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리더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을 18가지로 분류하고, 각 리더십 롤 모델에 해당하는 역사 속
인물을 예로 들면서 소개한다. 저자는 리더십은 조직 구성원의 능력과 주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
는 매우 까다로운 능력이기 때문에 언제나 완벽한 ‘완성형 리더십’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다양한 문제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리더십을 찾아내고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일 수도
있다고 역설한다.
인생리더 - 역사 속에서 리더를 만나다
▣ Short Summary
한고조 유방은 초나라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쟁패한 뒤 자신의 리더십을 ‘완성형’이라고 생각했을지
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열세의 상황에서도 엘리트 출신이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던 항우를 물
리치고 한(漢) 제국을 건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유방이 맞이한 현실은 달랐다. 전쟁을 치르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결국 유방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
어도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라며 유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본격적인 문치주의 시대를 연다.
이 책은 리더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을 18가지로 분류하고, 각 리더십 롤 모델에 해당하는 역사 속 인
물을 예로 들면서 자세히 소개한다. 저자는 리더십은 조직 구성원의 능력과 주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 매우 까다로운 능력이기 때문에 언제나 완벽한 ‘완성형 리더십’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다양한 문제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리더십을 찾아내고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일 수도 있
다고 역설한다. 아울러 동양 리더십의 핵심 사상인 ‘인(仁)’을 바탕으로 수신(修身)과 보필(輔弼) 리더
십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현실에 적절한 리더십 대안을 제시한다.
▣ 차례
머리말
제1장 역사가 들려주는 리더의 조건
역사 교양 사전 1 종묘(宗廟)와 묘호(廟號)
제2장 자기관리 리더십 - 매미와 익선관(翼蟬冠)
역사 교양 사전 2 왕의 이름 ‘휘(諱)’
제3장 사람관리 리더십 - 공자의 정명사상(正名思想)과 삼적(三適)의 도(道)
역사 교양 사전 3 궁궐(宮闕) 이야기
제4장 성군(聖君) 리더십 - 세종(世宗)과 한글창제
역사 교양 사전 4 모란과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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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리더 – 역사 속에서 리더를 만나다
제5장 애민(愛民) 리더십 - 영조(英祖)와 균역법(均役法)
역사 교양 사전 5 왕과 왕비의 호칭
제6장 혁신(革新) 리더십 - 정조(正祖)와 금난전권(禁亂廛權) 철폐
역사 교양 사전 6 가뭄과 기우제(祈雨祭)
제7장 전략(戰略) 리더십 - 이순신(李舜臣)과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역사 교양 사전 7 왕릉(王陵)과 소갈비
제8장 조직관리 리더십 - 제갈량(諸葛亮)과 한신(韓信)
역사 교양 사전 8 색깔과 신분
제9장 참여지향 리더십 - 항우(項羽)와 유방(劉邦)
역사 교양 사전 9 내시(內侍)와 궁녀(宮女), 그리고 후궁(後宮)
제10장 포용(包容) 리더십 - 관중(管仲)과 환공(桓公)
역사 교양 사전 10 왕의 얼굴과 어진(御眞)
제11장 인재중용 리더십 - 조조(曹操)
역사 교양 사전 11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제12장 인내(忍耐) 리더십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역사 교양 사전 12 자(字)와 호(號)
제13장 반면교사(反面敎師) 리더십 1 - 선조(宣祖)
역사 교양 사전 13 조선 4대 명당 왕릉(王陵)
제14장 반면교사(反面敎師) 리더십 2 - 인조(仁祖)
역사 교양 사전 14 당파(黨派) 이야기
제15장 보필(輔弼) 리더십 - 초요기(招搖旗)와 북두칠성(北斗七星)
역사 교양 사전 15 대장금(大長今)과 선정릉(宣靖陵)
제16장 2인자의 처세술 1 - 한고조(漢高祖)와 소하(蕭何)
역사 교양 사전 16 한양의 4대문과 4소문
제17장 2인자의 처세술 2 - 진시황(秦始皇)과 왕전(王翦)
역사 교양 사전 17 노비(奴婢)와 무당(巫堂)
제18장 이루었으면 떠나라 - 와신상담(臥薪嘗膽)과 범려(范蠡)
역사교양사전 18 방향과 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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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리더 – 역사 속에서 리더를 만나다
인생리더 - 역사 속에서 리더를 만나다
역사가 들려주는 리더의 조건
옛날의 임금들은 백성들이 먹고 사는 일, 즉 농경과 치수에 가장 큰 정성을 들였고, 순임금과 우임금
도 황허의 치수를 잘한 덕에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요임금은 아들이 아닌 순임금에게 보위를 물려주었
고, 순임금도 아들이 아닌 우임금에게 보위를 물려주었는데, 그 이유는 황허의 물 관리를 잘하여 백성
들이 먹고 사는 데 어려움이 없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임금은 아들 계에게 물려줘 보위를 세습
하는 왕조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중국 역사 최초의 통일왕국이라 일컫는 하(夏)나라다.
기원전 2100년경에 하나라가 건국되어 약 500년간 17명의 왕을 배출해 내려오다, 기원전 1600년경
하나라는 상(商)나라 탕왕에게 망하게 된다. 상나라는 이후 30명의 임금이 재위하면서 기원전 1100년
경까지 약 500여 년을 이어갔고, 기원전 1100년경 문왕(文王)과 아들 무왕(武王)은 상나라를 무너뜨리
고 주(周)나라를 건국한다. 주나라를 건국한 주역은 크게 4명이다. 문왕과 그의 큰아들 무왕, 넷째 아
들 주공 단(周公 旦),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사 강태공(姜太公)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주나라의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주공은 형님 무왕이 죽고 무왕의 어린 아들인 성왕이 보위에 오
르자 조카를 곁에서 보좌하며 정치의 틀을 세워 나갔다. 주변에서는 시기와 의심의 눈초리로 주공을
오해하기도 했지만, 주공은 어린 성왕(成王)이 어른이 되면 모든 통치권을 조카에게 넘겨주고 물러나
겠다는 약속을 하며 의연하게 정무를 살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며 강조되는 중화사상
(中華思想)이 바로 주문왕과 주공 단의 시대로 돌아가서 예(禮)와 인(仁)의 도리를 되찾는다는 의미다.
공자는 유학의 복잡한 사상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사람이고, 그 사상을 최초로 만들어내고 이론화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주문왕과 강태공, 그리고 주공 단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간단했다. 하늘에는 하늘을
다스리는 도리가 있고( ̄ ), 땅에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기운이 있으니(_ ), 이 도리와 기운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조화롭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역할(亻)이고, 이 역할을 잘 수행하는 사람이 곧 어진 사
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로소 인(仁)의 사상이 탄생하게 되었다. 특히 주문왕과 아들 주
공 단은 복희씨가 고안했던 주역을 완성했으며, 주례(周禮)와 의례(儀禮)에 대한 저술을 통해 궁궐 건
축부터 예와 의식에 이르는 거의 모든 통치의 기준과 지침을 마련한 인물이다.
자기관리 리더십 - 매미와 익선관(翼蟬冠)
임금이 머리에 쓰는 관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신하들로부터 하례를 받을 때 쓰는 원유관을 비롯해
서 면류관과 익선관이 바로 그것이다. 면류관은 혼례나 기우제 등 나라의 공식 행사 때 쓴다. 한편 익
선관은 임금이 평상시 시무복으로 입는 곤룡포와 함께 쓰는 관으로, 뒤쪽에 매미 날개를 닮은 모양의
얇은 검정색 망사 두 개가 붙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평생 임금이 매미에게 배우는 다섯 가지의 자세
와 마음가짐을 표현한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스스로 떠날 때를 알고 실천하라. 매미는
무더위가 끝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스스로 사라진다. 왕이 노쇠하여 판단력이 흐려지면 국정 운
영 능력이 떨어지고 동시에 객관적인 통찰을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임금은 미리 자신의 뒤를 이를
후계자인 세자를 정하고 학문 정진과 심신 수양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염치를 알고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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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리더 – 역사 속에서 리더를 만나다
자의 도(道)를 실천하라. 매미는 자기가 노력하지 않은 결과물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 남의 것을 탐내
지 않고 이슬과 수액만 먹으면서 본분과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는데, 이것이 선비가 배워야 할 정신이
며 군자가 가야 할 길이다. 셋째, 무소유(無所有) 정신으로 자기를 절제하라. 집이 없는 매미처럼 왕은
청빈한 생각을 가져야 하며 백성이 가진 것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넷째,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닮아라. 매미 얼굴은 정면에서 보면 역삼각형인데, 여기에 갓을 씌우면
글월 문(文)자가 된다. 이것은 영락없이 갓을 쓴 선비의 모습이다. 얼굴 모양 자체가 글공부(文)를 상
징하는 매미를 통해서 임금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않도록 스스로 독려한 것이다.
다섯째, 인내와 수양을 배워라. 매미는 지상에서 단 7일을 울다가 사라지기 위해 7년을 땅 속에서 애
벌레로 지낸다. 길고 긴 인내와 시련이 강인한 매미를 만드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사람
이 되기 위해서는 인내와 수련이 필요하고 만인의 지존인 왕이라고 해도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
사람관리 리더십 - 공자의 정명사상(正名思想)과 삼적(三適)의 도(道)
공자의 사상 중에 리더가 제대로 알고 실천해야 할 중요한 기본이 정명사상(正名思想)이다. 공자는 정
치의 요체를 ‘정(正)’이라 보았다. 한번은 노나라 제후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백성들이 잘 복종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에 공자가 대답하길,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여 사곡(거짓되고 표리부동
한 사람)한 사람들 위에 배치하면 백성이 저절로 복종하고, 사곡한 사람을 뽑아서 정직한 사람 위에
놓으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는다. 정직과 사곡을 구분하여 실행하는 것이 곧 지혜이며 정치의 요체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리더는 사람을 보는 안목을 가지고 적재(適材)를 적시(適時)에 적소
(適所)에 배치하는, 이른바 ‘삼적(三適)’의 ‘도(道)’를 실천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라는 것이다.
한편 공자는 제나라를 다스리던 제후 경공과 재상 안영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된다. 먼저 경공이 공자
에게 “선생, 정치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공자가 “예. 천하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
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경공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선생. 천하라는 말은 바로 이해가 되는데,
아름답다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하지 않습니까? 어떤 상태가 아름다운 상태입니까?”라고 재차
물었다. 그러자 공자가 웃으며 말하길, “예. 아름다운 상태란 자기 자리에서 자기다움에 충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 자리에서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의 자리에서 자식다워야 하며,
임금은 임금의 자리에서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의 자리에서 신하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 ‘다움’에 충실할 때 천하는 아름다워지고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가 유래하게 된다. 공자의 말은 임금과 신하
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답게 행동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뜻이다. 신하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다움에
충실하게 하려면 임금은 먼저 ‘곁에 둬야 할 사람과 두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분해서 각자 제자리에
두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정치하는 사람은 자연히 스스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정자정야
(政者正也)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공자는 이 정명사상과 더불어 ‘잘 다스려지는 나라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백성이 정치에 대해 논하
지 않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리더가 인(仁)과 예(禮)로써 모범을 보이면 백성 또한 스스로 예를 지켜
범법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무치(無治)의 도(道)’이고, 이것이야말로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다스
림이라는 리더십의 이상향을 제시했다. 기법은 변해도 진리는 영원한 것처럼 몇 백 년 몇 천 년이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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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리더 – 역사 속에서 리더를 만나다
른 먼 훗날, 그때도 필시 우리 후손들은 사람을 이끌고 조직을 관리하는 리더의 역할에 대해 공부할
것이고, 그 리더십 교육에서도 앞서 말한 이 ‘삼적의 도’와 ‘정명사상’은 똑같이 강조될 것이다.
성군(聖君) 리더십 - 세종(世宗)과 한글창제
동서고금 역사를 통틀어 인(仁)과 덕(德)으로 나라의 골격을 세우고, 문(文)과 예(禮)로써 국정의 표준
을 만든 왕을 꼽으라면 단연 세종대왕이 독보적이라 할 것이다. 세종의 가장 큰 업적은 훈민정음 창제
를 필두로 한 과학기술의 발전이고, 리더로서 세종의 가장 큰 덕목은 인재 등용과 애민정신이라 할 수
있는데, 세종대왕이 새로운 문자를 만들게 된 이유는 글을 모르는 평민들이 탐관오리와 양반들의 계략
에 의해 지속적으로 노비로 전락하니 한시바삐 이를 막을 제도적 보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리더로서 세종의 탁월한 능력 중 하나가 신하의 마음을 사로잡는 감성이었다. 어쩌면 세종의
이 감성 리더십 때문에 서른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황희나 맹사성 같은 노신들을 훌륭하게 이끌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세종 곁에는 뛰어난 신하들이 많았는데, 그 중 예학에서는 이조판서 허조
를 따를 자가 없었다. 세종이 스물여덟 살 되던 해인 1424년 종묘에서 신년 대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때 허조는 신(神)께 술잔을 올리는 세종 옆에서 술을 따르며 잔을 건네주는 찬작관 역할을 맡게 되
었다. 당시 허조는 환갑의 나이에 몸이 불편한 상태였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한창 신관례와 천조례
가 진행되고 있을 때 술을 따라 잔을 세종에게 건네려던 허조가 그만 정전 계단에서 미끄러져 굴러 떨
어졌고,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술잔도 돌바닥에 나뒹구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를 올리던 문무백관들 모두 아연실색해서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고 있을 때 세종이 침착하게 “이
판이 다치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허조의 몸을 걱정하며 물었다. 그러고는 이어서 “계단이 좁아서 이
런 불상사가 일어났다. 계단을 넓혀 차후에는 또 다시 몸을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명했고,
그 자리에 있던 문무백관들은 젊은 성군의 마음 씀씀이에 가슴 깊이 감동했다고 한다.
혁신(革新) 리더십 - 정조(正祖)와 금난전권(禁亂廛權) 철폐
창덕궁에 정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 앞에 존덕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예로부터 은행나무 주
변에 있는 정자는 학문하는 장소의 대명사로 알려져 왔다. 공자가 제자들을 은행나무 아래에서 가르쳐
행단이라는 말이 생겨났듯이, 정조도 은행나무를 심고 존덕정을 수리하면서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
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제목의 글을 짓고 그 내용을 현판에 새기게 했다. 이 글에서 평소 정조가 가지고
있는 인재관을 엿볼 수 있는데, 정조는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특징과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특성과 기량에 맞춰 너그러운 마음으로 적절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적어놓았다.
정조의 덕은 따뜻한 애민사상에도 묻어난다. 옛날에는 임금의 행차 때 길을 가로막고 억울함을 호소하
는 백성들이 간혹 있었는데, 이것을 격쟁이라 했다. 원칙적으로 이것은 위법이고 격쟁을 한 백성은 엄
벌에 처해지지만, 정조는 오히려 이를 활용해 백성들의 소리를 직접 듣고자 했고, 나아가 백성들의 격
쟁 내용과 건수를 왜곡하는 관리들을 엄벌에 처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백성들과 소통하고자 했다.
한편 당시에는 금난전권이라하여 한양 중심가 육의전과 시전에 점포를 가진 상인들만 장사를 할 수 있
고, 난전에서의 장사는 엄격히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 이 금난전권 때문에 지방의 상인들이 한양으로
특산물을 가져와 팔 때도 반드시 시전 상인들에게만 팔아야 했고, 그 반대로 한양에서 물건을 떼서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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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리더 – 역사 속에서 리더를 만나다
때도 시전 상인들을 통해서만 구입해야 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필요한 주요 물품을 육의전이나 시전
상인들을 통해 구입했고, 시전 상인들도 세금 납부를 통해 국가 재정에 기여하는 바가 있었기에 난전
이 난립하면 시전이 위축된다는 시전 상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난전을 금지했다. 하지만 이 같은 금
난전권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은 어려움이 극에 달했고 시전 상인들의 횡포는 갈수록 심해졌다. 정조는
이 같은 백성 수탈의 악순환을 끊어내고자 시전 상인들과 노론세력들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1791
년 ‘통공발매 정책’을 시행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이 가진 금난전권의 특권을 철폐함과 동시에
육의전에서 취급하던 상품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상품들의 자유로운 판매를 허가하였다.
한편 정조가 백성을 위해 과감한 혁신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곁에서 보필한 사람이 채제공이다. 채제
공은 영조와 정조 2대를 이어 보필한 명신으로 수원화성 축조에서부터 금난전권 철폐에 이르기까지 대
부분의 개혁 정책이 그를 통해 실시될 만큼 정조가 신임하는 최측근 신료였다. 정조와 채제공의 이러
한 혁신과 평등사상은 당시 기득권 세력인 노론들의 엄청난 반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정조
는 김홍도의 그림인 〈군선도〉를 보며 개혁 의지를 다지곤 했다. 군선도는 나귀를 타고 곤륜산에 사는
서왕모의 생일 잔치에 놀러가는 열아홉 명의 신선들을 그린 그림이다.
참고로 곤륜산은 중국 쓰촨성 끝에 위치해 있으며 도교 사상의 성지인 산이다. 당시 유교사상은 백성
들을 인(人)과 민(民) 두 종류로 나눠 인(人, 양반/지배층)이 민(民, 평민/피지배층)을 부리는 이분법 계
급 사상이었던 반면, 도교는 계급과 신분을 부정하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무소유 평등
사상을 주장했다. 따라서 조선의 양반 지배 계층은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도교를 싫어하고 천시했다.
전략(戰略) 리더십 - 이순신(李舜臣)과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조직에서 최고 리더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역량은 바로 ‘전략 설정과 의사 결정’이다. 조직에서 최
고의 리더가 갖춰야 할 첫 번째 역량인 ‘탁월한 전략 설정과 의사 결정’을 이해함에 있어 1592년 7월
8일 벌어졌던 ‘한산도대첩’보다 좋은 교재는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음력 4월 13일,
당시 이순신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해 있었다. 전란이 발생하자 경상좌수사인 박홍은 곧바로 달
아났고 경상우수사인 원균은 대패를 거듭하니, 그야말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상황에 처하게 되
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전열을 정비해 옥포, 합포, 적진포, 당포, 율포 등에서 왜 수군을 맞아 연전연
승을 거두며 전기점을 마련해 나갔다. 그러다 7월 8일, 그야말로 전란의 분위기를 바꿔놓을 수 있는
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 4대 해전 중에 하나인 한산도대첩이다.
한산도대첩의 3대 핵심은 ‘거북선’과 ‘학익진’, 그리고 ‘화포 공격’이다. 학익진은 아군의 배를 학의 날
개 모양으로 배치해 적선을 반원 형태로 둥글게 포위해서 공격하는 진법으로, 훗날 청ㆍ일전쟁과 러ㆍ
일전쟁을 치르는 일본 해군의 진법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참고로 당시 조선 수군의 배는 판옥선
이라 불렀는데, 밑바닥이 평평하여 제자리 선회가 가능한 평저선이었다. 평저선은 속도가 느리고 노를
젓는 격군들이 많이 힘들어하는 단점이 있었으나, 선체가 단단하여 해전에서 화포를 쏴도 그 반동을
견뎌낼 내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 제자리 선회가 가능했기 때문에 한쪽 측면에서 화포 사격을 하다
가 재장전을 해야 될 때 배를 180도 돌려 반대쪽에서 곧바로 사격이 가능한 구조를 가졌다.
당시 왜선은 아다케부네와 세카부네라는 두 종류의 전선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두 가지 모두 선체가
가볍고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이었다. 첨저선은 속도는 빠르나 제자리 선회가 안 될 뿐만 아니라 화포
의 반동을 견딜 수 없는 구조였다. 결정적으로 이순신은 결전지를 견내량으로 정했다. 물살이 급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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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리더 – 역사 속에서 리더를 만나다
견내량에서 이순신은 학익진을 펼치고 기다리다가 유인선에 현혹되어 좁은 견내량을 빠져나오는 적선
에 화포 공격을 퍼부어 왜군들을 전멸시켰다. 왜장은 조선 수군이 화포 공격 후 재장전하는 시간을 틈
타 도선을 하고 갑판 위에서 백병전을 벌일 생각이었으나, 조선 수군은 제자리에서 배를 회전시켜 공
격함으로써 재장전으로 인한 시간 지체를 최소화시켰다. 결국 좁은 해협에 갇힌 적군은 달리 도망갈
길이 없었고, 특히 첨저선인 왜선은 제자리 선회가 어려워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거북선이 투입되어 포를 쏘고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니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달아나기에 바
빴다. 참고로 거북선이 돌격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거북선의 격군들이 빠른 속도로 노를 저어
야 했다. 또 결정적으로 거북선은 침몰하면 그 안에 탑승한 수군은 누구도 살아나오기 힘든 구조였다.
결국 노를 젓는 격군이 감수해야 할 최악의 조건들을 모두 갖춘 배가 거북선인 것이다. 따라서 거북선
은 수군들 사이에서 기피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 거북선의 격군을 죄수 중에서 차출하기도 했고,
전란 중에는 노비나 의병들로 구성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동기부여될 여지가 없는 이런 조직원들과 함
께하며 23전 23승 신화를 일궈낸 이순신의 가장 큰 역량은 조직원들이 무조건 믿고 따를 수 있는 탁
월한 전략 설정과 그에 따른 정확한 의사 결정이라 하겠다.
조직관리 리더십 - 제갈량(諸葛亮)과 한신(韓信)
리더가 조직을 효과적으로 이끌어가고 조직원을 통솔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매력과 솔선수범하는 마
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가 조직을 통솔할 수 있는 자기만의 파워와
권한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권한은 조직에서 부여하는 직책권이지만 파워는 스스로 키워
야만 하는 리더로서의 영향력을 뜻한다. 현대 경영학의 조직관리론에서도 리더가 우선적으로 파워와
권한을 갖춘 다음, 조직을 체계화시켜 나가면서 최종적으로 조직원들의 존경심을 확보하는 것이 조직
관리 리더십의 정상적인 프로세스라고 강조한다. 이런 조직관리 프로세스에 입각해서 효과적인 리더십
을 발휘했던 역사적 인물들이 더러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제갈량과 한신이다.
서기 207년 봄, 유비는 삼고초려 끝에 제갈량을 군사로 모셔온다. 제갈량은 처음에는 이를 완강히 거
절하다 결국 조건을 내걸고 유비를 따라 나서게 되는데, 그 조건은 다름 아닌 의식을 거행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의식이란 삼군을 도열시킨 자리에서 큰 장단을 마련한 뒤, 그 위에서 유비가 제갈량 자
신에게 인장과 보검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하면서 군최고통수권자로서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제갈량
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조직을 운영할 권한과 파워가 없이는 관우와 장비를 비롯
한 조직 내의 장졸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이러한 사례는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항우를 물리친 대장군 한신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한신의 일화를 잘 아는 제갈량이 유비의 군사(軍師)가 되어 가장 먼저 착수한 일도 바로 한
신과 같이 군령을 개편하는 것이었다. 당시 유비의 군대는 오합지졸과 같아서 군령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부임 후 몇 달 동안 제갈량은 군사훈련과 군령 개편 작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모든 군사들에
게 금주령을 내리고 혹독한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군령을 만들기를 수 개월, 마침내 군령이 완성되던
날 제갈량은 전군 회식을 실시했다. 군사들에게 마음껏 술을 마시게 한 이튿날 새벽, 예정에도 없던
비상 점호를 내렸다. 군사들 모두 술이 덜 깨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삼삼오오로 집합했지만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장수가 한 명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제갈량은 곁에 있던 부관에게 비상
점호에 참석하지 않은 장수는 어떤 형벌인지 이제 완성된 군령을 살펴보라고 명령했다. 부관이 참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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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리더 – 역사 속에서 리더를 만나다
이라고 대답하자 제갈량은 그 자리에서 칼을 빼들고 목을 치려고 했다. 이에 휘하 장수들이 제갈량을
말리면서 급히 유비에게 전령을 보내 직접 이 상황을 수습토록 부탁했다. 유비 역시 잠이 덜 깬 상황
에서 전령에게 형 집행을 보류하라고 명령한 뒤 옷을 챙겨 입고 훈련장으로 달려 나왔다. 하지만 유비
의 명을 받은 전령이 채 당도하기도 전에 그 장수는 이미 목이 떨어진 후였다. 대장군 한신이 은개의
참수를 통해서 조직의 체계를 세웠듯이, 제갈량 역시 군령의 준엄한 원칙을 활용해 자신의 파워를 천
명하고 조직의 체계화를 꾀했던 것이다.
한편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되고 훌륭한 리더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간’이 필요하다. 리더
스스로 제아무리 많은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조직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십을 ‘농사’에 자주 비유한다. 농부가 제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수확을 하
려면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어야 한다. 봄에 씨를 뿌리고 한여름 뙤약볕과 태풍을 겪은 후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수확을 하는 농사처럼, 탁월한 조직관리 리더가 되려면 조직원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
다. 그리고 그 ‘마음’은 가장 마지막 단계인 ‘가을’에 얻어야 한다.
인재중용 리더십 - 조조(曹操)
예로부터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시대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를
잘 실천해서 역사의 주인공이 된 사람은 흔치 않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대
표적인 것은 리더로서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었거나, 그들을 다룰 능력과 식견이 부족했거나, 리더로
서 그들을 담을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훌륭한 리더가 되는 방법은 누구나 알고 있
지만 정작 그런 리더가 되기 위해 갖추고 실행해야 할 덕목은 어렵고 험난한 것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리더의 자질론에 대해 ‘군주라고 해서 반드시 여러 가지 좋은 자질을 갖추고 있
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갖추고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게 만들 필요는 있다. 나아가 실제
로 갖추고 있으면 짐스럽기만 한데 오히려 갖추고 있는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편이 더 간편하고 유익
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마키아벨리의 주장과 같이 역사를 통틀어 부하들로 하여금 그런 자질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생각케 만든 최고의 리더를 꼽자면 조조가 단연 으뜸일 것이다.
조조는 사소한 일에는 구애받지 않는 대범한 인물이었다. 예를 들면, 관도전투에서 원소를 물리친 후
원소 진영을 시찰하던 중 그의 부하와 원소가 내통한 편지가 발견되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통한 자들을 색출해서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조조는 “원소의 세력이 워낙 강해서 사실 나도 두려웠는
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 이제 와서 따져봐야 피바람만 몰아친다. 지난 일은 다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라고 말하며 그 편지를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뛰어난 문학적 소양과 원대한 포부를 가진 조조였지만 리더로서 그의 역량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인재를 등용하고 이를 활용하는 용인술일 것이다. 그는 재능 있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등용하고
상벌을 분명하게 하여 동기부여를 극대화시켰기에 사방에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
는 항상 뛰어난 인재들로 넘쳐났으며 적군의 명장과 책사였음에도 조조에게 투항해 온 사람도 적지 않
았다. 조조의 책사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순욱은 원래 원소 밑에서 일했지만, 그의 안목과 그릇에 실망
해 조조에게로 넘어왔다. 이때 조조는 순욱이 자신에게 찾아오자 맨발로 뛰어나가면서 “오, 나의 장자
방(장량)이 이제야 나를 찾아왔구려”라면서 크나큰 기쁨을 나타내기도 했다. 또한 ‘거짓편지 사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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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리더 – 역사 속에서 리더를 만나다
유비 밑에 있던 서서를 조조에게로 불러들인 정욱도 순욱이 추천해서 조조에게 합류한 인물이었으며,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참패한 후 피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했던 곽가 역시 같은 고향 사람인 정욱이 추천
한 인물이었다. 순욱보다 나이는 여섯 살 많지만 순욱의 조카뻘에 해당하는 순유 역시 이런 식으로 조
조 곁으로 모인 인재들이었다. 여하튼 조조의 사람 욕심은 끝이 없었다.
아무튼 후한 말 약 100년 간 지속되었던 풍운의 삼국시대에 수많은 인물들이 명멸해 갔지만, 그 시대
를 함께 살았던 인물들 중에 조조만큼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드물다. 나아가 중국 역
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분명한 목표의식을 기반으로 한 호방함과 인재 양성에 대한 탁월한 식견은 그
누구도 조조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재를 바로 볼 줄 알고, 적소에 배치할
줄 알며, 작은 허물을 덮어주고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능력을 가졌던 리더, 그래서 부하들로 하여금 조
직을 향한 끝없는 충성심을 유발시켰던 리더에 대해 논한다면 단연 조조가 으뜸이라 하겠다.
이루었으면 떠나라 - 와신상담(臥薪嘗膽)과 범려(范蠡)
진나라 소왕을 모셨던 명재상 채택은 ‘물로 거울을 삼는 자는 자신의 얼굴을 알고, 사람으로 거울을 삼
는 자는 자신의 길흉을 안다’고 하며 ‘성공한 곳에서는 오래 머물러 있지 말라’고 했다. 이처럼 물러날
때를 알고 스스로 내려오면 하산(下山)이라 하고, 때를 놓쳐 남의 손에 끌려 내려오면 추락(墜落)이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평범한 진리가 모두 자신만은 비켜갈 것이라 착각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토사구팽을 당했고 이는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소하, 장량, 병길에서
범려에 이르기까지 후세에 이름을 남긴 2인자들은 주군으로 하여금 대망을 이루게 하고 스스로 물러나
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지혜를 발휘해서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춘추시대 말기에 중국 대륙 남쪽에서 회계산을 사이에 두고 패권을 다툰 앙숙 두 나라가 있었으니 오
(吳)와 월(越)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두 앙숙으로부터 오월동주(吳越同舟), 동병상련(同病相憐), 기
사회생(起死回生), 그리고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들까지 생겨났으니 그 살벌한 분위기를
지금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두 나라의 긴 싸움에는 오자서와 범려라는 뛰어난 두 사람의 책사가
함께했다. 오자서는 오나라의 책사이고 범려는 월나라의 책사이다.
원래 오자서는 초나라 태생이었으나 오나라로 망명한 사람이다. 초나라 27대 평왕은 무능하고 욕심이
많아 국운이 기울어 가는 형국이었는데, 그는 특히 여자에 대한 욕심이 많아 자신의 아들의 부인, 즉
태자비를 진나라에서 맞아들이려다가 그 미색에 반해 도중에 자신이 가로채 버렸다. 이 사건으로 아들
태자와 거리가 생겼고 또한 직언하는 신하 오사와도 갈등을 빚게 된다. 그러던 중 오사의 정적인 비무
기의 모함에 의해 오사는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 오자서는 천신만고 끝에 오나라로 탈출했다.
당시 오나라는 비록 영토는 작았지만 그 뜻은 원대해서 강국인 초나라를 만만치 않게 괴롭히고 있었다.
오자서는 중용되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능력을 발휘할 자신이 있었지만, 쉽사리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렵사리 오나라의 왕자 광을 알게 되었다. 왕자 광은 오나라 왕통의 적자였으나 광의 아버
지 제번은 막내아들 계찰에게 양위하고 싶어 했다. 형제간에 피바람이 불었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광
이 보위에 오르게 되는데,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오자서였다. 광은 왕이 된 후 오자서를
행인(외무대신)으로 삼고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우리가 알고 있
는 오왕 합려가 바로 이 사람이다. 오왕 합려가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꺾어야 할 상대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남쪽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월나라였다. 기원전 496년, 월왕 윤상이 노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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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리더 – 역사 속에서 리더를 만나다
죽고 그 아들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구천이다. 평소 구천의 야심과 패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합려는 국상 중인 월나라를 공격했다. 원래 국상을 겪는 나라에는 3년간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는데 합려가 이를 무시하고 기습공격을 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전투에서 합려
는 독화살을 맞고 죽게 된다. 합려는 아들 부차에게 구천을 죽이고 반드시 원수를 갚으라는 유언을 남
기고 죽는다. 부차는 3년 내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하며 칼을 갈았다.
군비를 확충하고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복수의 일념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또한 그는 자
신의 맹세를 잊지 않기 위해 장작과 짚단 위에 누워 잠을 자며 복수를 다짐했는데 여기서 ‘와신(臥薪)’
이란 말이 생겨났다. 이렇게 부차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이 소문을 듣고 불안해하던 월왕 구천
이 오나라를 먼저 공격하며 전쟁을 일으켜 버렸다. 구천의 책사인 범려가 무리한 공격이라 말렸지만
이를 뿌리치고 먼저 공격해 버린 것이다. 결국 구천은 범려의 우려대로 참패했고 회계산으로 도망갔다.
이에 부차가 회계산을 포위하니 구천은 피할 곳이 없었고 결국 절망감에 자결하려 했다.
그러자 범려가 구천을 말리며 항복해서 뒷날을 도모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결국 구천은 부차의 신하가
되고 자신의 왕비까지 첩으로 주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 과정에서 오자서는 구천을 죽여 후환을 없
애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평소 은인 오자서를 질투하던 백비가 범려의 뇌물을 받고 부차에게 구천을 살
려줄 것을 간언했고, 결국 부차는 백비의 의견대로 구천을 풀어주고 화의를 맺었다. 구천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죽었다 살아난 셈이었는데, 여기에서 ‘기사회생(起死回生)’이란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이후 구천은 포로의 신분으로 피눈물을 머금고 월나라로 돌아왔다. 왕비마저 부차에게 첩으로 주었으
니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이었다. 절치부심(切齒腐心) 구천은 복수를 결심했다. 그는 원한을 잊지
않기 위해 침소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혀로 핥으며 17년간을 스스로에게 다짐
했다. 바야흐로 이제 ‘상담(嘗膽)’의 세월이 시작된 것인데, 와신은 부차가 했던 것이고 상담은 구천이
한 것으로 이 둘을 합쳐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 한다.
상담의 세월동안 구천은 흰 옷만 입은 채 몸을 낮추고 스스로 밭을 갈며 훗날을 도모했고, 책사 범려
는 자청해서 오나라로 끌려가 볼모가 되어 오나라 실정을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오자서가 이런
구천과 범려를 제거해야 한다고 수없이 건의했으나 끝내 부차는 그의 충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구천과 범려는 오나라의 부차를 쓰러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계책을 꾸몄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
인 것이 미녀를 선발해서 부차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표로 뽑힌 미녀가 서시와 정단이었다.
결국 오나라는 내리막길로 굴러갔고 직언을 계속하던 오자서는 자신이 구해 준 백비의 모함으로 부차
에게 자결을 명받았다. 오자서는 죽기 직전 가족들에게 “내가 죽거든 두 눈을 파내서 도성 문 위에 걸
어 두어라. 조만간 월나라가 쳐들어와 부차를 죽이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반드시 보겠다”는 유언을 남
기고 자결했다. 이렇게 오자서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구천은 오나라로 쳐들어왔다. 서시에 빠져 나라
를 망친 부차는 이미 막을 힘이 없었고, 구천에게 쫓기던 그는 고소산에서 포위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부차가 구천에게 항복을 청했다. 17년 전 회계산에서 구천이 겪었던 치욕을 이번에는 부차가
되풀이하게 된 것이었다. 구천은 부차의 항복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으나 범려의 간언에 따라 부차를
몰아부쳤다. 결국 부차는 죽어서도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며 자기가 죽거든 얼굴을 흰 천으로 가리라
는 유언을 남기고 목을 찔러 자결했다. 결국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무너뜨리면서 와신상담 복수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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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범려가 먼 나라로 떠나겠다고 구천에게 사직서를 올렸다. 깜짝
놀란 구천은 범려를 말렸으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끝내 사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범려는
가족들과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한편 도성을 떠나던 날 밤, 범려는 자기의 오랜 친구이자 대부인 문종
을 찾아가 자신의 뜻을 전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다 잡히면 활은 쓸모가 없어지고, 숲속의 토끼가 다
잡히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게 되는 것이 이치네. 그대도 나와 같이 월나라를 떠나는 것이 좋지 않겠는
가?” 말 그대로 토사구팽(兎死拘烹)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범려는 그날 밤 조용히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제나라에 정착해서 장사로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문종은 범려가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역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구천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오자서와 범려는 뛰어난 책사이자 2인자였지만 서로의 운명은 엇갈렸다. 오자서는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를 왕으로 만들어 준 공신이었으나 충언을 듣지 않는 주군의 우매함으로 비통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고, 범려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한 주군과 와신상담한 끝에 영화와 명예를 회복한 후 스스로 물
러났다. 오자서도 뛰어난 책사였지만 역사가 범려를 더 크게 기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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