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는 슬로건으로 대변되는 정치적 소비자 운동을 중요한 정치적
커뮤니케이션 연구 의제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유치원과 가습기, 어용 언론, 촛불집회 등
전형적이지 않은 정치적 소비자 운동의 연구 의제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과도한 매스미디어 편향성
을 넘어서 정치적 소비자 운동의 심층적 인식과 연구 지평의 확대에 기여하고자 한다. 또 쇠퇴해
가는 시민운동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이른바 ‘포용적 개인주의’와 ‘약한 연결의 힘’을 수용할 필
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 Short Summary
지금 우리는 기존 정치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변
화의 한복판에 ‘정치적 소비자 운동(political consumerism)’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
소비자 운동은 상품과 서비스에 초점을 두고 소비자들의 피해를 알리고 해결하는 데 주력하는 반면,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상품의 생산 과정에서부터 기업ㆍ경영자의 행태에 이르기까지 매우 포괄적인 범
주에 걸쳐 이념적ㆍ정치적ㆍ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정치화’한다.
한편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미국과 유럽에서 크게 발달되어 있다. 참고로 영국의 정치적 소비자 운동
가들은 아예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는 슬로건마저 들고 나왔는데, 이는 정치가 불신과 혐오의 대
상이 된 가운데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
에서는 일상적 삶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아직 미약한 편이지만, 젊은 층과 여성을 중
심으로 이전에 비해 크게 늘고 있으며 앞으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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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참고로 협의의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보이콧팅이나 바이콧팅이 시장에 미칠 영향을 중시하지만, 광의
의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그런 고려 없이 개인적인 신념을 우선시하는 윤리적 소비, 국제관계에서 제3
세계 생산자에게 정당한 이득을 주어야 한다는 공정 무역, 제3세계 공장에서 저질러지는 노동 착취에
반대하는 운동, 관광지의 주민들과 생태계에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 관광까지 포함한다.
한편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 들어와 있지만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우파는 시장질서의 교란과 시장에 대한 정치적 규제의 가능성을 이유로 비판하고, 좌파
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으로 정치를 약화시키는 반(反)정치 행위라는 이유로 비판한다. 그래서 기존 이
분법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운동이 좌에 속하는지 우에 속하는지 궁금해 하지만, 이 운동은 반자본주
의 운동도 아니고 신자유주의 운동도 아니다. 현 시장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이긴 하지만, 자본주의를
다른 걸로 대체하는 혁명보다는 개혁을 원하는 쪽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는 슬로건으로 대변되는 정치적 소비자 운동을 중요한 정치적 커뮤
니케이션 연구 의제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유치원과 가습기, 어용 언론, 촛불집회 등 전형적이
지 않는 정치적 소비자 운동의 연구 의제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과도한 매스미디어 편향성을 넘어서 정
치적 소비자 운동의 심층적 인식과 연구 지평의 확대에 기여하고자 한다. 또 쇠퇴해가는 시민운동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포용적 개인주의’와 ‘약한 연결의 힘’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 차례
머리말 -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나?”
제1장 왜 1,528명이 죽는 동안 정부와 언론은 방관했는가?
‘사립유치원 비리 사건’과 ‘정치하는 엄마들’ / ‘한유총’을 두려워한 정치인들과 진보 교육감들 / 정부의
‘어쩌다 공공기관’ 정책의 한계 / ‘잔인한 국가’의 근본을 바꿀 때까지 / ‘세월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
건이었음에도 / “가습기 살균제가 죽인 딸…저는 ‘4등급’ 아버지입니다” /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재난’
이 아니라 ‘악행’이다 / 왜 언론은 ‘가습기 살인’을 외면했는가? / ‘하루살이 저널리즘’과 ‘먹튀 저널리
즘’을 넘어서 / 1,528명을 ‘통계’로만 여기는 냉담과 결별해야 한다
제2장 왜 게임업계는 페미니즘을 탄압하는가?
“소녀들은 왕자님이 필요 없다”가 그렇게 큰 죄인가? / “게임계에 만연한 여성 혐오 문화”인가? / “게임
업계가 ‘남초 시장’이라는 건 착시 현상” / “매출 떨어지면 네가 책임질래?” /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약
자를 탄압해도 되는가? / ‘영혼 보내기’라는 페미니즘 바이콧 운동 / “광고는 페미니즘을 싣고 달린다” /
1990년대생들의 ‘반(反)페미니즘’을 위한 변명
제3장 왜 진보 언론은 자주 ‘불매 위협’에 시달리는가?
진보 언론을 위협한 ‘『시사IN』구독 해지 사태’ / ‘어용 지식인’과 ‘어용 시민’의 탄생 / 순식간에 2,000
명의 독자를 잃은『한겨레21』/ 걸핏하면 ‘ 《한겨레》절독’을 부르짖는 ‘어용 시민’ / 《뉴스타파》후
원자 3,000명이 사라진 ‘조국 코미디’ / “한경오는 오히려 지나치게 친(親)민주당이어서 문제다” / ‘매개
조직’의 허약이 키운 ‘정치 팬덤’ / “진보 신문은 보는 것이 아니고 봐주는 것이다” / ‘역사의 소급’과 ‘희
생양 만들기’ / ‘어용 저널리즘’은 어용 세력에도 독이다 / 유시민은 1984년 9월의 세상에 갇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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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문빠’는 민주주의와 진보적 개혁의 소중한 자산이다
제4장 왜 정치인들이 시민들보다 흥분하는가?
프란츠 파농과 아이리스 매리언 영 / 일본 정부가 촉발시킨 일본 상품 불매 운동 / ‘민주연구원 보고서
파동’과 정치권의 ‘친일파 논쟁’ / ‘냉정’이라는 말이 ‘보수 용어’인가? / ‘경제판 임진왜란론’에 대한 시민
들의 반발 / 일본 상품 불매운동의 그늘 / “한일 관계는 국내 정치로 환원되고 만다” / 왜 ‘보수-진보
편 가르기’를 해야 하는가? / ‘지피지기’하는 평소 실력을 키우자
제5장 왜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시민단체와 언론개혁 후원이 줄어들었을까?
“그 많던 시민은 다 어디로 갔을까?” / “1% 대 99%가 아니라 50%가 50%를 착취하는 사회” / 지긋지
긋한 ‘이분법 구도’를 넘어서 / “‘박근혜 퇴진’ 목표를 제외하면 모두 달랐다” / “신성한 촛불집회를 감히
소비자운동으로 보다니!” / ‘정치의 시장화’와 ‘시민의 소비자화’ / ‘홀로 함께’ 방식의 대규모 집단행동도
가능하다 / 문재인은 최소한의 ‘상도덕’이나마 지켰는가?
제6장 왜 ‘슈퍼마켓에서의 정치’가 유행인가?
‘폐병’이라는 낙인을 넘어선 ‘소비’의 진화 과정 / “미국은 소비자 불매운동으로 태어난 나라” / 미국 민
권법을 만든 ‘버스 보이콧 운동’ / 나이키의 ‘착취 공장 사건’ / ‘월마트 민주주의’ 딜레마 / 소비자의 사
랑을 받는 ‘맥도날드 포퓰리즘’ / ‘시민 소비자’의 권리와 책임 / ‘자기이익 추구’를 부정하는 정 치인들
의 거짓말 / ‘개인화된 정치’와 ‘라이프스타일 정치’의 등장 / ‘탈물질주의 가치’의 확산 /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시대의 ‘하부정치’
제7장 왜 ‘시민 소비자’를 불편하게 생각하는가?
“탈물질주의는 가난을 비껴간 시민들의 신념” / “소비자 행동주의는 미디어 이벤트에 불과하다” / “소비
자의 자유는 동물원의 하마와 같은 자유” / ‘구별 짓기’와 ‘과시적 환경보호’ /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결
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는가? / 소비문화에 반대하는 ‘문화 방해’ / 왜 비쩍 마른 모델 사진 위에 해골을
그려 넣는가? / “국가는 몰락했고 기업이 새로운 정보가 되었다”
제8장 왜 소비자의 아버지는 ‘윤리’보다는 ‘갑질’인가?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 실패로 돌아간 조선물산장려운동 / 민족주의 열기에 편승한
‘애국 마케팅’ / 노무현,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 기회만 있으면 ‘갑질’하려는 사람들 / “커피 나오
셨습니다”가 말해주는 감정노등의 극단화 / 일상화된 ‘약자의 약자 괴롭히기’ / 한국 소비자 운동의 현
실과 한계 / ‘정치적 소비자 운동’ 지평의 확대를 위하여
맺는말 - “끈적이는 관계는 싫어요!”
‘자본주의 진화론’과 ‘정치적 소비자 운동’ / 왜 연구자들은 ‘선거’에만 집중하는가? / “최선은 차선의 적
이 될 수 있다” / 기존 공동체를 대체하는 ‘소비 공동체’ / ‘따로 그러나 같이’ 가자 / ‘코로나19 사태’와
‘재난의 축복’ / ‘분열과 증오의 정치’를 넘어서
주
참고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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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머리말 -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나?” -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의 항변
2010년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즉석 피자가 소비자들의 큰 인기를 얻자,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과 네
티즌 사이의 설전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한 네티즌이 “신세계는 소상점들 죽이는 소형 상점 공략
을 포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자영업자들 피 말리는 치졸한 짓입니다”라는 글을 썼고, 이에 정용진은 ‘소
비자의 선택’을 강조하면서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나?”라고 대꾸했다. 정용진의 반론은 그간 오래된
상식이었다. 소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지 소비를 이념적으로 한다는 건 낯선 일이었다. 하
지만 날이 갈수록 이념적ㆍ정치적ㆍ윤리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소비를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기존 정치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성급한 질문일망정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변화의 한복판에 ‘정치적 소비자 운동(political consumerism)’이 자리 잡고 있
다는 건 분명하다.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소비 행위를 상품 자체의 문제를 떠나 소비자의 이념적ㆍ정
치적ㆍ윤리적 신념과 결부시켜 특정 상품의 소비를 거부하는 보이콧팅(boycotting), 지지하는 바이콧팅
(buycotting) 등의 정치적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소비자 운동과 구별된다. 일반적 소비자 운
동은 상품과 서비스에 초점을 두고 소비자들의 피해를 알리고 해결하는 데 주력하는 반면, 정치적 소
비자 운동은 상품의 생산 과정에서부터 기업ㆍ경영자의 행태에 이르기까지 매우 포괄적인 범주에 걸쳐
이념적ㆍ정치적ㆍ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정치화’한다.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미국과 유럽에서 크게 발달되어 있다. 영국의 정치적 소비자 운동가들은 아예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는 슬로건마저 들고 나왔다. 정치가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된 가운데 정치
적 소비자 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일상적 삶에
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아직 미약한 편이지만, 젊은 층과 여성을 중심으로 이전에 비해
크게 늘고 있으며 앞으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소비자 운동의 발전을 위해선 넘어야 할 큰 벽이 있다. 그 벽은 바로 “소비자는 왕이다”는 근
거 없는 미신이다. 중요한 건 이 미신적 슬로건이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사람들이 약자를 대상
으로 ‘갑질’을 하는 심리적 근거로 활용되어왔다는 점이다. 소비자에겐 권리만 있는 게 아니라 의무도
있다는 의식이 널리 확산될 때에 비로소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나는 그
어떤 문제와 한계에도 한국에서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왜 1,528명이 죽는 동안 정부와 언론은 방관했는가? - 유치원과 가습기
‘사립유치원 비리 사건’과 ‘정치하는 엄마들’
2018년 가을 전국의 학부모들이 분노한 이른바 ‘사립유치원 비리 사건’이 일어났다. 10월 5일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정책 토론회, 12일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25일 유치원 공공성 강화를 위한 정부 종
합 대책 발표에 이르기까지의 20일간 이 문제는 우리 사회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정부 대책의 주
요 내용은 2020년까지 국공립유치원을 40퍼센트 확충하고, 국가교육회계시스템인 ‘에듀파인’을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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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사립유치원에 적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여론에 쫓겨 서둘러 마련하느라 실천 가능성에 강한 의문이 제
기되었지만, 이 정도나마의 대안이 나오게 된 것은 순전히 사립유치원 소비자인 엄마들의 단체, 즉 ‘정
치하는 엄마들’이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요구 작업에 1년 넘게 끈질기게 매달려온 덕분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론의 비난 화살은 주로 사립유치원에 쏠렸지만, 정작 주된 비난을 받아야 할 대상은
정부와 정치권이었다. 전 국회의원이자 ‘정치하는 엄마들’의 공동대표 장하나는 “수십 년 동안 유아교
육 현장을 이렇게 망쳐놓은 건 교육 당국”이라고 비판했는데, 이 비판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세월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건이었음에도
‘사립유치원 비리 사건’은 정치적 소비자 운동의 성공 사례로 기록될 수 있겠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잔인한 국가’의 끝장을 보여준 사건임에도 이렇다 할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사건도 있
다. 그건 바로 ‘가습기 살균제 참사’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숨진 사람은 1,528명이나 된다(2020년
2월 19일 기준). 가습기 살균제 전체 피해 가구인 4,953가구 가운데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피해 인정
율은 8.2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피해자들이 바라는 건 많지 않다. 단지 피해 인정 범위를 넓히고 구
제에 차등을 없애달라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가해 기업과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드러난 건 2011년이었음에도 왜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진실을 파
헤치면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사건을 축소하기에 급급했던 박근혜 정권의 책임이 크나, 그것만
으론 다 설명할 수 없다. 정권이 바뀐 후 문재인 대통령이 피해자들을 불러 사과를 했지만, 단지 말뿐
이었다. 정부는 여전히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피해를 당한 소비자들
의 억울함과 분노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이 사실상 무정부 상태”라고 한 어느 피해자의 절규처럼 그 어
떤 사건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텐데, 왜 이런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었던 걸까?
이 사건은 ‘안방의 세월호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실은 ‘잔인한 국가’라고 하는 점에서 보자면 세
월호 사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두 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를 놓고 보자면, 세
월호 사건은 국가적 수준의 사건이었던 반면 ‘안방의 세월호 사건’은 말 그대로 ‘안방’에만 머무른 수준
이었다. 정치적 사건으로서 가치가 약했기 때문이었을까?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재난’이 아니라 ‘악행’이다
1,528명의 사망자, 피해자 수천 명의 ‘만성 울분’의 고통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숙명
여자대학교 교수 구연상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 재난(참사)인가 악행인가」라는 철학적 논문에서 기
존 시각은 이 사건을 대체로 재난이나 참사로 규정하거나, ‘제조물에 따른 피해 사건’ 정도로 보고 있
지만, 악행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살균제 기업들의 악행의 질은 그들이 살균제
제품에 쓰인 화학 물질의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안전성을 검사해야 할 자신
들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검사 결과를 ‘거짓’으로 조작하기까지 했으며, 소비
자의 안전을 철저히 무시해왔다는 점에서 매우 악질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어떻게 볼 것인가? 『미디어스』기자 장영은 이런 총평을 내렸다. “독성물질 천만 병
이 판매되는 동안 정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SK케미칼을 무죄로 만들어주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는 것 외에 정부가 한 일은 가습기 피해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정부가 국민을 먼저 생각했다
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피해자를 찾고, 연구를 통해 가습기 살균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질병은 철저하게 피해자로 인정해 구제를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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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왜 언론은 ‘가습기 살인’을 외면했는가?
이런 악행을 방관한 언론과 시민사회는 면책될 수 있을까? 유가족 연대 대표 최승운이 말했듯이, “언
론에서 처음부터 추적 보도를 해줬으면 (상황이) 이렇게까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지 않았다.” 언론은 왜 그랬을까?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은 2016년 5월 17일 「나
는 왜 ‘가습기 살인’을 놓쳤나」라는 칼럼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나섰는데, 그는 후배 기자 H가 자신에
게 한 말을 소개했다. “요즘 신문ㆍTV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 보면 죄책감이 들어요. 2014년 서
울중앙지검에 들어갈 때마다 거의 매일 그분들을 봤거든요. 피켓 들고 수사를 촉구하던 그분들 앞을
그냥 지나치곤 했어요. 검찰이 나서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 말을 듣고 자신이 사회2부장으로 있던 2014년 하반기부터 2015년 말까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뒤돌아본 권석천은 “지난 5년간 피해자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든 건 언론이었다. 아무리 절규하고 발버
둥 쳐도 언론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보인 건 수사가 본격화되고 시민들의 분노가 불붙은 뒤였
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나 자신을 포함해 한국 기자들은 ‘악마의 관성’에 갇혀 있다. 위험을
감수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탐사’하기보다는 발표 내용, 발설 내용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퍼 나르기’ 하
는 데 급급하다. 나태하게 방관하다 사냥의 방아쇠가 당겨지면 그제야 달려들어 과잉 취재를 한다. 사
자가 먹다 남긴 고기에 코를 처박는 하이에나와 다른 게 무엇인가.”
1,528명을 ‘통계’로만 여기는 냉담과 결별해야 한다
전반적인 시민의식의 문제는 없었던 걸까? 일반 시민들이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좀 더 일찍 분노하고 나섰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움직이지 않았
던 걸까? 미셸 미셸레티는 정치적 소비자 운동의 메시지는 ‘개인화(personalization)’의 방식으로 접근
해야 소비자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했는데, 혹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참고로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 라고 했다. 이는 좋은 말이라고 소개한 게
아니다. 우리 인간의 맹점을 알자는 뜻이다. 각기 말한 취지는 다르지만, 테레사 수녀도 인간 본성에
대해 “다수를 보면 행동하지 않고, 한 명만 본다면 행동한다”고 했다.
큰 맥락에서 보자면, 혹 ‘의도적 눈감기’는 아니었을까? 한국 사회는 ‘의도적 눈감기’가 상시적으로 일
어나는 ‘불감사회’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왜 어떤 경우엔 ‘의도적 눈감기’가 일어나고, 또 어떤 경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적극 개입해 국민적 분노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가? 이 물음에 답해야 하는
건 학자들의 몫이다. 이는 소통의 문제이므로, 언론ㆍ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이 우선적으로 답해야 한다.
그럼에도 언론ㆍ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이 문제를 자신과는 무관한 주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누가 누구를 향해 손가락질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 사회 전체가 ‘사일로(silo)’의 수렁에 빠져 의도하
지 않은 불감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국민적 성찰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기업, 정부, 정치권,
언론이 악행을 저지르거나 방관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마지막 자구책일 수밖에 없다. “쇼
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는 행동 강령을 철저히 실천하되,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역지사지의
수준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 는 사망한 1,528명을 ‘통계’로만 여기는 냉담과 결별해야 한다.
왜 진보 언론은 자주 ‘불매 위협’에 시달리는가? - ‘어용 언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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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진보 언론을 위협한 ‘『시사IN』구독 해지 사태’
미국에선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정치판의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기부
한 기업에 대해 민주당이 보이콧 운동을 벌이면, 공화당이 그 기업에 대해 바이콧 운동을 벌이는 식이
다. 기업이 권력 눈치 보기에 바쁜 한국에선 그런 유형의 질 낮은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벌어지긴 어
렵지만, 다른 유형의 이색적인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온라인에선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당파성과 관련해 진보 언론 불매 위협이 자주 일어나는데, 이는 정치적 반대편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
니라 크게 봐서는 같은 진보 진영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진보 언론 불매 위협은 진보 언론의 등장 이후 늘 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긴 하지만, 성공 사례의 원
조는 유시민이다. 그는 2010년 해학과 풍자를 담는「한홍구-서해성의 직설」난에 쓰인 ‘놈현 관장사’
라는 표현을 문제 삼아 ‘《한겨레》절독’으로 압박하면서 《한겨레》1면에 사과문을 게재케 하는 데에 성
공했다. 이와 관련, 당시 《한겨레》 기획위원이었던 홍세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흥미로운 일은 스
스로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의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를 절독하겠다는 소리는 종종 듣는 데 반해,
스스로 보수라고 말하는 사람의 ‘조중동’을 절독하겠다는 소리는 듣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적용될 듯싶지만, 나는 그보다 한국의 이른바 진보 의식이 성찰과 회의,
고민어린 토론 과정을 통해 성숙하거나 단련되지 않고, 기존에 주입 형성된 의식을 뒤집으면 가질 수
있는 데서 오는 경박성, 또는 섬세함을 통한 품격의 상실에 방점을 찍는다.”
‘어용 지식인’과 ‘어용 시민’의 탄생
2017년 유시민은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해 “지식인이거나 언론인이면 권력과 거리를
둬야 하고 권력에 비판적이어야 하는 건 옳다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대통령만 바뀌는 거지 대통령보
다 더 오래 살아남고 바꿀 수 없는,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기득권 권력이 사방에 포진해 또 괴롭힐
거기 때문에 내가 정의당 평당원이지만 범진보 정부에 대해 어용 지식인이 되려 한다”고 말했다.
유시민의 이 발언은 5월 9일 치러진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 문재인이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됨으
로써 문재인 지지자들에게 하나의 절대적 좌표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와 페미니즘 가치가 충돌할 때에
도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이론적 면죄부로까지 활용되었다. 손희정은『페미니즘 리부트』에 쓴 <어용 시
민의 탄생>이란 글에서 유시민의 ‘어용 지식인론’에 대해 “‘진보’와 ‘어용’과 ‘지식인’이 한자리에 설 수
있는 놀라운 광경은 반동적 반지성주의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고 개탄했다. 유시민은 진보와 지식
인이라는 말을 써온 역사적 맥락을 탈각해 맹목적인 당파성을 간단하게 ‘진보’의 자리에 올려놓고 ‘어
용’이라는 말 안에 녹아 있어야 할 수치심을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치심을 지워버린 효과 때문이었을까? 인터넷엔 자신을 ‘어용 시민’으로 칭하는 이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이들은 진보 언론마저 ‘어용’이 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이미 대선 과정에서부터 나타났다.
공정 보도를 실천하려다 부당하게 해고된 해직 기자들이 모여 만든 독립 언론《뉴스타파》는 문재인 후
보 캠프 검증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월 2,000명가량의 후원자들이 이탈하는 등 불매운동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일이었을까? 진정한 언론인이 되고 싶어 큰 희생을 무릅쓴 언론인들에
게 정부여당에 종속된 ‘기관 보도원’ 노릇이나 하라는 요구가 그 어떤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인
가? ‘어용’을 철저히 실천하는 북한이나 중국의 언론 모델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을까?
《뉴스타파》 후원자 3,000명이 사라진 ‘조국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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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어용 저널리즘’을 요구하는 어용파들이 벌이는 코미디 같은 행태는 수시로 벌어지는데, 아마도 그 압
권은 ‘윤석열 사건’일 게다. 2019년 7월 《뉴스타파》는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말미 후
보자 ‘위증’과 관련된 통화 녹음 파일을 공개했다. 그런데 당시는 문재인 지지자들 사이에서 윤석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때였다. 문재인-윤석열 지지자들은 “ 《뉴스타파》와 자유한국당이 야합했다“고
비난하면서 《뉴스타파》후원을 끊거나 댓글로 보도를 비난했다.
논란이 확산하자 《뉴스타파》대표 김용진은 이례적으로 ‘대표 서한’을 통해 ”저희는 윤 후보자가 청문
회에서 윤우진 관련 부분을 이런 식으로 넘겨버린다면 앞으로 본인이나 검찰 조직에 두고두고 부담이
될 수 있고, 국민과 임명권자에 대한 후보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며 취재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이런 해명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광고 없이 후원으로 유지되는 《뉴스타파》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전체 후원자 8~9퍼센트에 달하는 3,000여 명이 후원을 끊어버렸으니 말이다.
이렇게 매몰찼던 어용파들은 ‘조국 사태’ 이후 윤석열을 타도해야 할 적으로 지목하면서 180도 달라졌
다. 《뉴스타파》7월 8일자 <윤석열 2012년 녹음 파일… ‘내가 변호사 소개했다’> 기사엔 다음과 같은
후속 댓글들이 달렸다. “ 《뉴스타파》에 사과합니다. 윤석열을 인사이트로 본 언론이 《뉴스타파》가
유일했네요.” “너무 미안하네요. 대중의 어리석음. 저도 그 대중의 1인. 후원 증액합니다. 그게 제 반성
의 도리인 것 같네요. 계속 검찰과 검사 집단 심층 취재 부탁드려요.” 《뉴스타파》 홈페이지와 각종 커
뮤니티에도 《뉴스타파》에 사과의 뜻을 전하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진정한 사과였을까? 아니었다. 다
음 댓글을 보자. “그 당시 윤석열 녹취록을 청문회 막판에 공개한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네요. 《뉴
스타파》에 사죄드립니다.” 이런 ‘조국 코미디’에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유시민은 1984년 9월의 세상에 갇혀 있다
‘어용 저널리즘’ 요구가 시대의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가볍게 여기는 마음으로, 아니 즐기는 마음으
로 감내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게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의구심은 떨쳐버리기 어렵다. 이해
하려고 애를 써도 ‘어용 저널리즘’ 요구의 이론적 근거는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다수대표제-양당제 국
가에서 정치 혐오와 더불어 나타나는 ‘반감의 정치’와 ‘응징의 정치’ 모델이기에 더욱 그렇다.
승자독식을 기반으로 하는 이 모델에서 유권자들은 상대적으로 더 반감을 느끼거나 더 증오하는 ‘최악
(最惡)’의 정당을 응징하기 위해 ‘차악(次惡)’의 정당을 선택하는 투표를 한다. 이런 투표 행태를 잘 아
는 정당들은 뭔가 일을 잘해서 유권자의 표를 얻을 생각은 하지 않고 상대 정당을 공격해 유권자들의
반감이나 증오를 키우기 위한 ‘증오 마케팅’에만 몰두하면서 이걸 정치의 본령으로 삼는다. 지지자들
역시 같은 행태를 보이기 때문에 정치 참여를 ‘닥치고 공격’으로만 이해하며, ‘내부 비판’은 금기시한다.
‘어용 저널리즘’ 요구는 바로 이런 의식의 산물이기도 하다. 우리 편이 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상대편
을 공격해 승리하는 것을 정치의 본질로 삼는 이 모델에선 누가 승리하건 나라는 골병든다.
오랜 세월 적어도 2년에 한 번 이상 이런 ‘승자독식주의 체험 학습’을 한 유권자들은 승자독식주의를
당연시하는 사고방식을 갖기 십상이다. 그런 선거 방식을 보장한 법과 제도의 후광효과를 업고 “원래
세상이 그런 거 아냐?”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심성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치와 무관한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조차 승자독식주의가 만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압축 성장’의 혜택을 본 우리의
업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하다. 압축 성장이 심화시킨 ‘비동시성의 동시성’ 현상으로 이해해야 하는
걸까? ‘어용 저널리즘’ 요구의 선봉에 선 유시민은 아직도 이른바 ‘서울대학교 프락치 사건’ 또는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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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조작 사건’이 일어났던 1984년 9월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폭압적인 전두환 정권이 대학 캠퍼스에 프락치를 침투시켜 운동권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던 시
절 운동권 투사들에게 선악 이분법은 불가피한 점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의심과 확신의 경계는 쉽
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이 사건의 주동자로 구속된 유시민이 1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쓴 ‘항
소 이유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사실상 그런 비극적인 사태를 만든 주범인 전두환 일당에 대
한 분노를 치솟게 만들었다. 그런데 비극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민주화가 이루어질 대로 이루어진
오늘날에도 유시민이 그 시절의 선명한 선악 이분법의 사고 틀에 갇혀 있으니 말이다.
1980년대의 운동권을 지배했던 사고 가운데 ‘조직 보위론’이란 게 있다. 조직 보위론은 ‘진보의 대의’
를 위해 활동하는 운동 조직을 ‘적’의 공격에서 ‘보위’해야 하며, 따라서 내부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
났다 하더라도 이를 조직 밖으로 알려선 안 된다는 논리다. 바로 이 논리에 따라 운동권 내부의 많은
성폭력 사건이 철저히 은폐되었고, 피해자에겐 이중ㆍ삼중의 고통이 가해졌다. 유시민은 ‘조직 보위론’
의 신봉자로서 이미 여러 차례 이와 관련된 논란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는 민주화가 된 세상에서 그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조직 보위론을 다시 꺼내 든 것이다.
왜 유시민은 세상을 그렇게 일관성 있게만 살려고 하는 걸까? 왜 다른 생각을 전혀 못해보는 걸까? 정
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묻는 거다. 아니 간곡히 호소하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가 그간 그토록 외쳐온
‘밑에서부터의 개혁’은 말만 무성했을 뿐 실천이 없었다. 유시민이 지지자들에게 각자 선 자리에서 ‘우
리 이니’를 위해 그런 일을 해보자고 호소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니’를 싫어하던 사람들도
그들이 낮고 빛나지 않는 자리에서 그런 헌신적인 활동을 묵묵히 했다면, 그들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나머지 ‘이니의 성공’을 위해 동참하게 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유시민은 감성적인 선동의 달인이 아닌가. 게다가 그는 자신의 한마디
로 KBS 사장마저 벌벌 떨게 만들고, JTBC마저 ‘조국 사태’의 정국에서 ‘어용’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재인 지지자들의 적으로 전락시킬 정도로 막강한 ‘문화 권력’과 ‘정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그런 그가 자신의 타고난 달변을 통해 ‘분열과 증오’ 대신 ‘관용과 화합’을 외치면서 진보적 개혁의 메
시지를 전파하는 전도사로 활약했다면, 한국의 정치 지평 자체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문빠’는 민주주의와 진보적 개혁의 소중한 자산이다
아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문재인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착하고 선량하고 정의로
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국 민주주의와 진보적 개혁의 소중한 자산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
한다. 문제는 이들이 ‘우리 이니’에 관한 문제에선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는 점이다. ‘정치’가 아
닌 ‘종교’의 영역으로 이동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를 종교처럼 대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는
모두를 ‘의인’으로 여기겠지만, 정치를 정치로 여기는 사람들에겐 이만저만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용 저널리즘’을 요구하는 어용파는 대부분 ‘문빠’ 또는 ‘문파’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다음과 같은 ‘좌표 찍고, 벌떼 공격’을 어떻게 봐야 하나? “지금까지 문빠들의 타깃은 주로 정
치인이나 공직자, 언론인이었다. ‘공격 좌표’를 찍고 무차별 신상 털기와 악플, 문자 폭탄 테러를 가해
왔다. 한 번 당해본 인사들은 문빠를 ‘히틀러 추종자’, ‘문화대혁명 홍위병’이라며 학을 뗐다. 하지만 대
통령은 자신의 지지 세력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파괴 행위를 묵인해왔다. 문빠는 눈에 뵈는 게 없는 괴
물처럼 됐다. 이제는 반찬 가게 주인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그녀에게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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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숨어서 벌여온 문빠들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진중권은 2019년 11월 조국 가족의 표창장 위조 진상을 폭로해 악플 테러를 당하자 페이스북을 닫으
며 이런 심경을 토로했다. “누가 좌표를 찍었는지 저 극성스러운 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단체로 행패를
부린다. 저 뇌 없는 무리들의 아우성이 피곤할 뿐이다.” 곧 다시 활동을 재개한 그는 ‘유시민의 알릴레
오’에 대해 “알릴레오 시청자는 기자들 리스트를 만든다. 제대로 일하는 기자들을 리스트(만들어) 좌표
를 찍고 공격을 한다”며 “(기자의) 가족의 신상 파서 기레기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보수 언론에만 실릴 뿐, 진보 언론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좌표 찍고, 벌떼 공격’이 정당한 표현
의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고 있다면,
그 ‘뉴스 가치’에 주목해 그런 일이 있었다는 보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독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
갈 거라는 공포 때문에 그마저 할 수 없다는 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왜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시민단체와 언론개혁 후원이 줄어들었을까? - 촛불집회
“그 많던 시민은 다 어디로 갔을까?”
2017년 7월 초 인권운동가 박래군은 제주인권회의에서 “촛불집회를 한 이후에도 시민들이 시민단체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시민들은 시민단체 회원으로 가입하지 않고, 시민단체를 후원하지도 않아요. 활동
가는 더 이상 충원되지 않아 늙어가고 있습니다”라고 개탄했다. 《경향신문》논설주간 이대근은「그 많
던 시민은 다 어디로 갔을까」라는 칼럼에서 이 개탄을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건 시민운동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가 당면한 근본 문제다. 한국 사회에 시민이 없다. 지난해 겨울 광장의 시민을
생각하면 시민의 부재는 역설적이다. 시민단체 활동이 시민성을 판단할 유일한 척도는 아니지만, 광장
을 떠난 시민이 연대하기보다 고립된 개인으로 돌아간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개인과 국가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향우회, 동문회, 친목회만 번성한다.”
촛불 이후의 상황에 대한 평가는 촛불집회 2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 29일엔 더욱 부정적인 어조로
바뀌었으니 더욱 그렇다.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한국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거론하면서 “전 세계
를 감동시킨 ‘촛불혁명’의 성과로서는 너무나 초라하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이 사회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없애고 반칙과 특권을 해소”하고 “부의 대물림과 기회의 불평등을 바로잡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한겨레》역시 “2년 전 촛불이 처음 출현해 들불처럼 번져나갈 시기에 진보뿐 아니라 보수
세력까지 폭넓게 공감했던 민주주의와 불평등 타파의 가치를 다시 돌아볼 때다”고 역설했다.
“1% 대 99%가 아니라 50%가 50%를 착취하는 사회”
‘촛불 이후’에 대한 보수 쪽 시각은 훨씬 더 부정적이지만, 촛불의 의미에 대한 과잉 해석은 비슷했다.
《중앙일보》는 사설을 통해 “진보ㆍ보수를 넘어 사회 양극화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분열을 타파하고 어려운 서민의 삶을 해소하라는 국민의 명령이 바로 촛불정신이 아니었던가”라며 “그
것은 진보 단체의 촛불, 노조의 촛불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보편타당한 상식을 회복하자는 외침
이었다”고 했다. 포스텍 교수 송호근은 칼럼에서 “촛불은 민주투사들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지만, “그
촛불은 지대를 추구하는 힘센 조직들이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횃불이 되었다”고 했다.
이런 문제 제기는 촛불집회에 대한 과도한 미화가 불러온 부메랑일 수 있다. 또한 강도는 약하고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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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좀 다를망정 ‘지대추구’에 대한 비판은 보수 진영에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서강대학교 교수 이
철승은 2019년 8월에 출간한 『불평등의 세대: 누가 한국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었는가?』에서 ‘세대
간 지대추구’ 현상에 주목하면서 이른바 386세대를 그 주범으로 지목했다. 386세대가 무슨 악의를 품
고 그랬던 건 아니었다. 역사적 상황과 한국형 위계구조(네트워크 위계)라는 한국의 문화적 특성이 그
렇게 만들었다. 문제는 이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계급론’을 앞세워 그런 현실을 은폐하려고 드는 데
에 있었다. 이철승은 “특정 지위와 신분에 진입함으로써 그러한 기회를 불균등하게 부여받고, 심지어
는 다른 사람의, 하급자의 노동을 편취할 수 있게끔 하는 구조를 고치자”고 역설했다.
이철승은 《한겨레》인터뷰에서 직설적으로 보다 쉽게 말한다. 그는 “지금 우리 사회는 정규직 노조와
자본이 연대해서 하청과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구조다. 1% 대 99%가 아니라 20%가 80%를, 또는
50%가 50%를 착취하는 사회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스웨덴이나 독일과 같은 서구 국가 노조는 자발
적으로 임금 인상을 자제한다. 인플레이션이 생기면 비정규직, 파트타임 노동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규직 노조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최우선 목표
가 65살 정년 연장이다. 역삼각형 인구 시대가 연공급 및 세대 네트워크와 결합하면 정규직과 비정규
직 차별은 신분제처럼 될 거다. 나는 정규직의 특권을 축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를 알 수 없다. 이
이야기를 한국의 진보 세력이 솔직하게 터놓고 해야 할 시점이 왔다.”
문재인은 최소한의 ‘상도덕’이나마 지켰는가?
우리가 정작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촛불집회 덕분에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정치적 소비자 운동의 수준
에나마 상응하는 ‘상도덕’을 지켰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2019년 11월에 출간한 『강남 좌파 2: 왜 정
치는 불평등을 악화시킬까?』의 결론에서 “문재인 정부는 성공할 수 있으며, 꼭 성공해야만 한다”고 했
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박근혜의 퇴진 촛불집회에 나온 그 수많은 시민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들의
배신당한 처참한 심정이 이후 어떤 결과를 낳겠는가? 두렵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나는 “성공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 할 벽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건 바로 소통을 거부하는
도덕적 우월감이다. 나는 이걸 극복하기 위해 문재인이 매일 아침 자신의 대통령 취임사에서 밝힌 다
음 약속을 읽는 걸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저는 감히 약속드립니다. 2017년
5월 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예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국민과 수시로 소통
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분열과 갈등의 정치도 바꾸겠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끝나야 합
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직접 대화하겠습니다. 야당은 국정 운영의 동반자입니다. 대화를 정례화하고
수시로 만나겠습니다.……저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삼고초려해 일을 맡기겠습니
다.……약속을 지키는 솔직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군림하고
통치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화하고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이 약속은 취임사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다. 선거 유세 내내 문재인이 강조했던 공약이다.
시민으로서의 유권자 이전에, 쓸 만한 정치 상품을 고르겠다는 소비자와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분열과 갈등의 정치’, ‘분열과 증오의 정치’를 끝장내겠다고 했지만, 그는 오
히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국 사태’가 대표적인 증거다. 사태 초기에 조국 법무장관 임명 반
대 의견이 찬성보다 2배 이상 많았다는 건 반대에 문재인 지지자들의 상당수도 가담했다는 걸 의미했
다. 하지만 문재인이 생각을 바꾸지 않자 지지자들은 ‘조국 사태’를 ‘문재인 사태’로 인식하고 “문재인
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희대의 ‘국론 분열 전쟁’에 참전한다. 결국 여론의 뭇매를 견디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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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사퇴했지만, 문재인은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국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드러
냄으로써 제2차 ‘국론 분열 전쟁’의 불씨를 던졌다. 이는 문재인이 취임사에서 약속한 내용과는 상반된
것이다. 어렵고 고상한 이야기할 필요 없다. 그는 최소한의 상도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문재인을 비
판하기 위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아니 그 신성한 촛불집회를 감히 소비자 운동으로 보다니!”와
같은 식의 반응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촛불혁명이 진보의 것이었다는 착각 또는 욕심만
내지 않았다면, 국민 절대다수가 반대하는 일은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했고, 나름의 소신을 갖고 밀어
붙였다면, 그 실패에 대해 정직한 해명을 했어야 했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최소한의 상도덕이다. 우리는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거창하게 말하는 최대주
의를 좋아하지만, ‘분열과 증오의 정치’를 넘어서기 위해선 핵심에 집중하는 최소주의가 필요하다. 안재
홍이 좌우 합작을 시도한 신간회의 해소를 주장하는 급진사회주의자들을 겨냥해 “조선의 운동은 걸핏
하면 최대형의 의도와 최전선적 논리에 집착해 과정적 기획 정책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한 건 일제강
점기 시절인 1931년이었는데,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습속은 여전하다. 그런 허세를 버
리고 실천적 관점에서 정치적 소비자 운동을 이해하고 이용하는 게 필요하다 하겠다.
맺는말 - “끈적이는 관계는 싫어요!” - ‘약한 연결’은 주어진 조건이다
‘자본주의 진화론’과 ‘정치적 소비자 운동’
많은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가능케 한 자본주의가 파국으로 치닫는 걸 내버려둘 리
없으니, 자본주의의 진화는 계속될 게 분명하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진화하건, 분명한 사실은 자본주
의의 횡포와 타락은 스스로 교정되진 않으며, 정치적 소비자 운동 등과 같은 압박이 있을 때에 비로소
자본주의의 대행자인 기업들이 변화하거나 변화의 필요성을 좀 더 실감하게 된다는 점이다.
왜 연구자들은 ‘선거’에만 집중하는가?
언론학과 정치학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커뮤니케이션 연구는 투표를 중심으로 한 정치 참여와 선거, 그
리고 이를 다루는 매스미디어에 집중되고 있는데, 이는 투표가 그만큼 중요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스미디어 주목도와 관련도가 매우 높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들어 소셜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긴 하지만, 이마저 매스미디어와의 연계성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매스미디어와 무관하거
나 매스미디어 주목도ㆍ관련도가 낮은 사건들은 연구 의제에서 누락되고 있기 때문에 기존 연구 프레
임으론 정치 현실이 운동에 미치는 영향도 동시에 살펴보는 쌍방향의 연구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므
로 기존 미디어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정치의 정태성과 동태성을 동시에 살피면서 정치 커뮤니케이
션의 범위를 넓혀나가려는 시도도 필요한 게 아닐까?
나는 그런 의문에서 출발해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는 슬로건으로 대변되는 정치적 소비자 운동을
중요한 정치 커뮤니케이션 연구 의제로 삼을 것을 제안하고 싶다.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개인화된 정치’이면서도 연대와 단합을 통해 소기의 성과를 얻고자 하기
때문에 정치 커뮤니케이션 연구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주제다. 이 연구는 전형적이지 않은 정치적 소
비자 운동의 연구 의제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과도한 ‘매스미디어 편향성’을 넘어서 정치적 소비자 운
동의 심층적 인식과 연구 지평의 확대에 기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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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정치의 시장화’와 ‘시민의 소비자화’는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시민과 소비자는
전혀 다르며 정치는 소비 영역과는 전혀 다른 논리로 작동한다는 ‘시민 신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
한 채 소비와 소비자의 중요성에 상응하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 쇼핑을 주로 비판적인
문화 비평의 대상으로만 삼아온 그간의 관행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본격적인 정치 비평과 정치 커뮤니
케이션의 연구 의제로 삼으면 좋겠다. 서구 사회와는 다른 한국의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갖는 특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 언론ㆍ여론 시장의 구조와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도 있다. 예컨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와 여론의 분노를 촉발하는 기업들의 ‘갑질’에 대한 대응은 정치적 소비자 운
동의 성격이 있음에도 그 어떤 성과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일과성의 사건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
이다.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원래 휘발성이 높다지만, 한국에선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최선은 차선의 적이 될 수 있다”
그런 특성은 정치적 사건에도 마찬가지인바, 이 문제를 한국 언론ㆍ여론 시장의 구조와 메커니즘과 연
결 지어 탐구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날로 쇠퇴해가는 시민운동은 개인주의적인 정치적 소비자 운
동에서 활로를 찾을 수도 있다. ‘강한 연결’을 추구했던 이전의 방식을 탈피해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연
대를 배척하지는 않는 이른바 ‘포용적 개인주의(inclusive individualism)’와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약한 연결의 힘’에 대한 반론은 무성하다. 그런 힘으로는 세상을 바꾸기 어렵다는 비판이 가장 많은
것 같다.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 “당신은 강한 연결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강
한 연결’은 과거 운동권 문화를 떠올리면 된다.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버리고 대의를 위해 헌신하면
서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강하게 결속하는 연결 말이다. 그게 오늘날에도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우
리는 여기서 “최선은 차선의 적이 될 수 있다”는 리처드 로티의 경고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의 신(新)실용주의 철학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실현 가망성이 거의 없는데도 최선만을 고집하다가 차
선마저 놓치고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질 수 있는 비극에 대한 경고로 이해하면 된다.
최선에 대한 집착은 진보좌파만의 고질병은 아니다. 의외로 널리 퍼져 있는 미신이다. 차선은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지만, 최선은 그저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떠들기만 해도 자신이 빛나 보이는 효과를 발
휘하기 때문이다. 이젠 그런 게으름 또는 무책임과 결별할 때가 되었다. 시장을 이용해 시장 실패를
교정하겠다는 발상에 대한 우려는 타당한 면이 있지만, ‘시장’ 자체에 대한 반감 때문에 필요 이상의
우려와 반감을 갖는 건 아닌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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