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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CEO 누르하치

by Casey,Riley 2020.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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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명의 기병으로 창업해 마침내 중국 대륙을 M&A한 청 태조 누르하치. 미래에 대한 투철한 믿음과 더불어 누르하치가 대륙을 정벌하기 위해 활용한 오랑캐식의 다양한 전략과 전술은 21세기의 생존비법으로서도 충분히 벤치마킹의 대상이 될 만하다.

 

글로벌 CEO 누르하치

- 중국을 M&A한 오랑캐경영전략 -

 

 

Short Summary

누르하치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단지 13명의 기병으로 일어나 중원의 지배자가 된 이 여진족의 작은 부족장은 결코 시대를 타고난 영웅은 아니었다. 감성적이고 여린 마음을 가진 보통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과 경험을 얻어내 현실에 적용할 줄 알았다. 그 점에서 그는 난세를 이용할 줄 아는 전략가요, 정치가이며, 뛰어난 사업가이자, 탁월한 경영자였다. 그는 냉혹한 현실정치의 장에서 수많은 난국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힘을 얻었다. 거침없는 야망, 웅대한 포부, 풍부한 지략, 미래에 대한 투철한 믿음으로 가득 찬 누르하치는 많은 장수들과 자신을 묵묵히 따라준 군사들의 도움으로 결국 중원을 평정하게 된다. 요즘 기업용어로 얘기하자면 적대적 M&A를 통해 한족(漢族)의 명나라 경영층을 완전히 갈아치운 것이다.

 

미약한 세력과 척박한 지리조건에도 불구하고 때를 기다리고(天時), 사람들 다스릴(人知) 줄 알았던 누르하치는 슬기로운 경영자였다. 누르하치가 대륙정벌을 위해 활용한 다양한 전략과 전술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벤치마킹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이 계속 바뀌어온 중국역사를 되짚어보면 여진족이 지배한 청나라는 가장 최근의 이민족 통치사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중국 대륙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주인을 계속 바꿔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창업해 웅장한 뜻을 이뤄낸 누르하치의 경영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 책은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산물이 아닌, 현 시대 경영의 핵심교훈으로 삼고자 하며, 나아가 청 태조 누르하치의 지략을 통해 영웅들의 창업과 수성의 성공과 실패사를 되돌아보고 이를 현재에 비추어 재조명하고 있다.

 

차례

1 누르하치, 그는 누구인가

2 오랑캐식 경영 전략 : 전통과 방식을 벤치마킹하다

3 한 사람의 CEO가 세상을 바꾸다

4 중국 M&A의 완성과 새로운 창업의 길

 

글로벌 CEO 누르하치

- 중국을 M&A한 오랑캐경영전략 -

전경일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 20057/ 160/ 5,000

 

1. 누르하치, 그는 누구인가

 

1583, 한 젊은이가 명나라 군사들에게 쫓겨 백두산에 숨어들었다. 얼마 후 그는 의협심이 강한 여진 소년 7명과 의형제를 맺고 13명의 기병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의 아버지는 누르하치에게 13벌의 갑옷밖에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13벌의 갑옷은 창업 동지들의 몸을 감싸기에 충분했다. 얼마 후 그에게는 30여 명의 동지들과 100여 명의 부하가 생겼다.

 

누르하치는 1559년 여진 부족의 하나인 건주여진의 한 부장(部將) 집에서 태어났다.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여진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다. 멧돼지의 가죽은 질기다. 또한 그것만큼 뜨거움과 차가움을 잘 이겨내는 물건도 없다. 누르하치는 천만 가지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 부족을 이끌어 나가라는 염원에서 그의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누르하치는 매우 총명했다. 그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쳤다. 열 살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말을 타고 활을 쏠 줄 알았으며 검술과 봉술에도 능했다. 귀신같은 활솜씨 때문에 신전수(神殿手)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5세에 독립하여, 68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약 40년에 걸친 누르하치의 도전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그는 정복을 위한 전쟁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의 정복전은 언제나 CEO가 앞장서는 친정(親征)이었다. 스스로 앞서 나아감으로써 백성들이 따르게 했다. 바로 이 점에서 창업 CEO다운 면모가 드러난다. 누르하치는 분명 시대를 앞섰던 사람이며, 나아가 21세기형 경영을 실천한 미래의 개척자였다.

 

역사 이래 광활한 중국 대륙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천하를 제패하고자 수많은 영웅호걸이 북방에서 일어나 대의(大義)의 깃발을 내걸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우리 겨레의 광개토대왕, 거란족의 야율아보기, 여진족의 아구다, 몽골족의 칭기즈칸만이 이름을 날렸을 뿐이다. 누르하치는 이러한 영웅들의 성공과 실패의 발자취를 가슴에 품고 일어나 중국을 지배한 이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사실 여진족은 서주(西周)시대부터 수(), ()대를 거쳐 송(), (), (), ()에 이르기까지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다. 고난과 즐거움이 반복된 역사였다. 여진족에게 고통과 쇠락의 시기는 대부분 동족 내부의 분열로 서로를 죽이고 다툴 때였다. 여진족은 광활한 여진의 초원지대에 걸쳐 살고 있었으나, 누르하치 때까지 통합되지 못했다. 통합되지 못했으므로, 힘을 한 방향으로 모을 수 없었다. 방향 없는 힘은 동족상잔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한족(漢族)의 교묘한 이간책도 크게 한 몫 했다.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중국에는 금(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의 왕조가 차례로 세워졌다. 중국 역사의 상당 부분이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역사라는 사실은 중국을 다스린 주인이 변해왔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누르하치가 등장한 16, 17세기에도 동북아시아에서는 패권 이동의 대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라는 동북아시아의 큰 혼란을 틈타 고구려의 옛 터전인 여진 허투알라에서 건주여진의 후예로 누르하치가 나왔던 것이다.

 

 

2. 오랑캐식 경영 전략 : 전통과 방식을 벤치마킹 하다

 

창업에서 수성으로, 성공 메커니즘 : 여진족이 중국대륙을 얻기까지는 칠대한(七大恨)’을 내세워 대명 선전포고를 한 1618년부터 북경에 진입한 1644년까지 총 27년의 세월이 걸렸다. 세대로는 3대에 걸쳤고, 명의 잔병들까지 몰아낸 1683년까지는 66년이라는 실로 오랜 시간이 투여되었다. 명실상부한 정복사업은 태조 누르하치 때 시작해 4대 강희제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한 사람의 창업자가 단 13명의 군사를 데리고 창업한 지 6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창업은 그 완성을 보게 된 셈이다. 대를 이은 부단한 노력 끝에 얻어낸 실로 값진 성과였다. 청 왕조의 역사는 창업자 정신을 후임 CEO들이 꾸준히 이어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흔히 창업은 쉽지만 수성은 어렵다는 말이 있다. 이는 창업정신이 무뎌지지 않고, 2, 3대까지 지속되기 어렵다는 얘기이다. 창업하는 데에도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야 하는데, 수성까지 이어가려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야 되겠는가. 누르하치 군대가 승리한 것은 창업 상태의 지속이라는 정신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성장을 위한 제휴 : 몽골에 대한 누르하치의 장기적인 전략은 제휴와 정벌이라는 양면 병행 정책이었다. 이는 강한 세력과는 군사적 대결을 피하면서, 소규모 세력은 흡수하는 이중 전략의 일환이다. 누르하치는 제휴를 맺으면서도 기회만 생기면 계속 국지전을 일으키는 전략을 취했다. 누르하치는 명으로부터 제대로 배웠다. 적을 통제하기 위해 다른 적을 끌어들이되, 그 적이 화근이 되지 않도록 통제했다. 몽골족을 일정 지역 내 거주하게 한 것, 부족 상호 간의 왕래나 통신 등에 대해 철저한 감시를 행한 것 등은 모두 명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누르하치의 몽골에 대한 이 같은 정책은 오늘날 기업 인수합병전에 흔히 등장하는 LBO(Leveraged Buy-Out)와 유사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LBO란 타인자본, 즉 외부 차입금으로 조달된 자금으로 기업을 M&A하는 것을 말한다. 누르하치는 몽골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여분의 힘을 확보함으로써 이를 레버리지해 명 왕조를 인수하는 힘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결국 작은 만주족 군대(자기자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몽골(외부 차입금)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끌어들여(레버리지) 중국 M&A를 성공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휴 없이 혼자 대업을 이루겠다고 했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커다란 결실을 적을 통해 이룬 셈이다.

 

중국 정복의 대서사시-시작은 작게, 끝은 웅대하게 : 여진족은 언제부터 이런 웅장한 뜻을 품게 되었을까? 여진족의 전설적인 대서사시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였다. 준비하는 자세로 작은 성공을 쌓아가던 끝에 누르하치는 1601년 열하성(熱河省)에 정착하고 있던 부족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해 나가기 시작한다. 일사불란한 전투 병력을 조직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든 군대가 팔기군이다. 1616년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해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금()이라고 칭했다. 1625년에 그는 심양(瀋陽)에 수도를 정했다. 그의 뒤를 이은 태종 홍타이지는 1635년에 여진이라는 호칭을 만주로, 다음 해에는 국호를 매우 순결하다는 뜻의 대청(大淸)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이전의 부족적 의미의 여진족은 만주인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이는 여진 내부의 통일을 상징하던 후금시대로부터 다음 단계인 대청(大淸)시대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청은 만주족, 한족, 몽골족의 3대 종족을 아우르는 범이민족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소수민족은 다수를 어떻게 지배했을까 : 중국을 정복한 청 왕조 내에서 만주족의 수는 대략 2%밖에 되지 않았다. 지배민족의 수치고는 턱없이 적었다. 이는 새우가 고래를 삼킨 것과 같았다. 얼마 전 대우버스를 인수한 영안모자가 연상된다. 모자와 버스, 외관만 보아서는 전자가 후자를 인수한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인수회사가 피인수회사보다 외형이나 직원수 등 여러 면에서 훨씬 작은 탓에 과연 제대로 관리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만주족의 중국 정복도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다. 만주족은 지배민족으로서 특수한 지위를 누리고, 각종 특권과 이권에 개입함으로써 한족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인원이 적을수록 민족적 동질성과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탁월함의 경영 : 만주족이 중원을 얻게 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그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어떻게 그 적은 인원으로 많은 수의 이민족을 동원해 자기 목표를 이룰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비밀은 팔기제에 있다. 팔기는 기의 색깔에 따라 8개로 구분한 군대 편성 단위였다. 처음에는 만주족 중심으로 편제되었지만, 나중에는 만주팔기와 별도로 몽골 족으로 구성된 팔기, 한인팔기가 조직되었고, 1644년 입관(入關, 북경으로 진입하는 길목인 산해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함)할 때까지는 169,000여 명의 군대가 편성되었다. 여기에서 만주족의 숫자는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만주족은 이 같은 적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중국 정복을 이루었던 것이다.

 

또한 명의 구신(舊臣)들에 대해서 유화적 태도를 취했다. 이는 인심을 얻으려는 전략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한인 관리의 협조가 없으면 중국 지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청은 명의 마지막 황제를 후하게 장사 지내 북경에 묻어주었고, 이를 통해 민심의 교란을 방지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만주족의 중국 지배는 자신들의 정복욕 탓이 아니라, 명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역적들을 평정해 중국 땅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는 명분을 주지시켰다. 청의 이 같은 유화조치는 성공적이었다. 백성들에게는 누가 황제가 되든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조직적으로 만한 이원체제를 도입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그리하여 주요 관직은 양 민족이 거의 동수를 차지했다. 명실공히 성공적인 국가 인수합병전이 완수되고 공동운영체계가 성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공동경영방식을 취하는 한, 한족에게 청은 물리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동참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누르하치는 이처럼 명분을 바탕으로 실리 획득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한족의 적은 갑자기 흐릿해지고 말았다. 만주족은 유능한 한인들을 과거를 통해 뽑아 올렸다. 이 같은 전략은 전 왕조의 무능한 경영층과 비교할 때 청 왕조 경영층의 우월성을 입증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청이 명을 대체한 것은 한 국가의 경영층만 바뀌는 식이었다. 이 새로운 경영층은 무능하지 않았다. 경쟁력 우위를 지닌 채 피인수층을 끌어안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청 왕조는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왕조가 될 수 있었다. 성공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누르하치의 성공 배경에는 탁월한 경영이 자리잡고 있었다.

 

중화주의의 굴레를 벗어 던지다 : 12세기부터 중국은 사실상 이민족과 한족이 순차적이며, 역동적으로 지배권을 교차해왔다. 1127년 여진족에 의한 금()의 성립은 송()을 남송(南宋)으로 축소시켜놓았고, 이어 원()의 건국은 다시 한 번 중국의 주인을 몽골족으로 바꾸어 버렸다. 1368년 주원장에 의한 명의 건국은 다시 한족 정권의 대반격을 의미한다. 그 후 여진족에 의한 후금(後金), 곧 청()의 건국은 다시 동북아시아에서 발생한 세력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념적 정체(政體)는 현대에 와서 한족이 경영주체로 복구된 정권이다. 천안문 앞에서 이루어지는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사실상 한족에 의한 중국 지배의 유화적이며, 이이제이(以夷制夷)적 제스처다. 즉 이민족정부 대표자를 끌어들이려는 중국식 통일주의의 상징적 표현인 것이다. 여전히 중국을 구성하는 피의 색깔은 다양하며, 그들 간의 역사와 이해, 요구도 현격히 다르다.

 

경영이란 인재다, 인재를 찾아내라 : 팔기를 조직한 후, 누르하치는 1616년 국호를 금(), 연호(年號)를 천명(天命)으로 하고 정복사업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귀순한 한인과 몽골인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1577년에 인구 10만을 넘지 못했던 만주족은 인근 부족을 점령한 뒤에 4050만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16년에 이르자 누르하치의 세력은 북쪽으로는 흑룡강 중하류와 우수리강 유역까지, 동쪽으로는 조선의 육진, 남쪽으로는 관전(寬甸), 서쪽으로는 요동 변경까지 세력을 넓혀 명실상부한 국가수립의 조건을 마련했다. 이 무렵 누르하치가 귀순자들을 만주팔기에 귀속시킨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조치였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전쟁포로들까지 팔기에 편입시킴으로써 팔기 제도는 만주족만의 체제가 아닌, 다민족사회, 군사제도로 발전해 나갔다. 이는 포괄적 민족정책의 결과였다. 지배영역이 늘어나면서 인재의 수요도 크게 늘어났다. 누르하치는 대 중국 인수합병전을 수행하면서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또한 누르하치는 장기적인 지배의 성패는 민심을 사로잡는 데 있다고 판단하고 점령지의 민심을 달래는 데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줄곧 그의 몸과 정신에 배어 있던 야생의 냄새가 이제 서서히 지워지고 보다 차원 높은 정치력이 이를 대체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무렵 누르하치는 지배방식을 보다 유연하게 하고자 했고, 나아가 현지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형식을 취하고자 했다.

 

3. 한사람의 CEO가 세상을 바꾸다

 

동북아시아의 소()에서 대륙의 주역으로 : 1589년 누르하치는 건주여진 대부분의 부락을 통합하고 건주여진의 새로운 맹주로 등장하게 되었다. 1616년을 기점으로 누르하치는 대부분의 만주족을 휘하에 두었고,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후금을 세운 다음해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무순(撫順)성을 함락시켰다. 후금이 명의 총대장 장승음을 전사시키고, 1만여 명의 군사들을 패퇴시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자 명 조정에서는 만주족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 동원령을 내리고 심양에 주력군을 파병했다.

 

산해관은 북경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산해관에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이 바로 영원성이었다. 성을 지키고 있던 명의 장군 원숭환은 만주팔기가 승리한 원인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부족한 병사를 신식무기로 보충하고자 했다. 당시 홍이포는 누르하치의 철기군단을 효율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로 평가받았다. 원숭환이 홍이포로 무장한 사실을 모르고 총공격에 나선 누르하치의 군대 앞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력을 자랑하는 대포알이 날아왔다. 이날의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포탄이 깊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병세는 나날이 깊어져갔다. 7월에 청하온천(淸河溫泉)으로 요양을 갔다가, 1626930일 다시 심양으로 돌아오던 중, 이 야심찬 청조의 창업자는 심양에서 40여 리 떨어진 애계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은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짐 없는 정복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평생을 자신의 경영현장인 전쟁터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 이때, 이 위대한 여진족 지도자의 나이는 68세였다.

 

글로벌 CEO, 누르하치 : 누르하치는 13명의 기갑병으로 군사를 일으켜, 중국 한족의 교묘한 분열정책을 극복하고, 사분오열된 동족을 통합해냈다. 그 다음, 그는 결사적으로 한족과 맞서서 중국 인수합병전에 나섰다. 이를 위해 경제적군사적 거점을 확보하고 인구와 자원을 끌어 모으는 등 비상한 경영능력과 용인술을 드러낸 것은 물론이다. 이는 누르하치만의 탁월한 경영능력이었다. 나아가 전 여진족을 팔기라는 형식적 제도로 묶어 멀티형화, 정보맨화, 전사화해냈다. 그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최강의 군단으로 여진족을 정예화한 것은 전통과 혁신을 결합시킨 가장 놀라운 경영성과로 볼 수 있다. 또한 동북아시아의 패권이 이동하는 기회를 시의 적절하게 활용했다. 이러한 그의 국제적 감각과 판단력은 가히 글로벌 CEO의 전형이라 부르기에 조금도 손색없다. 그 만큼 누르하치는 희대의 탁월한 경영자였다.

 

그는 먼저 지나간 수레바퀴의 자국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고삐에서 풀려나는 소가 되는 날, 여진사회는 완전한 국가가 되는 것이고, 만주지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종국적으로 중원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중국 M&A 프로젝트는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꿈은 결코 작지 않았다. 누르하치에게는 해가 떠서 해가 지는 끝없는 대륙의 지평선만이 목표였다. 그는 이 같은 대륙의 웅혼한 기상을 품고 창업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랑캐라는 사실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랬다, 여진족은 오랑캐였다!

 

누르하치의 이 같은 각성이 끝내 민족의 과제를 끌어안은 것이다. 한 사람의 CEO가 세상을 바꾼 셈이다. 만주족의 성공은 누르하치 개인의 역량에 힘입은 바 크다. 이는 마치 오늘날 CEO의 역량이 기업 성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다. 그는 만주어, 중국어, 몽골어 등 3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국제인이었다. 따라서 누르하치는 중국몽골조선이 연결되는 동북아시아 무역 및 정치군사 구도를 파악하고 패권을 잡는 데 필요한 정보를 누구보다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기본토대 위에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동족을 통일하고 훗날 중국 대륙을 M&A하게 만들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가 탁월한 경영자가 될 수 있었던 건, 그의 모든 꿈과 희망이 실행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주족의 비전을 온몸으로 제시하며 앞으로 달려 나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 누르하치 성공의 11가지 비결

1. 가진 것 없이 출발했다.

2. 혼인과 정복이라는 양면 정책으로 여진 내부를 완전히 통일해냄으로써 단결된 힘을 외부로 뻗칠 수 있었다.

3. 강력한 군사조직인 팔기제를 만들어 이를 활용했다.

4. 극복 대상인 중국의 역사정치경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5.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마련했다.

6. 누르하치는 중국의 권위나 화려한 생활, 나아가 중화주의에 물들지 않았다.

7. 목표를 높게 세웠다. 교역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이 아닌,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8. 팔기의 군사들은 물론이고, 모든 민과 병을 통일시켰고, 멀티형 인간으로 훈련시켰다.

9. 만주족은 무엇보다도 트릭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거대한 명분으로 포장한 명 왕조의 허상을 간파했고, 그런 까닭에 한족보다 훨씬 더 교활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10. 전략적 제휴를 통해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만주족에게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제휴하지 못할 대상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몽골한테도 그랬고, 한족 내부의 인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1. 적의 방식으로 적을 굴복시켰다. 한족의 이이제이, 기미정책을 써서 오히려 한족의 심장을 겨누어 적을 무력화시켰다.

 

 

4. 중국의 M&A의 완성과 새로운 창업의 길

 

경쟁을 통한 후계자 선정 : 누르하치에게는 여러 부인으로부터 얻은 16명의 자식이 있었다. 누르하치는 죽을 때까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죽어 가는 전왕이 차기 대권 주자를 정하기보다는, 살아 있는 자들이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럴 때 잡음도 없을 것이며, 협력자들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참다운 후계자가 등장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8남 홍타이지가 왕위에 올랐다. 장남 추연은 이미 죽었고, 차남 대선은 남아 있었지만, 이 같은 원칙 하에 결국 중국 M&A라는 대업은 홍타이지가 이어받았다. 홍타이지는 중국 역사가들에게 한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역대 중국 황제 중에서 가장 지략과 전략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멈추지 않는 정복신화 : 청 왕조의 기반을 세운 CEO들의 특징을 분석하면, 누르하치는 앞장서서 밀어붙이는 깃발형’ CEO였고, 홍타이지는 전략가형 CEO라고 할 수 있다. 섭정왕으로 홍타이지의 아들 순치제를 도와 중국대륙을 M&A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숙부 도르곤은 황제에게 방향을 잡아주는 코치형지도자로 볼 수 있다. 만주족의 중국 M&A에는 다양한 리더십이 시의적절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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