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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노자를 웃긴 남자

by Casey,Riley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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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웃긴 남자



       제 1 장
  도올은 전 국민이 보는 TV에 나와서 고전강의를 한 것이 아니라 삼류 개그쇼를 한판 때린 거다. 개그쇼라는 게 사람들을 웃겨보자는 거라고 볼 때 우리는 웃어줘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지금부터 난다긴다하는 개그맨보다 더 골 때리는 도울의 명 개그쇼를 감상하면서 웃어보자. 나라꼴도 한심한데 이런 거나 보고 웃어야지 뭐 하겠나? 
노자 할아방의 불후의 명저《도덕경》원문을 보면서 도울의 개그 내용을 살펴보자. 도덕경 제1장의 첫 문장은 이런 소리로 시작한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울의 명저《노자와 21세기》에 이문장이 어떻게 풀이되어 있는지 한번 보자. 우리의 건아 도올 가라사대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네. 시작부터 황당해서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저런 소리를 보고 뭐라 그러는 줄 아냐? 바로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 라 하는 거다. 첫줄부터 삼천포로 빠져버리니 끝에는 어디로 가겠어? 하기사 이게 도올의 죄겠냐? 도올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왕필이부터 현대 중국과 대만·일본을 비롯 조선 핫바지 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자의 대가들이 한결같이 내놓은 해석이다. 원래 독창성이나 창의성은 별로 봐줄 게 없는 두뇌를 갖고 태어난 도올인지라 뭐 별다른 해석을 할 방법이 없었을 거다. 그저 전부 그렇다 하니까 자기도 그렇게 강의했을 뿐이겠지. 이게 평범한 학자의 강의라면 봐주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칭 동양학의 대가요, 노자를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뻥을 치는 인간이 이런 것도 바로잡지 못하면 지 자랑이 얼마나 무색한 것이냐 말이다. 
 《도덕경》의 첫줄은 불과 여섯 자지만 《도덕경》 전체5천 글자를 관통하는 대단히 중요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올바르게 읽지 못하면 노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생각 함 해봐봐. 사람이 책을 쓸 때 가장 고심하는 것이 첫 줄 첫 마디 아니겠어? 노자 할아방도 마찬가지다. 노자가 《도덕경》이라는 위대한 사상서를 쓰면서 그 첫머리를 저따위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로 시작했겠어?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라니?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 그럼 도를 도가 아니라고 말해야 도가 되는 거야? 문장 성립이 안 돼. 우리 노자가 작문 배우는 초등학생이 아니잖아. 저런 유의 헛소리는 도올 아저씨가 전공이지 노자 할아방은 절대 저따위 말도 안되는 소리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명확하고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앞뒤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소리만 한 사람이다. 그리고 저런 엉터리 같은 말이 적힌 책은 사상서로 대접받을 이유도 없는 것이야. 그리고, 만약에 저 번역이 맞다고 치면 노자의 작문이 엉터리가 되는 것이야. 저 말을 한문으로 쓴다면 '도왈도 도비도' 가 되지 '도가도 비상도' 가 될 수 없는거야. 노자는 문장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구사하는 사람이지 애매하고 모호하게 적는 스타일이 아냐. '가' 자는 '무엇을 할 수 있다' '해도 좋다' '가하다' 는 의미를 가진 글자다. 그래서 '도가도' 라는 말은 '도를 도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 라는 뜻이다. 
 그리고 '비상도' 는 하지만 언제나 도라고 할 필요은 없다'  가 된다. 즉 '도를 도라고 불러도 좋지만 꼭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소리다. 이 첫 문장은 노자가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무엇에 대해서 이름을 '도' 라고 붙인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자기가 지금부터 그것의 이름을 '도' 라고 하기는 하지만 꼭 그것의 이름이 '도'  여야 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후대의 엉터리 학자들이 그 말을 못 알아먹고 2천 년 동안 헛소리만 해온 거라. 이름을 '깨달음' 이라 해도 좋고, '섭리' 라 해도 좋고, '법칙' 이라 해도 좋다는 말이다. 그냥 이름을 붙이다 보니 '도' 라 했을 뿐이니 이름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지 않는가 고민하지 말라는 친절한 설명이다. 《도덕경》의 제1장은 노자가 어떤 것에 붙인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을 첫줄부터 못 알아먹고 딴 동네 가선 놀고 자빠졌으니 그 담부터는 볼 것도 없이 죄 횡설수설이 될 수밖에 없지. 불교가 동양정신의 거대한 기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현장의 탁월한 한역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만약 범어로 된 불경을 현장이 한문으로 번역해서 중국에 소개할 때 도올처럼 엉터리 짓을 했더라면 불경도 코미디 대본으로 전락했을 거다. 현장은 범어의 '니르바나'를 의역하는 우매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냥 소리나는 대로 '열반' 이라고 음역한 것이다. 이게 위대한 번역이다. 열반이란 이름에 말에는 아무 뜻이 없다. 그저 이름이 열반일 뿐이다. 열반이란 이름에 어떤 뜻을 담으면 그건 이미 열반이 아닌 것이 돼버린다. 노자가 그것을 염려하여 첫머리에 저 말을 써놓은 것이다. '도라는 것은 그저 이름일 뿐이고 그것(이름)은 꼭 도가 아니어도 무방하다' 라고 뒤에 가보면 알겠지만 이런 문장의 의미를 모른 채 《도덕경》을 해석한답시고 사람 속 뒤집는 짓을 하고 있으니 도를 '길' 이란 뜻으로 받아들이는 촌극을 벌이게 된다. 
 도올은 아예 그것을 영역으로  'WAY'라 한다. 이게 개그가 아니면 뭐가 개그겠냐? 도를 조선말로 번역하면 '도' 가 되고 영어로 옮기면 'TAO'가 된다. 이것을 '길' 이라거나 'WAY' 로 번역하는 인간은 노자가 뭔지도 모르는 인간이다. 이런 수준으로 노자를 팔면서 책장사 강의장사를 하고 앉았으니 어찌 나한테 욕을 안 얻어먹겠냐? 계속해서 개그쇼를 감상해보자. 다음 구절 '명가명 비상명' 은 '도가도 비상도'를 부연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이름으로 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꼭) 그 이름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사과나 애플이나 능금이나 이름은 어떻게 붙이든 그 가르치는 대상이 하나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지면 좋지 않은가라는 말이다. 도라는 이름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는 문장을, 도라는 것 자체의 본질에 대한 설명으로 오역해버리면 책 내용을 완전히 뒤바꾸게 된다. 《도덕경》이란 심오하고 고매한 철학사상서를 도올이 들어서 오역과 악역으로 황칠을 해놓은 탓에 누군가의 말처럼 초등학생 도덕 교과서보다 못한 황당무계한 잡서가 돼버린 거다. 왜 그러냐? 한 줄을 잘못 읽어버리니까 그 다음 구절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앞줄과 뒷줄이 내용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전혀 연결이 안 된다. 그러니 이게 고전이라 대접을 받겠느냐 말이다. 《도덕경》이 그런 책일까? 노자가 문장 실력이 없어서 앞 뒤 연결도 안 되는 수작을 그토록 늘어놓았을까? 노자 할아방은 개똥철학자가 아니다. 《도덕경》 전체 5천 글자는 그야말로 한 글자도 잘못 끼여든 것 없이 전체가 물 흐르듯 한 일관성과 논리성을 갖춘 경탄할 만한 명저다. 그러나 도올의 번역을 통해《도덕경》을 읽으면 이건 완전히 유치원생이 일기 써놓은 책과 같다. 점심 먹은 내용 쓰고 그 다음에 아침에 늦잠 잔 얘기 나오다가 갑자기 자기 전에TV 본 거 썼다가 또 오후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써놓은 애들 일기장 같다는 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글을 그렇게 쓰는 사람이 어찌 대사상가가 될 수 있으며 그런 책이 어찌 철학서란 말이야? 안 그래? 앞으로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도덕경》은 결코 그렇게 허술한 짜임새를 가진 책이 아니다. 소름이 끼치도록 논리 정연하고 완벽하게 짜여진 서술구조와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문장의 절약을 보여준다. 그 전체가 가히 천하의 미문이요, 명문이다. 이런 책을 망쳐놓는 꼬락서니를 보면 정말로 쪼인트를 까주고 싶다. 다음 구절을 보면서 정말로 그런가 확인하자.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노자와 21세기》에서 도올이 해놓은 번역은 이렇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컥! 목미 메인다. 이런 식의 번역문을 보면 결론은 둘 중 하나다. 노자가 엉터리이거나 도올이 사이비거나. 앞서 말했듯이 제1장은 '도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때는 천지의 시작이고, <도라는>이름을 붙이고 보면 이것은 만물의 어머니가 되는 무엇이다' 라는 말이다. 
 바로 도라는 이름을 붙여 노자가 지금부터 설명하려는 그 무엇은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냥 천지의 시작이니 언급할 이유가 없고, 도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 만물의 어머니로서 설명이 가능해진다. 고로 어쩔 수 없이<도라는>이름을 붙이게 되었노라, 하고 작명의 동기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름을 붙이든 안 붙이든 우주는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주'라는 이름을 붙여놓기 전에는 우리는 '우주'에 대해서 논할 수가 없다.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이 세상의 근본 공간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인식 세계에 편입되는 것은 이름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다. 도도마찬가지다. 그래서 노자는 이름을 붙이기 전의 무엇은 천지의 시작이니 따지기 어렵고, 도라는 이름을 분이고 나서야 만물의 모태로서 하나의 인식 대상이 되고 설명이 가능해진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 어렵고 난해한 철학적 서술을 불과 스물네 글자로 해치워버린 표현법은 실로 놀랍다. 천지지시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철학적 사변의 범주가 아니다. 그러나 만물지모는 언어로 설명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무엇이 된다. 그 경계가 바로 무명과 유명인 것이다. 그 어떤 초월적이고 불가사의하며 전세계적인 대상일지라도 우리는 이름만 붙이고 나면 그때부터 사유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음이다. 우주의 이전, 태초의 태초, 빅뱅 이전의 세계도 '무극' 이라든가 '태극' 이라든가 물리학적 용어로 '우주알' 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이름만 붙이면, 일단 언어적 표현의 대상물이 되고 언어의 범주에 포함되면 인식과 사유의 대상물이 된다는 철학적 통찰의 압축이다. 도올의 번역과 해석을 보라. 저게 무슨 철학이 되며, 사상씩이나 될 소리냐 말이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시작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이게 뭔 소리야? 아무 의미도 없고 내용도 없는 말장난이잖아. 이름이 없는 것이 어떻게 천지의 시작이 돼? 이름이 있는 것은 다 만물의 어미다 그 소리야? 이런 번역대로 해석된다면《도덕경》은 쓰레기야. 도올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지만, 노자의 세계를 짐작조차 못 하는 범부가《도덕경》을 강의한다고 나선 것은 비극이다. 그리고 그것이 통하는 것이 대한민국 동양학계의 현주소다. 다음 구절을 보자.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역시《노자와 21세기》의 번역을 먼저 보는 게 순서겠지.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는 게 도올의 번역이다. 이게 무슨 소린지 이해되는 사람 있나? 욕심이 없으면 묘함을 보고 욕심이 있으면 가장자를 보다니? 묘한 것의 반대어가 가장자리던가? 묘함과 가장자리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대구가 되느냐 말이다. '요' 라는 글자는 '지름길, 샛길 요' 자다. '돌 요' 로도 쓰인다. 우리가 '요행을 바란다'는 말을 쓸 때 저 '요' 자를 쓴다. 
 글자의 어원을 거슬러 가면 아주 고대에는 '변방의 요새'를 뜻하기도 했다. 도저히 해석이 안 되니까 글자의 어원까지 동원한 끝에 '변방'을 '가장자리'의 뜻으로 끼워 넣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렇다 쳐도 읽는 발음도 틀려서 '요'를 '교'라고 읽고 있다. 발음이 틀린 건 지엽적인 문제니까 넘어간가 쳐도 도올의 해석대로 하면 《도덕경》은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나오는 허망한 책이다. 당최 뜻이 제대로 통하는 구절이 없는 거다. 저런 내용을 가지고 강의를 하는 것도 재주는 참 재주다. 노자가 도라는 이름에 대해 말하다가 왜 뜬금 없이 전형 엉뚱해 보이는 이런 소리를 이런 위치에서 불쑥 하고 나오냐는 것이다. 도라는 이름과 무명이니 유명이니 하는 소리들과 천지지시나 만물지모가 나온 앞 구절하고 이 구절이 도저히 연결이 안 되잖아. 이게 무슨 철학서냐? 도올의의 번역대로《도덕경》을 보자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과연《도덕경》이 그런 책일까? 노자가 전혀 문맥상 상관도 없는 소리를 노망든 할망구 방구 뀌듯이 아무 데나 싸질러 놓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노자가 엉터리로 써놓은 것이 아니라 도올이 번역을 엉터리로 해서 그리 보일 뿐이다. 이 구절에 쓰인 '욕' 이라는 글자의 뜻을 생각해보자. 
 이름이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욕이란 글자가 튀어나오냐 말이다. 욕은 '하고 싶어하다' 는 뜻을 가진 글자다. 무욕은 당근 '하고 싶지 않다' 는 뜻이 되겠다. 그렇다면 위의 문장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냐를 생각해야 한다. '욕'의 목적어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름이다. 그래서 '고상무욕'은 '꼭(굳이) (도의)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하는 뜻이다. '이관기묘' 이말은 '그(도의) 묘를 볼것이고'로 해석하면 된다. 이어서 역하면 '도에 이름을 꼭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도의 묘함을 볼것이고' 가 되겠다. 앞에서 노자가 뭐라고 했지? 무명이면 천지지시라 다음 문장의 뜻은 자연히 이와 같다. 상유욕, 즉 '도에 굳디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그요를 볼 것이다.' 두문장을 연결해서 주해를 달아 읽어보자. '굳이 도에 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천지지시의)묘를 볼 것이고,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만물지모)의 요를 보게 된다' 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묘와 요의 의미가 무엇이냐다. 무엇일까/ 노자는 무엇을 묘라 하고 무엇을 요라 했을까? 그 것은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가장자리를 본다'는 식의 번역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다. 고전을 그렇게 함부로 지 멋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특히 전 국민이 다 보는TV에 나와서 자칭 동양학의 대가라 하면서 이렇게 몰상식한 소리를 하면 안되지. 차양자동 출이이명. 암만 머리가 나쁜 도올이라도 이 정도 쉬운 문장이야 알지 않겠어? 그런데 여기서 이 시대의 천재 도올은 그 진면목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번역하여 가로되, '그런데 두 가지는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했을 뿐이다.' 정말 번역 죽인다. 기가 막힌다. 다른 노자 주해서를 보면 '이 둘은 같은 근본에서 나왔으나 이름을 달리한다' 라고 해놓은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인 노자 주해서의 번역을 가지고 아주 멋을 부려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얼마나 멋지냐? 도올은 소설을 써도 잘 쓰겠다. 그러나 양쪽 다 노자의 본 뜻과는 거리가 먼 소리들이다. 한자는 소리글자가 아닌 뜻글자이기 때문에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옮겨쓰는 기능이 적다. 검인정 교과서의 문법이 없던 시대의 기록인《도덕경》을 읽으려고 하면 우리는 노자란 사람의 필법을 먼저 살펴야 하고 그가 주로 사용하는 어순과 글 버릇을 파악하지 않으면 오역이 나오기 쉽다. 그리고 고려해야 할 또 한 가지 문제는 문장으로서의 한문은 띄어쓰기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읽을 때는 오히려 정확하고 규칙적인 띄움을 사용한다. 그래서 만약 여덟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이라면 전후 네 글자씩 둘로 갈라지지 세 글자, 다섯 글자, 혹은 여섯 글자 두 글자 식으로 문장을 만들지 않는다. 만약 앞의 네 글자가 '◎◎ ◎◎'이면, 뒤의 네 글자도'◎◎ ◎◎'가 되고 앞부분이 '◎◎◎ ◎'이면 뒤도'◎◎◎ ◎'이 되도록 문장이 틀에 맞춘다는 것이다. 노자도《도덕경》을 기술할 때 이런 규칙성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차양자동 출이이명'이란 문장을 해석할 때 우선 이 문장의 구조를 살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차양자동'이란 앞부분을 띄워 쓰면 '차양자 동'이 된다. 즉 '이 두 가지는 같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뒷부분도 같은 구조로 띄어 읽으면 정확한 의도가 나온다. '출이이 명'이 되는 것이다. 즉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이름 이다'라는 문장이다. 이것을 '출이 이명'으로 읽으면 '다른 이름으로 나온 것이다' 라는, 의미가 다른 글이 돼버린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이름이다' 와 '다른 이름으로 나온 것이다' 는 비슷해 보이지만 의미가 다르다. 후자를 택하면 앞에 나온 내용들과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얖부분에서 노자가 이야기해왔던 것은 도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와, 이름을 붙이고 안 붙이는 것의 차이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다. 무명이냐 유명이냐 즉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말한 것이지, 이름이 같으냐 다르냐를 말한 것이 아니다. 천지지시와 만물지모의 차이는 이름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묘와 요도 마찬가지로 이름을 붙여 부를 때와 이름이 없이 부를 수 없을 때의 차이이다. 따라서 저 문장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되어야 정확한 것이 된다. '저 두 가지는 같은 것인데, 차이가 나는 것은 이름이다(있느냐, 없느냐) 보고 있듯이 노자의 글은 건너 뛰거나 난데없이 엉뚱한 글이 하나씩 끼여들거나 논리가 엉뚱한 곳으로 튀거나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돼서 물처럼 끊기지 않고 흐르는 사상의 강이다. 이것을 번역을 제대로 안 하니까 그냥 중구난방 좌충우돌하는 글이 돼버리는 거다. 사실 나는 도올이 '고전강의'를 하면서 노자 할아방을 제대로 설명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이게 난장판이 되더라 말이지. 하느니 지 자랑이요, 나오느니 억지고, 내미느니 무식이라 도저히 참고 봐주기가 어렵더라. 이제부터 보면 알겠지만 첨부터 끝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고, 제대로 아는 게 전무한 거야. 그리고 입만 열면 자랑해대는 게 그 놈의 학벌이야. 
 지가 대학 다닐 때부터 '노자'를 읽고 뿅가서 평생을 심취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엉터리로 읽고 뿅 갈 게 뭐 있냐 말이다. 지가 번역해 놓은 노자는 뿅 갈 게 하나도 없는 황당한 책인데. 다음 구절을 보자. 동위지현 현지우현. 갈수록 한자가 쫌씩 어려워지네. 이렇게 어려운 한자가 나오니 도올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이런 어려운 한자들이 앞으로 계속 나올 텐데 도올이 그 한심한 한문 실력을 갖고 어찌 해석을 하고 강의를 하느냐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동양학의 대가 도올을 굳게 믿자. 어찌 해놨는지 같이 보자. 도올이 이 구절을 풀이하여 가라사대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고 한다. 가물고 또 가물토다' 라 해놨다. 역시 도올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대문호다. 표현 함 봐봐. 철학서의 번역이 아니라 완전히 시다. 근데 문제는 일단 도올이 번역만 했다 하면 우리는 알아먹을 수 없는 소리가 돼버린다는 거다. 그런 것을 가물타고 하다니? 도대체 뭐가 가물타는 것이고 가문 게 뭐야? 도올이 하는 소리를 주욱 이어서 한번 볼까? '욕심이 없으면 묘함을 보고 욕심이 있으면 가장자리를 보는데, 이 두가지는 같은 것이고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했으니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 하니 가물코 또 가물토다.' 이게 뭔 소린지 다 알지? 바로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다. 철학이리라는 게, 사상이라는  게 무식한 민초 골탕 먹이는 소리가 아니다. 누가 듣고 누가 보더라도 타당성과 합리성과 논리성과 유용성을 가진 이야기를 철학이라 하고 사상이라 한다. 도올이 번역해 놓은 것이 맞다고 치면 노자 철학이 철학이 될 수 있겠나? '현은 검을 혐' 이다. 그러나 검은 색을 가리키는 '흑' 자와는 쓰임이 다르다. 천자문의 첫 구절에 나오는 천지현황이란 말처럼 하늘의 색이고, 신비스러운 궁창의 색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붉은 빛을 띤 검은 빛으로 검붉은 빛이라 할 수 있으나, 빛깔이 짙어서는 무슨 색인지 구별이 안 가는 그런 색이다. 그래서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성질을 나타내는 색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것을 '가물한 색깔'이라고 표현해서 안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표현이 아니라 내용이다. '동위지현'을 직역하면 '검은 것으로서 같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검기는 마친가지다' 가 된다. 뭐가? 바로 이름을 붙이기 전의 그 무엇(도)이나 (도라고)이름 붙인 그무엇은 사람이 뭐라고 나발을 불든지 검기는 마찬가지니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도올은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고 한다'고 해 놓으니 이거 참 골 때리는 소리가 돼버린다. 뒷부분의 '현지우현' 은 더욱 기가 막힌다. 이 구절을 '가물고 또 가물타' 라고 해서 어쩌자는 거야? 그래 가지고 앞뒤가 연결이 되기나 하냐 말이다. 
 '현지우현'은 '이놈도 검고 저놈도 검다' 라는 말이잖아. 암만 한자를 제대로 몰라도 그렇지 이 정도의 한자를 갖고 번역조차 똑바로 못 하면 어찌 동양학을 하면, 어찌 노자를 갖고 설을 푼단 말이냐? 대책이 없다. 21세기가 걱정스럽다. 앞의 현은 묘의 성질이고 뒤의 우현은 요의 성질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고 묘를 보거나, 굳이 이름을 붙여서 요를 보거나 간에 이 두 가지가 검기는 마찬가지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이 검어서 양자는 결국 같다' 는 설명이다. 여기서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자기가 지금 '도'라고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것의 이름을 편의상 '도'라고 붙이긴 했지만 그 이름에 신경을 붙이고 보건 이름 없이 보건 그것이 검기는 마찬가지고, 이리 봐도 검고 저리 봐도 검은 놈이니 검은 것만 보면 되지 이름이 무슨 상관이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노자가 하고 싶은 말 즉 결론이 나온다. 중묘지문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름을 붙이든 안 붙이든, 묘를 보건 요를 보건 자기가 지금 도라고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이런 말이다. 제1장의 중심어는 '명'이고, 결론은 '도이중묘지문' 이다. '도는 모든 오묘함이 나오는 문이니라. 그러니까 그쯤만 알고 다음 설을 들어보란 말이야'하고 《도덕경》의 서두를 꺼내고 있음이다. 혹시나 사람들이 '도'라는 이름에 사로 잡힐까봐 노파심으로 서두에 못을 박아두는 것이다.《노자와 21세기》에서 도올이 해놓은 마지막 구절의 번역은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이다. 제1장에서 그래도 비슷하게 찍은 건 이 마지막 한 줄이다. 도올의 개그쇼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2장 3장으로 넘어가면 갈수록 골 때리는 개그가 나온다. 웃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봐야 될 거다. 계속 봐주자. 제2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제1장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자. 《도덕경》의 원문과 도올의 번역문과 내 번역문을 차례로 보면 무엇인가 느끼는 게 있을 거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차양자동 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도올번역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를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 했을 뿐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라고 한다. 가물코 또 가물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소감이 어떠냐? 저게 천하의 대 사상서라는 《도덕경》의 서문이란다.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먹을 수가 없지? 어찌된 글이 그래, 불과 13줄밖에 안 되는데 서로 연결되는 소리가 하나도 안 보이느냐 말이다. 13줄이 전부 딴 소리다. 글이라는 것이 앞줄의 내용을 받아 뒷줄로 이어져야지 줄마다 딴 소리를 하는 글이 어디 있나? 이래 놓고 이걸 가치로운 고전이라고 21세기 사람들 한테 내민단 말이야? 만약 이게 정말《도덕경》이라면 내가 뭐 할 짓이 없어서 도를 배우고자 하겠냐? 내가 노자를 좋아하고 《도덕경》을 탐독하는 이유라면 그 말들이 전부 도리에 맞고 이치에 합당하고 앞뒤가 딱딱 어울리는 고매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자의 말씀을 저렇게 조잡한 맹탕으로 둔갑을 시켜 갖고 사람들한테 팔아먹는 꼴을 두고봐야 되겠나 이 말이다. 제대로 된 구름의 번역을 보고 다음 장으로 가보자. 진짜 골 때리는 쇼가 벌어지고 있으니. 바른번역 도(는 그 이름을)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꼭(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이름으로 (어떤 것의)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우리가)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도의 이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묘함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인 후(도의 이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 (도 이전의 세계와도 이후의 세계가) 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 (도와 도 이전의 무엇은 같은 것이니라)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지금부터 그것을 말하려 하느니)라.
 
      제 2 장
  사실 시작 부분에서 보여준 도올의 개그는 과히 심하게 웃긴 건 아니었다. 개그쇼로는 함량미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다. 진짜로 웃기는 건 지금부터니까. 그리고 갈수록, 진도를 나갈수록 포복절도, 기절초풍, 어안 벙벙한 개그의 진수를 보여준다. 본 게임의 막을 올려보자. 제2장이다. 도덕경 제2장의 첫 줄은 다음과 같다.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딱 보니까 벌써 걱정이 되지? 서너 글자밖에 안 되는 짧은 문장도 제대로 못 읽는 우리의 도올이 이렇게 긴 한문을 어찌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팍 되지. 하지만 도올이 누구냐? 이 시대의 석학 아니야? 찍기의 천재. 도올이 해놓은 번역을 먼저 보자. 배꼽들 조심하자.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벌써 골이 띵하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천하 사람들이 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이 추하다니? 우리 노자가 노망 들었다는 소리야? 천하 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아름다운 것은 노자가 봐도 아름다워야 하는 게 정상이다. 맞지? 그런데 저 혼자 추하다고 우기는 것은 사상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그냥 노망일ㅈ 뿐이다. 도올은 노자를 망령 난 할방구로 만들고 있다. 노자건 공자건 우리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게 진리다. 
 안 그래? 그런데 그것을 아니라고 우기는 게 위대한 사상일까?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이지. 진리는 상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상궤를 이탈한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사이비 종교가 사이비인 것은 모두 그 주장하는 바가 상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제2장의 첫 줄은 서두의 첫 구절과 마찬가지로《도덕경》 전체를 파악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문장이다. 이 문장 속에 《도덕경》의 열쇠를 푸는 키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뭔지 못 보는 사람이 노자를 떠들어서는 안 되는 거다. 그 열쇠는 바로 '위'라는 한 글자이다. 노자는《도덕경》전체를 통틀어 '위' 라는 글자를 대부분 한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물론 뒤에 가면 예외적인 사용도 있긴 하다). 이 '위' 의 뜻을 모르고《도덕경》을 읽고 자빠지면 도올의 번역처럼 첨부터 끝까지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만 하든가,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만 하게 된다. 원문 번역도 똑바로 못 하는게 책에서 한 소리 함 봐봐. 
 《노자와 21세기》를 보면 말이지, 자기가 중국에 갔을 때 꾸꽁(대 동양학자는 고궁을 꼭 꾸꽁이라 발음한다는 것도 새겨두자. 왕필이라 하면 무식하다 소리를 들으니까 가급적 왕삐라고 하고 공자도 꽁쯔라 해야 사람들이 우러러 본다)을 다니던 회상이나 백거이의 시가 어쩌고 지 자랑을 주절거린 담에 양귀비하고 서시에 고갱의 그림에서 타히티의 여인들까지 들먹이면서 횡설수설을 한참하고 있는데 당최 노자 이야기하고는 연결이 안 되는 잡소리들이다. 그렇게 약장사 사설을 줄창 늘어놓고는 하는 소리가 이렇다. 노자는 말한다 "천하의 사람들이 아름다움의 아름다움 됨 만을 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최소한 4∼5세기 이전에 이러한 철학적 주제가 이미 충분히 논의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하면서 감탄하고 있다. 
 '철학적 주제?' 그래서 이 문장을 해설하면서 객관주의니 주관주의니 하는 골치 아픈 소리들을 잔뜩 했던 거였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참으로 포복절도할 명강의를 내밀고 있다. 노자의 언어는 경이롭다. 노자는 미의 상대어로서 '추'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미의 상대어는 오인 것이다. 중국 고대어에서는 악를 모두 요새 우리가 생각하는 '악'으로 읽어서는 아니된다. 악은 악이 아니라 오인 것이다. 오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싫음'이요, '추함' 이다. 다시 말해서 '악'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노자와 21세기》 상권 122쪽 상단. 나는 노자보다도 도올의 언어가 더 경이롭다. 어쩌면 저렇게 횡설수설을 잘할 수 있는지 탄복치 않을 수가 없다. 하기사 도올이 대천재요 기린아로 극찬해 마지않는 왕필, 앗 나의 실수, 왕필이 아니라 왕삐다. 그 왕삐부터가 만만치 않다. 저 해설 뒤에 도올이 천하의 명주라고 소개해놓은 왕삐의 주도 번지수를 잘못 찾기는 마찬가지니 그 주를 보고 공부한 도울한테서 무슨 신통한 해설이 나올수 있겠느냐 말이다. 애달픈 일다. 왕삐가 했다는 천하의 명주를 한번 보자. 미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나아가 즐기는 바의 것이요, 악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바의 것이다. 《노자와 21세기》상권 122쪽 중단 왕삐가 노자의 주를 단 것이나 나이 스물이 되기 전이라 하는데, 십대 소년이 저 정도 쓰면 대견타 할 만은 하겠으나 무슨 천하의 명주씩이나 되고 천재씩이나 되는 양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가 안 됨이다. 
 왕삐의 저글조차도 노자의 글을 제대로 못보고 쓴 것이니 '천하의 명주' 란 것이 저럴진대 도올의 해석이야 일러 무엇하리요, 아니겠나? 우리가 외국 글을 우리말로 옮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원저자의 의도하는 바에서 벗어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원저자의 의도와 원문의 뜻을 벗어나서 역자의 생각을 펴쳐놓는 것은 번역이나 해설에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노자의 생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오라고 멋대로 바꾸는 것은 허락될 일이 아니다. 그것을 바꾸기 전에 노자가 왜 악이란 글자를 사용했는지 생각하는 게 바른순서다. 
 위의 문장에서 악은 미의 반대어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도올이 여기서부터 왜 헛다리를 짚고 시궁창에 처박히게 된 것인지 살펴보자. 도올은 여기서 실족한 다음부터《도덕경》의 마지막 끝 글자가 끝날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린다. 중학생을 붙잡고 노자사상이 뭐냐고 물어봐도 '무위사상 아닙니까?' 정도의 대답은 듣는다. '무위'는 노자사상의 상징어다. 그런데 무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찌 노자를 강의할 수 있다는 말이냐? 소가 웃을 일 아니겠나? '위' 자의 의미를 모르는데 무위를 어찌 알겠느냐 말이다. 노자는 제1장에서 '도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2장으로 넘어오면서 곧바로 '위'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노자가《도덕경》을 써나간 순서는 대단히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다. 
 제2장의 첫 번째 줄은 바로 '위'에 대한 설명이지, 아름다운 게 아름답고 추하고 이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생각 좀 해봐봐. 제1장에서 도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설명했잖아. 그럼 그 다음에 무슨 소리가 나와야 되겠어? 자기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그게 본론이잖아. 그런데 갑자기 아름답고 추하고 이딴 소리가 왜 나오냐 말이다. 글을 그렇게 쓰면 유치원생잊 사상가겠어? 제2장의 첫 줄은 바로 노자사상의 핵심인 '위'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느니 추하게 보느니 해대고 엉뚱한 소리나 늘어놓으니 노자가 억장이 막혀 돌아가실라 한다. 노자 딴에는 앞으로 자기가 계속 써야 될 '위'라는 글자에 대한 의미를 헷갈리지 말라고 고심고심해서 알아듣기 좋도록 예문을 적어줬더니 얼레! 알아봐야 될 '위'자는 쳐다보지도 안 보고 '미'자나 '악'자를 갖고 악다구를 해대니 이게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암만 노자가 쉽게 써줘도 돌대가리들한테는 소용이 없다. 《도덕경》의 원문으로 함 가보자. 우선 '천하개지미지위미'부터 보자. '개'는 '모두 개' 니까 '천하개지' 는 '온 세상이 다 안다' 는 뜻이다. 뭐를? '미지' 니까 '아름답다는 것을' 이다. 그러니까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는 말이다.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문제의 두 글자가 있다. 바로 '위미' 다. '위' 자는 '만들 위' '꾸밀 위' 다. 
 그러니까 '위미'는 '꾸며진 아름다움' 이다. 이제 감이 잡히지? 그러니까 저 문장의 올바른 의미는 '온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꾸며진 아름다움이다' 라고 옮길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사악이' 라고 했다. 즉 '그것은 나쁜 일이다' 이다. 이 한 줄만 가지고는 혹시 부족해서 헷갈릴까봐 노자가 또 한 줄을 써놨다. '천하개지 선지위선 사불선이' 라. '천하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알고 있는 것이 실은 꾸며진 선(위선)이니 이것은 불선이다' 《도덕경》 전체를 보고 나면 자연히 알겠지만, 노자는 아름다움과 착함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추함과 악함을 멀리하지도 않는다. 노자는 미추와 선악의 구별 자체를 싫어 한 사람이다. 뒷장에 가면 '너와 나의 거리가 얼마이며, 선과 악의 거리가 얼마이냐?' 라는 말이 나오는데 노자는 미추와 선악을 함께 인정하고 수용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노자가 가장 경계했던 것은 바로 '위'다. 악을 멀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위선을 멀리했고, '추'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위미'를 미워했다. 자연이란 '저절로 그러함이고' , 무위는 '있는 그대로' 이다. 그래서 '무위자연' 이란 '있는 그대로, 저절로 그러함'을 맗한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대로, 못난 것은 못난대로, 착한 것은 착한 대로, 악한 것은 악한대로, 세상 모든 것이 지 생겨먹은 그대로 '저절로 그러한 상태' 가 바로 노자가 말하는 도의 상태이다. 
 선악미추가 모두 있는 그대로 저절로 그러해야지 위선, 위악, 위미, 위추가 있어서는 아니되겠다는 이야기다. 만약에 세상 모든 일에 '위' 가 끼여 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설명한 내용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이 첫 두 줄을 엉터리로 번역해 버리니까 이어서 나오는 소리들이 또 연결이 안 된다. 도올의 번역을 맞다고 치면 제2장은 처음 두 줄이 같이 놀고 이하 구절들은 전혀 엉뚱한 소리가 되고 만다. 
 하나의 장 안에서 여러 문장이 문맥상 연결이 안 되고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면 이런 것을 어찌 책이라고 읽고 않았냐? '위' 라는 한 글자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 노자가 5처자 가운데 스물세 글자나 투자를 했는데 제일 중요한 '위' 는 갖다버려 버리고 번역을 하니 노자의 말이 완전히 노망든 노인의 헛소리가 돼버리지. 《도덕경》에서 노자는 이 '위'를 '꾸며놓은 것, 가식해 놓은 것, 위장해 놓은 것, 사실과 다르게 만들어 놓은 것' 이라는 의미로 일관되게 쓰고 있다. 
 그리고 이 글자가 이런 뜻으로 쓰인 문장은 대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구절이라서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도덕경》을 번역하면서 《도덕경》 전체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중심어를 빼먹은 번역을 어찌 번역이라 말할 수 있나? 도올은 여기서 노자가 전해주는 '위'의 의미를 놓치고 만 까닭에《도덕경》 전체의 번역을 엉터리로 하게 되는 것이다. 
 '무위'란 꾸미지 않은 상태,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인데, 도올은《노자와 21세기》에서 시종일관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이란 뜻으로 풀고 있다. 즉 '무위'를 '무행' 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노자강의' 가 개그쇼 가 될 수밖에 더 있나 말이지. 계속 가보자. 노자는 미와 위미, 선과 위선이 들어간 문장을 두 개나 써서 위에 대한 용례를 보여줬다. 그래서 아마도 후대 사람들이 '위' 라는 글자의 뜻을 헷갈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런데도 도올이 같은 까막눈들이 나올 거라고 짐작이나 했겠나? 불쌍한 노자 할아방. 이건 노자의 잘못이 아니다. 노자는 혹시나 남이 이해를 못 할까, 잘못 알아듣지는 않을까 세밀하고 섬세하게 살펴서 그런 오해가 없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글 속에 마련해놓은 사람이다. 그래도 못 알아먹는 거야 어쩌겠나? 그거야 읽는 사람 잘못이지. 
안 그래? 쓰는 사람이 그 이상 어떻게 해줄 수 있나? 《도덕경》은 앞줄을 못 알아들으면 다음 줄의 번역이 안 된다. 그 좋은 예가 여기 제2장이다. 다음 문장들을 보자. 고유무상생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도올이 그래도 동양학을 전공했다는 학자고 칠판에 한자를 써가면서 강의하는 사람 아닌가. 
 물론 한번씩 한자가 기억이 안 나서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 정도는 번역할 수 있다. 도올을 너무 무시하면 안 된다. 정말로 대견스럽게도 멋지게 풀어놨다 말이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어떠냐?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 거 같지 않나?
  맞다. 제대로 하긴 했다. 그런데 그걸로 다가 아닌 거서이 문제지. 한자를 풀기는 풀었는데 도대체 이런 소리가 여기에 왜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는 거다.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거나 선하다고 알고 있는 것이 추하고 선하지 않은 것이다' 해놓고 그 바로 뒤에는 있고 없고, 어렵고 쉽고, 길고 짧고가 나오니 이게 서로 연결이 안 되는 거야. 
 그러니 온갖 잡소리만 실컷 늘어 놓고는 이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이 다음 장으로 도망가버리고 말았지. 내가 TV에서 저 강의하는 것을 보니까 이런 데서 막혀서 지 혼자 낑낑거리고 고민하는 모습이 눈에 선해. 우리 도올이, 불쌍한 도올이. 하긴 우리 도올만 그런 게 아니고《도덕경》을 해설했다고 하는 책들이나, 노자를 연구한다는 세계의 전문가들도 다 마찬가지다. 문장의 글자는 알아보지만 이런 말들이 하필 왜 이 자리에 갑자기 끼여드는 것인지 아는 사람이 없는 거야. 
 앞줄하고 뒷줄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니까 그냥 어물쩍 넘어가 버리고 마니까 노자의 책이 웃기는 만화책이 돼버린다 이 말이다. 그러나 이 문장이야말로 이 대목에서 꼭 필요한 내용이며, 노자가 왜 위미와 위선을 악과 불선으로 기피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는 대목인 거야. 노자가 여기서 하고 있는 말을 정리해줄게. '유가 있어야 무가 성립이 되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 수 있고, 높은 것이 있어야 낮음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약에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놓고 사람을 속이면 진짜 없음이 나타날 수가 없고, 
 실제로는 짧은 것을 긴 것처럼 꾸며놓고 속이면 진짜로 긴 것이 긴 줄을 모르게 된다. 이것을 미와 선에 소급해서 말하면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꾸며놓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으로 믿게 만들면 진짜 아름다운 것이 드러날 수가 없고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한 것처럼 꾸며서 속이면 진짜 선한 것이 선한 줄을 모르게 된다. 그러하므로 아름다움을 지어내거나 선을 가장하는 것은 나쁜 짓이니라. 
 -악, 불선 이게 바로 노자가 유무, 난이, 장단, 고하, 음성, 전후를 죽 나열해 말한 요지다. 첫 두줄과 이 대목을 제대로 연결해서 읽지 않으면 이 뒤에 따라오는 문장들도 따로 놀아버린다. 
 서로 문맥이 이어지지를 않아. 《도덕경》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가느다란 실 하나로 길게 길게 이어진 문장이어서 중간에 끊기거나 잘라먹으면 이을 수가 없는 거야. 도올이 해놓은《도덕경》의 해설은 5천 자 길이의 실을 5천 개의 짧은 토막으로 잘라놓은 것이어서 그냥 실밥 찌꺼기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아. 도대체 TV에 낯짝을 비추면서 노자를 강의하겠다고 나서는 베짱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모르겠어. 
 오래전, 내가 어렸을 때 다락방을 정리하면서 누렇게 색이 바랜 데다가 크기는 수첩만한데, 표지 뒷면에 소화13년에 인쇄했다고 적힌 책을 하나 발견했다. 
 왜넘들이 찍은《도덕경》이었다. 해석도 없고 풀이도 없이 한자로 적힌 원문만 빽빽한 조잡한 책이었는데 그것을 읽다가 소녀시절에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영혼을 두드리는 북소리가 들렸고 마음의 심연을 흔드는 폭풍이 일었다. 그야말로 무수한 생과 생을 넘어 찾아온 고향을 눈앞에 보는 기분이었다. 노자의 순진무구하며 티끌 한 점 없는 그마음의 경계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한 구절 한 구절 얼마나 심금을 울리는 명문들인가? 그 어떤 명작 소설이 그토록 아름다우며, 어떤 경전이 그토록 마음을 깨끗이 해준단 말이냐. 《도덕경》의 글들을 보면 눈물이 그냥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나도 그런 글을쓰고 싶었다. 평생을 걸고 시이성인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그래서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서 꾸미지 아니하며, 말없이 행동으로 가르친다.' 노자의 다음 말씀이다. 성인이 별 게 아니다. 꾸미지 않고 떠들지 않고 행동으로 가르치는 게 성인이다. 어쩔수 없이 우리는 도올의 번역도 봐줄 수밖에 없다. 슬픈 운명이다. 도올 번역하여 가라사대 '그러하므로 성인은 함이 없음이 일에 처하고 말이 없으믜 가르침을 행한다' 라고 풀어놓았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한다' 는  게 도대체 뭔 소리야? 나는 당최 무식해서 도올이 하는 말은 알아먹지를 못하겠어. 동양학이 이렇게 골치 아픈 거면 누가 그 짓을 하겠나? 성인은 일을 할 때 말로써 꾸미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소리를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고 하니 어이가 없지. 번역은 그렇다 치고 해설해 놓은 꼬라지를 보면 더욱 가관이다. 
 무위를 '함이 없음' 이라고 해놓고는 몇 줄 횡설수설한 다음에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무위란 노자철학의 핵심적 사상을 이루는 개념으로 통상 유위와 대비되는 것이다. 무위는 '함이 없음' 이다. 그렇다고 무위가 곧 아무것도 하지않음(actionless)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위는 곧 무위다. 무위의 '위' 는 유위적이고 조작적인, 도의 흐름에 배치되는 사특한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위선적인 행위이며 거짓적인 행위이며, 독선적인 행위이며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적인 행위이다. 
 당연히 모든 사회의 리더는 그러한 조작적인 인간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거서이다. 그리고 리더는 잔일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작은 일에 집착해서는 아닌 되는 것이다. 
 리더는 자기는 함이 없이 남으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말하는 무위인 것이다. 《노자와 21세기》 상권 131쪽 하단. 참말로 황당하다. 
 노자의 위 를 '무엇을 하는 것' 즉 행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그 순간부터 노자하고는 빠빠이다. 노자의 생각은 고사하고 뒤퉁수나 발꿈치도 볼 수 없다. 노자의 위는 '꾸밈이 있는 것'이고 무위는 '있는 그대로' 를 의미하는 말이다. 뭘 하고 안하고의 뜻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무위요 추한 것이 있는 그대로 추한 것도 무위다. 선한 것도 무위요, 악한 그대로 드러난 악도 무위다. 노자는 미추와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추한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위장되거나 악한 것이 선한 것을 가장하는 것을 유위라 하여 멀리할 뿐이다. 
 선악미 추장단고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은 모두 무위인 것이다. 위란 꾸밈이요, 무위는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남이다. 위의 난삽하고 구질구질한 도올의 정의는 위를 잘못 알고 있는 데서 나온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본 것 같이 도올은 노자가 흑이라 하면 자기는 백이라 하고 노자가 오른쪽으로 가라 하면 왼쪽으로 간다. 그것은 청개구리 띠라서 그런 게 아니고 위의 의미를 몰라서다. 위를 모르는 노자철학의 대가가 노자강의를 하는 방송을 우리는 보았다. 도올은 근본적으로 노자를 잘못 알고 있으며 전혀 모른다. 
 도올이 해놓은 대로 자기는 함이 없이 남으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게 무위라면, 그리고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 무위의 도를 깨친 성인이라면, 성인은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기꾼이라야 한다는 소리다. 그렇지 않은가? 자기는 안 하면 남을 부려먹으려면 달콤한 말과 이익으로 꼬시거나 힘이나 거친 말로 위협하는 수밖에 더 있나? 
 그게 어찌 노자가 말하는 무위가 되며 그런 사람이 어찌 성인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오히려 노자는 그렇게 말로 꾸며서 사람들을 속이지 말고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 가르치라고 권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행불언지교' 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 가 아니라 '하라' 고 말한다. 하되, 말로 꾸미거나 속이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말하고 있다. 노자사상의 핵심은 바로 이 행에 있다. '무위의 행' 이것이 바로 노자사상이다. 꾸미고 지어내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함이 바로 무위의 행이다. 말로 속이고 말로 사람을 부려먹지 않고 스스로 실천 하는 행이 바로 무위의 행인 것이다. '무위'를  '함이없음' 이라고 받아들이면 대책이 없다. 기왕에 시작한 거니 끝까지 가보자. 도올한테는 좀 어려웠을지 몰라도 지금까지 나온 한자들은 그래도 좀 쉬운 글자들이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생소한 글자들도 막 나오기 시작한다. 
 이걸 어쩌면 조하 그래, 얼마나 웃길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다음 문자은 이런 건데 우리의 희망,21세기의 등불 도올의 강의를 따라가 보자.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도올 가라사대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고…' 
 딱 나오는 폼이 끝까지 옮기기도 귀찮게 만든다. 스스로 자라는 만물을 보고 성인이 할 짓이 없어서 간섭을 해? 번역이랍시고 해놓은 것마다 어찌 이리도 개판이야? 지금이 21세기 국민의 정부 시댄데 저 혼자 자유당이다. 이정도 진도가 나갔으면 한 줄 정도는 맞는 게 나와야 되지 않겠어? 내가 끝까지 두고 봤는데 끝까지 틀리는 거야. 
 기가 막혀서, 정말.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속으로 도올이 딱 한 줄이라도 제대로 하면 예쁘게 봐주자 결심했다. 그런데《도덕경》 5천 글자를 다 풀 때까지 끝끝내 그 한 줄을 못 맞추는 거야. 근데 내가 어찌 예뻐해줄 수가 있느냐 말이다. 내 살다가 이런 애 첨 본다. 우선 '만물작언이불사' 다. 
 여기서 사 자는 '말할 사' 다. 그러니까 '불사'는 말하지 않는다. '또는 말이 없다' 란 뜻이다. 엄청 쉽잖아. 
 이걸 못 읽는다는 게 나는 이해가 안 된다. 도올은 혹시 작 이라는 글자 때문에 헷갈렸나 생각도 해본다마는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작'은 '짓다' '만든다' 는 뜻이잖아. 행과 같은 의미로 봐도 무방하지. '언'은 '어찌 언' 인데 문미에 쓰일 경우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 거고. 그러면 다 끝났잖아. '성인은 만가지 사물을 만들지라도 말로 떠들지 않는다. 
 즉 자랑삼지 않는다. 공치사를 하지 않는다' 이런 뜻이지. 이것도 못 읽어서 뭐라?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다' 고? 참말로 육갑도 여러 가지로 떤다. 《도덕경》을 강의하지 말고 차라리 《도울경》을 짓는 게 낫겠다. 노자의 저 이야기를 조금 바꿔 말하면 '아무리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해낸다 해도 말로 자랑치 않고 실천으로써 행한다' 가 되는 거다. 
 그 담에 나오는 말이 뭐야? '생이불유' 네. 이런 글이야 중학생도 해석할 수 있는거 아니야? 이 정도 한자 못 읽고 고입 시험 패스할 수 있나? 어려운 글자가 뭐 있느냐 말이다. '날 생' 모르는 사람 있나? '아니 불' 모르는 사람도 없지? "있을 유'를 모른다고? 장난은 치지 말고 다 아는 글자잖아? '이' 자는 첨 보냐? 그건 그냥 접속사다. 
 몰라도 관게없다. 글자 그대로 따라 읽으면 되잖아. '나긴 났느데, 있지가 않다' 이러면 해석 끝난 거잖아. 문장이 조금 이상해? 그럼 조금만 다듬어 보지 뭐. '있지 않은 듯이 났다.' 이러면 약간 뜻이 통하는가? 그래도 이상해? 조금 더 비틀어 볼까? 없는 듯이 산다' 는 어때? 이게 정답이다. 한 번만 더 비틀면 아주 쉬운 말이 된다. 
 '생이불유' 즉, '살면서도 없는 듯하다' 는 뜻이다. 우리 주위에서도 드물지만 이런 유의 사람을 가끔 만날 수 있다. 함께 있으면서도 말로 떠들거나 다투는 법이 없이 항상 조용하게 자기 일만 성실히 하는 사람이다.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없는 듯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성인의 사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러면 우리의 우상 도올이 뭐라 해놨나 봐야지. 도올은 이 '생이불유'를 '잘 생성시키면서도 그 생성의 열매를 소유함이 없고' 라 해놨다. 미칠 노릇이다. '생' 이란 글자가 어찌 '잘 생성시키는' 으로 해석이 되며, '있을 유'가 어찌 소유라는 말로 둔갑을 하느냐 말이다. '생이불유' 란 '살면서도 없는 듯하다' 는 말을 '잘 생성시키면서도 그 생성의 열매를 소유하지 않는다' 고 해대니까 내가 더 상대해주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시는 거 있지. 내가 더 이상 도올이한테 눈높이를 맞출 방법이 없다.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없는 듯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성인 의 사는 모습' 이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난데없이 웬 소유가 여기서 나오니? 노자의 가르침 중 핵심적인 것이 바로 '살면서 튀지 마라' 는 당부다. 잘난 척 튀지 말고 파묻혀 없는 듯 사는게 만수무강의 첩경이라는 것이다. 도올처럼 쥐뿔도 모르는 게 너무 튀면 언젠가는 호되게 두들겨 맞는다는 경고를 내포하고 있다. 하긴 도올은 뜻도 모르고 읽고 앉았으니 배울 게 있었겠나? 《도덕경》만 들여다보면 뭐 하나? 노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본을 받아야지. 이 다음 줄에 가면 더 골 때린다. 계속 보자. 내가 도올이TV에서 하는 강의를 몇 편 보다가 처음에는 웃었지. 
 근데 나중에는 기가 막히다가 실실 부아가 나기 시작하는 거야. 저걸 세상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말이지 거기다 대고 황당무계한 소리만 하고 자빠지니 이걸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고, 참 돌아가겄더라고 그래서 내가 서점에 가서 그놈의 《노자와 21세기》를 사왔다는 거잖아. 돈이 아까워 죽겄더라. 
 내가 읽을 필요도 없는 책을 생돈 주고 사보기는 첨이다.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함 봐봐라. 우리 도올이 갈수록 태산이다. 이 '위이불시'를 갖고 뭐라 해놨는가 하면 '잘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 라고 해놨다. 얘가 도대체 한자를 알고 설을 푸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어. 일단 '공성이불거' 까지 볼까?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 살지 않는다' 고 완전히 흉몽 중에 칼부림이다. 잠꼬대 하고 있다. 
 앞서 말했다시피 '위' 라는 글자는 《도덕경》 전체의 중심어 역할을 하고 있는 글자다.  '만들 위' '지을 위' 다. 그런데 노자는 이 책 속에서 위라는 글자를 좋은 의미로 사용한 적이 별로 없다. 
 언제나 '(허위로)꾸며낸다' '(거짓으로)지어낸다' 또는 '가식한다' 따위의 의미로서, 그렇지 말아야 할 불선과 악의 원인 내지는 근원으로 보고 있다. 해서 노자는 무위를 지향해야 할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지. 《도덕경》에서 가장 중요한 한 글자를 고르라고 하면 바로 이 위자가 정답이기 때문에, 《도덕경》을 볼 때 이 글자가 사용되어 있으면 한 번 더 유의해서 살펴봐야 된다 말이다. 위 문장에 이 위가 첫머리에 나오잖아. 
 그럼 이게 뭔 말이겠나? '위이불시' 는 바로 '꾸며대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주어는 '성인' 이다. '성인은 자기 일을 할 때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살아가기를 마치 없는 듯이 하며, 꾸며서 지어내는 거서에 의존하지 않는다' 잖아. 즉 성인은 자기를 내세워 자랑하지 아니하고, 드러내지 아니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지 결코 꾸미거나 지어내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위라는 글자를 '잘되어가도록 한다'는 뜻으로 번역을 하게 되면 노자의 사상은 무위 지향이 아니라 유위 지향의 사상이 돼버려. 무위 란 '잘되어가도록 함을 없앤다' 는 뜻이 될 터이니 이게 무슨 철학이요 사상이 되겠느냐 말이다. 내가 번역이 더러 이상한 책은 봤어도 이렇게 말뜻을 정반대로 써놓고 번역을 했다고 육갑을 떠는 인간은 도올말고는 본 적이 없다. 
 사상이고 나발이고 인간사 모든 것이 잘되자고 하는 일인데 잘되도록 해주는 것을 없애자는 말이 어찌 사상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느냐 말이다. 노자는 사상가지 결코 노망든 영감탱이가 아니다. 노자를 평생 연구하고 강의까지 하면서 살아왔다는 인간이 노자를 망령 난 노인으로 만들고 있는데 내 눈에 어찌 불이 안 나겠어? 
  '공성이불거' 도 마찬가지.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 살지 않는다'는 해석이 명색이 학자란 인간이 내놓을 물건인가? 왕삐야 당시 나이가 중학생 정도였으니 봐줄 수 있다. 
 그 정도 나이에 그만한 답안이면 칭찬을 받을지언정 꾸지람 들을일은 없다. 그러나 명색이 교수요, 학자요, 자기 말대로 불혹의 나이를 10년도 전에 넘긴 사람이 저런 답안을 내면 안 되는 거다.  
저 문장에서 거 자를 '살 거' 로 읽으면 바로 다음 문장의 해석이 불가능해진다. '살 거'가 아니라 '쌓을 거' 로 읽어야 한다. 문맥상의 뜻으로 보면 '차지한다' 라는 의미가 더 어울릴 수 있다. 즉 '공을 이루어도 그것을 쌓아두지 않는다' 또는 '차지하지 않는다' 이다. 왜 '살 거' 가 아니고 '쌓을 거' 라야 하는지 다음 문장을 보면서 설명하자. 부유불거 시이불거 틀렸을 것이 뻔한 도올의 해석을 먼저 보자.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지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서 제대로 된 번역은 '대저'와 '오로지' 뿐이다. 앞 문장까지는 주어가 '성인' 이었지만 마지막 문장의 주어는 바로 '공' 이다. '공을 쌓아두지 않기(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이) 떠나지 아니한다 (없어지지 않는다 또는 흩어지지 않는다)' 라는 글이다. '성인이 공 속에 살지 않아서 영원히 산다' 는 그런 괴상망측한 소리가 노자하고 어울리기나 한가? 《도올 역 노자》에는 말이 되는 소리가 하나도 없다. 저리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갖고 몇 달 동안 TV 강의를 하고도 들키지 않고 흥행까지 대박을 터뜨리는 것을 보면 역시 대한민국은 이상한 나라다. 여기서 하나 소개하고 넘어가야 될 일이 있다. 나는 도올이 어떻게 '생이불유' 라는 말을 보고 소유하니 마니 하는 소리를 하게 됐을까 궁금했거든. 근데 알고 보니까 이걸 러셀이라는 양코배기한테서 커닝한 거더라 이 말이지. 배꼽이 빠질 노릇이다. 지 책에 보면 러셀이 노자 말씀을 영역했다는 것이 소개가 되어 있다. 한번 같이 볼까? 
 생이불유 : production without possession(소유 없는 생산), 위이불시 : action without self-assertion(자기 주장 없는 행동), 장이부재 : development without domination(지배 없는 발전). 황당하기는 진배없지만 그래도 도올보다는 러셀이 약간 수준이 늪지. 그래도 그렇지, 다른 거면 몰라도 '노자' 를 양코배기가 어찌 안단 말이야? '나서서 까불지 말고 없는 듯이 살아라' 는 말을 '소유 없는 생산' 이라고 영역을 해놓으니까, 
 양코배기 학자라고 하면 또 끔뻑 죽는 도올이 그걸 보고 그대로 베껴 갖고 써먹는다는 거잖아. '꾸밈에 의지하지 않는다' 말을 '자기 주장 없는 행동' 이라고 풀면 노자 할아방이 설 자리가 없다. 
 나도 러셀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러셀이 뭔 노자를 해설한다 말이야. 우리가 기대할 걸 해야지. 그래, 노자 말씀을 우리가 못 알아듣고 양넘한테서 답을 빌려온다 말이야? 우리 학문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돼? 세종대왕이 통곡하시는 소리가 안 들리나?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고유무상생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도올번역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선한 것이 선하다고만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고 잘 생성시키면서도 그 생성의 열매를 소유함이 없고 잘 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 살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그속에 살지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우리가 문장에서 '그러므로' 라는 말을 쓸 때는 그 앞의 문장에 '그러한 이유' 가 나와야 하고 그 이유와 뒷 문장의 '어떠하다' 가 논리적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이건 초중학생 논술지도에서나 나올 얘기인데 명색이 노자사상을 논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서글픈 일이다. 그런데 현재 나와 있는 《노자 도덕경》의 해설을 볼라치면 앞글과 뒷글이 따로 노는데다가 논리적인 연결이라고는 전혀 안 되고 있는데도 오히려 그런 점을 견강부회 억지점철로 끼워 맞추어 노자사상의 심오함이 그런 데 있기나 한 것처럼 혹세무민하는 학계의 현실을 볼 때 아무리 좋은 말로 점잖게 말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만든다. 
 도올 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도올은 억울할 수도 있다. '쓰바,' 나만 그랬냐? 딴 놈들도 다 나하고 비슷하게 해석들 해왔는데 왜 나만 이리 모질게 두들기냐? 고 원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말도 있고 긁어 부스럼 만든다는 소리도 있고, 가만히 있으면 50점은 받을 텐데 나서서 빵점 받는다는 소리도 있잖아. 
 우리나라에서 노자를 내놓고 팔아먹은 사람은 도올이 첨이다. 그러니까 도올이 시범케이스로 매를 맞을 수밖에 없지 않나? 사설은 그만 줄이고 2장에 대한 내 번역을 보고 3장으로 진도 나가자. 
 바른번역 세상 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꾸며진 아름다움이면 이것은 악한 짓이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 선함을 가장한 것이면 이것은 불선이니라. 없음에서 있음이 생기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게 되고 긴 것을 두고 짧은 것을 재는 법이며 높은 것과 견주어 낮은 정도를 보고 소리와 비교해서 음악을 알아듣고 앞이 정해져야 뒤가 따를 수 있음이니라. 
 (만약에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답게 지어내거나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하게 꾸미거나 어려운데 쉬운 것 처럼 가장하거나 짧은데도 긴 것처럼 속이거나 낮은 것을 높은 것처럼 과장하거나 소리를 음악이라고 우기고 앞과 뒤가 헷갈리면, 세상 사람들이 진실로 아름답고 추한 것과 선한 것과 악한 것과 있고 없음과 길고 짧음과 어렵고 쉬운 것과 높고 낮음과 음악과 소리의 구별을 하지 못하며 무엇이 앞이고 무엇이 뒤인지를 알지 못하나니) 그러한 이유 때문에 성인은 꾸미지 않고 일을 처리하며 말없이 가르침이 되게 실천하며, 
 천하 만물을 자기 손으로 만든다 해도 떠들어 자랑삼지 않는도다. 살면서도(드러내지 않기를) 없는 듯이 하고 꾸며서 지어내는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차지하지 않음이니, 대저, 오로지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이 없어지지 않느니라.
 ]
      제 3 장
  이제《도덕경》 제3장이다. 노자의 말씀은 더욱 깊어지고 도올의 개그도 더욱 웃기는 도를 더해간다. 첫 구절부터 보자. 불상현 사민부쟁 이 정도에서는 설마 한 줄 정도는 맞겠지 하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겠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 도올이 첨으로 제대로 맞춘 게 이 구절이다. 3장부터는 출발이 좋아서 지금부터는 도올이 뭔가를 보여주려나 보다 기대를 하게 만든다. '상' 은 '높일 상' '숭상할 상' '우러르 상' 이다. 그러니까 '상현' 이란 말은 '현명함을 높이 산다' 는 의미다. 이때는 현명함이나, 유식함, 똑똑함 등을 총칭하는 것으로 봐도 되겠고, 현명한 사람, 유식한 사람의 뜻으로 읽어도 큰 문제는 없다. 그래서 번역을 하면 '현명함(또는ㄴ 현명한 사람, 현자)'을 높이 받들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투지 않게 된다' 가 된다. 똑똑하고 유식하고 현명한 것을 높이 사는 사회는 경쟁사회다. 
 똑똑하고 아는 것을 서로 재고 경쟁해서 보다 잘난 놈이 위로 가는 세상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자연히 경쟁과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세상은 이러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지금의 우리 기준으로 보면 아프리카나 인도네시아의 오지에나 가야 똑똑하 게 별 볼일 없는 동네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내용보다는 우리의 도올이 이렇게 어렵고도 긴 문장을 제대로 읽었다는 사실이 더욱 기쁘다. 다음 줄도 제대로 읽어주면 얼마나 좋겠냐? 맞게 해놨는지 함 볼까? 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궁금하니까 도올의 답지를 얼른 보자. 뭐라고 해놨냐 하면.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말라!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이 되지 않게 할지니' 라 해놨네. 역시! 도올은 천재다. 21세기를 걱정할 자격이 있다. 한자 참 잘 읽는다. 
 도대체 이렇게 읽는 한문이 어디 있단 말이야? 우선 띄어읽기를 제대로 못 하니까 문장이 웃겨진다. 이 쉬운 문장을 하나같이 '불귀 난득 지화' 로 엉터리로 읽고들 자빠진다. 이 문장의 올바른 읽기는 '불 귀난 득 지화' 다. '얻기 힘든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마라' 고 하면 
 이게 말이 되는 쇠냐? 귀하니까 얻기 힘든 재화지.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 같으면 그게 '난득지화' 일 수가 있느냐 말이다. 얻기 힘든 재화를 귀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귀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난득지화' 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얻기 힘든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마라' 는 말은 그 자체로서 모순이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맞지? 여기서의 '화' 라는 것은 보물을 말하는 글자가 아니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 재화를 뜻하는 글자다. 만약에 '얻기 힘든 재화' 의 의미가 
귀한 보물과 같은 뜻이었다면 '난득지보' 라고 썼을 것이다. 한번 누군가가 '난득지화' 라고 읽어버리니까 2천5백 년 동안 '난득지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고정관념이란 이렇게 무섭다. 한번 굳어진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불귀 난득 지화' 가 아니라 '불 귀난득 지화' 이다. '귀난득' 은 '귀하고 얻기 어렵다' 는 말이다. '불' 은 '귀' 와 '난득' 의 양자에 똑같이 붙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풀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불귀, 불난득' 즉 '귀하거나 얻기 어렵게 하지 않는다' 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필수적인 요소들이 귀하고 얻기 어려우면 사람들은 도적으로 변하게 된다는 뜻인 것이다. '목구멍 이 포도청이다' 사흘 굶고 담 안 넘는 사람 없다' 는 속담들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그러므로 어찌해야 한다? 사람들을 헐벗고 굶주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공자나 맹자보다 노자가 위대한 점은 바로 이런 데 있다고 나는 본다. 아무리 인의예지신을 떠받고 예의와 범절을 
가르치고 인이니 예니 나발을 불어도 근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 배부른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노자는 갈파하고 있다. 인이니 예니 도덕이니 하는 것보다도 우선 창자를 채우고 따뜻하게 자는 것이 선결문제라는 것을 노자는 냉정하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도외시한 도덕적 규범들을 노자는 냉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고로 성인의 다스림이란…' 하고 다음 구절의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천재 도올이 번역이라고 한 꼬락서니를 함 봐봐.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마라?' 무슨 재주로? 도대체 어떻게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지 않게 만든단 말이야? 얻기 어려운 재화는 당연히 귀한 것이고 이미 귀하지 않게 된 재화는 난득지화가 아니잖아. 이런 엉터리 작문이 어디 있단 말이야? 안 그래? 그리고 이 문장을 그렇게 읽으면 다음 글들이 연결이 되기나 하느냔 말이지. 도올이 번역을 다소 틀리게 한 정도면 내가 이렇게 심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건 그냥 노자 말씀을 자기 멋대로 바꾸고 뒤집어서 흰 책을 깜장 책으로 만들고 있으니 내가 이러는 거다. 그래도 기특한 것이 다음 줄에 가서는 또 바로 읽은 줄이 나온다. 열에 하나 둘은 맞더라 하는 게 이런 거다.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욕심 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는 것이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지 않는 길이다.' 이 정도 문장이라도 읽을 줄 아는 게 어디야? 대견스럽지. 근데 말이다. 
 이렇게 한번씩 잘하다가도 두 줄을 못 넘기는 거다. 다음 줄에 가면 또 자빠진다. 어쩌는지 계속 따라가보자. 아이고! 이기 뭐야? 어구야 기네. 우리 도올이 큰일났다. 도올은 네 글자만 넘어가면 읽지 못하는데 이리 긴 글을 어찌 읽겠나? 시이성인지치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 도올이 해놓은 소리는 볼 것도 없다. 일단 문장이 이 정도 기니까 백프로 틀렸을 거라고 보면 된다. 우선 내가 제대로 읽고 도올이 거는 나중에 봐도 되겠다. '시이성인지치' 는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이란…' 의 뜻이다. 
 여기서 '그러하므로' 가 무엇인지는 앞에서 설명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허기심 실기복 약기자 강기골' 이게 무슨 소리야? 찬찬히 읽어보자. '허기심' 이니까 이거는 '마음을 비우고' 라는 소리네. 그 담에 '실기복' 은 '배를 채우라' 는 소린가 보네. 그러면 '약기지' 는 뭘까? '뜻을 약하게 해라' 는 말씀이겠고, '강기골'은 '뼈를 튼튼하게 해라' 이 소리네. 에이, 뭐 별로 어려운 소리도 아니네. 괜히 쫄았잖아. 쭉 붙여서 함 읽어볼까?'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이란 백성들의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워주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소리네. 조금 해설을 붙이면, '성인이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는 마음과 뜻 즉 심지를 비우고 약하게 만들고, 반면에 그 배와 뼈는 채우고 강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는 말로써 노자정치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구절이다. 다시 말하면 백성이 쓸데없는 야심이나 큰 뜻을 세우는 주제넘는 생각을 못 하게 하면서 그 대신 배부르고 등 따시게 해주라는 소리다. 복실공강이란 쉽게 말하면 '배부르고 등 따시다' 는 말이다. 노자는 정치사상적으로는 우민정책의 주창자로 보이기도 한다. 단 그의 우민은 애민을 위한 우민인 것이 마키아벨리즘의 우민정책과의 차이점이다. 즉 다스리는 자를 위한 우민이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백성을 위한 우민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배부르고 등 따신 백성이 제일 행복한 백성이라고 보는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성인의 정치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라의 다스림에 있어서 백성의 기본적 생존권 보장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지상의 과제라는 것' 이 노자가 말하는 이 장에서의 핵심이다. '일단 사람들의 배가 불러야 된다' 가 노자정치사상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정치사상의 핵심이라 하기에는 너무 뻔하고 쉬운 소리인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류 역사에 있었던 모든 정치론의 온갖 구라들과 잡소리를 전부 다 합친 것보다 훨씬 가치로운 한마디다. '백성의 배를 채워주고 뼈를 튼튼하게 만들어라!' 이 소리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소리인 거 같나? 노자 아니면 못 하는 소리다. 이게 위대한 사상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얼마나 쉬운 소리야? 그래도 예수 아니면 못 하는 소리다. '백성들 배부터 채워줘' 오직 노자라 할 수 있는 소리다. 공자 말씀 전부를 놓고 노자의 이 한마디를 놓고 저울에 달면 노자쪽으로 추가 기우는 거야. 정치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어. 정치란 어떤 의미에서는 이 한마디가 시작이고 끝이고 알파요 오메가고 이게 전부야. 이거 이에 정치가 뭐 있겠어? 이거만 하면 정치는 다 된 거야. 나머지는 사실 잘 안 돼도 심각할 일이 없어. 듣고 보면 뻔하고 뻔한 소리고 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 같지만 이 한마디를 못 하는 것이 범부들이야.  
그리고 정치를 한다는 넘들이 이 한가지를 못 해내는 것이고. 가장 쉽고 기본적인 것이 가장 어려운 거야. 그리고 그런 것을 잘라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상가인 거고. 사상이나 철학이 무지 어럽고 난해한 구라를 풀어내서 사람들 골에 쥐나게 만드는 게 결코 아니야. 
 노자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 것에 있어. 이것을 얼핏 보고 설핏 보면 마치 백성을 힘센 소나 배부른 돼지로 만들자는 우민정책으로 보이지만 백성들 배 채워주는 정치가 제일 아냐? 맞지? 그러면 심허지약이 왜 나왔겠어? 백성이란 건 복허하고 골약하면 자연히 심실하고 지강하게 되는 거야. 복허골약하면서 심실지강한 넘들이 뭐겠어? 바로 투사들이고 혁명가들이야. 복실골강하면 심허지약해지니까 어떻게 해서든 백성들 배는 부르게 해라.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귀하게 만들거나 얻기 힘들게 해서는 정치고 나발이고 쥐뿔도 되는 게 없을 거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어. 근데 우리의 주인공 도올이 말하는 꼬락서니 함 봐봐. 노자의 우민정책이 얼마나 심오한 사상 철학적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인가는 앞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쯤에서 밀어놓았던 도올의 오답을 보자고 척 보니까 도올이 써낸 건 오답이 아니라 아예 희한한 창작 논리를 만들어 냈어. 
 심허지약하게 만드는 한편 복실골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허로서 복실하게 하고 지약으로서 골강하게 만든다 하는 거야. 즉 마음을 비우면 배가 차고, 뜻이 약하면 뼈가 강해진다는 골 때리는 소리를 하고 자빠진다.《노자와 21세기》 상권 155쪽의 원문을 같이 보자.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이상적 정치)은 그 마음을 비워 그배를 채워주고, 그 뜻을 약하게 하여 그 뼈를 강하게 해준다. 여기서 심이란 인간의 타율신경계의 모든 복잡한 이론을 말한다. 腹은 인간의 자율신경계의 상징이다. 자율신경계의 특징은 '스스로 그러함' 이다. 그것은 곧 '自然' 이다. 그것은 곧 '無爲'를 말하는 것이다. 어때? 환상적인 개 풀 뜯어먹는 소리지? 노자가 어이가 없어서 웃지도 못하고 돌아앉았다 하더라. 
 노자는 자율신경계니 타율신경계니 하는 것을 알지도 못한 사람이다. 복은 그저 사람 밥통을 말한 것이고 그걸 채워주라고 했을 뿐이지 '스스로 그러함' 을 밥통에서 찾은 적이 없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면 배가 채워진다는 건 무슨 논리야? 
 뜻을 약하게 가지면 뼈가 강해진다는 소리는 또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도올이 한의학 공부를 하더니 인체이론도 지 멋대로 막 만들어내네? 배가 불러야 생각이 없어지고 뻐가 튼튼하면 심지를 굳힐 일이 없다는 소리를 거꾸로 뒤집어서 나발 불고 있잖아. 사람이 배가 고프면 악에 받치는 법인데, 악에 받치니까 배가 고프다는 소리하고 똑같아. 
 노자가 단순하게 '백성들이 쓸데없는 생각을 못 하도록 하고 배부르고 등 따시게 해주면 그게 젤 좋은 정치야' 하고 말 한 것을 도올은 확대발전, 침소봉대, 논리비약, 견강부회한 끝에 이런 어머어마한 독창적 이론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노자와 21세기》에 나발을 불어 놓기를 인간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배로 산다! 이것은 우리의 통념을 깨는 노자의 지혜다. 그리고 이것은 뇌 중심의 서양 인체해부학에 대하여 복부 중심의 한의학적 인간학의 지혜로운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청하는 것이다. 불후의 명저 상권 156쪽 노자의 지혜를 좋아하네. 우리 노자한테 저런 소리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는다. 노자든 도올처럼 머리가 복잡한 사람이 아니다. 
 간단명료하게 정리하는 단순성과 순진성이 특징이다. 그래서 노자의 말에는 파격이 없다. 다 상식적인 이야기다. 자율신경계가 나오고 인체해부학이 나오고 '한의학적 인간학의 지혜로운 가치' 까지 나오면 노자는 할말이 없지. 마음을 비운다고 해서 불러지는 배를 갖고 있다면 세계의 식량난이 사라질 것이고 뜻을 약하게 하면 강해지는 것이 사람의 뼈라면 의술이 필요 없겠다. 'A도 하고, B도 한다' 는 문장을 'A를 해서 B가 되게 한다' 로 바꾸거나 'A를 해서 B가 되게 한다'를 'B를 해서 A가 되게 한다' 로 바꿔버리면 이 두 문장은 전혀 다른 것이 돼버린다. 
 《도올 판 노자》는 《노자의 노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이 둘은 공통점이 전혀없다. 도올의 노자강의를 듣고 노자를 알았다는 사람은 큰 착각을 하는 것이다. 무늬만 노자를 배웠고 제목만 노자인 도올의 황당무계한 학설을 들었을 뿐이다. 
 나는 사람들이 도올의 TV 강의를 보고서 노자를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를 떠든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할까봐 그게 걱정이다. 이 다음에 노자사상의 참으로 심오한 문장이 나오는데 도올은 여기서 개그쇼의 진수를 보여준다. 기대를 갖고 다음으로 넘어가보자. 
 지금부터 노자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물론 우리 도올이의 진면목도 함께. 상사민무지무욕 사부지자불감위야 일단 문장이 길고 조금 어려운 한자들이 보인다 싶으면 도올이 한테는 기대할 게 없다. 당근 틀린다고 보면 틀림없지만 그래도 어떻게 틀리는가 궁금하고 재밌는 거다. 도올은 열심히 틀리고 부지런히 틀림으로써 사람들을 웃긴다는 자기 일을 충실하게 하고 있다. 그 열의를 봐서 같이 보고 웃어 주자. 도올 가라사대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앎이 없게 하고 욕심이 없게 한다. 대저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 고 해놨거든. 웃기지? 이리 웃기는 개그맨 첨 보잖아. 
 앞 구절은 그런대로 뜻이 통한다고 치고 뒤의 구절을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 라고 읽고 자빠지는 꼴을 보면 도올은 노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사부지자 불감위야' 이 한마디야말로 노자의 정치사상이 단순한 우민정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노자 할아방이 이 한마디를 넣어놓은 이유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공부 헛했다는 증거지. 안 그래도 나쁜 머리에 오만 가지 쓸데없는 지식을 잡동사니로 쌓아놓고 정리도 못 하는 게 마음속에는 오만과 편견만이 꽉 차 있으니까 노자의 글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겠나 말이다. 
 앞 구절에서 노자가 뭐라고 했나? '언제나 백성들을 잘 모르게 하고 욕심이 없게 만들어라' 했잖아. 이 말은 이것만 가지고 보면 대단히 반인류적이고 비인도적인 반동사상가로 오해받을 만하다. 그래서 노자가 2천 년 동안 유자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거잖아. 그것은 왕삐라는 애송이부터 도올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이 그 말 다음에 노자가 뭐라 했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었다. '상사민무지무욕' 이라는 말은 쉽게 풀면 백성을 아무 것도 모르고 욕심도 낼 줄 모르는 촌무지렁이로 만들어야 된다는 소리다. 그저 '송충이는 솔잎 먹고 살아야 한다' 하면서 자기 주제파악을 확실히 하고 땅이나 파면 된다는 그런 말로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백성을 그렇게 만든다 쳤을 때 아는 것도 없고 욕심 낼 줄도 모르는 어린 백서은 그야말로 통치자의 노예가 될 게 뻔하다. 무지하고 무욕한 백성이야 사실 지배 세력에게는 이상적인 백성일 테고 심하게 말하면 그들이 소유한 가축 무리와 마찬가지 일테니까. 많이 알고, 욕심 만만한 소수의 무리(지배계층)와 아무 것도 모르고 욕심도 없는 어린 백성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과연 노자는 이상국가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지배계급과 일반 백성의 구별이 없이 몽땅 다 무지하고 무욕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만약에 전자라면 노자는 우민화를 부르짖은 반동이요, 후자라면 노자는 사상가가 아니라 몽상가다. 그러나 문맥상 후자를 말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란 글자는 '만든다' '하게 시킨다' 라는 뜻의 글자이므로 '백성을 무지하고 무욕하게 만들어라' 하고 노자가 사주하고 있는 어떤 상대가 있다. 바로 지배계층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배계층이 바로 '많이 아는 무리' 다. 다음 구절에 나오는 '지자' 가 바로 그들이다. 즉 식자, 지식층을 말한다. 물론 도올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이 지자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성인이다. 따라서 뒤의 구절은 지식층에 대한 당부이고 그들이 '백성을 무지무욕하게 만들어 통치하는 반대급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백성이 무지무욕하여야 한다면 반면에 너희 지식층은 어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것이 뭐냐? 바로 '지자불감위야' 다.
  백성들과는 다르게 많이 아는 지자들은 절대로 무지무욕한 백성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백성을 무지무욕하게 만드는 것이 허용되기 위해서는 무지무욕한 백성을 속이는 지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있다. '불감위야' 는 '감히 속이거나 꾸며대지 않는다' 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노자는《도덕경》에서 위라는 글자를 '속이는 일' '꾸며대는 일' '가장하는 일' '가식하여 하는 일' 이란 의미로 일관되게 쓰고 있다. 
 때문에 여기서의 위도 엉터리 도올의 해석처럼 '어떤 일이든 못 하게 하는 것' 이 아니라 '백성을 속이고 꾸며대는 짓을 못하게 한다' 는 말이다. 만약에 한 나라의 지도층이 백성을 속이고 꾸며 대지 않는다면, 일반 백성은 설사 무지하고 무욕하다 해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노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이게 노자정치사상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런 뜻도 모르고 '안다고 하는 놈들이 뭘 한다고 까불지 못하게 해라'는 뜻이라고 박박 우기면 참말로 대책이 없다. 
 이런 소리는 정치론이 될 수가 없다. 그냥 헛소리일 뿐이다. 생각 좀 해봐봐. 지도층 없이 국민 전체가 무식한 국가가 존립할 수 있겠나? 그리고 지식층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누가 해? 노자는 앞에서 그런 지도층이 '행불언지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자가 감히 뭘 한다고 까불지 못하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지자들이야 말로 사명감을 가지고 많은 일을 맡아서 해야 할 사람이다. 이 사람들이 제대로 까불어야 나라꼴이 똑바로 될 터인데 못 까불게 하자? 그게 노자의 사상인가? 그런 게 노자의 사상이라면 미련 없이 갖다버려야 마땅하다. 도올이나 주워서 혼자 놀게 하면 족하다. 여기까지 이해를 하더라도 노자의 정치사상이 비판받을 소지는 남아있다. 즉 현실 정치를 도외시한 이상가의 꿈같은 소리라는 공박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 지도층이 과연 국민에게 한 마디의 거짓말도 하지 않고 어떤 것도 숨기거나 꾸며대지 않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 하는 것이다. 노자의 놀라운 점은 바로 그런 비판에 대한 대답까지도 제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노자의 통찰력은 바로 다음 한 줄에 집약되어 있다. 처음 출
 발을 잘못하면 끝까지 빗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도덕경》이 란 책이다. 아니면 앞 줄 얘기가 틀리고 뒷줄 얘기가 따로 노는 비논리적이고 몽환적인 이상한 책이 돼버린다. 어쨌거나 이 다음에 노자가 해놓은 소리를 보면 진짜 기가 막힌다. 그런 걸 읽어낼 수 있어야 노자를 만날 수가 있다. 위무위 즉무불치 노자에게 감탄하고 반해야 하는 대목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 《도덕경》은 여러 번 탄복하게 만드는 대목이 있는데, 물론 그것은 《도덕경》의 뜻을 제대로 알고 읽을 때의 이야기다. 
 도올처럼 엉뚱한 동네에서 저 혼자 노는 사람은 음악회 가서 언제 박수를 쳐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나 같고, 개그나 코미디를 보면서 웃어야 할 때를 모르는 사람과 같다. 노자의 글을 올바르게 해석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노자한테 감탄하며 노자한테 반했다고 말하는지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탄복해아 할 대목은 뭔지도 모르고 넘어가고 별 의미도 없이 해놓은 소리를 붙잡고 자기 혼자 끔뻑 죽기도 한다. 뜻도 모르는 책을 읽고 감탄을 하고 반할 수 있다는 것도 도올만의 기발한 개성이고 재주겠지. 도올은 저 구절을 풀어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함이 없음을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라 했거든. 
 도올은 '함이 없음'을 너무 좋아하는 게 탈이지. 뻑 하면 들고 나오는 것이 '함이 없음' 인데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는 것지 '함이 없음' 이 뭐야? 지금 철학강의를 하는 건지 말장난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지금까지 내 글을 읽어온 사람이면 '위무위' 의 뜻이 어렵지 않을 거야. 이게 어려울 게 뭐 있느냐 말이다. 
 '무위' 가 속이거나 꾸며대지 않는 거라 했잖아. 그러면 '위무위' 는 뭐겠나? 바로 '꾸미지 말고 하라' 는 말이거나 '꾸미지 않은 것처럼 꾸민다' 는 말이다. 즉 정치를 함에 있어서 완벽한 무위가 불가능할지라도 최소한 무위한 것처럼 꾸미기라도 하라는 말이다. 즉 백성을 어쩔 수 없이 속여야 할 경우에도 백성이 속는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속이라는 정치술의 요체를 말하고 있는 거다. 그게 바로 '위무위' 다 현실정치에서는 무위의 치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위를 위하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노자의 위대함이 있다. 무위가 어렵다 해서 유위를 택하지 말고 무위를 위 함으로써 현실에 대처하라는 가르침이다. 백성이 무지무욕하고 지자들이 무위로 다스린다면 노자가 그리는 이상향이겠으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백성은 무지무욕하고 지자들은 무위한 척이라도 해야 되겠다는 노자의 희망사항이다. 
 백성이 무지하고 욕심이 없어서 단순 소박하다 해도 그것을 기회로 지도층이 백성을 속이고 꾸며대는 짓이나 하면 백성의 단순 소박함이 유지될 수가 없고, 반드시 소요와 혼란이 일어남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하지만 지도층이 최소한 백성이 그런 사실을 모르도록 숨길 수 있는 염치와 지혜로움만 있어도 나라는 잘 다스려 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실정치에서 유위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백성에게 알려졌을 때다. 백성이 모르게 하는 정도의 위는 눈감아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위무위하면 즉무불치'라 한 것이다. 
 잊을 만하면 '검든 돈' 문제로 온 세상이 시끄러운 것도 다 정치하는 놈들이 '위무위'를 할 줄 몰라서 그렇다. 현실정치라 하는 게 돈 없이 될 수 있나? 정치 자금이라는 게 필요하지. 그런 걸 해먹더라도 정도껏 하고 받을 돈을 받고, 받더라도 국민이 모르게 좀 요령껏 재주껏 해야지 임마들이 하는 짓을 보면 그냥 내놓고 도둑질하는 거야. 
 그리고 서로 켕기는 넘들끼리 동네방네 나발을 불면서 물고 뜯고 싸우고 그러니 어찌 백성이 그 추잡한 짓거리를 모를 수가 있겠나? 암만 무지하고 무욕한 백성이라도 그런 꼬라지를 자꾸 보게 되면 무지무욕이 유지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노자가 제발 백성 모르게 
 '위무위' 하라고 당부하는 거다. 그래야 백성이 속는 줄 모르니 지도자들을 믿고 맘 편하게 산단 말이다. 물론 이 게 백성의 눈과 입을 강제로 막고 속이라는 말은 아니다. 성인의 치는 불위함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위무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염치껏 요령껏 하라는 소리다. 알겠지? 《노자와 21세기》에서 도올이 이 대목에 이르러 논하고 있는 꼴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이런 걸 보고 '꼴값' 이라고 하지 싶다. 공산주의 이론과 자본주의의 본질이 나오고, 미국이 어쩌고 소련이 어쩌고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가 잔뜩 나온 끝에 노자가 자본주의를 '인간의 욕망을 자극시키는 재화의 유통이라고 규정했다' 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가히 압권이다. 횡설수설의 클라이맥스요 헛소리의 진수다. 노자가 말한 것은 '백성이 도적이 될 만큼 헐벗고 굶주리게 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이지 '재화의 유통' 이나 '자본주의 해약'을 말한 것이 아니다. '소유 없는 생산' 이니 하면서 노자를 공산주의자로 모는 것도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다. '오직 생활에 필요한 정도의 의식주에 궁핍하지 않게 하되 그 이상의 욕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 는 것이 노자의 경제 노선이다. 이런 노자한테서 현대산업사회를 이끌 만한 깊이 있는 경제이론을 도출하려는 것은 각주구검이고 연목구어고 초상집에 춤추는 짓이다. 거러지가 동냥질을 해도 번지수는 제대로 찾아야 굶지 않는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도 나오고, 금강경의 여래도 나오고, 중국의 까오밍 선생도 나오고, 도올의 영원한 우상 왕삐의 해설도 나오고, 왕본, 무슨 본 해가며 《도덕경》의 원전 몇 종을 놓고 비교분석을 한답시고 오도방정을 떨고 있는 것도 노자를 아는 데는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 일 뿐인데 그 끝에 이런 대목이 있어서 사람을 또 놀래킨다. 
 그 변모의 과정을 이렇게 양자 테스트를 비교해보면 명료하게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작업이 바로 우리 저눈가들이 하는 작업인데, 지금 이것은 대중 방송을 위한 저술임으로 이런 작업을 일일이 다 밝힐 수는 없고(…) 《노자와 21세기》176쪽 상단 우리 같은 전문가라니? 도올 같은 전문가? 세상에나. 정말 착각도 야무지지. 원문 번역도 똑바로 못 하는 사람이 무슨 전문가씩이나 된다 말이냐? 
 종류 늘어놓고 비교분석한다고 땀 빼지 말고 있는 거 하나라도 놓고 제대로 읽어라. 제3장의 원문을 전체적으로 보고 도올과 내 역을 나란히 보자. 
 도올의 번역을 읽어보면 이게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도울 역《도덕경》은 시종일관 말이 안 되는 헛소리의 나열이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도올의 개그쇼는 최상의 경지를 보여준다. 개그가 아니라 엽기 그 자체다. 제4장으로 가보자. 불상현 사민부쟁 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시이성인지치허기심 실기복약기지 강기골 상사민무지무욕 사부지자불감위야 위무위 즉무불치 도올번역 훌륭한 사람들을 숭상하지 말라.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할지니.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말라!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이 되지 않게 할지니. 욕심 낼 것을 보이지 말라! 백성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어지럽지 않게 할지니.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그마음을 비워 그 배를 채우게 하고 그 뜻을 부드럽게 하여 그 뼈를 강하게 한다.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앎이 없게하고 욕심이 없게 한다. 대저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 함이 없음을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바른번역 현명함을 높이 사지 않으면 백성이 서로 다투지 않으며 재화를 귀하고 얻기 어렵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도적이 되지 않는다. 
 욕심이 날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으면 백성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의 마음을 비우게 하는 대신 그 배를 채워주고 백성의 뜻을 약하게 하는 대신 몸을 튼튼히 해주어 모름지기 아는 것과 욕심이 없게 한다. 반면에 다스리는 자들은 꾸밈이 없어야 한다. 꾸밈이 있더라도 백성이 모르게 한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제 4 장
  제4장의 첫 구절이다. 도충 이용지혹불영 이 문장에서 우리한테 생소한 글자라 해봐야 '충' 하고 '영'뿐이다. 그리고 문장이 어렵지도 않다. 그런데 이런 문장도 똑바로 못 읽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고나 할까, 어이가 없다고나 할까, 도올이란 사람이 참 희한해 보인다. 자기가 확실하게 알지 못해서 자신 없는 부분이 많으니 강의를 하다가 더듬거리고 말이 헷갈릴 때가 많은 것이 눈에 보인다. 아직 공부가 덜 됐거든 나서지 말아야지 안 그래? 방송국 PD들도 그렇지, 세울 사람을 세워야지 도올을 불러다가 노자강의를 맡긴다는게 말이 되는 소리야? 도올이 예전에 쓴 책《노자 철학 이것이다》도 안 읽어보고 캐스팅을 했단 말이야? 
 그 책 읽어보면 도올을 딱 알 수 있잖아. 그 책에서도 도올이 한 소리가 뭔데? '나는 노자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놈이올시다' 잖아. 그런 사람을 불러다가 카메라 앞에 세우면 '탱자탱자' 할 수밖에 더 있어? 원문을 같이 볼까? '충'은 '빌 충' 또는 '깊을 충' 이다. 
 그래서 '도충' 이라 하면 '도는 비었다' 또는 '도는깊다' 혹은 '도는그윽하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중 어떤 의미로 쓰인 충이냐는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다음 구절에가서 '깊을 연' 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충은 비었다는 의미로 쓰인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일단 '도충'을 '도는 텅 비었다' 로 번역하자. 문제는 역시 그다음이다. 도올은 
 문장이 조금만 길면 반드시 틀린다. 뭐라 했느냐 하면, 이용지혹불여을 '그러나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 라고 풀고는 덧붙여 기가 막힌 소리를 하고 있다. 영은 '찬다', '채운다' 의 뜻인데, 한문은 한 글자가 때로 그 정반대 되는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서의 영은 채우다의 반대 뜻인 '고갈시킨다', '다한다' 의 뜻이 있다. 45장에 '대영고충, 기용불궁'(크게 차 있는 것은 텅 비어 있는 듯하다. 
  아무리 써도 고갈됨이 없다.)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뜻이 상통하는 것이다. 여기서 '불영' 은 '불궁' 이다. 암만 봐도 도올은 《도덕경》을 볼 게 아니고《천자문》을 봐야 될 애다. 하늘 천, 따지를 제대로 익혀야 될 애가《도덕경》을 풀고 앉았으니 이게 장난이지 학문이겠나? 한자가 처음 만들어져서 글자의 의미들이 혼란스럽고 용례가 확실치 않을 때 만들어진 상서 같은 고대의 책들에서는 한 글자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정반대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자가 어느 시대 사람이야? 공자, 아니 꽁쯔가 춘추필법을 세운 시대의 사람이다. 도대체 그 시대에 누가 한자를 정반대 되는 뜻으로 쓰더냐?
 '찰 영'을 '다할 궁' 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빡빡 우기는 이유가 대체 뭐야? 이유는 한 가지뿐이 없지. 지 대갈빡으로는 해석이 안 되니까 글자의 뜻까지 바꾸는 거야. 외국말을 옮기는데 그래, 원문의 의미를 지 맘대로 바꾼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기가 막히는게 원문의 뜻 그대로 옮겼을 때는 도저히 말이 안 된다든가 문맥이 연결이 안 된다든가 하면 최후의 방법으로 반대어를 넣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원문의 한자 뜻 그대로 읽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된다. 도올처럼 정반대로 옮기면 바로 엽기적인 소리가 돼버린다. 그러니 어찌 옮겨지겠나? 한번 같이 보자. '그러나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 하네. 엽기적이지? 
송아지 생선 뜯어먹는 소리 아닌가? '도라는 것이 텅 비었다' 해놓고 뭘 퍼내어 쓴다 말이야? 도라는 것은 텅 빈 것인데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가 않아? 도올은 빈 쌀독에서 마르지 않도록 쌀을 퍼 올리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지. 나도 그 재주 좀 배우고 싶네. 텅 빈 데서 퍼 올려 쓰는 재주말이다. 그저 궁리를 하느니 어떻게 하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할까 하는 것뿐이지. 이런 엉터리 같은 학문을 하고 자빠지니 사람들이 '동양철학' 이라 하면 비논리적이고 앞 뒤 안 맞아도 되는 땡초들 선문답 비스름한 것으로 오해를 하는 거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 심오하고 고매한 무슨 뜻이 있기나 한 것처럼 헛소리나 하고 자빠지는 거고 그런 것이 '동양철학' 이고 그런 것이 '도' 인 줄 알고 밤낮 헛소리만 하는 거야. '동양철학' 이라는 게 얼마나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고 그 구조가 엄격하고 정밀한 것인지는 모르고 그저 주둥이로 말장난만 하려고 든다 말이다. 
그게 다 도올이 같은 사이비 학자 때문이다. 내 말이 틀리냐? 저 문장의 올바른 뜻은 '도는 텅 빈 것과 같아서 막상 쓸려고 하면 아무 것도 안 잡힐지 모른다' 는 것이다. 불영은 '채워져 있지 않다'는 의미잖아? 
한자를 보고도 뜻을 몰라, 그래? '이용지' 즉, 쓰고자 하면, '혹불영' 아마도 채워져 있지 않을 것이다(손에 잡히는 게 없을걸)' 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도라는 것을 무슨 천도복숭아처럼 따먹거나 주인 없는 소처럼 타고 다니거나 우물물처럼 두레박으로 퍼 올려 마실 수 있는 것처럼 생각지 말라 이거다. 도는 텅 비어서 소용이 없는 물건이라는 소리다. 쓸려고 하면 써먹을 수가 없다는 거다. 그래서 노자 할아방이 용용 죽겠지 하고 돌아 앉아 웃는다. 그걸 가지고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가 않는다니? 
노자가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날 소리다. 하긴 그렇게 써놓고도 한자를 반대로 해석한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다음과 같이 중언부언 변명을 하고 있다. '이용지혹불영'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해도 가능하다. 도는 텅 빈 듯 해서, 아무리 써도 다시 채울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해서해도 그 반어적 의미는 동일하게 될 것이다. 
 Yet when you use it, you never need fill it again. 《노자와 21세기》 194쪽 상단.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도 틀릴뿐더러 영어로 써 놓은 것은 더 웃긴다. 제발 동양고전 하면서 되지도 않은 영어 좀 쓰지 말았음 좋겠다. 내가 콩글리시 한번 해볼까? 문법이 맞다 틀리다 시비는 걸지 말자. 노자의 말을 영어로 옮기면 이렇게 되는 거다. 
'If you use it. You are foolish!' 왜넘 말로도 해볼까? '아나타와 빠가야로데스!' 다. 우리 도올은 자기가 해놓고는 암만 생각해도 자신이 없는지 못내 불안해서 또 왕삐리한테로 도망을 간다. '노자 본의를 꿰뚫는 멋들어진 주를 달아놓았더라' 고 하면서 왕삐리의 
주를 소개해 놨는데 '노자의 본의를 꿰꿇는다' 는 소리가 뭔 뜻인지 나도 모르겠고 그 왕삐의 주라는 것이 노자의 저 말과 어떻게 통하는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노자가 '동!' 하면 '서!' 하고 '흑!'
 하면 '백!'하는 꼬라지는 왕삐나 도올이나 둘 다 만만치 않다. 동문서답이 아니라 완전히 성동격서, 좌충우돌, 우왕좌왕, 지리멸렬이다. 왕삐의 '노자의 본의를 꿰꿇는 멋들어진 주' 는 옮기기도 귀찮으니 관심이 있는 사람은 불후의 명저《노자와 21세기》 상권 204쪽을 함 봐봐. 
진도 나가자. 계속 엽기 시리즈다. 다음 구절은 이런 소리다. 연혜 사만물지종 혜는 의미 없는 어조사니까 신경 쓸 거 없고, 연은 '도는 깊다' 라는 소리다. 이걸 또 도올은 멋을 부린답시고 '그윽하도다!' 라고 해놨다. 하여간에 구제불능이다. 세수도 못 하는게 화장하려고 덤비는 꼴이다. 뜻도 모르면서 멋만 부린다 말이다. 그윽하기는 뭐가 그윽해? 
그냥 '도는 깊다' 하면 되지. 텅 비어서 쓸려고 하면 써먹을 데가 없는 도이지만 그러나 그 텅 빈 것이 깊기는 아주 깊어서 
만물지종이다 하는 소리다. 만물지종이 뭔가? 쉽게 말하면 
만물의 씨앗이고 만물의 부모다. 즉, '도는 텅 빈 것이어서 쓰고자 해도 
소용이 없는 물건이지만 그 속이 깊고도 깊어서 세상 만물이 다 그것에서 나온다' 이다. 이 대목에서 훗날의 음양가 들의 '무극' 과 '태극'이 나왔다. 무극에서 태극이 나오고 태극에서 음양이 갈라져 음양에서 
오행이 비롯되고, 어쩌고저쩌고…. 무극이라는 것은 음양오행과 세상 만물의 시작이지만 무극 자체는 볼수도 만질 수도 파악할 수도 써먹을 수도 없는 텅 빈 무엇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를 음양사상의 무극에 견준다면 도올은 무극을 암만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 것이라고 나발부는 정신나간 인간이 돼버린다. 무극은 퍼내서 쓰고 자시고 할 물건이 아니다. 바로 노자가 앞에서 말했던 '천지지시' 다. 이 천지지시가 이름을 붙이는 순간 뭐가 된다? 바로 만물지모가 된다. 이게 무엇이다? 바로 태극이다. 태극은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고 음양이 조화를 일으키고 있는 상태다. 도올은 이것을 사람이 쓰고 이용할 수 있는 양넘들의 창조주 비슷한 개념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래 도올은 크리스천이잖아. 
그래서 그 사고의 저변에 창조론적 관념이 있다. 그래서 노자 말씀에 더 헷갈리는 거다. 그래서 걸핏하면 도를 하나님, 야훼 이런 개념에 갖다 붙이는데 그것도 무식의 소치고 무지의 소산이다. 노자는 '도는 쓸모 없는 물건이다. 소용이 안 된다' 고 분명히 말한다. 만물을 낳기는 해도 
만물한테 소용되는 구석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에다가 기도하고 찬송해봐야 응답도 없고 가피공덕도 바랄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나 
야훼 같은 창조주, 조물주는 다르다. 이런 건 소용이 있다. 아플 때 기도하면 병을 낫게 해주는 의사로도 쓰이고 사업이 안될 때는 고문역도 되고 컨설턴트로도 쓰이고, 심지어 어느 종목이 오를 것인지도 가르쳐주는 주식투자 자문에 펀드매니저 역할도 해준다. 가끔씩은 미운 놈 패주는 
청부폭력 해결사 역할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고 전쟁도 하지만 그런 건 모른 척하자. 아무튼 노자는 도는 그런 데 소용이 없으니 도를 어디에 써먹을 생각일랑 아에 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도올처럼 '만물의 으뜸 같도다' 라고 번역하면 30점 짜리다. 하긴 30점이 어디냐? 다음을 보자. 진짜 엽기가 나온다. 납량특집이다.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도올의 풀이를 먼저 보는게 재미가 더 있겠다. 도올 가라사대,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푸는도다. 
그 빛이 튀쳐남이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하네' 라고 해놨다. 캬∼죽이지? 완전히 시다, 사. 철학가가 아니라 시인해도 되겠다. 뭐 어쩐다고? 날카로움을 어떻게 하고 얽힘을 풀어? 티끌도 고르고? 뭐가? 도가? 도가 할 짓이 없어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야? 도는 그런 작용들과는 전혀 관계 없는 물건이다. 뭘 무디게 하고, 풀고, 없게 하고, 
고르고 하는 따위 잡스러운 일은 안 하는 게 도다. 노자의 말뜻을 너무 못 알아먹고 있다. 도올의 해석이 왜 납량특집 엽기 시리즌가 똑바로 푼 것을 보면서 한번 알아볼까? 조가예의 세 글자 가운데 '좌'는 '꺾을 좌' 다. '기' 는 '그 기' 이고 '예' 는 '날카로울 예' 다. 가운데 '기가 가리키는 '그것'이 문가 하면 바로 '도'다. 그래서 이말은 '도의 날카로움을 꺽고' 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도라는 물건의 형상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물건에서 날카롭게 삐쳐나온 것들, 즉 튀어 나온 가지들을 꺽어버린다는 말이다. 삐죽삐죽 나온 것을 모조리 꺾으면 둥글든 육방체든 그속의 틀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도라는 물건의 뾰족하게 나온 부분을 모두쳐내면 바탕 틀이 어떻게 생겼느냐? 그 모습을 묘사해놓은 말이 바로 화기광이다. 
여러개의 빛이 어우러진 상태라 영롱하지만 형체가 없는 모습이다. 해기분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해' 는 풀어헤쳐서 가른다는 글자다. '분' 은 어지럽고 난잡한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어지럽고 복잡하게 얽힌 것을 풀어서 헤치면 도가 어떻게 되느냐? 바로 '동기진' 즉, 티끌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알기 쉽게 문장의 순서를 정리하면 이렇다. '좌기예즉화기광이요, 해기분즉동기진이니' 라는 하나의 문장이 된다. 다시 조선말로 풀면, '도라는 물건의 튀어나온 부분들을 잘라내서 그 바탕의 모습을 보면 빛이 어우러지는 모습이요 도의 복잡하고 난잡한 것을 풀어헤쳐서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낱낱의 티끌과 같다' 이다. 고로 천하 만물이 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아무리 그것을 잘라보고 가루로 빻아보고 실타래를 풀 듯이 헤쳐봐도 빛이 어울리는 화광이나 먼지보다 작은 티끌 같은 것이어서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괜히 도가 어떤 건지 확인해보겠다고 파보고, 뒤집어보고, 헤쳐보고, 세워보고, 눕혀보고, 튀겨보고, 찔러보고, 잘라보고, 녹여보고 기타 등등 헛지랄 하지 말라는 충고다. 그 말을 못알아듣고 도라는 것이 뭘 무디게 
하고 풀고 고르고 하는 거라고 헛다리 짚고 자빠지면 어쩌자는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어. 도올은 자기 책에서 말하기를 주차장에서 차에 먼지가 쌓인 것을 보고 '아! 이게 동기진이구나 하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데 하기사 절 밑에 떡 파는 할머니 점심 문답에서 깨치는 수도 있으니 주차장에서 도를 얻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차에 먼지가 앉았으면 노자를 생각하기 전에 세차장으로 몰고 가는 게 낫다. 자동차 후드 위에 앉은 먼지가 극히 정교하게 앉았는데 이게 바로 도가 티끌을 고르는 것과 같다고 대오각성했다는 것이다. (노자 할아방은 창틀에 먼지가 앉았으면 그냥 털이개로 털어 버린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게 뭐냐면 
그랜저와 체어맨에 먼지가 앉으니 그 빛이 안 튀고 조화를 이루더란다. 세상에 세차장 다 문닫겠다. 그걸 보니 바로 화기광이라는 소린데 내 차에 앉은 먼지는 지저분하기만 한 이유가 고물딱지 프라이드라 그런 모양이지, 벌써 그랜저하고 체어맨 같은 고급차에 의미를 부여하는 속물 근성으로 노자의 세계를 엿본다는 것은 눈먼 고양이 쥐잡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여기까지만 해도 아직 봄날이다. 이 정도는 약간의 한자 실력이나 옥편 한 권만 들고 앉으면 어찌 해볼 수가 있다. 그런데 쪼금 뒤로가면 진짜로 동양철학과 고대철학사상의 전반적인 이해와 깊이 있는 저변의 기초 없이는 도저히 접근해볼 수 없는 대목들이 나온다. 이런 대목에 이르러서 도올이 보여주는 촌극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코미디요, 처절한 몸부림이다. 내가 TV를 보다가 차마 마음이 아파서 고개를 돌릴정도였다. 
안 돌아가는 대갈빡 갖고 얼마나 수많은 날을 노심초사, 고뇌 번민해 갖고 저 정도에 이르렀을까를 생각하면 부아가 연민으로 바뀐다. 사람은 자기 능력을 벗어나는 일을 하면 안 되는 거다. '주제파악' 은 《도덕경》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도라는 것은 빛이 어우러지는 것과 같고 티끌과 같아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말을 '도라는 것이 날카로운 것을 다듬고 얽힌 것을 푸는 조물주 비스름하고 영험 있는 귀신 같은 것' 이라고 턱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자빠지는 꼴을 앞에서 봤다. 만약에 도가 뭐를 다듬고 풀고 하는 거라면 우리는 도한테 엎드려 절하고 빌고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 기도란게 뭐야? 좀 풀어달라는 거잖아. 
내가 잘 아는 어떤 아줌마가 있는데 웃기는 게 이 아줌마는 주식을 사기 전에 꼭 기도를 한다는 거다. 주가가 막 꼬라박으니까 이 아줌마, 팔아야될지 갖고 있어야될지 좀 가르쳐주십사 열심히 기도를 하던데 얼마 전에 만나보니 완죤 죽은 사람 얼글이더라. 빚을 5천만 원이나 졌다더라. 생각 좀 해봐봐. 그래 여호와나 예수가 주식투자 전문가야? 펀드매니저야? 
기도를 할 걸 하고 기댈 걸 기대야지. 노자는 뭘 다듬고 풀어주고 하는 어떤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도를 그런 것으로 착각하고 혹시라도 절하고 기도하고 자빠지는 중생이 있을까봐 '도는 쓰려고 하면 텅빈 것이고 차 있지 않아서 써먹을 수 없다. 그 생긴 모양을 볼 것 같으면 그냥 어우러진 빛이고 티끌과 같아서 정체도 알 수 없는 것이니라' 하고 거듭 말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도올이 번역하고 자빠진 꼴 좀 봐. 노자 말뜻하고 완전히 따로 노는 거야. 이런 강의를 해서 되겠나? 
도올은 어려서부터 받은 기독교의 영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은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다음 구절도 좋은 예다. 담혜 사혹존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내가 있지, 도올에 대해서는 박사다. 
내가 지가 쓴 책들을 대게 다 봤거든. 뭐 남는 게 있어서 본 게 아니고 횡설수설 해대는 게 읽어보면 유머집처럼 재미가 있는 거라. 와! 이런 걸 이렇게 받아들이는 돌대가리도 있구나. 하고 웃는 재미가 있지. 그래서 나는 이번에 《노자와 21세기》를 사기 전에 강의를 보면서 이 대목은 이 정도로 해석하겠지 하고 예상하면서 봤는데 그게 빗나가본 적이 없다. 
이 구절에서 나는 도올이 상제라는 것을 여호와나 하나님으로 번역할 거라고 짐작했거든. 그런데 내가 진짜로 상상도 못 한 게 튀어나온거 있지. '여호와'도 아니고 '하나님' 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 이라고 하는 거야. 미치겠더라. 여호와면 여호와이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여호와 하나님' 이 뭐야? 세상에 그런 신이 어디 있나? 얘 정말로 무식한 애다. 꼭지 덜 떨어진 목사 중에는 '우리 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라 하고 자빠지는 인간도 있긴 있더라마는 철학을 한다는 인간이 단어를 이렇게 쓰면 안 되지. 잘 모르겠으면 '상제'를 그냥 '코끼리 신' 이라 하지. 그렇게만 번역을 했어도 50점짜리는 된다. 내가 애들 공부를 시켜보면 있지, 우등생이 의외로 쉬운 문제에서 틀릴 때가 있다. 그것은 아주 쉬운 문제를 어렵게 생각한 끝에 틀린 답을 고르기 때문이다. 보통 학생들은 쉬운 문제는 맞추고 어려운 문제에서 틀리잖아. 그런데 열등생은 어떤가 하면 쉬워도 틀리고 어려워도 틀린다.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냥 연필을 굴리거나 처음부터 끝까지 3번이나 4번을 써내기도 하지. 그런데 내가 '꼴통' 이라 부르는 애들이 있다. 평소에 하는 걸 보면 그리 못할 것 같지 않은데 시험만 치면 바닥에서 헤엄을 치는 애들이다. 쉬운 문제는 어렵게 생각해서 틀리고, 어려운 문제는 우습게 보다가 틀리는 애들이다. 도올을 보면 옛날에 가르치던 '꼴통'들이 생각난다. 상제가 코끼리 신이지 뭐겠냐? 안 그러냐? 그걸 어렵게 생각해서 머리를 굴리고 굴린 끝에 '여호와 하나님' 이라고 답을 적어내니 돌아가실 판이지. 중국에는 코끼리나 기린의 서식지가 없다. 그리고 상고시대 유적에서부터 
상아가 발견되는 것과 공자가 기린을 언급한 것을 보면 고대 지나인들이 코끼리나 기린이라는 동물을 알고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코끼리라는 동물은 중국 쪽에서 보면 인도에서 들어왔을 텐데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없고 먼 이국에서 가져온 이빨이나 풍문으로만 들을 수 있던 동물이기 때문에 약간 신비감을 가졌는지 지나인들은 코끼리, 기린, 낙타 등을 신성한 동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나인들이 제 라고 하는 것은 의인화된 신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점에서는 로마제국과 흡사하다. 네로나 시저 같은 황제도 신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 있는 것처럼 삼황오제는 
전부 지상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물론 노자 할아방도 관운 장과 같이 신의 반열에 올라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지나인들에게는 별의별 것들이 다 신이 된다. 색깔이나 방위도 어엿한 신이다. 노랑 신은 황제 하 하고 중앙의 신이며, 검정 신은 흑제로 북쪽의 신이고, 파랑 귀신은 청제 면서 동쪽의 신이라고 하는 식이다. 유대인들이 여호와나, 창조주 혹은 절대자라는 의미로 부르는 하나님과 지나인들이 말하는 제 혹은 신은 전혀 다르다. 무당들이 섬기는 관운장신이나 동자신 또는 할아방신의 개념과 비슷하다. 
그러니 동물들도 신이 안 되란 법이 없지. 생명 있는 것이든 사물이든 그것의 영화된 것들을 총칭해서 신이라 하는 거다. 그런 세계의 사상을 논하는 자리에 하나뿐인 유일신이라는 뜻의 하나님을 갖다 붙이는 것은 난센스다. 또, 이 온갖 잡다한 지나의 신들은 끗발에 따라 위계 질서가 있다. 신들의 세계는 군대식 계급사회다. 그리고 최고 대빵을 상제, 천제, 또는 옥황상제라 하고 저 아래 서낭당 고목 신까지 셀 수도 없는 신이 줄을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실은 그런 신들이 종종 겸직을 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황제' 라고 하면 복희, 신농과 더불어 중국에서 삼황 중의 한 사람이고 도교의 교조를 숭상받기도 하는 
전설상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방위 중 한가운데를 상징하는 중앙신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5원색 중 노란색의 신을 뜻하기도 하고 오행중 토로서 흙의 신을 말하기도 하고 동물로서는 용신이 되기도 한다. 이 전부는 같은 ㅻ이기도 하고 각각 다른 여러 개의 신이기도 하다. 지나인들이 생각하는 신의 계급으로 볼 때 아마 황제는 옥황상제의 아래쯤 될 것이다. 오행 중의 으뜸인 황의 레벨이다. 옥황상제는 오행을 낳은 음양 즉 태극의 레벨이다. 태극 위에는 뭐가 있어? 바로 무극이 있다. 태허 또는 노자가 말하는 도가 있다. 그렇다면 동물나라의 계급은 어떻게 될까? 일단 지나인 
하면 용이 생각나는데 용의 계급이 황제와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면 옥황상제와 같은 레벨의 동물이 무엇이냐? 아마 노자는 그것을 코끼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는 노자나 공자가 코끼리를 직접 보았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인도 전문을 통해서 들었을 것이고 그것의 이빨이라고 하는 상아는 보았을 것이다. 이빨 하나가 이 정도로 큰놈이면 덩치가 용보다 더 크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코끼리를 용이나 봉황 앞에 세워 제일 계급이 높은 신의 상징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노자가 말하는 상제란 끗발이 제일 높은 신이다. 그런데 왜 노자는 상제나 천제 같은 단어를 사용치 않고 '상제' 라고 썼겠느냐 말이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그 이유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직 이 책을 읽을 때가 안 된 것이다. 내가 앞에서 하나 하나의 글자의 뜻만을 볼 게 아니고 노자의 필법과 글 버릇까지 살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가 이런 대목 때문이다. 
노자가《도덕경》5천 글자를 쓰면서 다른 사람이 한번이라도 사용한 적이 있는 '의미태의 고유명사' 는 절대 쓰지 않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어야《도덕경》을 번역한다고 덤빌 자격이 있다. 내가 노자의 글을 읽으면서 감탄한 것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이런 철학사상적 개념을 그 이전에 사용된 적이 있는 의미태의 고유명사를 단 하나도 글 속에 넣지 않고서 
문장을 완성해냈다는 점이다. 《도덕경》에 사용된 모든 의미태의 고유명사는 노자가 직접 만든 오리지널 창조어 뿐이다. 모든 이름은 그 지적소유권이 오로지 노자한테 있는 말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일상적인 한자어 가운데 노자가 그 원작자인 말은 무척 많다. 
《도덕경》이 그말들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남이 만들어 붙인 이름을 노자는 자기 글 속에 단 한 마디도 쓰지 않는다. 이것은 노자의 엄청난 자존심 탓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도' 라는 것은 노자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설명하는 무엇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설명에 필요한 모든 단어까지도 노자가 만들 수밖에 없고 다른 어떤 글에 쓰여진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고집의 산물이라고. 
즉 그때까지 사용되던 상제니 천제니 하는 것들도 노자가 말하는 상제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노자는 자기가 '상제' 라는 이름을 만들어서 쓴 것이다. 뒤에 나오는 '현빈'  과 같은 단어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마치 불교에서 나오는 열반이나 도솔천 같은 지명, 여러 신장의 이름과 마찬가지다. 전부 석가모니가 지어낸 오리지널 창작 이름들이다. 그래서《도덕경》을 해석할 때 노자가 지은 신의 이름인《상제》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바꿔 번역할 수도 없고 번역해서도 안 된다. '상제' 가 뭐냐? 그냥 '상제' 다. 이 말을 '상제' 나 '천제' 또는 다른 신의 이름으로 번역하는 것은 노자에 대한 모욕이다. 《도덕경》이 어떤 책인지도 모르는 맹꽁이들이나 이런 노자 교유의 창조어를 번역하려고 육갑을 떠는 거다. 하물며 이 '상제'를 '여호와 하나님' 이라 해서 되겠나? 차라리 노자 족보를 바꿔라. 

노자의 말뜻을 풀어보면 도라는 것이 코끼리 신보다도 윗길에 있을 거다. 신들 중에 제일 끗발 높은 신보다도 먼저 생겼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노자는 도라는 것이 있어 보이기는 하나 하도 맑아서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낟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짐작컨대 최고 높은 신보다도 먼저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도를 신이나 제보다 앞서 존재하는 무엇으로 보는 것이다. 무엇을 다듬고 얽힌 것을 풀고 조화를 부리고 사람의 기도를 듣고 소원을 풀어주고 하는 영적인 존재들, 즉 신이란 것은 도의 다음에 나오는 개념이고 도는 그런 존재보다 선행하는 무엇이다. 
이 소리다. 이제 알겠지? 도올이 해높은 번역대로《도덕경》을 읽으면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다는 것을. 첨부터 끝까지 말장난이 돼버린다. 도올은《도덕경》이란 책의 본질과 노자의 생각을 모르니 시 상제란 말을 갖고 엄청 고민했을 거야. 코끼리 상 자가 왜 들어갔을까 하고 엄청 끙끙거리면서 침식을 잊었겠지. 《노자와 21세기》를 보면 그 고민의 편린들이 참으로 아름답게 어질러져 있다. 코끼리 상 자에는 '…인 것 같다' 는 뜻이 있다고 우기면서 굳이 'It seems…' 라고 영역까지 해서 영어 실력을 
다시 한번 과시하고는, '여호와 하나님보다 앞서는 것 같네('같네' 에 밑줄 쫘악)' 라 해놓았다. 도올이 이 코끼리를 갖고 얼마나 심사숙고, 오매불망, 용맹정진을 했는지 생각해보면 원문을 한번 좌주지 않을 수 없다. 그대들이 常를 말한다면 만물의 근원자인 道는 그 常보다 분명히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왜 노자가 '象' 자를 썼는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는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道는 여호와 하나님(여호와 하나님에 밑줄 쫘악)보다 앞서는 '것' 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순간에 노자는 바로 앞서 
'나는 누구의 아들인지를 알지 못한다' 고 직선 시간적 계시성(직선 시간적 계시성에 밑줄 쫘악)을 부정했던 그 부정의 논리에 위배되게 되느 것이다. 노자는 근원적으로 道가 그러한 존재의 시간적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서 개념화될 수 있고,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常)보다 앞서는 것 같네' (상상지선) 라고 하여, 그 초개념적 문의의 맥락(초개념적 문의의 맥락에 밑줄 쫘악)을 
명료히 한 것이다. 이로써 노자는 러셀 경이 비판하는 기독교의 논리적 위선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노자와 21세기》 상권 199쪽 상단. 누가 자기보고 철학하는 사람 아니랄까봐 그러는지 무지 어렵게 쓰고 있지. 나는 솔직히 저런 글 보면 딱 골치가 아프다. '직선 시간적 계시성' 
어쩌고 하면 나는 벌써 이해불가능이다. 될 수 있으면 어렵게 써야만 학자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날맹탕들이 가끔 보인다. '초개념적 문의의 맥락을 명료히 한다' 같은 소리도 내 귀에는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로밖에 안 들린다. 도올은 유식 칠갑을 떠는 저런 소리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 게 아니고 지 글에서 앞뒤가 맞는지 안 맞는지나 먼저 생각해 보는 게 안 좋겠나? 도가 좌기예하고 해기분하는 것이라고 도올은 말했잖아. 그런 것들은 모두 시간적 사건이다. 무엇을 다금고 풀고 하는 것은 시간적 개념상의 사건들인데 그런 것들을 하는 것이 도라고 풀어놓고는 뒤에 와서는 '道가 그러한 존재의 시간적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서 개념화될 수 있고,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노자가 주장하려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거든. 이런 것을 보면 도올은 철학을 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논리의 치밀함과 사고의 정연함과 문장 구조상의 엄격함과 접근의 합리성이 결여된 사람은 철학을 할 수 없다. 바로 앞줄하고 그 다음줄 내용하고의 모순이 눈에 안 들어오는데 무슨 철학을 하며 뭔 놈의 설을 푼다 말이야? 만약에 뒷부분의 설이 앞에서 한 소리하고 틀리면 그것은 벌써 그 글을 쓴 사람이 자기 생각에 대해서 정리가 덜 됐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완성되지 않은 개념을 가지고 썰을 풀고 있다는 증거다. 
《도덕경》이 만약에 그러한 책이었다면 나는 읽다가 집어던져 버렸을 거다. 그러나 노자의 얘기는 앞뒤에 어긋남이 없다. 전후에 모순이 없고, 수미가 일관되게 흐른다. 이런 빼어난 고전을 도올이 들어서 만화로 만들어버렸다. 워커발로 쪼인트를 까야 정신을 차릴 인간이지. 기독교의 여호와는 창조주다. 모든 것의 시작이 그로부터 비롯되는 태초의 아버지다. 이런한 모든 것에 선재하는 창조주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불합리한 것인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겠다. 도올까지도 그것을 알고 있을 정도니까. 이러한 인격신(영적 권능 또는 힘의 행사자)의 존재 이전에 무엇인가를 상정하지 않으면 신학은 풀 수 없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그 존재의 이름을 노자는 '도'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신이나 제 등은 도에서 나온 것들이다. 도가 만물지모라고 할 때 신의 존재들조차도 그 만물에 포함된다. 이러한 '도' 가 만물에 직접적인 효용가치가 있다고 하면 노자의 도론은 출발부터 무지막지한 반론과 공박의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일단 노자의 결론은 그렇다. '도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 도는 설명이 가능한 무엇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방법으로 이해를 할 것인다? 바로 도가 낳은 만물의 법책에서 그거을 유추해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도' 에 기반한 생활 윤리이며 규범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도출한 정치사상이 바로 노자의 '성인정치' 다. 이 성인정치는 공자의 '왕도 정치' 와 확실히 다른 정치론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이와 비슷한 철학적 토대 위에 서 있는 정치사상을 꼽는다면 나는 니체의 '초인정치'를 들고 싶다. 물론 양자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지만 위대한 두 스승의 응시점은 같다고 본다. 그건 그렇고 이 기회에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도덕경》이란 책의 성격에 대해서다. 인류 역사상《도덕경》만큼 그 성격이 그토록 오랫동안 오해와 
편견 속에 묻혀 있던 책은 없다. 주로 음양사상가에 의해 성립된 황노학으로부터 훗날의 도교에 이르기까지 노자의 얘기는 '도' 에 대한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도' 라는 하나의 종교철학과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법의 지침서인 것처럼 곡해되었고 왜곡되어 온 것이다. 도올의 번역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수많은 해석이《도덕경》의 원문을 그런 방향으로 비틀어서 해석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도' 란 노자의 이야기처럼 보거나 만지거나 설명하거나 분석해서 그 실체와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에 노자도 '도'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도덕경》은 무엇에 대해 써놓은 책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정치사상서' 고 노자의 주장은 바로 정치론이다. 그리고 곁들여 뛰어난 처세학 교과서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형이상학적인 철학서가 아니라 극히 현실적이고 형이하학적인 정치논문이다. 조금 더 진도를 나가면 사람들이 노자의 이야기를 '도인술' 또는 '신선술' 같은 것을 가르친 신비스러운 비서처럼 왜곡시켜 놓은 대목을 만나게 된다. 물론 우리의 도올도 별 수 없이 그에 편승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도덕경》의 올바른 원뜻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글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노자 도덕경》4장을 개괄해보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도충 이용지혹불영, 연혜 사만물지종,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담혜 사혹존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도올번역 도는 텅 비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퍼내어 서도 고갈되지 않는다. 그윽하도다! 만물의 으뜸 같도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푸는도다. 그 빛이 튀쳐남이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하네. 맑고 또 맑아라! 저기 있는 것 같네. 나는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몰라. 하나님보다도 앞서는 것 같네. 바른번역 도는 텅 빈 것이어서 쓰려고 하면 잡히지 않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도는 깊어서 온갖 만물이 그에서 비롯되니 도의 가치를 쳐내고 본래 모양을 보려 하면 빛이 어우려져 춤추는 것과 같고 어지럽게 얽힌 것을 풀어 헤쳐 그 속을 보려 하면 다만 낱낱이 티끌이 있을 뿐이며 맑고 맑아서 어찌 보면 있는 듯도 하건마는 그 비롯됨을 알 수 없구나. 다만 가장 높은 신보다도 먼저 있었음만 알겠구나. 도올이 TV에 나와 우리 노자를 한번 팔아먹더니 재미를 붙였는지 요새는 또 '논어'를  
강의하는 모양인데, 이제 공자, 아니 꽁쯔 할아방까지 만화로 만들 작정인가본데 하여간 요새 도올이 보면 참 잘나간다. 시체말로 떴다는 게 이런 거지? 그런데 도올이 공자강의하는 걸 보고 있으니까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아나? 바다에서 본 새들이 생각난다. 배를 타고 나가도 가까운 바다에서는 그런 새를 볼 수 없다. 태평양으로 나가면 그야말로 망망대해다. 가도가도 끝없는 푸른 원주 속의 한 점이 된다. 가장 가까운 섬이나 육지라 해도 1천 킬로미터 바깥인데 그런 바다 한가운데 날아 다니는 새가 있다는 거다. 나는 첨에 재주 있고 능력 있는 새들인 줄 알았어. 왜냐하면 그 먼거리를 그렇게 높이 날아왔으니 새 중에서는 난 놈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놈들이 배만 보이면 필사적으로 날아와서 아무 데나 앉는 거야. 자주 보다보니까 이놈들이 공통점이 있더라고 하나 같이 띨빵하게 생긴 놈들이라는 거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보니 이놈들이 새 중에서 특출나게 난 놈들이 아니고 있지, 제일 병신 같은 놈들인 거라. 방향감각을 상실해서 지 동료도 잃어버리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낙오조들이더라 이 말이지. 앉을 데를 못 찾아 온 바다를 헤매다가 배를 발견하면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날개를 저어 오는데 배 위에 앉았다 하면 그냥 뻗어버려. 
내가 가서 손으로 쥐어도 도망을 못 갈 정도야. 그런데 제일 안타까운 놈이 어떤 놈인지 아냐? 배까지 100미터도 안 남겨놓고 힘이 다 빠져서 바다에 떨어져 죽는 놈들이다. 이런 놈들이 바다에 빠지는 거 보면 완전히 급강하 폭격기다. 돌멩이가 떨어지듯이 높은 하늘에서 그냥 바다에 내리 꽂힌다. 어떻게 도와줄 방법도 없어. 지금 도올이 TV에서 기세가 등등해서 공자로 설을 푸는 모습을 보니 꼭 바다 위를 헤매며 날고 있던 그 새들이 생각난다. 언제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칠지 딱 불안하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한 게 조나단인가? 그런데 높이 나는 놈이 더 세게 꼬라박는다. 이건 중력가속도의 법칙이다. 높은데서 떨어질수록 대갈빡은 더 확실하게 깨진다.

       제 5 장
  어느새 5장까지 와버렸네. 여기서부터는 도올의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한번보자. 제5장의 첫 줄이다.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티엔띠 뿌르언!' 캬∼발음 죽이지? 내가 TV에서 도올의 고전강의 프로를 볼 때 좀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도올이 '티엔띠 뿌르언' 하는 걸 듣고 밥 숫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는 거잖아. 너무나 완벽한 본토발음
이어서 내가 뿅 갔다. 사실 중국말은 사성이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은 완벽한 본토발음이 잘 안 되거든. 그런데 너무너무 멋진 발음인 거 있지? '티엔띠 뿌르언!' 천지불인, 이 한마디를 우리노자가 했던 본토발음 그대로 들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 나는 사실 도올을 용서해주고 싶었다. 그 수많은 TV 앞에서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도오죠 히데끼를 보아야 했던 고역은 상쇄할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있잖아, 나는 암만 생각해도 도올이 중국말하는 것은 용서하겠는데 영어하는 건 용서할 수가 없는 거 있지. 소설 쓰는 것은 용서해도 철학 하는 건 용서할 수가 없어. 
어쩌면 좋겠냐? 본토발음의 반만큼이라도 뜻을 알아먹었으면 무지하게 좋으련만 발음만 멋지고 해석은 취권인걸. 도올이 TV 강의에서 저 '천지불인'을 멋들어지게 노래해서 나로 하여금 홀딱 반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까지 본토발음을 써놓은 이유는 결코 중국어 실력을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번만큼은 그 고질병인 위유식, 자찬박학 증세의 발작이 아니라 어린애처럼 순수한 감동의 발로로 보인다. 
그만큼 스스로 말하다시피 도올은 노자의 이 구절에서 주체할 길 없는 감명을 받은 거야. 이런 거 보면 도올도 보기보다 여린 남자 아닌가? 
나는 왜 저 대목이 그렇게 감동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짐작하건대 도올은 불인이란 말을 일반적인 통념과 상식을 깨뜨린 파격적인 통찰이라고 생각한거 아니겠어? 물론 이것도 헛다리짚은 거는 마찬가지지만 노자의 생각은 도올의 짐작이나 추측과는  전혀 반대편에 서 있다. 통밥을 굴려도 언제나 틀리는 쪽으로만 굴리는 것도 흉내내기 어려운 재주다. 고대에는 루소처럼 나이브한 자연주의자들이 없었다. 자연과 그것이 인간에게 강요하는 생존의 조건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혹독한 시대였단 말이다. 
  그래서 자연의 가혹함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줄 만한 지혜로운 자를 성인으로 꼽은 거야. 요순이 달리 요순이 아니고 치수를 잘해서 요순 아니야? 홍수, 가뭄, 산불, 지진, 역병 등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고난과 역경의 근본 원인이었지. '대자연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따뜻하니…' 따위의 자연 예찬은 고대인들의 의식 세계와는 동떨어진 거다. 천지는 그야말로 두려움과 외경의 대상이었다. 
 하늘은 인간에게는 비정하고 박절하며 아주 잔인한 무엇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겠지? 그리 생각되지? 그런데 노자는 자연의 그런 불인함이야말로 성인의 도와 합치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말을 천지와 성인은 비정하고 박정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천지와 성인은 비정과 온정, 혹은 인자하거나 매정하거나 하는 차원을 벗어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동시대 사람들이 자연을 인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노자가 '아니다. 자연은 인자하지 않다' 고 우긴 것으로 도올은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대단한 발견이나 된 것처럼 저 혼자 감격해 '티엔띠 뿌르언' 하고 자빠 지고 있으니 얼마나 웃기냔 말이다. 노자가 보는 천지와 성인은 인자하지도 않으며 인자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다정한 것도 아니고 다정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가혹하지도 않고 가혹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노자가 말할 때의 '인'은 공자가 말할 때의 '인'과 전혀 다른 소리라는 것을 도올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머리가 나쁘면 눈치라도 빨라야 귀염을 받지. '무위' 차원의 도를 보고 있는 노자의 눈에 공자의 인은 '유위' 의 차원이다. 불경에 보면 '보살행을 행한다고 생각하면 이미 보살행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내가 보살행을 행한다고 생각하고 행하는 행위는 이미 보살행과는 거리가 멀다' 는 말이다. 보살행을 행하고 자비를 베풀고 선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모두 마음의 의지가 불러오는 것이고 이것은 노자의 관점
에서 볼 때 '위'에 속할 것이다. 만들어지는 것, 또는 지어내는 것이다. 진정한 보살행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살행을 행한다는 생각조차를 떠나 있는 것이다. '인' 이란 군자지도의 수양을 통해 만들어지는것이며 이것은 본래적인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상태' 와는 거리가 있다고 노자는 생각한다. 태양의 따스한 기운이 만물을 소생시키고 온갖 생명을 키워도 태양에게 자비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이 대지를 말리고 초목을 태워도 태양이 잔혹하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태양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할 뿐' 이고 스스로 그러한 태양이 때로는 생명을 살리고 때로는 생명을 죽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천지야 말로 무위자연의 차원으로서 지극한 것이라고 본다. 천지나 성인의 불인은 인자하지 않거나 매정하거나 잔인하다는 뜻이 아니라 꾸미거나 지어내거나 만들어내는 행위가 아닌 '무위' 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불인' 은 '무위' 의 다른 표현이다. 뒤의 18장에 가면 '대도폐유인의' 라 하는 말이 나오는데 '지극한 도가 없는 자리에 인의가 있다'는 의미이고, 또 38장에 나오는 '상덕부덕시이유덕 이란 말도 '지극한 덕은 부덕한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덕이 있다' 는 것도 비슷한 말들이다. 때문에 '천지불인' 이라는 말은 천지의 인이야말로 '최상의 인' 이라는 소리인 것이다. 이 말에 이어서 뒤따라 나오는 말들이 바로 이와 같은 '최상의 인'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이만물위추구' 이말은 만물을 풀강아지 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추구(풀강아지)라는 것은 중국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사상에 올리는 풀로 만든 개를 말한다. 잡귀를 쫓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물건이다. 
이 풀강아지가 진짜로 잡귀를 쫓는지 귀한 신을 모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제상에  려진 풀강아지를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있기는 해야 하는 물건이지만 있다 해서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물건이 바로 추구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추구를 대하는 것이나 천지가 만물을 대하는 것이 비슷하다는 말이다. 이것을 잘못 헛짚으면 '하찮게 여긴다' '무시한다' '능멸한다' 라는 말로 오해할 수가 있다. 도올은 아예 '불인'을 '잔인하다' 로 번역하고 있다. 
예의 버릇이 또 나와서 안써도 되는 자리에 꼭 영어를 써서 이러고 나온다. Heaven and Earth are ruthless! 천지는 잔인하다! 노자의 사상에는 가벼운 낭만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천지는 잔인하기에 위대한 것이다. 잔인하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둑 터진 임진각의 탁류에 휩쓸려 묻힐지언정 천지를 원망치 마라! 왜? 우리의 천재소년 왕필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고 있다. 《노자와 21세기》 243쪽 하단.  
 나는 저기서 영어가 왜 나와야만 하느지, 왜 기어코 나오고야 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네. 그건 그렇다 치고 천지가 잔인하다고? 노자가 말한 뜻이 그런 거라고? 천만에 말씀이다. 노자의 말뜻은 '천지는 인자하지도 인자 안 하지도 않고, 잔인하지도, 잔인 안 하지도 않다' 이다.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 추구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야. 
 그렇다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세상에는 올려놓는 것이 관습이니까 올려놓기 하지만 소중히 여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부러 하찮게 여길 이유도 없는 것이 추구라는 물건이다. 올려놓고 그저 있나 보다 하면 그저 있나 보다 하면 그뿐인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가 '추구' 라는 것의 의미를 찾기를 제사를 지낼 때는 소중히 여기다가 제사가 끝나면 길에 갖다버리거나 불에 태워버리는 것으로 생각해서 필요할 때는 소중히 여기고 일이 끝나면 매정하게 버리는 것에 대한 비유일 거라고 보고 있다. 노자의 말을 왜곡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제 제사를 지내는 광경에 대한 상상력 부족이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에도 추구가 그리 소중한 제물은 아닐 뿐더러 제사가 끝났다 해서 매정씩이나 한 마음을 가지고 일부러 홀대하는 물건도 아니다. 제사 지내는 사람이 추구를 소중히 받들거나 잔인하게 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저 별 생각 없이 올렸다가 별 생각 없이 내리는 물건이다. 이 구절을 가지고 '잔인하다' 로 옮기면 노자가 할 말이 없어. 적당한 비유를 찾자면 '소가 닭 쳐다보듯이 한다' 는 말에 가까울 것이다. 닭을 쳐다보는 소의 눈길에는 애정도 연민도 호감도 적의도 없다. 그냥 무심한 눈길이다. 소가 닭을 쳐다보는 눈길이야말로 천지가 만물을 바라보는 눈이요, 성인이 백성을 바라보는 눈이다. 
 소가 마당을 가로질러 가다가 닭이 낳아놓은 알을 밟아서 깨뜨린다 해도 소가 닭한테 감정이 있어서 한 짓이 아니다. 소는 그저 마당을 지나 밭으로 걸어갔을 뿐이다. 배고픈 닭이 소똥 마른 것을 주워먹어도 소는 닭을 위해 똥을 싼 것이 아니다. 그냥 나오니까 쌌을 뿐이다. 닭도 소가 자기 알을 밟고 지나가도 소를 원망하지 않는다. '내 알이 깨졌구나. 저절로 깨졌겠지' 소똥을 맛있게 먹어도 소한테 감사할 줄 모른다. '먹이가 저절로 땅 위에 생겨났다' 고 생각할 뿐이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일어나고 절로 이루어졌을 뿐 '소가 했다느니, 닭 때문이라느니' 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천지성인과 만물백성의 관계가 이런 소하고 닭과 같다는 것이 노자의 말씀이다. 반면에 공자의 인은 사람이 키우는 닭과 같다. 집도 지어주고 먹이도 주고 물도 주고 춥지 않게 덥지 않게 보살펴주지만 언젠가는 손에 칼을 들고 닭의 모가지를 딴다. 이게 인이다. 노자는 백성이 잘살도록 도와주지도 않고 못살게 굴지도 않는 게 최고의 통치라고 본다. 인이니 군자의 도리니 쓸데없는 나발을 불어대던 인간들이 죄없는 백성을 괴롭히고 전쟁터에 내몰고 재산을 뺏고 죽이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말고 아예 백성을 무지무욕하게 내버려두라는 심오고매한 노자의 주장이시다. 
 그러면 백성은 절로 행복할 것이요 자기가 행복해져도 그것을 통치자(성인)의 덕택으로 생각지 않고 내가 저절로 행복해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도의 정치라는 가르침이다. '백성이 자기가 절로 행복해졌다고 생각하게 하는 정치야말로 최고 최선의 정치라는 것'이 이 대목의 골자요, 노자정치사상의 핵심이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개그계의 황제 도올의 쇼가 또 있다. 노자는 또 말한다. 천지가 불인한 것처럼 성인 또한 불인 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백성을 어여삐 여기고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고 교화하는 대통령을 좋아할지 모른다. 노자는 말한다. 
 모른지기 대통령은 은혜를 베풀면 안 되고 백성을 사랑한다 생각하면 아니 된다. 그는 인자하면 아니 된다. 그는 잔인해야 한다. 자기 당이라 편들고, 선거전에 자기에게 괘씸하게 굴었다고 미워하고, 정적이라 해서 그 능력이 있음에도 무조건 음해하기만 한다면 과연 지도자의 자격이 있겠는가? 천지불인! 성인불인! 그 얼마나 통렬한 핵심을 찌르는 반어인가? 
《노자와 21세기》 245쪽 중단. 참으로 배꼽을 찌르는 개그다. 기가 막혀서, 잔인해야 한다면서 미워하면 안 되고 음해하면 안 된다 하니 개그계의 황제답다. 동양학자 해라. 동양학자 못 하게 하면 정지한다고 나설까봐 겁난다. 이 대목의 해설에서 도올은 자기가 1989년에 펴낸 《길과 얻음》이라는 책이 우리말로《도덕경》을 번역한 최초의 책이라고 자랑하면서 
이런 나발을 불고 있다. 나의《길과 얻음》은 한문을 될 수 있는 대로 한글로 풀었다. 그리고 선봉고경은 본래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독립된 의미단위이므로, 그것이 모여서 생기는 개념을 하나로 묶지 않고 본래대로 한 글자씩 다 풀어 번역하였다. '만물' 이면 '만물'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만 가지 것' 이라든가 '온갖 것'으로 '천지' 도 '천지' 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늘 과 땅' 으로 번역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런데 이번 번역은, 대중을 상대로 한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이때 아이러니컬한 것은 한글로 풀면 의미가 더 전달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대중을 상대로 한다' 는 구체적인 뜻은 ' 대중의 언어의미 구조에 가장 쉽게 전달가능한 방식의 언어기준을 세운다' 는 뜻이다. '도'를 그냥 '도' 로 하는 것이, 오히려 '길' 로 하는 것보다 의미가 더 직접적으로 포괄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왜냐 우리 민중에게 이미 도는 '도' 로서 그들의 삶과 더불어 살아 움직여왔기 때문다. 미국인에게는 분명 'Tao' 보다는 'the way' 가 더 낳은 번역이다. 'Way'라고 하면 '길' '방법' '사람이 살아가는 행로' '만물이 움직여 가는 법칙' 등등의 뜻이다. 생겨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말로 '길' 이라 해놓으면 소달구지 마찻길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특별한 해설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오해려 한문 투보다 협애해지고 폐쇄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요번 나의 번역은 지난번, 지금으로부터 꼭 십 년 전 이맘때의 번역보다 그냥 평범한 한국말, 길거리에 지나 다니는 보통 한국 사람들이 가장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기준으로 해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번역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말한다면 십 년 전《길과 얻음》(통나무,1989년 11월 16일 초판 발행)을 참조해 보는 것도 그 맛이 새로울 것이다. 그러나《길과 얻음》은 왕필 주석에만 그 기본을 둔 것이며, 마왕퇴 백서와 곽점 죽간본의 연구성과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요번 번역은 1999년 11월까지의 세계적인 연구성과들을  집약했다는 면에서는 기존의 어떤 역서와도 그 성격이 다르다. 《노자와 21세기》 213∼214쪽. 킁…자기는 노자가 뭔지도 몰라요 하고 광고나발을 불고 자빠졌지? 
이리 긴 글을 왜 다 옮겨 소개했겠나? 바로 이 글 속에 도올이 공부했다는 노자가 다 들어 있다. 도올은 도가 적합한가 길이 더 나든가, 
 Tao가 맞는가 Way가 맞는가 고민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어느 것을 쓰건 틀린 것은 마찬가지니까. 십 년이면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세월이다. 그 세월 동안 노자 하나만 연구하고 전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집약했다는 사람이 겨우 도와 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런 속 터지는 중생이 있을까봐 노자는 서두에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이라고 미리 못을 박아둔 것이다. 그래도 보람이 없는 걸 어쩌겠어? 
반야는 그냥 반야지 그이름에는 아무 뜻이 없다. 열반은 그 이름이 열반이지 이름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냥 인도어 니르바나를 소리나는 대로 옮겼을 뿐이다. 노자도 '도'라는 글자로 이름을 삼았을 뿐 그 이름에는 아무런 뜻도 없는 것이다. 글자가 한문으로 가지고 있는 '길' 이라는 의미와는 전혀 무관하다. 한술 더 떠서 우리나라 말로도 번역을 
제대로 못 하면서 영역을 한다고 설치니 딱 겁이 난다. 도를 영어로 Way로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음마, 하품 나온다. 도는 도고 Tao지 길이나 Way가 아니다. 이름인 글자 자체에 의미가 들어가면 그건 이미 노자가 말하는 '도' 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 '도'라는 이름에는 아무 뜻이 없다. 
이름은 도올이 좋아하는 '좆' 이라 해도 관계없다. 티엔띠 뿌르언∼ '천지불인하니 이만물위추구요' ,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에 무심하고' , '성인불인하니, 이백성위추구니라' , '성인도 이와 같이 불인하니 백성들을 간섭치 않는도다' 라고 번역하면 그런대로 준수하다. 그리해야 다음 문장들과도 뜻이 잘 통하여 막힘이 없게 된다. 도올식의 악역인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라고 해버리면 다음 문장하고 연결이 안 된다. 이 문장을 해석할 때 '다룬다' 는 단어가 들어가면 무조건 빵점이다. 풀강아지처럼 다루건 보물처럼 다루건 아무튼 다룬다는 의미는 이 문장과는 상극이다. '다루지 않는다' 또는 '무심하다' 는 것이 바로 '위추구'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지는 결코 만물을 다루지 않는다' 는 문장을 '천지는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룬다' 로 하면 이게 어찌 번역이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런 수준으로 노자를 강의해서 이름을 얻고 강의료를 받고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참말로 나라의 장래가 걱정스럽다. 다음 문장을 보면 도올이 진짜 술 먹고 주정하는 꼴을 보게 된다. 어거 큰일났네. 갑자기 겁나게 어려운 한자가 나오는데 이를 어째? 이런 한자를 도올이 어찌 읽겠느냔 말이야. 밑에 문장에서 '탁' 자하고 '약' 자는 천자문에도 없는 글자고 시골 서당 훈장도 못 알아보는 글자다. 우리 도올이 큰일났지? 어쩌는가 함 가보자.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허이불굴 동이유출. 이 어려운 문장을 도올이 번역도 잘했지. 왈, '하늘과 땅 사이는 꼭 풀무와도 같다. 속은 텅 비었는데 찌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 더 내뿜는다' 라고 해놨네. 역시 도올이군. 내가 기가 막혀버린다. 여기서 풀무가 왜 나오냐? 생각을 함 해봐봐. 노자가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어디 비유할 데가 없어서 바람 내는 풀무에다 비교를 했겠나? 그리고 풀무라고 하면 이게 말이 되나? 이것부터 다음 다음 문장끼리 당최 이해가 안 돼버려. 좋다. '탁약'을 옛날에 그룻 굽는 가마나 숯 굽는 가마에다 바람 불어넣는 기계인 풀무라고 보자고 풀무라는 게 속이 텅 빈 것은 맞지. 그래서 어찌됐단 말이야?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아서 허이불굴 즉, 속이 비었지만 찌부러지지 않는다.이런 말이야? 들어보니 완투가 있는 소리네. 그지? 그럴 듯 하지 않나? 그러면 그 다음 구절 함 볼까? '동이유출' 이네. 이게 무슨 소린고? '움직일수록 더욱 많이 나온다' 라는 소리 아냐? 조금 헷갈려버리네.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네. 
완투는커녕 제로도 안 오는데. 풀무야 당연히 피스톤 식이건 날개 식이건 움직일수록 바람이 많이 나오지. 근데 하늘과 땅 사이가 어찌 움직일수록 뭐가 쏟아져 나오냐? 지구도 돌고 해도 돌고 별도 막 돌아버리니 뭐든지 막 나온다 이 소린가? 천지지간의 광대하고 적막한 공간하고 피스톤 파이프가 막 움직여 바람이 쌕쌕 나오는 풀무하고 정서적으로 연결이 안 되는데? 내가 이상하나? 노자가 이상하나? 다 이상하고 도올만 정상인가? 하늘과 땅 사이가 풀무처럼 정신없이 움직이면서 뭘 뱉어내는 그런 물건인가? 노자의 우주론은 24시간 상시 창조 체제인가 보네. 
이건 쉽게 풀 문제가 아니다. 일단 척 보니까 도올이 달려들어서는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지? '탁' 자는 옥편을 찾아보면 '전대 탁' 절구 탁' 이다. '약' 은 뭐냐? '피리 약' 이다. 에프킬라는 파리약이고 '약'은 '피리 약' 이다. 그러니까 '탁약'은 '절구와 피리' 다. 이 탁과 약을 붙여서 '탁약' 이라고 하면 '풀무' 라는 단어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탁' 과 '약'을 절구와 피리라는 두 개의 단어로 볼 것이냐, 아니면 '탁약' 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런 때는 문장의 앞 뒤 관계와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에 어느 쪽이 자연스럽고 논리적으로 순접하는 해석이 가능하느냐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 풀무라는
 기계에서 나오는 바람은 다다익선 이고 강강익선 이다. 많이 나오고 세게 나올수록 좋은 것이 풀무의 바람이다. 만약에 천지지간에 비유한 것이 풀무라면 그리고 천지지간은 무엇이든지 많이 만들어내고 세게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뜻이라면 사람의 말도 많을수록 좋은 것이 되어야 앞뒤가 맞는 소리가 된다. 그런데 바로 뒤에 노자가 하는 말은 '다언삭궁 불여수중' 이란 말이다. '말이 많으면 금세 막히는 법이니 가슴에 담아둠만 못하다' 이다. 이 말을 가지고 유추해 보면 노자는 '뭔가 많이 내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고 말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풀무'는 아닌 것이다. 반면에 절구와 피리는 이 경우에 대단히 적합한 비유가 된다. 절구는 너무 심하게 절구질을 하면 곡물 가루가 밖으로 마구 튀어나오고 피리도 너무 힘껏 불어 젖히면 쓸데없는 고음에 깨지는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많이 나오는 것은 좋지 않다' 는 말에 어울리는 비유는 '풀무'가 아니라 '절구와 피리' 이다. 앞 뒤 문장의 연결 관계도 그렇지만 문장 자체의 구조로 볼 때도 '탁' 과 '약' 은 '절구와 피리' 로 볼 수밖에 없다. '탁약' 이 도올의 설명대로 풀무라 하면 앞의 '기' 자하고 그 담의 '유' 자하고 맨 뒤의 '호' 자는 뭐야? 장식품이야? 대가리 숫자 맞추는 글잔가? '천지지간 기약탁약' 이라 해버리면 끝이지. 기유탁약호가 뭐냔 말이다. '유' 자는 움직일 유' , 또는 '원숭이 유' 잔데 '움직일 동' 과는 쓰임새가 약간 다르다. 원숭이 까불 듯 촐싹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하는 글자다.
 노자는 이 '유'를 절구질과 피리 부는 동작을 묘사하는 글자로 고른 것이다. 그래서 '유탁약' 은 '절구질 과 피리 부는 일' 로 옮길 수 있다. '기'를 붙여서 읽으면 '기유' 는 ' 그 움직임은' 이 된다. 맨 뒤의 감탄어조사 '호' 와 호응해서 '절구질과 피리를 부는 동작이란!' 하는 뜻이 되는 것이다. 물론 생략된 말은 '얼마나 경망스러운 것이냐?' 가 되겠다. 이런 문장을 '유' 는 버리고 '호' 자는 빼버리고 풀무라 하면 이건 번역이 아니라 창작이다. 그것도 황당무계한 창작이다. 탁약을 '풀무' 라고 하고 나니까 그 다음 번역이 안 되는 거야. 당근 횡설수설을 시리즈로 할 수밖에 없지. 그건 좀 있다가 보기로 하고 이 문장의 전체적인 의미를 알아보자. 노자의 글버릇을 살펴보면 한 가지 특이한 필법이 눈에 띄는데 그건 바로 'Aa Bb' 구조의 글을 'AB ab' 로 쓰는 버릇이다. 그것을 알아야 뜻이 통하는 부분이 더러 나온다. 앞에서도 그런 구조의 글이 나온 적이 있었다.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 이란 말과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이 그런 예이다. 이 문장을 읽기 쉽게 배열을 고치면 '허기심 약기지' 실기복 강기골' 이 된다. 뒤의 문장도 '좌기예 화기광' '해기분 동기진' 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게 하고 뜻을 약하게 하며, 배를 부르게 하고 뼈를 튼실하게 만든다' 라는 문장을 노자는 '마음을 비우게 하고 배를 부르게 하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한다' 는 어순으로 써놓은 것이다. 이런데 헷갈려서 도올은 정신을 못 차리고 헛소리만 하는 거다. '그 뾰족한 부분을 쳐내고 모습을 보면 빛이 어우러지는 영롱함이요, 그 얽힌 것을 풀어 헤쳐서 속을 보면 그것은 먼지와 같은 것이다' 라는 문장을 어순을 바꿔서 '뾰족한 부분을 쳐내고 얽힌 것을 풀어보면 빛이 어루어지고 먼지와 같다' 해놓으니까 도올 같은 머리로는 이게 해석이 안 되는 거다.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허이불굴 동이유출도 마찬가지로 천지지간 허이불굴 기유탁약호 동이유출로 어순을 바로 잡으면 아주 쉽게 그 뜻을 알 수가 있다. '하늘과 땅 사이는 텅 비어 있어 찌그러지지 않을 뿐이나, 절구질이나 피리를 불 때는 찧거나 불수록 튀어나온다(곡물 찌꺼기와 소리)' 라는 뜻이다. 그러면 노자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만 알면 된다. 천지지간이라는 대자연의 공간과 절구나 피리처럼 인위적으로 파놓은 공간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광대한 공간은 
텅 비어 있어서 그것(빔)의 소용은 다만 찌그러지지 않을 뿐이지만 절구와 피리의 속은 똑같이 비어 있으면서도 그것은 움직일수록 무엇인가가 경망스럽게 튀어나온다는 뜻이다. 고로 같은 '빔' 이라도 자연의 '빔' 과 인공적인 '빔' 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떠해야 한다? 절구나 피리처럼 움직일수록 경망스럽게 뭔가가 튀어나오는 절구나 피리 같은 '빔' 이 되지 말고 천지지간의 '빔' 처럼 그저 찌부러지지 
않으면서 고요한, 그런 '빔'을 가지라는 가르침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다음 구절에 따라 나온다. 그런데 도올은 '탁약'을 '풀무' 라 해버린 끝이라 앞 뒤 글의 연결이 불가능해서 끝까지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만 하고 자빠진다. 이런 애가 공자를 강의하고 자빠져 있으니 내가 마 억장이 무너진다. 절구와 피리라는 물건은 사람이 그 속을 파서 비게 만든 물건이다. 이 빈 것이 절구와 피리를 쓸모 있는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공적인 빔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람의 부가적인 노동이 필요하다. 절구는 공이로 부지런히 찧어야 곡식이 빻아지고 피리는 입과 손을 열심히 움직여야 소리가 난다. 열심히 할수록 더욱 많은 곡식을 빻고 더 요란한 소리를 낼 수가 있다. 그러나 절구질은 세게 할수록 가루가 밖으로 튀어나오고 피리도 너무 세게 불면 음이 깨져서 나온다. 이게 바로 '동이유출' 이다. 그러나 천지 사이의 공간은 열심히 움직이지 않아도 부지런히 애쓰지 않아도 그 빔은 비어 있다는 자체로서 가치를 지닌다. 바로 찌부러지지 않고 우주를 받치는 '허이불굴' 인 것이다. 그래서 노자가 우리에게 하는 말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다언삭궁 불여수중' 이다. 즉 절구나 피리를 불 때 너무 세게 하면 곡식가루나 음이 튀어나오는 것과 같이 '말이 많으면 금세 막히니 가슴속에 아껴둠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천지가 만물을 보고 아무 소리 안하고 성인이 백성을 간섭하지 않으며 천지간의 공간이 비어 있음으로써 찌그러지지 않는 것을 본받고, 절구와 피리처럼 경망되이 움직여 쏟아내지 마라. 모름지기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는 법이니 모쪼록 말을 아껴 가슴속에 담아뒤라. 이런 가르침이다. '다언식궁이니 불여수중이니라' 얼마나 좋은 말인고?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마음속에 담아둠만 못하느니라' 는 노자의 이 말씀은 도올이 명심해야 될 소리지. 사람이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 가지가 따라서 많아지는 거야. 틀린 말이 많아지고, 거짓말이 많아지고, 책임 못 질 말이 많아진단 말이다. 이 세 가지 때문에 사람이 궁지에 빠지게 되는 거고 요새 사람이 비명에 횡사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것이 뭔가? 교통사고지. 그러나 옛날 사람이 비명에 돌아가시는 이유 중에 으뜸이 
뭐였겠나? 바로 말이다. 횡액의 대부분이 말에서 비롯됐다. 연산군이 대신들한테 걸어준 묵언패의 내용이 '입은 화를 부르는 구멍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였잖아. 그래서 현대인은 싸돌아다니지 않으면 죽을 일이 없고 옛날 사람은 말을 안 하면 죽을 일이 없었다. 말로써 궁지에 몰리기는 백성이나 위정자나 범인이나 군자나 다를 바가 없었지. 옛날 같았으면 도올 같은 촐싹이는 그 입 때문에 벌써 인생 종치고 날 샜을 텐데 세상이 좋다보니 아마 죽을 때까지 헛소리 나발을 불 수 있을 거야. 그게 다 세상을 잘 타고난 덕분이지. 하지만 노자 당시에는 나발 잘못 불면 
바로 가는 수가 있었다. 가도 지 혼자 가는 게 아니고 불쌍한 처자식에 3족까지 데리고 갔단 말이다. 그래서 노자가 말하기를 대저 성인은 백서을 추구를 보듯이 하여 간섭치 않고 장담도 하지 않고 약속도 아니하며 거짓말도 아니하니, 이와 같이 말을 아끼라고 재삼 당부하는 것이다. 위정자가 말을 아끼면 백성은 위정자의 말에 따라 흔들리지 아니하고 약속을 하지 않으면 기대를 하지 않고, 장담을 하지 않으면 믿지도 않으며, 거짓말을 아니하면 분노 할 일도 없으므로 그저 묵묵히 지 할 일이나 하며 
산다는 얘기다. 그래서 불행해도 당연, 행복해도 당연, 그저 그런 것이려니, 이게 인생이거니 하고 살아갈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보는 것이지. 자연! '천지지간은 텅 비었으므로 굽히지 않는데, 사람은 절구나 피리와 같이 경망되이 움직이고 말이 많아서 자주 궁지에 몰리는 도다. 모름지기 다언삭궁이니 불여수중이니라!' 이쯤에서 도올의 번역과 해설을 또 아니 보고 넘어갈 수는 없지. 함 보자. 도올 가라사대,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네. 그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네' 라 해놨다. '수중'을 '그 속에 지킨다' 로 풀고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단순히 '그 속' 이 아니라 '흉중에' 또는 '가슴속에' 라고 약간 말을 꾸며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꾸밀 때 꾸미고, 꾸미지 말아야 할 때 꾸미지 않는 것이 좋은 번역의 첩경이다. 직역이 더 어울리는 대목에서 억지 멋을 부리거나 가미해야 할 때 무미하게 두는 것은 훌륭한 번역문이 못 된다. 이런 문장의 
꾸밈도 꾸밈이지만 번역을 엉터리로 했을 때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모든 문장의 뜻이 연결이 안 되고 각각 나 홀로 블루스를 춘다는 점이다. 천지지간이 풀무처럼 움직일수록 쏟아내는 것이라 해놓고 사람은 반대로 말을 아끼고 삼가라 하니 무슨 놈의 가르침이 이렇단 말이냐. 나같이 머리 나쁜 사람은 노자 못 배우겠다. 도올의 번역은 엽기적인 오역과 악역의 점철일 뿐만 아니라 어쩌다 하나씩 비슷하게 찍은 것조차도 그 꼬락서니가 한심하고 더욱이 사람을 기겁하게 만드는 건 그 해설이다. 번역보다 해설은 더 죽인다. 21세기의 명작《노자와 21세기》 상권 230쪽을 보자. 그러나 노자철학을 총괄해서 보면 그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은 분명 어떤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은 무엇인가? 노자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 은 바로 만물의 존재방식이 '빔'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유지될 때 스스로 
그러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항상 도는 스스로 그러할 때, 빔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 빔을 채워버리는 방향, 그 빔을 근원적으로 파괴시키는 방향으로의 사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함이 없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빔을 유지하는 함이요, 그 빔을 유지하는 함이야 말로 바로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위가 아니라 자연이다. 이것은 곧 모든 존재를 스스로 그러하게 내버려둘 때는 반드시 스스로 그러하게 허를 유지한다고 하는 자연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의 유위적 행동만이 빔을 유지시키지 않으며 스스로 
그러함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함은 존재의 자연이다. 여기서 우리는 허와 무위와 자연이 하나로 노자철학에서 관통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도의 쓰임이다. 그리고 박스까지 두르고 아래와 같이 도식을 그려놨다. 빔(허)≡함이없음(무위)≡스스로 그러함(자연)≡쓰임(용) 도올이 얼마나 노자사상을 모르는지 이 표만 봐도 알 수가 있다. 도올의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일고 행여 사람들이 노자를 실용주의자로 오해하게 될까봐 걱정스럽다. 노자는 실용주의자가 아니다. 위의 도식을 바로잡으면 다음과 같다. 도≡빔(허)≡본래 그대로(무위)≡스스로 그러함(자연)≡쓰임이 없음(무용) 노자는 앞에서 '이용지혹불영' 이라하여 '도무용' 임을 명백히 한 바 있다. 적어도 하나의 사상체계가 되고자 하면 앞 뒤 말에 어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앞에서 '아' 라 했던 
것을 뒤에 가서는 '어' 라 하는 수상쩍은 구석이 보이면 그것은 이미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도올이 번역한 노자의 어디에 앞과 뒤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있던가? 도는 허로써 무용이지, 결코 실로써 용이 아니다. 도는 모든 실이 나오는 허요, 모든 용을 낳는 무용이다. '도=용' 이란 등식을 그리는 인간이 어찌 노자를 아는 인간일 수가 있겠나? 소가 웃을 일이지. 그럼 이 인간이 노자를 강의하는 꼬락서니는 뭐겠냐? 소가 웃지도 못할 일 아니겠나? 이 장에서 우리 도올이 중언부언 해설이랍시고 잔뜩 늘어놓은 것들을 살펴보면 꼭 술 처먹고 오바이트 해놓은 거 같애. 이게 만약 철학이고 도올이 철학자라면 주일이는 성인이고 석천이는 보살이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만 퍼질러 놓고는 한다는 소리가 자기의 "기철학적 용어로 그런 것을 '천지코스몰로지(Tien-ti Cosmology)라 한다" 라니, 티엔띠가 
조선땅에 와서 고생이 많지. 영어까지 꼽사리 껴서 같이 고생이다. 그 '천지코스몰로지' 가 어떤 건지 볼라치면 "하늘은 형체없음이니 무형이라서 형이상이고, 땅은 형체가 있어서 유형이라 형이하인데, 양자는 일형으로서 일기다" 라 한다. 어렵지? 참말로 가방끈 짧은 나는 철학 못 배우겠다. 도올 같은 대학자의 글은 도무지 어려워서 이해를 못 하겠거니와 통박으로 굴려서 찍어도 역시 황당할 따름이다. 책을 보면 어쩌고저쩌고 골치 아픈 소리가 한참이나 계속되다가 역시 결론은 버킹검이야. 이것은 내 기철학의 방대한 의론 부분을 들어봐야만 그 실마리를 터득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서는 거론키를 삼갈 수밖에 없다. 정신은 마인드가 아니라 몸이다. 도올의 글은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다. 안 봐도 결론이 뻔하기 때문이다. 끝은 꼭 지 자랑으로 끝난다. 도올의 '기철학' 인가 뭔가 하는 책은 내가 읽고서 포복절도했다는 거잖아. 방대하다는 의론은 정말 황당하기가 《노자와 21세기》 뺨친다. 나중에 이 의론이라는 것을 함 볼때가 있을 텐데 일단 내가 이 말 정도는 뒷감당할 자신이 있다. '도올은 노자는 물론 기나 한의학에 대해서도 쥐뿔도 아는 게 없어.' 주차장에서 차에 앉은 먼지를 보고 '도의 본질'을 깨닫고, 다방 레지한테서 '빔의 도리'를 깨닫는 도올의 일도정진하는 학구열이야 감히 내가 흉내낼 경지겠느냐만 그 대갈빡 나쁜 것은 정말 흉내내기도 불가능하다. 얘 말하는 거 함 봐봐. "노자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 은 바로 만물의 존재방식이 '빔'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유지될 때 스스로 그러하다고 하는 것이다" 하고 봉창두드리는 소리하고 자빠지잖아. 완전히 대철인의 확철대오 답지? '빔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만물의 존재방식' 이라? 이게 뭔 해괴한 소리야? 만물은 '빔'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채움'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비려고 하지도 않고 차려고 애쓰지도 않는 것, 이것이 '저절로 그러함' 이다. 빈 놈은 빈 대로, 찬 놈은 찬 대로의 '있는 그대로' 가 바로 무위 다. 하늘과 땅이 그 사이를 비어 있게 하려고 애쓰는 걸 본 적 있나? 하늘과 땅은 둘 사이를 텅 비게 유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극대화는커녕 현상유지 조차도 관심이 
없다. 다만 스스로 그렇게 비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절구나 피리와의 차이점이 있다. 절구나 피리는 스스로 그러해서 속이 빈 것이 아니다. 사람이 속을 파내고 긁어서 비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천지간의 빔은 쓰임이 없다. 그저 찌부러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쓰고자 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절구와 피리의 빔은 쓰임이 있다. 곡식을 빻고 소리를 낸다. 그 쓰임을 위해서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것이 스스로 그러한 천지간의 빔과 용을 위해 만들어낸 빔(극대화 시킨 빔)의 차이점이다. '빔을 극대화 하는 것' 은 스스로 그러함이 아니라 절구나 피리를 파서 속이 비게 만드는 짓이다. 도올은 무위를 '행함이 없음' 이라고 어이없는 소리를 해대더니 이제 와서는 자연을 '빔을 극대화시키는 것' 이라고 헛소리 나발을 불고 있다. 도올이 개떡으로 만들어버린 게 노자 할아방뿐이면 내가 말도 안 해. 죄 없는 
음양오행설까지 들고 나와서 이것까지도 음양횡설, 오행수설을 만들고 앉았다. 얘를 어쩌면 좋겠냐? 머리 나쁜 게 부지런하면 뭐고? 바로 돌대가리지? 언제나 일을 조지는 건 멍부 맞지? 머리가 나쁘면 게으르기라도 해줘야 그게 사람들 도와주는 거지. 안 그래? 도올의 음양횡설, 오행수설 한마당 들어볼까? 티엔띠 뿌르언을 기똥차게 설명하면서 느닷없이 호주의 시드니가 튀어나오는 거야. 이게 뭔가 하고 보니 까 또 지 자랑인 것이라. 세계실내 건축가 워크샵인가 뭔가에 가서 일장 연설을 하고 왔노라 하는데 그런 단체는 내 첨 듣지만 참 별의별 자리에 다 낯짝을 내밀고 다니는구나 싶어서 그 부지런한 활약에 감탄을 안 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외국에 까지 나가서 횡설수설을 하고 온다는 거야. 생각 좀 해봐봐. 
코쟁이들이 뭔 음양오행을 알겠어? 지들이 황제내경을 들어보기나 했겠어? 노자란 사람이 있는 줄이나 알겠어? 그래도 그렇지 암만 양코배기들이 모른다 치고 막 떠들어도 분수가 있어야지. 이럴순 없는거야. 명색이 한의대를 나오고 한의사자격증을 받았다면서? 요새 한의대가 6년 과정이지? 지는 몇 년 하고 한의사시험 패스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역사 유구한 동의학도 노자 짝 날까 염려스럽다. 도올의 골 때리는 한의학 지식을 함 들어보자. 기대 되지? 도올은 개그를 하면서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는 데도 부지런하다. 노자만 갖고는 안 되니까 이제 음양오행설에 한의학까지 개그의 소재로 써먹자고 설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개그쇼의 단골메뉴라 하는데 암만 그래도 어찌 수천 년 억사를 가진 우리 의학을 갖고 코미디를 한단 말이냐. 허준 대감이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다. 도올이 명저
《노자와 21세기》에서 지 한의학 지식을 자랑한다고 보따리 풀어 놓은 거 같이 함 보자. 그 나이에 한의대 가서 뭘 배웠는가 의심스럽다. 도올이 시드니까지 가서 양넘들을 앉혀놓고 나발 불어 왈, 비장과 위장의 소화효소작용이 화라 했단다. 골 때리지? 이런 건 한의학의 기본의 기본이고 기초의 기초다. 1학년 때 다 배우고 2학년만 돼도 달달달 외우는 거다. 이런 데서 지랄유갑하고 자빠지면 한의사 사람 잡는다. 비장과 위장은 오행상 토에 속하는 장부지. 당근 토기를 그기운으로 삼는단 말이다. 화는 심장과 소장을 관장하는 기운이야. 오행의 상생상극으로 볼 때 화생토요, 
목극토의 관계가 있어. 그래서 토에 속하는 비장과 위장은 심장과 소장의 화기로부터 도움을 받고 간과 담의 목기로 부터는 상함을 받게 되는 거야. 위치상으로도 비장과 위장은 위로는 심장 아래로는 소장 사이에 딱 끼여 있잖아. 그래서 심장과 소장의 화기가 비장과 위장이란 그릇을 굽는 가마가 되는 거다. 화력이 셀수록 도자기는 단단해지고 광택이 좋아지는 것처럼 심장과 소장의 기운이 좋을수록 비장과 위장도 튼튼해지는 것이다. 반면에 간과 담(쓸개)은 토를 극하는 목기의 장부여서 간의 기능이 승하면 비장의 기운을 억제하고, 담의 기운이 강하면 위장을 손사 시키는 것이야. 이런 것은 한의학의 기본 상식이다. 내 살다가 비장과 위장의 소화효소작용을 화라 하는 돌팔이는 첨 본다. 그리고 또 도올이 뭐라 하는가 함 봐. 비장과 위장의 일차적 기능이 부숙에 있다 하는거야. 얘가 
노자를 지 멋대로 만들더니만 인체과학도 새로 만드는가보지. 부숙은 썩히는 것을 말하는데 택도 없는 소리지? 비장의 기능은 생리기능 조절에 있고 위의 기능은 해체와 혼합에 있는 거다. 위장이 하는 일은 잘게 부수고 섞는 것이지 썩히는 게 아니다. 썩힘과 섞음은 발음은 비슷해도 전혀 다른 소리잖아. 위장에 화기가 모이면 바로 위열이 되고 그건 바로 위궤양으로 직행하지. 큰일날 소리하고 있다. 흙의 성질이 바로 이와 같은 해체와 혼합이며, 부숙 즉 썩히는 것은 습기인 물의 작용이다. 오행을 각각 대응하는 색으로 나타낼 때 토는 누를 황이고, 화는 붉을 적이고, 목은 푸를 청이다. 그럴듯하잖아. 그런데 수의 색이 검을 흑이라 하면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한다. 선뜻 납득이 안 가지? 오행에 대입시킬 때 물의 색이 왜 검은 흑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이것 하나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게 우리나라 한의학이다. 물의 색이 오행상 왜 흑이 되는햐 하면 그건 바로 수기가 도올이 말한 부숙의 기운이기 때문이야. 
물은 모든 생명을 길러내지만 동시에 그것을 불러들여 썩히는 것이 바로 물이야. 그리고 썩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 색이 검게 변하게 돼 있어. 바로 습기의 작용으로 수의 색깔을 띠게 되는 거지. 우리는 '시커멓게 썩었다' 고 말하지 '시퍼렇게' 또는 '시뻘겋게 썩었다' 고 하지 않아. 그리고 물 없이 썩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고(수분 없는 부패 없다), 소금이 썩은 간장도 검은색이고 낙엽이 썩어도 검은 색이고, 고추장을 오래 둬 보면 알 듯이 빨간 고추도 썩으면 검어진다. 그래서 인체에서 볼 때 수의 장부인 신장이 바로 부숙의 역할을 한다. 인체에서 썩은 물을 걸러내는 것이 신장이고, 그게 바로 오줌이잖아. 불의 기운이란 썩어가던 물건도 소독을 해버리는 것이지. 위장의 작용이 화라 해놓고 이 화가 부숙을 시킨다 하면 21세기에는 물로 소독하고 불로 썩히는 시대가 되는 모양이지? 그러면 뭔 줄 아냐? 그게 말세다. 곰팡이가 피고 균이 번창하는 것은 오로지 습기 때문인 것이니 썩어 가는 것을 햇볕에 말려보면 당장에 썩는 것이 멈춰져. '비장과 위장이 썩히는 역할을 하고, 그 기운이 화기라 하고, 
불이 사물을 부패시켜 썩힌다' 는 소리를 태평양을 건너가서 불쌍한 양넘들을 앉혀놓고 떠들고 왔다 말이야? 그걸 자랑이라고 하고 자빠지니 이걸 어찌해야 돼? 동의학의 국제적 망신이지. 어물전에 꼴뚜기가 따로 없어. 물을 불이라 우기는 짓이 바로 지랄병이다. 비장은 곧 지라인데 인체의 생리기능 조절에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지라가 나쁜 사람의 증세를 일컬어 지랄병이라 한다. 지라 바로 위에 있는 심장의 화기가 너무 승할 때 지랄병이 생긴다. 은행까지 갔다가 통장을 안 가져와서 되돌아 오거나 차 속에 키를 꽂아두고 문을 잠가버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지라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은행까지 가서 집에 전화해서 구좌번호를 물어보거나, 철사를 구해서 차 문짝에 쑤셔 넣고 낑낑거리는 것이 바로 지랄하는 
짓이란 말이다. 내 보기에 도올은 지라에 약간 문제가 있어. 글에 지랄병 증세가 자주 보이기 때문이고 해외에까지 나가서 나라 망신을 시키는 것도 그렇지. 꼴에 저 나발을 시드니에서 영어로 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강의한 영어원고를 책에다 그대로 실어놨는데 그것도 다 지랄병이다. 심장의 화기가 머리에까지 치밀어 올라서 언제나 뚜껑 속에 증기가 풀풀 솟는 상태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인 거야. 심장을 식히고 머리 속의 김을 좀 빼내서 증기압을 낮추기 않으면 도올은 장수하기 어렵지. 지가 뭐TV에 나와서 푸샵 몇 개 한다고 오래 사는 게 아니다. 태권도 단증 흔들어 보인다고 해서 튼튼한 것도 아니고 내가 지 몸의 건강이나 상태까지 다 보고 하는 애기야. 한의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참에 도올의 증상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해주는 것도 괜찮겠다. 도올이 지금 하고 자빠진 꼬락서니를 일컬어 '지랄염병'이라 하는데 이 '지랄염병' 이 어떤 병이냐? 염병은 '염통'이 나빠서 생기는 병이다. 한의학적 소견으로 이 염병은 심장이 허(약)해서 오는 심장병이다. 심장의 기운인 화기가 약해지면 어찌되느냐,바로 지라가 같이 허에 빠진다. 왜냐하면 지라(비장)는 심장의 화기를 받아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장부이기 때문이다. 비장은 토에 속하기 때문에 화생토의 관계상 화기를 못 받으면 힘을 못 쓴다. 그래서 심장이 나쁜 사람은 반드시 지라가 안 좋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염병은 지랄병을 부르고 지랄병은 반드시 염병과 같이 온다. 그래서 우리가 이 둘을 항상 붙여서 '지랄염병' 이라 하는 거다. 그 담에 '미치고 환장하겠다' 하는 말을 자주 쓰잖아. 이게 무슨 병이냐? 미치고 환장하는 증세의 원인은 신장(콩팥)에 있다. 심장의 화기를 억제해주는 것이 바로 신장의 수기인데 신장이 약해서 몸에 수기가 부족하면 화기가 위로 올라가서 
골에 미치게 된다. 사람은 화기가 머리에 미치면 미쳐버린다. 수기가 부족해서 몸이 말라버리면 미치기만 하느냐? 그게 아니다. 환장을 같이 하게 된다. 환장은 '간이 말라서 비틀어지는 병' 이다. 물이 없으면 나무는 마른다. 간은 목이다. 그래서 신장의 수기가 부족하면 간이 마르게 되고 심하게 마르면 이게 비틀려서 뒤집어지는 거다. 이게 바로 '환장' 이다. 그렇다고 배를 째서 간을 보고는 '간이 제자리에 있는데 무슨 소리냐?' 하고 묻는 것은 무식한 짓이다. '간이 뒤집어진다' 는 말은 부침개 뒤집듯이 엎어진다는 게 아니고 그 기운이 뒤집어진다는 소리다. 때문에 미치는 증상은 환장하고 같이 온다. 그래서 '미치고 환장하겠다' 소리를 하는 거다. 이런 원리로 볼 때 '지랄염병' 과 '미치고 환장하는' 증세는 같이 오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인체라는 것은 하나가 나빠지면 도미노 카드가 쓰러지듯이 줄줄이 상하게 마련이라서 '미치고 환장' 하는 증세가 계속 
심해지면 '지랄염병'도 오게 된다. 도올은 심장이 유독 실해서 화기가 승한 체질이라 '지랄염병' 할 체질은 아니다. 그런데 왜 자꾸 지라병을 치게 되느냐? 몸에 수기가 부족해서 환장을 하기 때문에 나빠진 간(목)이 지라(토)를 침범해서 그렇다. 목극토다. 심장의 화기가 지라를 감싸주기 때문에 저 정도로 버티는 거지 천성적으로 심장까지 약하면 벌써 염병까지 떨고 있을 거다. 지가 어릴 때 관절염인가 류머티즘으로 고생한 것도 선천적으로 신장이 약해서 앓은 병이다. 수기는 신장과 방광의 기운이지만 동시에 뼈의 기운이다. 수기가 부족하고 화기가 승한 사람은 뼈가 나쁠 수 밖에 없다. 도올은 오래 살라면 어떻게 하든지 성질머리를 죽여서 화기를 누르고 좋은 물을 많이 마시는 수밖에 없어. 마음은 오장육부 상태의 총체적인 조화에서 나오는 것이고 글이라는 것은 마음의 표상이어서 어떤 사람의 글을 보면 그 사람의 건강상태를 알 수가 있다. 나는 얼굴을 한 번도 안 봐도 글 두세개만 보면 '아! 이 사 은 몸의 어디가 안 좋은 사람이고 어떤 부분의 기능이 활발한 사 람이구나' 정확하게 안다. 도올의 건강진단은 공짜다. 또 한 장 마무리하자. 천지불인 이만물추구 , 성인불인 
이백성추구 ,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 허이불굴 동이유출. 도올번역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를 뿐이다.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꼭 풀무와도 같다. 속은 텅 비었는데 찌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더 내뿜는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네. 그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네. 바른번역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보듯이 무시하게 바라볼 뿐이고 성인도 불인하여 백성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대하듯 간섭하여 말하지 않는다. 천지 사이의 공간이 어떠한가? 절구질과 피리를 부는 것은 어떠한가? 천지지간은 텅 비어서 찌그러지는 않을 뿐이지만 절구와 피리가 속이 빈 것은 부진런히 움직일수록 많은 것을 흘리고 있으니 그와 같이 말이 많을수록 자주 막히는 바이니 흉중에 담아두어 밝히지 않음만 못하니라.

       제 6 장 
  어영부영 하다보니 벌써 6장까지 와버렸네. 여기서부터가 진짜로 노자한테 헷갈리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도올뿐만이 아니고 노자를 연구한다는 고금의 학자들이 전부 다 골을 싸매고 고민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노자에 대해서 강아지 풀 뜯어먹는 헛소리들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것도 여기부터다. 물론 우리의 우상, 21세기의 희망 도올의 개그도 가일층 그 환상적인 경지를 보여주게 된다. 첫 문장을 함 보자. 곡신불사 시위현빈 앞에서 말했지만 노자는《도덕경》 5천 글자를 통틀어 다른 사람들이 쓴 적이 있거나 널리 쓰이는 의미태의 고유명사를 단 한 개도 사용하지 않는다. 《도덕경》에 나오는 모든 의미태의 고유명사는 백 프로 노자의 오리지널 창작어들이다. 노자가 지어낸 단어들이어서 이런 고유명사가 뭔지를 사람들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해석이 구구하고 중구난방 지 멋대로다. 이런 조어의 능력이 뛰어나기로 지나인보다는 오히려 고대 인도인이다. 불경을 읽어보면 말을 만들어내는 어휘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문학적 가치만으로도 인류의 보고라 할 만하다. 특히 이름을 지어내는 
데는 도가 텄다. 부처님한테 놀라는 게 바로 작명력이다. 온갖 대상 온갖 사물에 수천 수만 가지 이름을 만들어 붙이는데 정말 환상적이다. 신들의 이름부터 어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난해한 철학적 개념에 대한 명칭까지 멋지게 이름들을 척척 만들어 붙이는데, 불경에 등장하는 신과 보살, 신장들의 이름만 해도 기억을 다 못 할 정도다. 거기다가 해탈이니 열반이니, 반야니, 업이니, 보니 하는 것들도 전부 다 지어낸 말들이거든. 깨달음 한 가지를 가지고 만들어 붙인 이름이 수백 가지는 될 거야. 하지만 불교는 이런 이름들에 대한 설명이 그 작명자인 부처님의 설명을 
통해서 밝혀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고, 또 그 의미를 놓고 이설이 분분할 이유가 별로 없다. 반면에 노자 할아방의 글은《도덕경》의 원문만 전할 뿐 노자가 이에 대해 설명해놓은 강의록이 전해지지도 않고 노자로부터 직접 설명을 들은 제자도 없어서 겨우 왕필이 해놓은 주해가 고작이다. 그런데 왕필의 주해라는 것이 불경처럼 직접 그 원작자의 강의를 들은 제자가 기록한 게 아니고 왕필이 지 멋대로 풀어놓은 것이어서 보다시피 별 신빙성이 없는 참고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노자의 창조어들이 이 6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노자 연구가들이 이 문장의 처음에 나오는 '곡신'을 이런 고유명사로 착각한 나머지 이 장의 의미가 오늘날까지 제대로 풀어지지 못했다. 뒤의 현빈은 노자가 지어낸 고유명사지만 '곡신' 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게 헷갈려서 '곡신' 이 도대체 뭐냐? 해서 2천 년 동안 별의별 해석이 난무했다. 가장 골때리는 해석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지금 중국이나 대만의 내로라하는 동약학자들 중에는 '곡신'을 단전이라고 우기는 놈도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이 기공 수련의 요체라고 뻗대는 거다. 웃기는 놈들이지. 앞으로도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이상한 글들이 나오는데 그런 것을 죄다 신선술의 비결로 풀어 젖히는 웃기는 짜장면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 도올은 이걸 뭐라고 풀었겠냐? 내가 지 강의를 듣기 전에 통밥으로 감을 잡아봤다. 아마 도올은 틀림없이 '곡신'을 또 '여호와 하나님' 이라 하고 자빠지겠지 생각했거든. 그런데 내 통밥이 틀린거 있지. 도올은 역시 천재였어. 이걸 이번에는 '계곡의 신' 이라고 
번역하더라고 미치겠더라. 앞에서 상제를 여호와 하나님이라 하더니만 '곡신' 은 글자 그대로 '계곡의 신' 이라 하는데 얘 대갈빡은 내 수준으로는 짐작이 안 돼. 도올이 '곡신불사'를 뭐라고 옮겼느냐 하면 '계곡의 하나님은 죽지 않는다' 이래 놨어. 계곡의 하나님은 죽지 않다니? 그럼 강가의 하나님은 죽나? 들판의 하나님도 죽고 산꼭대기에 사는 하나님도 죽는데 계곡에 사는 하나님만 안 죽는단 소린가? 그럼 계곡에는 하나님들이 바글바글하겠네? 나는 올림포스 산꼭대기에 신들이 모여 논다는 소리는 들었다도 안 죽으려고 계곡에 숨어사는 신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한문을 
이렇게 읽으니까 당최 앞 뒤 연결이 안 될 수밖에 없잖아. 생각 좀 해봐봐. 바로 뒤에 오는 문장이 뭐야? '시위현빈' 이다. '검을 현' '계곡 빈' 이다. 그래서 '시위현빈' 은 '이것을 일컬어 검은 계곡이라 한다' 다. 그렇다면 당근 앞 문장의 의미는 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계곡' 에 대한 이야기라야 된다. 이게 문장의 법칙이다. 때문에 이 '곡신불사' 의 뜻은 '계곡의 신이 죽지 않는다' 가 아니고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을 말한다. 띄어쓰기를 해서 읽으면 '곡, 신불사' 다.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이 뭐냐? 바로 
신선의 고향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고 해탈의 세계이고 부처가 사는 곳이고 노자 할아방이 장자 할아방하고 바둑 두는 무릉도원이 고 무극이고 태허의 자리고 내가 죽은 다음에 갈 곳이고, 도올은 부르다가 부르다가 가지도 못해보고 죽을 곳이다. 그 담 문장을 갖고 도올이 뭐라 했는가 함 봐봐. '시위현빈'을 갖고 나발을 불기를 '이를 일컬어 가물한 암컷이라 한다' 해놨어. 벌떡 뒤집어 질 판이지? 갈수록 태산이고 첩첩이 산중이지? '빈'으 옥편에서 찾아보면 '암컷 빈, 계곡 빈' 으로 나오는데 이 두가지 뜻 주에서도 도올이 눈에는 '암컷' 이라는 말만 번쩍 띄었던 거라. '누가 지 보고 수컷 아니랄까봐. '암컷' 이나 '여자의 거시기' 비스름한 말만 나오면 헤까닥 해가지고 정신을 못 차려. '가물한 암컷' 이라니? 이건 달리 
말하면 까무잡잡한 암컷이란 말 아니겠어? 도대체 여기서 '가물한 암컷' 이 왜 나오나? 저 말은 '그 곳을 일컬어 검은 계곡이라 한다' 라는 뜻이고 두 문장을 연결해서 읽으면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이를 일러 현빈이라 하느니라' 다. 그런데 도올이 뭐라 하는가 하면 '계곡의 하나님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물한 암컷이라 한다.' 이런단 말이야. '계곡의 하나님' 이 죽지도 않으면서 뭐라? 그게 가물한 암컷이라?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가물한 암컷이란 하나님도 있나? '대통령이 사는 곳이 있는데, 그 이름을 청와대라 한다' 는 문장을 '대통령이 있는데, 그 이름을 청와대라 한다' 고 번역하면 이게 어찌되겠나? 청와대란 지명이 대통령 이름으로 바뀌어 버린다. 내가 도올을 보면 그 대갈빡 구조가 어찌된 앤지 심히 궁금하다. 지 강의를 보고 있으면 말이다, 애가 저능안가? 
지능지수가 미달인가? 싶을 때가 많다. 이게 뭐 어렵냐 말이다. 곡신이란 게 만약에 어떤 신의 이름이면, 이름이 하나만 나와야지 뭐 때문에 똑같은 이름이 현빈이라고 또 나오느냐고? 안 그래? 여호와면 여호와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여호와라 해놓고 하나님이라 하는 거나 똑같은 거야. '곡신은 안 죽는 신인데 이름이 현빈이다' 이런 문장은 초등학생 작문에도 안 나와. 이미 곡신이라는 신의 이름이 나왔는데 뭔 이름이 또 나오느냐 말이다. 한문을 이 따위로 읽는 넘들은 노자가 '곡신불사'를 알기 쉽게 '신불사곡' 으로 써놓으면 이번에는 '신은 계곡에서 죽지 않는다' 로 번역하고 자빠질 넘들이다. 바로 쓰나 거꾸로 쓰나 못 알아먹는 넘들 한테는 똑같은 거야. 암만 대가리가 돌이라도 그렇지. 다음 구절에 
'현빈'을 옥편만 들고 찾아봐도 '검을 현에 계곡 빈' 인데 이게 '검은 골짜기' 나 '신비한 골짜기' 로 밖에 해석이 더 되나? 물론 '현빈'은 '현빈' 이지 '검은 골짜기' 나 '신비한 골짜기' 는 아니다. 그냥 이름이 '현빈' 이다. 그러나 한자의 뜻을 봐야 감이 잡히는 수준이라도 최소한 '검은 골짜기' 로는 찍어야 된다. 그러면 당연 앞 구절의 의미는 뻔하잖아. 뒷구절에서 '이를 일컬어 이름을 뭐라고 한다' 고 나왔으면 앞 구절에 있는 것은 당근 이름이 무엇인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이겠지. 이건 논술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그냥 초등학생 글짓기 수준의 이야기야. '이름을 현빈이라고 
하는 무엇은 바로 신이 불사하는 계곡이다' 라야 말이 되지. 이걸 '이름을 현빈이라 하는 무엇은 곡신이라고 하는데 이놈은 죽지 않는다' 로 풀어봐, 골이 어지럽지. 도무지 문장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가 있잖아. 앞 구절을 엉터리로 읽고 나니 다음 구절이 감당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현빈'을 '가물한 암컷' 이라고 지랄염병을 떨고 나오는 거고. 내가 앞에서 말했지만 도올은 환장기가 있다. 간이 안 좋거든. 그래서 수시로 증상이 나오는데 어떤 경우에 드러나냐? '암컷' 이라든가, '여자' 라든가 '자지나 보지' 같은 것만 나오면 그냥 환장을 하는 거야. 이게 바로 환장 증세다. 이해가 잘 안 되겠지만 그게 다 간이 나빠서 나오는 성경이다. 옥편에서 '빈' 자를 찾아보니 '암컷' 이라는 뜻도 있거든, 거기다가 
'곡' 이 뭐야? 골짜기 아냐? '암컷' 이 나오고 '골짜기' 가 나오니까 도올이 대발빡 속에 번쩍하고 떠오르는게 뭐였겠어? 바로 여자 거시기밖에 없지. '아! 노자가 말하는 게 바로 여자 거시기구나!' 무르팍을 친 거야. 내가 있지 도올이 공부하는 꼬락서니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지가 노자를 갖고 횡수를 늘어놓으면 저런 헛소리가 왜 나오는지 그 이유까지 다 안다. 미리 밝히지만 《도덕경》 전체에 세인이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노자가 어떤 개념을 여자 거시기에 빗대서 말한 곳은 없다. 이게 다 도올이 같은 돌들이 노자를 연구합네 하면서 퍼질러 놓은 헛소리들 때문이다. 
《도덕경》이란 책이 말하자면 정치론인데 그것도 대단히 심오하고 고매한 정치철학선데 여기에 여자 거시가 뭐 때문에 나오느냐고? 간이 나빠서 환장한 놈들이라 그런 해석을 하고 자빠지는 거야. 다음 문장들을 보면 진짜로 지랄에 육갑을 떨고 앉았다. 같이 함 보자.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도올이 이 '현빈지문'을 풀어 가라사대, '가물한  컷의 아랫문' 이라 하고 자빠지는데,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을 똑바로 쓰면 뭐겠나? '시커먼 여자 보지' 아냐? 이게 정신 있는 인간이야? 옛날에 "여자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도올이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지. 그걸 책으로도 냈고 어린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명색이 교수란 인간이 강의를 하면서 '여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도 안 하고 네 시간 동안 계속 '자지 보지' 만 한 거야. 듣기 싫어서 나가려는 애들 있으면 호통을 쳐가면서 억지로 앉혀놓고 신 나서 '자지왈 보지왈' 했다는 거다. 그래 가지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혼줄이 빠진 적이 있지. 그래서 요새는 아주 점잖아졌다. 옛날 같으면 '시커먼 여자 보지' 라 했을 인간이다. 많이 순치된 거다. 철이 좀 들었다 해야 되나? 호랭이 물어갈 인간 같으니, 노자철학을 강의하는데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 이 뭐야? '곡신불사, 시위현빈' 은 '신이 영생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그 곳을 가리켜 현빈이라 하느니라' 하는 말이다. 고대 지나나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신은 영원히 존재하여 불사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부처, 보살, 신장은 인간세의 수명에 비하면 영원한 시간상의 존재지만 그것들도 모두 인연법에 의해 나타난 존재일 뿐이어서 언제나 인연이 다하면 돌아가는 것이며 영원불사하는 존재는 없다고 본다. 생자필멸은 불변의 법칙이며 영적인 존재인 신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 시간적 개념이 비록 억갑으로 세는 것이긴 해도 인간세 60년이나 부처의 억만 겁이나 영원의 관점에서 보자면 
찰나지간이긴 마찬가지이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가 암만 멀어도 무한한 우주 공간적 거리에서 보면 지구상의 개미가 1분 동안 기어가는 거리나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불교적으로 유추하면 그것은 해탈의 경지고 도피안이다. 해탈이란 인연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인연법이야말로 모든 존재를 현상계에 내보내는 세계의 법칙이다. 인연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의 저편으로 건너간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과의 영원하고 완전한 작별이다. 아디오스 발발탄이다. 부처는 이 세계와 저쪽의 경계를 넘어 가버린 사람이다. 그래서 실제로 부처는 우리와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아무리 부처님 전에 엎드려 애처롭게 빌어도 부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만약에 그 소리가 들리고 그 간절한 하소연에 부처의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있다면 부처와 나는 인연에 의해 연결되는 상대자가 된다. 부처 역시도 나와의 인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부처의 해탈은 뻥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히 구라다. 그러나 부처님은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너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즉 노자가 말하는 도의 존재로 돌아가버린 사람이어서 너희에게는 무용이라는 것을 확실히 했던 것이다. 그래서 죽은 부처한테 절하고 공양을 하고 염불을 해봤자 기대할 게 없다는 얘기다. 우리한테 소용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은 부처가 아니라 부처가 남긴 가르침이고 그 말씀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돌아가실 때 제자들에게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등불로 삼으라고 했던 것이다. 부처가 저쪽 세계로 아주 가버려서 아무런 영험도 없고 기도빨도 안 듣는다면 우리 같은 중생 입장에서는 믿을 이유가 없잖아. 말씀인즉슨 암만 진리라 쳐도 중생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아플 때 낫게 해주는 거고 돈 잘 벌게 신이 도와주는 거고, 애 못 낳는 여자 아들한 
뽑아내게 해주는 거 아냐? 맞지? 그런데 무슨 영험이 있어야 사람들이 모인다. 이게 종교다. 그래서 불교에서 영험 없는 부처 대신에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는 게 뭐게? 바로 보살들이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같은 보살들이 피안으로 영영 가버린 부처를 대신해서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고 어려움을 풀어준다. 이게 보살신앙이다. 보살이란 어떤 존재냐? 부처님처럼 아주 '현빈' 으로 가버릴 수도 있었던 사람인데 고해에서 신음하고 인연법에 묶여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가련함과 측은지심 때문에 마지막 한발자국 앞에서 해탈을 스스로 포기한 존재들이다. 중생을 제도하고 구원해주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여 인연법의 세계 속에 자시을 남긴 사람들이 바로 보살들이다. 이런 보살들은 실제로 기도에 응답을 하고 영험도 보여준다. 지장보살은 이 세계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제도하고 지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이 모두 풀려난 다음 지옥불이 완전히 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부처님 뒤를 따라가겠소이다, 하고 부처님께 서원한 사람이다. 이런 보살들은 겁의 세월을 두고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겠지만 그것도 인연이 다하면 부질없이 잊혀질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간에 지금 부처가 가 계신 그런 곳을 노자는 일컬어 '현빈' 이라 하는 거다.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하는 곳. 그런 곳은 인연에 따라 성주괴공하는 이 세계와는 다른 곳이다. 그러나 그곳이야 말로 이 세계가 있게 된 근본이다. 이 세계가 그곳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이다. 그곳이 바로 열반의 세계요, 피안이며, 도요, 현빈이다. 바로 노자의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이 그말이다. '현빈의 들어가는 입구야말로 천지의 근본이다' 라는 말이다. 부처님이 넘어 가버린 그문이 바로 '현빈지문' 이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중생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에 뒤돌아보다가 차마 넘지 못하고 발걸음을 되돌린 바로 그 자리가 '현빈지문' 이다. 그 문을 여는 데는 정말로 모질고 독한 마음이 필요하다. 두고가는 형제들, 자식들, 모든 사랑했던 사람들, 생명의 유혹과 그 본능까지도 다스려 잡지 못하면 넘지 못하는 문이다.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이야말로 우주의 
근본 자리이고 영원불사하는 세계이며 고통과 슬픔과 비참이 없는 곳이며 우주와 내가 일체가 되는 자리이다. 기독교인이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가 황금보좌에 앉아있고 그 우편에 베드로가 왼편에 바울이 있으며 천사 미카엘이 그 날개로 이 세계를 덮고 서 있는 그 장소가 바로 '현빈' 이다. 이런 심각하고 엄숙하고도 진지학 철학적 명제를 논하는 자리에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 을 들고 나오는 꼴값은 어찌 해야 되겠나? 이걸 강의라고 하고 자빠지는 꼬락서니를 언제까지 두고봐야 되겠느냐 말이다. 도올이 도를 알려면 한 겁의 윤회가 더 필요할 거다. 도올은 골짜기만 보면 여자 깊은 곳이 생각나고 문만 나오면 여자 아랫문이 떠올라 노자의 고상하시고 우아하신 성인 철학을 갑숙이의 성인 소설로 둔갑을 시키고야 말았다. 《도덕경》이 졸지에 '장미여관' 으로 전락해버리고 '무위의 도를 지향하자' 가
 '가끔은 포르노스타를 지향하자' 가 돼버린 거 아니냐 말이다. 내 말이 지나쳤나? 글이라는 게 반드시 점잖음으로 칠갑을 하고 교양으로 화장을 해야하는 건 아니다. 강의도 마찬가지다. 자지 보지가 꼭 필요할 때가 있고 또 목적상 자유스럽게 써야 할 장합도 있다. 이영희씨가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노래하는 역사> 같은 거 말이다. 그의 글 속에 대단히 노골적인 묘사들이 나오고 남녀의 신체 부위에 대한 쌍스런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아무도 이 글을 외설이나 저질스러운 글로 보지 않는다. 글의 목적과 주제 자체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이나 강의 내용에 있어야 할 알맹이는 하나도 없으면서 그런 말들을 흥행 목적으로 동원해서 빈약한 내용을 커버하려 들거나 학문적 빈곤을 호도하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작태다. 도올의 강의 '여자란 무엇인가?' 가 그토록 세인의 분노와 
비난을 샀던 이유는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용어로써 자지 보지를 썼기 때문은 아니다. 그 강의가 전체적으로 내용이 황당할 뿐 아니라 '여자란 무엇인가?' 란 강의 제목에 걸맞는 알맹이가 하나도 없는 날맹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파격적이라 할 만한 용어 구사만으로 강의의 상품성을 만들어내려고 들었기 때문에 그토록 욕을 얻어먹은 것이다. 도올은 '곡신' 과 '현빈지문'에서 그게 무슨 여성성을 상징하여 쓴 말인 줄로 헛짚고 자빠진 나머지 대단한 발견이나 한 양 온갖 구라를 다 치던데 한마디로 웃기지도 않는 삼류 개그였다. 노자가 그걸 본다면 얼마나 어이가 없겠냐? 설마 하니 '현빈지문'을 갖고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 이라고 읽는 인간이 2천 년 우에 태어나리라고 짐작이나 했겠냐? '현빈지문' 을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 이라고 한 도올이 시위천지근을 뭐라고 했는지 함 보자. 
'이를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 고 해놨다. 지 말이 맞다고 쳐도 황당하기 짝이 없지. 기왕에 '현빈지문' 을 '암컷의 아랫문' 이라고 우길 참이면 '시위천지근' 도 '암컷의 자궁' 정도로 우겨야 말이 되잖아. 근데 갑자기 웬 '뿌리' ? '문' 이 여성의 상징적인 비유어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뿌리' 는 남성의 상징이다. '문' 과 '뿌리' 는 대칭되는 두 개념으로는 쓰일 수 있어도 '문' 과 '뿌리' 가 동일 개념으로 쓰일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문은 드나드는 것이요 뿌리는 한자리에 박혀 있는 것이다. '암컷의 아랫문은 곧 천지의 뿌리다' 이런 말은 대단히 어색하지? 만약에 노자가 이런 의미로 글을 썼다면 아마도 이렇게 썼을 거다. '현빈지문 시위천지궁.' 만약에 암컷의 아랫문이 뿌리처럼 요지부동이면 수컷은 어떻게 해? 난감하겠지? 자고로 문이란 잘 열리고 닫혀야 되는 거고 뿌리란 튼튼하고 실해야 되는 거다. 도올은 이렇게 번역해놓고는 자기가 봐도 어색했는지 이런 소리를 해놨다. '여성의 성기야말로 모든 생성의 뿌리다.' 역시 도올이 철이 
들긴 들었다. '억수로 점잖지? '여성의 성기' 라. 더 쉬운 말도 있는데. 도올은 웃기는 게 꼴이 페미니스트 흉내를 내려고 든다. 인상이 험악한 남자일수록 페미니스트가 많은 이유에 대해 사회인류학적, 남성심리학적 고찰을 해서 논문을 하나 쓰면 아마 박사학위쯤은 쉽게 딸 거야. 도올은 또 '따라서 우주적 암컷의 성기(아랫문)야 말로 천지의 뿌리라고 노자는 갈파하는 것이다' 라고 헛소리를 계속한다. 하지만 천만에다. 노자는 그렇게 갈파한 적 없다. 노자를 어설픈 페미니스트로 만들지 마라. 그리고 노자철학을 '여성상의 우월'을 갈파한 페미니즘으로 둔갑 시키지 마라. 우주적 암컷의 성기가 천지의 뿌리라면 우주적 수컷의 성기는 도대체 뭐라는 거야? 줄긴가? 열맨가? 가지? 아니면 우주적 수컷의 성기는 아무 짝에도 못 쓰는 물건인가? 도올의 엽기적인 개그를 조금만 더 볼까? 항상 뽐내고 
으스대고 잘난 체하는, 봉우리같이 불뚝불뚝 서 있기 좋아하는 남성들이여! 항상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며 수모 받는 낮은 자리에, 소리 없이 있는 여성들을 우습게 보지 말라! 아무리 그대들이 뽐낸다 한들, 높은 것은 결국 낮은 것으로 오게 마련이요, 소리는 아무리 질러봐도 침묵으로 돌아가게 마련이요, 참은 빔으로 돌아가게 마련일지니, 남성이란 여성이라는 대지 위에 흩날리는 티끌만도 못한 존재로다! 남성이란 생멸의 한 고리에 불과한 잠시적(ephemeral)이라고 한다면, 여성이란 모든 생멸의 근원자로서 영속적(permanent)인 것이다. 《노자와 21세기》 상권 262쪽. 위의 글은 페미니스트인 척하는 남자들의 심리적 저변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지들은 불뚝불뚝 서 있고 여자는 낮은 데 숨어 있다고? 하기사 불뚝불뚝 설 
게 없으니 그거야 할 수 없다마는 뭐가 낮은 데 숨어 있단 말이야? 여성을 찬미하는 척하면서 아주 여성을 깔보고 능멸하는 황당무계한 오만과 편견의 전형이지. 저 소리가 여성 예찬으로 들릴 정도로 이 나라 여자들이 바본지 아나?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일수록 의식의 심층에는 여성 비하 의식이 더욱 강하게 도사리고 있다. 말로는 여성을 위하는 것 같으나 그 행동은 극히 남성중심적이야. 이게 바로 노자가 미워하는 '꾸밈' 이다. 여성을 귀히 여기지 않으면서 귀히 여기는 것처럼 속이는 것. 바로 '위여귀' 이고 '위페미니즘' 이다. 여성들은 이런 소리에 속으면 안 되나니 불퇴전의 의지로 남성다운 남성을 찾아야 한다. 내가 페미니즘을 경멸하는 이유는 페미니즘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우주적 암컷의 아랫문' 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암컷은 있어도 우주적 암컷은 없다. 우주적이라는 말 속에는 암수의 구별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현빈이라는 곳은
 남자로서 또는 여자로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우주라는 것은 음양의 조화체이지 양이  아닌 것 처럼 음이 아니다. 우주적 개념에 암수의 구별을 한다는 것은 '여호와' 가 남자라고 우기는 거나 마찬가지다. 도올은 '우주적 암컷' 이라는 말이 얼마나 웃기는 말인지도 모르고 있다. 이쯤 하고 다음 구절로 가볼까? 면면약존 용지불근 도올 왈 '이어지고 또 이어지니 있는 것 같네.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도다.' 앞에서 '이용지 혹불영'을 '아무리 퍼내어 써도 마르지 않네' 라 했던 것과 똑같은 지랄 육갑이 또 나오지. '면면' 은 노자가 처음 쓴 이래 지금도 우리가 자주 쓰고 있는 말이다. '면면히 이어져 온 전통' 과 같이 말이다. '면' 은 '솜 면' , '잇닿을 면' , '끊어지지 않을 면' 이다. 이 면이 두 개가 중첩되면 '이어지고 이어진다' '끊임없이 연결된다' 는 의미다. '약' 은 '같을 약' 이지만 '혹시' 또는 '만약' 의 의미로도 쓰이고 어조사로 쓰일 때는 앞 뒤 연결 관계에 따라서 여러가지 뜻으로 옮길 수 있는 글자다. 이 '약'을 도올은 '같을 약' 으로 읽어서 
'약존'을 '있는 것 같네' 라고 옮겼다. 하지만 이것도 한문 번역을 제대로 못 하는 초딩 같은 짓이다. 이 문장에서의 '약'은 앞 뒤 구절의 문맥상 의미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어조사로 기능하고 있다. 뒤 구절의 뜻을 먼저 보자. '용지불근' 불근은 말 그대로 '부지런하지 않음' 이다. 달리 말하면 '나태하고 게으른 것' 이 '불근' 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쓰임에는 게으르다' 는 뜻이다. '혹불영' , '채워져 있지 않다' 와 맥락을 같이 하는 글이다. 즉 '현빈' 이라는 것은 '천지의 근원으로서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지만 쓰임에는 게으른 것' 이라고 노자는 다시 한번 말하고 있다. 때문에 '약' 은 '∼이지만' 또는 '∼일뿐' 이라는 어조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면면약존 용지불근'을 보기 좋게 옮기면 '영원토록 이어져올 뿐 쓰임은 없는니라' 가 된다. '용지불근' 은 곧 '이용지혹불영' 이고 '도무용' 이다. 부처의 해탈은 윤회의 사슬을 끊은 한 개인의 해방이고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지만 
그것은 곧 이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차안과 피안의 강은 너무나 넓고 깊어서 한번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이다. 피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차안의 입장에서 피안은 아무 소용이 없는 땅이다. 그것은 그곳으로 건너 가버린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아직 차안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무용지지다. 오직 한 가지, 그곳으로 갈 수 있는 희망으로만 존재한다. 나무 한 그루, 석탄 한 조각, 과일 한 개 그곳으로부터 가져올 수 없음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용지혹불영' '용지불근' 이라 말하는 것이다. 도올처럼《도덕경》을 읽으면 이게 완전히 개그집이 돼버린다. 이것으로 불세출의 동양학자 도올님의 희대의 명저《노자와 21세기》상권이 끝났다. 이제 하권으로 가면 지금까지처럼 도올을 
심하게 야단 칠 수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까지는 사실 천자문 수준이라 이 정도의 한문도 제대로 못 읽고 헤맨다면 당근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아도 싸다. 그러나 하권부터는 도올이 우왕좌왕 지리멸렬로 꼴값을 떨어도 그게 그렇게 욕먹을 일은 아닐 정도로 사실 노자 글에 어려운 대목이 많다. 어쩌면 도올이 모르는 게 당연한 거고 알면 오히려 신기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도올만 그런 게 아니고 세계의 내로라하는 노자 연구가들이 한결같이 질퍽거리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우리의 희망 도올의 기를 너무 죽일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면면약존 용지불근. 도올번역 계곡의 하나님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물한 암컷이라 한다.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 이를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니 있는 것 같네.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바른번역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그 골짜기의 이름을 일러 현빈이라 하느니라. 그 계곡의 문이야말로 천지가 시작된 곳이니 그로부터 이어지기가 영원하지만 결코 쓰이고자 애쓰지 않는도다.

       제 7 장
  《노자와 21세기》상권을 떼고 하권으로 넘어오면서 나는 보다시피 황당무계하고 유치찬란한 데다가 무식과 무지로 칠갑을 한 도올의 강의가 그토록 많은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불가사의한 매력의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왜 사람들은 그의 책을 사보고 그의 강의를 듣는 것 일까? 몇 가지 이유가 떠오르지만 우선 생각나는 것은 도올이 아무도 모르는 분야를 골라서 뻥을 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양에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뻥을 친다는 소린데, 본 적도 없는 남대문을 지은 놈처럼 풀어내는 뻥이 가히 일가를 이룰 만한 경지이긴 하다. 그러나 자기가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구라를 푼다는 사실은 도올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내가 아는 학자들 중에 도올만큼 비판을 겁내는 사람이 없다. 그 심리적 방어기전은 그의 강의, 그의 책 모든 곳에 감출 길 없이 
드러나고 있다. 질문과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강의 스타일과 무슨 소린지 알 수 없게 장황하면서도 동서남북으로 개구리처럼 정신없이 튀는 글의 전개는 반박이나 비판을 기술적으로 원천 봉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의 논리나 주장이 학문적인 비판으로부터 견뎌내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노자나 기, 한의학처럼 이 현령 비현령 억지를 써도 진위구별이 어려운 난해하고 심오하면서도 일반인들은 상식조차 별로 없는
 분야만을 다룬다는 이유가 첫째다. 그리고 그는 전문가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오로지 쥐뿔도 모르는 민초만 잡고 설을 푼다. 이를 일컬어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 이 아니라 '도올식 철학의 대중화' 라 하는 거다. 철학의 대중화면 얼마나 좋겠나? 나부터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 근데 이게 말이야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완전히 철학의 개그화고 학문의 만화화다. 
대중을 상대하려면 개그나 만화라야 먹힌다고? 지금 대중 희롱하나? 제발 노자 말씀처럼 백성을 무지하게 내버려두면 좋지 않겠어? 뭐 하려고 그 어려운 철학을 대중화씩이나 해서 개그를 한단 말이냐고? 그래 쥐뿔도 모르는 놈들 앉혀 놓고 뻥구라를 치니 재밌더냐? 제대로 아는 진짜 전문가를 임자로 만나기 전까지는 니 혼자 동방불패해라. 두 번째가 뭐냐? 그 논리의 전개가 그야말로 현란하고 종횡무진 동서고금을 미친년 널 뛰듯이 횡행하므로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는 사람이 정신이 혼란하여 무엇을 비판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부 다 황당한 소리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이게 막상 꼬집어 내려면 실의 끄트머리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디가 시작이고 뭐가 끝인지, 본론이 어디고 결론이 무엇인지 찾을 수가 없으므로 비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강의나 책은 청중이나 독자의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남기는 것이 없다. 주제와 상관이 있건 없건, 앞뒤가 연결이 된건 아니건 오만 가지 잡다한 소리를 모두 끌어다 깔아놓기 때문에 그 방대한 밑천과 풀어내는 보따리의 
크기에 압도당해서 질려버리는 것이다. 하긴 난지도도 섬이라 하니 쓰레기도 많이 쏟아 부으면 수미산과 높이를 겨룰수도 있겠다. 거기다가 
보다시피 첨부터 끝까지 전부 다 틀리고 자빠졌으니 이걸 비판을 하려면 한 줄 쓴 거 가지고 열 줄 써야 되는 거란 말이지. 중간 중간에 하나씩 틀려야 반박을 해도 간단하게 하고 말지. 손을 대려고 하면 밑도 끝도 없어. 엄두가 안 난다 말이다. 그리고 남은 마지막 이유가 뭔지 알아? 
잘못 건드렸다가 뒷감당할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지. EBS 강의 도중 어느 신문에선가 다소 비판적인 기사를 실었다가 그기작 생욕을 먹는 꼴을 모두 봤잖아. '기자 놈들이 나라 망친다' 고 패악질을 하는 데 방송강의 한 회를 몽땅 할애하고도 분이 안 풀려 씩씩거리는 사람이 도올이다. 제자가 지 말 안 들었다고 노자철학 책의 삼분의 일을 글마 조지는 데 할애한 사람이다. 최근에 논어강의 도중에 연로하고 병약한 노인네 한 분이 방청석의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 풍경 버린다고 개 끌 듯이 끌어낸 사건 함 봐봐. 나중에 그 어르신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데 가족이 용서를 안하고 있다 하더라. 충효를 가르치는, 논어를 강의한다는 인간이 노인네가 볼썽 사나운 모습으로 방청석 앞자리에 앉아서 카메라빨 받는다고 내쫓은 인간이 도올이다. 방청석에다가 경로 우대석은 못 만들어줄 망정 그래 갖고 되겠어? 정말 겁나지? 공포의 엽기 아닌가? 내가 걔보고 미치고 환장하는 증세가 있다 하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도올은 정신을 잘 안 챙기면 일 낼 수 있다. 천장지구 천지소이능장차구자 이기부자생 고능장생. 
제7장의 첫 구절이다. 천장지구! 말의 순서를 조금 바꾸면 천지장구다.《도덕경》에서 유래한 '하늘과 땅은 길고 오래 간다' 는 유명한 말이다. 흔히 '장구한 세월' 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거니와 '오랠 구'가 들어간 단어로 또 늘 쓰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유구한 역사' 같은 것이 있다. 장구나 유구나 시간적인 길이를 나타내는 말들이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서 장이나 유는 구를 강조하는 글자다. '장구' 는 '길게 오래 간다' 는 뜻이고 '유구' 는 '아득하게 오래 되었다' 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 간다 '라고 해석하는 돌이 있다. 누구는 누구겠니? 바로 
대철학자 도올이지. '지구'와 떼서 '천장'을 풀이하면 그냥 '하늘은 길다' 가 돼버린다. 하늘이 너르면 널었지 길다는 건 뭔 엉뚱한 소리? 하늘을 보고 '야! 하늘은 참 길구나!' 하면 약간 맛이 간 넘 아냐? 그런데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하늘은 길다' 라고 번역하고 자빠지니 기가 막히지. 물론 도올 자신도 그렇게 번역을 하려니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던 모양이지. 그것을 느끼는 것을 보면 약간은 희망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도올은 "그래서 나는 그것을 '길다' 라고 표현치 않고 '너르다' 라는 역어를 썼다" 하며 자랑스럽게 나발을 불고 있다. 참 똑똑하지, 우리 도올이. 내가 기특해 죽겠어. 명색이 교수요, 학자요, 그서도 동양학의 대가라 하는 사람이 여기서의 '장'을 '길다는 틀리고 너르다가 맞다' 고 하니 더 할 말이 없어. 간만에 잘해보려고 어렵게 역어까지 써가며 애를 썼다만 헛짚고 자빠지는
 꼴은 하권에 와서도 변함이 없다. 도올의 자리 멸렬한 논리 능력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 여기서 나온다. 그런데 보통 천지코스몰로지에서 천은 시간을 나타내고 지는 공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여기서 '장'은 앞의 2장에서 '장단상교' 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공간을 나타내는 말이다. 《노자와 21세기》 하권 13쪽 중단. 역어를 그렇게 쓴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심히 웃긴다. 이 문장 전체가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되고 있다. 철학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문장 하나 속의 논리가 뒤죽박죽이어서야 한심할뿐이다. 앞의 2장에 나왔던 장단상교의 '장'을 무슨 이유로 공간을 나타내는 의미라고 우기는지도 황당할뿐더러 그렇다 치더라도 대 천지코스몰로지가 하늘을 시간으로 나타낸다면 당근 '천자' 의 뜻은 '하늘은 오래간다' 거나 '하늘은 영원하다' 하는 식의 번역이 되어야지. 안 그래? 이렇게 엉망진창 뒤죽박죽인 것이 '천지코스몰로지' 라고 자기가 뽀록을 내면 어쩌자는 것이야? 도올의 개그를 계속 들어볼까? 어차피 웃기자고 애를 쓰고 있으니 웃어줘야지. 부생모육지은 은 부모생육지은 이란 뜻이지 아버지가 
낳고 어머니가 길러준다는 말이 아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노자는 Aa Bb를 AB ab로 쓸 때가 많다. 천지장구를 굳이 천장지구로 표현한 것은 위의 '부생모육지은' 처럼 한문만의 독특한 멋 살리기다. 만약에 '하늘과 땅은 영원하도다' 라는 말을 '천지장구' 라 써버리면 이게 너무 싱거운 글이 돼버린다. 유덕화 나오는 영화 제목으로 채택될 수가 없다. 근데 '천장지구' 라 쓰니까 읽을 때 감칠맛이 있잖아. 그런데 문제는 '천지장구'를 천장지구' 라 써놓으면 도올이처럼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는 소리라고 헛소리하는 맹꽁이들이 생기는 거라. '부생모육'을 가지고 자식을 낳는 건 아버지라고 우기는 넘이나 똑같은 거야. 좋다. 뭐 도올이 말이 맞다고 치자고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 가는 것' 이라고 이해해주자. 그러면 바로 다음  장하고 연결이 안 돼. 우리 도올이 지랄하고 자빠지는 꼬락서니를 보기 전에 노자의 '천장지구' 가 들어간 시 한 수 구경할까? 백거이의 시 
장한가의 끝 부분이다. 천장지구유진시 , 차한면면무절기 , 하늘과 땅도 다할 때가 있으련만 , 이 몸의 한은 끝날 때가 없으리. 도올은 이 시를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 가는데 시간이 다해도 나의 한은 이어지고 이어지니 끝날 때가 없겠구나' 하고 읽을 거야. 도올의 명해설로 가볼까? 그에 비하면 '구' 는 분명 지속을 나타내는 말로서 시간적 개념이다. '오래간다' 는 뜻이다. 그렇다면 분명 '천구지장' (하늘은 오래가고 땅은 너르다)이라 해야 옳다. 시간을 나타내는 하늘에는 시간적 형용사가 붙어야 하고, 공간을 나타내는 땅에는 공간적 형용사가 붙어야 할 것이다. 겁나게 웃기지? 하늘이 시간을 나타내고 땅이 공간을 나타낸다는 정의가 어디서 나왔단 말이야? 공자가 그랬어? 맹자가 그랬어? 소크라테스가 그랬어? 무슨 철학이 지 멋대로야? 엿장사 맘이고 오야 맘이야? 도올이 얘는 몇 구절만 
넘어가면 앞에 나왔던 구절은 다 까먹는 애다. 앞뒤를 연결해서 통괄할 줄을 모른다. 노자가 앞에서 천지를 가지고 말한적이 있었다. '천지지간 허이불굴' 이라 했다. 이게 바로 천지를 공간적 개념으로 설명했던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7장에서는 시간적 개념의 천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늘과 땅을 공간적으로 볼 때는 텅 비었지만 찌그러지지 않는 것이요, 시간적으로 볼 때는 오래도록 영원한 것이라고 노자는 그야말로 물이 흐르듯 질서 있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도올은 물이 흘러오는 곳도 못 보고 흘러가는 곳도 못 보고 그저 지금 지가 보고 있는 눈앞의 그 물 밖에 모르는 거야.
 이러면서 무슨 고전을 번역하며 강의를 한다고 지랄육갑이야? 그러면서 또 하는 말 좀 봐봐. 왜 그랬을까? 여기 벌써 명백하게 천지코스몰로지적 사고에는 음양의 착종이라고 하는 음양론의 기본적 사유패턴이 개입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서 '천구' '지장' 이라고 하면 하늘이라는 시간과 땅이라는 공간이 실체적으로 유리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하늘은 하늘로서 하늘이 되는 것이 아니고, 땅은 땅으로서 땅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땅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고, 땅은 하늘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하늘 속에 땅이 들어있고, 땅 속엔 하늘이 들어 있는 것이다. 《노자와 21세기》 하권 14쪽 상단. 캬∼ 이런 심오한 생각을 어떻게 해냈나 모르겠어. 얘 두뇌구조는 참말로 희한한 회로지. 도대체 '착종' 이란 말은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나는 가방끈이 짧아서 얘 말은 당최 못 알아듣겠어. 그리고, 노자가 언제 사람인데 자꾸 음양이 나오니? 춘추전국시대에 무슨 음양론의 기본적 사유 패턴이 있었다는 말이냐고? 음과 양이란 글자 자체의 뜻도 헷갈리던 시대다. 상고시대 문헌을 조금만 공부해본 사람이면 이런 글자들의 의미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알 수 있지. 특이 음양이란 두 글자는 아주 골 때리는 의미의 변화를 겪은 글자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음과 양의 의미로 정착된 것은 훗날 전국시대 말에 등장한 소위 음약가라는 약간 맛이 간 인간류가 등장하기 시작한 쥬라기 때부터다. 
주역조차도 그 이전에는 음양이란 개념으로 해석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건은 하늘이요 곤은 땅이요 이런 식이었어. 《도덕경》전체에 음과 양이라는 글자는 한번도 나오지 않을뿐더러 노자가 음양사상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노자철학이 뉴튼 물리학이면 음양사상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마찬가지로 시대의 선후가 다르단 말이다. 그런데 노자사상에 음양사상의 기본적 사유 패턴이 나타난다고 지랄하고 자빠지면 이건 뉴튼 물리학에 상대성이론의 개념이 나온다는 소리나 같은 거야. 《도덕경》에 음양사상에 기반한 사유 패턴이 대 천지코스몰로지적 철학으로 등장한다 하니 까무러칠 노릇이지. 쟤 말뜻인즉슨 그거였겠지. '하늘과 땅에 어울리는 개념끼리 짝을 맞추면 
두 쌍이 유리되는 관계로 노자가 머리를 좀 써서 말을 바꿨다 이 소린데, 하는 짓마다 꼴통이야. 쉬운 문제를 무지 어렵게 대갈빡을 굴려서 꼭 틀린 답을 찍는단 소리지. 다음 구절을 가보자. '천지소이능장차구자' 도올의 번역은 들여다볼 것도 없이 '하늘과 땅이 너르고 또 오래 갈 수 있는 것은' 이겠지. 어디가 틀렸는지 말할 필요도 없지. '너르고' 는 끼여들 자리가 아니다. '하늘과 땅이 길고도 오래도록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올바른 풀이라고 알고 넘어가면 된다. 당근 다음 구절은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이기부자생' , '자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풀 수 있는
 문장인데 문제는 '자생' 의 뜻이다. 재미 삼아 객관식 5지선다로 풀어볼까? ① 자기를 고집하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② 스스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③ 존재하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④ 자기 힘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⑤ 자기가 태어나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게 정답이겠냐? 그리고 세기의 천재 도올이 고른 답은 뭐겠냐? 자 도올이 찍은 답부터 먼저 보자. 역시 우등생 도올은 예상대로①번을 골랐다. 객관식에서 답을 잘 모를 때는 제일 긴 것이 정답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 '찍기의 제1법칠' 이지? 도올은 거기다가 특이한 버릇이 한 가지 더 있다. 
가급적 어렵고 난해하고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주로 고르는 건데 이것은 '찍기의 법칙' 에도 없는 거다. '자기를 고집하여 산다' 는 말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자아에 집착한다' 는 의미와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어가 생명체가 아닌 하늘과 땅이기 때문에 생을 '산다' 또는 '태어난다' 로 직역하기 보다는 '존재한다' 로 바꾸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니면 약간 글자의 본래뜻과는 멀지만 다음 문장과의 연결 관계를 고려하면 '내보인다' 는 의미를 선택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①번은 '자기를 고집하여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 되는데, 물론 이 번역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구절의 '부자생' 에 대한 해석이 알력진 것만도 수백 가지가 된다
. 그 가운데는 위의 다섯 가지가 전부 포함된다. 《도덕경》전체를 통틀어 '이것이야말로 올바르고 정학한 유일한 해석' 이라고 단정짓기 곤란한 구절은 그리 많지 않다. 《도덕경》은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전체적으로 메시지가 대단히 명료한 책이다. 이렇게도 저렣게도 해석할 수 있는 애매한 구절이 있다면 여기 나오는 '부자생' 이라는 말 정도다. '천지가 영원토록 이어지는 이유는 천지가 부자생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에서 '부자생' 의 의미로 넣었을 때 어색하지 않은 해석이 몇 가지 나올 수 있다. 나는 위의 5지선다에서 고른다면 ③을 택하고 싶다. '존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또는 '내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 주어가 천지이므로 훨씬 자연스러운
 번역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 문장 '고능장생' 은 '그러므로 천지는 능히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다' 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사용된 '장' 도 시간적인 '오래'를 나타내는 말이지 결코 공간적으로 '길다거나 너르다' 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하늘과 땅은 스스로 존재하려고(내보이려고) 애쓰지 않으므로 능히 오랜 세월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나왔듯이 비려고도 애쓰지 않고 채우려고 애쓰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저절로 그러한' 자연은 노자는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도올이 설명한 '자연은 빔을 극대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고 하는 것이 《도덕경》의 논지와는 전혀 빗나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장의 나머지 부문을 살펴보자. 시이성인 후기신이신선 외기신이신존 '그러므로 성인은, 후기신이신선하고 외기신이신존 이니라' 대단히 좋은 말이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가르침이다. 물론 도올의 해석대로 읽으면 이것도 황당한 개그가 돼버린다. 먼저 보도록 하자. '그러하므로 몸을 뒤로하기에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 가 도올이 내미는 해석이다. 번역이란 한자로 쓰인 원문을 한국말로 옮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문자 자체가 함의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자 고전은 더 더욱 그렇다. 적어도 고전을 번역하려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을 대할 때 제일 먼저 선후와 내외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노자는 무엇의 앞과 뒤를 말하는가? 무엇의 바깥을 말하는 것인가 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 대한 도올의 해석을 볼라 치면 참으로 황당무계, 포복절도의 엎어치기 한판이다. 그것을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다소 길지만 어쩔 수 없이 끝까지 볼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항상
 그 몸을 뒤로하기에(후기신) 오히려 그 몸이 앞서고(신선), 항상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외기신) 오히려 그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신존). '그몸을 뒤로한다' 는 것은, 잘난 체하면서 항상 앞장서고, 뭘 자기가 꼭 앞서서 리드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러한 인격자세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 몸을 밖으로 던진다' 는  것은 자기 일신만을 지키는 데 급급하지 아니하고 내 몸을 던져 희생할 줄 아는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요즈음같이 몸을 도사리기만 하며, 앞에 서서 자기 현시하기만을 좋아하는 시대풍조에 정말 노자의 말씀은 우리의 폐부르 찌른다. 그런데 그 몸을 뒤로하는 것은 뒤로함으로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몸이 앞서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내 몸을 내던지는 희생적 행위는 희생으로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몸이 보존되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멋' 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자송' 함으로 생기지는 않는다. 인간의 '멋' 이란 손해볼 줄 아는 것' '희생할 줄 아는 것'에서 생겨난다.<천장지구>와 같은 모든 깡패영화에 공통된 주제는, 주인공 깡패의 삶의 자세가 항상 범인을 초월하여 '후기신' 하고 '외기신'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이 비록 사회적으로는 불량한 행위의 범주 속에 분류되고 있지만, 무엇인가 인간에게 안타까운 느낌을 주는 '멋'을 발한다는 데 있다.<비트> 속의 정우성 역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즉 사회적 악의 범주 속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선의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대개 갱스터 무비장르의 제1주제인 것이다.《노자와 21세기》하권 20쪽 21쪽. 노자 할아방 심장마비 걸려 숨넘어가시는 소리 안 들리나? 희생정신? 깡패의 멋? 천장지구에 비트? 세상에나. 노자 할아방은 있지 도올이 차원의 '희생정신' 은 헌신짝만큼도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이다. 노자가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성인은 이백성위추구 한다고. 백성보기를 풀로 만든 강아지처럼 보는 성인이 무슨 놈의 '희생정신'을 발휘한단 말야? 노자가 말하는 '몸을 뒤로하라는 것' 은 나서지 마라, 잘난 척하지 마라, 아는 체하지 말라는 것이고 접속사 이는 '=' 의 뜻이다. 그래서 '몸을 뒤로하기에 몸이 앞선다' 가 아니라 '몸을 뒤로하는 것으로서 앞세움을 삼는다' 라는 뜻이다. '즉 몸을 뒤로하는 것으로 앞세우는 것을 대신하는 것이 성인이다' 인데 만약에 자기가 남보다 앞서기 위한 방책으로
 몸을 뒤로 뺀다면 이런 '후기신' 이야말로 바로 노자가 가장 싫어하는 위선이다. 위후기신이 되는 것이다. 남의 뒤에 서기 위해서 몸을 뒤로하는 것이어야지 남의 뒤에서는 것이 남보다 앞설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맞지? 설마 노자가 그런 약삭빠르고 교활한 대갈빡을 굴리라고 가르치겠냐? '남보다 앞서는 가장 빠른 길이 몸을 남의 뒤로 빼는 것이니라' 라는  음험한 수작을 가르치고 있겠느냐고. 그런 게 노자철학이야? 노자 욕을 보여도 분수가 있어야지, 안 그래? 그래도 여기까지도 괜찮다. 그 뒷줄로 가면 완전히 골에 쥐나는 소리를 하고 자빠진다. '후기신이신선'을 몸을 뒤로함으로써 결국은 앞서게 하는 것' 이라고 턱도 없는 구라를 풀어놓고는 바로 다음 구절 '외기신이신존'을 가지고는 어이없는 잠꼬대를 하고 있다. '외기신'을 풀어 몸을 밖으로 던진다느니 희생정신을 발휘하라는 얘기라 해대니 이걸 뭐라 해야 돼? 엽기라는 말로도 표현이 안 돼. 보자고 '외기신' 은 '몸을 그곳(기)의 바깥에 둔다' 는 소리지.
 여기서 노자가 가리키는 그곳(또는 그것)이 도대체 뭐겠냐? 그걸 모르면서 노자를 떠들어서는 안 되는 거다. 노자가 말하는 그곳은 바로 '세상의 바깥' '명리의 바깥' '시비의 바깥' '이익의 바깥' 이다. 즉 세상살이에 초연하게 벗어나 있으라는 말이다. '그리하면 네가 허물이 없고 몸이 안전할 것이니' 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유덕화를 본받아 깡패 같은 희생정신을 발휘하라고? 돌았나? 도대체 노자의 가르침에서 무엇을 구하는 거야? 불교식으로 말하면 속세를 멀리하고 세상 시비에 끼여들지 말라는 거다. 희생정신 발휘하다 죽은 넘이 한둘인가? 공자 말씀 지키다가 죽은 넘이 또 얼마야? 충성 때문에 죽고, 명예 때문에 죽고, 재물 때문에 죽고, 의리 때문에 죽고, 정 때문에 죽고, 여자 때문에 죽어 나가는 게 세상살이다. 도대체 죽을 이유가 너무나 많은 위험한 아귀 지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 성인의 삶이니, 이리 해야 하늘과 땅이 장구한 것과 같이 네가 탈없이 오래 살 수 있다는 훈계다. 노자 할아방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를 제일 싫어한다. 희생정신이야 필요하지. 당연히 권장되어야 할 덕목이나 이 희생정신도 도올이 말하는 깡패 수준이 되면 그건 시비의 가름이고 시의 편에서 폭력이냐, 비의 입장에서의 폭력이냐 그 차이뿐이다. 노자는 애국이니, 애족이니, 충성이니, 희생이니, 헌신이니 하는 것들을 우습게 본 사람이다. 그런 덕목을 구하려면 공자나 맹자, 순자를 찾아가야지 노자 할아방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번지수가 틀린 얘기다. 도올이 얘가 얼마나 노자를 잘 모르고 야무지게 헛다리짚고 자빠지는 앤지 이런 대목을 보면 여실하다.
 그런 차원의 세속적인 가치 규범은 털어야 노자를 배울 수 있다. 그야말로 코스몰로지적인 가치를 찾고자 하면 몰라도 아직도 '희생정신은 고귀한 것' 따위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하산하기가 너무 빠르다. 쥐뿔도 모르면서 어디서 천지코스몰로지가 나오냐? 입산도 안 해본 주제에 하산한 거처럼 뻥을 치면 안 되지. 노자의 이러한 탈속 성향은 이 장의 바로 뒤에 나오는 유명한 '상선약수' 라는 말에서 다시 접하게 되는데, 물론 그 대목에서도 도올이 보여주는 엽기적인 개그는 환상적이다. 앞 구절을 똑바로 읽지 않으면 다음 구절과 연결이 안 되는 게《도덕경》이란 책이어서 살신성인하는 희생정신을 부르짖은 도올은 뒤 구절에 가면 그냥 대가리를 절벽에 처박고야 만다. 희생정신 갖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말이 뒤따라 나오기 때문이지. 함 볼까? 비이기무사야 고능성기사 지가 앞 구절을 잘못 풀어놓으니 도저히 이 구절하고 꿰맞출 방법이 있었겠나? 천하의 도올이 이 절벽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꼬랑지를 내리고 만다. 불후의 명작인《노자와 21세기》에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아예없다. 할 수가 없었겠지. 해석은 싹 빼먹고 괜히 왕삐만 가지고 횡설수설을 한참 하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다음 장으로 도망가버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제7장의 전문 번역에 나와 있는 한 줄만 가지고 우리는 대학자의 번역을 훔쳐볼 수밖에 없다
. '비이기무사야 고능성기사'를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오히려 그 사사로움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라고 풀고 있는데 어때? 지가 앞에서 한 소리하고 하나도 안 맞지? 지가 아무리 지어내고 싶어도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사'가 무엇인지 만들어 내기 힘들었겠지. 첫 구절의 마지막 '야'는 문장을 의문문으로 만들어주는 어조사다. 그래서 풀이는 도올이 번역한 바와 비슷하다. 그러나 도올은 그 말의 의미를 몰라서 팽개쳐 버리고 토낀거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에서의 사사로움이란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이익의 추구, 명리의 추구, 시비의 가림 들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사로움을 버리고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한 사사로움이 뭐겠냐? 그게 바로 이 우주 전체보다도 소중한 자기 자신의 생명이요 보존이다. '천하를 얻는다 해도 자기 몸 하나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언제나 남의 뒤에 서고 명리와 시비의 바깥에 몸을 둠으로써 하찮은 사사로움은 포기하고 오로지 소중한 자기 한 몸을 탈없이 잘 보존하라는 가르침이시다. 이제 알겠나? 이렇게 읽어보니 제7장의 전체적인 뜻이 쫘악 통하지? '하늘과 땅이 스스로 내보이려 애쓰지 않아서 영원히 이어지는 것처럼 성인은 남의 앞에 나서지 않고 세상의 바깥에 몸을 두어 명리와 시비를 멀리하여 사소한 이익들을 버리기 때문에 능히 개인(사:몸, 목숨)을 보존하느니라' 는 말씀이 바로 제7장의 내용이다. '능히 사사로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그 사사로움을 버리기 때문이 아니겠느가?' 의 사사로움 두 개 사이에서 뺑뺑이를 돌다보니 이게 앞의 사하고 뒤의 사가 해석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지금껏 노자 연구서들이
 여기만 오면 그냥 헛지랄을 했던 거고 이 문장에 나오는 두 개의 사가 각각 무엇인지 모르면 노자를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올이 여기서 직면한 문제는 앞의 구절에서 노자가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자기 몸을 밖으로 던지라' 고 했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 놓고 다음 문장에서 '사사로움을 이룬다(사)' 하니 도울의 나쁜 머리로도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소리라는 것을 눈치 챈거야. '몸을 던지는 희생정신' 과 '사사로움을 이루는 것' 이 도저히 연결되지 안잖아.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왕필 이야기를 끌어다가 횡설수설하고 다음으로 도망가버린 거다. 다시 말하지만 이 문장에서 노자가 말하는 '사' 는 바로 '자신의 안전과 보존' 이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사상이라고 보일지 모르겠으나 노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 남의 일에, 세상사에 아는 척 잘난 척 나서고 끼다가 화를 입지나 말고 그냥 자기 몸이나 잘보존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게 바로 '능성기사' 하는 첩경이다. 노자는 천하의 일보다 자기 몸이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본 사람이다. 정의니 인이니 도덕이니 사회니 국가니 하는 따위가 저 하나
 죽고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는 생각을 가진 게 노자다. 물론 그렇게 세상일에 무심하게 초연한 삶을 살아도 누구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노자가 바라보고 있는 곳이 어딘가? 바로 현빈이다. 그 가물하고 검은 골짜기를 보고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누군가? 바로 영원불사하는 신들이다. 그게 신선이다. 그런 영원불사의 이상향을 꿈꾼 사람이 노자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명리와 시비는 하찮은 것으로 보고 초연하려 했다. 그런데 말이다. 현빈을 가서 '가물한 암컷의 거시기' 가 어찌 생겼나 한번 보려면 우선 중요한 것이 비명횡사를 안 해야 된다는 점이다. 제 아무리 공력이 높아도 까불다가 잡혀 죽으면 죽는 거다. 별 수 없다. 삼국지에 보면 우길이란 도가사 오주 손권의 형 손책한테 까불고 개기다가 칼에 맞아 죽는 대목이 나온다. 공명과 우길은 노자의 신선술을 공부한 동문이다. 그러니까 노자의 제자들이다. 손책이 처음에는 우길을 화형시키려고 장작더미 위에 앉히고 불을 붙였는데 우길이 한번 껄걸 웃으니까 소낙비가 내려서
 불이 꺼져버린 거야. 졸딱들한테 죽이라고 하니까 이것들이 도력에 겁을 먹고 전부 뒷걸음을 치니까 할 수 없이 손책이 직접 칼을 뽑아 우길의 목을 쳐 죽었어, 나중에 죽은 우길의 귀신이 손책을 데려갔다 하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고 중요한 것은 제 아무리 도사라도 한칼 맞으면 죽는다는 사실이지. 공명이 적벽에서 동남풍을 부른 것과 우길이 장작더미에서 소나기를 내리게 한 것을 묶어서 호풍환우라 하는데 공명과 우길이 호풍환우하는 재주가 있어도 세상사에 부대끼는 한 화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노자는 세상 밖으로 나와 있으라고 하는 것이다. 외기신! 세상에서 제일 지독하고 무서운 것이 바로 사람이다. 도사 아니라 신선도 사람 손에 걸리면 죽기는 마찬가지다. 사람이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보다 귀신이 사람을 더 무서워한다. 우화등선하고 현빈으로 들어가면 그때서야 산 사람들 손이 미치지 못하니 안전하겠지만 그전에는 어쨌든 몸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자의 결론이 뭐냐? '도를 닦는 내 새끼들아, 모쪼록 사람들을 조심해라.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놈들이니가 가급적 사람 사는 근처에는 가지도 말아라' 다. 그런데 호풍환우도 못하는 도올이 뭘 믿고 저리 인간세에 좌충우돌
 나대는지 당최 이해가 안 돼. '외기신이신존'의 뜻이 '세상의 바깥에 몸을 두어 그 몸을 보존하라' 는 것이라고 했는데, 왜 이 문장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대답할 말이 있을까? 당근 있지. 노자는 사람들이 그 문장만으로는 의미를 알기 어렵다 싶은 구절 뒤에는 반드시 부연하는 문장이나 보충설명을 해두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하여 사람들한테 밝혀놓은 것이 바로 다음 장의 첫 구절인 유명한 '상선약수'란 말이다. 왕삐가 노자의 《도덕경》을 주해와 함께 남기면서 장 가름을 해놨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덕경》을 나누는 불변의 기준이 된 81장이다. 그러나 왕삐의 분장은 군데군데 불합리한 곳이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기다. 물론 왕삐가 '상선약수'를 앞장과 분리해서 별도의 장으로 넘긴 것은 이 말의 바른 뜻을 몰랐기 때문이고 제7장과 제8장이 바로 이어져아 하는 내용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상선약수' 는 제8장의 처음이 아니라 제7장의 마지막 구절로 포함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외기신이신존'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상선약수' 의 뜻을 모르면 '외기신이신존'을 알 수 없다. 도올이 상선약수를 가지고 웃기는 짜장면 한 사발을 퍼질러 놓은 것은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제7장 전문을 같이 보는게 순서겠다. 그리고《도덕경》에 대한 올바른 문장은 뒤에 가서 한번 손댈 때가 있을 것이다. 천장지구 천지소이능장치구자 이기부자생 고능장생 , 시이성인 후기신이신선 외기신이신존 , 비이기무사야 고능성기사. 도올번역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 간다. 하늘과 땅이 너르고 또 오래 갈 수 있는 것은 자기를 고집하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그 몸을 뒤로하기에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오히려 그사사로움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바른번역 하늘과 땅은 길고 오래 간다. 하늘과 땅이 그토록 길게, 또 오래가도록 가는 이유는 존재하려고 스스로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랫동안 존재한다. 그래서 성인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것으로 남의 앞에 서는 것을 삼는다. 세상 밖에 자신을 둠으로써 자신을 보존한다. 이것은 (작은)사사로움을 버리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럼으로써 능히 (자신의 보존이라는 큰)사사로움을 얻느니라. 

       제 8 장
제8장이다. 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우리의 주인공 도올이 이 8장의 첫 문장을 해설하면서 말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어느 곳에든지 꼭 '노자' 문구가 많이 걸려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걸려 있는 문구가 바로 이 '상선약수' 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같이 노자를 좋아해서 노자말씀을 사방에 걸어놓고 살지만, 예수 말씀만큼 이래도 노자말씀을 이해하는 자는 없고, 우리 역사는 노자가 말하는 미덕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노자와 21세기》하권 36쪽. 미쳐버린다. 노자를 이해하는 사람이 적다고 우리 역사를 걱정하고 앉았다. 주인공 자격이 충분하지? 얼마나 가상한가? 남 걱정은 고만하고 노자를 제대로 이해하면 얼마나 좋겠나?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자를 좋아해서 노자말씀을 사방에 걸어놓고 산단다. '상선약수' 가 노자 말씀인 줄 알고서 그거 걸어놓은 사람 몇이나 된다고 도올이나 알지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거 몰라. 일단 '어쩔 것인가?' 하는 걱정은 도올이 안 해도 좋을 것 같고, 그것 보다도 이 좋은
 '상선약수' 같은 구절을 앞에 놓고 5.16 이야기는 왜 꺼내며 자기 중학교 때 선생님 이야기는 왜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21세기에 대한 걱정보다는 나는 그것이 더 궁금하다. 도올의 TV 강의를 보다가 내가 헤까닥 뒤집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은 이 장면에서 보여준 것은 정말 백미요 압권이었다. '한국사100장면' 에 넣어도 좋으 만 하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가 대학교 다닐 때 군사정권에서 고려대 정문 안으로 탱크를 밀어 넣었다' 
는 쌍팔년도 이야긴데 그 담에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왜정 때 일본넘들이 아무리 악독하다 해도 그넘들은 대학교에 탱크를 집어넣는 그런 무식한 짓은 안 했다. 한마디로 필로소핀가 뭔가가 있는 넘들이었다.' 대충 이런 나발을 불더란 말이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그 순간 '얘 정말 바보 아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정 때 왜넘들이 대학교에서 데모했다는 소리 들어 본 적이 없다. 대학생들이 '천황제 폐지! 대동아 전쟁 반대!' 하면서 도오죠 히데끼 허수아비 만들어서 화형식을 하고 다녔으면 과연 왜넘 정권이 필로소피가 있어서 그걸 관대하게 용서해 줬겠나? 왜정 때 대학교라는 것은 천황제 수호를 위한 엘리트 양성기관이고 체제수호의 방파제였다는 사실도 모르나? 물론 그 속에도 잡다한 인간들이 섞여 있다 보니 아나키즘이 풍미하기도 하고, 반전 사상을 가진 넘도 나오긴 했지만 절대 다수가 그러했다는 이야기다. 도올이 다녔던 명문 고려대가 했던 것처럼
 데모로 날이 새고 데모로 날이 졌으며 아마 동경제국대학이라도 박살이 났을 거고, 총장, 학장에 교수들부터 학생까지 모조리 잡아다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구이, 칠성판에, 생난리판이 벌어졌을 거야. 그런데 그런 왜넘들이 필로소피가 있어서 학문과 대학을 그 정도로 대우했다고? 안중근 의사가 벌떡 일어나서 도올 강의 들으러 온다 하더라. 그 뒤에 유관순 언니도 고무신까지 벗어들고 쫓아오네. 왜넘들 필로소피 이야기는
 빼고 상선약수 번역이나 똑바로 해라. 그러면 필로소피가 넘치는 도올이 번역이라고 해놓은 꼬락서니 한번 볼까?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서로 다투지 않는다.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내가 이번 TV강의를 보면서 이 나라 역대 문교부 장관을 죄 불러다가 그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한자교육을 철폐하고 한글전용을 한다고 병신육갑을 떤 결과가 이 모양이다. 저렇게 쉬운 한자들로 된 문장을 가지고 저렇게 엉터리로 강의를 하는데도 한마디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나 같으면 두 마디도 듣기 전에 일어서버린다. 하긴 도올이 어떤 사람이야? 학생들 않혀놓고 세 시간 네 시간 말 같지도 않은 구라를 치면서 그것도 강의라고 학생들 화장실도 못 가게 한 인간이다. 그걸 또 자랑이라고
 무용담처럼 책에다 써놓은 사람이다. 오죽 시답잖으면 학생들이 화장실 간다고 자리에서 일어섰을까? 그리고 한 넘은 강의 끝난 다음에 화장실에서 둘이 같이 꺼내놓고 오줌 누다가 엉겨붙었다 하더라.
 그때 그넘이 이 글 보거든 나한테 연락 좀 해. 네가 진짜 싸나이다. '그걸 강의라고 하는 거냐?' 고 치받으니까 학생이 교수한테 호주머니에 손 넣고 말한다고 호통을 쳤단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걸작이지. 쫌만 더 엉겼으면 자기 태권도 실력을 함 보여줄라 했단다. 인물은 인물이다. 이런 위대한 인물이 TV강의를 하는 자리에서 누가 감히 중간에 일어설 용기가 있을 것이며, 그걸 용납할 도올이겠나. 보나마나 수강생들은 PD한테 정신교육을 단단히 받고 그 자리에 앉았겠지. '위대하옵시고 영명하옵신 우리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는 도중에는 어떤 질문도 해서는 아니 되며, 고개를 돌려도 아니 되며, 오줌보가 터져도 그 자리에서 쌀것이며 등등 사전교육이 오죽 철저했겠어? 강의를 듣고 감탄을 하고 탄복을 하는 표정
 관리에 박수 칠 대목까지 교육을 시켰다 하데? 이게 필로소피가 넘치는 인간의 강의야? 그 놈의 필로소피 두 번만 넘쳤으면 강의하다가 사람 잡겠다. 그리고 말이야 강의만끝나면 왜 그리 잽싸게 토끼냐? '선생님, 질문 있는데요' 하고 누가 붙잡을까 봐 겁이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토껴버리리데? 그렇게 자신이 없거들랑 아예 강단에 서지를 마. 보자. '상선약수'를 놓고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고 번역하는 꼬락서니는 노자뿐만 아니라 동양의 언어문화 자체에 무지한 것이야. 고우영이 그린 만화 열국지만 읽었어도 상선하면 떠오르는 게 있었을 거고 그것이 있나 없나 찾아봤을 거야. 고우영 만화를 보면 중국넘들이 지네 왕한테 아이디어를 상납할 때 꼭 나오는 버릇이 있다. 그게 뭔가 하면 꼭 상중하로 나눠서 결재를 올린다는 거다. '폐하 신이 보기에 이번 사단에 대한 계책으로는
 세 가지가 있사온데 상책은 지금 바로 토끼는 것이옵고, 중책은 구라로 사기를 쳐서 막아보는 것이옵고, 하책은 이대로 앉아 있다가 맞아 죽는 것이옵니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상' 이 나오면 반드시 그 다음에 '중' 과 '하' 가 나온다. '상선' 이 나오면 벌써 '중선' 과 '하선' 이 따라나오겠구나 하고 감이 와야 글마들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거다. 척하면 삼척이고 탁하면 억이잖아. '상' 은 '하' 에 대해 상이다. 따라서 '상선' 이라는 말도 '하선' 이 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차선이 없는데 최선이 홀로 있을 수 없다. 만약에 노자가 '하선' 에 대한 언급 없이 '상선'을 얘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노자가 한 잔 먹고 취해서 쓴 부분일 거다. 그러나 어김없이 바로 뒤에 '중선' 과 '하선' 들이 줄줄이 따라 나오고 있다. 그것들은 보지도 못하는 까막눈인지, 이걸 '가장 좋은 것은…' 하고
 번역해버리니까 그 뒷줄이 전부 덩달아 '제일 좋은 것들' 로 같이 둔갑해버리잖아. 이떄의 '상선' 은 글자 그대로 '상의 선은…' 하고 이어서 읽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약수' 는 글자 그대로 '물과 같다' 라고 읽으면 되겠다. 왜 물이 '선지상' 이냐? 그 이유가 두 가지 나오는데 하나가 '수선리만물이부쟁' 이고 다른 하나가 '처중인지소오' 다. 앞의
 것은 도올의 해석대로 읽어도 무방하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서로 다투지 않는다.' 물론 이 번역도 제대로 하자면 틀린 것이다. 한문 읽는 법이 그런 게 아니다. 정확하게 읽으면 '물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이롭게 한다' 이다. 그러나 도올이 이 어려운 문장을 이 정도라도 읽어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한없이 기쁘다. 더 이상은 안 바란다. 계속 이 정도만 이라도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우리 도올은 딱
 두 줄을 제대로 넘어가는 법이 없다. 어쩌다가 한 줄 제대로 읽었다 싶으면 바로 다음 줄에서 그만 뒤집어진다. 특히 이 문장 읽는 꼬락서니를 보면 나는 그냥 만정이 다 떨어진다.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저렇게 읽을 수가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일부러 틀리게 읽으려고 애를 써도 저렇게 읽기는 어려운 문장이다. '처중인지소오' 얼마나 평이한 문장이냐? 띄어쓰기 함 해볼까? '처' 는 어떤 장소에 있다는 뜻이다. 처하다 이런 말이다. 그 담에 '중인지소' 가 뭐야? 사람이 많이 있는 장소 아냐? 사람이 모여 있는 곳, 그 담에 '오' 는 싫어하다잖아. 쭈욱 이어서 읽으면 되잖아. '물은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머물기를(처하기를) 싫어한다.' 이런 문장은 다르게 읽을 수가 없는 거야. 오직 한 가지로 밖에는 읽을 수가 없어. 그런데 도올이 읽은 꼬락서니 함 봐봐. '뭇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라고 해놨어. 그냥 지가 막 지어내고 있어. 낮은
 곳에 뭐라뭐라 하는 말은 눈 씻고 봐도 없잖아. 첨부터 한번 볼까? 물의 선이 선 중의 상선인 이유는 '물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이롭게 하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싫어하여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때? 딱 말이 되지. 그리고 앞에서 했던 말, '외기신' 이 왜 세상의 밖에 몸을 두는 것이라고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겠지? 물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고 그런 물의 성질을 상선이라고 보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물이 필요하니까 주로 강가에 집을 짓고 모여 살지만 그렇다 해도 강물에 붙여서 집 짓는 사람은 없다. 사람 사는 동네와 물은 대부분 거리가 떨어져
 있다. 또 물이라는 것은 산 속의 계곡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번잡하고 시끄러운 사람 동네와는 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런 물의 선을 노자는 선 중에서 가장 최고의 선이라 말한 것이다. 생각 좀 해봐봐. 니가 물이라 치고 그래, 사람들하고 뚝 떨어진 조용한 계곡 속에서 흐르고 싶지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인 곳에 기어 들어가서 시궁창 물로 흐르고 싶겠니? 물이 그런 걸 좋아한다고 우기면 물이 기가 막히지. 그러니까 노자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한 것은 가장 상의 선을 취하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부처가 제자들이나 사바 중생에게 출가를 권유한 것과 같은 맥락이야. 노자도 우리한테 속세를 떠나 산 속의 물처럼 사람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있기를 권유하는 것이다. 그래야 도를 닦고 몸을 닦아서 '가물한 암컷의 거시기'를 구경하러 현빈으로 가볼 거 아니냐.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속세를 떠나 대가리 깎고 중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래서 부처님도 출가가 불가능한 사바 중생을 위해서 재가불자를 위한 설법을 했고 계율을 준 것이다. 팔정도가 바로 재가불자를  한 생활규범이다. 우리 노자도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떠나 유유자적 구름 위에서 노는 신선이 되지 않겠느냐고 꼬시면서도 한편으로 그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중선과 하선을 주고 있다. 그게 바로 다음에 따라나오는 거선, 심선, 여선 등등 쭈욱 줄 서 있는 선들이다. 물의 상선을 취할 수 없어서 중인지소에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중선과 하선일 망정 이러이러한 선은 가지고 살아라 이거다. 상선은 물 하나로 끝난다. 그런데 도올이나 여타 모든 노자 연구가들은 한결같이   나열된 여러 선을 전부 다 물로 보고
 있다. 이건 바로 노자 할아방을 물로 보는 짓이다. '노자를 물로 보지마!' '상선약수' 란 말이 그냥 여기서 이유 없이 튀어나온 말이 아니다. 노자가 '외기신이신존' 이라고 쓰고보니 아무리해도 나중에 사람들이 뜻을 몰라서 헷갈릴 거 같거든. 그래서 '외기신이신존' 의 이유를 들려주느라 넣은 글이다. 글 쓸 때 노자의 마음가짐이 이리 세심하고 친절하다. 그런데도 못 알아먹는 멍텅구리들은 어쩔 수가 없어. 왕삐부터 그걸 모르고 이걸 다음 장으로 후딱 넘겨버리다니 도올이 같은 애는 더 헤매는거야. 물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머물기를(허) 싫어해서 멀리 떨어져 유유히 흐르기 때문에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 가까이 있는 물은 더럽혀지기 마련이잖아. 상선은 약수이니 : 선 중의 상은 물의 선과 같은 것이니, 수선은 이만물이부쟁하고 : 물의 선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능히 만물을 이롭게 하고, 처중인지소를 오 하느니라 :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기를
 싫어 하느니라. 고로 기어도 이니라 :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깝다 할 수 있느니라. (기는 '거의∼하다' , '가깝다' 의 뜻이고 어는 감탄의 뜻을 내포하는 어조사) 만약 그대들이 상선을 따르기(외기신) 어렵다면 중선과 하선이라도 따라야만 능히 자기 한 몸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니라(이신존), 이 말이 노자가 생략해버린 구절이다. 상선이 나왔으니 당근 다음 나오는 것은 중선 아니면 하선일 수밖에 없으니 굳이 설명을 안 해도 알아먹겠지 하고 생각하신 거다. 달나라에 갈 수 있게 된 훗날의 인류가 이 정도의 생략 때문에 노자 자신의 글을 못 읽는 수준으로 지능이 퇴화하리라고는 짐작을 못 했던 거지. 어찌 도올 한 사람만 죄겠나? 다음의 중선 이하를 보자. 거선지심선연 여선인 어선신 정선치 , 사선능 동선시 부유부쟁 고무우 ,  거선지 : 머물때는 땅을 잘 보고 앉아야 하고 , 심선연 : 마음은 언제나 그윽하게 가지도록 하며, 여선인 : 남을 대할 때는 인으로서 
대하고, 언선신 : 말을 할 때는 믿을 수 있는 말만 하고, 정선치 : 바로잡을 때는 다스리는 법도로서 하고, 사선능 : 일을 할 때는 능력으로써 하며, 동선시 : 움직일 때는 때를 잘 보고서 움직여야 하리로되, 부유부쟁 :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남과 다투지 않는 것이니, 고무우 :그리하면 네가 허물(우환)이 없으리로다. 이 칠선 은 종교적인 계율이나 도덕적인 덕목이 아니라 속세를 살아가는 중생의 처세요령이다. 그것을 지키고 따르는 목적이 대단히 속물적이다. 그리해야 내 한 몸에 화가 없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소리다. 얼마나 솔직하냐? 십계명을 지켜야 천국에 가고 팔정도를 지켜야 극락왕생한다는 구라에 비하면 노골적이지만 그만큼 가슴에 와 닿는 구석이 있잖아. 노자는 사람이 나중에 천국을 가고 극락에 왕생하고 열녀비를 세우고 하는 그딴 것보다도 우선 자기 한 몸 안 다치고 
어찌하든 보신이라도 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만큼 춘추전국시대 민초의 삶이란 위험하고 불안한 것이었다. 그래서 노자는 거듭거듭 당부하기를 '제발 남과 싸우지 마라. 다투지 마라. 사소한 이익은 차라리 포기하고 양보해라. 네 한 몸 잘 보존해라. 죽으면 니만 섧다. 나서지 마라. 아는 척하지 마라. 없는 듯이 살아라' 말끝마다 전쟁터 나가는 아들 붙잡고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하는 어머니처럼 신신당부하는 거다. 백성에 대한 노자의 연민가 그 보살피는 마음은 병아리 돌보는 어미 닭보다 더 지극하다. 사바 중생에 대한 부처님의 측은지심에 비견할 만하다. 이 뒤에 가면 그런 노자의 애민지정에 내가 눈물을 쏟은 대목이 나온다. 물론 도올은 그게 무슨 소릴 줄도 모르니까 아무 생각 없이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요 하고 넘어가 버렸지만 말이다. 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노자가
 당부한 부쟁에 어긋나는 줄은 잘 안다. 그러나 노자의 말씀이 이토록 진흙탕에 뒹굴게 두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지? 상선은 도를 따르는 일선이고 이하 중하선은 세상 속에 살아가며 새겨야 할 칠선이다. 이 여덟 개의 선은 도교의 십계명이고 노자의 팔정도라 할 수 있다. 도올이 이 대목을 가지고 뭐라고 또 횡수를 늘여놓았는지 함 볼까? 도올은 상선 이하 쭈욱 나열된 차선들을 보고 이게 도대체 뭔 소린지 알 수가 없었나봐. 상선약수에 처중인지소오는 어떻게든 찍으려고 통빡을 섞어서 황당하게나마 풀었는데 거선 심선 여선 어선 하고 나오니까 이게 뭔가? 한참 고민했겠지. 상선에 대한 차하선 들이라는 것을 눈치도 못 채고 얼마나 속으로 꿍꿍 가슴앓이를 했는지 이렇게 해 놓은거 있지. '거선지' 로부터 시작하는 일곱 구절은, 백서본에도 거의 비슷한 형태로 실려 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방식은 너무도 다양한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같은 글자에 대해서도 동사·형용사·목적어의 다양한 변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노자의 21세기를》 48쪽 하단 이렇게 해놓고는 내가 했던 것처럼 객관식 사지선다를 해보자고 판을 벌여놓은 거야. 그런데 웃기는 것은 문제를 출제한 사람이 내놓은 사지에 정답이 없다는 거야. 도올이 거선지를 샘플로 삼아 내놓은 객관식 답안을 한번 볼까? ① 거할 때는 땅을 좋은 것으로 삼고 ② 거할 때는 낮은 데 처하기를 잘하고 ③ 좋은 따에 거하고 ④ 거할 때는 땅을 좋게 하고 나는 있지, 도올이 아직까지 동양학 교수를 하고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다. 학생들이 얼마나 불쌍하겠니? 예문에 정답이 없는 객관식 문제를 교수가 시험에 턱하니 내면서 풀라고 하면 이게 환장할 일 아니겠냐? 이런 문제를 내놓고 또 뭐라고 하는가 보면 더 걸작이다. 이 밖에도 다른 번역의 가능성이 있겠지만,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번역해도 어느 것이 더 정답이라는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거 좋아하네. 모르면 모른다고 해. 그러면 가르쳐주기나 하지. '거선' 이란 머물 때의 지혜를 말하는 거잖아. 이것은 비단 어디서 
살 것이냐 하는 거주지를 뜻할 뿐만 아니라 직장. 벼슬 등, 살아가는 데 있어서 처하게 되는 모든 상황을 두루 아우르는 말이다. '머무름에 있어서의 선은 그땅을 살피는 데 있다' 라는 뜻이지. 땅은 꼭 대지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고 어떤 상황 전체를 말한다. 주변 상황를 잘 살피고 파악해서 거하라는 처세의 방편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이 가르침을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발 뻗을 자리를 보고 앉아라' 하는 말이다. 거선지를 모르면 사람이 어찌되는 줄 아냐? 도올이처럼 사지에 빠져버린다. 지가 지금 TV강의로 한번 떠서 천지분간도 못 하면서 논어강의까지 하고 자빠지는데 지금지가 서 있는TV 녹화장소가 바로 '죽을 자리' 라는 것도 모르는 거야. 내가 앞에서 그랬잖아 높이나는 놈 일수록 대갈빡은 확실히 깨진다고. 멍청하게 호랑이 아가리 앞에 자리를 깔고 드러누으면 어쩌자는 거야? 대한민구에 사람이 없는 줄 아냐? 이나라가 그리 만만 나라가 아니다.
 잘나고 똑똑한 놈들이 곳곳 쌔고 쌨다. 도올은 이 '거선지' 이하의 나열을 물에 대한 설명이 계속 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 끝도 없이 헛다리짚고 자빠지는 거야. 그러다 보니 사지선다가 아니라 십지선다를 해도 정답이 없을 수밖에. 물의 선에 대한 이야기는 '고기어도'에서 이미 끝났는데 도올은 저 혼자 물을 붙들고 기를 쓰고 있는 거거든. 어떤 스님 둘이 내를 건너는데 물이 불어서 한처자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자 한 스님이 냉큼 업어서 건네줬어. 그리고 한참 길을 가는데 다른 스님 하나가 물었어. "출가한 몸으로 처자를 등에 업어도 됩니까?" 그러자 그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어. '나는 그처자를 아까 등에서 내렸는데 자네는 아직도 업고 있구만.' 노자는 물 이야기를 벌써 끝냈는데 도올은 아직도 그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어. 그러다 보니 말하는 저도 곤혹스러운 거야. 생각을 함 해봐봐. 도대체 물의 성질하고 거, 심, 여, 언, 정, 사, 동이 어찌 연결이 되느냐고? 도올은 절벽만 만나면 그냥 대가리를 박아버려. 보고 있는 
내가 답답해서 못 봐주겠어. 얘는 또 지가 막히면 나오는 버릇이 있지. 멀쩡하게 보이는 게 횡설수설을 막 하는 거야. 강의 주제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나발을 신나게 불어 젖혀서 사람들 혼을 약간 빼놓은 다음에 사람들이 눈치 못 챌 때 얼른 다음으로 도망가버리는 약은 꾀를 부린다 말이다. 노자사상에 대한 불세출의 명 해설서《노자와 21세기》는 이 장에 대해 꽤나 길게 중언부언 잡다한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지만 노자가 이 장에서 물에 대해 언급한 것은 단 네 줄에 지나지 않고,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싫어하는 물의 성질로서 도를 비유했을 따름이며 그와 같이 은둔함이 좋지않겠는가 하고 은근슬쩍 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올은 이 장 전체가 물에 대한 기술이라고 보고 노자가 물이는 것에 대해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단단히 착각한 나머지 노자 해설서를 '물에 대한 보고서' 로 만들고 앉았어. '상징화(sysmbolization)' 니, '상징적표상(symbolicrepresentation)' 이니, '보편적 적응의 원리(a principele of universal applicability)' 니, 하면서 그 전매특허 같은 유식이 철철 넘치는 소리를 잔뜩 한 다음에 
약방의 감초같이 왕필의 주가 나온 끝에 '물은 유로서 관념의 세계고, 도는 무로서 사실의 세계다' 라고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를 또 하고 자빠진다. 이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가 단순히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가 아니고 사실은 언어의 제약과 상징 체계를 벗어나는 심오한 철학적 꽈배기 언어의 산출물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런 다음에 곽점죽간본이라는 근자에 발견된《도덕경》의 또 다른 사본의 내용인 '태일생수' 의 원문을 옯겨놓고 장황스레 연구결과를 과시하고 있는데, 이것도 진짜 웃긴다. 곽점죽간본의 태일생수편 내용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도덕경》에 나타나지 않는 개념과 말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 태극 과 음양을 비롯해서 사시라든지, 차고 덥고 습하고 건조한 것 등 훗날 오행에 대입되는 개념들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학의 대가씩이 못되는 올채이 아마추어 동양학자가 봐도 공노 시대의 사상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훗날 
전국시대 말기에 동북 변방의 제나라에서 융성한 황노학의 산물인 것이다. 음양오행의 철학체계는 빨라도 전국시대 말에서 한대에 걸쳐 발상한 것이다. 노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음양사상이 태동하기도 전이었다. 곽점죽간본의 태일생수편은 후대의 황노학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노자는 물이라는 것에 대해 도올이 착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도덕경》전체에 물이 나오는 것은 이 장의 단 네줄로 처음이고 끝이다. 책을 똑바로 보지 못하다보니 뭐가 중요하고 뭐가 덜 중요한지 알지 못하고 그저 고추 먹고 맴맴이다. 《노자와 21세기》에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태극도설이니 음양사상이니하는 것들은 노자와는 거리가 먼 소리들이다. 노자는 태극이라는 말도 몰랐던 사람이다. 그래서 '곡신불사' 니, '현빈' 이니 해서 노자가 손수 이름을 지어가며 설명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을 노자의 사상이라 말해서는 안 되는 거다. 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부쟁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 거선지 심선연 여선인 어선신 정선치 , 사선능 동선시 부유부쟁 고무우. 도올번역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 때는 낮은 땅에 처하기를 잘하고, 마음 쓸 때는 그윽한 마음가짐을 잘하고, 벗을 사귈 때는 어질기를 잘하고, 말할 때는 믿음직하기를 잘하고, 다스릴 때는 질서 있게 하기를 잘하고, 일할 때는 능럭 있기를 잘하고, 움직일 때는 바른 때를 타기를 잘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어라. 바른번역 선 중의 상은 물의 그것과 같다. 물의 선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이롭게 하며 뭇 사람이 모이는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은 도와 가깝다 할 수 있다. (만약 물과 같은 상선이 어렵다면) 머물 때의 선을 땅을 살피는 것으로 하고 마음을 간직하기를 
그윽함으로써 선을 삼고 남과 어울릴 띠는 어진 것으로 선을 삼고 말을 할 때는 믿음으로써 선을 삼으며 올바름을 세우는 것으로 다스림의 선을 삼고 능히 해낼 수 있느냐로 일할 때의 선을 삼으며 움직이는 것은 때를 가리는 것으로 선을 삼아야 하나니 모름지기 다투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리해야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제 9 장
  벌써9장이다. 이 장은 엄청 쉽다. 누구든 옥편 한 권 들고 앉으면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장이다. 그렇다 해서 우리 주인공 도올이 우리를 웃기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어러우면 어려운 대로 쉬우면 쉬운 대로 주인공은 반드시 웃겨준다. 지금까지 살펴온 것에서 우리가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도올은 한자 읽는 법을 전혀 모른다. 고전의 번역과 해석은 고사하고 한자 공부의 기초가 안 되어 있다. 이렇게 쉽고 평이한 문장을 제대로 못 읽는 것을 보고 내가 뭘 느꼈겠냐? 뒷골이 다 당기고 앞골에는 쥐가 난다. 함 보자. 지이영지 불여기이, 취이절지 불가장보, 금옥만당 막지능수, 부귀이교 자유기구, 공수신퇴 천지도. 첫번째 구절 '지이영지 불여기이'를 도올이 뭐라 했는가 먼저 보는 게 순서겠지. '지니고 채우려
 하는 것은 그것을 그만두느니만 못하다' 다. '지' 는 '가질 지' '지닐 지' 다. '영' 은 앞의 '이용지혹불영' 이란 구절에서 보았던 '찰 영' 이다. 그러니까 '지이영지' 는 '지니고 채우는 것' 이라고 번역한 게 맞잖아? 하고 우길 모양인데 이걸 정말 어째야 돼? 이런 한심한 꼴통을 데리고 공부랍시고 가르쳐야 되는 내가 참 기가 막힌다. '지' 가 들어간 단어를 몇 개 생각해봐봐. 지속, 유지, 지구등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들이잖아. '지' 는  포괄적으로 항상성을 의미하는 글자다. 자체의 뜻은 '가진다' '지닌다'는 뜻이고 그런뜻으로 쓰이는 단어는 '이력서를 지참한다' 할 때의 '지참' 정도가 있어. 이 자 자뒤에 어떤 다른 글자가 오면 그 글자의 의미를 유지시키는 말이 되는 거다. 뒤에 '찰 영' 이라는 글자가 오면 '지' 는 '영' 을 수시하는 글자로 변한다. 즉 '체우는 것을 계속한다' 가 된다. 바꿔 말하면 '계속 들이 붓는다'는 말이다. 만약에 컵에다 물을 계속 들이부으면 
어찌 되겠어? 당근 넘쳐버리지? 그래서 '불여기이' '(적당한 때에)그만두는 것만 못하다' 라고 하는 거야. 이어서 말하면 '채우기를 계속하는 것은 적당히 체우고 멈춤만 못하다' 하고 읽어버리면 도데체 뭔 소리가 되느냐 말이다. 사람이 지닐 때는 지녀야 되고 채울 때는 채워야지 '지니고 체유는 짓을 하지 마라'  는 소리잖아. 원 세상에…. 여기까지도 괜찮아. 다음 줄을 보면 뒤로 넘어가버려. '취이절지 불가장보'를 뭐라 하느냐면 이래 놨다. 취(   )를 '갈다' 라고 해석하면 절(  )은 분명 '날카롭게 한다'는 뜻이 될 것이므로, 이것은 예의 오사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칼이 무딘 것과 날카로움을 비교해보면, 항상 날카로운 것이 무딘 방향으로 자연그럽게 진행한다. 무딘 것이 날카로운 것에 비해 허가 더 많은 것이다. 날카로움은 무딘 것보다 오래 보존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간의 성격도 너무 날카로운 사람은 허가 없어 자신을 들볶에 마련이다. 에도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가 무딘 목검으로 당대의 최고 검개사사키의 날카로운 진검을 쓰러뜨린 이야기도 결국 이 노자의 허의 사상을 무술에 적용시킨 대표적인 사례중의 하나인 것이다. 《노자와 21세기》 하권91쪽 상단 지랄 났다. 지랄이 난 게 아니고 인물이 났다.  ㅁ씨 가문에 인물 났어. 여기서 '갈다' 가 왜 나오고 목검이 왜 나오고 미야모토 무사시가 뭐 때문에 등장하는 거야? 다른 노자 주해서를 봐도 대부분 '취이절지'를 '칼을 갈아서 날을 세운다' 는 뜻으로 풀고 있긴 하다. 도올 머리에 유별나게 독창적인 뭐가 나오겠느냐마는 그래도 연구씩이나 했으면 기조늬 해석이 틀린 것쯤은 바로잡을 줄 알아야지. 안 그래? 앞 넘이 틀린 걸, 뒤넘이 그대로 이어받고 그 뒤넘이 또 그걸 그대로 갖고 간단 말이야? 이래서 무슨 학문의 발저이 있겠니? 그래 저 문장이 안 읽혀서 멀쩡한 글자를 괜히 바꾸고 자빠지나? 그리고 '절'자를 어쩐다고? 이게 오자니까 '날카로울 예' 자로 바꿔야 해석이 된다고? 에라이, 밥 팔아 똥 사먹을 넘들. '절' 은 '기둥 절' '막대기 절'인데 기둥 중에섣도 들보 위의 짧은 기둥인 동자주 즉 '쪼구미'를 말하는 것이다ㅣ. 이것을 센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마로 집을 크게 지으면서 쪼구미 숫자를 세고 있어도 불가장보니라. 
즉 '오래 보존할 수 없는니라' 는 뜻이다. 암만 기둥이 많이 늘어서 있는 큰집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 집이 얼마나 오래 가겠느냐는 말이다. 진시황이 아방궁을 짓고서 그 속에서 산 것이 몇 년이나 됐어? 집이란 건물 자체가 오래 못 가는 것이라는 말이겠지만 그 속에서 사람이 사는 날은 더 짧다는 말일 수도 있다. 기둥을 센다 또는 잰다는 말을 원문의 글자를 바꿔가면서 '날카롭게 간다' 하고 자빠지니 암만 좋게 얘기하고 싶어도 이제 안 되는 거야. 한자도 제대로 못 읽는 게 도 해놓은 소리 함 봐봐. 뭐라고? 미야모토 무사시가 사사키 고지로오를 이긴 이유가 노자사상을 무술에 적용시킨 탓이라고? 우리 노자가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실 판이다. 어찌 노자 사상을 설명하면서 노상 꺼내는 이야기가 깡패 아니면 칼잡이야? 노자가 제일로 긿어하는 부류가 그런 폭력을 쓰는 인간들이다. 노자가 싫어 하는 소리만 잘도 골라서 하고 앉았지. 밉다 밉다 하니까? 
이래도 밉냐는 식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지만 소설 내용을 사실 그대로의 상황으로 인정해준다 치더라도 둘의 승부에 노자사상은 아무 관계가 없다. 태양의 위치를 싸움에 이용하는 미야코토 무사시 특유의 동물적인 싸움 감각과 기 싸움에서 사사키 고지로오가 밀렸기 때문에 승패가 갈린 것이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무사시가 둘의 실력에는 큰 차가 없다는 현실을 받아 들이고 생사를 하늘에 맡겨버리고 무심의 일격으로 승부를 지으려 했던 데 반해 고지로오는 그래도 자기가 상대보다 한수 위라는 실력의 차이를 믿소 또 그것으로 승부를 지으려고 기술에 집착했다는 마음가짐의 차이는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유명한 두 검객의 승부에서 목검의 무딤과 진검의 날카로움은 어떤 변수도 되지 못한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무딘 목검을 썼기 때문에 사사키 고지로오를 이긴 것이라면 왜넘들은 전부 다 목검만 차고 다녔을 거야. 미야모토 무사시가 결투장으로 정해진 섬으로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노를 깎아 목검을 만든 이유는 노자의 
무딤의 허를 싸움에 이용하자는 게 아니고 극히 산술적이고 물리적인 계산 때문이었다. 고지로오가 쓰던 칼은 당시의 일반적인 왜넘 칼보다 한 자나 길어서 옆구리에 차고 다니지 못하고 등에 매고 다녔던 물건이다. 칼이 길다는 것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기운이 좋다는 뜻이다. 맥아리 없는 넘은 긴 칼을 쥐여줘도 힘이 딸려서 휘두를 수가 없는 거야. 상대가 긴 칼을 쓴다고 지도 칼을 길게 만들어 덤비면 칼에 못 이겨서 지 풀에 자빠져버린 단 말이다. 칼의 무게를 늘리지 않으면서 길게 만드는 방법이 뭔가 골똘히 생각했던 끝에 나온 것이 바로 그 목검이야. 그리고 그 길이의 싸움에서 미야모토 무사시가 이기게 됐던 거고. 사사키 고지로오 장검이 먼저 미야모토 무사시의 머리에 통여맨 수건을 날리지. 그와 동시에 목검이 고지로오의 대칼통을 부쉈던 것인데, 무사시가 만약에 짧은 칼로 싸웠다면 목검이 고지로오의 대칼통을 가지 전에 고지로오의 칼 끝에 수건이 아닌 목이 먼저 날아갔을 거야. 고지로오만한 검술의 달인이 
상대와의 거리 측정을 잘 못 하고 칼을 휘둘렀던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상대의 의표를 찌르고 길다란 목검을 가지고 나타났기 때문에 그 길이에 헷갈린 것으로 볼 수 있어. 그래서 한치 빠르게 칼을 휘두른 것이고. 미야모토 무사시가 섬에 다다라 배에서 뛰어내렸을 때 사사키 고지로오가 뱉은 첫마디가 '목검이로군' 이었어. 이 말 뒤에 숨은 속내는 '제기랄 죽이게 기네' 라는 거였을 거라고 나는 짐작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 간의 승부가 어디서 갈리는 것이지 알 수 있으려면 도올은 아직 한참 멀었어. 여담이지만 같은 종류의 병기에서 긴 것은 짧은 것을 이긴다는 것은 고금의 진리야. 이 단순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것에 무사시의 뛰어남이 있어. 긴 것에는 긴 것으로 싸워야지 짧음을 기술과 정신만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거야. 이런 싸움의 진리를 무시해서 진 것이 훗날의 태평양 전쟁이야. 무기의 열세를 야마토다마시 하나로 우겨보려고 
든 왜넘들은 자기네가 숭상하는 검술의 달인이 남긴 교훈을 잊은 넘들이야. 이런 승부의 갈림을 노자사상에서 찾는 고락서니를 보면 한마디로 놀고 자빠졌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어. 미야모토 무사시를 들먹이면 사람들이 유식하다고 봐주는 거야? 그러러면 제대로 알고 구라를 풀어야지. 깡패를 희생정신을 노자에서 찾은 도올이니만큼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글을 쓰고 있는 내가 맥이 풀려버린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계속하자. '금옥만당 막지능수'는 '재물과 보화를 집안 가득 채워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로 번역하면 된다. 우리의 건아 도올도 이런 정도는 풀 수 있다고 믿고 넘어가자. '부귀이교 자유기구'를 '돈 많고 지위 높다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 길 뿐이다' 라고 한 도올의 번역은 대단히 훌륭하다. 칭찬을 해주고 싶다. 그다음 문장까지도 준수하게 번역하고 있다. 박수! '공수신퇴 천지도'를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 하늘의 길이다' 로 멋지게 번역해놓았다. 번역도 자꾸 하다보면 느나보다. 공부도 자꾸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 지금가지는 워밍업이고, 오픈게임이 이었고, 도올의 진짜 실력은 지금부터 나오는 게 아니가 은근히 기대가 된다. 독자들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얼른 다은 장으로 가보자. 지이영지 불여기이, 취이절지 불가장보, 금옥만당 막지능수, 부귀이요 자유기구, 공수신퇴 천지도, 도올 번역 지니고서 그것을 채우는 것은 때에 그침만 같지 못하다. 갈아 그것을 날카롭게 하면 오래 보존할 길 없다. 금과 옥이 집을 가득 메우면 그를 지킬 길 없다. 돈 많고 지위 높다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길 뿐이다.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 하늘의 길이다. 바른번역 (무엇이든지)채우기를 계속하는 것은 (적당한 때에) 그만둠만 못하느니라. (집이 크다고 하여)아무리 기둥을 세어도 그것을 오래도록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금은보화가 집안에 가득해도 그것을 지킬 방법이 없느니라. 무유하고 고귀함을 자랑하면 스스로 허물이 될 뿐이니 공을 이루면 무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니라.
    
       제 10 장
  여기가 바로 유명한《도덕경》이 제10장이다. 도올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짐작조차 못 했던 장이다. 다른 장들은 틀리건 맞건 시쳇말로 찍기라도 할 수 있었지만 여기만 오면 그냥 꽉 막혀버린다. 그래서 이 10장의 내용은 어떤 해설서를 봐도 전부 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들뿐다. 비슷하기는커녕 아예 근처에도 못 오고 달나라에서 병신육갑을 떨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도올한테는 아예 기대할 게 없다. 도올은 처음부터 포기하는 게 속이 편하다. 노자께서 등선하신지 2천 년 만에 내가 처음으로 이 말의 올바른 뜻을 풀어준다. 이후에《도덕경》에 대한 논란은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10장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자. 첫 구절이다.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지? 아무리 한자에 정통한 사람도 이 문장은 못 읽는다. 대부분의 노자 연구가나《도덕경》해설자를 보면 여기서부터는 노자가 철학 사상적 사변에서 벗어나 도가수행의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암시들을 내놓고 있다고 야무지게 착각을 하고 자빠진다 백 이라는 글자에 현혹되고 전기 같은 말에 헷갈려서 이 장의 내용이 신선술이나 양생법 내지는 기수련에 대한 설명이다 라는 턱도없는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이다. 천방지축 까부는 소년 왕삐는 물론이도 왕삐를 우상으로 받드는 도올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지나의 학자들이나 물 건너 게다국 전문가상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앞의 몇 줄은 장님 밤길 가듯이 어찌어찌 풀어나가다가 몇 줄도 못가서 애민치국을 만나면 그게 발이 걸려서 헤까닥 자빠져 버린다. 왜, 이런데서 갑자기 애민치국이 나오는 거지? 오사가 아닐까? 후대에 잘못 끼여든 구절일 거야. 오만가지 궁리를 해봐도 답이 안 나오는 거다. 그러니 들어 있는 것을 뺄 수도 없고 억지로 풀어놓고 다음 줄로 도망가기 바쁘다. 그러나 이 장의 내용은 앞 장에서 개인적인 처세의 방편을 설명한 것에 뒤따르는 천국의 요령을 설명하는 장이다. 앞장이 수신제가의 장이라면 여기는 치국평천하의 장이다. 나는 도올의 TV 강의를 보면서 
사실 도올이 이 장을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궁금했다. 다른 건 다 틀려도 이 장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이해를 했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봐줄 수도 있다. 그러나 태생근기가 너무 허약해 보인다. 도올의 첫 구절 번역을 먼저 함 볼까? 땅의 형체를 한 몸에 싣고 하늘의 하나를 껴안는다. 그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또 횡설수설하기 시작하지? 번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저렇게 번역한 이유를 늘어놓은 해설이라는 것이 서너 쪽에 달하는데 그 전부가 강아지 풀 뜯는 소리다. 아마 도올 자신도 자기가 한 소리가 뭔지 잘 모를 거야. 저 번역이 맞다 쳐도 그 자체로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냐? 땅의 형체를 한 몸에 싣고 하늘의 하나를 껴안고 떠나지 않다니?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먼저 보자. 재는 실을 재 이룰 재 가득할 재 자고 영은 경영할 영 지을 영 진영 영 자고, 백은 넋 백 자고, 포는 안을 포 품을 포 가질 포 다. 그리고 일은 한 일 자다. 그러면 이게 뭔 소리겠니? 퀴즈를 푼다 치고 다들함 생각해봐. 신문 퍼즐 맞추는 거보다는 훨 재밌는 거다. 재는 일단 내버려두고 우선 영 이라는 글자를 먼저 보자. 영은 노자 당시의 춘추전국시대에 군대가 주둔하는 군진의 단위였다. 한 단위의 군대가 모여 세운 진지 또는 숙영지다. 오늘날도 그 뜻 그대로 병영이란 말을 쓰고 있다. 노자는 이 글자를 한 무리의 사람들을 표현하는 단어로 골랐다. 그것도 그냥 사람의 무기가 아니라 어떤 카테고리 내에 엮여 있는 사람들이다. 씨족이건 동족이건 한나라 백성이건 동질성을 가진 어떤 사람들의 집합이다. 군대를 지 맘대로 이탈하는 것을 탈영이라 하고 전시에는 즉결처분 감이다. 즉 영 이란 그 속의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이 엄격하게 묶여 있는 집단이다. 
민족 이니, 국민 이니 하는 말들이 없던 시대다. 기껏해야 백성 이란 말로 인간 사회 집단을 불렀을 뿐이다. 때문에 여기서 노자가 영 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 소속된 사람들을 일컬어 한 말이다. 한 국가의 국민이란 징집되어 병영에 모인 병사처럼 국가라는 하나의 테두리 내에 갇힌 사람들이고 그것으로부터의 입출이 자유롭지 못한 강제적인 소속 개념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의 영 은 군대가 모인 진영처럼 운명 공동체로서 조직된 인간의 집단이나 조직을 말한다. 바로 국가이고 국민이다. 그렇다면 다음 글자까지 붙여서 읽어보자. 영백 은 국민의 넋 또는 국민의 마음 이다. 이것을 우리는 민심 이라고 한다. 영백 은 민심이다. 이제 맨 앞의 글자, 재를 붙여 보자. 실을 재 가득 찰 재를 붙이면 재영백 이 된다. 즉, 영내에 가득 찬 백이 된다. 조금 다듬으면, 온 나라에 가득 찬 혼 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전국민의 혼이요, 마음 이다. 거국적인 또는 총체적인 민심 이란 말이 된다. 앞 세 글자의 뜻만 알면 다음의 포일은 어려울 것도 없다. 하나로 안는다 또는 하나로 품는다 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앞 구절의 의미는 다 풀었다. 재영백포일의 뜻은 온 나라 백성의 마음을 하나에 담는다 이다. 뒷구절 능무리호!는 능히 떠나지 않게(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이다. 그렇다면 재영백포일능무리호! 라는 것은 온나라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에 담아서 이것이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다. 이게 뭔가? 바로 치국의 제일 첩경이요, 요체요,
 나라 다스림의 알파요 오메가다. 얼마나 소름 끼치도록 정곡을 찔러오는 표현인가? 나는 어떤 정치학이나 정치론에서도 이보다 더 섬뜩하게 하나로서 전부를 관통하는 촌철살인의 경구를 본 적이 없다.《도덕경》을 읽을 때 이 문장에서 노자의 무서움을 느꼈다. 공자보다 윗길이다. 치원이 한층 높다. 이토록 심오절묘한 한마디를 뭐라? 땅의 형체를 한 몸에 싣고 하늘의 하나를 껴안아? 지랄육갑을 떨고 놀고 자빠졌다.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온 나라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이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정치를 한다는 놈들은 죄다 노자의 이 한마디를 벽에 붙여놓고 아침 저녁으로 들여다보면서 그 말뜻을 새겨야 되는 거다. 아니면 지 이마에 붙여놓고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보고 또 보든지. 저것이 되면 정치는 끝난 거야. 황제, 왕후로부터 오늘날의 대통령까지 하려고 그토록 노력했어도 쉽게 안 되는 게 저거다.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꾼다면 민심합일, 국론통일 이다. 이걸 할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정치가다. 정치하는 놈들이 노자의《도덕경》에서 이 10장의 내용만 명심해도 인간이 확 달라질 거야. 정치하는 놈들이 바뀌어야 나라가 변할 텐데 위무위 할줄 모르고 공수신퇴 할 줄도 모르는 놈들이 뭘 가지고 재영백포일을 하며, 그 다음에 능무리를 하겠느냐 말이다. 넋두리는 그만 하고 다시 우리 주인공한테로 돌아가 보자. 쥐뿔도 모르는 게 탱자탱자한다고《훈몽자회》까지 들이대면서 백이란 글자를 설명한다고 오두방정을 떨고 앉았는데 동양학 한다는 인간이 백자도 몰라서 저 난리를 치니까 보기가 딱하지. 한심하지만 어쩌겠냐? 기왕 가르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귀찮지만 이런 것도 설명해줘야지. 이제 도올이가 이 백을 가지고 뭐라고 턱도 없는 구라를 풀어서 사람을 웃기는지 보자. 그리고 이 글자의 뜻과 노자가 왜 
백성의 마음 이란는 표현을 위해 이 글자를 사용했는지 알아보자. 백은 옥편에서 찾아보면 넋 백 이라고 나온다. 다른 말로는 얼 이다. 이 백 은 홀로 쓰이기보다 대개 혼 과 결합되어 혼백 이라는 합성어로 쓰인다. 혼은 우리말로 쓰면 넉 이다. 고대부터 동양에서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하고 있는 것으로보았고, 그 본질을 정 가 신 이라 했다. 이 둘이 결합된 합성어가 바로 정신 이다. 정 은 육신의 생명력이요, 신 은 영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양자를 산 생명으로서 결합시키는 힘이 바로 기 다. 때문에 동양적 관점에서 살아 있는 인간 이란 정기신 의 결합체이다.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기 의 운행이 멈춰 육신의 생명력인 정 과 영의 생명력인 신 이 분리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정 
과 신 은 산 생명일 때의 정신이며, 죽은 다음의 분리된 둘은 각각 다른 이름을 갖는다. 
 정이 신 과 분리되면 백이 되고 신이 정과 헤어지면 혼이 된다. 이 혼이  홀로 영계에 존재하는 것을 동양에서는 신이라 한다. 양넘들의 God하고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동양의 신은 육신과 분리된 혼을 일컫는다. 그래서 신은 곧 귀신이지 별다른 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서양에서 
기독교가 들어오면서God의 개념과 동양의 신이 뒤섞여 버려서 개념조차 혼탁해져버렸다. 양넘들의 God은 처음부터 God이고 인간들하고는 출생 성분부터 다른 존재이다. 그래서 상넘이 양반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물론 고대로마제국의 신관은 동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야훼가 지중해를 건너오면서 신과 인간이 별개의 존재로 분리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동양적 사고에서 보면 인간을 창조한 신이라는 것은 대단히 웃기는 개념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이 된다. 안 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신이 될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귀신이 되어 제삿밥이나 얻어먹으러 다니는 처량한 신세가 돼버린다. 그런 귀신 중에서 특히 영험이 있고 쫌 귀족적인 양반 귀신을 따로 부를 때 재수 없는 귀자를 떼버리고 그냥 신이라 하는 거다. 영계에서 우글거리는 귀신들은 모두 한때는 살아 있던 넘들이다. 하지만 이 넘들은 다 수명이 있다. 영생불사하는 게 아니고 다른 세상에 환생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혼들이다. 아예 갈 데를 못찾고 지 주제파악을 못 해서 육신도 없는 껍데기로 오랫동안 개기는 넘들이 바로 무당들이 받드는 귀신들이다. 이게 바로 인격신이다. 그 위에 양넘들의 God과 비슷한 개념의 것도 있기는 하다. 특별히 하느님 또는 천신, 또는 상제라 하는 넘들인데 그 존재조차 의심스럽다. 화기광이고 동기진 같은 넘들이어서 정체가 가물가물한 넘들이다. 그리고 그냥 허이불굴하고 있는 넘들이라 사람들한테 별나게 복을 주는 일도 없고 헤코지하는 일도 없다. 생이불유하는 존재들이라 무용이다.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없다. 개개인의 길흉화복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존재들이다. 바트 그러나, 하늘의 뜻 또는 천명 이라는 개념으로 확대해서 볼 때에는 뭔가 수작을 부리는 듯한 흔적이 자주 보인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넘들이다. 역사를 공부할 때 자주 그런 심증을 갖게 된다. 하늘의 뜻 , 신의 의지 같은 것이 혹 작용한 탓에 일이 그리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 말이다. 정리해보면 백 은 우리말로 넋 또는 얼 이라하고, 혼 으 넉 이라 한다. 얼 은 육신의 생명력인 정이어서 육신과 함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얼은 빠진다 고 표현한다. 그래서 얼빠진 놈 이라 하는 것이지 얼 나간 놈 이란 욕은 없다. 반면에 넉 은 영체로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어서 넉은 나간다 라는 말은 틀린 표현이다. 혼(넉)은 신의 생명력으로 
죽으면 하늘로 돌아가고 백(넋,얼)은 정의 생명력으로서 죽으면 따으로 꺼지는 것이다. 기는 죽으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도올의 해설을 보면 기의 개념은 고사하고 혼과 백의 구별도 제대로 못 해서 《훈몽자회》를 들여다보니 혼은 넉이고 백은 넋이다는 정도 밖에 안 나오거든. 그래 뭐라 뭐라 궁시렁궁시렁 하는데 하나도 못 알아 듣겠어. 자기부터 정확하게 모르는 것을 남에게 설명하려니 본인인들 오죽 죽을 맛이겠나? 원문을 옮겨놓고 같이 보겠지만 영의 뜻을 설명하면서, 고대인의 인테관에서 영은 위와 상대되는 말인데, 어쩌고저쩌고… 날구라를 치는데 설마 이런 것을 아는 사람은 없겠지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지 멋대로 지어내다보니 영은 땅이 되고, 위는 하늘이 된다는 골 때리는 결론이 나올 수가 있는거다. 기는 하늘과 땅을 하나의 생명으로 유지시키는 힘(기운)이 지 기가 하늘이거나 당의 개념으로 사용될 수가 없다. 저런 무식이, 철철 넘치는 소리를 하면서 어떻게 기철학을 하는지 신통방통할 따름이지. 그러니 땅의 형체를  한 몸에 시도 하늘의 하나를 껴안는다 같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다시 한번 재영백이라는 말로 돌아가볼까? 글자 그대로 옮기면 
어찌되나? 한 무리의 사람들 것으로 채워진 백 이란 뜻이지. 즉 백의 집단을 말한다. 이것을 어떻게 한다? 포일, 하나에 담는다 는 말이니까 다시 말하면 인간 집단의 백(얼)을 자루 하나에 담아서 이것을 어찌한다? 능무리호, 흩어지지 않게 한다 다. 수천 수만 명의 영혼을 하나로 묶어서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 인간의 영혼을 수집하는 악마가 등장하는 호러무비가 생각나지? 그러나 이것 이야말로 아래에 아노는 애민치국의 요체라는 말이다. 지도자를 향해 민심이 복속하고 천하가 하나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또 영이란 말이 나왔으니 장수가 장병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아 군대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 과도 통하는 소리다.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이 국민을 세뇌하여 통치한 것도 노자의 제영백포일 능무리 가 완전히 엽기적으로 실현된 예다. 요새 자주 사단을 일으키는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하는 짓은 재영백포일 능무리의 호러편이다. 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정치의 요체는 바로 제여백포일 능무리 하는 데 있다는 것은 이로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왜 노자가 이 대목에서 혼과 백중에서 백만 가지고 얘기를 했느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재영혼포일이 아니고 제영백포일이어야 하는가의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알아보자. 만약 노자가 이 대목에서 백이 아니 다른 글자르 썼다면 노자가 아니다. 노자는 글자 하나도 생각 없이 집어넣는 사람이 아니다. 이게 철학이다. 정과 신, 그리고 혼과백은 서로 바꿔 쓸수 없는 글자다. 이 경우에 노자가 말하는 영백이라는 말속에는 국가, 국민, 민족과 같은 개념이 깔려 있다. 그리고 민족혼이나 애국심, 동포애와 같은 집단 의식은 혼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에 들어 있다. 이런 혈연과 밀접한 영적인 소속 개념은 당에 결부되어 있고, 그 땅에서 나서 그 땅으로 돌아가는 백에 담겨 있는 것이지 허공으로 사라지는 혼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내세관과 영혼관이다. 육신의 생명력인 정은 그 양분을 땅에서 나는 음식에서 얻고, 영의 생명력인 신은 그활력을 대기의 호흡에서 얻는다. 그러므로 저의 영화체인 백은 그 
땅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그 땅에서 나는 곡식과 물을 떠나지 아니한다. 신토불이가 그래서 나온 말인 것이다. 국가와 민족 또는 씨족과 혈연 이라는 것은 땅으로 해서 맺어지는 것들이다. 때문에 애국심이나 충성심 동포애 같은 것은 모두 얼(백)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백만 하나로 모으면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의 혼은 치국의 방해물이다. 혼은 신의 영화체로서 전인류적, 전생명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어느 나라 사람이나, 어느 부족 사람, 어느 집안 사람과 같은 토착성이 따지고 들면 한국혼 이란 말은 잘못 합성된 조어이다. 한국의 얼 또는 한국백 이 되어야 하는데 습관적으로 쓰기를 한국혼 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신은 국적이 없다. 반면에 정은 먹거리의 촌수를 따진다. 그래서 먹거리가 다라지면 정이 바뀌고 정이 바뛰면 
사람의 체형과 생김새가 바뀌고 모습이 달라지면, 즉 다른 종자가 돼버린다. 대한민국을 지키려면 김치를 지켜야 하고, 고추장을 지켜야 하고, 된장을 지켜야 하고, 쌀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댜. 먹거리가 달라지면 사람도 달라지고 그 얼이 바뀌게 된다.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은 머거리를 지키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얼이 제자리 제 따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만리 타향에서 죽은 몸일망정 그 시신이나마 조국의 흙에 묻히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왜 노자가 뭇 사람의 백을 하나로 모아 흩어지지 않게 하라 고 하는지 이제 알겠지? 정과 그것의 영화체인 백(얼)만이 피를 모으고 촌수를 따지고 먹거리를 가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국 사람 이라고 말할 때 한국적인 모든 것은 바로 열에 담겨 있다. 신은 혈통과 살아온 땅과 먹거리에 구애받지 않는다. 한국인의 백은 있어도 한국인의 혼은 없다. 한국인의 얼은 있어도 한국인인 신은 없다. 한국인의 백은 포일이 아니라 백산하고 있다. 오호 통제라! 환인·환웅·단군의 세 분 삼성께서 개천하신 이래 일만 년 이어온 하늘 백성의 적통이 오늘에 이르러 혼미백산을 하는구나. 내가《도덕경》을 처음 읽을 때 이 10장의 내용을 읽는데 어떤 장면 하나가 눈앞에 선연히 떠올랐다. 아마 이 장의 내용을 올바르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떠오를 장면이다. 그러나 도올처럼 흰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자요 하면 눈앞에 보이는 게 없어. 그게 어떤 장면이었는지 좀 있다가 말하기로 하고 이쯤에서 헛소리의 대가, 잠꼬대의 달인 도올의 해설이라는 것을 
한번 보자. 그래야 한번씩 웃지. 인간의 몸은 하늘과 땅의 묘합이다. 몸의 하늘을 혼(넉,《훈몽자회》)이라 부르고, 몸의 땅을 백(넋,《훈몽자회》)이라고 부른다. 우리말에 혼났다 넋잃다 넋이빠졌다 등의 표현은 잠시 혼이 백에서 분리되는 현상을 뜻하는 것이다.《훈몽자회》는 혼=넉 백=넋 이라 했는데 우리 고대말에서는 혼과 백이 그리 명백하게 분화되지 않는 듯하다. 혼과 백이 분리되면(죽으면), 혼은 제 고향인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제 고향인 땅으로 돌아간다. 혼은 무당들이 하늘에 제식을 올리고, 백은 장례자들이 땅에 묻는 것이다. 《노자와 21세기》하권 98쪽. 영 은 고대인의 인체관에서 위 와 상대되는 말인데, 영은 몸의 내부를 운영하는(영양을 공급하는) 영혈을 의미한다. 위는 몸의 밖으로부터 보위하는(주로 면역작용과 관련) 위기을 의미한다. 즉 영위는 기혈론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천기론적 도식으로 설명하면 역시 영은 땅(혈)이 되고 위는 하늘이 된다. 따라서 여기 재영백은 모두 땅과 관련되 말들임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인간 유형의 형체를 말한 것이다. 영백을 싣는다라는 듯은 즉 내 이 비계덩어리를 가지고 산다는 뜻이다. 그에 반하여 여기 일이란 유형이 아닌 무형자요, 포괄적인 도의 별칭이다. 《태일생수》에서 말한 태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암암리 영백이 땅의 함의가 강함으로 일을 하늘의 뜻으로 
대비시켰다. 우리는 어차피 비계덩어리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란 이 비계덩어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이 비계덩어리와 하늘의 무형의 기운이 같이 떠나지 않고 있을 때만 존속되는 것이다. 일이란 우주 전체, 즉 태일의 기운이다. 일이란 우주 전체, 즉 태일의 기운이다. 이 전체의 기운을 내가 끊임없이 받을 때만이 나는 생동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21세기》 98쪽-100쪽 어때? 가히 절세의 학문이지? 백년에 한 사람 나올까 말가 한 대학자다. 정말 시자우환이라더니 어찌 이렇게 꼴값을 떨 수 있느냐 말이다. 혼과 백을 몰라서 《훈몽자회》까지 들추고 자빠지나? 애는 썼다. 욕본 것은 가상하다마는 제영백을 어쩐다고? 비계덩어리를 가지고 산다 라고? 이런 육갑을 떨면 안 되지. 그리고 암암리에 어쩌고저쩌고 하여 대비시켰다 는 소리는 도 뭐야? 무슨 학문적인 저술에 아암리에 대비시킨다는 소리가 나와? 독자나 청중을 상대로 속임수 쓰나? 차라리 도저히 모르겠으면 나 천하의도올도 이 구절만큼은 뜻을 모르겠더이다 하면 나 같은 사람이 있어 나서서 가르쳐줄지도 모르잖아. 근데 다 아는 척 사서 고생이야? 무슨 학문에 암암리가 나오나? 암암리는 평안북도 
고게면에 있고, 야바위꾼들이 패 돌릴 때 눈속임이 암암리다. 그래 암암리에 대비를 시켜서 푸릴 문제야? 다음 구절 전기치유하고 능영아호? 는 어쩔래? 이거는 숨어서 사바사바해서 해결할래? 함 볼까? 고대에 행해지던 전기 치료법이라고 우길까봐 겁난다. 전기치유 능영아호라는 다음 구절을 대부분의 해설서가 기르 가지고 몸을 부드럽게 만들어 어린아이의 몸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뜻으로 풀어서 마치 기송수련의 비결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전기라는 말에 현혹이 되고 영아라는 말에 헷갈린 나머지 노자가 지금까지 해 온 소리를 다 까먹었다는 소리다. 이 구절을 보고 기수련을 연상하면 안 된다. 이 구절부터는 계속 앞 문장에 이어지는 말이고 지금까지 해왔던 말의 되풀이다. 내가 10장의 글을 읽을 때 눈앞에 좌르르 펼쳐진 광경이 뭔지 아나? 노자는 수염이 허연 산신령이 아니고 주나라 아니면 초나라에서 관리로 근무했던 사람이다. 앉은 그대로 공중으로 떠 오른다고 뻥을 쳐서 사람들을 웃긴 어떤 영감처럼 백발이 성성한 도인을 연상할지 모르겠는데 실제 노자는 대단히 핸섬한 미남이다. 도사풍말고 아주 
정열적인 혁명가를 연상하면 오히려 비슷하다. 그 이미지가 게바라하고 오히려 엇비슷할 거야. 이런 잘생긴 우리 노자를 초나라 왕이 불렀단 말이다. 바둑 두자고 부른게 아이고, 치구평천하의 도를 물어보자는 것있어어. 왕이 묻고 노자가 답하는 광경이 마치 어제 본 영화의 장면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거야. 이건 아마 실제로 있었던 장면이라고 믿어도 된다. 역사적인 기록에는 없는 장면이지만 내가 있었다 하면 있었던 거야. 왕이 묻기를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길이 무엇이뇨? 하니 노자가 오히려 왕한테 묻기를 왕께옵서는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능히 이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겠나이까? 하는 거야. 그러니까 왕이 답이 종 궁하거든. 짜식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지, 내가 그걸 할 수 있으면 너 잡고 물어보겠냐 임마? 싶었지만 꾹 참고 말하기를 그럴 수 있다 치고, 그 다음은 무엇이뇨? 하고 물으니까, 우리 노자가 줄줄이 말해 놓은 것이 바로 전기치유 능영아호 이하 제 10장의 구절들이다. 전기치유 능영아호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로 모은 뭇 사람 얼의 기운을 마음대로 부드럽게 만들어 어린아이처럼 변화시킬수 있겠사옵니까? 하고 노자가 왕한테 묻는다. 앞에서 노자가 했던 말, 위백성무지무욕을 실제로 해낼 수 있겠는냐는 질문이다. 전은 오로지전 제 마음대로할 전 이다. 전기는 기운을 마음대로 한다 이다. 도는 그냥 오로지라는 말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러면 
전기치유 라는 말은 오로지 백성의 기운을 부드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면 백성의 심성을 사납고 흉포하게 만들지 말라는 주문이다. 노자가 살던 시대는 춘추시대의 끝 무렵이고 전국시대로 접어들던때다. 국왕이나 제후들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자기나라 사람들을 사납게 만들어서 이웃나라와의 전쟁에 써먹을까 골몰하던 시대다. 남자는 태어나면 전사로 양육해서 어떻게 해서든 사나운 싸움개로 키워야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수 있었다. 그런 시대에 왕한테 치국의 도 라고 상주하기를 백성들의 기운을 부드럽게 만들어 어린아이처럼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왕이 기가 막히지. 이 문장들이 전부 의문문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노자가 통치자와의 대화형식을 빌려 치국의 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노자는 백성의 기운을 하나로 하여 떠나지 않게 해라 가 아니고 할 수 있겠느냐? 고 묻고, 왜 백성들의 기운을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처럼 만들어라 가 아니고 만들 수 있겠느냐? 고 물었을까? 즉 노자의 치국의 도 라는 것은 아무 왕이나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자도 그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별스럽게 속세간에 크게 쓰이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그럴 욕심도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왕이 물으니 심드렁하니 되묻고 있는 듯한 
감을 준다. 그러 생각도 없으면서 괜히 사람 말시키지 마쇼 하는 것이 저 말을 할 때의 노자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그 다음에 오는 구절들을 주욱 읽어보기만 해도 그 뜻이 눈에 잡힐 거야. 도올이 계속해서 자빠지고 개다리 춤을 추는 것은 좀 있다봐도 되니까 한번씩 생가 좀 해봐봐. 노자의 출생지와 신분 노자는 《사기열전》에 따르면 초나라의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이다. 성은 이요 이름은 이, 자는 백양 또는 담으로 노담이라 했다. 춘추시대 주나라의 수장실사(장서실 관리인)였다고 전한다. 
 한편 노자의 본명이 노담이라는 기록은 《사기》외에도 《여씨춘추》의 불이편과 《장자》의 양생주편이나 응제왕편등에 나온다. 하지만 이 노담이 과연 사기에 기록된 주나라 사관을 지낸 그 노담이냐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론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사기에 기록된 노담이란 사람과 그 후손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담은 공자의 제자인 자사와 동시대 인물이 된다.  기원전 약 400년 전 사람이다. 그러나 장자의 천운편에 보면 공자가 노자에게서 예를 배웠다는 기록이 있고 사마천 역시도 사기의 공자세기나 노자편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어서 사마천도 노자의 실존을 확인하기 
어려워 세간의 떠도는 이야기로 정리했으리라는 추정을 하게 만든다. 주나라 사관인 노담과 공자는 약 100년의 차이가 난다. 또 다른 학설로는 초나라의 철학자이며 관리를 지냈던 효자로 이름이 높은 노래자가 바로 《도덕경》을 쓴 노자라는 학설도 있다. 나는 후자의 학설을 지지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훗날의 황노학이 연나라, 제나라와 같은 중국 변방의 나라에서 일어난 학문이고, 이 황노학을 연구했던 학자들 역시 당대 학계의 주류가 아닌 사람들로서 초나라 사람이 많았다. 특히 황제학과 노자의 장생술을 접목해서 황노학을 성립시킨 것으로 유명한 환연은 노자의 제자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사람도 초나라 사람이다. 반면에 황노학에 주나라 학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어떤 가정을 하더라도 노자의 실존적 인물이 누구냐 하는 것은 알기 어렵다. 또 주나라의 태사인 담이 진나라 허공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떤 이는 그가 곧 노자라 하고 어떤 이들은 
아니라고 한다. 노자가 주나라가 쇄해가는 것을 보고 거기를 떠나 함곡관 밖으로 사라져 행방을 감추었는데, 그때 관문지기였던 윤희가 청하여 노자에게서 오천언의 도덕경을 받았다고 한다. 도덕경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질문자도 없고 어느 인물에 대한 평도 안 보이고 지명조차 등장하는 것이 없다. 다만《논어》의 산문적 성격에 비해《도덕경》이 지니는 시적, 상징적, 명상적인 경향은 남방적인 특성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노자는 초나라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만 사마천이 사기를 쓸 무렵인 한 대에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어서 정확한 기술이 어려웠을 정도로 그의 실체는 신비에 싸여있다. 백성의 기운을 어린아이와 같이 어짉 순박하게 만들 수 있겠느냐는 노자의 말을 듣고 왕이 무슨 생각을 했겠어? 이 자슥이 뭘 잘못 먹었나?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자빠진 거야? 왕이 듣고 싶었던 것은 부국강병책 이었는지 노자가 말하는 것과 같은 패러다이스의 건설 이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다행히도 왕은 인내심이 강했던지 콱 쪼인트를 까주고 싶은 생각을 누르고 다시 묻는다. 그래, 백성을 아이처럼 
만들어서 어쩌자는 거야? 
그러자 노자가 왕한테 또 묻는데 이게 팍 돌아가실 소리다. 내가 눈물을 쏟았다는 게 바로 여기다. 함 들어봐. 척제현람 능무자호. 캬∼정말로 죽이지? 나는 저 척제현람 능무자호?에서 뿅 갔다. 얼마나 가슴이 찡한 소리냐? 상선약수 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있지 정말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면 내가 신필로 용이 날아가듯이 저 여덟 글자를 휘갈겨서 집무실에 걸어 놓게 할 거다. 처제현람! 척 은 닦을 척,  씻을 척 이다. 세척제 라 할 때 쓰는 글자다. 제 는 섬돌 제, 층계 제 다. 섬돌이란 옛날 집에서 대청 마루 올라갈 때 딛고 오르도록 마루턱에 놓아두는 넓적한 돌이다. 다르게는 마당이나 뜰 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그러니까 
척제 는 섬돌을 닦아준다 는 말이고 다르게는 마당을 쓸어준다 는 뜻으로 옮겨도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씻어준다 닦아준다 는 말과는 이미 마당 보다 섬돌 이 표현상 더 어울릴 것 같다. 미천한 백성이 집에 오를 때 흙투성이 발을 딛는 그 섬돌을 왕이 허리를 굽혀 손수 닦아준다는 말이다. 그러면 현람은 뭐겠냐? 어려운 말이 아니다. 어두운 곳을 본다 는 소리다. 그래서 척제현람 은 바로 백성의 섬돌을 닦아주고 
그어두운 곳을 살펴준다 는 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현 은 빛깔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신비스러운 어둠이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백성들 삶의 어둡고 아픈 곳을 살펴준다는 말이 참으로 시적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문장으로 다가온다. 그 다음의 구절 능무자호를 마저 보자. 자 흠집 상처 라는 글자다. 그러니까 이 말은 상처를 없앨 수 있겠느냐? 는 말이다. 전체를 같이 함 읽어볼까? 왕이시여, 몸소 허리를 굽혀 백성의 섬돌을 닦아주고 그 어두운 곳을 살펴 백성들의 아픈 곳을 없앨 수 있겠나이까? 
하고 묻는 말이다. 지도자 복이 지지리도 없던 박복한 민족의 딸로 태어난 나는 노자의 저 말에 울고야 말았다.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노자는 성인이라 했다. 저게 바로 노자의 성인정치 다.《도덕경》5천 글자의 핵심이고 노자사상의 전부다. 저런 말을 가지고 도를 닥아 신선이 되네, 기 수련을 어떻게 하네 하면서 헛지랄을 해왔으니 노자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나? 일반적인 노자 해설서에는 저 소리가 뭐라고 되어 있는 줄 알아? 마음을 깨끗이 닦아 흠집을 없앤다 로 되어 있다. 완전 초등학생용 도덕 교과서지? 불세출의 대학자 도올은 뭐라고 해놨겠어? 주인공을 빼먹으면 주인공 섭해서 삐진다. 한번 보자. 여기 현람이란 우주적 거울을 말하는데 그것은 곧 우리의 마음을 뜻할 것이다. 백서갑본에는 람이 람 으로 되어 있고, 을본에는 감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모두 자형으로 보아, 
그릇에 물을 떠놓고 자기를 비추어보는 형태의 갑골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자》《천도》에 수정유명 이황성인지심정호! 천지지람야 만물지경야(물의 고요함이 이와같이 맑게 비추거늘, 하물며 성인의 마음의 고요함이랴! 그것은 천지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귀감이요, 만물의 거울이다)라 한 것이 바로《노자》의 구절과 상통한다 할 것이다. 척제 란 우리가 세척이란 말을 쓰듯이, 내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하여 티끌 하나도 없이 하여(무자) 만물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전에 이미 노자에게 이러한《대승기신론》 등지에서 말하는 불교의 심진여상적 통찰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아무 티끌도 없는 마음의 거울, 그래서 끊임없이 생감하는 상도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 언설상을 떠나고 명자상을 떠나고 심연상을 떠난 여여의 세계! 그것을 노자는 이미 살파하고 있는 것이다. 설파하고 있는 거 좋아하네. 
환상적인 개다리 춤이라 해라. 꼴에 우주적 인 거는 무지 좋아하지. 우주적 거울 이라. 나중에는 우주적인 강아지 도 나오겠다. 뭐라고?《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심진여상적통찰 이라고? 심진여상적이란 게 뭐야? 그거 설명할 줄 알면 내가 도올을 다시 보지. 대승기신론을 뭘 안다고 들먹이냐 들먹이길. 말하는 꼬락서니 보면 첨부터 끝까지 지도 모르고 남도 모를 소리뿐이면서. 우리 도올이 보면 하연간에 놀라운 애지? 섬돌을 닦아주는 일 에 대승기신론이 왜 나오며, 심진여상적통찰 이 왜 나오느냐 말이다. 백성을 그만큼 아끼고 사랑하라 는 말에 심연상을 떠난 여여의 세계가 뭔 소리야? 얘는 하버드대학 동문서답과 나왔을 거야. 지 고대 다닐 때 횡설수설과가 있었나 모르겠다. 척제를 못 읽어서 세척 하고 같은 말이라 하는 수준으로 무슨 노자야? 안 그러냐? 애민치국 능무지호. 풀고 자시고 
할 것도 없네. 말은 쉬운데 문제는, 뭐 마음을 닦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해 쌓다가 갑자기 이런 소리가 나오니까 도올은 그만 정신이 혼란해지는 거다. 애민치국이 여기서 왜 나오느냐 말이다. 왜 나오기는, 이 장이 치국평천하의 성인치도를 설명하는 장이니까 나오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지에 의지하지 않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는 소리다. 앞에서 노자가 불상현하라고 했던 말을 생각하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아는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마라 는 주문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다스리라는 소리겠니? 오직 진실된 마음으로 다스리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리 개판인 이유가 바로 똑똑하고 잘난 대통령이 진실된 마음이 아니라 
지 만 믿고 대갈빡을 굴려서 그렇다. 진심은 찾아볼 수가 없고 오로지 그때 그때 땜빵이나 하려고 암기응변의 술책과 권모술수로 헤쳐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우 아가리 하나 벗어나면 늑대 아가리 앞이고 그거 겨우 벗어나면 호랑이 아가리다. 대통령 주위에 있는 놈들도 하나같이 마음을 똑바로 쓰는 놈이 없고 전부 다 잔대가리 굴리는 놈들뿐이야. 그런 대가리는 어찌 그리도 영악하게 잘 돌아가는지, 보는 내가 탄복을 할 정도야. 지로 다스리니까 그런거다. 도올이 학문을 한다고 하면서 재주부리는 것도 다 지에만 의존할 공부라서 그렇다. 지를 붙들고 있으니까 마음이 까막눈이 되는 거야. 좋지도 못한 대갈빡을 천재적이라고 야무지게 
착각하니까 그런 거다. 그런 천재적인 머리로 이 문장을 푸니까 능무지호 가 능히 무지할 수 있는가? 라고 나오는 거야. 웃지도 말자. 이런 거 가지고 웃으면 나중에는 감당이 안 돼. 다음 구절 함 볼까? 천문개합 능무자호. 아이고, 도올이 좋아하는 말 또 나왔네. 문 이다 문 나왔다. 문 만 나오면 도올이한테서 나오는 소리는 딱 정해져 있지. 암컷의 거시기 거기다가 이번에는 열고 닫는다 는 말도 있고 거기다 자 자까지 나왔네. 자 가 뭐야? 암컷 이잖아? 문이 나오고 그문이 열리고 닫히고 암컷이 나왔으니 이거는 볼 것도 없이 '암컷의 거시기 다. 도올이 전공과목이니 이거는 맞겠지 하고 믿어줘야 되나? 이번에는 암컷의 거시기 가 틀림없나?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니?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번에도 아니다. 암컷의 거시기 는 
 도올을 도아주는 법이 없다. 정말로 원망스러운 암컷의 거시기지. 나를 보고 어떤 사람은 할아버지라 하고 어떤 사람은 천리안의 살아있는 전설 이라고도 하는 데 할아버지건 전설이건 그런 건 상관없다. 그러나 여기엔 쫌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 그게 뭐냐면 바로 사람들이 맹종하는 권위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말이 맞느냐 아니냐 가 아니고 그 사람의 말을 믿을 만한 권위가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하는 거야. 내가 노자에 대한 글을 쓰니까 내가 그런 글을 맞게 쓸 만한 사람인가를 고민하고 자빠지는 거야. 유학을 다녀왔는지, 박사 학위는 있는지, 다른 저명한 저서가 있는지. 교순지…이런 천하에 쓰잘데기 없는 권위를 찾으려고 눈을 두리번거리는 맹꽁이들이 있는 거다. 이건 비단 누구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고 나라 
전체의 심각한 병이야. 나는 지금까지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왔네, 뭐를 했네 그런 거 떠들어 본적이 없어. 내가 쓴 그 책이 바로 나의 약력이고 나의 경력이지 그외의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 물론 사실을 말하면 내가 명문 고려대학교라도 나왔으면 자랑스럽게 넣었을 거고 하버드를 다녔으면 책 제목보다 더 크게 하버드 유학 다녀왔음 하고 넣었겠지. 박사학위가 있으면 아예 학위 증명서로 표지를 디자인 했을거야. 하지만 내가 뭐 내놓을 만한 가방끈이 있어야지. 일전에 TV 'PD수첩 인가 뭐 그런 거를 봤어. 
실물 경제 에 관한 책을 써서 돈도 벌고 이름도 날린 어떤 머슴애가 학력하고 경력을 날조했다가 들켜서 그만 매장을 당하는 꼬락서니가 나오더라. 근데 웃기는 게 뭐냐면 미국의 유명 대학 대학원을 나온 경제학 박사 아무개일 때는 아무도 그 사람의 책을 비판하지 못하다가 막상 정체가 드러나고 나니까 그때서야 그 책은 사실 상식적인 수준으로 아무나 쓸 수 있는 정도고 어쩌고 지랄육갑을 떠는 놈들이 나온다는 거야. 학력을 속인 그놈보다 나중에 뒷북치고 나오는 놈들이 더 형편없는 놈들이야. 이게 대한민국이야. 실력보다 학력에 뻑 가고 능력보다 간판에 고개 숙이는 놈들이 너무 많은 거야. 그놈이 뭐 사람이 나빠서 그랬겠어? 그런 경력이라도 안붙이고 책을 냈어봐. 아무리 세계 경제를 살릴 만한 책이라도 서점 차고고에서 먼지나 뒤집어 쓸 거야. 어찌 도올의 명저《노자와 21세기》처럼 초초초 베스트셀라가 되것어?  저 말이 맞나 안 맞나 가 아이고 저 말을 하는 사람이 어느 학교를 나왔냐? 뭐 하는 사람인가? 그거나 신경 쓰고 
자빠지니까 나라가 이 모양이다. 노자를 배우는 건 급하지 않다. 도올 지가 제 아무리 대한민국 사람 전부가 인정하는 동양학의 대가고 제 아무리 세계에서 젤로 좋다는 하바드 대학을 나온 박사라 해도 그 말이 틀렸으면 주저 없이 망설이지 않고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 나처럼. 지 나이가 아무리 환갑에 가깝고 그 권위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학문에 나이와 권위는 쥐뿔도 아닌 거다. 이건 말이지 도올이 옛날에 지 입으로 한 얘가가 있어. 지 젊고 나이 든 노털 교수들이 짱짱하게 버티고 있을 때 치받은 말이 있어. 내가 이 참에 뒤져서 원문을 공개할 생각인데, 말은 맞는 말이야. 학문은 맞느냐 틀리느냐 이고 누가 과연 옳으냐 이다. 어느 날 내가 짠하고 
졸업장하고 학교 성적표를 들이밀면 그때서야 끔뻑할래? 그건 학문적인 납득도 아니고 인간적인 매료도 아니야. 그저 간판에 절하는 짓이야. 제발 이 나라 사람들 용기를 갖기 바란다. 조작된 권위에 맹종하지 마라. 세상 사람들이 다 엎드려 맹종하는 권위가 사실은 꾸며진 권위이니 이는 불선이니라. 노자의 말씀이다. 말이 난 김에 내가 옛날 얘기 하나 해줄게. 러일 전쟁 때 러시아군의 여순 요새를 공격한 게다군의 대장이 노기마레츠케란놈이다. 훗날 왜넘들한테 군신으로 추앙 받은 넘이다. 이넘이 만주로 가는데 왜넘 총사령부에서 요새공략전을 염두에 두고 당시 왜넘 군바리 중에서 포병의 전문가라 할 만한 놈들은 죄다 뽑아서 노기밑에 붙여줬다. 당시 노기의 일본 제3군 사령부는 일본 포병의 간판스타들이 전부 다 모였어. 이 전문가 중의 전문가라 하는 놈들이 온갖 전문적인 지식을 총동원해서 전문적인 포병전을 펼쳤지. 결과 어땠을 것 같아? 6개월에 10만 명이 넘는 왜넘들 시체가 여순 요새를 뒤덮고도 함락을 못 시켰어. 이걸 나중에 해낸 놈이 누군 줄 알아? 고다마 겐타로라는 넘이야. 이넘은 노기의 친구로 
만주에 있는 일본군 총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있던 넘인데 이넘은 포병의 포 자도 모르는 너머이야. 이넘이 다급해서 여순에 나타나 가지고는 노기의 지휘권을 뺏다시피 해서 지휘를 하게 돼. 작전회의를 하는데 전문가 포병 장교들이 뻑 하면 그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전문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건 말이 안 되는 작전이올시다 하고 사사건건 지랄육갑을 떤 거야. 그러니까 고다마가 이랬다 하더라. 야 이 넘들아. 골 때리는 소리 고만하고 시키는 대로나 해! 그래가 어찌 됐겠냐? 6개월 동안 10만 명이 뒈지고도 끝이 안 났던 전투가 단 반나절 만에 끝나버린 거야. 전문가라는 인간들은 자주 웃기는 소리들을 한다. 그걸 맹종하면 안되는 거다. 포병의 전문가라는 권위에 맹종했던 노기는 무능의 표본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그넘나큼 무능한 장군은 찾아보기 힘들다. 나중에 메이지가 뒈지고 나서 뒤따라 자살한 바람에 왜넘들이 군신이니 꼴값이니 떠받들고 자빠지고 있는 거지만. 전문가다, 교수다, 박사다 이게 중요한게 아니고 맞느냐가 중요한 거야. 이게 바로 실사구시야. 물론 나는 진짜 전문가를 존경하고 전문가야말로 소중한 사회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단 전문가니까, 전문가의 말이니까 하는 선입관에 의한 맹종은 위험하다는 거다. 
전문가도 종종 틀리니까. 그리고 그 틀리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일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전문가가 틀리면 바로잡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했더라. 맞다. 천문개합 하다가 말았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힌다는 소리네. 그런데 우리 도올은 하늘을 빼억고 문이 여리고 닫힌다고 하니까 암컷의 거시기가 열리고 닫히는 것만 생각이 나는가봐. 
그게 뭐가 보기에 아름다운 모습이겠냐? 나는 얘가 그런 것만 떠올리는 게 참 신기해. 그게 그렇게 좋단 말이야? 도올이 뭐라고 했ㅥ지 같이 보면서 얘기할까? 천문개합, 능무자호: 백서을본에는 천문호합 능위자호로 되어있다. 무자는 위자의 오사이다. 왕필주에도 자웅이불창, 인이불위, 언천문개합능위자호, 측물자빈 처자안의(암컷이란 본시 부르는데 응할 뿐 자기가 주창하지 아니하고, 무엇에 원인이 되어줄 뿐 자기가 능동적으로 하지 않는다. 천문이 열렸다 닫혔다 함에 능히 암컷이 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한 것은, 곧 만물이 스스로 질서 지우며, 그 처함이 스스로 편안해짐을 말한 것이다.)로 되어 있다. 암컷은 무위의 덕성의 상징이다. 《노자와 21세기》 하권 103쪽 얘는 참 번역 쉽게 하지. 해석이 잘 안되면 그냥 원문 글자를 내리 바꿔머린다. 그렇게 하면 세상에 번역 못 할 사람이 어딨냐? 
여러개 원본 중에 지가 찍기라도 할 수 있는 쪽을 진짜라고 우기는 거야. 이런 학문이 어딨나? 안그러나? 이런 거는 학문이 아니고 개똥 철학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노자를 원조 페미니스트로 둔갑시켰다. 뭐라? 암컷이 무위의 덕성의 상징이라? 노자가 무위의 덕성으로 본 건 여자가 아니다. 그건 좀 있다가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노자 정치사상의 핵심이랄 수 있는 제10장에 걸맞게 도올이 보여주는 개그의 최고 경지를 보도록 하자. 제10장은 노자정치사상의 핵심이다. 그건 또 어찌 알았는지 도올은 그에 
걸맞게 여기서 개그의 최고 경지를 선보이고야 만다. 도올이 한 소리를 소개하기 전에 소개자로서 미리 독자들에게 주의를 해 두어야 할 책임을 느낀다. ◆ 주의 ◆ 이하 소개되는 글은 미성년자나 노약자 또는 심장질환이 있는 사람 또는 배꼽 탈착증이 심한 사람은 열람을 금지합닏. 여기서 천문이란 추상적인 말이 아니다. 이것은 여체의 부분을 말한 것이다. 하늘의 문, 그것은 여체에 있어서의 만물의 생성의 문이다. 그것은 곧 여자의 성기를 의미한다. 문이라는 표현과 성기의 이미지와의 상응성은 리얼하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천문개합이란 바로 고대 여성들에게서 
아주 명료하게 나타났던 에스트루스 성징을 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배란기며, 자궁에 있어서의 증식기(에스트로겐 지배기)와 분비기(프로게스테론 지배기)가 엇갈리는 때인 것이다. 이때는 외음순이 도톰해지면서 핑크빛이  더 돌고, 검으티티한 색깔이 나면서 분비물이 많아지고 사향과 같은 냄새의 발동이 심해진다. 그리고 음순과 클리토리스가 뻑뻑해지고 뿌듯해지면서 성옥이 발동하고 입술과 입술사이가 더 벌어지면서 구멍이 열리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때가 소위 말하는 천문이 개하는 시기인 것이다. 
벤스트루알 사이클에 있어서 그 반대되는 시기가 합의 시기(황체의 기능이 떨어지는 시기)가 될 것이다. 여자의 몸의 천문이 개합(열렸다, 닫혔다)하는 것이 곧 생성의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달의 기울고 차는 모습, 계절의변화,《태일생수》말대로 조습한열의 변화가 모두 생성의 시간이요. 리듬인 것이다. 그러한 리듬의 흐름 속에서 지배적이고 조작적인 남성적인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적이며 순응적인 여성적 가치를 유지 할 수 있겠느냐고 노자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의 이야기들은 노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삶의 숙제들인 것이다. 《노자와 21세기》하권 
104쪽 105쪽. 노자 해설이 아니라 완전<킨제이 보고서>지? 도올이 같은 안다이 박사가 와 저기서 G SPOT' 얘기는 뺐는가 모르겠어. 문만 나오면 여성의 성기를 들고 나와. 이 고매하고도 심오한 정치사상을 논하는 자리에 음순과 클리토리스가 웬 말이야, 맨스트루알 사이클이 왜 나오나? 노자 할아방이 점잖지 못하다 해서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세 가지다. 깡패, 칼잡이, 여자가 그거다. 그런데 어째서 노상 꺼내는 이야기가 깡패, 칼잡이 아니면 여자 거시기 소리뿐이야? 애는 암만 봐도 항문기에 고착된 유치한 정신 상태가 선천성 구제불능성 여자 거시기 집착증 으로 증상이 나타나는 케이스인 거야. 이 대목에서 도올은 아마 짜식들, 어떠냐? 내가 
동양학만 하는 줄 알았겠지만 여자에 대해서도 박사고, 산부인과도 전공이야 하고 속으로 우쭐우쭐했을 거야. 월경 주기를 영어로 맨스트루얼 사이클이라 하면 그게 유식한 건가? 에스트로겐이 어쩌고 프로게스테론이 어쩐다고? 꼴에 클리토리스는 알아서. 할아방은《도덕경》에서 천문이건, 현문이건, 지문이건, 사립문이건 문 이라는 말을 쓸 때 여자의 거시기 생각은 눈곱만큼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여기서 천문개합 이란 말이 왜 나오겠니? 앞서 했던 말을 쭈욱 읽어보면 감이 와야지. 한번 더 리플레이해줄게. 왕이 치국지도를 물었어, 노자가 답하여 묻기를, 주공께옵서는 온 나라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이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사옵니까? 
왕이 다시 묻기를, 그런 다음에는 어찌해야하느뇨? 하니 노자가 다시 물어 가로되, 오로지 백성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만들 수 있겠사옵니까? 왕이 다시 묻기를, 그리한 다음에는 무엇이뇨? 하니, 백성들 집의 섬돌을 주공께서 허리를 굽혀 손수 닦으시고 어두운 곳을 살펴, 아픈 곳이 없도록 할 수 있겠나이까? 하니 왕이 다시 답하여, 그렇게 하면 성인의 치도라 하겠느뇨? 그러자 노자가 말하기를, 그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성인의 도를 행하는 것이옵니다. 이제 감이 집히냐? 천문개합 이란 바로 성인지도 다. 강증산이 늘 말했던 천지공사 라는 것이 바로 성인의 다스림이다. 내가《도덕경》을 읽으면서 노자한테 참 반했던 것이 그 문학적 표현이다. 얼마나 기가 막히냐? 척제현람 이나 천문개합 같은 소리는 문학적으로 볼 때도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이냐? 
이 말을 듣고 음순에 클리토리스를 떠올리는 양아치가 어찌 노자의 사상을 이해한다는 말이야? 그럼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말 능무자호 는 뭐겠어? 이 말의 의미를 알면 우리는 노자한테 다시 한번 까무러친다. 인간세상의 본질과 정치라는 것의 이면의 이면까지 꿰뚫어보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소리다. 이런 것이야말로 대 사상가의 통찰력이고 그런 정신세계를 엿볼 때 우리가 놀라고 감탄해야 할 대목이 이런 곳이야. 과연 노자는 그와 같은 성인에 의한 이상적 통치가 가능하다고 본 것일까? 나는 그랬으리라고 본다. 중국넘들의 정치적 이상은 요순이다. 요 와 순이 그네들이 그리는 이상적 정치지도자의 모델이다. 노자가 말하는 성인에 가까운 인물이 존재할 수 있느냐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다 훨씬 윗길이라 할 만한 인물들도 그리 귀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인간은 한편으로는 조잡한 동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한 생명체이다. 석가모니를 보라. 인간이 그럴 수 있겠느냐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아니 한계를 훨 뛰어 넘었다. 노자도 그러하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사실 찾자면 셀 수도 없다. 그런 분들을 볼 때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사회가 이 모양이냐? 요순의 태평성대가 왜 무너졌느냐? 왜 성인이 성인치도를 행하지 못하게 되느냐? 성자에 가까운 왕이 있어서 노자가 묻는 말에 다 그리할 수 있겠노라. 또 그리 
하겠노라 고 대답하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한다 하여도 그게 다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다. 물론 이 문제는 인류 탄생 이래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 인류가 사라질 때까지 해결 될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문제다. 그게 뭘까? 딱 짚이는 거 없어? 머리 속에서 팍 하고 오는 뭐 없냐고? 그게 뭐냐? 바로 여자다. 협의로 말하면 남자의 배필인 마누라 문제다. 제 아무리 성인도 마누라 잘못 만나면 선정이고 치국이고 평천하고 간에 엿 돼버린다. 요순까지 쳐다볼 일도 없어. 소크라테스 함 봐봐. 정관의치라 했던 당나라의 전성기가 양귀비에 무너지고 그 
찬란했던 백제가 의자왕의 탕음에 쓰러지고 그 총명했던 공민왕이 노국공주에 혼을 뺏겨 5백 년 고려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어. 은나라가 달기 때문에 망했고 주나라가 포사의 웃음에 망조가 들었어. 요순의 태평성대가 어이타가 무너졌냐? 천하의 덕있는자(성인)를 모셔서 선위하던 풍습이 지 자식새끼한테 대물림하게 되면서 옛 이야기가 돼버렸어. 세습이란 게 남자들이 만든 게 아니야. 그 어미가 지 아들한테 물려주려고 지랄발광을 하니까 애비가 그걸 이길 수가 없는 거야. 성인정치 좋아하네. 태평성대? 그런 건 엿이나 먹으라고 그래.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고 어쨌든 내 배에서 낳은 내 새끼가 물려받는 꼴을 봐야 내가 눈을 감는단 말이다. 내 아들넘을 
놔두고 뭐라? 성인을 모셔와? 그놈의 성인이란 것들 내가 씨를 말려버릴 테니 함 데리고 와봐. 이게 여자다. 아니 여자가 아니라 어미다.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이 왜 일어났고, 연산군이 어쩌다가 미치광이가 됏는지, 영조가 지 아들넘을 뒤주에 쳐넣어 죽여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봐. 정치를 남자가 하고 역사를 남자가 만든 줄 아냐? 천만에 말씀이고 만만의 콩딱이야. 여자가 용서해주고 너그럽게 봐줄 때 지가 성인이고 정치가지 누구 맘대로 성인 행세를 한단 말이야? 여자 허락 안 받고 성인 할 놈 여기 함 나와봐. 그게 남잔 거야. 마누라 이기는 남자는 없어. 여자한테는 이길지 몰라도 마누라는 못이겨. 마누라는 이길지 몰라도 새끼들 엄마는 절대로 못 이겨. 그걸 잘 알기 때문에 노자가 능무자호 하고 처량한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성인의 도를 행하는데 과연 배필 없이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묻는 거야. 일단 왕한테 마누라가 있고 그 마누라가 끼여들면 성인이고 나발이고 만사 꽝 된다는 것을 노자는 아는 거야. 그래서 배필 없이 할 수 있겠어요? 하고 걱정스레 묻는 거다. 그런거 보면 부처님은 참 머리가 좋다. 제일 먼저 마누라부터 떼버리고 산으로 토꼈으니까 말이다. 암, 여자를 옆에 끼고 득도나 수행이 가당키나 한 소리야? 그래서 부처님이 여자 거시기는 뱀의 아가리보다 무서우니 제발 가까이 가지 마라. 그 안에다 물건 처박는 순간 너는 수행이고 나발이고 끝이라느 걸 명심해라. 당부에 당부를 하신 거다. 독신 출가가 다 이유가 있다. 능무자호. 주공이시여, 하늘의 문을 열고 다든 것과 같이 중요한 일이라 할진대 그것을 위해 배필을 두지 않을 수도 있겠사옵니까? 하고 물으니까 왕이 뭐라고 했겠어? 더 말하기도 싫었겠지. 원 별 또라이 같은 자식 다 보겄네. 
내가 여자도 없이 살 바에는 차라리 왕을 안 하고 말겠다, 자슥아 하는 생각이 든 거야. 저런 턱도 없는 나발을 불다가 노자가 어찌됐겠어? 삭탈관직, 봉고파직 당하고 쫓겨난 거야. 내가 왕이라도 쫓아내 버리지. 저런 헛소리 나발을 부는 영감탱이를 뭐 하러 옆에 놔두겠어? 안 그래? 하지만 노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왕의 마누라로만 끝나면 문제 삼지 않았을 거야. 여우 같은 게 옆에 붙어서 수작을 해도 어찌해 나가겠지. 하니만 문제는 그게 왕의 아들의 어미라는 데 있다. 세습에 대한 집착과 욕구는 어미의 그것이 아비의 그것보다 훨씬 강하다. 그리고 성인정치와 세습제는 
공존할 수 없는 문제다. 노자의 고민이 그것에 있었다. 능무자호? 그래서 노자의 결론이 뭐였겠어? 제길 이게 인간들 세상에서는 안 되는 거다. 될 수가 없는 일이야.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고 그만 산에 들어가 신선이 돼버렸다. 마음 잘 먹었지? 오밤중에 성문 지키는 놈한테 여권없이 불법 통과하는 뇌물 대신 써주고 토낀 게 바로《도덕경》이다. 곤충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어떻게 하는지가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는데 근자에 페로몬이라는 것이 발견되면서 그 비밀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리가 적에게 공격을 당하면 같은 순간 수만 마리의 동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개개의 생명체로 보이는 곤충의 집단은 실제로 하나의 육신을 
가진 거대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일부의 생물학자들은 갖고 있다. 나도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즉,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떼는 사실 하나의 생명체이고 낱낱의 개미는 그 생명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세포 단위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유기적으로 묶어서 하나의 생명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해주는 것이 페로몬이라는 신경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곤충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냐?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수업억 인간은 실제로 하나의 유기체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수십억 인간은 실제로 하나의 유기체이며 이들간의 보이지 않는 영적인 또는 무의식적인 교감이 이루어진다고 
볼 만한 여러 정황이 존재한다. 인간의 문명과 문화가 발달해 온 과정을 더듬어보면 수천,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대륙의 인간들 간에 마치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개념과 비슷한 단계의 문명이 건설되고 있었음은 우연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오늘날에도 놀랄 만큼 유사한 아이디어에 기반한 동일한 연구가 세계의 여러 곳에서 각기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예가 많다. 물론 각자는 서로 어떠한 의견 교환이나 또는 자기 외의 사람이 같은 연구를 하고 있다는 시실조차도 모른 채 말이다. 한 인간의 진화는 전체 인류의 진화를 선도하고 촉발하는 원인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처 한 사람이 나오면 억만 중생이 그 가피를 입는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한다. 
왜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노자를 읽다보면 부처의 말씀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감을 받기 때문이다. 
당시의 인도와 중국은 지구와 달나라만큼 멀었다. 히말라야 산맥과 힌두쿠시가 가로막은 두 대륙이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인종도 달랐다. 즉각적인 학문적 교류라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시대다. 불교라는 것이 중국에 알려지고 그것이 이해되는 데 수세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노자와 부처는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차이가 나봐야 불과 100년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세계관과 지향점이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그 가르침이란 것이 오십보백보다. 팔만대장경을 5천 글자로 압축하면《도덕경》
이고 그것을 다시 290자 정도로 팍 줄여버리면《반야심경》이 된다. 이것을 세 글자로 줄이면 깨달음 이고 두 글자로 만들면 성불 이고 한 글자로 바꾸면 도 다. 그런데 이 두 성인이 약속이나 한 듯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여자가 여페 있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 는 사실이다. 부처의 출가 권유나 노자의 외기신 이 다른 이유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다. 바로 여자가 무서워서 토껴야 되겠다 는 거지 딴 게 아니다. 물론 무서운 게 여자 자체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실 가는 데 바늘 따라온다고 여자가 옆에 있으면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따라온다. 먹여 살리는 문제, 줄줄이 생기는 자식들, 가족간의 갈등, 특히 도망가거나 피할 길 없는 잔소리와 바가지. 거기에 치이다보면 성인이고 나발이고 수행이고 자시고 간에 그 전에 진이 빠져서 끝난다. 그러나 그게 여자 잘못이냐? 그렇다면 듣는 여자 섭하지. 여자 입자에서 보면 도를 닦네, 수행을 합네, 
해탈을 합네, 현빈에 갑네 하는 소리는 다 엿 같은 소리다. 배부른 넘들 지랄육갑 떠는 짓이지 그게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한 놈이라도 더 퍼질러 낳는 거고, 낳은 새끼들 배 안 곯고 잘 키우는 거고, 오늘 땟거리 안 떨어지게 하는 거지 뭔 놈의 말라비틀어진 도야? 만약에 여자들까지 말이야 머슴애들 고 지랄 떠는 데 휩쓸려서 천지분간도 못 하고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앉았어봐, 세상 벌써 끝났어. 그나마 세상이 이 정도까지 온 게다 여자들 덕분인 거지. 너희가 무신 지랄염병을 떨어도 우리는 낳고 기르고 해왔다는 얘기야.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어 놓고 남자를 보고 마음을 놓은 게 아니야. 여자들이 있으니까 어찌됐건 이것들이 이어는 가겠지, 하고 돌아누워서 낮잠을 자는 거야. 남자들만 있었어봐. 
하느님이 불안해서 잠을 못 자. 그렇게 생겨 먹은 거다. 그걸 아니까 부처님이 그토록 여자들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으려 했던 거다. 부처의 이모, 고모들이 따라다니면서 울고 불고 난리를 쳐도 비구니라는 것을 인정을 안 하려 했다. 물론 나중에는 못 이겨서 허락하기는 했지만 여자의 본성과 그리고 모성의 무서움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여튼 두 할아방한테 여자는 거추장스러운 방해물로 보인 거지. 그래서 금욕을 합네, 독신을 합네, 출가를 합네 난리육갑을 떠는 거다. 웃기지? 어쨌거나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건 남자들이 해왔고 여자들은 도올이 좋아하는 아랫문이나 열심히 열고 닫아왔다는 거다. 각자 다 지 할 일 열심히 한 거다. 부처나 예수나 노자나 다 하늘의 문을 열고 닫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뭘까? 여자가 없었다는 거다. 하늘의 문을 열기에는 좀 속물 같은 구석이 
있지만 마호메트는 참 난 놈이다. 돈 많은 과부꼬셔서 자식새끼 줄줄이 낳고 거기다가 처처처처첩까지 꿰차고서 그런 일을 해냈으니 말이다. 이런 넘이 잘난 넘이지. 세종대왕도 빠질 수 있나? 자식을 수십 명 만들고도 성군 소리를 들었으니 말이다. 해서, 부처와 노자는 성인의 길을 가는 데 두 가지를 권하고 있다. 하나는 속세간에서 벗어나는 길이요, 하나는 독신이다. 배필을 데리고는 갈 수 없는 길이요, 자식새끼들을 끌고는 못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던거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도 색에는 눈이 멀고 자식한테는 당달봉사가 돼버린다. 도교의 도사들도 불교의 비구와 마찬가지로 독신자들이다. 능무자호? 에 예 라고 대답하지 못하면서 도사도 비구도 
될 수 없다. 너거도 도 함 닦아볼래? 능무자호? 이 장을 읽으면서 나는 노자의 가슴 저리는 애민지심에 울었고, 한편 으로는 노자가 불쌍해서 울었다. 하긴 불쌍한 할아방이 어디 노자뿐인가? 공자도 그러했고, 맹자도 그랬고, 달마도 그러했고, 예수도 마찬가지였어. 공자가 큰 뜻을 품고 천하를 주유하며 직장을 얻으러 다닐 때 이 공자가 재주는 뛰어난데 요령이 없어서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위나라 영공이 공자의 학식과 재주에 대해 소문을 듣고 불렀어. 공자는 혹시나 한자리 얻어걸릴까 기대를 갖고 면접을 보러 갔겠지. 면접관인 위영공이 구두로 문제를 출제했는데 그게 진법이었던 거다.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진법이 뭐뇨? 하고 물으니 우리 
불쌍한 공쯔 할아방 두꺼비처럼 눈만 끔뻑끔뻑 하다가 쫓겨나버렸어. 나중에 추천했던 사람이 무색해서 공자를 잡고 그랬어. 아니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에 두루 통달하신 분이 그까짓 진법을 대답을 못 하십니까? 공자 대답이 이랬다는 거야.  자고로 군자는 병을 입에 담지 않느니.  이리 푼수들이 없어서 개나 고동이나 다 해먹는 재상 자리 하나 못 얻어서 평생을 비루먹었다는 거 아니겠어? 맹자도 마찬가지야. 양나라 혜왕이 맹자를 
불러다가 과인이 지금부터 조나라를 칠라고 하는데 좋은 계책이 있으면 함 말해봐봐. 이랬거든. 그러니까 맹자 할아방이 답하기를 옛날에 주의 태왕께옵서는 이웃나라가 쳐들어오자 스스로 빈땅으로 물러갔나이다 이런거야. 이게 당최 취직할 생각이 없는 넘들이지? 당근 노자도 못 얻고 쫓겨났지. 공맹 두 할아방의 청승맞은 꼬락서니를 한탄하여 훗날에 사마천이 적기를  이윤은 솥을 지는 요리사로서 탕왕을 격려하여 왕도를 이루게 하였고, 백리해는 수레 밑에서 소를 먹이다가 목공을 도와 패업을 이루게 하였다. 먼저 상대의 비위를 맞추다가 나중에 그들을 대도로 인도하였다  
고 대답해왔어. 물론 사마천이 공자하고 맹자보다 이윤이나 백리해가 윗길이라고는 말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 영합하지 않고 대도를 걸은 할아방들을 칭송하는 글들이 사기의 곳곳에 보인다. 달마도 그랬어. 인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다음 양나라 무제를 만난 자리에서 불법을 이해시키는 데 실패하고 소림사로 돌아가 십 년간 묵거에 들어갔어. 할아방들의 고상무비한 설이 세상에 먹히지 않았던 거야. 능무자호? 가 계집은 다다익선!을 
부르짖는 현세의 왕들한테 먹힐 리가 없지. 하지만 할아방들이 취직에 번번이 실패하고 백수로 살았다 하여 자기 신세를 한탄했겠어? 대저 천하의 일이라는 것이 아침에 잠깐 풀잎에 맺혔다가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것이니, 천지의 장구함을 보는 성인군자가 어찌 발 밑의 이슬을 보겠나. 노자 할아방인들 저런 소리가 먹힐 거라고 생각하고 한 소리는 아닐거야. 하지만 왕이 점점 심드렁해지는 것을 억지로 참고 그래 마누라도 없이 
살아라 이 말이지. 그 담은 뭐냐? 하고 죄 없는 지 코를 쑤시면서 물으니까. 노자는 눈치도 없이 말하기를 생지축지 라 했어. 이 말이 무슨 소리겠어? 글자 대가리 수 맞 추려고 들어간 앞뒤의 지 자를 빼버리면 생축이다. 많이 보던 단어 같지 않아? 뒤집으면 바로 축생 이다. 중생 바로 밑이 축생이고 그 아래가 아귀생이다. 업이 많아서 사람으로 못 태어난 서글픈 생명이 바로 짐승이고 그것을 축생이라 한다. 생지축지으 축은 축양이란 
뜻으로 잘 양육한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생지축은 짐승으로 살아라 라는 소리다. 소나 개 돼지처럼 살 수 있겠나이까? 하는 소리다. 이런 소리야말로 노자 아니면 할 수 없는 소리다. 인간이 무지무욕하고, 허기심하고 약기지 하면서 오로지 실기복하고 강기골하기만 하면 그게 뭐겠나? 바로 짐승 읻. 노자 얘기는 꾸미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글자 그대로 짐승이 
되라 는 소리다. 이런 대목을 보면 영악하게 지혜가 발달하고 욕심덩어리인 인간이란 것에 대해 혐오를 느끼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랬을 수도 있다. 나는 노자의 심정을 이해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고 말한 게 루소지? 만약 루소가 2000년 전에 중국에 노자란 할아방이 있어서 짐승으로 돌아가라 고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저 말을 못 했을 거다. 루소 같은 근대적 교양인은 곀로 노자처럼 노골적이고 직실적인 소리를 차마 못 하는 단점이 
있다. 내가 노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글을 쓸 때 불필요한 장식이나 멋을 부리지 않고 둘러대거나 은유하지 않고 꼭 나처럼 있는 그대로 내질러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노자의 글을 읽을 때 사람이 약간의 쇼크를 받을 수 있다. 백성의 마음을 비우게 하고 뜻을 약하게 만들어라. 등 따시고 배나 부르게 해라, 이런 소리들이 전부 뭐야? 짐승으로 되돌리라는 얘기다. 도덕이니 인이니 법이니 하는 것을 인간들에게 가르치기 보다 그런 것을 알지도 모사는 상태라야 한다는 애기야. 그게 바로 영아이고 축생이야. 
능영아호? 능생축호? 라고 노자는 묻는다. 능히 어린아이가 되고 짐승이 될 수 있겠느냐? 혼자 떠들다보니 주인공을 잊어버렸다. 우리의 주인공이 뭐라고 하데? 암컷이야말로 무위의 덕성의 상징 이라고 헛소리 나발을 불었지? 노자가 무위의 덕성의 상징으로 본 건 암컷이 아니라 어린아이요 짐승이다. 암컷은 오히려 유위로 칠갑을 한 욕심덩어리니 어쨌든 멀리 
도망가라고 권하는 대상이다. 이쯤에서 우리 주인공 말씀 함 들어볼까? 전기치유, 능영아호 : 이것은 우리나라의 모든 단전호흡이나 국선도, 기공 등의 원리가 다 여기 이《노자》에게서 나온 것임을 말해주는 구절이다. 전기 란 기를 오로지 한다 라는 뜻으로 내몸의 기를 전일하게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기를 집중시킨다는 것은 단전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운영이 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자와 21세기》하권 101쪽 상단. 완전히 지 혼자 달밤에 체조를 하고 자빠지지? 내가 앞에서 도올은 기에 대해서도 쥐뿔도 모른다고 말했잖아. 저 여덟 글자에서 무슨 기공의 원리가 나온단 말이야? 기를 오로지 하여 몸을 어린아이처럼 만든다 는 것이 기공의 원리야? 그리고 국선도가 그런 원리로 만들어졌다 말이야? 국선도 가 뭔지도 모르는 게 마냥 아는 
척만 하는 거야. 국선도의 창시자는 청산이란 사람이다. 이 양반이 뭐 하던 사람이냐? 차력사다. 국내에서 최초로 차력 시범단을 만들어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한 사람이다. 입으로 물통 들어올리기, 몸에 벽돌 올리고 망치로 두들겨 부수기, 마빡으로 송판에 못 박기. 이런 게 주 레퍼토리였다. 6, 70년대에 공설운동장이나 초등학교 운동장 같은 데 사람들 
모아놓고 약장사하듯이 차력술을 보여준 사람이다. 칠선녀니 기발산이니 하는 애들 끌고 다니면서 무술 시범을 하다가 돈을 좀 모아서 도장을 차렸는데 초기에는 고생 억수로 했어. 나중에는 상전벽해가 무색할 만큼 성공을 했지만, 제자도 많아지고 전국 곳곳에 지부며 도장이 열렸어. 이 청산거사가 나발불기를 자기는 지리산인가 설악산인가 어디 들어가서 10년 수도한 끝에 드디어 금강체를 이루었다 한 거야. 불 속에 앉아 있어도 뜨겁지 않고 몸을 쇠망치로 때려도 안 아프다고 뻥을 친 거야. 아마 일본 
NHK인가 그런 데도 출연해서 믿지 못할 경지를 보여주기도 했어. 그게 뻥인지 아닌지는 내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차력무술이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하고 연결이 되는 소리야? 얘는 뭐든지 끌어다 붙이는 데는 능력이 있어. 맞는지 안 맞는지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지도 모르고 듣는 놈들도 모르니까 무조건 아무거나 끌고 오는 기야. 생각없이 듣고 있으면 진짠 거 같아. 근데 쫌만 알고 들으면 이게 배꼽을 잡을 개근 거야. 도대체 어떤 
놈이 저 여덟 글자를 읽고 기공의 원리를 알아낸단 말이야? 그 놈 낯짝 함 보자. 지금 금용이 영웅문 얘기하나? 아니면 이연걸이 나오는 황비홍 얘기야? 무협지를 보면 말이야, 주인공이 구음진경 같은 상승무공의 비전에 적힌 요상한 구결 한두 줄만 외우면 공력이 배씩 상승해서 하루아침에 일류 고수로 둔갑하는 황당한 소리들이 나오지만 도올이 무슨 재주로 저 여덟 글자를 보고 기공의 원리를 깨친단 말이야? 철학을 한다는 게 다 말장난뿐인 거야. 본 김에 조금 더 볼까? 매일 아침 단전호흡학원에 나가 온갖 수련을 다 해도 낮에는 더럽게 외식하고 저녁에는 주색에 곯아버리는 상황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전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치유 다. 내 몸이 뻣뻣해진다는 것은 내 몸의 삶의 부분을 죽음의 부분이 이기고 있다는 증표이다. 전기는 오로지 내 몸이 부드러움(유)에 이르는(치) 현상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허리가 부드럽고, 목이나 온갖 관절이 자유롭게 돌아가며, 근육이 보들보들하면서 탄력성이 있는 몸, 그것을 어린애와 같은 몸(영아)이라 부르는 것이다. 노자는 묻는다. 전기치유하여 영아(갓난애기)와 같은 몸을 유지할 수 있는가? 조선민족이여! 늙지 말자! 항상 어린애 같은 몸을 유지하자. 《노자와 21세기》 하권 101 쪽 하단. 개그도 이 정도 되면 입신의 경지지. 조선민족이 쪽팔려서 얼굴을 못들겠다. 해봐, 해봐, 하니까 진짜로 여덟 글자 구결 하나 갖고 기공수련의 원리를 만들고 앉았어. 그만 해. 참아 제발. 저 가서 혼자 놀아라. 노자 다음 말씀이나 보자. 이 10장의 내용을 도올이처럼 기공 교본 으로 해석하고 자빠진 맹꽁이들은 하나같이 애민치국과 생지축지에서 갈팡질팡 
방향감각을 상실해버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를 어찌어찌 해서 몸을 어린아이 처럼 만들어 불로장생하자는 소리 가운데 애민이 왜 나오고 치국이 왜 나오느냐 말이다. 그것도 괜찮다. 갑자기 생지축지가 나오니까 그냥 허겁지겁하는 거야. 지금까지 노자가 해온 소리들을 하나도 귀담아 안 들었다는 소리야. 들었어도 도올이처럼 엉뚱한 소리로 듣고 자빠졌으니까 이게 글자 그대로 짐승처럼 살아라 는 소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는거야. 노자가 해 온 소리들을 꼼꼼히 읽어온 사람이면 노자가 바로 이 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너절한 소리들을 해왔구나 하는 것을 단박에 알아야 돼. 지금까지 노자가 해왔던 소리를 쭈욱 적어놓고 초등학교 애들한테 
이 글의 결론을 요약해서 10자 이내로 적어봐 하고 논술문제를 내면 애들은 짐승이 되라는 소리네요 하고 대답할지 모른다. 노자를 알려면 모든 선입견과 편견과 지식을 버리고 노자와 벌거벗은 마음으로 마주앉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성인들이 해왔던 고상하고 우아한 구라들은 다 잊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상태에서 노자가 하는 말을 하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노자를 알 수 없다. 얄팍한 대갈빡을 굴려서 지 멋대로 글자를 바꾸고 문장을 비틀고 뜻을 왜곡해서 구라를 풀어봐야 그건 노자가 아니고 지 생각일 뿐이다. 이 대목에 대해 왕필이 했다는 주가 소개되어 있는데 한번 보고 가자. 왕필은 생지 에 대해서는 불새기원야(그 근원을 막지 
않는다)라는 주를 달았고, 축지 에 대해서는 불금기성야(그 본성을 억압하지 않는다)라는 주를 달았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구절이 문맥의 흐름에서 너무 돌연하게 들어와 있음으로 착간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셨지만, 백서의 발굴로 과거에 착간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구절들이 제자리에 제대로 있는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생지, 축지 는 결코 추상적으로 얼버무릴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노자의 사상을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강령이요,《중용》과 같은 기타 유가문헌과도 연속적 관계에 있는 매우 중요한 사상을 반영하는 명구절이다. 생지 란 도의 측면을 말한 것이요,  
축지 란 덕의 측면을 말한 것이다. 도란 보편자요, 우주적 원리요, 상대적인 언어개념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변화하는 현상 그 자체이다. 《노자와 21세기》106쪽∼107쪽. 치다가 손가락도 아프고 귀찮아서 그만뒀는데 이하 계속 이어지는 소리는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니까 옮길 것도 없어. 무슨 근거로 어떤 이유로 생지가 측면이고 축지가 덕의 측면이 된단 말이야? 다 지 생각이야? 차라리 착간이라고 우겨라. 그게 외려 낫다. 저 글을 쪼금 더 읽으면 이런 소리도 나온다. 도는 길이요, 덕은 얻음이다 어때? 한 마디로 죽이지? 그래 놓고는 영어로 버츄가 어떻고 희랍어로 아레테가 어쩌고 하면서 영어만 갖고도 안 돼서 희랍어까지 주절거리고 나오니 도올은 참 큰 일 하고 있다. 우리나라 개그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거다. 어떤 개그맨이 개그할 때 희랍어 쓰더냐? 도올이 첨이다. 상 줘야 된다. 희랍어를 구사하는 개그맨은 아시아를 통틀어 도올 하나뿐이다. 노자는 인간을 세상에서 제일 못된 짐승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인간만큼 흉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동물은 없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노자가 말하는 무위 그자체이다. 속일 줄도 모르고 꾸밀 줄도 모르고 잔인하고 포악한 짓은 더 더욱 할 줄 모른다. 인간도 어쩌면 인지가 덜 발다했던 옛날에는 다른 짐승처럼 배고프면 먹고 때가 되면 짝짓기하고 날이 저물면 동굴에 들어가 잠을 잤던 그런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런 시절의 인간은 그리 악한 존재가 아니었고 모든 인간이 다 성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리는 노자가 말하는 성인들을 만나기 어렵지는 않다.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조금 멀리 가는 기분은 들지만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나 자바 또는 뉴질랜드의 오지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성자들만 사는 원주민 마을들이 있다. 그들에게서 노자가 그토록 미워하고 혐오했던 인간의 악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인간이 원래 그랬다. 애초부터 악하고 사악한 짐승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변해왔느냐? 노자는 그 이유를 인지의 발달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아버린 인류는 자연계라는 실험실의 실수로 태어난 프랑켄슈타인이다. 이게 노자가 인간을 보는 시각이다. 그래서 그놈의 지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거듭 거듭 말하고 있다. 배나 채우면 되지 공부가 뭔 소용이냐? 라는 것이다. 알면 알수록 많이 아는 자와 덜 아는 자의 차이가 생기고 이것이 권력을 만들고 권력이 전쟁과 노예를 만든다. 그래서 
불상현하라는 거다. 암만 많이 아는 놈도 지보다 더 많이 아는 놈한테는 지고, 아무리 잘나도 지보다 더 잘난 놈이 있으니까 비참한 꼬락서니를 겪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두 다 짐승처럼 똑같이 모르는 상태로 가자는 거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달리 행복했던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몰라서 행복했다.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 무엇인가 대갈빡 속에 띵하고 들어가면서 낙원은 사라졌다. 두 발 짐승이 인간이란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된 다음의 아담과 이브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낙원에의 동경이 무엇이겠냐? 바로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에의 동경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귀의 본능이다. 어린아이들은 모르기 때문에 행복하다. 그저 배부르고 등 따시면 쌔근쌔근 행복하게 잠든다. 그런 행복을 인류는 너무나 오랜 옛날에 잃어버렸다.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거 같나? 그러나 짐승들이 인간보다 더 행복할 지 모른다. 철없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눈물이 난다.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낙원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노자는 어린아이와 짐승들에게서 성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아마도 다음에 나오는 장이부재를 말했을 
것이다. 노자가 앞에서 했던 말이 생이불유 위이불시를 한번 더 말한 다음에 꺼낸 소리가 바로 장이부재 다. 생이불유 위시불시는 설명한 대로 없는 듯이 살고, 꾸밈에 의지하지 말라 는 소리다. 이 꾸미지 말라는 말은 도덕경의 앞부분에 참으로 여러번 나온다. 여기서 내가 건너뛴 한 구절을 함께 묶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천문개합, 능무자호 다음에 생지축지 가 나오기 전에 한 구절이 더 있다. ? 명백사달 능무위호? 란 말이다. 
풀어보면 뜻을 명백하게 사방에 전하는 데 꾸밈이 없겠는가? 라는 말이 된다. 지도자가 자신의 의사나 생각을 온 천하에 명확하고 분명하게 알리되 그것에 꾸밈이나 거짓들이 들어가지 않게 하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다시 말하면 백성을 상대로 거짓 선전이나 기만하는 허위 나발을 불지 말라 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알여야 할 것은 분명하게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온 소리가 바로 생지축지 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소리가 없는 듯이 살고, 꾸밈에 의지하지 말라 이고 그리고 장이부재 
시위현덕 이다. 이 전체를 보면 생지축지 란 말을 짐승들이 하는 것처럼 할 수 있겠느냐?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도 있다. 왜냐하면 지도자가 명백하게 자기의 의사를 꾸밈없이 사방에 알리면서도 다스리지 않는 지도자가 되는 현명함은 짐승들이 가장 잘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짐승은 자기들 집단의 우두머리를 둔다. 사자를 한번 볼까? 수사자는 암사자들과 새끼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거느리는 우두머리다. 
그런데 이 수사자가 자기 영토와 식솔들을 다스리는 꼬락서니를 함 봐봐. 아무 것도 아는 짓이 없이 그냥 빈둥거려. 나무 밑에서 낮잠이나 자고 한번씩 암사자들이 와서 꼬랑지를 흔들면 그거 한번씩 해주고 그게 다야. 사냥도 안 하고 일도 안 해. 어쩌다가 마지못해 영토 내를 한번씩 둘러보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나 수사자가 한번 크게 울면 사바나 전체의 동물들이 숨을 죽여. 그래서 백수의 왕이라 그래. 그게 바로 명백사달이야. 뒤에서 노자가 하는 말이 있어. 태상은 하지유지라고 가장 좋은 우두머리는 아랫사람들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 자라고 수사자가 그래. 아무 일도 안 하고 암사자들을 괴롭히지도 않지만 수사자가 하릴없이 나무 밑에서 뒹굴면서 낮잠이나 자고 게을러터져서 사냥도 안 하지만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바나 전체가 사자의 집단에 복종을 하는 것이고 어떤 다른 짐승들도 사자를 우습게 보지 못해. 그리고 암사자들은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고 새끼들을 키우는 거야. 이제 성인치도의 모델이야. 코끼리도 마찬가지야. 늙은 수코끼리 한 마리가 수백 수천 마리의 대 가족을 거느리고 살지만 암만 카메라를 숨겨놓고 여러 달을 관찰해도 그 우두머리 코끼리가 특별히 통치행위를 하는 게 없어. 그저 우두머리라고 있을 뿐이고 모든 코끼리 집단이 그 권위를 인정하는 거야. 새끼 코끼리 한 마리조차도 우두머리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는 법이 없어. 이것이 바로 
장이부재, 명백사달이야.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대통령들 통치라고 하는 꼬락서니 함 봐봐. TV, 라디오, 신문, 잡지 온갖 것을 총동원해서 국민들 정신이 혼란하도록 광고나발을 불어도 국민들이 그 말을 믿지 않아. 능무위를 못 하기 때문이고 명백사달 이 안 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장이부재는 꿈도 못 꾸고 각 부처의 국장들이나 신경 쓸 일을 대통령이 직접 챙긴답시고 나서서 설치고 오두방정을 떨어도 나라가 안 되는 거야. 이게 전부 뭐 때문이겠어? 그 말에 위 가 많기 때문이야. 인간이 과연 사자나 코끼리 보다 나은 동물일까? 장이부재 는 다스리지 않는 우두머리 라는 말이다. 이 말을 보더라도 10장은 지도자의 성인지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짐승들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우두머리라는 것도 다스림이란 행위가 불필요하다고 노자는 보고 있다. 천지가 만물을 위추구하듯이 백성들을 간섭치 말고, 더 잘살게 해주겠다고 나서서 깝죽거리지 말고 그냥 가만 있으라는 얘기다. 그러나 노자의 말은 모두 이면이 있다. 반드시 그 말의 전제가 따라 붙는다. 다스린다는 행위가 없다는 것이 방치나 유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재영백포일 하고 척제현람 이며, 애민치국 하여 천문개합 하고 무위 로 명백사달 함으로서 백성이 무지무욕 하고 실기복 강기골 해서 부쟁무우 한 상태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전제가 되는 
것이다. 노자의 장이부재를 성인도 아닌 게 실천하려고 들면 어찌되느냐? 앞에서 말했던 어떤 왜넘 꼬락서니가 돼버린다. 하지만 왜넘들의 천황이라는 것은 장이부재하는 성인이 아니라 그냥 핫바지고 허수아비다. 그러다가 반짝 메이지가 제대로 일을 했고, 그 다음에 히로히토는 역시 등신이 됐다. 에도 막부의 역대 쇼군이라는 것도 그런 전통에 휩쓸리면서 정신박약아 내지 유치찬란한 놈들 시리즈로 이어졌다. 이놈들은 대가리를 허수아비로 앉혀놓고 장이부재를 실천하면서 밑에 놈들이 다 해먹는 묘한 전통이 있다. 그래서 웃대가리는 바보라도 좋고 등신이라도 좋고 인형처럼 아랫놈들이 입혀주는 의관이나 제대로 입고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다. 
왜넘들이 제일 이상으로 생각하는 지도자는 절 받는 인형 이다. 그리고 그 인형 앞에서 절은 열심히 한다. 이런 습성은 메이지 시대에도 그대로 드러나서 당시 게다군의 편성은 등신 같은 총대장에 똑똑한 참모들로 만들었다. 러일전쟁 때 만주의 일본군 총대장은 오야마 이와오란 넘이고 그 밑에 참모장이 고다마 겐타로다. 오야마는 참모회의할 때 한마디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나라에서 주는 봉급을 받아 먹을수 있었다. 작전은 고다마가 다 짰다. 다행히 이 넘이 근대 일본 육군에서 난 넘이라 러시아를 상대로 한 버거운 싸움에서 겨우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등신 같은 총대장에 병신 같은 참모가 붙으면 어찌되냐? 여순에서의 노기 꼬락서니가 나버린다. 노기 마레스케도 오야마하고 마찬가지로 회의 때 앉아 있는 일 외에는 어떤 일도 할 줄 몰랐던 넘이다. 그런데 참모장인 이지치라는 넘이 말하자면 돌대가리다. 이넘이 얼마나 황당한 돌대가린지 작전이란게 도스케키 밖에 몰랐어. 한번 돌격에 1만 명에서 1만 5천 명 정도 잔나비새끼들이 죽어 나갔어. 여순은 왜넘들의 지옥으로 변했어. 고지마다 산마다 왜넘들 시체가 산처럼 쌓여서 뒤덮였는데도 노기 
이넘은 백마 타고 돌아다니면서 한시나 짓고 자빠졌어. 여순 전투를 한 달 마 더 끌었더라면 근대 일본은 서기도 전에 무너졌을거야. 나라 전체를 망국 일보 직적으로 몰고 간 것이 노기란 넘하고 이지치란 넘이다. 하지만 이런 장이부재 스타일의 조직이 대단히 효율적이고 이상적 일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은 보여준 것이 왜넘들인 것은 틀림없다. 해군에서 보면 도오고오 헤이하치로가 육군의 오야마이와오고아키야마 사네유키란 넘이 고다마 겐타로다. 이 콤비는 환상적이어서 여순과 대마도 앞 바다에서 러시아의 극동함대와 발틱함대를 깨부시고 일본을 승리로 이끌었다. 오야마나 
도오고오는 장이부재 하면서도 명백사달 할 줄 알았던 넘이고, 노기는 그냥 등신일 뿐이야. 그 도오고오가 쓰시마 해전이 끝난 다음에 세계 각국의 기자들한테 둘러싸여서 질문을 받는데 해군 역사상 누가 가장 위대한 제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니까 영국의 넬슨이야 감히 내가 견주겠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제가 신발에 끈을 맬 자격도 없소이다. 했어. 이건 낭설이 아니고 실제 그대로의 이야기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박통 이전에는 이순신 장군 잘 몰랐어. 하지만 왜넘들은 이순신 장군을 바다의 군신으로 생각해왔단 말이지. 장군들뿐만 아니라 졸병들까지 러일전쟁 당시에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심지어 쓰시마 해전을 앞두고 진해 만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출격을 할 때 졸병으로 배에 타고 있던 한 왜넘이 수기를 남겼는데 마음속으로 이순신 장군님께 함대의 가호를 빌었다. 는 내용이 있을 정도야. 참 이순신 장군이 까무러칠 일이다마는 장이부재 하고 명백사달 할 수 있었던 성인의 모델로 손색이 없는 분이 이순신 장군이다. 세계의 전사에 그 존재 자체가 불가사의한 분이다. 이건 어떤 일본 군사학자의 말이다. 쓸 만한 배 한 척이 없어도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왜넘들과 게다구 전체가 벌벌 떨었고,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조선 백성들이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 지도자를 다시 보고 싶다. 장이부재 명백사달 이란 말을 보면서 생각난 이야기를 조금 주절거렸다. 이제 10장의 원문 전체를 한꺼번에 보고 다음으로 가자. 제 10장은 시위현덕 이라는 마지막 말로 끝난다. 그리하면 그것이야말로 한량없이 높고 지극한 덕일 것이옵니다 이다. 현 은 앞뒤의 내용에 따라 그 해석이 수없이 달라질 수 있는 글자니 
글자도 가물한 놈이다. 현빈이라 할 때는 신비롭고 기묘한 계곡 이라 말할 수 있고, 현덕이라쓰면 가이없이 지극한 덕 으로 읽을 수도 있고 현람이라 
할 때는 어둡고 컴컴한 곳을 본다 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사실 이런 말은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현덕은 열반이나 성불과 같은 소리다. 그냥 그대로 현덕이라 합니다 라고 읽던 현덕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하는 게 좋겠다. 왜냐하면 열반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뜻을 풀어서 쓰려고 하면 엄청 길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덕도 풀어서 쓰면 작문이 되지 그게 단어가 안 된다. 그래서 이런 말들은 그냥 현덕이라 한다 고 읽고 지극히 높은 덕을 일컫는 이름 이구나 생각하면 된다. 
도올이 이 말을 가믈한 덕 이라고 옮긴 것까지 뭐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도올이 금과옥조로 삼는 왕필의 주는 솔직히 뱀발에 가깝다. 발을 그려서 조진 뱀 그림이다. 한번 읽어보면 되겠고, 그 다음에 이 10장의 마지막 결어가 너무 걸작이어서 그것만 옮기려 하니까 보기 싫더라도 
참아주기 바란다. 웃자는 거니까. (유비의)삼고초려 란 곧 물 과 같이 자기를 낮추는 현덕의 지혜다. 그래서 제갈공명과도 같은 천하의 지혜인을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대세는 반드시 지혜로운 자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논해야 할까? 
마지막 말이 너무 멋있잖아.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논해야 할까? 나는 저런 대목에서 사실 도올한테 반한다. 내 머리를 순간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거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순간적으로 머리 속에서 한바퀴 돌려봐도 노자의 이 10장하고 연결되는 장면이 떠오르지가 않는 거야. 뭘 가지고 저런 기막힌 결구를 끄집어냈을까? 그거 생각하다가 내가 돌 뻔했다. 어떤 할 일 없는 인간은 모나리자의 미소가 무슨 의미일까 평생 그 생각하다가 
돌았다 하더니만 나도 돌 뻔했다. 내가 상대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고수다, 도올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라…셰익스피어의 비극… 셰익스피어의 비극…. 에라 모르겠다. 궁금한 사람은 도올한테 직접 물어봐. 하여간에 10장을 마감하면서 내가 노자의 말씀을 요약해봤다. 그대로가 내 인생 철학이고 좌우명이다. 무욕무적 : 욕심이 없으면 적이 없고 , 무지무우 : 아는 게 업으면 걱정이 없고 , 부쟁불패 : 싸우지 않으면 질 일도 없다.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 전기치유 능영아호 , 척제현람 능무자호 , 애민치국 능무지호 , 천문개합 능무자호 , 명백사달 능무위호 , 생지축지 생이불유 , 위이불시 장이부재 , 시위현덕. 도올번역 땅의 형체를 한 몸에 싣고 하늘의 하나를 껴안는다. 그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기를 집중시켜 부드러움을 이루어 갓난아기가 될 수 있는가? 가물한 거울을 깨끗이 씻어 티가 없이 할 수 있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앎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힘에 암컷으로 머물 수 있는가? 명백히 깨달아 사방에 통달함에 함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도는 창조하고, 덕은 축적하네. 낳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을 내 뜻대로 만들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라는 것을 지배하지 않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덕이라 하네. 바른번역 온 나라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그것이 흩어지지(분산되지)않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의)기운을 오로지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백성의)섬돌(또는 마당)을 손수 닦아주고 그 어두운 곳을 살펴, (백성의)아픈 곳을 없이 해줄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지에 의존치 않고 할 수 있겠는가? 성인의 도를 행하는 데 있어 배필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분명하고도 밝게 뜻을 온 천하에 전하면서도 꾸밈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짐승들이 그러하듯이 없는 듯이 살며, 꾸밈에 의존하지 않고 우두머리이면서도 다스리지 않으면 이를 일컬어 현덕 이라 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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