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26章. 통흘도에 들이닥친 청나라의 함대들
강희제는 시랑으로 하여금 대만을 침공케 하였다. 시랑은 팽호일전(澎
湖一戰)에서 대만의 수군을 크게 무찌르자 승리의 여세를 몰아 대만으
로 진입할 수 있었다. 더욱이 연평군왕인 정극상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
하는 바람에 대만도 마침내 청나라의 영역으로 편입 되었다.
강희는 위소보의 추천으로 시랑이 큰 벼슬에 올라 이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특별히 위소보를 이등통흘후(二等通吃候)로 진급시켰고, 아울러
태자태보(大子太保)란 직함을 내렸다. 장남인 위호두에게는 음일등경차
도위(陰一等輕車都尉)란 벼슬을 하사했다. 그러나 위소보는 사은(謝恩)
이 끝나자 마치 무엇을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허전했다. 그는 시랑이
대만을 평정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위소보는 정극상과 원수지간이 되었고, 게다가 사부인 진근남도 그에게
피살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만이 평정되
었기 때문에 복명(復明)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
니 어찌 섭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는 나이도 어리고 배운 것도 없었으나 천지회에 오랫동안 있었
으므로 평소에 회의 형제들로부터 자주 들어서 만주인이 우리 한인의
강산을 차지하고 있는 게 몹시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정극상을 북경으로 잡아갔다는 말을 들어도 별로 기쁘지 않았다. 더욱
이 그의 사부는 오직 대명의 천하를 회복하기 위해서 온갖 힘을 다 쏟
았다. 그러니 설사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해외에 있는 대명의
그 영토만은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부가 피살되
자마자 정극상이 바로 투항해 버렸으니 사부가 저승에서 이 소식을 들
으면 분명히 통곡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사부가 피살된 것도 순전
히 시랑과 싸운 후에 기진맥진해 있었기 때문에 정극상이 등뒤에서 암
살할 수 있었던 것인데 시랑의 득의양양한 모습을 본 그가 어찌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시 대인께서그런 큰공을세우셨으니 필시 높은 벼슬에 봉해졌겠군?]
시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직(卑職)은 황상의 은혜를 입어 삼등정해후(三等靖海侯)에 봉해졌소
이다.]
위소보가 말했다.
[축하하오, 축하하오!]
그는 내심 생각했다.
(난 이제 이등통흘후(二等通吃候)다. 황제가 나를 연이어 두 계급 승진
시킨 건 내가 시랑과 똑같은 삼등후가 되면 섭섭하게 여길까봐 그랬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시랑이 대만을 평정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을 때 자기는 이
황량한 섬에서 답답하게 지내고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고 그가 더욱 미워졌다. 시랑은 문안을 올리고 나서 공손히 말했
다.
[황상께서는 비직을 소환하여 한차례 격려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
습니다. '시랑, 네가 이번에 출사(出師)하여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
누구의 덕택인지 알고 있느냐? 그리고 옛날 네가 북경에 있을 때 아무
도 널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누가 널 천거했으냐?' 비직은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황상께 아뢰오. 그건 위 백작님의 보살핌과 황상의 은총에
힘입은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근본을
잊지 않았다니 기특하구나! 그럼 넌 이 길로 통흘도(通吃島)에 가서 위
소보에게 성지를 전하거라.' 그리하여 비직이 이처럼 달려 온 것입니
다.]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내가 천거한 사람들은 모두 공을 세웠는데 정작 나 자신은 이 섬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구나. 비록 황상은 내 벼슬을 끊임없이 올려 주고 있
지만 설사 내가 통흘왕(通吃王)으로 봉해진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
가?)
[시 대인, 그대가 대만의 전선을 타고 오는 바람에 난 정말 깜짝 놀랐
소. 난 대만의 수군이 쳐들어오는 줄로 알았지. 그대가 뽐내러 오는 줄
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시랑은 얼른 사죄하며 말했다.
[당치도 않습니다. 비직은 성지를 받고 급히 백작님을 뵙기 위해서 성
능이 우수하고 속도가 빠른 대만 배를 타고 온 것입니다.]
[대만의 전선이 빨리 달릴 수 있는 건 순전히 배 위에 해와 달이 그려
져 있는 휘호(徽號) 때문이지요. 난 그것도 모르고 조금 전에 속으로
시 대인 자신이 대만에서 자립하여 왕이 된 줄 알고 정말 걱정했소이
다.]
순간 시랑은 크게 놀라며 급히 말했다.
[비직(卑職)이 대만 전선 위에 있는 휘호를 지우지 못한 건 일시적인
소홀함 때문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그의 소홀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대만을 평정한 후 득의양양하
여 전리품으로 얻은 대만 전선을 타고 북상하여 천진(天津)
에 갔다가 다시 남하하여 통흘도(通吃道)까지 내려왔지만 일부러 뱃머
리에 그려져 있는 대만의 휘호를 지우지 않았다. 자기의 전공(戰功)을
남한테 과시하고 싶어서였다. 뜻밖에도 위소보한테 그가 대만에서 자립
하여 왕이 되고 싶은 것으로 의심을 받자 그만 등에서 식은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황제는 이 소년을 시종일관 몹시 총애하여, 자기는 혈전을
치루어 대만을 평정할 때 그는 평안히 섬에서 지내고 있었는데도 그에
게 돌아간 공로가 역시 더 컸다. 따라서 그는 이등후(二等候)에 봉하
고, 자신은 삼등후에 봉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만약 다시 북경에 돌
아가 황상의 면전에서 몇 마디 지껄이기만 하면 자기는 큰 화를 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시랑은 내심 당황하여 즉시 처음 상륙할 때 그 기고만장했던 태도를 거
두고 함께 온 속관(屬官)들에게 명하여 위소보의 앞으로 다가가서 인사
를 여쭙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왕년에 위소보가 진근남을
따라다닐 때 만났던 지당문(地堂門)의 고수 임흥주(林與珠)였다. 위소
보는 내심 흠칫 놀랬다.
(그는 대만의 장령(將領)인데 어떻게 시랑의 수하가 되었을까?)
이때 그가 자기의 직함을 수사도사(水師都司)라고 보고하는 소리가 들
렸다. 임흥주도 상륙하여 위소보를 만나고 나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진 군사의 제자인데 어떻게 조정의 대신이 되었을까? 더욱이 시
제독마저 그를 이처럼 공경하다니!)
시랑은 임흥주와 홍조(洪朝)라는 수사수비(水師守備) 한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임 도사와 홍 수비는 본시 모두 대만의 군사였는데 정극상과 유국헌
(劉國軒)을 따라 조정에 투항했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해전에 능숙하
기 때문에 비직이 이번에 함께 데려와 그들로 하여금 대만의 전선을 보
살피도록 했습니다.]
위소보는 오! 하고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그랬었군.]
이때 임흥주와 홍조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드러내
고 있었다. 대만은 정성공이 개부(開府)한 후부터 일본(東瀛), 여송(呂
宋), 안남(安南) 등지와 통상했기 때문에 몹시 부유했다. 시랑이 대만
을 평정할 때 외국의 보물들을 많이 얻었지만 자기는 한 가지도 갖지
않고 모두 조정에 바쳤다. 강희는 그에게 일부분을 위소보에게 하사하
라고 명했다. 그 밖에 시랑도 선물을 받았지만 모두 대만의 토산품인
대나무 상자와 초석 같은 투박한 물건들이었다. 위소보는 이러한 선물
들을 보자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장 큰 형님, 조 둘째 형님, 왕 셋째 형님, 손 넷째 형님들이 오삼계를
무찌르고 나에게 보낸 선물이 얼마나 풍후(豊厚)했는데 넌 이런 보잘것
없는 물건들만 내게 보냈다. 이를 보면 날 안중에도 두지않고 있는 것
이 틀림없다.)
그날 밤 위소보가 연희를 열어 그들을 대접할 때 시랑을 수석(首席)에
앉히고 그 밖에 수사무관(水師武官)과 임흥주, 홍조 등이 동석했다. 이
윽고 술이 세 순배 돌자 위소보가 물었다.
[임 도사, 대만의 연평군왕은 원래 정경(鄭經) 정 왕야인데 어째서 정
극상 그 녀석으로 바뀌었죠? 소문에 그가 정 왕야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왕야의 자리에 앉았지요?]
임흥주가 말했다.
[백작 나으리. 정 왕야께선 금년 정윌 꼬일에 서거하셨습니다. 물론 후
계자로 큰 공자인 정극장에게 왕위를 계승하라고 유언하셨습니다. 큰
공자는 영명강의(英明剛毅)해서 대만의 군민들은 모두 그를 따랐습니
다. 그러나 태후께서 그를 좋아하지 않아서 풍석범을 파견하여 그를 살
해하고, 둘째 공자인 정극상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습니다. 큰 공자
의 부인 진씨가 태후에게 찾아가 큰 공자께선 죄가 없다고 말하자 태후
는 크게 진노하여 사람들을 시켜 진 부인을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진
부인은 큰 공자의 시체를 끌어안고 한바탕 통곡한 다음에 목을 매어 죽
었습니다. 진 부인은 바로 진.. 진 군사님의 따님이십니다. 이 일을 대
만 사람들은 모두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위소보는 사부의 따님이 남에게 핍박당하여 죽었다는 말을 듣자 문득
사부님이 생각나서 가슴이 쓰라렸다. 그래서 탁자를 후려치며 욕을 퍼
부었다.
[정극상! 그 녀석같이 무능하고 흐리멍텅한 것이 왕야라니, 그건 말도
안 된다!]
임흥주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둘째 공자는 왕위를 계승하자 그의 장인 풍석범을 제독에
봉하여 모든 정사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풍석범은 처사(處事)가
불공평하고 사심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몇 마디 바른말을 하면 그에
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때문에 문무백관은 모두 속으로만 불만을 품고
있었지 감히 누구도 발설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큰 공자와 진 부인의
혼백도 자주 나타났기 때문에 마침내 4월에 태후는 귀신에 놀라서 그만
죽고 말았지요.]
위소보가 말했다.
[통쾌하다, 통쾌해! 그 태후가 저승에 가면 국성야(國姓爺)께서 그녀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임흥주가 말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태후가 귀신한테 놀라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몹시 기뻐했습니다. 대만에선 북에서 남쪽까지 사흘 동안 폭
죽을 터뜨리며 귀신을 쫓는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 늙은 할망구가 잘 죽
었다고 경축한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었겠군!]
시랑이 말했다.
[혼백에 관한 일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필시 태후께선 큰손자를 죽이
고 게다가 큰손자며느리까지 핍박하여 죽게 되자 마음이 불안하여 밤에
귀신을 보았다고 착각한 것이겠죠.]
위소보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악귀(惡鬼)는 정말 있습니다. 특히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귀신으로 변
하면 반드시 복수를 하죠. 시 대인, 그대가 이번에 대만을 평정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그 대만의 전선에도 분명히 많은 악귀가 있을 것
이오. 시 대인께서도 근심하는 게 현명할 거외다.]
시랑의 안색은 약간 변했지만 즉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쟁터에 나가면 살인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패망한
적군들이 모두 귀신으로 변해서 복수를 한다면 무장(武將)
들은 모두 곱게 죽지 못하겠군요?]
위소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시 대인께서는 대만 국성야(國姓爺) 휘
하의 대장인데도 고개를 돌려 대만의 장병들을 죽였으니 죽은 자들의
원귀가 자연히 불복할 게 아닙니까? 이런 경우는 다른 장군들과는 다르
죠.]
시랑은 몹시 울화가 치밀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복건(福建)
진강(晋江) 사람이며, 대만 정 왕야의 부하들도 십중팔구가 모두 복건
인이었다. 때문에 그는 대만을 평정한 후 많은 원성을 들었다. 어떤 사
람은 익명으로 문장을 써서 그를 풍자하여 욕하기도 했다. 물론 그 자
신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처럼 면전에서 공공연하게 비방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위소보에게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분노를 임
흥주한테 옮겨 그를 향해 눈을 부릅떠 보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섬만 떠나면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위소보가 말했다.
[시 대인, 그대는 운이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만약 진근남 군사께서
피살되지 않았다면 태후와 정극상 일당은 왕위를 찬탈하지 못했을 것이
오. 더욱이 진 군사께서 군민(軍民)을 통솔하여 지키고 있었다면 대만
은 일심단결하여 그대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오.]
시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심 자기의 재능은 진근남보다 훨씬
못하기 때문에 만약 그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자연히 국면(局面)이 크
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홍조가 갑자기 말을 가로챘다.
[위 나으리의 말씀이 옳습니다. 대만의 병장과 백성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정극상을 불효자라고 원망하고 있습니
다.]
시랑은 화를 내며 말했다.
[홍 수비, 자네는 이미 대청에 투항한 몸인데 어찌 감히 그런 대역무도
한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이냐?]
순간 홍조는 얼른 일어나며 말했다.
[소인의 일시적인 잘못을 대인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홍형, 그대의 말은 모두 사실이오. 설사 황상께서 직접 들으셨다 해도
나무랄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니 앉아서 술이나 드시지요.]
홍조가 말했다.
[예.]
그는 전전긍긍하며 자리에 앉아 술잔을 들었지만 손이 너무 떨려 술을
반 이상 흘렸다. 위소보가 말했다.
[진 군사께서 정극상한테 피살당한 것을 대만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나
요?]
홍조가 말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극상이 대만에 돌아간 후 그는 진군사
가....진 군사가....]
그러면서 시랑의 눈치를 살피더니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 위소보가 말
했다.
[그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아무도 그대를 탓하지 않을 것이오.]
흥조가 말했다.
[예, 예. 정극상과 풍석범 두 사람은 위사를 몇 명 데리고 작은 배로
바다에 표류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어선을 만나서 무사히 대만으로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정극상은 진 군사가 시 장군에게 피살됐다고 말했습
니다. 정 왕야께서는 그 소식을 듣고 여러 날 통곡하셨습니다. 나중에
정극상은 임금 자리를 빼앗은 후 비로소 백성들에게 진 군사를 자기가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허풍까지 떨
었습니다. 진 군사님의 많은 부하들이 이에 불복하여 진 군사님이 무슨
죄를 범했느냐고 그에게 질문했는데 모두 풍석범한테 죽임을 당했습니
다.]
순간 위소보는 쥐고 있던 술잔을 탕, 하고 내려놓으며 욕을 퍼부었다.
[그놈의 할미! 가랑이를 찢어 죽여야 돼!]
그러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정극상 그놈의 할미는 마땅히 가랑이를 찢어 죽여야죠.]
이 몇 마디 말에는 시랑도 역시 대찬성이었다.
[위 나으리의 말씀은 너무나 지당하십니다. 우리 모두 그 할망구에게
욕을 합시다. 국성야께서는 영웅호걸이시라 모든 게 다 좋은데 유독 마
누라만은 잘못 얻은 것 같습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정극상의 할머니를 욕할 수 있지만 시 장군만은
그럴 수 없소이다. 시장군의 공명과 부귀는 모두 그 할망구로부터 얻은
게 아니겠소? 비록 그대의 부모님과 처자식이 모두 그년 때문에 죽음을
당했지만 그대의 벼슬이 껑충 뛰어올랐으니 과히 손해보신 것도 없는
듯하구려.]
순간 시랑온 울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빨개지며 내심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떡을 칠....자라 새끼 같으니!)
그는 분노를 억제하고 술잔을 쳐들며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러나 숨
이 고르지 못한 탓에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간 다음 심한 기침을 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너의 안색을 보면 틀림없이 속으로 우리 할머니를 욕하고 있는게 분
명하다. 그렇지만 난 우리 아버지가 누구인 줄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
게 할머니를 알 수 있겠느냐? 그러니 네가 우리 할머니를 욕해도 틀림
없이 엉뚱한 사람을 욕한 것이다. 넌 속으로 나를 후레자식이라고 욕을
할 것이다. 후레자식도 자식이니 너는 내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
다면 우리 할머니는 바로 너의 에미가 아니냐? 네가 우리 할머니를 욕
한다면 그건 바로 너의 늙은 에미를 욕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껄껄 웃었다.
이때 좌중에 있던 성이 노(路)씨인 수사부장(水師副將)이 그들 두 사
람이 다투게 될까 봐 입을 열었다.
[위 백작 나으리, 시 장군께서 이번에 대만을 평정한 것은 순전히 혈전
을 치러 얻어 낸 공로입니다. 장군께서는 성지를 받고 6월 초나흘에 전
선 육백여 척과 군사 육만여 명을 이끌고 대만을 평정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는 바람에 11일 되어서야 비로소 팽호에
당도했습니다. 이윽고 16일에 유국헌이 통솔한 대만의 군사와 대전을
치렀습니다. 그 일전은 실로 치열했을 뿐만 아니라 시 장군 자신도 부
상을 당했습니다....]
위소보는 임흥주와 홍조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 노기를 띄우고
있는 걸 보고 그들 두 사람도 팽호지역(澎湖之役)에 참여했다고 짐작했
다. 그는 내심 그 싸움에서 시랑이 승리한 공로를 이야기하는 게 듣기
싫었고, 다른 두 사람도 그럴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시 장군, 국성야께서 대만을 함락할 때도 팽호에서 공격했습니까?]
시랑이 말했다.
[예,그렇습니다.]
[당시 그대는 국성야님의 휘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팽
호를 함락시켰습니까?]
[당시 팽호에는 붉은 털을 지닌 군사가 주둔해 있었습니다.]
위소보는 임흥주에게 물었다.
[왕년에 국성야께서 바다 건너 동쪽을 정벌할 때 임형께서 등패병(藤牌
兵)을 이끌고 양놈들의 다리를 베었다던데 무슨 방법으로 벤 것입니
까?]
순간 임흥주는 생각했다.
(그 얘기는 이미 당신한테 들려줬는데 지금 다시 되묻는 건 분명히 시
랑이 대만을 평정한 더러운 일을 듣고 싶지 않아 나로 하여금 국성야님
과 진 군사의 영웅적인 무용담을 얘기하라는 것이군! 그러나 나 자신의
일은 많이 얘기할 수 없고 또 시랑이 앙심이라도 품으면 틀림없이 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그를 좀 추켜세우는 것이 좋겠
구나.)
이렇게 생각한 그는 말했다.
[시 장군께서 대만을 두 번 공격한 전공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왕년
에 국성야께서 장군들을 소집하여 바다 건너 동정(東征)할 일을 상의할
때 많은 장군들은 모두 대만이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이며 바다의 풍랑도
거세고 홍모귀(紅毛鬼)의 포화도 위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몹시 위험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 군사와 시장군께서는 적극적으로 공격했
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큰 공을 세웠습니다.]
시랑은 그의 이러한 말을 듣자 안색이 다소 좋아졌다. 임흥주가 다시
말했다.
[영력(永曆) 15년 2월....]
시랑이 말했다.
[임 도사(都司), 명나라의 연호는 다시 거론하면 안 됩니다. 그건 대청
순치(順治) 18년이죠.]
임흥주가 말했다.
[예, 예. 그 해 2월, 국성야의 대영(大營)은 금문성(金門城)으로 이주
했습니다.3월 초열흘날 국성야와 진 군사는 친군우무위(親軍右武衛),
좌우호위(左右虎衛), 효기진(驍騎鎭), 좌선봉(左先鋒), 중충(中衝), 후
위진(後衛鎭), 선의전후진(宣毅前後鎭), 원초후진(援剿後鎭) 등 각군의
전함을 모두 규합하여 요라만(料羅灣)에서 바람이 잔잔하길 기다렸습니
다. 당신 군심은 황황(惶惶)해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자 국성야와 진 군사, 시 장군께서 각 진을 돌면서 군심을 안정시
켰습니다. 그런 식으로 줄곧 23일 정오까지 기다렸습니다. 그제서야 비
로소 날씨가 좋아졌고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마침내 대군은 출항하여
24일 오후 팽호에 당도했습니다. 그러나 팽호에 도착한 후 태풍이 다시
불어 왔고, 바다의 풍랑도 크게 일어서 여러 날 동안 배를 띄울 수 없
었습니다. 팽호의 섬에는 양식이 없었습니다. 양식이 부족해지자 모두
감자로 끼니를 이었습니다. 그러자 군심은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렇게 30일까지 기다려 봤지만 날씨는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국성야께서는 출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태풍
으로 거센 파도가 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동정(東征)하기로 결
심한 것입니다. 그날 밤 일경(一更)이 지나자 국성야의 중군 함상에는
수(帥)자 큰 깃발이 올랐고 세 번 발포했습니다. 이옥고 금고(金鼓)가
일제히 울리면서 전선은 돛을 올려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하늘에
는 온통 먹구름이 깔려 있었고, 해상의 파도는 마치 한 채 한 채 작은
산처럼 뱃머리로 덮쳐 왔습니다. 바람도 세차게 불었고, 비도 억수같이
쏟아져서 사람들은 모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그때 국성야께선 장검
을 손에 쥐고 뱃머리에 서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충성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풍랑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에 수만 명의 군사들도 일제히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충성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풍랑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때의 함성은 마
치 광풍거랑(狂風巨浪)의 소리도 잠재워 버린 듯했습니다.]
위소보가 시랑에게 말했다.
[그 당시 시 장군께서도 함성을 지르셨겠군요?]
[그때 비직은 하문(廈門)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대만으로 못
갔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정말 애석한 일입니다.]
노 부장(路副將)이 말했다.
[정 왕야께서 팽호에 당도하여 만난 것은 대풍과 거센 파도에 불과했지
만 시 장군이 팽호에서 벌인 싸움은 실로 경심동백(驚心動魄)할 혈전이
었습니다. 유국헌이 통솔한 수군은 팽호의 우심만(牛心灣)과 계룡서(鷄
龍逝)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연안 이십 리 안에는 모두 토방을 쌓
았고 토방마다 대포를 설치했습니다. 대청의 수군이 당도하자 언덕 위
의 대포를 일제히 쏘아댔고, 화전(火箭), 분통(噴筒)이 빗발쳤습니다.
정말 형용할 수 없이 맹렬한 반격을 퍼부었습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노 부장, 내가 보기에 그대의 담력은 나하고 비슷한 것 같습니다.]
노 부장이 말했다.
[과찬의 말씀! 소장이 어찌 백작 나으리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거참 이상하군요. 난 내 담력이 쥐처럼 작아서 형편없는 줄 알았는데
그대가 나보다 더 작다고 하다니! 하하하! 알 수 없군, 알수 없어!]
노 부장은 얼굴만 붉힐 뿐 감히 대꾸를 하지 못했다. 위소보는 임홍주
에게 물었다.
[국성야께서는 대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간 후 어떻게 됐습니까?]
임흥주가 말했다.
[처음 전선은 풍랑 속에서 두 시진 동안이나 지체했습니다. 그러나 삼
경쯤 되자 갑자기 날씨가 맑아지면서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졌습니다.
더욱이 잠시 지나자 바람까지 순풍으로 변했습니다. 순간 군사들은 우
뢰 같은 함성을 질렀습니다. 모두가 하늘의 보살핌이라며 이번 원정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윽고 다음날 아침에 전선은 녹이
문(鹿耳門) 밖에 당도했고, 대나무로 수심을 측량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수심이 얕아서 앞으로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국성야께
선 몹시 초조한 마음으로 향안(香案)을 설치하여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윽고 잠시 지나자 조수(潮水)가 갑자기 불어서 전선들이
일제히 녹이문으로 밀려 들어갔습니다. 순간 안상(岸上)의 홍모병(紅毛
兵)들은 마구 대포를 쏘며 공격했습니다. 그때 홍모귀들은 거기에다 성
을 두 채 건축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열란차(熱蘭遮) 성이라고 불렀고
다른 하나는 보라민차(普羅民遮) 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양놈들은 지명을 괴상망칙하게 지었군! 무슨 열래차니 냉래차니 나무
바라밀다관세음보살이니....]
임흥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시 국성야께서 천리경으로 관찰해 보니 홍모귀의 주력 함대가 두 척
있었고, 순양함 두 척, 협판함과 소정이 수백 척이나 있었소. 이윽고
장령(將令)을 하달했죠. 선의진진의 제독 진택(陳澤)으로 하여금 선대
(船隊)를 이끌고 녹이문에 상륙하여 다른 홍모함대가 원조하지 못하도
록 북산미(北汕尾)를 지키도록 했고, 황소(黃昭)로 하여금 선수(銑手)
오백 명과 연환포(連環抱) 이십 대를 삼 대(隊)
로 나눠 곤신미(鯤身尾)에 파견하여 적군이 남하하지 못하도록 막으라
고 하셨지요. 비직한테는 등패수 오백 명을 이끌고 귀자포(鬼仔浦) 뒤
로 돌아가서 곤신(鯤身)의 왼쪽을 맡으라고 하셨으며, 또 소공신(蕭=拱
+馬身)한테는 쾌초(快哨) 이십 척을 이끌고 흥모대가 칠곤신(七鯤身)을
지나 공격해 오는 걸 발견하면서 즉시 상륙하여 공성(攻城)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큰소리로 함성을 질러서 그들을 견제하라고 하셨지요. 장수들
은 명령을 하달받자 각각 목적지로 출발했고 선상의 대포로 폭격을 개
시했습니다. 그 무렵 다른 한쪽에선 진 군사께서 통솔한 수병들이 홍모
귀의 주력 함대 두 척을 포위하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함성
은 높이 울려퍼졌고, 바다는 온통 화약 연기와 화염으로 뒤덮여 있었습
니다. 약 한 시진 정도 싸운 끝에 꽝! 하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홍모귀
의 주력함 한 척이 아군에게 격침되었습니다. 나중에야 비로소 그 전함
이 패극덕아(貝克德亞) 호였고 홍모귀 수군의 정예부대란 걸 알았습니
다. 다른 한 척은 마리아(馬利亞) 호였는데 일부가 파손되어 동쪽 바다
로 향해 달아나 버렸습니다. 또 두 척의 홍모귀 순양함도 격퇴당했습니
다. 그무렵 진댁이 통솔한 형제들은 홍모귀의 육군을 만났지만 모두 죽
음을 무릅쓰고 공격해 갔습니다. 비록 홍모귀의 총기는 무서웠지만 전
력을 다해 싸우는 아군의 용감성을 보고 홍모귀들은 놀라서 투지를 잃
은 채 성안으로 후퇴했습니다. 마침내 아군은 적감(赤嵌)으로 상륙하여
곧장 보라민차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위소보는 술을 따라 양손으로 임흥주에게 건네주머 말했다.
[임형,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내 그대에게 한잔 권하겠소.]
임흥주는 일어나서 술잔을 받았다. 단숨에 마신 후 계속 말을 이었다.
[아군이 적감에 상륙하자 그곳의 중국인들은 모두 뛰어나와 환영해 주
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모두 입을 모아 이번에
야말로 우리들의 구세주가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위 나으리, 국성야님
의 부친 정태사께서는 원래 바다에서 밑천 안 드는 장사를 했으며, 대
만은 그 어르신의 소굴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어르신께서 수하 형제들
을 이끌고 중원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대만을 화란 놈들과 서반아 놈들
이 점거한 것입니다. 화란 놈들은 남쪽에 있었고 서반아 놈들은 북쪽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반아 놈들이 싸움에서 패하자 대만 전역을 모두
화란 놈들이 차지했습니다. 섬위에 있는 우리 중국인들은 화란 홍모귀
한테 학살당했습니다. 당시 섬에는 정태사님의 옛 동료 곽회일(郭懷一)
이란 분이 남아 계셨습니다. 그분은 중국인들이 홍모귀한테 온갖 수모
를 당하는 걸 보다 못해 몰래 형제들을 규합하여 8월 15일 즉 추석날에
일제히 거사하기로 하고 각지의 중국인들에게 통보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보자(普子)라는 매국노가 홍모귀에게 고해바쳤습니다....]
위소보는 탁자를 후려치며 욕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중국인들의 일은 모두 매국노가 그르친 것이오!]
임흥주가 말했다.
[옳습니다. 곽희일 대형은 보자가 도주한 것을 발견하자 일에 차질이
생긴 걸 알고 즉시 만육천여 명의 중국인을 이끌고 보라민차성을 공격
하여 홍모귀의 관공서와 점포를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러자 홍모
귀는 대군을 동원하여 맹렬한 포화로 반격했습니다. 우리 중국인들은
몇 자루 화롱총(火龍銃)을 제외하면 모두 칼이나 창, 아니면 괭이, 몽
둥이 같은 것으로 무기를 대신하여 적감에서 보름동안 싸웠습니다. 걸
국 곽회일 대형은 홍모귀의 대포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순간 위소보는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그것 참 야단났군요!]
임흥주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곽 대형께서 전사하자 마치 머리가 없는 뱀과 같이 중국
인들은 성을 버리고 대호변에서 칠 일 동안 밤낮으로 혈전을 치렀습니
다. 그리하여 대호변에서 죽은 사람들은 모두 사천 명이 넘었습니다.
급기야 부녀자와 아이들도 굴복하지 않고 싸우다 오백여 명이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때 흥모귀한테 잡혀간 여자들은 창녀가 되었고, 남자는
오마분시(五馬分屍)하지 않으면 화형으로 고문당하다가 천천히 죽어 갔
지요....]
위소보는 대노하여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홍모귀의 잔인함은 대청의 군사가 우리 양주에서 학살을 한 것 보다
더욱더 악랄하군!]
시랑과 노 부장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소년은 정말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구나!)
임흥주가 말했다.
[그건 영력(永曆) 6년 8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홍조가 손가락을 꼽아 보며 말했다.
[영력 6년이면 바로 대청 순치 7....8....9....순치 9년입니다.]
임흥주가 말했다.
[그렇죠. 그런 대참살극을 연출한 후부터 대만의 중국인들과 홍모귀 사
이는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급기야 홍모귀는 사소한 일로 중국인들을
마구 죽였습니다. 그러다가 국성야님의 대군을 보자그야말로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환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죠. 그 당시 남녀노소 모두 우
리들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홍모귀의 태수인 규일(揆
一)이 대패한 분풀이로 일곤신에 살고 있는 중국인을 오백여 명이나 죽
였습니다. 다음날 국성야께선 보라민차 성을 공격했습니다. 진 군사께
선 계책을 세워서 등패병을 훈련하여 양놈들의 다리를 잘랐습니다. 그
리하여 마침내 보라민차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노형의 공이 컸겠군요?]
임흥주가 말했다.
[그건 모두 진 군사님의 묘책이지 비직의 공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국성야께선 휘병(揮兵)을 따라 홍모 태수가 주둔하고 있는 열란차 성
을 공격했습니다. 성에서는 맹렬한 포화로 반격을 가했기 때문에 아군
의 피해가 아주 심했습니다. 그러나 마신(馬信) 장군과 유국헌 장군은
여전히 죽음을 무릅쓰고 일곤신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국성야께선 형제
들이 너무나 많이 죽는 걸 보자 열란차 성 밖에다 토방을 쌓아 놓고 대
포로 성 안을 맹렬하게 폭격했습니다. 잠시 후 아군의 제이로(第二路)
수군인 좌충(左衝), 전충(前衝), 지무(智武), 영병(英兵), 유병(游兵),
전병(殿兵) 등 각 진의 전함이 모두 당도하자 기세는 더욱 충천했습니
다. 급기야 국성야께선 군사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으며 포위망을 구축
하도록 하시어 장기전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5월에 접어들자 갑자기 홍
모귀의 원병이 파달유아(巴達維亞)에서 당도했습니다. 그러자 성 안에
있던 홍모귀들이 나와서 협공하게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수륙 양면에서
대접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싸움이 어찌나 치열했는지 바닷물이
모두 피로 빨갛게 물들 정도였습니다.]
순간 위소보는 탁자를 치며 찬탄했다.
[대단하오, 대단해 ! ]
그러면서 시랑을 향해 말했다.
[시 장군께서 그때 하문(廈門)에 계신 게 정말 애석하군요. 만약 그 몇
차례의 대전을 치루면서 홍모귀를 수백 명 정도 죽였더라면 그야말로
진정한 영웅호걸이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시랑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위소보가 홍조에게 물었다.
[홍형께서는 당시 어디서 싸우셨습니까?]
[당시 소장은 유국헌 장군님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진택 장군께서 통
솔한 수군들과 함께 북산미(北山尾) 일대에서 홍모귀 원병을 위공(圍
功)했습니다. 당시 홍모귀의 전함은 아주 컸습니다. 게다가 총포 또한
위력이 대단했습니다. 아군의 총포 탄알이 홍모귀의 전함에 명중되었지
만 모두 철갑에 맞고 도로 툉겨 나왔습니다. 그러자 선의전진(宣毅前
鎭)의 임진신(林進紳) 장군께서 보다못해 직접 이백여 감사대(敢死隊)
를 이끌고 몸에 화약을 지닌 채 홍모귀 전함으로 뛰어 올라가서 함상에
있는 대포를 파괴시켰습니다. 홍모귀들은 아군이 이처럼 죽음을 무릅쓰
고 맹렬한 공격을 하자 모두 크게 당황했습니다. 마침내 우리들은 홍모
귀의 함장을 한 명 죽이고 주력함 두 척을 나포하자 홍모귀의 수군은
붕괴되었습니다. 그 무렵 육상(陸上)에선 진 군사님의 군대가 전승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진 군사님의 몸에서 홍모귀의 탄알을 모두
일곱 개나 파냈습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우리 사부님은 홍모귀의 포총 아래에 죽지 않고 그 정극상이란 놈의
검 아래에서 죽었군요. 시 장군님, 사내대장부는 외국 놈들과 싸워야만
비로소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인이 중국인을 죽이면
제아무리 많이 죽여도 호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내 말이 틀림없지요?]
시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흥주가 말했다.
[홍모귀들은 몇 차례 패전을 거듭하자 아군의 군량을 불태우려 했습니
다. 그렇지만 매번 진 군사님한테 간파되어 모두 실패했습니다. 홍모
대수 규일(揆一)은 고성(孤城)에 갇혀 버리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는 하는 수 없이 사람을 시켜 바다 건너 대청의 민절(閔浙) 총독인 이
솔태(李率泰)에게 연락하여 원병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이 대인은 홍모
귀들이 먼저 금문과 하문 일대에 주둔한 국성야님의 군대를 평정해야만
원병을 보내겠다고 답신을 했습니다. 그무렵 흥모귀들은 마치 자라처럼
열란차 성 안에 목을 움츠리고 있는 실정인데 금문과 하문에 파병하여
공격할 겨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홍모귀들의 말은 마치 방귀를 꿔는 것 같아서 끝내 금문과 하문을 공
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우리 대청은 항상 약속대로 이행했
습니다. 단지 지체된 것뿐이죠. 안 그렇습니까? 시 장군께서 군대를 이
끌고 대만을 공격할 때 홍모귀들과 이통외국(事再外國)하지 않았습니
까?]
시랑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위 백작님, 형제는 그대와 함께 모두 대청의 관리인데 무엇 때문에 그
대는 항상 저를 야유하는 것이오?]
[내가 언제 시 장군님을 야유했다는 겁니까? 시 장군께서 이통외국하지
않았다면 다행이 아닙니까? 그러나 내가 보기에 만약 이통외국하시려
한다면 아직 때가 늦지 않았습니다. 시 장군께서 대군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홍모귀, 서반아귀, 포도아귀(葡萄牙鬼), 나찰귀(羅刹鬼)들이 모
두 기꺼이 그대와 손을 잡을 것입니다.]
시랑은 내심 흠칫 놀랐다.
(큰일났다! 만약 이 약삭빠른 놈이 황상한데 내가 이통외국한다고 모함
하면 내 일생은 그의 손에 의해 망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자 조금 전에 일시적으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무례한
말을 한 것이 크게 후회되었다. 그래서 즉시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
다.
[형제는 너무 과음했는지 실수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위 백작 나
으리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위소보는 그의 화난 모습을 보고 다소 겁을 먹었지만 그가 다시 사과하
는 걸 보니 그가 자기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라 웃으며 말했다.
[시 장군께서 대만에서 자립하여 왕이 되고 싶으시면 먼저 형제를 죽여
입을 틀어막는 게 상책일 것입니다. 그래야만 내가 황상께 기밀을 누설
하지 못할 게 아닙니까? 단지 큰소리를 치며 분풀이를 한 것이라면 형
제의 담력이 아무리 작아도 거기에 겁을 먹지 않습니다.]
순간 시랑은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예를 올리며 말
했다.
[위 백작 나으리, 대인은 소인의 과오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정녕 비직에게 잘못이 있다면 얼마든지 벌을 받겠습니다. 그렇지만 자
립하여 왕이 되려 한다느니 이통외국이니 하는 말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비직은 오직 한마음 한뜻으로 황상께 충성을 다할 뿐 다른
뜻은 전혀 품고 있지 않습니다.]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앞으로 두고 보겠습니다.]
이어서 고개를 임흥주에게 돌리며 말했다.
[그대는 이야기꾼보다 더 재미있게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러니 어서 다
음 얘기를 계속하십시오.]
임흥주가 말했다.
[당시 국성야께서 대군을 이끌고 대만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내지(內地)
까지 전해지자 황오(黃梧) 대인께서 조정에 소위 '견벽청야평해오책(堅
壁淸野平海五策)'이라 일컬어지는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황오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순간 임흥주는 시랑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기침을 몇 번 할 뿐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시랑이 입을 열었다.
[그 황 대인이란 분도 원래 국성야님의 휘하에 있었으며 벼슬은 청병
(總兵)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귀순한 후 관운이 형통하여 돌아가실
때 일등해등공(一等海登公)에 봉해졌습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그 사람도 역시 대매국....]
마지막 '노' 자는 도로 삼키고 말았다. 순간 시랑은 얼굴을 붉히며 내
심 생각했다.
(네가 날 대매국노라고 욕했지만 내가 보기에 너도 가짜 만주인 같은데
그렇다면 우리는 피차일반이 아니더냐?)
위소보가 말했다.
[그 황오란 자는 얼마나 황상께 아부를 잘했길래 단숨에 공작에 봉해졌
습니까? 정말 재주가 보통이 아니군요. 그런 재주는 우리도 잘 배워 둬
야 합니다.]
임홍주가 말했다.
[그 황오는 왕년에 국성야께서 해징(海澄)에 파견하여 그곳을 지키라고
했는데 그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조정에 투항했으며 귀순하지 않은 장
사(將士)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당시 대청나라의 조정에서는 국성야 때
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대방의 장군한 사람이 군대를
이끌고 성시(城市)까지 한꺼번에 귀순했으니 그 얼마나 반가웠겠습니
까? 그 때문에 특벌히 후한 벼슬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랬었군요. 그가 제시한 계책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습니까?]
순간 임흥주는 탄식을 말했다.
[그 황 대인이란 분은 백성들에게 실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
의 평해오책(平海五策)의 제1조는 연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모두 내
지로 이주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금문과 하문은 대만과 완전히
분리되는 거죠. 제2조는 연안에 있는 모든 배를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
리고 앞으로 목판 한 조각이라도 바다에 띄우는 걸 금하는 겁니다. 제3
조는 국성야님의 부친인 정태사를 살해하는 겁니다. 제4조는 국성야님
의 조상들의 묘지를 파혜쳐서 그의 풍수(風水)를 망치는 것입니다. 제5
조는 국성야님의 옛 관병들을 모두 내지로 거처를 옮기게 하여 후환을
방지하고 각처의 황무지를 개간토록 하는 겁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그놈의 계책은 실로 독하기 이를 데 없군요?]
임홍주가 말했다.
[누가 아니랍니까? 그 무렵 순치 황제께서 가붕(假崩)하시어 황상께서
왕위를 계승하셨지만 나이가 어려서 오배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
다. 그 간적 오배는 황오의 평해오책을 보더니 아주 지당하다머 즉시
채택했습니다. 이윽고 명령을 하달하여 요동에서부터 직예(直隸), 강소
(江蘇), 절강(浙江), 복건(福建), 그리고 광동(廣東)까지의 연안 삼십
리 안에는 사람을 살지 못하게 했으며 배들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당시
연안에 살고 있던 수천 수만의 백성들은 졸지에 집을 잃고 떠돌이 생활
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황오의 계책은 정말 너무 지나쳤습니다. 금상친정(今上親政)하시고 위
대인께서 오배를 몰아낸 다음에 비로소 금해령(禁海令)이 해제됐습니
다. 그러나 연안 일곱 성(省)의 백성들은 그동안 너무나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엄령(嚴令)을 어긴 백성들은 모조리 잡아다가 참수
시켰습니다. 정태사(鄭太師)께서도 그때 피살됐습니다. 오배는 특별히
병부상서 소납해(蘇納7每)를 복건성의 남안현에 파견하여 정가(鄭家)의
묘지를 파혜쳤습니다.]
[오배는 용사라 자칭하면서 그런 몰상식한 일을 서슴지 않고 하다니,
정녕 그가 재주가 있다면 국성야님과 정식으로 싸웠어야 하지 않겠습니
까? 더욱이 연안의 백성들을 내지로 거처를 옮기게 한 것은 남을 두려
워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황상께서는 백성들을 아끼시기 때문에 황오의
계책이 만약 황상의 손에 들어갔다면 분명히 그의 목을 잘랐을 것이외
다.]
시랑이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황오가 일찍 죽은 건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
다.]
임흥주가 말했다.
[정태사께서 서거한 소식이 대만에 전해지자 국성야께선 군심이 동요될
까 봐 유언비어라 하시면서 함부로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친
병(親兵)의 말에 의하면 국성야께서는 밤마다 통곡하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국성야께서는 진 군사와 몇 분 대장들에게 황오의 계책은 너무 악
랄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침내 국성야께선 장령을 하달하여 새해가 되기
전에 필히 열란차 성을 함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홍조에게 물었다.
[우리가 총공격하던 날이 11월 22일이죠?]
홍조가 말했다.
[그렇소. 그날은 바람과 비가 거세게 물아쳤습니다. 아군은 각처 토방
의 대포로 일제히 맹렬하게 폭격을 가하여 성벽 한쪽 구석을 무너뜨렸
습니다. 이어서 성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보루도 폭파했습니다. 그러자
흥모귀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수백 명이 죽은 후
다시 후퇴하여 도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홍모 태수 규일은 백기를
올려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만에 있던 중국인들은 모두 복수를
하겠다고 홍모귀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습니다. 국성야께서는 백성들에
게 우리 중국은 예의지국이라 일단 적이 투항하면 더 이상 죽일 수 없
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홍모 태수로부터 항서(降書)에 서명하도록 하고
패잔병들을 끌고 대만을 떠나 파달유아(巴達維亞)로 떠나도록 하셨습니
다. 홍모귀들은 명나라 천계(天啓) 4년부터 대만을 점거했으니 모두 삼
십팔 년 동안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영력 15년에 이르러....그
러니까 대청 순치 18년 11월 29일에 비로소 대만이 다시 중국의 영토로
돌아온 것입니다.]
임흥주가 말했다.
[국성야께서 장령을 하달하여 투항한 흥모병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지만
중국 백성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들에게 침을 뱉고 돌
을 던졌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은 동요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홍모병들
은 하나같이 팔이 부러지거나 아니면 다리가 부러졌지만 감히 한 마디
도 지껄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병선(兵船)이 떠날 때는 깃발을 올렸
다 내렸다 하면서 예포를 쏘았습니다. 그건 국성야님께서 목숨을 살려
준 은혜에 대해 치사하는 것이었죠.]
위소보가 말했다.
[옳거니! 우리 중국인들은 역시 대단합니다. 흥모귀들의 포화가 그렇게
화력이 좋은 데도 대만을 함락시켰다니 그는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
죠.]
홍조가 말했다.
[국성야께선 그 열란차 성을 안평진(安平鎭)이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보
라민차 성은 승천부(承天府)로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그 후부터 영원히
대만의 중진(重鎭)이 된 것입니다.]
노 부장이 말을 가로챘다.
[시 장군께서 대만을 공격할 때도 왕년에 국성야께서 걸었던 길로 들어
갔습니다.]
순간 위소보는 손을 흔들어 그의 말문을 막고 하품을 크게 하며 말했
다.
[중국 사람이 홍모귀들을 무찔러 바다에 처넣었다는 얘기를 들어야 신
이 나지, 자기 민족끼리 동족상잔한 것은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시 장군, 이제 술도 거의 다 마셨으니 그만들 일어나시죠.]
시랑은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예, 위 백작 나으리의 대접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럼 비직은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이윽고 위소보는 내당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시랑의 말머리를 막고 그로
하여금 대만을 함락한 전공(戰功)을 과시하지 못하게 했는지 여섯 부인
들한테 들려주었다. 그녀들은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러나 유독
아가만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심 정극상에게 시집갔더라면 지금쯤 그와 함께 포로가 되어
북경에 압송됐을 것이고, 망국의 첩부(妾婦)라 하여 온갖 수모를 당하
는 것을 면하지 못했으리라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 아가는 정극상
이 소정을 타고 통흘도를 떠날 때부터 이미 그의 생사존망에 대해선 아
랑곳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그가 나라를 잃고 적에게 항복했다는 말
을 듣자 더욱 마음에 두지 않게 되었다. 다만 그자가 무능하고 비열한
사내였는데도 그의 풍채와 용모에 반했던 자신이 심히 부끄럽게 느껴졌
다. 공주가 말했다.
[황제 오라버니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너무나 관대한 것 같습니다. 정
극상 그놈은 투항한 몸인데도 아직까지 죽이지도 않고 당신보다 벼슬이
높다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위소보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마음쓰실 것 없소. 국성야란 분은 자타가 공인하는 영웅호걸이라 황상
께서 국성야님의 체면을 보고 그의 손자한테 일등공(一等公)이란 벼슬
을 내린 것이오.]
다음날 정오 무렵에 위소보는 임흥주와 홍조 두 사람만 초대하여 작은
연회를 베풀면서 시랑이 대만을 함락한 경과를 물었다. 청군과 대만군
은 팽호의 우심만과 계룡서에서 여러 날 동안 혈전을 계속하였고, 첫날
시랑은 패전했지만 나중에 청군의 원병이 도착하여 다시 대전을 치루면
서 마침내 대만의 전선들을 불 태우고 크게 무찔렀다. 사상자는 만여
명이 넘었고, 전함은 침몰한 것과 불태워진 것이 무려 삼백여 척이나
되었다. 유국헌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다시 대만으로 후퇴했다.
시랑이 수군을 이끌고 대만을 공격할 때 녹이문(鹿耳門)의 수심이 얕아
서 전선이 상륙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바다에 12일 동안이나 발이 묶
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을 뒤덮는 짙은 구름과 함께 비가 쏟아져 조수
가 크게 불어나서 청군의 전선은 일제히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대만
측에선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여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옛날에 국성야께서 녹이문에 조수가 불어나는 바람에 대만을 얻었는데
지금 다시 녹이문의 조수가 불었다는 건 이미 천험(天險)
을 잃은 것이다. 이건 모두 하늘의 뜻이니 싸워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
다.]
정극상은 청군의 주사(舟師)가 녹이문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풍석범이 그에게 투항하라고 권하자 두말하지
않고 이에 응했다. 다만 시랑이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정씨의 자
손들에게 화를 입힐까 봐 몹시 주저했다.
이윽고 유국헌이 시랑에게 서찰을 보내 항복할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국성야 자손의 안전은 반드시 보장해 쥐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만의 군민들은 국성야의 은의(恩義)를 생각해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시랑은 즉시 답신을 보내 절대로 구원(舊怨)을 따지지 않겠다고 보장했
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극상, 풍석범, 유국헌은 대만의 문무백관을 이
끌고 항복하니 이로써 명나라의 대가 끊어진 것이다.
임흥주는 시랑이 군대를 이끌고 상륙한 후에 뜻밖에도 약속대로 정씨
자손을 전혀 괴롭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시랑이 직접 정성공
의 연평왕묘(延平王廟)에 가서 제를 올리고 한바탕 통곡을 했다고 말했
다. 흥조가 말했다.
[그가 제문(祭文)을 낭송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죠.]
[그는 뭘 그렇게 중얼거린 것입니까?]
홍조가 말했다.
[옛날에 오자서가 초(楚)나라를 멸하자 초평왕(楚平王)의 시체를 무덤
에서 파낸 다음에 채찍질을 삼백 번 가하여 부친과 형님의 복수를 했다
고 합니다. 그러나 시랑은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
다.]
위소보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홍! 국성야께서는 비록 이미 죽었지만 그는 여전히 국성야를 두려워하
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소? 그는 정가(鄭家)의 가
업을 망쳤기 때문에 행여나 국성야의 영혼이 그를 괴롭힐까 봐 국성야
묘에 가서 절을 하고 통사정한 것이겠지. 시랑이라는 자는 아주 간교하
니 그대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자 임흥주와 홍조 두 사람은 일제히 예, 하고 대답했다. 위소보가
말했다.
[오자서에 관한 이야기는 연극으로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오자서가 소
관(昭關)를 지날 때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는데 맞습니
까?]
흥조가 말했다.
[예, 예. 백작님의 기억력은 정말 좋으십니다.]
위소보는 즉시 오자서의 전후사정을 물어 보았다. 홍조라는 자는 왕년
에 과거에 응시한 적이 있었다. 비록 등과는 하지 못했지만 뱃속에 먹
물이 꽤 들어 있어서 자초지종을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위소보는 흥미
진진하게 듣고 나서 말했다.
[내가 이 황도(荒島)에서 지내는 동안 실로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다행
히 두 분이 오셔서 내게 이야기를 들려준 덕분에 한결 즐거워졌습니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그대들은 오랫동안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임흥주가 말했다.
[저희들은 대만의 항복한 장군입니다. 더욱이 어제 말하는 도중에 시
장군을 화나게 했기 때문에 시 장군께서 저희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입
니다. 위 대인, 부디 대인께서 시 장군께 말씀드려 저희 두 사람을 여
기에 남아 대인을 모시게 해주십시오.]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되물었다.
[홍형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홍조가 말했다.
[어젯밤에 비직과 임형은 자세히 상의했습니다. 만약 위 대인께서 저희
들을 살려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두 사람은 틀림없이 개죽음을 당할 것
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두 분께서 나와 함께 있으려면 모든 일에 나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
다.]
임흥주와 흥조 두 사람은 일제히 몸을 굽히며 말했다.
[위 대인의 분부라면 죽음도 불사할 것입니다.]
위소보는 몹시 기뻐하며 내심 생각했다.
(이 두 사람만 있으면 이 귀신 같은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강희 황제는 팽 참장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통흘도를 지키라고 파
견할 때 사전에 미리 성지를 내렸다. 즉 위소보나 그의 가족들은 절대
로 섬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팽 참장은 약삭빠르지도 못하고 재주도 별로 없었지만 황상의 성지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감히 거역하지 못했다. 강희 황제가 그로 하여금
단단히 지키라 명했으니 그는 단단히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위소보가
그를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오백 명의 군사들을 모
두 죽인다 해도 배가 없으면 섬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수군의 장수였으니 배를 만드는 것과 항해하는 데 분명 재주가
있을 것이다. 그날 밤 다시 연회를 베풀어 시랑을 초대했다. 이번에는
단지 임흥주와 홍조 두 사람만 동석하게 하였다. 잠시 동안 잡담을 나
누고 나서 위소보가 말했다.
[시 장군, 아무래도 그대는 여기서 한두 달 더 머물러 주셔야 하겠습니
다.]
시랑이 말했다.
[비직도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자주 대인의 교회(敎誨)를 듣고 싶지만
대만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떠나 있을 수 없어 내일 대인께
하직 인사를 고할까 합니다.]
[그대가 나와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서 자주 나의 교회(敎誨)를 듣겠다
는 말이 진심입니까? 아니면 내 환심을 사려고 하는 말입니까?]
시랑이 말했다.
[물론 비직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진심입니다. 왕년에 대인을 따라 통
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신룡교를 포격할 때 매일 대인의 가르침을
경청하면서 대인과 함께 술을 마시고 노름하고 농담을 했던 그 시절이
정말 그립습니다.]
[만약 그런 생활을 다시 즐길 수 있다면 그대는 기꺼이 응해 주시겠군
요?]
시랑이 말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죠. 훗날 황상께서 대인에게 막중한 중책을 맡기시면
비직은 당연히 대인을 따를 것입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그대가 나를 따라 나의 농담을 듣고 싶다면 아
무런 어려움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내일 함께 대만으로 가도록 합시
다.]
순간 시랑은 깜짝 놀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
다.
[그....그....그 일은 황상의 성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비직은 감히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대인께서는 용서....용서 해 주시기 바
랍니다.]
[내가 대만에 가고 싶은 건 단지 국성야께서 대남과 대북을 개간하여
새로운 도시를 일으키신 걸 직접 보고 싶어서입니다. 내가 대만에 가면
그대는 나의 교회를 자주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그대 자신이
직접 말한 것입니다. 난 단지 그대의 인간성이 좋고 게다가 옛날에 나
를 따른 적이 있어서, 또 우리들은 옛 상사와 옛 부하의 관계라 방법을
강구하여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는 겁니다. 내가 대만에 가서 한두 달쯤
놀고 온다 해도 그대가 말하지 않고 내가 말하지 않으면 황상께서도 모
를 것입니다.]
시랑의 표정은 극도로 난처했다. 그는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위 대인, 그 일은 실로 난처한 일입니다. 물론 대인의 명령을 비직이
따라야 옳겠지만 황상께서 아시게 되면 소인은 문책받을 것이고 소인으
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황제께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그건 황제를 기만하는 대죄를 범하는 것인데 비직이 어찌 감히 그런 일
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앉으세요, 앉으세요. 시 장군께서 난처하시다면 더 이상 거론하지 않
겠소.]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기군(欺君)의 죄라는 말이 나왔으니 솔직히 털어놓겠는데 나도 황상을
기만했던 일이 여러 번 있었소. 그렇지만 황상께선 번번히 넓으신 도량
으로 욕을 몇 마디 하셨을 뿐 크게 문제삼지 않으셨습니다.]
시랑이 말했다.
[예, 예. 사람들은 모두 황상께서 위 대인을 대하시는 심후한 은택(恩
澤)은 실로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군신(君臣)이 그처럼 허물없
이 지낸다는 건 정말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그러나 비직 같은 소장외신
(小將外臣)이 어찌 감히 위 대인님의 흉내를 낼 수 있겠습니까?]
위소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 장군의 말씀을 들어 보면 마치 담력이 아주 작은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소문에 시 장군께서 대만을 함락
한 후 제문을 한 편 써서 국성야에게 받쳤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시랑이 말했다.
[대인께 아룁니다. 국성야(國姓爺)란 세 글자는 더 이상 거론할 수 없
습니다. 대청나라의 국성(國姓)은 애신각라(愛新覺羅)입니다.]
第127章. 대만을 다스리는 위소보
[알고 보니 청나라 황제들은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씨를 지니고 있
었구먼.]
시랑은 말했다.
[정성공(鄭成功)에 대해서 말하면, 그의 성씨는 명나라에서 하사한 성
씨입니다. 때문에 비직은 그 제문(祭文)에서 감히 금기(禁忌)
된 사항을 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위소보가 트집을 잡을 것 같아서 미리 선수를 친 것이었다. 비록
국성야(國性爺)란 이름을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정성공이 명나
라에서 하사받은 성은 주(朱)씨였다. 따라서 그의 국성(國性)은 명나라
의 국성이지 청나라의 국성이 아니었다. 그러니 만약 위소보가 그 세
글자로 문제를 확대하여 조정에 보고한다면 큰 화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위소보는 무식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
했는데, 시랑이 변명을 늘어놓자 도리어 그를 깨우쳐준 격이 되었다.
[시 장군께서는 전에 명나라의 작록(爵祿)을 받았으니 명나라 때 사용
하던 국성야라는 말을 잊지 못했다 해도 나무랄 수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 대청(大淸)에 정말 충성을 맹세하셨다면 마땅히 정성공을 역성(逆
性), 위성(僞姓), 비성(四生), 구성(狗性)이라고 일컬었어야 옳았습니
다. 국성이라거나 하사한 성이라거나 하고 부르면 곤란하지요.]
시랑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매우 못마
땅하게 여겼지만 이 일로 그와 입씨름해 봐야 자기가 불리할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그가 정성공을 사성(賜性:하사받은
성)이라 칭한 것은 확실히 아직 전조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위소
보가 말했다.
[시 장군은 그 제문을 틀림없이 아주 잘 지으셨을 텐데 내게 좀 들려주
시지 않겠습니까?]
시랑은 전쟁터에 나가서 싸움만 할 줄 알았지 제문 같은 건 전혀 쓸 줄
몰랐다. 이 제문은 그의 참모 중의 한 명인 사야(師爺)가 써준 것이었
다. 그 사야는 퍽이나 재능이 있었다. 제문을 잘 지어 준 덕분에 시랑
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내심 기뻐했다. 그리고 그중 많은
구절들을 가슴에 기억한 채 자주 남에게 들먹이곤 했었다.
[비직이 엉터리로 몇 구절을 적어 본 것이니 대인께서는 너무 흉보지
마십시오.]
그는 제문 중의 몇 구절을 외었다. 위소보는 그 구절을 외는 걸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정말 훌륭한 문장입니다. 나는 이런 문장을 죽었다 깨어나도 써낼 수
없을 것이오. 설사 남이 지은 걸 나보고 외우라 해도 아마 열흘은 걸릴
것입니다. 시 장군의 재능과 뛰어난 기억력에 정말 탄복 했소이다.]
순간 시랑은 얼굴을 붉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넌 내가 쓴 게 아니고 남이 쓴 걸 뻔히 알면서 이처럼 나를 비꼬는구
나.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너와 입씨름할 필요가 없다.)
위소보가 말했다.
[그중 노중궁사(盧中窮士), 의소불위(義所不爲)란 여덟 자는 무슨 뜻입
니까? 나는 학문이 아주 형편없기 때문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시랑은 말했다.
[노중궁사는 오자서(伍子胥)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왕년에 그가 초(楚)
나라에서 오(吳)나라로 피신할 때 강변에 이르러 한 어부의 도움으로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부가 먹을 걸 구하러 간 사이에 오
자서는 추병(追兵)이 따라올까 봐 강변에 있는 갈대밭에 몸을 숨겼습니
다. 이윽고 어부가 돌아와서 갈대밭에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노중인(盧中人), 노중의 궁사(窮士)!' 후일 오자
서는 오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는 초나라를
평정한 후 초평왕(楚平王)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낸 다음에 삼백 번 채
찍질을 가하여 그의 부친과 형님을 살해한 복수를 했습니다. 사성(賜
姓)....정성공은 전에 저의 부모처자를 죽였기 때문에 대만 사람들은
제가 대만을 평정하면 똑같은 복수를 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비직은
그 제문에서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하늘
에 있는 정성공의 영혼도 안심하고 대만의 군민들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랬었군요. 시 장군은 자신을 오자서에 비유하시는군요?]
[오자서는 영웅호걸인데 비직이 어찌 감히 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자서의 집안이 모두 화를 당했고 홀몸으로 도망 나왔으며 결국 군대
를 이끌고 다시 돌아가 원수를 갚았다는 그 일절(一節)이 비직의 경우
하고 비슷했을 뿐입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쪼록 시 장군의 장래가 오자서와 크게 다르길 바라겠소. 그렇지 않
으면 실로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순간 시랑은 오자서가 오나라에서 큰공을 세웠지만 훗날 오왕(吳王)한
테 죽임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안색이 변하면서 술잔
을 쥐고 있던 손을 벌벌 떨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소문에는 오자서가 큰 공을 세운 후 거만해져서 오왕한데도 아주 불경
하게 대했다는데 시 장군, 그대가 자신을 오자서에 비유하는 건 아주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대의 그 제문(祭文)은 이미 벌써 북
경성에 전해져서 황상께서도 필시 보았을 터인데 만약 누군가 황상께
모함을 한다면 내가 보기에 그대가 세운 큰 공이 물거품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오....]
시랑이 급히 말했다.
[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비직이 말한 건 오자서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
는 겁니다. 이....이것은 완....완전히 다릅니다.]
[그대의 제문은 도처에 퍼졌습니다. 시 장군 자신을 오자서와 비유한
것을 천하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순간 시랑은 벌떡 일어나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황상께서 성명(聖名)하시고 은덕이 산과 같기 때문에 공을 세운 신하
들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비직은 좋은 주군을 모시고 있기 때문
에 오자서보다는 훨씬 운이 좋은 편이죠.]
위소보는 말했다.
[물론 그 말은 틀리지 않지만 오자서의 속셈이 뭔지는 나도 잘모릅니
다. 그렇지만 전에 연극을 볼 때 오왕(吳王)이 그를 죽이려하자 오자서
는 자신의 눈을 파내어 성문 위에 올려놓으라고 하더군요. 그래야만 월
(越)나라 군사들이 경성으로 진격하여 오나라가 멸망하는 걸 볼 수 있
다고 했죠. 나중에 과연 오나라가 멸망했습니다. 시 장군은 문무전재
(文武全才)해서 틀림없이 이 이야기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죠?]
순간 시랑은 자기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꿈에도 오자서가 죽기 직
전에 말했던 그 몇 마디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자기의 그제문 중에 '노
중궁사, 의소불위'란 말은 오자서가 행하던 일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만 자신을 오자서에 비유한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제문 중에서 오자서
를 거론할 때 단지 편시북구(鞭屍復仇)를 말했는데 뜻밖에도 위소보는
저주망국(詛呪亡國)에 그 일을 결부시킨 것이다. 만약 이처럼 크나큰
죄명을 자기의 머리에 얹어 놓는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위소보의 이런 얘기가 만약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아무리 황상이 성명
(聖名)하여 벌을 내리지 않더라도 속으로 분명 개운치 않게 여길 것이
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승진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정성공의 사당에 간 걸 몹시 후회했다. 또한 사야로 하여
금 그 제문을 쓰게 한 것도 몹시 후희하였다. 그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
청히 서 있을 뿐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위소보는 말했다.
[시 장군, 황상께서 친정(親政)하신 후 첫번째로 큰일을 하신 게 뭐
죠?]
[간신 오배를 제거하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배가 비록 간신이긴 하지만 그는 고명대신이며 왕년에
공성파적(攻城破敵)할 때 우리 대청을 위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때문
에 황상께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과인이 오배를 제거하면 아
마 어떤 사람은 과인이 공신(功臣)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며
그리고 무슨 조(島), 무슨 궁(弓)이라고 말할 것이오.' 그게 무슨 말인
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소이다.]
[조진궁장(島盡弓藏)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당신도 이처럼 말씀....]
시랑이 얼른 말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 황상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성어(成語)를 말한
것입니다.]
[그대는 새를 잡은 후에 활을 버린다는 말로 황상이 오배를 제거하신
걸 비방하는 겁니까?]
시랑이 급히 말했다.
[대인께서 제게 무슨 성어냐고 물으셨기에 비직은 대인의 물음에 답했
을 뿐 어찌 감히....감히 황상을 비방하겠습니까?]
위소보의 두 눈이 그를 빤히 주시하고 있는 터라 당황한 시랑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예로부터 신하가 만약 자신이 세운 공로에 비해 상이 박
하다고 여기면 황제는 그를 몹시 미워했다. 신하의 입에서 원언(怨言)
이 나오지 않고 단지 속으로만 억울하다고 여겨도 그 죄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시랑이 당황하는 바람에 위소보에게 유도되어 '조진궁장'이란 말을 했
던 것이다. 물론 말이 나오자마자 즉시 잘못된 줄 알았지만 이미 거두
어들일 수는 없었다. 더욱이 위소보말고도 임흥주, 홍조 두 사람이 옆
에 있어서 부인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난 시 장군께서 말씀하신 '조진궁장'이란 말이 황상을 비방하는 것인
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조정의 대학사, 성서(尙書), 한림(翰林)은 알
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흑백을 가리게 합시
다. 내가 황상과 함께 지냈던 날은 실로 적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바
에 의하면 황상께선 남이 그를 오생어탕(烏生魚湯)이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셨지 조진궁장이라 말하는 것은 듣기 싫어 하셨습니다. 비록 똑
같이 두 마리 새지만 이 가운데는 아마 크게 다른 점이 있을 겁니다.
한 마리는 좋은 새고 한 마리는 나쁜 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순간 시랑은 경악과 분노가 엇갈렸다. 내심 네가 날 이처럼 모함한다면
아예 너희 셋을 모두 죽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막상 생각이 이
쯤에 이르자 자기도 모르게 눈빛에 흉광(兇光)이 서렸다. 위소보는 그
의 돌변한 얼굴을 보고 내심 놀랐다. 그는 즉시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시 장군,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거두어들일 수 없는 것이오. 그대가
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길뿐입니다. 첫째는 즉시 나와 임흥주, 홍조,
세 사람을 죽인 다음, 나의 부인들과 아들까지 모두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뒤 대만으로 군대를 끌고가 자립하여 왕이 되는 겁니다. 다만
그대가 통솔한 군대가 모두 대청의 관병이라 그대를 따라 반란을 일으
킬지 궁금하군요. 더욱이 대만의 군민들도 그대를 따를지 모르겠습니
다.]
이때 시랑은 속으로 한참 이 일을 궁리하고 있었는데 그가 자기의 속셈
을 꿰뚫어보자 즉시 흉광을 거두며 급히 말했다.
[비직은 절대로 그런 뜻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대인께서는 지나친
의심으로 비직의 죄명을 무겁게 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대인께서 말씀
하신 두 번째 길은 어떤 것인지 감히 여쭈어 보겠습니다.]
위소보는 그의 말투가 부드러워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두 번째 길은 필히 형제와 임흥주, 홍조 두 분의 도움이 있어야만 이
루어질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시 장군께서 황상을 거론할 때 확실히
오(烏) 자를 말씀하셨고 황상을 오생어탕이라 평가하신건 아주 잘하셨
습니다. 훗날 형제가 황상을 뵙게 되면 틀림없이 시 장군의 충성심을
말씀드릴 것이며 아울러 시 장군이 만약 오자서라면 오왕의 강산을 만
만년 동안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서시(西施)
같은 미인은 물론이고 동시, 남시, 북시, 중시마저도 한꺼번에 모두 강
탈하여 오왕께 바쳤을 것이라고 말씀드릴 겁니다. 오자서가 연연하고
있는 건 오로지 자신이지만 시 장군이 연연하는 건 우리 대청의 성명천
자(聖明天子)가 아닙니까? 마음이 올바르면 좋은 결과가 있기 마련입니
다. 이렇게 되면 황상께서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시면서 시 장군께
자연히 큰 벼슬을 내리실 것이오.]
이러한 말을 듣게 된 시랑은 실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급히 읍하며
말했다.
[만약 대인께서 황상께 이처럼 미언(美言)을 해주신다면 비직은 영원히
대인의 은덕을 잊지 않을 겁니다.]
위소보는 몸을 일으켜 답례하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
[이 얘기들은 별로 어려운 얘기가 아니오. 내 기분이 좋을 때 자연히
황상께 말씀드릴 것이오.]
시랑은 내심 생각했다.
(만약 너를 대만에 가지 못하게 하면 네 녀석의 기분이 어떻게 좋아질
수 있겠느냐?)
그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대만은 이제 막 평정됐기 때문에 민심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직은 황상께 주명(奏明)하여 위존망중(位尊望重)한 대인 한 분을 파
견하게 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분으로 하여금 성상의 덕음(德音)을
드러내게 하여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것입니다. 전 이 대인이란 분으로
위 대인이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직은 즉시 황상께 배표(拜
表)하여 대인을 대만의 선무로 강지하시길 간청하겠습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대가 배표상경(拜表上京)하여 황상의 지의를 기다린다면 오고가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몇 달은 지체될 것이오. 더욱이 이런 일은 잠시도
지체할 수 없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시 장군께서 즉시 황상이 믿는 대
인 한 분을 모시고 대만에 함께 가서 철저히 조사해야만 그대가 대만에
서 자립하여 왕이 되겠다는 속셈이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다. 밖
에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대가 명호(名號)마저도 정했다고 합니다.
무슨 '대명대만정해왕'(大明臺灣靖海王)
이라고 한다던데, 맞습니까?]
시랑은 '대명대만정해왕'이란 말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네가 황량한 섬에 있으면서 어떻게 떠도는 소문을 들을 수 있겠느냐,
이건 분명히 위소보 네가 꾸며낸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말이 북경에
전해지면 조정에서는 틀림없이 그대로 믿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분명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얼른 말했다.
[그건 유언비어입니다. 대인께선 절대로 믿지 마십시오.]
위소보는 담담히 말했다.
[물론입니다. 난 그대와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라 당연히 믿지 않습니
다. 그렇지만 시 장군께서는 대만을 평정할 때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
문에 틀림없이 원한관계를 적지 않게 맺었을 것이오. 따라서 그대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 그대를 중상모략한다면 내가 보기에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옛말에도 조정에 사람이 없으면 벼슬길에 오
르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과연 조정의 대신중에 어느 분이 자신의 목숨
을 내걸고 전력으로 시 장군을 옹호해 주겠습니까?]
시랑은 더욱 암담했다. 조정에 자기를 옹호해 줄 사람은 전혀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왕년에 북경에서 그런 고생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래
도 정말 자기를 위해 한마디 말이라도 해준 사람은 오직 눈앞에 있는
이 위소보뿐이었다.
[대인께서 지적해 주셔서 비직은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기왕
사태가 긴박하게 전개되었으니 비직이 내일 대인을 모시고 함께 대만으
로 가서 진상을 밝혀 드리겠습니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 사이가 어디 보통 사이입니까? 하물며 시 장군을 위한
일인데 어찌 제가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다시 바다로 나가면 배멀미를 하겠지만 기꺼이 함께 가
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처자와 자식들과 항상 함께 지냈기 때문에 그들
과 헤어지는 게 좀 섭섭하군요?]
시랑은 속으로 몰래 욕을 퍼부었다.
(네가 수없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한 번도 네가 배멀미하는
것을 못 봤는데 갑자기 배멀미라니, 빌어먹을!)
그러나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인의 여러 부인과 공자, 그리고 아가씨도 당연히 함께 가셔야죠. 비
직이 제일 큰 배를 선택하여 대인을 모실 겁니다. 요즘은 해상에 풍랑
이 없으니 대인께선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위소보는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정히 그러시다면 형제도 하는 수 없이 시 장군을 위해 기꺼이 가겠습
니다.]
다음날 위소보는 일곱 부인과 호두, 동추 두 아들과 쌍쌍이란 딸을 대
동하고 시랑의 기함(旗艦)에 올랐다. 팽 참장이 저지하려 하자 시랑이
즉각 명령을 하달하여 그를 큰나무에다 묶었다. 이윽고 배들은 닻을 올
리고 대만을 향해 미끄러져 갔다. 위소보는 수년 동안 머물러 있었던
통흘도를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노름꾼이 이미 섬을 떠났으니 여기는 더 이상 통흘도라고 부를 수 없
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고쳐 줘야 할 텐데....]
시랑은 말했다.
[옳습니다. 대인께선 어떤 이롬이 좋을 것 같습니까?]
위소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전에 황상께서 사람을 보내어 성지를 전달할 때 황상께서는 주문왕에
게 강태공이 있었고 한광무에게 엄자능이 있었으며 모든 성명천자에게
는 필히 한 사람의 낚시질을 잘하는 충신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황상께
서 날 이곳으로 파견하여 낚시질을 하라고 하셨으니 우리 저 섬을 조어
도(釣魚島)라고 부릅시다.]
시랑은 손뼉을 치며 동조했다.
[대인께서 지어 준 이름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을 겁니다. 한편으론 황
상을 주문왕, 한광무에 비하여 공송하고 한편으론 대인께서 강태공처럼
문무전재(文武全才)하시고 엄자능처럼 청고풍아(淸高風雅)한 걸 드러내
는 이름이군요! 맞습니다. 맞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저 섬을 조어도라
고 부릅시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나 통흘후는 조어후(釣魚侯)로 이름을 바꿀 수밖에 없겠
구려. 더욱이 훗날 다시 승진되면 무슨 조어공(釣魚公)이라고 부를 게
아닙니까? 그건 좀 거북스럽군요.]
시랑이 웃으며 말했다.
[어부지리란 크게 이익을 얻는다는 뜻인데 그것과 비슷한 듯하니 오히
려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황상께서 날 통흘백(通吃伯) 통흘후(通吃侯)로 봉하실 때 난 아주 듣
기 좋다고 여겼는데 뜻밖에도 나의 부인들은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
니다. 훗날 황상께 주청하여 조어후로 바꾼다면 아마 모두 기뻐할 겁니
다.]
시랑은 속으로 비웃으며 내심 생각했다.
(통흘백이니 통흘후니 하는 건 모두 황상께서 심심풀이로 너한테 봉해
준 것이고 전혀 존중하는 뜻이 서려 있지 않았다. 그러니 설사 조어후
로 바꾼다 해도 뭐가 듣기 좋겠는가?)
그러나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어초경독(漁樵耕讀)이라 말하지 않습니까? 어부가 서열로 따
지면 첫번째이고 글 읽는 사람은 네 번째입니다. 따라서 조어공, 조어
왕이란 봉호(封號)가 장원(狀元), 한림보다 훨씬 존귀합니다.]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위소보가 탄 시랑의 기함은 대만에 도착하여 안
평부에 상륙했다. 가는 길에 임흥주와 홍조는 옛날에 정성공이 어떻게
홍모병을 대파했는지 손짓까지 해가며 위소보에게 들려주었다.
이때 위소보는 아주 홍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다. 시랑이 그를 대만에 데
려왔기 때문에 더 이상 그를 비꼬지도 않았다. 시랑은 장군부에서 성대
한 연회를 베풀어 위소보를 극진히 대접했다. 그런데 한참 술을 마시고
있을 무렵 갑자기 경성에서 유지(諭旨)가 당도했다. 시랑은 급히 밖으
로 나가서 성지를 받았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
다.
[위 대인, 성지입니다. 대만을 포기하라는군요! 이거야말로 큰일이 아
닙니까?]
위소보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대체 무슨 이유입니까?]
시랑이 말했다.
[비직이 전지대신(傳旨大臣)께 알아낸 바에 의하면 조정의 대신들이 황
상께 건의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대만이 홀로 해외에 동떨어져 있기 때
문에 도적들의 소굴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조정에서
관리하기 어렵고 더욱이 대군을 파견하여 주둔하면 많은 군량이 소모되
어,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이랍니다.]
위소보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되물었다.
[시 장군께서는 조정의 여러 대노(大老)들의 진짜 저의가 뭔지 아십니
까?]
순간 시랑은 깜짝 놀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설마....설마 오자서의 얘기가 벌써 북경에 전해졌단 말입니까?]
위소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옛날에도 호사불출문(好事不出門), 악사전천리(惡事傳干里)란 말이 있
습니다. 조정에서는 장군이 정말 '대명대만정해왕'인지 뭔지가 될까 봐
걱정한 겁니다.]
시랑이 말했다.
[이....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대만의 수십만 백성들은 여기서 이
미 수십 년 동안 터전을 잡고 살아왔는데 한꺼번에 내지로 옮긴다면 그
들이 어떻게 생활을 꾸려 나가란 말입니까? 게다가 만약 강제로 이주시
키면 틀림없이 큰 변고가 생길 것입니다. 더욱이 대청의 관병이 일단
떠나면 흥모병이 다시 와서 점거할 게 아닙니까? 우리 중국인들이 피땀
으로 쌓아올린 기업(基業)을 홍모귀한테 고스란히 넘겨주는 것인데 어
찌 마음이 내키겠습니까?]
위소보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일은 전혀 만회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소. 황
상께서는 백성들을 제일 걱정하시기 때문에 장군께서 단지 백성들한테
청명(請命)할 수만 있다면 아마 황상께서도 허락하실 겁니다.]
시랑은 다소 마음이 놓여 말했다.
[그렇지만 만약 조정에서 이미 헛소문이 떠돌고 있다면 비직이 황상께
그처럼 진정하는 건 마치 대만을 떠나기 싫어서, 또한 충성심이 부족해
서 그런 줄로 생각할 게 아닙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지금은 오로지 그대가 즉시 북경으로 가서 여기 사정을 직접 황상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가 북경에 당도하면 대만에서 자립하여
왕이 되겠다는 유언비어를 더 이상 믿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순간 시랑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옳습니다. 옳습니다. 대인의 가르침이 옳습니다. 비직은 내일 즉시 떠
나겠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서 말했다.
[대만의 문무백관은 대인께서 잠시 다스려 주시기 바랍니다. 황상께선
대인을 제일 신임하시기 때문에 대인께서 대만을 다스려 주신다면 조정
의 대신들도 감히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순간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내심 대만에서 벼슬을 한 번 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섕각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성지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병마대권을 나한테 넘겨주면 황상
께서 나무라실 것인데 무슨 대책이라도 있으신지요?]
시랑은 이 말을 듣자 다시 크게 망설였다. 그러다가 자기 나름대로 생
각했다.
(그는 진근남의 제자이며 반역 천지회의 일당이다. 황상께서는 비록 그
를 총애하지만 최근에는 줄곧 그를 통흘도에 유배하여 그에게 아무 권
한도 주지 않았다. 만약 그가 병마대권을 장악하여 천지회와 함께 반란
을 일으킨다면, 난....난 또 죽을죄를 짓는 게 아닌가?)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좋은 대응책이 떠올랐다.
(내가 수사(水師)를 전부 데려가면 그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
다. 설사 그가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수사를 다시 데려오면 즉시 그를
평정할 수 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병마대권을 다른 사람한데 넘겨주면 황상께서 나무라실지 몰라도 대인
께 넘겨주면 아무 하자도 없을 겁니다.]
그들은 서둘러 주연을 끝냈다.
시랑은 밤새 명령을 하달하여 대만의 문무백관을 불러다 위소보를 참견
(參見)하게 하고 그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그리고 사야를 모셔다가 위
소보를 대신하여 상주문을 쓰게 했다.
상주문에는 위소보가 우심국사(憂/L伺事)해서 특별히 대만을 잠시 다스
리고 있으니 조정에서는 심려하지 말고 아울러 천전지죄(擅專之罪)에
대해서도 용서해 달라고 했다. 또한 대만의 백성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신하가 직접 목격했으니 철수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 나니 어느새 아침이 되었다. 이윽고 시랑이 배에
오르려 하는데 위소보가 그에게 물었다.
[큰일이 한 가지 있는데 준비하셨는지요?]
[큰일 이 라니 요?]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화차화차(花差花差)!]
시랑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화차화차?]
위소보가 말했다.
[그렇소. 그러니까 이번에 그대가 대만을 평정하면서 조정의 대신들한
테 얼마를 보냈느냐 이겁니다.]
순간 시랑은 흠칫 놀라며 말했다.
[순전히 천자(天子)의 위덕(威德)을 의지하여 대만을 평정한 것이고,
조정의 대신들은 아무 힘도 쓰지 않았습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 나으리, 어찌 기분만 좋으면 옛날 버릇이 다시 발작하는 것이오?
그대가 대만을 평정하자 사람들은 모두 그대보고 금산은산(金山銀山)을
혼자 포식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할 것이오. 그런데 조정의 벼슬아치
들이 어찌 탐내지 않을 수 있겠소?]
시랑은 당황하며 말했다.
[그건 당치도 않습니다. 만약 이 시랑이 대만의 돈을 혼자 한푼이라도
챙겼다면 이번에 제가 북경에 가서 황상으로부터 능지처참을 당할 것입
니다.]
[그대 스스로 청렴결백한 관리가 되는군. 그것도 좋지만 남들까지 모두
그대처럼 청렴결백한 관리가 될 수는 없는 멉이오. 그대가 청렴결백하
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그대를 헐뜯게 될 것이외다. 그렇다면 그대는
이번에 북경에 갈 때도 역시 빈손으로 가겠단 말이오?]
시랑이 말했다.
[대만의 토산품인 목조(木彫), 죽람(竹藍), 초석(草席), 가죽상자 같은
건 좀 휴대했습니다.]
위소보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시랑은 무안해서 처음에는 얼굴이 빨개
졌지만 곧바로 크게 깨달았다. 그는 위소보를 향해 정중히 읍례를 하며
말했다.
[대인의 가르침,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비직은 이번에 하마터면 큰
화를 입을 뻔했습니다.]
위소보는 문무관원을 소집하고 말했다.
[시 장군께서 이번에 상경하는 건 백성들의 청명을 위한 것입니다. 만
약 성공하지 못하면 여러분도 모두 패가망신할 텐데 이 청명비(請命費)
를 시 장군 한 사람에게만 부담시킬 작정입니까? 노형 여러분, 여러분
이 속히 상의하여 마련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랑은 청렴결백한 관리였다. 대만에 온 후 한 번도 백성들한테 금품을
건네받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위소보는 인수받자마자 첫번 째 명령이
바로 청명비를 징수하자는 것이 아닌가?
이 무렵 대만의 백성들은 내지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
고 모두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시랑이 위소보가 제시한 계책대로
상경하여 백성들을 위해 청명한다는 걸 알게 되자 청명비를 아낌없이
내놓았다. 다행히 대만의 민간인들이 부유해서 반나절 동안에 삼십여
만 냥의 은자가 걷혔다. 위소보는 관고(官庫)에서 육십여 만 냥을 더
보태라고 명하여 모두 백만 냥을 마련했다.
아울러 시랑에게 어떤 사람한테 필히 많이 건네줘야 하고, 또 어떤 사
람한테는 적게 줘도 무방하다고 자세히 지적해 주었다. 시랑은 고마워
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날 밤 초경(初更) 무렵에야 비로소 배가 떠
났다.
다음날 위소보는 승당(升堂)하자 여러 관원들에게 말했다.
[어젯밤에 시 장군께서 경성으로 떠날 때 청명비를 아무리 거두어도 백
여 만 냥에 불과하더군요. 그래서 형제는 대만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수년간 사축(私蓄)한 돈과 일곱 부인들의 패물을 모두 긁어모아 다시
백만 냥을 마련하여 시 장군께 건네주었소이다. 어휴! 대만에서 관리가
되기란 실로 쉽지 않군요. 형제는 잠시 서리(署理)로 있는데 이미 첫날
백만 냥을 날린 셈입니다. 그야말로 난 가산을 탕진하고 말았소이다.]
그러자 대만부 지부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대인께서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실로 부처님 같습니다. 그런데 어
찌 우리가 대인께 피해를 입힐 수 있겠습니까? 공금에서 보탠 육십여
만 냥은 물론이고 위 대인께서 개인적으로 장만하신 일백만 냥도 대만
백성들이 모두 부담하겠습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들도 모두 적지 않은 돈을 내놓았기 때문에 하나같이 주머니가 비
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들이 수많은 돈을 내놓은
건 따지고 보면 모두 백성들을 위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공금을 축
낸 것도 당연히 각 지방에서 부담하셔야지 우리같이 청렴한 관리가 무
슨 돈이 있습니까? 하루 세 끼 찾아 먹고 입에 풀칠하기에도 벅찬 형편
이죠. 그러나 그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죠. 그러니 여러분은
다소 손해보더라도 본전만 거두어들이세요. 이걸 소위 애민여자(愛民如
子: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함)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관리들은 모두 크게 기뻐하며 일제히 고맙다고 치하했다. 심지
어 이 위 대인이란 분은 과연 좋은 상관이라고 생각했다. 위소보는 첫
날 등청하자마자 백만 냥을 횡령했다. 그러니 앞으로 그의 재원(財源)
은 무궁무진하게 솟아나는 샘물과 같을 것이 분명했다.
며칠 후 위소보는 제품(祭品)을 준비하라고 분부하고 정성공의 사당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그는 이 명진천하(名震天下)한 국성야란 분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다.
이윽고 사당에 당도하여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정성공의 초상화가 단정
하게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얼굴은 타원형이고 윗입술과 아랫입술,
턱에는 모두 짧은 수염이 달려 있었다. 두 귀는 아주 컸지만 눈은 실눈
이었고 눈썹은 반달처럼 생겨서 자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영웅적인 기
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실망하여 종관(從官)에게 물었다.
[국성야의 용모가 정말 저렇게 생겼습니까?]
임흥주가 말했다.
[이 초상화는 국성야 본인과 아주 닮았습니다. 국성야는 선비 출신이라
비록 영웅호걸이시지만 용모는 아주 점잖게 생기셨습니다.]
[그랬었군요.]
그러다 위소보는 초상화 양 옆에 약간 작은 초상화가 있는 걸 보자 임
흥주에게 물었다.
[저 두 사람은 누굽니까?]
임흥주가 말했다
[여자는 동태비(董太妃)이고 남자는 사왕야(嗣王爺)입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사왕야가 누굽니까?]
임흥주가 말했다.
[바로 국성야의 공자이시고 왕위를 계승하실 분이었죠.]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하! 바로 정경(鄭經)이군요? 어쩐지 정극상 그 녀석과 약간 닮았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부님이신 진 군사의 초상화는 어디에 있죠?]
임흥주가 말했다.
[진 군사님의 초상화는 없습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저 동태비는 인간성이 나빠서 저기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어서 그
녀를 끌어내시오. 그리고 즉시 사람을 시켜 진 군사의 초상화를 만들어
국성야 옆에 세우도록 하시오.]
第128章. 탐관오리 위소보
임흥주는 크게 기뻐하며 신감(神龕) 안으로 기어가 동태비의 초상화를
아래로 끌어냈다. 위소보는 정성공의 신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몇 번
절을 했다.
[국성야님, 당신은 영응호걸이시라 제 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습니
다. 그러나 이 할미는 당신의 대사를 그르쳤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매
일 당신 곁에 있으니 당신이 틀림없이 화내실 것 같아서 제가 당신을
대신하여 쫓아버리고 우리 사부이신 진 군사를 당신 곁에 모셔오겠습니
다.]
사부의 최후가 떠올라 위소보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대만 백
성들은 모두 동태비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영화
는 산업을 육성하고 학문을 장려하고 충성을 다했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대만의 제갈공명이라고 칭했다.
정극상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아무도 감히 동태비를 비난하지 못했다.
물론 진영화를 찬양하는 말도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위소보가 이런 명령을 하달하자 사람들은 무척 통쾌하게 여겼다. 게다
가 국성야 신상 앞에서 절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백성들은 더욱 감격했다. 비록 이 위 대인이란 인물은 돈을 지나치게
요구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진 군사의 제자라 대만의 군민들에게 호의를
느낀다고 생각했다. 시랑이 청병을 이끌고 대만을 평정하는 바람에 명
나라의 해외에 남아 있는 강산이 완전허 소멸했었다. 그러므로 시청위
탐(施淸韋貪:시랑은 청렴하고 위소보는 탐욕스럽다는 뜻)이란 말이 생
겨났지만 백성들은 그래도 이 위 대인이란 분이 대만에 남아 있어 주길
바랐고 될 수 있으면 시랑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한 달 좀 넘게 지나자 시랑이 수군을
이끌고 다시 대만으로 돌아왔다. 위소보가 해안으로 마중나가 보니 시
랑이 일품대원(一品大員) 복장을 입고 있는 대신 한 사람과 배에서 나
왔다. 그 대신은 도판(跳板) 위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위 형제 잘 있었는가? 이 형님은 정말 보고 싶어 죽을 뻔했네.]
그 대신은 다름아닌 바로 색액도였다. 순간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재
빨리 앞으로 달려나갔다. 두 사람은 갑판 위에서 서로 손을 맞잡고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색액도가 웃으며 말했다.
[아우님, 반가운 소식을 갖고 왔네. 황상께서 그대보고 북경으로 올라
오라는 성지를 내렸네.]
순간 위소보는 기쁨과 근심이 엇갈렸다.
(내가 만약 북경에 가고 싶었다면 벌써 갔을 것이다. 소황제는 아주 고
지식해서 절대로 나한테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천지회를 쳐
부수는 일을 수락하지 않으면 그는 나를 만나 주지도 않을 것이다.)
시랑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성은의 호탕함은 실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황상께선 대만의 백성들이
내지로 거처를 옮기는 지의를 철폐하셨습니다.]
이 무렵 대만 군민들은 한 달 넘도록 날이면 날마다 모두 황제가 대만
을 포기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황상의 입은 금구(金
口)이니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로 번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시랑이 이와 같은 말을 하자 해안의 관원들은 참다 못해 큰소리로
환호하면서 일제히 소리쳤다.
[만세! 만세! 만만세!]
이 소식이 전해지자 도처에서 환호성이 터졌고 이어서 폭죽소리가 요란
하게 울려퍼졌으며 설날보다 훨씬 더 화려한 축제 행사가 벌어졌다.
색액도가 전달한 성지는 위소보의 기운을 몹시 북돋아주는 내용이었다.
그가 즉시 상경하면 별도의 지시가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황
제의 은혜에 감사드렸다. 두 사람은 대중을 피해 내당으로 들어가 밀담
을 나누었다. 색액도가 말했다.
[아우님, 황상께선 그대가 아직도 머뭇거릴까 봐 특별히 나로 하여금
달려와서 촉가(促駕)토록 한 것이오. 그대는 황상께서 어떤 임무를 맡
기시려는지 알고 있소?]
위소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황상의 신기묘산을 우리들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색액도는 그의 귀에 대고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나찰귀(羅刹鬼)를 쳐부수는 것이오.]
위소보는 잠시 어리벙벙해졌다. 그러나 이윽고 껑충 뛰어오르면서 큰소
리로 외쳤다.
[정말 묘책 중의 묘책입니다!]
색액도가 말했다.
[그대가 이 소식을 전해 들으면 분명 아주 기뻐할 거라고 황상께서 말
씀하셨는데 과연 틀림없군. 아우님, 나찰귀들은 순치(順治) 황제 때부
터 흑롱강 일대를 점령하였으며 그 기세 또한 아주 대단하오. 그래도
선제(先帝)와 황상께선 도량이 넓으셔서 구차하게 따지지 않았소. 그런
데 뜻밖에도 나찰귀들은 날이 갈수록 점차 땅을 점령해 오고 있소. 요
동(遼東)은 우리 대청의 근거지인데 어찌 외국놈들이 날뛰는 걸 용납할
수 있겠소? 지금은 삼번(三藩)의 반역도들과 대만의 정씨를 모두 평정
했으므로 천하무사하니 황상께서는 나찰을 쳐부수기로 결심한 것이오.]
위소보는 통흘도에 수년 동안 갇혀 있었기 때문에 답답하기가 노름을
하다 망통을 연거푸 열 번 잡은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이 소식을 접
하자 마음이 흡족해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색액도가 다시 말을
이었다.
[황상께선 나찰국 대한(大汗)에게 여러 차례 유지(諭旨)를 보냈지만 상
대방에서는 끝내 답신이 없었소. 나중에 하란국(荷蘭國) 사신으로부터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나찰국이 비록 크긴 하나 역시 오랑캐 나라라
중국 문자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황상의 유지를 받고도 도무지 이
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답신을 하지 못한다고 했소. 그렇지만 나찰병들
은 동쪽으로 침략하는 일을 시종일관 중단하지 않았소. 그럼에도 불구
하고 황상께선 우리 중국은 인의(仁義)
를 중요시하므로 무식한 오랑캐들을 깨우쳐야지 함부로 죽일 수 없다고
하셨소. 따라서 먼저 그들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어
야 하며, 만약 그래도 여전히 굽힐 줄 모른다면 그때는 별수없이 무력
으로 주륙(誅戮)을 해야 한다고 하셨소. 더욱이 조정의 대신들 중에 나
찰어에 능통한 사람은 오직 위 아우님 한 사람밖에 없지 않소?]
순간 위소보는 생각했다.
(내가 나찰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소황제가 내게 항복한 것이구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짓발짓을 하며 기뻐했다. 색액도가 웃으며 말했
다.
[아우님이 나찰어에 능통한 것도 대단하지만 또 한 가지 지니고 있는
재주는 누구도 따르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나찰국의 섭정 여왕은 대한
(大汗)의 누님이고 아우님의 옛 애인이라던데 맞습니까?]
위소보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찰 여인은 온몸이 노란 털로 덮여 있습니다. 그 소비아란 섭정 여왕
은 얼굴은 예쁘게 생겼지만 피부는 생각보다 아주 거칠더군요.]
색액도가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아우님을 출마시킨 건 다시 그녀의 피부를 몇 번 더 만져 보
라는 것이 아니겠소!]
위소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흥미 없소! 흥미 없소!]
[아우님께서 그 섭정 여왕을 만져 주기만 하면 양국이 친해질 수 있고
앞으로 전쟁이란 재앙을 면할 수 있는데 이거야말로 국태민안의 큰일이
아니겠소?]
[황상께선 나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싸우라는 게 아니라 나더러 십팔
막이라는 신공(神功)을 전개하라는 것이군요. 하하하!]
위소보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위소보가 나찰국이 흑룡강 일대를 점령
한 자초지종을 묻자 색액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명나라 만력년(萬曆年)부터 나찰인들은 동침(東侵)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찰인들은 시베리아의 탁목사극(托木斯克), 엽니색사극(葉尼塞斯
克), 사고차극(邪庫車克), 악곽차극 등지에 성을 건축했다. 순치(順治)
6년에는 나찰인들이 녹정산에 성을 건축하고 아이파청(阿爾巴靑)이라고
불렀다. 아울러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면서 온갖 약탈을 했다.
순치 9년에는 만청(滿淸)의 영고탑(寧古塔) 도통(都統)이었던 해색(海
色)이 군사 이천을 거느리고 흑룡강 연안에서 나찰병을 격퇴시켰다. 나
중에 다시 송화강 일대에서 접전이 벌어졌지만 만청의 도통 면안탈리
(明安達理)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나찰군을 대파했다. 이윽고 나찰병
들은 서쪽으로 퇴각하면서 니포초(尼布楚)에다 성을 구축했다. 그리고
모스크바로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원병을 청했다. 그 사자는 모스크바
로 가는 도중에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즉 흑룡강 일대에는 온통
금은이 매장되어 있고 소와 말이 떼를 지어 있으며 주민들의 가옥은 모
두 황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찰인들은 횡재하고 싶
은 마음에 떼를 지어 동쪽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연도에서 노략질을 하
면서 백성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그중 카자흐 기병들은 제일 악랄했
다. 마침내 만청(滿淸)의 영고탑 도통인 사이호달(沙爾呼達)과 영고탑
장군인 파해(巴海)가 군대를 이끌고 승리를 거두었으며, 나찰병의 통군
대장을 죽였고 카자흐 기병대를 절반 이상 죽여 버렸다. 그러자 나찰인
들은 감히 더 이상 흑룡강 일대로 내려오지 못했다.
강희 초년에 이르자 나찰군은 다시 대거 동침했고, 아극살 성(雅克薩
城)을 근거지로 삼았다. 강희 황제는 어른이 되자 나찰인들의 야심이
만만찮다는 걸 알고 길림(吉林)의 수사(水師)를 흑룡강 일대로 이동시
켜 엄밀한 수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나찰군들도 끊임없이 군대를
증가시켰다. 그들은 또한 아극살 성을 아주 튼튼하게 건축하는 동시에
나찰국 본부로 통하는 연도에 정거장을 설치하여 흑룡강 일대의 광대한
토지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했다.
그 무렵 강희는 전력을 다해 오삼계와 싸우고 있었던 터라 나찰의 침략
을 방어할 겨를이 없었다. 삼번(三藩)을 평정하고 대만의 정씨가 항복
한 후에야 비로소 나찰에 대응할 수 있었다. 더욱이 위소보가 모스크바
에 간 적이 있어서 피방(彼邦)의 정사를 잘 알고 있는 데다가 나찰국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는 섭정 여왕과 보통 관계가 아니란 걸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를 중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위소보가 대만에 당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즉시 색액도에게 명하여 소환시켰던 것이다.
마침내 위소보는 처자를 데리고 북경으로 향했다.
물론 그가 대만에서 횡재한 청명재(請命財)도 부하에게 명하여 배에 실
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시랑한테 대만 정씨의 장령(將領)인 하우(何
佑)와 임흥주, 홍조, 그리고 오백 명의 등패병(藤牌兵)
을 달라고 했다. 시랑은 그가 이번에 상경하면 틀림없이 중용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자기는 조정에서 그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두말 않고 승낙함과 아울러 그와 색액도에게 후한 예물을 전해
주었다.
대만의 백성들은 내지로 거처를 옮기라는 조정의 지의(旨意)를 철폐시
킨 데는 이 소년 위 대인의 공이 크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
는 마음으로 만민산(萬民傘), 호민기(護民旗) 등의 선물을 수없이 보내
왔다. 심지어 위소보가 배에 오를 때는 신발올 벗어 높이 들어 올리면
서 작별인사를 했다. 이 탈화(脫靴)의 인사법은 본시 청렴결백하고 백
성에게 존경받는 지방관에게만 사용했다. 그런데 위소보 같은 탐관오리
가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있었으니 실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하루가 지나기 전에 배는 당고(塘庫)에 당도했다. 위소보, 색액도 일행
은 상륙하여 육로로 천진(天津)을 지나 북경에 이르렀다. 위소보는 도
문(都門) 안으로 다시 들어오자 실로 별천지에 온 것 같이 몹시 흥분했
다. 그는 즉시 황제를 만나 보러 갔다.
강희는 서재에서 그를 접견했다. 위소보는 강희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끓고 절을 하고 나서 몸을 일으키려다 문득 서러운 생각이 들어서 바닥
에 잎드린 채 목놓아 통곡했다. 강희는 위소보가 온 걸 보고 속으로 몹
시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울화가 치미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에 비록 그를 중용하지만 버릇은 단단히 고쳐 놓아야겠다. 감히
성지를 누차 거역하다니. 이번 기회에 버릇을 고쳐 두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날뛰게 될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위소보가 만나자마자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강희의 마
음도 약해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네 녀석은 어째서 만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냐?]
위소보는 울면서 말했다.
[평생 다시는 황상을 못 만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만
나 뵙게 되어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강희가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라! 일어나! 어디 네 얼굴 좀 보자.]
위소보는 몸을 일으켰다. 얼굴은 온통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되어 있었
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강희는 웃으며 말했다.
[빌어먹을! 그 사이 네 녀석의 키가 조금 컸구나.]
문득 동심이 되살아나서 어좌(御座) 아래로 내려오며 말했다.
[누가 더 큰지 어디 재 보자.]
그러면서 다가오더니 그와 등을 맞대고 섰다. 위소보는 그와 신장이 비
슷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상이 신장을 비교해 보자는데 어찌
황상보다 클 수가 있겠는가? 위소보는 즉시 무릎을 약간 구부렸다. 강
희가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의 머리를 재어 보니 자기가 약 일촌(一寸)
정도 더 큰지라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의 키는 비슷하구나!]
그는 몸을 돌리고 몇 걸음 떨어지더니 웃으며 말했다.
[소계자(小桂子), 그 동안 자식을 몇이나 두었느냐?]
[소인이 못난 탓에 아들 둘하고 딸 하나뿐입니다.]
강희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 일은 내가 너보다 한 수 위구나. 난 이미 아들이 넷이고 딸은 셋이
나 있다.]
[황상께서는 웅재대략(雄才大略)하신데 어찌 소인이 비할 수 있겠습니
까?]
강희는 웃으며 말했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는데도 너의 학문은 조금도 진보되지 않았구나.
자식을 낳는 일이 웅재대략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냐?]
[옛날 주문왕(周文王)에게는 아들이 백 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좋은
황제라면 아들도 틀림없이 많은 것입니다.]
강희가 웃으며 되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황상께서는 소인으로 하여금 고기를 낚으라고 통흘도로 보내셨기 때문
에 우리 두 사람은 주문왕과 강태공에 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문
왕에 관한 일을 소인이 상세하게 알고 있어야만 황상을 뵙게 될 때 서
슴없이 대답할 게 아닙니까?]
최근 몇 년 동안 강희는 오삼계를 상대하여 싸우느라고 밤낮으로 분주
했다. 한편, 위소보란 소년 신하가 곁에 없어 우스운 얘기로 답답한 마
음을 풀어 주지 못해서 때로는 허전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군
신(君臣)이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반갑겠는가? 한참 동안 정담
을 나눈 후 통흘도에서 지냈던 일과 대만의 풍토와 백성들이 살고 있는
실정을 물어 보았다. 위소보가 말했다.
[대만이란 곳은 토지가 기름지고 기후가 따뜻하기 때문에 많은 농산물
이 생산됩니다. 따라서 백성들도 아주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더욱이
황상께서 그들이 대만에 거주하는 걸 허락하신 것을 알자 모두 황상께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모두들 하나같이 황상을 영락없는 오생어탕
이라고 말합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사란 백성들한데 폐를 끼치지 않는 게 급선무다. 백성들이 대만에서
편안히 살고 있는데 그들로 하여금 내지로 거처를 옮기게 한다는 건 너
무나 크나큰 폐를 끼치는 것이다. 조정의 대신들은 대만의 실정도 모르
고 헛되이 의논을 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대사를 그르칠 뻔했다. 너와
시랑은 이번에 정말 애 많이 썼다.]
순간 위소보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
했다.
[소인이 여러 번 성지를 거역한 죄는 목을 열여덟 번 잘려도 마땅합니
다. 그러니 어떠한 공로든 마음에 두실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황상께
서 성은을 베풀어 소인을 용서해 주시고 저로 하여금 곁에서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강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도 목이 열여덟 번 잘려도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너에게는 목이 그만큼 없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분명
히 너의 목을 열일곱 개는 잘랐을 것이다.]
[예, 예. 소인은 머리통이 오직 한 개만 있는 것을 만족합니다.]
[그 머리통을 보존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앞으로 너의 충성심을 지켜볼
것이다. 붙어 있고 없고는 더 이상 성지를 거역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소인은 무조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충심경경(忠心耿
耿), 적담충심(赤膽忠心), 진충보국(盡忠報國)할 것입니다.]
강희가 웃으며 말했다.
[넌 그 충자에 관한 성어(成語)를 꽤 많이 알고 있구나. 그것 말고는
더 없느냐?]
[소인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오로지 충 자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히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그 밖에 충군애국(忠君
愛國)이 있고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충신이 아니다, 그리고 충후노실(忠厚老實)······]
[그만 일어나라! 만약 네가 충후노실하다면 세상에는 버릇없고 교활한
무리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위소보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오직 황상 한 사람에게만 충성할 것입니다. 다른 사
람을 대할 때는 충성을 바치지 않습니다. 황상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소
인의 성격이 다소 익살스럽긴 하지만 황상께 대하는 태도는 진정한 충
성심이고 친구에게 대하는 태도는 의리입니다. 만약 충의를 한꺼번에
이룰 수 없을 때 소인은 하는 수 없이 몸을 움츠린 채 통흘도에서 낚시
를 할 것입니다.]
[넌 지금 괜한 걱정을 하고 있구나. 내가 언제 너더러 천지회를 상대하
여 싸우라고 했느냐?]
강희는 뒷짐을 지고 몇 걸음을 옮기면서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네가 친구한테 의리를 지키는 것은 미덕이다. 나도 그 일로 널 나무라
지 않겠다. 성인들이 충서지도(忠恕之道)를 중요시했듯이 이 충 자는
군(君)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아무한테나 진심갈력(盡
心竭力)하게 대하면 그것이 곧 충이라고 할 수 있다. 너처럼 친구를 배
반하지 않기 위해서 죽음을 택한다거나, 부귀영화를 버리고 친구를 배
반하지 않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너의 그런 태도에는 고인지풍(古人之
風)이 담겨져 있구나. 정녕 네가 친구를 배반할 수 없다면 자연히 나도
너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소계자, 내가 네 죄를 사면한 것은 예전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네가 나와 어려서부터 친
했다 해서도 아니다. 그건 순전히 네가 중요시하는 그 의리가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위소보는 매우 감격하여 눈물을 철철 흘렸다. 그는 흐느끼며 말했다.
[소인은……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단지 다른 사람이 진심으로 절
대하면 저도……저도 진심으로 그들을 대할 뿐입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 나찰국의 섭정 여왕도 네게 잘 대해 줬는데 내가 널 파견하여 그녀
를 치게 하면 어찌할 생각이냐?]
순간 위소보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녀가 계모에게 갇혀 있을 때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
때 소인이 그녀에게 화창수(火槍手)들을 충동시켜 반란을 일으키라고
가르쳐 줌으로써 왕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그녀에게도 할만큼 했습니다.
그녀가 군대를 파견하여 황상의 금수강산을 빼앗으려 한다면 절대로 용
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화냥기가 있어서 오늘은 이 남자
와 놀아나고 내일은 저 남자와 놀아난다는 건 모두 헛소문입니다. 만약
나찰국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소인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서
그 여왕을 잡아가다 황상께 보여드렸을 겁니다.]
[나찰국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이번 싸움
은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나찰국이 비록 화기도 우수하고 기병
도 용맹무쌍하지만 그들의 본토는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는 가까이 있
기 때문에 그들이 머나먼 곳에서 동쪽으로 내려올 때 병원(兵員), 마
필, 화기, 탄약, 양식, 피복 등을 충분하게 휴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러나 우리는 이미 호부상서 이상아(伊桑阿)를 영고탑(寧古塔)으로 파견
하여 애휘(曖暉), 호마이(呼瑪雨) 두 성에다 양식과 탄약을 충분히 비
축했다. 그리고 십여 개의 역참(驛站)을 설치하여 군품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했다. 더욱이 사전에 몽고에 성지를 전달하여 나찰인과 무역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아울러 흑룡강에 장군 살포소광(撒布素
廣)의 기병대를 파견하여 나찰인의 수송차량을 만나면 모조리 태워 버
리고 나찰병의 마필을 보면 즉시 죽여 버리라고 지시했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말했다.
[황상께서 그처럼 치밀한 조치를 취하셨다면 이번 싸움은 틀림없이 승
리할 것입니다.]
[그렇지도 않다. 나찰은 대국이다. 남회인(面懷仁)의 말에 의하면 절대
로 적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싸움에서 패하면 우리는
요동 땅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국본(國本)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패하더라도 본국은 무관하고 단지 서쪽으로 퇴각하면 그뿐이다.
그러니까 이번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네가 만약 패하면 내가 군
대를 이끌고 직접 나가서 싸울 것이다. 그때 내가 첫번째 행할 일은 바
로 너의 목을 치는 것이다.]
강희가 맨 나중 말을 할 때의 음성은 예사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황상께서는 심려하지 마십시오. 소인의 목을 보존할 수 없는 이상 나
찰병한테 잘리면 잘렸지 절대로 황상께서 직접 오셔서 자르도록 하지는
않겠습니다.]
[네가 그 점을 알고 있다니 기특하구나. 하지만 전쟁이란 아무도 장담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단지 적을 너무 가볍게 생
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위소보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만약 우리가 나찰국을 상대하여 전쟁을 치를 생각이었다면 너를 보내
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감히 우리 강토를 침
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은혜와 위협의 작전을 섞어 써서 그들로
하여금 은혜에 감사하게 함으로써 양국이 영원히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살생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화친에 중점을
두어라. 싸움을 하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최
상의 수법이다. 따라서 네가 나찰국의 섭정 여왕을 설득하여 군대를 철
수하고 양국이 화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게 큰 공을 세우는 것이다.]
[소인이 나찰병의 장군을 만나면 황상의 성유(聖諭)대로 그들을 계몽시
키고 아울러 그들로 하여금 나찰국 섭정 여왕에게도 황상의 뜻을 전달
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서양의 이미 여러 선교사들로 하여금 나찰국의 역사, 풍토, 지
리, 군정 등을 상세히 탐문토록 하였다.]
[잘하셨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자고로 지피지기하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습니까?]
강희는 웃으며 말했다.
[그 선교사들 말에 의하면 나찰인들은 본성이 비열하다고 하더군. 따라
서 좋게만 대해 주면 그들은 갈수록 더욱 사나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히 그들에게 위엄을 드러내어 우리를 함부로 넘볼 수 없다는 걸 깨닫
게 해야 한다. 우리는 대군을 출동시켜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고 만약
싸움을 하게 되면 싸우고, 다른 한편 우리는 예의지방(禮義之邦)이라
함부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걸 그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
[소인 명심하겠습니다. 이른바 제갈양이 맹획(孟獲)을 일곱 번 놓아 주
었다가 다시 사로잡은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
고 앞으로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강희가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것이다.]
위소보는 그의 웃는 얼굴이 좀 이상하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이미 그
의 뜻을 알아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건 바로 만세야(萬歲爺)께서 소계자를 일곱 번 사로잡은 것처럼, 소
인으로 하여금 고맙게 여기면서도 겁을 먹게 하여 앞으로 더이상 엉뚱
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군요. 소계자는 손오공과 같아서 항
상 부처님 손바닥 같은 만세야한테서 도망가지 못합니다.]
강희가 웃으며 말했다.
[너도 나이가 몇 살 더 먹었다고 갈수록 겸손해지는구나. 하지만 네가
나의 손바닥에서 도망친다면 난 정말 널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소인은 황상의 손바닥 안이 아주 편한데 무엇 때문에 도망가겠습니
까?]
[오삼계를 평정한 일은 따지고 보면 네 공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
너로 하여금 수륙삼군(水陸三軍)을 통솔하여 나찰에 출정하게 한 것이
다. 아극살 성(雅克薩城)이 녹정산에 건축되어 있다. 나는 너를 삼등녹
정공(三等鹿鼎公)과 무원대장군(撫遠大將軍)에 봉하겠다. 도통 붕춘(朋
春), 흑룡강 장군 살포소, 영고탑 장군 파해(巴海)로 하여금 널 돕게
할 것이고, 문관(文官)으로는 색액도로 하여금 널 돕게 할 것이다. 우
리는 먼저 보병 사만과 수사 오천을 출동시킬 것이다. 만약 부족하면
얼마든지 더 지원해 주겠다. 마필과 군수품은 이미 모두 준비되어 있
고, 애휘와 영고탑에 비축된 양식으로도 대군은 삼 년 동안 지탱할 수
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강희가 한마디할 때마다 위소보도 한 마디씩 감사의 말을 했다. 이윽고
그의 말이 끝나자 얼른 무릎을 꿇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강희가 말
했다.
[아극살과 니포초에 있는 나찰국 기병과 보병은 육천 명에 불과하다.
우리가 그 일고여덟 배나 되는 병력으로 상대한다는 건 그야말로 뇌정
만균지세(雷霆萬鈞之勢)가 아니겠느냐? 네게 바라는 것은 단지 우리 중
화(中華)의 위풍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번 싸움은 소인이 황상을 대신하여 나간 것이라 우리가 조금이라도
헛점을 보이면 나찰인들은 우리를 업신여길 겁니다. 그러니 황상께선
심려하지 마십시오.]
[좋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봐라.]
[소인은 대만에서 오백 명의 등패병을 경성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홍모병을 상대하여 싸운 적이 있어서 화기에 저항하는 데 능하기 때문
에 함께 데려가 나찰을 무찌를까 합니다.]
강희는 기뻐하며 말했다.
[그거 아주 잘됐구나! 정성공의 옛 부하들은 하란(荷蘭)의 홍모병을 격
파했기 때문에 네가 데려가서 나찰병을 친다면 우리한테 더욱 승산이
있겠구나. 그렇지 않아도 나는 나찰병 화기의 성능이 뛰어나서 우리 군
대의 피해가 많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등패는 조총탄알을 막을 수 있고 등패병들은 땅바닥으로 굴러가서 칼
을 사용하여 나찰병의 발목을 자를 것입니다.]
강희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아주 그럴싸한 묘책이다, 묘책이야!]
위소보가 말했다.
[소인에게 첩(妾)이 하나 있는데 그녀는 전에 모스크바에 함께 갔었기
때문에 나찰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습니다. 소인의 생각에는 그녀
를 함께 데려갈까 하는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청나라의 법도는 출사(出師)할 때 군중에 가족을 데려가면 대죄를 범하
는 것이라 필히 사전에 진정을 올려야 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다. 그러니 큰 공이나 세우도록 해라!]
위소보가 절을 하고나서 입구까지 물러갔을 때 강희가 다시 그에게 물
었다.
[소문에 너의 사부인 진근남이 정극상한테 살해됐다는데 틀림없느냐?]
순간 위소보는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예.]
강희가 말했다.
[정극상은 이미 조정에 투항한 몸이다. 나는 그에게 정씨 자손을 해치
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 너는 그를 괴롭히지 마라.]
위소보는 하는 수 없이 예, 하고 대답했다. 그는 경성으로 오기 전부터
정극상을 찾아가 분풀이를 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강희가 미리 알아
차리고 이와 같은 분부를 내린 것이다. 만약 다시 가서 그를 건드리면
그건 곧 어명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사부님을 해친 원수 놈을 이대로 방치하란 말인가?)
위소보는 고개롤 숙인 채 천천히 걸어나오는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렸
다.
[위 형제, 축하하네!]
위소보는 귀에 익은 음성이라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눈앞에 체격이 아
주 우람한 사람이 웃는 얼굴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바
로 어전시위 총관인 다륭이었다. 순간 위소보는 깜짝 놀랐다. 그날 그
가 궁 밖으로 빠져나갈 때 분명히 자기 방에서 다륭을 일검에 찔러 죽
였는데 어떻게 지금 자기 앞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의
혼백이 복수하러 왔단 말인가? 그는 놀라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생각 같아선 즉시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빌고
싶었지만 두 다리가 마치 땅바닥에 못으로 박혀 있는 듯이 도무지 움직
일 수가 없었다. 앞뒤가 모두 급한 바람에 똥오줌이 한꺼번에 흘러나왔
다. 다륭이 가까이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아우님을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해서 이 형님은 아주 보고 싶었다네.
그 동안 별일 없었는가? 자네가 통흘도에서 황상을 위해 낚시질을 했으
며 황상께서 자네의 벼슬을 승진시켰다는 말을 듣고 나도 몹시 기분이
좋았다네.]
위소보는 그의 손이 몹시 따뜻하게 느껴졌고 햇빛에 비친 자신의 그림
자 옆에 그의 그림자도 있었기 때문에 귀신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
어서 다소 마음을 놓았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예.]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가 복수를 할까 봐 걱정했다. 당시 그의 비수는
분명히 다륭의 심장을 정확하게 찔렀는데 어찌 아직도 살아있을 수 있
단 말인가?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륭은 다시 말했다.
[그날 아우님 방에서 이 형이 암살을 당할 때 아우님이 자객을 쫓아 준
덕분으로 이 목숨을 겨우 보존할 수 있었네. 이 일을 줄곧 자네한테 치
사하지 못했지만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또 시랑을 시켜서 대만에서 나한데 선물까지 보냈으니 그 고마움은 정
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네.]
위소보는 그의 진지한 태도를 보고 절대로 거짓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고 느꼈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그는 어전시위 총관이며 황상 신변의 근신(近臣)이다. 시랑이 이번에
선물을 나눌 때 자연히 그의 몫이 있었을 것이다. 필시 그가 시랑에게
내 얘기를 묻자 시랑은 틀림없이 선물의 일부분을 내가 보냈다고 말했
을 것이다. 그래야만 그가 나하고 보통 사이가 아니란 걸 드러낼 수 있
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나의 체면을 봐서 그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
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어째서 내가 자객을 쫓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다륭은 그의 창백한 얼굴과 넋을 잃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자 강희한테
꾸중을 들어서 그런 줄 알고 그를 위로해 주었다.
[최근 황상께서 자주 역정을 내시는 건 모두가 나찰국의 지나친 행패
때문이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네. 이따가 퇴궐한 후 우리끼리 한잔 하
면서 그 동안 못다 한 얘기를 나누세.]
[황상의 은덕은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텁습니다. 조금 전에 또 저를
승진시키셨습니다. 이 아우는 황은을 어떻게 갚아드려야 할지 정말 모
르겠습니다.]
다륭이 웃으며 말했다.
[축하하네, 축하해! 아우님은 일처리를 하는데 있어서 남달리 뛰어난
재주가 있기 때문에 황상의 걱정을 덜어 드릴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승진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부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위소보는 그
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다정하면서도 부드러운 걸 보자 내심 두려워
했던 마음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다 형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 지금 오줌이 마려워서 미칠 지
경입니다. 황상을 뵈올 때 당부하신 말씀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지금
까지 오줌을 참고 있었는데 더 이상은 정말 참을 수 없을 것 같습니
다.]
순간 다륭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황상께서 신하를 만날 때 만약 용
무가 끝났다는 뜻을 비치지 않으면 신하는 절대로 먼저 물러갈 수 없었
다. 따라서 신하가 정말 오줌이 마려울 경우에는 실로 난감한 일이었
다. 하지만 위소보 같은 총신(寵臣)이 아니면 황상도 그렇게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는 법이 없었다. 다른 대신들은 두세마디로 끝나기 때문에
오줌이 마렵거나 똥이 마려운 경우는 드물었다.
다륭과 위소보는 항상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다륭은 오늘 오랫만에
다시 위소보를 만나자 정말 반가웠다. 그래서 그는 즉시 위소보의 손을
끌고 변소 앞까지 데려다 주고 자기는 문 밖에 서서 그가 나오기를 기
다렸다.
그날 위소보는 사부와 천지회의 여러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서하는 수
없이 검으로 다륭을 찌른 것이다. 평소에 그가 자기한테 잘 대해 준 것
을 생각하면 내심 미안한 생각도 들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죽지
않았고 게다가 자기를 대할 때 전혀 원망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지라
위소보는 대소변을 보고 나서 속옷으로 뒤를 닦고 그 속옷을 구석에 처
박아 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륭에게 그날의 상황을 물어 보았
다. 다륭이 말했다.
[그날 내가 깨어나 보니 이미 침대에서 나흘이나 누워 있었더군. 의원
의 말에 의하면 심장이 약간 옆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자객의 칼이
내 폐를 스쳐 갔을 뿐 심장을 찌르지 못했다더군. 더욱이 나같이 심장
이 치우쳐 있는 사람은 십만 명 중에 한 명이 있을까말까 하다고 말했
네.]
위소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랬었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난 줄곧 형님이 정직한 호한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형님께서는 마음
이 비뚤어져 있는 사람이군요? 형님의 마음은 작은부인 쪽인가요? 아니
면 아드님 쪽인가요?]
순간 다륭은 어리벙벙해졌다. 그러나 이윽고 웃으며 말했다.
[아우님이 그 얘기를 하지 않았으면 난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네. 내가
여덟 번째 소첩을 각별히 사랑하고 있는 건 아마 내 심장이 비뚤어졌기
때문일 걸세.]
두 사람은 한바탕 웃어 댔다.
[그 자객의 무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가 형님을 암살하러 올 때 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랬을테지.]
다륭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마침 그때 건녕 공주 전하께서 날 만나러 오셨네. 나는 삼 개월 동안
치료하여 겨우 완쾌되었지. 황상의 말씀에 의하면 위 아우께서 죽음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했다고 하더군. 더욱이 손수 자객을 처단했다고
하니, 이 중간의 상세한 과정은 아우님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이 형
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네.]
위소보는 얼굴 두껍기로 천하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그제서야 비로소 황제
가 자기의 과오를 숨겨 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황제가 직접 말
했기 때문에 다륭이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또 한가지 이유는 공주의
사생활이 개입된 일이라 될 수 있으면 캐묻지 않는 게 상책이란 걸 궁
중 사람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궁금해도 가슴 깊이 묻어 둘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위소보는 내심 부끄럽게 여기며 이 충후하고 착
한 사람한테 필히 한 차례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대만에서 토산품을 좀 가져온 게 있는데 나중에 사람을 시켜서
형님댁에 보내드리겠습니다.]
다륭은 마구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없네. 지난번 아우님이 시랑을 시켜서 보내은 선물도 집에
많이 쌓여 있다네.]
순간 위소보는 문득 한가지 일이 생각났다.
(이 일은 설령 황상이 알게 되어도 내가 어명을 거역했다고 나무랄 수
없을 것이다.)
[다 형님, 정극상 그 녀석은 항복한 후 북경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
까?]
[황상께서 잘 대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일등공(一等公)이란 벼슬
을 내리셨네. 그 녀석은 아무 재주도 없는데 조상 복을 잘 타고 나서
뜻밖에도 벼슬이 아우님보다 더 높다네.]
[그날 우리가 장난삼아 그가 시위들한테 일만 냥의 은자를 빛졌다고 해
서 제가 대신 갚았던 일을 형님께선 아직 기억하고 계시겠죠?]
다륭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기억하고말고! 아우님이 좋아했던 그 낭자는 나중에 어찌 되었는가?
만약 아직도 정극상을 따라다니고 있다면 우리 지금 당장 가서 그녀를
빼앗아 오세.]
위소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낭자는 이미 제 마누라가 되었고 아들까지 낳았답니다.]
다륭이 웃으며 말했다.
[축하하네. 정극상 그 녀석이 경성에서 제아무리 일등공, 이등공이라
해도 필경 아무런 권한이 없는 빛좋은 개살구가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그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해도 감히 뭐라 하지 못할 것이네. 자고로 귀
순한 번왕(藩王)들은 행여나 황상께서 그가 속으로 불복하여 다시 반란
을 일으킨다고 의심할까 봐 온종일 전전긍긍하며 지내고 있지.]
[우리는 그를 괴롭힐 것도 없고 단지 빛진 돈만 받으면 그뿐입니다. 그
가 일등공이 아니라 설령 친왕(親王)이나 패륵(貝勒)일지라도 남한테
빛진 게 있으면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옳다, 옳아. 그날 그자가 아우님한테 일만 냥을 빚질 때 우리 어전시
위들이 여러 명 목격했으니 지금 받으러 가세.]
위소보가 미소를 지으머 말했다.
[그 녀석은 정말 한심합니다. 단지 그 일만 냥뿐이라면 얘기도 하지 않
습니다. 그자는 나중에도 여러 차례 저한테 많은 돈을 빌어갔으며 그가
친필로 쓴 차용증서도 제 손에 있습니다. 정씨 집안은 대만에서 몇 대
째 왕야(王爺)노릇을 했으니 금은보화를 적지 않게 모은 건 엄연한 사
실이고 틀림없이 모두 북경으로 가져왔을 겁니다. 정성공과 정경은 좋
은 사람이라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지 않았겠지만 정극상 그 녀석은
절대로 가만 있지 않았을 겁니다. 따라서 그가 왕야 노릇을 하루 하면
적게 잡아도 일백만 냥은 수탈했을 겁니다. 이틀이면 이백만 냥이고 사
흘이면 삼백만 냥입니다. 그러니 그가 며칠 동안 왕야 노릇을 했는지
형님께서 한번 계산해 보시죠.]
순간 다륭은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딱 벌렸다.
[대단하다, 대단해!]
[나중에 제가 차용증서를 형님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제 자신은 그 돈
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네. 형님된 입장으로 아우의 빛을 받아주는 것
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수하의 시위들을 거느리고 직
접 찾아가면 그의 담력이 아무리 크다 해도 감히 거절하지 못할 것이
네.]
[그 빚은 생각보다 좀 많습니다. 그 녀석은 왕년에 물 쓰듯 돈을 뿌렸
습니다. 그러니 한꺼번에 갚으려면 그다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형님께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그가 열흘 안에
갚지 못하면 시위 형제들의 이름으로 차용증서를 나눠 쓰도록 하세요.
차용증서는 한 장에 일천 냥으로 써도 좋고 이천 냥으로 씨도 좋습니
다. 그리고 그 차용증서를 어느 시위가 받든 그것은 바로 그자의 것입
니다.]
[그건 말도 안 되네. 시위들은 모두 자네의 옛 부하가 아닌가? 옛 상사
를 위해 빚을 좀 받아 주는 것인데 포상을 바란다면 그건 말도 안되
네.]
[그들은 비록 모두 저의 옛 부하들이지만 좋은 형제들이고 친한 친구들
이기도 합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전 마치 순풍에 돛단배를 띄운 것처
럼 벼슬이 날로 높아졌지만 그들에게 전혀 해준 것이 없어서 미안한 생
각도 듭니다. 그래서 이 몇백만 냥의 은자를 여러 시위들께 나눠 주려
는 겁니다.]
순간 다륭은 깜짝 놀라는 것 같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몇……몇백만 냥의 은자가 있다구?]
위소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중의 일부는 꿔 준 것이고 게다가 이
자에 이자가 붙어서 액수가 커진 겁니다. 그러니 이 돈은 형님께서 많
이 차지하기 바랍니다.]
다륭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몇백만 냥?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로 하여금 차용증서를 나눠 쓰도록 하는 것이오. 그래야만
좀 수월하게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위소보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 일에 절 개입시키면 안 됩니다. 만약 어사(御史)들이 알게 되면 틀
림없이 저한테 번왕 일당과 사귀고 고리대금업을 한다는 죄명을 씌워
상소를 올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전시위들이 그에게 노름빛을 받으러
간다면 한 사람 앞에 불과 일, 이천 냥의 은자라 그다지 문제될 건 없
습니다. 형님께서 만약 어전시위들이 혼자 먹기에 좀 뭐하다고 생각하
신다면 효기영의 군관 몇 명을 데려가십시오. 그들도 모두 저의 옛 부
하라 마땅히 조금씩 나눠줘야 할 게 아닙니까?]
다륭은 연신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심 이 빚을 받으면 최소한 절
반 이상은 위소보한데 돌려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비록 남보다 손
이 큰 편이지만 그래도 그의 본전은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第129章. 나찰국 군대를 사로잡다
위소보는 몹시 득의 양양했다. 내심 다륭이 사나운 호랑이 같은 어전시
위와 효기영 군관들을 거느리고 빚을 받으러 가면 정극상은 골치가 아
플 거라고 생각했다. 사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정극상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강희가 미리 당부했지만 이렇게 해놓으면 모르긴 해도 그의 재
산을 절반쯤은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정극상으로선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감히 떠들어대지도 못할
것이고 설사 남들이 알게 되더라도 그건 어전시위와 효기영 군관들이
노름빚을 독촉하는 사적인 일이라 다른 사람들은 단지 정극상이 옛버릇
을 고치지 못하고 경성에 와서도 여전히 도박을 한다고 말할 뿐 아무도
위소보를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궁을 나오자 강친왕 걸서, 이위, 명주, 색액도, 늑덕홍(勒德7共), 두립
덕(札立德), 풍박(馮博), 도해(圖海), 왕희(王熙), 황기(黃機), 오정치
(吳正治) 만한대신(滿漢大臣) 등이 모두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다가
와 축하하며 그를 둘러싼 채 동모아(銅帽兒) 골목으로 함께 갔다. 골목
입구에 당도하자 거대한 저택 한 채가 그곳에 우뚝 서 있었다. 예전의
백작부보다 훨씬 더 컸다. 대문 위에 빨간 칠을 한 현판이 하나 있었지
만 글씨는 쓰여 있지 않았다. 위소보는 글자라고는 한 자도 알지 못하
지만 현판에 글씨가 없는 건 분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만 어리벙벙했
다. 강친왕이 웃으며 말했다.
[위 형제, 황상께서 자네를 대하는 은택은 정말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텁소. 그 해 자네의 백작부가 화재로 인해 불타 버렸을 때 자네가 경
성에 없었으므로 황상께서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즉시 이 형을 파견하여
다른 저택을 한 채 건축하게 했네. 성지에는 돈을 얼마 쓰라고 당부하
지 않았고 단지 모든 경비를 국고에서 지불토록 하셨네. 이는 황상께서
자네한테 내린 상인데 이 형이 뭣 때문에 황상의 돈을 아끼겠는가? 그
러나 아우님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구만.]
그러면서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위소보는 얼른 치하의 말
을 했다. 이윽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호화롭고 사치해서 강
친왕부하고 비슷할 정도였다. 대신들은 모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하
나같이 모두 부러워했다. 강친왕이 말했다.
[이 저택은 꽤 오래 전에 공사를 끝내고 줄곧 아우님께서 와서 기거하
기를 기다리고 있었네. 다만 황상께서 자네한테 어떤 벼슬을 내릴지 몰
랐기 때문에 부상(府上)의 그 현판을 비워 둔 것이네. 그럼 '녹정공부
(鹿鼎公府)'란 네 글자를 우리 이 대학사께 부탁드립시다.]
이위는 보화전대학사(保和殿大學士)겸 호부상서였다. 게다가 대학사 중
에서 자력(資歷)이 제일 깊었기 때문에 수석 학사였다. 그는 사양하지
않고 붓을 들어 해서(楷書)로 '녹정공부' 네 글자를 썼다.
그런 뒤 종리(從吏)가 공장(工匠)에게 명하여 금자(金字)로 주근한 다
음에 현판에다 박았다.
그날 밤 녹정공부에서 크게 연희를 베풀어 축하하러 온 친귀대신(親貴
大臣)을 환대했다. 정극상, 풍석범 등 대만의 인물들도 선물을 보내 왔
지만 직접 축하하러 오지는 않았다.
하객들을 보내고 나서 위소보는 다시 집안 사람들과 축하연을 벌였다.
위소보가 쌍아를 데리고 함께 북정(北征)한다는 말을 꺼내자 나머지 여
섯 부인은 모두 못마땅하게 여기며 하나같이 그가 편파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위소보는 하는 수 없이 황상의 성지라고 둘러댔다. 쌍아는 나
찰국에 간 적이 있고 또 나찰어를 할 줄 알아서 그녀를 파견한 것이라
고 했더니 여섯 부인들은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다행히 쌍아란 여인은 온유해서 여섯 부인들과 모두 친하게 지냈기 때
문에 아무도 그녀를 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독 건녕 공주만은 스스
로 자신이 금지옥엽 같은 황상의 누이인 신분인데도 일개 미천한 하녀
출신보다 못하다고 여기며 내심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
곱 부인들한테 평소 무슨 분쟁이라도 생기면 나머지 여섯 명은 항상 연
맹(聯盟)하여 공주를 상대해서 싸웠다. 건녕 공주는 위소보까지 그녀를
회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근에 와서 성질이 아주 순해졌고 함부로 화
를 내지 않았다.
다음날 위소보는 쌍아에게 정극상이 왕년에 통흘도에서 피로 쓴 차용증
서를 꺼내 오도록 명했다. 그리고 나서 다륭을 모셔 오라 하여 그에게
건네주었다. 다륭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 친필 차용증서만 있으면 우린 얼마든지 그의 기름을 짜낼 것이네.
만약 정극상 그 녀석이 감히 억지를 부리고 빚을 못 갚겠다고 하면 우
리 어전시위와 효기영 사람들은 경성에 머물러 있을 필요조차도 없지.]
그로부터 며칠 후 강희는 위소보를 궁으로 소환하여 그에게 아주 큰 지
도를 한 장 주면서 진군(進軍), 접전(接戰), 위성(圍城), 응원하는 방
법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지시하고 동시에 주필(朱筆)로 지도 위에다 나
눠서 표시해 주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이번 싸움은 황상께서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싸우는 것이라 소인은 감
히 아무 주장도 내세우지 못합니다. 따라서 황상의 분부대로 거행할 것
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설령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황상께
선 기뻐하시지 않을 겁니다.]
강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위소보의 이와 같은 얘기는
그의 속마음과 아주 딱 들어맞았다. 그는 어렸을 때 무예를 배웠지만
도무지 시전(施展)할 수 없어서 오직 위소보와 대련하는게 고작이었다.
그 후 끊임없이 위소보를 파견하여 임무를 완수하게 했지만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모두 그 자신이 대신하여 나간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위소보는 나이도 자기보다 어렸고 무공, 지모, 학문, 견식조차도 자기
를 따르지 못하는데 그가 성사시킬 수 있다면 자기는 더욱 잘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명나라의 정덕 황제는 스스로 자신을 위무대장
군진국공(威武大將軍鎭國公)으로 봉하여 몸소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지
만 그건 단지 적막함을 못 이겨서 자신의 재주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
다. 그러나 강희는 정덕 황제처럼 일처리를 엉망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위소보를 파견하여 일처리를 하여도 내심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왕년에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백전노장이라 필히 대신이나
숙장(宿將)을 보내 상대해야 했다. 만약 위소보로 하여금 군대를 통솔
하도록 했다면 틀림없이 일이 실패했을 것이다. 그 싸움은 수년간 계속
되었다. 비록 강희가 직접 나가서 적을 맞이하여 싸우지는 않았지만 매
번 전역(戰役)마다 모두 상세히 캐물었다. 때문에 이해득실을 마치 손
금 보는 듯했다. 아울러 실전에서 병법을 익히게 된 것이다.
이 무렵 나찰국을 상대하여 싸움을 하더라도 전혀 걸리는 게 없었고 게
다가 모두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기 때문에 이번 싸움은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짐작한 것이다. 왕년에 오삼계를 상대하여 전전긍긍했
던 싸움과는 딴판이었다. 위소보는 출정할 날짜가 눈앞에 닥쳐 오자 감
히 더 이상 천지회의 형제들을 만나러 가지 못했다. 그는 내심 나름대
로 생각했다.
(황상께서 나로 하여금 천지회를 궤멸토록 하지 않는 건 그가 나한테
항복한 것이고 아울러 내 체면을 살려 준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걸 모
른 체하고 다시 이력세, 서천친 등을 만나러 가면 황상께선 틀림없이
지난 일들을 다시 거론할 것이다. 이거야말로 위소보가 돌로 자기의 발
을 찍는 격이다.)
흠천감(欽天監)이 황도길일(黃道吉日)을 선정하여 마침내 대군은 북정
(北征)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일 강희는 태화문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강희가 승좌(升座)하자 무원대장군 겸 녹정공인 위소보가 통솔할 출정
관들인 명주, 살포소, 임흥주 등과 운량관(運糧官)인 색액도 등은 일제
히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내원대신(內院大臣)이 만몽한(滿蒙漢) 세 가
지 칙서로 각 대장군들에게 의복과 마필 그리고 활과 칼을 하사했다.
출정관들은 금수교(金水橋) 북쪽에 앉았고 좌우에선 음악을 연주하며
온갖 창극을 벌이고 있었다.
강희는 대장군을 면전으로 불러서 몸소 술을 권했다. 대장군은 무릎을
꿇은 채 술을 받아 마셨다. 이어서 도통, 부도통 등도 계속 들어가자
황제는 시위를 명하여 그들에게 술을 권했다. 그러한 뒤 문무백관들에
게 명하여 병정들과 함께 술을 마시도록 하고 아울러 돈과 포목도 하사
했다. 문무백관과 병정들의 사은이 끝나자 대군은 출발했다. 강희는 몸
소 오문(午門) 밖까지 전송했다. 대장군 및 여러 대신들은 무릎을 끓고
무사히 회가(回駕)하도록 간청했다. 그러한 뒤 마침내 수륙대군이 첫번
째 북행길에 나섰다.
위소보는 비록 융장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대신들 눈에는 전혀 대군통
수다운 위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들은 이자가 배우지 못한 일개
시정 무뢰한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그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
하면 틀림없이 대사를 그르칠 것이고 아울러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희가 제일 아끼는 사람인데 감히 누가 진
간(進諫)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많은 왕공대신들이 겉으로는 모두 즐
거운 듯이 웃음을 자아냈지만 속으로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위소보는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여러 차례 임무 수행을 했으나 한번도 이
번과 같은 위풍은 없었다. 따라서 그의 기쁨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 일이 중대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에서 감히 공
공연하게 노름을 하지 못했다. 다만 도중에서 무료할 때 몇몇 대장들을
불러다가 주사위를 몇 번 던져 진 쪽이 이긴 쪽에게 술을 대접하는 것
이 고작이었다. 이윽고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대군은 산해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요동을 향해 북상했다. 이곳은 옛날 위소보가 유랑했던
곳이다. 다만 그때는 쌍아와 숲속에서 노루 사냥을 하며 끼니를 때우고
이리저리로 숨어 다녔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비참했었다. 어찌 오늘같
이 출관하여 북정하는 위풍을 찾아볼 수 있었겠는가?
상쾌한 가을 날씨였지만 대군이 점차 북상하자 삭풍(朔風)이 날로 심하
게 불었다. 아극살 성에서 약 백여 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선봉장인
하우(何佑)가 대영(大營)으로 와서는 척후병들이 현지의 백성들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나찰병들이 사방에서 백성들을 괴롭힐 뿐만 아니
라 살인, 방화, 강간, 약탈 등 온갖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으며 게다가
십여 일마다 한 번씩 온다고 말했다. 따라서, 며칠만 더 지나면 다시
약탈하러 올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위소보는 사전에 강희로부터 지
시를 받았기 때문에 대군들한테 더 이상 진격하지 말고 야영을 하도록
분부했다. 그리고 하우로 하여금 열 조의 백인대(百人隊)를 통솔하여
아극살 성 삼십 리 밖에 매복하도록 명했다. 만약 나찰군의 대대가 밀
려오면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소대의 적군을 만나면 죽이거나 사로
잡아서 모조리 소멸해야 하며 한 명도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명했다.
하우는 명령을 전달받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멀리서 화창소리가 은은하
게 들렸다. 게다가 끊임없이 이쪽저쪽에서 오랫동안 들렸기 때문에 선
봉대가 나찰병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는 걸로 짐작되었다. 이윽고 저녁
무렵이 되자 선봉장이 나찰병 포로 열두 명을 대영(大營)으로 보내 왔
다.
위소보는 승장(升帳)하여 몸소 심문했다. 나찰병들은 위소보가 나찰어
를 할 줄 아는 걸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하나같이
모두 완강하여 굽힐 줄 몰랐다. 더욱이 그들은 매복한 청병의 수가 많
아서 승리한 것이니 전혀 명예스럽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위소보는 노발대발했다. 이윽고 나찰병 두 명을 가까이 불러다 놓고 품
안에서 주사위를 꺼내며 말했다.
[너희들 둘은 주사위를 던져라!]
주사위 놀이는 서양에도 옛날부터 있었다. 이집트 고분에서 발굴한 것
도 중군의 주사위와 똑같았고 나찰병들도 자주 하는 놀이였다. 두 명의
나찰병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 청병
(淸兵)의 나이 어린 장군이 무슨 속셈인지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주사
위를 던졌다. 주사위는 두 개였다. 하나는 칠점이 나왔고 하나는 오 점
이 나왔다.
위소보는 그 오 점을 던진 나찰병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졌다! 사만기(死蠻基)!]
나찰어로 '사만기'는 '사망'이란 뜻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친병한테
분부했다.
[밖으로 끌어내 목을 쳐라!]
그러자 네 명의 친병은 그 나찰병을 천막 밖으로 끌고 가서 단칼에 그
나찰병을 죽여 버렸다. 그러자 나머지 열한 명의 나찰병들은 모두 안색
이 크게 변했다. 위소보는 다른 두 명의 나찰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에는 너희들 두 명이 나와서 주사위를 던져라!]
순간 그 두 명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말했다.
[나는 던지지 않겠다.]
[좋아, 너희들은 던지지 마라.]
위소보는 친병에게 말했다.
[둘은 모두 끌어내서 목을 쳐라!]
삽시간에 다시 두 사람이 처형을 당했다. 위소보는 다시 두 명의 나찰
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들이 나와서 던져라.]
던지지 않으면 즉시 죽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주사위
를 한 번 던지면 그래도 한 명은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둘은 천
천히 주사위를 들었다.
한 사람이 전전긍긍하며 주사위를 들고 막 던지려는 순간 다른 한 명이
손을 내밀어 주사위를 빼앗아 갔다. 그자는 위소보에게 말했다.
[내가 너와 겨루겠다!]
몹시 거만한 태도였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좋다, 네가 감히 나한테 도전을 하다니. 그럼 네가 먼저 던져라!]
그 병사는 칠 점이 나왔고 위소보는 십 점이 나왔다. 위소보는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어떠냐?]
그 병사는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운이 나쁜 것이니 달리 할말은 없다.]
[넌 우리 중국에 와서 중국 사람을 몇 명이나 죽였느냐?]
[정확한 숫자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적게 잡아도 스물아홉 명은 될 것이
다. 그러니 이제 너한테 죽어도 난 손해보지 않는다.]
위소보는 그를 처형하라고 분부한 다음에 다른 나찰병을 가리키며 말했
다.
[네가 와서 던져라.]
주사위를 집어든 그 병사의 손은 마냥 떨고 있었다. 이윽고 주사위 두
알이 동시에 탁자 위로 떨어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십일 점이라 승산이
아주 컸다.
이때 위소보는 재주를 좀 부려서 십이 점이 나오게끔 던지려고 했는데
연습을 소흘히 한 탓에 수법이 통하지 않았다. 급기야 주사위 두 알에
있는 육 점짜리가 위로 향하지 않고 일제히 밑으로 향해서 겨우 이 점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위소보는 즉시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겼다!]
그러자 그 병사가 급히 말했다.
[나는 십일 점이고 넌 겨우 이 점밖에 안 되는데 어째서 네가 이겼느
냐?]
[이번 것은 점수가 적으면 이기고 점수가 높으면 진다.]
그 병사는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당연히 점수가 높은 쪽이 이기는 것이다. 우리 나찰인의 규칙은 항상
그러했다.]
위소보는 성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여기가 중국이냐, 아니면 나찰이냐?]
[물론‥·중국이다.]
[중국이라면 당연히 중국의 규칙을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 누가 너희들
더러 중국에 오라고 했느냐? 다음 번에 내가 나찰국으로 가면 나찰의
규칙을 따르겠다. 너 사만기!]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친병에게 말했다.
[끌어내서 목을 쳐라!]
그는 다시 또 다른 나찰병을 불러냈다. 그러자 그 병사가 물었다.
[중국 규칙대로 한다면 이번에 점수가 높은 쪽이 이기는 것이냐, 아니
면 점수가 낮은 쪽이 이기는 것이냐?]
[중국 규칙대로 한다면 중국 사람이 이긴다. 중국 사람의 점수가 높으
면 높은 쪽이 이기는 것이고 중국 사람의 점수가 낮으면 낮은 쪽이 이
기는 것이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 넌 정말 지나칠 정도로 행패를 부리는 것
같구나.]
[너희들 나찰병이 중국에 와서 살인하고 노략질을 한 것이지 우리 중국
사람들이 나찰에 가서 살인하고 노략질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럼 도대체
나찰인이 야만적인 것이냐, 아니면 중국인이 그런 것이냐?]
그 병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서 던져라, 어서 던져!]
[어차피 내가 지게 될 것인데 던질 필요가 있겠느냐?]
[안 던지면 사만기다! 사만기!]
그는 다시 나찰병 한 명을 불러냈다. 그 병사는 체격이 우람하고 얼굴
이 온통 수염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중국 꼬마야, 잔꾀 그만 부리고 어서 날 죽여 다오. 이번에 너희들은
사람이 많았고 게다가 눈 속에 매복해 있다가 갑자기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라 이겨도 영광스럽지 못할 것이다. 우리 나찰국의 대군이 당도하
면 너희들은 하나하나 모두 처치될 것이다.]
위소보가 말했다.
[네가 우리한테 사로잡힌 게 억울하다, 이거지?]
[그렇다!]
[만약 같은 인원수로 싸운다면 반드시 너희들이 이긴다는 것이냐?]
[물론이다. 우리 나찰인 한 명은 중국인 다섯을 이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중국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나하
고 내기를 걸자. 너희들 다섯 명이 나와서 나와 싸우는 것이다. 너희들
이 이기면 내 목을 자르고 만약 내가 이기면 즉시 날 풀어 쥐라.]
이자는 나찰국에서 유명한 용사였고 게다가 힘 또한 장사였다. 그의 눈
에는 위소보의 장막 중에 있는 친병이 하나같이 키가 그보다 머리 하나
쯤 작았기 때문에 일 대 오로 싸우더라도 자기한테 승산이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쌍아는 줄곧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이때 그의 교만한 말
투를 듣고 입을 열었다.
[나찰인, 쓸모없다. 중국의 여자도 널 이긴다.]
그러면서 다가오더니 위소보 곁에 섰다. 그 병사는 그녀의 가냘픈 몸매
와 아름다운 용모를 보자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네가 나하고 무술을 겨루겠다는 것이냐?]
위소보는 친병에게 분부하여 그의 양손을 묶고 있는 밧줄을 절단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쌍아야, 그에게 우리 중국 여인의 무서움을 보여 줘라.]
그 병사가 말했다.
[중국 여인이 나찰어를 할 줄 알다니, 기특하다. 기특해!]
쌍아의 나찰어 실력은 위소보보다도 뒤지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의사전
달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와 필요 이상 입씨름하지 않고 왼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향해 허초(虛招)로 일 장을 후려쳤다. 그러자
그 병사는 얼른 고개를 쳐들고 손을 내밀어서 막았다. 순간 쌍아는 오
른발을 날렸다. 그러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하복부에 격중되었
다. 그 병사는 통증을 느끼자 대갈일성하며 두 주먹을 휘둘러 댔다.
그는 주먹을 뻗을 때 신속할 뿐만 아니라 힘이 있었다. 쌍아는 그걸 간
파하여 잽싸게 그의 등뒤로 다가가서 좌우봉원(左右逢源)이란 일 초를
발출했다. 순간 팍, 팍, 하는 소리가 두 번 들리더니 그의 좌우 허리를
각각 한 번씩 걷어찼다. 그 병사는 통증을 못이기고 주저앉으며 외쳤
다.
[발을 사용하는 건 반칙이다! 반칙!]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는 중국이라 중국식으로 한다.]
쌍아가 외쳤다.
[나찰식으로 해도 내가 이긴다.]
그러면서 잽싸게 그 병사의 앞으로 돌아나와 오른 주먹으로 그의 하복
부를 후려쳤다. 순간 그 병사는 손을 뻗어서 막았다. 그러나 쌍아의 그
일권은 허초였다. 그가 채 막기도 전에 오른 주먹을 거두고 왼 주먹으
로 그의 가슴팍을 후려쳐 갔다. 그 병사는 다시 손을 뻗어서 막았다.
쌍아는 좌일권 우일권 하면서 연거푸 이 권을 발출했지만 모두 허초였
다. 이는 중국 무술에서 해시신루(海市蜃樓)라고 일컬었다. 즉 신기루
같은 환상이란 뜻이다. 보통권법과 비교하면 몇 배 더 빨랐다. 그 병사
가 연거푸 몇 번 막더니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여자들의 재주는 쓸모없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팍팍, 하는 소리가 두 번 들리더니 좌우 양뺨에
연거푸 이 장을 얻어맞았다. 순간 그 병사는 크게 외치며 팔을 아래위
로 휘두르면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쌍아는 몸을 비스듬히 하여 공
격을 피했다. 그리고 오른손의 식지(食指)를 뻗어 그 병사의 오른쪽 태
양혈을 찍었다. 순간 그 병사는 한차례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 같더니
몇 번 휘청거렸다. 그러자 쌍아는 몸을 퉁겨서 수도로 그 병사의 뒤통
수에 있는 옥침혈(王枕穴)을 강타했다.
옥침혈은 사람들 몸에 있는 대혈이라 아무리 힘이 장사라 해도 견뎌 내
지 못했다. 그 병사는 맥없이 앞으로 넘어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
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쌍아의 손을 잡고 그 병사의 뇌문(腦門)을
발로 한번 걷어찼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 물었다.
[이제 승복하겠느냐?]
그 병사는 몽롱한 정신으로 말했다.
[중국 여인은… 요법(妖法)을 사용한다……그녀는 무당이다.]
위소보가 욕을 하며 말했다.
[이런 돼지 같은 놈이 있나? 요법이라니! 끌어내서 목을 쳐라. 너희들
나찰병 중에 승복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다시 나와서 겨뤄보자!]
나머지 다섯 명의 나찰병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이 대력사(大力士)
도 졌는데 자기들이 감히 어떻게 적수가 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위소보가 말했다.
[너희들이 패배를 인정하고 투항한다면 살려 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나
와서 나와 주사위를 던져라. 너희들이 중국의 규칙대로 나를 이길 수
있다면 살려 주고 지게 되면 사만기다!]
그러면서 오른손을 한 번 휘둘러 목을 자르는 동작을 취했다. 순간 다
섯 병사는 같은 생각을 했다.
(중국 규칙대로라면 어떤 점수가 나와도 모두 네가 이기는 게 아니냐?)
이윽고 한 병사가 몸을 굽히며 말했다.
[항복하겠소!]
위소보는 기뻐하며 말했다.
[좋다! 술과 고기를 가져와 그에게 먹이도록 해라.]
친병은 천막으로 가서 술 한 사발과 고기 한 접시를 들고 나왔다. 이윽
고 그 병사의 포박을 풀어 주어 그로 하여금 먹고 마시도록 해주었다.
나찰국은 기후가 굉장히 추워서 사람들은 모두 술을 좋아했다. 위소보
는 비록 술은 좋아하지 않지만 군중에 준비돼 있는 건 최상품 고량주라
천막 안이 온통 향기로 가득 찼다. 나머지 네 명의 나찰병들은 술 냄새
를 맞자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이윽고 그 병사가 기분좋게 마시고 있
는 걸 보고는 견딜 수 없어서 하나씩 하나씩 말했다.
[항복이오, 항복! 술을 마시게 해주시오.]
위소보는 그 네 명의 포박을 풀어 주라고 분부했다. 그리고 나서 친병
으로 하여금 네 사람 몫의 술과 고기를 가져와 그들에게 나눠주라고 명
했다. 위소보는 나찰병들에게 음식이 부족한 것 같아서 다시 그들에게
일 인분씩 더 갖다 주라고 분부했다. 이윽고 얼큰하게 취한 나찰병 다
섯 명은 서로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잠시 노래
를 부르다가 문득 죽음 직전에서 목숨을 부지한 그들이 뜻밖에도 이런
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두 위소보를 향해 몸을 굽히고 치
사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선봉장인 하우는 계속해서 나찰병 포로들을 압송해
왔다. 많을 땐 열대여섯 정도였고 적을 땐 한두 명에 불과했다. 이 포
로들은 맨 처음 투항한 다섯 명과 서로 면담한 후 비로소 대청 장군과
주사위 놀이를 하면 영락없이 죽게 되고 투항을 하면 술과 고기로 융승
한 대접을 받는다는 걸 알게 되자 모두 서슴지 않고 투항했다.
이 나찰병들은 본시 무뢰한들이거나 아니면 좀도둑이나 도적떼들이라
십중팔구는 악한 일을 서슴없이 하는 작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동쪽
으로 모험삼아 내려온 것 자체가 아무도 좋은 마음을 먹고 있지 않았음
을 증명하고 있었다.
처음에 중국 백성들을 살해할 때 아주 손쉽게 행해졌기 때문에 나찰병
들은 중국 사람들을 모두 경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비록 포로가 되어도
여전히 오만방자했다. 그리하여 급기야 위소보가 병사 몇 명을 참수하
여 위엄을 세우고 나서야 비로소 나머지 포로들은 무서운 걸 알게 되었
다. 상대방이 더욱 야만적이고 악랄하다는 걸 보면 순순히 투항할 수밖
에 없는 것이다.
이 무렵 총독인 고리진(高里津)은 이미 소비아 공주의 소환을 받고 모
스크바로 돌아가 높은 벼슬로 승진했다. 이 지역을 담당한 나찰국의 대
장은 도이포청(圖爾布靑:Alexi Tolbusin)이었다. 나찰병 소대가 노략질
을 하러 밖으로 나갔는데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마침내 도이포
청은 사람을 파견하여 수소문했지만 시종 회보(回報)가 보이지 않자 사
태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성 안에 있는 이 천여 명의 기마대
를 몸소 이끌고 밖으로 나가 살펴보았다. 도이포청은 도중에서 적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자 중국인들의 농가를 보이는 대로 불태워 버리고 백
성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런데 이십여 리쯤
나가자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들리면서 한 기병대 부대가 공격해 오고
있었다.
도이포청은 즉시 병사들로 하여금 흩어지라고 외쳤다. 말을 타고 공격
해 오는 청군 기병대들은 약 오백 명쯤 되었고 무기는 활을 사용하고
있었다. 도이포청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미개한 중국놈들은 활밖에 사용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우리 나찰인들
의 화창을 상대해서 싸울 수 있겠느냐?]
이윽고 도이포청이 명령을 하달하자 일제히 총을 발사했다. 순간 십여
명의 청병이 말에서 떨어졌다. 청군 진중에서 징소리가 울리자 청군들
은 일제히 말머리를 돌려 남쪽을 향해 도망갔다. 도이포청이 추격하라
고 명령을 하달했지만 이 청군 기병대들이 타고 있는 말은 모두 정선된
좋은 말들이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칠, 팔 리쯤 쫓아가 보니
앞쪽 숲속 옆으로 황룡기(黃龍旗)
가 하나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찰병들이 쏜살같이 다가가 보니
청군의 천막이었다. 나찰병들이 총격을 가하자 천막에서 몇십 명의 청
군이 도망나와 활을 몇 번 쏘더니 말을 타고 남쪽으로 도망갔다. 급기
야 나찰병의 선봉이 천막을 덮쳤을 때는 청군은 이미 하나도 보이지 않
았다. 도이포청이 말에서 내려 천막 안으로 들어가보니 탁자 위에는 술
과 고기 그리고 안주 등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김이 모락모
락 났다. 바닥에는 온통 금덩이, 은덩이, 금의(錦衣), 주보(珠寶)가 널
려 있었다. 도이포청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건 중국놈 대장이 급히 도망가는 바람에 금은보화를 챙겨가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어서 말을 타고 쫓아가도록 해라! 그리고 놈
들의 대장을 사로잡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릴 것이다. 놈들의 대장한
테는 금은보화가 틀림없이 아주 많이 있을 것이니 너희들이 가서 빼앗
아라!]
병사들은 금은보화를 발견하자 서로가 가지려고 다투기 시작했다. 그중
에는 탁자에 있는 술과 고기를 집어먹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주수(主
帥)가 명령을 하달하자 큰소리로 환호성을 외치며 천막 밖으로 뛰쳐나
와 모두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서 말발굽 자국을 따라 동남방 쪽으
로 추격했다. 도중에 금덩이, 은덩이, 칼창, 활등의 물건들이 길가에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찰 병사들은 모두 중국 병사들이 나찰
대군이 당도하는 걸 보고 겁이 나서 무기조차 버리고 도망쳤다고 말했
다. 다시 한차례 추격해 보니 노상에 장화 몇 켤레와 홍영모(紅纓帽)
몇 개가 버려져 있었다. 순간 도이포청이 외쳤다.
[틀림없이 중국의 장군이 졸병으로 위장하여 도망간 것이다. 그러니 절
대로 그들한데 속지 마라.]
수행원들이 모두 말했다.
[장군님의 추측이 틀림없을 겁니다.]
도이포청은 신발과 모자를 수거하라고 분부했다.
[중국놈들을 잡으면 그들로 하여금 모자를 써 보고 신발을 신어보라고
해라. 만약 몸에 맞는 자가 있으면 틀림없이 그자가 바로 대장일 것이
다.]
부하들은 일제히 장군에게 지혜롭다고 칭찬했다.
다시 몇 리 밖으로 쫓아가서 청군의 천막을 또 한 채 점령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닥에 금은보화와 병기 말고도 색상이 선명한 여자의 옷가지
들이 많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천막 옆에는 연지와 분(粉), 손수건,
비녀, 귀고리 등등 여자들의 장신구가 떨어져 있었다. 순간 병사들은
음욕이 크게 일어나 일제히 외쳤다.
[빨리 쫓아가자! 빨리 쫓아가자! 중국놈들은 여자를 데리고 있다.]
이와 같이 계속해서 쫓아가며 천막을 연거푸 일곱 채 점령했을 때, 전
방에서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도이포청이 안장 위에
서 천리경(干里鏡)을 꺼내 관찰해 보니 몇 리 밖에 한 중국 부대 병사
들이 낭패한 모습으로 한참 도망가고 있었다. 깃발은 흐트러졌고 대열
도 무질서했다. 순간 도이포청은 크게 기뻐하여 외쳤다.
[드디어 따라잡았다!]
그러더니 마도(馬刀)를 뽑아들고 허공을 향해 마구 휘두르며 외쳤다.
[돌격! 죽여랏!]
그러면서 병사들을 이끌고 질풍처럼 앞으로 달려갔다. 이때 연도에는
이십여 필의 청군 군마가 쓰러져 죽어 있었다. 병사들은 기뻐서 외쳤
다.
[놈들의 말이 지쳐서 도망가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서 최대한으로 말을 몰았다. 이윽고 점점 가까워지자 청병들은
두 개의 산 중간에 좁게 나 있는 길로 도주하여 들어갔다. 도이포청은
협곡 앞에까지 쫓아와서 험악한 지세(地勢)를 바라보고는 다소 놀라움
을 금치 못했다.
(만약 이곳에 적이 매복해 있다면……)
이때 갑자기 앞에 있는 골짜기 안에서 나찰어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중국놈들아, 너희들이 항복한다니 정말 잘 생각했다. 잘 생각했어!]
이어서 누군가 다시 외쳤다.
[하! 하! 이번에야말로 중국놈 비참하게 패했구나!]
다름 아닌 바로 본국 관병의 음성이라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순
간 도이포청은 크게 기뻐하며 서슴없이 말을 몰아 곧장 안으로 들어갔
다. 그의 뒤에는 이천여 명의 기병대가 따랐다. 도이포청이 외쳤다.
[앞에 있는 부대는 어느 소속이냐, 너희들은 어디에 있느냐?]
그러자 산벽(山壁) 뒤에서 십여 명이 일제히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린 여기에 있다! 중국 병사들은 모두 항복했다!]
도이포청이 환호를 질렀다.
[잘했다!]
그러면서 막 고삐를 들어올리는 순간 느닷없이 등뒤에서 총소리가 들렸
다. 순간 도이포청은 깜짝 놀랐다. 얼른 뒤로 돌아다보니 골짜기 입구
에는 연기가 자욱했고 좌우 양쪽 산벽에 있는 숲속에서는 불빛이 번뜩
거리면서 아래를 향해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러자 나찰병들은 놀래
서 비명을 질렀다. 도이포청이 큰소리로 외쳤다.
[말머리를 돌려 골짜기 밖으로 후퇴해라!]
그러자 양쪽 산벽 위에 있는 수천 명이 큰소리로 외쳤다.
[나찰병, 투항하라. 투항해!]
이윽고 무수한 바위들과 나무토막이 굴러 내려와 삽시간에 입구를 막아
버렸다. 나찰병들은 좁디좁은 골짜기 안에 갇혀 서로 밀치고 껴안았으
며 게다가 말까지 시끄럽게 울어대자 실로 아수라장이었다. 이때 청병
들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향해 활과 총을 쉴새없이 발사했다. 도이포청
은 적의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알았지만 퇴로가 이미 차단되어 있었기 때
문에 하는 수 없이 말머리를 돌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병사들이여, 앞으로 돌격!]
그러나 몇 장(丈)밖에 돌진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꽝꽝 하는 굉음이 들
리더니 포탄이 날아와서 십여 명의 사병을 쓰러뜨렸다. 순간 도이포청
은 놀래서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는 청병의 화기가 이처럼 위력이 있
을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 험악한 골짜기에 대포가 매
복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말에서 급히 뛰어내리
며 외쳤다.
[말을 버리고 화력을 집중시켜 오던 길로 밀고 나가라.]
그러자 나찰병들은 모두 말에서 내렸다. 이윽고 골짜기 입구에 쌓여 있
는 바위와 나무토막 위로 기어올라갔다. 뒤에 있는 부대는 양쪽 산벽을
향해 총을 쏘며 엄호해 주었다. 나찰병들의 화기는 위력도 대단하지만
사정거리 또한 멀어서 도리어 청병이 적지 않게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러나 청병의 대포는 끊임없이 폭격을 가했고 기세도 맹렬했다.
수백 명의 나찰병들이 막 가로막고 있는 바위 위로 기어올라갔는데 갑
자기 꽝, 하고 밑으로 대포가 터지는 바람에 수백 명 병사들 가운데 십
여 장(丈) 위로 퉁겨지는 자도 있었고 머리가 잘라지거나 팔이 부러진
자도 있었다. 순간 혈육(血肉)이 사방으로 튀었다. 다행히 죽지 않은
자들은 얼른 아래로 기어 내려왔다.
도이포청은 앞뒤 퇴로가 모두 막힌 걸 보자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아주
용감한 군관 한 명이 수십 명 독전대를 이끌고 북쪽 산벽을 기어올라가
통로를 만들려고 했지만 산벽이 깎은 듯이 가파르고 발 디딜 곳조차 없
을 정도로 매끈해서 얼마 기어오르지 못하고 십여 명 병사가 아래로 떨
어져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산꼭대기 위에 있는 청병은 돌을 던져서 나머지 몇십 명을 모두 떨어뜨
렸다. 그 군관은 떨어져서 머리가 깨지는 바람에 즉사했다. 청군의 대
포도 끊임없이 폭격을 가했기 때문에 산벽 사이는 온통 나찰병들의 비
명소리로 가득 찼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전멸할 것 같아서 도이포청이 소리를 외쳤다.
[이제 그만 공격을 멈춰라. 공격을 멈춰라!]
그러나 포성과 사병들의 고함소리가 그의 소리를 삼켜 버렸다. 그러자
그의 곁에 있는 사병들이 일제히 큰소리로 외쳤다.
[공격을 멈춰라, 공격을 멈춰라!]
이어서 나머지 사병들도 따라 외쳤다. 마침내 청군의 포화가 멈추고 누
군가 나찰어로 소리를 질렀다.
[총과 칼을 버리고 옷을 전부 벗어라!]
도이포청은 크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무기만 버리고 옷은 벗지 않겠다!]
청군 중에 누군가가 외쳤다.
[총과 칼을 버리고 옷을 전부 벗는 자는 착하다! 나와서 술을 마시게
해주마. 옷을 벗지 않는 자는 죽는다.]
도이포청이 소리를 외쳤다.
[옷은 죽어도 안 벗겠다!]
이 말을 하자마자 꽝꽝, 하는 소리와 함께 청군의 대포가 다시 폭격을
가했다. 나찰병 중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즉시 총칼을 버리고 옷
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자 도이포청은 권총으로 옷을 벗고 있는 사병
한 명을 사살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옷을 벗으면 모두 사형에 처하겠다.]
그러나 청군의 맹렬한 폭격 아래선 장군의 엄령도 소용없는지 십여 명
의 사병들은 옷을 홀랑 벗고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 위로 기어 올라
갔다. 그러자 양쪽 산 위에 있는 청병들이 박수를 치고 웃으며 소리쳤
다.
[빨리 옷을 벗어랏!]
살아 남기 위해서 옷을 벗는 사병이 갈수록 많아졌다. 도이포청이 권총
을 연발하여 다시 두 명을 사살했지만 어떻게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
가. 청군의 대포가 잠시 멈추더니 산벽 위에서 누군가 외쳤다.
[살고 싶으면 빨리빨리 옷을 벗고 이쪽으로 와라.]
이때 나찰병들은 완전히 투지를 잃었기 때문에 십중팔구 모두 단추를
풀거나 장화를 벗고 있었다. 도이포청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권충으
로 자기의 태양혈을 겨냥하여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부관
이 그의 권총을 빼앗으며 말했다.
[장군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늙은 매라도 날개를 남겨 놓아야 높은
산을 날아서 넘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나찰의 속담이다. 바로 중국의 '청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없다'는 속담과 같은 의미였다.
이윽고 청군 중에서 누군가 나찰어로 외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이 도이포청의 옷을 홀랑 벗겨서 함께 나오지 않으면 다시 폭격
을 가하겠다.]
이 말은 바로 투항한 나찰병이 협박당하여 소리지른 것이었다. 도이포
청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지만 부하 몇 명이 눈을 부릅뜨고 자기를 쳐
다보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나쁜 마음을 먹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
이 들어서 손을 내밀어 허리춤에 차고 있는 패도(佩刀)를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이 칼자루에 닿는 순간 등뒤에서 병사 한 명이 덮쳐 그
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륙 명의 사병이 일제히 덮쳐 와서 그를 바닥에
눌러 둔 채 삽시간에 그의 옷을 홀랑 벗기더니 밖으로 들고 나갔다.
나찰병 한 명이 나올 때마다 청병 두 명이 다가가서 양손을 뒤로 묶었
다. 그리고 나서 몇 리 밖에 있는 넓은 평원으로 압송했다. 이번 싸움
에서 이천여 명의 나찰병들 가운데 사살됐거나 중상을 입은 육, 칠백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천팔백여 명은 모두 양손을 뒤로 묶인 채 벌거
숭이로 대열을 지었다. 가을 바람이 불고 있어 모두 사시나무 떨듯이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청병들은 도이포청을 압송하여 대열의 맨 앞에다 세웠다. 나찰병들은
하나같이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평소에 위엄있고 가혹한 장군
이 이런 꼴로 변해 있는 걸 보자 모두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중 몇십
명은 대장의 매끈한 엉덩이를 보자 참다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천여 명의 관병들이 일제히 큰소리로 웃어
대기 시작했다. 도이포청은 화를 벌컥 내더니 뒤로 돌아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차렷! 뭐가 우습냐!]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그가 이런 위엄 있는 태도를 취하자
더더욱 우스웠다. 관병들은 평소에 그를 몹시 무서워했지만 이러한 상
황에서 어떻게 웃음을 참을 수 있겠는가. 한참 큰소리로 웃고 있는데
갑자기 총성이 여덟 번 들리고 북이 일제히 울리더니 한 떼의 청병이
산 뒤에서 걸어나왔다. 그들은 노란 깃발을 들고 있었고 동쪽을 향해
나란히 섰다. 다시 삼 대(隊)의 청병이 각각 빨간색, 하얀색, 파랑색
깃발을 든 채 남쪽, 서쪽, 북쪽을 향해 나란히 서자 나찰병들은 자연히
그 안에 포위되었다.
나찰병들은 청병들이 긴 창이나 혹은 큰 칼이나 혹은 활을 구부려 화살
을 장진하거나 혹은 장총을 들고 있는데 자기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도
없는 걸 깨닫고는 더욱 적군의 무기가 위협적인 것 같아서 더 이상 웃
지 않고 내심 겁을 먹고 있었다.
청군의 대열이 정해지자 뒷산에 있는 대포가 다시 세 번 울렸다. 풍악
소리와 함께 큰 깃발 두 개가 펄럭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왼쪽의 큰 깃
발 위에는 무원대장군위(武遠大將軍韋)라고 써 있었고 오른쪽의 큰 깃
발 위에는 대청녹정공위(大淸鹿鼎公韋)라고 써 있었으며, 수백 명의 호
위병들이 소년 장군 한 명을 옹호한 채 말을 타고 밖으로 나왔다.
이 장군이란 사람은 머리에 홍정자(紅頃子)를 썼고 몸에 황마괘를 입었
다. 얼굴에는 웃음을 띄우고 있었으며 왼손으로 깃털 부채를 살며시 흔
들고 있는 게 마치 제갈공명 같았고, 오른손으로 큰칼을 거꾸로 들고
있는 모습은 위엄 있는 관운장 같았다. 그는 다름아닌 바로 위공(韋公)
소보(小寶)였다. 그는 말을 몰고 나오더니 하하하, 하고 세 번 앙천대
소했다. 이는 조조를 흉내낸 것이다. 다만 애석하게도 옆에서 장단을
맞춰 줄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장군께선 무엇 때문에 웃는 겁니까'라
고 묻지 않았다.
도이포청의 가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위험을 돌보지 않고
큰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중국 꼬마야, 간사한 계책으로 날 잡았기 때문에 너는 영웅이라 할 수
없다. 죽이고 싶으면 죽일 것이지 무엇 때문에 이처럼 날 모욕하는 것
이냐?]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널 모욕했느냐?]
도이포청이 화를 내며 말했다.
[날… 날 이런 모습으로 만든 것이 모욕이 아니란 말이냐.]
위소보가 웃으며 되물었다.
[네 바지를 누가 벗겼느냐?]
순간 도이포청은 말문이 막혔다. 자기의 옷은 모두 부하들이 억지로 벗
긴 것이라 이 꼬마 장군을 나무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극도로 화
가 나서 얼굴이 온통 시뻘겋게 되었다. 앞으로 달려가서 위소보와 사생
결단을 내려는데 위소보 곁에 있는 친병 네 명이 잽싸게 다가오더니 장
총을 쳐들고 번쩍거리는 총구로 그의 몸을 겨냥했다. 도이포청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자기의 하체를
가렸다. 쌍방의 관병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폭소를 터뜨렸다.
[네가 투항을 했다면 그건 곧 대청에 귀순한 것이니 지금 당장 북경으
로 가서 중국 황제께 절을 올려라!]
도이포청이 말했다.
[항복하지 않겠다. 설령 내 몸을 난도질을 한다 해도 난 절대로 항복하
지 않겠다.]
위소보가 목청을 높여 나찰병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항복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관병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위소보
는 서쪽의 백기를 가리키며 소리를 외쳤다.
[항복하는 군관이나 병사들은 서쪽으로 가거라!]
관병들은 넋을 잃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그중 대부분의 사병들은 투항
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쪽으로 가는 사람이 없어서 감히 먼저 나서지
못했다. 위소보가 말했다.
[좋다. 아무도 투항하지 않겠다 이거지? 취사병들 나와라!]
곧바로 친병대 뒤에서 열 명의 취사병들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웃옷을
입지 않았고 손에는 뾰죽한 칼과 쇠꼬챙이를 들고 앞으로 다가가서 몸
을 굽히며 명령을 기다렸다. 위소보가 도이포청에게 말했다.
[너희 나찰국에 하서니극(霞舒尼克)이란 맛좋은 요리가 있는데 왕년에
내가 모스크바에서 먹은 적이 있었다. 맛이 아주 괜찮은 것 같았다. 갑
자기 난 그게 또 먹고 싶구나!]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열 명의 취사병에게 말했다.
[하서니극을 만들어라!]
취사병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명령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스무 명의 사병이 쇠로 만든 난로를 열 개 밀고 나왔다. 난로 안에는
숯불이 시뻘겋게 타고 있었다. 나찰 관병들은 이 중국 장군이 무슨 엉
뚱한 짓을 할지 몰라서 겁에 질려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위소보가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스무 명의 친병이 다가가서 나찰병 열 명을 끌고
왔다. 위소보가 나찰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들 몸에 있는 고기를 잘라서 하서니극을 만들어라!]
하서니극이란 쇠꼬챙이에다 쇠고기를 끼워서 불에 굽는 것으로서 나찰
국에서 제일 유명한 요리였다.
이윽고 취사병들이 나찰병 앞으로 걸어가서 뾰죽한 칼을 높이 쳐들더니
밑으로 내리쳤다. 순간 나찰병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고환
이 싹둑 잘라져 버린 것이다. 이 나찰병들은 산 위로 끌고 갔다. 바닥
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취사병들 왼손에 들려 있던 쇠꼬챙이 위에는 이
미 고환이 꽂혀져 있었고 화로에 그것을 굽기 시작했다. 나찰병들은 서
로 얼굴을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두 숨을 죽인 채 바라보고
만 있어 쥐죽은 듯이 조용했지만 숯불이 타는 소리와 고기에서 나온 기
름이 불로 떨어질 때마다 '칫칫칫'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위
소보가 외쳤다.
[다시 나찰병 열 명을 끌고 가서 하서니극을 만들어라!]
친병들은 다시 사람을 끌어냈다. 이때 피납된 나찰병 중에서 네 명이
소리를 질렀다.
[항복, 항복.]
[좋다! 항복한 자는 저쪽으로 끌고 가라.]
친병들이 항복한 병사들을 백기 아래로 끌고 가자 그들에게 술과 고기
를 갖다주는 사람이 있었다.
친병들은 다시 대열로 가서 다른 네 명을 끌어내려 했다. 그 네 명은
항복한 동료한테는 고기와 술을 대접하고, 항복하지 않는 자는 몸에 있
는 살을 잘라서 하서니극으로 구워 버리는 걸 목격했다.
비록 잘라 낸 부위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청병의 눈빛이 자꾸 자기의 하
체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서 아주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너무
나 겁에 질린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항복이다!]
굴복하지 않았던 여섯 명의 사병들도 기세가 꺾여서 모두 소리를 외쳤
다.
[항복!]
마침내 스스로 항복하겠다는 자들이 나타나자 나머지 병사들도 감히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친병이 끌어내기도 전에 스스로 백기 아래로 걸어
갔다. 삽시간에 일천팔백여 명의 나찰 병사들은 모두 항복했다. 단지
도이포청 한 사람만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넌 항복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죽어도 항복하지 않는다!]
[좋다, 널 아극살로 보내 주마.]
그러더니 홍조로 하여금 오백 명 병사를 이끌고 그를 아극살 성으로 호
송토록 하였다. 도이포청은 자기가 이처럼 완강하게 버티면 이 청군 장
군이 틀림없이 자기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석방해 주겠다
는 말을 듣고 몹시 의아해 하며 말했다.
[네가 날 석방해 주겠다면 내 옷을 돌려줘라!]
[옷은 돌려줄 수 없다.]
그러면서 홍조(洪朝)에게 분부했다.
[그대는 저자를 아극살 성 아래까지 호송하여 나의 장령을 전달하시오.
잠시 성을 공격하는 건 멈추고 이 벌거승이 나찰 장군을 끌고 성을 세
바퀴 돌고 나서 그를 풀어 주도록 하시오.]
홍조는 장령을 전달받고 벌거숭이가 된 도이포청을 압송해 갔다. 임흥
주가 말했다.
[대장께선 그 나찰 장군을 뭣 때문에 다시 풀어 주려는 것입니까? 이
안에는 필시 오묘한 계책이 있을 것 같은데 이 소인에게도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싸움에서 대승을 거둘 때 무슨 계책을 사용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건 대장님의 치밀한 계획이 아닙니까? 소장은 정말 탄복했습니다.]
위소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내 계획이 아니라 황상께서 세우신 묘책입니다. 황상께서는 왕년
에 제갈공명이 맹획을 일곱 번 놓아 주었다가 일곱 번 도로 잡았던 계
책이 아주 좋다고 하시면서 나로 하여금 한번 시도해 보라고 하셨습니
다. 그대는 칠금맹획(七擒孟獲)이란 창극을 보셨는지요. 설령 구경하지
못했더라도 이야기는 들었을 게 아닙니까? 제갈공명은 위연으로 하여금
출전토록 했는데 절대로 싸움에서 이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윽고 열
다섯 번이나 연패하자 맹획은 일곱 채의 영채를 점령하게 되었고, 마침
내 그를 반사곡(盤蛇谷)으로 유인하여 등갑병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우
리가 오늘 사용한 것은 바로 제갈공명의 계책입니다.]
제장들은 모두 탄복했다. 위소보가 다시 말을 이었다.
[황상께선 마음이 너그러우셔서, 제갈공명이 등갑병을 불태워 버린 건
너무나 지나쳐 자기의 수명을 단축시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나
찰병이 항복하면 그들의 목숨을 살려 준 것입니다.]
부도통 낭탄(郎坦)이 말했다.
[만약 대장께서 그 하서니극이란 계책으로 나찰병 열 명의 살을 잘라서
굽지 않았다면 그 사나운 나찰병들은 아마 항복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
다. 따라서 그 계책은 실로 제갈공명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화로불에 구운 건 최상품 고기입니다. 과연 맛이 얼마나 좋은지 여러
분들도 한번 시식하지 않겠습니까?]
위소보의 말에 장군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장군들이 다시 되물었다.
[대장께서 적의 추장을 사로잡았는데도 다시 그를 놓아 준 것은 칠금칠
종(七擒七縱)해서 그로 하여금 다시는 침략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
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일은 내가 북경에 있을 때 황상께도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황상께 우리도 제갈공명처럼 나찰의 장군을
사로잡으면 그를 일곱 번 놓아 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었는데 황상께선
그건 옳지 못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제갈공명을 배우려면 필히 응
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맹획은 야만인의 추장이라 그가 반란을 일으키
지 않겠다고 한번 말하면 영원히 일으키지 않지만 우리가 잡은 건 일개
나찰의 장군이 아닙니까? 설령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말해도
나찰국의 사황과 섭정 여왕이 다른 원수를 파견하여 군대를 이끌고 우
리 영토를 침략하러 올 것인데 그의 말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장군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옳다고 말했다.
[아극살을 지키고 있는 병사는 사나울 뿐만 아니라 포화의 위력도 대단
합니다. 만약 우리가 나찰의 원수를 죽이면 성 안에 있는 관병들은 다
른 통수(統帥)를 추대할 것이며 공략하기 더욱 힘들 겁니다. 그러나 지
금 우리가 이 나찰 원수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그를 끌고 성을 세 바퀴
돌면 성 안에 있는 나찰병들은 앞으로 그를 경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의 위풍이 실추되면 앞으로 명령을 하더라도 순순히 따르지 않을 겁니
다.]
제장들은 일제히 '옳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임흥주가 되물었다.
[옷을 홀랑 벗기는 계획 역시 황상께서 당부하신 겁니까?]
위소보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어떻게 그런 장난을 하시겠습니까? 황상께선 단지 나로 하여
금 우리 사병들의 사기를 높이고 나찰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방법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황상께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찰
병들은 키도 크고 체격도 크다. 게다가 온몸에 털이 있어서 마치 야만
인 같다. 뿐만 아니라 화기 또한 성능이 아주 뛰어나다. 그러니 아군이
그들의 야만적인 모습을 보면 필시 겁을 먹게 될 것이다. 일단 사기가
꺾이면 싸움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소계자, 너는 나보다 잔꾀가 많
으니 아군들로 하여금 놈들을 경시하도록 만들어라.' 그러나 아무리 생
각해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갑자기
내가 어렸을 때 노름하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제장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네가 어렸을 때 노름하던 것과 나찰병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위소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양주에서 노름할 때 돈을 따면 문제가 없었지만 잃기
만 하면 마냥 떼를 썼죠. 심지어 싸운다해도 난 겁내지 않았습니다. 그
런데 한번은 어떤 사람한데 호되게 당했습니다. 그때 나의 돈을 딴 사
람은 날 붙잡고 내 바지를 벗기더니 나더러 엉덩이를 드러낸 채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히죽히
죽 웃었습니다. 그 후부터 나의 성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제장들은 일제히 껄껄 대고 웃었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는 싸움의 원칙은 임기응변이라고 하셨습니다. 황상께선 단지
방략대계(方略大計)를 지시할 수 있을 뿐, 정작 싸우려면 나 자신이 머
리를 써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남들이 바지를 벗기는 걸 무서워
했는데 이 나찰병들이 어찌 무서워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예측대로 바
지를 벗기자마자 모두 순순히 투항하지 않았습니까?]
제장들은 일제히 칭찬하며 탄복을 금치 못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
각했다.
(이 바지를 벗기는 방법은 손자병법에도 없는 것이다. 이 위자병법(韋
子兵法)은 생각보다 아주 무섭구나.)
위소보는 투항한 나찰병들에게 명하여 청병의 의복을 입고 모자를 쓰도
록 했다. 그리고 나서 참장 한 명을 파견하여 이천 명의 청병을 이끌고
포로들을 북경으로 압송해 황제에게 바쳤다. 영중(營中)에는 멀리까지
말을 전달할 수 있는 목소리가 큰 포로를 스무 명쯤 남겨 놓았다. 그리
고 대영에 있는 사야(師爺)로 하여금 상주문을 쓰게 하였다. 상주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무원대장군 위소보는 황상의 어의를 따라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나찰
병들이 중국을 앙모하여 귀순한 건 실로 우리 황상의 덕이 하늘에 사무
쳐 만이(蠻夷)를 감화시킨 것입니다.]
그날 밤 위소보는 삼군(三軍)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벌이고 다음날 아
침 몸소 군대를 이끌고 아극살 성에 왔다. 이때 섬벽 위에는 연기가 자
욱했고 성내와 성 밖은 쌍방의 군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했
고 총성과 포성은 그칠 줄 몰랐다. 공성(攻城)의 주장인 붕춘(朋春)이
입영하여 보고했다.
[성 안의 포화가 맹렬해서 공성했던 아군의 사병들이 적지 않게 사망했
습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빌어먹을! 그렇다면 우리도 대포로 폭격합시다.]
붕춘이 명령을 전달하자 얼마 후 동서남북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렸다.
그러나 나찰인들은 오랫동안 아극살을 구축한 것이라 공사가 아주 견고
하게 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모두 견고한 진지 안에 피해 있었다. 비록
청군의 대포가 많아서 적지 않은 집들을 무너뜨렸지만 나찰병들이 지키
기만 할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그들은 어찌할 수 없었다.
여러 날 동안 공략을 했지만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자 붕춘은
일천 명의 용사를 이끌고 가까이 다가가서 성벽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
런데 성벅 위에서 총을 아래로 마구 쏘는 바람에 청병은 삽시간에 사백
명이 전사했다. 붕춘은 불리하다는 걸 알자 즉시 신호를 보내 병사들을
거두었다. 나찰병들은 성벽 위에서 박수치며 큰소리로 웃었다. 심지어
수십 명의 나찰병들은 바지를 내려서 밑으로 오줌을 갈겼는데 그 모습
은 실로 오만불손했다. 마침내 흑룡강 장군인 살포소가 크게 진노하여
몸소 군대를 이끌고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성벽 위에서 총을 마구 쏘
아 대는 바람에 살포소는 총을 맞고 그만 낙마하고 말았다. 순간 청군
은 크게 혼란해졌다.
이때 성문이 열리고 수백 명의 나찰병이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러자
임흥주는 등패병을 이끌고 땅바닥에 뒹굴며 앞으로 다가가 큰칼을 휘둘
렀다. 나찰병들은 얼른 몸을 퉁기며 피했다. 이 등패병은 임흥주가 직
접 훈련시킨 것이라 지당도법(地堂刀法)이 아주 능했다. 그들은 땅바닥
에 뒹굴며 앞으로 다가가 왼손에 들고 있는 등패로 적의 탄알을 막고
오른손에 들고 있는 큰 칼로 나찰병들의 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잘랐다.
도이포청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급히 명령을 하달하여 병사들을 거두어
들였다. 임흥주는 살포소를 구해 돌아왔다. 살포소는 오른쪽 이마에 부
상을 당했지만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
번 싸움은 쌍방이 모두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청군의 사상자가 더욱
많았다. 위소보는 군의관을 데리고 몸소 살포소의 천막으로 가서 치료
해 주고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임흥주에게는 후한 상을 내렸다. 이윽
고 부대를 오리 밖으로 후퇴시킨 다음에 그날 밤 천막 안에서 제장들을
모아 놓고 공성하는 방법을 상의했다.
제장들은 등패병이 오늘 큰 공을 세웠다고 하면서 내일 다시 놈들을 성
밖으로 유인하여 등패병으로 하여금 놈들의 발목을 자르자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놈들의 사기가 꺾였기 때문에 감히 출전하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긴 진지를 구축해서 사방을 포위하여 그들을 산 채로 굶겨 죽이
자고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땅굴을 파서 성을 공격하자고 했다. 땅
굴을 파서 성을 공격하는 건 중국의 옛 방법 중에 한 가지였다. 그런데
이 말은 뜻밖에도 위소보를 깨우쳐 주었다. 아극살 성은 원래부터 지하
도가 있었다. 왕년에 자기가 바로 그 지하도에서 벌거숭이 소비아 공주
를 껴안았던 적이 있었다.
지금 그녀는 이미 귀하신 섭정 여왕이 되어 나찰국 군정대권을 장악하
고 있는데 자기는 여기서 그녀의 부하들과 싸우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만약 지금 그녀가 아극살 성 안에서 직접 지휘하고 있다면 내가 땅굴
로 성에 들어가서 그녀의 침대에 기어올라 한 번 만지고 두 번 만져서
나중에 그녀가 온몸이 달아오르면 그 화냥년은 분명히 큰소리로 항복이
라고 외칠 것이다.)
제장들은 위소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보고 그에게 이미 묘책이 있는 줄 알았다. 그들은 즉시 입을 다물고
대수의 분부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들이 어찌 그가 지금 노란 털이 나
있는 소비아 공주의 몸을 어떻게 애무할 것인지 궁리하고 있는 줄 짐작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두 눈을 감을 듯 말 듯 하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끝내 주는 여자야. 그녀한테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
다니까!]
제장들은 어리벙벙했다. 이윽고 다시 대장의 말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한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침대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제장들은 더욱 뭐가 뭔지 몰라서 어리벙벙했다. 이윽고 그의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나찰의 화냥년이 보통내기는 아니지만 이 어르신네는 그녀를 상대
할 방법이 있지.]
붕춘이 말했다.
[대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나찰놈들이 제아무리 어려운 상대라 할지라
도 반드시 우리는 상대할 방법이 있을 겁니다.]
순간 위소보는 깜짝 놀랐다. 이윽고 눈을 뜨고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
다.
[우리? 그렇다면 그대도 그녀를 만지겠다는 건가?]
이어서 큰소리로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 참, 그렇지! 그 지하도는 너무나 좁아서 한 사람밖에 기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게다가 출구는 장군의 방에 있기 때문에 아마 지금쯤 벌
써 막아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히 다른 것을 파야 합니
다.]
제장들은 그의 말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이윽고 위소보는 몸을 일
으키며 말했다.
[여러 장군들의 계책은 모두 훌륭합니다. 내일 아침부터 여러분들은 나
눠서 진지를 길게 구축하고 땅굴을 파도록 하십시오. 동시에 대포를 쏴
서 그들을 출전토록 유도하여 등패병을 파견해 놈들의 발목을 자르도록
합시다.]
제장들은 자신들이 건의한 계책을 대수가 채택하자 모두 기쁜 마음으로
천막을 나섰다.
다음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장군들은 부하들을 이끌고 일을 시작했다.
붕춘은 사병들이 진지를 구축하는 걸 감독했고, 낭탄은 대포 쏘는 걸
지휘했으며, 파해(巴海)는 땅굴 파는 걸 지시했다. 홍조는 오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찰병 포로들한테 배운 욕으로 성 아래에서 큰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나찰인들은 무식해서 욕도몇 마디 되지 않았다.
병사들의 목소리가 아주 컸지만 포함된 뜻은 아주 평범했다. 아무리 반
복해도 '너는 더러운 돼지다', '똥이나 먹어라' 같은 몇 마디에 불과하
니 어찌 지저분하고 다채다자(多采茶姿)
하며 변화무쌍한 중국의 욕을 따를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잠시 듣고
있었으나 몹시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나찰병들은 어제 발목을 잘리는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성벽 위에 있는
토담 뒤에 숨어서 욕을 퍼붓기만 하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청군의
대포가 성 안으로 폭격을 가했지만 별로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당
시의 대포는 화약을 포통 안에 담아서 불을 붙여 쏘는 것이라 단지 쇠
로 된 탄알이나 납으로 된 탄알을 발출하기 때문에 직접 사람 몸에 명
중되면 중상을 입지만 만약 땅에 떨어지면 별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
다.
부근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십여 년 동안 나찰병들이 참혹하게 학살하
는 바람에 집안이 망하고 가족이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황상께서 발병(發兵)하여 나찰놈들을 무찌르러 왔다는 소식을 듣자 모
두 미칠 듯이 기뻐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관
군을 위로했고 어떤 사람은 호미를 갖고 와서 토방을 구축하는 걸 도와
주기도 했다. 그리고 밖으로 소식이 전해지자 수백 리 밖에 떨어져 있
는 백성들까지도 모두 몰려와서 성을 공격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도이포청이 성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치 개미떼와 같은 사람들
머리가 한데 어우러져서 흙을 운반하여 토방을 쌓고 있었다. 성 밖에
있는 긴 토방이 갈수록 높아지자 영락없이 갇혀서 죽게 될 것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오직 바라는 것은 서방의 니포초 성에 있는 나찰병이 와
서 구원해 주는 것뿐이었다. 더욱이 안팎에서 협공을 가해야만 비로소
승산이 있다.
그러나 강희 황제는 이미 사전에 그 일을 예측했기 때문에 이미 다른
기병대를 니포초로 파견하여 나찰병들의 협공(挾攻)을 견제하고 있다는
걸 어찌 그가 알았겠는가?
이 무렵 니포초 성의 수장(守將)도 매일 도이포청의 원병이 와주길 바
라고 있었다.
나찰병의 충포는 사정거리가 멀기 때문에 청병은 감히 가깝게 접근하여
성을 공격하지 못했다. 아극살 성은 나찰이 동방(東方)을 경영(經營)하
는 기지다. 나찰인들은 야심이 커서 흑룡강과 송화강 일대의 넓은 땅을
점령한 후 더욱 남침을 가하여 중국 전체를 모두 정복하려 했다. 아울
러 수천만 사람들을 모두 신복(朝段)이나 농노(農奴)로 만들기 위해서
아극살 성이 성벽을 아주 견고하게 건축했던 것이다. 성 안의 탕약은
충분했고 양식도 산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에 삼 년 내지 오 년 정도 갇
혀 있어도 아무 걱정이 없다. 게다가 성 안의 우물이 깊기 때문에 식수
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도이포청은 성 안에 있는 중국인들이 내란을
일으킬까 봐 중국 남자들을 모두 성 위로 끌어다 살해하고 시체를 성
아래로 버렸다. 성 밖에 있는 중국의 군민들은 이를 보고 하나같이 분
개하며 욕을 퍼부었다.
第130章. 아극살 성을 함락시키다
이 무렵 청군이 파고 있던 땅굴은 서서히 성에 접근하고 있었다. 위소
보는 내심 녹정산은 황제의 용맥이 서려 있는 곳이라 만약 용맥을 끊어
서 강희를 죽게 만든다면 크나큰 잘못을 범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하여 땅굴을 성 안까지 파지 못하도록 명했다. 단지 성벽 아래 폭약을
설치하여 성벽을 폭파시키라고 했다.
이날 성 안에 있는 몇 개의 우물에 갑자기 물이 말라 버렸다. 도이포청
은 용병술이 능해서 이 소식을 전해 듣자 곰곰이 생각해보니 적군이 땅
굴을 파고 있기 때문에 지하의 수원(水源)이 땅굴 안으로 흘러나간 것
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위치를 측정하여 청병의 땅굴 위
에다 폭약을 설치해 놓고 불을 붙이자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땅굴을 파
고 있던 백여 명의 청병이 모두 전사했다. 그리고 땅굴도 삽시간에 막
혀 버렸다.
아극살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추워졌다. 이
극북(極北) 지방은 본시 추운 곳이라 일단 가을이 깊어지면 추위가 보
통이 아니었다.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었다. 조금만 소홀
히 해도 코와 귀가 얼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심지어 손가락
이 얼어서 떨어지고 손발이 얼어서 썩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다.
며칠 동안 대설이 내리자 관병을 돕고 있던 백성들이 먼저 견디지 못하
여 관병들에게 내년 초여름에 얼음이 녹으면 다시 와서 돕겠다고 말했
다. 그리고 관군들에게는 엄동설한에 얼어 죽을지도 모르니 남쪽으로
후퇴하라고 충고했다.
살포소, 파해 등 군관들은 북지에 오랫동안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겨
울이 되면 아주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야간에 갑작스럽게
한파가 급습하면 하릇밤 사이에 관병이 절반 이상 얼어 죽는 일도 있었
다. 나찰병들은 집안에 살고 있어서 벽이 한기를 막아 주지만 청군들은
야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불을 피워도 허사였다. 마침내 그들은
위소보에게 잠시 남쪽으로 후퇴하여 한파를 피하자고 건의했다.
위소보는 내심 황상께서 자기를 파견하여 출정토록 했는데 성하나 함락
하지 못하고 후퇴해야 하는 자신이 너무나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했지만 끝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때 부장(部
將)이 와서 수십 명의 군졸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었다고 보
고했다. 위소보가 한참 풀이 죽어 있는데 갑자기 성지(聖旨)가 당도했
다. 강희의 성지는 다음과 같았다.
[무원대장군 위소보가 출사득리(出師得利)해서 심히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지금쯤은 이미 나찰의 항장(降將)이 대청의 칙서를 모스크바에
있는 나찰국 왕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짐은 그들로 하여금 군대를 철수
하고 양국이 영원히 화친하자고 촉구했다. 지금쯤 그곳 날씨가 추워져
병장들의 노고가 심할지니 짐의 마음이 측은하다. 위소보는 즉시 군대
를 이끌고 남쪽으로 후퇴하라. 애휘(曖暉), 호마이(呼瑪爾) 두 성에 주
둔하여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도록 하며, 내년 봄에 나찰병들이 만약 여
전히 완강하게 저항하면 다시 진군하여 일거에 소탕토록 해라. 그리고
무원대장군 및 소속장군, 도통, 부도통 이하 관병들에게 부족한 의복과
이불, 금은, 주식(酒食)을 하사하는 바이니 장군들은 필히 짐의 뜻을
따라 사병들을 아끼며 급히 공을 세우려 하지 마라. 왕사(王師)가 북정
(北征)을 강행한 것은 원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사병들도
곧 백성이란 걸 명심하기 바란다.]
위소보와 제장(言都卒)들은 성지를 받고 사은했다. 제장들은 모두 만세
야께서 장사(將士)들을 아끼시는 마음은 실로 하해와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막상 이대로 후퇴하면 그 동안 들인 공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
이 들었다. 성지를 전하러 온 흠차(欽差)가 각 영(營)으로 가서 성지를
선포하고 상을 내리자 사병들은 우뢰 같은 환호성을 외쳤다.
다음날 위소보는 명령을 전달하여 살포소로 하여금 사병들을 이끌고 먼
저 후퇴하라고 했다. 그리고 파해와 임흥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추
격병을 막으라고 명했다. 만약 나찰병들이 쫓아오면 그들을 하나도 어
김없이 사살하라고 했다.
나찰병들은 청병이 철수하는 걸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천여 명
이나 되는 나찰병들은 성곽 위에 서서 아래로 향해 오줌을 갈겼다. 위
소보는 노발대발하며 군사들로 하여금 일제히 성곽을 향해 소변을 보도
록 명령을 하달했다. 만여 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일제히 오줌을 갈기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이때 성곽 위와 아래는 웃음소리와 욕을 퍼븟
는 소리가 한데 뒤섞여서 말할 수 없이 어수선했다.
나찰병들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향해 오줌을 갈기니 오줌이 성아래까지
갈 수 있지만 청군은 위로 갈길 수 없어서 이 오줌 싸움은 청군이 패한
것이었다. 마침내 성 아래는 온통 오줌으로 덮여있었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대자 삽시간에 누런 얼음으로 변했다.
위소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성곽을 가리키며 한참 동안 욕을 퍼부었다.
그러자 성지를 가지고 온 흠차가 타이르며 말했다.
[나찰병들은 모두 짐승 같은 놈이니 대장께서 참으십시오.]
위소보가 말했다.
[그럴 순 없소. 진 게 너무 창피하지 않소.]
그러면서 수룡(水龍)을 꺼내 오라고 분부했다. 수룡은 화재가 일어나면
사용하는 도구라 행군할 때나 야영을 하면 반드시 휴대했다. 친위병들
이 십여 대의 수룡을 끌어오자 위소보는 진지 위로 끌어올리라고 분부
했다. 이때는 강물이 얼었기 때문에 사용할 물이 없었다. 그러자 화부
(火夫)들로 하여금 큰 솥에다 불을 피워서 얼음과 눈을 녹여 수룡에 붓
도록 명했다. 그런 뒤 위소보는 바지를 내리고 뜨거운 물에다 오줌을
한 번 갈기더니 큰소리로 친위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친위병들은 주수(主帥)가 이러한 묘책을 생각해 내자 모두 기뻐하면서
일제히 용감하게 수룡의 지렛대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수룡안에 있는
뜨거운 물이 곧장 성을 향해 발사해 갔다. 친위병들이 큰소리로 외쳤
다.
[위 대장께서 나찰놈들에게 하사하시는 오줌 세례다!]
뜨거운 물이 발사해 오자 나찰병들은 욕을 퍼부으며 모두 대피했다. 제
장(諸將)들 중에는 속으로 위소보를 비웃는 자도 있었고 어떤 자들은
대장한테 잘 보이기 위해 옆에서 큰소리로 응원하는 자도 있었다. 다만
날씨가 너무나 춥기 때문에 수룡 안에 있는 뜨거운 물이 잠시만 지나면
모두 얼어 비려서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야했다. 위소보는 기분이 좋아
서 자화자찬했다.
[제갈공명은 반사곡을 불태워 비렸지만 위소보는 오줌을 녹정산에 발사
했다. 이는 똑같은 위풍이라고 할 수 있다.]
부도통 낭탄이 옆에서 칭찬했다.
[대장님의 오줌 세례는 나찰놈들의 사기를 크게 꺾었을 겁니다.]
순간 위소보는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고 마치 넋 빠진 사람처럼 있다가
한번 크게 외치더니 겅충낑충 뛰면서 껄껄 대고 웃었다.
[그렇지, 바로 그거다!]
위소보는 모든 장수들을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제장들이 모두
모이자 그들에게 물었다.
[우리 부대에 수룡이 모두 몇 개나 되오?]
군수품을 관리하는 참장이 보고했다.
[대원수께 아뢰오. 모두 열여덟 대 입니다.]
위소보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너무 적다, 너무 적어! 왜 좀더 많이 가져오지 않았느냐?]
[죄송합니다.]
그러나 참장은 내심 생각했다.
(부대 안에 자주 화재가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열여덟 대만 있으면 충
분하다.)
위소보가 말했다.
[난 수룡 천 대가 필요하니 즉시 사람을 부근 마을로 보내서 조달하도
록 해라. 언제쯤이면 준비가 되겠느냐?]
그곳은 최북단에 있는 변방이라 땅은 넓어도 사람은 아주 적었다. 따라
서 제일 가까운 마을도 수백 리 밖에 있었다. 그리고 마을마다 불과 수
백 가구밖에 없었고 게다가 주민들이 모두 가난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수룡이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천 대의 수룡을 조달하는 건 절대
로 불가능했다. 그 참장은 난처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대원수께 아뢰오. 천 대의 수룡을 조달하려면 관외(關外)에서는 불가
능합니다. 반드시 관내로 들어가 북경이나 천진에 가서 운반해 와야 합
니다.]
위소보는 화를 벌컥 냈다.
[닥쳐라! 북경이나 천진에 가서 수룡을 조달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
겠느냐? 싸움을 하는 일은 반나절도 지체할 수 없다!]
그 참장은 연신 예, 예, 하고 대답하며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내 목이 자리를 옮기게 됐구나.)
그 흠차는 옆에 앉아 있다가 참다 못해 타이르며 말했다.
[대장님, 그대의 귀뇨(貴尿)는 이미 성곽 위로 발사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번 싸움은 우리가 이긴 것입니다. 그러니 궁지에 몰려 있는 도적놈들
을···그만 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일천 대의 수룡이 없으면 이번 큰일을 치를 수 없
습니다.]
그 흠차는 내심 나름대로 생각했다.
(이 대수는 정말 너무 엉뚱하구나. 이 사뇨투기(射尿鬪氣)하는 일은 어
쩌다 장난삼아 한번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대대적으로 오줌을 싸려고
하지? 소년 황제는 소년 장군을 아끼신다. 게다가 그들 군신지간은 막
역한 사이라 다른 사람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한다. 그러나 엉뚱한
짓을 지나치게 하면 체통이 깎이고 사람들의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느
냐.)
그가 타이르려 하자 위소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장군 여러분, 어떤 분께서 묘책을 생각해 내어 즉시 일, 이천 대의 수
룡을 조달해 오시면 그건 막대한 공을 세우는 것이오.]
붕춘이 말했다.
[대장님께 묻겠습니다. 대원수님께선 그 수룡으로……성에다 오줌을 발
사하려는 것입니까?]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에게 일천 대 수룡이 있다 해도 어디서 그 많은 오줌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군사가 백만이 있다 해도 부족할 겁니다.]
붕춘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대수께서 이 미련한 부하를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
다.]
위소보가 말했다.
[조금 전에 본수(本帥)는 귀뇨(貴尿)가 성곽 위로 발사되자 즉시 얼음
으로 얼어 버리는 걸 보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일, 이천 대의 수룡으로
계속 며칠 동안 뜨거운 물을 성 안에다 발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순간 장군들은 모두 어리벙벙했다. 이윽고 머리 회전이 빠른 몇 사람이
먼저 환호성을 터뜨리자 곧바로 다른 사람들도 모두 깨닫게 되었다. 그
리고 천막 안에서 일제히 우뢰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장군들은
크게 외쳤다.
[정말 묘책입니다. 정말 묘책입니다. 이거야말로 수만아극살(水滿雅克
薩) 빙동녹정산(氷凍鹿鼎山)입니다!]
잠시 후 환호성이 멈추자 이윽고 어떤 사람이 말했다.
[설령 북경, 천진에 가서 조달하더라도 그 일천 대 수룡을 운반해 와야
합니다.]
부장과 좌령들이 여러 명 자청하여 수룡을 징집하러 가겠다고 나섰다.
흥조는 직위가 낮았기 때문에 맨 뒤에 서 있다가 몸을 굽히며 위소보에
게 말했다.
[말장(末將)에게 얕은 소견이 하나 있는데 주수께서 깨우쳐 주시기 바
랍니다.]
[말씀해 보시오!]
[말장은 복건 사람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너무 가난해서 수룡을 장만하
지 못합니다. 그래서 농촌에 화재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모두 대나무 물
총으로 불을 껐습니다. 그 대나무 물총은 아주 굵은 모죽(毛竹)으로 만
든 것입니다. 먼저 대나무 속을 비우고 끝부분에다 동전만한 구멍을 뚫
고 다른 한쪽에는 나무로 만든 마개를 하나 대나무통에 쑤셔넣는 것입
니다. 진화시킬 때는 물총의 구멍을 물에 잠갔다가 마개를 뒤로 끌어당
기면 대나무통 안에는 물이 가득히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서 함껏
마개를 앞으로 밀면 물총 안에 있는 물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위소보는 '음' 하고 대꾸하더니 이 물총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하
우가 말했다
[주수께 아뢰오. 이 물총은 크게 만들 수도 있고 작게 만들 수도 있습
니다. 소장도 어렸을 때 친구들하고 물총 놀이를 아주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일대에는 대모죽(大毛竹)이 생산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물총을 크게 만들려면 장강(長江)을 건너야만
그런 큰 대나무를 구할 수 있습니다.]
위소보가 홍조에게 물었다.
[그대에게 무슨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흥조가 말했다.
[이 일대에 비록 대모죽은 없지만 큰 소나무와 큰 삼나무는 무척 많습
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큰 나무를 잘라서 중간을 파내어 큰 물총을 만
들 수 있습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큰 소나무의 속을 파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때 성이 반(班) 씨이고 산서(山西)에서 목수일을 했던 부장 한명이
말했다.
[주수님께 아뢰오. 그 일은 과히 어렵지 않습니다. 먼저 나무 토막을
반으로 갈라서 중간을 반달 모양으로 파낸 다음 매끈하게 다듬는 겁니
다. 그러한 뒤 두 개를 합치면 나무의 중간에 둥그런 구멍이 형성됩니
다. 그리고 반쪽을 서로 합칠 때도 정교하게 하려면순두(筍頭)를 사용
하고 만약 정교하지 않아도 된다면 쇠못으로 박아 버리면 됩니다.]
순간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옳거니! 그야말로 묘책 중의 묘책이다. 그렇게 큰 물총을 한 자루 만
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
반 부장이 말했다.
[소장이 혼자 하면 하루에 한 자루 만들 수 있지만 밤새도록 만들면 두
자루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위소보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너무 느리다. 너무 느려! 그럼 넌 즉시 부대로 가서 일꾼들을 선발하
여 함께 일을 하도록 해라. 그러니까 너는 스승이 되어 즉석에서 제자
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물총 밖에 붙어 있는 나무껍질은 벗길
필요가 없다. 단지 물을 성 안으로 발사할 수만 있으면 된다. 장군 여
러분, 즉시 벌목을 하여 물총을 만들도록 하시오.]
장군들은 명령을 받자 각각 소속된 사병들을 이끌고 즉시 출발하여 숲
속으로 가서 벌목을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쾌마(快馬)를 파견하여 백성
들에게 목공일을 하는 도구를 빌리러 갔다.
관외(關外)에는 온통 소나무와 삼나무 투성이였다. 액이고납하(額爾古
納河) 일대는 곳곳에 숲을 이루고 있었고 백 년 이상 된 교목(喬木)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청군은 출동한 지 반나절도 채 못 되어 수천 그루의 큰 나무들을 벌목
했다. 사병들 중에는 본래 목수일을 했던 사람들이 백여 명이 있었다.
반 부장은 그들을 한곳에 불러다 놓고 다시 손재주가 있는 사병들을 찾
아 서로 도와가며 밤낮으로 물총을 만들기 시작했다.
반 부장은 먼저 시범용으로 한 자루를 만들었다. 그 물총의 직경은 두
자 정도였고 총신의 길이는 일 장 정도였다. 마개 끝부분에는 횡목(橫
木)을 한 토막 장치하여 여섯 명의 사병들이 좌우로 나눠 횡목을 움켜
잡고 일제히 밀고 끌어야만 했다. 이윽고 물총의 구멍으로 뜨거운 물을
주입시킨 후 반 부장의 명령에 따라 사병들은 힘껏 마개를 앞으로 밀었
다. 그러자 뜨거운 물은 물총 안에서 밖으로 격사(鵑射)되었다. 그것은
곧장 이백여 보(步) 밖으로 날아갔다.
위소보는 시험하는 걸 보고 나서 연신 갈채를 보내며 말했다.
[이건 물총이 아니라 물대포다. 그럼 우리가 그럴 듯한 이름을 하나 지
어 줍시다. 저……저 백룡수포(白龍水砲)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위소보는 금붙이와 은붙이를 꺼내서 반 부장과 대포를 함께 만든 관병
들에게 나눠 주며 최대한으로 많이 만들어 보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때 도이포청은 청병이 후퇴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걸 보았다. 그리고
성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청군 기지에 무수한 목재가 쌓여 있었
다. 순간 생각했다.
(중국놈들은 벌목하여 불을 피워서 따뜻함을 유지하고 계속 성을 포위
하겠다는 것 같은데, 흥! 앞으로 보름만 더 지나면 거센 눈바람이 불어
올 것이다. 그때는 너희들도 아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이 제아
무리 불을 피워도 지옥에서 나온 그 음풍한기를 견뎌 내지는 못할 것이
다.)
그는 성 아래로 내려가 친위병으로 하여금 실내를 따뜻하게 하라고 명
령했다. 그리고 나찰의 독한 술을 마시며 포로로 데려온 중국 소녀 두
명을 불러 술 시중을 들도록 했다.
붕춘, 하우 등 장군들은 각각 기병대를 보내서 인근 수백 리에 살고 있
는 백성들의 연장과 솥을 모두 진지로 옮겨 놓았다. 진지에 쌓여 있는
나무더미와 빙설더미는 마치 한 채 한 채의 산과 같았다. 그리고 완성
된 백룡수포는 나찰병들이 발견할까 봐 모두 나뭇가지로 덮어 놓았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반 부장으로부터 백룡수포 삼천 대를 완성시켰다는
보고를 받았다. 게다가 다음날은 황도길일이라 위소보는 묘시(卯時)에
승장하여 북을 쳐서 장군들을 집합시켰다. 그런 뒤 백룡수포를 토방 위
로 들어올려서 포구를 성 쪽을 향해 겨냥했다. 이윽고 진지 안에 있는
호각이 일제히 울리면서 신호음을 꽝, 꽝, 꽝, 하고 아흡 번 연발했다.
그러자 각 진지의 병사들은 일제히 빙설을 솥에다 퍼넣고 불을 지폈다.
도이포청은 한참 따뜻한 이불 속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성 밖
에서 포성이 크게 울리자 벌떡 일어나 황급히 옷을 입고 나서 성곽 위
로 올라가 살펴보았다.
이때는 한참 눈보라가 바람과 함께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에 날
씨가 어둠침침했다. 이윽고 어렴풋이 청군의 긴 토방 위에 큰 나무토막
이 하나하나씩 놓여 있는 걸 보고 의혹을 품고 있는데 갑자기 청군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수천 그루 큰
나무에서 물이 뿜어 나와 성 안으로 발사해 왔다.
도이포청은 깜짝 놀랐다. 이어서 한 줄기 뜨거운 물이 가슴팍을 후려쳤
다. 다행히 날씨가 너무나 춥기 때문에 물이 발사해 올 때는 많이 식어
있었다. 그래도 그는 밀리는 힘에 못 이겨 다리가 휘청거리며 그만 쓰
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친위병이 재빨리 부축해 세웠다. 마
침내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나왔고 머리 위로는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리
면서 마치 한 마리 한 마리 백룡처럼 물기둥이 성 안으로 날아들었다.
삽시간에 아극살 성 위에는 짙은 안개가 덮였다. 물론 이 안개는 수증
기가 냉각되어 형성된 것이다. 순간 도이포청은 어수선한 마음으로 버
럭 소리를 질렀다.
[중국놈들이 또 요법(妖法)을 부리고 있다!]
뜻밖에도 나무 안에서 물이 뿜어 나왔으니 어찌 그로서 요법이라고 의
심하지 않겠는가? 이윽고 그는 당황한 나머지 큰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모두 총올 쏴서 중국놈들이 성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해라!]
그는 청군들에 의해 옷이 홀랑 벗겨진 그날부터 위신이 크게 떨어지는
바람에 명령을 내려도 부하들이 예전처럼 복종하지 않았다. 다만 청군
이 성을 함락시키려고 몹시 다급한 모습이라 나찰병들은 혹시나 성이
함락되어 변을 당할까 봐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수비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갑자기 수천 줄기의 물기둥이 성 안으로 발사해 오는 걸 보자
사병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도망갔다. 그러니 누가 그의 명령
을 따르겠는가?
다행히 청군은 물만 발사했지, 그 틈을 타서 성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나찰병들이 한차례 수선을 떨고 나서 놀랐던 마음을 다소 안정시키고
보니 땅에 고여 있는 물이 모두 얼음으로 얼어 버렸다. 그리고 머리 위
에서는 여전히 물이 아래로 뿌려졌다.
아극살 성에 남아 있는 중국 남자들은 이미 다 죽었기 때문에 남은 건
오직 음락(7孚樂)의 대상인 젊은 여자들뿐이다. 성에는 나찰병들 말고
도 모스크바에서 파견해 온 문직관원(文職官員)과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군대를 따라 장사하는 상인도 있었고 동방에서
힁재하려는 무뢰배들과 좀도둑, 강도들도 와 있었다. 그러나 삽시간에
사람들의 몸이 마치 물에 빠진 생쥐처럼 모두 흠뻑 젖었다. 처음에는
수온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별로 추운 줄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젖
은 옷이 서서히 춥게 느껴졌다. 또 잠시 지나니 젖은 옷이 얼기 시작했
다.
순간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하여 입고 있던 옷과 바지 그리고 가죽 장
화마저 모두 벗어 던졌다. 그들은 젖은 옷이 일단 얼어 버리면 피부에
달라붙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상 그렇게 되면 그땐 손
가락마저 굳어 버려서 벗으려 해도 벗을 수 없게 된다. 설령 누가 도와
준다 해도 살갗이 옷과 바지 그리고 신발에 붙어 한꺼번에 찢어 내는
수밖에 없으므로 대단히 위험했다.
마침내 땅에 고인 물은 점차 깊어지면서 서서히 응고되어 마치 묽은 죽
처럼 변했다. 나찰인들은 맨발로 그걸 딛고 있으니 그 추위는 실로 뼈
를 깎는 듯했다. 그들은 참다 못해 제자리에서 마구 뛰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얼어 죽겠다. 얼어 죽겠다.]
마침내 사람들은 다투어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아예 지붕 위로 기어 올라갔다.
사람들 중에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항복, 항복! 더 이상 항복하지 않으면 이대로 모두 얼어 죽게 될 것이
다.]
도이포청은 털옷을 걸치고 왼손으로 우산을 받치고는 거대한 말을 타고
왔다갔다 하면서 순찰을 돌고 있었는데, 누군가 '항복'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분노를 터뜨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떤 놈이 여기서 군심을 교란하고 있는 것이냐? 그놈은 분명히 염탐
꾼이다. 어서 밖으로 끌어내 총살시키도록 해라!]
사람들은 그가 물을 막을 수 있는 털옷을 입고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
하고 호통을 치며 욕을 퍼붓는 것을 모두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떤 사
람이 얼음을 집어 그를 향해 던졌다. 순간 도이포청은 권총을 들고 사
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발사했다. 두 사람이 총에 맞고 쓰러졌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그를 향해 얼음을 마구 던졌다. 심지어 어떤 사
람은 그에게 달려가 그를 말에서 끌어내렸다. 그러자 위병(衛兵)들이
칼을 마구 휘둘렀지만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한참 소란을 피우고 있을 때 기병 일 소대가 달려왔다. 나찰인들은 그
제서야 흩어졌다. 도이포청이 땅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자 마침 머리 위
로 두 줄기 물기둥이 뿌려져 그의 온몸을 흠뻑 적셨다. 그는 큰소리로
욕을 퍼부었지만 별수없이 위병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옷과 장화를 모두
벗었다. 청군들은 성에 있는 나찰병들의 낭패한 상황을 바라보며 토방
위에서 우뢰 같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어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물
론 그중에 위소보의 '한 번 만지고 두 번 만져'로 시작되는 십팔막도
빠질 리가 없었다.
붕춘 등 장군들은 모두 분주하게 지휘했고 반 부장이 데리고 있는 목수
부대는 망가진 대포들을 바쁘게 수리했다. 그리고 물 끓이는 부대는 계
속 장작을 보태어 불을 키우며 얼음과 눈덩어리를 삽으로 퍼서 솥에다
집어넣었다. 이윽고 물을 운반하는 부대가 뜨거운 물을 한통 한통씩 포
구에 주입했다. 포통에 물이 가득 차면 '하나, 둘, 셋, 쏴라!' 하는 소
리와 함께 여섯 명의 포수가 있는 힘을 다하여 마개를 앞으로 밀었다.
그러면 한 줄기 물화살이 포구에서 발사되어 성 안으로 곧장 날아갔다.
청군들이 발사한 뜨거운 수포는 마치 기둥처럼 꼿꼿했다. 그리고 어떤
것은 성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공중에서
흩어졌고 어떤 것은 고도가 비교적 낮았지만 그래도 응집(凝集)되어 흩
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의 몸에 쏟아졌다.
수포 가운데 어떤 것은 힘이 세서 멀리까지 나갈 수 있었지만 어떤 것
은 사정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심지어 몇 번 발사하면 포통이 파열되는
바람에 도리어 청군의 포수들한테 화상을 입히는 것도 적지 않았다.
수포 삼천 대를 한 시진쯤 사용하자 이미 육, 칠백 대가 망가졌다. 그
리고 얼음과 눈을 뜨거운 물로 끓이는 속도가 수포를 발사하는 속도를
따르지 못해서 나중엔 '탄약'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다. 이윽고 다시
반 시진쯤 더 발사하자 망가진 포는 갈수록 많아졌고 뜨거운 물도 갈수
록 부족했다. 나중엔 팔, 구백 대밖에 발사하지 못해서 위력이 크게 감
소되었다.
위소보가 한참 풀이 죽어 있을 때 갑자기 성문이 활짝 열리더니 수백
명의 나찰인들이 몰려 나와서 큰소리로 외쳤다.
[항복,항복!]
살포소가 일천 명 기병대를 이끌고 앞으로 다가가며 버럭 소리를 질렀
다.
[항복하는 자는 땅바닥에 앉아라!]
나찰인들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서 어리둥절했다. 그러자청군 파
총(巴摠) 한 명이 덥석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크게 소리쳤다.
[앉아라,앉아!]
바로 이때였다. 성문이 다시 닫히고 성곽 위에서 아래로 총을 마구 발
사하는 바람에 투항한 나찰인 수십 명이 죽었다. 순식간에 투항한 나머
지 나찰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갔다. 청군들은 수포로 성곽 위
에서 총을 발사하는 나찰병들을 겨냥하여 물기둥을 발사하자, 나찰병들
은 성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성 안에는 물이 두 자쯤 차 있었고 이미 모두 얼음으로 얼어 버렸다.
만약 성 전체를 물로 채워서 얼음성으로 만들려면 최소한 열흘이나 보
름쯤 걸릴 것이다. 그러나 나찰병들은 옷도 없고 신발도 없고 불도 피
울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추워서 덜덜 떨고 있을 뿐만 아니
라, 안색마저 시퍼렇게 변했다. 심지어 어떤 병사들은 여러 명이 한데
껴안고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이고 있었다.
도이포청은 여전히 큰소리로 호통치며 병사들로 하여금 성을 지키라고
독촉했다. 병사들은 모두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도이포청은 크게
화를 내며 손을 뻗어서 한 군관을 후려쳤다. 그러자 그 군관은 냅다 도
망갔다. 도이포청이 한참 뒤쫓아가다가 갑자기 빙판 위로 미끄러지는
바람에 곤두박질치며 넘어졌다. 마침 옆에 있던 사병이 손을 써서 그를
물이 고여 있는 구덩이로 밀었다. 도이포청은 있는 힘을 다하여 기어
나오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손발이 마비되는 바람에 기어오르지 못했다.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병사들은 야릇한 얼굴로 그 물구덩이 근처에 모여서 구경하고 있었다.
잠시 지나니 구덩이 안에 고여 있는 물이 얼음으로 응고되면서 도이포
청은 산 채로 얼어 버렸다. 그의 상체는 구덩이 밖에 있어서 여전히 숨
을 헐떡거리고 있었지만 가슴 아래는 얼음 안에 빠져 있어서 마치 산
채로 매장시키는 것 같았다.
이를 보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문을 열고
큰소리로 외치며 벌떼처럼 몰려나갔다.
[항복!]
순간 위소보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춤을 덩실덩실 추며 아무렇게나 지
껄이는 바람에 하달하는 호령이 뭐가 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행
히 청군에서 대동한 장군들은 모두 백전노장들이라 스스로 알아서 수강
(受降), 입성(入城), 격계(檄械), 청리(淸理) 등등 여러 가지 절차를
질서정연하게 처리했는데 위소보가 하달한 호령과는 전혀 무관했다.
처음에는 성 안으로 물을 많이 발사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지만 지금은
성 안에 쌓여 있는 얼음을 물로 녹여 성 밖으로 흘려 보내는 것이 더욱
어려워 별수없이 자연의 이치로 따랐다.
낭탄은 병사들을 이끌고 먼저 총독부를 정돈한 다음에 위소보, 색액도
와 흠차(欽差)가 기거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한 뒤 다시 화약고, 창계
고(槍械庫), 금은고(金銀庫) 등 요지로 가서 일일이 봉쇄해 놓고 군대
를 파견하여 지키도록 했다.
그 무렵 청나라의 국세는 한참 강해지고 있을 때라 군대의 규율도 삼엄
했다. 더구나 위소보, 색액도 같은 벼슬아치들은 틈을 타서 막대한 재
물을 긁어모을 수 있었지만 군관과 사병들은 물건 하나도 감히 차지할
수 없었다.
그날 성 안과 성 밖에선 소를 잡고 양을 잡아서 크게 경축식을 거행했
다. 색액도 등 사람들은 위소보의 용병술이야말로 옛날의 손오(孫吳)가
부활하더라도 따르지 못한다며 아부의 말을 했다. 흠차가 말했다.
[이번에 경성을 떠나실 때 황상께서 위 대수로 하여금 지나치게 살생을
하지 말라고 누차 당부하셨습니다. 오늘 위 대수께서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시킨 건 기공(奇功)이라 할 수 있는데 더더욱 대단한 것은 무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아군이 단 한 명도 전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마 하루만에 적을 무찌르고 유명한 성을 함락시킨 건 예로부터 지금
까지 유독 위 대수 한 사람뿐일 것입니다. 이는 비단 공전절후의 일일
것입니다.]
위소보는 득의양양하여 크게 허풍을 떨었다.
[아극살 성을 함락시키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만 병사들을 지나치
게 희생시킬 수 없다는 황상의 분부가 계셨기 때문에 저는 오늘까지 기
다렸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 계책을 사용한 것은 흠차대신께 직접 보여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황상께 충성을 바친 몸이라 싸움에서 승
리를 거둔다 해도 그뿐이고, 게다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라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황상의 성의대로 싸움에서 승리하되 사람
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 좀 어렵죠.]
장군들은 하나같이 그가 자화자찬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싸움에서
단 한 사람도 희생시키지 않고 승리를 했다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라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색액도가 말했다.
[이는 황상의 홍복이며 위 대수의 기재(奇才)입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오늘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 큰공을 세우셨습니다. 만약 흠차대
인과 색 대인께서 몸소 적을 맞이하여 작전 지시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
도 이처럼 쉽게 이길 수는 없었을 겁니다.]
순간 흠차와 색액도는 크게 기뻐하며 감격했다. 사실 조금 전에 싸움을
할 때 그들 두 문관은 상처를 입을까 봐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 있었
다. 몸소 적을 맞이하여 작전을 지시했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렇지만 위소보가 일단 이처럼 말을 하면 자연히 자기들도 공을 세운
게 된다. 만청(滿淸)의 군공산(軍功賞)은 기타 공로와 비할 수 없을 만
큼 후했다.
위소보는 벼슬아치들의 심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자기
가 흠차에게 큰 공을 한몫 안겨 준다 해도 자기한테는 전혀 손실이 없
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흠차가 이번에 북경으로 돌아가면 황제의 면전
에서 틀림없이 자기를 크게 추켜세워 줄 것이다.
술좌석의 흥이 잠시 지나니 살포소의 부하들은 나찰병들로부터 도이포
청이 얼음 구덩이 안에 있다는 걸 전해 듣고 그를 구덩이에서 파내어
계단 아래로 들어다 놓았다. 도이포청은 이미 온몸이 시퍼렇게 된 채
얼어 죽어 있었다.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사람은 이름을 잘못 지은 것 같소. 만약 도이포청이라 하지않고 도
이포재(圖爾布財)라고 불렀다면 이렇게 얼어 죽지 않고 굉장한 부자가
되었을 것이오.]
그러면서 사람을 시켜 관을 구해서 그를 묻도록 하였다. 이윽고 포로의
수와 성 안에 있는 재물, 기계 등 물건들을 대충 점검한 다음에 위소보
와 색액도, 흠차 세 사람은 연명으로 상주했다. 아울러 북경으로 파발
꾼을 보내 황제께 보고드리게 하였다.
위소보와 쌍아는 총독부의 거실에서 잠을 잤다. 화롯불을 크게 일구어
놓고, 여우가죽을 이불 삼고, 돈피로 요를 삼아 누우니 방안은 따뜻하
기만 했다.
이곳은 그가 옛날에 한 번 와 본 곳이었다. 그는 침대가에 있는 커다란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 상자 안에는 군복과 총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쌍아는 웃었다.
[상공은 아마 상자 안에서 다시 나찰 공주가 기어나오기를 바라는 거겠
지요?]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중국 공주로서 나찰 공주보다 훨씬 낫지.]
쌍아는 웃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대의 중국 공주는 북경에 있지 이곳에는 없네
요.]
[쌍아, 우리들은 오늘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둔 셈이 아니오?]
쌍아는 방긋 웃으며 두 뺨을 붉혔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위소보와 부
부관계를 해 왔으나 남편이 희롱하는 말을 들으면 여전히 부끄러워하였
다. 위소보는 와락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나란히 침대에
앉아 위소보가 말했다.
[그대가 지도를 짜 맞추느라고 많은 심혈을 기울인 결과 우리들은 끝내
녹정산을 얻게 되었고 황상께서는 나를 녹정공에 봉하셨으니 이 한 채
의 성은 십중팔구 내가 관리할 것이오. 이 산 아래에는 무수한 금은보
배가 숨겨져 있는데 우리들은 천천히 파내도록 합시다. 그리고 나면 이
위소보는 이름을 바꾸어 위다보(韋多寶)라고 불러야 할 것이오.]
쌍아는 말했다.
[상공께서는 이미 많은 금과 은을 갖고 있으며, 몇 대의 자손들이 쓴다
해도 다 사용하지 못할 거예요. 보물과 보석은 아무리 많아도 쓸모가
없는 것이니 제가 볼 때는 역시 위소보 그대로가 좋겠어요.]
第131章. 나찰국 여왕에게 연애편지를 보내다
위소보는 쌍아의 얼굴에 가볍게 입맞춤을 한 후 말했다.
[맞았소, 맞았소. 이 며칠 동안 나는 줄곧 마음을 정하지 못했소. 보물
을 파내면 그야말로 용맥을 끊게 되어 황제를 죽게 만들까 봐 겁이 났
소. 황상께서는 나에게 잘 대해 주시고 계신데 내가 그를 해쳐 죽게 한
다면 그에게 미안한 노릇이 아니겠소? 그런데 보물을 파내지 않는 것도
아깝단 말이오. 그러니 이렇게 합시다. 우리들은 잠시 동안 보물을 파
지 말고 황상께서 돌아가시면, 이후 우리가 밥을 굶을 정도로 곤궁해지
게 되면, 그때 다시 파도록 합시다. 그래도 늦지 않을 것이오.]
막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였을 때 갑자기 나무상자 안에서 가볍게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눈짓을 하고 나무상자를 주시하며 잠시
동안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동정도 엿볼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두
손을 가볍게 세 번 쳤다. 쌍아는 다가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밖
을 지키고 있던 네 명의 친위병들이 즉시 허리를 구부리고 무슨 분부인
가 하고 기다렸다. 위소보는 즉시 나무상자를 가리키며 나직이 말했다.
[안에 사람이 있다!]
네 명의 친위병은 깜짝 놀라 나무상자 옆으로 서둘러 다가가 뚜껑을 열
었다. 그러고 보니 나무상자 안에는 옷가지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위
소보가 손짓을 하자 친위병들은 옷가지를 들추어내고 상자 밑바닥을 들
추었다. 커다란 동굴이 드러났다. 바로 이때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동
굴 안에서 누군가 총을 쐈다. 한 명의 친위병은 으악, 하더니 어깻죽지
에 총을 맞고 뒤로 벌렁 쓰러졌다.
쌍아는 재빨리 위소보를 끌어당겨 자기의 등뒤로 밀었다. 위소보는 화
로를 가리키며 불을 쏟아 부으라는 손짓을 했다. 한 명의 친위병이 화
로를 들고 그 구멍에다 쏟았다. 그러자 그 구멍 안에서는 나찰말로 크
게 부르짖었다.
[화로를 쏟지 마시오. 투항이오!]
곧이어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위소보는나찰말로 부르짖었다.
[먼저 화총을 던지고 기어나오도록 해라!]
동굴에서 곧 단총이 던져졌고 곧이어 한 명의 나찰병이 고개를 내밀었
다. 친위병이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당기자 다른 친위병은 칼을 빼
어 그의 목에 갖다 대었는데 그 병졸의 수염에도 불이 붙어 아직도 꺼
지지 않은 상태라 그는 아파서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으며 낭패하기 이
를 데 없는 모습으로 기어나왔다. 위소보는 부르짖었다.
[아래 또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그러자 동굴 안에서 또 누가 부르짖었다.
[또 한 사람 있소. 투항이오, 투항이오!]
위소보는 호통을 내질렀다.
[총을 던져라!]
구덩이 입구에서 하얀 광채가 번쩍 하더니 한 자루의 마도(馬刀)
가 던져지고 곧이어 한 무더기의 불꽃이 나왔다. 원래 그 나찰병의 머
리카락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문 밖에서 지키고 있던 친위병들은 대원
수의 방에서 어떤 변고가 일어났음을 깨닫고 몇 사람이 달려들어왔다.
곧 칠팔 명의 친위병들이 두 명의 나찰병을 잡고 그들의 머리카락과 수
염에 붙은 불을 끄고 나서 손을 뒤로 해서 결박했다. 위소보는 갑자기
한 명의 나찰병을 가리키며 부르짖었다.
[어? 너는 왕팔사계(王八死鷄)가 아니냐?]
그 병졸은 얼굴에 기쁜 빛을 띄우고 말했다.
[예, 예. 중국의 꼬마 대인. 나는 화백사기(華伯斯其)이외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의 나찰병이 부르짖었다.
[중국 어린애 대인, 나는… 나는 제락낙부(齊洛諾夫)이외다.]
위소보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수염은 불에 타서 엉망으로
벌겋게 되어 있었으나 서로 얼굴을 알아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맞았어, 너는 자라유부였지!]
제락낙부는 크게 기뻐 부르짖었다.
[맞았소, 맞았소! 중국의 어린애 대인, 나는 그대의 친구이외다!]
화백사기와 제락낙부는 모두 소비아 공주의 위사들이었다. 과거 아극살
성에서 위소보와 함께 모스크바로 간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엽궁에서
화창수들을 따라 반란을 일으키고 약간의 공로를 세웠었다. 소비아 공
주는 나라의 정권을 받은 이후 자기를 뒤따른 병사들에게 보답하기 위
해서 자기가 거느렸던 위사들을 모조리 대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들 가
운데 네 사람은 동쪽으로 와서 공을 세우는 한편 노략질을 하려고 이
아극살 성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싸움에 패하여 성이 무너질 때 한 사
람은 전사하고 한 사람은 얼어죽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살그머니 지하
도로 숨어 들어가 성 밖으로 달아나려고 했는데 성 밖의 지하도 출구가
이미 봉쇄된 줄을 몰랐던 처지여서 그만 두 사람은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으며, 끝내 그들의 행적이 탄로나고 만 것이었다.
과거 위소보는 그들을 왕팔사계와 자라유부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그
뜻을 알 까닭이 없었고 그저 중국의 어린애가 발음이 부정확해서 그런
다고 생각하고 즉시 대답을 했다.
그들은 소비아 공주가 위소보를 중국 어린애라고 하는 바람에 처음엔
따라서 중국 어린애라고 했으나 나중에 위소보가 공을 세우고 공주가
그에게 작위를 내리자 위사들은 중국 어린애 대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
이었다. 위소보는 그들의 내력을 듣고 친위병에게 명하여 결박을 풀어
준 이후 술과 음식을 대접도록 했다.
친위병들은 이 지하도에 아직도 첩자가 있을까 봐 들어가 수색을 했고,
방안에 다른 지하도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물러갔다. 친위병
대장은 마음속으로 여간 당황하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잇따라 사죄를
했다. 그는 속으로 정말 요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이 두 명의 나찰
병이 야밤에 구덩이에서 뛰어나와 위 대원수를 찔러 죽였다면 온 가족
이 몰살을 당할 판이었던 것이다.
이튿날 위소보는 화백사기와 제락낙부를 불러서 소비아 공주의 근황을
물었다. 두 사람은 공주 전하가 조정을 총괄하고 있으며, 나찰국의 왕
공 대신이나 주교들 가운데 그 누구도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
다. 그리고 두 사황 역시 나이가 어려서 모두 누님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이었다. 제락낙부는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중국의 어린애 대인을 매우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우
리들에게 그대의 소식을 알아보라고 분부했으며 우리들이 그대를 만나
게 된다면 다시 모스크바로 초청해서 며칠 놀다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
면 공주께서는 많은 상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화백사기는 말했다.
[공주 전하는 중국 어린애 대인이 군사를 데리고 와서 싸우는 것을 모
르고 계셨소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두 다 친애하는 사람이고 절친한
친구이니 이번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들은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여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군.]
두 사람은 맹세를 하며 절대 틀림없는 사실이며 거짓말이 아니라고 했
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황상은 본래 나에게 방법을 강구해서 나찰국과 강화를 하도록 하지 않
았는가? 그러고 보니 이 두 녀석을 시켜 소비아 공주에게 이야기해 보
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내가 한 통의 편지를 써 줄 테니 그대들은 공주에게 갖다 주시오. 하
지만 나는 나찰의 지렁이 글자를 모르니 그대들이 대신 쓰도록 하시
오.]
화백사기와 제락낙부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난처한 빛을 띠었다. 그
들 두 사람은 그저 말을 타고 총을 쏠 줄만 알았지 붓을 들고 글을 쓰
는 것은 전혀 깜깜이었다. 제락낙부는 말했다.
[중국 어린애 대인께서 연서를 쓰라 하시면 우리들 두 사람으로서는 해
낼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우리들이 선교사를 찾아내어 쓰도록 하
죠.]
위소보는 응낙했다. 그리고 친위병이 그들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나찰
의 항복한 사람들 가운데 선교사를 찾도록 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두 사람은 한 명의 텁석부리 선교사를 데리고 왔다.
이때 나찰의 군인들은 대부분 글자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종군 선교사는
상제(上帝)에게 기도하는 것 외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직책이 있었으니
그것은 군사들과 장수들을 대신해서 집에 편지를 써 주는 것이었다. 그
선교사는 청나라 군사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옷이 너무
작아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 선교사는 매우 놀라서 전전긍긍하면서
두 명의 대장을 따라서 위소보에게 인사를 드리며 말했다.
[상제께서 중국의 대장군이신 그대에게 복을 내려 주시고 중국의 대장
군 일가도 무사하기를 빕니다.]
위소보는 그에게 앉으라고 하고 말했다.
[그대는 나를 대신해서 그대들의 소비아 공주에게 드리는 편지를 써 줘
야겠소.]
그 선교사는 즉시 응낙했다. 친위병은 이미 탁자 위에 문방사우를 준비
해 놓았다. 그 선교사는 붓을 들고 화선지를 펼친 이후 구불구불한 나
찰의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붓놀림이 부드럽기 이를 데 없어
획이 갑자기 굵어졌다가 가늘어졌다 해서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으나
반 마디도 중국의 붓과 먹이 나쁘다고는 감히 하지 못했다. 그저 이 중
국 장군의 반감을 사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는 다음과 같이 쓰시오. 헤어진 이후 종종 공주를 생각했으며 공
주를 마누라로 삼고자 했소……]
그 선교사는 깜짝 놀라 손을 떠는 바람에 붓이 그만 종이 위에 떨어져
하얀 종이 위에 한 무더기의 검은 자국을 내었다. 제락낙부는 말했다.
[이 중국 어린애 대인은 바로 소비아 공주 전하의 달콤한 사랑이란 말
이오. 공주 전하께서는 매우 그를 사랑하시어 종종 중국의 정인은 나찰
의 정인보다 백배는 낫다고 말했소.]
그는 위소보의 비위를 맞추려고 몇 배 불려서 이야기를 했다. 선교사는
연신 대답했다.
[예, 예. 백 배 더 낫죠, 백 배는 뛰어나죠.]
그러나 그는 마음과 정신이 안정되지 않아 글귀를 생각해 내어야 하는
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감히 붓
을 든 채 생각을 가다듬을 엄두도 나지 않아 평소 써왔던 진부한 글귀
들로 적어 내려갔다. 이것은 모두 다 나찰 사병들을 위해서 고향의 처
와 정인에게 써 주는 정다운 귀절들이었다. 다정하고 달콤한 마음이니,
어젯밤 꿈에 그대를 보았느니, 일만 번이나 그대에게 입맞춤을 했느니
따위로서 여러 차례 그런 인사말을 써야했다. 그가 나는 듯 붓을 움직
이는 것을 보고 위소보는 크게 만족해서 말했다.
[그대들 나찰병은 우리 중국 땅을 점령하고 많은 중국의 백성을 죽였
소. 중국의 황제는 매우 화가 나서 나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그대들의
병졸과 장수들을 다 잡으라 했소. 나는 그들을 토막 토막 내서 모두 다
하서니극으로 만들 것이오……]
그 선교사는 다시 깜짝 놀라 아, 하고 말했다.
[오! 저의 상제이시여!]
위소보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대 공주 얼굴을 봐서 잠시 죽이지 않겠소. 만약 그대가 나찰
군사로 하여금 재차 우리 중국의 영토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응낙한다면
중국과 나찰국은 바로 영원히 절친한 친구가 될 것이오. 만약 그대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군사를 보내 그대 나찰 남자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니 그때는 그대를 모시고 잠을 자는 나찰의 남자가 한 사람도 없게
될 것이오. 그대가 남자와 더불어 잠을 자려면 천하에서 오로지 중국
사람밖에 없을 것이오.]
선교사는 속으로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천하에는 나찰 남자들 외에 중국 남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너무나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는 한편으로 이와 같이 무례한 말은 공주에게 쓸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몇 마디 공손하고 다정한 말로 고쳐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한다
해도 중국의 장군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위
인됨이 조심스러워 혹시 위소보가 알아내게 될까 봐 그와 같은 몇 줄의
글은 라틴어로 썼다. 다 쓰고 나자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위소보
는 다시 말했다.
[이제 나는 왕팔사계와 자라유부를 시켜 그대에게 편지를 보내고 예물
을 선물하는 바이오. 나의 정인이 되든지 적이 되든지 그대 스스로 결
정하도록 하시오.]
그 선교사는 최후의 말은 지극히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말로 다음과
같이 썼다.
[중국의 소신은 전하의 두터운 은혜를 언제나 잊지 않고 있으며, 삼가
공물을 바쳐서 충성심을 표하나이다. 소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전하
에게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신하입니다. 아무쪼록 두 나라가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라며 나찰의 포로된 군민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해
주시면 실로 전하의 무한한 은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최후의 이 한마디는 바로 그의 사사로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는 만약 두 나라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기와 나머지의 나찰 포
로들은 반드시 타향에서 객사하여 영원히 귀국할 수 없으리라고 짐작했
던 것이다.
[끝났소? 그대는 나에게 한번 읽어 주시오.]
선교사는 두 손으로 편지를 받쳐들고 읽어 내려갔는데 자기가 고쳐 쓴
부분에 이르러서는 다시 위소보의 뜻을 그대로 읽었다. 위소보는 본래
나찰의 말을 잘할 줄 모르는 데다가 듣기에도 거의 비슷비슷한지라 어
찌 그 선교사가 임의로 문장을 고쳤다는 것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매우 좋소!]
그는 무원대장군위지인(撫遠大將軍韋之印)이라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도
장을 꺼내서 편지 말미에다 찍었다. 이 한 통의, 연애편지 겸 공문 같
은 글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위소보는 그 선교사에게 아래로 내려가 상을 받도록 하라고 이르고 대
군영의 사야에게 분부하여 그 편지를 봉투에 넣고 봉투 겉면에는 중국
의 글자로 소비아 공주의 이름을 쓰도록 했다. 그 사야는 진하게 먹을
갈아서 잔뜩 먹물을 묻힌 이후 첫번째 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대청국무원대장군 녹정공위봉서(大淸國撫遠大將軍鹿鼎公韋奉書)>두 번
째 줄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라사국섭 정 여 왕소비 아고륜장공주전하(俄羅斯國攝政女王蘇飛雅古
倫長公主殿下)> 나찰이라는 두 글자는 불경에서는 마귀라는 뜻인데 이
말로 아국(俄國)을 호칭하는 것은 경멸하고 업신여긴다는 뜻이 들어 있
기 때문에 문서에서는 아라사라고 쓴 것이었다. 그 사야는 소비아라는
석 자가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비(菲)자는 사람으로 하
여금 풀들이 무성한 모양을 생각하게 하여 마치 그녀의 전신이 털로 뒤
덮여 있는 것을 풍자하는 것 같아 그냥 소비아(蘇飛雅)라고 썼다. 이것
은 낙하여고목제비(落霞與孤陂齊飛)라는 옛시에 나온 말이었고, 또한
비하박면(飛霞撲面) 즉 노을 빛이 얼굴에 덮쳐 온다는 아름다움을 묘사
한 것이다. 그리고 고륜장 공주라고 한 것은 청나라 공주 가운데 가장
존귀한 봉호(封號)였다. 황제의 자매는 장공주였고, 황제의 딸은 공주
인데 소비아라는 여자가 섭정하는 신분이고 또한 사황의 누나이니 자연
히 으뜸가는 공주라고 여기고 그렇게 쓴 것이었다. 위소보가 웃으며 말
했다.
[이 나찰 공주는 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데 이 몇 년 동안 보지않은
사이에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그 사야는 봉투 뒤쪽에다 다시 두 줄의 글을 다음과 같이 썼다.
<부화융적(夫和戎狄) 국지복야(國之福也) 여약지화(如藥之和) 무소불해
(無所不諧) 청여자낙지(請與子樂之)> 이 말은 오랑캐 나라가 중국 청나
라와 화목하게 된 것은 나라의 복이며 두 나라가 화해함으로써 모든 일
이 순조로운 것이니 아무쪼록 두 나라가 화해하기를 바란다는 뜻이었
다. 그리고 사야는 속으로 이 말은 좌전(左傳)에서 나온 말인데 애석하
게도 나찰은 오랑캐 나라라 중화상국(中華上國)의 경전을 이해하지 못
할 것이며, 그 가운데 두 가지의 뜻이 섞여 있는 것은 더욱더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추파를 장님에게 던지는 것과 같고 그야말로 진
주를 돼지에게 주는 격이라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라사국고륜장공주 소비아만 이 중국 글자 속에 숨어 있는 뜻을 이해
할 수 없는 게 아니고 대청국무원대장군녹정공 위소보 역시 자기의 이
름과 큰 대 자 외에는 한 자도 모르는 터였다. 그리하여 위소보는 그
사야가 봉투 앞쪽과 뒤쪽에 글자를 쓰는 것을 보고 말했다.
[충분하오, 충분하오. 그대는 글씨를 무척 잘 쓰는군! 나찰의 텁석부리
보다 뛰어나오.]
이어 그는 사야에게 귀중한 예물을 준비하도록 일렀다. 다행히 아극살
성에서 포획한 물건이라 그의 밑천은 한 푼도 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
리고 다시 화백사기와 제락낙부 두 명의 대장을 불러 와서는 그들 두
사람에게 나찰의 항복한 병졸 가운데 백 명을 뽑아서 호위대로 삼고 즉
시 모스크바로 달려가 편지를 전하라고 했다. 두 명의 대장은 크게 기
뻐서 끊임없이 허리를 구부리고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으며, 다시 위소
보의 손을 잡고 그의 손등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위소보는 손에 두 사
람의 수염에 닿아 간질간질한 것을 느끼고 그만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아극살 성은 규모가 작아 대군이 주둔할 수 없었다. 그 즉시 위소보와
색액도는 서로 상의한 끝에 낭탄과 임흥주 두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성 안에 주둔하도록 하고 대군은 남쪽으로 내려가 나누어 애휘, 호마이
두 성에서 성지를 기다리도록 했다. 위소보는 떠나면서 정중히 낭탄과
임흥주 두 장수에게 아극살 성에서 샘물을 파거나 지하도를 파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대군은 남쪽으로 내려갔다. 위소보와 색액도, 붕춘 등은 애휘에 주재하
게 되었고 살포소는 다른 군사를 거느리고 호마이 성에 주둔하였다.
위소보는 항복해 온 나찰 군사들에게 청나라 군사의 복장을 입히도록
했고 사람을 보내 중국말을 가르치도록 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아황만
세만만세(我皇萬歲萬萬歲) 성천자만수무강(聖天子萬壽無彊) 중국황제덕
피사해(中國皇帝德被四海) 황은호탕(皇恩浩蕩)' 등의 귀절을 익숙해지
도록 외우게 했다. 그리고는 군사들을 보내 북경으로 압송했으며, 그
포로들로 하여금 북경 큰 거리를 지날 때마다 소리 높여 외치도록 했
다. 또한 강희를 뵙게 되었을 때 더욱더 큰소리로 고함쳐 외우도록 했
으며, 기운차게 부르면 부를수록 황상께서 많은 선물을 내리리라고 말
해 주었다.
이십여 일 남짓 지났을 때 강희는 조서를 내렸고 출정한 장수와 사병들
에게 크게 갸륵하다는 칭찬의 말을 했다. 그리고 위소보를 이등 녹정공
에 봉했고 나머지 장수와 사병도 각각 벼슬을 올려 주고 상을 내렸다.
성지를 전해 온 흠차는 화칠인(火漆印)으로 딱지를 붙여 놓은 나무상자
를 위소보에게 내주면서 황상이 내리시는 물건이라고 했다. 위소보는
큰절을 하고 은혜에 고맙다는 인사말을 한 후, 상자를 열어 보고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 상자 안에는 하나의 누런 금으로 만든 밥그
릇이 들어 있었고 그 그릇에는 공충체국(公忠體國) 네 자가 쓰여 있었
는데 과거 시랑이 자기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다만 꽃무늬와 그 새겨진
글자가 약간 파손되었는데 아마도 다시 보수하여 완전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위소보는 과거 이금 밥그릇을 동모아 호동의 백작부에 놔둔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바삐 도망치느라고 가져오지
못했는데 다시 잘 생각해 보니 그 이치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틀림
없이 그날 밤 백작부를 폭격한 후 전봉영의 군사들은 백작부에 남아 있
는 물건들을 일일이 적어 황제에게 바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금으로
된 밥그릇은 파손되었으나 완전히 녹아들지 않아 강희는 장인에게 보수
를 하도록 하여 다시 그에게 내린 것인데, 그 뜻은 바로 너의 금 밥그
릇은 이미 한 번 깨어져 나갔지만 이빈에는 잘못하여 다시 깨뜨리는 일
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라고 생각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황제는 나에게 퍽이나 의리를 지키는구나. 우리는 서로 의리를 주고
받았으니 나 역시 그의 용맥을 파지는 않겠다.)
그날 그는 크게 연희를 열어 흠차를 대접했으며 장수들이 옆에서 모시
도록 했다. 물론 연희가 파한 이후에는 노름판을 벌였다.
第132章. 열 명의 외국 미녀들
한 달 정도 지나자 강희는 다시 유시를 내렸는데 이번에는 크게 꾸짖는
내용이었다. 즉 위소보가 일을 터무니없이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그것
은 나찰의 항복한 군사들로 하여금 만수무강이라는 말을 소리치게 한
것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그 유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무릇 인군(人君)이라 함은 백성들에게는 목자(牧者) 같아 위로 천심을
살피고 아래로 백성을 사랑해야 하노라. 나찰이 오랑캐의 나라라고 하
지만 그 백성들 또한 사람이고 이미 항복하여 귀순했다면 재차 모욕하
거나 굴욕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니라. 그대는 대신이니 마땅히
인군에게, 어질고 밝게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를 간하여야 할 것이었노
라. 짐이 만약에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게 된다면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한다 해도 밝은 인군이 될 것이고, 만약에 교만방자하여 잔악한 일을
저지른다면 아무리 만수무강한다 해도 부질없이 천하를 고달프게 할 뿐
이니라. 대신들이 아첨과 사악하고 허망된 행동으로 인군을 부도덕한
위치에 서게 만드는 것은 그 죄가 가장 크니 반드시 이를 경계할지어
다.]
위소보는 이번에 아첨을 한다는 것이 말 뒷다리를 건드린 셈이 되었다.
그야말로 핀잔을 대단히 많이 받은 셈이었고 코가 납작해진 판이었다.
다행히 그의 얼굴이 두터워 별로 애석하게 여기지 않았고, 성지를 내리
는 흠차를 향해 네 놈이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크게 욕을 했다. 그러면
서 생각했다.
(천하에 어떤 사람이 아침받는 것을 싫어하겠는가? 이것은 틀림없이 나
찰병들이 중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황상이 듣기에 애매모호하여 화가
난 것이리라.)
그는 나찰병들에게 중국말을 가르친 몇 명의 사야들을 불러 한바탕 크
게 꾸짖었다. 그리고 난 후 탁자를 가운데 놓고 그들과 노름판을 벌이
고 주사위를 몇 번 던지는 동안 강희의 훈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
다. 어느덧 수개윌이 흘러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위소보는 애휘에서
편안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으나 아가와 소전등 아내들과 아들딸들이
보고 싶기도 하여 잇달아 친위병들을 시켜 집에 선물을 보냈다. 부인들
역시 각기 옷가지와 일용품들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모두들 그가 글자를
모르는 줄 알고 편지는 쓰지 않았다. 다만 친위병에게 전갈을 보냈는데
집안 사람들은 아래위 할것 없이 모두 편안무사하니 대원수께서는 부디
개선해서 돌아오라는 말이었다.
어느 날 북경에서 다시 유시가 내려왔는데 위소보와 색액도를 의화대신
(議和大臣)으로 삼아서 나찰국과 화약(和約)을 맺도록 한다는 것이었
다. 그리고 또 양황기 한군도통(漢軍都統)이며 일등공인 동국강(侈國
綱), 호군통령(護軍統領) 마라(馬喇), 상서 아이니(阿爾尼), 좌도어사
(左都御史) 마제(馬齊) 등 네 사람을 보내 돕도록 했다.
동국강이 유시를 읽고 난 이후 다시 한 통의 공문을 읽었는데 그것은
나찰국의 두 사황이 강희에게 보낸 국서였다. 이미 북경에 있는 선교사
로 하여금 한문으로 번역을 해 놓은바 그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
다.
[삼가 이 세상에서 으뜸이신 나라에 임하시어 어지신 신하들을 거느리
며 여러 강토를 다스리고 만주와 한나라를 아울러 이끌어 명성이 자자
하신 대성(大聖) 황제에게 바치나이다. 저희 선황 아열극석미한라(阿列
克席米汗羅)가 한(汗)이 되었을 때 사신이 이과래(尼果來)에게 국서를
보내 천조(天朝)와 수교토록 하였으나 중국의 전례(典禮)를 몰라 행동
거지가 조야하고 점잖치 못한 점을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기 바라옵니
다. 거기다가 황제를 칭송함에 있어서 오만무례한 것은 역시 황량하고
먼 곳에 위치하여 전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소치이니 탓하지
않았으면 다행이겠습니다. 옛날 편지는 하국(下國)에 그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 까닭을 알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이과래 등이 돌아와 천조
대신들을 체포하고 달아난 근특목이(根特木爾) 등을 되돌려주지 않아
번경이 소란해졌다고 하더군요. 근래에 황제께서는 군사를 일으켜서 저
의 경내로 보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수교의 뜻을 저버린 것이 아니겠
습니까? 만약에 하국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킨다면 천조에서는 사신을
보내 지시하신다면 마땅히 그 죄를 다스릴 것인즉 어찌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늘에서야 조서를 받들고 그 사정을 알게 되어 즉
시 하국에서 파견한 장수와 군사들에게 접전을 하지 말라고 일렀습니
다. 삼가 우리나라에서 난을 일으킨 사람을 밝게 살피시어 되돌려주셔
서 올바른 법의 다스림을 받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사신을 보내 변경
의 국경선을 회의하는 일에 있어서는 먼저 말기(末起), 불아위우고(佛
兒魏牛高), 의번(宜番), 법아라와(法俄羅瓦)에게 밤을 도와 편지를 가
지고 달려가도록 했습니다. 바라옵건대 아극살을 포위 공격하는 것을
풀어 주시고 상세한 사정을 편지로 써서 하국에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모든 일들이 해결될 것이고 영원히 화목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국의 대신 위소보 각하께서는 옛날 저희 섭정여왕 소비아 전하를 알
게 되시어, 멀리 우리 서울인 모스크바에 왕림하셔서 난을 평정했으니
이는 상국에서 내리신 은혜입니다. 하국의 군신들은 감히 잊지 못할 것
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예물을 대성 황제 폐하에게 바치며 다음으로
중요한 예물을 위소보 대신 각하에게 바쳐 하국이 성심성의로 수교에
대한충심을 표시하고자 합니다.]
(이 한 통의 아라사국의 국서는 역사서에서 베낀 것이며, 정확한 것이
다. 다만 최후의 한 부분, 위소보에 관한 내용은 아무래도 소설가의 말
로 봐야 할 것이며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국강이 국서를 읽은 이후 사야가 그 책의 뜻을 위소보와 장수들에게
일일이 자세하게 해석을 했다. 이것은 군중의 통례였다. 문서를 주고받
게 되었을 때 때로는 문자가 퍽이나 까다롭고 심오해서 군사를 거느린
장수들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몇 년 책을 읽은 사
람이라 해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만약에 공문에 대하여 오해가 생기
면 군기대사에 커다란, 즉 중대한 오류를 빚게 되므로 만주 군 제도에
서는 사야가 문서를 해석하는 규정을 두고 있었다. 동국강은 웃었다.
[이 나찰국의 섭정여왕이 위 대원수에 대해서 옛정을 생각하고 적지 않
은 예물을 보내 왔더군요. 황상께서는 이 형제에게 함께 가져가 대원수
에게 건네드리라고 했소이다.]
위소보는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정말 고맙소이다. 정말 고맙소이다.]
그는 다시 말했다.
[나찰 사람들은 예절을 잘 몰라 자기의 예물이 가볍다는 말을 하지 않
고 자화자찬으로 예물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지요. 그리고 황상
에게는 무거운 예물을 주었으며 나에게는 그 다음가는 예물을 주었다고
했는데 그야말로 남이 웃을까 봐 두렵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동국강은 말했다.
[그렇조 그런데 위 대원수가 북경에 바치신 포로들을 황상께서 친히 심
문한 끝에 병졸 가운데 한 명의 나찰 대관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
니다······]
위소보는 아, 하고 부르짖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동국강이 말했다.
[그 사람은 매우 교활하여 병졸들 속에 섞여 있었으며, 조금도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요. 그날 황상께서는 포로들을 데리고 차례로 심문을
하였는데 한 명의 하란 선교사가 통역을 맡았소이다. 그리하여 심문이
차츰 진행되고 있을 때 황상께서는 그 선교사에게 몇 마디 라틴말을 했
소이다. 나찰의 포로 가운데 한 명의 병졸이 갑자기 얼굴에 의아한 빛
을 드러내어 황제께서는 그에게 라틴말을 아느냐고 물었소이다. 그 병
졸은 끊임없이 고개를 가로저었소. 황상께서는 라틴말로 명령을 내렸조
'이자를 데리고 나가 목을 치도록해라.' 그러자 그 병졸은 안색이 크게
변해서 무릎을 끓고 용서를 빌며 그가 라틴말을 안다고 인정하게 되었
지요.]
[라틴말이 뭡니까? 나찰 사람들이 장정을 데려다가 군량을 운반할 때
하는 말인데 황상께서는 어떻게 아시죠?]
[황상께서는 총명하시고 지혜로워 모르시는 것이 없소이다. 나찰인들이
장정을 데려올 때 하는 이야기도 할 줄 아시지요.]
[그런데 어째서 황상께서는 나찰인들이 평소 하는 말은 모르시고 장정
을 데려다가 쓰는 말만 하실 줄 알지?]
동국강은 대답할 바를 몰라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우리들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외다. 다음에 대원수께서 황
상을 뵈옵게 되었을 때 스스로 큰질을 올리고 여쭤 보도록 하십시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 나찰인은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황상께서는 자세히 심문을 하셨고, 그 사람은 끝내 속일 수 없어 모든
것을 털어놓았지요. 원래 그 사람의 이름은 아이청사기(亞爾靑斯基)로
서 니포초(尼布楚)와 아극살 두 성의 도총독(都總督)이었소.]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 녀석의 벼슬은 작지 않군요.]
[그러게 말이외다. 나찰국에서 동쪽으로 파건한 벼슬아치 가운데 그가
가장 높은 셈이지요. 아극살 성이 무너지는 날 그는 병졸 옷차림을 하
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이 그만 깜박 속아넘어간 것입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아극살 성을 깨뜨리는 그날 나찰의 장군과 병졸, 대관과 소관들은 하
나같이 벌거벗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봐도 똑같아 실로 분별할 수가
없었소이다. 벼슬이 높다고 해서 그것마저 크다고는 할 수 없지요. 벼
슬과 그 물건이 비례한다면 이 형제가 가장 클 게 아닙니까? 그 대관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결코 우리의 잘못이 아니랍니다.]
장수들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동국강에게 그날 아극살 성을 무너뜨리
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동국강은 웃었다.
[그랬구려. 황상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위소보가 나찰국
의 니포초, 아극삭 두 성의 도총관을 잡은 공로는 적지 않으나 그는 이
사람을 그저 여느 병졸로 보아 넘겼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너무나 멍청
했기 때문에 세운 공을 죄로써 메운다고 할 수 있으니 이번 일에 대해
서는 아무런 상벌을 내리지 않겠소.' 하고 말이오.]
위소보는 몸을 일으키더니 공손히 말했다.
[황상의 은혜에 대해 소신은 고맙기 짝이 없다고 느낍니다.]
동국강은 말했다.
[황상은 그 아이청사기를 잇달아 엿새 동안 심문하였는데 나찰국의 군
정대사와 그 지역에서 나는 물산 등 모든 것을 세세히 알아 내었소이
다. 황상께서는 정말 하늘이 내리신 지혜를 가지신 분으로서 다시 아이
청사기의 몸에서 한 가지 기밀을 발견했지요. 위 대원수의 말에 의하면
그 사람이 잡혔을 때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는 놀랍게도 비밀문서를 몰래 숨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 뭡니까?]
위소보는 욕을 했다.
[제기랄! 아이흔사계(何二欣死鷄)는 실로 간계가 많은 자이군요. 다음
에 만나면 반드시 그에게 창피를 줘야겠습니다. 그 비밀문서는 어디다
숨겼었지요? 설마 항……항문에……]
[나찰의 포로는 황상을 뵈옵기 전에 모두 다 어전시위들에 의해서 자세
히 수색을 받았고, 머리카락과 수염도 만져 보았으며, 바지와 신발도
벗겨서 살펴보았지요. 오랑캐의 군사들이 불측한 마음을 품고 만약 몸
에 무기라도 지닌다면 큰일이 아니겠소? 이 아이청사기의 몸을 자세히
수색했으나 몸에는 별다른 물건이 없었지요. 그러나 황상께서는 세밀히
통찰하시고 그의 오른쪽 어깨가 불룩 솟아있는 것을 보았고, 그가 때때
로 곁눈질로 쳐다보는 것을 보고 그에게 팔에 무엇이 있는가 물었소.
아이청사기는 소맷자락을 끌어올리어 팔에 두텁게 감은 붕대를 보이며
아극살 성에서 입은 상처라고 했소. 황상께서는 그보고 가까이 다가오
라고 했고 힘주어 그의 팔을 한 번 꼬집었소. 아이청사기는 아이쿠, 하
는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 소리에는 그렇게 아픈 기미가 보이지 않았
소.]
위소보는 웃었다.
[재미있군요, 재미있군요. 그 나찰 괴수가 상처를 입은 것은 가짜였군
요.]
[그렇고말고요. 황상께서는 즉시 시위에게 분부하여 그의 팔에 감긴 붕
대를 풀도록 했지요. 아이청사기는 그만 안색이 흙빛이 되어서 전신을
벌벌 떨었소이다. 위 대원수께서는 그 붕대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었다
고 짐작하시지요?]
[그대는 조금 전 비밀문서라고 했는데 바로 그 물건이 들어 있었던 것
이 아니겠소이까?]
[바로 그렇소이다. 황상께서 때때로 그대가 총명하다고 칭찬을 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구려. 정말 단번에 알아맞히시는구려. 그 아이청사기
의 붕대에 감춰진 것은 놀랍게도 문서로서 나찰국의 사황이 그에게 준
비밀유시였소. 황상께서는 하란 선교사에게 번역을 하게 했는데 그 내
용의 초본이 여기 있소이다.]
그는 봉투에서 한 통의 공문을 꺼내서 큰소리로 읽었다.
[그대는 중국 황제에게 알리도록 해라. 대아라사(大俄羅斯), 소아라사
(小俄羅斯), 백아라사(白俄羅斯)를 영유하고 있는 아황(俄皇) 폐하께서
는 그 위엄이 멀리까지 떨쳐져 이미 많은 나라의 군왕이 대황제 폐하의
최고통치 아래 귀의하였다는 사실을 알려라. 그리고 중국 황제 역시 마
땅히 대아라사, 소아라사, 백아라사를 영유하고 있는 황제 폐하께 은혜
를 빌어 대황제 폐하 최고 통치 아래에 귀의하도록 하라고 일러라. 대
황제 폐하는 반드시 중국 황제를 호탕한 황은으로 매우 사랑하고 보호
할 것이며, 적의 침해를 받지 않도록 할 것이고, 중국 황제 홀로 대군
주 폐하에 귀의하여 아황 폐하의 통치 아래에 위치하도록 하겠으니, 대
황제께 공물을 바쳐야 할 것이고, 대황제 폐하에 속하는 사람들로 하여
금 중국의 두 곳 경내에서 자유로이 상업을 하도록 허락을 내려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중국 황제는 마땅히 대황제 폐하의 사신이 저지받지
않고 통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또한 대황제 폐하께 대답하는 국서를
을려야 할 것이다.]
동국강이 한 문장 읽을 때마다 위소보는 욕을 한 마디씩 했다.
[개방귀 같은 수작이야!]
그가 다 읽고 났을 때 위소보는 이미 수십 번이나 개방귀 같은 수작이
라고 욕을 하였다. 동국강은 말했다.
[황상께서는 유시를 내리셨는데 나찰인의 야심이 크고 무례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하시었소. 그리고 이 밀지를 내리는 나찰의 황제는 지금 두
사황의 부친인데 이미 죽었소. 그때 그는 아직 우리 중국 사람들을 두
려워할 줄 몰랐소. 이제 나찰인들은 매운 맛을 보았으니 아마 그전처럼
방자하게 굴지는 않을 것이오. 하지만 그들과 평화협정을 맺게 되더라
도 여전히 부드럽고 강한 방법을 아울러 써야 할 것이며 조금도 소흘히
해서는 안 될 것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소이다. 황상께서는 분부하셨소. 우리들은 매섭게 그들의 따귀를
갈기고 발길질을 하며 또 어깨를 툭툭 치고서는 등을 만져봐야 한다고
하셨소이다.]
[그 무슨 섭정 여왕인가 하는 사람도 교활하기 짝이 없소. 그녀는 아극
살 성이 이미 우리들에게 공격을 받아 무너진 사실을 짐짓 모르는 척하
고 나찰 군사들에게 우리와 싸움을 하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 했소. 그러나 국서에서는 마각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황상
에게 우리가 잡은 나찰 사람들을 되돌려주어 자기들의 올바른 법으로
다스리게 해 달라고 한 바로 그 한 마디외다.]
[그렇게 수월한 일이 어디 있소? 그녀는 나에게 몇 장의 돈피와 몇 알
의 보석 따위의 예물을 주면서 그녀의 관병을 풀어 달라는 말인가요?]
[황상께서는 나찰인이 평화협정을 맺고자 한다면 그들과 평화협정을 맺
는 것은 상관없지만 우리들은 반드시 대군을 데리고 그들과 성하지맹
(城下之盟)을 맺어야 한다고 분부하셨소.]
[성하지맹이라는 것이 무엇이죠?]
[두 나라에서 싸움을 하게 되었을 때 우리들의 대군이 오랑캐 나라의
성을 포위하여 오랑캐 나라에서 화친을 부탁해 온다면 그 성에서 맺는
평화조약을 바로 성하지맹이라고 하고 있소이다. 이때 오랑캐는 투항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찌되었든 졌음을 시인한 것이외다.]
[그렇군요. 기실 우리가 군사를 보내서 니포초를 함락시키는 것은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황상의 유시에서도 한번 더 이기는 싸움은 자신이 있다고 말씀하셨소.
하지만 나찰은 당금 세상에서 대국이고 그 아래에 통할하고 있는 작은
나라가 무척 많소. 만약 나찰국이 동쪽에서 엄청나게 져서 위풍을 크게
상실한다면 소속되어 있는 여러 소국들은 승복하지 않을 것이오. 그렇
게 된다면 나찰은 반드시 큰 군사를 일으켜서 복수를 하러 올 것이고
그러면 잇달아 병란을 겪어야 할 것이며, 어느 해 어느 달에 가서 끝날
지 모르는 일이외다. 황상께서는 아이청사기에게 물어서 나찰국의 서방
에 다른 큰 대국이 있어 이를 서전(瑞典)이라고 하며 나찰국과 서전이
일촉즉발의 기세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소이다. 나찰이 만약에
동서 양쪽에서 동시에 싸움을 하게 된다면 매우 골치 아픈 일이 될 것
이오. 그러니 우리들은 이 기회를 빌어 그들과 화약을 맺자는 것이고,
이는 반드시 크게 득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적어도 북쪽 강토가 일백 년
동안 태평함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소이다.]
위소보는 크게 승리한 나머지 단번에 그 기세를 몰아 니포초까지 공격
해 무너뜨리고 싶었지만, 황상께서 나찰의 화친을 받아들이자고 응낙하
는 말을 듣고는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일은 황제가 결정할
일이라 성지를 어기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동국강을 바라보
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대는 황상의 외삼촌이니 역시 내 마누라의 외삼촌으로 따지고 본다
면 나의 웃어른이시오. 거기다가 그대는 일등공작이고 나는 이제 막 진
급이 된 이등공작이오. 이번 나찰 사람들과 평화협정을 맺는 데 대해서
황상께서 그대를 보내 나를 돕도록 한 것은 나의 체면을 크게 세워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동국강의 부친 동도뢰는 강희의 어머니 효강황후의 부친으로 바로 한나
라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강희의 혈통은 반은 만주사람이고 반은
한나라 사람이었다. 동도뢰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동국강이 세습을 이
어받아 일등공에 봉해진 것이다. 동도뢰는 일찍이 관외에서 만주 청나
라에 귀의하여 양황기의 군영에서 큰 공훈을 세워 명성이 큰 바 있었
다. 그러나 위소보는 그의 이름이 너무나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도뢰,
도뢰 한다는 것은 바로 도박에 지고서도 억지를 부린다는 뜻으로 당당
한 국장(國丈)께서 어찌 그러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날 밤 크게 연회를 베풀어 새로운 사람들의 여독을 씻어 주었는데 대
신들은 이 대원수의 휘하에서 몇 수 노름판을 벌이게 되었다. 동국강은
아니나다를까 계속 졌다. 그러나 육백 냥의 은표를 손해봤는데도 조금
도 개의치 않았고 억지를 쓰려는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위소보는 그가 지는 것에 있어서 시원시원한 것을 보고 그의 부친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의아하게 여겼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서
잠을 청하였을 때야 확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동골광(冬骨光:이는 위소보가 편리한 대로 생각한 동국강
의 이름)이라고 했으니 이는 바로 골패에서 모조리 지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도박을 하는 성품은 지극히 좋아 그와 친구로
사귈 수 있을 것 같다.)
이튿날 위소보와 대신들은 상의를 했다. 모두들 상대방과 성하지맹을
맺어야 하니 이대로 대군을 내보내 다시 대군을 동원하는 번거로움이
없도록 하자고 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고 즉시 명을 내려서 애휘
와 호마이 성의 두 군을 일제히 출발시켜 니포초 성 아래에 모두 모이
라고 했다.
이때는 이미 여름철로 접어들어 날씨는 따뜻하고 눈이 녹기 시작해서
행군하기에 무척 편한 때였다.
이날 해랍이(海拉爾) 냇가에 이르렀을 때 선봉에서 보고를 보내왔다.
그 보고는 나찰병의 일 소대를 거느린 대장이 대원수를 뵙겠다는 것이
었다. 위소보가 그들 대장을 불러 보니 화백사기와 제락낙부 두 사람이
었다.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매우 좋아, 매우 좋아. 왕팔사계와 자라유부였군.]
두 사람은 허리를 구부리고 소비아 공주의 희답을 바쳤다. 이때 그 나
찰의 선교사는 여전히 청나라 군사의 대군영에서 필요할 때 쓰기 위해
서 데리고 있었다. 강희는 평화협정의 문서에 조인하기 위해서 또 한
명의 하란 선교사를 보내 도와 주도록 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두 명의
선교사를 장막 안으로 불러서 그들에게 공주의 회신을 번역하도록 했
다. 나찰의 선교사는 그날 위소보의 본래 뜻을 마구 고쳤던 터라 가슴
이 두근거렸고, 공주의 회신에서 마각이 드러나면 어쩌나 하여 재빨리
편지를 받아들고 한 번 읽어본 이후에야 가까스로 마음을 놓을 수가 있
었다. 그리고 그 하란 선교사는 즉시 편지의 나찰 문자를 중국말로 번
역을 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헤어진 후 때때로 그리워했으며 평화협정이 조인된 이후에는 위소보가
모스크바로 한번 와서 옛 사람과 정을 풀도록 하자. 그리고 위소보가
두 나라의 군주에게 총애를 받고 있으니 반드시 가운데서 여러 오해를
정정하고 서로간의 간격을 없애 두 나라 사이에 만대에 걸쳐 평화를 누
릴 수 있는 기틀을 세우자.]
그런가 하면 편지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중화와 나찰은 동과 서로 떨어져 있으나 나란히 대국끼리 손을 잡고
연맹을 맺는다면 즉시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으며, 어떤 국가라도 대항
할 수 없다. 만약에 평화협정이 이뤄지지 못하고 장기간의 전쟁을 벌인
다면 두 나라 똑같이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소보에
게 바라건대 이 일을 한시바삐 이루도록 하여 중화나라에서 대공을 세
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찰국에도 큰 공을 세우게 되니 반드시 그
녀는 보답을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위소보에게 청하는데 중국 황제에
게 말씀을 올려 나찰국의 장수들과 사병들을 되돌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달콤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게 해 달라]
하란의 선교사가 번역을 다 끝내자, 위소보는 화백사기와 제락낙부 두
사람이 서로 눈짓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달리 사정이 있음을 알
고 두 명의 선교사를 물러가게 한 후 물어 보았다.
[그대들은 또 무슨 할말이 있소?]
화백사기는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우리들에게 중국의 어린애 대인께 말씀을 드리라고
했죠. 그러니까 공주 전하께서는 무척 그대를 그리워하고 있으며 나찰
의 남자들은 좋지 않고 중국의 어린애 대인이 천하 제일이니 반드시 모
스크바로 와 주십사 한답니다.]
위소보는 흥,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나찰의 사탕발림이니 절대 믿을 수 없지.)
제락낙부는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또 다른 몇 가지 일을 아무쪼록 중국 어린애 대인께
서 처리해 주십사 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공주 전하께서 그대에게 드
리는 것입니다.]
그는 목에서 구리로 만든 목걸이를 풀었다. 그런데 그 목걸이 끝에는
가죽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화백사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두
사람은 먼 길을 달려와야 했기 때문에 혹시 잃어버릴까 봐 구리로 만든
쇠사슬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었던 모양이었다. 두 가죽 주머니의
주둥이에는 모두 구리로 만들어진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화백사기는 허리띠에서 열쇠를 풀더니 제락낙부 가죽 주머니의 구리 자
물통을 땄다. 제락낙부 역시 자기의 열쇠로 화백사기가 가지고 온 가죽
주머니의 구리 자물통을 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공손히 그 가죽 주
머니를 위소보가 앉아 있는 탁자 위에 놓았다. 위소보가 가죽 주머니를
거꾸로 들자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 알의 보석이 쏟아져 나왔
는데 오색영롱한 빛이 내뿜어지는 것이 찬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두
지극히 큰 홍보석, 남보석, 황보석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죽 주머니
에 담겨져 있는 것은 금강석과 비취였다. 장막 안은 보광으로 눈이 부
실 지경이었다.
위소보는 구슬이나 보석들을 무수히 보아 왔으나 이토록 많은 양의 커
다란 보석들을 함께 모아 놓고 구경한 적은 일찍이 한번도 없었던 일이
라 크게 기뻐했다.
[공주가 이토록 무거운 예물을 나에게 내리시다니 정말 감당할 수 없구
려.]
(연경학보(燕京學報) 25회 유선민(劉選民)이 지은 중아조기무역고(中俄
早期貿易考)가 있다. <대사 비요다라 과라문을 보내 중국과 국경선에
경계를 굿고 '수호조약 및 통상' 사무를 담판하도록 했다. 과라문은 동
쪽으로 오는 도중에 다시 조정의 기밀 훈령을 받았는데 그 훈령은 다음
과 같이 정중히 지시를 하고 있었다. 만약에 중국과의 통상의 이득을
얻는다면 아극살 성은 중국에게 양보해도 상관이 없다. 그리고 아황(俄
皇)의 위엄에 손상을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 비밀히 중국 대표에게
상당한 예물을 마련하여 매수해도 좋다.>)
화백사기는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만약에 중국의 어린애 대인이 큰일을 처리하는 데 성
공하신다면 더욱더 귀중한 예물을 선물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아
라사, 소아라사, 백아라사, 카자흐, 서전, 타타르, 페르시아, 네덜란
드, 독일, 단맥(丹麥) 등 열 개의 나라에서 각 나라마다 한 명씩 젊고
아름다우며 처녀인 미녀들을 뽑아 모두 중국 어린애 대인에게 바치겠다
고 했습니다.]
위소보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일곱 명의 내 마누라들을 상대하기도 벅찬데 다시 열 명의 미녀가 생
긴다면 중국 어린애 대인은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오.]
화백사기는 급히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열 명의 아름다운 처녀
들은 공주 전하께서 이미 갖추어 놓았는데 우리들이 친히 본 바가 있습
니다. 하나같이 매화 같은 얼굴 모습에 우유 같은 피부를 하고 있었고,
꾀꼬리와 같은 음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위소보는 마음이 크게 동하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공주 전하께선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셨소?]
제락낙부는 말했다.
[첫번째는 두 나라에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며 공평하게 국경선을 긋고
다시는 싸우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소황제도 바로 그와 같이 원하고 있으니 이 일은 매우 쉽다.)
그러나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대들 나찰국의 서쪽에 있는 서……서 뭐라고 하는 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해 왔는데 우리와 함께 군사를 보내 동쪽과 서쪽에서 나찰을 협공
하여 그대들의 국가를 나누자고 했소. 그때 무슨 대아라사, 소아라사,
크고 작지도 않은 중아라사, 흑아라사, 백아라사, 다섯 가지 빛에 여섯
가지 빛깔의 꽃 모양의 아라사에서 갖가지 미녀들을 얼마든지 요구하는
대로 갖출 수 있을 것이니 그대들 공주 전하께서는 선물할 필요가 없어
지는 것이오. 더군다나 한 나라에서 한 사람씩만 보낸다면 너무나 초라
하고 치사하지 않소?]
나찰 대장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때 서전의 국왕은 사리(査
理) 십일 세가 제위하던 때였는데 역시 영명하고 훌륭한 젊은 군주였
다. 그는 군사를 정돈하여 군사 훈련을 시켜 동쪽의 나찰을 침범할 뜻
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대대의 병마를 끊임없이 동쪽으로 보내고
있었다. 모스크바 조정의 문무대신들은 이 일을 근심하고 있었는데 뜻
밖에도 서전에서 먼저 중국과 연맹을 맺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닌가?
나찰국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만약에 앞과 뒤에서 적을 맞게 된다면 그
야말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판이었다. 위소보는 두 사람의 안색을 살피
고 자기가 한번 휘둘러 댄 일초에 이미 효과가 발생한 것을 깨닫고 말
했다.
[그러나 나와 공주 전하는 달콤한 마음의 절친한 친구인데 내 어찌 서
무슨 나라의 오랑캐에게 응낙을 하겠소. 그리고 지금 우리 중국 황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소. 만약에 나찰국이 정말 성심을 다해 화평을
구하고자 한다면 나는 서 무슨 나라의 사자를 그들 나라로 쫓아 보낼
수도 있소.]
두 명의 대장은 크게 기뻐서 말했다.
[나찰국은 매우 성의에 차 있으며 조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중국의 어
린애 대인께선 빨리 서전 나라의 사자를 쫓아내십서오. 한칼에 그의 목
을 자르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자의 머리는 벨 수 없는 것이오. 더군다나 그는 이미 나에게 많은
보석과 십여 명의 미녀들을 보내 왔소. 그러니 목을 칠래야 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나찰 대장은 연신 그렇다고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서전 나라에서는 이미 이 어린애 대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먼저 물
건을 보낸 이후에 나중에 또 돈을 받아들이도록 했구나. 그들의 이 한
수는 우리보다 위구나.)
그들은 다시 생각했다.
(다행히 중국의 어린애 대인이 우리 공주의 달콤한 마음에 빠져 우리들
이 큰 화를 당하지 않은 셈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번 일로 크게 야단
을 당할 뻔했구나.)
위소보는 물었다.
[공주 전하께선 또 나에게 무슨 일을 해 달라고 하셨소?]
화백사기는 웃었다.
[공주 전하가 진정으로 중국 어린애 대인께서 해주십사 하는 일은 그대
가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의 공주 침실로 가시는 일입니다.]
위소보는 훗, 하고 웃으며 생각했다.
(이것 또한 나찰의 사탕발림이다. 간단히 칭해서 나찰탕(羅刹湯)이라고
해 두자. 그러나 믿을 수는 없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대들 나찰 남자들은 쓸모가 없는 모양이구려?]
제락낙부는 말했다.
[나찰의 남자들이 쓸모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공주 전하께서는 특
별히 중국의 어린애 대인을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도 또 나찰탕이로구나.)
[그 밖에 다른 것은?]
화백사기가 말했다.
[공주 전하께선 중국의 황제에게 청하여 두 나라 상인들이 자유롭게 두
나라 국경을 왕래하며 통상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락낙부는 말했다.
[두 나라 상인들이 빈번하게 내왕을 하게 된다면 공주께서는 수시로 편
지를 써서 대인께 선물을 바칠 수도 있습니다.]
(제기랄! 또 한 그릇의 나찰탕이군.)
[그렇다면 두 나라가 통상을 맺자는 것은 공주의 사사로운 욕심을 위한
것이고 공(公)을 위한 것은 아니로군.]
제락낙부는 말했다.
[아니지요. 완전히 중국 어린애 대인을 위한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오. 그대들은 다시는 나를 중국의 어린애 대
인이라고 부르지 마시오.]
두 사람은 공손히 허리를 구부리고 말했다.
[예, 예. 중국 대인 각하!]
위소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소. 그대들은 물러가 쉬도록 하시오. 우리들은 니포초로 가는데 그
대들도 함께 가도록 합시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생각했다.
(중국의 대군을 이끌고 니포초로 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설마 성
을 공격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대들은 안심하시오. 나는 공주에게 두 나라의 화친을 응낙할 것이니
다시는 싸움을 하지 않게 될 것이오.]
두 사람은 다시 일제히 허리를 구부리며 말했다.
[정말 중국 어…… 아니……대인 각하께 감사드립니다.]
화백사기는 다시 말했다.
[공주께서는 중국의 다리가 매우 훌륭히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시고 계
십니다. 중국의 다리는 아무리 넓은 큰 강이나 냇물이라 해도 모조리
커다란 바위로 다리를 만들되 아래에 석주(石柱)를 세우지 않습니다.
공주께서는 마음속으로 중국 대인 각하를 사랑하시며 또한 중국의 물건
도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인께서 몇 명의 다리를 만드는 공장
(工匠)이나 기사를 모스크바로 보내어 중국의 신비한 돌다리를 만들어
주십사 하고 바라십니다. 공주 전하께서 매일같이 중국의 돌다리 위를
거닐면서 산보를 하신다면 매일같이 대인 각하를 만나는 것과 같지 않
겠습니까?]
(나찰탕을 한그릇 한그릇 마구 먹이려고 하는데 다 마셨다가는 토해 낼
것이다. 공주가 우리 중국의 돌다리를 특별히 좋아한다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이 가운데는 반드시 이상한 점이 있으니 나찰의 불여우 같은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주에게는 돌다리가 필요없소이다. 그리고 공정(工
程)이 너무 크외다. 대신 나는 그녀에게 몇 채의 중국 명주 이불과 중
국 베개를 드려 그녀가 안고 자도록 하겠소. 그러면 매일밤 중국 대인
각하와 함께 자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 아니겠소.]
두 명이 나찰 대장은 서로 쳐다보더니 얼굴에 하나같이 겸연쩍은 빛을
띠었다. 제락낙부가 말했다.
[이건……아무래도……]
화백사기의 머리가 좀더 민첩하게 돌아가는지라 이렇게 말했다.
[대인 각하의 생각은 지극히 고명하십니다. 중국의 명주이불과 베개는
우리들이 가져가겠습니다. 공주께서 중국 대인 각하를 안아보지는 못하
지만 중국의 명주이불과 중국의 베개를 안아 보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명주이불과 베개는 몇 년이 지나면 썩고 맙니다. 돌다리보다 견
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돌다리를 세우는 기사를 대인께서는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위소보는 그들 두 사람의 말투로 미루어 볼 때 나찰의 조정에서 다리
만드는 기사를 급히, 그리고 간절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는 반드시 어떤 간계와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중
국의 다리 만드는 기술이 당시 천하에서 으뜸이며 외국 사람이 중국에
와서 건축 구성이 웅장하고 엄청난 돌다리를 보면 반드시 혀를 차며 칭
찬과 감탄해 마지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구름다리는
강 위에 가로로 펼쳐져 있는데 그 아래에 지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을 보고 더욱더 신기하게 여겼다. 나찰인들이 이 다리를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것은 그야말로 중국 과학의 기술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강희 15년, 나찰국은 사파탑뢰(斯巴塔懶;N.G
Spatnary)를 흠차로 지정하고 보석 전문가와 약재 전문가를 거느리고
북경에 보내어 이와 같은 요구사항을 내걸었는데, 그 가운데 일조는 중
국에서 아라사국이 다리 만드는 기사를 차용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흠차는 강희에게 큰절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 조정에 의해서 쫓겨났으며 아무 성과 없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너희들이 얻고자 하는 물건을 나는 결코 주지 않겠다.)
위소보는 이런 생각을 하며 말했다.
[알았소 내려가시오!]
두 명의 대장은 감히 더 말하지 못하고 절을 한 후 물러갔다.
며칠 후 나찰국의 흠차대신 비요다라는 니포초 성에 청나라 대군이 도
달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사람을 시켜 편지를 전달했는데, 그 편지는
청나라 군사가 원위치에 주둔하기를 바라며 그러면 그 자신은 즉시 달
려와 만나겠다는 것이었다.(나찰국의 평화협정의 책임을 맞게 된 흠차
의 이름은 비요다라 과라문(費要多羅 果羅文;Feder Golovin)인데 당시
서구인들은 이름이 먼저이고 성이 뒤라는 습성을 모르고 있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서에서는 비요다라라고 일컫고 있다.)
위소보는 말했다.
[겸손해 할 것 없소. 우리가 방문하도록 하겠소.]
그리고 청나라 군사들은 위풍당당하게 니포초 성으로 들어갔다.
살포소, 붕춘, 마라가 인마를 나누어 거느리고 니포초 성 북쪽과 남쪽,
그리고 서쪽으로 돌아가 요도를 지켜 이곳저곳의 나찰국 병사들의 퇴로
를 차단하는 동시에 서쪽에서 지원군이 달려오는 것을 저지하였다.
위소보는 친히 중군을 거느리고 성 동쪽에 주둔하였다. 중군의 유성포
(流星砲)가 하늘로 쏘아지자 사면의 호포(號砲)가 일제히 울려퍼졌다.
니포초 성 안의 나찰 대신과 군관, 사졸들은 청나라 군사가 구름 떼처
럼 모여 성을 에워싸는데 그 위엄이 엄청난 것을 보고 모두 다 압도되
고 말았다. 비요다라는 즉시 예물을 갖추고 사람을 청나라 군중으로 보
냈으며 아울러 증국 흠차대신에게 편지를 바쳤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두 나라 황제가 이미 군사를 거두고 평화협정을 맺도록 했으며 이번에
만나서 회담을 하는 것은 평화조약을 맺자는 데 있는 것이니, 쌍방의
군대는 너무 가깝게 위치하지 말아야 충돌을 방지할 수 있고 두 나라
수호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다.]
위소보는 대신들과 상의를 했다. 사람들은 중화상국에서 너무 거칠고
야만스럽게 나갈 것 없이 반드시 먼저 예의를 차린 이후 군사를 움직여
야 한다고 했다. 위소보는 즉시 명을 내려서 수마장 군사를 물러나게
해 십이객하(什耳喀河) 동쪽에 주둔하도록 했다. 그리고 니포초 성 북
쪽과 서쪽, 남쪽 삼면의 청나라 군사들은 산속으로 물러나서 명령을 기
다리도록 하라고 일렀다.
비요다라는 청나라 군사가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약간 마음을 놓고
다시 한 통의 문서를 써서 네 가지 회담 조건을 제출했다.
첫째, 회견 장소는 니포초 성과 십이객하 사이의 중간이어야 한다.
둘째 , 만나는 날은 두 나라의 흠차가 각기 수행원 사십 명을 거느리도
록 한다.
셋째, 두 나라가 각기 군사 오백을 내보내되 아라사군은 성 아래에 대
열을 짓게 하고 청나라 군사는 냇가에 대열을 짓게 한다.
넷째는 두 나라 사절의 호위 친위병들은 제각기 이백육십 명으로 한정
하고 검 외에 화기를 지니는 것을 허락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가 이같이 네 가지 조건을 내건 것은 청나라 군사의 기세가 너무나
엄청나고 아라사군이 적기 때문에 만약 쌍방의 사람 수를 한정하지 않
는다면 아라사군이 반드시 열세에 몰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
나 나찰병의 화기가 무서운지라 만약 쌍방의 군사 수가 대등하다면 아
라사군이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상대방에서 허락하지 않
을까 봐 미리 호위병들로 하여금 검만을 휴대하도록 하자는 제의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문서에는 이튿날 만날 것을 건의했다. 위소보와 대신
들은 상의한 이후 괜찮다고 인정을 하고 즉시 받아들였으며 군사들을
내보내 장막을 세워 회담장소로 삼을 준비를 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위소보, 색액도, 동국강 등 흠차들이 수행원을 대동
하고 이백육십 명의 등패수(藤牌手)를 거느리고 회담장소로 나갔다. 니
포초 성의 문이 활짝 열린 곳에 이백여 기의 가살극 병사들이 손에 긴
칼을 들고 한 떼의 나찰 관원들을 호위한 채 달려왔다. 이 한 떼의 기
마병들은 모두 체구가 우람했고 위풍당당했다. 청나라 군사의 등패수들
은 모두 보병들이라 서로 견주어 볼 때 기세에 있어서 크게 뒤떨어졌
다. 동국강은 욕을 했다.
[제기랄, 나찰귀들은 정말 교활하기 짝이 없군. 첫걸음부터 우리들은
속았소. 모두들 이백육십 명의 호위병들만 데리고 나오기로 했는데 기
병을 말하는 것인지 보병을 말하는 것인지를 잊고 말하지 않았구려. 이
렇게 되면 그들은 이백육십 필의 말이 더 많은 셈이외다.]
색액도가 말했다.
[이 일은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는 바가 있소. 나찰귀들과 사귀는 데는
그야말로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외다. 그저 반푼이라도 소홀히 여겼다
가는 그들의 술수에 말려들 것이오.]
말을 하는 사이 나찰병들은 앞에까지 달려왔다.
동국강은 말했다.
[우리들은 황상의 말씀에 따라 매사에 있어 중화상국은 예의지방(禮義
之邦)인 것을 보여 줘야 하니 모두들 말에서 내립시다.]
위소보는 말했다.
[좋소, 모두들 말에서 내리시오.]
사람들은 일제히 말에서 내려 두 손을 맞잡고 엄숙히 섰다. 나찰의 흠
차 비요다라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자 호령을 내렸고, 관원들 역시 모
조리 말에서 내려 허리를 구부리고 절을 했다. 쌍방은 가까이 다가섰
다. 비요다라는 말했다.
[아라사국의 흠차 비요다라는 사황의 명을 받아 대청국 황제의 성궁안
강(聖宮安康)을 삼가 비옵니다.]
위소보는 그의 말을 흉내내어 말했다.
[대청국 흠차 위소보는 대황제의 명을 받들어 나찰국 사황의 성궁안강
을 빕니다.]
그리고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또한 섭정 여왕 소비아 공주 전하께서 아름답고 즐거우시기를 빕니
다.]
비요다라는 빙그레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대청나라 사신이 우리 공주 전하께서 아름답고 즐거우시라고 빈다니
그 인사말은 정말 희한하구나. 하지만 공주가 들으셨다면 반드시 기뻐
하실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칭송하는 말을 했고 부사(副使)를 소개했다.
그리고 쌍방에 통역관들이 있어서 그 말을 옮겼다. 위소보는 나찰외 관
원들이 한편에 서서 공손히 듣는 것을 보고 예절이 깍듯하다고 생각했
다. 그러나 이백육십 명의 카자흐 기병대들은 가슴을 편 채 말 위에 타
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손에 긴 칼을 들고 대열을 지어 서 있는 것이 마
치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표정이라 은연중 위협을 가해 오는 기세
가 엿보여 보면 볼수록 화가 나서 말했다.
[그대들의 호위병들은 너무나 무례하오. 중국 대인 각하를 보고도 어째
서 말에서 내리지 않소?]
그는 나찰말을 문법에 제대로 맞지 않게 사용했고 그 한마디 한마디에
잘못된 점이 많았지만 화가 난 끝이라 통역관이 말을 옮기기도 전에 불
쑥 나찰말을 내뱉었다. 비요다라는 말했다.
[폐국의 규칙에 의하면 기마병은 부대에서 사황 폐하를 만난다해도 말
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이곳은 중국 땅이오. 중국에 왔으면 중국의 규칙에 따라야 하오.]
비요다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각하께선 잘못 아셨소이다. 이곳은 아라사 사황의 영지이
고 중국의 지방이 아니외다.]
[이곳은 분명히 중국의 지방인데 그대들이 억지로 빼앗아 갔을뿐이요.]
[미안하지만 중국 흠차대인께서는 오해하고 계십니다. 이곳은 아라사
사황의 영지입니다. 니포초 성은 바로 아라사인이 세운 것입니다.]
이번에 두 나라는 회의를 열어 국경선을 정하자는 데 있었으니만큼 이
곳이 중국에 속하느냐 아라사에 속하느냐 하는 것은 그야말로 관건의
소재였다. 그래서 두 흠차대신은 만나자마자 장막 안으로 들어가 담판
을 하기도 전에 언쟁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들 나찰 사람들이 중국 지방에 한 채의 성을 쌓았다고 하여 이 지
방이 바로 그대들의 것이란 말이오? 천하에 이런 도리가 어디 있소?]
비요다라는 말했다.
[이곳은 아라사의 지방이니까 아라사 사람들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입
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곳에 성을 쌓지 않았으니 바로 그것이 아라사
지방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중국 흠차대인 각하께서는 이곳이 중국
지방이라고 하시는데 무슨 증거가 있습니까?]
니포초 일대는 관할하는 사람이 없었다. 중국이나 아라사 두 나라의 국
경선도 확실히 정해지지 않아 도대체 중국에 속하는지 아라사에 속하는
지 그 누구도 증거가 없었다. 위소보는 그의 질문에 그만 말문이 막히
는 것을 느꼈다. 억지로 변명을 하자니 알고 있는 나찰말의 밑천이 짧
아 자기의 뜻을 표현할 수가 없었고, 나찰말로 대답하는 것도 난감한데
어찌 교묘한 변설을 늘어놓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노해서 말했다.
[이곳은 중국 지방이오. 증거는 얼마든지 있소.]
곧이어 그는 양주 말로 욕을 했다.
[빌어먹을! 나는 너희들 나찰귀의 팔 대 조상까지 떡을 치겠다.]
이 한마디 말이 입에서 터져나오자마자 양주의 상소리가 물흐르듯 끊임
없이 흘러나왔다. 그리하여 비요다라의 고조모, 증조모, 조모, 어머니,
자매, 외할머니, 이모 고모, 모든 사람들은 그야말로 큰 욕을 얻어먹었
다. 나찰국의 비요다라 집안의 여성들은 한 사람도 요행을 바랄 수 없
게 된 것이었다. 중국이나 아사라 쌍방의 관원들은 중국의 흠차대신이
노여워하는 것을 보고 모두 아연해졌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이 마치
기다란 폭죽을 터뜨리는 것 같아 비요다라는 어리둥절해졌을 뿐만 아니
라 중국의 관원들과 쌍방의 통역관들도 멍하니 이해하지 못했다. 위소
보가 욕을 하는 이 말들은 양주 시정잡배 사이에 오고가는 가장 조야하
고 천박한 속어들로써 양주의 신사숙녀들도 어느 정도만 이해할 수 있
을 정도였으니 색액도, 동국강 등 만주나 북쪽에서 오래 살아 왔던 무
관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第133章. 국경선을 가르는 담판
위소보는 한차례 욕을 한 후 마음이 후련해져서 껄껄 웃었다. 비요다라
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의 표정과 어조를 보고 화를 내고
있다고 짐작했다. 그런데 그가 다시 소리내어 웃는 것을 보자 더욱 어
리둥절해져서 물었다.
[실례지만 귀사(貴使)는 한바탕 열변을 토하셨는데 어떤 가르침을 내리
셨는지요? 귀사의 말씀이 너무나 심오하여 폐인 등은 학식이 얕아 이해
할 수가 없으니 아무쪼록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다시 말씀하시어 가르
침을 받도록 해주시오.]
[나는 방금 그대가 너무도 억지를 쓴다고 말했소. 그리하여 나는 그대
의 조모님을 나의 마누라로 삼겠다고 했소.]
비요다라는 웃었다.
[우리 조모님은 모스크바 성에서 유명한 미녀였지요. 그녀는 피득락부
사기(彼得洛夫斯基) 백작의 딸입니다. 중국 대인 각하께서도 저의 조모
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칭송의 말을 들어 보셨다니 폐인으로서도 실로
영광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 조모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소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의 어머니를 나의 달콤한 마누라로 삼겠소.]
비요다라는 싱글벙글 웃으며 더욱더 기뻐서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명문귀족 출신으로 살결이 희고 부드러우며 법국(法國)
시도 지을 줄 알지요. 모스크바 성의 적지 않은 왕공 대신들도 그녀를
숭배하고 있지요. 우리 아라사의 대시인도 우리 어머니를 찬양하는 시
를 수십 수는 썼답니다. 그분은 금년 나이가 이미 예순세 살인데도 모
습은 여전히 삼십 세의 젊은 부인과 같답니다. 중국 대인 각하께서 장
래 모스크바로 오신다면 나는 반드시 그대에게 우리 어머니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결혼은 할 수 없어도 달콤한 마음은 될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리고 저의 어머님이 응낙하신다면 될 수도 있는 일이지요.]
원래 서양 사람들의 풍속에 있어서 그 누가 자기 어머니나 처의 아름다
움을 칭찬한다면 이를 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
했으며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말보다 더욱더 기뻐했다. 위소보는 상대
방이 자기를 두려워하여 그의 어머니를 자기에게 맡기고 자기를 의붓아
비로 삼으려 한다고 하자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던 노기가 대뜸 사그러
지는 것을 느끼고 미소를 지었다.
[매우 좋소, 매우 좋소. 이후 모스크바로 가게 된다면 반드시 그대의
저택을 자주 찾는 손님이 되겠소이다.]
고리고 그의 손을 잡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쌍방의 수행원들도 모두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위소보 등 일행은 동쪽에 앉았고 비요다라 일행
은 서쪽에 앉았다. 비요다라는 말했다.
[폐국의 섭정 여왕 전하께서는 분부하셨습니다. 이번 국경선을 정하는
희담에 대해 우리들은 지극히 커다란 성의를 보이고 있으니 쌍방은 반
드시 공평해야 하며 그 어느 쪽에서도 상대방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폐국에서는 두 나라가 흑룡강을 경계로 삼아 강남은
중국에 속하고 강북은 아라사에 속하도록 제의하는 바입니다. 국경선이
정해진 이후에는 아라사 병사는 다시 강을 건너 남쪽으로 들어갈 수 없
고 중국의 병사 역시 강을 건너 강북으로 올 수가 없습니다.]
위소보는 물었다.
[아극살 성은 강남에 있소? 아니면 강북에 있소?]
비요다라는 말했다.
[강북에 있습니다. 그 성은 우리 아라사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흑룡강 강북의 땅은 모두 아라사의 땅입니다.]
위소보는 그 말을 듣자 다시 노기가 끓어오르는 듯 물었다.
[아극살 성내에 조그만 산이 있는데 그 산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오?]
비요다라는 고개를 돌려 수행원에게 묻고 대답을 했다.
[고조략산(高助略山)이라고 한답니다.]
위소보는 나찰 말 중에 고조략이 바로 사슴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말
했다.
[우리 말로는 녹정산이라고 하고 있소. 그대는 내가 어떤 작위에 봉해
졌는지 아시오?]
[각하는 녹정공이지요. 우리 나찰 말을 빌자면 바로 고조략산 공작입니
다.]
[그렇다면 그대는 일부러 나를 괴롭히자는 것이 아니오? 분명히 내가
녹정공인 줄 알면서도 나의 녹정산을 점령해 버리다니. 이것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공작이 될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겠소?]
비요다라는 재빨리 말했다.
[아넙니다, 아닙니다. 결코 그런 뜻은 없습니다.]
[그대는 어떤 작위를 받고 계시오?]
[폐인은 낙막낙사벌(洛莫諾沙伐) 후작입니다.]
[좋소. 그대의 녹읍지는 바로 우리 중국에 속하는 지방이오.]
비요다라는 깜짝 놀랐으나 곧 미소를 띄웠다.
[폐인의 봉읍(封邑)인 낙막낙사벌은 모스크바 서쪽에 있는데 어찌 중국
의 지방이라 하십니까?]
[그대는 그대의 작위가 노묘랍시법(老猫拉屎法)······]
[아닙니다. 낙막낙사벌입니다.]
위소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의 경성인 북경에서 노묘랍시법까지 모두 몇 리 길이 되겠으며 며
칠을 가야 되겠소?]
[낙막낙사벌에서 모스크바까지는 모두 오백여 리 길이 되고 닷새의 노
정이 됩니다. 모스크바에서 북경까지는 아무래도 삼 개월은 가야겠지
요.]
[그렇다면 북경에서 노묘랍시법까지는 삼개월하고도 닷새를 더가야 하
니 그 노정은 퍽이나 멀겠구려.]
[무척 먼 길이죠. 무척이나 먼 거리입니다.]
[그와 같이 먼 거리라면 노묘랍시법은 물론 중국에 속하지 않을 것이
오.]
비요다라는 미소했다.
[공작 대인께서는 더할 나위 없이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위소보는 술잔을 들고 말했다.
[자, 술을 듭시다!]
나찰인들은 술을 목숨보다 좋아했다. 술잔이 비요다라 앞에 놓인지 이
미 오래되었고 술향기가 코를 찌르고 있었는데 위소보가 술잔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감히 마시지 못하고 있었다. 위소보가 잔을 드는
것을 보고 그는 재빨리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시고 말았다. 청나라 수
행원들은 다시 그에게 술을 따라주며 찬합에서 음식과 안주를 꺼냈다.
모두 북경의 유명한 요리사들이 튀기고 볶은 것이었다. 이때는 나찰국
이 개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중에 피득대제가 커서 그의 누나 소
비아 공주와 권세 싸움을 벌여 승리를 하게 된 이후 소비아를 수녀원에
보내고 나서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위소보의 때만
하더라도 나찰국의 모든 기물과 제도와 문명, 그리고 교화(敎化)에 있
어서 모두 중국보다는 훨씬 뒤떨어져 있었고 요리의 정묘함에 있어서도
아직 여전히 중국보다는 훨씬 뒤떨어지고 있었다. 과거 니포초 성 밖에
서 비요다라가 처음으로 중화의 풍미로운 음식을 맛보았을 때 자연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지게 되었으며 하마터면 자기의 혓바닥
까지도 깨물어 삼킬 뻔했다.
위소보는 그와 더불어 모든 접시의 음식과 안주를 맛보면서 어시(魚翅)
가 무엇이며 연와(燕窩)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여 오리의 발이 연희석에
서 진귀한 음식이 되며, 또 어떻게 하여 닭의 간이 요리상에서는 보물
로 여겨지게 되는가를 설명했다. 그런 말을 들은 비요다라는 매우 기뻐
했고 찬탄했으며 여간 부러워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무심히 질문을 던
졌다.
[귀사는 이번에 모스크바에서 언제 떠나온 것이오?]
[폐인은 4월 12일 공주 전하의 유시를 받들고 모스크바에서 출발했습니
다.]
[매우 좋소. 자, 다시 한잔 비웁시다. 우리 이 동 공작 나리께서는 주
량이 무척 세시니 그대들 두 분께서 서로 잔을 주고받도록 하시죠.]
그리하여 동국강이 즉시 비요다라에게 경의를 표하고 나서 서로 석 잔
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위소보는 물었다.
[귀사는 이번 달에 니포초에 도달한 것이겠죠?]
[폐인은 지난달 15일에 도착했습니다.]
[음,4월 12일에 출발하여 7월 15일에 도달했으니 거의 3개월이 걸렸구
려.]
비요다라는 말했다.
[그렇지요. 3개월 남짓 걸렸습니다. 다행히 날씨가 따뜻해서 길을 오기
에 별로 어렵지 않았지요.]
위소보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칭찬을 했다.
[매우 좋소. 귀사는 이번에야말로 진실을 말했으며 끝내 니포초가 나찰
국의 땅이 아닌 것을 인정하게 되었소.]
비요다라는 십여 잔의 술을 마신 끝이라 술기운이 얼큰하게 올라 있었
는데 그 말을 듣고 아연해져서 물었다.
[내가‥·…내가 언제 승인했다는 말이오?]
위소보는 웃었다.
[북경에서 노묘랍시법까지 가려면 3개윌 남짓 가야 하며 노정이 매우
멀지 않소. 그렇기 때문에 노묘랍시법은 중국 지방이 아니오. 모스크바
에서 니포초까지 올 때 역시 3개월 남짓 걸렸으며 그 노정도 가깝지 않
소. 그러니 니포초는 자연 나찰국의 것이 아니지 않겠소.]
비요다라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일시 대답할 말이 없어 잠시 멍하니 있
다가 말했다.
[우리 아라사국의 땅은 매우 크니까 그것은 문제가 다르죠.]
[우리 대청나라 땅도 역시 작지 않소.]
비요다라는 억지로 웃었다.
[귀사는 농담을 하시는군요. 이건···두 가지 일로씨······일
률적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귀사가 반드시 니포초가 나찰국의 땅이라고 한다면 우리 두 사람은 한
번 교환을 해봅시다. 내가 모스크바로 가서 공주에게 청하여 그대를 니
포초 백작으로 봉하도록 하고 나를 노묘랍시법 공작으로 봉하도록 하겠
소. 이 노묘랍시법 성은 그렇게 된다면 중국의 땅이 될 것이오.]
비요다라는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급히 말했다.
[그…·‥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는 크게 걱정을 했다. 공주는 원래 위소보의 정인이 아닌가? 만약 위
소보가 베갯머리에서 중국의 사탕발림으로 은근히 성을 교환하라는 대
답을 받아 내면 그야말로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낙막낙사벌은 조상 대대로부터 전해지는 봉읍으로 산물이 풍부하
다. 만약에 공주가 니포초로 봉읍을 옮기도록 한다면 이곳은 날씨가 춥
고 인정도 적어 그야말로 나의 목숨을 달라는 격이다. 더군다나 지금
나는 후작이니 니포초 백작으로 봉해진다면 그야말로 계급이 강등되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그가 조심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웃있다.
[그대는 나의 본지인 아극살마저 차지하여 나로 하여금 녹정공이 되지
못하게 하고 있소. 그러니 나에게 무슨 방법이 있겠소 부득이 노묘랍시
법 공작이 될 수밖에 없구려. 물론 그대의 이 봉읍은 이름이 듣기에 매
우 거북하여 무슨 늙은 고양이가 똥을 싸고 작은 개새끼가 오줌을 싸는
것처럼 들리지만 적당히 내버려 두는 수밖에 더 있겠소?]
비요다라는 생각했다.
(그대가 나의 낙막낙사벌을 차지하려고 하나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 위소보는 이미 우리 아라사 제국의 작위를 얻
은 바 있는데 만약에 나의 봉읍마저도 얻고자 도모한다면 오히려 귀찮
은 노릇이다. 우리들은 진정으로 아극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이
아극살은 이미 그대들이 공격해서 점령했으니 우리가 그대들에게 물러
나라고 하면 자연 응하려 하지 않겠지.)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아극살 성이 귀사의 봉읍이라면 우리가 한걸음 양보하지요. 두나라는
여전히 흑룡강을 경계로 하되 아극살 성과 성 주위의 십여리의 땅은 중
국에 속하는 것으로 하지요. 이것은 완전히 귀하의 체면을 봐서 큰 양
보를 한 것입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너희들이 싸움에 지고서도 이토록 거들먹거리다니. 만약에 이번 싸움
에서 너희들 나찰이 이겼다면 북경성마저도 너희들에게 떼어 달라고 하
겠구나!)
[우리가 한 번 싸운 셈인데 그대들이 이겼는지 아니면 우리가 이겼는지
모르겠구려.]
비요다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그만 접전을 두고 누가 이기고 졌다고 할 수는 없지요. 우리 공주
전하께서는 엄히 명령을 내려 귀국과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서 싸움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소. 그렇기 때문에 귀국의 군대가 공격을 해올
때에 폐국의 장수와 사병들은 반격을 하지 않았던 것이오. 그렇지 않았
다면 국면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하오.]
위소보는 그 말을 듣고 대노해서 말했다.
[나찰병들은 총과 포를 일제히 쏴댔는데도 반격한 셈이 아니군요.]
비요다라는 말했다.
[그들은 본국의 땅을 지켰을 뿐 반격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나찰
인들이 정말 싸움을 한다면 수비만 하고 공격하지 않을 리가 없어요.
두 나라가 만약에 큰 전쟁을 벌이겠다면 나찰의 화창수와 카자흐 기병
들은 북경성으로 진격해 들어갈 것이오.]
위소보는 극도로 분노에 차서 생각했다.
(제기랄, 이 누런 털의 귀사는 큰소리로 위협을 주려고 하고 있구나.
내 너의 위엄에 눌린다면 내 성을 갈고 너의 아들이 되겠으며 위소보라
하지 않고 소보비요다라라고 하겠다.)
그는 모스크바에 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찰 사람들의 습관은 이름이
앞이고 성이 뒤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요다라가 이름이지 성이
아닌 것은 모르고 있었다.
위소보는 입을 열었다.
[그건 매우 잘되었소, 참 잘되었소. 후작 대인, 그대는 내가 마음 속으
로 가장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그건 모르겠소. 어디 가르침을 받고 싶군요.]
[나는 지금 공작이오. 마음속으로 가관진작하여 군왕(郡王)이나 친왕에
봉해졌으면 하오.]
비요다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가관진작되는 것을 그 누가 바라지 않겠는가?)
그는 웃었다.
[공작 대인께선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 귀국 황제의 총애를 깊이 받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몇 가지의 공로를 세운다면 군왕이나 친왕에 봉해
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폐인은 성심성의로 미리 성공할 것을
삼가 축하드립니다.]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대가 도와 줘야 이룰 수 있소. 그렇지 않을 때는 이
룰 수 없을 것 같구려.]
비요다라는 어리둥절해져서 말했다
[폐인이야말로 마땅히 도와 드려야죠. 그런데 어떻게 도와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위소보는 입을 그의 귓가로 가져가서 나직이 말했다.
[우리 대청나라의 규칙에 의하면 오로지 커다란 싸움에서 이겨 공을 세
워야만 왕에 봉해질 수가 있소. 이제 우리나라는 태평무사하고 반역자
들은 모조리 멸망하여 다시 삼십 년을 기다린다 하더라도 아마 싸우게
될 수 없을 것이오. 그러니 내가 왕에 봉해지고자 하더라도 매우 어렵
게 되었소. 이번에 국경선을 협의하는 데 있어서 그대는 양보할 필요없
이 군사를 파견하여 우리들에게 도전하여 이곳의 우리 대신들을 한두
명 죽여 주었으면 가장 좋겠소. 그렇게 된다면 우리 두 나라가 크게 싸
울 것이 아니겠소? 그대는 화창수와 카자흐 기마병들을 보내 북경을 진
격해 가도록 하시오. 우리와 서전국은 연맹해서 군사를 보내 모스크바
를 공격하리다. 그렇게 된다면 흙먼지 모래가 뿌옇게 일어나고 피는 흘
러 냇물을 이루게 될 것이니 그대와 나는 왕에 봉해질 수 있을 것이 아
니겠소? 부탁이오, 부탁이오. 아무쪼록 그대가 협조를 해주기 바라오.
그런데 나직이 이야기하시오. 다른 사람이 듣게 해서는 안 되오.]
비요다라는 들으면 들을수록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젊은이는 정말 대
담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에 봉해지고 싶다고 하여 두
나라의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서전국과 연맹을 하다
니 그렇게 되어 싸움을 벌인다면 장래 누가 이기고 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찰 군사의 수는 적고 청나라 군사는 많아
군의 실력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코앞에서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속으로 매우 후회했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위협을 한답시고 화창수들과
카자흐 기마병들을 북경성으로 공격해 들어가도록 하겠다는 말을 한 것
을 후회했다. 더구나 상대방 위소보는 그 말을 정말로 여기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렇게 된다면 그야
말로 진정 일을 잘하려다가 졸렬하게 만든 결과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
렇다고 그가 두려운 빛을 드러낸다면 위소보에게 무시당할 것 같아 잠
시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모스크바는 이곳에서 너무 머니 대청나라 군사가 그곳까지 달려가 공
격을 하는 데 있어서 실로 자신이 없소. 어쩌면 패전을 당해 황상께서
는 오히려 나를 탓할지도 모르는 일이오.]
비요다라는 그 말을 듣고 얼굴에 기쁜 빛을 띄우며 말했다.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각하께서는 역시 모험을 하지 않는 것
이 좋겠다고 권고드리는 바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그저 공을 세워 왕에 봉해지고 싶은 것이지 나찰국을 멸망시키고
싶은 것은 아니외다. 귀국의 땅은 매우 넓어 나 역시 멸망시킬 재간이
없소이다.]
비요다라는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그대는 병사를 보내 북경을 공격하고 나는 군사를 보
내 니포초를 공격하여 각기 제멋대로 싸움을 합시다. 북경성을 빼앗으
면 그대의 공로이고 니포초를 빼앗으면 나의 공로이외다. 그대가 볼 때
이 계책이 어떠하다고 생각하시오?]
비요다라는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주위에는 이천여 명의
인마밖에 없어 아극살을 되찾을 능력도 없는 판인데 무슨 수로 북경성
을 공격하겠는가? 자기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위소보라는 젊은이
가 거짓말을 진짜로 여기고 실천에 옮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쓰디쓰
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작 대인께서는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조금 전 내가 화창수와 카자
흐 기마병들을 보내 북경성을 공격하겠다는 말은 정말로 여기지 마십시
오. 내가 말을 잘못한 것으로 모조리 취소하겠소이다.]
위소보는 의아하여 말했다.
[이미 꺼내 놓은 말을 어찌 취소한단 말이오?]
비요다라는 말했다.
[폐인이 공작 대인에게 한번 봐 달라고 청을 드리지요. 아무쪼록 그 말
을 잊어 주십시오.]
[그렇다면 그대들 나찰병은 북경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그렇지요.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들 역시 우리 아극살 성을 차지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비요다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럴 리는 없지요.]
[이 니포초 성에 대해서도 그대들은 역시 결코 요구하지 않을 작정이
오?]
비요다라는 어리둥절해져서 말했다.
[이 니포초 성은 우리 사황의 영지이니 공작대인께서는 양해해 주십시
오.]
위소보는 생각했다.
(소주의 사람들은 온종일 흥정을 하다가 해가 져서야 돈을 지불한다고
했다. 내가 그에게 니포초를 달라고 한다고 해서 즉시 손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선 그에게 니포초 서쪽 지방을 달라고 해봐야지. 그런
후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겠다.)
위소보는 말했다.
[우리는 이번 평화회담에 있어서 반드시 공평하게 거래를 해야 할 것이
며 어린애나 노인을 속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고 그 누구도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될 것이 아니겠소?]
비요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두 나라가 성의를 다해 국경선을 정하고 영구 화평을 추
구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옳은 말씀이오. 만약 이 국경선을 모스크바와 너무 가깝게 정한
다면 그대들 나찰 사람들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북경과
너무 가깝게 끊는다면 우리 중국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이오. 가장 좋
은 방법은 중간을 가로질러 중간에다 국경선을 정하여 둘로 나누는 것
이외다.]
비요다라는 물었다.
[무엇을 둘로 나누자는 것이죠?]
[모스크바에서 북경까지는 대략 삼 개월 걸리는 노정이 아니겠소.]
[예.]
[삼 개월을 둘로 쪼갠다면 얼마나 되겠소?]
비요다라는 그 뜻을 몰라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한 달 반이 되겠지요.]
[맞았소. 우리들은 더 말할 것도 없소이다. 우리는 각기 본국으로 돌아
간 이후 그대는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출발하고 나는 북경에서 서쪽으
로 출발하여 나아가는 것이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한 달 반을 나아간
다면 자연히 마주치게 될 것이 아니겠소?]
비요다라는 말했다.
[예, 그런데 대인은 그같이 해서 어쩌자는 것이죠?]
위소보는 말했다.
[이것이 가장 공평하게 국경선을 정하는 방법이 아니겠소? 우리가 마주
치는 곳이 바로 두 나라의 국경선이 될 것이외다. 그 지방은 모스크바
에서 한 달 반의 노정이 걸리는 곳이고 북경과도 역시 한 달 반의 노정
이 걸리는 곳이오. 그대들도 득을 보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들도 역시
득을 보지 않는 것이오. 그러니 우리가 이번 싸움에 이긴 것은 그야말
로 헛이긴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따지고 보면 그대들이 득을 본 것이 아
니겠소?]
비요다라는 온 얼굴이 시뻘겋게 부어올라서는 말했다.
[이 건……이건……이 건…‥·]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위소보는 웃었다.
[그대 역시 그 방법이 매우 공평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소.]
비요다라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절대 불가하오. 그와 같이 국경선을 긋는다는 것은
아라사 제국의 국토 반을 그대에게 떼어 주는 격이 아니겠소?]
위소보는 말했다.
[반보다 적소. 그대들은 모스크바 서쪽에도 많은 국토가 있지 않소. 그
국토는 중국과 둘로 나눌 필요가 없는 것이오. 그러니 이렇게 겸손해
할 것은 없지 않겠소?]
비요다라는 울화가 치밀어 수염을 마구 쥐어뜯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
었다.
[공작 대인, 그대가 만약 성심성의로 평화회담을 하지 않겠다면 그대는
마땅히 정리에 맞는 주장을 해야 할 것이외다. 이와 같은……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나라 영토의 반을 때어 가겠다니 이거야……이거야말로
너무나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오.]
그가 씩씩거리며 털썩 주저앉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가 우두득,
하는 소리를 냈다.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기실 경계선을 가지고 의논한다는 것은 재미없는 노릇이외다. 역시 우
리들은 싸우는 것이 좋겠소.]
비요다라는 끊임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으며 참을 수 없다는 듯 탁자
를 두드리며 일어나 크게 호통을 치고 싶었다.
(싸울 테면 싸웁시다.)
그러나 만약 싸움을 벌인다면 그 결과는 명확해서, 자기 쪽이 이길 승
산이 전혀 없는지라 부득이 억지로 참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위
소보는 갑자기 손을 뻗쳐 탁자 위를 치더니 웃었다.
[되었소, 되었소. 나에게 또다른 방법이 있소.]
그리고 손을 품속으로 가져가더니 두 알의 주사위를 꺼내 후, 하고 분
후에 탁자 위에 던지며 말했다.
[싸움도 하기 싫고 둘로 나누기도 싫다면 이 주사위를 던져 결정을 하
도록 합시다. 북경에서 모스크바까지를 일만 리 노정으로 보고 우리들
이 열 토막으로 나누되 한 토막을 일천 리로 합시다. 내가 그대와 주사
위를 던져 열 번을 겨루는 데 있어 매번 겨룰 때마다 걸게 되는 것은
일천 리의 국토요. 만약 그대의 운수가 좋아 열 번을 모조리 이긴다면
곧장 북경성 아래의 땅덩이까지도 모두 나찰국의 땅이 되는 것이오.]
비요다라는 코웃음쳤다.
[만약 내가 열 번을 모조리 진다면 어떻게 하겠소?]
[그것은 그대 자신이 이야기하도록 하시오.]
[설마 모스크바 동쪽의 만리강산을 모조리 중국이 차지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내 짐작컨대 그대의 운수가 그렇게 형편없으리라고는 보이지 않는구
려. 열 번 중에 어찌 한 번도 이기지 못하겠소. 그대가 한번 이기게 되
면 일천 리의 토지를 보장하는 셈이고, 두 번 이기면 이천 리, 여섯 번
을 이긴다면 오히려 득을 보는 것이 아니겠소?]
비요다라는 노해 말했다.
[무슨 득을 본다는 말이오? 모스크바 동쪽 육천 리는 본래 우리 아라사
의 땅이오. 칠천 리, 팔천 리 역시 우리 아라사의 땅이란 말이오.]
위소보와 비요다라 두 사람이 끊임없이 교섭을 하고 있을 때 통역을 맡
은 하란 선교사는 옆에서 끊임없이 중국말로 옮겨 말했다. 동국강과 색
액도 등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처음에는 비요다라가 정말 억지를 쓴다
고 생각했다. 흑룡강을 경계로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중국의 요동을 핍
박하는 것인데 요동은 바로 만주의 용흥지지(龍與之地)가 아닌가? 어찌
오랑캐의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그들은 속으로 매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위소보가 한사코 싸움을 해서 공을 세워서
왕에 봉해져 땅을 받고 싶다고 하자 아라사의 사절은 즉시 밖으로는 무
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겁을 집어먹고 감히 말을 받지 못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거기다 다시 위소보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
를 끌어내어 봉읍을 바꾸자느니 둘로 쪼개 갖자느니 또 주사위를 던져
경계선을 긋되 일천 리 토지를 매번 걸자느니 하는 소리를 듣고, 터무
니없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상대방이 결코 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
나 비요다라의 기운이 크게 꺾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하
나같이 생각했다.
(나찰 사람들은 무지막지하다더니 정말 명불허전이로구나. 만약 그들과
점잖게 담판을 한다면 반드시 열세에 몰리게 될 것이다. 황상이 위 공
작을 파견해서 이 평화희담을 이끌어 나가도록 한 것은 그야말로 사람
을 알아보는 능력이 탁월하신 것이로구나. 이 오랑캐의 귀자는 야만인
이니까 오로지 위 공작과 같이 학문이 없는 시정의 망나니만이 그와 예
리하게 맞서서 야만적인 방빕으로 야만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동국강과 색액도 등 대신들은 겉으로는 위소보에 대해서 매우 공손하고
깍듯했으나 속으로는 그를 업신여기고 있었다. 하나같이 그가 황상의
총애를 받고 있는 어릿광대 같은 신하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평
소 이야기를 하거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종종 꼴사나운 모습을 드
러내고서도 전혀 수치를 모르는 듯 의기 양양해 하는 꼴을 보고 가소롭
게 생각했다. 때문에 이번에 외국사신과 절충을 벌여 담판을 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외국의 비웃음을 사서 나라의 체면을 잃게 되리라 생각
했다. 그런데 황상은 적절한 인재를 헤아려 보고 그를 사신으로 삼아
크게 효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 아닌가? 만약 이와 같이 억지를 쓰는 인
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조정의 문무대신들
가운데 이에 버금가는 사람을 다시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대신들
은 들으면 들을수록 탄복하였고 더욱더 황상께서 영명하시고 지혜로운
점을 신하들이 따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색액도가 여기까지 들었을 때
갑자기 입을 열었다.
[모스크바는 본래 우리 중국의 땅이오.]
하란 선교사가 그 말을 통역했다. 비요다라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
다.
(이 젊은이가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그대와 같은 늙은이도 그렇게 염치없는 말을 함부로 지껄인단 말인가?
우리의 서울인 모스크바가 그대 중국의 땅이라고?)
색액도는 계속해서 말했다.
[귀사의 말에 의하면 나찰인들이 잠시 점거했던 땅은 바로 나찰국의 토
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소?]
비요다라는 말했다.
[본래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귀사는 모스크바가 중국의 땅이라고 하
는데, 허허허! 그건……너무나 우스운 소리이고 천하에 다시 찾아볼 수
없는 농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색액도는 말했다.
[나찰국의 백성들에게는 대아라사, 소아라사, 백아라사, 그리고 카자
흐, 타타르 등동이 있는데 모두 다 나찰인들이죠.]
비요다라는 말했다.
[틀림없소이다. 우리나라의 토지는 광대하고 나찰인의 백성은 무척 많
죠.]
색액도는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류도 역시 많소. 만주인도 있고 한나라 사람도
있고 묘인(苗人), 회인(回人), 장인(蔣人) 등등이 있소이다.]
비요다라는 말했다.
[바로 그렇지요. 아라사는 대국이고 중국 역시 대국입니다. 우리 두 나
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대국이죠.]
색액도는 말했다.
[귀사가 이번에 데리고 온 호위병들은 모두 카자흐 기마병들인 것 같구
려.]
비요다라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카자흐 기마병들은 용맹무쌍하며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용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색액도는 말했다.
[카자흐 기병들이 아라사 사람들에 비해 훨씬 무섭소이까?]
비요다라는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요. 카자흐는 나찰의 백성이고 아라사 역시 나
찰의 백성이라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은 만주 사람이 중국인과 같
으며 몽고 사람이나 한나라 사람들이 역시 중국인인 것과 다를 바가 전
혀 없습니다.]
색액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스크바는 우리 중국의 땅이라오.]
위소보는 그들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일시 색액도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모스크바가 이곳에서 만 리나 먼 저쪽에 있으니만큼
결코 중국 땅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색액도가
마치 정말 그런 것처럼 이야기하고 비요다라의 이마에 푸른 힘줄이 붉
어지고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비요다라의 마
음속에는 미칠 듯한 화가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불쑥
입을 열었다.
[모스크바가 틀림없이 중국 땅인 것은 사실이오. 중국의 황제는 너그러
운 아량으로써 유비에게 형주(荊州)를 빌려 준 것처럼 한번 빌려주었는
데 그대들은 영원히 되돌려주지 않았단 말이오.]
비요다라는 물론 유비가 형주를 빌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
다. 그저 이 중국 오랑캐들은 이치를 따지지 않고 말하는 것이 역시 문
명인답지 않다고 생각하고 냉소했다.
[나는 예전에 중국의 역사가 유구하고 중국인들은 매우 학문이 깊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소. 그런데 알고 보니……허허, 그저 아무 증거
도 없는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뿐이구려.]
색액도는 말했다.
[귀사는 나찰국의 대신이오. 설사 별다른 학문이 없다 해도 나찰국의
역사는 알고 있을 것이 아니겠소?]
비요다라는 말했다.
[우리나라 역사는 책이 있어 증거가 되고 있으며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
는지라 결코 사람들이 터무니없이 지껄이는 데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
색액도는 말했다.
[그것 잘되었소. 옛날에 중국에 황제가 있었소. 그 이름은 징기스칸(成
吉思汗)이라고 하지……]
비요다라는 징기스칸이라는 말을 듣자 그만 어이구, 하고 부르짖고 생
각했다.
(야단났다, 야단났다. 내가 어째서 이토록 멍청한가? 그와 같은 큰일을
잊어 먹다니.)
색액도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 징기스칸은 우리 중국에서 원태조(元太祖)라고 부르고 있소. 왜냐
하면 그는 우리 중국에서 원나라를 창건하신 태조이기 때문이오. 그는
몽고사람이오. 귀사도 방금 말했지만 만주 사람이나 몽고 사람, 그리고
한인은 모두 중국 사람이며 전혀 차이가 없다고 했소. 그때 몽고의 기
마병은 서쪽을 정벌하였는데 한때 나찰 군사와 크게 몇 번 싸운 적이
있소. 귀국의 역사책에 똑똑하게 기술되어 있을 것이오. 그 몇 차례의
커다란 싸움에서 우리 중국인이 이겼소? 아니면 귀국의 나찰인이 이겼
소?]
비요다라는 잠자코 있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몽고인이겠죠.]
색액도는 말했다.
[몽고인은 중국 사람이오.]
비요다라는 한참 동안 눈을 부릅뜨고 있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옛날의 일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와 같은 말을 듣자 새삼 정신
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고 말했다.
[중국 사람과 나찰 사람이 싸움을 한다면 나찰 사람은 반드시 지게 마
련이오. 그대들의 재간은 확실히 뒤떨어지지요. 다음에 다시 싸운다면
우리들은 그저 한 손으로 싸워도 충분할 것이오. 그렇지 않을 때는 쌍
방의 격차가 너무나 심해 싸워도 아무런 재미가 없을 것이외다.]
비요다라는 부릅뜬 눈으로 응시하며 생각했다.
(만약에 공주 전하께서 엄명을 내려 이번에 그저 평화회담을 성사시키
되 싸우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처럼 우리 나찰 사람을 모욕하는
말에 나는 단연코 결투를 했을 것이다.)
위소보는 싱글벙글 웃으며 색액도에게 물었다.
[색형, 징기스칸은 어떻게 나찰병을 크게 패배시켰지요?]
색액도는 말했다.
[과거 징기스칸은 이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서쪽으로 보내 정복하도
록 했지요. 모두 이만 명의 인마에 불과했는데 나찰 연합군의 십만여
명을 크게 대패시켰지요. 징기스칸의 손자 발도(拔都) 역시 한 분의 커
다란 영웅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나찰병을 공격하여 그야말로 나찰병이
낙화유수처럼 나가떨어지게 만든 이후 모스크바를 점령하였고 흉아리
(匈牙利)를 공격하고 다노하(多瑙河)를 건너갔지요. 그 이후 수백 년간
나찰의 왕공 귀족들은 모두 우리 중국 사람들의 말을 들었답니다. 그때
모스크바의 대공작은 수시로 황금 장막에서 거주하는 중국 사람들에게
와서 큰절을 했지요. 중국 사람들은 그들의 볼기를 때리고 싶으면 볼기
를 때렸고 따귀를 때리고 싶으면 따귀를 때렸는데 나찰 사람들은 여전
히 싱글벙글 웃으며 잘 때렸다고 큰소리로 부르짖어야 했고 그렇지 않
았을 때 그는 공작이 될 수가 없었소이다.]
(몽고 대장수 발도는 서기 1238년 모스크바와 기보(基輔)를 함락했다.
그리하여 몽고 사람들은 1240년에서 1480년의 240년간 아라사의 광대한
땅을 통치하고 금장한국(金帳汗國)을 건립하였다. 대영백과사전에 보면
아라사에 관한 조목 가운데 다음과 같은 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모스
크바의 왕자는 반드시 복이가(伏爾加> 강 입구 살래성(薩筮+姐-女城)으
로 가서 황금 장막 안의 몽고 가한(可汗)을 조배해야 했으며 봉호를 받
아야 했다. 그들은 평소 여러 가지의 굴욕을 참았다. 조배가 끝나면 모
스크바로 돌아온 이후 타타르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으며
인근의 제후들의 조그만 나라를 업신여기며 압박했다.>)
위소보는 신이 나서 싱글벙글하며 탁자를 두드리고 말했다.
[얼씨구! 원래 모스크바는 중국에 속해 있었구나.]
비요다라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는데 색액도가 말하는 역사는 결코
거짓이 없었다. 다만 나찰인들은 몽고 사람을 중국인으로 인정하지 않
았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몽고가 중국에 속하 있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모스크바가 한때는 중국에 속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근거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후작 각하, 우리가 보기에 국경선을 긋는 일을 더 담판할 필요가 없겠
소이다. 아무쪼록 그대는 돌아가서 공주에게 언제쯤 모스크바를 중국에
되돌려줄 것인지를 물어 보기나 하시오. 나 역시 북경으로 돌아가 소가
죽과 황금을 구입해서 정묘한 한 채의 황금 장막을 만들어서 크레믈린
궁을 헐어 버리고 황금 장막을 세워 소비아공주에게 청해 잠자러 오라
고 하겠소. 하하하!]
비요다라는 여기까지 듣자 그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 듯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장막 밖으로 달려나갔다. 곧이어 그가 우뢰와 같이 큰소리
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곧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몇 필
의 말이 일제히 달려왔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아이쿠! 저 털보가 싸움을 하려는 모양인데 우리는 이제 목숨을 건지
는 것이 중요하다.]
동국강은 오래 전부터 싸움에 임해 왔기 때문에 참을성이 많아 호통을
질렀다.
[위 공작 나리,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때 장막 밖에서 카자흐 기마병들이 일제히 큰소리를 내질렀다. 위소
보는 그만 깜짝 놀라서 전신을 바들바들 떨다가 고개를 숙이고 탁자 밑
으로 기어들어갔다. 동국강과 색액도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역시 놀
람과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천막의 휘장을 들추고 한 장수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는데 바로 등패수를 인솔하고 있는 임흥주였다. 그는 낭랑
히 외쳤다.
[대원수께 아룁니다·‥···]
그런데 대원수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위소보는 탁자 밑에서
말했다.
[나는······나는······나는 여기 있소. 모두들 빨리……빨
리 도망을 쳐 목숨을 건지도록 하시오.]
임흥주는 몸을 구부리고 탁자 밑에 있는 대원수에게 말했다.
[대원수께 알립니다. 나찰병의 기세가 흉흉합니다. 우리들은 결코 약하
게 보여서는 안 되니, 빌어먹을! 한바탕 해보지요.]
위소보는 그가 용감하게 말하는지라 가까스로 심신이 안정되는 것을 느
끼고 즉시 탁자 밑에서 기어나왔다. 조금 전에는 너무나 창졸간에 일어
난 일이라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게 되었지만 기실 그 역시 겁쟁이
는 아니었다. 그는 가슴을 치며 말했다.
[맞았소, 할 테면 해보라지. 빌어먹을! 내가 먼저 앞장을 서서 용감하
게 앞으로······앞으로 나가······나가지 않겠소, 아니지
용감하게 나가야 사내대장부인데……]
그는 용감하게 나가지 못하면 창피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는 임흥주
의 손올 잡고는 장막 밖으로 걸어나갔다. 장막 밖으로 나서자 이백육십
명이나 되는 카자흐 기마병들이 기다란 칼을 높이 쳐들고 준마에 올라
탄 채 장막을 에워싸고 거들먹거리고 있었으며 둥글게 원을 그리며 끊
임없이 말을 달렸다. 비요다라가 한마디 명령을 내리면 기마병들은 멀
리 달려가 이백여 장 밖에서 대열을 짓는데 스물여섯 명이 한 줄이 되
었다. 열을 지은 기마병들이 정렬하고 있다가 갑자기 소리 높여 고함을
내지르며 위소보 앞으로 즉시 달려왔다. 위소보는 부르짖었다.
[아이쿠!]
그는 장막 안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했으나 다시 생각했다.
(나찰귀들이 만약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장막 안으로 숨어 들어간다 해
도 일시 그들에게 잡혀 나오게 될 것이다. 얼굴에 흙칠을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는 전신을 바르르 떨고 얼굴은 흙빛이 되었으나 놀랍게도 우뚝 버티
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第134章. 기마병을 제압하는 기술
임흥주는 호통을 내질렀다.
[등패수들은 대원수를 보호하라! 이리 다가오라!]
이백육십 명의 등패수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옛!]
그들은 재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위소보와 대신들 앞에 섰다. 위소보는
신발 목에서 비수를 뽑아들며 생각했다.
(만약 나찰귀들이 정말 손을 쓰고자 한다면 모두들 한바탕 싸울 수밖에
없다.)
그는 서둘러 색액도 앞에 서며 부르짖었다.
[색형,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켜 드리리다.]
색액도는 문관이라 이미 혼이 나갈 정도로 놀라서 말했다.
[모두······형제만 믿겠소.]
이때 십여 줄의 카자흐 기병들이 급히 달려왔다. 그런데 청나라 군사와
의 거리가 오 장쯤 되는 곳에 밀어닥쳤을 때 앞장을 선 대장이 기다란
칼로 허공을 내리치며 호통을 내질렀다. 그러자 기마병들은 가슴을 내
밀고 말을 세웠다. 이백육십 필의 말들이 동시에 그자리에 멈춰 섰다.
그 대장이 다시 호통을 내지르자 기마병들은 가운데서부터 두 패로 나
누어지더니 백삼십 필의 말을 탄 기마병들은 꺾어져 북쪽으로 향하였고
백삼십 명의 다른 기마병들은 남쪽을 향해 수십 장 달려가더니 원을 그
리면서 다시 천막과 이백여 장쯤 떨어진 곳에 말을 세웠는데 그 대열이
전혀 흩어지지 않았다. 이백육십 필의 인마는 그야말로 한 사람이 한
필의 말을 탄 듯해서 평소에 훈련을 잘 받은 정규병임을 알 수 있었다.
비요다라는 껄껄 웃으며 소리 높여 외쳤다.
[공작 대인, 그대가 보기에 우리 나찰 군사가 어떻습니까?]
위소보는 그가 기마병들을 내세워 시위를 했다는 생각이 들자 노기가
치솟아 크게 부르짖었다.
[말 잔등에서 잔나비를 갖고 노는 짓과 다름이 없군요. 진짜 싸우게 되
었을 때는 아무런 소용도 없겠는걸?]
비요다라는 노해 부르짖었다.
[우리 다시 시작합시다!]
그는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너의 코앞까지 달려들겠다. 그때 네가 도망치지 않나 보
자.)
그는 외쳤다.
[중국 군사의 모자를 다 베어 떨어뜨리도록 해라!]
카자흐 기마병의 대장은 즉시 명령을 내렸고 이백육십 명의 병마는 다
시 질풍같이 달려들었다. 위소보도 부르짖었다.
[말의 다리를 베어라!]
임흥주는 부르짖었다.
[명을 받겠습니다. 말의 다리는 베되 사람은 해치지 마라.]
그런데 말발굽소리가 우뢰와 같이 일어나는 가운데 이백육십 필이나 되
는 말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카자흐 기마병들의 커다란 칼은 태양
아래 번쩍번쩍 빛을 발했고 곧이어 그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는데 여
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임흥주는 부르짖었다.
[곤당도(滾堂刀) 진격!]
이백육십 명의 등패수들은 앞으로 달려나가 땅바닥에서 몸을 데구르르
굴렸다. 이들은 모두 다 임흥주가 친히 가르쳐 길러낸 지당도(地堂刀)
의 고수들이었으며 신법이나 도법에 있어서 모두 다 익숙해 적 앞으로
데구루루 굴러갈 때 등패로 몸을 보호했으며 조금도 칼을 드러 내지 않
았다. 카자흐 기마병들은 갑자기 청나라 군사가 땅바닥을 데구르르 굴
러서 달려드는 것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 아극살 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등패수에게 고통을 당한 적이 있지만 그들 군사들은 죽은 사람은 죽고
포로가 된 사람은 포로가 되어 이미 전군이 멸망한 터였다. 이 일대의
카자흐 기병들은 모스크바에서 비요다라를 호송하여 동쪽으로 온 터라
등패수들이 싸우는 방법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
같이 땅바닥을 뒹군다는 것은 너무나 우둔한 노릇이며 말발굽에 짓밟혀
도 남을 탓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삽시간에 첫번째 줄의 기마병들이 등패수들과 부딪치게 되었다. 별안간
말들이 일제히 울부짖는 가운데 다투어 쓰러졌다. 등패수들은 예리한
무기를 휘둘러 단번에 한두 필 말의 발을 잘라 버리고 등패로 몸을 보
호한 채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다른 말들의 발을 베어 갔다. 나찰병들
이 고함을 질렀고 말들은 울부짖었는데 그 가운데 등패수들은 이미 열
줄의 기마병들 밑으로 굴러 나갔고 백팔십여 개나 되는 말의 다리를 자
른 이후 카자흐 기마병들의 진 뒤에서 대오를 지었다. 임흥주는 등패수
들을 이끌고 재빨리 돌아와 위소보 앞에 줄을 세웠다. 이백육십 명 가
운데 십여 명이 말발굽에 밟히거나 쓰러지는 바람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는 모두 가벼운 경상이었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억지
로 아픔을 참고 여전히 대오를 짓고 서 있었다. 이백육십 명이나 되는
카자흐 기병들은 태반이 말에서 떨어졌고 어떤 사람들은 쓰러져서 땅바
닥에 타고 있던 말에 눌려 신음소리와 고함을 내질렀다. 오로지 수십
명만이 말을 몰아 멀리 피했고 대부분은 땅바닥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
랐다. 이들 기마병들은 한평생 말 등에서만 자라 왔고 말 등에 탔을 때
만 용감무쌍하게 싸웠으므로 두 발이 땅에 닿기만 하면 그야말로 물고
기가 물 밖으로 나온 것처럼 의지할 데가 없어지고 마는 셈이었다. 위
소보는 부르짖었다.
[군사의 반을 나누어 나찰의 대관들을 둘러싸게!]
임흥주는 즉시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백 명의 등패수
들이 비요다라를 비롯 십여 명의 관원들을 에워쌌다. 그리고 백 자루나
되는 커다란 칼들이 하나의 칼로 이루어진 듯 테두리를 만들어서 칼날
이 안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만약 명령이 떨어지면 이 백 자루의 커다
란 칼은 일제히 밀고 들어갈 것이고 비요다라 등은 나찰의 피떡이 되고
말 것이다. 카자흐 기병의 정부대장은 이 모양을 보고 나는 듯 달려오
며 부르짖었다.
[사람을 찌르면 안 되오!]
위소보는 고개를 돌리고 친위병 복장을 하고 있는 쌍아에게 말했다.
[달려가서 그들의 혈도를 짚으시오!]
쌍아는 몸을 날려 달려나갔으며 나찰국 기병대 대장의 등뒤로 다가가서
손가락을 뻗쳐 그의 뒷허리의 혈도를 짚고 또다시 부대장의 혈도를 짚
었다. 그러자 한 명의 소대장이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한 자루의 단
총을 꺼내 부르짖었다.
[꼼짝 마라!]
쌍아는 옆에 있는 한 명의 나찰병을 잡아서 앞에 세우고 그를 앞으로
밀며 나아갔다. 그 소대장은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부르짖었다.
[꼼짝 마라!]
쌍아는 그 나찰병을 그에게 던졌다. 그 소대장은 놀라 몸을 날려 피하
려고 했다. 쌍아는 어느새 달려가서 그의 가슴팍과 허리에 있는 혈도를
짚고 손을 뻗쳐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단총을 낚아채서 두 손으로 쥐고
하늘을 향해 꽝, 하고 한 방을 쏘았다. 위소보는 큰소리로 말했다.
[잘한다. 쌍방에서 화기를 갖지 않기로 해놓고서 너희들 나찰귀들은 단
총을 지니고 있었으니 이거야말로 신의를 저버린 행동이다.]
그는 몇 걸음 다가서며 비요다라에게 말했다.
[이것 보시오! 그대는 수하인들에게 칼과 검을 던지고 모두 말에서 내
려 대오를 짓도록 하시오! 그리고 몸에 화기를 지닌 사람은 모두 꺼내
도록 하시오!]
비요다라는 항거할 수 없음을 알자 즉시 명령을 내렸다. 카자흐의 기마
병들은 칼과 검을 던지게 되었고 말에서 내려 대오를 지었다. 위소보는
이백육십 명의 등패수들로 하여금 사방에서 에워싸고 나찰병들의 몸을
수색하도록 했다. 이백육십 명의 몸에서 이백팔십여 자루나 되는 단총
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두 자루 씩 지니고 있었던 것이
다. 니포초 성 아래의 나찰병들은 이 같은 형세가 빚어지는 것을 보고
천천히 다가왔다. 동쪽의 청나라 군사들도 역시 원위치에서 앞으로 나
왔다. 두 나라 군사가 수백 걸음을 두고 진을 쳐 대립하게 되었다. 나
찰병들은 그들의 원수가 포위된 것을 보고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을
뿐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위소보는 비요다라에게 물었다.
[후작 대인, 그대는 어째서 이 화기들을 가지고 왔소?]
비요다라는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매우 미안하게 되었소. 호위병들이 명령을 듣지 않고 암암리에 화기롤
가지고 왔구려. 돌아가면 무거운 벌을 내리도록 하겠소.]
위소보는 부르짖었다.
[등패수, 스스로 옷을 들추어 그대들이 화기를 지니고 있는지 없는지
보여 주도록 해라!]
이백육십 명의 등패수들은 일제히 등패를 내려놓고 왼손으로 옷을 들췄
다. 그러나 오른손은 여전히 기다란 칼을 높이 쳐들어 상대편에서 이상
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경계했다. 여러 사람들은 옷자락을 풀어헤치
고 가슴을 드러낸 채 몇 번 뛰어 보였다. 아니나다를까 화기를 지닌 자
는 한 사람도 없었다. 비요다라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아무 소리도 하
지 못했다. 위소보는 나찰말로 고함을 질렀다.
[나찰 사람들은 매우 뻔뻔스럽구려. 그들의 옷과 바지도 벗겨 화기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보자꾸나!]
비요다라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공작 대인, 은혜를 베푸시오. 그대……그대가 만약 나의 바지를 벗긴
다면 나는……나는 자살할 수밖에 없소.]
[바지는 반드시 벗겨야 하오.]
[아무쪼록 한 번만 용서하시오. 다른 일은 모두 그대의 분부를 따르리
다.]
[조금 전 그대의 기마병들이 달려들 때 나는 깜짝 놀라 탁자 밑으로 기
어들어가 공작 대인의 체면을 깡그리 잃게 되었소. 이 일을 어떻게 한
단 말이오?]
비요다라는 생각했다.
(네 자신이 겁쟁이기 때문인데 내게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그러나 그의 옆에 청나라 군사들이 날이 번쩍번쩍 빛나는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부득이 말했다.
[폐인이 기꺼이 손실을 배상해 드리리다.]
위소보는 흐뭇해져서 생각했다.
(나를 뜯어잡수시오 하고 스스로 내미는 격이로구나!)
그러나 일시에 그에게 무엇으로 배상을 하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명령을 내렸다.
[나찰 대관과 병졸들의 허리띠를 모조리 자르게.]
등패수들은 크게 부르짖었다.
[영을 받들겠습니다.]
일제히 칼을 들어 나찰인의 허리에 끼우고 칼날을 바깥으로 해서 잡아
당기자 허리띠가 즉시 잘라졌다. 비요다라 이하 모든 나찰 사람들은 모
두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라 두 손으로 바지를 꼭 잡고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위소보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영을 내렸다.
[나찰 사람들을 압송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세.]
이때 나찰의 관병들이 모두 걱정하는 것은 바지가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을까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청나라 군사들이 미는 대로 조금도 저항
하지 않고 청나라 군사들을 따라 대오를 지어 동쪽으로 따라갔다. 동국
강은 웃었다.
[위 대원수의 묘기에 정말 탄복했소이다. 허리띠를 자른 것이 그야말로
삽시간에 이백육십 명이나 되는 나찰 관병들의 두 손을 모조리 뒤로 결
박한 것과 같은 결과를 낳았구려.]
위소보는 웃었다.
[나찰의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지를 벗기는 것입니다. 그러
나 나찰의 여인들은 정반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상한 노릇이 아닙니
까?]
동국강 등은 씩 웃었다.
위소보 일행과 청나라 대군은 회합하게 되었고, 청나라 군중에서는 사
백여 포의 대포를 밀어 내어 위에 덮어두었던 베 조각을 제거한 후 대
포 입구가 나찰군 쪽을 향하도록 했다. 나찰국의 화기는 예리했으나 동
쪽으로 오자 이번에 싸울 것에 대비해서 준비를 한 강희의 청나라 군사
에 미칠 수가 없었다. 강희는 전국을 통틀어 모든 대포의 반수를 니포
초 전선에 배치했기 때문에 병력이나 화력에 있어서 청나라 군사가 몇
배 더 강했다. 나찰군은 갑자기 많은 수의 대포를 보자 모두 서로의 얼
굴을 쳐다보며 두려운 빛을 드러냈다. 나찰군을 거느리는 장관은 급히
영을 내려 나찰 군사를 성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고 성문을 닫았다. 청
나라 군사 역시 성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때 카자흐 기병의 대장, 부대장과 한 명의 소대장이 쌍아에게 혈도를
짚혀 여전히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나무로 깎은 듯이 빈
터에 서 있었다. 나찰의 여러 병사들은 니포초 성으로 들어갈 때는 서
둘렀기 때문에 미처 알지 못했는데 성 위에서 이 세 사람을 내려다보고
하나같이 놀람과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두 감히 나서서
구하려고 하지는 못했다. 반 시진이 흘러도 세 사람이 여전히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대대의 카자흐 기병들이 성을 나와 구
원하려고 했으나 십여 장 달려나왔을 때 청나라 군사 측에서 몇 발의
대포를 쏘아 대는 것이 아닌가?
성을 지키는 대장은 재빨리 호각수들에게 명하여 후퇴의 신호를 정하도
록 하여 그 한 떼의 기마병들을 불러 가고 말았다. 청나라 군사가 우르
르 성문으로 몰려온다면 성을 나온 구원병마저도 청나라 군사에게 잡힐
까 두려웠던 것이다.
성 위와 성 아래에서 두 나라 군사들은 멀찍이 서서 세 사람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기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보고, 청나라 군사들은
손뼉을 치고 크게 소리내어 웃었으며 나찰병들은 모두 다 아연해 했다.
위소보는 비요다라 일행을 중군장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 손님과 주인으
로 나누어 앉게 했다. 위소보는 싱글벙글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비요다라는 노해 말했다.
[공작 대인, 그대는 나를 놀리려고 하지 마시오. 죽일 테면 어서 죽이
시오.]
위소보는 웃었다.
[나는 그대와 친구인데 어째서 그대를 죽인단 말이오? 우리는 국경선을
정하는 조건이나 담판합시다.]
그는 이때 상대방의 국경선을 의논하는 대신들이 이미 자기의 손아귀
안에 들어왔으니 자기가 어떤 조건을 제시한다 해도 상대방은 거절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했다. 한데 비요다라는 군인 출신으로 성격이 매우
굳건해서 가슴을 편 채 말했다.
[나는 그대의 포로이지 국경선을 담판하려는 사절은 아니오. 내가 그대
의 위협 하에 놓여 있으니 어떠한 조건도 논할 수 없소. 설사 논하게
되고 수결을 쓴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외다.]
위소보는 말했다.
[어째서 효럭이 없소?]
[모든 조건은 그대가 정할 것이니 무엇을 더 논하겠소? 그대는 나에게
그대와 담판하라고 핍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외다.]
[어째서 그대를 핍박하여 담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나는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가 칼을 휘둘러 나를 죽이든가
충을 쏘아 나를 죽이고 싶으면 얼마든지 손을 쓰도록 하시오.]
[만약에 내가 사람을 시켜 그대의 바지를 벗긴다면?]
비요다라는 크게 노해 벌떡 일어서며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는 어찌하여……]
그런데 그대라는 한 마디를 하였을 때 바지가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 급
히 손을 써서 잡아야 했다. 그의 허리띠가 이미 잘려 있었는데 의자에
앉자 손으로 잡을 필요가 없었고 그만 왈칵 화가 난 끝에 몸을 일으키
느라고 그 일을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늦지 않게 손
을 썼기 때문에 추악한 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중군
장의 청나라 대관들과 시종들은 모두 다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비요다
라는 화가 나서 안색이 창백해졌으며 두 손으로 허리춤을 잡고 서 있었
는데 그 표정이 난감했다. 비요다라는 한차례 강개하고도 격앙된 말을
하고 싶었으나 두 손을 마구 휘둘러 상황을 도을 수 없는 고충이 있었
다. 아무리 강개하고 격앙된 말을 하더라도 그 기세에는 반드시 한도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는 침을 뱉고 다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나찰국 사황 폐하의 흠차이니 그대들은 나를 모욕할 수 없소.]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는 안심하시오. 나는 그대를 모욕하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역시
국경선 정하는 것을 논하기로 합시다.]
비요다라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자기의 입을 막고 양쪽 끝을
머리 뒤쪽으로 돌려서 매듭을 지었다. 그 뜻은 아무리 말을 시켜도 담
판에 응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친위병들에게 맛좋은 술과
안주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으라고 하고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게 한
후 웃었다.
[자자, 드시오. 겸손해 할 것 없소!]
비요다라는 술과 안주의 향긋하고도 구수한 냄새를 맡자 손수건을 풀고
술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위소보는 웃었다.
[후작께서는 또 입을 사용하시게 되었소?]
비요다라는 술과 안주만 먹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의 입은 그저
먹고 마시는 데 쓸 뿐 다른 데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
었다. 위소보는 끊임없이 술을 권했다. 그를 취하게 하면 굴복시킬 수
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비요다라는 십여 잔의 술을 마시고
몇 조각의 쇠고기를 집어먹더니 다시 수건으로 자기의 입을 싸맸다. 위
소보는 이와 같은 광경을 우스꽝스럽게 여기고 친위병에게 명령하여 그
를 뒤에 있는 장막으로 안내하여 휴식하도록 하되 엄밀히 지켜보도록
지시했다. 위소보는 색액도, 동국강 등과 대책을 상의했다. 동국강은
말했다.
[그 사람이 그토록 굳건하니 결코 우리의 군중에서 평화희담을 하려고
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놓아준다는 것은 실로 아쉬운 감
이 없지 않소이다.]
색액도는 말했다.
[그를 여드레고 열흘이고 감금하여 매일같이 그의 앞에서 나찰귀들을
때려잡는다면 그가 버티겠소?]
동국강은 말했다.
[만약 그를 다그치다 죽이게 된다면 이번 일을 크게 그르치게 하는 것
이외다. 우리가 무력으로 상대방의 국경선을 정하고 평화회담을 위해서
보낸 대신들을 포로로 했다면 황상께서는 반드시 죄를 물으실 것이오.]
색액도도 찬성했다.
[동공 나리의 말씀도 옳습니다. 그를 상대로 강경한 수단을 쓴다는 것
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대신들은 한참 동안 상의했으나 별다른 뾰족한 방책이 없었다. 오늘은
비요다라를 잡아와 비록 승전을 거두었다고는 할 수 있었으나 그것은
결코 화친을 하자는 황상의 본뜻이 아니니, 그야말로 이미 조정의 커다
란 계책을 어긴 셈이라 잘못 처리했다가는 성지를 어겼다는 중한 죄를
뒤집어쓸 상황이었다. 나중에 이르러서 대신들은 하나같이 위소보에게
비요다라를 석방하도록 권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좋소. 우리는 그를 하룻밤 억류했다가 내일 아침 놔주도록 합시다.]
그는 자기 침실인 장막으로 되돌아와 서성거리며 방책을 강구했다. 그
때 갑자기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먼젓번엔 제갈양이 불로 반사곡을 태우는 방법으로 아극살에서 대승리
를 거둘 수 있었다. 이번에 나는 다시 주유가 군영희에서 장간(莊幹)을
우롱하던 방법을 씨보자.)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위소보는 어느 정도 계책을 세울 수 있었다. 중
군장으로 돌아와 통역을 맡은 하란 선교사를 불러 한동안 그와 은밀히
계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이십여 마디의 나찰말을 가르쳐
정확하고 틀림없이 외우도록 했다. 그리고 난 후 네명의 장수와 친위병
의 대장을 불러와서 이러이러하라고 분부했다. 사람들은 명을 받고 나
갔다. 비요다라는 뒤쪽 장막에서 잠을 청하였는데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고 한편으로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으며, 한편
으로는 후회되기도 했고 한스럽기도 해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야밤이 되었을 때 갑자기 장막 입구 쪽에서 우뢰
와 같이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감시하던 세 명의 친위병이 놀랍게도
잠이 든 것이었다. 비요다라는 생각했다.
(만약에 중국 오랑캐의 조건에 응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곳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약 내일 그 꼬마가 성질을 부려 나를 죽이도록 만
든다면 그야말로 억울한 죽음이 아니겠는가! 다행히 이 친위병들이 잠
들었으니 이때 도망치는 모험을 하지 않고 무얼 하겠는가?)
그는 발걸음소리를 죽이며 침대 위에서 일어나 비스듬히 등에 걸치고
있던 혁대를 풀어서 허리에 감아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한 후 가만
가만 장막 입구로 다가갔다. 그리고 보니 친위병들은 장막의 기둥에 기
댄 채 매우 곤하게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손을 뻗쳐 한 명의
친위병 허리를 더듬어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뽑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친위병이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비요다라는 깜짝 놀라 급히 손을 멈추
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동정이 보이지 않자 그는 다시 다른 한
명의 친위병이 차고 있는 칼을 뽑으려고 했다. 그때 그 친위병 역시 갑
자기 기지개를 켜며 잠꼬대를 해대는 것이 아닌가? 비요다라는 더 지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살그머니 휘장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장막
밖으로 나가자 그늘진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이러저리 살펴보니
밖에 친위병들이 손에 등롱을 들고 칼을 든 채 순라를 돌고 있는데 북
쪽과 동쪽, 남쪽에는 순라를 도는 병졸이 있었으나 서쪽만은 어둠침침
한 것이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한걸음 두걸음 서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순라를 도는 병
졸이 가까이 다가오면 장막 뒤에 몸을 숨기곤 했다. 다행히 줄곧 서쪽
으로 나가는데 아무런 일도 없었다. 막 한 채의 커다란 장막을 지나게
되었을 때 갑자기 서쪽에서 한 떼의 순라병들이 걸어왔다. 비요다라는
재빨리 장막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이때 장막 안에서 소리가 들렸
는데 바로 나찰말이 아닌가! 그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대인께서 모스크바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면 공격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만 길이 너무 멀어서 매우 위험합니다.]
비요다라는 깜짝 놀라 즉시 몸을 엎드려서 장막의 아래를 젖히고 안을
들여다보고는 그만 가슴이 크게 두근거리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장
막 안에는 등불이 대낮처럼 휘황하게 밝혀져 있었으며 위소보는 전신에
대원수의 옷차림을 한 채 한복판에 앉아 있었고 양쪽에는 십여 명이나
되는 대장수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장막의 아래 쪽에 수십 명의 친위
병이 손에 큰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위소보의 탁자 옆에는 바로 통역을
하던 그 하란의 선교사가 서서 위소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위소
보는 나찰말로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서 비요다라와 술을 마시며 한두 달 지껄이는 것은 모두
가 가짜요. 그 동안 대군은 몰래 서쪽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오. 나찰
공주는 수시로 비요다라의 엉터리 보고를 접하게 될 것이고 물론 그 내
용은 우리와 담판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오. 그러면 그녀는 아무것도 두
려워하지 않고 매일같이 사랑하는 사람과 춤을 추고 잠을 잘 것이오.
이때 중국의 대군이 별안간 모스크바 성 아래에 도달하여 공격을 해서
두 사황과 소비아 공주를 잡아 버린단 말이오. 그러면 나찰 사람은 엎
드려서 울부짖으며 우리에게 투항할 것이오.]
그 하란의 선교사는 말했다.
[저는 군을 통솔하여 전쟁하는 일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나찰사람들과
한편으로 평화회담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사를 내보내 그들의 경성을
암습한다는 것은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천주님은 우리에게
속임수를 쓰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소이다.]
[하하하! 나찰 사람들이 먼저 사람을 속었소. 쌍방의 호위병들이 화기
를 지니지 않도록 하자고 해놓고 그들이 먼저 총을 감추었소. 그들이
속였으니 우리도 속이는 것이오. 그가 나를 한 번 물면 나는 그를 두
번 물 것이오.]
선교사는 잠시 후에 다시 말했다.
[바라옵건대 공작대인께서는 역시 싸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나
라가 싸움을 일으킨다면 죽는 것은 모두 천주님의 아들로······]
위소보는 손을 내저었다.
[더 말하지 마시오. 나는 보살을 믿지, 천주님은 믿지 않소. 그 비요다
라가 만약 공평하게 담판을 하고 중국이 좀더 넓은 땅을 차지하도록 한
다면 평화회담을 할 수가 있소. 그러나 그는 한 마장의 땅도 양보하려
고 하지 않소. 우리가 모스크바를 공격하여 점령한다면 나찰의 남자들
은 천당에 오르게 될 것이고 여자들은 중국 사람의 마누라가 될 것이
오.]
비요다라는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말이라 속으로 생각했다.
(중국의 오랑캐는 정말 대담하구나.)
이때 위소보가 다시 말했다.
[나는 오늘 한 명의 친위병을 보내 세 명의 카자흐 기병 대장의 몸을
손가락으로 몇 번 찌르도록 했소. 이 세 명의 대장은 꼼짝하지 못했는
데 그대는 보았소?]
[저는 보았습니다. 그건 어떤 마술인데 그토록 이상야릇합니까?]
위소보는 말했다.
[중국 마술이오. 징기스칸이 전수한 것이오. 징기스칸이 이 방법으로
나찰 사람을 공격하여 땅에 엎드려 투항토록 했소. 나는 이 방법을 사
용해서 그들을 치겠소. 나찰국은 다시 죽게 될 것이오.]
비요다라는 생각했다.
(과거 몽고인은 이만 명의 인마로 흉아리까지 공격했으며 천하에서 그
들을 당할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아무래도 그들은 반드시
마술을 지니고 있었을 것 같다. 동방의 사람들은 이상야릇하기 짝이 없
고 그들은 또한 마술을 쓸 줄 아니 이걸······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때 그 선교사가 말했다.
[나찰 사람들이 멀리서 총을 쏜다면 그대들의 마술은 쓸모가 없게 되
오.]
위소보는 웃었다.
[그렇소.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반드시 이곳에서 담판을 하는 듯 가
장하고 군대는 모스크바를 치는데 그들은 도적들처럼 몰래 성으로 들어
가는 것이오. 나는 모스크바에 가보았는데 그곳에는 타타르 사람들이
무척 많았소. 우리의 군대는 타타르의 양떼를 치는 사람들처럼 가장해
서 성 안으로 숨어 들어가면 나찰의 수비군은 절대 발견할 수 없을 것
이오.]
비요다라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생각
했다.
(이 중국 꼬마가 만들어 낸 계책은 정말 무섭기 짝이 없다. 중국의 군
사들이 타타르의 양치기로 가장하고 우리 경성으로 숨어 들어가 마술을
펼친다면 우리 나찰인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는 쌍아의 점혈수법이 일문의 고심한 무공으로써 반드시 내공이 상승
의 경지에 이르도록 연마한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청나라 군사들이 수만 명이 되었으나 점혈수법을 아는 사람은 그녀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비요다라는 이 마술을
모든 사람들이 쓸 줄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와 같이 손가락으로
건드리기만 한다면 상대방은 꼼짝할 수 없게 될 것인즉 수만이나 되는
중국 군사들이 이 방법으로 모스크바를 함락한다면 나찰은 아무래도 멸
망하고 멸종되리라고 생각했다. 이때 그 선교사가 말했다.
[공작대인이 만약 이만의 중국군을 모스크바로 잠입시켜 징기스칸이 전
해 준 마술로 나찰군을 제압한다면 두 사황과 섭정 여왕을 포로로 잡는
것은 정말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하지만 이 일은 반드시 비밀에 붙
여야 하며 대군이 서쪽으로 나갈 때 나찰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아야
합니다. 공작대인, 오늘 나찰군은 매우 강대하여 과거 징기스칸과 싸움
을 벌이던 나찰 사람들과는 크게 다르답니다.]
[나는 모스크바에 가본 적이 있어 나찰국의 사정을 똑똑히 알고 있소.
내일 아침 일찍 비요다라를 놓아 보낸 다음 그와 담판을 할 것인데 모
두 가짜라서 그는 응낙하려 하지 않을 것이오. 우리가 이 곳에서 하루
더 담판을 하게 된다면 중국 대군은 하루의 노정만큼 모스크바와 더 가
까워지는 것이오.]
[예, 예. 대인께서는 모든 점에서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이 일은 매우
위험합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알았소. 그대는 말을 내지 않도록 하시오. 비요다라 등에게 의심을 일
으켜서는 안 되오.]
第135章. 해괴망측한 서명
위소보는 호통을 내질렀다.
[왕팔사계와 자라유부를 불러라!]
친외병이 화백사기와 제락낙부를 데리고 들어왔다. 위소보는 두 사람에
게 말했다.
[내일 나는 관병들을 모스크바로 보내오. 예물은 많고 많소. 소비아 공
주에게 드리는 것이오. 가는 길엔 도적들이 많을 것이니 많은 관병을
파견하여 호위토록 하려는 것이오.]
화백사기는 말했다.
[이곳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는 하찮은 무리의 달탄 강도들 밖에 없
고 게다가 그다지 흉악하지도 못하니 공작대인께선 안심하십시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는 모르오. 타타르의 강도들은 팔, 구천 명이 한떼를 이루기도 하
고 이만 명이나 삼만 명이 때를 짓기도 하오.]
화백사기와 제락낙부는 서로 한번 쳐다보았으나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
는 표정을 지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나의 군사들은 남북 두 길을 따라 모스크바로 가게 될 것이오. 왕팔사
계는 북쪽 길을 안내하고 자라유부는 남쪽 길을 안내토록 하시오. 두
길은 어떻소?]
화백사기는 말했다.
[북쪽 길로 가게 된다면 이곳에서 서쪽으로 적탑(赤塔)에 이르러야 하
고 조사조덕(,島斯島德)을 경과하여 패가이(貝加爾) 호수의 남쪽을 지
나 서쪽으로 탁목사극(托木斯克), 악목사극(鄂木斯克) 등의 성을 지나
모스크바에 이르게 되죠.]
제락낙부는 말했다.
[남쪽 길도 처음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패가이 호수를 지나서 길이 갈
라지게 되죠. 서남쪽으로 합살극(哈薩克)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지
나 줄곧 서쪽으로 나가다가 오사극(奧斯克)과 오랍이사극(烏拉爾斯克)
등을 지나 모스크바에 이르게 됩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그렇게 가는 것이오. 나의 예물과 편지는 중국 사자가 공주에
게 전할 것이니 그대들 두 사람은 길을 안내하도록 하시오. 안내를 잘
하면 많은 상을 내릴 것이오. 그러나 잘못하면 군사를 거느린 중국 장
군이 그대들의 머리를 잘라 낼 것이오. 물러가도록 하시오.]
두 명의 나찰대장이 물러간 뒤 위소보는 중국의 장수들을 불러다가 명
령을 내렸다. 비요다라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
다. 그러나 영을 받는 모든 중국의 대장수들이 하나같이 비분강개하는
표정에 가슴을 치고 주먹을 쥐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해를
두고 맹세하는 것을 보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대성공을 하겠다고 대원
수에게 장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손가락을
자기의 목에 뻗쳐 자르는 시늉을 했고 어떤 사람들은 비수를 뽑아 자기
가슴팍을 찌르는 시늉을 했으며 입 속으로는 끊임없이 부르짖고 있었
다.
[모스크바! 모스크바!]
이로써 비요다라는 만약 모스크바를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장수들이 자
살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임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위소보가
뭐라고 다시 한바탕 말을 하자 곧바로 네 명의 친위병이 탁자 위에서
한 장의 커다란 지도를 쳐들었는데 공교롭게도 비요다라의 맞은편이었
다. 이때 위소보는 손가락으로 니포초 성을 짚고 한 줄기 붉고 굵은 선
을 따라 서쪽으로 움직여 가 곧장 붉은 색으로 원을 그려 놓은 곳을 가
리켰다. 비요다라는 원 위의 중국 글자를 알아보지는 못했으나 위치로
보아 그 원이 모스크바임을 알 수 있었다. 위소보는 다시 한바탕 말을
하고 손가락으로 다시 다른 선을 따라 모스크바를 가리켰다. 비요다라
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들 중국 오랑캐들은 정말 고약하다. 원래 그들은 벌써부터 계책을
써서 모스크바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
위소보는 다시 한동안 무슨 말을 하면서 비요다라라는 이름을 계속 들
먹였는데 장수들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소리내어 웃었다. 비요다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들은 필경 나더러 바보 멍청이라 하면서 웃고 있겠지? 그리고 나
를 속여서 국경선을 정한다는 담판으로 시일을 끌어 모스크바를 기습공
격하겠지? 흥! 나는 절대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비요다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천주님께서 보호해 주셔서 나로 하여금 중국 어린애의 이와 같은 간계
를 발견토록 하셨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 아라사 제국은 천주님의
돌보심으로 틀림없이 국운이 융성하게 될 것이다. 어찌됐든 그는 나를
석방해 준다니 오늘 밤에 모험을 하듯 도망칠 필요는 없다.)
서쪽의 순라를 도는 군사들은 끊임없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동쪽은
어둠침침한 데다가 사람도 없었다. 그는 살그머니 되돌아갔다. 다행히
청나라 군사는 발견하지 못했다. 자기의 장막 밖에 이르게 되었을 때
간수를 보던 세 명의 호위병은 여전히 잠들어 있어서 그는 장막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이튿날 아침 비요다라는 아침밥을 먹은 뒤 친위병
을 따라 중군장으로 갔다. 위소보는 웃으며 물었다.
[후작 대인, 어젯밤은 잘 주무셨소?]
비요다라는 흥, 하고 말했다.
[그대의 호위병이 알뜰하게 보호해 주는 바람에 나는 물론 잠을 잘 잤
소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오늘 그대는 다시 성을 내지 않으시겠지? 우리 국경선을 정하는 조건
을 이야기해봄이 어떻소?]
비요다라는 대답하지 않고 몸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시 입을 싸맸다. 위
소보는 크게 노해서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가 이처럼 뻣뻣하게 나오니 내 즉시 그대를 죽이겠소!]
비요다라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오늘 나를 놓아줄 작정 아니냐? 그와 같이 우락부락한 표정을 짓
는다고 내가 너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
위소보는 잠시 성질을 부렸으나 시종 그가 굴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어
찌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좋소. 그대가 이토록 용감하니 그대에게 탄복했소. 그대를 석방해 드
리리다. 나가서 푹 쉬도록 하시오. 열흘 이후 우리 다시 다른 곳을 찾
아 국경선을 정하는 담판을 짓도록 합시다.]
비요다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대는 죽어라 하고 담판을 끌고 있는데 지금쯤 아마도 모스크바로 출
정할 군대는 출발을 했겠지. 나는 결코 너의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
는다.)
[그대가 나를 놓아준다는 것은 무척 고마운 일이오. 우리들의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 오후에 담판을 시작하되 열흘 이후까지 끌
필요가 없다고 건의하는 바요.]
위소보는 웃었다.
[이 일은 서두를 것이 없소. 모두들 쉬어 가면서 천천히 담판하는 것이
좋겠소.]
[두 나라의 군주는 담판이 일찍 성사되기를 바라고 있소. 그러니 나는
역시 국경선에 관한 조약을 먼저 체결한 이후 그때 쉬어도 늦지 않을
것 같소.]
[우리 황상께서는 그렇게 서두르지 않으시오. 그러나 그대가 원한다면
오 일 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비요다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체할 것 없이 오늘 이야기합시다.]
[그렇다면 사흘 후에 합시다.]
[아니오. 오늘 합시다.]
[그럼 내일이 어떻소?]
[오늘 합시다.]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대가 이토록 굳건하게 나오니 내가 양보할 수밖에 없구려. 하지만
내 충고하는데 본격적으로 국경선을 정하는 일을 놓고 담판을 할 때 나
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을 것이오.]
비요다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국경선을 정하는 데 한 치까지 자세히 논한다면 이야기가 끝날 때쯤엔
너희들은 이미 모스크바를 공격해 들어갈 것이다. 너는 내가 정말로 바
보 멍청이인 줄로 아느냐?)
그는 즉시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이만 실례하겠소이다. 공작 대인의 술과 음식에는 정말 감사
드리오.]
위소보는 그를 장막 입구까지 전송했다. 그리고 일대의 등패수는 비요
다라를 호송하여 니포초 성으로 들어가게 했으나 이백육십 명의 카자흐
기병은 석방하지 않았다. 비요다라는 장막에서 나오자 어제 군영을 세
웠던 곳이 이미 텅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대대의 청나라 군사가 이미
막사를 거두고 떠나간 것을 알았다. 그는 속으로 놀랐다.
(중국 오랑캐는 정말 한다면 하는 사람들로서 놀랍기 이를 데 없구나.)
일행들이 어제 희담한 장막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 세 명의 카자흐 대
장들은 멍청히 그곳에 서 있었는데 여전히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꼼짝
도 하지 않았다. 청나라군 가운데서 비쩍 마르고 키가 작은 군관 한 명
이 달려나오더니 세 명의 카자흐 대장 앞에 서서 큰소리로 주문을 부르
짖었다.
[징기스칸! 징기스칸!]
그리고 다가가서 세 사람의 몸을 몇 번 후려치고 문질렀다. 그때서야
세 명의 대장은 천천히 움직일 수 있었는데 하룻밤과 반나절을 서 있었
던 터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두 발은 마비되어 있어서 일제히 땅바
닥에 주저앉았다. 여섯 명의 등패수들이 앞으로 나가 부축하고 그렇게
십여 장쯤을 걷고 나자 세 명의 대장은 겨우 걸음을 옮겨 놓을 정도가
되었다. 비요다라는 더욱 크게 놀랐다.
(징기스칸이 전한 마술은 정말 무섭기 짝이 없구나! 그가 천하를 주름
잡고 아무도 대적할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행히 이제
화기를 발명했기에 적으로 하여금 가까이 다가들지 못하도록 할 수 있
다. 그렇지 않았을 때 중국의 이교도들은 다시 또 전 세계를 통치하게
될 것이며 우리 천주님을 믿는 정교도(正敎徒)들은 모두 다 노예로 전
락하고 말 것이다.)
청군의 등패수들은 비요다라를 니포초 동문 앞까지 전송한 이후에야 돌
아갔다. 비요다라는 세 명의 카자흐 대장들에게 마술이 걸리게 된 사정
을 물었다. 대장의 말은 그 당시 그저 등심과 허리께가 마비되면서 전
신을 움직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비요다라는 물었다.
[그대들, 몸에 십자가를 지니고 있는가?]
세 명의 대장은 옷자락을 헤치고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를 보여주었는
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의 성상(聖像)을 더 걸고 있었다. 비요다
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징기스칸의 마법은 정말 무서워 예수 기독(基督)의 십자가마저도 그
악한 기운을 물리칠 수 없는 모양이로구나!)
그는 석 장의 상주문을 써서 열다섯 명의 기마병들로 하여금 세갈래 길
로 나누어 모스크바로 달려가 급함을 알리고자 했다. 그 내용은 물론
중국의 군사가 이미 암습을 하기 위해서 출발을 했으며 모두 다 타타르
의 목동으로 변장하고 경성으로 잠입하려고 하니 반드시 미리 방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오 무렵에 세 갈래로 상주문을 가지고 떠났던 기
병들은 성으로 되돌아와서 서쪽으로 가는 도로가 이미 중국의 군병들에
게 차단되었으며 멀리서 나찰 기병들을 보고 활을 쏴 실로 통과하기 어
렵더라고 전했다. 비요다라는 속으로 여간 걱정이 되지 않아 초조하게
생각했다.
(오로지 빨리 중국의 오랑캐와 국경선을 정하는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구나!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병마를 철수시킬 것이다!)
미시쯤 되었을 때 비요다라는 십여 명의 수행원들을 이끌고 두 나라가
회담을 하고 있는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그는 나찰국 기병들을
데려가지 않아 다른 뜻이 없음을 표시했다. 더군다나 호위대를 거느린
다 하더라도 중국병의 징기스칸 마술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역시 쓸
모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비요다라는 학식이 넓고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훌륭하여 결코 쉽게 기
만당할 사람이 아니었으나 나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징기스칸에 대한
두려움이 뿌리깊었다. 더욱이 매우 정묘한 쌍아의 점혈수법을 친히 보
게 된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먼저 장막 안에
이르러 기다리자 다음에 위소보, 색액도, 동국강 등 청나라 대신들이
차례로 도달하였다. 위소보는 상대방이 호위병도 거느리지 않은 것을
보고 호위를 하고자 하는 등패수들에게 물러가도록 명령했다. 쌍방은
몇 마디 인사치레의 말을 하고 어제 일은 전혀 들먹이지 않은 채 국경
선을 정하는 담판을 시작하였다. 비요다라는 그저 한시 바삐 일이 성사
되기를 바라고 있어서 매사에 양보했다. 어제의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위소보는 속으로 웃으며 어젯밤 주유가 군영회에서 장간을 우롱한 계책
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국경선을 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어 즉시 색액도를 내세워 선교사로 하여금
통역을 하도록 한 후 상대방과 상의해 조약을 정하도록 했다. 색액도와
비요다라 두 사람은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커다란 지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색액도의 손가락은 끊임없이 북쪽을 가리켰다. 비요다라
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할 수 없이 그도 북쪽을 짚어 보였다. 그야말로
비요다라의 손은 한치 한치 밀려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에서
북쪽으로 한 치쯤 양보하는 것은 실제로는 백여 리나 되는 땅들이 중국
에 귀속된다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잠시 그들이 하는 수작을 보고 있다
가 답답한 생각이들어 다른 탁자 곁으로 자리를 옮기고 시종으로 하여
금 식합을 꺼내게 해 바구니를 들고 앉아 천천히 간식용 음식을 씹으며
콧노래로 십팔막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비요다라는 양보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고 색액도는 혹시 일에 무슨 변
고가 생길까 봐 너무 심하게 다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조약의 글 내용
은 매우 엄했으며 쌍방의 선교사가 일일이 라틴어로 번역하고 되풀이해
서 상의하느라고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렀다. 그리하여 나흘째 되는 날
해질 무렵, 니포초 조약(네르친스크 조약) 조문 육 조가 모조리 타결되
었다.
위소보는 색액도와 동국강의 설명으로 조약의 내용은 중국에 매우 유리
하고 중국에게 떼어주는 토지가 지극히 넓어 강희가 유시로 지정한 것
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약은 모두 네 통으로 나뉘어 있
어서 중국문이 한 통, 나찰문이 한 통, 라틴문이 두 통이었다. 그리고
쌍방의 문자에 그 뜻이 상부하지 않은 대목이 있다면 라틴문을 표준으
로 삼기로 했다. 즉시 시종은 먹을 갈아서 붓을 먹물에 듬뿍 찍어서 삼
가 중국수석 흠차대신에게 조인을 하도록 청했다.
위소보는 자기 이름 석 자는 알아보았다. 그러나 때로는 장(章)
자를 위(韋) 자로 보았으며 매(賣) 자를 보(寶)로 잘못 알곤 했다. 세
자가 한데 나열되어 있으면 착오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글에 있어
서는 작을 소(小) 자만 간신히 쓸 수 있었을 뿐이고 나머지의 첫글자와
뒤의 한 글자는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그는 한평생 얼굴이 두꺼웠으
나 이때만은 약간 발그레한 빛이 되었으니 이것은 노기를 품은 것도 아
니고 술을 먹은 탓도 아니다. 어느 정도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꼈기 때
문이었다. 색액도는 그의 지기인지라 말했다.
[이와 같이 조약을 맺는 문자에는 그저 수결을 써 넣기만 하면 되오.
위 대인께선 아무렇게라도 소 자를 쓰면 그것으로 조인을 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속으로 소 자를 쓰는 것쯤은 자기의 특기라고
생각하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 왼쪽에 크게 둥근 것을 하나 그리고 오
른쪽에도 둥근 것을 하나 그렸다. 그리고는 중간에 막대기와 같은 것을
곧장 내려그었다.(조약상의 위소보 서명은 이상하여 분별할 수 없다.
후세의 사가들은 그저 색액도와 비요다라의 수결을 알아볼 수 있을 뿐
이었고 고고학자로서 곽말약(孰末若) 같은 사람들은 그저 갑골문자만
알아보았지 니포초 조약에 조인된 소 자를 알지 못해 위소보의 대명이
파묻히고 말았다. 후세의 기록에서는 니포초 조약에 조인한 사람이 색
액도와 비요다라라고 했다. 고왕금래로 이 세상에 위소보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녹정기의 독자들뿐이다. 본서에서
기술한 니포초 조약의 조인과 내용은 역사책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역사의 기재에 근거한 것이다.)
색액도는 미소를 지었다.
[되었소! 무척 잘 쓰셨소이다!]
위소보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기가 쓴 소 자를 감상하다가 갑자기 큰소
리로 웃었다. 색액도는 이상해서 물었다.
[위 대원수께서는 뭐가 그리 우습소?]
위소보는 웃었다.
[이 글자를 좀 보시오! 한 마리의 참새에 두 개의 알이 달린 격이라 바
로 남자의 그것처럼 생기지 않았소이까?]
청나라 쪽 대신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껄껄 소리내어 웃었고 시종들과
친위병들까지도 웃음소리를 냈다. 비요다라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
보았으나 그 사람들이 어째서 웃는지를 알지 못했다. 즉시 위소보는 네
통의 조약에 모두 글자를 그려 넣었다. 나찰문의 그 조약에는 중간의
내려긋는 것을 더욱 굵직하게 그었다. 그런후 비요다라, 색액도, 그리
고 아라사 방면의 부사 등이 서명을 했다. 중국과 아라사 사이의 첫번
째 조약은 이로써 조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중국이 외국과 맺은
첫번째의 조약이었다. 강희가 계획을 상세히 세우고 심혈을 기울였으며
거기다가 파견한 사람 또한 매우 힘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니포초 조약
에서 국경을 정함에 있어서 중국은 크게 득을 보았다. 조약 가운데 규
정은 북쪽은 외흥안령(外興安嶺))을 경계로 삼았는데 지금 소련의 아목
이성(阿穆爾省)과 빈해성(濱海省)의 모든 땅이 모조리 중국에 속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쪽과 동남쪽 등 바다에 이르는 곳까지 중국
땅으로 되어 있었다.
쌍방이 국경선을 결정하기 전 그 지역은 어느 나라에도 귀속되지 않고
있었으며 이번에 중국이 차지한 땅도 나찰에 소속된 것이 아니었다. 그
러나 나찰은 이미 그곳에다 성을 쌓고 백성들을 살도록 했는데 조약이
맺어진 이후 강제로 철수시키도록 했으니 이는 실로 중국의 군사와 외
교상의 승리라 할 수 있었다. 조약에서 중국의 땅으로 귀속된 총면적은
이백만 평방 킬로미터에 달했으며 중국 동북의 각 성과 비교한다 하더
라도 배 남짓 큰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조약의 수립으로
중국 동북 변경은 백오십여 년간의 안녕을 누리게 되었고 나찰국의 동
쪽 침략은 저지를 받게 되어 침략의 야심도 약간 수그러지게 되었다.
그러나 강희와 옹정(雍正) 건륭(乾降)의 대를 지난 이후 청나라는 외국
과 조약을 맺으면서 하나같이 그 권리를 상실하고 땅을 잃게 되어 강희
와 위소보가 과거 국위를 크게 떨친 웅풍(雄風)은 다시 후세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당시 습관에 의하면 쌍방이 동시에 대포를 쏘아 하늘에 맹세코 신의를
지키되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표시를 해야 했다. 그리하여 청나라 쪽
에서는 대포 사백여 문을 니포초 성 동서남북 사방에서 일시에 울려퍼
지게 만들어 그야말로 온 대지가 진동했다. 그런데 아라사군에는 겨우
이십여 대의 대포밖에 없어 포소리기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그 어느 쪽
이 강하고 약한가 하는 것은 비교할 수 조차 없었다. 비요다라는 속으
로 요행이라고 생각했으며 만약 평화희담을 이루지 못하고 싸움을 하였
더라도 아라사는 반드시 패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즉시 두 나라 사신
은 서로 예물을 주고받았다. 비요다라가 위소보 등에게 준 것은 시계,
천리경(干里鏡), 은기(銀器), 초피(貂皮), 칼, 검 등의 물건이었다. 위
소보가 상대방 사절들에게 준 것은 말안장, 비단 옷, 비단 등의 물건이
었고 그 외에 이백육십 명의 카자흐 기병들에게 은자 이십냥을 주어 청
나라 군사에게 바지띠가 잘려진 데 대한 보상을 해주었다.
이날 밤 크게 연회석을 열어 조약을 조인한 것을 경하했다. 비요다라는
모스크바를 기습하기로 한 청나라 군사를 즉시 위소보가 불러들였는지
여전히 걱정이 되어 끊임없이 시찰하듯 물어 보곤 했으나 위소보는 그
저 모르는 척했다. 이틀이 지난 뒤 비요다라는 대대의 청나라 군사가
서쪽에서 되돌아온다는 전갈을 받고 성 머리에 나가 천리경으로 바라보
았다. 아니나다를까 대대의 청나라 군사가 서쪽에서 돌아와 니포초 내
를 건너 그 동쪽 언덕에 막사를 치고 주둔했다. 비요다라는 크게 기뻐
했으며 서쪽으로 침범한 청나라 군사가 되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대대의 청나라 군사가 니포초 서쪽 이백 리 밖에 주둔하여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가 포소리를 듣고 즉시 막사를 뽑아 천천히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뒤 석공이 국경선에 세울 비석들을 조각해 왔다. 그 비석
에는 만(滿), 한(漢), 몽(蒙), 라틴 및 나찰의 다섯 가지 문자가 씌어
있었다. 이 비석 즉 경계비(境界碑)는 나누어 격이필제하(格爾必齊河)
동쪽 언덕과 액이고납하(額爾古納河) 남쪽 언덕, 그리고 동북 저쪽에
있는 위이극아림대산(威伊克阿林大山) 각처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두
나라가 격이필제하를 경계로 하여서 이 내의 상류쪽 불모지와 대흥안
(大典安)령에서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산과 남쪽 일대의 흑룡강으로 들
어가는 개울과 냇물은 모조리 중국 땅에 속하며 산의 북쪽 일대의 개울
과 냇물은 모조리 아라사에 속한다고 설명되어 있있다. 그리고 다시 흑
룡강으로 들어가는 액이고납하를 경계로 하여 그 냇물의 남쪽은 중국에
속하고 그 냇물의 북쪽 언덕은 아라사에 속한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그
리고 그 남쪽 언덕의 미륵이객하(眉勒爾客河) 입구의 모든 아라사 집들
은 북쪽 언덕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아
극살에 거주하는 아라사의 백성들은 모조리 찰한한(蔡罕汗)이라는 곳으
로 철수시키고, 또 사냥꾼들은 국경선을 넘어가지 못하며 만약 떼를 지
어, 무기를 지니고 사냥을 하거나 사람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하는 자는
즉시 잡아서 올바른 법에 의해 처단하며 이 조그만 일로써 중국과 아라
사 두 나라의 화평을 깨뜨려 싸움의 발단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설명이
었다.
두 나라의 흠차는 부하들을 파견해 지형을 탐사하여 잘못이 없다는 것
을 확인한 이후에야 경계비를 세웠다. 이 경계비가 서는 곳은 본래 중
국과 아라사 두 나라가 일만년의 세월이 흐른다 해도 옮길 수 없는 국
경선이 되어야 하겠지만 일백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다음 아라사
는 중국의 국세(國勢)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국경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침입하여 과거에 정해 놓은 국경선을 돌보지 않고 중국의 커다란 비옥
한 땅을 집어삼켰다. 후세 사람들은 이 대목의 역사를 읽을 때 한숨을
쉬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하면 강희와 위소보 같은 사람을 다시 세워 낭자야심(狼子野
心)한 나찰 사람들을 내쫓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을 수 있을까?]
경계비를 세우는 일이 끝나자 두 사람의 흠차는 절을 하고 작별을 고한
뒤 서울로 가서 황제에게 이 같은 소식을 알리기 위해 각기 출발하였
다. 위소보는 화백사기와 제락낙부를 불러서 자기의 예물을 소비아 공
주에게 갖다 바치라고 했다. 그 가운데는 솜 이불도 있었고 베개도 있
었다. 이와 같은 물건은 북극의 황량한 곳에서 구입할 수도 없었으니
모두 쌍아의 물건이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공주가 정말 나를 그리워한다면 이 비단 이불과 베개를 안고 자라고
하시오.]
화백사기는 말했다.
[공주 전하의 대인 각하에 대한 정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처럼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단 이불과 베개는 해어지기 십상이니 대인께선 역
시 몇 명의 다리를 만드는 기사들을 보내 모스크바에다 돌다리를 세우
게 하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영원히 망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위소보는 웃었다.
[나도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한 바가 있으니 그대들은 여러 소리하지 마
시오.]
그는 친위병으로 하여금 커다란 나무상자를 들고 나오도록 했다. 그 길
이는 여덟 자이고 폭은 네 치인데 커다란 관과 같았으며 여덟 명의 친
위병이 커다란 지렛대를 이용하여 들고 옮겨야 할 만큼 아주 무거웠다.
상자는 쇠줄로 꽁꽁 묶었으며 뚜껑은 봉했을 뿐 아니라 화칠(火漆)로
붙여 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이 예물은 대단한 것이라 그대들이 잘 보호하여 운송하도록 하시오.
공주께서 이를 보게 되면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오.]
두 명의 나찰대장은 감히 더 묻지 못하고 나무상자를 갖고 떠나갔다.
이 나무상자는 천 근도 더 되는 무게였으니 니포초에서 만리 먼길을 운
송하여 모스크바까지 가는 것은 실로 수고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비아 공주는 이를 받자 곧 상자를 열어 보았는데 놀랍게도 위소보의
나체 석상이 들어 있었다. 그 석상은 위소보가 빙그레 웃고 있는 모습
으로서 그야말로 여간 생동감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위소보는 경계비
를 조각한 석공을 불러서 이 성상을 조각하도록 하고 다시 선교사로 하
여금 '나는 영원히 그대를 사랑하노라' 하는 나찰 문자를 석상의 가슴
곽에 새기도록 했다. 소비아 공주는 이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지
도 울지도 못할 심정이 되었으며 이 중국 어린애의 뚱딴지 같으면서도
영악한 점에는 나찰 남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은지라 불현듯 정
이 솟구쳐 만리 밖에 있는 위소보를 생각하였다.
이 석상은 크레믈린 궁 안에 꼭꼭 숨겨졌는데 후에 피득 대제가 정변을
일으켜 소비아 공주를 궁에서 축출하는 과정에서 이 석상이 깨어졌다.
그런데 유독 남은 몸뚱이 부분이 병사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갔는데
나찰 민간의 무지한 부녀들이 이 깨진 석상을 향해 아들을 낳게 해주십
사 빈 다음 석상의 아랫도리를 만지면 크게 영험이 있다고 믿었다고 한
다.
위소보는 개선을 하면서 북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대군이 북경성 밖
에 이르게 되었을 때 조정 대신들은 일제히 성 밖에 나와서 영접했다.
위소보는 동국강, 색액도, 마라, 아이니, 마제, 붕춘, 살포소, 낭탄,
파해, 임흥주 등을 데리고 강희를 배알했다. 황제는 부드러운 어조로
격려를 했으며 조서를 내려 위소보를 일등 녹정공으로 승진시켰고 동국
강과 색액도 등 대신들 및 군관 사졸들을 모조리 벼슬을 올리고 상을
내렸다.
이후 며칠 동안 강희는 위소보를 불러서 아극살 성을 공격하여 함락하
고 국경선을 정하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물었다. 위소보는 솔직히 상주
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조금도 그때의 상황을 과장하지 않았다. 강희는
무척 기뻐하면서 그에게 철이 많이 들었다고 칭찬을 하고 위소보의 일
곱 부인과 두 아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이날 강희는 무원대장군이며 녹정공인 위소보와 이번 일에 공로가 있는
신하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강희는 그 자리에서 두 수의 시를 쓰
게 되었고 그 연회석에 참석했던 한림사의 학자들은 모두 다 공손히 화
답하여 세운 공을 경하했고 그 성대한 업적을 길이 기렸다.
잔치가 끝나자 위소보는 황제께서 하사하신 물건들을 갖고 의기양양해
서 궁에서 나와 관리들이 전후좌우에서 옹위하는 접대를 받으며 자기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거리 쪽에서 그 누가 부르짖었
다.
[위소보! 이 배은망덕하고 의리를 저버린 대도적아!]
위소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소리는 퍽이나 귀에 익어 고개를 돌
려보니 한 명의 대한이 처마 밑에서 거리 한복판으로 뛰어나와 그를 손
가락질하며 크게 욕을 하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 죽일 좀도적아! 멀썽한 한인이 청나라
에 투항하여 오랑캐의 주구와 종놈이 되다니! 너는 네 자신의 사부를
찔러 죽이고 절친한 형제들을 살해한 대가로 오랑캐 황제가 내린 부귀
영화를 누리면서 거들먹거리는구나! 제기랄, 허연 칼이 들어갔다가 붉
은 칼이 나온다고, 너 이 좀도적의 몸에다가 제기랄! 열일곱 번이고 스
물여덟 번이고 찌른다면 그래도 네가 자라 새끼가 되지 않고 배기겠느
냐?]
그 대한은 웃통을 벌거벗다시피 하고 있어, 가슴팍에 시커멓게 덮인 털
이 수북하게 보였다. 그리고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졌으며,
흉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바로 위소보를 데리고 북경으로 왔던
모십팔이었다. 수십 명의 친위병들이 번개처럼 그를 에워쌌다. 모십팔
은 신발 속에서 단도를 뽑아들고 저항하려 하였으나 이미 친위병들이
일제히 손을 쓴 다음이었다. 어떤 사람은 칼을 그의 목에 갖다 대었고
또 어떤 사람은 그의 손에 들린 단도를 빼앗아, 모십팔은 질질 끌리다
시피 해서 한쪽으로 끌려가서 묶였다.
第136章. 사로잡힌 모십팔
모십팔은 여전히 욕지거리를 해댔다.
[위소보, 이 갈보가 낳은 좀도적아. 과거 내가 너를 데리고 북경으로
온 것이 잘못이다. 난 정말로 진근남 총타주에게 미안하고 천지회의 호
걸들에게도 미안하기 짝이 없다. 나는 더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천하
사람들에게 너 위소보가 칭호를 팔아 영화를 꾀했으며, 은혜를 저버리
고 의리를 저버린 개새끼란 것을 알려야만 하겠다. 너는 그저 벼슬아치
가 되어 재산을 긁어 모으고 오랑캐 황제의 주구가 되어서……]
친위병들이 그의 주둥이를 후려쳤으나 그는 시종 욕지거리를 멈추지 않
았다. 위소보는 재빨리 호통을 쳐서 친위병들에게 손찌검을 하지 못하
도록 했다. 한 명의 친위병이 손수건을 꺼내어 모십팔의 입 안에 처넣
었다. 모십팔은 응얼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아마도 여전히 욕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위소보는 친위병들에게 분부했다.
[이 사람을 저택으로 데려가 잘 지키되 괴롭히지는 말고 술과 음식을
주어 환대하도록 해라. 내가 나중에 친히 심문하도록 하겠다.]
위소보는 제자리로 돌아간 후 서재에 주안상을 차려 놓고 모십팔을 청
했다. 그러나 그가 손을 쓸까 봐 소전과 쌍아로 하여금 심복으로 가장
하고 시중을 들도록 했다. 친위병이 모십팔을 데리고 오자 위소보는 모
십팔의 몸에 채워진 수갑을 풀게 하고는 친위병들로 하여금 물러서도록
명했다. 위소보는 웃으면서 맞이했다.
[모형, 오랫동안 만나 보지 못했는데 그 동안 안녕하셨소?]
모십팔은 노하여 말했다.
[내가 안녕하고 안녕하지 못할 게 뭐 있느냐? 너 같은 좀도적을 알게
된 이후 본래 멀쩡하던 나는 안 좋게 변하고 말았다.]
위소보는 웃었다.
[모형은 편하게 앉으시오. 이 형제가 석 잔의 술로 경의를 표해 먼저
화를 가라앉히도록 해주겠소. 이 형제가 도대체 모형에게 어떤 죄를 지
었는지 모르지만 욕은 술을 마신 후에 해도 될 것이오.]
모십팔은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오며 호통을 내질렀다.
[나는 먼저 너와 같은 좀도적을 죽인 후에 술을 마시겠다.]
그는 커다란 주먹을 뻗쳐 내서는 획, 하니 위소보의 얼굴을 때리려고
드는 것이었다. 이때 소전이 재빨리 달려들어서는 왼손을 뻗쳐 모십팔
의 손목을 잡아 가볍게 비틀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어깻죽지를 두 번 쳤
다. 모십팔은 대뜸 반신이 시큰하면서 마비되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
르게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놀람과 분노에 얽혀 힘을 모
아 몸을 벌떡 일으키며 욕을 했다.
[좀도적아……]
소전이 그의 등뒤에 서 있다가 두 손을 들어 그의 두 어깻죽지에 있는
견정혈(肩貞穴)을 잡고 다시 가볍게 아래로 누르자 모십팔은 이에 항거
하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게 되었다. 그의 체구는 우람하여 적어도 소전
의 두 배나 될 정도였으나 소전의 고심한 무공에 제압을 당해 손발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 순순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더욱
노하여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늘 너와 같은 매국노를 욕했을 때 이미 목숨을 건질 수 있으리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네가 사부를 팔고
친구를 팔아 넘긴 비열하고도 몰염치한 자임을 알리자는······]
위소보는 말했다.
[모형, 나는 황상을 위해서 일을 처리했고 나찰귀들을 때려 부순 것이
며, 한인을 죽인 것이 아닌데 어찌해서 매국노라고 하시오?]
모십팔은 말했다.
[그럼······그럼 어째서 너는 사부 진근남을 죽였느냐?]
위소보는 다급히 말했다.
[내가 어째서 나의 사부를 죽인단 말이오? 나의 사부님은 바로 정극상
이란 그 녀석이 살해한 것이오.]
모십팔은 노하여 꾸짖었다.
[너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억지를 쓰겠다는 것이냐? 오랑캐 황제는 제기
랄! 성지 속에서 분명히 얘기하고 있다.]
위소보는 놀라 말했다.
[황상의 성지 가운데 어째서……어째서 내가 사부를 죽였다는 내용이
쓰여 있단 말이오?]
위소보는 속으로 아리송해져서 고개를 돌려 소전을 바라보았다. 소전은
말했다.
[황상께서 며칠 전 그대를 일등 녹정공에 봉하던 날 내린 조서 가운데
그대의 공로를 서술한 대목이 있었죠. 그런데 그 조서를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그 가운데 그대가 훌륭한 장수를 추천하여 오삼계 역적을 평
정하도록 했고 대만을 평정하게 했으며 군사를 이끌고 성을 함락하여
국위를 외국까지 떨치게 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옳았어요. 그러
나 그 다음의 두 마디 가운데 천지회의 고수인 진근남과 풍제중을 잡아
죽여 천지회의 못난 자들이 다시 날뛰지 못하도록 했으며, 도적 같은
패거리와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로 하여금 혁면세심(革面洗心)토록
하게 했다는 글귀는 잘못된 것이었어요.]
위소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이 혁면세심이란 것이오?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소전은 말했다.
[이 조서에서는 그대가 진근남과 풍제중 들을 잡아 죽여 천지회의 사람
들이 다시는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했다는 거예요.]
위소보는 펄쩍 뛰며 부르짖었다.
[그런······그런 일이 어디에 있소? 이것은 억울한 누명을 씌우
는 것이 아니오?]
소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풍제중은 첩자로서 확실히 우리가 죽인 것이라 성지에서 한 말은 잘못
된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진근남이란 석 자가 추가된 게 탈이죠.]
위소보는 다급히 말했다.
[진근남은 나의 은사요. 내가······내가 어째서 그를 시해한다는
말이오? 황상……황상의 그 성지······아···그대는 성지를 보
고도 어째서 나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하지 않았소?]
소전은 말했다.
[우리는 상의해 본 적이 있어요. 성지에 '진근남'이란 석 자가 들어 있
다는 사실을 그대가 알게 된다면 크게 불쾌하게 생각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위소보는 자기네들이 상의했다는 그 말이 바로 일곱 명외 부인들이 함
께 상의했다는 뜻임을 알고는 고개를 돌려 쌍아를 쳐다보니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모형, 우리 사부님은 정말로 내가 죽인 것이 아니오. 풍제중은 천지회
의 반역도이외다. 그는…···그는 몰래 황제에게 밀고를 했던 것이
오.]
모십팔은 냉소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오히려 좋은 사람이 되겠군.]
위소보는 맥없이 주저앉으며 말했다.
[내 황상에게 말하겠소. 그리하여 고쳐서······고쳐서·····
·고쳐서·····]
고쳐서라는 말만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강희가 결코 성지에 진근남
이란 석 자가 더 많았다고 해서 특별히 달리 조서를 고쳐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생각했다.
(어느 개도적이 쓸데없는 주둥이를 놀려서는 황상에게 내가 사부님을
해쳐 죽였다는 말을 했지? 황상께서 볼 때는 내가 충성심을 다한 것으
로 보이겠지만·‥…그렇지만 이 위소보는 그렇게 되면 사람 노릇을 어
떻게 한단 말인가?)
그는 속으로 초조하여 갑자기 왁,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부르짖었다.
[모형, 전 누나···쌍아···나는 사부님을 해쳐 죽이지 않았소!]
세 사람은 위소보가 갑자기 소리까지 내며 울음을 터뜨리자 깜짝 놀랐
다. 소전은 재빨리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부둥켜안고는 부드러운 어조
로 말했다.
[그 정극상이 통흘도에서 그대의 사부님을 죽이는 것을 우리는 목격했
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모십팔은 그
제서야 이 무공이 강한 친위병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크게 놀라움과 의
아함을 금하지 못하게 되었다. 위소보는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말했다.
[모형, 정극상이란 그 녀석 역시 북경에 있으니 우리들이 바로 그에게
가서 직접 그와 대질하도록 합시다. 아마도 그는 억지를 쓰지는 못할
것이오. 맞았소, 맞았소. 우리 즉시 달려가도록 합시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친위병이 큰소리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성지가 도달하였습니다! 어전시위 다 총관께서 칙서를 받자옵고 성지
를 선포하려 합니다.]
위소보는 몸을 일으켜서는 문 앞으로 마중 나갔다. 그리고 보니 다륭이
싱글빙글 웃으면서 걸어 들어왔다. 위소보는 북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
고는 삼가 황제의 편안을 물었다. 다륭은 그가 인사를 끝내기를 기다렸
다가 말했다.
[황상께서는 거리에서 욕을 한 반적을 끌고 가서 친히 심문을 하시겠다
고 하셨네.]
위소보는 가슴속이 서늘해짐을 느끼고 말했다.
[그…···그 사람 말인가요? 형제가 잡아와 상세히 심문해 보니 실성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저 옥황상제니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니 하는 터무니없는 말만을 지껄이더군요. 이 형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어 그에게 매섭게 매질을 한 연후에 이미 그를 석방해 주었답니
다. 황상께선 어떻게 이 일을 알게 되셨습니까? 사실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인데……]
모십팔은 거기까지 듣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 맹렬히 탁자를 한 번 내
리쳤다. 그 바람에 그릇과 잔들이 퉈어 올라 쨍그랑, 하는 소리들과 함
께 바닥에 떨어져 조각이 났다. 모십팔은 큰소리로 욕을 했다.
[제기랄! 위소보, 누가 실성했다는 것이냐? 오늘 내가 큰거리에서 오랑
캐 황제를 욕했다. 나는 천갈래 만갈래 찢겨 죽는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은데 빌어먹을 오랑캐 황제를 대하는 것이 두려울 줄 아느냐?]
위소보는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강희나 다륭을 속인 이후 즉시
모십팔을 석방하려고 했는데 모십팔은 자기가 감싸고 돌려는 뜻을 헤아
리지 못하고 이토록 공공연히 황상을 욕하고 나서니 모십팔에게 열여덟
개의 모가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온전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속으로 생
각했다. 다륭은 한숨을 내쉬며 위소보에게 말했다.
[형제, 그대가 강호 친구들에게 의리가 깊은 데에 대해서는 나 역시 탄
복하는 바일세. 그러나 이 일은 그대가 이미 힘을 쓴 것으로써 그대의
의리는 이미 다한 것이네. 우리 가세.]
모십팔은 성큼성큼 문 앞으로 나서며 갑자기 탁, 하고 고개를 들어 침
을 뱉었는데 그 침은 위소보의 얼굴로 날아갔다. 그때 위소보는 이런저
런 생각에 잠겨 있던 중이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찰싹 하는 소리와 함
께 두 눈 한복판에 그 타액이 맞고 말았다. 몇 명의 친위병들이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고 모십팔에게 달려들었다. 위소보는 손을 내저으며 친
위병들에게 말했다.
[그만두세, 그만두세. 그를 괴롭히지 말도록 하게.]
다륭이 데려온 수하가 수갑을 꺼내 모십팔의 손에 채웠다. 위소보는 속
으로 생각했다.
(황상께서 친히 모형을 심문하신다면 세 마디의 말도 묻기 전에 그를
끌어내어 참수하고 말 것이다. 나는 지금 즉시 황상에게 달려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방법을 강구하여 저 사람을 구해야겠다.)
그는 다륭에게 말했다.
[내가 황상을 찾아뵙고 사정을 말씀드릴 터이니 저 거칠고 생각없는 사
내가 황상의 위엄을 거스르지 않도록 해주시오.]
일행은 황궁에 이르렀다. 위소보는 황제가 서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즉
시 뵙기를 청했다. 강희는 그를 불렀다. 위소보는 큰 절을 한 후 몸을
일으켰다.
[오늘 큰거리에서 그대를 욕하고 나를 욕했던 사람은 그대의 친구가 아
닌가?]
[황상께서는 만리 밖도 내다보고 계시는군요.]
[그는 천지회의 사람인가?]
[그는 정식으로 가입한 사람은 아니지만 천지회 사람들을 적지않게 알
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저의 사부님을 매우 존경했습니다. 황상의
성지에서 제가 사부님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 그는 화가 나서 저를 통렬
히 매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황상에 대해서는 그는 조금도 공경하지 못
한 언행을 감히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강희는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천지회와 이미 관계를 끊어 차후로는 내왕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예. 이번에 나찰귀들을 공격하는 데에도 소신은 천지회 사람들을 데리
고 가지 않았습니다.]
강희는 물었다.
[이후 그대의 천지회 친구들이 그대를 찾아온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
는가?]
[소신은 결코 그들을 만나지 않겠습니다. 만나면 서로가 거북하게 될
터이니 거북한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조서에서 친히 진근남과 풍제중이란 이름을 가하여 그대
로 하여금 이후 귀찮은 일들을 면하도록 하려고 했네. 소계자, 사람이
란 언제나 두 발로 두 척의 배를 딛고 서 있을 수는 없다네. 그대가 나
에 대해서 충성을 다한다면 한마음 한뜻으로 조정을 위하여 일해야 할
것이고, 천지회 일에는 다시 관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네. 그대가 만약
천지회 향주 노릇을 하겠다고 결심했다면 한 마음 한 뜻으로 나에게 반
기를 들어야 옳은 것일세.]
위소보는 깜짝 놀라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소신은 결코 반기를 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소신은 어릴 적부터 일을
멍청하게 처리하고 철없이 날뛰었지만 이제는 깊이 대의(大義)를 깨닫
게 되었고 혁면세심하게 되었으니 그때와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것 잘되었네. 그렇다면 오늘 거리에서 욕을 하던 그 미친 자를 내일
그대가 친히 목을 자르는 것을 감독하도록 하게나.]
위소보는 큰절을 했다.
[황상께서 굽어살피십시오. 소신이 북경으로 와서 황상을 뵙게된 것은
모두 그 사람의 덕분입니다. 소신은 그에 대해서 아직도 은혜를 보답한
적이 없으니 황상께서 그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차라리…차라리
소신이 이번 나찰귀들을 공격한 공로를 황상께서는 모조리 없애고 소신
이 다시 물러나 녹정후가 되겠습니다.]
강희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조정에서 내린 작위를 그대는 어린애 장난으로 알고 있는가? 그대를
일등 녹정공으로 승급시킨 것은 나의 은혜일세. 그대는 내가 내린 녹봉
으로 나와 거래를 하며 흥정을 하자는 것인가? 정말 당돌하군.]
위소보는 연신 큰절을 하며 말했다.
[소신은 그저 온종일 흥정을 할 터이니 황상께서는 얼마든지 값을 깎도
록 하십시오. 녹정후로 내려앉아도 안 된다면 통흘백이나 통흘자로 만
들어도 됩니다.]
강희는 그를 놀라게 해서 조정의 규칙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
이었는데 이 위소보는 역시 시정 소인배라 일등공이나 대장군에 봉해졌
어도 망나니의 성질은 조금도 고치지 못한 것을 보고는 그만 화가 나기
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호통을 내질렀다.
[네 이놈! 일어나라.]
위소보는 큰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강희는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런, 경을 칠. 나는 그대의 값을 깎겠네. 그대가 나에게 그 반역도를
용서해 달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자네 머리를 그의 머리와 교환하도록
하세.]
위소보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황상께서는 너무나 값을 깎으셨군요. 좀더 붙여서 말씀하십시오.]
[좋아, 내가 한걸음 양보하지. 그대는 불알을 자르고 정말로 궁안으로
들어와 태감 노릇을 하도록 하게.]
[황상께서는 좀더 붙여 주십시오.]
[더는 붙여 주지 못하겠네. 그대가 가서 그를 죽이지 않으면 바로 나에
대해 불충의 죄를 짓게 되는 것이네. 한 사람이 충성을 바치려면 바치
는 것이고 불충을 하려면 불충을 해야 하는 것이지 거기에도 무슨 흥정
이 있단 말인가?]
[소신은 황상에 대해서는 충성을 바치고, 친구에 대해서는 의리를 바치
며, 어머니에 대해서는 효성을 바치고,처에 대해서는 사랑을....]
강희는 소리내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충효절의(忠孝節義)를 다 갖추었군. 좋아. 탄복했네, 탄복했
어. 내일 이맘때 머리를 가지고 오도록 하게. 그 반역도의 머리가 아니
고 바로 그대 자신의 머리를 말이네.]
위소보는 어쩔 수 없어 큰절을 하고 물러났다. 강희는 그가 문 앞으로
가는 것을 보고 물었다.
[소계자, 또 도망칠 셈인가?]
[이번에는 감히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다. 소신은 집으로 가서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서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황
상을 기쁘게 해드리고 또한 친구의 의리도 돌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신의 이 머리도 어깨 위에 잘 붙어 있게 하는 것입니다.]
강희는 미소를 지었다.
[매우 좋아. 나는 건녕 공주를 오랫동안 보지 못해 몹시 보고 싶더군.
그래서 이미 궁 안으로 불러들였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대의 나머지 여섯 부인과 세 아들딸도 공주를 따라 함께 궁안으로
들어와 태후를 만나 뵙고 있다네. 태후께서는 그대의 공로가 적지 않으
니 그대의 부인들과 아들딸들에게 멋진 상을 내려야겠다고 하시더군.]
[태후와 황상의 은혜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소신은 실로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잠시 두 걸음 물러섰다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황상, 소신은 옛날에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대는 여래 부처님이시고
저는 손오공이라 소신은 아무리 해도 그대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가 없다고 말입니다.]
강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의 신통력도 광대하니 너무 겸손해 할 것 없네.]
위소보는 서재 문을 나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상이 나의 일곱 명의 마누라와 세 명의 아들딸들을 모조리 억류했으
니 설사 내가 도망칠 용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차마 그들을 내버리고 도
망칠 수도 없구나.)
기다란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다륭이 그를 마중 나오며 웃었다.
[위 형제, 태후께서 그대의 부인과 공자, 그리고 소저들을 불러들였네.
아마도 많은 상을 내릴 것 같네. 축하하네.]
위소보는 그의 두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다륭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형제가 이번에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하기 전에 나에게 빛을 받아 달라
고 분부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까지 거의 다 받아냈네. 이백육십여
만 냥이나 되는 은표를 내 나중에 그대의 저택으로 보내도록 하지.]
위소보는 웃었다.
[형님의 재간은 대단하시군요. 놀랍게도 그토록 많이 짜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가 갈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정극상이란 녀석이 저의 사부님을 해쳐 죽였기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
기까지도 나로 하여금 골치를 썩게 만드는군요. 제기랄, 떡을 칠. 그
실성한 사람이 거리에서 욕을 한 것도 정극상이 뿌린 화근이랍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증오심이 폭발하였다.
[형님, 좀더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우리 함께 빚을 받으러 갑시다.]
다륭은 다시 정극상의 저택으로 빚을 받으러 가자고 하는 말에 이것이
야말로 으뜸가는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오늘은 무원대장군
이며 일등 녹정공 위소보가 동행을 하는 만큼 빛을 받아내는 데 있어서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즉시 응낙을 하였다. 그리고 어전
시위 부총관으로 하여금 궁에서 자기 대신 일을 하도록 분부를 한 이후
백여 명의 시위들을 불러 위소보와 함께 정극상의 저택으로 갔다. 정극
상이 봉해진 것도 역시 공작이었다. 그러나 위소보의 공작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한 사람은 항복한 반역도당이었고, 한 사람은
황제의 총신이며 대공신이었다.
똑같은 공작부였으나 그 규모와 기세부터 전혀 달랐다. 정극상 공작부
대문의 편액에는 해징공부(海澄公府)라는 넉 자가 검은 글로 쓰여 있었
지만 위소보 공작부의 녹정공부라는 넉 자는 금칠로 쓰여 졌다. 위소보
는 그 대문 위의 편액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 녀석의 대문 위의 편액은 나의 금자로 된 간판보다 못하구나.]
다륭의 시위들은 해징공부에 와서 빛을 받아 간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이삼 일 만에 한 번 왔던 터라 문지기가 통보하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위소보는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한복판에 떡 버
티고 앉았고 다륭은 그 옆에 앉았다.
정극상은 무원대장군 위소보가 도달했다는 전갈을 듣고 그야말로 당금
세상에 있어서 위소보가 가장 으뜸가는 극성(剋星)인지라 그만 손발을
어떻게 놀려야 할지 몰랐다. 그렇다고 감히 만나 주지 않을 수도 없어
서 부득이 공복(쇄伎)을 갈아입고 전전긍긍하며 나왔다. 그리고 앞으로
나와 두 손을 마주잡고는 인사를 하며 불렀다.
[위 대인!]
第137章. 풍석범을 반쯤 죽이다
위소보는 일어나지도 않고 시건방지게 떡 버티고 앉아서 고개를 쳐들고
천장을 향한 채 코방귀를 뀌고는 다륭에게 말했다.
[다형, 정극상이란 녀석은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군요. 우리가 온지 반
나절이나 지났는데도 나와 보지 않으니 이것은 바로 우리를 업신여기기
때문이 아니겠소?]
다륭은 말했다.
[그렇지! 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을 바쳐야 하고 빚을 졌으면 돈을 갚아
야 하지. 한평생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다닌다고 끝까지 피할 수 있
는 것은 아니지.]
정극상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남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할 때
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눈앞의 두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사람은 병권을 쥐고 흔드는 대장군이고 또 한 사람은 어
전시위 총관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으로 말하면 권세도 없는 몸이었고
남의 의심을 받는 처지라 비록 작위를 지녔다고는 하지만 실제에 있어
서는 여느 백성의 처지보다도 못한 편이 아닌가! 그는 억지로 노기를
참고 나직이 기침을 한 후 말했다.
[위 대인, 다 총관, 두 분 모두 안녕하신지요!]
위소보는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보니 눈앞에 허리를 숙인
구부정한 한 늙은이가 서 있었다. 머리는 반백이 다 되었고 얼굴은 초
췌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턱 아래의 수염도 이미 반백이 다 되어 있었
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이 사람은 나이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
다. 그저 울상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눈가에 주름이 잡혀 있어서 그렇
게 보이는 것이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그 사람이 바로
정극상이 아닌가?
수년 만나 보지 못한 사이에 놀랍게도 이삼십 세나 더 늙어 보이게 된
것이었다. 위소보는 크게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이유를 알아챘다.
그가 이 몇 년 동안 온갖 고통을 당하다 보니 갑자기 늙은 것임을 짐작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과거
통흘도에서 진근남을 찔러 죽인 악랄함을 상기하자 노기가 끓어올라 냉
소했다.
[당신은 누구시오?]
[불초는 정극상이라 합니다. 위 대인께서는 저를 못알아보는군요.]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극상? 정극상은 대만에서 연평왕 노릇을 한 사람이 아니오? 어찌해
서 그가 북경으로 왔지? 그대는 가짜이겠지?]
[불초는 대청나라에 귀순하여 황상의 은혜를 받아 작위와 녹봉을 하사
받게 되었습니다.]
[아, 그래요? 그대는 과거 대만에서 큰소리를 치지 않았소. 북경으로
공격해 와서는 황상을 잡아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고 말이오. 그 말은
아직도 효과가 있는 것이오?]
정극상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나에게 죄명을 뒤집어 씌우려고 한다면 아무렇게나 날조한다고
하더라도 황상께서는 그의 말을 믿게 될 것이고, 결코 나의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다륭이 어전시위들과 효기영의 군사들을 데리고 끊임없이 소란을 피우
는 바람에 정극상은 그야말로 하루를 일 년처럼 보내야 했다. 그래서
대만에서 가지고 온 가산 중 십중팔구를 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
리고 이백여 만 냥이나 되는 은자를 맞추기 위해서 그는 이미 구슬이나
보석 등 장식품들을 모조리 팔아야 했다. 그는 투항하지 말았어야 했다
고 몇천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시랑이 공격해 왔을 때 만약 군사
들을 데리고 힘이 다할 때까지 죽기를 각오로 싸웠더라면 반드시 진다
고 볼 수 없었고 설사 진다 하더라도 전선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다 죽
었으니 하늘에 계신 조부와 부친을 떳떳하게 대할 수 있었을 것이며 투
항한 이후의 무궁한 고달픔과 갖은 수모를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때 그는 위소보의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정말로 죽고 싶도록 후회해
마지 않았다. 위소보는 말했다.
[다형, 이분 정 왕야는 과거에는 무척 위풍당당했지요. 형제는 과거 남
의 말을 듣건대 그 누가 정왕야를 모시고 대만으로 가서는 다시 왕위에
올리겠다는구려. 정 왕야, 그대와 접촉한 사람은 어떤 말을 했지요? 이
형제는 알아내서 황상께 알리고 싶구려.]
정극상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위 대인, 아무쪼록 한번만 봐 주시오. 그대가 말씀하시는 일은 전혀…
…전혀 없었던 일로써……]
[어, 그것 참 이상하군. 다형, 어제 우리들은 한 반역도를 붙잡지 않았
소. 그는 크게 황상을 욕하고 다시 이 형제를 욕했소. 그 사람은 정 왕
야의 부하라고 했으며 정 왕야가 북경에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기 때
문에 정 왕야를 위해 원수를 갚겠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 오랑캐
들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하지 않겠소.]
정극상은 거기까지 듣자 그만 더 견딜 수가 없어 두 무릎을 꿇고 엎드
려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위 대인, 목숨만 살려 주시오. 소인은 과거에 만번 죽을죄를 지었소이
다. 그대에게 죄를 지었소이다. 그대는 대인의 아량으로써 나에게 살길
을 열어 주시오. 그러면 하느님은 그대의 공후만대(公侯萬代)에 이르도
록 보호하실 것이외다.]
위소보는 냉소했다.
[그날 그대가 나의 사부님을 죽였을 때 오늘과 같은 날이 있으리라 생
각하셨소?]
별안간 후당에서 재빠른 걸음으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체구가 마르
고 키가 큰 편이었는데 매우 다부진 얼굴 모습이었다. 바로 일검무혈
풍석범이었다. 그는 서둘러 정극상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뻗쳐 그를 잡
아 일으킨 후 고개를 돌리고 위소보를 향해 말했다.
[과거 진근남을 죽인 것은 모두 나의 뜻이었으며 정 공작 나으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소이다. 그대가 그대의 사부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면
얼마든지 나에게 손을 쓰도록 하시오.]
위소보는 언제나 풍석범을 매우 꺼려하는 편이었다. 그가 기세등등하여
나서는 모양을 보고 그만 전신을 의자에 파묻히도록 움츠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는……그대는 사람을 때릴 작정이오?]
다륭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부르짖었다.
[게 누구 없느냐?]
그러자 십여 명의 시위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그들을 겹겹이 둘러쌌다.
위소보는 자기 쪽의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보고는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이 서울에서 감히 흉악한 짓을 저지르려 하다니, 체포해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네 명의 시위가 동시에 손을 뻗쳐 풍석범의 손과
발을 잡았다. 풍석범은 항거하지 않고 낭랑히 말했다.
[우리가 조정에 귀의하게 된 이후 황상께서는 공자 나으리를 해징공으
로 봉하셨고 나를 충성백으로 봉하셨소. 황상의 금쪽 같은 입으로 과거
의 일은 싹 지워 버리고 다시는 따지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소. 그런데
위 대인, 그대는 사사로운 일을 가지고 공무를 행하는 듯 좋은 사람에
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니 우리들은 부득이 황상 앞으로 가서 사실을 밝
혀보도록 합시다.]
[그대가 좋은 사람이라고? 일검무혈 풍 대인께서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
는 것은 오늘 처음 듣겠소이다.]
풍석범은 말했다.
[우리들은 북경에 온 후부터 분수를 지키며 살아 왔고 한번도 외부 사
람과 만난 적이 없소. 그러니 왕법(王法)을 감히 범할 수도 없었소. 그
런데 이 시위대인들이 끊임없이 와서는 손을 벌리고 돈을 내놓으라고
했으며 우리의 가산을 모조리 탕진하면서까지 상대를 해 드린 것은 괜
찮다고 합시다. 그러나 위 대인, 그대가 만약 우리들에게 함부로 죄명
을 덮어씌운다고 하더라도 황상께서는 만리를 밝게 내다보시는 분이시
라 그대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외다.]
이 사람은 담이 크고 또 견식이 있어 정극상과는 견줄 수 없는 인물이
었다. 그와 같이 도도히 흐르는 말에 위소보는 일시 반박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속으로 그들 두 사람은 대만에서 항복해 온 사람들이지
만 이미 조정에서 작위를 받은 몸이니 약간 업신여기고 못살게 구는 것
은 상관없지만 정말 그들을 쓰러뜨리려고 한다면 황상께서 몇 마디 물
어 보시게 될 것이고 그 즉시 일이 탄로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황상께서는 사부님을 위해 원한을 갚으려고 한다고 짐작하고 반드시 자
신을 탓할 것이 아닌가. 그는 그만 마음이 약해졌으나 입으로는 여전히
지극히 강경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어제 한 사람의 반역도를 잡았소. 그는 친히 정 왕야를 맞아
서는 대만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단 말이오. 설마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는 주장하지 않겠지?]
풍석범은 말했다.
[그와 같은 사람이 함부로 지껄이는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이오.
위 대인은 그 사람을 끌고 오시오. 우리 형부로 가서 대질을 합시다.]
[대질을 하겠다고? 그것 참 잘되었군, 그것 참 잘되었어. 진정 신이 나
서 어깨춤을 출 지경이외다.]
그는 정극상에게 말했다.
[정 왕야, 그대는 나에게 빛을 졌소. 도대체 언제 다 갚을 셈이오?]
풍석범은 위소보가 다른 말을 끄집어내고 또 그의 안색을 살펴보건대
위소보는 황제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풍석범은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대담
하게 일을 벌여 황제 앞으로 나가 시비를 따질 정도로 시끄럽게 만들어
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아직 젊기는 하지만 매우 영명해서 반드시
시비곡직을 분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이 기희에 완
전히 처리해 놓지 않는다면 금후에 끊임없이 핍박을 받게 될 형편이 아
니겠는가? 실로 이 위가라는 녀석에게 양보할래야 양보할 수 없올 정도
로 핍박을 받게 된 지금, 개가 다급해지면 담장을 뛰어넘고 사람이 다
급해지면 대들보에 목을 매단다는 말이 있듯이 네가 나를 핍박하여 목
을 매달게 한다면 모두 한꺼번에 목숨을 걸고서 싸워 보자는 생각을 했
다. 그는 이미 결심을 굳힌 후였다.
[위 대인, 다 총관, 우리 황제에게 이 일을 알려 판가름을 내도록 합시
다.]
위소보는 뜻밖이었다. 만약에 황제 앞으로 끌려가면 그야말로 자기가
낭패를 볼 일이 아닌가! 그렇지만 지금 결코 그들 앞에서 자기의 약점
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매우 좋소. 저 정가도 함께 데리고 갑시다! 그들 두 사람을 먼저 뇌옥
에 감금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한가한 복을 누리게 한 후 일 년이나 반
년이 지난 이후 우리 천천히 다시 황상께 상주하도록 합시다.]
다륭은 속으로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극상은 황제가 친히 봉한
공작인데 그에게 빚을 받으려 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감금하려고 하
는 것은 반드시 위의 유시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나직이 말했
다.
[위 대인, 먼저 황상께 상주한 후 다시 이들을 잡도록 합시다.]
정극상은 느긋해진 기분으로 말했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나를 잡아간다는 말이오?]
바람 부는 대로 돛을 돌리는 것이 위소보의 천성이라 즉시 말했다.
[죄를 짓고 안 지은 것은 지금 알 수 없는 일이오. 그대가 나에게 빚진
것을 다 갚지 못했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시겠소? 그대는 돈을 갚겠소?
아니면 날 따라가겠소?]
정극상은 체포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다는 말에 얼른 대답했다.
[돈을 갚겠소, 돈을 갚겠소.]
그는 급히 내당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한 웅큼의 은표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두 명의 하인이 쟁반을 들고 나왔는데 그 위에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장식품이 가득 놓여 있었다. 정극상은 말했다.
[위 대인, 비직이 상자와 농을 뒤엎다시피 하여 삼사만 냥의 은자를 마
련하기는 했으나 실로 더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더 내놓을 수가 없다고? 믿을 수가 없는데? 형제가 그대를 모시고 들
어가 찾아보도록 하지.]
정극상은 말했다.
[그건······그건·‥…너무 거북한 노릇이죠.]
풍석범은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이 왕법을 범하지 않았는데 위 대인은 우리의 가산을 몰수하자
는 것이오? 성지를 받든 것이오, 아니면 형부의 서류를 가지고 있는 것
이오?]
위소보는 웃었다.
[이것은 가산을 몰수하는 것이 아니외다. 정 왕야는 다시 내놓을 수 없
다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에는 더 내놓을 수 있을 것 같구려. 그가 금은
주보와 대량의 칼과 창, 그리고 무기들이나 무슨 용의(龍椅), 용포(龍
袍) 등을 지하 밀실에다가 감추어 놓아 일시 찾지 못할까 봐 모두들 그
를 도와 찾아보려는 것이외다.]
정극상은 말했다.
[칼과 창, 무기와 용의, 용포 뭐라고 하는 것을 내가‥‥··내가 어찌
사사로이 감출 수가 있겠소. 더군다나 비직은 그저……그저 공작에 지
나지 않으니 왕야라는 칭호는 결코 감당할 수가 없소이다.]
위소보는 다륭에게 말했다.
[다형, 얼마나 되는지 한번 세어 보시오.]
다륭과 두 명의 시위가 은표를 세고 나서 말했다.
[은표는 모두 삼만 사천 삼백 냥의 은자이고 나머지 것은 가치없는 장
식품인데 어떻게 값을 매겨야 할지 모르겠구려.]
위소보는 손을 뻗쳐 장식품 더미를 몇 번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하나의
금봉채(金鳳釵)를 들고 놀란 듯이 말했다.
[아이쿠! 다형, 이것은 금기를 어기는 물건이 아니요? 황상은 용이시고
정궁(正宮)마마는 봉인데 어째서 정 왕야의 왕비가 금봉채를 가질 수
있단 말이오?]
풍석범은 크게 노하여 말했다.
[위 대인, 그대는 계란 안에서 뼈다귀를 찾자는 것이오? 이 풍가는 오
늘 그대와 사생결단을 내겠소. 천하의 금과 은으로 만든 장식품 등을
파는 가게의 어느 집에 금봉채가 없소? 북경의 벼슬아치들 집안의 여자
들 가운데 어느 누가 금봉채를 지니지 않았다는 말이오?]
위소보는 그 말을 즉시 받았다.
[풍 대인께서는 북경 성 안의 벼슬아치 집안의 여자들을 모조리 살펴보
셨구려. 음, 그대는 어느 집안의 부인이나 소저가 가장 예쁘다고 섕각
하시오? 쯧쯧쯧! 정말 대단하구려, 정말 대단하오. 그토록 많은 여자들
을 보았다니 눈으로 누릴 수 있는 복이 적지 않구려. 강친왕의 왕비와
병부상서 명주 대인의 소저를 그대는 모조리 보았다는 말이오?]
풍석범은 울화가 치밀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역시 두렵
기도 했다. 이 젊은이는 당금 조정의 권신들과 귀족들과는 그야말로 절
친한 사이가 아니던가! 만약에 그가 단 한 마디의 있는 말 없는 말을
보태서 퍼뜨린다면 그야말로 자기는 운수 사나운 꼴이 된다고 생각했
다. 정극상은 연신 허리를 구부리고 읍을 하며 말했다.
[위 대인, 아무쪼록 한번만 봐 주시구려. 비직이 그대에게 사정합니
다.]
위소보는 몇 마디의 말에 놀라 풍석범이 아무 소리도 못하는 것을 보고
순풍에 따라 깃발을 올린 지 이미 오래되었는지라 즉시 껄껄 웃으며 입
을 열었다.
[하하하! 다형, 이 형제의 얼굴은 그대에 비한다면 훨씬 떨어지는구려.
다형이 빛을 받으러 왔을 때는 이백만 냥의 은자를 받아낼 수 있었으나
형제가 친히 나서서 받아 낸 것은 겨우 이것뿐이구려.]
정극상은 말했다.
[실로 비직의 집안에는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코···감히 빚진 것
을 갚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우리 갑시다! 열흘이고 반 개월이 지난 이후 정 왕야가 대만에서 금과
은을 옮겨 온다면 그때 다시 빛을 받아 내도록 합시다.]
그는 몸을 일으켜 대청을 나섰다. 풍석범은 위소보가 말끝마다 정극상
이 불측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함을 하고 여전히 대만의 옛날 부하
와 결탁하고 있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듣자 이것이야말로 멸족을 당할
큰 죄이므로 만약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한평생 그에게 꼬투리를 잡혀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리라고 판단하고 낭랑히 말했다.
[우리는 법을 엄히 지키고 있으며 감히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디지 않
으려고 애쓰고 있소. 오늘 위 대인과 다 충관께서 이곳에서 하신 말씀
을 우리들은 반드시 자초지종을 모두 밝히어 황상께 상주하겠소. 그렇
게 하지 않는다면 천지가 넓다 하더라도 우리가 발 디디고 설 곳이 없
게 될 것이오.]
위소보는 웃었다.
[발 디디고 설 곳이 없다구요? 있지요, 있어요. 정 왕야와 풍 장군께서
대만으로 돌아가신다면 그야말로 커다란 땅의 발 디딜 곳이 있지 않겠
소이까? 그대들 두 분께서는 그곳에서 발을 딛고 서서 큰일을 상의하십
시오. 우리는 이만 실례하겠소이다.]
그는 다륭의 손을 잡고는 훵 하니 문을 나섰다. 위소보는 집으로 돌아
오자 즉시 주연을 베풀어 시위들에게 술을 대접했다. 다륭은 수하 시위
들에게 네 개의 상자를 옮기도록 하고 그 상자를 열어 젖혔다. 그 상자
에는 금은주보와 한 묶음의 은표가 들어 있었다. 다륭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몇 달 동안 빚을 받은 나머지 정극상이란 녀석의 가산 중 십중팔구는
이곳에 모이게 되었네. 위 형제, 그대가 혜아려서 거두어 들이도록 하
게나.]
위소보는 한 웅큼의 은표를 집었는데 그것은 약 십여 만 냥이나 되는
은표였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 개 같은 도적놈이 우리 사부님을 해쳐 죽였는데도 황상께서는 그에
게 작위를 내리셨으니 이 원한을 갚을 수 없게 되었구려. 형과 여러 형
제들이 그를 못살게 굴어서 이 형제의 앙갚음을 해준데 대해서 정말 고
맙게 생각하오. 우리 사부님에게는 가족도 없소. 형제는 이 돈을 가지
고 사람을 시켜 대만에다가 커다란 사당을 지어 우리 사부님을 모시고
자 하오. 나머지는 형과 여러 형제들이 나누어 가지시구려.]
다륭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안 되네, 안 되네. 이것은 정극상이 형제에게 빚진 돈이 아닌가? 그대
가 몇 명의 친위병들을 보내서 매일같이 빚을 독촉한다면 그는 빚을 갚
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일세. 우리가 그대를 위해 조그만 심부름을 한 것
에 불과하고 또한 우리는 한집안 사람과 다름이 없는데 어찌 내 그대의
것을 받을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형제의 가산은 이미 다스리지 못할 정도로 많소이다.
절친한 친구끼리 돈이 있으면 같이 쓰는 것인데 어찌 네 것 내 것을 따
진단 말이오.]
다륭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으므로 두 사람은
얼굴을 붉히면서 다투었다. 최후에는 시위들이 이백만 냥의 은자를 빛
받아 준 비용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나머지 삼십만 냥은 효기영의 형
제들에게 나누어 가지도록 했으며 나머지의 것들은 다륭이 친히 받쳐
들고는 위소보의 내당으로 옮겨다 주었다. 궁에서 당직을 보고 있는 시
위들까지 모두 골고루 나누어도 한 사람 앞에 몇 천 냥의 은자가 돌아
가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시위들은 흥이 나서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은
후에 공작부 화청에서 패구와 주사위 노름을 크게 벌였다. 절친한 친구
끼리니 위소보는 주사위를 던짐에 있어서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이경
무렵까지 도박을 하였을 때 위소보는 다륭에게 말했다.
[다형, 형제는 한 가지의 수고를 형에게 끼쳐야겠소이다.]
다륭은 그렇지 않아도 한창 재수가 좋았던 판이라, 기분이 좋아서 말했
다.
[좋네, 무슨 일이든 간에 그대가 분부만 하게. 다만 한 가지만은 안 되
네. 거리에서 욕을 한 그 미친놈을 황상께서는 나에게 엄히 돌보라고
분부하셨으며, 내일 이른 아침 그대에 의해 참수되는 것을 감독토록 했
네. 만약에 내가 사사로운 정으로 그를 석방한다면 황상께서는 나의 목
을 자르실 것일세.]
위소보가 그에게 부탁하려던 일은 바로 모십팔을 석방시켜 달라는 것이
었다. 그런데 그가 미리 짐작하여 거절을 하니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상의 신기묘산은 정말 무슨 일이든지 앞을 내다보고 있구나. 백만
냥의 은자로써도 모형의 한 목숨을 구할 수 없다니…···)
그는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다시 정극상의 집으로 가서 빛을
받아 내고 싶었다. 그러나 정극상의 그 초라해진 모습을 떠올려 보니
불쌍한 벌레와도 같은 자를 못살게 구는 것도 영웅호걸이 할 짓이 아니
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생각을 돌려 말했다.
[그 미친 자의 일은 황상께서 친히 분부하신 것이니 내 아무리 하늘처
럼 커다란 담이 있다 해도 어찌 감히 그를 놓아 달라는 부탁을 하겠소?
오늘 우리가 빛을 받으러 갔을 때 정극상은 상관이 없었지만 그의 수하
인 풍석범은 제기랄! 정말 대단하여 우리가 오히려 그에게 업신여김을
당한 꼴이 되었소. 형제가 생각해 볼 때 이 수모는 정말 참고 견딜 수
가 없구려.]
시위들은 옆에서 이 말을 듣고 모두 그렇다고 말했다.
[오늘 우리들은 그와 같은 일을 보고 모두 다 화가 났지요. 위 대인께
서는 화내지 마십시오. 모두들 함께 찾아갑시다. 패전을 해서 항복해
온 장수가 감히 북경성에서 내노랍시고 잘난 척하고 또한 무법천지로
놀고 있으니 우리가 이래서야 제대로 벌어먹고 살 수 있겠습니까?]
시위들은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난다는 듯 즉시 달려가서 모두들 풍석
범의 백작부를 마구 부수자고 말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우리가 그 후레자식을 공공연히 건드릴 수는 없소. 관가에서나 어사가
알게 되어 상주문을 올린다면 어전시위의 명성이 크게 나빠지게 되오.]
다륭은 재빨리 말했다.
[그렇지, 그렇지. 형제가 고려한 점은 매우 옳으이.]
위소보는 말했다.
[다형이 친히 출하할 것은 없소이다. 장형과 조형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면 됩니다.]
그는 장강년과 조제현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전봉영 태 도통(都統)의 수하를 가장하여 급한 공무로 풍석
범이라는 후레자식을 모셔 가서 상의하려고 한다고 말하시오. 그렇게
된다면 그가 설사 마음속으로 의심을 한다고 하더라도 감히 따라오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오. 그리고 중도에 이르렀을 때 그의 발과 손에 수
갑을 채우고, 검은 베로 그의 눈을 가리고 다 떨어진 베 조각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를 데리고 여러 곳을 몇 바퀴 빙글빙글 돌아다니다가 최후
에는 이곳에 데리고 오도록 하시오. 그리고 모두들 그를 패 주고 그의
옷을 벗겨서 태 도통의 작은마누라 침대 위에 옮겨 놓도록 합시다.]
시위들은 소리내어 웃었으며 정말 멋진 계획이라고 말했다. 어전시위와
전봉영의 관병들은 언제나 화목하지 못했으며 서로 부딪치기만 하면 싸
움을 벌이려고 했다. 전봉영의 통령은 아적제(阿赤濟)였으나 그날 위소
보가 계략을 짜서 뇌옥에 갇히게 된 이후 나중에 풀려나기는 했으나 강
희는 그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이미 파
면을 시켰으며 지금의 도통은 태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륭과 태
도통은 알게 모르게 싸우고 있었으며 이미 오래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
았으나 그 누구도 어느 한쪽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다륭은 기
분이 좋아져서 말했다.
[태가라는 녀석은 마누라를 제일 두려워하여 처첩들을 맞아들이고 나서
도 감히 집으로 데려오지 못한다네. 새로이 맞아들인 여덟 번째의 첩은
바로 첨수정 골목에 살고 있는데 태가는 저녁에 그곳에 가서 머물면서
도 잠은 자지 않는다고 하더군. 우리들이 풍석범을 벌거벗겨서 그의 새
로 맞은 첩의 침대 위에다 눕혀 놓는다면 태가는 그야말로 울화통이 터
져 죽으려고 할 거야. 그는 물론 우리가 부린 수작이라고 의심하더라도
모두들 꼭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로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네.]
시위들은 즉시 몸에 달고 있는 시위의 표기를 뜯어 내고는 히히덕거리
며 문을 나섰다. 위소보와 다륭은 화청에서 술을 마시며 기다렸다. 위
소보의 부하인 친위병들은 끊임없이 소식을 알아내어 보고를 했다. 시
위들은 이미 충성백부의 문 앞에 도달했으며 자칭 전봉영의 사람들이라
고 말하고 문을 열고는 풍석범을 뵙기를 청했다. 풍석범이 이에 그들을
영접하고 사람들을 안으로 모셔서 차 한잔을 마시도록 했다.
장강년은 태 도통이 명을 받고 대만의 긴급한 군정(軍情)을 상의해야
하기 때문에 즉시 풍석범을 모셔 오란다는 말을 했다. 풍석범은 이미
교자에 올라 탔고 시위들은 그를 호위한 채 서성으로 갔다. 시위들은
이미 풍석범에게 수갑을 채웠으며 그를 따르던 시종들도 모두 잡아 버
렸다.
일행들이 북성으로 갔을 때 구문제독이 순라를 돌다 호통쳐 묻자 조제
현은 큰소리로 전봉영의 사람들이라고 대답했으며 풍석범이 교자 안에
서 반드시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다시
공작부로 향했다. 향을 한 대 피울 시간이 지나자 시위들은 풍석범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장강년은 큰소리로 말했다.
[태 도통께 아룁니다. 죄를 지은 풍석범을 데리고 왔습니다.]
위소보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매섭게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시위
들은 외쳤다.
[법을 어긴 관원인 풍석범은 반역도들과 결탁하여 불측한 일을 도모했
다. 그러니 태 도통께서는 무겁게 고문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리고는 즉시 그의 몸에다 주먹과 발길질을 가했다. 풍석범은 무공이
지극히 고강했으며 위인됨이 매우 기민했다. 시위들이 전봉영의 관병을
사칭하고 모셔가겠다고 했을 때 그는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
꼈다. 만약 도망을 친다면 시위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결코
그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투항한 이후에 백작으로 봉
해진 만큼 상대방이 설사 자기를 함정에 빠뜨려 해를 입히려 하는 뜻이
있다 하더라도 황제께서는 똑똑하시니 죄가 있고 없음을 어떻게 하든
분간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에 자기가 도망을 친다
면 그야말로 죄를 겁내어 도망을 쳤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게 되고 그 이
후부터 존귀하고 영예로운 작위와 녹봉은 모조리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줄곧 항거하지 않았다. 다만 부귀 공명을 탐한 나머지
당금 무공의 고수이면서도 시위들에게 맞아 초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
의 코에서 피가 절로 흘러내리고 내상이 심한 것을 보고 위소보는 매우
통쾌함을 느꼈으며 사부를 죽인 원한을 어찌 되었든 간에 반은 갚았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때리다가는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
즉시 손을 들어 제지한 후 친위병들에게 그의 옷을 벗기고 담요로 그의
몸을 둘둘 감도록 했다. 이때 풍석범은 이미 한 가닥의 숨만 남아 있었
을 뿐 인사불성이었다. 다륭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태가의 여덟 번째 첩에게 가도록 합시다.]
조제현 역시 웃으며 말했다.
[태가의 여덟 번째 첩도 벌거벗겨서 두 사람을 함께 묶는것이 어떻겠
소?]
시위들은 매우 즐거워했으며 우렁차게 커다란 소리로 좋다고 고함을 질
렀다. 다륭은 도통의 여덟 번째 마누라의 벌거벗은 모양을 보고 싶어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내가 통솔하지.]
일행이 풍석범을 떠메고 막 출발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두 명의 친위병
이 재빠른 걸음으로 달려와서 위소보에게 보고했다.
[대인께 알립니다. 첨수정 골목 태 도통의 바깥채는 지금 발칵 뒤집히
다시피 했으며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답니다.]
여러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하나같이 생각했다.
(어떻게 소식이 누설되었을까? 태 도통이 방비를 하고 있다면 이거 야
단났는걸!)
위소보는 물었다.
[어떤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가?]
[소인 등 모두 여덟 명이 대인의 명을 받고 첨수정 골목 전후에서 염탐
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때의 낭자군(娘子軍) 삼사십 명이....]
위소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낭자군이라니?]
그 친위병이 말했다.
[대인에게 아룁니다. 그 한떼의 사람들은 모두 발이 큰 여인들이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밀가루 반죽을 밀어 칼국수를 만들 때 사용하는 막대기
를 들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빨래 방망이를 들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문 빗장과 지게 막대기를 들고 태 도통의 바깥 채로 들어가 우지끈 뚝
딱 하고 마구 부셔 대기 시작했으며 어여쁘고 매끈한 젊은 낭자를 끌어
내더니 가죽 채찍으로 매섭게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거 이상하군. 다시 알아보도록 하게.]
두 명의 친위병은 즉시 대답하고 나갔다. 두 번째로 친위병들이 달려와
서 보고를 했다.
[대인께 아룁니다. 태 도통이 빠르게 말을 타고서 이미 첨수정 골목으
로 달려왔습니다. 그는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있었고 왼발은 신발을
신었으나 오른발은 맨발이었습니다. 원래 낭자군을 이끌고 첨수정 골목
을 치러 온 사람은 바로 태 도통의 본부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그만 왁, 하니 소리내어 웃었다. 그제서야 태
도통의 부인이 질투심을 일으켜 작은집을 때려부수는 것임을 알게 되었
다. 그 친위병은 여기까지 이야기하다가 참 우습다는 듯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 부인은 태 도통을 잡더니 다짜고짜 철썩철썩 따귀를 갈기고는 다시
발길질을 해댔는데 정말 대단했습니다. 태 도통은 그저 굽신굽신하며
연신 말했지요. '부인 고정하시오!']
다륭은 손짓발짓 하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태가가 꼼짝없이 당하게 되었군.]
[형님, 빨리 사람들을 이끌고 달려가 싸움을 말리십시오. 이번에야말로
태가는 형에게 꼬투리를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그의 전봉영이
우리 어전시위와 맞서지 못할 것을 보장합니다.]
다륭은 그의 깨우침을 받고 크게 기뻐서 손으로 자기의 이마를 탁 치며
웃었다.
[나는 정말로 멍청하구나. 이와 같이 좋은 기희를 붙잡지 못하다니. 형
제들이여! 우리 모두 다 구경 갑시다.]
그는 시위들을 이끌고 첨수정 골목으로 달려갔다.
第138章. 사형수를 바꿔치다
위소보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풍석범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을 어떻게 처치해야 할까? 그를 놓아 준다면 반드시 이 일을
황상에게 고자질할 것이다. 설령 나의 꼬투리를 잡지 못한다 하더라도
황상께서는 반드시 내가 부린 수작임을 짐작하실 것이다.)
그는 두 손을 뒷짐 진 채 화청에서 서성거리다가 다시 생각했다.
(날이 밝기만 하면 모형을 죽여야 하는데 무슨 방법이 있어 그의 목숨
을 구할 수 있을까? 대명부(大名府) 사형터에서 사람을 가로챈다는 것
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사형터라, 사형터…)
갑자기 그의 뇌리에 한 토막의 연극이 떠올랐다.
(법장환자(法場換子)! 즉, 사형터에서 아들을 바꾼다는 연극이 아닌가!
맞다. 설강(薛剛)이 화를 불러일으켜 온 가족이 멸족을 당하게 되었을
때 서 아무개라는 휜 수염의 늙은이가 자기의 친아들을 사형터에서 설
아무개라는 갓난아기와 바꿔치기 했지…)
그는 연극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극중 인물들의 이름은 제대로 기억하
지 못했다. 그러나 그 줄거리만은 똑똑히 외우고 있었다. 법장환자라는
연극을 생각하게 되자 곧이어 다른 한 토막의 연극이 다시 생각났다.
(수고구고(搜孤救孤)! 이 이야기도 비슷한 내용이다. 정앵(程櫻)
이라고 부르는 검은 수염이 자기의 아들과 주군의 아들을 바꾸어 놓고
자기의 아들이 참사당하게 한 후 자기 주인의 아들을 구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 정말 다행이다. 다행히 모형의 나이가 내 아들의 나이와
같지 않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호두나 동추를 사형터로 보내
머리를 자르게 하고 모형을 바꿔치기 해야 하지 않는가! 친구의 의리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좋아, 좋아!)
그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풍석범을 다시 한번 힘주어 걷어차고는 말
했다.
[너의 운수가 나쁘지 않아 이 위 대인께서 너를 의붓아들로 거두어들이
도록 하겠다. 위 대인의 친아들은 모형과 맞바꾸기에는 너무 어리니 너
와 같은 의붓아들을 내세우는 것이다. 의붓아들이라면 죽어도 상관없
다.]
그는 친위병 대장을 불러서 은밀한 당부를 하고는 그에게 천 냥의 은자
를 내렸다. 그리고 다시 천 냥의 은자를 주어서는 일을 처리하는 나머
지 친위병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그 대장은 허리를 굽히고 고맙다
는 인사를 하며 말했다.
[대인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일체의 모든 것을 적절히 처리하겠으며 결
코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위소보는 안배가 끝나자 내당으로 들어갔다. 일곱 명의 부인과 아들딸
들이 모두 태후에게 불리어 황궁으로 들어가고 없는지라 집안은 썰렁했
다. 그는 옷을 입은 채로 침대 위에서 한참 동안 누워있자 얼마 후 날
이 밝았다. 진시쯤 되었을 때 궁에서 성지가 떨어졌다.
[강양대도 모십팔은 대역무도하게도 대신에게 욕을 했으니 즉시 참수토
록 하되 무원대장군이며 일등 녹정공인 위소보가 참수형을 감독토록 하
라.]
위소보는 유시를 받들고 저택 밖에서 친위병들을 불렀다. 그러자 다륭
이 수십 명이나 되는 어전시위들을 데리고 모십팔을 압송해 왔다. 모십
팔은 눈가가 시퍼렇고 코가 부어올라 있었으며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심한 고문을 받은 것이 분명하였다. 그는 위소보를 보자
마자 대뜸 욕을 퍼부었다.
[위소보, 이 뻔뻔스러운 작은 매국노야! 오늘 네가 나의 머리를 자르는
것을 감독한다지? 나는 조금도 억울하지 않다. 내가 그때 눈이 멀어서
양주의 갈보집에서 너라는 작은 매국노를 북경으로 데리고 온 것이 잘
못이었다.]
친위병들은 큰소리로 호통을 내질렀으나 모십팔은 더욱더 거칠게 욕을
해댔다. 위소보는 그의 그런 행동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륭에게 물었다.
[태가는 어떻게 되었소?]
다륭은 웃었다.
[어젯밤 내가 달려가 보니 태 도통은 이미 부인에게 할퀴어 온 얼굴이
상처투성이더군. 그가 나를 보자마자 그 낭패스러워하는 꼬락서니라니,
정말 가관이더군. 나는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나서서 그의 부인을 말렸고
또 그 여덟 번째 마누라를 내 집으로 모셔 나의 두 첩이 그녀를 벗하게
해주었다네. 태가는 고맙다고 하며 감격해서 어쩔 줄을 모르더구만.]
위소보는 웃었다.
[그 여덟 번째 마누라의 모습은 어떻든가요?]
다륭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허허,대단해.]
위소보는 웃었다.
[형님은 색을 보고 다른 뜻을 품어 불난 집에서 노략질을 하는 것 아니
오?]
다륭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형제는 안심하도록 하시게. 그대의 형이 그토록 못난 줄 아는가? 태가
는 비록 나의 적수이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일을 이 형은 결코 하지 않
을 것이네.]
즉시 두 사람은 모십팔을 압송해서 채소를 팔고 있는 저자거리 입구에
있는 사형터로 갔다. 다륭은 말을 타고 위소보는 커다란 마차를 타고
갔다. 모십팔은 소가 끄는 수레 위에 앉아 있었는데 두 손은 뒤로 묶여
있었고 목에는 나무 팻말이 매달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
여 있었다.
<흠범(欽犯) 모십팔을 즉시 참수한다.> 소달구지는 노새와 말들을 팔고
사는 시장 큰 거리에서 서쪽으로 나섰고 백성들은 다투어 모여들어 구
경을 했다. 모십팔은 길을 가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노래를 불렀
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십팔 년 후에 다시 영웅호걸로 태어나리라. 다시 모십팔의 이름
을 지니고 다시 참수를 당하리라!]
거리의 백성들은 큰소리로 갈채를 보내며 그를 칭찬했다.
[사내답다. 정말 굳센 사내다!]
말시장이 있는 큰 거리와 선무문(宣武門)의 큰 거리가 교차되고 있는
십자로의 입구, 즉 채소를 팔고 사는 저자거리 어귀의 사형터에 도달하
였다. 위소보는 이미 친위병들을 시켜 밤을 도와 차일을 쳐 놓도록 했
다. 차일의 앞뒤로는 친위병들이 지극히 엄밀하게 지키고 있었다. 다륭
은 강희의 당부를 받고 혹시나 천지회에서 사형터의 죄수를 낚아챌까
봐 이미 구문제독에게 알려서 이천 명의 관병들을 사형터의 사방에서
지키도록 했다. 모십팔은 늠름하게 사형터의 한복판에 버티고 서서 부
르짖었다.
[우리들은 모두 대한나라의 백성이다. 비록 화려한 강산을 오랑캐에게
점거당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오랑캐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다!]
위소보는 마차에서 내려 차일 안으로 들어섰고 마차 역시 차일바로 밖
에 섰다. 위소보는 자리에 앉았고 다륭을 옆자리에 앉게 했다. 다륭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범인은 대역무도한 말만 하는군. 이곳에서 사람의 인심을 선동하니
우리들은 빨리 이자의 목을 자르도록 합시다.]
위소보는 말했다.
[예!]
그는 호통을 내질렀다.
[범인을 데리고 오너라!]
, 네 명의 친위병들은 모십팔을 차일 안으로 밀어넣고 그를 내리 눌러
서는 무릎을 끓도록 했으나 모십팔은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았다. 위소
보는 말했다.
[무릎을 꿇게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륭에게 말했다.
[형님, 저사람이 확실한지 한번 알아보십시오.]
[틀리지 않네.]
[이제 틀림없는 사람이란 것을 확인했으니 즉시 국사범 모십팔을 참수
하도록 하라.]
그는 먹을 듬뿍 먹인 붓을 들어 나무 팻말 위에다가 커다란 원을 그리
고는 그 나무 조각을 던졌다. 친위병 한 명이 그 나무 조각을 손에 들
고서는 모십팔을 끌어 내갔다.
[다형, 제가 형님에게 좋은 물건을 한가지 보여 드리죠.]
위소보는 소맷자락 안에서 한 묶음의 손수건을 꺼내서 다륭에게 내밀었
다. 손수건에 수놓아져 있는 것은 한 폭의 춘궁도(春宮圖)였는데 그 그
림 속의 남녀는 얼굴이 준수하고 아름다웠으며 그 자태에는 생동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다륭은 이를 보자 그만 대뜸 그 춘궁도에 시선이
못박히고 말았다. 한 장의 손수건을 넘기자 그 손수건에는 또 다른 한
폭의 춘궁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체위가 매우 특이했다. 다륭은 웃으
며 말했다.
[이 모양은 정말 이상야릇하기 짝이 없군.]
그는 계속해서 들추어 보았는데 손수건마다 수놓아진 인물의 체위는 가
면 갈수록 이상야릇했으며 어떤 것은 한 남자가 두 여자를 희롱하고 있
었고 또 어떤 것은 두 남자가 세 여자와 즐기고 있었다. 다륭은 그와
같은 그림을 대하자 하체가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형제, 이 보물은 어디서 난 것인가? 이 형에게 한 벌 팔게나.]
위소보는 웃었다.
[이것은 모두 형님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다륭은 마치 엄청난 보물이나 얻은 것처럼 싱글벙글하며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는 한 묶음의 손수건을 매우 정중히 품속에 갈무리했
다. 바로 이때 갑자기 밖에서 포성이 세 번 들려오고 친위병 대장이 들
어와 보고를 했다.
[시간이 되었으니 대인께서 참수를 감독하십시오.]
위소보는 말했다.
[좋아!]
그는 몸을 일으켜 다륭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서 보니 모십
팔이 고개를 푹 떨군 채 맥이 빠진 사람처럼 사형터의 한복판에 꿇어앉
아 있었는데 마치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곧이어 고수들이 북을 치기
시작했고 북소리가 멈추어지자 붉은 옷을 걸친 희자수가 손을 번쩍 쳐
들었다가 귀두도(鬼頭刃)를 내리치자 범인의 머리가 싹둑 잘려져 나갔
다. 곧이어 희자수가 왼발로 머리통을 걷어찼다. 범인의 몸이 앞으로
푹 꼬꾸라지면서 모가지에서 더운 피가 쿨쿨 쏟아져 나왔다. 다륭은 말
했다.
[일은 다 끝냈군, 우리는 헤어지세. 나는 가서 황상께 아뢰야 되겠네.]
위소보는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다형, 이 사람은 나와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지만 황상이 엄밀한 성지
를 내렸기 때문에 그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아!]
그늑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흐느껴 울었다. 다륭은 한숨을 내쉬
었다.
[형제는 정말로 의리가 있군. 그대는 그의 시신을 잘 수렴해서 안장시
켜 주게. 그러면 저승에 가서라도 마주 대할 수 있을 것이네.]
위소보는 대답하고 흐느껴 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위소보는 소맷자
락으로 눈물을 훔쳤으나 기실은 소맷자락 안에 숨기고 있던 생강으로
두 눈을 부벼서 두 눈이 빨개지도록 만들었고 눈물이 흘러나오도록 했
던 것이다. 그는 속으로 웃으면서 사람을 바꿔치기 하는 것에 성공한
것을 기뻐해 마지 않았다. 다륭은 그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하고 그
를 마차 위로 부축해 올렸다. 그제서야 그는 마차를 타고 떠나갔다.
시위병들은 마차를 호위하며 곧장 공작부로 돌아갔다. 다른 몇 명의 친
위병들은 돗자리로 범인의 시체를 둘둘 말아서 한쪽 옆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관 안에다 집어넣고 관 뚜껑을 닫고 못을 박았다. 참수형을 구
경한 백성들은 다투어 이야기했는데 모두들 모십팔이 죽기 전에 크게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보니 정말 영웅호걸이라고 했다. 그러나 두려워
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꾸짖으며 국사범이 대역무도한 말을 했으니 화를
당하지 않으려면 결코 그를 칭찬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위소보는 공작부 앞에 이르자 마차에서 내렸고 그 마차는 곧장 남쪽으
로 나아가 북경성을 벗어난 이후 곧장 남쪽 양주를 향해 갔다.
이윽고 위소보는 궁 안으로 들어가 복명하게 되었다. 그러자 강희는 즉
시 그를 불러 만났다. 그는 이미 다륭의 보고를 통해 위소보가 모십팔
의 목을 자르는 참수형을 감독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는 사실을 알
고 있었다. 이때 그의 두 눈이 붉게 부어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충심으로 군주를 위해 일한다는 것
이 매우 갸륵하다는 생각이 들어 부드러운 어조로 위로의 말을 했다.
[소계자, 그대가 잡아온 그 나찰병들의 대다수는 석방되어 제나라로 돌
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석방했네. 그러나 이백여 명은 중국에 남기를
원하더군.]
[북경은 모스크바보다 훨씬 날씨가 좋을 뿐만 아니라 먹고 입는 것 또
한 나은 편이지요. 그야말로 모스크바에서 사황이 되는 것보다 신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강희는 미소지었다.
[나는 이 나찰병들로 아라사좌령(俄羅斯佐領)을 만들기로 했는데 이 나
찰병들은 그대가 통솔하도록 해주게. 그러나 그대는 그들이 북경에서
일을 일으키지 않도록 잘 다루어야 할 것이네.]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무릎을 꿇고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다. 궁에서
나오자 귀순하는 나찰병들은 이미 태화문(太和門) 밖의 금수교(金水橋)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찰병들은 하나같이 새로 만든 청나라 병졸
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매끈하게 몸에 맞는 것이 퍽이나 힘차 보였
다. 위소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각기 은자 이십 냥을 나누어 주고 사흘
간의 휴가를 준다고 말했다. 나찰병들은 크게 기뻐했다.
강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나찰병들은 줄곧 청나라의 군중에 복무
를 했으며 충성을 다했고 달리 마음을 품지 않았다. 외국의 사신들이
북경에 왔을 때 중국 황제가 나찰관병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모
두 존경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찰병들이 늙어
점차 죽어 가자 아라사좌령의 편제는 그제서야 황제의 결제를 받아 철
폐되었다.(나찰병들을 포로로 하여 청나라 군사에 편입시킨 상세한 사
정은 유정섭(兪正燮)이 지은 <계사류고(癸巳類稿)> 제9권 아라사좌령고
(俄羅斯佐領考)에 자세히 나옴. 소일산이 지은 <청대통사(淸代通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포로들을 북경으로 바치자 현엽(玄燁)
은 이들을 사면하여 좌령으로 편입시켰는데 바로 아라사의 부족병이라
할 수 있었다. 그 후예들은 아직까지도 존재한다.')
위소보가 공작부로 돌아왔을 때 공주와 나머지 여섯 부인들 그리고 세
자녀들은 이미 궁에서 나와 있었으며 하나같이 태후에게 적지 않은 상
을 하사 받아서 좋아하고 있었으나 유독 공주만은 즐겁지 않은 표정이
었다. 위소보는 그 사연을 공주에게 물어 보았다. 태후는 일곱 명의 부
인들에게 똑같이 대했으며 공주는 그녀의 친딸임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의 다정한 말도 나누어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물론 그 가
운데의 숨은 뜻을 알고 있어서 속으로 생각했다.
(태후가 그대에 대해서 나쁘게 대하지 않은 것만 해도 너의 지아비의
체면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태후께서는 이러 모로 생각이 깊은 분이오. 그대에게만 특별히 잘 대
해 준다면 나머지 여섯 명의 부인들이 질투심을 일으킬 것이 아니겠
소.]
공주는 노하여 말했다.
[그분은 나의 친어머니예요. 나에게 좀더 잘해 준다고 해서 설마 그들
이 질투심을 일으키겠어요?]
위소보는 그녀를 얼싸안으며 웃었다.
[내가 그대에 대해서 특별히 잘 대해 준다면 그녀들이 질투심을 일으키
지 않을 것 같소?]
다른 부인들이 재잘거리면서 배꼽을 잡도록 웃음을 터뜨렸고 공주는 솔
직한 성격이라 모든 사람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자 그제서야 그만 마음을
돌리었다.
이후 십여 일은 왕궁 대신들이 잔치를 베풀어 위소보가 공을 세운 데
대해서 축하를 했으며 연극을 보고 도박판을 벌이며 밤에는 매일 번갈
아 부인들을 바꾸며 즐겼다.
이날 다륭이 찾아와서 풍석범이 십여 일 동안 실종이 되었는데 그의 가
족이 이미 순천부(順天府)에 실종신고를 했다고 말했다. 다륭이 나직이
물었다.
[형제, 우리가 그날 밤 그를 죽어라 하고 때려 준 이후에 어떻게 했
지?]
[그 후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지요. 그 녀석이 집으로 안 가면 어디로
가겠어요.]
[그대가 그를 죽인 것은 아니겠지?]
[만약에 내가 사람을 시켜서 그를 죽였다면 형은 옆에서 반드시 구경하
셨을 것입니다. 다형, 그대는 보았나요?]
다륭은 재빨리 말했다.
[아니, 아니. 우리들은 그저 그를 실컷 패주기만 했지 언제 죽였단 말
인가?]
[그렇지요, 형제는 성지를 받들어 군사를 이끌게 된 이후 비록 부총관
의 일은 그만두었지만 어전시위들이 한 짓이라면 어떠한 일이든 여전히
형과 더불어 함께 책임을 지겠소이다.]
[뭐, 별다른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걸세. 풍씨 집안에서는 그날 전봉영
태가가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갔고 그 후에 풍씨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일세. 순천부에서는 친히 태가를 방문하고 그날의 일을 물었네. 태가
는 매우 겸연쩍어하며 얼렁뚱땅 얼버무리면서 더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는군. 그러나 계속해서 묻자 수치가 분노로 변해서는 태가가 크게 신경
질을 부리는 바람에 순천부에서도 더 조사하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는 몸을 일으켜 위소보의 어껫죽지를 두드리며 말했다.
[형제, 그대는 복을 타고난 장수일세. 그 어찌 이토록 일이 공교롭게
되리란 것을 짐작이나 했겠나. 태가의 부인이 하필이면 빠르지도 늦지
도 않게 그날 밤 공교롭게 낭자군을 데리고 첨수정 골목으로 쳐들어올
지 그 누가 알았겠느냔 말일세. 이렇게 되면 모든 일에 대해서 태가가
책임을 지게 되겠지.]
그는 속으로 풍석범은 반드시 위소보에게 살해당한 것임을 짐작하고 있
었다. 어 일에 대해서는 자기도 약간 책임을 져야 할 판이었지만 전봉
영의 태 도통에게 화를 전가시킨 데 대해서는 크게 흡족하게 생각했다.
그는 태 도통의 본부인이 그때 나섰던 것이 공교로운 일이 아니라 위소
보가 시간을 맞추어서 사람을 보내 그녀에게 밀고했다는 사실까지는 모
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위소보가 친위병을 파견하여 모십팔을 참
수하는 것을 감독하였을 때 차일 안에다가 밀실을 만들어 풍석범을 그
안에 숨겨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십팔이란 것을 확인하고 차일에서 끌어낼 때 위소보가 춘궁도가 수놓
아진 손수건을 꺼내서 다륭의 시선을 춘궁도로 모아지게 했고, 그 순간
수하인 친위병들이 재빨리 모십팔과 풍석범을 바꿔치기 했던 것이다.
이때 풍석범은 이미 인사불성이 되었고 온 얼굴에 피칠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옷차림도 모십팔과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사형터에서 고
개를 푹 숙이고 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만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풍
가와 모가 두 사람의 얼굴 모습이나 몸매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그 누구
도 이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친위병들은 모십팔을 안아서 차일 옆에 바짝 대 놓은 위 대인의 마차에
올려 태우고는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말을 쉬지않고 양주로
내려 보내었는데 황하를 지나게 되었을 때야 모십팔에게 모든 진상을
설명하고 다시 그에게 삼천 냥의 은자를 건네주었던 것이다.
모십팔은 목숨을 건지게 되자 마음이 크게 변했으며 위소보가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자기를 구출해 준 것을 보면 결코 의리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자연 나중에는 다시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위소보는 연일 손님 대접을 받는데도 그만싫증이 났고 천지회
의 형제들이 걱정되었다. 황제의 수단이 가면 갈수록 더욱 무서워지고
있는데다 자기가 공작부에서 복을 누리고 있는 이때에 청목당의 형제들
은 황제에게 일망타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어찌 되었
든 간에 좋은 방책을 강구할 수 있도록 상의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리하여 그는 부잣집 공자의 차림을 하고 쌍아로 하여금 시종으
로 분장을 하도록 하여 두 사람은 천교에 이르렀다. 그리고 사람들 가
운데에서 반 시진 동안 시간을 보낸 끝에 서천천이 등뒤에 약상자를 메
고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위소보는 즉시 찻집
안으로 들어가 서천천의 옆자리에 앉아서 나직이 말했다.
[서 형!]
서천천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얼굴 가득히 노기를 띄우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위소보는 어리둥절해졌으나 곧 그의 뒤를 따라 나갔으며
서천천이 줄곧 으슥한 곳으로만 가는 것을 보고 즉시 쌍아와 함께 멀리
서 뒤를 쫓았다. 서천천은 세 곳의 골목길을 지나고 두 곳의 조그만 거
리를 지나서 어느 조그만 골목길 앞에 이르렀다. 그 골목길의 입구에는
커다란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서 있었다. 그는 그 골목 안으로 들어가
더니 다섯 번째 집 대문의 고리를 잡고 몇 번 두드렸다. 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번강이 나왔다. 그는 위소보를 보더니 잠시 어리둥절해 했으나
역시 얼굴 가득 노기를 띄우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앞으로 다가가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번형, 그 동안 안녕하셨소?]
번강은 싸늘히 코웃음치며 대답하지 않았다. 서천천은 얼굴 표정을 굳
히며 물었다.
[위 대인, 그대는 병마를 데리고 우리들을 잡으러 온 것이오?]
[서 셋째 형, 어째서……어째서 그와 같은 농담을 하시오?]
번강은 재빠른 걸음으로 골목 밖으로 나가 살펴보더니 재빨리 집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위소보와 쌍아는 두 사람을 따라 마당을 가로질러
서 대청에 이르렀다. 그리고보니 이력세, 기청표, 현정 도인, 마언초,
전노본 등 몇몇이 모두 대청에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위소보를
보자 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위소보는 두 손을 맞잡았다.
[여러 형들, 그 동안 안녕하셨소?]
현정 도인은 노하여 부르짖었다.
[우리들은 그대에 의해서 해침을 받아 죽지 않았으니 괜찮은 편이지.]
그는 싹 하니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위소보는 한걸음 물
러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그대는 어째서 나에게……나에게 이러시오? 내가 무슨……그
대들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이오?]
현정 도인은 큰소리로 노기를 터뜨렸다.
[총타주는 그대에게 해침을 받아 죽었고, 둘째 형 역시 그대에게 죽임
을 당했소. 그리고 며칠 전 그대는 또 모십팔을 죽이지 않았소? 우리…
…우리는 그야말로 그대의 힘줄을 뽑고 가죽을 벗기고 싶은 증오심에
차 있소.]
위소보는 크게 다급해져서 재빨리 말했다.
[그런……그런 일은 없소.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오.]
현정 도인은 한 걸음 다가들어 왼손으로 위소보의 옷자락을 움켜잡더니
외쳤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들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대를 죽이려 했는데
……그대라는 어린 매국노가 스스로 죽으려고 뛰어 들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총타주의 하늘에 계신 영이 돌보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군.]
위소보는 정세가 불리한 것을 깨닫고 즉시 몸을 돌려서는 신행백변의
재간을 펼쳐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서천천과 번강 두 사
람이 무기를 들고 그의 바로 등뒤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부득이
말했다.
[모두들 한집안의 형제와 다름이 없는데 어째서…어째서 이리 성급하게
구는 것이오?]
현정은 말했다.
[누가 그대와 같은 작은 매국노와 형이니 아우니 한다던가? 그대와 같
은 꼬마의 교묘한 변명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 먼저 너의 그 개 같고
이리 같은 심장을 도려내서 총타주와 둘째 형을 제사지낸 후에 말하기
로 하자.]
그는 왼팔로 위소보를 잡아당겼다. 위소보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억울하오, 억울하오.]
쌍아는 그가 위급하게 된 것을 보고 품속에서 나찰의 단충을 뽑아 꽝,
하니 공포 한 방을 쏘았다. 대뜸 집안은 연기로 가득 찼고 그 즉시 쌍
아는 손을 뻗어 위소보의 등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현정은 과거 서양
화기에 고통을 당한 적이 있었고 부친과 형들이 모두 그 화기에 맞아
죽었는지라 총소리를 듣자마자 크게 충격을 받아 위소보를 쌍아에게 빼
앗기고 말았다. 쌍아는 위소보를 잡은 채 대청 모퉁이로 몸을 날린 후
위소보의 앞을 가로막고는 단총으로 사람들을 겨눈 채 호통을 쳤다.
[그대들은 도리를 따지자는 거예요? 도리를 저버리자는 거예요?]
현정은 두 눈이 붉어지며 부르짖었다.
[모두들 달려들어 그들과 사생결단을 내도록 합시다!]
그는 검을 쳐들고 먼저 서둘러 달려들려고 했다. 그때 전노본이 손을
뻗쳐서 그를 잡고 말했다.
[도장,잠깐만!]
그는 쌍아에게 말했다.
[그대에게 어떤 도리가 있는지 어디 말씀해 보시지.]
쌍아는 말했다.
[좋아요!]
그녀는 위소보가 어떻게 하여 진근남과 여러 영웅호걸들을 구해서는 도
망을 치게 하였고, 또 어떻게 신룡교에 잡혀 통흘도로 가게 되었으며,
진근남이 어떻게 정극상과 풍석범 두 사람에게 살해를 당했으며, 풍제
중은 어떻게 음모가 탄로되어 자기의 총에 맞아 죽었고, 강희가 두 번
세 번 위소보에게 천지회를 없애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위소보는 그 명
령을 받들지 않았으며, 최근에는 또 어떻게 하여 사형터에서 사람을 바
꿔치기 하여 모십팔을 구해 냈는가 하는 사실들을 일일이 이야기했다.
그녀는 결코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지도 못했다. 그러나 군호들과 그녀는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터
이라 평소 그녀가 거짓말을 조금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
다. 거기다가 그녀가 그 즉시 말을 해댔으며 추호도 망설이거나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 이야기를 갑자기 삽시간에 날조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위소보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벼슬을 버렸으며 백작부가 대포에 맞아 날아가게 된 사실을 뭇사람들은
친히 목격하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풍제중의 행동들을 곰곰이 돌이켜보
니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현정은
말했다.
[그렇다면 오랑캐 황제의 성……성…제기랄 성지 가운데는 어째서 위
향주가 총타주를 죽였다는 말이 있지?]
그가 위 향주라고 이름을 고쳐 부른 것을 보면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어느 정도는 믿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쌍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기청표가 말했다.
[그것은 오랑캐 황제의 음모이외다. 위 향주로 하여금 본희와의 관계를
딱 끊고 차후로는 죽으라 하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오랑캐의 벼슬아치
노릇을 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외다.]
서천천은 말했다.
[기 형제의 말이 맞는 듯하오.]
그는 검을 검집에 넣고 두 무릎을 꿇더니 위소보에게 엎드리며 말했다.
[우리 한떼의 멍청이들은 너무나 경솔하여 그만 위 형제에게 죄를 지을
뻔하였구려. 만번 죽을죄를 지었으니 기꺼이 벌을 받겠소.]
그러자 나머지 군도들 역시 덩달아 무릎을 끓었다. 현정은 자신의 뺨을
때리며 욕을 했다.
[죽어 마땅해, 죽어 마땅해!]
위소보와 쌍아는 재빨리 무릎을 끓고 답례했다. 위소보는 가까스로 놀
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여러 형들은 일어나시오. 모르고 한 죄는 죄가 아니오. 일시 오해가
있었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소?]
군호들은 몸을 일으키며 다시 사과를 했다. 위소보는 다시 의기 양양해
졌고 손과 발을 움직여 가며 신나게 옛 얘기들을 했다. 그가 이야기한
것은 물론 재미있고 박진감이 넘쳤으며 벌어지는 일마다 아슬아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군호들이 들을 때는 쌍아가 이야기하는 것만큼
믿음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군호들은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이
력세가 입을 열었다.
[위 향주, 진 총타주는 불행히도 간악한 자의 해침을 받아 천지회에는
우두머리가 없어진 격이 되었소. 열 당의 형제들은 줄곧 총타주를 추대
하는 일에 대하여 의논하고 있었소. 우리 청목당의 형제들은 그대를 총
타주로 추대하고 싶소이다. 다만 나머지 아홉 당의 형제들이 이에 승복
하지 않거나 또는 마음에 의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지라 모두
들 그대가 한 가지 큰공을 세웠으면 하고 생각하오.]
위소보는 연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는 총타주 노릇을 할 수 없소.]
그러나 그는 호기심이 일어서 물었다.
[그런데 무슨 큰 공을 세우라는 것이오?]
이력세는 말했다.
[세 번왕의 난은 이미 평정되었고, 대만도 오랑캐에게 정복당했으며 북
방의 나찰인 역시 위 향주에 의해 대패됐으니 우리의 반청복명의 위업
은 점점 갈수록 어렵게 되었소.]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그는 속으로 말했다.
(매우 어렵게 되었다면 모두 좀 게으름을 피우는 셈치고 반청복명을 하
지 않으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이력세는 말했다.
[오랑캐의 황제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매우 똑똑하고 부지런 한 데다
가 사람의 인심을 모을 줄도 알고 있소. 천하의 백성들은 이제 명나라
에 대해서는 점점 잊어 가고 있소. 만약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아무래도 오랑캐가 차지한 이 강산이 더욱 오래 지속될 것 같소.]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현자가 이 강산을 오래 차지하고 있는 것도 별로 나쁜 일은 아니
지.)
이력세는 말했다.
[위 향주는 매우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모두들 그대
가 계책을 세워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궁 안으로 잠입해 들어가 오랑캐
황제를 찔러 죽였으면 하고 생각하오.]
위소보는 깜짝 놀라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이건‥··‥이 일은 행할 수 없소이다.]
번강은 말했다.
[실례지만 위 향주에게 묻겠는데 이 가운데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있소
이까?]
[황궁은 시위들이 너무나 많고 거기에다가 효기영, 전봉영, 호군영(護
軍營), 화기영(火器營), 건예영(健銳營), 호창영(虎檜營) 등등이 어가
를 보호하고 있소. 단지 시위만 하더라도 어전시위가 있고 건청문시위
(乾淸門侍衛), 삼기시위(三旗侍衛) 등이 있소. 그날 신검무적 귀신수
나으리도 그토록 영웅다웠는데도 실패하여 목숨을 잃었는데 나야 더 말
해 무잇하겠소? 황상을 찔러 죽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일 중에서
도 가장 어려운 일이외다.]
군호들은 그가 거절하는 말을 듣고 불쾌하게 생각했는데 그가 다시 황
상이라 칭하는 말에 더욱더 노기가 끓어올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얼굴에 노기를 띄었다, 번강은 형제들을 한번 바라보더니 위소보에게
말했다.
[위 향주, 오랑캐의 황제를 찔러 죽인다는 것은 물론 지극히 어려운 일
이나 그대가 대국을 이끌어 나간다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법도 없을 것
같구려. 우리 형제들이 궁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야말로 한 사람도
살아 나올 생각은 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위 향주의 편안무사함은 보장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대는 본회를 위하여 적지 않은 공을 세웠고 본회
의 십여 만 명이나 되는 형제들 가운데 그대에 미치는 사람은 단 한 사
람도 없을 것이외다. 천지회와 오랑캐와는 불공대천지 원수이외다. 금
후 반청복명의 무거운 짐은 모두 위 향주께서 짊어지시게 되었소.]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일은 나로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일이외다. 황상께서는 나보
고 천지회를 멸하라고 했지만 나는 이를 행하지 않고 있소이다. 그것은
의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오. 그대들이 나에게 황제를 찔러 죽이라고 한
다면 그 역시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외다. 그 역시 의리를 배반할
수 없기 때문이오.]
현정은 노하여 부르짖었다.
[그대는 한인인데 어째서 오랑캐 황제에게 의리를 지킨다는 말씀이오?
그것이야말로……그것이야말로……]
그는 매국노라는 욕을 하려고 했으나 끝내 참고 말하지 않았다. 번강은
말했다.
[이 일은 매우 중대한 일이오. 위 향주가 즉시 대답하기가 어렵다는 것
은 있을 수 있는 일이외다. 그러나 그대가 자세히 생각해 보고 다시 여
러 사람들에게 분부를 내리도록 하시오.]
위소보는 재빨리 말했다.
[좋소, 좋소. 내 자세히 생각해 보기로 하겠소이다.]
서천천은 그가 조금도 성의없이 대답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아무쪼록 위 향주께서는 고 총타주의 뜻을 잊어버리지 말고 또 나라를
잃게 된 참화를 잊지 않도록 바라오. 무릇 우리 한인들은 결코 오랑캐
의 노예가 될 수 없소.]
위소보는 말했다.
[맞았소. 맞았소. 그것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것이오.]
그러나 군호들은 그의 말이 솔직하지 못한 것을 보고 모두 다 잠자코
있었다. 위소보는 이 사람을 쳐다보았다 저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며 웃
으면서 입을 열었다.
[여러 형들은 어째서 말씀을 하지 않으시오?]
군호들은 여전히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흥미가 없다는 생
각이 들었고 바늘방석 위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잠시 헤어지도록 합시다. 나중에 내가 자세히
생각해 보고 다시 여러 형들과 상의하도록 하죠.]
그는 몸을 일으켰다. 군호들은 골목 어귀까지 그를 전송하였으며 공손
하게 절을 하고 작별을 고했다. 위소보는 저택으로 돌아오자 상방에 앉
아 답답한 심정을 달랬다.
이튿날 오후가 되자 궁에서 다시 성지가 내렸는데 황상께서 그를 부른
다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즉시 서재로 가서 배알을 했다. 강희는 물었
다.
[풍석범이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위소보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그 일을 나에게 묻지?)
그는 말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풍석범이 실종된 그날 밤에 소신은 줄곧 다 총관과
어전시위들과 함께 놀았습니다. 그 이후 들어 보니 전봉영 태 도통이
풍석범을 데려갔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그 후 풍석범이 실종되었다고 하
더군요. 이들 대만에서 항복해 온 사람들은 남의 눈치를 보고 일을 처
리하는 것이 이상야릇하기 그지 없습니다. 몰래 불측한 도모를 꾀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소신이 자세히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강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아, 풍석범의 행방을 분명히 알아보도록 한 이후 즉시 보고를 하도
록 하게. 나는 대만에서 항복해 온 사람들에게 그들의 안전을 지켜 주
겠다고 응낙했네. 그런댜 그 사람이 갑자기 실종이 되었으니 내가 책임
을 지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나는 천하 사람들에게 신의를 잃는 것이 아
니겠는가?]
위소보는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황상의 이 한 마디는 정말 무거운 것이다. 설마 하니 그는 내가 풍석
범을 죽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예.]
第139章. 위소보의 갈등
강희는 다시 물었다.
[어제 저녁 그대는 은행 골목 안으로 들어갔었는데 놀기 좋았는가?]
위소보는 어리둥절해졌다.
[은행 골목이라니요?]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천지회의 군호들이 머물고 있는 골
목 입구에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던 것으로 보아 그 골목을
바로 은행 골목이라 하는가 보다 생각했다. 황제가 은행 골목이라는 이
름까지 알고 있는데 무엇을 더 속일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자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두 다리는 맥이 빠져 버렸다. 그는 즉시
무릎을 끓고 큰절을 했다.
[황상께서는 만리를 내다보시는군요. 어찌되었든간에 소신은 충성을 다
하고 있습니다.]
강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반적들이 그대에게 나를 해치자고 다그쳤지만 그대는 한사코 그를
응낙하지 않았다지? 그대는 나에게 의리를 지키려 한 모양이군. 그러나
소계자, 그대는 한평생 두 척의 배를 딛고 서 있을 텐가?]
위소보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황상께서는 굽어살피십시오. 소신은 천지회의 총타주가 될 수는 없습
니다. 황상께서는 마음을 푹 놓으십시오.]
강희는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중국의 황제가 된 나는 요순우탕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백성을 아끼
고 사랑하였으며 어진 정치를 볘풀어 백성들을 다스리려고 애썼네. 명
나라의 황제 중 그 누가 나보다 낫더란 말인가? 이제 세 번왕은 이미
평정되었고 대만도 수중에 넣었으며 나찰국도 다시는 감히 변경을 침범
하지 못할 것이네. 이로써 천하는 태평해졌고 백성들은 즐거이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네. 그러나 천지회의 반적들은 반드시 주씨의 명나라를
되찾겠다고 떠벌리고 있는데 백성들이 주씨의 황제 치하에서 보냈던 지
난 날들이 오늘보다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위소보는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뭐, 그거야 내가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소신은 봉양화(鳳陽花)라는 북을 치는 사람이 노래하는 것을 들은 적
이 있습니다. 주씨 황제가 나선 이래 십 년 중에 구 년은 땅이 황폐해
지더라. 대갓집 사람들은 전답을 팔게 되고 소작인들은 아들을 팔더라.
그러나 이제 날씨도 순조로워 국태민안하고 황상께서는 오생어탕이라.
주씨 황제를 황상에게 비한다면 그야말로 십만팔천 리나 떨어져 천리마
를 타도 쫓아올 수 없을 지경이라 했습니다.]
강희는 빙그레 웃었다.
[그대는 그만 일어나게.]
그는 서재에서 서성거리다 말했다.
[부황은 만주 사람이지만 나의 친어머니는 효강황후로서 한인 출신의
기인(旗人:만주인)일세. 그러니 나도 절반은 한나라 사람이라 할 수 있
네. 나는 천하의 백성들을 똑같이 대하고 있으며 조금도 한나라 사람들
을 차별하지 않는데 어째서 그들은 그토록 나를 미워하고 나를 죽이려
고 하는 것일까?]
위소보는 말했다.
[그들 반역도들은 대역무도하고 멍청하기 그지없습니다. 황상께서는 그
들에게 마음쓰지 마십시오.]
강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젓더니 처량하고도 외로운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만주 사람에게도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듯이 한인들 역시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네.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너무 많
아서 모두 죽일래야 죽일 수도 없고, 그들을 감화시켜 올바른 길을 밟
도록 하고 싶지만 나에게 그만한 재간도 없네. 아, 황제가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네.]
그는 위소보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말했다.
[그대는 가 보게나.]
위소보는 큰절을 하고 물러났다. 그의 전신은 축축하고 차가웠다. 조금
전 온몸에 식은땀을 흘릴 때 속옷까지 다 젖었던 것이다. 그는 궁문을
나서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휴, 하고 내쉰 후 속으로 생각했다.
(천지회의 형제들 중에 다시 첩자가 스며들었군. 풍제중이란 첩자를 죽
였는데 다시 또 한 명이 나섰구나.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나에게 황상
을 찔러 죽이자고 했던 말들을 황상께서 어떻게 알고 계실 수 있단 말
인가. 과연 어느 누가 첩자인지 알 수 없구나.)
그는 저택으로 돌아와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전혀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황상께서는 나에게 풍석범의 행방을 알아내라는 책임을 지웠다. 황상
의 표정을 보건대 내가 부린 수작이라고 의심은 하고 있지만 정확히는
모르고 있는 듯했다. 이 일을 또 어떻게 얼버무릴 수 있을까? 어제 쌍
아는 은행 골목에서 내가 사형터에서 사람을 바꾸어 모 형을 구한 일들
을 모두 이야기했다. 다행히 나는 그녀에게 풍석범으로 바꿔치기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쌍아는 반드시 그대로 털어
놓았을 것이고 그 첩자는 곧 그 사실을 황제에게 고자질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일등 녹정공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내 성을
갈아야 할 지경이 될 것이다.)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 보고 하였으나 아무래도 번거롭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전에는 궁 안으로 들어가 강희와 우스갯소리를 하며 흐뭇해
했는데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황상의 위엄이 날로 더해 가는지라 터무
니없는 말들을 함부로 내뱉을 수도 없게 되었다고 느꼈다.
사실 위소보는 무원대장군이니 일등 녹정공이니 하는 대관은 별로 재미
있는 노릇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차라리 어릴 적 여춘원에
서 심부름꾼을 하고 있었던 때가 오히려 대견스럽고 즐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생각했다.
(천지회의 형제들은 나에게 황상을 찔러 죽이라고 핍박하고, 황상께서
는 나에게 천지회를 없애라고 핍박하고 있다. 황상께서는 나에게 한평
생 두 척의 배를 딛고 있겠느냐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제기랄! 나는
하지 않겠다. 어떤 노릇도 하지 않겠다.)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고 뇌까리고 보니까 갑자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품속에서 주사위를 꺼내서 탁자 위
로 내던지며 빌었다.
(하지 않는 것이 좋다면 만당홍이 나오너라.)
그는 주사위를 던지며 이미 수작을 부려 두었지만 만당홍을 던지는 데
는 성공하지 못했다.
[제기랄!]
그는 다시 주사위를 던졌다. 여덟 번째에 가서야 네 알이 모두 붉은 점
이 하늘을 향하도록 던지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기뻐서
말했다.
[하느님은 나에게 먼저 황상에게 일곱 가지 큰일을 해주고 난 후에 하
지 말라는 것이구나.]
그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일곱 가지 큰일은 이미 해냈다. 오배를 죽인 것이 그 첫번째 일이고,
노황야를 구한 것이 두 번째 일이었고, 오대산에서 황상의 앞을 가로막
아 황상을 구한 것이 세 번째 일이며, 태후를 구한 것이 네 번째 일이
된다. 그리고 다섯 번째 큰일은 몽고, 서장과 연맹을 맺은 것이고, 여
섯 번째는 신룡교를 깨뜨린 것이며, 일곱 번째 일은 오응웅을 잡은 것
이다. 여덟 번째는 장용과 조양동 등을 추천하여 오삼계를 깨뜨리는 데
공을 세우도록 했던 것이고, 아흡 번째는 아극살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
켰던 일을 들 수 있겠다·‥… 너무나 많다, 너무나 많아. 작은 일들은
그만두더라도 큰알만도 알맞게 일곱 가지이니 실로 적지 않구나.)
그는 어떤 일곱 가지 일이 큰일이었는지 계산해 보기도 귀찮은 생각이
들어 어쨌든 그만두어야겠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벼슬을 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해
야 하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다시 양주로 돌아가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인 것 같다.)
그는 양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자 흐뭇해져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게 누구 없느냐!]
그는 친위병에게 술과 음식을 가져오라고 한 후에 스스로 따라 마시며
어떻게 해야 후환을 없앨 수 있겠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즉 강희
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 자기를 잡지 않도록 하고, 천지회에서 역시 자
기에게 함께 반역을 도모하자고 핍박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공주에게 자기와 더불어 양주에서 매일같이 돈을 써
가면서 술을 마셔 대며 노닥거리자고 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마다할 것
이 분명했다. 하지만 양주에 가서 기녀원을 세우겠다면 소전, 아가, 방
이, 목검병, 증유, 그녀들 모두가 응낙하려 들지 않을 것 또한 분명한
노릇이었다.
(좋아, 가는 데까지 가 보자. 나는 수백만 냥의 은자를 가졌으니 기녀
원을 차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설마 굶어죽지야 않겠지. 다만 그렇게 재
미가 있을 수 없는 것뿐이다.)
그날 밤 그는 집에서 조촐한 연회석을 차리게 했다. 일곱 부인들은 그
가 싱글벙글 웃으며 홍에 겨워서, 우스갯소리를 곧잘 하는 것이, 요즘
잔뚝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상태와는 전혀 다른지라 의아하여 물었다.
[무슨 일로 그토록 기뻐하세요?]
위소보는 활짝 웃었다.
[천기는 누설할 수 없소.]
공주는 물었다.
[황제 오라버니가 그대의 벼슬을 올렸나요?]
증유는 물었다.
[노름판에서 돈을 크게 땄나요?]
쌍아는 물었다.
[천지회의 일은 다시 귀찮지 않게 되었나요?]
아가는 말했다.
[퉤, 이 사람은 또 어디서 소저를 눈여겨보고 점찍어 두었다가 여덟 번
째 부인으로 들여앉히려고 하는군?]
위소보는 그저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부인들이 다그쳐 묻자 위소
보는 말했다.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이토록 캐물으니 이야기할 수밖
에 없군.]
일곱 명의 부인들은 모두 젓가락질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위소보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크게 벼슬아치가 되어서 공작에 봉해졌으나 글자를 하나도 모르
니 실로 체면이 서지 않소. 내일부터는 책을 읽으면서 문장을 짓는 연
습을 하겠소. 그리하여 장원급제하여 한림(翰林)이 되겠소.]
일곱 명의 부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까르르 하고 웃
음을 터뜨렸다. 모두들 이 낭군이 살인방화와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
거나 유괴를 한다거나 속임수를 쓰는 일 등은 가리지 않고 하지만, 천
하에서 유일하게 한 가지 결코 하려 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책을
읽고 글자를 익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第140章. 명판관이 된 위소보
이른 아침 순천부 지부가 찾아왔다. 황상께서 위 공작에게 충성백 풍석
범의 실종사건을 조사하는 임무를 부여했다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눈살
을 찌푸리며 물었다.
[순천부 관아에는 포졸들이 무척 많은데 이 며칠 동안 어떤 단서라도
조사해 냈소?]
그 지부는 말했다.
[위 공작께 알립니다. 풍 백작이 갑자기 실종된 일은 무척 이상한 일이
라 비직이 며칠간 남모르게 조사를 했으나 조금도 단서를 얻을 수가 없
어 초조해하던 중입니다. 오늘에서야 황상께서 아시고 위 공작 나으리
에게 특별히 성지를 내리시어 이 사건을 담당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
고 비직은 그야말로 한꺼번에 세 계급이 올라가는 것보다 더 기뻐했습
니다. 위 공작 나으리로 말씀드리면 우리 조정에서 가장 똑똑하고 부지
런한 대신으로서 말을 타게 되면 군사를 거느리고, 말에서 내리면 백성
을 다스리며, 아무리 어렵고 큰일이 있다 하더라도 공작 나으리의 손에
들어가면 즉시 순조롭게 풀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직이 공작 나
으리를 시중들어 이 일을 처리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조상이 덕을 쌓은
덕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직의 관아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이마를 치며 좋아하고 있으며 모두들 이번 일은 잘될 거라고 말하고 있
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 서게 되었다고 야
단들이지요. 위 공자 나으리께서 나서시기만 한다면 나찰의 귀자들도
패해서 노망을 치는 판인데 풍 백작 나으리의 행방을 어찌 조사해 내지
못하겠습니까?]
위소보는 이 순천부의 지부가 청산유수처럼 아첨의 말을 하는 것을 보
고 매우 기분이 좋았으나 기실은 책임을 자기에게 미루는 것임을 알고
속으로 생각했다.
(풍석범의 시체를 어디다 숨겼는지 모르지만 오늘 밤 화시분을 써서 꼬
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조처해야겠다. 증거가 없다면 그 누구도 나에게
덮이씌울 수는 없을 것이다. 기실 이 시체는 벌써 없애 버려야 했는데
이 며칠간 너무나 바빠서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러나 황상의 앞에서 어
떻게 책임을 져야 할까? 황상께서 처리하라고 명령하신 일 가운데 이루
지 못한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때 그 지부는 다시 말했다.
[층성백작 부인은 매일같이 사람을 비직의 아문으로 보내서 아문 안에
앉아서 가지 않고 사람을 내놓으라고 한답니다. 비직은 정말 상대하기
가 어렵습니다. 어제 풍 백작부에서 또다른 사건을 알려 왔는데 백작
나으리에게는 난향(蘭香)이라고 하는 젊은 첩이 있는데 그녀는 한 명의
마부와 도망치면서 금과 은 장식품들을 적지 않게 가져갔다고 합니다.
만약 충성백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집안의 친척들과 시녀
들, 그리고 하인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위소보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풍석범이 이디에 숨어서 풍류를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대는 더
많은 사람들을 보내서 기생집듣을 모조리 뒤져 알아보도록 하시오. 그
가 먹고 마시고 오입질을 하느라고 집에 돌아가지 않으니까 작은미누라
가 다른 남자와 도망치는 것이 아니겠소? 이야말로 벌을 받아 싸지.]
그 지부는 말했다.
[예, 예. 이치대로 말한다면 풍 백작 나으리께서 만약 화류계에서 노셨
다고 해도 이 며칠 동안 놀았으니 이제는 돌아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것은 밀하기 어렵네. 풍석범이란 녀석은 본래 성인군자가 못되니 오
입질을 할 때 그저 하룻빔cl나 반나절 묵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사람일
세.]
바로 이때였다. 충성낵의 풍 부인이 그녀의 형세들을 보내 여덟가지 빛
깔의 예물을 보내와서는 위 공작 나으리를 뵙고 인사를 드리겠으니 위
공작 나으리께서 애써서 사건을 처리해 주십사 하고 부탁을 드리겠다는
전달을 해왔다. 위소보는 즉시 그들을 물리치라고 분부를 하고 예물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친위병은 돌아와서 보고를 했다.
[대인께 알립니다. 풍씨 집안사람들은 정말 무례하군요. 떠날 때 연신
냉소를 하며 원한이 있게 되면 원한으로 갚고, 원수를 맺게 된다면 원
수로 갚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거기다가 황상께서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계시니 끝내 모든 것이 밝혀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인, 이 사람
들이 감히 우리 집 문 앞에 와서 그와 같은 소란을 벌인 것을 보자, 소
인은 대뜸 달려가 그들에게 몇 대의 따귀를 때리고 싶었습니다.]
그날 사형터에서 사람을 바꾸는 일에 친위병도 참여한 바가 있었다. 그
는 풍 백작부에서 달려온 사람들이 무섭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이미 내
막을 짐작한 것 같아 소름이 끼치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안색이 약간 변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시끄럽다가는 아무래도 들통이 나고 말겠다. 풍석범마저도 나
에게 죽었는데 설마 내가 죽은 귀신의 마누라를 두려워할까?)
갑자기 그는 어떤 생각이 떠올라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그 지부에게
말했다.
[지부, 급히 서둘러 갈 필요가 없소이다. 그대는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
도록 하시오.]
그는 내당으로 들어가서는 친위병 대장을 불러 조용히 어떤 분부를 했
다. 그 대장은 명을 받고 물러갔다. 위소보는 대청에 돌아와 말했다.
[황상께서는 나에게 이 일을 조사하도록 명령을 내리셨는데 우리 신하
되는 사람들은 마땅히 합심협력하여 황상께 보답을 해야 할 것이오. 우
리는 이제 풍씨네 집안으로 가서 조사를 해봅시다.]
그 지부는 어리둥절해져서 생각했다.
(충성백이 실종됐는데 그 집안에서 무슨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일
까?)
그러나 그는 입으로는 연신 대답을 했다.
[예,예.]
위소보는 말했다.
[이번 사건은 매우 어렵소. 하지만 우리가 풍씨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불러 자세히 물어 본다면 무슨 특별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오.]
지부는 말했다.
[공작 나으리께서 보신 바가 지극히 정확합니다. 비직은 우둔하여 시종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기실 그런 일로 지부가 어찌 감히 충성백부로 들어가 자세한 조사를 할
수 있겠는가? 동시에 순천부에서는 아래윗사람 할 것 없이 모두 풍석범
이 무원대장군 위 공작 나으리와 앙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풍석범이 실종된 것은 십중팔구 위 공작 나으리가 사람을 파견
해 죽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 공작 나으리는 당금 조
정에서 가장 총애를 받는 사람이고 또 손에는 병권을 쥐고 있는데 감히
어느 누가 호랑이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파리를 때려 잡겠다고 호랑이
의 머리를 내리치겠는가? 따라서 그들은 이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 진지
하게 임하지 않고 그저 시일만 끌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는 얼렁뚱땅 회
피하려고 하는 참이었다. 그 지부는 생각했다.
(위 공작 나으리는 풍 백작을 죽이고서도 그의 집안 사람을 괴롭히려
하고 있다. 그 풍 부인은 정말 분수도 모르지. 왜 사람을 보내와서 터
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였을까? 그러니 위 공작 나으리께서 화를 내는 것
도 무리가 아니지.)
위소보는 순천부 지부와 함께 여덟 사람이 떠메는 커다란 교자를 타고
가서 충성백부 문 앞에서 내렸다. 그러고 보니 수백 명의 친위병들이
이미 사방에서 겹겹이 그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충성백부 문 안으로
들어가가 친위병 대장이 잎으로 나와 말했다.
[대인, 풍씨 집안의 가족들 모두 일흔아흡 명은 서쪽 대청에서 대인께
서 질문하실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익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장온 다시 말했다.
[대인, 대인께 알립니디. 공당(公堂)은 동쪽 대청에다가 마련했습디
다.]
위소보는 동쪽 대청으로 갔다. 심문을 하는 공안(公案)온 이미 차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복핀에 앉고 지부로 하여금 아래쪽에 앉아서
같이 일을 보도록 했다. 친위병이 한 젊은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나이
가 스물서넛 정도로 보였고 생긴 것이 그렇게 못나지 않았다. 그녀는
사뿐사뿐 공당 앞으로 걸어와 무릎을 꿇었다. 위소보는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 여자는 말했다.
[백작대인의 다섯 번째 소첩입니다]
위소보는 웃었다.
[일어나 앉으시오. 그대가 나에게 무릎을 굻다니 감당할 수 없구려.]
그 여자는 주저히며 감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위소보는 자리에서 일
어나며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그대를 향해 무릎을 꿇겠소.]
그 여자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가리에 앉았
다. 그 지부는 생각했다.
(위 공작 나으리는 풍시 집안의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흉악하지는 않구
나. 하지만 너무나 색기어린 눈을 하고 있어서 근엄하지 못해 탈이다.)
위소보는 물었다.
[그대 이름은 무엇인고?}
[저는 국방(菊芳)이라고 합니다.]
위소보는 몇 번 킁킁거리더니 웃었다.
[훌륭한 이름이군! 그러니까 그대가 들어오자마자 이곳에 한 가닥 국화
향기가 퍼진 것도 무리가 아니군.]
국방은 다시 웃으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 나으리께서는 농담이시겠지요.]
위소보는 고개를 흔들며 그녀를 잗시 바라보더니 물었다.
[소문에 들으니까 귀부에서 한 명의 소첩이 도망을 갔다고?]
[예, 그녀는 난향이라 하지요. 그 계집년은 염치가 없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지아비가 갑자기 보이지 않으니 두 번째 남자를 따라간 것도, 그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로써 왈가……왈가……]
고개를 돌리고 지부에게 물었다
[왈가 무어라고 하지?]
그 지부는 맏했다.
[공작 나으리께 말씀드립니다. 왈가왈부라고 합니다.]
위소보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맞소,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소. 국방 누나는 어깨서 도망을 치지 않았
소?]
지부는 그 말을 듣고 대뜸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건 갈수록 말이 되지 않는구나. 어째서 누나라는 두 자를 함부로 쓴
단 말인가?)
국방은 고개를 숙인 채 위소보에게 추파를 던졌다. 위소보는 크게 즐거
운 듯, 마치 그녀 집에 놀러온 듯한 기분으로 웃으면서 물었다.
[그대는 혹시 십……]
그 말이 입까지 나왔으나 빨리 말을 되삼켰다. 그는 십팔막이라는 노래
를 부를 줄 아는지 물어 보려고 했던 것인데, 너무나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라 생각하고 즉시 말문을 닫은 것이다. 위소보는 고개를 돌려 친위
병에게 말했다.
[이 국방 소저에게 열 냥의 은자를 하사하도록 하게.]
몇 명의 친위병들이 일제히 대답하고 외쳤다.
[대인께서 상금을 내리시니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오!]
국방은 살포시 큰절을 하고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으리, 감사합니다!]
그녀는 기녀원 출신이었다. 손님이 돈을 내었을 때 습관적으로 나으리
라고 부르는 게 버릇이 되어 공작 나으리를 그냥 나으리라고 부른 것이
다. 위소보는 차례로 풍씨 집안 사람을 불러와 심문을 했는데 모두 다
여인들이었다. 나이가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에 대해서는 그저 한바탕
히히덕거리고, 늙고 추한 사람들을 대하면 한바탕 꾸짖었다. 즉 그녀들
이 백작에게 제대로 시중을 들지 못했기 때문에 백작이 바깥으로 나가
서 풍류를 즐기느라고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약 반 시진 정도 심문을 하였을 때 친위병 대장이 걸어들어오더니 위소
보의 등뒤에 가 섰다. 위소보는 다시 되는 대로 두 사람에게 질문을 하
고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우리 각처를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는 지부와 순천부의 문안(文案), 포도군관, 친위병들을 데리고 우선
대청, 마루, 방들을 조사해 나갔다.
세 번째 서쪽 채에 이르렀을 때 친위병들은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상자
를 뒤지고 농 안에 있는 것을 끌어내 조사를 했다. 그런데 한 명의 친
위병이 갑자기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상자 밑에서 한 자루의 칼을 꺼
냈는데 칼에는 적지 않은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무릎을 반쯤
구부리고 두 손으로 칼을 받쳐들고 소리쳤다.
[대인께 알립니다. 흉기를 한 자루 찾아냈습니다.]
위소보는 음, 하고는 말했다.
[다시 조사해 보게.]
그는 지부에게 말했다.
[노형이 한번 살펴보시오. 칼에 묻은 것이 핏자국이 아니오.]
지부는 칼을 받아서 코에 가까이 갖다대고 맡아 보더니 과연 피비린내
가 풍기는지라 말했다.
[공작 나으리께 알립니다. 아마도 피인 것 같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이 칼의 칼날 쪽에 구멍이 하나 있구려. 이것은 무슨 칼이요?]
한 명의 무관이 자세히 보더니 말했다.
[공작 나으리, 이것은 짐승들의 먹이를 썰 때 사용하는 작두입니다. 마
구간에서 사용하지요.]
위소보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친위병 대장은 부하들에게 한 통의 물을 떠오라고 하더니 땅바닥에 쏟
았다. 위소보는 물었다.
[무엇을 하는 것인가?]
대장은 말했다.
[대인, 만약 이곳을 파거나 손을 썼다면 흙이 견실하지 못해 물이 재빨
리 스며들어가게 됩니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침대 아래쪽의 물이 신속하게 땅속으로 스
며들었다. 친위병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침대를 옮기고 곡괭이와
삽으 로 땅을 팠는데 삽시간에 시체 한 구를 꺼낼 수 있었다. 시체는
머리통이 없었다. 이미 썩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죽은지 며칠 된 것
같았는데 몸에는 백작이 공복을 입고 있었다. 그 지부는 이를 보자 대
뜸 부르짖었다.
[이건……이건 풍 백작 나으리입니다!]
위소보는 물었다.
[풍석범이란 말이오? 그대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소?]
그 지부는 말했나.
[예, 예. 반드시 머리를 찾아내야 이 사긴을 종결지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옆에 있는 포도군관에게 말했다.
[도대체 이 방은 누가 살던 방이지?]
군관은 말했다.
[소인이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서청으로 가서 한 명의 풍씨 가족을 불러 물었나. 원래 이 방은
도망친 난향의 거처라고 했다. 포도군관은 말했다.
[공작 나으리와 무태 대인(武台大人)에게 알립니다. 흉기는 마구간에서
말먹이를 썰던 작두이고, 난향을 데리고 도망을 친 것은 이 집의 마부
형사(形四)라고 합니다. 소인이 마구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친위병들은 마구간으로 가서 수색을 했다. 아니나다를까 구유통 아래의
흙 속에서 한 사람의 머리통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풍 부인에게 시체
를 확인하게 한 결과 풍석범이 틀림없다고 했다. 즉시 수렴관이 감정을
한 결과 풍석범은 칼에 잘려 몸뚱어리와 모가지가 따로 떨어져 죽었다
는 것이었다. 풍씨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다 풀려났고 백작부 안은 그
야말로 통곡소리가 진동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은 형사와 난향이 악독하
게도 주인을 해쳐 죽였다고 욕을 해댔다. 소문은 금방 퍼졌다. 반나절
도 되지 않아 북경성 안 곳곳에 그 소문이 퍼져 시끌시끌하였다.
그 지부는 한편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만약 위 공작 나으리
가 신속하게 사건을 해결하지 않았더라면 자기의 앞길이 크게 지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저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했으며, 한편으로
는 각처에 공문을 띄워 주인을 죽이고 도망친 형사와 난향을 잡도록 하
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윗사람에게 보고를 했다. 오로지 그 포도군관
만이 속으로 의심을 했다. 시체의 목이 잘린 상태로 미루어 보아 재빠
른 칼로 잘라진 것이지 풀이나 먹이를 자르는 작두로 벤 것 같지 않았
던 것이다. 그리고 시체를 숨기고 머리를 숨긴 흙이 무척 새로운 것으
로 보아 틀림없이 조금 전에 손을 쓴 것처럼 느껴졌으며 십여 일이나
묻어 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위 공작 나으리가 이 커다란 사건을
해결지어 윗사람으로부터 풍성한 상금을 받게 되고 풍씨 저택에서도 적
잖은 은자를 쥘 수 있으니 빨리 이 사건을 결말지어야 하겠다고 생각했
다. 따라서 그는 크게 의심스러웠지만 그와 같은 사정을 한마디도 입밖
에 낼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풍씨 저택을 조사하였을 때 위 공작 나으리의 친위병들이 각처를 지키
고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으니 그들이라면 시체를 옮겨 증거
를 만드는 것쯤은 수월하게 할 수 있었으리라. 땅바닥에 한 구의 시체
를 묻는 것은 말할것도없고 팔십 명이나 백 명의 시체를 묻는다 하더라
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위소보는 순천부 지부가 사건을 끝맺었다는 공문을 가지고 강희를 찾아
가서 사건을 해결한 사정을 자세히 보고했다. 강희는 빙그레 웃으며 말
했다.
[소계자, 그대를 보고 모두들 포룡도(包龍圖)가 다시 세상에 태어났다
고 하더군.]
위소보는 말했다.
[그것은 황상의 홍복이고 소신은 그저 우연히 사건을 해결지을 수 있었
을 뿐입니다.]
강희는 흥, 하며 그를 한번 노려보더니 말했다.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일은 나의 홍복과 아무 상관이 없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황상께서는 어떻게 아셨을까?)
그리고 생각을 해보니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황상께서는 우리 친위병 안에도 틀림없이 밀정을 확보해 놓았을 것이
다.)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는데 강희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와 같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좋겠지.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말
이야. 하지만 그대가 이토록 대담하고도 당돌한 일을 하다니, 나로서는
정말 그대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군.]
위소보는 속으로 안심을 하며 황제가 다시 한번 자신을 용서했다는 사
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즉시 무릎을 꿇고 연신 큰절을 올렸다. 강희는
말했다.
[지금 천하가 태평하여 병변이 일어나지 않으니 그대의 무원대장군이라
는 감투는 그만두도록 하게.]
위소보는 말했다.
[예, 예.]
그는 황제가 자기가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데 대해서 벌하려고 한다
는 것을 알고 다시 말했다.
[소신은 일등 녹정공(鹿鼎公)이니 한 계급 낮출 수 있습니다. 소신이
너무 겁없이 날뛰었기 때문에 저 역시 속으로 불안합니다. 황상께서는
세 등급 강등시켜 주십시오.]
강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제기랄, 그대가 불안함을 느끼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는걸?]
위소보는 그가 제기랄, 하는 한마디를 내뱉자 황상의 노기가 이미 사그
라들었다는 것을 알고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소신의 양심이 별로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있기는 있는 모양입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그대에게 그 조그마한 양심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그대의 목을 잘라서 그대의 부인 쌍아 침대 아래에
묻었을 것이네.]
위소보는 다급해져서 말했다.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강희는 물었다.
[어찌하여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인가?]
[아가와 쌍아는 결코 마부를 따라 도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강희는 웃었다.
[마부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다른·‥··]
그는 말을 여기까지 하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더 말한다는 것이 너
무나 경박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위소보가 무법천지로 천둥벌거
숭이처럼 날뛰지만 역시 자기에 대해서는 충성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군신지간에 농담을 하는 것은 괜찮지만 모욕적인 말은 할 수 없다고 생
각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탁자 위에 놓인 상주문들을 뒤적거렸다.
위소보는 손을 내려뜨리고 옆에 서 있었다. 그런데 강희가 눈살을 찌푸
리고 깊은 우려의 빛을 띠자 속으로 생각했다.
(황상께서도 때때로 즐겁시 못할 때가 있구나. 황제는 물론 위풍 당당
하기는 하지만 정말 황제가 된다면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 것 같
다.)
강희는 한동안 상주문올 훑어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께서는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이 소신에게 일을 처리하도록 해주
십시오. 소신은 공을 세워 속죄하겠으며 황상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보
답하겠습니다.]
강희는 말했다.
[이번 일은 그대를 시킬 수가 없네. 시랑이 상주를 올렸는데, 대만에
태풍이 몰아쳐서 수재를 당해 평지의 물 깊이가 넉 자나 되고 백성들의
집이 파손되거나 무너지는 등 집을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부지기
수라 참담한 상태라 하네.]
위소보는 황상이 말할 적에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고 그와는 일찍부
터 절친한 친구였는데 이번 일에도 돕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말했
다.
[소신에게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강희는 말했다.
[무슨 방법인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소신은 대만에서 벼슬을 하였을 때 조그만 재물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대만의 부자에게 묵은 빚을 받았습니
다. 소신은 황상께서 볘풀어 내려 주신, 깨뜨려진 것을 다시 새롭게 다
듬어서 하사하신 금 밥그릇을 들고 있으니 한평생 밥을 굶지는 않을 것
이라 돈이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돈을 내놓겠으니 황상께서는 대
만의 수재민들을 구제하십시오.]
강희는 빙그레 웃었다.
[수재민이 무척 많아 그대의 그 조그마한 재산으로는 별로 도움이 못
되네. 즉시 성지를 내려서 궁 안의 궁녀나 태감들에게 의식비를 줄이는
등 모든 것을 절약하도록 하여 내무부(內務府)로 하여금 방법을 강구해
사오십만 냥의 은자를 모아 수재민들을 구제하도록 하겠네.]
위소보는 말했다.
[소신은 정말 만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정말 엄청난 일을 저질렀습니
다.]
[무슨 소린가?]
[소신은 탐관오리가 되어 대만에서 백만 냥의 은자를 긁어 모았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정극상에게 꾸어준 백만 냥을 돌려받았답니다.]
강희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뭐가 그렇게 많은가?]
위소보는 가볍게 자신의 주둥이를 쥐어박고는 말했다.
[소계자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강희는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돈을 불리는 방법은 고명하기 이를 데 없군. 난 조금도 몰랐는
걸?]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소계자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얼굴에는 의기 양양한 빛을 띠고 속으로 생각했다.
(벼슬아치들은 손을 뻗기만 하면 돈을 벌지. 어찌 황제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대가 내 수하 사람들 가운데 밀정을 파견했다 하더라도 그들
은 내가 감히 반란을 일으키는가 일으키지 않는가 하는 것만 조사할 뿐
이다. 그대의 매부가 오른손으로 돈을 거두어들여 왼손으로 주머니에
넣는 것은 그대의 누이도 모르는 일인데 처남인 그대가 어찌 알아낼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입으로 소신이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매부라고 자부하고 있
었다. 강희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대는 군직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정말 갸륵하군.
이렇게 하지. 그대는 백오십만 냥의 은자를 내놓도록 하게. 내가 다시
오십만 냥을 절약하도록 하지. 그리하여 우리 군신 두 사람이 이백만
냥을 만들도록 하세. 대만의 수재민들은 약 만몇천 호나 되는데 한 집
안에 백 냥씩을 나누어 준다면 그것도 상당히 풍부한 편이 될 것이네.]
위소보는 일시 충동으로 크게 마음을 써 돈을 바치겠다고 말했으나 지
금은 후회하는 참이었는데 강희가 그를 위해 오십만 냥을 절약해 주겠
다고 하자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예, 예. 황상께서는 정말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황상을 보우하셔서 매사가 순조로워 국태민안하게 지켜 줄 것입니다.]
강희는 대만의 재난이 무척 심한 편이어서 반나절 동안 마음속으로 괴
로워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엄청난 돈이 생기자 몹시 흐뭇했다.
[그대의 벼슬이 오르고 재물을 모을 수 있도록 보살피며 다복하고 다수
하기를 보호해 주십사 빌겠네.]
위소보는 웃었다.
[만세야의 금쪽 같으신 말씀으로 축원해 주시니 장말 황공하옵니다. 소
신이 벼슬길에 오르고 재물을 긁어 모으며 다복다수할 수 있는 것은 모
두 황상께서 내리신 은혜입니다. 더군다나 소신에게 흘러들어온 돈은
본래 모두 대만 사람들의 것이니 대만의 백성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은
역시 완벽귀……완벽귀대(完璧歸臺), 귀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강희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완벽귀조(完璧歸趙)란 숙어를 제기랄! 그대가 완벽귀대로 고쳐버렸구
먼.]
위소보는 말했다.
[예, 예. 완벽귀조입니다. 소신은 일시 그 조나라 조(趙) 자가 생각나
지 않았습니다. 조전손이(趙嶺孫李), 주오진왕(周吳陳王), 백성 가운데
조씨 성이 첫번째로 꼽히니 그들이 그토록 출세를 한 것도 무리가 아니
군요. 원래 완벽귀조라 한 것은 모두 다 조가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었군요.]
강희는 더욱더 우습게 생각하머 위소보는 정말 학문이 없어서 그에게는
많이 가르칠 수도 없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리고 한마디의 숙어가 있는데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네. 이것은 그대 위씨 집안 사람들이 애써 공부를 하여 학문이 무
척 뛰어나다는 뜻이네. 그래, 그대들 위씨들로 말하면 역시 대단하기
이를 데 없는 편이지.]
(위편삼절 가운데 위자는 죽간(竹簡)을 잇는 가죽조각인데 강희는 일부
러 그 뜻을 왜곡하여 설명함으로써 위소보에게 농담을 한 것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소신의 학문은 너무나 형편없어서 위씨 조상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강희는 말했다.
[이번에 대만으로 가서 수재민을 구하는 일은···‥·]
그는 이치대로 따져서 위소보를 파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
나 다시 생각해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이 사람이 엄청난 은자를 내놓은 것은 나와의 의리를 지키자는 것이지
진실로 모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궁문을 나서기만 하면 즉시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가 대만에 가
면 백만 냥의 은자를 뿌려 구제를 한 후에 십중팔구 밑천이 생각나서
손실을 메우려고 더 많은 돈을 거두어들일 것이며 어쩌면 이자까지 긁
어낼지도 모른다.)
강희는 말했다.
[이 일은 매우 수월한 일이니 그대가 친히 갈 필요는 없네. 소계자, 일
등 녹정공인 그대가 굳이 갈 필요까진 없지. 또 우리는 처남 매부 사이
니까 서로 좋은 게 좋지 않겠는가?]
위소보는 무릎을 끓고 은혜에 감사하는 큰절을 한 후 말했다.
[소신이 조그만 은자를 바친 것은 그저 완벽귀······조전손이에
불과한 것으로써 황상의 공로여야 마땅합니다. 황상께서 잡수시고 입는
것을 줄이는 것은 진정으로 절약하는 것으로써, 그것이야말로 쉬운 노
릇이 아니지요.]
강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우리 궁에서 쓰는 모든 비용은 은자 한 냥이라도 백성들에게
서 나온 것이네. 백성들이 나에게 금의옥식(錦衣王食)을 공양시켜 주고
있는 것이지. 내가 인군이 되어 만민 위에 군림하게 된 이상 마땅히 정
성과 힘을 다해서 백성들의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대는 인
군의 녹을 먹고 있으니 물론 인군에게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일세. 그리
고 나는 백성의 녹을 먹고 있으니 반드시 백성의 일을 충성을 다해 돌
보아야 할 것이네. 고서에서는 사해가 곤궁하게 되면 천록(天祿)이 끝
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만약에 백성이 곤궁하게 된다면 그것은 황제가
나쁜 것이고 하늘이 노하신 것으로 나는 황제 노릇을 할 수 없게 되
네.]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대가 대신이 된 것은 나의 은혜이고, 내가 황제가 된 것은 하늘의
은혜일세. 그대가 일을 충성스럽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대의 머리를
자를 것일세. 내가 훌륭한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하늘이 역시 다른 사
람으로 바꿀 것이네. 상서(尙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네. '황
천후토(皇天后土) 개궐원자(改厥元子)'라고. 여기서의 원 자는 바로 황
제를 가리키는데 이 말은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하늘이 그
를 쫓아낸다는 말일세.]
第141章. 황제로 추대된 위소보
[예, 예. 황상께서는 소현자라고 불리우는데 원래 현자(玄子)는 바로
황제라는 말이군요?]
강희는 말했다.
[현(玄) 자와 원(元) 자와는 다른 거야.]
[예,예.]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경단을 둥글게 빛어 놓으면 거의 다 비슷하더라, 뭐.)
그는 원 자나 현 자를 모르고 있었지만 머리를 쓰면서까지 그 차이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강희는 탁자 위에서 한 권의 책을 들고 말했다.
[절강의 순무가한권의 책을 올렸는데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이라고
하는 것이네. 이것은 절강 사람인 황여주(黃黎洲)가 새로 쓴 것이라 하
더군. 절강의 순무는 책 가운데 대역무도한 말이 많이 쓰여 있으니 엄
밀히 조사해야 한다고 했네. 나는 방금 이 책을 보았는데 매우 도리가
있다고 느껴져 절강의 순무에게 쓸데없는 일을 일으키지 말도록 지시를
내렸네.]
그는 다시 책을 뒤적이며 말했다.
[이 책에서는 인군이 천하를 받드는 것이지 천하의 사람들이 한 사람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고 했네. 이 뜻은 매우 훌륭하네. 그는 또 말하기
를, '천자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고 천자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역시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고
말했는데 이 말 역시 매우 옳은 소리야. 사람에게 어찌 과실이 없겠는
가? 천자 역시 사람인데 황제가 되었다고 해서 어찌 모든 일에 있어서
옳기만 하고 영원히 잘못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강희는 한동안 이야기를 했으나 위소보가 그저 예, 예, 하고 대답하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의혹의 빛을 짙게 띠고 있는 것을 보고 그만 픽 웃
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 나이 어린 망나니와 도리(道理)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니 어찌
그가 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야기를 더 길게 한다면 그는 아마도
연신 하품을 할 것이다.)
강희는 왼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대는 가 보게.]
그는 오른손으로 여전히 그 책을 들고 소리내어 읽어내려갔다.
[천하의 이해지권(利害之權)은 모두 나에게서 비롯되고 나는 천하의 이
득을 모조리 나 자신에게로 돌리고 천하의 해를 모조리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 하더라도 아니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도록 하고 자기의 이득만을 얻지 못하도록 하라.]
위소보는 그 말을 듣기 더욱 아리송해질 뿐이었다. 황제가 독서를 하고
있으므로 그는 연신 좋다고 칭찬의 말을 했다. 어찌 이와 같은 기회에
황상을 추켜세우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강희는 책을 내려놓
았다. 위소보는 슬쩍 물었다.
[황상, 그런데 그 책 속에서는 무슨 말을 하고 있으며, 어떤 점이 그리
좋다는 것입니까?]
[황제가 되는 사람은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사사롭게 자기만을 위하
도록 하지 말고 자기만의 이득을 취하지 말도록 하라 했네. 황제 한 사
람만이 사사로운 욕심을 내고 이득을 취한다면 이것은 황제의 커다란
욕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결코 백성들을 위하는 큰일이 아니라고 말하
고 있네. 따라서 황제가 처음에는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되어 어느 정도 부끄러움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이러한
일들이 습관이 되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고 자기가 모두 옳다고 생
각되어 다른 사람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라고 충고했네.]
[그 사람은 나쁜 황제를 말하고 있군요. 황상께서는 이와 같이 오생어
탕하고 계신데 그가 말한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허허허, 황제가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 자신이 오생어탕이라고 생
각하지, 어느 누가 스스로 걸왕과 주왕처럼 폭군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더구나 모든 폭군의 곁에는 반드시 많은 공덕을 칭송하는 몰염치한 대
신이 있어 폭군을 오생어탕으로 받든다네.]
위소보는 웃었다.
[다행히 황상께서는 진짜 오생어탕이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신이 그
야말로 몰염치한 대신이 되지 않겠습니까?]
강희는 왼발을 들어 땅을 한 번 구르더니 웃었다.
[그대는 정말 염치가 좋군. 빨리 꺼지도록 하게.]
[황상, 소신에게 황상의 은혜를 베푸시어 이 소신의 휴가를 허락하시어
양주로 가서 저의 어머님을 뵐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대에게 그와 같은 효성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더군다나
부귀공명을 누리고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 되겠지. 그러니 마땅히 고향에
돌아가서 뽐내어야 옳지 않겠는가. 그대는 일찍 갔다가 일찍 돌아오되
어머니를 북경으로 모셔 와 살도록 하게. 나는 사람에게 성지를 쓰게
하여 그대의 어머니에게 일품 태부인(一品太夫人)이라는 고봉(詰封)을
내리도록 하겠네. 그대의 돌아가신 아버님의 이롬이 무엇인지 이부에
보고를 하면 함께 관직을 추서하도록 하지. 이 일은 지난번 그대가 양
주로 돌아갔을 때 마땅히 처리했어야 할 일이었네. 그런데 그때는 공교
롭게도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를 지체하고 말았지.]
그는 위소보가 십중팔구 그의 부친 이름 즉 함자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며 더 묻지 않았다. 강희는 물론 영명하기는 했으
나 이 일에 대해서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위소보는 부친의 함자
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친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위소보는 황상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궁문을 나
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백오십만 냥의 은표를 꺼내 호부(戶部)로
가지고 가서 은고(銀庫)에 바쳤다. 그리고 병부에 가서는 무원대장군이
라는 병부의 도장을 바쳤다. 그리고 그는 다시 소전에게 청하여 자기의
부친 이름을 짓도록 했다. 그리하여 조상 삼대에 걸쳐서 모조리 작은마
누라들의 이름까지 갖다 붙이고, 똑똑히 써서는 전문적으로 이부에서
봉증(封贈), 습음(襲蔭), 토사사직(土司嗣職)이 사무를 처리하는 험봉
사(驗封司) 낭중(郎中)에게 갖다 바쳤다. 모든 일이 끝나자 그는 짐을
챙겼다.
위소보는 조정에서 인간관계가 지극히 좋았고 또한 황상의 총애를 크게
받고 있는 터라 왕공대신들은 전송 연회를 베풀었고, 갖가지 재미나는
일이 있었던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출발할 임시에 백오십만
냥이나 되는 은자를 바치게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다시 친위병
을 정극상에게 보내서는 만여 냥의 빛을 받아내도록 한 후에야 북경성
을 나섰다.
처음 육로로 통주(通州)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려 배로 바꾸어 탔다. 그
리하여 운하(運河)를 이용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천진(天津), 임청
(臨淸)을 지나 황하를 가로 건너고 제령(濟寧)을 지나게 되었다. 그리
하여 이날 회음(淮陰)에 이르렀을 때 관선(官船) 사양집(泗陽集)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위소보는 배 안에서 일곱 명의 부인들과 저녁밥을 먹
은 후 앉아서 한담을 나누었다. 소전은 말했다.
[소보, 우리는 바로 내일 회음에 도달해요. 옛날에 한 사람이 회음후
(淮陰候)에 봉해진 적이 있었지요……]
위소보는 말했다.
[음, 벼슬은 나보다 못했군.]
소전은 웃었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요. 그는 왕에 봉해졌으며 제왕(齊王)에도 봉해
진 적이 있답니다. 후에 황제는 그가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서 그의
왕 작위를 없애고는 희음후에 봉한 것이지요. 그 사람은 성은 한(韓)씨
이고 이름은 신(信)으로 크게 유명하지요.]
위소보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것은 나도 알고 있는 일이오. 소하(簫何)가 달빛 아래에서 한신을
뒤쫓는다느니 십면매복(十面埋伏)에 초패왕이 우희(虞姬)와 작별하도다
하는 그런 연극에 모두 있지 않소?]
소전은 말했다.
[바로 그래요. 그 사람은 매우 재간이 뛰어나고 공로도 무척 크게 세워
초패왕과 같은 영웅도 그의 손에 졌지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결과가 좋
지 않아서 황제와 황후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석하군, 애석해! 황제는 어째서 그를 죽였소?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소?]
소전은 고개를 가로저있다.
[아니에요. 그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어요. 다만 황제는 그의 재간이
뛰어나서 혹시나 반란을 일으킬까 봐 꺼려했던 것이지요.]
[다행히 나의 재간은 보잘것없어서 황상께서는 모든 점에 있어서 나보
다 뛰어난 편이라 결코 나를 꺼려하지는 않을 것이오. 다만 나는 한 가
지 일에서만 황상보다 뛰어나고 그 이외의 모든 점에 있어서는 절대로
황상에게 미칠 수가 없소.]
아가는 물었다.
[그대의 어느 점이 황상보다도 뛰어나다는 거예요?]
[나에게는 일곱 명의 꽃과 같고 옥과 같은 부인들이 있소. 천하에서 다
시는 이와 같은 여자들을 찾아 내지는 못할 것이외다. 황상께서는 홍복
제천(洪福齊天)하시고, 이 위소보는 염복제천(艶輻齊天)한 것이오. 우
리 군신 두 사람은 각기 장점을 갖추고 있는 것이외다.]
그가 뻔뻔스럽게 허풍을 떨자 그의 일곱 부인들은 까르르 웃었다. 방이
는 웃으머 입을 열었다.
[황제는 홍복제천이시고 그대는 제천대성(齊天大聖)이에요.]
위소보는 말했다.
[맞았소. 나는 수렴동의 손오공이오. 그리하여 한 떼의 잔나비 마누라
와 자식들, 손자들을 거느리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오.]
이와 같이 농담을 즐기고 있는데 하인이 침실 밖에서 말했다.
[공작 나으리께 아룁니다. 손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시녀가 네 장의 배첩을 들고 들어왔다. 소전은 받아 보더니 나직이 말
했다.
[손님은 고염무(高炎武), 사계좌(査繼佐), 황여주(黃黎洲), 여유량(呂
留良), 네 분이에요.]
위소보는 말했다.
[아, 고 선생 일행이시군. 그렇다면 반드시 만나 봐야지.]
그는 하인에게 분부하여 손님들을 가장 큰 선실로 모시게 한 후 차를
대접하도록 했다. 그리고 고는 즉시 옷을 갈아입고 나아가 만나 보았
다. 고염무, 사계좌, 황여주, 이 세 사람은 과거 양주에서 오지영에게
잡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위소보가 구해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여유량은 처음 만나는 인물이었다. 그의 등뒤에는 두 명의 이십
여 세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따르고 있었는데 바로 여유량의 아들
여보중과 여의중이었다.
서로 절을 한 후에 손님과 주인이 나누어 자리에 앉자 여보중과 여의중
은 부친의 뒤에 가 섰다. 고염무는 나직이 말했다.
[위 향주, 이 몇 사람이 이번에 달려와 방문하게 된 것은 한 가지 큰일
을 상의드리고자 하는 것이외다. 사양집에는 이목이 많으니 말하기가
불편하구려. 그대가 이 배를 수 마장 밖으로 저어 가도록 해서 사람이
없는 곳에 정박시킨 후에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겠소?]
고염무는 과거 하간부의 살귀대희에서 강호 영웅의 총군사로 추대된 바
있으며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위소보는 그에 대해서 항상 탄복하
고 있었던 터라 즉시 응낙을 하고는 소전 등에게 이를 전했다. 소전은
말했다.
[사람은 사람을 경계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어요. 우리들이 타고
있는 배도 함께 따라가겠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서로 접응을
하도록 해야 해요.]
본래 위소보가 타고 있는 관선은 한두 척이 아니었다.
위소보는 고염무 등과 사람이 없는 곳에 가려고 생각하자 약간 가슴이
두근두근해지면서 불안했는데 일곱 명의 부인들이 뒤를 따라와 보호한
다면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좋다고 했다. 그는
사공들에게 두 척의 배를 남쪽으로 저어 가도록 말했다. 그 구실은 운
하의 풍경이 좋은 곳을 골라서 술을 마시며 달 구경을 하려는데 위 공
작 나으리가 크게 흥이 일게 된다민 몇 수의 시를 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배들은 여전히 사양집에 정박한 채 이들을 기다
리도록 했다.
위소보는 커다란 배로 돌아와 손님들을 상대했다. 두 배는 남쪽으로 열
여덟 마장 정도 나아갔는데 양쪽의 언덕 위는 평탄한 들이었고 또 넓었
으며 둥근 달이 하늘에 솟아올랐으며 사방에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즉시 닻을 내려 정박하도록 하고는 커다란 배의 사공
들과 시종들은 모두 다 뒤의 배로 가서 위공작 나으리와 여섯 분의 시
흥을 방해하지 않도록 했다. 그리하여 배 안에 다른 사람이 없게 되자
고염무는 그제서야 다시 과거에 보여 준 큰 은덕에 감사드린다는 인사
말을 했다.
위소보는 겸손의 말을 하고 이어서 오륙기와 진근남이 차례로 해를 입
게 된 경위를 말하였고 이를 들은 여러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탄식
해 마지않았다. 고염무는 말했다.
[강호에서는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는데 모두들 위 향주께서 부귀공명을
탐하시어 사부를 죽였다고 하고 있소이다. 황형과 사형, 그리고 이 형
제 몇 사람들은 결코 그와 같은 유언비어가 사실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위 향주와 아무런 면식도 없었는데 위
향주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영 그 녀석을 죽여 우리들의 목숨
을 구해 주셨습니다. 그와 같이 하늘을 뚫을 것 같던 두터운 의리를 가
진 분이 어떻게 자신의 사부를 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계좌는 말했다.
[우리는 강호의 친구들로부터 이 일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힘써 위 향
주를 변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랑캐 황제의 성지에서조차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어찌 거짓일 수가 있느냐고 했습니다. 위 향주
께서는 몸은 조조의 군영에 있다고 해도 마음은 한나라에 있습니다. 여
러 가지 행동에 대해서 바깥의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실 수 없는 고
충이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자고로 영응호걸들은 모두 하나같이 수
고는 수고대로 하고도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주공(周公)과 같이 크
게 어질고 뛰어난 분에게도 관채(管蔡)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 비난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위 향주께서는
더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위소보는 주공이나 관채 같은 사람들을 알지 못하는지라 그저 대답만
할 뿐이었다. 여유량은 말했다.
[위 향주는 고심하면서 외롭게 뜻을 떨쳐 커다란 일을 꾀하고 있으니
천하를 보고 이해해 달라고 변명을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최
후로 경천동지할 커다란 사업을 해낸다면 모두들 지난 일들이 오해였다
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내가 무슨 경천동지할 커다란 사업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아이고,
야단났다. 이들은 또 나에게 황제를 찔러 죽이라고 권할 참인 모양이
다. 어떻게 이러쿵저러쿵 변명을 하여 사양을 할까? 나는 먼저 말문을
막아야겠다.)
그는 입을 열었다.
[형제에게는 전혀 재간이 없으며 학문은 더욱더 없으므로 하는 일마저
도 양쪽의 호감을 사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리하여 이 형제는
그만 좌절감에 빠져 이번에는 고로환향(告老還鄕)하여서 이후에는 아무
런 일도 하지 않을 작정이랍니다.]
고로환향이라는 것은 늙어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겠다는 숙어였다.
여의중은 위소보의 나이가 자기보다도 어린 편인데도 고로환향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듣고는 참을 수 없어 후훗, 웃었다. 고염무등도 역시
우스꽝스러워 빙그레 웃었다. 황여주는 웃으며 말했다.
[위 향주께서는 젊은 영웅이시니 전도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무지한 자들이 오해를 하는 것을 마음에 두실 필요가 없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이것은 따져야 마땅한 일이오. 황 선생, 그대는 한 권의 훌륭한 책을
지었더구려. 그 책 이름이 명···…명……뭐라고 했지요?]
황여주는 크게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사람은 글을 단 한 자도 모르는데 어째서 내가 그와 같은 책을 지
은 것을 알고 있을까?)
그는 말했다.
[명이대방록이라고 합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소, 그렇소. 그대는 그 책에서 많은 말로 황제를 마구 욕했다지
요?]
황여주 등은 깜짝 놀라 하나같이 생각했다.
(이 사람의 말을 들으니 또 한번 커다란 문자옥(文字獄)이 일어나게 되
겠구나.)
고염무는 말했다.
[그것은 황제를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황형이 그 책을 지은 것은 독특
한 의견을 피력하는 것으로써 인군이 되려는 사람의 도리가 어떻게 되
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지요. 황상께서는 이 며칠 동안 매일같이 황 선생의 그 책을 읽고
있으며 끊임없이 훌륭한 내용이라고 그대를 칭찬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
대를 모셔 가서 재상으로 삼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황여주는 말했다.
[위 향주께서는 농담을 하시는군요. 어떻게 해서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위소보는 이윽고 강희가 어떻게 명이대방록을 크게 칭찬했는지를 이야
기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안심을 했다. 황여주는 말했다.
[오랑캐의 황제도 시비를 분간할 줄 아는구려.]
위소보는 이것이 기희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소황제는 그 자신이 오생어탕은 아닐지 모르지만 명나라
때의 여러 황제들과 비교해서 뒤떨어지지 않다고 했으며 어쩌면 더 나
을지도 모른다고 했소이다. 그가 황제가 된 이후 천하의 백성들은 명나
라 때보다 훨씬 좋은 세윌을 보내고 있다고 했지요. 형제는 학문도 없
고 견식이 짧아 그의 그러한 말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릅니다.]
고염무와 사계좌, 황여주, 여유량 등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명
나라 때의 황제들로 말하면 명나라를 일으킨 태조에서부터 마지막 황제
인 순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잔인하고 포악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방탕하
고 멍청했으며 그 누구도 지금의 강희와 견줄 수가 없었다.
이들 네 사람들은 당대의 큰 선비들인지라 역사적인 사실을 잘알고 있
는 관계로 양심에 없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 자기들도 모르게 모두들
고개를 끄덕여 이 말에 수긍하고 있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도 훌륭한 사람이고 천지회의 형제들도 훌륭하지
요. 황제께서는 나에게 천지회를 없애라고 명했으나 나는 결코 그 일만
은 할 수가 없있소이다. 천지회의 형제들은 나에게 황제를 찔러 죽이라
고 했으나 그 또한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소. 그 결과 양쪽에서
모두 다 나를 탓하니 이 형제는 이리 생각해 보고, 저리 생각해 본 끝
에 고로환향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고염무는 말했다.
[위 향주, 우리가 이번에 찾아온 것은 그대에게 황제를 찔러 죽이라고
권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그것 참 잘되었소이다. 황제를 찔러 죽이는 일만 아니라면 이 형제는
의리상 사양할 수 없지요. 네 분 노선생과 두 분 소선생은 어떤 분부가
있으십니까?]
고염무는 선실의 창문을 열고는 바깥을 살폈다. 사방이 쥐죽은 듯이 고
요한 것을 확인한 후에 그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우리들은 위 향주 자신이 황제가 되라고 권하려고 왔소이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위소보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떨어져서
박살이 났다. 그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그건…···그것은 농담이 아니시오?]
사계좌는 말했다.
[결코 농담이 아넙니다. 우리 몇 사람들은 몇 달 동안 계획을 세우고
의논을 해보았습니다. 모두들 대명나라의 운이 다하여 천하 백성들의
마음이 명나라에서 떠나간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실로 명나라의 역
대 황제들은 너무도 백성들을 고달프게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통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랑캐가 우리 한인의 강산을 차
지하고 천하의 한인들에게 상투를 잘라 머리를 땋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랑캐의 의관으로 고쳐 입도록 했으니 이런 분통 터질 노릇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위 향주는 손에 병권을 쥐고 있고 또한 오랑캐 황
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만큼 높이 의기를 쳐들어 스스로 황제가 된다면
천하 백성들은 반드시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위소보는 여전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연신 손을 내저었다.
[나는…·‥나에게는 그와 같은 복이 없소이다. 나는 황제가 될 수 없
소이다.]
고염무는 말했다.
[위 향주께서는 남을 위해서 의리를 내세우는 분이시고 또한 봉록도 무
궁하신 분입니다. 이 천하를 두루 돌아보아도 한인들 가운데 그대와 같
은 복을 타고 난 사람을 다시 찾기는 힘들 것이외다.]
여유량은 말했다.
[우리 한인들은 만주 사람들보다 백 배나 더 많습니다. 백 명이 한 사
람을 죽인다면 어찌 이길 수가 없겠소? 그날 오삼계가 거사를 일으켰을
때 그가 바로 대명나라의 강산을 멸망하게 한 대매국노이므로 천하의
한인들은 그에 대해 이를 갈고 통한스럽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
을 거두지 못했던 것이오. 하늘과 사람이 모두 위 향주를 따르고 있습
니다. 최근에는 나찰병까지도 평정하여 중국의 높은 기공을 세웠으며,
그대의 명성은 그야말로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과 같습니다. 위 향주께
서 고개만 끄덕이신다면 우리들이 나서서 모든 강호의 호걸들에게 연락
하여 대사를 공히 도모하겠소이다.]
위소보는 가슴이 두근두근한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꿈에도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황제가 되라고 권고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한
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나이 어린 건달 출신이고 자랑할 수 있는 재간이라고는 기껏해야
욕이나 하고 노름을 하는 일입니다. 대장군이 되고 대관이 되었을 때도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승복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는데 어찌 이러한 내
가 황제가 될 수 있겠소. 이 진명천자(眞命天子)는 하늘같이 커다란 복
을 받고 태어나야만 됩니다. 저의 팔자는 잘못되어 있습니다. 전에 점
쟁이가 혜아려 본 바가 있습니다. 내가 만약 황제가 된다면 사흘도 살
지 못할 것입니다.]
여의중은 그가 다시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자 후훗,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사계좌는 말했다.
[위 향주의 팔자가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한 고명한 점쟁이에게 가서
물어 보도록 하지요.]
그는 위소보가 별로 지식이 없어, 대의를 들어 깨우쳐 주려고 하면 그
저 소의(小義)를 따져 대의를 논하려 하지 않으며, 대세를 들어 이야기
하면 그는 그저 소세(小勢)를 깨달을 수 있을 뿐이고 대세를 깨우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한 점쟁이를 사서 그가 진명
천자로서 옥좌에 앉을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면 오히려 믿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위소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의 사주팔자는 우리 어머니만이 알고 계신데 양주에 도달하였을 때
제가 가서 이를 여쭈어 보도록 하죠.]
사람들은 그가 솔직하지 못하게 사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유량
은 말했다.
[무릇 영웅호걸이라고 한다면 조그만 행동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한
고조로 말하면 활달하고도 커다란 아량을 지닌 분이신데, 위 향주보다
도 더 아무렇게나 지내던 사람이지요.]
그는 속으로 말했다.
(그대는 작은 건달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다. 그야말
로 한고조는 큰 건달 출신으로서 사람을 욕하고 노름판을 벌이는 데 있
어서 그대보다 터무니없는 짓을 더 많이 했다고 할 수 있지만 끝내는
한나라를 세운 개국지주(開國之主)가 되지 않았던가.)
위소보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모두들 절친한 친구들이니 내 그대들에게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그는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만지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밥을 먹을 수 있는 녀석을 여전히 남겨서 제기랄! 수십 년간 더 밥
을 먹도록 해야겠습니다. 이 녀석의 얼굴에는 한 쌍의 눈이 박혀서 연
극을 보거나 미녀를 보는 데 사용되고, 한 쌍의 귀는 이야기꾼의 이야
기를 듣는 데 사용하고 노래를 듣는 데도 사용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내
가 만약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나는 이 녀석의 목을 십중팔구 부지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리하여 잘려진다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될 것
이 아니겠소이까? 더군다나 황제가 되는 것 역시 즐겁지가 못하답니다.
강희는 대만에서 일전에 커다란 비바람이 불자 걱정을 했습니다. 그리
고 운남에서 그 누가 반란을 일으키자 신경을 써야 했으며 머리를 짜내
야 했습니다. 황제란 일은 고달프고도 재미없는 일이라 나는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고염무 등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속으로 그 말도 맞다
는 생각이 들었다. 위소보가 가슴속에 커다란 뜻을 품고서 나라를 위하
고 백성을 위하여 나설 생각이 없는데야 어찌 그를 설득하여 움직일 수
가 있겠는가! 이는 실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잠시 후 고염무
가 입을 열었다.
[이 큰일은 결정하기에 수윌한 노릇이 아니니…···]
막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십여 필의
말이 서쪽의 운하 언덕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달려오는 기척이 들
렸다. 밤은 깊어 사방은 조용한데 그 소리는 더욱 또렷이 들려오는 것
이었다. 황여주는 말했다.
[깊은 밤에 무슨 이유로 대대의 인마가 나타난 것일까?]
여유량은 말했다.
[혹시 순라를 도는 관병들이 아닐까?]
사계좌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소. 관병이 밤에 순라를 돌 때는 항상 느릿느릿하게 움직
이지, 이토록 빨리 말을 달릴 리가 있소? 혹시 강호의 호걸들이 아닐
까?]
그 말을 하는 사이에 동쪽 언덕에서도 수십 필의 말들이 달려왔다. 운
하의 폭은 그리 넓지 못하여 양쪽의 언덕에서 말을 달리면 운하의 가운
데에 있는 배에서는 이를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뒤의 한 척외 배에
서는 사공이 명을 받아 닻을 올리고 배를 이쪽 배로 가까이 다가오게
하였다. 소전과 쌍아가 뱃머리로 뛰어올라왔다. 소전은 말했다.
[상공, 아무래도 저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좋은 뜻을 품고 있지 않은
듯하니 모두들 함께 있도록 하시지요.]
위소보는 말했다.
[좋소. 고 선생 등은 모두 노선생이라 결코 호색을 탐하는 사람같지는
않구려. 모두들 들어오시오. 이분들에게 얼굴을 보여도 상관이 없소.]
고염무 등은 속으로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하나같이 위소보의 안사람들과 만나기가 거북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배
뒤로 걸어나갔다. 공주와 아가 등 일곱 부인들은 아들과 딸들은 안고서
앞쪽의 선실로 들어왔다.
이때 동쪽과 서쪽 양쪽 운하의 두 언덕 위에서 삘리리, 하는 대나무 피
리 소리가 이쪽 저쪽에서 서로 호응하면서 들려왔다.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천지회의 피리소리요!]
양쪽 언덕 위 수십 필의 말들은 관선 곁으로 다가왔고, 서쪽 언덕 위에
서 그 누군가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위소보, 썩 나오너라!]
위소보는 나직이 욕을 했다.
[제기랄! 저토록 아래위가 없다니, 위 향주라고 부르지 않고·····
·]
그가 뱃머리로 나가려고 했는데 소전이 그를 덥썩 잡고 말했다.
[잠깐, 제가 똑똑히 물어 본 후에 응답하도록 하세요.]
그녀는 선실 입구로 걸어가서 소리쳐 물었다.
[어느 영웅호걸들이 위 상공을 찾으시오?]
그녀는 양쪽의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말 위에 타고 있는 사람
들 모두가 다 푸른 베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고 손에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서쪽 언덕 위에서 앞장을 섰던 사람이 말했
다.
[우리는 천지회의 사람들이오.]
소전은 나직이 말했다.
[천지회의 사람들이 서로 만났을 때의 암호는 어떻게 되지요?]
위소보는 선실 입구로 다가가서 낭랑히 외쳤다.
[오인분개 일수시(五人分開一首詩), 신상홍영 무인지(身上洪英無人
知)!]
말 위의 사람이 말했다.
[그것은 천지회의 엣날 시(詩)외다.]
옛날 위소보가 천지회를 배반하고 적에게 항복한 이후 부귀영화를 누리
기 위하여 그의 사부님을 해쳤다는 소문이 퍼진 후에 천지회는 암호를
모조리 고쳤었다. 위소보는 놀라 말했다.
[그대는 누구요? 누군데 그와 같은 말을 하시오?]
그 사람은 말했다.
[그대가 바로 위소보요?]
위소보는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내가 바로 위소보요.]
그 사람은 말했다.
[그대에게 말해도 상관이 없겠지. 나는 천지회의 굉화당 좌하의 서(舒)
아무개라는 사람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서형이었군. 이 가운데에는 많은 오해가 있소. 귀당의 이 향주는 이
부근에 계시오?]
그러자 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그대는 하늘보다 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향주께서 그만 울화가
치밀어서 돌아가시고 말았소.]
서쪽 언덕 위에 있던 사람들이 큰소리로 말했다.
[위소보는 천지회를 배반하고 적에게 항복을 했으며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자기의 사부님까지 해친 사람이오. 그런데 서형은 그러한 사람
에게 더 말할 것이 무엇이 있소? 우리들은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 진
근남 총타주와 이 향주의 원수를 갚도록 합시다.]
동쪽 언덕 위에 있던 사람들도 그 말을 듣자 역시 큰소리로 그와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별안간 휙, 하니 그 누가 언덕 위에서 한 발의 비황
석을 던졌다. 위소보는 재빨리 선실 안으로 몸을 숨기며 속으로 야단났
다고 생각했다.
(굉화당 이 향주가 죽었구나. 이 형제들은 시비곡직을 가리지 않고 손
부터 쓰려고 하니 이를 어쩌면 좋지?)
이때 선실의 지붕 위에서 퍽퍽, 하는 소리가 크게 일었다. 양쪽에서 끊
임없이 암기가 날아드는 모양이었다. 관선은 운하의 한복판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양쪽 언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편이라 암기들은 거
의 물 속에 떨어졌고 설사 배 위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힘이 무척
약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제갈양이 배에 짚단을 가득 싣고서 불화살을 받는 격이
로구나. 나는……나는 노숙(魯肅)으로 그저 놀라 몸을 떠는 일밖에는
할 수가 없구나. 어느 제갈양…… 제갈양이 빨리……빨리 방책을 강구
하구려.]
고염무 등은 사공들과 함께 배 뒤에 있었는데 암기가 다투어 쏘아져 오
는지라 모두 선실 안으로 피했다. 별안간 불빛이 번뜩이는 가운데 몇
대의 불화살이 선실로 쏘아져 들어왔고 선실 지붕이 대뜸 타오르기 시
작했다. 위소보는 부르짖었다.
[아이쿠! 야단났구나. 저들은 불을 질러 나 위소보를 태워 죽이려 하는
구나!]
소전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고염무 선생께서 바로 여기에 계시니 그대들은 더 어상 무례한 짓을
하지 마시오!]
그녀는 고염무가 강호에서 명성이 무척 높은지라 천지회의 무리들도 그
에게는 감히 함부로 죄를 짓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양
쪽 언덕 위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끌시끌해 그녀의 음성은 들리
지 않는 모양이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여러 마누라, 우리 함께 '고염무 선생이 여기 계시오' 하고 부르짖도
록 합시다. 하나 둘 셋!]
일곱 명의 부인들은 위소보의 말을 따라 일제히 부르짖었다.
[고염무 선생이 여기에 계시오!]
세 번째 소리쳐서야 언덕 위의 사람들 소리가 점차 조용해지는 듯하더
니 암기를 쏘는 것도 멈춰졌다. 그 서가가 소리쳐 물었다.
[고염무 선생께서 그 배 안에 계십니까?]
고염무는 뱃머리로 나아가서 두 손을 맞잡았다.
[형제, 고염무는 여기에 있소.]
그 서가는 어이쿠, 하더니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자맥질을 할 수 있는 형제들은 빨리 운하로 뛰어들어 배를 언덕 쪽으
로 끌어당기도록 하시오.]
곧 텀벙텀벙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더니 십여 명의 사람들이 운하
로 뛰어들어 배를 밀고 또 끌어당기면서 서쪽 언덕으로 옮겨 가도록 했
다. 배 위의 불길은 이미 심하게 치솟고 있었다. 쌍아는 위소보를 데리
고 먼저 언덕 위로 올라갔고 그 나머지 사람들 역시 그 뒤를 다투어 언
덕 위로 올라갔다. 천지회의 무리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사방에서 이들
을 에워쌌다. 그 서가는 고염무에게 포권을 하고 허리를 굽히더니 말했
다.
[불초는 천지회 굉화당의 서화룡(舒化龍)이라고 합니다. 고 선생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고염무 역시 이에 두 손을 모으고 답례했다. 천지회의 무리들 중에서
한 노인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과거 하간부에세 살귀대희를 열었을 때 천하의 영웅들은 고 선생을 총
군사로 삼게 되었지요. 그때 불초는 고 선생을 한 번 뵈온 적이 있습니
다. 형제들의 경망한 행동을 아무쪼록 용서해 주십시오.]
위소보는 웃있다.
[그대들은 원래부터 일을 처리할 때 경솔한 바가 있지 않소?]
그 늙은이는 날카롭게 외쳤다.
[나는 고 선생에게 말하는 것이다. 누가 그대와 같은 매국노를 상대로
얘기했는 줄 아느냐?]
그는 손을 뻗쳐 위소보의 가슴곽을 잡으려 했다. 소전은 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왼손을 들어 금나수법을 써서 그의 손목을 비틀어 잡고 상
대방의 힘을 빌어 확 떠밀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제대로 서 있지 못하
고 바깥쪽으로 내동댕이쳐지게 되었다. 천지회의 무리가 달려들어서 그
를 부축했다. 고염무는 외쳤다.
[모두들 말로 하는 것이 좋겠소! 손을 쓰지 마시오! 손을 쓰지 마시
오!]
이때 관선의 선실 안으로 이미 불길이 번졌고 그 화광에 언덕 위에 있
는 사람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소전은 자기와 쌍아의 무공이 고강
하기 때문에 남편을 호위하여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것은 그리 어려
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천지회의 무리들이 상대하고자 하는 사람
은 그저 위소보 한 사람이니 그 한 사람만 도망친다면 이 강호의 사람
들은 부녀나 어린애들을 괴롭히지는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 즉시 그녀는 쌍아와 함께 위소보의 좌우에 서서 세 필의 말을 눈여
겨보아 두었다. 일단 쌍방에서 오고가는 말들이 곱지 못하고 싸움을 하
게 된다면 즉시 손을 써서 말을 빼앗으려는 속셈이었다. 고염무는 서화
룡의 손을 잡고 말했다.
[서형, 귀 좀 빌립시다.]
두 사람은 수장 밖으로 나아갔다. 서화룡은 고염무의 말을 몇 마디 듣
더니 큰소리로 육칠 명을 불러 갔다. 그 모양을 보건대 그들이 이 사람
들의 수령인 것 같았다. 그 안에는 소전에게 내동댕이쳐진 늙은이도 들
어 있었다. 나머지 사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여전히 위소보를 겹겹
이 에워싸고 있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배 위에는 값진 물건이 적지 않게 있는데 그대들이 삽시간에 불태워
버렸으니 굉화당에서 이를 배상하려면 크게 손해를 볼 것이오.]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칼을 들고 위협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욕을 했다. 위소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염무가 서화룡 등에게 진상
을 설명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연 서화룡 등 굉화당의 수령들은
고염무의 설명을 들은 이후 그 동안에 퍽이나 곡절과 까닭이 많았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되었다. 위소보가 조정에서 대관 노릇을 하고 있는 것
은 여전히 여러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총타주 진근남이 그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속의 분노와 증오심이 모두 사
그라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그에게 다가왔다. 서화룡은 포권의 예를 하
며 말했다.
[위 향주, 조금 전의 일들은 모두 우리들의 오해로 인한 것입니다. 고
선생께서 만약 깨우쳐 주시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크나큰 죄를 지을
뻔했소이다.]
위소보는 웃었다.
[정말 나에게 죄를 짓는다는 것은 그리 수윌한 노릇이 아니지요.]
그러더니 그는 몸을 비스듬히 날려 신행백변이라는 무공을 펼쳤다. 왼
쪽으로 달려들다가 오른쪽으로 슬쩍 가로질렀고 두세 번 몸을 날리자
이미 굉화당 무사들의 포위 밖으로 달려나갔으며 벌떡 몸을 날려서는
한 필의 말 위에 올라탔다.
서화룡 등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 누구도 그의 경신법이 이토록 신묘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사람의 무공이 이토록 고강한 것
을 보면 어린 나이에 천지회 청목당의 향주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있다. 명사에게 고제자가 나는 법이라 총타주의 직계 제자는 역
시 대단한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굉화당의 그 늙은이는 무공이 무척 강했으므로 형제들이 평소 탄복해
왔는데도 소전이 한 번 비틀어 밀자 방어할 여지도 없었고 하마터면 곤
두박질을 칠 뻔하지 않았던가? 나머지 여섯 명의 부인들도 하나같이 고
수들인 것 같아 자기 쪽의 사람수가 비록 많았지만 정말 손을 쓴다면
그야말로 창피를 톡톡히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소
보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만 실례하겠소이다.]
그는 말고삐를 잡아당기더니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서쪽으로 십여 장
을 달려가더니 벼락같이 말에서 뛰어내려서 북쪽으로 달려가다가 왼쪽
을 뚫고 오른쪽으로 뛰어들었는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또다시 포위망 안으로 들어와 싱글벙글 웃으며 원위치로 돌아와 서 있
는 것이 아닌가? 그 누구도 그가 어떻게 되돌아왔는지 볼 수 없었다.
천지회의 무리들은 서로 쳐다보며 아연해 했다. 서화룡은 포권을 했다.
[위 향주의 무공이 무척 뛰어나구려. 탄복했소이다! 탄복했소이다!]
위소보 역시 포권을 하며 웃었다.
[못난 꼴을 보였소이다.]
서화룡은 말했다.
[고 선생은 조금 전에 위 향주께서 몸은 비록 조조의 군영에 있으나 마
음은 한나라에 있으며, 한 가지 경천동지할 큰일을 하여서 천하를 한인
들에게 돌려주려고 한다고 했소이다. 위 향주가 정말로 거사를 벌였을
때 우리 굉화당의 형제들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위 향주께서 어떠한 일
을 시킨다면 끓는 물 속이나 타는 불 속으로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예.]
서화룡은 위소보가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자 갑자기 오른손의 식
지를 뻗쳐 내더니 곽, 하고 자신의 왼쪽 눈을 찔렀다. 대뜸 선혈이 흘
러내렸고 사람들은 경악에 찬 소리를 질렀다. 위소보와 고염무는 모두
놀라 부르짖었다.
[서형, 이게…‥·무슨 짓이오?]
서화룡은 가슴을 치며 말했다.
[형제가 위 향주의 위엄을 거슬려서 본희의 웃어른을 존경해야 한다는
계율을 어겼으니 두 알의 눈동자를 찔러서 멀게 하여 저의 버릇없음을
징계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 형제는 다른 한 알의 눈동자를 남겨
두어 위 향주가 도대체 어떤 경천동지할 큰일을 이루고자 하는가를 보
고 싶습니다.]
그 노인은 싸늘히 말했다.
[만약에 위 향주가 아무 일도 벌이지 않고 시종 부귀공명만 욕심내어
오랑캐의 큰 벼슬아치 노릇만을 계속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서화룡은 말했다.
[그렇다면 위 향주 역시 자신의 눈알을 뽑아서 나에게 배상해야 할 것
이외다.]
그는 고염무와 위소보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우리들은 위 향주에게서 좋은 소식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왼손을 흔들자 사람들은 흩어져 물러났으며 모두 말 위에 올랐
다. 그 노인은 고개를 돌리고 부르짖었다.
[위 향주,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에게 물어 보시오. 그대의 아비가 한
인인지, 만주인인지 말이오. 사람이란 자기의 조상을 잊어서는 안 되
오.]
대나무 피리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동쪽 언덕 위의 군호들 역시 말
을 달려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삽시간에 양쪽 언덕 위의 인마는 깨끗이
물러갔고, 운하에는 그 한 척의 관선만이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고염
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형제들은 위 향주에 대해서 여전히 의심하고 있구려. 그들은 초망
의 영웅호걸들이라 말을 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거칠긴 하지만 충
성스런 마음에는 절로 존경심이 우러나는구려. 위 향주, 우리가 나누었
던 모든 이야기들을 그들에게도 이야기했소. 그저 그대가 대한의 자손
이란 것을 명심하기 바라오. 우리들은 이만 작별하도록 합시다. 이후에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그는 두 손을 잡고 흔들어 보이더니 황여주, 사계좌, 여유량 등과 함께
작별을 하고 떠나갔다. 위소보는 망연히 언덕 위에 서 있었는데 가을
바람이 불어옴에 따라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아 왔다. 관선의 불길
은 점점 사그라들었고 간혹 가다가 무엇인가 탁탁 터지는 소리가 들려
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불길이 다시 치솟았다가는 점차 잦아들었다. 그
는 중얼거렸다.
[이를 어떻게 하지? 이를 어떻게 하지?]
소전은 말했다.
[아직도 한 척의 배가 남아서 다행이에요. 우리는 먼저 사양집으로 돌
아가서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해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 늙은이는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에게 나의 아비가 한인인
지 만주인인지 물어 보라고 했소. 허허허! 이 말은 정말 틀리지 않는
말이오.]
소전은 권고했다.
[소보, 그와 같이 거친 사람이 터무니없이 지껄이는 말을 마음에 둘 필
요가 없어요. 어서 배에 오르도록 해요.]
위소보는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마음속은 어지럽기만 했다.
고개를 숙이고 보니 땅바닥에 몇 방울의 피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
다. 바로 서화룡이 스스로 자신의 왼쪽 눈을 찔러서 홀린 피였다. 그는
갑자기 부르짖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
일곱 부인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랐다. 위쌍쌍은 어머니의 품속에 안겨
잠이 들어 있었는데 위소보의 크게 부르짖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나
서 자지러지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위소보는 큰소리로 말했다.
[황제는 나에게 천지회를 없애라고 압박을 가하고 천지회는 나에게 황
제를 공격하라고 핍박한다! 나는 두 척의 배에 양발로 딛고 서서 양쪽
모두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나의 머리를 자르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의 눈알을 뽑아 내려고 하고 있다. 한 사람에
게 몇 개의 머리통이 있으며 몇 개의 눈알이 있단 말인가? 이쪽에서는
나를 칼로 치고 저쪽에서는 두 눈을 후벼파려고 한다면 내 자신에게 남
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하지 않겠다. 나는 이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소전은 그의 정신 상태와 표정이 이상해진 것을 보고는 부드러운 어조
로 권했다.
[소보, 조정에서 벼슬을 하는 것은 온종일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태워야
하며 재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천지회의 향주 역시 좋을 것이
없어요.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
도 없이 잘된 일이에요.]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그대들 역시 나에게 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이오?]
소전, 방이, 아가, 증유, 목검병, 쌍아 여섯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건녕 공주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겨우 공작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벼슬을 하지 않으려는 거예
요? 어쨌든 왕에 봉해져야 하고 수보대학사(首輔大學士)가 되고, 장상
이 된 이후에야 늙었다고 은퇴를 하는 거예요. 더군다나 그대가 지금
벼슬에서 물러나려고 한다면 황제 오라버니께서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위소보는 버럭 노성을 질렀다.
[내가 벼슬을 하지 않는다면 황제의 간섭 또한 받지 않게 되는 것이오!
그는 나의 처남에 불과하오. 제기랄! 다시 잔소리를 한다면 나는 그의
매부가 되기를 마다하겠소!]
매부가 되기를 마다하는 것은 바로 공주를 마다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공주는 그만 놀라서 감히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일곱 부인들
이 다시 이의를 달지 않자 신이 나서 말했다.
[굉화당에서 온 사람들은 내가 타고 온 배를 불태웠는데 정말 잘 태웠
소! 멋지게 태웠소! 그야말로 신나게 태웠다고 할 수 있소! 우리가 살
그머니 숨어 버린다면 지방의 벼슬아치들은 틀림없이 우리가 비적들에
게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고 조정에 보고를 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나
의 처남은 다시는 나를 찾지 않을 게 아니겠소?]
소전 등은 일제히 손뼉을 쳤으나 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즉
시 여덟 사람들은 상의를 하고 결정을 내렸다. 위소보, 공주, 쌍아 세
사람은 옷차림을 바꾸고 회음의 객점으로 가서 기다리도록 하는 한편
소전은 방이, 아가, 목검병, 증유 등 네 명을 데리고 사양집에 정박시
켜 놓은 배로 되돌아가서 금은과 보석들, 그리고 여러 가지 중요한 물
건들을 손에 챙긴 후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위 공작 나으리의 관선이
어두운 밤중에 한 떼의 도적들의 습격을 받아 배는 망가지고 사람들은
죽었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쪽 배에 타고 있던 몇 명의 사공들은
위소보가 죽지 않은 것을 보았으니 그야말로 커다란 우환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소전은 그대로 그들을 죽여 입을 봉한 후 시체를 운하가에
버려 두면 더욱더 그럴싸하게 보이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목검병은 차
마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소전은 말했다.
[좋아, 검병 누이는 양심이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보호하여 통통
한 아들을 많이 낳게 해주실 거야. 소보, 내가 검을 들고서 그대를 죽
이려고 할 테니 그대는 숲속으로 도망을 치면서 큰소리로 부르짖어요.
그대가 나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가장하도록 하죠.]
위소보는 웃었다.
[그대는 악독한 마누라로 가장해서 자신의 친남편을 모살하려는 것이
오?]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람 살려! 사람을 죽인다!]
그는 냅다 뺑소니를 치기 시작했으며 몇 바퀴 원을 돈 이후에 숲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소전은 검을 들고 그를 쫓아 숲속으로 달려갔다. 이
때 위소보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목숨만 살려 주오! 목숨만 살려 주오! 사람 살려……!]
살려라는 두 자로 된 한 마디를 내지른 이후 갑자기 그의 소리가 뚝 멈
춰지고 말았다. 목검병은 가짜인 줄 알면서도 위소보의 부르짖는 소리
가 처절하게 들려오자 그만 가슴이 쿵쿵 어지럽게 뛰놀기 시작해서 나
직이 물었다.
[쌍아 누이, 저 비명소리는……가짜겠지?]
쌍아는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물‥··‥물론 가짜예요.]
그러나 그녀도 역시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때 소전이 숲속에서
검을 들고 나오면서 외쳤다.
[사공들을 모조리 죽이자.]
사공들은 줄곧 운하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천지회의 무리들이
불을 질러 배를 태우고 소전이 흉악하게 위 공작 나으리를 죽이는 것을
보고는 벌써부터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전이 검을 들고 자기들
을 죽이려고 달려들자 즉시 사방팔방으로 죽어라 하고 도망질을 쳤으며
삽시간에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쌍아는 위소보가 걱정이 되어서 재빨리 숲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살펴보니 위소보가 땅바닥에 쓰러져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쌍아는 그만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라서는 소전이 잘못하여 그를 진짜로
죽인 것이 아닌가 하고 달려들면서 부르짖었다.
[상공, 상공!]
그러나 위소보의 몸은 뻣뻣했다. 그녀는 더욱더 당황해서 재빨리 손을
뻗쳐서 그를 부축했다. 위소보는 재빨리 두 팔을 쫙 벌리더니 그녀를
꼭 껴안고서 부르짖었다.
[대성공이니 우리 입이나 한번 맞추자!]
위소보와 그의 여자들은 재물을 챙긴 후에 옷차림을 바꾸고 양주로 내
려가 모친을 빼냈다. 그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운남으로 갔으며 그 이후
부터는 성과 이름을 감추고 대리성에서 자유스럽고도 멋진 나날을 보내
게 되었다.
위소보는 한가하고 무료할 때마다 아극살 성의 녹정산 아래에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으며 아직 파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였다. 그리
고 그 자신이 천하의 으뜸가는 부자라고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또 흡족
하게 여겼다. 다만 그는 강희와의 교분을 생각해서 차마 그의 용맥을
자를 수 없어서 녹정산으로 가서 보물을 캐려고 하지 않았다.
강희는 위소보의 성격과 재간을 잘 알고 있있다. 그가 가볍게 도적들에
게 해침을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시
체도 못 찾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그는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어 알게
모르게 조사하였으나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었다. 후세의 역사가들
도 강희가 여섯 번이나 강남으로 내려간 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 주지
(主旨)는 황하의 하공(河工)을 시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어
째서 그는 이전에는 한 번도 강남으로 간 적이 없었는데 위소보가 실종
되자마자 그 해에 바로 강남으로 내려갔을까? 하공을 순시한다면서 항
주까지 내려갈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매번 양주에서 그
토록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일까? 어째서 매번 많은 어전시위들을 양주
주외의 각처에 있는 기녀원, 도박장, 찻집, 술집 등으로 보내어서 위소
보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하고 탐문했을까? 그리하여 어떠한 성과도
올리지 못하자 그토록 우울하고 즐겁지 못한 표정을 지었을까?
후세의 사가(史家)들이 고증한 바에 의하면 흥루몽(紅樓夢)의 작가 조
설근(曹雪芹)의 조부 조인(曹寅)은 원래 어전시위였으며 한때는 위소보
의 수하 노릇을 하기도 하였는데 후에 강희에 의해 소주로 파견되어 비
단 짜는 일을 책임지게 되었고 또 강령(江寧)에서 비단 짜는 일을 책임
지기도 했는데 강희 황제는 그에게 오랫동안 강남의 번화한 곳에 머물
도록 하면서 그 부근에서 위소보를 찾아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었
다.
위소보가 부인과 아들딸들을 데리고 양주에 내려간 날 위춘방은 일곱
명의 며느리들이 하나같이 꽃과 같이 예쁜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소보라는 이 좀도둑이 계집들을 알아보는 눈은 있단 말이야. 이 녀석
이 기녀원을 열면 반드시 큰 재물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위소보는 어머니를 방안으로 끌어들이면서 다짜고짜 물었다.
[어머니, 나의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지요?]
위춘방은 눈을 부릅떴다.
[내가 어떻게 아니?]
위소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가 뱃속에 나를 잉태하기 전에 어떤 손님들을 받았나요?]
[그때 너의 어머니는 매우 예뻤단다. 그래서 매일 여러 손님들이 찾아
들곤 했는데 내가 어찌 그들 모두를 기억할 수 있겠느냐?]
[그 손님들은 모두 한인들이었나요?]
위춘방은 말했다.
[물론 한나라 사람도 있었고, 만주의 벼슬아치도 있었으며, 또 몽고의
무관도 있었다.]
[외국의 귀신 같은 작자는 없었나요?]
위춘방은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너의 에미가 썩어 문드러진 갈보인 줄 아느냐? 외국 귀신들마저
도 받게? 빌어먹을! 나찰귀, 홍모귀(紅毛鬼) 들이 여춘원으로 들어올
때마다 이 에미는 빗자루로 그들을 쓸어 냈단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안심을 했다.
[그것 참 잘하셨습니다.]
위춘방은 고개를 쳐들고 옛일을 희상해 보다가 말했다.
[회족(回族) 사람이 있어서 종종 나를 찾아왔는데 그의 얼굴 모습이 매
우 준수했단다. 나는 종종 너를 볼 때마다 너의 잘생긴 코가 그를 닮았
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지.]
위소보는 말했다.
[그러면 한인, 만주인, 몽고인, 거기에다가 회족 사람까지 있었군요?
그럼 서장 사람은 없었나요?]
위춘방은 크게 의기 양양해져서 말했다.
[어째서 없었겠느냐? 그 서장의 라마는 침대 위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불경을 외웠지. 불경을 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눈동자를 슬금슬금 굴
려서 나를 쳐다보았단다. 너의 눈동자가 흘금거리는 것을 볼 때면 그
라마를 보는 것 같다니까!]
<녹정기 끝>
---------著者 後記-----------
<녹정기>는 1969년10월 24일부터 <명보(明報))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1972년 9월 23일 끝을 맺었다.2년 11개월 동안 연재한 셈이다. 나는 습
관적으로 매일 1희분을 써서 그 다음날 신문지상에 발표했으니 <녹정
기>를 연재하는 2년11개월 동안에 매일같이 집필을 한 셈이다. 만약 특
수한 예외가 없다면(살아 있는 동안에는 특수한 예외가 있을 수 있으므
로) <녹정기>는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다.
<녹정기>는 일반 무협소설과 다른 점이 많으며 역사소설의 범주에 속한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녹정기가 연재될 때 독자들은 편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곤 했었다.
'녹정기는 다른 사람이 쓴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녹정기가 과거의 내
작품과 매우 다른 것을 알고 그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이다. <녹정기>는
내가 직접 쓴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나의 작품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주고 나를 총애하고 격려하는데 대해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녹정기>와 내가 이전에 썼던 무협소설은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내가
일부러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작가는 자기의 고정된 풍격
(風格)과 형식에 얽매이면 안 되며 항상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독자들은 <녹정기>의 주인공 위소보의 품덕(品德)에 불만을 느끼
기도 한다. 위소보의 품성이 일반적인 가치관에 상당히 위배되기 때문
이다. 무협소설의 독자들은 습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소설 속의 영웅에
대입시킨다. 그러나 위소보에게 자기 자신을 대입시키기는 꺼려할 것이
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독자들의 흥취를 조금 박탈한 것이 아닌가
싶어 미안한 생각도 든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이 반드시 좋은 사람이
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인물을 창조
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결점이 있는 사람, 장점을 지닌
나쁜 사람 등을 모두 묘사해야 한다.
강희제 시대의 중국에 위소보와 같은 인물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작가는 한 명의 인물을 묘사할 때 반드시 긍정적인 전형(典型)을 창조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햄릿처럼 우유부단한 인물도 창조할 수 있고
로뎅처럼 실천력이 없는 사람도 묘사할 수 있으며 <주홍글씨>의 목사처
럼 간통을 하는 인물을 묘사할 수도 있으며 안나 카레리나처럼 남편을
배신하는 사람을 묘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는 다만 어떤 유형의
인물을 묘사하면 그걸로 족하며 독자들이 작중인물을 모방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소설 속의 인물이 완전무결하면 진실과 거리가 멀어진다. 소설은 사회
의 반영이다. 현실사희에는 절대로 완전무결한 사람이란 없다. 소설은
결코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그러나 내 소설의 독자들 가운데는 소년
소녀들이 많으므로 순진한 꼬마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즉
위소보는 의리를 중시하는 좋은 품성을 지니고 있지만 여타의 다른 행
위는 결코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쓴 모든 작품은 장편 12부 단편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일찍
이 작품의 이름에서 앞글자를 따서 다음과 같은 한 쌍의 대련(對聯)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飛雪連大射鹿, 笑書神俠倚碧鴛>이 그것이다. 그
러나 이 대련 속에 단편소설인 <윌녀검(月女劍)>은 포함되지 않았다.
최초의 작품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은 1955년에 연재하였고, <월녀
검>은 1970년 1윌에 연재하였다. 나는 15부의 장편과 단편을 쓰는 데
15년이 걸렸다. 단행본 출판을 위해 1970년 3월부터 교정 작업을 시작
하여 1980년에 끝마쳤다. 그러니 교정을 보는 데만 꼬박 10년이 걸린
것이다. 물론 그 동안에 많은 일들을 했으며 가장 중요한 업적은 <명
보>를 경영하고 <명보>의 사설을 썼다는 점이다. 우연히 독자들을 만나
면 그들은 자주 한 가지를 질문하곤 한다.
'당신은 자기가 쓴 작품 중에서 어느 작품을 가장 좋아합니까?,이런 질
문은 매우 대답하기 곤란하므로 한번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다
만 '내가 좋아하는' 측면에서 말한다면 나는 비교적 감정이 격렬하게
묘사된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비호외전>, <소오강호> 같은 작품
을 좋아한다.
또 항상 따라다니는 질문은 '당신은 어떤 작품을 높이 평가합니까?'이
다. 이 질문은 작품의 기교와 가치를 묻는 것인데 나 자신의기교와 작
품성이 시간이 흐를수록 진보했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장편이 단편보
다 우수하고, <녹정기>와 같은 후기 작품일수록 이전의 작품보다 작품
성이 뛰어나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람마다 작품을 보는 관점이 다를 것
이다.
------作家 紹介------
原作 : 金 庸
김용은 1924년 중국 절강성(浙江省) 해령(海寧)에서 태어났다. 역사학
자, 수집가, 논설가이기도 한 그는 상해 동오법과 대학(東吳法科大學)
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으며 현재 홍콩에서 발행되고 있는 일간,주간,
월간 명보(明報)의 주필이자 사장이지만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더욱 높
다.
오랫동안 중국문단의 기인(奇人)이자 소설의 거장으로 각광받아은 그는
'영웅문','천룡팔부','신조협려','소오강호' 등 십여편의 장·단편 소
설을 발표해 이미 신필(神筆)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동남아, 대만, 홍콩, 중국 대륙은 물론 구미에 이르기까지 천만명 이상
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중국 역사 소설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김용의
소설 가은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녹정기'는 작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응대한 스케일의 대작으로 그의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상
상력을 동원해 필생의 정력을 다해 썼기 때문에 '녹정기'를 능가하는
작품을 다시는 쓸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譯者 : 朴永昌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를 졸업했으며 현재 중국어 번역가,
평론가, 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림파천황, 구마경 등의 창
작소설과 '천룡팔부', '소오강호','명황성','청강만리'등 다수의 번역
서가 있다.
책,영화,리뷰,
김용 녹정기09
반응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