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375∼413)
고구려 제 19 대 왕으로, 살아 있을 때는 영락 대왕으로 불리었다. 광개토 대왕은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왕이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백제를 정벌하
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을 차지하였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
내어 왜구를 격퇴시켰으며, 동예를 정복하였다. 또한, 연나라의 침입을 두 차례나 받았으나, 요동
성과 목저성에서 모두 격퇴시키기도 하였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하여 철령 이북의 동부여
땅은 고구려 땅이 되었다. 남으로는 한강까지 진출하였고, 서로는 요동 지역을 확보하여 만주의
광활한 땅을 지배하였다. 광개토 대왕은 39세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능은 장소가 불분명하나 장
수왕이 414년에 세운 광개토 대왕비가 만주 지린(길림) 성 지안(즙안) 현에 남아 있어, 그의 생애
와 업적을 알 수 있다.
1. 씩씩한 왕자
왕자님, 왕자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놈이 또 나타났습니다.
담덕 왕자는 뛰어나갔다. 바깥 뜰은 밤새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다. 하늘에서 팍팍 하며 큰 날
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닙, 위험합니다. 조심하십시오.
담덕의 충실한 부하 을내는 추녀 아래 몸을 숨긴 채 외치고 있었다. 하늘에는 유난히도 크고
사나운 독수리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던 것이다.
독수리는 공중을 휘휘 돌다가 별안간 날개를 짝 펴고 소리 없이 공중을 미끄러져 내려와 흰눈
에 검은 그림자가 멍석처럼 덮으면서 무섭도록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람
이고 짐승이고 채 가는 것이다. 그래서 독수리가 나타나면 모두들 조심해야 한다.
걱정 마라!
담덕은 이 때 열한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몸집이 크고 유난히도 팔이 길었다.
아니, 무서운 독수리와 맞서겠다는 것일까?
담덕은 손에 한 팔쯤의 가죽끈을 잡고 빙빙 돌리고 있었다. 가죽끈 끝에는 주먹만한 돌이 매어
져 있어, 그것을 회전시키며 가죽끈을 확 당기는 것과 동시에 팔꿈치를 비틀면 돌이 번개처럼 날
아간다. 이것은 일종의 투석기로 전투에도 사용되는 무기의 하나이다.
이놈, 오늘은 내 손에 죽고 말리라.
담닥 왕자가 벼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겨울이 되고 눈이 쌓이면서 독수리가 대담하게도 왕궁 근처에 자주 나타났다. 그리고 왕자가
사랑하던 사냥개 한 마리를 채갔던 것이다.
한 번 맛들이자 독수리는 또다시 나타났다. 본래 독수리는 들쥐나 뱀, 새, 물고기,그리고 죽은
동물을 잡아 먹는다.
대부분의 맹수들은 사람이 사는 마을 근처에는 좀처럼 잘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마을 근처에
서는 쉽게 먹이를 구할 수 있는 대신 인간의 복수가 무섭기 때문이다.
이 독수리는 그러한 본능적 경계심마저 잊고 있는 것이다.
팍, 팍
날게 소리로 무섭에 겁을 주고 있었다. 나무가 없는 벌판이라면 아무리 담덕이 용감하다 하더
라도 독수리와 맞선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 곳에는 군데군데 소나무가 가지를 드리
우로 있었으며, 독수리도 쉽게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담닥은 그 잠을 충분히 계산하여, 몸을 가끔 노출시켜 가며 독수리가 땅에 가까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앗, 왕자님!
을내는 외쳤다. 검은 바위덩이처럼 독수리가 곧바로 떨어져 왔다. 그리고 다시 날이오르려는 순
간 담닥의 가죽끈에 매달린 돌이 독수리를 향해 날아갔다.
팍, 팍, 퍽!
요란한 날개 소리와 함께 돌이 날개죽지를 맞히는 소리가 동시에 났다. 잔털이 동시에 날렸다.
독수리는 그대로 빠르게 지나갔으나, 이내 속력이 떨어지며 크게 기우뚱거렸다.
맞았어요! 저놈이 비틀거리고 있어요!
을내는 좋아라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개도 덩달아 짖어대며 따라왔다.
위험하다. 엎그려!
담덕이 자기의 몸으로 을내를 껴안고 땅에 뒹굴었다. 담덕이 조금만 늦게 행동했다면, 을내는
독수리의 반격을 받고 크게 다쳤을 것이다. 독수리는 부상을 입고서 달아나는 척하다가 날개를
돌려 최후의 공격을 해 왔던 것이다.
독수리는 얼마쯤 더 날아가다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사냥개 몇 마리가 쫓아갔지만, 독수리로부
터 멀찍이 떨어져 사납게 짖어대고 있었다.
을내는 훌쩍훌쩍 울었다.
괜찮아, 이제 염려 없어.
왕자님! 왕자님은 저의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오늘의 일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글세, 지나간 일이라니까.
그러면서 몸울 일으키다가 담닥은 놀랐다. 어느 결에 그 곳까지 나와 계셨는지 아버지 고국양
왕이 빙그레 미소 짖고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앗,아버님!
둘 다 다친데는 없느냐?
네.
그러면 되었다. 어마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 어머니를 따
르도록 하라.
담덕은 서기 375년, 고구려 제 17 대 소수림왕 5년에 태어났으며, 소수림왕은 담덕의 큰아버지
였다. 그런 소수림왕이 죽고, 오늘은 49일재를 올리는 날이었다.
이윽고 담덕은 어머니와 함께 마차를 타고 이불란사로 향하였다. 마차를 모는 일은 을내가 맡
았다. 마차를 모는 일은 을내가 맡았다.
이 때, 고구려의 서울은 동황성(지금의 강계 부근으로 추측됨)으로 절은 산 아래 시가지가
있었다.
어마 마마, 아바 마마께서는 오늘 왜 함께 가시지 않으신가요?
왕비는 아들의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대왕님은 성을 비울 수 없으시단다.
당시 고구려는 매우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었다. 열한살의 담덕도 자세한 것 까지는 몰랐으나,
그런 눈치마저 모를 철부지는 아니었다.
왕비는 왕자의 궁금증을 돌리듯 말하였다.
선대왕께서는 네가 태어나기를 얼마나 고대하셨고, 너의 탄생을 축하하셨는지 모른다.
담덕도 살아 계실 때의 소수림왕을 보았기 때문에, 왕비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건 알고 있었다.
선대왕의 휘자는 구부이며, 몸이 크고 늠름하셨고 슬기로운 지혜를 가지고 계셨단다.
그래서요?
담덕은 세상에서 어머니가 제일 좋았다. 아버지는 무예에 대해서는 가끔 말씀하셨지만,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를 해 주지 않으셨다.
구부께서는 어려서 아버님이신 고국원왕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으셨다. 구부야, 지금 우리
고구려는 사방에적을 가지고 있다. 북쪽에는 흉노가 있고, 서쪽에는 연나라가 있다. 이들은 우리
고구려에게는 모두 강작이다. 그리고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가 있는데, 이들은 우리에 비해 훨씬
약하다. 그러니 너는 어느 쪽의 적부터 쳐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더란다.
그래서 구부님은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구부님은 이 때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도 못 하셨다. 그러지 임금님은 구부야, 전쟁
에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약한 적을 치고 힘을 기른 다음, 강적과 싸우는 게 순서란다.
라고 말씀하셨다.
서기 190년, 공손탁이 요동 태수가 되면서 고구려와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그 뒤, 서기 220년에 조조가 중국의 북부 일대를 차지하면서 나라를 위 라고 하였고, 서기 233
년에는 요동의 공손연이 독립하여 연왕이라 자칭하였다. 이 무렵부터 고구려는 북쪽 나라들과의
접촉이 잦아지며, 충돌도 더 심해졌던 것이다.
담덕은 어머니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선대왕이신 구부님께서는 임금이 되신 후, 늘 슬픔이 많으셨단다.
왜죠?
고국원왕께서는 남쪽의 신라나 백제를 먼저 치시겠다는 생각이셨다. 그래서 서기 333년에는
평양성을 크게 증축하시고, 남쪽으로 쳐내려갈 준비를 하셨지. 그런데 그 해는 겨우내 ㄴ눈도 내
리지 않고 봄에는 쓸데없는 비가 많이 내리더니, 여름에는 심한 가뭄이 계속되었단다.
그래서 전쟁도 못 하셨겠네요?
그렇지. 해마다 흉년이 들고 게다가 모용황이 이끄는 연나라 대군이 북쪽 국경의 신성까지 몰
려왔지 뭐냐. 가까스로 화친을 청하긴 했지만 남쪽에 대한 공격은 생각도 못하게 된 것이란다.
담덕은 자기가 알고 있던 중국의 역사를 생각해 보았다. 중국의 만리 장성 북쪽에는 여러 종족
이 살았다. 그 대표적인 종족은 흉노였는데, 어떤 종족인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흉노족은 눈이 오목하고 몸에 털이 많다.
이 정도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흉노는 기원전 54년 동흉노 와 서흉노 로 분열되었고, 동흉노의 호한야 선우 는 한나라에 항복
하였다. 그리고 서흉노는 동흉노와 선비족에게 쫓겨 서쪽으로 달아났다. 전한에서 후한으로 넘어
어오자 한족의 세력은 약해졌다. 이 무렵, 한나라에 항복했던 동흉노가 다시 북흉노 와 남흉노 로
분열되었고, 서기 48년 남흉노는 후한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 남흉노의 후손 가운데 유연이라는 자가 대장군이 되어 큰 세력을 가졌는데, 그 때의 중국
은 후한이 망하고, 조조가 세운 위나라에 이어서 일어난 서진의 황제 사마염이 죽고, 태자가 왕제
에 올라 혜제 라 일컬었을 때였다. 그런데 혜제는 형편없는 바보였다.
폐하, 지금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백성은 헤아리리 수 없이 많습니다.
굶어 죽는다고? 쌀이 없다면 고기를 먹으면 될 게 아닌가!
이런 바보 황제 아래 야심을 가진 황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8왕자의 난 이었다. 그
러자 황후 가씨는 황제 대신 권력을 잡고 황족 가운데 똑똑한 여남왕 사마양과 초왕 사마위를 반
역자로 몰아 체포하였다. 황제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두 황족에게 말하였다.
짐은 모를 일이오. 황후에게 살려 달라고 하시구려.
이 때문에 서기 308년에는 진나라에 큰 혼란이 일어났고, 남흉노 출신의 유연은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한 이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이 때부터 약 130년 동안 5호 16국 이라
는 숱한 나라들이 흥망을 거듭하게 되었다.
5호는 중국인이 새외(만리 장성 밖)의 민족들을 오랑캐 라 하며 차별하여 붙인 호칭인데, 흉
노,갈,선비,저,강족을 뜻한다. 갈족은 흉노에게서 갈라진 지족이었고, 저족과 강족은 티베트 계통의
종족이었다.
중요한 것은 선비족으로, 일찍이 동호 라는 강성한 종족이 있었다. 흉노는 기원전 209년 묵특
선우 시대에 동호를 격파했었다.
풍속으로 흉노는 머리를 땋아 뒤로 길게 늘이는 변발을 하고 있었지만, 섬비족ㅇ든 머릴르 ㄹ
중처럼 밀었었다.
이윽고 선비족에게 단석괴라는 뛰어난 족장의 자리를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고, 용맹하
고 슬기로운 인물이 추대되어 대인이 되는 제도였다.
사냥만 가지고서는 백성들이 해마다 굶주린다. 동쪽 우인족을 치고, 그 백성을 잡아다가 고기
를 잡아 바치게 하도록 하자.
단석괴는 이렇듯 백성들의 양식 문제를 해결하였고, 또 죽음을 앞두고 이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 선비족이 약했던 것은 지도자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의 자리는 자손 대
대로 물려주어야 한다.
단석괴가 죽자 아들 화련이 대인이 되었다. 그러나 화련은 무능하였고 공평하지 않아, 선비족은
모용,우문,걸복,척발,단의 다섯 부족으로 갈라졌다. 당시 고구려의 숙적이었던 연나라의 모용씨도
선비족이었다.
애당초 유연이 황제가 될 만큼 세력이 강성해졌던 것은 흩어져 있던 흉노 부족을 통일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족, 갈족도 자기 밑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서기 310년 유연이 줒자 유총이
황제가 되었다.
이 때, 갈족의 지도자로 석륵이 있었다. 석륵은 유총의 부하 장군으로 진나라 10만 대군을 영평
이란 곳에서 전멸시켰고 낙양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사마씨의 진은 멸망하였다.
한편, 서기 318년 유총이 죽자, 유요가 그 뒤를 이었고 나라 이름을 한에서 조 로 고쳤다. 그러
자 석륵도 독립하여 황제가 되고 나라 이름을 조 라 했지만, 앞의 유요가 세운 조와 구별하기 위
하여 후조 라 불렀다.
석륵은 알자무식이었으나 드물게 보이는 명군이었다. 후조의 영토는 하북, 산서, 산동, 그리고
하남성 일부에 걸쳐 있었지만 한족과 호족이 의죟게 섞여 살았는데, 석륵은 저마다 민족의 고유
한 풍속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군자영 이라는 자문 기관을 두어 나라를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
조와 후조는 영토가 이웃하고 있어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조나라 왕 유요는 재주가 뛰어난 장
군이었으나, 석륵에게 번번이 패하자, 이것을 분하게 생각하여 계속해서 후조를 공격하였다. 그런
데 전투중 적군으로부터 날아온 돌에 맞아 말 위에서 떨어졌고, 서기 328년 마침내 조나라는 멸
망하였다.
후조 역시 석륵이 아무리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해도 문제는 있었다. 태자 석홍은 어버이에게
효성스럽고 백성에게 인자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태자의 사촌 석호는 포악하고 잔인한 장국이
어서, 자신의뜻이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잔혹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서기 333년에 석륵이 죽자, 석호는 태자 석홍을 죽여 버리고 자기가 왕제자리를 차지하였다. 석
호의 포악한짓은 악마나 다름없었다. 죄 없는 백성을 함부로 죽이고 토목 공사를 일으켜 백성들
을 괴롭혔다.
석호는 북쪽의 모용씨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연나라에 모용황 이라는 인물이
있어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담덕 왕자가 고구려 주변 나라들의 정세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그들
과의 전쟁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이불란사의 승가람마가 보이기시작하였다. 담덕은 새삼 생각난 듯이 어머니께 물었다.
큰아버님(소수림왕)의 슬픔은 무엇이었나요?
선대왕께서는 아버님(고국원왕)의 원수를 생전에 갚지 못하셨던 게 한이셨단다.
아버님의 원수요?
왕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연나라의 모용황은 세력이 커지자 고구려를 자주 괴롭혔다. 이에 고국원왕은 국내성을 쌓고, 서
기 342년에 도읍을 환도성으로 옮겨 연나라를 칠 준비를 하였다.
한편, 연나라의 모용황은 석호의 후조와 대결하기 위하여 동진과 손을 잡았다.
이 무렵, 모용황은 고구려와 싸워 승리를 거두고 기세가 한창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다시 전쟁 준비를 하자 모용황은 부하 장군들을 소집하였다.
이 때, 모용한이 말하였다.
후조를 치자면 먼저 우리 배후에 있는 고구려를 쳐야 합니다.
그러자 모용패가 말했다.
고구려를 침공하는 데는 길이 두 가지 있습니다. 북쪽에 있는 길은 평평하고, 남쪽에 있는 길
은 험하므로 대군을 움직이자면 평평한 길을 택해야 합니다.
모용한은 이것을 반대 하였다.
적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우리 대군이 반드시 평평한 북쪽길로 오리라 믿고 , 그 쪽을 엄중
히 지키고 있겠지요. 그러니 왕께서는 날랜 군사를 이끌고 남쪽 길로 나아가 적을 기습한다면 불
쪽은 빼앗을 것도 없겠지요. 따로 부대를 편성하여 북쪽 길로 보낸다면, 비록 실패하더라도 그 중
심부가 무너진 이상 적은 어쩔 도리가 없을 겁니다.
모용황은 이 작전을 따랐다. 그는 직접 4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모용한,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아 험한 남쪽길로 나아갔고 따로 왕우 등에게 1만 5000명의 병사를 주어 평평한 북쪽 길을 공
격하게 하였다.
이 때, 고구려는 왕의 아우 고무를 시켜 5만 명의 병력으로 평평한 북쪽 길을 지키고, 고국원왕
은 약간의 병력으로 험한 남쪽 길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작전의 실패였다. 남쪽 길로 연나라 군사들이 물밀 듯이 몰려와 아군을 크게 패
하였다. 적장 한수가 고구려의 장군 아불하도가를 죽이고, 다시 환도성까지 쳐들어오자, 왕은 수
십명의 패잔병만 거느리고서 단웅곡이라는 깊은 골짜기로 달아났다.
결국, 환도성이 함락되고 연나라의 군대는 고국원왕의 어머니(미천왕의 부인) 주씨와 왕비를 사
로잡아 저희 나라로 돌아갔다.
또한, 연나라 군사들은 미천왕의 능을 파헤쳐 그 시체와 부고에 쌓아 둔 역대의 보물을 수레에
싣고, 고구려의 백성 5만 명을 노예로 끌고 돌아갔다.
이듬해,고국원왕은 동생 고무를 연나라에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고 아버지의 시체와 왕비는 찾
아왔으나, 고국원왕의 어머니는 볼모로 잡혀 데려오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의 세력은 크게 떨어졌다. 고국원왕은 할 수 없이 도읍을 평양의 동황성으
로 옮기고,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기 369년에 고구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남쪽의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실패하였다.
당시 백제에는 근조고왕 이라는 영특한 임금이 있어, 세력이 강성해져 있었을 때였다.
서기 371년, 고국원왕은 또다시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전투 중 화살을 맞고 전사
하였고, 그의 아들 소수림왕이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담덕의 어머니가 담덕에게 이야기한 고국원왕의 원수이며, 소수림왕의 한이었다.
그랬었군요?
어린 담덕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기어코 이 원수를 갚아 드려야지.
담덕은 왕자와 왕비는 깊은 생각에 잠겨 이불란사로 들어갔다.
2. 영웅들.
담덕은 열두 살 때 태자가 되었다. 고국양왕은 담덕태자에게 말하였다.
무예도 좋다마는 학문도 있어야 한다.
당시 고구려에는 초문사와 이불란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초문사에는 전진에서 온 순도 스님이
있었고, 이불란사에는 동진에서 온 아도 스님이 있었다. 담덕은 이두 스님에게 번갈아 가면서 학
문을 배웠다.
순도 스님은 눈썹도 수염도 모두 새하얀 일흔 살이 넘은 분이었다. 순도는 입버릇처럼 말하였
다.
태자님, 검으로 일어나는 자는 검으로 망합니다. 후조의 석호가 그 좋은 본보기이지요.
담덕은 남달리 총명하여 자기가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은 반드시 속시원히 알 때까지 질문하는
습관이 있었다.
어째서지요?
악한 사람은 반드시 그 죄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덕만 있고 힘이 없다면 그 나라는 결국 멸망하지 않을까요?
담덕의 이런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서기 369년에 남쪽으로 백제
를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고, 서기 371년에 다시 백제를 공격했으나 불행하게도 백제군의 화살
에 맞고 전사하였다.
고국원왕이 죽자, 태사 구부가 뒤를 이었다. 이분이 고구려 제 17대 소수림왕으로 담덕의 큰
아버지이다. 소수리왕은 자기 아버지의 일을 교훈 삼아 국력을 기르는데 힘썼다.
먼저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 그러자면......
이리하여 소수림왕 2년에 전진의 부견이 순도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보내오자 이를
받아들였다. 뿐만아니라 태학을 두어 유교를 받아들였고, 이듬해에는 율령을 반포하였다.
담덕은 순도에게 물었다.
스님께서 계셨던 전진에 어떤 나라였나요?
후조에서 사촌인 태자를 죽이고 황제 자리를 빼앗았던 석호가 죽자, 후조에 강제로 이주되고
있었던 저족과 강족이 동요되었다.
이 두 종족은 티베트 계통의 사람들로 저족의 지도자는 부홍이었고, 강족의 지도자는 요익중이
었다.
동진은 양쯔 강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게 숙원이었다. 그리하여 서기 354년에 동진의 환온이 대
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이 무렵, 중국 북부 지방은 동쪽을 모용씨의 전연이 지배하였고, 서쪽을 저족의 전진이 지배하
고 있었다. 이 때, 전진은 부홍이 죽고 그의 아들 부견이 환제의 자리에 있었다.
환온은 전진의 수도 장안을 공격했지만, 끝내 점령하지 못하고, 두 번째로 북벌군을 일으켰는데
이번의 공격 목표는 전연이었다. 이 무렵 전연의 수도는 용성에서 업으로 옮겨져 있었고, 황제는
모용황의 손자 모용위였다. 환온은 전연의 수도 가까이에 육박했지만 결국 점령하지 못하였다. 전
진이 전연을 도왔기 때문이다.
소승이 장안에 있었던 것은 이 무렵입니다. 그 때의 임금님이 명군이신 부견이시지요.
부견?
바로 고구려에 불상과 불경을 보내 주신 분입니다. 동진의 장군 환온의 공격을 받은 전연의
모용위는 전진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했습니다..
아니? 서로 사이가 나쁜 나라에게 구원을 청했단 말입니까?
그러하옵니다.
전연의 구원 요청을 받은 전진의 대신들은 구원군을 보내는 것에 모두 반대하였다. 특히 번세
라는 장군이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왕맹 장군은 전연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왕맹은
한족으로, 부견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은 것이나 같구나. 하며 기뻐한 인
물이다. 하지만 저족의 중신들은 부견이 너무도 왕맹을 신임하므로 불만이 많았었다.
전연이 멸망하게 되면 우리 전진도 위태롭습니다. 지금은 미워하는 감정을 버리고 그들을 도
와 주어야 합니다.
왕맹의 말에 번세가 이를 결사 반대하였다.
폐하, 왕맹의 의견을 좇는다면 나는 그를 이 자리에서 죽이고 말겠습니다.
그러나 번세의 지나친 말에 화가 난 부견은 좌우 무사를 시켜 번세를 끌어내어 목을 베게 하고
원군은 보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전연은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런데 원군의 대가로 영토를 쪼개
준다고 했던 전연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순도는 계속하여 담덕에게 말하였다.
태자님, 개인은 물론이고 나라 사이라도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만일 약속을 어기고 신의를 지
키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멸아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전연은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나요?
뜨거운 것도 목구멍만 넘어가면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연은 원군의 대가로 쪼개 주겠다
던 호뢰관 이서의 땅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부견 임금은 격노하시고 서기 370년에 전연을 공
격하여 멸망시켰지요.
그래서요?
태자님, 부견 임금이 위대했던 것은 항복한 전연의 백성은 물론이고 모용위도 살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부견은 다시 서쪽에 있는 전량을 공격하였다. 전량은 지금의 감숙성 서부, 둔황 일대에 걸쳐 영
토를 가지고 있었다. 부견의 군대는 이 곳을 점령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부견은 여기서도 사람 하
나 죽이지 않았따. 이어 부견은 동진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비수를 사이에 두고 전진과 동진은 맞섰습니다. 부견이 이끄는 전진은 100만 명의 대군이었고,
동진은 사현이 거느리는 고작 8만 명의 군사였습니다. 사현은 전진의 대군이 비수에 집결하기 전
에 먼저 강을 건너 적을 공격하는 선제 공격을 가했습니다. 전진의 선봉장 부융은 이 계획을 알
고, 적이 비수를 반쯤 건넜을 때 반격하여 적을 전멸시킬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진의 군사들
은 적이 건너오기 시작하자 반격은커녕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 패하고 말았습니다.
담덕은 고개를 갸웃했다.
100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 어째서 겨우 8만 명의 작은 병력에게 진단 말입니까?
부견 임금의 100만 명의 대군은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동진의 군대
는 자기 영토를 지키겠다는 사람들뿐이어요.
그래도 담덕은 한참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부견이 이끄는 전진의 100만 명의 대군과 사현이 이끄는 동진의 8만 명의 군사가 맞붙어, 전진
이 패했던 비수 싸움은 담덕 왕자가 아홉 살 때 있었던 일이었다.
절에서 순도로부터 비수 싸움의 이야기를 듣고 궁전으로 돌아온 담덕은 아버지 고국양왕에게
자기가 느꼈던 의문을 털어놓았다.
저는 이제껏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수 싸움만은
어째서 전진의 대군이 동진에게 패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란다.
비수 싸움의 자세한 내막은 이렇다. 전진의 북견은 북중국을 통일하자 다시 중국 전체에 제국
을 건설하려는 포부를 가졌다. 그래서 남쪽을 정벌하기 위한 준비로 양양을 점령하였다. 이어 부
견은 본격적인 남쪽 정벌을 시작하였다. 부견은 보병 60만, 기병 27만 명을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
하였다.
이 때, 부융은 선봉 부대 30만 명을 강기슭에 배치하고 황제의 대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
에 맞선 동진의 대장은 사현이었는데, 전진의 선봉 부대가 비수에 도착하자마자 공격 명령을 내
렸다.
적의 대군이 양양에서 도착하기 전에 강을 건너 적을 무찔러라!
이리하여 동진의 군대는 비수를 건너기 시작했던 것이다. 부융은 동진의 군사가 공격해 오는
거을 보자, 부대를 조금 후퇴시켰다.
적은 적은 병력이다. 적이 우리를 얕보고 건너오면 우리의 함정에 빠진 꼴이 된다. 적이 다 건
너오면 포위하여 섬멸하라.
그러나 이것은 병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적이 강물속에 있을 때 공격하는 게 가장 유리하다.
왜냐하면, 물 속에서는 갑옷이 물을 빨아들여 무겁고 행동도 둔해져서 공격은커녕 방어하기도 힘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융은 너무 욕심을 냈던 것이다. 적을 전부 건너오게 한 후에 전멸시키려는 생각이었
는데, 전진의 군사들은 사령관의 이런 속셈을 몰랐다.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슬금슬금 물
러나다가 진짜 후퇴가 되어버려 너도나도 모두 도망치고 100만 명의 대군이 그대로 무너져 버렸
다.
이 때, 전진의 100만 명의 대군 가운데 살아남은 군사는 오로지 전연의 군대였던 선비 선비족
몽용수가 이끄는 3만 병력이었다. 부견은 이들의 보호를 받으며 달아났던 것이다.
원수를 갚을 기회가 이 때입니다. 무엇을 망설이고 계십니까?
모용수의 아들 모용보는 부견을 죽이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모용수는 부견이 도와 준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이를 거절하였다.
비수의 싸움에서 대패한 전진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고, 서기 384년 모용수는 중산(허베이 성
의 딩셴)에 도읍을 정하고 후연을 세웠다.
소수림왕은 불도를 깊이 믿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그에게는 왕자가 없었다. 그가 불도를
열심히 믿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선대왕의 원수도 못 갚고 자식도 없으니,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구나.
그러자 일관(천문학자)이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너무 근심하지 마옵소서. 신이 요사이 천문을 보았더니, 장차 우리 나라에 세 가지
길운이 있을까 하옵니다.
그 세 가지 길운이란 무엇인가?
신으로서는 아직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라에 경사가 생기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선은 수곡성(황해도 신계) 근방이었다.
본디 고구려와 백제는 형제국이었다. 그 조상의 뿌리는 동명 성왕이다. 그런데 수백 년이 지나
는 사이 어느덧 원수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고국원망 때는 2만 명의 병력으로 백제의 치양(황해
도 백천) 땅을 공격하였다.
이 때, 백제왕은 제 13대 근초고왕이었다. 근초고왕은 태자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무찔렀고, 자
비령 너머로 쫓아 버렸다.
그 뒤, 사기라는 고구려 군졸이 백제로 도망쳐 왔다. 백제의 태자 수는 사기를 엄중히 심문하였
다.
너는 본디 우리 백성으로 고구려에 도망쳤다가 어찌하여 다시 돌아왔느냐?
태자님, 부디 가엾은 저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저는 마구간 군졸로 장수님 말의 발굽을 다치
게하여 벌이 무서워 고구려로 달아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몇 년 지나는 사이 고향의 부모 처자가
그리워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말이 틀림없으렷다!
제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좋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렷다. 샅샅이 고하도록 하라.
사기의 정보로 백제는 고구려가 다시 치양 싸움의 보복을 하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백제군
은 패강(대동강)까지 진출하여 강기슭 갈대밭 속에 잠복하고 고구려군이 건너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강 건너편에 고구려군이 나타났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군사라, 잠복해 있던 백제군은
동요되었다. 이 때, 사기가 말하였다.
저쪽 군사가 비록 많은 것 같지만 다만 수를 채운 의병일 따름입니다. 그 가운데 붉은 헝겊을
단 군사들이 가장 날래니, 만일 그들만 어긴다면 나머지는 그대로 두어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
다.
백제 태자는 이 말을 좇아 고구려군을 크게 무찔렀다. 태자는 이에 만족하고, 그 곳에 수비병을
두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죽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소수림왕으로서는 백제
의 근초고왕이나 사기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원수였다.
고구려의 사기는 떨어지고 자기에게는 자식이 없어 걱정하던 차에 세 가지 길운이 있을 거라는
일관의 말을 듣자, 소수림왕은 크게 기뻐하고 정병 5000명을 뽑아 수곡성 공격을 명했다.
여름이 되었다. 신하 한 명이 급히 소수림왕한테 달려와 아뢰었다.
대왕 마마, 동쪽 궁전 지붕에 붉은 구름이 감돌고 있습니다.
동쪽 궁전은 소수림왕의 동생 이련(후에 고국양왕)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왕은 이상히 여기고
곧 일관을 불러오게 하였다. 일관은 아뢰었다.
대왕님, 기뻐하십시오. 장차 이 나라의 큰 대왕이 되실 분이 태어날 징조입니다.
이 때, 태어난 분이 담덕 왕자였다.
그 며칠 후, 전선에서 승전의 소식을 알려 왔다.
대왕님, 기뻐하십시오. 수곡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또한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합니
다.
뭣이? 그게 정말이냐!
소수림왕은 일관이 예언한 두 가지 길운이 모두 맞아 기쁘기 이를 데 없었다.
두 가지는 맞았는데, 나머지 한 가지는 무엇일까?
이 해도 저물어 가는 11월, 백제의 도읍 한산에 잠입했던 첩자가 돌아와 아뢰었다.
대왕님, 백제의 근초고왕이 죽고, 그 태자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제야 원수를 갚을 날이 돌아왔구나.
고구려는 곧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일진일퇴, 별 소득 없이 몇
년을 두고 계속되었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는 담덕은 무럭무럭 자랐다.
그 당시에는 한반도에는 호랑이가 많았다. 담덕이 네 살 때였다. 난데없이 대궐 안에 호랑이 한
마리가 뛰어 들었다. 이윽고 호랑이는 마구간 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자 담덕의 유모는 울부짖었
다.
도와 주세요, 도와 주세요. 왕자님이 마구간에서 지금 놀고 계세요.
사람들은 모두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사람들이 달려가 보니 담덕은 태연히 서 있었다. 놀라
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피할 생각도 없이 서서 호랑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
나 호랑이와 눈싸움을 했을까? 호랑이는 마침내 꼬리를 감추더니, 대궐 담을 뛰어넘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역시 수신이 우리 고구려를 보호하시는 거야!
당시 고구려에는 귀신, 사직, 영성을 제사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특히, 10월에는 하느님께 제사
를 지내는 대회가 있었는데, 이 대회를 이름을 동맹 이라 하였다. 동맹에는 젊은이들이 모여 말달
리기, 활쏘기, 칼쓰기 등 갖가지 시합을 하였고, 여자들은 춤을 추었다.
또, 고구려 동쪽에는 큰 굴이 있었는데 수신 이라 불렀고, 역시 10월에 집집마다 수신을 맞아들
여 제사를 지냈다. 담덕이 호랑이에게 물려가지 않고 무사했던 까닭을 사람들은 이 수신의 보살
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해는 큰 가뭄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굶주렸다. 게다가 늦가을에는 거란족이 북쪽 경
계를 침범하여 여덟 부락을 약탈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자 미신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수군거
렸다.
왕자님의 목숨이 무사한 대신 하늘이 가뭄을 내려 백성을 굶주리게 하셨을 거야. 그리고 거란
이 침범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일 거야.
가뭄이 계속되가 소수림왕은 몸소 기우제를 올렸고, 궁중에서의 사치를 금했으며, 백성들과 고
생을 함께했다.
이듬해, 봄이 되어 보리 농사가 퐁년이 들자 민심도 가라앉았다.
담덕은 이 무렵부터 말타기를 배웠다. 물론, 고구려 사람으로 말을 타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젖먹이 적부터 남녀를 가릴 것 없이 가죽 주머니에 넣어져 말에 매달아졌다. 그들은 넓은
광야를 이동하며 살았기 때문에 아이를 그렇게 강하게 키우는 것이었다.
담덕은 그 누구보다도 말타기를 쉽게 익혔으며, 솜씨도 날로 향상되어 갔다.
소수림왕은 서기 384년에 세상에 떠났다. 왕위는 소수림왕의 동생 즉 담덕의 아버지인 고국양
왕이 이었다.
이 무렵, 담덕은 열 살의 나이에 무예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사냥을 멀리 나갔다가 거란의
무리를 만나 하마터면 죽을 고비도 겪었다. 다행이도 심복 부하 을내가 적 하나를 거꾸러뜨렸고,
담덕은 지붕 위에서 몸을 날려 달리는 말에 올라타는 재주를 보여 위기를 벗어났다.
이런 승마술은 어려서부터 말타기를 한 담덕으로서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 때, 고구려는 전쟁 준비로 온 나라가 분주하였다. 고국양왕은 왕이 되자, 지난날 소수림왕과
자신의 아버지, 즉 고국원왕에게 치욕을 안겨 주었던 연나라에 대한 복수전부터 시도하였다.
담덕아, 널 이번 전쟁에 데려가겠다.
담덕이 날로 성장해 가는 것을 지켜 보았던 아버지 고국양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담덕은 아직 어립니다.
어머니는 반대했지만, 왕은 껄걸 웃으며 말하였다.
전쟁에 대려간다고 해서 꼭 위험하지만은 않소. 나하고 함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전장인 것은 같지 않사옵니까?
왕은 이 때 엄숙한 얼굴이 되었다.
사나이로서 어디에 있거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오. 전장에 가서 죽을 아이라면 집에 있다고하
여 안전하란 법은 없소.
왕은 이렇게 말하지만, 참뜻은 전장에서의 전투 장면을 담덕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때, 고구려군은 4만 명의 병력으로 당당히 요동의 벌판을 행진했다.
때는 서기 385년 6월로, 해는 중천에서 이글거렸고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이 이어졌
다.
용성은 아직도 멀었나요?
하루빨리 전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에 담덕은 왕에게 물었다. 그러나 고국양왕은 아무말
없이 앞만 보고 나아갔다.
용성은 전연의 모용황이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며 요하동쪽, 극성 근처에 있었는데, 왕좌라는 나
라 장군이 지키고 있었다. 왕좌는 급히 원군을 청하였고, 모용수는 사마학경에게 군사를 주어 돕
도록 하였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고국양왕과 담덕 왕자는 높직한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싸움을 지켜 보았다.
고구려군은 중앙에 보병대가 있고 양쪽에 기병대가 있었다. 왕의 큰 기가 크게 원을 돌리자, 고
구려군은 학이 양 날개를 벌리듯 적군을 크게 에워쌌다. 햇빛에 칼과 창이 번쩍이고 고함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어떠냐, 무섭지 않느냐?
저런 진형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학익진이라고 한다.
학의 날개란 뜻이군요?
담덕은 이해를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구려는 이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다시 궁으로 돌아온 왕은 담덕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제부터 대성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스스로 더 배울 게 없다고 생각되면 하산하여라.
절대로 누구와 함께 가면 안 된다. 혼자서 가야 한다.
네.
전부터 대성산에는 신선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겨울이 머지않은 어느 날, 담덕은 혼자 산을 향해 왕궁을 떠났다.
이윽고 겨울이 되었고, 밖에는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왕비는 자나깨나 혼자 산으로 간 담덕
을 걱정했다.
산에는 눈이 한 길은 쌓여 있겠지요. 그 아이는 추위 속에서 무엇을 먹고 살까요?
너무 걱정 마시오. 그 아이는 나이보다는 생각이 깊고 행동이 침착하오. 장차 이 나라의 태자
가 되려면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이겨 내야만 하는 것이오.
그럼 담덕을 태자로?
왕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산에서 내려오면 곧 태자로 삼을 작정이오. 그러니 당신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현숙한
태자비나 골라 두시구려.
담덕은 산에 올라간 지 석 달 만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왕자가 산에서 어떤 선인을 만났고, 어떠한 것을 배웠는지 궁금하게 여겨 담덕에게
물었지만, 담덕은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담덕이 아주 어른스러워진 데에 왕은 만족하고 그가 열두 살이 되자 태자로 봉하였다.
한편, 백제는 용맹스러운 근초고왕이 죽고 태자 수가 뒤를 이었는데, 이분이 제 14대 근구수왕
이다. 근구수왕은 왕위에 오르자 박사 고흥을 시켜, 비로소 문자 기록을 하도록 하였다. 이 때가
서기 375년 이었다.
이 당시 백제는 모든 면에 있어 고구려와 경쟁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에는 중국에서 불교가 들어와 평양성에 절이 두 개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근구수왕은 서기 379년에 사신을 바닷길로 동진에 보내기로 하였다. 사실 백제로서는
예로부터 항해술이 능하였고, 바닷길이 육로보다 빠르고 안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신은 도중에
서 풍랑을 만나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근구수왕은 생전에 불교를 들여오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며, 그가 왕위에 오른
지 10년째인 서기 384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근구수왕에게는 아들이 2명이 있었다. 맏아들이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이분이 제
15대 침류왕이다.
이 무렵 중국은 동진, 전진, 후연이 있었다.
전진의 부견은 모용수의 도움으로 낙양에서 10만여명의 패잔병을 수습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결국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강족의 요장이라는 자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요장은 서
기 384년에 후진 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이 무렵, 마라난타라는 스님이 동진에서 백제로 건너왔다. 백제 왕실에서는 마라난타를 궁중에
맞아들여 설법을 들었다.
이것으로 선대왕의 한도 풀리셨겠지. 곧 절을 지어 모든 백성들이 이 가르침을 배우도록 하
자.
서기 385년 2월, 침류왕은 도읍 한산(지금의 서울)에 절을 짓고, 뜻이 있는 사람 10명을 뽑아서
마라난타의 제자가 되도록 하였다. 아무래도 초기에는 불교에 대한 반발이 있을까 봐 그런 조치
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해 11월, 침류왕이 세상을 떠났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 아신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 즉 침류왕의 동생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분이 제 16대 진사왕
이다.
진사왕은 형님과는 달리 성격이 쾌활하고 또한 지략이 많았다. 그는 왕이 되자 무엇보다도 국
방에 힘을 기울여 이웃 나라들을 칠 계획을 세웠다.
3. 호적수
백제의 진사왕은 형님인 침류왕의 장례가 끝나자 자기의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
였다. 이 무렵 백제의 전진 기지는 청목령(개성)에 있었다.
고구려는 기병이 강하다. 이들을 막자면 목책을 세우고 곳곳에 말뚝을 박아야 한다.
그는 백성 중에서 열다섯 살 이상의 남자를 동원하여 청목령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팔곤성까지,
서족으로는 서해까지 목책을 쳤다.
어느 날, 열두 살이 된 담덕은 부왕께 아뢰었다.
지금 후연은 새로이 일어난 북위의 위협 때문에 감히 우리 고구려를 엿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진사왕이 새로 왕이 되면서 목책을 수백리에 걸쳐 세우고 있다 합니다. 그들
의 방비가 더 튼튼해지기 전에 이를 칠까 하옵니다.
담덕은 정보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첩자를 곳곳에 잠입시켜 놓았던 것이다.
담덕의 말을 들은 고국양왕은
좋겠지. 그러나 적과 싸울 때에는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과 자신만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
다. 젊은 사람은 흔히 조금만 이겨도 우쭐하기 쉬운데, 그 점을 조심한다면 한 번 나가 싸워 보는
것도 좋으리라.
아바 마마의 말씀 꼭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전 전날 담덕은 어머니를 찾아갔다. 왕비는 아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니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태자야, 너는 어째서 위험한 곳을 스스로 찾아가려 하느냐?
그것은 제가 이 고구려의 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장군을 보낼 수도 있지 않겠느냐?
아닙니다, 어머님. 제가 할 일이 있고 장군들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싸움은 꼭 이
기겠다는 마음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뭐라고 할까요, 적의 힘을 탐색하는 데 목적이 있지요.
나는 전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튼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부처님께 빌겠다.
어마 마마,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도록 하십시오.
담덕은 도성을 출발하였다. 그는 출발에 앞서 장검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지금은 이미 8월이라 곡식도 거의 수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양민의 전답을 짓밟
거나 약탈을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를 어기는 자가 있다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도저히 열두
살 된 소년 장군의 말이라 여겨지지 않을만큼 위엄이 이었다.
비록 이 싸움은 탐색전으로 끝나지만, 담덕에게는 많은 경험을 얻게 해 준 출전이었다.
백제의 진사왕은 더욱 국방을 강화했다. 진가모를 달솔로 삼고 두지를 은솔로 삼았다. 달솔과
은솔은 백제의 벼슬 이름으로 장군에 해당된다.
고국양왕 6년 서기 389년, 담덕 태자도 열다섯 살이 되었다. 그런데 고구려는 전년에 이어 2년
씩이나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 식량이 부족하여 마침내는 짐승은 물론이고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
먹을 정도였다. 이런 때 백제가 침범하여 남쪽의 부락을 몇 곳 약탈하고 돌아갔다.
그런 소식을 들은 담덕은 화가 머리끝가지 치밀었다. 곧 왕 앞에 달려가 간청하였다.
그러나 고국양왕은 그의 청을 물리쳤다.
왜 안된다는 것이옵니까? 저는 이미 열다섯 살이옵니다. 그리고 전번에도 전장에 나가지 않습
니까?
그러나 왕은 엄숙하게 말하였다.
전쟁을 하는 것만이 태자로서 할 일은 아니다. 너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텐
데......
담덕은 하는 수 없이 왕의 앞을 물러났지만, 적을 무찌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을 것 같
지 않았다.
태자궁에 돌아온 담덕은 우울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때 한 젊은 여인이 그 앞
에 와서 꿇어 엎드리며 울면서 말하였다.
태자님, 아무쪼록 저의 남편을 살려 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덮어놓고 살려 달라니 너의 남편이 누구이며,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이냐?
저의 남편은 관곡을 훔쳤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끌려 갔습니다요.
관의 곡식을 훔쳤다면 도둑질이 아니냐.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저도 그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저의 남편은 처자식이 굶어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그만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하오니 아무쪼록 자비를 베푸셔서 저의 남편을 풀어 주십시오.
담덕은 그 순간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부왕께서 전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건 바로 이와 같은 가엾은 백성들을 돌봐 주라는
분부가 아니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충실한 부하 을내가 놀라며 물었다.
태자님 어디를 가시려 하십니까?
옥에 가 보았더니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이 갇혀 있었다. 구역질이 나는 악취가 풍겼고, 돼지
우리도 이보다는 나을 듯 싶었다.
왕자는 옥을 둘러보고 죄수 하나하나에게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까닭을 말해 보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억울합니다.
저는 죄가 없습니다.
하고 여기저기서 한결같이 소리를 질렀다.
이 옥에는 무고한 사람들만 잡아 가두었단 말인가?
좋아, 잘 알았다. 그렇다면 이 곳에 있는 너희들은 모두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란 말이
지?
네 그렇습니다, 태자님.
모두들 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담덕은 그 때, 구석에서 아무 말 없이 혼자 흐느끼고 있는 죄인을 발견하였다.
너는 어떻게 해서 이 곳에 오게 되었느냐?
저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이 정말로 죄를 지었습니다..
담덕 태자는 흥미를 느꼈다.
그래? 그럼 너는 어떤 죄를 지었느냐?
네, 저는 아내와 두 자식, 그리고 노부모님을 모신 여섯 식구의 가장입니다. 그런데 작년과 금
년에 걸친 흉년으로 먼저 부모님들이 돌아가셨고, 아이들마저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요. 그래서 도
둑질이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관곡을 훔치다가 그만 잡히고 말았습니다.
아하, 그 아낙네가 살려 달라고 애원했던 사람이 바로 이 사내로구나.
왕자는 그 죄인의 말이 끝나자 가지고 있던 막대기로 사내의 등을 철썩 때렸다.
정말, 너는 괘씸한 놈이로구나. 이 감옥에 있는 자들만은 진짜 죄인이로구나. 이런 자를 무고
한 사람들과 함께 놔 둘 수는 없다. 여봐라, 옥사장!
네, 태자님.
이 자를 곧 이곳에서 내보내도록 하라,
다른 죄수들은 그제서야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서기 390년 7월, 백제는 달솔 진가모를 보내어 고구려의 도압성을 점령하고, 군사 200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놈들, 이번에야말로 용서하지 않겠다!
담덕은 크게 분격하여 왕에게 출전하게 해 줄 것을 간청했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적이 우리의 성 하나를 빼앗아 갔다고 그것을 일일이 보복한다면 이 세상에는 싸움이 그칠 날
이 없지 않겠느냐?
하오나 아바 마마, 우리가 이대로 있게 되면 백제는 더욱 거만해져 우리를 얕보게 될 것입니
다.
그렇지만 전쟁만이 해결책이 아니란다.
담덕은 이 말에 문득 떠오르는 계책이 있었다. 그는 각국에 내보낸 첩자로부터 보고를 수시로
받고 있었다.
계림(신라)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구나!
즉, 계림으로 하여금 백제의 후방을 위협하게 하여 백제의 군사를 분산시킬 생각이었다.
서기 391년, 고구려 사신이 계림을 찾아갔다. 신라는 이 때, 계림이라는 이름이었고 내물 이사
금이 왕이었다.
계림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 가운데 영토도 작았고, 나라의 힘도 별로 강하지 못했었다. 처
음에는 나라 이름을 사로 라 하였고, 건국 초부터 왜국의 침략을 자주 받았었다.
그런데 서기 64년경 백제의 세력이 남하되면서 사로와 충돌이 생겼다. 이 무렵부터 사로는 계
림 이라 이름을 고치고, 제5대 파사 이사금 때 음집벌국(안강), 실직곡국(삼척), 압독국(경산)을 정
복하여 나라의 힘을 키웠다.
서기 111년경에는 다시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합쳤고, 백제의 땅이던 내기군(영주)도 계림이
차지하였다.
이 무렵, 계림과 백제는 60년 가까이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제 8대 아달라 이사금 때 백
제가 공격함으로써 평화는 깨어졌다. 그런 만큼 계림의 제 17대 내물 이사금은 고구려 사신을 매
우 반갑게 맞이하였다.
고구려는 이제껏 우리 계림과는 한 번도 싸운적이 없지요. 정말로 잘 오셨습니다.
저의 대왕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양국이 오래도록 친선을 맺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저를 특별히 보내신 것입니다.
내물 이사금은 이 때,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로 보내기로 하였다. 실성은 키가 6척
이 넘었고 덕망이 있었는데 고구려와 화친을 한다는 조건으로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기로 한 것이
다.
고구려의 사신은 며칠 있다가 실성을 데리고 고구려로 돌아갔다.
계림에서 실성이 볼모로 왔던 그 해 3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고국양왕은 담덕 태자를
가까이 불렀다.
태자야, 나는 이제 일어나지 못할 것 같구나.
담덕은 그 말을 듣자 뜨거운 눈물부터 쏟아졌다. 그는 목메인 소리로 말하였다.
아버님, 병은 정신력으로 이기셔야 합니다. 부디 마음을 굳게 가지시고 건강을 회복하셔야 합
니다.
아니다, 내 병은 내가 잘 안다. 그것보다 이 나라의 앞날은 오로지 태자의 두 어깨에 달려 있
으니, 내 말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두도록 하여라.
네.
첫째로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조상님의 옛 땅을 되찾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한 전쟁을 하면 백성들이 힘들어지고 국력이 약해져서 안 된다. 충분히 힘을 갖춘 후, 뚜렷한
명분을 걸고 전쟁을 해야 하느니라. 명분이 바르면 설사 전쟁에서 패하더라도 백성들의 원망을
듣지 않게 되느니라.
네, 알겠습니다.
담덕은 석륵이나 부견과 같이 용맹스럽고 덕이 많은 제왕이 되고 싶었다. 이것은 부왕의 부탁
이 아니더라도 담덕이 소망으로 간직해 온 것이었다.
둘째로 불법을 보호하고 더욱 널리 전파되도록 힘써다오.
고구려에서는 순도, 법심, 의연, 담업과 같은 고승이 잇달아 불법을 크게 일으켰지만, 아깝게도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왕은 말을 마치자 혼수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5월에 세상을 떠났으며 담덕이 뒤를 이으니, 이
분이 바로 광개토 대왕(영락 대왕)이다.
왕은 즉위 초부터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백제를 칠 계획을 세우고, 젊은이들을 뽑아 맹훈련
을 시켰다. 광개토왕은 군사를 지휘하는 데 천재였다. 그는 기병과 보병의 전투법을 새롭게 고쳤
다.
이를테면, 기병의 공격을 학익진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학익진에는 어린진으로 대항하는게 그
때까지의 상식이었다. 어린진이란 고기의 비늘을 늘어세운 것처럼 세모꼴이 되는 진형이 되어 돌
파하는 것이었다.
광개토왕은 이 어린진을 새롭게 했다. 기병을 밀집시켜 적진을 돌파하는 전법이었다. 이 밀집된
기병 군단 앞에서는 어떠한 적도 막아 내지 못하였다.
또, 보병에게는 긴 창을 들렸다. 이 긴 창을 가진 보병대가 둥글게 원진을 치면 적이 감히 덤벼
들지 못했다. 아군은 등을 서로 맞대며, 긴 창으로 적을 견제하므로 안심하고서 싸울 수가 있었
다.
광개토왕이 을내를 데리고 부대를 검열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웬 젊은이가 그 앞에 꿇어 엎
드리며 청했다.
대왕님, 이번 싸움에 저도 꼭 데려가 주십시오.
광개토왕은 그 얼굴을 보자 낯이 익었다.
너는?
네, 저는 대왕님의 은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가까이에서 대왕님을 모시게 해 주십
시오.
그는 관의 곡식을 훔쳤다가 옥에 갇힌 것을 담덕이 풀어 준 젊은이였다.
역시 그 때의 정직한 사람이었군. 그러나 네 성의는 고맙다마는 이번만은 가족을 돌보도록 하
라!
아닙니다. 식구는 제 자식놈이 돌볼 것입니다. 이번 전쟁에는 꼭 참전토록 해 주십시오.
알았다. 네 뜻이 그렇다면 허락하마.
이 젊은이는 왕의 하락이 있자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 젊은이의 이름은 구칠이었다.
광개토왕은 자기가 뜻한 바대로 군사를 훈련시켜 어느 정도 만족한 상태에 이르자, 그 동안 고
구려의 남부 지역을 괴롭혀 왔던 백제를 혼내 주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서기 392년 7월, 광개토왕은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당당히 남쪽을 향해 행군하였다. 길 옆으
로는 많은 백성들이 나와 배웅하였다.
아, 우리의 대왕님! 얼마나 늠름한 모습이신가!
이번에는 할아버지 때의 원수를 꼭 갚으시겠죠?
여기에서 할아버지 때의 원수란 고국원왕이 백제를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한 일을 말하
는 것이다.
그 당시 백제는 진사왕 8년으로, 진사왕은 광개토왕을 가볍게 여겼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가 감히 우리 국경을 침범한다고? 오기만 해라. 저의 할아비
사유(고국원왕)처럼 될 것이다.
그러자 병관 좌평 진가모가 말하였다.
백제에는 내신 좌평·내두 좌평·내법 좌평·위사 좌평·조정 좌평·병관 좌평의 6대신이 있었
는데, 병관 좌평은 병마를 관할하는 직책으로 지금의 국방 장관이다.
담덕은 비록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병법이 보통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제 왕이 되어 한창
기세가 뻗쳐 있으므로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는 게 상책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항상 서쪽과 북쪽
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오래 끌지 못하니, 우리는 가급적 싸움을 피해야 합니
다. 그러면 적은 스스로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자 달솔로 승진된 두지가 말하였다.
적이 왔는데 성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겁쟁이라고 비웃음을 받을 것입니다. 당당히 성문을 열
고 나가 싸워야 합니다.
진사왕도 두지의 의견에 찬성하였다.
이윽고 고구려군이 석현성 앞에 이르자 두지는 성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진사왕과 진가모는
성벽에 올라 그것을 굽어보고 있었다. 두지는 군사들을 뒤에 늘어세우고 말을 천천히 몰아 백 보
쯤 앞으로 나가서 목청껏 외쳤다.
고구려왕 담덕은 듣거라! 너는 무슨 낯으로 남의 영토를 함부로 침범했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군사를 돌려 썩 물러가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줄테다. 만약 내 말을 듣지 않고 쓸데
없이 덤빈다면 너의 할아비와 같이 되고 말리라.
그러자 백제군은 징을 울려대며 함성을 질렀다. 자기네 사기를 돋우고 적에게 겁을 주는 함성
이었다.
그런데 고구려군은 조용하기만 했다.
한참 후 백제군이 조용해지자, 갑옷을 입힌 말에 올라탄 젊은 장수가 혼자서 긴 창을 옆구리에
끼고 천천히 나타났다.
바로 광개토왕이었다.
그는 부하 장수들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두지도 담덕이 직접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
였다. 게다가 광개토왕은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 투구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두지는 눈이 부셨
다. 상대편이 산처럼 거대하게 보였고 위압감을 느꼈다.
광개토왕은 차츰 속도를 빨리하여 두지 쪽으로 달려 오는가 싶더니 순간적으로 두지의 가슴을
찔렀고, 단창에 찔린 두지는 그대로 말에서 거꾸러졌다.
그 순간 고구려 진영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함성이 들렸다. 북 소리를 울려대고 고구려군
이 일제히 공격을 해 왔다.
백제군은 대장을 잃자 그대로 무너졌다. 백제군이 성으로 쫓겨 들어가자 성문을 닫을 새도 없
이 고구려군이 밀어닥쳤다. 진사왕과 진가모는 깜짝 놀라 모든 군사를 버리고 성의 뒷문으로 달
아났다.
광개토왕은 석현성을 점령하자, 군사에게 휴식을 주었다. 그러나 군기 단속을 잊지 않았다.
주민의 약탈을 금한다. 배불리 먹고 교대로 잠을 자도록 하라. 그 대신 술만은 절대 금지다.
4.영토 확장
광개토왕은 불과 한 달도 못 되어 석현을 비롯한 백제의 성을 열 개나 빼앗았다.
자, 이만하면 백제도 한동안 무서워 우리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군사를 돌리도록 하
자!
광개토왕은 그 연호를 영락 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일명 영락 대왕 이라 불린다. 또 그의 정식
시호(죽은 뒤의 호칭)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이다.
국강상은 글자 그대로하면 나라의 언덕 위라는 뜻이다. 이 말의 뜻은 잘 알 수 없으나, 다음의
광개토왕은 영토의 경계를 널리 열었다는 말로 영토를 넓혔다는 뜻이다.
영토를 넓히려면 그만큼 전쟁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않고 호태왕 이라고 우러름을 받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광개토왕 다음의 평안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적의 침입을 허락지 않고 백성을 안
심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아 백성들이 항상 불안에
떨며 살았다. 더구나 적이 영토 안으로 쳐들어오면 집, 곡식, 가축은 물론 사람들까지도 잡아가
노예로 부렸던 것인데, 영토 안으로 들어오는 적이 없도록 하였으니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것이다. 또, 불법을 충실히 지켰기 때문에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어진 임금으로 불리웠다.
고구려는 본디 부족 국가로 계루부·연노부·순노부·절노부·관노부의 5부가 있었다.
광개토왕은 5부의 단결을 위해 속전 속결로 싸울 필요가 있었다. 광개토왕은 질풍처럼 군을 돌
려서 9월에는 북으로 거란(글안, 비려)을 쳤다.
거란은 몽고 계통의 유목 민족으로 민족 의식이 강하고 독자적 글안 문자를 발명하여 사용할
정도였다.
이 거란족들이 고구려의 옛 땅에 자리를 잡고 세력을 키우며, 수시로 고구려를 위협하고 있었
다. 광개토왕은 이들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쳐부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광개토왕은 보병을 본국에 남겨 두고 기병만 1만 명 남짓 선발하여 복진하였다. 병력 1만 명이
라도 기병은 여비로 곁마를 몇 마리씩 데리고 가므로, 이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는 구름처럼 피어
올라 하늘을 뒤덮는 듯하였다.
이들 기병은 말을 달리며 저마다 가죽끈에 돌을 감아 날리며 적을 공격하였다. 물론, 활과 화살
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돌멩이에 비한다면 사치품이었다. 화살용 대나무가 북만주에는 없었
고, 만드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거란족은 지평선에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었다 싶더니 질풍처럼 달려온 고구려군 앞에 싸움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여 도망치기에 바빴다.
광개토왕은 거란의 남녀 500명을 사로잡았고, 우리 백성들로서 거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인구
1만 명을 잘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 당시에는 인구가 부족하여 누동력은 물론 전쟁을 할 때에
도 군사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인구를 거느리는 것이 바로 국력이 커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작전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리기 전에 철수하자.
도성에 돌아오자 광개토왕은 그 해 10월 다시 출동하였다. 이번에는 그 동안 쉬게 했던 보병과
수군을 동원하였다.
목표는 관미성이다. 모두들 있는 힘을 다해 싸워서 고구려의 위력을 과시하도록 하자.
관미성은 황해도 연안의 섬으로, 수군이 동원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관미성을 점령하게 되면 동진과 벡제 사이의 연락을 끊을 수 있다. 꼭 점령해야 한다.
육지에 길이 있듯이 바다에도 길이 있다. 항해술이 발달되지 않은 옛날이라도 뱃길이 있기 마
련이었고, 뱃사람은 늘 다니던 뱃길이라야 안심하였다. 따라서 백제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문인
관미성을 지키는 백제군도 결사적이었다.
고구려의 담덕이 제아무리 날랜 군사를 쓴다 해도 이 관미성만은 어림없다.
관미성을 빼앗기 위한 고구려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성은 천연의 요새로 공격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바닷물이 하루에 두 번 들락날락한
다. 썰물일 때에는 개펄이 드러난다. 하지만 수렁이라 말은 물론이고 사람도 가슴까지 푹푹 빠져
도저히 건너갈 수 없었다. 그래서 광개토왕은 밀물일 때 바로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섬 벼랑
에 우뚝 솟아 있는 성에서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져 접근하기에도 힘이 들었다. 병법에 능한 광
개토왕도 공격을 한 지 20일이나 지났건만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광개토왕은 고심하였다.
마침내 그의 머리를 스치는 좋은 생각이 있었다.
한꺼번에 여러 방면에서 공격하면 어떨까? 그러면 많지 않은 병력으로 지키고 있는 적은 정신
을 못 차리겠지?
광개토왕은 즉시 작전 회의를 열어 병력을 일곱 부대로 나누어 여러 방면에서 동시에 공격을
하였다.
고구려군의 작전은 들어맞았다.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던 성도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백제의 진사왕은 형 침류왕이 죽자 조카들이 아직 어려 대신 왕위에 올랐었다. 그런데 침류왕
의 아들인 아신이 컸는데도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안 하자 아신은 자기가 태어날 때, 궁전의 용
마루에 오색의 구름이 감돌고 하늘에서 음악이 은은히 울렸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작은아버지에
게 빼앗긴 왕위를 되찾기 위한 푸석이었다.
그러던 중 관미성의 패전으로 진사왕이 죽자 아신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아신은 매와 말을 좋아하였고, 사냥을 하면서 무예를 닦았다.
아신은 왕이 되자, 자기의 외숙인 진무를 병관 좌평에 임명하고 아울러 대장군의 직책을 주었
다.
어느 날, 아신왕은 진무에게 말하였다.
관미성은 우리 나라 북쪽의 요지로 관미성이 있어야만 중국과 왕래를 할 수 있는데, 지금 고
구려가 차지하고 있으니 나는 자나깨나 그것이 분하오. 그러니 장군께서 나의 분을 풀어 주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임금님의 한을 풀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서기 393년에 백제는 1만 명의 군사로 관미성을 공격하였다. 진무는 부하를 아끼고
도량이 넓어 인망이 있었다. 그는 전투에서 적의 화살이나 돌을 겁내지 않고 앞장 서서 싸웠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은 진무의 명령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공격을 하였다.
아, 관미성은 과연 천연적으로 지형이 험하여 공격하기 힘든 곳이로구나.
진무는 용감하게 공격했지만 끝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더욱이 군량미마저 떨어져 군사
를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도 아신왕은 고구려 공격을 단념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 아신왕은 맏아들 전지를 태자로 삼고 배다른 동생 홍을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내신
좌평은 세금을 담당하는 지금의 재무 장관과 같은 직책이다.
보리 수확을 끝내자, 아신왕은 진무를 시켜 수곡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 때도 광개토왕은 5000
명의 정병을 이끌고 와 백제군을 크게 이겼다.
적을 물리쳤으니 크게 사냥을 하도록 하자. 하고 광개토왕은 군사들에게 알렸다. 왕은 사냥하
여 잡은 사슴, 노루, 멧돼지, 토끼 따위를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배불리 먹게 하고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상금을 많이 내렸다. 또한, 평양성 안팎으로 절이 아홉 개나 세워져 백성들이 이를 축
하하며 즐겼다.
우리 대왕님은 나이는 젊지만,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야. 고구려 만세, 대왕님 만세!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5.왜군 토벌
왜인은 본디 키가 작고 몸이 작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용감하여 전쟁을 할 때에는 악착같이
달라붙는 습성이 있었다.
왜국은 섬나라로 산이 많고 밭은 적어 양식이 늘 부족하였다. 사면에 바닷가 있어 해산물이 풍
부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식량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계림을 자주 괴롭
히고 식량을 약탈해 갔다.
여기서 계림(신라)의 형편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내물 이사금 9년인 서기 364년에 왜병의 무리가 금성을 습격하였다.
이 때, 이사금은 허수아비를 수천 개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토함산 아래에 줄지어
세웠다. 그리고 병사 1000명을 부현 동쪽 벌판에 잠복시켰다.
왜병은 거침없이 전진해 오다가 허수아비 군사들을 보고 놀랐다.
계림의 군사가 저렇듯 많은가?
그들이 주춤할 때, 잠복해 있던 계림의 군사가 일제히 일어나 적을 거의 전멸시켰다.
그렇게 영특하고 용맹한 내물 이사금도 이제 늙었다.
서기 393년, 왜병이 또 침략하여 금성을 포위하였다. 계림은 성을 굳게 닫고 지켰으나, 왜구들
은 보란 듯이 부근 마을을 마구 노략질하며 불을 질렀다. 사람들은 이를 갈며 이사금에게 말하였
다.
왕이시여, 부디 성 밖으로 나가 왜병들을 쳐부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저들의 노략질을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다. 적은 지금 배를 떠나 육지 깊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를 꾀어 내어 전쟁을 단번에
결말지으려 하고 있는 거다. 조금만 더 있으면 양식이 떨어져 스스로 물러가리라.
과연 적은 닷새 만에 포위를 풀고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내물 이사금은 날랜 기병 200
명을 먼저 지름길로 보내서 적의 뒤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윽고 왜군은 독산이란 곳에서 앞뒤로
협공을 당하였다. 적은 이리저리 몰리다가 전멸하고 말았다.
내물 이사금은 전쟁에 이겼지만 몹시 피로하였다.
어느 날, 그는 대신들 앞에서 말하였다.
나도 이제 늙어 지쳤다. 누구든지 고구려에 가서 볼모로 잡혀 있는 실성을 되돌려 달라고 전
할 사람은 없느냐?
곧 사자가 고구려로 향하였다.
한편, 광개토왕은 서기 395년 지금의 예성강 기슭에서 백제군과 다시 부딪쳤다. 이 때, 백제의
대장은 진무였다. 광개토왕은 진무 앞으로 말을 몰고 나아가 비웃듯이 말하였다.
오, 진무 장군 또 만났구려. 이번에는 우리 고구려군을 이길 계책이라도 마련하고 오셨소?
진무는 도량이 넓기로 이름난 장군이었다. 젊은 광개토왕이 자기를 무시하며 놀려도 꾹 참았다.
전쟁에서 화를 내는 쪽은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감정에 사로잡혀 전쟁을 하다 보면 정세를 잘못
하기 쉬웠다.
광개토왕은 진무 장군의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는 듯이 씨익 웃고서 칼을 높이 빼들었다.
고구려의 호랑이 같은 용사들아! 앞으로 나아가 적을 무찔러라!
그러자 고구려 보병 부대가 긴 창을 가지고 나아갔다. 이어 백제의 보병과 맞부딪쳐 싸웠다. 고
구려 군사의 창자루가 백제 군사들의 창보다 한 자쯤 길었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단연 우세하였
다.
진무는 이런 고구려 보병을 깨뜨릴 계책으로 기병을 진격시켰다. 그러나 이것도 소용이 없었다.
기병의 습격을 받자, 고구려군은 둥글게 뭉쳐서 고슴도치처럼 되어 버렸다. 게다가 창자루를 거꾸
로 돌려잡더니 언제 준비했는지 창에다 낫을 붙들어 매고, 그것으로 백제 기병이 타고 있는 말의
다리를 후려쳤다. 말들이 고꾸라지자, 기병들은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이 때, 고구려군은 7000명밖에 되지 않았다. 기병도 없었는데,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백제군
8000명이 패배하였던 것이다.
아, 분하다! 내 무슨 면목으로 왕의 얼굴을 볼 수 있으랴!
진무는 또다시 기병 수십 기를 이끌고 적진을 공격하였지만,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패전 소식
을 들은 백제의 아신왕은 크게 화를 냈다.
대체 담덕이 귀신도 아닐 텐데, 우리 백제군이 번번이 패한단 말이냐? 이번에는 내가 친히 너
서리라.
그 해 11월, 백제의 아신왕은 또 군사 7000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향했다.
쳇, 왕께서 아무리 분하여도 이 추운 겨울에 전쟁을 하겠다니 정말 너무하시는구나.
추운 겨울에 전쟁을 하러 가는 군사들은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불만이 많았다.
아신왕은 백성들의 어려움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감정이 폭발하는 대로 군대를 움직였던 것이
다.
얼어붙은 한수(한강)를 건너 청목령(개성)까지 갔지만 앞으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혹독한 추위가 닥쳐 많은 군사가 얼어 죽었다.
아! 하늘마저 광개토왕의 펀이로구나!
아신왕은 할 수 없이 군대를 철수시키며 하늘을 원망했지만, 원인이 자기에게 있음을 몰랐다.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한성으로 돌아온 아신왕은 왜에게 백제를 도와 달라는 편지를 보
냈다. 백제의 세력 안에 있던 왜로서는 곧 군사를 보내 주었다.
이 소식을 첩자로부터 전해 들은 광개토왕은 분노의 빛이 얼굴에 가득하였다.
왜군까지 끌어들이다니, 백제의 헹동이 괘씸하구나.
네, 왜군은 벌써 도착하고 있습니다. 곧 한수 남쪽에서 열병식까지 올린다고 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공격할 계획이로구나. 좋다, 우리가 먼저 공격을 해야겠다.
광개토왕은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 때가 서기 398년 가을이었다.
아신왕은 이보다 앞서 사두를 장군으로 삼고, 쌍현성을 한수 북쪽에 쌓였다. 고구려 공격의 전
진 기지인 셈이었다. 이 곳에 군량미를 쌓고 고구려 기병의 진출을 막기 위해 나무 울타리를 쳤
다. 말이 쉽게 뛰어넘지 못하도록 두 겹으로 쳤고, 군데군데 말뚝을 박아 말이 자유롭게 달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백제의 백성과 군사는 강제로 동원되어 공사를 했기 때문에 왕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며 투덜거
렸다.
무엇 때문에 해마다 전쟁일까? 백성을 펀안하게 쉬게 해야지, 군사다 인부다 하며 못살게 굴
다니!
어떤 시람들은 밤중에 가족들을 데리고 계림으로 도망을 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의 인
구가 많이 줄었지만, 아신왕은 민심을 잃고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광개토왕은 앉아서 적의 내막을 훤히 알고 있었다.
백성들이 임금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그 나라는 이미 힘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백제의 사람들은 왜인들까지 끌어들이게 되었다고 왕을 원망한다고 합니다.
광개토왕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나 그는 적을 결코 얕보지 않았다.
오늘날 일본 민족은 한반도를 통해, 대륙에서 건너간 사람들과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중국 남
부 또는 남태평양에서 흘러온 사람들의 자손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그 정착의 시작은 대마
도(쓰시마 섬)나 규슈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본다.
물론 일본에도 원주민이 있었다. 그 하나가 아이누 족인데 이들은 수수께끼의 종족이다. 왜냐
하면 몸에 털이 많고 피부 색깔은 백인에 가깝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일본 열도 중간까지 널리
분포되어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홋카이도에만 겨우 수백 명이 남아 있을 뿐이다.
왜국은 이렇게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모였지만, 당시의 우수한 문화와 문명을 지니고 한반도에
서 건너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를 이루었다. 특히, 당시 해양 강국이었던 백제계의 이주민
들이 지도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삼국 중 백제와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백제
를 본국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광개토왕은 여러 가지로 작전을 생각하였다. 백제군과는 여러 번 싸웠기 때문에 그들의 무기나
전투 방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왜인 몇 명을 잡아다가 물어 보고, 또 실제로 소부대로 전투를 벌여 그들의 실력부터 알아보
자.
광개토왕은 여러 가지로 정보를 수집하던 중, 백제에서 귀순해 온 한 병사를 통하여 왜국에게
서는 기병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아 냈다.
말을 탄 자는 장수로 몇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수전(물에서의 싸움)만은 잘 하니 조심해
야 합니다.
음, 알았다.
그 밖에 특별한 것은 없느냐?
광개토왕의 물음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네, 그들은 마치 짐승 같아 죽음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지만, 미신이 많아서 갖가지 신들을 숭
배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이냐?
산이나 강은 물론이고 나무, 새, 물고기, 돌맹이 등 모든 신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둠을
두려워하며 해를 자기들 조상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미개한 녀석들이로군.
드디어 전선에서 왜군과 마주쳤다. 광개토왕은 그들 앞에 나아가 꾸짖었다.
너희들은 어째서 이 곳까지 왔느냐?
광개토왕이 외치자, 백제 사람이 이것을 통역하여 알려 주었다. 그러자 왜장이 뭐라고 대꾸를
하였다.
저 녀석이 뭐라고 대답했느냐?
네, 자기들은 돈에 팔려 싸우러 왔다고 합니다.
광개토왕은 그 대답을 듣자 그만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과연 가엾은 놈들이로구나!
고구려군 앞에 왜군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고구려의 막강한 기병대, 그리고 장창을 가진 보병
대, 병법에 능하고 지략과 지혜가 뛰어난 젊은 광개토왕 앞에 그들은 파리 목숨처럼 죽어 자빠졌
다.
특히, 밤중에 큰 연을 만들고 거기에 불덩어리를 달아 하늘로 올리자, 어둠을 무서워하는 왜군
들은 허둥지둥 달아났다.
으악! 밤중에 해님이 떠올랐다. 점점 우리한테로 다가온다. 잘못하다가 해님에게타 죽겠다. 빨
리 도망가자!
바람에 떠내려가는 연의 불을 보고, 그것이 자기들에게 덤벼든다고 겁을 먹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질서를 잃고 달아나다가 지리를 잘 몰라 한수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광개토왕은 군사들에게 함성과 징만을 요란하게 울리도록 하고는 추격하지도 않았다.
이런 때는 자기 그림자만 보아도 놀라 도망치게 되므로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왜군이 무너지자 백제군도 덩달아 무너졌다.
고구려군은 한수를 건너 백제의 도읍 한성(지금은 남한 산성 근처)에 육박하였다. 또, 한 부대
를 멀리 미추성(지금의 인천)에 보내어 점령하였다.
이렇게 되자, 아신왕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곧 대신을 광개토왕에게 보내어 항복할 뜻을 전
하였다.
무명 1천 필과 남녀 1000명을 노예로 바치겠습니다.
본래 광개토왕은 영토를 탐낸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고, 백제의 침공이
다시는 없게 하려는 생각으로 출동한 것이었다.
좋소, 그 대신 왜국과는 손을 끊으시오. 그리고 우리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시오.
네, 맹세하겠습니다.
워낙 불리한 상황아었기 때문에 아시왕은 순순히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광개토왕은 아신왕의
아우 홍과 대신 10명을 볼모로 하고 철수하였다.
광개토왕은 평양으로 개선하였다.
여기서 밝혀 둘 것이 있다. 이제까지 고구려의 도읍을 평양이라고 했는데, 이 평양은 고국원왕
이 모용황의 침입을 받아 도읍을 평양 동황성(지금의 강계 부근으로 추측함)으로 옮긴 데서 이르
는 말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로는, 광개토왕 때의 도읍은 압록강 북쪽 환도성(지금의 지안)에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이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다.
광개토왕은 도읍으로 개선하자, 계림의 볼모 실성을 불렀다.
무엇 때문에 불렀을까?
실성이 불안한 얼굴로 나타나자 광개토왕은 말하였다.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오. 그대를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겠소.
실성은 자기 귀를 의심하였다. 볼모가 살아서 고국에 돌아간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살
아 돌아가기는커녕 양국 사이 전쟁이 일어나면 맨 먼저 죽임을 당하는게 볼모였던 것이다.
그게 정말이옵니까?
정말이오. 지금 내물 이사금은 나이가 많아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고 하오. 그러니 그대는
빨리 돌아가 계림의 왕이 되시오.
이렇게 말한 광개토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은 왜국과의 관계요. 그들은 이번에 보았더니 간사하기 이를
데 없고 겉과 속이 달랐소. 그러니 그들에게는 마음을 주지 말고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하시구
려.
귀국 준비를 마친 실성은 고구려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계림으로 돌아왔다. 내물 이사금은 너
무나도 기뻐 성 밖 멀리까지 나가 실성을 맞이하였다.
살아서 돌아오니 정말 반갑구나.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이 모두가 이사금의 은혜인 줄 아옵니다.
그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계림의 백성들은 이 광경을 보자 만세를 부르
며 좋아 했다.
이제 우리 계림도 염려가 없다.
계림은 아직도 삼국 가운데 가장 작고 세력도 약했다. 게다가 남으로는 왜구와 북으로는 말갈
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말갈은 삼국 시대에 생긴 이름이다. 서기 395년 내물 이사금 40년에도 말
갈이 쳐내려와서 계림는 실직(삼척)의 벌에서 이들을 맞아 크게 무찌른 일이 있었다.
이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있으니, 고구려 밑에 있는 말갈은
염려가 없습니다. 다만 왜국은.
하고 말끝을 흐렸다. 실성은 고구려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의 인품에 대해서 잘 알
고 있었다.
서기 400년, 한동안 조용하던 고구려의 북쪽에 전쟁의 검은 구름이 덮었다. 신성에서 급한 연락
이 왔다.
후연의 모용회가 3만 명의 대군으로 우리의 신성과 남소를 공격해 왔습니다.
의리 있는 모용수가 죽더니, 이제 이 녀석들이 함부로 남의 나라를 침범하는 구나.
모용수는 비수 싸움 때, 전진의 부견을 끝까지 보호해준 인물이다. 그는 서기 396년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의 발위에게 공격을 받아 도읍이던 중산을 버리고 요동의 용성으로 달아났다. 따라서
그들이 고구려를 공격한 까닭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살길을 찾기 위해서 였다.
북쪽의 소식이 전해져 왔다.
신성과 남소가 함락되었습니다.
뭣이! 이런 괘씸한 것들이 있나!
우리의 땅 700리를 빼앗아, 그들의 백성 5000호가 그 곳에 옮겨 와 밭을 갈고 있습니다.
이 때, 광개토 대왕은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백제의 아신왕이 전날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또 왜와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계림에서도 새로운 소식이 알려져 왔다.
계림에서는 서기 402년에 내물 이사금이 죽고, 실성이 이사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성 이사
금은 내물의 아들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고, 그들과 화친을 맺었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북쪽으로는 적을 맞이해야 하고, 남쪽으로 부터는 위협을 받게 되었다. 광개토왕은 며
칠 동안 주변의 정세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먼저 북쪽의 후연을 쳐서 빼앗긴 땅을 다시 찾자.
6. 귀신 같은 용병
서기 402년 광개토대왕은 매우 용감한 용사들로만 2만명이나 되는 정예 부대를 이끌고 북으로
출동하였다.
고구려는 계루부, 연노부, 순노부, 절노부, 관노부의 5부가 평소에는 요동벌에 흩어져 살고 있었
지만,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말을 타고 모두 모여 들었다.
신성 가까이에 이르자 광개토왕은 장군들을 모으고 작전 지시를 했다.
모용희가 이끄는 후연의 군대에는 한족들이 만히 섞여 있는데, 그들은 말을 탈 줄 모른다. 그
래서 평평한 평지에 견고한 성곽을 쌓고, 그 곳에서 농성하는 전법을 쓸 것이다.
장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타기에 능숙하지 못한 한족들이 성벽을 의지하고 싸우려 하는 것
은 당연하기 때문이 었다.
광개토왕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성 가까이 접근하여 적에게 갖은 욕을 퍼붓고 약을 올려 적이 성에서 나오도록 하느느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만약 적이 우리 꾀에 넘어가지 않는 다면 그 때 가서 새로운 전법을 쓰
도록 하자.
장군들은 이미 광개토대왕의 작전에 대해서는 깊은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믿고 그대
로 따랐다.
우리 대왕님의 용병술(작전)은 귀신도 곡할 정도일세. 상대편의 성격이나 전법까지 환히 내다
보고 계시거든.
고구려군은 신성의 5리 밖까지 가서 진을 쳤다. 기습이나 야습을 방비하기 위해 진지 둘레에
목책을 치고 파수병을 두었다. 그리고 매일 2000명의 병력을 출동시커 적을 유인하는 전술을 썼
다.
너희들은 겁쟁이냐? 성문 닫고 지키기만 하고 나와서 싸우지도 못하는구나!
야, 이 녀석들아! 너희들도 남자라면 떳떳하게 나와서 한 판 붙어 승부를 가르자!
야, 모용희! 너는 뭐하는 녀석이냐?
그런데도 모용희는 나오지 않았다.
실컷 욕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저들의 꾐에 빠져 우리가 성문을 연다면 꾀 많은 담덕에게 반
드시 패하고 만다. 성 안에는 식량도 많고 일 년이고 이 년이고 끄떡없다. 저렇게 욕을 많이 하고
발악을 하다가 식량이 떨어지면 저절로 물러가겠지.
변방의 유목 민족이 나라의 수도가 있는 중심 지대를 침공하면 무력으로는 압도적으로 강했지
만, 문화적으로는 농경 민족인 한족에게 동화되고 만다. 그 까닭은 농경 민족인 한족은 유목 민족
에 비해 문화가 앞섰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금 역사를 통한 교훈이었다.
예를 들어, 서기 398년 척발규는 평성(지금의 다퉁)에 도읍을 정하고, 도무제 라 불이었다. 도무
제는 새로운 정복지의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한인 관리를 썼다.
본디 선비족은 머리를 밀고 변발하는 게 풍속이었지만, 속발(상투 따위를 매는 것)하고 모자를
쓰도록 법령을 정했다.
도무제는 백성을 중국화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자신은 포악하기 이를 에 없었다. 불교를
보호했고 그 자신 역시 신자 였으나 걸핏하면 사람을 죽였다. 얼굴빛이 달라지든지 숨소리가 거
칠거나 걸음걸이가 이상하든가 말투가 보통이 아니든가 하면, 도무제는 그 사람을 붙잡아 스스로
때려 죽었다.
마음에 악한 생각이 있어 행동이 절로 그런 것이 나타난다.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는 후궁들이나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였다. 태자는 척
발사였다. 도무제는 척발사를 태자로 책봉하면서 조건을 내놓았다.
예로부터 외척이 정치에 간섭하여 백 년 대계를 위해 태자 어머니 에게는 죽음을 내리겠다.
그러면서 태자 어머니 즉, 자기의 왕비를 죽이고 말았다.
태자는 그것을 슬퍼하며 매일 같이 울고 있었는데, 도무제가 이것을 알고 격노하여 태자에게
즉시 입궐할 것을 명했다. 이 때, 태자의 측근 최굉이 말하였다.
태자님, 입궐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입궐하셨다가는 예측하지 못할 일이 생길 것이니, 잠시밖
에 나가 계시도록 하십시오.
척발사는 그 말을 따랐다.
한편, 도무제에게는 척발소라는 둘째 아들이 있었는데, 놀기를 좋아했고 시내에 나가서 곧잘
말썽을 일으켰다. 며칠 뒤, 이런 일을 알게 된 도무제는 척발소의 어머니 하부인을 감금하고 죽이
려 했다. 어머니의 교육이 모자라기 때문에 자식이 비뚤어진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하부인은
아들인 척발소에게 구원을 청했다.
어머니를 살리려면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다.
척발소는 환관(내시)과 궁녀와 짜고 황제가 있는 천안전에 가서 욍쳤다.
불이야!
이 소리에 깜짝 놀란 도무제는 궁전 밖으로 뛰어나오다가 기다리고 있던 척발소의 칼에 맞아
죽었다. 이 때가 서기 409년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척발사는 궁중으로 급히 들어와 척발소를 죽이고 황제에 올랐으며, 이 사람이
명원제였다. 명원제가 황제가 된 것도 최굉과 같은 한인 관료들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유목 민족 출신들은 무력에서는 막강했으나, 지혜를 짜내고 문화적인 일을 하는 데는
농경 민족인 한족을 당해 내지 못했다.
이야기는 다시 광개토왕과 후연의 싸움으로 돌아와, 고구려군이 아무리 약을 올려도 모용회가
성에서 나오지 않으므로 싸움은 되지 않았다.
적이 끝까지 농성을 한다면 이제 다른 방법을 쓰도록하자.
왕은 성벽 앞에 토산을 쌓도록 했다. 성벽보다 높게 흙으로 산을 쌓고, 그 위에서 성 안을 굽어
보며 화살을 쏘았던 것이다. 이 전술에는 후연의 군사도 당해 내지를 못했다.
신성이 수복되고 모용희는 전사했으며, 모용귀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고구려군은 잃었던 옛
땅을 다시 찾았을 뿐 아니라, 요수 건너 요서 땅까지 쳐들어갔다.
공개토왕은 신성, 남소, 요동성에 각각 수비병을 남겨두고 개선길에 올랐다. 그 때 말을 탄 연
락병이 왔다.
백제의 아신왕이 마침내 왜군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려고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다시 몇일이 지나자, 이번에는 계림의 실성 이사금이 급한 구원을 청해 왔다.
적은 매우 강성합니다. 간절히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저희를 빨리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서기 403년 7월, 백제와 왜군은 계림 변경의 작은 성들을 차례로짓밟고 명활성을 포위했던 것
이다. 광개토왕은 정예 기병 5000명을 이끌고 계림의 변경을 향해 달렸다. 광개토왕은 미리부터
이런 일에 대비하여 백제 국경 일대에 7성을 두고 각각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 군사들이
가는 도중 합세되면서 병력은 어느덧 5만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백제와왜군의 병력은 이보다 더
많았다.
이번에야말로 다시는 왜가 이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결심한 광개토대왕은 곧 실성 이사금에게 사자를 보내어 어렵겠지만, 끝까지 버티라고
격려했다.
이 때, 일본은 왜의 5왕 시대가 시작되려는 무렵이었다. 이것은 5세기의 중국 남조와 교섭을 가
졌던 나라로, 서기 421년 왜찬이 처음으로 중국 송나라 황제에게 사신을 보냈었다.
왜찬은 백제 아신왕의 청을 받아들여 곧 군대를 보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욕심이 있었다.
백제와 계림, 특히 계림은 그 왕이 커다란 금관을 쓰고 있닥 합니다. 그것은 그 나라에 많은
금이 나고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를 정복하면 많은 금잉 손에 들어올 것입니다.
또한, 당시의 고구려, 백제, 신라에는 왜나라에서 볼 때 탐나는 기숙들이 많았다. 이 시대에 백
제의 남쪽에서 시작된 벼농사, 누에치기, 대장 기술 등은 그들에게 무척 호감을 주는 것들이었다.
특히, 벼농사의 기술을 배우게 되면 그들의 고민거리인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누에를 치고 실을 뽑아 명주를 짜면 고급 옷감을 만들게 되고 대장 기술
은 무기와 농기구를 만드는 데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다 줄 것이다.
이러한 욕심으로 백제를 도와 연합군을 편성하고 계림을 공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활성의 수
비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견고 하였다.
본디 계림에는 시조 박혁거세 21년 즉, 기원전 37년에 궁성을 짓고 이를 금성 이라 했던 것을
다시 서기 101년 파사 이사금 때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고 이를 월성 이라 하였다.
월성은 일명 재성 이라 했고, 둘레가 1023보였다. 그리고 신월성 북쪽에 만월성이 있고 둘레가
1838보,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이 있고 둘레는 1906보, 또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이 있고 둘레는
2804보였다. 즉, 서라벌에는 금성, 월성, 신월성, 만월성, 명활성, 남산성의 6성이 있었다. 금성에는
시조 박혁거세 때부너 왕이 있었는데, 후대에 와서는 월성과 만월성이 주로 임금의 거처로 쓰였
다.
이것으로 볼 때, 몇몇 성은 산성으로 적이 침입했을 때에 사람들이 들어가서 주변읭 성과 서로
협력하여 적과 맞섰다고 생각된다.
왜병들은 민가에 들어가 노략질하기에 바빴다. 식량과 가축을 빼앗는 것은 물론, 자기 나라에서
보지 못했던 물건들이나 옷가지, 세간 등을 빼앗고 사람들을 마구 잡아갔다. 그러나 힘이 약한 계
림의 군사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고구려의 기병대가 도착했다. 그리고 왜병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성 안에 있
던 계림군은 전날 고구려군이 올린 봉화로 고구려군이 도착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때다! 성문을 열고 나가 적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실성 이사금은 외치자, 고구려군과 계림군은 도망치기 시작한 적군은 추격했다. 이 때 광개토대
왕은 실성 이사금에게 말했다.
계림군은 백제군을 맡으시오. 우리 고구려구은 왜병을 맡으리다.
광개토왕은 이사금에게 부탁하여 그 곳 자리를 잘 아는 사람 몇 명을 길 안내인으로 삼아 쫓겨
가는 왜병들은 추격하는 한편, 기병을 멀리 울산만 쪽에 보내어 왜군들이 타고 온 병선을 불질렀
다. 이리하여 왜병과 백제군은 가야국 쪽으로 달아났다.
이놈들, 어디까지 도망갈 테냐!
고구려군은 왜군을 끝끝내 놓아 주지 않았다. 그 중에는 도망가다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왜
병도 있었으나, 이 때만은 광개토왕도 노하여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살려 둘 필요가 없는 배은 망덕한 자들이다. 용서없이 목을 쳐라!
이때, 왜군은 섬멸한 고구려는 대가야까지 정복했다.
당시 낙동강 서쪽에서 6가야가 있었다. 대가야는 지금의 고령 지방에 있었고, 6가야 중 중심되
는 나라였다. 광개토대왕은 여기서도 그들에게 호의를 보였다.
갑자기 자기 나라에 쳐들어온 고구려군을 보고 가야왕은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불안에 떨고
있는 가야왕에게 광개토대왕은 따뜻하게 말했다.
내가 이 곳에 온 것은 왜군을 섬멸하기 위해서였소.그러니 당신들의 영토나 재물에는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안심하시오.
이 말을 들은 가야왕은 얼마나 감격하고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이 싸움에서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백제였다.
아신왕은 패전의 쓰라림을 안고 한성으로 돌아갔으나, 이내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는 병이 깊
어지자, 자신이 한일을 돌이켜 보았다.
나는 한 번도 담덕을 이기지 못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생각할수록 한스러운 일이었다.
아신왕은 서기 405년 9우러에 마침내 죽었다. 그가 왕위에 있었던 14년 동안은 줄곧 전쟁만 했
던 것이다. 이리하여 왕의 둘째 아우 훈해가 왕의 대리가 되어 급히 사신을 왜나라에 보내, 왜국
에 가 있는 전지 태자를 돌아오게 하였다.
본국의 소식을 들은 전지 태자는 귀국을 서둘렀다. 그를 실은 배는 왜국의 하카타 근처를 출발
하여 이키 섬, 대마도를 거쳐 남해안에 이르렀고, 거기서 한려 수도를 지나 강진의 포구까지 오는
데 여러 날이 걸렸다.
그 사이 백제에서는 정변이 일어났다. 아신왕의 막내 아우 첩례가 왕의 대리이면 형인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던 것이다.
전지는 울면서 고국에 돌아왔지만, 전지를 기다리고 있던 첩례의 부하가 태자를 습격하여 포박
하고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백성들은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특히, 해충은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
였다.
이 나라의 왕은 태자이신 전지님이다. 그분이 역적 첩례의 부하에게 잡혀 한성으로 끌려갈 지
경에 놓여 있는데, 우리가 어찌 보고만 있을 것인가!
이리하여 해충은 전지 태자를 구하고 울면서 말했다.
지금, 대왕께서 세상을 떠나자 왕의 아우 첩례가 형님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있습니
다. 그러니 태자님께서는, 가까운 섬에 들어가 잠시 동안 때를 기다리는게 좋을 것입니다.
전지는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하였다.
이국에 가 있은 지 거의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건만 꿈에도 그리던 가족을 만나기는커녕
아버님 무덤에 참배도 못 하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러나 몇 달 안가서 첩례의 불의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백제 사람들이 첩례를 왕위에서
내쫒고 죽였기 때문에 전지는 도읍에 들어가 왕이 될 수 있었다. 이 분이 백제 제 18대 전지왕이
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그런 소식을 듣고, 을내에게 말하였다.
아신이 생전에 전쟁을 너무 좋아하고 백성을 괴롭혔기 때문에 그가 죽자마자 골육 상잔의 내
분이 일어난 것이다. 나라의 임금된 자는 마땅히 백성을 사랑하고 꼭 필요한 전쟁만 해야 하리
라.
그런데 이 무렵, 후연의 모용귀가 군사를 끌고 와서 요동성(지금의 요양)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끝끝내 지키어 적은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갔다.
서기 406년 12월, 후연이 또 고구려의 목저성을 공격했지만, 수비가 견고하여 그대로 돌아갔다.
후연은 이렇듯 성 하나도 함락시키지 못할 만큼 세력이 약해졌으며, 이윽고 한족 출신의 장군
이던 풍발이 임금을 죽이고 나라 이름을 북연 이라 했다. 이 때가 서기 409년이었다. 끝까지 고구
려를 괴롭히던 후연이 결국 망한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이 무렵 내치(나라 안 정치)에 힘썼다.
대대로 이하 12등급의 관리 제도를 마련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고구려는 지방에 부락과 읍이 있었고, 그 곳의 우두머리인 제가가 있었으며, 제가 위에 큰 우두
머리인 대가가 있었다. 또 일반 백성은 하호 라 불렀다. 그리고 전국에 5개의 행정구와 군사관구
가 있었고 욕살, 처여근지, 수상과 같은 사람들이 있어, 서로 계통이 다른 지배 구조를 이루고 있
었다.
이것은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든 제도였다. 그렇게 때문에 도읍도 거성과 산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만주 지안 현에는 국내성과 위나암 산성이 있고, 평양에는 거성인 평양성, 안학궁과 대
성 산성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당시의 고구려 유적은 모두 파괴되어 알길이 없지만, 고분의 벽화로 다소나마 엿볼
수 있다. 무덤은 고구려 특유의 적석총인데,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그 안에는 석실이 있다.
석실 안에는 갖가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서기 407년, 광개토왕은 궁궐을 크게 중수하였다. 다시 서기 409년에는 왕자 거련을 태자로 봉
했다. 이렇듯 내치에 힘쓰고 있을 때, 북쪽에서 연락병이 왔다.
동부여가 우리 고구려 백성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동부여는 주로 지금의 함경도 방면에 있던 나라로 고구려의 대무신왕 때 패하여 수백 년 동안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이러한 동부여가 겁도 없이 고구려를 괴롭힌다는 소식
을 받은 것이다. 서기 411년 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동부여 토벌에 나섰다.
이 때, 대신들의 왕 앞에 나와 아뢰었다.
이제 우리 고구려는 동방의 큰 나라입니다. 군대는 강하고 장수들은 훌륭합니다. 어찌 닭을 잡
는 데 우도(소를 잡는 칼)를 쓰려 하십니까? 대왕께서는 직접 서지 마시고 마땅한 장군을 하나
보내서 무찌르도록 하십시오.
광개토대와은 이 때 서른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동안 내치에 힘쓰다 보니 몸
이 많이 굳어져 있었다.
경들의 충고는 고맙지만 이러다가는 말을 타는 법마저 잊어버릴까 염려되오. 또, 아무리 작은
적이라도 얕보아서는 안 되오. 이번에 내 몸소 나서리다.
광개토왕은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적을 치겠다는 목적만 갖고 동부여 정벌에 나선 것은 아
니었다.
황제나 왕이 영토를 돌아보고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는 것을 순행 또는 순수 라고 한다. 이렇
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사기도 높여 주고 더욱 훌륭한 정치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광개토왕은
이런 생각 아래 위용도 당당히 싸움터로 나갔다.
순행이 주된 목적인 까닭에 행군의 속도를 빨리 하지는 않았다.
천천히 행군하라. 동부여의 왕도 아마 내가 친히 온다는 걸 알게 되면 싸우기도 전에 성문을
열고 항복하리라.
왕은 이르는 곳곳에서 효자나 열부, 또는 노인들에게 상을 내렸다. 또, 군중에서 씨름 대회 같
은 것을 열어 사기도 돋우었다.
이 무렵, 고구려의 남쪽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우선 고구려를 계속 괴롭혔던 백제는 전지왕의 시대가 되면서 왜국과 자주 사신을 교환하면 친
밀히 지내고 있었으나, 고구려를 침략하겠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편, 계림은 그 뒤에도 계속 잦은 왜구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 계림이 이처럼 왜의 침입을 자
주 받았던 까닭은 계림이 왜와 가까이 있는데다가 계림의 힘이 약하여 해안이나 변방까지 군사를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성 이사금 6년 3월, 왜인이 계림의 동쪽 변방을 침략하여 백성 100여 명을 잡아갔다. 이듬해
2월에도 왜병의 침략이 있었다.
더 이상 왜구들의 횡포를 볼 수 없었던 실성 이사금은 마침내 대신들을 모으고 자기의 계획을
말했다.
해마다 우리 나라에 침입하는 왜인은 그 소굴이 대마도요. 우리 몸에 병을 다스리려면 그 뿌
리를 없애야 하는 법, 정병을 뽑아 대마도를 치고자 하오.
그러자 이벌찬 미사품이 반대하였다.
대왕님, 전쟁은 신중히 해야 합니다. 만일 바다를 건너가서 적을 치다가 자칫 한 번이라도 잘
못되면 그 영향이 너무도 큰 것이라, 국가의 흥망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을 치는 것
보다 험한 곳에 관문을 설치하고, 왜구의 침입을 막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
니다.
이 의견에 실성 이사금도 더 이상 자기의 고집을 내세우지는 못했다.
또한, 백제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내물이사금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
내고, 계속 고구려와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데 힘썼다.
한편, 동부여를 치기 위해 몸소 대군을 이끌고 순행길에 올랐던 광개토왕은 동부여가 가까위짐
에 따라 본격적인 작전을 세웠다.
동부여가 아직도 항복하지 않는 것을 보니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구나.
광개토왕이 일부러 진격 속도를 늦추었던 것은 그들이 자진해서 항복해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
다.
전쟁을 하게 되면 아군이나 적군 할 것 없이 많은 사라들이 죽거나 다친다. 나는 그것을 피하
고 싶었는데, 끝끝내 동부여가 싸움을 하겠다고 한다면 나는 그들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
싸움을 쉽게 끝내기 위해서는 적을 건드려 적이 먼저 공격해 오도록 유인 작전을 쓸 필요가 있
었다. 성에서 농성하는 적을 공격하는 것보다 적을 화나게하여 성 밖으로 끌어낸 다음, 적을 무찌
르는 편이 아군의 손실도 적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작전 회의를 하고 있는 군막 안에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도부여왕을 성나게 할 임무를 띤
사신으로 누구를 보낼 것인가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이 사신이지 적을 성 밖으로 유인해 오는 미끼였기 때문에 거의 죽으로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을 때, 광개토왕을 어린 시절부터 곁에서 모시던 을내가 입을 열었다.
대왕님, 저를 사자로 보내 주십시오.
아니, 을내! 자네가 가겠다고?
광개토왕은 소년 시절부터 친했던 을내의 얼굴을 찬찬히 응시했다.
저는 대왕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은 뒤, 이제껏 아무런 공도 없이 호강만 했습니다. 부디 저를
보내 주시어 대왕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게 해 주십시오.
광개토왕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가면 십중 팔구 죽을 게 뻔했다. 그런 위험한 임무로 사랑하는 신하를 보내는 광개토왕의 심정
은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희생을 보다 적게 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왕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고맙소. 남은 가족에 대해서는 염려 마시오. 내 그대의 충성을 생각하여 아무 걱정 없이 편히
살도록 해주겠소.
그러자 자원자가 또 나섰다. 그는 바로 광개토왕이 태자 시절에 관곡을 훔쳐 옥에 갇혔던 것
을 그의 정직함을 보고 풀어 주었던 구칠이었다.
왕은 구칠이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며, 곧바로 동부여왕을 화나게 할 서신을 만들도록 하였다.
드디어 광개토왕의 서신을 받은 을내가 정사가 되고, 구칠은 부사가 되어 동부여로 갔다.
동부여왕은 고구려의 국서를 받아 읽자 격노하였다.
마소는 물론이고 개나 돼지도 그 주인의 은혜를 아는 법, 그런데 너희는 그만도 못 하니 천벌
을 받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지금이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땅에 엎드려 빈다면 너희의 미련함을
생각하여 용서해 줄 수 있으나, 그렇지 않고 나에게 대항을 한다면 너희 모두를 사로잡아 마구간
에 처넣으리라.
당시 동부여는 자기들이 기르는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쓰고 있었다. 광개토왕은 그것을 빗
대어 동부여왕을 격분시켰던 것이다.
국서를 읽고 있던 동부여왕의 턱이 분을 못 이겨 부르르 떠는가 싶더니, 광개토왕이 생각했던
대 고구려의 국서를 찢으며 외쳤다.
이 요망한 글을 가지고 온 고구려의 사신을 끌어내어 당장 목을 베어라. 그리고 전병력을 동
원하여 방자한 담덕을 무찔러 버려라!
전쟁에서 흥분은 금물이었다. 고구려군은 동부여군이 지나는 깊은 계곡의 양쪽 산 위에 미리
숨어 있다가 동부여군이 나오자, 바위와 큰 나무를 마구 굴려 동부여군의 앞과 뒤를 막았다. 이리
하여 동부여군은 독 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
광개토왕은 산마루에서 우왕좌왕하는 동부여군을 굽어보며 탄식을 했다.
가엾지만 저들을 모두 죽일 수밖에 없겠지. 저들이 저토록 날뛰니 하는 수 없다. 광개토왕은
마침내 불로 공격을 하여 이들을 모두 불태워 죽였다.
이 소식이 사방으로 퍼지자, 이웃읭 다른 부족들은 앞을 다투어 항복해 왔다.
이제 고구려의 영토는 남쪽의 한수에서 북쪽의 쑹화강까지, 동쪽은 요하에서 서쪽의 연해주까
지 이르렀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 일대의 영걸 광개토왕도 서기 413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직은
한창 일할 젊은 나이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태자 거련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이분이 바로 고구려의 제20대
임금인 장수왕이었다. 장수왕은 아버지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만주 통구 즙안(지안)현에 광개토
대왕비를 세웠다.
장수왕은 광개토 대왕 못지않은 대왕이었다.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옯겼고, 장수왕 20
년에는 요동에 진출하여 북위와 국경을 이웃했다. 그리고 장수왕 63년에는 백제의 도읍 한성을
점령하여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한수 유역을 제압했던 것이다(서기 475년).
한편, 중국도 많은 나라가 세워지고 멸망을 했다.
서기 589년에는 양견이 세운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고구려를 빈번히 침범했으나, 뜻을 이
루지 못했다.
세월은 흘렀다. 청나라 말기였던 서기 1875년 봉천유수였던 숭실은 퉁커우(통구)지방을 순찰했
다. 숭실은 학자였고 서예에 관심이 많았다.
서예를 하는 사람들은 금석학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주민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옛날 비석은 없습니까?
네, 있습니다. 그런데 비석이 너무 커서 어떤 비석인지를 모르겠습니다요.
그래? 어디 그 곳으로 가 봅시다.
주민이 안내한 곳에 서 있는 비석은 과연 어마어마했다. 비석을 덮고 있는 이끼를 벗겨내고 비
문을 자세히 살펴보던 숭실은 깜짝 놀랐다.
아, 이것은 고구려 호태왕의 비가 아닌가!
이것으로 광개토 대왕이 돌아가신 지 1500년 가까이 지나서야 그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
대왕비가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힘이 강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과 만주를 침략하려는 의도에서 이 비문
을 조작하고 훼손시키며, 자기들에게 이로운 쪽으로 해석을 하였다.
8.15 이후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들이 과거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게 되었고, 광개토 대왕비에
나타난 기록 중 논쟁의 핵심이 되었던 왜가 바다를 건너왔다. 는 부분이 틀린 것이라고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광개토 대왕비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대립은 계속되고 있다.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육실제의 심리학 역할 (0) | 2023.03.10 |
---|---|
광기와 권력 (0) | 2023.03.10 |
공간적 배치의 미시정치학 (0) | 2023.03.10 |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 무라카미 류 (0) | 2023.03.09 |
고선지 [한국위인전집] (0) | 2023.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