아빠가 뉴욕에서 변호사를 하신대. 글쎄, 얘네 아빠가 그 사립탐정을 
알고 있대. 몇 년동안 그 보석을 쫓아서 밥낮으로... "
  로라는 멍한 얼굴로 알리슨을 보았다. 벤은 지금 암스테르담에 있다. 그런데 
언제 뉴욕에 와서 팔찌를 저당 잡혔는가?
  "파라찌 말고 다른 것들도 지금 추적중이래. 경찰이 포기한 수사를 사립탐정 
혼자 죽어라고 뛰고 있으니...  그 도둑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대. 잡히면 
한참 시끌벅적하겠는 걸. 없어진 보석 중 제일 멋있는 게 목걸이였는데..."
  "늦어서 미안해요."
   뒤편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가 벤을 생각하던 로라를 일시에 깨웠다.
  "이번엔 진짜 늦지 않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말이야."
  뒤로 돌아선 로라 앞에 폴 젠슨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7장
  사람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았다.
  "파티 정말 좋았어요. 대단한 파티예요!"
  모두들 로라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클레이는 여자 친구와 함께 일찍 
자리를 떴지만 대부분의 손님들은 실내에 흐르고 있는 음악 소리보다 더 
소란스럽게 떠들며 먹고 마셨다. 주방용 엘리베이터 안에서 연신 후식접시를 
꺼내던 퍼디는 음악 소리를 아예 낮게 줄여버렸다.
  로라는 파티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팔찌가 발견되었다는 알리슨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들려왔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로라는 침실을 향해 종종걸음 
첬다. 문을 닫기 위해 등을 도리던 로라는 문뒤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폴 
젠슨에게 당황한 표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말았다.
  "혼자 있길 원하면 그냥 가고..."
  그는 로라가 입을 열기 전에 재빠르게 말했다.
  "하지만 단순히 소음을 피해 조용한 곳을 찾았다면 나도 들어가서 귀를 좀 
쉬게 하고 싶은데..."
  키가 훤칠한 폴을 보기 위해 로라는 고개를 약간 위로 치켜 들어야 했다. 
짙고 검은 눈동자 속에는 상대를 탐색하고자 하는 호기심이 가득 들어 있었다.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누어보지 않고 삼년 내내 가슴속에만 품고 있었던 사람이 
눈앞에 우뚝 서 있지만 로라는 알리슨의 팔찌 얘기 때문에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냥 그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몸을 옆으로 비켜 폴을 방으로 
들어오게 한 로라는 방문을 닫았다.
  "휴, 이제 좀 살 것 같군."
  그는 로라를 보며 씨익 웃었다.
  "하도 떠들어 귀가 아팠거든요. 이런 파티를 처음 구경해서 그럴 거예요."
  "파티가 어땠는데요?"
  로라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군데로 몰아넣은 파티라고 할까. 늘 끼리ㄲ리 지내던 
사람들이ㅣ 전혀 다른 세계 사람들을 만났으니 시끌벅적하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죠. 한마디로 표현하면 야채샐러드라고 할 수 있지요. 섞인 것 같으면서도 
상추, 파슬리 다 따로 놀지 않소?"
  "내 학교 친구들과 알리슨의 친구들이 서로 섞여지지 않는다는 소리군요."
  "어떤 면에선 그렇다는 말이오. 더군다나 저 대학생들은 파티에 초대된 다른 
부류 사람들과 아마 좁촉을 거의 못해봤을 거요. 시를 읊듯 얘기하는 오웨늬 
정원사, 하버드 법대생과 대화를 나누며 스카치를 마시는 가구 제조업자, 
식료품가게 주인, 그리고..."
  "그분들을 비웃는 거군요. 다 내가 좋아하는 이웃들이고 친구분들이세요."
  폴의 두 눈썹이 놀랐을 때와 마찬가지로 높게 치켜 세워졌다.
  "내가? 오히려 그 반대요. 로라의 용기를 칭찬하는 건데. 다른 사람이면 감히 
시도도 못 할 거요. 그냥 편하고 쉽게 알리슨이 알고 있는 친구들만 초대했다면 
싱거운 파티가 됐을 거요. 그들은 일년 내내 파티를 돌아다니며 똑같은 얼굴만 
봤던 친구들이니 여느 파티처럼 조용하게 먹고 마시고 했겠지."
  "용기라고 하셨어요?"
  로라는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맞는 말일 거예요. 겁이 나긴 했어요. 서로 맞지 않아 어색해 하면 어떡하나 
싶어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까요."
  "그나저나 어떻게 이곳 저곳에서 친구를 끌어모을 수 있었는지 궁금한데."
  "이상하단 소린가요? 비콘 힐 근처에 사는 사람들만 사귀란 법 있어요?"
  또다시 차갑게 나오는 로라의 방어적인 말투에 포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묵묵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냥 아무 뜻없이 묻는 말에도 그렇게 항상 전투적으로 덤벼들어요?"
  "아무 뜻없는 말이 아니니까 그렇죠. 가지각색의 친구들을 사귀는 내가 
특이하다는 말씀 아니예요?"
  "특이하다는 말은 맞는 것 같소. 그렇게 독특한 아가씨니까 내가 여기 이렇게 
와 있는 것 아니겠소."
  폴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잠깐 앉아보라는 말도 없이 정말 이럴 거요? 이렇게 서서 우정을 맺는 게 좀 
힘들 것 같지 않소?"
  로라는 자신도 모르게 침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 번도 남자를 들이지 
않았던 이 은밀한 침실에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던 남자와 지금 단둘이 있다. 
로라는 두려우면서도 가슴이 설레였다.
  "난 우정이란 말밖에 안했는데."
  고개를 든 로라의 눈으로 폴의 장난기 짙은 미소가 들어왔다. 톡 쏘듯 아무 
대꾸 없이 등을 돌린 로라는 벽난로 옆에 있는 의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침대와 제법 멀리 떨어진 벽난로 옆에 마주 앉았다.
  "삼년 동안 로라 얘긴 많이 들었소."
  폴은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를 풀어나갔다. 어딘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로라와 달리, 다리를 편하게 꼰 채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실은 그는 로라의 
눈동자를 끈질기게 쫓고 있었다.
  "작년 여름을 가족들과 함께 보냈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못했지. 그랬더라면 
로라와 좀더 친해질 수 있었을 텐데. 식구들이 로라를 무척 아끼던데, 로라는 
어때요? 우리 식구들이 마음에 들어요? 물론 나를 포함해서."
  "사랑하고 있어요."
  그 말을 한 후 로라는 얼굴을 붉혔다.
  "내 말은... 오웬, 알리슨, 레니, 바바라 모두 다... 정말 나에게 너무들 잘 
해주세요."
  "펠릭스하고 아사는 빼놓은 것 같은데."
  어깨를 반쯤 들썩거리던 로라는 즉시 몸을 곧게 했다.
  "자주 뵙지 못해서 제가 깜빡 했나봐요."
  "뼈가 담긴 말로 들리는데. 하긴 그분들과 함께 어울리긴 힘들거요. 아사는 
그래도 좀 편해요. 펠릭스 없는 데서 만나면 농담도 꽤 즐길 줄 알고... 가족들이 
그립진 않소?"
  "클레이밖에 가족이 없는걸요."
  "한 사람밖에? 그럼 더욱더 친구들 생각이 많이 나겠는데? 뉴욕 친구들 
말이오."
  "보고 싶긴 해요. 하지만 새로 사귀는 일도 좋잖아요. 전 사람 사귀는 걸 참 
좋아해요."
  로라의 얼굴은 어느새 부드러움을 띠고 있었다.
  폴은 로라의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은 그런 뜻으로 묻지 않았는데 
교묘히 대답을 회피하고 이쓴 로라의 심중이 봅시 궁금했다.
  "그 동안 유럽, 아프리카, 인도 등등 많이 돌아다녔어요."
  "여행 안할 땐 뭐 하시는데요?"
  "사진을 찍죠."
  "찍어서 파나보죠?"
  "아뇨. 그걸 뭐하러 팔아요? 그냥 취미로 하는 것뿐이지 다른 목적은 없어요."
  "취미로 하는 거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이 세상은 돈을 벌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그런 면에서 난 운을 타고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거요. 난 내 자신을 야망도 
없고 쓸모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오웬할아버지는 그런 내가 불쌍한지 
나에게 신경을 많이 써주시죠. 다니기 싫어서 다녔다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학을 다니긴 했어요. 특별하게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여행을 많이 다니는 셈이죠. 현재는 그래도 사진 찍는 일을 내 일로 알고 
있지만. 근데... 대학을 다닌다고 햇는데, 공부 끝나면 뭘 할 생각이요?"
  "호텔 경영 같은 거요. 비슷한 걸 지금 배우고 있거든요. 시간있을 때마다 
연극도 하구요."
  깜짝 놀라는 폴의 표정에 그녀는 슬쩍 웃었다.
  "연극은 뭐 특별한 사람만 하는 건가요? 취미로 별 짓을 다 하잖아요? 내 
취미는 연극이에요. 출연중인 걸요."
  "연극이 좋아요?"
  "그럼요. 나 아닌 다른 인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게 멋있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대사가 있으니까 무대에 서서 뭘 얘기해야 할지 걱정할 필요도 없어요. 
호흡법에 따라 대본대로 하면 돼요. 극작가들은 실제 생활에서 쓰이는 말보다 
훨씬 멋진 대사들을 만들어내거든요."
  "그 취미 때문에 여러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나 보죠. 저 밖의 찬구들과는 
어떻게?"
  여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온갖 자랑을 끝없이 늘어놓는 남자들과 달리, 
자꾸만 자신에 대한 질문을 퍼붓는 폴 젠슨이 거북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캐묻는 디들을 속으로 미워했던 때와 달리 그에게 전혀 화를 내고 있진 않은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오히려 그녀는 깊은 호기심이 담긴 
그의 따스한 눈동자를 자신에게 계속 붙들어두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얘기 안해줄 건가 보지?"
  폴은 생각에 잠긴 로라를 채근하듯 물어왔다.
  "사실 난 남의 말 듣는 걸 더 좋아해요. 사람들은 보통 자기 얘길 즐겨 
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같은 사람이 있어야 되잖겠어요. 말하는 
사람만 있으면 대화는 금방 끝나버리거든요. 하지만 듣는 사람이 있으면 몇 
시간이고 계속되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 듣는 걸 좋아해요. 
아마 남들 한데 호기심을 느껴서 그런가봐요."
  폴은 미소를 지었다.
  "호텔 경영은 잘 해내겠는데."
  "오웬 할아버지도 그런 말씀 하셨어요."
  "그래요? 웬만해서 그런 말씀 안하시는 분인데. 보스턴 샐링거에 혹 일자리 
알아봐주신다는 말씀 없었어요?"
  "그러셨어요."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어떤 자린데요?"
  "관리부장 쥘 르클레어 보좌 역할이에요."
  "누군지 모르겠는걸. 호텔 사람들한텐 원체 관심을 안 두니까... 그래 근무는 
언제부터요?"
  "월요일부터예요. 여름방학 때는 하루종일 근무하지만, 방학이 끝나면 
시간제로 일할 수 있게 편의를 봐준다고 했어요."
  "좋은 기회일 거요. 연극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전공으로 삼지 
않았소?"
  "할아버지가 호텔 경영학을 배우라고 하셨어요."
  "그럼 배우는 될 수 없겠네."
  "연기는 취미니까요."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께서 호텔들을 경영하는 데 연기 솜씨가 필요하진 않지만, 그래도 
취미로 삼아두면 다방면으로 뛰어난 경영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폴의 두 눈썹이 순간 치켜 올라갔다.
  "샐링거 호텔을?"
  "네. 왜요? 내가 할 수 없을까봐서요?"
  "할 수 없다는 소린 안했소. 잘 해내겠지. 하지만 그 호텔 체인은 펠릭스와 
아사가 맡고 있지 않소?"
  "알아요. 그 체인을 얘기한 게 아니에요. 샐링거 가문에 속한 그 호텔 체인이 
아니라 오웬이 예전에 독립적으로 세운 호텔 네개를 말씀하신 거죠. 그 
호텔들을 새롭게 경영하실 생각인 것 같아요. 펠릭스와 아사가 그 호텔에 
관심이 없다는 말씀도 있었어요."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그 사람들은 샐링거 호텔에 있는 먼지 조각 하나도 
버리지 않을 사람들이오. 오엔 할아버지도 그걸 알고 계실 텐데 무슨 계획을 
세우신 모양이지. 혹시 그 호텔들을 새로 경영해보자고 로라가 한 거 아니오?"
"설득하다니요? 내가 누굴 설득해요? 난 그분을 설득할 수 있는 입장이 못돼요."
  "내 말에 화가 났다면 사과하리다. 하지만 나는 좋은 뜻에서 물어본 것 
뿐이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당당히 내세우는 여성이야말로 아름답게 
보이죠."
  로라는 폴의 설명에 눈을 반짝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뭔가 의심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방망이에 맞은 듯 크게 화를 내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열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사진만 찍진 않겠죠?"
  "책도 읽고, 하이킹과 스키도 타고, 자전거로 산길을 다니기도 하고, 다음 
국ㄱ경 넘으면 뭐 할까도 궁리하고..."
  "한 곳에 계속 머무르고 싶지 않은 모양이죠."
  "그래요. 로라는 어때요?"
  "전 여기 머물고 싶어요. 할아버지의 보호 아래 영원히요. 가능하다면 하고 
싶은 일들 많이 하면서 오래도록..."
  "한 곳에 있으면서 어떻게 많은 일을 하겠다는 거요?"
  "우습게 들리겠지만, 안전하고 편안한 나만의 공건을 지켜나가고 싶어요.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에요."
  그러면서 로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가보는게 좋겠어요."
  "좀더 있어요. 여주인이 없어도 몇 시간 계속 굴러갈 파티니까."
  폴은 그녀를 따랄 몸을 일으켰다.
  "로라!"
  그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았다.
  '특별하게 되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 로라는 특별해요. 뭘 하든 능히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 영인이라는 소리오."
  폴은 그녀를 향해 타오르는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로라를 
자신의 얼굴 밑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우리 가족 모두 로라를 기꺼이 도울 거요. 로라가 원하는 게 정확히 뭔지 
모르지만 그걸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어둡고 외롭게 살아온 지난 세월 다 
잊어버려요. 이제 뭐가 두려워요? 로라를 겁나게 하는게 있다면 힘껏 
도와주겠소."
  "가, 가봐야겠어요."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진 그녀는 말까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 거요? 나 때문에? 내가 이렇게 붙들어서? 맙소사, 
로라..."
  "아니예요. 당신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원래 이런 덴 익숙하지 못해서..."
  그는 대화 분위기를 바꾸어보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래, 방 얘기 좀 해봐요. 아주 멋지게 꾸며 놨는데 진짜 마음에 들어요."
  폴은 화려한 아이보리와 살구빛 실크를 새로 입힌 아리리스의 프랑스식 옛 
가구들과 방 천장 무늬, 그리고 파스텔조의 연녹빛 벽에 맞춰 연한 아이보리로 
페인트칠 된 벽난로 등을 꽤 오래 시간을 두며 살펴나갔다.
  "정말 멋져."
  폴은 자신에게 말하듯 낮게 속삭였다.
  "깨끗하고, 상큼하면서도 아주 푸근하게 꾸며 놨어요. 심오하면서도 아늑한 
아름다움이라..."
  그는 로라에게 미소를 건넸다.
  "죽어버린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으셨네. 박쥐소굴 같은 곳이었는데. 색깔을 
완벽하게 맞췄어요. 예술적 감각까지 있는 줄 미처 몰랐어요."
  "고마워요."
  벽난로 가까이 있는 책장 앞으로 다가간 폴은 꽂혀 있는 책들을 하나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것들 다 어디서 구했소?"
  "칼 핸디라는 친구한테서요. 책방을 운영하던 분이셨는데, 돌아가시면서 내게 
그것들을 남기셨죠. 내가 그 책들을 좋아하는 줄 알고 계셨거든요."
  "좋은 친구였나보죠."
  폴은 책장에 진열돼 있는 고서 중에서 한 권을 빼들어 유심히 넘겨보고 
있었다.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팔 책이 아닌 이상 값은 알아서 뭐 하겠어요?"
  "보통 책이 아니니까 하는 소리요. 팔면 목돈을 만질 수 있을 책들이오. 이건 
워싱턴 어빙의 (최면 걸린 골짜기 전선) 초판본이네. 정말 희귀한 책인데. 이거 
내가 한번 감정해봐도 되겠소?"
  "그러세요. 하지만 감정 결과가 어떻든 나한텐 아무 상관없어요. 그분을 무척 
좋아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 고서들은 절대 팔지 않을 거예요."
  "어쨌든 가지고 있는 물건이 어떤 것들인지 자세히 알아두는 것도 좋은 
일이니까 한 일주일 가량 이걸 나한테 맡겨봐요."
  탁자 위에 그 고서를 올려놓은 뒤 그는 몇 발짝 옮겨 벽난로 선반 위에 걸려 
있는 흑백사진틀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어디서 찾아낸 거요?"
  "할아버지 서재에서 옮겨왔어요. 언젠가 이 사진을 보면서 감탄하는 걸 
보시더니 여기다 걸두는 게 어떠냐고 하시길래... 허락없이 걸었는데 
괜찮겠어요?"
  "벽에 걸려 있는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기분 나빠할 사진작가가 어디 
있겠소?"
  웰플릿 해변에서 놀고 있는 세 어린아이들에게 연속적으로 수십 번씩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 뒤 암실에서 일주일씩 걸려 만족할만한 그림이 나올 때까지 
씨름을 해가며 완성시켰던 자신의 작품사진을 폴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오년 전,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 찍은 사진이었다. 그때 그 
작업과정을 통해 얻어낸 사진들을 앞에 두고 폴은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프로답게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폴로부터 그 사진들 중의 한 장을 선물 받았던 오웬은 후에 
정식으로 폴에게 돈을 치르며 네 장의 사진을 추가로 구입했다. 그 중 한 
작품이 바로 로라의 방에 걸려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꼬마 여자애가 
남자아이 둘과 함께 자신들이 쌓아올린 모래성 앞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어린 소녀는 빨간 리본으로 국기를 만들어 성 꼭대기에 꽂으려 
하고 두 소년들은 해적 깃발로 소녀의 빨간리본을 무너뜨리려고 서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폴은 세 아이들의 정서와 감정이 사진 속에 그대로 배어 나올 
수 있도록 극적인 대비를 이용하고 있었다. 모래 위에 흰 거품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검은 파도, 아이들의 빛나는 눈동자, 구름 한점 없이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선을 그으며 날아가는 갈매기, 길고 각진 그림자에 둘러싸인 
모래성. 모든 것이 대조적 명암으로 구성된 작품사진이었다.
  "왜 하필 이 사진을 고른 거요? 사람들은 잔잔하고 꿀길같이 부드러운 풍경을 
대부분 좋아하는데 말이오."
  "전 이 사진이 꿈같이 느껴지는데요."
  "그래요? 어떤 면에서?"
  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로라에게 물었다.
  "성이 아직 완성된 게 아니잖아요."
  폴의 눈이 다시 사진으로 옮겨갔다. 그런 얘기를 한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다.
  "로라 가슴속에도 그런 성이 있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죠. 당신은 어때요? 원하는 걸 다 얻었어요?"
  "원하는 걸 얻곤 했지. 하지만 가끔 욕심을 부리긴 해요. 현재 가진 것보다 더 
가질 수는 없을까 하고 말이오."
  그녀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잘 이해가 안되요."
  "이해할 수 없긴 나도 마찬가지니까."
  폴은 계면쩍은 듯 턱을 문질렀다.
  "하지만 지금 또 욕심이 일어나는데 이거 어쩐다... 당신을 좀 더 알고 싶어요. 
내일밤 나와 저녁식사 하지 않겠소? 아니 그전에 만나지. 로라가 끓여주는 
은은한 차를 마시면서 먼저 식욕을 돋운 다음 저녁을 하러 가는 게 더 낫겠군. 
그래 주겠소?"
  "네."
  로라는 주저 없이 폴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였다. 가까이 하기에 위험한 
인물일 가능성도 있었으나, 가슴속에 자리한 욕망을 로라는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뉴욕의 전당포에서 발견된 팔찌는 레니 샐링거의 조모가 새로운 인생을 
펼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열세살짜리 딸 아이에게 준 
이별의 선물이었다. 물렁한 순금 대신 합급을 이용해 정교하게 세공을 한 그 
팔찌 뚜껑 속에 레니의 조부 사진과 이름 첫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다시 손에 넣게 된 순간 레니는 뚜껑 속에 들어 있는 고수머리 조부가 웃는 
모습을 들여다보녀 기쁨에 넘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바보처럼 울고 있다는 걸 나도 알아요. 험악하고 무서운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는 세상에 팔찌 하나 갖고 이렇게 굴다니... 하지만 너무 기뻐서 그래요. 
이제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지 않고 다시 내 손에 들어왔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이에요."
  "기쁘지."
  커머밴드(남자들이 턱시도 같은 예복을 입을 때 허리에 두르는 넓은 
허리띠:역자 주)를 단단히 조인 펠릭스는 턱시도와 한짝으로 어울리는 커프스 
단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팔찌를 찾게 된 것보다는 그걸 훔쳐간 개자식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생겼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
  긴 실크슬립 차림으로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레니는 하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여름 휴가를 맞이해 도시를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리는 오페라 구경을 위해 그녀는 뒤가 길게 끌리는 예복을 골라놓고 
있었다.
  "난 잘 모르겠어요. 처음엔 그 도둑을 혼내주고 싶었는데 지금은... 벌을 주든 
안주든 그건 관심없어요. 중요한 건 그 물건들이 알리슨에게 그리고 또 언젠간 
그애 딸한테 고스란히 물려져야 된다는 생각뿐이에요. 그 중에서도 목걸이는 
진짜 중요해요. 아버지가 덴마크에 계셨던 조부한테 물려받은 것을 엄마한테 
선물했던 모걸이였는데... 그걸 나한테 주시면서 엄마는 참으로 기뻐하셨어요. 
알리슨도 그게 자기 것이 되는 줄 알고 좋아했었는데. 그애가 그 소중한 것을 
물려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가슴 아파요."
  "그놈이 누군지 모르지만 끝이 어떻게 되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겠소. 
감히 내집을 뒤져!"
  "당신은 어떻게 그걸 그런 식으로만..."
  레니는 뒷말을 그냥 삼켜버렸다.
  "그놈을 반드시 잡고 말 거야. 두고 봐. 당신 금방 준비되지? 늦겠는대."
  "또 걱정이에요? 당신처럼 항상 미리 가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라구요."
  레니는 거울을 옆눈으로 바라보며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달았다.
  "클레이 페어차일드가 필라델피아에서 일을 잘한다고 들었어요."
  펠릭스는 아무 말없이 윗도리를 집어들었다.
  "그 보석 얘길 할 때마다 로라하고 클레이 생각이 나다니,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레니는 진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잘못이죠. 아마 그애들 들어온 지 얼마후 도둑이 
들었기 때문일 거예요. 도둑 때문에 놀라긴 그애들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무섭다고 짐 싸들고 나가지 않은 게 고마운 일이죠. 아버님이 로라를 무척 
아끼시더라구요. 그애도 아버님을 친할아버지처럼 모시구. 이십 년 넘게 같이 
살았지만 아버님이 지금처럼 행복해 하시는 걸 뵌 적이 없었어요. 로라 말로는 
아버님이 그애한테 일자릴 줬다 하던데요. 쥘 보좌역이라든가? 시간 날 때마다 
아버님이 호텔경영도 가르치신다던데..."
  "뭐하러?"
  펠릭스는 눈썹을 이마 가운데로 모았다.
  "그앨 단지 비서로 쓰고 있는 것 같던데... 그것도 그래, 언제고 필요하면 불러 
쓸 수 있는 애들이 기획실에 열 명도 넘는데 뭐하러 집에 그런 앨 두고 쓰는지 
이해할 수 없다니까. 쥘 밑에서 일하게끔 해주고 대학까지 보내줬으면 됐지. 또 
뭘 원한데? 욕심도 많구만."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요즘 젊은 아가씨들 봐요. 욕심부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레니의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기 위해 펠릭스는 귀를 곧추세워야 했다. 
귀걸이를 확실하게 조인 레니는 귀걸이와 한쌍인 목걸이를 집어들었다.
  "펠릭스, 이것 좀 걸어줄래요?"
  레니는 두 눈을 감은 채 뜨겁게 달아오르는 욕망을 누르고 있었다. 목걸이 
체인을 돌리는 펠릭스의 손길이 그녀의 둣목덜미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저 
사람은 아무 감정도 못 느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녀는 달아오르는 마음을 
삭여야만 했다. 누군가가 있어야 되겠어. 이러다간 정말... 누구든 한 사람을 
찾아낼 거야. 네드가 떠난 지도 벌써... 남편의 소리에 그녀는 눈을 떴다.
  "뭐라구요?"
  "언제 오냐구? 당신 하녀 말이야. 기다리는 일 질색하는 거 당신 알잖아. 
늦을까봐 초조해 하는 것도 싫고."
  "곧 올 거예요. 시간 아직도 충분해요."
  레니는 남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초조한 게 아니라 오히려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무슨..."
  "당신... 내 팔찌 때문에 그런 거 아니예요? 그 팔찌 찾은 뒤로 내내 그랬어요. 
팔찌 찾았다고 삼년 넘게 못 잡은 도둑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레니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난 그렇게 생각 안해요. 아마 힘들 거예요."
  "아냐, 잡을 수 있어. 얼마나 끈질긴 사람들인지 당신이 몰라서 그래. 몇 
십년이 걸려도 이 잡듯 뒤져서 잡아낼 거야. 이제 단서가 생겼으니까 잡는 건 
시간 문제야. 그 개자식을 분명 내 눈으로 보고 말테야. 경찰놈들, 못 잡기만 
해봐. 입 한 번 벙긋하면 그 머저리 같은 놈들을 모두 한꺼번에 모가지 날릴 수 
있어. 그런 병신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세금을 내다니, 다 쏴 죽여버리는게 
낫지."
  방안은 죽음 같은 싸늘함이 감돌았다. 레니는 화장대 앞에 멍하니 앉은 채 
남편을 바라보았다. 주름살 하나 없는 윗저고리, 가슴에 꽂혀 있는 실크 
손수건... 뭐 하나 빠진 게 없나 하고 펠릭스는 기둥식으로 된 거울에 이리저리 
몸을 비춰보고 있었다. 레니는 그가 아주 만족해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급 
흰색 알마비바 넥타이와 턱시도 정장 뒤에 증오심과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을 
숨긴 채.
  말끔하게 새로 다린 드레스를 든 하녀가 들어오자 레니는 화장대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도 참 대단한 여자야. 레니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몇 년 동안 
저런 사람을 계속 받아들이고 있다니. 왜 저 사람을 못 떠나고 있는 거지.
  하녀가 드레스를 입힐 수 있도록 레니는 두 팔을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신경 
곤두세울 필요 뭐 있니? 펠릭스가 도둑한테 어떻게 하든 나하곤 아무 상관없는 
일이잖아. 난 보석만 다시 찾으면 돼. 복수를 하든, 뭘 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클레이와 겨우 통화를 한 로라는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보석을 찾았대."
  "뭘 찾아?"
  "뉴욕 전당포에서 도난 당했던 그 보석 말이야.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찾은 게 뭐래?"
  "팔찌."
  "그거 하나만? 다른 말은 없어?"
  "별소린 없었어. 그걸 맡긴 사람을 아직 못 찾아냈대."
  "그 전당포 주인은 알고 있을 거 아냐? 분명 경찰한테 뭘 얘기 했을 거라구."
  "클레이, 좀 잠자코 들을 수 없니? 네 말이 맞아. 전당포 주인 말로는 짙은 색 
안경에 금발머리 청년이라는 사실밖엔 기억이 안난다고 했대."
  "하지만 서류가 있을 거 아냐. 저당 잡히고 줄 때 영수서류에다 서명을 
한다구. 경찰이 분명 그 서류를 봤을 거야."
  "벤 프랭클린이란 서명이 잇었다는구나. 가짜 주소하구."
  "그리고, 그게 다야. 다른 건 없대?"
  "그 이름 듣고도 놀라지 않니?"
  "알아. 형 짓이겠지. 진짜 그게 다야? 다른 단서는 못 잡았대? 다른 인상착의 
말야."
  "다른 게 없었으니까 더 이상 말이 없었겠지."
  "확실한 거야? 듣긴 제대로 들었어? 놓친 거 있나 잘 생각해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몰라서 그래? 빠릴 잘 더듬어봐. 그 전당포 주인이 다른 점은 기억 
못했대? 그게 장물인지 어떻게 알고 경찰을 불렀대?"
  "경찰이 돌린 전단에 그 팔찌가 있는 걸 보고 신고했대. 클레이, 겁이 나 
죽겠다. 어떡해야 좋겠어?"
  "나도 몰라. 생각해봐야지. 침착해. 우린 그 일과 전혀 관계 없어. 우릴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누나.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괜찮을 거야. 그나저나 형이 
유럽에서 언제 뉴욕엘 왔지? 편지에 뉴욕 간다는 얘기 없었어?"
  "오빠가 전화할 것 같니?"
  "하지 말라고 그랬다면서?"
  "그래. 하지만 우리가 진짜 많이 보고 싶대... 가끔 나도 보고 싶긴 해."
  "만나보면 좋긴 좋겠지. 셋이 있을 때가 좋긴 좋았어. 지금은 혼자 외롭게 
지내겠지... 브루클린 기억나? 예정보다 사람들이 빨리 돌아오는 통에 
다락꼭대기로 올라가 지붕을 탔었잖아. 그때 우리 둘이 얼마나 떨었는지 누나도 
기억하지? 형이 있었길래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둘 다 심장이 터져 죽었을 걸. 
덜덜 떨고 있는 우릴 웃기려고 형이 농담을 얼마나 많이 했어. 영화도 보여주고, 
핫도그하고 아이스크림도 사줬지. 지금은 아이스크림을 통으로 퍼먹어도 그때 
형이 사준 아이스크림 맛은 도저히 느낄 수가 없어. 만나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 제기랄, 그럴 순 없어. 우릴 이런 일에 빠뜨리다니..."
  "그만 끊자. 오웬한테 가봐야 돼. 며칠 뒤에 다시 얘기하자. 전화하기 전에 
생각해봐. 우리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야."
  "그냥 침착하게 있으라니까. 무슨 일 있으면 즉시 연락해. 알았지? 조심하구."
  "알았어. 사랑한다, 클레이."
  "나도."
  클레이는 얼굴을 찡그린 채 수화기를 내렸다. 우라질, 잘되어 간다 싶더니만... 
뿌듯한 마음으로 앞날을 설계하던 그로선 정말 불길한 소식이었다. 삼년 전 
일인데, 삼년 전에 받은 전단을 기억해 장물을 알아낸 전당포 주인이 있다니... 
세상에 기가 막히도록 머리좋은 놈이구만. 잃어버렸으면 그만이지 찾긴 뭘 
찾겠다구. 진짜 이젠 어떻게 해야 되지?
  "클레이, 자네 거거시 뭐하고 있는 건가?"
  지배인의 목소리가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보스턴에 있는 누나와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절 잘 돌봐주셔서 누나가 
감사드린대요."
  지배인 책상 옆자리로 걸어간 클레이는 보청기를 낀 그의 귓바퀴에 입을 
가까이 했다.
  "누나가 지배인 말씀 명심하고 일 잘하고 하더군요. 많은 걸 가르쳐주실테니, 
덤벙거리지 말고 호텔경영 일인자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일하랍니다. 맞는 
말이죠."
  윌라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처진 턱과 볼이 물풍선처럼 출렁거렸다.
  "젊은이들은 늙은이의 지혜를 배워야 해. 나이는 지혜 그 자체라네. 자넨 아직 
어려. 성급하고 기다릴 줄 몰라. 나이가 지혜라는 걸 배우면서 열심히 일하게나."
  윌라드는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그럼 내일 만나세."
  "이렇게 오래까지 여기 계실 줄은 몰랐어요.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인데..."
  "뭘 졸 눈여겨볼 게 있어서 그랬네. 자, 그럼 내일 보자."
  그가 나간 뒤 클레이는 그의 책상 위로 눈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날 눈여겨봤다 이거겠지. 내가 일 하나 안하나. 내가 고등학생인 줄 아는 
거야, 뭐야. 재수없게!"
클레이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만큼 속이 상해 있었다. 보스턴에 있는 로라가 
그리웠다. 한 살 차이의 누나였지만 신기하게도 클레이는 매번 로라로 인해 
끓는 속을 위로받곤 했다.
  술이나 마시자. 삼십 분쯤 자리를 바워도 크게 문제 될 일은 없겠지. 이래저래 
심란한 날이었다.
  방파제로 올라간 폴은 로라를 끌어올리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방파제 위로 올라온 로라는 폴 바로 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잊은 채 은청색으로 빛나는 바다물결을 보았다. 보스턴 
북쪽 대서양 물결 앞에 수줍게 혀를 내밀고 있는 케이프 앤 해안 모래톱 위에는 
암초들이 촘촘하게 늘어서 있었다. 암초 위에는 군데군데 갈매기드이 군생을 
하고 있었고, 그보다 더 먼 곳에는 띠를 이루며 날고 있는 물총새들이 힘찬 
날개짓으로 하늘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파도가 쉴새없이 바위를 때리고 바람이 두 사람에게 신선한 물보라를 실어올 
때마다, 로라의 머리ㅣ카락에는 태양에 반짝이는 보석처럼 작은 물방울이 
생기곤 했다. 그 작은 물구슬을 하나씩 털어내던 폴이 그녀를 한 팔로 껴안는 
순간, 두 사람의 손가락은 서로 상대를 굳게 감싸쥐고 있었다.
  "바위가 계단처럼 보이나보지. 깡충깡충 잘도 뛰어오르던데. 난 남잔데도 
그렇게 뛰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암벽등반가란 소릴 왜 안했지?"
  "오랜만에 바위를 탄 기분이에요."
  로라는 고개를 돌려 폴과 마주보았다. 소금기 어린 바다 내음으로 그녀는 
기분이 더욱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허드슨강가에 널려 있는 바위 위로 자주 기어오르곤 했어요. 오빠, 동생들과 
함께."
  "오빠하고?"
  "아, 옆집에 착한 오빠가 있었어요."
  폴로부터 떨어져 나온 로라는 떨리는 손으로 구두끈을 다시 여몄다.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가벼운 욕지기가 느껴졌다. 
가족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거짓말을 해왔지만, 폴 젠슨에게만은 두 번 다시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운명적으로 폴을 만나게 된 그 파티 이후 두 주일 동안 로라는 다섯 번 
넘게 폴과 데이트를 했다. 로라는 멋진 식당과 콘서트, 그리고 피아노 선율이 
잔잔하게 흐르는 나이트 바를 전전하며 그와 함께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폴과 꿈같은 시간을 보낸 로라는 그와 영원히 같이 있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진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거짓없이 내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그년는 폴 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우리 여기 이 바위 위로 걸어봐요."
  "아버지하고 꼬마였을 때 해보긴 했는데, 커선 영..."
  "당신 아버지하구요?"
  "아주 조용한 분이시긴 해도 아버진 카누 챔피언이셨어. 산악등반에도 
뛰어나셨지. 지금이야 손떼고 계시지만."
  성큼 다리를 벌린 폴은 로라가 서 있는 바위로 올라섰다.
  "이허게 바위 타는 법을 누구한테 배운 거야? 분명 클레이가 가르쳐주진 
않았을 거고. 클레이는 로라와 달리 발걸음이 재지못하니까."
  "클레이가 아니라... 뉴욕에 사는 사람이 있어요."
  "친군가 보지?"
  "네 아주 오래전부터 나하고 동생하고 무척 친하게 지내던 친구예요."
  폴은 뒤에 둔 채 얼기설기 숫아오른 암초들 위로 재빨리 몸을 옮기면서 
로라는 담벼락과 지붕을 타던 옛 시절을 생각했다. 창문턱에 손가락으로 
매달리는 방법, 홈통과 등나무 줄기를 확실하게 잡는 방법... 그녀는 바위타기에 
몰두한 채 계속 숨을 할딱이며 튀어올랐다. 테니스와 수영, 보스턴 뒷골목을 
탐험하면서 단련된 로라의 근육은 고무공처럼 탄탄했다.
  지금도 얼마든지 고양이처럼 지붕 위로 기어오를 수 있어. 하지만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
  폴은 멀어져가는 로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길고 부드러우면서도 날렵하게 
튀어오르는 로라의 몸매를 그는 감탄의 눈길로 계속 쫓아갔다. 끊어짐 없이 
부드럽게 몸을 놀리는 댄서를 생각나게 하는 움직임이었다. 작은 영양 같기도 
햇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나도 눈에 두려움을 가득 담고 콩콩 뛰어 사라지는 
아름다운 영양. 이주 전보다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거리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음을 그는 뼈저리게 느꼈다.
  그동안 폴은 그녀의 과거, 친구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을 거의 다 
알아내을 정도로 로라에게 탐닉해 있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상대 여자의 
모든 것을 알아낸 적이 전에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로라 페어차일드라는 
여인만은 달랐다. 좌절과 허탈을 느끼게 하면서도 어느 순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강렬하게 자신을 사로잡았다. 폴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뛰어가던 로라는 허리를 구부려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돌로 만든 반지예요."
  파도 소리르 뚫고 로라의 맑은 음성이 날아왔다.
  "뼈로 만든 건가? 예쁘지 않아요?"
  그녀에게 다가간 폴은 로라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작은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화석인데. 어림잡아 삼억 오천만 년은 지났겠다."
  로라는 그에게 동그랗게 떴다.
  "삼억 오천만 년이라구요?"
  화석을 다시 받아든 로라는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기분이 참 묘해요. 무한이라는 단어를 손으로 만지는 기분이네요. 사랑이나 
명예 같은 것도 이렇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이 화석에 비한다면 인간은 허망한 존재지. 길게 살아봤자 백살일 텐데."
  "원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요?"
  "여기 이 부분에 깃털처럼 작은 돌기가 있었을 거야. 여기 이 부분에. 
고생물학자들이 보면 확실히 알 텐데."
  "성게... 불가사리."
  주술사가 주문을 외듯 로라는 천천히 속삭였다.
  "신기하기만 해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이렇게 신비로운 것들이 숨어 
있다니. 사ㅏㅁ 손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면서 오랜 세월을 보냈겠죠."
  로라는 화석을 청바지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이런 거 모아두면 괜찮겠죠? 어렵고 힘들 때마다 이걸 보면 오랜 세월을 
참고 견딘다는 게 어떤 건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을 거예요."
  폴은 로라의 턱을 한 손으로 살며시 치켜들었다.
  "사람이든, 생물이든 완벽한 건 이 세상에 없어. 이 화석도 따지고보면 완벽한 
게 아니야. 결국 죽었잖아. 그게 완벽하지 않은 점이지."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세상에 훌륭한 사람들이 참 많아요. 저는 그 분들을 
볼 때마다 제가 모자란다는 것을 느껴요."
  "그렇지 않아."
  폴은 두 손바닥으로 그녀의 볼을 감쌌다.
  "로라에게 모자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오히려 당신은 부러움을 받는 
대상이야. 사람들이 당신을 그런 대상으로 여기는 것처럼 당신 스스로 자신을 
신뢰하고 믿을 수 있어야 돼."
  "날 그렇게 좋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폴은 따스한 손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에 로라는 현기증을 느꼈다. 바위 
끝에 올라가 있는 발이 위로 치솟는 기분이기도 했다.
  "너무 늦었는데, 이제 가보아야지요."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는 폴을 뒤에 둔 채, 로라는 다시 폴짝거리며 
오던 길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나는 새처럼 바위 사이를 날렵하게 
뛰어넘었다.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가버리는 로라로 인해 기분이 상해 있었던 
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금 뜨거워지는 가슴으로 로라를 뒤쪼ㅈ고 
있었다. 가까이 오는 것 같다가도 금세 멀리 멀어지는 로라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폴은 로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온 기분이 들어. 아니 그것보다 더 좋았던 것 같아.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그때보다 더 즐러웠어."
  주차장을 뒤돌아보며 그는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아비뇽 시장 근처에서 아름다운 여인들을 모델로 사진 찍던 때겠죠."
  로라는 놀리듯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었나?"
  "좋은 날들이라곤 했어요."
  "직업적인 면에서 그랬겠지. 하지만 로라 페어차일드라는 여인과 함께 한 
사간이 아니니 최고로 좋은 날이었다고는 말 못해. 그리고 추억이라는 건 금세 
사라지게 마련이야. 겨우 한 컷씩만 기억나는 걸."
  그녀는 생긋 웃으며 폴에게 속삭였다.
  "우리 저녁 약속한 건 기억해요?"
  "킹스 타번에서 여섯 시 삼십분. 배 고파?"
  "죽기 몇 분 전이에요."
  "그렇다면 십 분 안에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킹스 타번은 글로세스터 대로를 굽어보는 얕으막한 언덕에 자리해 있었다. 그 
너머에는 파도에 따라 삐꺽거리는 고깃배들이 모여 있는 부두가 있었고, 항구 
위편으로는 옛모습 그대로인 가게와 식당들이 있었다.
  로라는 그런 풍경들을 하나하나 음미했다. 특히나 보스턴의 절친한 이웃들을 
생각나게 하는 자그마한 어촌의 아름다움이 마음을 끌었다. 두 사람은 식당 
뒤편에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폴은 미리 식당 겸 여인숙 주인에게 
샤워와 옷 갈아입을 수 있는 공간을 미리 부탁해놓았다. 식당 뒤편 맨 끝에 
있는 그 방에는 의자 두 개와 자그마한 침대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손가방을 
들고 일어나는 로라에게 폴은 간단하게 입으라고 했지만, 로라는 무엇을 입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소금기가 배어 있는 청바지와 카키색 셔츠를 벗어던진 후 작은 욕조에 들어간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결국 목이 V자로 깊게 파진 흰 색의 긴 소매 플레어 
면공단 원피스로 결정했다. 그리고 케이프 프로빈스타운 가게에서 구입한 
터키석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하지만 머리 스타일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은 습기찬 바닷공기 때문에 맥빠진 듯 풀이 죽어 있었다. 
빗질을 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앞 이마와 뺨에 붙은 머리결을 대강 정리한 후 얇은 머리빗을 
한숨과 함께 가방 속에 넣었다. 방을 나오기 전 로라는 다시 한 번 거울을 
보았다.
  너무 흥분하고 들떠 있는 것 같애. 저 사람은 지적이고 침착한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이런 나를 보고 걸스카우트라 그럴지도 몰라.
  바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면서 폴은 부산한 항구와 그 너머 마을을 구경하고 
있었다. 부두 위 선원들은 방금 잡아올린 바닷가재를 네모난 희색 상자에 담아 
부지런히 하역을 시키고 있었다. 항구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폴의 모습을 
로라는 잠시 동안 훔쳐보고 있었다. 어두워 보이는 그의 얼굴빛은 거의 
경직되어 있는 듯했다. 그런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을 법한 그만의 비밀을 상상했다.
  자신을 향산 시선을 느낀듯 괘ㄱ를 재빨리 돌린 폴은 로라에게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의 눈빛에는 경탄과 환희가 어려 있었다.
  "아주 환해지셨네. 정말 아름다워. 나도 옷좀 갈아입어야겠어. 포도주를 
주문해놨는데 곧 돌아올게."
  자리에 앉은 로라는 폴이 그랬던 것처럼 강인해 보이는 어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부둣가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신나게 암초위를 뛰어다니다가, 갓 
잡아올린 싱싱한 가재요리를 멋진 저녁으로 즐긴 뒤 자정 전까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곳은 보스턴에서 북쪽으로 불과 오십 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아름다운 해변마을이었다. 보스턴에 돌아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돌아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머리카락에 올라 있는 물방울을 털어내던 폴의 손가락과 
어깨를 감싸 안던 팔의 감촉이 떠올랐다.
  자신을 매몰차게 꾸짖었지만 한편으로 남자를 한 번도 받아 들이지 않은 
처녀의 설렘과 기대감이 있었다. 고교시절 자동차 뒷좌석에서 두려움과 
어색함으로 옷을 벗던 기억이나 대학교 교정 구석에서 아주 짧게 접촉했던 
경험도 있었지만, 실제 그녀는 처녀의 몸이었다.
  부둣가의 모습이 차츰 변해가고 있었다. 고깃배의 안전귀항을 기원하는 
성베드로 축제를 화려하게 끝낸 어부들과 마을주민들이 뗏목을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어깨 위에 놓인 폴의 따스한 손을 느끼며 고개를 올린 로라는 그의 깊고 짙은 
눈매를 보았다.
  선박용 랜턴의 여린 불빛과 함께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로라는 폴에게 
전적으로 시간을 맡기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속삭이듯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은 서로 상대의 손등을 애무해나갔다. 서로를 원하는 두 사람의 욕망은 
서서히 집을 짓고 있었다. 손님들의 소근대는 목소리와 투명하고 여리게 
나무탁자를 때리는 그릇 소리들이 들려왔다. 한참 식사를 하던중 갑자기 폴이 
큰 소리로 감탄을 터트렸다.
  "당신처럼 그렇게 가잿살 잘 빼먹는 사람 처음 보겠는 걸. 몸통도 뒤집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살을 빼낼 수 있지? 야, 대단해, 꼭 마법사 같다니까. 어떻게 
보면 손놀림이 소매치기 같애. 포도주 더 할래? 한 병 더 시킬 생각인데."
  "아니 됐어요. 이거면 충분해요."
  로라는 붉은 색 가잿발과 반으로 금이 간 등껍데기, 깨끗하게 잘 빠져나와 
있는 흰 가잿살을 내려다보았다.
  로라의 가슴을 뜨끔하게 만든 농담이었는지는 까마득히 모른 채 폴은 
마블해드 해협에 살고 있는 친구와의 추억담을 신나게 얘기하고 있었다.
  "걔네 집 뒷마당은 해변과 곧바로 이어져 있었거든. 그래서 우리 둘은 항상 
잔디밭을 굴러내려가 바닷물에 몸을 담그곤 했지. 누가 먼저 바다에 도착하나 
내기를 하면서 말야. 하지만 나중엔 그런 장난도 못했어. 우리 둘이 하도 심하게 
장난을 하니까 그 친구 부모님이 보다못해 비탈 끝에 울타리를 치시더라구.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위험한 장난이었지. 그때 누가 이겼는지 알아? 항상 내가 
그 친구보다 앞서 물에 뛰어들었어. 그때가 처음이었어.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는 
걸 사람들이 인정해준 때가 말이야."
  로라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소매치기 같다는 농담에 자신도 모르게 
당황했던 로라는 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편안한 기분에 잠기고 
있었다.
  "그 울타리가 싫어서 그렇게 여행을 자주 하는 거예요?"
  "글쎄, 생각 못했던 질문인데. 시간 내서 생각 좀 해봐야 되겠는 걸. 울타리를 
싫어한다는 소린 맞는 말이야. 문을 이용하기 보다는 항상 울타리를 넘어 
다녔을 정도니까. 당신도 그래요? 아까 암초 위로 뛰어다니는 거 보니까 아주 
잘할 것 같은데."
  "잘 넘어요. 옛날에 해봐서. 지금은 실력이 어떤지 모르겠지만요."
  "나도 마찬가지지, 뭐. 우리 언제 시합 한번 해볼래?"
  "우리가 늙었다는 걸 증명해보려구요?"
  "아니, 할 수 없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로라는 미소를 지었다.
  "그럴싸하게 들리는데요."
  "자신 있어요?"
  "그럼요."
  부두 위에선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노란 달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어선들을 신비롭게 비추고 있었다.
  "원한다면 지금 보스턴에 데려다 줄게. 여기 더 있고 싶으면 좀더 있고..."
  "좀더 있고 싶어요."
  그는 로라의 손을 들어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친구 집이 비어 있을 거야. 주말마다 이용하는 집이거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얼마나 자주 그 집을 이용하는지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과거가 있을 바에야, 그를 만나기 전의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폴의 친구 집은 마블헤드 해협 맨 끝에 있었다. 마블헤드만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좁다란 지역에 올라가 있는, 회색 지붕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저택이었다. 
바다 건너편으로 바블헤드시가 뿜는 빛이 아스라하게 보이긴 했지만, 폴이 모는 
차 앞 정면도로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연락을 해놓지 않아서 당신을 편하게 모실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아침식사도 직접 준비해야 될 텐데."
  로라는 어둠 속에서 폴에게 미소를 보냈다.
  "당신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믿음이 강한 자여, 그대는 여자이니라! 내가 요리할 줄 모른다면 어쩔 거야?"
  "날 굶기기야 하겠어요?"
  껄껄거리며 차에서 내린 폴은 뒷좌석에서 로라의 가방과 자신의 가방을 
끌어냈다.
  "열쇠가 어디 있을 텐데... 어디였더라? 현관 조명등 아래였나? 기억이 잘 
안나는데..."
  오랫동안 여길 안 왔나봐. 로라는 그의 과거를 생각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을 
떠올렸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약한 곰팡내가 풍겼다. 거실로 들어가 불을 밝힌 폴은 
창문을 열어 통풍을 시켰다.
  "부엌은 저 문 바로 뒤에 있어. 뭘 졸 먹을까? 아니면 가볍게 한 잔 할래?"
  로라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식당에서 느꼈던 전율이 다시 몸을 휘감았다. 
그녀는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먼저 이층으로 올라가자."
  로라 허리에 팔을 두른 폴은 구녀를 둥글게 올라간 계단으로 이끌었다. 
발걸음을 맞춰가며 두 사람은 천천히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는 큰방으로 
들어갔다. 폴이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살며시 돌린 순간, 로라는 아주 
자연스럽게 두 팔로 그의 등을 안았다.
  "이주 동안..."
  그는 말끝을 흐리며 로라의 입술을 찾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난..."
  폴은 그녀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혀로 로라의 입술을 벌리며 부드럽고 
강하게 그녀 입 속으로 탐험을 해나갸ㅆ다. 로라는 그의 혀끝에서 쌉쌀한 
코냑향을 맡을 수 있었다. 길고 긴 입맞춤이었다.
  폴이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한 순간, 로라는 가쁜 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좀 앉았으면 해요."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침대가 저기 있는데."
  그들은 은색리본처럼 달빛이 서리서리 스며든 침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네 
가장자리 위에 흰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키 높은 침대 위에는 섬세하게 세공된 
누비이불이 있었고, 바로 옆에는 등받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침대 위로 로라를 
사뿐히 들어 올린 폴은 다시 입술과 얼굴을 더듬기 시작했다.
  "오, 내 사랑 나의 로라..."
  로라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열정으로 
그녀는 폴의 입술과 전신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가 잠바를 벗는 동안에도 
로라의 열 오른 손가락은 잠바 속의 셔츠단추를 성급하게 마구 뜯어냈다. 폴이 
원피스를 어깨 밑으로 내려 발끝으로 빼내는 순간에도 로라는 쉬지 않고 그를 
애무했다.
  어깨와 팔에 탄탄하게 붙어 있는 근육과 가슴팍의 무성한 털을 뜨거운 
손바닥으로 정신없이 쓰다듬었다. 폴이 거의 찢어내듯 옷을 다 벗는 동안 
로라의 손은 뜨겁게 움직였다.
  하얀 달빛이 방안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로라의 순백색 살결과 폴의 검게 탄 
등판에도 흰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가슴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열정에 로라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가만히 
누어 있지 못할 만큼 그녀의 몸은 달아오르고 있었다.
  "제가 너무 급하죠?"
  로라는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그런 말은 필요없어. 로라, 내 사랑. 우린 지금 서로를 원하고 있어. 기쁨을 
서로에게 주기 위해..."
  "맞아요. 당신을 원해요."
  폴의 속삭임이 끝나자마자 로라는 열정적으로 그를 애무해 갔다.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그의 입술과 혀를 목마른 사람처러 핥았다. 그녀는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폴을 느끼기 시작했다.
  폴은 로라의 속옷을 밑으로 잡아 내렸다. 시원한 공기 속에 다가오는 따스한 
감촉. 폴의 손놀림에 로라는 방안 가득 비명을 터뜨렸다.
  그는 입으로 그녀의 젖무덤을 찾았다. 그의 입술과 혀 끝 바로 밑에서 유두가 
단단하게 익어가는 동안 터져나오는 기쁨을 참지 못해 그녀는 폴의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 폴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축축하고 은밀한 곳에 닿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애무하던 손길을 멈춘 폴은 팔꿈치에 몸을 실은 채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자들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일 때 익숙한 손길과 
다양한 체위로 기쁨을 나누곤 했었지만, 로라는 지금껏 상대해온 수많은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여겨졌다. 그전의 여자들은 성애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아는 여자들이었다. 그러나 로라는 그렇재 않았다. 성적으로 뜨겁게 
부풀어오르면서도 거의 투박할 정도로 기교가 없었고, 강하게 원하면서도 뭔가 
두려워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욕말 가득한 여인이자,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야성적인 소녀 같았다. 그녀가 단지 남자를 원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원하는 
건지에 의문이 들자 폴은 자신도 모르게 애무의 손길을 멈추었다.
  "왜 그래요?"
  로라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폴의 눈동자를 
찾았다. 그러나 달빛에 그늘진 그의 얼굴은 검은 마스크를 쓴 듯 검게 보일 
뿐이었다.
  "폴, 당신을 원해요. 당신의 모든 것을 느끼고 싶어요. 이런 기분 처음이에요. 
이렇게 강하게 원해본 건... 이럴 줄은 전혀 몰랐어요. 이렇게 뜨겁고..."
  "오, 로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폴은 로라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긴머리카락, 부드러운 이마, 큰 눈을 가린 채 촉촉하게 닫혀 있는 속눈썹 위로 
폴은 차례차례 나비날개처럼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난생 처음 사랑에 빠진 
소년과 같은 열정으로 그녀를 어루만졌다. 스스로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한없이 빨려 들어갔다. 그녀는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성숙한 
여인이었다. 폴의 손길은 점점 야성적으로 변해갔다. 팔꿈치에 무게를 실은 폴은 
달빛 아래 아름다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로라의 두 손과 입술은 그의 가슴과 
단단한 복부를 끊임없이 쓸어내렸다. 한치의 공간도 없이 두 사람은 강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다시 몸을 실어 두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든 폴의 혀가 
날렵하게 움직이는 순간 로라는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고 하나로 변한 그들의 육체는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8장
  회색 철제 캐비닛과 직원용 철제 책상들, 타자기가 놓인 보조책상들이 창없는 
사무실을가득 메우고 있었다. 로라의 책상 역시 진회색 철제로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사무실을 나가면 휘황차난하게 빛나는 로비가 있다는 사시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파리한 형광등이 깜박이는 사무실은 너무도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언제 여기도 때깔 나게 만들어야 될텐데."
  한 달에 두세 번씩 뜬구름 잡는 식으로 말을 던질 뿐, 쥘 르클레어는 바쁜 
업무만 핑계대고 사무실 개조를 전혀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대형 호텔을 관리하는 감독관은 모든 걸 철저하게 해야 하는 직책이라는 걸 
명심하도록 하시오."
  로라의 첫 출근 때 호텔을 관장하고 있는 지배인 쥘 르클레어가 한 말이었다.
  까마귀처럼 새까만 정장에 빨간 조끼, 정갈하게 다듬어진 콧수염, 가볍게 물결 
진 은색 머리카락의 쥘 르클레어는 로비 중앙에 있는 멋진 호두나무 책상에서 
호텔 업무를 보고 있었다. 매일 아침 그의 워터포드 꽃병에는 싱싱한 꽃이 새로 
꽂혔고, 뾰족하게 깎인 연필들은 키를 나란히 한 채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책상 위에 깔린 색유리판은 얼굴에 있는 점이 보일 정도로 반짝반짝 닦여 
있어야 했는데, 그는 서류 결재를 하다가도 책상 유리에 나타난 얼굴을 
만족스런 표정으로 들여다보곤 했다.
  "근무시간은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다섯 시까지오. 물론 더 오래 일하고 
싶으면 해도 좋아요. 열심히 배우는 것만이 감독관이 되는 지름길이니까. 나는 
시계같이 정확한 사람인 걸 명심해요. 시간은 우리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하다는 
것도 기억해요. 우리가 시간을 못 맞추면 모든 게 무너져요. 그렇기 때문에, 나 
쥘 르클레어는 하루 스물네 시간 근무를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오. 우리 
점심시간은 정확하게 한 시간뿐이오. 점심을 한 시간 줄임으로 해서 우리 호텔 
손님들이 더욱더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보다 세심하게 신경을 쓸 수 있기 
때문이지. 우리의 그런 철두철미한 봉사정신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 손님들이 
다시 여길 찾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친구들까지 데려오게 될 거요. 열쇠를 
손님들에게 넘겨줄 땐 손님들 이름을 불러가며 인사를 해야 되고, 전에 한 번 
여기 묵었던 손님이 다시 찾아오는 경우엔, 객실에 좋아하는 음료와 꽃을 
준비해 놓고, 극장 오페라나 야구장 티켓 같은 것을 원할 때마다 구해놔야 하는 
거요. 그렇게 될 때에야 우린 비로소 호텔 관리인이 될 수 있을 거요. 늘 그렇게 
생쥐처럼 조용한가보지 로라 페어차일드? 좋은 버릇이지. 배울 땐 조용하게 
듣는 게 최고니까."
  쥘은 로라에게 끊임없이 일을 시켰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로라의 
개인수첩에는 도시, 호텔, 재숙박 손님명단 등이 빼곡하게 적혀나갔다.
  로라의 아침 일과는 오웬이 일어나기도 전에 시작되었다. 여섯시 삼십 분에 
로라가 차려주는 아침을 들자마자 그녀는 알링턴가를 이십 분만에 달려 샐링거 
호텔에 도착했다. 샐링거 호텔은 그때에야 비로소 웅성거리며 막 깨어나고 
있었다.
  "모두들 좋은 아침!"
  로라가 책상에 앉자마자 쥘은 상쾌한 얼굴로 들어왔다.
  "이게 오늘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에요."
  직원들에게 한다발의 서류를 넘기며 쥘은 손님에게나 보일 듯한 미소를 
지었다.
  "로라가 할 일은 여기 따로 있어요. 아주 중요한 건데, 오늘부터 이주 동안 
좋은 날 닷새를 골라 이리니아 백작부인이 쓸 요트를 예약해놓도록. 일정을 잘 
보면서 정하도록 해요. 대금은 백작부인 비서가 여기 도착하는 대로 치른다고 
했으니까 우리 호텔계좌에서 먼저 빼내 대여비를 계산하도록. 주방장 루이를 꼭 
붙여서 보내달라고 해요. 작년에 백작부인이 그 주방장이 만든 크렘 
브뤼레(우유, 계란, 구운 사탕으로 만든 과자: 역자 주)를 한참 칭친했었으니까. 
예약이 완료되는 대로 백작부인에게 글월 올리도록 해요. 사인은 물론 내가 할 
테니까 타이핑해서 올려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달레시오 부인께서 다음주 파리로 가실 때, 디오르 매장을 
구경하시겠다고 하니까, 아니 이건 내가 직접 해야 될 일 같군. 아주 섬세하고 
예민한 문제라서 말이야. 파리에 있는 친구한테 내가 직접 부탁해보겠어요. 대신 
부인한테 이런 내용으로 편지를 써요. 이 일을 우리에게 맡겨줘서 매우 
감사드리며 편지 드리게 돼 영광이라고 말이오. 이 편지도 내가 서명할 테니까 
같이 결재 올리도록. 자, 그리고 또 뭐가 있냐 하면..."
  쥘이 혼자 떠들고 있는 동안 로라는 고개만을 까딱일 뿐 아무소리도 내지 
않았다. 중요한 업무는 혼자 움켜쥔 채 짭짤한 팁을 받아 챙기는 쥘은 로라에게 
좀체 부유층 고객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허락하지 않았다. 로라가 그런 그에게 
불만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비 쪽으로 연결된 사무실 문이 열리고 펠릭스가 나타났다.
  "좀 볼까요?"
  의문조로 끝을 올리긴 했지만 펠릭스의 말은 거의 명령조였다.
  "네, 곧 가겠습니다."
  쥘은 간드러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라, 내 자리에 좀 앉아 있어요. 손님이 원하는 건 다 받아적도록 해요. 
미소를 자주 짖고. 오래 비우진 않을 테니까."
  그는 솜씨 좋은 연극배우처럼 딱딱한 얼굴을 환하게 펴며 펠릭스에게 
다가갔다.
  "어디... 저기 창가 소파에 앉으실까요? 내 책상하고 어여쁜 우리 부하 직원을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아 좋을 듯싶은데요."
  로라는 정면 소파에 앉은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펠릭스가 다가올 때 미소를 
보냈건만, 그는 로라의 존재 자체를 거의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늘 차갑게 
대하는 그를 볼 때마다 로라는 쥘과 자신을 함께 묶어 일하게 한 오웬의 구상을 
펠릭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하곤 했다. 아침 조깅을 끝내고 
돌아오는 손님이 열쇠를 찾으러 오자 로라는 얼근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스타렛씨."
  책상 맨 위칸 패널에서 꺼낸 열쇠를 손님에게 건네며 로라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호두빵과 아침커피를 올려보내드릴까요?"
  "그래요."
  그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로라를 자세히 살폈다.
  "새로 왔죠? 얼굴은 한 번 본 것 같은데."
  "뒷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렇게 나와서 일하는 게 더 좋아 보이는데요. 프랑스풍으로 얘기하는 
노인네보다 백 배 천 배 낫지. 내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놀라워요."
  로라는 다시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왕왕거리는 댈러스 특유의 비음으로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백 가지도 넘는 주문을 해대는 윌리 스타렛을 잊다니, 
천만의 말씀. 아무리 기억력이 나빠도 당신만은 기억해낼 걸요.
  "우리 호텔에 묵고 계신 손님이신데 당연하죠. 아침 즉시 주닙해드리겠습니다. 
약속 있으시면 차량준비도 해드릴 테니 말씀해 주세요."
  주방으로 전화를 한 뒤에도 로라는 조깅을 끝내고 돌아오는 여섯 명의 손님을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그러나 꼬깃한 손수건을 손에 진 채 창백한 얼굴로 
나타난 키 작은 사내 이름만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알아낼 수 없었다. 아니 
이름은 둘째치고 얼굴조차 처음 보는 손님이었다. 당황해하면서도 로라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뭘 도와드릴까요?"
  "경비 용역회사에서 왔는데 여덟 시 정각에..."
  급작스럽게 박동질하는 심장으로 인해 로라는 그가 하는 얘기를 끝까지 다 
듣질 못했다. 결찰을 보거나 '경비'라는 단어가 들리기마 ㄴ해도 로라느느 겁을 
집어먹곤 했다. 두려워할 게 없는데, 쫓는 살마도 없는데 자신이 왜 이렇게 겁을 
먹는지 그녀로서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어느 분을 만나러 오셨다구요?"
  "아사 샐링거씨요."
  저놔로 윗층에 약속을 확인한 로라는 용역회사 직원에게 아사 사무실이 있는 
곳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아사가 무슨 문제로 경비회사 직원을 호출시켰을까 
궁금해하면서 로라는 오후 관광을 문의하기 위해 몰려드는 손님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쥘과 펠릭스가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름과 요구사항 
등을 일일이 적어가며 처리한 내용을 쥐에게 넘겼다.
  "보세요. 잘 해내고 있죠. 가르치면 꼭 그대로 한다니까요."
  쥘은 펠릭스에게 로라를 한참 칭찬했다.
  "얼굴이 예쁜 우리 로라양은 아주 훌륭하게 업무를 잘 보고 있습니다. 오웬 
샐링거님한테 이런 보석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로라, 
이젠 됐어요, 내 자릴 돌려줘야죠?"
  욕지기를 가까스로 누르며 로라는 쥘에게 미소를 보였다.
  "사무실로 가보겠습니다."
  "로라, 잠깐만 나랑 한 잔 할 수 있을까?"
  펠릭스의 뜻하지 않은 청에 매우 놀랐지만, 로라는 표정을 감춘 채 쥘을 
바라보았다. 완벽한 지배인이라고 자인하는 노인네였지만 쥘은 아직 교활한 
여우가 되기엔 모자라는 인물이었다.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쥘은 펠릭스와 
로라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 
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펠릭스와 함께 걸어가면서 로라는 계속 미소를 지었다.
  "왜 웃지?"
  "쥘을 생각하고 있으면 웃음이 나서요. 빨간 조끼하고 머리 돌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케이프에서 본 벌새가 생각나거든요. 목에 빨간 점이 박힌 벌새 
말이에요."
  한 번도 로라에게 미소를 보인 적이 없던 펠릭스가 로라의 말에 웃음을 
머금었다.
  "재미난 표현이군. 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 못 해봤는데."
  영리하군. 펠릭스는 힐끗거리며 로라를 살폈다. 똑똑하기도 하지만 아주 
매력적이야. 은회색빛 정장에 목까지 올라오는 흰 브라우스를 받쳐 입고 남자 
텍타이를 매듯 세련되게 고리 맨 진청색 실크 스카프 위에는 아이보리색 핀이 
정갈하게 꽂혀 있었다.
  삼년 전에는 빼빼 마른 데다 촌티가 줄줄 흘렀다. 펠릭스는 누가 로라를 
이렇게 세련되게 만들었는지 생각했다. 알리슨이 그랬을까? 원래 뭘 바꾸는 덴 
소질 있는 애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동물이고, 사람이고, 가족, 친구 등 
알리슨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상대를 바꾸는 재주가 있었다. 에미를 닮아서 
누구든 도와주려고 한단 말야. 쓰잘데 없게시리.
  "여기 앉지. 커피 내오라고 했으니까 곧 가져올 거야."
  로라는 줄무늬 소파에 앉았다.
  "로라가 호텔 경영에 대해 배운다는 소릴 들었지."
  "힘껏 배우려고 해요."
  "대학에서도 경영학을 배운다면서?"
  "네."
  "그렇게 열심히 이곳 저곳에서 주워 배운 뒤 뭐할 생각인가?"
  "배운 지식은 활용해야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로라는 호텔 안에 있는 보스턴 레스토랑에서 올라온 웨이터가 탁자 위에 잔 
두 개와 커피포트. 냅킨, 크루아상이 담긴 빵바구니 등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웨이터가 잔에 커피를 따르기 시작하자 로라는 펠릭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웬 할아버지께서 졸업 후 일할 직장을 알아봐주시겠대요."
  "지금 있는 자리가 어때서? 쥘과 잘 해내고 있잖아."
  "이 자리보다 더 높은 데 목표를 두고 있어요. 언젠가는 호텔을 하나 
운영해보고 싶거든요."
  "하나?"
  "일차 목표는 하나예요."
  "그 다음에 늘려가겠다는 생각인가?"
  "가능한 한도내에서 힘을 써봐야죠."
  그녀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가며 대답을 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펠릭스를 
로라는 유심히 살폈다. 표정 없는 얼굴은 여전했지만, 삼년 내내 차갑게 흐르던 
그의 목소리는 전에 비해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저한테 특별히 물어보실 말씀 있으세요?"
  "특별한 건 없어요. 그냥 둘이 얘길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쥘이 
로라를 아주 마음에 들어하고, 아버님도 똑똑한 애라 칭찬이 대단하시고, 
알리슨도 전화만 걸면 제일 친한 친구라는 로라 얘기뿐이니... 레니가 그러더군. 
요즘 젊은 여자들은 끝없이 뭘 원한다고. 로라처럼 말이야. 그래, 호텔을 원하고 
있는거지?"
  "뚜렷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없어요. 오웬 할아버지와 그런 얘기는 안 
나눠봤거든요. 작은 쪽이 되겠죠. 하지만 모든 건 다 할아버지가 결정하실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구식호텔 쪽이 되겠지."
  "구식호텔들은 한결같이 규모가 작지요."
  두 사람은 공을 서로 상대편 코트로 넘기고 있었다. 계속 말을 걸어오면서 
그는 그녀에게서 뭔가 캐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가 뭘 알고 싶어하는지, 
그것을 재빨리 캐내지 못하는 자신을 로라는 초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로라를 가로질러 다가오는 오웬을 발견했다. 그를 보자마자 로라는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기와 대화하는 도중에 일어나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펠릭스는 
로라의 옮겨진 시선을 따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오웬이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사랑스런 로라하고 펠릭스가 아침을 같이 해? 뜻밖인 걸."
  "아침 일찍 웬일이세요."
  "일이 있다면 나한테 있겠지."
  오웬은 로라가 따라준 커피잔을 들었다.
  "이제 앞으로 슬슬 나와볼 생각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보고서 올리잖습니까?"
  "그래, 잘 받아본다. 세인트 키츠에 올라가는 새 호텔 얘기 좀 들어보자꾸나."
  "무슨 얘기요?"
  "객실들이 다 작은 것 같더구나."
  펠릭스는 호텔 건물 계획을 설명했다. 객실을 작게 하는 대신 골프 코스와 
회의장에 건설비가 추가로 투자돼야 되는 이유를 그는 딱딱 끊어지는 어조로 
설명했다. 새우등처럼 몸을 구부리고 연신 손까지 흔들어가며 얘기하는 
펠릭스의 모습에서 로라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지금껏 보아왔던 차갑고 당당한 
모습이 아니었다. 호텔 건설 계획에 미심쩍은 생각을 지닌 오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펠릭스는 안쓰러울 정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오웬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운 쇳소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너야 십구 세기식 구석방을 좋아할지 몰라도 우리 고개들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게다. 요즘 손님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얻는 건 네 
방식이지만, 그 사람들은 모든 걸 다 원한다. 수영장, 헬스클럽, 골프 코스, 
대리석 로비, 프랑스 주방장, 모든 게 다 완벽하길 원하고 있어. 우린 그걸 다 
맞춰줘야만 해. 돈이 얼마가 들든 말이다. 돈이 들어간 만큼 이익이 되어 
나온다는 사업철칙도 모르는 게냐? 언제까지 너는 그 구식 발상을 지니고 있을 
거니? 벽돌에다 회반죽을 칠해놓기만 하면 손님들이 그냥 생기는 줄 알아? 그런 
식으로 호텔을 수백 개 지으면 뭘 하겠어."
  오웬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 호텔들을 이제내가 맡겠다. 조만간 어떻게 그 호텔들이 변하는지 보게 될 
게다. 오래전부터 원했던 일이다. 여태껏 새로운 빌딩을 짓고 체인을 늘려가느라 
젊음 다 보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게 다시 원기를 가져다 준 젊은이가 
있으니... 잘된 일이지. 내 계획이 못마땅하면 내가 눈 감고 난 뒤에나 네 원대로 
새 호텔을 지어봐. 게딱지만한 객실에 대형 수영장이 달린 멋진 호텔을 말이다."
  펠릭스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도 손해보는 건 아니잖니. 그 호텔 네 군데 다 수지타산은 맞는다. 
여태껏 적자 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오웬은 아들 펠릭스에게 은근한 눈길을 보냈다.
  "뭣 때문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게냐? 그 네 곳은 완전히 내게 속한 호텔 
아니냐? 세계 곳곳에 있는 쉰여덟 개 샐링거 체인하곤 완전히 독립돼 있어."
  "네 군데 다 미국 최고 도시인 뉴욕 시카고 필라델피아 워싱턴에 있는 
호텔입니다. 제가 그곳에 현대식 호텔을 만들어서 아버님과 경쟁을 할 순 
없잖아요. 구식 호텔 때문에 그 황금어장을 놓치고 잇어요. 다른 그룹들이 
그곳에서 돈다발을 긁어모으고 있는데 샐링거 호텔만 이급으로 떨어져 낡은 
인상만 심어주고 있단 말씀입니다."
  오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했다. 우리 샐링거가 최고가 돼야지. 이급은 될 수 없단 소리야 백 번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손을 쓰겠다는 거 아니냐?"
  "어떻게요? 저한테 손끝 하나 못 대게 하시면서요. 아버님의 독립사업이란 
이름 아래 자물쇠로 꽁꽁 잠 놓고 계시잖아요."
  "옛 정취를 살리면서도 충분히 일급으로 키워갈 수 있다."
  오웬은 로라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런 일을 할 만큼 난 아직 젊다. 넌 어찌 생각해?"
  펠릭스는 졌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겨렸다.
  "노인네 취미는..."
  들릴락말락 낮게 중얼거린 뒤 펠릭스는 좀더 큰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바빠서 이만 가봐야 되겠어요. 경비회사 직원이 왓다고 하는데 
좀 만나봐야 되겠어요."
  "네, 아까 봤어요. 아사를 찾아왔다고 하길래 이층 사무실을 가르쳐드렸는데."
  "경비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냐?"
  "큰 문제는 아직 없지만 대비를 해야겠어요. 지난달 호텔 앞에서 손님이 
둘씩이나 소매치기를 당했대요. 청원경찰을 고용해서 이주 동안 주변을 
지키라고 했는데도 그 머저리 같은 경찰관 바로 코앞에서 소매치기가 
일어났어요. 아예 단단하게 손을 써 놓든가 해야지..."
  "그래, 그런 건 확실하게 해두거라. 우릴 믿고 호텔에 묵는 손님들인데 빨리 
조치를 취해야지. 결찰관 숫자도 더 늘려야지?"
  "필요하면 열두서넛으로 늘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예 결비용역 회사를 
불렀어요."
  "경비원들이 앉을 수 있을 만한 자릴 만들어주는 게 어떨까요?"
  두 사람은 동시에 로라에게 얼굴을 돌렸다. 펠릭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로라는 펠릭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지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서서 근무하는 게 효율적이지 않는 것 같아요. 눈 위치가 너무 높게 
고정돼버리거든요. 만약 앉아 잇으면 시선이 바로 호주머니 위치에 오게 되니까 
소매치기가 나타나더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텐데요."
  "기가 막힌 생각이다, 로라!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해냈니? 펠릭스, 지금 당장 
경비원들한테 의자를 갖다 주거라."
  펠릭스는 오웬의 유난스러운 칭찬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로라의 아이디어는 
고려해봄직했다.
  "그렇게 한 번 해보는 것도 괜찮겠죠."
  "분명 성공할 게다."
  오웬은 로라에게 활짝 웃었다.
  "굉장한 생각을 해냈구나 로라. 아주 좋았어."
  그때 갑자기 여자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아침 공기를 날카로운 칼로 찢는 
듯한 소리였다. 순식간에 로비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총알처럼 튀어 일어난 펠릭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뚜쳐나갔다.
  "가봐야겠어요."
  로라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래 어서 가봐라."
  오웬의 숱 많은 눈썹은 걱정 탓인지 한 군데로 모아져 있었다.
  "우리 호텔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여태껏 한 번도 없었는데..."
  오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로라는 웅성거리는 로비로 향했다. 한 
여인이 의자 위에 꼬부리고 앉아 있었고, 펠릭스는 매우 화가 난 표정으로 
여인을 내려다보고 있ㅇㅆ다.
  "도대체 얘길 안하니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어야지. 의사도 싫고 경찰도 
싫다니, 도대체 어쩌란 말이야."
  여자는 두 손을 턱에 받치고 눈을 굳게 감고 있었다. 오십 후 반쯤 됐을까. 
로라는 그녀의 진한 화장기와 염색머리, 값 비싼 의상과 보석 등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을 물어뜯으며 그녀는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총총걸음으로 로비로 들어온 쥘은 허리를 구부려 여자의 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로라를 보자 뒤로 가만히 물러서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뜨거운 차를 가져올게요."
  로라는 아기를 달래듯 부드럽게 소근거렸다.
  "일어날 수 있으시겠어요?"
  여전히 눈을 감은 여인을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로라는 펠릭스에게 차를 
부탁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듯 씩씩거리며 서 있는 
펠릭스는 우선 로비분위기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쥘에게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쥘, 차 좀 가져와요. 가볍게 요기할 것도."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사태 돌아가는 것을 눈치챈 쥘은 아무 말없이 
뒤축을 돌려 뛰어가듯 멀어져 갔다.
  "제가 부축해드릴 테니까 일어나 보세요."
  로라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부드러웠다.
  "힘드시면 우리가 라운지로 안아서 모시겠습니다. 얼마나 다치셨는지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다치진 않았어요."
  여자는 슬쩍 눈을 뜨고 로라르 쳐다 보았다.
  "여라 군데 세게 맞긴 했지만 원래 습관이..."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 하기를 계속 반복했다.
  "여기 직원인가요?"
  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을 떨어서 미안해요."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세상에, 사람들이 뭐라고 지껄여댈까?"
  "상관없으니까 마음 놓으세요."
  "아가씬, 몰라요. 너무 어려서 모른다니까."
  그녀는 로라에게 의지한 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자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짙게 덧바른 파운데이션 위로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죄송해요. 미안합니다. 오면 안되는 줄 알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짐했는데... 댈러스에 그대로 있어야 했는데... 그 사람이 뭘 하든 모르는 
척하고 살아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오고 말았어요. 그 계집을 다시 보지 
않겠다고 해놓구선 호텔방에 불러들여 그 짓을 하는 걸... 내가 알고서도..."
  "그만하세요. 이따 말씀하는 게 더 낫겠어요."
  로라는 조금 차가운 어조로 그녀의 말을 막으려 했다.
  "침대 속에 있더라구. 홀랑 다 벗은 채로 말이야. 갈보가 남편이 조깅하고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그녀는 갑자기 깔깔 웃기 시작했다.
  "아침 새벽에 아주 좋은 운동이겠지. 땀을 흘리며 둘이서 레슬링할 테니 아주 
근사한 스포츠지. 윌리 스타렛이 건강을 돌볼 새도 없이 일에 매달린다구? 개 
같은 소리 하지도 말라 그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하나님 맙소사. 그렇게 
다듬은 체력으로 날 여기서, 이 로비에서 때렸어. 나만 보면 주먹으로 때려서..."
  쥘이 쟁반 든 종업원과 달려왔을 때 여인은 배를 잡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됐어요... 여기 놓고... 부인, 마실 게 왔어요."
  로라는 컵에 차를 가득 따랐다.
  "스타렛 부인, 그만 말씀하시고 이걸 마셔보세요. 이 비스킷도 좀 
들어보실래요? 조금 있다 방을 준비해드릴게요. 짐을 갖고 오셨나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라는 눈물 때문에 시커멓게 번진 마스카라 자국을 
손수건으로 부드럭베 닦아내기 시작했다.
  "자, 차 드세요 스타렛 부인."
  "지니라고 불러요."
  로라는 생긋 웃었다.
  "로라 페어차일드예요. 제가 방을 준비하는 동안 여기 잠깐 계실 수 있겠죠? 
얘긴 나중에 하죠. 원하신다면요. 샤워하고 좀 쉬고나면 기분이 훨씬 나아지실 
겁니다."
  "날 두고 가지 말아요. 얘길 했으면 해요. 아가씨가 직접 날 방으로 
데려가줘요."
  충혈된 눈과 지워진 화장 자국으로 지저분한 얼굴이었지만 여인의 어투에서는 
도도하고 당당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러겠습니다."
  로라는 쥘의 재빠른 손짓을 보았다.
  "잠깐 기다리세요."
  버지니아 스타렛에게 고갯짓을 한 뒤, 로라는 로비를 가로질러 예약부 책상 
쪽으로 달려갔다.
  "아주 능숙하구만. 저런 직원을 두게 돼서 행복하겠군, 쥘."
  펠릭스는 로라의 행동을 비꼬듯 말했다.
  쥘 뒤편에서 모든 걸 지켜본 오웬은 굳어 있는 쥘의 어깨로 친근하게 팔을 
올렸다.
  "훈련 잘 시켰네."
  쥘은 오웬의 칭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 네. 물론 힘들었지만 직원들을 교육시키는 게 제 본연의 임무라 생각하고 
열심히 했습니다. 더구나 샐링거씨가 귀여워하시는 로라 페이차일드양이 여간 
똑똑한 아가씨가 아니라서... 그녀가 그렇게 교육된 것을 볼 때마다 
자랑스러움을 느낍니다.
  다시 조용해진 로비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버지니아 스타렛을 
바라보며 오웬과 쥘은 각자 나름대로 뿌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오웬의 숙소 주방에서 저녁을 한 뒤, 로라는 폴에게 쥘 르클레어와 함께 한 
호텔 근무를 일일이 보고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교육된 것을 볼 때마다 아주 자랑스러움을 느낍니다."
  로라는 쥘의 고갯짓과 플랑스식 억양을 그대로 흉내냈다.
  "똑같애!"
  폴은 로라와 함께 박장대소했다.
  "어떻게 똑같은 줄 알죠? 호텔 직원들을 눈여겨보지 않았다면서요."
  "지금은 달라. 눈을 부라리며 다닌다니까. 가끔씩 시간 있을 때마다 호텔에 
들러 구경하지. 로라의 일자리가 혹 불편하지 않나 그걸 살피려구."
  미소를 짓고 있긴 했지만 로라의 얼굴은 심각해 보였다.
  "만약 불편하면 어쩌시려구요?"
  "쥘 모가지를 비틀어서 바닷속에 집어 던진 다음 그곳에서 가재랑 놀라고 
할까?"
  "보스턴 시만들 입맛을 버려놨다고 가재 양식장 주인들이 죽도록 패대기 
치겠네. 아서요, 싸울 힘도 없으시면서."
  폴은 머릴 가볍게 저었다.
  "그냥 당신이 보고 싶어서 갔댔어. 내가 하루 종일 당신 생각을 하는 동안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일을 하나 궁금해서 말이야. 자, 얘기 계속해봐요. 그 
여자한테 방을 얻어주겠다고 했을 때 쥘이 자화자찬하는 걸 어떻게 알아는데?"
  "일부러 천천히 걸었거든요. 오웬한테 하는 소릴 들었어요."
  "이런 똑똑이 여왕 같으니라구. 등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항상 알고 
사는 사람은 당신뿐일거야."
  폴은 로라의 잔에 커피를 부었다.
  "일이 마음에 드나보지."
  "좋아요. 하지만 쥘은 내가 고객드랗고 접하는 걸 싫어해요. 하지만 스타렛 
건은 시키기도 전에 내가 앞질러서 그냥 해결해버렸어요. 속으로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 매일 그렇게 내가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일만 생기면 너무 신날 
거예요."
  "정신 없을 텐데. 혼란스럽기도 할 테고..."
  "손님들 문제를 팍팍 잘 해결해주어야 멋진 여왕이 될 수 있는 걸요."
  "이미 당신은 나에게 아름다운 여왕인걸."
  폴은 그녀에게 바싹 다가갔다.
  "그러니까 날 시험해보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이 분야에서 내가 성공할 수 
있나를요."
  "이 분야? 배우 되는 건 어쩌구?"
  "그건 취미로 하는 거잖아요. 연극은 취미라는 말도 몰라요?"
  "그런 오웬 말이잖아?"
  "이젠 내가 하는 소리예요. 물론 좋아하기는 하지만 내 인생전체를 진짜 
바꿔주진 않잖아요. 나한텐 시간이 없어요. 연극보다는 이 길이 더 빠르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구요."
  "난 호텔사업에 문외한이야. 그쪽은 외인지대라구."
  "단지 업무가 낯설다 뿐이지 다른 건 없잖아요. 모든 직장이 처음엔 다 
그렇죠."
  "하지만 난 모든 자리가 낯설어. 한 가지 마음에 두고 하는 일이 없잖소. 
더군다나 호텔사업이란 자신보다는 남을 만족시키기 위해 있는 직장 아닌가?"
  "당신에게도 만족할만한 일이 있잖아요. 사진 말예요. 계속 해 보세요. 끈기 
있게, 열심히..."
  "지금으로선 필요성을 못 느끼는데."
  "돈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로라, 내 인생이 어때서 그래? 난 만족하는 걸."
  "전번 파티 때 그랬잖아요. 모든 걸 다 갖고 있지만 계속 뭔가를 또 
원한다구요."
  "당신은 그때 내가 그러는 걸 이해 못하겠다고 했잖아."
  "지금은 이해해요. 원하는 걸 모두 가진 듯해도 당신에겐 중심이 없어요. 자기 
인생에서 소중한 걸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있잖소."
  "날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당신을 장난으로 사귀는 것 같애?"
  "그런 건 아니지만... 난 지금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폴 젠슨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친구들하고 스포츠를 하거나 보트놀이, 독서도 했다가 기분 
내키면 이것저것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그것도 그만두고 찍어놓은 필름조차 
현상하지 않을 때도 많잖아요. 당신은 내 일이 끝날 때까지 그냥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처음도, 중간도, 끝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당신이 열정적이고 현명한 여자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은 필요없는 
얘길 하는 것 같은데. 난 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 아주 
만족스럽게 살아가고 있다니까. 부족한 것 모르고 근심 걱정 없이 말이오. 커피 
더 하겠소?"
  뭔가 얘기를 하려는 듯 주저했지만 로라는 폴에게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각각의 잔에 커피를 채운 뒤 폴은 적갈색 태양빛이 내려앉은 오웬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폴은 논쟁을 가급적 피하라는 부친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었다. 자기 
식대로 생각하고 타인을 자기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쓰는 바로 그 순간부터 
논쟁이 시작된다고 얘기했던 토마스 젠슨은 논쟁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엇다.
  로라는 말없이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로라 역시 다툼을 원치 않았다. 두 사람 
사이는 더 바랄 나위없이 좋았다. 구ㄸ이 문제를 만들어낼 것까지 없을 것 
같았다. 집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주변에는 점차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오웬과 
로자는 케이프로 숙소를 옮긴 뒤였고, 집을 돌보는 고용인들도 여름휴가에 
들어가 있었다. 그밖의 샐링거 가족들도 아침에 여름휴가를 위해 보스턴을 떠난 
상태였다. 호텔 근무로 샐링거 식구들과 케이프로 가지 못한 로라는 주말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오웬의 비콘 힐 저택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아침에 식구들이 다 떠날 때만 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큰 저택에서 혼자 밤을 지새야 한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로라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삼년 전 방 하나 
없이 생활하던 뉴욕 시절, 그때는 그렇게 혼자 되길 원했는데, 이제 이 큰 집을 
혼자 지키면서 무서움에 떨고 있다니. 스물두 개의 방을 가진 오층짜리 
대저택을 나 혼자 지켜?
  "왜 그렇게 부산을 떨고 그래?"
  접시를 있는 대로 다 꺼내놓고 닦고 훔치는 로라에게 폴은 농담투로 
얘기했다.
  "그냥 두면 가정부가 어련히 알아서 치울까봐."
  "밤새 접시들을 이대로 놔둘 순 없어요."
  "왜?"
  "그냥 놔두면 안될 것 같아서요."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나보지?"
  "우리 엄마만 그런가요. 딸이 설거지 그릇을 쌓아놓고 잠드는 걸 좋아할 
엄마가 어디 있어요?"
  "엄마랑 함께 설거지를 하곤 했소?"
  "네."
  그 말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엄마와 함께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곤 
했다. 그러나 둘이 나눈 얘기는 전혀 기억 나지 않았다. 부모님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벤이 영원히 자신과 동생을 돌보겠다고 한 순간 그런 기억은 눈물과 
함께 수챗구멍으로 모두 다 흘러가버린 듯했다.
  "그래? 그럼 나도 같이 해봐야지."
  폴은 그릇을 화강암 싱크대 위로 날라왔다.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단 둘이 
설거지 놀이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의 영상을 폴은 마음의 눈으로 읽고 있었다. 
로라의 긴 밤색 머리카락 위위에 내려 앉은 따스한 전등 불빛을 보며, 폴은 
마블해드 해협 빈집에서 느꼈던 열정을 새롭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에게 로라는 
항시 새로운 여자였다. 처음 관계를 가진 후 몇 주가 지나면 상대에게 싫증을 
느끼던 그로서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로라와 지내는 시간은 그에게 늘 신선한 
샘물이었다.
  "로라."
  폴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녀는 그의 두 팔에 포근히 안겨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
  귓바퀴에 쏟아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산바람처럼 하늘거렸다.
  "혼자 여기 있는 게 너무 이상..."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두 사람은 서로 어깨를 포갠 채 위층 
로라방으로 올라갔다.
  폴과 로라는 그렇게 황금처럼 빛나는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로라가 일을 
끝내고 나오면 폴은 호텔 주차장 차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외식을 하거나 비콘 힐 식당의 둥근 마호가니 탁자에 앉아 키 큰 촛대 
위의 부드러운 양초 불빛 아래에서 사랑의 밀어를 나누었다. 저녁을 먹고나면 
콘스트나 연극 구경을 가기도 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하버드 
광장, 공원 숲길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밤을 새도록 사랑을 나누다 그들은 지쳐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어슴프레 
잠이 깨면 그들은 황홀한 아침을 찬미하는 기분으로 또다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고나면 찬란한 아침 햇살이 스며든 주방으로 내려가 서로를 위해 아침을 
만들었다. 매일 아침 로라를 호텔까지 태워다 준 후, 폴은 암실이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로 달려갔다. 어느날 아침 침대 위에서 그녀를 주제로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주말은 폴이 가장 싫어하는 날이었다. 도둑이 들기 전 오웬이 선사한 별채에 
짐을 풀며 따로 떨어져 있자고 하는 로라에게 폴은 볼멘소리로 반대를 했다.
  "왜?"
  "식구들이 다 모여 있는데 어떻게 같이 방을 써요? 꼭 그분들 앞에서 일부러 
과시하는 것도 같고. 더군다나 당신 아버님은 날 인정하지 안하시니..."
  "아버님은 당신을 좋아해."
  "나 때문에 당신이 마음을 잡은 것 같아 그런 거겠죠.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까 주목하고 계신다구요."
  "그걸 도대체 당신이 어떻게 안다구 그래?"
  "알리슨이 그랬어요."
  "알리슨 그 녀석 입조심을 시켜야겠구남."
  "왜요? 내가 당신 가족들이 뭘 생각하는지 알면 안되는 거예요?"
  "알 걸 알아야지."
  "당신은 아버지를 사랑하잖아요. 그분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죠? 내 눈이 
틀림없어요."
  "우리 식구 모두 내가 보스턴에서 당신과 함께 있는 걸 알고 있어."
  "어쨌든요. 아침에 방문 열고 나와, 여기 보세요, 우리 지금 한 침대에서 자고 
나오는 길이예여.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싫단 소리예요."
  "그게 더 솔직하고 낫지 않아?"
  "가끔씩 솔직하지 않은 게 나을 때도 있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순간적으로 어두운 빛이 로라 눈에 떠올랐지만 폴은 모르는 척 그녀 어깨를 
감싸안았다.
  "당신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아? 생전 처음으로 보스턴의 칠월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라니까. 일주일에 닷새를 거기서 꼼짝 않고 보내잖아."
  둘은 서로 마주보녀 크게 웃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폴은 그녀의 말이 맞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굳이 가족들 
앞에서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에 그는 꿈과 
혼상을 맛볼 수 있었고, 자신을 사랑하는 여잉ㄴ의 정열과 함께 그 환상은 더욱 
깊고 화사하게 피어났다. 폴 자신도 스스로 로라의 사랑을 확인했지만, 알리슨도 
폴에 대한 로라의 마음을 그에게 확인시켜주었다.
  알리슨은 혼자 체드와 함께 캐나다를 여행하고 있었지만 전화를 통해 
식구들과 함께 있었을 때보다 더 자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오빠를 미치게 사랑하던데."
  어느날 아침 루이스 호숫가에서 전화로 폴을 깨운 알리슨은 로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너무너무 사랑해서 숨기려 해도 자꾸 내 눈에 걸려드는 걸. 알아? 몰라?"
  "알아. 하지만 이렇게 제삼자가 확인시켜주니까 기분이 더 좋은데. 그래, 
재미있니?"
  "별로야. 캐나다로 지금 날아와라. 같이 재미있게 놀고 싶어. 심심해."
  "알리슨, 체드하고 단둘이 재미있게 놀지 못하면서 어떻게 결혼까지 생각하니? 
  "질문 잘 했어. 오빤 로라하고 결혼할 거야?"
  "생각 안해본 질문이다."
  "에이, 빼긴."
  "솔직히 말하자면 생각 안해본 건 아닌데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애. 지난 
주 로라와 통화했다면서 로라가 무슨 소리 안하든?"
  "아니. 하지만 모두 다 한 마디씩 하던데. 두 사람 다 뜨겁게  어 있다면서? 
특히 폴 젠슨이란 사람이. 이거 얘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모두 다라니?"
  "그래,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다 그러더라구. 엄마는 오빠가 예전에 비해 자릴 
잡은 듯 신중해졌다고 햇어. 아빠는 매일 호텔에서 오빠를 본다고 하던데. 
로라를 데려다주고 데려가고 한다면서? 그나저나 아빤 일 안하고 창밖만 
내다보나봐. 그리고 그밖에 소식통에 의하면 해변가, 낸터켓까지 왕래하는 보트 
위, 포도밭 구석, 별채 베란다 등등에서 서로 코를 비벼댄다면서? 스파이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 줄 모르고, 쯧쯧쯧."
  "넌 체드를 사랑하니? 시월에 결혼한다면서?"
  "글쎄, 그렇게 될지 모르겠어. 확신이 안가. 어쨌든 대관식 같은 결혼식은 안할 
거야. 체드하고 결혼하겠다는 마음이 정해지면아주 조용히 소리 소문없이 할 
거야."
  "나 한텐 미리 귀띔해주는 거지?"
  "그럼. 오빠한텐 연락해야지. 꼭 와야 돼. 로라도 마찬가지야. 걔랑 얘기 좀 
했으면 하는데, 자꾸 피하는 것 같애. 내가 사랑하냐고 물어서 화났어?"
  "내가 왜 그런 일로 너한테 화를 내겠니? 체드와 문제가 있다면 얼마든지 
전화해라. 나도 로라에 대한 얘길 너한테 하고 싶으면 전화할게."
  "그애 오빠한테 어울려. 오빠 요즘 아주 좋아진 거 몰라? 옛날 하고 많이 
틀려졌어. 진득한 거 있지. 일이 주 넘게 우리하고 함께 있던 때가 언젠데 그래? 
얼마나 좋아? 어른들도 좋아하구. 난 로라를 사랑해. 오빠도 사랑하구. 둘 다 잘 
됐으면 좋겠어. 마음 아프게 하는 일 없이. 그런 일 있으면 누구 편 들어야 할 
지 고민해야 되잖아. 그러니까 둘 다 싸우지 말고 착하게 지내. 알았지?"
  알리슨의 농담 섞인 진담에 폴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둘 다 노력하고 있어."
  폴에게 로라와 어느 정도로 깊어져 있는가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별장을 떠나기 위해 모두가 분주하게 준비를 시작하던 구워 어느날, 오웬은 
처음으로 로라에게 폴에 관한 얘기를 넌지시 꺼냈다.
  보스턴 서재로 가져갈 책들을 정리하기 위해 하나씩 책 내용을 살펴가며 
상자에 넣던 오웬은 로마 역사물을 다룬 조각 책자를 손에 쥔 채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이번 여름은 아주 멋지게 지나간 것 같지?"
  마룻바닥에 앉아 있던 로라도 환하게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정말 그랬어요. 쥘한테 배운 것도 너무 많구요. 언제고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될 것 같애요."
  "난 쥘 얘길 하려든 게 아닌데."
  오웬은 로라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네가 굳이 쥘 얘길 하겠다면 들어주마."
  "죄송해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폴 얘기 하시는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여태껏 한번도 말씀을 안하시길래 
저희 두 사람을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너희 둘이 같이 자는 일 말이냐? 아니면 사랑한다는 사실 말이냐?"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는 로라의 머리에 오웬은 조용히 손을 얹었다.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기울어가는 세월 속에 살고 있긴 
하다만 내 눈은 아직 살아 있단다. 레니도 얘그를 하더구나."
  "다들 우리 얘길 하시나보죠?"
  "그럼 하구말구. 남 시선 아랑곳 없이 둘이 손 붙잡고 다니는 젊은 남녀를 
보고 사람들이 가만 있겠어? 이건 농담이고. 어쨌든 네가 날 찾아와 속마음을 
털어놓길 바랐다."
  "죄송해요. 그러고 싶었어요. 하지만 찬성하시지 않을 것만 같아서."
  "같이 자는 일 말이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판사가 방망리 두드리듯 시원하게 인정을 했을까마는... 레니가 
그러더라. 요즘 젊은이들 모두 다들 그런 식으로 시작한다면서? 놀라긴 했지. 
하지만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관습이나 관례는 바뀌는 일 아니겠니? 어느 
게 좋은 건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아는 것이고. 하지만 그래도 난 옛날 식이 더 
좋은 것 가다. 내 젊은 시절에 대한 일종의 향수겠지. 한 젊은이가 한 젊은 
여인에게 약혼 전까지 키스할 생각조차 못하던 시절 말이다. 약혼 후에도 여자 
허락을 받고서 키스를 하던 때지. 심지어 허락을 못 받아내는 젊은이도 있었는 
걸."
  "아이리스에게 허락해달라고 하셨나보죠?"
  오웬의 입가에 희마한 미소가 어렸다.
  "생각해보니까 우린 그때 둘 다 똑가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어. 
허각해달라, 허락해준다, 그런게 없었으니까."
  "그러고나서 결혼신청을 하셨어요?"
  그는 벽에 걸린 사진을 깊게 응시했다. 케이프 해변가, 마디가 뒤틀려 올라간 
나무 옆에 서 있는 아이리스의 사진이었다. 머리카락을 뒤로 길게 늘어뜨린 채 
햇빛을 막느라 차양으로 만든 손으로 눈을 가리고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 확실해. 키스해도 되냐고 묻진 않았어. 어느날 밤이었지. 아이리스 
침실에 둘이 앉아 있을 때였을 거야. 바로 건너편은 장인어른 서재였는데 문이 
열려 있었어.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읽고 계시더군. 우리 둘이 키스할 시간을 
주시기 위한 배려 같았어. 그래서 우린 입맞춤을 나눴단다. 그런 다음 둘이 같이 
살 집에 대해서 얘길 했었지."
  로라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오웬에게 물었다.
  "항상 같이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나보죠?"
  "아주 영원히."
  오웬은 다시 로라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는 옛추억을 더듬는 듯한 
눈빛으로 로라의 반짝이는 갈색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난 그때만 해도 남자라기보다 혈기만 왕성한 미완성의 젊은 애숭이였단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진짜 여자엿지. 그래도 날 직접 바꿔보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어. 그대신 생활해가면서 어느 게 좋고, 어느 게 중요한 것인지를 몸과 
마음으로 나타내 보였지. 결국 얼마간 세월이 흐른 뒤, 난 그 사람 뜻대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그래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우뚝 서게 될 수 있었단다. 일 끝나면다른 데로 새지 않고 집으로 곧장 
달려와서 애들도 돌봐주고, 단지 내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들과 아내를 
위해 호텔을 짓고, 아름다운 아내가 멋진 무도회를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모든 걸 다 접어두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턱시도 단추를 끼우곤 
했었단다."
  그는 바닥에 앉아 있는 로라를 내려다 보았다.
  "그 사람이 언젠가 그러더라. 내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을 때가 제일 멋져 
보이고, 그 다음이 청바지, 와이셔츠, 그 다음이 턱시도 순이라고 말이야.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그러네요. 두 분 아주 굉장히 잘 어울리셨을 것 같애요."
  "그래, 그랬ㅇㅆ지. 정말 행복했었는데... 길 앞에 환한 랜턴 불빛이 비치듯 
밝고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는데, 그 사람이 죽자 갑자기 어둠이 다가왔지. 유리관 
옆에 서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려고 했지만 보이지가 않았어. 빛이 없었거든. 
캄캄한 어둠이 우리 사이로 달려들었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건네던 
그 사람을 추억 속에서만 볼 수 있다니... 신혼 초 비콘 힐의 그 넓은 집을 
깡총거리며 뛰어다니던 모습이며, 나와 함께 침대에 누워 요람에 담긴 아이를 
어르던 옆 모습, 평화와 기쁨을 나누던 그 시절. 그 아름답던 순간들을 단지 
추억 속에서만 느껴야 하다니... 오, 로라. 우리들이 느꼈던 그 기쁨을 네가 알 
수 있겠니? 씨를 뿌리고 왕국을 건설해도 그걸 봐줄 여인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 내 자신이 이룬 것을 들고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 이건 당신 거야. 
당신을 위해서 내가 이걸 다 해냈어. 이젠 모두 당신 거야'하고 말할 수 있는 
남자라면 이 세상에 더 바랄게 뭐 있겠어. 아이리스는 내 인생 그 자체였단다. 
내 자신이 아이리스였어."
  오웬의 목소리에는 열정과 안타까움이 깊이 서려 있었다.
  "그런 그녀가 병이 들다니... 너무 급작스럽게 다가왔어. 안녕이란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너무 짧은 시간이었어. 깔끔하고 완벽했던 그 사람은 병치레조차 
내게 맡기기 살ㅎ어서 그렇게, 그렇게 일찍 날 떠나버렸지."
  그는 두 눈을 감았다. 로라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었지만 여전히 짙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리스를 다시 내게 끌어오려고 손을 벌렸지만, 내 
손은 항상 비어 있었어. 텅빈 내 인생처럼. 그래서 화가 났지. 벽장에 걸려 있는 
그 사람 옷을 향해 소리를 지럴ㅆ어. 내가 사랑하는 줄 알면서, 내가 당신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 줄 알면서 날 두고 이렇게 가는 게 어딨어! 난 어쩌라구. 난 
어쩌라구! 한동안 너무너무 화가 나서 날 떠난 아내를 위해 애도조차 할 수 
없었어. 분노가 떠나버리고나니까 남는 게 아무것도 없더구나. 끊어진 전구처럼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단다. 아무 것도... 이년 동안 난 문을 닫고 살았지. 
로자가 펠릭스와 아사를 키웠단다. 로자가 모든 걸 다햇어. 내 대신 모든 걸. 난 
죽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오직 아이리스와의 삶을 그리워하며 그 환상속에 날 
가둬버렸지. 로자가 문간에서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날 노려보며 소리를 
지그러둔. 누군가 동반자를 찾아서, 사랑이면 더 좋고, 어쨌든 밖으로 나가 
누구든 만나라는 거야. 하지만 난 그러질 못했단다. 그럴 수가 없었어. 
아이리스가 어둠 속으로 들어가버렸다는 이유로 난 어둠 속에 살기를 원했단다."
  로라는 오웬의 손에 오래도록 입을 맞췄다. 오웬의 뺨위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미소 짓는 법을 아는 여자였지. 그리고 경이로움과 흥분을 선사할 
줄 아는 여자였어. 근데 네 미소가 어떤지 아니? 넌 내 아내와 똑같이 미소 
짓는단다. 눈빛도 똑같이 반짝이고. 네가 미소를 지을 때마다 난 아니리스를 
발견하지. 머리 빛깔도 똑같아. 조금 어두운 듯하면서도 항상 밝게 빛나지. 
아이리스는 복잡한 방법으로 그 아름답고 긴 머리카락을 핀으로 고정시키곤 
했지. 눈빛은 늘 먼 데를 향해 있었어. 신비로운 눈빛이었단다. 마치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을 갖고 있는 것처럼. 네 눈빛도 그것과 똑같애."
  화들짝 놀란 그녀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내가 비밀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해변에서 널 처음 봤을 때 그걸 느꼈단다. 아직도 그 비밀이 있는 것 같은 
걸. 신비로움이지. 먼 시선 속에 뭐가 있을지 언제나 궁금했다. 아이리스도 네 
눈빛과 똑같이 먼 시선을 지니고 있었지.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었단다. 네 눈 속에도 그런 게 들어 잇어. 신비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미소 말이다."
  오웬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렇게 이년 동안 컴컴한 의자 속에서 아이리스의 호나상과 함께 
생활을 하던 어느날 난 갑자기 호텔 생각을 하게 됐지. 그래서 다시 일로 
돌아갔단다. 이제야 알겠니, 로라? 늙은이가 되긴 했지만 사랑, 섹스 그리고 
결혼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은 여전하단 소리다. 너도 내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존재지. 그런데 너희들이 손 붙잡고 다닌다는 소리가 자꾸만 
들려오는데, 내가 걱정 안하게 됐니?"
  로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걱정요? 폴 때문에요?"
  "너희 둘 다. 그애를 무척 사랑하지. 그만큼 난 그애 속을 훤히 읽고 있어. 
굶주린 코요테(북미산 늑대: 역자 주)처럼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는 녀석이란 
것도."
  로라는 피식 웃고 말았다.
  "좀더 너그럽게 비유를 할 순 없으세요?"
  "코요테가 어때서. 이름 때문에 좀 나쁘게 들려서 그렇지 얼마나 강하고 
잘생긴 동물인데. 날카롭고, 지혜롭고, 가족들 잘 건사하고, 번식 잘하구. 자잘한 
먹이 대신 스케일 크게 사냥을 벌이지. 아주 용맹스런 짐승이란다."
  등을 돌린 로라는 새 책 쪽으로 손을 놀리고 있었다.
  "폴은 내 종손자다.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얼마나 그애를 사랑했는데. 
뒤뚱거리면서 서재를 휘젓고 다니는 무법자였지. 그애 손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었단다. 고집은 무쇠 같았고, 호기심이 얼마나 많은지 눈에 보이는 건 다 
만져서 뜯어내야 속이 시원한 녀석이었어. 폴은 책 읽는 것을 좋아했지. 
아름다뭉레 민감한 애고. 째째하지 않지. 손 안에 들어온 인생을 나름대로 
요리할 줄 알고, 그 인생을 즐기면서 살 줄도 알어. 아들 녀석들보다 그 
녀석하고 더 오랜 시간을 보냈을 만큼 그애를 사랑했단다. 그애하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니까. 한데 이 녀석이 머리가 커가면서 이것저것 일만 
벌여놓지 뭐 하나 제대로 끝내는 게 없어. 뭘 잡아도 금방 싫증을 느끼는 
모양이야. 세상 구경을 다니면서 여자들도 그런 식으로 갈아치운다는 소리도 
들리더군. 물론 그애가 너한테도그럴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또 그래서도 
안되구."
  로라는 창문 너머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내 마음 알겠지? 널 상하게 할 순 없다, 로라."
  "폴에 대해 지나치게 말씀하시는 것 아니예요?"
  로라는 조심스럽게 이의르 제기했다.
  "듣기 좋든 싫든 난 사람을 직시할 줄 알아. 일흔 살 전후로 난 상대가 
누구든, 그쪽이 제대로 된 인물이 아니란 것을 안 이상은 대충 얼버무리지 
않는다. 심지어 내 아들 녀석들이 못되게 굴 때도 예전과 달리 내 속을 그대로 
보이면서 힐책 해. 마음 상 할 수도 있겠지만 신경 안 써. 근데 왜 내가 종손자 
녀석을 거짓으로 두둔하겠니? 그애를 사랑하는 만큼 널 사랑하는데. 내가 널 더 
염려하고 걱정하는데. 이 철부지야. 난 네가 염려된다구. 네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단 소리다."
  "만약 누가 할아버지한테 아이리스에 대해 이런 식으로 얘길 했다면 
어쩌시겠어요?"
  "그거야 물론 들으려 하지 않았겠지. 아이리스를 비난한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그자를 도시 밖으로 내쫓아벼렸을 게다."
  "그때 할아버진 지금 저보다 더 똑똑하셨나요?"
  "난 좀더 세상을 아는 사람이었다."
  "아깐 혈기만 왕성한 젊은 애숭이였다고 했잖아요."
  "노인네가 한 말을 그렇게 금방 도용하면 못써."
  그러면서도 오웬은 웃고 있었다.
  "그래, 그만 끝내는 게 나을 것 같구나. 내가 너같이 영특한 애를 이겨내기나 
하겠니? 어쩌면 내가 틀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나도 늙긴 늙은 모양이구나. 
사람들 뒷전으로 물러앉아야 한다는 펠릭스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전 싫어요. 제 삶 속에 할아버지를 간진하고 싶은 걸요."
  로라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오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이란 게 뭔지 나도 안다. 어쩌면 네가 폴을 도와줄 수도 있을 게다. 
정착할 수 있도록 말이야. 아이리스가 날 소리 없이 변화시켰듯이 네가 그런 
마술을 부릴 수 만 있다면..."
  "하지만 폴하고 저는 결혼 얘기는 아직 안해봤어요. 대학도 아직 일년 남아 
있고..."
  "대학 끝날 때까지 내 곁에 있어주는 거지?"
  "그럼요, 제가 어딜 가겠어요. 절 버리실 때까지 꼬박 붙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할아버지 호텔을 도울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그 호텔에 새 생명을 준 다음 다시 크게 살펴보자꾸나."
  오웬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둘이서 함께 하는 거야. 듣기만 해도 멋지지 않니? 포도주 좀 갖고 
오련? 저녁 전에 함께 축배를 들자꾸나. 아니면 축배만 들고 넌 네 젊은 짝과 
저녁을 하러 가든가."
  로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책장 사이에 있는 포도주장에서 
아몬티야도(스페인산 세리주: 역자 주) 한 병과 유리잔 두 개를 꺼냈다.
  "사실 저녁 약속이 있긴 한데 괜찮으세요?"
  "안 괜찮다면 널 꽁꽁 묶어둘까? 네 생활인데 어찌 내가 일일이 간섭하겠니. 
눈을 부릅뜬 채 요것드링 침대로 들어갔나 나왔나 감시하고 있으련?"
  "그렇게 못하실 걸요."
  "마음 먹으면 못할 게 어딨어? 폴은 내 나이 때보다 훨씬 남자다운 남자일 
걸."
  오웬의 말에 로라의 얼굴이 빨개졌다.
  "넌 아주 사랑스런 여인이 될 게다. 재치 있고, 상상력도 풍부하고... 네 자신을 
신뢰하려면 네ㅔ 충분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거란다. 그렇게만 하면 
강하면서도 고귀한 여인이 될 수 있을 게야. 아마 동쪽 해변에 뒹구는 남자들을 
반쯤은 끌어 모을 수 있을 걸."
  "나머지 반은요?"
  그는 소리없이 웃었다.
  "나머지 반은 알리슨을 따라가겠지. 글쎄, 그 중에서 그애가 생각하고 있는 
유아독존식 사고방식을 깨뜨려 결혼할 마음을 일으킬 인물이 잇을까?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지."
  오웬은 한숨을 쉬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나가는 거야, 로라. 나도 내 자신을 위해 노력하겠다."
  로라는 그에게 키스해따.
  "내가 있잖아요, 이렇게. 마음 약해지지 마세요."
  "그래."
  그는 양손으로 로라의 손을 모아쥐었다.
  "로라가 내 말을 들어줄 때마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겁먹고 있는 꼬마 아가씨를 행복한 여인으로 자라나게 했으니 얼마나 내 자신이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아이리스가 떠났을 때 사라져버린 랜턴 불빛을 네가 
다시 가져다 준 것같구나."
  로라가 자리를 뜬 후에도 오웬은 그 자리에 앉아 로라를 생각하고 있었다. 
로라는 분명 아이리스처럼 그의 세계를 빛으로 가득 채웠을 뿐아니라, 그녀만의 
독특한 빛깔로 사랑과 따스함을 주었다. 언젠가 마음을 열고 가슴속에 들어 
있을 법한 비밀을 털어내길 기대하고 있었으나, 그런 면에서 여전히 쌀쌀하기만 
한 로라였다. 물론 영원히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오웬은 
말없이 홀로 짐을 지고 가려 하는 로라가 못내 가여웠다. 그 짐을 나눠 
짊어지면 앞날이 훨씬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오웬은 빈 잔에 포도주를 가득 부었다. 그리고 저녁놀을 바라보며 추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아이리스, 당신이 여기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어. 우리 둘이 한번도 길러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딸, 로라가 여기 있는데.

    9장
  오월의 태양은 뜨겁기만 했다. 담요처럼 무겁고 칙칙하게 달라붙는 검정 
가운을 입은 로라는 졸업식이 진행되는 동안 오웬과 알리슨의 옆에 앉아 있는 
폴에 대한 생각으로 마이크에서 흘러나오는 연설자의 음성을 귓전으로 흘리고 
있었다. 식장으로 출발하기 직전, 필라델리차에서 전화를 한 클레이는 식에 참석 
못하겠다고 말했다.
  "윌라드가 감기래. 부지배인이 된 다음부턴 이 몸이 바쁘다구. 윌라드 없으면 
내가 다 해야 돼. 우나, 미안해. 가고 싶지만 정말 몸을 뺄 수 없어."
  "됐어, 괜찮아."
  일년 전이었다면 분명 화를 냈겠지만 한 가족으로 맞아준 폴과 오웬, 
알리슨으로 인해 그녀는 클레이의 불참에도 대범할 수 있었다.
  "나중에 내가 얘기해 줄게."
  "잘생긴 미남이 사진 많이 찍어줄 테니까 내가 안가도 사진 걱정은 없겠다."
  "찍어주겠지."
  폴에 대한 얘기를 더 끌어내지 않기 위해 오라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클레이는 로라가 폴과 사랑에 빠져 자칫 그들의 과거를 털오놓을까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로라는 알고 있었다.
  "여자들이 얼마나 섹스에 약한지 알아? 몸 섞은 남자한테 할말 못할 말 
다하는 동물이 바로 여자야."
  로라는 클레이에게 사랑이나 열정 때문에 과거를 드러내는 멍청한 실수를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누누이 했다.
  보석이 없어진 지 이미 사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뒤였다. 전당포에서 팔찌가 
발견된 뒤 더 이상의 진전이 없는 것음 룰론, 저택경비를 예전보다 강화시킨 것 
외에 샐링거 가문 모두 아물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사건을 잊어가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체드롸 결혼식을 올린 알리슨은 석 달 동안 신혼 여행을 하고 
돌아와 신혼생활 석 달만에 점차 새로운 사람을 찾아 눈을 돌리고 있었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생활을 체드에게 요구했던 아릴슨은 얼마 안가 일부러 
남편이 싫증을 느끼도록 유도하고 있는것 같았다. 매일 밤, 거의 새로운 
사람들을 초대해 파티를 연던 두 사람은 자신들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은 안개 
같은 침묵으로 인해 옛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것을 아무런 괴로움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로라는 가족들 사이에 오르내리고 있는 소문들을 사년 전과 달리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큼 그려는 자신이 샐링거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고, 또한 그들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했다. 지루한 연설 끝에 
박수소리가 쏟아져 나오자 졸업생들은 졸업장을 옆에 낀 채 흩어지기 시작했다. 
로라도 가족들이 있는 인공잔디 쪽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잠깐만."
  끌어안으려는 폴과 알리슨에게 로라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이 옷을 벗어야지 도저히 못 참겠어."
  졸업가운을 벗어 던진 뒤 로라는 허리에 팔을 두른 폴과 함께 오웬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너무 기뻐요. 이렇게 다들 와줘서."
  "내가 안오면 누가 오겠니? 대학 가기 전엔 넌 내 학생이었어."
  쥘도 오겠다고 했다는데 표가 세 장밖에 없다고 내가 얘기했다."
  "정말 오고 싶었대요?"
  "절 자랑하고 싶었겠지. 네 교수들보다 자신이 더 많이 가르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 말은 맞아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가장 큰 스승이었는 걸요."
  오웬은 껄껄 웃었다.
  "쥘한테 그 말은 하지 말자구나."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오웬은 작은 벨벳 주머니를 꺼냈다.
  "졸업선물이다."
  로라는 가는 줄이 매달린 주머니를 살며시 풀어보았다. 청자줏빛 오팔에 한 
떨기 아리리스 모양을 세공한 순금 옷핀이었다. 말없이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로라는 고개를 들었다.
  "아이리스님 거죠?"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 첫 결혼기념일날 그 사람에게 내가 직접 주문해 만들어준 선물이었다. 
아이리스가 아주 귀중해 여긴 물건이었찌."
  로라는 오웬을 껴안은 뒤 오래도록 입을 맞췄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저한테도 소중한 물건이어에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말 안해도 된다. 무슨 말 하려는지 네 얼굴에서 다 읽었으니까."
  오웬은 두 팔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이리스와 어누 닮았어. 기쁨에 젖어 흥분하는 얼굴하며... 자, 이제 
가보거라. 실컷 즐기려무나. 난 알리슨이 태워다 준다고 했으니, 폴하고 
마음놓고 신혼여행을 떠나."
  깜짝 놀라는 로라를 보며 오웬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앞이마를 가만히 
두드렸다.
  "휴가. 내 말은 휴가를 떠나라는 소리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했으나, 이젠 좀 놀아도 돼요."
  로라는 그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빰에 느껴지는 오웬의 콧수염을 느끼며 
로라는 오웬이 나이 들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지난 몇 주 동안 졸업시험과 
논문 준비하야, 쥘 밑에서 정신없이 근무 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로라는 
오웬을 뒤돌아볼 시간조차 없었다. 키스를 하는 순간 로라는 새삼스레 오웬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두 뺨은 움푹 패고, 거미줄처럼 미세한 주름살은 오래된 
양피지처럼 굵은 선 사이사이에 집을 짓고 있었다. 여든세살이지만 그는 결코 
노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괜찮으시죠?"
  "아주 좋다. 괜찮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니 헛헛. 내가 말을 이상하게 했나?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보다. 맞아, 그래서 그래. 이 더위에 날 언제까지 세워놓을 
작정이니? 알리슨하고 시원한데서 점심할 생각인데 말이다. 어서 빨리 
가보라니까. 팔딱거리면서 날아갈 줄 알았더니 왜 이렇게 꼼지락거리는 게야."
  "알았어요."
  로라의 음성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꾸만 그렇게 떼어버리려 하지 마세요."
  로라는 폴의 팔짱을 꼈다.
  "우리 둘 다 보기 싫다시는데 슬프죠. 폴?"
  "슬퍼도 가라시는데 가야지."
  폴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오웬과 알리슨을 뒤로 한 채 스탠드 밑 
터널을 지나 거리로 나왔다.
  "당신을 껴안고 뒹굴고 싶은데 어쩌지?"
  자동차가 한 블록을 지났을 즈음 폴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로라를 보았다.
  "여기서요?"
  로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음 주유소에서 그냥 서버릴까?"
  로라의 말에 둘은 서로 깔깔대며 깊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 방법밖에 없어요? 그럴려면 아예 케이프 그 별채에 숨어서 했겠지. 몇 
시간 기다려줄 수 있죠?"
  "당신을 기다리는 일이라면 백년 천년이라도 기다려야죠."
  두 사람이 탄 차는 커먼웨스를 돌아 유료고속도로로 돌아섰다.

  시간이 흐르면서 폴과 로라는 사랑을 느긋하게 즐길 줄 아는 연인으로 변해 
있었다. 결코 채워질 것 같지 않은 욕정으로 비바람치는 폭풍우에 휩싸여 있던 
그들은 서서히 잘 익은 과일을 천천히 음미할 줄 아는 미식가로 변해갔다. 
밤새껏 잠을 물리쳐가며 수시로 한 몸이 될 때마다, 그들은 뜨거운 순간을 더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 웃고 얘기하며 천둥 같은 욕정을 간신히 참아냈다.
  잠이 든 순간에도 그들의 몸은 떨어지지 않았다. 두 손과 두발을 얽은 채로 
아침을 맞기가 일쑤였다. 러라는 폴의 탄탄한 가슴 위에, 폴은 그녀의 이마 위에 
입술을 한참 동안 대고 있노라면 창밖이 차츰 밝아졌고 두 사람은 한 몸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했다.
  매일 그들은 그렇게 아침을 맞이했다. 조그만 물방울이 모여 큰 대양을 이룬 
뒤 마침내 강한 파도를 만들어내는 자연의 놀라운 조화처럼 두 사람은 따뜻한 
입김과 손길로 천천히 상대를 즐겁게 만드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욕망이 
끓어오를 때에도 전처럼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잔물결을 한 곳으로 모아 갈 줄도 알았고, 그것을 위해 체위를 바꿔가며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가슴이 되는 순간을 기다렸다. 격하게 뜨거운 숨결이 
올라오는 순간에도 처음 돛을 올리기 시작했을 때로 다시 돌아가 사랑의 기간의 
시간을 연장시키곤 했다.
  여름 보금자리용으로 오스터 빌에 집을 구해놓았던 두 사람은 텅빈 오월의 
케이프 코드를 둘만의 낙원으로 여기며 사랑을 속삭였다. 태양이 부서지는 바다 
위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상큼한 소나무 향이 배어나는 녹음 속을 걷기도 했고, 
맨발로 모래사랒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여름 낮이 그렇게 지나면 달빛을 따라 
고적한 해벼을 겨닐었다. 머리 위로 삐삐 울며 지나가는 삐삐도요새를 바라보며 
웃기도 했고, 보물을 찾으러 나갔다가 보이지 않는 무덤에 묻혀버린 고래잡이 
선장과,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미며 울었다는 모래언덕 위의 회색 
과부집을 쳐다보며 옛전설을 더듬어보기도 했다.
  "이주일이 후딱 지났네."
  휴가 마지막 날 폴은 아쉬운 눈길로 로라를 바라보았다.
  "안되겠어. 연장시키자. 적어도 한 달은 더 있어야겠어.":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내일 출근해야 해요."
  "내가 전화할게. 쥘, 당신 수석비서가 유괴당했습니다 하고 말이야."
  폴은 로라의 긴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기고 뒷목에 키스를 퍼부었다.
  "로라가 여기서 밤마다 설거지를 해야 된다고 그럴까?"
  로라는 깔깔거리며 하이킹 신발로 손을 뻗쳤다.
  "쥘이 당신을 보고 아마 정신 나갔다고 할 걸요. 그 사람 아마 집에선 설거지 
그릇을 산더미같이 쌓아놓을 거야. 호텔에서만 깨끗한 척하구."
  "당신이 접시 닦는 동안 내가 마른 행주질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 뭐라고 
할까?"
  "남자가 째째하다고 그러겠죠 뭐."
  "하루 종일 일하고 늦게까지 설거지하는 여자를 그냥 두고 보란 말이야? 좋아. 
그럼 우리 가정부를 두자구."
  로라는 신발끈을 강하게 조이며 볼멘소리를 냈다.
  "난 가정부 부릴 줄 몰라요. 한 번도 가정부 같은 걸 두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걱정 마. 내가 다 할 테니까. 내가 가정부 부리는 법을 좍 써 놓으면, 당신은 
그걸 또 좍 읽기만 하면 돼"
  "재미는 있겠네요."
  "그럼. 우리가 어디에서 사느냐를 정하는 게 문제지."
  폴은 허리를 굽힌 채 신발끈을 묶기 시작했다.
  "우리가 보스텀에 머문다면 어머니나 레니 이모가 경험 많은 가정부를 구해줄 
수 있을 거야. 그뿐이겠어? 로자가 기가 막힌 사람들을 보내주든가, 그게 성이 
안 차면 직접 와서 우리 집을 살펴줄텐데. 우리가 보스턴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간다면 우리가 직접 알아봐야 하긴 해. 그런 걸 봐선 보스턴 쪽이 낫겠지?"
  "하지만 오웬이 날 시카고로 보낼지도 모른다고 얘기했잖아요."
  "확실히 정해진 건가? 언제쯤이지?"
  "오늘 내일은 아니예요. 당분간은 쥘하고 계속 일해야 될 거예요."
  "그래? 그래도 상관없어. 시카고에 가서 살지, 뭐. 그쪽에 친구도 많은데 뭐가 
걱정이야. 매일 와이프 직장까지 태워다 주고, 태워 오고. 밤마다 아내에게 
마티니 한 잔 갖다주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시카고식 남편이라... 진짜 
행복하겠는 걸. 하지만 당신은 마티니 못하잖아."
  "못해요."
  로라의 눈가가 젖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맛 좋은 레디 와인이라면..."
  눈물을 감추기 위해 로라는 등을 돌려 휴지를 더듬었다.
  "아니, 왜 그래? 내가 뭐랬길래?"
  폴은 로라 앞으로 티슈박스를 내밀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가 시카고 따라가는 게 싫어서 그래? 혼자 가고 싶은데 나혼자 괜히 
떠들어대서? 왜 그래? 난 정말..."
  폴은 안절부절 못했다.
  "그만해요.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소리를 해요. 당신하고 같이가고 싶어하는 걸 
잘 알면서... 어디든지 같이 가길 원해요. 시카고든, 어디든. 나도 몰라요. 내가 
왜 우는지..."
  두 사람은 서로를 깊게 끌어안았다. 한참 후 로라는 고개를 들어 폴을 
쳐다보았다.
  "진정이었어요?"
  "그럼 농감인 줄 알았어? 농담할 때가 있고, 안할 때가 따로 있지. 여태껏 
이렇게 심각하게 말해본 적이 없었지? 오래전에 얘길 했어야 하는 건데. 
오래전부터 당신을 사랑했어, 로라.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했나봐. 당신을 만나기 
전의 세월은 기억도 나지않아.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다시는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으니까."
  "오, 폴.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을 거예요."
  로라는 그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폴의 탄탄한 두 팔이 그녀를 아프도록 
거세게 끌어안았다. 드디어 소망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이젠 완전히 안전해진 
것이다.
  "로라, 내사랑. 뭘 그렇게 생각해?"
  "오웬요. 아이리스한테 프로포즈할 때를 물어본 적잉 있어요. 결혼하자고 
말하는 대신 어느날 밤 두 사람 다 똑같이 어디 살건가 얘기했대요."
  "그래? 처음 듣는 얘긴데. 로자 말로는 두 분이 기가 막히게 어울리셨다고 
하던데. 이젠 우리 두사람 보고 그러겠지. 그리고 분명 우릴 위해 결혼 케이크를 
만들어줄 거야. 내가 대학 다닐때 로자가 그러더군. 내 결혼 케이크 만들어줄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다음 주 어때? 여기 케이프에서 하자. 이스트 데니스에 
아주 멋진 고딕식 예배당이 있거든. 예전부터 거기서 식을 올리고 싶었어. 
가족들 다 모아놓고. 괜찮겠어? 가곶과 함께 교회당에서...찬성?"
  "좋아요, 폴. 너무 좋아요, 다음주에. 우리 둘이..."

  레니는 두 사람의 결정에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결혼식을 제대로 치르자면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레니는 오웬에게 두 살므이 
결혼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하지 않겠냐며 제동을 걸었다.
  "둘이 너무 다른 것 같아서요. 자라난 환경, 현잴 처해 있는 상황 등등... 한푼 
없는 로라와 호주머니에 돈이 얼마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폴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로라가 번다고는 하지만, 폴이 나중에 갖게 될 유산에 
비하면 정말 코흘리개 용돈..."
  "그만큼 잘 어울리는 쌍도 드물다."
  오웬은 레니 말을 한마디로 묵살해버렸다.
  "그애는 몇 년 동안 내게 기쁨을 준 아이다. 그리고 지금은 호텔사업을 위해 
뛰고 있지. 그애하고 내가 뭘 만들어내는지 그냥 좀 기다려줄 수 없겠니? 
그리고 폴 좀 봐라. 요즘 그애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봐. 한 자리에 이렇게 
오랫동안, 그것도 기쁘게, 한여자에게 온 정성을 쏟는 걸 본 적이 있니? 
알리슨도 그러더구나. 마치 친자매 같은 기분으로 로라를 사랑한다구. 로라가 
우리집 가문과 혼인할 수 없는 신분이라면 지금 당장 그애를 우리 가문에 
입적이라도 시킬까?"
  레리는 오웬에게 잔잔하게 웃어 보였다.
  "명랑하고 사랑스럽다는 건 부정할 수 없어요. 저도 아주 반해 버렸는 걸요. 
전 다만 두 사람이 나중에 어찌 될까 그게 염려 돼 그랬던 거예요. 예감이..."
  "그래, 펠릭스와 결혼할 땐 예감이 어땠니?"
  "좋지 않았어요."
  레닌는 우물거리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더 그러는 거예요. 자꾸 그때가 생각나서요. 펠릭스는 이성을 
잃어가면서 화를 냈어요. 로라가 재산을 탐내서 그런다구요. 전 그래서 둘한테 
더 멋진 결혼식을 준비해줄까 싶기도 해요. 아주 화려하고 당당한 신부로 꾸며 
결혼시키고 싶어요."
  오웬은 ㄹ니의 말에 기분이 풀렸는지 껄껄 웃었다. 그러나 그녀가 사라진 뒤 
그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져갔다.
  여든세 살이야.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나이는 나이지. 저보다 더 손가락이 
떨리는 것도 그렇고.
  오웬은 집안 일은 물론이고 호텔 문제조차 아들들하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기를 싫어했다. 그가 제일 편히 느끼는 존재는 단한 사람, 로라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계자 문제에 그녀를 끌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 마무리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식구들이 케이프로 향해 짐을 꾸리기 시작하던 유월초 내내 오웬은 서재에 
않아 깊은 명사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주 석양을 구경했다. 등 높은 가죽의자에 
앉아 떠오르는 별과 초승달을 구경하느라 잠을 설칠 정도였다. 오후에도 그 
의자를 떠나지 못한 채 깜박 잠이 들었다가 퇴근해서 돌아오는 로라 목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오웬은 굵고 흔들리는 필체로 로라와 함께 구상중인 호텔 
보수문제를 촘촘히 적어나갔다. 몇년 동안 머릿속에만 담아두었던 구상들을 
종이에 옮기며 현실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오웬은 자신이 결코 늙지 않았다는 
새로운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심오하고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사람이 
죽음 앞에 와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의 다 끝나간다."
  금요일 저녁, 서재 책상 앞으로 다가온 로라에게 오웬은 명랑하게 입을 
열었다. 앞뒤 양쪽으로 날개가 달린 오웬의 대형 책상은 1804년 치펜데일(유럽 
가구계를 리드한 영국인으로 로코코 장식을 특징으로 곡선이 많고 장식이 
화려한 가구를 제작:역잘 주) 2세가 직접 만든 정교한 고가구였다. 오래전 
남편과 시아버지가 서로 마주보며 사업 얘기를 나누었으면 했던 레니가 특별히 
선물한 책상이었다. 그러나 오웬은 앞자리에는 펠릭스 대신 로라가 앉아 있었다.
  오웬은 책상을 볼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ㄹ 토마스에게 그것을 줄까도 
생각했다. 특히나 서류를 너무 많이 넣어둔 통에 서럽하나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서졌을 때는 애석한 눈빛으로 책상을 바라보던 토마스 얼굴을 본 후 더 
그랬다. 그러나 선물을 한 레니가 실망할까봐, 게다가 서랍도 그리 크게 망가진 
건 아니어서 덜컹거리느 책상을 계속 사용해오고 있었다. 오웬은 로라와 그 
반들거리는 마호가니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앞뒤로 달린 서랍들을 
소리나게 열고 닫으며 정이 담긴 토론을 나누는 때가 가장 행복했다.
  "거의 다 끝났어."
  책상 위로 누런색 파일 네 개를 밀어내며 오웬은 만족스럽게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뉴욕, 시카고, 필라델피아, 워싱턴. 이제 우리는 하났기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봐야 할 때다. 수입에 따라 계산도 해보구.증축비, 새 가구 비용 등등을 
따로 계산하되 필요한 물건들은 돈 생각 말고 제대로 들여놓아야 해."
  로라는 오웬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우리'라는 말을 기쁜 마음으로 
듣고 이었다.
  "시카고부터 머저 해야 되겠지? 네가 직접 경영해나갈 곳이니까 말이다."
  "제가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에요."
  "할 수 있어. 우리 예쁜이가 어떤 아가씬데. 여태껏 너만큼 가르쳐준 걸 
재빨리 익힌 사람이 없었다. 다른 지배인들 다 제쳐놓고 제일 먼저 성공할 게다. 
내가 장담하지. 윌라드 페인은 언제 시작했는지 아니? 내가 무려 오십여 년 전 
필라델피아 호텔을 세웠을 때 고교를 막 바로 졸업하고 벨보이로 시작했어. 
호텔 명성이 사그라진 다음에야 지배인 자리에 올랐다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았는 것 같더라. 어쨌든 이걸 사고, 저걸 짓고 정신없이 사업을 늘렸가쓴데...일 
배워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모두 다 현대식 호텔로 도망가버리더군. 아무도 그 
낡은 호텔 지배인 자리로 오지 않으려 했어. 다들 번쩍번쩍 빛나는 새 건물로 
옮겨갔지."
  그는 침을 삼키며 숨을 가다듬었다.
  "펠렉스도 마찬가지였지. 그애 말이 맞아. 요샌 최신식만을 원하거든. 물론 
내가 좋아하는 옛식도 손님들을 끌어모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대부분 반듯하고 
깔끔한 하야트처럼 최신식 기기에 번쩍거리는 건물 말이다. 우리도 그렇게 
해보는 거야. 대신 우린 한 가지를 더 추가하는 거야. 옛 것과 새것,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거지."
  그는 눈짓으로 책상에 놓인 파일을 가리켰다.
  "저걸 보면 알 수 있을 게다. 우리가 그동안 서로 얘기했던 것들이 다 들어 
있단다. 그 위에 몇 개를 더 추가해서 써놓았다. 펠릭스는 분명 좋아하지 않을 
거야. 너무 돈이 많이 든다느니, 모험이라는니 투덜대겠지. 그앤 원래부터 내 
계획 자체를 마음에 두지 않았어. 가족들이 운영하는 샐링거 그룹에서 네 군데 
호텔을 빼내 독립군으로 둔 걸 말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아무리 그래봤자 내 
물건을 두고 왈가왈부할 수야 없을 테지. 자, 어디 보자. 뭐 바뜨린 게 없나? 아, 
클레이가 있구나. 요즘 부지배인 일을 아주 잘 하고 있다던데. 마음에 들어, 
우리 둘 다 그애가 괜찮다고 생각된다면 네 군데 중 하나를 그애한테 맡겨도 
좋을 것 같은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제 마음 아시잖아요. 우리 둘에게 정말 너무 잘 해주셨어요."
  로라는 오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거 나중에 다 읽어볼게요. 우리랑 식사 약속하신 거 잊지 않으셨죠?"
  "사랑하는 사람이 초대한 자린데 잊을 수가 있나. 넥타이를 매야 되는 
자니냐?"
  "정장 안하셔도 돼요. 우리 셋만 모이는 자리예요. 폴 아파트에서 제가 직접 
음식을 만들려고 해요. 먹고난 다음 설거지는 그 사람이 할 거구요. 시간은 일곱 
시로 맞췄어요."
  "로라."
  오웬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은 것을 느끼며 로라는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폴한테 우리 계획을 다 털어놓은 건 아니겠지?"
  "아니오. 시작할 때까지 입 다물고 있으라 하셨잖아요."
  그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렸다.
  "혹시라도 펠릭스한테 들어갈까봐 그런다. 그애 방해가 없으면 우리 일하기가 
더 편하지 않겠어? 사랑하는 이에게 숨긴다는 게 좀 힘들겠지만 할 수 없다."
  "폴한테 털어놓고 싶긴 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인데 
참아야죠."
  "고맙다. 아, 참, 얘야."
  오웬은 잠시 숨을 끊고 어깨에 두른 스웨터를 가슴 안쪽으로 끌어모았다. 곧 
유월이 다가오는데도 요즘 그는 쌀쌀한 기운을 느끼곤 했다. 왜 그런지 
의아해하면서도 오웬은 아무에게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고 스웨터를 덧입곤 
했다.
  "우리가 끝낸 얘기들 말이다. 재정문제, 증축내용 등을 네 군데 파일에다 담긴 
했지만, 따로 한 서류에 모두 담아놓은 게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요약해놓은 거야. 내가 이러저러해서 결국 이렇게 결정했다는 것을 모두 다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나중에라도 그걸 토대로 네가 직접 진두지휘를 
했으면 한다."
  "홰요? 왜 제가 그걸... 무슨 소리세요. 할아버지가 하시는 걸 제가 옆에서 
돕는 거지, 제가 무슨..."
  휘둥그레진 눈으로 오웬을 바라보던 로라는 오웬에게로 달려갔다.
  "왜 그러세요? 어디 편찮으신 것 아니예요?
  "아냐. 그렇진 않아. 하지만 혈기왕성한 젊은이가 아니잖니? 현명한 사람은 
미래를 보고 사는 거란다. 여든세 살에도 현명하지 않다면 내가 언제나 
현명해지겠냐?"
  오웬은 로라의 이름이 적힌 긴 편지봉투를 로라 손에 꼭 쥐어주었다.
  "자, 받아라. 안전한 곳에 꼭꼭 감추어두어야 한다.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걸 네가 갖고 있었으면 한다."
  "여기 서랍 속에 그냥 넣어두세요. 여기 있는 줄 알면 되잖아요. 할아버지가 
갖고 계세요. 이건 제것이 아니예요. 할아버지 거죠. 부탁이에요. 이걸 역 두는 
걸로 해요."
  "그래, 그러자. 네가 그게 편하다면."
  오웬은 책상 맨 윗서랍에 그 봉투를 밀어넣었다.
  "자, 이제부터 좀 자둬야겠다. 그래야 저녁 때 팔팔하게 너희들하고 놀지. 
가보거라. 이따 일곱 시에 만나자꾸나."

  비콘 힐을 따라 내려온 로라는 찰스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 산책로를 향해 
아서 피들러 인도교를 건너갔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길이었다. 
잔디밭에는 소형보트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강변을 따라 나무나 한 줄로 서 
있었고, 좁은 셋강이 흐르고 있는 반대쪽 너머에는 부드러운 붉은 색 벽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옛집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옛스러우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주는 그 집들은 로라가 보스턴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로라는 과거를 완전히 지우고 숨어 살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혼문제를 두고 벤에게 허심탄회하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심적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벤은 여전히 암스테르담에서 살고 
있었다. 호텔 경비일에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벤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녀는 언제나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금방이라도 벤과의 관계가 들통나서 
모든 것이 사년 전으로 돌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졸업식과 결혼 계획, 
시카고의 새 호텔 이야기 등을 숨김없이 편지에 담아 보냈지만, 로라는 폴의 
이름만은 밝히지 않았다.
  폴의 집은 강 뒤편, 백베이쪽의 오래된 사층 아파트 삼층이었다. 로라는 폴을 
지하실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에서 찾아냈다. 오래된 사진들을 정리하고 있는 폴 
옆에는 몇 달 동안 찍어온 로라의 사진묶음만 있고 다른 사진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선 폴은 그녀에게 긴 입맞춤을 했다.
  "식탁은 벌써 다 준비해놨습니다, 부인. 근데 어쩌지? 접시는 준비가 됐는데 
그 위에 올라갈 음식이 없어요."
  로라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물론 나도 기적을 기대하진 않아요. 복잡하진 않을 테니 걱정말아요. 오늘 
저녁 메뉴는 조개수프아 샐러드예요."
  로라는 등뒤에서 두 팔로 폴을 안았다.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를 거예요. 당신을 알게 되었고, 사랑에 
빠지고,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정말 너무 감사해요."
  "누구한테?"
  "운명한테요."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제우스의 세 딸 말이에요. 인생을 짜고, 재고, 자르고 한다면서요"
  "어디 그뿐인가? 당신을 사년 전에 우리 집으로 보낸 것도 그들이지."
  폴의 말에 로라는 웬일인지 대답이 없었다.
  "당신을 보낸 게 제우스 딸이든 누구든 그 운명한테 감사할 사람은 바로 나야. 
내 인생을 바꿔놓았으니까. 당신이 그때 우리 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 
둘 다 지금 어떻게 됐을까?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겠지."
  "식탁 준비하기 전에 잠깐 나가서 걷지 않을래요?"
  "그것도 좋지. 쥘하고 하루 종일 보냈으니 우리 아가씨께서 가슴이 오죽 
답답하겠나."
  로라의 침묵을 농담으로 덮어두긴 했지만, 폴은 그것이 과거로부터 기인된 
침묵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과거가 뭐든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둘이 설계해나갈 
미래가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로라가 못내 안타깝기만 했다. 커먼 
웰스를 따라 길게 이어진 대학촌에서 무더기로 쏟아져나오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두사람은 손을 잡고 푸른색 페어필드로 걷기 시작했다.
  "우리 신혼여행을 어디로 갈까? 아프리카 어때?"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다른 데는요?"
  "런던, 파리, 로마 같은 곳도 생각해봤는데, 거긴 다들 가는..."
  "난 안 가봤어요."
  그는 걸음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군. 당신 유럽 한 번도 안 갔었지. 그럼 당연히 
그쪽으로 가야지."
  "아니예요. 당신이 생각했던 곳으로 가요. 난 정말 어디라도 괜찮아요. 유럽은 
다른 때 가면 되잖아요."
  "아냐.모든 걸 보여주고 싶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걸 
구경시켜주고 싶다구."
  길다란 그림자를 남긴 채 흐릿하게 사위어가는 햇살 속으로 두 사람은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과 젊은 강사들이 
보도 위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었으나, 두 사람 앞에는 꿈길처럼 아름다운 길만 
보일 뿐이었다. 아파트로 들어오자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폴이 전화기를 
들자마자 로라는 전화기 밖으로 새어나오는 로자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웬님...오웬님이..."
  로라는 순간 오웬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병원에 모습을 나타낸 두 사람을 보자마자 레니는 창백한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아직 숨은 쉬고 계시대. 하지만 쇼크 상태가 워낙 강해서... 버그만 박사 
말로는 얼마..."
  "뵐 순 없어요?"
  폴의 목소리는 낮게 떨리고 있었다.
  "얼굴만 잠깐 뵈면..."
  레니는 머리를 흔들었다.
  "못 들어가게 하더라. 하긴 들어가봤자 혼수상태시니...로라가 제일 처음 
보았는데, 그때부터 내내 저러신다."
  소식을 듣고 속속 도착하는 가족들로 대기실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잡지책을 뒤적이는 손길과 오웬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는 소리들로 실내는 어수선했다. 매시간마다 버그만 박사가 
대기실에 모습을 나타냈지만 가족들에게 줄 소식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자정 무렵 그는 오웬이 정신을 차렸다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식이 돌아왔어요. 하루 이틀 두고 봐야겠지만 일단 정신은 차린 것 
같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셔서 좀 쉬십시오. 오랜 싸움이 될 수도 있으니 
미리부터 진을 빼지는 마세요."
  다음날 아침 레니와 펠릭스는 오웬의 병실 안에 몇 분간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다시 올지 모를 쇼크를 막기 위한 듯 오웬은 철사줄 비슷한 
알루미늄줄과 튜브에 꽁꽁 묶여 있었다.
  펠리스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모든 사람 위에 우뚝 서서 호령하던 
아버지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는 계속 머리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 한구석에는 어떤 기대감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이에 관계없이 정력적으로 일하는 아버지가 짜증스럽게 
느껴졌었다. 그가 가끔씩 사무실에 나타나 질문을 하거나, 중역회의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샐링거 그룹의 사장으로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사람은 
펠릭스 샐링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텔 직원들과 샐링거 가문은 늘 오웬 
샐링거를 최고 우두머리로 여겨왔다.
  오웬이 은퇴한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존재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펠릭스는 이번 쇼크가 전번과 달리 죽음으로 연결될 
것임을 확신했다. 오래전부터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던 소원이 펠릭스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머리속에는 승리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의 나이 쉰다석, 자신 
위에 항상 드리워져 있던 그늘의 장막에서 처음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샐링거 호텔 그룹이 드디어 그의 손 안에 완전히 들어온 
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는 없었다. 가문의 우두머리에 걸맞게 
품위와 체면을 지키며 애통함을 보여야만 했다.
  "사무실에 가봐야겠소. 나중에 또 올게."
  펠릭스는 레니가 대답도 하기 전에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나갔다. 자신의 
건강 상태는 최상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병원문을 빠져나와 자동차에 
이를 때까지 펠릭스의 가슴은 벌떡벌떡 뛰었다.
  조금 후에 아사도 병원을 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오웬이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그렇가도 호텔 일상업무에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니었다. 호텔 
업무가 아니라 펠릭스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오후 레니에게 전화를 한 펠릭스는 사무실에 벌여놓은 일 때문에 병원에 
도저히 가지 못하겠다는 소리를 아무 감정 없이 할 수 있었다.
  결국 밤샘을 하는 사람들은 여인네들뿐이었다. 레니와 아사의 아내 캐롤, 
그녀의 딸 파트리샤, 바바라 젠슨, 알리슨, 로라 그리고 로자가 병실을 지켰다. 
토마스 젠슨은 중동지역에 흩어져 있는 샐링거 호텔들을 하나하나 돌며 
감독하는 중이라 주말에만 보스턴에 왔다. 남자로서는 유일하게 폴이 대기실의 
여자들을 위로하며 잔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폴은 남자 간호사와 번갈아가며 휠체어에 않은 오웬을 
산책시킬 수 있었다. 말을 하거나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의식을 차린 오웬은 호흡기를 떼고도 스스로 숨을 쉴만큼 회복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이주일 뒤 오웬은 퇴원했다.
  "스물 네 시간 간호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십시오. 그러면 댁에 계셔도 무관할 
겁니다."
  버그만 박사는 특히 레니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지금으로선 뾰족한 수가 없어요. 병실보다 오히려 집이 더 나을 것 같군요. 
대신 로라에게 자주 침대 곁을 지키게 하세요. 현재로선 그 아가씨한테 제일 
많이 반을을 나타내고 있으니까요."
  버그만의 부탁이 없었더라도 로라느 오웬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순간이라도 오웬을 떠나 다른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무급휴가를 받은 
로라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오웬의 침대 곁을 지키며 책을 읽어주거나 
말을 시키곤 했고, 정원에 노니는 벌새와 버논가를 따라 손수레나 유모차를 
몰고가는 할머니들, 머리카락을 뒤로 휘날리며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어린 
소년들,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소녀들, 자갈 깔린 골목길로 따각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꼬마들 모습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유월 어느날, 오웬은 자신에게 종알대는 로라에게 
미소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천천히 입술을 벌려 얘기를 하기도 
했다.
  반마디씩 흔들려 끊어지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로라밖에 
없었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으로 혀를 굴리게 됐을 무렵에는 다른 사람들도 
대강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웬은 자신의 말을 모두 알아듣는 로라가 
신기해 보일 뿐이었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가족들을 위해 로라는 마치 
외국어를 통역하는 사람철럼 그의 말을 되풀이 설명하곤 했다. 그런 까닭에 
오웬이 갑작스럽게 변호사 엘윈 파킨슨을 불렀을 때 오웬에게 인사시킨 사라믄 
로라일 수밖에 없었다.
  오웬이 중대한 일 때문에 자신을 호출한 것이라 짐작한 파킨슨은 로라에게 
자리를 비켜줄 것을 요청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을 도와드리고 싶은데..."
  "아니, 괜찮아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어요."
  로라를 내보내고 문을 닫은 파킨슨은 침대 곁으로 바싹 다가갔다.
  "유언장."
  오웬은 단어을 하나씩 불분명하게 끊었다.
  전혀 뜻밖이 아니라는 듯 파킨슨은 아무 대꾸 없이 펜과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추가조항을 넣으실 수 있습니다. 그걸 말씀하시는 거죠? 새롭게 유산관계를 
정리하고 싶으세요?
  오웬은 천천히 자신의 뜻을 파킨스에게 말했다. 얼굴을 심하게 찡그리면서도 
변호사는 오웬이 더듬는 소리를 빠짐없이 적었다, 
  "정식 문구는 아니지만 빠짐없이 추가조항들을 적어놨습니다. 정확히 다듬는 
일은 회복이 되신 뒤 나중에 확실하게..."
  거친 숨소리가 오웬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오웬이 내 웃음소리라는 
것을 파킨슨은 조금 후에야 알아차렸다.
  "시간없다. 바보구만. 난 죽어가네. 마지막 기회야..."
  "알겠습니다. 서명할 수 있으시죠."
  오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안에 이걸 완성해서..."
  "일주일?"
  오웬이 성난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파킨슨은 새파랗게 질린 
오굴로 오웬을 제지했다. 자신 때문에 오웬이 죽기라도 하면 가족들의 심한 
비난을 면치 못할 터였다.
  "아, 알겠습니다. 내일 서류를 갖고 다시 오면 되죠?"
  오웬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파킨슨은 위층에서 내려오는 로라를 발견했다. 오웬의 
침실로 들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는 오웬과 자신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로라가 어디에 있었을까를 생각했다. 파킨슨은 서재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가족들을 지나치며 곧바로 현관 쪽으로 걸어나갔다.
  몇 년 전부터 유언장을 다시 손보겠다고 했던 오웬이었다. 그렇지만 진짜 
그걸 원했다면 왜 진작 손을 써놓지 못했을까?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급 
비즈니스맨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런 일을 하나다는 것이 얼마나 바보스럽고 
위험한 일인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겨우 말하고, 겨우 움직이고, 겨우 생각할 
수 있는 환자가 그런 엄청난 조항을 유언장에 추가로 집어넣겠다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오웬 샐링거 그 양반을 위해서라도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되지. 파킨슨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집요하게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룬 유언장에서 
재산을 물려받게 될 로라의 뒤조사를 하는 일이었다.
  다음날 오후, 파킨슨이 다시 온 시각에도 샐링거 가족들은 한자리에 모여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에게 발을 돌릴까 주저하던 그는 결국 오웬의 침실로 
직행했다. 로라가 방에서 떠나자 그는 오웬에게 바짝 다가갔다.
  "제가 로라의 뒷조사를 했습니다. 듣고 나시면 마으미 변하실겁니다."
  "유언장."
  오웬도 변호사 못지 않게 서두르고 있었다.
  "네, 그건 갖고 왔어요.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말을 먼저 들으셔야 합니다. 
제 얘길 듣고 나시면 절대 서명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 여자가 누군지..."
  "시끄러!"
  오웬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파킨슨을 노려보았다. 오웬의 입술이 심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유언장 읽어."
  파킨슨은 할 수 없이 가방에서 꺼낸 얇은 서류철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다 
읽자마자 오웬은 펜을 찾았다.
  "잠깐만요. 제 말을 먼저 들으셔야 합니다. 로라는 도둑입니다. 전과자에요. 
그것뿐인 줄 아십니까? 지금은..."
  오웬의 입술 사이로 거친 숨결이 흘러나왔다.
  "아냐."
  "사실입니다. 증거가 제 손에 있습니다. 뉴욕경찰서에서 있는 형사하고 제가 
직접 통화를..."
  "아냐! 그건...틀려."
  흥분과 분노로 그는 심하게 떨고 있엇다.
  "로라 불러."
  "무슨 말씀이세요?"
  "로라 불러."
  "도대체 지금 무슨 말씀..."
  오웬의 일그러진 얼굴에 파킨슨은 말 끝을 맺 못했다. 이 노인네 이러다 
죽는거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다.
  "로라는 안돼요. 다른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유산 수혜자가 유언장 서명시 
증인이 될 순 없는 법이니까요. 간호사들을 부르죠. 잠간만 기다려주실 수 
있다면..."
  파킨슨은 홀 건너편의 간호사들을 부른 후 오웬의 손에 펜을 쥐어주었다.
  "도와..."
  숨을 몰아쉬는 오웬에게 간호사 둘이 양옆으로 달려들었다. 파킨슨이 침대 
위에 펼친 서류를 보기 위해 오웬은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허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파킨슨이 만든 유언장 맨아래 공백에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서명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사람처럼 깊은 숨을 토해냈다.
  "겨우 마쳤구만."
  증인으로 입회한 두 간호사와 파킨슨에게 오웬은 죽음의 그림자가 낀 미소를 
보냈다.
  "로라."
  오웬은 로라를 찾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혈압을 재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파킨슨은 한숨을 쉬며 침실을 빠져나왔다. 바로 문밖에 로라가 서 있었다.
  "아가씰 찾으시는데."
  변호사의 목소리에서 차가운 기운을 느낀 로라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슬픔이 가득 담긴 그녀의 눈빛에서 잠시 동요를 일으켰던 변호사는 
말없이 돌아섰다.
  "안녕히 가세요."
  변호사에게 인사를 한 뒤 오웬의 침실로 들어간 로라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간호사는 혈압을 조사했는지 혈압기를 둘둘 말고 있었다. 로라가 
침대 곁에 앉자 간호사들은 방을 나갔다.
  "이상한 사람이에요.뭣 때문에 화가 났을까? 변호사한테 소리치셨어요?"
  눈을 감은 오웬은 입 바깥으로 씩씩거리는 소리를 냈다. 로라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오웬만의 특유한 웃음소리였다. 오웬이 내민 손에 손바닥을 마주대며 
로라는 손바닥 치는 소리를 냈다. 그러라 오웬은 머리를 끄덕였다.
  "잠깐 눈 좀 붙이실래요?"
  그는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라는 장미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창문의 두꺼운 벨벳커튼을 내렸다. 부드러운 어둠이 실내를 감싸고 
있었다.
  "뭐하고 싶으세요?"
  "얘기."
  눈을 굳게 감은 오웬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너한테 남겼어...조그만 것...유언장에..."
  로라는 두 눈에 투명한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유언장 얘긴 하지 마세요. 좋아지고 있잖아요. 오늘 아침 다른 쪽 손이 
움직이는 것을 봤어요, 앞으론 더..."
  "아냐."
  오웬은 힘겹게 두 눈을 떴다. 어느 선을 넘어가버린, 깊고 깊은 곳에서 
새어나오는 눈빛 같았다.
  "로라, 너는 나에게 기쁨이었다. 가끔...내가 폴이었으면 싶었다. 폴 나이로 
돌아가, 열정적으로 사랑을..."
  로라는 울고 있었다.
  "가지 마세요.할아버지. 내가 보살펴드릴게요. 약속해요. 날버리고 가지 마세요. 
이렇게 가시면 안돼요. 할 말이 있어요. 꼭 할 말이 있는데...제발, 제발 가지 
마세요..."
  그녀는 머리를 오웬의 가슴 위에 기댔다. 그는 핏기 없는 손을 올려 로라의 
눈물을 닦으려 했으나 그녀의 젖은 빰에 닿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로라야. 끝내...우리 계획을...이젠 네 것이다. 그게...끝나는 
걸...봤으면...좋으..."
  오웬의 두 눈이 감기면서 뺨 위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로라는 그의 
손가락을 자기 손에 깍지 끼웠다.
  "할아버진 제게 생명을 주신 분이에요. 날 이렇게 만들어주셨잖아요. 날 
자랑스럽게 만들어주셨는데, 보답도 하기 전에...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얘길 
하고 싶었어요. 아니 지금이라도 얘길 할게요...듣고 계신 거죠? 나한테 새 
생명을 주셨어요. 할아버진 내 인생 일부분을 차지하신 분이라구요. 제발 듣고 
있다고 말해주세요. 감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내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제대로 표현도 못하고 바보처럼..."
  방안에 고요한 어둠뿐이었다.
  "사랑해요."
  로라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오웬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냈다.
  "제 말 듣고 계시죠? 누군가 사랑을 줄 땐 그걸 알아들을 수가 있는 거래요. 
그런 거죠? 사랑해요. 사랑해요."

    10장
  사무실에 있는 펠릭스에게 파킨스이 전화를 했다.
  "삼일 전부터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안되더군요. 오늘 묘지서 말씀드릴까 
했지만 그런 장소에게 하기가 뭣해서..."
  "비서 말로는 아버님 유언장 문제 때문이라는데, 맞소?"
  "더 정확히 말해 로라 페어차일드에 관한 얘기입니다."
  펠릭스는 의자에거 몸을 고쳐 앉았다.
  "로라에 대해서?"
  "전화론 안될 것 같은데 삼십 분내로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지금 말해요!"
  파킨슨은 변호사 대접을 제대로 해주던 오웬을 생각했다. 펠릭스에게 
맞대놓고 불쾌하다는 얘기를 할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으나 자존심보다 샐링거 
고문변호사로서의 수입을 계산하고 참기로 했다.
  "그럼, 간단히 얘기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로라는 전과범입니다. 뉴욕에거 
붙잡힌 경력이 있다는데, 동생 클레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둑이라."
  펠릭스는 놀라는 기색 없이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언제 그랬데요?"
  "칠년 전 열다섯 살 때, 클레이는 열넷 살 때구요."
  "부모는?"
  "경찰 기록엔 잡히기 바로 일년 전 트럭 사고로 둘 다 세상을 뜬 걸로 돼 
있답니다. 보호자가 누군지 나와 있지 않대요. 이모인가 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데 체포한 뒤 그 여자한테 감호처리시켰다는 기록도 있답니다. 이름은 
메로디 체이스."
  "누구?" 
  "가짜가 십중팔구겠지만, 그렇게 적혀 있어요."
  "이년 뒤, 그러니깐 열일곱 살 땐 유산을 받은 걸로 돼 있더군요. 핸디라는 
책방주인이 그 아가씨한테 책 열 권을 남겼대요."
  "그밖에는?"
  "작게 볼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 책이 보통 책들이 아니라면 더욱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돌아가시기 전 부친이 유언장을 바꾸셨기 때문에 하는 소립니다. 
추가조항으로..."
  "아버지가 뭘 했다구요?"
  "샐링거 호텔 그룹 이 퍼센트와 오웬 샐링거 주식회사와 호텔등을 로라 
페어차일드에게 넘긴다는 추가조항을 만드셨습니다."
  "이 퍼센트를? 그 애한데? 아니 아버님이 그렇게 하는 걸 보고만 있었던 
게요? 왜 나한테 말..."
  "변호사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유언장 내용을 밝힐 수 없습니다."
  "어떤사람이라니? 지지리 멍청한 사람같으니! 난 아들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걸 그렇게 내버려둔 거요. 두 눈 빤히 뜨고 서류를 다시 만들어 줘? 
오웬 샐링거 호텔하고 뭐, 뭐를 어째?"
  "비콘 힐 저택도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부동산까지..."
  "막아보려고 했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막았어야지."
  펠릭스는 내장이 꽈배기처럼 비틀리는 것을 느꼈다. 위는 팽팽하게 
부풀어올랐고, 이는 단단하게 악물렸다.
  "미쳤어. 미쳤으니까 그런 거라구."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고인이 뭘 하려는지 분명 알고 계셨으니까. 아무리 
말려도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셨어요. 증인이 필요하다는 것가지 알고 
계실만큼 의식이 또렷하셔서 내가 간호사들까지 불러와야 했습니다."
  파킨슨은 잠시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끊었다. 펠릭스로 하여금 자신에게 바짝 
매달리게 만들 순간이었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했..."
  "이상하다니?"
  "매우 피곤한 상태였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지요. 그래서 느낀 건데. 물론 
확실한 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파킨슨, 오 말꼬릴 그렇게 흐리는 거야. 도대체 뭘 느꼈다는 거요?"
  "어떤 압력을 받아서 그렇게 행동하신 게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는 
얘기요."
  파킨슨의 말이 펠릭스의 머릿속에서 부유물처럼 떠돌고 있었다.
  "누군가가 아버님을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단 소리지요."
  "노인네 옆에 붙어 모든 걸 좌지우지하게 만든 솜씨로 끝내 유언장까지 
바꾸게 만들었단 말이구만."
  "그렇게 말하진 않았는데..."
  "물론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펠릭스는 생각에 잠긴 듯 말을 길게 뺐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 의견을 묻게 된다면..."
  "오웬 샐링거가 어떤 강요나 강압에 의해 마음을 바꾸지 않았을까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는 얘기할 수 있겠죠. 거기다 유언장 조정을 위해 그분 침실에 
두 번 들어갔을 때, 로라 페어차일드가 그분 곁에 있다가 자릴 비킨 사실과, 일 
끝내고 나왔을 때마다 문밖에서 그녀를 보게 됐다는 사실도 추가로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고맙소. 수고했어요."
  펠릭스는 차분한 음성으로 파킨슨을 칭찬했다.
  "유언장 공개는 다음주에 합시다. 그 전에 따로 연락을 취할테니 기다리시요."
  전화를 끊은 뒤 펠릭스는 구석진 창문 앞에 서서 비콘 힐 방향에 있는 
시립공원을 굽어보았다. 모든 생각이 하나의 궤도를 돌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애한테 비콘 힐을 남겼다구. 호텔들도. 그룹 일부분도. 내 회사를? 미쳤구만. 
가만두지 않겠어. 날 바보로 만들었어. 하지만 이제부턴 내가 막겠어. 아버진 
죽었지만 난 안 죽었다구. 그 계집을 두 조각으로 찢어발기겠어. 유언장은 
이전의 것 하나만으로 족해. 유언장 말고 다른 건 없는 걸까? 노인네가 직저 
작성해둔 서류가 있다면?
  그게 뭐가 됐든 찾아내야만 했다. 초조해 견딜 수가 없었다. 샅샅이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것을 깨끗이 마무리해야 한다고 그는 다짐했다. 일곱 시경 
펠릭스는 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 같이 하며 얘기 좀 하자. 우리 둘만 오붓하게 말이다. 늦은 건 알지만 
좀 바빠서. 아직 저녁 전이거든."
  "내일 점심으로 하면 어때요?"
  폴은 머뭇거리며 펠릭스에게 양해를 구했다.
  "로라가 와 있어요. 장례식 내내 그러더니 지금까지 마음이 안정된 것 같지 
않아서요. 혼자 두고 떠나기가 좀 그렇네요."
  "그러자 그럼. 비서가 내일 아침 전화를 할 테니 그편에 정확한 시간을 
정해두거라."
  로라가 폴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그는 마음 편히 오웬의 숙소로 달려갈 수 
있었다.
  "로자, 수고 많아요."
  일층에 있던 로자에게 인사를 던진 뒤 펠릭스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아버님 서재에 있을 테니 가서 자요. 필요한 게 있으면 내 알아서 할 
테니까."
  로자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오십 년이 넘도록 오웬은 결코 로자에게 
침대로 가서 자라느니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도와줘요? 뭘 찾는 것 같은데, 물건 어디 있는가는 내가 알지 다른 사람은..."
  갑자기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기 위해 로자는 얼굴을 계단 반대편으로 돌렸다. 
요즘 거의 매일 눈물이 나왔다. 오웬 때문이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이미삼층으로 
가는 홀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그는 한거번에 계단 두개씩을 밟아 올라가며 소리쳤다.
  주인을 잃은 서재는 여전히 오웬의 체취를 머금고 있었다. 탁자와 마룻바닥에 
흩어져 있는 책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돈돼 있었다. 치펜데일 
책상 위에 있는 램프에 불을 밝힌 펠릭스는 책상 위 서류들과 서랍 속에 들어 
있는 서류뭉치 등을 거내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로라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쉽게 찾아냈다. 그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사랑하는 로라에게
  바깥 날시만큼이나 기분이 아주 상쾌하다. 죽음을 앞둔 노인으로서 신중을 
기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을 쓰기로 했다. 정신이 맑고 손에 임이 있을 때,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너와 함께 계획했던 호텔사업에 관해 써놓는 것이 
아무래도 현명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내가 그 호텔에 애착을 가지는 것만큼 너도 
그곳에 사랑과 관심을 보이는 걸 알고 있단다. 호텔 증축에 관한 계획을 
얘기하기 전에 유언장을 좀 조정해놓으려 한다는 사실을 먼저 얘기하마. 
문중들이 운영하는 그룹 중 일부분과 이집, 그리고 내 소유로 되어 있는 회사 
전체를 네게 남기고자 한단다. 내가 죽게 되면 네가 그 호텔을 맡아 
운영해달라는 소리다. 내가 뜻을 못 이루고 가더라도 그것들을 다시 멋지게 
일으켜주렴.

  굵게 씌여진 부친의 필체가 거의 열장 넘게 남아 있엇지만 펠릭스는 그것들을 
끝가지 읽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편지를 통해 나타난 아버지의 목소리를 
그는 부인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친아들인 자신보다 로라를 더 사랑했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하시구만. 그는 
오웬을 향해 거친 숨을 토했다.
  나한테 이렇게가지. 온 천하에 날 미워했다는 사실을 공표하시겠다구. 
아들보다도 더 그 계집애를 사랑했다구? 내가 그토록 원하는 걸 피 한 방울 안 
섞인 개뼈다귀한테 던져? 미쳤어. 미치지 않고선 아들한테 이럴 수 없어!
  가슴속에서 들끓고 있는 분노로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잊고 
있었다. 그때 아래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움이 역력한 로자의 목소리에 이어 폴과 로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펠릭스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맨 꼭대기 책상 서랍 속으로 서류를 대강 쓸어 놓은 그는 서둘러 서랍을 
닫았다. 그런데 서류 몇 개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는 것을 상기한 그는 서럽 
속에서 몇 개의 서류뭉치를 꺼내 책상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리고 서랍을 
닫으려고 하는데 뭔가 서랍 뒤편에 끼어 움직이지 않았다. 서재 바깥쪽에서 
점점 크게 다가오는 로자의 목소리에 그는 안감힘을 써서 서랍을 밀어붙였다.
  "조금 전에 왔어. 여기 서재에 계실 텐데..."
  노크 소리가 났으나 펠릭스는 소리를 죽인 채 서재 옆에 붙어있는 부친의 
침들로 들어갔다. 서재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로라가 뭘...어, 아무도 없는데."
  로자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떠나는 소릴 못 들었는데. 나도 이젠 늙었나봐. 그래도 이상하지. 펠릭스는 
원래 쿵쿵 소릴 내면서 걷잖이. 어쨌든 잘됐네. 괜히 일하고 있는 사람 방해하나 
싶어서 걱정했는데. 그래, 뭘 찾나? 로라, 내가 좀 도와줄까?"
  "됐어요. 괜찮아요."
  거의 들릭락말락한 소리였다.
  "소지품을 좀 챙길가 해서요. 며칠 동안 폴 아파트에 있으려구요."
  홀로 빠지는 침실문을 통해 펠릭스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여태껏 
당당하기만 했던 그가 세 사람을 피해 거의 개처럼 기고 있었다.
  날 이렇게 만든 널 반드시 밟아버리고 말겠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그는 소리 없이 저택 앞 계단을 빠져나갔다. 폴과 
함께 있겠다 그랬지. 내일 다시 와서 찾을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 
셈이다.
  그러나 잠시 후 빈손으로 나온 것에 대해 뼈아픈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도둑처럼 몰래 서류를 서랍에 쓸어넣는 대신 필요한 것을 손에 쥐고 나왔어야 
하지 않는가. 차 옆에 멈춘 채, 그는 발걸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기 전에 자리를 뜰 것이냐, 아니면 어디 숨어 있다가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본 뒤 다시 서재로 올라갈 것이냐에 대해 망설이고 있었다. 
한번도 사용한 적은 없었지만 열쇠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두번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는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폴과 로라를 기다렸다. 일을 끝내고 돌아가야만 
잠을 이룰 성싶었다. 그로부터 삼십 분 뒤 폴과 로라는 차를 타고 떠났다. 
그러나 펠릭스는 로자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무려 두 시간을 어둠 
속에서 기다려야 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소등 뒤 삼십 분을 추가로 더 
기다렸던 그는 사년 전 오웬의 심장발작 후 바로 만들어서 나누어 가졌던 
열쇠로 오웬의 비콘 힐 저택 현관문을 열었다.
  어둠에 잠기 계단을 발로 더듬어 올라 서재로 들어간 펠릭스는 오웬의 편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뒤였다.
  서랍을 아예 끌어내 뒤집어보았으나 있는 것이라곤 
화물탁송장나부랭이들뿐이었다. 책상 위에 혹 섞여 있을까 싶어 이 잡듯이 
뒤져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져갔구나. 그년이 가져갔어. 병든 노인네를 꼬시더니, 이젠 그 중요한 
편지를 도둑질해갔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편지만은 찾아야 했다. 그래야만 노인네가 넘긴 샐링거 
재산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찾아야 돼. 그걸 이용해서 노인네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할 
거야. 강압받지 않은 상태에서 유언장을 재조정했다고 주장할 것이 틀림없어. 
그걸 찾아야 돼. 노인네가 날 병신으로 만든 사실을 가문뿐 아니라 전세계에 
퍼뜨리기 전에 그 여우를 잡아들여야 해.
  뭐든 빨리 생각해야 된다. 펠릭스. 난 해낼 거야. 내가 누군데. 실수는 결코 
용납할 수 없어. 여태껏 해오던 식으로 철저하게 이 일을 끝내고 말 거야.
  펠릭스는 두 손을 그러잡았다.

  유언장이 공개되는 순간 그는 먼저 선공을 해나갔다. 편지를 빼내려고 머리를 
쥐어짰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엄하게 일어나 로라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매서우면서도 차가운 독화살이었다.
  오웬의 유언장을 공개하느 자리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펠릭스의 치명적인 
독화살을 맞은 로라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오웬의 사랑을 
받고부터 자신의 어두운 과거가 행복한 미래를 앗아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녀에게 펠릭스의 독화살이 날라온 것이다. 이제 
사랑하는 남자 폴은 나에게서 떠날 것이다. 그녀는 깜깜한 절망 속에 갇혀 
있었다.

  "잠깐, 잠깐만요!"
  로라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유언장의 내용을 글로 남겼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어요. 그걸 
보시면 제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정말이야, 로라?"
  폴은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로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지."
  미심쩍은 눈빛이었으나 폴은 허둥거리는 로라를 따라 나섰다. 문을 소리나게 
닫은 폴은 로라의 손을 잡았다.
  "뭐가 어더ㅎ게 돌아가는 건지 설명 좀 해줘야겠어, 로라."
  "당신은 내가 그런 인간이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오웬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로라의 눈으로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삼층 계단으로 달음박질치는 로라의 뒤를 폴은 황급히 따라갔다.
  "펠릭스가 한 말이 모두 다 거짓이라면..."
  로라는 폴이 하는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오웬의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 
서랍을 잡아뺀 로라는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서류뭉치를 보자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 서류들이 왜 이렇게... 아무튼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쪼그리고 앉은 그려는 서류들을 다 뽑아 무릎 위로 오렸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찾아나갔다.
  "없어요."
  로라는 폴을 쳐다보며 힘없이 말했다. 폴의 얼굴에는 당황과 절망이 교차하고 
있었다.
  쥘을 완벽하게 흉내내던 로라. 프로급 여배우. 영양처럼 바위로 오르던 로라. 
호텔 부지배인으로 일하는 로라. 백화점에서 물건 고르는 것조차 싫어하던 로라. 
마치 누군가 물건을 고르는 자신을 도둑으로 모는 것처럼 꺼려 했었지.
  폴의 머릿속에는 그가 아는 로라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유언장에 관한 편지 같았는데, 돌아가신다는 걸 상상하기 싫어서 안 받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 서랍에 넣으셨는데..."
  "뭐라고 쓴 편진데?"
  "읽지도 않았어요. 우리 둘이 계획했던 것들을 다 적어놓으셨다고... 호텔 
증축건이에요. 네 군데 호텔 말이에요."
  "당신에게 남기셨다는 호텔들 말이겠군."
  "네, 하지만 그 사실만은 몰랐어요. 정말 나한테 그것들을 남기실 줄은."
  "그 편지를 받고서도 안 읽어봤다는 말이야?"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이해 못해요? 단지 돌아가셨을 경우에만..."
  "그건 그랬다 치고 다른 소린 어떻게 된 거야? 펠릭스가 한 소리 말이야."
  "어떻게..."
  로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떻게 당신이 그런 걸 나한테 물을 수 있었요? 그분 옆에 항상 가까이 있던 
날 보고서? 당신을 사랑해요. 그분을 사랑했어요. 내가 여태껏 보여주었던 
것들은 진실이었어요. 당신이 보고 듣고 느기고 한 걸 모른단 말이에요? 느낀 
걸 부정할 순 없잖아요?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일년 넘게 같이 보낸 세월이 
그럼 거짓이었나요? 우리가 서로 거짓으로 상대를 사랑했나요? 그래요?"
  "난 아니었어."
  그려늘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할아버진 날 믿었어요. 난 그분에게 사랑과 신뢰를 드렸고, 그분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기뻐하셨어요. 그리고 그걸 다시 내게 돌려주셨어요... 감사들릴 수 
없을 만큼 두 배 세 배로 더 많이..."
  그녀의 목소리는 울분과 슬픔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날 사랑하셨단 말이에요. 오웬은 날 그렇게 믿어주셨는데...당신 정말 미워요. 
오웬이 날 사랑하는 것만큼 당시이 날 믿는다고 생각했었어요. 펠릭스 때문에, 
그 몇 분 사이에 날 의심하다니..."
  그녀는 몸을 뒤로 돌렸다. 가슴은 얼음장같이 차갑게 마비돼 있었고 눈은 
말라 있었다. 울지 않을 거야, 절대로. 사랑 때문에, 고통 때문에 날 울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다시 폴에게 몸을 돌린 그녀는 메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 때문에 매일 매일이 새롭고 환한 세계였는데... 난 당신도 나처럼 그런 
줄 알았어요. 하지만 펠릭스가 입을 벌린 그 순간부터 당신은 날카로운 칼로 
우리 세계를 찢어놓으려 했어요. 우리가 서로 얘길 나누기도 전에 날 믿지 못해 
의심을 했어요. 우리 사랑을 말이에요."
  무거운 침묵에 빠져든 두 사람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로라의 두 손이 
가볍게 흔들렸으나 다시 밑으로 힘엇이 떨어져 내렸다. 등을 곧게 뻗고 머리를 
높게 쳐들고 그녀는 문간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펠릭스 말이 사실이냐?"
  "그래요."
  그녀는 방을 빠져나갔다.
  로가가 문을 잡아당긴 순간, 시끄럽게 웅성거리던 가족들은 숨을 죽였다. 
로라는 펠릭스가 자신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왜 이럴까? 그가 편지를 가겨갔을 텐데. 왜 내 손에 편지가 
있는지를 확인할까? 로라는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안타까움과 분노가 섞인 
알리슨의 시선, 레니의 슬픈 얼굴, 바바라 젠슨의 당황하고 서운해하는 모습. 
샐링거 가족들 모두가 혼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클레이의 
일그러진 얼굴도 보였다.
  "둘 다 지금 떠나겠어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은 
오래도록 허공에 얽혀 있었다. 당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모든 걸 다 걸겠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무슨 짓을 하든, 오웬과 날 추악하게 매도한 뒤 호텔들과 
이 집을 뺏아간 당신을 무너뜨리고 말 거야.
  그녀와 클레이는 팔월의 태양이 눈부시게 부서져내리는 보스턴 거리로 발을 
내디뎠다. 삼층 오웬의 침실 창문에 내려진 진초록빛 셔터와 붉은 벽돌담을 
로라는 멍하니 보았다. 오웬... 사랑했어요. 행복했구요. 내 마음 아시죠? 편히 
주무세요.


      3. 새로운 만남
    11장
  변호사의 이름은 앤셀 롤린스였다. 여린 눈빛과 긴 턱,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반들거리는 머리가 특징인 그는 로라 아버지의 
대학동창이었다. 그는 펠릭스측 변호사인 카버세인만큼 구보스턴 사교계에서 
확고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카버 그 사람 내가 잘 알지. 대단한 실력가야."
  둥근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로라와 클레이에게 엔셀은 힘주어 말했다.
  "급으로 따지면 특급이지. 그쪽이 어떤 무기를 지니고 있는지 확실히 모르지만 
미리부터 겁을 먹진 말자. 오웬시가 썼다는 그 편지를 우리가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쪽에서 먼저 꼬리를 감추고 사라질 텐데. 그렇게 스러지기 전에 
오래전부터 유언장을 고칠 생각이었다는 걸 증명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거든. 그 유산이 네게 유증됐다는 것을 확실하게 입증해낼 수 있는 
무기란 말이야."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 뒤질 수도 없잖아요."
  "그래도 희마은 있다. 도두들 두 사람이 아주 가깝게 지낸 걸 알고 있으니까."
  그날 오후 내내 로라와 클레어는 지난 오년간을 회고하며 롤린스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았다. 벤의 이야기만을 제외한 채. 변호사를 만나기 전 벤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클레이는 멘 때문에 계속 
투덜거렸다.
  "제기랄, 형은 우리 두 사람을 이렇게 싹수 노랗게 만들어버렸어. 그래도 
다행이지, 뭐. 아무도 우리가 그 집을 털었다는 걸..."
  "우린 그 집을 털지 않았어, 클레이!"
  "형이 꼬릴 잡히면 가만히 입다물고 있을 것 같애? 빠져나가려고 우릴 
잡아맬걸. 어쨋든 난 절대로 형과 가가이 하지 않을거야. 만나는 건 고사하고 
아예 연을 끊을 거라구."
  맞는 말이었다. 벤에 대한 이야기르 꺼낸다는 것은 오년 동안의 삶이 
거짓이란 것으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었다. 더 나아가 없는 일까지 있게 만들어 
더 큰 의심을 받게 될 지도 몰랐다. 결국 그 이유 때문에 두 사람은 모든 것으 
이야기하는 대신 벤에 관해서는 침묵하기로 입을 모았다.
  두 사람의 긴 이야기를 다 들은 롤린스는 굳은 표정이었다.
  "위험스러운 요소가 몇 개 있긴 하구만."
  그는 중얼거리며 노트에 몇 가지를 끄적거렸다.
  "하지만 신중하게 대처하기만 하면... 그래 좋아. 단계적으로 계획을ㅇ 
세워보자. 필라델피아의 이 번호로 연락하면 되나?"
  "아뇨?"
  그러면서 로라는 그이 상담노트에 새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었다.
  "여기에 모레쯤 도착해 있을 거예요."
  "단톤스?"
  변호사는 로라가 적은 주소를 읽었다.
  "제이슨 랜딩 뉴욕 단톤스 맞나?"
  "휴양지예요. 당분간 거기 머무를 예정이에요. 하지만 저희를 필요로 하실 
때는 보스턴으로 나오겠어요. 말씀대로 따를 테니까 힘서주세요. 기다려야 
된다면 언제가지 기다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될 수 있는 한 빨리 진행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제겐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돈은 항상 중요한 거지."
  그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빌어먹을 놈."
  도시를 빠져나가기 전 점심을 먹기 위해 찾은 식당에서 클레이는 변호사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 자식은 돈밖에 모르는 놈이야, 변호사비 못 받을까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어."
  "그게 적은 돈이니."
  로라는 생기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펠릭스에 대한 분노로부터 시작된 
감정은 폴과의 이별,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들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떠오르면서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변호사말이 아니더라도 법정 싸움에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로라는 짐작하고 있었다.
  창가 좌석에 앉아 로라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괴이한 모습을 보았다, 화장도 
못했구나. 머리도 좀 자르든가 어쩌든가 해야겠다. 로라가 이러고 있는 모습을 
봤다면 분명 허리를 곧게 펴라고 충고했겠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아면 
얼마나 좋을까. 로라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곧 돌아옭;."
  그녀는 식당 뒤편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 앞에 선 채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가방 속에 들어 있던 지갑에서 소형 가위를 꺼내든 
로라는 서슴없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동그랗게 말린 부분을 날카롭게 하기 
위해 머리 끝을 계속 잘랐지만, 길이가 짧아질수록 머리카락은 더욱 강하게 
안으로 말리가만 했다. 결국 머리카락이 소형핀 길이만큼 줄어들고 나서야 
로라는 가위질을 멈추었다. 본래 갸름하던 얼굴은 더욱 작아 보였고, 광대뼈는 
높게 솟아올라 커다란 두 눈이 수프접시처럼 움푹 들어가 보였다.
  클레이는 몇분만에 완전히 변해버린 로라의 모습에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디 가서 뭘 어떻게... 완전히 딴 사람이잖아."
  "그래? 잘 됐다. 내가 아니였으면 했으니까."
  로라른 어깨를 들썩거렸다.

  도시 북쪽을 향해 차를 몰던 클레이는 로라에게 농 섞인 말을 했다.
  "롤린스가 배심원들 눈에 아름답고 가련하게 보여야 된다고 말했는데, 머리 
자른 누가 모습이 꼭 그래."
  "사람들이 날 믿어주면 이기는 거고, 아니면 망하는 거겠지."
  "누나."
  클레이는 근심어린 눈빛으로 로라를 보았다.
  "포기하는 건 아니지?"
  "그건 아냐."
  혼잡한 도로를 빠져나가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로라는 켈리와 존 단톤 부부의 모습을 
상상상하기 시작했다. 전화통화만 했을 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일주일 
전 낙심천만으로 전화를 건 로라에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해준 
사람들이었다.
  "얼마든지!"
  켈리는 시원하게 로라의 청을 받아들였다.
  "내가 안된다고 할 줄 생각했어여? 그랬다면 정말 섭섭한데. 이리니아 
백작부인과 그 수행원팀을 일주일씩이나 우리 섬에 묵게 해주어 한철 장사를 단 
한 번에 끝내준 이가 당신인데 거절할 수가 없지. 로라가 뭘 부탁하든 다 
들어줬을걸. 원한다면 우리 섬을 통째로 가지시라구."
  그들은 제이스 랜딩 근처의 작은 마을이 보일 때까지 챔플레인 호숫가를 계속 
따라내려갔다. 켈리가 이야기했던 섬 입구를 찾아 로라는 방죽길을 어림 잡아 
삼십분은 달려야 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차는 섬 밖에 주차시켜야 한다는 것이 
단톤스섬의 규칙이었으나 켈리는 로라에게 직접 섬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짐은 놔둬요. 우리가 알아서 안으로 들일 테니까."
  본채 건물에서 뛰어나와 숨을 몰아쉬며 로라에게 뜨거운 포옹을 한 켈리는 
포옹을 푼 뒤에도 선하고 맑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연신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검은 눈동자와 빗질을 무시한 듯 중구난방으로 헝클어진 
길고 검은 머리채. 그리고 우렁한 목소리의 그녀는 로라보다 키와 체구가 훨씬 
크고 나이도 두 배 정도 되었지만 명랑하고 밝은 성격탓인지 나이가 그렇게 
들어 보이지 않았다.
  "안녕, 반가워요!"
  차에서 나오는 클레이에게 켈리는 예의 그 환한 미소를 보냈다.
  "누가가 계속 운전하고 왔나봐요?"
  "저도 했어요. 누난 겨우 조금 전부터 핸들을 잡았는데..."
  "잘됐다. 마침 멋진 기사 한 분이 필요했는데. 이 섬에 오는 손님들한테 차량 
반입을 금지시키거든요. 그래서 멋진 자동차들을 몰고 골프 코스에 손님들을 
실어 나를 사람이 필요해요. 어대요? 재미있을 것 같죠?"
  "아이구, 재미있긴요. 고생길처럼 보이는데."
  "두고 보면 알겠지. 말 나온 김에 인사를 합시다. 날 따라올래요?"
  로라는 정감 있게 클레이를 이끌어가는 켈리의 뒤를 따라갔다. 켈리는 본채 
뒤편에 있는 대형 주차장으로 그를 데려가 조장급 기사에게 인사시켰다. 로라의 
눈에는 멀뚱하게 서 있는 클레이가 너무나 어려 보였다. 필라델피아에서 호텔 
일을 했건만 아직도 애티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로라는 켈리와 존이 동생을 
굳센 남성으로 가꿔주길 은근히 기대했다.
  두 사람을 차고에 둔 채, 로라는 느긋한 걸음으로 주변을 살폈다. 단톤스섬의 
본채는 챔플레인 호수가 내뿜는 푸른 빛과 멀리 에디런덱스(뉴욕주 동북쪽에 
있는 산맥:역자 주)의 녹색빛 산맥에 어울리는 진홍색 지붕을 하고 있었다. 
색깔도 눈에 띄지만 야트만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서 육지 끝에서도 잘 
보였다.
  산책로와 승마 코스를 제외하고 섬 전체에 우거진 송림은 눈부시도록 
푸르렀다. 송림에 둘러싸인 방갈로 본채 앞에는 부드럽게 손질된 푸른 잔디밭과 
테니스 코트장, 겨울에만 사용되는 실내수영장, 그곳과 직접 연결된 옥외수영장, 
크로켓 경기와 배드민턴을 할 수 있는 아담한 운동장과 모터보트장, 그리고 
선창으로 연결되는 자갈 깔린 석판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단톤스섬의 풍경은 일급 호텔들이 갖추지 못한 고요과 숲이 주는 아름다움을 
풍성하게 지니고 있었다. 해안과 송림이 주는 분위기는 케이프 코드의 오스터 
빌을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
  "동생이 분명 여길 좋아하게 될 거라고 장담하지. 최고급 자동차들을 신나게 
몰다보면 행복해서 기절하려고 할걸."
  어느새 다가와 우렁찬 목소리를 쏟아내던 켈리는 로라의 표정을 살폈다.
  "왜 그래요? 누가 죽었나보지? 아니면 배싱당했구만. 그것도 아니면 누가 
사정없이 쫓아내버린 거야?"
  "켈리, 내가 솔직하게 얘기 안한다고 화내진 않겠죠?"
  "천만에.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그냥 속에다 담아둬요. 자, 그럼 우리 
들어가볼까요. 두 사람이 쓸 방들이니까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저녁은 한 시간 
뒤니까 그때가지 조금 쉬어도 괜찮겠지. 로라, 내가 머리손질 꽤 잘하는 거 
모르지?"
  켈리는 로라의 기분을 생각해서 자연스럽게 머리 얘기를 꺼냈다. 로라는 마구 
삐죽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에 손을 올리며 수좁게 대꾸했다.
  "보기 흉하죠?"
  "프로미용사가 자른 것 같진 않은데."
  켈리는 투박한 손가락으로 로라의 짤은 머리카락을 몇 번 훑어내렸다.
  "아무래도 손질을 해야겠는걸."
  그날밤 로라의 머리를 정성껏 다듬어준 켈리는 로라가 짐을 푸는 동안 옷가지 
등을 장 속에 일일이 걸어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가구가 별로 없죠?"
  주방장이 차와 함께 내온 아몬드쿠키를 접어들며 켈리는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석유재벌인가 하는 어떤 남작이 여길 건축했을 당시엔 꽤나 멋있는 가구들이 
있었대요. 하지만 부인과 별거하면서 이혼할 때까지 가구들을 계속 
팔아버렸다는군. 결국 텅텅 비어서 유령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집을 고치느라 
우리들이 애를 썼죠. 그래도 워낙 덩치가 큰 건물이라 가구를 채워 넣기가 쉽지 
않았어요. 샐링거 호텔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하지. 여기 있으면 그 호텔 생각이 
종종 날 거예요."
  "그만뒀어요.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새 직장 얻을 때까지 여기가 집이거니 생각하고 지내요."
  "그래요 괜찮겠어요? 뭐든 도와드릴 순 있어요. 일자리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하겠어요."
  "단톤스 휴양지 부지배인 자린 어때?"
  "부지배인이요?"
  로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일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을 내보낸다는 말씀이세요?"
  "문제가 생겼으니까 하는 소리예요. 지금 막 도착해서 못 느꼈겠지만 여긴 
지금 난리예요."
  켈리는 소나무로 된 걸상에 몸을 기댔다.
  "지난 주에 성격이 활화산 같은 내 남편께서 손님들한테 팁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부지배인과 남자종업원 둘을 그 자리에서 목을 잘라버렸거든. 물론 나도 
남편 결정에 동의를 했죠. 덕분에 우리린 황금 같은 팔월말을 노동절처럼 
문닫고 지내야 했다니까. 내눈에 두 사람이 천사처럼 보이는 이류를 이제 좀 
알겠어요?"
  "세상에, 거짓말 같애요. 양쪽에 딱 들어맞게 일이 풀리다니...클레이를 기사로 
쓰시게요?"
  "우선은 기사가 급해요. 존이 제안하는 드라이브코스를 완벽하게 해내면 그 
일자린 클레이 거죠. 그 다음에 다른 일이 있나 또 알아보도록 해요. 거짓말같이 
느껴지는 건 나예요. 두 사람 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니까. 처음엔 
백작부인을 보내주더니 이젠 직접 이렇게 와서 우릴 도와주려 하다니.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는데...샐링거 호텔에 근무하던 사람들한테 혹 여기가 
지루하게 느껴지면 어쩐다?"
  "지루하긴요."
  로라는 잠시 머뭇거렸다.
  "저...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가끔씩 보스턴에 나가봐야 해요.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거든요. 그게 여기 업무에 방해가 된다면 부지배인보다 좀 덜 
중요한 자리도 괜찮아요."
  "한번 나가면 얼마동안 있게 되는데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가능하면 빨리 끝내고 돌아와야겠죠."
  "그래요? 그럼 됐어요. 로래 걸리는 일인가 보죠?"
  "한 일년쯤 걸리 것 같아요."
  "좋아요, 그렇게 결정을 본 거니까 일이 있어 나갈 때마다 미리 나한테 얘길 
해주는 걸로 합시다. 됐죠?"
  "고마워요, 켈리."

  그로부터 삼개월 뒤 추수감사절을 앞둔 어느날 로라는 클레이와 함께 
법정심리에 앞서 미리 선서증언을 하기 위해 보스턴을 향해 차를 몰았다. 아직 
눈이 순백으로 빛나는 그린 마운틴을 통과해 뉴 햄크셔의 목초지와 송림을 
가로질러 매사추세츠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펠리스의 변호사 카버 세인의 사무실이 있은 보스턴 금융가로 들어서자 
로라의 가슴속에는 지난날의 추억이 미려들었다. 가슴을 저미는 추억들이었다.
  창문에 블라인드가 내려진 세인의 방에는 형광불빛이 탁한 갈색가구들을 
강렬하게 비추고 있었다. 클레이를 대기실에 둔 채 그녀의 변호사 앤셀 
롤린스와 함께 법정 속기사 옆에 자리한 로라는 세인의 모든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그는 롤린스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차가운 법조인의 모습으로 세인은 
끈질기게 오웬과 로라와의 관계를 몇 번씩이나 확인했다. 어떤 이유로 오웬의 
서재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가, 둘이서 얼마나 자주 산책으 나갔는가, 얼마나 
자주 둘이서만 식사를 했느가, 다른 가족들과 떨어져 둘이서 시간을 보낸 
이유는 무엇인가, 남 몰래 오웬에게 몇 통의 개인적인 편지를 보냈는가, 오웬의 
사업상 업무를 얼마나 자주 도와주었는가, 왜 다른 가족들에게 모든 것을 
비밀로 했는가 등등 그는 철저히 따져들었다.
  "그분이 날 신뢰하셨기 때문이에요."
  "물론이겠죠."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말해줄래요. 왜 그분이 비서를 해고시켰다고 했죠?"
  "해고한 게 아니라니까요. 그 여잔 보스턴 샐링거 기획실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내가 오웬과 함께 이하게 된 다음부턴 다시 기획실로 돌아간 것 
뿐이에요. 그분이 비서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까요."
  "아가씨가 그분과 함께 있게 된 다음부터라고 했는데, 그럼 그여잘 비서직에서 
해고시킨 다음 아가씨가 그 자리에 앉은 건가요?"
  "해고한 게 아니라고 몇 번 얘기해야 돼요!"
  몇 번씩이나 같은 질문이 반복되고 있었다. 로라와 롤린스는 사태가 나쁜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세인은 필요하면 뉴욕에서 전과사실을 들고 
나올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저쪽이 뉴역건을 꺼내지 않은 게 다행이긴 한데."
  세인의 사무실을 나서면서 롤린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법정에서 그 문제를 꺼내지 않는 게 좋다고 확신한 것 같군. 잘됐어. 판사도 
분명 그걸 사안으로 삼지 않을 테니까 이번 재판건과는 무관한 일로 떨어져나갈 
게다."
  "그걸 어떻게 알죠?"
  클레이가 물었다.
  "감으로 아는 거지."
  롤린스는 긴 설명이 필요없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
  "아까 대답을 하느라 땀은 흘렸겠지만, 다 예상했던 질문들이었어. 
선서증언이란 게 다 그런 거지. 정보를 얻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만든 자리니까 
법정에서 불쑥 새로운 사실들이 튀어나오는 것도 막을 겸 해서 말이다."
  "그럼 뭐하러 재판정까지 가요? 아까 그 자리에서 그냥 끝내버리면 될 걸."
  텔레비전에서 언젠가 봤던 재판 장면을 떠올리며 클레이가 물었다.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는 배심원들이 정할 일이니까 그렇재. 나야 두 사람 
변호를 맏았으니 무슨 말을 하든 옳다고 믿지만, "
  클레이가 혼자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막으며 로라는 롤린스에게 물었다.
  "저쪽에서 무슨 소릴 하든 재판 전에 우리가 그걸 다 알 수 있나요?"
  "재판 몇 분 전에 새로운 사실이 터져나오지 않는 한 그렇지. 법정에 서는 
증인들이 갑자기 얘길 한다면 상황이 달라질수도 있지만 말이다."
  "다른 얘기라면..."
  "선서증언 때 얘기했던 내용과 다른 것이 새롭게 생각났을 수동 있을 것이고, 
변호사가 미처 묻지 않았던 것을 재판에서 물어보게 되면 새로운 게 나타날 
수도 있는 법이지. 하지만 그런 건 별로 흔한 일이 아니니까 신경쓸 건 없어."
  그는 문밖에서 두 사람을 배웅했다.
  변호사가 다시 전화를 해온 것은 십이월이었다. 켈리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은 
로라는 옆에 붙어 있는 자신의 자그마한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롤린스와 
조용히 통화하기 위해서였다. 카버세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무실로 샐링거 
가족들과 의사, 간호사들, 파킨슨을 선서증인으로 불러들여 질문을 해봤다는 
롤린스는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로라에게 그동안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예상밖으로 튀어나온 얘긴 없었어. 하지만 그게 오히려 불안해. 자기쪽이 좀 
약하다고 느끼면 카버가 가만 있지 않을 테니말이야. 분명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들을 긁어모을 것 같애."
  "걱정된다는 말씀이세요?"
  "걱정된다는 소린 아니고 마음 단단히 먹고 경계해야 된다는 말이지. 법정 
심리 전에 몇 번 더 만나서 얘길 해야겠는데, 어때 여기 나올 수 있겠어? 이주 
뒤부터 시작할 생각인데."
  "물론 나가야죠."
  "됐어. 마지막 점검을 확실하게 해야 돼. 그동안 생각을 잘 정리해요. 나중에 
틀린 말 하면 안되니까."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모든 게 다 진실이니까."
  로라는 메마르게 대꾸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에게서 별다르게 나온 얘긴 없었나보죠?"
  "특이한 내용은 없었어. 오웬씨가 쇠약했다는 것과 움직이지 못해 
속상해했다는 소리는 있었지. 그쪽보다는 우리가 잘 이용해야 할 열쇠는 
파킨슨이야. 원래 뛰어난 변호사라서 그런지, 아주 간략하고 정확하게 증언을 
했어. 만약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다면 첨부 유언조항을 만들어 오웬씨가 
서명하도록 만들진 않았을 사람이란 뜻이지.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되는 셈이니까. 오웬씨가 자신의 행위를 잘 알고 있었다고 
파킨슨이 증언만 해준다면 우리한테 승산이 있어."
  "다른...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폴 젠슨 얘길 하는가본데, 카버 말로는 그 사람이 증언을 거부했다고 하던데. 
카버도 나도 유동적인 증인은 원치 않아. 그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 로라도 
모르니까. 아무튼 폴 젠슨은 법정증인석엔 나오지 않을 거야."
  로라는 폴이 어느쪽을 기울어 있는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법정에서 이기든 
지든, 폴은 이미 떠나간 사람이었다. 자신이 새인생을 꾸미듯, 그 사람도 새 
삶을 찾아 멀리 가버린 것이다. 법정싸움이 어떻게 되든 그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로라는 유원지 사업을 새로 배워가며 케리의 단톤스섬 부지배인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 어느날 로라는 벤에게 편지를 썼다.
  샐링거 가문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말했지만 오웬의 유언장에 관한 얘기와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내용 등은 벤에게 감추었다. 처음부터 샐링거 가문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벤에게 그가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샐링거가 절대 사랑과 신뢰를 줄 존재가 아니라고 우겼던 벤에게 
결국 로라는 새 주소지와 간단한 인사말 정도만 적어 보냈다. 그 뒤 로라는 
벤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유원지의 자잘한 업무에 파묻혀 하루하루를 
보냈다.
  존이 수송과 스포츠 등 체력 단력에 시간을 쏟는 동안, 로라는 켈리와 함께 
내부 업무를 총괄적으로 해결해 나갔다. 처음에는 불확실하게 시작한 
일이었지만, 몇 달이 지나자 로라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덕을 부리는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도 쥘 르클레어 밑에서 터득한 
솜씨로 매끄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로라는 오웬이 가르쳐준 호텔 기구 
편성법과 경영 체제도 적재적소에 이용해가며 놀라운 실력을 발휘했다. 
대학에서 배웠던 강의 내용을 실험적으로 이용해보기도 했고, 유원지 주변의 
널려 있는 단톤스만의 독특한 점들을 살려 시선을 끌었다.
  그녀는 켈리와 존이 쉬라고 간청을 해올 정도로 경영 구조를 효율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만 매달렸다. 법정에서 승리한 뒤에 
얼마든지 쉴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패배 후의 일도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될 경우 자신에게 적합한 일을 찾아 과감하게 나가겠다는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름에 몰려올 손님들을 위해 계획표를 짜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각 
지역에서 근무할 종업원 진영과 장비목록, 테니스, 승마, 수영, 에어로빅, 
수상스키, 제이스 랜등에 깔려 있는 열여덟개 골프 홀, 카드놀이 등과 야간의 
무료한 시간을 달래줄 흘러간 명화극장 코너가지 단톤스의 휴가시스템을 
전반적으로 개편할 계획을 세웠다. 휴가온 손님들이 대체적으로 음식에 대한 
관심이 많은 점을 착안해서 이백 명이 한거번에 몰려와도 편한하고 풍족한 
식사시간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바와 식당의 메뉴에 특히 신경을 섰다.
  "단가를 좀 높이면 어린애들 숫자가 줄어들 것 같은데."
  일월 어느날, 보트 선착장을 살핀 뒤 본채로 돌아오던 존이 로라에게 의견을 
물었다.
  "얘들은 안 왔으면 좋겠거든. 여간 말썽이어야지. 사고만 치면 그래도 
다행이게? 섬 밖에서 날마다 의사를 불러와야 될 정도야. 켈리는 그래도 
가족단위 손님들을 늘리자는 생각인데, 로라 생각은 어때?"
  "숙박비를 대폭 인상하고 가족단위 휴양지로 꾸미는 건 어때요? 부자들은 
대게 아이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잖아요."
  존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로라를 바라보았다. 넓게 벗어진 이마와 짙은 
구레나룻이 그의 얼굴을 억세게 보이게 했다.
  "글쎄..."
  "애들이 싫다고 숙박비를 대강 올리는 것보다 아예 호화롭게 꾸며놓고 
가족들을 불러들이는 게 훨씬 나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부모들도 놀러갈 때 
얘들을 할머니한테 맡기면서 괜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거 아니에요?"
  "자식들을 두고 놀러가면 죄의식을 느끼나?"
  "그 사람들 마음이야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난 그럴 것 같은데요.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애들은 애들애로 즐겁게,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신나게 
휴가를 보내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결혼해서 빨리 애를 가져야겠구만. 아주 훌륭한 엄마가 되겠어."
  로라는 수줍어하며 얼굴을 붉혔다.
  "부잣집 도령들과 꼬마 아가씨들이 뛰노는 단톤스섬으로 오라이거지. 그럴 
듯한데. 아주 마음에 들었어."
  걸음을 옮기던 존은 고개를 돌려 심각한 얼굴로 로라를 바라보았다.
  "로라는 언제쯤이나 결혼할 생각이지? 매일 밤 그렇게 일에만 몰두하니..."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에요. 켈리하고 언제 한번 여길 나가보는 게 어때요? 
근사하게 저녁을 같이 하면서 분위기도 내고 그래봐요."
  "그 사람은 이놈의 휴양지 생각밖에 안해. 쓸고, 닦고, 그저 여길 키우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아."
  존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클레이는 존을 무척 따랐다. 프로급 기사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은 존과 함께 
클레이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구식 자동차들을 몰고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클레이가 빠뜨릴 수 없는 관심사는 휴양지에 근무하는 젊은 
여종업원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의 마음을 녹이는 아가씨는 늘씬한 다리로 
남자를 유혹하는 테니스 코치 마리나였다.
  클레이는 1927년산 은색 롤스로이스를 여태껏 만난 여자들보다 더 
애지중지하며 번쩍번쩍 광을 내곤 했다. 금 도금과 마호가니로 된 차체와, 
가죽을 씌운 파워 핸들, 부드러운 양가죽 시트에 손바닥을 댈 때마다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흥분을 느낄 정도였다. 최상의 부를 손아귀에 움켜쥔 듯한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게 현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부가 뭔지 맛도 못 본 사람이라면 이 정도로 감지덕지 하겠지."
  클레이는 거실을 거닐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 망할 놈만 아니었다면 우린 지금 비콘 힐에 들어앉아 다리뻗고 세월아 
네월아 배 두드리고 있을 텐데 말이야. 근데 지금 우리 꼴을 좀 보라구! 우리질, 
앞으로 달리기는커녕 거꾸로 가고 있다니까! 이 꼴 같지 않은 곳에서 둘이 
꼬물거리는 꼴이 곡 오년 전 센터 빌 차고 있는 격이잖아. 이 엿 같은 곳에 
틀어박혀서..."
  "여기가 어때서? 여긴 우리 집이야, 클레이. 여기 이렇게 있게된 것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봐."
  매몰차게 클레이의 입을 막아버린 로라는 동생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네가 얼마나 속이 상해 있는지 알아. 하지만 클레이, 여기 있는 동안 난 네가 
아무 말없이 일만 배웠으면 해. 앞일은 내가 알아서 할거야. 다 생각이 있어.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좀 명랑하고 궁정저으로 생각하란 말이야."
  클레이는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길게 앞으로 뻗쳤다. 그는 훈계를 죽는 
것보다 싫어했다.
  "쌀쌀해질 것 같은데 벽난로 좀 봤니?"
  "내가 어떻게 알아? 비콘 힐에선 관리인들이 다 하던 일이잖아."
  "불 좀 피우자."
  "연기 나오면 어떡하라구?"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한 번 해보자."
  짜증이 역력하던 클레이가 표정을 바꾸며 로라에게 키스했다.
  "그래도 헤어지지 않고 이렇게 누나랑 같이 있어서 다행이야. 장작 주워올게 
기다려."
  클레이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누나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언장 사건이 터진 이후 
괴로워하는 누나를 위해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클레이는 절망하고 있었다. 펠릭스가 해고하기 전에 필라델피아 호텔을 
뛰쳐나온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번듯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로라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울지도 
않았다. 그저 돌같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라가 불행하다는 것을 
클레이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누나를 그냥 혼자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돌아다니는 로라가 혼자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챘다. 
  로라는 아무 도움도 원치 않았다. 단 하나 로라가 원한 것은 함께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케이프 코드에서 보스턴까지, 보스턴에서 망할 놈의 
섬구석까지-그가 꿈꾼 곳은 최첨단의 도시 뉴욕이었건만-같이 있어 달라는 
누나의 애걸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따라온 것이다.
  그래도 마음 붙일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근사한 마리나가 있었고, 
멋진 자동차들과 여름철 피크 때가 되면 월급을 올려주겠다고 할 정도로 자신을 
귀여워해주는 존 단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게다가 뉴욕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것도 좋았다. 그 때문에 클레이는 단톤스섬의 단조로운 생활을 참아내고 
있었다.
  하긴 참아내지 않고 떠난들 뽀족한 수도 없었다. 벤을 찾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형이긴 했지만 믿음을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어디든 못 
갈 것도 없었지만 당분간은 로라 곁에 머물 작정이었다.

  "보스턴에 들락거리는 이유를 정말 말 안해줄거야?"
  삼월의 상큼한 아침, 본채 현관 앞 베란다에 앉아 있던 켈리는 로라에게 
우정어린 협박을 하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자기 사무실로 뛰어들어가는 이유는 또 뭐야? 님 
기다리는 처녀처럼 말이야?"
  "언젠가 꼭 말할께요. 하지만 아직은 그 시가기 아니예요."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계시구만."
  켈리는 로가가 불편하지 않도록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난 항상 이 자리에 있어. 로라 말을 들어주고 때에 따라 도움도 줄 수 있단 
말이야."
  "알고 있어요. 감사드려요, 켈리."
  켈리는 잔에 커피를 가들 따랐다.
  "그래도 로라가 처음 여기 왔을 때보다는 많이 차분해진 것 같애. 우리 부부가 
잘 해줘서 그런 건가?"
  "맞는 말씀이에요."
  로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감사드려요."
  로라는 무릎 위에 놓인 메로판에서 새 종이를 뒤집어가며 다시 사무적인 
음성으로 되돌아갔다.
  "포도주 목록을 아직 안 만들었잖아요."
  "그만 할 수 없어, 로라? 좀 쉬자. 경영이사진 명령이다. 켈리 그리고 로라! 두 
여자분들 휴식을 취하시오, 땅 땅 땅!"
  "난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일만 하고 쉬진 말자 이거지."
  한숨을 쉬긴 했지만 켈리는 못 이기는 척 메모판을 무릎 위로 올렸다.
  "침대시트하고 탁자보들은 어떻게 됐지? 이제 다 끝냈었나? 침실하고 식당은 
다 끝냈고... 헬스클럽에 들어갈 것만 의논하면 되겠네?"
  "마사지실에 수건 열네 장하고 시트 스물네 장 배당해놨는데 한번 보세요. 
오늘 오후에 시내를 나가볼까 해요. 세탁송에 들러서 신경 써달라고 부탁해야 
될 것 같아서요."
  "그래, 잘 생각했어. 난 그쪽 일 이제부터 종칠래. 맨날 가족들 걱정만 
늘어놓는 세탁소 주인 넋두리가 이젠 무섭다니가. 시트 찢어지지 않게 잘 
빨아달라는 부탁 때문에 그 수다를 다 견뎌야하다니 끔찍해. 그런 건 로라, 
자기가 나보다 더 씩씩하게 잘 해낼 걸."
  로라는 켈리의 말을 들으며 문득 잠 못 이루는 밤들을 생각했다. 켈리의 
말만큼 자신은 씩씩하지 못했다. 원하는 만큼 강하게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켈리는 나지막한 허밍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뭔가 생각중이라는 켈리의 
신호였다. 켈리는 그 신호로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미리 막아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본채 대형 홀에서 베란다 쪽으로 걸어나오던 존이 로라에게 눈짓을 하며 
물었다.
  "켈리 허밍 소린데, 무슨 일이야?"
  "세탁소 얘길 하고 있었어요."
  존은 껄껄거리며 켈리에게 입을 맞췄다. 아내의 어깨에 살짝 기대앉은 존은 
켈리의 무릎 위에 있는 메로판을 흘긋 보았다.
  "포도주라, 내가 깜빡 했는데 어제 새 공급처를 찾아냈어. 프랑스하고 
이탈리아산 대신 특별하게 우리 미국 포도주만 취급하다는군. 가만 있자, 가격표 
나온 게 어디 있을 텐데. 갖고 올 테니까 그거 보면서 의논해보지."
  존은 메모지를 들춰가며 말했다.
  "바에 술잔들을 새로 들였으면 좋겠어. 지난 시즌에 꽤 많이 깨졌잖아. 
시즌이라 말해놓고 보니가 별로 맘에 안 드는군. 시즌 장사만 할 게 아니라 
여길 일년 내내 돌아가는 유원지로 꾸며보는게 어때?"
  "못할 거 없죠.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얼마간 기다려야 할 겁니다, 단톤씨."
  "얼마간이라는 게 참 묘한 단어야. 어쨌든 내 예상보다 더 오래 걸릴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존은 머리를 긁적이며 허리를 곧게 폈다.
  "사년쯤 기다리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야."
  "그 얘긴 언제부터 나온 소린데요?"
  켈리의 직선적인 대꾸에 존은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삼천 번도 넘게 말했을걸. 근데 변한 건 하나도 없잖아. 예수님을 보내준 
하나님 덕분에 크리스마스 때나 조금 북적거릴까, 십이월부터 오월까지 여긴 
묘지처럼 썰렁해. 그동안 우린 뭘 했지?"
  "열심히 일했죠. 일년 삼백육심오링, 연중 무휴로 돌아가는 유원지를 꿈꾸면서 
말이에요."
  "열심히 어떻게 일했는데?"
  "당신 무슨 퀴즈 게임해요? 서로 머리 맞대고 일했지 어떻게 하다뇨? 나하고 
로라하고 똘똘 뭉쳐서 일하면 그렇게 될 날이 있을 테니 두고봐요. 혹시 존, 
당신 또 딴 생각하는..."
  "이 사람 왜 이러시나, 또!"
  뒤통수에 두 손을 깍지낀 채 존은 켈리를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한 번이면 족해. 한 번 실수로 딴 사람 만난 걸 가지고 계속 그러기야. 절대 
그 얘기 안 꺼낸다고 해놓구선..."
  "그걸 누가 믿어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하느냐구요? 새끼 병아리들이 여기에 나타나게 되면 혀 빼물고 쫓아다니는 
강아지처럼 또 그애들을 따라 섬 밖으로 뛰쳐..."
  "아내가 날 강아지라고 부르는데 이거 어쩌죠, 하나님? 그런 소릴 들어도 
마땅하다구요?"
  존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아요, 존!"
  "그럼 어떤 식으로 말해볼까. 응? 어떤 식으로?"
  로라는 슬그머니 일어섰다.
  "전 주방에 가 있을게요."
  "젠장할!"
  존은 손바닥으로 자기 허벅지를 치면서 로라의 등뒤에 대고 외쳤다.
  "내가 비면줄게. 아주 중요한 회담을 내가 깨뜨렸구만. 여기일 끝내고 가요."
  존은 로라가 대꾸하기도 전에 베란다에서 나와 잔디밭으로 내려갔다.
  "난 왜 로라처럼 침착하지 못한 거지? 존이 병아리들과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장면만 생각하면 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니까. 무능한 남편 데리고 
결혼생활 하랴,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듯 한 푼 두 푼 아껴가면서 이 유원지를 
살려내랴, 어휴 내 팔자야."
  켈리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꼴을 보여서 미안해. 존이 사과한 것 받아들여요. 나도 사과할게. 넋두리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었나봐. 코딱지만한 이섬에 말 상대가 있어야지. 일도 잘 
안 돌아가지, 우리 부부 사이는 점점 심하게..."
  "필요한 땐 시원하게 터뜨려버려야 돼요. 그리고 신경 쓰는 것도 그애ㅛ. 모든 
걸 한꺼번에 풀려고 하지 말고, 한 번에 한 개씩만 고민해보세요. 그럼 덜 
고민스러울 테니까."
  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로라가 침착한 모양이군. 그렇지? 로라 같은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하지만 가끔 내가 로라 때문에 초라하게 느껴지는 건 
모를거야. 마치 점장이가 구슬앞에서 느긋하게 온 세상을 쳐다보는 것처럼 
침착한 로라를 볼때마다 난 왜 이럴까, 로라처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걸까하는 자책감이 들어. 이성을 잃고 소릴 지르거나 울어본 적도 없지?"
  "울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로라는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여기 유원지 사업에 정신을 쏟으면서 존과의 묵은 감정을 깨끗이 정리해보면 
켈리도 한결 마음이..."
  "그래, 좋아, 운다느니 뭐 그럼 애긴 하고 싶지 않다 이거지? 그래 그런 애긴 
그만두자. 유원지 사업에 온 정신을 쏟으라구? 존이 얼마나 질투를 하는데 그래. 
믿기지 않지? 하지만 진짜야. 내가 남편보다 사업을 더 사랑한다고 
질투한다니까. 그럼 그 사람한테 정신을 기울여보라고 하겠지. 하지만..."
  켈리는 두 손을 앞으로 펴 보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 사람은 그걸 또 못 견뎌한다구. 아까 봤지? 부드럽게 나가다가 갑자기 
그런 식이야. 그렇게 부딪치면서 사운다니까. 침실에서도 똑같애. 침대에 누워 
평범한 애길 나누다가도 불꽃 튀기면서 다툰다니까. 그 뒤론 섹스고 뭐고 없어. 
밤새워 또 티격태격하는 거지. 내가 이렇게 남의 애기하듯 술술 말하지만 실제 
당해 보지 않고는 모를 거야. 침대 위에서 싸움을 하다니, 세상에."
  "두 분이 어디 다른 곳으로 잠시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요. 아직 삼월 
중순이니까, 피크가 되려면 몇 달 남았잖아요. 멀리 나갔다 오기에 적당한 시기 
같은데, 어때요?
  "우리 둘을 없애버리려고 안달이시구만. 우릴 쫓아내버리고 혼자 직접 여길 
경영해보고 싶다 이거지?"
  "어디 저 때문에 그러나요? 켈리 때문이지."
  "하지만 로라는 직접 자기 것을 운영해보고 싶을텐데."
  "언제고 그럴 날이 있겠죠."
  "휴, 얼마나 머리 아픈 일인데. 어리 깨져. 우리랑 같이 이렇게 일하는 게 훨씬 
나을걸. 미래가 보장된 곳이니까. 농담이 아냐, 로라. 심각하게 한번 생각해봐. 
동업자든 뭐든 좋아. 우리하고 조건을 맞춰가면서 평생 뛰어보자구."
  "생각해볼게요. 켈리가 휴가를 떠난다면 말이에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바빠져서 올해도 똑같은 생활에, 똑같은 분위기로 살아가실 거예요."
  "할 수 있다면 왜 못하겠어? 하지만 안돼. 돈을 함부로 쓸 순 없어. 로라도 
지금 참고 있잔하. 그동안 말은 안했지만, 눈치는 채고 있었어. 로라가 모든 
욕구를 인내심 하나로 누르고 있다는걸 말야."
  켈리는 로라가 입고 있는 재팃을 가리켰다.
  "랄프 로렌이지? 랄프 로렌 모자도 있던데. 그 비싼 상표를 사던 사람이 여기 
온 뒤론 손수건 한 장 안 사들였잖아. 옷장에 다득 차 있는 비싼 옷들. 
그뿐이야? 가죽장정으로 된 고서적들이 꽤나 되던데... 훔쳐보려고 의도족으로 
그런건 아니야."
  켈리는 로라 입가에 나타난 어색한 미소를 보며 당황해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좀 엿봤지. 아주 살짝 말야. 그냥 사이즈만 잠간 재봤어. 
부러운 마음으로 말이지. 한숨도 쉬면서. 로라를 볼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십사호 대신 로라처럼 팔호 사이즈를 입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타게 부러워한다니까."
  로라는 솔직하기 이를 데 없는 켈리가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 있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있던 로라에게 운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변호사 앤셀 
롤린스였다. 재판 일자가 유월로 정해졌다는 소식이었다. 

    12장
  공단으로 덮인 대형 침대에 앉아 등을 기댄 레니 샐링거는 자신의 탄탄한 
허벅지에 얼굴을 묻은 젊고 잘생긴 청년의 붉은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축축하게 젖어 있는 은밀한 곳으로 다가오는 혀놀림을 느끼고 있었다.
  차가운 보드카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꿀맛 같기도 한 욕망이 몸 전체로 
잔잔히 퍼지고 있었다. 비단과 벨벳으로 치장된 실내 분위기를 그녀는 눈이 
아닌 온 몸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육감세포로 읽고 있었다. 청년은 비스듬하게 
누워 있던 그녀를 거센 손길로 쓰러뜨렸다. 레니는 파르르 떨며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녀와 함께 움직이던 청년은 상체를 높게 세워 단단하면서도 깊게 
팽창된 레니의 은밀한 곳을 파고들었다. 레니의 몸이 활처럼 완전히 휠 때까지 
청년은 뜨거운 상하운동을 반복해 나갔다. 두 번씩이나 오르가슴을 느끼도록 
노련하게 몸을 놀리는 청년의 움직임에 따라 레니는 비명을 질러댔다.
  젊은 사내가 열에 들뜬 비명을 토해낸 순간 레니는 그의 탄탄한 근육을 미친 
듯이 쓸어내렸다. 절정의 순간이 지나자마자 레니는 가슴 위의 사내를 한쪽으로 
밀치고 팔목시계를 들여다 봤다.
  "가야돼. "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자마자 청년은 로봇처럼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갔다. 몇 
달 전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를 계속 잡아두길 원했던 청년은 얼마 
안 가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복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도와줄게요. "
  청년은 잽싸게 일어나 레니에게 다가가며 속삭였다. 결렬한 정사가 끝나고 
둘만이 즐기는 사랑놀이였다. 긴 스타킹과 짧은 슬립을 주워 들어 입힌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브래지어와 얇은 브라우스의 단추를 채웠다. 차갑게 식은 
육체 위로 스커트를 재빠르게 내린 뒤 붉은 색 뱀가죽 벨트를 맨 레니는 회색빛 
뱀가죽 신발을 신으면서 웃옷을 거의 동시에 입었다.
  "다음주에 오는 거죠?"
  바지 혁대를 조이던 젊은이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모르겠어. "
  레니는 뉴욕에 올 때마다, 늘 들고 다니는 핏빛 에르메스 핸드백을 둘러멨다.
  "시간을 내보도록 하지. 하지만 약속은 못해. 이사회의가 네군데나 있어서 
시간이 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장담할 수가 없어. 잘됐지 뭐. 숙제할 시간도 
생기고 좋지 않아? 매일 내 옆에만 있으면 숙제는 언제 하려구. "
  "밤에 하면 되죠. "
  "밤엔 여자친구랑 데이트 해야지. "
  "데이트 같은 거 안해요. "
  "데이트 안하는 대학생들이 요즘 어딨나?"
  "난 못해요. 딴 여자들은 거들떠보기도 싫은걸 어떻..."
  "또 그렇게 나온다!"
  레니의 음성은 싸늘했다.
  "나 때문에 네 인생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럼 괜히 신경 
쓰인다구. "
  "알았어요. "
  레니가 딴 상대를 찾아나설까봐 두려운 마음에 청년은 늘 고분고분 순종했다.
  레니는 자신에게 푹 빠져 있는 대학생의 열정에 흐뭇한 심정으로 전신거울 
앞에 몸을 비추어보았다. 은회색 정장에 흰색 실크 브라우스, 회색 실크 장갑, 
눈썹 위로 약간 기울어진 듯한 자홍빛 아돌포 모자. 마스카라와 아이새도가 
번진 자국없이 새로 그려져 있었고, 립스틱을 연하게 바른 입술도 선명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시간이 되면 전화할게. "
  그녀는 청년에게 짧은 키스를 던졌다. 복도로 나간 레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 로비로 내려갔다. 호텔 로비에는 오후 쇼핑과 식사를 하거나 비밀이 
보장되는 최고급 호텔 품에서 연인과 몇 시간 동안의 짧은 밀회를 갖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늦은 오후의 거리는 따스하고 한가로웠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마저 다른 때와 달리 느긋해 보였다. 레니는 티파니 보석상에 잠깐 
들렀다가 보스턴행 다섯시 소형 여객기를 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저녁 일곱시, 산들바람이 부는 대양의 여린 파도처럼 푸른색과 은빛의 
프랑스식 꽃무늬 벽지가 우아한 식당 창가에서 레니는 펠릭스와 함께 저녁을 
들고 있었다.
  "당신이 갖고 싶다던 그 넥타이 핀을 샀어요. 타파니에 딱 하나 남아 
있더군요. 요즘 부활절에 선물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늘어난 것 같아요. "
  "상인들이 꽤나 좋아할 뉴스구만. 어땠소? 얼굴을 보니까 꽤나 재미있게 보낸 
듯 싶은데?"
  "아주 좋았어요. "
  레니는 송아지 고기와 쌀을 볶아 만든 요리를 두 접시재 먹어 치우고 있었다. 
뉴욕여행을 끝낼 때마다 그녀는 늘 굶주린 고양이처럼 음식을 탐하곤 했다.
  "당신은 오늘 어땠어요?"
  "좋았어. 호놀룰루 엘라니 호텔 진척 사항을 비디오로 살폈는데 이번 가을쯤에 
오른할 수 있겠더군. 시카고 호수 위에 세울 호텔건으로 그쪽 은행관계자들을 
만났는데 자금 문제로 압박 받을 걱정은 안해도 되겠어. 아주 성공적이지. 낡은 
호텔 매매건까지 손봐준다고 나오더라니까. 괜찮은 가격에 살 사람을 알고 
있다는구만. "
  "그걸 어떻게 팔려고 그러세요? 당신 것도 아니잖아요. "
  "다음달이면 모두 다 내 것이 될 텐데 뭐. 두고 봐. 배심원들이 모두 다 내 
편을 들 테니까. 그때가서 계획을 세우라는 말인가? 꼴 같지 않은 재판이 
끝나자마자 이을 진행시킬 생각인데. "
  "그 작은 호텔들을 누가 살까 싶어요. 이익을 볼 사람이라면 절대 그런 
건물들을 사지 않을걸요. 하지만 시카고에 있는 전문 대학과 워싱턴 간호학교 
같은 곳이 관심을 갖고 있대됴. 그렇게 되면 네 곳 모두 우리 손을 떠나 좋은 
뜻에 사용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펠릭스를 바라보는 레니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아버님은 그 호텔들을 무척 사랑하셨어요. 자랑도 많이 하셨구요. "
  "그래서 당신도 그 호텔들을 유독 사랑하는 건가? 감상적이구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버님은 그 호텔들을 현대식으로 바꾸길 원하셨어. 다만 그걸 
해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 구식으로 내버려둔 것뿐이오. 
그분이 원했던 것을 지금 내가 이뤄보겠소. "
  "그렇지 않아요. 아버님이 살아계셨다면 분명 화를 내셨을 거예요.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잔인하게 발로 차버렸듯 당신을 차버리셨을 거예요. "
  레니의 목소리에는 오웬을 향한 그리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렇게 하시곤 기분좋게 껄껄 웃으셨을 거예요. 숱 많은 콧수염을 양쪽으로 
올리시면서..."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히기 시작했다.
  "뵙고 싶어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살아계신 것만 같아요. 폴도 
그랬어요. 온화하고 너그러운 성품이 온 집안에 가득찼던 그 시절이 그리워요. "
  "아버지 유품 중 몇 개는 오늘 이곳으로 옮겼소. "
  "비콘 힐에서 가져왔다는 소리예요? 세상에! 법정에 올라 있는 집에서 함부로 
그렇게..."
  "자꾸 그렇게 안된다, 안된다 하는데 그 소리 좀 그만둘 수 없소? 내가 
하겠다는데 감히 누가 안된다는 소릴 할 수 있단 말이오! 때가 됐으니까 
그것들을 갖고 와서 써도 무방할 게요. 벌써 일년이 다 되도록 아무도 돌보지 
않는 빈 집..."
  "빈 집이라뇨? 로자가 있잖아요. "
  "오래전에 나갔어야 할 사람이오. 당신이 싸고돌지 않았다면 벌써 비콘 힐을 
떠났을 거요. 엄청난 월급이 탐나서 붙어 있는거지. "
  "로자는 우리랑 같이 영원히 있을 거예요. 난 로자가 필요해요. "
  "우리 집에 그런 주방장은 필요 없다니까. "
  "그럼 비콘 힐에 있으라 그럴 거예요. "
  "그것도 안될걸. 그 집이 내 손 안으로 떨어지는 순간 팔아버릴 생각이니까. "
  "그것만은 절대 안돼요. 로라한테서 그 호텔들을 빼앗을 순 있겠지만. 절대 그 
집만은..."
  "아버지는 어쨌는데? 유언장을 통해 완전히 날 짓밟아버렸잖소!"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말아요. 거의 전부를 큰 아들인 당신에게 
물려주셨는데 그런 소릴 해요?"
  펠릭스는 포도주잔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포도주잔의목이 부러지면서 붉은 
피같은 포도주가 마호가니 탁자 밑으로 흘러내렸다. 
  "다쳤어요?"
  레니는 별반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남편의 손바닥을 살폈다.
  "괜찮소. "
  펠릭스는 냅킨으로 손바닥을 대충 닦아냈다.
  "제정신이었다면 절대 그렇게 유언장을 남기진 않았을 거요. 날 얼마나 
신뢰했는데. 누구보다도 날 중하게 여기셨어. 돌아가신 뒤에도 나를 통해 자신의 
명예와 존엄을 유지하길 원했단 말이오. 알아듣겠소? 그분은 날 의지하셨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이 펠릭스 샐링거를 말이오. 호텔들, 그룹내 주식, 
오웬 샐링거 주식회사가 다 내 소유이듯, 그 비콘 힐도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어. "
  "법정싸움에서 이기면 우리 집이 되겠죠. 하지만 절대로 매매는 없을 거니까 
그런 줄 아세요. "
  레니의 공격적인 어조에 펠릭스는 린넨으로 된 냅킨을 강하게 비틀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오웬이 세상을 떠난 뒤, 아니 요부 같은 
로라가 짐을 챙겨 떠난 뒤로 펠릭스는 아내가 완전히 달라진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과 앉아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순종하던 예전의 레니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펠릭스는 레니 위에 군림해온 전형적인 군주였다. 그것 때문에 
펠릭스는 다른 남자들에게 부러운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정작 
중요한 레니의 마음은 얻지 못했다. 22년의 결혼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아내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네니가 완전한 자기의 소유물이라는 
펠릭스의 자만감은 레니를 만난 첫날부터 이미 오판이었다.
  교회 출석 외에는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정통 보수파 가문의 
레니가 열아홉살 나이로 한창 피어오를 무렵이었다. 레니의 가문은 조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펠릭스가 처음으로 그녀를 만난 곳은 그리니치 빌리지(영국 
그리니치가 아니라 뉴욕의 예술가, 작가들이 많이 출입하는 구역:역자 주)였다. 
그녀 곁에 있던 한 남자가 펠릭스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도둑 중의 상도둑 펠릭스이신가? 아니면 금세기 최대의 귀공자 
펠릭스이신가?"
  "저드. "
  펠릭스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그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믿기지 안흔 
일이었다. 뉴욕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나다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삭막한 곳이 
뉴욕인 줄 알았는데 이미 오래전에 기억에서 지워버린 저드 가드너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전보다 약간 초라해 보였지만 몇 
년 전과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니었다.
  돌연히 모습을 감춘 뒤 다시 나타난 저드의 한쪽 팔에는 한 여인이 매달려 
있었다. 큰 키에 비해 갸날픈 몸매의 여자는 흐르는 듯한 금발 아래로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꼿꼿하게 머리를 치켜든 자태라든가 우아한 맵시가 궁전 
같은 곳에서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고 있는 귀족부인처럼 보였다. 그녀의 자태는 
펠릭스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요즘 어떤가?"
  "죽지 못해 살지. "
  저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밑바닥 인생을 가고 있다네. 자넨 겉모습만 봐도 잘 나가는 것 같은데. "
  "저드, 추워요. "
  소용돌이 치는 사월의 바람은 한겨울의 매서움과는 또 다르게 뼈 마디마디를 
파고드는 듯했다. 춥다고 어깨를 웅크리고 있는 여자의 맨다리를 의식하면서 
펠릭스는 털가죽 코트와 양모 목도리에 가죽장갑까지 낀 자신을 생각했다. 
  "이 근처에 사나보지?"
  "멀진 않네. "
  "그럼 자네 집까지 같이 걷지. "
  저드는 여자를 주시하는 펠릭스의 속마음을 눈치챈 듯 갑자기 큰소리로 
떠벌렸다.
  "이이구, 그러고보니 소개도 시키지 않았구만. 이쪽은 레니 반그리스, 그리고 
이쪽은 펠릭스 샐링거. 레니, 펠릭스는 원하는 건 꼭 갖고 마는 집념의 
사나이니까 조심해야 돼. "
  "그만가요, 저드. "
  "무슨 소리야? 펠릭스가 한 잔 산다는데. 옛 시절을 추억하면서 한 잔 마시고 
싶어. 마실 게 하나도 없는데 가다가 슈퍼에 들러 뭣좀 사자구. "
  "사긴 뭘 사요. 집에 그냥 가요. "
  "아니야 몇 병 사야 돼. "
  횡설수설하는 저드를 살피던 펠릭스는 그가 알코올중독이라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챘다.
  "펠릭스가 한턱 낸다니까. "
  "우리끼리 그냥 집에 가요, 제발. "
  "펠릭스하고 같이 가자니까. 펠릭스는 술꾼이야. 박카스, 술의신. 자, 우라가 
갑니다. "
  그들은 술병을 나눠 들고 일층에 세탁소와 전당포가 있는 벽돌 건물 사층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올라갔다. 좁은 복도 양쪽으로 방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 아파트였다. 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저드는 양촛물이 지저분하게 
흘러내린 포도주병과 도자기가 놓여 있는 소파에 몸을 구기듯 쓰러졌다. 구식 
에어컨이 있던 자리인지 창문 한쪽은 유리 대신 베니어판으로 막아 놓았는데, 
그 밑에는 녹물이 얼룩져 있었다. 게다가 벽, 바닥, 가구 할것 없이 곳곳에 
현란한 색상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포스터가 어때? 저걸 보고 있으면 어디고 못 갈 데가 없지. "
  스카치 원액을 더블로 따라 마시면서 저드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름다운 아가씨를 이 구석방으로 데리고 나가고 싶을 때마다, 저 멋진 
세계로 날아가서 우리의 찌든 영혼을 씻곤 한다네. 직접 가진 못하지만 말일세. 
"
  "저드, 그만해요. "
  레니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는 펠릭스의 마음속에는 
그녀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가 저드 가드너의 것을 
뺏으려 한 게 처음은 아니었다. 펠릭스는 탁자 앞에 있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저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어딜 가고 싶은데?"
  펠릭스의 질문에 저드는 눈길을 다시 포스터 쪽으로 돌렸다.
  "천국이지. 파라다이스 말야. 태양빛에 익은 금사과와 달빛에 익은 은사과를 
따서 레니에게 줄 수 있는 천국 말일세. 우리 불쌍한 이 아가씨께선 날 
로맨티스트로 생각하고 있거든. 비오는 오후의 화랑에서 만났으니 그럴 법도 할 
거야. 날 사랑하고 있지. 글쎄 사랑이라..."
  "당신도 날 사랑하잖아요. "
  "아,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레니... 한 번만이라도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될거예요. 당신이 날 사랑하도록 만들 테니 두고 보세요. 나하고 
결혼하게 되면 술도 끊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당당하게 아빠를 찾아가서 
당신을 근사하게 소개할 거예요. "
  "나 그동안 결혼했었네. 웃기는 얘기겠지만 한번 들어보겠나? 아니 들어야 
돼!"
  저드는 손을 떨지 않으려고 애쓰며 잔에 술을 채웠다.
  "마누라하고 아들이 있었지. 근데 그 마누라가 어쨌는지 알아? 술만 마신다고 
날 쫓아냈다구. 아, 참 도둑질도 있지. 그거 잊으면 안되지. 오래전에 진짜 
회사까지 있었어. 나한테 말야. 친구하고 동업으로 차린 회사였지만, 그건 나의 
전부였어. 그런데 그것을 욕심 많은 파트너가 낼름 먹어버린 거야. 한꺼번에 
낼름 말일세. 자넨 그걸 어떻게 생각하나?"
  저드는 또다시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단숨에 마시려는 듯 잔을 높게 
들어올리던 저드는 그러난 천장의 불빛에 호박색 액체를 비춰가며 한동안 
술잔만을 들여다봤다.
  "그 친구놈이 그걸 나한테서 빼았아갔단 말이야. 아니, 정확히 말해 친구가 
아니라 적이었지. 그 회사를 팔아넘기기 위해서 훔쳤으니까. 그래서 나도 
훔치기로 마음 먹었다네. 합법적으로 그걸 돌려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아낸 뒤로 
난 도둑놈처럼 조금씩 조금씩 훔칠 수밖에 없었다네.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서 
팔아 넘기거나 전당포에 맡길 수 있는 물건들을 훔쳐다 돈을 만들어 아들하고 
마누라한테 넘겼단 말일세. 지금 그 녀석 벌써 여덟살로 부쩍 컸다네. 밥을 
먹이고, 코니 아일랜드에 가서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아버지 노릇을 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는데, 비록 인간된 도리는 아니었지만, 난 아들 녀석을 위해 열심히 
훔칠 수밖에 없었지. "
  "저드, 제발 그만 해요. "
  저드는 레니의 말을 비웃듯 코웃음치며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레니는 두 
손으로 술을 따르는 저드의 손을 붙잡았다.
  "안한다고 약속했잖아요. 집안에서 만큼은 안 마시겠다고 해놓고선 이게 
뭐예요. 예정에도 없는 사람 불러놓고... 싫어하는지 뻔히 알면서..."
  "제기랄, 나 좀 내버려두란 말이야! 오, 아냐, 아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화내지 마. 하지만 지금 펠릭스랑 예길 하고 있잖아. 우리 좀 내버려둬. 알았지?"
  레니는 뒤에서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펠릭스를 향해 고개를 세웠다.
  "그만 가주실래요?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저드가 굉장히 흥분 한 것 같아요. 
그러니 그만 나가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펠릭스는 저드를 보면서 술에 절어 있는 유령이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하고 
있었다. 
  "가고 싶은 곳을 말해보게. 여행비를 대줄 테니. "
  저드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레니를 원하는구만. "
  "자네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천국을 보여주겠다니까. "
  "레니를 데려갈 순 없는 곳이겠지. "
  "글쎄, 그런 곳이긴 하지만. "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레니는 펠릭스와 저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대를 이 지옥에서 데려간다는 소리야. 레니. "
  "저드의 말에 레니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미친 소리 하지도 말라 그래요. "
  레니는 양 허리에 팔을 올리고 냉정한 표정으로 펠릭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가라고 했는데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요? 다시 한 번 얘기하죠. 지금, 당장, 
여기서, 꺼져버려요. 당신 같은 사람 도움 필요없으니까. 던군다나 나는 당신 
같은 타입 좋아하지 않아요. "
  "저드는 가란 소리 안했는데. "
  레니를 갖고 노는 듯한 펠릭스의 대꾸에 저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있지. "
  "그냥 있으라구요? 당신 어떻게 된 것 아니예요?"
  "그냥 있어. 나하고 옛날 얘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이거든. "
  저드의 눈빛에는 어둠이 가득 내려 앉았다.
  "어때, 펠릭스? 옛날 얘기 말야. 얘기해도 되겠지?"
  레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두 사람 언제부터 아는 사이예요?"
  "대학 때부터. "
  펠릭스의 간단한 대꾸에 저드는 차갑게 한 마디를 더했다.
  "룸메이트였지. "
  "오래전 얘기지. 자네 기억나나? 난 거의 다 잊어버렸어.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기억 안 나는데. "
  저드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웅얼거렸다.
  "하지만 돈이 손에 들어오면 기억날 것 같은데. 돈을 쥐고 떠날 수 있다면 
가물거리는 기억이 확실해질 거야. "
  레니는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물고 있었다.
  "저드, 저 사람한테 돈을 받기만 해봐요. 그 즉시 여길 떠날 테니까. "
  그는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알아. 하지만 당신은 언제고 떠날 사람이잖아. 내 말 무슨 소린지 알지? 오, 
귀여운 나의 레니. 당신은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야. 사랑이 식고 가난에 지치면 
날 버리고 가버릴 거잖아. "
  저드는 레니의 손목을 잡으려고 힘없이 손을 뻗쳤다.
  "난 레니에게 줄 게 없어. 당신에겐 멋진 왕국이 어울리는 데도 말야. 여기는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 오래전부터 이런 말을 하려고 기다려 왔는데 잘됐네. 
아주 잘됐어. "
  "돈 때문에, 돈 때문에 그래요?"
  화가 잔뜩 올라 쏘아대는 레니에게 저드는 여전히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냐. 자극이 필요했겠지. 언젠가 레니도 이런 날 이해할 거야. "
  저드는 힘없이 펠릭스를 올려다보았다.
  "얼마?"
  "멀리 가준다면 평생 죽을 때까지 한달에 천 달러씩 주지. "
  저드는 고개를 뒤로 젖혀 등뒤에 있는 레니를 올려다봤다.
  "그것봐, 레니. 내가 뭐랬어? 집념의 사나이라 그랬지? 우리 미래가 이제 
환해졌어. "
  "난 안 그래요. 저드, 날 믿어줘요. 내가 당신 운명을 바꿔놓을 테니까. 이건, 
이건 안돼요!"
  그는 펠릭스를 다시 쳐다봤다.
  "육개월치를 먼저 줄 수 있지?"
  펠릭스는 저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표책을 꺼냈다.
  "내가 돌봐준다니까요!"
  레니는 미친 듯 울부짖었다.
  "내가 할 거예요.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어요. 제발 좀 기다려줘요, 
저드!"
  몸을 이으킨 저드는 레니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날 다시 만들 수는 없어. 분노와 원한 때문에 그 누구도 사랑 할 수가 없어. 
만의 하나 혹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 상대는 당신이 아닐 거야. 당신은 
너무 어려. 이 세상이 주는 파도를 이겨내기엔 너무 약한 존재야. "
  펠릭스가 수표책에서 저드에게 내밀 수표를 찢는 순간 레니는 저드에게서 
몸을 뺐다. 수표를 받아든 저드는 아주 작게 그것을 접고 또 접었다.
  "과거가 희미해지기 전에, 난 그걸 벌써 잊으려 하겠지. "
  저드는 펠릭스에게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던졌다.
  "내 아들에게 날 파멸시킨 자 이름을 남겼네. 그자가 내게 한 짓을 아주 
자세히 말일세. 날 사랑하는 자식이니까 애비가 한 얘길 기억하고 복수를 
해주겠지. 반드시 해줄 거야. 펠릭스, 난 굉장히 똑똑하지?"
  "내가 복수를 해줄게요. 내가요. 뭔데 그래요?"
  레니는 이성을 잃은 채 저드에게 매달렸다. 펠릭스에게 작게 소근거리는 
저드의 말에서 복수라는 단어만을 엿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나한테 당신 과거 얘길 안해주는 이유가 뭐예요?"
  "레니,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야. 내 원한과 미움 속에 당신을 끌어넣을 순 
없어. 강하고 힘센 사람을 찾아요. 레니. 당신의 그 용기와 사랑응 이용할 줄 
아는 남자를. 그럼 행복할거야, 분명히. "
  저드는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자, 그만 가지, 레니. "
  저드의 입가에 피어나던 미소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가서 엄마하고 아빠한테 용서를 빌어. 당신을 훔쳐냈던 나 대신 사과도 드려. 
어서가! 빨리 여기서 꺼져버려. "
  레니의 팔을 낚아챈 펠릭스는 그녀를 문 밖으로 끌어냈다. 서럽게 울어대는 
레니에게 저드가 낮은 목소리로 이별의 인사를 보냈으나, 펠릭스는 레니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세월이 흐른 뒤에도 레니에게 묻지 않았다.
  "사랑한다, 레니. 잘 가, 나의 레니. "
  그러나 펠릭스는 똑똑히 들었다. 저드의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서둘러 
현관문을 세차게 걷어찼다. 몸부림치는 그녀를 번쩍 안아든 펠릭스는 
어둠침침한 사층 계단을 내려갔다.
  "집까지 데려다 주겠소. 호텔로 데려가지 않을 테니까 몸부림 치지 말아요. "
  "왜요? 속마음은 안 그러면서. 날 데려가서 실컷 먹어보지. 그것밖에 지금 
생각나는 게 없지? 헉헉대면서 더럽고 치사하게..."
  그는 레니의 입을 손바닥으로 가로막았다.
  "그렇게 막돼먹은 십대처럼 굴 거요? 결혼 전에 완전히 그 버릇을 
고쳐놓아야겠어. "
  "혼자 잘도 놀구 있네. "
  그녀는 입을 가로막은 손바닥 사이로 욕설을 내뱉었다.
  "앞으로 같이 놀게 될걸. 침대에서 말야. "
  웬만해선 활짝 웃는 법이 없는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우리 둘 다 원하는 일 아닌가? 당신과 눈이 마주치자 온몸이 짜릿했는 걸. 
갖고 싶어서 말야. 날 바꿀 생각은 절대 하지 마. 그건 통하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거지. 바꿀 사람은 나야. 내가 결혼해서 당신을 바꾸겠어. "
  펠릭스는 완강하게 고개 젓는 레니에게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당신은 반항하고 앙탈할 타입의 여자가 아니야. 로맨틱한 여자지. 반항하고는 
여자는 어떤 줄 알아? 상대를 정복해 세계를 바꾸려 하지. 하지만 로맨티스트는 
저드 가드너 같은 주정뱅이와 사랑을 꿈꿀 뿐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해. 
구출해주거나 도와줄 사람만을 기다리면서..."
  그녀는 그를 밀쳐내며 울부짖었다.
  "개새끼, 빨리 꺼..."
  그는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펠릭스는 그런 키스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자를 폭행으로 취하는 것도 싫어했지만 도전적인 언사나 
상스런 욕을 해대는 여자도 싫어했다. 누구든 자신에게 거부감을 보이는 자를 
증오했다. 그는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자신의 밑에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레니는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여자였다. 희미한 옛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자애 섞인 기품, 아버지와 상대할 때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 
거친 힘과 의지력, 보스턴에 문외한인 뉴욕 출신이어서 남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등이 모두 그녀의 장점이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일말의 열등감을 
느끼던 저드 가드너의 여자였다는 점이 더욱 그를 신바람나게 만들고 있었다.
  "집이 어디요?"
  "집에 안 가요. 도망나왔는데 어떻게 들어가요? 차라리 당신의 호텔로 가지. 
당신 원대로 둘이 실컷 놀아봐요. 나나 우리 부모님이 무슨 상관이죠? 그저 
생각나는 건 내 허벅지를 벌려 그 잘란..."
  그는 그녀의 뺨을 세게 갈겼다. 그러면서 그는 생전 처음으로 폭력을 휘두른 
자신에게 놀랐다.
  "그런 식으로 두 번 다시 얘기하지 말아요. 알아듣겠소? 집이 어디요?"
  "그건 알아서 어디다 써먹게요?"
  아파트 일층 현관문을 강하게 밀어붙인 그는 레니를 세 블록쯤 떨어진 곳에 
주차해놓은 차로 끌고갔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운전석을 통해 그녀를 앞좌석 
오른쪽으로 밀어넣은 뒤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잘 들어요. 당신 부모님께 이렇게 설명할 생각이니까. 우리 둘이 사랑에 빠져 
도망을 갔지만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후회를 해 이렇게 찾아오게 됐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아직 레니가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안 됐기에 
부모님에게 걱정 끼쳐드리기 싫어 다시 돌아왔다구. "
  레니는 휘둥그런 눈으로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 알만해요. 고리타분해서 뛰쳐 나왔겠지. 
부모님처럼 되기 싫어 자유를 찾아 나왔는데 지금 와서 수그리고 들어가기 싫다 
이거 아니오? 내 말 맞소?"
  레니는 놀란 사람처럼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때 친구들도 당신처럼 굴었소. 바보천치처럼. 부모와 대항하기 위해서는 
옆에 붙어 있어야지 멀리 떨어져서 어떻게 싸우겠다는 건가?"
  "부모님과 싸우고 싶진 않아요. "
  레니의 목소리는 개미 소리처럼 작았다.
  "주소가 어디요?"
  "파크 820번지. "
  펠릭스는 차 시동을 걸었다.
  "서른세살이지만 아직 결혼은 고사하고 마음을 준 여자도 없었소. 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되면 샐링거 호텔 그룹을 직접 내 손에 쥐고 운영할 생각이오. 당신 
부모님, 대단히 기뻐하시겠는데. 어때 내 구애를 받아주겠소?"
  순간 레니는 눈물을 머금은 채 미친 듯 웃었다.
  얼마 후 레니 반 그리스와 결혼을 한 펠릭스는 그녀를 보스턴 사교계에 
자랑스럽게 내보이기 시작했다.
  "날 사랑하지 않잖아요. "
  결혼 전야, 레니는 펠릭스에게 물었다.
  "당신이 필요해. "
  천하의 펠릭스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고백이었다. 레니는 그 말이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업계에 내노라 하는 인물로 자리 잡고 있을 만큼 힘 있는 펠릭스 
샐링거였지만, 어릴 적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어린 소년의 마음으로 
그는 늘 타인의 부러운 시선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속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마음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투쟁적인 생활 속에는 외로움이 서려 있었다. 그와 가까운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덕분에 레니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가 섹스를 원할 때마다 육체를 
제공해주고, 사업상 필요한 자리에 나가 그의 옆좌석을 지켜주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 그녀는 최대한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결혼 전 그가 
약속한 자유와 풍요가 넘쳐 흐르는 최고의 생활이었다.
  22년 동안 철없는 그가 휘두르는 권력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레니는 
나름대로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웬이 죽고 로라가 떠난 이후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낭만적인 꿈에 매달려 철없던 열아홉 
살의 소녀가 아니라 현실을 냉정하게 계산하는 여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펠릭스와 레니는 묘한 균형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권력을 휘두를 수는 
있어도 레니를 마음대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비콘 힐에서 뭘 가져왔어요?"
  추억에 잠겨 있던 펠릭스는 레니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앉아 있는 레니가 
마치 손에 잡히지 않는 먼 곳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가구 몇 개와 액자 몇 개. 내가 그동안 눈여겨봤던 것들이야. "
  "무슨 가구요?"
  "아버지 책상, 흔들의자, 그리고 탁자 몇 개. 그 집을 계속 갖고 있겠다는 
이유가 뭐요?"
  "아버님이 남기신 유품이잖아요. 그걸 팔다니 말도 안돼요. 결코 원치 않으실 
거예요. 돈이 필요해서요? 그게 아니잖아요. 난 그 집이 좋아요. 책상은 또 
왜요?"
  펠릭스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당신이 사들인 것 아니요? 회사 대표 상징으로 남겨 대대로 물릴 생각이오. "
  "아버님보다 당신에게 선물해야 마땅했나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랬으면 보기 좋았겠지. 아내가 남편에게 권력의 상징을 선물한다, 멋지지 
않소?"
  그는 쌀쌀하게 말을 끊고 식당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물건을 시아버지한테 선물하는 대신 말이오. 잔이 깨졌으니 포도주잔 
세트를 새로 준비해놓도록 해요. 완벽한 세트가 아닌 것은 구역질 나. 어울리지 
않는 건 사람이든 물건이든 보기 싫어. "
  프랑스식으로 꾸며진 식당문 밖으로 나가는 남편을 레니는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결혼도 서로 어울리지 않은데 어떻게 할래요? 레니는 속으로 
조요히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남편을 쫓아버린 저드의 아내, 저드의 회사를 통째로 말아먹었다는 못돼먹은 
동업자, 아들이 그토록 원했는데도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오웬. 내 자신도 
마찬가지야. 나도 펠릭스를 실망 시키고 있어. 그에게 사랑과 고마운 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내게는 친구들도 많고, 사랑하는 알리슨도 있지만 
저 사람한텐 아무도 없어. 남편 대신 아버님한테 그 치펜데일 책상을 사서 드린 
일 때문에도 마음이 몹시 상했어. 그걸 내내 마음에 담고 있었구나.
  종을 울려 식탁을 치우게 한 레니는 펠릭스가 가져왔다는 오웬의 책상을 보기 
위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13장
  재판은 2주간 계속됐다. 증인석은 매일 다른 증인들로 새롭게 채워졌다. 맨 
앞좌석에는 샐링거팀이 자리잡고 있었다. 헤어진지 거의 일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법정에 몰려 앉아 있던 샐링거 가족들은 로라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로라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로라는 많이 변해 
있었다. 로라를 바라보는 알리슨의 눈길에는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탓만은 아닌 듯 싶었다. 일년 동안 피나게 노력했던 결과였다. 특히 
보스턴에 오기 일주일 전부터 로라는 표정 관리에 특별히 신경 썼다. 덕분에 
차갑게 굳은 로라의 얼국은 침착하고 제법 여유 있어 보였다.
  열흘 동안 차례로 증언대로 오른 샐링거 자족들이 눈빛과 손짓과 입술로 
그녀의 마음을 비로 얼룩진 그림처럼 흐리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법정의 모든 절차를 냉정하게 대응했다.
  레니는 로라와 오웬이 서재에서 오래도록 같이 일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해변가에서의 산책, 별장에 도둑이 든 이후 로라가 보스턴으로, 그후 오웬이 
회복될 때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의 곁에 있었다는 사실 등이 레니의 입을 
통해 차례로 증언됐다.
  "심장 발작 이전이나 보스턴으로 돌아와 회복된 뒤에는 건강하셨단 말이죠?"
  앤셀 롤린스이 유도 질문에 레니는 그렇다고 대응했다.
  "정신적으로 좀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은 가족 중 아무도 없었나요?"
  "아뇨, 그럴 이유가 없었습니다. "
  "페어차일드양을 특히 사랑했다는데 그것도 이상하지 않았나요?"
  "아뇨. "
  차례가 된 카버 세인이 레니 앞에 섰다.
  "여름 별장 주방 보조직으로 로라 페어차일드를 면접했다고 했는데 처음 
그녀에 대한 인상은 어땠습니까?"
  "명랑하고 일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어요. "
  "이력서라든가 추천서를 그녀에게서 받았습니까?"
  "네. "
  "추천서를 읽어보셨을 때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가짜라고 생각했어요. "
  레니는 안타깝다는 듯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앤셀 롤린스는 표정의 동요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서류들이 가짜라는 
사실을 로라에게 이미 들었기 때문에 굳이 이의를 제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증언대에 나선 펠릭스는 신경을 써가며 목소리를 조절하고 있었다.
  "우린 모두 다 찜찜한 기분이었소. 강도가 든 이후엔 더 그랬죠. 하지만 
아버님이 워낙 완강하게 주장하시는 바람에 저 여잘 집안에 계속 둘 수밖에 
없었소. 아버님은 최면술에 걸려 있었던것 같습니다. "
  "이의 있습니다. "
  롤린스의 이의 제기에 판사는 그 부분을 법정기록에서 삭제시켰지만 모두들 
펠릭스가 주장한 끝부분을 귓속에 담아둔 뒤였다.
  증인석에 허리를 세우고 앉은 로자는 로라에게 뜻 모를 미소를 보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
  "로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누가 뭐라든 오웬님이 
로라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로라도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실만큼은 변할 
수 없을 겁니다. "
  "주방에선 로라양이 어땠는지 판사님께 말씀해주시겠어요?"
  세인은 법정식 말투 대신 가변운 어조로 물었다.
  "처음부터 주방일을 척척 잘해 일손을 덜어주던가요?"
  "난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일을 시키지 않았어요. "
  "그럼 어떤 식으로 했나요?"
  "대형 주방일은 잘 모르는 것 같아 천천히 가르치면서 시켰죠. 그런데 
가르치는 족족 얼마나 일을 잘 해내는지..."
  "처음엔 어땠나요? 부유층 주방에서 일을 해본 솜씨였나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았어요. "
  "그럼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보십니까?"
  "이의 있습니다!"
  롤린스가 목청을 높였다. 판사는 세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다른 식으로 물어보시오, 변호사. "
  "페어차일드양이 경력 문제에 있어 진실했다고 증언하실 수 있는지요?"
  "글쎄, 그건 좀 그런 걸요. 하지만 일자릴 찾기 위한 젊은이라면 그런 
것쯤이야..."
  "질문에 예, 아니오로만 대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케이프코드 별장에 
샐링거씨의 서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페어차일드양이 주방에서 벗어나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몇 시간씩 일을 했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네. "
  "샐링거씨가 페어차일드양에게 서재에서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까?"
  "그게... 그걸 제안한 사람은 로라였어요. 그분은 그 소릴 듣고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하신 뒤 나한테 시간을 내줄 것을 부탁하셨죠. "
  "퍼어차일드양이 그걸 먼저 원했다구요?"
  "네. 책을 안다고 그러더군요. "
  "그래서 샐링거씨한테 뭐라 대답하셨습니까?"
  로자는 잠시 주저했다.
  "로라가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고, 그러니까 했던 일과 할 수 
있는 일에 관한 한 말입니다. "
  금요일 오후, 공판이 열린지 한 주가 다 되어갈 때 알리슨이 증언석으로 
올랐다.
  "우린 서로 친구였어요. 모든 걸 다 얘기하는 친구요. "
  "어린 시절 얘기도 말인가요?"
  카버 세인이 섬세하게 목소리를 조절하며 보충설명을 했다.
  "부모, 학교, 남자친구, 밤샘 파티 등등 말입니까?"
  "이의 있습니다!"
  앤셀 롤린스가 언성을 높였다.
  "오웬 샐링거의 유언장과 관계 없는 질문입니다. "
  "페어차일드양의 성격과 관계 있는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
  세인은 재빨리 판사를 살피며 롤린스의 이의에 반박했다.
  "특히 이번 사건은 성격과 매우 연관이 깊다고 보고 있습니다. "
  "인정합니다. "
  판사는 세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의를 기각합니다. "
  세인은 알리슨에게 눈을 맞췄다.
  "페어차일드양이 과거에 관해 얘기했나요?"
  "아닙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또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했어요. "
  "그럼, 뉴욕시에서 절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실을 얘기..."
  "이의 있습니다. "
  롤린스는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재빨리 판사석으로 다가간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판사님, 잠깐 얘기드릴 수 있으면 하는데요..."
  재판장은 고개를 끄덕인 뒤 세인에게 앞으로 다가오라는 눈짓을 했다. 
롤린스는 판사에게 한 묶음올 된 서류를 올렸다. 이런 때를 대비해 특별하게 
준비해둔 서류였다.
  "보시는 바와 같이 소년 범죄로 판결되... 증거채택용을론 허용이 안된... 여기 
이 선례가 된 것을..."
  "판사님!"
  세인은 긴박한 목소리로 판사를 불렀다.
  "유죄판결 이후 겨우 칠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페어차일드양과 동생이 
샐링거 사건에 연류될 수 있는 동기뿐 아니라 성격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페어차일드양이 오웬 샐링거와의 관계와 그가 
원했던 일들, 특히 투병 부분을 진술할 때 진실 여부를 가늠하는 척도로 
중요하게 이용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
  판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인정하겠소. 하지만 질문 궤도를 벗어나진 마시오. "
  롤린스의 얼굴은 순간 검붉게 변했다.
  "판사님, 무효심리(법정심리 절차상 나타난 과오:역자 주)를 요청합니다. "
  "거절하겠소. 계속해도 좋소, 세인씨. "
  알리슨이 증언석을 내려오고 뉴욕시 경찰구 담당자가 증언석에 앉는 동안 
롤린스는 불평을 터뜨리고 있었다. 판사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로라의 체포 
사실과 보석으로 풀려나 유죄판결을 받은 일, 멜로디 체이스란 이모가 찾아와 
폐허가 된 빌딩을 거주지로 적어놓고 보호관찰식으로 데려간 사실 등을 차례로 
듣고 있었다.
  뉴욕경찰관의 증언이 끝나자 법정에는 정적이 내려 앉았다. 이정적은 판사에 
의해 깨졌다.
  "월요일 아침 아홉시까지 휴정합니다. "
  유월의 쨍쨍한 오후 햇살이 퍼부어대는 보스턴의 주말, 정신없이 이리저리 
춤추는 자동차들을 제치며 그들이 단톤스에 도착한 것은 밤 열시가 넘어서였다.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할 만큼 클레어는 격노해 있었다.
  "형 때문이야. 우라질! 물귀신처럼 끈질기게 우릴 이렇게 잡아 끌다니. 경찰에 
잡혀가 유죄판결을 받게 된 게 모두 다 형 때문에..."
  "오빠 때문이 아니잖아. 그날밤 우린 오빠 말을 믿고 일을 저지른 게 아니야. 
우리 둘이 근사하게, 오빠 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 거지. "
  "우릴 내버려두지 말았어야지. "
  "우리 잘못이야. 훔치질 말았어야지. "
  "가르친 게 누군데?"
  "지나간 일이야. 오빠를 비난할 수만은 없어. "
  "우리보단 나이가 많았잖아. "
  맞는 말이기는 했다. 벤은 그들보다는 어른이었고, 더 똑똑했으며, 두 사람이 
올바르게 자라도록 돌봐야 할 책임 있는 보호자였다. 많은 주의를 기울여주진 
못했어도 벤은 동생들을 진심으로 돌봐준 가족이었다.
  "난 오빠를 원망하진 않아. 우리한테 얼마나 잘 해줬니? 샐링거만 털지 
않았으면 우린 여태껏 둘도 없는 가족으로 정을 나누고 있었을 거다. "
  단톤스의 대형 홀과 현관 앞에 넓게 펼쳐진 잔디밭은 불빛 속에 있었다. 
삼백여 명이 넘는 손님으로 단톤스는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밤 보트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본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 호숫가를 걷고 있는 
사람, 로라가 앞뜰 잔디밭에 전시해놓은 조각 사이로 산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본채 현관에서 켈리가 손을 흔들며 뛰어 나왔다.
  "열네 개 팔렸다. 뉴욕에서 왔다는 손님이 그러는데 여태껏 본 전시회 중 
제일... 이런, 표정이 왜 그래? 주말 재미가 영 그랬나보지?"
  "별로였어요. "
  자동차들이 잘 있나 살피러 가는 클레어를 바라보며 로라는 조각전에 관한 
얘기로 모든 것을 잊으려 했다.
  "열네 개 팔렷다구요? 어머, 잘됐다. 별일 없었죠?"
  "포도주와 샴페인이 바닥났지만 존이 제이스 랜딩에 있는 가게 주인과 얘길 
잘해서 지난 주말 충분하게 비축시켜놨어. 재판사건 읽었어. 보스턴 신문을 
사들고 온 손님이 있어서... 내가 도울 일 없을까?"
  "그랬으면 제일 먼저 부탁을 했게요. "
  로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진 않았어요. 생각보다 열세에 놓여 있는 것뿐이지. 그곳에 가 있는 게 
죽기보다 싫었어요. "
  "보스턴 아니면 법정?"
  "둘 다요. "
  "아무튼 이젠 집에 왔잖아. 편히 쉬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내일, 모레 이틀 
동안 침대에서 기어나오지 말고 푹 쉬어. "
  "고마워요, 켈리. 아무튼 내일 아침에 나올게요. "
  "알았어. "
  켈리는 로라를 끌어안으며 키스를 했다.
  "우리가 얼마나 로라를 사랑하는지 알지? 꿈 잘 꿔. "
  다음난 아침 사무실로 부산하게 걸어가던 로라는 뒤에서 부르는 중후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로라에게 목소리의 주인공은 손을 
내밀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웨스 커리어입니다. "
  "커리어?"
  악수를 나누면서 그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팔월에 열릴 국제금융협의회에 참가차 왔소. 이주 전에 나한테 편질 보내지 
않았소?"
  대형 홀 깊숙이 스며든 아침 햇살로 인해 그의 얼굴이 매우 기이하게 보였다. 
로라는 얼굴을 붉혔다. 단톤스에 묵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죄송합니다. 딴 생각을 하느라 미처,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달에나 오실 줄 
알고 있었거든요. 무슨 문제가 있나보죠?"
  "아니오. 미리부터 챙기는 걸 좋아해서 말이오.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곳이라 
미리 둘러보는 게 좋다고 생각했죠. "
  "좋은 생각이시네요. 미리 점검을 하셔야지요. "
  "아니. 점검까지는 생각 안했소. 준비가 잘 됐을 거라고 생각했지. "
  직선적이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편지 고마웠어요. 문장 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던데. 전화 목소릴 듣고 
반해버렸는데, 역시 내 판단이 맞았네요. 내 육감이 정확하다는 걸 이번에 또 
확인한 셈이 됐군요. "
  그는 가벼워 보이는 울수웨터를 어깨 위에 걸치고 있었다. 은 회색으로 물든 
머리카락은 한 올도 흐트러짐없이 깨끗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숱 짙은 진회색 
눈썹 밑으로 깊은 회색눈이 그윽하게 빛나긴 했지만 앞으로 약간 튀어나온 넓은 
이마와 각진 얼굴형 때문에 공격적인 인상이었다.
  "내가 묵을 곳이 어떤가 해서 미리 온 것뿐이니 걱정은 하지말아요. "
  로라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의 강한 눈빛을 차마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었다. 
그 눈빛에 담긴 호기심이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안내해드릴까요?"
  "그렇게 해주겠어요?"
  종업원들이 청소를 하고 있는 객실을 층층마다 돌며 커리어는 로라의 설명을 
주의 깊게 경청했다. 밝고 넓게 트인 객실에는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벽난로와 미개척 시대풍의 벽지와 가구들, 차양과 네 개의 기둥이 달린 멋스런 
고풍식 침대, 수제 책꽂이, 책상, 의자 네 개와 짝을 이룬 원형탁자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객실에서 식사를 원할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로라는 원형탁자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하지만 손님들 대부분은 식당으로내려오시는 편입니다. "
  "시끄럽게 북적대는 것을 좋아하나보군요. "
  "그보다는 약간 들떠 있는 분위기를 좋아들 하시죠. 대체적으로 새로운 
사람들과어울리는 걸 좋아하세요. 여길 떠난 뒤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생각에 
다들 부담없이 서로를 대하는 것 같았어요. "
  그의 눈썹이 짧게 위로 치솟았다.
  "관찰력이 대단하군요. 맞는 말이에요. 좀더 얘길 하고 싶은데 점심 뒤에 바로 
떠나야 되는 게 유감이군요. 점심 같이 할 수 있을까요?"
  "쉬울 것 같지 않은데 어쩌죠? 하지만 커피 한 잔은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
  "그럼 기다리죠. "
  한 바퀴를 돌고난 두 사람은 다시 사무실 현관 앞으로 돌아왔다.
  "그럼 한시 정각 커피타임에 만나뵙죠. 하지만 바쁘면 그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한가했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떠난 후에도 커리어는 한동안 사무실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조한 
얼굴색과 슬픈 눈매만 아니라면 아주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커리어는 그날 그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다. 잠깐 시간을 내 커피를 마시러 
나와주긴 했지만, 그녀는 일주일간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업무가 산더미같이 
밀려 있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커리어는 은근히 짜증 나기 시작했다.
  "팔월 전에 미리 올까 하는데 그땐 시간이 좀 나겠어요?"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사업차 가끔씩 자릴 비워야 돼요. 더군다나 잘 아시겠지만 팔월은 저희들에게 
제일 바쁜 달이거든요. 구월이 되어야 지나가듯 사람을 만나는 대신 진짜 
친구를 만들 시간이 날 걸요. "
  커리어는 처음으로 껄껄거리며 웃었다.
  "지금 한 말 잘 기억해뒀다가 구월경에 다시 와야겠는데요. "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로라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저희 단톤스나 회의장에 대해서 궁금하신 게 있다면 지금 말씀해주시지요. "
  "회의장에 올 거죠?"
  "가볼 생각이야 있지만 확실치가 않군요. 노력해봐야죠. "
  "그럼 내가 언제 나타나면 되는지 좀 알려줄래요?"
  "정말 죄송해요. 너무 일이 많아서... 오늘 죄송했습니다. "
  택시에 탄 커리어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멋진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 로라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법정에서 과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재판에 
질 경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녀가 풀어야 할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있었다. 웨스 커리어는 그런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재판은 월요일에 속개되었다. 로라와 클레어가 법원 건물 이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에어컨은 보스턴의 칠월 열기를 쫓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층 
층계참에 서 있던 키 작고 깡마른 사내가 손에 수첩을 들고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글로브) 신문의 양크 보스워드 기잡니다. 페어차일드양, 잠깐만요. "
  로라의 표정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을 눈치챈 기자는 성급하게 뒷말을 
이었다.
 "간략하게 얘길 좀 해주시뇨. 질문 몇 가지만..."
  "놀고 있네, 꺼져버려! 그러잖아도 골치 아파..."
  "클레이!"
  로라는 클레이를 제지했다.
  "너는 먼저 들어가. "
  클레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질문 있으면 대답해드리죠. 하지만 재판이 끝난 다음이 더 좋겠는데요. "
  "배심 판결 전에 기사를 만들어야 합니다. "
  보스워드 기자는 아주 빠른 속도로 주말 동안 그녀가 어디 있었으며, 샐링거 
가문에 대한 현재 느낌, 재판 결과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등을 물었다. 로라는 
감정을 배제하고 간략하게 대답했다.
  "나머진 재판과정을 통해 듣겠습니다. 한가지 말씀드릴까요. 앞으로 억울한 일 
많이 당할 겁니다. 법정에서 지저분한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
  무슨 말인가 싶어 로라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그건 기사화하지 마세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우릴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군요. "
  그녀는 기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힘주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또 만납시다. "
  롤린스가 엘윈 파킨슨을 증언대로 불러 세울 즈음에야 법정의 웅성거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평이하지만 비음이 섞인 음성으로 선서를 한 파킨슨은 무릎 
위에 두 손을 얌전히 올리고 증언석 의자에 앉았다. 코 주변에 아주 작게 일고 
있는 경련만이 그가 긴장했음을 유일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롤린스는 확신에 찬 어조로 오웬 샐링거와의 오랜 변호 업무 관계와 오년 전 
오웬의 첫번째 유언장 내용, 그후 추가조항이 들어가게 된 상황 등을 차례로 
열거해나갔다.
  "추가조항에 무슨 내용이 들어가는지를 샐링거씨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직접 얘기했나요?"
  "그렇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직접 얘기했나요?"
  "그렇습니다. "
  "그럼 샐링거씨가 그 내용들을 얘기할 때 변호사께선 그걸 일일이 다 
적었겠군요?"
  "그렇습니다. "
  "그뒤, 그러니까 다음날이 되겠군요. 서명을 받을 수 있도록 추가조항이 
들어간 서류를 사무실에서 만드셨나요?"
  "네. 지금은 그걸 후회하고 있습니다. 몇십년 넘게 관계했던 고객을 잘 
보좌해야 되는데 그 의무를 저버린 기분이 듭니다. 외부로부터 받은 압력과 
압박감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닌 그분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판사님, 기록삭제를 청하는 바입니다!"
  롤린스는 버럭 언서을 높였다.
  "당신이 제시한 증인 아니오. 롤린스씨?"
  판사는 준엄하게 롤린스를 주시했다.
  "부정적 감정을 지닌 참고인입니다. 파킨스씨는 선서증언 때 진술한 내용과 
동일하게 얘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기록된 내용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하겠소?"
  "그만 내려가주십시오, 파킨슨씨. "
  롤린스는 파킨슨을 증언석에서 내려오게 했다.
  "우리측도 질문으 해야겠은데요. "
  카버 세인의 반대신문(법정에서 한쪽의 변호인이 다른 편 증인에게 심문하는 
것:역ㅈ자 주) 요청에 롤린스는 화난 눈길로 판사를 쳐다보았다.
  "판사님, 우리측 반대신문 내용 등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습니다. 휴정을 
요청합니다. "
  짧게 침묵이 오고간 뒤 판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파킨스씨의 증언내용을 끝까지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인씨 
반대신문하시오. "
  "이의 있습니다. "
  롤린스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판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의를 기각하오. "
  롤린스의 지켜보는 세인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배어 있었다.
  "개자식 벌써 매수당했구만. "
  롤린스이 말에 로라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전엔 저렇게 얘기 안했잖아요. 오웬이 분명 제 정신으로 얘기 했다고 
진술해놓구선..."
  "항소하면 돼. 개자식... 돈을 얼마나 받았길래 갑자기 저렇게 뒤바뀌는 거야?"
  "돈이라뇨? 뇌물을 받았다구요?"
  롤린스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공식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먹은 게 분명해. "
  "파킨슨씨. "
  세인은 아주 부드럽게 파킨슨을 불렀다.
  "아까 후회를 했다고 하셨는데 대단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배심원측에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파킨슨은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몇 번 두드렸다.
  "샐링거씨가 중병으로 누워 계신 까닭에 그분이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 그분을 말리다 혹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만 그분이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시켰던 
것입니다. 선서증언 때는 이런 심정을 그냥 망므속에 담아두려고  생각했으나, 
나의 소심함이 빚어낸 엄청난 결과와, 친구이자 고객이었던 샐링거씨를 생각할 
때 마다 마음이 괴로워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전부터 알고 있던 
유능한 의학박사들을 찾아가 의논도 해봤습니다. 병상의 샐링거씨 형태와 
그정의 심리상태에 관해서도 그분들께 소상하게 얘길 했었죠. 예를 들자면 뭐라 
할까... 두려워하는 표정이나 말투, 아, 내가 보기엔 마치 누군가로부터 심하게 
압력이나 압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이의 있습니다!"
  롤린스는 법정이 떠나갈 듯 으르렁댔다.
  "파킨슨씨는 실제 본 내용만을 진술하기 바랍니다. "
  판사는 롤린스의 항의를 대신해 파킨슨에게 경고를 내렸다.
  "의사 몇 분들과 상담을 하셨다는데 무슨 얘기를 들었습니까?"
  "샐링거씨를 만나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상한 행동을 정확하게 묘사했더니, 의사들은 
죽음이 앞에 다가와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나머지 자신보다 더 강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얘기하더군요. "
  "간단히 말해 압박감에 의한 스트레스와 동요감이라고 의사들이 결론을 내린 
순간, 난 내가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오랜 
고객에게 큰 해를 입힌 걸 생각할 때마다 너무 괴로워 이렇게나마 법정에서 
속죄를 드리면 좀 나아질까 해서 선서증언 때 하지 않은 진술을 하게 됐습니다. 
"
  "파킨슨씨, 말이 나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번 진술로 인해 변호사로서의 
경력이나 명성에 해를 입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판단 착오로 인해 오웬 샐링거씨와 그분의 유족들에게 입힌 
손실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내 힘껏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전신이 마비된 상태에서 정신까지 가물거렸던 샐링거씨는 분명 귀찮게 
졸라대거나 위협을 하는 사람에 의해 유언장을..."
  "이의 있습니다. "
  롤린스는 다시 일어섰다.
  "증인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진술내용을 
상상으로만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
  "인정합니다. "
  판사는 세인을 바라보며 묵직하게 말했다.
  "배심원측은 증인의 마지막 진술을 무시하시오. "
  세인은 판사가 입을 다물자마자 유리하게 흐르는 분위기를 계속 잡아두려는 
듯 재빨리 입을 열었다.
  "샐링거씨가 어떻게 보였다구요?"
  "위협을 받고 있는 것처럼요. 왕성하게 일하는 사업가들에게 자주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의사들이 그러더군요. 그래서 전 항상 대담하게 일을 추진해나가던 
샐링거씨도 자신에게 이성적인 판단력이 계속 남아 있다고 착각한 상태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 것이죠. 나이 들고 병든 상태였던 그분은 편안하게 
돌봐 주거나 아니면 속이려 드는 자에게 빠져들어갈 만큼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이미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페어차일드양은 양면성을 지닌 채 
그분을 돌보면서 속이려 들었던 거지요. 결국 그분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에게 복종하듯 길들여졌겠죠. 내가 보기엔 
말입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는 이의를 제기하려는 롤린스의 표정을 보며 뒷부분에 '확실하지 
않지만'이란 단서를 붙였다.
  "난 그때만 해도 그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냥 단지 그분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줄로만 생각했으니까요. 누군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겠어요. 그분은 죽음을 두려워했던 것 이상으로 뭔가, 
분명 뭔가를 두려워했어요. 그분이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순간을 맞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때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결국 그분과 유족 여러분에게 심려와 폐를 끼치게 된 사실에 대해 어떻게 
사죄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뿐입니다. "
  그동안 로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파킨슨은 모든 것을 다 토해낸 
뒤에야 비로소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짜 개새끼네. 보스턴 사람 특유의 참을성을 내던진 채 롤린스가 중얼거렸다.
  퇴직금 스무 배는 챙겨 넣었을걸. 암, 그래야지. 번호사 생활 이제 
종쳐버렸는데 그만큼은 받아 넣어야지. 개새끼... 정말 개자식이군. 
  증언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로라는 이미 승패가 기운 것을 
직감했다.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그녀는 오웬과 나누었던 사랑을 떠올렸다.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그러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차가운 
여자구만. 감정이 없는 여자야. 배심원들은 그녀를 바라보며 한결같이 그렇게 
생각했다.
  "페어차일드양!"
  오웬과 몇 년을 함께 보냈다는 로라의 진술이 끝난 뒤 롤린스가 그녀를 
부드럽게 불렀다.
  "한 순간이라도 오웬 샐링거를 사취하거나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해 입힐 
생각을 했나요?"
  "아닙니다. "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목소리에 열기가 살아났다.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분이 유언장에 날 위해 뭘 남긴다는 생각은 
추호도 안해봤어요. 왠지 아세요? 그분이 돌아가신다는 걸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분이 어린아이 같다니요? 그분은 어린아이도 아니었고, 
어린애처럼 행동하지도 않았어요. 그분은 날 사랑하는 자애로운 어른이셨어요. 
날 사랑하시고 위해주셨어요. 그리고 나도 그분을 염려하고 사랑했어요. 그 
누구도 그분의 실체를 짓밟을 순 없어요. "
  그녀는 샐링거 가문이 모여 있는 곳으로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길을 돌렸다.
  "우리 모두 다 그분이 정상인과 똑같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거짓은 그분을 
욕되게 만드는 일입니다. "
  반대신문에 들어간 세인은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페어차일드양, 몇 년 전 절도죄로 유죄판결을 받으셨죠?"
  "그렇습니다. "
  "도둑이었죠?"
  "우린 가난했고 난 너무 어렸어요, 그래서 가끔 물건을 훔쳤죠. 하지만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어요. 난..."
  "질문에만 대답해주시죠, 페어차일드양. "
  "도둑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변화가 있길 바랐어요. 대학에 들어가 하고 
싶은..."
  "페어차일드양!"
  "죄송합니다, 하지만 질문하시는 의도가..."
  판사가 윗몸을 아래로 굽혀 로라를 내려다봤다.
  "페어차일드양 경고하는데 감정을 제어한 뒤 변호인이 하는 질문에만 
대답하시오. "
  로라는 경멸이 담긴 눈빛으로 판사를 올려다봤다. 진실이 뭐든 상관 않고 
방망이만 두드려댈 판사였다.
  "네. "
  로라는 냉랭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칼 핸디라고 하는 책방주인을 알고 있죠?"
  로라는 롤린스에게 얘기했던 사항 등을 세인에게 그대로 되풀이했다. 세인은 
벤에 대한 얘기를 묻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만의 하나 동생들이 
체포됐을 경우를 생각해 벤은 로라의 고교 생활기록부 보호자란에 이웃 아저씨 
이름을 적어 넣게 했다. 시당국이 결혼하지 않은 젊은 남자에게 아이들을 
맡기지 않을 거란 사실을 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판에 관계된 서류철에 벤이 올라 있지 않은 이유는 너무도 
당연했다. 더군다나 그들이 함께 살았던 건물은 이미 철거된 상태였고, 건물주는 
세상을 떤난 뒤였다. 설령 뉴욕 경찰이 더 자세하게 파고들었더라도 벤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침내 카버 세인은 최종 변론을 하기 위해 배심원을 향해 섰다. 지금껏 
다뤄왔던 협잡꾼과 도둑에 관한 사건들을 일일이 나열하던 세인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최후의 심판이라도 내리듯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여러분 부모님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부모님들이 지금 어떠한지? 아니면 
어떠했는지 가만히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편안한 순간만을 기다리지 
않던가요? 마땅히 편안한 생활을 하셔야죠. 오랜 생을 살아오신 분들이니까요. 
힘들었지만 고귀한 인생을 말입니다. 그 오랜 세월을 이젠 끝마치려 하고 
계십니다. 그분들은 모두 다 한결같이 편안하게, 아주 평화롭게 생을 끝낼 
권리를 지니신 분들이죠.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여러분 부모님들이 
아름다운 가면을 쓴 전과자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기 
앉아 있는 여자는 절도죄로 유죄를 선고 받은 뒤 다시 절도행각을 위해 
의도적으로 샐링거 가문에 침투했습니다. 샐링거씨를 가족으로부터 훔쳐내, 
그분의 사랑을 훔치고, 가족들간의 유대감까지 해쳐가며 전통과 명예가 깃든 
가문을 송두리째 몰살해버린 것이지요. 한평생 뼈빠지게 일해서 세운 사업체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남기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건 법적으로도 
보장된 유족들의 권리이자 특권이기도 합니다. 만약 그걸 훔쳐낸 사람이 
없었다면 말입니다. 존경하는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 앞에 바로 그 도둑이 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물건을 훔치는 사람만 도둑인 건 안닙니다. 
이성을 잃고 가족들의 사랑을 찾던 샐링거씨를 가문에서 훔쳐내 마음대로 
조종한 뒤 목적을 이룬 이 여자도 도둑입니다. 그 도둑이 바로 여러분 앞에 
앉아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배심원들은 좀처럼 법정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세 시간만에야 옆 문이 열리며 
열두 명의 남녀 배심원들이 법정으로 들어왔다. 로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롤린스는 로라의 팔위에 손을 얹은 채 정면을 주시했고, 로라는 
아무 표정없이 배심원 대표가 딱딱 끊어지는 말투로 판결을 내리는 것을 듣고 
있었다.
  "우리 배심원들은 고소인측으로..."
  롤린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라는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판사가 입을 열었다.
  "배심원들의 판결 내용에 따라 오웬 샐링거의 유언장에 담긴 추가조항건이 
무효 파기 됐음을 선언합니다. "
  웅성거림 속에 샐링거 일가는 일시에 썰물처럼 법정을 빠져나갔다. 비콘 힐과 
오웬 샐링거의 호텔 네 곳을 손에 쥔 펠릭스가 샐링거 가문의 새로운 
우두머리로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들을 바라보던 로라는 법정 현관 
쪽에서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오는 보스워드 기자를 발견했다.
  "질문 몇 가지 더 해도 되죠?"
  "나중에요. "
  로라는 등을 돌려 나가는 샐링거 일가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보스워드는 탁자 끝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필요하거든 연락주세요. "
  로라는 고개만을 끄덕였다.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롤린스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항소하자. 분명 다음엔 승산이 있을 거야. "
  그러나 로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신 이곳에 서고 싶지 않아요. "
  "지금은 힘들어서 그래. 그래도 잘 해냈어. 또 한 번 할 수 있을 테니 두고 봐. 
오웬 샐링거가 남긴 걸 한 조각도 못 줍고 여길 걸어나갈 수 없잖아. "
  "오웬이 남긴 사랑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남아 있어요. "
  로라는 놀랄 만큼 차분하고 맑은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랑과 깊은 관심, 그것만은 뺏기지 않았어요. 그 
영원한 사랑과 그분에게 배운 모든 것들, 새로 시작하기 위해 그거면 족해요. 
그걸로 다시 일어나 반드시 그 유산을 돌려받을 겁니다. "

    14장
  호텔 암스테르담 샐링거는 만원이었다.
  팔월말은 일년 중 가장 피크를 이루는 관광철이다. 칼버스트라트 거리는 매우 
혼잡했다. 신겔 꽃시장은 언제난 만원이었고, 램브란트 생가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은 매일 긴 줄을 섰다. 셰익스피어 연극에서부터 스트립 댄서가 나오는 
밤무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극장과 클럽은 초만원이었다.
  "사람들이 암스테르담을 정신병원으로 부르는 이유를 곧 알게 될 겁니다. "
  호텔 총지배인은 싱글거리며 알리슨과 파트리샤를 안내하였다. 펠릭스와 
아사의 고명딸이 자기 호텔에 왔다는 것은 그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객실은 모두 만원입니다. 하지만 걱정마십시오. 제가 두 분을 위해 특별하게 
로열실을 비워두었으니까요. "
  "그래요? 왕이 나타나면 어쩔 건데요?"
  알리슨이 굽실거리는 지배인에게 농담을 했다.
  "아궁이에다 집어넣어야죠. "
  훌륭한 지배인은 유능한 정치인이 돼야 한다던 오웬의 말을 기억하며 
알리슨은 활짝 웃었다. 아,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알리슨은 혼잡한 로비를 뚫고 
나가는 뚱뚱보 총지배인을 따라가며 오웬을 그리워하였다. 벌써 일년이 지났다. 
살아 있을 때는 할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깨달았다. 로라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은 지워야 했다.
  파트리샤가 샴페인 병을 따는 동안 알리슨은 로열룸 거실 창에 기댄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암스테르강이 도시 주변을 U자 모양으로 휘감고 있었다. 강은 
마치 숲 사이에 난 푸른 길처럼 보였다. 알리슨은 강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내려다보며 그 속에 살고 있을 사람들을 상상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쁨이나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 도시에 그녀가 반년 조금 넘게 
알리슨 월콧으로 있다가 다시 알리슨 샐링거로 돌아간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 할까?"
  알리슨이 침묵을 깨뜨렸다.
  "어둡기 전에 발렛주 근처를 한바퀴 돌아볼까?"
  파트리샤는 얼굴을 찡그렸다.
  "지저분하고 구역질나는 데 가서 뭐해?"
  "그래 봬도 그 여자들 다 사장님이셔. 난 아주 흥미진진해. "
  "어린애처럼 왜 그래?"
  파트리샤는 찡그린 얼굴을 풀지 않았다.
  "유리벽 속에 앉아 뜨개질하면서 손님 기다리는 창녀들이 뭐가 그렇게 보고 
싶다는 거야. 레인더스 카페에 가서 남자나 찾는 게 낫지. "
  "유리벽 속에 앉아 뜨개질하는 대신 직접 뛰쳐나가 남잘 구하겠다는 거야. "
  "언니 왜 그래? 웬 몰취미야. "
  파트리샤는 못마땅하다는 듯 웅얼거렸다.
  알리슨은 다시 창가로 돌아갔다. 파트리샤 말이 맞았다. 그냥 한번 내뱉어본 
소리였다. 하고 싶은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그녀는 피곤하다는 생각을 했다. 결혼하고, 이혼하고, 마음에 
꼭 맞았던 친구가 도둑으로 판명된 사실들로 그녀는 몹시 지친 상태였다.
  파트리샤는 그늘진 곳이 없는 사촌이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세월 
좋게 모든 것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저래야 되는데. 알리슨은 파트리샤의 
태평한 성격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 스스로 젊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 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여인처럼 모든 것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떠미는 
바람에 오긴 왔지만 기분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파트리샤, 쇼핑이나 하자. 저녁은 어디서 할 건지 네가 골라봐. "
  또다시 머뭇거리는 알리슨은 귓가에 레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비관하지 마라. 체드 잘못도 아니다. 제발 비난 같은건 하지 말고 재미있게 
인생을 즐기렴.
  두 사람이 다시 호텔로 돌아온 것은 새벽 두시경이었다. 드레스, 코트, 신발, 
실크 제품들, 가방, 보석 등 쇼핑해놓은 물건들이 어느새 로열실에 배달된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실에서 외출복을 벗던 파트리샤가 알리슨을 불렀다.
  "베니스에서 내가 산 꼬마 꽃병 봤어? 침대 바로 옆 탁자에다 올려놨었는데. "
  "종업원이 침실 정리하다 네 그 잘난 보석들 옆에, 놔뒀나보지. "
  "멀쩡히 있는 꽃병을 왜 치워?"
  파트리샤는 소란스럽게 서랍들을 다 뒤졌다.
  "없어. 누가 가져갔나봐. "
  공단으로 된 나이트가운을 걸친 알리슨은 파트리샤의 침실 문 곁에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정말 없어졌어?"
  "천사백 달러밖에 안 나가는 거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었던 건데. "
  "너한텐 천사백밖에 겠지만, 꽤나 많은 돈인걸. "
  알리슨은 파트리샤에게 일치므ㅇㄹ 가한 뒤 전화로 프런트를 불렀다.
  "샐링거예요. 우리 방으로 경비담당하는 사람 올려보내줄래요?"
  알리슨의 전화를 받은 상대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경비담당. 아, 예. 실례지만 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먼저..."
  "우리 방에서 뭔가 없어져서 그래요. 전화로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누구든 
올려보내요. 지금 당장!"
  "아, 지금 당장 보내겠습니다. 경비대장을 올려보내는 게 더 낫겠지요?"
  "그래요. "
  알리슨은 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 사람 이름은?"
  "벤 가드너라고 합니다. "
  동거중인 여인의 젖가슴 위에 손을 올린 채 잠들어 있던 벤은 침대 옆에서 
울어대는 전화소리에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죄송합니다. 주무시고 계실 텐데. "
  알버트는 그가 전화기를 들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하지만 로열실에 묵고 계신 여자분이 전화로 뭔가 없어졌다고 하길래요. 성이 
샐링거라는데, 대장님이 직접 일을 맡는 게..."
  "내가 맡지. "
  그는 이미 침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샐링거 뭐라던가?"
  "샐링거 누군진 모르겠어요. 아마 제 교대신간에 온 손님인 것 같은데, 볼 
기회가 없었거든요. 어쨌든 제일 먼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
  "좋아, 아주 잘했네. 반 시간내로 가겠다고 그 손님한테 말해주게. "
  벤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이 부산하게 
떠올랐다.
  세탁기 바구니 속에 처넣었던 검정색 바지와 흰 와이셔츠를 다시 꺼내 입고 
진청색 타이를 목에 대강 감아 맨 벤은 양복 저고리를 손에 쥔 채 문밖으로 
급히 뛰어나갔다.
  샐링거. 그는 자전거의 자물쇠를 풀면서도 계속 생각에 잠겼다. 샐링거. 뭔가 
없어졌다구. 제일 가까운 택시 승차장을 향해 벤은 페달을 힘차게 밟아 나갔다.
  절도행각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호텔들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암스테르담 샐링거는 여태껏 그런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적이 
없었다. 벤은 객실 문에 달린 자물쇠를 신식으로 모두 교체했을 뿐 아니라 
경비요원들도 늘려가며 호텔 경비에 만전을 다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 운하로 나가는 호텔 앞 부둣가에 경비요원을 늘리자는 제안으로 
주목을 끈 뒤, 그는 전직 경비대장이 은퇴하자마자 그 직을 승계하였다. 간혹 
로비나 식당에서 자그마한 소지품들이 없어지는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여태껏 
심각한 절도사건은 한 건도 없었다. 그런데 벤 가드너가 경비대장으로 일하고 
있는 호텔에서 샐링거가 도둑을 맞았다니.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가는 벤 뒤로 부지배인이 허둥대며 따라오고 있었다.
  "헨릭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프다고 해서..."
  "내가 알아서 할게요. "
  가슴이 뛰고 있었지만 벤은 자신의 숨소리와 목소리가 평소보달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거을 의식했다. 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넥타이와 저고리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빗까지 꺼내 머리를 깨끗하게 정돈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벤은 안주머니에서 뿔테 안경으 꺼내 썼다.
  알리슨이 문을 열자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알리슨은 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그러나 그를 본 기억도, 그를 
닮은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튼튼해 보이는 턱, 파란 눈동자, 자연스러운 
머릿결, 훤칠한 키에 곧게 뻗은 몸매와 탄탄한 근육. 멋진 외모였다. 알리슨은 
순간적으로 그에게 매료당한 느낌이었다. 공격적으로 보이는 인상도 그녀를 
잡아끌었다. 검정색 비지니스 의상과 뿔테 안경 뒤에 숨어 있는 그의 철저한 
직업정신도 궁금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벤 가드너?"
  놀란 벤에게 알리슨은 미소를 던졌다.
  "알리근 샐링거에요. 사람 이름 외우는 덴 도사급이죠. 던군다나 날 도와주는 
사람인데 이름만큼은 확실히 알아둬야죠. "
  벤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샐링거 가문에 대한 기사를 찾아 신문과 잡지를 
뒤질 때마다   알린슨의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고 읽었다.
  "들어오시죠. "
  젊은 여자가 긴 의자에 앉아 있었고, 알버트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벤은 알리슨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달아로를 때 모습이 
어떨까를 상상했다. 벤은 상상 속에서 그녀를 옷을 벗겨나갔다. 길게 뻗은 
몸매와 실크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신선한 폭포 
밑으로 이끌어 가면 저 공단가운만큼 유혹적인 미소를 띠고 다가오겠지.
  "사촌동생, 파트리샤 샐링거예요. "
  알리슨이 벤의 상상을 깨뜨리며 파트리샤를 소개했다.
  "파트리샤, 벤 가드너씨. 경비대장이시란다. "
  파트리샤는 앉은 채 벤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한건 알리슨과 
비슷한데, 완전히 타입이 다르구만. 벤은 레니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알리슨의 
매력적인 분위기를 애써 떨쳐내려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샐링거 일가와 
맞부딪치고 싶었던 벤은 펠릭스에게 복수를 꿈꿔왔다. 열세 살의 소년이 서른한 
살의 청년으로 자라는 동안 그 감정이 조금 희석되긴 했지만 아직도 복수는 벤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얘기할 건 다 이쪽한테 얘기했어요. "
  파트리샤는 고갯짓으로 알버트를 가리켰다.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경비태세가 이렇게 느슨하다니 놀라도 한참 놀랄 일이네요. 이 분야에서 얼마 
동안 일을 하셨나요?"
  "파트리샤가 좀 흥분한 것 같으니까 이해하세요. "
  알리슨은 벤에게 재빨리 사과했다.
  "꽃병을... 선물로... 그러니까 엄마한테 줄 선물로 샀거든요. 아주 아끼던 
물건인데 없어져서..."
  "소설 써, 언니?"
  파트리샤는 비위가 상한 듯 알리슨에게 목청을 높였다.
  "왜 그래? 호텔직원한테 내가 흥분했는지 안했는지 시시콜콜 설명할 필요 
있어? 사과까지 하구 말야. 내가 좋아서 내 화장대 위에 놓으려고 산 물건이 
없어져서 화가 나 있는데 왜 딴소리해. 호텔 여종업원 주려고 샀는 줄 알아?"
  꽤나 공치아픈 여자군. 벤은 파트리샤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알리슨을 
살폈다. 사촌동생의 거친 말투를 대신 사과하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있는 
알리슨에게 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상상밖의 일이었다.
  "호텔 직원이 그 꽃병을 가져 간 게 확실합니까?"
  벤은 감정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음서으로 물었다.
  "증거가 없으니까 모르죠. 우리 둘 다 여기 없었으니까. 하지만 청소하느라 
하녀들이 드나들었을 것 아니예요? 쇼핑 끝내고 돌아와 보니..."
  그녀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알버트에게 또 고갯짓을 했다.
  "다 말했으니까 이 사람한테 물어봐요. "
  "그럼 됐습니다. 알버트에게 모든 걸 얘기했다면 가서 주무시죠. 알버트가 
적어놓은 보고서를 읽은 뒤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일어나는 대로 전호나를 
주세요. 그때 가서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의논하기로 합시다. "
  그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파트리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인사도 
아니고 목례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아침하면서 얘기하면 되겠네요?"
  알리슨의 청에 잠시 머뭇거리던 벤은 즉시 대답했다.
  "그러죠, 여덟시 괜찮겠죠?"
  파트리샤는 방을 가로질러 침실로 걸어가 비꼬는 투로 알리슨을 불렀다.
  "언니, 나 원래 아침 안 먹는 거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렇구나. "
  알리슨은 온화한 얼굴로 벤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가드너씨와 함께 아침을 하지. 그런 다음 널 만나면 되겠다. "
  "다 쓸데없는 짓이야. "
  파트리샤는 침실문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 꽃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애? 어림없어. 공양이 같은 하녀가 냉큼 집어가 
벌써 팔아먹었을 걸. 왜 전화까지 걸어 사람을 불러들이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파트리샤는 거칠게 문을 닫았다. 벤과 알리슨은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멍하니 두 사람을 쳐다보던 알버트가 엉덩이를 들며 벤에게 말했다.
  "타자를 쳐서 올리죠. 내 글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같이 가세. 나도 할 일이 있으니까. "
  알버트에게 얘길 하면서도 벤의 시선은 여전히 알리슨을 향해 있었다.
  "그럼 내일..."
  여운을 남기듯 알리슨에게 인사를 한 뒤 벤은 알버트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사촌에게 돌려주세요. "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알리슨과 마주앉은 벤은 파트리샤의 꼬마 꽃병이 
티슈에 말려 담겨진 상자를 내밀었다. 알리슨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꽃병과 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걸 찾았어요?"
  "여태껏 이런 일은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누가 그랬어요?"
  "객실 종업원이 그랬나본데, 지금 조사중입니다. "
  알리슨은 그쯤에서 꽃병 문제는 일단락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온 웨이터의 눈은 짙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종업원들 사이의 
쑥덕거림이 벌써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다. 벤 가드너와 펠릭스 샐링거의 딸이 
나란히 앉아 아침을 먹었다 등등...
  "이 꽃이 왜 여기 있는 줄 아세요?"
  알리슨은 손톱 끝으로 탁자 위에 있는 크리스탈 꽃병에 꽂힌 아이리스 꽃잎을 
가볍게 건드리며 물었다. 벤은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 이름이 아이리스였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몇 년 동안 
할머니를 그리워 하던 할아버지께서 모든 호텔에 이 꽃을 꽂아놓으라고 
하셨대요. 매일매일,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신선하고 깨끗한 흰색 
아이리스를 꽂아두라구요. 할아버지말씀은 법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아빠도 감히 
그걸 바꿀 수는 없었죠. "
  벤은 말없이 창밖의 암스테르강을 내려다보았다. 벤이 정말 궁금한 건 오웬 
샐링거가 아니라 오년 동안 보지 못한 두 동생, 로라와 클레이였다. 그러나 벤은 
두 사람의 소식을 물을 수가 없었다. 암스테르담에 근무하고 있는 벤 가드너란 
인물이 어떻게 샐링거 일가와 함께 살았던 로라 페어차일드와 그 남동생을 알고 
있단 말인가?
  "어디 출신이세요? 여기 오기 전에 어디 계셨어요? 로비에서 네덜란드어를 
하는 걸 들었는데, 뭐하러 굳이 어려운 네덜란드어를 배웠을까 궁금했어요. 
호텔업계에선 영어를 쓰잖아요?
  "어느 곳이든 일자릴 구하고 싶은 곳에선 그 나라 말을 배워두는 게 제일 
빠른 길이죠. "
  "영국 쪽은 아닌데... 미국인 맞죠?"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확히 뉴욕?"
  "귀가 예민하군요. "
  "그런데 뉴욕 출신 답지 않게 말투가 약간 부드럽네요. 많이 노력한 것 
같아요. 딱딱한 말투를 없애려고... 추억 같은 것도 없애버리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요. "
  "난 없애버리진 않아요. 쌓아두죠. "
  "그럼 가끔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나요? 아니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로 
삼나요?"
  "후자일 때가 더 많아요. 불쑥뿔쑥 추억들이 떠오르죠. "
  알리슨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과 연관된 추억이면 더 그렇겠죠. "
  "그렇진 않아요. "
  "그럼 혼자 스스로 실수하고 그런 추억을 되살리란 말이에요?"
  "실수란 소린 안했어요. 추억이라 그랬지. 물론 타인과의 추억이겠죠. 하지만 
내 말은 추억을 생각하는 것과 추억 속의 사람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었어요. "
  "남자였나요? 여자? 친구? 아니면 가족 중 누군가 하구?"
  "지금 말씀하신 것 다요. 죽음, 이혼, 그리고 몇 가지 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일 말이군요?"
  "어머, 그걸 아시네. 아 참, 다 알고 있지. 호텔업계에 있는 사람인데 모를 
턱이... 그래요. 그것도 일부분이에요. "
  "그리고 이혼건도요. 최근인가 보죠?"
  "지난해 십일월이에요. 정확히 추수감사절 때죠. 전남편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거액의 이혼수당을 챙긴 날이에요. 아주아주 조그만 사건으로 기가 막힌 상금을 
탄걸요. 어머, 얘기가 왜 이렇게 돌아가고 있죠. 분명 난 그쪽 얘기를 묻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요. "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던 벤과 함께 알리슨은 처음으로 크게 소리 높여 
웃었다. 손가락 끝을 혀로 가볍게 핥은 뒤 사과케이크 한쪽을 집어든 알리슨은 
벤에게 다정한 눈길을 보냈다.
  "이 케이크 참 맛있어요. 당신네 주방장이 직접 구운 거예요?"
  "아뇨, 당신네 주방장이 구운 겁니다. "
  알리슨은 미소를 지우며 얼굴을 붉혔다.
  "주방장은 고용원이죠. 주인은 당신 아닙니까?"
  "왜 일부러 날 불편하게 하는 거죠?"
  "글쎄, 나도 모르겠습니다. 왜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아침을 나누는지도요. "
  "당신을 좀더 알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런데 뜻대로 안되는군요. "
  "다른 남자들보다 힘들어요?"
  "굉장히요. 그러지 말고 얘길 해봐요. "
  "일이 있습니다. "
  의자를 뒤로 밀며 벤은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이해해주십시오. "
  "아직 아홉시밖에 안됐는데. "
  "아홉시부터 근무 시작이죠. "
  "그래서 언제 끝나요?"
  "여섯시오. "
  "그럼 일곱시에 저녁 할 수 있겠네요?"
  벤은 알리슨의 표정에서 그녀가 자신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알았다. 알리슨 
샐링거, 샐링거 호텔 그룹의 상속녀. 펠릭스의 고명딸. 벤은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일곱시 정각, 좋아요. "
  벤은 그녀의 어깨 위로 가볍게 손을 얹었다.
  "식당은 내가 정해놓을까요?"
  "그래 주세요. "
  "일곱시에 내가 룸으로 전화하는 걸로 합시다. "
  그는 유럽식으로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벤은 하루종일 알리슨 샐링거를 생각했다. 정각 일곱시에 전화를 걸어 로비로 
나오라 할까, 아니면 직접 로열실로 찾아갈까를 두고 수없이 고민했다.
  그들은 호텔을 나와 말없이 걸아갔다. 무척이나 수줍어하며 침묵에 잠겨 있는 
알리슨을 보며 벤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나 걱정스러웠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햇지만 그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한동안 그들은 타인들처럼 얼마간의 거리를 둔 채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그 사이 땅거미가 내리고 암스테르담의 매력적인 불빛이 금빛으로 
도시를 밝히기 시작했다. 그 빛깔은 바로 램브란트의 그림색이면서 동시에 
암스테르담의 빛깔이기도 했다.
  관광객들과 퇴근하는 직장인들 속에 섞여 두 사람은 암스테르담 거리를 
쏘다녔다. 벤은 가끔씩 특이하게 생긴 빌딩을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기도 하고 
청어구이나 팬케이크를 파는 노점상들에 고나한 얘기를 들러주었다. 또 거리의 
대형 오르간 연주자들이 왈츠와 재즈를 연주하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알리슨을 맨 앞자리에 내세우기도 했다.
  신나는 음악이 거리의 황금빛과 어울려 거리마다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식당에 앉아 유리창을 내다보고 있는 두 사람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운하를 따라 높고 길게 이어진 웅장한 건물들도, 전통 프랑스식 식당이 
주는 감미로움도,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벤이 미리 주문해놓은 
최고급 포도주도 알리슨의 침묵을 깨뜨리진 못했다. 무늬가 새겨진 유리창을 
통해 발밑으로 흐르는 운하를 지켜보던 알리슨은 오랜 침묵을 깨고 운하 
양쪽으로 있는 주거용 선박을 가리켯다.
  "모든 배들이 다 저런가요? 마치 물에 떠 있는 동물농장 같네요. "
  벤은 알리슨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밑부분이 물에 잠겨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선상주택 벽면에는 꽃들이 만발한 초원과 진청색 하늘 위로 
높게 날고 있는 새들이 화려한 색깔로 그려져 있었다. 어떤 보트 위에서는 
강아지 한 마리가 의자에 올라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거의 다 저런 식으로 그림을 그리죠. 돈이 없어 저런 곳에 사니까요. 
언젠가는 저 그림처럼 멋진 야외로 나가 집을 짓고 살겠지 하는 희망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
  "난 보트 위에서 살아보는 게 꿈인데..."
  알리슨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며칠 못 잘걸요. "
  "낭만적이고 아늑할 것 같은데요. 맘 내킬 때마다 육지로 도망가면 되잖아요. 
"
  "보트로부터? 아니면 같이 살던 사람으로부터?"
  "오, 난 혼자 살고 싶어요. 선상생활을 같이 나눠보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모를까. 그럼 도망갈 필요도 없겠죠. "
  벤은 포도주잔을 들어올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당신을 찾아내길!"
  알리슨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그 사람이 날 찾아냈으면 진짜 좋겠네요. "
  "보스턴에 언제 돌아갈 생각입니까?"
  벤의 물음에 알리슨은 자세를 고쳐 앉은 뒤 한 손은 무릎에 얹고 또 다른 한 
손으로 유리잔을 들어올렸다.
  "아침하고 똑같이 넘어가려는 거죠? 이번엔 내 얘기 말고 당신 얘길 해봐요. 
뉴욕 얘기 좀 들려줘요. 자세히 말이에요. "
  지난 몇 년 동안 누구에게도 자신의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던 벤은 알리슨 
샐링거에게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려가며 거의 거짓없이 
이야기했다. 홀로 낯선 곳을 돌아다니던 몇 년 동안의 세월을 통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보다는 부분적이나마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버님께선 가구회사를 운영하셨죠. 직접 디자인을 하고 일일이 수작업으로 
가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혼자 시작하셨던 건 아니고 동업자가 있었다는데, 
그자는 공급처를 관할했다는군요. "
  "어떤 가구들이었는데요?"
  "호텔 납품용이었죠. 처음엔 작게 시작했지만 차츰 규모가 커지자 아버님은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셨어요. 물론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죠. 하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아버님이 그러시더군요. 당신 인생에서 세 
가지를 목숨 바쳐 사랑한다구요. 나와 어머니 그리고 그 작은 회사를 말입니다. 
제이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아버님은 징병당해 전쟁터로 가셨죠. 어떻게 
해서 그 동업자가 징병을 피했는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잔 미국에 
남아 계속 회사를 운영했답니다. 휴전 몇 달 전 아버님은 심한 부상을 입고 
미국으로 돌아오셨죠. 전쟁이 가져다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동업자가 던진 
배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회사를 한 입에 말아먹은 동업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에 완전히 그것을 합병시키고 말았으니까요. "
  알리슨은 벤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어재지 못했다. 지난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무덤덤했다. 애정도, 분노도, 슬픔도, 기쁨도, 그 어떤 희노애락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님은 살아계신가요?"
  "아뇨. "
  식당지배인이 찾아와 직접 포도주를 따라주며 공손히 물었다.
  "한 병 더 하시겠습니까?"
  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 파테(잘게 썬 오리고기를 양념해 질그릇에 끓여서 그대로 식혀 먹는 
프랑스 요리:역자 주)도 준비해줘요. "
  그는 붉게 물든 유리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열세 살 때 돌아가셨죠. 어머니는 지금으로부터 팔년 전에 
돌아가셨구요. 아버님과 이혼하시고 재혼으로 새 삶을 찾았지만... 난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부터 홀로 뉴욕 등지를..."
  "뭘 했는데요?"
  "잡화상 점원에서 식다 웨이터, 고물 같은 것도 팔아봤고... 그 다음, 그러니까 
오년 전이군요. 유럽으로 건너와 호텔에서 일자리를 찾아 헤맸죠. 짐꾼, 수리공, 
사무직원, 제네바에선 회계사까지 해봤어요. 하지만 그러느라고 프로답게 
전문적인 일을 배워보진 못했어요.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몰랐으니까요. "
  "지금은 어때요?"
  표정 없는 벤의 입게에 아주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글쎄, 지금은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
  웨이터가 파테와 치즈 그리고 비스킷 등을 늘어놓는 동안 지배인은 두번째로 
주문한 포도주병을 따고 있었다. 벤은 익숙한 손놀림을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은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그것은 바로 샐링거 
왕국의 일부분이야.
  흐르는 세월과 함께 부친을 우한 복수심이 시들어 갔다고는 하나 샐링거 
가문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겠다는 갈망은 결코 시들지 않았다. 벤은 
지금에야 비로소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원했던 게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 자신이 꿈꿨던 복수의 시나리오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샐링거 일가가 자고 있는 침실에 방울뱀을 던져 넣기, 저녁식탁에 모인 
그들을 향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몰살하기, 리무진 속에 검은 독거미를 뿌려 
놓기 등등이었다. 그러나 열세 살짜리 소년의 눈에 샐링거 일가는 손댈 수 없는 
하늘의 왕국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실천할 수 없었다.
  그가 해낼 수 있는 유일한 복수는 그들로부터 뭔가를 훔쳐내는 일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아버지 저드를 잃었듯이 그들로 하여금 뺏기는 것이 뭔가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펠릭스가 제일 사랑하는 것을 뺏고 싶었다. 그러나 
펠릭스가 사랑하는 것은 호텔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벤은 
잡지책에서 읽은 레니의 보석들을 생가해냈다. 오스트리아인이었던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귀중한 유산을 레니가 보물보다 더 중히 여기니다는 
사실을 알고 벤은 펠릭스와 제일 가까운 레니를 괴롭히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진짜 유치한 생각이었더. 웨이터가 접시와 나이프, 포크 등을 챙겨 
놓는 것을 지켜보며 벤은 말없이 중얼거렸다. 방울뱀이나 독거미와 다를 바 
없는 어린애 장안이었지. 부유층을 터는 것은 마치 핀으로 코끼리를 찌르는 
일과 마찬가지였다. 부자들은 그때만 지나면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예전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결국 복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시 말해 샐링거의 인생에 치유될 수 
없는 타격을 가한는 길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뭘 원하고 있는지 말 안해줄 거예요?"
  벤은 갑작스럽게 생기가 도는 알리슨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어깨가 드러난 
연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알리슨은 휘황찬란한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고리로 
치장하고 있었다.
  "조금 나중에 합시다. 먼저 알리슨에 대한 얘길 듣고 싶은데, 가족 얘긴 
하나도 안했지 않소. "
  그녀의 눈빛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호텔 얘기 말이에요?"
  벤은 천천히 머릴 흔들었다.
  "그 얘기 말고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들 말입니다. 행복하게 했거나 아니면 
거꾸로 불행하게 만들었던 사람들 없어요?"
  알리슨은 싱긋 웃었다.
   "오늘 그걸 다 듣겠다구요?"
   "많으면 어떻고 또 길면 어떻습니까? 두고두고 밤마다 얘기하면 되겠죠. "
  그는 살짝 붉어지는 알리슨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남편 얘기만 아주 조금 들었지 그밖의 것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아, 물론 아버님이 계시지. 나도 호텔직원이니까. 펠릭스 샐링거가 당신 
아버님이란 건 알고 있어요. "
  오리 파테 한 조각과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알리슨은 의자 깊숙이 
앉았다.
  "먼저 오웬과 아이리스, 조부모님 얘길 해야겠네요. 지금으로부터 거의 일세기 
전에 태어나신 할아버진 자수성가하신 분이에요. 정열적으로 호텔을 일으켜 
가며 두 알들을 얻게 된 뒤..."
  그녀가 자신이 태어나기 이십오년 전에 사망한 아이리스 샐링거를 중심으로 
가족 얘기를 시작했다.
  "할머니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한테 그리 중요한게 아니었어요. 
할아버니가 할머니 얘기와 두 분의 사랑 얘기를 세세히 해주셨기 때무네, 난 늘 
그분이 내 인생 속에 들어와 살아계신다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으니까요.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뭘 해야 될 지 알 수 없을 때, 또 얘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늘 할머니를 생각하곤 했어요. "
  "엄마한테도 얘길 못했나 보죠?"
  "엄만 정말 훌륭하신 분이세요. 하지만 가끔은 터놓고 얘기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죠. 혼자 삼켜내야 할 슬픔 같은 것 있잖아요. "
  "무슨 소린지 이해합니다. 어떤 슬픔이었나요? 예를 들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슬픔 같은 거. "
  "그것도 큰 슬픔 중 하나일 겁니다. "
  "그리고 이혼할 때도 그랬어요. 실패했다고 스스로 인정해야 했거든요. 모두들 
그 사람하고의 결혼을 말렸어요. 폴, 로라, 할아버지 모두가 말렸는데 난 그 
말을 듣지 않았어요."
  "로라?"
  로라라는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그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폴하고 할아버지가 내내 충고를 했었죠. 폴 젠슨이라고 사촌 오빠가 있어요. 
엄마도 내심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셨죠. 하지만 난 모두 무시해버렸어요. 난 
내가 옳고 그른 걸 판단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거든요. "
  벤은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로라도 사촌인가요?"
  "아니예요. 그애 얘기만은 하고 싶지 않아요, 벤. 사촌 얘기가 궁금하면 다른 
얘기 할게요, 우리 집안은 사촌 투성이에요. 파트리샤는 이미 만났고..."
  "사촌들이 궁금한 게 아니라 뭣 때문에 당신이 슬퍼했을까 그게 궁금했어요. 
그래서 물어본 것 뿐이에요. 로라라는 사람이 슬픔을 주었나보죠?"
  알리슨은 입술을 깨물었다. 선상가옥 위에서 정담을 나누고 있는 일가족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그녀는 또다시 깊은 침묵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보트 몇 
척이 지나고 있었다. 모두 다 활기 차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로라는 내 친구였어요. "
  그녀는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몇 년 동안 우리 가족과 함께 지낸 친구죠. 열여덟살 때부터 사년 넘게 
주방일을 하면서 할아버지 서재 정리를 돕던 애였어요. 그애 남동생도 있었지만, 
내가 좋아했던 애는 로라였어요. 우리 둘이 얼마나 신나게 매일매일을 보냈는지 
벤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걸요. 아무것도 모르던 애였죠. 테니스, 댄스, 물건 사는 
법등등 로라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엄마하고 바바라 이모도 성심껏 
도와줬죠. 모든 것을 가르쳐줬어요. 원래 예쁘기도 했지만, 우리 모두 그애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눠줬어요. 로자는 요리하는 법을 
가르쳤고, 난 그애를 식당으로 데려가 주문하는 법부터, 무례한 웨이터 다루는 
방법 등을 가르쳐줬죠. 둘이서 그 연습을 하다 배꼽을 잡고 깔깔거렸는데..."
  알리슨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죄송해요, 바보처럼. 그애 생각만 하면 항상 이렇게 울어요. 로라는 정말 
재미있는 애였어요. 사람 흉내내는 덴 진짜 도사급이었어요. 사랑스럽고, 
정직하고 똑똑했는데... 아니, 정직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오랫동안 우린 그애가 
정직한 애라 믿었어요. 뭔가 의견을 물어보면, 그앤 항상 열심히 그리고 
신중하게 생각한 뒤 나한테 도움을 주곤 했죠. "
  "정직하진 않았다뇨?"
  "그앤 도둑이었어요. "
  알리슨은 투박하게 말했다.
  "뉴욕에서 체포된 뒤 유죄선고까지 받았대요. 자세한 건 몰라요. 아빤 로라가 
남동생과 함께 케이프에 있는 우리 별장을 털기 위해 들어왔다고 했어요. 그해 
여름 누군가가 들어와서 엄마가 아끼는 보석들을 몽땅 털어갔거든요. 하지만 
그냥 그걸로 끝나고 말았어요, 경찰이 애썼지만 잡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
  "그 친구가 했다고 믿어요? 그 친구 동생이 했을지도 모르잖아요. "
  "모르죠 뭐. 더 이상 신경쓰고 싶지 않아서 잊기로 했어요. 우리 모두 로라를 
사랑하고 믿었는데 로라는 마음을 터놓지 않았어요. 거짓말만 했던 거죠. 더구나 
할아번지가 돌아가신 뒤..."
  그 부분에서 알리슨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만해요, 그 얘긴. 이젠 당신 얘기 들을 차례..."
  "안돼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에게 벤은 재빨리 사과했다.
  "미안해요. 소리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당신 얘기 속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가 나도 모르게 큰소릴 낸 것 같군요. 얘기 끝까지 들었으면 하는데요. "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로라 일에 왜 그렇게 관심을 두는 거죠?"
  "당신이 괴로워하는 일 같은데 관심이 안 가겠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을 때였어요. 몇 달 동안 거동도 못하실 만큼 
아프셨다가 돌아가셨어요. 그 몇 달 동안이 문제였나봐요. 말씀조차 제대로 
못하는 할아버질 로라가 하루도 쉬지 않고 간호했거든요. 숨을 거두기 바로 
직전 할아버진 변호사를 통해 유언장을 바꾸셨대요. 할아버지 집과 샐링거 그룹 
주식 얼마하고, 그분 소유로 돼 있는 호텔 네군데를 로라에게 남기는 걸로요. "
  "세상에. "
  벤은 숨을 몰아 쉬었다.
  "왜요?"
  "운수대통했군요. "
  "아빠도 그랬죠. 아빠는 로라를 재산만 탐내는 사냥꾼이라고 햇어요.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했어요. 로라가 호텔과 다른 재산을 물려받게 된 걸 난 정말 
기뻐했어요. 할아버지와 로라는 서로 사랑을 나눈 사이였어요. 로라로 하여금 
사업을 잇게 할 만큼 할아버진 무척이나 그애를 사랑했어요. "
  그녀는 초첨없는 눈길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아주 부자가 됐겠네요. 그런데 그게 뭐 그렇게 슬픈 일이에요? 좋아하는 
친국가 운수대통했는데. "
  "더 이상 내 친구가 아니니까 그렇죠. 부자도 아니구요. 얘기했잖아요. 우릴 
속였다구. 사년 동안 그앤 우리에게 내내 거짓말을 했어요. 우리가 그토록 
마음을 열고 대햇는데 말이에요. 그것뿐인 줄 알아요? 할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흉계를 꾸몄다는 거예요. 무슨 소린진 아직도 이해가 잘 안되지만 뭔가 
할아버지를 겁나게 만들고 위협했다는... 돌아가시기 전에 할아버지는 
이상했어요. 뭐라고 얘길 하시는데 알아듣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로라는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있다고 그랬죠. 그래서 우릴 위해 통역까지 했어요. 난 
할아버지 침실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무서웠거든요. 그곳에 들어가 뭐라고 
얘기해야 될지 몰랐어요. 하지만 로라는 기가 막히게 모든 걸 잘 처리해냈죠. 
침대 곁에 앉아 얘기하고 듣고... 마치 한가하게 오후 티 타임을 즐기는 
사람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어요. "
  "대단한 것 같군요. "
  "그런데 문제가 일어났던 거예요. 혼자 그렇게 할아버지 곁에 있을 때, 아무도 
모르게 할아버지를 조종해 유언장을 추가로 만들게 한 거죠. 누구도 생각 못한 
일이었어요. 전에 그런 말씀을 입밖에도 내지 않았던 분이 갑작스럽게 뜻을 
바꿀 수 있겠어요? 로라가 그분을 조종해 그렇게 만든 거예요. "
  벤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가 할아버지를 조종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확실한 건 몰라요. 자주 그 방에 들어가야 했는데...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죠. 그러질 못했으니 누구든 알 수 없는 일이에요. 우리 모두 말은 
안했지만 은연중에 할아버지 간호를 피했었나봐요. 로라가 하게끔 내버려둔 
거죠. 다 우린 잘못인지도 몰라요. 어쨌든 변호사가 재판중에 나와서 증언을..."
  "증언이라뇨? 법정에서요?"
  오웬 샐링거 유언장에 관해 재판이 있었다는 불분명한 소문이 나돌긴 했으나 
암스테르담 샐링거와는 관계 업슨 일이었기에 호텔에서 그 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빠가 유언장에 실린 추가조항을 파기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었거든요. 
원래 유언대로라면 아빠하고 작은 아빠가 모든 걸 물려받게 돼 있었으니까요. "
  "그래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벤은 초조한 기색을 억누르며 물었다.
  "아빠가 이겼어요. 배심원들이 할아버지가 올바른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는 
결정을 내렸어요. 추가조항을 구술할 만큼 맑은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는 뜻이죠. 
"
  "결국 그녀는 빈손이 돼야 했겠군요. "
  "할아버지가 남긴 걸 뺏겼으니까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빤 그앨 
쫓아버렸어요. 지난 칠월에 법정이 열렸는데 그때야 비로소 그앨 볼 수 
있었어요. 얘긴 못해봤어요. 얘길 걸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차갑게 변해 있어서... 
더군다나 그때만 해도 나 역시 몹시 화가 나 있었나봐요. "
  알리슨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또 뭘 하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확실한건 우리 모두 
마음을 열어 모든 걸 줬는데, 로라는 그 사랑을 내던진 채 거짓으로만 우릴 
대했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바보같이 자꾸 그애 생각이 나요. 이렇게 보고 
싶으니 나도 참 못 말리는 애죠.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요. 친구처럼 모든 
걸 나누고, 거의 친자매 같았는데..."
  벤의 얼굴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두 주먹은 탁자밑에서 
부들부들 떠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빤 그앨 내쫓아버렸어요. 
알리슨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벤은 일말의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봐라. 내 뭐랬니? 뭐, 어째? 친절하고 기가 막힌 가족이라구? 그는 곁에 
없는 로라에게 마구 퍼부었다. 경고했었지. 코방귀도 안 뀌더니, 날 버리고 그 
가족을 택하더니만 이게 뭐야, 거지처럼 쫓겨나다니. 꼴 좋다. 당해도 싸다, 싸!
  동시에 그는 로라에게 심한 분노를 느꼈다. 말을 해야 되지 않은가. 그런 
지경까지 빠졌으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오빠한테 도움을 청해야 하지 않는가. 
벤은 그런 로라가 말할 수 없이 서운했다.
  그러나 분노는 순간이었다. 그는 로라를 향한 연민에 가슴이 아팠ㄷ. 
마지막으로 끌어안았던 로라의 연약한 어깨선을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할 착한 아이였는데, 그앨 도둑으로 몰고 
쫓아내? 그 시퍼런 법정 속으로 그앨 던져넣었다구! 펠릭스에게 복수할 일이 또 
하난 생겼다는 생각에 그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뭐라구요?"
  머리를 갸우뚱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알리슨에게 벤은 다급하게 물었다. 
  "미안해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못 들었거든요. "
  "그 얘긴 그만두자고 했어요. "
  그녀는 벤의 손등에 간만히 손을 올렸다.
  "남 얘길 끝까지 그렇게 들어주다니,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이쯤해서 
그만둘래요. 나에겐 너무 힘든 얘기라..."
  그녀는 허탈한 듯 웃었다.
  "로라 얘기보다는 내 결혼 얘길 하는 게 더 쉽겠어요. 이젠 당신 얘기해요. 뭘 
원하는지 얘기 안해줬잖아요. "
  그녀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코를 간지럽히는 그녀의 향수가 
벤을 어지럽혔다. 손등을 간지럽히는 그녀의 손가락, 바로 펠릭스 샐링거의 딸이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현실 앞에 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뭘 원하는지 얘기해달라니까요. "
  알리슨은 다시 달콤하게 속삭였다.
  "내가 원하는 건 사랑과 꿈이 있는 가정입니다. "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외투처럼 벤이 던진 말들은 그녀를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15장
  "지치지도 않나 봅디다. 아직도 정보 얻을 게 없나 하고 기자들이 열심히 
돌아다닌다고 들었어요."
  안개 자욱한 구월의 아침이었다. 단톤스의 식당에서 로롸와 마주앉은 웨스 
커리어는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노동절(9월의 첫 월요일:역자 주) 
휴가를 맞아 숙소는 초만원이었다. 국제무역회의에서 첫 연설을 마ㅋ게 된 
커리어는 회의 전에 로라와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중요한 일들이 많을 켄데 왜 그렇게 시간 낭비하는지 모르겠어요. 곳곳에서 
중요한 기사들이 터져나오고 있을 텐데."
  로라는 알 수 없다는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웨스 커리어란 분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만들어 가는지 궁금해서 그러는 
거겠죠."
  "만들다뇨? 천만의 말씀. 영향을 끼치는 정도라면 모를까. 나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만들진 않아요."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선생님은 모든 회사를 좌지우지 하고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쓰는 물건, 주식 등등 그들이 일하고 있는 회사의 미래가 선생님 
손에 달려 있잖아요?"
  "난 단지 외부 요소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에요. 어떤 것을 형성하거나 만드는 
건 각자 자신들이 하는 거죠."
  겸손한 척하면서도 결국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커리어에게 혐오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로라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다. 모든 좌석은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손님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대기실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도 제법 많았다.
  모든 것이 제대로 잘 돌아가고 있었다. 로라는 커리어에게 시선을 다시 
돌렸다. 팔월에 그와 함께 저녁을 한 뒤 로라는 그에게 호감이 갔지만, 높은 
자리에 오른 이들 특유의 거만함이 눈에 거슬렸다.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처럼 운이 좋고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시나봐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요. 운명을 끌고 나가지 못하지요."
  "왜 자신을 이끌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요?"
  "제시간에 손님들이 아침을 드시도록 하는 일은 해낼 수 있죠."
  커리어의 눈빛에 짜증이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로라는 가볍게 응수했다. 
커리어는 상대가 자신과 맞서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연설하시는 모습 볼 수 잇었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날지 모르겠어요."
  "지난달에 다 들었을 텐데요?"
  "연설내용도 그렇지만 그냥 바라보는 게 좋아서요. 청중을 한손에 
움켜쥐시던데요.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고마위요. 나는 연설에 능하지만, 로라는 대화 내용을 바뀌느ㅎ는 데 아주 
수준급인 것 같군."
  "그래요?"
  커리어는 결코 속을 털어놓지 않는 로라에게서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끌려들고 있었다.
  "오늘 저녘 함께 하는 게 어때요? 좋은 데 있으면 추천해봐요. 단톤스 밖으로 
나가서 같이 식사합시다"
  "포스트 하우스라고 좋은 데가 있긴 해요. 여기만큼 분위기가 좋죠. 물론 
시간을 낼 수 있다면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능한 거 아니오? 능력 있는 경영자가 되려면 
시간배당을 효울적으로 할 줄 알아야지."
  "그 충고 기억해둘게요."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미안해요."
  커리어는 로라에게 재빨리 사과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권리가 나한테 어디 있다구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군."
  "노력해보죠."
  대형 응접실까지 같이 걸어간 두 사람은 헤어져 각자 회의장과 사무실 
들어갓다. 로라의 책상 위에는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점검해야 
할 청구서들, 주문한 커튼 샘플 책자들, 구월말경에 열리기로 돼 있는 패션쇼 
프로그ㅓ램을 위해 해당 디자이너들에게 부칠 편지묶음 등등. 로라는 수많은 
일거리를 눈앞에 두고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아홉시 삼십분 직전에 회의장으로 연결된 층계를 밟아 내려갔다. 
회의장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로라는 일일이 이름을 불러가며 
인사를 건넸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아준다는 기븜 때문이엇는지 매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창문 하나 없는 아래층이었으나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치장된 회의실은 마치 
대낮의 태양을 글어들인 것 같았다. 멀리 로라의 모습을 본 커리어는 환한 
미소를 보냈다.
  문앞에 서 있는 그녀의 가냘픈 몸매는 푸른색 플레어스커트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부드러운 밤색 머리카락이 얼굴 언저리를 다라 물결치고 있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굳게 닫힌 입술선 때문에 그녀의 매력이 
반쯤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가금 그녀가 장난기 있는 웃음소리와 밝은 미소를 
터드릴 때마다 커리어는 숨이 멎는 듯했다.
  "들어와요, 로라."
  그는 마치 회의장을 장악한 주인처럼 자연스럽게 그녀를 옆자리로 
불러들였다. 바로 그때였다. 화려한 조명이 일시에 꺼지고 창문 하나 없는 
회의장은 암흑천지로 변해ㅓ버렸다. 카펫 위로 밀어대는 의자 소리들로 
회의장은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햇다.
  "내 생각엔 그냥 움직이지 말고 앉아 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일순간에 모든 소음을 잠재운 커리어는 로라에게 재빨리 말했다.
  "로라, 플래시 있어요?"
  "아마 없을 거예요. 하지만 양초는 있어요. 손님들이 객실 식사를 원할 때 
사용하는 건데..."
  그녀는 손으로 더듬어가며 구석에 있는 캐비닛으로 다가갔다. 양초상자 몇 
개를 손으로 확인한 그녀는 그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커리어가 앉아 있다고 
짐작되는 곳을 향해 벽을 더듬어가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웨스? 무라고 얘길 나누면 어디 있는지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이오."
  로라의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 위에 느껴진 순간 커리어는 망설임없이 두 
손으로 로라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찾지 않소."
  로라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인 뒤 그는 목청을 조금 돋워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을 불렀다.
  "누가 성냥이 있으면..."
  "그 사랑에 불을 붙일 텐데 말이오."
  누군가 커리어 말을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그러나 성냥이 있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래 선냥 하나 없단 말이야?"
  누군가가 신경질을 부리며 목청을 높였다.
  "아, 있어요, 성냥 있어요."
  로라는 당황한 목소리로 웨스를 불렀다.
  "웨스, 이것 좀 받아주실래요?"
  그의 손바닥 위에 양초상자를 올린 뒤 그녀는 다시 구석 벽장으로 기다시피 
걸어갔다. 로라는 잠시 후 성냥을 켰다. 어둠 속에 한 점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자 모든 시선이 일제히 로라를 향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손님 중 한 사람에게 선냥갑을 넘긴 뒤 방을 빠져나온 로라는 성냥불이 
손가락으로 타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복도 끝으로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불은 들어오지 안항ㅆ다. 결국 커리어와 나머지 
손님들은 플래시를 갖고 들어온 호텔 직원의 안내를 받아 태양이 비치는 
대형응접실 층계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열린 문을 통해 커리어는 수화기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정신없이 떠들고 있는 
켈리를 훔쳐볼 수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섬 전체가 다 나갔다니까!"
  켈리는 욕설을 내뱉다가 홀에 서성거리는 손님들 쪽을 힐끗거리며 소리를 
낮췄다. 재빨리 켈리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간 커리어는 소리가 박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문을 굳게 닫으며 그녀에게 속삭엿다.
  "내가 뭐 도와줄 일이라도?"
  "감사합니다. 로라에게 좀 가보실래요? 난 전기회사하고 먼저 얘길...?"
  켈리는 또다시 전화기에 대고 소리쳐ㅅ다.
  "스물네시간이라구? 정신 나갔어요?"
  로라의 사무실로 갔을 때 그녀도 켈리처럽 어깨 위에 전화기를 올려놓고 
뭔가를 열심히 메모하는 중이었다.
  "죄송해서 어떻게 하죠?"
  그녀는 커리어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 지하묘지에 갇혀 있다 
나온 느낌들일텐데... 네? 백파운드 있다구요?"
  그녀는 커리어에게 말하다 말고 전화기에 대고 대꾸했다.
  "너무 잘됐어요. 지금 당장 그걸 갖고 올 수 있으면... 물론이죠. 더 있으면 
더좋구요. 몽땅 다 갖고 와요. 지금 많고 적고가 문제겠어요? 냉장고가 몽당 다 
나갔는데 드라이 아이스 개수 세고 있을 깨가 아니예요. 알았어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커리어는 초조해 하면서도 목소리를 
가다듬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로라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리고 빌. 플래시 있는대로 다 긁어올 수 있죠? 객실마다 하나씩 돌려야 
해요. 단톤스를 최고급 휴양지로 만든 게 조명이에요."
  커리어는 수화기 박으로 흘러나오는 빌의 걸걸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로라도 
빌을 따라 웃고 있었다.
  "고마워요. 빌. 빌이 최고예요!"
  커리어는 로라가 전화하는 것을 보고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에 반해 제 할 일 
다 제쳐놓고 도와주겠다는 남자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도와줄 일은 없어요?"
  커리어는 그녀가 전화를 끊자마자 물었다.
  "글쎄, 갑작스런 일이라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뭣 때문에 그런 거지? 변압기 때문인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일까지 수리가 안된대요. 발전기를 
구해보겟다고 존이 버링턴에 나가긴 했지만 섬 전체를 돌리기엔 역부족일 것 
같아요. 무슨 수를 쓰든지 해야지..."
  "어쨌든 내 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즉시 말해줘요."
  고개를 끄덕이며 로라는 내부 인터폰 다이얼을 돌렸다.
  "로저, 조금 있으면 드라이 아이스 도착할 거예요. 그때까지 냉장고문 열지 
말고 기다려요... 그래요. 점심은 수프하고 샌드위치로 해야겠어요. 글쎄 저녁은 
아직 모르겠는데, 점심 먹고 생각해봅시다."
  커리어는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로라는 정물처럼 앉아 있는 그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듯햇다. 가끔씩 그를 무표정하게 쳐다보긴 했으나, 생각은 
완전히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전화통에 매달려 있던 손을 떼는 순간, 클레이가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우리 문 닫았다는 소문이 시내에 쫙 퍼진 거 알아? 랜딩 약국에 들렀는데 
우리가 문을 닫았다고 그러더라구. 전기가 완전히 끊어졌다구 말야."
  로라는 다시 전화 다잉얼을 돌렸다.
  "팀? 로라예요.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공항라운지에 아주 크게. 메모 하나 
붙여줘요. 우리 손님들을 위해 문 활짝 열어놓고 기다린다고 쓰면 돼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문 닫았다는 소문 듣고 다른 곳으로 갈까봐 
걱정돼서 그래요."
  그녀는 앞에 놓인 메모지 위에 연신 뭔가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럼요. 아무 문제없어요. 모든 게 완벽하게 처리됐어요. 헛소문 믿지 말고 
도와줘요, 팀. 절대 후회하는 손님 없을 겁니다."
  커리어는 어느 순간 로라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종이 위에 
마구 흩어진 알 수 없는 낙서와 로라의 입술에 나타난 미소를 커리어는 흘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기막힌 생각이 났어, 클레이."
  로라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클레이를 불렀다.
  "너 캠프 파이어 만들 줄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뉴욕에서 태어나 여태껏 그곳에서 자랐는데."
  사무실로 들어온 켈리가 로라의 책상 끝에 힘없이 주저 앉았다.
  "로저가 저녁으로 바다가재 코키유(가재를 조가비에 구워 담아 내놓는 프랑스 
요리:역자 주)를 정했다는데 오븐 때문에 큰일이다. 전기 오븐이니 어떻해?"
  "걱정 말아요, 켈리. 근사한 생각이 났어요. 밖에 나가서 저녁을 하면 어때요? 
캠프파이어를 하는 거예요. 모닥불을 지펴놓고 큰 통에다가... 아, 아냐. 그런 
식으로 물을 끓일 수 있어요? 걸스카우트에 다녔으면 이런 건 문제없을 텐데. 
아냐, 못할 것도 없지. 할 수 있을 거예요. 제목을 뭘로 할까? 슨사하게 파티 
이름을 지어야지. 그래, 롭스터 프리미티브(옛날식으로 바다가재를 먹자는 
내용:역자 주)가 어때요? 야외식으로 한판 벌이죠. 감자는 은박지에 싸서 
구울까? 어떡한다지. 장작불에 구우려면 숙련된 솜씨가 필요한데. 후식은 
샐러드하고 아이스크림을 준비하도록 로저한테 이를게요. 그거 다 먹어치워야 
돼요. 안 먹으면 다 녹아버리니까요. 아이디어가 별로예요?"
  "우리 식이 아니잖아. 로라가 오고난 다음부턴 우린 시골풍을 버렸어. 
우아하고 세련되게 나가자고 해서 여태껏 그렇게 했잖아. 파크 애비뉴 
맨션(뉴욕시의 최고급 주택가로 사치와 유행의 최첨단 중심시:역자 주)이 즈는 
호화로움을 에디런덱스에서 느껴보세요라고 얘기한 사람아 누군데."
  "알아요. 하지만 완전히 바꾸자는 게 아니예요. 일부분을 수정하겠다는거지. 
켈리, 누구나 한번쯤은 아주 가끔씩 전원식으로 즐기고 싶어해요. 실크 셔츠에 
검정 넥타이를 매고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도 가끔씩은 옛날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인 거 몰라요? 분명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요."
  "생각은 확실한 게 아니잖아. 만약 싫어하면 어쩌려구?"
  "그럼 망하는 거겠죠. 하지만 구운 가재와 최고급 포도주를 별빛 아래서 먹을 
수 있다면 주방에서 대강 차린 음식보다 훨씬 더 좋아할 거예요. 두고봐요, 
켈리."
  "나도 로라 생각과 꼭 같은데."
  커리어는 미소를 지으며 거들었다.
  켈리와 로라는 동시에 커리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커리어는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일 먼저 가재발을 공격할 테니 두고봐요. 제일 멋지게 가재껍데기를 
벗기는 사람한테 상금을 걸 생각도 갖고 있는데. 불 지피는 일도 도와주겠소."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나보죠?"
  "솔직히 해본 적은 없지만 명령만 내리시면 그대로 따르겠나이다!"
  켈리는 커리어를 잠시 쳐다본 뒤 문 쪽으로 다가갔다.
  "로저하고 얘길 해볼게. 좋은 생각 같기도 한데... 클레이, 보트장 좀 
가봐줄래?"
  로라는 잠시 후 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켈리 사무실로 달려갔다.
  "켈리, 십팔호실 손님 이름이 피카르 맞뇨?"
  "그렇겠지. 이름 외우는 덴 로라가 나보다 한 수 위잖아."
  "IBM 중역인데 시간 있을 때마다 연기를 한다는데."
  "그런데?"
  "켐프파이어 때 유령 나오는 연극 꾸미면 어떨까요? 애드거앨런 포나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 아주 무시무시한 얘기를 하나 골라서요."
  "아주 괜찮은데. 근사한 생각이야, 그 사람 이름이 뭐라구?"
  "에릭 피카르."
  "전화해볼게."
  "골프 치고 있을 거예요. 어쨌든 전화메모를 남겨두자구요."
  "뭘 먹고 자랐길래 그렇게 머리가 좋아? 놀랠 노짜다, 정말."
  "페어차일드 집안 내력이에요."
  가볍게 대꾸한 로라는 다시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노래 부를 줄 알아요?"
  로라가 던진 질문에 커리어는 그녀가 모르는 척하면서도 아침 내내 자신을 
지켜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 부르는 사람 있으면 따라하긴 해요."
  "그래요? 따라하는 건 아마 노래할 때 뿐이겠네요."
  "나는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면 무조건 따르지. 뭐든 로라를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완벽하진 않아요. 페어차일드 집안 내력이라고 해두죠."
  "그 내력 좀 자세히 들었으면 좋겠는데, 얘기해주겠소?"
  로라는 그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시간은 많으니까 언제고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켈리가 환한 얼굴로 다시 찾아왔다.
  "클레이가 방금 전화를 해왔느데 부두 가스 탱크를 수동식으로 돌려놨대. 
마사지실에선 근사하게 촛불 켜놓고 마사지 한다는군. 아무튼 큰일은 대강 
막아놓은 것 같애. 밖에서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옥외로 옮겼어. 언뜻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 있지? 존이 이런 순간에 섬 밖에 나가 있는 
게 믿어지지 않아. 일부러 이 지옥 같은 순간을 피해버린 것 같다니까. 로라가 
큰 일했지. 자기 없엇으면 난 분명 나가떨어졌을 거야. 이젠 좀 쉬어도 될 것 
같은데. 완전히 기진맥진한 얼굴이다."
  "보트 타러 갑시다."
  커리어는 신나는 얼굴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스 걱정할 필요없다니까 배나 실컷 탑시다."
  로라는 커리어의 제의를 물리칠가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점심하면서 피크닉 합시다. 로저한테 뭐 좀 싸 달라고 부탁하면 안될까?"
  "지금 바쁠 거예요. 내가 하죠. 몇 시간 걸릴 것 같은데, 괜찮아요, 켈리?"
  "두분 다 쉬고 싶을 때까지 푹 쉬다 오세요."
  로라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간 커리어는 그녀가 치즈와 프랑스 바게트, 복숭아, 
백포도주 등을 바구니에 챙기는 모습을 흐믓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소란스럽게 음식을 만들고 있는 주방 일꾼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구석에서 
그녀는 사무실에서처럼 노련한 손길로 점심 바구니를 챙기고 있었다.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요?"
  잔디밭을 지나 선착장 쪽으로 걸아가면서 커리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나이를 마해주자 커리어는 못 믿겠다는듯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스물 다섯?"
  "더 어리다고 생각했나보죠? 아니면 더 늙었다구?"
  "대여섯 위로 봤어요."
  커리어는 클레이와 쾌속정을 고르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로라를 내내 
곁눈으로 지켜봤다.
  "밖에 갔다올게. 골프 그룹이 도착했대. 뭐 피요한 거 없지?"
클레이는 로라에게 등을 돌리며 물었다.
  "켈리한테 물어봐."
  커리어가 엔진을 돌리자 로라는 클레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속도를 내기 
시작한 쾌속정은 눈부신 하늘에 연한 물보라를 뿌리며 호수 위에 V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로라는 오웬과 함께 앉아 있던 물결 치는 해안가와 폴과 함께 노닐던 
케이프 해안의 모래언덕을 떠올랐다.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뒤로 약간 젖힌 
로라는 추억 속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커리어는 호수 위에서 파도를 즐기는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힘차게 
배를 몰아갔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자 차츰 재의 속력을 줄였다. 
반대편 호숫가에는 녹색 숲이 우거져 있었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다.
  커리어는 로라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녀는 머리를 여전히 뒤로 젖힌 채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그는 눈 앞에 있는 여인에게 
빨려들고 있었다. 어떤 말이나 자극적인 유혹도 없이 침묵만으로 자신을 점령한 
사람은 여자고 남자고 간에 로라가 처음이었다. 침묵에 잠긴 로라와 말을 
나누기 위해 커리어는 힘차게 돌아가는 엔진음을 줄였다.
  "어떤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애써본 적이 있어요?"
  그녀는 깜짝 놀란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요. 당연하지 않아요. 구구나 다 그렇겠죠.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해주길 원하죠."
  커리어가 의외의 표정을 짓자 그녀는 약간 당황했다.
  "안 그러신가보죠?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줄 알고 
있는데"
  "현명한 방법이군. 아주 그럴 듯한데. 하지만 난 로라가 그런 노력 하는 걸 
여태껏 못 봤는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요?"
  "내가 웨스한테 그런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는 소리군요.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굴지 않았나보죠? 그렇다면 내가 이상한 여자로 보이겠네요."
  "이상하다기보다는 독특하다고 할까."
  그의 말에 로라는 엷게 미소지었다.
  "오늘 불시의 정전에 대처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소.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날 믿고 있는 켈리 때문이기도 하고... 또 과거에 날 잔인하게 공격해댄 
사람들을 잊기 위한 방편일지도 모르죠."
  "잔인하게 공격한 사람들이라..."
  커리어는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표시했다.
  "잔안한 사람들은 이 세상 도처에 깔려 있을 거예요."
  로라는 보트 소리를 피해 숲 속으로 달아나는 사슴 한 마리를 눈으로 쫓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 중에도 잔인하고 공격적인 사람들이 있을걸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편협하고, 사기꾼 같은 사람들일수록 남들을 짓밟고 
꼭대기에 오르려 하지."
  로라는 계속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사람 많이 알고 있나보죠?"
  "내가 여기 가끔씩 오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구요?"
  "로라가 켐프파이어니 뭐니 모험을 즐기는 것도 볼 만하구."
  두 사람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저러나 그 계획이 잘 들어맞았으면 좋겠여요."
  "로라가 한 일인데 뭐가 됐든 잘될거요."

  가을 내내 커리어는 유럽 출장을 제외한 주말을 로라가 있는 단톤스에서 
보냈다. 승마와 테니스를 하기도 했고, 호수 위에서 보트놀이를 하거나 
오외수영장에서 물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섬이 지켜울 때면 커리어는 
에디런덱스에 널려 있는 작은 마을들을 돌며 새로운 구경을 했다. 커리어는 
자기 얘기라면 무엇이든 상세하게 로라에게 알려주었다. 로라는 그런 그에게 
자기를 조금씩 드러냈지만 여전히 그가 자신의 신상에 대해 물어 올 때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녀가 거북해 하는 것을 알아차린 커리어는 그녀의 마음이 
스스로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기분으로 자제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두 사람은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조금씩, 
아주 느린 속도이긴 했지만 로라는 커리어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폴 
앞에서 쥘 르클레어를 흉내내던 솜씨로 대학 시절의 교수들 모습을 흉내내기도 
하고 보스턴 샐링거에서 부지배인 수습직으로 시간제 근무를 했던 일과 나이 
많은 홀아비의 말동무로 재냈던 과거사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그뒤 클레이와 함께 여기로 왔죠."
  제이스 랜딩에 있는 포스트 하우스 구석진 곳에 앉아 로라는 커리어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낮은 천장에 가스램프가 매달린 자그마한 선술집이었다. 
십일원의 주중 오후여서인지 손님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켈리와 존이 두리 둘에게 숙소와 일자릴 제공해줬죠. 배울 수 있는 자리라서 
더욱 마음에 들어요. 일년 남짓 여기 있었는데 회계업무부터 식당 괸리 등등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켈리하고 존이 날 믿고 휴가를 떠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하게 배워놨죠."
  "나이 많은 홀아비는..."
  "친구였어요."
  갑자기 그녀는 인생 내내 거짓을 말해야 하는 자신에게 심한 욕지기를 
느꼈다. 마음 한 구석에 언제나 거짓을 담고 사는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커리어는 다른 사람들보다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이해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생각과는 다른 말이었다. 비밀을 감추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도 강했던 
탓이었다.
  "돌아가셨어요. 정말... 너무 보고 싶어요. 그분 주방에서 일하다... 로자라는 
주방장이 있었는데..."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로라는 포도주로 묵을 축였다.
  "거기서 일을 많이 배웠어요. 요리 말이에요. 요리할 줄 알아요? 당신이 음식 
만드는 장면은 도저히 상상이 안돼요."
  "주방장이 여섯이오. 여섯채 집에 각각 한명씩. 기회가 없어서 요린 못해봤소. 
하지만 햄버거는 만들 줄 알아요. 언제 뉴욕에 오면 내가 만든 햄버거를 먹을 
수 있을 텐데."
  "기대되는데요."
  "언제 뉴욕에 와줄 거요?"
  "지금은 어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어요. 언제고 갈 날이 있겠죠. 햄버거 말고 
다른 건 못해요?"
  "지금은 안돼요. 하지만 약속할게요. 당신 부엌에서 만든 햄버거를 꼭 
먹어보겠다구요. 후식은 내가 만들게요. 뭐 좋아해요?"
  "사과파이."
  "좋아요. 아주 기가 막힌 사과파이를 만들어 줄게요."
  두 사람은 마주보며 웃었다.
  그주 내내 커리어는 언젠가뉴욕에 와주겠다던 로라의 목소리에 사로잡혀 
회의조차 제대로 치러내지 못했다. 허둥대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없을 
정도였다. 그는 로라를 볼 수 있는 금요일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다 끝난 거요?"
  "거의요. 주말 지내러 온 거예요?"
  "오늘밤만. 내일은 워싱턴에 가봐야 돼요. 미안한데."
  "미안한 건 나예요. 베란다에서 한 잔 하는 게 어때요? 오늘은 참 따뜻하네요. 
십일월 같지 않죠?"
  날씨는 따스했지만 그녀는 늘 차가웠다. 커리어는 그런 로라 때문에 사춘기 
때나 가질 수 있는 심술을 잔뜩 그녀 앞에서 부리고 싶어졌다. 너를 보기 위해 
석달 동안 거의 주말마다 에디런덱스 골짜기로 미친 듯 달려왔는데... 도대체 뭘 
얻었단 말인가? 간들거리는 목소리로 '미안한 건 나예요'라니! 그는 베란다 위에 
놓인 긴 쿠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짜증이 치밀었다. 여자가 하나밖에 없나? 
천하의 내가 도도하게 구는 여자 앞에서 쩔쩔매고 있다니.

  "로라, 나랑 결환해주겠소?"
  해가 지고 있었다. 서편 하늘의 구름이 자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오랫동안 
로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 번도 잠자릴 같이 하지 않은 여자에게 어떻게 결혼 얘길 꺼낼 수 
있어요?"
  표정이 일그러지는 그를 보고 로라는 자신이 경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해요, 웨스. 마음에 없는 소리였어요. 하지만 너무 급작스런 일이라서... 
깜짝 놀랐어요."
  "사과할 필요없소. 처음 떠오른 생각을 말했던 거겠지."
  "정말 죄송해요. 무례했어요."
  "무례한 게 아니라나까. 당신을 깜짝 놀라게 했으니까. 사과할 사람은 나요. 
미안해요. 당신하고 잠자릴 하지 못해서..."
  "재가 잘못했다고 했잖아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예요."
  "아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오래전부터 당신을 내 침대에 눕히고 싶었소. 
난 항상 원하는 걸 갖는 남자지. 그래서 그리 걱정도 안해요, 왜 그런지 아오? 
조만간 로라가 마음속에 있는 악마를 쳐부수게 되는 날, 당신은 날 친구로 
여기거나 단순히 회의장의 연설꾼 쯤으로 여기지 않고..."
  "그렇게 단순히 여기진 않아요."
  "아직은 그렇게 여기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사과한다는 거요."
  그는 로라의 손목을 잡고 가볍게 키스했다.
  "정말 무례하게, 아니 무지막지하게 결혼신청을 했소. 나도, 당신도 둘 다 멋이 
없었어. 서로 사과합시다. 하지만 난 진심으로 당신과 결혼하고 싶소. 사랑하고 
돌봐주고 싶어요. 대학을 다니면서 돌봤다는 그 늙은 영감에 대해 애기할 때 
로라 얼굴이 어땠는지 알아요?"
  "내 표정이 어땠는데요?"
  "슬픔과 절망에 빠진 모습이었소. 그런 슬픔에 빠뜨리지 않을거요. 내 청혼을 
받아줘요. 어딜 가든 늘 당신과 함께 다니고 싶은걸. 내 일도 도와줄 수 있지 
않겠소? 당신같이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해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소. 
결혼생활에는 그런 게 좀 문제될 지도 모르지만 비즈니스 면에선 그런 능력이 
필요해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비즈니스를 위해서 결혼생활에 문제가 될 지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구요?"
  "그런 억지 쓰지 말아요. 우리 둘이 사랑하게 된다면 그렇게 나오지 않으리란 
걸 알아요."
  "사랑?"
  로라는 낮게 중얼거렸다.
  "사랑하면 모든 걸 이겨낼 수 있소. 하긴 내가 진실한 사랑이란 걸 해봤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오. 세 번 다 이혼으로 결혼을 끝냈으니... 아까는 낯간지러운 
소리보다는 이렇게 간단하고 직선적인 청혼을 로라가 더 좋아할 줄 알고 그랬던 
거요."
  로라는 살며시 그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여자는 가금 낯간지러운 속삭임을 원해요. 말로는 싫다 좋다 이리저리 빼곤 
하지만요."
  "그럼 다음번엔 그렇게 청혼하리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늘은 이제 어두운 
오렌지빛이었다. 호텔 본채 앞에 있는 키 큰 상록수 위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로리를 두 팔로 끌어안은 커리어는 그녀의 목 뒷덜미에 나 있는 짧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당신이 악마를 쳐부수는 날... 로라는 커리어가 
한 말을 곱씹었다. 그래 그래야지. 오빠는 그만 그리워하자. 암스테르담에서 
어떻게 사는지, 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지, 그런 생각들은 그만두자. 폴도 
잊어야 돼. 오스터 빌, 보스턴, 레니, 알리슨, 폴의 부모님, 정원에서 뛰어놀던 
폴의 사촌동생들. 이젠 모두 다 잊어버릴 시간이야. 잊자, 로라. 모든 걸 다 
깨끗이 잊어야 네 삶이 시작돼.
  "사개월 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강해지 건 같애. 이젠 자신이 만든 
새장을 박차고 나올 때야, 로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얘기 하나 해줄까? 내가 스물다섯 살 때 얘기요. 처음으로 백만장자 소리를 
들었을 부렵이었는데, 그 일년 뒤에 아내가 날 떠나버렸소. 오랫동안 겁에 질려 
있었지.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코 내 품에서 날아가버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그만 내 손 밖으로 날아가버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그만 내 손 밖으로 달아나버린 거요. 모든 걸 다 가졌다고 신이 나를 잔인하게 
벌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소."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당신을 지켜보며 누군가가 당신 손에서 뭔가를 빼앗아 간 거라고 생각했지. 
소중하고 귀중한 걸 말이오.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아니면 나쁜 악령이 당신을 
벌주기 위해 그것을 앗아갔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는 느낌을 받았어. 그래서 
분노와 함께 두꺼운 조개껍데기로 자신을 꽁꽁 가둔 뒤 섹스도 사랑도 
안하겠다고 마음먹은 게지."
  그녀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글쎄요."
  그녀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말없이 로라를 안고 있던 커리어는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웨스."
  로라의 음성은 깊은 바닷속에서 울려나오는 것처럼 어둡고 무거웠다.
  "내가 혹시 호텔 하나를 구입해달라고 하면 생각 좀 해보겠어요?"
  커리어는 기업가적인 아내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로라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로라를 얻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었다.
  "확실한 계획이 있다면 물론 도와주겠소. 마음에 둔 호텔이라도?"
  "시카고 샐링거요."

  마리나의 탄탄한 두 다리가 클레이의 엉덩이를 휘감고 있었다.
새깨 고양이처럼 울고 있는 마리나를 내려다보며 클레이는 그녀가 절정에 오를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수문 밖으로 터져나오는 급류처럼 드거운 파도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완벽한 해방감으로 클레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 클레이. 자기 너무 멋져."
  그는 축축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은밀한 부분을 몸 전체로 느낄 수 있었다. 
푹신거리는 마리나의 몸 위에 엎드린 그는 침대시트를 끌어올렸다. 서서히 몸이 
식으면서 심한 한기를 느꼈다. 방안 공기가 제법 서늘했다.
  "오, 내 사랑 클레이."
  마리나는 클레이의 귓바퀴를 입에 넣고 긴 혀로 귓바퀴와 귓불을 핥기 
시작했다. 잠시 잠들었던 세포들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리나의 두 손이 
그의 엉덩이를 강하게 잡아 쥐자마자 그는 날카로우면서도 육감적인 여인의 
손길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다시 한 번 클레이는 여인의 육체 속으로 깊고 
긴 탐험을 떠나기 시작했다. 강약의 리듬에 맞춰가며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 
춤추기 시작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쾌감이었다.
  마리나는 결코 지치지 않는 여자였다. 단톤스 코트장에서 테니스를 가르칠 
때도,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때도, 네브래스카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가족들을 
위해 하루 종일 쇼핑을 하며 선물을 살 때도, 제이스 랜딩에 있는 그녀의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사랑을 나눌 때도 그녀는 결코 지치지 않았다. 미친 
여자야. 난 미친여자에게 미쳤구. 클레이는 늘 마리나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때로는 그런 그녀가 무섭기조차 했다.
  특히 그녀와 사생결단으로 정사를 치를 때마다 그의 두려움은 더욱 심해졌다. 
매일 새벽 세시경, 그녀의 자그마한 셋방 침대 위에서 치르는 무아지경의 
섹스로 인해 클레이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그는 그녀에게 결혼을 하자는 
소리도, 동거을 하자는 요구도 하지 않았다.
  스물일곱 살의 마리나 애플바이는 십년 넘게 테니스 코치를 해오고 있었다. 
그녀는 클레이가 자신보다 세살 아래라는 것을 별로 꺼려 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훨씬 카가 크고 기공이 반듯한 금발 미남에게 그녀는 무서운 욕정으로 
달려들었다. 그동안 근육이 단단한 남자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매던 눈길이 아예 
클레이에게 붙박혀버린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녀를 무서워했다. 상냥한 이들은 대담하다고 도려 
말하곤 했으나, 그렇지 않은 남자들은 그녀가 몹시 호전적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호전적으로 나올 때에도 클레이는 아무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그런 
클레이가 박력도 기개도 없는 머저리처럼 여겨져 눈길을 주지 않았으나 누나가 
내리는 결정에 따라 모든 일을 하는 클레이의 성격을 알아낸 뒤부터 차츰 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분명 로라처럼 모든 걸 억세게 헤쳐나가는 여자를 좋아할 
거야. 그런 면에선 내가 적격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리나는 시계를 맞춰놓은 
뒤 잠에 빠져들었다.
  근무 시간에 늦지 않도록 마리나는 클레이를 아침 다섯시에 깨워야 했다. 
클레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단톤스에서 자리를 잃게 되면 
분명 어딘가를 떠돌아다닐 클레이를 자신의 곁에 붙들어두기 위해서였다. 
일주일에 팔십시간을 바쳐가며 일에 몰두하다 주말이면 웨스 커리어와 
돌아다니느라 동생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는 로라를 생각할 때마다 
마리나는 클레이를 돌볼 사람은 역시 자신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일어나요. 날이 밝았어요. 아침 준비할게요."
  마리나는 클레이의 길고 매끈한 등판을 손가락으로 퉁기듯 쓸어내렸다. 
남자들이란 약하기 짝없는 존재들이야. 요리, 빨래, 하다못해 양말 한 짝 살 
때도 여자 손길이 필요해. 먹는 것도 그래. 제대로 봐주지 않으면 챙겨 먹지도 
못하잖아. 마리나는 숯처럼 검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내리며 탄탄한 
알몸 위에 가운을 걸쳐 입었다.
  "오늘밤 뭐 할건데?"
  "포커놀이 하려구. 내 팔뚝에 리본 매줄래? 재수좋게 말야."
  "그래 맞아."
  "전쟁 나가나 뭐."
  "누가 알아, 진짜 전쟁일지. 오늘 오는 애들은 다 도사급들이라는데. 많이 
잃을지도 모른다구. 딸 수도 있겠지만."
  "로라가 자기 그러는 거 알아? 몰라?"
  토스트와 계란프라이를 먹다 말고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버린 클레이를 보며 
그녀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긴 무슨 상관이야, 알든 말든. 재밌게 보내. 돈 많이 따면 나 예쁜 거 사줘. 
알았지?"
  "고마워, 자기. 나중에 보자구."
  그는 마리나 볼에 키스를 한 뒤 집을 나섰다. 어제 하루도 무사히 흘러간 
것에 대해 그는 속으로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별 걱정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것이 고맙기만 했다. 훔칠 때 느끼는 
짜릿함을 그는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벽을 기어오르는 일, 그림자처럼 남의 
집에 들어가 고양이처럼 움직이는 그 순간은 마리나와의 섹스보다도 더 
짜릿했다. 로라와 함께 지하철 승객들 호주머니를 털던 때도 그리웠다. 그러나 
오래전에 그 희열에서 손을 떼야 했다. 아주 잘했다, 클레이. 네가 너무 
자랑스럽다, 라고 속삭이는 누나의 따뜻한 격려 때문이었다.
  물론 도둑질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돈이 들어왔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뉴욕에선 휴식이 없었으나 단톤스에서는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 
뉴욕에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여유가 있었다.
  기가 막히게 멋진 고급 자동차를 자신의 소유물인양 뻐기며 손님들을 데이고 
다닐 수도 있었고, 반나절 동안은 멋진 책상에 앉아 손님들을 한 손에 장악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누나와 함께 쓸 수 있는 편안한 숙소에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여자도 있었다.
  그뿐인가? 운전기사, 집사, 에디런덱스 주변 별장에서 근무하는 주방장들로 
구성된 밤샘 포커판을 제이스 랜딩 근처의 작은마을 구석진 곳에서 우연히 
발견했으니 그것만 생각하면 매일매일이 눈 돌아갈 정도로 신날 뿐이었다. 
포커판 사람들은 모두 다 그보다 나이가 위였지만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그를 
기꺼이 판에 끼어줄 만큼 탁 트인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노는 수준에 있었다. 클레이보다 두세배씩 월급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판을 크게 벌였다. 제기랄! 하지만 두고 보라구. 섬으로 연결된 
방죽길로 차를 몰며 클레이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자들 솜씨를 언젠간 배우겠지. 
클레이 페어차일드가 어떤 분이신데!

  오하르 항공 귀빈실 구석에서 커리어는 단톤스에 있는 로라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보고 싶소, 로라. 간밤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전화를 했는데 어딨는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더구만."
  "어제 죽는 줄 알았어요. 네살짜리 꼬마애가 뭘 잘못했는지 벌로 후식을 안 
주겠다는 부모 때문에 식당이 난리가 났거든요. 꼬마애가 식당천정이 
떠내려가라 소릴 질러대는데, 확실하게 교육을 시켜야 된다는 부모 때문에 
켈리하고 존이 그애를 달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나도 거기 있었는데, 
한 시간 뒤 애가 없어져서 또 한참 소동을 피워댔어요."
  "힘들었겠군."
  로라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부모가 자릴 원치 않는다고 그 꼬마애가 선착장에서 펑펑 울고 있잖아요. 
보트 속에서 자겠다고 울면서 떼쓰는 통에..."
  "꼬마 부모는 뭣 때문에 그랬대요?"
  "꼬마가 라비고트 소스(파, 마늘 따위에 초를 섞어서 만든 프랑스 소스:역자 
주) 바른 송어를 먹지 않았다고 후식을 먹지 못하게 했대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까짓 일로 그렇게 펄펄 뛰며 벌을 내리다니 이해가 잘 안가요."
  "글쎄 왜 그럴까? 아빠가 안돼봐서 대답은 못하겠는 걸. 그래 그 꼬마를 
가슴에 푸근히 안아 데려왔소? 꼬마가 당신 어깨에 머릴 기댄 채 말이오."
  "네, 그랬어요. 왜요?"
  "그애가 부러워서 물은 거요."
  로라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직 샌프란시스코예요?"
  "사카고요. 샐링거를 살펴봤지."
  "어머!"
  "형편없던데."
  "그럴 줄 알았어요. 몇 년 동안 버려져 있었을 거예요. 별다른 건 못 봤어요?"
  "대충 봐서 잘 모르겠는 걸. 둘이서 마음먹고 한번 자세히 살펴봅시다. 얼마나 
중요한 거요? 그 호텔 말이오."
  "내 걸로 하고 싶은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하세요. 그 호텔에 대한 자료, 웬만한 
건 다 알고 있어요. 위치는 정말 좋아요. 겉은 그렇지만 건축구조도 튼튼해요."
  "아직 몰라. 기사들 시켜서 확실하게 점검해봐야지."
  "그건 일 년 전 얘기예요. 확실하게 점검된 보고서를 봤어요. 필요한 건 
다시..."
  "천만 달러는 될 것 같소. 짐작이지만."
  둘 사이에 잠시 말이 끊겼다.
  "샐링거가 그 가격에 움직이지 않는다면 직원을 시켜서 그들과 직접 대면을 
해보겠소."
  "웨스, 나하곤 절대 관계 없는 일로 해줘야 돼요."
  "왜? 내가 돈을 대기 때문에 그렇소? 그건 문제될 것 없어요. 난 향상 뒹데 서 
있는 걸 좋아해요. 이건 당신 거요, 로라. 공식적으로도 그렇구. 당신이 할 일은 
그 호텔을 흑자로 만들어내는 일 뿐이야. 그럼 기자들이 아마 당신 뒤를 졸졸 
따라붙을걸."
  "난 내가 기사화되 거 싫어요. 그냥 고용원 자격으로 있을 거예요. 모든 
호텔을 내 소유로 할 때..."
  그녀는 말끝을 흐렸고 커리어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우리가 사들여야 할 호텔이 몇 개 남았는데?"
  "이번 하나만 도와주면 돼요. 그 뒤는 내 힘으로 할 테니까."
  "하지만 온 천지에 깔린 호텔을 다 갖겠단 소리요?"
  "온 천지에 깔린 걸 다 갖겠단 소린 안했어요."
  "몇 개를 소유하고 싶은데?"
  "네개요. 만나면 모든 걸 다 얘기해줄게요. 언제 여기 올 수 있어요?"
  자신이 그녀를 그리워하는 만큼 로라도 자기를 그리워한다는 고백을 
기대했으나 그녀는 결국 그 비슷한 얘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늘밤 뉴욕에 떨어질 예정인데, 아마 그쪽엔 금요일 저녁이나 가게 될 것 
같소. 아, 좋은 생각이 났는데. 당신이 뉴욕으로 오는 게 어떻겠소?"
  "그러겠어요."
  의외로 그녀는 쉽게 승낙했다. 커리어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마치 국민학교 
입학을 앞둔 어린 꼬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전혀 그런 
내색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입을 열엇다.
  "그럼 금요일 오후에 만납시다. 러시안 티룸에서 다섯시 삼십분. 집 
관리인에게 비행기 도착시간을 알려주면 기사가 공항으로 나가 아파트로 
데려다줄 거요. 그다음 티룸으로. 아니, 전화할 시간이 안되면..."
  "웨스."
  로라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전화선을 통해 그녀의 미소를 느낄 
수 있을 만틈 아주 밝은 음성이었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염려 말아요."
  "금요일?"
  "알았어요, 금요일."
  전화를 내려놓는 순간, 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지 기회를 잡아야 
했다. 그러자면 그에게 모든 것을 밝혀야 했다. 웨스에게 감출 수는 없었다. 
서슴없이 거액을 투자할 만큼 그는 로라를 신뢰하고 있었다. 국제적으로 이름난 
최고 비즈니스맨답게 그는 확실하고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아무 조건 없이 돈만 
벌라고 했다.
  그는 물론 그밖의 것을 원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남자로서도 그리 매력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세계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기업인이었다.
  그러나 커리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한다는 부담감보다 더 큰 
근심거리가 있었다. 그가 시카고 샐링거를 매입하겠다는 얘길 한 순간부터 
로라는 가슴에 납덩이를 매단 느낌이었다. 분명 자기 입으로 형편없다고 평한 
호텔을 커리어는 단지 로라를 위해 매입하기로 한 것이다. 시카고 샐링거를 
매입하는 일이 바보 같은 짓이라 여겼기에, 로라 페어차일드란 여자가 그 
호텔을 경영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세세한 점검을 해보자고 얘기했던 것이 
아닐가 하는 염려에 그녀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토해냈다.
  오웬, 그녀는 마음으로 그를 불렀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우리들이 힘 모아 
계획했던 일을 시카고 샐링거에서 먼저 시작해볼게요.
 
  세인트 제임스 타워 앞에 틱시가 정차했을 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로라는 수위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커리어의 아파트로 들어섰다. 비행기가 
연착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짐도 미처 풀지 못하고 간단히 샤워만 해야 했다.
  "기사가 아가씨를 모시기 위해 밑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어디든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커리어의 아파트를 돌보고 있는 관리인 겸 집사가 그녀에게 레인코트를 
입혀주며 공손하게 말했다.
  "지금 불러주세요."
  집사가 전화로 기사를 부르기 위해 모습을 감추자마자 그녀는 이곳저곳을 
돌며 집안 구경을 했다. 키 낮은 사방 탁자와 푹신한 소파들로 꾸면진 신내는 
흑색 강철축으로 된 기둥에 테없이 올라간 이탈리아제 거실 램피빛으로 은은한 
ㅜㄴ위기였다. 모든 것이 최고급 현대풍으로 꾸며져 있었으나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것이 금세 느껴지는 어딘가 집어낼 수 없는 허전함이 있었다. 좀 어질러져 
있어야지. 쿠션도 주름이 가고 말이야. 허긴 집사가 굉장히 깔끔하게 생겼어. 
누가 않았다 일어서면 곧바로 방석 주름을 펴놓겠는걸.
  그녀는 식당을 살폈다. 회의장에 갖다 놓으면 알맞을 것 같은 번쩍이는 
대형식탁을 중심으로 열두개 남짓한 의자들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서재와 
커리어의 사무실을 구경한 그녀는 그의 침실로 발을 옮겼다. 윤이 나는 흑단 
옷장과 침대용 스탠드, 그리고 흑백이 조화를 이룬 커리어의 침대 시트를 
차근차근 훑어보면서 로라는 오랜만에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테이블이 나기를 기다리며 좁은 대기실에서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는 손님들에 
석여 로라를 눈이 빠기게 기다리고 있었던 커리어는 저만치 로라의 모습이 
나타나자 일어섰다.
  "제때 와줘서 고마워요."
  커리어는 그녀를 한 팔로 끌어안으며 볼에 입을 맞추었다.
  "아무리 예약석이지만 자리 기다리는 사람들을 언제까지나 내몰 수 없었거든. 
막 뺏기려는 순간이었지."
  두 사람은 붉은 빛 가죽으로 장식된 탁자로 안내됐다.
  "너무 아름다워서 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데 어쩌지?"
  커리어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로라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마음이 변해 안 온다고 할가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짐작이나 
하겠소?"
  "약속해놓고 안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는걸요."
  그녀는 시원스럽게 대꾸했다.
  "단신하고 침대에 같이 눕는다는 게 왠지 그래요."
  커리ㅓ어는 감짝 놀랐다는 듯 고개를 번적 들었다.
  "그게 어때서?"
  그는 마치 심약한 십대 청소년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로라는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그런 마음을 훔쳐봤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로라의 속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억울하기도 했다.
  "호텔 매입 때 날 재정적으로 밀어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감사하고 있어요."
  "감사할 필요없어요. 날 위해 돈다발을 갖다 줄 텐데 감사는 내가 해ㅓ야지. 
잘 들어요, 로라."
  그는 윗몸을 다시 탁자 위로 쑥 내밀었다.
  "난 섹스를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오. 한 번도 그럴 필요를 느껴본 적이 
없었소. 아무리 늙어도 내가 취할 여자는 반드시 매혹시킬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가요. 원하는 여자 앞에선 항상 ㄹ진실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소. 
물물교환이란 내 인새에 존재하지 않아요."
  "모욕하려고 그런 건 아니예요. 물물교환이 아니라는 건 저도 알아요."
  로라는 또박또박 대꾸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굳게 잡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짤ㅂ고 강하게 느껴지는 손가락이었다.
  "날 더 알려고 노력해봤소?"
  "당신이 어찌 됐든 그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예요. 모르겟어요? 난 지금 내 
마음속에 들어 있는 감정이 뭔지 알고 있어요.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말이예요."
  "그건 상관없소. 내가 당신을 원한다는 게 중요하지. 이유가 뭔지 모르지만 
당신을 간절히 원해요. 그걸 발견하지 못하면 아마 우린 오래 가지 못할거요. 
하지만 반드시 알아내고 말겠어. 왜 니가 이토록 당신을 원하는지 말이오."
  로라는 웨이터가 포도주를 따르는 동안 말없이 유리잔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둘이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는 생각에 뉴욕에 온게 아니었소?"
  조금 전 커리어의 침실에서 느꼈던 설렘을 떠올리며 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확신만틈은..."
  "왜? 당신의 그 감사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아니면 잊기 위해 애쓰는 그 
남자 때문인가?"
  "둘 다요."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그녀는 묻지 않았다. 그가 그 사실을 몰랐다면 오히려 
이상했다.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클 거예요."
  "우리 둘이 함께 사업을 할 것고 옛사랑들을 침대 밖으로 쫓아내줄 것을 
분명히 약속하겠소. 날 믿어요, 로라. 상어알을 들겠소? 아니면 단장 여기서 
나갈가?"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로라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는 듯한 편안함에 
젖어 있었다. 커리어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전과 달리 그녀를 아주 평화롭게 
감사고 있었다.
  "좀 기다려줄래요? 오늘 한 끼도 못 먹었어요. 굶어 죽기 직적이에요."
  커리어는 로라의 농담에 크게 웃었다.
  "얘길 하고 싶어요. 잊어야 할 게 너무 많아요. 웨스. 그걸 다들려주고 싶어요. 
당신이 알았으면 해요."
  "물론 들어야지. 듣고 싶소. 하지만 오늘은 그냥 지나갑시다. 그리도 괜찮겠지? 
오늘밤은 윌에게 첫날이나 마찬가진데, 과거 보다 현재로 시작하는 게 더 낫지 
않겠소?"
  그녀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뇨, 하지만 이번 주 안에 언제 날을 잡아서..."
  "내일? 아니면 모레, 일요일로 합시다."
  상어알 요리와 포도주를 끝낸 뒤 식당 바로 앞에 주차된 리무진에 오른 
그들은 몇 분 만에 커리어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문을 닫자마자 커리어는 그녀의 레인코트를 벗겨 내리고 두 팔로 번쩍 안아 
들었다.
  "당신을 처음으로 원한 게 언젠 줄 알아요?"
  그녀의 얼굴에 뜨거운 입김을 쏟아부으며 그는 말했다.
  "단톤스 본채 식당에서 당신과 처음 아침을 먹을 때였지."
  그의 입술릉 깃털처럼 강볍게 로라의 얼굴 솜털 위를 더듬어 내렸다. 
  "나를 앞에 둔 채 당신은 식당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노상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잖소. 그런 당신을 두 팔로 끌어안고 싶었소. 그래서 그 잘난 놈의 
식당ㅈ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하고 싶었단 말이요."
  로라는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굶주린 사람처럼 그의 입술을 탐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누는 키스였다. 폴과 헤어진 이후 어떤 욕망도 없었으나 지금 
그녀는 정열적인 남자의 손길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애프터세이브의 
잔잔한 향, 부드러운 캐시미어 재킷, 입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그의 부드러운 
혀놀림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몸이 위로 말려 올라가는 느김을 
받았다. 이년 동안 두르고 있던 조개껍데기가 그의 손과 입술에 의해 부서지고 
무게 없는 육체는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전기가 나갔던 날 아침이었소."
  그의 입술에서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왔다.
  "내가 말을 하면 날 찾을 수 잇다고 했을 때..."
  "그래서 찾았잖아요."
  동시에 몸을 돌린 두 사람은 집사가 미리 손봐준 침대를 향해 커다란 
응접실을 가로질러 갔다. 램프의 불빛이 어슴푸레 깔린 침실은 아늑한 동굴 
같았다. 창 박에는 비가 억수로 퍼붓고 있었다. 로라의 정장 슈트를 벗겨 내린 
커리어는 그녀를 두 팔로 끌어 안았다.
  "모든 걸 다 잊게 만들어주겠소."
  그의 음성은 신음에 가까웠다.
  "다른 것들, 다른 사람들, 심지어 내가 옆에 있는 것조차 모르게 
만들어주겠소."
  로라의 손가락이 그의 타이를 서둘러 풀어냈다.
  "그런 얘긴 필요없어요, 침대에선 모든 생각을 잊게 마련..."
  "침대에서만이 아니오. 내 말 뜻 모르겠소? 난 당신이 항상 날 원하게 만들고 
싶다는 거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나만 생각나게 만들고 싶소."
  "웨스, 얘기 그만해요. 사랑해줘요. 날 기쁘게 만들어줘요, 얘긴 나중에 해요, 
제발."
  그녀는 웨스의 입술을 강하게 빨았다. 그들은 쫓기는 사람들처럼 황급히 옷을 
벗어 던졌다. 목에 매달린 타이를 듣어낸 급한 손길은 블라우스의 진줏빛 
단추를 벗겨냈고, 거의 동시에 브래지어와 브라우스를 침대 밑으로 떨어뜨렸다. 
옷이 다 벗겨지자 로라는 황홀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커리어는 두 
손바득으로 로라의 젓가슴을 받쳐든 채 입술과 혀로 번갈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과 혀의 움직임에 따라 로라의 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두 손으로 스커트를 내리는 순간에도 커리어는 ㄹ젓가슴에서 입술을 떼지 
않았다. 부드럽게 혀를 굴리며 젓꼭지를 애무하는 커리어의 가슴을 쓰다듬기 
위해 로라는 셔츠단추를 급하게 뜨ㄷ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그녀의 
손길을 거부했다. 눈을 치켜뜬 로라의 눈앞에서 그는 스스로 모든 옷을 하나씩 
벗어내렸다.
  옷을 벗기 위해 그가 떨어져 나간 순간 로라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동작을 멈춘 그의 입술과 손길이 미치도록 그러ㅣ웠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그의 묵직한 육체 밑에서 그녀는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커리어는 그녀을 부스러뜨릴 듯 껴안고 넓은 침대 뒤를 뒹굴었다. 
로라는 내부로쿠너 속구치는 강한 욕정에 온 몸을 내맡겼다. 상대가 커리어라는 
것도 잊었다. 
  커리어는 그녀를 오래도록 애무해 나갔다. 전신을 몇 번씩 훑어나간 그의 
손가락은 드디어 그녀의 은말한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허벅지 사이 
진밤색으로 숲을 이룬 작은 삼각 늪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은 차츰 어둡고 
축축하게 젖어 있는 동굴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입술은 여전히 단단하게 
돌출된 분홍빛 앵두를 연신 핥고 잇었다. 신음을 지르며 그를 안으로 
끌어들이는 로라의 손길을 커리어는 여전히 거부하고 있었다. 그 손길과 입술은 
여체를 끈기 있게 인도해 나갔다. 드디어 그가 몸 위로 올라온 순간 로라는 
따스한 무게감이 주는 황홀경에 엉덩이를 치켜든채 그를 깊숙이 받아들였다. 
죽어 있던 육체에 새로운 꽃이 피는 순간이었다.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 위해 시내를 한 바퀴 돌았을 뿐 주말의 모든 시간은 
침대 위에서 황홀하게 흘러갔다. 뉴욕에서 자란 로라였지만 커리어가 이근 
산책로는 그녀에게 완전히 낯선 곳이었다. 그만큼 두 사람이 살아온 세계가 
달랐다.
  커리어가 로라를 안내한 곳은 그동안 그녀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상류계급촌이었다. 로라와 클레이와 벤, 세 사람이 머물렀던 셋집의 일년치 
집세보다 훨씬 비싼 드레스가 천지에 깔린 쇼핑거리, 벤이 몇 년 간 훔쳐낸 
물건값의 스무 배가 넘는 그림들을 파는 ㄹ화랑가 등지로 두 사람은 느긋하게 
산책을 즐겼다.
  일요일 오후, 버링톤행 비행기 시각을 두 시간 남짓 남겨놓고 커리어는 서재 
소파에 앉아 로라를 불렀다. 잠시 그쳤던 빗줄기가 다시 굵어지고 있었다. 
발갛게 타오르는 벽난로 앞 푹신한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은 세리주와 건포도 
과자를 양손에 쥐고 있었다. 
  "이번 주말이 나한테 얼마나 소중했늦지 얘기ㅓ했었나?"
  "네."
  "이제 로라의 비밀을 들을 시간이야."
  로라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사람이 누구요? 로라가 사랑했던 남자 말이오."
  "폴 젠슨."
  사랑을 나눴던 연인의 이름이었지만 전혀 낯선 인물처럼 느껴졌다.
  "오웬 샐링거의 큰며느리 조카예요."
  커리어의 미간이 바싹 좁혀졌다.
  "그 일가 모든 사람과 연결이 돼 있군."
  로라는 그의 반응에 입을 다문 채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다 악고 있군요. 그러면서 모르는 척 한 거죠?"
  "때를 기다린 거야. 당신이 입을 열 때까지."
  그는 앞으로 몸을 숙여 로라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당신이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 잊고 있었군요. 당신이 
연인처럼 행동하는 바람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업가란 사실을 잊고 말았어요."
  "잊어야지. 날 사업가로 보지 말고 연인으로 대해달란 소리야. 유명세 덕으로 
당신을 침대로 끌어들이진 않았으니까. 그 재판은 보스턴은 물론이고, 뉴욕, 
로스앤젤레스 신문에 쫙 깔렸던 뉴스였어."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녀는 커리어에게 잡혀 있던 손을 살며시 뱄다.
  "이제 나한텐 말할 수 있겠지."
  "알고 계시잖아요."
  "당신에게 직접 듣고 싶어. 뉴욕 시절부터 얘기해주겠어? 진짜 도둑질을 하긴 
한 거야?"
  로라는 얼굴을 붉혔다. 처음으로 솔직해보기로 마음 먹었던 생각이 달아나려 
하고 잇엇다. 그러나 로라는 끝까지 솔직해지기로 했다.
  "네."
  "솜씨는 좋아씨구?"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솜씨는 없었어요. 잡혔으니까요. 하지만 샐링거를 털었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로라는 오웬에 대해 또 그와 함께 세웠던 호텔 증축 계획들, 그의 죽음, 
유언장, 재판 관계 등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그러나 커리어는 ㄹ상대가 그려내지 
않은 부분까지 예리한 눈길로 살피고 있었다.
  "왜 하필 샐링거로 들어간 게요?"
  법정에서조차 나오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롤린스가 비슷하게 한 번 물었던 
적은 있었다. 그녀의 뒷조사를 하기 위해 펠릭스가 눈을 부릅뜨긴 했으나, 결국 
보석강탈사건에 대한 증거 불충분으로 자료화시키지 못했던 것을 알고 난 
롤린스는 그 건을 아예 질문자료에서 빼버렸었다.
  "도둑질을 하러 들어갔었죠."
  로라는 담담한 어투로 대꾸했다.
  "하지만 우린 그 집을 털지 않았어요. 할 수 가 없었죠. 모두다 우리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내 말을 하고 많은 부잣집들 중 왜 하필 샐링거였냐는 소리야."
  그녀는 결국 마지막 진실까지 토해내야 했다.
  "오빠가 우리 둘을 그리 보냈기 때문이었어요."
  커리어의 표정이 순간 날카롭게 변햇다.
  "법정에서는 얘기 안했던 건데."
  "오빤 오웬의 유언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잖아요. 더군다나 난 샐링거 사람들 
앞에서 우리 인상을 더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몇 년 동안 같이 
있으면서 뭔가 숨기고 있었다는 그런 인상을 줄가봐 겁이 났어요."
  "오빠란 사람 지금 어디 있소?"
  "유럽에 있어요. 몇 년 됐어요."
  "오웬의 유언장과 관계 없는 사람일지 몰라도 펠릭스의 고소건과는 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로라는 그의 표정을 진지하게 살폈다.
  "카버 세인보다 더 날카로운 눈을 가졌군요. 맞아요. 그해 여름 우리가 그 
집에 일자릴 얻은 지 몇 달 후, 오빤 샐링거집을 털었죠. 윈래 계획대로 
말이예요. 하지 말라고 애원했는데 내 말을 안 듣고 그 집을 털었어요. 유언장을 
개봉하4던 날 펠릭스는 우리 두 사람을 도둑으로 몰았어요. 도둑질을 ㄹ하고 난 
뒤에도 뻔뻔스럽게 집에 남아 오웬을 조종한 뒤 유언장까지 고치게 만들었다고 
몰아쳤어요."
  "가족들이 그 망르 믿었구만, 그래서 당신을 내몬 것일 테고. 그 다음 오웬이 
당신에게 남긴 걸 법정을 통해 가져갔겠지."
  그녀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유럽으로 날아간 오빠는 그 뒤 못 봤겠구만."
  "네."
  "안 보고 싶은가보지?"
  "얼마나 보고 싶어햇는지 몰라요. 하지만 세윌이 지날수록 영영 보지 못할 
것처럼 느껴졌어요.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파요. 샐링거 가문의 일부에 속해 
있다고 얼마나 행복해했는데... 오바가 나한테 그 사람들이 절대 날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절대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했어요. 다시 사이 좋은 오누이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런 날은 평생 없을 거예요."
  "내가 유럽으로 당신을 데려가면?"
  웨스는 로라에게 확신에 찬 눈길을 보냈다.
  "분명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과거를 잊을 수 있을 거야. 다시 오누이가 될 수 
있어."
  그녀의 입 언저리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고마워요, 웨스. 멋진 생각이에요. 유럽에 가고 싶어요. 오바하고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우선 먼저 호텔을 사야 돼요, 당신이 여전히 날 
신뢰한다면 말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나 로라에게 다가간 웨스 커리어는 그녀릉 일으켜 세웠다. 
  "나는 단신을 변함없이 신로ㅐ해. 그 빌어벅을 자식에게서 당신호텔을 다시 
찾아내."
  주말에 느꼈던 정열을 다시 한 번 온 몸으로 느끼며 그는 그녀에게 깊은 
ㄹ키스를 했다. 달콤한 입맞춤에서 몸을 먼저 밴 사람은 로라였다.
  "웨즈, 비행기 탈 시간이에요."
  "내가 태워주는 비행기를 타라구. 멋진 비행일 테니 두고봐."
  그의 음성은 뜨겁게 타올랐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도 배어 있었다.
  "올 땐 자유럽게 왔겠지만 나갈 땐 내 허락이 있어야 돼."
   잠시 망설였지만 로라는 이내 커리어에게 몸을 맡겼다. 그의 팔에 안겨 
그녀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던 자신을 기분좋게 받아들이고 잇었다.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 있게 숨김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요 거짓이 지뢰를 이룬 벌판을 걸어야 했던 과거. 
이제 그 과거는 ㄹ더이상 존재하진 않았다.
  호텔을 매입할 수 있도록 힘서준 그에게 또 다른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가 솔직해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과거로부터 해방된 그녀는 거리낌없이 그가 인도하는 쾌락의 세계로 
달려갔다.

    16장

  가을비에 젖은 시월의 오후였다. 빗줄기 사이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아파트를 한두 바퀴 돌고난 알리슨과 파트리샤는 집주인 곁으로 다가갔다. 원래 
대가족일 모여 살던 건물을 한층에 다섯 가구씩 재배치시킨 구식 아파트였다.
  "언니하곤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니까. 너무 작아."
  파트리샤는 말도 안된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암스테르담도 작잖니. 난 작은 게 좋아. 암스테르담도, 여기 이 아파트도 
마음에 들어."
  현관 앞에 서 있는 지주인에게 고개를 돌리며 알리슨은 활짝 웃었다.
  "좋아요. 가구들도 마음에 들어요. 한달 동안만 쓰겠어요."
  "곤란한데요. 적어도 육개월 이상은 계약해야 됩니다."
  "그렇게 멀리까지 계획을 잡아놓고 살아보지 않아서요."
  그녀는 수표책을 껴냈다.
  "어쩌면 오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장담하진 못하겠어요."
  "그렇게 오래는 안될 걸. 이모가 어떤 사람인데. 언니가 누구와 있는 걸 알게 
되면 분명 미국으로 끌어..."
  "글쎄다."
  알리슨은 파트리샤의 찌푸린 표정도 아랑곳없이 들뜬 얼굴로 집주인에게 
수표를 내밀었다.
  "이 수표 받죠? 내일 당장 들어오고 싶어요."
  그는 수표를 신중히 들여다보았다.
  "샐링거 호텔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친해요."
  그녀는 킬킬거리며 말했다. 파트리샤는 알리슨의 팔을 잡아끌었다.
  "왜 그렇게 이상하게 구는 거야. 장난 그만하고 나가자. 뜨거운 코코아를 
마셔야 되겠더. 춥단 말야."
  "샐링거 호텔 일가와 관계가 있냐구요?"
  수표를 읫미스러워 하는 집주인을 힐긋 살핀 알리슨은 전화통으로 다가갔다.
  "아빠가 샐링거 대표예요. 못 믿겠다면 호텔 지배인에게 전화해보세요. 내 
이름을 대면 금방 알 거예요. 내일 이사올 테니 그렇게 아세요."
  "아빠가 샐링거 대표예요. 못 믿겠다면 호텔 지배인에게 정화해보세요. 내 
이름을 대면 금방 알 거예요. 내일 이사올 테니 그렇게 아세요."
  "먼저 전화를 걸어 확인한 후 결정하도록 합시다."
  알리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스턴에선 이런 일 없었는데."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아파트를 그녀와 벤의 신나는 보금자리로 꾸밀 
생각에 그녀는 호텔로 전화를 해야 했다.

  "오늘밤 또 그 사람 만날 건가보지?"
  자갈ㅇ이 깔린 보도 위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현관 돌층계를 내려서며 
파트리샤는 계속 궁시렁거렸다. 신경질적으로 우산을 펴든 그녀는 알리슨이 
우산을 펴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 아선 땅에 날 혼자 내버려두고 말야."
  알리슨은 폭소를 터뜨렸다.
  "나보다 암스테르담을 더 잘 알면서 왜 그리?"
  검정빛 건물 지붕 속에 화려하게 펼쳐진 색색의 우산 속에 섞여 두사람은 
프린센그라체가를 따라 내려갔다.
  "삼주 내내 미국 대학생하고 붙어지내 놓구선. 이젠 암스테르담이 지루해서 
파리로 간다고 했잖아. 그래놓고 여기가 낯설다니? 더군다나 내ㅓ가 벤하고 
나가도 되냐구 물어봤잖니. 괜찮다고 할 땐 언제구..."
  "처음 두 번밖에 더 물어봤어?"
  "혼자 알아서 잘 지내겠다고 했잖니? 사실 너한테 그런 말 물어볼 필요도 
없어. 네가 무슨 노처녀 사감 선생이라도 되니? 그만 두자. 나 지금 너무 
행복하다, 파트리샤."
  "그 남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눈빛이 수상하던 걸.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게 무슨..."
  "예를 들어봐? 눈이 나븐 것도 아닌데 안경은 웬 안경이야. 눈빛을 가리기 
위해 안경을 쓴 거야."
  "파트리사, 너 그러다가 잔소리 할망구 되갰다."
  "언닌 멍청이 쪼다되구?"
  알리슨은 잠시 후 중얼거렷다.
  "진자 행복하단 말야."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우산을 대리는 맑은 빗소리를 들으면 운하 위로 
흘러가는 보트를 구경했다. 여덟 살 때 할아버지를 따라 암스테르담을 처음으로 
구경하던 때가 생각났다. 웃고 떠들고 장난치던 그때가 그리웠다.
  알리슨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서 잇는 파트리샤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호텔로 돌아갈거야. 그리고 밤에는 ㄹ벤하고 나갈 예정이야."
  파트리사는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 번 들썩거린 뒤 그녀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호텔 리무진은 뒀다 뭣에 써. 이럴 때 타고 다니지. 발 알파죽겠단 말이야."
  "난 리무진 싫어."
  "택시는 탈 수 있잖아."
  "택시도 실어."
  부지런히 나머지 여섯 구역을 걸은 그들은 호텔 로비의 동양풍의 카펫 위로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화난 거야? 다 언니 잘되라고 충고한 건데 뭘 그래. 그 수상한 멍청이한테 푹 
빠져서 헤어..."
  "안녕!"
  로비를 가로질러 다가온 사름은 알리슨이 푹 빠져 있다는 벤가드너였다.
  "수건 갖다줘요?"
  "우릴 위해서에요? 아니면 카펫 때문에 그래요?"
  알리슨은 밝은 미소와 함께 농담을 했다.
  "물론 두 분 아가씨들을 위해서지요."
  그때였다. 무심코 로비 저족을 바라보던 알리슨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폴!"
  알리슨은 로비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대리석이 무너져라 쿵쾅거리며 뛰어가 
소란을 떠는 알리슨 때문에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얼굴을 지푸릴 정도였다.
  "오빠, 암스테르담엔 웬일이야? 방급 도착한 거야? 여기 묵으려구? 세상에, 
여기서 이렇게 오빠를 보다니..."
  폴은 알리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왜 이렇게 젖었니? 그래도 아주 건강해 보이는데."
  폴의 외모를 이리저리 뜨어보던 알리슨이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세상에 흰머리잖아? 어디서 뭐하고 다녔길래 이렇게 팍삭 늙었어? 이 주름 
좀 봐."
  그녀는 폴의 양 입가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그래 늙었다."
  폴은 살며시 웃어 보였다.
  "엄마가 소식 없다고 걱정하던데 연락 좀 드리지 그랬니?"
  "그래서 일부러 온 겨야? 날 찾아내라는 임무를 받구서?"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냥 놀러왓어. 잘 있었니, 파트리샤."
  "안녕 폴. 우리 여기 있는 줄 알았나보지?"
  "레니 이모가 암스테르담에 갈 기회 있으면 너희 둘 좀 만나보라 그랫어. 시간 
있겠다, 또 보고 싶기도 해서 이렇게 왔지. 저녁에 약속 있니? 누굴 좀 소개할까 
하는데 말야."
  "난 안돼. 데이트 잇어."
  파트리샤는 딱 잘라 말했다. 알리슨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깐 그런 소리 없었잖니?"
  "그럼 넌 어때, 알리슨 너만이라도 가지."
  "좋아요. 누구를 데려갈 수 있는 자리라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런데 소개할 사람이 누군데?"
  "에미리 켄트. 아마 한 번 만나봤을걸."
  "이름은 들어본 것 같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알리슨은 짓궂게 웃으며 폴에게 물었다.
  "깊은 사이유?"
  "몰라 아직. 좀 있으면 알게 되겠지."
  "어디 있는데?"
  "위에. 옷 갈아입는 중이야. 옷 갈아입는 게 취미래. 네 친구는 누구니?"
  "벤 가드너."
  고개를 돌려 로비를 살피던 알리슨은 동동 ㄹ발을 굴렀다.
  "이런 가버렸잖아. 이를 어째. 그 사람한테 말도 안하고 뛰어와 버렸으니. 
오빠, 낯선 사람하고 저녁 괜찮겠어?"
  "너만 괜찮다면 난 오케이다."
  "그럼 에밀리하고 일곱시까지 우리 방으로 와. 엑셀시오르에서 할 생각인데, 
프랑스 음식 괜찮지?"
  "아주 좋다. 에밀리가 좋아할 게다."
  폴은 알리슨의 두 밤에 차례로 입맞춤을 했다.
  "집에 있을 때보다 아주 행복해 보인는데."
  "맞아. 아주 많이. 모든 게 너무너무 좋아. 오빤?"
  그는 양 어깨를 으쓱거렷다.
  "너처럼 좋진 않다."
  잠시 후 폴이 주저하듯 물었다.
  "로라 얘기 들은 거 없니?"
  "아니."
  "어디 사는지도 몰라?"
  "알고 싶지 않아. 이따 일곱시에 봐."
  우리 둘 다 여전히 실연당한 꼴로 산느구나. 엘리베이터로 다가가며 폴은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조용한 복도를 걸어가며 그는 욕을 내뱉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면 그래도 그녀를 사랑햇을까? 아니야. 그렇게 털어놓은 
여자가 아냐. 내가 알고 있는 로라는 절대 그럴 여자가 아니야. 그의 사고는 늘 
여기서 멈추었다. 
  "당신이에요?"
  책상에 앉아 있는 에밀리의 흐르는 듯한 금발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지난 몇 달 간 폴이 찍어댄 그녀의 사진 묶음이 책상 위에 잔뜩 
널려 잇었다. 그것들을 대충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난 에밀리는 폴에게 
다가와 가볍게 키스를 나눴다.
  "방금 누가 전화했는지 알아맞취봐요."
  "글쎄, 우리가 암스케르담에 있는 걸 아는 사람이 있나?"
  "베리 마켄이 전화했어요. 정말 운이 좋았어요. 숙박 명단에서 그 사람 이름을 
봤거든요. 그래서 오늘 아침 전화를 걸어놨는데, 조금 전 전화를 해온 거예요. 
오늘 저녁 같이 하기로 했어요."
  "사촌동생하고 저녁 약속 해놨는데..."
  "폴, 동생은 언제고 만날 수 있잖아요. 베리는 내일 떠난대요."
  "그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라도 되나?"
  "그 서럼 얘길 나한테 해준 게 누군데? 최소한 두 번은 더 얘기 했겠다. 
《아이(EYE)》발행인, 마켄에인전시 사장 말이에요!"
  "기억해. 뉴욕에서 몇 번 만났지."
  "전화하지 말았어요 하는 건데, 괜히 했군요."
  에밀리는 화는 얼굴로 휙 돌아섰다.
  "걱정할 필요없어. 정 그렇다면 잠시 여기로 오라고 하지 뭐. 그냥 가볍게 한 
잔 하면 되니까. 그 사진들 보여주려고 그런 거 아냐. 그자는 아마 보려고도 
낳을걸."
  "그래서 그런건 아니예요. 오해 말아요. 난 그냥 그 사람하고 친해두면 앞일이 
잘 풀릴까 싶었어요.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친구로 만들고 싶단 말이에요. 날 
단지 모델로, 그리고 당신을 그냥 사진작가로 여기게 하고 싶지 않단 소리예요. 
폴."
  "물론이지. 우릴 그 이하로 여기고 있을 텐데."
  그는 어깨짓을 한 뒤 고개를 한두 번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그 작자하고 저녁하지. 알리슨에게 전화할게."
  "고마워요. 다링."
  알리슨에게 전화를 하면서 폴은 에밀리의 치밀함을 다시금 되새기고 잇었다. 
그녀는 결점을 찾을 수 없는, 명망이 잇는 보스턴 가문의 무남독녀였다. 나이는 
폴과 비슷한 서른 안팎이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했다. 서른살의 여자답지 않게 얼굴에는 잔주름 하나 없었고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린 금발은 그녀의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푸른 빛 눈동자 
속에 담긴 약간 놀란 듯한 기운과 천진스러움은 그녀를 더욱 섹시하게 만들고 
있었다.
  몇 년 동안 그녀는 단지 좋은 남편감을 고르기 위해 취미로 자선패션쇼에서 
모델활동을 했다. 그러나 스물일곱 살이 되면허 모델엘에 전문적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폴은 수화기를 내리며 에밀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리슨 친구가 내일 시내 박에서 볼일이 있대. 그 친구를 우리한테 
소개시키지 못해 아주 안달이 났는걸."
  "누군데요?"
  "벤 가드너래."
  "어디 사람인데요?"
  "안 물어봤어. 다섯시 삼십분에 만나기로 했는데, 당신 친구 마켄과 몇 시에 
만나기로 햇지?"
  "그는 내 친구가 아닐 우리 친구예요. 아니, 아직 친구는 아니지만 오늘 
저녁에 만나고 나면 분명 좋은 친구가 될 거예요. 동생하곤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요?"
  "호텔 라운지."
  "좋아요. 먼저 쇼핑가요. 옷은 쇼핑하고 나서 갈아입으면 되겠다."
  에밀리가 누군가에게 들었다는 새로운 상점을 찾기 위해 베토벤가로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폴은 내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게 뭔지도 그는 알지 못했다. 일도 여자도 그의 열정을 
불러일으킬수 없었다. 너무나 큰 상처로 인해 그의 마음은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다.
  공단으로 뒤덮인 발루아 상점 안쪽에서 폴은 모자들을 이것저것 써보는 
에밀리를 지켜봤다. 그는 상점 구석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삼각 거울에 전신을 
비추고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사진을 찍듯 
손가락으로 완벽한 곡선을 이룬 옆 얼굴의 구도를 잡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로 
동그란원을 그려가며 그는 삼각거울에 비친 에밀리의 영상을 잡아냈다. 카메라 
없는 손가락으로 연신 자신을 찍어내는 폴을 발견한 에밀리는 그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카메라 갖고 올 걸 그랬다. 삼각거울에 비친 모습은 안 찍어 봤잖아."
  "새로운 각도에서 당신을 찍어봐야겠어."
  "명령만 내리세요. 언제든지 포즈를 취할 테니까."
  그녀는 어느 한 포즈를 위해 몇 시간이라도 꼼짝하지 않을 정도의 철저한 
프로급 모델이었다. 그녀를 그렇게 지탱하게 만든 것은 바로 행복감이었다. 
누군가의 초점 안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은 늘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사진이 어떻게 나오든, 사진 작가의 구성이나 연출 방법이 어떻든 상관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찍을 건지 물어본 적도 없었다. 오직 뷰파인더 안의 초점 
대상이라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그녀는 지극히 행복했다. 그러나 동시에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에밀리의 영상을 사진기로 찍어낸다는 새 구상법은 
건조하게 살아가는 폴에게는 순간적인 흥미 거리일 뿐이었다.
  "카메라 갖고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까요?"
  "아냐, 됐어. 내일 다시 오지 뭐."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주위를 살폈다.
  "알리슨한테 줄 선물을 살까 하는데."
  "생일이에요?"
  그는 싱긋 웃었다.
  "아냐. 그냥 선물 하나 사주려구. 사랑스런 애야."
  "그런 게 어딨어? 선물은 특별한 날에나 하는 거지."
  그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모자 몇 개를 산 에밀리가 돈을 치르고 배달지를 
알려주는 동안 폴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한테 화난 건 아니죠?"
  택시를 잡기 위해 빗속을 뛰어가면서 에밀리는 폴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트집잡거나 바난할 생각 없었는데."
  "언제든 트집장아도 왜. 그건 당신 자유니까. 그리고 나 화 안났어."
  택시 뒷좌석에서 폴 곁에 바싹 다가앉은 에밀리는 암스테르담 풍경을 보며 
계속 재잘거렸다. 그 사이 폴의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폴은 
에밀리의 매력 아닌 매력을 경계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부드럽게 순응하며 아양을 떠는 여자를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기분이었다. 보듬고 쓰다듬는, 늘 양보하고 순종하는 손길에 중독이 된 
폴은 에밀리에 의해 자신이 그런 남자로 변해가고 있지 않나 염려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면을 알리슨이 날카로운 눈으로 지적했다. 샐링거 라운지 탁자에 
세 사람이 모여 앉은 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알리슨을 모든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했다.
  "오빠하고 한 본도 의견충돌이 없었단 말이에요?"
  알리슨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식으로 지루해서 어떻게 살아요?"
  "폴은 한 번도 지루해하자 않았어요."
  에밀리는 알리슨의 말을 심각하게 받았다.
  "그리고 항상 소신껏 행동했어요. 지루한 적도 없었어요. 우리 둘 다!"
  알리슨의 양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에밀리는 폴이 좋아하는 사촌이라니 될 수 
있는 한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어딨니? 파트리샤는?"
  "파트리샤는 못 온다구 했어. 벤은 올 거야. 좀 늦긴 해도."
  소매 없는 긴 검정드레스에 다이아몬드 귀고리와 목걸이를 한 알리슨의 
아름다운 자태에 폴은 속으로 경탄하고 있었다. 동그스름하고 부드러운 
에밀리의 모습이 약간 마른 듯하면서도 각이 진 알시슨의 아름다움에 빛을 잃는 
듯했다.
  "벤 가드너라..."
  폴은 뭔가를 생각하듯 그의 이름을 웅얼거렸다.
  "미국인? 영국인? 암스테르담에선 뭘하고 있는데?"
  "미국인이야. 여기서 일해."
  "암스테르담에서?"
  "여기. 이 호텔 말야. 경비대장이야."
  알리슨은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폴이 벤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봐줄 
것을 기대해서였다. 그러나 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을 향해 키 큰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알리슨은 활급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벤!"
  그녀의 음성은 평소보다 많이 상기되어 있었다.
  "사촌오빠 폴 젠슨이에요. 그리고 에밀리 켄트."
  두 사람은 악수를 교환했다. 똑같은 키에 똑같이 날씬하고 단단한 
근육질이었지만 두 사람은 판이하게 다른 인상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벤은 폴의 흑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로라가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가 로라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궁금했다.
  "알리슨한테 얘긴 많이 들었습니다만, 유럽에서 이렇게 만날줄을 몰랐습니다."
  "내 잘못이 크죠. 모든 사람들하고 연락을 끊고 살았으니까요. 여기서 사신 
지는 오래 됐어요?"
  "암스테르담에서만 이년이고, 유럽에선 오년째입니다."
  "집 떠난 지 꽤나 오래 됐겠군요."
  "나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요."
  폴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난 여행하는 사람이니까. 유럽 오기 전엔 어디 살았어요?"
  "뉴욕입니다. 알리슨 말로는 보스턴이 고향이라면서요?"
  "맞아요. 여길 떠나면 뉴욕으로 갈까 생각중이요. 뉴욕엔 언제돌아갈 
생각이죠?"
  "모르겠는데요."
  "가족은 뉴욕에 계십니까?"
  "아무도 없대."
  알리슨이 벤을 대신해 대답했다.
  "도무지 상상이 안 가. 원래 대가족 속에서 자라서 그런지 난가족이 없다는 게 
이해가 안돼. 안 그래, 오빠?."
  "원래부터 대가족이 아니었으니까요, "
  벤이 폴과 시선을 맞춘 채 말했다.
  "몇몇은 세상을 뜨고 몇몇은 사라지고..."
  "소설 같은데요."
  폴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런 셈이죠. 폭풍우 같은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유럽으로 왔군요."
  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은 어때요? 가족이 맞은 폭설 때문에 보스턴을 떠나왓나요?"
  "벤한테 우리 얘길 좀 했어요."
  알리슨은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오빠 얘긴 많이 안했어요. 얘기하고 싶으면 오빠가 직접 하라구 
남겨뒀죠."
  "뭔지 모르지만 듣고 싶은데요."
  겸연쩍어 하는 알리슨을 돕기라도 하듯 벤이 끼여들었지만 폴은 단호하게 
말을 잘라버렸다.
  "지난 얘긴데 해서 뭐하겠습니까. 내 얘긴 접어두고 그쪽 얘기나 들어봅시다. 
가족이 그렇게 사라지다니, 그ㅔ 어디... 전쟁이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허긴 
서로 의견이 안 맞아서 다투고 나면 그럴 수도 있죠."
  "배신 때문이에요."
  벤은 폴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 충격을 놓치지 않았다.
  "샐링거 집안에도 그런 일 비슷한 게 있었다고 들었는데..."
  벤이 질문 비슷하게 말끝을 흐리자 알리슨은 농담투로 말을 받았다.
  "요즘 그런 게 유행인가 보지?"
  "그런 유행은 없는 게 낫지."
  벤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폴은 벤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벤의 표정 
속에는 잃어버린 것을 향한, 아니면 목표를 향한 강인한 뭔가가 있는 듯햇다. 
뭔가를 손아귀에 쥐기 위해 쉬지 않고 더듬이를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바로 
그런 모습이 알리슨을 매료시켰겠지. 폴은 알리슨과 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언제 한번 점심 같이 할까요? 근무 끝끝난 다음에 호텔 밖으로 나가서 
식사했으면 하는데."
  "노력해보죠. 하지만 내일 런던으로 떠나기 때문에 조만간은 곤란할 겁니다."
  "이런, 우린 오래 머물 수 없는데. 어쩌지."
  "그럼, 다음번 암스테르담에 들를 기회가..."
  "아이, 오빠. 좀더 오래 있지."
  알리슨은 어리광을 부리며 폴에게 매달렸다.
  "폴은 일해ㅓ야 돼요."
  에밀리느 딱 부러지게 못을 박았다.
  "우리 둘 다 일이 있거든요."
  "일을 한다구? 진짜야?"
  알리슨은 얼굴을 찌푸리는 폴을 보았다.
  "어머, 미안. 정말 일하는 거야?"
  "그냥 생각중이야."
  폴의 음성은 표정과는 다르게 부드러워ㅅ다. 폴은 벤을 쳐다보며 말했다."
  "미국은 얼마나 자주 가요?"
  "가끔씩. 자주는 못 가요. 하지만 앞으로는 자주 들를 생각입니다."
  "오게 되면 연락 줘요."
  그는 명함을 꺼내 벤에게 내밀었다.
  "보스턴에 있는 사무실 주소입니다. 전화를 하면 내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거예요."
  벤도 역시 자신의 명함을 폴에게 건넸다.
  폴과 에밀리를 택시로 보낸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로킨가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가을비가 그치고 난 밤공기가 쌀쌀하면서도 상쾌했다.
  "벤. 말할 게 있어요."
  깜짝 놀란듯한 표정으로 벤은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인데?"
  "나쁜 쪽으로 생각하는 거죠? 항상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애. 
좋은 일이에요. 앞으로 당신이 좋은 생각만 하게만들 테니 두고봐요."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 아파트 하나를 빌렸어요."
  "아파트를 빌렸다구?"
  "으응! 프린센그라체 쪽에. 아주아주 예쁘고 자그마한 아파트예요. 하지만 
우리 둘이 살면서 서로를 더 많이 알기 위한 장소로는 아주 제격이에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혼자 아파트를 구했다구? 누가 미국 여자 아니랄까봐."
  "그게 어때서요. 내가 자랑스럽지 않아요."
  "물론 자랑스럽지. 놀라워, 알리슨. 오랬동안 가정이란 것을 잊고 살았거든. 
하지만 파트리샤는?"
  "파리로 갈 거예요. 암스테르담에 육주 이상 머물렀으면 충분하대요."
  벤은 두 손으로 알리슨의 턱을 감싸고 눈을 응시했다.
  "순간적인 기분으로 그러는 건 아니지?"
  알리슨은 속으로는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바로 당신이에요, 하고 말했으나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구했다.
  "순간적인 기분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럼 어때요? 그 기분이 사라질 때까지 
서로 즐기면 되잖아요."
  잠시 동안 벤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뭔가 사줄 게 잇어. 얼마 전부터 생각한 건데, 지금 당장 사야겠어."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당신밖엔. 우리 둘이 함께 나눌 시간만 있으면 돼요."
  "그걸 위해 아파트를 구했다면서. 이번에 내가 할 차례야. 우리 둘을 위해."
  벤은 그녀 팔을 잡아 끌었다.
  "벤, 지금 시간엔 다 문을 닫았어요."
  "아냐, 아직 십오분 남았어. 서두르면 갈 수 있어."
  "어딘에요?"
  벤은 암스테르담 다이아몬드 센터에서 발을 멈췄다. 커팅사(다이아몬드 원석을 
상품으로 다듬는 사람들:역자 주)가 퇴근하는 시각이었으나, 지배인은 벤에게 
악수를 청했다.
  "샐링거ㅣ양을 소개합니다."
  벤은 시선을 알리슨에게로 돌렸다.
  "알리슨, 인사해요. 클라우스 쿼이퍼씨. 샐링거양에게 물 좀 선물할까 하는데 
너무 늦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시간은 얼마든지 있지요."
  "잘됐네요. 알리슨, 구경 좀 하지."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자꾸 뭔가가 거슬렸다. 아파트 얘기를 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벤의 의도대로 진행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클라우스 쿠이퍼 
앞에서 벤을 무안줄 수는 없었다.
  작업복을 입은 남녀 커팅사들이 긴 탁자와 쌍을 이룬 팔걸이 없는 의자에 
앉아 무게와 빛깔, 커팅 방법 등으로 분류된 다이아몬드 원석을 아름다운 
보석으로 새롭게 탄생시키고 있었다. 섬세한 톱으로 자르고 형태에 따라 갈고 
빛을 내는 모습을 알리슨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한번 끼워봤으면 좋겠는데, 알리슨."
  벤이 어느새 그녀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클라우스가 세팅해놓은 게 있다고 해서 봤는데 내 마음엔 속들어, 어때?"
  투명한 수정처럼 보이는 자그마헌 다이아몬드가 은줄에 매달려 있엇다.
  "너무 예뻐요."
  거절할 수 없는 선물이었다. 반지가 아니라서 더욱 좋았다. 행복해 보여.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행복해진 모습니야. 많이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벌서 
이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어. 알리슨은 이런 생각에 잠긴 채 목에 은줄을 
걸었다.
  "고마워요. 당신 아마 지겨워할걸요. 내내 이목걸이만 걸고 있을 테니까요."
  "그때 다른 걸 또 사주면 되지."
  두 손으로 알리슨의 얼굴을 감싼 벤은 재빨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공개적으로 키스를 하지 않는 그의 오랜 습관 때문에 벤의 키스는 아주 짧게 
끝났다.
  "사랑해, 알리슨."

  창밖으로 캐럴 송이 한창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맨해튼에 있는 《아이》잡지사 
패션담당 편집장 사무실의 대기실 크리스마스 트리에는 딱딱한 종이로 만든 
눈동자 모양의 방울과 붉은색, 녹색, 흰색으로 빛나는 작은 눈동자가 수십개 
매달려 잇었다. 에밀리는 눈동자 장식이 왠지 음산하게 느껴졌다."
  "베리가 직접 만나보라고 했어요."
  리틀 이탈리아사에서 조크 플린으로 불리다 록펠러센터로 옮긴 뒤 제이슨 
오르로 이름을 바꾼 편집장에게 에밀르는 상냥하게 말했다.
  "아무리 사장이지만 편집장 영역을 침범하고 싶지 않다는 말씀도 있었구요."
  "나한테 그렇게 전하라는 소린 없었을 텐데."
  제이슨은 비음 섞인 목소리를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에밀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대기실에 놓인 
크리스마스 트리만큼이나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어디 그럼 갖고 온 걸 볼까요?"
  제이슨의 음성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베리는 여간해서 그런 농담을 하지 않는 ㄹ사람인데 그런 말 하면서 아가씰 
보내다니, 아가씨가 맘에 드는 행동을 했나보군."
  그는 에밀리가 가져온 사진들을 보기 위해 커다란 가죽 패널을 열어젖혔다. 
에이전시에 맡겨놓고 집에 그대로 있으면 된다는 베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에밀리가 몇 번씩 간청해서 굳이 직접 사무실로 가져온 사진들이었다.
  "아가씨 운이 좋구만. 기가 막힌 사진사를 만났어. 대단해. 정말 대단해!"
  "사진이, 아니면 모델이요?"
  에밀리는 초조하게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둘 다. 천재성이 엿보여. 대단한 솜씨야."
  "감사합니다."
  그녀의 밝은 음성에 그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런데, 베리가 그런 소리 안했어요? 모델들이 넘친다구."
  "그런 소린 없었어요. 항상 새로운 얼굴을 찾는다는 얘기밖에."
  "우리는 정규로 계약하는 것보다 필요할 때마다 모델을 쓰죠."
  에밀리는 분통이 터졌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필요할 때가 언제죠?"
  "지금으로선 별로..."
  그는 사진첩을 소리내어 닫았다.
  "오월에 열릴 쇼가 있는데 그건 이미 세팅이 끝나 마무리 단계고, 유월 쇼에 
몇 명이 필요할지 확실하지 않아요. 필요하면 전화할게요."
  제이슨은 어느새 대기실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녀가 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판을 들어올린 에밀리는 아주 정중하게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요?"
  뉴욕으로 돌아온 이래 내내 같이 머물고 잇는 폴의 아파트에 도착하자만자 
에밀리는 분통을 터뜨렸다.
  "적어도 베리가 추천한 모델을 어떻게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어요. 구걸하러 
간 것도 아닌데. 난 보스턴의 켄트 가문이란 말야. 도대체 제깐 것이 뭐길래 날 
그렇게 마구 갖고 놀아."
  에밀리가 펄쩍 뛰는 동안 폴은 성냥불을 그어대고 있었다. 불꽃이 황하게 
이는 것을 보며 유리로 된 난로문을 조심스럽게 닫은 폴은 두 팔로 에밀리를 
끌어안았다.
  "내 말 듣고 있었어요?"
  "들었어."
  에밀리에게서 떨어지며 그는 작은 홈바로 갔다.
  "한 잔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반침(벽의 일부가 쑥 들어간 곡:역자 주) 속에 자그마하게 자리한 홈바에서 
폴은 마티니 두 잔을 만들었다.
  "자 이리와 앉지. 전쟁터로 들어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당신 옛친구 베리하고, 새 친구 제이슨이 서로 누가 기선을 제압하나 싸움을 
하고 있단 말이야. 그 속에 당신이 끼여든 거야. 절차를 따르지 않고 베리가 
당신을 보낸 걸 제이슨이 싫어하는 것 같은데."
  "그 절차가 도대체 문데요?"
  물론 에밀리는 그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베리가 그랫다면서? 에이전시를 통해 당신 사진을 보내겠다구."
  "문명화된 사회에선 직접적인 만남이 더 효과적인 결과를 낳는다구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행동을 옹호하려는 에밀리에게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는 말이겠지. 하지만 베리가 몇 번씩 그러지 말라고 했다면서? 혹시 
그 사내들 서로 사랑하는 사이 아냐?"
  "아니예요. 제이슨은 몰라도 베리는 정상이에요. 날 우너하던데요, 뭘."
  "그랬어? 여자 볼 줄 아는 녀석인데."
  폴의 농담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저녁하려고 르 시르크에 예약해놨어."
  "거기는 적어도 삼주 전 안니면 예약 못할걸."
  "이주 전에 해놨어."
  "정말이요? 무신 일 있어요?"
  "다음주가 당신 생일아냐? 생일 바로 삼일 뒤가 크리스마스구. 딴 이유 더 
있어야 돼?"
  "멋진 분위기에서 나한테 결혼신청하려고 하는지도 모르죠. 아니, 아니예요. 
괜한 소리였어요. 제이슨 도르만큼이나 주책없게 굴었네요."
  "당신이 여태껏 주책없이 군 적 한 번도 없었어. 왜 자신을 그런 식으로 막 
표현해?"
  그녀가 묵묵히 타오르는 불꽃을 지켜보는 동안. 폴은 홈바에서 마티니를 
만들고 있었다. 오웬의 초상화 석 점이 걸린 서재 소파에 앉은 그녀의 얼굴 
위로 벽난로의 불꽃이 어른거렸다. 일렁이는 불꽃 때문에 수시로 달라 보이는 
에밀리 켄트의 표정 없는 얼굴 뒤편에서 폴은 다른 여자의 모습을 읽고 있었다.
  소파에서 멀리 떨어진 어둠 속에서 그는 계속 에밀리의 표정변화를 살폈다. 
통나무가 굴러떨어지며 수십개의 작은 불꽃을 일으키튼 순간, 그는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슬픔을 포착해 냈다.
  에밀리의 얼굴이 서서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입가에 나타난 슬픔, 
그것은 바로 로라의 얼굴이었다.
  폴은 쥐어 있던 유리잔을 벽난로 쪽으로 던졌다. 유리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에밀리의 비명이 들려왔으나 폴은 그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빌어먹을, 
일년하고도 반년이 더 지나갔는데 아직도 로라를... 폴은 울음을 삼켰다. 그런 
자신에게 심한 분노를 느꼈다. 그 어떤 여자와도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도대체 왜 만나는 여자들 얼굴에서 로라을 찾고 있단 말인가?
  "폴!"
  노려보는 에밀리의 얼굴에서 로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뭣 때문에 이래요?"
  "에밀리, 미안해. 다른 생각을 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정말미안해."
  "뭘 생각하고 있었어요?"
  "친구. 오래 전에 사귄 친구였어. 사실은 속으로 사진 찍고 있었어."
  "날 찍었나보죠?"
  완전히 자신에게 취해 있는 여자였다. 차라리 그래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럼 당신이지 누구겠어. 내가 제일 사랑하는 모델인 걸."
  "동반자란 말이 더 듣기 좋은데."
  "그래, 동반자."
  그는 생각에 잠긴 채 에밀리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 맞는 말이야. 이제 일어나자. 저녁하러 가야지."
  "몇 시로 예약했어요?"
  "여덟시. 하지만 좀 일찍 나가지. 왠지 걷고 싶은데."
  "어머, 좋아라."
  그녀는 아이처럼 팔짝거렸다.
  "부츠 신고 갈래요.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눈이 오더라구요."
  서튼 지구에서 메이페어 렌젠트까지, 그것도 십이월의 눈을 맞아가며 걸아갈 
메밀리가 아니라는 것을 폴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밀리의 또 한 가지 
매력은 민감한 직관력으로 상황판단을 제대로 해낸다는 점이었다. 잠깐의 
편안함을 포기하는 대신 폴의 마음을 더욱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영리한 
여자였다. 그런 면에서 에밀리에게 고마움과 포근함을 느끼곤 했다.
  그들은 63번지로 들어섰다. 조용한 동네였다. 얌전히 잠들어 있는 밤색 벽돌의 
주택단지를 가로질러 두 사람은 파크애비뉴에 다다랐다. 메이페어 레젠트에 
도착했을 무렵 폴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젊은 남자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호텔 밖으로 걸어나오는 여자가 있었다. 
레니 샐링거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발견했다.
  "어머, 폴."
  폴은 레니가 당황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차분하고 한 순간도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았던 레니 이모였다.
  "에밀리도 함께로구나. 눈이 내리네. 참 어쩜 예쁘게도 내린다. 이렇게 눈길을 
걷는 사람이 있을 줄은... 그것도 밤에 말야. 뜻밖인걸. 아, 내 정신 좀 봐. 토르 
그랜트를 소개할게."
  남자들이 악수를 나누는 동안 레니는 웬만큼 제정신을 찾은 듯했다.
  "늦지 않았으면 같이 한 잔 하면 좋을 텐데, 저녁하러 가니?"
  "르 시르크에서요."
  "오, 그래. 그럼 가봐야겠구나. 언제 한번 만나자꾸나. 우리 아파트 구하는 
중이다."
  폴은 무의식적으로 젊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펠릭스하고 말이다."
  레니는 아주 담담한 어조로 덧붙였다.
  "에밀리, 이렇게 보게 돼서 정말 기쁘구나. 저녁 시간 잘들 보내라. 그럼 
다음에 보자"
  "생각해보니까 우습네, 참."
  레니가 젊은 사내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폴은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생판 모르는 남자와 악수를 나눈 거지? 
얘기 한마디 나누지 못한 사람하고 말이야. 이모도 저 사람 얘기는 한마디도 
안했어. 다시 볼 리도 없는 사람인데."
  "이모님에겐 너무 어린 것 같은데?"
  에밀리는 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폴은 피식 웃었다.
  "이모가 좀 나이가 많긴 많지."
  "이해가 안 가요."
  "완전히 이모한테 취해 있던걸. 이모를 바라보는 그 녀석 눈빛 못 봤어? 레니 
이모가 다른 남자들한테 눈 돌리고 있는 줄은 진짜 몰랐는 걸. 하기야 당연하지. 
하나님은 아실 걸. 그게 당연하다는 것 말야. 하지만 좀더 세련되고 머리가 있는 
사람을 고를일이지. 이모 옆에 붙어있던 작자는 애야. 모든 종류의 섹스를 
차례로 경험해보려고 혈안이 된 젊은 놈팽이란 말이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느낌이야. 육감."
  그들은 르 시르크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됐다."
  에밀리는 불현듯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레니 이모 말이에요. 슬픈 일 같아요."
  "뭐가?"
  부츠를 벗어 종업원에게 건넨 뒤 에밀리는 잽싸게 이브닝 슈즈로 갈아신고 
있었다.
  "원하는 걸 얻어야 행복한 것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방황하게 
될텐데..."
  "그것밖에 선택할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뭔가를 오래 기다리면 그 꿈은 
이뤄지는 법이에요."
  "기다리면서 꿈을 현실로 만든다는 얘긴가?"
  그녀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남자들처럼 강제로 밀고 나가는 억지 말구요. 가장 현명하게 꿈을 이루는 
방법은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거예요. 그럼 언젠가 꿈이 이뤄진다고 믿어요. 
물론 손바닥 안에 있는 것이 뭔가 그것을 똑바로 알 수 있을 만큼 똑똑한 
여자라야 하겠죠."
  폴은 로라를 생각하며 그녀는 어떤 식으로 꿈을 이루려 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게 뭐였든 로라는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리는 대신 로라는 성급하게 
목표를 직접 만들려고 했다.
  에밀리는 그런 면에서 현명한 여자였다. 폴은 기다릴 줄 아는 에밀리를 
찬찬히 살폈다. 로마에서 폴이 선택하기를 기다렸던 여자, 사진 찍을 준비가 될 
때까지 얼마라도 기다렸던 여자, 어떤식으로 사진을 찍든 간에 늘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던 여자, 더 나아가 폴 젠슨이란 사진작가를 위해 ≪아이≫ 잡지사와 
마켄 에이전시를 뛰어다니며 사진을 보여줬던 여자. 또 다른 생각이 떠올라 
그는 한쪽 입술을 말아올리며 씩 웃었다.
  "왜 웃어요?"
  "내가 당신 손바닥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해서."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손바닥 보다는 마음속에 두었어요."
  "잘했군."
  폴은 낮게 중얼거렸다. 돔 페리뇽 샴페인을 갖고와 뚜껑을 따는 지배인을 
폴은 말없이 지켜봤다.
  "레니 이모하고 차 한잔 해야겠어."
  "나도 같이 가요?"
  "아니, 단 둘이 얘기하고 싶어서."
  그는 주의 깊은 눈길로 에밀리를 살폈다. 연한 청색 실크 드레스에 그가 
파리에서 선물한 사파이어 목걸이를 한 에밀리는 식당의 사치스런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본능적인 유혹을 드러내고 있는 그녀가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등을 보이고 달아나던 레니를 생가하며 폴은 더욱더 
에밀리의 도도한 아름다움에 빨려 들어갔다. 에밀리 말이 맞아. 진짜 슬픈 
일이야. 뭔가 좀더 나은 것을 위해 오랫동안 외로운 날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에게 말할 게 있어."
  그는 탁자 위오 손을 뻗어 에밀리 손을 잡았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17장
  창공을 나는 대머리독수리처럼 구오 레스토랑은 도시 전제를 내려다보고 있는 
존 핸콕 센터 95층 위에서 지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웨스 커리어가 새해 축하와 
OWL (OWL은 올빼미란 뜻도 있다. 역자 주) 개발주식회사의 시카고 샐링거 
호텔 매입 기념을 겸해 이백여  명의 축하객에게 저녁만찬을 제공하는 
자리였다. 로라가 OWL이라는 회사 이름을 제안했을 때 커리어는 극구 
반대했다. 
  "재정문제로 은행가들과 만날 텐데 꼭 장난하는 것 같잖아. 웃음거리가 될 
거야. 좀 근엄하고 보수적인 이름이 좋겠어. 심각한 것 같으면서도 약간 밝은 
것으러 말이야."
  "난 좋기만 한데. 나한텐 중요한 뜻이란 말이에요."커리어는 로라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OW는 오엔에게서 딴 것이겠고, L은 로라한테서 딴 거지? 하지만 지금 우린 
게임하는 게 아니야. 장난하기엔 게임판이 너무커."
  "웨스, 난 꼭 이걸로 하고 싶어요. 진심이에요."결국 그렇게 해서 회사 이름이 
정해졌다. OWL 개발이란 이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후 커리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재빠르게 회사를 주식회사로 등록시키는 한편 능숙한 솜씨로 
구백만 달러를 투자하여 호텔 매입을 성사시켰다. 형식상 구매대금은 두 사람이 
함께 투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사백오십만 달러로 호텔 주식 오십 
퍼센트를 사들인 커리어는 로라에게 같은 액수의 돈을 대부해주는 형식으로 
호텔을 OWL 소유로 만들었다. OWL 개발주식회사를 세우기 위해 투자한 
지금도 두 사람이 양분해 투자한 것으로 서류 정리를 시켰다. 결국 로라가 
커리어에게 빌린 대금은 사백오십만 달러였다. 호델을 매입하기 전에 커리어는 
출장 계획까지 변경시키며 시카고에 있는 로라를 찾았다. 업무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때마다 그는 든든한 기둥처럼 그녀를 뒷받침해주었다. 로라는 한 동안 
시카고와 단톤스를 오가며 일을 처리해야 했다. 켈리와 존이 새 부지배인과 
호흡을 맞출 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커리어와 의논해 건축기사를 
고용한 로라는 시카고에 올 때마다 그와 함께 호텔보수 계획을 의논했다. 
로라는 오웬과 함께 얘기했던 호텔 재복원 계획안을 거의 그대로 기억해냈다. 
그후 로라는 커리어가 잘 아는 은행가를 만났다. 두 사람이 제출한 청사진을 
검토한 은행가는 시카고 셀링거를 매입하여 전면 보수할 수 있도록 자금지원에 
쉽게 응낙했다.
  그렇게 준비된 자금으로 커리어는 로라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부하직원을 통해 호텔 매입을 추진시켰다. 펠릭스가 낡은 시카고 호텔을 팔고 
싶어 한다는 소문은 오래전에 나돌았었다. 부친의 유언장 문제를 다룬 소송건이 
아진 재판에 회부된 상태에서 나던 소문이었다. 매입에 생각이 었던 두 재벌을 
동시에 놓친 뒤 늦가을을 맞아야 했던 펠릭스가 분통을 터뜨리며 시카고 
부도산계를 싸잡아 욕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결국 그런 상황에서 펠릭스의 시카고 부동산 중개인과 협상을 벌였던 커리어측 
직원은 커리어가 예상하고 있던 천만 달러보다 백만 달러가 더 싼 호조건으로 
호텔을 쉽게 매입할 수 있었다. 협상서류나 매매서류 그 어느 곳에도 로라 
페어차일드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를 대신해 펠릭스의 시카고 
변호인과 만난 로라의 시카고 변호인은 모든 것을 OWL 개발사 이름으로 
진행시켰고, 시카고 금융계에 로라를 소개시킨 커리어도 그녀를 OWL 개발사의 
호텔 지배인으로 불렸다 펠릭스가 언젠가는 호텔의 실소유자를 알게 될 테지만 
그래도 로라는 그때까지만 이라도 비밀에 부치고 싶어했다. 가능하다면 
오래도록, 오웬의 나머지 세 호텔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때까지 자기 정체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OWL 개발사가 샐링거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럴 계획은 없으니까 안심하십시오."
  "뭐라고 명하실 건데요?"펠릭스의 변호인이 쓸데없이 물어왔다.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호텔 이름은 이미 지어져 
있었다. 로라와 커리어만이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로라는 호텔을 비콘 힐로부를 
생각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 호텔을 계속 사들일 때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 호텔을 계속 사들일 때마다 같은 이름을 
붙일 계획이었다. 다른 것이라곤 비콘 힐 앞에 붙을 도시 이름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커리어의 주문에 따라 구오 레스토랑의 주방장은 새해를 
맞이하는 그믐밤 파티 티저트용으로 시카고 비콘 힐의 글자가 그ㅋ박으로 
새겨진 케이크를 준비해야만 했다. 홀빼미 한 마리가 상단에 장식된 케이크였다. 
홀 입구 정중앙에 탁자를 놓고 케이크를 올린 로라의 의도대로 열시 정각에 
몰려든 손님들은 모두 다 케이크를 향해 환호성을 지러댔다. 검정 타이를 맨 
남자들과 화려한 옷차림의 여인들은 마치 장난감 가게를 들여다보는 아들처럼 
사각의 햐얀 케이크를 보고 한참동안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클레이가 로라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올빼미는 내 아이디어야. 딴 사람한텐 말 안할게. 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의 
주인공이 나라는 건 인정해줘야 돼. 금박은 웨스가 하자고 그랬대. 모자 
테두리를 보고 생각했대나 어쨌대나..."
  "알아, 잘했어."로라는 인사를 건네기 위해 다가오는 손님들을 기다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클레이."
  "고맙긴.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우아한 시카고 비콘 홀의 부지배인인데, 
상사한테 잘 보야야지.
  홀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마리나를 발견한 클레이는 그녀에게 윙크를 보냈다. 
클레이의 얼굴은 더할나위 없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로라, 여긴..."커리어는 한 친구에게 로라를 시카고 비콘 힐의 지배인으로 
소개시켰다. 그녀는 케리어의 친구와 악수를 교환하며 미소지었다.
  "멋있어요. 아주 아름답습니다."로라에게 다가와 악수를 한 어느 사업가는 
감탄을 연발했다.
  "자네도 마찬가지야, 웨스. 아주 좋아 보여. 검정타이도 근사하고 그런데 
무엇보다 휼륭한 건 자내 여인아야. 너무 아름다워."그는 계속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로라는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커리어는 친구의 찬사를 들으며 로라를 
다시금 주시했다. 그녀를 안 지 육개월, 로라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문득문득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얼굴이었지만, 그 속엔 미소와 
즐거움, 기쁨 그리고 사랑이 이었다. 그는 로라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손님들을 
맞이했다. 누가봐도 그가 그녀의 주인이란 것을 눈치챌 수 있는 제스처였다. 
살며시 자신에게 몸을 기대오는 로라를 느꼈을 때 그는 여자를 통해 느끼지 
못했던 소유감과 자부심을 만끽할 수 이었다.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홀가분하게 자신에게 기댈 수 있도록 그녀가 진 짐을 대신 
짊어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나서 반가웠네. 여기 오래 있을 건가? 점심 어때?"로라가 유리벽으로 된 
식당을 기웃거리는 동안 두 사람은 만날 약속을 정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친구를 바라보던 로라는 웨스에게 부탁했다.
  "바깥을 좀 내다보고 싶은데 잠깐만 자릴 비우면 안될까요?"
  "당신 파틴데, 뭘 못하겠어. 더군다나 올 사람들은 다 온 것같건."계속 로라의 
허리에 팔을 두른 커리어는 식당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메인 
식당 옆,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시바리스 라운지에 모여 바텐더가 내 놓은 
칵테일을 마시고 이었다. 로라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피해 거의 천장처럼 
보이는 대형 우리창으로 다가갔다. 자동차의 오렌지빛 헤드라이트와 사무실의 
푸른 빛, 광활하게 뻗어 있는 어두운 호숫가를 따라 이어진 아파트의 흰 조명은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저 아래 불빛 중에 당신 몫이 있겠지."뒤편에서 로라를 감싸안은 그의 손이 
젖가슴 바로 밑으로 모아졌다. 
"완벽하게 당신 걸로 만들 수 있어."로라는 편하게 그의 가슴애 등을 기댔다. 
케리어는 폴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폴보다 두 배쯤 되는 나이에 자수성가한 
사업가. 체계적이고 흔들림 없는 인생관, 어떻게 보면 독신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남성이었다. 그녀는 식당 건터편에서 마리나와 건배를 하고 있는 클레이를 
지켜보았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거나 자기 기준에 미치지 않는 젊은이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커리어었으나, 단지 로라라는 여인 때문애 그는 클레이에게 
국제 무역이나 은행업무를 성의껏 가르쳐주고 있었다. 무역 규모 면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클레이는 커리어의 지도를 제법 잘 따라가고 있었다. 로라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생전 처음 스스로 책을 잡은 클레이는 로라가 
추천해준 열댓권의 책까지 군소리없이 읽어내는 열성을 보였다, 새 호텔의 
부지배인 자리를 약속해준 까닭에 로라가 무슨 말을 하든 고분 고분 잘 따랐다. 
보스턴과 필라델피아, 그리고 단톤스에서 배운 실무 능력에 새로운 지식을 
더해가며 그는 아주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일자리와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누나  때문에도 그랬지만, 마리나의 자부심과 속삭임 또한 그를 
책 속으로 파고들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남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모두 다 행복한 것 같애. 로라는 식당 소음을 뚫고 흘러드는 피아노 선율에 
몸을 맡긴 채 다시 시카고 야경으로 눈울 돌렸다. 마음의 눈으로 그녀는 오웬의 
미소를 느꼈다. 느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오웬의 부드러운 손길도 느낄 수 
있었다.
  "멀리 길 떠난 사람 같은데?"
  커리어의 입술이 로라의 귓바퀴를 애무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시나, 로라 아가씨?"
  "꿈을 생각했어요."
젖가슴 밑으로 온 커리어의 손 위에 로라는 자신의 손을 살며시 얹었다.
  "오웬하고 내가 꿨던 꿈을요."
  "내 꿈도 붙여줄 거지?"
  "그럼요."
  그러나 아직은 오웬의 꿈이었다. 누가 워래도 오웬과 로라 페어차일드 둘만이 
나누는 꿈이었다. 그녀는 순간 물밀듯 밀려오는 그리움에 목이 메어옴을 느꼈다. 
은빛 수염을 반짝이며 손님들 사이를 누벼야 할 오웬이었다. 비콘 힐과 
게이프에서 그랬듯, 파티 후 자신과 함께 손님들 흉내를 내기 위해 사람들 
말투와 버릇등을 유심히 지켜볼 오ㅞㄴ의 자애로룬 눈빛이 그리웠다.
  자정이었다. 묵은 해와 새로운 해가 순식간에 자리바꿈을 하는 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 러라는 지금껏 케리어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완전히 열린 마음으로 
그에게 키스했다.
  "해피 뉴 이어, 웨스. 앞으로 우리 두 사람 앞에 행복하고 멎진 일만 나타나길 
기원해요."
  "모든 걸 우리 둘이서 함께 나눌 거야."결혼에 대한 암시를 그녀가 
받아들였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로라는 새해 첫날을 
시카고의 케이페어 레젠트 귀빈실에서 맞이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차가 우면서도 쾌청한 일월의 하늘 아래 잔잔하게 
찰랑이는 짙푸른 호수였다. 쌀쌀한 실내공기 때문에 로라는 따스한 침대 속으로 
다시 둘어갔다. 침대에 누어 창 밖을 바라보면서 로라는 비콘 힐을 떠올렸다. 
어젯밤 커리어가 속삭이던 말이 생각났다. 결혼과 호텔. 결혼을 하는 것이 
호텔을 잡아둘 수 있는 길이란 말인가? 그녀는 초조한 기분으로 객실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아냐, 그건 앞뒤가 안 맞아. 결혼을 하면 호텔을 잡을 수 없어. 늘 
간이 있길 원하니 결혼하면 더 자주 출장길에 동반해야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나머지 호텔은 고사하고 손애 들어온 시카고 호텔까지 영영 날아가게 돼.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와의 결혼 자체가 싫었다. 그 누구하고든 
결혼은 실어. 아무하고도 결혼 같은 건 안할 거야. 결혼보다 중요한 일이 
있는데, 안돼, 결혼은 안돼. 만약 상대가 폴이라면? 폴이 다시 나타나 짙은 
눈빛과 그윽한 눈매로 유혹해 온다면? 일 때문에 정신 없는 와이프를 
쫓아다니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남편이라...
  또다시 옛추억을 떠올리는 자신에게 그녀는 매서운 칼질을 했다. 이러면 안돼. 
절돼 안돼, 로라. ㅅ해야.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해. 옛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올 시간이야. 얼마 전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불쑥 떠올랐다. 사랑하는 남자를 취할 수 없는 여인에 관한 
글이었다.
  - 여름비처럼 달콤한 그의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여인의 가슴에는 영원히 
적혀지지 않을 목마른 밭이 존재한다.
  그녀를 위한 글 같았다.
  그래, 맞아. 그럼 그대로 놔두지, 뭐. 그렇게 마른 조각으로 남아 있으라고 해. 
거기에 폴을 앉혀두면 돼. 그 사람이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런 
기분으로 살아가면 목마르지 않을 거야.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며 그녀는 계속 생각에 빠졌다. 할 일아 너무 많았고, 
세워야 할 께획들이 산적해 있었다. 오웬이 준 사랑의 서물을 되찾기 위해 
올라가야 할 계단은 아직도 멀었다. 커리어의 손이 그녀의 가슴 위로 올라왔다.
  "너무 일찍 일어났어."
  "늦겠어요. 벌써 다섯시 삼십분인데요."
  그는 눈을 벌쩍 뜨며 로라를 바라보았다.
  "새해 첫날 다섯시 삼십분에 일어나는 사람이 어딨나?"
  "비콤 힐 욕실 배관공사 때문애 뭣 좀 물어..."
  "이런 사람 참!"
  장난기 섞인 그녀의 미소에 어쩔 수 없이 따라서 웃고만 커리어는 그녀를 
안으려 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우리 둘만의 배관공사를 하는게 어때?"
  "나 진짜 지금 가야 돼요."
  그러나 로라는 사랑과 모든 것을 준 커리어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그의 품속에 
정열적으로 뛰어들었다. 세로운 설계를 위해 뛰는 자신을 그가 이해하히라는 
생각과 함께. 항상 모든 걸 이해해주는 사람, 로라는 그가 자신의 속마음도 
이해해주리라 믿었다. 결혼할 수 없는 로라의 마음을.
  "오늘은 휴무입니다!"
  사랑을 나눈 뒤 욕실로 걸음을 옮기면서 커리어는 로라에게 소리쳤다.
  "오늘 쉬는 날이야. 나랑 산책해야 돼."
  "어디로 가게요?"
  호텔에서 제공되는 호화로운 가운을 벗으며 커리어가 들어간 욕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다른 욕실로 들어서던 로라가 역시 큰 소리로 물었다. 이 가운이 
하루에 몇 개나 없어질까? 이따 지배인한테 물어봐야지.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호텔사업 생각뿐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상점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으나, 먀셜 필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코트 속으로 찬바람이 
파고들었으나 커리어와 로라는 강변길을 산책했다. 추위로 바들바들 떨면서도 
로라는 메이페어 리젠트 한 블록 앞에서 동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직 완성 되지 
않은 비콘 힐을 보기 위해서였다. 텅텅 비어 있는 시카고 샐링 거. 두 사람은 
찬바람을 맞으면서 오랫동안 묵묵히 그 건물을 올려다 보았다.
  "아이스 케이크보다 훨씬 더 멋있는데."활기찬 도시 분위기에 비해 텅텅 비어 
있는 호텔이 쓸쓸해 보이는 것 같아 그녀는 약간 속이 상했다.
  "그럼, 당연하지. 새해 꼭두새벽부터 배관공사 생각을 한 사람이 있는데 
어련하겠어?"그는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보수 계획안을 볼 때마다 내가 매번 감명받는 거 알아? 오웬이란 분 아주 
대단한 사람이야. 당신도 그렇지만."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난 빼줘요. 이 호텔은 단지 오웬의 비전이 실현될 장소예요. 난 그분 대신 
일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해요."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런 각오라면 분명히 성공할 거요. 아주 크게."
  로라는 그의 격려를 안고 분주하게 작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청사진에 따라 
보수공사를 지위하는 한편, 아파트를 구하려 아녔다. 그녀는 일월 중순경, 드폴 
구역에 있는 빅토리아식 육층 아파트에 세를 구할 수 있었다. 창문을 열면 
서쪽에서 기차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었다. 섬셈하게 조각된 멋진 벽난로와 
손님용 객실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부근에 드폴 
대학이 있다는 점이었다. 유모차를 밀면서 산책하는 젊은 부부들과 눈사람을 
만들며 떠드는 어린이들, 겨울바람에 떨고 서 이슨 커다란 트름나무 밑으로 막 
학교를 파한 고등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곳은 도시라기 보다 
시골냄새를 풍기는 아담한 곳으로, 옷턴의 비콘 힐을 떠올리게 했다. 클레이도 
일마일쯤 떨어진 곳에 마리나와 함께 살 집을 구했다.
  "왜 머리나를 싫어하는 거야?"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아 클레이는 로라에게 
볼맨 소리를 했다. 호수를 다라 호텔로 가는 노선 버스에서 약속 시간들을 
확인하고 있던 로라는 그의 퉁명스런 질문에 가방 속으로 서류를 재빨리 쓸어 
넣었다.
  "싫어하진 않아. 좋아해. 사랑하지 않을 뿐이지."
  "왜?"
  "넌 사랑하니?"
  "내 얘긴 왜 꺼내? 난 지금 누나 마음을 묻고 있는 거야."
  "클레이, 얘기해봐. 그 여잘 사랑하니?"
  "함께 살고 있는데."
  "클레이."
  "그런 것 같애. 아니 잘 모르겠어. 사랑에 빠진 건지, 아니면 그냥 신나게 갖이 
노는 건지. 누나는 어떻게 그걸 알지. 누난 웨스하고 사랑에 빠진 것 같애?"
  "아니 그냥 좋아할 뿐이야. 사랑하진 않아. 넌 어때?"
  "가끔. 진짜 견디기 힘들 때도 있긴 해. 마리나는 그개 재밌나봐. 어린애 
같기도 해. 선물 사주면 애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데, 그럴 땐 정말..."
  "선물 자주해?"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어두었다.
  "그럼 안돼?"
  "내켜서 하는 일인데 안될 건 없지."무슨 돈으로 그렇게 선물을 해대는 거냐고 
따끔하개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내 마을을 바꿨다. 아무리 철이 없는 
동생이라도 마치 어머니처럼 이것저것 물어볼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왜 넌 선물 받았단 소리가 없니? 주기만 했어?"
  "선물 사줄 필요가 없으니까 그랬겠지. 딴 방법으로 날 행복하게 해주거든. 
다른 건 몰라도 진짜 날 사랑하는 것 같애. 나에게 누가 또 그렇게 해주겠어? 
누나 말고 딴 사람이 날 그렇게 신경 서주겠냐구? 엣날에 형이 우리 두 사람을 
영원히 돌봐주겠다고 했을때 얼마나 감격했는지 알아? 하지만 지금으니 형 
필요없어. 난 혼자라도 괜찮아. 하지만 누난 안 그런 것 간아. 항상 누군가를 
필요로 하잖아."
  "그래, 네 말이 맞아."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로라는 클레이에게 몸을 기댔다.
    "특히 어깨가 강한 남자를 말야."그녀는 밝게 웃었다.
  "형한테 소식 있었어?"
  "아니. 곧 오겠지. 내 생일날엔 항상 카드를 보내주니까/"
  "생일이 다음주네. 우리 시카고에 있는 거 알고 있어?"
  "호텔 샀다는 애기하고 주소 보냈어. 네가 안부 전한다는 애기도 했다."
  "내가 언제 그런 소리했어?"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연관되기 싫어. 형하곤 절대, 절대로 싫어!"
  "그런데 왜 얘긴 꺼내고 그래? 네가 먼저 묻지 않았어?"
  "그렇긴 하지만... 빌어먹을!"그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형을 그렇게 못 잊겠어?"
  "너도 마찬가지야. 형을 잊지 못할 거다. 무슨 짓을 했든 말이야."
매일 아침 미시간 거리를 통과해 호텔에 도착할 때마다 로라는 새롭게 변해가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로 설치된 창문을 제오하면 겉모습은 옛날과 변함이 없었다. 석회암과 
벽돌로 된 담벽에서 시커먼 때를 제거한 뒤 현관을 새로 단 것이 새로울 뿐 
외부 모습은 그전과 흡사했다. 기적은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클레이와 
함께 코너를 돈 로라는 클레이의 함성에 감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야! 대리석이야. 드디어 도착했구나!"
  욕실 벽을 장식할 얇게 저민 대리석과 소용돌이 무늬로 욕조바닥을 장식할 
두툼한 대리석이었다. 모양은 용도별로 각기 달랐지만 빛깔은 모두 진한 녹새과 
진한 청색이 섞인 비둘기 색이었다. 고정 붙박이 가구들은 휜색으로, 모든 
타월은 푸른색으로 정했다. 객실에는 예회없이 욕실에서 최고의 편안함을 
그낄수 있다'는 광고문을 내세울 계획이었다. 커리어와 의논해 자문디자이너로 
고용한 크리스티앙 드레이에게 로라는 자신의 그런 생각들을 얘기해 두었었다.
  "똑같이 구며야 돼요. 여자쪽은 핑크와 금색으로, 다른족은 시카고 페트리엇 
축구팀 분위기로 꾸며야 된다는 고정관념은 아예하지 말아요."
  "페트리엇이 아니라 시카고 베어스예요."
드레이는 프로 앞에서 까부는 아마추어를 경멸하듯 눈을 내리깔며 대꾸했다.
  "알았어요. 꼭 기억하죠. 뉴잉글랜드 쪽에서 지냈기 때문에 페트리엇이 입에 
익었나봐요. 다른 것들고 얘기해 줄래요? 시카고에 관한 것들 말이에요. 그럼 
이방인이란 트낌을 벗을 수 있을텐에"
드레이는 전문가의 세련된 안목을 무시하고 멋대로 이것저것 지시하는 로라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보통 푸른 색 타월은 싫어해요. 깨끗한 색, 흰 색을 제일 좋아하죠."
  "하지만 마셜 필드 영업부 사람들 말에 의하면 흰색보다 빛깔있는 타월이나 
시크가 훨씬 더 많이 팔린다고 하던데요. 그걸 보면 대부문 무색보다 색이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자기 집에선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호텔에선 아니예요."
  "어쟀든 이건 내 호텔이에요. 파란색이 제일 낫다고 생각해요."그녀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잠깐 좀 앉으시죠? 자체 회사를 운영하신다구요?"로라는 임시 사무실 한 
가운데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드레이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선 채로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웨스 커리어씨가 우리 회사의 휼륭한 디자인 업무실력을 평가해 이 호텔..."
  "커리어씨하고 내가 결정한 겁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요점을 말해볼까요? 자부심을 갖고 자체 회사를 운영하는 분으로서 사람들이 
이것저것 지시하는 게 싫으시겠죠?"
  "정확해요. 바로 맞췄어요."
  "내 입장을 얘기해볼게요."로라는 더욱 상냥하게 말했다.
  "지금가지 한 한 번도 내 것을 가져본 적이 없는 여자예요. 그런데 이렇게 
호텔 하나를 갖게 됐어요. 자부심과 기대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완벽한 호텔로 꾸미고 싱어요. 그래서 지금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화장실에 걸리니 후지 종류부터 가켓, 현관 앞에 놓일 
안내데스크까지 모두 다 관여하고 싶은 심정에요."그녀는 꿈에 취한 표정이었다.
  "침착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꿈이 실현됐다는 안도감 때문에 
실수라도 하게 될까봐 여간 걱정이 아니예요. 그래서 실내 디자인께에서 제일 
탁월한 당신을 찾게 된 겁니다. 배우고 싶어요. 그것뿐이 아니예요. 다른 도시에 
있는 호텔 세 개를 더 따낼 계획이에요. 우리 둘이 같이 일해요. 그럼 분명 
서로에게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진솔한 로라의 말에 그의 마음이 어느새 풀려 
있었다.
  "그럼 먼저 쿠션 빛깔부터 골라봅시다. 아주 종류가 많아요."그는 미소까지 
지으며 넓은 책상 위에 정사각형 원단뭉치를 하나씩 펼쳤다.
  "쿠션 색갈도 욕실을 꾸밀 때와 마찬가지예요. 상투적인 분위기는 싫어요. 
콤비로 하면 좋겠어요. 아주 밝고 대담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편안함을 트낄 수 
있도록. 물론 남자, 여자 다 똑같아야죠"
  그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주 독특한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중간색으로 단순한 회색이나 푸른색으로 
하면 되겠군요."
  "남북전쟁 때 군인들 복장처럼요."
  그러면서 로라는 책상에서 가위와 필통을 꺼냈다.
  "이 샘플 내가 좀 잘라봐도 되겠죠?"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녀는 샘플 
원단을 사각사각 가위질 해나갔다.
  "우리 둘이 이렇게 먼저 본을 떠보면..."
  결국 회색 바탕에 보라색 금색 붓꽃무늬가 깔린 양탄자를 손수 만들어야 했던 
크리스앙 드레이는, 그 견본을 에섹스 공장으로 보내 똑같은 무늬와 재질로 
커튼 휘장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 이후 드레이는 매일 아침 로라가 예전에 
지배인이었들 때 사용하던 사무실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일꾼들이 망치를 놓는 
시간까지 로라 옆에 붙어서 샘플을 뜨고, 결정하고, 납품업자를 만나 크고 작은 
일들을 검토하는 한편, 가구종류, 배치, 객실디자인, 로비와 레스토랑을 꾸미는 
방법, 로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티 라운지 장식 등에 프로다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드레이의 조언에 따라 로라는 헨레든 소파 세트를 호텔 
주가구로 고를 수 있었다. 푸른빛이 연하게 감도는 보라와 흰색, 진한황금색, 
암녹색 등의 빛깔에 싸인 소파들은 실크와 울이 멋들어지게 어울려 은은한 
광택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른 가구들은 거의 옛모양을 그대로 지닌 골동품으로 
채워졌다.
  잡화물품들로는 에르메스, 클리니크, 세바스티앙 등 열댓 군데가 넘는 
유명상품들이 줄을 잇고 찾아왔다. 그들끼리 경쟁을 시켜 가며 계속 단가를 
인하시켰던 로라는 아주 싼값에 최고급품을 욕실과 화장실에 배치시켜 놓았다. 
대단한 수완이었다. 샴푸, 린스, 핸드클;ㅁ, 티슈, 매니큐어용 손톱줄, 칫솔, 치약, 
면도기 등 로라가 원하는 품목은 한이 없었다. 그렇게 되자 각 회사 영업담당 
이사들은, 아니 사장가지 나서서 벌써부터 우명해진 로라의 우렵식 호텔에 
물건을 납품하기 위해 별별 방법을 다 동원했다. 단가가 얼마든 최고급으로 
꾸미겠다는 주인의 뜻에 따라 모든 납품업자들은 이익 여부를 떠나 우선 새로은 
기린아로 떠오르고 있는 호텔에 자사제품을 들여 놓을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국제적 체인으로 운영되는 대그룹 호텔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뛰어 넘으려는 
것이 로라의 야심이었다. 식당에 들어갈 식기류도 빠뜨릴 수 없는 품목이었다. 
로라는 한 세트당 식기 세트, 레녹스 크리스탈이었다. 로라는 객실 분위기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오엔의 비콘 힐 저택에 있던 자신의 방분의기를 그대로 
연출한 생각이었다. 클레이와 함깨 그꼈던 따뜻한 집안 분위기를 손님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로라는 르 페로케 식당에서 저녁을 하던 이월 어느날 
밤 커리어에게 그런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집처럼 아늑하게 꾸미고 싶어요."
  로라의 생활으르 축하하기 위해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서 돔페리뇽으로 
건배하고 있었다.
  "손님들이 진자 그런 분위기를 좋아할 것 같애? 바보들이 아닐텐데. 호텔과 
질을 구별 못하겠어? 호텔이든 집이든 편안하게만 꾸미면 될 것 같은데."작은 
바다가재를 포크로 찍어 소스에 담그던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일 좋아하느느 호텔 이름 생각나는 대로 말해볼래요?"
  "메이페어 레젠트."
  그는 로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즉시 대답했다.
  "하지만 어떻게 셍갸ㅆ는지 기억도 안 나. 당신과 함께 있었던 것 
밖에."그녀는 살짝 웃으며 다시 물었다.
  "다른 호텔들은?"
  "다른 데라... 파리 리츠호텔, 런던의 47파트 스트리트, 암스테르담 샐 링 거, 
샌프란시스코 스탠퍼드 커트 그리고..."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해요?"
  "대부분 작지만 서비스는 최상급이었지. 편안하고 조용하구."
  "잘 정돈된 집처럼요."
  "우리들이 끄밀 집처럼?"
  "모든 집들이 다 그럴 거예요."커리어는 심삭해 보였다. 새해 첫 키스를 나눈 
이래 그는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로라의 시카고 드폴 
아파트로 찾아올 때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결혼 약속을 되살릴 수 있도록 
행동하곤 했다. 하지만 로라는 결혼 얘기를 은근히 피하고 있었다.
  "생일을 위해 정식으로 건배해야지."기분을 바꾼 듯 커리어의 목소리는 
평온하게 들렸다.
  "고마워요. 멋진 생일을 맞게 해줘서."
  "아직 선물도 안 받았는데 그런 소릴 해?"
  "지난 십이월에 벌써 받았는 걸요. 내가 가장 원했던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잖아요."
  "일주일에 백 시간 이상 일하게 만든 걸 말하는 건가?"
  "아무래도 좋아요. 전라레인지 아니면 오리털 침대, 그섣도 아니면 삶에 
유용한 물건을 나한테 준거난 마찬가지에요. 나한테 천말 달러를 투자해 
은행에서 이천만 달러를 융자 받을 수 있게 도와준 대신 말이에요."
  그는 기분 좋은 웃음을 떠뜨렸다. 그가 생생을 좀 내려고 할 때 마다 기분 
나쁘지 않게 굴복할 줄 아는 여자였다. 젊고 경험이 적은 여자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능력이었다. 침대 바깥에서도 매력을 풍기는 여자. 끌어당길수록 
강한 도전혁으로 독립하려는 여자가 로라였다.
  "반지를 하나 샀는데..."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미안해요."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 그래도 다행인걸. 대응책으로 이걸 또 준비했거든."그는 자그마한 벨벳 
상자를 내밀었다.
  "닐 위해 시간 좀 내라는 의미로 이걸 샀어."
  손 모양으로 세공된 커다란 다이아몬드 두 개와 깨알같은 다이아몬드가 
테두리를 수놓은 얄팍한 금장시계였다.
  "세상에, 너무 여뻐요. 이런 시계는 처음 봐요."
  "반지는 호주머니에 있는데."그는 그녀를 지켜보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요하지 말아요, 웨스. 자꾸 그러면 우리 둘 다 
불편해져요. 그냥 시계만 받을게요. 고마워요. 내가 뭔데 이렇게..."
  그는 항복하듯이 웃어보였다. 언젠가는 결혼을 수락하겠지. 강요해서 될 일도 
아닐 테구. 자기 입으로 말을 하면서도 커리어는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텔을 완성시키기 위해 온 정신을 쏟고 있는 로라였다. 커리어는 
로라가 펠릭스에게 뺏긴 것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운명에게 받은 명령을 
완수한다는 의무감으로 호텔에 전념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오웬 샐링거와 함께 했던 일 -그녀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미래에 대한 꿈울 
심어준 바로 그 오엔과 나누었던 계획들- 을 그녀는 신들린 듯 실행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가 할 일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자정 무폅 커리어와 함께 아파트로 들어서던 로라는 현관 바로 밑에사 전보 
한 장을 발견했다. 발신처는 암스테르담이었다.
  "암스테르담에 아는 사람이 있었나?"
  "벤 오빠예요. 언젠가 얘기했죠. 카드는 매번 받았지만 전보는..."
  이상한 예감에 덜리는 손으로 전보를 뜯어낸 그녀는 급하게 읽어 내려갔다.
  멋진 행일가 새해를 맞길 기원함 뉴스가 많다. 호텔 경비대장으로 얼마 전 
승진. 알리슨 샐링거와 결혼 예정. 복수를 위한 멋진 첫걸음. 사랑하는 벤 
그녀는 몇 자 안 되는 전보를 읽고 또 읽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뭐 내가 도와줄 일 없어?"
  로라는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니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네? 아, 아니됐어요. 아니 있어요. 전보 어떻게 보내죠?"
  "암스테르담으로?"
  "네."
  전화번호부를 뒤져 번호를 찾아낸 커리어는 그것을 종이에 적어 주었다.
  "나, 서재에 가 있을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녀는 커리어의 따뜻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면요. 고마워요, 웨스."
  어떻게 알리슨을 만났을까? 참 세상도 좁다. 두 사람이 도데체 어떻게 만날 
수 있었지? 그것도 사랑에 바졌다구? 아냐, 오빤 사랑에 빠진 게 아냐. 복수 
때문이지. 무엇 때문에? 분명히 무슨 비밀이 있어. 그래서 그때도 샐링거를 
꼽았던 거야. 복수. 복수. 그토록 잊어버리려고 발버둥치던 추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땀 흘려가며 테니스를 가르치던 알리슨. 메뉴 읽는 법이며, 무례한 
웨이터 휘어잡는 법 등을 꼼꼼하게 일러준 것도ㅗ 그녀였다. 어울리는 
블라우스를 찾기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부튼가와 보일스턴가를 돌아다니면서도 
밝은 미소를 짓던 알리슨. 서재에서 펠릭스가 숨겨진 과거를 들추어내며 비난을 
할 때 충격 빼문에 비틀거리던 알리슨 샐링거.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떠나가버린 친구였다. 친구에게 등을 돌린 
배신자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잖아. 그애도 나처럼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거야. 
나처럼 말야. 기다릴 수도 있었는데. 등을 돌린 배신자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잖아. 그애도 나처럼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거야. 나처럼 말야. 기다릴 수도 
있었는데. 등을 돌릴 시간은 언제든 있었는데. 그래, 기다리지 않았어.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추억들을 지울 수는 없었다. 벤 가드너가 알리슨 샐링거를 
복수이 무기로 이용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로라는 커리어가 남기고 간 메모를 
보여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수신인 이름은 벤 가드너... 그녀는 전보 접수계에 벤의 암스테르담 주소를 
불러주었다.
  알리슨은 내 친구였어. 해치지 마. 뭐가 됐든 옛일은 다지나갔어. 복수는 
생각하지 마. 로라
  시카고 비콘 힐은 크리스마스에 개관될 예정이었다. 구오 
빌딩스카이라운지에서 열린 기념파티 후 거의 일년이 지나고 있었다. 로라는 
비서들에게 초대장을 준비하도록 이르고 새롭게 꾸민 사무실에 앉아 조용히 
치르기로 한 파티를 위해 스케줄을 짜고 있었다. 비콘 히ㅊ 개장에 앞서 친한 
사람들기리 조촐한 파티를 치를 작정이었다. 식당은 매끼마다 정찬을 준비할 
예정이었다. 오폐라, 관련악단, 박물관, 쇼핑을 위해 번쩍거리는 리무진들도 
주차장에 대기시켜 놓았다. 케리어가 초청할 사람의 명단을 만들어 놓았다. 
로라는 직접 초청장을 디자인했다. 비콘 힐이라는 호텔 이름이 금박으로 인쇄된 
카드와 호텔 문장 바로 위에 푸른색과 금색의 아이리스가 새겨진 봉투였다. 
명단을 책상 위에 둔 채 스케줄을 짜던 로라에게 낯선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로라 폐어차일드입니다."
  "로라페어차일드."누가 들어도 텍사스 출신임을 알 수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선으로 흘러들었다.
  누가 들어도 텍사스 출신임을 알 수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선으로 
흘러들었다.
  "정말 세상도 좁댜. 나는 지니 스타렛이에요."
  지니 스타렛.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몇 년 전의 한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보스턴 샐링거 호텔 로비, 여자의 비명소리, 소파에 누어 있던 버지니아 스타렛, 
그녀의 마스카라 자국을 닦아내던 일과 쥘 프클레여에게 차를 갖고 오라 이른 
일들이 바로 어늘 아침의 일처럼 또렸이 기억났다.
  "지니, 반갑네요. 이렇게 전화를 주시다니... 어디예요 절 어떻게 찾아냈어요?"
  "뉴욕이예요. 웨스 커리어 때문에 로라를 찾아냈어. 멋진 친구지. 다음달 
파티에 날 초대한다고 카드를 보냈다는데, 내 얘기 안했나보지?
로라는 아직 발송하지 않은 카드 뭉치로 눈을 돌렸다.
  "명단은 웨스가 만들었거든요 그 사람이 지니를 알고 있는 줄 몰랐어요. 여기 
올 수 있죠? 꼭 오세요. 다시 만나면 얼마나 좋겠어요."
  "물론 가야지. 내가 얼마나 신세를 졌는데.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직도 
모르지만 말야."
  "신세는 무슨..."
  "쉿, 내가 졌다면 진 줄 알아.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알아? 육개월인가 
팔개월 뒤에 다시 그 호텔에 갔더니 없더라구. 어디갔는지 아는 사람도 없구 
말이야.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람이 어딨어? 어쨌든 만나서 얘기 
실컷하자. 웨스 얘기도 해줘야 돼. 그 친구가 호텔 뒈에 있는 모양이지?"
  "네."
  "아주 좋은 사람이야. 그건 그렇고 나 특실에 넣어줄 수 있는 거지?"
  "특실분이겠어요. 아예 귀빈실로 모시죠."
  로라는 흥분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잠시 후에야 
그녀는 그 이우를 깨달았다. 지니 스타렛은 과거 속의 존재였다. 과거. 그녀는 
과거에 굶주려있었다.
  "귀빈실은 웨스가 다른 사람한테 이미 약속한 것 같던데. 얘기안했나보지."
  "그런 얘긴 못 들었어요. 지금 뉴욕에 있거든요. 오늘 전화 통화를 못했어요. 
특실도 멋져요, 지니. 두 분으로 예약해 놓으면 되겠죠?"
  "나 하나면 돼 윌리하곤 그 직후에 이혼해버렸어, 다 로라 덕분이야. 그때 
얘기했던 것 아직도 기억하지? 로라의 그 말 대문에 변호사를 찾아갔었어. 
이혼하려구.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제가 이혼하라고 한 적운 없는 것 같은데..."
  "그것보다 더 멋진 말을 해줬지. 내가 그때 어땠는지 알아? 뚱뚱한 몸매에 
술에 취해, 허옇게 표백한 얼굴로, 에스터 로데 분공장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허옇게 덕지덕지 바른 얼굴로 조깅에 미친 당나귀하고 결혼한 신세를 
한탄하면서 펑펑 울어댔잖아. 그때 로라가 그랬어. 폭력을 가하는 살람들한테 
굴복한다는 건 너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야. 윌리 스타렛이 날 그렇게 몇 
년씩 두들겨팼어도 어느 한 사람 그런 소릴 안해줬는데, 젊디 젊은 여자가 그런 
기가 막힌 충고를 해주잖아.
  그래서 그 즉시 변호사를 찾아간 거야. 그 수탕나귀 가랑이 속에 숨겨진 돈을 
박박 짜냈더니 몇 백반 달러가 나오더군. 아, 참 생각난 김에 물어보자. 샐링거 
일가 소문 이젠 흥미없는 건가, 아니면 아직도 관심있어?"로라는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이런, 어린얘 같긴. 보스턴하고 뉴욕 돌아다니다 주워들은 얘기야. 남 
얘기라면 얼마나 신이 나서 떠들어대. 오웬, 그 사람 유언장 사건을 신문에서 
읽었는데 그땐 펠릭스가 떠내기 위해 어쨌다는 둥. ㅡ글쎄, 누가 알겠어. 레니가 
누구랑 재미 보고 있는 사이에 펠릭스도 신나게 다른 데서 벌거벗고 레슬링 
했을지.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 알리슨 샐링거가 유럽 어딘가에서 철저하게 
비밀에 싸인 남자와 약혼했다는 소식이 있더군. 요번 크리스마스때 결혼할 
예정이라는데 펠릭스하고 레니는 그 남자 얼굴조차 보기 싫다고 한다나? 
그것뿐이 아냐, 어딘가에선 ..."
  "잠깐만요."로라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목에 뭔가가 걸힌 듯한 느낌이었다.
  "혹시... 그 남자 이름이 뭔지 알앙요? 결혼한다는 사람 말이에요?"
  "글쎄. 다들 모르는 인물이래. 샐링거 호텔에서 일한다는데, 지배인인가, 
경비대장인가, 뭐 그렇대. 하지만 정확하지 않아. 신경써서 듣지 않았거든. 
왜냐하면 더 재미난 얘길 동시에 들었거든. 결혼 얘기 말야. 알리슨 그애 사촌도 
결혼식을 올린다나봐. 그 상대 여자가 내가 알고 있는 애라서 확실히 알고 
있어."
순간 로라는 심장의 박동이 멎는 듯했다.
  "사촌 누구요?"
  "폴 젠슨. 벌써 결혼했겠다. 에밀리 컨트하구. 보스턴의 순수한 혈통인데, 기가 
막히게 멋진 얘야, 몸매, 얼굴, 정말로 아름다운 여자지."로라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이, 미안해라."로라의 침묵이 마음에 걸렸는지 화제를 바꿨다.
  "일하고 있었을 텐데 주책 없게 나 혼자 떠들었으니. 미안해, 로라. 괜찮은 
거지?"
  "그럼요."무의식적으로 대답은 했지만 로라는 온 몸이 땅 밑으로 꺼지는 둣한 
느낌이었다.
  "언제 도착할지 시간 알려줘요. 오시면 시간 내서 차 한잔 같이 하고 싶어요."
  "물론 그래야지. 그런데 목소리가 아무래도 이상한데? 내가 기분 나쁜 소리 한 
건 아니지?"
  "아니예요." 될 수 있는 한 자연스럽게 로라는 지니에게 인사를 했다.
  "개관식 때 오신다고 해줘서 고마와요. 그럼 그때 봐요."
  전화수화기를 내려놓은 순간, 로라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더위와 한기가 
번갈아가며 찾아들었다.
  몸이 왜 이러지? 여태껏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내가 왜 이렇까? 
로라는 책상 모서리를 붙들었다.
  지니 스타렛이 떠들던 얘기가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샐링거집을 털지 
말라고 했는데. 지난 이월에도 알리슨과 결혼하지 말라고 그렇게 애원했는데...
  두 눈울 꼭 감은 그녀는 벤을 생각했다. 다시 만나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오빠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그러나 더 큰 충격은 폴의 
소식이었다. 벤에게 생각을 집중시키려 해봤지만 허사였다. 에밀리 컨트. 폴과 
에밀리. 현기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그녀는 내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말 
개관식 계획들, 초정장 묶음, 계산서, 청구서, 카탈로그, 해야 될 일이 잔뜩 쌓여 
있었다. 새로 꾸며 나가야 할 세계가 그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과거로 
들어가는 문은 이미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완전히 해방됐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해방은 결코 없었다. 과거는 현재를 이루고 있는 
일부분이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 과거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들을 다 한군데 몰아 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더 이상 쳐다보지 않을 
결심으로. 과거는 과거 그 자체로 있어야 했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그녀는 용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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