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02章. 상결 라마와 갈이단 왕자
위소보는 말했다.
[여러분들은 소식이 빠르기도 하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이번에 내가
북경을 나설 때 황상께서 무슨 분부를 하였는지도 여러분들은 아십니
까?]
상결은 말했다.
[가르침을 받겠소.]
[가르침이랄 것까지는 없습니다. 황상께서는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위소보, 그대가 양주로 가서 일을 처리하면 오삼계가 사
람을.보내 찔러 죽이려고 할 것이니 짐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 다행
히 그의 아들이 짐의 손에 있으니 만약 그대에게 어떤 변고라도 생기면
짐은 오응웅 그 녀석으로 하여금 똑같은 변고를 당하도록 할 참일세.
오삼계가 사람을 시켜 그대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자른다면 오응웅도 새
끼손가락 하나가 잘려질 것이네. 오삼계 그 늙은 녀석이 사람을 시켜
그대를 죽인다면 그야말로 자신이 아 들을 죽이는 결과가 되겠지.' 그
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소이다. '황상, 저는 다른 사람의 아들
노릇은 모두 할 수 있어도 오삼계의 아들만은 절대로 하지 않겠소이
다.' 황상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소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양주로 오게
된 것이외다.]
상결과 갈이단은 서로 한번 쳐다보더니 안색이 약간 변했다. 상결은 말
했다.
[왕자 전하와 나는 이번에 양주로 와서 그대를 찾으면서 황제가 보낸
흠차라면 반드시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이
멀리서 바라보니 옛날부터 아는 사이이며 이 아기 소저마저도 그대를
알고 있더군요.]
위소보는 웃었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죠.]
아기는 탁자 위의 것가락 하나를 들더니 그의 이마를 쿡 찌르며 쳇! 하
며 물었다.
[누가 그대와 좋아하는 사이지!]
상결은 말했다.
[우리는 대만의 정 둘째 공자와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소. 원래는 어떻
게 그대에게 손을 쓸까를 상의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그대가 스스로
찾아와 주었으니 우리는 쓸데없는 수고를 절약하게 되었구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소이다. 황상은 왕자의 부하인 그 텁석부리 한첩마에게 사흘 동안
심문을 하여 모든 것을 알아내셨소이다.]
상결과 갈이단은 한첩마란 이름을 듣자 모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뭐라고?]
위소보는 말했다.
[그것도 뭐 대단하지 않은 일이외다. 황상은 한첩마와 'ㅆ라ㅆ라'하고
말했는데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소. 후에 황상께서는 그에게 많
은 은자를 내리고 병부상서 명주 대인 수하로 들어가 일을 처리하도록
일렀소. 그리고 사홀도 안되어 나를 보내서 그에게 빨리 지도를 그리라
고 재촉했소. 그와 같이 군을 거느리고 쌍무를 하는 일은 나 역시도 모
르는 일이었소. 그래서 나는 황상께 말했소. '황상, 몽고와 서장은 너
무나 추운 곳이라 황상께서 군사를 보내 싸우겠다면 소신은 황상에게
휴가를 얻어서 양주땅처럼 요란하고 시끌시끌한 세상을 구경하도록 하
겠습니다.']
갈이단은 얼굴 가득히 우려의 빛을 띠고 물었다.
[그대의 말은 소황제가 군사를 보내 몽고와 서장을 친다는 것이오?]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 같은 일은 나도 잘 모르겠소. 황상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
소. '우리는 단지 늙은이 하나만 상대하는 것이 가장 좋네. 만약 몽고
와 서장이 우리를 도와준다면 우리는 그들을 친구로 여길 것이고, 그들
이 만약 늙은 녀석을 도와준다면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며 부
득이 먼저 선수를 쳐서 제압할 수밖에 없지.']
상결과 갈이단은 그를 쳐다보며 마음이 약간 누그러진 듯 의자에 앉았
다. 갈이단은 한첩마의 상태에 대해 물있는데 위소보는 그의 얼굴 모습
과 행동거지를 생생하게 묘사해 들려주었다. 이렇게 되자 갈이단과 상
결은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위소보는 그들 두 사람이 눈살을 살짝 찌푸
리는 것을 보고, 그들 두 사람은 한첩마가 청나라에 투항했으며 몽고와
서장, 그리고 오삼계가 결탁한 일을 이제 소황제까지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서 강희가 먼저 손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하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쌍아와 증유도 모조리 혈도를 짚혀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여덟 명의 친위병 가운데 태반은 이미 저승으
로 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위소보는 이번에 살그머니 여춘원으로 오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신
분에 얽힌 비밀이 알려질까 두려웠기 때문에 서천천, 장용, 조제현 등
을 한 사람도 데려오지 않았다. 때문에 자기가 상대방 사람들에게 갈기
갈기 찢겨져 젓을 담듯이 되고 양주에서 유명한 사자두(獅子頭)라는 요
리처럼 지지고 볶여 심지어는 개의 기름을 더 보텐다 해도 달려와서 구
해 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따라서 빠져나갈 계책이 없으면 아무렇
게라도 지껄이는 것이 앉아서 죽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어 말했다.
[황상께서는 갈이단 왕자가 무공이 고강하고 영웅으로서 적수가 거의
없다는 말을 듣고 매우 탄복했소이다.]
갈이단은 웃으면서 물었다.
[황제께서도 무공을 연마하셨소? 어떻게 나에게 무공이 있다는 것을 아
셨을까?]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께선 물론 무공을 아시죠. 그리고 또 그럴싸하답니다. 전하가 그
날 소림사에게 솜씨를 크게 보여 소림사 방장으로 하여금 기꺼이 졌음
을 시인하도록 했고 달마장이나 나한당 그리고 반야당 수좌들이 모두
당하지 못하겠다며 혀를 내두르도록 공격하지 않았소? 형제는 이미 그
와 같은 사실을 황상께 자세히 말씀드렸던 것이외다.]
그날 갈이단은 소림사에서 그야말로 날개를 꺾인 상태에서 돌아갔었다.
그런데 이때 위소보가 그를 위해 허풍을 떨어 주자 상결 앞에서 체면이
서는 노릇인지라 얼굴에 득의의 빛을 띄웠다. 위소보는 말했다.
[소림사 방장 희총 대사의 무공을 무림에서는 역시 첫째나 둘째로 손꼽
는 형편이었죠. 그런데 왕자 전하가 소맷자락을 이렇게 한번 휘두르자
회총 방장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는데 다행히 그가 앉
을 때 엉덩이 아래에 방석이 있어서 그의 늙은 뼈는 다치지 않았지
요....]
기실 그날 갈이단은 희총이 소맷자락을 한 번 휘두르는 바람에 털썩 의
자에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는데 위소보는 거꾸로 말을 한 것
이다. 그리고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회총 사형은 나에게 잘 대해 주었다. 그러나 오늘 이 사저의 몸뚱이가
피를 뿌리게 되는 재난을 만났으니 당장이라도 자화(自火)
하여 왕생극락하게 되었으니 어찌할 수 없구나. 부득이 공은 바로 색이
고 색은 바로 공이라 사형의 이김은 바로 패한 것이고 패한 것이 바로
이김이 아니겠는가?)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며 속으로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굴리느라고 고
심중이었다. 그리고 눈을 들어서 동쪽과 서쪽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흘낏 보니 아기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아리따운 눈을 들
어 갈이단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 눈에는 정이 가득 차 있는 것
을 볼 수 있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저 고약한 소저는 몽고 왕비가 되고자 하는구나.)
그는 말했다.
[황상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소이다. '갈이단 왕자는 무공이 고강
하고 얼굴 모습 또한 준수하니 왕비를 맞는다면 젊고 아리따우며 무공
이 높은 소녀를 맞아들여야 할 것이네....']
그리고 그는 홀낏 아기를 쳐다보았다. 아니나다를까 그녀의 얼굴은 빨
개졌으며 그 표정에 무척 관심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이어 말했다.
[진원원은 천하 제일의 미녀라 일컬어지고 있지만 지금은 나이가 많은
데 갈이단이 무엇 때문에 그녀를 취하겠소?]
아기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가 진원원을 맞아들인다고 누가 말했어요? 또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
이는군.]
갈이단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있소?]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지요, 그래서 저는 말했지요. '황상께 알립니다. 갈이단 왕자 전
하에게는 서로 좋아하는 소저가 있는데 아기 소저라고 하지요'....]
아기는 체, 하고 코웃음쳤으나 얼굴 표정으로 보아 매우 흐뭇하게 여기
는 것이 분명했다. 갈이단은 싱글병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위소
보는 계속해서 말했다.
['아기 소저의 무공은 천하에서 세 번째이며 그저 상결 대라마와 갈이
단 왕자 전하만 미치지 못할 뿐이고 황상보다는, 헤헤혜, 조금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소신이 솔직히 말씀을 드리니 황상께선 너무 탓하지 마십
시오....']
상결은 위소보의 말을 듣고 심정이 약간 답답해졌다. 그런데 위소보가
황제에게 자기를 무공에 있어서 천하 제일이라고 했다지 않은가? 이 꼬
마가 말하는 것은 열 마디 가운데 믿을 것은 반도 없지만 상결 역시 그
만 의기 양양해져서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것은 믿을 수 없다는 뜻이었
다. 위소보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자 황상께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소이다. '나는 믿을 수 없는걸.
그 나이 어린 소저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설마 그의 사부보다
뛰어나겠는가?' 그래서 저는 말씀을 드렸지요. '황상께선 잘 모르십니
다. 그 소저의 사부님은 몸에 백의를 걸친 여승인데 무공이 무척 고강
해서 천하에 세 번째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결 대라마와 무
공을 겨루었을 때 상결 대라마가 후려친 일 장을 감당해 내지 못해 그
사부는 전신의 내공이 종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
에 무공이 천하에서 세 번째 간다는 칭호를 그녀의 제자에게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아기는 그가 자기의 사문 내력을 밝히는지라 속으로 놀람과 의아함을
금하지 못했다.
(그는 어찌하여 나의 사부님을 알고 있을까?)
상결은 구난과 손을 쓴 적이 없었으나 열두 명의 사제들이 모조리 그의
사부 손 아래에서 비명횡사한 만큼 그 일을 한평생 가장 큰 치욕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위소보가 구난이 자기의 일 장에 얻어맞아
내공이 흐트러졌다고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얼굴에 금을 갖다붙
이는 격이었다. 사실 상결과 갈이단이 앞서서 가장 걱정을 한 것은 위
소보가 자기들의 꼴사납던 사실을 들춰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렇기 때문에 하나같이 재빨리 이 사람을 죽여 입을 봉하리라고 작정하
고 있었는데 듣고 보니 자기네들이 크게 패한 일을 크게 이긴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지라 서둘러 죽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상결은 아기를 잠시 동안 응시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제서야 그대가 백의인의 제자인 것을 알았구나. 이 가운데는
아무래도 이상한 점이 있다.)
아기는 물었다.
[그대는 진원원 뭐라고 했는데 그것은 또 어떻게 된 것이죠?]
위소보는 말했다.
[그 진원원은 내가 곤명에서 친히 만나 본 적이 있었소이다. 솔직히 소
저에게 말해서,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았으며 천하 제일의
미녀라는 칭호는 정말 명불허전이었소.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나자마자
혼이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손발이 얼음처럼 차가
워져서 전신이 벌벌 떨렸으며 속으로 그저 이 세상에서 이토록 아름다
운 사람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소. 아기 소저, 고대의 사매 아가는 매우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만 진원원에 비하면 용모나 자태에 있어서 훨씬
뒤떨어진다오.]
아기는 물론 아가의 얼굴이 절세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리고 위소보가 아가에게 넋이 빠져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데 그마저
그와 같이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닌가 보다 하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승복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대라는 사람은 알고 보면 나이 어린 색골이 아니에요? 상대방이 약
간 자색이 뛰어나면 그저 몇 배로 불려서 이야기를 하곤 하지. 진원원
은 금년에 적어도 마흔은 되었을 것인데 설사 옛날에는 아름다웠다 해
도 지금은 아름답지 않을 것이 아닌가요?]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틀렸소, 틀렸소. 아기 소저, 그대는 금년에 십팔구 세에 불과하여서
물론 아름다워도 더 아름다워질 수가 없는 형편이죠. 그러나 다시 삼십
년이 지난다 해도 여전히 아름답기 이를 데 없을 것이오. 그대가 만약
믿을 수 없다면 내 그대와 무슨 내기를 해도 좋소. 만약에 삼십 년 이
후 그대의 모습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나는 내 목을 잘라 그대에게 드리
리다.]
아기는 훗, 하고 웃었다. 어떤 여인이든 자기를 가리켜 아름답다고 하
면 자연 흐뭇하게 여긴다. 더군다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와
같은 칭찬을 해주니 그녀로서는 더욱더 흐뭇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
가 그녀는 자기의 용모에 대해서 퍽이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삽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다 해도 자기는 그렇게 추해 보이지는 않으리
라고 생각했다. 위소보는 그녀가 내기에 응낙하겠다는 대답을 하길 바
랐다. 그렇다면 갈이단은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봐서 자기로
하여금 다시 삽십 년을 더 살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었다. 그때 가서 다시 이기고 지는 것을 결판낸다 하더라도 늦지 않
는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상결이 코웃음치더니 냉랭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대는 오늘 밤을 넘길 수가 없소. 아기 소저의 삽
십 년 후의 아름다운 얼굴을 볼 만한 복을 갖지 못했소이다.]
위소보는 혜헤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상관이 없소이다. 그저 대라마와 왕자 전하께서 나의 이 한 마
디를 기억하시고 삽십 년 후 어느 날 이 위소보가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것을 아시면 될 것이 아니겠소?]
상결과 갈이단, 그리고 아기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걸껄 소리내어 웃었
다. 위소보는 말했다.
[내가 곤명에 간 것은 몇 달 전의 일이외다. 내가 건녕 공주를 데리고
가서 오삼계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던 사실을 그대들 세 분도 알
고 있을 것이오. 본래 이것은 매우 큰 경사였지만 곤명성 안으로 들어
가자마자 거리마다 모든 사람들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고 몇 집 건너
지 않아 하나의 관을 볼 수 있었으며 많은 여인과 어린애들이 상복을
입고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도록 우는 것이 아니겠소?]
갈이단과 아기는 일제히 물었다.
[그것은 또 무엇 때문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나 역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지요. 그리하여 운남의 벼슬아치에게 물
었으나 모두들 얼버무리려고 들며 말을 하려 하지 않았소. 후에 내가
친위병을 보내 수소문을 한 결과 그 사실을 알았는데, 원래 이날 아침
진원원은 공주가 왕림하신다는 말을 듣고 친히 나와 영접하려고 했었
소. 그런데 그녀가 가마를 타고 나서자 십여 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모
두 실성한 듯 하나같이 그녀를 보려고 밀고 당기며 모두들 하늘에서 선
녀가 내려왔다고 하면서 서로 밀치고 미는 가운데 그만 수천 명이나 되
는 사람들이 밟혀 죽었다는 것이었소. 평서왕 휘하의 무관과 병졸들이
처음에는 죽어라 하고 탄압을 했지만 나중에 진원원을 보고는 모두들
칼과 창마저 떨어뜨리고 하나같이 입을 딱 벌리고 침을 흘리면서 진원
원을 쳐다보더라고 하지 않겠소.]
상결과 갈이단, 그리고 아기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결같
이 생각했다.
(이 어린애의 말에는 틀림없이 거짓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진원원은
정말 아름답기 이를 데 없을지도 모르니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구나.)
위소보는 이 세 사람이 점차 믿는 것을 보고 다시 말했다.
[왕자 전하, 평서왕 휘하에 한 명의 총병이 있는데 이름은 마보라고 하
지요. 그대는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갈이단과 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두 사람은 마보와 함께 소림사
로 간 적이 있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갈이단은 말했다.
[그날 소림사에서 그대 역시 그를 본 적이 있소.]
위소보는 말했다.
[그 사람입니까? 저는 잊었군요. 그날 저는 그저 왕자 전하가 신공을
크게 펼쳐서 소림사의 고승을 쓰러뜨리는 것을 눈여겨보느라고 다른 사
람을 쳐다볼 여가가 없었지요. 설사 여가가 있다 하더라도 아기 소저의
꽃과 같고 달과 같은 용모를 몇 번 더 쳐다보느라고 다른 여가는 없었
을 것입니다.]
아기는 퉤, 하고 침을 뱉는 시늉을 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흐믓하게 여
겼다. 갈이단은 물었다.
[마 총병은 또 어떻게 되었소?]
第103章. 위기가 감도는 여춘원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 총병 역시 그날 사고가 난 것이죠. 그는 평서왕의 명을 받들어 진
원원을 보호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그가 진원원을 몇 번 보는 사이 그
만 정신이 몽롱해져서는 놀랍게도 가까이 다가가 진원원의 그 하얗고
부드러운 조그만 손을 어루만지게 되었소이다. 후에 평서왕이 알고 그
에게 사십 대의 곤장을 때리게 되었지요. 그런데 마 총병은 살그머니
다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더라지 않습니까?
'내가 만진 것은 진원원의 왼손이므로 왕야가 나의 한 손을 자르리라고
생각했소. 진작부터 사십 대의 곤장만 맞고 끝날 줄 알았다면 그녀의
오른손마저 만져 보는 것인데 그랬소. 칠십 대의 곤장을 맞는다고 해서
설마 죽기야 하겠소.' 평서왕 휘하에는 모두 열 명의 충병이 있는데 나
머지 아흡 명의 총병은 모두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죠. 그 말이 평서
왕에게 들어가자 그는 즉시 명령을 내려서 누구든 진원원을 만진다면
반드시 두 손을 자르겠다고 했답니다. 평서왕에게 하국상이라는 사위가
있는데 그 역시 열 명의 총병 가운네 한 사람이죠. 그는 바로 솜씨 좋
은 장인(匠人)을 불러서는 한 쌍의 가짜 손을 만들었다지 뭡니까? 그는
때로 선녀와 같은 장모님을 만나는데 참지 못하고 손이라도 만지고 싶
어지면 자기가 만들어 놓은 가짜 손을 만지려고 했다더군요. 이것이야
말로 뭡니까? 유비무환이라고 할 수 있겠죠?]
갈이단은 그 말에 그만 입을 코게 벌리고 넋을 잃었다. 상결은 끊임없
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황당하군, 황당해!]
열 명의 총병이 황당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위소보의 말이 황당하다는
것인지 다른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기는 말했다.
[그대 역시 진원원을 만나 보았는데 어째서 그대는 그녀의 손을 만지지
않았지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것은 까닭이 있지요. 내가 진원원을 만나기 전에 오응웅이 먼저 와
서 나를 만나자고 했소이다. 그리고 그는 천 리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와서 공주를 자기의 아내로 삼게 해주니 매우 고맙다고 하더군요. 그러
면서 그는 금빛이 번쩍이는 한 가지 물건을 품속에서 꺼냈는데, 그 위
에는 빛이 아름다운 옥홍보석, 묘아안 등이 잔뜩 박혀 있는 황금 수갑
이지 뭡니까.]
아기는 물었다.
[무슨 수갑인데 그토록 진귀해 하지요?]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무슨 물건이냐고 물어 보면서 어찌 됐든 그가 나에게 주
는 예물이거니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는 철컥 나의 두 손에 수갑을 채
우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나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지요. '부마 그대는
어째서 나를 잡으시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소? 무슨 죄를?' 오응웅은
말했지요. '흠차대인, 흠차대인께서는 오해를 하고 있구려. 이 형제는
호의로 이러는 것입니다. 그대가 우리 작은어머니를 만나 보고자 한다
면 이 수갑을 반드시 차야 한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참지 못하
고 손을 뻗쳐 그녀를 만져 보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그녀의 손끝이라
도 만져 본다면 부왕께서는 그대 흠차대인의 체면을 보아서 어떻게 하
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대가 한 번 만지고 두 빈 만지고, 세 번 만지게
된다면 부왕께서는 흠차대신을 살해하는 커다란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니
그것이 두렵다 이거죠. 그렇게 된다면 대인께서도 야단이지만 우리 오
씨 집안도 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깜짝 놀라서는 수갑을 찬
채 진원원을 만나보게 되었지요.]
아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우스워서 말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군요.]
위소보는 말했다.
[다음에 그대가 북경에 오시면 그 금수갑을 꺼내 보여 달라고 해보십시
오. 금수갑을 보게 되면 그대는 믿게 될 것이외다. 그는 그 황금으로
만들어진 수갑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진원원을 만날 때 꺼내
서 수갑을 차려는 것이었지요. 그저 한걸음이라도 늦는다면 큰일이 날
테니까 말입니다.]
상결은 흥, 하고 코웃음치며 말했다.
[진원원은 그의 서모인데 설마 하니 그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단
말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그는 물론 감히 하지 못하조 그렇기 때문에 몸에 그와 같은 황금 수갑
을 갖고 다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기는 말했다.
[그는 북경으로 가게 되있는데 왜 그 물건을 몸에 지녀야 했지요?]
위소보는 당황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야단났다. 허풍이 들통나게 생겼구나.)
하지만 그의 머리는 무척 빨리 돌아가는 편이라 다시 말했다.
[오응웅은 곤명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고 북경에서 오래 살려고 간 것
이 아니었지요. 북경에 남아 있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상결은 그를 한번 노려보더니 말했다.
[그것은 그대가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 아니겠소? 상대방은 수갑까지
그대에게 빌려 주는 등 의리를 보였는데 그대는 그를 운남으로 돌아가
지 못하게 저지하지 않았소?]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응웅이 나에게 무슨 은혜를 베풀었단 말입니까? 오히려 그는 나와
불공대천의 원수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상결은 의아하여 말했다.
[그가 그대에게 죄를 지었단 말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죄를 짓잖구요. 수갑을 나에게 빌려 준 것은 나의 아비를 죽인 것보다
더욱 악독하답니다. 당시 내가 만약에 그 수갑을 차고 있지 않았다면
진원원의 얼굴을 만져 볼 수 있었지 않았겠소이까? 아! 대라마, 왕자
전하. 내가 진원원의 그 꽃잎보다 만배나 아름다운 얼굴을 만질 수가
있다면 오삼계가 나의 두 손을 자른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소. 설
사 그가 나의 두 다리까지 잘라서 운남 선위(宣威) 땅에서 화퇴(火腿)
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대수로운 일이겠소?]
세 사람의 정신은 남쪽으로 날아가 진원원의 절세적인 용모를 상상하느
라고 그 몇 마디의 말을 듣고도 웃지 않았다. 위소보는 음성을 낮추어
매우 신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직이 말했다.
[하늘처럼 커다란 비밀이 있는데 세 분은 들으시고 누설하시면 아니됩
니다. 본래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세 분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의기투
합하여 지기에게 말해 주어도 상관이 없다고 느낀 것이외다.]
갈이단은 재빨리 물었다.
[무슨 비밀이오?]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황상께서는 군사와 장수를 움직여서 오삼계를 공격하려 하고 있소.]
세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똑같이 생각했다.
(그게 무슨 비밀인가? 황제가 오삼계를 치지 않는다 해도 오삼계는 군
사를 일으켜서 황제를 칠 것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들은 황상이 어째서 운남에 군사를 사용하려는지 아시오? 그것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외다.]
아기는 말했다.
[설마 그것 역시 진원원 때문인가요?]
위소보는 탁자를 치며 매우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어! 그대가 어떻게 아셨소?]
아기는 말했다.
[아무렇게나 짐작해 본 것이에요.]
위소보는 크게 찬탄하며 말했다.
[소저야말로 진짜 여자 제갈양으로서 귀신처럼 일을 혜아려 보는구려.
황상께서는 황제가 되었으니 모든 깃을 갖추었지만 다만 천하 제일의
미녀민 부족한 셈이었소. 지난 번 황상께서는 나 같은 어린 사람을 운
남으로 보내면서 어째서 덕망이 높고 수고와 공을 많이 세운 대신들을
보내지 않았겠소? 그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친히 만나 보아 도대체 그
녀가 정말로 그토록 아롬다운지 확인을 하고 오삼계가 진원원을 황궁으
로 바칠 뜻이 있는지 없는지 그 뜻을 슬쩍 알아보라고 했소. 그런데 허
연 수염의 대신에게 그와 같은 일을 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겸연쩍은 일
이 아니겠소. 그런데 내가 한 마디 비추자마자 오삼게는 탁자를 두드리
며 화가 나서 말했소. '그대는 한 명의 공주를 보내 나의 살아 있는 관
음보살을 바꿔치려는 것이오? 흥 흥, 설사 백 명의 공주라 해도 나는
바꿀 수가 없소.']
상결과 갈이단은 서로 마주보았다. 은연중 그들은 오삼계에게 크게 속
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원래 그 가운데는 그와 같은 아름다운 여자
문제도 얽혀 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삼계가
과거 그야말로 머리끝까지 모조리 곤두설 정도로 노했던 것은 바로 진
원원 때문이었고 또한 대명나라 삼백 년이나 되는 사직과 강산을 잃게
했다는 것도 천하가 모두 알고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소황제가 나이가
젊기 때문에 풍류적으로 놀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고 모두 생각했
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현자, 그대는 오생어탕이 아니겠소. 결코 늙은 자라의 마누라를 탐
하지는 않았소. 하지만 이 소계자가 크게 난을 당하게 되어 그대에게
몇 마디 나쁜 말을 지껄였지만 정말로 여기지는 말아 주오.)
그리고 상결과 갈이단이 모두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오삼계가 그토록 노하는 것을 보고 감히 더 말하지 못했소. 그때
나는 운남에 있었고 비록 수천 명의 병마를 거느리고 있다고는 하나 어
찌 오삼계 수하의 천군만마를 대적할 수 있었겠소? 그렇기 때문에 그만
입을 싹 다물고 있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생각을 했는데 사실
그렇지 않겠소?]
갈이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말했다.
[어느 날 밤 텁석부리 한첩마가 나를 찾아왔소. 그는 왕자 전하가 그를
곤명으로 보내 오삼계와 연락을 하도록 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곤명의
정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몽고인은 한(汗)의 자손으로 모
두 영웅호걸인데 무엇 때문에 오삼계의 여자를 위해서 전쟁을 하며 죽
어야 하느냐고 말했소. 그는 자기를 북경으로 데리고 가 황제를 만나게
해 달라고 청을 했소. 자기 자신이 친히 황제에게 진원원인가 하는 여
자는 몽고 왕자와 서장 라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겠
다고 했소. 몽고의 갈이단 왕자에게는 아기 소저가 있으니 다시는 진원
원이라는 사람을 요구하지 않으리라고도 했지요. 그리고 서장의 대라마
에게도....많은 아리따운 서장의 소저가 있다고 했지요....]
상결은 큰소리로 꾸짖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우리 황교의 라마들은 계율을 엄히 지키고 있으며
결코 색을 밝히지 않소.]
[그것은 한첩마가 말한 것이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외다. 대라마,
한첩마는 황제의 호의를 사서 안심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대가 진원원을
빼앗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말했는지도 모르지요.]
상결은 코웃음쳤다.
[흥, 다음에 한첩마를 만나면 반드시 그에게 물어 봐야겠군! 도대체 그
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그토록
우리의 명성을 더럽히다니.]
위소보는 속으로 무척 기뻤다.
(그가 한첩마에게 질문을 한다면 지금 나를 죽일 것 같지는 않구나.)
[예, 예. 다음에 그대가 나와 한첩마를 직접 대질시키도록 하시구려.
그대들이 오삼계를 도와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결코 좋지 않소이다.
설사 반란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대들 두 분이 몸에 수갑을 항상 준비
하고 있지 않는다면 언제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될 것이외다....]
갑자기 상결의 얼굴에 노기가 도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했다.
[대라마에게는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 진원원을 본다하더라도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지요. 하지만 하지만....아!]
상결은 물었다.
[하지만 뭐란 말이오?]
[지난 번 내가 곤명에 이르렀을 때 진원원이 나서서 공주를 맞이했는데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밟혀 죽었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 죽
은 사람들의 집에서 법사를 행하려고 했으나 화상과 도사들이 갑자기
오실 수가 없게 되었소.]
아기는 물었다.
[그것은 또 어째서이죠?]
위소보는 말했다.
[많은 화상들은 진원원을 보고 속세에 대한 미련이 일게 되어, 하루에
도 몇천 명이나 되는 화상들이 환속하여 출가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오. 생각해 보시구려. 갑자기 수천 명이나 되는 화상들이 환속해 버렸
으니 법사를 크게 치러야 할 사람이 얼마나 부족하겠소?]
갈이단 등 세 사람은 반신반의했다. 위소보의 말이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진원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이미 의심할 여
지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아기는 갈이단에게 눈짓을 하더니 나직이 말
했다.
[곤명이라는 곳이 그토록 이상야릇하다면 나는 가지 않겠어요. 그대가
오삼계를 돕고 싶다면 직접 가도록 해요.]
갈이단은 재빨리 말했다.
[누가 곤명으로 간다고 했소? 나는 진원원을 만나고 싶지 않소. 내가
볼 때 우리 아기 소저가 결코 진원원에게 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구
려.]
아기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그대는 내가 진원원에게 지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 됐든 내가
그녀보다 못하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그대는 그녀를 만나 보
고 싶어하는군요.]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가겠어요.]
갈이단은 매우 어색해져서 말했다.
[아니, 아니오. 나는 하늘에 두고 맹세하겠소. 결코 한평생 진원원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겠소.]
아기는 뾰로통해졌던 얼굴에 기쁜 빛을 띄우며 앉았다. 위소보는 말했
다.
[그대가 결코 진원원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말은 옳은 것이외다. 그 누
구이든간에 고녀를 만나 보면 한 번 보아서 어찌 만족할 수 있겠소. 백
번 보고 천 번 봐도 부족한 판이라오.]
갈이단은 욕을 했다.
[그대라는 꼬마는 그저 터무니없는 소리만 지껄이는군. 나는 맹세코 영
원히 진원원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했소. 만약에 만난다면 나의 두
눈알이 멀게 될 것이오.]
아기는 크게 기뻐서는 정을 듬뿍 담은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소황제에게 들은 말이지만 그대들 두 분이 오삼계를 무엇 때문에
도우려고 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소이다. 만약에 진원원을 얻고자 한다
면 그것이야 할 수 없는 일이죠. 천하에는 한 명의 진원원밖에 없고 소
황제마저도 갖지 못했으니 말이외다. 그러나 그 미녀를 제외하고 오삼
계에게 무엇이 있느냐 말이오. 소황제에게는 그야말로 그보다 열 배나
더 많은 것이 있지 않소. 그대들 두 분이 황제를 돕기만 한다면 금은재
보는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소?]
상결은 냉랭히 말했다.
[서장과 몽고가 가난하기는 하나 결코 금은재보를 탐하는 것은 아니
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금은재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미녀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도 아
니라면 그들 두 사람이 얻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속으로 생각을 굴려 보았다.
(그렇구나. 소장부(小丈夫)에게는 하루라도 돈이 없으면 안 되지만 대
장부는 하루라도 권세를 휘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위소보는 소장부
이고 그들 두 사람은 대장부이다.)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소황제께서는 갈이단은 왕자일 뿐이고 아직도 충분히 크지 못했지만
만약에 소황제를 도와 오삼계를 공격한다면 왕자를 몽고의 국왕으로 봉
하겠다고 했소.]
갈이단은 두 눈에 기쁜 빛을 띠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황....황제는 정말 그와 같은 말을 했소?]
[물론이오. 내 어찌 그대를 속이겠소?]
[천하에는 몽고 국왕이라는 명칭이 없소. 황제가 만약에 전하를 도울
준객이한(準喀爾汗)을 찾는다면 전하께서도 만족하실 수 있을 것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되지요, 되고말구요. 전부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 황제가 반드시 봉하
려 할 것이오.]
(전부가 좋다는 것이, 제기랄 무슨 말이지. 설마 하니 반이 좋다는 것
도 있을라고?)
그는 준객이한이라는 말을 전부 좋다는 말로 잘못 듣고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상결은 그의 얼굴 표정을 보고 그가 잘 알지 못한다
는 것을 알아채고 말했다.
[몽고는 몇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소. 준갈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부
족이오. 몽고의 왕은 국왕이라 부르지 않고 한(汗)이라고 부르오. 왕자
전하는 아직도 한이 되지 않았소.]
위소보는 말했다.
[그랬군요. 왕자 전하가 황상을 돕기만 한다면 전체의 한이 되는 것도
매우 쉬운 일이오. 황제께서 성지를 내리기만 한다면 수만의 병마를 파
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설마 다른 몽고 사람들이 반항을 하겠
소?]
갈이단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황제가 그렇게 해주시기만 한다면 그거야 쉬운 노릇이오.]
위소보는 가슴을 치며 말했다.
[그대는 걱정할 것 없소이다. 내가 책임지도록 하겠소. 황상께서는 그
저 오삼계 한 사람만 미워한다오. 아기 소저가 아름답기는 하나 황상의
눈에 띄지 않게만 한다면 그는 그대의 여자를 빼앗으려고 하지 않는다
는 것을 보장할 수 있소. 그리고 상결 대라마에 관해서는 그대가 황상
을 돕는다면 황상께서는 자연히 그대에게 전 서장을 관리하는 큰 벼슬
을 내릴 것이오.]
그는 그 큰 벼슬이라는 것을 뭐라고 할지 몰라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상결은 말했다.
[전 서장은 달뢰활불(達賴活佛)이 다스리는 곳으로써 황상이 마음대로
봉할 수 없소.]
위소보는 말했다.
[다른 사람이 활불이 될 수 있는데 그대가 어째서 될 수 없다는 것이
오? 서장에는 모두 몇 명의 활불이 있소?]
상결은 말했다.
[또 한 분의 반선활불(班禪活佛)이 있으니 모두 두 분이외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소. 하루는 세 끼의 밥을 먹는데 그치는 것이오. 그러니 무슨 일
에도 세 개가 있어야만 옳은 일이외다. 우리는 황상에게 다시 한 분의
상결활불을 봉해 달라고 청을 하여 상결 대활불로 하여금 달 뭐라고 하
고, 반 뭐라고 하는 작은 활불들을 다스리도록 하면 될 것이오.]
상결은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이 꼬마 녀석이 티무니없는 소리를 마구 하는 것 같지만 퍽 일리가 있
는 밀들을 하는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의 수척한 얼골에는 대뜸 웃음빛이 떠올랐다.
이때 위소보는 그저 목숨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상대편에서 다른 요
구를 해온다 하더라도 무조건 응낙할 참이었다. 더군다나 준갈리한과
서장의 대활불을 봉하는 것은 밑천도 들지 않는일이라고 생각했다.
[허풍치는 것이 아니오. 이 형제가 어떤 계책을 바치면 황제는 십중팔
구 그 계책에 따른다오. 더군다나 두 분이 오삼계를 공격하겠다고 나선
다면 황제는 비단 두 분을 높은 지위에 세우실 뿐 아니라 커다란 상금
을 내릴 것이고, 형제 역시 큰 공을 세우는 것이니 반드시 벼슬이 오르
고 재물을 얻게 될 것이오. 흔히들 조정에 사람이 있으면 벼슬하기가
쉽다지 않소. 형제가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하고 있으니 두 분이 나누어
몽고와 서장에서 큰 벼슬을 하도록 하시오. 나의 말은 즉, 우리 세 사
람이 결의형제를 맺어 차후로는 복이 있으면 함께 누리고 이려움이 있
으면 함께 막도록 하자는 것이며, 동넌 동월 동일 생은 아니나 동년 동
월 동일에 죽기를 바라는, 소황제를 제외하고는 우리 세 사람이 가장
크게 될 것이니 그야말로 멋진 일이 되지 않겠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동년 동월 동일에 죽기를 바란다는 이 한 마디는 매우 중요하다. 그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면 다시는 나를 죽일 수 없을 것이
다. 나를 죽인다는 것은 자살과 마찬가지일 데니까 말이다.)
상결과 갈이단은 양주로 오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조사해 놓고 있었
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 소년 흠차가 소황제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사
람으로서 출세길이 훤히 열려 벼슬도 지극히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이 흠차대신이 자신들이 알고 있던 소년이라
는 것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갈이단은 그와 아무런 원한도
없었다.
상결은 그에게 해침을 받아 열두 명의 사제를 잃었고 열 개의 손가락을
잘리는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했으나 위소보의 그
와 같은 말을 들은 이후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사제들은 이미 죽은
몸이니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일이고 손가락은 자른 이후에 다시 자라날
수도 없으니, 만약 이 사람을 죽인다 해도 화를 풀 수 있을 뿐이며 그
저 헛되이 오삼계에게 커다란 협조를 하는 셈밖에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들은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지만 만약 그와 결의형제를 맺는다면 매우 커다란 실리를 얻게 되고
좋은 점이 여간 많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그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모두 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매우 기뻤다. 자기가 한바탕 지껄인 말로 두 악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였다. 그는 두 사람이
흑시라도 후회를 할까 봐 재빨리 말했다.
[큰형, 둘째 형, 둘째 형수님, 우리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결의형제를
맺기로 하지요. 둘째 형수님은 절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둘째 형수님
은 둘째 형님과 천지신명에게 절을 한다면 그때는 한집안의 사람이 아
니겠습니까?]
아기는 얼굴을 붉히고 퉤, 하고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위소보
의 아첨하는 소리는 남의 비위를 여간 잘 맞추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결은 갑자기 손을 뻗치더니 팍, 하고 탁자의 한 모퉁이를 내
리쳤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또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이때 상결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위 대인, 그대가 오늘 한 말을 나는 잠시 믿기로 하겠소. 그러나 이후
그대가 이랬다저랬다하는 사람으로서 식언을 하고 자기 욕심만 채워 살
이 찐다면 이 탁자의 모퉁이가 바로 그대의 본보기가 될 것이오.]
위소보는 웃었다.
[큰형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만약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일을 하
게 된다면 모두에게 좋은 점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만약에 그대들을
속인다면 그때는 몽고와 서장에서 군대를 풀어 황제를 괴롭힐 것이 아
닙니까? 아, 그렇게 되면 황제는 화가 나서 나의 머리를 자르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두 분 형님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이 형제가 어찌 감
히 그대들에게 죄를 지을 수 있겠소이까?]
상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옳은 말이오.]
세 사람은 즉시 대청에 붉은 촛불을 밝히고 바깥쪽을 향해 큰절을 올려
서 형제의 의를 맺게 되었다. 상결이 나이가 가장 많았고 갈이단이 그
다음이었으며 위소보는 셋째가 되었다. 그는 첫째와 둘째 형에게 인사
를 하고 다시 아기에게 절을 하며 둘째 형수님이라고 매우 다정히 부르
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대가 나의 둘째 형수가 된 이상, 이후 내가 내 마누라인 아가를 희
롱하는 것을 보아도 겸연쩍어 간섭을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아기는 술주전자를 들더니 넉 잔의 술을 따르고는 웃었다.
[오늘 그대들 세 형제가 결의형제를 맺었으니 아무쪼록 이후에는 처음
부터 끝까지 잘지내면서 커다란 일을 해내기를 빌겠어요. 소매(小妹)는
그대들 세 분에게 한 잔의 술로 경의를 표하겠어요.]
상결은 웃었다.
[이 한 잔의 술을 물론 마셔야지.]
그는 술잔을 들었다. 위소보는 재빨리 말했다.
[큰형, 잠깐만! 이것은 찌꺼기 술이니 깨끗하지 못합니다. 사람을 불러
바꾸도록 하지요.]
그는 큰소리로 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빨리 술을 가져오너라.]
그는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춘원은 어떻게 된 것이지?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이 와서 시중드는
것을 볼 수 없다니, 이상한 일이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렇다. 주모와 귀노는 우리가 싸우는 것과 관병을 죽이는 것을 보고
모조리 도망친 모양이구나.)
이같이 생각하고 있을 때 한 명의 귀노가 들어와서 고개를 푹 수그리며
애매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지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춘원의 귀노들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녀석은 새로 온 모양
이로구나. 어찌하여 손님에게 이토록 예의를 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아
마도 놀라서 멍청해진 모양이로구나.)
그는 호통을 쳤다.
[빨리 가서 술 두 주전자 가져오게.]
[예.]
그 귀노는 대답을 하고 몸을 돌려서 나갔다. 위소보는 그 귀노의 뒷모
습을 보자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어, 저 사람이 누구더라? 대낮 선지사 밖에서 작약을 구경했을 때 그
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으로 와서 귀노가 되었지? 여기에
는 반드시 이샹야릇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만 등줄기에서 식은땀
이 흐르면서 자기도 모르게 아, 하고 벌떡 일어나게 되었다. 상결과 갈
이단, 그리고 아기 세 사람이 일제히 물었다.
[왜 그러오?]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저 사람은 오삼계의 휘하 고수인 무사가 가장한 것이외다. 우리가 조
금 전에 한 말을 그가 모조리 들었을 것이외다.]
상결과 갈이단은 깜짝 놀라 일제히 말했다.
[그렇다면 그를 남겨 둘 수가 없지.]
[두 분 형님들은 잠시.... 잠시 손을 쓸 것 없습니다. 우리들은 모르는
척하고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왔는지, 또.... 어떤 간계가
있는지 두고 보기로 합시다.]
그는 이 몇 마디 말을 하며 음성마저 떨었다. 이 귀노가 만약 정말로
오삼계의 무사가 가장한 것이었다면 그는 오히려 이토록 당황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신룡교의 육고헌이었다. 이 사람은 신룡
도에서 위소보를 따라 북경으로 가기도 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함께
생활했다. 그의 분장한 모습이 지극히 교묘하여 얼굴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으나 그의 뒷모습을 보자 눈에 퍽 익숙했다. 낮에 선지사 밖에서는
전혀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여춘원에서 다시 만나게 되자 이 가운데는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다고 느껴졌고 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제서야 확
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단지 육고헌 한 사람뿐이라면 두려운 바가 없
었다. 그러나 그가 선지사 밖에서 위소보가 멋모르고 슬쩍 한 말을 들
었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여춘원으로 와서 소
곡을 듣겠다고 했는데 고 말을 듣고서 그가 이곳으로 와서는 귀노로 변
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십중팔구 반두타와 수
두타 역시 여기에 와 있을 것이고 어쩌면 홍 교주마저도 친히 왕림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군다나 홍 교주는 자기와 의리로 맺어졌으며 동
년 동월 동일에 죽겠다는 맹세를 했는데 그것이야말로 천만번 더 어렵
고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위소보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겁이 나서 이
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이때 육고헌이 나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나무 쟁반 위에는 두 개의
술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술주전자를 탁자 위에 올
려놓았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구나. 흥, 또 어떤
사람이 왔는지 모르겠구나.)
그는 말했다.
[이 기녀원에는 어째서 그대 혼자만 있는 거지? 빨리 여러 사람들을 불
러 시중들게 하시오.]
육고헌은 예예, 하더니 재빨리
[몸을 돌려 나갔다.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큰형, 둘째 형, 그리고 둘째 형수님은 나중에 나의 눈빛을 보고 일을
처리하도록 하시오. 내가 만약에 눈을 까뒤집고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
보면 그대들은 즉시 손을 써서 들어오는 사람을 죽이도록 하시오. 그
사람들은 무공이 고강하기 이를 데 없는 자들이외다.]
상결 등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응낙을 했으나 속으로는 이상하게 생
각했다.
(오삼계 휘하의 무사들이라면 무공이 제아무리 높다 해도 대단할 자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잠시 후 육고헌은 네 명의 기녀들을 데리고 들어와서는 네 사람의 곁에
앉혔다. 네 명의 기녀는 위소보가 모르는 사람으로 원래 여춘원에 있던
기녀들이 아니었다.
기녀들의 얼굴은 모두 지극히 추악했다. 어떤 사람은 사팔뜨기였고 어
떤 사람은 입이 삐뚤어졌으며 어떤 사람은 피부 색깔이 노랗거나 까맣
고, 울긋불긋하기도 했고 얼굴이 온통 흉터 투성이기도 했다. 위소보는
웃었다.
[여춘원의 소저들은 얼굴 모습이 정말 예쁘군.]
이때 상결의 옆에 앉아 있던 온 얼굴에 흉터투성이인 기녀가 그에게 눈
을 깜박이더니 곧이어 다시 눈짓을 했다. 위소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신
랄하게 움직이고 또 눈초리가 무척 아름다운 것을 보고 생각했다.
(이 네 사람은 신룡교의 사람이라 일부러 이와 같은 모양을 했구나. 그
런데 그녀가 나에게 연신 눈짓을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는 한 주전자의 미춘주를 들어 네 명의 기녀에게 한 잔씩 따르고 말
했다.
[모두들 한 잔씩 드시오.]
기녀원에서는 손님이 기녀에게 술을 따르는 법이 아니었다. 손님이 손
을 뻗쳐 주전자를 들기만 하면 기녀가 낚아채서 술을 따르기 마련이었
다. 그러나 이 네 명의 기녀들은 그저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을 뿐 위소
보가 그녀들에게 술을 따라 주는데도 네 사람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
았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네 명의 여인은 가짜 갈보로 분장하고 있는데 연기가 형편없구나.)
그는 말했다.
[그대들은 손님을 시중들러 왔는데 어째서 규칙을 모르지? 먼저 한 잔
마시지 않고 무엇하는 것이오?]
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따르고 육고헌에게 말했다.
[그대는 새로 온 사람이지? 자라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구먼. 그대들이
손님들에게 술로써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면 손님들이 화가 나서 어떻게
행화전을 내리겠느냔 말일세.]
육고헌과 네 기녀는 기녀원의 규칙이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한 듯 모두
응낙했다.
[예.]
그들은 술을 마셨다. 위소보는 웃었다.
[그래야지. 이 기녀원에는 자라 같은 갈보들이 또 있소. 모조리 불러
오시오. 이토록 넓은 여춘원에 어째서 그대들 다섯 사람밖에 없소? 정
말 좀 이상하구먼.]
그러자 얼굴이 싯누렇게 부어오른 듯한 기녀가 육고헌에게 눈짓을 했
다. 육고헌은 몸을 돌려 나가더니 다시 두 명의 귀노를 데리고 들어와
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갈보들은 없습니다만 자라는 두 마리가 있습니다요.]
위소보는 속으로 우스운 것을 참아야 했다.
(갈보와 자라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뒤에서 부르는 것인데 그대 스스로
귀노의 짓을 하면서 어찌 갈보, 자라라고 칭한단 말인가? 설사 기녀원
에 하룻밤을 묵으러 온 손님들이라 해도 이토록 무례하게는 굴지 않을
것이다. 기녀원에서는 그저 소저와 동료라고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내
가 너를 시험해 보았는데, 후후! 마각을 드러내는구나. 홍 교주가 신기
묘산을 쓴다고 해도 이 위소보가 바로 이 기녀원에서 자랐다는 것은 꿈
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 들어온 두 명의 귀노들은 모두 키가 크고 뚱뚱했다. 한 사람은 반
두타가 가장한 것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수두
타인데 어째서 키가 그토록 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잠
시 생각해 보고는 그의 발 아래 뭔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만약에 마음속으로 알아차리지 않았다면 결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
다. 위소보는 다시 두 잔의 술을 따르고 말했다.
[손님이 너희들 자라에게 술을 마시라고 하면 너희들 두 마리의 자라는
빨리 마셔야 한다.]
반두타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수두타는 성
질이 거칠어 참을 수 없다는 듯 냅다 욕을 했다.
[너 소잡종이야말로 자라다!]
육고헌은 재빨리 소맷자락을 당기며 호통을 쳤다.
[빨리 술을 마시게! 어찌 손님에게 그토록 무례한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수두타가 이번에 귀노로 가장한 것은 교주의 은밀한 당부를 받은 것이
라 속으로 깜짝 놀라서 재빨리 술을 마셨다. 위소보는 물었다.
[모두 다 왔는가? 다른 사람은 없겠지?]
육고헌은 말했다.
[없소이다.]
위소보는 물었다.
[홍 교주는 자라로 분장하지 않았는가?]
이 한 마디의 말을 하면서 그는 두 눈을 까뒤집고 고개를 쳐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육고헌 등 일곱 명은 그 소리를 듣자 모두 깜짝 놀랐다.
네 명의 기녀들은 일제히 일어났다. 상걸은 이미 운기행공하여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두 손을 일제히 내밀어 대뜸 수두타와 육고헌 두 사람
의 허리를 찍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두 손가락을 찔렀을 때 육고헌은
찔리자마자 쓰러지는데 수두타는 그저 흥 했을 뿐 곧이어 손을 휘둘러
상결의 머리를 후려쳐 오는 것이 아닌가? 상결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속으로 자기의 양지선(兩指禪) 재간을 좌우에서 일제히 쏟아 낸다면 그
야말로 천하무쌍이라 할 수 있으며, 열 개의 손가락 가운데 독이 묻은
한 토막을 잘라낸 후 손가락이 한 토막씩 더 짧아졌기 때문에 손 씀씀
이가 예전처럼 민활하지 못했지만, 바로 그 한 토막이 잘려졌기 때문에
적의 몸을 찍었을 때 힘이 옛날보다 더 강해지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
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때 분명히 이 뚱보의 허리 혈도
를 짚었는데 어째서 이 사람은 아무 일도 없는 듯 행동을 하고 있는 것
일까? 하고 의아하게 여겼다. 설마 그 역시 위소보처럼 이미 금강호체
신공을 연마한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기실 두 사람은 누구도 금강호
체신공을 연성한 것은 아니었다.
위소보의 몸에 칼과 창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바로 온몸을 보호하는 보
의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수두타는 다리 아래에 대나무 조각 같은
것을 달아서 한 자 정도 키가 훌쩍 더 큰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상결
은 그의 몸이 정말 그토록 건장한 줄만 알고 손을 뻗쳐 손가락으로 그
의 허리를 짚는다고 짚었으나 그의 손가락이 적중한 곳은 수두타의 허
벅지 바깥쪽이었다. 따라서 수두타는 한차례 극렬한 아픔을 느꼈으나
혈도는 결코 봉쇄되지 않았다.
第104章. 마침내 아가와 한몸이 되다
이때 반두타는 이미 갈이단과 한데 어울려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
가득 흉터가 있는 기녀는 아기와 싸우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의 기녀는
위소보에게 달려들었다. 위소보는 웃었다.
[왜 간질이라도 일으켰느냐? 이와 같이 사납게 달려들게 뭐람.]
그 기녀의 일 손가락은 갈고리 같았으며 그 기세가 흉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여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손을 뻗쳐 그 기녀의 다리를 밀었다. 그 기녀는 미춘주를 마
신 이후 약기운이 퍼져 있던 터라 머리가 그렇지 않아도 흐릿했는데 위
소보에게 밀리게 되자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하고 한두 번 흔들하더니 털
썩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곧이어 나머지 세 명의 가짜 기
녀도 차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수두타와 상결은 서로 몇 수를 주고받았는데 발바닥에 받친 것이 있어
서 움직이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느낀 수두타는 두 발에 힘을 주었다.
그라자 뚝뚝, 하는 소리와 함께 받친 것이 부러졌다. 상결은 그제서야
욕을 했다.
[알고 보니 난쟁이였구나.]
수두타는 노해 말했다.
[나는 옛날에 너보다 훨씬 키가 컸다. 내가 난쟁이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인데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상결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두 사람은 입으로는 말을 하고 있었으나
손은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무공의 고수인지라 수초를 겨
루게 되자 서로 상대방의 무공에 대해 암암리에 탄복을 했다. 상결은
속으로 생각했다.
(오삼계의 수하에 이와 같이 무공이 뛰어난 위사가 있었다니 놀랍구
나.)
수두타도 속으로 생각했다.
(너의 무공이 고강하기는 하지만 위소보라는 꼬마의 주구 노릇을 하는
것을 보면 무슨 좋은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때 갈이단은 수초를 주고받자 그만 반두타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반두타는 이미 한 잔의 미춘주를 마신 후라 손발이 영민하지 못
해 일시에 그를 때려눕힐 수가 없었다. 아기는 자기와 싸우던 기녀가
초식이 민활하지 못하고 몇 수도 쓰기 전에 역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갈이단을 보니
갈이단은 연신 뒤로 물러서지 않는가? 그녀는 재빨리 앞으로 나가 도와
주었다.
반두타는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끼고 몸을 두 번 휘청거렸
다. 단지 적이 자기의 가슴에 일 장을 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힘이 별로 무섭지 않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두
손으로 상대방의 손과 발을 밀어젖히고 두 손의 식지로 상대방의 겨드
랑이 아래쪽을 짚었다.
아기는 대뜸 전신이 시큰해지면서 맥이 빠져 천천히 육고헌의 등 위에
쓰러졌다. 아기가 놀라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할 때 반두타가 갑자기
앞으로 쓰러져왔다. 갈이단이 부르짖었다.
[아기! 아기! 그대는 어떻게 되었소?]
별안간 반두타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주먹으로 갈이단의 가슴팍을 내
질러 갈이단은 일 장 밖으로 나가떨어져서는 벽에 심하게 부딪혔다.
반두타와 수두타의 내력은 매우 심후했다. 미춘주를 마시기는 했으나
이는 기녀원에서 만든 흔허 볼 수 있는 미혼약이라 결코 그 약효가 무
섭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지러운 감을 느끼기는 했으나 여전히 지탱해
낼 수가 있었다.
이때 수두타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희뿌연 한 무더기의 그림자였
다. 그런데 상결의 그림자가 모호하게 흔들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그는 손을 뻗어 때리려고 했으나 상결은 가볍게 피해 버렸고 오히
려 자기의 오른쪽 귀와 뺨을 잇달아 심하게 주먹으로 얻어맞게 되었다.
상결의 장력은 무섭기 이를 데 없어 아무리 수두타의 가죽이 두껍고 살
이 두툼하다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잇달아 울부짖
음을 토해 내더니 문 밖으로 달아났다. 육고헌 역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으나 상체의 혈도가 풀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멍청하게 서 있다가
달려나갔다. 갈이단은 반두타에게 얻어맞아 벽에 부딪히게 되자 등줄기
가 갈라지는 듯 아파왔다. 정히 겁을 먹었을 때 반두타가 왼손으로 탁
자를 짚고 눈을 감은 채 오른손을 가슴팍 앞에 들고서는 끊임없이 흔들
어대는 게 아무래도 누가 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갈이단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벌떡 몸을 일으켜 앞으로 달려가 힘주
어 그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반두타는 크게 부르짖더니 왼손을 획
뒤로 돌려서 갈이단의 가슴팍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의 몸을 쳐들어
올렸다. 상결이 재빨리 달려들어 구하려고 했다. 반두타는 눈을 뜨고
갈이단을 잡은 채 감로청에서 달려나가 몸을 날려 담장 위로 뛰어올랐
다. 상결은 호통을 내질렀다.
[사람을 내려놓아라!]
그러더니 즉시 뒤쫓아 나갔으며 곧이어 지붕 위로 달려갔다. 그런데 두
사람의 호통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위소보는 탁자 밑에서 기어나왔
다. 나와 보니 바닥에는 어지럽게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쌍아와 증유는 감로청 모퉁이에 누워 있었고 네 명의 가짜 기녀들은 바
로 옆의 바닥 위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정극상은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상태로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싸움의
와중에 의자가 넘어져서 그는 이미 탁자 밑으로 굴러가 있는 상태였다.
아기의 상반신은 바닥에 누워 있고 하반신은 의자 위에 걸쳐져 있는 상
태였다. 이 사람들 모두는 하나같이 꼼짝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혈도를 짚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미춘주에 정신을 잃어 마치 죽은 사람
들 같았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쌍아였다. 재빨리 그녀를 부축
하여 일으켜 보니 눈동자는 여전히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호흡도 평
소와 같아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혈도를 풀 줄 몰랐기 때
문에 쌍아와 종유, 아기 세 사람을 부축해서 의자에 앉혔다.
그는 마음속으로 모친이 걱정되어 어머니 방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러
고 보니 위춘방은 침대가에 쓰러져 있었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재빨리
달려가서 부축해 일으켰다. 그런데 그녀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이 아닌
가? 하지만 숨소리와 가슴은 평소처럼 뛰고 있었다. 아마도 신룡교의
사람에게 혈도를 짚힌 모양이었다. 여춘원의 갈보들과 자라들은 하나도
요행을 바랄 수 없이 혈도를 짚힌 모양이었다. 위소보는 몇 시진이 지
나면 자연히 풀어질 것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감로청으로 돌아와 귀를 기울였다. 반두타와 수두타 혹은 상결과
갈이단이 되돌아오는 기척이 없어 속으로 생각했다.
(얼굴 가득 흉터가 있는 가짜 갈보는 나에게 크게 눈짓을 했는데 아마
도 나에게 조심을 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양심이 괜찮은 편
인데 누구인지 모르겠구나.)
그는 몸을 굽히고 손을 뻗쳐 그 여자의 얼굴을 몇 번 어루만졌다. 그러
자 한 겹의 흙이 손을 따라 떨어지면서 간드러지고 부드러우며 곱고 휜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는 소군
주 목검병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말했다.
[역시 그대는 나에게 정을 지니고 있었군. 그대는 그들에게 잡혀서 나
를 속이도록 핍박을 받은 것이겠지.]
갑자기 그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다른 세 명의 가짜 갈보는 누구일까? 방이 소저는 그 안에 있을까 없
을까? 그 작은 갈보는 전문적인 방법을 강구해서 나를 해치려고 들었는
데 이번에 이 사람들과 함께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노
릇이다.)
그는 방이를 생각하자 달큼하면서도 기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누렇게 부어오른 여자의 몸매가 아리따운 것을 보
고 아마도 십중팔구 방이라는 생각이 들어 손을 뻗쳐서는 그녀의 얼굴
에서 진흙을 떨어 냈다. 진흙가루가 떨어지면서 요염하리만치 간드러지
고 화사한 얼굴이 나타났다. 나이는 방이보다 대여섯 살 더 많았고 용
모는 그녀보다 더 아름다웠다. 바로 흥 교주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술
에 취한지라 두 뺨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살결에서는 금방이라도 물
이 스며나올 것 같았다.
위소보는 흥 부인이 아름답고 사람의 간장을 녹이는 매력이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경박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잔뜩 곯아떨어진 것을 보고 기회는 이때다 하고 오른손
을 뻗쳐 그녀의 뺨을 한번 가볍게 꼬집었다. 그런데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고 아무런 감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두근거리
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그녀의 다른 쪽 뺨을 꼬집었다.
몸을 돌려 다시 다른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두 여자들은 몸이 비대한
편이었는데 결코 방이가 아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매섭게 자기에
게 달려들려고 하지 않았던가?
위소보는 술주전자를 들어서 그녀의 얼굴에 약간 술을 쏟아붓고 옷자락
을 들어 얼굴을 닦아 주자 진짜 모습이 드러났는데 놀랍게도 가짜 태후
가 아닌가?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생각했다.
(이번 공로야말로 진정 크구나. 황상과 태후께서는 이 늙은 갈보를 잡
아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 스스로 여춘원으로 달려와 늙은 갈보 노릇을 하고 있었구나. 이것
으로 볼 때 내가 그녀를 줄곧 늙은 갈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선견지명
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시 네 번째 가짜 갈보의 화장을 지우고 보니 드러난 얼굴은 바로 방
이가 아닌가? 위소보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어째서 허리가 이토록 굵어졌을까? 설마 하니 다른 남자와 사
사로이 정을 통해서 아이를 가진 것은 아닐까? 천지신명이시여, 늙은
갈보는 정말 늙은 갈보가 되었고 이 작은 자라는 정말로 작은 자라가
됐단 말입니까?)
그는 손을 뻗쳐 그녀의 내의 안쪽을 더듬었다. 그런데 손에 닿는 것은
살갗이 아니었다. 만져보니 바로 베개가 아닌가? 위소보는 껄껄 소리내
어 웃었다.
[너의 양심은 소군주에 비해 너무나 나쁘구나. 소군주는 내가 너희들에
게 독수를 당하게 될까 봐 끊임없이 나에게 눈짓을 했다. 그런데 너는
내가 알아볼까 봐 절구통 같은 배를 만들어 나를 속이려 하다니, 하하
하! 너, 작은 갈보는 여춘원에서 뱃가죽이 늘어나게 되었으니 내가 낙
태를 시켜 주마. 일찍 낙태를 하나 늦게 낙태를 하나 마찬가지 아니겠
니?]
대청 밖으로 나가 살피니 수 명이나 되는 친외병들이 땅바닥에 죽어 있
었고 기녀원은 등불 하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아무런 기척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반두타와 수두타는 약주를 마셨으니 끝내 우리 두 결의형제들이 이겨
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홍 교주와 접전을 벌였다면 그 결
과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두 분 형님, 만약에 오늘 제가 저세상으로
가게 된다면 이 소제가 동년 동월 동일에 죽지 못한 것을 용서하시오.
정말 미안하게 됐소이다.)
대청 안으로 돌아와 보니 흥 부인, 방이, 목검병, 쌍아, 증유, 아가등
여섯 명의 미녀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또 어떤
사람은 움직이기가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저마다 아름답고 내력
이 있어 위소보는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방안의 침대 위에 아름답고 나이 어린 소저가 이 여섯 명보다도 더 예
쁘다. 그녀는 나와 이미 천지신명께 절을 했으나 동방화촉을 밝히지 않
은 조강지처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밤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찾아왔는데 그대의 지아비가 그대를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너
무나 정이 없고 의리가 없는 행동이다.)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증유가 아름다운 눈동자로 자
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져
있었고 매우 부끄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위소보는 속으로 생
각했다.
(왕옥산에서 양주까지 오는 동안 너라는 계집애는 자꾸만 나를 피해 한
마디의 말도 못하게 만들었지. 오늘 밤이야말로 너에게 얌전하게 굴 수
가 없다.)
그는 증유를 안아서 안쪽 방으로 옮겨 아가의 옆에다 놓았다. 아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기다란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우고 있었
으며 입가에는 방긋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녀는 혼미한 가운데서도
십중팔구 정극상과 다정히 노니는 황홀한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친김에 모조리 해치우자. 너희를 모두 안으로 옮겨 놓도록 하겠다.
이곳은 여춘원이다. 여자들이 기녀원에 온 이상 무슨 좋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 스스로 온 것이니 정신을 차린 이후에 나를 탓하
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큰 뜻을 품고 있었는데 그 큰 뜻이라는 것은 양주에
서 크게 기녀원을 차리는 것과 여춘원으로 와서 크게 술상을 차리고 여
춘원의 모든 기녀들로 하여금 자기를 모시게 하는 일이었다. 지금의 전
경은 비록 옛날에 품었던 야심과 그리 맞지 않았지만 역시 엄청난 쾌거
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는 즉시 쌍아, 아기, 홍 부인, 방이, 목검병
을 일일이 안아서는 안으로 옮겼고 그 후에는 가짜 태후마저도 안고 들
어가 여덟 명의 여자를 침대 위에 나란히 눕혔다.
(친구의 처는 업신여기면 안 된다고 했다. 둘째 형수 그대는 나의 형수
요, 우리들은 영웅호걸이니 그야말로 의리를 지켜야 하겠지.)
그는 아기를 다시 안아서 대청으로 옮겨 의자에 잘 앉혔다. 그녀의 눈
동자에는 고마워하는 빛이 서려 있었다. 위소보는 그녀의 얼굴 모습이
예쁘고 급하게 숨을 몰아쉬느라 가슴이 올라갔다내려갔다하는 것을 보
고 갑자기 후회하는 마음을 뿌리칠 수 없었다.
(내가 대라마와 몽고 왕자와 의형제를 맺게 된 것은 결코 의기투합한
것이 아니라 계책을 강구해서 그들로 하여금 나를 죽이지 못하도록 속
이자는 데 있었다. 뭐가 큰형이고 둘째 형인가? 모두 다 아무렇게나 해
본 소리다. 아기 소저가 이토록 아름다운데 둘째 마누라로 맞아들이도
록 하자. 이야기꾼은 삼소인연구미도(三笑姻緣九美圖)라는 이야기에서
당백호(唐伯虎)에게 아횹 명의 마누라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
나 내가 아기를 계산해 넣는다 하더라도 여덟 명의 미녀에 불과하고 한
명의 미녀가 부족하다. 퉤! 퉤! 퉤! 늙은 갈보 또한 늙고 흉악한데 어
찌 그녀를 한 명의 미녀로 뽑을 수 있겠는가?)
당백호와 비교해 볼 때 한 사람의 미녀가 부족한 것은 그래도 얼렁뚱땅
넘길 것 같았으나 두 미녀가 모자란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기가 형편없
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아기를 안고서 내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몇 걸음 옮기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관운장은 천리길을 멀다하지 않고 황수(皇嫂)를 전송했으며 그야말로
유비의 마누라인 큰형수를 자기의 마누라로 삼지 않았다. 위소보는 일
곱 걸음으로 왕수(王嫂)를 전송한 셈인데 어찌 됐든 간에 의리를 저버
릴 수는 없지 않은가? 두 미녀가 적으면 적은 대로... 아! 설마 하니
장래에 아흡 수를 채우지 못하겠는가?)
그는 즉시 몸을 돌리고 다시 아기를 의자에 앉혔다. 아기는 그가 속으
로 갈등을 느끼고 있는 것을 모르고 위소보가 자기를 안아서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고 무슨 수작을 하는지 몰라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위소보는 내실로 들어가서 말했다.
[방 소저, 홍 부인, 소군주, 그대들 세 사람은 스스로 여춘원에 들어와
갈보가 된 것이오. 쌍아와 증 소저, 그대들 두 사람 역시 스스로 원해
서 나를 따라 여춘원으로 온 것이오. 이곳이 어떤 곳인지 그대들이 올
때는 비록 몰랐다해도 계집의 몸으로 이런 곳에 온 이상 몸을 바쳐 나
를 모시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외다. 아가, 그대는 나의 마누라인데 이
곳에 와서 나의 어머니를 데리고 놀려고 했으니 바로 그대의 시어머니
를 희롱한 것이라 할 수 있소. 그러나 그대의 지아비가 그대를 희롱하
여 되갚아 주도록 하지.]
그는 손을 뻗쳐 가짜 태후를 멀찍이 침대 모서리 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이불을 활짝 펴서 여섯 명의 여자들을 한꺼번에 덮어 놓고는 옷가지와
신발을 벗어 던지고 나서 알몸이 되어 크게 환호성을 외치며 이부자리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재미있는 짓을 한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
를 일이었다. 탁자 위의 초가 끝까지 타서 방안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
싸여 있었다. 미녀들을 번갈아 겁탈한 그는 나직이 십팔막이라는 노래
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일백일곱 번을 만져서 누님과 누이의 일곱 개의 손을 만지게 되었고
나....일백여덟 번을 만져서 누님과 누이의 여덟 개의 발을 만지게 되
었구나....]
그가 다시 손을 이리저리 더듬으며 여인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갑
자기 한 여인이 간드러진 음성으로 나직이 말했다.
[싫....싫어요,....정....정 공자....이러지 마세요.]
바로 아가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미춘주를 가장 먼저 마셨기 때문에 한
참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으나 약기운이 점점 물러가서 점차 정신
을 차리게 된 것이었다. 위소보는 대노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자나깨나 정 공자를 그리워하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가 너의
몸을 더듬는 줄 알고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이냐?)
그는 정극상의 음성을 흉내내었다.
[그렇소. 바로 나요.]
그렇게 말하며 아가의 몸 위로 기어올라가 한몸이 되었다. 아가는 나직
이 말했다.
[싫어요. 이러지 마세요....]
말과는 달리 그녀는 위소보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위소보는 쾌락에
겨워 힘껏 노를 저었다. 아가는 환락에 겨워 음음, 하는 신음소리를 냈
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정극상이 대청 쪽에서 외쳤다.
[아가! 아가! 그대는 어디 있소?]
우지끈,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탁자에 부딪혀 탁자 위에
엎어놓은 잔과 접시들이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아가는 정극상이
대청에 있는 기척을 느끼고 자기를 안고 있는 사람이 정극상이 아니라
는 것을 알았다. 깜짝 놀란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떨리는 음성으
로 말했다.
[그대....그대는 누구지? 어째서....나를....나를....]
[그대의 진짜 지아비 음성도 알아듣지 못하겠소?]
아가는 그만 깜짝 놀라 힘주어 바둥거리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전신이 시큰거리고 맥이 빠져 일어설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여
전히 그녀를 힘껏 끌어안고 그짓을 하고 있었다. 아가는 그를 뿌리칠
수 없자 큰소리로 외쳤다.
[정 공자! 정 공자!]
정극상은 헐레벌떡 몸을 비틀거리며 방안으로 달려들어왔다. 그러나 방
안에는 등불이 없어 쿵, 하고 이마팍으로 문설주 위를 받았다. 그러면
서도 그는 아가를 불렀다.
[아가, 그대는 어디 있소?]
이때 아가는 큰소리로 외쳤다.
[빨리 비켜!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정극상은 말했다.
[뭐라고?]
그는 위소보에게 한 말인 줄 모르고 있었다. 위소보는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쾌락에 젖어 한창 움직이고 있는데 어찌 그녀를 쉽게 놓아 주겠
는가? 아가는 애걸했다.
[제발 나를 놓아 줘.]
위소보는 여전히 동작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나는 놓지 않겠다.]
정극상은 놀람과 분노로 호통을 내질렀다.
[위소보! 네놈은 어디 있느냐?]
위소보는 이때서야 볼일을 다 보고 아가의 몸 위에 엎드려 의기 양양해
서 말했다.
[나는 침대 위에서 나의 마누라를 껴안고 있다. 내가 동방화촉을 밝히
고 있는데 너는 무엿하러 왔지? 이 신방에 뛰어들어 옛날 습관대로 소
란을 피우겠다는 것이냐?]
정극상은 대노해서 말했다.
[네 에미와 그짓을 한다고 해라.]
그는 소리나는 쪽을 향해 달려들어 위소보를 끌어내리려고 했다. 그런
데 어둠 속에서 그는 한 사람의 팔을 붙잡게 되었다.
[아가, 그대의 손이오?]
[아니에요.]
정극상은 그 손이 아가의 손이 아니라면 반드시 위소보의 것이라 생각
하고 힘주어 잡아끌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잡아끈 것은 가짜 태후 모동
주였다. 그녀는 미춘주를 먹고 난 이후 머리가 흐릿한 상태에서 그 누
가 자기의 팔을 잡아당기는 것을 보고 왼손으로 냅다 일 장을 후려친다
는 것이 바로 정극상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그녀의 공력은 이미 십 성
중에 팔구 성은 제거된 상태라 그 일장에는 별로 힘이 실려 있지 않았
다. 정극상은 깜짝 놀라서 털썩 주저앉는 바람에 머리를 침대 다리에
부딪히고 대뜸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아가는 놀라 부르짖었다.
[정 공자! 그대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러나 대답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위소보는 여전히 그녀와 한몸이 되
어 밀착된 채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가 신방을 구경하러 왔다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간 모양이이구먼.]
아가는 외쳤다.
[빨리 나를 놔라.]
위소보는 말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마라.]
아가는 갑자기 팔굽을 뻗쳐 그의 목을 쳤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머리
를 뒤로 젖혔다. 이렇게 되자 아가는 그와 떨어질 수 있었다.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몸을 돌린다는 게 그만 모동주의 가슴팍에 걸터앉
고 말았다. 모동주는 아픔을 느끼고 크게 비명을 지르더니 팔을 뻗쳐
그녀를 꼭 껴안았다. 아가는 어둠 속에 자기를 얼싸안은 것이 누군지
모르고 매우 놀라고 당황하여 전혀 기운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발을 누가 내리누르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깜짝 놀라 전신에서 식
은땀이 흘러내렸다.
[침대 위에는 많은 남자들이 있다.]
위소보는 어둠 속에서 아가를 찾지 못하자 말했다.
[아가, 빨리 소리를 내시오. 그대는 어디 있소?]
(그대가 나의 목을 자른다 하더라도 나는 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야.)
위소보는 말했다.
[좋아, 그대가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첫번째도 만지고 두 번째도 만지
고 하나하나 만져서는 그대를 만질 때까지 만지도록 하겠소.]
그는 갑자기 소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첫번째도 만지고 두 번째도 만지고 한 사람의 미녀를 만지게 되었노
라. 미녀의 얼굴은 갸름한데 혹시 그대는 늙은 갈보가 아닌가?]
입으로는 노래를 부르며 두 손으로는 여인들의 보드라운 몸뚱이를 마구
더듬었다. 갑자기 마당 쪽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누가
명령을 내리는 가운데 대대의 병마가 몇 집이나 되는 기녀원들을 일제
히 에워싸는 기척이 들렸다. 곧이어 발걸음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누가
여춘원으로 들어왔다. 위소보는 나타난 사람이 만약 자기의 부하가 아
니면 바로 양주의 관원일 것이라 생각하고 기뻐했다. 그가 이부자리에
서 기어나오기도 전에 사람들은 이미 불을 밝히고 감로청 안으로 들어
서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현정 도인이 부르짖었다.
[위 대인, 그대는 이곳에 계신가요?]
그 음성은 매우 초조해 보였다. 위소보는 대답했다.
[나는 이곳에 있소.]
천지회의 군웅들은 위소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혹시나 그가
위험한 일에 부딪힌 것이 아닌가 하고 찾아나서게 되었다. 그가 친위병
을 데리고 기녀원 쪽으로 갔다라는 것을 알고 조사를 하다가 여춘원에
서 누가 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춘원으로 들어오게 되
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몇 명의 친위병들이 땅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가 친히 대답을 해야만 안심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소보는 사람들이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모
조리 이쪽으로달려오는 것을 알고는 재빨리 침대의 휘장을 내렸다. 그
러느라고 자기의 발이 어떤 여인의 배를 밟았는지 돌볼 겨를도 없었다.
휘장을 막 내려놓았을 때 현정 도인 등이 이미 방안으로 들어섰으며 그
들은 각기 횃불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정극상이 침대 앞에 쓰러져 있
는 것을 보고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 부르짖었다.
[위 대인, 위 대인!]
[나는 여기 있소. 그대들은 침대 휘장을 들추지 마시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여러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하나같이 생각했다.
(모두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대는 바로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며 재미
있게 놀고 있었구나.)
위소보는 불빛을 따라 옷을 입고는 모자를 찾아 쓰고 침대 위에서 기어
내려와 신발을 찾아 신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나는 계책을 써서 몇 명의 국사범들을 잡았는데 모두 침대 위에 있소.
모두들 이번 일에 공로가 적지 않을 것이오.]
사람들은 크게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평소 신출귀몰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거북하기도 해서 더 묻지는 않았다. 위소보는
정극상을 묶으라고 하고 가마로 아기 소저를 태워서 보내도록 했다. 그
리고 휘장 끝을 이부자리 안에 쿡쿡 쑤셔 박아 놓고는 십여 명의 친위
병들을 불러서는 커다란 침대를 그대로 흠차의 화원으로 옮기도록 했
다. 친위병 대장은 말했다.
[대인께 알립니다. 문 입구가 너무 작아서 떠메고 나갈 수가 없겠는데
요.]
[이 멍청한 것아, 벽을 헐면 되지 않느냐?]
그 대장은 즉시 옳으신 말씀이라고 하고는 호통을 치며 명령을 내렸다.
친위병들이 손을 써서 여춘원의 벽을 세 곳이나 무너뜨렸다. 그리고 십
여 명이 칠팔 자루의 가마를 떠멜 때 사용하는 멜대를 커다란 침대 밑
에다가 끼워서 커다란 침대를 평온하게 떠메고 나갈 수가 있었다. 날은
이미 밝아 있었고 커다란 침대가 양주의 큰 거리를 지나가게 되었다.
친위병들은 물러나라고 소리치면서 팻말들을 들어 보이며 징을 치고 호
통을 내질렀다. 그리고 전후좌우에서 호위해 갔다. 양주의 백성들은 이
를 보고 모두가 희한한 노릇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커다란 침대는 화원
에 이르렀는데 문 입구가 역시 너무나 좁았다. 이때 친위병들은 이미
한 번 배운 바가 있는지라 요령이 늘어 흠차대인이 분부하기도 전에 즉
시 명을 내려 담장을 허물고 커다란 침대를 화청으로 떠메고 들어가서
는 대청 한복판에 내려놓았다.
위소보는 즉시 명령을 내려서 침대 위의 국사범들을 잡는다는 것은 엄
청난 일이므로 수십 명의 장수들은 병졸들을 이끌고 시위에 활을 먹이
고 칼집에서 칼을 뽑아서는 화청 사방을 에워싸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
리고 다시 서천천 등으로 하여금 밖에 나가서 지키도록 하여 수두타 등
이 달려들어 가로챌 것에 대비했다. 화청 사방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기
는 했으나 대청에는 커다란 침대와 위소보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 전 여춘원에서는 그토록 좋은 기회에 시간이 부족하여 일곱 명의
미녀들 가운데 맛을 보지 못하고 빠뜨린 사람이 있는 것 같구나. 더군
다나 어둠 속이라 누구를 안았고 누구를 안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 역시 더듬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낫겠구
나.)
그는 입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첫번째도 만지고 두 번째도 만지고 누이의....]
그는 휘장을 들추고 침대 위로 뛰어올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땋은 머리
가 바짝 조여들었고 목이 아팠다. 누군가에게 땋은 머리를 붙잡혀서는
들어올려졌고 또한 그 사람이 왼손으로 자기의 목을 누르는 것이었는데
바로 홍 부인이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자 미춘주의 술기운이 사라지고 홍 부인, 모동주,
방이, 목검병 등 네 여인은 이미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쌍아와 증유는
몸에 봉해졌던 혈도가 이미 풀어졌다. 그러나 커다란 침대로 양주 거리
에서 떠메고 올 때는 침대 주위에 많은 군사와 장수들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침대 위의 일곱 여인네들은 그 누구도 꼼짝할 수 없었고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위소보가 다시 뜨거운 염복을 누리려고 침대 위에
오르자마자 홍 부인에게 잡히게 된 것이다. 홍 부인은 얼굴에 웃는 듯
마는 듯한 코웃음을 치며 나직이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 정말 당돌하다. 감히 나를 희롱하다니.]
위소보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웃음을 띄웠다.
[부인, 나는....나는 희롱을 한 것이 아니고 그저....그저....]
홍 부인은 말했다.
[그대가 부른 노래는 어떤 것이지?]
[그것은 기녀원에서 들은 것입니다.]
홍 부인은 나직이 말했다.
[그대는 죽고 싶은가? 아니면 살고 싶은가?]
[속하 백룡사는 삼가 부인과 교주께서 선복을 영원히 누리시기를 빌며
수명이 하늘처럼 길기를 바랍니다. 부인의 명령을 속하는 받들어 어기
지 않겠소이다.]
第105章. 영웅이 되기 위해 아가를 보내주다
홍 부인은 그가 이 말을 할 때 히죽히죽 웃으며 조금도 공손한 빛이 보
이지 않는 것을 보고 쯧쯧 하더니 말했다.
[그대는 먼저 화청 주위의 병졸과 장수들을 물리치도록 하게.]
위소보는 말했다.
[좋지요. 그 일이야 쉬운 노릇이 아넙니까? 부인께서는 먼저 손을 내려
놓으십시오. 그러면 내 즉시 명령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홍 부인은 말했다.
[그대는 이곳에서 명령을 내리도록 해.]
위소보는 어찌할 수가 없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대청 밖에서 임무에 응하고 있는 총독, 순무, 병부상서, 호부상서들은
모두 들으시오. 모든 병졸과 장수들은 물러갈 것이며 이곳에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소.]
홍 부인은 그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호통을 쳤다.
[무엇이 병부상서이고 호부상서야?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군.]
그녀는 다시 힘주어 그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위소보는 큰소리로 부르
짖었다.
[아이쿠, 아파 죽겠네!]
바깥에서 병졸들을 거느리고 있던 벼슬아치들은 위소보가 총독이니 상
서니 하였을 때 이미 의심을 하였는데, 그가 크게 아프다는 소리를 내
지르자 대뜸 수십 명의 손에 칼과 창을 든 병졸들을 이끌고 대청 안으
로 달려들어와 일제히 물었다.
[흠차대인, 무슨 일입니까?]
위소보는 부르짖었다.
[아무것도....아무것도 아닐세! 아이구 엄마야!]
장수들과 벼슬아치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손발을 어떻게 놀려야
할지 몰랐다. 홍 부인은 속으로 화가 나서 손을 쳐들고 찰싹 위소보의
따귀를 갈겼다. 위소보는 크게 부르짖었다.
[아이쿠! 어머니! 아들을 때리지 마십시오.]
흥 부인은 위소보가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갈보라고 욕을 하
는 것이란 사실을 몰랐지만 그가 그토록 망나니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손을 쳐들고 다시 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등뒤의 천종(天宗)
과 신당(神堂) 두 혈이 대뜸 시큰거리며 마비되어 자기도 모르게 오른
팔을 맥없이 내려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홍 부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누가 자신의 혈도를 짚었는가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등뒤에 자
기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바로 방이가 아닌가!
홍 부인은 냉소했다.
[방 소저, 그대의 무공은 훌륭하군.]
그녀는 왼손으로 재빨리 방이의 눈을 찌르려고 했다. 방이는 부르짖었
다.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아니라고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 홍 부인이 다시 재차 공격을 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등뒤에서 두 손이 빠져나와 그녀의 왼팔을 얼싸안는 것이 아
닌가! 바로 목검병이었다. 목검병은 크게 부르짖었다.
[부인, 우리 사저가 그대를 짚은 것이 아니에요.]
그녀는 홍 부인의 혈도를 짚은 사람이 바로 쌍아였음을 알고 있었다.
모동주는 손을 쳐들더니 목검병에게 일 장을 내리쳤다. 다행히 그녀에
게는 이미 내력이 없어 목검병은 상처를 입지 않았다. 모동주가 두 번
째로 손을 들어 치려고 했을 때 방이가 손을 뻗쳤다. 아가는 네 명의
여자가 한데 어울려 싸우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려 침대 위에서 내려서고
자 했다. 그런데 오른쪽 다리를 막 이불 속에서 꺼내었을 때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즉시 몸을 움츠렸다. 위소보는 그녀의 왼발을 잡고 말했
다.
[가지 마시오.]
아가는 힘껏 발길질을 하며 외쳤다.
[이것을 놓아라.]
위소보는 웃었다.
[그대가 어디 짐작해 보시지, 놓을까? 놓지 않을까?]
아가는 매우 다급해져 몸을 돌려 한 대의 주먹을 내실렀다. 위소보가
슬쩍 비키자 짝, 하는 소리와 함께 그만 증유의 왼쪽 뺨을 때리고 말았
다.
[그대는 어째서 나를 때리는 거예요.]
아가는 말했다.
[미....미안해요....]
사과를 하려는 그 순간 방이에게 그만 일 장을 얻어맞았다. 삽시간에
침대 위는 소란이 벌어지게 되어 일곱 명의 여자들은 마구잡이로 때리
고 다투었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천하에 커다란 소란이 일어나고 군웅들....아니 군자(窘
雌)들의 혼전이 벌어진 셈이로군!)
그는 이 틈에 손으로 장난을 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가 내려앉았다. 이렇게 되차 침대 위에 있던 여덟 명
은 서로의 몸뚱이가 상대방의 손과 다리를 내리누르는 꼴이 되었다. 일
곱 명의 여자들은 일제히 날카롭게 소리쳤다. 장수들과 벼슬아치들은
이와 같은 광경을 보고 그만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위소보는 큰소리로 웃으며 사람들 틈에서 기어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왼쪽 다리가 누군가에게 붙잡혀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는 부르짖
었다.
[모두 손을 놓으시오! 장수들과 관원들은 모두 나의 크고 작은 마누라
들을 일제히 잡도록 하시오.]
장수들과 관원들은 침대 주위를 빙 둘러서기는 했으나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위소보는 모동주를 손가락질했다.
[이 늙은 갈보는 바로 국사범이오. 절대 그녀를 도망치게 해서는 안 되
오.]
장수와 관원들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이 여자들이 저분의 크고 작은 마누라일까? 또 국사범은 무엇
이며, 다른 두 명은 왜 친위병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러나 그러한 말들을 어찌 위소보에게 물어 볼 수 있겠는가! 즉시 누
군가 칼과 창으로 모동주를 겨누었고 또 다른 사람이 모동주를 잡아 일
으켰다. 그리고는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
위소보는 홍 부인을 가르켰다.
[이 부인은 나의 윗사람이오. 하지만 우리들은 그녀에게도 수갑을 채우
도록 합시다.]
장수들은 더욱더 이상하게 생각하며 홍 부인에게 수갑을 채웠다. 홍 부
인은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지만 쌍아에게 두 곳의 혈도를 짚힌 터
라 반신이 시큰거리고 마비되어 반항하기가 어려웠다. 쌍아와 증유가
그제서야 사람들 틈에서 기어나왔다. 어젯밤에 겪은 일을 상기하고 그
녀들은 얼굴을 붉혔으나 또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한 모양이었다. 위소
보는 방이를 손가락질했다.
[그녀는 나의 큰 작은마누라이외다.]
그는 또 목검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작은 작은마누라인데 큰 작은마누라는 수갑을 채우도록 하고
작은 작은마누라는 그럴 필요가 없소.]
장수들은 방이에게 수갑을 채웠다. 흠차대인이 잇달아 이상한 말들을
지껄였으나 그들은 흠차대인의 그러한 말들을 많이 들어온 바가 있는지
라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때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
가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고 옷
매무시는 단정하지 못했다. 남자의 옷차림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여전히 매력적이었는데, 그녀는 두 손으로 장포의 아
랫자락을 꼭 잡고서 밖으로 드러난 매끈하고 희디흰 두 다리를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 두 뺨을 붉히고 있었다.
병졸들과 장수들은 똑같이 생각했다.
(흠차대인의 이 몇 명의 크고 작은 마누라들 가운데 이 마누라가 제일
아름답구나.)
이때 위소보가 말했다.
[그녀는 내가 정식으로 매파를 두어 맞아들인 본부인이요. 내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도록 하지.]
그는 두어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마누라, 일어나도록 하시오.]
그는 손을 뻗쳐 부축하려고 했다. 갑자기 철썩, 하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어느새 흠차대인이 얼굴에 심하게 따귀를 한 대 얻어 맞은 것
이었다. 아가는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대는 틈만 있으면 나를 못살게 굴더니 마침내....마침내.... 나를
짓밟았어요! 차라리 그대는 나를 죽여요! 나는....나는.... 살고 싶지
않아요!]
장수들과 관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아연해 하지 않는 자가 없
었다. 흠차대인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구타를 당하였으니 그야말로 장
수들과 관원들이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모든 사람들이 직책
을 다하지 못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흠차대인을 구타하고 모욕한 사
람이 바로 그의 본부인이니 앞으로 나아가 막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
이고 그렇다고 호통을 내지를 수도 없어서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위
소보는 얻어맞은 쪽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그대를 아까워서 어떻게 죽이겠소? 마누라는 화를 내지 마시오. 내가
즉시 정 공자를 죽이도록 하겠소.]
그는 큰소리로 물었다.
[여춘원에서 잡아온 그 남자는 어디에 있느냐?]
한 명의 좌령이 대답했다.
[도통께 알립니다. 그 녀석은 손과 발에 수갑을 채워 잘 지키고 있습니
다.]
[매우 좋아. 그가 만약 도망을 치려 한다면 그의 왼쪽 다리를 자르고
다시 그의 오른쪽 다리도 자르시오....]
아가는 놀라 크게 부르짖었다.
[안....안돼요....그의 발을 자르지 말아요....그는....그는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가 도망친다면 나는 정 공자의 두 손을 자르도록 하지.]
그는 방이와 목검병 등을 한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나의 이 큰 작은마누라와 작은 작은마누라들이 만약 도망을 친다 해도
정 공자의 귀와 코를 자르도록 하게나.]
아가는 다급해져 말했다.
[그대는....그대는 이 여인들과 정 공자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이 여인들의 일에 어째서 그를 탓한단 말이에요?]
위소보는 말했다.
[물론 상관이 있소. 나의 이 여인들로 말하자면 하나같이 화용월태인데
정공자는 색골이오. 그가 이 여인들을 한번 보게 된다면 좋지 않은 마
음을 품을 것이 아니겠소?]
아가는 속으로 생각했다.
(억지를 쓰는구나!)
그러나 위소보가 도리를 따지지 않는 사람인 줄 아는지라 무슨 말을 해
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아가는 다급한 김에 다시 울음을 터뜨렸
다. 위소보는 말했다.
[수갑을 채운 후에 이들을 모두 억류하도록 하여 잘 지키시게. 발에도
쇠사슬을 채우도록 하게. 그리고 다시 주방에 분부하여 주연을 차리도
록 하게나. 수갑을 채우지 않은 훌륭한 소저들은 이곳에서 나와 더불어
술을 마시게 될 것이야.]
친위병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가는 울었다.
[나는....나는 그대와 더불어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아요. 그대는 나에게
수갑을 채우도록 해요.]
증유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나갔다. 위소보는 말
했다.
[어! 그대는 어디로 가시오?]
증유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그대는....그대는 정말 염치가 없군요. 나는 다시 그대를 보지 않겠어
요.]
위소보는 어리둥절해져서 말했다.
[어째서?]
[그대는....그대는 어째서라고 묻는 건가요? 이 여인이 그대에게 시집
을 가려고 하지 않는데 억지로 몸을 빼앗다니! 그대가 대관이라 해서
이토록 백성들을 못살게 굴어도 된다는 것인가요? 나는 처음에 그대
가....그대가 영웅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그런데 알고
보니 어떻단 말이요?]
증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감싸더니 말했다.
[나는 모르겠어요. 그대는....그대는 나쁜 사람이지 좋은 사람은 아니
에요.]
울면서 그녀는 화청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두 명의 군관이
칼을 들이대며 앞을 막고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가 대인을 모욕하다니? 가지 못한다. 흠차대인의 처분을 기다리도
록 해 라.]
위소보는 증유의 그와 같은 꾸지람을 듣게 되자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
는 기쁨에 휩싸여 있다가 그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의 말에도 일
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오랑캐의 대관이 되고 나서 그 권
세를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은 그야말로 이야기꾼이 말하는 간신들
이나 고약한 토호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내가 영웅이란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증 소저, 그대는 들어오시오. 내 그대에게 할 말이 있소.]
증유는 고개를 돌리고 가슴을 펴며 말했다.
[제가 그대에게 죄를 지었으니 그대는 저의 목을 치는 것이 좋겠어요.]
쌍아는 그녀와 교분이 두터운지라 재빨리 말했다.
[증 언니, 화내지 마세요. 상공은 그대를 죽이지 않을 거예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소. 내가 만약 그녀들에게 강요하여 나의 마누라로 삼
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얼굴을 알록달록하게 칠한 간신이 백성의 여자들
을 억지로 빼앗는 것과 다름이 없소. 그야말로 삼소인연(三笑姻緣) 가
운데 왕노호(王老虎)가 남의 신부를 빼앗은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오.]
그는 손가락으로 아가를 가리키며 친위병들을 거느리고 달려온 좌령에
게 말했다..[그대는 이 소저를 데리고 나가게. 그리고 그 정가라는 남
자도 놓아 주게.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부가 되도록 하게.]
이 말을 하였을 때 그는 마음이 여간 아프지 않았다. 그는 다시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갑을 풀고 그녀 역시 놓아주게. 그녀로 하여금 그녀의 다정한 사람
인 유 사형을 찾아가도록 하게. 아! 나의 본부인이 간부와 놀아나고 있
으니 나의 큰 작은마누라 역시 간부와 놀아나도록 만들어 줘야지. 제기
랄! 내가 무슨 흠차대인이고 도통대인이야? 나야말로 자라대인 노릇을
톡톡히 하게 되었구나.]
좌령은 그가 신경질을 부리는 것을 보고 놀라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빨리 저 두 여인을 데리고 나가게.]
그 좌령은 대답하고는 아가와 방이를 데리고 나갔다. 위소보는 두 여인
의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여간 아쉽지 않았다. 그런데 방이와 아가는
고개 한번 돌리지도 않고 나갔으며 한마디의 고맙다는 인사말도 없었고
고맙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증유가 두어 걸음 나가
며 나직이 말했다.
[그대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대는....그대는 저를 벌하는 게 좋겠어
요.]
온유한 표정 속에는 크게 미안하다는 빛이 서려 있었다. 위소보는 대뜸
정신이 번쩍 들어 즉시 환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았소, 맞았소. 내 확실히 그대에게 벌을 내려야겠소. 쌍아, 소군주,
증 소저, 그대들 세 명은 훌륭한 소저들이요. 자, 우리 안으로 들어가
서 이야기나 합시다.]
그는 세 소녀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다정하게 정담을 나누려고 했
다. 그런데 화청 입구에서 한 명의 군관이 들어오며 말했다.
[도통대인께 아룁니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홍 교주의 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도통대인을 뵙기를 청합니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말했다.
[뭐가 홍 교주이고 녹 교주인가? 만나지 않겠네, 만나지 않겠어. 빨리
쫓아내게.]
[예.]
그는 한걸음 물러서더니 다시 말했다.
[그 사람은 그의 손에 두 남자가 있는데 도통대인이 데리고 있는 두 여
인과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두 여인과 바꾸겠다고?]
그는 홍 부인과 동지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멍청이로군. 이와 같이 좋은 물건을 내 어찌 바꾸고자 한단 말인
가?]
[그렇습니다. 비직이 가서 그를 쫓아보내죠.]
[그는 어떤 남자들과 바꾸겠다는 것인가? 제기랄! 남자가 무엇이 좋다
고 그러지? 남자와 여자를 바꾸자는 수작을 생각해 내다니 참 용하군!]
[그 사람은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습니다. 한 명의 라마와 한
명의 왕자인데 모두 다 도통대인의 의형제라고 했습니다.]
위소보는 아,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상결 라마와 갈이단 왕자가 홍 교주에게 잡혔구나.)
[라마와 왕자를 내가 인계받아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자네는 가서 그
녀석에게 이 두 여인으로 말하면 설사 이백만 명의 남자를 데리고 와
바꾼다 해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게나.]
그 군관은 잇따라 그렇다고 말하고는 뒤로 물러가려고 했다. 위소보는
증유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처음에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내 마누라를 풀어 주
고 그녀들로 하여금 그녀들의 정부와 노닥거리도록 해주니까 비로소 나
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흥!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적지 않은
밑천을 들인 셈이군. 갈이단과 상결 라마 두 사람은 어찌되었든간에 나
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인데 내가 그들을 바꾸어 오지 않는다면 반드시
홍 교주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홍 부인을 억류해서 무슨 소용이 있
겠는가? 그녀는 정말 아름답기 이를 데 없지만 나와 영원히 선복을 누
리려 하는 것도 아니고 수명이 하늘처럼 높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
다. 제기랄! 색을 중시하고 친구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영웅호걸이
아니지.)
위소보는 호통을 내질렀다.
[잠깐! 그대는 가서 그에게 홍 교주가 두 사람을 석방해 주면 나도 바
로 홍 부인을 되돌려주겠다고 하게. 이 부인으로 말하면 화용월태로 서
시와 양귀비보다 뛰어난 인물로서 이 세상에서는 그야말로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네. 나의 목을 자른다 하더라도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
으나 그가 데리고 있는 두 남자와 바꿈으로 해서 그에게 크게 은혜를
베푸는 셈이지. 다른 한 여인은 형편없지만 놓아줄 수 없단 말이야.]
그 군관은 대답을 하고 나갔다. 홍 부인은 줄곧 얼굴을 굳히고 있다가
이때서야 웃음을 띄우고 입을 열었다.
[흠차대인께서는 과연 영웅호걸이시군요?]
위소보는 말했다.
[부인, 그대야말로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데 어찌 겸손한 말씀을 하십
니까? 우리는 끝까지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하죠. 그리고 이미 밑천을 까
먹었으니 끝까지 밑천을 까먹는 방향으로 하겠소이다. 먼저 물건을 보
내고 나서 돈을 받기로 하죠. 거기 누구 없느냐! 빨리 내 상사의 수갑
을 풀도록 해라.]
그는 열쇠를 받아서 친히 흥 부인의 수갑을 풀어 주고 그녀를 모시고
나갔다. 대청에 이르렀을 때, 그 군관은 육고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
다.
[육 선생, 그대는 부인을 잘 모시고 돌아가도록 하시오. 부인, 속하는
삼가 그대 어르신이 승리를 하여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축하드리오며
그대와 교주께서 영원히 선복을 누리고 수명이 하늘처럼 길게 되기를
기원하겠소이다.]
홍 부인은 호호거리며 간드러진 웃음을 흘렸다.
[흠차대인께선 벼슬이 높아지고 재물도 두둑하게 쌓이기를 빌며 수명은
남산보다 길고 간드러진 처와 아름다운 첩들을 거느리고 만대에 걸쳐
공후장상이 되시기를 빌겠어오..]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벼슬이 오르고 재물을 긁어모으기는 쉬우나 간드러진 처와 아름다운
첩을 거느리는 것은 어렵지.]
그는 큰소리로 분부를 했다.
[주악을 울려라. 그리고 손님을 전송하되 교자를 준비하여라.]
풍악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그는 친히 대문 입구까지 전송하여 홍
부인이 교자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홍 부인이 탄 교자가 떠나고
위소보가 막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문 앞에 다시 커다란 한
채의 교자가 들이닥쳤다. 바로 양주부 지부가 방문하는 것이었다. 위소
보는 손에 들어왔던 미녀들이 하나하나 떠나가는 것을 보자 마음이 여
간 괴롭지 않아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대는 왜 또 왔소?]
第106章. 사로잡힌 반청복명의 지사들
지부 오지영은 인사를 하고 말했다.
[비직은 대인께 알릴 비밀의 군정(軍情)이 있습니다.]
위소보는 '비밀의 군정'이란 말을 듣고서야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
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만일 비밀스럽고 큰일이 아니라면 볼기를 때려줘야
지.)
그는 안쪽 서재로 가서 먼저 자리에 앉았다. 오지영에게는 앉으라는 말
도 없이 다짜고짜 물었다.
[무엇이 비밀의 군정이란 말이오?]
오지영은 말했다.
[대인께서는 좌우의 사람들을 모두 물리쳐 주십시오.]
위소보는 손을 내저어 친위병들을 물러가도록 하였다. 오지영은 그의
앞에 이르더니 말했다.
[흠차대인, 이 일은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대인께서 상관하신다면 커
다란 공로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비직 또한 대인의 덕을 입게 되는 것
이지요. 비직은 무태와 번태 두 대인에게 먼저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
고 생각합니다.]
위소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큰일인데 그와 같이 중요하단 말이오?]
오지영은 말했다.
[대인께 말씀드립니다. 그야말로 황상의 타고나신 복이 크시고 대인께
서 타고나신 복이 크셔서 비직이 이처럼 커다란 소식을 수소문해 내기
에 이른 것 같습니다.]
위소보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그대 오 대인 역시 타고난 복이 컸구려.]
오지영이 말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비직은 황상의 은혜를 입고 흠차대인으로 추대된
몸이라 그야말로 밤낮으로 어떻게 그 커다란 은혜에 보답할까 하고 생
각하고 있던 차입니다. 어제 선지사 밖에서 대인을 모시고 작약을 구경
하고 난 이후 대인의 이야기하시는 풍채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탄복하고 우러러보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매일같이
대인의 일을 돌봐드리며 시시각각 대인의 가르침을 받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오. 그대는 지부 노릇도 할 필요가 없소. 내가
보기에 그대는 매우 총명하니 차라리....차라리....]
오지영은 크게 기뻐서 재빨리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대인께서 키워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위소보는 미소지었다.
[차라리 나를 위해 우리 집의 문지기가 되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을 때
는 나를 위해 교자를 떠메도록 하시오. 나는 매일같이 이 집을 나서는
사람이니 그렇게 된다면 나를 매일 볼 수 있지 않겠소? 하하하....]
오지영은 매우 화가 나 안색이 약간 변했으나 곧 웃음을 지으며 말했
다.
[그것 참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군요. 대인을 위해서 문지기가
된다면 그야말로, 양주에서 지부 노릇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요. 비
직은 평소 한가한 사람들을 내보내 곳곳에 수소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
래서 만약에 누군가 마음속으로 반역의 뜻을 품어 황상을 비방하거나
대신들을 모함한다면 비직은 그 즉시 알게 됩니다. 요사한 말로 사람들
을 선동하는 자가 있으면 비직은 언제나 엄히 처벌을 한답니다.]
위소보는 '어' 하고, 속으로 이 사람은 문지기나 가마꾼이라는 한 마디
정도만 언급해도 슬쩍 말을 돌릴 줄 알 만큼 벼슬길의 요령을 깊이 터
득하고 있으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오지영은 다시 말했다.
[만약에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일꾼들이나 시정잡배들이라면 터
무니없이 말을 몇 마디 지껄인다 하더라도 큰 해는 없지만, 가장 경계
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선비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시를 짓고 문장을
쓰는 데 종종 옛날의 일을 빌어 조정을 풍자하지요. 보통사람들은 이를
보고도 종종 그들이 옛날 일을 빌어 오늘날을 풍자하고 있는 악독한 행
위라고 생각하지 못한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아 이해되지 않는다면 해가 될 것이 없지 않소?]
오지영은 말했다.
[그렇지요. 하지만 역시 따지고, 보면 그 마음은 죽이고 싶도록 간절한
것이 아닙니까? 이와 같은 대역무도한 시와 글이 천하에 독을 입히도록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는 소맷자락 안에서 시를 베껴쓴 표본을 들고 두 손으로 바치며 말했
다.
[대인께서는 이것을 보십시오. 이것은 비직이 어제 얻게 된 한 권의 시
집입니다.]
만약 그가 소맷자락에서 한 웅큼의 은표를 꺼냈더라면 위소보는 대뜸
얼굴을 바꾸고 그를 대했으리라. 그러나 한 권의 책자인 것을 보고 이
미 실망을 하였는데 다시 시집이란 말을 듣게 되자 대뜸 길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손을 뻗쳐 받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외면하고 아랑곳하
지도 않았다. 오지영은 매우 겸연쩍어했으며 두 손으로 시집을 받쳐들
고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어제 술 좌석에서 어떤 여자가 한 수의 해로운 시를 얻게 되었는데 그
시는 바로 양주의 시골 여자들을 묘사한 것이었죠. 그런데 대인께서는
그 시를 듣고 매우 불쾌히 여겼습니다. 비직은 그래서 그 사람이 쓴 시
를 가지고 오게 해서 살펴본 결과 그 시 가운데 아니나다를까 대역무도
한 구절들이 적잖이 있는 것을 발견하었습니다.]
위소보는 온 몸이 노곤한 듯이 말했다.
[그래서?]
오지영은 책자를 뒤적이더니 한 수의 시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대인, 이것을 보십시오. 이 시의 제목은 흥무동포가(洪武銅疱歌)
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신행(査愼行)이 쓴 것인데 명나라 주원장이 사
용한 구리로 만든 대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위소보는 그 말을 듣자 약간 흥미가 일어나 오지영에게 물었다.
[주원장 역시 대포를 쏜 적이 있소?]
오지영은 말했다.
[예, 예. 지금 우리 대청나라의 거룩하신 천자께서 제위에 계신데 이
사(査)가는 시를 지어 주원장의 구리로 만든 포를 노래하며 칭송하니
그야말로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전 명나라를 생각토록 하는 것이 아니
겠습니까? 이 시는 주원장의 위풍을 과장되게 칭찬하고 있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며 최후의 네 마디는 다음과 같은 말까지 하고 있습니
다. '아래견여형극중(我來見汝荊棘中), 병여강산작빙조( 與江山作憑
弔), 금적마사총루류(金狄摩死總淚流) 유정쟁인장등조(有情爭忍長登
眺)' 그러니 마음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우리
대청나라는 하늘이 점지한 운세를 이어받아 주씨들이 이끌어 온 명나라
를 쳐부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 사람은 어째서 주원장이 사용한 일 문의 대포를 보고는 강산을 조상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한단 말입니까?]
위소보는 말했다.
[이 구리 대포는 지금 어디에 있소? 가서 그것을 구경하고 싶구려. 아
직도 쓸 수 있소? 황상께서는 대포를 매우 좋아하신다오.]
오지영은 말했다.
[시에서는 구리 대포가 형주(荊州)에 있다고 하더군요.]
위소보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양주에 없는데 그대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오? 그대가
맡고 있는 것은 양주의 지부이지 형주의 지부가 아니지 않소. 나중에
그대가 형주의 지현(知縣)이 되어 가면 그 구리 대포를 살펴보시도록
하시오.]
오지영은 깜짝 놀라 형주의 지현이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벼슬이 강등
하는 일인지라 이 일을 더이상 들먹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시집을 소매 안에 갈무리하고 다른 두 권의 책을 꺼내며 말했다.
[흠차대인, 그 사씨의 시는 그저 약간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만 대인께
서 그토록 은혜를 베푸시니 더 조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두 권
의 책은 결코 못 본 척할 수 없으실 것입니다.]
위소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또 어떤 작자의 것이요?]
오지영은 말했다.
[한 권은 사윤황이 지은 국수록(國壽錄)인데 이 안의 글들은 모두 청나
라를 반대하여 반역을 일으키는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권은
고염무(顧炎武)의 시집인데 위로 군주도 없고 윗사람도 없는 것처럼 그
야말로 무법천지로 이를 논하고 있습니다.]
위 소보는 속으로 놀랐다.
(고염무 선생과 우리 사부님은 모두 살귀대희의 총군사이시다. 그의 책
이 어쩌다가 이 벼슬아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그 책에 우리 천
지회에 대해서 언급한 대목은 없을까?)
그는 물었다.
[책 안에 무슨 내용이 씌어 있는지 자세히 말해 보시오.]
오지영은 위소보가 갑자기 관심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국수록을 펼치며 말했다.
[대인께 아룁니다. 이 책은 청나라를 반대하는 반역자들을 모조리 충신
이고 의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한 편의 병부주사증감찰어사사자전
(兵部主事贈監蔡御史査子傳)에서는 그의 육촌 형제 사미계(査美繼)가
우리 대청나라에 항거하는 역적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어떻
게 반역도들과 결탁하여서 왕사(王師)와 적이 되어 싸우게 됐는가를 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문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인, 보십시오. 그는 반역도들을 의사라고 칭하고 있으며 우리 대청
나라의 왕사를 죽여야 한다고 하니 이야말로 죽여 마땅한 일이 아니겠
습니까?]
위소보는 물었다.
[고염무의 책에는 또 무어라 적혀 있소?]
오지영은 국수록을 놓고 고염무의 시집을 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
다.
[이 사람이 지은 시는 모두 모반과 반역의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시의 제목은 강호(江湖)라고 하는데 명백하게 우리 대청나라를 비방
하는 것입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시구를 가리키며 읽어 내려갔다.
아국금구본무결(我國金 本無缺)
난지초생자이얼(亂之初生自夷孼)
징병이건주(徵兵以建州)
가향이건주(加餉以建州)
토사일반서촉우(土司一反西蜀憂)
요민일창산동수(妖民一唱山東愁)
이지신주반류적(以至神州半流賊)
수기효실유이추(誰其嚆夫由夷酋)
사입교근린제로(四入郊禁躪齊魯)
파읍도성불가수(破邑屠城不可數)
할복절장(割腹絶腸)
절경접이(折頸摺 )
이택량시(以澤量屍)
행이득수(幸而得囚)
거내위이(去乃爲夷)
이구아아(夷口阿阿착치거아(鑿齒鋸牙)
건치기(建蚩旗)
승망거(乘莽車)
시천성지류혈(視千城之流血)
옹염여혜여화(擁艶女兮女花)
오호,이덕지잔여차(嗚呼夷德之殘如此)
이위천욕여지국가(而謂天欲與之國家)....
위소보는 손을 내저었다.
[더 읽을 필요 없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오지영은 말했다.
[대인께 아룁니다. 이 시는 우리 만주 사람을 오랑캐라 말하고 명나라
조정에서 건주(建州)의 만주 사람들과 싸움을 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군사를 징집하고 군자금을 거두어들이게 됨으로써 천하가 매우 어지러
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 만주 사람들이 성 안 사람들의 배
를 가르고 창자를 잘라서는 도살하다시피 죽였으며 미녀를 마구잡이로
강탈했다고 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랬었군. 미녀를 강탈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 아니겠소? 청나라
군사가 양주를 깨뜨렸을 때 많은 백성을 죽이지 않았소? 만약 그 일이
아니었다면 황상께서 어찌 양주에선 삼 년간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좋
다고 감해 주셨겠소? 고염무는 시를 꽤나 솔직하게 쓰는군.]
오지영은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어린 나이라 무겁고 가벼운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구나. 이와 같은 말
들을 다행히 네가 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고 내
가 이를 상주하게 된다면 너의 그 머리 위의 사모가 그대로 눌러 있을
것 같으냐?)
그러나 그는 위소보가 무척이나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라 감히 흠차대신과 맞설 용기를 내지는 못하였다.
그는 계속 '예, 예' 하고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인께서는 정말 고견을 지니고 있어서 비직으로 하여금 확연히 깨우
치게 하는 바가 크옵니다. 이 한 수의 정중심사가(井中心史歌)는 역시
대인께서 가르쳐 주셔야겠습니다. 이 한 수의 시 처음 부분에는 한 편
의 기다란 서문이 있는데 정말 이만저만 억지를 쓰는 것이 아니었습니
다.]
그는 책자를 들고 고개를 흔들며 읽기 시작했다.
[숭정십일년동(崇禎十一年冬), 소주부성중승천사이구한사정(蘇州府城中
承天寺以久旱俟井), 득일함(得一函), 기외왈(基外曰) 대송철함경(大宋
鐵函經), 고지재중(錮之再重). 대인 이것은 우물에서 하나의 쇠상자를
찾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쇠상자라고? 그 안에 금은보화라도 들어 있었소?]
오지영은 다시 읽어 내려갔다.
[중유서일권(中有書一卷), 명왈(名曰) '심사(心史)' 칭(稱) '대송고신
정사초백배봉(大宋孤臣鄭思肖百拜封), 사초(思肖), 호소남(號所南), 송
지유민(宋之遺民), 유문어지승자(有聞於志承者), 기장서지일위덕우구년
(基藏書之日爲德祐九年) 송이망의(宋已亡矣), 이유일야망진승상(而猶日
夜望陳丞相), 장소보통해외지병(張少保統海外之兵), 이득대송사백년지
토우(以復大宋三百年之土字). 대인, 고염무는 대만의 정씨 역적들이 해
외의 반란병들을 거느리고 와서 명나라의 토지를 희복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다시 읽어 내려갔다.
[이구호원어막북(而驅胡元於漠北), 지어통곡유체(至於痛哭流涕), 이도
지천지(而禱之天地), 맹지대신(盟之大神 ), 위기화전이(謂氣化銓移),
필유일일연이위하자(必有一日變夷爲夏者). 대인, 그는 우리 청나라 사
람들을 오랑캐라고 욕을 하고 있으며 우리들을 내쫓자고 선동하고 있습
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는 만주 사람이오?]
오지영은 말을 더듬거렸다.
[그건....그건....비직은 대청나라 황상의 신하로서 만주대인의 속하입
니다. 이것은 오로지 한마음 한뜻으로 만주를 위하는 일이기도 하지
요.]
그는 다시 읽어 내려갔다.
[어시군중지인견자무불계수경탁(於是郡中之人見者無不稽首驚託), 이순
무도원장공국유각지이전 (而巡撫都院張公國維刻之以傳), 우위소남립사
당(又爲所南立祠堂), 장기함사중(藏基函祠中), 미기이조국난(未幾而遭
國難) 일여덕우말년지사(一如德祐末年之事), 오호(嗚呼), 비의(悲矣)!
대인, 대청나라 군사들이 중원 안으로 들어와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를
벌하는 것을 고염무는 국난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오호 슬프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 씀씀이는 물어 볼 것도 없지 않
습니까?]
오지영은 다시 읽어 내려갔다.
[기서전지북방자소(其書傳至北覩少), 이변고지후(而變故之後), 우다위
이불출(又多謂而不出), 불견차서자삼십여년(不見此書者三十餘年), 이금
복도지어부평주시(而今復도 之於富平朱氏). 석차서초출(昔此書初出),
태창수전군숙부시이장(大倉守嶺君肅賦試二章), 곤산귀생장화지팔장(崑
山歸生莊和之八章),급절동지함(及浙東之陷),장공주귀동양(張公走歸東陽
), 부지중사(赴池中死). 전군후지회외(嶺君逅之每外), 졸어랑기산(卒於
琅琦山). 귀생갱영조명(歸生更名祚明), 위인우개기격렬(爲人又慨氣鵑
烈), 역종궁아이몰(亦終窮餓以沒). 대인, 이 세 사람의 반역자는 모두
우리 대청나라의 신하로 복종하지 않는 난민들입니다. 일찍 죽어 다행
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온 집안 사람들이 멸족을 당하게 되었을 것입니
다....]
오지영은 위소보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읽어 내려갔다.
[독여부재(獨余不才), 부침어세(浮沈於世), 비년원지일왕(悲年遠之日
往), 치금망지유밀(値禁모媒之愈密)인, 그는 조정에서 반역과 소란을
일으키게 되는 문자를 조사하고 금하는 것이 더욱더 심해졌다고 했습니
다. 그런데 이 녀석은 놀랍게도 간에 털이 난 모양인지 두려워 하지 않
는군요....]
그는 다시 읽어 내려갔다.
[이견현사제(而見賢思齊), 독립불구(獨立不懼), 장발휘기사(將發揮基
事), 이시위인신처변지측언(以示爲人臣處變之測焉), 고작차가(故作此
歌).]
그의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위소보는 연신 하품을 하였다. 다만 고염
무의 책에 무엇이 쓰여져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에 꾹 참고 듣는 것
이었다. 마침내 그가 한 토막의 서문을 다 읽자 물었다.
[끝났소?]
오지영은 말했다.
[아래는 문장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별 중요한 것 아니라면 읽을 필요 없소.]
오지영은 말했다.
[중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중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는 다시 읽었다.
[유송유신정사초 (有宋遺臣鄭思肖), 통곡호원이구묘(痛哭胡元移九廟),
독력난장한정부(獨力難將漢鼎扶), 고충욕향상루조(孤忠欲向湘累弔), 저
서일권칭(著書一卷稱) '심사(心史)' 만고차심심차리(萬古此心心枇理)
천심유정치철함(千尋幽井置鐵函), 백배단심금미사(百拜丹心今未死), 호
로종래무백년(胡虜從來無百年), 득봉성조재개천(得逢聖租再開天)....
대인, 이 한 마디 '오랑캐는 한번도 백 년을 간 적이 없다'는 이 말은
정말 크게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는 우리 대청나라가 나
라를 누리는 것이 백 년이 넘지 않으리라고 말하려 한 것입니다. 그리
고 한나라 사람들 중에서 무슨 성조(聖祖)가 나타나 다시 하늘을 연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늘을 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청나
라를 거꾸러뜨린다는 것이 아닙니까?]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황상에게서 들은 적이 있소. 대청나라에서 백성들을 잘 대해주기
만 한다면 이 강산을 편안하게 차지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때는 빈말
로 천 년, 만 년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헛된 노릇이라고 말씀하셨소.
그리고 외국 사람으로서 탕약망(湯若望)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지금
천감감정(天監監正)에 있소. 그대는 알고 있소?]
오지영은 대답했다.
[예, 비직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 사람은 한 권의 역서를 지었는데 이백 년을 계산했소. 그런데 누가
그를 고자질하여 말하기를 대청나라는 만 년이나 누리게 될 것인데 어
째서 이백 년밖에 혜아리지 않느냐고 반문하였소. 당시 국정을 뒤흔들
던 사람은 오배였는데 그는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라 놀랍게도
그의 목을 자르겠다고 했소. 다행히 황상께서는 거룩하시고 영명하시어
오배를 크게 한 번 꾸짖고 또 고자질한 사람의 목을 잘랐을 뿐만 아니
라 온 가족을 몰살시켰소. 황상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누군가 좋은
사람을 모함하는 것이오. 즉 대청나라가 백 년 천하이고, 이백 년 천하
라는 헛소리를 해서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단 말이오. 황상께서는 진정
으로 훌륭한 관리라면 반드시 백성을 사랑하고 조정을 위해 힘써 책임
을 다해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하셨소. 그리고 다른 사람을 무고한답시
고 언제나 시나 문장에서 잘못된 것을 꼬집어 내는 사람은 바로 계란에
서 뼈다귀를 찾는 자로 그야말로 커다란 간신이라 하셨소. 그리고 나에
게 분부하시길 그와 같은 녀석을 만나게 되면 즉시 묶어서 목을 자르라
하셨소.]
위소보는 오로지 고염무를 변호할 생각밖에 없었다. 또한 오지영이 자
기에게 고자질을 하다가 안 되면 다시 다른 관리에게 나가서사건을 일
으킬까 봐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말투와 얼굴 표정을 엄숙하게 가다듬어
오지영에게 겁을 주었다. 그가 차후로는 다시 이 일을 들먹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오지영이 지부가 된 것은 바로 장정룡이 편찬하
고 감수한 『명사집략』에 청나라 조정에 대한 불경스러운 구절이 있다
고 고자질해서 얻은 벼슬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원래 문자옥을 일
으켜 부귀공명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이 사람이 특기로 삼는 것이기도
했다.
이번에 오지영은 고염무와 사이황 등의 시문 가운데에서 잘못된 점을
찾자 기쁨을 금치 못하고 그야말로 하늘이 자기에게 복을 내리시어 다
시 세 계급이나 오르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그런데 흠차대인이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삽시간에 전신이 식은땀으로 젖는 걸 느
꼈다.
(내가 고자질한 명사 사건은 오배 대인이 처리한 것이다. 오배 대인이
황상에게 파면당하고 중한 처벌을 받은 것을 보면 황상의 성격은 확실
히 오배 대인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이다. 이거야말로 정말 큰일났구
나.)
강희가 어떻게 오배를 잡았건, 그것이 별로 영광스럽지 못하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대신들은 그렇기 때문에 황상의 뜻을 짐작하였고
벼슬길에 있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일을 들먹이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오지영은 벼슬이 높은 것도 아니었고 직책도 보잘것없었다. 더군다나
외지의 주현(州縣)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지라 한평생 유일하게 그를
알아준 오배 대인이 바로 이 대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모르
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혼비백산하고 말았으리라. 위소보는
그의 안색이 흙빛이 되어 벌벌 떠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뻐하며 물었
다.
[다 읽었소?]
오지영은 대답했다.
[이 한 수의 시는 아직도....아직도....절반이나 남아 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아래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소?]
오지영은 전전긍긍하며 읽었다.
황하기청인불대(黃河己淸人不待)
침침수부유광채(沈沈水府留光彩)
홀견기서출세간(忽見奇書出世間)
우경호기만강산(又驚胡騎滿江山)
천지세도장반복(天知世道將反覆)
고출차서시신혹(故出此書示臣鵠)
삼십여년재견지(三十餘年再見之)
동심동조복동시(同心同調復同時)
육공이향애문사(陸公已向厓門死)
신국인구괘연시(信國捐軀卦燕市)
석일음시조고인(昔日吟試弔古人)
유황낙목수산귀(幽篁落木愁山鬼)
오호(嗚呼)
포황지배하기다(蒲黃之輩何基多),
소남견차당여하(所南見此當如何)?
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읽어내려갔고 감히 한 마디의 해설도 덧
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간신히 다 읽고 나자 책장은 땀방울로 흠뼉 적
셔져 버렸다. 위소보는 웃었다.
[그것은 대단한 게 아니군! 무슨 산귀신(山鬼)과 무슨 얼굴이 누런 노
파(黃婆)라니 꽤나 재미있군.]
오지영은 말했다.
[대인에게 아룁니다. 시 속의 포황(蒲黃) 두 자는 얼굴이 누런 노파가
아니고 송나라 조정에서 원나라 조정으로 투항을 하여 대관이 된 포수
경(蒲壽庚) 황만석(黃萬石)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그것은 한나라 사람이
대청나라의 관리를 하는 것을 풍자한 것입니다.]
위소보는 안색을 굳히고 외쳤다.
[내가 얼굴이 누런 노파라면 바로 얼굴이 누런 노파야! 그대 마누라의
얼굴이 싯누런가? 그 누가 시를 지어 노파를 칭송하는데 그대가 어째서
불평이란 말인가?]
오지영은 한걸음 물러나서는 두 손을 벌벌 떨었다. 그 바람에 땀방울에
젖은 시집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예, 예, 폐직이 죽을죄를 졌습니다.]
위소보는 더욱더 큰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당돌한 것 같으니! 나는 삼가 황상의 거룩하신 유시를 받들어 너를 깨
우쳐 주려 하고 있다. 그대는 조그만 관리에 불과한데 감히 나의 앞에
서 물건을 던지고 성질을 부리는가? 그대가 황상의 거룩하신 유시를 업
신여기는 것, 이것은 반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가?]
오지영은 두 무릎을 땅바닥에 끓고는 연신 큰절을 하며 말했다.
[대....대인,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소인이 멍청한 것을 용서하십시
오.]
위소보는 냉소했다.
[그대가 나에게 물건을 던지고 신경질을 부린 것은 문제가 되지않아.
흠차를 모욕하고 소리를 내는 죄를 짓는 건 기껏해야 무겁게 되면 머리
를 자르게 될 것이고, 가볍게 되면 쫄병이 되겠지. 그것이야말로 작은
일이지.]
오지영은 쫄병이 되고 머리를 잘리는 것보다 더욱 무서운 일이 있다는
말에 기겁을 하여 연신 큰절을 해대며 말했다.
[대인께서는 넓으신 아량을 베풀어 주십쇼. 소....소....소인은 죄를
알았습니다.]
위소보는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는 황상의 그러하신 유시를 업신여기니 그럴 수가 있는가? 그대의
마누라, 작은마누라, 아들, 딸, 장모, 고모, 하녀, 정부, 모조리 끌고
나가서 목을 베게 될 것이다.]
오지영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바람에 이빨이 드드득 마주쳐 말을
잇지 못했다. 위소보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호통쳐 물었다.
[고염무란 사람은 지금 어디 있는가?]
오지영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대인께 말씀드립니다. 그는....그는....그는 지금....]
오지영은 이빨이 혓바닥을 깨무는 바람에 말을 똑똑히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 그는 전전긍긍하다가 말했다.
[비직은 당돌하게도 고염무와 그 사가....그리고....그리고 한 명의 여
가를 모조리....모조리 지부의 아문에 감금하고 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는 고문을 했는가? 그들은 뭐라고 말했지?]
오지영은 말했다.
[비직은 그저 아무렇게나 몇 마디 물어 보았습니다만 그들 세 사람은
아무것도 실토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들이 정말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오지영은 말했다.
[안....안 했습니다. 하지만....하지만 사가의 몸에서 한 통의 서신을
찾아냈는데 무척 중대한 것입니다. 대인께서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그는 몸에서 또 하나의 조그만 베로 싼 것을 꺼내 펼쳤다. 안에
는 한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바쳤다. 위소보는 받
지 않고 물었다.
[또 무슨 시고 문장이란 말인가?]
오지영은 말했다.
[아닙니다. 이것은 광동의 제독 오....오륙기가 쓴 것입니다.]
위소보는 광동의 제독 오륙기라는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오륙기도 시를 지을 줄 아는가?]
오지영은 말했다.
[아닙니다. 오륙기는 밀모(密謨)하여 반란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
는 바로 무쇠와 같은 증거물이 될 것인즉 그는 다시는 억지를 쓸 수 없
을 것입니다. 비직이 방금 말한 은밀한 군정과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위소보는 오, 하고 부르짖었다. 오지영은 다시 말했다.
[대인께 알립니다. 독서하는 선비들이 시를 쓰고 문장을 쓰며 또한 반
역의 말을 조금 한다는 것은 대인의 영단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
신 말씀에 폐직은 무척 탄복하고 있습니다. 흔히 선비가 반란을 일으키
면 삼 년이 가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짐작컨대 커다란
화근이 되지 못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오륙기는 한 성의 병부
(兵符)를 쥐고 있습니다. 그가 군사를 모으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데 만약 선수를 써서 제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그것이야말로
큰일이 나는 일이지요.]
오륙기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대목에서 그의 입놀림은 대뜸 영활
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줄곧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는데 위소보의 얼굴
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모습을 보고 이 일에 관심이 많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위소보는
흥, 하고 그를 한번 노려보았다. 오지영은 다시 깜짝 놀라 재빨리 꿇어
엎드렸다. 위소보는 말했다.
[이 편지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는가?]
오지영은 말했다.
[대인에게 아룁니다. 편지의 글은 매우 은근하게 씌어 있습니다. 그는
서남쪽에서 큰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데 바로 대장부가 큰 공을 세우고
기업을 일으킬 때라고 했습니다. 그는 사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광동으
로 와서 가르침을 베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중산(中山), 도모하고자 하고 천하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장거에는 청전(靑田) 선생이 계셔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면 공을 이룰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정말 틀림없이 반역을
꾀하는 편지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는 또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서남쪽에 큰일이 있다는 것이
무슨 큰일인지 알고 있는가? 그대는 조그만 벼슬아치로서 어찌 황상과
조정의 기밀을 안다고 하지?]
오지영은 말했다.
[예, 예. 하지만 그는 편지에서 분명히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말하고 있
으니 진정 소홀히 보아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위소보는 편지를 받아서 편지지를 꺼냈다. 그 편지에는 복숭아씨만한
큰 글자가 씌어 있었는데 먹을 매우 진하게 갈았고 필획 또한 거칠기
짝이 없었지만 그로서는 역시 한 자도 알 수가 없었다.
[편지에는 반란을 일으킨다고 말한 곳이 없는 것 같군.]
오지영은 말했다.
[대인께 알립니다.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말은 물론 공공연히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륙기가 중산왕(中山王), 개평왕(開平王)이 되고자 하는데
그 사가를 청전 선생으로 삼는다는 것은 바로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입
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벼슬하는 사람 가운데 어느 누가 왕에 봉해지고 공에 봉해지고 싶지
않겠소? 그대는 그럴 생각이 없단 말이오? 이 오군문(吳軍門)
의 공로는 매우 크오. 그가 다시 조정을 위해 커다란 공을 세우게 되면
황상께서 그를 한 사람의 왕야로 봉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인데 이것이
야말로 충성스런 일이 아니겠소?]
오지영은 더욱 겸연쩍어져서 속으로 생각했다.
(너같이 무식한 잡배와는 정말 무슨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구나. 나는
이미 그대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였는데 만약 이 일에서 공을 세우지 않
는다면 나의 앞길은 보장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성질을 누르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인께 아룁니다. 명나라 조정에는 두 명의 대장군이 있는데 한 명은
서달이라 불리웠고 한 명은 상우춘이라 불리웠습니다.]
위소보는 어릴 적부터 이야기꾼으로부터 대명영렬전(大明英烈傳)을 들
어왔고 또 명나라 개국공신들의 이야기를 외우다시피 들어왔던지라 그
가 서달과 상우춘이란 두 분의 대장수를 들먹이자 흥미가 일어 웃으면
서 말했다.
[두 대장수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했고 대단히 무서웠지 않소? 그대는 서
달이 어떤 무기를 사용했으며 상우춘은 또 어떤 무기를 사용했는지 아
시오?]
이렇게 되자 오지영은 그야말로 난처하게 되고 말았다. 그는 명사(明
史) 사건으로 출세길을 달리게 된 사람이라 명나라 조정의 역사에 대해
서는 아는 바가 많았지만 서달과 상우춘이 어떤 무기를 사용하였는지는
알지 못해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비직은 재주가 없고.학문이 얕아서 정말 모르겠습니다. 대인께서 가르
쳐 주십시오.]
위소보는 의기 양양해져서는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그저 죽은 책만을 읽기 때문에 이런 일을 모른단 말이오. 내
그대에게 가르쳐 주지. 서 대장수는 송나라 조정 악비 악 나으리가 환
생한 것으로서, 한 자루의 혼철점강창(渾鐵點鋼槍)을 썼으며 허리띠에
는 열여덟 대의 낭아전(狼牙箭)을 두르고 있있는데 백 걸음 밖에서 버
드나무의 가지를 맞춰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한 대의 화살도
헛되이 쏘지 않았다오. 상대장수로 말하면 삼국시대 연인(燕人) 장익덕
(張翼德)이 환생한 것으로서 한 자루의 장팔사모(丈八蛇矛)를 사용하였
는데 그야말로 만 명의 사람도 감당해 내지 못할 용기를 가지고 있었
소.]
그는 곧이어 서달과 상우춘 두 장수가 원나라 군사를 크게 깨뜨린 일을
이야기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다 이야기꾼의 입으로부터 전해 들
은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황당하기만 하고 진실된 면이 적었다. 오지
영은 바닥에 엎드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므로 무릎이시큰거리고
아팠다. 그러나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는 매우 재미있게 듣는 것처
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찬탄을 토해 내기도 해야했다. 그리고 그가 이
야기를 일단락 짓자 겨우 입을 열었다.
[대인께서는 정말 견문이 넓고 암기력이 뛰어나군요. 비직은 정말 탄복
했습니다. 그 서달과 상우춘 두 사람의 공로는 매우 커서, 죽은 이후에
주원장은 그들 두 사람을 왕으로 봉하였는데, 한 사람은 중산왕이 되고
한 사람은 개평왕이 되었지요. 주원장에게는 또 한 명의 군사(軍師)가
있는데....]
위소보는 그 말을 받았다.
[맞았소. 그 군사는 유백온(劉伯溫)으로서, 위로는 천문을 알고 아래로
는 지리에 통달했으며 앞으로는 삼천 년을 알고 뒤로는 일천 년의 일을
내다보고 계셨지.]
그는 도도하게 설명을 시작하더니 유백온이 어떻게 하여 하늘에 통하고
땅에 통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으며 어떻게 귀신도 예측할 수 없는 지
혜를 가지고 싸움을 했는가를 이야기했다. 오지영은 두 다리가 저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털썩 주저앉으며 웃음을 지었다.
[대인께서 하시는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습니다. 비직온 넋을 잃을 정도
입니다. 대인께서는 은혜를 베푸십시오. 비직이 일어나서 들으면 안 되
겠습니까?]
위소보는 웃었다.
[좋소. 일어나시오.]
오지영은 의자를 의지해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대인께 아룁니다. 오륙기의 편지에 나오는 청전 선생이란 바로 유기
(劉基) 유백온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 유백온은 절강성 청전(靑田)
땅의 사람입니다. 오륙기 자신은 서달과 상우춘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
고 그 사가의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유백온이 되도록 하려
는 것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서달과 상우춘이 되고자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 아니겠소? 그 사가
가 유백온이 된다는 것은, 흥! 그와 같은 재간이 있다고는 볼 수 없을
걸? 아무나 유백온이 될 수 있을 것 같소? 유백온은 소병가(燒餠歌)에
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소. '손에 강철칼을 아혼아홉 자루 들고 오
랑캐를 모두 죽이고서야 손을 놓더라.' 하, 대단하지, 대단해!]
오지영이 말했다.
[대인께서는 정말 총명하셔서 단번에 알아맞히시는군요. 서달과 상우
춘, 유백온 세 사람은 모두 다 원나라를 쳐부수고 주원장을 도와 오랑
캐를 쫓은 사람들입니다. 오륙기의 편지 중에서 몇 마디의 말은 분명히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서 만주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오형의 의도를 내가 모를 줄 알고 네가 굳이 나서서 이야기하려는 것
이냐? 이 편지는 정말 커다란 꼬투리가 되겠구나. 천만다행으로 내 손
에 걸렸군.)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쳐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좋소! 운수가 정말 좋구려. 이 일은 만약 그대가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큰일이 날 뻔했소. 황상께서는 나를 보고 복을 타
고난 장수라 하셨소. 아니나다를까 승상의 금쪽 같은 말씀은 틀림이 없
는 말이오.]
오지영은 그의 말을 듣고 전신의 뼈마디가 녹아나는 것 같았다. 그저
어머님 뱃속에서 나온 이래 일찍이 이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없었던 것
같아 눈물이 나을 정도로 감격해서 흐느끼며 말했다.
[대인께서 이토록 사랑해 주시니 이 은덕은 비직의 온 몸뚱어리가 가루
가 된다 하더라도 보답하기가 어렵겠습니다. 대인께서는 복을 타고난
장수이시니 대인을 따를 수가 있다면 그야말로 복을 타고난 병졸이 될
것이고 또한 복을 타고난 견마가 될 것이니, 그 또한 조상들을 영광스
럽게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위소보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매우 좋소! 매우 좋아!]
오지영은 키가 큰 편이었다. 위소보가 손을 뻗쳐 자기의 머리를 만지려
고 하는데 쉽게 되지 않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위소보가 자신의
정수리를 만질 수 있도록 했다. 처음 위소보가 크게 신경질을 부렸을
때 오지영은 꿇어앉아 엎드려 절을 하느라고 이미 모자를 벗은 상태였
다.
위소보가 손바닥을 그의 머리 위에다 갗다대고 천천히 뒤쪽으로 어루만
져 나가는 모습은 마치 한 마리 꼬리를 흔들며 아양을 떠는 강아지를
어루만지는 것과 같았다. 위소보는 오지영의 뒤통수를 만지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나 또한 네가 온몸이 가루가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다만
이 머리통을 칼로 내려쳐 뎅겅 잘라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물었다.
[이번 일은 그대 이외에 또 누가 알고 있소?]
오지영은 말했다.
[없습니다. 비직은 사태가 너무 심각한지라 감히 조금이라도 누설할 수
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오륙기라는 반적이 자기의 역모가 이미 탄로났
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즉시 거사를 일으킬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대인과 비직은 반푼어치의 공로도 없게되죠.]
위소보는 말했다.
[맞았소. 그대는 정말 생각이 치밀하군. 절대로 남에게 알려서는 안 되
오. 서둘러 조정에 품하여 그대의 큰 공을 가로채는 일이 없도록 합시
다.]
오지영은 흐뭇해졌다.
[모두 대인께서 이끌어 주시고 길러 주신 덕택입니다.]
위소보는 고염무의 그 편지를 품속에 집어넣고 말했다.
[이 시집들은 모두 이곳에 남겨 두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대는 몰래 가
서 고염무와 그 몇 사람들을 모조리 데리고 오시오. 내가 모든 사실을
물어 알아낸 이후 그대에게 그들을 압송하여 북경으로 데려가도록 하겠
소. 그리고 내 친히 상소문을 써서 황상에게 품하겠소. 이번의 커다란
공로는 그대가 첫째이고 나는 그대의 덕택으로 두 번째 공로를 세우게
되는 것이지.]
오지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재빨리 말했다.
[아닙니다. 대인이 첫째이시고 비직이 둘째입니다.]
위소보는 웃었다.
[그대가 황상을 만난 이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자세히 가르쳐 주
겠소. 황상께서 기뻐하시기만 한다면 그대가 순무가 되는 것은 내가 책
임을 지도록 하겠소.]
오지영은 기뻐서 까무라칠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시집과 문집(文集)
들을 탁자 위에 놓고서는 쿵쿵쿵 하는 소리가 나도록 이마로 땅을 찍어
큰절을 한 뒤에 물러갔다.
第107章. 공문서를 위조하라
위소보는 중도에 어떤 변고도 생기지.않도록 일대의 효기영 군사들을
뽑아서 한 명의 좌령이 거느리도록 하여 오지영과 함께 가서 범인들을
데려오도록 하였다. 그는 내당으로 들어가 사람을 시켜 이력세 등에게
상의하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자 쌍아가 앞으로 다가와서 갑자기 그
의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며 말했다.
[상공, 상공께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위소보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킨 다음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쌍아, 그대는 나의 목숨과 같소. 무슨 일인지 내 반드시 그대를 위해
처리하지.]
그녀의 뺨에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위소보는 이를 보
고 왼손을 들어 소맷자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쌍아는 말했
다.
[상공, 이 일은 정말 어려워요. 하지만 저는....저는 상공에게 부탁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위소보는 왼팔을 뻗쳐 그녀의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어려운 일일수록 내가 그대를 위해 처리한다면 그만큼 내가 쌍아를 총
애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소?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해 보시
오.]
쌍아는 창백한 얼굴에 약간 홍조를 띠고 나직이 말했다.
[상공, 저는....저는 조금 전의 그 벼슬아치를 죽여야겠습니다. 상공께
서는 저에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은 그야말로 뜻과 길을 같이하게 되는 셈인데
그대가 나에게 부탁을 하다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멋진 일이 아니겠는
가!)
[그 벼슬아치가 그대에게 어떤 죄를 지었지?]
[그는 저에게 죄를 짓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오지영은 우리 집안의 큰
원수예요. 장씨 집안의 큰나리와 작은나리 모두 다 그에게 해를 당해
돌아가신 거예요.]
위소보는 대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 밤 장씨 집안에서 본 여자들은
모두가 과부였었고 집안에는 많은 영위를 차려 놓지 않았던가! 그 원흉
이 바로 그 사람 오지영이었구나 하고 깨달은 위소보는 물었다.
[그대는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오?]
쌍아는 다시 눈물을 줄줄 흘리며 흐느꼈다.
[아니에요. 잘못 알 리가 없어요. 그는 포졸과 벼슬아치들을 데리고 장
씨 집안으로 들이닥쳐 사람들을 잡아갔어요. 저의 나이가 아직 어릴 때
였지만 그의 흉악하던 모습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어야만 그녀는 내가 크게 인정을 베풀었다
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잠시 동안 깊이 생각한 후 망설이는 듯 말
했다.
[그는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이며 양주부의 지부요. 황제가 나를 양주로
보내어 일을 처리하는데 그대가 만약 그를 죽인다면 나도 벼슬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조금 전 그는 또 나에게 와서 큰일을 얘기했는데 그
대가 그를 죽인다면 아무래도....아무래도....]
쌍아는 초조한 듯 눈물을 흘렸다.
[저는....저는 이미 상공께서 매우 난처하시리란 것을 알고 있어요. 하
지만 장씨 집안의 노마님 아니 셋째 작은마님, 작은마님 그녀들은....
매일같이 영위 앞에서 절을 올리고 그 오가라는 고약한 벼슬아치를 죽
여 원한을 갚겠다고 맹세하고 있어요.]
위소보는 무릎을 탁 치고 말했다.
[좋아! 나의 사랑스런 쌍아가 부탁하는 것이니, 내가 황제를 죽이고 스
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부탁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대의 말을 쫓겠
소. 더군다나 일개 조그만 지부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소? 그러나
내가 입맞춤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어야 하오.]
쌍아는 온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기쁨과 부끄러움에 휩싸여 고개를
돌리고 나직이 말했다.
[상공께서는 저를 이렇듯 잘 대해 주시는군요. 저는....저라는 사람은
이미 그대의 것이에요. 그대는....그대는....]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위소보는 그녀가 부드럽고 유순한 것을
보고 그만 마음이 약해져서 그녀에 대하여 경박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좋소. 우리들이 일을 성공시킨 날 나는 그대에게 입맞춤을 하겠소. 그
대는 그때에 도망치지 말도록 하시오.]
쌍아는 얼굴을 붉히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지금 그를 죽인다면 원한을 갚는 방법이 그리 통
쾌하지 못할 것 같구려. 내 그대로 하여금 그를 데리고 장씨 집안으로
가서 그를 장씨 집안의 큰나리들과 작은나리들의 신위 앞에 끓어앉게
하고는 셋째 작은마나님들로 하여금 친히 그놈을 죽이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쌍아는 이 일이 너무나 좋은 일이라고 느껴졌으나 믿을 수 없었다. 그
리하여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위소보를 쳐다보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공, 그대는 저를 속이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어째서 그대를 속이겠소? 그 개 같은 벼슬아치가 그대의 윈수라
면 또한 나의 원수도 되는 것이 아니겠소? 그는 나에게 부귀공명을 누
릴 수 있는 기회를 주려 했지만 이젠 달갑지가 않소. 그저 쌍아가 나에
게 잘 대해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좋소.]
쌍아는 마음속으로 감격한 나머지 그의 몸에 기댄 채 다시 참을 수 없
다는 듯이 눈물을 흘렸다. 위소보는 그녀의 부드럽고 섬세한 허리를 껴
안게 되자 매우 즐거워졌다.
(이와 같이 쉽게 인정을 베푸는 거라면 매일같이 여덟 내지 열 가지를
부탁해도 힘들지 않다. 오지영이라는 개 같은 벼슬아치가 어째서 아가
의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지? 아가가 만약 나에게 원한을 갚아 달라고
부탁을 하며 나로 하여금 그녀를 껴안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는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아가의 부친은 이자성이 아니면 바로 오삼계이다. 어찌 오지영에게 해
침을 당하겠는가?)
이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라왔다. 이력세 등이 당도한 것을 알고
위소보는 말했다.
[이 일은 안심해도 좋소. 지금 나는 중요한 일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
를 해야 하는데 그대는 문 밖에서 지키고 있되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절대 우리들이 하는 말을 엿들어서는 안 되
오.]
쌍아는 대답했다.
[예, 저는 한번도 그대가 하는 말을 엿들은 적이 없어요.]
그녀는 위소보의 오른손을 잡고 몸을 구부려 손등에 입맞춤을 한 후 재
빨리
[문을 나갔다. 이력세 등 천지회의 군웅들은 방안에 이르자 다투어 자
리에 앉았다. 위소보는 말했다.
[여러 형들, 어젯밤 나는 중대한 소식을 듣고 사태가 긴급한지라 여러
분들과 상의하지 못하고 급히 여춘원으로 달려갔소. 어찌되었든간에 운
수가 나빠 그야말로 창피한 소란을 일으키고 말았지만 끝내 고염무 선
생과 오륙기 형의 목숨은 건질 수 있게 되었소.]
군웅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위 향주가 어젯밤의 일에 지나치게 당당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기녀원에 들어가 기녀를 끼고 자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기녀원에서 커다란 침대를 떠메고 나올 뿐 아
니라, 일곱 명의 여자들을 옮김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
록 한 것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짓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바로 고염
무와 오륙기를 구하기 위해 그런 짓을 했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리 생
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지라 일제히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위소보는 웃
었다.
[우리가 곤명에 있을 때 여러 형들은 오삼계의 위사들로 가장하고 기녀
원으로 들어가 술을 마시고 싸움을 벌이지 않았소? 형제는 그 계책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하고 어젯밤 똑같은 짓을 또 행하게 된 것이오.]
군웅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같이 생각했다.
(그랬었구나.)
위소보는 여기서 말을 더 하게 되면 마각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
고 신중히 입을 열었다.
[이 중간의 상세한 점은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구려.]
그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오륙기가 놓고 간 그 한 통의 편지를 꺼
냈다. 전노본이 받아 탁자 위에 펼쳐 놓고 사람들과 함께 읽었다. 그리
고 보니 편지의 끝에는 '윤황인형선생도감(伊黃仁兄先生道鑒)'이라고
쓰여 있고 편지의 말미에는 '설중철걸(雪中鐵乞)'이라는 넉 자의 서명
이 있었다. 모두들 설중철걸이 오륙기의 호라는 것은 알았으나 윤황 선
생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편지에서 말하는 서남에서 큰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중산과 개평이 장거를 도모하려 하고 또 청전 선생
이 아니면 계획을 세워 공을 세우지 못한다느니 하는 전고(典故)와 은
어(隱語)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로의 얼굴을 바
라보며 위소보의 설명을 조용히 기다렸다. 위소보는 웃었다.
[내 뱃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양주의 탕포(湯包)와 장어면(長魚 )이지
먹물은 조금도 없소이다. 여러 형들의 뱃속에도 아무래도 먹물보다는
술이 더 들어 있겠구려. 고염무 선생이 얼마 후 도달하게 될 것이니 우
리 그 선생에게 듣도록 합시다.]
말을 하는 사이에 친위병이 손님이 찾아왔다는 보고를 했다. 한 사람은
대라마이고 한 사람은 몽고 왕자라고 했다. 위소보는 천지회의 군웅들
을 친위병으로 가장해서 함께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이 두 결의형제는
얼굴을 붉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편으로 아기
를 모셔오도록 했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마주 대하자 상결과 갈이단은
매우 다정하게 굴었다.
그리고 위소보의 의리가 매우 깊다고 크게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가 아기가 기뻐서 달려나와 맞이하는 것을 보고 갈이단은 더욱더 마음
이 느긋해졌다. 이때 아기는 손에 찼던 수갑이 제거되었고 다시 지분
바르고 옷매무시를 고친 상태였다. 위소보는 웃었다.
[다행히 두 분 형의 무공이 절세적이라 요사한 인물들을 물리치게 되었
소. 그렇지 않았다면 형제들의 생명을 보존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 한
떼의 요사한 인물들의 무예는 약하지 않았고 사람들 또한 많았소. 두
분 형님들은 적은 수로 많은 사람들을 이겼고 그들로 하여금 똥오줌을
갈기며 황망히 도망치도록 만들었으니 형제는 크게 탄복하오. 우리 다
시 경공연(慶功宴)을 일어서 두 분 형이 천하에 위세를 떨치고 큰 성공
을 이루고 돌아온 것을 축하하도록 합시다.]
상결과 갈이단은 신룡교에 잡힌 몸이었는데 다행히 위소보가 홍 부인을
석방함으로써 이 두 사람을 맞바꾸어 온 셈이었다. 그러나 위소보는 마
치 그들 두 사람이 적을 크게 무찌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상결은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었으나 속으로는 고마워했다. 갈이단은
신이 나서 싱글벙글했고 심지어는 의기 양양해졌다.
술상을 차리라는 위소보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당에는 즉시 성대한 주연
이 베풀어지게 되었다. 위소보는 몸을 일으켜 두 분의 의형과 잔을 들
었다. 그리고 아첨하는 말을 거센 조수가 들이닥치는 듯한 기세로 해대
어 나중에는 상결마저도 자기가 사로잡혀가 욕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
을 정도였다. 그러나 위소보가 그의 무공이 천하 제일이라고 재차 찬양
하자 상결은 연신 손을 내저었다.
그는 홍 교주에 비하면 자신의 무공이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술을 마신 이후에 상결과 갈이단은 몸을 일으키고
작별을 고하였다. 위소보는 말했다.
[아무래도 두 분 형님께서 각기 한 장의 상주문을 써서 이 형제로 하여
금 황제께 바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래에 큰형이 서장의 활불
이 되고 둘째 형님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형제가 황제 옆에서 요란
하게 북을 쳐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이후 오삼계 늙은 녀석이 반란을 일으키게 될 때 두 분 형님이 황제를
도와 그 늙은 녀석을 공격한다면 우리들의 일이 어찌 성공하지 않을 턱
이 있겠소이까?]
두 사람은 크게 기뻐 일제히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하며 웃었다. 위소
보는 두 사람을 데리고 서재로 갔다. 갈이단은 말했다.
[우형은 글씨를 쓰는 데 있어서는 능통하지 못하니 상주문은 역시 형제
가 대신 써 주시구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이 형제는 자신의 이름자라고 하더라도 그저 소(小) 자 정도만 틀리지
않고 쓸 뿐이지 위(韋) 자만 하더라도 믿을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리
고 보(寶) 자로 말씀드리면 아무리 써 봐도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든답니
다. 우리들은 사야보고 대신 쓰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결은 말했다.
[이 일은 매우 은밀하니 남에게 알려서는 안 되오. 우형의 문장력이 그
렇게 매끄러운 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쓸 수는 있을 것이네. 다행히
우리들은 과거를 보는 것도 아니니 황상께서는 문필의 좋고 나쁨을 따
지지 않을 것이네. 그저 의사소통만 하면 될 것이네.]
그는 모든 손가락이 한 토막씩 잘라져 있었으나 쓸 수는 있었다. 그리
하여 그는 자신의 상주문을 갈이단을 대신해서 쓰고 갈이단으로 하여금
손도장을 찍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 사람은 다시 맹세를 거듭했다. 장
래의 부귀는 함께 나누고 어려움은 서로 도와 주기로 했으며 결코 형제
의 의로 맺은 정을 잊지 말자고 맹세했다.
위소보는 세 쟁반에 금을 나누어 두 분의 형과 아기에게 나누어 주고,
말과 교자를 준비해서는 공손히 문 밖으로 나가 전송했다. 대청으로 돌
아오자 친위병이 오지부가 이미 죄인들을 압송해 왔다는 보고를 했다.
위소보는 오지영으로 하여금 동쪽 대청에서 기다리도록 하고 고염무 등
네 사람을 데리고 내당으로 들어가 친위병을 물리친 다음 수갑을 풀어
주고 천지회의 군웅들만 남겨 둔 후 문을 닫았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며 말했다.
[천지회의 청목향주 위소보가 형제들을 이끌고 고 군사와 사 선생, 그
리고 여 선생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이날 사윤황은 오륙기의 밀서를 받고 난 후 크게 기뻐서 여유량과 함께
양주로 와서 고염무를 찾아 상의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오지영이 마침
고염무의 시집을 조사하기에 이르러 포졸들과 아문의 벼슬아치들을 데
리고 사람들을 잡으러 나와 사윤황과 여유량 두 사람을 함께 압송한 것
이다. 그리하여 검색을 해본 결과 뜻밖에도 사윤황의 몸에서 오륙기의
밀서를 몰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세 사람은 부끄러움과 희한에 죽고 싶어했으며 하나같이 그들의 목숨을
잃는 것은 상관없지만 오륙기의 밀서가 누설된다면 큰일을 그르치게 되
는 것이라고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흠차대신이 자칭
천지회의 향주라고 하니까 그만 놀람과 기쁨에 얽혀서 아직도 꿈을 꾸
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게 되었다.
그날 하간부에서 살귀대희를 열었을 때 위소보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으
나 이력세, 서천천, 현정 도인, 전노본 등은 모두 고염무와 인사를 하
였었다. 그리고 고염무와 사윤황, 여유량 세 사람은 과거 운하에서 위
험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 천지회의 총타주 진근남의 구원을 받지 않았
던가! 그런데 이제 이 눈앞의 소년 흠차가 바로 진근남의 제자라는 것
을 밝히자 더욱 의심이 없어져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사윤황
이 오륙기의 편지에 중산과 개평, 그리고 청전 선생에 대한 사연을 밝
히자 천지회 군웅들은 그제서야 확연히 깨닫고 매우 위험했다는 말들을
하였다.
[아! 우리 세 사람과 또 한 분의 황이주의 황형은 존사의 구원을 받은
적이 있소이다. 그런데 오늘 조심하지 않아 다시 화를 일으키고 말았는
데 위 형제가 어려움을 풀어 주었구려. 아! 정말 서생이란 쓸모가 없나
보오. 귀하 사부와 제자분의 커다란 은혜는 더욱더 보답할 길이 없을
것 같구려.]
위소보는 말했다.
[모두 한집안 사람인데 여 선생께서는 그토록 겸손해 하실 것 없습니
다.]
사윤황은 말했다.
[양주부 아문의 포졸들이 갑자기 대문을 깨뜨리고 들이닥친 것은 그야
말로 갑작스런 천둥소리에 미처 귀를 막을 수 없는 형편이었소. 나는
정세가 잘못된 것을 알고 재빨리 우형의 편지를 찢어 없애려 했으나 이
미 손과 발이 잡히고 뒤로 꺾이게 되었소.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커다
란 화를 입겠구나 하고 생각되어 속으로 고문을 받게 되면 편지를 쓴
설중철걸이 오삼계라고 하려고 했었소. 이 형제의 늙은 목숨은 보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오륙기형의 안전은 지키기로 마음먹었던 것이오.]
사람들은 소리내어 웃으며 모두 잘된 계책이라고 말했다. 사윤황은 밀
했다.
[그것도 부득이한 궁여지책이외다. 설중철걸은 천하에 이름이 알려져
있어 오삼계와는 어떤 관계를 맺게 할 수도 없을 거외다. 만약 관원이
오형의 필적을 가져와 대조하게 된다면 반드시 진상이 밝혀지게 될 일
이지요.]
고염무는 말했다.
[우리가 두 분 오형의 비밀을 누설하고 두 번 구원을 받게 된 것을 보
면 하늘의 뜻이 있는 것을 살필 수가 있소. 따라서 오랑캐의 기운은 결
코 빌지 않을 것이니 오형은 반드시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되는구
려. 그러나 이후 이 일은 다시 입밖에 내어서는 안 될 것이오. 어떻게
든 세 번째 가서는 이와 같이 운수 좋게 풀려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구려.]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고염무는 위소보에게 물었
다.
[위 향주, 그대가 볼 때 이 일은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소?]
위소보는 말했다.
[세 분 선생과 만나 뵙기가 어려우니 세 분께서는 이곳에서 며칠 묵도
록 하시고 여러분들과 함께 술을 들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오지영
이란 개 같은 벼슬아치를 불러서 그를 옆에 세워 두고 구경을 하도록
하면 그는 아마 놀라 죽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그 개 같은 벼슬아치가
담이 커서 놀라게 해도 죽지 않는다면 한칼에 그의 개 같은 목을 베는
것이죠.]
고염무는 웃었다.
[그 방법은 가슴속의 울화를 풀 수는 있으나 그렇게 된다면 아무래도
이 일이 누설될 것이외다. 그 개 같은 벼슬아치는 조정에서 임명한 관
리인데 위 향주가 그 관리를 죽인다면 어찌되었든간에 죄명이있어야할
것이외다.]
위소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있습니다. 사 선생께서 한 통의 가짜 편지를 만들어 오삼계가 그 개
같은 벼슬아치에게 써준 것으로 하면 됩니다. 이 개 같은 벼슬아치의
족보를 따져 볼 때 오삼계가 그에게 아저씨뻘이 된다고 했으니까요. 만
약에 가짜 편지를 만드는 것이 귀찮다고 느끼신다면 오륙기 형님의 편
지를 그저 베껴도 될 것입니다. 다만 아래의 이름을 바꾸도록 해야겠지
요. 그 누구든간에 오삼계와 결탁했다고 하면 내가 그의 머리를 치는
데 대해서 소황제께서도 반드시 찬성할 것 입니다.]
모두들 좋다고 말했다. 고염무는 웃었다.
[위 향주는 생각이 깊고 기민하구려. 이와 같은 계책은 정말로 화살 한
대로 두 마리의 독수리를 쏘아 잡는 격이외다. 그 사람의 술수를 그 사
람에게 되돌려주어 다스리는 법이기도 하지요. 윤황 형, 써갈기도록 하
시오.]
사윤황은 웃었다.
[뜻밖에도 오늘 오삼계 그 늙은 도적의 기실(記室:서기)이 되어야겠구
려.]
위소보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서 한 통의 편지를 가짜로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로 느껴졌다. 그래서 원래의 편지를 베끼자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러나 고염무와 사윤황, 여유량 세 사람은 당금 세상의 명
사로서 붓을 들고 편지를 쓰는 것을 마치 위소보가 주사위를 던지고 노
름을 하는 것처럼 밥먹듯 흔하게 하니 뭐가 어렵겠는가!
사윤황은 붓을 들고 막 쓰려고 하다가 물었다.
[오지영의 자가 어떻게 되오? 오삼계가 그에게 편지를 써줄 때 만약 그
의 자를 쓰게 된다면 더욱 친숙한 것처럼 보일 것이 아니겠소?]
위소보는 말했다.
[마형, 그대가 가서 그 개 같은 벼슬아치에게 물어 봐 주시구려.]
마언초가 나가서 물어 보고는 돌아와서 웃으며 말했다.
[그 개 같은 벼슬아치의 자는 현양(顯揚)이라고 한답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자기의 자를 묻느냐고 하더군요. 저는 흠차대신이 북경의 이부
(吏部)와 형부圻賠D 두 분 상서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세하게 그의 공로
를 칭찬하고 그의 관명과 자를 알리려고 한다고 했소이다. 그랬더니 그
개 같은 벼슬아치는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나에게 열 냥의
은자까지도 주었소.]
그리고 그가 한 덩어리의 은자를 흔들어 보이자 사람들은 소리내어 웃
었다. 사윤황은 금세 편지를 써서 고염무에게 건네주었다.
[정림 형, 그대가 볼 때 그럴싸하오?]
고염무가 받아든 편지를 여유량이 옆에서 함께 넘겨 본 후에 그들은 하
나같이 말했다.
[매우 좋습니다. 매우 좋아요.]
여유량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처음 오(吳)나라라고 일컫게 되었
더니 놀랍게도 삼백 년 후에 우리 숙적의 성씨와 부합된다는 것을 그
누가 알았겠소. 한 마디의 오자는 그야말로 사람을 꼼짝없이 만드는 것
이니 아무리 변명을 한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외다.]
고염무는 웃었다.
[이 두 마디 '백사(白蛇)를 베고 대풍(大風)의 노래를 짓고자 하나 바
라건대 우리 조카는 흙다리 아래에서 신발을 들어올리는 창피를 무릅쓰
기 바라며 깊이 생각하고 분발하여 하늘의 뜻에 호응함으로써 우리 조
카가 성의지작(誡意之爵)을 얻을 수 있기 바라오'라는 말은 륙기 형의
'중평과 개평의 위업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청전 선생으로 하여금 계책
을 세우게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오'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
아니겠소?]
사윤황은 웃었다.
[똑같은 방법으로 흉내를 낸 것이외다.]
천지회의 군웅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그들 세 사람이 무슨 말을 하
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방회에서 하는 암호를 말하거나 강호의 언어로
말하는 줄 알았다. 그리하여 고염무는 모두에게 설명을 했는데 명 태조
주원장이 처음 거사를 일으켰을 때 스스로를 오국공(吳國公)이라고 일
컬었고 나중에는 오왕(吳王)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오삼계와 오지영의
성씨와 상통한다는 것이고, 백사를 베고 대풍가를 지어 부른다는 것은
한 고조 유방의 일이며, 돌다리 아래서 신발을 줍는 것은 장량의 고사
이고, '성의'라는 작위에 봉해진 사람은 바로 유백온이라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이 편지는 오륙기 형님이 쓴 것보다 더 좋군요. 오삼계는 본시 황제가
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한 고조와 주원장에게 견주는 것은 그를
너무 추켜올리는 것입니다.]
여유량은 웃었다.
[이것은 오삼계 자기 자신이 추켜올리는 것이외다.]
위소보는 웃었다.
[맞았습니다, 맞았습니다. 나는 이것이 오삼계 스스로 쓴 것임을 잊었
소이다.]
사윤황이 물었다.
[아래에는 무엇이라고 서명하는 것이 좋겠소?]
고염무는 말했다.
[이 편지는 누가 보더라도 오삼계가 쓴 것으로 알 것이니 서명이 애매
하면 애매할수록 더욱더 그럴싸하게 보일 것이오. '숙서수찰(叔西手
札)'이란 넉 자로 서명을 하는 것이 좋겠구려.]
그는 전노본에게 말했다.
[전형, 이 넉 자는 그대가 쓰도록 하시오. 우리들이 쓴 글에는 선비들
의 기운이 엿보여 군사를 거느리는 무인의 글씨와 같지 않구려.]
전노본은 붓을 들고 전전긍긍하며 쓰고는 겸연쩍게 말했다.
[이 넉 자는 삐뚤삐뚤해서 모양이 안 나는군요.]
고염무는 말했다.
[오삼계는 무인이라 자연히 편지는 기실로 하여금 쓴 것이 되지 않겠
소? 이 넉 자의 서명은 매우 좋소이다. 일정한 법칙은 없으나 매우 힘
찬 글씨라서 무장의 글씨라고 할 수 있소.]
사윤황은 겉봉에다가 친정양주부가지부노야친탁(親呈揚州府家知府老爺
親託)이라는 열두 자를 써서는 편지를 봉투 안에 넣어 위소보에게 내밀
며 미소를 지었다.
[편지를 위조한다는 것은 음흉하고 덕행을 거스르는 행동이라 할 수 있
으며 그야말로 성인군자의 소행이라 할 수 없소. 하지만 대업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조그만 것을 저버리지 않을 수 없구려.]
위소보는 생각했다.
(오지영과 같은 도적을 상대하여 한 통의 가짜 편지를 만든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선비들은 정말 가소로울 정도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구나.)
그는 편지를 거두며 말했다.
[이 일이 잘 처리되면 그 후에 다시 술을 마시면서 세 분 선생을 환영
해 드리지요.]
고염무는 말했다.
[위 형제와 륙기 형은 그야말로 한 사람이 문관이라 하면, 한 사람은
무관이라 할 수 있으니 반드시 명나라를 중흥하는 기둥이 될 것이고 등
고밀과 곽분양 역시 그 정도에 불과할 것이외다. 만약에 오삼계라는 늙
은 도적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면 그것은 오랑캐의 한 발을 없앤 것과
다름이 없게 될 것이외다. 위 형제의 그 한 잔의 술은 커다란 공을 성
사시켰을 때 다시 마시도록 합시다. 우리 세 사람은 이대로 작별을 고
해야겠소. 이곳에 오래 지체함으로 인해 소문이 누설되어 큰일을 그르
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되겠소이다.]
위소보는 마음속으로 고염무를 퍽이나 우러러보았다. 그러나 세 분 명
사들의 말은 그야말로 문자를 입으로 씹어서 하는 듯 한마디 한마디마
다 심오했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수월한 노릇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
과 좀더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온몸이 부자연스러워질 것 같은 판인데
그들이 가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어찌 더 이상 만류하겠는가.
(세 분 선생들은 분명히 노름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기녀원의 소저들
을 보면 깜짝 놀라서 혼마저 달아나게 될 것이오. 내가 만약 제기랄!
하고 욕을 하면 반드시 그대들은 눈을 부릅뜨고 수염을 부르르 떨기까
지 할 테니 역시 빨리 가 보시는 게 좋겠소.)
그는 한 응큼의 은표를 꺼내 모든 사람들에게 일천 냥씩 나눠주어 노자
로 삼도록 하고 서천천과 마언초가 뒷문으로 그들을 호송해서 성 밖으
로 나가도록 만들어 주었다. 고염무와 사윤황, 그러고 여유량 등이 떠
나자 위소보는 기분이 홀가분해져서 속으로 생각했다.
(조정의 문관들도 글공부를 하는 선비들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재미가
있구나. 강소성의 벼슬아치들, 예를 들자면, 마 무태, 모 번태 등도 고
선생이나 사 선생 등에 비하면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친구를 사
귄다면 오지영이란 녀석이 세 분 노선생보다는 나은 편이다.)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친위병이 와서 순무와 포정사가 뵙기를
청한다고 말했다. 위소보는 움찔했다.
(혹 비밀이 누설됐단 말인가?)
第108章. 탐관오리 오지영에게 역적 누명을 씌우다
위소보는 대청으로 나가 그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의 얼굴이 매우 엄숙
하여 위소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님과 주인의 예의를 차리고 자리
에 앉자 순무 마우(馬佑)가 소맷자락 안에서 공문을 꺼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바치며 말했다.
[흠차대인, 큰일났소이다.]
위소보는 공문을 받아 포정사 모천안(慕天預)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형제는 글자를 모르니 모형이 읽어 주시구려.]
모천안은 말했다.
[예.]
그는 공문을 펼쳤으나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지라 금방 말했다.
[대인, 북경의 병부에서 긴급 공문을 띄워서 대인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습니다. 내용은 오삼계 역적이 군사를 모아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
입니다.]
위소보는 그 소리를 듣자 크게 기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르짖
었다.
[제기랄! 늙은 녀석이 과연 해냈구나.]
마우와 모천안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흠차대인이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미친 듯 기뻐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위소보는 웃었다.
[황상께서는 신기묘산으로 이미 이런 일이 있을 줄 내다보고 계셨소.
두 분은 당황할 것 없소. 황상은 병마와 양곡, 대포, 화약, 군비, 기
계, 무엇이든 적절하게 준비했소이다. 오삼계 그 늙은 녀석이 손을 쓰
지 않는다면 모르되 그가 반란을 일으킨 이상 우리는 반드시 진원원을
잡아와야 할 것이오.]
마우와 모천안은 그의 말이 뚱딴지 같다고 느꼈으나 황상께서 준비가
돼 있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오삼계는 싸움에 능하고 휘하의 병마들
이 건장할 뿐만 아니라 그 수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군사를 일
으켜 모반을 꾀했다는 소식을 듣고 관리들은 모두 전전긍긍했으며 자기
머리의 사모를 보존할 수 없을까 겁을 내었던 것이다. 위소보는 말했
다.
[그런데 이 일은 매우 이상하구려.]
두 사람은 일제히 말했다.
[아무쪼록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위소보는 말했다.
[이 소식을 두 분은 이제서야 안 것이오?]
마우는 말했다.
[예, 비직은 병부의 공문을 받자마자 즉시 번태 대인에게 알려 대인의
행원으로 달려왔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정말 누설되지 않았다는 말이오?]
두 사람은 일제히 대답했다.
[이것은 군국대사이므로 반드시 대인께서 결정을 내리셔야 할 일이기
때문에 비직은 감히 누설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러나 양주부의 지부는 미리 알고 있었소. 뭔가 좀 이상하지 않소?]
마우와 모천안은 서로 한번 쳐다보더니 똑같이 의아한 빛을 띄웠다. 마
우는 말했다.
[오 지부가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르겠군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는 조금 전 살그머니 나에게 와서는 서남쪽에서 앞으로 커다란 일이
발생할 것이니 그 누가 주원장이 되고 자신은 유백온이 된다고 했소.
그리고 나에게 운수를 알고 시세의 흐름을 안다면 그대들 두 분을 억류
하라는 것이었소. 나는 주원장이니 유백온이니 하는 소리를 이해할 수
가 없었으며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욕을 하던 참인데 그대들
두 분이 오셨구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안색이 크게 변했다. 마우는 용렬한 사람이었지만
모천안은 임기응변에 능해서 나직이 말했다.
[그 오가가 그와 같은 말을 했다면 대인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권고한
것입니다.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지요.]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에게 좀더 명백하
게 이야기하라고 했소. 그는 자꾸만 책주머니를 던지며 후발이니 선발
이니 하는 말을 했소. 나는 나이 어린 몸으로 이미 큰 벼슬을 했으니
먼저 출세한 셈이 아니냐고 했지요.]
마우와 모천안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오 지부가 말한 것은 먼저 선수를 써서 사람을 제압해야지, 후수를 쓴
다면 오히려 그 사람에게 제압을 당한다는 말이었겠지. 흠차대인은 학
문이 없으니 그저 먼저 출세하고 뒤에 출세하는 것으로 안 모양이다.)
두 사람은 노련한 만큼 그와 같은 사실을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수를 써서 먼저 사람을 제압한다는 이 숙어는 위소보가 어릴
적부터 이야기꾼으로부터 익히 들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야말로 학문
이 없어서 그러한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니고 일부러 바보 행세를 한 것
이었다. 마우는 말했다.
[오 지부는 매우 당돌하군요. 그는 갔습니까?]
위소보는 말했다.
[아직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소. 나와 앞으로의 커다란 계획을 상의하
겠다는 것이오. 그 조그만 지부라는 직책으로 나와 무슨 커다란 계획을
상의하자는 것인지.... 이 형제로서도 오삼계를 공격하는 커다란 계획
은 두 분과 상의를 하고자 했지 그 조그만 지부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
는 않소이다.]
마우는 말했다.
[그렇지요, 그렇지요. 대인께서는 오 지부를 불러서 비직으로 하여금
그에게 몇 마디 말을 듣도록 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위소보는 말했다.
[매우 좋소.]
그는 고개를 돌려 친위병에게 분부했다.
[오 지부를 모셔 오도록 하여라.]
오지영이 대청에 이르러 보니 순무와 포정사가 자리에 있지 않은가? 그
는 그만 기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기쁜 것은 흠차대신이
자신의 밀보를 매우 중시하여 무태와 번태마저 초청해 와서 함께 상의
한다는 점이었고 걱정한다는 것은 소식이 누설되면 순무와 포정사가 자
기가 얻을 큰 공을 나누자고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하고 공손히 한켠에 섰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오 지부는 앉으시오.]
[예, 대인께서 자리를 내리신 데 대해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그는 엉덩이를 살짝 의자에 대는 척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오 지부, 그대는 매우 큰일을 이 형제와 상의하겠다고 했소. 물론 그
대가 두번 세번 무태 대인이 모르도록 하라고 했지만 이 일은 매우 중
대하여 부득이 두 분 대인을 불러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으니
아무쪼록 그대는 너무 탓하지 마시오.]
오지영은 매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고 재빨리 몸을 일으켜서 위소보와
무태, 그리고 번태 세 사람에게 절을 하고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비직이 당돌한 점, 세 분 대인께서는 살펴 주십시오. 이것은....이것
은....]
그는 대충 얼버무리려 했으나 위소보가 솔직하게 말했는지라 무슨 말을
하더라도 변명으로 감추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순무와 포정사
두 사람의 얼굴은 자연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위소보는 말
했다.
[오 지부의 소식은 매우 빨랐지요. 그는 서남의 병마 대권을 쥔 한 무
장이 일간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고 했소. 그가 반란을 일으킨다
면 야단이 나게 되고 천하가 진동하여 황상께서는 용상에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우리들의 머리도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했소. 그렇지 않소?]
[예, 하지만 세 분 대인께서는 하늘만큼 높은 복을 타고나신 분들이시
니 흉한 일을 만난다 하더라도 길하게 빈할 것이며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상서로운 일로 변하게 될 것이므로 전혀 거리낄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것은 오 대인의 덕을 보는 것이겠지. 오 대인, 그 무장은 그대와 종
씨라고 했지요?]
[예, 저와 성이 같습니다만....]
위소보는 그 말을 가로챘다.
[그대는 그 무장의 편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가 친히 쓴 것이라고 했는
데 그 편지는 결코 가짜는 아니겠지요.]
[절대 틀림없는 것이며 가짜일 리가 없습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편지에는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주원
장이니 유백온이니 하는 사람들을 들먹였소. 이 형제는 글공부를 제대
로 하지 못해 편지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몰랐는데, 오 대인이 이 형제
에게 자세히 그 뜻을 설명하고 이 형제로 하여금 즉시 손을 쓰도록 했
소. 그리고 선발이 어떻고 후발은 어떻다고 했으며 백 년이 가더라도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라고 했소. 또 그렇게 하면 반드시 커다란
부귀를 놓치지 않을 것이고 이 형제는 왕으로 봉해질 것이며 오 대인
역시 백작인가 뭔가에 봉해질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오지영은 말했다.
[그것은 비직의 짐작이고 대인께서 밝게 살피셨는데 정말로 비직보다
백배 더 잘 보고 계십니다. 그 편지의 뜻은 확실히 그런 뜻이었습니
다.]
위소보는 오른손의 소맷자락에서 오륙기의 편지를 꺼내 오지영의 앞으
로 내밀면서 몸을 한쪽으로 기울여 다른 사람이 그 편지를 보지 못하게
가로막고 말했다.
[바로 이 편지가 아니오? 그대는 똑똑히 보시오. 사태가 중대하니만큼
결코 잘못 보아서는 안 되오.]
[바로 이 편지입니다. 결코 틀림이 없습니다.]
[매우 좋소.]
그는 그 편지를 오른쪽 소맷자락 안으로 거두어 넣고는 의자 등걸에 등
을 기대며 말했다.
[오 지부, 아무쪼록 그대는 잠시 물러가 있도록 하시오. 나는 대인들과
더불어 함께 상의를 하겠소. 우리 세 사람의 부귀공명은 모두 오 대인
에게 달려 있는 것 같소이다. 하하하....]
오지영은 얼굴에 의기 양양한 빛을 감추지 못한 채 다시 세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모두가 세 분 대인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키워 주신 덕택입니다]
그는 몸을 옆으로 돌려 천천히 물러갔다. 위소보는 그가 문 입구까지
물러가기를 기다려 물었다.
[오지부, 그대의 자는 어떻게 되시오?]
오지영은 말했다.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비직의 천한 이름은 지영이라 하옵고 자는 현
양이라 합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됐소.]
마우와 모천안 두 사람은 오지영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관
계의 규칙에 의하면 상관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아랫사람이 끼여들
수는 없었다. 마우는 성질이 매우 급한 사람이었다. 꾸짖어 주려고 하
는데 위소보가 어느덧 오지영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하지 않는가? 이 바
람에 마우는 이마에 푸른 심줄을 불끈 세웠고 온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위소보는 왼쪽 소맷자락에서 사윤황이 쓴 가짜 편지를 꺼내며
말했다.
[두 분은 이 편지를 보시오. 오지영 그 녀석은 이 편지가 대단하다고
했는데 형제는 글공부를 하지 못해 그가 말한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구려.]
마우는 그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보니 그 봉투 위에는 '친정양주
부가지부노야친탁'이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그는 편지를 꺼내 모천안
과 함께 보았다. 그런데 그 편지의 위에는 '현양, 나의 조카'라는 이름
이 쓰여 있었다. 두 사람은 그것을 보자 더욱 화가 났다. 마우는 편지
를 다 읽기도 전에 탁자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 개 같은 녀석이 이토록 대담하다니! 내가 나서서 한칼에 죽여 버려
야겠소이다.]
모천안은 비교적 세심한 성격이었다. 그는 오지영이 공공연하게 상관에
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권고했다는 것은 사리에 너무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 전 위소보가 자기들 앞에서 심문을 했고 쌍방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친히 들었으니 어떻게 의심을 할 수 있겠는가?
어제 선지사 앞에서 작약을 구경할 때 오지영은 친히 오삼계가 그에게
아저씨뻘이 된다고 했으니, 그는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켜서 반드시 성
공하리라 짐작하고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분수를 모르고 분별없는 행동
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이 편지는 정말 오삼계가 그에게 써 준 것이오?]
마우는 말했다.
[그 개 같은 녀석이 틀림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위소보는 말했다.
[이 편지에는 장황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라 했는지 두
분이 이 형제에게 설명을 해주시구려.]
모천안은 백사를 자르고 대풍가(大風歌)를 지어 불렀다느니 돌다리에서
신발을 주웠다느니 하는 얘기를 일일이 설명했다. 마우는 말했다.
[단지 우리의 태조 고황제께서 가장 먼저 오나라라고 칭했다는 이 한
마디만 하더라도 멸족시킬 수 있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모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적이 이 일을 일으킨 데 대해서 소문을 들으니까 무슨 주삼태자(未
三太子)를 내세워서 사람들을 긁어모았으며, 말로는 명나라를 되찾겠다
는 것이라 하더군요.]
한참 의논하고 있을 때 돌연 북경의 어전시위가 달려와서 성지를 선포
하였다. 위소보와 마우, 모천안은 끓어엎드려서 성지를 받들었는데 바
로 강희가 위소보에게 북경으로 올라오라는 부름이었다. 그리고 양주에
충렬사를 세우는 일은 강소성의 포정사에게 맡겨 처리하라는 당부가 있
었다. 위소보는 매우 기뻐서 속으로 생각했다.
(소황제가 오삼계를 공격하는데 만약 나를 대원수로 삼는다면 그야말로
위풍당당하겠구나.)
마우와 모천안은 황상의 유시 가운데 위소보에게 장려하는 말이 있는지
라 즉시 축하 인사를 하고 그의 벼슬이 높아지게 된 것을 축하했다. 위
소보는 말했다.
[이 형제는 내일 북경으로 돌아가야겠소이다. 황상을 만나면 자연히 두
분이 훌륭한 벼슬아치라는 것을 칭찬하게 될 것이외다. 하지만 두 분이
맡은 일을 얼마나 훌륭하게 처리했는지 말씀드리려면 제가 잘 모르고
있는 점을 두 분이 이야기해 주셔야겠소이다.]
무태와 번태 두 사람은 크게 기뻐서 공수를 하고 사의를 표했다. 모천
안은 번태라고도 하는 포정사이므로 먼저 순무의 정적(政積)을 칭찬했
다. 그는 강희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마우가 어떻게 부지런히
정사를 베풀어서 백성들을 사랑했으며 어떻게 황제의 덕을 넓게 퍼뜨렸
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말 가운데 십중팔구는 거짓말이었다. 마
우는 병긋벙긋 웃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곧이어 모천안 역시 자신이
가장 자랑하는 정적을 이야기했는데 매우 과장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있
을 수 있는 공로들이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것들은 이 형제가 모두 다 기억하겠소. 그리고 우리들은 또 한 가지
의 커다란 공로를 보태야 하겠소. 오삼계 역적이 반란을 일으킨 데 대
해서 황상은 매우 통한하게 생각하고 계시오. 그런데 오지영이 내응을
하려고 했으며 강소성의 문무백관들로 하여금 일제히 반란을 일으키도
록 선동했는데 다행히 우리 세 사람이 사전에 이를 적발해 내지 않았
소? 이와 같은 사실을 상주하면 상을 받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이
형제는 내일 출발하여 북경으로 돌아 가겠으니 두 분이 한 장의 상주문
을 씨주시구려.]
무태와 번태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것은 위 대인의 공로인데 비직들이 어떻게 가로챌 수가 있겠습니
까?]
위소보는 말했다.
[너무 겸손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세운 공로라고
하면 더욱 좋지 않겠소.]
모천안이 말했다.
[총독 마(麻) 대인께서 강녕(江寧)으로 돌아가셨는데, 흠차대신께서는
성상께 상주하실 때 역시 마 대인을 위하여 몇 마디 좋은 말을 해주시
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매우 좋소. 말을 한다고 해서 밑천이 드는 것도 아니지 않소.]
마우와 모천안은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서야 작별을 고했다. 위소
보는 서천천 등에게 명하여 오지영을 묶도록 했으며 그의 입에 자갈을
물려 말을 하기 힘들도록 만들었다. 오지영이 마음속으로 느끼는 놀라
움과 공포감, 그리고 의아함은 그야말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튿날 이른 아침, 양주성 안의 문무 관원들은 하나하나 줄을 서서 대
청에서 기다렸다. 흠차대인을 접견하려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모든 사
람들은 하나같이 상당한 양의 예물을 갖추어 놓고 있었다. 양주에서의
벼슬은 벼슬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든 관원들은 벼슬이
오르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흠차대인이 북경으로 가서 및
마디의 좋은 말을 하여 자기들의 지위를 몇 년 더 누릴 수 있게 해준다
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을 느낄 수 있는 형편이었다. 총독 역시 소식을
듣고는 밤을 도와 양주로 달려왔다. 그와 순무가 한 선물은 정말 대단
했다. 양주 일대에 삼 년 동안 세금을 바치지 않도록 면해 주었는데 세
금과 관계된 사람은 자연히 빼돌리는 돈이 있기 마련이었다. 위소보는
친히 그 일을 알 수는 없었지만 번태 등이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미리 마련해서 바쳤다는 것을 알았다. 위소보를 따라온 무장들과 심복
들도 모두 풍성한 은자를 노자로 받게 되었다. 마우는 이미 상주문을
준비하여 위소보로 하여금 황제에게 직접 드리도록 했는데 그 상주문에
는 위소보가 얼마나 은밀하게 조사했으며 어떻게 그 위험한 곳으로 들
어가서 오삼계와 오지영이 밀모한 사건을 알아내게 되었는가 하는 사실
을 자세히 설명하고 크게 칭찬을 했다. 그리고는 총독과 순무, 그리고
포정사 세 사람이 옆에서 도와 역시 공로를 세운 셈이라는 말도 곁들이
고 있었다. 모천안은 다시 말했다.
[황상께서 오 역적을 상대로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애석하게도 비
직은 문관이라 적진으로 뛰어들어가 도적을 죽일 재간이 없군요. 비직
은 이미 총독 대인과 무태 대인의 뜻을 받들어 열홀 안에 사람을 보내
한 무더기의 전량을 호남으로 보내 황상께서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하겠
소이다.]
위소보는 웃으면서 말했다.
[대군이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식량이 먼저 도달하겠구려. 세 분은 치
밀하시니 황상께서는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외다.]
여러 관리들과 이별한 후에 위소보는 친위병을 여춘원으로 보내서 어머
니를 모셔 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어머니를 만났
다. 위춘방은 아들이 큰 벼슬을 한 줄은 모르고 그저 수작을 부려 노름
을 한 끝에 한밑천 크게 잡은 줄로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위소보가 그
녀를 모시고 북경으로 가서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으
나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노름으로 얻은 돈은 오늘 왼손으로 들어왔으면 내일은 오른손으로 나
가기 마련이다. 내가 북경에 갔을 때 네가 다시 돈을 깨끗하게 잃는다
면 이 어미를 술집으로 팔아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 어미가 장사를
하려면 역시 양주에서 하는 것이 낫다. 북경이란 곳의 그 혀끝이 뱅뱅
도는 표준말만 하더라도 이 어미는 한마디도 할줄 모른다.]
위소보는 웃었다.
[어머니, 아무쪼록 안심하세요. 북경에 가시면 하녀들과 아주머니가 어
머니의 시중을 들 것이니 무엇이든지 어머니 스스로 할 필요가 없습니
다. 나의 은자는 영원히 쓰고도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위춘방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답답해서 죽을 것이다. 하녀와 아주머니들이
있어 시중을 든다고는 하지만 이 어미는 그와 같은 복을 타고나지 못했
으니 사흘도 넘기지 못해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것이다.]
위소보는 어머니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온종일 커다란 집안에 갇혀
서 답답한 세월을 보낸다면 확실히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 웅큼의 은표를 꺼내 모두 오만 냥이나 되는 은자를 내밀며 말했다.
[어머니, 이 은자를 어머니에게 드러지요. 어머니는 여춘원을 사서 직
접 주인이 되어 보십시오. 이 돈이면 세 곳의 기녀원을 더 살 수도 있
답니다. 여춘원(麗春院), 여하원(麗夏院), 여추원(麗秋院), 여동원(麗
冬院)을 경영한다면 춘하추동 일 년 얼두 달, 사계절 동안 돈을 모을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위춘방은 그렇게 큰 야심은 없는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사람을 시켜 이 은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오도록 하겠다.
만약에 이 은표를 은자로 바꿀 수 있다면 이 어미는 조그만 기녀원을
차리도록 하겠다. 그것만 하더라도 매우 흐뭇한 일이다. 만약 큰 기녀
원을 차리겠다면 네가 커서 스스로 주인이 되도록 해라.]
그녀는 나직이 물었다.
[소보야, 너 이 많은 돈을 훔치거나 빼앗아 온 것은 아니겠지?]
위소보는 주머니 안에서 네 알의 주사위를 꺼내어 큰소리로 부르짖었
다.
[만당홍(滿堂紅)!]
그는 주사위를 탁자 위에 굴렸다. 아니나다를까 주사위는 모두 사 점이
하늘로 향하도록 누워 있었다.
[후레자식이 한 수 재간을 배웠으니 아무리 져도 몽땅 잃지는 않겠구
나.]
第109章. 병든 자의 무술 솜씨
다음날 위소보는 병마를 대동하고 오지영과 모동주(毛東珠)를 압송하여
양주를 떠나 경성으로 돌아갔다. 강희 황제의 성화와 재촉이 심하여 일
행은 도중에서 감히 지체하지 못했다. 따라서 뇌물과 재물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자연히 적어졌다. 연도에서 소식을 들으니 오삼계가 병사
를 일으킨 이후로 운남제독(雪南提督) 장국계(張國桂), 귀주순무(貴州
巡撫) 조신길(曹申吉), 제독(提督) 이본심(李本深)등은 투항하였으며
운남순무(雲南巡撫) 주국치(朱國治)는 피살되었고 운귀충독(雪貴總督)
감문혼(甘文 )은 자살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날 산동(山東)에 당도하자
한 지방 관리가 저보(邸報)를 베껴와 흠차대신(欽差大臣)에게 바쳤다.
그 저보는 바로 강희 황제가 오삼계를 힐책하는 내용의 초서였다. 위소
보는 사야(師爺)에게 읽어보고 해석을 하라고 하였다. 그 사야는 초서
를 받쳐들고 읽어내려갔다.
[역적 오삼계는 궁핍하고 사태가 위급하자 귀순하려고 했다. 나의 세조
(世祖) 장황제(章皇帝)께서는 그가 진심으로 따르고 복종하겠다는 뜻을
품은 줄 아시고 군대를 주고 왕위를 수여했다. 그리고 그에게 속해 있
던 무관들과 관리들에게는 세습할 수 있는 벼슬을 내리시는 은혜를 베
풀어 주셨다. 짐(朕)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여러 차례 은전을 베풀었고
또한 친왕(親王)의 작위를 주어 나라를 지키는 성곽과 몸에 차고 다니
는 무기처럼 중히 여기고 의지하였으며, 최대한의 성의와 예의로써 대
해 주었다. 이런 모든 예우는 자고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위소보는 사야가 해석하는 말을 듣고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
다.
[황상은 그 역적에게 정말로 잘 대해 주셨지. 그것은 조금도 거짓이 아
니며 허풍이 아니야. 예를 들어 나 위소보는 황상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도 단지 백작(伯爵)에 봉해졌을 뿐이야. 친왕(親王)에 봉해지려면 그
길은 아직 멀고도 멀지.]
그 사야는 계속해서 읽어내려갔다.
[그런데 역적 오삼계는 금년 칠월 내로 왕의 지위를 내놓고 다른 곳으
로 이주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짐의 총애를 빙자하여 악랄한 흉계를 꾸
미고, 교만하게 대역무도한 일을 저지르려 한 그 속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짐은 오삼계의 이러한 결정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그의 나이가 연로하고, 변방에 주둔한 지도 이미 오래되
었기 때문에 그의 간청을 윤허하였다. 그래서 곧 관련 부서에 명하여
적절하게 안배를 하고 그자의 희망에 따라 적당하게 처리하라는 짐의
뜻을 흠차대신을 파견하여 전하였노라. 짐은 오삼계에게 가히 수족처럼
온정을 베풀었고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근자에 천호총독(川湖
總督) 채류영(蔡毓滎) 등이 상소한 바에 따르면 오삼계는 서슴없이 역
적질을 하여 하루아침에 짐의 은혜를 저버렸으며 한 떼의 흉악한 세력
을 등에 업고 추악한 만행을 저질러 백성들을 도틴세 빠뜨려 절대로 용
서를 받을 수 없고 하늘과 땅이 모두 진노할 만행을 자행하고 있다고
한다.]
위소보는 한 마디의 해석이 끝날 때마다 한 마디씩 맞장구를 쳤다.
[황상의 도량은 하해와 같으시지. 오삼계의 할머니를 욕하시지 않는 것
만 해도 이미 예를 다했다고 할 수가 있어.]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장용(張勇), 조양동(趙良棟), 왕진보(王進寶),
손사극(孫思克), 이력세(李力世) 등은 속으로 생각했다.
(성지의 내용은 단지 황제께서 그자에게 더없이 잘해 주었음을 말하고
있고 오삼계가 배은망덕했음을 힐책하고 있으며 단 한마디도 만주족과
한족의 차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가 어떻게 명조왕
실(明朝王室)을 말살시켰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것은 말
을 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에게 오삼계의 행위
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사야는 계속해서 읽어내려갔는데 그 내용은 지방 관민들에게 절대로 그
역적들과 한패가 되지 말라는 권고와, 설사 이미 실수를 하여 한패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진심으로 참회하고 귀순한다면 절대로 옛날 일을 추
궁하지 않을 것이며 친척들이 각 지방에서 벼슬을 하고 있다면 그들에
게 절대로 연좌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었다. 성지에서는 또 말
하기를,
[오삼계를 사로잡아 군문에 바치는 자에게는 오삼계의 작위인 평서왕에
봉할 것이며, 그의 휘하에 있는 괴수들을 죽이거나 포박을 해온 자, 그
리고 병마를 데리고 귀순한 자는 공적에 따라서 최고의 대우를 할 것이
다. 짐은 절대로 식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위소보는 '오삼계를 사로잡아 군문에 바치는 자에게는 오삼계의 작위인
평서왕에 봉할 것'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온몸이 근질근질하여
이력세 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가서 그 오삼계를 잡아야지. 우리도 한번 평서왕의 자리에 앉아
봐야 하지 않겠소? 그것 참! 구미가 당기는 일인걸.]
여러 사람은 일제히 그의 말에 찬동했다. 그러나 장용 등 여러 무장(武
將)들은 한결같이 생각했다.
(오삼계 휘하에는 장병도 많고 무장들도 많은데 그를 잡는다는 것이 말
과 같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이력세 등은 내심 생각했다.
(우리가 오삼계를 죽이려 하는 것은 그자가 한족의 강산을 정복했기 때
문이다. 설마 우리가 정말로 오랑캐 황제를 위해서 힘을 쓰겠는가? 그
러나 만약에 위 향주가 평서왕이 된다면 오삼계를 본받아 운남에서 병
력을 이끌고 와서 다시 모반을 하여 청나라를 뒤엎는 것도 괜찮겠구
나.)
위소보는 조서를 다 읽고 나자 즉시 출발을 명령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북경에 당도해야 다른 사람들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고 자신이
출정의 임무를 부여받을 수 있고 그래야 다른 사람이 먼저 오삼계를 잡
아서 평서왕의 작위를 뺏어가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날 그들은 향하(香河)에 도착했다. 북경과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워졌
다. 위소보는 장용에게 대대를 이끌고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분부하고
국사범인 모동주를 엄중하게 지키고 있으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자기
는 쌍아와 천지회의 군웅들을 데리고 오지영을 압송하여 서남쪽으로 방
향을 바꾸어 장가(莊家)에 가서 친히 장가의 셋째 마님에게 오지영을
건네주어 그녀에게 쌍아와 같이 좋은 계집을 준 데 대해 보답하려 하였
다.
저녁 무렵 마을에 당도하였다. 장가의 큰집까지는 아직도 이십여리나
남아 있었으므로 일행은 한 식당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이때 각자는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오지영은 아혈(啞穴)
과 몇 군데 혈도를 짚혔으나 끈으로 묶이지는 않았다. 그래야만 사람들
외 이목을 피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은 두 개의 탁자를 에
워싸고 앉아 있었다. 그 누구도 오지영과 같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
않았다. 쌍아는 그가 도망갈까 봐 염려되어 혼자서 그와 한 탁자에 앉
아 엄중하게 감시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밥과 반찬이 나와 모두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 열댓 명의 관병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맨 처음
들어온 자는 수비(守備)였고, 식당 바깥에서는 말울음소리가 끊이지 않
았다. 병사 두 명이 스스로 물을 길어다가 말에게 먹이고 있었다. 그중
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큰소리로 긴급한 국무로 북경에 들어가서 보
고를 해야 하니 빨리 닭을 잡고 밥을 지어 달라고 분부를 하였다. 주인
은 연신 대답을 하며 점원에게 관리들을 잘 대접해 주라고 재촉하였고,
몸소 그 수비가 앉은 자리에 다가가 의자를 갖다주며 앉도록 하였다.
한 무리의 관병들이 막 자리를 청하고 앉자 동구 밖에서 수레와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식당 앞에 수레와 말이 멈추어 서자 몇 사
람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맨 먼저 들어온 두 사람은 건장한 사내였
다.
두 번째로 들어온 사람은 병색이 완연한 중년 사내였는데 키는 작고 비
쩍 말랐으며 두 볼은 푹 패였고 광대뼈는 튀어나와 있었으며, 안색은
밀랍처럼 노랗고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두 눈에는 살기와 독기가 나타
나 있었으며 몇 걸음 뗄 때마다 기침을 한 번씩 했다.
그의 몸 뒤로 한 명의 노옹(老翁)과 한 명의 노부(老婦)가 어깨를 나란
히 하고 들어오고 있었다. 언뜻 보니 나이가 이미 팔순이 넘어 보였다.
그 노옹도 몸이 비쩍 마르고 작아 보였다. 그러나 정신은 초롱한 듯했
고 하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와 휘날리고 있었으며 얼굴은 대추빛같이
붉었다. 그 노부인은 노옹보다 약간 키가 크고 허리는 조금도 굽지 않
았으며 두 눈에서는 광채가 번뜩였다.
마지막 두 사람은 모두가 이십여 세 정도의 부인네였다. 이 일곱 사람
의 차림새를 보건대 옷을 화려하게 입은 그 병자는 돈 많은 부잣집 사
람인 것 같았고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는 모두가 하인처럼 보였
다. 노인과 노부인 두 사람은 몸에 파란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옷감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매우 깨끗해 보였으므로 그들의 신분을 옷차림으
로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 노부인은 말했다.
[장 어멈, 장 어멈은 그릇에 뜨거운 물을 담아서 도련님께서 약을 드시
도록 시중 좀 들어 주게나.]
한 명의 여자 하인이 대답을 하더니 바구니 속에서 자기 그릇을 꺼내
식당의 주전자를 집어들고 그릇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서 몇 번이나
헹구더니 다시 반 그릇 정도 물을 따라 그 병색이 완연한 사내의 앞에
갖다놓았다. 노부인은 품속에서 자기 병을 꺼내어 뚜껑을 열고 그 속에
서 빨간색 환약 한 알을 꺼내어 사내의 입에 갖다대었다.
사내가 입을 크게 벌리자 노부인은 환약을 그의 혓바닥 위에 올려놓고
물 그릇을 집더니 그 알약을 삼킬 수 있도록 물을 먹었다. 병색이 완연
한 그 사내는 약을 복용하자마자 숨을 헐떡거리며 계속해서 기침을 했
다. 노옹과 노부인은 뚫어져라 그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표
정은 심각하였으며 매우 걱정하는 누런 눈빛이었다. 그자의 가쁜 숨이
좀 멈춰지고 기침이 약간 가라앉자 두 사람은 비로소 길게 한숨을 쉬었
다. 병색이 있는 사내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왜 그렇게 저를 똑바로 쳐다보고 계십니까? 나는 죽
지 않을 것입니다.]
노옹은 코방귀를 뀌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노부인은 웃으면서 말
했다.
[얘야, 죽는다, 산다, 그런 소리는 입밖에도 내지 말아라. 너는 백살까
지 살 것이다.]
위소보는 내심 생각했다.
(이자는 설령 옥황상제의 영단(靈丹)을 먹는다 하더라도 며칠 더 살지
못할 것 같다. 알고 보니 이 늙은이와 할망구는 그의 애비, 에미로구
나. 저 병쟁이는 틀림없이 어려서부터 너무나 귀엽게 자라서 자기 어머
니가 몇 번 더 쳐다봤다고 성질을 벌컥 내는 것이야.)
노부인은 말했다.
[장 어멈, 손 어멈. 자네들은 먼저 도련님께서 먹을 인삼탕을 데워 온
다음에 밥을 짓도록 하게나.]
두 명의 하인은 대답을 하더니 각자.바구니를 들고서 뒤쪽으로 사라졌
다. 관병들 가운데 그 수비는 주인장에게 북경으로 가는 길을 알아보고
있었다. 주인장은 말했다.
[여러 어르신들께서는 다시 이삼십 리 길을 재촉하신 다음에 마을 주막
에서 하룻밤 묵으시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시면 오후에는 틀림없이
경성에 당도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수비는 말했다.
[우리들은 밤새도록 길을 달려야 할 판인데 무슨 놈의 주막에 머물겠
소? 이보오, 주인장. 오늘부터 일 년 동안 당신은 틀림없이 장사가 크
게 번창하고 잘될 것이오. 그러니 좋은 술과 좋은 음식을 많이 많이 준
비해 두시오. 그때 가서 당황하지 말고 말이오.]
주인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저의 이 조그만 장사는 지금까지 평범하여
오늘 같은 장사도 한 달에 며칠 있을까말까합니다. 그것은 모든 어르신
들과 손님께서 보살펴 주신 덕택이지요. 그렇지만 날마다 이렇게 귀한
손님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그 수비는 웃으면서 말했다.
[주인장, 내가 좋은 소식을 하나 가르쳐 드리리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
으켜 그들 무리들이 이미 호남(湖南)에 진격해 들어왔소. 우리들은 경
성에 문서롤 가지고 들어가는 파발들이오. 이번 싸움은 아마 삼 년, 오
년이 가도 끝나지 않을 것이외다. 그러니 군대에 상황을 알리는 사람들
이 날마다 이곳을 지나갈 것이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분명히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외다.]
주인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으나 속으론 걱정이 태산 같았다.
(당신네 같은 군인을 상대로 장사를 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먹고
퍼마시고, 그래도 좀 호방한 사람은 내키는 대로 몇 푼의 돈을 쥐어 주
지만 못된 자는 때리고 욕을 한 다음에 앙덩이를 털털털고 가버리면 그
만이지. 삼 년, 오 년은 고사하고 일 년 뒤에는 아마 내가 기둥에다 목
을 매달아야 할걸?)
위소보와 이력세 등은 오삼계가 이미 호남까지 쳐들어왔다는 소리를 듣
고 모두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작자의 진격 속도는 정말로 빠르구나.)
전노본(錢老本)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가서 상세히 물어 볼까요?]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노본은 그 수비 앞에 가까이 다가가 얼굴
에 싱글벙글 웃음을 지으면서 포권하며 말했다.
[조금 전에 장군 대인의 말씀을 듣자니 오삼계가 이미 호남까지 쳐들어
왔다고 하는데 소인의 가족들은 장사(長7少)에 있어서 매우 걱정이 되
고 안부가 염려됩니다. 그곳의 싸움이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장사
는 괜찮겠지요?]
그 수비는 이자가 자기를 장군 대인이라고 부르자 내심 흡족해서 말했
다.
[장사가 괜찮을지 괜찮지 않을지 그건 모르겠소. 오삼계는 그의 수하의
대장인 마보를 파견하여 귀주(貴州)에서 호남(湖南)으로 진격토록 하였
소. 완주는 함락되었고 총병(總兵) 최세록(崔世祿)은 포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삼계 부하인 장국주(張國柱), 공응린(襲應麟), 하국상(夏國
相)은 각각 동쪽으로 진격하고 있는 중입니다. 또 다른 대장인 왕병번
(王屛藩)은 사천을 공격하러 갔소. 듣건대 병력이 막강해서 천상(川湘)
일대의 백성들은 모두들 피난 중이랍니다.]
전노본은 얼굴에 우울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이건....이건 정말로 일이 심상치가 않군요. 그러나 대청병(大淸兵)도
막강하지 않습니까? 오삼계는 아마 대청병을 이기지는 못하겠지요.]
수비는 말했다.
[모두들 그렇게 말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주 싸움에서 오삼계의
병마를 당해 내기가 쉽지 않았소이다. 이 국면은 실로 말하기가 어렵다
고 봅니다.]
전노본은 공수를 하며 감사의 말을 하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천지회 군웅들 중 어떤 자는 내심 생각했다.
(한족을 배반한 이 오삼계라는 작자가 황제가 되면 안 될 텐데.)
또 어떤 자는 생각했다.
(제일 좋은 것은 오삼계가 북경까지 쳐들어와 만주족의 오랑캐들과 한
바탕 붙어서 둘 다 망하는 것이다.)
여러 관병들은 잽싸게 술과 밥을 먹었다. 그 수비는 몸을 일으켜 세우
더니 말했다.
[이보시오 주인장. 내가 당신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 주었으니 밥값은
당신이 한턱 쓰는 걸로 대신 하시구려.]
[예, 예, 그러조 그래야지요. 여러 어르신께서는 천천히 가십시오.]
[천천히 가라고?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 앉아서 한바탕 더 먹어 줘야겠
군.]
주인은 매우 난감해졌다. 그는 억지 웃음을 짓고 머뭇거렸다. 그 수비
가 문 입구로 걸어가며 노옹과 노부인, 그리고 그 병자의 탁자 앞을 지
나가는데, 병색이 완연한 사내가 갑자기 왼손을 내밀어 그의 가슴을 거
머쥐더니 말했다.
[당신이 북경에 무슨 공문을 가지고 가는지 꺼내서 좀 보여 주시구려.]
그 수비는 몸이 장대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잡히자 순식간에 무릎을 꿇
었다. 수비는 노해서 일갈을 터뜨렸다.
[제기랄 놈! 뭐하는 짓이냐?]
수비는 얼굴이 새빨개지고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쳤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병자가 오른손으로 그의 가슴팍의 옷을 꽉 찢어 버리자 커다란
봉투가 하나 떨어져 나왔다. 병자가 손으로 수비를 가볍게 밀자 그는
그대로 굴러 두 개의 탁자를 뒤엎고 와장창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여러 관병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역적놈 같으니! 죽고 싶어 발버둥을 치는구나!]
그들은 서로 다투어 창을 들이대고 칼을 뽑아 병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병자가 데려온 두 명의 하인은 슨과 발을 휘둘러 앞으로 나서는 자들을
고꾸라뜨렸다. 여러 병정들은 순식간에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병자는
봉투를 찢더니 그 안에서 공문을 꺼내 읽었다. 그 수비는 그런 광경을
보자 혼비백산이 된 듯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이것은 황상께 바치는 진장(秦章)이다. 네 놈이....세 놈이 감히 이
공문을 찢어 버리다니 이건....이건....역적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병자는 공문을 보더니 말했다.
[호남순무(湖南巡撫)가 오랑캐 황제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평서왕을 칠
것을 요청하는 공문이구민. 흥, 설사 백만대군이 간다 해도 그래도....
쿨럭쿨럭....여전히 평서왕에게 깨끗이 당할 것이다.]
말을 하면서 한편으로 꾸깃꾸깃 뭉친 공문을 손바닥에 모았다가 말이
끝나자마자 손바닥을 획 뻗치니 무수한 종이조각이 마치 나비처럼 사방
으로 훨훨 날았다. 천지회의 군웅들은 이러한 내공을 보고는 모두 안색
이 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생각했다.
(그외 말투로 보아 오삼계의 수하가 분명하다.)
그 수비는 버둥거리며 일어나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며 외쳤
다.
[네 놈이 공문을 찢어 버렸으니 어차피 이 몸은 살 수가 없다. 그러니
네 놈과 한바탕 죽기 살기로 붙어야겠다.]
칼을 들어 앞으로 달려나가 있는 힘을 다하여 병자의 정수리를 내리쳤
다. 병자는 여전히 앉아서 우측으로 손을 내밀어 수비의 아랫배를 약간
밀쳤다. 마치 귀찮게 굴지 말라는 투였다. 칼을 높이 쳐들고 있던 수비
의 팔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더니 몸과 함께 힘없이 땅바닥에 쓰러졌
다. 그리고는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헐떡거렸다. 조금 전에 쓰러졌던
병정들 가운데 몸을 일으켜 세운 몇몇이 멀찌감치 서서 힘없이 몇 마디
를 외쳤으나 누구도 감히 달려나와 자기들의 상관을 구하려 하지 않았
다.
이때 한 명의 노복이 뜨거운 인삼탕을 받쳐들고 와서 가볍게 병자 앞에
놓고는 말했다.
[도련님, 인삼탕을 드시지요.]
노부부 두 사람은 조금 전에 벌어진 큰 소란을 마치 보지도 않은 양 단
지 아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들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서천천(徐
天川)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은 사악하고 이상한 사람들 같으니 우리는 이만 가지요?]
마언초가 식대를 지불하고 일행은 문을 나섰다. 노부인은 인삼탕을 받
쳐들고 살짝 입김을 불더니 그릇을 병자의 입 가까이 갗다대고 그가 인
삼탕을 마시게 했다. 위소보와 그의 일행은 마을 밖으로 걸어나와서야
비로소 너도나도 그 병자가 어떤 인물일까를 떠벌리기 시작했다. 서천
천은 말했다.
[그자가 그 무관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는데 그 공력은 정말 대단
했소. 정말로....정말로 그와 같은 사람은 드물지.]
현정 도인도 말했다.
[그자가 그 무관의 배를 살짝 밀었는데 마치 미는 동작이 그리 힘을 들
이지 않는 듯 평범한 것이었어. 그러나 그것을 피하고 막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풍형께서 그런 일을 당하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
겠소?]
풍제중은 말했다.
[그의 곁에 세 척 이상 가까이 가면 안 됩니다.]
군웅들은 그의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느꼈다. 그렇게 밀어내는 행동은
피하거나 막는다 해도 최소한 그의 몸에서 세 척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만 공격할 수 있거나 방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세 척 보다 가까이 접
근한다면 더 이상 방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서천천은 갑자기 말했다.
[내가 그자의 손목을 잡는다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고개를 옆으로 살래살래 흔들었다. 상대방의 내
공이 고강하기 때문에 설사 그의 손목을 잡는다 해도 그가 손바닥을 뒤
집어 비튼다면 자신의 지골(指骨)과 완골(腕骨)이 부러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분명히 병자가 오삼계 일당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
다. 그러나 친히 두 눈으로 그자의 난폭하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그러
한 행동을 보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손을 써서 막거나 저지하지
못하였다. 피해를 입은 자는 오랑캐의 군관이었으나 그를 구하지 못한
것은 결국 그들의 평소와 같은 의협 호걸의 행동이 아니었으므로 내심
창피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기분이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한참 이야기를 하고 나자 모두들 입을 꾹 다물었다. 몇 리를 나아가고
있자니 갑자기 등뒤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두 마리의 말이 줄을
서서 급히 이쪽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이 길은 협소했기 때문에
두 마리의 말이 나란히 달릴 수가 없었다. 군웅들은 기분이 나지 않고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비록 말발굽 소리가 매우 급하게 들려왔지만 풍
제중과 쌍아 두 사람만이 말꼬비를 세우고 길 옆으로 비껴섰을 뿐 나머
지 사람들은 아무도 길을 양보해 주려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두 마리
의 말이 그들의 뒤로 가까이 달려왔다. 군웅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보니 말 위에 탄 자들은 바로 그 병자가 데리고 있던 두 명의 남자 하
인들이었다. 한 명의 노복이 외쳤다.
[우리집 도련님께서 당신들 보고 좀 기다리라고 하시오! 당신들에게 물
어 볼 말씀이 있다고 하시니 어서 걸음을 멈추시오?]
이자의 말투는 비록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건방
진 태도와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군웅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화가 치밀어올랐다.
현정 도인이 일갈했다.
[우리는 급한 일이 있어 기다릴 시간이 없소! 평소에 서로가 알고 지내
는 사이도 아닌데 무슨 물어 볼 말이 있다고 하시오?]
[이것은 우리 집 도련님께서 분부하신 것이니 당신들은 기다리는 것이
좋을걸?]
말투는 점점 공갈과 협박조로 바뀌었다. 전노본은 말했다.
[당신 주인은 오삼계의 수하요?]
[그런 소리 마시오. 우리 집 주인이 어떤 신분인데 그 같은 평서왕의
수하가 될 수 있겠소?]
군웅들은 모두 생각에 잠겼다.
(그자가 오삼계라고 말하지 않고 평서왕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면 틀림
없이 역적인 오가 놈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때 수레바퀴소리가 울리더니 큰 수레 한 대가 길을 따라서 달려
오고 있었다. 그 노복은 말했다.
[우리 집 주인이 오십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급히 말꼬비를 돌려 마중하러 갔다. 군웅들은 만약에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말을 달려간다면 그것은 그 병자가 두렵기 때문
이라는 인상을 줄까 봐 즉시 말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
다. 큰 수레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한 명의 여자노복이 수레를 몰고
있었으며 또 다른 한 명의 여자 노복은 수레의 장막을 걷고 있었다. 병
자는 수레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고 그의 부모는 뒤에 앉아 있었다.
그 병자는 군웅들을 향해서 눈을 치켜뜨더니 물었다.
[당신들은 어째서 이 사람의 혈도를 짚었소?]
그는 말을 하면서 오지영을 가리켰다. 그리고 또다시 물었다.
[당신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것이오?]
그 목소리는 예리하고 날카로웠으며 말투는 매우 교만했다. 현정 도인
은 말했다.
[귀하께서는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우리는 평소 아는 사이가 아닙
니다. 강물은 샘물을 넘보지 않소이다. 어째서 다른 사람의 일에 관여
하시는 것이오?]
그 병자는 코방귀를 흥, 하고 뀌더니 말했다.
[네까짓 놈은 내 이름을 물어 볼 자격도 없다. 내가 조금 전에 두 가지
질문을 했는데 너는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느냐? 어째서 대답을 하지 않
느냐?]
[내가 당신의 이름을 물어 볼 자격이 없다면 당신도 우리의 일을 물어
볼 자격이 없소. 오삼계는 반란을 일으킨 크나큰 역적인데 당신은 말
끝마다 그를 평서왕이라고 존칭을 붙이니 틀림없이 당신은 그들과 한패
일 것이오. 내가 귀하를 보니 이미 병이 들어 희복할수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일찍 집에 돌아가서 남아 있는 목숨이나마 보존토록 하시오.
잘못했다가 찬바람이나 쐬어 감기가 들어 기침을 하는 날에는 남은 목
숨도 보존하기 힘들 것이오.]
천지회의 군웅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껄껄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갑
자기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 움직이더니 철썩, 소리와 함께 현정의 좌측
어깨에 일장이 적중되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이 두 번의 연속동작은
신속하고 빠르기 그지없었다. 땅바닥에 떨어져서야 군웅들은 비로소 손
을 쓴 자가 바로 노부인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두 개의 장으로 현정을 때려 쓰러뜨리고 두 발을 땅에 잠시 대
더니 몸을 날려 처음처럼 수레에 다시 가서 앉았다. 군웅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수레를 향해 덮쳤다. 그 병자는 수레를 모는 노비의 잔
등을 잡더니 가볍게 살짝 밀치고 이미 그녀와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
그 여자 하인을 수레 속으로 밀어넣고 자기가 수레를 모는 앞자리로 옮
겼던 것이다. 이때 마침 전노본이 몸을 날려 두 번 장을 내리쳤다. 그
때 그 병자가 왼쪽 주먹을 내밀어 그의 두 손바닥과 서로 부딪쳤다. 그
러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전노본은 한 줄기의 강력한 힘이 자기의 몸 안으로 용솟음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어 몸이 자기도 모르게 공중에서 두 바퀴를돌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두 다리가 착지를 하고 난 뒤에 똑바로 서려고 했으나
갑자기 두 무릎에 힘이 빠지고 금방 땅바닥에 꿇어 앉을 것 같았다.
그는 깜짝 놀란 나머지 급히 있는 힘을 다하여 뒤로 나뒹굴었다. 이렇
게 함으로써 적을 향해 무릎을 꿇는 치욕만큼은 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
다. 전노본이 땅바닥에 나뒹굴자 풍제중이 바로 덮쳐들었다. 그 병자는
또 일격을 가했다. 풍제중은 그의 주먹과 서로 부딪치지 않고 우측 손
바닥을 중도에서 방향을 바꾸어 갑자기 그의 목덜미를 향해서 내리쳤
다.
그 병자는 상대방의 무공이 대단하고 그의 공격이 뜻밖이라는 듯 억,
하고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우측 손의 약지를 중지에 걸더니 그
의 장심을 향해서 툉겼다. 풍제중은 즉시 장을 거두어 들이고 우측 발
을 노새의 등 위에 올려놓았다. 마언초와 번강은 두 남자 하인을 향해
서 공격을 가했다. 두 명의 하인은 말을 달려 몸을 피하더니 외쳤다.
[당신들 둘은 도련님께서 처리하실 거다.]
마언초, 번강 두 사람은 상대의 노비들과 싸움을 하면 설사 이긴다 하
더라도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므로 두 사람의 노비가 뒤로 물
러나자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하고 즉시 몸을 날려 그 병자의 좌측을
공격했다. 갑자기 노새가 크게 비명을 지르더니 흐물흐물 땅바닥에 쓰
러졌다. 그러자 노새가 끌고 있던 수레도 옆으로 쓰러졌다. 알고 보니
풍제중이 노새의 등에 발을 올려놓았는데 발바닥에 암암리에 기가 운행
되어 힘을 주자 노새의 척추가 부러진 것이다.
그 병자는 발도 움직이지 않고 몸도 일으키지 않았는데 기침소리가 나
는 가운데 이미 땅바닥에 서 있었다. 수레 속의 노옹과 노부인은 각기
여자 하인들을 붙잡고는 수레에서 몸을 날려 나왔다. 이 세 사람의 행
동은 언뜻 보기에는 그리 빠른 것 같지 않았으나 이들이 수레에서 빠져
나오자 수레는 비로소 뒤로 벌렁 나뒹굴어졌다. 전노본과 서천천은 노
옹과 노부인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그 늙은 부인은 좌측 손을 살래살래
흔들더니 우측 손으로 병자를 가리키면서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 둘은 저쪽으로 가서 내 아이와 함께 좀 놀려무나.]
그 말투는 마치 두 사람보고 자기 아들의 주먹 세례를 받고 아들의 마
음을 조금 즐겁게 해주라는 듯한 말투였다. 서천천의 우측 주먹이 그
노옹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갔다. 노인은 상당히 연로했으므로 단 한주
먹에 그를 죽일까 봐 염려되어 조심스럽게 일갈을 하였다.
[주먹을 받아라!]
손에는 있는 힘을 다 쓰지 않고 약간의 힘만을 썼을 뿐이었다. 그는 한
때 실수를 하여 백한송을 때려 죽이고 목왕부에서 적지 않은 소란을 피
운 이후로 스스로 자기 행동을 자제했던 것이다. 그 노옹의 몸은 비록
마르고 작았지만 손바닥은 상당히 컸다. 그는 서천천의 주먹을 거머쥐
고 난 후에 소리쳤다.
[저쪽에 가서 놀아라!]
서천천은 나이는 비록 노옹보다는 적었지만 그도 이미 백발의 노인이었
다. 그러나 이 노옹의 말은 마치 장난꾸러기 어린이에게 타이르는 듯한
투였다. 서천천은 있는 힘을 다하여 오른손을 거두어들이고 바로 좌측
주먹을 휘둘렀다.
이 청룡백호(靑龍白虎)의 일 초는 본시 서로 보완해 주는 그러한 초식
이었다. 좌측 주먹은 결코 상대방의 급소를 적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대방에게 겁을 주어 손을 풀게 하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만약에
상대방이 손을 풀지 않는다면 이 일권은 바로 상대방의 콧잔등을 적중
시킬 수가 있었다. 그 노옹은 팔뚝의 힘을 풀어 손을 풀어 주었다.
서천천은 한 줄기의 강력하고 거대한 힘에 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다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의 좌측 주먹을 휘둘렀기 때문에 우측
힘은 뒤로, 좌측 힘은 앞으로 뻗쳐 순식간에 몸이 팽이처럼 빙빙 돌더
니 똑바로 쓰러졌다.
그 병자는 풍제중, 마언초, 번강, 이력세 등 네 사람과 결투를 하고 있
었는데 서천천이 몸을 팽이처럼 돌며 다가오는 것을 보자 손뼉을 치면
서 웃으며 말했다.
[아! 재미있어.]
네 사람의 팔과 주먹이 마치 질풍처럼 그의 몸을 향해서 들어오고 있었
으나 그러한 와중에서도 여유가 있는 듯 손뼉을 치고 환호를 지르면서
손을 내밀어 서천천의 몸을 툉겼다. 갑자기 서천천의 도는 방향이 바뀌
었다. 우측으로 돌고 있다가 좌측으로 돌면서 아주 빠르게 그 노옹을
향해 접근하며 팽이처럼 돌았다. 그 병자는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참 재미있어요. 그 팽이를 돌려서 이쪽으로 좀 보내주세요.]
현정은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려들었다. 그 병자가 여러 번 튕기고 밀치
니 현정, 마언초, 번강, 이력세 네 사람도 팽이처럼 도는 형세가 되었
다. 단지 풍제중만은 팽이처럼 돌리지 못했는데 그러나 그도 이미 가슴
에서 뜨거운 피가 용솟음쳐 올라옴을 느끼고 급히 뒤로 세 발짝 물러나
몸을 보호했다.
第110章. 누가 독을 풀었는가
다섯 명의 천지회 군웅들은 계속해서 맴돌았다. 기력을 운행시켜 멈추
려고 했으나 아무리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의 도는 속도
가 약간이라도 늦추어지면 그 병자는 재빨리 달려들어 튕기고 밀쳐서
도는 속도를 빨라지게 했다. 이 정경은 마치 어린아이가 탁자 위에다
동전을 돌리는 것과 거의 같았다. 다섯 개의 동전을 탁자 위에 돌려 놓
고 그중 한 개라도 도는 속도가 늦추어져 쓰러지려고 하면 그 아이는
바로 달려들어 손가락으로 그 동전을 다시 튕겨 돌리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그런 광경을 쳐다보고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쩍 벌어져 놀
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쌍아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 간이 콩알만해
져서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삼삽육계 줄행랑을 치자!]
쌍아는 말했다.
[빨리 장가(莊家)로 가시죠.]
[맞다, 장가에 도착하기만 하면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이야. 그곳은 세력
이 큰 장원이니까 이놈들을 혼내 줄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는 몸을 돌려 도망쳤다. 쌍아는 오지영을 끌고 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 병자는 팽이를 아주 즐겁게 돌리고 있었다. 한 쌍의 노부부는 얼굴
에 미소를 머금은 채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명의 하인들은 박수
를 치며 갈채를 보내고 옆에서 주인의 흥을 돋우고 있었다.
그 병자는 풍제중이 똑바로 서서 좌측장을 높이 쳐들고 우측장을 아래
로 향하여 고송교립세(古松橋立勢)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보자 즉
시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어 그의 오른쪽 어깨를 튕기었다. 풍제중은
오른쪽 다리를 뒤로 한 발짝 물러나서 어깨를 약간 옆으로 비키며 공격
을 피하였다. 그러나 감히 손을 써서 반격을 하지는 못했다. 그 병자는
화가 나서 말했다.
[팽이 노릇도 못하는 못난 사람 같으니라구!]
그리고 손을 내밀어 또다시 풍제중의 오른쪽 어깨를 튕기었다. 풍제중
은 또 뒤로 물러났는데 뜻밖에도 좌측 어깨에 한 줄기의 크나큰 힘이
밀려들어옴을 느꼈다. 삽시간에 자기 몸을 스스로 주체할 수가 없게 되
었다. 그 병자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몸이 급속도로 돌기 시작했
다. 그는 천근추(干斤墜)의 공력을 써서 몸을 똑바로 세우려 했으나,
그 병자가 등뒤에서 힘껏 튕기자 몸이 더욱 빨리 빙빙 돌기 시작하였
다. 오지영은 그 병자가 그들을 못살게 굴자 문득 한 가지 꾀가 생각났
다. 즉시 절뚝절뚝 앞으로 몇 걸음 걸어나가 넘어진 듯 땅바닥에 쓰러
졌다. 쌍아가 있는 힘을 다해서 잡아 끌었으나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
려 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매우 다급해졌다. 그가 적에게 진상을 말할
까 봐 염려되어, 왼손으로 그의 아래턱을 잡아 쥐고 있는 힘을 다하여
비틀자 오지영은 입을 쩍 벌렸다. 위소보가 가죽 장화에서 비수를 뽑아
들더니 그의 벌어진 입 속에다 칼을 밀어넣고 휘두르자 그의 혓바닥이
싹뚝 잘려져 나갔다. 오지영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쌍아는 위소보가 이 자를 살해한 줄로 여기고 외쳤다.
[상공(相公), 빨리 도망치세요!]
두 사람은 앞을 향해서 나는 듯이 도망쳤다. 두 사람이 얼마 달리지 않
아 등뒤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자가 말을 타고 뒤쫓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왼쪽 바위 투성이의 산등성이를 가리켰다. 두
사람은 작은 길을 빠져나와 돌무더기들이 흩어져 있는 데로 뛰어들었
다. 그 병자는 한 명의 하인과 함께 말을 타고 뒤쫓아왔다. 두 사람이
탄 말이 바위 투성이의 산등성이 위로 올라가지 못하자 그 하인은 말에
서 뛰어내려 외쳤다.
[너희 꼬마들은 절대로 무서워하지 말아라. 오직 도련님께서 함께 놀자
고 하시는 것이니 빨리 돌아오너라.]
위소보는 말했다.
[어른들은 팽이 돌리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위소보는 더욱 빨리 달렸다. 그 하인은 바위 투성이를 혜치고 뒤쫓아왔
다. 위소보와 쌍아는 발이 빠르기 때문에 그 하인이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병자가 외쳤다.
[숨바꼭질하자고?]
즉시 말에서 내려와 기침을 계속하면서 남쪽에서 뒤쫓아 올라왔다. 위
소보와 쌍아는 몸을 돌려 동북쪽을 향해서 달려갔다. 그들은 반대로 그
하인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하인이 몸을 덮쳐 위소보를
잡으려고 했다. 위소보가 구난(九難)에게 전수받은 신행백번(神行百變)
의 내공을 써서 몸을 살짝 피하자 그는 허공만 잡을 뿐이었다. 쌍아는
일 장을 가하여 그의 허리를 내리쳤다. 그 하인은 그녀의 나이가 매우
어린 것을 보고는 조금도 마음의 방비를 하지 않은 듯 초식도 쓰지 않
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우측 팔을 비틀었다. 쌍아의 좌측장이 질풍처럼
내려와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허리를 적중시켰다. 그 하인은 너무
아파서 악,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바로 이때 쌍아가 그의 우측 손목을 잡고 비틀어 버리자 우두둑 소리가
나면서 그의 손목 관절이 으스러져 버렸다. 그 병자는 어,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이쪽 바위에서 저쪽 바위로 건너뛰고 몇 번이고 이렇
게 뛰어서 몸을 날려 쌍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병자가 왼손을 휘두
르자 쌍아의 머리에 있던 모자가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머리카락이 흩어
져 내려왔다. 병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 이거 아가씨로군!]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잡았다. 쌍아가 얏! 하고 소리
를 지르며 쌍회룡(雙廻龍)이라는 일 초를 써서 두 팔꿈치를 뒤로 툉기
자 그 병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좋다!]
그리고 왼손을 우측으로 휘감아 그녀의 두 손바닥을 잡아서 등 뒤로 돌
리더니 이어서 오른손으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그녀의 두 손
목을 두 바퀴 정도 휘감더니 머리카락으로 두 손을 묶어 버렸다. 그리
고는 껄껄 웃었다. 쌍아는 다급해서 울음을 터뜨렸다.
[상공, 빨리 도망치세요. 빨리 도망치세요.]
그 병자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눌러 혈도를 찍었다.
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절대로 도망칠 수가 없을걸?]
병자는 쌍아를 내버려둔 채 위소보를 향해 뒤쫓아갔다. 순식간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위소보는 이리 뛰고 저리 몸을 날리면서 바위 사이로
도망쳤다. 그 병자는 몇 번인가 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그의 신행백변
공력 때문에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병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숨바꼭질하는 재주가 정말로 비상한데?]
위소보는 내공이 부족하여 한참을 뛰자 이미 숨이 헐떡헐떡 차올라왔
다. 잠시 후면 그에게 잡힐 것이 뻔했다.
[너는 나를 지금까지 잡지 못했다. 이제 내가 너를 잡을 차례다. 빨리
도망치거라. 내가 너를 잡고 말겠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 몸을 돌려 그 병자를 향해 달려갔다. 그 병자는 킥
킥 웃더니 과연 정말로 몸을 돌려 도망치는데 역시 바위들 사이로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위소보는 그 병자가 무공은 높지만 사람됨이 멍청하
고 바보스러우며, 나이는 사십 살이 넘어 보였지만 행동은 마치 어린애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몸놀림이 재빨라서 바위들 사이
에서 금방 동쪽에서 보였다가 순식간에 서쪽에 나타나 그 신속하고 민
첩함이 마치 귀신 같았다. 위소보는 경이롭고 놀라워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틀림없이 너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내 손 안에서 도망칠
수가 없다.]
그는 거짓으로 뒤쫓는 척하면서 쌍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단숨에 그
녀를 끌어안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봐! 이봐! 나는 한 사람을 둘러메고도 너를 잡을 수가 있지.]
그 병자는 껄껄 웃더니 크게 외쳤다.
[빰빠라 빰, 나팔을 불어라. 콜록콜록....허풍 떨지 말아라!]
위소보는 쌍아를 껴안고 그 병자를 추격하는 척 가장하며 멀리 도망쳤
다. 그 병자가 외쳤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놈. 나를 잡지도 못하면서....콜록콜록....]
그리고 위소보를 향해서 몇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위소보는 외쳤다.
[너는 기침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다.]
말을 하면서 그를 향해 뒤쫓는 시늉을 하였다. 그 노부인은 먼 곳을 쳐
다보고 있다가 소리를 쳤다.
[못된 놈, 감히 내 아이를 곯려서 기침을 하게 만들다니!]
획, 소리가 나면서 돌멩이 하나가 허공을 뚫고 날아왔다. 돌멩이는 비
록 작았지만 날면서 나는 파공성은 실로 예리했다. 위소보는 아이쿠,
하고 소리를 지르며 몸을 숙여 피하였다. 잽싸게 몸을 피했지만 그래도
한걸음 늦어 그 돌멩이가 장딴지에 와서 적중되었다. 그는 쌍아와 한
덩어리가 되어 땅바닥을 굴렀다. 그 노부인은 말했다.
[잡아오너라!]
다른 남자 하인이 몸을 날려 다가와 위소보와 쌍아의 뒷덜미를 거머쥐
고 그 노부인 앞에 데리고 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병자는 껄껄
웃고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쓸모없는 놈, 엉터리 같은 놈, 콜록콜록....한 번 자빠지더니 우당탕
소리를 내네.]
위소보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서천천, 풍제중 등은 이미 긴 밧줄에 꽁꽁 묶여 마치 염주알처럼 한 줄
로 묶여 있었다. 한 명의 여자 하인이 긴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었으며
오지영조차도 그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었다. 묶여 있는 사람들은 가슴
에 얼굴을 파묻고 두 눈을 꼭 감은 모습이 이미 지각을 상실한 듯하였
다. 그 노부인은 말했다.
[이 계집아이는 남자 분장을 하였군! 흥! 너의 그 분근착골(分筋錯骨)
의 수법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 그리고 너의 그 신행백변의 공력은 누
구에게 배운 것이냐?]
위소보는 깜짝 놀라며 생각했다.
(이 노파의 눈은 상당히 예리하구나. 나의 공력 이름을 알고 있다니.)
다른 사람이 자기의 공력을 알아보는 걸 보면 자기의 신행백변의 공력
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자 위소보는
자기도 모르게 의기양양해졌다. 그래서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신행백변이요? 당신은 내가 신행백변의 공력을 할 줄 안다고 말
씀하시는 거예요?]
그 조부는 말했다.
[꿈도 꾸지 말아라. 네가 날뛰는 꼴을 보니 개도 그렇게 뛰지는 않을
것이고 기어가는 게도 그렇게 기어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어찌 신행
백변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소보는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말했다.
[이것은 당신 스스로가 신행백번이라고 말을 한 것이오. 내 입에서 그
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니오. 내가 어찌 신도백변(神跳百變)인지 아니면
신파백변(神爬百變)인지 알겠소이까?]
그 병자는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신도백변도 할 줄 알고, 신파백변도 할 줄 안단 말이지? 하하하! 재미
있군! 재미있어!]
그는 몸을 숙여 위소보의 등을 찍었다. 위소보는 한 줄기 뜨겁고 따뜻
한 기가 몸 속으로 똑바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마비가 되어 있던
사지가 갑자기 활발해지면서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있었다. 위소보는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말했다.
[당신은 혈도를 푸는 재주가 정말로 대단하오.]
그 병자는 말했다.
[빨리 기어 보시지. 기어서 백 가지의 변화를 연출해 보시지. 거북이가
기는 흉내를 내고 조개가 기어다니는 흉내를 내야 비로소 신파백변이라
고 말할 수 있지.]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신파백변의 묘기를 부릴 줄 모르오. 당신이 만약에 할 줄 안다면
당신이 한번 시범을 보여 주시오.]
그 병자는 말했다.
[나도 할 줄 몰라. 무학의 대사(大師)는 다른 사람의 공력을 모방해야
될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독창적으로 무엇인가 창출해야만 비로소
대사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 아버지, 무학
가운데 신파백변이란 공력이 있습니까?]
그 노옹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당신은 무학의 대사이므로 이 세상에 이러한 공력이 없다면 당신 스스
로 창출해 내어 신파문(神爬門)이란 문파를 하나 세워 보시는 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노부인은 위소보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녀
의 일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함부로 지껄이지 말아라!]
그 노부인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아들을 한번 살펴보았다. 아마 아들이
위소보가 부추기고 선동하는 말을 듣고 정말로 그 무슨 신파백변이라
하는 새로운 공력을 창출한다고 설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아들이 이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
서 위소보에게 물어 보았다.
[자네는 이름이 무엇인가? 사부는 누구시지?]
위소보는 내심 생각했다.
(이 두 명의 늙은 요괴와 한 명의 어린 요괴....아니지, 어린 요괴가
아니고 젊은 요괴. 이들의 무공은 너무 막강하므로 나는 도저히 이들을
무찌를 수가 없다. 알면서도 손해를 볼 필요는 없지. 별 수 없이 그들
을 좀 속여야겠군. 내가 만약 오삼계의 친구로 가장한다면 그들은 나를
못살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지영을 홀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나는 성이 오가이며, 이름은 지영이라고 합니다. 자는 현양(顯揚), 양
주부 고우현(高郵縣) 사람입니다. 나의 백부인 평서왕은 멀지않아 북경
까지 들어오실 것이오. 당신들이 만약 나를 못살게 군다면 평서왕께서
는 절대로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노부부와 그 병자는 크게 놀라고 의아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곧 그
병자가 말했 다.
[아니야, 가짜야! 평서왕에게 어찌 당신과 같은 조카가 있단 말이야.]
위소보는 말했다.
[내가 어째서 가짜란 말이오! 그렇게 못 믿고 의심이 나면 평서왕의 집
안에 대해.한번 물어 보시오. 내가 만약 한 가지라도 틀리게 대답한다
면 그때 당신이 내 머리를 치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 병자는 말했다.
[좋아! 평서왕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지?]
위소보는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물건이요, 아니면 사람이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진원원이었는데 나중에 진원원이 나이가 들자 그는 사면관음(四
面觀音)이라는 미인을 좋아하게 되었지요. 지금 그가 마음속으로 제일
좋아하는 미인은 팔면관음(八面觀音)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오.]
그 병자는 말했다.
[미인이 뭐 좋단 말인가? 내가 말하는 것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물건이
란 말이오.]
[평서왕에게는 세 개의 귀중한 보물이 있는데 그 세 개의 보물이 바로
그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이오. 첫째로는 흰 호랑이 가죽이고, 두 번째
로는 크기가 계란만한 홍보석(紅寶石)이며, 세 번째는 호랑이 가죽 무
늬의 대리석 병풍입니다.]
그 병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알기는 잘 아시는군. 자, 좀 보시지.]
그가 옷고름을 풀고 왼손으로 옷고름을 거머쥐고 바깥으로 휙 젖히자
옷 안에 껴입고 있던 가죽옷이 나타났다. 그 가죽옷은 하얀 바탕에 검
은 줄의 무늬를 하고 있었다. 바로 횐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말했다.
[어, 어, 이것은 평서왕이 제일 아끼는 흰 호랑이 가죽인데 당신이....
당신이....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훔쳐 올 수가 있었소이까?]
[훔치기는 누가 훔쳤단 말이야? 평서왕이 나에게 준 것이지.]
위소보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것은 정말 믿을 수 없소이다. 내가 나의 매형인 하국상에게 듣기로
는....]
그 병자는 말했다.
[하국상이 당신의 매형이라고?]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소, 사촌 매형이요. 내 사촌 누나 오지....오지방(吳之芳)은 그에
게 시집을 가서 마누라가 되었소. 나의 매형은 싸움을 참 잘하지요. 그
래서 평서왕 휘하의 십대총병(十大總兵) 중의 한 사람이 되었소.]
그 병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은 맞는 말이오. 평서왕이 나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를 초
대해 주었는데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가시지 않고 나 혼자 거기에 갔
었지. 평서왕은 친히 나와 함께 대작을 하셨어. 그 휘하의 십대총병도
모두 다 왔었지. 당신 매형이 맨 첫줄에 앉아 있더구먼.]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소, 그리고 마보(馬寶) 형님, 왕병번(王屛藩) 형님, 장국주(張國
柱) 형님, 그들 모두 최고의 장군들이고 그 위풍과 위세는 정말로 대단
하지요.]
병자는 말했다.
[당신 매형은 이 휜 호랑이 가죽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소?]
위소보는 그의 환심을 얻기 위해서 과장되게 아무렇게나 이야기를 꾸며
댔다.
[나의 매형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옛날 진원원이 최고의 총애를 받을 때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어떤 사람이 말해 주기를 그
휜 호랑이 가죽을 이불로 삼아 삼 일 동안 덮기만 하면 금방 그 감기가
낫는다는 말을 해주었소. 그래서 그녀는 오.... 아니 평서왕에게 그 휜
호랑이 가죽을 달라고 하였지요. 평서왕이 말씀하시기를 '당신에게 며
칠 동안 덮으라고 빌려 줄 수는 있어도 당신에게 줄 수는 없소. 이것은
천하에서 제일 상서로운 보배로 팔백 년만에 휜 호랑이가 한 마리 나타
난다고 하는데 설령 그 호랑이가 나타난다 해도 그것을 잡을 수도 없고
그 가죽은 더욱이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오.' 이 횐 호랑이 가죽은 방에
다 걸어 놓기만 하여도 귀신이나 악마들이 그것을 보고 멀찌감치 달아
나 버립니다. 몸에 병이 있다면 약을 먹고 이 휜 호랑이 가죽을 이불삼
아 덮으면 며칠 안 가서 씻은 듯이 나아 버리지요. 사람들이 패구(牌
九)로 노름을 할 때에도 좌문(左門)을 청룡(靑龍)이라 부르고, 우문(右
門)을 백호(白虎)라고 부르지요. 청룡피(靑龍皮), 백호피(白虎皮)는 모
두 가격을 말할 수 없는 최고의 보물입니다.]
노부인은 조용히 그가 줄줄이 꿰뚫어 맞추는 말을 듣고 있었다. 노부인
은 아들 몸에 병이 있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그것이 유일하게 관심을 갗
는 일이었다. 흰 호랑이 가죽을 이불로 삼는다면 기침을 적게 할 수 있
다는 말을 듣고는 비록 그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꼭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물었다.
[얘야, 평서왕이 이 보물을 너에게 주었느냐? 너야말로 대단한 인물이
로구나. 또한 너는 그 가죽을 가지고 옷을 만들어 입었으니 정말로 똑
똑하다. 만약에 이 휜 호랑이 가죽이 정말로 병을....병을 낫게 할 수
만 있다면....]
병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몸에는 아무런 병도 없는데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노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그래. 너는 정말 하늘을 날으는 용이고, 온 산을 휘젓고 다니는
호랑이지. 이 몇 사람들은 모두가 강호의 호걸들인데 네가 이들을 팽이
처럼 가지고 놀지 않았니. 정말 재미있게 한바탕 놀았구나.]
병자는 껄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웃음소리에는 기침이 섞여 있었다. 노
부인은 말했다.
[너는 저녁에 잠을 잘 때에도 이 가죽옷을 이불로 삼고 꼭 덮고 자도록
해라.]
병자는 고개를 돌리며 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노옹은 손가락
으로 풍제중 일행을 가리키며 물어 보았다.
[이 사람들도 모두 평서왕의 휘하인가?]
위소보는 내싣 생각했다.
(내가 그 역적놈의 조카로 둔갑한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런
데 만약 서 형님 일행을 보고 오삼계의 휘하라고 하면 그들은 절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또 그들은 강직하여 절대로 굴하지 않을
사람들이니 잘못했다가는 마각이 드러날 것이다.)
그는 말했다.
[그들은 모두 나의 휘하 사람들이오. 우리들은 평서왕께서 의거를 일으
키자 그의 부마와 공주가 경성에 잡혀 도망쳐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평소에 오응웅 형님과 저는 서로 의기 투합하고 교분이 두
터웠지요. 그래서 나는 이 친구들을 데리고 북경에 가서 그 부마를 구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이 일은 비록 위험하지만 모두들 의리로 뭉친
사람들이고 설사 기름을 짊어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꼴이라 해도 우
리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들키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뻔히
알지만 우리는 그 일을 반드시 해낼 것이외다.]
이 몇 마디의 말을 할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호기가 치솟아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노옹은 고개를 끄덕이며 포박을 당하여 꼼짝 못하고 있는
풍제중 일행에게 다가가 손을 몇 번 움직여서 그들을 묶고 있던 포승을
풀어 주었다. 이어서 그들의 등과 허리를 몇 번 툭툭 쳤다. 그러자 그
들은 지금까지 막혀 있던 혈도가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노복이 쌍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두 손을 묶고 있던 머리카락을 풀어 주
었다. 노옹은 위소보를 향해서 말했다.
[자네의 말만으로는 전부 믿을 수가 없네. 자네가 평서왕의 조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는가?]
위소보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르신, 그것은 정말 난감하군요. 나의 어머니, 어버지를 호주머니 속
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지요. 우리가 북경
에 가서 부마를 만나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미 황제
에게 잡혀갔다면 우리는 건녕 공주에게 가서 공주를 만나 보도록 하지
요. 공주께서는 틀림없이 당신들에게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내가 정
말로 평서왕의 친척인지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북경에 도착하기만 해 봐라. 내 어찌 너희들 같은 녀석들을 두려워 하
겠느냐? 설사 정말로 너희들에게 잡혀서 건녕 공주를 만난다 해도 공주
께서는 내가 설령 옥황상제라고 사칭을 해도 틀림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말씀을 하실 것이다.)
노옹과 노부인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한참 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
였다.
위소보는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웃으며 말했다.
[아! 있습니다. 나에게 평서왕이 써준 서찰이 있습니다. 이 편지를 다
른 사람이 보면 아마도 우리 집안은 멸족을 당할 것이요. 그러나 당신
들은 평서왕의 친구이니 한 번 본다고 해서 그리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
을 것 같군요.]
그는 말을 하면서 손을 품속에 집어넣어 사윤황이 거짓으로 만들어 준
그 서찰을 꺼내어 노옹에게 건네주었다. 노옹은 서찰을 꺼내서 기울어
지는 석양빛 아래에서 읽어 보았다. 위소보는 그들이 이해를 못할까 봐
염려되어 해석해 주었다.
[백사(白蛇)를 죽이고,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는 것은 바로 주원장(朱
元璋)을 뜻하는 것입니다....]
잠자코 있으면 중간이나 갈 텐데 그 옛날 유방(劉邦)이 백사를 죽이고
대풍가를 불렀다는 이야기를 주원장을 끌어들여 이야기했던 것이다. 다
행히 노옹과 노부인은 정신을 집중하여 편지를 읽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의 말을 그리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노부인은 편지를 보고 나서 말했
다.
[틀림없는 사실이군. 평서왕은 한고조(漢高祖), 명태조(明太祖)와 같은
양심을 품고 있고 이자를 청해다가 장자방(張子房), 유백온(劉伯溫)과
같은 중요한 직책을 맡기려고 하는군. 이보시오, 영감. 평서왕은 이번
의 거사가 순전히 명의 황실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이 편지
의 말투를 보니 흥! 그는.... 꿍꿍이 속이 정말 대단하군요.]
그녀는 위소보를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너는 나이가 이렇게 어린데....]
말을 더 계속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어찌 장자방, 유백온 등 그런 큰 인물들과 비견된
단 말인가?)
노옹은 편지를 잘 접더니 봉투 속에 집어넣고 위소보에게 되돌려 주면
서 말했다.
[과연 틀림없는 평서왕의 조카님이시구려. 조금 전엔 실례가 많았소이
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모르는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이때 서천천 등은 정신이 들어 위소보가 자칭 오삼계의 조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을 보자
퍽이나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리나 평소 소향주(小香主)는 꾀가 많은
모사꾼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위소보는 내
심 생각했다.
(이 어르신께서는 얼마 전에 몽고인 한첩마 앞에서 오삼계의 아들로 가
장했었다. 아들도 됐었는데 그의 조카가 된들 뭐가 대수롭단 말인가?
빌어먹을! 다음엔 오삼계의 아버지로 변신을 하자. 때에 따라서 변신을
하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면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이
다.)
이미 날은 저물어 어둑어둑하였다. 여러 사람은 들판에 서 있었다. 차
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그 병자는 계속해서 기침을 했다. 위소보는 물었
다.
[어르신과 노부인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 노옹은 말했다.
[우리들의 성은 귀(歸)씨요.]
위소보는 생각했다.
(많고도 많은 성 가운데 무슨 성을 못 가져서 하필이면 거북이 귀(龜)
란 성을 가졌을까? 정말 웃기는 일이로구나.)
노부인은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곧 날이 저물 모양이니 적당한 곳을 찾아 묵도록 하지요. 다른 일은
천천히 상의해도 늦지 않아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 저는 저쪽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
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위에 인가가 있는 모양이니 우리 그곳에 가서
하룻밤 묵어 가기로 하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장가의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사실 이곳은 장가와
십여 리 떨어져 있었고 주위에는 산들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인가의 연
기는 볼 수 없었다. 남자 하인들은 두 마리의 말을 끌고와 노옹, 노부
인이 타도록 도왔다. 노부인과 병자는 한 마리의 말을 함께 탔다. 그녀
는 아들의 등뒤에 앉아 그를 꼭 껴안았다. 위소보 일행은 각자 타고 온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히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네 명의 하인은 뒤
따라 걸었다. 한참 가다가 위소보는 쌍아를 향해서 큰소리로 말했다.
[너는 말을 빨리 달려가 앞에 있는 마을이 큰 마을인지 아니면 작은 마
을인지 살펴보도록 하여라. 그리고 한두 칸 정도의 큰 방을 빌어서 빨
리 물을 데우고 귀가의 도련님께서 따뜻하게 인삼탕을 잡수실 수 있도
록 하거라. 또 그 집 주인에게 돈을 넉넉히 주어 뜨거운 물을 준비하도
록 하여 우리가 당도해서 그 뜨거운 물에 발도 좀 씻고, 술을 마시고
밥을 먹도록 하자꾸나.]
그의 말이 끝날 때마다 쌍아는 옆에서 대답을 하였다. 위소보는 품속에
서 큰 은 덩어리를 하나 더듬어 꺼내면서 정신을 잃게 할 수 있는 약을
한 봉지 꺼내 쌍아에게 같이 건네주였다. 쌍아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건
네받고 질풍처럼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갔다. 노부인의 얼굴은 희색이
만면하였다. 위소보가 뜨거운 물을 데우고 인삼탕을 끓이라고 분부하는
소리를 듣자 흡족한 모양이었다. 그들 일행이 몇 리를 나가자 쌍아가
다시 돌아왔다.
[상공, 앞에 있는 것은 큰 읍도 아니며 마을도 아닙니다. 다만 크나큰
장원이 있습니다. 집안 사람들이 말하기를 집의 남자들이 모두 외출을
했기 때문에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돈을 주어도 그들은 받으
려 하지 않았습니다.]
위소보는 이 말을 듣자 욕을 해댔다.
[멍청한 계집 같으니라고. 그들이 받거나말거나 우리는 가면 될 것이
아니냐?]
쌍아는 대 답했다.
[예,예.]
노부인도 말했다.
[우리는 단지 하룻밤만 묵어갈 뿐이야. 남자들이 없다고 한들 우리가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거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일행은 장씨 집 장원에 도착했다. 남자 하인이 문을 두드리자 한참 후
에야 늙은 노복이 걸어나와 문을 열었다. 그 노복은 반벙어리에 반귀머
거리였으므로 의사 전달이 잘 되지 않았다. 그 노복은 단지 집안에 남
자가 없다는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병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집안에 남정네들이 없다고 하는데 여기에 많은 남자들이 왔지 않느
냐?]
그는 몸을 날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노복은 이에 밀려 한쪽으로
물러섰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들어가 그 집의 대청에 자리를 잡고 정좌
했다. 노부인은 말했다.
[장 어멈, 손 어멈은 빨리 가서 물을 데우고 밥을 하게나. 주인집에서
손님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니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해야 하겠네.]
그 노복은 곧바로 주방을 찾아 들어갔다. 서천천은 이 장씨 집에 와 본
적이 있었다. 위소보가 온갖 수단과 교묘한 말로 이 무공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수들을 속여서 함정과 그물 속으로 끌어오자 내심 기뻐서 춤
이라도 추고 싶은 지경이었다. 여러 형제들은 계단에 앉아 마각이 노출
될 것을 염려하여 병자와 위소보가 있는 곳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
다. 노옹은 오지영을 가리키며 물었다.
[입 속에 피를 흘리고 있는 사내는 어떤 사람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이놈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던 놈으로 우리가 도중에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관청에 밀고할까 봐 그래서....그래서 그의 혀를 잘라 버렸습니
다.]
노옹은 처음부터 그에 대해 내심 의혹을 품고 있었는데, 위소보가 하는
말을 듣고도 여전히 반신반의하여 오지영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며 물
어 봤다.
[자네는 조정의 관리인가? 정말 그러한가?]
오지영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몇 번인가 까무러쳤기 때문에 상황 판
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옹은 또 물었다.
[자네는 어떤 자가 모반을 획책하려는 것을 알고서 조정에 밀고하려고
했는가?]
오지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는 남쪽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무장이 모반하려는 것을 알고 있었
습니다. 그 무장의 성은 오씨인데 그분이 병력을 일으키기만 하면 천하
가 흔들리는 것이죠.]
그 노옹은 다시 오지영에게 물었다.
[그의 말이 사실인가?]
오지영은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노옹은 더 이상 의심을
품지 않았다. 위소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믿는 눈치였다. 그는 의자
에 돌아와 앉으며 위소보에게 물었다.
[오형의 무공은 어느 사부님께 가르침을 받은 것이오?]
위소보는 대답했다.
[나의 사부님은 여러 분 계시지요. 하나, 둘, 셋 모두 세 분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저는 본래가 멍청하고 게을러서 그 무엇도 제대로 배우
지 못하였지요.]
노옹은 내심 생각했다.
(네 놈이 무공을 잘 연마하지 않았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러나 그의 신행백변의 경공(輕功)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위소보가 보여 준 신행백변의 경공은 구우일모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의 몸놀림과 발놀림은 틀림없이 신행백변이란 상승의 경공
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다시 물었다.
[당신은 누구에게 경공을 배우셨소?]
위소보는 내심 생각했다.
(이자가 끝끝내 나에게 경공을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물어 오니 틀림없
이 나의 사태(師跆) 사부님과 원수지간임에 틀림없다. 절대로 말할 수
없지. 이자는 오삼계의 일당이고 대체로 서장(西藏)의 라마들과 교분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서장에 대라마 한 분이 계신데 그분의 이름은 상결(桑結)이라는 분이
십니다. 그분께서는 곤명 평서왕의 오화궁(五華宮)에서 나를 만나 보시
고 내 무공이 너무나 빈약하여 사람들과 싸움을 할 때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도망가는 방법이라도 배우는 것이 좋겠
다고 하시며 며칠 동안 그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이 공력을 배
울 때 매우 고생을 해서 내 스스로는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었지요. 그
런데 어르신과 노마님, 그리고 이 신강력장(身强力壯)하시고 정신백배
(精神百倍)하신 귀 도련님을 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군요.]
노부인은 위소보가 자기 아들을 '신강력장, 정신백배'라고 칭찬하자 자
기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지며 아들을 몇 번이나 쳐다보며 마음에
기쁨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 영감! 이 아이가 며칠 동안 정신이 아주 든 건 사실이에요.]
노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들이 피곤하여 의자에 기대어 있는
모습은 쇠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괴
로웠다. 그는 위소보를 향해 말했다.
[알고 보니 그렇게 되었구려. 그렇다면 됐소이다.]
노부인이 물었다.
[그런데 그 상결은 어떻게 철검문(鐵劍門)의 경공을 할 줄 알게 되었을
까?]
노옹은 말했다.
[철검문 중에는 옥진자(王眞子)라는 사람이 있는데 서장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적이 있었지.]
노부인이 말했다.
[아! 맞습니다. 그는 본래 목상도장(木桑道長)의 사제입니다. 아마 그
는 그때 서장에서 어떤 사람에게 전수를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쌍아에게 물었다.
[아가씨, 당신의 무공은 누구에게서 전수받은 것이오?]
노부부는 그녀롤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의 무공 전승 내력이 아
주 중요한 일이나 되는 듯한 눈치였다. 쌍아는 두 사람이 똑바로 쳐다
보자 약간 당황하며 대답했다.
[저는....저는....]
그녀는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위소보가 재빨리 말했다.
[이 여자는 저의 계집종입니다. 상결 라마께서 그녀에게도 역시 무공을
가르쳐 주셨지요.]
노옹과 노부인은 일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똑같이 말했다.
[절대로 아닐 것이다.]
병자가 다시 큰소리로 기침을 해댔다. 기침은 갈수록 더 심해졌다. 노
부인은 급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노옹 역시 고
개를 돌려 아들을 쳐다보았다.
여자 하인이 주방에서 인삼탕과 뜨거운 차를 받쳐들고 나왔다. 그리고
병자에게 다가가 그의 기침이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기침이
잠시 멈추자 인삼탕을 건네주어 그가 마시도록 도왔으며 병자가 인삼탕
을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그릇을 열어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
작하였다. 서천천 일행에게도 찻잔이 돌아갔다. 노옹이 차를 마시고 다
시 쌍아에게 무언가를 물어 보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뒤뜰로 간 후였
다. 노옹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손 어멈에게 물었다.
[이 차를 끓인 물은 어디에서 길어 온 것인가?]
위소보는 깜짝 놀라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하였다. 그는 속으로 외
쳤다.
(큰일났구나! 큰일났어! 이 망할 늙은이가 알아차렸구나.)
[저와 장어멈이 함께 물을 끓인 것입니다.]
손 어멈이 이렇게 대답하자 노옹은 다시 물었다.
[어떤 물을 사용한 것이냐?]
손 어멈과 장 어멈과 함께 대답했다.
[주방에 있는 항아리의 물을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그 물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 물은 매우 깨끗하
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털썩털썩 소리가 나더니 두 명의 남자 하인이
땅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노부인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몸이 뒤뚱거렸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머리를 감싸며 외쳤다.
[차 안에 독이 있다!]
서천천 등은 차를 마시지 않았으나 서로 눈짓을 하고 일제히 거짓으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하였다. 쨍그랑,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찻잔
들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위소보는 외쳤다.
[아이쿠!]
그 역시 땅바닥에 쓰러져 눈을 꼭 감았다. 장 어멈과 손 어멈이 동시에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은 우리들이 끓인 것입니다. 주방 안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않
았습니다.]
그 노부인은 말했다.
[항아리에 약을 집어넣은 것이다. 얘야, 너는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아직은....]
병자는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리더니 역시 정신을 잃었
다. 손 어멈은 말했다.
[인삼탕에는 물을 더 넣지 않았습니다. 인삼탕은 우리들이 다려서 가져
온 것입니다.]
노옹은 말했다.
[옆에서 물을 끓일 때 그 수증기가 들어갔을 것이다.]
노부인은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 아이는 너무 허약하니까. 그래서....그래서....]
그녀는 급히 손을 내밀어 병자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이마를 만지는
손은 계속해서 벌벌 떨고 있었다. 노옹은 내공을 운행시켜 뱃속에 들어
있는 약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지 못하게 억제하면서 말했다.
[빨리 가서 차가운 물을 길어 오도록 하여라.]
장 어멈과 손 어멈은 차를 마시지 않았지만 눈앞에서 이렇게 괴상한 사
건이 일어나자 놀란 나머지 혼비백산하여 급히 안쪽으로 달려갔다. 노
부인이 말했다.
[이 집이 수상쩍습니다.]
그녀는 몸에 병기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몸을 숙여 남자 하인의 허리
에서 칼을 뽑아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땅바닥이
빙빙 도는 듯하여 더 이상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자
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가락이.칼자루에 가 닿았지만 힘이 없어 칼자
루를 쥐지 못했다. 노옹은 의자에서 왼손으로 턱을 기대고 눈을 감았
다. 그러나 숨을 헐떡이며 연신 몸을 기우뚱거렸다.
위소보는 땅바닥에 쓰러진 채 이러한 상황들을 살펴보았다. 쌍아가 한
무리의 여자들을 이끌고 나타나자 노옹이 갑자기 일장을 휘둘렀다. 하
얀 옷을 입은 한 여자가 그 일 장을 맞아 멀리 날아가더니 의자 위에
떨어졌고 의자는 대뜸 박살이 났다. 서천천 등은 큰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다투어 노옹의 앞으로 달려갔다. 달려가 보니 노옹 역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풍제중은 그의 혈도를 짚고 또 노부인과
병자의 혈도를 짚었다. 위소보는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껄껄 웃으면서
외쳤다.
[셋째 마님, 안녕하십니까?]
한 무리의 여자들 중에 한 여자를 향해서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였다.
그 여자는 바로 장씨 집안의 셋째 마님이었다. 위소보가 인사를 하자
급히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위 도련님, 도련님께서는 우리들의 크나큰 원수를 잡아 주셨습니다.
정말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우
리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위 도련님, 이리 오셔
서 우리 사부님을 만나 보시죠.]
그리고는 그를 데리고 노란 옷을 입은 여자 앞으로 갔다. 그 여자는 손
을 내밀어 조금 전에 노옹에게 일 장을 맞아 나가떨어진 여자의 등을
톡톡 치고 있었다. 그러자 그 상처를 입은 여자가 확 하고 소리를 내더
니 새빨간 피를 토해 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
했다.
[이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부드러워 듣는 사람의 간장을 녹이는 듯하였다. 위
소보가 얼핏 보니 이 여자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 보였으나 목소리는 마
치 소녀처럼 아름다워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금
환(金環)이 얹혀 있었으며 발은 맨발이었고 허리에는 수를 놓은 허리띠
를 감고 있어서 차림새가 매우 이상하였다. 머리카락은 이미 하얗게 세
었으나 얼굴은 하얗고 부드러웠다. 단지 눈 가장자리에 약간의 주름살
이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추측할 수 없었다. 머
리카락을 보아서는 육십이 넘어 보였으나 얼굴을 보면 삽십 살 안팎으
로 보일 뿐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셋째 마님의 사부이므로 위소보는 즉시 앞으로 나가 무
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할머니 누님, 절 받으십시오.]
그 여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 아이가 지금 나에게 뭐라고 했느냐?]
위소보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셋째 마님의 사부이시니 제가 응당 할머니라고 불러야
되겠지요. 그러나 어르신네의 모습을 보니 아무리 많이 보아도 저의 누
님뻘밖에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머니 누님이라고 부른 것
입니다.]
그 여자는 킥킥 웃더니 말했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자네의 누님뻘이라면 자네의 동생도 될 수 있지
아니한가?]
위소보는 대답했다.
[만약에 제가 뵙지 않고 어르신네의 목소리만 들었다면 그때는 어르신
을 할머니 동생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여자는 몸을 젖히며 깔깔 웃더니 말했다.
[정말로 재미있는 사람이군. 입에 참기름을 바른 듯 말이 번지르르하니
정말로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겠어. 그러니 귀 사백(歸師伯)과 같은 영웅
도 자네의 재간을 당해 내지 못하여 속고 말았지.]
그녀의 이 말이 떨어지자 모든 사람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第111章. 함사사영이라는 악독한 무기를 선물로 받다
위소보는 노옹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이 노인네가 바로 할머니 누님의 사백입니까?]
그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나는 이 노인네와 사십여 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 맨 처음
에는 나도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 노인네가 그렇게 맹렬한 설횡진령
(雪橫秦嶺)의 일 장을 쓰는 것을 보고서야 나의 사백인 줄 알았지. 아
마 이렇게 무서운 설횡진령의 공력을 쓰는 사람은 중원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울 거야.]
위소보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분들이 우리 편이라고요? 이것 참 어떻게 하지요?]
그 여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웃더니 말했다.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의 사부님께서 이 일을 아신다
면 틀림없이 나에게 호된 꾸지람을 내리실 거야.]
그녀는 몇 명의 여자 하인들이 손에 굵은 끈을 가지고서 기다리는 것을
보자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가 만약에 이 사람들을 묶고 싶다면 명령을 내려서 묶도록 하게
나.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네. 이분이 바로 나의 사백님이니 나야 묶
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만약에 묶지 않는다면 이 노인네가 정신이
들어 공격해 올 때, 우리가 절대로 당해 낼 수 없지. 여보게, 자네는
자네 힘으로 이 노인네를 당해 낼 수 있는가?]
위소보는 그녀의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더욱 당해 낼 수가 없지요.]
위소보는 그녀가 이렇게 나오자, 그녀가 이 일에 끼여들고 싶지않으나
그렇다고 사백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려는 의사도 없음을 알고 급히 서
천천을 향해서 말했다.[이 사람들은 오삼계의 일당이고 좋지 않은 사람
들입니다. 할머니 누님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니 우리 천지회에서
이자들을 묶기로 하지요.]
서천천 등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병자에게 희롱을 당하고 놀림을 당했
었다. 이와 같은 치욕은 평생 겪어 보지도 못했던 터였다. 분풀이를 하
려고 벼르던 차라 위소보가 묶으라고 하자 즉시 끈을 가지고 노옹, 노
부인, 병자와 두 명의 남자 하인을 있는 힘을 다하여 단단하게 묶었다.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물었다.
[어쩌다 귀 사백께서 오삼계와 일당이 됐죠? 당신들은 어떻게 이들과
만났소?]
위소보는 어떻게 노옹과 식당에서 만났으며 식당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
는지를 설명하었다. 그러나 서천천 일행이 이 병자에게 어떻게 놀림을
당했는가는 빼고 말했다. 단지, 그 병쟁이의 무공이 대단하여 우리 모
두 그의 적수가 못된다는 말만 했을 뿐이었다. 그 여자는 말했다.
[귀가(歸家) 소사제(小師弟)의 생명은 역시 우리 사부님이 구해준 것이
야. 그는 어려서부터 중한 병을 앓아서 지금까지도 몸이 좋지 못하지.
그는 귀 사백 부부의 생명줄이야.]
그 여자는 노옹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귀 사백은 본시 정의로운 사람인데 어떻게 오삼계 그 역적놈과 한패거
리가 되었을까? 만약 이것이 정말이라면 나의 사부님은 욕을 하시지는
못할 것이야. 호호호!]
그녀의 말투를 보아 하니 사부님을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말했다.
[오삼계를 도와 주면 그 누구라도 죽음을 면치 못하지요. 사부님께서
이를 아신다면 크게 어르신을 칭찬하실 겁니다.]
그 여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해주실까?]
노옹과 노부인을 바라보면서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병자에게
다가가 숨을 살피더니 말했다.
[잠시 후에 사백께서 정신이 들면 틀림없이 크게 화를 내실 거야. 그렇
지만 우리가 죽일 수도 없는 일이니, 이렇게 하지. 이들을 이곳에다 남
겨 놓고 우리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가 버리자.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누가 그들을 묶었는지 모르게 하는 거야. 이 방법이 어
떻겠나?]
[사부님의 분부이시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셋째 마님은 이렇게 대답했으나 이곳에서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갑자
기 떠나려 하자, 이곳을 버리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많은 물
건들을 옮기기가 쉽지 않아서 얼굴에 난색을 드러냈다. 다른 흰옷을 입
은 노부인이 말했다.
[원수를 이미 잡아들였으니 이 원수를 영전에 바치고 제사를 지낸 다음
에 그 영전의 위패를 태워 버리면 될 것 같소이다.]
셋째 마님은 말했다.
[할머니의 말씀이 옳습니다]
즉시 여러 사람은 영전 앞으로 갔다. 그리고 오지영을 끌고와 땅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넷째 마님은 공탁(供卓)에서 책 한 부를 꺼내다가 오지
영의 눈앞에 갖다 들이대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오 대인, 이 책이 무슨 책인지 잘 알고 있겠지?]
오지영은 이 책을 일찍이 보아 왔기 때문에 이 책의 두께, 크기, 권 수
를 보자, 이 책이 바로 자기가 벼슬을 얻고 권세를 누리도록 해준 책이
라는 것을 알았다. 제목을 보니 과연 명서집략(明書輯略)
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마님은 또 말했다.
[여기를 똑바로 쳐다보시오. 이곳에 모셔 놓은 위패는 당신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오.]
오지영은 위패에 쓰여 있는 이름을 쳐다보았다. 위패에는 장윤성(莊允
城), 장정룡(莊廷龍), 이령석(李令晳), 정유번(程維藩), 이환(李煥),
왕조정(王兆楨), 모원석(茅元錫)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백여 개가
넘는 위패들은 모두 자기가 제보하거나 밀고하여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
의 이름이었다. 오지영은 여덟아흡 개의 이름을 보자 혼비백산했다.
그는 혓바닥이 잘려져 피를 계속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죽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 땅바닥에 고꾸라져 몸을 사시나무
떨듯했다.
[네 놈은 단지 부귀를 쫓고 공명이 탐이 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
다. 이분들은 옥중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받다가 죽거나 처참하게 능지
를 당하여 돌아가셨다. 다행히 우리들은 천운으로 사부님의 구출을 받
아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네 놈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
다. 오늘 단칼에 네 놈을 죽여 버린다면 그것은 너에게 너무나 편안함
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너희들처럼 그렇게 잔인하지 않으니
지금 죽겠다면 스스로 끝장을 봐라.]
그녀가 말을 하면서 그의 혈도를 풀어 주고 한 자루의 단도를 땅바닥에
던지자 쨍고랑, 하며 단도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오지영은 온몸을 사시
나무 떨듯 벌벌 떨며 땅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자살
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어찌 그리 쉽겠는가! 갑자
기 몸을 돌려 밖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한 발짝 나오자 수십 명의 흰옷
을 입은 여자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지영은 목구멍에서 쉰소리
를 몇 차례 내더니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몇 번인가 몸을 떨더니 잠시
후에는 꼼짝도 하지 않고 뻗어 버렸다. 셋째 마님이 그의 몸을 뒤집었
다. 호흡은 이미 멈춰 있었고, 얼굴은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
며 눈을 부라리고 죽은 모습이 실로 공포스러웠다.
[악독한 짓을 하면 악독한 대가를 받는 법입니다. 이 간사한 자도 결국
은 죽었군요.]
그녀는 영전 앞에 무릎을 끓고 말했다.
[이제서야 복수를 했습니다. 상공(相公)께서 혼령이 있으시다면 이제
편안하게 눈을 감으십시오.]
여러 여자들은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위소보와 천지회 군
웅들도 영전 앞에 절을 하였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한쪽에 서서 눈
살을 약간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여러 제자들은
한바탕 울고 난 뒤에 위소보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고 원수를
잡아 준 데 대해서 감사를 드렸다. 위소보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절을
하며 말했다.
[작은 일을 했을 뿐이니 그렇게 추켜세우지 마십시오. 만약에 다른 복
수할 자가 있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당신들에게 그자를 잡
아다 대령시키겠습니다.]
셋째 마님은 말했다.
[그 간사하고 흉악한 오배를 어르신께서 친히 죽여 주셨고 또다시 오지
영을 잡아다 주셔서 그 대가를 치루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들의 복수는
이미 다 끝났습니다. 다른 누구와도 원한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 제자들은 영전을 거두고 위패를 태웠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그녀들이 예의를 차리고 격식을 따지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자, 참지 못
하고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묶인 사람을 살펴보려고 밖으로 나갔다. 위
소보와 천지회 군웅들은 그녀를 뒤따라 나갔다. 노옹, 노부인, 병자는
아직까지도 정신이 들지 않은 상태였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보게, 귀여운 어린 친구. 독을 써서 사람을 잡으려면 착실하게 잘
배워야 되겠더구먼.]
위소보는 말했다.
[예, 예. 약을 써서 정신을 잃게 하는 방법 외에는 실로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공이 너무나 강했으므로 제가 만약 이런 흉계를
꾸미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들에게 목이 잘렸을 것입니다. 이런 저질
수법은 강호의 영웅호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 다음 번에는 절대 이런 일을 벌이지 않겠습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약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가 최고의 수법이고 최저의 수법이야? 사람을 죽였으면 사람을 죽인
것이지. 주먹으로 죽이나 약으로 죽이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똑같은 것
이 아닌가? 강호의 영웅호걸들이 업신여긴다고? 흥! 누가 그들보고 칭
찬을 해달라고 했나? 예를 들면 오지영 같은 놈은 조정에 밀고를 해서
수천 수백 사람을 죽였다. 그가 독을 쓰지 않았으니 칭찬해 주고 대단
한 사람으로 보아야겠는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위소보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고 위안을
시켜 주었다. 그래서 위소보는 얼굴이 환해지며 말했다.
[할머니 누님, 그 말씀은 옳은 말씀이십니다. 제가 어렸을 때 누굴 도
와서 싸움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석회(石仄)를 상대방 눈에
뿌려 버렸지요. 그래서 그 싸움은 우리가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은 오히려 제가 비굴한 수법을 썼다고 매섭게 제 따귀를 때렸조 그때
할머니 누님께서 앞에 계시지 않았던 것이 정말로 애석한 일이군요. 그
때 계셨더라면 그자에게 교육을 시키는 건데 그랬습니다.]
[그러나 자네가 나의 귀 사백에게 독을 썼으니 내가 자네의 따귀를 때
려 줘야만 하겠어.]
그녀의 말에 위소보는 급히 대꾸했다.
[그때 저는 정말로 이자가 할머니 누님의 사백인 줄 몰랐습니다.]
[자네가 만약에 그가 나의 사백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자네 목을
비틀었을 거야. 어떤가? 자네에게 독약이 또 있다면 그에게 독을 쓸 건
가 쓰지 않을 건가?]
[목숨과 관련이 있으면 별수없이 실례를 해야겠지요.]
[자네는 솔직해서 좋구먼 자기의 목숨이 달아날 판인데 그 어찌 다른
사람의 목을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자네의 따귀를 때
리려는 것은 자네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모르기 때문이야. 이 양반
은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신권무적(神拳無敵) 귀신수(歸神手)라는 분
인데 그의 공력이 얼마나 깊고 강한 줄 알고나 있나? 자네는 이분에게
별볼일없고 아무 효과도 없는 몽한약(蒙汗藥)
을 썼는데 이 어르신은 그 약을 후춧가루쯤으로 여기고 계시는 분이
지.]
[그러 나 그는....그분은....]
[자네는 이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밀가루 같은 약을 차 안에 타면 여
든 살이나 먹은 노강호가 그렇게 흐리멍텅하게 마실 줄 알았나? 그런
약은 남의 재물이나 빼앗으려고 술집을 차리는 작은 모리배들이 하는
장난에 불과해. 독을 쓰려면 독다운 것을 써야지.]
위소보는 그 말을 들으니 놀랍고 또한 기뼜다.
[알고 보니....알고 보니, 할머니 누님께서 제일 강한 약으로 바꾸어
놓으셨군요?]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 나는 약을 바꾸지 않았다. 귀 사백 일
행은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서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 정신을 잃었을 뿐
이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병에 골골하는 약골 하나와 여든
살이 훨씬 넘은 할아버지와 할망구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고 해서 그
게 무슨 신기하고 희귀한 일이란 말이냐?]
그녀의 말투는 매우 점잖았으나 눈빛에는 장난기가 역력하게 배어 있었
다. 위소보는 그녀가 훗날 사부가 이 일을 알면 나무랄까 봐 염려되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이 여자에 대
해서 말할 수 없는 호감과 감탄이 일어났다. 그는 갑자기 땅바닥에 무
릎을 꿇고 말했다.
[할머니 누님, 제가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저를 제자로 거두어 주
십시오. 앞으로는 제가 사부 누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 여자는 킥킥 웃더니 오른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그의 턱 아래에 갖다
대었다. 위소보는 턱 아래에 무엇인가 딱딱한 것이 와 닿자 사람의 손
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숙여 바라보고 깜짝 놀랐
다. 그것은 바로 검은 빛의 쇠갈고리였다. 그 쇠갈고리의 끝은 매우 날
카로웠으며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그 여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디 더 자세히 살펴보겠나.]
왼손으로 오른손의 소매를 걷어을리자 새하얀 팔뚝이 드러났다. 그러고
보니 손목은 끊어지고 손바닥이 없었다. 그 쇠갈고리는 손목에 부착된
것이었다. 그 여자는 말했다.
[자네가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어려울 것도 없지. 손바닥을 절단해 버
리고 내가 자네에게 쇠갈고리손 하나를 달아 주면 되지.]
이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바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오독교(五毒敎)의
교주 하철수(何鐵手)로, 나중에 원승지(袁承志)를 사부로 모시고 이름
을 하척수(何揚守)로 고쳤던 것이다.
명나라가 망한 후 그녀는 원승지를 따라 멀리 해외로 나갔었다. 그리고
얼마 후 사명을 받고 중원으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왔는데 우연히 장씨
집안 셋째 작은마님 등 한 떼의 과부들을 구하고 그녀들에게 약간의 무
예를 전수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왔을 때 마침 쌍아가 몽한약을
가지고 온 것을 보고 사정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상대방이 누군지 모
르지만 무공이 그토록 고강하니 보통 몽한약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독한 약물을 물독에 넣었던 것이
다.
하척수는 본래 독을 쓰는 재간이 천하무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화산파
(華山派)로 귀의한 이후 독을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물독에다 독을 쓰는 것을 보고는, 그만 손이 근질근질하여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사부 원승지보다 더 심후
한 내력을 가진 귀신수가 위소보가 어전시위들 손에서 구한 보통 몽한
약 한 봉지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병든 사내 귀종(歸鐘)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미 병을 얻었기 때문에 키우기가 정말 어려운 지경이었
다. 그런데 후에 진귀하기 이를 데 없는 영약을 먹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체와 머리가 이미 손상을 입어서 늘 여느 사람들처럼
건장하지 못했다.
귀신수 부부는 자식이라고는 이 아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생명
보다 더 아꼈다. 그리고 그가 어릴 적부터 병고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그만 지나친 총애를 하여 가르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귀종은 일신에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으나 중년에 이르러서도 지혜와 성격에 있어
서는 여전히 팔구 세의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척수는 약을 쓸 때는 상대방이 누군지 몰랐었지만 나증에 귀 사백의
집안이란 것을 알고 크게 가슴을 두근거렸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다군다나 위소보는 사람의 환심을
사는 말을 매우 잘하는지라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그녀는 해외에서는
이와 같이 영리하고 짓궂은 소년을 찾아볼 수 없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위소보는 한쪽 손을 잘라야만 사부로 모실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손이 잘라질 때 아플 것이 두려웠고 또 아까워서
매우 망설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척수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사부로 모실 필요는 없다. 나 역시 너에게 무공을 전수할 마음이 없으
니. 그러나 나에게 한 가지 매우 재미있는 암기가 있는데 그것을 너에
게 주마. 그렇지 않으면 너는 속으로 억울하고 헛되게 큰절을 했다고
생각하며 나보고 사부 누님이라고 부른 것을 후회할 것이 아니겠느냐?]
[사부 누님, 그것은 절대 헛되이 부른 것이 아닙니다. 사부 누님이 설
사 저에게 무공을 전수하지 않고 저에게 물건을 주지 않는다 해도 그대
처럼 어여쁜 소저에게 몇 번 더 사부 누님이라 부르는 것은 즐겁기 이
를 데 없는 일이지요.]
하척수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잔나비처럼 기름 바른 입술과 혓바닥으로 너의 할머니뻘되는 사람에게
버릇없이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구나.]
그녀는 본래 묘족(苗族) 출신이라 한나라 사람들의 예법과 규칙에 대해
서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위소보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자 예의가 없고 나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흐뭇하게 생각
하였다. 그녀는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잔나비야, 다시 한번 불러 보렴.]
위소보는 웃었다.
[누님, 훌륭한 누님!]
[아이쿠! 가면 갈수록 더 망나니가 되는구나.]
그녀는 자신의 왼손을 뻗쳐 그의 뒷덜미를 잡더니 그를 들어올렸다. 그
순간 지지직, 하는 소리가 나면서 탁자 위의 세 촛불이 꺼졌고 맞은편
의 판자벽에 파파팍,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위소보는 놀람과 기쁨에 섞여 물었다.
[이게 무슨 암기지요?]
[네 스스로 보려무나.]
그리고는 그를 땅에 내려놓았다. 위소보는 차탁자 위에서 촛대를 들고
판자벽에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수십 대의 번
득이는 강침(鋼針)이 판자벽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탄복하여 말했다.
[누님, 꼼짝도 하지 않고 어떻게 이 많은 강철침을 발사할 수 있었지
요? 이와 같은 암기를 천하에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척수는 웃었다.
[과거 나는 함사사영(含沙射影)이라는 암기를 사용하여 나의 사부를 쏘
았으나 그분은 피했으며 한 대의 침도 그분에게는 적중하지 않았단다.
하지만 우리 사부님 이외에 이 독침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몇 사
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사부님은 그대로 하여금 시험삼아 그를 쏘게 하였기 때문에 미리
방비하고 있었겠지요. 만약에 갑자기 쏘았더라면 그 어르신네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이와 같이 종적도 없고 그림자도 없이 날아오는
암기를 어떻게 피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 나와 사부님은 적대지간에 놓여 있어 한창 격전을 벌이고 있던
판이었다. 사부님은 나에게 시험삼아 쏘라고 하지 않았으며 사전에 전
혀 모르고 있었단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겠군요, 그렇지요. 그때 사부님은 온 신경을 곤두세워 그대를 경
계하고 있었으니 피할 수 있었겠지요. 만약 그때 그대가 동쪽을 가리키
고 고개를 돌려서 '어, 누가 오는군?' 하고 소리쳤다면 그대 사부 역시
동쪽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때 그대가 독침을 발사했다면 반드시 적
중되고 말았을걸요?]
하척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강철침에는 극독을 묻혔
기 때문에 우리 사부님이 만약 피하시지 못했더라면 죽었을 것이다. 사
실 그때 나는 그분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단다.]
[그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을 사랑하신 거지요?]
하척수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런 일은 없었으니 터무니없는 소리는 지껄이지도 말아라. 우리 사모
님께서 들으신다면 너의 혓바닥을 반 토막으로 잘라 낼 것이다.]
위소보는 하척수가 몰래 사랑하게 된 것은 바로 여자로서 남장을 한 사
부님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짐작조차 못했다. 젊었을 때의 옛일이 그림
같이 머리에 떠오르자 이미 수십 년이 지난 일이었지만 하척수의 얼굴
이 더욱 붉어졌다.
그녀는 두 개의 사슴가죽으로 만든 골무를 왼손 엄지손가락과 식지에
끼우고는 판자벽에 박힌 강철침을 한대 한대 뽑았다. 곧이어 손을 뻗쳐
옷자락 안에서 하나의 무쇠로 만들어진 띠를 풀었다. 그 띠 위에는 하
나의 강철 상자가 장치되어 있었는데 뚜껑에는 무수한 구멍이 송송 나
있었다. 위소보는 확연히 깨달은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누님, 이 암기는 정말 교묘하군요. 원래 옷자락 안에 장치해 놓았다가
무쇠로 만들어진 띠의 장치를 들추기만 하면 쇠상자에서 강철침이 쏘아
져 나가게 되는군요.]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암기를 선물하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십중팔
구 이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어 흐뭇했다. 하척수는 웃었다.
[아무리 무서운 암기라 하더라도 쏠 때는 어쨌든 손의 힘을 빌어 겨냥
을 해야 한다. 너의 무공은 너무나 형편없기 때문에 이 함사사영 이외
의 다른 암기는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어서 그녀는 강철침을 한대 한대 상자 안에 도로 담았으며 그에게 장
포를 걷어올리라고 하고는 무쇠로 만들어진 띠를 그의 몸에 감아 주었
다. 강철 상자가 가슴팍 앞에 이르도록 하고는 장치를 움직이는 법과
다시 바늘에 묻어 있는 독약과 해약을 만드는 처방을 알려주고 말했다.
[상자 안의 강철침은 모두 다섯 번 사용하게 되어 있는데 사용한 후에
반드시 다시 닫아야 한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함부로 무고한 사람을 해
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여러 번 당부하셨다. 이 암기는 본래 극독을
묻힌 것이지만 지금 묻힌 독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독약이 아니라,
사람에게 적중되면 간지럽고 마비되는 것을 금할 수 없게 하여 전신의
기운이 쏙 빠지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나 너는 함부로 이것을 사용하지
않도록 해라.]
위소보는 연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다시 엎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하척수는 말했다.
[너는 이들 세 분을 부축하여 제대로 앉히도록 하여라.]
위소보는 먼저 귀신수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히고 다시 귀종을 부축하여
앉히려고 하다가 그의 허리에 불룩하니 하나의 호로 같은 것이 달려 있
는 것을 건드렸다. 그의 장포를 들추고 보니 가죽 주머니였다.
第 112章. 살해된 오륙기
위소보는 호기심이 일어 가죽 주머니에 채워진 줄을 풀고 살펴보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아이쿠! 아이쿠! 사람의 머리다!....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는
군.]
하척수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고 말했다.
[그가 어떤 중요한 인물을 죽였는지 모르겠구나. 일부러 수급을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을 보면 참 희한하다. 꺼내 보도록 해라.]
위소보는 말했다.
[죽은 사람아, 죽은 사람아! 내 너를 꺼내 주겠으니 너는 나를 물지 않
도록 해라.]
그는 손을 주머니 안으로 천천히 집어넣어 그 수급의 땋은 머리를 잡고
들어올려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촛불 아래에서 보니 그 수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레나룻을 밤송이처럼 뻗치고 있었다. 위소보는 크게
한 소리 부르짖고는 뒤로 세 걸음 물러서서 외쳤다.
[바로....바로 오형이시다....]
하척수는 약간 놀라 물었다.
[그대는 그를 아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그는....그는 우리 천지회의 형제 오륙기 형입니다!]
그는 슬픔을 참을 수 없어 대성통곡했다. 천지회의 군웅들은 그가 미친
듯이 울부짖는 것을 듣고 대청으로 달려왔다. 오륙기의 수급을 발견하
고는 모두 다 놀람과 의아함을 금치 못하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각기 손을 칼자루로 가져가며 하척수를 응시했다. 그녀가 오륙
기를 죽인 줄로 안 모양이었다. 곧이어 쌍아가 달려나왔다. 위소보는
그녀의 손을 잡고 수급을 가리키며 말했다.
[쌍....쌍아, 너의 의남매인 오형이다. 그는....그는 이 악적에게 해침
을 당해 죽었구나!]
그는 귀종의 앞으로 다가가서 그의 몸을 매섭게 몇 번 걷어차고 서천천
등에게 말했다.
[오형의 수급을 이 악적이 몸에 달고 있었소.]
사람들은 다시 그 수급을 바라보았다. 핏자국은 이미 말라 있었고 목이
있는 곳은 석회를 뿌려 놓았다. 약물과 석회를 뿌려 썩지 않도록 한 모
양이었다. 쌍아는 수급을 어루만지며 소리내어 통곡했다. 이력세는 말
했다.
[냉수를 퍼부어 이 악적을 깨워 자세한 사실을 물어 본 후 그를 죽여
오형의 원한을 갚도록 합시다.]
군웅들은 모두 그러자고 했다. 하척수는 말했다.
[이 사람은 나의 사제인데 그대들은 그의 머리털 하나라도 다치게 해서
는 안되오]
그녀는 손을 뻗쳐 무쇠로 만들어진 오른손의 갈고리를 드러내더니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초를 향해 몇 번 휘두르고 표연히 안으로 들어갔다. 현
정 도인은 노하여 부르짖었다.
[설사 그대의 사부라 하더라도 그를 짓이겨 젓을 담겠다!]
갑자기 풍제중이 어, 하더니 왼손의 두 손가락으로 초를 토막내 한 조
각 집어들었다. 촛대의 초는 본래 꽤 남았는데 이때는 이미 일곱 토막
으로 나 있었다. 몇 토막은 한 치도 되지 않는데 정교하게 잘려 쓰러지
지 않고 있었다. 이 한 수의 무공은 정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천지회의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현정
도인은 휙, 하니 차고 있던 칼을 뽑으며 말했다.
[내가 이 녀석을 죽여 오형의 원수를 갚겠소. 그리고 그 여인으로 하여
금 나를 죽이도록 하시오.]
이력세는 말했다.
[잠깐, 먼저 물어 본 후 이 세 사람을 함께 죽이도록 합시다.]
위소보는 말했다.
[맞았소! 이분 할머니 누님은 그녀의 사백부를 두려워하는 것 같으니
죽이려면 그녀의 사백부와 사백부의 안사람까지 모두 죽여야만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오. 쌍아, 그대는 가서 한 대야의 냉수를 떠오시오. 그
러나 주방의 약을 섞은 그 물은 아니 되오.]
쌍아는 안으로 들어가 한 대야의 물을 들고 나왔다. 서천천은 이를 받
아서 귀종의 머리 위에 천천히 부었다. 그러자 그가 재채기를 하며 천
천히 눈을 떴다. 몸을 움직이는 순간 그는 자신의 손발이 묶여 있는 것
과 허리의 혈도마저 짚혀 있는 것을 알고는 분노했다.
[누구냐? 누가 나에게 장난을 친 거야?]
현정 도인은 칼날을 그의 얼굴에 가볍게 갖다대며 욕을 했다.
[너의 조상께서 너에게 장난치는 것이다.]
그리고 오륙기의 수급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사람은 네가 죽인 것이냐?]
귀종은 말했다.
[그렇다. 내가 죽인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은 어디에 있소?]
그는 고개를 돌려 부모도 묶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매우 놀라 하마터
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는 한평생 부모님을 따르며 매사 뜻대로
해와 조금도 좌절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언제 또 이와 같은 일을 겪었
겠는가? 그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대....그대들은 어쩌자는 것이오? 그대들은 나를 이기지 못하는데,
어째서....어째서 내가 묶였지?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왜 묶
었소?]
서천천은 손을 들어 철썩, 따귀를 한 대 갈기고 호통을 쳤다.
[이 사람을 네가 어떻게 죽였지? 빨리 말해라. 한마디라도 거짓말을 한
다면 즉시 너의 눈을 찔러 멀게 하겠다.]
그는 칼 끝을 뻗쳐 그의 오른쪽 눈을 겨누었다. 귀종은 혼이 나갈 정도
로 놀라서 끊임없이 기침을 하며 말했다.
[내....내 말하겠소. 그대는 내 눈을 찌르지 마시오. 눈이 멀게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소....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쿨룩!....쿨
룩!....평서왕은, 오랑캐 황제는 크게 나쁜 사람으로서 억지로....억지
로 우리의 대명나라 강산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소. 그래서 나에게 부
탁해서....오랑캐 황제를 죽이라고 했소....]
군호들은 서로의 얼굴들을 쳐다보며 하나같이 생각했다.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위소보는 크게 못마땅해서 욕을 했다.
[이 빌어먹을! 오삼계가, 제기랄! 제 놈은 좋은 사람이었던가?]
귀종이 말했다.
[평서왕은 너의 백부이니 그....그가....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너 역시
좋은 사람이 아니다.]
위소보는 그를 힘껏 걷어차며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오삼계는 매국노야! 어째서 나의 백부가 된단 말이
냐? 오삼계는 너의 백부다!]
귀종은 부르짖었다.
[네가 한 말이다. 아이쿠! 너는 네가 한 말에 대해서 억지를 쓰는구나.
나는 그만두겠다. 나는 그만두겠다!]
이력세가 물었다.
[오삼계는 그대에게 오랑캐 황제를 죽이라고 했다는데 어찌하여 그를
죽였지?]
귀종은 말했다.
[저 사람은 광동성의 대관인데, 평서왕은 그가 대매국노로서 오랑캐 황
제를 보호하고 있다고 했소. 평서왕이 군사를 일으켜 광동을 치려면 반
드시 그를 죽여야 된다고 했소. 평서왕은 나에게 많은 보약을 주었고,
기침을 멎게 하는 약도 먹여 주었으며, 또 하얀 호랑이 가죽도 주었단
말이오. 우리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대매국노는 반드시 죽어야 된다고
했소. 쿨룩쿨룩, 그 사람은 무공이 매우 고강하여 나는....나와 어머니
두 사람이 함께 공격해서 겨우 죽일 수 있었소. 그대들은 빨리 나를 놓
아 주시오. 우리들은 북경으로 가서 오랑캐 황제를 죽여야 하오. 그것
은 커다란 공로란 말이오.]
위소보는 고함을 질렀다.
[황제를 죽인다 하더라도 너 같은 폐병쟁이한테까지는 차례가 가지 않
는다. 형들, 빨리 이 세 녀석을 죽이도록 하시오. 할머니 누님은 내가
책임지겠소.]
갑자기 장원 밖에서 수십 명이 일제히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병쟁이야, 빨리 기어나오너라! 너를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 죽여 오
형의 원한을 갚겠다!]
장원의 앞뒤에서 일제히 소리가 들려왔으며 사방의 지붕 위에서도 고함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많은 사람이 장원의 사방을
에워싼 모양이었다. 천지회의 군호들은 나타난 사람들이 오육기를 위해
원수를 갚겠다는 말을 하자 자기 편이라 생각하고 속으로 기뻐했다. 전
노본은 큰소리로 외쳤다.
[명복청반, 모지부천. 바깥의 친구는 어느 파의 친구들이오?]
천지회의 구호는 '천부지모, 반청복명'이었다. 그러나 신분을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먼저 여덟 글자를 꺼꾸로 해서 말했다. 만약 회의
형제라면 그대로 말을 해서 인정할 것이고 만약 외부 사람이라면 상대
방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신분을 누설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장원 밖과 지붕 위에서 십칠팔 명이 한 목소리로 부르짖었
다.
[지진고강(地振高岡), 일파계산천고수(一派溪山千古秀)!]
대청 안의 군호들도 부르짖었다.
[문조대해(門朝大海), 삼하합수만년류(三河合水萬年流)!]
지붕 위에서 누가 물었다.
[어느 당의 형제들이 그곳에 있소?]
전노본은 말했다.
[청목당의 형제가 형제들을 영접하는 바이오. 어느 당의 형제들이 오셨
소?]
대청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걸어들어오며 큰소리로 말했다.
[소보, 네가 여기 있느냐?]
그 사람은 키가 크고 비쩍 마른 편으로 훤칠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천지회의 총타주 진근남이었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앞으로 달
려나가 큰절을 하고 연신 부르짖었다.
[사부님, 사부님.]
진근남은 말했다.
[모두들 안녕하셨소!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러다가 탁자 위에 있는 오륙기의 수급을 바라보고 서둘러 달려오더니
탁자를 집고 대성통곡을 하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대청문 안으로
잇따라 사람들이 들어왔다. 광서성 가후당의 향주 마초흥, 귀주의 적화
당 향주 고지중 등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귀종을 발견하자
다투어 칼을 뽑았다. 그리고 스무 명이나 되는 광동 홍순당의 부하들은
더욱더 증오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귀종은 한꺼번에 여러 사람들이 흉신
악살같이 덤벼들려는 기세를 보자 두어 번 기침을 하더니 그만 기절해
버렸다. 진근남은 몸을 돌리고 물었다.
[소보, 너희들은 어떻게 이 세 명의 악당을 잡았느냐?]
위소보는 이제까지의 경과를 말했다. 그러나 서천천 등이 어떻게 하여
귀종에게 희롱을 당하고 자신이 오지영으로 가장하는 등 추악한 일들은
아예 들먹이지 않고 최후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세 명의 악당들은 모두 무공이 대단합니다. 우리들은 이길 수가 없
었습니다. 다행히 할머니 누님이 계셔서 도와 주셨기 때문에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할머니 누님은 이 늙은이를 자신의 사백부라고
하며 우리가 그를 묶어 오형의 원한을 갚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
다.]
진근남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이 할머니 누님이냐?]
[그녀는 나이가 할머니뻘인데 얼굴 모습은 누님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를 할머니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진근남은 말했다.
[그녀는?]
[그녀는 뒤에 숨어 있으며 그녀의 사백부를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사
부님, 그리고 고형, 마형, 그대들은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지요?]
진근남은 말했다.
[이 악적이 오형을 해친 것을 알고 우리들은 즉시 전갈을 보내 사면팔
방에서 뒤쫓아오게 되었단다.]
청목당의 사람들은 새로 나타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원래 산동,
하남, 호북, 호남, 안휘성의 각 당의 형제들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들
의 대부분은 장원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 고지중과 마초흥은 동시에 말
했다.
[위 형제가 이와 같은 큰 공을 세웠으니 오형의 하늘에 계신 영혼도 그
은덕을 고맙게 여길 것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오 대협은 저에게 그지없이 잘 대해 주었는데 그의 원수를 갚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요.]
이력세는 말했다.
[총타주님께 알립니다. 이 악적은 조금 전에 북경으로 가서 오랑캐 황
제를 죽이겠다고 했으며 또 청나라를 거꾸러뜨리고 명나라를 되찾겠다
는 말을 했는데 그 사정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위소보 말했다.
[무슨 사정이 있겠소? 그는 우리가 그를 죽일까 봐 두려워 그저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여 본 것에 불과하오. 그의 몸에 있는 이 하얀 호랑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포자(袍子)만 하더라도 바로 오삼계가 그에게 준 것
이오. 오삼계의 개 같은 친구들 가운데 좋은 사람이 있겠소? 우리들은
이 세 악적의 배를 갈라 심장을 도려 내고 오형의 원한을 갚아야 될 것
이오.]
진근남은 말했다.
[세 사람을 다 깨워서 잘 물어 보도록 하자.]
쌍아는 다시 가서 한 동이의 냉수를 떠왔으며 귀신수 부부와 귀종에게
물을 쏟아 정신을 차리게끔 했다. 귀이낭(歸二娘)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욕을 퍼부있으며 독을 써서 사람의 정신을 잃게 하는 것은 강호에서 가
장 비열하고 몰염치한 수작이라고 말했다. 귀신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진근남은 말했다.
[그대들의 신수를 보건대 결코 범상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소. 그대들
의 이름은 무엇이라 하오? 우리 오육기 형과는 어떤 원한이 있기에 독
수를 써서 그를 죽였소?]
귀이낭은 화를 내며 말했다.
[너희들같이 몽한향을 쓰고 몽한약을 쓰는 몰염치한 좀도적들도 이 할
미의 성명을 물어 볼 자격이 있느냐?]
고지중이 칼을 들어 위협을 하자 귀이낭은 더욱더 무섭게 욕을 해댔다.
위소보는 말했다.
[사부님, 그들의 성은 귀씨입니다. 자라라고 할 때의 귀씨인 것 같습니
다. 그러니까 두 마리의 늙은 자라와 한 마리의 작은 자라이지요. 제가
먼저 작은 자라를 죽인 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그는 비수를 뽑아 귀종의 목을 겨누었다. 귀이낭은 위소보가 자기의 아
들을 죽이려는 것을 보자 당황해서 즉시 부르짖었다.
[이 꼬마야, 네가 사내라면 이 할미를 죽이도록 해라. 우리 아들의 손
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꼭 이 작은 자라를 죽여 보이겠소.]
그는 칼 끝으로 귀종의 목을 가볍게 눌렀다. 가볍게 갖다대는 정도였으
나 비수는 지극히 예리해서 귀종의 목에서는 즉시 피가 흘러나왔다. 귀
종은 겁에 질려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어머니, 어머니!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내....내 아들은 죽이지 말아라!]
위소보는 말했다.
[우리 사부님께서 한마디 물으실 때 그대는 순순히 대답하시오. 그러면
반 시진 안으로는 그대의 폐병쟁이 아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오.]
[우리 아들에게는 병이 없다. 너야말로 폐병쟁이다.]
귀이낭은 이렇게 말하며 위소봇가 자기 아들을 잠시 동안 죽이지 않는
다고 약속했으므로 약간 마음을 놓았다. 위소보는 일부러 연신 기침을
하면서 귀종의 말투를 흉내내며 말했다.
[엄마야, 나는....나는....콜록, 콜록....곧 죽게 되었다. 엄마야, 빨
리 솔직히 이야기해라....콜록....콜록....나는 폐병에 걸린 것이 아니
고 강도단두병(鋼刀斷頭病)에 걸렸어. 뾰족한 칼날에 목이 잘려지는 병
에 걸렸으며 전신이 토막이 나서 젓을 담그는 병에 걸렸단 말이야! 콜
록, 콜록....]
그는 매우 비슷하게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귀이낭은 그만 모골이 송연해
져서 외쳤다.
[그만둬, 우리 아들의 말을 흉내내지 말아라!]
그러나 위소보는 계속해서 흉내냈다.
[엄마야, 묻는 말에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나는....나는 콜록....콜
록....다시 배가 갈라지는 병이 생길 것이고 창자가 흘러내리는 병도
걸리게 될 거야....]
그는 귀종의 옷을 걷어올리고 비수 끝으로 그의 비쩍 마르고 갈비뼈가
앙상하게 솟아난 가슴팍을 베는 시늉을 했다. 귀이낭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 우리들은 화산파의 사람들이다. 우리 바깥 어른으로 말할 것 같
으면 신권무적(神拳無敵) 귀이협(歸二俠)으로서 과거 중원에서 위세를
떨칠 때 그대들 같은 좀도적은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진근남은 이 사람들이 바로 명성이 쟁쟁했던 신권무적 귀신수 부부라는
것을 알고 그만 존경하는 마음이 크게 일었다. 그리고 오륙기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났는가 하는 사실도 상기했다. 그 당시 그가 피살되는 광경
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홍순당 형제들의 말로는 한 명의 노파와
한 명의 폐병쟁이가 손을 써서 십여 명이나 되는 홍순당 고수들을 쓰러
뜨리고, 다시 두 사람이 오륙기를 협공해서 그를 격살하여 목을 잘랐다
고 했으니 상대방에서 남의 이름을 사칭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었다. 신권무적 귀신수는 명성을 떨친 지 이미 오래되어 근 수십 년간
은 강호에서 떠돌아다닌다는 소문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번 참화에 얽히게 되었는지 여기에는 반드시 중대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즉시 앞으로 나가 귀신수에게 공손히 포권을 하고 절을
하며 말했다.
[화산파의 신권무적 귀이협 부부셨군요. 진근남이 많은 실례를 범하였
습니다.]
그는 손을 뻗쳐 귀신수의 몸을 묶어 놓은 밧줄을 자르고 곧이어 등과
허리께를 몇 번 만져 혈도를 풀어 준 후 다시 몸을 돌려 귀이낭과 귀종
의 몸에 감겨 있는 밧줄 역시 잘라 버렸다. 위소보는 다급해져서 다시
말했다.
[사부님, 이 세 사람은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놓아 주면 안 됩니다.]
진근남은 빙그레 웃고 말했다.
[귀이낭은 우리들이 몽한약을 썼으니 강호에서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 천지회에서는 몽한약을 쓰지 않았
으며 그와 같은 약을 쓴다 하여도 귀이협은 내공이 심후하여 보통의 몽
한약으로는 어르신의 정신을 잃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천지회에서는 몽한약을 쓰지 않습니
다.]
그는 이 약이 할머니 누님의 것이고 또한 그녀 스스로 바꾼 것이니 천
지회가 저지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귀신수는 왼손으로
처와 아들의 등을 슬쩍 쳐서 두 사람의 혈도를 풀어 주었는데 그 수법
이 진근남보다 훨썬 빨랐다. 귀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무서운 약물이었다.]
그는 손을 뻗쳐 아들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귀이낭은 정신을 가다듬고
남편의 안색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어때요?]
귀신수는 말했다.
[지금 당장에는 별일이 없을 것 같군.]
그는 자기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전에 한 사람과 일 장을 맞바꾸었는
데 그 사람의 무공은 무척 얕은 편이었으나 익힌 내공의 여력은 바로
화산파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쌍아가 어지러운 바위들
이 널려 있는 언덕 위에서 줄달음쳤을 때 그 신법 역시 화산파의 경신
법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사람들 틈에 서 있는 쌍아를 발
견할 수 있었다. 쌍아는 그가 불타는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보
고는 그만 두려움을 느껴 위소보의 등뒤로 돌아가서 몸을 움츠렸다. 귀
신수는 말했다.
[너, 이리 가까이 오너라. 너는 화산파 사람이지?]
쌍아는 말했다.
[가지 않겠어요! 그대는 저의 의오라버니인 오형을 죽였으니 나는 그의
원수를 갚으려는 거예요. 나는....나는 화산파 사람이 아니에요.]
하척수는 과거 장씨네 셋째 젊은 마나님과 쌍아에게 약간의 무공을 전
수했을 뿐이지 결코 그녀들을 정식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
렇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자신의 문호와 파벌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화산
파라는 석 자는 쌍아로서는 오늘 처음 듣는 셈이었다. 귀신수는 나이
어린 소녀를 상대하지 않으려는 듯 갑자기 진기를 단전에서 끌어올리더
니 낭랑히 소리쳤다.
[풍난적의 제자와 사손들은 썩 나서 보아라.]
이 한 마디는 결코 우렁찬 것은 아니었으나 그 순간 기류가 소용돌이치
며 지붕의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는 동문 사형제 가운데 원승지
문하들은 모두 해외에 있고, 대사형 황진(黃眞)은 세상을 뜬 지 오래되
었으며, 화산파의 문호는 황진의 큰제자 풍난적이 이어받고 있기 때문
에 장원 안에 화산파의 제자가 있다면 반드시 풍난적이 직계라고 생각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참 동안 기다렸으나 내당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진근남은 말했다.
[일 년 전, 천하영웅대회를 가졌을 때 피로써 맹약을 한 바 있었으며
한마음 한뜻으로 대매국노 오삼계를 죽이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 당
시는 영사질인 풍난적 선배님이 바로 살귀대회의 주인격이라 할 수 있
었습니다. 어째서 선배님은 오삼계와 손을 맞잡고 폐회의 의사인 오륙
기 형제를 죽이셨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가까운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고
원수들이 좋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음성은 매우 나직했으나 진근남의 말은 상대방을 사정없이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귀이낭은 그를 한번 노려보더니 말했다.
[사람들에게 듣건대 한평생 진근남을 모른다면 영웅이라 일컬어도 헛된
노릇이라고 하더군. 귀하가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부부
는 이미 천하를 주름잡다시피 했소. 그런데 그대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에야 우리들을 영웅이라 칭할 수 있게 되었으니, 흐흐흐, 가소롭
군, 가소로워!]
진근남은 말했다.
[불초가 지니고 있는 재주와 무공은 귀이협 부부께서 한번 웃을 가치조
차 없습니다. 강호의 친구들이 불초를 높이 산 것은 불초가 시비를 명
백히 하고 못된 짓을 하는 도적 같은 사람과는 함부로 사귀지 않는 점
에 있지요.]
귀이낭은 노하여 말했다.
[그대는 우리가 못된 짓을 하고 도적 같은 사람과 사귄다는 말이오?]
진근남은 말했다.
[오삼계는 대매국노입니다.]
귀이낭은 말했다.
[오륙기는 호랑이의 앞잡이가 되어 오랑캐의 대관 노릇을 하고 있으며
우리 한나라 백성들을 업신여기고 핍박하고 있었소. 그대들은 어째서
말끝마다 그를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이것이야말로 못된 짓을 마구
하는 도적과 사귀는 것이 아니겠소?]
마초홍이 큰소리로 말했다.
[오형으로 말하면 몸은 조정의 군영에 있지만 마음만은 한나라에 있었
소이다. 그는 천지회의 홍순당 홍기 향주였으며 광동성의 병권을 쥐고
있었는데, 일단 기회가 오면 군사를 일으켜 오랑캐를 치게 되어 있었소
이다. 홍순당의 여러 형제들, 그대들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죠?]
홍순당의 속하 이십여 명이 일제히 대답했다.
[예! 바로 그렇습니다!]
마초흥은 말했다.
[그대들은 가슴을 펼쳐 이들 두 분의 대영웅에게 보여 주시구려.]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두 손으로 옷자락을 찢듯 양옆으로 잡아당겨 가
슴팍을 드러내 보였다. 가슴팍에는 '천부지모, 반청복명'이란 여덟 글
자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살갗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간
상태였다. 귀종은 줄곧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십여 명의 가
슴팍에 여덟 글자가 문신되어 있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천지회의 군웅들은 모두 노기 띤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근남은 귀
신수에게 말했다.
[자제분께서는 재미있다고 느끼시는 모양인데 귀이협 부부께서는 어떻
게 생각하십니까?]
귀신수는 후회하는 듯 크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귀이낭에게 말했다.
[사람을 잘못 죽였군. 오삼계란 간악한 적의 속임수에 넘어갔어.]
귀이낭은 이렇게 말하며 왼손을 뻗더니 마초흥의 허리에서 칼을 뽑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가 자신의 목을 찌르려 했다. 진근남은 부르짖었다.
[안....]
재빨리 오른손을 뻗쳐 그녀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귀이낭은 오른손으
로 후려쳤다. 진근남은 왼손을 들어 맞받았는데 두 사람의 몸이 흔들렸
다. 진근남은 왼손의 두 손가락을 뻗쳐 칼 등을 휘어잡았다. 귀이낭은
다시 오른손으로 진근남의 가슴팍을 노리고 일 장을 후려쳐왔다. 진근
남이 만약 이를 받는다면 칼을 빼앗을 수 없게 되어 그녀는 곧 자결을
할 판이었다. 조금 전 그녀와 일 장을 맞바꾸었을 때, 그녀는 이미 늙
어 내력에 있어서 자기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손 씀씀이는 번
개같이 빠르고 권각법에 있어서의 재간은 절묘하기 이를 데 없어 자기
가 만약 한 걸음이라도 물러선다면 맨손으로 다시는 그녀의 손에 들린
무기를 빼앗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즉시 가슴팍을 내밀어 펑 하니 그녀
의 일 장을 억지로 맞받았다.
귀이낭은 어리둥절해지게 되었고, 진근남은 왼손의 두 손가락으로 그녀
의 칼을 빼앗아서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섰으나 왁 하니 한모금의 선혈을
토해 냈다.
귀이낭이 칼을 비껴들고 자결을 하려고 했을 때 귀신수가 만약 손을 썼
다면 물론 저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 역시 자기가 오육기를 잘못 죽였다
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움과 후회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결하여 사과할
뜻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처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는데, 진근남이 자신
의 몸을 돌보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귀이낭의 손에 들린 강철
칼을 빼앗는 것을 보고는 더욱더 부끄러움과 고마움이 착잡하게 얽혔
다. 그러나 그는 별로 언변이 없는 사람인지라 그저 다음같이 말할 뿐
이었다.
[진근남이 당금 세상의 호걸이라는 말은 과연 명불허전이구려.]
진근남은 탁자를 짚고 기식을 조절한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 수가 있었
다.
[모르고 한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오형을 해쳐 죽인 원흉은 바로
오....오삼....]
그 말을 하다가 그는 다시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귀이낭은 나이
가 많았지만 옛날의 공력 대부분을 아직도 지니고 있는 상태였다. 진근
남은 그녀의 손에 들린 무기를 빼앗기 위해 운기행공하여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일 장이 결코 가벼울 수가 없었던 것이
다. 귀이낭은 말했다.
[진 총타주, 내가 만약 자결을 한다면 그대의 성의를 저버리게 되는 것
이오. 우리 부부는 반드시 오랑캐 황제를 죽이고 다시 오삼계라는 간악
한 도적을 죽이고 말겠소.]
그리고 땅바닥에 엎드려서 오륙기의 수급을 향해 큰절을 세 번 올렸다.
진근남은 말했다.
[오륙기 형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은밀을 기해야 했기 때문에 강호의
많은 영웅들이 그의 위인됨을 모르고 그를 마구 욕했지요. 어지신 두
분께서 이번에 손을 쓴 의도는 원래 매국노를 주살하자는 것이었지만
애석하게도....애석하게도....]
그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귀신수 부부는 마음속으로 똑같은 생
각을 하고 있었으며 강희와 오삼계를 찔러 죽인 후에 자결하여 오륙기
에게 사과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바깥으로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
다고 생각하고는 동시에 진근남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진 총타주, 이만 작별을 할까 하오.]
진근남은 물었다.
[두 분께서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불초의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귀씨 부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막 문 밖으로 나가려다 그 말을 듣고 발
걸음을 멈추었다. 진근남은 말했다.
[오삼계가 운남에서 군사를 일으켜 지금 천하가 크게 소란해질 판인데,
이것은 바로 우리 한나라 산천을 되찾을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
다. 많은 영웅들이 북경에 모여 대책을 강구하고자 합니다. 모두들 뜻
이 같고 길이 같으니 두 분 선배님도 함께 북경으로 가셔서 상의를 하
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귀신수는 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얼
굴을 맞댈 수 없는 심정이라 고개를 흔들고 다시 바깥 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위소보는 그들 두 사람이 황제를 죽이려 간다는 말을 듣
고 속으로 이 세 사람의 무공이 지극히 고강한데 소황제가 미처 방비하
지 못한 사이에 그들에게 해침을 당해 죽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부르짖었다.
[이는 천하의 큰일인데 그대들의 공자는 일하는 것이 엉망진창이외다.
이번에도 일을 망치게 만든다면 그대들 세 사람이 설사 한꺼번에 자살
을 한다 하더라도 그야말로....취기만년(臭氣萬年)이될 것이외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취만년(遺臭萬年)이라는 숙어를 들은 적이 있
었으나 제대로 외지 못하고 취기만년이란 말로 대신했던 것이다. 엉터
리로 말했지만 귀씨 부부는 그 뜻을 알아차렸다. 귀신수는 자기의 무공
이 고강하나 일을 보는 데는 남들처럼 똑똑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삼계의 말만 듣고서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지르
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소보의 그와 같은 말을 듣자 그만 가슴속이 서
늘해져서 속으로 생각했다.
(황제를 찔러 죽인다는 것은 확실히 나라의 큰일이다.)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지금의 황제는 나이가 어리고 일을 제대로 몰라 오삼계로 하여금 반란
을 일으키게 하는 등 어리숭한 점이 있소. 그대들이 만약 그를 죽여 나
이 지긋한 오랑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우리 한나라의 강산은
바로 그대들 손에서 없어지는 셈이외다.]
귀신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진근남은 말했다.
[두 분 선배님, 이 아이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말하는 데 위아래가 없
으니 위엄을 거슬린 점 너무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사과의 뜻을 표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걱정하는 바는 긴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
집니다. 그와 같이 큰일은 우리들이 깊이 생각하여 방법을 정한 이후에
움직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귀신수는 속으로 한 번 잘못했으면 그만이지 두 번 잘못할 수는 없으
며, 일시적인 수치와 분노 때문에 만대에 걸쳐 죄인이 될 필요는 없다
고 생각했다.
[좋소! 진 총타주의 분부를 따르겠소.]
진근남은 말했다.
[분부란 말씀은 당치도 않습니다. 내일 오전에 모두 북경으로 함께 가
셔서 저녁 무렵에 이 애의 거처에서 모여 함께 대사를 논의하고자 합니
다. 두 분의 의향은 어떠신지요?]
귀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근남은 위소보에게 물었다.
[너는 거처를 옮겼느냐?]
[제자는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진근남은 말했다.
[불초는 내일 밤 두 분 선배님이 북경 동성 동모아 호동의 이애 자작부
에 삼가 왕림하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사부님, 화내지 마십시오. 지금은 백작부라고 부른답니다.]
진근남은 말했다.
[허! 또 벼슬이 올랐군.]
귀이낭은 눈을 부릅뜨더니 위소보를 바라보았다.
[그대 역시 오삼계의 조카로서 역시 몸은 조정에 있으나 마음은 한나라
에 있으며, 대의로써 가까운 사람을 없애고자 하는가?]
위소보는 웃었다.
[나는 오삼계의 조카가 아닙니다. 오삼계는 나의 증손자지요.]
진근남은 위소보를 크게 꾸짖었다.
[선배님 앞에서 무례한 행동을 하면 못 쓴다. 빨리 절을 하고 사죄 하
도록 해라.]
위소보는 말했다.
[예.]
그는 무릎을 꿇는 시늉을 했으나 행동은 느릿느릿하게 해서 시간을 지
체했다. 귀신수는 손을 쳐들었다. 처와 시종들을 거느리고 곧장 문 밖
으로 나섰다. 바깥에는 잘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차라
리 굶으며 노숙을 하면 했지 천지회의 군호들과 마주보고 있을 염치가
없었던 것이다. 귀종은 어릴 적부터 짝끙이 없는 형편이었는데, 위소보
가 영리하고 나이가 어려 무척 놀기 좋다고 생각되자 위소보에게 손짓
하며 말했다.
[꼬마야, 너는 날 따라와라. 나와 같이 놀자.]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는 나의 친구를 죽였으니 그대와는 놀지 않겠소.]
별안간 획, 하는 소리가 나면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귀종
이 달려들어 냉큼 위소보를 잡고 문 밖으로 들고 간 것이다. 이 한 수
의 솜씨는 지극히 빨라, 조금 전에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고 있었고 거
리도 상당히 멀어서 진근남은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천지회의
군웅들 가운데 한 사람도 때늦지 않게 저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귀
종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우리 다시 숨바꼭질을 하자. 그리고 재미있게 놀자꾸나.]
귀신수는 안색을 굳히며 호통을 내질렀다.
[얘야, 내려 놓아라.]
귀종은 감히 부친의 말을 거슬릴 수가 없어 위소보를 내려놓았으나 입
술을 삐죽거리며 울먹울먹했다. 귀이낭은 위로했다.
[얘야, 우리는 두 사람의 서동을 사서 너와 함께 놀도록 해주겠다.]
귀종은 말했다.
[서동은 놀기가 좋지 않아요. 저 꼬마가 놀기 좋아요. 우리 저 꼬마를
사도록 해요.]
귀신수는 그의 아들이 못난 꼴을 보이자 아들의 손을 잡고 재빨른 걸음
으로 문을 나섰다. 군웅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모두들 오육기
가 일세의 영웅인데 저토록 얼간이 같은 자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이 너
무나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사부님, 제가 가서 할머님 누님을 나오시게 해서 여러분들과 인사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쌍아와 함께 후당으로 갔다. 그러나 하척수는 이미 떠나고 없었
다. 셋째 젊은 마님은 여자의 몸으로 군웅들과 만나 보기가 거북하다고
하며 그저 하녀들에게 술과 밥을 마련해서 손님들을 환대하라고 분부를
내렸다.
第113章. 황제를 암살하려는 귀신수
이튿날 위소보는 장원의 주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진근남 등과헤어져 북
경으로 갔다. 진근남은 말했다.
[소보, 귀이협 부부는 황제를 찔러 죽이려 하는데 우리와 상의해서 다
시 결정하기로 응낙했다. 너는 북경으로 돌아간 후 황제에게 알려 그가
방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위소보는 그렇지 않아도 그러한 뜻이 있었는데 사부에게 간파당하자 재
빨리 말했다.
[그야 물론이죠. 오랑캐들이 우리 한나라의 강산을 점거하고 있고 제가
비록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는 있지만, 이 모든 게 사부님의 명령을 받
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어찌 그를 위하겠습니까?]
[그렇다. 네가 만약 솔직하지 못하게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한 노릇을
한다면 나는 너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위소보는 쌍아와 서천천 등을 데리고 장용과 조양동 등과 함께 모동주
를 압송하여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는 북경으로 돌아가게 되면 즉시 달
려가 강희를 만나려고 했다.
(소황제는 나의 절친한 친구인데 어찌 그가 세 마리 자라의 손에 죽도
록 내버려둘 수가 있겠는가? 나는 궁으로 들어가 많은 시위들을 내세워
경계하고 지키도록 해야겠다. 그런데 나는 황제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이미 사부와 했다. 대장부라면 신의를 지켜야 하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 마리 자라가 성공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가 막 문을 나서려는데 진근남이 이미 고지중과 마초홍 등을 데리고
들이닥쳤다. 위소보는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당신네들은 이토록 빨리 오시는 거요?)
그러나 그는 억지로 환한 얼굴을 하고 잔치를 벌여서 접대를 했다. 얼
마 후 천지회의 군웅들이 차례로 도착하였다. 곧이어 목검성이 철배창
룡 유대흥, 요두사자 오립신, 성수거사 소강 일행을 데리고 왔다. 목왕
부의 사람들은 이미 북경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일제히 모임에 참석하
러 온 것이었다.
사람들이 술과 밥을 먹고서도 다시 한참 동안 기다렸을 때 귀씨 집안의
세 사람이 왔다. 위소보는 다시 분부하여 따로 상을 차리도록 했으나
귀이낭이 먹고 왔다고 말했다. 귀종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저택이
매우 화려한 것을 보고 말했다.
[꼬마야, 너의 집 모양은 평서왕의 왕궁과 별로 차이가 없구나. 너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오삼계는 정말 너의 백부였구나.]
[맞아, 오삼계는 바로 나의 아들놈이다. 불효막심한 자식이지.]
위소보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마디하고 싶은데
말을 하면 사부님께서 화를 내실 것 같아 말투를 바꾸었다.
[세 분께서 이미 식사를 하셨다면 모두 동쪽 객석으로 가셔서 차를 드
시도록 하시구려.]
사람들은 동쪽 객청으로 나갔다. 곧이어 차와 간식이 나왔고 위소보는
하인과 하녀들을 모조리 내보냈다. 진근남은 다시 십여 명의 무리들을
내보내 객청 주위와 지붕 위에서 지키도록 한 이후에야 문을 닫고 빗장
을 걸어 잠그고 큰일을 논하기에 이르렀다. 진근남은 먼저 귀씨 부부와
목왕부의 사람들을 인사시켰으며 오륙기의 일은 들먹이지 않았다. 귀씨
부부는 이미 은퇴한 지 오래되있지만 유대홍, 오립신 등은 그들을 우러
러보았던 터라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 귀이낭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
다.
[오삼계가 군사를 일으켜 호남과 사천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게 되었는데
군사의 기세가 무척 날카로워 파죽지세라 하오. 오삼계는 과거 오랑캐
에게 투항을 하여 대명나라의 천하를 오랑캐에게 넘겨준 바 있어 아주
커다란 죄를 지었다고 하겠으나 결국은 그 역시 한나라 사람이외다. 우
리 귀 둘째 나리의 의견을 말씀드리지요. 우리는 황궁으로 들어가 오랑
캐 황제를 죽여 오랑캐들로 하여금 대가리가 없어진 뱀으로 만들어 난
장판을 만들려는 것이오. 여러분들의 고견은 어떠하시오?]
목검성이 말했다.
[오랑캐 황제는 물론 죽여 마땅합니다만 그렇게 되면 오삼계란 간악한
도적에게 협조를 하믄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귀이낭은 말했다.
[오삼계가 목왕야를 죽였으니 목공자는 물론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겠
지요. 그러나 만주인과 한인을 분간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오. 우리는
먼저 오랑캐들을 죽인 이후에 오삼계는 천천히 처치해도 늦지 않을 것
이외다.]
유대홍이 말했다.
[오삼계가 만약 군사를 일으켜서 승리한다면 그 자신이 바로 황제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그를 다시 쳐부수기란 쉽지 않은 노릇입니
다. 이 후배의 견해는 우리가 먼저 오랑캐와 오삼계가 서로 죽고 죽이
도록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부지리를 얻자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후배는 지금 오랑캐 황제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
합니다.]
그는 허연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나 귀씨 부부가 이미 명성을 떨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후배라 칭하였던 것이었다. 목왕부의 사람들
은 오삼계와 그야말로 바다처럼 깊은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오
삼계가 민저 망하는 꼴을 보아야만 통쾌하게 여길 정도였다. 귀이낭은
말했다.
[오삼계가 내걸고 있는 것은 명나라를 일으키고 오랑캐를 토벌한다는
깃발이며 주삼 태자를 보좌하여 등극시키겠다는 뜻이외다. 여기에 오삼
계가 군사를 일으킨 격문(檄文)이 있으니 모두들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품에서 커다란 종이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진근남은 즉시 이
를 읽어내려갔다.
[원래 산해관을 지키던 총병이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성지를 받들어
천하의 수륙군사를 거느린 대원수이며, 명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오랑캐
를 토벌하겠다는 대장군 오(吳)는 천하 문무관들과 백성들에게 격문을
돌려 알리노라. 본진(本鎭)은 대대로 대명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며 산해
관을 지키고 있었다....]
진근남은 몇 마디 읽고 나서 다시 그것을 해석했다. 그리고 첫번째의
한 부분을 설명한 이후 다시 읽어갔다. 아래는 이자성이 어떻게 북경을
깨뜨렸고 명나라의 숭정 황제가 어떻게 돌아가시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그는 군부(君父)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 부득이 청나라에게 군사를 빌어
도적을 쳐부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
다.
[다행히 커다란 역적을 토벌한 우리는 대통을 이을 황제를 세웠다. 본
인은 만주 오랑캐를 이 땅에서 몰아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교활하기 이
를 데 없는 오랑캐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맹약을 저버려 우리의 안이
허술한 틈을 타서 연경(燕京)을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선대 명나라의
천하를 가로챘으며 우리 중국의 제도를 바꾸어 놓았다. 나중에서야 본
인은 호랑이를 물리치려고 이리를 끌어들인 잘못과 장작을 안고 불을
끄려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후에 만주 사람들에게 군사를 빌린 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애석하게도 때가 늦고 말았지요.]
귀이낭의 말에 유대홍은 싸늘히 코웃음을 쳤다.
[이 간악한 도적은 그럴듯하게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모두 거짓이외
다.]
귀이낭은 말했다.
[진 총타주, 계속해서 읽어내려가도록 하시오.]
[예!]
그는 계속해서 읽었다.
[본인은 그야말로 양심에 찔려 피를 토할 지경이며 후희가 막급이었소.
그리하여 북으로 창을 되돌려 잃었던 땅을 되찾고 오랑캐들을 소탕하려
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선황의 세 번째 태자를 만나게 되었소이다. 태자
는 겨우 세 살 난 아이였는데 허벅지에다 문신을 남겨서는 어떤 사람에
게 맡겨져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몸으로서 종묘 사직이 이 사람에게 걸
려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소. 그리하여 잠시 은인자중(隱忍自重)하게
되었고 때를 기다리면서 장수를 뽑고 군사를 연마하여 은밀히 나라를
되찾고자 애써 온 것이 벌써 삼십 년이나 되었소.]
유대홍은 거기까지 듣더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개방귀 같은 소리다! 개방귀 같은 소리야! 이 이리의 심장에 개의 간
을 지닌, 천지에서 용납받지 못할 간악한 도적이 만약에 정말 반푼어치
라도 명나라를 되찾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째서 태자를 죽였더란 말
이요? 이 일은 천하가 모두 알고 있는 일인데 어찌 억지를 쓴단 말이
요?]
군웅들은 유대홍이 수염과 눈마저 곤두세울 정도로 화를 내는 것을 보
고 하나같이 그의 충성심과 의지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삼계가 십이 년 전에 곤명의 저자거리에서 영력 황제 부자를 교살한
사실은 아무리 교활한 변명을 하더라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
다.
[유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오삼계는 결코 충신의사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랑캐황제를 찔러
죽이고자 하는 것은 청나라를 쳐부수고 무너뜨려 명나라를 되찾겠다는
것이지 결코 오삼계를 도와 황제가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외다.]
귀이낭의 말에 이어 진근남은 말했다.
[내가 이 격문을 다 읽고 난 후에 차근차근 의논하도록 합시다.]
그는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이렇게 되어 오랑캐의 우두머리가 무도하게 날뛰고, 간악하고 사악한
자들이 날뛰게 되었으머, 도의를 지키자는 선비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
다시피 하였소. 그리하여 소인배들이 높은 벼슬에 올라....]
여기까지 읽고 위소보를 향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소보, 이 한마디는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위소보는 그 격문이 문체로 쓰여진 글이라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삼계가 그를 들먹였다는 말을
듣고 놀람과 기쁨을 느끼며 재빨리 물었다.
[사부님, 그가 뭐라고 했죠? 그 녀석은 저에게 좋은 말을 하지는 않았
을 것입니다.]
[학문과 도덕이 있는 좋은 사람들은 그저 깨알 같이 작은 벼슬을 하고,
전혀 재간이 없는 하찮은 녀석들이 대관이 되었다고 했다. 이것이야말
로 너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느냐?]
[그 자신은요? 그의 벼슬은 나보다 더 큰데 그렇다면 그는 나보다 더
쓸데없는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웃으며 말했다.
[맞았소! 오랑캐 조정의 관직 가운데 평서친왕보다 더 높은 것은 없지
요.]
격문의 최후 한 토막은 다음과.같았다.
[산도 슬퍼하고 물도 근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며 부인들은 울부짖고 자
식들은 흐느끼고 있소. 위로는 하늘이 노하여 혜성이 떨어지고 아래로
는 땅이 원한을 지녀 산이 무너지는 듯한 이 마당에 본인은 하늘을 우
러러보고 땅을 내려다보며 난폭한 자들을 물리쳐서 백성을 구하여 하늘
에 순종하고 사람의 뜻을 따르기로 날을 정하게 됐소. 그리하여 점을
쳐 본 결과 갑인년 정월 원단(元旦:초하루)에 태자를 삼가 모시고 천지
신명께 제사를 올려 대보(大寶)에 오르시도록 했음을 널리 알리는 바이
오. 건원주자(建元周咨).]
진근남은 읽고 난 후 설명했다. 사람들 가운데 진근남과 목검성 두 사
람 이외에는 글공부를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같이 이 격문은 마
치 바른 말만 하고 있는 듯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되어 있
는지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목검성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말
했다.
[진 총타주, 그가 주삼(朱三) 태자를 모시고 대보에 오르게 되었다면
어째서 대명나라의 국호를 되찾지 않고 주(周)라는 국호로 바꾸어야 한
단 말이오? 이 가운데 실로 커다란 빈틈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소.
더군다나 주삼 태자인가 하는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누가 알겠소?
그런 인물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밑도끝도없이 불
쑥 튀어나왔소이다. 십중팔구 오삼계는 철 모르는 어린애를 끌어다가
주삼 태자라고 말하면서 인심을 불러 모으고 있지만 기실은 그를 꼭두
각시처럼 조송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구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다. 귀이낭은 말했다.
[오삼계가 주삼 태자를 괴뢰로 삼았다는 것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일
이지요. 하지만 주삼 태자는 어린아이가 아니요. 선황이 서거하신 지
이미 삼십 년이 지났으니 만약 주삼 태자가 진짜라면 적어도 삼십여 세
는 되었을 것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삼십여 세라도 철모르는 꼬마가 있는 법이지요, 혜헤.]
그는 귀종을 한번 바라보았다. 군웅들 가운데 몇 사람들은 참을 수 없
어 웃음을 터뜨렸다. 귀이낭은 눈썹을 곤두세우며 화를 내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때 위소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자기의 귀여운 아들은 삼십여 세나 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철모르
는 꼬마가 아닌가? 그녀는 그만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들 한참 동안 상의를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강희의 손을 빌어서
오삼계를 먼저 제거한 후에 나중에 나라를 되찾자고 했고, 어떤 사람들
은 오삼계가 간악하기는 하나 그 역시 한나라 사람이니 마땅히 그를 도
와 오랑캐를 쫓아내고 한나라 강산을 되찾은 후에 그를 제거해야 한다
고 했다. 이론이 분분했으며 어떤 결론도 내리기 어려웠다. 걸국 모두
들 진근남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혜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반드시 어떠한 고견이 나오리라고 기대했다.
[우리들은 천하를 중시해야 합니다. 만약 지금 강희를 죽인다면 오삼계
의 세럭은 물론 크게 강해지겠으나 대만의 정왕야께서 바다를 건너 서
쪽으로 정벌을 나서게 될 것이고 군사들을 복건성과 절강성으로 상륙시
켜 곧장 강소성으로 공격해 올 것입니다. 그때 오삼계가 청나라 조정을
무찌르고 황제가 되려고 해도, 정왕야의 병력에다 다시 목왕부와 천지
회, 그리고 각처의 영웅들이 힘을 합쳐서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
다.]
소강은 냉랭히 말했다.
[진 총타주의 그와 같은 말씀은 대만의 정왕야를 위해 하시는 말씀이
아닌지요?]
진근남은 늠름하게 말했다.
[정왕야의 충성은 천하에 알려져 있는데 소형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오?]
소강은 말했다.
[진 총타주가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의협심이 깊다는 것은 모두 다 알고
탄복하고 있소이다. 그러나 정왕야 곁에는 간사하고 비열한 소인이 적
지 않게 있는 것도 사실이오.]
위소보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말도 맞습니다. 예를 들자면 일검무혈 풍석범, 그리고 정왕야의 작
은아들 정극상도 모두 좋은 사람이 아넙니다.]
진근남은 그가 자기의 말에 찬동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약간 의아한 생각
이 들었다.그러나 그의 말도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이낭은 말했다.
[오랑캐를 쫓아내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대사입니다. 누가 황제가 되든
우리가 관계할 필요가 없으나 청나라를 무찌르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져
야 할 일이니 명나라를 되찾고 못 찾는 것은 천천히 상의하도록 합시
다.대명나라의 숭정 황제만 해도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지요.]
진근남과 목왕부의 군웅들은 언제나 주씨의 명나라에 충성하고 있던 터
라 이러한 말을 듣자 모두 안색이 변했다. 목검성은 말했다.
[우리가 주씨 자손을 옹호하여 그 자리를 되찾도록 하지 않는다면 설마
하니 오삼계란 대간적을 옹위해야 한다는 말이요?]
귀종이 갑자기 말했다.
[오삼계는 매우 좋은 사람이지요. 그는 나에게 흰 호랑이 가죽으로 만
든 옷을 선물했소. 그대들은 본 적이 있소?]
그는 저고리를 들추더니 흰 호랑이 가죽을 보여 주며 매우 의기양양한
태도였다. 귀이낭이 그를 나무랐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일 때가 아니다.]
소강은 냉소했다.
[귀 도련님의 눈에는 가죽으로 만든 마고자가 우리 한나라의 강산보다
도 중요한 모양이군요?]
귀이낭은 진노하여 말했다.
[얘야, 그것을 벗어라!]
귀종은 어리둥절해졌다.
[무엇 하게요?]
귀신수는 손을 뻗더니 아들의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았다. 광채가 번쩍이
는 가운데 짝짝짝, 하는 소리가 났다. 귀신수의 손에 들린 장검의 끝이
아들의 몸 뒤, 어껫죽지, 손과 팔 등이 있는 곳에서 오락가락했다.
모두들 깜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으며 귀신수가 아들을 찔
러 죽이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귀종이 입고 있는 마고자가 열일고여덟
조각이 나서 그의 주위로 떨어지면서 그 속에 입고 있던 비단옷이 드러
났다. 귀신수의 이 검법은 정말 정확하기 이를 데 없도록 쓰인 것이다.
마고자만 잘라 놓았을 뿐 안에 입고 있는 비단옷은 조금도 자르거나 구
멍을 내지 않았다. 군웅들은 이를 똑똑히 보고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귀종은 깜짝 놀라 어리둥절하며 기침을 해댔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버지,쿨룩....쿨룩....oㅏ부지....,쿨룩....나,나....]
귀신수는 손을 휘둘러 장검을 검집에 꽂더니 자신이 걸치고 있던 마고
자를 벗어서 아들의 몸에 걸쳐주며 말했다.
[입어라!]
귀이낭은 땅바닥에 떨어진 휜 호랑이 가죽 조각을 집어서는 한창 타오
르고 있는 화로 속에다 집어던졌다. 불길이 크게 솟아오르면서 가죽이
타는 노린내가 퍼지는 가운데 횐 호랑이 가죽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위
소보는 소리쳤다.
[정말 애석하구나, 애석해!]
귀신수는 위소보를 힐끗 노려보더니 말했다.
[가자!]
그는 아들의 손을 잡고 대청문 쪽으로 걸어갔다. 진근남은 말했다.
[귀이협께서 큰일을 하시겠다면 저희들은 삼가 시키시는 대로 거행하겠
습니다.]
귀신수는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 그럴 필요도 없소!]
그는 대청문 쪽으로 향했다. 위소보는 그가 즉시 손을 쓰려는 것임을
알았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황제에게 달려갈 수도 없어서 시간을 늦추
어 그를 저지할 생각에 큰소리로 말했다.
[황궁 안의 집들은 일만 칸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오천 칸은 될 것
입니다. 그대는 오랑캐 황제가 어디에 거처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귀신수는 어리둥절해졌으나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대는 아는가?]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는 사람이 없지요. 오랑캐 황제는 자객이 두려워서 매일 밤 자는 곳
을 바꾼답니다. 어떤 때는 장춘궁에서 자고, 어떤 때는 경양궁에서 자
며, 어떤 때는 함복궁(成福宮)이나 연희궁(延禧宮)에서 자며, 어쩌면
여경헌(麗景軒), 우화각(雨花閣), 육경궁(毓慶宮)에서 잘지도 모르지
요.]
그는 계속해서 일고여덟 채의 궁궐 이름을 들먹였다. 귀신수는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설사 황제의 심복인 태감, 시위들이라 하더라도 그가 오늘 밤에 잘 곳
은 알지 못한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황제를 찾을 수 있겠는가?]
[황제가 조정의 일을 보려고 모습을 드러내면 문무백관들은 모두 다 그
를 볼 수 있지요. 그러나 그가 대궐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 자신은
보고 싶은 사람을 찾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그를 영원히 찾을 수 없
습니다.]
사실 강희는 잠자리를 바꾸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귀신수 부부는 초
야에 묻혀 살던 사람들이라 어찌 황궁 내의 규칙을 알겠는가?
위소보의 터무니없는 말을 듣고 황제가 자객을 엄히 방비하기 때문에
마땅히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크게 망설이는 빛을 띄웠다.
위소보는 귀신수가 얼굴에 난처한 빛을 띄우는 것을 보자 의기양양해져
서 물었다.
[귀 나으리, 황제에게 얼마나 많은 비자(妃子)들이 있는지 아십니까?]
귀신수는 흥, 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말했다.
[이야기꾼들의 말을 들으면 황제에게는 삼궁유원(三宮六院)이 있으며
후궁의 미녀가.... 삼천 명이나 된다고 하더군요. 오랑캐 황제의 마누
라는 그토록 많지 않습니다. 삼천 명은 안 되고 그저 구백 명 정도에
불과하죠. 그는 밤마다 신랑이 되고 오늘은 삼백오십한 번째의 비자에
게서 잠을 자고 내일은 육백삼십네 번째의 비자에게 가서 잠을 자지요.
설사 황제의 비자라 하더라도 황제가 어디에 머무는지 모르고 삼 년이
나 사 년 동안 기다리기만 하는 비자도 있지요.]
진근남은 말했다.
[소보, 너는 궁 안에 있은 지 오래되었으니까 황제를 찾는 방법을 알
것이 아니겠느냐?]
위소보는 말했다.
[대낮에는 찾기 쉽지만 저녁에는 어떻게 해도 찾을 수 없답니다.]
진근남은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대낮에 우리들이 옷차림을 바꾸고 변장을 한 이후 네가
인솔한 가운데 궁 안으로 잠입해서 일을 벌이면 될 것이 아니겠느냐?
이분 전형제와 오 둘째 형은 네가 데리고 궁 안으로 들어가거라.]
그는 전노본과 오립신 두 사람을 가리켰다. 위소보는 말했다.
[전형은 주방에만 가 보았을 뿐이지요. 그리고 오 둘째 형 일행은 황궁
으로 들어갔다가 위사들....위사들에게 발각당했지요. 황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에서 십만팔천 리나 떨어진 곳이었지요. 전형과 오 둘째
형,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노본과 오립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두 사람은 황궁을 들어가 보
았으며 궁 안에서 황제가 있는 곳을 찾는 것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제자에게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진근남은 물었다.
[무슨 방법인가?]
위소보는 말했다.
[제자가 내일 황제를 뵈러 가겠습니다. 그는 반드시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군사를 파견하여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의논하려 할 것입니
다. 그때 제자는 그에게 대포를 시험해 보자는 제의를 하는 겁니다. 그
가 궁문을 나서기만 하면 손을 쓰기가 훨씬 쉬워지고, 찔러 죽이는 것
이 성공하든지 성공하지 않든지 우리들은 발에다 기름칠을 한 것처럼
뺑소니칠 수가 있으니 많은 위험한 일들을 덜게 되지 않겠습니까?]
귀이낭은 냉소했다.
[황제께서 그대와 같은 꼬마의 말을 그토록 잘 듣는단 말인가? 그가 삼
년 동안 궁에서 나서지 않는다고 우리들이 설마 그를 삼년 동안 기다려
야 한단 말인가? 그대가 이런저런 구실을 내세워 변명하는 것은 어찌되
었든 우리를 인솔하여 일을 저지르고 싶지 않아서겠지, 안 그런가?]
목검성은 말했다.
[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찔러 죽이는 일은 형제도 해보았습니다. 말씀드
리기 부끄럽습니다만, 우리 목왕부는 몇 분의 형제들만 죽게 만들었습
니다. 저의 누이동생과 방 사매, 그리고 이분 오 사숙과 두분 사제는
모두 궁 안에서 잡혀서 하마터면 변고를 당할 뻔했으나 다행히 위 향주
가 의를 내세워 구해 주는 바람에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담이 적어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은 정말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귀이낭은 위소보를 바라보며 냉랭히 물었다.
[그대가 그들을 위험에서 구해 낼 수 있었단 말인가?]
오립신은 재빨리 말했다.
[이 위 향주는 나이는 어리지만 인의에 뛰어나며 기지와 총명은 남이
따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형제의 목숨을 바로 그가 구해 주었습니다.]
귀이낭은 말했다.
[목왕부에서 해내지 못한 일을 우리 역시 해내지 못한다는 법은 없어
요.]
유대홍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귀씨 부부는 신권무적이니 물론 우리 조그만 목왕부보다 백 배나 뛰어
날 것입니다. 이제 곧 출발하십시오. 우리들은 이곳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천지회 홍순당의 한 형제가 말했다.
[위 향주, 그대는 역시 함께 궁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하
여 귀씨 집안의 세 분 대인께서 오랑캐들의 위사에게 체포당했을 때 그
대가 나서서 구원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니겠소?]
그는 귀씨 집안의 세 사람이 오륙기를 죽인 데 대해서 분노와 더불어
증오심을 품고 있었던 터라 총타주 앞인데도 불구하고 참지 못하고 비
웃는 말을 한 것이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했다.
(너희들 세 마리의 자라가 궁으로 들어가 잡히게 된다면 나의 목이 잘
리더라도 구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귀씨 집안의 세 분 대협이 어찌 위사들에게 잡히겠소? 황궁의 위사들
은 팔천 명이나 되지만 귀씨댁 도련님께서 기침 몇 번만 하면 팔천여
명이나 되는 위사들이 모조리 충격을 받아 죽고 말 것이오.]
천지회와 목왕부의 적지 않은 군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귀종도 웃었
다.
[정말 그런 일이 있을까? 그것 참 재미있겠구나! 그것들은 나의 기
침....쿨룩,쿨룩....하는 것을 두려 워한다는 말이지? 쿨룩, 쿨룩....
쿨룩,쿨룩....]
귀씨 부부는 대노하여 각기 아들의 한쪽 팔을 잡고 세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진근남은 말했다.
[귀이협, 잠시 노기를 가라앉히십시오. 형제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귀이낭은 그가 평소부터 지혜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몸
을 돌리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진근남은 말했다.
[귀이협 부부는 무예가 고강하여 당대의 무적이십니다. 그러나 위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면 역시 중과부적입니다. 우리들은 역시 만전지책을
강구....]
귀이낭은 말했다.
[나는 진 총타주에게 무슨 고견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요!]
그녀는 몸을 돌려 대청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유대흥과 오립신이 갑자
기 재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문 앞을 막아섰다. 유대홍이 말했다.
[두 분이 오삼계를 도와 주려는 것을 우리 목왕부에서는 결코 허락할
수 없소이다.]
귀이낭은 말했다.
[아니, 손을 쓰겠다는 말이에요?]
유대홍은 말했다.
[두 분은 먼저 우리 사형제를 죽인 후 문을 나서서 오삼계를 도와 주도
록 하십시오.]
第114章. 그림을 그려 상주문을 만들다
귀이낭은 말했다.
[우리가 언제 오삼계를 도와준다고 말했어요?]
유대홍은 말했다.
[두 분은 오 역적을 도와주려는 뜻은 없으나 이 일이 만약 성공한다면
오 역적이 기세를 크게 떨치게 되어 다시는 그를 제압할 수 없게 되
오.]
귀신수는 나직이 말했다.
[비키시오!]
그는 한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유대홍이 두 팔을 벌리고 문 앞을 가로
막고 섰다. 귀신수는 왼손을 앞으로 뻗쳐 그의 가슴팍을 움켜잡으려 했
다. 유대홍이 손을 뻗쳐 이를 막았다. 순간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두
손바닥이 서로 맞닥뜨리게 되었는데.유대홍은 잠시 비틀거리더니 얼굴
이 창백하게 변했다. 귀신수는 말했다.
[나는 그저 오 할의 힘을 썼을 뿐이오.]
오립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가 온 힘을 다 써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사 형제들을 모두 죽이도
록 하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귀종이 이렇게 말한 후 두 손을 들더니 한 손은 움츠리고 다른 한 손은
뻗쳐 내었다. 오립신은 팔을 뻗쳐 이를 막으려 하였다. 귀종이 두 손을
다시 움츠리자 오립신은 허공을 막는 셈이 되었다. 귀종은 그의 두 팔
이 움츠러들었을 때 번개와 같이 두 손을 뻗쳐 그의 가슴팍 요혈을 움
켜잡았다. 진근남이 달려들면서 권했다.
[모두 다 절친한 친구이니 무공은 사용하지 말도록 합시다.]
위소보가 말했다.
[서로 다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이렇게 하지요. 주사위를
던져 결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약 귀 나으리께서 이긴다면 우리들
은 세 분이 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을 뿐 아니라 이 후배가
궁 안의 사정을 두 분에게 자세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귀이낭이 말했다.
[만약 그대가 이긴다면?]
[그렇게 된다면 이 일을 잠시 연기하는 거지요. 오삼계가 죽은 후에 우
리가 다시 황제를 노리고 손을 써도 될 것입니다.]
위소보의 말을 듣고 귀이낭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우리 편 사람들끼리 먼저 싸우게 된다면 목씨 집안에서는 십중팔
구 오랑캐 황제에게 전갈을 할 것이니 이 일은 해내기 어려워질 것이
다. 차라리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좋겠다.)
그녀는 남편에게 물었다.
[둘째 나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귀신수는 위소보에게 말했다.
[네가 졌을 때 억지를 써서는 안 돼!]
위소보는 웃었다.
[사내 대장부가 한마디 말을 내뱉으면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뒤
따라잡을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랑캐의 소황제가 저의 애비도 아
닌데 어째서 그를 감싸고 돌겠습니까? 하지만 이기려면 영웅답게 이겨
야 하고 지더라도 솔직담백해야지요. 누가 이기고 지든 간에 감정을 상
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진근남은 고의 최후의 한 마디가 퍽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말했
다.
[이 일은 매우 중대하여 우리가 대업을 이루는 데 화가 될지 복이 될지
실로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점을 쳐서 결단을 내린다
고 했으니, 우리가 주사위를 한번 던져 보는 것도 뜻이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모두 다투지 말고 하늘의 뜻에 따라 이 일을 진행하도록 하
십시다.]
귀이낭이 귀종을 보며 말했다.
[얘야, 손을 놓아라.]
[안 놓겠어요.]
[저분 소형제가 주사위를 던지며 놀잔다.]
귀종은 크게 기뻐서 즉시 손을 풀었으며 오립신의 가슴팍을 잡고 있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오립신은 가슴팍이 시큰거리고 아픈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또한 호흡도 제대로 되지 않아 끊임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귀 도련님, 주사위를 꺼내도록 하시오. 그대의 것을 사용하도록 합시
다.]
귀종은 말했다.
[주사위? 나는 없는데? 너에게도 없니?]
위소보는 말했다.
[나도 없소. 어느 분께서 주사위를 가지고 계시죠?]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나같이 생각했다.
(노름꾼도 아닌데 주사위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
가?)
귀이낭이 말했다.
[주사위가 없다면 동전을 던져 판가름하는 것이 좋겠군.]
위소보는 말했다.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 공평합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친위병 가운데
는 주사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제가 물어 보도록 하지
요.]
그는 빗장을 뽑고 문을 열더니 대청에서 나갔다. 동쪽의 대청에서 나와
다른 대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꺼냈다. 그것은
그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법보(法寶)였다. 하지만 당장 품속에서
꺼내면 귀씨 부부가 반드시 의심을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대청에서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동쪽 대청으로 되돌아가서 웃으며 말했다.
[주사위를 찾았습니다.]
귀이낭은 말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어떻게 하시겠소?]
위소보는 말했다.
[주사위 노름에 대해서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귀 도련님, 그대는
어떻게 내기를 하는 것이 좋겠소?]
귀종은 주사위를 들고 말했다.
[내 그대와 정확함을 겨루도록 하지.]
그는 손가락으로 주사위를 툉겼다. 그러자 쨍쨍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알의 주사위가 날아가더니 두 자루의 촛불을 끄고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주사위가 판자 벽에 박혔다. 군웅들은 이를 보고 일제히 칭찬을
했다.
[휼륭한 재간이군!]
위소보는 말했다.
[주사위를 던질 때는 점수의 높고 낮은 것을 겨루지, 암기의 재간으로
겨루는 것은 아닙니다.]
귀이낭은 말했다.
[그렇지, 그대들 두 꼬마가 한 번씩 던지되 점수가 높은 사람이 이긴
것으로 하지.]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 번만 던졌다가는 그가 운수가 좋아 단번에 삼십육 점을 낼지도 모
르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이렇게 하지요. 우리가 각기 세 번을 던져 삼판양승제로 하지요.]
귀종은 던지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기쁜 일인지라 말했다.
[우리는 똑같이 삼백 번을 던져 이백 번을 이긴 사람이 이긴 것으로 하
는 게 좋지 않을까?]
귀이낭은 말했다.
[그렇게 귀찮게 할 게 뭐람. 각자 세 번만 던지면 돼.]
서천천은 판자벽에 박혀 있던 두 알의 주사위를 파내어 탁자 위에 놓았
다. 위소보는 말했다.
[귀 도련님, 그대가 먼저 던지십시오.]
귀종이 주사위를 들고 싱글벙글 웃으며 주사위를 던지려 하는 순간 귀
이낭이 말했다.
[잠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목검성과 유대홍에게 물었다.
[이번 내기에서 만약 우리가 이긴다면 목왕부는 이를 인정하겠소?]
유대홍은 귀신수에게 일 장을 얻어맞아 가슴속의 기혈이 끓어올랐었는
데 지금까지도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상대방이 그저 오 할의
힘만 사용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선배 영
웅이라 결코 헛소리는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가 정말 황궁
으로 들어가 황제를 찔러 죽이려 한다면 목왕부의 사람이 어떻게 그를
저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즉시 고개를 끄
덕였다. 목검성은 말했다.
[하늘의 뜻이 어떠한지 두 분이 주사위를 던져서 결정할 수밖에 없겠소
이다.]
귀이낭은 말했다.
[좋소!]
그는 귀종에게 말했다.
[던져라! 점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귀종은 여섯 알의 주사위를 자세히 보더니 말했다.
[가장 높은 것이 육 점이고 가장 낮은 것은 이 점이군. 그리고 커다랗
게 움푹 꺼진 구멍도 있네?]
귀이낭은 말했다.
[커다랗게 움푹 꺼진 그 구멍이 일 점이란다.]
귀종이 말했다.
[이상하다. 사 점은 붉은 색깔이네.]
그는 오른손을 쳐들었다가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내리쳤다. 여섯 알의
주사위가 모두 탁자 위에 박혔는데 위로 향하고 있는 것이 모두 다 여
섯 점짜리였다. 그는 손바닥 위에다가 주사위를 얹어놓고는 여섯 알의
주사위의 일 점들이 모조리 위로 향하도록 한 이후 후딱 뒤집어 내려쳤
으니 자연히 육 점짜리가 위로 향하게 마련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
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폐병쟁이 같은 녀석이 보기
에는 바람에 날려갈 것 같은데 내력이 이토록 심후한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사위를 그 따위로 던지는 것을 보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귀이낭은 말했다.
[얘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손바닥을 펼쳐 탁자를 툭 쳤다. 그러자 여섯 알의 주사위가 툭
튀어나왔다. 사람들은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귀이낭은 주사위를 들고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굴리며 말했다.
[굴려서 나와야 그것이 바른 점수이다.]
[그랬군요.]
귀종은 어머니의 흉내를 내서 주사위를 들고 가볍게 탁자 위에 던졌다.
주사위가 떼구루루 구르다가 멈추었는데 합쳐서 이십 점이었다. 여섯
알의 주사위가 이십 점을 냈다면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약간 높은 편
이었다. 위소보는 주사위를 들고 새끼손가락으로 몇 번 두들겨서 암암
리에 수작을 부리고서는 부르짖었다.
[다 먹었다!]
그는 주사위를 던졌다. 다섯 알의 주사위가 굴러서 십칠 점을 내었고
마지막 한 알은 계속하여 구르고 있었다. 그가 수작을 부린 수법에 의
한다면 이 주사위는 반드시 육 점이 나와 이십삼 점이 되어 첫번째 판
을 이기게 되는 것이었다. 그 주사위는 굴러가더니 갑자기 탁자 위의
조그만 구멍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곳은 바로 귀종이 조금 전 주사
위를 쳐서 낸 구멍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주사위는 갑자기 멈추었는데
하늘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일 점이었으니 모두 합쳐 십팔 점으로 위
소보가 지고 말았다.
[탁자 위의 구멍이 있으니 이것은 계산에 넣을 수가 없소.]
위소보는 주사위를 들어 다시 던지려고 했다. 진근남은 고개를 가로저
었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니 첫번째는 네가 졌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도 두 번 남았으니 반드시 내 너를 이기고 말 테다.)
그는 주사위를 귀종에게 내밀었다. 귀종은 의기양양해서 던졌는데 이번
에는 구 점빡에 나오지 않았다. 목씨 집안의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이
기게 되었다고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위소보는 네모난 탁자의 한 모
퉁이로 가서 탁자 위에 난 여섯 개의 구멍과 멀리 떨어진 곳에 주사위
를 던졌는데 놀랍게도 네 알이 육 점이고 두 알은 오 점으로 삼십사 점
이 나왔다. 두 알의 주사위 숫자만 친다 하더라도 이긴 셈이니 그야말
로 싱겁기 짝이 없는 승리였다.
쌍방이 각기 한 번씩 승리를 했으니 세 번째는 결승전이었다. 귀종이
대뜸 주사위를 던졌는데 주사위는 한참 동안 돌다가 삼십일점이 나왔
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무척 높은 점수였다. 목씨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얼굴에 근심의 빛을 띠며 속으로 삼십일 점을 이기려면 정말로 높
은 점수가 나와야 한다고 걱정했다.
(조금 전과 같은 방법으로 삼십사 점을 낸다면 너를 이길 수 있다.)
위소보는 새끼손가락을 손바닥에 갖다대고서 몰래 주사위의 위치를 제
대로 가늠한 후에 가볍게 굴렸다. 그러자 여섯 알의 주사위가 탁자 위
에서 하나하나 돌아가더니 멈추어 섰다. 육 점, 오 점, 오점, 육 점,
네 알이 이렇게 모두 높은 점수가 나와 이미 이십이 점이나 되었다. 다
섯 번째 알이 다시 육 점이 나와 이십팔 점이 되었다. 최후의 한 알은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만약 삼 점이 나오면 쌍방은 무승부가
되어서 한 번을 더 던져야 했다. 그러나 일 점이나 이 점이 나오면 지
는 것이고, 사 오 육 점이 나오면 이기는 것이었다. 현재로서는 이길
가능성이 더 큰 셈이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사 삼 점이 나와 무승부가 된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던진다면 너는
반드시 재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주사위가 빙글빙글 돌며 바로 육 점에서 멈추려고 하는 것을 보고
부르짖었다.
[좋아! 멈춰라!]
그런데 갑자기 주사위가 더욱 빨리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누가 수작을 부렸다.]
힐끗 보니 귀신수가 주사위를 향해 미미하게 입바람을 불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때 그 주사위는 멈춰서 움직이지 않게 되고 움푹
꺼진 구멍이 하늘을 향하게 되었는데 바로 일 점이 나왔다. 위소보는
놀랍기도 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주사위를 던져 수작을 부리는 사람은
무수히 보았지만 숨을 내쉬어 주사위를 돌리는 사람은 오늘 처음 보았
던 것이다.
이 늙은이의 내력은 고강하기 이를 데 없어 기를 모아 입바람이 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한 알의 주사위가 육 점에서 일 점으로 돌아
가도록 불어 젖혔는데 조금 전 귀종이 삼십일 점을 내었을 때도 운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옆에서 입김을 불어 도와준 것이 틀림
없을 것 같았다. 위소보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큰소리로 말했다.
[귀 나으리, 그대는....그대는....휙, 휙, 휙!]
그는 입술을 모으고 숨을 내뿜는 시늉을 하였다. 귀신수가 말했다.
[이십구 점, 네가 졌다!]
그는 손을 뻗쳐서 그 여섯 알의 주사위를 들고 엄지손가락과 중지 사이
에 끼우더니 콱 눌렀다. 그러자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주사위가 깨지
더니 적지 않은 수은이 흘러나와 탁자 위에 흩어졌는데 수은은 수백 수
천 알의 가늘고 둥근 구슬이 되어 사방으로 굴렀다. 귀종은 손뼉을 치
며 웃었다.
[그거 재미있군, 재미있어! 이게 무엇이지요? 물 같기도 하고 은같기도
하네.]
위소보는 그가 주사위에 수은을 넣은 사실을 눈치채고 이를 폭로하는
것을 보자 그가 숨을 불어 주사위를 굴렸던 것을 따질 수 없었다. 그는
일부러 깜짝 놀란 척하며 말했다.
[주사위 안에는 수은이 들어 있군요. 귀 나으리, 그대는 정말 이 후배
에게 하나의 경험을 쌓도록 하셨습니다. 주사위는 소뼈로 만드는 것인
데, 오늘에서야 저는 수은이 소뼈다귀 안에서 나오는 것인 줄 알게 되
었습니다. 이전에는 은에 물을 섞어 배합을 하는 것으로 알았지요. 황
소가 밭을 갈 뿐만 아니라 수은을 만들어 내기까지 하니, 정말 대단합
니다.]
귀이낭은 그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
다.
[모두들 더 할말이 없겠지요? 위 형제, 그대는 황궁 안의 사정을 아무
쪼록 자세히 이야기해 줘야 해요.]
위소보는 눈을 들어 사부를 바라보았다. 진근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
했다.
[하늘의 뜻이 그럴진대 너는 두 분 선배에게 솔직히 이야기해 드리도록
해라.]
그는 위소보가 무척 교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라는 한 마디를 덧붙여 말한 것이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나름대로 결정
한 바가 있어 말했다.
[노름빛을 안 갚겠다고 억지를 부릴 수는 없지요. 사내대장부가 남의
것을 빼앗거나 속이는 것은 벌 상관이 없지만 노름빛만은 갚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요. 황궁에는 집들이 너무 많으니 말을 해 보았자 알아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지도를 그리겠습니다. 서형과 전 형, 그대들은
손님들을 모시고 계시구려. 저는 그림을 그리겠소.]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두 손을 맞잡아 보이고는 몸을 돌려 객청에서 나
와 서재로 갔다. 이 백작부는 강친왕이 선물한 것이라 서재에는 도서들
이 잔뜩 꽂혀 있었고 탁자 위에는 벼루와 붓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위
소보는 노름 운이 나빠지게 될까 봐 이 서재에는 평소 한걸음도 들어가
지 않았다. 중국말의 음으로는 책 서(書) 자와 밑질 수(輸) 자가 같은
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재로 들어가 탁자 앞에 앉자마자 소리를 질
렀다.
[먹을 갈아라!]
그러자 하인이 와서 시중을 들었다. 백작대인은 한번도 붓을 들고 글을
쓰지 않았다. 하인은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으며 얼굴에 탄복했
다는 표정을 지으며 즉시 정신을 차리고 과거 왕희지가 사용했다는 반
룡자석(蟠龍紫石)으로 만들어진 오래된 벼루에 맑은 물을 붓고, 저수량
(楮遂良)이 쓰다 남긴 당나라 시대의 송연향묵(松烟香墨)을 쥐고 손가
락에 힘을 주어 숨을 죽이고 짙게 먹을 갈았다. 필통에서 조맹부(趙孟
頓)가 맞추었다는 호주의 은양반죽(銀鑛斑竹)에 양모털이 박힌 붓을 한
자루 꺼내 먹물에 적셨다. 그리고 송나라 휘종(徽宗)이 만들었다는 금
화옥판전(金花王版箋)을 꺼내 펼치고 위 부인이 글을 쓸 때 피웠다는
용뇌온사향(龍腦溫麝香)을 피워서 백작대인이 휘호(揮毫)하기를 공손히
기다렸다. 드디어 위소보는 붓을 잡았는데 그 모습은 정년 서예의 대가
다운 풍모였다.
위소보는 손을 호랑이 발톱처럼 하고 손가락에 힘을 주어 무엇을 잡을
것처럼 한 다음에 냉큼 붓대를 쥐었다. 그리고는 듬뿍 먹을 찍었다. 갑
자기 탁, 하는 경미한 소리가 났다. 커다란 먹물 방울이 붓 끝에서 떨
어져 대뜸 한 장의 금화옥판전을 버려놓았다.
하인은 생각했다.
(백작대인께서는 글씨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묵화를 그리려고 하시는가
보구나.)
위소보는 그 먹물 방울의 왼쪽에다가 붓을 쭉 내려그어 구불구불한 나
뭇가지를 한 가닥 그려 놓았다. 그 나뭇가지의 왼쪽에다 한 점을 찍었
다. 마치 북종(北宗) 이사훈(李思訓)의 부벽준(斧劈=俊-人+皮) 같기도
하고, 남종(南宗) 왕마힐(王摩詰)의 피마준(披痲=俊-人+皮) 같기도 했
는데, 실로 남북 이종의 장점을 한데 모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인
은 서재에서 종종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뱃속에는 어느 정도 먹물이 들
어 있었던지라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위소보가 말했다.
[작은 소(小) 자를 썼는데 보기에 어떤가? 그럴싸한가?]
하인은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위소보가 작을 소 자를 쓴다는 것을 알
고 재빨리 칭찬의 말을 했다.
[대인의 서법은 필순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니 정말 독특하기 이를
데 없는 격식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늘이 내리신 서예
의 기재이십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자네는 나가서 장 제독을 들어오시게 하게.]
하인은 대답을 하고 나갔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백작대인께서는 아래에 무슨 글자를 쓰시려고 하실까?)
그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떤 자를 쓸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위소보는 소 자 아래에다 하나의 둥근 원을 그렸다. 둥근 원의 아래에
는 한 조각의 딱딱한 장작개비 같기도 하고 지게 막대기 같은 것을 가
로로 그었다. 그리고 그 위에다 한 마리 지렁이가 그 지렛대를 뚫고 지
나가는 것 같은 모양을 그려 넣었다. 지렁이가 지렛대를 꿰뚫는 이 형
국은 바로 아들 자(子) 자였다. 이 석 자를 연결시키면 강희의 이름인
소현자가 되었다. 현(玄) 자는 쓸 줄 몰랐기 때문에 둥근 원을 그려 대
신한 것이다. 사실 그가 청량사에서 중이 되어 있을 때 강희가 그림을
그려서 성지를 내린 적이 있었다. 위소보는 이를 매우 부러워하고 그때
감화를 받은 나머지 삼가 천자 황상께서 행하신 바를 받들어 행하고 싶
었었다. 그런데 오늘 사태가 위급해지자 그는 그림을 그려서 상주하게
된 것이다. 그는 소현자의 이름을 쓴 후에 검을 한 자루 그렸다. 검의
끝은 곧장 둥근 원을 찔러 들어가도록 그렸다. 이 한 자루의 칼 같은
물건을 그리는 데 그는 땀을 뻘뻘 흘렸다.
그가 그림을 다 그리고 나니 장용이 도달했다. 위소보는 금화옥판전을
접어서 봉투 안에 집어넣고 밀봉한 후 장용에게 내밀며 나직이 말했다.
[장 제독, 이것은 긴급히 올리는 상주문이오. 그대는 즉시 궁으로 들어
가 황상께 이것을 바치시오. 내가 은밀히 상주하는 것이라고 하면 시위
나 태감들이 그대를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통보할 것이오.]
장용은 대답하고 두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 막 품에 상주문을 넣으려
했다. 그때 서재 밖에서 두 명의 친위병이 일제히 호통치며 물었다.
[게 누구냐?]
갑자기 퍽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방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달려 들어
왔는데 바로 귀씨 부부와 귀종이었다. 귀이낭은 장용의 손에 들린 상주
문을 보자 대뜸 나꿔채더니 날카로운 어조로 위소보에게 물었다.
[너는 오랑캐 황제에게 밀고하려는 것이지?]
위소보는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오....아닙니다....아닙니다....]
귀이낭은 봉투를 뜯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편지지
위에는 이상야릇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리둥절한 그녀는 귀신수에
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이게 뭘까요?]
그녀는 다시 위소보에게 물었다.
[이것이 뭐냐?]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그에게 주방으로 가서....그....그 단자를 만들어 손님들에게 대
접하라고 당부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단자를 만들지 말고 조그만
단자를 만들어 그 단자에는 꽃을 새기도록 했지요. 그가....그가 잘 모
르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그림을 그려 보여 준 것입니다.]
귀신수와 귀이낭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색이 대뜸 풀어졌다.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은 과연 칼을 사용해서 조그만 단자 위에 꽃을 새기는 모양
을 하고 있으니 결코 황제에게 밀고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 위소보는 장용에게 손짓을 보냈다.
[빨리 가 보시오, 빨리 가 봐!]
장용은 몸을 돌려 서재를 나섰다. 위소보는 말했다.
[많이 준비하고 빨리 만들도록 하시오. 모두들 즉시 먹어야 할 것이오.
이것이야말로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이니 잠시라도 지체할 수 없소.]
장용은 문 입구에서 대답했다.
[예.]
귀이낭은 말했다.
[간식 먹는 일은 서두를 것 없소. 위 형제, 그대는 황궁의 지도를 그렸
소?]
위소보는 한 장의 옥판전을 꺼내 탁자 위에 펼치고 붓을 귀이낭에게 건
네주며 말했다.
[아무리 이리 그리고 저리 그려도 좋지 않군요. 제가 말씀을 드릴 테니
그대가 받아 그리도록 하십시오.]
귀이낭이 붓을 받아 쥐며 말했다.
[좋소. 그대는 말하시오.]
위소보는 속으로 이 일을 속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문(午
門)에서 시작하여 북으로는 금수교(金水橋)에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꺾
어서는 홍의각(弘義閣), 태화(大和), 중화(中和), 보화(保和) 세 곳의
대전을 지나 다시 융종문(降宗門)에서 어선방(御膳房)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였다. 어선방은 위소보가 관장하던 곳이었고 그가 항상 다니던
길이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 동쪽으로 건청문(乾淸門)을 지나 건청궁
(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 어화원(御花園), 흠안전
(欽安殿)에 이르고 어선방에서 북쪽으로 나아가면 남고(南庫), 양심전
(養心殿), 영수궁(永壽宮), 익곤궁(翊坤宮), 체화전(體和殿), 저수궁
(儲秀宮), 여경헌(麗景軒), 수방제(漱芳齊), 중화궁(重華宮)이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함복궁(咸福宮), 장춘궁(長春宮), 체원전(體元
殿), 태극전(大極殿)이 있고 서쪽으로 나아가면 우화각(雨花閣), 보화
전(保華殿), 수안궁(壽安宮), 영화전(英華殿)이 있으며 재차 남쪽으로
가면 서삼소(西三所), 수강궁(壽康宮), 자녕궁(慈寧宮), 자녕화원(慈寧
花園), 무영전(武英殿)이 있고 무영문에서 다리를 지나 동쪽으로 나아
가 희화문(熙和門)을 지나면 다시 오문으로 되돌아왔다. 이것은 자금성
(紫禁城)의 서반부(西半部)였다.
귀씨 부부는 그가 반나절을 설명한 것이 겨우 황궁의 서반부에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황궁의 궁전과 누각들을 기억할래야 기억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그만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귀이낭은 차례로 궁전
과 문호의 명칭을 기록했다.
위소보는 다시 황궁의 동반부 각처의 궁전과 문호를 이야기했다. 다행
히 그의 기억력은 무척 좋은 편이었고 평소 황궁의 곳곳에서 놀았기 때
문에 지극히 익숙했다.
귀이낭은 한참 지나서야 간신히 황궁의 내구당(內九堂) 마흔여덟곳의
위치를 다 그릴 수가 있었다. 그녀는 붓을 놓고 휴, 하고 한숨을 내쉬
더니 미소했다.
[위 형제가 이토록 명백하게 기억하는 것이 가상하구려. 정말 고맙소.]
그녀는 위소보가 모든 궁전과 무호의 명칭과 위치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마치 자기 집안에 있는 보물을 헤아리듯 조금도 머뭇거리는 법이 없었
기 때문에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위소보가 거짓말로 날조한다
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위소보는 웃었다.
[귀 도련님이 주사위를 던져서 내기에 이긴 것이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
소이다. 황궁의 어전시위는 평소 대부분 동화문(東華門) 옆의 난여위
(欄與衛) 일대에서 시중을 들고 있소. 하지만 지금은 오삼계와 싸움을
하고 있는 터라 오랑캐 황제는 반드시 엄하게 경계할 것이오. 아마도
자금성 마흔여덟 곳 구석구석을 시위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한마디 덧붙여 놓아야, 소현자가 나의 밀보를 전해듣고 위사들
을 더욱 많이 파견한다 해도 이 세 마리의 자라들이 내가 전갈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귀이낭도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위소보는 말했다.
[궁 안에 시위는 무척 많으나 대단한 고수는 없지요. 그러나 만주 사람
들의 화살을 쏘는 재간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세 분은 물론 마음에 두
시지 않겠지요.]
귀이낭은 말했다.
[여러모로 가르쳐 줘서 고맙소. 우리들은 이만 작별을 고하겠소.]
위소보는 말했다.
[세 분께서는 단자를 자신 후에 가셔야 일할 기운이 나실 것 아니겠습
니까?]
그는 문가에 가서 큰소리로 말했다.
[게 누구 없느냐? 간식을 좀 가져오너라.]
문 밖의 하인들이 소리 높여서 대답했다. 귀이낭은 말했다.
[부를 것 없소.]
그는 아들의 손을 잡더니 귀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재에서 나갔
다. 두 사람은 생각했다.
(너는 그 꽃을 새긴 단자 가운데 십중팔구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을 것
이다. 단자에 꽃을 새길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 말이다. 한번 속았으면
됐지 두 번 속을 줄 알고?)
그들 세 사람은 위소보의 부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맑은 차 한모금 마
시지 않았다. 위소보는 그들을 문 입구까지 전송하고 두 손을 모아 작
별을 고했다.
[이 후배는 기쁜 소식을 알려 올 사람을 목을 빼고 기다리겠습니다.]
귀신수는 손을 뻗쳐 대문의 돌사자 머리를 한 번 쳤다. 그러자 대뜸 돌
가루가 마구 휘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냉소를 흘리더니 훵하니 떠났
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생각했다.
(이 일 장을 만약 내 머리 위에 후려쳤다면 정말 참담한 맛이었겠구나.
그는 나에게 그들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이와 같은 일 장으로 내 머리통을 쳐서 박살을 내겠다는 것이겠
지.)
그도 역시 손을 뻗쳐 그 사자 머리를 후려쳤다. 순간 그는 악, 하는 비
명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손바닥 여기저기에 피멍이 맺혀 있었다.
돌사자의 머리는 원래 매끄러웠는데 조금 전에 귀신수가 일 장을 후려
쳐 많은 돌조각이 튀었기 때문에 울퉁불퉁해져 있었던 것이다. 손바닥
을 살펴보니 피멍만 들었을 뿐이지 다행히 피는 흐르지 않았다.
第115章. 가짜 태후를 압송하다
위소보가 동쪽 대청으로 들어섰을 때 진근남 등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사부에게 말했다.
[자금성의 상세한 사정을 귀씨 부부에게 이야기하고 방금 그들을 전송
했습니다.]
진근남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귀씨 부부가 설사 오랑캐 황제를 찔러 죽인다 하더라도 돌아오지는 못
할 것이다.]
군웅들은 착잡한 심사에 사로잡혀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간혹 한
두 사람이 몇 마디의 말을 했으나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로부터
다시 반 시진쯤 지나자 문 밖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백작 나으리께 아룁니다. 장 제독께서 볼일이 있어 뵙겠다고 하십니
다.]
[한밤중에 무슨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건가? 이미 내가 잠이 들었으니 볼
일이 있으면 내일 다시 오라고 전하게.]
그 사람은 대답했다.
[예.]
그러자 진근남이 위소보를 보고 나직이 말했다.
[혹시 왕궁에서 무슨 소식이 왔는지도 모르니 네가 가서 물어 보려무
나.]
위소보는 대답을 하고 대청으로 나갔다. 조양동, 왕진보, 손사극 세 사
람이 대청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장
용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위소보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급히 물었
다.
[장 제독은?]
왕진보가 대답했다.
[대인께 아룁니다. 장 제독에게 사고가 났습니다. 백작부 문 밖에 기절
해 쓰러져 있는 것을 떠메고 와 상방에 눕혀 놓았습니다.]
위소보는 깜짝 놀랐다.
[아니.... 왜 기절을 하였단 말이냐?]
그는 서둘러 상방으로 달려갔다. 장용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 데 안
색이 창백하여 가슴이 연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부르짖었다.
[장 제독, 어떻게 된 일이오?]
장용은 천천히 눈을 뜨면서 입을 열었다.
[비....비....]
그러더니 두 눈을 까뒤집고 다시 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그의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자신이 쓴 상주문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내심 야단났다고 부르짖었다. 손사극은 말했다.
[조금 전 순라를 돌던 병졸이 와서 백작부 문 밖의 수백 걸음 떨어진
곳에 한 명의 군관이 쓰러져 있다기에 가서 살펴보니 바로 장 제독이었
습니다. 장 제독의 머리에, 무언가에 부딪혀 흘러내린 피가 이미 굳어
있는 것을 보면 기절한 지 오래된 듯합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기절한 지 오래되었고 상주문을 전하지 못했다면 문을 나서자마
자 독수를 입은 것이 틀림없다. 혹시 세 마리의 자라가 사람을 문 밖에
매복시켰다가 내가 황제에게 사람을 보내 밀고하는 것이 두려워 장 제
독에게 손을 쓴 것은 아닐까?)
그는 여간 초조하지 않았다. 이때 장용이 다시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왕진보는 재빨리 술 주전자를 들고 그에게 몇 모금의 소주를 마시게 했
다. 손사극과 조양동은 소주를 그의 손바닥에 붓고 마구 비벼 주었다.
장용은 약간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비직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대문을 나서서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갑자기 가슴속이 칼로 에는 듯 아파왔으며 다시....다시 몇 걸음 걷자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습니다. 대인....대인이 당부하신 일을 처리하
지 못했으니 비직은 즉시....즉시....]
그러면서 몸을 버둥거리며 일어나려고 했다.
[장형, 아무쪼록 누워서 쉬시구려.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시켰어도 마
찬가지였을 것이외다.]
위소보는 상주문을 왕진보에게 주어 조양동, 손사극과 함께 위사들을
데리고 급히 왕궁으로 달려가 황제에게 바치라고 분부했다. 그는 몹시
초조해졌다.
(귀씨 집안의 세 사람이 간 지 반 시진이 넘었다. 소현자는 이미 목숨
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왕진보 등 세 사람은 즉시 명령을 받들고 달려갔다. 장용은 말했다.
[대인, 서재의 그 영감....그 영감의 무공은 정말 무섭습니다. 제가 서
재에서 나오자 그는 저의 등을....쿨룩....가볍게 한 번 밀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때 이미 내상을 입었지 뭡니까?
대문을 나서자마자 즉시....즉시 발작을 일으켜서....대인의 큰일을 그
르치고 말았습니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귀신수가 이 상주문이 밀고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
지 않았으나 역시 의심하여 암암리에 중수법을 써서 장용으로 하여금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임을 알았다. 장용이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고 있는 것을 보고 위소보는 말했다.
[장형, 안심하고 정양이나 하시오. 이 일은 조금도 그대를 탓할 수 없
소. 제기랄! 그 늙은 자라가 그대에게 암수를 썼으니 우리는 이대로 끝
낼 수는 없소.]
그는 다시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하고 심복에게 빨리 삼탕을 끓여서 장
용에게 마시게 하는 한편 의원을 불러 치료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동쪽 대청으로 돌아가서 말했다.
[궁에서 무슨 소식을 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장 제독이 귀이낭 나으리
에게 중상을 입어 아무래도 목숨을 건지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라 일제히 물었다.
[그가 왜 장 제독을 때려 상처를 입혔다는 것이오?]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 제독이 저택 앞에서 순찰을 돌고 있다가 그들 세 사람이 나서는 것
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 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귀이낭 나으리께서 그만
일 장을 후려치신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같이 생각했다.
(어느 누가 신권무적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당해 낼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매우 후회했다.
(만약 장 제독이 독수를 당할 것을 알았고, 상주문을 소현자에게 먼저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궁 안의 사정을 상세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동서남북을 헷갈리게 만들어 뒤죽박죽되도록 이야기했을 텐데. 내
가 산과 바다를 뒤섞어 놓는 식으로 황극전(皇極殿)을 수안궁(壽安宮)
으로 옮겨 놓고 중화궁(重華宮)을 문화전(文華殿)으로 옮겨 놓았다면,
세 마리의 자라는 황궁 안에서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다가 어지러워서
방향도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딱딱이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경을 알리는 소리였다. 다시 한참 시
간이 흘렀다. 갑자기 멀리서 개들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칼자루를 잡고 벌떡 몸을 일으켜 귀를 기울였다. 그러
나 개들은 한동안 짖어대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한참이 지난 후 조용한 가운데 은연중 닭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곧이어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퍼졌고 창문에는 희뿌연 빛이 감
돌기 시작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날이 밝았군요. 저는 궁 안으로 달려가 봐야겠습니다.]
진근남은 말했다.
[귀씨 부부와 그 아들이 만약 불행히도 실수하였다면 너는 반드시 방법
을 강구하여 그들을 구원해내야 한다. 오륙기 형의 일은 오해에서 비롯
된 것이니 그들을 탓할 수 없는 일이다. 무릇 대의를 중시하고 사사로
운 사귐을 가볍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느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오만한
태도를 지었던 것 역시 마음에 둘 필요가 없느니라.]
위소보는 말했다.
[사부님의 분부는 제자 역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하지만 그
들이 만약 소황제를 이미 죽였다면 제자가 이 작은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구출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는 소황제가 지금쯤 귀씨 집안의 세 사람에게 피살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아파 대뜸 눈물이 흘러내리고 목이 메어서 말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형은....]
그 기회를 빌려서 울음을 터뜨리는데 목검성이 말했다.
[귀씨 부부가 일을 저질렀다면 성패를 막론하고 오늘 북경성 안은 크게
소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깥에 적지 않은 친구들이 있으니 반드시 나
가서 안배하여 모두들 흩어져 숨도록 한 후에 이 풍파가 지난 후에 다
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진근남은 말했다.
[그렇소. 폐희의 형제들 역시 성내의 각처에 있소. 모두들 흩어져 있으
라고 통지하고 강호의 모든 친구들에게도 조심하라고 이르시오. 오늘밤
유시에 다시 이곳에 모여 금후의 행동을 상의하도록 합시다.]
여러 사람들은 응낙했다. 그 즉시 네 명의 천지회 형제들이 나가서 살
펴보도록 했다. 그들이 되돌아와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전갈을 받고서
야 차례차례로 백작부에서 떠나갔다.
위소보가 문을 닫으려고 할 때 손사극이 돌아와서 상주문을 궁문을 지
키고있는 시위에게 건네주었으며, 그 시위들을 통솔하고 있는 사람에게
위 대인이 은밀히 고하는 상주문이라고 하여 황상께 바쳤다는 보고를
했다. 그들 세 사람이 궁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오경이 되도록
그 통솔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왕진보와 조양동 두 사람을
여전히 궁문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고 위 대인이 걱정하실까 봐 먼저 와
서 보고하는 것이라 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좋소, 그대는 장 제독을 보살피도록 하시오.]
그는 매우 근심에 차서 친위병에게 가짜 태후 모동주를 조그만 교자에
태우도록 하고 궁으로 들어가 황상을 뵙고자 했다.
궁문 앞에 이르렀을 때 사방은 조용하니 아무런 기색도 없었다.
십여 명의 궁문 시위들이 앞으로 나와 인사를 드리고 모두 히죽히죽 웃
으며 말했다.
[부총관께서는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 양주 지방은 놀기가 좋았던가 보
지요?]
위소보는 속으로 약간 마음을 놓으며 생각했다.
(궁 안에서 큰 소란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나에게 양주의 일을 들먹일
심정이 아닐 것이다.)
그는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동안 모두들 별일 없었소?]
한 명의 시위가 말했다.
[부총관님의 덕택으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편안합니다. 다만 오
삼계 늙은 녀석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황상께서는 매우 바쁘시며
삼경 야밤에도 대신들을 궁으로 불러서는 이 일을 논의하고 계십니다.]
위소보는 다시 한 번 속이 느긋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시위
가 웃으머 말했다.
[총관 대인께서 북경으로 돌아오셔서 황상을 도와 큰일을 처리하게 될
테니 황상께서는 이제 좀 한가하시게 되었습니다.]
위소보는 웃었다.
[그대들은 아첨떨지 말게. 나는 양주에서 가져 온 물건들을 모두 여러
형제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안배했네. 그 누구도 받지 못하는 사람
은 없을 것이네.]
시위들은 모두 기뻐하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위소보는 작은 교자를 가
리키며 말했다.
[저것은 태후와 황상께서 분부하여 잡아오라 하신 국사범이네. 그대들
이 한번 보게나.]
그는 시종들로 하여금 교자의 휘장을 들추게 하고 궁문의 시위들이 수
색하도록 했다. 시위들은 평소의 예에 따라 흉기 등 금지된 물건이 있
는가를 살펴본 이후 말했다.
[부총관 대인께서는 이번에 적지 않은 공로를 세우셨으니 또 벼슬이 오
르시고 축하 술을 얻어 마시게 되었군요.]
위소보는 궁 안으로 들어서서 건청문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위사들에게
물어보았다. 그제서야 황상께서는 양심전(養心殿)에서 대신들을 불러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을 논하고 있으며 아직도 의논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위소보는 그 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서 생각했다.
(어젯밤 황상께서는 바쁘셔서 잠도 주무시지 못했구나. 대신들을 불렀
을 때는 자연히 사방에 삼엄한 경계망을 치기 마련이다. 양심전 사방에
는 수백 수천 개의 등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을 데니 귀씨 집안의 그 세
마리 자라들이 어찌 황상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소현
자가 일찌감치 침대 위에서 잠을 잤고 등불도 하나 없는 캄캄한 밤이었
다면 어젯밤에 이미 화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야
말로 홍복제천(鴻福齊天)이로구나. 다행히 오삼계 늙은 녀석이 싸움에
이기는 바람에 황상께서는 마음의 초조함을 느끼시고 밤이 새도록 일을
논의하신 모양이구나.)
그는 양심전 밖에 이르러 조용히 기다렸다. 그는 강희의 총애를 받고는
있었지만 황제가 왕공 대신들과 군국대사를 논하는 자리에는 감히 들어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반 시진 넘게 기다려서야 내반숙위(內班宿衛)가 대전의 문을 열었다.
강친왕 걸서, 명주, 색액도 등이 차례로 나왔다. 대신들은 위소보를 보
자 모두 미소를 짓고 두 손을 맞잡아 보였으나 그 누구도 감히 말을 건
네지는 못했다. 태감이 통보하자 강희는 즉시 그를 불렀다.
위소보는 위로 올라가 큰절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강희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신수가 훤해 보였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말했다.
[황상, 소신이 황상을 뵈올 수 있게 되다니 정말....정말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하룻밤 내내 걱정을 했는데 강희가 무사한 것을 보니 그만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강희는 웃으며 물었다.
[왜 멀쩡한 사람이 우는가?]
[소신은 기뻐서 웁니다.]
강희는 그가 진정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웃었다.
[좋아, 좋아! 오삼계 늙은 녀석이 정말 반란을 일으켰네. 그는 이미 몇
번 싸움에 이겼는데 내가 그를 두려워하여 내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지
못하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일세. 제기랄! 나는 이미 오응웅의 머리를 잘
랐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황상께서는 이미 오응웅을 죽였습니까?]
[그렇다네. 대신들도 나에게 오응웅을 죽이지 말라고 권하더군. 뭐 왕
사가 출전을 해서 불리하다면 오삼계와 강화를 할 수도 있고, 그를 번
왕 자리에서 철수시키지 않고 영원히 운남을 지키도록 하면 된다나. 그
리고 어떤 사람은 오응웅을 죽이면 오삼계가 더욱 흉악하게 날뛸 것이
라 하더군. 쳇, 모두 겁쟁이들이야.]
[황상의 영단이십니다. 소신은 군영희(群英會)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
습니다. 주유와 노숙이 손권에게 신하들은 조조에게 투항을 할 수 있으
나 주공께서는 투항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왕공 대신들은 오삼계와 강화를 하려고 하지만 황상께서는 강화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희는 크게 기뻐서 탁자를 한 번 내리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내
려오면서 말했다.
[소계자, 그대가 하루라도 더 일찍 와서 그 도리를 대신들에게 설명해
주었다면 그들은 감히 나에게 강화하라고 권하지 못했을 것이네. 그들
은 오삼계에게 투항을 하면 똑같이 상서나 장군을 하게 될 것이니 무슨
손해를 보겠는가?]
그는 대신들이 사사로운 욕심을 가지고 자기만을 위하고 있는 반면에
위소보는 학문은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소보의 손을
잡고 커다란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는 커다란 지도가 놓여
있었다.
강희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이미 정규병을 거느릴 장군을 내려보냈네. 한길은 형주(荊州)에
서 상덕(常德)까지 지키도록 했고, 다른 길은 무창(武昌)에서 악주(岳
州)까지 지키도록 하였는데 순승군왕(順承郡王) 늑이금(勒而錦)을 영남
정구대장군(寧南征寇大將軍)에 봉하여 장수들을 이끌고 적을 소탕하라
고 했네. 조금 전 나는 형부상서 막락(莫洛)에게 서안(西安)을 지키라
고 했네. 오삼계가 운남, 귀주, 사천성을 얻은 후 호남성으로 공격해
들어온다 해도 우리들은 그를 겁낼 필요가 없네.]
[황상, 소신에게도 일을 맡겨 주십시오.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오삼계
라는 늙은 녀석을 해치우겠습니다.]
강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군을 통솔하여 전쟁을 한다는 것은 장난이 아닐세. 그대는 궁에서 나
와 함께 있도록 하세. 더군다나 이번에 내보낸 사람들은 모두 만주의
장수들과 관원들이며 만주의 병졸들이라네. 아무래도 그들은 그대의 지
휘를 따르지 않을 걸세.]
[예.]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삼계는 한인들에게 봉기하여 오랑캐들을 무찌르자고 했다. 나는 가
짜 만주인이니 황상께서는 자연히 나를 믿지 못하실 것이다.)
강희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그대의 충성심을 못 믿는 것은 아니네. 소계자, 오삼계의 병마는 무섭
기 이를 데 없네. 삼 년이나 오 년, 심지어는 칠, 팔 년이 걸려야 그를
정벌할 수 있을지도 모르네. 처음 몇 년은 우리가 반드시 패할 걸세.
이번 토벌은 처음에는 우리가 고달프겠지만 뒤에는 좋아질 걸세. 먼저
패하고 뒤에 승리를 거둘 것이네. 그대는 패전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승전을 좋아하는가?]
[물론 승전을 좋아하지요. 투구와 갑옷을 내던지고 황망히 도망치는 맛
은 좋지 않을 것입니다.]
강희는 웃었다.
[그대가 나에게 충성을 다하니 나 역시 그대에게 손해를 끼치고 싶지
않네. 처음 삼 년이나 오 년 동안은 패전을 할 것이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싸우도록 하는 것이지. 그리하여 오 역적이 지칠 대로 지쳐서
대국이 이미 판가름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대를 다시 운남으로 보내 친
히 그 늙은 녀석을 잡아오도록 하겠네.]
위소보는 크게 기뻐 말했다.
[황상의 은혜는 정말 하늘보다 높고 깊습니다.]
[나는 누구든지 오삼계를 사로잡은 사람에게 오삼계의 벼슬을 내리겠다
고 했네. 소계자, 이번에야말로 그대의 재수를 두고 봐야 할 것이네.
제기랄! 그대의 꼬락서니는 평서왕답지 않은데? 하하하하!]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한참 동안 위소보를 들여다보더니 웃었다.
[지금은 그저 원숭이 같아. 조금도 닮지 않았네. 그러나 육, 칠 년이
지나서 그대가 스무 살이 된다면 왕야에 봉해진다 해도 어울릴 듯하군.
하하하하 ! ]
위소보는 웃었다.
[평서왕인가 하는 벼슬....소신은 아마 그만한 복은 타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상께서 저를 대장수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운남
으로 가서 오삼계를 잡아오라고 하시면 정말 대장수의 위풍당당한 모습
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소신은 그야말로 손에 장팔사모를 쥐고서 큰소
리로 부르짖는 것이지요. '오삼계, 나서서 장수의 이름을 밝히도록 해
라.' 그러면 정말 멋질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천지신명께서 보살피시
어 오삼계가 일찍 죽지 않고 소신이 친히 그를 잡아 이곳에 데려와 무
릎을 끓리고 황상에게 큰절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강희는 웃었다.
[좋아, 좋았어!]
그는 다시 정색을 하고 말했다.
[소계자, 우리 처음 몇 년 동안은 정말 외로운 전쟁을 하게 될 것이네.
전쟁에 져도 상관은 없지만 나라가 어지럽지는 않아야 하네. 반드시 대
장수의 재주를 가진 사람만이 지더라도 나라 안을 어지럽히지 않고 버
티어 나갈 수 있다네. 그대는 복을 타고난 장수이지만, 용장이나 명장
은 못되고 더군다나 대장수감은 아닐세. 아, 애석하게도 조정 안에는
대장수감이 없단 말일세.]
[황상 자신이 바로 대장수가 아니십니까? 황상께서는 이미 우리가 처음
몇 년간은 반드시 질 거라고 인정하였습니다. 패구 노름을 하는 것처
럼, 황상께서 전주가 되어 처음에는 그에게 일곱 번 여덟 번 패하는 척
하면서 조금도 손해에 연연해하지 않아야죠. 우리들은 본전이 두둑하여
태산(泰山)의 석감당(石敢當)과 다를 바 없으니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돈을 잃었을 때 그저 그에게 빌려 주는 정도로 여
기는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들은 좋은 패를 마구 내는 것이지요. 한 쌍
의 인패(人牌), 한 쌍의 지패(地牌), 한 쌍의 천패(天牌), 그리고 지존
보(至尊寶) 등 좋은 패들을 마구 내놓고서는 상대방을 통째로 죽이고
먹는 겁니다. 그럼 오삼계라는 늙은 녀석은 나자빠져 말은 땅바닥에 구
르고, 손안에는 아무것도 쥘 수 없으며 주머니는 하늘을 향하고, 뒤집
어 놓은 패는 하나같이 별십이 되는 거지요.]
강희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조정에 대장수가 없으나 내 자신이 대장수라 한 말은 정말 틀리지 않
다. 진다 하더라도 침착하게 견뎌낼 만한 사람은 나 이외에 아무도 없
다.)
그는 탁자 위에서 위소보가 올린 그 비밀 상주문을 집어들고 말했다.
[그대는 누군가 나를 찔러 죽이려고 하니 나에게 조심해서 경계하라고
했는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 당시 상황이 너무 긴급하고 소신이 또 찾아온 사
람들에게 잡혀 있던 까닭에 사야로 하여금 상주문을 쓰게할 수가 없어
서 부득이 그와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황상께서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으시니 한 번에 알아보셨군요. 그 자객은 눈을 뜨고서도 그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습니다. 그야말로 만세야께서는 홍복제천이
시니 반역자가 역모를 꾸민다하더라도 헛되이 고생만 할 뿐이지요.]
[어떤 자객인가?]
[오삼계가 서울로 보낸 자들입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 역적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나는 즉시 세 배로 시위들을 늘렸네.
어젯밤 그대의 상주문을 보고는 다시 내관숙위들을 더 강화시켰지.]
위소보는 말했다.
[이번에 오 역적이 보내 온 자객의 무공은 정말 무섭습니다. 비록 성천
자(聖天子)에게 백신(百神)이 있어서 보호를 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백
배 더 조심해야 황상께서 놀라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말했다.
[황상, 소신에게 한 가지 보물과 같은 조끼 잠방이가 있습니다.
몸에 걸치고 있으면 칼과 창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소신이 벗어서 황상
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는 장포의 단추를 끄르려고 했다. 강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배의 집에서 몰수한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 가죽이 아무리 두텁더라도 느닷없이
그러한 질문을 받게 되자 그만 얼굴이 시뻘겋게 되었다. 즉시 무릎을
끓고 말했다.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무엇이라도 황상을 속일 수가 없군요.]
강희는 웃었다.
[그 금사배심(金絲背心)은 전 명나라 궁에서 얻은 것이네. 당시 오배가
많은 공을 세웠고 적진을 함락시키느라고 몸에 칼이나 창, 화살, 돌에
입은 상처가 적지 않았네. 그렇기 때문에 섭정왕께서 그에게 그것을 내
리신 것일세. 내가 자네를 오배의 집으로 보내 가산을 몰수하였을 때
그 몰수한 재산 목록에는 이 금사배심이 없더군.]
위소보는 헤, 하고 웃어 보이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강희는 웃었
다.
[그대가 오늘 벗어서 나에게 주겠다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그대의 충성
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네. 그러나 나의 몸은 깊은 궁궐 안에 있고 수
백 수천의 자객이 들어오더라도 내 가까이에는 다가오지 못할 것일세.
그러므로 그 배심은 필요가 없네. 그대가 나를 위해 바깥에서 일을 처
리할 때 종종 위험한 일에 부딪힐 것이니 그 배심은 내가 오늘 그대에
게 하사한 것으로 해 두세.]
위소보는 다시 꿇어앉아 은혜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이
미 식은땀이 등줄기에서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큰일이다! 내가 사십이장경을 훔친 일은 황상께서 모르셔야 할터인
데...)
[소계자, 그대가 나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있네. 그
러나 그대가 일을 할 때에는 좀 얌전하게 처리해야 하네. 만약 그대의
몸에 걸치고 있는 그 금사배심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면 그야말로
좋지 않은 일이야.]
[예, 예. 소신이 어찌 감히 그런 일이 있도록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다시 몇 번 큰절을
하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양주의 일은 이후에 다시 말하도록 하게.]
그는 하품을 했다. 지난 밤 잠을 자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척 피곤한 모
양이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태후와 황상의 덕택으로 극악무도한 늙은 갈보를 소신이 잡아 왔습니
다.]
강희는 이 말을 듣자 외쳤다.
[빨리 데려오게. 빨리 데려오란 말이야!]
위소보는 나가서 네 명의 시위에게 명하여 모동주를 끌고 대전 안으로
들어와 강희 앞에 꿇어앉혔다. 강희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호통
을 쳤다.
[고개를 들어라!]
모동주는 잠시 주저하더니 고개를 들어서 강희를 바라보았다. 강희는
그녀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 마음이 괴로웠다.
(이 여자는 나의 친어머니를 죽이고 부왕을 슬프게 하여 출가하게 만들
어 나를 부모가 없는 천애고아로 만들었다. 그녀는 태후를 수년 동안
몰래 감금시키고 괴롭혔으니 이 세상에 아무리 극악무도한 사람이라도
이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그러나 어릴 적에 어머니
를 잃은 후 그녀가 나를 줄곧 키워왔다. 그녀는 실로 나에게 많은 은혜
를 베풀었으며 나의 친어머니와 다를 바가 없었다. 깊은 궁궐 안에서
진정으로 나에게 잘 대해 준 사람이 있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인
과 교활하고 일을 잘 저지르는 소계자밖에 없으리라. 만약 그녀가 동악
비와 동악비의 아들인 영친왕을 죽이지 않았다면, 부황께서 동악비를
지극히 총애하셨으니 대위(大位)는 반드시 영친왕에게 전해 주었을 것
이다. 그러면 나는 황제가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목숨까지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나에게 공이 있다고 할 수 있
지 않은가?)
수년 전만 하더라도 강희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한스
러운 일은 조실부모한 자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몇 년 동안
친히 정권을 잡고 보니 대위를 만약 남에게 빼앗기면 만사가 끝장난다
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제왕의 권위가 부모의
인자한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
은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일이고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사실
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동주는 그의 안색이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했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켰다 해도 황상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초
조해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무쪼록 몸을 보존하셔야 합니다. 매일
아침 복령연와탕을 잡숫고 계시겠지요?]
강희는 넋을 잃고 있다가 그녀의 질문을 받고 대답했다.
[그렇소. 매일 먹고 있소.]
모동주는 말했다.
[내가 지은 죄가 너무 크오니.... 친히 나를 죽여 주십시오.]
강희는 속으로 괴로운 것을 느끼고 고개를 저으며 위소보에게 말했다.
[그녀를 자녕궁으로 데리고 가 태후를 뵙도록 하게. 태후께서 성단(聖
斷)을 내려 처리하시라고 전하게.]
위소보는 오른쪽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예 !]
강희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 보게.]
위소보는 품속에서 갈이단과 상결이 쓴 두 장의 상주문을 꺼내서 두 걸
음 앞으로 나서며 강희에게 바치고 말했다.
[황상께서는 기뻐하십시오. 서장과 몽고의 병마는 이미 오삼계와 반목
하여 황상을 위해 힘을 다하기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강희는 연일 군사를 움직이고 장수를 보내면서도 속으로는 서장과 몽고
의 병마가 오삼계의 반란에 호응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소
보가 이와 같은 말을 하자 놀라고 기뻐서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가?]
그는 상주문을 펼쳐 보고 더욱 기뻐 어찌할 줄 몰랐다. 그는 손을 저어
시위에게 모동주를 대전에서 데리고 나가도록 한 후에 위소보에게 물었
다.
[이 큰 공을 그대가 어떻게 해서 이룰 수 있었는가? 제기랄! 그대는 진
정으로 커다란 복을 타고난 장수야.]
이때 서장과 몽고의 병력은 무척 강한 편이었다. 강희는 상결과 갈이단
이 오삼계와 결탁하고 이미 많은 군사들을 대기시켜 놓고 유사시에 움
직이려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상주문에는 매우 공손하고 간절한
어조로 오히려 오삼계를 토벌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겠다고 하니 어
찌 흐뭇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
루어진 일이라 일시 진실로 여겨지지 않았다. 위소보는 매번 소황제가
자기에게 제기랄이라고 말할 때는 그가 마음이 흡족할 때임을 알고 헤
벌죽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황상의 홍복이십니다. 소신은 그들과 의형제를 맺어 상결 대라
마는 큰형이 되고, 갈이단 왕자는 둘째 형이 되었으며 소신은 셋째 동
생이 되었습니다.]
강희는 웃었다.
[그대는 정말 신통력이 대단하군. 그들이 나를 도와 오삼계를 치는 데
자네는 그들에게 어떤 이득을 주겠다고 응낙하였는가?]
[황상께서는 밝게 살피셨습니다. 우리들이 의형제를 맺은 것은 그저 명
색일 뿐이지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황상
께서 벼슬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상결은 활불이 되고 싶어
하고 달뢰활불과 반선활불 외에 황상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그에게 다시
상결활불을 내려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갈이단 왕자는 전체를 좋
아한다고 했는데 소신은 잘 모르겠습니다.]
강희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전체를 좋아한다고? 아, 그는 준갈이한이 되고 싶은가 보군. 이 일은
어렵지 않고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닐세. 그때 가서 칙서를 내리고 어보
(御寶)를 찍어 그대를 흠차대신으로 삼아 그곳으로 보내 선포하면 되는
일일세. 그대는 그대의 큰형과 둘째 형에게 힘을 써주기만 한다면 그들
이 원하는 일을 내 모두 응낙한다고 말하게나. 그러나 결코 이랬다저랬
다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네.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실제 행동은 저
렇게 나오는가 하면 바람 따라 키를 돌리는 것처럼, 어느 쪽에서 승리
를 하면 그쪽을 돕는다는 방식은 용납할 수 없네.]
[황상의 말씀이 옳습니다. 두 의형의 성품은 결코 고명한 편이 못되니
황상께서도 완전히 믿지 마시고 방비하셔야 할 줄 압니다. 황상께서는
우리가 처음 몇 년은 패전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 두 사람이
오히려 전주를 돕지 않고 돈을 버는 사람을 도와 천문(天門) 쪽에 걸
것을 방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먼저 못을 박아 둠으로써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강희
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옳아. 그러나 우리 역시 그들이 두렵지 않아. 그들이 만일 공
격해 온다면 천문,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에서 모조리 잡아먹
자.]
위소보는 껄껄 웃으며 속으로 매우 탄복했다.
(황상은 패구 노름에 있어서도 매우 노련하구나!)
第116章. 모동주와 수두타의 죽음
위소보는 모동주를 압송해서 자녕궁으로 가서 태후를 배알했다.
태감은 국사범을 데리고 들어오라는 명령을 전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전에 나는 태감이어서 태후의 침전을 자연스럽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대신인데 어째서 나보고 침전으로 들라고 하시는가?
아마도 태후께서는 늙은 갈보를 잡았다는 말을 들으시고 너무나 기뻐서
내가 태감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신 모양이다.)
침전 안은 어두컴컴했으며 가짜 태후가 거처할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태후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었으며 등뒤로 휘장이 나직이 드리워져
있었다. 위소보는 큰절을 올려 삼가 문안을 드렸다. 태후는 모동주를
한 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대가 국사범을 잡아왔군. 그대는 이만 나가 보게.]
위소보는 모동주를 침전 안에 남겨 둔 채 큰절을 하고 나왔다.
그는 자녕궁을 나오면서 속으로 화를 냈다.
(내가 늙은 갈보를 잡아온 것은 그야말로 커다란 공을 세운 것인데 태
후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칭찬 한마디 없구나. 제기랄! 그 누구나 자
녕궁에서 거처하면 바로 후레계집년이다. 진짜 태후도 가짜 태후도 모
두 늙은 갈보다.)
그는 속으로 욕을 하며 자녕궁 화원의 꽃길을 따라 걸어 한 채의 가산
옆을 지났다. 별안간 가산 뒤에서 세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뻗어 위소보의 왼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안녕 하신가?]
위소보가 깜짝 놀라 바라보니 늙은 태감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늙은 태감은 바로 귀이낭이 아닌가!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니 놀랍
게도 귀신수와 귀종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내관숙위의 복색을 하고 있
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여기 숨어 있었구나!)
위소보는 왼손을 귀이낭에게 잡혀 있었는데 팔이 시큰거리고 마비되어
왔다. 만약 소리를 지른다면 귀신수가 가볍게 일 장을 후려쳐 자기의
머리통을 박살내고 말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의 머리통이 백작
부 밖의 채석장 돌처럼 딱딱할 것 같지 않아 그는 쓰디쓰게 웃으며 말
했다.
[어르신께서도 안녕하십니까?]
그는 그곳에서 몸을 뺄 계책을 강구했다. 귀이낭은 나직이 말했다.
[나를 따라가자. 할말이 있다.]
위소보는 감히 그 말을 거역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 등뒤에 따라 오
던 몇 명의 시위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이곳에서 기다리게.]
그러자 귀이낭은 위소보의 손을 잡고 앞으로 십여 걸음 나가더니 나직
이 말했다.
[빨리 우리를 황제에게 안내하여라.]
[세 분은 어제 저녁에 왔으면서도 어찌하여 아직도 황제를 찾지 못하셨
습니까?]
[몇 명의 태감과 시위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모두들 황제께서 대신들을
불러 만나느라고 밤을 새우고 있다더군. 우리들은 가까이 할 방법이 없
어 손을 쓰지 못했지.]
[조금 전 저는 황제를 뵈옵고 그의 말을 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즉 그대들 세 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했지요. 그러나 황제는
이미 잠이 드셔서 만나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세 분은 이미 옷차림을 바
꾸었으니 정말 잘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궁에서 나갑시다.]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찌 궁을 나선단 말이냐?]
[대낮에는 안 됩니다. 세 분은 오늘 밤 다시 와서 일을 벌여도 상관없
을 것입니다.]
[간신히 들어왔는데 큰일을 이루지 않고 어찌 나가겠느냐? 그가 어디서
잠을 자고 있는지 빨리 우리를 안내하여라.]
[저 역시 그가 어디서 자고 있는지 모릅니다. 태감을 찾아서 물어 봐야
합니다.]
[자네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네. 그대는 조금
전에 황제를 배알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째서 그가 자는 곳을
모른단 말인가? 흥! 이 늙은이 앞에서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가 본데 그
렇게 쉽지는 않을걸?]
귀이낭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위소보는 그야말로 뼈
가 갈라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다섯 손가락이 다 부러질 것 같아 으
윽,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귀신수는 손을 뻗더니 그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잘 영글었군. 손 대면 톡 터질 것만 같구나.]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내가 그들을 데리고 자녕궁으로 가서 소란을 피우면 소황제는 전갈을
받을 것이고 미리 방비를 할 것이다. 그들이 손을 써서 태후를 죽인다
고 해도 황제가 죽는 것보다는 낫다.)
[조금 전에 저는 자녕궁에 갔었습니다. 어쩌면 황제는 태후에게 문안을
드리고 있는지도 모르니 우리 다시 자녕궁을 찾아가 보도록하지요.]
귀이낭은 그가 조금 전 자녕궁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의 말
이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이 이미 궁으로 들어온 이상 살아서 나갈 생각은 하지 않
네. 만약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부득이 자네의 조그만 목숨을 앗
아갈 수밖에 없네. 우리 네 사람이 함께 염라대왕을 만난다면 길을 가
는 동안 외롭지 않을 것이고, 내 아들도 자네와 짝이 되는 것을 퍽이나
기뻐할 걸세. 자네 생각은 어떤가?]
[짝이 되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승으로 가는 것은 아직 시
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그대는 염라대왕을 만나 보겠는가? 아니면 오랑캐 황제를 만나보겠는
가? 이 두 녀석 가운데 오늘 그대는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할 걸세.]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황제를 뵈러 갑시다. 그러나 미리 말해 두지만 황제
를 뵙게 되었을 때 그대 세 분이 알아서 손을 쓰시오. 나는 도울 수 없
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누가 그대의 도움을 청한다고 했는가? 그대는 우리들을 황제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기만 하면 즉시 놓아주겠네. 그 후의 일은 그대와 상관없
는 일일세.]
[좋소. 그렇게 합시다.]
위소보는 세 사람에게 잡혀서 자녕궁 쪽으로 걸어갔다. 귀종은 화원의
공작과 백학을 보고 홍미진진해 보였다.
위소보는 손가락질하면서 그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이라도 시간을 늦출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귀이낭은 답답하게 생각했으나 아들이 한평생 고질병에 시달려 왔고 이
세상에서 얼마 더 살지 못하므로 죽기 전에 기쁘게 해주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그의 흥취를 차마 깨뜨리지 못했다.
이때 멀리 자녕궁에서 한떼의 사람이 걸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 일행은 두 채의 교자를 떠메고 있었다.
귀이낭은 한 손으로 위소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아들을 잡고 모란 화
단 뒤로 가서 숨었다. 귀신수는 바로 그녀의 곁에 바싹 붙어 섰다. 그
행렬은 점점 가까이 왔다.
위소보가 보니 앞장 선 사람은 바로 경사방(敬事房)의 태감이었다. 뒤
의 교자 가운데 한 채에는 반드시 황태비(皇太妃)가 탔을 것이고 한 채
는 황태후(皇大后)가 탔을 것이었다. 교자 옆에는 각기 태감이 있어 교
자를 부축하고 교자 뒤에 있는 태감은 황라대산(黃羅大傘)을 들고 따르
고 있었다. 이어 수십 명이나 되는 내관숙위들이 그 뒤를 따랐다.
본래 태후가 궁에서 움직일 때에는 따르는 시위가 없었다. 아마도 황제
는 위소보의 전갈을 받고 시위들에게 보좌토록 한 모양이었다. 그는 갑
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나직이 말했다.
[조심하시오. 앞의 교자는 바로 오랑캐 황제이오. 그리고 뒤의 교자는
반드시 황태후일 것이외다.]
귀씨 부부는 이 행렬의 기세가 당당하고 자녕궁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는 틀림없이 황제와 태후라고 생각했다.
귀씨 부부는 가슴이 크게 설레이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은 일제히 아
들을 바라보았는데 눈빛은 애잔했다.
귀이낭은 나직이 말했다.
[얘야, 앞의 교자에 앉아 있는 것이 바로 황제이다. 그들이 가까이 오
기를 기다려서 내가 '쳐라' 하고 소리치면 우리 세 사람이 달려들어 사
람과 교자를 박살내야 한다.]
귀종은 웃었다.
[좋아, 이번에야말로 재미있게 되었군!]
두 채의 교자는 점점 가까워졌다.
위소보는 손에 땀이 괴는 것을 느꼈다. 경사방의 태감이 자꾸만 쉬이,
쉬이, 하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하라는 것이었다.
귀이낭은 나직이 소리쳤다.
[쳐라!]
세 사람은 동시에 달려나갔다.
이 세 사람이 달려가는 기세는 무척 빨라 광풍폭우가 갑자기 들이닥치
는 것 같았다. 곧이어 펑, 하는 커다란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세
사람의 주먹은 이미 첫번째 교자를 후려치고 있었다.
귀신수와 귀이낭은 황제를 때려죽이지 못하게 될까 봐 즉시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들고 삽시간에 교자 안을 잇따라 대여섯 번 찔렀다. 그러자
흰 칼이 들어갔다가 붉은 칼이 되어 나왔다. 칼날에서 피가 뚝뚝 흘렀
다. 교자 안에 수십 명의 목숨이 있다 해도 이미 끝장이 났을 것이었
다.
뒤를 따르던 시위들은 깜짝 놀라 일제히 호통을 치며 무기를 뽑아들고
앞으로 나아가 막아 섰다. 귀이낭은 부르짖었다.
[성공이다!]
그녀는 왼손으로 아들의 손을 잡고 곧장 북쪽으로 달려갔다. 귀신수는
장검을 급히 휘두르며 앞장서서 길을 뚫었다.
시위들이 어찌 그들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곧이어 세 사람은 수강궁
(壽康宮) 서쪽 꽃밭 길로 뛰어들었다. 궁녀와 태감들은 놀라서 아우성
치며 한무더기로 얽혔다.
사방에서 징소리가 울려퍼졌고 궁중의 수천 수백 개가 되는 쪽문들과
창문들이 꼭 닫혀지고 빗장이 걸리며 궁 안팎의 경계가 삼엄해졌다. 내
관숙위들과 궁문의 시위들은 엄히 각처의 요로와 통로를 지켰다. 곧이
어 궁 담장 밖에서 내부(內府) 삼기(三旗)인 호군영(護軍營)과 전봉영
(前鋒營), 효기영의 관병들이 하나같이 시위를 당기고 칼을 뽑아든 채
겹겹이 에워싸고 엄밀히 지켰다.
위소보는 귀씨 집안 세 사람이 황태비를 찔러 죽이는 데 성공한 줄 알
고 그냥 도망을 치자 속으로 크게 기뻐 즉시 화단 뒤쪽에서 달려나오며
큰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모두들 당황하거나 소란을 피우지 마시오. 황태후를 보호하는 것이 중
요하다!]
시위들은 목이 떨어진 파리처럼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위소보
가 나타나 지휘를 하자 마음속으로 안심이 되는 듯 약간 차분해졌다.
위소보는 큰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황후의 어교(御轎)를 에워싸듯 보호하도록 하시오! 갑자기 자
객이 침범해온다면 반드시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할 것이오.]
시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위소보는 시위의 손에서 칼을 낚아든 채 높이 쳐들고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우리가 충성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때이오. 황태후와
황태비를 위해 목숨을 바칠 때이니 모두들 태후의 성가(聖駕)
를 보호하도록 하시오.]
시위들은 다시 일제히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시위 부총관이며 백작 대인인 그가 위풍당당하게 시위들을 지휘하는 모
습이 매우 충성스러워 보였다. 생명을 초개(草芥)와 같이 여기는 듯해
서 모두들 마음속으로 탄복해 마지않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역시 남보다 뛰어난 데가 있다.)
십여 명의 시위들은 겹겹이 황태후의 성가를 에워싸고 지켰다. 위소보
는 다시 태감들과 궁녀들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들은 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가? 빨리 바깥쪽을 에워싸고 태후를
보호하라. 다시 자객이 침범해서 성가를 범하는 일이 있게 되면 내 먼
저 그대들의 값어치 없는 목부터 자를 것이다!]
태감들과 궁녀들은 자기의 머리통이 값어치는 별로 없지만 잘려져 나가
는 것은 크게 아쉽다고 생각했다. 칼을 휘두르는 위소보의 형색이 매우
위엄에 차 있어서 누구도 감히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몇 사람은
놀라 바지에 오줌을 싸기도 했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칼을 내리고 황태후의 어교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소신 위소보가 구하러 오는 것이 늦어 태후의 성가를 놀라게 했습니
다. 삼가 태후께 문안을 여쭙니다. 자객은 이미 물러갔습니다.]
태후는 교자 안에서 말했다.
[매우 좋네!]
위소보는 손을 뻗어 교자의 휘장을 들춰 보았다. 태후의 안색은 창백했
으나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 그대는 정말 훌륭하다. 정말 훌륭해! 나를 또 한번 구했구
먼!]
위소보는 말했다.
[태후께서 만안하시니 소신은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가만히 교자의 휘장을 내려놓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두 명의 시
위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빨리 황상께 알리시오. 태후께서는 편안하시니 황상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을 올리시오. 그대들은 위소보가 삼가 황상께 문
안을 여쭙는다고 전하고 시위들이 용감하게 나서서 성가를 호위하였기
때문에 자객은 이미 멀리 도망갔다고 전하시오.]
시위들은 명을 받고 달려갔다. 별안간 태후가 나직이 말했다.
[위소보!]
[예, 소신 여기에 있습니다.]
태후는 나직이 물었다.
[앞의 교자에 타고 있던 두 사람은 죽었는가?]
[두 사람이라뇨?]
[그대가 조심해서 보호하도록 하게.]
위소보는 대답을 했으나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두 사람일까? 어째서 조심하라는 것인가?)
그는 앞의 교자로 가서 휘장을 들추었다. 그 순간 위소보는 자기도 모
르게 앗, 하고 비명을 지르며 휘장을 내려놓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두 무릎이 시큰거리고 맥이 빠져 하마터면 땅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교자 안의 사람은 피와 살이 엉켜서 모두 죽어 있었다. 두 사람의 몸에
는 몇 군데 검에 의한 상처가 나 있었고 그 상처에서 피가 콸콸 흘러내
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가짜 태후 모동주였고 다른 한 사람은 키가 작고 뚱뚱한 남
자인데 오관은 이미 장력에 맞아 묵사발이 되어 있었다. 그 몸매로 미
루어 보니 놀랍게도 수두타가 아닌가? 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죽어 있
었다. 모동주가 교자 안에서 죽은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녀는 위소보가 자녕궁으로 압송해서 태후에게 넘긴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이 수두타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들 두 사람은 황태비의 교자
에 앉아 황태후의 보호를 받으며 어디로 가려던 것일까?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태후의 교자 앞에 가서 나직이 말했다.
[태후께 알립니다. 그 두 사람은 이미 죽었으며 묵사발이 되어있습니
다.]
태후는 웃었다.
[잘되었네. 우리는 자녕궁으로 돌아가세. 그 교자도 떠메고 가되 다른
사람들이 휘장을 들추어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하게.]
위소보는 대답했다. 그는 명을 내리고 자기 자신은 태후의 교자를 호위
했다. 이윽고 자녕궁에 이르러 휘장을 들추고 태후를 부축해서 나오도
록 했다. 태후는 다시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정말 훌륭하군.]
위소보는 그저 웃음으로써 칭찬에 대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이 훌륭하다는 것일까? 태후의 나이는 적지 않으나 얼굴 모
습은 꽤 예쁘군.)
태후는 손짓을 하며 그에게 자기를 따라 침전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며,
궁녀와 태감들에게는 모조리 나가라고 분부하고 위소보에게 문을 닫도
록 했다. 위소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만 얼굴이 붉어져
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이쿠! 야단났구나! 태후는 내가 훌륭하다고 칭찬했는데 혹시 나보고
노황제를 대신해 달라는 게 아닐까? 아! 가짜 태후에게는 수두타가 있
어서 그녀의 이부자리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런데 진짜 태후가 나를
이부자리 속으로 기어들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태후는 침대가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번 일은 정말 위험했는데 그대가 힘을 써 준 덕택에 무사했다.]
[소신은 태후와 황상께 커다란 은혜를 입은 몸이라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는 매우 충성심이 강해. 황상께서 그대를 임용하신 것은 역시 우
리들의 복이라고 할 수 있네.]
[그것은 태후와 황상의 은혜입니다. 소신은 그저 충성을 다해 주군을
위해서 힘쓰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옥황대제시여! 관음보살이시여! 보호해 주시옵소서. 그녀가 결코 나에
게 궁녀로 가장하고 이부자리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후는 다시 그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는데 그 웃음에 위소보는 그만 심
장에 솜털이 돋는 것 같았다.
이때 그녀가 말했다.
[죽은 두 반적과 교자를 함께 불에 태우도록 하게. 그리고 반 마디도
누설하지 않도록 하게. 조금 전 그곳에 있던 시위들과 궁녀, 태감들
은....]
거기까지 말하더니 한참 동안 망설이는 듯 입을 열지 못했다.
[태후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소신이 그들에게 입방아를 찧지 못하도록
할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태후는 그의 말이 거칠어지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번 일을 그대가 적절히 처리해 준다면 그대에게는 큰 이득이 돌아갈
것이네.]
위소보는 인사를 하고 말했다.
[소신은 애써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누가 누설한다면 태후께서
는 소신의 머리를 자르도록 하십시오.]
[그렇다면 안심했네. 나가 보게나.]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큰절을 하고 물러나왔다.
자녕궁에서 나오자 강희의 어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수백 명
의 숙위들이 어교의 전후좌우에서 호위하고 있었는데 위사들은 평소보
다 몇 배나 증가되어 있었다.
위소보는 한옆으로 피했다. 강희는 교자 안에서 그를 보고 외쳤다.
[소계자! 그대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게!]
그는 강희가 태후에게 문안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골똘히 생각해 보
았다.
[수두타는 어째서 황태비의 교자 안에 숨어 있었을까? 정말 희한하다!]
第117章. 위소보의 정체를 알아낸 강희제
강희는 자녕궁에서 나왔다. 위소보는 그를 따라 양심전으로 가서 밖에
서 불러 주기를 기다렸다. 한참 후에 전봉영 통령인 아제적(阿濟赤)이
양심전에서 나왔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황상께서는 반드시 전봉영을 움직여서 자객을 더욱더 엄밀히 경계하도
록 조처하신 모양이다.)
곧이어 태감이 위소보에게 들어오라는 전갈을 했다. 강희는 시위태감들
을 물리치고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
강희는 눈살을 찌푸리고 대전 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마음속에 어려
운 문제가 있는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듯했다.
위소보는 이와 같은 광경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황제는 나이가 점차
들어감에 따라 그 위세가 날로 더해서 매번 그를 만날 적마다 정답다는
느낌이 점점 사라지고 두려움이 많아져서 다시 옛날처럼 서로 붙잡고
비틀고 때리며 허물없이 지낼 수 없었다.
한참 후에 강희는 입을 열었다.
[소계자, 한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네.]
[황상께서는 총명하시고 지혜로워 제갈양도 감히 따르지 못하오니 생각
해 내신 방법은 반드시 고명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번에는 제갈양도 방법이 없네. 그대는 커다란 공로를 세 가지나 세
웠는데 나는 그대에게 단 한 가지도 상을 내리지 못했네. 모동주를 사
로잡은 것이 그 첫번째 공로이고, 몽고와 서장의 병마로 하여금 우리
청나라에 귀의하여 항복하게 한 것이 두 번째 공로이네. 그리고 조금
전 다시 사람을 내세워 자객을 물리치고 태후를 구한 것이 세 번째 공
로일세. 그대는 나이가 어린데 이미 백작에 봉해졌으니 아무리 큰 공로
를 세워도 그대를 왕으로 봉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강희는 껄껄 웃었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강희가 자기에게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모든 것은 태후와 황상의 홍복이십니다. 모든 공로는 황상 자신의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황상은 스스로 관직을 올리실 수 없지요. 그렇지
않으면 황상께서는 마땅히 세 계급을 올려야 했습니다.]
강희는 다시 껄껄 웃더니 말했다.
[황제는 자신의 벼슬을 올릴 수는 없지만 옛부터 얼마나 많은 황제들이
자기에게 존호 내리기를 좋아했는지 모른다네. 경사스러운 일이 있거나
조그만 싸움에 이기기만 해도 몇 개의 존호를 가하게 되지. 물론 말로
야 신하들이 공손하게 청했다고 하지만 기실은 황제가 자기 얼굴에 금
칠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황제가 자화자찬을 한다는 것은 퍽이나 가소
로운 일일세. 더군다나 많은 폭군들 역시 거룩합네, 인자합네, 하면서
문무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명철하고 지혜롭다는 등, 그야말로 크게 찬
사를 늘어놓았지. 황제가 멍청하면 멍청할수록 그에 대한 칭호는 더욱
길어지니 그야말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 거룩하고 어진 군주
가운데 요순우탕보다 뛰어난 임금님이 어디 계시겠는가? 그러나 요는
그냥 요이고 순은 그냥 순일 뿐일세. 후세 사람이 속으로 우러러보며
기껏해야 큰 대자를 붙여 대요, 대순이라고 할 뿐이지. 황제 노릇을 하
고 있는 자가 만약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헤아려 보는 눈이 있다면
존호를 수십 자나 되도록 길게 갖다붙이지는 않을 것이네.]
[오생어탕이 자기 스스로 존호를 붙인 것은 아니군요. 황상께서는 오생
어탕이시니 자연 존호를 붙일 수가 없지요. 하지만 소신이 볼 때 오삼
계를 평정한 후 황상께서 만약 몇 개의 칭호를 더 보태서 멋을 내지 않
는다면 너무나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강희는 웃으며 물었다.
[무슨 손해를 본다는 것인가?]
[오삼계를 평정한 후에 황상께서는 공신들을 크게 봉하고 삼군을 포상
하게 될 것이니 모두들 벼슬이 오르고 재물이 늘어날 것이 아니겠습니
까? 그런데 황상께서는 벼슬도 오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창고
문을 활짝 열고 누런 황금덩이와 허연 은자를 한 상자씩 꺼내 마구 뿌
려대야 할 것이니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희는 웃었다.
[그대는 학문이 없어서 못난 소리만 하는군! 역적을 소탕하고 제거하면
천하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안거하며 즐겁게 생업을 이어갈 것이니, 그
게 바로 벼슬이 오르고 재물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군요.]
[하지만 오 역적을 탕평(蕩平)하게 된다면 군신들은 반드시 존호를 올
리려고 할 것일세. 아첨 대왕들은 짐을 위해 힘을 쓰거나 걱정을 함께
나누지 않았으면서도 일단 어떤 일이 성공하면 성공의 과실을 함께 누
리려 하면서 크게 아첨을 한단 말일세.]
[황상께서는 모든 일에 선견지명을 갖고 계시군요. 우리들은 그때 조용
히 지켜보죠. 벼슬아치 가운데 황상께 존호를 가하려 하는 사람이 있다
면 그 사람이 바로 아첨 대왕이 될 것입니다.]
[맞았네. 제기랄! 그때 나는 그놈의 개 같은 볼기짝을 걷어차겠네.]
군신은 서로 마주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과연 강희의 짐작대로 훗날 오
삼계의 난이 평정된 이후 군신들은 다투어 존호를 올리고 공덕을 칭송
하고자 했으며 크게 아첨을 떨려고 했다.
이에 강희는 이런 유시를 내렸었다.
<도적을 평정한 후에 군신은 마땅히 여러 지방을 잘 다스려야 할 것이
고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로하여 감화되도록 해야 하며, 반드시 청렴결
백함을 근본으로 삼아 태평성대를 이루어야 할 것이니라. 만약 공을 세
웠다고 해서 존칭을 올리려고 하거나 함부로 상을 내려주십사 하고 청
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니라.> 매우 명백하게 자기 의사를 표명한 것인
데 신하들은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강희가 거짓으로 사양한다고 생각하
고 다시 존호를 가하자고 청했다. 강희는 다시 다음과 같은 유시를 반
포하기에 이르렀다.
<짐은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하는 동안 옛날 임금들이 일을 행함에 있어
서 시종일관하지 못함을 보고 이를 항상 경계해 왔도다. 밤낮 옷을 입
고 정사를 보았으며 음식도 먹는둥 마는둥 했노라. 그리고 추운 날이나
더운 날이나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노라. 어제는 밤중에 몇 가
지 상주문이 올라왔는데 밤을 새워 천하의 생명들을 위해 일을 처리했
노라. 우리는 모두 청렴결백해야 할 것이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지 못하
는 한 임금과 신하들은 전혀 공로가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만약에
짐의 존호를 올리고 그대들의 관직을 올린다면 부끄러움만 자초할 뿐이
지 무슨 영광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이렇게 되자 신하들은 헛물을 켠
꼴이 되었고 심히 창피하여 다시는 감히 청하지 못했다. 이것은 물론
훗날의 일이었다.
강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황제 스스로 존호를 붙이는 일은 흔한 일이니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네. 명나라 조정만 하더라도 정덕(正德) 황제라고 있었는데 이 황제야
말로 정말 너무하셨지.]
[그 황제는 소신도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강희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몇 번 보았다고? 꿈속에서 말인가?]
[아니죠. 소신은 무대에서 보았습니다. 매룡진(梅龍鎭)이라는 연극이
있었는데 정덕 황제가 강남에 놀러 갔을 때 매룡진에서 술을 파는 소저
인 이봉저(李鳳姐)를 만나게 되었죠. 이봉저가 아름답게 생겨서 정덕
황제는 그녀와 히히덕거리게 되었지요.]
강희는 웃었다.
[정덕 황제는 민복 차림으로 구경나가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봉저
와 그런 일이 정말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 황제는 자기에게 존호를 가
하지 않고 자기에게 벼슬 봉하기를 좋아했는데 그는 자기 자신에게 총
독군무위무대장군총병관(總督軍務威武大將軍總兵官)이라는 벼슬을 내렸
고 바람이 불어 풀이 흔들려도 유시를 내리고 싶어했지. '북쪽의 도적
들이 변방을 침범하니 특별히 총독군무위무대장군총병관인 주수(朱壽)
가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할 것을 명하노라.' 주수는 바로
자기의 이름이었지. 그 후에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기실은 패전했건만
그는 승전했다고 하면서 공로가 무척 크다는 이유로 성지를 내려 자기
를 진국공(鎭國公)에 봉했으며 녹봉으로 오천 석을 보댔지.]
위소보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황제 노릇은 하지 않고 진국공 노릇을 하다니, 정말 멍청하군요.]
강희는 웃었다.
[당시 대신들은 일제히 반대를 했으며 진국공에 봉한다면 황제의 조상
삼 대까지도 추가하여 벼슬에 봉해진다고 했다. 황상 스스로 진국공이
라 칭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그렇게 된다면 황제의 조상 삼 대는 모
두 황제인데 그들의 계급을 어찌 내리겠느냐고 주장했지. 그런데도 정
덕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드시 진국공이 되어야 한다고 했으며, 그
후에 다시 공을 세웠다고 해서는 자기를 태사(大師)에 봉했다네. 다행
히 그가 일찍 죽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봉해진 말은 더욱더
대단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득이 자기 스스로 자신의 제위를 찬탈하여
아예 황제 노릇을 하게 되었을 것이네.]
위소보는 찬탈이란 말을 듣고는 감히 더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헛웃음
만 몇 번 날렸다.
강희는 말했다.
[정덕 황제는 정말 멍청한 일을 많이 했으며 백성들이 고달프도록 했다
네. 그것은 그 자신이 나쁘기도 하지만 태반은 태감과 신하들이 그를
잘못되게 가르친 탓일세.]
[예, 예. 나쁜 황제는 나쁜 태감과 간신들을 임용하기를 즐기지만 훌륭
한 황제는 훌륭한 태감과 충신들을 임용하기를 즐기죠.]
강희는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없네. 훌륭한 황제 곁에도 나쁜 태감과 간신들이 있
기 마련일세. 황제가 멍청하지만 않으면 설사 상대방에 의해서 한때는
속아넘어가더라도 끝내는 간신의 교활한 점을 폭로하게 되지.]
[예,예.]
그의 가슴은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강희는 물었다.
[모동주라는 그 계집년의 간부는 이름이 무엇인가?]
[그는 수두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이름은 소신도 모릅니다.]
[그가 그토록 뚱뚱해서 그야말로 살코기로 빚은 공 같다면서 어째서 수
두타라고 하는가?]
[소문에 듣자하니 그는 키가 무척 크고 비쩍 말랐었는데 후에 신룡교
교주가 내린 독약을 먹고 체구가 축소되어 땅딸하게 되었다고 하더군
요.]
강희는 다시 물었다.
[그대는 그가 모동주와 함께 신(愼) 황태비의 교자 안에 숨어 있으면서
태후를 협박해서 궁궐 밖으로 벗어나려고 한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가?]
위소보는 속으로 재빨리 궁리를 했다.
(황상께서는 처음에 내가 사람을 보내 자객을 물리치고 태후를 구했으
니 공로가 크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 두 사람이 황태비의 교
자 안에서 태후를 협박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귀씨 집안의 세 사람이
황상을 찔러 죽이려고 한 사실을 황상께서는 아직도 모르고 있겠구나.
하지만 귀씨 집안의 세 사람이 도망을 쳤든, 사로잡혔든, 맞아 죽었든,
끝내 속일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지?)
강희는 그가 망설이며 대답하지 않자 물었다.
[아니? 무엇을 머뭇거리는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소신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
째서 그 두 명의 반적이 태비의 교자 안에 타고 있었는지 정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생각해낼 수가 없군요. 아무쪼록 황상께서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내 그대에게 먼저 묻겠네. 그대는 교자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황태비
인 줄 알고 시위들을 지휘하여 어교를 습격하도록 했는가?]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황상께서는 궁중의 시위들이 수두타와 모동주를 죽인 줄로 아시는구
나. 이 일은 끝내 들통이 날 것이니 나는 역시 솔직히 이야기하자.)
[소신은 죽을죄를 한 번 지었습니다. 황상께서는 용서하십시오.]
그는 무릎을 꿇었다. 강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소신은 황상의 성지를 받자와 반적 모동주를 자녕궁으로 압송한 후에
자녕궁을 나와 어화원을 지나게 되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가산 뒤쪽에
서 시위와 태감 복장을 한 세 사람들이 불쑥 나와서 소신을 잡았으며
소신에게 황상이 계신 곳으로 안내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무공은 지
극히 고강하여 소신의 손가락이 하마터면 그들에게 부러질 뻔했습니
다.]
그는 왼손을 쳐들었다. 정말 다섯 손가락은 모두 응어리가 져 있었고
부어 있었다.
[그들이 왜 나를 찾았지?]
[그 세 사람은 오삼계가 파견해 온 자객이 틀림없습니다. 소신은 그들
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그들이 황상을 침범하도록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아니, 마침이 아니라 공교로운 것이
죠. 공교롭게도 태후와 황태비의 난가가 도착했습니다. 그 세 명의 자
객은 멍청하게 황태비의 교자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황상이신 줄 알고
달려나가 흉악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동주와 수두
타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태후와 황상의 홍복제천이 아니
겠습니까? 그 세 명의 자객이 시위들에게 격살을 당했는지 아니면 잡혔
는지 소신이 나가서 알아보고 상주하겠습니다.]
[자객들이 그렇게 멍청할 리가 없네. 그대는 그 자객들이 나를 범하느
니 차라리 황태비를 해치도록 하려는 것이었겠지? 그들이 손을 쓰게 된
다면 궁중은 크게 소란스러워질 것이고 나를 해칠 수 없게 될 뿐만 아
니라 그대의 하찮은 목숨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닌
가?]
위소보는 강희에게 정곡을 찔리자 억지를 쓸 수 없어 연신 큰절을 했
다.
[그대가 자객으로 하여금 황태비를 해치도록 유도한 일을 생각하면 마
땅히 목을 잘라야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대는 나에 대해 삼푼 정도 충
성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위소보는 재빨리 말했다.
[삼 푼이 아닙니다. 열 푼입니다. 아니 백 푼입니다. 천 푼이며 만 푼
의 충성심과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강희는 미소지었다.
[그렇지 않을걸?]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강희는 발을 뻗쳐 그의 이마빼기를 가볍게 톡 차더니 웃었다.
[제기랄! 일어나거라.]
위소보는 깜짝 놀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는 큰절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강희는 웃었다.
[그대가 세 가지 큰 공을 세웠기에 그대에게 어떤 상을 내릴 것인지 생
각해내지 못했는데 이제 생각해냈다. 그대가 자객을 지시해서 윗사람에
게 흉악한 짓을 범하도록 했으니 그야말로 신하답지 못한 마음을 가진
것일세. 따라서 나는 그대에게 공을 세워 속죄한 것으로 하겠으니 더
이상 공로가 남아 있지 않네.]
[매우 좋습니다. 매우 좋습니다. 이것은 황상께서 패구 노름을 하는 것
처럼 앞에서는 소신이 이겼지만 뒤에서는 황상이 이기신 것이라 모두
무승부가 된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저의 것을 잡수시지도 않고 저의 몫
을 내놓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벼슬이 오르지 않아도 좋다. 설마 하니 그대가 나를 위무대장군이나
진국공에 봉할 수 있겠는가? 설사 태사에 봉한다 해도 대단할 것은 없
다. 당백호(唐伯虎)에 나오는 이야기에 보면 화태사(華太師)
의 두 아들 화대(華大)와 화이(華二)는 바보 멍청이였다. 만약 화태사
의 두 아들처럼 장래의 내 아들 역시 그토록 멍청하다면 그야말로 재수
옴붙은 격이지.)
강희는 말했다.
[그 땅딸한 도적의 마음 씀씀이는 정말 간악하고 음험하기 짝이 없었
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대에게 잡히자 그는 그대가 궁으로 데리
고 들어와 태후에게 바쳐서 처리하리라 짐작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자녕
궁으로 뛰어들어와 윗사람을 범하는 일을 저질러 태후를 협박하기에 이
른 것이네. 궁중의 시위들이 수 배나 더 불어나고 경계가 삼엄해지자
그는 지난번처럼 사람들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담장을 넘어 도망
칠 자신이 없었지. 그러나 공교롭게도 엉뚱한 자객이 자신들을 죽일 줄
은 결코 생각해 내지 못했겠지.]
위소보는 확연히 깨달은 듯 말했다.
[그랬었군요. 태후와 황상께서 정말 홍복제천(洪福齊天)이라는 말은 조
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늙은 갈보를 보내주었을 때 태후는 재수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군. 마치 내가 삼백 냥의 은자를 빚지고 갚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
었지. 그때 이미 수두타는 침전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수두
타는 자녕궁에서 적지 않은 날을 두고 기다렸을테니 길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 커다란 침대에서 며칠 밤을 잤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태후의 침전에서 얼마 동안이나 기다렸을까? 어쩌면 며칠이 되는지 모
르겠구나. 아이쿠! 야단났다. 수두타와 태후가 방안에서 며칠 동안 함
께 있었다면 무슨 짓을 했는지 누가 아는가? 오대산 노황야의 마누라가
아무래도 바람을 피웠겠는걸?)
강희는 그가 마음속으로 이런 조잡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태후와 나의 복도 크지만 그대의 복도 적지 않았네.]
[소신은 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황상을 오랫동안 따르다보니 황상의
복에 감염되었나 봅니다.]
강희는 껄껄 소리내어 웃더니 물었다.
[그 귀신수라는 자는 '신권무적'이라는 별호가 있다는데 무공이 정말
그토록 무서운가?]
강희가 크게 웃으며 그 같은 말을 하자 위소보는 마치 천둥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아 몸을 휘청거렸으며 두 다리가 시큰거리고 맥이 빠져서 말
했다.
[그건....그건....]
강희는 호통을 질렀다.
[천부지모, 반청복명! 위 향주, 그대는 매우 당돌하더군!]
위소보는 그만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땅이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
같았으며 머릿속이 그야말로 어지러워질 대로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첫
번째 떠오르는 생각은 손을 뻗쳐 신발목의 비수를 뽑아들까 하는 생각
이었다. 그러나 즉시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알고 있다. 그의 무공은 나보다 고강하니 나는 일검
으로 그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설사 그를 죽일 수 있다 해도 난 결
코 그를 죽이지 않겠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즉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소계자, 항복이오! 아무쪼록 소현자께서는 저의 목숨을 구해주십시
오!]
소계자라는 한 마디가 귀에 들리자 강희의 뇌리에는 대뜸 옛날 그와 무
공을 겨루며 즐겁게 놀았던 일들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대는....줄곧 나를 잘도 속였었지!]
위소보는 큰절을 했다.
[소신은 비록 천지회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황상에 대해서는 이만저만
충성하지 않았으며 눈꼽만치라도 황상께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강희는 싸늘히 말했다.
[그대가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반역할 뜻이 있었다면 내 어찌 그대를 오
늘까지 살아 있도록 용납했겠는가?]
위소보는 강희의 말투가 약간 누그러진 것을 느끼고 재빨리 큰절을 했
다.
[황상께서는 오생어탕이시고 제갈지량(諸葛之亮)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소신은 충성을 다해서 군주를 섬기고 있으니 그야말로 관운지장(關雪之
長)에 견줄 수 있습니다.]
강희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속으로 욕을 했다.
(제기랄! 뭐가 제갈지량이고 관운지장이야?)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때 조금이라도 얼굴 표정을 누그러뜨린다면 어릿
광대 같은 위소보가 더욱더 날뛸 것이고 어쩌면 기어올라 수염마저 잡
고 흔들지도 모를 일이니 그렇게 된다면 다시는 그를 길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호통을 쳤다.
[너는 자초지종을 모두 실토해라! 한 마디라도 거짓말이 있으면 나는
즉시 너를 짓이겨 개고기 젓을 담겠다.]
강희는 최후의 한 마디를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위소보는 바닥에 엎드려 있어 그의 안색이 이미 부드러워진 것을 보지
못했다. 그저 그의 말투가 준엄한 것을 느끼고 재빨리 큰절을 했다.
[예, 예. 황상께서 모든 것을 아시는데 소신이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감추겠습니까?]
그는 강친왕부로 가서 오배를 죽인 일이며 천지회의 사람들에게 사로잡
히게 된 일, 그리고 어떻게 하여 진근남을 사부로 모시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하여 청목당의 향주가 되었는가 하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씨 집안의 세 사람을 어떻게 만났으며 주사위
던지기에서 자신이 졌기 때문에 그림을 그려 은밀히 상주한 일이며, 자
녕 화원에서 귀이낭에게 잡혀 황태비의 난교를 습격하도록 하여 황제에
게 위험을 알리도록 한 일들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사십이장경을 훔치
는 등의 요긴한 대목은 물론 들먹이지 않았다.
그가 길게 늘어놓는 말 가운데는 놀랍게도 거짓말은 매우 적었고 사실
이 대부분이었다. 그야말로 그는 난생처음으로 진실을 털어놓는 것이었
다. 강희는 끊임없이 천지회의 사정을 물었고 위소보는 솔직히 아뢰었
다. 강희는 한참 동안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인분개일수시(五人分開一首詩), 신상홍영무인지 (身上洪英無人知).]
위소보는 어리둥절해졌다.
(황제께서는 우리 회에 몸담고 있는 형제들이 서로 알아보는 암호까지
도 알고 있었구나.)
그리하여 그는 이어 읊었다.
[자차전득중형제(自此傳得衆兄弟 ), 후래상인단원시(後來相認團圓時).]
강희는 읊었다.
[초진홍문결의형(初進洪門結義兄), 당천명서표진심(當天明誓表眞心).]
위소보가 읊었다.
[송백이지분좌우(松伯二枝分左右), 중절홍화결의정 (中節洪花結義亭).]
강희는 말했다.
[충의당전형제재(忠義堂前兄弟在), 성중점장백만병(城中黑胡午百萬
兵).]
위소보는 읊었다.
[복덕사전래서원(福德祠前來誓願), 반청복명아홍영(反淸復明我供英).]
천지회 규칙에 의하면 이 두 마디의 시를 읊고 난 후에는 상대방이 스
스로 자기의 성명을 밝히고 어느 당에 속해 있으며 거기서 직분이 무엇
인가를 밝혀야 했다. 그러나 강희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황상께서도 저희 희에 몸담고 계셨군요. 그런데 어떤 당에 계신지요?
그리고 몇 대의 향을 피우시는지....]
거기까지 이야기하다 보니 그는 자기가 너무도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청나라의 황제인데 어째서 반청복명을 하겠는가?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이 멍청한 녀석을 때려줘야겠구나!]
그는 철썩철썩 소리가 나도록 자기 뺨을 후려쳤다. 강희는 몸을 일으키
더니 서성거리며 말했다.
[그대는 만주의 벼슬아치로서 우리 대청나라의 녹봉을 먹고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반청복명의 생각을 지니고 있었네. 만약 그대의 공로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대에게 백 개의 머리가 달려 있다해도 소용없을
걸세.]
[예, 예. 황상께서 넓으신 아량을 베푸셨기 때문에 소신의 머리통을 지
금까지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소신은 즉시 천지회에서 탈퇴하겠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천지회의 향주 노릇은 그만두도록 하겠습니다. 이
제부터는 결코 반청복명을 하지 않겠으며 반명복청(反明復淸)을 전문적
으로 하겠습니다.]
강희는 우스운 것을 참으며 속으로 욕을 하면서 말했다.
[우리 대청나라가 망한 것도 아닌데 무엇을 회복한다는 것이야? 터무니
없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군.]
위소보는 재빨리 말했다.
[예, 예, 소신은 우리 군주의 강산이 만만 년이나 지탱할 수 있도록 보
살피겠습니다. 황상께서 저에게 무엿을 희복하라고 하시면 저는 무엇을
희복하겠으며 저에게 그 무엇을 반대하라 하시면 소신은 그 무엇을 반
대하겠습니다.]
강희는 나직한 음성으로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좋아, 나는 네가 천지회를 배반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예,예.]
그러나 그는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으므로 얼굴에 자연히 난처한 기
색을 떠올렸다.
[그대는 입으로는 교묘한 말만 늘어놓으며 충성심이 강하다고 말했는데
그 역시 정말인지 거짓인지 모르겠군.]
위소보는 재빨리 말했다.
[틀림없는 진짜 금과 같습니다. 더 참될래야 참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대의 뒷조사를 해 본 결과 어찌됐든 그대는 나에게 대역무도한
악행이 없었네. 그러나 그대가 나의 분부를 따라 이번에 천지회를 뒤엎
어, 풀을 베고 뿌리를 뽑는 격으로 반역도들을 모조리 죽인다면 큰 공
을 세워 속죄한 것으로 하고 그대가 기군망상한 큰 죄를 용서하도록 하
겠네. 어쩌면 그대에게 상을 내릴지도 모르지. 만약에 그대가 여전히
교활하게 속임수를 쓰거나 두 얼굴을 하고 있으면, 흥! 흥! 설마 내가
천지회의 위 향주를 죽이지 못할 줄 아는가?]
위소보는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연신 말했다.
[예, 예. 황상께서 소신을 죽이는 것은 개미 한 마리를 눌러죽이는 것
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지만....하지만 황상께서는 오생어탕이시니 충
신을 죽이지 않습니다.]
강희는 코웃음을 쳤다.
[그대가 무슨 충신인가? 그대는 꼬마 간신이지.]
[황상께서는 밝게 살피십시오. 소신이 황상께 감추고 어떤 일을 말하지
않은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이지 간신은 아닙니다. 결코 동탁이나
조조처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아. 그대가 설사 간신이 아니라 해도 하얀 코의 어릿광대이네.]
위소보는 황제가 자기를 그와 같은 인물에 비유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
워지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말했다.
[어릿광대라면 어릿광대가 되죠. 그야말로....시천(時遷) 주광조(朱光
祖)처럼 황상을 위해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강희는 빙그레 웃었다.
[흥! 그대는 자꾸만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군. 이렇게 하
지. 그대는 병마를 데리고 천지회, 목왕부, 그리고 귀신수 등 반적들을
모조리 잡아오게. 만약 한 명 놓아주면 그대의 손을 하나 자르게 될 것
이고 네 사람을 놓아준다면 한 쌍의 손과 한 쌍의 발을 모조리 자르는
것일세. 그리고 다섯 명을 놓아주면 그때는 그대의 어디를 잘라 낼까?]
[그건....그건....소신은 부득이 진짜 태감노릇을 해야되겠지요.]
강희는 그만 참을 수 없다는 듯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욕을 했다.
[제기랄! 그대는 꽤나 주판알을 굴리는군.]
위소보는 울상을 짓고 말했다.
[황상께서 저의 두 손과 두 발을 자른다면 소신은 십중팔구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목 위의 머리통을 자르지 않아도 자른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목왕부의 일까지 다 알고 있다니 정말 소식이 밝구나.)
강희는 소맷자락 안에 손을 집어넣더니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 읽었다.
[천지회에는 총타주 진근남, 청목당의 향주 위소보, 그 부하에 이력세,
서천천, 현정 도인, 전노본, 마언초, 풍제중 등이 있다. 목씨 집안에는
목검성, 유대홍, 오립신 등이 있으며 궁 안으로 들어온 세 명의 자객은
귀신수, 귀이낭, 귀종이다. 그리고 하나, 둘, 셋, 넷, 다섯....모두 사
십삼 명의 반적이 있는데 그대를 빼면 모두 사십이명이 되는 셈이다.]
第118章. 장렬한 죽음
위소보는 다시 무릎을 끓고 큰절을 두 번 올린 후 말했다.
[황상, 그 사람들은 반청복명을 하겠다고 했으나 그들은 반대하는 데
성공하지도 못했으며 또 회복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저로 하여금 그들에게 가서 황상께서 위로 천명을 알고 아래로는 지리
를 알고 있으며 과거와 미래를 그야말로 훤히 내다보신다고 말하겠습니
다. 그리고 황상께서는 대청나라의 강산을 만만 년 동안 유지하리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틀림없는 일이고 청나라에 반대해봤자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니 모두 흩어지자고 말하겠습니다.]
강희는 손을 뻗쳐 탁자를 힘껏 내리치며 날카롭게 외쳤다.
[그대는 한마음 한뜻으로 명령에 반대하여 반적들을 잡으러 가지 않겠
다는 것인가?]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강호의 호걸들은 의리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 내가 만약 사부님을 잡
는다면 황상께선 반드시 그의 머리를 자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위
소보는 친구를 팔아먹은 오삼계처럼 될 것이 아닌가? 아!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소계자로 가장을 했단 말인가? 이 백작대인도
그만둬야겠다. 그리고 방법을 강구해서 사부님께 도망치도록 통지를 하
고. 빌어먹을! 뺑소니치는 것이 상책이다.)
강희는 그가 빨리 대답하지 않자 더욱 화가 나서 호통을 내질렀다.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설마 그대 스스로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내가 그대에게 개과천선할 좋은 기회를 주는데
도 여전히 나와 흥정을 하겠다는 것인가?]
[황상, 그들이 황상을 해치려고 하는 것을 저는 반대하고 막았습니다.
소신은 그야말로 황상께 의리를 다했습니다. 황상께서 그들을 잡으려고
하는데 소신이 그 가운데 낀다면 사람 노릇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
니까 부득이 용서를 하라고 빌 수밖에 없는데, 이 또한 의리를 다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희는 매우 화를 냈다.
[그대가 마음속으로 반적들을 감싸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순종과 반역
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고 또한 안하무인 격인데 무슨 의리를 지킨다
는 것인가?]
그리고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대가 오늘 나의 목숨을 구하고 부황과 태후를 구했으니, 내가 만약
그대를 죽인다면 그대는 마음속으로 틀림없이 승복할 수 없을 것이고
내가 그대에게 의리를 저버렸다고 하겠지?]
이 지경에 이르자 위소보는 아예 염치불구하기로 작정을 했다.
[그렇습니다. 옛날 황상께서는 소신이 설사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저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세야의 금쪽 같은 입으로
한번 말한 것을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죠.]
[좋아, 그대가 암기력이 좋아 일찌감치 그와 같은 바둑알을 미리 박아
두었다면....흥! 기심가주(基心可誅)로군!]
위소보는 기심가주라는 숙어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섕각
해봐도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강희를 알게 된 이후 지금까
지 한 번도 그가 이처럼 성질부리는 것을 보지 못한 터라 속으로 생각
했다.
(나의 머리통은 이미 태반이 잘린 것이나 다름없다. 소황제의 성질로는
사정을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니 도리를 따져 이야기할 수밖에 없구나.)
[황상, 저는 황상을 사부로 모신 적이 있으며 황상께서는 저를 제자로
거둔다고 응낙한 적이 있습니다. 진근남 역시 저의 사부입니다. 만약
제가 황상을 해칠 마음을 품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부를 기만하고 조상
을 없애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그 사부를 해치려고 한다
면 역시 사부를 기만하고 조상을 멸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더군다
나....더군다나 황제께서 소신의 머리를 자르는 것은 그야말로 흔하디
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부께서 제자의 머리통을 자르는
것은 아무래도 뭔가 잘못되었을 것입니다.]
강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를 제자로 거두겠다는 장난말을 확실히 한 적이 있다. 이 녀석은 총
애를 믿고 무법천지로 날뛰고 있구나. 어이없게도 나롤 천지회의 도적
우두머리와 함께 놓고 논하다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군.)
강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멀리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가 들렸고, 창창창! 무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위소보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자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부님께서는 가만히 계십시오. 제자가 앞
을 가로막겠습니다.]
강희는 속으로 코웃음치며 생각했다.
(이 녀석에게 천 가지 잘못한 일이 있다 해도 나에게는 역시 충성과 사
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그대는 나를 다시는 사부로 부르지 말게. 그대는 본문의 문규를 지키
지 않았으니 본 사부는 그대를 제명하겠네.]
강희는 그렇게 말하고나자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이때
발걸음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몇 사람이 양심전 문 밖으로 달려오는 소리
가 들렸다. 위소보는 양심전 문 쏙으로 달려가서는 즉시 빗장을 들어
문을 걸었다. 이것은 목숨에 관계되는 일이라 손발의 재빠름은 그야말
로 무엇에 견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호통쳐 물었다.
[게 누구인가?]
밖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궁 안에 세 명의 자객이 침입했습니다. 그러나 내관
숙위들이 이미 그들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어 얼마 후면 사로잡을 수 있
을 것입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귀씨 집안의 세 사람은 끝내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호통을 내질렀다.
[황상께서도 알고 계신다. 빨리 시위 백 명을 더 불러서 양심전 전후에
서 어가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하고 지붕 위에도 삼십 명이 서서 지키도
록 하게.]
양심전 밖의 시위 우두머리는 대답을 하고 달려나갔다. 강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치밀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그날 오대산에서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 그 백의 여승은 지붕의 기왓장을 흩뜨리고 뛰어내렸는데 정말 방비
하기 어려웠다. 다행히도 이 녀석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내 앞을 가
로막아 일검을 물리칠 수 있었지.)
잠시 후 호통치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
아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다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강희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세 명의 자객도 잡지 못하다니 만약 삼십 명이나 삼백 명, 삼천 명이
온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황상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귀신수 같은 인물은 세상에 좀처럼 없
습니다. 기껏해야 사, 오 명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잠시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발걸음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재
차 칼과 검이 철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갈하게 된 내관숙위들이
대전 밖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양심전 지붕 위
의 사방 기왓장들도 소리를 내었다. 높이 오를 수 있는 숙위들은 지붕
위로 뛰어을랐다. 위사들은 황제가 바로 양심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모두 양심전의 처마나 모퉁이 위에서 지켰지 감히 양심전 지붕 한가운
데로는 나가지 못했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의 머리 위에 서게 되는 셈
이니 그야말로 불경스러운 죄를 짓게 되는 것이었다.
강희는 양심전 안팎에 적어도 사, 오백 명의 시위들이 지키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자객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대는 이것이 무엇인지 보게.]
그리고 그는 소맷자락 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탁자 위에 던지며
말했다.
위소보가 다가가 바라보니 한 폭의 그림이었다. 중간에 그려진 것은 한
채의 커다란 집이었고 집 앞에는 깃대와 돌사자가 세워져 있는 것이 자
기의 백작부와 약간 비슷했다. 그리고 집 사방에는 십여 문의 대포가
나열되어 있었고 대포 주둥이는 그 큰 집을 겨냥하고 있었다. 다시 자
세히 살펴보니 그 집은 보면 볼수록 자기가 살고 있는 집 같았다.
[그대는 이 집을 알고 있는가?]
[소신이 살고 있는 집과 약간 비슷하군요.]
[그대가 안다니 잘되었네.]
그리고 그는 그림 속 대문의 편액에 새겨져 있는 네 글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충용백부(忠勇伯府)라는 네 글자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그 말을 듣자 과연 자기 집이 틀림없구나 생각했다. 그러자
다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자기의 집 사방에 이토록 많은 대포들이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니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친히 외국의 탕약망과
남희인이 대포를 시험하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대포가 한 번 터지자
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야말로 화염이 충천하고 흙과 돌들이 십여 장
높이로 치솟지 않았던가? 자기 몸에 설사 백 가지가 넘는 호신보의를
입고 있다 해도 그야말로 갈기갈기 찢어져 개고기로 담은 젓갈처럼 되
고 말 것 같았다. 대포가 한 번 쏘아지고 난 후 그 위세를 생각해볼 때
자기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강희는 천천히 말했다.
[오늘 밤 그대들 천지회와 운남 목씨 집안, 화산파의 귀가, 그리고 왕
옥파의 문하 사도학 등은 모두 그대의 집에서 모임을 갖겠지? 나의 이
십이 문의 대포는 이미 그대의 집 주위 민가에 설치되었고 포탄과 황약
도 이미 장치되었네. 대포 주둥이를 드러낸 채, 심지에 불을 당기기만
하면 단 한 명의 반적들도 목숨을 건질 수 없게 될 것일세. 설사 죽지
않고 도망쳐 나온다 해도 바깥에서 에워싸고 있는 많은 전봉영의 병마
들이 결코 그냥 둘 리가 없지. 조금전 그대는 전봉영 통령 아제적을 만
났겠지? 그는 이미 군사를 불러 손을 쓸 준비를 하고 있네. 전봉영은
언제나 그대가 거느리는 효기영과는 화목한 편이 못 되었으니 그대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할 걸?]
위소보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황상께서는 모든 것을 헤아리셨군요. 이제서야 소신에게 밝혀 말씀하
시는 것은 바로 소신의 목숨을 살려주신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소신이
예전에 세운 조그만 공로는 이로써 속죄를 하느라고 깨끗이 없어져 조
금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강희는 빙그레 웃었다.
[그대가 알았으면 좋아. 이것은 우리 두 사람이 패구 노름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네. 그대가 처음에는 많은 은자를 땄지만 마지막 판에서 나한
테 모두 지고 만 셈이야. 그러니까 그전에 이긴 것을 모두 갚은 셈이
되었고 이후부터는 이기고 지는 것이 없게 되는 셈일세. 우리가 다시
놀고자 할 때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일세.]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정으로 황상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소신은 오로지 한마음으로 황
상의 심부름을 하겠으며 천지회는 말할 것도 없고 천구회(天九會)의 향
주라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초조하게 생각했다.
(사부님들과 오늘 밤 나의 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어떻게 하면 그들을
못오게 하지?)
[황상께서 저에게 분부하여 이 몇 명의 반적들을 잡으라고 한 것은 그
저 소신의 마음을 시험해 본 것이죠. 황상께서는 이미 조처를 다 취해
두셨군요.]
이때 대전문 밖에서 누군가가 낭랑히 외쳤다.
[황상께 알립니다. 반적을 잡았습니다.]
강희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띄우고 소리쳤다.
[데리고 들어오게!]
위소보는 대답했다.
[예.]
그리고 그는 대문으로 달려가 빗장을 뽑고 대전문을 열었다.
수십 명의 시위들이 귀씨 집안의 세 사람을 끌고 들어와 일제히 소리
쳤다.
[황상께 인사드립니다. 끓어앉아라!]
그리고 수십 명의 시위들도 일제히 끓어 엎드렸다.
귀신수와 귀이낭, 귀종, 세 사람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곳
곳에 상처를 입고 있었는데도 가슴을 편 채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세
사람은 모두 굵은 밧줄에 묶여 있었고 바로 곁에는 각기 두 명의 시위
들이 붙잡고 있었다. 시위 영반(領班)이 호통을 내질렀다.
[꿇어 엎드려라! 끓어 엎드려라!]
귀씨 집안 세 사람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귀씨 집안의 세 사람과
상처 입은 시위들의 몸에서 핏방울이 끊임없이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귀이낭은 부릅뜬 눈으로 위소보를 내려보더니 호통을 질렀다.
[이 조그만 매국노야! 너는....너, 이 흉악한 도적아!]
위소보는 세 사람의 참상을 보고 마음속으로 괴로움을 느꼈으므로 그녀
가 욕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희는 고개를 끄
덕이고 말했다.
[신권무적 귀신수는 알고보니 쭈그렁 영감태기에 지나지 않는군! 우리
쪽에서는 얼마나 살상을 당했는가?]
시위 영반이 말했다.
[황상께 알립니다. 반적은 흉악하기 이를 데 없어 시위 가운데 순직한
사람은 삼십여 명이나 되고, 상처 입은 사람은 사십여 명이 됩니다.]
강희는 허! 하더니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속으로 칭찬했다.
(대단하다!)
시위 영반은 수하에게 분부하여 세 사람을 끌어내도록 했다.
별안간 귀신수가 일성대갈하더니 내력을 돋우어 오른쪽 어깨로 옆에 있
는 시위를 와락 떠밀었다. 그 시위는 아! 하고 크게 부르짖더니 몸뚱이
가 날아가 머리를 벽에 부딪혀 대뜸 절명하고 말았다.
귀신수는 귀종의 몸에 묶여 있는 밧줄을 잡더니 세게 잡아챘다.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밧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곧이어 귀종의 몸을
잡고 큰소리로 말했다.
[얘야! 빨리 가라! 나와 어머니는 곧 뒤따라 가마!]
그리고는 귀종을 바깥으로 내던졌다. 귀종의 몸은 대전문 입구쪽으로
날아갔다. 이때 귀씨 부부는 몸을 날려 강희에게 달려들었다. 위소보는
갑작스런 변고가 일어나자 깜짝 놀라 즉시 강희를 안고 탁자 밑으로 기
어들어가 자기 등을 바깥쪽으로 해서는 강희를 보호했다. 그 순간 퍽
퍽! 하는 소리가 두 번 났고 곧이어 몇 명의 시위들이 달려와 강희와
위소보를 부축해 일으켰다. 귀씨 부부를 보니 이미 피바다 속에 엎어져
있는데 등에 일고여덟 자루의 칼과 검이 꽂혀 있어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귀신수는 힘써 수십 명의 시위들을 죽인 후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마
지막으로 내력을 돋우어 아들의 몸에 묶여 있는 밧줄을 자르고 즉시 강
희에게로 달려들었다. 귀이낭은 남편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녀 역시 죽
음을 당하기 전 습격을 가해서 오랑캐 황제의 목숨을 해칠 수 있기만을
바랐고 아들로 하여금 그 혼란을 틈타 도망치게 하려고 했다.
두 사람의 손발은 밧줄에 꽁꽁 묶여 있어서 다시는 힘을 주어 끊을 수
가 없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몸을 날려서 강희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온힘을 다해 싸운 끝이라 몸을 허공으로 띄울 때 미
친 듯 피를 토하면서 다시는 견디어낼 재간이 없어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시위들이 설사 다시 칼과 검으로 찌르고 치지 않았다 해도 두
사람은 이미 절명하고 말았으리라. 강희는 가까스로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고 눈살을 찌푸렸다.
[끌어내라! 끌어내!]
시위들은 일제히 대답하고 두 사람의 시체를 떠메고 나가려 했다. 별안
간 대전문 입구에서 그림자 하나가 흔들하더니 한 사람이 달려들어왔
다. 신법이 기이하도록 빨랐는데 귀씨 부부의 시체 위에 엎드리며 큰소
리로 부르짖었다.
[어머니! 아버지!]
바로 귀종이었다.
몇 명의 시위들이 무기로 내리치는데도 귀종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아
무기들은 모두 다 그의 몸에 적중되고 말았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
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나와 함께 가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나는 길도
모르는데....]
그리고 두 번 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떨군 채 죽어갔다.
그는 한평생 어머니와 한걸음도 떨어진 적이 없었고 매사에 어머니의
안배와 시중을 받아야 했다. 이제 부모 곁을 떠나자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고 비록 양심전에서 도망쳐 나왔으나 끝내 다시 돌아가 부
모에게 의지하려 했던 것이다.
시위총관 다륭이 대전 안으로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황상께 아뢰오. 궁 안의 자객은 모조리....모조리....숙청되었습니
다....]
그러다가 양심전 곳곳에 피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황송하고 두려운
마음에 큰절을 했다.
[자객이 황상을 놀라게 했으니, 소신....소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강희는 조금 전 위소보에게 안겨서 몸을 굴려 무척 낭패한 꼴을 당해
위엄에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위소보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자
기를 구하려고 했기에 군주인 자기에 대한 충성심만은 조금도 의심할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륭에게 말했다.
[바깥에 또 사람들이 있어 위소보를 찔러죽이려고 하니 그대는 그를 잘
보호하되 한걸음도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더욱더 그를 궁에서 나가
게 해서는 안 되네. 내일 아침 다시 분부를 내리도록 하겠네.]
다륭은 재빨리 말했다.
[예, 예. 소신은 정성을 다해 위 도통을 보호하겠습니다.]
위소보는 암암리에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황상께서는 오늘 밤 대포로 천지회를 박살낼 작정이구나. 내가 전갈을
할까 봐 다륭에게 분부하여 나를 지키도록 하는구나.)
강희는 대전 입구에 이르렀을 때 다시 생각했다.
(소계자는 교활하기 짝이 없다. 다륭이라는 거친 사내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다륭, 그대는 좀더 많은 사람을 시켜 위소보를 지키도록 하게.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과 말을 하도록 해서는 안되며, 그로 하여금 어떤 물건
을 궁 밖으로 내오도록 해서도 안되네. 어찌 되었든 간에 형세가 매우
위험하니 그대는 그를 국사범처럼 처리하게나.]
다륭은 대답했다.
[예, 예. 황상께서는 신하에게 크게 은혜를 베푸시어 정말 알뜰살뜰하
게 보살피십니다.]
그는 황상이 위소보를 너무나 사랑하고 아낀 나머지 자객들로 하여금
위소보를 해칠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상의 은혜는 소신의 몸이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보답하기 어렵습니
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황제가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 체면을 세
워주기 위한 것이고, 이후 자기를 쓸 데가 따로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강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다시 한 번 이겼네. 우리 내일부터 다시 놀도록 하세. 그러나
그대의 금 밥그릇은 꼭 잡고 있어야지 깨뜨리면 안 되네.]
그리고 그는 양심전에서 나갔다.
강희의 그 두 마디 말은 위소보도 물론 알고 있었다. 조금 전 위소보가
강희를 안고 보호한 것은 위소보가 다시 공을 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사부 진근남 등 몇 사람을 죽인 후에 자기가 천지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면 황제는 그때 다시 중용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금 밥그릇에는 공충체국(公忠體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러니까 황제는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되 두 마음을 품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이기도 했다.
위소보는 사부와 천지회의 형제들이 피와 살이 마구 튀기는 참상을 생
각하자 자기가 설사 고관대작이 된다 해도 어씨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
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이 되어 의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갈보년의 후레자식밖에
더 되겠는가?)
그는 다시 생각했다.
(황상의 소식통이 그토록 영통한데 그 어느 후레자식이 황상에게 이야
기를 한 것일까? 오늘 아침 내가 처음으로 황상을 만났을 때 황상께서
는 나에게 무척 잘 대해 주셨다. 그리고 나를 싸움에 이기는 전장에 내
보내겠으며 내가 오삼계를 잡아서 평서왕에 봉해지기를 바란다고까지
하셨다. 그때까지도 황상께서는 내가 천지회의 위 향주라는 사실을 모
르고 계셨다. 그가 소식을 받은 것은 내가 늙은 갈보를 압송하여 태후
에게 갖다 바치는 때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개 같은 도적이 전갈을
한 것일까? 흥! 십중팔구 목왕부의 사람이 아니면 왕옥파 사도학의 부
하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십이장경을 훔치고 신룡교에서 백룡사
노릇을 한 일을 황상께서는 왜 또 모르시겠느냔 말이다.)
다륭은 그가 잔뜩 울상을 짓고 정신이 없는 듯한 표정을 짓자 어깻죽지
를 두드리며 웃었다.
[위 형제, 황상께서 그대를 이토록 총애하시니 정말 그대가 전세에 몇
번이나 은덕을 베풀었는지 알 수가 없구먼. 조정의 어느 친왕, 패륵,
장군, 대신이라 하더라도 황상께서는 한 번도 어전시위를 보내 보호한
적이 없다네. 모두들 위 도통은 이십 세도 되기 전에 공이나 왕에 봉해
질 것이라고 한다네. 그러니 그대는 걱정하지 말고 궁 문에서 한걸음도
나서지 않는다면 반적들에게 천군만마가 있다 해도 그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것이네.]
위소보는 그저 씁쓸한 웃음만 지었다.
[황상의 은덕은 그야말로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텁지요. 우리 신하된
자로서는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황상의 은전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수십 명의 시위가 전후좌우에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 천지회
의 형제들에게 전갈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렵고도 어려운 노릇이라
고 생각했다.
왕이나 공에 봉해진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다. 차라리 소황제가 나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큰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이 낫겠다.
'이 녀석아! 깨끗이 꺼져! 다시는 내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말아라.'
(이렇게 보호해 주는 것은 그야말로 나의 부끄러운 목숨을 보호해 주는
격이 되겠구나.)
다륭은 말했다.
[위 형제, 황상께서는 그대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분부했는데 그
대는 예전에 살던 방으로 가서 쉬겠는가? 아니면 시위 영반의 방으로
가서 함께 놀겠는가?]
그는 위소보가 주사위 노름과 패구 노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
기 때문에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위소보는
갑자기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어서 말했다.
[태후께서 나에게 중요한 일을 즉시 처리하도록 분부하셨으니 다형이
함께 가주셨으면 좋겠소.]
다륭은 얼굴에 난처한 빛을 띠었다.
[태후께서 분부하시는 일이라면 즉시 해결을 해드려야지. 하지만....하
지만....황상께서는 엄하게 분부하셨네. 위 형제가 절대 궁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하라고....]
위소보는 웃었다.
[이것은 궁 안에서 하는 일이니 다형은 걱정할 것 없소이다.]
다륭은 즉시 안심하고 웃었다.
[궁에서 나서지만 않는다면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네.]
위소보는 시위들에게 분부해서 신황태비의 난교를 즉시 신무문 서쪽의
쓰레기 태우는 곳으로 떠메고 가서 말했다.
[누구라도 교자의 휘장을 들춘다면 태후께서는 즉시 머리를 자르라고
하셨네.]
자객이 황태비의 난교를 습격했던 일은 다륭과 시위들이 모두 알고 있
었으나 그 가운데 얽힌 진상은 몰랐으므로 불안스럽게 생각하고 있었
다. 그런데 위소보가 난교를 떠메고 가서는 불로 태우겠다고 하자 그것
이야말로 하늘처럼 커다란 화근을 제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각기
마음속으로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내려놓는 격이 되었다. 그리하여 즉시
다륭은 위소보를 따라 난교를 화장터로 옮겼다. 그런데 길을 오는 동안
교자 안에서는 여전히 핏방울이 떨어졌다. 다만 교자 안에서 죽은 사람
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그 누구도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화장터에 이르자 허드레 일꾼들이 장작과 나믓가지들을 쌓아올려 난교
사방을 뒤덮고는 불을 질렀다.
위소보는 나뭇조각을 주워서는 한 마리의 참새를 그리고 두 손으로 그
나뭇조각을 붙잡고서 교자 쪽을 향해 빌었다.
(수두타, 늙은 갈보,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부부 노릇을 못했으니 저승
에 가서라도 천년 만년 부부가 되시오. 그대들을 죽인 귀씨 집안의 세
분도 이미 죽고 말았소. 그대들이 한걸음 앞서갔고 그들은 뒤따라갔소.
만약 내하교(柰何橋) 위에서나 망향대(望鄕台) 가에서 만나게 되면 서
로 친근하게 굴도록 하시오.)
다륭은 그가 입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죽은 자의 영혼이
일찌감치 왕생극락하라고 빌어주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위소보는 몇 개의 돌을 옮겨서 조그만 돌무덤을 만들더니 그 위
에 나뭇조각을 꽂아놓았는데 그것은 마치 한 대의 향을 피우는 것과 흡
사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위소보가 도홍영과 연락하는 표시인 것을
다륭이 어찌 알겠는가?
교자와 시체가 모두 숯덩이가 된 것을 보고 위소보는 자기가 옛날 머물
렀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미 그를 받들던 태감들이 깨끗이 청소를 해놓
고 그가 들어가자 즉시 술과 음식을 날라왔다.
위소보는 행화전을 내리고 다륭과 시위들과 함께 약간의 음식을 들면서
말했다.
[다형, 그대들은 느긋하게 앉아 계시도록 하십시오. 이 형제는 어젯밤
밤새도록 황상을 위해 일을 처리하느라고 실로 피곤하기 짝이 없군요.]
[형제, 너무 겸손해 할 것 없네. 빨리 가서 주무시게. 이 형이 그대를
보호해 드리지.]
[그것은 진정 천만 년 감당할 수 없는 일이외다. 다형, 그대는 황상께
서 그대에게 무엇을 내리기를 바라오? 그대가 나에게 이야기한다면 이
형제는 마음속에 기억해 두었다가 황상께서 기뻐하실 적에 그대를 도와
말씀을 드려보겠소. 그러면 아마도 십중팔구 성공할 수 있을 것이오.]
다륭은 매우 기뻐했다.
[위 형제가 내 대신 황상에게 부탁을 하겠다면 어찌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형의 일은 바로 이 형제 자신의 일인데 어찌 힘을 쓰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륭은 웃었다.
[이 형이 북경에서 일을 보는 것은 약간 싫증을 느끼게 되었네. 그래서
바깥 성(省)으로 나가 기분을 전환했으면 하네.]
위소보는 무릎을 치고 웃었다.
[형의 말씀이 옳소이다! 북경성 안에는 우리보다 높은 왕공이나 대관들
이 너무 많아 우리가 별로 위풍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단 북
경에서 벗어나면 자유롭기 이를 데 없지요. 몇 냥의 은자를 갖고 싶으
면 그저 기침을 한 번 하면 상대방이 즉시 순순히 두 손으로 바치는 것
이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위소보는 방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침대 위에 누워 속으로 생각했다.
(다형은 황상의 성지를 받들어 나를 꼼짝 못하게 감시하고 있다. 내가
궁에서 나가 사부에게 전갈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중에라
도 고모님이 오거든 그녀에게 전갈을 하도록 해야지. 그런데 그녀가 너
무 늦게 올까 봐 걱정이 된다. 만약 그녀가 야밤 삼경에 만나러 온다면
저쪽의 대포는 이미 펑펑 쏘아졌을 때니 어떻게 하면 좋지?)
그리고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지금은 방법을 강구해서 시위들을 내보내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
는 수밖에 없구나.)
이와 같이 생각이 정해지자 그는 눈을 감고 한숨 잤다. 그리고 깨어보
니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졌는데 미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는 방에
서 나가 다륭에게 물었다.
[다형, 다형은 나에게 손을 쓰려고 하는 한 때의 반적들이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건 모르지.]
[한 패는 천지회의 사람들이고 한 패는 목왕부의 사람들입니다.]
다륭은 혀를 내밀었다.
[그 두 패의 반적들은 모두 다 대단하지. 그러니까 황상께서 그토록 걱
정을 하셨구먼.]
[내가 궁 안에서 하루를 지낼 수 있다 해도 한평생은 피할 수 없습니
다. 오늘은 다형이 있어 보호를 받고 있지만 반적을 제거하지 않고는
언제나 후환이 무궁합니다.]
[황상께서 내일 부르실 때는 반드시 묘책이 있을 것이니 위 형제는 너
무 걱정하지 말게.]
[예, 솔직히 형님에게 말씀드려서 형제 집에는 몇 명의 꽃 같고 옥 같
은 계집애들이 있는데 이 형제는 무척 좋아하지요. 아무래도 오늘 밤
반적들은 저의 집으로 들어와 나를 찔러 죽이려고 할 것인데 만약 그들
이 이 형제를 해칠 수 없으면 십중팔구 그 몇 명의 계집애들을 죽이고
말 것입니다. 그....그거야말로 매우 애석한 노릇이죠.]
다륭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언젠가 위소보가 자기에게
일부러 정극상을 괴롭히도록 하라고 이른 것도 바로 한 명의 나이 어린
미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이 소형제가 풍류적이고 호색적이라 나이는 어리지
만 집안에 이미 많은 시첩들을 거느렸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쉬운 노릇이네. 내가 사람을 형제의 백작부로 보내 보호하겠
네.]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두 손을 맞잡고 사의를 표했다.
[형제 집의 계집 가운데 내가 가장 총애하는 사람은 세 사람이 있습니
다. 한 사람은 쌍아이고 한 사람은 증유이며 한 사람은.... 검병(그는
속으로 목검병이라는 목 자를 들먹이면 의심을 받게 될것이라고 생각했
다)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다 볼만한 편이지요. 그러나 이 형제는
실로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형께서 사람을 보내 보호해 주시면서 그
녀들에게 오늘 밤 천지회와 목씨 집안의 자객들이 찾아들 것이니 그녀
들에게 빨리 피하라고 일러 주십시오. 형이 좀더 많은 사람들을 보내
형제의 집을 지키고 있다가 자객이 오면 모조리 잡아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형제가 힘을 쓴다면 제가 마땅히 사의를 후하
게 표하도록 하지요.]
다륭은 자기 가슴팍을 치며 웃었다.
[고 일은 쉬운 일이라네! 위 백작부의 일인데 어느 누가 목숨을 걸고
도우러 가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는 즉시 시위 영반에게 분부하여 내보낼 사람들을 뽑도록 했
다. 시위들은 위소보의 손 씀씀이가 매우 커서 평소 아무 일도 하지 않
는데도 종종 팔 백이고 천 냥의 행화전을 주는데 이번에 그야말로 그가
총애하는 시첩들을 보호하게 된다면 더욱더 두터운 상을 받게 되리라
생각하고 뽑힌 사람은 즉시 즐겁게 명을 받들고자 했다. 그리고 자기
차례가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은 긴 한숨을 내쉬며 운수가 좋지 않다고
투덜거렸다.
위소보는 속으로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끼고 생각했다.
(쌍아 그녀들은 궁에서 사람들이 나와 보호하고자 하며 또한 천지회와
목왕부의 자객들을 잡으려 한다는 말을 들으면 자연히 우리 사부와 형
제들에게 피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피할 수 있
는데 쌍아와 증 소저 그리고 소군주 세 사람이 대포에 맞아죽게 된다면
얼마나 큰 야단인가. 하지만 한 때의 어전시위들이 나의 집에 있으면
밖의 포수들도 함부로 대포를 쏘지는 못 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았다.
(만약 포수들이 황제의 엄한 성지를 받고 삼칠은 이십일은 상관하지 않
고 마구 쏘아댄다면 어떻게 하지?)
소군주와 중유는 그렇다 해도 쌍아는 자기에게 그야말로 정이 깊고 의
리가 깊었다. 쌍아는 그의 마음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며
절대로 그녀가 목숨을 잃도록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일은 두 가지
점에서 난처했다. 만약 시위들로 하여금 쌍아 일행을 먼저 영접해내도
록 한다면 남아서 사부와 형제들에게 전갈할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쌍
아를 구하고 사부를 구하지 않는다면 색을 중시해서 친구를 가볍게 여
기는 것이니 이것은 후레자식이나 할 일이다. 일시 그는 방안을 서성거
리며 계책이 없어서 안절부절 못했다.
그렇게 반 시진이 흘러갔다. 사람들을 이끌고 충용백부로 달려갔던 시
위 영반이 돌아와 보고했다. 그들은 백작부에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전봉영의 관병에게 저지를 당했는데 전봉영의 관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참령의 말로는 그들이 황상의 성지를 받들어서 백작부를 보호하고 있으
니 시위대인들은 신경쓰지 말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시위들이 안으로 들어가 가족들을 보호해야겠다고 했더니 전봉영은 한
사코 들어가지 못하게 하며 황상께서 모든 일에 이미 안배를 했다고 하
더라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전봉영의 아통령까지도 친히 달려와 저지하
는 마당이라 시위들은 그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돌아오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그 소리를 듣자 몹시 당황했다. 다륭은 웃었다.
[형제, 황상께서는 정말 그대를 치밀하게 보살피는구먼! 전봉영의 관병
으로 하여금 그대의 소미녀들을 보호하도록 하니, 그대가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하하! 하하하!]
위소보도 덩달아 몇 번의 웃음을 날리고 생각했다.
(소황제가 무슨 무엇 중에 무슨 천리 밖에 있다는 것처럼 이번에야말로
우리 사부님 등은 정말 큰 화를 당하게 되었구나. 전봉영은 틀림없이
황상의 엄한 성지를 받들어 나의 백작부 사방을 지키고 있으면서 여느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 내버려두었다가 저녁에 대포를 쏴서 함께
죽이려 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문부관원이라 하면 들어가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있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갑자기 함사사영(含沙射影)이라는 암기를 쏘아 다형의 목숨을 빼
앗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많은 시위들을 어찌 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애석하게 내가 가지고 있던 몽혼약은 장씨 집안에서 모조리
써 버렸으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구나.)
그는 해가 자꾸만 더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마치 뜨거운 솥 위의 개미
처럼 안절부절못했으며, 전신이 화끈거려 오줌을 갈기고 또 갈겼으나
눈꼽만큼도 대책이 떠오르지 않으니 어떻게 하랴?
다시 한 시진이 흐르자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위소보는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일고여덟 명의 시위들이 창밖에서 매
우 엄밀히 지키고 있었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도홍영의 모습
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힘없이 침대 위에 걸터앉아 속으로 생각했다.
(이 무렵쯤이면 친구들은 이미 백작부로 들어갔을 것이다. 일각이라도
더 지체하면 형제들은 저승길에 한걸음씩 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가?)
第119章. 시위총관 다륭을 죽이다
[황상께서 위대하신 것이 아니라 황상께서는 천하의 많은 대사를 처리
해야 하는데 어느 겨를에 이런 조그만 일에 신경을 쓸 수 있겠소? 솔직
히 말해서 제가 다시 이곳에 머문다는 것은 규칙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
외다.]
다륭은 웃었다.
[다른 사람은 규칙에 어긋나지만 형제는 괜찮아.]
그는 궁 안의 총관태감이 위소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아무도 이 방에
머물지 못하도록 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궁 안에는 집과 방이
얼마든지 있었다. 해대부가 머물렀던 이 방이 좋은 방도 아니고 어선방
을 관리하는 태감은 따로 거처가 있었다.
위소보는 웃었다.
[형이 들먹이지 않았다면 이 형제는 깜박 잊을 뻔했소이다. 우리 같은
외신(外臣)들이 궁 안에 머무는 것을 어사대인께서 알고 탄핵문이라도
써내게 되면 그야말로 쓴맛일 겁니다.]
[황상께서 그대를 총애하시는데 누가 상관하겠는가?]
[자, 앉아요. 이 방은 별로 좋은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이 형제가 머물
다 보니 오히려 밖의 백작부가 이곳만큼 편안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뿐이죠.]
위소보는 천천히 그의 등뒤로 돌아가면서 비수를 뽑아들고 웃었다.
[이 여덟 가지 찬은 이 형제가 좋아한다는 것을 어선방에서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군요. 형은 해분사자두(蟹粉獅子頭)를 맛보시는 것이 어
떻습니까?]
[형제가 좋아하는 반찬이라면 반드시 가장 좋은 것일 테지....]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왼쪽 등이 격렬히 아픈 것을
느끼며 탁자 위에 엎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위소보가 이미 그의 등을
노리고 있다가 비수로 찔렀던 것이다. 이 한 칼은 소리도 없이 살속으
로 파고들어가 작은 태감은 알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술을 따르고 있
었다.
위소보는 그의 등뒤로 돌아가서 다시 가볍게 비수로 그를 찔러 죽이고
즉시 문에 빗장을 질렀다. 재빨리 옷과 모자 그리고 신발과 버선을 벗
었다. 내의와 바지 그리고 몸을 보호하는 배심만 남겨놓은 채 소태감의
옷과 모자를 벗겨서 자기가 입고 자기의 옷과 모자는 모두 소태감에게
입혀주었다. 두 사람은 키가 비슷해서 옷이 몸에 잘 맞았다. 그런 후에
그는 소태감의 시체를 의자 곁으로 안아다 앉히고 비수를 들어 소태감
의 얼굴을 마구 난도질해서 오관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재빨리 손을 놀리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다형, 그대는 오랑캐이고 우리 천지회는 오랑캐를 죽이는 것으로 밥을
먹고 있으니 그대를 죽이지 않을 수 없구려. 오늘 그대의 목숨을 해친
것은 정말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외다. 다행히 그대는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이오. 내가 오늘 밤 도망치면 황상은 내일 그대의 머리를 자르
게 될 것이니 그대는 불과 반나절을 일찍 죽는 셈일 뿐이니 그렇게 손
해를 보는 것은 아니외다. 더군다나 내가 그대를 죽였으니 그대는 공무
로 순직하게 된 셈이 아니겠소? 하지만 황상께서 그대의 머리를 자르게
되면 그대는 반드시 자산을 몰수당하게 되고 마누라와 아들딸까지도 해
를 입게 될 것이니 차라리 반나절을 일찍 죽음으로써 집안에 내리는 구
혈금을 받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이외다. 주판을 들고 계산해 본다면
그대는 실로 커다란 득을 본 셈이 아니겠소?)
그러나 다륭은 평소 자기에게 너무나 잘 대해 주었있다. 부득이 해서
그를 죽이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괴로움을 참을 수 없어 눈물을 흘
렸다. 그는 눈물을 닦고 다시 몸을 돌려서 소태감을 바라보았다.
(너 소형제는 몸에 황마괘를 입고 있으니 얼마나 멋있는가? 너는 이 세
상에 열 번 다시 태어난다 해도 황마괘의 겉자락도 걸쳐보지 못할 것이
고 머리에 백작대인의 모자도 쓰지 못할 것이다. 그 한알의 홍보석만
해도 네가 일고여덟 대에 걸쳐 쓸 수 있을 것이다. 허허허! 너는 벼슬
이 오르고 재물을 얻게 되었으니 크게 운수대길한 셈이로구나! 위소보
는 과거 소계자를 사칭하였고 이후부터 크게 출세해 커다란 벼슬아치가
되었다. 자네가 오늘 위소보를 사칭하여 금후 출세를 하게 될지 아닐지
는 너의 재간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소태감으로 가장했으니 오늘은 소태감이 나처럼 가장하도록 해야
지. 이렇게 되면 진 빚은 깨끗이 갚게 되는 셈이다. 소현자야, 소현자
야, 나는 정말 그대에게 잘못한 일은 없다.)
그는 옷매무시를 고치자 아무런 빈틈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큰소리
로 말했다.
[꼬마야! 이제 나가보도록 해라! 이곳에서 네가 시중들 필요가 없다!
이 다섯 냥의 은자는 사탕을 사먹도록 너에게 주지.]
그는 애매모호하게 한마디했다.
[백작대인,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음성을 높여서 말했다.
[나는 륭 총관과 이곳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테니 누구도 방
해하지 않도록 해라.]
태감은 궁에서 본래 황제, 황후, 비빈, 왕자와 공주를 시중들 뿐이었
다. 그러나 직책이 있는 대태감은 소태감으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해오
고 있었다. 위소보는 이제 태감이 아니었지만 옛날 그는 바로 황궁에서
명성이 혁혁했고 그야말로 붉다 못해 자색빛이 도는 태감 나으리였으니
소태감으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하고 은자를 하사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문 밖의 시위들은 그 말을 듣고 그 누구도 아랑곳하
지 않았다. 곧이어 방문이 열리면서 소태감이 밥을 넣었던 상자를 떠메
고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소태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돌려 문을 닫고 있었다.
위소보는 식합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
다. 시위들은 한창 밥을 먹고 술을 따르느라고 아무도 유의해보지 않았
다. 위소보는 기뻐서 속으로 생각했다.
(시위들은 적어도 한 시진이 지난 후에야 두 사람이 이미 죽었다는 사
실을 발견할 것이다. 위 백작과 다륭 총관이 모두 자객에게 찔려 죽은
줄로 알겠지? 그들은 깜짝 놀라 똥오줌을 바지에 갈길 것이다.)
그가 대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몇 명의 태감과 궁녀들이 등롱을 들고 앞
장을 선 채 한 채의 교자를 떠메고 왔다. 이 교자는 꿩의 꼬리와 털로
장식을 하고 있었는데 작교(雀轎)라고 불렀다.
앞장선 태감이 호통을 내질렀다.
[공주께서 왕림하셨소!]
위소보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공주는 하필이면 이때에 들이닥친단 말인가? 집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면 즉시 위소보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궁 안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혀지지 않겠는가? 나간다는 것은 절대로 불
가능해진다.)
그는 일시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랐다. 이때 교자가 멈추면서 건녕 공
주가 교자 안에서 성큼 내려서며 위소보를 불렀다.
[소계자는 안에 있느냐?]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공주, 위 백작 나으리께서는 술에 취했습니다. 소신이 공주를 모시고
안으로 들어가지요.]
불빛이 별로 밝지 않아서 공주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시위들이 모두
방안에서 나오며 영접하자 공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왼손을 들어 흔들었다.
[모두들 밖에서 시중을 들도록 해요.]
공주는 방안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위소보도 따라 들어갔다.
그는 방안으로 들어가자 손을 뒤로 돌려서 문을 닫았다.
공주는 말했다.
[그대도 나가 보시지.]
위소보는 말했다.
[예, 위 백작 나으리께서는 안방에 계십니다.]
공주는 재빠른 걸음으로 방문을 열어 제쳤다. 위소보, 다륭 두 사람이
탁자 위에 엎드려 있었는데 크게 취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호통을 내질렀다.
[빨리 나가지 못해 ! ]
위소보는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만약 나가면 등갑병을 태우지 못하게 될 것이오.]
공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촛불 아래 놀랍게도 위소보가 서 있
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그만 놀랍고 기뻐서 아, 하고 부르짖었다.
[그대는....그대는 무엇을 하는 거예요?]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아무 소리도 하지 마시오.]
공주는 그를 쳐다보고 다시 탁자 위에 엎드려 있는 위소보를 보더니 나
직이 물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죠?]
위소보는 그녀를 끌고 방안으로 들어가 안방문을 닫고 나직이 말했다.
[큰일났소. 황상께서 나를 죽이려고 하시오.]
[황제 오라버니는 이미 부마를 죽였는데 어째서 그대마저 죽이려고 하
는 거예요? 그는....그....그가 만약 그대를 죽인다면 나는 그와 사생
결단을 내겠어요.]
위소보는 두 팔을 뻗쳐서 그녀를 덥석 껴안고 그녀의 뺨에 입맞춤을 하
였다.
[우리 궁에서 빨리 도망치도록 합시다. 황상께서는 나와 그대의 일을
알고 내 머리를 자르려는 것이오.]
공주는 그에게 안겨 입맞춤을 당하자 그만 전신이 녹작지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코먹은 소리로 말했다.
[황제 오라버니가 부마를 죽일 때 나는 이제야 그대에게 시집을 갈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어째서....어째서 이와 같은 사고가 벌어진
거죠? 그가 어떻게 알았죠?]
[그대가 그런 뜻을 비춘 것이 아니겠소?]
공주는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나는 그런 일 없어요. 나는 그저 그대가 언제쯤 돌아오느냐고 몇 번
물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거지. 그러나 상관없소. 어찌 됐든 우리 두 사람은 부
부로 맺어진 사이요. 빨리 궁 안에서 도망치도록 합시다.]
공주는 거절했다.
[내일 내가 가서 황제 오라버니께 빌겠어요. 그러면 그는 그대를 죽이
지 않을 거예요. 그는 부마를 죽였을 때 나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
면서 다시 훌륭한 부마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는 언제나 그대
를 매우 좋아했어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그녀는 방안의 피비린내가 더욱더 짙어지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뭐예요....]
갑자기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구역질이 나서 왁, 하고 의자를 붙
잡고 토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연신 토했지만 그저 물만 토해 내는 정
도였다. 위소보는 가볍게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며 나직이 위안의 말을
했다.
[아니, 음식을 잘못 먹었소? 이제 좀 나아졌소?]
공주는 다시 두 번 구역질을 하더니 별안간 뒤로 몸을 돌려 철썩, 하니
그에게 따귀를 한 대 갈기고 욕을 했다.
[내가 음식을 잘못 먹었다고? 모두 그대가 나쁜 탓이야! 모두 나쁜 탓
이에요!]
그리고 두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방망이질하듯 마구 두들겼다. 공주
는 언제나 거칠었다. 이렇게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데 대해서 위소보는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태가 긴박했다. 일각
이라도 지체를 한다면 대포를 쏴 댈 시간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셈이라
그녀와 쓸데없이 엉켜서 돌아갈 여유가 없었다.
[좋소, 좋소. 모두 내가 나빴소.]
공주는 그의 귀를 꼭 잡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대는 나와 더불어 황제 오라버니를 만나러 가요! 우리 두 사람은 즉
시 천지신명께 고하고 부부가 돼요!]
위소보는 크게 다급해져서 빌었다.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일은 내가 책임을 지겠소. 그러나 황상을 만난다
면 그대의 지아비는 머리가 없는 부마가 될 것이오. 오히려 궁에서 빨
리 도망치는 것이 급선무요.]
공주가 그를 힘주어 잡아당기는 바람에 위소보는 귀가 아파서 고함을
질렀다. 공주는 욕을 했다.
[그대의 머리가 없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그대와 같은 꼬마는
본래 머리가 없는 자라잖아요? 내 뱃속의 작은 소계자는 또 어떻게 하
란 말이에요.]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녀는 왁,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뭐 ....뭐 ....작은 소계자?]
공주는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배를 걷어차며 울었다.
[내 뱃속에는 그대의 못나고 작은 소계자가 들어 있단 말이에요. 모두
그대 탓이에요. 우리가 만약 즉시 부부가 되지 않는다면 나의 배는 점
점 불어나게 될 것이고....황상께서는 오응웅이 태감이니 아이를 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에요. 나는....나는 사람 노릇을 할 수 없
게 되었어요.]
위소보는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너무도 긴박한 순간에
이와 같은 겸연쩍은 일을 만난 것이라 재빨리 말했다.
[우리가 만약 빨리 궁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작은 소계자는 애비가
없게 되오. 도망을 친 이후에 즉시 혼례를 올려 작은 소계자를 낳도록
합시다. 그렇게....그렇게 된다면 그 애는 황상의 생질이 되는 것이 아
니겠소? 황상께서는 외삼촌이 되고 또 나의 큰처남이니 매부를 죽이는
데 대해서 매우 미안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겠소?]
공주는 말했다.
[뭐가 미안해요? 오응웅은 그의 매부였는데 여전히 한칼에 죽였잖아
요?]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께서는 오응웅이 가짜 매부라는 것을 알았고 이 위소보가 진짜인
줄 알고 계시거든! 가짜 매부는 죽일 수 있지만 진짜 매부는 죽일 수가
없지. 공주, 우리의 작은 소계자가 세상에 태어나 그대의 목을 껴안고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부르면 그 얼마나 밋진 일이오?]
그는 손을 뻗쳐 그녀의 목을 껴안았다. 공주는 훗, 하고 웃으머 기뻐서
말했다.
[그대는 같은 후레자식이라 멋지겠지. 나는 작은 후레자식의 어머니라
고 불리는 것이 싫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위소보의 귀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코먹
은 소리로 말했다.
[오랫동안 그대를 만나지 못했군요. 그대는 그동안 나를 얼만큼 생각했
나요?]
그러면서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생각했지. 매일같이 생각했고 밤마다 생각했으며 시시각각 생각했소.]
그는 속으로 욕을 했다.
(이 순간 이렇게 귀찮게 구니, 제기랄! 죽일 갈보로군!)
그녀는 두 눈에 정을 가득 담고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이 순간
그녀와 더불어 다정하게 굴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비위를 상하게 할 수도 없어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함께 궁에서 도망을' 치면 이후 대낮이고 밤이고 붙어 있게 될
것이며,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오. 이제 곧 떠납시다.]
공주는 몸을 몇 번 비틀며 말했다.
[안 돼요. 우리는 오늘 밤에 부부가 돼요.]
[좋소, 좋소. 오늘 밤이라고 해두지. 그러나 어찌 됐든 궁에서 벗어난
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왜 도망을 치나요? 황제 오라버니는 나를 가장 귀여워한단 말이에요.
그는 그대의 사부이며 그대를 가장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 내일 찾아가
서 그에게 빌도록 해요. 그러면 그는 화가 풀릴 거예요. 황제 오라버니
는 오삼계를 가장 미워하고 있으니 그대는 황상에게 군사를 데리고 가
서 오삼계를 공격하겠다고 청을 하세요. 그러면 내가 그대와 더불어 함
께 떠나겠어요. 나는 병마대원수가 되고 그대는 부원수가 되어 오삼계
가 낙화유수가 되도록 공격을 하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황제 오라버니
는 그대를 왕야로 봉하게 될 거예요.]
그러면서 건녕 공주는 그를 꼭 껴안았다.
위소보가 정히 낭패하기 이를 데 없는 상태에 놓여 있을 때 느닷없이
창문의 격살을 누가 가볍게 세 번 쳤다. 그리고 한 번 멈추었다가 다시
두 번을 쳤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나직이 말했다.
[도 고모님인가요?]
그는 가볍게 공주를 밀치고 달려가서 창문을 열었다. 그림자가 흔들하
더니 한 사람이 뛰어들었는데 바로 도홍영이었다.
두 여인은 마주 대면을 하자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도홍영은 나직이 부르짖었다.
[공주!]
공주는 노해 부르짖었다.
[그대는 누구지? 여기에 왜 왔지?]
대뜸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지라 그녀는 크게 질투심이 복받치게 되었
다. 밤이 이슥해질 무렵 궁녀가 창문을 넘어 소계자의 방으로 뛰어들어
무슨 좋은 일을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반드시 그들은 서로 좋아하
는 사이가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도홍영은 늙어 보였으나 소계자가 이와 같이 늙고 못난 궁녀마저 데리
고 노닥거렸다고 생각하니 더욱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
지 않아도 그녀는 불 같은 욕정을 느끼고 있던 참에 이 여인에 의해 좋
은 일이 깨뜨려지자 미친 듯 노기가 터져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게....]
위소보는 이미 방비하고 있어서 그녀가 게 누구 없느냐 하는 한마디를
내지르도록 하지 않고 대뜸 손을 뻗쳐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힘주어 조르며 욕을 했다.
[죽일 갈보 같으니! 목을 졸라 죽이겠다!]
공주는 대뜸 호흡이 어려워지는 듯 손과 발을 마구 버둥거렸다.
위소보는 왼손을 돌려 그녀의 머리를 주먹으로 두 번 내리쳤다.
도홍영은 그가 감히 공주를 구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 일로 소란이 빛어지면 큰일이라는 것을 알고 즉시 손가락을 뻗쳐서
공주의 허리께와 가슴팍 있는 곳을 잇달아 세 번 찔러 그녀의 윗몸에
있는 혈도 몇 곳을 봉해 버렸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손을 놓고 나직이 말했다.
[고모님, 큰일났습니다! 황제가 나를 죽이려고 하니 이대로 빨리 도망
쳐야겠습니다.]
도홍영은 말했다.
[바깥에는 시위들이 무척 많네. 나는 이미 이곳에 도달했었지만 화단
뒤에서 반 시진 남짓 기다렸다가 빈틈을 노려 뛰어들어온 것일세. 저것
보게나.]
그녀는 창을 가볍게 밀어 실날 같은 틈을 내었다.
위소보는 밖을 내다보았다. 일고여덟 명이나 되는 시위들이 등롱을 들
고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뇌리에 스치는 것은 수두타와 모동
주가 궁 안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방법이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 두 사람은 운수가 불길해서 귀신수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의 흉내를 낸다 하더라도 설마 귀씨 집안의 세 사람이 시체를 빌어
혼백이 되돌아와 공주의 교자를 공격하는 일은 없겠지.)
그는 공주에게 말했다.
[공주, 질투심을 일으키지 말아요. 우리 고모님이야. 바로 우리 아버님
의 누이동생이고 우리 어머님의 언니야. 그대는 함부로 성질을 부리지
말아요.]
공주는 도홍영에게 혈도를 짚히게 되자 그만 울화가 치밀어 까무러칠
정도였으나 위소보의 그와 같은 말을 듣자 대뜸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
버지의 누이와 어머님의 언니가 같은 사람일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
지 못하고 어찌 됐든 이 여인이 소계자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상
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즉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빨리 나를 놔줘요!]
위소보는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말했다.
[그대는 나의 마누라이니 빨리 고모님이라고 부르시오!]
공주는 무척 기쁜 듯 그 말을 따라 불렀다.
[고모님!]
도홍영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이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치고박고 하던 사인데 어째서 공주가 자기를 고모님이라고 부르는
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는 교자를 방안으로 떠메고 들어오도록 분부하시오. 다른 사람은
나가도록 하고 문을 닫고서 그대와 내가 함께 교자 안에 타는 것이오.
궁에서 빠져나가 즉시 혼례를 올리도록 합시다. 반드시 웃어른이 옆에
서 지켜봐야만 혼례를 올린 것으로 인정할 수 있소. 우리 고모님은 바
로 웃어른이시오. 그대의 의견은 어떠하오?]
공주는 크게 기뻐서 얼굴을 붉히며 나직이 말했다.
[무척 좋아요.]
위소보는 그녀의 등을 밀며 재촉했다.
[빨리 하시오. 빨리 해!]
공주는 그의 재촉을 받고 상반신의 혈도가 풀리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문 입구로 가서 분부했다.
[교자를 떠메고 방으로 들어오너라.]
태감들과 궁녀들은 한결같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공주가 일을
처리하는 것은 언제나 불가사의했다. 공주가 평소 분부하는 일 가운데
상례에 맞지 않는 일이 많아서 뚱딴지 같은 일들이 무척 많았다. 따라
서 그들은 일제히 대답하고 교자를 떠메고 안으로 들어왔다.
황태비의 난교는 자녕궁으로 들어가 살그머니 수두타와 모동주를 태우
고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위소보의 방문은 몇 자 폭밖에 되지 않는데
공주의 작교가 어찌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겠는가? 교자의 받침대만 들어
올 수 있을뿐 교자는 문 입구에 막혀 들어올 수 없었다.
第120章. 도망치는 천지회의 군웅들
[쓸모없는 것들, 모두 나가라!]
공주는 욕을 했다.
방안에서 교자를 떠밀던 태감들은 생각했다.
(문 입구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데 어찌 우리들을 탓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교자 옆으로 기어나갔다. 위소보는 공주의 곁에서 나직
이 말했다.
[그대는 시위들이 듣는 데서 나보고 나가지 말라고 소리치시오.]
공주는 큰소리로 말했다.
[소계자! 그대는 얌전히 방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도록 해요.]
위소보는 큰소리로 말했다.
[예! 시간이 늦었습니다. 공주 전하께선 일찌감치 돌아가셔서 쉬시도록
하십시오.]
공주는 욕을 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서 구경을 하겠어요.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위소보는 큰소리로 말했다.
[궁 안은 자객으로 소란이 빚어지고 있으니 공주 전하께서는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공주는 말했다.
[황상께서는 한 떼의 시위들을 키우고 있는데 그들은 밥만 먹고 일할
줄은 모른단 말인가? 여봐라! 모두들 방 밖에서 들어오지 말도록 해
라.]
시위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위소보는 교자 안으로 기어들어가 손짓을
했다. 도홍영은 즉시 공주의 혈도를 풀었고, 공주 역시 교자 안으로 들
어와 그의 품에 안겼다.
위소보는 그녀를 껴안고 나직이 도홍영에게 말했다.
[고모님, 아무쪼록 우리들과 함께 궁을 나서 주세요.]
그녀는 무공이 뛰어나니 그녀가 교자 옆에서 호송을 한다면 누군가가
그들이 도망치는 것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위소보를 도와 싸우거나 죽여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홍영은 즉시 대답했다. 그녀는 궁녀의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공주의
교자 옆에 서 있으면 그 누구도 의심할 리가 없었다.
공주는 호통을 내질렀다.
[교자를 떠메고 가라.]
교자를 들던 두 명의 태감이 다시 교자 옆으로 해서 문 안으로 기어들
어와 뒤에서 교자를 메는 태감과 함께 교자의 지렛대를 들어올렸다. 몇
걸음 뒷걸음질친 이후 교자를 돌려서 떠멘 채 걸음을 옮겨놓으며 태감
들은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교자가 갑자기 무거워졌지?)
공주는 위소보의 가르침을 받아 신무문으로 해서 궁 안을 벗어나라고
했다. 교자가 신무문에 이르렀을 때 시위들은 공주의 작교가 깊은 밤에
궁에서 나가려는 것을 보고 앞으로 나와 질문을 했다. 공주는 교자 안
에서 벌떡 일어나며 호통을 쳤다.
[나는 궁에서 나가야겠다. 빨리 문을 열어라!]
이날 밤 신무문에서 당직을 보고 있는 시위 영반은 조제현이었다. 그는
즉시 허리를 굽히고 웃음지었다.
[공주께 아룁니다. 오늘 밤 궁 안은 자객으로 시끄러워 조용한 편이 못
됩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날이 밝은 후에 나가도록 하십시오.]
공주는 노해서 소리쳤다.
[나에게 급한 일이 있는데 뭐가 두렵단 말이에요?]
조제현은 감히 그녀의 비위를 건드리지 못했지만 이미 오응웅이 격살되
었고 공주가 야밤에 궁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쩌면 오삼계가 반란을 일
으킨 일과 관련이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일 조사를
하여 자기가 그 간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큰일이다싶어 계속해서 인
사말을 할 뿐 좀처럼 명령을 내려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공주가 심
하게 몰아세우자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소신이 다륭 총관에게 여쭤 보겠습니다. 공주께선 잠시 기다
려 주십시오. 소신이 알아본 이후에 즉시 돌아와서 문을 열도록 하겠습
니다.]
위소보는 공주가 그저 신경질만 부리고 있고 조제현은 한사코 문을 열
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륭을 찾아 나선다는 말을 하자 큰일이다
싶어 다급한 끝에 입을 열었다.
[조제현, 그대는 내가 누군지 아시오?]
조제현은 그를 따라 일한 지 오래되어서 그의 음성을 알아듣고 놀람과
기쁨에 읽혀 물었다.
[위 부총관이시오?]
위소보는 웃었다.
[바로 그렇소.]
그는 교자 안에서 고개를 빠끔 내밀고 손짓을 했다. 조제현은 재빨리
다가왔다.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나는 황상의 밀지를 받고 기밀에 속하는 큰일을 처리하러 가고 있소.
내가 얼굴을 내밀면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황상께
서는 나에게 공주의 교자를 타라고 분부했으며 공주로 하여금 나의 행
동을 감추도록 한 것이오.]
조제현은 평소 그가 황상의 총애를 깊이 받고 있고 일을 하는 것이 신
출귀몰한 것을 알고 있는지라 더 의심할 여지가 없어 재빨리 말했다.
[즉시 문을 열겠습니다.]
위소보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나직이 말했다.
[그대는 벼슬이 오르고 재물을 얻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소?]
조제현은 그를 따라 일을 처리한 지 수년 만에 벼슬은 두 계급이나 올
랐고 재물도 이미 만여 냥이라는 은자를 모았다. 다시 벼슬이 오르고
재물을 모을 수 있다는 말을 듣자, 위 부총관이 그렇게 묻는 한마디는
자기를 끌어올려 키워주겠다는 뜻이 있는 것이라 여기고 그만 흐뭇해져
서 재빨리 무릎을 꿇고 인사를 했다.
[부총관께서 키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부총관이 어떤 일을 시키든
지 폐직은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사양하지 않겠소이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말은 네 스스로 한 것이다. 대포가 쏘아져서 너의 몸이 가루가 된
다 해도 너는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나를 탓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한 떼의 반적들이 오삼계와 결탁을 하고 있소. 황상께서 계책을 짜내
어 그들을 속여 나의 백작부에 모이도록 했소. 지금쯤 많이 모여 있을
것이오. 따라서 황상께서는 나에게 전봉영의 사람을 데리고 가서 잡으
라고 했소. 전봉영은 평소 우리 효기영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데, 그대
는 황상이 어째서 나에게 전봉영의 관병들을 끌고 가도록 했는지 아시
오?]
조제현은 말했다.
[폐직은 우둔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위소보는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전봉영의 통령은 오삼계와 결탁을 하고 있소. 황상께서는 이 기회에
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것이오. 공주는 오삼계의 며느리이니 그들이 공
주를 보면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소?]
조제현은 확연히 깨달은 듯 말했다.
[아, 그랬었군요. 전봉영 통령이 감히 대역무도한 마음을 품다니 뜻밖
입니다. 이 일은 십중팔구 위 부총관께서 조사해서 큰공을 세우신 모양
이로군요.]
위소보는 말했다.
[이 공로는 황상 자신이 안배한 것을 나에게 넘겨준 것이라고 할 수 있
소. 우리들은 사이좋은 형제이니 벼슬이 오르면 함께 오르고 재물을 모
을 수 있으면 함께 모아야 되지 않겠소? 그대는 사십명의 시위를 데리
고 나와 더불어 공을 세우러 갑시다.]
조제현은 크게 기뻐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고 재빨리 공주에게 교자에
오르기를 청했다. 그리고 평소 자기에게 아첨을 잘하는 시위 사십 명을
뽑아서 은밀한 성지를 받들어 일을 처리하게 되었으니 신무문을 활짝
열어 공주의 작교가 궁에서 나가도록 호송하라고 일렀다. 그는 나머지
육십 명의 시위에게 궁문을 엄히 지키도록 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이 궁문은 오늘 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열어서는 안되오. 다륭총관이
나 나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이 궁에서 나가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오.]
조제현이 재빨리 위소보의 명령을 전달하자 나머지 육십 명의 궁문 시
위들은 일제히 대답을 했다. 위소보는 은밀히 웃었다.
(내가 이번에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총관의
혼백이 이곳으로 달려와 문을 열라고 명령을 내릴는지 모를 일이다.)
일행은 얼마 후 충용백부 가까이 왔다. 길을 오는 동안 위소보의 마음
은 두근거리고 앞쪽에서 천지를 울리는 포화가 터지는 것이 아닌가 하
고 애를 태웠다. 그런데 다행히도 시종 조용한 것이 아무런 동정도 엿
볼 수가 없었다.
골목 어귀에 도달하였을 때 전봉영의 통령 아제적이 이미 공주의 작교
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 앞으로 마중을 나왔다.
공주는 교자 안에서 위소보에게 애무를 받으면서 그에게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시를 자세히 들었는지라, 아제적이 자기의 성명을 밝히
고 영접하자 즉시 교자 휘장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아제적 통령, 황상께서 비밀스럽게 성지를 내리시어 오늘 밤 처리하도
록 한 일은 매우 중요한데 그대는 모두 준비되었나요?]
아제적은 허리를 구부렸다.
[예,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공주는 나직이 말했다.
[그 대포들도 모두 적절하게 안배했나요?]
아제적은 말했다.
[예, 예. 남회인 남대인이 친히 지휘를 하고 있습니다.]
위소보는 교자 안에서 생각했다.
(황상은 정말 나를 속이지 않았구나. 남희인이라는 그 양놈이 이곳에서
친히 대포를 겨냥하면 백발백중일 것이다.)
공주는 말했다.
[황상께서 나에게 백작부 안으로 들어가 일을 처리하도록 분부했소. 그
러니 그대는 나를 따라 들어갑시다.]
아제적은 말했다.
[공주님, 지금 시간이 급박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공주는 노해 말했다.
[뭐가 들어갈 수 없다는 거요? 이것은 성지예요. 그대는 감히 성지를
어길 참인가요?]
아제적은 말했다.
[소신이 어찌 어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하지만 실로 너무나 위험
합니다. 공주께서는 만금지체이신데....]
위소보는 교자 안에서 기침소리를 한번 냈다. 도홍영이 대뜸 달려들어
질풍같이 손가락을 움직여서 어느덧 아제적의 좌우 허리와 옆구리 아래
세 곳의 요혈을 한 번씩 찔렀다.
아제적은 그저 나직이 소리를 낼 뿐 상반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전신이 싸늘해지면서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한 자루의 예리한 비수가
어느덧 그의 등에 기다란 상처를 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는 그만
혼비백산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게 되었다. 공주는 말했다.
[황상의 밀지를 받들지 않겠다면 즉시 그대의 목을 치고 그대의 온 가
족을 몰살시키도록 하겠어요.]
아제적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예l, 예.]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어전시위는 나를 따라 일을 처리하면서 언제나 말을 잘 들어왔는데
어찌 그들의 목숨을 다치게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전봉영의 관병으로
하여금 대신 죽는 몸이 되도록 해야지.)
그는 공주의 귀에다 입을 대고 나직이 말했다.
[그에게 오십 명의 수하 군사들을 이끌고 우리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
일을 처리하도록 해요!]
공주가 그 말을 전하니 아제적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예....]
즉시 그는 명령을 내려 오십 명의 군사를 뽑아서 공주의 교자 뒤를 따
르도록 했다. 그리고 곧장 백작부 안으로 들어갔는데 위소보는 조제현
에게 어전시위들을 거느리고 집 밖을 지키도록 했다.
교자가 중문 안으로 들어가자 공주와 위소보는 모두 교자에서 내렸다.
그리고 오십 명의 군사들에게 뜰에서 대열을 선 채 기다리라고 했다.
도홍영은 아제적을 압송해서 네 사람은 함께 화청으로 들어갔다.
화청의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진근남, 목검성, 서천천, 모든 사람들이
모조리 대청에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위소보가 한 사람의 귀부인과 한
사람의 궁녀 그리고 한 사람의 무관을 데리고 들어오자 모두 크게 의아
한 눈치였다.
위소보는 손짓을 했다. 사람들은 모두 모여들었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황상께선 우리가 지금 이곳에 모여 있다는 것을 알고 이미 골목 밖에
다 수많은 관병으로 하여금 포위하도록 했습니다. 거기다 십여 문의 대
포를 세워 놓고 이쪽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군호들은 깜짝 놀라 그만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유대홍은 말했다.
[모두들 공격해서 뚫고 나갑시다.]
위소보는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바깥의 관병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거기다 대포가 더욱 무
섭습니다. 저는 이미 수십 명의 관병을 데리고 왔습니다. 모두들 그들
의 옷을 바꿔 입고 바깥으로 달려나가도록 합시다.]
군호들은 일제히 묘책이라고 부르짖었다. 위소보는 숨을 돌려 공주에게
이야기했다.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제적에게 말했다.
[이십 명의 군사를 들어오게 하시오.]
아제적은 형세가 이미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지만 칼이 자기의 목
을 겨누고 있는지라 감히 반항할 수가 없어 명령을 내렸다.
천지회와 목왕부의 군호들은 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이십 명의 군사
들이 화청으로 들어오자 즉시 이십 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모조리 땅바
닥에 때려눕혔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다시 십오 명을 들어오게 했고, 세
번째에 다시 십오 명을 들어오게 했다. 그리하여 오십 명의 군사들을
모조리 때려눕힌 후 그들의 옷을 벗겨 군호들이 바꿔 입었다. 공주도
바꿔 입었다.
위소보는 목검병과 증유가 사람들과 함께 옷을 바꿔입는데 쌍아가 보이
지 않아 재빨리 증유에게 물었다. 증유는 말했다.
[쌍아 누이는 그대가 궁 안으로 들어간 지 오래되도록 나오지 않고 귀
이낭 그들이 궁으로 들어가 황제롤 찔러죽이려 했는데도 전혀 소식이
없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풍 나으리와 함께 소식을 알아본다
고 나갔어요.]
목검병은 말했다.
[그들 두 사람은 점심을 먹은 후 나갔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위소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간 근심이 되지 않았다.
풍제중의 무예가 고강하여 쌍아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들 두 사람은 황제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
니 사람들이 도망친 후에 돌아오고 마침 대포가 쏴진다면 큰일이 아닌
가. 그는 잠시 생각해 보고 전노본에게 말했다.
[전형, 풍형과 쌍아는 소식을 알아본다고 나간 이후 아직 돌아오지 않
았다는구려. 이곳에다 뭔가 표시를 남겨 그들이 보고 즉시 떠날 수 있
도록 해주시오.]
전노본은 너무나 다급한 판이란 즉시 단도를 뽑아 두 명의 청나라 병사
허벅지를 두 번 칼질을 해서 옷자락을 찢어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상
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찍어서 각처의 문에다가 빨리 도망치라는 글자
를 썼다. 여러 문에 글 쓰는 것을 마쳤을 때 옷을 바꿔 입는 것도 끝났
다.
위소보는 사람들을 이끌고 마구간으로 가서 타고 갈 말을 끌어냈다. 네
명의 천지회 부하들은 태감으로 분장을 해서 공주의 작교를 들었다. 아
제적만 잡아 압송해 나왔으나 오십여 명이나 되는 군사들은 혈도를 짚
히거나 혹은 손발이 묶여서 백작부에 남게 되었다.
위소보는 여전히 공주의 교자에 앉아 있었는데 백작부에서 벗어나자 한
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집안에서 나를 시중들던 문지기들과 마부, 요리사, 친위병, 남녀 하인
들은 모조리 대포에 맞아 죽임을 당하겠구나. 그러나 만약 그들도 함께
나서자고 한다면 반드시 관병들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날 오대산에서 모두 라마로 가장하여 노황야의 목숨을 구했는데 오
늘도 똑같은 계책을 사용하였구나. 이 자라 껍질을 벗고 도망치는 계책
은 꽤나 쓸모가 많구나.)
군호들은 공주와 아제적을 데리고 골목을 나서게 되었다. 관병들은 왔
다갔다하면서 순찰을 돌고 있었으며 경계가 삼엄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러나 대포를 어디에 나열해 놓았는지는 발견할 수 없었다.
위소보는 위험한 곳에서 벗어나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와 형제
들이 모두 포화에 날아가는 재난에서 벗어난 것을 무척 기뻐하며 조제
현에게 말했다.
[아 통령은 윗사람을 범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니 대역무도한 자요.
그대가 그를 압송하여 옥에 가두어두고 황상께서 친히 심문하고자 하지
않는 한 내가 돌아와서 다시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시오.]
조제현은 응낙했다.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이 사람은 국사범이며 황상께서는 그를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고 있
소. 이름만 들어도 크게 신경질을 낼 것이오. 그대는 형제들에게 모두
입을 조심하도록 일러 황상께서 그 반적의 이름을 듣지 못하도록 하시
오.]
조제현은 그 명령을 받고 사십 명의 어전시위들을 거느리고 아제적을
압송해서 떠나갔다.
아제적은 그 후 옥에 갇혔고 차후 어떻게 벗어나게 될는지 위소보는 신
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군호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외딴 곳으로만 나갔다. 한 마장
나갔을 때 위소보는 교자에서 내려 말로 바꿔 탔다.
진근남은 물었다.
[귀신수 가족이 궁으로 들어가 황상을 찔러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되
었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그들 세 사람은....]
별안간 꽝, 꽝, 꽝,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이어 곧 백작부 위의 하늘
이 검은 연기로 가득 차 올랐다. 멀리서 보니 대들보와 벽돌 그리고 기
왓장들이 공중으로 어지럽게 날아올랐다.
군호들은 발 밑의 땅이 드르릉 울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포소리
는 여전히 우르릉거리며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백작부에서 시뻘건 화
염이 치솟았는데 그 높이가 십여 장이나 되었다.
군호들은 동모아 호동에서 다행히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으나 여전히
훅훅 끼치는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모두들 서로 쳐다보며 아연실색했다. 대포의 위력이 저토록 무서우리라
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잠시라도 늦게 떠났다면 목숨이 붙어 있었
겠는가?
유대홍은 욕을 했다.
[제기랄! 이토록 천지를 진동시키다니....]
곧이어 다시 꽝꽝, 하는 대포소리가 울려 그 다음 말을 완전히 뒤덮고
말았다. 멀리서 백작부를 볼 때 불빛이 언뜻 어두워지는가 했는데 곧이
어 화염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하늘 반쪽이 모조리 시뻘겋게 타오르
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대포소리를 소황제도 반드시 들었겠지. 그가 사람을 보내 나를 불
러 이야기를 하려고 할 테니 즉시 들통이 나고 말 것이다.)
그는 즉시 진근남에게 말했다.
[사부님, 우리들은 재빨리 성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소식이 전해지면
성문 입구에서 조사가 엄해져 쉽게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진근남은 말했다.
[맞다. 이대로 떠나자.]
공주가 재빨리 교자 안에서 달려나왔다. 위소보는 고개를 돌리고 공주
에게 말했다.
[그대는 궁 안으로 먼저 돌아가시오. 일이 조용해진 이후에 내 다시 그
대를 맞으러 오리다.]
공주는 분노하여 호통치며 물었다.
[그대는 뭐라고 했지요?]
위소보는 다시 한번 더 말했다.
공주는 부르짖었다.
[그대는 다리를 지나자마자 판자를 뜯어 내는군요! 이대로 나를 버리고
상관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아니오, 그게 아니라....]
그는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철썩 하고 심하게 따귀를 한 대 얻어맞
았다. 군호들은 모두 어리벙벙했다.
조금 전 포화가 천지를 진동하자 하나같이 위소보가 방법을 강구해서
구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모두 이미 잿더미가 되어 나뒹굴었을 것이고
결코 살아날 가농성은 없었을 것이다. 평소 이 젊은 향주를 별로 예쁘
게 보지 않던 사람들도 이제는 감격하며 탄복하고 있던 터인데 갑자기
공주가 손으로 위소보를 치는 것을 보자 즉시 달려와 그녀를 밀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크게 꾸짖는 사람도 있었다. 공주는 큰소리로 울부
짖었다.
[그대가 나와 혼례를 올린다고 말해서 나는 그대의 말을 듣고 그대를
황궁에서 끌어냈어요. 그리고 전봉영의 통령으로 하여금 그대의 친구들
을 구하도록 했어요. 그대는....그대는 고약한 도적처럼 그저 시치미를
떼려고 하는군요. 우리는 이대로 끝낼 수 없어요. 내 뱃속에....]
위소보는 그녀가 부끄러움도 없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꼴사나운 일을
들먹이게 될까 봐 재빨리 말했다.
[좋소, 좋소. 그대가 나를 따라가려면 따라가도록 하시오. 모두 성을
나선 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공주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몸을 훌쩍 날려 말을 탔
다. 일행은 동성 조양문(朝陽門)에 이르렀다. 위소보는 외쳤다.
[황상의 밀지를 받들고 성을 나가 반적을 잡아야 하니 빨리 성문을 여
시오!]
효기영, 호군영, 전봉영 세 곳의 관병들은 황제의 어림군(御林軍)
이고 친위병이다. 사실 이들은 북경성 안에서 거들먹거렸고 문무백관들
도 그들을 어느 정도는 꺼려했다.
문을 지키는 관병들이 전봉영 군사들이 들이닥치는 데야 감히 거역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방금 대포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던 것을 들은 터
라 성 안에 반드시 큰 사고가 났다는 생각이 들어 즉시 성문을 활짝 열
어 젖혔다. 사람들은 성을 빠져나오자마자 동쪽으로 질풍같이 내달았
다.
어느덧 날이 밝아왔다.
위소보는 진근남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면서 귀신수의 집안 사람
들이 황상을 찔러죽이려다가 실수를 하였고, 황제가 어떻게 자기의 정
체를 발각했는가를 간단히 말했다.
진근남은 칭찬했다.
[소보, 나는 평소 네가 경박한 것을 보고 네가 정말 성실하지 못한 사
람이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요긴한 때에 이르러 의를 앞세우
고 부귀공명을 탐하지 않으며 친구를 팔아 넘기지 않았으니 실로 갸륵
한 일이다.]
위소보는 웃었다.
[다른 친구라면 몰라도 대의멸사(大義減師)의 일은 결코 저버릴수 없는
일이죠.]
진근남은 말했다.
[뭐가 다른 친구라면 몰라도야? 친구라면 그 누구든지 팔아 넘길 수 없
는 것이다. 대의멸사라는 넉 자를 잘못 사용하고 있구나.]
위소보는 혀를 쏙 내밀고 말했다.
[제자는 학문이 없어 말을 잘못했습니다. 사부님은 너무 탓하지 마십시
오.]
옛날 소황제와 터무니없는 말을 주고받는 등 무척 즐거웠던 때를 회상
했다. 그런데 오늘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하니 차후에는 다시 그와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지라 그만 마음이 침울해졌다.
진근남은 말했다.
[우리가 전봉영의 군사로 가장해서 나선 것을 반나절이 되기도 전에 오
랑캐들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빨리 옷차림을 바꿔야 되겠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앞 고을에 들어가 옷을 사서 옷차림을 바꾸도록 해야지
요.]
동쪽으로 이십여 리를 달려 한 고을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을에는 헌
옷을 파는 곳이 없었다.
진근남은 군을 통솔하여 전쟁에 임하거나 정사에 관해서는 재주와 지략
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이와 같이 일상의 조그만 일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인지 옷 파는 가게가 없는 것을 보고 말했다.
[앞쪽 고을에 가서 다시 사기로 하자. 헌 옷을 파는 가게를 찾을 수 있
다면 좋으련만.]
일행들은 그 고을을 가로질렀다. 그런데 그 고을 어귀에 한 대갓집이
있었다. 담장이 높은 데다가 붉은 대문이었고 또한 규모가 상당히 웅장
한 편이었다.
위소보는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어서 말했다.
[사부님, 이 집에 들어가 몇 가지 옷을 빌려입도록 하지요.]
진근남은 주저했다.
[그들이 응하지 않을 것 같구나.]
위소보는 웃었다.
[우리들은 관병이 아닙니까? 관병이 대갓집에서 먹고 자지 않고 대갓집
것을 입지 않는다면 누구의 것을 마음껏 입겠습니까?]
그는 말에서 내려 문에 달려 있는 구리로 만들어진 고리를 잡고 탕탕
탕, 쳤다. 그러자 문지기가 나와서 문을 열었다.
여러 사람들은 우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이는 사람마다 즉시
옷을 벗겼다. 주인은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 있는 관
리였다. 그는 이 한 떼의 전봉영 관병들이 늑대나 호랑이처럼 날뛰는
것을 보고 부르짖었다.
[여러 나리들은 거칠은 짓을 하지 마시오! 이 형제가 술과 밥을 안배하
도록 분부해 여러분들이 들도록 하겠소. 그리고 여자들을 들여보
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사람이 그를 잡고 장포와 바지를 벗겼다.
그는 깜짝 놀라서 부르짖었다.
[속옷은 벗기지 마시오!]
군호들은 히히, 하하, 하며 삽시간에 사람들의 옷을 수십 벌이나 빼앗
았다. 그 은퇴한 벼슬아치의 가족들은 그만 혼비백산했다. 다행히 이
한 떼의 관병들은 그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의 옷을 벗겼지만 여자들을
희롱하거나 모욕하지는 않았다.
남자의 옷만 빼앗고 다른 짓은 하지 않고 우르르 다시 달려나가더니 말
을 타고 떠나가 버렸다.
대갓집의 모든 남자들은 벌거숭이가 되어 서로 쳐다보며 어리벙벙해 있
었다.
군호들은 조용한 곳에 이르러 다투어 옷을 바꿔 입었다. 공주와 목검
병, 그리고 증유 세 사람도 남장을 하였다. 그들은 다시 말 위에 올라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위소보는 쌍아가 걱정되어 말했다.
[풍 형과 나의 나이 어린 하녀가 북경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구
려. 위외성(位外省)에서 낯선 형제가 북경으로 되돌아가 소식을 알아봤
으면 하오.]
그러자 광서성에서 온 두 명의 형제들이 명을 받고 달려갔다. 군호들은
관병이 뒤쫓아오는 것이 보이지 않자 약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다
시 한동안 나갔을 때 목검병이 아아, 하고 놀라 부르짖자 모두들 껄껄
웃기 시작했다. 증유가 탄 말이 갑자기 붉은 똥을 싸기 시작하여 하마
터면 그 똥이 목검병의 발에 튀길 뻔했던 것이었다.
다시 얼마 나가지도 못해 몇 필의 말이 설사를 했다. 곧이어 현정 도인
이 탄 말이 히힝, 부르짖으며 땅바닥에 쓰러지더니 다시 일어나지 못했
다. 전노본은 말했다.
[도장, 우리 두 사람이 말을 함께 탑시다.]
현정은 말했다.
[좋소!]
그는 몸을 날려 말 위에 올라 전노본의 등뒤에 앉았다.
위소보는 갑자기 섕각되는 바가 있어 그만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사부님, 보응입니다. 보응! 이번엔 야단났습니다.]
진근남은 물었다.
[뭐가?]
위소보는 말했다.
[오....오응웅의 시신이 나를 붙잡고 늘어진 것입니다. 그는 내가 미워
서....내가 그를 다시 잡아오고 거기다가 그의....빼앗은데 대해
서....]
그는 '그의 마누라'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날 황상의
명을 받고 오응웅의 뒤를 뒤쫓은 것을 상기했다.
오응웅 일행이 탄 말이 모두 대량의 파두를 먹었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끊임없이 설사를 하고 쓰러져 죽어 오응웅은 멀리 도망치지 못하고 그
에게 잡혔던 것이 아니었던가?
만약 그때 오응웅이 운남으로 도망쳤더라면 황제는 그를 죽일 수가 없
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기가 도망칠 차례가 되자 말들이 하나 하
나 똑같이 설사를 하고 쓰러져 죽으니 이것이야말로 오응웅의 귀신이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군다나 자기로 말하면 그의
처를 데리고 함께 도망을 치고 있으니 오응웅은 귀신이 된 이후에도 자
기에게 달려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겁이 나서 몸을 벌벌 떨었다. 이때 두 필의
말이 몇 번 울부짖으며 다시 쓰러졌다.
진근남 역시 뭔가 사정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재빨리 어떻게 된 것인
가를 물었다.
위소보는 그날 오응웅을 잡던 상황을 이야기하고 들려오는 소문을 말했
다.
[오응웅이 혼이 흩어지지 않고 있다가 오늘 원한을 갚으러 온 것입니
다. 이건....이건....]
공주는 화를 냈다.
[오응웅이라는 녀석은 살아 있을 때도 병신이었으니 죽은 이후에는 더
욱 멍청이가 되지 않았겠어요? 그대는 왜 그를 두려워해요?]
진근남은 눈살을 찌푸렸다.
[청천백일에 무슨 귀신이 있다는 것인가? 그날 그대가 오응응의 말에
독을 먹인 것을 황제는 알고 있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저에게 복을 타고난 장수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진근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황제는 복을 타고난 장수를 다스리게 된 것이다. 그는 네가
도망칠까 봐 이미 태감을 시켜서 너의 말에다 파두를 먹인 것이다.]
위소보는 즉시 깨달은 바가 있어서 말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날 오응웅을 잡았을 때 소황제는 매우 흐뭇하
게 여겼으며 저의 마부에게도 조그만 벼슬을 내렸습니다. 이번에는 그
를 시켜 나의 말이 중독되도록 했을 것입니다.]
진근남은 말했다.
[그렇지. 그는 말의 성질을 잘 알고 있고 또 훤히 내다볼 수 있는지라
독을 썼다면 자연 백발백중이겠지.]
위소보는 노해 말했다.
[다음에 그 마부를 잡는다면 지금 설사한 똥들을 모조리 그의 아가리에
처넣겠습니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타고 있던 말이 갑자기 앞으로 푹 꼬꾸라
졌다.
위소보는 훌쩍 땅에 내려섰다. 그 말은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
다. 그러나 몇 번 몸부림을 치더니 뒷발마저 꿇는 것이 아닌가?
진근남은 말했다.
[말들은 쓸모없게 되었다. 앞 고을로 들어가 다시 사야겠다.]
유대홍은 말했다.
[한번에 수십 필의 말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근남은 말했다.
[그렇소. 모두들 잠시 헤어지도록 합시다.]
이런 말을 주고받을 때 홀연히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현정은 기뻐서 말했다.
[관병이 추격해 왔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을 마구잡이로 쳐죽이고 말을
빼앗아 탈 수 있습니다!]
진근남은 말했다.
[천지회의 형제들은 큰길 왼쪽에 잠복하도록 하고 목왕부와 왕옥산의
형제들은 오른쪽에 잠복하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관병이 도달했을 때
그들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공격하도록 하시오. 아이쿠! 잘못되었
는 걸....]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땅바닥이 은연중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추격하는 관병은 적어도 일이 천명은 될 것 같았다.
군호들은 그의 '아이쿠 잘못되었다'는 한 마디가 어떤 뜻으로 한 말인
지 물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는지라 모두 안색이 변하고 말았
다. 군호들은 수십 명에 불과했고, 무공이 약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대낮에 넓은 들에서 많은 기병들과 싸우게 된다면 적군이 겹겹이 에워
싸고 공격을 해올 판이라 무공이 고강한 사람은 어떻게 도망칠 수 있다
해도 나머지 태반은 목숨을 잃게 될 일이 아니겠는가?
第121章. 외간 남자의 애를 밴 홍 부인
진근남은 즉시 결단을 내렸다.
[관병의 수가 적지 않으니 우리들은 도저히 그들과 맞서서 싸울 수가
없소! 마을이나 숲속으로 흩어져 숨도록 합시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발굽 소리는 더욱더 가까워졌다. 지금까지 달
려왔던 길에 먼지가 자욱하게 치솟아 오르는 것이 아닌가?
마치 커다란 먹구름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큰소리로 외쳤다.
[야단났다! 야단났어!]
그는 냅다 도망치려고 하는데 공주가 외쳤다.
[이봐요!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녀는 바싹 뒤쫓아왔다. 위소보는 외쳤다.
[그대는 궁으로 돌아가시오! 나를 따라가도 덕볼 일은 없을 것이오!]
공주는 욕을 했다.
[고약한 소계자! 이제 와서 도망을 치겠다는거예요? 그렇게 수월한 노
릇은 아닐걸?]
위소보는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공주를 피하는 것은 추격해 오는 군사들을 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동북쪽에 수수밭이 펼쳐져 있는데 그 높이가 사람의 키보다 컸다. 그는
즉시 죽어라 하고 달려갔다. 가까이 달려가 보니 수수밭 뒤쪽에 두 채
의 농가가 있었고 그 밖에는 달리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었다.
뒤쫓아오는 군사들의 말이 빠르니 순식간에 도달할 것이라 생각하고 즉
시 수수밭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 뒷덜미를 바싹 조여 잡더니 공주의 웃음 섞인 목소
리가 들려왔다.
[어딜 도망치려고?]
위소보는 몸을 돌리고 쓰디쓰게 웃었다.
[그대는 다른 곳에 가서 숨으시오. 추격병들을 피한 후에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합시다.]
공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나는 그대와 함께 있겠어요.]
그녀는 즉시 옥수수밭 안으로 기어들어가 그의 몸에 자기의 몸을 갖다
붙였다. 두 사람이 미처 숨기도 전에 발걸음 소리와 함께 증유의 부르
는 소리가 들렸다.
[위 향주! 위 향주!]
위소보는 고개를 내밀었다. 증유와 목검병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려
오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있소. 빨리 이곳으로 와 숨도록 하시오.]
두 소녀는 즉시 뛰어 들어왔다.
네 사람은 수수밭으로 깊숙이 들어가 몸을 숨겼다. 추격해 오는 군사
들이 좀처럼 발견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자 마음이 약간 놓였다. 잠시
후 일 대대의 군인들이 큰길을 따라 달려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날 나, 아가, 여승 사부, 정극상이라는 고약한 녀석 네 사람이 짚
더미 속에 몸을 숨겼었지. 아, 만약 곁에 있는 사람이 고약한 공주가
아니고 아가라면 얼마나 즐거울까? 아가는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십중팔구 정극상의 마누라가 되었겠지. 쌍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갑자기 멀리서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고 한 때의 기병이 말을 멈추었
다. 말발굽 소리가 멈추자마자 이쪽으로 수색해 왔다.
공주는 놀라 외쳤다.
[그들이 우리를 발견했나 봐요!]
위소보는 말했다.
[아무 소리도 하지 마시오. 우리를 보지는 못했을 것이오.]
공주는 말했다.
[그들이 이리로 오고 있잖아요?]
이때 한사람이 외쳤다.
[반적들이 타고 있던 말들이 모조리 이곳에서 죽은 것을 보면 멀리 도
망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모두들 자세히 수색해라.]
공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죽은 말이 여러 사람을 망쳐 놓는구나.)
그녀는 손을 뻗쳐 위소보의 손을 꼭 잡았다.
요동의 관외는 땅이 넓고 인구가 적었으며 토지가 비옥했다. 수수 같
은 종자를 심을 때는 수천 마지기나 되는 곳에 심어서 언뜻보아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 같았다. 수수의 키가 자랐을 때는 청사장(靑紗帳)이
라고 일컬으며, 그 안에 몸을 숨기면 좀처럼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북경 근교의 수수밭은 듬성듬성했다.
위소보 등 네 사람이 숨은 수수밭만 하더라도 이삼십 마지기에 불과했
다. 관병이 수색해 온다면 순식간에 잡힐 것이었다.
관병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저쪽 농가에 들어가 숨읍시다.]
그는 목검병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앞장서서 두 채의 농가로 다가갔
다. 세 명의 여자는 뒤를 따라왔다.
사립문을 지나 판자문을 열어젖혔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 안 한 모퉁이에는 적지 않은 농기구들이 쌓여 있었다. 위소보는 다
가가서 몇 개의 도롱이를 집어들고 세 여인에게 나누어 주며 말했다.
[빨리 걸치도록 하시오.]
자기 역시 도롱이를 걸쳤다. 이어 머리에 삿갓을 쓰고 한 모퉁이에 주
저앉았다.
공주는 웃었다.
[우리가 모조리 시골 사람이 되었네요. 정말 재미있어요.]
목검병은 쉿, 하고 나직이 말했다.
[왔어요!]
판자문이 열리면서 일고여덟 명의 관병들이 들어왔다. 위소보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한 사람이 큰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사람이 없다. 시골 사람들은 아마 밖으로 농사일을 하러 간 모
양이다.]
위소보는 그 음성이 귀에 매우 익었다. 삿갓 밑으로 슬쩍 곁눈질해 보
니 조양동이 아닌가? 그는 속으로 기뻤다. 이때 한 명의 군사가 말했
다.
[총병대인, 저 네 사람은....]
조양동은 호통을 내질렀다.
[모두 나가라! 내가 자세히 수색해보겠다. 집안이 이렇게 좁은데, 제기
랄! 너희들이 모조리 이 안으로 들어오면 몸도 제대로 돌릴 수가 없겠
구나.]
군사들은 대 답하고 모두 물러 갔다.
조양동은 큰소리로 말했다.
[이곳에는 농사꾼들만 있고 범인들은 없구나.]
그는 위소보 앞으로 오더니 품속에서 두 덩이의 금원보와 세 덩이의 은
자를 꺼내 가만히 위소보의 발 옆에 놓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 패거리들은 북쪽으로 도망을 쳤구나. 황상께서 크게 노하셨으니 붙
잡히면 반드시 머리가 잘릴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멀리
도망친 것이다. 그들은 멀리 도망칠수록 좋겠지만, 우리들은 정말 야단
났다.]
그 말은 위소보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그는 몸을 구부리더니
위소보를 가볍게 껴안아 주고 몸을 돌려 나가며 호통을 질렀다.
[반적들은 북쪽으로 도망쳤다. 빨리 뒤쫓도록 해라!]
위소보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속으로 생각했다.
(조 총병은 그래도 의리가 있구나. 이 일이 남에게 알려지면 그 자신의
머리를 보존하기 힘들 것이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는 가운데 관병들은 북쪽으로 달려갔다. 공주는
의아해하며 말했다.
[저 총병은 분명히 우리를 봤는데 어째서.... 아, 그는 그대에게 금과
은을 선물했군요. 그대의 친구였군요.]
위소보는 말했다.
[우리는 뒷문으로 갑시다.]
그는 금과 은을 품속에 갈무리하고 뒤쪽으로 나갔다. 뒷마당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처마 아래에 몇 명이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위소보는 그들을 보자 깜짝 놀라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몸을 돌려 달아
나려고 했다. 두 걸음 옮겨 놓았을 때 뒷덜미가 바싹 조이면서 어느덧
누군가에게 잡혀 들어 올려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사람은 바로 홍 교주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홍 부인, 반두타, 육고
헌, 청룡사 허설정, 적룡사 무근 도인, 흑룡사 장담월, 황룡사 은검 등
신룡교의 수뇌 인물들이었다. 한 명의 소녀도 있었는데 바로 방이였다.
공주는 화가 나서 말했다.
[당신이 왜 그를 붙잡고 야단이에요?]
그녀는 발을 들어 홍 교주를 걷어차려고 했다. 홍 교주는 왼손을 내리
면서 중지로 그녀의 발등을 살짝 퉁겼다. 공주는 악, 하고 비명을 지르
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위소보는 몸이 허공에 매달려 외쳤다.
[교주와 부인께서는 영원히 선복을 누리시기 바라며 수명이 하늘처럼
길기를 비옵니다. 제자 위소보가 삼가 인사드립니다.]
홍 교주는 냉소했다.
[네가 아직도 그 두 마디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갸륵하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 두 마디의 말을 제자는 언제나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잠에
서 깨자마자 한 번 읊고, 세수할 때 한 번, 아침밥을 먹을 때 한 번,
점심밥을 먹을 때 한 번, 저녁밥을 먹을 때 한 번 읊으며, 저녁에 잠자
리에 누울 때 또 한 번 읊지요.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습니다. 때로
는 교주와 부인의 은덕을 생각하고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도 몇 번씩 더
읊어 본답니다.]
신룡교의 옛 소굴이 망가져 교의 무리들 중 죽은 사람은 죽고 흩어진
사람은 흩어져 홍 교주의 곁에는 몇 명의 늙은 형제들밖에 남지 않았
다. 강호에서 떠돌아다니게 된 신세라 모두들 영원히 선복을 누리고 수
명이 하늘처럼 길지어다 하는 칭송의 말은 기운이 없어 제대로 하지 못
하였다. 날이 갈수록 칭송하는 말을 듣기 어려웠다. 이때 위소보가 그
같은 말을 마구 쏟아내자 홍 교주는 속으로 흐뭇해져서 그를 내려놓았
다. 그의 차갑기 이를 데 없던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위소보는 말했다.
[속하가 오늘 교주님을 뵙게 되니 몸에서 기운이 나고 정신이 샘물처럼
맑아지는군요. 그런데 한 가지 일만은 모르겠습니다.]
홍 교주는 물었다.
[그게 뭔가?]
위소보는 말했다.
[교주님과 부인을 뵈온 지 상당히 오래된 것 같은데 어찌하여 교주님께
서는 칠팔 세나 더 젊어지신 것 같고 부인께서는 저의 누이 동생처럼
변했느냔 말입니다. 정말 이상하군요.]
홍 부인은 깔깔거리고 간드러지게 웃으면서 손을 뻗쳐 그의 얼굴을 꼬
집고 웃었다.
[이 어린 원숭이야! 아첨을 떠는 재간은 그대가 천하 제일이다.]
공주는 대노해서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이라는 여자는 염치가 없군요. 어째서 손과 발을 마구 놀리는 거
예요?]
홍 부인은 웃었다.
[나는 손을 썼을 뿐이지. 발은 움직이지 않았어. 좋아, 그렇다면 발도
한번 움직여 볼까?]
그리고는 왼발을 들더니 퍽, 하고 공주의 엉덩이를 힘주어 찼다.
공주는 아파서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이때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삽시간에 사방에서 말
들이 달려드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관병들인지 모르지만 농사꾼의
집을 겹겹이 에워싼 것이다.
곧이어 십여 명의 관병들이 몰려 들어왔다. 앞장선 두 사람은 마당으로
들어서더니 여러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한 사람이 말했다.
[모두 농사꾼들이군.]
위소보는 왕진보라는 것을 알고 속으로 기뻐하며 고개를 돌렸다. 왕진
보 곁에는 손사극이 있었다. 두 사람은 눈짓을 하더니 손을 들어 군사
들에게 나가라고 했다. 손사극은 큰소리로 말했다.
[몇 명의 백성들밖에 없구나. 이것 보시오! 당신들은 도망치는 범인들
을 보았소? 보지 못했다구? 좋아, 우리들은 다른 곳을 조사하러 가자.]
위소보는 생각했다.
(내가 신룡교주의 손에 잡혔으니 무슨 수를 써도 이번에는 끝내 목숨을
건질 수 없을 것이니 왕진보를 따라가자. 먼저 신룡교의 독수에서 벗어
나 다시 그들 두 사람에게 나를 놔주라고 부탁하면 될 것이다.)
그는 왕진보와 손사극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불렀다.
[왕 셋째 형, 손 넷째 형, 나는 위소보요. 그대들은 나를 데리고 가 주
시오.]
손사극은 말했다.
[당신들 시골 사람들은 멀찌감치 비켜서도록 하시오.]
왕진보는 말했다.
[이 꼬마 형제는 돈이 없어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 같구먼.]
손사극은 말했다.
[돈 말인가? 있지 있어.]
그는 몸 속에서 한 웅큼의 은표를 꺼내 위소보에게 내밀며 말했다.
[북경성 안에서 반적이 도망치는 바람에 황상께서는 크게 화를 내시어
수천이나 되는 병마들을 내보내 반적을 잡아들이라고 하셨소. 반적을
잡게 된다면 즉시 머리를 자를 것이오. 작은 형제, 이곳은 위험하기 짝
이 없소. 만약 억울하게 잡혀가서 목숨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
소?]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들은 나를 잡아가 주시오....나는....나는 차라리 그대들을 따라
가겠소.]
왕진보는 말했다.
[그대는 우리들을 따라가겠다는 것이오? 그러나 이것은 장난이 아니오.
밖에는 황상이 친히 파견한 화기영(火器營)의 병마들이 있는데 모두 화
총(火銃)을 지니고 있어, 펑펑 쏴 대면 그대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해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화기영의 병마가 있다면 더욱 잘되었다. 홍 교주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재빨리 말했다.
[나는 황상께 상주할 말이 있소. 그대들은 나를 데리고 가 주시오.]
왕진보는 말했다.
[황상은 그대를 보는 즉시 그대의 머리를 자르려고 할 것이오. 황상 역
시 평범하게 생겨서 눈 두 개에 입 하나를 가지고 있을 뿐인데 어째서
만나보려 하시오? 아, 우리들이 열세 필의 말을 남겨 둘 테니 열세 명
의 시골 사람들은 각기 한 필의 말을 타도록 하시오. 팔 년이나 십 년
이 지난 후 북경으로 보내오면 될 것이오. 하지만 말이 한 필이라도 죽
는다면 배상을 해야 하니 조심하시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마당으로 나갔다. 위소보는 몹시 다급해져서 앞으
로 뛰어나가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왕 셋째 형, 제발 나를 데려가 주시오!]
별안간 커다란 손이 그의 정수리를 살짝 찍었다. 곧이어 홍 교주의 음
성이 들려왔다.
[여보게 소 형제, 이 총관 나리께서는 호의를 베풀고 계시네. 그는 방
금 경성에서 와서 황상의 생각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니 그대는 쓸데없
는 생각을 하지 말도록 하게나.]
손사극은 큰소리로 말했다.
[맞았소. 우리들은 빨리 반적을 쫓아갑시다.]
위소보는 이미 자기 목숨이 홍 교주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홍 교주가 내공을 쏟아내기만 하면 자기는 즉시 머리통이 부숴지고 골
수가 터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죽지 않는다해도 얼마 후에
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대는 빨리 나를 데리고 가 주시오. 내가 바로 위소보입니다.]
손사극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위소보는 십여 세의 소년이외다. 그대와 같은 영감은 팔십 세도 더 된
것 같구려. 음성을 뾰족하게 해서 장난을 치는데 그런 소리를 내면 사
람들이 웃다가 입이 삐뚤어지지 않겠소?]
그는 왕진보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
겨놓았다. 이윽고 호통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열세 필의 말을 이곳에다 남겨두도록 해라. 그래야 뒤쫓아오는 추격병
들이 탈 것이 아니겠느냐? 두 칸의 초가집은 불태워 반적들이 숨는 것
을 막도록 해라.]
군사들은 대답했다.
[영을 받들겠습니다.]
즉시 집을 태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한 때의 인마는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다. 왕 셋째 형과 손 넷째 형은 내
가 이곳에서 머뭇거리며 가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데 만약에 추
격병이 다시 들이닥친다면 나의 사정을 봐 주지 않을 것이다.)
이때 집 주위는 이미 불에 휩싸였고 화염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홍 교주는 웃었다.
[그대의 친구는 퍽 의리가 있군. 은자도 주고 말까지 주지 않는가? 자,
모두 가세.]
목검병이 공주를 부축해 일으켜 모두들 뒷문으로 나와서 집 앞으로 돌
아갔는데 과연 커다란 나무 아래에는 열세 필의 준마가 매여 있었다.
그 가운데 두 필의 말등에 얹혀 있는 안장은 매우 값진 것으로 왕진보
와 손사극이 타던 말이었다.
여러 사람들은 말을 타고 동쪽으로 향했다. 위소보 등 네 사람은 한가
운데서 말을 몰아야 했다. 위소보는 추격병이 달려와 자기를 잡아갔으
면 하고 바랐다. 소황제가 자기에게 정이 깊고 의리가 깊으니 이번에
커다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자기 머리를 자를 것 같지는 않았다. 반
면 홍 교주는 음흉하고 악랄하기 이를 데 없으니 그의 수중에 떨어진
이상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길을 가
는 동안 추격병의 말발굽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여러 사람이 타고 있는 말들은 모두 왕진보가 뽑은 훌륭한 말들이라서
나는 둣 달렸으며 추격병이 쫓아온다 해도 그들이 뒤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더군다나 조양동, 왕진보, 손사극 세 총병이 일찌감치
추격병들을 북쪽으로 이끌고 가지 않았는가.
길을 가는 동안 공주가 욕하고 떠드는 소리 외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홍 부인이 공주의 아혈을 짚어 버리자 공주는 가슴 가득히 끓
어오르는 노기를 참을 수가 없었으나 욕도 할 수 없었다.
홍 교주는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동남쪽의 황량한 곳만 찾아서 달렸고
밤이 되면 황야에서 노숙을 했다. 위소보는 몇 번이나 계책을 강구해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홍 교주의 계책은 결코 그에 못지않아 매번 얻어맞
았을 뿐이었다.
며칠 후 그들은 해변가에 도달하였다. 육고헌은 위소보의 품에서 한 덩
이의 은자를 꺼내 한 척의 커다란 해선(海船)을 얻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배를 빌리는 은자까지 자기 돈
을 내는 것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모든 사람이 배에 오르자 해선은 돛을 올리고 동쪽으로 나아갔다. 위소
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는 신룡도로 갈 것이다. 늙은 자라는 반드시 나를 뱀의 먹이로
삼으려고 하겠지.)
섬의 독사들이 한마리 한마리 기어올라와 입을 벌리고 자신의 몸을 무
는 광경을 상상하니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방법을 강구해서 배 밑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모두 함께 죽었으면
좋겠다.)
신룡교 사람들은 그에게 간계가 많다는 것을 알고 매우 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 무슨 기회를 엿볼 수 있었겠는가? 위소보는 신룡도에
두 번 간 적이 있었다. 첫번째는 방이와 배를 타고 정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대군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신룡도를
찾아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에게 주먹으로 얻어맞고 발길에 채이는
등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어서 예전에 신룡도를 찾아갈 때와는 천양지
차였다.
이번에 방이를 만난 후에 육지에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렸고, 바다
에서도 함께 배를 탔자만 방이는 시종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고, 그
저 무표정한 얼굴만 하고 있었다. 위소보 자신을 괴롭히려 하지는 않았
지만 결코 위소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위소보는 그녀가 홍 교주의 위세때문에 자기에게 아무리 깊은 정을 갖
고 있어도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때때로 저 작은
갈보가 누차 자기를 속였으며 음흉하고 교활한 점에 있어서는 천하의
여자들 가운데 그녀가 으뜸이라는 생각을 하면 이가 갈리곤 했다.
배를 탄 지 며칠이 지나자 드디어 신룡도에 도달하였다. 육고헌과 반두
타는 위소보, 공주, 목검병, 증유 네 사람을 압송하여 언덕으로 올라갔
다.
섬의 나무들은 불에 그슬려 있었고, 이곳 저곳에 깨어진 기왓장이 널
려 있었는데 도처에 그때 포격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으며, 길에는 죽은 뱀들의 뼈가 남아 있었다.
건물 앞에 이르니 담장은 무너져 있고, 대나무는 잘려 나갔으며 수십
채나 되는 대나무집들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홍 교주는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금 등은 하나같이
분노의 빛을 띠며 위소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장담월은 큰소리로 외쳤다.
[홍 교주께서 섬으로 돌아오셨다. 각처의 교도들은 빨리 나와서 교주님
께 인사를 드리도록 해라!]
그가 크게 부르짖자 그 소리가 수 마장 밖에까지 울려퍼졌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두 번 외쳤다. 그러자 산골짜기에서 메아리소리가 들려왔다.
[섬으로 돌아오셨다. 교주님께 인사를 드려라! 섬으로 돌아오셨다. 교
주님께 인사를 드려라!]
그러나 교도들이 벌떼처럼 달려나오기는커녕 대답소리도 들을 수 없었
다. 홍 교주는 고개를 돌리더니 위소보에게 냉랭히 말했다.
[네가 포로 쏴대어 신롱교가 박살나고 말았으니 이제 소원풀이를 한 셈
이냐?]
위소보는 그의 얼굴에 악독한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모골이 송연해
져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옛 것이 가지 않으면 새 것이 오지....오지 않습니다. 홍 교주께서는
과거의 위풍을 다시 떨치시고 커다란.... 커다란 일을 도모하시어 재
차....재차 새로운 교를 창립하신다면 교세를 더욱 떨치고 재물을 긁어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태우면 태울수록 더욱 흥청거리
고 포를 쏴댈수록 더욱 기세를 돋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주
와 부인께선 영원히 선복을 누리시고....]
홍 교주는 말했다.
[매우, 좋아!]
그는 위소보의 엉덩이를 차서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위소보는 퍽, 소리
와 함께 땅바닥에 코방아를 찧었다.
위소보는 코피가 터지고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때문에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증유는 홍 교주의 흉악한 태도에 두려움을 느꼈으
나 즉시 다가가 위소보를 부축해 일으켰다. 은금은 앞으로 나아가 허리
를 구부렸다.
[교주님께 알립니다. 저 좀도둑은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속하가 한칼
에 그의 목을 자르겠습니다.]
홍 교주는 흥, 하더니 말했다.
[서두를 것 없소.]
그는 다시 말했다.
[저 녀석은 큰 비밀을 알고 있고, 본교를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그에
게 의지해야 하니 얼마 동안은 그를 죽일 수 없소.]
은금은 말했다.
[예, 예. 교주님께서는 멀리 앞을 내다보고 계신데 속하는 우둔해서 그
가운데의 오묘한 점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군요.]
홍 교주는 커다란 돌 위에 걸터앉아 정신을 가다듬고 한참 생각해보고
나서 말했다.
[큰일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많은 재난을 겪게 되오. 본교가 일시 재난
을 당하기는 했으나 염려할 것은 없소. 지금 교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졌
는데 어떻게 그들을 다시 모으고 옛날의 위풍을 다시 세울 수 있는지
모두들 각자의 소견을 솔직하게 피력해 보시오.]
은금은 말했다.
[교주께서는 영명하시고 지혜로우셔서 우리들이 열흘 밤 열흘 낮을 두
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교주님의 번쩍 떠오르는 영감에 미칠 수가 없습
니다. 그러니 교주님께서 훌륭한 방책을 지시하여 주시면 모두들 명을
받들겠습니다.]
홍 교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다시 교의 무리를 모으는 것이오. 지난번 오랑캐
의 관병이 본도를 대포로 쏘아 교도들이 상처를 입고 죽은 수가 적지
않으나 그 수는 일부에 지나지 않소. 그 나머지 교도들은 반드시 사방
으로 흩어졌을 것이오. 이제 육고헌으로 하여금 백룡사에 취임하여 오
룡사의 수를 채우도록 하겠소.]
육고헌온 허리를 굽혀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홍 교주는 다시 말했다.
[청, 황, 적, 백, 흑, 오룡사는 즉시 각처로 달려가 옛 부하들을 모으
도록 하고, 자질이 괜찮은 소년, 소녀를 발견하면 거두어 부하로 삼도
록 하시오. 옛 사람들은 불러모으고 새 사람들은 끌어들여 신룡교를 다
시 부흥시키도록 합시다.]
은금과 장담월, 그리고 육고헌 세 사람은 허리를 굽혔다.
[삼가 교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적룡사 무근 도인과 청룡사 허설정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홍 교
주는 두 사람을 싸늘히 쳐다보며 물었다.
[적룡사와 청룡사 두 사람은 무슨 할말이 있소?]
허설정은 말했다.
[교주님께 알립니다. 속하에게 두 가지 진정드릴 일이 있으니 교주께서
는 허락해 주십시오.]
홍 교주는 싸늘히 코웃음쳤다.
[무슨 일이오?]
허설정은 말했다.
[속하 등은 언제나 본교와 교주에게 충성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교
주께서는 시종 형제들을 믿지 못하시니 그야말로 속하들에게 크게 실망
을 안겨주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간청드리옵건대 교주께서는
표태역근환의 해약을 내려주시어 이 형제들로 하여금 마음속에 꺼리는
바가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교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
오.]
홍 교주는 냉랭히 말했다.
[만약에 내가 해약을 주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성심성의를 다해서 일을
처리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허설정은 말했다.
[속하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로 간청드리옵건대 소
년소녀들은 일을 성공시키지는 못하면서 일을 망치는 데는 재간이 있습
니다. 큰 환난을 당하면 모조리 도망쳐버립니다. 본교가 지금 어려움에
처하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교주님과 부인의 곁을 따르는 사람은 우리
몇 명의 늙은 형제들밖에 없습니다. 소년소녀들은 입으로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충성을 다하겠다느니, 끓는 물속이나 타는 불 속이라도 들어
가는 등 만 번 죽어도 사양하지 않겠다느니 하고 떠벌렸으나 막상 큰
환난을 당하자 어느 누가 진정으로 힘을 쏟았습니까? 속하의 의견에는
본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마땅히 책임감이 있고, 뼈대가 있는 사내
대장부들을 망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은 달고 마음은 모진, 터무
니없는 말만 지껄이는 소년소녀들은 그야말로 위소보와 같은 좀도둑에
불과하니 더 이상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한 마디를 할 때마다 홍 교주의 얼굴에 나타난 검은 기운은 점점
더 짙어졌다. 허설정은 속으로 두려움을 느꼈으나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와 같은 말을 다 끝낼 수 있었다. 홍 교주는 무근 도인의 얼굴을 쏘
아보며 냉랭히 말했다.
[그대는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시오?]
무근 도인은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속하는 청룡사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전철을 다시 밟을 필
요는 없을 것입니다. 일을 겪지 않으면 지혜가 불어난다고 했으니 교주
님의 커다란 지혜로 소년소녀들이 쓸모도 없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자
연히 아셨을 줄 믿습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목검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소저는 본래 우리 적룡문의 속하였고, 교주는 그에 대해서 많은 은
덕을 베풀었지만 일단 환난에 부딪히자 즉시 교를 배반하고 적에게 투
항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사람은 반드시 쫓아가 잡아다가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교를 배반한 자들에게 경종을 울
려야 할 것입니다]
홍 교주는 육고헌 등을 하나하나 쳐다보더니 물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상의해서 하는 말이오?]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반두타가 입을 열었다.
[교주께 아룁니다. 우리들은 상의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속하
는 청룡사와 적룡사 두 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 교주는 장담월을 쳐다보며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장담월은 전전
긍긍하며 말했다.
[본교가 이번에 하마터면 멸망을 당할 뻔했는데 모두 다 위소보라는 이
좀도둑 때문입니다. 속하는 이와 같은 사람을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홍 교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좋소. 그대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한패거리였군. 육고헌, 그대는?]
육고헌은 말했다.
[속하는 교주의 커다란 은혜를 입어 백룡사라는 중책을 맡기에 이르렀
으니 자연히 힘을 써서 교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 바쳐야 할 것입니다.
모두들 본교와 교주님을 위해서 그런 말씀을 올렸으며 결코 다른 뜻은
없습니다.]
은금은 큰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그대들의 말은 모두 틀렸소. 교주의 지혜는 우리보다 백 배나
뛰어나시오.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쓸데없는 말을 하시오. 교주와 부
인의 지휘를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오랑캐 군사가 본교를 폭격한
것은 본교의 때를 벗겨낸 것이오. 교주께 불충스러운 모든 교도들을 대
포로 쏘아 내쫓은 것이라 할 수 있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누
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 것을 알 수 있었겠소? 우리 속하들은 우물 안
개구리이고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얕으니 어찌 교주처럼 백세(百世)를
통찰할 수 있단 말이오?]
허설정은 노해 말했다.
[본교가 여지없이 쓰러지게 된 것은 바로 그대와 같은 아첨꾼 때문이
오. 당신이 마구 아첨을 떨어서 본교에 무슨 이득이 있었으며 교주님께
무슨 이득이 있었소?]
은금은 말했다.
[뭐, 아첨꾼이라고? 당신은.... 당신은.... 당신이야말로 반역도가 아
니오?]
허설정은 화를 내며 부르짖었다.
[당신 같은 뻔뻔스러운 소인이 본교를 망쳤으니 그대야말로 반역도요.]
그는 손을 칼자루로 가져갔다. 은금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날 그대가 반란을 일으켜 윗사람을 범하고 교주를 배반하였으나 다
행히 교주님과 부인께서 너그러이 은혜를 베푸시어 벌을 받지 않았는데
오늘....오늘 그대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오?]
허설정, 무근 도인, 장담월, 육고헌, 반두타 다섯 사람은 일제히 교주
를 똑바로 쳐다보았으며 노기를 띤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 교주는 고개를 돌려 은금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냉랭한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은금은 깜짝 놀라 다시 한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교주님, 그들....그들은 음흉한 일을 도모하려 하니 반드시 죽여야 합
니다.]
홍 교주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방금 그대는 무슨 말을 했지?]
은금은 그의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을 보자 더욱 두려움을 느끼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속하는....충....충....교주님께 충성을 다하는 몸이라 이 반적들과는
세....세불양립(勢不兩立)입니다.]
홍 교주는 말했다.
[우리들은 그날 무거운 맹세를 했다. 옛일을 다시 들추어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은금은 놀라 혼비백산해서 말했다.
[교....교주께서는 벌을 주십시오. 속하는 일시 충성심으로.... 다른
뜻은 결코 없었습니다.]
홍 교주는 말했다.
[그날 나와 부인은 맹세했다. 만약 묵은 원한을 기억한다면 용담으로
들어가서 만 마리의 뱀들에게 물어뜯겨 죽어야 한다고 했다. 그 일은
이미 깨끗이 지웠고 모든 사람들이 깨끗이 잊고 있는데 너는 아직도 기
억하고 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간질을 하는데 도대체 어떤 저의
를 지니고 그러는 거냐?]
은금의 얼굴에서는 이미 한점의 핏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만
두 무릎을 꿇더니 큰절을 하며 말했다.
[속하는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영원히 다시는 들먹이지 않겠습니
다.]
홍 교주는 싸늘하게 말했다.
[본교의 무거운 맹세를 어찌 함부로 어긴단 말이냐? 그 맹세를 네가 어
겼으니 나는 지켜야 하겠다. 너 스스로 용담으로 들어갈 테냐, 아니면
내가 던져 넣을까?]
은금은 크게 비명을 지르더니 뒤로 몸을 날려 잽싸게 도망쳤다.
홍 교주는 그가 수장 밖으로 달려나가기를 기다려 돌을 한 조각 집어들
고 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돌은 은금의 뒤통수에 적중되었
다.
은금은 길게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 일어났다가 맥없이 쓰러져 몸을
몇 번 꿈틀거리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홍 교주는 허설정 등 다섯 사
람이 서로 손을 잡는 것을 보고 자기의 무공에다 부인과 은금이 도와주
면 충분히 다섯 사람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룡교의
원기가 크게 손상을 입었고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은금
은 아첨만 할 줄 알았지 실력이 별로 없었다. 그 다섯 사람을 죽인다면
자기 부하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는 셈이었다. 그는 삽시간에 이
해득실을 따져보고 은금을 죽여 허설정 등 다섯 사람의 노기를 가라앉
히려고 했던 것이었다. 장담월과 육고헌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교주님께서는 맹세를 지키시어 저 간악하고 사악한 자를 주살하시니
속하는 탄복했습니다.]
허설정과 무근 도인 그리고 반두타 세 사람도 역시 말했다.
[교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섯 사람은 평소 은금이 그저 아첨만 할 줄 알았지 인품이 낮은 것을
보고 그를 매우 멸시해 왔다. 그런데 조금 전에 교주가 친히 손을 써서
그를 죽이자 모두 통쾌함을 느꼈다.
홍 교주는 위소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은 요동의 아주 북쪽, 춥기가 이를 데 없는 곳에 많은 보물이
매장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소. 만약 그가 안내하지 않으면 찾아낼 수
없소. 그 보물올 찾은 후에 우리들이 신룡도를 다시 세우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수월할 것이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방금 그대들 다섯 사람은 그 소년소녀들은 믿올 수 없으니 나에게 과
거의 전철을 다시 밟지 말라고 권했소. 본좌가 생각해보니 그말에도 일
리가 있소. 이제 그대들의 주장에 따라 본교가 새로운 무리들을 불러모
으게 될 때는 반드시 신중을 기해서 간악하고 허망된 자가 교에 들어오
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오.]
허설정 등 다섯 사람은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으며 일제히 허리를 굽혀
고마워했다.
홍 교주는 몸에서 두 개의 자기병을 꺼내더니 한 병에서 각기 다섯 알
의 알약을 손바닥에 쏟았다. 다섯 알은 황색이고 다섯 알은 백색이었
다. 그는 병을 품속에 갈무리하고 알약을 왼손바닥에 놓고 말했다.
[이것은 표태역근환의 해약이니 그대들 한사람 한사람이 각기 두 알씩
복용하도록 하시오.]
허설정 등은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알약을 받았다. 홍 교주는 말
했다.
[그대들은 즉시 복용하도록 하시오.]
다섯 사람은 알약을 입 속에 넣고 삼켰다.
홍 교주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매우 잘되었소....]
갑자기 그는 일성대갈했다.
[육고헌, 그대의 왼손에 가지고 있는 것은 뭐지?]
육고헌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아무것도....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왼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는데 주먹을 쥐고 있었다.
홍 교주는 날카롭게 말했다.
[왼손을 펼쳐 보여라!]
그 호통소리가 얼마나 큰지 사람들은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
꼈다.
육고헌은 몸을 휘청하더니 왼손을 천천히 펼쳤는데 탁, 하는 가벼운 음
향과 함께 하얀 알약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허설정 등 네 사람은 하나같이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평소 육
고헌의 견식이 비범하고 지략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육고헌이 그 하얀 알약을 먹지 않은 데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들은 이미 삼켰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홍 교주는 날카로운 어조로 다그쳤다.
[그 하얀 알약은 몸을 건강하게 하는 대보설삼환(大補雪參九)인데 어째
서 본좌를 의심하고 감히 손바닥 안에 숨긴 채 복용하지 않으려는 것이
냐?]
육고헌은 말했다.
[속하....어찌 감히....그럴 수 있겠습니까? 속하는 근래 내공을 연마
한 것이 잘못되어 경맥의 기혈이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
에....그렇기 때문에 교주께서 하사하신 이 한 알의 대보약을 오늘 밤
운기행공한 후에 천천히 복용하려는 것입니다.]
홍 교주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알고 보니 그랬었군. 그대는 어느 경맥의 기혈이 순조롭지 못하오? 그
것은 수월한 노릇이지. 내 그대를 도와 내공을 순조롭게 해주지. 이리
다가오시오.]
육고헌은 오히려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감히 교주게 수고를 끼칠 수가 없습니다. 속하가 천천히 운기행공을
하면 낫게 될 것입니다.]
홍 교주는 말했다.
[그대는 끝내 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오?]
[속하는 감히 그러지 못합니다.]
홍 교주는 땅바닥의 그 하얀 알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즉시 복용하시오.]
육고헌은 그 알약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예.]
그는 그 하얀 알약을 집어들었다. 그는 별안간 중지로 그 알약을 퉁겨
냈다. 획,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알약은 허공을 가로지르며 멀리 산골짜
기에 떨어지고 말았다. 육고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속하는 이미 복용을 했습니다. 교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홍 교주는 껄껄 소리내어 웃더니 말했다.
[하하! 좋소, 좋아. 그대는 정말 간덩이가 부었군.]
육고헌은 말했다.
[속하는 충성으로 교주를 위해 힘을 써 왔습니다. 교주께서 이미 해약
을 내리시어 표태역근환의 독성을 해소시키는 마당에 어찌하여 독성이
더욱 무서운 백연환(白綎九)을 내리려 하십니까? 속하는 죄가 없으니
벌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허설정 등은 일제히 물었다.
[백연환이라고? 그것은 무슨 독약이오?]
육고헌은 말했다.
[교주께서 백 가지의 독사와 독충의 타액을 채집하여 조제한 약이오.
극독이 안에 있는지 없는지는 나도 잘 모르며 어쩌면 정말 몸을 보호하
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나는 담이 적어 감히 시험삼아 복
용해볼 수 없었소.]
허설정 등은 더욱 놀랍고 당황해서 육고헌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들 다섯 사람은 한 줄로 늘어서서 홍 교주를 노려보았다.
홍 교주는 냉랭히 말했다.
[그대는 그것이 백연환인지 어떻게 알지. 터무니없는 소리로 이간질을
하는구나.]
육고헌은 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 날 나는 방 소저가 풀더미에서 달팽이를 잡는 것을 보고 그녀에
게 무엇을 잡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교주의 명을 받고 달팽이를 잡
아 약에 쓰려는 것이라고 대답했소. 교주의 그 백연환의 처방을 나는
우연히 보았소. 백연환의 독성은 삼 년 후에 발작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백연환은 교주께서도 일찍이 조제한 적이 없었으니 정말 삼 년 후에 독
성이 퍼지는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오. 속하는 오래 살고 싶지 삼
년만 살다가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홍 교주는 얼굴에 분노한 빛을 띄우더니 버럭 호통을 질렀다.
[나의 약처방을 어떻게 볼 수 있었느냐?]
육고헌은 홍 부인을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부인께서는 속하에게 교주의 약상자에서 약을 찾아 내어 그녀에게 복
용시켜 달라고 했는데 그 처방전이 바로 그 약상자 가운데 있었소.]
홍 교주는 날카롭게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부인이 몸이 불편하다면 나에게 약이 있느냐고 물었
을 것이다. 하필이면 너에게 약을 찾아달라고 했겠느냐? 나의 약상자는
언제나 자물쇠로 잠가두고 있는데 함부로 열어 봤단 말이냐?]
육고헌은 말했다.
[속하는 결코 함부로 열어본 것이 아니외다.]
홍 교주는 호통쳤다.
[함부로 열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내가 분부하여 열었다는....]
,그러다가 홍 부인에게 물었다.
[그대가 열쇠를 준 것이오?]
홍 부인은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홍 교주는 말했다.
[그대는 무슨 약을 찾으려고 했소? 어째서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소?]
홍 부인은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졌다가 다시 창백해지더니 몸을 몇 번
떨었다. 갑자기 그녀는 아랫배를 거머쥐고 왝왝, 하는 소리를 내면서
물을 게워냈다. 홍 교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어디가 편찮으시오? 앉아서 쉬도록 하시오.]
건녕 공주가 갑자기 외쳤다.
[그녀에게 아기가 생긴 거예요. 이 늙은 멍청이, 자기에게 아들이 생기
게 되었는데도 모르고 있다니.]
홍 교주는 깜짝 놀라 앞으로 달려가더니 부인의 손목을 잡고 날카롭게
외쳤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오?]
홍 부인은 허리를 숙이고 끊임없이 구역질을 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
다. 홍 교주는 냉랭히 물었다.
[그대는 약을 찾아서 낙태를 시키려고 했던 것이오?]
육고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이상하게 여겼다.
홍 교주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부인을 매우 사랑했으니 만약 부인이 그
를 위해 아기를 낳아 준다면 남자애든 여자애든 매우 좋아할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째서 그녀가 낙태를 시키려 했단 말인가? 홍 부인이 천
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았어요. 나는 낙태를 하려고 했어요. 그러니 빨리 나를 죽이세요.]
홍 교주는 왼손을 쳐들고 호통을 내질렀다.
[누구의 아기요?]
그의 무공이 지극히 고강하니 일 장을 내리친다면 홍 부인은 반드시 그
즉시 목숨을 잃게 되리라. 홍 부인은 오히려 고개를 쳐들며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빨리 죽여 달라고 했는데 어째서 손을 쓰지 않는 거죠?]
홍 교주의 두 눈에서는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를 죽이지 않겠으니 털어놓아라. 누구의 애새끼냐?]
홍 부인은 입을 꼭 다물었다. 이미 목숨을 포기한 표정이었다. 홍 교주
는 고개를 돌리더니 육고헌을 노려보고 물었다.
[그대의 애새끼냐?]
육고헌은 재빨리 말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속하는 부인을 마치 하늘의 선녀처럼 존경하는
터인데 어찌 범하겠습니까?]
홍 교주의 눈초리가 육고헌의 얼굴에서 천천히 장담월, 허설정, 무근
도인, 반두타에게로 차례차례 옮겨지면서 하나하나 훑어 가는 것이었
다. 그의 눈초리가 얼굴에 와 닿으면 그 사람은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
다. 홍 부인은 큰소리로 말했다.
[그 누구도 아니에요. 그대는 나를 죽이도록 하세요. 쓸데없는 것을 물
어서 무엇해요?]
공주는 부르짖었다.
[그녀는 당신의 마누라이니 그 애는 당연히 그대의 아이일 텐데 무슨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거예요? 정말 망령이 난 게로군.]
홍 교주는 호통을 내질렀다.
[입 닥쳐! 한마디만 더 하면 먼저 너의 골통을 부쉬버리겠다.]
공주는 더 말하지 못했으나 속으로는 여간 불만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홍 교주가 근년에 상승의 내공을 연마하느라고 여색을
가까이 한 지 오래되었으며 부인과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는 사
실을 모르고 있었다. 홍 교주는 부인의 뱃속에 다른 놈의 아기가 있다
는 말을 듣자 분노와 부끄러움, 후회, 서글픔, 고통, 증오, 아쉬움, 두
려움 등 여러 가지 격렬한 감정이 복받쳐올라 한 손을 허공에 높이 쳐
들었다. 그러나 차마 내리치지는 못했다. 그가 바라보니 허설정 등의
얼굴에는 경멸의 표정이 가득하였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와 같이 창피한 일을 그들이 알았으니 내 무슨 얼굴로 그들의 교주
가 된단 말인가? 이 사람들을 모두 깨끗이 죽여 없애 한 사람도 살려놓
아서는 아니된다. 소문이 나면 강호의 호걸들은 나를 비웃을 것이니 내
무슨 영웅호걸이라고 불리울 수 있겠는가?)
그는 살의를 느끼자 갑자기 손에 잡았던 부인을 내려놓고 벼락같이 앞
으로 달려가 대뜸 육고헌을 잡고 호통을 내질렀다.
[모두 네 놈이 수작을 부린 것이다.]
육고헌은 큰소리로 외쳤다.
[사람을 죽여 입을 봉하려고....]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의 정수리에서 퍽, 하는 소리가 들렸
다. 이미 홍 교주의 무거운 일 장을 받아 그의 두 눈이 불쑥 튀어나오
며 숨이 끊어져 죽고 말았다.
허설정 등은 이와 같은 광경을 보자 홍 교주가 사람을 죽여 입을 봉하
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네 사람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
서 몸 앞에 세웠다. 허설정은 외쳤다.
[교주, 이것은 그대의 사사로운 일이며 속하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
다.]
홍 교주는 외 쳤다.
[오늘 모두 함께 죽자. 그 누구도 살 생각은 하지 말아라!]
그는 맹렬히 네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반두타는 무게가 이십여 근이나 되는 발풍대환도(撥風大環刀)를 쳐들머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기세는 위맹했다. 홍 교주는 몸을 옆으로 돌
려 피하고 오른손으로 장담월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허설정은 한 쌍의
판관필로 홍 교주의 등을 노리고 이 초를 공격했다.
동시에 무근 도인의 안령도(雁令叩) 역시 홍 교주의 허리께를 내리쳐
갔다.
홍 교주는 일성대갈하더니 허공으로 뛰어올라 장담월을 노리고 덮쳐 들
었다. 장담월은 원앙쌍단검(鴛鴦雙短劍)을 쓰고 있었는데 삽시간에 위
쪽을 향해 잇따라 일곱 번을 찔러댔다. 이 일 초는 칠성취월(七星聚月)
로 그야말로 그가 한평생 자랑하는 특기였다. 일곱 번을 찌르는 신속함
과 날카로움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홍 교주는 오른손을 약간 틀어서 그의 왼쪽 어깨를 가볍게 눌렀고 그
탄력을 빌어 번쩍 몸을 날려 피했다. 장담월은 크게 부르짖더니 바닥을
한 번 뒹굴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왼쪽 어깨가 시큰거리고
아파서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외쳤다.
[오늘 그를 죽이지 않으면 그 누구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네 사람은 각기 무기를 휘두르머 다시 홍 교주를 포위 공격했다.
이 네 사람은 모두 신룡교에서 제일가는 인물이었다. 반두타와 허설정
은 더욱 뛰어나 보였다.
반두타의 대환도에 매달려 있는 아흡 개의 강철 고리는 쨍그랑, 쨍그
랑, 하는 소리를 마구 냈는데 그 수법은 정말 강맹했다.
허설정의 판관필은 그와 반대로 면밀하면서도 정교하여 초식마다 상대
방의 온몸에 있는 요혈을 노렸다.
무근 도인은 하얀 광채를 뿜어내며 안령도를 휘둘렀으며 그는 속으로
오늘 백연환을 복용하였으니 자기의 목숨이 길지 않을 터인즉, 죽기 전
에 반드시 이 간사하고 흉악한 대원수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
기 때문에 그는 열 번 휘두르는 칼에 아흡 번은 공격의 초식을 썼다.
적과 함께 죽으려는 것이었다.
장담월은 과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사십이장경을 손에 넣을 수 없었
는데 만약 무근 도인과 허설정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미 홍 교주에게
죽임을 당했으리라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왼팔이 격
렬하게 아파왔으나 여전히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애써 공격을 했다.
홍 교주의 무공은 네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편이었다. 그러나 네 사람
이 손발을 맞추어 공격해 오니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쉬워도 자기 자
신도 상처를 입는 것을 면할 수 없었다. 수십 합을 싸우자 가슴속에 끓
어오르던 분노는 차츰차츰 가라앉고 심신이 안정되어 펼치는 초식이 더
욱 침착해지고 악독해졌다. 그는 네 사람이 무기를 들고 공격하는 가운
데서도 이리저리 맴돌며 조금도 열세에 몰리지 않았다.
장담윌이 점점 힘이 달리는 것을 느끼자 홍 교주는 상대방의 가장 약한
곳이 장담윌의 왼쪽 어깨라 판단하고 거기서부터 손을 쓴다면 강적을
하나하나 때려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위소보는 네 사람이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보고 살그머니 증유와 목검
병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다시 공주에게 눈짓을 하여 그녀가 아무 소
리도 내지 못하도록 했다. 네 사람은 몸을 돌려 발걸음소리를 죽이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홍 교주 등 다섯 사람은 한창 싸우고 있는 판이라 그 누구도 그들을 유
의해 보지 못했다. 설사 보았다 해도 누구도 손을 늦추어서 그들을 저
지할 수가 없었다.
네 사람이 한참 동안 걸어 결국 홍 교주 일행과 멀어지게 되었다. 외소
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다섯 사람은 여전히 매섭게 싸우고 있었는
데 칼빛이 번쩍이고 손 그림자가 난무하여 일시 승부를 판가름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위소보는 말했다.
[우리 좀더 빨리 갑시다.]
네 사람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갑자기 등뒤에서 발걸음소리가 났는데
두 사람이 나는 듯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홍 부인과 방이였
다. 네 사람은 깜짝 놀랐으나 불행히도 몸에 지니고 있던 무기와 암기
를 사로잡혔을 때 모두 빼앗기고 말았으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방이 혼자라면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홍 부인은 무척 무서운 상대가 아
닌가? 아무리 해도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들은 죽어라 하고 도망쳤
다. 수십 걸음을 달려갔을 때 공주가 돌부리를 차고 걸려 넘어지면서
비명소리를 질렀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뱃속에 내 자식이 있으니 구하지 않을 수가 없지.)
그는 몸을 돌려 그녀를 부축했다. 그런데 홍 부인이 몇 빈 몸을 날리더
니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양손을 허리에 척 걸치며 말했다.
[위소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위소보는 웃었다.
[우리들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경치가 좋아 이곳에서 놀려고 하는 것
입니다.]
홍 부인은 냉소했다.
[좋아요. 그대들이 풍경을 감상하려고 했다면 어째서 나를 부르지 않았
죠?]
그같이 말하는 사이에 방이 역시 달려왔다. 목검병과 중유는 위소보가
홍 부인에게 저지를 당하자 몸을 돌려서 돌아와 위소보의 곁에 섰다.
목검병은 방이에게 말했다.
[방 사저, 그대는 우리와 함께 가도록 해요. 그는....그는....]
그녀는 위소보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줄곧 그대에게 잘 대해 왔어요. 그대 역시 옛날 맹세한 바가 있는데
설마 잊었나요?]
방이는 말했다.
[나는 그저 부인께 충성을 다하며 부인의 명령만 따를 뿐이에요.]
목검병은 말했다.
[그대는 부인의 약을 복용했을 뿐이며 나도 예전에 복용했어요....]
위소보는 그제서야 확연히 깨달았다. 방이가 과거 두 번이나 자기를 속
인 것은 모두 홍 부인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녀에 대한 증오심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말했다.
[이 누나, 그대도 우리와 함께 갑시다.]
이 누나라는 호칭은 지난번 그가 방이와함께 신룡도에 올때 배안에서
정답게 놀며 불렀던 것인데 방이는 갑자기 그와 같은 소리를 듣자 얼굴
을 붉혔다. 홀연 홍 교주가 큰소리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 부인! 그대는 어디로 갔소?]
고함소리는 당황함과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홍 부인이 그를 버
리고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러나 홍 부인은 못들은 척했
다. 홍 교주는 다시 몇 번 더 불렀으나 홍 부인은 시종 대답하지 않았
다. 위소보 등 다섯 사람은 홍 부인을 바라보며 하나같이 생각했다.
(그대는 어째서 대답을 하지 않지? 교주가 그대를 부르고 있는데 어째
서 돌아가지 않지?)
이때 홍 부인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나직이 말
했다.
[우리 빨리 가요. 배를 타고 도망칩시다.]
위소보는 놀랍고 기뻐서 말했다.
[그대....그대도 우리와 함께 도망치겠다는 것이오?]
홍 부인은 말했다.
[섬에는 한 척의 배밖에 없어요. 함께 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어요.
교주가 날 죽이려는 것도 모르세요?]
그녀는 얼굴을 다시 한번 붉히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사람들이 산 아래로 수 장을 달려오자 홍 교주가 다시 큰소리로 부르짖
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 부인! 어서 돌아오시오!]
별안간 그 누가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죽기 전에 내지르는 비명소리
같았는데 허설정 등 네 사람 가운데 누구의 비명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홍 교주는 큰소리로 외쳤다.
[이것 보시오. 이것 보시오! 장담윌이라는 늙은 녀석이 나에게 맞아 죽
었소. 그는 한평생 나를 따르며 나의 일을 도왔는데 늙어 망령이 들어
날 배반하려 했으니 정말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노릇이오! 그대는 어
째서 돌아오지 않소? 나는 그대를 탓하지 않겠소. 내가 그대를 용서하
겠소. 악, 제기랄! 네 놈이 나를 내리치는데 성공했구나. 하하! 반두
타, 이 일 장에 너의 그 개 같은 목숨이 살아 남을 것 같으냐? 너는 머
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구나. 어째서 다른 사람을 따라 나를 배반했다는
말이냐? 죽는 게 소원이냐?]
홍 부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안색이 변해서 말했다.
[그는 이미 두 사람을 죽였어요.]
위소보는 급히 말했다.
[우리 빨리 도망쳐요!]
그는 줄달음질쳤다. 별안간 홍 교주가 외쳤다.
[너희 두 반적은 내가 천천히 죽여 주마. 부인, 부인 빨리 돌아오시
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는데 아마도 산 위에서 아래로 쫓아 내려오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홍 교주는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질풍같이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위소보
는 혼비백산해서 죽어라 달렸다. 허설정은 큰소리로 외쳤다.
[그를 막으시오! 그를 막으시오! 그는 중상을 입었으니 오늘 반드시 그
를 죽여야 하오!]
무근 도인도 외쳤다.
[그는 도망치지 못할 것이오!]
두 사람은 무기를 들고 뒤쫓아왔다. 위소보 일행은 어느덧 해변가에 다
다랐다.
홍 교주, 허설정, 무근 도인, 세 사람도 걸음이 재빨라 그들이 해변가
에 당도했을 때 그들 세 사람도 산 아래에 이르렀다. 세 사람의 몸은
은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홍 교주는 큰소리로 외쳤다.
[부인, 그대는 어째서 나에게 대답하지 않는 것이오? 그대는 어디로 가
려고 하시오?]
허설정은 외쳤다.
[부인은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소. 그녀에게는 이미 젊고 준수하게 생
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오!]
흥 교주는 몹시 화를 내며 외쳤다.
[터무니없는 소리!]
그는 몸을 날려 달려가더니 왼손을 들어 허설정의 머리를 맹렬히 내리
치려고 했다. 허설정은 왼손의 판관필로 반격하였고 무근도인도 달려와
서 칼을 휘둘러 홍 교주의 허리를 찌르려고 했다.
이때 홍 교주는 왼발을 절룩거리고 있었고, 몸동작과 손 놀림이 조금
전보다 훨씬 둔해 보였다.
홍 교주는 외쳤다.
[부인, 내 즉시 두 반적을 요리할 테니 그대는 지켜보시오. 그 네 명의
어린 계집애들은 그대가 모조리 죽이도록 하시오. 그 좀도적은 죽이지
말고 살려 두어 우리가 보물을 찾으러 갈 때 길을 안내하게 합시다.]
홍 부인은 가볍게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목검병 등을 차례로 쳐다보았
다. 위소보는 외쳤다.
[부인, 그대가 네 계집애들 중 한 사람이라도 다치게 하면 나는 자살하
게 될 것이고, 귀신이 되어서 그대를 못살게 굴 것이오. 사내대장부가
한마디를 내뱉는다면 무슨....무슨 말로도 따라갈 수가 없다오.]
다급한 김이라 그는 사마난추라는 말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별안간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허설정은 허리에 일 장을 얻어맞았다.
그는 몸을 몇 번 휘청거리더니 쓰러졌다.
홍 교주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다리를 들어 걷어찼다. 그 순간 허설
정은 후딱 뛰어 일어나 급히 달려들었는데 그 순간 홍 교주의 발길질에
가슴팍을 걷어채여 우지끈, 뚝, 하는 소리가 나면서 가슴팍의 늑골이
부러졌다. 그러나 홍 교주의 오른쪽 다리를 꼭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홍 교주는 애써 떨쳐버리려고 했으나 그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무근 도인이 나는 듯 달려들어 칼을 들어 홍 교주의 머리통을 내리쳤
다. 홍 교주는 머리를 옆으로 피하며 냅다 뒤로 손을 뻗쳐 일장을 후려
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근 도인은 아랫배에 일장을 얻어맞았다.
그러나 그의 칼이 홍 교주의 오른쪽 어깨에 박혔다.
무근 도인은 입에서 선혈을 와락 내뿜었다. 그 피는 홍 교주의 뒷덜미
에 내뿜어졌다. 무근 도인은 칼을 뽑아 다시 내리찍으려고 했으나 안령
도는 이미 홍 교주의 어깨에 깊숙이 파고들었고, 그의 손에 힘이 없어
다시 뽑을 수가 없었다.
홍 교주는 외쳤다.
[빨리....빨리 와서 그를 떼어 놓으시오.]
홍 부인은 놀라서 멍청해진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도와 주려 하지 않는
것인지 세 사람이 한데 어울려 매섭게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 자
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설정은 한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판관필을 들더니 홍 교주의 아랫배
를 쿡 찔렀다.
[으아악!]
홍 교주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왼발로 허설정을 걷어찼다. 그 바
람에 허설정의 몸이 붕 떠올라서 뒤쪽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 순간 홍 교주가 다시 왼쪽 팔굽으로 뒤를 향해 맹렬히 공격하자 무
근 도인의 몸뚱이는 맥없이 쓰러졌다.
홍 교주는 몸에 안령도와 판관필이 박힌 채 미친 듯이 소리내어 웃으며
부르짖었다.
[하하하, 이들.... 반적들 가운데 그.... 그 누가 나의 적수가 되겠느
냐? 그들....그들은 배반을 하려고 했지만 쿨룩.... 쿨룩 역시.... 역
시.... 나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느냐?]
그는 몸을 돌리더니 부인에게 말했다.
[그대는....그대는 어째서 나를 도와 주지 않았소?]
홍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대의 무공이 천하 제일인데 다른 사람의 도움이 어찌 필요하겠어
요?]
홍 교주는 대노해서 외쳤다.
[너 역시 나를 배반하겠다는 것이냐? 너 역시 본교의 반도가 되겠다는
것이냐?]
홍 부인은 냉랭히 말했다.
[맞았어요. 그대는 자기만 돌봐 왔어요. 내가 그대를 돕게 된다면 끝내
그대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 거예요.]
홍 교주는 외쳤다.
[내 네 년을 목 졸라 죽이겠다. 양심없이 다른 놈의 애새끼를 밴 반역
도를 내 손으로 목 졸라 죽이겠다.]
그러면서 홍 부인을 향해 덮쳐 들었다.
홍 부인은 아, 하더니 급히 피하려고 했다. 홍 교주는 중상을 입었으나
행동은 민첩하기 이를 데 없어 왼손으로 그녀의 오른팔을 잡고 오른손
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며 호통을 내질렀다.
[어서 말해라. 배반하겠느냐, 배반하지 않겠느냐? 배반하지 않겠다고
하면 내 너를 용서해주겠다.]
홍 부인은 천천히 말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마음속으로 배반하고 있었어요. 그대가 나에게
그대의 아내가 되도록 강요한 그날부터 나는 그대를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했어요. 그대는....그대는 어서 나를 목 졸라 죽이세요.]
홍 교주의 몸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끊임없이 그녀의 머리와 얼굴로
떨어졌다. 홍 부인은 눈을 뜨고 그를 빤히 쳐다보며 눈 한번 깜빡거리
지 않았다. 홍 교주는 큰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은 모두 나를 배반했다. 나는....나는 따로 새 사람을 불러모아
다시 신룡교를 만들 것이다!]
그가 오른손에 힘을 주자 부인은 대뜸 숨을 쉴 수가 없어 혓바닥을 내
밀었다. 위소보는 옆에서 그 무서운 광경을 지켜보며 한없이 두려운 마
음이 솟구쳤다. 그런데 홍 부인이 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을 보
자 모래바닥에서 커다란 돌을 집어들어 홍 교주의 등에다 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돌은 홍 교주의 등에 적중되었다. 홍 교주는 눈앞
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고 홍 부인의 목을 조르던 손을 풀고 몸을 돌
려 외쳤다.
[너.... 너 좀도적 놈아, 나는 보물도 필요없다. 너를 죽이고 말겠다.]
그는 손을 휘둘러 위소보를 치려고 했다. 위소보는 나는 듯 도망쳤다.
홍 교주는 바짝 쫓아갔다. 홍 교주가 지나간 모래바닥에는 한줄기 길다
란 핏자국이 남았다.
위소보는 이번에 그에게 잡히면 절대로 목숨을 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미친 듯이 달렸다. 별안간 꽉, 하는 소리와 함께 등뒤의 옷자락이
홍 교주에게 붙잡혀 한 조각 찢겨 나갔다. 만약 위소보가 몸에 호신보
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면 등의 살덩이가 찢겨져 나갔으리라.
위소보는 깜짝 놀라 더욱더 재빨리 달렸다. 그는 구난이 전수해준 신
행백변의 경신법을 펄쳐서 모래바닥 위에서 동쪽으로 돌아갔다가 서쪽
으로 빠지는 등 이리 돌고 저리 돌았다.
홍 교주가 몇 번이나 손을 뻗쳐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쫓아왔으나 위기
일발의 순간에 위소보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도망치곤 했다.
위소보가 만약 곧장 앞만 보고 뛰어갔다면 이미 잡혔을 것이다. 그러
나 이 신행백변은 철검문의 절기였다. 게다가 목상 도인이 새로이 창안
해 낸 변화를 보댔기 때문에 정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第122章. 홍 교주를 죽이다
위소보의 동작이 신행(神行)이라고 할 만큼 빠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변(百變)이라는 두 글자는 그의 천성과 비슷하여 위소보가 거의 터득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공의 고수는 아니지만 당금 무림에서 뺑
소니치는 데는 첫번째나 두 번째 가는 고수였다.
홍 교주는 연신 노호를 터뜨리며 연달아 삼 장을 쏟아냈다. 위소보는
이 장을 피할 수 있었으나 세 번째의 장력은 끝내 피하지 못하고 펑,
하니 등을 얻어맞고 곤두박질치면서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홍 교주는
중상을 입은 나머지 장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고, 위소보는 보의가 있
어서 몸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졌으나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가 막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갑자기 뒷덜미가 바짝 조여들었다.
이미 홍 교주의 두 손에 잡히고 만 것이다. 위소보는 심장이 목구멍으
로 튀어나올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는 다급한 김에 고개를 숙이고 홍 교주의 사타구니 아래로 빠져나가
려고 했다. 이것은 홍 교주가 과거 그에게 가르친 구명삼초 가운데 일
초였다. 그 일 초를 귀비기우(貴妃騎牛)라고 했는지 아니면 서시기양
(西施騎羊)이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는 벼락같이 사타구니
아래로 기어나가 몸을 훌쩍 날려 홍 교주의 목덜미에 올라탔다.
이 일 초도 그는 결코 익숙하게 연마한 상태는 아니었다. 설사 익숙하
게 연마한 상태라고 해도 홍 교주와 같은 대고수에게 사용해서는 결코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나 홍 교주는 신룡교의 네 고수를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이었고, 또 부인이 자기를 버리고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당황하고 어지러워 중상을 입은 몸이었다. 어깻죽지에 박힌 안
령도는 어小비를 자르고 깊이 파고들었고, 아랫배에는 한 자루 판관필
이 박혀 있었다. 그런 상태로 수백 장이나 급히 달렸고 내공이 거의 소
모된 상태였다. 두 손으로 위소보를 움켜잡았을 때 이미 손에 힘이 없
는 것을 느꼈고 위소보가 떨치자 그만 손을 놓쳐 위소보는 그의 목에
올라탄 것이었다.
위소보는 그의 어깻죽지에 올라타자 몸이 떨어질까 봐 자연히 손을 뻗
쳐 그의 머리를 얼싸안았는데 두 손의 중지가 자연스럽게 홍 교주의 눈
꺼풀 위에 닿았다.
홍 교주의 뇌리에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과거 자기가 이
한 수를 가르쳤다는 생각이었다. 적의 목덜미에 올라타는 그 순간 적의
눈알을 뽑으라고 가르쳤는데 놀랍게도 자기와 같은 호걸이 끝내는 한
장난꾸러기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장난꾸러기가
쓰는 초식이 바로 자기가 가르친 것임을 상기하니 진정 인과응보라는
것은 어찌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평생 헤아릴 수 없
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그와 같은 인과응보를 받는 것도 억울
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길게 탄식을 내쉬며 두 손을 아래로 내
렸다. 그가 한 가닥 끌어올린 숨을 뿜어 내자 그는 더 견딜 수가 없어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위소보는 그가 무슨 무서운 수법을 펼치는 줄로 알고 급히 몸을 날려
피했다. 홍 교주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부인, 전아, 전아! 그대....그대는 이리 다가오시오.]
홍 부인은 그에게 몇 걸음 다가갔으나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움
직이지 않았다. 홍 교주는 말했다.
[그대의 뱃속에....든 애는 도대체....도대체 누구의 애새끼냐?]
홍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는 알 필요가 없어요.]
그녀는 참지 못하고 곁눈질로 위소보를 한 번 바라보고 얼굴을 붉게 물
들였다.
홍 교주는 놀라고 분노하여 호통쳤다.
[설마....설마 저 꼬마가....]
홍 부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이야말로
묵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홍 교주는 큰소리로 외쳤다.
[내 저 꼬마를 죽이고 말겠다.]
그는 몸을 날려 위소보에게 덮쳐들었다. 홍 교주는 온 얼굴이 피투성이
인데다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두 손에서 선혈
을 뚝뚝 떨어뜨리며 있는 힘을 다하여 덮쳐드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혼비백산해서 몸을 날려 다시 홍 부인의 사타구니 밑으로 기
어나가 그녀의 등뒤에 몸을 숨겼다. 홍 부인은 두 팔을 벌리고 정면에
서 홍 교주를 막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대는 한평생 위풍을 떨쳤으니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홍 교주는 몸을 허공에 떠올렸다가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고 내공이
종적도 없이 사라져 쿵, 하니 홍 부인 옆에 떨어졌다. 그는 한맺힌 어
조로 말했다.
[나는 교주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은 모두 나의 말을 들어야....들
어야 한다. 어째서.... 어째서.... 모두.... 나를 배반하느냐? 너희
들.... 너희들은 모두 틀렸다. 오로지.... 오로지 나만 옳다. 나는 너
희들을 하나하나 모조리 죽이고.... 나 혼자만 영원한 선복을 누리게
될 것이고 수명은 하늘....하늘.... 하늘....]
하늘처럼 길다는 한 마디를 끝내 내뱉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리더니 그
대로 숨지고 말았다. 두 눈은 부릅뜬 상태였다.
위소보는 몇 걸음 도망친 후에야 몸을 돌렸다. 홍 교주는 쓰러져 꼼짝
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어 걸음 다가가 언제라도 뺑소니칠 자세를 취
하며 물었다.
[그는 죽었소?]
홍 부인은 한숨을 나직이 내쉬며 말했다.
[죽었어요.]
위소보는 다시 두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그는....그는 어째서 눈을 감지 못하는 거죠?]
별안간 철썩, 소리와 더불어 위소보는 심하게 따귀를 한 대 얻어 맞았
고, 곧이어 오른쪽 귀를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바로 건녕 공주였다. 공
주는 다시 위소보의 엉덩이를 한 번 걷어차더니 욕을 했다.
[이 후레자식, 그가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네가 그의 마누라를 훔쳤기
때문이야! 너....너는 어쩌다가 저런 흉악한 여자와 배가 맞았지?]
홍 부인은 싸늘히 코웃음치더니 건녕 공주의 따귀를 후려쳤다.
공주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공주의 오른손은 여전히 위소보의 귀를 잡
아당기고 있어 그녀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지자 위소보는 귀가 아파서
그녀의 몸 위에 엎어져 버렸다. 홍 부인은 호통을 내질렀다.
[말을 할 때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너를 죽이고 말테다.]
공주는 대노해서 몸을 일으키며 홍 부인에게 달려들었다. 홍 부인이 왼
발을 걸자 공주는 다시 땅바닥에 쓰러졌다.
공주는 세 번이나 몸을 일으켜 싸우려 들었으나 계속 곤두박질쳤다. 끝
내 그녀는 자신의 무공이 상대방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음을 알고 주저
앉아서 울부짖으며 욕을 했다. 그러나 감히 홍 부인을 욕하지 못하고
위소보에게 욕을 퍼부었다.
[후레자식, 죽일 놈의 태감 같으니. 짐승, 짐승 같으니. 고약한 소계
자!]
위소보는 귀를 만져 보았다. 손에 피가 묻어 났다. 귓불이 공주가 잡아
당기는 바람에 크게 찢어져 있었던 것이다. 홍 부인은 나직이 위소보에
게 말했다.
[나는 홍 교주의 부인이었어요. 내가 그를 매장해도 좋지요?]
그 음성은 매우 부드러워 위소보에게 간절히 허락을 바라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놀람과 기쁨에 얽혀 말했다.
[좋소이다. 마땅히 묻어 줘야지요.]
그는 땅바닥에 떨어진 한 자루의 판관필을 들어 홍 부인과 함께 모래
바닥에 구덩이를 팠다. 방이와 목검병이 다가와 도왔다. 그들 네 사람
은 홍 교주의 시체를 매장했다.
홍 부인은 끓어엎드리더니 큰절을 한 번 한 후 나직이 말했다.
[그대는 나에게 시집을 오도록 강요했지만....혼례를 올린 후 나는 한
번도 진심으로 그대를 대한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몸을 일으키더니 눈물을 주르륵주르륵 흘렸다.
그녀는 멍하고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눈물을 닦더니 위소보에게 물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머물러야 하나요, 아니면 중원으로 돌아가야 하나
요?]
위소보는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말했다.
[이곳에는 절대로 머무를 수 없소. 홍 교주와 육 선생 등의 악귀가 나
에게 목숨을 달라고 할 것이니 야단이 아니오? 하지만 중원으로 돌아가
면 소황제는 나를 잡아다 목을 자르려고 할 것이오. 가장 좋기로는....
가장 좋기로는 아주 조용한 곳을 찾아 숨는 것이오.]
별안간 그는 한 곳을 머리에 떠올리고 기뻐하며 말했다.
[있소. 우리 통흘도로 갑시다. 그곳에는 악귀도 없고 소황제도 나를 찾
을 수 없을 것이오.]
홍 부인은 물었다.
[통흘도는 어디 있나요?]
위소보는 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의 조그만 섬을 가리키는 것이오. 나는 그곳을 통흘도라고 부른답
니다.]
홍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좋다면 그리 가도록 하세요.]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녀는 위소보에게 매우 고분고분했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갑시다, 가. 모두들 함께 갑시다.]
그는 공주를 부축하고 웃으며 말했다.
[모두들 배에 오릅시다.]
공주는 손을 휘둘러 다시 뺨을 후려치려고 했으나 위소보는 고개를 옆
으로 돌려 피했다. 공주는 노해 외쳤다.
[나는 안 가겠어.]
[이 섬에는 많은 악귀들이 있소. 머리가 없는 귀신, 다리가 잘린 귀신,
대포에 맞아 창자가 흘러나온 귀신, 전문적으로 여자의 큰 배만 더듬는
손 여러 개 달린 귀신....]
공주는 그 말에 무척 겁이 나서 발을 굴렀다.
[그대와 같이 전문적으로 터무니없이 주둥이만 놀리는 귀신도 있겠지?]
그렇게 말하고는 왼발을 쳐들어 위소보의 엉덩이를 힘껏 찼다.
위소보는 악, 하고 펄쩍 뛰었다. 홍 부인이 천천히 다가가자 공주는 몇
걸음 물러섰다. 홍 부인이 말했다.
[이제부터 그대가 다시 위 공자를 한 번 때리면 나는 그대를 열 번 때
릴 것이고, 그대가 그에게 한 번 발길질을 하면 나는 그대에게 발길질
을 열 번 할 거예요....]
공주는 그만 화가 나서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대는 그와 어떠한 사이길래 그를 감싸고 도는 거예요? 그대는....그
대의 지아비가 죽고 나니까 남의 지아비를 빼앗으려는 거예요?]
방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대의 지아비도 죽지 않았나요?]
공주는 극도로 노해서 욕을 했다.
[이 못난 계집애, 너의 지아비도 죽었다.]
홍 부인은 공주에게 천천히 말했다.
[그대가 감히 한번만 무례한 말을 한다면 나는 그대 혼자 이 섬에서 지
내도록 할 것이며, 한 사람도 그대를 벗삼지 않을 것이니 그대가 알아
서 해요.]
공주는 자기 혼자 이 섬에서 머물면 그 많은 창자를 드러낸 귀신, 손
많은 귀신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평생 귀여움을 받
으며 자랐고, 턱으로 사람을 부린 몸이었으나 이때는 금지옥엽의 오만
을 부릴 수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고약한 계집애가 오늘은 적수를 만나게 되었구나. 이제부터 그녀를
제압할 사람이 있으니 걸핏하면 손으로 때리는 일은 하지 않겠지.)
그는 잡아당겨서 찢어진 자기의 귀를 손으로 만져보니 여전히 매우 아
팠다. 홍 부인은 방이에게 말했다.
[방 소저, 그대는 가서 사공들에게 배를 띄울 준비를 하도록 하시오.]
방이는 말했다.
[예.]
그녀는 다시 말했다.
[부인께선 어째서 속하에 대하여 이토록 깍듯하십니까? 감당할 수가 없
습니다.]
홍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자매로 칭하도록 하고 다시 부인이니 속하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아요. 그대는 나를 전 언니라고 부르고 나는 그대를 이 누이라고 부
르도록 해요. 그 독약의 해약은 배에 오른 후 그대에게 복용시켜 드리
겠으며 다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방이와 목검병은 모두 기뻐했다.
일행이 배 위에 오르자 사공들은 돛을 올려 배를 서쪽으로 몰았다. 위
소보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매우 의기 양양해졌다. 홍 부인은 해약을
꺼내 방이에게 먹이고 다시 배 위에 있던 무쇠상자를 열더니 위소보의
비수와 함사사영이라는 암기, 은표 등을 꺼내 그에게 되돌려주었다. 그
리고 증유 등이 가졌던 무기도 되돌려주었다.
위소보는 웃었다.
[나 역시 그대를 누나라고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소?]
부인은 기뻐서 말했다.
[좋아요. 서로 나이를 따져 봐요. 누가 많고 누가 적은지 알아봐야겠어
요.]
사람들은 생년월일을 말하게 되었는데 물론 홍 부인 소전이 나이가 제
일 많았다. 그 다음이 방이였으며, 그 다음이 공주였다. 증유와 목검병
은 위소보와 동갑이었는데 증유는 삼 개월 일찍 난 셈이었고, 목검병은
그보다 며칠 늦게 태어난 셈이었다.
소전과 방이 등 네 여인들은 언니니 누이니 매우 다정하게 불렀다. 다
만 공주만 옆에서 노기를 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전이 말했다.
[그녀는 공주 전하이니 우리들 평민과 자매가 되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
이군. 모두들 그녀를 공주 전하라고 부르도록 하세.]
공주는 냉랭히 말했다.
[나는 감당할 수 없어요.]
그녀들은 한 패거리가 되었는데 자기는 외따로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양심도 없는 죽일 태감 소계자는 그녀들 네 사람을 자기보다 더
감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울적해진 공주는 참을 수 없어 소리내어
울었다. 위소보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어
조로 천천히 말했다.
[됐소. 모두들 즐거워하고 있는데 울지 마시오....]
공주는 대뜸 위소보의 따귀를 때리려고 하다가 갑자기 소전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후려친 일 장을 갑자기 멈출 수 없었고 부득이 중도
에서 방향을 바꾸어 퍽, 하고 자기의 가슴을 때리고 아, 하고 외쳤다.
사람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깔깔 소리내어 웃었다.
공주는 더욱 화가 나고 서러워서 위소보의 품에 머리를 박고 크게 소
리내어 울었다.
위소보는 웃었다.
[됐소. 모두 싸우지들 말아요. 우리 신나게 노름이나 하도록 합시다.
내가 전주가 되지.]
그러나 홍 교주의 철상자를 아무리 뒤져 봐도 위소보의 주사위는 찾아
낼 수 없었다. 아마도 육고헌이 그의 몸을 수색할 때 그 두 알의 주사
위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모양이었다. 위소보는 답답한 심정이 되었
다. 소전은 웃으며 말했다.
[나무로 두 알의 주사위를 깎도록 해요.]
위소보는 말했다.
[나무는 너무나 가벼워서 맛이 나지 않을 것이오.]
증유가 손을 품속에서 꺼내더니 주먹을 쥐고 웃으며 말했다.
[이게 뭔지 알아맞혀 보세요.]
위소보는 말했다.
[동전이 몇 개인지 알아맞히라는 것이오? 그것도 좋겠지. 어찌 되었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증유는 미소를 지었다.
[몇 알인지 알아맞혀 보세요.]
위소보는 웃었다.
[두 알?]
증유는 손바닥을 펼쳤다. 그녀의 하얀 손바닥 위에는 놀랍게도 두 알의
주사위가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아, 하고 큰소리를 질렀으
며 펄쩍 몸을 일으켰다.
[어디서 난 것이오? 어디서 난 것이오?]
증유는 나직이 웃으며 주사위를 탁자 위에 놓았다.
위소보는 냉큼 집어들어 한 번 던지고 다시 한 번 던지는데 그 재미가
무궁무진했다. 그는 두 알의 주사위 무게가 때에 따라서 가볍고 무거운
것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수은을 넣어 만든 가짜 주사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증유는 언제나 수줍음을 잘 타고 얌전한데 어
째서 이와 같은 가짜 주사위를 만들어 남의 돈을 따려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마음속으
로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왼손을 뒤로 돌려 그녀의 허리
를 껴안고 얼굴에 입맞춤을 하고 웃었다.
[정말 고맙소, 유 누나. 그대가 내 주사위를 줄곧 몸에 지니고 있었으
니 천만다행이오.]
증유는 온 얼굴이 새빨개져서 선실 밖으로 달아났다. 원래 그날 위소보
가 왕옥파 제자들과 주사위를 던져 노름을 하였을 때 목숨을 걸었지만
나중에 사람들을 모조리 석방하였고, 증유는 떠날 때 군영 안에서 그에
게 두 알의 주사위를 달라고 해서 받은 것이었다.
위소보는 이미 그 일을 깜박 잊고 있었으나 증유는 줄곧 품속 깊숙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사위는 구했지만 여자들은 도박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위소보
를 상대로 그저 재미로 놀았으나 거는 돈이 너무 적었고, 이기고 지는
것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밥 한 끼를 먹을 시간을 놀았지만 여자
들은 아직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흔히 양주의 기녀원이나 도박장,
궁중 또는 군영 등에서 마구잡이로 판돈을 걸고 노름판을 벌이던 때와
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위소보는 그만 흥미가 싹 가시는 것을 느끼고
소리쳤다.
[때려치웁시다. 그대들은 하나같이 노름할 줄도 모르는군.]
그러나 금후 통흘도로 피난하여 지내게 될 때 다섯 명의 미녀가 있어서
자기를 모시고 있다지만 노름을 할 수도 없고 볼 연극도 없다는 데 생
각이 미치자 답답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섬
안에서 수천 수만 냥의 금이나 은이 있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금과 은은 그야말로 흙, 모래, 자갈들과 마찬가지였고, 돈을 모으는 것
도 흙, 모래, 자갈을 모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쌍아의 생사
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고, 아가 또한 어디 있는지 수시로 걱정
이 되었다.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홍미가 없어지는 것을 느끼고 말했다.
[우리 통흘도로 가지 맙시다.]
소전은 말했다.
[그럼 어디로 가겠다는 거예요?]
위소보는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 말했다.
[우리 모두 요동으로 갑시다. 거기서 큰 보물을 끌어내도록 합시다.]
소전은 말했다.
[탈없이 조용한 섬에서 태평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엄청난 보물을 파내서 무엇에 써요?]
위소보는 말했다.
[금은보화가 어째서 쓸모가 없다는 것이오?]
방이는 말했다.
[오랑캐 황제는 반드시 군사를 보내 도처에서 그대를 잡으려 할거예요.
그러니 우리들은 숨어서 피하는 것이 좋겠어요. 일이 년 지난 후 그대
가 요동으로 가고 싶다면 그때 다시 우리 모두 함께 가도 늦지 않을 거
예요.]
위소보는 증유와 목검병에게 물었다.
[그대들 두 사람의 의견은 어떠시오?]
목검병은 말했다.
[나는 사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요.]
증유는 말했다.
[그대가 만약 답답하다고 생각한다면 섬에서 그저 몇 달만 피해 있기로
해요.]
그러나 위소보가 여전히 불쾌한 빛을 띠고 있자 다시 말했다.
[우리는 매일같이 그대를 상대로 주사위 노름을 하도록 해요. 지면 벌
로 손바닥을 맞기로 해요, 어때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손바닥을 때린다고 무슨 재미가 있어?)
그런데 부끄러운 빛을 띄우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무척 귀여워 그는 마
음이 설레는 것을 느겼다.
[좋소, 좋아. 내 그대들의 말을 들으리다.]
방이는 몸을 일으키더니 미소지었다.
[과거 저는 그대에게 너무나 잘못했어요. 나는 찬을 만들어 그대 술상
을 봐드리겠어요. 내가 그대에게 사과하는 뜻으로 받아주세요.]
위소보는 더욱 기뻐서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
방이는 뒤쪽으로 찬을 만들러 갔다.
방이의 음식 솜씨는 정말 일품이었다. 이와 같이 정성을 들여 만든 음
식은 배 안의 재료들이 완전하지 못했으나 먹는 사람들은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위소보는 외쳤다.
[우리 주먹내기를 합시다.]
목검병과 증유, 그리고 공주 세 사람은 시권(猜拳:주먹내기)을 할 줄
몰라 위소보는 그녀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가양호(哥孃好), 오경괴수(五
經魁首), 사계평안(四季平安)이 라고 외치며 주먹을 내밀었다. 공주는
처음에 답답하게 여기고 재미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한동안 주먹내
기를 하고 몇 잔의 술을 마시자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배 안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오후에 통흘도에 도달하였다. 청나라
군사가 주둔했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중군장(中軍帳)을 삼았던
집도 여전히 서 있었다. 위소보라는 대장수가 늠름하게 지휘하던 광경
은 볼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방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날 바로 이곳에서 그대는 날 속여 배에 오르도록 만들었으며 하마터
면 내가 나찰국에서 목숨을 잃게 만들 뻔하지 않았소?]
방이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미 사과했잖아요. 설마 나에게 큰절을 하라는 것은 아니겠죠?]
위소보는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소. 마음을 굳게 가진다면 훌륭한 보답이 있듯이 내가
천신만고 고생을 하긴 했으나 오늘 끝내 진정으로 함께 있게 된 것이
아니겠소?]
목검병이 뒤에서 외쳤다.
[그대들 두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들으면 안되는 얘긴
가요?]
방이는 웃었다.
[그이는 그대의 얼굴에다 조그만 자라 한 마리를 새기겠대요.]
소전은 말했다.
[우리 너무 서둘러 장난칠 생각만 하지 말고 먼저 일부터 하는 것이 중
요해요.]
그녀는 즉시 사공들에게 배 안의 모든 양식과 기구들을 모조리 섬으로
옮기도록 하고 다시 배 위의 돛배와 삿대, 밧줄, 키를 뜯어내어 섬으로
옮기고 벼랑의 동굴 안에 넣어 두었다. 이제 사공들이 몰래 배를 타고
도망칠 염려는 없었다. 위소보는 칭찬의 말을 했다.
[전 누나는 역시 세심하시군.]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바다 저쪽에서 꽝, 하는 소리가 들
렸다. 대포소리인 것 같았다. 여섯 사람은 깜짝 놀라 큰 바다 쪽을 바
라보았다. 바다 위에는 하얀 안개가 가득 덮여 있었는데 안개 속에서
두 척의 배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곧이어 꽝, 꽝, 하는 음향이
두 번 들렸는데 아니나다를까 배 위에서 대포를 쏘고 있었다. 위소보는
외쳤다.
[야단났다. 소황제가 사람을 시켜 나를 잡으러 왔소.]
증유가 말했다.
[우리 빨리 배 위로 올라가 도망가요.]
소전은 말했다.
[돛대와 키가 언덕에 있으니 지금 설치하기는 너무 늦었어요. 숨어서
기회를 보아 일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어요.]
여섯 사람 가운데 공주 외에 나머지 다섯 사람은 모두 어렵고 위험한
일들을 많이 겪어왔던 터라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소전은 다
시 말했다.
[아무리 꼭꼭 숨어도 끝내는 관병에게 들키고 말 거예요. 그러니 우리
저쪽 벼랑 위 동굴로 들어가도록 해요. 관병이 하나하나 벼랑 위로 올
라와 공격을 해 온다면 우리가 하나하나 죽여서 그들이 우리들에게 달
려들지 못하도록 해요.]
위소보는 말했다.
[맞았소. 이것이야말로 한 용사가 관문을 지키고 있으면 옹기 그릇 안
에서 자라를 잡는 것처럼 적들이 쳐들어오지 못하는 격이지.]
소전은 미소지었다.
[맞았어요!]
공주는 깔깔 소리내어 웃었다. 위소보는 눈을 흘겼다.
[뭐가 우습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대는 숙어를 잘 사용하여 듣는 사람이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군요.]
위소보는 공주를 한 번 더 흘겨 주었다.
여섯 사람은 동굴로 들어갔다. 소전은 칼올 휘둘러 나뭇가지들을 잘라
서 동굴 앞에 쌓아 그들의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은 나뭇가지 사이로
바깥쪽을 살폈다. 두 척의 배가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면서 곧장 통흘도
로 들어왔다. 뒤의 배는 아직도 대포를 쏴대고 있있고, 포탄은 앞쪽 배
의 주위에 떨어지면서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곤 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뒤쪽의 배가 앞쪽의 배를 향해 대포를 쏴대고 있군.]
소전은 말했다.
[두 척의 배는 서로 싸우고 있어요.]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그럼 저 배들은 우리를 잡으러 온 게 아니군?]
소전은 말했다.
[그렇기를 바라요. 하지만 그들이 섬으로 와 사공들을 만나게 되어 물
으면 즉시 알아차릴 것이고, 반드시 이곳을 수색할 거예요. 설사 우리
가 서둘러 사공들을 죽인다 해도 시체들을 묻을 여유가 없어요.]
위소보는 말했다.
[앞의 배는 어째서 대포를 쏴서 반격을 하지 않을까? 정말 재미가 없구
먼. 네가 한 방 쏘고 내가 한 방 쏘아 두 척의 배가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했으면 좋겠다.]
앞쪽의 배는 비교적 작았다. 돛은 잔뜩 바람을 안고 무척 빠르게 달려
왔다. 갑자기 대포소리가 나면서 돛대가 부러지고 돛대에 불이 붙기 시
작했다. 위소보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앞쪽의 배는 대뜸 기울어졌고 선채가 맴을 돌았다. 곧이어 배 위에서
소정(小艇)을 내리더니 십여 명이 소정 위로 뛰어내려 노를 젓기 시작
했다. 섬과는 이미 가까워진 상태였고 뒤의 배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는
데 물이 얕아 언덕에 댈 수가 없었다. 그 배에서도 소정을 내려놓았는
데 다섯 척이나 되었다.
앞의 한 척은 도망을 치고 뒤의 다섯 척은 뒤쫓았다. 얼마 후 앞의 소
정에 타고 있는 열 명의 여인들이 모래바닥 위로 뛰어올라 주위의 형세
를 살폈다. 누군가 소리 높여 외쳤다.
[모두 저쪽 벼랑으로 갑시다.]
위소보는 그 목소리가 사부 진근남의 음성 같다고 생각했다. 십여 명
이 산 언덕을 따라 벼랑 위로 올라오게 되었을 때 한 사람이 손에 장검
을 들고 벼랑가에 서서 지휘를 하는데 바로 진근남이었다. 위소보는 너
무 기뻐서 동굴에서 달려 나가며 외쳤다.
[사부님, 사부님 !]
진근남은 몸을 돌려 바라보더니 위소보를 발견하고 놀람과 기쁨에 얽혀
외쳤다.
[소보, 네가 어떻게 이곳에 있느냐?]
위소보는 나는 듯 달려가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십여 명의 사람들 가운
데 한 명의 소저가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바로 아가였다. 그는 크게 외쳤다.
[아가!]
그는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러나 그녀의 등뒤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
다. 바로 정극상이었다. 아가를 만났으니 정극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당
연했다. 위소보는 미친 듯 크게 기뻐하다가 꼴도 보기 싫은 그 녀석을
만나자 기분을 잡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옆에서 누군가 외쳤다.
[상공!]
다른 한 사람이 또 외쳤다.
[위 향주!]
그는 그저 아무렇게나 대답하면서 멍하니 아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갑
자기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조그만 손이 뻗쳐 와서 그의 왼손을 잡아
위소보는 흠칫하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수려한 얼굴 가득 웃음을 띄
우고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쌍아가 아닌가? 위소보는 얼마나
기뻤던지 대뜸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 쌍아. 보고 싶어 죽을 뻔했다.]
너무나 기뻐서 그는 아가마저도 잊고 말았다. 진근남은 외쳤다.
[풍형, 그리고 풍 형제. 우리는 이 통로를 지키도록 합시다.]
두 사람은 일제히 대답하고 저마다 무기를 들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벼랑 위로 오르는 좁은 길을 지켰다. 한 사람은 풍석범이었고, 한 사람
은 풍제중이었다. 위소보는 갑자기 친숙한 사람들을 만나자 다음과 같
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소?]
쌍아는 말했다.
[풍 나으리께서는 저를 데리고 곳곳으로 그대를 찾았는데 마침 진 총타
주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대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는 소문을 듣
고서....그래서....]
쌍아는 거기까지 이야기하더니 기쁨에 겨워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이때 다섯 척의 소정을 타고 온 추격병들이 모조리 모래 바닥 위로 올
라왔는데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니 모두 청나라의 군사들로서 칠팔십 명
은 될 것 같았다. 앞장을 선 사람은 손에 긴 칼을 들고 있었고, 체구가
우람했는데 거리가 멀어서 얼굴을 잘 볼 수는 없었으나 청나라 군사들
을 지휘하여 대오를 짓도록 하고 있었다.
청나라 군병들은 장군이 영을 내리자 등에서 기다란 활을 내리더니 전
통에서 활을 꺼내 시위에 먹이고 벼랑 위를 겨냥했다. 진근남은 외쳤
다.
[모두들 엎드리시오!]
위소보는 사부가 분부할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는 청나라 군사
가 활을 들 때 벌써 암석 뒤에 몸을 숨겼다. 이때 그 장군이 외쳤다.
[쏴라!]
대뜸 쉭, 쉭, 하며 화살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벼랑 위는 무척 높아
밑에서 위로 쏘는 화살은 기운이 다해 벼랑 위까지 날아오지도 못했고
날아오는 것이 있어도 힘이 없었다. 풍석범과 풍제중은 한 사람은 장검
을 들고 한 사람은 칼을 들고 맞은편에서 오는 화살들을 쳐냈다. 풍석
범은 외쳤다.
[시랑, 이 뻔뻔스러운 매국노야. 용기가 있다면 위로 올라와 일 대 일
로 목숨을 걸고 싸우자!]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래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시랑이었구나. 군사를 거느리
고 싸우는 데는 역시 저 사람이 가장 뛰어나다.)
이때 시랑이 외쳤다.
[사내라면 네가 내려오너라! 일 대 일로 싸운다 해도 노부는 너를 두려
워하지 않는다.]
풍석범은 말했다.
[좋다!]
그는 앞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진근남은 말했다.
[풍형,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오. 저 사람은 비열하고 몰염치하
니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소.]
풍석범은 한 걸음 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외쳤다.
[너는 일 대 일로 싸우자면서 뭣하려고 다섯 척의 소정을....제기랄 여
섯 척이로군. 우리들의 소정마저도 훔쳐갔구나. 이 고약한 매국노야!
네가 소정을 내보내 사람을 데려오는 것은 많은 수로 이기려는 것이 아
니냐?]
시랑은 웃었다.
[진 군사, 풍 대장, 그대 두 분의 무공이 뛰어나 이 시 아무개는 언제
나 탄복해 왔소. 시세의 흐름을 아는 자만이 준걸이라 하지 않았소? 그
러니 역시 정 공자를 데리고 모두 투항하도록 하시오. 황상께선 반드시
그대 두 사람을 높은 벼슬에 봉할 것이오.]
시랑은 과거 정성공 휘하의 대장수로 주전빈(周全斌), 감휘(甘煇), 마
신(馬信), 유국헌(劉國軒) 등 네 사람과 함께 오호장(五虎將)으로 일컬
어졌다. 진근남은 군사였다. 풍석범은 무공이 고강했으나 군사를 거느
리고 싸우는 데는 재능이 없어서 정성공의 위사대장 노릇을 했다.
시랑, 진근남, 풍석범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피를 흘리는 싸움을 해왔
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환난을 같이 겪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시랑은
진근남과 풍석범에 대해서 여전히 과거의 칭호를 사용해서 부르는 것이
었다. 벼랑 위와 아래쪽은 일고여덟 장의 간격이 있어 시랑은 멀리 서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벼랑 위까지 똑똑히 들렸다. 정극상은 안색이
변해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풍 사부, 그대....그대는 투항해서는 안 됩니다.]
풍석범은 말했다.
[공자, 안심하시오. 풍모가 한가닥 숨이 붙어 있는 한 결코 오랑캐에게
투항하지 않을 것이오.]
진근남은 풍석범이 음흉하고 간사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자기를 해치려고 했으며 정극상을 보호하여 연평군 왕세자를 삼으려고
했던 사실을 상기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가 말하는 것이 늠름한 것을
보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서 말했다.
[풍형, 그대와 나는 오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죽음을 각오한 싸움을 벌
이게 되었으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둘째 공자의 안전을 지켜야 할 것
이오.]
풍석범은 말했다.
[군사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정극상은 말했다.
[진 군사께서 이번에 나를 보호하느라고 공을 세웠으니 대만에 들어가
면 나는 부왕에게 여쭈어 반드시 크게 상을 내리도록 하겠소이다.]
진근남은 말했다.
[속하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는 벼랑가로 다가가 적의 상황을 살폈다. 위소보는 웃었다.
[정 공자, 크게 상을 내릴 필요는 없소. 그대가 배은망덕하게 나의 사
부님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여러모로 고맙겠소.]
정극상은 그를 한 번 노려보았다.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사저, 우리 정 공자를 잡아서 청나라 군사들에게 바칩시다.]
아가는 퇴, 했다.
[입만 벙긋하면 못된 소리만 나오더라. 그대는 어째서 그를 놀리는 거
예요?]
[놀려 준다고 해서 죽지 않소. 죽는다 해도 상관없는 일이지.]
아가는 퇴, 하고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위소보는 쌍
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함께 있게 되었지?]
[진 총타주는 풍 나으리와 저를 데리고 바다로 나와 그대를 찾았어요.
나는 그대가 통흘도로 왔으리라 생각하고 진 총타주에게 이야기해 이곳
으로 와 보기로 한 거예요. 그런데 도중에 공교롭게도 청나라 군사가
대포를 장치한 배를 타고 정 공자를 쫓아가서 그의 배를 격침하려 하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우리들은 그를 배 위로 구해 올렸고 이
곳까지 도망치게 된 것이에요. 정말 천지신명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끝
내 여기에서 그대를 만났군요.]
그러더니 다시 눈가를 붉혔다. 위소보는 손을 뻗쳐 그녀의 어깨를 다독
거리며 말했다.
[착한 쌍아, 이 며칠 동안 나는 하루도 그대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
었소.]
이 말은 결코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었다. 아가와 쌍아에 대하여 그는
매일같이 열 번은 생각하지 않아도 여덟 번은 생각했다. 쌍아를 걱정하
는 횟수가 좀더 많았다. 진근남은 외쳤다.
[여러 형제들, 오랑캐의 구원병이 도달하기 전에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
한차례 적을 공격합시다. 다시 여섯 척의 소정이 오랑캐 군사들을 싣고
들이닥치면 상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오.]
모두들 그렇게 하자고 대답을 했다. 이번에 섬에 온 십여 명 가운데는
진근남, 풍석범, 풍제중, 아가, 쌍아 외에도 천지회의 회원 팔 명이 있
었고, 정극상의 위사 세 사람이 끼어 있었다. 진근남은 말했다.
[정 공자, 아가 소저, 그리고 소보와 쌍아, 당신들 네 사람은 이곳에서
머물도록 하시오. 나머지는 모두 나를 따라 내려갑시다.]
그는 장검을 휘두르며 앞장을 서서 벼랑 아래로 내려갔다. 풍석범과 풍
제중, 나머지 열한 명은 일제히 달려 내려가며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
은 청나라 군사들을 향해 질풍같이 내달았다.
청나라 군사들은 다투어 활을 쏘았으나 그 화살들은 모조리 진근남과
풍석범, 풍제중 세 사람이 휘두르는 무기에 떨어졌다.
배를 타고 바다에서 싸웠을 때 시랑이 타고 있는 것은 커다란 전선으
로 포화가 무서워서 진근남 등은 그저 피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가까이서 격전을 벌이자 청나라 군사들 가운데 시랑 한 사람을 제
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무공이 평범하니 진근남, 풍석범, 풍제중 세
고수를 어찌 당해낼 수 있겠는가? 천지회의 형제들과 정 공자의 위사들
은 무공이 뛰어난 편이었다. 십오 명이 돌격해 들어가자 청나라 군사들
은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사저, 쌍아, 우리들 역시 내려가서 한차례 공격을 합시다.]
아가와 쌍아는 동시에 대답했다. 정극상은 말했다.
[나도 가겠소!]
위소보가 비수를 손에 뽑아 들고 벼랑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고, 쌍아
와 아가가 차례로 달려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정극상은 몇 걸음 달려가
다가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나는 천금지체인데 어찌 부하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랴?)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가, 그대는 가지 마시오!]
아가는 대답하지 않고 위소보의 등뒤를 바싹 쫓아갔다.
위소보의 무공은 평범했으나 몸에 네 가지 보물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
한 고비를 쉽게 넘겼다. 그 네 가지 보물이란 무엇인가? 첫 번째 보물
은 비수. 날카롭기 이를 데 없어 적의 무기가 반드시 잘려져 나간다.
두 번째 보물은 몸을 보호하고 있는 보의. 칼과 창이 꿰뚫지 못한다.
세 번째의 보물은 도망치는 재간. 그 누구도 제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그리고 네 번째 보물은 쌍아가 곁에 있어서 청병이 좀처럼 대적하기 어
렵다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 보물을 가지고 고수와 상대를 한다면 지
겠으나 청나라 관병들을 상대하는 데는 여유가 있었다. 삽시간에 그는
몇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혔는데 진정 위풍이 늠름하고 살기등등했
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과거 조자룡이 장판파에서 적진속으로 일곱 번 들어갔다가 일곱 번 나
왔는데 그 또한 이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면 역시 위소보가....)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들어가 마구 찍고 치자 청나라 관병들은 사
방으로 도망쳤다. 진근남은 홀로 시랑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는데 일시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풍석범과 풍제중은 청나라 군사들을 마치 수
박 쪼개듯 죽이고 있었고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되지 않아 팔십여 명이
나 되는 청나라 군사들 가운데 오륙십 명이나 살상을 입었으며, 나머지
병사들은 다투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수군들은 자맥질에 뛰어나 재
빨리 커다란 전선 쪽으로 혜엄쳐 갔다. 천지회 형제들은 두 사람이 죽
었고, 한 사람이 중상을 입었으며, 나머지는 시랑을 겹겹이 에워쌌다.
시랑은 칼을 어지럽게 휘두르며 진근남과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시
랑은 포위되어 있는 몸이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위
소보는 외쳤다.
[시 장군, 그대가 칼을 버리고 투항하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개고기로
만든 젓갈이 될 것이오!]
시랑은 정신을 가다듬고 싸움에 응했으며,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듣지
도 않았다. 한참 격렬하게 싸우고 있을 때 진근남이 길게 휘파람을 내
불더니 연속해서 세 번 검을 찔러 냈고, 세 번째 검을 찔렀을 때 검은
이미 시랑의 강철칼에 찰싹 달라붙고 말았다.
진근남은 손목을 떨치며 급히 두 번의 원을 그리자 시랑은 아, 하는 소
리를 내었고, 그 순간 강철칼이 그의 손에서 날아갔다. 진근남은 검의
끝을 잽싸게 휘둘러 그의 목을 겨누고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는 할말이 있는가!]
시랑은 말했다.
[이겼으면 나를 죽일 일이지 무슨 할말이 있다는 것이냐?]
진근남은 말했다.
[지금도 너는 호걸이라고 뽐내는가? 주인을 배반하고 친구를 팔았는데
도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시랑은 갑자기 몸을 뒤로 제치더니 땅바닥에 몸을 던지고 때구르르 굴
렀다. 그와 같이 몸을 던져 뒹굴자 목을 겨누었던 검의 끝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 순간 두 발로 진근남의 다리를 걷어차려고 했다. 그러나
진근남은 장검을 세로로 세워서 막았다. 시랑의 두 발이 만약 진근남의
다리를 걷어차려면 자기의 두 발목이 먼저 검날에 잘려야 할 판이었다.
위급한 가운데 그는 왼손으로 땅바닥을 집고 두 발을 모아 위쪽을 향하
여 차는 듯했다. 그 순간 훌쩍 뒤로 재주를 넘어 물러나려고 몸을 바로
세웠을 때 진근남의 검 끝은 다시 그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랑은 가슴속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기 자신이 상대방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갑자기 물었다.
[군사, 국성야는 나에게 어떻게 대했소?]
이 한 마디의 질문은 진근남에게는 뜻밖이었다. 정성공과 시랑 사이의
은원관계가 진근남의 뇌리에 얼핏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국성야는 확실히 그대에게 잘못했소. 그러나 국성야의
커다란 은혜를 입은 것도 사실이오. 아무리 억울하다 해도 참아야지 무
슨 방법이 있겠소?]
시랑은 말했다.
[내가 악비를 흉내내어 억울하게 죽으란 말이오?]
진근남은 날카롭게 외쳤다.
[악비를 본받지는 못할지언정 진희(秦檜)를 본받을 수는 없는 것이오.
사내대장부가 어찌 오랑캐에게 투항하여 개돼지만도 못한 매국노 노릇
을 한단 말이오?]
시랑은 말했다.
[나의 부모 형제와 처자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국성야는 그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였단 말이오? 그가 나의 전가족을 죽였기 때문에
나는 그를 죽여 가족들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오!]
第123章. 천지회의 총타주 진근남의 죽음
진근남은 말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작은 일이고 매국노가 되는 것은 큰 일이오. 오늘
내가 그대를 죽인다면 그대는 무슨 면목으로 저승에서 국성야를 대할
것이오?]
시랑은 머리를 쳐들고 큰소리로 말했다.
[빨리 나를 죽이시오. 국성야가 나를 볼 면목이 없으면 없었지, 내가
그를 볼 면목이 없지는 않을 것이오.]
진근남은 날카롭게 말했다.
[그대는 이 순간에도 큰소리를 치겠다는 것이오?]
그는 일검으로 그의 목을 찌르려고 했으나 옛날 싸움터에서 생사를 같
이했던 정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랑은 국성야의 부하로서 언제
나 선봉을 섰으며 피로 목욕을 하듯 고달픈 싸움을 치렀고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다. 만약에 동부인이 시랑에게 오만방자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오늘날 반드시 대만의 대들보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적에게 투항하여 나라를 배반했으나 그의 전 가족이 무고하게 살
육당했으니 실로 동정을 금할 수 없어 검을 내리고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겠소. 그대가 맹세를 하고 항복해
온다면, 다시 정왕야의 휘하로 들어온다는 조건으로 오늘 그대의 목숨
을 살려 주겠소. 금후 그대는 공을 세워 속죄하고 대업을 일으키는 데
전력한다면 여전히 당당한 사내 대장부임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오. 시
형제, 내 좋은 말로 권하니 부디 돌아서기 바라오.]
최후의 이 한 마디는 매우 간절했다. 시랑은 냉랭한 안색으로 말했다.
[내가 다시 대만으로 귀의한다면 이랬다저랬다하는 소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
진근남은 검을 칼집에 꽂고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시 형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의리와 절개요. 그대가 앞으로 충성을
바친다면 과거의 철모르고 한 짓을 누가 감히 비웃겠소? 관운장 관왕야
만 하더라도 조조에게 항복한 적이 있지 않소?]
별안간 등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그 악적은 나의 할아버지가 그의 전가족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소. 우
리 대만은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소. 빨리 그를 죽이시오.]
진근남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말한 사람은 바로 정극상이었다. 진
근남은 그를 바라보고 말했다.
[둘째 공자, 시 장군은 용병술에 뛰어나 과거 국성야의 장수 중에서는
버금가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소이다. 그가 항복해 온다면 우리의 반
청복명의 대업에 지극히 큰 득이 되오. 우리는 마땅히 국가를 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며, 사사로운 원한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좋을 것
이외다.]
정극상은 냉소했다.
[흥, 이 사람이 대만에 가서 병권을 쥐면 우리 정씨 집안 사람들이 어
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소?]
진근남은 말했다.
[시 장군이 맹세를 해주기만 한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그에게 다른 마
음이 없다는 것을 보증하겠소.]
[그가 우리 전 가족의 목숨을 없애면 진 군사가 스스로의 목숨으로 배
상할 수 있을 것 같소? 대만은 우리 정씨 집안 것이지 진 군사의 것은
아니오.]
진근남은 울화가 치밀었으나 억지로 노기를 가라앉히고 다시 말을 하
려 했다. 그때 시랑이 갑자기 도망을 치면서 부르짖었다.
[군사, 그대가 나에게 보여준 두터운 의리를 나는 영원히 잊지못할 것
이오. 그러나 정씨 집안의 종놈 노릇을 다시 할 수는 없소....]
진근남은 부르짖었다.
[시 형제, 돌아오시오! 할 말이.... 으윽윽!]
갑자기 등이 격렬하게 아파왔으머, 한 자루의 예리한 검이 등뒤에서
찔러 들어와 앞 가슴팍 쪽으로 뻐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일검은 바로 정극상이 갑자기 암습한 것이었다. 진근남의 무공을
두고 말할 때 열 명의 정극상이라 하더라도 그를 죽일 수는 없다. 그러
나 등뒤에 있던 정극상이 갑자기 독수를 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정성공이 대만을 공격, 정복한 후에 아들 정경을 금문과 하문에
주둔시켰었다. 정경은 군심을 얻고 있었으나 행동이 점잖지 못해 유모
와 사사로이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 정성공은 그 사실을 알고 매우
분노했으며, 영전(令箭)을 가진 사람을 하문으로 보내 정경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장수들은 아무도 그 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정성공
은 휘하의 장수들이 명을 받들지 않자 더욱 분노했고, 얼마 후 그만 병
이 들어 죽었는데 이때 나이 겨우 39세였다.
대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장수들은 정성공의 동생인 정습(鄭襲)을
연평군왕으로 받들었다. 정경은 금문과 하문에사 군사를 이끌고 대만으
로 돌아왔으며 대만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을 쳐서 항복받고 왕위에 오
르게 되었다. 정성공의 아내 동부인은 집안에 이와 같은 변고가 생기고
왕야가 일찍 돌아가시게 된 것이 바로 유모가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라
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모가 난 자식인 정극장을 매우 미워하고 직계
손자인 정극상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정경
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진근남은 언제나 정경에게 충성을 다했
으며 딸을 정극장에게 시집 보내 정극장의 장인이 되었다. 동부인과 풍
석범 등은 암암리에 밀모를 꾸미고 정극상을 세우려면 먼저 진근남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차에 걸쳐 암살을 하려고 했으나 진근남이
피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진근남이 정극상의 목숨을 구해 준 지 얼
마 되지 않았는데 오히려 정극상의 독수를 입게 된 것이다. 그 일검은
너무나도 재빨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풍석범이 시랑을 뒤쫓아가려고 하는데 흘깃 보니 위소보가 비수를 들고
정극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풍석범은 재빨리 위소보를 막았
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풍석범의 장검이 두 토막 나고 말았다. 그의
일검은 내경이 웅후해서 위소보의 비수도 날려 보냈다.
풍석범은 위소보를 발길질로 걷어차 곤두박질치게 만들고 다시 추격해
서 죽이려고 했는데 쌍아가 재빨리 달려나와 막았다. 이어 풍제중과 두
명의 천지회 형제들이 앞으로 나와 협공을 했다. 위소보는 몸을 일으켜
비수를 집어들고 울부짖었다.
[저 악인은 총타주를 해쳐 돌아가시게 했다. 모두들 목숨을 걸고 싸우
자!]
그는 정극상에게 재차 달려들었다.
정극상은 몸을 옆으로 날려 피하며 검을 뻗쳐 위소보의 뒤통수를 찌르
려고 했다. 그의 무공은 고강한 편이었고 이 일검은 퍽이나 교묘해서
위소보가 좀처럼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별안간 옆에서 한 자루의 칼
이 뻗쳐와 그 검을 밀어냈는데 그 검을 밀어 낸 사람은 아가였다. 그녀
는 부르짖었다.
[나의 사제를 해치지 마세요!]
곧이어 두 명의 천지회 형제들이 정극상을 공격했다. 풍석범은 풍제중
과 쌍아 등 네 사람을 상대로 싸웠는데 여전히 유리한 입장에서 싸우고
있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명의 천지회 형제를 쳐서 그 형제는
피를 토하고 죽었다. 별안간 정극상이 버럭버럭 큰소리로 고함을 질러
대자 풍석범은 상대하던 사람들을 내버리고 정극상 쪽으로 달려가 다시
장력을 휘둘러 천지회 형제 한 명을 때려 죽였다.
그는 진근남이 죽은 이상 이 한패거리 사람들 중 우두머리는 위소보라
생각하고 이 꼬마를 먼저 처치하려고 즉시 손을 뻗쳐서 위소보의 정수
리를 내리치려 했다. 쌍아는 부르짖었다.
[상공, 빨리 도망쳐요!]
그녀는 몸을 날려 풍석범의 뒤로 달려들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도 조심하시오!]
그리고는 도망을 쳤다. 풍석범은 생각했다.
(내가 만약 저 꼬마를 쫓는다면 공자를 보호할 사람이 없다.)
그는 왼팔을 뻗어 정극상을 안고 위소보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는 한
사람을 안고 있었으나 여전히 위소보보다 빠른 편이었다.
위소보는 고개를 돌려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곧 손을 뻗쳐서
함사사영이라는 암기의 기관장치를 누르려고 했다. 일시 머뭇거리는 순
간 풍석범은 재빨리 뒤쫓아와 오른손을 후려치고 있었다.
위소보는 비스듬히 몸을 날리며 신행백번의 재간을 펼쳐서 도망쳤다.
풍석범은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위소보의 뒤를 쫓아갔다. 위소보는 부
르짖었다.
[우리 사부님의 혼백이 쫓아와 당신의 머리를 만지려 하고 있소!]
이 말을 하느라고 일시 지체하자 풍석범은 다시 바짝 다가올 수 있었
다. 뒤에서 쌍아와 풍제중이 그림자처럼 풍석범을 뒤쫓고 있었다.
위소보는 동쪽으로 뛰고 서쪽으로 달리며 변화무쌍하게 도망쳤고, 풍석
범은 정극상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신법이 영민하지 못하여 일시 그를
뒤쫓아 잡을 수가 없었다. 쌍아와 풍제중은 수 장이나 뒤떨어져 있었
다.
이같이 한동안 쫓고 쫓기자 위소보는 숨이 차서 다급한 김에 벼랑 위를
향해 달려올라갔다. 풍석범은 크게 기뻐했다. 이 벼랑으로 오르는 좁은
길은 사면이 허공이고 퇴로가 없었다. 풍석범은 여유있게 뒤를 쫓아갔
다. 위소보는 이 좁은 산길을 올라가자 신행백변이라는 재간을 펼칠 수
가 없었다. 그가 막 벼랑 위에 올라서자 풍석범 역시 바짝 그의 뒤를
따라왔다. 위소보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큰마누라, 중간마누라, 작은마누라, 모두들 빨리 와서 도와줘요! 지금
나서지 않으면 모두들 과부가 될 것이오!]
위소보가 벼랑 위로 도망치는 광경을 다섯 여인은 이미 내려다보고 있
었다. 소전은 풍석범이 왼팔에 한 사람을 끼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나는
듯 달려오는 것을 보고 무공의 고강함이 홍 교주와 비슷하다고 생각했
다. 그녀는 칼을 뽑아 들고 벼랑가에 엎드려 풍석범이 달려오기를 기다
렸다가 획, 하니 풍석범의 허리께를 노려 질풍같이 내리쳤다.
풍석범은 정말 사람이 매복해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한칼의 수법이 절묘하고 뛰어난 것을 보고 약간 놀라서 한걸음 물러섰
다. 그는 오른발을 벼락같이 차올려 소전의 손목을 걷어찼다. 소전이
아, 하는 소리를 내는 순간 유엽도는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위소보는 바로 이 찰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풍석범을
바라보며 오른손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함사사영의 장치를 눌렀다. 치
지직,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한 무더기의 가느다란 침들이 급
격히 쏘아져 나가 모조리 풍석범과 정극상의 몸에 적중되었다.
풍석범은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정극상을 놓고 말았다. 두 사람은 데
굴데굴 굴러 산길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쌍아와 풍제중은 좁은 길을 반쯤 올라왔을 때 두 사람이 세차게굴러내
려오는 것을 보고 즉시 옆으로 피했다. 정극상과 풍석범 두 사람이 벼
랑 밑에까지 굴러갔을 때 강철침에 묻어 있는 독성이 이미 퍼졌다. 두
사람은 마치 돼지 목 따는 소리를 내지르며 끊임없이 뒹굴었다. 하척수
는 화산파의 문하로 들어온 후에 극독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함사사영
이라는 강침에 묻은 독 역시 몸을 마비시키는 약이었지 목숨을 빼앗는
극독은 아니었다. 과거 오독교 교주가 전수한 독이 묻은 암기를 그대로
사용하였다면 풍석범과 정극상 두 사람이 벼랑 아래로 굴러내려갔을 때
는 이미 숨이 끊어졌으리라.
두 사람은 강철침이 몸 안으로 파고들자 근질근질한 것을 감당할 수 없
었다. 두 사람의 전신은 마치 수백 마리의 전갈이나 지네들이 달려들어
물어뜯는 것만 같았다. 풍석범은 참을 수 없어 끊임없이 울부짖었다.
위소보, 쌍아, 풍제중, 소전, 방아, 목검병, 공주, 증유, 아가 등이 차
례로 달려왔는데 풍석범과 정극상의 이 같은 광경을 보고는 모두 깜짝
놀랐다.
위소보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는 숨을 몇 번 몰아쉰 후 서둘러 진근남
의 곁으로 다가갔다. 정극상의 장검은 가슴을 관통한 상태로 여전히 그
의 몸에 박혀 있었다. 그는 아직도 숨을 거두지 않은 상태였다. 위소보
는 대성통곡하면서 그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진근남은 공력이 매우 심
후하여 내력이 흩어지지 않았는지 아주 나직이 말했다.
[소보, 사람은 언젠가 죽는 것이다. 나는....나는 한평생 나라와 백성
을 위했기 때문에 천지신명께 부끄러움이 없다. 너는....너는....너는
괴로워하지 말아라.]
위소보는 그저 부르짖기만 했다.
[사부님, 사부님!]
그가 진근남과 함께 있었던 시일은 매우 짧았다. 매번 진근남을 만나면
언제나 사부님이 자기의 무공을 시험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저 어떻
게 변명을 하고 얼버무려 자기가 노력하지 않은 것을 감출까 하는 생각
만 했었지, 사부님의 은혜에 고마워한 적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가 죽
어가는 것을 보자 사부가 평소 여러 가지 말하던 가르침과 인자한 아버
지처럼 자기를 두텁게 사랑해 주던 것이 가슴속 가득 차올라 자기가 그
를 대신해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어 말했다.
[사부님, 잘못했습니다. 사부님....사부님이 저에게 전수한 무공을 저
는....저는....조금도 배우지 못했어요.]
진근남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좋은 사람이 된다면 사부는 그것만으로도 기쁘다. 무공을 배우든
배우지 않든 그것은.... 그것은 상관이 없다.]
[저는 반드시 사부님의 말씀대로 좋은 사람이 되겠으며 나쁜....나쁜
사람은 되지 않겠어요.]
[착하구나. 너는 언제나 착한 애였다.]
위소보는 이를 갈며 말했다.
[정극상이라는 악적이 사부님을 해쳤어요. 흑흑, 사부님, 저는 이미 그
를 제압했어요. 반드시 그를 짓이겨 고기젓을 담아 사부님의 원수를 갚
겠어요. 흑흑흑....]
그는 울면서 한편으로는 말을 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진근남은
몸을 흠칫 하더니 재빨리 말했다.
[아니, 아니다. 나는 정왕야의 부하이다. 국성야는 나에게 태산과 같은
은혜를 주셨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국성야의 혈육을 해칠 수는 없
다....차라리 그가 매정하게 나오는 것을 덮어두더라도 나로서는 의리
없는 짓을 할 수 없구나. 소보, 나는 이제 곧 죽게 된다. 너는 충의를
다한 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라. 너는.... 너는 꼭 내 말을 들
어야 한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으나 갑자기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다
시 말했다.
[소보, 나에게 약속을 해다오. 그를 대만으로 돌려보내라. 그렇지 않으
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위소보는 어쩔 수 없어 말했다.
[사부님께서 그 악적을 용서해 주시니 저는 사부님....사부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진근남은 안심을 할 수 있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말했다.
[소보, 천지회....반청복명의 대업을 너는 훌륭히 해내야 한다. 우리
한인들이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치면 끝내는 강산을 되찾을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애석하게도 나는....나는 광복의 그날을
볼 수 없게 되었구나....]
그 소리는 차츰차츰 낮아지더니 숨을 제대로 몰아쉬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거두는 게 아닌가? 위소보는 그의 몸을 껴안고 크게 부르짖었다.
[사부님, 사부님!]
진근남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소전 등은 줄곧 그의 곁에 서 있었는
데 진근남이 죽자 위소보가 슬픔을 참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처
연해 했다. 소전은 가볍게 그의 어깨를 만지머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
다.
[소보, 그대 사부님은 돌아가셨어요.]
[사부님이 돌아가셨다, 돌아가셨다.]
위소보는 한 번도 아버지를 모신 적이 없었으나 마음 깊이 사부를 아버
지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사부가 세상을 떠남에 따라 마음속에 쌓
이고 쌓였던 슬픔과 고통이 그야말로 봇물이 터지듯 걷잡을 수 없었다.
원래 자신이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었음을 새삼 절감하였다. 소전은 말
했다.
[그대의 사부를 죽인 흉수를 어떻게 처리하죠?]
위소보는 벌떡 일어나며 냅다 욕을 해댔다.
[빌어먹을 후레자식, 우리 사부님은 너희 정씨 집안의 부하이지만 이
위소보는 정씨 집안의 밥 한 끼 먹지 않았고 돈 한푼 써보지 않았다.
제기랄, 이 고약한 도적놈아! 너는 나에게 만 냥의 은자를 빛지고도 갚
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너의 목숨을 용서해 주라고 하셨다. 좋다, 목
숨만은 살려 주마. 그러나 만 냥의 은자를 빨리 갚아라. 갚을 수 없다
는 것이냐? 그렇다면 한 냥의 은자에 너를 한 칼씩 찔러 보상을 받도록
하겠다.]
입으로 끊임없이 욕을 해대며 그는 비수를 쳐들고 정극상에게 다가가
마구 걷어찼다. 정극상은 맞은 독침이 풍석범보다 훨씬 적어서 상처의
아픔과 가려움증이 많이 멎었다. 그는 진근남이 자기의 목숨을 용서해
주라는 말을 했다는 소리에 크게 기뻐했으나 빛쟁이가 빛을 갚으라고
하자 난처했다. 갖고 있는 은자가 전혀 없어서 애걸했다.
[나는....나는 대만으로 가면 반드시 열 배, 아니 백 배로 불려서 갚아
드리겠소.]
위소보는 그의 머리를 한 번 차고 욕을 했다.
[이 이리만도 못한 심보를 가진 놈아! 은혜를 저버리고 의리를 저버린
좀도적아! 그와 같은 말은 개방귀와 다를 것이 뭐냐? 나는 일만 번 너
를 칼질해 너의 살을 도려내야겠다.]
그는 비수를 그의 얼굴에 갗다대고 두어 번 비수를 닦는 시늉을 했다.
정극상은 혼비백산하여 아가를 바라보며 그녀가 나서서 부탁해 주기를
바랐다.
(이 나이 어린 도적이 마음속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 아가이다. 그러
나 그녀가 나를 위해 애걸을 한다면 이 나이 어린 도적은 더욱더 나를
미워할 것이고, 일만 번 이상 칼질을 하면 했지 한 번도 덜 하지는 않
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백만 냥의 은자를 나는 반드시 갚겠소. 위 향주, 위 상공, 만약 믿을
수 없다면....]
위소보는 다시 그를 발로 걷어차며 부르짖었다.
[물론 믿을 수가 없다. 우리 사부님은 너를 믿었는데 너는 그를 찔러
죽였다.]
그는 끓어오르는 비분을 참을 수 없어 비수를 뻗쳐 그의 얼굴을 찌르려
고 했다. 정극상은 부르짖었다.
[그대가 믿을 수 없다면 내가 아가에게 보증을 서 달라고 청을 하겠
소.]
위소보는 말했다.
[보증도 필요없다. 그녀는 너를 위해 보증을 선 적이 있지만 나중에 너
는 시치미를 떼지 않았더냐?]
[나는 물건을 잡히겠소.]
[좋아, 너의 개 같은 머리를 잘라내서 담보로 잡히도록 해라. 네가 백
만 냥의 은자를 갚는다면 나는 너의 개 같은 머리를 되돌려 주마.]
정극상은 말했다.
[나는 아가를 그대에게 저당잡히도록 하지.]
순간 위소보는 하늘이 빙글빙글 돌고 땅이 너울너울 돌아가는 것을 느
끼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놓았다. 비수가 떨어지면서 싹, 하고 흙 속으
로 파고들었다. 그 떨어진 곳이 정극상의 머리와 몇 치 정도의 간격밖
에 되지 않아 정극상은 아이고, 하는 소리를 내고 급히 머리를 움츠리
며 말했다.
[나는 아가를 그대에게 맡기겠소. 그러면 그대는 믿을 것이 아니겠소?
내가 백만 냥의 은자를 갚았을 때 다시 나에게 아가를 되돌려 주시오.]
위소보는 말했다.
[그런 문제라면 상의할 수 있겠군.]
아가는 울면서 부르짖었다.
[안 돼요, 안 돼요. 나는 그대의 것이 아닌데 그대가 어째서 나를 맡긴
다는 거예요?]
정극상은 급히 말했다.
[내가 지금 큰 재앙을 당하고 있는데 아가는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으
니 정말 매정하고 의리가 없군. 나는 사양하겠소. 위 향주가 만약 그대
를 요구한다면 나는 만 냥의 은자에 그대를 팔겠소. 그러면 우리는 서
로 빚을 갚게 되어 위 향주는 나를 만 번 칼질할 필요도 없지 않겠소?]
[그녀가 마음속으로 언제나 그대를 사모하고 있으니 그녀를 나에게 판
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녀의 뱃속에 이미 그대의 아기를 가졌는데 어째서 그녀가 나를 사모
하겠소?]
위소보는 놀라고 기뻐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그대는 뭐라고 했지?]
정극상은 말했다.
[그날 양주의 여춘원에서 그대는 그녀와 한 침대에서 자지 않았소? 그
녀에게 아기가....]
아가는 큰소리로 부르짖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서 얼굴을 가린 채 바다
쪽으로 나는 듯 달려갔다. 쌍아가 몇 걸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아
되돌아왔다. 아가는 울부짖었다.
[그대는....그대는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어째서.... 어째서 말
하는 거예요? 그대가 말하는 것은 정말 개방귀....개방귀....]
비록 수치와 분노에 얽혀 있으나 개방귀를 뀐다는 말이 아름답지 못하
다는 생각에 그 말을 다하지 못했다.
정극상은 위소보의 얼굴 표정이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보고 그의 마음이
변하게 될까 봐 걱정되어 재빨리 말했다.
[위 향주, 그 아기는 정말 그대의 것이오. 나는 아가와 깨끗한 사이요.
그녀는 나와 혼례를 올린 후에 부부관계를 하자고 했소. 그대는....그
대는 절대 의심하지 마시오.]
위소보는 물었다.
[덤으로 아기까지 생기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마다하지?]
[그녀는 뱃속에 그대의 아기가 잉태된 후에 종종 그대를 걱정했으며 나
와 말을 할 때도 온종일 그대에 관해서 얘기했소. 나에게는 전혀 흥미
를 보이지 않는데 내가 그녀를 맞아들여서 무엇한단 말이오?]
아가는 끊임없이 발을 구르며 화를 냈다.
[그대는 무슨....무슨 말이든 다 하는군.]
이렇게 말하자 그의 말을 인정하는 셈이 되었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그대는 꺼지도록 하시오.]
정극상은 크게 기뻐서 재빨리 말했다.
[정말 고맙소. 고마워. 그대 두 분이 백년해로하기를 기원하겠소. 사례
금은 이 형제....이 형제가 훗날 보내드리겠소.]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위소보는 퉤, 하고 땅바닥에 침을 뱉으며
욕을 했다.
[나는 한평생 네 놈 같은 도적놈을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오늘 그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사부님과 약속했다. 다른 사람
을 보내 그를 죽이는 것은 상관이 없을 것이다.)
세 명의 정씨 집안 위사들은 줄곧 한곳에 움츠리고 있다가 위소보가 주
인의 목숨을 용서하는 것을 보고서야 다가와 정극상을 부축했으며 다시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풍석범을 부축해 일으켰다. 정극상은 바다 쪽을
바라보며 속으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시랑이 타고 왔던 전선은
이미 멀리 가고 없었고 언덕가에는 두 척의 배가 머물고 있었다. 물론
한 척은 자기들이 타고 온 배인데 그 배는 청나라 군사들의 대포에 맞
아 돛대가 부러지고 불타 버려서 다시 띄울 수가 없었다. 다른 한 척은
온전해 보였지만 그것은 위소보 등이 타고 온 듯하니 자기들에게 양보
해 줄 리 없다고 생각하여 나직이 물었다.
[풍 사부, 우리들에게 배가 없는데 어찌하오?]
풍석범은 말했다.
[소정에 오른 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일행은 천천히 해변 쪽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한 사람이 등뒤에서 외쳤
다.
[잠깐, 위 향주는 그대들의 목숨을 용서했지만 나는 용서하지 않았소.]
정극상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한 사람이 손에 칼을 들고 달려오는데
바로 천지회의 고수 풍제중이었다. 정극상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그대는 천지회의 형제요. 천지회는 언제나 대만 연평왕부의
지시를 받아왔는데, 그대는....그대는?]
풍제중은 날카롭게 외쳤다.
[내가 어쨌다는 것이오? 거기 서시오!]
정극상은 속으로 두려움을 느꼈으나 응할 수밖에 없었다. 풍제중은 위
소보 앞으로 와서 말했다.
[위 향주, 이 사람이 총타주를 죽였으니 우리 천지회의 형제와는 불공
대천의 원수이며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소. 총타주는 한때 국성야에게
커다란 은혜를 입어 그의 자손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소. 위 향주는 총
타주의 유언을 받들어 손을 쓸 수가 없소. 하지만 속하는 한 번도 국성
야를 본 적이 없고 총타주의 유언도 나에게 말한 것이 아니오. 속하는
오늘 친히 이 악적을 죽여서 총타주의 원한을 갚겠소.]
위소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대는 뭐라고 했소? 나의 귀가 갑자기 멍멍해져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소. 풍형, 그대는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마음놓고
일을 처리하시오. 나의 명령을 들을 필요는 없소. 나의 귀가 어떻게 된
모양이오. 시랑이란 녀석의 대포 소리에 귀가 멀었나 보오.]
이 한 마디는 명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풍제중이 정극상을 죽이려면
얼마든지 손을 쓰라는 말이었다. 풍제중이 머뭇거리자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사부님께서 돌아가실 때 나보고 정극상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내가 그를 보호하겠다고는 약속하지 않았소. 그저 내가 친히 손을 쓰지
만 않으면 되는 것이오. 천하의 수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죽일 수
있는데 그 누가 상관할 수 있겠소?]
풍제중은 위소보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위 향주, 잠시 귀 좀 빌립시다.]
두 사람이 십여 장 밖으로 걸어나가자, 풍제중은 걸음을 멈추고 말했
다.
[위 향주, 황상께서는 그대를 줄곧 좋아하시지 않았소? 황상께서 그대
에게 총타주를 죽이라고 했는데도 그대는 옹하지 않고 스스로 도망쳐
온 것을 볼 때 그대의 의리가 무척 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소. 강호의
영웅호걸들은 하나같이 탄복할 것입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처연히 말했다.
[그러나 사부께서는 끝내 돌아가시고 말았소.]
풍제중은 말했다.
[총타주는 정극상이라는 놈에게 해침을 당하시었소. 그러나 황상께서
위 향주에게 분부하신 일은 어떻든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소....?]
위소보는 크게 의아하여 물었다.
[그대는....그대는 어째서....그와 같은 말을 하시오?]
풍제중은 말했다.
[황상께서는 마음속으로 세 사람을 가장 꺼리고 있으며, 그 세 사람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황상의 자리는 언제나 불안할 것이외다. 그 첫번째
가 오삼계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두 번째는 역시 총타주이외다.
천지회 형제들이 천하에 널리 퍼져 있고, 반청복명의 뜻을 한번도 게을
리하지 않아 황상은 매우 골치가 아팠던 것이오. 이제 총타주가 돌아가
셨으니 황상께서 크게 걱정하던 일은 한 가지 없어진 셈이 되었소....]
위소보는 거기까지 말을 듣게 되자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대였군, 그대였군. 바로 그대였군!]
위소보가 천지회에서 행한 모든 행위를 강희는 다 알고 있었고 천지회
의 암호마저도 술술 외웠다. 그러나 위소보가 사십이장경을 훔치고 신
룡교에서 백룡사가 되었던 사정을 강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위소보
는 자세히 생각해 보고 틀림없이 천지회에 첩자가 있을 것이고, 그 사
람은 반드시 자기와 매우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청목당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충성심이 강하고 의리가 깊어 절대 첩자가
되어 친구를 팔아 넘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음속
으로 줄곧 커다란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어떤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
다. 그저 일이 매우 이상야릇해서 풀기가 어렵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때 풍제중이 그와 같이 말하자 위소보는 갑자기 깨달은 바가 있었다.
(네가 바로 죽어 마땅할 간첩이로구나. 내 어째서 이 사람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날 소황제가 나에게 백작부를 폭격하겠다고 했을 때 천지
회의 사람들 가운데 이 사람만이 백작부에 없었다. 이 일은 이때 명백
하게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백작부의 사람들은 결코 첩자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대포를 쏘아대는데 그 누가 그 속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겠는가? 그는 사전에 이미 내막을 알고 먼저 피해 버린 것이
다. 아! 나는 정말 멍청이였다. 그가 지금 말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아
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풍제중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무공은 고강했지만 행동거지가 약간
멍청한 것이 시골뜨기와 다름없었다. 위소보는 누가 첩자일까 하고 생
각했다. 언변이 좋고 시정의 무뢰배와 다름이 없는 전노본을 생각했고,
행동거지가 날렵하면서 똑똑하고 눈치 빠른 서천천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치밀하고 능력이 있는 마언초, 성질
이 급하고 술을 좋아하는 현정 도인, 호방한 번강, 몸이 늙어 몹시 약
해진 이력세, 말을 할 때마다 상대방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쏘아대는
기청표 등을 의심해 보았으나 유독 풍제중만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별안간 다시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때 쌍아 역시 백작부에 없었다. 설마 그녀....그녀 역시 첩자로서
나에게 불충스러운 일을 했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그만 마음속이 쓰라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짐작되는 일이 있었다.
(쌍아는 풍제중이 일부러 데리고 나간 것이다. 그는 이 나이 어린 계
집애가 나의 생명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폭격을 가해 그녀가 죽은
후에 자기가 첩자 노릇을 한 것이 들통나면 내가 그를 미워하리라는 것
을 알고 그랬을 것이다. 그는 황상이 보낸 일개 첩자에 불과하여 몰래
소식이나 전해줄 뿐이니 천지회가 망한다면 황상께서는 그를 필요로 하
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황상 앞에서 그를 괴롭히려 한다면 그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나에게 죄를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 위소보의 마음속에 번쩍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위소보
는 말했다.
[풍형, 그대가 쌍아를 백작부에서 끌어내어서 대포밥이 되지 않게 해준
데 대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오.]
풍제중은 아, 하더니 대뜸 안색이 크게 변해서 뒤로 두 걸음 물러서 칼
자루를 잡고 말했다.
[그대 ....그대 ....]
위소보는 웃었다.
[그대와 나만 알고 있는 셈이외다. 황상께선 이미 나에게 모든 것을 설
명했소.]
풍제중은 황제가 그를 매우 총애하고 있으니 그 말이 거짓일 리는 없다
고 생각하고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성지를 받들지 않았소?]
이 한마디 질문은 그의 지난 행적 모두를 실토하는 셈이 되었다.
[풍형, 그대는 어찌 알면서도 묻고 있소? 황상께서 나에게 잘 대해 주
신 데 대해서는 고맙게 여기고 있소. 그러나 사부님 역시 나에게 잘 대
해 주셨소. 이제 사부님이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내 무슨 거리낌이 있겠
소? 그런데 황상께서 나의 죽을죄를 용서하시려고 할지 모르겠구려.]
풍제중은 말했다.
[지금이 바로 공을 세워 속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조금 전 나
는 황상께서 눈의 가시인 세 사람을 제거할 결심을 했다고 하지 않았
소? 오삼계와 진근남 외에 세 번째에 해당되는 사람은 바로 대만에 웅
크리고 있는 정경이오. 우리가 정경의 아들을 잡아서 북경으로 압송해
간다면 정경을 항복하도록 몰아세울 수 있을 것 같구려. 따라서 황상께
서는 크게 기뻐하시어 위 도통께서 하늘만큼 커다란 죄를 졌다 해도 용
서하실 것이외다.]
그는 이제 위소보에게 모든 사실을 감추지 않고서 호칭마저도 바꾸어
위 도통이라고 불렀고 총타주의 이름도 마구 불러댔다. 위소보는 속으
로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그대같이 의리가 없는 간악한 도적이 감히 나의 사부님의 이름을 함
부로 부르다니.)
그러나 강희와 사이가 좋아지는 것은 역시 바라던 일이었다. 벼슬을 하
고 못 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그저 소황제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그 즐거움과 재미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풍제중은 다시 말했다.
[위 도통, 우리가 북경으로 돌아간다 해도 여전히 그 일을 폭로할 필요
가 없소. 천지회의 사람들은 진근남이 죽은 것을 알면 십중팔구 그대를
총타주로 임명할 것이오. 그대는 의리를 중시하여 부귀영화를 기꺼이
던지고 백작도 마다했을 뿐 아니라 도통까지도 차버렸는데, 천지회의
친구들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천하에 알려져 있소.
지금 강호에는 이런 소문이 나 있으니 그 누가 위 도통의 영웅다운 호
기에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소?]
위소보는 의기 양양해서 물었다.
[정말 모두들 그렇게 얘기하고 있소? 그대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
겠지?]
풍제중은 재빨리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폐직은 결코 도통대인을 속이지 못하는 사
람입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그가 스스로 폐직이라 자칭하니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
나.)
호기심이 일었으나 물어 볼 수는 없었다. 물어 보면 마각이 드러나게
될 판이었다. 황상께서는 이미 자기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고 했는
데 그 말이 틀려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다시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 어떤 벼슬에 올랐느냐고 묻는 것은 상관이 없겠지.)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그와 같은 큰 공을 세웠으니 황상께서는 그대의 벼슬을 올렸겠
구려. 지금은 무슨 벼슬이오?]
풍제중은 말했다.
[황상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폐직에게 도사(都司) 벼슬을 내리셨습니
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흥! 깨알처럼 작은 무관이구먼. 나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빌어먹을!)
청나라의 관제는 백작이 초품대관(超品大官)이었고, 효기영 도통은 종
일품이었다. 한인의 녹영무관(綠營武官)은 가장 높은 제독이 종일품이
고, 총병은 정이품이었으며, 그 아래로 부장, 참장, 유격이있은 다음에
야 도사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풍제중은 두 눈에 의기 양양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축하하오, 축하하오. 이것은 황상께서 친히 끌어올려 주신 것이니 다
른 사람과는 다르오.]
풍제중은 새삼 인사를 하고 말했다.
[대인이 여러모로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한집안 사람이나 다름이 없는데 그런 말을 해서 무엇하오? 황
상을 위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그대의 재간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
구려.]
[비직이 어찌 대인의 만분의 일엔들 미칠 수 있겠습니까? 대인께 말씀
드립니다. 황상은 비직에게 분부하셨는데 후에 대인을 만나면 어떻게
하든 대인으로 하여금 북경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명을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전하라고 했습니다. 황상의 말투로 미루어 보아 대인을 몹시 중
시하고 계시며 한편으로는 매우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
에 큰 공을 세워 대만의 정씨 역적의 아들을 북경으로 사로잡아 가면
황상께서는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고 대인의 벼슬을 크게 올리실 것입니
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유격으로 승진해야 되겠구먼.]
[비직은 황상을 위해 힘을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황상께서 대인
을 만나시고 기뻐하신다면 우리 신하들도 경사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벼슬이 오르는 것은 오직 황상의 은혜입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줄곧 그대를 무척이나 얌전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벼
슬아치의 요령에 뛰어나고 입놀림도 번지르르하였구나.)
풍제중은 다시 말했다.
[대인께서 천지회의 총타주가 되시면 십팔 당의 각 향주와 중요 두목들
을 모조리 한데 모아 진근남을 위해 장례식을 치른다고 하십시오. 그때
일망타진하면 불경스런 일을 도모하는 대역무도한 반적들은 하나도 도
망칠 수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은 큰 공로는 그야말로 그날 대포로 백작
부를 쏘아댄 것보다 열 배나 더 큰일이 될 것입니다. 대인께서는 생각
해 보십시오. 그때 만약 성지를 받들어 진근남과 이력세 같은 몇 명을
죽였더라면 천지회의 반적들은 각 성에 모두 있으니 한 사람의 총타주
가 죽더라도 또 새로이 한 사람의 총타주를 세울 것이고 어찌되었든 깨
끗하게 해치울 수는 없었겠지요? 오로지 대인께서 총타주가 되어야만
일망타진하여 황상의 심복지환을 근절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위소보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계책은 정말 가공할 만하구나. 네 스스로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지
는 못했을 것이고 십중팔구 소황제의 계책이겠지. 내가 북경으로 돌아
가면 소황제는 반드시 나의 큰 죄를 용서해 줄 테니까 천지회를 일망타
진하라고 명령할 것이다. 그리고 풍제중에게 나를 요리할 수 있는 기묘
한 방책을 알려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그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위소보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서늘해졌다.
(소황제가 나를 투항시켜 나의 볼기짝을 때리는 것은 상관이 없는 일이
지만 나로 하여금 천지회의 총타주가 되도록 핍박하고 모든 형제를 죽
이라고 한다면 도저히 그 짓만은 할 수 없다. 그런 짓을 한다면 천하의
호걸들이 나의 십팔 대 조상까지 욕을 할 것이다. 죽은 후에도 나는 사
부님을 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큰 계집애와 작은 계집애들
도 모두 마음속으로 남편을 업신여길 것이다. 위소보에게 양심이 많지
는 않지만 그래도 눈꼽만큼은 있지 않은가!)
그는 풍제중을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만약 이 일을 응낙하지 않으면 그는 즉시 나에게 목숨을 걸고 덤
벼들 것이다. 우리는 사람수가 많으니 그에게 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
만 그의 무공이 너무나 높아 큰 계집애나 작은 계집애들 가운데 그에게
한두 사람이라도 죽는다면 그야말로 낭패다. 나는 다시 한번 함사사영
을 가지고 놀아야겠구나.)
그는 생각해 보는 척하며 말했다.
[황상을 찾아가 뵈옵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기는 하나.... 천지회의 그
많은 형제들을 죽인다는 것은 의리를 저버리는 일이오. 다시 한번 상의
해 보도록 합시다.]
풍제중은 말했다.
[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좁으면 군자가 되지 못하고,
독하지 않으면 사내대장부가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위소보는 말햇다.
[맞았소, 맞았소. 독하지 못하면 사내대장부가 되지 못하지.... 어, 어
이쿠! 정극상이라는 저 녀석이 도망친다!]
풍제중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위소보는 가슴을 풍제중
쪽으로 향하고 손을 뻗쳐서 함사사영의 암기 장치를 누르려고 했다. 그
때 쌍아가 서둘러 다가오더니 부르짖었다.
[상공, 무슨 일인가요?]
그녀는 두 사람이 한참 동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관심있게 바라
보다가 천천히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위소보가 놀라 어이쿠,
하는 소리를 지르자 즉시 몸을 날려 달려든 것이다. 위소보가 이 함사
사영을 쏜다면 풍제중을 적중시키고 쌍아까지 적중시킬 것이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그 암기장치에 닿았으나 누르지 못했다. 풍제중이 고개
를 돌려 바라보니 정극상과 풍석범이 여전히 해변가에 서 있는 것을 보
았다. 아무래도 도망칠 기미가 없어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순
간 냅다 쌍아를 잡고 그녀를 자기의 앞에 세웠다. 쌍아의 무공으로 볼
때 풍제중이 단번에 손을 써서 잡을 수는 없었으나 느닷없이 일어난 일
이라 쌍아는 전혀 방비를 못했기 때문에 즉시 그에게 손목을 잡혔고,
상반신이 시큰거려 움직일 수 없었다. 풍제중은 말했다.
[위 대인, 아무쪼록 손을 쳐드시오.]
위소보는 암습을 가할 좋은 기회를 잃고 쌍아가 제압당하자 대뜸 열세
에 처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풍형, 무슨 장난을 치려고?]
풍제중은 말했다.
[위 대인의 종적도 없이 날아드는 암기는 너무나 무서워서 폐직은 무척
두렵소이다. 그러니 아무쪼록 두 손을 쳐드시오. 그렇지 않으면 폐직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소이다.]
그는 쌍아를 앞으로 밀었고 그 자신은 그녀의 등뒤에 몸을 숨기고 위
소보로 하여금 암기를 쓰지 못하도록 했다.
소전, 방이, 아가, 증유 등은 이쪽에서 변고가 일어난 것을 보고 다투
어 달려왔다. 풍제중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은 이 계집애를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에 감히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저 여인들은 이 나이 어린 계집애의 목숨은 아낄 줄 모
르고 그저 저 녀석만 아낄 뿐이니 나에게 마구 덤벼들 것이다.)
그는 왼손으로 허리에서 칼을 뽑아 손과 팔을 쭉 뻗쳐서 칼 끝으로 위
소보의 목을 겨누며 호통을 쳤다.
[모두들 다가서지 마시오!]
소전 등은 위소보가 위험한 처지에 놓인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하나같이 초조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풍제중은 분명히 위소보의 친구였고 조금 전만 해도 함께 적에게 대
항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의견이 벌어져 손을 쓰게
된 것일까. 아마도 위소보가 정극상을 놓아주려고 하는데 풍제중은 정
극상을 죽여 진근남의 원한을 갚으려고 하니까 의견충돌이 생겼나 보
다.)
칼이 목에 닿자 위소보는 뒤로 몸을 젖혔다. 그러자 풍제중은 칼을 더
욱 앞으로 내밀며 호통을 쳤다.
[위 대인, 움직이지 마시오! 칼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으니 두 손을 쳐
드시오!]
위소보는 어찌할 수 없어 두 손을 쳐들며 웃었다.
[풍형, 그대가 큰 벼슬에 오르고 재물을 얻으려면 역시 나에게도 좀 고
분고분하게 대해야 할 것이오.]
풍제중은 말했다.
[벼슬이 오르고 재물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오.]
그는 갑자기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위소보의 등뒤로 돌아가 손을 뻗쳐
그의 발목에서 비수를 뽑아들고 그의 등뒤를 겨누며 말했다.
[위 대인, 그대의 이 비수는 예리하기 이를 데 없지요. 폐직은 이 것을
쓰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소이다.]
위소보는 등뒤가 약간 아파왔다. 비수의 끝이 이미 겉옷을 꿰뚫고 있었
다. 그는 몸에 보의를 입고 있었으나 그 보검을 당해 내지 못하는 것을
깨달았다. 풍제중은 호통을 내질렀다.
[모두 몸을 돌리고 무기를 던지시오!]
소전 등은 이와 같은 형세에 놓이자 몸을 돌리고 무기를 던질 수 밖에
없었다. 풍제중은 여섯 명이나 되는 천지회의 형제들이 한쪽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들 이리로 오시오. 내 할말이 있소.]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까닭인지 모르고 다가왔다.
풍제중은 오른팔을 들더니 퍽 하고 팔굽으로 위소보의 등에 있는 대추
혈(大稚穴)을 찍었다. 거의 동시에 왼손의 칼을 휘둘렀다. 비명소리가
몇 번 울려퍼지는 가운데 여섯 명의 천지회 형제들은 모조리 그의 칼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풍제중은 삽시간에 여섯 명을 쓰러뜨린 것이었고, 매번의 칼질은 상대
방의 요혈을 내리찍은 것이다. 칼을 휘두르는 재빠름과 내리찍어 죽이
는 매서움은 실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소전 등이 비명소리를 듣고 일제히 몸을 돌렸을 때 여섯 명의 천지회
형제들은 이미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머리에, 어
떤 사람들은 목, 어떤 사람은 가슴, 어떤 사람은 등, 어떤 사람은 허
리, 어떤 사람은 옆구리에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에서는 피가 샘솟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인들은 깜짝 놀라 비명소리를 내질렀고, 얼굴은
백지장이 되었다.
풍제중은 이미 기선을 제압하고서 손을 쓴 것이었다. 자기 쪽에는 자기
혼자밖에 없으니 서둘러 손을 써서 여섯 명의 천지회 형제들을 죽인 것
이다. 그 첫째 목적은 위소보로 하여금 겁을 먹게 하여 반항하지 못하
도록 하려는 것이었고, 두 번째 목적은 여섯 명의 적을 없애는 데 있었
다. 이렇게 되자 상대방의 인원수가 많기는 하나 한 명의 소년과 일곱
명의 여자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왼손의 칼을 돌려 위소보의 목에 갖
다 대고 말했다.
[위 대인, 우리 배에 오르도록 합시다.]
그는 위소보와 정극상 두 사람을 황제에게 바쳐 공을 세우려고 한 것이
다. 일곱 여인은 여전히 섬에 남겨 두려고 했다. 스스로 일곱 명의 여
인을 죽이지 않음으로 해서 위소보와 깊은 원한을 맺지 않으려는 속셈
이었다. 황상께서 이후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
었던 것이다.
여인들은 위소보가 그에게 붙잡혀 꼼짝 못하는 것을 보고 모두들 하나
같이 간담이 서늘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때 건녕 공주가
큰소리로 꾸짖었다.
[당신이 무엇인데 감히 이토록 무례할 수 있소? 빨리 칼을 던지시오.]
풍제중은 흥, 하니 코웃음칠 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위소보를 따
라 그녀를 호송하여 운남에서 혼사를 올리려고 했던 적이 있었는지라
공주를 알아보고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공주는 그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을 보고 더욱더 대노했다. 그녀는 세상
에서 태후, 황제, 위소보, 소전 네 사람 외에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는
편이었다. 그녀는 몸을 굽혀 땅바닥에서 칼을 집어들더니 앞으로 달려
나가 풍제중의 머리를 내리쳤다.
풍제중은 몸을 날려서 피했다. 공주는 휙휙휙, 잇따라 연속 세 번 칼질
을 했으나 풍제중은 좌우로 피했다. 만약에 다른 여자가 이같이 나섰다
면 그는 나는 듯 다리를 들어 그녀를 차서 쓰러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칼을 들고 내리치는 사람은 바로 황제의 누이동생이고 금지옥엽과 같은
공주였다.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저 공을 세워 벼슬이 오르
고 황실에 충성을 다하자는 것인데 어찌 공주에게 죄를 지으랴? 풍제중
은 그저 피하기만 했다. 공주는 욕을 했다.
[이 못난 후레자식! 꼼짝하지 말고 서라. 내가 너를 자르려는데 너는
자꾸만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피하니 나는 헛칼질만 하지 않느냐? 황제
오라버니한테 너를 천갈래 만갈래 찢어 죽이라고 말하겠다!]
풍제중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황제의 누이동생이고 자기는 깨알같이
조그만 무관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공주를 상대해서 이길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그녀의 분부에 따라 자기의 못난 대가리를 움직이지 않고 세
워 두어 공주의 귀하신 손에 들린 칼이 자기 머리를 내리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공주는 입으로 마구 욕을 하며 칼을 왼쪽에 한 번 오른쪽에 한 번씩 내
리찍었다. 풍제중은 몸을 살짝 옆으로 비틀어 가볍게 피했다. 매번 칼
질을 할 때마다 그 간격은 불과 몇 치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시종 칼에 맞지 않았다. 공주는 초조해져 칼을 비껴들고 허리께를 쳤
다. 풍제중은 부르짖었다.
[조심 하시오!]
그는 몸을 날렸다. 그런데 그녀가 그 칼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위소
보의 어깻죽지를 내리치는 게 아닌가? 이때 풍제중은 허공에 떠올라 있
는 상태로 왼발을 뻗쳐 위소보를 차서 땅바닥에 쓰러뜨리더니 그 반탄
력올 이용해서 일 장 밖으로 달려나갔다.
第124章. 아기를 밴 여인들
쌍아가 즉시 앞으로 달려와 위소보를 얼싸안고 나는 듯 옆으로 피했다.
풍제중은 깜짝 놀라 칼을 쳐들고 달려왔다. 쌍아의 무공은 뛰어났으나
역시 힘이 약했다. 그녀가 위소보를 껴안고 수 장 정도 달려갔을 때 풍
제중이 바짝 뒤쫓아오게 되었다. 위소보는 등의 혈도가 봉해져 있는 상
태라 사지를 움직일 수가 없어서 말했다.
[나를 내려놓아요. 암기를 쓰도록 해줘.]
그러나 풍제중은 너무나 재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쌍아가 위소보를
내려놓고 그로 하여금 함사사영의 암기를 발사하도록 하기에는 이미 때
가 늦었다. 다급한 김에 그녀는 힘껏 그의 몸뚱어리를 내던졌다.
풍제중은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달려가 손을 뻗쳐서 위소보를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등뒤에서 찰칵,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마치
화도와 화석이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였다. 곧이어 꽝, 하는 커다란 소
리가 울려퍼졌고 풍제중의 몸뚱이가 펄쩍 튀어 올랐다. 그러더니 땅바
닥에 내동댕이쳐졌고 몇 번 꿈틀거리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위
소보는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는 쌍아의 몸 앞에 한 무더기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과 그녀의 손에 한 자루의 단총, 즉 화창이 들려 있는 것
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오륙기가 그녀와 남매의 의를 맺었을 때 그녀에
게 선물한 예물이었다. 그것은 나찰국에서 교묘히 만든 화기인데 실로
무섭기 이를 데 없었다. 풍제중의 무공이 탁월하다고는 하나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뚱이로는 도저히 총알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쌍아 자신도 깜짝 놀란 것 같았다. 화창 소리가 터지자 그 충격으로 그
녀는 손과 팔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으며 손이 떨리는 바람에 단총마
저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바로 이때 소전이 달려와 위소보의 혈도를 재빨리 풀어 주었다. 위소보
는 간신히 일어나기는 했으나 풍제중이 아직도 죽지 않았을까 봐 서둘
러 몇 걸음 그에게 다가가 가슴팍을 풍제중 쪽으로 향하도록 내밀고 허
리에 차고 있던 기관장치를 눌렀다. 즉시 강철침이 쏘아지면서 모조리
풍제중의 몸에 박혔다. 풍제중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는데 화통이 한
번 꽝, 하는 순간 죽어 버린 모양이었다.
여인네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일곱 명의 여인들이
새들이 재잘거리는 듯 너 한마디 나 한마디 다투어 그 과정을 묻는 것
이었다. 위소보는 간단히 설명을 했다.
쌍아는 풍제중과 상당히 오랜 시일을 두고 이야기를 해왔으며 길을 오
는 동안 그가 성실하고 소박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뜰하
게 보살피는 것이 실로 본분을 지킬 줄 아는 늙은 호인으로 여겼다. 그
러나 누가 알았으랴? 그의 마음이 그토록 음침했다고 생각하니 생각할
수록 두려웠다. 그녀는 몸을 돌려 단총을 집어들었다. 별안간 오륙기가
자기와의 남매를 맺었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다.
오륙기는 무림의 기인인 위소보가 그녀를 처로 맞아들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하녀의 신분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천지회 홍기 향주의 의누이가 된 이후에는 천지회 청목당의 향
주에게 얼마든지 시집을 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의오라버니의 호
의를 새삼 깨닫고 사람은 가고 없는데 총만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니 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위소보는 몸을 돌렸다. 정극상 등
네 사람은 해변가로 다가가서 소정에 오르려고 했다. 그는 생각했다.
(그가 사부를 죽이도록 내버려두고도 태평스럽게 떠나보내는 것은 그에
게 너무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위소보는 즉시 비수를 들고 쫓아가며 부르짖었다.
[잠깐!]
정극상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 얼굴을 이미 흙빛이 되어
있었다.
[위.... 위 향주, 그대는 이미 나에게 응낙하지 않았소? 우리, 우리를
놔주겠다고.]
위소보는 냉소했다.
[나는 그대를 죽이지 않겠다고 응낙했소. 그러나 그대의 한쪽 다리를
잘라내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소.]
풍석범은 크게 노해서 화를 터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손을 쳐들자 전신
이 시큰거리고 맥이 쭉 빠져 다시는 팔에 힘을 쑬 수 없었다. 정극상은
이미 간담이 서늘해져 두 무릎에 맥이 빠져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
다.
[위....위 향주, 그대가 나의 한 다리를 자른다면 나는....나는 살지
못할 것이오.]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 수 있소. 그대는 나에게 아가를 저당잡히고 백만 냥의 은자를 빚졌
소. 그러나 그녀는 나와 천지신명께 절을 하고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마누라요. 그녀의 뱃속에는 내 아이가 있어서 그녀 스스로도 나를 따르
기 원하고 있는데 그대는 나의 마누라를 이용하여 나에게 저당을 잡히
겠다는 것이오? 천하에 그런 도리가 어디 있소?]
그러자 소전, 방이, 증유, 공주 등이 일제히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안 돼!]
정극상은 머릿속이 이미 혼란스러웠으나 역시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럼....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소?]
위소보는 말했다.
[내가 그대의 한 팔을 자르고 한 다리를 잘라서 저당을 잡겠소. 그리고
장래에 나에게 만 냥의 은자를 갚으면 나는 그대의 잘라진 팔과 다리를
주겠소.]
정극상은 말했다.
[아가를 그대에게 팔면 만 냥....만 냥의 은자를 빚진 것은 이미 없었
던 것으로 하기로 했잖소?]
위소보는 크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안 되오. 방금 나는 흐리멍텅해서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오. 아가는 나
의 마누라인데 그대는 어찌 내 마누라를 나에게 판다는 말이오? 좋소,
나는 그대의 어머니를 그대에게 파는 데 백만 냥에 팔겠소. 그리고 그
대의 부친을 그대에게 파는 데도 다시 백만 냥에 팔겠소. 그대 할머니
를 그대에게 파는 데 역시 백만 냥의 가격을 먹이겠으며, 또한 그대의
외할머니를 그대에게 파는 데 역시 백만 냥....]
정극상은 말했다.
[우리 외할머니는 이미 죽었소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죽은 사람도 팔 수 있소. 내가 외할머니의 시체를 그대에게 파는 데
죽은 사람이니 할인을 해서 팔십만 냥을 받도록 하겠소. 관값은 따로
받지 않겠소.]
정극상은 그가 말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사람의 가격을 부르는 것을
알았고, 죽은 사람들까지도 팔겠다는데 자기의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
버지, 고조할머니, 증조할머니 등 모조리 자기에게 팔아 넘길 것이니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죽은 사람은
할인해서 깎아준다 해도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그저
애걸했다.
[나는....나는 더 살 수 없소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좋아. 살 수 없다면 용서를 해주지. 그러나 이미 산 것은 물릴수 없
소. 그대는 나에게 삼백팔십만 냥의 은자를 빚졌는데 어떻게 갚을 작정
이오?]
공주는 웃었다.
[그래요. 삼백팔십만 냥의 은자를 빨리 되돌려줘요.]
정극상은 울상을 하고 말했다.
[나에게는 천 냥도 없소. 어디서 삼백팔십만 냥을 가져다 줄 수 있겠
소?]
위소보는 말했다.
[좋아, 은자가 없다면 물건을 되돌려 받도록 하지. 그대는 빨리 그대의
부친, 모친, 할머니, 죽은 외할머니를 함께 나에게 넘겨주시오. 머리카
락 하나라도 적어서는 안 돼.]
정극상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나가다가는 끝내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
하리라 생각하고 아가를 쳐다보며 그녀가 나서서 사정을 해주기를 바랐
다. 그러나 그녀는 뜻밖에도 멀찌감치 서서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아
닌가?
그녀는 이 일에 관계하지 않겠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속으로 크게
초조해졌다. 위소보의 이와 같은 행동을 볼 때 반드시 자기의 한 손과
한 다리를 자를 것이 분명한지라 그만 연신 큰절을 하며 말했다.
[위 향주, 내가.... 내가 진 군사를 해친 것은 정말 죽을죄를 지었소이
다. 그저 그대가 넓은 아량으로 소인의 목숨만 살려 주기 바라오. 그리
고 내가 그대 어르신에게 삼백팔십만 냥의 은자를 빛진 것으로 하고,
이후 나는 반드시.... 반드시 방법을 강구해서 모두 갚도록 하겠소이
다.]
위소보는 그를 그토록 곯려 주고 나니 분노와 한이 약간 가시는 것이었
다.
[그렇다면 그대는 차용증서를 써주시오.]
정극상은 크게 기뻐서 말했다.
[예, 예.]
그는 몸을 돌려 위사에게 말했다.
[종이와 붓을 가져오시오.]
그러나 이 황량한 섬 어디서 종이와 붓을 찾는단 말인가? 그 위사는 그
래도 기민한 편이라 즉시 자기의 옷 아랫자락을 찢더니 말했다.
[저쪽에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의 피를 묻혀서 쓰면 될 것입니다.]
그는 달려가 풍제중의 시체를 끌어오려고 했다.
위소보는 왼손을 뻗쳐 정극상의 오른쪽 손목을 잡았다. 하얀 광채가 번
쩍 하는 순간 비수를 내리쳐 그의 식지 한 토막을 잘라 냈다. 정극상은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의 손가락에서 나오는 피로 쓰도록 하시오.]
정극상은 아픔에 전신을 와들와들 떨며 잠시 손발을 어떻게 놀려야 할
지 몰랐다.
[천천히 쓰도록 하시오. 만약에 피가 말라 부족하다면 다시 그대의 다
른 손가락을 잘라 주지.]
정극상은 재빨리 말했다.
[예, 예!]
그는 감히 주저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머 아픔을 참고 반 토막이 잘려
져 나간 식지로 다음과 같이 썼다.
'은자 삼백팔십만 냥을 차용함. 정극상 씀.'이 몇 자를 쓰고 나자 그는
거의 까무러칠 정도였다. 위소보는 냉소했다.
[당당한 왕부(王府)의 공자께서 평소 공부를 하지 않고 글자도 쓰지 않
아 한 장의 차용증서를 쓰는데 글씨가 삐뚤삐뚤한 것이 전혀 쓸모없는
글씨로군!]
그는 옷자락을 받아들더니 쌍아에게 내밀었다.
[그대가 거두시오. 숫자를 적게 쓰지 않았는지 살펴보시오. 이 사람은
간사하고 교활하니 몇 냥은 적게 쓸 수도 있을 것이오.]
쌍아는 웃었다.
[삼백팔십만 냥의 은자, 한푼도 적게 쓰지 않았군요.]
그녀는 혈서로 쓴 차용증서를 품속에 넣었다. 위소보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정극상의 턱을 걷어차고 호통을 내질렀다.
[죽은 외할머니한테로 꺼져.]
정극상은 곤두박질을 치며 저쪽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위사들이 재빨리
달려가 부축하고서 그의 손가락에 난 상처를 싸맸다. 두 명의 위사는
다투어 정극상과 풍석범을 부축해 한 척의 소정에 오르고 바다 쪽으로
저어가기 시작했다.
위소보는 끊임없이 웃다가 사부의 참담한 죽음을 생각하고 참을 수 없
어 대성통곡을 했다.
정극상은 소정이 수십 장 저어 나가자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하고 말했다.
[우리들은 큰 배를 훔쳐서 떠나도록 합시다. 짐작하건대 천벌을 받아
죽을 저 남녀들은 쫓아오지 못할 것이오.]
커다란 배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배에는 키도 없었고, 항해할 때 사용
하는 기구들도 전혀 없었다. 풍석범은 이를 갈며 말했다.
[그 한 떼의 개 같은 남녀들이 물건을 걷어치웠군!]
바다는 망망하고 파도는 거셌다. 소정에는 양식도 물도 없는데 어찌 멀
리까지 항해를 할 수 있겠는가? 정극상은 말했다.
[돌아가서 다시 그 도적에게 배를 빌리도록 합시다. 기껏해야 삼백팔십
만 냥의 차용증서를 쓰는 것밖에 더 있겠소?]
풍석범은 말했다.
[그들도 한 척밖에 없는데 어찌 우리들에게 빌려 줄 수 있겠소? 나는
차라리 바다에 떨어져 고기밥이 되었으면 되었지, 돌아가서 그 도적에
게 애걸하고 싶지는 않소이다.]
정극상은 그의 말이 단호한지라 감히 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한숨을
내쉬며 세 명의 위사에게 소정을 바다 쪽으로 저어 나가도록 명령했다.
위소보는 정극상의 소정이 큰 배 있는 쪽으로 저어가더니 큰 배가 행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소정을 저어 멀리 떠나는 것을 보고는 참
을 수 없어 웃었다.
소전은 위소보가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것을 보고 사부님을 잃은 슬픔과
고통을 위로해 줄 겸 말했다.
[저 정씨 집안의 둘째 공자는 간사하기 이를 데 없군. 분명히 우리 큰
배를 빼앗으려고 한 모양이에요. 소보, 그대가 가지고 있는 삼백팔십만
냥의 차용증서는 내가 보기에 나중에는 그가 아무래도 억지를 쓸 것 같
군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 녀석은 정말 못됐어.]
소전은 웃었다.
[그대는 어떤 점에서는 똑똑한 편인데, 조금 전 그 녀석이 그대의 마누
라를 그대에게 팔아넘기고서 만 냥의 빚을 갚는다고 하자 생각해 보지
도 않고 그저 응낙을 했지요. 이것은 그대가 아가 누이를 너무나 사랑
한 탓일 거예요. 그때 그가 그대에게 만 냥의 은자를 내놓으라고 했더
라도 그대는 역시 응낙했을 것 같아요.]
위소보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상관할 것 없소. 응낙한 후에 다시 따지기로 하지. 천천히 그에게 빚
을 받으면 되지.]
방이는 물었다.
[나중에 어떻게 손해를 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위소보는 머리를 긁적긁적하고 말했다.
[풍제중을 죽인 후에 나는 걱정할 일이 없어져서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
기 시작했소.]
그는 풍제중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았었다. 그러나 마음속 깊
숙한 곳에서는 신변에 커다란 화가 다가음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아무 까닭도 없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했는데 풍제중이 죽자 즉시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듯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저
도적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그저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
다.)
사람들은 위기에서 벗어나고, 죽을 사람은 죽고 도망칠 사람은 도망쳐
서 섬이 태평스럽게 되자 모두들 온몸이 피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외소보는 이때 두 발이 마치 천근처럼 무거운 것을 느끼고 견딜 수 없
어 그만 모래 바닥 위에 누워서 쉬었다. 소전은 풍제중에게 짚혔던 혈
도를 안마해 주었다.
석양 빛이 하늘을 뒤덮고 물결이 반짝거려 바다에 마치 금빛 뱀이 서로
다투어 뛰고 나는 듯해서 그 광경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여인들은 모두 주저앉았다. 얼마 후 위소보가 먼저 코를 골았고, 여인
네들도 차례로 잠이 들었다. 한 시진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방이가 먼
저 깨어났다.
그녀는 위소보가 옛날 중군장으로 사용하던 집으로 가서 밥과 음식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불러서 식사를 하도록 했다. 객당에는 소나무로
만든 횃불을 걸어놓아 온 집안을 훤하게 밝혀 놓았다.
여덟 명이 함께 식사를 한 후에 방이와 쌍아가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
다.
위소보는 소전으로부터 시작하여 방이, 공주, 증유, 목검병, 쌍아, 아
가 등 일곱 여인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어떤 여인은 간드러지도록 화사했으며, 어떤 여인은 온순했고, 어떤 여
인은 활발했으며, 또 어떤 여인은 단정하면서도 수려했다.
제각기 장점이 있는지라 위소보는 크게 흐뭇해서 한 여인에게 등을 기
대고 다리는 다른 여인에게 갖다 대었다. 마음은 평화롭기 이를데 없었
으며, 그날 여춘원에서 일곱 여인과 더불어 커다란 이부자리 안에서 천
둥 벌거숭이처럼 날뛰었던 때와 비교해 볼 때 또다른 평안하고 아늑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과거 모조리 먹어치운다는 뜻으로 이 작은 섬에 통흘도라는 이름을 붙
인 것은 선견지명이 있어서 그대들 누나와 누이들을 모조리 내 마누라
로 삼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소. 이것이야말로 모르는 가운데 하늘의
뜻이 있는 것처럼 그 누구도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
소? 이제부터 우리 여덟 사람은 이 통흘도에 살면서 수명이 하늘처럼
길게 되고 영원히 복을 누리도록 합시다.]
소전은 말했다.
[소보, 그 말은 불길하니 다시는 하지 않도록 해요.]
위소보는 그녀가 홍 교주와 관계 있는 일은 어떤 것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재빨리 말했다.
[맞았소, 맞았소. 내가 또 실수를 했구려.]
소전은 말했다.
[시랑과 정극상이 돌아간 후에 십중팔구 군사를 데리고 원수를 갚으러
올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집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수는
없을 거예요.]
여인들은 일제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방이는 말했다.
[전 언니, 우리는 어디로 가면 좋지요?]
소전은 위소보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것은 역시 지존보(至尊寶)의 생각을 들어야겠지.]
위소보는 웃었다.
[그대는 나를 지존보라고 부른 것이오?]
[만약에 지존보가 아니면 어떻게 통째로 다 먹어치울 수 있었겠어요?]
위소보는 껄껄 웃었다.
[나의 이름에 있는 보 자가 조그마한 보물 보 자인 줄로 알았소. 그런
데 알고 보니 지존보였구려.]
그는 뭇여인이 일제히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잠시 생각한 후 말
했다.
[중원에는 갈 수가 없소. 신룡도는 이곳에서 너무 가까우니 역시 좋지
않소. 어쨌든 쾌적하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할 것이오.]
그러나 사람이 없는 황량한 곳은 쾌적할 수 없으며, 쾌적한 곳이라면
반드시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위소보의 기준으로 쾌적하
다고 하는 것은 바로 도박을 할 수 있고, 연극을 볼 수 있고, 이야기꾼
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갖가지 잡다한 놀이를 즐길 수 있어야 했
다. 그리고 노래, 맛좋은 음식, 맛좋은 찬, 간식용 음식, 아름다운 소
저, 모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아름다운 소저들은 이미 곁에 적
지 않게 있었으나 나머지의 여러 가지들은 북경이나 양주와 같이 천하
에 으뜸가는 번화한 곳이 아니면 결코 흐뭇하게 누리기 어려울 것 같았
다. 그는 이와 같은 풍류적이고 흥청거리는 곳을 생각하자 갑자기 호기
심이 발동하여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모여 사는 것도 퍽이나 재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소.
그러나 우리 어머님 혼자 외로운 삶을 보내고 있는데 어찌 지내시는지
모르겠구려.]
여인들은 그로부터 자기 어머니를 들먹이는 것을 한번도 듣지 못하다가
이 말을 듣자 그에게도 효성심이 있다고 생각하여 일제히 물었다.
[그대의 어머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
어떤 여인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대의 어머니는 바로 나의 시어머니이니까 마땅히 방법을 강구해서
한자리에 모셔 시중을 들어야 할 것이다.)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양주 여춘원에 계시오.]
여인들은 양주 여춘원이라는 소리를 듣자 공주 외에 나머지 여인들은
대뜸 얼굴이 빨개졌고, 어떤 사람은 얼굴을 돌렸으며, 어떤 사람은 고
개를 숙였다. 공주는 말했다.
[아, 양주 여춘원이라는 곳은 그대가 말한 적이 있어요. 그곳은 천하에
서 가장 놀기 좋은 곳이며, 그대는 나를 데리고 놀러가겠다고 약속했잖
아요?]
방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그대를 곯려주려는 말이니 그 말을 믿지 말아요. 그곳은 가장
점잖치 못한 곳이에요.]
공주는 말했다.
[어째서 점잖치 못한 곳이란 말이에요? 그대는 놀러가 본 적이 있나요?
어째서 그대들은 하나같이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죠?]
방이는 우스운 것을 참고 대답하지 않았다. 공주는 목검병의 어깨를 얼
싸안고 말했다.
[누이, 그대가 나에게 들려줘.]
목검병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했다.
[그곳은....그곳은 기녀원이에요.]
공주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지 계속 물었다.
[그대의 어머니가 기녀원에서 무엇을 하지? 소문에 들으니까 그곳은 남
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하던데?]
방이는 웃었다.
[그는 언제나 터무니없는 말을 잘 해요. 그대가 그의 말을 한마디만 믿
어도 골치가 아플 거예요.]
그날 여춘원에서 위소보가 일곱 여인과 한 이불을 덮고 잠자리를 하였
을 때 지금 여기 와 있는 공주만 늙은 갈보 모동주와 바뀌어 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모조리 여기 있는 것이다. 공주의 거친 태도는 모동주
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처럼 음흉하고 악랄하지 못한 데
다가 젊고 아름다운 점에 있어서는 더욱 뛰어난 편이었다.
위소보는 이렇게 바뀌어진 것이 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지금쯤
자기를 모시고 있는 것이 공주가 아니고 그녀의 어머니였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어쩌면 나중에 자기 역시 노황야처럼 오대산으
로 출가하여서 화상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약 화상이 되더라
도 반드시 일곱 명의 마누라는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여인들이 겸연쩍어하는 빛을 띠고 있는 것을 보고 모두들 그날 밤
의 광경을 떠올리는 것임을 알았다.
(그날 밤 어둠 속에서 나는 마구 날뛰어서 누가 누구인지 분간도 하지
못했다. 아가와 전 누나의 뱃속에 나의 아기가 들어 있으니 두 사람은
드러난 셈인데 또 누구를 건드렸는지 확실히는 모르겠구나. 천천히 알
아내야지.)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전 누나, 공주, 아가, 그대들 세 사람의 뱃속에는 이미 나의 아기가
들어 있는데 또 누구의 뱃속에 나의 아기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구려.]
그 말이 떨어지자 방이 등 네 여인의 얼굴은 더욱더 붉어졌다. 목검병
은 재빨리 말했다.
[나는 없어요, 나는 없어요.]
증유는 위소보의 눈초리가 자기에게 돌아오자 눈을 곱게 흘기며 말했
다.
[없어요.]
위소보는 쌍아를 보며 말했다.
[쌍아, 우리는 반드시 대성공을 했겠지?]
쌍아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한 모퉁이로 몸을 숨기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위소보는 방이에게 웃으며 말했다.
[어떠시오? 그대가 여춘원에 왔을 때 뱃속에 베개를 넣어서 잔뜩 불려
놓은 것을 보면 반드시 선견지명이 있었을 것이오.]
방이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킥, 하고 웃으며 혀를 찼다.
[죽일 태감 같으니, 내 그대와....어찌 그런 짓을....]
목검병은 말했다.
[그래요. 사저, 증 언니, 쌍아 자매, 나, 우리 네 사람은 그대와 천지
신명에게 알리는 혼례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어째서 애가 생기겠어요?
소보, 그대는 나빠요. 그대는 왜 전 언니와 공주, 그리고 아가 언니와
혼례를 올린 것을 나에게 말하지 않고, 나에게 국수도 먹여주지 않았느
냔 말이에요.]
목검병은 사람들이 혼례를 올려야 아기가 생기는 줄 알고 있는 듯했
다. 사람들은 그녀가 너무도 천진스럽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는 웃음소
리를 내었다. 방이는 팔을 뻗쳐 그녀의 허리를 얼싸안고 말했다.
[소 자매, 그렇다면 그대가 오늘 밤에 그와 천지신명에게 절을 하고 부
부가 되도록 해요.]
第125章 무인도에서의 신혼생활
목검병은 말했다.
[안 돼요. 이 황량한 섬에는 꽃가마가 없지 않아요? 나는 새색시가 될
사람이 붉은 옷을 입고 봉관(鳳冠)을 쓴 것을 보았는데 우리들은 그런
것들도 없잖아요.]
소전은 웃었다.
[간단하게 해도 상관은 없어. 우리들이 가서 꽃을 꺾어서 꽃으로 족두
리를 만들면 그것이 바로 봉관이 되는 것이지.]
위소보는 그녀들이 농담을 하는 것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건드린 여인은 또 누가 있을까? 또 누가 나의 애를 뱄을까? 아가
일까? 나는 그녀를 안고 왔다갔다했으며, 후에 그녀를 의자 위에 앉히
기는 했지만, 침대 위로 안고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여자들이
너무나 많아 나는 멍청하게 그녀를 안고 침대 위로 올라갔는지도 모른
다. 만약 그녀의 뱃속에 나의 아기가 있다면 그 작은 녀석은 장래 몽고
의 왕자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쿠, 야단났다. 혹시 늙은 갈보일
까? 만약 그녀라면 귀신수 가족은 내 아들을 때려 죽인 셈이 되는구
나.)
이때 목검병이 입을 열었다.
[설사 이곳에서 혼례를 올린다 하더라도 방 사저가 먼저 천지교배를 해
야 돼요.]
방이는 말했다.
[아니야, 그대는 공주마마이시니 당연히 그대가 먼저 천지교배를 해야
지.]
목검병은 말했다.
[우리는 나라가 망한 사람인데 무슨 공주를 따져요?]
방이는 웃었다.
[그렇다면 쌍아 누이가 그와 먼저 천지교배를 해야겠지. 그대는 그를
따른 지 가장 오래되었고 생사를 함께하고 환난을 겪은 사이라 남과는
다른 데가 있지.]
쌍아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대가 그런 말을 한다면 나는 떠나겠어요.]
그녀는 문 입구를 향해 달려갔으나 방이에게 그만 얼싸안기고 말았다.
소전은 위소보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소보, 그대가 말하도록 해요.]
[천지교배를 하는 일은 천천히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우리는 내일
먼저 사부님을 장사지내야 하지 않소?]
여인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다 숙연해졌다. 이 사람이 이토록 사부를
존중하고 도의를 지켜 이와 같이 예의와 의리를 고루 갖춘 말을 하리라
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다음 말은 다시 그의 본성
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대들 일곱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의 다정하고 훌륭한 마누라들이니
모두들 선후와 크고 작은 것을 따지지 않도록 하시오. 이후 매일 밤 그
대들은 주사위를 던져 지고 이기는 것을 판가름해야 할 것이고 한 사람
이 크게 이기면 그녀가 나를 모시게 될 것이오.]
그는 품속에서 두 알의 주사위를 꺼내 훅 하고 불고 떼구르르 탁자 위
에 굴렸다. 공주는 쳇, 하고 말했다.
[그게 뭐가 좋다구, 지는 사람이 그대를 모시는 것이 옳아요.]
위소보는 웃었다.
[맞았소, 맞았소! 이것은 그야말로 주먹내기를 하는 것처럼 지게 된다
면 벌주를 한 잔 마셔야 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어느 누가 먼저 던지겠
소?]
이날 밤 황량한 섬의 집은 누추했으나 도처에 춘풍이 불었다. 주사위
를 던져 누가 이기고 졌는지는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후부터
위씨 집안의 여인들은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위소보는 남과 주사위를 던져 노름을 할 때 걸게 되는 것은 금은재보
이고 땄을 때 무척 즐거움을 느끼곤 했지만, 스스로 구덩이를 판다는
말이 있듯이 이제부터 그 자신은 여인들이 노름판에 거는 물건처럼 취
급당하게 되었고, 주사위 던지는 노름판에서 밀려난 셈이라 포근한 복
은 누릴 수 있었으나 도박을 하는 재미는 없어지고 말았다.
이튿날 여덟 사람은 해가 석 자나 높이 떠오른 후에 몸을 일으키게 되
었다. 위소보는 일곱 여인을 데리고 진근남의 시체를 묻었다. 황토가
사부의 몸을 덮을 때 그는 다시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을 했다. 일곱 여
인들 역시 일제히 꿇어엎드려서는 무덤 앞에서 절을 했다.
공주는 속으로 내키지 않았다. 자신은 당당한 대청나라의 공주인데 어
찌 반적에게 무릎을 끓고 큰절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금지옥엽의 몸이지만 위소보의 눈에는 가
장 지위가 낮을지도 모르며 친근감에 있어서도 쌍아만 못하고, 아름다
움에 있어서도 아가만 못하며, 무공에 있어서는 소전만 못하며 눈치 빠
름에 있어서는 방이만 못하고, 천진하고 순박함에 있어서는 목검병만
못하고, 온순하고 착한 데에 있어서는 증유만 못한 반면에, 한 가지라
도 뛰어난 점이 있다면 그저 우악스럽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에 만약 큰
절을 하지 않는다면 위소보는 이후 자기를 차별대우할 것 같았고, 매일
저녁 주사위를 던지게 되었을 때 주사위에다 어떤 수작을 부려 자기로
하여금 주사위를 던질 때 마다 크게 이기도록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억울하지만 역시 무릎을 꿇고 속으로 빌었다.
(반적아, 반적아. 이 공주 전하께서 너에게 큰절을 하지만 너는 예의
를 받을 만한 복을 받고 태어나지 않아 저승에 가서라도 좀더 고달픈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큰절을 한 후 몸을 일으키고 몸을 돌렸다. 방이는 갑자기 부
르짖었다.
[아이쿠, 배가 어디로 다 갔지요? 배가 어디로 갔나요?]
사람들은 그녀가 경황없이 부르짖는 말을 듣고 일제히 바다 쪽을 바라
보았다. 그 커다란 배가 정박해 있던 곳에서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
아 모두 깜짝 놀라 멀리까지 내다보게 되었는데, 오로지 보이는 것은
시퍼런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멀리 파란 하늘과 잇닿아 있었고 해변 위
로는 수십 마리의 해조들이 아래위로 날고 있는 것뿐이었다.
소전은 벼랑 위로 올라가 섬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동서남북 그 어디에
도 배의 종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방이는 산의 동굴 쪽으로 달려가
서 거두어들인 돛과 키, 그리고 배에 사용하는 기구들을 살펴보았다.
이미 그것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들은 한데 모여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속으로는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어젯밤 여덟 명은 웃고 떠드느라고 밤이 깊어서야 잠이 들었는데 당번
을 세워 밤새도록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었다. 그래서 사공들에
게 배의 기구들을 모조리 도적질당하고 사공들이 그 배를 타고 떠나 버
려 자기들은 이 외딴 섬에 갇혀 다시는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
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위소보는 시랑과 정극상이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복수를 하러 올 터인
데 어떻게 이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전과 공주, 아가가 아기를 낳게 된다면 이 또한 큰일인 것이다.
소전은 뭇사람을 위로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된 이상 서둘러 보았자 소용이 없는 일이니 우리 천천
히 방법을 강구해 보도록 해요.]
집 안으로 들어가자 이구동성으로 사공들을 욕했다. 한 시진 가량 욕을
하고 나니 이제는 듣기에 색다른 욕을 할 수가 없었다. 소전은 위소보
에게 말했다.
[이제는 청나라 군사가 다시 오는 것을 방비해야 해요. 소보, 그대는
어떻게 하실 참이에요?]
[청나라 병사가 다시 온다면 그 수가 적지 않을 것이니 우리가 모두 나
가 싸운다 하더라도 이길 수는 없소. 우리들로서는 숨는 수밖에 없으며
그저 그들이 단번에 우리들을 찾아내지 못하여 우리들이 이미 배를 타
고 이곳을 떠나간 줄로 여기기를 바랄 뿐이오.]
소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옳아요. 청나라 군사들은 우리의 배를 다른 사람이 훔쳐갔으
리라고는 결코 짐작하지 못할 거예요.]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만약 내가 시랑이라면 다시 오지 않을 것이오. 그는 우리들이 즉시 도
망을 쳤다고 여기지, 멍청하게 이곳에 머물러 그가 와서 잡아가기를 기
다리겠느냐고 생각할 것이오.]
공주는 말했다.
[그가 황제 오라버니에게 말하고 황제 오라버니가 이쪽으로 사람을 보
내 살펴본다면 우리가 어느 쪽으로 갔는지 알아보려 할 것이 아니에
요?]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랑은 황상에게 아뢰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어째서예요?]
[그가 아뢴다면 황상께서는 어째서 우리를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묻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는 싸움에 패했다는 사실을 실토하여야 하는
데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것이 아니겠소?]
소전은 웃었다.
[그 말이 옳아요. 소보는 벼슬을 하는 재간이 고명해요. 위는 속이되
아래는 속이지 못한다는 벼슬아치의 비밀을 알고 있군요.]
[전 누나가 만약에 벼슬아치가 된다면 큰 벼슬에 오르고 큰 재산을 모
을 수 있을 것이오.]
소전은 빙그레 웃으며 생각했다.
(신룡교의 그 사람들이 하는 행동과 관계(官界)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
겠지.)
위소보는 말했다.
[시랑이 그와 같은 말을 한다면 황상께서는 그가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
기게 될 것이오. 그것은 둘째치고 반드시 그를 내보내 군사를 이끌고
우리를 잡아오라고 할 것이오. 시랑은 이미 우리가 도망갔으리라고 생
각하고 있는데 어디에 가서 우리를 잡을 수 있겠소? 이것이야말로 그
자신이 귀찮은 일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잠자코 있는 것
이 크게 재물을 모으는 격이 될 것이오.]
여인들은 그의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모두
근심을 약간 떨쳐버릴 수가 있었다. 공주는 말했다.
[정극상이란 그 녀석은요? 그는 아무래도 가슴속의 울분을 삭히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아가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의 숨은 뜻을 알 수 있
었다. 그 말은 바로 꽃과 같고 옥과 같은 아가를 그가 어찌 포기할 수
있으며, 군사를 이끌고 와서 빼앗아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아가는 온
얼굴이 새빨져서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가 만약에 다시 온다면 나는.... 나는 자결하면 했지 결코 그를 따
라가지 않겠어요.]
그녀의 그 어조는 매우 굳건했다. 위소보는 크게 기뻤다. 아가는 자기
에 대해서 언제나 매정한 편이었다. 자기가 간계를 쓰고 훔치거나 강탈
하거나 유괴를 해 속여서야 겨우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이제 그와 같
은 말을 듣자 그야말로 열 척의 커다란 배를 얻은 것보다도 기뻐 자기
도 모르게 덥석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얼굴에다 쪽, 소리가 나도록
입맞춤을 했다.
[아가, 훌륭한 아가, 그는 감히 오지 못할 것이오. 그는 나에게 삼백팔
십만 냥의 은자를 빛지고 있소. 그의 간이 하늘처럼 크다고 하더라도
어찌 빚쟁이를 찾아올 수 있겠소?]
공주는 말했다.
[아이쿠, 정말 소름이 끼치는 장면이군! 그가 군사를 데리고 와서 그대
를 잡아 차용증서를 빼앗고는 다시 아가를 잡아간다면 어떻게 하겠어
요? 거기에다가 그대의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외할머니를 그대에게
팔아 모두 칠백육십만 냥의 은자를 내놓으라고 하고 그대의 손가락을
잘라서 그대에게 차용증서를 쓰자면 어떻게 할 거예요?]
위소보는 들으면 들을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정극상이 자신이 한 것처
럼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외할머니를 억지로 그에게 팔아넘긴다면
어머니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해도 아버지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터이
고 할머니는 더욱더 모르는데 자기도 모르는 두 사람을 팔아넘길 생각
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그만 화가 나서 날카롭게 외쳤다.
[그만둬요! 정극상이란 녀석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면 나는 다른 사람은
팔지 않겠지만 천하에서 가장 값나가는 황제의 누이동생을 그에게 팔겠
소. 뱃속의 아기마저도 덤으로 드리겠고 값을 천만 냥으로 하겠소. 그
렇게 된다면 그는 나에게 이백사십만 냥의 은자를 내주어야 할 것이니
이 장사는 꽤 해볼 만한 것이 아니겠소?]
공주는 그만 왁, 하니 울음을 터뜨리고 얼굴을 가린 채 그 자리를 뛰쳐
나갔다. 목검병이 재빨리 쫓아가 위소보는 절대로 그와 같은 뜻이 없는
데 그저 그녀를 놀라게 하려고 한 말이니 괴로워할 필요 없다고 달랬
다.
위소보는 신경질을 부리기는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소전의 지휘를 받아 섬 안의 밀림에 커다란 동굴을 하나 찾아서
깨끗이 청소하여 기거하는 장소로 삼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살던 집에는
한걸음도 들여놓지 않기로 했다. 시랑이나 정극상이 다시 이 섬에 오더
라도 인적이 없는 것을 보고 그들이 여기에서 도망갔으리라 여기고 다
시 자세한 수색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처음에는 모두들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태우며 밤낮없이 차례로 바다 쪽
을 쳐다보며 지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도록 청나라 조정과 대만에
서 온 배들은 고사하고 어선 한 척 보이지 않자 점차 마음을 놓게 되었
다. 시랑이 감히 일을 벌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정극
상이 탄 소정은 커다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되었으리라고 생각했
다.
여덟 명은 섬에서 고기도 잡고 짐승도 잡았다. 새를 쏘아 떨어뜨리고
과일을 따는 등 하루 종일 바쁘기는 했으나 무사태평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다행히 섬에는 새와 짐승들이 적지 않게 있었고 바다에는 물고
기와 새우들이 풍부했다.
여덟 명은 무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고기를 잡는 것은 무척이나 쉬
운 노릇이라 양식은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소전, 공주, 아가,
세 사람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 갔다. 방이와 쌍아는 짐승의 가죽
을 벗겨서 여덟 명의 겨울옷을 만들었으며 새로 태어날 갓난아기의 옷
들도 하나하나 장만했다.
어느 날 갑자기 큰눈이 내렸다. 하룻밤 사이에 온 섬은 하얀 눈으로 뒤
덮혔다. 여덟 명은 이미 예상했던 터라 절였던 물고기와 짐승들의 고
기, 말린 과일 등을 동굴 안에 무척 풍족하게 저장하고 있었으며, 하루
같이 주고받는 이야기의 대상은 곧 세상에 태어날 아기들에 관한 것이
었다.
눈은 멈추었으나 북풍이 심하게 몰아치는 어느 날 밤 찬바람이 끊임없
이 산의 동굴 판자문으로 스며들었다. 쌍아는 모닥불에 마른 나무를 더
집어넣고 위소보는 주사위를 꺼내서 여인들에게 주사위를 던지도록 했
다. 다섯 여인들이 던졌는데 목검병이 던진 점수가 삼 점으로 가장 적
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녀가 지게 될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아 증유
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검병 누이가 졌어. 나는 던질 필요도 없게 되었네.]
목검병이 웃으며 말했다.
[빨리 던져, 빨리 던져요! 어쩌면 그대는 이 점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증유는 주사위를 손에 들고 위소보의 행동을 흉내내어 손바닥 위의 두
알 주사위에 김을 불어넣은 후 주사위를 던지려고 했다.
이때 한차례의 북풍이 휘몰아쳤는데 은연중 바람소리 가운데 사람의 소
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대뜸 안색이 변했다. 소전은 이때
이미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그 소리를 듣고 갑자기 일어나 앉았다. 여
덟 명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삽시간에 사람들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시고 말았다.
목검병은 나직이 부르짖으며 머리를 방이의 품속에 파묻었다. 잠시 후
바람소리 가운데 엄청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매우 똑똑히
들렸는데 그 부르짖는 소리는 다음과 같았다.
[소계자, 소계자.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소현자가 여간 걱정하지않는
단다!]
위소보는 펄쩍 뛰어 일어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소현자가 나를 찾아왔다.]
공주는 말했다.
[소현자가 누구예 요?]
[바로.... 바로....]
소현자란 이름은 바로 강희를 뜻하는 것임은 그 혼자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으며 강희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을 터인데, 갑자기 그 누가 부르짖을뿐 아니라 그
소리가 그토록 우렁찬 것을 볼 때 어쩌면 강희가 직접 찾아나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소보는 부들부들 떨며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강희가 죽어
서 그의 귀신이 통흘도까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삽시
간에 그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을 듬뿍 담고 동굴에서 밖으로 달려나오
며 부르짖었다.
[소현자, 소현자, 나를 찾는 것이야? 소계자는 여기에 있다!]
그 소리는 다시 울려퍼졌다.
[소계자, 소계자,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소현자는 너를 너무나 걱정하
고 있단다.]
그 목소리는 엄청나게 커서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 같지 않고 수
백 수천 명이 일제히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수백 수천 명이 함께
외친다면 그렇게 동시에 울려퍼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한 사람이 부
르짖는다면 아무리 내공이 고강하다 하더라도 그토록 천둥소리같이 크
게 들릴 수가 없는 노릇이니 반드시 강희의 귀신이 부르는 소리라고 생
각되었다.
위소보는 괴롭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그만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소현자가 나에 대한 의리가 너무도 깊어서 죽은 후에도 귀신이 되어 찾
아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평소에 귀신을 매우 두려워했으나 이때는 어떻게 하더라도 소현자
의 귀신과 한번 만나 보고 싶어 즉시 줄달음쳐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
려가며 부르짖었다.
[소현자, 가지 마라. 소계자가 여기 있다.]
온 땅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아주 미끄러웠다. 그래서 그는
몇 번 곤두박질쳤지만 즉시 일어나서 달려갔다.
산 모퉁이를 돌자 모래펄에 화광이 여기저기서 번지고 있었는데 마치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을 연상시켰다. 그것은 바로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등롱과 횃불을 들고 정연하게 줄을 서 있는 광경이 아닌가!
위소보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아이쿠!]
그는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사람들 틈에서 한 사람이 달려나오며
부르짖었다.
[위 도통, 이제야 그대를 찾게 되었군.]
위소보는 두어 걸음 앞으로 내딛었으나 다음의 정세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종적이 상대방에게 잡힌 이상 상대방의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수색을 벌인다면 이 조그만 섬 통흘도에서는 숨
을 수가 없으리라. 그 사람의 음성을 들어 보니 매우 귀에 익숙하였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사람은 부르짖었다.
[위 도통, 모두들 그대를 그리워했답니다. 천지신명께 감사드립니다.
끝내 그대를 찾아낼 수 있었군요.]
그 목소리에는 기뻐하는 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사람은 손의 횃불
을 높이 쳐들고서 재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는데 가까이 다가온
후에 보니 그는 바로 왕진보가 아닌가!
위소보 역시 옛 친구와 만나니 기뻤다. 그날 북경을 빠져나온 들에서
왕진보는 성지를 받들어 자기를 잡으러 왔지만 일부러 못본척했으며 목
숨을 걸고 도와준 것은 그야말로 의리가 깊은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오늘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비록 위험하지만 상의할 여지
는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웃으며 말했다.
[왕 셋째 형, 그대의 계책은 정말 절묘하구려. 결국에는 나를 속여서
나서게 했구려.]
왕진보는 횃불을 던져 버리고 허리를 굽혔다.
[속하가 어찌 기만할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실로 도통께서 섬에 계시리
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위소보는 웃었다.
[이것은 황상께서 친히 전수하신 금낭모계가 아니오?]
[그날 황상께서는 도통께서 해외로 숨으셨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속하에
게 세 척의 해선을 거느리고 찾아보라는 분부를 내리셨지요. 그리하여
성지를 받들고서 크고 작은 섬을 하나하나 차례로 찾아보던 중입니다.
섬에 올라 바로 황상의 성지를 받들어 이같이 외쳤던 것이랍니다.]
이때 쌍아와 소전 등이 모두 다 달려와 위소보의 등뒤에 서게 되었다.
잠시 후에 방이, 공주, 아가 세 사람도 도달하였다. 위소보는 고개를
돌리고 공주에게 말했다.
[그대는 황제 오라버니에게 가니 정말 기쁘겠구려. 그는 끝내 우리들을
찾아내었소.]
왕진보는 공주를 알아보고는 엎드려 절을 했다. 공주는 말했다.
[황상께서는 그대를 보내 우리들을 북경으로 사로잡아 오라고 하셨나
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황상께서는 그저 소장에게 바다로 나서서 위 도
통대인을 찾아보라고 명하셨으며, 공주께서 여기에 계신지는 전혀 모르
고 계십니다.]
공주는 고개를 숙이고 자기의 불룩한 배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왕진보는 위소보에게 말했다.
[속하는 사 개월 전에 바다에 나섰으며 이미 팔십여 곳이나 되는 작은
섬들에 올라서는 소리소리 외치며 찾았는데 오늘에서야 도통과 만나게
되었으니 실로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나는 큰 죄를 저지른 사람으로서 이미 그대의 윗사람은 아니오. 도통
이니 속하니 하는 칭호는 그만두도록 합시다.]
[황상의 뜻은 도통께서 성지를 읽어 보시면 자연히 아시게 될 것입니
다.]
그는 몸을 돌려 사람들을 향해 손짓을 하더니 말했다.
[온(溫) 공공(公公), 이리 오십시오.]
사람들 틈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는 태감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
데 바로 위소보가 잘 아는 사람으로서 서재에서 일을 보는 온유방(溫有
方)이라는 태감이었다. 그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더니 낭랑히 외쳤다.
[성지요.]
온유방은 위소보가 처음으로 궁 안에 들어갔을 때 노름 친구이기도 했
으며, 주사위를 던질 때 수작을 부릴 줄 모르는 '봉'이기도 했다. 따라
서 이미 그는 위소보에게 얼마나 많은 은자를 빛졌는지 모르는 형편이
었다. 위소보가 크게 출세를 한 후에 위소보는 그를 볼 때마다 언제나
팔십 냥이나 백 냥의 은자를 상으로 내리곤 했다.
위소보는 성지라고 부르짖는 소리를 듣자 즉시 무릎을 꿇었다.
온유방은 말했다.
[이것은 밀지이니 다른 사람들은 물러서시오.]
왕진보는 그 말을 듣자 멀찌감치 물러섰다. 소전 등도 따라서 물러섰
다. 공주는 말했다.
[황제 오라버니의 성지는 저 역시 들을 수 없는 것인가?]
온유방은 말했다.
[들을 수 없소. 황상께서 분부하셨소이다. 이것은 밀지로 그저 위소보
한 사람에게만 알리는 것이오. 만약에 한 마디라도 누설하면 소신의 온
가족이 멸족을 당하게 될 것이오.]
공주는 싸늘히 코웃음치더니 말했다.
[그렇게 무섭다니, 그렇다면 그대의 온 가족이 몰살당하도록 하지.]
그러나 자기가 옆에 있으면 온유방이란 태감이 결코 성지를 읽지 않으
리란 것을 알고는 부득이 물러나고 말았다. 온유방은 몸에서 누런 봉투
를 꺼냈다. 위소보는 즉시 무릎을 굻었다.
[소신 위소보가 성지를 받드옵니다.]
[황상께서는 분부하셨소. 이번에는 그대가 서서 성지를 받되 무릎을 꿇
고 큰절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스스로 소신이라 칭하
지 않도록 분부하셨소.]
위소보는 크게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그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이오?]
온유방은 말했다.
[황상께서 그렇게 분부하셨소.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전하는 것이
오. 도대체 어떠한 이유인지는 그대가 황상을 뵙게 되면 여쭤 보도록
하시오.]
[황상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온유방은 한 누런 봉투를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대가 뜯어 보시오.]
위소보는 두 손으로 받아서 봉투를 뜯어 한 장의 누런 종이를 꺼냈다.
온유방은 왼손으로 등롱을 들고 누런 종이를 비췄다. 위소보는 종이 위
에 여섯 폭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첫번째의 화폭
에는 두 어린아이가 땅 위를 뒹굴면서 서로 비틀고 싸우고 있었는데 그
것은 바로 과거 강희와 자기가 씨름하듯 무공을 겨루는 광경이었다. 두
번째의 화폭은 어린애들이 오배를 잡으려 했고 오배가 강희에게 달려들
려고 하는데 위소보가 칼로 오배의 배를 찌르는 장면이었다. 세 번째의
장면에는 한 명의 소화상이 한 명의 노화상을 업고 도망을 치고 있었
고, 그 뒤에는 육칠 명의 남자들이 칼을 들고 뒤쫓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청량사에서 노황야를 구출하던 광경이었다. 네 번째의 화폭에는
백의 여승이 허공에서 덮쳐 들어 검을 뻗쳐 강희를 찔러 죽이려고 하는
데 위소보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대신 일검을 막는 광경이었다. 다섯
번째의 화폭에는 위소보가 자녕궁 침전에서 가짜 태후를 땅바닥에 눕혀
밟고 서서 침대 위의 진짜 태후를 부축해 일으키는 광경이었다. 여섯
번째 화폭에는 위소보와 나찰국의 여자, 몽고의 왕자, 늙은 라마가 일
제히 한 늙은 장군의 땋은 머리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는데 그 장군의
옷차림으로 미루어 볼 때 바로 평서왕 오삼계였다. 이것은 위소보가 계
책으로 오삼계의 연맹군을 흩어지게 한 것을 이야기하는 그림이었다.
강희는 뛰어난 그림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이 여섯 폭의 화폭은 정말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었다. 다만 강희는 오삼계와 갈이단 왕자, 상결
라마, 소비아 공주 네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모습들은
닮지 않았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슷하게 그려져 있었다. 더
욱이 위소보의 짓궂은 모습은 더없이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여섯 폭의 그림에는 글은 한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위소보는 물론
이것이 자기가 세운 여섯 가지의 큰 공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
다. 강희와 장난삼아 무공을 겨룬 것은 공로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강
희는 마음속으로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룡교를
폭격했던 일, 가짜 태후를 잡았던 일, 오응웅을 잡았던 공로는 이 일들
과 비교해 볼 때 말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다.
위소보는 그와 같은 여섯 폭의 그림을 보고는 그만 멍해져서는 눈물을
흘렸다.
(그가 이토록 많은 시간을 허비해 가면서 이러한 여섯 폭의 그림을 그
리고 나의 공로를 기억하고 있다니, 이것은 나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온유방은 한참 동안 기다리더니 말했다.
[그대는 똑똑히 보셨소?]
[그렇소.]
온유방은 두 번째의 봉투를 뜯고는 말했다.
[황상의 밀지를 선포하겠소.]
그는 한 장의 종이를 꺼내더니 읽어내려갔다.
[소계자, 제기랄! 그대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무척 그대가 그립구나.
그런데 네 녀석은 정도 없고 의리도 없이 나를 잊었단 말이냐?]
위소보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도 잊지 않았지요. 정말 잊지 않았소이다.]
중국에서 삼황오제(三皇五帝) 이래로 황제의 성지 중에 제기랄, 이라는
상스러운 말을 쓰고 황제 스스로 나라고 칭한 예는 아무래도 강희의 이
밀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온유방은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
시 읽었다.
[그대는 나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의 사부를 죽이려 하지 않았으며 다
시 건녕 공주를 데리고 도망쳤다. 제기랄, 그대의 이와 같은 행동은 나
를 그대의 큰처남으로 만들자는 수작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의 공
로는 매우 크고 또한 나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니 어떤 죄를 지었다 하
더라도 나는 이미 모든 걸 용서했다. 내가 곧 혼례를 올리게 되었는데
그대가 와서 국수를 먹어 주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실로 즐겁지 못한 일
이로다. 내 그대에게 말하는데 그대는 순순히 투항하여 즉시 북경으로
오게나. 나는 이미 그대를 위해 달리 한 채의 백작부를 지어 놓고 있는
데 옛날 것보다 훨씬 크니라.]
위소보는 큰소리로 말했다.
[좋지, 내 즉시 국수를 먹으러 가리다.]
온유방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약속은 미리 해두기로 하세. 이후부터 그대가 다시 나의 말을 듣
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그대의 목을 자를 것이네. 그러나 그대는 내가
그대를 속여 북경으로 오라고 해놓고서 다시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게. 그대의 진씨 성을 가진 사부는 이미 죽었으며, 천지회도 이미 그
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졌으니 그대는 조금이라도 힘을 써서 천지회
를 깨끗이 없애 주게. 그러면 내 그대를 다시 파견하여 오삼계를 공격
하도록 하겠네. 그리고 건녕 공주를 그대에게 내려 마누라가 되도록 하
겠네. 이후에는 공이나 왕에 봉하여 벼슬이 오르고 재물을 모을 수 있
도록 할 테니 그야말로 그대가 즐거워하게 될 것이네. 소현자는 그대의
절친한 친구이고 그대의 사부이며 오생어탕으로서 한 번 한 말은 무슨
말을 타고 쫓아가도 뒤쫓아갈 수 없는 노릇이니 그대는 빨리빨리 돌아
오도록 하게나.]
온유방은 밀지를 다 읽고 물었다.
[그대는 모두 알아들으셨소?]
[그렇소. 모두 다 알아들었소.]
온유방은 밀지를 등불에 갖다 대어 초에다 불을 당기고 그 종이쪽지를
태워 버렸다.
위소보는 그 한 장의 밀지가 불에 타 불꽃을 날리다가 점차 재가 되는
모양을 지켜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쳐들게 되었다. 그는 몸을
구부린 채 그 떨어진 한 무더기의 재를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온유방은
온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새삼스럽게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위 대인, 황상의 그대에 대한 총애는 그야말로 더 뭐라고 말할 수 없
을 정도입니다. 소인을 그대가 이끌어 주셔야겠습니다.]
위소보는 침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했다.
(그는 나에게 천지회를 멸망시키라고 하고 있다. 이 일은 형제들에게
미안한 노릇이다. 만약 내가 그와 같은 일을 한다면 오삼계, 풍제중과
다를 바 없이 대매국노가 될 것이며 자라 새끼 후레자식이 될 것이 아
니겠는가? 소현자, 그가 내리는 밥상은 먹기가 쉽지않다. 이번에 그는
나를 죽이지 않고 용서했지만 다음에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못박아 놓고
있다. 만약 내가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나를 어떻게 할까?)
[만약 내가 북경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황상께서는 어떻게 하라고 했
소? 그대들에게 나를 잡아오라고 했소, 아니면 죽이라고 했소?]
온유방은 얼굴 가득 의아한 빛을 띄우며 말했다.
[위 대인께서 성지를 받들지 않으시겠다구요? 그런.... 그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이건 정말로.... 아, 성지를 어긴다는
말은 입밖에 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그대는 나에게 솔직히 말하시오. 만약 내가 성지를 받들지 않는다면
그땐 어떻게 되겠소?]
온유방은 머리를 긁적긁적하더니 말했다.
[황상께서는 그저 소인에게 두 가지의 일을 처리하라고 분부하셨소이
다. 하나는 한 장의 밀지를 위 대인에게 전해주는 것이고, 다른 한 가
지는 위 대인이 첫번째 밀지를 본 이후 다시 다른 한 통의 밀지를 뜯어
서 읽어 주라는 것이었소. 이 밀지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소인은 전혀
알 수가 없소이다. 그 나머지의 일은 더욱더 모를 일이지요.]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고 왕진보에게 다가서서 물었다.
[왕 셋째 형, 그대는 나에게 북경으로 돌아가서 일을 하라는 것이오?
그러나....그러나 그대도 보시다시피 공주의 배가 저렇게 불러 있어 나
는 정말로 떠날 수가 없구려. 만약에 성지를 받들지않고 내가 북경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황상께서는 나를 어떻게 처리하라고 하시었소?]
그는 생각했다.
(먼저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 보도록 하자. 만약에 무
작정 죽이라고 했다면 나는 그저 투항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상대방과 흥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황상께서는 저에게 각처의 섬으로 가서 위 도통을 찾아보라고 하셨으
며, 찾은 이후에는 온 공공이 밀지를 낭독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
의 일은 물론 위 도통이 시키는 대로 따르도록 되어 있겠지요.]
위소보는 크게 기뼜다.
[황상께서는 그대에게 나를 잡으라거나 죽이라고 하지 않았소?]
왕진보는 재빨리 말했다.
[없습니다. 없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황상께서는 위 도통
을 매우 중시하고 계십니다. 위 도통이 북경으로 올라가신다면 반드시
크게 등용하여 상서가 되지 않으면 대장군이 될 것입니다.]
[왕 셋째 형, 솔직히 말해서 황상께서 나를 북경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을 데리고 천지회를 멸망시키라는 것이오. 나는 천지회의
향주인데 어떻게 친구를 살해하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왕진보는 위인됨이 지극히 의리가 있었다. 특히 위소보의 일에 대해서
도 그는 이미 잘 알고 있는지라 그가 그와 같이 말을 하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벼슬이 오르고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 친구를 팔아먹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위소보는 다시 말
했다.
[황상께서는 나에게 태산 같은 은혜를 내리셨지만 이번에 내리신 분부
만큼은 나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가 없소. 나는 감히 황상의 얼굴을 대
할 수가 없어 부득이 내세에서 소나 말이 되어 황상의 커다란 은혜에
보답할 수밖에 없구려. 만약 황상께서 외로워하시면 그대가 나의 난처
한 점을 변명해 주시구려. 본래 충성과 의리는 골고루 갖출 수 없는 것
이고 연극 무대에서는 마땅히 자살하여 주군에게 보답하는 것이 아닙니
까? 목을 자르는 것은 아프기 이를 데 없지만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어
진충보국할 수밖에 없소이다.]
왕진보는 자기가 위소보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 자기가 만약 위
소보같이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면 역시 자살하는 길 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군황이 자기를 알아준 은혜에 보답하고 친구의 의
리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는 급히 권했다.
[위 도통, 그와 같은 하책을 쓰시면 안 됩니다. 이에 대한 대책을 천천
히 강구해 보도록하지요. 속하가 그와같은 도통의 고충을 황상께 아뢰
겠습니다. 장 제독, 조 총병, 손 부장 등 몇 분은 이 몇 달 동안 약간
의 공을 세워 황상의 주시를 받고 계십니다. 모두들 앞길을 내던지고
마는 한이 있더라도 위 도통을 위해서 크게 상주를 올리고 사정을 해보
겠습니다.]
위소보는 그가 아주 다급해져서 황급히 소리치는 양을 보고서는 속으로
우습게 생각했다.
(이 위소보로 하여금 자살하게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자살은커녕 나는 내 새끼손가락 하나도 잘라 내지 못하는 사람
이다. 더군다나 소현자는 나를 죽이고 싶으면 죽일 것이고 용서하고 싶
으면 용서할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주장이 있는 사람인데 그대들 몇
사람이 큰절을 몇 번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의리가 깊은 것을 보고 고마워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렇다면 수고스럽지만 왕 셋째 형이 황상께 여쭈어 주시구려. 위소보
가 정말 진퇴양난이어서 검으로 자결하려 하였는데 다행히 그대가 있어
서 구해 주었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고 말이오.]
[예, 예!]
그는 속으로 온 태감이 바로 옆에 있고 모든 광경을 목격했는데 그토록
기군망상의 죄를 짓는다면 대번에 들통이 나리란 생각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그만 난처한 빛을 띠게 되었다. 위소보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왕 셋째 형, 정말로 여기지 마시오. 나는 농담을 한 것이외다. 황상은
위소보의 위인됨을 깊이 알고 계시오. 자살이란 무척 어려운 노릇이 아
니겠소? 그대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아뢰도록 하시오.]
왕진보는 그제서야 안심을 했다.
[우리는 할말을 다 했소. 왕 셋째 형, 형제는 이 황량한 섬에서 오랫동
안 도박을 하지 못했는데 실로 따분해 하던 참이었소. 우리 주사위를
한두 번 던져 보는 것이 어떻겠소?]
왕진보는 크게 기뻐했다. 그는 노름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 좋아하는 정
도가 결코 위소보에 못지않았다. 상대가 없을 때에는 종종 자기의 왼손
과 오른손이 서로 주사위를 던져서 노름을 할 정도였다. 즉시 그는 연
신 좋다는 말을 하고 급히 수하의 병사들로 하여금 한 조각의 평평하고
커다란 바위를 옮겨 오도록 하고 여섯 명의 병사에게 등롱을 높이 쳐들
고 옆에서 비추도록 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위소보와 도박을 하게
되었다.
얼마 후 은유방과 및 명의 참장, 유격들도 주사위를 던지는 노름에 가
담하게 되어, 그 커다란 바위의 주위에는 점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목검병은 그 광경을 보고 많은 의혹을 느낀 듯 살짝 방이에게 물었다.
[사저, 그들은 왜 주사위를 던지죠? 설마 진 사람들이 바로.... 바
로....하지만 그들은 모두 남자가 아니에요?]
방이는 후훗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진 사람이 그대를 시중들게 될걸?]
목검병은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라 손을 뻗쳐 방
이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으며 두 여인은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 깔깔
거렸다.
도박판은 날이 밝아질 무렵이 되어서야 끝났다. 위소보의 앞에는 은이
세 무더기나 쌓이게 되었다. 첫째로 재수가 좋았고, 둘째로는 크게 수
작을 부려 관병들 열 명 가운데 아흡 명이 돈을 잃은 것이다. 위소보는
신이 나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니 공주, 아가, 목검병 세 여인은
바위에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고 소전, 방이, 쌍아, 증유 네 사람은
게슴츠레한 눈동자를 억지로 버티면서 옆에서 모시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는 불현듯 미안한 생각이 들어 앞의 세 무더기의 은자를 밀며 말했
다.
[왕 셋째 형, 이 은자는 그대가 대신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시
오. 여러분들이 이 황량한 섬에 오셨는데 뭐 대접할 것도 없어 실로 미
안하기 짝이 없소.]
관병들은 노름에 져서 얼굴이 흙빛이 되어 있었는데 그 말을 듣자 대
뜸 우뢰와 같이 환호성을 질러대며 일제히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왕진
보는 관병들에게 소정을 저어 배로 돌아가 배에 있는 쌀, 돼지고기, 양
고기, 맛좋은 술, 약, 젓가락, 탁자, 의자, 솥, 냄비, 식칼 등의 물건
을 소정에 가득 실어 섬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옮기도록 하였다. 그는
관병들을 지휘하여 숲속에다가 몇 칸의 커다란 초가집을 짓도록 했다.
사람이 많으니 일하기가 쉬워 몇백 명의 관병들이 힘을 써서 손을 움직
이자 수일이 지나지 않아 통흘도에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졌다.
그제서야 그는 위소보와 작별을 하고 떠났다.
온유방은 떠날 때 이 섬 이름이 통흘도란 것을 알고는 연신 발을 구르
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곳에서 노름을 하며 신나게 살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는 것이었다.
십여 일이 지나자 아가가 먼저 아들을 낳았고, 이튿날 소전이 아들을
낳았다. 공주는 한 달 남짓 지나서 딸을 낳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들을 낳았는데 자기만 딸을 낳자 화가 나서 며칠 동안 울었다. 위소
보는 그녀를 위로했다. 자기는 딸을 좋아하지 아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는 말을 하자 그녀는 비로소 웃었다.
세 명의 갓난아기에게 일곱 명의 어머니가 딸린 셈이었다. 모두들 경험
이 없었으므로 바쁘게 돌아가자니까 우스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곤 했
다. 그러나 세 갓난아기는 퍽이나 건강하고 활발했다. 여인들은 위소보
에게 아들과 딸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위소보는 웃었다.
[나는 눈뜬 장님이고 무식쟁이인데 어떻게 아들과 딸에게 이름을 지어
줄 수 있겠소. 매우 난처한 노릇이군. 우리 주사위를 던져 결과가 나왔
을 때 그 결과로써 그 아이의 이름을 짓도록 합시다.]
즉시 그는 두 알의 주사위를 들고 입으로 중얼거렸다.
[도박의 신과 보살께서는 보호하셔서 이 세 명의 아기에게 듣기좋은 이
름을 붙여 주시옵소서. 첫번째.]
그는 주사위를 던졌다. 한 알은 육 점이고 한 알은 오 점으로 바로 호
두(虎頭)였다.
[큰아기의 이름은 근사하군. 위호두라고 부르도록 하지.]
두 번째 주사위에서는 일 점과 육 점으로 동추(銅鎚)라는 결과가 나와
둘째는 위동추라고 부르게 되었다.
세 번째 던졌을 때 첫째 주사위는 데구루루 굴러서 이 점을 냈고, 두
번째 주사위는 데구루루 굴러 멈추지 않고 맴돌더니 똑같이이 점이 되
어 걸상의 뜻이 되는 판등(板登)이 나왔다. 위소보는 어리둥절해 하더
니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우리 큰딸의 이름은 상당히 이상하게 되었군. 위판등이라고 해야겠는
데?]
공주는 노해 말했다.
[듣기 싫어요. 훌륭한 규수를 어찌 판등, 판등, 하고 부른단 말이에요?
빨리 다시 한번 주사위를 던져 봐요.]
위소보는 말했다.
[노름의 신과 부처님께서 취하신 이름인데 어째서 함부로 고친단 말이
오.]
그는 여자 아기를 안고 그녀의 뺨에 쪽, 하고 입맞춤을 하고는 웃었다.
[위판등, 이 귀여운 것아! 이름이 무척 아름답구나.]
공주는 노해 부르짖었다.
[안 돼요, 안 돼요! 판등이라고는 부를 수 없어요. 이 애는 내가 낳은
것이에요. 그렇게 듣기 싫은 이름을 붙일 수는 없어요.]
위소보는 말했다.
[흥! 애는 당신이 낳았지만 혼자서 낳을 수 있었겠소?]
공주는 주사위를 빼앗아 들고 말했다.
[내가 던지겠어요. 던져서 결과가 나오면 그 이름을 붙이겠어요.]
[좋소, 그러나 이번에는 억지를 쓰지 마시오. 만약 호두나 동추가 나오
면 어떻게 할 것이오?]
[애 오라비들처럼 역시 호두나 동추로 하면 되죠!]
그녀는 주사위를 손바닥에서 끊임없이 흔들더니 말했다.
[노름신과 보살님! 우리 딸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의 이 형편없는 주사위를 깨뜨리고 말겠소이다.]
그녀는 주사위를 던졌다. 두 알의 주사위는 구르고 굴러 멈췄는데 천하
에 이처럼 공교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놀랍게도 다시 이점이 나와
판등이 됐다. 공주는 순간 입이 딱 벌어지고 두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왁,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놀랍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했으며
우습기도 했다. 소전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누이, 서둘지 말아요. 두 번이나 반복되니 쌍쌍이 아니요? 그러니 딸
을 위쌍쌍이라고 부르면 어떻겠소?]
공주는 그제서야 노기 띤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기뻐하며 말했다.
[좋아요, 좋아요. 그 이름은 정말 재미있군요. 쌍아 누이와 비슷하네
요.]
쌍아 역시 매우 기뻐하며 위쌍쌍을 다정스레 품에 안았다. 목검병은 그
모양을 보고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쌍아 누이, 그토록 아기가 사랑스럽다면 빨리 젖을 줘야 할 것이 아니
오?]
쌍아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대가 먹이도록 해요.]
그녀는 목검병의 단추를 풀려고 했다. 목검병은 급히 도망쳤다. 여인들
은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통흘도에 세 명의 갓난아기가 태어나자 생활이 더욱 재미있었다. 왕진
보가 대량의 음식과 가구들을 갖다주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물건은 퐁
족한 편이라서 매일같이 고기잡이를 하거나 사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기분내키는 대로 신선한 고기나 새우, 그리고 짐승과 고기를 먹고
싶으면 사냥을 하곤 했다.
처음에는 모두들 강희가 위소보를 불렀는데도 가지 않았으니 천황의 위
엄으로 볼 때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어 혹시 후환이 있는 것이 아닌
가 하고 걱정을 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
자 점점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게 되었다.
이 해 여름 왕진보는 다시 커다란 배를 수척이나 이끌고 달려와서 성지
를 읽었다. 이번의 성지는 그야말로 사자나 육자로 짜맞춘 운문으로써
문장의 뜻이 매우 어려웠다. 위소보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 소
전이 옆에서 설명을 해줘야만 했다.
강희는 지난번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한 명의 참장
을 보내 군사와 병졸들을 데리고 섬에 주둔시켜 공주를 보호한다는 것
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 열여섯 명의 남자 종들과 열여덟 명의 하녀들,
여덟 명의 계집종들, 그리고 여러 가지의 기구와 음식들을 커다란 세
척의 배에 가득 싣고 왔다. 위소보는 속으로 걱정했다.
(소현자가 이토록 많은 물건을 내린 것은 이 통흘도에서 한평생 살라
는 뜻인가 보다.)
그는 활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섬에서 보내는 세월은 근심 걱정이 없었
고, 또한 일곱 명의 꽃과 같은 부인들과 함께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
다고 하겠으나 태평스러운 세월을 오랫동안 보내다 보니 재미가 없고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여춘원에서 남에게 땋은 머리를 잡혀서
얻어맞고 욕을 먹던 때가 시원하고 통쾌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이 해 12월에 강희는 조양동을 보내 성지를 반포했다. 황제는 차자(次
子) 윤잉(允芿)을 황태자로 삼았으며, 천하에 내사령을 내리고, 위소보
는 한 계급을 올려 이등 통흘백(二等通吃伯)에 봉한다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잔치를 벌여 조양동에게 술을 대접했다. 술자리에서 조양동은
오삼계를 토벌하는 전쟁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오삼계의 군사
들과 장수들이 사납고 무서워 조정의 군사들이 곳곳에서 지고 있다고
말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조 둘째 형, 그대는 돌아가서 황상께 알리시오. 나는 이곳의 생활이
답답하고 무료해서 죽을 지경이니 황상께서는 나를 보내 오삼계라는 늙
은 녀석을 치도록 해주십사 하고 여쭤 주시오.]
[황상께서는 이미 백작 나으리께서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며 나라를 사
랑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오 역적이 창궐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으리께서 알게 된다면 반드시 선봉으로 나서겠다는 청을 하리
라고 내다보고 계시지요. 그래서 황상께서는 '위소보가 오삼계를 치는
것은 관계없지만 그가 먼저 나를 위해 천지회를 멸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소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통흘도에서 고기나 잡고 자라나 잡
도록 하라는 말씀이 계셨소이다.]
위소보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조양동은 말했다.
[황상께서는 옛날 한나라 한광무(漢光武)가 젊었을 때에 엄자능(嚴子
陵)이라는 친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소이다. 한광무가 황제가 된 이
후 엄자능은 큰 벼슬을 마다하고 부춘강(富春江)에서 낚시질을 했다는
것이었소. 황상께서는 또 옛날 주무왕(周武王)의 대신인 강태공 역시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했다고도 했소. 한광무와 주무왕은 모두 옛날의
훌륭한 황제인데 이로 미루어 보아 훌륭한 황제에게는 커다란 벼슬을
마다하는 친구가 한 명 있고 이들은 모두 낚시질을 했다고 했소. 황상
께서는 황상 자신이 오생어탕이 되고자 하는데 만약 위 백작 나리께서
그를 위해 오징어나 고기를 낚시질하지 않는다면 황상 자신이 어찌 오
생어탕이 되겠느냐고 했소이다. 위 백작 나으리, 속하는 조야한 무인이
라 어째서 황상께서 백작 나으리를 이곳으로 보내 고기를 잡게 하는지
실로 알 수가 없소. 하지만 황상께서는 영명하기 이를 데 없으시니 아
마도 이 가운데는 반드시 큰 뜻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구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소. 그렇소.]
그는 강희가 자기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래도 자기
가 천지회를 멸하겠다고 응낙하지 않는다면 황제는 자기를 이곳에서 한
평생 고기나 낚도록 할 모양인 것 같았다. 오백 명이라는 관병들이 구
실은 공주를 보호한다고 하나 기실은 옥관이나 옥졸처럼 감시하머 자기
로 하여금 섬에서 한걸음도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
다.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글퍼져서 그만 술자리를 적당히 끝냈고,
술을 마신 후에 노름판도 벌이지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 찔끔찔끔 눈
물을 흘렸다. 일곱 명의 여인들은 위소보가 우는 것을 보고 놀람과 의
아함을 금치 못하고 모두 위로의 말을 했다. 위소보는 강희의 그와 같
은 말을 전했다. 공주는 화를 내며 말했다.
[맞아요. 황제 오라버니가 정말 그대의 관직을 올릴 생각이라면 삼등
백작에서 이등 백작으로 올려야 할 거예요. 그런데 이등 통흘백을 시키
는 이유가 어디 있으냔 말이에요. 우리 대청나라에는 소신백(昭信伯),
위이백(威吏伯), 아니면 양근백(襄勤伯), 승은백(承恩伯)이 있을 뿐이
에요. 그대는 본래 삼등 총용백으로 그대로 있는 게 더 좋았을 거예요.
그런데 통흘백이라는 석 자는 분명히 사람을 놀리는 것으로 오라버니는
조금도 나를 안중에 두지 않고 있어요.]
위소보는 말했다.
[통흘백은 상관이 없소. 이 통흘도라는 이름은 내가 스스로 지은 것이
니 황상만 탓할 수도 없는 일이오. 내가 통흘도의 이름을 지었으니 자
연히 통흘백이 된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통배백(通賠伯)보다는 훨씬
낫소. 전 누나, 그대가 어떻게 방법을 강구해서 우리 모두 중원으로 도
망치도록 합시다. 나는....나는 실로 어머니 생각에 견딜 수가 없구
려.]
소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일은 실로 처리하기 난처해요. 천천히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
어요.]
위소보는 찻잔을 던져 박살을 내며 부르짖었다.
[그대는 방법을 강구하려고 하지 않는군, 좋소. 앞으로 나 혼자서 살그
머니 뺑소니칠 테니 그때 가서 모두들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나는....
나는 차라리 여춘원으로 가서 술주전자를 드는 귀노가 될지언정, 제기
랄! 통흘백 노릇은 하지 않겠소. 이 노릇이야말로 정말로 사람을 답답
하게 만들어 죽을 지경인걸.]
소전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웃었다.
[소보, 서둘지 말아요. 언젠가 황상께서는 그대를 불러 어떤 일을 처리
하도록 할 거예요.]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몸을 일으키더니 깊이 읍을 하고 말했다.
[좋은 누나, 내가 그대에게 인사를 드리리라. 그런데 황상께서 나에게
어떤 일을 시킬 것인지 빨리 말씀을 해보시오. 그저 천지회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떤 일이라도 다 할 것이오.]
공주는 물었다.
[황제 오라버니가 만약 그대에게 요강을 닦거나 마구간의 구유통이나
씻도록 한다면 어떻게 하죠?]
[그것도 좋지. 하지만 매일같이 그대를 보내 내 대신 그 일을 하게 만
들 것이오.]
공주는 그가 신경질을 마구 내는 것을 보고 감히 더 말하지 못했다.
목검병은 말했다.
[전 언니, 그대는 빨리 말하세요. 소보는 정말 다급해서 어쩔 줄 모르
잖아요.]
소전은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무슨 일을 시킬는지 나 자신도 몰라. 그러나 황제의 마음을 헤아려 보
건대 언젠가는 그대를 북경으로 부르실 거예요. 그분이 그대에게 투항
하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바로 천지회를 멸하겠다고 응낙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죠. 만약에 그대가 응낙하지 않는다면 그는 조양동에게 말하신
대로 행할 거예요. 소보, 그대가 영웅호걸이 되고 친구의 의리를 돌보
려고 한다면 이런 고통쯤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해요. 한편으로 영웅호
걸이 되고자 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녀들이 십팔막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싶어한다면 그런 영웅호걸 노릇을 누구는 못해요?]
위소보는 생각해 보니 그 말에도 일리가 있는지라 몸을 일으키더니 웃
었다.
[내가 영웅이 되는 건 나중 일이고 생각난 김에 십팔막이라는 노래나
부르겠다.]
그는 노래를 불렀다.
[첫번째도 만지고 두 번째도 만져서 전 누나의 머리칼을 만졌노라.. ]
그는 손을 뻗쳐 소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모두들 히히덕 거리
는 가운데 조그만 풍파는 이로써 해소되고 말았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일년이 갔다. 위소보와 일곱 명의 여인들은
통홀도에서 잘 살고 있었다. 매년 12월이 되면 강희는 반드시 사람을
보내 물건들을 보냈다. 위소보에게는 수정으로 만든 주사위와 비취로
만든 패구, 여러 가지 금에다가 옥을 박은 도구들을 부지기수로 내렸
다. 다행히 통흘도에는 오백 명의 관병들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위소
보는 노름판의 상대가 없지는 않았다. 이 해에 손사극이 물건들을 가지
고 왔다. 위소보는 그의 모자에 흥보석이 박혀 있고 입고 있는 옷이 일
품 무관의 복장인 것을 보고 그가 제독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 재빨리
축하의 말을 했다.
[손 넷째 형, 그대의 벼슬이 오른 것을 축하합니다.]
손사극은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띄우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이 모두가 황상의 은혜이지요. 그리고 위 백작 나으리께서 이끌어 주
신 덕택입니다.]
그는 성지를 낭독했는데 조정에서 세 번왕을 평정했다는 것이었다. 즉
운남 오삼계와 광동 평남왕 상지신, 복건 정남왕 경정충을 차례로 평정
했다는 내용이었다. 강희가 논공행상을 하였는데 이등 통흘백 위소보는
대장수들을 초청하는 수훈을 세워 심히 가상하니 특별히 작위를 올려
일등 통흘백으로 삼고, 그의 장자 위호두를 운기위(雪騎尉)에 봉한다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황은에 감사하는 인사를 끝내고 강희가 내리는 여러가지의 물
건들을 거두어들였다. 그 가운데는 놀랍게도 대리석으로 만든 병풍이
있었다. 바로 과거 오삼계의 서재에 있던 것인데 오삼계의 세 가지 보
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가 하면 장용, 조양동, 왕진보, 손사극 등도
각기 많은 예물을 보내왔다.
이날 밤 연희석 자리에서 손사극은 오삼계를 평정했던 과정을 이야기했
다. 장용은 감숙성과 영하(寧夏) 일대에서 오삼계의 대군을 대파하여
수차 대공을 세웠기 때문에 지금은 일등 후작에 봉해셨을 뿐만 아니라
소전(小傳)에다가 태자태보를 겸하고 있어 관작은 이미 위소보보다 훨
씬 위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손사극은 장 후작 나리가 과거
귀신수에게 일 장을 얻어맞은 이후 시종 몸을 회복하지 못해 말을 탈
수 없고 또한 서 있을 수도 없어서 전투를 할 때 언제나 교자에 타고
대군을 지휘했다는 말을 했다. 위소보는 쯧쯧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교자를 드는 사람들도 용사여야만 되겠군. 그렇지 않다면 장 노형이
크게 돌격하라고 부르짖을 때 네 병의 가마꾼들이 겁에 질려 뒤로 도망
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야단이지 않겠소.]
손사극은 말했다.
[그렇지요. 장 후작 나리께서는 싸움에 임하였을 때 교자 뒤에 반드시
도부수(刀斧手)들을 따르게 했으며, 교자를 드는 사람들이 만약에 뒤로
달아나면 커다란 칼이나 도끼날로 내리찍게 했지요.]
손사극은 다시 조양동이 양평관(陽平關)을 빼앗고 한중(漢中)을 평정
했으며, 성도(成都)를 되찾고 곤명을 공격하는 등 공로가 무척 크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황상은 조양동을 용략장군(勇略將軍)에 봉하고 운
남성과 귀주성의 총독을 겸하도록 했고 거기다 병부상서의 칭호까지 내
리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진보와 그 자신 역시 각기 힘써 싸움에 임
했기 때문에 제독으로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그가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자기가 때맞추어 그
전쟁에 나서지 못하였던 것에 대해서 여간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 명의 훌륭한 친구들이 모두 다 큰 공을 세우고 대관에 봉해졌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손사극은 말했다.
[우리 몇몇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했죠. 이 몇 년 동안의 싸움은 그
야말로 매우 통쾌하게 싸운 것이 사실인데, 물을 마시면 그 근원을 생
각한다고 모두가 황상께서 알아주시는 은혜를 입게 된 것은 위 백작 나
으리께서 추천해 주신 덕분이란 것이지요. 만약에 위 백작 나으리께서
평서대원수가 되어 우리 네 사람을 데리고 오삼계를 공격했다면 그야말
로 파죽지세였겠지요. 조 둘째 형과 왕 셋째 형은 종종 언쟁을 벌이며
황상의 어전에 나가서 말씨름을 벌이기 때문에 장형까지도 그들을 어떻
게 해볼 수가 없었답니다. 황상께서는 몇 번이나 위 백작 나으리를 들
먹이며 그토록 시끄럽게 언쟁을 벌인다면 위 백작 나으리께 미안한 노
릇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면 그제서야 그들 두 사람은 언쟁을 그만두곤
했답니다.]
위소보는 웃었다.
[그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언쟁을 벌이는데 어째서 대장군이 된
후에도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는 것일까?]
손사극이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두 사람은 때때로 다투어 상주를 올려서 이 사람은 저
사람을 나쁘다고 하고 저 사람은 이 사람을 나쁘다고 하곤 하지요. 다
행히 황상께서 너그러운 아량으로 따지지 않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
다면 아마 두 사람 모두 다 처벌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삼계 그 늙은 녀석은 어떻게 되었소? 그대는 그의 땋은 머리카락을
잡고 욕을 하며 발길질을 하지 않았소?]
손사극은 고개를 저었다.
[그 늙은 녀석은 운수가 참 좋았죠....]
위소보는 놀라 물었다.
[아니, 그가 도망쳤단 말이오?]
손사극은 말했다.
[그렇지는 않소이다. 그는 곳곳에서 패전을 당하고 차지했던 땅을 잃어
더 이상 지탱해 낼 수 없자 죽기 전에 황제 노릇이나 한번 해보고 죽어
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마침내 황포(黃袍)를 입고 대보(大寶)에 올랐으며
형주를 도읍으로 정하였지요. 우리들은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말을 듣
고 더욱 신이 나서 쳐부수었고, 그는 몇 번 크게 패전을 당하자 놀라고
울화가 치민 끝에 그만 죽어 버리고 말았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랬었군. 그것이야말로 그 늙은 녀석이 복이 많은 셈이군.]
손사극은 말했다.
[오 역적이 죽은 후 그의 부하 장수들이 그의 손자 오세번(吳世藩)을
옹립하여 대위를 잇도록 했으며 곤명으로 올라갔지요. 조 둘째 형이 곤
명으로 공격해 들어가 오 역적의 대장인 하국상과 마보 일당을 모조리
잡아서 참수했지요. 그러자 오세번이 자살하여 천하는 태평하게 되었답
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곤명에는 한 가지 국보가 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려.]
[무슨 국보인가요? 속하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국보로서 천하 제일 미녀 진원원이외다.]
손사극은 웃었다.
[진원원 말이군요. 그러나 그녀의 행방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습니
다. 나중에 죽었는지 도망쳤는지 모르겠군요.]
[애석하군, 애석해.]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가가 내 마누라이니 진원원이야말로 진짜 내 장모님이 아닌가? 조
둘째 형이 그녀를 사로잡았다면 나의 장모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자연히 통흘도로 보내와 그녀와 아가 모녀가 해후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 모녀가 만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사위와 장모가 만나
는 것은 크게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비파를 퉁기며 원원곡(圓圓
曲), 방방가(方方歌)를 듣는 것은 좋으나 딸과 장모님을 한꺼번에 희롱
할 수도 없고, 사위가 장모님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침을 삼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연희가 파한 후 그는 내당으로 들어가 일곱 부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
다. 아가는 어머니의 행방을 모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릴 적부
터 구난에게 잡혀가 어머님 곁에 있지는 못했지만 모녀의 정은 있는지
라 슬픔을 금할 수 없었다.
위소보는 아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어디
로 가셨든지 백승도왕 호일지가 그 옆에서 한걸음도 떨어지지 않고 잘
모실 것이라는 말을 하고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가, 호형의 무공이 고강한 것을 그대도 친히 보았지? 그대의 어머니
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쉬운 노릇이오.]
아가 역시 생각해 보니 그런지라 찌푸렸던 미간을 폈다. 그런데 위소보
는 갑자기 탁자를 치며 부르짖었다.
[앗, 야단났다!]
아가는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우리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의 어머니에게는 위험이 없지만 나에게는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겠
소.]
아가는 의아하여 물었다.
[그대에게 무슨 위험이 생긴다는 거예요?]
위소보는 말했다.
[호형은 나와 여덟 번 큰절을 한 의형제가 아니겠소. 그런 그가 그대의
어머니와 얼싸안고 노닥거리면 그는 나의 장인 영감이 되는 것이 아니
겠소? 그렇다면 그야말로 배분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 아니냔 말이
오.]
아가는 쳇, 하고 눈을 흘겼다.
[호 백부님은 가장 점잖고 얌전한 사람이에요. 그대는 천하의 남자들이
모두 그대처럼 여자만 보면 얼싸안고 노닥거리는 줄 아세요?]
위소보는 웃었다.
[자, 자. 말이 나온 김에 우리 한번 얼싸안고 노닥거려 봅시다.]
그는 팔을 뻗쳐서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
위소보가 일등 통흘백이 된 후 섬의 요리사와 시녀, 그리고 하인은 말
할 것도 없고 계집종들마저도 수십 명이나 더 불어나게 되었다. 위호두
는 황상의 보필 속에서 운기위라는 작위를 받았다. 황량한 섬에서의 생
활이었지만 비단옷에 기름진 음식을 입고 먹을 수 있었으며 부귀영화를
한껏 누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너무나 편안하고 무료한 생활
이기도 했다.
위소보는 여러 가지 계책을 짜내어 사건을 일으키고 이상야릇한 짓을
하려고 했다. 사실 황당무계한 일들을 저지르지 않고는 세월을 보내기
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일곱 부인들은 하나같이 점잖
고, 밤낮없이 그를 엄하게 감시했다.
공주와 같이 일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 역시 그를 쫓아 말썽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이 일등 통홀백 나으리께서는 손발이 묶여진 꼴이 되어 크
게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손사극이 오삼계를 정벌하였을 때의 크고 작은 싸움터의 이야기를 돌이
켜볼 때 때로는 아슬아슬하기 이를 데 없었고 때로는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자신은 그 싸움에 가담할 수 없었고 또한 크게 솜씨를 드러
낼 수도 없었으니 실로 유감스럽기 짝이 없었다. 만약에 자신이 그 싸
움터에 있었다면 오삼계가 병들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반드시 방
법을 강구하여 오삼계를 사로잡아 수롱(水籠)에 잡아넣고 호남 형주에
서 시작하여 북경까지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켜 가며 압송을 하였으리
라. 그때 사람들에게 한 번 보는 데 오 전을 받고 또 그에게 침을 한
번 뱉는 데 은자 한 냥을 받되 어린이에게는 반으로 할인해 주고 미녀
에게는 아예 한 푼도 받지 않는다면, 천하의 백성들은 그 대매국노를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고 있으니 위소보는 그야말로 큰돈을 벌지 않았
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삼계의 난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이제 싸울
전쟁터는 없었다. 그러나 천하에는 싸우는 일 이외에도 재미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엔 자연히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게 마련이 아닌
가. 어쨌든지 먼저 이 통흘도에서 떠나야 한다. 그러나 일곱 아내들과
두 아들, 그리고 딸이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고 그의 뒤를 따르고 있으
니 그야말로 열 개의 커다란 돌멩이를 목에 걸고 있는 셈이라 그들과
함께 통흘도에서 몰래 떠난다는 것은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차라리 이 열 사람을 내버려 두고 자기 혼자 뺑소니칠까 보다 하
는 생각도 하였다. 손사극을 떠나보낸 이후 그는 매일같이 이러한 생각
을 하고 있었다. 때로는 바위 위에 앉아 바다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커
다란 거북이 등에 타고 거센 파도를 헤치며 기분좋게 중원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통쾌한 일일까 생각하는 것이었다.
때는 중추절이 가까워 오는 날인데 날씨는 여전히 더웠다. 위소보는 한
동안 낚시질을 한 이후 마음이 번거로워 바위 위에 기댄 채 몽롱히 잠
을 청하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말했다.
[위 백작 나으리께 아룁니다. 용왕께서 청하십니다!]
위소보는 크게 의아하여 정신을 가다듬고서 그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
보니 바다 위에서 한 마리의 커다란 거북이가 머리를 쳐들고서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동해의 용왕 어르신께서는 무척이나 적막하고 무료하시어 특별히 소장
을 보내시어 위 백작 나으리가 연희에 참석하실 수 있도록 모시고 오라
고 하셨습니다. 연회가 끝난 이후에는 한바탕 크게 노름판도 벌이신다
고 하십니다. 용왕께서는 산호와 수정을 내기에 거는데 육지에서 사용
되는 은표도 통용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을 듣고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말했다.
[참 잘되었군, 참 잘되었어. 이와 같이 훌륭한 이웃이 이토록 깍듯이
대접해 주시겠다니 그야 물론 상대를 해드려야지.]
큰 거북이는 말했다.
[수정궁에는 한 떼의 연극을 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들은 전문적으
로 군영회(窘英會), 정군산(定軍山), 종규가매, 백수탄(白水灘)
등의 연극을 한답니다. 그리고 이야기꾼이 있어서 대명영렬전, 수호지
같은 책을 이야기해 주기도 하지요. 그리고 무수한 가수들이 갖가지의
새로운 소조(小調)를 부르게 되는데 탄오경(嘆五更), 십팔막, 사계상사
(四季相思) 등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또한 용왕의 일곱 공주님
들은 하나같이 화용월태로서 오래 전부터 위 백작 나으리께서 풍류스럽
고도 영리하다는 소문을 듣고 흠모해 오던 참이어서 모두 다 한번 뵙기
를 청하고 계십니다.]
위소보는 그와 같은 말에 그만 가슴속이 근질근질해지는 것을 느끼며
연신 말했다.
[좋소, 좋아! 우리 이대로 갑시다.]
큰 거북이는 말했다.
[그렇다면 백작 나리께서는 바로 저의 등에 앉아 주십시오. 즉시 수정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위소보는 몸을 날려 커다란 거북이의 등에 올라앉았다. 그 큰 거북이는
파도를 헤치며 편안하게 수정궁으로 헤엄쳐 갔다. 동해의 용왕은 친히
궁 밖으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으며 그의 손을 잡고서는 용궁으로 이끌
었다. 남해의 용왕도 이미 와서 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즐거운 잔치
가 벌어지고 있을 때 다시 손님들이 잇따라 들이닥쳤다. 저팔계와 사오
정의 두 요정도 있었고, 장비(張飛), 이규(李逵), 우보(牛旱), 정요금
(程咬金) 등의 대장들도 있었으며, 주왕(紂王), 초패왕(楚覇王), 수양
제(隋煬帝), 명나라 정덕(正德) 등의 네 분 황제도 있었다. 이 네 분의
황제와 네 명의 장수, 그리고 한 마리의 돼지와 한 마리의 소, 두 마리
의 용, 네 명의 신마(神魔)는 하나같이 모두 옛날부터 지금까지 하늘
위에서나 땅 아래는 말할 것도 없고 바다 밑에서도 가장 멍청한 '봉'이
었다.
연회가 끝난 후에 노름판이 벌어졌는데 위소보가 전주가 되어 닥치는
대로 패를 거머쥐고 수작을 부렸다. 그리하여 매번 패를 뒤집어 놓고
보면 지존보(至尊寶)가 아니면 천일대(天一對)였다. 이렇게 되자 그는
마구 따기만 하여서 그 나머지 열두 명은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고 금은
재보를 모두 잃어 위소보의 앞에만 가득 쌓였다.
최후에 주왕이 사랑하던 여자 달기와 정덕 황제가 사랑하던 여자 이봉
저(李鳳姐), 저팔계의 무기와 장비의 장팔사모(丈八蛇矛)까지도 따게
되었다. 이규의 쌍도끼를 따게 되었을 때 이규는 화가 나서 그의 검디
검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냅다 호통을 질렀다.
[이 도둑 같은 자식아' 적당히 땄으면 그만둬야 할 게 아니냐? 남의 마
누라를 따가는 것은 고사하고 남의 밥 먹는 그릇까지도 따가려 하니,
너무도 의리없는 일이 아니냐?]
그는 대뜸 위소보의 가슴팍을 움켜잡고 항아리만한 주먹을 들어서 내리
쳤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주먹은 바로 위소보의 귓가를 내려쳤는
데 그 바람에 그의 귀가 멍멍해졌다.
위소보는 크게 비명을 지르며 두 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한 대의 낚싯
줄이 획, 하니 바닷속에 떠오르더니 빙글 돌아 낚싯바늘이 그의 뒷덜미
에 걸렸다. 이를 와락 잡아당기자 낚싯바늘이 그의 살속으로 파고들어
그 자신도 덩달아 펄쩍 뛰어 오르게 되었다. 삽시간에 이규, 장비, 용
왕 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깜짝 놀라깨어 보니 남가일몽이 아
닌가? 바로 이때 펑, 하는 커다란 소리가 바다 쪽에서 들려왔다.
위소보가 고개를 들고 바다를 바라보니 십여척의 큰배가 돛에 바람을
잔뜩 맞으며 섬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몸에 걸려 있던 낚싯바늘을 뿌리치려고 몸부림쳤으나 도
리어 낚싯바늘이 뒷덜미에 걸려 더욱 심한 통증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낚싯대를 등뒤에 질길 끌면서 냅다 도망을 쳤다. 정극상
그놈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빚을 갚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다. 빚을 갚으러 온 건 좋은 일이지만 빚쟁이 주제에 대포를 마구 쏘아
대며 기세등등한 모습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가 집 앞에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섬을 지키는 팽 참장이 숨을 헐떡
거리며 달려와 말했다.
[위....위 백작 나으리, 큰....큰일났습니다! 대만의 전선이 쳐들어왔
습니다.]
위소보가 물었다.
[네가 대만의 전선인지 어찌 아느냐?]
팽 참장이 말했다.
[소장이 조금 전에....조금 전에 천리경으로 보았는데 배....꼬리....
아니, 아닙니다. 뱃머리에도 해와 달이 하나씩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건 대만에 있는 정.. 정 역적의 휘호입니다. 만약 한 척에 오백 명씩
병사를 싣고 있다면 두 척에는 천 명, 세 척에는 천오백명....]
위소보는 그의 손에서 천리경을 받아 전선을 세어 보았다. 전함은 모두
열세 척이나 되었다. 뱃머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해와 달이 그려져
있는 깃발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서 군대를 이끌고 해안을 지키도록 해라! 적이 작은 배로 상륙하면
즉시 활을 쏘아라!]
팽 참장은 연신 예, 예, 대답하고 나서 재빨리 달려갔다. 이때 소전 등
은 모두 위소보의 고함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다가오는 전선에서
다시 대포소리가 들리자 공주가 말했다.
[아가 자매, 대만에 갈 때 호두(虎頭)도 함께 데려갈 건가요?]
아가는 발을 구르며 화를 냈다.
[지금 그런 농담이나 하고 있을 때예요?]
위소보는 화를 벌컥 내며 욕을 퍼부었다.
[저 미련한 공주나 쌍쌍(雙雙)을 데리고 대만에 가라고 해라....]
소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어? 어째서 포탄이 바다에 떨어졌는데도 물기둥이 치솟지 않을까?]
이때 대포소리가 다시 두 번 울렸다. 포구에는 화약 연기가 자욱했지만
포탄은 해안으로 날아오지도 않았고 바다에 떨어지지도 않았다. 위소보
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껄껄 크게 웃으며 말했다.
[저건 예포다. 우릴 난처하게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공주가 말했다.
[선례후병(先禮後兵)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위소보가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쌍쌍, 이 계집애는 어디 갔느냐? 볼기를 때려 줘야겠다.]
공주도 성을 내며 말했다.
[그 애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때린다는 거예요?]
[에미가 꼴보기 싫으니깐 새끼를 때릴 수밖에.]
마침내 배가 가까이 다가와서 천리경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배 위
엔 대만의 일월기(日月旗)가 아니라 대청의 황룡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위소보는 놀라움과 기쁨이 엇갈려 천리경을 소전에
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대가 좀 보시구료. 뭐가 뭔지 모르겠소.]
소전은 잠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건 대만의 수군이 아니라 대청의 수군입니다.]
위소보가 다시 천리경으로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 과연 대청의 수군이 틀림없소. 아야! 이게 무슨 짓이냐! 빌어
먹을, 누굴 죽이려 하느냐?]
뒤로 돌아다보니 아가 품에 안겨 있는 위호두가 낚싯대를 움켜잡고 끌
어당기고 있었다. 낚싯바늘이 위소보의 뒷덜미에 걸려 있었으니 자연히
아플 수밖에.... 그러자 아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얼른
낚싯바늘을 뽑아 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제가 사과드리겠으니 화내지 마세요.]
[녀석, 기특하기도 하지. 나이도 어린데 벌써 강태공의 기질이있다니!]
그러자 공주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지.]
이때 팽 참장이 허겁지겁 달려와 소리쳤다.
[위 백작 나으리, 배 위에 펄럭이는 대청의 깃발은 속임수일지도 모릅
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그렇다! 그러니 작은 배 한 척만 상륙시키고 나머지는 대기시켜라!]
팽 참장은 명령을 전달받고 돌아갔다. 공주가 말했다.
[필시 정극상 그놈이 대만의 군선에다 대청의 깃발을 꽂아 위장한 게
분명합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잘 봤소, 잘 봤소. 공주, 당신은 최근에 더욱 예뻐진 것 같구려.]
순간 공주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남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어
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주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데 예뻐지긴요.]
위소보가 말했다.
[당신의 빨간 입술, 하얀 얼굴, 그리고 반달 같은 눈썹은 마치 달에 있
는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 것 같아서 정극상이 보면 틀림없이 못견뎌 할
것이오.]
공주는 침 뱉는 시늉을 했다. 얼마 후 배가 가까이 다가왔다. 마침내
닻을 내리고 정박하더니 예닐곱 명의 수병이 작은 배를 몰고 해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팽 참장은 활로 배를 겨냥하라고 병사들에게
명했다.
이윽고 작은 배는 가까운 곳까지 다가오더니 누군가 배 위에 서서 화통
(話筒)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어명이다! 수사제독시군문(施軍門)이 위 백작님께 어명을 전달하러 왔
다!]
순간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욕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시랑 그놈이 무슨 속셈으로 대만의 전선을 타고 와서 내게
어명을 전달하는 것이자?]
소전이 말했다.
[아마 그가 해상에서 대만의 수군을 무찌르고 얻은 전리품일 것입니
다.]
위소보가 말했다.
[틀림없소. 맞소, 맞아! 전 누님은 역시 머리가 비상하다니까!]
공주는 여전히 승복하지 못하겠는지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시랑이 대만에 투항하고 정극상의 성지를 전달하려고 온 것 같군요.]
위소보는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녀를 꾸짖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엉덩이를 한 번 철썩, 후려친 후 즐거운 마음으로 총총히 모래
사장으로 걸어가 성지를 받았다. 작은 배에서 내려온 자는 과연 시랑이
었다. 그는 모래사장에 우뚝 선 채 큰소리로 성지를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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