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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글쓰기가 뭐라고

by Casey,Riley 2020.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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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 동안 300권 가까운 책을 펴낸 강준만 교수가 자신 만의 글쓰기 비법 30가지를 소개한다. 글쓰기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강준만 교수가 제안하는 핵심은 이렇다. 주눅 들지 마라, 뻔뻔해져라, 글쓰기의 고통에 속지 마라. 강준만 교수는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글쓰기의 고통은 과욕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는 글쓰기에 대한 환상과도 맞물려 있는데, 강준만 교수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글쓰기의 환상과 신화, ‘글쓰기는 이래야 된다는 기존 문법들을 과감하게 해체시킨다. 그리고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어깨에 힘을 빼면 글쓰기가 즐거워진다.”

글쓰기가 뭐라고

 

 

Short Summary

나는 신문 기사 하나에도 각주(脚註)를 달려고 안달하는 편이다. 내가 각주를 는 것은 글 쓰는 자의 윤리이자 더불어 감사의 표시이다. 아울러 내 책을 징검다리로 해서 관련 주제를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는 독자에 대한 서비스와 함께 겸손을 지키기 위한 성찰의 의미도 있다. 이런 각주 사용법에서 드러나듯, 나는 오늘날 저자란 편집자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동의하며, 그 동의의 실천을 지향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나는 어떤 주제에 대해 책을 쓸 때엔 관련 책과 기타 자료들을 구할 수 있는 한 모두 다 구해서 읽어보는 못된버릇이 있었는데, 이젠 그 버릇을 버리기로 했다. 사실 나의 이 못된버릇은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다. 돈도 많이 들고 시간과 노력을 얼마나 잡아먹는지 내심 이럴 시간에 내 생각이나 더 말하는 게 훨씬 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왜 그런 미련한일을 계속해왔던가?

 

나는 논문이든 잡글이든 글을 쓰기 전에 선행 연구(또는 생각)를 검토하는 건 기본적인 윤리인 동시에 더 나은 글을 만들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문득 과연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책에서도 그게 좋은 생각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들이 이 많은 책을 다 읽을 수 없을 테니, 내가 대신 읽고 핵심 메시지만 전해주겠다는 뜻으로 부지런히 인용을 해댔지만, 독자들이 원한 건 그게 아니었다.

 

글쓰기는 크게 2가지 즉, 스타일 중심의 글쓰기와 메시지 중심의 글쓰기로 나눌 수 있다. 내 글은 스타일에 약하고 메시지 실용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나는 스타일은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이 책에 서 말하는 글쓰기는 글쓰기로 세상 보기를 하자는 것으로 생각중심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대부분의 글쓰기 책이 스타일 중심의 글쓰기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반해 메시지 중심의 글쓰기 책은 많지 않다. 그래서 내가 할 말이 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둘째, 대부분의 글쓰기 책이 구체적으로 어떤 독자들을 겨냥 한 것인지 그게 영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문학적 글쓰기에 좋은 것이 실용적 글쓰기에도 좋을까? 일반적인 독자에게 전문 문인들 사이에서나 통용될 법한 조언을 해주는 게 바람직할까? 이 책은 주로 시사적 문제에 대한 논증형 글쓰기(주장과 근거로 이루어진 시설이나 칼럼 등과 같은 저널리즘 글쓰기) 공부를 하려는 대학생들을 주요 대상 독자로 삼는다.

 

셋째, 대부분의 글쓰기 책이 예외 없이 글은 어떻게 써야 한다는 규칙과 법칙을 말하는 식으로 확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글쓰기에 어떤 규칙이나 법칙이 있는 건가? 공식적인 규칙이 존재하는 맞춤법만 하더라도 짜장면처럼 언중(言衆)이 원하면 틀렸다에서 맞다로 바꾸는 법인데, 어찌 지식 엘리트가 바람직하게 여긴다고 해서 그게 곧 규칙이나 법칙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소통은 다수가 익숙하거나 편하게 생각하는 것을 존중하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다르다틀리다를 구분하지 않고 쓰는 것은 바로잡는 게 좋지만, 외국어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간결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해서 그걸 쓰면 안 된다는 식으로 규칙화하는 것엔 동의하기 어렵다. 확신과 단정적인 어법은 소통의 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설득이다. 그럼에도 심리학자와 언론학자들은 글쓰기 책 집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나는 평소 그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기에 이 책을 통해 설득의 심리학과 관련된 주제를 많이 다룸으로써 그런 아쉬움도 해소해보려고 노력했다.

 

차례

머리말_ ‘글쓰기 책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1장 마음에 대하여

작가들이 말하는 글쓰기 고통에 속지 마라 / 구어체를 쓰지 말라는 말을 믿지 마라 / 생각이 있어 쓰는 게 아니라 써야 생각한다 / 글을 쉽게 쓰는 게 훨씬 더 어렵다 / 글쓰기의 최상은 잘 베끼는 것이다 / ‘보다는 이 훨씬 더 중요하다 / “뭐 어때하면서 뻔뻔해져라 / 글쓰기를 소확행 취미로 삼아라 / ‘적자생존을 생활 신앙으로 삼아라 / 신문 사설로 공부하는 것은 양날의 칼이다

 

2장 태도에 대하여

글의 전체 그림을 미리 한 번 그려보라 / ‘간결 신화에 너무 주눅 들지 마라 / 김훈을 함부로 흉내내다간 큰일 난다 / 인용은 강준만처럼 많이 하지 마라 / 사회과학적 냄새를 겸손하게 풍겨라 /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스토리텔링을 하라 / ‘첫인상의 독재에 적극 영합하라 / ‘사회자가 아니라 토론자임을 명심하라 / 제목이 글의 70퍼센트를 결정한다 / 30초 내에 설명할 수 있는 콘셉트를 제시하라

 

3장 행위에 대하여

통계를 활용하되, 일상적 언어로 제시하라 / 우도할계의 유혹에 완강히 저항하라 / 추상명사의 함정에 빠지지 마라 / 양파 껍질은 여러 겹임을 잊지 마라 / 시늉이라도 꼭 역지사지를 하라 / 뭐든지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보라 / 양자택일의 문제로 단순화하지 마라 / 스스로 약점을 공개하고 비교 우위를 역설하라 /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라는 생각을 버려라 / 글쓰기가 민주주의를 완성한다

글쓰기가 뭐라고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811/ 224/ 13,000

 

1장 마음에 대하여

 

작가들이 말하는 글쓰기 고통에 속지 마라

글쓰기는 마조히즘이다. 모든 다른 범죄처럼 처벌받아야 하는, 자신을 향한 범죄다.” 프랑스 소설가 시도니 콜레트가 글쓰기의 고통과 관련해 한 말이다. 이렇듯 전문 작가들은 글쓰기의 고통에 대해 격렬한 언어로 말하며, 고통을 묘사하는 것도 드라마틱하다. 하지만 이런 발칙한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법하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건 그 정도의 고통은 있는 게 아닐까? 창작의 고통이 아무리 심하다 한들, 조직에서 생존을 위해 비굴해져야 하는 직장인의 고통보다 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문인들의 고통은 강요당한 것이라기보다 자발적으로 택한 것임에도 그렇게 고통스럽다고 외쳐대도 되는 걸까?

 

폴 오스터는 글쓰기의 고통을 말하면서 글쓰기를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글을 쓰는 게 너무 행복하단다. 오스터만 그러는 게 아니다. 글쓰기의 고통을 말하는 문인들이 모두 그런 식이다. 글 쓰는 게 행복해 죽겠다면서도 동시에 너무도 고통스럽다고 아우성쳐대니 이걸 어찌 이해해야 할까? “밑지면서 판다고 주장하면서도 많이 팔릴수록 좋아하는 상인과 무엇이 다를까?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글쓰기의 고통을 발설하는 건 문인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이야기 없인 살 수 없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이야기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각 직업마다 나름의 특권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작가들의 그런 특권을 인정하면서도 글쓰기의 고통담론이 유발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주목한다. 소설가 장정일은 특정 장르의 문학이 글쓰기의 피라미드 가장 높은 꼭대기에 좌정하고 있으면서 그 외의 글쓰기를 억압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문학이 너무 강한 사회는 온갖 사회적 의제와 다양한 글감을 문학이란 대롱으로 탈수해버린다는 이유에서다. 장정일은 이른바 문학적 글쓰기 패권주의현상을 고발한 셈이다. 나는 문학 문외한으로서 문학이 글쓰기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 다만 문학에 경외감을 갖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 논픽션 글쓰기를 하면서도 글쓰기의 준거점을 자꾸 문학으로 삼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로 인해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 주변에서 그런 학생을 많이 보았다. 시사적인 문제나 신변잡기라도 좋으니 A4 용지 1~2장 분량으로 글을 써보라는 요청에도 손사래를 치는 학생이 많다. 자신이 무슨 정상급 문인이라도 된 것처럼 글쓰기의 어려움을 큰 고통이나 되는 것처럼 과장해 말하는 경향이 있더라는 것이다. 이처럼 글쓰기의 고통을 느껴보기도 전에 그 고통을 말하는 이유는 문인들이 말하는 글쓰기의 고통이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 답은 한결같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 뱁새가 준거집단을 황새로 두면 불행해진다. 그래선 안 된다. 작가들이 말하는 글쓰기 고통에 속아 넘어가 자신이 글쓰기를 피하는 이유의 면죄부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전문적인 문인과 보통 사람은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이유가 다르다. 문인들이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힌 걸 보면 마치 온 우주를 책임지려는 듯한 기개가 엿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누가 보통 사람에게 그런 요구를 했단 말인가? 일반 대중은 작가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기 마련이고, 작가는 그런 수요에 부응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평범한 당신에게 그런 환상을 갖고 있단 말인가? 우리 모두 어깨에 힘을 빼고 가볍게 접근하자. 그러면 글쓰기가 즐거워진다. 치유하는 글쓰기의 저자인 박미라는 글을 잘 쓰려면 ~해야 한다는 원칙이나 원리를 버리고서야 비로소 글 쓰는 일이 행복해졌다고 말한다. 당신이 글쓰기 능력에서 평범한 중하층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문인들의 글쓰기 고통과 더불어 문학적 글쓰기를 표준으로 삼은 글쓰기 원칙은 당신과는 거리가 먼 상류층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자세를 갖고 아무리 힘을 빼도 글쓰기가 여전히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글쓰기에 임하는 자신의 자세를 살펴볼 일이다. 혹 일반적인 글쓰기에서조차 창작자가 되려는 과욕을 부리는 건 아닌가? 나는 창작자가 아닌 편집자의 자세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윤리적인 편집자다.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글쓰기의 고통은 과욕에서 비롯된다. 처음부터 자신이 모든 걸 다 만들어내겠다니, 그 얼마나 무모한 욕심인가. 중요한 것은 창조는 편집이라는 것을 흔쾌히 인정하는 마음이다. 여기에서 내 메시지는 간단하다. “작가들이 말하는 글쓰기 고통에 속지 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이지도 마라. 눈높이를 낮추면 글쓰기의 고통글쓰기의 즐거움이 된다.”

 

글쓰기의 최상은 잘 베끼는 것이다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말이다. “어디서 가져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져가느냐가 중요하다.” 프랑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의 말이다. "독창성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아이디어 도둑질을 숨기려고 애쓰지 마라. 오히려 축하하고 장려하라.” 영국 광고업계의 전설로 통하는 폴 아든의 말이다. 이 세 주장에 동의하시는가? 글쓰기를 그런 식으로 해도 괜찮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는 독자라면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남정욱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보는 게 좋겠다. “글쓰기의 최상은 잘 베끼는 것이다.” 나는 남정욱의 이 주장에 전폭적으로 동의한다.

 

남정욱은 오로지 자신의 통찰만으로 세상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은 무식한 생각이라고 단언한다. 나는 동시에 유치한 생각이거나 위선적인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무식하고 유치하고 위선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아주 많다. 이게 보통 사람들의 글쓰기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남정욱은 현재의 소생이 생각하는 글쓰기의 최상은 독창이 아니라 잘 베끼는것이다. 독창을 추구했더니 독()과 창()으로 돌아와 욕창이 생기도록 고생한 끝에 얻은 소중한 결과물이다며 베끼기의 주요 방법으로 잘 엮는것을 추천한다. “영업 비밀을 하나 털어놓자면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나는 일단 블로그와 카페를 검색한다. 열 개 정도면 청탁받은 소재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가 잡힌다. 소생이 하는 일은 이걸 죄 퍼온 다음에 중복과 근거 희박을 걷어내고 인물이나 사건 하나를 주인공 삼아 흐름을 재배치한 후 내 말투로 바꾸는 것이다. 딱 그게 전부로 짧으면 한나절, 길어야 사흘이다.”

 

남정욱의 이런 작업을 쉽게 생각하면 큰 오해다. 남의 글에서 중복과 근거 희박을 걷어내고 흐름을 재배치한 후 자신의 말투로 바꾸는 것은 고도의 기량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방식이 좋은 것은 독창을 부르짖다가 결국 글쓰기를 포기하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기량과 노력의 차이에 따라 글의 품질이 크게 달라지지만, 일단 글의 완성은 가능해진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표절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므로 절대 안 된다. 어디까지가 표절이고 어디까지가 표절이 아닌가 하는 것은 검색을 해서 관련 글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인 강원국 역시 당당하게 모방하자고 말한다. 무조건 모방이 아니다. 당당한 모방이다. 글쓰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독창성의 게임이라기보다는 기억력의 게임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의 게임이다. 많이 읽고 기억력이 좋을수록 머리에 든 게 많을 테니 그만큼 글쓰기도 쉬워진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우리는 독창성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 묘한 게임을 한다. 창조의 주역은 단 한 사람이라는, 그리고 그 사람의 아이디어는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리켜 독창성 신화라고 하는데, 이는 헛된 욕망에 불과하다.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입력된, 수많은 책에서 얻은 정보와 지식과 생각이 자신의 것이란 말인가? 참고문헌을 보지 않고 기억력에 의존해 그런 정보와 지식과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다고 해서 독창성을 주장할 수 있는 걸까? 그러다간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절도 망각증에 사로잡히기 쉽다. 부디 글쓰기의 최상은 잘 베끼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뭐 어때?” 하면서 뻔뻔해져라

글쓰기 재능을 연마하기 전에 뻔뻔함을 기르라고 말하고 싶다.”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의 말이다. 나는 평소 학생들에게 겸손하면서 오만하고 오만하면서 겸손하라고 말해왔는데, 이젠 이렇게 말하련다. “ ‘뭐 어때?’ 하면서 뻔뻔해져라!” 전문 작가에겐 부정적 비평을 이겨내는 게 중요하겠지만, 글쓰기 초심자에겐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 하는 부정적 비평을 넘어서는 게 중요하다. 전문 작가건 초심자건, 나는 뻔뻔함의 미덕자기효능감(self-efficacy)’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자기효능감은 자신이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걸 말한다. 자신의 글쓰기 능력에 대한 신념이 높은 학생일수록, 글 쓰는 것을 덜 걱정하고, 그러한 기술들이 개인적 성취에 유용하다고 여기며, 글쓰기에서 더 나은 수행을 한다.

 

전문 작가에게 자기효능감의 원천은 판매 부수다. 물론 비평가들의 호평까지 얻는다면 더욱 좋겠지만, 양의 문제일 뿐 악평을 받는 건 피할 수 없는 작가의 숙명이다. 책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그 어떤 악평에도 내심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심적 평온을 누릴 수 있다. 초심자에게 자기효능감의 원천은 작은 성공이다. 목표를 낮춰 잡고 글의 발표를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나중에 높고 큰 목표로 가기 위해서라도 처음엔 낮고 목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효능감은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라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뻔뻔함을 비판하는 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효능감을 느끼기 위해 그런 정도의 뻔뻔함을 갖는 게 도대체 누구에게 피해를 주며 왜 문제가 된단 말인가?

 

스티븐 기즈는 그의 저서 습관의 재발견: 기적 같은 변화를 불러오는 작은 습관의 힘에서 작은 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 밝히고 있다. 그는 지인으로부터 하루 30분 운동이 쉽지 않으니, 팔굽혀펴기 운동을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는 처음에 이 말을 듣고 비웃었다가 실제로 딱 한 번 해보고 나서, 이후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 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기즈는 한 번 하는데도 어깨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났고, 팔꿈치에 윤활유라도 칠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왕 자세를 취한 김에 몇 번을 더 했고, “좋아, 한 번 더. 좋아, 두 번만 더. , 다시 한 번 더!”라는 식으로 잘게 나눈 목표를 세웠더니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그는 나쁜 습관을 끓는 것보다 좋은 습관을 기르는 게 쉽다며, 작은 습관 시스템은 적용이 쉽고 마음가짐을 긍정적으로 바꿔주는 강점이 있다고 역설한다. 이걸 글쓰기에 적용해 매일 2~3줄 쓰기로 접근하라는 조언도 빠트리지 않는다.

 

어떤가? 그의 말처럼 시도해본다고 밑질 건 없잖은가. ‘매일 2~3줄 쓰기가 힘들다면 매일 1줄 쓰기는 어떤가? 그렇게 해서 글쓰기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글에 담을 내용을 전개하는 데도 뻔뻔함이 필요하다. 나는 학생들에게 종종2006년 독일월드 컵 때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홍명보가 후배들에게 한 말을 들려준다. “우리 선수들이 건방져졌으면 한다.” 그동안 해외에서 치러진 월드컵에서 한국 선수들이 상대팀 선수들의 눈빛이나 표정에 주눅 들어 제 기량을 다 펼쳐보지도 못하고 좌절을 겪었던 쓰라린 경험담에서 나온 조언이었다. 잘난 척해도 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글을 너무 겸손하게 쓰는 학생이 많다. 무난하고 깔끔하게 쓴 글이지만, 참신성이 없고 도발적인 새로움도 없어 속된 말로 안전빵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정도론 약하다. 글쓰기를 할 때엔 겸손하면서 오만하고, 오만하면서 겸손할 필요가 있다. 글에서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욕심을 내는 일에선 오만이 필요하며, 그런 욕심이 드러나지 않게끔 차분하게 논지를 펴 나가는 일에선 겸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너무 겸손한 나머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시점에서 글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바짝 긴장해 압축적으로 할 말 다 해야겠다는 공격성이 모자라다. 결론도 그날이 오길 바란다’,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꿈꿔보자등으로 끝나는 건 너무 약하다. 이는 세미나에서 상습적으로 나타나는 막판에 낙관주의자 되기와 유사하다. 세미나 내내 어떤 주제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해놓고 막판엔 할 수 있다로 돌아서는 낙관주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물론 그건 잘해보자는 의지를 다지는 취지로도 볼 수 있겠지만, 많은 경우 냉정한 현실 인식을 방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글에 전반적으로 당위가 너무 많고 어떻게가 빈약한 것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스스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방안을 제시해보는 적극성이 아쉽다는 것이다. ‘당위의 역설보다는 어떻게를 말하는 것이 값지다는 걸 잊지 말자. 부자도 아니면서 부자 몸 사리듯 하지 말고 욕심을 좀 내는 게 좋다. 내 글이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도록 하자. 아니면 어떤가? 다시 말하지만, “뭐 어때?” 하면서 뻔뻔해진다고 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잖은가.

 

2장 태도에 대하여

 

글의 전체 그림을 미리 한 번 그려보라

집을 지으려면 설계도가 필요하듯, 글을 쓰기 전에 글의 주제에 대한 전체 그림을 미리 한 번 그려보자. 정교한 설계도를 요구하는 건 아니기에, 그저 밑그림이라고 해도 좋겠다. 일단 총론을 세워놓고 각론으로 들어가자는 뜻이기도 하다. 대체로 많은 학생들이 주제 전체보다는 어느 한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주제에 대해 잘 몰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주제 전체의 모습을 요리해보겠다는 마인드가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돌입하기 전에 논점을 확실히 하는 건 물론 논리 전개 방식까지 미리 머릿속에 정리해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써나가다 보면 나중에 논점을 잃고 갈팡질팡하게 된다. 평가를 받아야 하는 학생의 처지에선 중요도에 따른 지면 배분을 미리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당신은 제한된 지면과 시간에 얽매인 처지다. 결코 한가롭지 않다. 중요한 건 부각해야 한다. 이는 글의 총체성과 포괄성을 배려하면서도 특별히 악센트를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한 학생은 200자 원고지 5매도 안 되는 분량의 글에서 한일 양국에 대한 관계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과거의 한일 관계와 현실 진단을 하고, 앞으로 전망을 해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고려대학교 교수 이남호는 원고지 3분의 1을 이런 낭비성 문장으로 채우는 수험생도 있는데, 이는 자신의 글쓰기 실력과 사고력이 부족하다는 걸 드러내는 일이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자상한 성격이거나 완벽주의 기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혹 채점관이 모를까봐 불안해 그런 불필요한 설명을 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지면은 좁고 해야 할 말은 많다. 이러한 자기 설명은 없애거나 예컨대, “우선 그간의 한일 관계부터 살펴보자라는 식으로 소화해야 한다.

 

지면은 좁고 해야 할 말은 많으므로 서론, 본론, 결론 지면 할애에 균형을 취하는 것도 글을 쓰기 전에 미리 해두어야 할 일이다. 다만 그런 3분법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서론, 본론, 결론 이라는 형식을 버리고 논증을 취해야 실용적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주장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하면 되겠다. 이러한 주장을 펴는 철학자 탁석산은 서론, 본론, 결론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패턴화한 글은 읽는 이를 지치게 만든다. 따라서 서론, 본론, 결론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글을 쓰지 말고 신문이나 잡지의 칼럼처럼 논증 형식으로 써야 한다. 논증이란 자신의 주장인 결론과 주장을 뒷받침하는 전제로 구성된다. 서론, 본론, 결론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 보고서나 논문을 보면 모두 서론과 결론이 있는데 이는 서비스 차원에서 두는 것으로 없어도 무방하다.”

 

물론 탁석산이 말하는 논증 형식의 글에서도 애써 구분하자면 서론본론에 해당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오히려 문제는 서론, 본론, 결론 구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지면을 낭비하는 경우다. 일반적인 논증형 글쓰기에선 그 구분을 명시적으로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글에 녹여내는 게 바람직하다. 이남훈은 결론부터 내려놓고 시작하면서 결론에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메시지가 갖는 주요 내용인 사실, 정보, 경고, 교훈, 의도 등과 같은 살만 붙이면 글이 된다고 주장한다.

 

글쓰기 능력을 평가받는 시험에서 시간을 아끼겠다고 곧장 써내려가다가 낭패를 보는 수가 있는데, 그거야말로 소탐대실이다. 글의 전체 그림을 미리 한 번 그려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지면 낭비는 곧 시간 낭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글쓰기 시험은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지면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끔 글쓰기에 돌입하기 전에 미리 자신이 할 말에 지면 배분을 해보는 시도를 머릿속에서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잊지 말자. 늘 지면은 좁고 해야 할 말은 많다.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스토리텔링을 하라

우리 인간은 이야기 없인 살 수 없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이야기하는 인간이다. 우리 인간의 뇌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타고난 특질이다. 중요한 사실에 대한 기억은 이야기의 형태로 뇌에 저장되기 때문에 이야기는 지식의 축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야기는 추상적인 개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맥락을 제공하기 때문에, 즉 지식을 일상적인 삶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어 보여주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야기하기를 일컫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좁게는 디지털 시대의 특성에 맞는 이야기하기, 넓게는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오늘날 스토리텔링은 전 분야에 걸쳐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스토리텔링 기사를 중시하는 캐나다 신문 데일리글리너의 편집 회의실엔 이런 캐치프레이즈가 걸려 있다. “모든 사실을 인물 구조로 바라보라. 당신의 기사를 더 생생하고 풍부하게 독자에게 전하고 싶다면 모든 주제를 인물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라.” 예컨대, 이 신문은 자동차 산업을 육성시키려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관한 기사의 제목을Putin puts Russia in the driver's seat로 달았다. 푸틴Putinput in이라는 같은 음의 동사를 이용해 푸틴, 자동차 산업 육성 추진이라는 딱딱한 제목이 아닌 푸틴, 러시아를 운전석에 앉히다라는 제목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면 글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우선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글을 쓰겠다는 자세를 가져보라. 부담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토리텔링은 글의 시작이나 배경 설명을 위한 장치로 많이 활용한다. 평소 무심코 읽던 신문 칼럼을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면 의외로 많은 필자들이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나 남에게서 들은 에피소드를 많이 활용한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글의 생생한 실감을 살리는 건 물론 재미있게 만드는 데엔 그런 이야기만큼 좋은 게 없다. 스토리의 힘을 말해주는 최고의 증거는 여러 심리학자들이 이른바 ‘(스토리 편향story bias)’의 위험을 경고하는 데에서 잘 나타난다. 스토리 편향은 이야기가 진실보다 큰 힘을 발휘하는 현상을 말한다.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복잡한 설명과 단순한 설명 중에서 단순한 설명이 더 참일 것 같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 사례가 미국의 24시간 케이블 뉴스 채널 폭스뉴스. ‘극우 선전기구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노골적인 당파성에도 폭스뉴스는 시작한 지 5년 만인 2001년 이익을 냈을 뿐만 아니라 경쟁자인 CNNMSNBC를 능가하는 시청률을 기록함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폭스뉴스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바로 스토리 만들기였다. 폭스뉴스 경영진은 매일 모든 필자와 프로듀서, 앵커에게 메모를 보내는데, 그 메모에는 그날그날 해야 할 스토리의 요점이 담겨 있다. 폭스뉴스는 이 메모에 따라 뉴스를 스토리에 맞게 조정하는 방식으로 시청자들이 빠져들 만한 스토리 개발에 열중했고, 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2011년 메릴랜드대학 연구팀의 조사에 따르면 폭스뉴스 시청자들은 시사 이슈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비율이 다른 채널 시청자에 비해 12퍼센트 포인트 높았으며, 이런 무지는 폭스뉴스를 더 오래볼수록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스토리 편향의 위험을 경계하면서 폭스뉴스식의 스토리텔링을 규탄해야 한다. 그렇다고 스토리텔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텔링을 호모 픽투스의 속성과 타협하는 필요악으로 이해하면서 윤리적인 스토리텔링을 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전문 작가들이 말하는 글쓰기의 이유글쓰기의 고통에 부화뇌동한 나머지 글쓰기를 너무 근엄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30초 내에 설명할 수 있는 콘셉트를 제시하라

대중문화와 기업계에선 짧게 요약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미덕으로 예찬 받고 있다. “영화의 아이디어를 25단어 이내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영화일 겁니다. 저는 손에 쥘 수 있는 아이디어를 좋아합니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말이다. 할리우드에선 25단어 이내로 설명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리켜 하이 콘셉트(high concept)’ 라고 부른다. 또한 미국 대학에선 학위 논문을 쓰려는 학생에게 주제에 대해 25단어 이내로 설명해보라는 교수가 많다. 굳이 단어 수를 말하지 않더라도 주제가 뭔데?”라는 질문에 대해 짧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25단어 안팎이라는 이야기다.

 

미국 기업계에선 그런 하이 콘셉트를 제시하는 걸 가리켜 엘리베이터 연설(elevator speech)’이라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30초에서 1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동승자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말한다. 회사, 상품, 서비스의 개념이 엘리베이터 한 번 타는 동안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간단명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가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사업을 하겠다며 당신의 의견을 물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친구의 이야기를 1~2시간 들어봐야 판단할 수 있는가? 아닐 게다. 30초 만 들어도 안다. 짧게 설명할 수 있는 알맹이가 없으면 당신은 극구 만류할 것이고, 그래야 마땅하다. 그게 바로 콘셉트의 파워다.

 

콘셉트는 개념이다. 개념은 무서운 것이다.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개념 없는 관점은 맹목적이며 관점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고 했다. 왜 개념이 무서운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헌신적인 투쟁까지 이르게 할 수도 있다. 개념은 콘셉트의 번역어지만 콘셉트에 비해 무거운 느낌을 준다. 기업계에서 굳이 콘셉트라는 외래어를 선호해 쓰는 데엔 아마도 그런 무거움을 떨쳐버리고 비교적 가볍게 접근해보자는 뜻도 있을 게다.

 

주장이나 아이디어를 내세우는 글이라면 반드시 콘셉트를 제시해야 하고, 그것은 30초 내에 설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학생들의 글이나 리포트에 대해 엘리베이터 스피치를 시도한다. 물론 학생에게 묻는 질문은 간단하다. “무슨 글이야?” 무엇에 관한 글이라는 답이 돌아오면, “아니 그러니까 어떤 주장을 하려는 거냐고?"라고 되묻는다. 의외로 여기서 말문이 막히는 학생이 많다. 그런 질문은 스스로 해보는 게 좋다. 길건 짧건, 나는 내 글에서 30초 내에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콘셉트를 제시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자기 생각이나 주장이 없거나 약한 글을 검증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어떤 생각을 30초 내에 설명할 수 없다면, 그 생각으로 독자들의 관심이나 지지를 끌어내리라는 희망은 접는 게 좋다. 그렇다고 글쓰기마저 접을 필요는 없다. 30초 내에 설명할 수 있는 콘셉트를 제시하기 위해 애쓰면 되니까 말이다. 이 또한 늘 나 자신에게 스스로 하는 주문이다.

 

3장 행위에 대하여

 

우도할계의 유혹에 완강히 저항하라

우도할계(牛刀割鷄)는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다는 뜻으로, 큰일을 처리할 기능을 작은 일을 처리하는 데 씀을 이르는 말이다. 사소한 일에 과도한 대응을 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학생들의 글을 보면 의외로 우도할계의 유혹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어느 학생은 지극히 현실적인 한국 영화 산업의 문제를 다루는 글에서 대중영화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예술 영화실험영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는데, 이는 논점을 벗어난 이야기다. 그건 실업난을 주제로 한 글에서 자본주의 경제 자체를 문제 삼는 것처럼 너무 근본으로 파고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주장은 대중문화오락에 미친 사회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글에 적합하다.

 

우도할계의 오류는 한국 사회에 꽤 만연되어 있는 거대담론 증후군이기도 하다. 거대담론은 주로 인문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으로, 어떤 담론의 구조나 체계에서 상부 단계나 포괄적 단계에 속한 담론을 뜻하지만, 구체적인 현실 문제에 너무 거대한 담론에 대응하는 경향을 냉소적으로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그런 경향을 가리켜 거대담론 증후군이라고 한다. 김상조는 거대담론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서 한국 사회에서 부족한 것은 거대담론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구제적인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시대정신이니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니 하는 거대담론을 구사하게 되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 거대함에 압도되어 빨려 들어가게 된다. 자기 생각을 정당화하려는 포장 심리로 오용되어 습관으로 굳을 위험이 있다는 걸 조심해야 한다. 아마도 선동적인 글에선 거대담론이 필요할 것이나 시사 문제를 다루는 논증형 글쓰기에선 자제하는 게 좋다.

 

많은 경우 거대담론은 과도한 추상성에서 비롯된다. 고상하고 품위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선 꼭 추상화 능력이 필요하지만, 시사적인 이슈에 대해 추상 일변도로만 나가면 논점이나 본질을 피해간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건 필요에 따라 거시미시담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사회현상을 분석할 때에도 탁월한 안목을 제공해준다. 사회현상을 거시적으로도 보고 미시적으로도 보는 차원 구분을 시도해보자.

 

학생들에게 다문화주의라는 주제로 글을 쓰게 했을 때 한국이 다양하고 미국이 획일적이라는 주장을 한 학생이 있었는가하면, 정반대로 한국이 획일적이고 미국이 다양하다는 주장을 한 학생도 있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김영명이 아주 좋은 답을 내놓았다. 획일성과 다양성 문제에 대해 김영명은 동양에는 서양과 동양이 공존하지만 서양에는 서양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서양이 동양보다, 미국이 한국보다 더 다양하다고 할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의 답은 한국은 문명 차원에선 다양하지만 일상 차원에선 획일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차원 구분을 해주어야 교통정리가 제대로 된다. 거시와 미시, 추상과 구체를 동시에 사랑하자. 그것들은 서로 가로지르면서 뒤섞이기도 한다는 걸 유념하자. 세상은 예술이다. 복잡하게 보자. 역설 같지만 그래야 단순하게 이해된다. 처음부터 단순하게 보면 뒤죽박죽이 되어 세상을 이해하는 걸 아예 포기하게 된다. 매사를 미시적으로만 보는 것도 문제지만 거시적으로만 보는 것도 문제다. 사안에 따른 적절한 시각과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스스로 약점을 공개하고 비교 우위를 역설하라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할 때 상대방의 저항을 인정하는 표현이 포함된 설득 메시지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현우에 따르면, “네가 싫어하는 건 아는데처럼 상대방의 저항을 인정하거나, “네가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건 아는데처럼 상대방의 의견을 인정하는 다양한 표현을 구사하라는 것이다. 어떤 글에 대해서건 독자는 처음엔 어디 한번 나를 설득해봐!” 라는 뻣뻣한 자세로 저항하기 마련이다. 특히 처음 보는 필자의 글에 대해선 감별사의 시선을 던진다. 독자의 그런 저항을 원천적으로 없앨 수는 없지만, 그걸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반감시킬 수 있다. 독자들의 이런 심리를 이용하는 게 바로 약점 공개법이다. 약점 공개법은 스스로 약점을 공개하면서 그걸 보완할 메시지를 제시하거나 비교 우위를 역설하는 방식을 말한다. 특정 입장에 우호적인 주장만 제시하는 일면적 메시지보다는 자신의 입장에 우호적인 주장뿐 아니라 반대하는 입장도 언급하는 양면적 메시지가 낫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대부업체 러쉬앤캐쉬의 광고다. 이 광고는 두 사람의 대화로 진행되는데 이런 내용이다. “거기 이자 비싸지 않니?”(여성) “버스랑 지하철만 탈 수 있나? 바쁠 땐 택시도 타는 거지.”(남성) “조금 비싼 대신에 편하고 안심되는 거?”(여성) “좋은 서비스란 그런 거 아닐까?”(남성)

이 광고는 개인적으로 영 마땅치 않지만, 약점 공개법의 사례로는 잘 어울린다. 다만 이 광고가 시사하듯이, 꼭 명심해야 할 것은 자기주장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지나칠 정도도 변명하는 것은 약점 공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학생은 자신의 주장을 펴면서 미천한 사견으로는라고 했는데, 이건 도가 지나친 전혀 불필요한 말이다.

 

약점 공개는 주도권을 내가 갖는 것으로 오히려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설득 전략이다. 잘 생각해보라.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떤 주장을 펼 때에 이미 속으로 판단하고 있다. “저 주장은 이러 저러한 문제점이 있는데, 저 사람은 그걸 모르거나 모른 척하는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 주장에 대해 신뢰가 갈 리 없고 설득당할 리 만무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스스로 자기주장의 문제점이나 약점을 공개한다면? 그러면서 그 약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비교 우위가 있다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으로선 그 사람이 현실에 기반을 둔 판단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조금 더 신뢰 하게 되지 않을까?

 

당신이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 주장을 할 때에, 그 주장에 약점이 없을 리 없다. 당신은 그 약점을 감추고 강점만을 역설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아니면 강점에만 몰두한 나머지 어떤 약점이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 이건 스스로 함정을 파는 거나 다름없다. 당신의 주장이 아무리 정당하다 한들, 그건 ‘64’‘73’의 수준에서 정당할 뿐 ‘91’이나 ‘100’은 아니다. 당신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주장에도 3이나 4의 정당성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흑백 사고의 세계에선 스스로 약점을 공개하고 비교 우위를 역설하는 건 어리석게 여겨지겠지만, 세상은 결코 흑백의 세계가 아니다. 퍼지(fuzzy)라고 하는 회색의 세계다.

 

퍼지의 세계에선 내향적인 사람이나 외향적인 사람은 없으며, ‘0.6 내향적이거나 ‘0.6 외향적이다. 두세 명 중 한 명은 내향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내향성을 루저의 자질로 간주하는 사회에선 내향성을 가진 사람이 외향적인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퍼지식 사고는 바로 이런 이분법에 반대하는 것이다. 퍼지식 사고의 모태가 된 퍼지 논리는 원래 컴퓨터 공학에서 나온 개념이지만, 이걸 글쓰기를 비롯한 소통에 적용하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이론적 기반이 될 수 있다. 화이부동은 서로 조화를 이루나 같아지지는 않는다는 뜻인바, 상대편의 주장을 존중하면서도 자기주장의 비교 우위를 역설한다는 점에서 생산적인 논쟁을 가능케 한다는 장점이 있다.

 

논증적 글쓰기는 자주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승자독식형 행위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지 말자. 스스로 약점을 공개하고 비교 우위를 역설하라는 건 화이부동이라는 대의의 실현에도 기여하지만, 글의 설득력을 높이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흑백 어느 한쪽에 치우친 사람들에겐 화끈하고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을 주지 못해 인기가 없겠지만, 그런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건 아니잖은가. 훨씬 더 폭넓은 지지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글쓰기를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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