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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날지 않는 새

by Casey,Riley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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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지 않는 새
방귀희

 

      차   례
      <제 1부>
    1. 고고지성
  우리도 쇼핑 좀 합시다 / 축하해요
  작은 올림픽 / 항변
  누구를 위한 것이냐 / 목발 부대의 설움
  효도할께요 / 고진감래
  충격 / 상처 받은 모정
  함께 춤을 추실까요 / 환자 취급은 싫어요
  걸어야 한다 / 너무 합니다
  슬픈 호소 / 혜택이 아닌 혜택
  벗겨버릴 수 없는 굴레 / 이런 무시
  벽 / 우리들의 목욕탕
  데이트를 방해하는 것들 / 헛소리
  오호 통재라 / 무언의 위로
  혼자 걷는 길 / 장애가 가장 장애가 될 때
  헐 값 / 우정의 등반
  척수마비와 성생활 / 웃기는 일
  백평야에 남긴 한 / 문전박대의 각설이
  경사로 탄생의 진통 / 작은 배려로
  취업의 문 / 수화방송에 앞서
  다이애너비가 온다는데 / 또 차별
  66년만에 온 기회를 / 청와대 문턱은 왜 이리 높은가
  피맺힌 한라산 꼭대기 / 유서
  곰두리의 합창 / 우리의 부모님
  고질적인 병폐 / 너무나 큰 오류
  상담자 / 장관님의 편지

    2. 세상구경
  전국 방방곡곡 / 일본에서의 5박 6일

    3. 극복자에게 영광이 있으라
  우리들의 우상 / 이 생명 다하도록
  잿더미에서 핀 신화 / 입이 있었다
  도전과 극복 그리고 성취 / 베데스다의 창조
  머리로 쓰는 기사 / 슬픔이여 이렇게 갔다
  소녀의 기도 / 동창생 아버지
  목발의 산악인 / 재활의학과의 입원실
  자기 밥 / 놀랬지요
  휠체어 정치가의 내한 / 손으로 달리는 사람들
  맹인 차관 / 멋진 제 2의 인생
  두 팔, 두 다리 / 끝없는 도전
  빛과 그림자 / 거 제법인데
  걷는 기적 / 부끄러운 차이
  무릉도원 / 세계를 휠체어로
  침묵의 영웅

      <제2부>
    1. 병신별전
  깜깜이전 / 네 발로전
  막막해전 / 한심이전

    2. 혼자 부르는 노래
  색계 : 인생 / 정복자의 아픔 / 고독 / 밤비 / 빈잔의 축배 / 바닷새 
         그날은 왠지 / 후회하기 위해서
  속계 : 엄마에게 내 젊음을 나누어 줄 수 있게 해 주소서 / 나는 무엇일까?
         동정은 싫어요 사랑해 주세요 / 행복한 사람 / 그대 나의 속살이라 
         부르는 것은 
  무색계 : 시가 / 부부 / 한줄기 빛 / 님께서는 / 또 다른 이산가족 / 나무야 
           나무야 나의 나무야

    3. 날지 않는 새
  침입자 / 신세계
  갈등 / 믿음
  설녀

      <제1부>

    1. 고고지성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입니다.
  껍질을 벗기는 부끄러움은 있지만
  숨긴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훌훌 벗어던지고 자유로워 지고 싶습니다.

     * 우리도 쇼핑좀 합시다 *
  IOCU의 가이드 라인에 '모든 인간은 소비자다. 어디에 살거나 무엇을 하는 사람이
거나 연령, 성별, 인종에 관계없이 소비자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신체 장애 때문에 때로는 소비자로서의 권리마저 박탈 당할 때가 비일비재
하다. 물론 상인들이 우리에게 물건을 팔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들
이 자유롭게 쇼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장은 완전 전쟁터이다.
  힘이 약한 사람은 밀려나게 되어있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장이다.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을 휠체어를 타고 한바퀴 돌고 나면 물건을 사고 싶다는 생각
이 싹 가신다. 어서 빨리 이 시장 안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가슴을 메운다.
  어쩌다 내 휠체어에 부딪치기라도 하면 험상궂은 인상으로 바지를 탁탁 털면서 기
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 시장까지 뭐하러 기어나오냐는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는 언짢은 사건들이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물건을 사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며, 또 침해당할 수 없는 권
리이다.
  언젠가 시장에서 블라우스를 살 떄였다. 시장은 정찰제가 아니어서 바가지를 씌운
다는 말들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나도 구매의 기본 요건인 품질이 좋고 값싼 물건을 
구입하여 알뜰한 소비자가 되고 싶었다.
  " 아줌마, 5,000원에 해 주세요 "
  " 이 아가씨가, 안사려면 관둬요, 관둬! 깍기는 아침부터 재수 없게 "
  아줌마는 눈을 부릅뜨며 쏘아붙이는 것이 아닌가.
  내가 건강한 고객이었어도 무척 기분이 상할 언동이었는데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나로선 심한 굴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시장 시간으로선 좀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적기 때문에 일부러 이
른 시간을 택해서 갔던 것인데 재수없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소비자는 왕이다. 소비자가 없으면 상인들은 아무리 좋은 상품을 가지고 있더라도 
판매행위를 할 수 없다.
  좀 더 약은 상인이었다면 나에게 굉장히 친절했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들은 아무래
도 세상 일에 어둡고 또 아무래도 때가 덜 묻어 콩나물값을 깎는 그런 알뜰함을 보이
지 못할 뿐 아니라, 자주 나오기가 불편해 한번 나오면 한꺼번에 물건을 구입하는 아
주 큰 손님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박을 별로 하지 않는 신의있는 손님들이다.
  그런데 이런 대접을 하니 누가 그 물건을 살 마음이 생기겠는가?
  그래서 찾은 곳이 백화점이다. 백화점은 그런대로 견딜만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완전한 서비스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판매대의 높이가 놓아 휠체어에 앉은 나는 물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차라지 판매대
에 매달린 손님들의 엉덩이만 본다.
  또 홀수 짝수로 운행되는 엘리베이터가 있을 뿐 장애자 안재 표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우리들의 쇼핑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갔다가 4층엘 가려면 다시 1층으로 내려와서 다른 엘리베
이터를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바꾸어 타는 것이 귀찮다고 말 할 염치는 없다. 다만 
이렇게 하려면 엘리베이터 앞에서 수십 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슬프고 서럽다는 거
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도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좀 비켜줘야겠다는 양보의 몸짓 하나 보이지 않는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 
빤히 쳐다보면서 그냥 통과시킨다.
  세상 인심이 이렇게 메말랐구나 싶어 겁이 더럭 난다. 어쩌자고 사람들은 그렇게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흘러만 가는지.... 
  화가 치민 나는 하는 수 없이 에스컬레이터를 타러 갔다. 머리만 잘 쓰면 별 불편
없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또 웬걸, 에스컬레이터를 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그 
비명 소리는 가뜩이나 기죽은 내 가슴을 더 콩알만 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소동에 백화점 관리인까지 뛰어나왔다.
  " 안돼요. 휠체어를 타고 어떻게 에스컬레이터를 탄다는 거예요? "
  그러나 그 말이 떨어졌을 때는 이미 무사히 안착을 했을 때였다. 나는 여유있게 웃
어 주었다.
  내가 새삼스레 이런 불평을 털어놓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머지않아 88 장애자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세계각국에서 선수들이 올 것이다. 분
명히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갈 것인데 그때 만약 이런 소동이 벌어진다면 얼마나 유
쾌하지 못한 한국의 이미지를 심어 주게 될 것인가를 다 같이 한번쯤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 축하해요 *
  " 축하해요! "
  그날은 두 사람의 결혼식 날이었다.
  주위의 많은 친구들이 결혼을 했지만 난 한번도 초대받지 못했었다. 심지어 장애자 
친구의 결혼식에까지도...
  하지만 그날은 당당히 초대를 받아 결혼식에 참석을 했다.
  우리들이 손수 꾸민 조촐하면서도 아지자기한 결혼식장엔 목발과 휠체어 부대가 일
찍부터 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
  축하의 팡파르 세례를 받으며 주인공들이 식장에 입장을 했다. 휠체어를 탄 신랑이 
두 손으로 휠체어를 굴리며 아주 늠름한 모습으로 앞장을 섰고, 신부는 하얀 웨딩 드
레스로 예쁘게 단당을 하고 다소곳이 얼굴을 숙인 채 휠체어 뒤를 따랐다.
  우리는 그 모습에 일제히 환호를 보내며 축하 박수를 쳤다. 여느 결혼식과는 달리 
축사의 말씀이 있었다. 구구절절이 가슴을 울리는 축사에 어느새 내 눈가엔 이슬이 
맺혀지고 말았다.
  행여 나는 신부가 울면 어떡하나 싶어 얼마나 가슴을 죄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
혼식이 끝날 때까지 자세 한번 흐트러뜨리지 않고 고운 모습으로 서있는 신부를 보니 
두 사람은 반드시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난 이 결혼식을 보며 하나의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장애자의 결혼을 어렵게 만드
는 요인은 당사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애자와 결혼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부모들에게 있다는 것을...
  이번 결혼식에도 여자 쪽에선 아무도 참석을 하지 않았다.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
한 채 진행되는 결혼식은 어딘지 모르게 완전해 보이지 않았다.
  외국의 예를 들어 안됐지만 미국이나 그밖의 선진국에서는 장애자와 결혼하겠다는 
선언을 하면 부모들은 자식에게 애정어린 키스를 해주며 진심으로 축하를 해준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 또한 자식을 잘 키웠다며 그 부모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
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들기 위해서 산업체만을 육성시키려 할 뿐 국민의 의
식구조엔 전혀 무관심한 것 같다.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야 완전한 인간이 되듯이 경제성장과 국민 의식이 함께 
발전을 해야 진정한 선진 문화국이 되리라. 처음이나 어렵지 일단 그것이 상식화되어
지면 아무런 부작용없이 실행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 우리 젊은이들의 용기와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라고 본다. 선구자
의 길은 언제나 외롭고 힘든 법이다. 하지만 다음 세대를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는 일
을 기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 작은 올림픽 *
  난 체육 시간엔 교실 당번을 도맡아 했다.
  내 스스로도 운동을 할 엄두를 못냈지만 선생님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처럼 여겼다. 그러니 자연 체육시간은 나에겐 없는 아니 죽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누
구 못지 않게 나도 운동을 하고 싶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나의 운동 욕망은 체육 시간이 아니라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제
지당했던 것 같다. 2살밖에 차이가 안나는 언니와 나는 붙잡고 뒹굴기를 잘 했었다. 
치고 받고 깨물고, 꼬집고....
  숨이 차서 씩씩거리면서도 난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엄마는 늘 이런 
선언을 하셨다.
  " 가만 놔둬라. 몸도 성치 못한 동생을 갖고 왜 그래. 그만 두지 못해! "
  엄마는 내편을 들어주셨지만 난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치 못한 기분에 
더 우울해졌었다. 그 후로 난 몸을 움직이는 장난은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은 승부를 걸고 게임을 함으로써 적극적인 성격으로 자란다고 한다.
  그러나 난 어릴 때부터 ㅇ그런 기회를 몽땅 잃었다. 또한 철이 들어서는 내가 움직
이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기가 싫었다.
  그때 나의 유일한 친구는 옆집의 동섭이 오빠였다. 나보다 한 살 위였고 소아마비
에 걸린 것도 1년 선배였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 오빠 우리도 경주하자? "
  " 무슨 경주? "
  " 저쪽 벽까지 누가 빨리 달려가나. "
  참으로 우스꽝스런 제안이었다.
  나보다 장애가 가벼웠던 동섭이 오빠는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 삽시간에 골인을 
했고, 난 숨을 할딱할딱거리며 쫓아갔지만 거의 제자리였다. 나의 뇌리엔 동섭이 오
빠의 승리에 찬 얼굴이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다.
  몸을 움직이고 싶은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곧 살
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적인 것보다는 동적인 것을 더 좋아한다. 나도 또한 마찬
가지다. 활동하고 싶어한다. 무지무지하게....
  하지만 우리의 움직임은 사람들 눈에 꼴불견으로 보인다. 그로인해 우리는 그 움직
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해 석고처럼 몸을 굳혀가며 마음까지 굳어버리게 하고 있다.

     * 항변 *
  " 너희는 그래도 참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거야. 내가 어렸을 때는 어땠는 줄 아
니? 내가 밖에 나가기만 하면 어디서 그렇게 삽시간에 개미떼들처럼 몰려왔는지 동네 
아이들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절름발이! 절름발이! 하고 절뚝거리는 흉내를 냈
다구. 귀희 너, 요즘 등에 업혔을 때나, 휠체어에 탔을 때, 놀려대는 아이 봤어? 못
봤지? 그만큼 사회인식이 많이 개조된거야. 앞으론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너희들이 
날개를 활짝 펼 수 있는 새 시대의 장이 열릴꺼야. 반드시! "
  사람의 말이 그렇게 마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선배님의 언변도 일품이었지
만 그 말씀은 정말 풀어지려하는 용기에 다시 태엽을 감게 하는 힘을 주기에 충분했
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가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자기 동생이 있는데 아주 심한 장애
를 갖고 있어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 생신 때마다 참석을 못했다.
  그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차려 드려도 잡숫질 않고 조용히 눈
물만 흘리시며 서럽게 흐느끼셨다.
  " 애그, 다른 자식들은 지 발이 있으니께 제각기 걸어서 들어오는디, 그 자식만 저 
문을 열구 들어오질 못하는구먼. 그 아인 내가 죽었다 해도 못올겨."
  아주머니는 이 말이 너무 가슴에 맺혀 이번 어머님 생신엔 동생을 업고, 멀고 험한 
시골길을 가느라 힘이 쭉 빠져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겨놓는데 
동네 어른들까지 무슨 큰 구경거리를 만난 듯이 " 빨리 좀 나와 봐. 빨리 좀! " 하면
서 난리를 쳤다.
  " 부인이 자기 남편을 업고 가나 봐. 아유, 근디 왜 멀쩡한 여자가 저런 남자한테 
시집을 왔을까이? "
  참으려고 참으려고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지만 지들끼리 쑥덕거리며 낄낄거리는 웃
음 소리를 듣자 아주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단다.
  " 사람 구경 첨 하남! "
  이 얘길 듣고 나는 선배님한테 항의를 하러 가고 싶어졌다.
  " 좋아지긴 개뿔딱지나 뭐가 좋아졌다는 거예요? "

     * 누구를 위한 것이냐 *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하지만 그분이 넓은 대지 위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겨우 2평 남짓한 아주 초라
한 골방이었다.
  넓고 훌륭한 정원을 내다보기에는 너무나 인색한 높고도 작은 창이 그분을 더욱 어
둡게 만드는 것 같았다.
  시간 맞춰주는 식사와 간식의 내용물은 기름진 것이었지만 그분에게 그것은 단순한 
먹는 즐거움만을 줄 뿐 식사 시간을 통한 가정의 단란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진 못
하였으리라.
  그분과 정원에 매여있는 불독과 다른 것이 있다면 불독은 이른 아침에 주인과 함께 
산책을 하지만 그분은 주인의 아들인데도 한번도 함께 외출을 한적이 없다는 것이었
다.
  잘 먹으니까 몸은 자꾸자꾸 비대해지고 할 일이 없으니 라디오와 TV로 소일하며 바
깥 세상과 완전히 격리되어 사는 인간이란 종명을 가진 생명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집안이라면 아무 불편없이 공부를 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집안의 체면이라는 것 때문에 사람 앞에 내놓기를 꺼려했던 것이 그분을 이 지
경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자기 집에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리도 창피한 일일까?
  장애자를 100만으로 잡을 때 그 가족까지 계산한다면 500만, 그렇다면 500만이라는 
사람이 장애자와 직접 간접으로 연결이 되어져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오는
데, 그렇다면 우리 나라 인구의 6분의 1이 그분과 같이 우울하게 살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하지만 우울해하고만 살기에는 시대가 너무 발전해버렸다. 즉 바깥 세상과 벽을 쌓
아놓고는 한시도 살 수 없게 되었다.
  이 땅덩어리의 6분의 1이나 되는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장애자들도 정상인들
과 융화되어 발맞추어 나가며 자립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작게는 가정의, 크게는 사회와 국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장애자를 
둔 가정에서는 자기 아이가 무엇을 해야 떳떳한 사회인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관찰하고, 사회는 그 능력을 인정해 주는 가운데 복지국가의 기틀은 마련되리라 믿는
다.
  햇빛마저 가린 골방에 숨겨두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을 주는 것으로써 부모의 의
무를 다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건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육하는 거니까.

     * 목발 부대의 설움 *
  장애자 친구끼리의 친목 모임이 있다.
  우리는 만나면 1차, 2차, 3차까지 다닌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우리들에게 붙은 별
명이다. 이름하여 '목발 부대'
  우리가 잘 가는 신촌의 우정집 아줌마가 붙여준 별명이다. 한꺼번에 20∼30명이 우
르르 들어가면 손님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지만 우정집 아줌마는 언제나 반가이 맞아주신다. 목발을 한꺼번에 다 모아두면 
40∼60개는 족히 되기 때문에 굉장한 위압감을 느끼게 해주는 모양이다.
  그런데 한번은 어떤 손님이 화장실을 가다가 그만 목발다발을 넘어뜨렸다.
  " 아니, 이건 웬거야? "
  목발 세례를 받은 손님은 투덜거렸다. 아줌마는 얼른 목발들을 집어서 방으로 갖고 
들어 오셨다.
  수난을 당하는 목발이 그 때처럼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다.
  벽 모퉁이에 목발을 한다발 묶어놓고 술을 마셨다. 누구도 목발때문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웬지 그쪽으로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곳을 나와 우리들 몇몇은 2차를 갔다. 하지만 그 어느 곳도 우정집 아줌마처럼 
따뜻하게 반겨주지 않았다.
  그런 눈빛에 더욱 당황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자리를 못잡고 서성거려도 자리
를 만들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겨우 찾은 자리에 앉으려하자
  " 이, 이쪽으로 오세요. 거긴 손님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어서... "
  이럴 때의 느낌은 굳이 말 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더욱 마셔대고 더욱 
큰 소리로 얘기했다. 그래야만 견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퍼마셔서 몸을 가누지 못해 비틀비틀 더 흉하게 걷은 모습들이 싫어서 술잔
을 뺏는 일이 나의 주업무였다.
  " 그만들 마셔요. 술 하고 웬수졌나? "
  " 마셔서 날려보내는 거야 "
  " 뭘 날려보낸다는 거예요? "
  " 세상 살기 너무 힘들다. 힘들어. 우리가 설 땅은 도대체 어디냐? "
  " 공중에 떠 있어야죠 "
  " 그래, 그게 해답이다. 그래서 이렇게 마시잖니? 장애자 문제, 장애자 문제, 떠들
어들대지만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어. 아- 좋은 방법이 있긴 있다. "
  " 그게 뭔데요? "
  " 몽땅 죽이는 거야. 폐기 처분하는 거라구. 한꺼번에 싸악! "
  몇 모금 마신 술 기운이 확 올라왔다. 장애자 문제는 정말 해결될 수 없는 것인지. 
가슴이 답답해진다. 숨이 터억 막힐만큼....

     * 효도할께요 *
  특별한 병을 앓지도 않았는데 네 살이 되도록 걷지를 못하는 아이가 집에 놀러왔었
다. 네 살이면 온갖 애교를 다 부릴 나이인데 그 아인 그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싫은 표정도 좋은 표정도 없는 전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 아이 엄마는 푸념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 요만 또래의 아이가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어요. 차라
리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아직 어리거니 하니까 괜찮은데요 친척들이나 친구들은 큰
일났다구 어쩐 일이냐고 걱정을 하는 통에 속이 상해서 만나기가 싫어요. 애 아빠 보
기도 미안하구요. 더구나 시어머니께서 다니러 오시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자꾸 실수
만 저지르게 돼요. 애 때문에 전 집안에서 죄인이 됐어요. "
  몇년 후 그 아줌마가 이혼을 했다는 아니 이혼을 당했다는 소식이 날아왔을 때 나
는 분노심에 몸을 부르르 떨었었다.
  아이가 그렇게 된 것이 어째서 엄마 혼자만의 책임이란 말인가? 
  이것은 가족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 해결해나가야 할 가정의 공동 과제다. 우리나
라 어머니들은 자식이 장애자가 된 것을 전생의 죄까지 들먹거리며 당신 혼자서 그 
책임을 다 뒤집어 쓰고 한국적인 피맺힌 한에 서려 한평생을 속죄하며 살려는 쓸데없
는 바보이다.
  나는 지금 책임전가의 문제를 놓고 발뺌하는 것이 얄미워서가 아니라, 우리 나라 
가족 구조에 나타난 이상형에 대해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아줌마 뿐만이 아니라 장애자 단체의 상담실 문을 노크하시는 어머니들의 상당
수가 바로 이런 고민을 호소하신다고 한다.
  이 얼마나 한심한 현상인가?
  우리 때문에 어머니들이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해야 한다면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
나게 한 책임은 누가 져야하는 건지....
  그때 그 아줌마는 네 살씩이나 먹은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 주며 긴 한숨을 내뿜으
면서 말했었다.
  " 못걸어도 좋으니 머리나 영리했으면 좋겠어요. 근데 지금으로 봐선 통 가망이 없
는 것 같아요. "
  " 아유, 애기 엄마, 조금도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아이가 얘만 했을 땐 어림도 없
었다우 온 몸이 다 뒤틀어졌었고 말도 제대로 못했어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니까 차
차 나아집디다. 우리 딸아이라서가 아니라 아주 똑똑해요. 조금도 염려하지 말고, 마
음 든든히 먹고 잘 키워요. 두고 보라구. 나중에 큰 효자가 될 테니... "
  두 어머님의 모습이 어찌나 처량해 보이던지.

     * 고진감래 *
  " 섭섭하게 생각진 말게. 소개하신 분을 생각해서 자네를 오늘부터 출근하라고 하
긴 했네만. 사실 우리 회사 형편으론 사람 한 사람을 더 쓴다는 것이 좀 무리일세. 
월급은 많이 못 주네. "
  그 말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입술을 깨물지 않으면 ' 알겠습니다. 그만 두지요 '
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늙으신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꽉 깨
물고 고개를 숙인 채, 꼿꼿이 서있기 위해 짧은 다리를 발끝으로 지탱하느라 진땀까
지 바질바질 났다.
  그 다음날 러시 아워에 인파들 속에 묻혀 겨우겨우 만원 버스 속에 몸을 싣고 이런 
결심을 했다.
  뼈가 으스러져도 지각, 조퇴, 결근 따윈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가슴을 깎아내는 고
통이 있더라도 꾹 참아낼 것.
  절룩거리며 수위실 안으로 들어가
  " 아저씨 저 오늘부터 정식 출근이에요. 잘 부탁합니다. "
  라고 인사를 드렸고, 회사 안에서는 남들이 하기 귀찮아 하는 것까지 모조리 도맡
아 했다. 또 직원들 사이에서도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고 진짜 무진 애를 썼다.
  이렇게 하기를 반년,
  수위 아저씨 뿐만 아니라 회사 사람들도 모두 자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남들보다 
보수는 적었지만 그래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열실히 일만 하던 어느날 사
장님의 호출을 받고 들어갔다.
  " 자네의 출근부를 보니 자네 도장이 안찍힌 곳이 없더군. 정말 장하네. 진짜 놀랐
어. 이젠 내가 자네에게 부탁을 할 차롈세. 힘들더라도 나를 좀 도와 주게. 오늘 내
가 자네를 부른 것은 자네한테 선물을 주기 위해서야. 그동안 너무 박봉이어서 미안
했네. "
  그동안의 설움과 어려움이 그 순간 다 씻겨내린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었으리라. 이 
경우를 두고 볼 때 자기 사랑은 자기가 만든다는 것이 맞는 말 같다. 그리고 쓴 것 
뒤에는 단 것이 온다는 말도 맞는 말이고 말이다.

     * 충격 *
  " 이모야, 병원에 갔다 왔나? "
  6살짜리 미야가 거의 반 년이 지난 후에 왔는데도 잊지 않고 이런 질문을 했다. 지
난 번에 미야는 이렇게 물었었다.
  " 이모, 이모는 왜 걸어다니지 않는데? "
  " 아퍼서. "
  " 그럼 병원에 가면 되잖아? "
  " 그래, 그럼 병원에 갈께. "
  난 달리 설명할 말이 없어서 이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미야는 깜찍하게도 그걸 기
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왜 거짓말을 했던가 후회스러웠다. 그래서 그날은 자세히 설명 해 주었다.
  " 이모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란 병에 걸렸었어. 그런데 그 병은 아주 무서운 병이
야. 한번 걸리면 이모처럼 이렇게 걸어다니지를 못하게 되거든. "
  " 근데, 왜 그런 무서운 병에 걸렸는데? "
  " 응, 미야 가끔 감기 걸리지? "
  " 응 "
  " 이모 병도 그렇게 감기처럼 이모도 모르게 거리게 된 거야 "
  미야의 질문에 신경이 쓰였던 것은 사실이었는데, 그 후론 절대 물어 보지 않았다.
  이런 고충은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우리 친구들이 다같이 겪고 있을 것이다. 그런
데 대부분 걷지 못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고 그런 소리 하면 못쓴다고 야
단을 치기 때문에 아이들은 더욱 호기심을 갖는다.
  호기심이 자꾸 커지면 그 아이들은 우리를 아주 딴 나라에서 온 괴물 우주인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 아이들이 컸을 때도 그런 의식이 잠재적으로 남아 있게 되므로 장애자에 대한 
인식은 아주 그렇게 고정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올바른 인
식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 같다.
  굳어진 고정 관념으로 아주 좋은 예가 있다. 나이 많으신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은 
우리를 보면 혀를 끌끌 차신다. 그런데 한번은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나를 똑바로 쳐
다보며 3초 동안 혀를 찼다. 어찌나 가소롭던지,
  어울리지 않는 혀차는 소리에 이쁘장한 얼굴이 악마처럼 보였다.
  또 미장원으로 파마를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 손님, 자리좀 옮겨 주시겠어요? "
  내 머리를 만져주던 아가씨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아가씨가 와서 이런 
요청을 했다. 대답하려던 참에 아까 그 아가씨가 달려오더니 눈짓으로 자기 친구를 
책망했다.
  거울에 비춰진 그 얼굴들이 나에게 작은 미소를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파마가 다 
끝나고 나서 빗질을 해주며
  " 머리결은 참 좋네요. " 라는 칭찬 한 마디에 나는 그만 심한 우울증을 느끼지 않
을 수 없었다.
  지나친 소심증일까? 하지만 이렇게 사소한 대화 중에서도 작은 충격을 받을 떄가 
종종 있다.
  ' 귀희 같은 사람도 사는데 ' 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 아니 어떻게 된 거야? 너무 
소식이 없어서 자살한 줄 알았어 ' 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난 충격을 받아야 했다.
  이런 충격들은 나를 자꾸 위축시킨다. 충격 속에서 의욕을 잃게 되는 것이다.
  난 가끔 바람을 쐬러 훌쩍 낯설은 곳을 찾아 떠날 떄가 있다. 좀 더 신선하고 상쾌
한 바람 냄새가 그리워서 말이다.
  서울 거리를 벗어나면 콱 막혔던 가슴이 갑자기 펑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함에 감탄
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바깥 세상은 날 맞이할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평할 수가 없
었다. 너무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에....
  휠체어론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작은 언덕이 있었다. 그래서 난 그만 두자고 했지만 
언니는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올라가보자고 했다.
  그래서 휠체어는 옆에 세워 놓고 언니 등에 업혀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
다. 등산복 차림의 남자들 한떼가 몰려 내려왔다.
  " 야 저년들 레즈비언 아냐! "
  레즈비언 이건 호모이건 그 정도는 다 좋다고 치자, 다만 갑자기 얻어들은 욕 때문
에 분하고 억울했을 뿐이다.
  바깥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추잡한 면들이 나에겐 몹시도 낯설다. 그래서 
더욱 당황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 상처받은 모정 *
  " 결혼하기도 힘들었지만 결혼하고 아이들이 생기니까, 더 힘이 드는 것 같아요. 
아이가 어릴 적에는 잘 몰랐었는데 철이 들기 시작하니까, 더욱 더 힘들어져요. 자기 
엄마가 다른 엄마들 하고 다른 모습이라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 생기나봐요. 한번은 
이런 일까지 있었죠. 동네 아줌마들이 가게 집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대요. 그러다 
우리 아이가 지나가는 것을 보구 아유 쟤쟤 바로 쟤네 엄마가 다리를 절잖우, 그러더
래요. 그래서 우리 아이가 아줌마들 참 나쁜 사람이예요. 우리 엄마가 아줌마들한테 
뭘 잘못한다고. 우리 엄말 흉보는 거예요 하며 대들었다구 하더군요. 그랬더니 아줌
마들은 이 당돌한 아이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병신 자식이라느니 하면
서 어린 가슴에 못을 박았어요. 다행히 친하게 지내는 옆집 아줌마가 알려주길래 부
리나케 뛰어갔지요. 하지만 말이 뛰는 거지, 보통 사람들이 걷는 것만도 못해요. 마
음은 급하고 몸은 말을 안듣고, 옆집 아줌마는 빨리가야 한다고 재촉하고 정신이 없
는 바람에 그만 넘어져서 흙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더 절름거리며 나타난 제 모습이 
우리 아이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나봐요.
  땅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서 울고 있던 아이가 엄마는 뭣하러 나왔냐며 돌을 던지
더군요. 그때 모든 걸 다 끝내려 했어요. 하지만 끝낸다는 것이 그리 쉽진 않더군요. 
악이 받치니까 눈물도 나오지 않았어요.
  아이를 업고 집으로 들어가면 깨끗할 텐데 나한텐 아이를 업을 만한 힘 좋은 다리
가 없었어요. 내 다린 내 몸을 지탱하기에도 힘이 드니까요.
  고맙게도 옆집 아줌마가 우리 아일 업어다 줬어요. 그래서 집에 와서 목욕을 시키
며 타일렀지요.
  하지만 아이의 눈빛은 전혀 나를 이해 못하는 것같아 가슴이 메어지듯 숨이 막혀왔
어요. "

     * 함께 춤을 추실까요 *
  " 빨리, 날 잡자. "
  "그래, 잡자. "
  정말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이런 즐거운 표정을 지은 분들은 그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여기서 가는 날이란 디스코장에 가는 날을 뜻한다.
  두 분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디스코장엘 가겠다고 했다. 그 말엔 어떤 복수심이 
서려 있는 듯했다. 춤은 건강한 사람들의 향유물이니 말이다.
  우리 친구들은 춤이라는 단어에 묘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흥겨운 음악이 나오면 
저절로 어깨 박자가 맞추어지기 마련인데, 우리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제한다.
  한번은 김현 위원님(내일은 푸른하늘의 PD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 미스 방, 오늘 잡지 컬럼에서 봤는데 외국에서는 휠체어를 탄 장애자들도 춤을 
아주 잘 춘다고 하더군. "
  " 저도 그런 소릴 들었어요. "
  " 근데 말야, 남자들이 아주 당연하게 휠체어를 탄 여자한테 가서 같이 춤을 추자
고 신청을 한다데. "
  " 얼마나 좋을까요? "
  " 우리 나라 남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거지? "
  문득 한 언니의 말이 생각났다.
  친구들을 따라 디스코장엘 갔었다. 친구들이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
라보고 있는데 웬 남자가 다가왔다.
  " 같이 한번 나가시죠? "
  언니는 사색이 되어
  " 저 전, 춤을 못춰요 "
  하자 남자는 안하무인격으로 
  " 못추실수록 더욱 좋습니다 "
  하며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웬지 선뜻 고백하기가 싫어 언니는 계속 사양을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무례하게도 언니의 손을 덥썩 잡으며 다짜고짜 잡아끌더라는 것이
다. 그때서야 겁에 질려 고르지 못한 목소리로
  " 전 장애자예요 "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홀안 가득 퍼진 음악이 그 말을 삼켜버렸기 때문에 그 사람은 못 알아들었
는지 반문을 했다.
  " 뭐라구요? "
  " 자, 장애자라구요. "
  그 때, 그 언니는 얼마나 참혹했을까? 그러나 정말로 참혹한 건 그 다음이었다. 얼
굴빛이 확 변한 그 남자는 " 실례했습니다 " 란 말을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도망가듯 
사라졌다고 한다. 함께 춤을 추자고 왔을 때의 그 다정함과 예절과 관심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때 그 남자는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까?
  그 언니정도면 충분히 춤을 출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당장 힘들었다면 말벗이라도 
되어 줄 수는 없었을까 말이다.
  장애는 다리나 팔의 불구이지 성의 불구는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멋대로 우리
의 장애에 성까지 포함시켜버린다. 그리곤 영원한 피터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 사람 구실은 제대로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 "
  늘 이런 식이다.
  아! 성을 잃어가는 이 슬픔이여!

     * 환자 취급은 싫어요 *
  병원만큼은 목발이나 휠체어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요즘 병원들은 감기 환자만 받는지 계단 투성이다.
  둘째 언니가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병문안 갔다가 생긴 일이다. 계단이 딱 세 개가 
있었다.
  누군가가 앞을 들어주지 않으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단 앞에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모두가 쌀쌀한 찬 바람만 일구며 휙휙 지나쳐 버렸다.
  그런데 국민학교 3, 4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 어린이 둘이 걸어나오다가 나를 발
견하곤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 좀 도와드릴까요? "
  아이들은 나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이 둘이서 휠체어의 양쪽을 잡아 들
어 계단을 올려주는 거였다.
  어찌나 대견스럽던지 볼에다 입을 맞춰주고 싶었다.
  " 고마워요 "
  " 아니예요. 빨리 나아가지고 가세요 "
  그 말이 귀여우면서도 짜릿하게 심금을 울렸다. 꼬마들 얼굴을 떠올리며 엘리베이
터 앞에서 멈췄다.
  하지만 면회 시간 이외엔 언니가 있는 3층엔 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만 낙심을 
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때 마침 내 모습이 안되었던지 청소부 아줌마가 안내실에 부탁을 하면 된다고 일
러주었다. 나는 살았구나 하며 안내실로 갔다.
  " 아저씨 3층에 가려고 하는데요 "
  그러자 아저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인터폰을 누르며
  " 휠체어 환자가 있어요. 3층에 세워주세요 " 하고 말했다.
  환자! 환자라는 표현이 듣기에 거북살스러웠지만 이런 것까지 불평을 한다면 내가 
너무 옹졸한 것이리라.
  갑자기 굳게 닫혔던 엘리베이터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아가씨가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 3층엔 왜 가시는 거예요? "
  " 병문안 가요 "
  환자가 환자를 병 문안 간다는 것이 퍽이나 이상했던 모양이다.
  엘리베이터의 어지러움 때문인지 눈 앞이 노랗게 현깃증이 일었다.

     * 걸어야 한다 *
  " 얘얘, 저기 좀 봐. 꼭, 트위스트 추는 것 같다. 그치? "
  이렇게 수근덕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아인 목발 없이 걸을 수는 있었지
만 굉장히 심하게 온 몸을 흔들며 걸었다.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감과 코
믹함을 동시에 느끼에 했다.
  목발을 짚으면 누가 봐도 안정감 있고 또 본인도 힘이 덜 들이고 걸을 수 있을 텐
데 이상하게 그 아인 목발이 싫다고 했다. 자기가 왜 목발을 짚어야 하느냐는 거였
다. 보장구에 대한 묘한 심리가 있는 것 같다. 
  어떤 언니는 9살 때 처음으로 보조기와 목발로 보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보
행의 기쁨보다는 보조기의 불편함과 물리 치료의 아픔이 어린 나이에 큰 고통이었다.
  이것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보조기와 목발을 보따리에 싸서 다락에 넣어버렸다. 때
문에 시원할 줄 알았는데 왠걸 다락 속의 보조기가 녹이 슬어가듯 자기의 마음도 녹
이 슬어 갔다.
  그렇게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어느날 장애자 모임에서 만난 고마운 동료의 권유로 
다시 보조기를 신게 되었다. 거의 10년 동안 보행을 중지했던 몸이라 몸이 완전히 굳
어져서 바로 서려해도 30도 정도나 허리를 펼 수 없었다.
  하지만 눈물이 펑펑 쏟아질 정도의 아픔을 참고 노력한 결과, 이제는 그 거추장스
러운 휠체어가 오히려 다락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장애자에게 있어 보조기의 착용과 물리 치료는, 치료라는 개념을 떠나 단순히 장애
의 현상 유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사실보다는, 단지 지겹고 힘든 일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운동 능력은 계속 활용하지 않으면 아주 약화된다고 한다. 이 사람도 힘들
더라도 참고 목발을 짚고 다녔으면 이러한 고통 없이 더 쉽게 더 편안히 잘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앨범을 보다가 모임 언니의 서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었
다. " 어머, 언니! 언니도 일어설 수 있었네? "
  " 말두 마. 공연히 걷겠다고 보조기 신고 다니다가 열 발자국도 못가서 쓰러지고 
또 쓰러져, 이 턱뼈가 부러지고 난 후에 고물 장수한테 엿바꿔 먹었단다. "
  하지만 턱뼈 아니라 목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걸을 수 있으면 걸어야한다. 
걷지 못하는 설움이 얼마나 큰 것인데....

     * 너무 합니다 *
  어떤 때가 진짜 억울한 걸까?
  어렵게 모든 학교 과정을 마치고, 강사 자리라도 얻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선배가 있다. 그 선배가 술에 만취되어 신세 타령을 했다.
  " 난 말야. 내가 장애자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거든. 근데 요즘 와서 그걸 절실히 
느끼고 있어. 글쎄, 총장하고 면담을 하는데 서슴없이 이걸 요굴하더군. 자네 한번 
여기서 저기까지 걸어가 보게. 젠장, 미스 코리아를 뽑는지, 밸은 꼴리지만 어떡해. 
할 수 없이 일어나서 걸었지. 절름거림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는 절름거
림 시사회였다구. "
  " 왜 그렇게 얘기해요. "
  " 너두 부딪쳐봐라.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매서운 세상이야. 그런데 그 다음 말
이 더 일품이더군. 머리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리더니 자네, 그 지팡이가 없이는 못걷
나? 하잖아. 빌어먹을! 지팡이가 없이도 걸을 수 있다면 왜 짚고 다니겠어. 무식한 
자식 같으니라구. "
  내가 직접 당한 것과 똑같은 아픔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 놓고도 발 붙일 
곳이 없다니, 그 동안의 그 노력을 어디에서 보상받으란 말인가?
  또한 첨부되는 건강진단서도 오장을 뒤집어 놓는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감정하기 
위해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돌 조각 취급을 받으니 말이다.
  그런데 억울한 건 감정이 끝나기도 전에 가짜라는 오판을 내리는 거다. 건강진단서
는 고용주를 위해서 첨부되는 것이 아니라 고용인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더욱 괘씸한 것은 건강진단서, 아니 번연히 자기 눈으로 면접자의 상태를 보면서도 
  " 자네 100미터를 몇 초에 뛸 수 있나? "
  하는 식의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런 순간 얼마나 많은 장애자 친구들이 절망을 하며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
게 되는지 모르리라.
  ' 아이쿠, 틀렸구나. ' 이런 직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고 했다. 그런데 또 이런 경
우도 있었다.
  의상학을 전공한 여학생인데 장애가 심하지 않기 때문에 서있을 때는 거의 완벽한 
아가씨이다.
  하지만 사회의 눈은 너무나 정밀한 것 같다. 명동에 있는 양장점에 디자이너로 취
직을 했다며 전화가 왔었다.
  " 언니, 월급 타면 한턱 낼께요 "
  " 그래! 난 뭘 사달라고 할까, 생각해 놓고 있을께 "
  그러고 나서 꼭 일주일 후였다.
  " 언니, 지금 나 만나줄 수 있겠어? "
  난 급한 원고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 응, 내가 시내 나가는 길에 전화할께. " 하고 말했다.
  " 전화 못 받아요. "
  " 왜? "
  " 그만뒀어요. "
  " 아니, 왜? "
  " 나가래. "
  " 왜? "
  " 손님한테 보기 안좋데. "
  왜? 왜? 왜? 난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분노심이 용광로처럼 끓어올라 목구멍을 막
아버렸다.
  수화기를 통해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웬지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 울지마! 뭐하러 우니? 그럴 줄 몰랐어? "
  " 막상 당하고 나니까... "
  말끝을 채 맺지 못하고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인간이 감수하기엔 너무도 잔
인한 고통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취직을 한 후에도 문제는 계속 발생한다. 바로 진급이다. 직장이라는 
것은 어쩌면 진급하는 맛에 정력을 쏟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장애자라는 신분 
때문에 어느 정도 올라가다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버린다.
  만년 상사! 왜? 우리한텐 계급장을 달아주지 않습니까?

     * 슬픈 호소 *
  " 친구를 만나려고 찻집에 갔었거든. 근데 찻집 아가씨가 급히 나오며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건네 주더라. 그저 목발로 카운터를 한대 내려칠까도 했었지. 하지만 참
았어. 그래 웃으면서 동전을 받아들곤 여유있게 걸어들어가 친구 앞에 앉았지. 목에 
힘주며 점잖게 말했어. 여기 커피 둘. 그러자 그 아가씨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로 
변하더구나. 어쩔 줄 몰라하며 죄송하다는 말을 번복하는 그 여자가 갑자기 불쌍하다
는 생각이 들어서 난 마음 속으로 준비해두었던 얘기를 차마 하지 못하고 그저 웃어
주기만 했어 "
  나는 이 말을 들으며 그 여자의 태도에 아니, 이 사회의 부당한 처사에 격분하면서
도 그 친구의 침착한 행동엔 박수를 쳤다.
  장애자 = 거렁뱅이라는 사회의 통념들....
  이런 통념들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솔직히 암담할 뿐이다. 아무래도 생활 능력이 
정상인들보다는 부족하기 때문에 장애자들의 구걸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하지
만 그렇다고 해서 장애자를 곧 거렁뱅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저열한 판단이다.
  겉모양이 남루한 사람은 깔보고, 아무렇게나 대해 주고, 겉모양이 번지르르한 사람
한테는 온갖 아부를 아끼지 않고 귀빈 접대를 해주는 세상이라면 굳이 인격을 쌓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치장만 잘 하고 다니면 언제라도 신사요, 숙녀가 
될 테니까 말이다.
  사람을 대할 땐 그것이 사람이라는 생각 외엔 다른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장애자에 대한 폭력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은 말 할 것도 없고, 목발을 짚은 사람 역시 자기 몸을 지탱하기도 힘든 상태
인데 방어 능력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샌드 백처럼 마냥 얻어 맞기만 한다.
  깡패한테 잘못 걸려 흠씬 두들겨맞고 전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을 본 적
이 있다.
  장애자를 구타해서는 안된다는 법을 만들어 주십사 하는 부탁보다는 도덕적 양심으
로 우리를 보호해 달라는 호소를 드리는 바이다.

     * 혜택이 아닌 혜택 *
  장애자라고 특별한 혜택을 주는 것 역시 유쾌하지 못한 현상이다. 
  내 친구는 취직을 했는데 남들한테 다 돌아가는 숙직이 자기한텐 돌아오지 않더란
다. 그래서 이상히 여겨 알아봤더니 위에서 자기한테는 숙직을 빼라고 했다는 것이
다. 보통 사람 같으면 옳다구나 잘됐다 했겠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았다.
  " 저도 이 회사의 가족입니다. 가족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고 어떻게 가족
으로서의 권리만을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다른 가족들에겐 주어지지 않는 특별한 혜
택은 원치 않습니다. 내 능력껏 일하고 싶습니다. "
  이렇게 해서 친구는 불평등의 혜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한다.
  난 흔히 장애를 앞세워 특권을 요구하는 장애자들을 본다. 마치 장애가 자랑인양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아간다는 듯이 요구한다.
  난 그럴 때가 가장 가슴이 아프다. 권리와 의무가 균형을 잃은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자기는 아무 것도 베풀 수 없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기는 
당연히 혜택을 받아야 하는 특별한 존재로 착각하는 것은 정말 가관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 복지제도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우리들 스스로 일해서 
스스로의 삶을 영위해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돈이라는 것은 참 묘한 것이다. 자기가 직접 벌어보지 않으면 돈의 귀중함을 잘 못
느낀다. 또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번다는 의미보다는 자신도 뭔가를 한
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사람은 일을 해야한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음이다. 살아서 죽음
을 느끼는 것 만큼의 고통은 없으리라.
  30년 만에 처음으로 직장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고 기뻐하던 분의 얼굴은 정말 천
국이었다.
  그분이 얻은 직장은 출판사인데 장애가 몹시 심하기 때문에 출 퇴근이 힘들어 교
정지를 가족들이 갖고 오고갔다. 그러한 배려를 해준 출판사가 한없이 고마웠다.
  이렇게 생각만 잘 하면 얼마든지 편리한 조건으로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배려를 몹시 귀찮아 한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좀 역설같지만 난 또 이럴 때도 언짢다. 꼭 장애자여야 한다는 단서를 붙여 사원을 
모집하는 것 말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경쟁 속에서 떳떳하게 직장인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일부 얄
팍한 사람들은 장애자를 고용하면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나비같이 날아다니지도 못할 
것이고, 임금을 조금 주어도 되는 등의 약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한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가끔 본인도 장애자인 경우도 있다. 우리 서로 잘 해보자는 그
럴듯한 명분을 앞세워 거머리처럼 피를 빨아먹는다.
  어떻게 이렇게 파렴치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떤 아가씨가 흥분을 해가지고 날 찾아온 적이 있었다.
  " 세상에 이런 법도 있어요? 무료로 기술을 가르쳐주고 취직까지 시켜준다는 대문
짝만한 광고를 보고, 희망을 갖고 찾아갔는데요. 글쎄 취직은 커녕 석달이 지났는데
도 아직 기술도 안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래서 고소를 할려구해요. "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겪인 이 싸움 결과는 말하나 마나리라.

     * 벗겨버릴 수 없는 굴레 *
  나는 내가 사람들 눈에 여자면 여자, 학생이면 학생, 이렇게 비쳐지기를 원했지만 
사람들은 여자이고, 학생이기에 앞서 장애자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보통 사람들이 지각을 하면 그냥 지나쳐버리면서도 내가 지각을 하면 몸이 불편하
니까 라는 이유를 꼭 붙여준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남들보다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더 한다. 하지
만 어떤 때는 "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까? " 하는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더우기 부담스러운 것은 장애자를 특수한 천재쯤으로 생각해서 우리들이 이
루어놓은 좋은 결과를 마치 머리가 무지하게 좋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거저 얻어낸 
걸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애썼던 그 피나는 노력은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아주 당연한 것으
로 받아들이며 우리한테 지나친 기대를 걸고 있다. ' 몸이 성치 못하면 공부라도 잘 
해야지! ' 하면서 말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장애와 연결시켜 생각하려 할 때가 가장 속상하다.
  석사 논문을 낼 때였다. 논문 심사를 받기위해 교수님들이 쭉 앉아계신 앞에 서게 
되었다.
  교수님 첫 말씀이
  " 몸도 성치 못한 사람이 쓴 논문이니, 심사하기가 좀 뭣하구먼. "
  눈물이 핑 돌았다. 나를 언제나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장애자라는 굴레가 그때처
럼 치욕적이었던 적은 일찌기 없었다.
  교수님의 고마우신 뜻은 잘 알면서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 교수님, 저도 논문을 제출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학생이예요. 휠체어에 탄 제
모습을 보지 마시고, 그 논문을 제출한 방 귀희라는 학생으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
  하루를 살아가면서 내 자신이 장애자라는 생각을 할 때보다는 평범한 사람 그 자체
로 느껴질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이런 마음에 던져지는 돌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장애자로 다시 돌아가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 이런 무시 *
  무지무지하게 큰 건물의 수위실에서였다. 언니는 출입증을 얻으러 본관으로 갔고, 
난 추위를 피해 수위실로 들어갔다.
  " 왜 왔어? 누굴 만나러 왔어? "
  처음엔 나한테 하는 말인 줄 몰랐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
제서야 나한테 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그 아저씨 얼굴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대답을 않자 다시 큰소리로 물었다.
  " 왜 왔냐니까? "
  무례함을 속으로 나무라면서 겉으론 활짝 웃으며
  " 왜요? 아저씨 " 하고 반문했다.
  그저 사실대로 얘기를 했어야 옳았을 텐데, 비뚤어진 열등감이 이렇게 반문을 하게 
만든 것이다.
  " 그래, 언제부터 아팠어? "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자존심을 억누르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 돐 때요 "
  " 그래, 전혀 못 걷나? "
  '걸으면 뭐하러 휠체어를 타요. ' 라는 말은 가슴 속에 녹이고 
  " 네. " 해버렸다.
  " 조금도? "
  " 네, 조금두요. "
  " 근데, 여긴 왜 왔어? "
  내가 온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던 모양이다.
  " 도서실에 갈려구요. "
  " 도서실은 왜? "
  " 찾아 볼 책이 있어요. "
  " 무슨 책? 여긴 소설책은 별로 없는데. "
  소설책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을 너무너무 무시하는 태도에 난 말문
이 막히고 말았다.

     * 벽 *
  한 가지 일을 결정내리기 위해서는 너무나 큰 홍역을 치르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다. 
  쉽게 생각해도 될 것을 너무 깊이 생각하는 낭비를 저지른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
고 있는 가장 큰 결점이다.
  예고없이 닥치는 일에 보통 사람들보다 더 큰 갈등을 겪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진을 찍을 때의 일이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여럿이 모여들었는데 유독 한 사람
만이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같은 멤버의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을 빼놓고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권고를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사람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는 한다. 균형을 
잃은 자신의 모습이 찍혀지는게 화가 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정말 장애자다운 행동이다. 무슨 일이든지 당당하게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훨씬 멋있어 보일 것이다.
  입버릇처럼 내뱉는 병신이란 말에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인다거나 늘 다른 사람들
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 같은 부담을 가지고 있으면, 산다는 것이 무척이나 피곤해진
다.
  육체에서 오는 장애도 견디기 어려운데 마음의 장애까지 겹쳐진다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마음의 장애의 덫에서 한시라도 빨리 탈피해야 한다. 그 덫에 걸려있는 한 결코 자
유로울 수 없다. 장애는 불편한 점은 많으나 결코 부끄러운 것은 없다. 불편을 부끄
러움과 혼동하기 때문에 그 불편은 불능한 것으로 변한다.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벽은 또 있다.
  한 남자가 이런 고백을 했다. 자기가 끔찍히 사랑하는 여자는 자기 곁을 떠났고,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는 여자는 자기가 사랑하지 않노라고.
  손바닥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렇게 헛손질만 하고 있으니 소리가 날 리가 없다.
  그런데 또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이
  " 난 지금 어떤 여자를 무지무지 사랑하고 있어요. 또 그 여자도 날 무척 사랑하구
요. "
  " 그럼 됐네요. "
  " 하지만 우린 사랑할 수 없는 사이예요. "
  " 아니 왜요? "
  " 그 여자도 장애자거든요. "
  이것은 무슨 딜레마인가?
  사랑할 수 없는 사이 그것이 장애 때문이라니.
  무척 심각한 얼굴로 
  " 우리들은 꼭 정상인 하고 결혼을 해야하나요? "
  라고 묻던 남학생이 있었다.
  난 완강히 이렇게 못박았었다.
  " 결혼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거야. 꼭 정상인이어야 한다는 단서는 필요치 않아. 
"
  " 장애자 복지사업을 하시는 분이 그랬어요. 장애자는 꼭 정상인하고 결혼을 해야 
한다구요. 자녀 교육 등 문제가 되는 것이 너무 많다고 하셨어요. "
  " 틀린 말은 아냐. 자기의 장애에서 오는 불편을 상대방이 커버해 줄 수 있다면 아
주 바람직하니까. 하지만 장애자의 결혼이라고 해서 보통 사람들과 달리 꼭 정상인이
란 조건이 붙는 것이 난 싫은 거야. 다 똑같은 사람인데 우리의 결혼만 유별나게 조
건이 한 가지 더 붙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못되잖아. 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장
애자 끼리는 서로 중성이 되고 말꺼야. 이 이상 더 큰 불행이 어디 있어. "
  내 말을 이해해 주는 눈빛이었다.
  장애자 끼리의 묘한 경계심. 그건 왜 생긴 것일까?
  그건 아마 서로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또 서로가 자기는 장애의 범주에서 벗어
나고 싶은 욕망에서 생긴 자기 보호본능일 것이다.
  속으로는 서로 무척 좋아하고 있으면서 가까와지지 못하도록 서로 고통스런 인내를 
하고 있다.
  꼭 이래야만 하나?
  나란히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을 꺼려하고, 나란히 거리에 나가는 것을 피하고, 나
란히 걸어가는 것을 금기로 여긴다.
  이렇게 우리들 자신도 벽을 허물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남들한테만 벽을 헐어달
라고 부탁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 자신이 우리를 이겨내야 다른 사람들도 우리의 장애를 하찮은 것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플라톤은 승리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극복이라고 했듯이 우리
는 인생의 승리를 위해 이 벽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 벽은 우리들 자신의 소유로 되어 있기 떄문에 누구한테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
고, 우리 자신의 허락만 받으면 된다.
  그러니 빠른 결정을 내리길.

     * 우리들의 목욕탕 *
  가장 가보고 싶은 곳 목욕탕. 가장 가기 싫은 곳 목욕탕.
  언젠가 앙케이트지에 이렇게 썼던 기억이 난다. 이 소망은 아직도 여전하지만 이제
는 충분히 상상이 간다.
  하지만 영영 못가볼거란 생각에 희미한 아픔이 가슴을 파고든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목발을 짚은 친구들은 목욕탕에 간다는 거였다.
  " 어머, 그랬니? 어쩜! 그래, 괜찮니? "
  " 언닌 괜찮긴, 목욕탕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그 수치심을 언닌 이해 못할 꺼야. 
유일하게 상처를 감출 수 있는 옷마저 벗겨져 나간 형편없는 몸을 목발에 의지하며 
들어서면요, 한꺼번에 와서 쏟아지는 사람들의 눈빛 세례에 난 다리에 힘이 빠져 그
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요. 눈물을 감추려고 머리를 물 속에 푹 박아버린다구요. "
  그 말이 피부를 자극시켰다. 하지만 이 아인 그래도 행복한 거다. 장애가 심한 사
람들에겐 목욕이라는 것이 매우 힘든 행사이다.
  인간한테 가장 큰 욕망 중의 하나인 목욕의 즐거움까지도 억제당하고 있다는 생각
을 하면 서글픔이 겨울 바다의 파도처럼 매몰차게 밀려온다.
  몸을 깨끗이 씻고 새 옷을 입으면 날개가 돋을 것만 같이 가볍고 상쾌하다.
  " 언니 언니, 근데 언니는 목욕을 어떻게 해요? "
  못보여줄 것을 보여준 것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 비밀이야, 그건. "
  비밀이란 건 원래 조그만 것도 크게 보이는 법이다. 사람들은 모든 사물을 확대경
을 놓고 자세히 들여다 보기를 원하지만 인간에겐 자기만이 간직하고 싶은 비밀이 있
다.
  특히나 남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우리들은 그 호기심에 대항하는 방편으로 가
슴 깊은 곳에 비밀을 갖게 된다.
  비밀이란 추한 것도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감추어주니까. 몽땅 다 펼쳐서 보여주는 
것보다는 대충 숨기는 것도 가끔은 필요한 것같다.
  하지만 이런 비밀은 무척이나 나를 슬프게 한다.
  우리들이 마음 놓고 청결의 욕구를 채울 수 있도록 우리들을 위한 공중 목욕탕이 
생겼으면 한다.

     * 데이트를 방해하는 것들 *
  가끔 데이트를 하고 싶을 떄가 있다.
  다방에서 만나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공원을 산책하는 그런 데이트 말이다.
  가끔 데이트를 위해 친구를 만나도 어디로 갈 것인가를 정하는데 거의 30분 정도나 
망설여야 한다. 계단이 있어선 안되고, 자리가 좁아선 안되고, 사람이 많아선 안되
고. 거기서부터 나의 데이트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자꾸 
이런 것들과 담을 쌓고 살게 되고, 아예 데이트를 못하는 사람으로 되어버렸다.
  중학교 2학년인 한 소녀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 언니, 난 친구를 무척 갖고 싶어요. "
  " 그럼, 친구를 사귀렴? "
  " 잘 안돼요. "
  " 왜? "
  " 어떤 애가 나하고 친구하고 싶다고 했어요. "
  " 그런데? "
  " 근데 나하곤 친구가 될 수 없대요. 친구란 같이 행동을 해야 사귈 수 있는 거래
요. 분식점에도 같이 가야 하고 영화 구경도 같이 가야 하고, 등산도 같이 가야 하
고... "
  그 소녀의 커다란 눈엔 어느새 눈물이 핑 돌아 있었다.
  " 그건 친구가 아냐. 진정한 친구란 행동을 같이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같이 하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보자. 틀림없이 좋은 친구가 나타날거야. "
  아무리 철딱서니 없는 아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그런 충격적인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싶어 얄미웠다.
  티없이 맑고 순수해야할 소녀의 마음에 어찌 그런 허영심이 가득 차 있는지 이해가 
안간다.
  하지만 나는 그 책임을 우리들이 행동하는데 불편을 주는 시설 쪽으로 돌리고 싶
다.
  극장, 공원, 음식점 뿐만 아니라 전시장, 박물관, 동물원, 지하도, 육교.... 그 어
디를 가도 걸리고 막히는 것 투성이다.
  이런 것들이 더욱 장애를 가중시켜 꼼짝없는 장애자로 몰아붙인다.
  모든 건물, 모든 시설들을 장애자를 위해 만들어달라는 건 절대 아니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이용하는 공공 건물이니만큼 조금의 배려가 있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다.
  그래서 데이트 중 적어도 장소때문에 장애를 느끼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 헛소리 *
  "아유, 글씨 좀 잘 써라. 어째 맨날 국민학생 같으냐. "
  손에 힘이 없기 때문에 꼭꼭 눌러 써 버릇하던 습관이 들어서 나는 글씨 쓰는 일이 
거의 중노동이다.
  타자기로 친 것처럼 반듯반듯한 내 글씨, 멋은 없지만 그래도 글씨마다 정성이 담
긴 아주 깨끗한 내 글씨에 난 만족하고 있는데도 주위에서는 이렇게 성화를 부린다.
  그런데 며칠 전이었다.
  " 어머, 무슨 글씨가 이래요? 꼭 지렁이가 꾸물거리고 기어가는 것 같네요. "
  내 생전 그렇게 엉망인 글씨는 처음일 정도로 악필이었다. 그런데 그 글씨엔 아주 
슬픈 사연이 서려있었다. 어렸을 때는 굉장히 글씨를 잘 썼기 떄문에 칭찬을 많이 받
았단다.
  글씨를 쓸 일이 생기면 꼭 자기를 부를 정도로 글씨 잘 쓰는 학생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 저 뒷 칠판 글씨 수민이가 썼나보구나. " 하는 선생님의 칭찬에 
기분 좋아하고 있는데 바로 뒤에 앉은 친구가 " 쳇, 글씨를 잘 써 봤자 도장 파는 사
람밖에 더 되겠어. "
  15살 밖에 안된 소년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으리라.
  소년의 꿈은 일순간에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렸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자기 글씨가 조금이라도 쓰여져있는 것은 모두 다 태워버리고 나서 그 후부턴 글씨를 
아무렇게나 갈겨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글씨가 꼬불꼬불 해지니까 마음도 흔들흔들. 마음이 흔들거리니 걸음도 더욱 절룩
절룩. 자기의 모든 것이 흔들리다보니 이상도, 희망도 다 쓸모없는 불량품이 되어버
렸다고 하며 한숨지었다.
  그렇다. 사실 이 사람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뭔가
를 해보려고 안간힘을 다 쓰며 붙잡으려 하는 것을 사람들은 여유있게 내려다보며 그 
안타까운 노력에 조소를 보내면서 즐기고 있다 해도 과언을 아닐 것이다.
  " 너는 글씨를 잘 쓰니까 훌륭한 문필가가 되겠구나. " 하고 칭찬은 못해줄 망정 
하필이면 도장 파는 일에 비교를 했을까?
  하지만 이런 헛소리들에 좌절하는 우리들의 마음도 헛마음이다.
  아아, 이 아픔이여!

     * 오호 통재라 *
  그 사람은 아주 풍부한 얘깃거리를 가진 남자였고 또 여자를 다루는 솜씨도 보통이 
아닌 그런 예의 바른 남자였다.
  " 어떻게 휠체어 운전을 잘 하시네요? "
  " 귀희 씨를 만나려고 연습했죠. "
  거짓말인줄은 빤히 알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 귀희 씬 처음 뵙는 분 같지가 않군요. "
  정말 그렇게 날 대해줬다.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는 시간이었
다.
  속으로 은근히 애프터 신청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의 마지막 인사는 이러했다.
  " 오늘 제가 너무 말이 많았던 것 같군요. 귀희 씨를 여자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
에.... "
  " 네, 잘 알아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구요. "
  더 긴 설명을 하기 전에 단호히 잘라버렸다. 내 대답이 너무 싸늘했던지 그는 궁여
지책으로 변명을 했다.
  " 귀희 씨는 이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
  이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팔이 자유로왔으면 뺨이라도 후려쳐주고 싶었다.
  " 그래요. 정확히 오늘 같은 날은 없었어요. 덕분에 많이 웃었어요. 그럼, 저 먼저 
갈께요. "
  이런 일들이 나를 자꾸 메마르게 만든다.
  그리고 난 이 얘기에 붙여 천사의 탈을 쓴 악마의 제비를 말 안할 수 없다.
  한 아가씨의 하소연인즉
  " 그 사람은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했어요. 자기 눈에는 내가 목발을 짚고 다
니는 게 아름답게 보인데요. 우리는 열심히 사랑을 했어요. 난 이 사람에게 그 무엇
을 준다해도 아까울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만... "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 난 어떡하면 좋아요? 죽고 싶어요. "
  " 뭘 그런 걸 갖고 그래. 결혼하면 되잖아. "
  " 그 후, 우리는 자주 만났어요. 하지만 난 웬지 불안했어요. 그래서 어렵게 얘길 
꺼냈지요. 결혼하자구요. 그랬더니 글쎄, 그 사람 얼굴 빛이 싹 달라지는 거예요. 하
지만 그대로 물러날 수가 없었어요. 나도 살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책임지라고 대들
었어요. 그랬더니... "
  " 그랬더니? "
  " 자기 부모님들이 날 받아주지 않을 거래요. "
  " 부모님들은 언젠가는 이해해주셔. "
  " 핑계예요, 그건. 처음부터 그 사람은 날 결혼 상대로 생각지 않았어요. 그저 아
주 손쉽게 구한 장난감으로 생각한 거예요. 언니! 이런 작대기를 짚고 다닌다고 사람
을 이렇게 깔봐도 되는 거예요? "
  이런 사랑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우리 클럽에서 다정하기로 소문이 났던 예쁜 연인의 파탄설이 두사람만 모여도 쑥
덕거리게 된 것은 한 달쯤 전의 일이었다.
  어느날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놀랄만큼 많이 수척해 있었다. 이런 그레게 
나는 연민을 느껴 조심스럽게 물었다.
  " 냉전이 너무 긴 거 아녜요? "
  " 끝났어, 완전히. "
  헤어진 이유는 보통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얘깃거리조차 될 수 없는 것이었다.
  " 그 여자는 나를 밖에서 만나기를 꺼려했었어. 난 연극도 보러가고 싶었고, 음악
회도 가고 싶었고, 근사한 곳에 가서 외식도 하고 싶었지만, 그 여자는 굳이 사양을 
했었지, 그때 난 그것이 나를 생각해서 그러는 줄 알았어. 그런데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아낸 거야. 어느날 차 안에서 혼자 소리처럼 중얼거리더구나. 여자는 작은 곳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남자가 아이를 안고 다정히 걸어가는 저 젊은 부부가 부러워보인다
나. 그 말을 들으니 그동안 안개 속에 묻혀있던 것들이 말끔히 드러나더구나. 그 여
자의 접근은 순전히 동정이었어. 그리고 호기심이었고, 그래서 그 호기심이 풀리자 
달아나고 싶었던 거야. 날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말야. "
  쉬운 상대, 순진한 상대, 피해를 입혀도 반항하지 않을 상대, 작은 사랑에도 크게 
감동하는 상대, 먹다가 맘대로 버려도 되는 상대, 속이면 잘 속아넘어가는 상대, 경
험이 없기 때문에 불평할 줄 모르는 상대, 윽박질러도 찍소리 못하는 상대, 그것이 
바로 우리라니.

     * 무언의 위로 *
  " 그래, 이 다린 괜찮니? 아휴, 아주 가늘구나. "
  엄마는 그 아이의 다리를 만지며 계속 나와 비교를 해 말씀하셨다.
  " 아이구! 여긴 우리 아이보다 더 휘었네. "
  엄마의 말씀이 바늘처럼 가슴에 꽂힐 적마다 내 숨통은 자꾸만 죄어 들었다.
  ' 나는 다 컸으니 무슨 말을 들어도 이해할 수 있지만 쟤는 아직 어려서 이런 말에 
가슴이 무척 아플텐데, 엄마는 정말 왜 그러실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 줄 알면
서... '
  그런데 그 아이는 내 마음을 알았던지 배시시 웃어주었다. 그래서 나도 활짝 웃어
보이며 무언의 위로를 서로 주고 받았다.
  그런데 우리 엄마 뿐만 아니라 어른들은 대부분 우리들을 격려해주실 때 안된 마음
에서인지 쓰지 못하는 다리를 꼭 어루만져 주신다.
  그것이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는가 보다. 하지만 난 그럴 때마다 시장
에 가서 생선을 사면서 비늘이 많이 떨어졌다는둥, 싱싱하지 않다는 둥 하며 이리뒤
척 저리 뒤척 살펴보는 것 같은 그런 수치심을 느낀다.
  그래서 손이 닿을 때마다 오싹오싹 소름이 끼친다.
  그런데 어른들은 이런 우리들의 기분은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자신의 감정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표현하시는 것 같다.
  또 자기 자식의 장애를 남의 자식의 장애와 비교하며 경쟁 아닌 경쟁을 하신다.
  말로 납득을 못시킬 경우에는 옷까지 벗겨 장애 부위를 보여주면서 말이다.
  자기 자식에게 돌아갈 상처 따위는 전혀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이런 행위들로 서로
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자기들의 상처만 보호하려하는 것 같다면 너무 심한 소리일
까?

     * 혼자 걷는 길 *
  시각에 장애를 갖고 있는 친구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을 했다.
  그 후 아기 아빠가 됐다는 전화가 왔다. 아이는 건강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를 본 어떤 여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 아이 눈이 이상한 것 같애. 흰자위가 많아서 눈을 이렇게 치뜨는데 무섭더라구. 
"
  부모의 장애가 자식에게로 옮겨질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아이의 돌 때 내가 본 아이는 어느 한곳도 나무랄데가 없는 아주 정상이
었다.
  이제 그 집은 걱정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아이도 튼튼하고 비록 아기 아빠가 시
각의 장애는 있지만 돈도 잘 벌고 또 아기 엄마도 착하고.
  그런데 내가 다녀온 지 두 달도 채 못된 어느날 그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그 친구
답지 않게 축 쳐진 목소리였다.
  " 아기 엄마가 나갔어요. "
  "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애기 엄마가 나가다뇨? "
  도망간 여자 얘기는 내 주변의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믿기질 않았
다. 하지만 그 여잔 어쩌다 나갔다가 못들어온 것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나갔다. 패물
까지 챙겨 들고 말이다.
  남편을 버리고, 설사 남편은 버릴 수 있다 해도 자기 뱃속에서 열달을 있다 세상에 
나와 젖을 물려 1년 동안을 키운 그 분신을 어떻게 버릴 수 있는지 내 좁은 소견으론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직도 아이 엄마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용서해준다고 해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단다.
  도망간 여자는 흔하다. 그 중 남편이 부실해서 그것도 장애 때문에 도망가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종종 있어온 일이다.
  그런데 그런것 중의 하나가 자살이다.
  내가 부천 아저씨라고 부르는 분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3학년 때 군에 입대, 마지막 휴가 때 자살의 씨앗이 텄다.
  마지막 휴가를 즐기기 위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길을 건너다가 그만 달리는 버
스에 치인 것이다.
  병상에서 학교는 졸업했지만 그 후엔 할 일이 없었다.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
다. 그래도 배운게 공부라 공부를 계속하기로 하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대학원에 입
학했다.
  하지만 부천에서 서울까지, 더구나 넉넉한 가정도 아닌 부천 아저씨는 한 학기 이
상 더 버티질 못했다.
  아저씨가 학교를 쉰다고 하며 안동 재활원에 간다고 했는데 안동에서 부천에 올라
오는 날에는 꼭 내게 전화를 걸어 주어 안동의 자랑을 늘어놓곤 하였다.
  그 후 아저씨를 만나기 위해 부천집을 찾아갔다가 난 그만 가슴을 텅 비우고 돌왔
다. 그 동네 아줌마가 하시는 말씀이
  " 그 집 망했어요. 집달리들이 와서 짐을 죄다 밖으로 내놓아 그 사람이 휠체어에 
앉아서 짐을 지키더라구요. 그리곤 저녁 늦게 어디론가 가버렸다우. "
  그것이 마지막일줄 그땐 몰랐다.
  내가 82년 안동 재활원을 찾아갔을 때 그 부천 아저씨의 소식을 알고 싶었던 것이 
더 컸었다. 그러나 ' 그 사람 자살했어요. ' 라는 소릴 듣고 난 그만 눈앞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현깃증을 느꼈다.
  부천 아저씨는 대학, 그것도 서울대학을 나온 수재였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야, 너 쌍가마구나. 쌍가마면 장가 두 번 간다는데. " 하며 우리과 친구들이 장
난을 치고 있는데 부천 아저씨는
  " 그말 틀려. 난 쌍가마인데도 장갈 한번도 못갔는걸. " 하며 밝게 웃던 부천 아저
씨. 부천 아저씨에겐 그의 죽음을 기려줄 사람이 없다. 혼다다. 혼자 가는 길이 얼마
나 쓸쓸할까?

     * 장애가 가장 장애가 될 때 *
  장애가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긴급할 때이다.
  미장원에서 머리를 커트하려고 물뿌리게로 찍찍 뿌려 물에 빠진 생쥐 같이 하고 주
간지를 뒤적이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 여기 프레스토차 주인 있어요? "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아저씨를 쳐다봤다.
  " 사고를 냈어요. 사람을 둘씩이나 치었다구요. "
  그 말은 나에게 폭탄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침착한 척하지 않으면 내 감정을 내
가 주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마음은 벌써 사고 현
장에 가 뱅글뱅글 맴돌고 있었다.
  조금후 어떤 아저씨 손에 끌려들어온 언니는 창백한 얼굴로 아이구 아이구 소리만 
내었다.
  " 괜찮아, 언니. 진정해. "
  언니에게 다가가 해야할 위로였지만 난 역시 그 자리였다.
  경찰이 들어와 언니를 데려갔다.
  " 아저씨, 제가 차 주인인데요. 소아마비로 걸을 수가 없어요. 집에다 연락할 테니
까 그때까지 잘 좀 봐주세요. "
  급한 일을 당하고 나니까 장애가 정말 장애가 되었다.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입만 
살아서 나불거렸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미장원 아가씨는 울쌍이 되어
  " 어떻게 머리 하시겠어요? " 라고 물었다.
  " 네, 하세요. "
  싹뚝싹뚝 잘려지는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가슴이었다.
  그때 경찰이 왔다.
  " 여기 환자가 있다던데요? "
  숨을 한번 몰아쉬고
  " 아녜요, 환자가 아니라 몸이 불편해서 걸을 수가 없어요. 집에다 연락을 했으니
까 곧 오실꺼예요. "
  걷지 못하는 답답함에 대한 또 한번의 고문이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미장원 여자들은 좋은 얘깃거리를 만났다는 듯이 
  " 한 여자는 다리를 다쳤는지 깽깽이 발을 하고 있더라구. 근데 남자는 허리를 다
쳤나봐. 두손으로 허리를 받치고 차에 타더라. "
  하며 수다를 떨었댔다. 정신을 잃지 않은 걸 보니 크게 다친 것은 아니구나 싶어 
조금 마음이 놓였다.
  " 차가 네 대나 나갔어. 완전히 짜부통이 됐더라구. "
  그 여자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내가 알 수 있는 사고 현장의 전부였다. 아무도 정성
껏 있는 그대로를 전해주려 하지 않고 그냥 재미로 하는 얘기였다. 남의 마음을 조금
도 헤아려주지 않는 것이 야속했다.
  그 다음 걱정은 사고야 어찌되었던건 빨리 이 미장원을 빠져나가는 일이었다. 구출
해줄 사람이 빨리 나타나서 나를 집에 데려다 주는 일도 사고만큼 절실했다.
  그날 따라 집에는 아버지밖에 안계셨다. 모두 언니 아기 낳는 병원에 가있었다. 그
러니 경찰서로 향했을 아버지가 이곳에 오실리는 만무했다.
  오빠한테 걸어도 출타요, 구원의 손길은 전혀 없었다.
  미장원 문밖 거리를 지나는 많은 차들, 또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 저토록 자유로운데 왜 나는 이렇게 갇혀 있을고. '
  철들어 처음으로 이런 유치한 한탄을 해봤다. 하지만 여유있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속 마음을 위장하려고 거울을 이리저리 쳐다보며 머리 모양을 만졌다.
  주간지라도 보는 척하면 덜 초라해보일 것 같지만, 탁자 위에 있는 주간지마저 내 
손에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큰 폐를 끼치면서 주간지까지 집어달라고 부탁
을 할 염치도 없었다.
  타는 것은 내 가슴 뿐이었다. 일시적 술렁임으로 끝난 미장원 안은 모든 것이 정상
으로 돌아갔다.
  " 얘, 혹시 아까 그 남자, 남자 구실 못하게 되는 거 아니니? 허리를 다쳤다며. "
  " 호호, 깔깔. "
  남의 불행에 낄낄거리는 그들을 미워할 용기도 없었다.
  아버지가 오셨다. 구세주였다. 아버지는 사고 처리보다는 내가 더 급하셔서 이리로 
달려오셨다. 하지만 아버지도 날 운반하시기엔 역부족이다. 이미 반백의 초로이시니
까.
  이젠 오빠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난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이다. 학교 다닐 때 등교는 정확히 했지만 하교 때 날 데
리러 올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일주일이면 3 4일 되었다.
  텅빈 교실에서 집에 못가 챙긴 가방 다시 풀어놓고 공부 아닌 공부를 하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때야 학생이라 치더라도 내 나이 설흔이 된 지금 식구 이외의 보호자를 만들지 
못한 것이 왠지 허전했다.
  " 아무개 씨, 지금 빨리 좀 와줘. "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곤두박질쳐서 달려올 
사람이 없음이 더욱 불안함을 느끼게 했다.
  " 엄마, 아버지 죽으면 어떡하니? " 하시는 엄마의 걱정이 그 순간만큼 절실해져 
본 적도 없었다.
  그때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오빠였다. 난 그렇게 구출되었다.
  내 문제가 해결되자 이제 언니 걱정이 되었다. 경찰에 끌려가던 모습, 너무도 다부
진 언니의 혼비백산된 얼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얼마나 가슴 죄고 있을까?
  그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날 저녁으로 모든 사건은 끝났다. 병원에 간 사람도 그날로 퇴원을 할 정도로 경
상이었고, 부서진 자동차는 공장에서 수리를 하면 되었다. 그리고 언니도 집으로 돌
아갔다.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후의 적막이 평화를 강하게 느끼게 했다.
  내가 굳이 이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은 어려움에 대한 신세 한탄이 아니라 피같
이 진한 정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말이 더듬거려질 만큼 진정이 안된 상태에서의 전화였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정신 차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언니의 가장 큰 걱정은 혼자 있을 나를 빨리 집에 
데려다주는 거였다고 했다.
  그래서 경찰한테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때 미장원에 두 번째 왔던 거라고 했다.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나 자신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언니의 그 마음은 우
리 부모나 형제의 마음과 똑같은 그런 것이었다.

     * 헐 값 *
  교통 사고를 당한 한 정박아의 어머니가 보상이 보통 아이들의 반도 안되더라고 하
며 장애자의 가격은 그런 것이냐고 울부짖었다.
  또한 생명보험을 들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부모로서 장애를 가진 자
식의 앞날을 위해 생활 보장을 해주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보험에서조차 그런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절망스러웠으랴.
  장애자의 가격을 또한 이런데서도 나타난다. 장애자 복지시설기관에 있는 사람들은 
장애자들을 항상 게네들이라고 부른다. 나이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그리고 자기네
들은 새파랗게 젊었는데도 선생님이라고 칭한다.
  내가 취재를 간다고 전화로 통보를 했을 때는 너무도 친절하다. 막상 휠체어를 타
고 나타나면 위 아래를 훑어보며 " 방송국에서 오셨다구요? " 하며 웃긴다는 듯이 이
렇게 반문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건 장애자의 가치를 우선 헐값으로 보는데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리고 ' 극복의 올림픽 '을 쓰면서 장애자 복지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체계적인 
논리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원서를 내고 시
험을 친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역시 내 가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김   교수님이
  " 공부만 많이 해서 뭘해. "
  옆에 있던 교수가
  " 우리 학교는 복지시설이 전혀 안돼 있어서 계단이 많은데. " 하며 고개를 갸웃뚱
했다.
  이미 내 기분은 저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기 때문에 건방질만큼의 어조로 대답했
다. " 그건 상관없습니다. "
  또 한 교수가
  " 일어설 수 있습니까? " 하고 점잖게 물었다.
  " 없습니다. "
  이것이 면접 시험의 전부였다. 물론 발표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끝이었
음을 난 이미 직감했으니 말이다.
  소위 사회복지를 위해 사회사업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가 싶어 정
나미가 뚝뚝 떨어졌다.
  학부도 아니고 대학원을 지망한 사람인데 반말이나 하고, 계단이 많다는 것을 부끄
러워할 줄도 모르는 무식함에 더 이상 애정을 쏟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미국의 어느 학교에서는 장애자 학생들이 학교를 상대로 고소를 했다고 한다. 편의 
시설이 안되어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그 학생을 위해 경사로 등의 편의 
시설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신문의 칼럼란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만약 내가 학교의 편의 시설을 문제로 고소를 한다면 그건 곧바로 기각되고 말 것
인데,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장애자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데가 딱 한군데 있다.
  " 어디 어디에 가면 유명한 점쟁이가 있는데 다리를 못쓰는 사람이야. 아주 본 것
처럼 맞히더라구. "
  장애자라는 것이 무슨 신비스러운 영감의 표상으로 생각이 들었나 보다. 참으로 우
스운 일이다.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존경( ? ) 을 받고 있으니.

     * 우정의 등반 *
  한라산 정상에서 졸업 기념사진을 찍은 목발의 장애자가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4학년생 70명이 4박 5일 예정의 제주도 졸업여행길을 떠났다. 
소아마비로 목발을 짚어야 하는 김 명관 군은 급우들이 만장굴, 민속촌, 일출봉 등을 
관광할 때 언제나 버스속에서 혼자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영수라는 급우가 문득 이런 제안을 했다.
  " 내일 한라산을 오를 때 명관이를 데려가자. "
  11명의 급우들의 얼굴은 긴장감과 결의감으로 굳어졌다.
  다음 날 아침 등반 시발점 어승생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조심스럽게 급우들의 계
획이 명관군에게 전해졌다.
  명관군은 처음에는
  " 너희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 " 며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만 " 우리들의 제의
는 동정이 아니고 우정 " 이라는 끈질긴 급우들의 설득에 마침내 김군은 동의했다.
  그래서 11명의 자원대가 구성됐다. 1명은 명관 군의 목발 등 일행의 짐을 들고 나
머지 10명은 70㎏이나 되는 명관 군을 차례로 업기로 했다.
  오전 9시 40분, 아침 나절의 등반길은 습기 때문에 몹시 미끄러웠다. 가파르게 경
사진 곳도 많았다.
  모두가 땀투성이었다. 업혀가는 명관 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1시간 30분쯤 후 비교적 평탄한 길이 나타났을 때 명관 군은 스스로 걷겠다고 고집
했다. 그러다 길이 험해 힘들어 할 때는 다시 급우들이 번갈아 업었다.
  함께 오르던 다른 등반객들로보터 격려와 비난이 엇갈려 쏟아졌다. 우정이 부럽다
며 음료수와 과자를 선사하는 사람, 박수를 치는 사람. 그러나 산을 업신여기는 행위
라며 젊은이의 객기를 버리고 즉시 하산하라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었다.
  정상에 가까와질수록 더욱 가파른 길은 한 때 이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그래서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명관 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장애를 원망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 정상이 코앞이다. 중도 
포기는 있을 수 없다. " 고 외쳤다.
  다시 명관 군을 업고 오르면서 줄을 놓치거나 미끄러져 공중에 매달리는 등 위험한 
고비를 몇 번 넘겼다.
  정상 도전 4시간 만에 정상 주변의 평지에 이르렀을 때 명관 군은 다시 목발을 짚
고 서서히 백록담으로 다가갔다.
  급우들은 빨리 백록담을 내려다 보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면서 말없이 명관군의 뒤
를 따랐다.
  드디어 해낸 것이다.
  70명의 급우, 특히 동반자 11명이 학창 시절 최대의 감격의 순간을 되새기는 동안 
명관 군은 일생 최대의 감격을 억누르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김명관 군은 해발 1,950m 를 올라갔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의 백록담을 본 
것이다. 정상에 오른 등반객들이 박수를 터뜨렸을 때, 명관 군보다 더욱 자랑스런 표
정을 보인 것은 11명의 급우들이었다.
  돕고 협조하는 우정의 결실이 새삼 가슴을 메이게 한다.
  등반길과는 달리 하산길에는 등성이마다 계곡마다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
정의 등반을 알아챈 다른 등반객들의 격려였다.
  이것은 명관 군의 의지보다는 11명의 급우들 의지의 승리였다. 명관 군과 11명의 
급우들은 머리가 백발이 되어도 그때의 그 환희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남자들 세계에선 이런 의리가 가장 값진 재산이리라. 내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
면 이런 진한 의리 속에서 좀더 멋있는 생활을 했을텐데 싶어 한편 부럽기도 했다.
  지금도 생생이 떠오르지만 나의 대학 졸업여행 때 난 그 고마운 우리과 친구들의 
뜻을 이렇게 거절했었다.
  " 진짜 싫어, 싫다구. "
  신경질적인 나의 태도에 조금은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한껏 신세지고 싶지 
않다는 나의 깍듯한 예절이었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후회스럽다. 지금은 그럴 기회도 
없으니 말이다.
  참,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우정이다.

     * 척추마비와 성생활 *
  장애자는 성에 대한 전문 지식의 부족과 장애자의 성적 재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성에 대한 논의를 터부시하는 사회의 태도속에서 불감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사고로 인해 성기능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 척수 장애자들의 경우를 보
면 그들은 걷는 능력의 회복보다는 성기능의 회복을 더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부상 
후 척수의 장애를 가진 환자들은 제일 먼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성기능이 전과 같이 
가능한가 아닌가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울의대부속병원 재활의학과 김 진호 박사의 척수마비와 성생활 ( 갈길 제 
6호 ) 을 참고로 기재한다.
  척수마비의 결과 초래되는 성생활의 장애는 척수손상의 심한 정도나 손상의 부위에 
따라 다르기는 해도 한결같이 재활과정에 있어서 복잡한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 성
생활 ' 이란 것 자체가 복잡미묘한 문제인데 거기에 대하여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
드는 것은 환자와 배우자와의 관계, 환자와 의료진과의 관계, 배우자와 의료진과의 
관계이다. 즉 환자가 그의 배우자나 의료진에게 성에 대하여 말을 꺼내기 주저하고 
심지어는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려 하기도 하기 때문에 일이 어렵게 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배우자가 의료진에게 성에 대한 얘기를 삼가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또 자기의 마음을 겉으로 나타내
는 것을 겸손치 못하다고 여기는 사회에서는 이성문제는 거의 덮어놓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성이란 부도덕한 것일까. 성을 왈가왈부 논한다는 것이 부질
없는 일일까. 우리가 인생이란 긴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성은 떼어놓을 수 없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인생 자체가 성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결혼 자체가 성생활을 
대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까다롭고 좌절하기 싶상인 성문제이나 덮어놓고 
터부시하지 말고 서로 서로 의견 교환을 하거나 책을 통해 공부함으로써 척수마비의 
장애를 극복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줄 안다.
  성기능상태를 평가하려면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성반응이다. 즉 생리학적인 문제로서 성기의 감각이 있는가, 발기나 사정, 
질의 윤활 ( 분비 ) , 오르가즘 ( 황홀감 ) , 기타 자극에 대한 반응 등이다.
  둘째는 성행위로서 포옹이나 애무, 혹은 성교, 성욕 등이며
  셋째는 임신 혹은 피임 등의 문제이다.
  1. 성반응
  척수손상에 있어서 성의 생리적 장애를 이해하려면 성반응이란 복잡한 반사작용이
란 것을 알아야 한다. 반사란 무엇인가. 반사에는 반응을 시작하는 어떤 자극과 그 
자극을 중추로 전달하는 신경과 되돌아 오는 신경과 반응을 일으키는 기관이 있다. 
성반응의 한 가지 특징이라면 성기의 반응이 다른 자극을 충동시켜 성반응의 각옫가 
점점 상승하고 결국은 온몸이 참여하는 것이다. 즉 근육이 긴장하고 혈압이 오르며 
맥박이 증가하는 것이다. 자극에는 ' 정신적 ' 인 것과 ' 접촉 ' 에 의한 것이 있다. 
에로영화나 생각이 전자에 속하고 접촉은 성기와 다른 신체부위의 접촉을 말한다. 신
경이 성한 사람은 성기를 리드믹하게 비벼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자극이 된다. 남
자에 있어서는 음경의 발기와 오르가즘이 오는데 남성의 오르가즘은 두 가지 부분응
로 나눌 수 있다. 즉 정액의 분비로 인한 내부의 긴장 ( 충만감 ) 과 정액의 사정으
로 인한 이 긴장의 해소가 그것이다. 여성에서는 그렇게 뚜렷하진 않지만 질의 열감, 
윤활물질의 분비증가, 강한 내부긴장감, 그리고 끝에 가서 기분좋은 해소 ( 이완 ) 
등을 볼 수 있다. 성기외에도 유방, 목, 넓적다리 안쪽 회음부, 항문주위를 자극해도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가 있다.
  척수가 완전히 절단되면 어떤 성적반응이 일어날까. 성기에서 일어나는 신호가 뇌
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발기나 질의 분비가 일어날 경우에도 성기에서 오는 오르
가즘은 없다. 
  제 10 흉추에서 제 1 요추까지의 척수손상에서는 성기의 감각이 없어지긴 하나 접
촉에 의한 반사적인 발기는 가능하다. 사정이나 성기로부터 오는 오르가즘은 잃게 된
다. 그러나 입이나 목, 기타 정상 부위를 자극하면 에로틱한 황홀감은 맛 볼 수 있
다.
  제 2 요추에서 제 1 척추까지의 척수손상에 있어서는 막연한 성기의 감각이 남아 
있다. 성기접촉에 의한 반사적인 발기가 가능하고 정신자극에 의한 발기도 가능하다. 
사정이나 오르가즘이 불가능하다고 하나 정액이 흘러나오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리
고 에로틱한 황홀감은 정상 부위를 자극함으로써 가능하다.
  제 2 척추에서 제 4 척추까지의 척수손상에서는 성기의 감각이 소실되고 성기의 접
촉에 의한 반사적인 발기가 없어진다. 그러나 정신적 자극에 의한 소위 정신적 발기
는 가능하다. 사정이나 오르가즘은 불가능하고 정액유출은 가능하다. 여기서도 정신
적 황홀감은 있을 수 있다.
  척수손상이 불완전한 경우에는 손상된 정도와 조직종류에 따라 전혀 이상이 없을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손상받을 수도 있다.
  2. 진단 ( 검사 )
  남성이나 여성에서 성기자극에 의한 오르가즘이 가능한가를 볼 수 있는 검사가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바늘로 통각을 검사하든지 뜨겁고 찬물로 온도차를 아는가를 검사하는 
것이다. 만일 즉각적으로 구별할 수 있으면 중요한 통로가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한
다.
  다른 하나는 항문을 수축해보라고 명령하여 그것을 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위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다면 성기의 감각과 오르가즘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 둘 중에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검사가 비정상일 때는 오르가즘이나 사정이 불가
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나 그렇더라도 남성에서는 접촉에 의한 반사적인 발기나 정신적
인 발기가 가능한데 그것은 어떤 위치에서 척수가 손상되었느냐에 달려 있다. 그 위
치를 가려내기 위해 다음 세 가지 검사가 있다.
    음경 끝을 꼭 쥐면 ( 여성에서는 음핵 ) 항문 근처의 근육이 수축하게 되는데 
이 검사가 양성이면 접촉에 의한 반사적인 발기가 가능하다.
    검사자가 손가락을 항문 속으로 넣으면 항문이 오므라들게 되는데 이 검사가 양
성이면 요추와 척추의 손상은 없고 손상이 보다 상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
서 접촉발기작용은 꽤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손상이 제 9 흉추이상에 있으면 정신적 발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을 
알기위한 검사는 고환을 손으로 꼭 눌러잡는 것이다. 환자가 아무 감각을 못 느끼면 
손상이 제 9 흉추보다 상부인 것을 뜻한다. 만일 고환이 아픈 것을 느끼면 정신적 발
기가 가능한 것이다.
  손상후 경과한 시간이 얼마 안된 비교적 초기에서는 성적반응이 오히려 과장되어 
나타나는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성기를 조금만 건드려도 강한 발기가 오래 계속되는 
수가 있어 도뇨 ( 호스로 소변을 뽑는 동작 ) 해 주러 온 간호원을 당황케하고 환자
는 멋적게 되는 수가 있다. 정신적자극에 의한 반사적 발기는 손상 후 몇달 후에나 
발생하는데 이렇게 지연되는 이유는 모르고 있다.
    정신적 자극에 의한 발기와 함께 정액이 흘러나오는 수가 있는데 그 떄는 발기
가 힘이 약해지는게 보통이다. 정신적 자극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보는 것, 듣
는 것, 상상하는 것, 꿈꾸는 것 등이 있다. 가슴, 목, 귀 등을 만지는 것도 자극이 
될 수 있다. 어떤 여자들은 꿈을 꾸거나 에로틱한 환상에 몰두함으로써 오르가즘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남자는 이런 행운이 뒤따르지 않는다. 정신적 자극에 
의한 발기가 방해를 받는 요인은 다른 근심이나 걱정, 우울증이나 분노, 진정제 복용
이나 알콜음주 또는 성행위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강박관념자체 등이다. 접촉성 발기 
( 혹은 체성발기라고도 함 ) 는 항경련제약품을 복용하면 감소한다. 접촉성 발기와 
정신적 발기 모두 외괄약근절제술을 하면 소실될 수가 있는데 수술받은 환자의 20% 
미만이 이런 손실을 보는 것이다.

     * 웃기는 일 *
  신문의 해외 토픽에 ' 휠체어까지 탄 강도 ' 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그 내용
인즉 휠체어를 탄 남자 1명을 포함한 2인조 강도가 덴마아크 수도 코펜하겐 근교의 
한 우체국에 침입, 6,950만 크로네 ( 약 70억 ) 가 들어있는 우편낭을 훔쳐 달아났다
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기사를 읽고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 강도까지, 정말 웃기네. "
  하지만 그것은 단면일 뿐이다. 베트남 전선에서 지뢰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한 남
자가 행인의 지갑을 빼앗아 달아나던 소매치기를 수백 미터나 추격한 끝에 붙잡아 경
찰에 넘겼다는 기사도 난 놓치지 않았다.
  북세인트루이스 출신의 존 D 부커 씨는 오후 3시경 소크러그스 할머니의 손지갑을 
낚아채 달아나는 소매치가가 뒤쫓아간 남자에게 잡혀 육탄전을 벌이는 것을 발견하고 
1 미터 높이의 트럭에서 뛰어내려 수백 미터를 두손으로 기어가 붙잡았다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부커 씨는 발이 아닌 손으로 기어가 범인을 잡았다.
  이 기사에 사람들은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서커스를 했군. 웃기는데. "
  나쁜 일을 해도 좋은 일을 해도 우리가 하는 일은 다 웃기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장애자도 인간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 뿐
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과장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만다.
  재미있는 얘기가 또 있다. 84년 5월 1일자 한국일보에 웃지 못할 헤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사회면에 알루미늄 목발을 짚은 은행강도를 잡은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공
식적으로 발표된 우리 나라 최초의 장애자 범인이었다.
  알루미늄 목발의 범인은 은행을 털때 망을 보는 역할을 했는데 소리를 지르자 바람
처럼 사라졌다며 그것을 아주 굉장한 일로 보도하면서 알루미늄 목발이 초췌한 범인
의 얼굴과 함께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인지 문화면에는 ' 청소년 교육소설 쓴 신체장애 처녀 ' 라는 큰 
제목과 함께 내가 쓴 ' 동자야 어디로 가니 ' 책에 대한 기사가 역시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꿋꿋한 의지로 휠체어 인생을 이겨낸 밝고 건강한 모습을 다시 보여주었다고 극찬
을 했다. 
  사회면에서 강도로 등장한 장애자가 문화면에선 교육소설을 쓴 도덕자로 등장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각각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같은 장애자라고 생
각하기 떄문에 또 웃기는 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고 우리 친구들은 " 방귀희 얘기보다는 알루미늄 목발이 더 용
기를 주던데 정말 우리도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잖아. "
  정말,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는가 보다.

     * 백 평야에 남긴 한 *
  정립회관에서 주최한 제 2 회 정립스키캠프가 진부령 스키장에서 있었다.
  스키라는 것이 과연 어떻게 우리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해서 이 두 눈으로 직
접 보고 싶었다. 
  그런데 함께 갔던 스키 캠퍼 중에는 장애가 그다지 심하지 않은 친구들이 많았다. 
나이가 적을수록 소아마비의 장애 정도가 가벼워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가끔 쟤도 소아마비인가 싶을 만큼 아주 자세히 관찰을 해야 표시가 나는 친구들도 
있다.
  양쪽 목발을 짚어야 하는 사람들은 썰매를 탔는데 남들이 다 서서 고고히 활주하는 
하얀 설원을 점잖게 엉덩이를 붙이고 미끄럼을 타는 것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가는 길 등에 계단이 많아 선생님들만 고생시켜드리는 것 같아 미안함이 앞
섰다. 
  어느 곳에서나 심한 장애와 가벼운 장애 사이의 차이는 또 생기기 마련이었다.
  실로 30년 만에 처음으로 흰 눈과 친구할 수 있었다.
  겁을 잔뜩 먹고 미끄러져 가는 내 몸은 이미 스키를 타는 날렵한 스키어의 모습으
로 변했고 설원 위의 하얀 스릴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광경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그 경험을 또 과장하여 자랑하게 되리라. 아니나 
다를까 진부령에 갔다와 난 수없이 많은 인사를 받았다. 
  " 아니 스키장까지 어떻게 갔었어. 나보다 낫네. "
  달나라라도 갔다온 것 같은 우월감이 들었다. 그 우월감 때문에 회비를 5만원씩이
나 내고 부산이나 울산에서도 왔을 것이다.
  너무 추워서 사람들의 눈빛을 자세히 관찰할 여유가 없었지만 우리를 이상하게 보
는 사람은 없었다. 무관심인지 높아진 의식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고마운 일이었
다.
  이번 스키 캠프에서 만난 몇 명의 친구들 얼굴이 떠오른다.
  선경이는 고등학교 2 학년인 여학생이었다. 양쪽 발이 심한 편에 속한 캠퍼임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성격으로 모든 사람들을 손에 쥐고 흔드는 여장부였다.
  " 언니 꼭 나와서 썰매 타세요. 얼마나 재미있다구요. " 하며 내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오락 시간에도 리더쉽을 발휘해 분위기를 꽉 잡고 있는 선경이를 보니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난 사람들 앞에서는 숨도 제대로 못쉴만큼의 새침때
기, 아니 용기없는 나약자였었다.
  또 한 명은 의택이란 국민학교 5학년 남자 아이인데 아무 등에나 잘 업히며 자기의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온화하면서도 매사에 적극적인 아이였다.
  누나가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온다는 의택이는 그 나이로선 보기 드문 극복자
였다.
  식사 시간에 마침 내 옆에 앉은 의택이에게 물었다.
  " 뭐 불편한 건 없니? "
  " 없어요. "
  " 화장실은 어때? "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의택이에게 이런 질문을 안 할 수 없었다.
  " 내 오줌통은 2,500톤도 더 저장할 수 있어요. "
  2.5톤 트럭을 많이 보아서 2.5란 숫자가 나왔을 것이고 거기에 1.000배를 하다보니 
2,500톤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자 그 옆에 앉았던 남자 형이 점잖게 타일렀다.
  " 야, 임마! 오줌 참으면 못 써! "
  이때 내 가슴엔 또 하나의 전류가 흘렀다. 이런 우리들의 대화가 우리를 슬프게 한
다.
  하얀 설원 위에 한을 남기고 돌아온 지금, 열심히 놀던 친구들의 모습보다는 남기
고 온 한들이 가슴을 메운다.

     * 문전박대의 각설이 *
  86년 1월 23일 조간신문에 ' 304점 장애자 낙방 ' 이란 타이틀로 사건의 시작을 알
렸다.
  22일 발표된 가톨릭대 의학부 최종 합격자 중 1차 시험에 합격했던 세 명의 학생들
이 소아마비라는 이유로 탈락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목발은 물론 보조기도 착용하지 않는 아주 가벼운 장애를 가지고 있
었다. 장애자에서 탈락을 시켜야 마땅할 정도로 말이다.
  그날 아침 정립회관에 올라갔을 때 기자들로부터 전화가 오고 벌써부터 기획부는 
술렁이고 있었다.
  이사님 방에는 권 미선 양이 언니와 함께 와 있었고 관장님은 카톨릭 대학과 모종
의 숨가쁜 통화를 하고 계셨다.
  관장님 얼굴은 벌써 눈물이 지나간 흔적으로 부석부석했다.
  ' 우리 관장님은 무슨 팔자로 당신이 겪으신 아픔만으로도 가슴에 멍울이 지셨을 
텐데 해마다 이게 무슨 곤욕이실까. '
  23일 오전 11시쯤 가톨릭 의대 교무처장실에서 학교측과 장애자측의 첫 면담이 있
었다.
  실험실습 등 학업에 지장을 초래하는 신체적 결함을 가진 자 즉 수학 능력이 없다
는 대화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얘들이 계단을 올라갈 수 있습니까? "
  이말에 학부모들은
  " 뛰라고 해보세요. 못뛰나, 자전거도 타고, 스케이트도 탑니다. " 라고 대항했다.
  이때 불합격이란 판정으로 이미 패배당한 세 명의 학생들은 망연히 눈물을 줄줄 흘
리고 있었다.
  설사 수학 능력이 없으면 졸업 정원제이니 그때 탈락시켜도 될 것인데 기회조차 주
지 않고 미리 안받아 주겠다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횡포이다.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24일 문교부는 카톨릭대에 장애 학생 합격처리를 종용했다. 
하지만 학교측은 당초의 불합격 방침을 고수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밝혔다.
  급하게 된 관장님은 24일 오후 명동성당으로 김 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이들 학생들
의 구제를 요청했다.
  가톨릭대도 25일 오전 11시 30분부터 50명( 총 62명 )의 교수들이 모여 2시 30분까
지 점심을 거르면서 의논을 했다. 학교측이 충분히 거론해 결정한 사실을 재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반대론과 학교설립 이념에 따라 장애자들에게도 학업의 기
회를 주도록 하자는 찬성론으로 의견이 엇갈렸다.
  그래서 결정을 보류했다.
  당연한 결과의 문제를 가지고 3시간 동안이나 의논을 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
다.
  26일은 일요일이어서 잠시 휴전이었다. 본인들에게는 너무도 숨막히는 24시간이었
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27일의 교수회의는 오후 4시여서 더욱 가슴을 죄게 했다. 그러나 2차 전체 교수회
의에서 51명의 참가자 중 3명이 기권을 하고 48명의 교수가 거수로 구제를 찬성했다. 
인간 양심의 표상이리라.
  이런 결론이 나오게 된 것은 가톨릭 지도자이며 재단 이사장인 김 수환 추기경의 
재심 요청에 따른 종교적인 결정이었지만 사회 여론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었다고 학
교측은 그 동기를 고백했다.
  이렇게 해서 닷새만에 일단락이 난 이번 인권 전쟁 ( ? ) 을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
은 결론이 나온다.
  첫째, 88년도에 장애자 올림픽을 열 우리들인데 아직 멀었다는 것과, 몸은 컸는데 
머리는 아직 유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자기 점수에 따라 학교를 선정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이라는 사랑의 정신을 
보고 지원을 해서 가톨릭 대학에만 몰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82년도에 수석 입학을 한 이 정화 양은 소아마비인데도 무리없이 붙어서 현재 공부
를 잘하고 있는데 말이다.
  모교인 동국대학교의 경우도 부처님의 자비 사상으로 현재 다른 학교의 배가 넘는 
장애 학생들이 재학 중이다. 또 밖으로 문제화시키지도 않았는데 수학과에 지망했다 
면접에서 떨어졌던 뇌성마비 수험생을 입학시켰다.
  우리 친구들은 생활 보장을 받는 의대, 한의대, 약대를 목표로 삼고 있다. 자기의 
적성에 관계 없이 말이다.
  이번에 문제가 되었던 학생들도 가톨릭 의대의 3명 외에 중앙대학교 약대의 4명과 
대구 한의대의 2명이 모두 그런 학과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중앙대학교에서는 약대가 아닌 다른 과로의 구제를 또 대구 한의대에서는 
불합격의 고수를 각각 주장하고 있어 한층 분노를 일게 한다. 그런 와중에서 중대 약
대에서 탈락됐던 김 성우 군은 건국대 의예과에 장학생으로 보란듯이 합격했다. 의사
가 될 것이다.
  이번에 장애자는 다시 한번 인간이 누릴 당연한 권리를 잃고 살고 있다는 것을 확
인할 수 있었다. 점수로 충분하면 합격이 당연한 것인데 구제라는 차원에서 이 문제
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번 사건으로 88 장애자올림픽을 앞두고 한참 장애자 복지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보사부에서 가장 면목없어 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장애자의 입학과 취업에 있어서의 불이익 처분에 대한 것
이 노동부와 문교부 등에서 논의 되었다. 즉, 공무원 채용시 직종별 특성이나 장애자
의 개별적 능력을 고려함이 없이 획일적으로 판정하고 있는 신체검사 규정을 고치고, 
학교 입학 때 감독 관청자 승인을 얻어 장애자에게 불이익 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한 
특수교육진흥법상의 예외 규정을 삭제 하기로 한 것이다.
  ( 85년 1월 25일 동아일보 )
  또한 내년부터 장애자 수험생들의 수학 가능 여부를 일정기준에 의해 사전 검사하
여 판정서를 붙여 대학에 지원토록 하기로 했다고 한다.
  문교부와 보사부 관계자와 대학 관계자 또한 재활의학 전문의 등으로 신체장애자 
수학 판정 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이 위원회가 일정 기준으로 장애자 수험생들의 자애 
정도를 심사해 적격 판정을 내리도록 말이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불완전하다.
  장애라는 것은 복잡미묘해서 손을 못쓴다해도 손가락 끝은 힘이 있을 수 있고 꽉 
쥘 수는 있는데 펴는 힘이 약하다든지 하는 식으로 어떤 틀에 넣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장애를 극복했다는 얘기가 있듯이 똑같은 장애라 해도 그 의지에 따라 극복의 
범위는 달라지는 것이다.
  제 1회 삼애 봉사상 수상자의 배 준호 선배는 두 다리, 두 팔 모두가 완전치 못하
다. 하지만 그 선배는 중앙대학교 약대를 나와 지금 아주 커다란 약국에서 성업 중이
다.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과연 그가 저런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의아해할 정도로 무거운 장애자이다.
  이런 위원회가 극복의 정신을 가진 자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탈락시킴으로써 또 희
생자를 만들게 한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좋은 방법은 하다가 못하면 그때 군소리 없이 그만 둘 수 있도
록 - 사실 그럴 정도의 사람이면 그 부모들이 먼저 포기를 하였겠지만 - 입학의 기회
는 그냥 아무 조건없이 주는 것이다.
  10년이 넘도록 연례행사가 되어 버린 대학 입학 거부말썽은 이젠 유치하고 촌스럽
다.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문전박대하여 내쫓는 것은 고대 소설에서나 나오는 얘기
다.
  못하게 막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단 한명이라도 재활을 하게 하는 것
이 국가적으로도 이익이 되건만 너무너무 근시안적이다.
  정책 입안자들의 색안경을 바꿀 때도 되었는데   

     * 경사로 탄생의 진통 * 
  84년 5월 22일 한국일보에서 다음과 같은 아주 반가운 기사를 읽었다.
  ' 앞으로 새로 짓는 6층 이상의 건물에는 장애자를 위한 경사로를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 서울시는 21일 건축법 시행령 개정에 따라 관청 등 공공 업무시설과 학교 및 6
층 이상의 건물을 지을 때는 건물 1층의 엘리베이터 승강장과 건물 외부를 연결하는 
경사로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건축 심의 기준을 강화했다. '
  정말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어도 건물에의 진입로에 경사로가 없어 불편을 겪을 
때가 제일 약이 오른다.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정보를 미리 갖고 오늘은 고생을 안하겠구나 하면 입구에 서
너 개의 계단이 있어 실망을 할 때가 많다.
  미국의 한 보험회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 장애자 편의시설이 되어 있는 건물에는 
다른 건물보다 작업과 관련된 사고율이 낮아짐으로서 산재보험료율의 인하를 통해 실
질적으로 근로자들의 보수 수준을 인상하는 효과를 갖는다. ' 고 하였다.
  또 Charles A. Bacher 는 그의 저서에서 만약에 시설 신축 당시 설계상에 장애자에 
대한 고려를 했었다면 그러한 고려없이 건물이 완공된 이후 다시 장애자를 위하여 시
설을 개 보수할 경우에 드는 비용의 0.5%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장애자를 위한 편의시설은 당초 계획 입안자들의 조그만 배려가 있었더라면 커다란 
추가 비용 부담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런데 보사부의 사회국에 재활과가 생긴 것은 세계 장애자의 해인 1981년 이었는
데 내가 처음 재활과를 찾은 것은 1984년 2월이었다.
  난 정립회관의 백승완 씨한테 어떻게 가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인지를 물었다. 백
승완 씨는 정문에 계단이 많으니까 후문을 사용하라고 했다. 거기엔 계단이 7 ∼ 8 
개밖에 안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난 ' 극복의 올림픽 ' 책을 준비하던 터이라 자료를 구하기 위해 재활과에 
속해 있는 서울장애자올림픽 업무추진반을 방문하려고 과천으로 향했다.
  과연 뒷문엔 계단이 8개가 있었다.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뒷문이어
서 사람의 발걸음이 뜸한 곳이라 2월의 찬바람 속에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
야 했다.
  육교에 앉아있는 거지가 지나가는 사람의 인정을 기다리듯이…… .
  마침 회색 제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보였다.
  망설이면 늦기 때문에 얼른 입을 열었다.
  " 아저씨, 이 휠체어 좀 들어주세요. "
  내 말에 발걸음을 멈춘 사람은 3명이었지만 내게로 오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 아 여기를 어떻게 올라가려구 그래요? "
  " 아저씨께서 앞만 좀 잡아주시면 돼요. "
  다른 한 명의 아저씨까지 불러 계단을 올라가니 이번엔 문이 잠겨 있었다. 회전문
으로는 휠체어가 지나갈 수 없으니까 큰 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 문은 굳게 닫혀져 있
었다.
  안된다고 하는 것을 사정사정하여 간신히 열고 들어갔다. 그래서 장애자 올림픽 업
무추진반을 노크했을 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무척 낯설어했다.
  장애자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장애자를 낯설어하다니 말도 안되는 대접이었다. 잘 
풀리지 않는 서먹한 냉기 속에서 바짝 경직되어 있는데 마침 정이사님 ( 정립회관의 
정은배 이사님 ) 이 들어오셨다.
  마치 날 구원해주기 위해 나타난 구세주 같았다. 차차 서먹한 공기는 누그러졌고 
재활과의 김행진 과장님에게 말을 건넸다.
  " 재활과가 있는 건물인데 경사로 하나 없다는 것이 이해가 안갑니다. "
  과장은 매우 미안해 하며
  " 대단히 죄송합니다. 벌써부터 계획 중인데 아직 실천을 못했습니다. 곧 시행이 
될 겁니다. " 하고 말했다.
  몇 달 후 내가 재활과를 찾았을 때는 경사가 완만한 멋진 경사로가 날 반기고 있었
다.
  또한 휠체어 두 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장애자 전용 주차장도 있었다. 그리고 몇달 
후에는 화장실까지 마련되었다. 게다가 경비 아저씨들도 아주 친절하게 손수 휠체어
를 밀어주기까지 했다.
  그 경사로를 만들면서 경비 아저씨들의 교육까지 시킨건지 아니면 그 경사로를 보
고 장애자가 무엇인지를 알았는지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 작은 배려로 *
  ' 서울시는 30일 신체장애자들의 보행 편의를 위해 올해부터 87년까지 18억원의 예
산을 들여 시내 횡단보도 755개소의 보도와 차도 경계석을 낮추고 758개소에 점자 보
도블럭을 깔기로 했다.
  즉 신체장애자의 보행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휠체어끼리 자유롭게 교차할 수 있도
록 보도 폭을 1.8m 이상으로 확대하고 횡단보도의 경계석 높이를 2cm 이하로 낮추   
한편 맹인들을 위해 횡단보도에 점자 보도블럭을 설치하고 보도 양끝에 음향 신호기
를 설치할 계획이다 ' 고 했다. ( 85년 6월 30일 중앙일보 )
  그래서 1차로 정비한 도심지 11개 간선 도로의 인도와 차도의 경계 높이를 낮추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10cm 이상이나 돼, 실효성이 없다. 분명 2cm 이하라고 했는데 일이 진행되
는 과정에서 5배나 늘었다.
  장애자를 위해서 고쳐준다는 선심만 썼지 실용성이 없다. 그건 장애자에 대한 배려
가 너무도 의식적이고, 의무적이라는, 한마디로 왜 경계석의 높이가 2cm 가 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촌극이었다.
  장애자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야박한지를 잘 말해 주는 예가 하나 있다.
  에너지 절약정책에 따라 엘리베이터가 격층제로 운행이 되었고 그나마 3층 이상부
터였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가 이용할 수 없음을 알고 당황할 때가 많았다. 그래
도 이미 있는 엘리베이터이니까 조작이 될 수도 있겠나 싶어 경비실에 부탁을 했더니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만약 그 정책이 발표될 때, 단 장애자의 사용시는 모든 층에서 가동된다는 단서가 
붙었다면 이런 어려움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싶어 야속하기 그지 없었다.
  그건 장애자한테 주는 혜택이 아니다 장애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인데도 그것
을 빼앗고도 너무나 당당하다.
  정책을 입안하면서 한번쯤 장애자를 떠올렸다면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문제까
지도 사사건건이 부딪치며 살아야 한다.
  소록도의 어느 목사님이 정치를 하는 사람 중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명만 나
병에 걸리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 취업의 문 *
  ' 노동부는 내년에 신체장애자 1천 명에 대해 직장 적응훈련을 실시하기로 했다. 1
2일 노동부는 한국장애자재활협회에 위탁하여 1주일 과정으로 적성 검사 및 직업관 
교육을 실시하기로 했다.
  노동부는 또 이들에게 적합한 직종을 택해 3∼4개월 간의 집중교육도 실시할 예정
이다.
  노동부는 올 9월말 현재 장애자 1,020명을 취업시켰다. 이들의 대부분인 738명    
( 72.3% ) 이 한국장애자재활협회를 통해, 254명이 노동부 지방 사무소를 통해, 4명
이 산업재활원을 통해 각각 일자리를 얻었다.
  노동부는 취업한 장애 근로자들이 이직률이 낮고 인내력과 성실성이 높다는 점을 
사업주들에게 홍보하고 장애자 취업에 협조토록 권장하고 있다. ' ( 85년 11월 13일 
서울 신문 )
  올해 1,020명이 취업을 했다는 것이 우선 반갑다. 보통 사람들도 직장을 얻지 못해 
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몸이 성치못한 친구들이 직업을 얻었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만족스러워하지 않을 줄 안다. 자기한테 맞는 직장
을 찾았기보다 이미 만들어진 자리에 끼워 넣어졌을 테니까.
  장애자의 취업은 대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취업
이 잘 된다. 그들은 단순 노동의 저임금으로 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명의 취업을 꼭 자랑할 만한 것은 못된다. 고급 인력들이 자기의 능력껏 
일할 수 있도록 대기업에서 빨리 문을 열게 좀 해야 한다.
  정립회관에 들렸다가 아주 낯익은 노신사를 뵈었다. 꼭 4년 만에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그 노신사는 4년 전 장애를 가진 아들의 진학을 상담하러 왔었는데 지금은 취업 상
담을 오셨다.
  그때 단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학교 근처로 집을 옮겨가며 아들 뒷바라지를 해왔지
만 대학이 너무 큰 난관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 윤석 군은 학교를 많이 낮추어 안전권으로 중대 공대에 들어갔다. 입시 
준비를 하던 아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면 하는 부탁을 받고 내가 편지를 했었는데 그때 
시작한 편지가 대학 1학년의 여름방학까지 갔었다.
  그러다 서로 연락을 못하고 잊혀져갈 무렵 그의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그 아버지 
하시는 말씀이
  " 대기업에는 명함도 못 내밀어요. 학교 입시보다 더 치열하더군요. 전혀 불가능해
요. 산넘어 산이라더니 정말 큰 일입니다. "
  대학은 돈 주고 배우러 가는 곳이기 때문에 그나마 자리가 있었지만 회사는 돈 받
으며 다니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한테까지 자리가 마련될 리가 없다.
  그래서 난 1,000명이라는 머릿수보다는 질적인 향상이 되어야 장애자 취업의 문은 
진정으로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수화 방송에 앞서 *
  ' 보사부는 23일 청각 장애자들의 TV 시청을 위해 내년부터 KBS 와 MBC TV 에서 수
화 방송을 실시해 줄 것을 문공부와 방송국측에 요청했다.
  보사부는 뉴우스 프로그램 중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날씨와 시장 정보등
에 대해 우선적으로 수화 방송을 병행해 줄 것과 재난 발생등에 대한 긴급 뉴우스는 
자막 방송을 함께 해줄 것을 요청했다. ' ( 85년 11월 23일 동아일보 )
  갖추어야 할 것들이 슬슬 진행되는 것 같다.
  방송국측에서야 청각 장애자가 얼마나 된다고 수화 방송을 하나 하고 시덥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방송을 가장 열심히 보는 사람들이 바로 장애자들이다. 단절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시간의 여유가 가장 많으니까 말이다.
  장애자들에겐 방송이 친구도 되어주고 또 스승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방송국
에 전화를 거는 것을 좋아하고 엽서나 편지를 쓰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는다. 
  84년 MBC TV 의 ' 함께 풀어봅시다 ' 라는 퀴즈 프로에 맹인 친구인 김종환씨가 신
청을 해서 출연하게 되었는데 맹인이라고 하자 출연을 취소했다고 한다. 아침 프로여
서 좀 곤란하다는 것이다.
  아침에 장님을 보면 재수가 없다고 해서 침을 밷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김종환 씨는 그 말을 듣고 펄펄 뛰며 흥분을 했지만 약한 자의 분노는 항상 그렇게 
팔딱팔딱하다가 혼자 지쳐서 쓰러지게 되어 있다.
  얼마 전 ' 차인태의 출발 새아침 ' 에서 심령 수술로 암을 치료한 가수 김   씨
가 초췌한 얼굴로 나와 아침부터 눈물을 찔찔 짜는 것을 방송했는데 재수가 좋은 일
인지 납득이 안간다. 아침부터 여자가 말이다.
  가장 공정성을 지켜야할 방송에서 심령수술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주는 일은 서슴치 
않고 하면서, 진짜 해줘야 할 일은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없이 안하고 있다.
  81세계 장애자의 해였기 때문에 생긴 KBS-1 라디오의 ' 내일은 푸른하늘 ' 이 지금
까지 방송이 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경의로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88 장애자 올림픽을 앞두고 이제 ' 내일은 푸른하늘 ' 의 존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20분으로 줄인다느니, 교육 FM으로 보낸다
느니 하는 얘기가 있어 나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물론 아무일도 없었지만.
  이러한 상황에 수화 방송이 실시된다는 것은 자연스런 발상이 아니라, 억지 춘향이
의 흉내내기에 불과하다.
  제 3 TV에 있는 장애자 대상 프로 ' 해뜨는 교실 ' 을 해가 좀 뜨게 채널 1이나 2
로 옮겨달라고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데 갑자기 손짓으로 얘기하는 모습이 화면 한
구석에 나타나면 시청자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 우리 아이들이 자꾸 벙어리 흉내를 내요. 교육적으로 악영향을 끼친다구요. '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런 탓을 안할 리가 없다. 또 끄떡하면 교육 영향
을 내세워 꼼짝도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방송인데 수화 방송이 또 얼마나 진통을 겪
으랴.
  무엇보다도 먼저 장애자가 무엇인지를 인식시키고 왜 수화 방송이 필요한지를 이해
시키는 것이 순서지 선진국에서 수화 방송을 하니까 우리도 해야한다는 식의 구태의
연한 사고방식이 안타깝다. 그러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슬쩍 꼬리를 감추게 
되지는 않을런지… .

     * 다이애너비가 온다는데 *
  88년에 서울에서 열릴 장애자올림픽에 영국의 찰스 황태자 부처를 비롯한 유럽 및 
중동의 4개국 왕실 가족과 IOC 위원장, 장애자 스포츠 기금재단 ( ISFD ) 회장 등 귀
빈들을 서울장애자올림픽에 초청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너비, 네덜란드의 마거리트 부처,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부처, 요르단의 훗세인 국왕 부처인데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영국의 찰스 황태
자부처일 것이다.
  장애자 올림픽에는 관심이 없어도 이들 손님들한테는 벌써부터 관심이 고조되고 있
다.
  어떤 사람은 장애자 올림픽은 모르고 올림픽 때 다이애너가 온다는 것만 얘기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왜 오는 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들이 일반 올림픽이 아닌 
장애자 올림픽 때 왜 오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서는 그들의 방문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들 왕실 가족은 각기 자국 장애자 단체의 회장직을 맡아 장애자 재활 사업을 주
도하고 있다. 그래서 장애자 올림픽이 열리는 서울대회를 참관하러 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매년 세계장애자 체육대회가 개최되는데 85년 대회에 갔다 오신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다이애너비가 선수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너무도 진지하고 사랑이 저절로 느껴지더
라고 말이다. 비가 오는데도 그 비를 다 맞으면서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대화
를 나누는데 겉치레가 아닌 진실에서 궁금한 점을 묻고 하는데 해외 토픽에서 그녀의 
화려한 면만 보도하여 갖고 있었던 선입견이 싹 없어지더라고 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열리는 각종 장애자 스포츠대회에서도 일본 황실 가족들이 주축이 
되어 시행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처럼 장애자 복지는 왕실의 사업으로 발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야 왕
실은 없지만 누군가 우리의 문제를 맡아줄 계층이 필요하다.
  88년도에 왕실 가족이 온다 해도 장애자 복지 측면보다는 나라의 귀빈으로서 떠들
썩하다 끝날지도 모른다.
  다이애너비가 무슨 옷을 입고 어떤 악세서리를 했느니 하는 사사로운 개인적인 퍼
슨낼리티만 화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황실 가족의 방한은 그들이 장애자 복지 발전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했고 그
들 나라의 장애자 복지는 어떠한지 하는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 또 차별 *
  대중 교통 수단인 버스나 전철 등을 우리에게 편리하게 승차와 하차의 시간을 늦추
어달라고 불평하진 않는다.
  다만 개인적인 편의를 위해 비싼 돈 주고 타고 다니는 택시조차 우리를 외면하는 
것을 호소할 따름이다.
  휠체어에 타고 있으면 승차를 거부하는 비정한 택시 운전수, 또 태워놓고도 계속 
투덜거리며 고객을 개 취급하는 횡포를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기분을 도저히 모
를 것이다.
  그런데 83년 1월 1일부터 장애자에게도 운전 면허를 주게끔 법이 개정되어 여유있
는 친구들은 신바람이 났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은 그림의 떡이다.
  장애자의 차는 승용차가 아니라 보조기구이다. 그런데 장애자 전용버스가 운행되고 
있지 않은 마당에 교통수단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하지만 전혀라는 말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85년 12월 10일 보훈 신문에서 이런 발표를 발견했다.
  ' 국가보훈처는 지방세법 제 7조와 지방자치단체 조례등에 근거를 두고 보철용 면
세 차량에 대해 제세 공과의 면세 시혜를 확대키로 했다. 그 대상은 올해 ( 85년 ) 
운행 차량 ( 4기통 이하 ) 에 대한 자동차세 면허세가 우선 면세되고 내년도 신규차
량 구입자에 대해서는 취득세와 등록세가 추가 면세된다. '
  물론 건강한 몸으로 나라를 위해 의무를 이행하다 장애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상이
용사에 대해 이런 혜택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차별에서 장애자들 사이의 위화감이 일어난다. 상이용사와 일반장애
자, 이들은 같은 아픔을 가졌는 데도 장애자와 정상인이 갈라지듯이 또 갈라지게 되
는 것이다.
  상이용사들에게 자동차세, 면허세에다, 신규차량 구입 취득세와 등록세까지 면세가 
되는 동안 일반 장애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돌아간 것이 없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이해할 수는 있다. 상이용사들은 그 기록이 다 남아있기 때문
에 제도적인 법령의 입안이 쉽다. 하지만 일반 장애자들은 등록제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그 정확한 수치마저도 나오지 않고 있다.
  상이용사들을 위해서는 국가 보훈처라는 독립된 부처가 있지만 일반 장애자의 문제
는 보건사회부 재활과에서 관할하기 때문에 우리 일은 사회 복지정책 중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같이 치우친 행정은 불만과 원망을 만드는 법이다. 나누어 먹기를 잘 해야지 한
쪽은 풍년인데 한쪽은 흉년이면 평화가 깨지고 만다.
  그리고 장애자 주정차 혜택에 대한 이런 기사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 앞으로 지체부자유자가 운전하는 승용차는 현행 도로교통법상의 주정차 및 통행 
제한 또는 금지 제한을 받지 않아도 된다. 
  보사부는 10일 급격히 늘고 있는 지체부자유자의 승용차 운전면허 취득에 대비, 이
들이 손수 운전하는 승용차에 대해서는 현행 도로교통법에 특례 조항을 두기로 하고 
내무부와 협의 중이다.
  보사부는 협의가 끝나는 대로 내년 1월 1일 부터 이 제도를 시행할 예정이다.
  보사부가 마련한 특계 조항에 의하면 지체부자유자의 승용차에는 장애자용 승용차
란 표지를 차량 전면에 부착토록 해 주정차 금지구역에서도 주정차 할 수 있도록 했
다.
  또 학교 앞등 차량 통행제한 지역이나 금지 구역도 통행할 수 있도록 했다.
  보사부는 우선 법령이 정비되기 전까지는 경찰에서 위반 스티커를 발부하지 않도록 
치안본부에 협조를 요청했다.
  9월말 현재 전국의 운전면허 취득 지체부자유자는 모두 1,606명이다. ' ( 85년 10
월 11일 조선일보 )
  1월 1일부터 시행이 된다고 했는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기다리는 사람은 눈
알이 빠지는데.
  조금만 신경 써주면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고스란히 당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
속의 원시인 생활처럼 마냥 우스꽝스런 일인데도 말이다.

     * 66년만에 온 기회를 *
  제 66회 전국체전에 체전 사상 처음으로 장애자 육상 시범단이 선을 보인 것은 특
이할 만한 사건이었다.
  춘천 종합 운동장의 개회식에서 26명의 육상 시범단이 장애자 선수단이란 팻말을 
앞세우고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그 순간 TV 앵글이 대통령각하 내외분의 얼굴을 클로즈업시켰다. 열렬한 박수 흐뭇
한 표정.
  그런데 대통령각하의 치사에서 장애자 선수단에 대한 말씀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멀리에서 온 해외 동포팀, 체전을 주관한 강원도팀등 빼놓지 않고 감사를 보내면서 6
6년 만에 처음으로 등장한 장애자 선수단에 대한 격려 한 말씀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
도 섭섭했다.
  촐촐이 비까지 맞으면서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입장을 했는데 말이다.
  나는 식이 끝난 후에 시범경기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시범 경기를 TV 
앞에서 기다렸지만 중계는 끝나고 말았다. 처음있는 시범 경기이니 좀 보여줄만도 했
을텐데 …… .
  시범 경기에 나간 장애자들은 13개 시도에서 2명씩 뽑힌, 정말 한다 하는 사람들이
었고 또 일반 체전에 나간다는 것에 대해 부풀어 있었는데 김빠지는 일이다.
  하지만 제 66회 전국체전이 개막된 85년 9월 10일은 뜻깊은 날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신문에서 장애자 선수단의 숙소를 한림병원으로 정했다는 기사를 읽
고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그 이유가 일박 숙박업소에서 장애자 선수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안되어 있기 때문
이라고 한다.
  26명 밖에 안되는 적은 숫자에서 였겠지만 숙박시설만큼은 제대로 준비해줬어야 옳
았다. 교통편, 경기장 시설등도 불편했는데 잠자리까지 설움을 받다니 말도 안된다.
  선수들은 병원 침대에 누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뜩이나 환자 취급해주는 것에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는 우리들인데, 그날은 진
짜 환자가 되고 말았다.
  언제나 전시효과를 위한 전시품으로 이용되고 나서는 공허한 가슴에 씁쓸한 뒷맛만 
남게 한다.
  체전 66년 사상 처음으로 장애자 선수에 대한 기회를 주었는데 그 의의를 진정하게 
보여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하나의 전시효과를 노렸다는 것이 배신감마져 느끼게 했
다.

     * 청와대 문턱은 왜 이리 높은가 *
  86년 10월 1일에서 4일까지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열린 제 2 회 세계장애자 기능
경기대회 ( Abilympic ) 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종합우승을 하고 돌아왔다.
  우승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너무너무 기뻐 한국장애자재활협의회의 이청자 부장님
께 축하 전화를 드렸다.
  부장님도 너무 감격하시어 선수들을 맞을 계획을 말씀하셨다.
  " 공항 행사를 하고, 저녁때 호텔에서 만찬을 하는 계획밖에 없어. 카퍼레이드라도 
해야하는데. "
  핑계인지 몰라도 IMF 총회때문에 카퍼레이드는 못하게 됐다고 했다.
  10일 오후 4시 30분. 선수들을 맞을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1층 대합실은 각 단체의 
내빈과 동원된 장애자들로 붐볐다.
  그리고 축하의 꽃다발과 플랭카드로 환영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었다.
  드디어 태극기를 앞세우고 우리나라 선수단이 모습을 보였는데 휠체어에 앉은 낯익
은 얼굴들을 보자, 왠지 코끝이 시큰했다.
  신문기자들과 각 TV 에서 나온 카메라들의 세례 속에 선수들는 ' 왠일이야? ' 했을 
것이다.
  여자 선수들 눈에서는 이슬 방울이 맺히기도 했다.
  이해원 보건사회부 장관이 준비된 원고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축사를 
하셨고 문병기 회장님도 떨리는 목소리로 그동안의 우리의 설움이 이젠 끝났다는 말
씀을 하셨다.
  그 두 분이 그렇게 말씀을 잘 하시는 줄 또 그렇게 우리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신
지를 처음으로 깨닫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세계 60개국에서 600여명이 참가하여 12개 부문에서 기량을 겨룬 이번 대회에서 우
리는 각 부문에 단 한 명씩 밖에 출전을 못시켰지만 12명이 금 3, 은 4, 동 2, 모두 
9개의 메달을 따 내어 우승을 했다.
  지난 81년 일본에서 열린 제 1회 대회에서도 2위를 했던 우리나라고 보면 어쩌다 
운이 좋아서 따낸 우승이 아니라, 우리들의 능력에 대한 산 증거였다.
  난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일반 기능 올림픽에서 우승한 것보다 더 값지고 의미있는 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아무 쓸모없는 무용지물로 여겨졌던 장애자들인데 이렇게 훌륭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는 것을 전세계에 훌륭히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권투시합, 축구 경기 등 행사 때마다 잊지 않고 축전이나 축하 전화를 보내
주시고, 또 경찰의 날, 노동의 날, 저축의 날… 많기도 많은 기념일 다음날에는 반드
시 청와대로 부르시어 오찬을 베푸시는 각하께서 우리 장애자들에게는 항상 묵묵부답
이시다.
  성치도 못한 몸으로 국위를 선양하고 왔건만 축전 한 통 보내지 않으셨고, 일반 기
능대회 선수들은 부르시면서 왜 우리한테는 그런 기회를 주시지 않는지, 청와대의 문
턱은 높기만 하다.
  칭찬받고 싶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렇게 하므로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함께 격려해줄 기회가 되기 때문에 어린애 같은 투정을 해본 것이다.
  정말 장애자 행정은 우리의 걸음처럼 느림보다. 선수들이 개선한지 무려 67일이나 
지난 12월 16일에 해단식을 하면서 포상식을 했다.
  포상을 받았는지 뭘 했는지 보도를 하지 않으니 나라도 여기에 기록하여 알리고자 
한다.
  금메달
  이기현 ( 지체장애자, 라디오 수리, 철탑산업훈장, 격려금 100만원 )
  박재중 ( 지체장애자, TV 수리, 철탑산업훈장, 격려금 100만원 )
  김해영 ( 지체장애자, 기계편물, 철탑산업훈장, 격려금 100만원 )
  은메달
  김영진 ( 청각장애자, 목공예, 석탑산업훈장, 격려금 50만원 )
  김동중 ( 청각장애자, 가구제작, 석탑산업훈장, 격려금 50만원 )
  정양호 ( 청각장애자, 선반, 석탑산업훈장, 격려금 50만원 )
  서영수 ( 시각장애자, 영문타이프, 석탑산업훈장, 격려금 50만원 )
  동메달
  이용임 ( 지체장애자, 양재, 산업포장, 격려금 25만원 )
  김영권 ( 지체장애자, 광고미술, 산업포장, 격려금 25만원 )
  또 메달을 따지 못한 3명에게도 10만원씩의 격려금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 흉내만 내는 소꼽장난으로.

     * 피맺힌 한라산 꼭대기 *
  삼육재활학교 학생 5명이 한라산 정상을 향한 도전이 86년 새해 벽두부터 눈길을 
끌었다.
  1월 6일로 예정되었던 산행이 퍼붓듯이 쏟아진 눈 때문에 연기되었던 것이다.
  소아마비, 뇌성마비 등으로 평지도 걷기 힘든 친구들이 그 혹한 속에서 우리나라에
서 가장 높은 한라산 꼭대기에서 인간들의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는 것은 가히 역사적
인 일이다.
  하지만 난 우리 친구들보다는 같이 따라간 사람들의 노고가 먼저 마음에 걸린다. 
갔다 왔다고 하면 그랬나보다 했을지도 모르겠는데 TV 화면에 비친 친구들의 모습은 
내 가슴에 뜨거운 불을 붙여주었다.
  질질 끌리는 다리를 뒤에서 끌어올리는 장면, 엉ㄷ엉이를 땅에 붙이고 두 팔로 기
는 모습,
  그 장면을 보고 정말 훌륭히 해냈다고 그 의지를 칭찬할 것인지, 아니면 무엇이든
지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과장된 과시로 보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앞선다.
  아니나 다를까.
  " 귀희씬 어떻게 보았는지 몰라도 우리가 할 수 없는 부분은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의지라고 생각해요. 정상인들과 똑같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용기가 되는거지, 걸어야 
할 것을 기어서 했다고 극복한 것은 아니죠. 솔직히 정상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
르지 못할 일이였다구요. " 라는 비난 아닌 비난을 했다.
  장애자에 의해 밟히지 않은 산들로 남아있는 것보다는 그 산도 우리의 발길로 눌려
졌다는 것은 기분좋은, 정말 평등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 승리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 때문에 그런 쇼가 자꾸자꾸 벌어
질까봐 두렵다.
  장애자가 완전히 할 수 없다고 단정되어 있는 일을 완전함이 아니라 흉내로 마치 
완전을 찾은 것처럼 평가되는 경향 때문에 오히려 우리 어린 친구들에게 잘못된 극기
를 심어주는 것이 아닌가 싶은 염려마저 든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큰 일을 해냈다.
  직원들의 친목을 위해 결성된 삼산회에 이따금 끼었던 장애 학생들이었건만 이렇게 
11시간 동안의 한라산 산행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서울 근교의 산을 오를 때 술취한 등산객들이 " 무슨 쇼를 하느냐 " 고 비난하면 
다리가 4개라 더 쉽다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던 그들이기에 이번의 정상 정복도 
가능했을 것이다.
  1 미터도 넘게 쌓인 눈덮인 한라산을 오르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왜, 이토록 심한 장애를 주시어 끌고 끌리게 하셨습니까? ' 하는 장애에 대한 원
망과 정말 장애가 지겹도록 불편하다는 것을 그 시린 기온만큼 뼈저리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술취한 등산객에 대한 복수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리.
  그런데 사람들은 그 미소를 정상을 정복한 기쁨의 표시로 알았을 것이다. 속으로 
피맺힌 그 사연은 모르고.

     * 유서 *
  ' 시장님, 왜 저희는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 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
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스스로 부딪혀보지 못하고 피부로 못느껴 본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
다.
  택시를 잡으려고 온종일 발버둥치다 눈물을 흘린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휠
체어만 눈에 들어오면 그냥 지나치고 마는 빈 택시들과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에이듯 
쓰렸습니다.
  그까짓 신경질과 욕설이야 차라라 살아보려는 저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져보게 해
주는 것이라고 자위해버리를 수도 있겠지만 도대체 움직일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주
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놓았습니다.
  시장님, 을지로의 보도 블럭은 턱을 없애고 경사지게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밖의 시내 어느 곳을 다녀도 그놈의 턱과 부딪혀 씨름을 해야 합니다. 또 
저같은 사람들이 드나들수 있는 화장실은 어디 한 군데라도 마련해 주셨습니까?
  장애자들은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대우를 받아도 끝내는 이용당합니다. 조그
마한 꿈이라도 이뤄보려고 애써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저를 약해지게만 만듭
니다. '
  84년 9월 19일 오전 10시, 그의 지하 셋방 한구석에서 음독 자살한 김순석 씨의 마
지막 외침이었다.
  편지지 5장을 검은색 볼펜으로 빽빽하게 채운 그의 유서 구절구절에서 그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낄수 있었다.
  집에서 머리핀, 브로치, 반지, 목걸이등 각종 악세사리를 만들어 남대문 시장 상가
에 팔아오면서 다섯 살된 외아들 경남군과 살기 위한 몸부림을 쳤던 그 였는데 결국 
사랑하는 아들과 영원히 헤어진 것이다.
  김순석 씨는 5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절었지만, 아무 불편없이 악세사
리 공장에서 9년간 일해오면서 공장장에까지 승진되었던 극복의 사나이었다.
  그런데 4년 전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마저 잃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했다.
  그러나 업친데 덮친 불행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었는데 결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꺾이고 말았다.
  그가 왜 굴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를 몇가지 일로 짐작할 수 있다.
  행상 리어카나 좌판들이 빽빽이 들어찬 남대문 시장 골목을 휠체어로 비집고 들어
서야 하는 그에게 온갖 모멸이 쏟아져 내려 왔다.
  또한 횡단보도의 턱때문에 길을 건널 수 없어서 인도와 차도가 경사로 이어진 곳으
로 돌아가 길을 건너다 교통순경의 눈에 적발되어 무단 횡단이라는 죄명으로 다음날 
새벽에야 집에 들어올 때도 있었다.
  악세사리 상점마다 찾아다니며 새로 개발한 금형의 모형을 내보였지만 휠체어에 탄 
그에게 선뜻 일을 맡기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겨우 주문을 받아내도 상인들은 남보
다 1∼2할 가량 싼 값으로 계약하려 들었다. 또 그렇게 겨우 확보한 거래처도 막상 
대금을 지불할 때면 다음 번 계약을 끊어버리겠다며 은근히 가격을 낮추도록 강요하
기가 일쑤였다.
  그러다 가격 문제로 거래 상인과 대판 다투고 거래가 끊겨 보름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새로운 거래처를 뚫어보겠다며 결혼 예물인 금목걸이를 전당포에 맡겨 10만원
을 들고 나갔던 사람이 사흘만에 지친 몸으로 들어와 이틀후인 19일 오전에 자살을 
했다.
  그 나흘 동안의 행적은 밝히지 않았지만 나는 짐작할 수 있다.
  결혼 예물인 금목걸이를 전당포에 맡기고 10만원으로 마지막 재활을 위한 안간힘을 
써봤지만 여전히 서울 거리는 턱이 있었고, 여전히 사람들은 사람 대우를 해주지 않
았기 때문이리라.
  그를 죽인 건, 바로 이 사회다.
  이 사건이 신문지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우리들은 흥분을 하며, 애통해 했
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런 사건이었으려니, 한 장애자가 삶에 회의를 느끼로 자
살을 했으려니 하며 몇 번 혀나 차주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서울 시장이 사표를 낼 만큼의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아무도 이 사건을 문책하
지 않았다. 또 그 때문에 보도의 턱을 없애주지도 않았다.
  이렇게 가볍게 넘려질 죽음이라면 지하에서 얼마나 억울해하고 있을까 싶지만 확실
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서늘하게 했던 것은 사실이다.

     * 곰두리의 합창 *
  이겨레와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들이 한결 더 깊고 간절합니다.
  불편한 몸 극복해 일어서는 우리가
  선진하는 역사의 횃불이 되오리다.

  우리의 의지는 하늘의 의지, 우리의 희망은 끝이 없나니
  우리의 의지는 하늘의 의지, 우리의 희망은 끝이 없도다.

  파라림픽 우리가 견뎌 이김으로써
  이나라 숨은 저력 드러내 보이고 
  모든 일과 평화도 우리들이 앞장서
  온 세계의 자랑이 크게 되게 합시다.
  우리의 의지는 하늘의 의지 우리의 희망은 끝이 없나니
  우리의 의지는 하늘의 의지 우리의 희망은 끝이 없도다.

  이 시는 88서울장애자올림픽의 노랫말인데 서정주님께서 써 주셨다.
  정말 지당하신 말씀이다. 파라림픽을 치루기 위해선 주인인 우리가 견디어내야할 
문제가 참으로 많다.
  하지만 그 문제를 풀고나면 우리 나라의 힘이 과시 된다.
  그리고 장애자올림픽의 휘장은 오륜기와 위치와 색깔은 같지만 동그라미가 아니고 
태극 무늬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 전래의 문양으로 한국의 고유한 이미지를 나타내기 
때문에 한국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물결모양은 약동하는 장애자의 재활의
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또 마스코트인 곰두리는 곰 두마리가 어깨 동무를 하고 한쪽 발을 한데 묶고 뛰는 
모습인데 마스코트에 두마리가 등장하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곰은 영특한 지혜와 불굴의 용맹을 함께 갖춘 동물로서 단군 신화이래 우리 겨레와 
가장 친근한 동물이다. 또 동서고금을 통하여 하늘의 별무리 중에서 가장 잘 보이는 
별자리를 찾아 큰 곰자리니, 작은 곰자리니 하고 불리웠을 정도로 우리 생활과 밀접
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아기 반달곰 두마리가 발을 맞춰 힘차게 뛰는 모습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 협동하여 
활기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올림픽의 호돌이와 비교하면 여러 면에서 재미있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단군 
신화에서 곰은 마늘과 쑥으로 동굴 속에서 100일을 견디었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끝까지 견딘 곰은 장애자의 인내를, 뛰쳐나간 호랑이는 정상인의 활동성
이라고 좋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 되지 못한 호랑이와 웅녀가 된 곰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그런데 현실은 호랑이가 더 득세를 하고 있고, 곰은 숨어지내야 하는 입장이고 보
면 이토록 적반하장일 수가 있을까 싶어 한숨이 절로 난다.
  곰두리 녀석이 웅지를 펴고 마음껏 뛰어다녀야 하는데 곰두리는 음지에 웅크리고 
앉아 꼼짝도 않고 있으니 건강한 사람으로 변신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구박을 받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우리의 부모님 *
  85년 2월 26일 우리나라 최초의 전장애자부모회가 탄생했다. 지금서야 부모회가 결
성되었다는 것은 우리 나라 부모님들이 얼마나 안일했는가를 말해준다
  사실 우리의 문제를 가장 앞장 서서 해결해야 할 사람은 사회 사업가도 아니요, 정
부도 아니요, 우리 부모님이시다.
  자식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분들이기에 또 부모님들은 장애자가 아니
기에 우리를 대신해서 얼마든지 활동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벌
어먹기에 바빴고, 부자들은 충분한 재산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걱정할 필요
가 없었다.
  황관장님이 연세 소아재활원 당직 의사였을 때 용기를 심어주기 위한 애기를 하면 
' 난 걱정없어요. 우리 엄마가 나 평생 먹고살 것은 해놨다고 하셨어요. ' 라고 해 
충격을 받았다고 하신다.
  정말 그 아이는 지금 성장하여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자기 부
모가 이루어놓은 재산의 혜택 속에서 말이다. 
  돈만 많으면 장애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버스 대신 자가용으로, 힘들게 움직
이는 대신 보조원이 업어주고, 그리고 굳이 의대나 약대에 가서 생활 안정기반을 닦
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자 문제처럼 복잡미묘한 것은 없을 것이다. 못 배우고 가난한 
장애자는 나라에서 보장구를 지급하고, 의료혜택을 주고, 보조금이라도 나왔으면 하
지만, 제법 산다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장애자들은 장애자를 구호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 결사 반대한다.
  그리고 중간의 장애자들은 돈으로 권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실력으로 하려고 그렇
게 애를 쓰는데 그 노력이 자꾸 좌절되는 것은 사회의 비뚤어진 인식때문이다.
  학교문제, 취업문제, 결혼 문제 등 평등한 대우만 해주면 모든 것이 깨끗이 해결될 
것을 이토록 비비 꼬여 있어 그 해결이 난제 중의 난제인데, 그것은 부모님들이 뭉치
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이다.
  제 1 회 장애자 부모대회가 롯데 호텔에서 열렸다. 700여명이 참가를 했지만 모두 
호텔에 올 수 있을 정도의 비교적 부유한 층들이었다.
  그날 토의된 내용이 보청기 등 장애자들에게 필요한 기구에 대한 면세조치, 상속
세, 소득세 감면조치, 특수아에 대한 과외 허가조치, 고교입시를 위한 배정고사에서 
듣기 평가의 면제 혜택, 그리고 장애자에 대한 대학의 문을 넓혀줄 것 등이었다고 한
다.
  그런데 좀더 구체적인 가장 필요한 부분이 그냥 지나쳤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부
모님들은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모님들 중에는 자식의 장애가 부끄러워 사람들 앞에 내보이려 하지 않는 분들도 
많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장관이나 국회의원 등 정치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식의 장애가 자신의 정치 생명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
다고 한다. 그래서 자식을 자살의 궁지로까지 몰아놓곤, 누가 알세라 쉬쉬거리며 입
을 막기위한 노력은 정말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에드워드 케네디 미 상원의원의 아들은 암으로 
한쪽 다리를 잃고 장애자 복지를 위해 일하고 있다. 또, 중공 등소평의 아들 등박방
은 문화 혁명 때 강제로 건물 4층에서 내던져지는 바람에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게 되
었는데 현재 중공장애자 복지기금 회장직을 맡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드러내보이고 있지만, 정치생몀에 하등의 피해가 없었다. 오히려 진
실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들이 우리를 감추려고 할 때가 가장 처참하다. 치장해둔 외제물건 자랑은 하
면서 자식자랑은 하지 않는 부모, 과연 부모라고 부를 수 있을까?

     * 고질적인 병폐 *
  우리 친구들 중에는 재활원 원장이 꿈인 사람이 많다.
  자기가 재활원 생활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같은 어려움 속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뜻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손쉬운 일이기도 하다. 방 한 칸 밖에 준비못한 상황에서도 아
주 거창하게 이름을 붙이고 원생들을 모집한다.
  그 모집광고를 듣고 꿈에 부풀어 상경을 하지만 그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
  할아버지 같은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서울에 온다고 넥타이까지 매고 온 장애자 
한 분을 만났는데 방안을 빙빙 둘러보는 그의 눈은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집에서는 재활이 힘들 것같아 어디론가 가는 것으로 탈출구를 찾으려 하지만 그것
도 또 좌절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크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재활원들이 대개 얼마 못가 파산하
고 다른 장애자가 인수를 한다.
  그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그리고 원생들은 이곳저곳으로 철새
처럼 방황하며 그 어느 곳에서도 만족을 못느끼고 옮겨 다닌다.
  그런데 원장이라는 사람들 중에는 어떻게 하면 사회나 관계기관의 도움을 받을까 
자나깨나 노심초사한다. 그래서 대개 종교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비록 작더라도 그 가족들만이라도 행복할 수 있는 선에서 만족을 못하고 자꾸 확장
하려고만 한다. 그래서 매스컴에서 취재해오도록 온갖 수단을 다 쓴다. 아무것도 모
르는 매스컴은 좋은 기사거리로 취재를 나오고 또 기사의 흥미를 위해 좋은 면은 확
대하고 안좋은 면은 감춘다.
  그런데 그것을 안 라이벌 단체에서는 그것이 질투가 나 밝히지 않아도 될 치부까지 
다 드러내보인다.
  드러누워 침 뱉는 격이다.
  이런 추태는 그 개인의 인격뿐만이 아니라 장애자 전체인격에 누가 되기 때문에 부
끄럽기 짝이 없다.
  한데 뭉처서 힘을 발휘할 생각은 하지않고 어느 것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
는 그 빌어먹을 근성 때문에 장애자 복지는 늦어지고 있다.
  이것은 비단 작은 단체에서만이 아니라 우후죽순처럼 결성되는 법인체에서도 마찬
가지다.
  자기네 협회만의 행사, 자기네 협회만의 회원, 너무나 조잡한 행동에 때로는 혐오
감이 들 때가 없지 않다.
  진정한 장애자 복지를 위한다면 함께 모여야 하는데 그것을 각자의 욕심 때문에 막
고 있는 것이다.
  또한 겉으로 보이는 행사에만 주력하고 장애자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마련
하는 일에는 등한시한다.
  장애에 수반되는 수술이나 물리치료, 욕창 등 의료적인 문제의 해결을 의해 장애자 
의료보험을 그렇게 부르짖고 있건만 아직도 깜깜 무소식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자
면 지하철 공사를 할 때, 장애자의 휠체어 폭을 건의하였던들 1,2 호선의 개찰구에 
단 1 cm 차이로 휠체어가 못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 만들어진 후 나중에 아웅다웅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장애자의 편에 선다는 것을 
증명하는 양 서로 목청 돋구워 얘기한다.
  그 덕분에 3,4 호선의 개찰구는 넓어졌지만 그렇게 한박자씩 늦추지 않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세심한 관찰을 하여 귀찮을 정도로 따라 다니며 건의를 하는 것이 그런 협
회의 가장 큰 업무라고 생각한다.
  한번을 장애자 캠프에 초청강사로 갔을 때 한 아가씨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이런 말
을 했다.
  의료기사 면허증을 따고 여러 군데 이력서를 냈지만 장애자라고 채용을 안해주더라
고 말이다.
  그 아가씬 장애가 아주 가벼웠다. 그런데도 장애때문에 면허증를 활용하지 못한다
면 더 심한 장애자는 감히 도전해볼 생각도 못하게 된다. 그로 인한 장애자는 비생산
적인 무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그녀의 호소에 난 혼자 해결할 수 없으면 장애자들의 권익을 옹호해 주는 곳이 있
으니 의논을 해보라고 하자, 벌써 여러 군데 찾아봤지만 무반응이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혼자의 외침은 전달되지 않지만 그런 협회에서 우리의 목소
리를 전해줄 의무가 있는 것인데 사회의 이목을 끌만한 커다란 사건만 해결사 노릇을 
하고 작은 권익은 짓밟혀도 방치해두는 형편이다.

     * 너무나 큰 오류 *
  과민성, 이것은 요즘 어느 곳에서나 적용이 되는 공통어이다. 그런데 사실 현대인
들은 감각이 더듬이처럼 예민해져가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때에 대중앞에 알몸을 
보인다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지만, 대중들은 자극적이지 않고는 눈길을 주지 않는
다.
  나도 현대인이란 구실을 붙여 과민성 한번 부려보겠다. 신문에 주말에 볼만한 TV 
프로라는 문구가 의기양양하게 버티고 있었다.
  MBC 베스트셀러극장 ' 비를 타고 오른 망둥이 ' ( 유익서 원작, 박찬성 극본, 김지
일 연출 84년 2월 26일 오후 10시 ) 쭉 훑어 보다가 나는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 대기업의 경리부 직원이 출세욕으로 불구의 사장의 딸과 결혼 '
  아주 짤막한 안내문이었지만 날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난 약간의 설레임까지 느끼
며 나 혼자 은밀히 TV 앞에 앉았다.
  주인공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빈 휠체어를 밀고 거리로 나오는 장면과 함께 타이틀
이 소개되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리하여 말하자면
  1. 대기업의 경리부 직원으로 취직이 될 정도의 남자가 마치 그 회사의 청소부 같
이 보였다는 것.
  2. 소아마비로 20여년 동안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하던 여자가 갑자기 멀쩡한 다리
로 걷게 되었다는 것.
  3. 몸이 불편한 사람은 사랑이란 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조건 자기를 받아주는 사람
만 있으면 결혼을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는 것.
  4. 꼭 대기업의 사장 딸고 부모 형제 아무도 없는 좀 모자란 듯한 남자만이 어울리
는 한쌍이 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해주고 있다는 것.
  5. 결혼을 해서 임신까지 했던 여자를 장애의 몸에서 풀려났다고 금방 받아들이는 
남자가 있다는 것.
  6. 또 장애자가 정상의 몸이 됐다고 살을 섞은 남편을 개처럼 쫓아내는 못된 인간
성의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 온통 모순 투성이었다.
  물론 시나리오란 픽션이다. 또 극적인 면을 많이 설정해야 드라마로서의 생명이 있
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드라마가 방영됨으로써 백만이 넘는 장애자들에겍 미치는 영향을 조금
도 생각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괘씸했다.
  ' 병신과 결혼한 자네도 따지고 보면 더 병신일세! '
  이 말을 어떤 식으로 보상받아야 하는 건지, 과연 장애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망둥
이밖에 안되는 건지 대책이 서질 않는다.
  만약 이런 경우에 있는 부부가 이 드라마를 봤다면 얼마나 민망스러웠을까? 또 그
것을 본 사람들은 그들 부부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 얘 그 다리 아픈 여자 아직 왜 애가 없을까? "
  " 요즘 그 남자 얼굴 훤해졌더라. "
  " 글쎄, 술 먹고 늦게 들어올 때가 많다지 뭐니. "
  이렇게 가뜩이나 색안경을 쓰고 쑥덕거리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사람들은 관심을 진짜 보내줘야 할 곳엔 냉정하고,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될 곳엔 과
민성을 보이는 좀 이상한 습성이 있다.

     * 상담자 *
  수석 졸업을 할 당시에는 하루에 수십 통의 편지를 받았지만 이젠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그때의 편지는 동생으로 하자 언니로 하자, 또는 애인하자는 식의 펜팔 편
지였지만, 이제는 진지한 인생에 대한 상담 편지가 많이 오기 때문에 요즘의 편지야
말로 나로 하여금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또 내가 하는 일에 열중해야 한다는 결
심이 생기게 한다.
  대개의 내용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한통의 편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귀희 언니께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부산 경남 여고를 졸업한 이 선민입니다. 언니의 주소는 동국대학교에 
문의하여 알았습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펜을 든 것은 앞으로의 제 진로 문제를 상의드리고 언니의 좋은 
도움 말씀을 듣고자 함이니 바쁘신 중이시겠지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먼저 저의 장애 정도를 말씀드리면 1 살때 소아마비로 두 다리가 마비되어 혼자서
는 전혀 걸을 수도 설 수도 없는데 양쪽 보조기를 신고 목발을 짚으면 평지는 조금 
걸을 수 있지만 계속적인 연습부족 때문에 아주 가까운 거리만 갈 수 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까지는 일반학교인 성남교에 다녔는데 집에 일보시는 아줌마가 
업고 다녔습니다.
  5학년 초에 서울 한양대학병원 재활과에 1달 반 동안 입원, 보조기를 신고 걷는 연
습을 해 퇴원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 특수 학교인 혜성 학교로 전학을 해 거기서 졸업했습니다. 그래
서 수정 여중을 거쳐서 경남 여고를 올해 졸업했습니다.
  학력고사를 치르긴 했지만 대학교에 가는 것이 도저히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고 말
았습니다. 그후 그냥 집에 있는데 마음이 편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버지께선 7년 전부터 서예를 하셨고 검도도 오래 하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서실
이나 도장에 다니시는 분들께 제 문제로 말씀을 많이 나누시나 봅니다.
  그 분들 중에 한학 하시는 분, 작가이신 분등이 계시니까 자연히 얘기가 그런 방향
으로 가, 저에게 서예와 한학 같은 것을 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다니시는 서실의 선생님께선 사전이나 국전 심사위원을 하신 정도의 대가이신
데 아버지께 항상 제 안부를 물으시며 관심을 가지시고 제가 하게되면 잘 밀어주실 
거라며 하라고 하시고, 또 서예도 하시고 한학에도 능통하신 분이 계신데 그 분께선 
배우겠다면 오셔서 해주시겠다고 하신답니다.
  어머니께선 요즘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고집을 피우고 안하느냐고 야단이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라면서요.
  저는 집에서 부모님께 이렇다 저렇다 의사 표시를 못하고 지금껏 있습니다.
  언니가 올해 대학 졸업하고 집에 있는데 언니와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지금 제 나
이에 이런 쪽이 선뜻 마음에 닿지 않는 걸 이해한다고 합니다.
  제 생각은 취미로 서예를 배우기는 하겠는데 대가를 꿈꿀 정도의 자신이 서지 않습
니다. 그리고 혼자 하는 일이라 외로운 생각도 듭니다.
  아버지께선 20년 정도만 하면 뭐가 돼도 안되겠느냐고 하시며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 시간이 무한정 있으니 남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남과 달라서 시집을 갈 것도 아니고 하니 평생 가질 나의 일에 대한 
애착이 남보다 강해야 항상 꿋꿋이 살아나갈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
가 경제적으로 혼자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예나 한학 같은 것에 평생을 바칠 수 있을지 그리고 경제적인 것도 
걱정입니다. 부모님께선 대가의 글자 한자가 얼마나 비싼지 아느냐고 하지만 너무나 
긴 시간이 필요하고 될지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며 배운 공부에 익숙해버려 그런 공부에 대
한 미련도 많이 남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하니까 언니는 저에게 네 인생은 어차피 네 것이니까 
하고 싶은 것을 해야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간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저의 적성이라
든가, 앞으로 무슨 방면으로 나갔으면 한다는 확실한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늘 막연하고 불안하기만 하였습니다.
  저는 문과인데 제가 이과 계통의 대부분 과에 진학할 수 없는 신체이기 때문에 그
렇게 결정된 것입니다.
  과목 중에 수학에도 흥미가 있고, 암기 과목도 어학 계통도 모두 싫지 않고 성적도 
별 차이 나지는 않습니다.
  심리학쪽에 좀 관심이 있습니다. 만약 계속 공부를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반 대학은 시설이 되어있지 않으니 현상태로 다니려면 이사를 가든
지, 차가 있고 데리고 다닐 사람이 필요한데 제가 운동부족 때문인지 체중이 무거워
서 그것도 골치입니다. 아뭏든 경비가 너무 많이 들 것 같아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집에서도 될 것 같으면 올해 갔지 이러고 있었겠습니까?
  얼마 전 언니가 방통대 영문과로 가서 번역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알아보니 
방송통신대학은 1년에 2주 정도만 출석하면 되고, 학비도 1학기당 5만원 이하였습니
다.
  그런데 번역 일도 어느 정도 졸업 후 진로가 보장될지 저로서는 아는게 없으니 의
문입니다. 방통대 이야기는 언니와 둘만의 얘기인데 언니는 빨리 결정하라고 합니다.
  아버지도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모르셔서 얘기가 엇갈리실 때도 있고 어머닌 내가 
계속 아무 말없이 있으니까 성화가 대단해서 저도 한시 바삐 결정을 해야겠는데 걱정
만 될 뿐 모르겠습니다. 취미라도 우선 서예를 할까 생각해봤지만 우선 내가 평생 가
야할 길을 결정하고 나야 순서가 아닐까 싶어 그저 가만히 있습니다.
  저희 언니는 귀희 언니께서 어떻게 다녔는지 의문스러워 하십니다. 어머닌 집에서 
그만큼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그렇다고 하시며 저를 보낼려면 적어도 한달에 30만
원 넘게 그리고 차가 있으면 더 든다고 하십니다.
  언니께선 대학원까지 마치셨다니 저로선 상상이 안됩니다. 대학은 이 건물 저 건물 
옮겨다녀야 한다는데 화장실은 또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무슨 일을 하시며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불쑥 저의 이런 골
치 아픈 문제를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집안엔 언니와 얘기해봐도 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고 밖에서 누굴 만날 수도 
없어 답답한 마음에 편지를 띄웁니다.
  언니는 일단 방통대에 가 공부를 하다보면 - 물론 열심히 해서 인정받아야 겠지만 
- 차차 길이 열리겠지 하며 어렵게 생각 말고 결정을 하고 부모님께 이야기하라고 하
지만 버릇이 되어버렸는지 늘 가만히만 있습니다.
  언니의 의견을 듣고 많은 도움을 얻고자 하니 바쁘시겠지만 답장 주시면 고맙겠습
니다.
  늘 건강하시고 보람된 생활하시길 바라며 안녕히 계세요.
                                          85. 6. 7
                                             부산에서 선민 올림
  이 편지에서 우리 장애 학생들의 고민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학력고사는 11월에 봤을 텐데 이 편지가 내게 온 것은 6월이고 보면 반년 정도를 
갈등하며 방황했을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 편지를 쓰는 순간도 해결이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감정은 많이 희석되었으리
라 생각된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민 양이 시집갈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ㅁ해
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슬프도록 대견하다. 
  그만한 나이의 소녀들한테는 전혀 없는 고민을 우리는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선민양은 고등학교 때
부터 대학에 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적성과 앞으로의 진로를 생각해 보지 
않고 막연하게 불안해하기만 했다고 했다.
  지금의 나 역시 앞날을 생각하면 막연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난 시도해 보지 않고 
미리 포기하지는 않았다. 끊임없는 시도가 줄기차게 따라 다니는 제약으로 좌절되기
도 많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방향이 수정되었다.
  난 의사가 되기 위해 고등학교 때 이과반에 들었고 내가 갈 학교를 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장애 때문에 거절되었을 때 난 다시 가능한 쪽의 길을 찾아나섰다.
  가능한 길을 찾아다니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할 수 있
었던 것은 우리 집안식구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는 잘 될 때도 많았지만 어려울 때도 더 많은 기복이 심한 편
이었다. 수기집 ' 그래도 이손으로 ' 에서 쓰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지만, 난 중학교 
입학하고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서 언니와 같이 살았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방을 얻
기까지 집에서 밥을 날라다 먹으며 두 달을 여관방에서 살았던 적도 있었다. 화장실 
사용이 어려워 모두가 잠든 한밤중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때 학교까지 날 업어다 주어 공부를 하도록 해준 분이 바로 수위 아저씨인 홍씨 
아저씨였다.
  15년이 지난 지금 우스운 추억으로 생각되지만 그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
다. 하지만 우리 가족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시하였고 나 역시 그 어려움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해서 1년을 다니고 휴학했을 때가 결정적인 시련이었다. 그것은 학교 
앞에 집을 얻는다 해도 업어다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건물을 옮기고 층을 오르
내리며 공부를 해야하기 때문에 등하교가 된다 해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질려버리지 않고 다시 도전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참 장했다.
  버릇이 되어버렸는지 늘 가만히 있기만 한다는 선민 양의 마지막 말이 가장 경계해
야 하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은 곧 죽음이니까 말이다.
  이런 우리의 어려움은 곧 시정되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자 컬럼 86년 2월 8일 ( 한국일보 ) 에 실린 장애자 딸을 둔 어느 아버
지가 멀리 시카고에서 보내준 편지를 소개한다.
  " 제 딸은 생후 10개월 일 때 소아마비에 걸려 혼자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인데 현
재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상업미술을 공부하면서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늘     일로 걱정해 온 부모로써 최근 고국의 신문( 장애자대학낙방사건 ) 을 읽고
  크게 놀랐으며 우리 나라의 대학들이 하루 빨리 후진적 사고에서 벗어나기를 비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미국의 대학들은 장애자 학생이 학교 구내를 불편없이 다닐 수 있도록 처음부터 시
설 공사를 했는데 그 시설들을 돌아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엘리베이터에는 점자 표시가 있어 맹인 학생들이 자기가 원하는 층을 남의 도움 없
이 누를 수 있고, 휠체어를 타고 왕래할 수 있는 경사로가 있으며 문턱 하나에도 휠
체어를 고려한 세심한 배려가 눈에 뜁니다.
  이곳에서는 중산층 이하의 대학생들이 졸업 후에 상환할 수 있는 대학 장학금을 쉽
게 얻을 수 있지만 장애자의 경우 전액 무상환의 정부 장학금으로 등록금과 기숙사비
가 충당됩니다.
  또한 사회보장혜택으로 월 300불 ( 27만원 ) 정도의 생활비가 별도로 지급되고 졸
업 후에는 주정부가 직업을 알선해 주며 무제한의 의료 혜택이 무료로 제공됩니다.
  제 딸이 다니는 대학에 팔을 못쓰는 교수가 있는데 그가 강의 시간에 말로 강의를 
하면 조교가 옆에서 흑판에 글씨를 쓰고, 그림 그리는 일을 도와줍니다.
  고국의 장애 학생들이 겪는 일을 신문에서 읽으면서 저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고 
이런 일을 남의 나라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
  우리가 이런 소릴 들으면 정말일까 싶을만큼 신기하게 느껴지지만 이것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이야기이다.
  정립회관 이사님께서 릭 한센의 휠체어 세계 일주 선발대들의 방문을 받고 있는데 
장애자 낙방 사건이 터져 기자들이 오고, 학부모들이 오고, 또 장애자 친구들이 모여
들자, 그 선발대가 의아해하며 묻길래 한두 시간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해서 사실대
로 얘기를 했더니, 그 선발대장의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 저희나라 같으면 총살감입
니다 ' 하는 말을 듣고 쇼크를 받으셨다고 했다.
  총살, 우리는 장애자를 총살 하고 있다. 펄쩍펄쩍 뛰는 심장을 겨냥해서, 하지만 
그 어떤 벌도 내려지지 않는다.

     * 장관님의 편지 *
  방귀희 양에게
  방양이 정성스럽게 써보낸 편지와 책자는 잘 읽어보았습니다. 장애자 올림픽에 대
한 도움 말씀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며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일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는 방양에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방양의 이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나도 장애자 복지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항상 따뜻한 협조에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말을 전하며 아울러 장애자를 위한 많은 
활동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방양에게 건강과 행운이 늘 함께 하길 빕니다.
                              1985 .  10 .
                       보건사회부장관  이  해  원
  장애자올림픽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 구조를 설문 조사하여 극복의 올림픽 부록 책
자로 만든 ' 우리들은 장애자 올림픽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 를 보내드렸더니 장
관님께서 이렇게 답장을 보내주셨다.
  프로 개편 문제로 저녁 늦게까지 시달리다 지쳐 돌아온 나를 장관님의 편지가 얼마
나 큰 위로를 해주었는지 모른다.
  나한텐 이런 장관님의 빽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 나를 아니 장애자를 무시한 
사람 코 앞에 대고 이 편지를 흔들고 싶었다.
  장관님의 편지는 타이프 라이터의 냉기를 품은 딱딱한 인공의 글씨가 아니라 장관
님 친필로 가슴을 어루만져 주셨다. 겉봉투까지 손수 쓰셨다.
  장관님의 편지라 해서 이토록 감격하는 내 자신이 너무 어린아이 같지만 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장애자 복지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겠다는 말씀이 한없이 고마웠고 힘
이 되었다.
  난 이해원 장관님을 여러 차례 뵈올 수 있었다. 4월 20일 장애자 재활의 날 보건사
회부 표창장을 받을 때도 휠체어이기 때문에 단상 아래에서 상을 받으러 올라갈 수가 
없어서 무대 옆 커튼 속에 숨어있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시던 장관님이셨다.
  그리고 장애자 올림픽 자원봉사자 결단식 때 이진우 위원장님께서 장관님께 방귀희
에게 격려해주시라고 하시자 장관님께서는 시상식때 보았노라고 기억하고 계셨다.
  또 충북 무극에 있는 꽃동네의 정신요양원 준공과 결핵 요양원 기공식 때도 장관님
은 나를 반겨주셨다.
  그 외에도 기념식장에서 여러 차례 뵈올 수 있었기 때문에 난 늘 가까이에 계신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는 짝사랑일 뿐이었는데 지금에서야 짝
사랑의 고뇌는 사라졌다.
  하지만 장관님께서는 방귀희라는 개인보다는 휠체어를 타는 장애자로 기억하실 것
이다. 그리고 나의 모습에서 장애자의 활동과 능력을 판단하실 것이다.

    2. 세상구경
  제주도를 제외한 남쪽 땅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집 떠난 세상은 온통 진귀하더군요.
  바다 건너 일본 땅에도 가봤습니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배운 것은 
  그게 다 그거라는 자신감이었죠.

     * 전국 방방곡곡 *
  - 우리들의 보금자리
  6월 30일 서울을 떠났다.
  언제나 그렇듯이 서울을 떠난다는 것은 크나큰 호기심과 즐거움을 준다. 일거리를 
갖고 간 여행이기 때문에 여행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더 즐거운 여행인지도 모른다.
  대구는 아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생소하지 않았다. 여관을 잡고, 옷을 갈아 입
고 전국장애자 기능대회 대구직할시 참가선수 환영식에 참석했다.
  거기에 서울에서 열린 장애자 기능경기대회 때 인사를 나눈 노제교 상록봉사단장님
이 날 반겨주셨다.
  샘터뭉침회 총재인 김정구 씨가 최영숙 씨와 딸 예슬이를 데리고 나왔다. 최영숙 
씨는 내일은 푸른하늘 펜 클럽인 푸른하늘 모임의 총무였기 때문에 선배언니를 만난 
기분이었다.
  또 82년 부산 청해회 9주년 기념식에서 만난 대구 푸른샘 회장 김선규 씨도 만삭이 
된 부인과 함께 나왔다. 모두가 반가운 얼굴이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되었는데 왜 벌써 만삭이냐고 묻자 김선규 씨는 특유의 유머로 
옵사이드 트랙을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옵사이드 트랙? 정말 꼼짝 못하게 하는 좋은 작전인 것 같다.
  삼애 봉사상 시상식 때 처음 만났던 서기식 씨도 큰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대구대
학교의 안병즙 교수님은 먼저 날 보고자 하실만큼 사랑을 베푸셨다. 안교수님은 맛있
는 저녁을 사주시며 많은 말씀을 들려주셨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자상하시어 그 제자
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어떻게 제자 하나하나의 마음 구석구석까지를 어루만져 주시
는지 강의가 끝나면 휑하니 나가버리는 서울의 교수님들과는 너무도 다른 점이 많았
다.
  내가 취재를 한 곳은 대구 장애자 복지관과 대구의 각 장애자 모임들을 시작으로 
해서 70대의 개인 택시로 장애자들에게 요금을 50% 인하해주며 친절을 베풀어 주고 
있는 훈우회를 만났는데 훈우회의 회원은 모두 국가유공자 가족들이었다.
  우리들이 택시를 탈 때마다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가를 생각하니 한없이 고마
웠다.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 기념으로 세워진 뇌성마비 어린이들을 위
한 어린이집이 있었는데 수녀님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시설이 아주 깨끗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지저분한 곳에서 수용되어 있는 아이들을 
볼 때보다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7월 2일 대구에서 가장 귀한 분인 대구대학교 이태영 총장님을 만나 뵈었다. 대구
대학교 특수교육과는 세분화된 전공으로 완벽한 특수교육의 산실이었다.
  부속 기관으로 취학전 장애자들에게 재활 훈련을 실시하여 기능을 회복시키는 재활
원과 시각 장애자들을 위한 점자도서, 녹음 도서의 출판 제작과 생활에 필요한 맹인
교재 용구를 개발하여 보급하는 점자 도서관이 있었고, 전국 장애자 기술교육 센타, 
재활을 위한 많은 연구소가 있었다.
  특히 특수교육을 위한 부속학교가 여섯 개나 되는 것이 놀라웠다. 정서장애자들을
위한 덕희학교, 시각장애자들을 위한 광명학교, 청각장애자들을 위한 영화학교, 정신
박약아들을 위한 보명학교, 지체장애자들을 위한 보건학교, 그리고 모자라는 인원을 
위해 경북 영천군에 세운 청각장애자와 정신박약아 특수 교육기관인 영광학교, 이렇
게 여섯 개의 특수학교가 버티고 있어 대구의 장애자들은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대구대학이 특수 교육의 전당이 된 것은 이태영 총장님의 부
친인 이영식 목사님께서 일구어 놓으신 밭에서 익은 열매였다.
  이영식 목사님이 광복 후 조국독립 기념사업으로 장애자들을 위한 대구 맹아학원을 
건립하면서 시작된 특수교육사업이 1956년에 한국사회사업대학( 현 대구대학 ) 을 이
루었던 것이다.
  이태영 총장님은 처음에 공학도였지만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이렇게 이땅에 특수
교육을 뿌리내려 주셨다.
  총장님은 사택이 따로 없고 광명학교 4층에 사시는데 그것은 매일 오르내리며 장애
자들을 보아야 더욱 열심히 그들을 위해 일하시겠다는 결심이 굳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대구대학에서 나온 책을 일일이 챙겨주셨고 직접 점자 도서관 등을 안내하시며 설
명해 주시는 자상함에 너무 감격스러웠다. 그 후에도 총장님은 내 편지에 항상 친서
로 곧장 답서를 보내주시어 그 인품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질 정도였다.
  그리고 대구대학에서 강영우 박사님과 황재환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대구
의 방문을 더욱 뜻깊게 했다.
  누가 우리나라에서 꼭 소개하고 싶은 장애자의 보금자리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난 
망설이지 않고 대구대학교를 얘기해 줄 것이고, 누가 우리나라의 장애자 복지를 위한 
공헌자를 묻는다면 난 주저없이 이태영 총장님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 부산은 아직도
  대구에서 서기식 선생님, 양경규 선생님, 김선규 씨 이렇게 멋있는 분들과 분위기 
있는 곳에서 양식을 먹고 하루만 더 있다 가라고 붙잡는 간청을 뿌리치고 언니가 기
다리고 있는 부산을 향해 캄캄한 고속도로를 달렸다.
  어둠이 점령한 고속도로는 완전히 나만을 위한 광활한 공간이었다. 새벽 2시쯤 언
니집에 도착, 오래간만에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푹 자고 일어나니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내가 나갈 때쯤 되서는 소낙비로 변
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산에서는 오영택 씨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 청애회회장이었을 때 날 부산까
지 내려오게 한 박력이 넘치는 동료이다.
  한국청애재활공예사라는 곳에서 우리 프로로 구인안내를 부탁하는 전화를 걸어오고 
했기 때문에 그곳을 찾았다.
  휠체어로 내려갈 수 없는 가파른 비탈 아래에 있는 작은 집에서 장애자들이 모여 
크리스탈을 연마하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나서 청애회 회원들을 만나고 저녁 때 해운대 비취호텔에서 김봉련 선생님
과의 약속이 있었다.
  삼애 봉사상 4회 수상자로 우리는 삼애라는 한가족이다. 김봉련 씨를 기다리는 동
안 내려다본 창밖은 너무도 아름다왔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비내리는 해운대 바다를 우산을 받쳐든 한싸의 연인의 모습
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했다.
  우산 속의 작은 공간이 그들의 공기를 더욱 뜨겁게 달구리라는 상상까지 했다. 밀
려오며 밀려가는 파도가 내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김봉련 씨와도 결혼 얘기를 했다. 좋은 남자와 결혼하게 됐노라고. 그것이 가장 큰 
행복일 것이다.
  다음날 82년에 뵈었던 뇌성마비 복지회 부회장인 박정은 여사님과 만났다. 박정은 
여사님은 뇌성마비 아들을 1등 짜리 우등생으로 키우셨고 또 자기 아이뿐만이 아니라 
부산 지역의 뇌성마비 복지를 위해 분주히 뛰고 계시는 맹렬 어머니였다.
  3년 만인데도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혜성학교에 가서 하달영 교장선생님과 어머니들을 만났는데 부산어머니들은 목청 
돋우어 말씀하셨다.
  정서 장애로 벽에 온통 낙서를 한 죄를 그아이 형이 대신 꾸중을 받았다는 얘기, 
소풍을 갔다가 비를 만나 도시락을 먹을 곳이 없어 어떤 집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그 
집 아들이 들어오더니 장애자라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도시락을 먹다 말고 도시락을 
먹다 말고 쫓겨났다는 얘기… .
  지금에야 옛날 이야기처럼 하지만 그 일을 당했을 그 당시에는 가슴이 갈갈이 찢겨
져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박여사님과 함께 온 어머니는 보험 사원이었는데 아들이 지능이 특수 학교
에도 갈 수 없을 정도로 낮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도 갈 수 있는 특수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돈을 번다고 하셨다.
  불우한 어린 시절 교회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는데 대학 2학년이 되자 목사님은 
자기 아들과 결혼할 것을 은근히 강요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동안 숨겨져 있던 그 아들은 바로 정박아였다. 그 엄마는 그 사실에 사색
이 되어 뛰쳐나왔는데 이렇게 정박아 아들을 두었다고 하며 업보란 생각을 하고 계셨
다. 그래서 정박아 교육에 뜻을 세웠다고 하신다.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큰 감동을 주었다.
  부산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양지재활원이었다. 역시 3년 만에 다시 찾은 곳인데 신
익균 원장님께서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다. 사모님께서도 여전히 웃는 얼굴이셨다.
  그때보다 과가 더 생겨 더 많은 친구들이 자기에 맞는 기술을 익히고 있어 흐뭇했
다. 그런데 거기서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을 만났다. 81년 KBS 의 장애자 생활수기 모
집에서 가작으로 당선됐던 최임춘 어머님의 아들이 그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반가웠다. 그후 춘천에서 어머님도 뵙게 되었다. 재활원을 둘러보고 편하게 또 평범
하게 사는 방법도 많을텐데 이렇게 봉사로 생을 영위해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내 
자신을 부끄럽게 했다.
  남자원생들만 있는 이 재활원은 수용이 목적이 아니라 기술을 배우면 졸업을 하는 
학원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 어느 재활원보다 활기가 넘쳤다.
  하루만 더 있다 가지 않으면 다시 못오게 하겠다고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시고 출근
하신 형부의 뜻은 잘 알지만 난 아직도 많은 방문지를 남겨 놓고 있었기 때문에 머무
를 여유가 없었다.
  진해로 갔다. 일하러가 아니라 군법사인 남편을 따라 진해에 내려와 살고 있는 친
구 보향이를 두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마침 친구는 타향에서 둘째아이를 낳고 또 다른 근무지인 목포로 떠난 남편이 숙소
를 정할 동안 혼자서 아이 둘과 외롭게 지내고 있었다. 갑자기 불쑥 나타난 나를 보
고 보향이는 눈이 휘둥그레 졌다.
  " 너무너무 신난다. 밤마다 무서워 죽겠어. "
  " 점심만 얻어먹고 갈꺼야. "
  우리과 대표였던 장익 씨와 내친구 보향이를 축제 파트너로 소개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한 친구들이라 아주아주 가깝다. 보향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끼니 한끼 때우는 거니까 라면이면 된다고 해도 보향이는 뚝딱뚝딱 부엌에서 뭔가
를 열심히 준비했다. 아이스 크림과 쥐포를 함께 먹던 단발머리 친구가 이렇게 의젓
이 살림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것이 신기했다.
  한창 잘차린 밥상을 받고 같이 먹자고 했더니 흥분이 돼서 그런지 먹을 마음이 안
난다며 꼭 일찍 가야하느냐고 난리다.
  보향이가 목포로 전화를 했다.
  " 글쎄, 성원이가 왔어요. "
  성원이는 집에서 부르는 이름인데 가까운 친구들은 그렇게 부른다.
  " 장익씨, 보향이 빨리 데리구 가. 거기서 혼자 재미보는 거야. 정말? "
  놀러왔던 옆집 아줌마가 친구 신랑한테 반말 한다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뿔사, 두 아이의 아버지 였구나! 학창시절의 버릇은 고쳐지질 않는가 보다. 나한
테 벌써 학창시절이 추억으로 느껴지다니 우스운 일이다.
  전송하는 보향이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내 코 끝도 찡했다.
  여행 중에 친구를 만나는 것 이상 기쁜 일은 없는 것 같다.
  아침에 헤어지던 언니 얼굴이 떠올랐다. 또 다시 찡-

     * 무지개를 보았어요 *
  장마 때여서 늘 걱정이 됐지만 여수로 향하는 남해 고속도로는 햇볕이 났다. 고맙
기 그지없는 햇볕이었다.
  여수로 향하는 남해 고속도로에서 여러장의 엽서를 썼다. 흔들리는 차 속에서의 난
필로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런데 힘들게 찾아간 여수 애양 재활병원에는 원장님도, 과장님도 아무도 안계셨
다. 그곳은 금요일이 쉬는 날이라고 했다.
  그리고 수간호원도 내일 다시 오라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여수 애양병원은 많은 우
리 동료들이 수술을 받은 곳으로 우리들 사이에선 아주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꼭 방
송에 한번 소개를 하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 11시에 만납시다 ' 에 출연하러 오신 유경운 원장님을 서울에서 
뵐 수 있었다.
  난 월요일엔 꼭 방송국에 가야하기 때문에 속상한 마음을 달래며 광주로 향했다.
  광주의 행복 재활원은 생각보다 꽤 큰 시설이었다. 정윤영 원장님 댁도 재활원 안
에 있었는데 아버지 때부터 시작한 복지사업이라고 한다.
  동생은 고아원으로 자기는 이 행복재활원으로 왔다는 한 원생은 휠체어에 앉아 있
는데도 운동화에 구멍이 나 있었다.
  그 원생은 재봉을 배운다고 해서 큰 뜻이 있나싶어 물어봤더니 그냥 그렇게 되었다
고 맥빠지게 대답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으리.
  비단 여기 재활원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많은 재활원이 원생 하나하나의 재활
을 돕기에는 역부족이다.
  전주로 향하면서 헤진 운동화가 지워지질 않았다. 전주에는 하나회 회장인 윤시몬
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는 뇌성마비로 언어장애까지 있지만 참 똑똑한 친구이다.
  발로 타이프를 쳐서 글을 쓰는데 나와는 81년 부터 친구가 되었다.
  학교공부는 없지만 라디오를 들으며 혼자 독학을 했고, 시 공부를 해 혼이 담긴 시
를 쓰고 있다. 게다가 요즘은 전주의 장애자 복지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윤시몬 씨의 소개로 지정환 신부님을 알게 됐는데 지신부님은 카톨릭사회복지회 관
장으로 장애자들의 친구셨다.
  복지회 4층까지 오르내리기가 불편한 우리 친구들을 위해 철제로 외부 경사로를 만
들어주셨는데 4층까지이니 그 길이가 엄청나고 그 꼭대기는 마치 구름다리 같았다.
  그 경사로가 끝나는 곳에서 알루미늄 목발을 짚으신 지신부님이 반겨주셨다. 신부
님은 우리 말을 잘하셔서 전혀 언어의 장애를 느끼지 않아 더욱 친밀하게 느껴졌다.
  지신부님은 벨기에 사람으로 25년 전 서울에 와 농촌 사업부터 시작하셨다고 한다.
  휠체어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 휠체어를 헌납받아 전해 주고, 치료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 병원을 찾아가 치료의 길을 마련해 주고, 요즘에는 하나회 회원들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주선해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의지할 곳 없는 장애자들을 위한 무지개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계셨다.
  신부님은 모든 사람들이 예비 장애자라고 할만큼 장애자의 아버지로서 친구로서 우
리의 아픔을 함께 하고 있다. 지신부님은 자기는 외국인이 아닌 지구인이라며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고 있는 거란 말씀이 큰 교훈을 주었다
  신부님은 나를 위해 침대까지 준비해 주셨지만 또 아쉬운 작별을 해야했다. 흐뭇한 
마음을 안고 이리 성애여원을 향했다.
  성애여원은 우리 프로에 수기를 많이 보내주는 곳이라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곳은 장애자를 위한 시설이 아니라 윤락여성 등 여성 복지시설이었는데 한복과 15
명만이 장애자로 한복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모두가 밝은 얼굴이었다. 모두 장애가 심한 편이었지만 잘 생활하고 있었다.
  그 밝음을 안고 대전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난 난생 처음으로 무지개를 보았다. 무
지개 빛깔이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이고 그 모양은 반원이고 하
는 것만 알았는데 진짜 무지갤 보았다.
  신비로왔다. 하늘을 꿰뚫은 무지개 그 고운 빛깔.
  난 너무 감격하여 무지개 같은 인생이 내 앞에 펼쳐질거라는 예징으로 느껴졌다.

     * 자연법칙 *
  구질스럽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대전에 있는 성세재활원에 도착했다. 성세재활원은 
병원 시설과 학교 시설을 갖춘 제법 큰 재활원이었다.
  커다란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작은 아이들, 복도를 기어다니는 그 모습들이 비 때문
인지 구질스러워 보였다. 언제부터인지 그런 모습들이 나를 못 견디게 만든다.
  부모들에게 버림받은 장애 아이들이 오줌, 똥 냄새로 찌든 방에서 제멋대로 누워있
었다. 어떤 아이는 정상아였지만 버릴 때의 충격으로 머리를 다쳐 저능아가 되었다고 
한다.
  버리려거든 곱게 버리지, 그 이중의 죄를 어찌 다 받을런지…… .
  대전에서 충주로 발길을 돌렸다. 숭덕 재활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숭덕재활원에서 
만난 김천일 총무님은 정말 거짓없는 사랑을 느끼게 했다. 성세재활원의 차거운 인상
의 총무 얼굴과 정반대였다. 훨씬 마음이 놓였다.
  숭덕재활원은 학교 시설과 중증 장애자를 위한 요양원이 있었다. 어느 재활원이나 
비슷비슷한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요양원에서 만난 친구들은 또 한차례 비를 뿌려주었다. 아프리카 난민 수용
소에 있는 어린이 같은 여자 아이는 IQ 가 20이라고 하는데 서면 선채로 앉으면 앉은 
채로 팔의 위치도 바꿀 줄을 몰랐다. 단지 빛이 보이면 그것을 따라 나간다고 했다.
  또 마치 우는 소리를 내며 작은 고릴라같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소년이 있어 왜 우
느냐고 물었더니 우는 것이 아니라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라고 했다. 그리고 머리를 
온통 붕대로 싸맨 아이는 자꾸 밖으로만 나가려고 로보트처럼 발길을 옮겼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분명 사람의 씨로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들이건만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동물에 
더 가깝게 보이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이런 아이들이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모습, 쓰
레기통에 쭈그려앉아 있는 모습들을 상상하니 이러한 시설이 있다는 것이 한없이 감
사했다.
  그런데 모든 재활원에서는 원생들의 복지보다는 시설의 확대에 최대 목표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보사부가 85년부터 87년까지 3년 동안 해마다 106억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 장애자
복지시설을 신축 또는 확충하고 복지시설이 전문적인 재활 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의료장비, 직업훈련장비, 장애자 체육기구 등을 갖추는데 필요한 예산 지원을 강화하
기로 했기 때문인지 이 기회에 한몫 잡아보려는 눈치들이 아주 노골적이었다.
  물론 시설이 확충되면 우리들이 이용할 곳이지만 지금 현재 수용되어 있는 장애자
들을 위해서는 현재의 복지가 더 시급하다.
  지방까지 둘러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나한테 이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장애라는 것을 잊고 살기보다는 늘 장애 속에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라
는 뜻으로 느껴진다.
  마지막 목적지인 우영환 교수님 댁에 들렸다가 칠흙같은 하늘에서 억수같이 쏟아내
는 빗속을 뚫고 서울로 왔다.
  내 생전의 가장 긴 여정이었다. 난 많은 사람들 특히 장애를 갖고 있는 우리의 많
은 친구들이 살기 위한 발버둥을 치는 것을 생생히 보았다.
  그런 발버둥조차도 못느끼며 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빨리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배가 후배를 밀어주듯이 좀 유리한 장애자들
이 그보다 불리한 장애자들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자연법칙이다. 건강한 사람이 불
편한 사람을 돕는 것처럼… .

     * 꽃동네 *
  충북 음성군에 있는 꽃동네는 영부인께서 방문하시고 또 콜롬비아 난민을 위해 1천
만원의 구호금을 내놓아 갑자기 유명한 곳이 되었다.
  내가 꽃동네를 찾았을 땐 마침 정신요양원 준공과 결핵요양원 기공기념으로 이해원 
보건사회부장관님께서 내려와 계셨다. 뜻하지 않은 만남이었다.
  그곳은 신부님의 기도로 은총을 받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가톨릭 신도로 몹시 붐
볐다. 교통이 두절될 정도로 인파의 물결이 홍수를 이루었다.
  한 엄마는 막내딸을 데리고 왔는데 그 막내딸은 자기 나이도 모르고 무조건 ' 안녕
하세요 ' 라는 인사만 공손히 했다. 하고 또 하고 그것이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전부
인 것 같았다.
  자식 가진 부모님의 마음은 알지만 기도를 받기 위해 갑자기 먼 여행을 해서 토악
질을 하며 집에 가자고만 조르는 것이 안돼 보였다.
  신부님 만나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행사로 복잡하기도 했겠지
만 그래도 서울에서 온 손님인데 그리고 꽃동네를 취재하기 위해 온 사람인데 다른 
분야도 아닌 장애자 복지 사업을 한다는 사람들이 너무 배려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
다.
  하지만 정작 오웅진 신부님을 뵙자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신부님 말씀은 동화 
얘기처럼 신비했다.
  일본 징용에 끌려갔다가 정신 이상이 된 최귀동 할아버지가 이집 저집으로 구걸을 
다녀 얻은 밥을 다리 밑에 있는 몸이 불편한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할아버
지의 선행을 계기로 신부님이 이 곳 꽃동네를 만들었다고 하셨다.
  76년 11월 5 가구 준공 18명이 수용되었던 것이 지금은 결핵환자, 정신병환자, 알
콜 중독환자, 장애자 등 주로 나이가 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300명이 넘게 수용되어 
있다.
  그 비용은 모두 1개월에 1000원씩 도와주는 꽃동네 회원들의 사랑으로 마련이 된다
는 것이 더 의미를 주었다.
  신부님은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은총이라고 하셨다. 동냥하던 걸인
들이 병들면 아무도 모르게 길가에서 죽어간다고 그래서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쉬게 
할 장소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휠체어에 탄 모습은 그곳에서 처음 봤다. 난 아동 시설을 다
니면서 장애자는 아동으로만 생각했지 우리들이 늙는다는 것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꽃동네를 다녀오니 정말 끔찍했다. 우리도 머지않아 곧 늙을 몸인데 그땐 
부모 형제의 보호는 이미 손이 닿지 않을 테고, 만약 결혼을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꽃동네가 더 늘어날 것이란 생각이 드니 조바심이 생겼다. 이런 모습
으로 늙지 않기 위해 빨리 재활해서 떳떳이 폐 끼치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 일본에서의 5박 6일 *
  - 1985년 8월 15일 맑음
  이 날은 나의 첫 해외 나들이가 이루어진 날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행이었는
데 공교롭게도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짐을 준비하느라 잠까지 설치고 공항에 도착했다. 내가 비행기를 타기 위해 김포공
항을 찾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감회가 깊었다.
  출입구로 들어갈 때 조금 가슴이 떨렸다. 모두가 처음 당하는 분위기라 서먹하고 
겁도 났다. 그런데 더욱 겁나게 한 것은 난 우리 일행과 헤어져 공항원이 이끄는 대
로 다른 통로를 이용해야 했던 것이다.
  배행기는 의외로 타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영화에서 트랩을 오르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인형 같은 스튜어디스가 처음 만난 일본사람이었다. 5박 6일이니까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지 그렇지 않으면 통곡이라도 할 것 같았다. 유학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눈물이 핑 돌려고 한다.
  비행기의 작은 유리창에 솜뭉치같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는다. 파란 바다속에 
하얀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상상을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지 그렇게 신기하진 않았다. 한 시간만 더 탔으면 했
는데 벌써 내리란다. 빠르기도 하여라 시시하긴.
  내리자 내 휠체어가 아닌 것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 항공원이 나를 
또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이젠 정말 무서웠다. 짧은 시간인데도 길게 느껴졌다. 대
합실에 나오니 일본 항공원이 손짓을 하며 저 휠체어 둘다 내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어 두 대 중 어느쪽이 내것이냐고 물었다. 오른
쪽 것이라고 했다. 역시 모두가 손짓이었다.
  그 일본인 항공원은 내 휠체어를 가져오며 나를 옮겨주겠다고 했다. 난 질겁을 했
다. 내 몸에 다른 사람의 손이 닿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데 그것도 생판 모르는 일본 
남자가, 말도 안되었다.
  난 얼떨결에 ' 좃대 맛대구다사이 ' (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 라고 큰소리로 말했
다. 그 일본인 항공원은 자기네 말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사 논
문 쓰느라 조금 배운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출입구 밖으로 나가자 ' 웰컴! 안녕하세요 ' 라고 쓰여진 프랭카드를 든 자원봉사
자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웠다. 미아가 되는게 아닌가 했는데.
  그 공항은 후꾸오까이기 때문에 우리의 목적지인 나가사끼까지는 봉고 버스를 이용
하게 되어 있었다. 그 거리는 서울에서 대구가기만 하다고 한다.
  버스 속에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영어 통역자는 대학 2학년 영문과 학생이었다. 입
도 뻥긋해보지 않았던 영어가 급하니까 튀어 나왔다.
  단발머리의 쾌활한 성격인 미즈오양, 예쁜 보조개의 여자다운 모리우찌 양, 남자인
지 여자인지 알 수 없다가 셔츠에 비친 브래지어끈을 보고 여자라고 확신한 후꾸다 
양, 그리고 자원 봉사의 왕초인 다까시 등 한 사람 앞에 한명이 넘는 비율로 자원 봉
사자가 따라 다녔다.
  그들을 생각하면 친절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히로아기가 자기
네 명절인 오봉을 자랑스럽게 설명해줬는데 나가사끼에 도착하자 거리는 정말 장관을 
이루었다.
  쇼론 아가시라 부르는 작은 배를 만들어 거기에 자기네 집안의 혼령을 싣고 불을 
밝힌다. 그리곤 화염병을 터뜨리며 불꽃놀이를 하는 것이 오봉축제였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무서울만큼 귀를 따갑게 했지만 그 소리가 새로운 환경을 더
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거리는 온통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과 남자들로 붐볐다.
  그들의 축제가 마치 우리들을 반기는 함성 같았다.
  여장을 풀고 오봉 축제에 함께 하고 싶어 서둘러서 방에서 내려왔다. 나가사끼으 
밤거리를 혼자 돌아다니고 싶어 탈출을 시도했지만 어느 틈에 자원봉사자에게 체포되
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로 계속 떠들어 댄다. 그리곤 몰듯이 호텔로 데리고 왔다. 9
시까지 집합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멀리서 오느라고 피곤할 테니까 쉬라고 했지만 초행인 우리들은 피곤이란 있을 수 
없었다.
  실장님( 정립회관의 이윤진 실장님 ) 께 애원을 하여 쇼론 아가시를 띄우는 나가사
끼 강까지 구경갈 수 있게 되었다. 택시를 이용했다.
  아이스 크림을 핥으며 까만 나가사끼 강 위의 눈부신 불꽃들을 구경했다. 아름다움
이라기 보다는 신기함과 설레임의 과장된 감정이었다.
  일본 잠옷을 입고 폼을 잔뜩 잡고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친구들이 아주 교태스러
워 보인다고 했는데 듣기 싫지는 않았다. 몸은 피곤한데 마음이 들뜬 탓인지 쉽게 잠
이 오질 않았다.

  - 8월 16일 맑았다가 비가 옴. 
  욕실이 너무 좁아 그 안에서 두 명이 움직이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씻는 것도 큰
일이다.
  아침 문안 전화를 실장님께 드렸다.
  " 모시 모시. "
  " 오 미스방! "
  " 네, 실장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
  아침은 토스트였다. 그런데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우리의 통역을 위해서 정인선
이라는 유학생이 오늘부터 같이 하기로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않다가 고국 사람
을 만나니 기뻤다.
  백승완 씨가 짓궂게 물었다.
  " 조총련 아녜요? "
  " 여기 나가사끼에는 조총련이 없어요. "
  소양 교육을 받을 때 특히 일본으로 가는 사람들은 조심을 하라고 한 말이 생각났
다.
  아침을 끝내고 방으로 올라와 가장 중요한 대회가 있는 오늘을 위해 만든 한복을 
차려입고 내려갔다.예쁘다고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다까시가 한복이 멋있다고 칭
찬해 주었다.
  첫 방문지는 나가사끼시 심신장애자 복지 센터였다. 서울에 있는 장애자 시설과 거
의 비슷했지만 일본은 장애자 복지시설의 원장이 반드시 장애자로 그런 시설에서 교
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능력에 따라 선출된다는 것이 놀라웠고 나이가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다음은 나가사끼 시청 방문이었다.
  이미 우리를 맞을 준비를 갖추고 깍듯이 맞아주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사진 기자들
이 몰려들었다. 내 자리는 휠체어 덕분이겠지만 늘 실장님 옆이었다.
  실장님께서 우리들 하나 하나를 소개해주셨는데 난 소개하기 좋은 조건들 때문에 
뜻하지 않은 귀빈 대접을 받았다. 카메라 후레쉬도 늘 내 앞에서 펑펑 터졌다. 그래
도 그 동안의 경험으로 난 여유있을 수 있었다.
  시청장을 비롯한 교육감 등과 명함을 교환했다. 또 현청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
였다.
  점심 식사 때 와다보우시 음악회 위원장 다가미 쥰이찌 씨를 비롯한 교육감 등 일
본측과 우리측이 마주 보고 앉아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 일본은 장애자 복지 시설이 잘 되어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시청에 들어갈 때 계단
이 있어 조금 실망했습니다. "
  그러자 교육감이 당황한 눈빛으로 허겁지겁 변명했다.
  " 이 시청은 너무 오래전에 지어서 그렇습니다. 다른 시의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 
  " 이 음악회를 와다보우니 음악회라 해서 장애자란 단어가 들어있지 않은데 일본의 
장애자들은 장애자란 단어를 싫어하기 때문인가요? "
  " 아닙니다. 우리는 장애자라고 따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후는 연습 시간이었다. 난 호텔 화장실에 갔다가 지각을 했다. 후꾸다가 날 찾
아오지 않았으면 미아가 될 뻔했다.
  연습을 끝내고 나가사끼시 공회당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는데 NBC에서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개의치 않고 자연스레 행동했다.
  대기실에는 우리 곡을 연주해 줄 플룻과 기타 그리고 피아니스트가 와 있었다. 또 
주먹밥에 색색의 반찬들이 간식으로 예쁘게 놓여 있었다.
  일본측에서는 우리를 중공팀과 함께 하지 못하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 같았
다. 기분 나쁠 정도로 말이다.
  무대에 등장했을 때 난 너무나 깜짝 놀랄 일이 있었다. 무대 바로 앞에 넓은 대를 
만들어 놓고 앉을 수도 없는 뇌성마비 관중들이 드러누워 있지 않은가!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는 한번이라도 이런 배려를 해봤던가?
  그 넓은 공회당이 완전히 메워져 있었고 NBC에서 녹화 방송을 했다. 우리로선 도저
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화로 실황을 청각장애자에게 전해주는 수화 통역자는 움직이는 범위가 큰, 즉 온
몸을 움직였는데 수화의 예술성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제 8회 와다보우시 음악회의 휘호는 ' 우리는 모두 같은 하늘 아래에서 태어났다 '
는 것이었다.
  용재와 호일이가 깔끔한 모습으로 노래했다. 난 중간에 영어로 가사를 낭송하는 역
할이었다. 생각보다는 만족스럽게 되지는 않았지만 떨리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우리의 순서가 끝나자 긴장의 풀렸다.
  마지막 순서에 와다보우시 노래를 마치 찬송가처럼 열정적으로 부르며 누워있는 장
애 관람자들을 안고 무대 위로 올라와 거적 같은 것을 깔고 그 위에 앉아 아이를 안
은 몸을 흔들면서 노래를 부를 땐 광란에 가까운 열기가 가슴을 뜨겁게 울렸다.
  일본 사람들은 동양 사람인데도 열정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와다보우시 노래는 
쉬워서 나도 따라 부를 수 있었는데 그 가사가 참 의미있었다.
  1. 누가 꺾었나 민들레야
     후- 욱 불어보아라
     바람에 날리어 날아가네 
     둥실 둥실 두둥실 
     먼곳까지 날아가 뿌리를 내려라
  2. 둥실 둥실 날리는 민들레야
     우리들의 꿈을 품고 
     꽃이여 나의 마음을 전해다오.
     둥실 둥실 두둥실
     먼곳까지 날아가 뿌리를 내려라
  3. 희망에 가득찬 민들레야 
     꿈의 나라 이루기 위하여
     우리들의 소원 들어다오
     둥실 둥실 두둥실
     먼곳까지 날아가 뿌리를 내려라.
  4.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민들레야
     햇님만은 우리를 잊지 않는다. 
     항상 어딘가에서 빛을 바라고 있네
     둥실 둥실 두둥실
     먼곳까지 날아가 뿌리를 내려라.
  밖에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 8월 17일 맑음
  오늘은 관광이다. 평화 공원이 시작이었다.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향한 모
습으로 앉아 있는 큰 평화 기념상이 눈에 먼저 띄였다. 그 큰 좌상에 참새들이 날아
와 앉아 쉬고 있었다. 숭글숭글한 털같아 징그러웠다. 그리고 각 나라에서 보낸 평화
상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미국과 한국의 것은 없었다.
  미스정은 작은 연못에 세워진 기념비를 해석해 주었다.
  ' 목이 말라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물에는 기름과 같은 것들이 표면에 
떠 있었습니다. 어쨌든간에 물이 먹고 싶어 기름을 헤치고 물을 마셨습니다. '
                                      - 어느날 어떤 소녀의 수기에서 -
  이것은 원폭을 맞고 쓰러진 어느 소녀가 겨우 정신이 들었을 때 타는 듯한 갈증을 
참지 못해 원폭의 재로 더러워진 물을 마셨다는 안타까운 그때의 상황을 잘 말해주었
다.
  이 평화 공원이 세워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다음은 네덜란드 천주교 신부들이 일본에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 와서 온갖 박해
를 받으면서 돌을 하나하나 날라다 만든 오란다성의 언덕을 구경했다. 돌이라 휠체어
가 잘 구르지 않아 고생을 해서 그런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다음은 구라파 가든, 푸치니의 가곡으로 너무나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비부인의 생
가였다. 나비 부인이 쓰던 쇼파 등 모든 생활 용품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경
사로 모양의 에스컬레이터로 아주 편하게 구경을 했다. 경비 아저씨들이 무척 친절해
서 편의 시설이 잘 안되어 있었어도 불편이 없었다. 내려다 보이는 나가사끼 항구가 
인상적이었다.
  다음의 방문지인 나가사끼 평화회관은 박물관이었다. 그곳에는 2차 대전 때 나가사
끼에 떨어진 원자 폭탄으로 폐허가 된 나가사끼의 건물과 사람들의 모습이 사진으로 
혹은 화석으로 보존되어 있었다.
  원자폭탄을 맞은 사람들은 온 몸이 숯덩이처럼 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원폭으로 
내장이 완전히 녹아내린 것을 엑스레이로 촬영한 사진, 원폭 당시 점심 도시락 밥알
이 새까맣게 그슬린 어느 소녀의 점심 도시락, 수만 km에서 원폭 빛을 슬쩍 쬐었는데
도 누릇누릇하게 탄 소나무 등으로 원폭의 무서운 위력을 한 눈에 볼 수가 있었다.
  등이 완전히 시뻘겋게 타서 엎드려있던 소년의 사진을 가리키며 그 소년은 아직도 
살아 있는데 온 몸을 데었기 때문에 땀이 나오질 않아 고생을 하고 있다고 했다. 생
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수천 마리의 학을 접어 실에 꿰어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는데 그것은 행운을 위해서
라는 우리와 똑같은 풍습이었다. 어디가 먼저인지는 몰라도,
  일본의 장애자 복지는 이런 원폭 피해자 때문에 더욱 박차를 가했던 것 같다.
  점심 초대는 재활사업을 하고 있는 의학박사 천면국언이 했는데 내천상지라는 뇌성
마비 청년도 함께 초대되어 있었다.
  그는 식사를 하는데 몹시 힘들어 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밥을 흘리고 먹고 
소리도 요란했지만 거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 청년은 곧 자기 수기가 나올 것이라며 한국 장애자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
냐고 물었다. 결혼과 취업이라고 하자 자기네와 같다며 신기해했다. 그는 교육이나 
시설 등에 대해서 자세히 물었다.
  꽤 똑똑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천면국언씨가 택시를 잡아 그 청년을 태워주는 모습은 많은 반성을 하게 만
들었다. 우리나라 재활시설의 장급들은 편안히 승용차를 타고 먼저 가는 것이 통례인
데 말이다.
  점심 식사 후는 쇼핑 시간이었다. 사고 싶은 물건은 없었지만 첫 해외나들이라 몇
몇 분의 기념품을 샀다. 백화점이 붐비질 않아 물건 사기엔 아주 좋았다. 서울에서 
겪던 어려움이 생각났다. 
  저녁 때 사요나라( 안녕 ) 파티를 호텔에서 부페로 했다. 그들의 대접은 늘 친절했
다. 뜻밖에 나에게 말을 할 기회가 주어져 난 간결하고도 유머있게 얘기했다. 광고료
도 받지 않았는데 일본의 장애자 복지에 대해 자랑을 많이 했다고 하자, 폭소를 떠뜨
렸다.
  그리고 88년 서울에서 열리는 장애자 올림픽으로 한국의 장애자 복지는 새로운 이
상형으로 완성될테니 그때 서울에서 만나자고 하자 박수를 쳤다.
  사요나라 파티를 끝내고 위원장님과 함께 나가사끼 항구의 야경을 구경했다.
  - 8월 18일 맑음
  오늘은 나가사끼를 떠나야 한다. 짐을 챙겼다. 비행기도 난생 처음 타보았고 기차
도 난생 처음이었다.
  기차는 오봉 명절을 쉬러 고향에 왔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느라고 초만원이었
다. 중간 역에서 들어온 한 가족이 퍽 인상적이었다. 넉넉치 못한 가정 같았다. 두 
아들이 엄마한테서 떨어지지 않을려고 아귀다툼을 해 가뜩이나 더운 기차 안을 더욱 
짜증스럽게 했지만 아이들이 귀여웠다.
  " 한국 껌이다. "
  하며 껌 두개를 주자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아이 아빠가 꼭 이또우를 닮아 이또
우 생각이 났다. ( 3학년 때 우리 과에 편입해 온 일본 유학생 ) 이또우를 만나지 못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이분현 벳뿌시에 왔는데 다이분현 청소년 회관에서 또 자원 봉사자들이 나와 있
었다. 끝내주는 친절을 가진 사람이었다. 청소년 회관으로 향하면서 운전을 하는 자
원봉사자가 영어를 전혀 몰라 말이 안통했지만 서글서글한 사람이었다. 다이분현 지
체 부자유아 부모회 회장을 비롯한 어머님들이 와 있었다.
  저녁 때, 태양의 집 실력가 요시나가씨와 휠체어를 제작하는 다기 상회 소장인 우
에노씨가 와서 환영 파티를 열어 주었다. 언제나 철저한 사전 준비가 당혹스러울 만
큼 놀라웠다. 한국에 연수 왔었던 학생들이 많이 참석하여 한국에 왔던 소감들을 얘
기했다. 
  저녁 때 우리 팀원 두명이 없어지는 바람에 소동을 벌렸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나갔다 왔다고 하는데 들어 올 때까지 잠도 못자고 걱정을 했다.
  여기서도 장애가 심하면 인기가 없기는 마찬가지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 8월 19일 맑음
  아침 일찍 일본묘를 구경갔다. 혼자 자유로이 다니고 싶었다. 너무 철저한 봉사가 
이젠 질리기 시작한다.
  현에서 나온 버스는 휠체어에 탈 수 있는 리프트 버스였다. 역시 처음 타보는 것이
었다. 너무너무 편했다.
  태양의 집을 방문했다. 비디오로 태양의 집 소개를 받았는데 무척 과학적이었다. 
장애의 정도와 적성 검사를 해 그에 맞는 일을 시키는 제도가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
었다.
  아주 심한 뇌성마비들은 컴퓨터로 품질 검사를 하기 위해 스크린만 쳐다보면 되는 
등의 시스템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태양의 집은 1965년 7명의 장애자가 죽세공품을 만들면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1,000
명에 달하는 장애자들이 계산기, 시계 등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오므론, 쏘니, 혼다와 
인쇄업 등에 현대식 기계장비로 활발한 생산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일본의 전자 산업은 장애자들의 손에서 이루어진다고 자랑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았
다. 그것은 장애자 수용 시설이 아니라 하나의 대기업이었다.
  그 안에 은행, 수퍼마킷, 아파트 등을 갖춘 완전한 장애자 센터를 이루며 중산층의 
수준으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장애자끼리의 결혼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되어있다는 데 그런 
면을 못마땅했다. 장애자 끼리만 모여사는 하나의 독립된 땅, 귀향지가 되는게 아닌
가 싶어서 말이다.
  잘 먹고 살기만 하면 된다는 사고 방식은 멀리 내다보면 불만 밖에 남는 게 없다. 
인간은 빵만으론 살 수 없는 이성과 감성의 동물이니까.
  거기서 나와 어머니 봉사단과 관광을 했다. 해지옥이라는 온천인데 뻘건 물이 콸콸 
터져나오고 연기가 환상적으로 뒤덮인 볼만한 곳이었다.
  달걀을 넣은 즉시 삶아져 나오는데 그것을 먹으면 10년을 젊어진다고 했다.
  식물원의 연꽃은 그 위에 5살 정도의 아이가 올라섰는 데도 꼼짝도 하지 않아 신기
했다. 수족관 구경을 했다.
  다시 후꾸오까를 향하는 기차를 탔다. 긴 기차 여행이었다. 이젠 기차가 붐비질 않
아 좋았다. 야경 속에 우뚝 솟은 불상이 밝음을 온누리에 보내고 있었다. 뭔가가 느
껴질 것 같은 안타까움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원효 스님께서 신라에 없는 법
이 당엔들 있겠느냐고 유학을 포기하셨는데 우리 나라에서 깨닫지 못한 불법을 여기
에서 얻어내려고 하다니…… 
  밤거리를 장식하는 우리의 교회 십자가와 대조를 이루며 불상이 눈에 들어왔다. 관
세음보살!
  호텔에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곤이 쌓여서인지 호기심이 없어졌다. 그저 고국
에 돌아간다는 생각에 즐겁기만 했다. 
  나가시끼에서 따라온 두명의 자원봉사자들과 사요나라 파티를 했는데 전형적인 일
본인 근성이 나타났다. 자페니즈란 말을 너무 강조하여 한일감정까지 일으키게 했다.
  불쾌한 마지막 밤이었다.
  - 8월 20일 맑음
  아침 일찍부터 나가사끼로부터 자원봉사자들이 왔다. 모두가 반가운 얼굴이었다. 
고마웠다.
  후꾸오까 공항까지 다가미 위원장이 나와서 전송을 해주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며 
자원봉사자들이 울었다. 정말 정이 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만약 그동안 나쁜 일이 생겼으면 어떡하나 
싶어 그때부터 몹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온통 반갑기만 했다. 언니네 식구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며칠 안
보았다고 조카가 많이 큰 것처럼 보였다. 정립회관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다.
  거울을 보니 까맣게 탄 얼굴이 더욱 까매보였다.
  내가 본 일본은 대단하진 않았다. 친절은 꾸며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고, 시설
이나 복지 제도 등도 인간적이기보다는 너무 인위적이었다.
  너무나 발달해버린 복지로 오히려 자살 인구를 늘게 한 스웨덴 같은 복지 왕국을 
보고 있듯이 편하게 잘 해준다고 해서 복지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장애자만의 천국보다는 모든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 대우받기를 원한다
는 것은 내가 본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애자 복지의 천국이니 요람이니 하는 말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새
로운 형태로 개척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꽤 희망적이라고 볼 수 있다. 백지 위에 우리가 그릴 그림은 미지
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세심한 배려를 가진 부유한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장애자라는 소
외 계층에 대해 아낌없는 투자를 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해도 무방하리라.
  우리들한테는 둘 다 없는 것들이니 부럽긴했지만 난 희망을 안고 돌아 올 수 있었
다.

    3. 극복자에게 영광이 있으라
  연꽃은 진흙땅에서 핍니다.
  하지만 연꽃엔 흙하나 묻어있지 않습니다.
  이 극복자들의 영광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감동을 줍니다.
  그들의 정신은
  바로 이 연꽃같은 은은한 아름다움을 줍니다.

     * 우리들의 우상 *
  정립회관의 황연대 관장님이 1985년 5월 16일 제 20회 5.16 민족상 사회부문을 수
상했다.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경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황관장님은 3살 때 소아마비
에 걸려 한쪽 다리를 몹시 저는 장애자이시다.
  소아마비란 병이 과연 고칠 수 없는 병인가를 알고 싶어 의대에 가셨다는 관장님은 
이화여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관장님이 대학을 입학하던 1957년 당시는 지금과는 
달리 장애자의 입학이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었고 또 특히 의과대학은 더욱 그러했는
데도 관장님은 입학을 물론 모든 실습 과정을 다 이수하고 졸업을 했다.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인턴을 거쳐 1965년 세브란스병원 소아재활원 당직 의사로 근
무하면서 장애 어린이들과 아픔을 같이 하셨다.
  관장님은 그 시절을 이렇게 술회했다.
  " 모두가 너무너무 영리한 아이들이었어. 내가 아이들과 처음 만나 인사를 했을 때 
이렇게 물었지.
  ' 선생님 진짜 의사예요? ' ' 그렇단다. ' ' 소아마비인데 진짜 의사가 될 수 있어
요? ' 여리디 여린 가슴을 소아마비가 이렇게 무섭게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땐, 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 어서 빨리 이 아이들의 마음에서 그 짐을 덜어
주어야 겠다는 신념밖에는, 그래서 난 미국 유학을 포기했지. 그리곤 소아마비 아이
들의 인권 옹호를 위한 어떤 힘이 응집되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녔지. 
밤 늦게 들어와서도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보지 않으면 잠이 안왔어. 내가 들어 올 
때까지 준호와 승명( 상급생 ) 이는 자지 않고 날 기다리고 있다가 궁금한 눈초리로 
'어떻게 됐어요? 선생님 ' 하고 묻더군. 난 내가 다니면서 받았던 수모를 아이들에게 
얘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진전된 사항은 없고 해서 정말 면목이 없더구나. 그저 
고개만 저었어. 준호와 승명인 금방 알아 들었단다. 난 밤마다 눈물로 일기를 썼어. 
우리 아이들이 받고 있는 소아마비란 무서운 벌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말야. 나한테 
진짜 의사냐고 묻는 그 아이들에게는 장애를 갖고도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선배들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용기를 줄 것 같아소 송영욱 변호사님, 윤덕진 교수님, 김용
준 검사님, 이완수 화백님, 이용상 사장님 이렇게 찾아다니며 나의 간절한 뜻을 호소
했지. 그래서 1965년 삼애회를 발족했어. 그리고 한국일보를 찾아가 이분들과의 대담
기사를 부탁했지. 장소는 우리 아이들이 있는 재활원으로 해달라고 했더니 선뜻 그렇
게 해주더구나. 대담은 이영희 기자였어. 국회의원까지 된 분말야.
  목발을 짚고,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는 그분들을 보고 우리 아이들은 눈이 동그래졌
지 몹시 감격했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
  이 삼애회를 모체로 1966년 4월 한국소아마비협회는 설립되었다. 그리고 장애자의 
전인생활을 위한 정립회관을 1975년에 세웠다.
  정립, 똑바로 서라는 것이다. 관장님 자신이 똑바로 서지 못하여 체육 교사에게 서
러운 야단을 맞고 그후로 똑바로 서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셨다고 한다.
  그동안 관장님이 이루어 놓으신 업적은 너무나도 많지만 가장 큰 공헌으로 손꼽는 
것은 지체부자유 학생들의 고교와 대학입시에서 장애 때문에 받는 불이익 처분방지 
조치를 제도화한 것이다.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장애 때문에 탈락되고 있는 수많은 입시생들을 위해 관장님
은 눈물로 호소하고 다니셨다.
  이번의 카톨릭 의대의 장애학생 낙방사건도 관장님께서 해결해 주셨고 카톨릭대가 
해결된 후 매스컴에서 일체 멀리 하였지만 관장님은 중대 약대를 지망한 4명과 대구 
한의대의 3명의 위해 무거운 다리를 옮기며 다니셔야만 했다.
  또 체육시간에 교실만 지킬 수 밖에 없는 장애 학생들을 위해 학교에서 못한 체육
수업을 회관에서 받게 하여 학교 체육 성적에 반영시키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체육점수 40점을 받고 울고불고 하던 후배들은 생기지 않게 되었다.
  또한 권익옹호를 위해 발벗고 나서주신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것이다. 법관 임용 
탈락 때 희생당한 4명의 장애법관들을 위해 끈질긴 투쟁으로 모두 임용된 사실을 기
억하리라 믿는다.
  이밖에도 1968년부터 어린이날 전날인 5월 4일을 지체부자유 어린이 날로 정해 친
구들과 마음껏 뛰어다니지 못하는 한을 풀어주셨고, 후진 양성을 위해 삼애봉사상을 
제정하여 매년 모범적으로 성공한 1명의 장애자를 선정하여 벌써 5명의 기둥을 꽂게 
하셨다.
  그리고 장애자 수련대회로 멤버쉽을 기러 협동 정신을 심어주었고 한국 최초의 여
름 해변 캠프, 겨울 스키 캠프등을 과감히 시도하시어 잔뜩 웅크리고 집에만 있던 동
료들을 시원한 바다로 설경의 산으로 나오게 했다.
  전혀 불가능하다고 제쳐놓았던 부분들에 대한 도전과 그 정복의 쾌감을 관장님은 
우리에게 나누어주셨다.
  또 역시 전혀 도외시 되어왔던 장애자 스포츠의 싹을 트게 했고, 그 활성화를 위해 
경기 5종목 즉 수영, 사격, 양궁, 탁구, 매트놀이를 실시하여 대회를 통한 기량을 닦
게 했고 급기야 국내외의 장애자 체육대회에서 상을 휩쓸고 있다.
  장애자 복지 불모 시대에 여자의 몸으로 또 편안히 살 수 있는 길이 있었음에도 불
구하고 100만 장애자의 어머니로서 우리의 우상이시다.
  관장님의 대학 시절의 일화에서도 관장님이 그런 우상으로 존경받을 소양이 발견된
다.
  정립회관에 계시는 이윤진 실장님은 관장님께서 이화여대에 다니실 때의 체육과 교
수님이셨다. 본과 때에는 체육 강의가 없었지만 예과 때는 체육이 있기 때문에 두 분
은 그때 만난 것이다.
  관장님은 복장, 준비물등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 없어 체크당할 것이 없었다고 한
다.
  그 힘든 몸으로 체육 수업을 받겠다고 해서 견학을 해도 좋다고 했더니 해보는 데
까진 해보겠다고 할 때 벌써 관장님의 인간됨을 알 수 있었다고 하며 이렇게 회상하
셨다. 
  연대는 도저히 아이들을 따라할 수 없게 되자 한쪽 의자에 앉아서 견학을 했는데 
뭔가를 열심히 썼다.
  그때 이교수는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 열심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견학도 수업인
데 딴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의과 대학생들의 초를 아끼는 그런 
공부로 넘겼다.
  그런데 한 학기가 끝났을 때 이교수 방을 노크하고 수줍음을 가득 안고 들어오는 
것은 연대였다.
  " 응, 어서 와라 "
  " 교수님, 전 체육 수업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가져왔어요. "
  그녀가 내민 것은 노트였다.
  " 그래, 이것으로 점수를 달라는 거지? "
  연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 네 " 라고 겨우 대답했다. 이교수는 가뜩이나 많
은 업무에 또 이런 일까지 생겨 이런 것 안가져와도 점수 줄텐데 싶어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쪽 옆에 밀어두었다. 그러다 무심히 책을 찾다 손에 잡혀 뒤적여 본 이교
수는 가슴 벅찬 환희의 전률을 느꼈다.
  이교수가 한 체육수업을 그림까지 그려 넣고 다소 틀린 스펠링이지만 거의 정확히 
체육 수업에 대한 기록이 되어있는게 아닌가? 단 한번도 빠짐없이 그리고 그 뒤에는 
체전의 각 종목별 기록이나 메달 선수 명단 등 체전에 관한 기사가 스크립되어 있었
다. 그 알뜰한 정성에 그 뜨거운 사랑에 감동되지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이교수는 " 그래 됐다. A 다 이런 훌륭한 증거가 있는데 성한 사람보다 왜 점수가 
좋으냐고 따져도 충분히 맞설 수 있지 "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집으로 날라온 연대의 체육 점수는 다른 과목들과 나란히 A
였다. 장애자라고 차별이 된 것이, 불이익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연대는 교수님의 뜨거운 사랑에 또 눈물을 흘렸다.
  다음 학기가 시작됐을 때 항의가 안 들어올 리 만무했다. 성치못한 학생이 A인데 
멀쩡한 내가 왜 B냐는 둥 똑같은 장애자인데 난 왜 C냐는 둥.
  비록 똑같은 장애자였지만 그 학생은 연대보다 장애가 가벼웠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런 노력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C를 주었던 것이다.
  이 항의들은 논의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확실한 노력의 댓가였으니 말이다.
  난 이 얘기에서 크나큰 교훈을 얻었다. 나의 체육 수업은 어떠했던가?
  교양학부 시절의 체육 점수는 1, 2학기 모두 C였다. 난 멀건히 앉아 견학을 하면서 
반발심만 불태웠었다. 왜 저들 속에서 소외되어 이렇게 열심히 뛰는 저 건강함을 바
라보아야 하는지 그것이 울화가 치밀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못남의 증거이리라.
  실장님의 회상을 다시 적어 본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실기 대신 이론을 했는데 눈이 오던 날이었다.
  이교수가 강의를 하러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딱 한 명의 학생이 앉아 있었다.
  ' 연대구나! ' 하는 반가움에 다가가보니 바지가 온통 젖어 있었다. 
  " 너 왜 옷이 그렇게 젖었니? 추운데 "
  연대는 부끄러운 몸짓으로 " 오다가 미끄러져서…… "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이교수는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연민이 솟구쳤다. ' 연대는 그 비탈길을 오르기 위
해 그 성치도 못한 몸을 얼마나 혹사했을까? 내가 괜히 수업을 한다고 했지. 9시에 
맞추기 위해 1시간이나 먼저 출발을 했다니…… '
  이교수는 그녀가 무척 사랑스럽기 시작했다. " 그래 우리 둘이 공부하자 " 텅빈 교
실에 교수와 제자가 마주 앉아 체육의 일반론을, 그러다 인생을 논하며 진한 사랑의 
전류를 서로 보냈다.
  다음 체육 시간에 이교수는 많은 학생들 앞에서 연대를 칭찬했다. " 내 수업을 받
을 자격이 있는 학생은 황연대 밖에 없어요. "
  야단을 맞는 학생들도 칭찬을 받는 연대도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후 연대는 
체육 수업에서 제외된 학생이 아니라 체육 수업을 가장 빛내는 학생이 된 것이다.

  관장님에 관한 얘기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난 이 원고를 쓰면서 관장님의 전기는 
꼭 내손으로 써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관장님의 사랑과 관장님의 사상은 모든 장애
자의 하나의 삶의 지표가 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교수와 제자 사이가 이제는 상관과 직원의 사이가 된데에는 또 하나의 인연
이 있었다.
  이교수는 관절을 치료하기 위해 먹은 한약의 수은 과다로 수은 중독이 되어 사경을 
헤매다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게 된 이교수를 찾아온 연대는 이교수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
었다.
  " 교수님이 왜 이렇게 되셨어요? "
  " 괜찮다. 다 하느님의 뜻인걸, 그런데 연대야, 내가 할 일이 뭐 없을까? 이렇게 
있자니, 답답해서 미치겠다 "
  " 교수님, 정말 일하고 싶으세요? "
  15년 전 A학점이란 교수님의 은혜를 입었던 학생이 이젠 그 교수님의 소원을 풀어
주었다. 이렇게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그런데 모든 우상들이 그러하듯이 관장님은 외롭고, 하루도 마음 놓을 날이 없다. 
우리나라의 장애자 복지는 목마른 사람이 파는 우물과 같으니 말이다.
  간혹 관장님에게 철없는 투정을 부리는 친구들도 있지만 만약 우리에게 관장님 같
은 분이 안계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대변자가 그 시대에 탄생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만큼 손해 보는 일이 더 
많았을 것이다.
  황연대 관장님은 대단한 분임에는 틀림없다. 멋진 연애 시절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
기가 장애자 결혼의 표본이 되었고 또 지금은 장성한 두 아들의 어머니이고 알뜰한 
주부라는 것이 한치의 빈틈도 없는 극복자의 표상인 것이다.

     ** 이 생명 다하도록 **
  주몽재활원의 개원을 취재하기 위해 주몽재활원을 찾아갔었다. 이사장님인 김기인 
싸기 영화 ' 이 생명 다 하도록 ' 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재활원의 개원을 떠들썩하
게 만들었다.
  난 새로 지은 시설을 둘러보고 깨끗한 환경에 가슴 흐믓했다. 특수 학교의 복지 시
설, 게다가 재활 병원까지 갖춘 장애자 센터였다. 그런데 원생들이 입소되지 않은 상
태라 텅빈 재활원은 찬바람이 불었다. 아마 이사장님과 직접 인터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빈 내 마음에서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주몽재활원은 김기인 씨가 30년 동안, 피와 땀으로 세운 그의 반평생의 
분신이다.
  김기인 이사장은 건강인, 장애자 모두 같이 살자는 이념의 실현을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다.
  50년대 말의 라디오 연속극과 60년대 초의 영화로 ' 이 생명 다 하도록 ' 은 하나
의 유행어가 되었다. 난 너무 어릴때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이 영화 제목이 머리 
속에 들어와 있고 또 우리 부모님들은 이 영화를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로 세상 사람
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영화에서 그때의 휠체어가 지금의 휠체어 하고는 달리 투박한 모양인 것을 보니 향
수를 느끼게 했다.
  ' 이 생명 다 하도록 ' 의 시나리오를 썼던 한운사 선생을 만났었는데 한운사 선생
은 이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몇 달을 같이 살다시피 했다며 김기인 씨를 잊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김기인은 육사 5기생으로 6.25에 참전했는데 경기도 광주 운용산 부근에서 적의 수
류탄을 몸으로 막아 부하를 살리고 자신은 쓰러졌다. 사나이로서 젊은 장교로서 너무
도 멋진 희생이었다.
  하지만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사람들의 눈에서는 굵은 이슬 방울이 굴러떨어
지고 있었다. 척수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된 그를 그렇게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영화의 가장 큰 성공인 눈물보를 유감없이 터트리게 했다. 하지만 눈물은 거
기서 끝나지 않는다. 10년 동안 한 육군 병원에서의 투병 생활도 보는 이의 가슴을 
저몄다.
  총부리를 잡고 용맹을 떨치던 사람이 갑자기 두 다리를 잃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
야 했으니 좌절감에서 허우적거리는 고통도 남달리 처절했다.
  그러다 마침내 육군 대령으로 예편을 한 김기인은 이제 정말 장애자로 사는 길만 
남아있었는데 그 길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원호 대상자로 정부에서 나오는 연
금을 받아 먹으며 영원한 환자로 사는 길, 또 하나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고달픈 개
척자로 사는 길 이 두가지인데, 그는 후자를 택했다.
  김기인은 스스로 고난의 짐을 짊어진 것이다. 주몽이란 그의 호에서도 잘 알 수 있
듯이 꿈에서도 달릴 만큼 그는 정말 제 2의 인생을 숨가쁘게 보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에덴 모자원을 설립하여 전쟁 미망인들과 
고아들을 위해 시작한 복지 사업이 이제는 장애자 복지 사업으로 열매 맺었다.
  김기인의 사회사업이 5.16 민족상 사회부문을 수상할 정도라면 긴말이 필요 업승ㄹ 
줄 안다.
  또 그는 우리나라 유일의 휠체어 교장선생님( 성동국민학교 ) 이라는 것이 우리에
게 커다란 용기를 준다. 김기인 교장은 선생들은 물론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장애라는 
것이 능력의 불능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주었으니 그 이상의 장애자 계몽은 없으리
라.
  ' 이 생명 다 하도록 ' 의 주인공이 건강히 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
일텐데 그는 훌륭한 교육자요 대단한 역량의 사회사업가로 이 사회에 너무도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얼마 전 김기인 이사장이 전화를 주셨는데 하시는 말씀이 " 이젠 미스방 같은 젊은 
주자에게 바톤을 넘겨야지. " 그러나 꿈에서도 뛰어온 그 마라톤은 그 생명 다하도록 
끝나지 않으리. 그 생명 다 하도록.

     ** 잿더미에서 핀 신화 **

  시카고에서 가까운 인디애나주 44개 학교를 관할하는 시교육위원회에서 영재아동교
육과 장애자교육 등 특수교육에 관한 행정을 통괄하고 있는 특수교육부 부장, 시카고
의 노드이스턴 일리노이대학 대학원에서 특수교육 심리학을 강의하는 교수, 인디애자 
주지사의 장애자 재활문제 자문위원, 국제 로터리클럽 인디애나 지부 지역사회 봉사
위원장, 대구대학교 협동학장,
  이런 화려한 경력을 가진 강영우 박사님은 놀랍게도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다.
  강박사는 우리나라 장애자의 선구자이다. 한국 맹인 최초의 정규대학 졸업생, 최초
의 유학생, 최초의 박사 등 그는 이 땅에 신화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다.
  내가 신화라는 표현을 쓴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그의 어린시절에서 받은 감동
때문인데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영우는 양수리 근처에서 2남 2녀의 위에 누나를 둔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한강 배 운송 사업에 실패하고 전매청에서 일하다 세상을 뜨셨다.
  혼자 몸이 된 모친은 전매청에서 막일을 하며 4남매의 생계와 교육을 위해 헌신을 
했다.
  1958년 어느 봄날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데 골키퍼를 
맡고 있던 그의 왼쪽 눈에 공이 날아왔다. 수많은 별과 점들이 아른거렸다.
  여러 안과를 다녀 보았지만 병명을 못찾고 1년을 허송하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망막
박리란 진단이 내려졌다. 그는 병원비가 적게 드는 중앙의료원에서 88일 동안의 안전 
요법을 받았지만 수포로 돌아갔고, 첫번째, 두번째 수술도 실패로 끝났다.
  이제 그는 맹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맹아 학교에 가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어린 
강영우는 울부짖었다.
  그 이틀 후 면회를 온 모친에게 그는 " 어쩌면 말이지, 어쩌면 장님이 될지도 모르
겠어 " 그 소릴 듣고 모친은 두손을 후들후들 떨었다.
  모친은 그의 손을 놓고 황급히 나갔다. 그 후 모친은 4개월 후 퇴원하는 날까지 단 
한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남이 장님이 되었다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8시간 후 눈을 감은 것이었다.
  모친이 돌아가신 후 누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재봉사로 일을 하며 동생들과 생
계를 꾸려나갔지만 피로와 영양 실조로 17살의 나이에 또 세상을 떠났다.
  불과 4년이란 짧은 세월 동안 그는 두 눈과 부모와 마지막 보루였던 누나마저 잃고 
어린 두 동생과 남게 되었다.
  이젠 그 가족들도 헤어질 차례였다. 13세난 남동생은 친척집에, 9살난 여동생은 고
아원에, 강영우는 맹아학교로 각각 흩어졌다.
  그는 61년 말, 사회사업가 이선희 씨를 찾아갔다. 이선희 씨는 공병우 씨가 사재로 
운영하던 천호동 맹인부흥원으로 데리고 가 한달치 수업료를 내주며 점자와 타자를 
배우게 했다. 그의 첫번째 은인이었다. 
  한달간 맹인부흥원에서 공부한 뒤 그는 62년 3월 서울 맹아학교에 정식 입학했다. 
그는 공부하기 위해 맹아학교에 간 것이 아니라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곳이기 때
문에 간 것이었다.
  그런데 5월 셋째주 그의 운명을 새롭게 탄생시켜 주는 두번째 은인을 만나게 된다. 
권순귀 씨가 퀘이커 교도들의 미팅 즉 걸스카우트 지도자 모임에 그를 데리고 갔다. 
그 모임이 끝나고 권순귀 씨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 너희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내가 영우 버스 태워주고 올께 "
  그때 한 여대생이 나섰다.
  " 언니 내가 할께요. "
  그는 그 여대생의 손을 잡고 버스를 타기 위해 나갔다.
  " 난 숙대 1학년 영문과에 다녀, 영우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은데 뭘 해줬으면 
좋을까? "
  " 책을 읽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
  그후 그녀는 주말마다 기숙사에 찾아와 책을 읽어주었다. 계속되는 고통 뒤에 찾아
온 너무나 오래간만에 느끼는 행복이었다.
  강영우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와 동등해지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대
학 진학을 결심했다. 그녀는 그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쳤고 밤이면 그를 코리아 헤
럴드에 데려가 함께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 입시를 6개월 앞둔 어느 날 그녀는 미국연수교육을 떠났다. 그의 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잃는 아픔이었다.
  그럴수록 더욱 동등해지고 싶었다. 입학 원서 접수조차 거부하던 차별을 뚫고, 연
세대학교 교육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녀를 잊기 위해 공부에 몰두했고 연세자유교양회( 현재 인간문화연구회 ) 라는 
서클을 창립하는 등의 학교 생활을 활발히 했다.
  써클을 창립하는 것은 영웅심에서가 아니라 아무 써클도 그를 입회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1년 만에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젠 고백할 수 있었다. " 나와 
결혼하면 어때? "
  그 후부터 그들은 한 맹인소년과 그를 돕는 봉사자가 아니라 동등한 연인 사이가 
되었다. 
  3년 후, 1972년 2월 21일 강영우는 문과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했고, 닷새 후 7년간
이나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다 드디어 결혼이란 완전한 소유가 이루어졌다. 신랑 강영
우, 신부 석은옥.
  행복한 신혼도 능력이 없는 신랑에겐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차석의 영광을 안
고 받은 학사증이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아무도 그의 능력을 받아주지 않았다.
  유학을 결심했다. 새로운 발판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신체장애를 해외유학 결격
사유로 묶어오던 법적 차별을 폐지시킨 공로자이기도 하다.
  한미재단 총재와 연세대 총장의 도움으로 강영우는 한국 최초의 맹인 유학생이 되
었다. 그래서 미국 피츠버그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4년 6개월 만에 석사학위 2개와 
교육 철학박사 학위 1개을 취득했다.
  이렇게 학위를 얻기까지 감수해야했던 그의 인고는 과히 초인적이었다. 언어 장벽
에 부딪혀 녹음기에 담은 강의 내용을 집에서 듣고 또 들으면서 귀를 틔우고 점자로 
복습을 했다. 하얗게 밤을 지새우면서……
  또 산달인 부인이 더 이상 길잡이가 되어줄 수 없었을 때는 버스를 놓쳐 혼자 우두
커니 정류장에 서있어야 했고 또 중요한 강의를 놓치게 되어 발을 동동 구를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도서관 역시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어 부인이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해야했
다. 그녀의 노고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짐작이 가리라 믿는다.
  순간순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어려움이 늘 따랐지만 76년 4월 25일 수백 명의 박사 
후보생들 중에 학위를 획득한 사람은 단 세 사람, 그 중에 한국인, 그것도 맹인인 강
영우의 이름도 끼어있었다.
  그의 나이 이제 41살. 12살 된 진석, 9살인 진영 두 아들의 아버지이다. 강박사는 
두 아들이 영재 교육을 받고 있다며 자랑하면서 이런 흐믓함도 전해주었다.
  학교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글짓기를 했는데 두 아이가 다 자기 아버지 
강영우 박사를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글을 썼다고 한다.
  강박사는 아이들에게 생활 얘기, 학문 얘기 등도 해주지만 스케이트도 함께 타고 
스키도 함께 탄다. 그러니 그들에게 어디가 부족한 아버지이랴.
  그는 83년 6월 국제 로터리클럽 총회 때 103개국으로부터 온 대표 1만명 앞에서 연
설을 했는데 기립 박수를 받았다. 또 84년 2월 7일 먼스터 로터리클럽 창립 15주년 
기념식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대구대학교의 이태영 총장님은 강영우 박사의 얘기를 강연 때마다 빼놓지 않으신
다. 그리고 고국에서의 방학 특강 때엔 그의 강의실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하다.
  그의 수기 ' 빛은 내 가슴에 ' 라는 책이 4개 국어로 번역이 되어 세계의 사람들에
게까지 감동을 주고 있다.
  강영우, 이제 그 이름 앞에는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없다. 그저 강여우라는 이름 
그 자체로 존경받기에 충분한 인물이 된 것이다.

     ** 입이 있었다 **
  내 방에 걸려 있는 동양화를 나는 우리 집을 찾는 사람마다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작가를 설명하기 위해선 구필이란 것이 이름앞에 들어간다. 바로 김준호 씨의 작
품이다.
  백상 기념관에서 ' 김준호 구필 작품전 ' 을 연 것을 취재하기 위해 84년 4월에 그
를 처음 만났다. 물론 TV 화면에서 그의 생활의 모두를 자세히 볼 기회가 있었지만 
직접 그를 만나보니 빨리 지나가버리는 화면 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아픔이 스
며들었다.
  엎드려서 목만 침대 밖으로 내밀고 있다. 얼마나 목이 아플까? 두통인들 또 얼마나
… 엎드려 있는 탓으로 목소리에 비음이 많이 섞여 작게 나오는 김준호 씨 앞에서 나
는 나의 신체조건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 옆에 그림자 처럼 붙어 있는 전 경분씨 역시 대단한 여자였다.
  그해 12월 말 특집방송으로 ' 새해 소망을 듣는다 ' 를 만들기 위해 난 또 인천으
로 향했다. 얘기를 할 수록 재미있는 남자, 김준호 씨였다. 극복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틀에 박힌듯한 내용의 딱딱한 말이 아니라 대학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나누던 
산뜻함을 그는 주었다.
  아내와 둘이 있는 시간도 그런 얘기들을 하리라는 생각이 들자, 전경분씨는 외롭고 
힘든 간호가 아니라 재밌는 남자와 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아내란 
생각이 들었다.
  그후 ' 극복의 올림픽 ' 책 제호를 부탁하는 일등으로 나는 김준호씨와 자주 만났
다. 그래서 그 그림도 김준호 씨가 내게 선물한 것이였다.
  김준호가 오늘이 되기 전까지의 얘기를 잠시 소개하기로 한다. 그는 인하대학교 건
축과 2학년 때 건강한 대한민국의 남성이면 누구에게나 지워진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
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그래서 종합 병기창에서 근무하던 76년 10월 그는 오늘날의 구필 화가가 되기 위한 
운명을 맞이했다.
  창고를 정리하던 중 그만 발을 헛디뎌 3m 높이의 보급품 상자에서 거꾸로 떨어져 
목부분에 심한 골절상을 입게 된 것이다.
  부대 의무실로 실려갔는데 목부분의 뼈가 모두 으스러진 상태에서 의무병은 지압을 
한답시고 마구 힘을 주어 주물러댔고, 결국 부산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어 갔을 땐 이
미 그의 목부분에는 죽은 피가 속으로 엉겨붙어 모든 신경조직이 마비되어 회복이 불
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온몸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정신은 맑아 며칠만 쉬면 다시 근
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서 3개월을 보냈고, 서울 통합병원으로 옮
겨서 1년간을 보냈다. 절망의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그때 간호 실습생으로 전경분 씨가 나타나게 되었다. 전경분 씨는 한쪽 구
석에 둥그렇고 이상하게 생긴 회전 침대에서 아무하고도 말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이
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누워있는 그가 너무 불쌍해보여 말을 시켰지만 대꾸도 없
었다.
  솔직히 호기심이었던 그때의 감정이 사랑으로 변하리라고는 그 당시에는 생각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다 78년 1월 제대하고 원호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젠 그 말벗마저 없어진 김준
호 씨에겐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김준호 씨를 찾아주었다. 그와 함께 그에겐 또 하나의 행운
이 싹트기 시작했다.
  원호병원 ( 현재 보훈병원 ) 내에 있는 사회사업과 ( 현재 보훈과 ) 에서 붓글씨를 
가르치던 서예 강사가 서예를 해볼 것을 권유했다.
  그는 강사에게 " 아니 무엇으로 쓰란 말이오 " 하며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그 강
사는 입이나 발등으로 그린 그림이 실린 잡지책을 그앞에 내밀었다.
  그것이 김준호씨 입에 붓을 물게 한 동기였다.
  중. 고등학교 때 미술부에서 그림을 그리던 정도의 실력이었지만 그의 글씨는 나날
이 향상되어 갔다. 
  입술이 부르트고, 잇몸에서 피가 날 정도로 그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화가가 되기에는 또 한차례의 시련이 뒤따랐다. 정식으로 지도를 해 줄 스
승을 찾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몇 사람의 화가에게 보내 지도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
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그림도 좋고 발전성도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기는 바쁘니 누구
누구를 찾아보라는 등 부담을 회피하는데 급급했다.
  하지만 김준호 씨를 그냥 내버려둘 만큼의 몰인정한 사회는 아니었다. 아니 그 노
력이 하늘을 감동시켰을 것이다.
  숙대 미대의 이인실 교수가 그를 오늘날의 대화가로 키워 줄 뜻을 밝혀온 것이다.
  79년 10월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본격적인 화가수업이 시작됐다. 81년 1월에는 
개인전을 열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해 5월 17일 원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81년 KBS 자선 미술전과 재활훈련 작품전, 83년 KBS 초대미술전, 일본 동경 
희망의 예술전에 출품 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장애자 예술인 협회의 준회원으로 국제적인 교류도 하고 있다. 이런 활
동을 보통 사람들과 또 소아마비와 같은 장애자들과 같게 생각하면 안된다.
  입으로 그려서가 아니라 그는 아직도 욕창등의 합병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 극
복의 올림픽 ' 책이 나와 책을 들고 그를 찾았을 때 그는 보훈 병원에 입원하여 보름
동안 집에 없었노라고 했다.
  난 그때야 그의 고통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빨대에 꽂아 쥬스를 함께 마시면
서 쪼르륵 소리가 나는 것은 무감각해진 요도와 연결된 호수를 통해 빈통으로 떨어지
는 오줌 소리였다. 그 쪼르륵 소리가 가슴 깊은 곳까지 흘러내렸다. 
  김준호 씨는 첫번째 해외 작품전을 85년 8월 1일부터 15일까지 미국 뉴욕에 있는 
한국 문화원에서 열었었다.
  미국 육영 선교회 초청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전에는 동양화 43점, 서예 5점 등 48
점이 전시되었다. 뉴욕 총영사와 한인 회장, 재미 교포, 미국인 등 많은 사람들이 초
인적인 의지가 담긴 작품을 보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현지의 각 TV 방송을 비롯해 뉴욕타임지 등 각 신문에서도 뉴우스 및 인터뷰로 대
대적인 보도를 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해외 작품전을 위해 보훈처장이 금일봉을, 조중훈 대한항공사장이 왕복 항공편 
및 작품 수송비를, 미국 육영 선교회 최호림 회장이 체류 기간 중 숙식등의 모든 경
비를 지원했다.
  김준호 씨는 6월 20일 출국해 11월 16일 귀국했는데 그동안 뉴욕, 필라델피아 등의 
교회에서 간증을 하여 많은 신도들을 열광시켰다.
  또 그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 영부인 낸시 여사에게 한국 심장병 어린이를 치료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작품 한 점을 선물했는데 귀국 후 낸시 여사로부터 감사하다
는 내용의 회신을 받았다.
  이렇게 김준호 씨는 그의 날개를 활짝 펴 더 높고 더 넓은 곳을 향하여 날고 있다.
  팔이 없으면 다리로 그린다지만 그것도 없었다. 하지만 김준호 그에겐 입이 있었
다. 입이…… .

     * 도전과 극복 그리고 성취 *
  우리들의 세계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을 손꼽을 때 우영환 교수를 얼른 떠올린다.
  우영환 씨를 만난 것은 85년 7월 초 그의 집에서였는데 그가 안정된 가정 속에서 
안주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국에 금의환양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곧 천사 같은 아내와 결혼했고 내가 갔을 때는 첫 아들이 탄생한 지 한 달 가량이 되
었었다.
  우영환 씨와 나는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아주 친밀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전화 
통화를 몇 번 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부드러운 인상에서였을 것이다.
  장래 희망이 교수인 나로서는 우교수가 너무나도 부러웠다. 선배의 생활에서 후배
들은 자기의 인생을 결정하듯이 공부를 하고 있는 장애 학생들에게는 그의 지금까지
의 과정이 무척 궁금할 것이다.
  그는 194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의사였던 부친께선 공산 정권에 협력하지 않는 브
르조아라는 죄로 박해를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우영환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1.4 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부산 피난 시절 소
아마비에 걸렸다. 그때가 3살, 어머니는 포목이나 조화 장사로 그를 정성껏 키웠다.
  우영환은 사회가 장애자에게 가장 친절하지 못했던 시절에 성장했다. 입학 시험에
서 체육 점수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때였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우영환의 중학교 입학을 위해 여러 학교를 찾아다녔지만 번번히 거절당했
다. 그러다 대광중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하다면 고려하겠다는 타협으로 중학교 3년을 
마칠 수 있었다. 
  중학 입시에서 그토록 시련을 겪은 우영환은 그런 치욕을 또 경험한다는 것은 지옥
과 같은 고통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등학교 입시를 포기하고 체육 과목이 없는 검정
고시로 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65년 7월 대학 입학 자격을 획득했다.
  그러나 대학 문은 더욱 굳게 닫혀있었다. 아버지의 유업을 잇기 위해 의대에 가 의
사가 되려고 했지만 입학이 거부되었다.
  2년 동안 계속 두들겨 보았지만 남은 것은 세월의 빈껍질 뿐이었다. 그는 더이상 
방황할 수 없었다. 그래서 68년 경희대 경제학과에 들어갔다.
  7층에 있는 강의실을 목발로 올라가는 것은 한라산 등정과 같은 험한 고통이 수반
되었다. 교양학부 때는 좀 업어다 주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2학년 때부터는 그런 기회
가 좀처럼 없었다. 우영환의 목발이 7층 까지 오를 수 있는 유일한 의지처요, 도구였
다.
  그렇게 어렵게 공부한 졸업이 그에게 더 큰 시련으로 밀려왔다. 취직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영환의 방황은 입학과 졸업처럼 늘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하나의 몸살이었다.
  우영환은 생각했다. 자신의 장애가 자신의 활동 범위를 한정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학문의 세계에 자신의 인생을 걸어 보려는 소망은 점점 굳어져 갔고, 이를 실현하
기 위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유학을 결정했다.
  그래서 그는 회현동에 있는 불어 교육 기관인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다니며 불어 공
부를 했는데 거기 도서실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남편을 따라 서울에 와 있던 
제레이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정말 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영환은 그 부인에게 회화를 배우면서 자신의 처지를 얘기했다. 그러자 그 부인은 
프랑스로 귀국한 후 그의 유학을 주선해 주면서 3년 동안의 프랑스 유학을 책임지겠
다고 약속해 73년 9월 1일 김포공항을 떠났다.
  드디어 유학의 꿈이 실현되었다. 그는 몽뺄리 대학에 입학하면서 희망과 절망이 엇
갈린 유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의 부실한 다리로 시간을 맞추기 위해 남보다 1시간 
일찍 집을 떠나야 했고 살 수 없는 자료를 구하려고 하루 수천장씩 복사를 해야 했
다.
  그의 육체적 피로는 극한 상태에 이르러 마침내 공부를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다. 노
골적으로 인종 차별을 하는 지도 교수와 문제가 생긴데다 학문상의 의견 충돌까지 겹
쳐 지도 교수가 바뀌었기 때문에 지중해와 알프스 사이의 400km 를 2년 동안 한주에 
두 번씩 기차 통학을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러면서 유학 자금이 없어 수학 아르바이트,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의 불어 아
르바이트, 호텔에서 전화받는 일, 교회에서 시무보는 것 등의 일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81년 4월에 박사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논문이 패스되었다 
해도 귀국 후의 취업 전망은 비관적이었다. 
  서울에서 어머니 친구들이 취업 알선을 하였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서울을 떠날 때의 상황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시 불안이 밀려왔다. 이젠 더 밀
릴 곳이 없다는, 어쩌면 지금까지의 전진이 화려한 도피였는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으
로 깊은 슬럼프에 빠져있었다.
  82년 12월 초 유학 친구인 김시경 교수 ( 단국대 무역학과 ) 에게서 편지가 왔다. 
스키단의 전지 훈련을 위해 그로노블에 들린다는 내용이었다.
  동고동락한 유학 도시에서 헤어진 후 1년 반 만에 그를 만나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스키단이 도착한 15일 후 스키 선수를 격려하기 위해 아프리카 순방 중이
던 단국대학교의 장충식 총장이 그로노블에 왔을 때 김시경 교수의 소개로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장총장은 실력을 갖추었으나 장애로 웅지를 펴지 못하는 우영환에게 튼튼한 날개를 
달아주었다.
  " 자네의 신체적 결함은 자연 법칙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간으로서는 거
부할 수가 없는 것이지. "
  이 멋진 말로 인해 그토록 간절한 소망이었던 교수의 꿈은 이루어졌다. 드디어 83
년 1월 최초의 휠체어 교수의 탄생이 각 신문과 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84년 
2월 단국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로서의 강의를 시작했다.
  천안 캠퍼스에서의 생활을 얘기하는 우교수는 나에게
  " 왔다 갔다 강의실을 두루 살피면서 하는 강의가 아니라 큰 강의실 뒤에서 떠드는 
학생까지 휘어잡지 못하겠어. " 라고 고백을 했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지성의 전당에서 서로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하는 진지한 수업태
도가 안되는 것은 우교수 한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 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
이다.
  또한 수학 여행 때 지도교수로 가는 우교수를 말리는 동료 교수들의 의식에 아쉬움
이 생겼다. 교수들조차 이 당연한 사실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 어쩔 수 없
는 의식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흔들리지 않는다. 도전과 극복 그리고 성취가 그의 인생의 하나
의 공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닥쳐왔다. 새해 연휴로 마냥 풀어져 있을 때 우교
수님의 사모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 소식 못 들으셨어요? "
  온갖 방정맞은 생각이 몇초 사이였지만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게 했다.
  " 아뇨. 무슨 일이 있으세요? "
  " 교수님께서 교통 사고를 당하셨어요 "
  " 어디를 다치셨어요? "
  그렇게 어렵게 한 공부인데 혹시 머리를 다쳤으면 어떡하나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 다리가 부러지셨어요. 이제야 정신이 좀 드셨는데 방양한테 전화를 하라고 하시
더군요 "
  정신이 드시고 날 생각하셨다는 말에 우교수의 정이 새삼 뜨겁게 가슴에 와 닿았
다. 병원에 달려 갔을 때 우교수는 많이 회복된 상태라고 했지만 내 눈엔 전혀 그렇
게 보이지 않았다.
  동료 교수가 부친상을 당해 학생들을 데리고 천안을 떠나 장흥으로 향하는 고속 도
로에서 미군 트럭에 밀려 중앙선을 넘는 바람에 마주 오는 택시와 정면 충돌을 했다
고 한다.
  그래도 택시이기에 목숨을 건졌지 버스였으면 끝장났을 것이라며 머리를 흔드셨다.
  " 내가 많이 다쳐서 다행이야. 학생들이 잘못됐으면 어떻게 할 뻔 했어 " 그말에 
과연 큰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다리 중 조금 더 잘 쓸 수 있는 다리가 부러졌지만 손힘으로 다니는 분이니 팔
을 다치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고, 또 마침 안경알을 플래스틱으로 바꾸었기 때문
에 ( 사고가 나기 며칠 전 부인의 성화로 말다툼까지 하며 바꾼 것이라고 함 ) 유리 
조각이 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때의 상황을 한참 설명하던 학생들이 우교수 흉내를 냈다.
  " 사고가 났나 보군 "
  다리가 부러지고 턱뼈가 나가고 가슴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산산히 깨진 유리 조각 
세례를 받은 모습으로 그렇게 침착하게 물었으니 흉내를 낼 만하다.
  그 말에 나도 깔깔거리고 웃었다.
  장총장님도 문병을 다녀가셨고 정립회관의 황연대 관장님도 오셨었다고 한다. 1년
이 넘어야 완치가 되지만 한 6개월 정도는 꼭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해 봄 강의 걱정
이 태산같았다. 우교수의 그 걱정은 바로 우리 모두의 걱정이지만 이 시련도 머지 않
아 끝날 것이다.

     * 베데스다의 창조 *
  베데스다 4중주단은 예비 스타들이다. 그 이름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스타겠지만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사람들이기 때문에 난 예비 스타라고 하겠
다.
  76년에 구성된 그들은 정말 행운의 사나이들이었다.
  대전에 있는 성세 재활원에서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성장한 그들이 손에 
악기를 들었을 때 그것이 오늘날의 전문인이 되리라곤 아무도 예측 못했을 것이다. 
그들 자신들 조차도……
  내가 너무 운명론적으로 치우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죽어라 노력해도 그 보람이 
쉽게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력한 만큼의 보람이 금방 눈에 띄게 나타
나는 사람이 있음을 이 원고를 쓰면서 자꾸 느끼게 된다.
  어찌 되었든 베데스다의 운명은 미리 정해지기라도 한듯이 시행착오없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그 얘기들을 함께 해보기로 한다.
  베데스다는 성세 재활학교에 바이올린을 전공하던 강민재 선생이 자원봉사를 오면
서부터 바이올린과 인연을 맺고 배우게 되었는데 충남 음악협회 콩쿠르에서 1등을, 
전국 신체장애자 경진대회에서 음악부문을 휩쓰는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선생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자 베데스다는 유명무실해졌고 베데스다 멤
버들은 졸업장 없는 중학교 졸업으로 성세 재활원을 떠나게 되었다.
  졸업을 한 이듬 해인 74년 12월, 이 졸업생들에게 학교 이사장의 주선으로 일본 벳
부에 있는 장애자 재활 시설인 태양의 집으로 1년간 직업기술연수를 떠나는 행운이 
주어졌다.
  그 1년간의 일본 생활이 커다란 정신적 성장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75년에 돌아와 성세재활학교 음악 선생의 소개로 대전 목원대학 관현악단의 겨울 
합숙에 합류를 했다. 거기서 은인 고영일 선생을 만났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생
들로 구성된 실내악단의 지휘자였다.
  그리하여 76년 1월 15일 그들은 현악 4중주단을 결성하게 되었다. 남시균 이사장이 
' 은총의 샘 ' 이란 뜻의 베데스다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하여 그해 5월 21일 
대전 카톨릭 문화회관에서 창단 연주회를 성황리에 마쳤다.
  그해 8월 독립해 부엌과 연탄 창고를 연습실로 이용하면서 맹연습을 했는데 그때부
터 학교, 교도소, 교회, 병원, 군부대 등을 방문 연주했다.
  그것이 중앙에까지 알려져 77년 10월 13일, 14일 양일간 소극장 공간 사랑 초청으
로 연주회를 갖게 되었다.
  그떄 그 연주회를 관람하러 온 정립회관 직원이 방학 동안에 장애 학생들의 사회성 
개발을 위한 수련 캠프에서의 초청 연주를 제의해와 몇 차레 연주를 했다.
  78년 4월 15일에 국립 교향악단원을 주축으로 한 연합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베데
스다 4중주단 특별 대연주회가 대전에서 정립회관 주최로 열렸다.
  그리고 79년 3월 29일 대전에서 제 7회 정기 연주회를 끝으로 서울 정립회관에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했다.
  어린이 회관 소속 청소년 교향악단에 입단하려 했으나 무대에 나타났을 때, 관중들
에게 주는 휠체어의 나쁜 인상을 이유로 오디션 조차 거부당했다.
  그래서 비공식 단원으로 열심히 연습했다. 그 후 실력을 인정받아 오디션에 통과하
고 10월에 정식 입단하여 많은 정기 연주회와 지방 연주회 특히 81년 8월 중국 대만 
연주회에 같이 동행하여 음악으로서 서로 이해하는 사이가 되었다.
  세계 장애자의 해인 81년은 큰 수확의 해였다. 4월에 고입 검정고시, 8월에 대학 
입학 자격 검정 고시를 무난히 합격했고 5월에는 세계장애자의 해 기념 특별 연주회
를 가졌는데 공간 연주회 때부터 베데스다를 후원해 주던 재한 미국인 작곡가 James 
Wade 씨가 현악 4중주 제 2 번 ' 베데스다를 위하여 ' 를 주어 초연을 하였다.
  10월에는 일본 총리부에서 초청하여 4개 도시 순회공연을, 12월에는 제 8회 정기 
연주회를 성황리에 마쳤고 또 LA시장 초청으로 미국 연주회도 가졌다.
  그런데 한 가지 상처는 7년 이란 긴 세월동안 형제처럼 살던 이종현과 헤어지고 새
로운 첼리스트 홍종진이 입단한 것이다.
  홍종진을 장애자가 아니어서 베데스다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이미 실력을 닦아온 상태인지라 장애자만을 고집하여 새로 시작할 수가 없었다고 한
다.
  베데스다 4중주단의 멤버 소개를 뒤로 미룬 것도 바로 그 때문인데 소개하자면 제 
1바이올린에 차인홍, 제 2바이올린에 이강일, 비올라에 신종호, 첼로에 홍종진이다.
  그런데 81년 5월 2일 연주 때 신동옥 교수란 분이 나타나 베데스다를 이끌어 주기
로 굳게 약속을 했다.
  그 뒤로 신교수는 그들을 지도해 주었는데 자기 은사인 미국 신시내티 주립 대학의 
상주 4중주단인 라셀 4중주단에게 베데스다를 소개하는 연주 실황 테이프를 보냈다.
  그로 인해 장학생으로 1년간 가르쳐 주겠다는 소식이 왔고 생활비는 아산 사회복지 
사업 재단과 정립회관을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드디어 82년 9월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대학으로 갈 수 있었다.
  베데스다는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1년 연수가 아닌 정식 연주학 석사 과정에 들어
갔고 앞으로 계속 박사과정까지 마쳐 학위를 받을 작정이라고 한다.
  그들은 학교 공부 외에 뉴욕, LA, 시카고 등에서 년 50회 정도의 연주 활동을 펴고 
있다. 그들은 아리랑을 4중주 곡으로 편곡한 아리랑 4중주를 앙코르 곡으로 연주하며 
국위를 선양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겐 결혼 역시 멋있게 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제 1바이올린의 차인홍 씨는 84년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부인이 대학에서 피아
노를 전공한 음악인이어서 더욱 깊은 내조를 해주고 있다.
  신종호 씨는 85년 8월 20일 정립회관에서 약혼식을 했다. 신부는 야마우찌 아쓰꼬 
양으로 동경의 쇼오와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얌전한 일본 아가씨이다. 홍종진 씨 
부인 역시 음악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이어서 베데스다는 음악가정으로 성장할 것 같
다.
  베데스다가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며 연주회를 통해 명
성을 떨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그 누가 그들의 이런 고통으로 얼룩
진 과거를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뿔뿔이 흩어졌던 유리조각들을 붙여 갈고 닦아 그 금이 보이지 않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밝은 빛까지 내게 되었다.
  흩어져 있을 때는 볼품없는, 아니 해롭기까지 했던 유리 조각이었지만 그것을 붙여
준 은인 덕분으로 또 갈고 닦은 피나는 자신의 노력 덕분으로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 
졌음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 머리로 쓰는 기사 * 
  휠체어에 탄 야구기자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불운의 그러나 행운의 주인공은 일
간 스포츠 체육 2부 차장인 천일평 기자이다.
  운명이 바뀐 것은 84년 8월 LA 올림픽 취재 때 교통사고로 요추 1번이 결단나고 척
추 10번을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서울고 시절 야구를 직접 해 봤었고 10여 차레의 해외 취재를 다녔던 그로서는 너
무도 크나큰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목숨을 건졌고 또 이렇게 다시 옛 자리에 앉아서 새로운 변신을 할 수 있었
던 것은 행운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라스베이가스에서 2주간의 긴급 수술을 받은 후 LA 의 란츠로스아미고스 척추신경 
전문병원으로 옮겨 3개월여 동안 입원 치료를 받고 85년 1월 9일 귀국해 세브란스 재
활원에 입원해 있다가 3월 23일 드디어 10개월 만에 정상 출근을 했다.
  다른 직업도 아닌 기자 업무를 휠체어에 앉아서 할 수 있다고 그를 믿어준 한국일
보가 극복할 것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천기자의 얘기는 이런 차원에서 장애자들에
게 큰 용기를 주었다.
  천기자의 얘기가 큰 취재거리였지만 난 선뜻 그를 찾아갈 수 없었다. 장애자 경력
이 너무 짧은 그로선 나의 방문이 야속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서 난 85년 9월의 어느날 전화를 걸고 만남을 허락받았다. 한국일보에 들어서
면서 경비원 아저씨의 친절한 배려로 엘리베이터가 서지 않게 되어있는 3층이었지만 
편안히 갈 수 있었다.
  그분의 얼굴은 잘 모르지만 유일하게 휠체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내 휠체어는 어
디서 구했느냐고 물으면서 자기는 미국에서 퇴원할 때 공짜로 얻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것이 어찌나 가슴을 아프게 하던지.
  9월의 날씨에 땀을 바질바질 흘리며 계속 물을 마시던 천기자는 아직도 진통 속에 
있었다. 집이 2층이기 때문에 오르내릴 때 부인이 고생을 많이 한다는 말씀, 택시 잡
기가 힘들더라는 말씀 등으로 개인적인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어 난 운전을 배우라는 
조언 ( 장애로는 내가 선배니까 ) 을 해주었다.
  그때 레저부의 강대형 부장이 오더니 " 우리 요즘 장애자 기사 많이 다룹니다. " 
고 하자 천기자가 " 나때문에 그렇지. " 그 말에 " 자네가 장애잔가? " 하던 강부장
의 말이 눈물이 나올만큼 고마웠다.
  자네가 장애잔가?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몸이 불편하게 된 후 대개 직장을 그만 
두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동료들이 옛날처럼 대해주지 않고 자꾸 격리시키려 하는 
그런 불융화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이상의 동료애를 어디서 느낄 수 있으랴.
  그래도 아직 사회는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다. 한국 체육기자연맹은 85년 12월 11일 
처음 제정한 한국체육기자상 제 1회 수상자로 그를 선정했다. 발로 쓰는 기자 사회에
서 휠체어의 천일평기자를 수상자로 뽑았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동정이나 행운이 아니라 그에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비장
한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입원 생활 중 수많은 야구서적과 잡지를 섭렵해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그는 일간 
스포츠의 천일평 코너에서 예지가 빛나고 있다. 그는 수상소감에서 실적 위주의 스포
츠열을 건전하고 유익한 국민 스포츠로 유도함으로써 수상에 보답하겠다는 결의를 보
였다. 
  천일평 기자는 휠체어 기자가 아니라 그냥 기자이다. 처음부터 아무런 수식어가 없
는 그냥 기자였듯이 말이다.

     * 슬픔이여, 이렇게 갔다 *
  국민학교 6학년 때로 기억되는데, 신문 기사를 읽고 나도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
어야겠다고 결심한 일이 있었다.
  아들이 나란히 사법고시에 합격을 했는데 아들 중 하나는 소아마비로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너무나 위대해 보였다.
  나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신문에 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한동안의 세월이 흘러 정립회관 행사 때 먼 발치에서 그 주인공인 박장우 
씨를 만났다. 판사가 되어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 슬픔이여, 그렇게 가렴 ' 이란 책이 손에 들어왔다. 박판사의 어
머니 황을연 여사가 쓴 수기였다. 오랜 세월로 누렇게 변한 페이지마다 박판사의 옛
날을 함께 하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옛날에는 가난한 선비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장원 급제를 했지만 요즘 세상은 부자
들이 성공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전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여전히 가난한 선비
의 와신상담의 결심과 의지가 성공을 낳고 있다.
  판사의 어린 시절은 6.25 를 겪었기 때문에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 또 병약한 몸
으로 질병과도 싸워야했다. 그때의 장애자 불이익은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
려운 차별이었다. 하지만 박장우 판사는 서울대학을 졸업했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그 벽을 뛰어 넘은 강한 극복자이다.
  법관임용 탈락으로 우리들 모두를 분노케했던 그 4명의 소아마비 법관들은 스틱 하
나 잡지 않는 가벼운 장애자였는데 박판사는 계단을 오르기 힘들 정도로 중증이었다.
  그 후 박판사와 몇 번 자리를 함께 했었고 또 댁에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황여
사의 얼굴이 무척 평온해 보였다. 며느리와 두 손자, 그 옛날을 생각하면 너무도 귀
한 사람들이리라.
  우리 어머니들 중에는 성치 못한 아이한테 무슨 소득을 보겠느냐며 우리의 능력을 
어머니부터 무시하는 경우가 있지만 온갖 정성을 기울이면 부실한 자식의 효도가 더 
크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박판사는 법원에서의 얘기를 해 주었다. 판사란 직업이 가만히 앉아서 처리하는 것
이 아니라 현장검증을 하러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가야한다. 그런데 부산에 있을 때, 
살인 사건을 현장검증 가는데 깍아지른 듯한 산꼭대기더란다. 그래서 그곳을 오르면
서 ' 죽을려면 좀 낮은데서 죽던지 ' 라고 중얼거렸다는 말에 소리내어 웃었지만 그 
웃음 끝은 뼈속 시린 아픔이었다.

     * 소녀의 기도 *
  아동 문학계의 권위있는 새싹 문학상을 받은 서정슬 씨는 뇌성마비이다.
  그녀는 혼자서 생활을 잘 하는 것 같았다.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고 빨래도 한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런 서정슬 씨가 동시로 새싹 문학상을 탔다는 것은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아버지가 고대 교수로 꽤 부유한 가정의 맏딸이다. 다른 형제들은 의사들이 
되었고, 또 음악 전공으로 유학들을 가 있다고 서정슬 씨의 어머니는 자녀들의 자랑
을 늘어놓았다. 우리집과는 정반대라 좀 이상했다.
  서정슬 씨 어머니는 매스컴을 거절했다. 딸을 위해서라면 이런 기회에 동시 작가로
서의 자리를 잡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녀의 능력을 북돋아주고, 생활의 보람을 찾도록 해야 할 텐데 싶어 안타까웠다. 
물론 딸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였겠지만 혹시 집안의 체면을 더 중하게 생각하
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한번은 성당의 수사가 수퍼마켓 (서정슬씨 아파트 동네) 구경을 시켜줬는데 수퍼마
켓에 있는 마네킹을 보고 사람인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35년 만에 처음으로 수
퍼마켓 구경을 한 것이었다. 경험이 가장 중요한 동시 작가가 말이다.
  그래서 서정슬 씨의 동시의 소재는 개미, 하늘, 꽃 등 서정슬 씨가 집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예쁜 글을 써낸 것을 보면 신기하다. 나에게 가장 깊은 감동을 
준 시는 소녀의 기도이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개미를 한마리 죽인 일이 있어요.
  그 개미는 사람을 무는 놈이었어요.
  팔 다리를 따끔따끔 물길래
  손가락으로 꼬옥 누른 거예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지렁이를 한마리 죽인 일이 있어요.
  그 지렁이는 눈이 없는 장님이었어요.
  세수를 하다보니 발 밑에 있어 
  깜짝 놀라 밟아버린 거예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귀뚜라미 다리를 하나 뗀 일이 있어요.
  그 놈은 방안이 운동장인줄 알았나봐요.
  펄떡펄떡 뛰다가 앉아있길래
  가만히 뒷다리를 잡았더니 떨어졌어요.

  그보다 훨씬 전 아주 어릴 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이 세상에 오기 전에 하느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주셨을까요.
  왜 이런 괴로움을 받아야만 하는 걸까요.

  이 시에는 서정슬 씨의, 아니 우리 모든 친구들의 기도가 담겨져있다.
  개미나 지렁이, 귀뚜라미 같은 코딱지만한 동물들도 우리를 얕보고 덤벼든다. 그래
서 정당방위를 했건만 그것이 죄가 되었는지 아니면 기억해낼 수 없는 때의 죄 때문
인지 우리는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을 짊어지고 살고 있다.
  우리가 왜 그래야하는지 그 이유라도 알았으면 속시원하겠건만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조건 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아픔이 있기에 이런 천사같은 기도를 할 수 있으
리.

     * 동창생 아버지 *
  84년 대학졸업 시즌 때 아주 큰 감동을 자아내던 이야기가 있었다. 아버지와 뇌성
마비의 아들이 함께 나란히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졸업한 것이다.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한 50세의 아버지 양희생 씨와 아들 양경
규 군이 그 주인공이다.
  맏아들로 태어난 경규 군이 뇌성마비에 걸렸으니 그 부모님들의 마음은 얼마나 허
탈하고 고통스러웠으랴.
  경규 군은 9살 때 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까지는 무사히 마쳤지만 대학 1학년 때 
강의를 따라갈 수 없다며 대학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누구보다도 향학렬에 불타던 경규군이 그런 말을 입밖으로 내놓은 것은 일시적인 
불평이 아니라 전혀 불가능임을 그의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2학년 때 편입학을 했다. 그리고는 노트 필기를 해서 
아들에게 보여주며 강의 내용을 토론하는 등 아들의 학업을 도왔다. 그리하여 경규 
군은 대학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부자가 동창생이 되어 뇌성마비의 아들을 자랑스런 학사모를 씌워 졸업시킨 부정이 
졸업시즌에 화제를 일으킨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곧 뇌리에서 사라졌다.
  나의 솔직한 심정은 아무리 졸업을 했어도 졸업 후의 취업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졸업의 영광이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85년 5월 정립회관의 삼애봉사상을 수상한 대구보건학교의 서기식 선생이 
자기 학교에 우리 나라 최초의 뇌성마비 교사가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좋은 취재거리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7월에 대구에 갔을 때 대구대학교 캠퍼스에서 
푸른샘 식구들과 만나 얘기를 나누었었는데 그 자리에 그 뇌성마비 선생님도 있었다. 
바로 양정규였다. 서울 신문에서 보던 그리고 잠시나마 걱정을 하던 바로 그 경규 군
이 이렇게 선생이 되어있었다. 너무 대견하고 너무 반가웠다.
  양경규 선생은 뇌성마비로서는 가벼운 편이었다. 하지만 언어 장애도 있었고 걸음
걸이도 불안정했다. 그 날 함께 저녁을 했는데 퍽 온순하면서도 고집센 의지를 느꼈
다.
  양경규 씨는 자기의 이야기가 매스컴에서 운운되는 것이 싫다는 반매스컴주의자였
다. 난 양선생의 얘기에 많은 장애자 특히 뇌성마비 학생들에게 얼마나 힘이 되겠느
냐고 설득했지만 그는 아직 그럴만한 위치가 아니라고 했다.
  언어 장애까지 가지고 있는 그가 특수학교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인데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큰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조금은 수긍을 
하는 눈빛이었다.
  그 후 뇌성마비복지회의 여름 캠프를 위해 서울에 온 그가 비가 쏟아지듯이 오는 
날, 내가 부탁한 설문지를 갖고 왔다.
  양선생은 자기는 자타가 공인하는 행운아라고 했다. 졸업을 하고 집에서 노는 동안 
이제까지 갖지 않았던 종류의 장애 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솔직히 대학까
지 나와 복사기 한대 놓고 장사를 하자니, 부모님을 비롯한 주위의 눈길들이 따갑더
라며 그 숨막히던 6개월을 악몽에 비유했다.
  대구보건학교에 출근을 하게 된 양선생은 장애의 극복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장애자의 극복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요,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요, 바로 
이런 처음을 탄생시켜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는 것이 극복일 것이다.

     * 목발의 산악인 *
  바위산을 훨훨 오르내리는 소아마비 산안익 오오섭 씨는 16년이란 산행 경력이 그
를 더욱 의지의 사나이로 느끼게 한다.
  3살 때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68년 4월 7일 ' 내가 진짜 
병신인가? ' 를 시험하기 위해 도전한 첫 등반( 북한산 ) 을 성공하면서 그는 정상인
이란 선언을 자기 자신에게 하게 되었다.
  설악산에서 한라산까지 목발의 오오섭 씨 발 아래 밟히지 않는 산이 없다. 산에 오
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
지로 미미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년 열두달 중 두세 달을 제외하고는 산에 묻혀 산다. 168cm 의 키에 
51kg 의 가냘픈 몸은 쇠 목발에 체중을 의지해야 하는 그의 최적 컨디션이다. 몸무게
가 많아지면 힘들어진다고 한다.
  오오섭 씨는 그런 몸으로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단 한번도 쉬는 적이 없고 호흡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다. 지친 기색도 전혀 엿볼수 없다.
  그런 실력으로 그는 등반 가이드로 돈을 벌고 있다. 목발을 양 겨드랑이에 끼고 건
강한 사람들의 등반을 안내하는 것이다.
  오오섭 씨는 등산을 하기 전에 금은세공, 라디오 수리 등 보통 장애자들이 흔히 하
는 기술을 배웠지만 그는 지금 괴짜라는 소릴 듣는 등반 가이드가 되었다.
  그는 83년 4월에는 에베레스트 산의 축소판으로 일본에서 가장 험난하다는 해발 3,
190m 의 북알프스산도 정복했다고 하니 등반 가이드로서의 실력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는 단순히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암벽 등반도 하고 원만한 산의 오버행 코스
도 거뜬히 해낸다.
  초창기에는 산에 올라와 있는 목발의 오오섭 씨를 보고 사람들이 깜짝 놀라 어떻게 
올라왔느냐고 물으면 헬리콥터로 올라왔는데 고장이 나서 못내려가고 있다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그는 산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마음이 넓어 보였다. 사람들은 그의 산행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는 목발이 하나의 장식처럼 느껴졌다. 그는 히말라야산 마나슬루
봉을 정복하기 위해 지금도 산에 오르고 있을 것이다. 참 대단한 용기다. 정상에서 
벗어났던 정상을 정상으로 올려놓기 위한 그의 노력이 고맙기까지 하다.

     * 재활의학과의 입원실 *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은 누구한테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기의 돈을 선뜻 내준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돈이란 많아도 쓸 곳이 많고 적어도 쓸 곳이 많은 그런 것
이기 때문이다.
  돈 범릭 힘 든다는 것은 내가 벌어 보니까 알 것 같다. 그러나 의식주만 해결된다
면 축적보다는 정말로 돈을 필요로 하는 곳에 쓰여지도록 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리
라.
  조선일보 ' 색연필 ' 란에 흐믓한 얘기가 있어 소개한다.
  20살의 시골 처녀가 집에서 젖소를 돌보다 세차게 불어닥친 폭풍우에 담벼락이 무
너지는 바람에 그 밑에 깔려 전신마비가 되었다. 그런데 하루 60만원씩이나 드는 치
료비를 감당할 길이 없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퇴원을 했다.
  내 주변에는 치료비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고 수술을 하면 더 편해질 
장애도 수술비 때문에 목발 하나 구입해 굽혀진 다리를 공중에 둥둥 뜨게 하고 다니
는 친구도 많았다.
  그런데 그녀는 참 운이 좋았다. 요통으로 영동 세브란스에서 치료를 받던 사업가 
김정길 씨가 병원측으로부터 김양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듣고 선뜻 5백만원을 치료비로 
내놓았다고 하니 말이다.
  김양은 다시 입원해 지금은 목도 팔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게 되어 휠체어를 타
고 다니며 서류 전달 등의 병원 잔심부름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재활의학과 문재호 과장님이 김양에게 타이프를 가르쳐 병원에서 일할 수 있
도록 하겠다고 했고 장기적으로는 운전을 가르쳐 김양이 자립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한테 이런 행운이 오지 않기 때문에 이와같은 혜택을 
받은 김양을 볼때 천우신조라는 말을 실감나게 해 준다.
  김양은 발랄하게 뛰어 다녔을텐데 갑자기 휠체어에 앉아 있지만 만약 이 병원과 인
연이 되지 않았더라면 전신마비 상태로 시골의 어두운 방에 누워 천정만 바라보고 있
었을 것이다.
  난 소아마비나 뇌성마비 등으로 어려서부터 장애와 함께 사는 친구들보다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이 더 걱정이 된다.
  그런데 재활 의학과에 입원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중도에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이
다. 재활의학과 입원실에서 만난 몇몇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두 다리가 허벅지부터 완전히 없어져 휠체어에 앉아 있다기 보다는 얹혀 있다는 느
낌이 드는 한 부인이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꽤 미인축에 들었다.
  그 부인은 연애를 하다가 일시적인 충동으로 철로에서 자살을 기도하여 두 다리를 
잃었다고 한다. 
  그때가 22살이었는데 벌써 37살의 중년 부인이 되었다. 15년 동안이나 그런 몸으로 
살다가 이제 와서 의족을 할 생각이 든 것은 중학생이 된 아이들이 엄마에게 의족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부인은 자살을 기도한 원인이었던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 남자는 3년 동안이나 
부인 곁에서 간호를 하며 끈질긴 애원으로 결국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부인이야말로 극복자라고 여겨진다. 아이를 둘 씩이나 낳아 기른 부인이 참 대단하
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는 남편의 지극한 사랑의 충전이 있었겠지만……
  산업 재해로 한쪽 다리를 잃은 30대 초반의 아저씨는 사회에 대한 불만이 무척 많
았다. 
  다리를 잃었는데 그 보상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보상을 운운하는 모습이 더욱 비
참해 보였다. 갑작스럽게 건강과 직업을 함께 잃었는데 생활 보장이 안된다는 것은 
너무도 큰 충격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버스와 부딪혀 전신마비가 된 총각, 트럭에 치여 척수마비가 
된 할머니, 비탈길에서 쓰레기 청소 리어카에 밀려 전신이 마비된 청소부…‥
  그들은 장애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만 장애의 올가미를 
쓰게 됐다. 그래서 장애를 받아들이기까지 처절히 울부짖으며 몸부림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겐 불편에다 또 한 가지의 고통이 있다. 마비된 부분이 불덩이처럼 후끈거리
며 바늘이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생명의 존귀함 그 자체로 생존하고 또 적응하며 극복해 나간다. 모
진 목숨인지 강한 정신력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 자기 밥 *
  밀알이란 모임의 회지에 낼 원고를 받으러 온 정진석 씨는 오래간만에 나를 시원하
게 해 준 멋진 남자였다.
  정진석 씨는 자기의 굽어진 다리를 보며 수술을 하면 이렇게 되겠지 하고 자기가 
먼저 진단을 했다. 그래서 부모에게 수술을 건의했지만 안타깝게도 부모님은 여유가 
없는 분들이었다.
  그 때는 의료보험 제도가 없었고 수술이 아주 큰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엄두도 못
내었다.
  그러나 정진석 씨는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 같이 재활원 부속으로 있는 병원에서 
싸게 수술을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하느님께 편지 쓰는 마음
으로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 한테 편지를 썼다.
  그랬더니 잊어버릴만 했을 때 보사부 장관한테서 회신이 왔다. 정군의 수술에 대해 
대통령의 위임을 받았다며 세브란스 병원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염원하던 수술을 하게 됐다. 그런데 수술실에서 나오자 10.26 사태가 일어
났다.
  의사가 얘기하길 " 정군은 운이 좋아요. 하루만 늦었어도 수술이 힘들었을 거예요 
" 하며 빙그레 웃었다.
  정진석 씨는 목발을 버리고 보조기로 섰다. 가만히 서 있을 때는 아주 건강한 모습
이 된 것이다. 우리 친구들 중에는 수술을 불필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외모
를 무시할 수는 없다. 굽어진 다리로 목발을 어렵게 짚고 다니는 것 보다는 다리를 
곧게 펴고 가능한 목발없이, 스틱 정도로 움직이게 되면 여러 면에서 훨씬 유리해진
다. 그리고 땅에 발을 딛는 희열도 대단한 것이다.
  정진석 씨는 현명했다. 또 그는 자기 권리를 찾는 일에는 양보를 하지 않았다. 공
무원 시험을 쳤는데 신체 검사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공무원의 품행을 훼손시킨다는 
모멸적인 이유로, 하지만 정진석 씨는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
  신문사를 찾아갔고 또 보사부를 찾아갔고 각 관계 부처를 찾아다니며 호소를 했다. 
그래서 급기야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 당당한 공무원이 된 것이다. 그러구서 
한 5년 일을 하다보니 더 큰 욕심이 생겨 사표를 내고 대학 문을 두드렸다.
  학교에서는 총학생 부회장까지 지낼 정도로 후회없이 보냈다.
  나를 만났을 때는 졸업 후 취업을 위해 또 한차례의 투쟁이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하나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의 정신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 친구 중에 시계와 금.은 보석을 취급하는 신일사라는 점포를 갖고 있는 아저씨
가 있는데 두다리와 왼손이 불편하지만 하루 종일 일을 하며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는 자랑스런 가장이다.
  또한 금강이란 필명으로 무협지를 쓰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국민학교만 
나와 중.고등 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했다.
  그리고 집에서 독학으로 중국어와 한문 등을 익혀 중국소설을 공부해 무협지 작가
로서 자리를 굳혔다. 월 수입이 백만원도 넘는다고 하니 그만하면 무엇이 부럽겠는
가. 또 언젠가는 중국 소설로 전향하여 작품다운 작품을 써 보겠다는 의욕이 대단했
다.
  또 사회 일반의 인식이야 어떻든 운명 철학가로 성공한 친구들도 많다.
  성공의 기준을 꼭 박사가 되고 검.판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자립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성공이요, 그것이 극복인 것이다.
  좋은 예로 미국인 비스카티 씨가 있다.
  비스카티 씨는 선천성 양하지기형으로 다리가 없는 상태이지만 그는 굳은 신념의 
소유자였다. 
  ' 이 세상에 장애자란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사람에 따라 능력의 차이
가 있을 뿐이다 ' 라는 멋진 얘길했다.
  그는 이런 신념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1952년 ' 할 수 있는 힘 ' 이란 뜻의 ' 어빌
리티즈사 ( Abilities 사 ) ' 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했다.
  창설 당시 이 회사의 고용원은 4명으로 사장인 비스카티 씨를 포함, 5명의 노동력
은 모두 손 5개, 발 하나였다. 정말 아주 철저히 심한 장애자들의 회사였다. 하지만 
창설 6년만에 종업원이 40명이 되었고 연간 총매출액, 3백만 달러 이상의 중소기업으
로 성장했다.
  정부 지원금과 민간 기부금으로 시작된 이 기업은 이제 상당한 수익을 올리는 ㅓ기
업으로 발전했고 그 수익금으로 장애자 고용 문제를 학문적으로 조사 연구하는 사업
에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야 재활은 제구실을 하는 것이다.

     * 놀랬지요 *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를 못쓰는 윤갑수 씨는 궁중 무술 총본부 사범이다.
  또한 그는 적십자 인명구조원이고 수상안전 강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수
영 실력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불무도 5단, 궁중 무술 5단에 활법, 지압, 침술 등 다양한 재주를 지녔다.
  그는 물에선 목발이 필요 없고, 가는 다리가 물 속에 감춰지기 때문에 물이 고향 
같다고 한다.
  하지만 자꾸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중심을 가누기도 어렵고 다리 대신 손을 계속 
움직여야만 물 위에 뜰 수 있는 악조건을 극복한 그는 인명 구조원 강습 때 보트 뒤
집기, 다이빙, 인명 구조 등의 강훈련을 받으면서 스피드가 정상인들에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가 됐다.
  그리하여 윤갑수 씨는 84년 8월 29일 팔당 미사리에서 광진교간의 12km 한강 물길
을 3시간 동안 헤엄쳐 주파하는데 성공했다.
  조선일보 ( 84년 3월 9일 ) 의 해외 스포츠 화제에 이런 기사가 났었다. 그레그 하
몬드라는 호주 소년이 호주 수영 선수권 대회에서 2위로 들어왔지만 양손으로 골인 
벽에 닿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입상이 취소되었다고,
  왜냐하면 하몬드 군은 팔꿈치 아랫 부분이 없는 장애자였다.
  윤갑수 씨도 일반 수영대회에서 기량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그래
야 더 많은 사람 앞에서 그의 실력을 과시하고, 장애 수영 선수의 신화도 낳았을 텐
데 말이다.
  또 한가지 놀라운 일은 말도 하지 못하고 잘 들을 수도 없는 심재훈 씨가 전남 여
수중학교 농구팀 코치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씨가 농구를 시작한 것은 한국 구화학교 4학년 때 농아 친구들하고 였는데 광주
고와 단국 대학의 학교시절에도 선수 생활을 했다.
  일반 학교에 입학을 했다는 것만도 대단한 일인데, 듣지 못하는 장애를 갖고도 그
는 일반 선수들과 함께 코트를 누볐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아무데서도 써주질 않아, 선수 생활을 계속 할 수가 없어 물
고기가 물을 떠나듯이 코트를 떠나 실의에 찬 생활을 했었는데 그의 능력을 인정한 
여수 농구협의회 추천으로 여수중학교 농구팀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경기장에서 작전 지시를 할 때 불편한 점은 많지만 선수들과 호흡이 잘 맞아 어려
움이 없다고 한다. 심코치의 열성과 선수의 일치 단결로 도내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
적을 거두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휠체어 코치도 있다. 부산동고 체조팀의 최천수 코치이다.
  체조 국가대표선수였던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철봉에 매달리기 시작하여 선수 생활
의 절정기에 연습을 하다가 착지하는 순간 허리를 다친 것이 하반신 마비라는 불행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철봉이 있는 체육관을 떠날 수가 없었다. 자나깨나 늘 철봉만을 생각
했다. 그리하여 무보수로 부산동고 체조부의 지도를 자청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선수들을 지도했다.
  그의 이런 열정에 감격해 선수들은 말 할 것도 없고 학교에서도 최코치를 꼭 필요
로하고 있다고 한다.
  최코치는 자기가 못다한 한을 제자들이 실현시키도록 하겠다고 다짐하여 그의 체조
에 대한 사랑과 극복의 정신을 말해 준다.
  이렇게 선수 생활 중에 장애를 갖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건강이 최고의 재산인 
체육인들인데 말이다.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탁구 국가 대표선수가 된 감동의 이야기도 있다.
  85년 7월 31일 탁구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당당히 국가대표선수로 발탁된 박상
재 군이다.
  박군이 소아마비에 걸린 것은 대전 원동국민학교에 입학한 바로 그해 4월이었다고 
한다.
  부모가 방안에만 있는 아들을 위해 탁구대를 설치해 주었던 것이 국가 대표 선수까
지 만들었다.
  박군은 하루 1,500개 이상의 서비스 볼을 때리면서 피나는 훈련을 했고, 또 테크닉
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했다.
  왼쪽 다리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이쪽 저쪽으로 발을 자주 옮기는 대신 중앙에 
버티고 선 채 오른팔만 좌우로 뻗어 쳐내는 세이크 핸드형을 터득해냈다.
  이렇게 각 분야에서 놀라운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기쁘고 한편 마음이 든든하
다.

     * 휠체어 정치가의 내한 *
  미국 앨라배마 주지사인 조지 웰레스가 한.앨라배마주간의 교역증대를 위해 휠체어
를 타고 85년 10월 16일 하오 6시에 내한했다. 한, 미 무역 마찰이 첨예화되고 있는 
가운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온 것이다.
  나는 82년 11월 4일 한국일보에 ' 불구의 웰레스 주지사 복귀 이변 ' 이라는 타이
틀의 기사를 발견하고 신기해 했는데 그가 드디어 한국 땅에 온 것이다. 나는 찾아가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조지 웰레스에 대한 소개를 하기로 한다.
  조지 웰레스는 7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유세 도중 저격당해 하반신 마비에 
반귀머거리 신세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했다.
  하지만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 79년까지 주지사 임기를 마치고 은퇴한 웰레스는 그 
전 해에 코빌리아 부인으로보터 이혼을 당해 그의 정치 생애는 물론 그의 존재조차 
망각 속에 묻히는 듯했다.
  그런 그가 앨라배마 주지사 선거에서 1874년 이후 최초의 공화당 주지사로 메모리
폴마 몽고메리 시장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됐다.
  앨라배마의 유권자들은 그가 주지사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건강한
지의 여부를 궁금해했는데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웰레스의 말을 믿어주었던 
것이다.
  웰레스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트럭 운전과 권투 선수를 하면서 고학으로 대학
을 나와 변호사, 검사, 판사, 주지사까지 된 인물이다.
  휠체어에 앉은 지금도 대통령 출마의 집념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으로 그의 극복의 
정신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난 웰레스보다 웰레스가 살고 있는 앨라배마주의 주민들 또 더 나아가 미국
이라는 나라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웰레스가 발버둥을 쳤어도 웰레스를 받아줄 만한 자세가 안되어 있었더라면 
웰레스는 외면당했을 것이다.
  지금 웰레스는 교역 증대란 업무로 우리나라에 왔다. 그것 역시 웰레스의 의지보다
는 웰레스가 살고 있는 나라의 국민들이 그를 극복시켜 준 것이다.
  웰레스는 72년부터 79년까지 병상에서도 주지사 업무를 계속했다. 우리 같았으면 
가능했을까?
  79년부터 4년간을 은둔 생활을 하며 지내던 웰레스를 이렇게 따뜻하게 다시 받아줄 
수 있었을까?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줄 줄 아는 참으로 대단한 나라의 대단한 사람들이다.
  웰레스가 그의 유세중에 " 나는 불구자를 뽑아달라고 호소하는게 아닙니다. 나는 
사냥도, 낚시도 수상스키도 골프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정력을 쏟아 
나의 업무에 몰두할 수 있습니다. " 라는 말이 어서 빨리 우리 나라의 국민들에게도 
이해되는 날이 와야 할 텐데.

     * 손으로 달리는 사람들 *
  미국 청년 마이크 킹은 85년 4월 29일 알래스카 페어뱅크스에서 인간 의지의 위대
함을 보여주는 여정을 떠났었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알래스카에서 워싱톤까지 고난의 길을 떠난 것이다. 거리는 장
장 8,690km 로 서울과 부산을 10번 오가는 만큼의 길이이다.
  킹에게는 국토순례가 억누룰 수 없는 강력한 꿈이자 신앙이었다고 한다. 78년 오토
바이로 순례를 떠난 직후 킹은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입었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
만 척추를 크게 다쳐 끝내 두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병원과 재활원을 전전하던 2년간은 고통과 절망의 시기였다고 그는 회고한다. 장애
자로서의 생활은 불확실하고 두렵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이 있다. 킹은 친구와 가족의 도움 그
리고 신앙의 힘으로 좌절을 딛고 일어섰다.
  미완의 순례를 다시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인생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것 뿐 아니
라 장애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려는 생각에서였다.
  " 인간은 누구나 문제를 지니고 산다. 나의 문제는 신체적인 장애이다. 장애자들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거나 두려워하기 쉽다. 그러나 인생에서 무엇을 하거나 꿈과 목표
를 실현하는데 장애자라는 조건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진정 장애가 되는 것
은 장애자이기 때문에 할 수 없으리라는 패배의식 뿐이다 " 라고 킹은 말하며 인간 
의지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여정을 떠났다. 킹은 하루에 77km 씩 강행군을 했는데 킹
의 여행에는 몇몇 친구들이 승용차로 따라가며 뒷바라지를 했다.
  이들 선발대는 각지의 후원자들을 통해 팀의 숙식을 준비하고 모금 운동을 전개했
는데 모금된 돈은 전국의 장애자들을 위해 쓰여지게 된다고 한다.
  킹을 치료했던 에드워드 슈웬트거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 킹의 계획은 정상인으
로서도 힘든 계획이다. 킹은 이미 장애자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선 무기력한 일상속
에 안주하는 우리가 장애자이다. "
  킹은 가을 학기부터 사회사업학 박사 과정에 들어간다고 하는 수재이기도 하다.이
런 킹이 8,690km 를 휠체어 바퀴를 굴려 완주하고, 8월 28일 미 국회의사당에 도착한 
후 의사당 계단 맨 위까지 휠체어를 굴려 올라가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는 작은 
해외 토픽이 너무도 큰 감명을 주었다.
  킹의 얘기에 자극을 받았던지 우리나라에서도 휠체어로 국토 종주에 나선 친구가 
있었다.
  평소 푸른하늘 가족모임을 통해 잘 알고 지내던 최부암 씨였다. 그는 2년전서부터 
나에게 국토 종주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
  아무리 뜻이 있고 능력이 있어도 킹처럼 뒷바라지를 해줄 선발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후원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국 장애자자활복지 선교회의 회장인 강대철 씨를 만나 드디어 그 꿈을 
실현에 옮길 수 있었다. 주자는 최부암, 공헌구, 천대철 세명이었고, 부산에서 시작
하여 서울로 올라오는 경로를 정하고 9월 29일 오후 3시에 부산 영락교회 광장을 출
발하여 매일 50km 씩 500km 를, 국도를 따라 달린 것이다. 그리하여 10월 9일 오전 1
0시에 여의도 광장에 도착했다.
  10일 동안 다리로 걷는다 하여도 기진맥진할텐데 그들은 손으로 걸었다. 손에 물집
이 잡혀 있었다. 또 근육통인들 오죽 했으랴.

     * 맹인 차관 *
  스웨덴에 맹인 차관이 탄생했다. 14살 때 시력을 잃고 스웨덴 장애자연맹 중앙위원
회 의장을 지내던 벵트 린트크비스트 씨가 스웨덴 내각 개편에서 사회보장 및 장애자 
복지등을 다루는 사회부의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래도 지체장애는 국회의원등 정치를 하는 사람이 몇몇 있지만 맹인은 전무했기 
때문에 이 소식이 더욱 더 진귀하게 느껴진다. 맹인이 차관이 됐다면 스웨덴에서는 
지체장애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겠구나 싶어 천국같아 보인다.
  차관이면 결재 서류만해도 많을 텐데 그 많은 서류들을 점자로 만들 수는 없을 것
이고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린트크비스트 차관은 컴퓨터 전문가들의 도
움으로 자신이 개발해낸 특수 전자 정보 처리기를 사용 일상 업무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고 한다.
  세상은 참 편해지고 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업무를 수행할까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차관까지 
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야한다.
  장애자 부모 대회에서 이런 얘기들을 하는 것을 들었다.
  " 우리 아이들 중에서도 국회의원이 나와야 하고 장관이 나와야 합니다. "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맹인이 차관이 됐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신기하기만 하다.
  스웨덴 정부가 린트크비스트를 차관으로 임명하던 상황이 그대로 우리에게로 옮겨
진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 린트크비스트 씨는 공정성 있게 업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사회 보장은 노인, 
청소년, 부녀자 너무도 많은 분야가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린트크비스트 씨는 
장애자 가운데서도 특히 맹인편에서만 일할 것입니다. 그래서 린트크비스트 씨는 자
신이 맹인이기 때문에 공정성을 잃고 편파적인 맹인 복지에만 주력할 것입니다. "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린트크비스트 씨를 맹인으로 보기 전에 한 사람의 유능한 인
력으로 생각했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어려움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사회 보장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느낄 것이고, 장애자 복지 분야에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
주었다.
  우리나라의 장애자 관련 기관에 양념으로 하나 둘 그것도 아주 가벼운 장애자만 채
용하는 경우하고는 전혀 다른 인간애를 느끼게 한다. 

     * 멋진 제 2의 인생 *
  세갈은 20살부터 아주 다른 제 2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사보이에 체류하고 있던 그는 책상 앞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
때 그의 뒤에서 여자 친구 한사람이 책상 서랍에서 방금 찾아낸 권총을 손에 들고 이
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총탄이 발사됐고 세갈을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이것이 멀쩡했던 빠
뜨릭 세갈을 영원히 휠체어에 앉히게 한 순간의 사고였다.
  4시간에 걸친 수술 후, 척추뼈 여섯번째 마디에 깊이 박힌 총탄은 제거했지만 척수
는 회복 불능이었다.
  세갈은 사고가 일어나기 바로 얼마 전 신체장애자의 재활을 전문으로 하는 물리요
법사 과정의 공부를 마쳤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이미 봐왔던 것은 운명이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달이 되자 이런 척수불능이라는 의사의 판정은 인생을 포기해야 한다는 
선고로써 느껴지기 보다는 극복할 수 있다는 난관이나 도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세갈은 곧 휠체어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훈련했고 이어 휠체어에 스
키를 부착시켜 띠네 스키장의 가파른 비탈을 내달릴 수 있었고 승마까지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비범한 인물이다. 등반도 하고 100kg 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800m 나 1500m 
휠체어 경주에 출전해 훌륭한 성적을 내기도 했으며 당수 유단자이기도 하다. 또 바
다를 좋아하는 그는 요트맨이기도 하다.
  이 모두가 견디기 힘든 신체적 고통을 참고 이룩했다는 것에 더 큰 경의를 표하게 
된다. 
  직업이 작가겸 사진 작가이기 때문에 세갈은 세계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기로 결
심했다.
  세갈은 전쟁이 한참 벌어지고 있는 월남의 사이공에서 전쟁으로 다친 환자들이 재
활치료장비 하나 갖추지 못한 병원에서 그대로 신음하는 모습도 본 반면, 호주에서는 
하반신 마비 환자들이 과학자나 전자 기술자가 되기 위해 대학이나 기술 학교에 다니
며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때 세갈은 신체 장애자가 남에게 의존해서 살아야하는 치유불가능한 환자가 아니
라 일을 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책임있는 인간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갈은 15개월 동안 12개국, 총 5만km 이상을 여행하며 세계의 문이 장애자에게 열
리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 머리 속으로 걷는 사람 ' 이란 제목으로 모험적
인 세계여행을 책으로 펴냈는데 10개 국어로 번역된 이 책으로 그는 1977년 베리떼  
( 건실 ) 상과 메종드라 프레스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76년 터론토에서 열린 장애자 육상 대회에서 높이 뛰기 186cm 를 기록한 
외다리 챔피언, 아니 볼트의 모습을 담은 그의 사진은 프랑스 스와르지의 1면을 장식
했었고, 1980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장애자 올림픽 때 찍은 그의 기록 영화 ' 햇빛이 
비치는 밤 ' 은 1981년 칸느 영화제에 출품되었었다.
  또 세갈은 장애자들을 돕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일본에서 물리요법사로 
일하며 병원 간호사들에게 강의도 하고 내란으로 만신창이가 된 베이루트로 가 재활 
치료에 관한 강의를 하며 장애자들을 위한 보조 기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파리에다는 
알르포랭에 장애자용 통로를 설치하게 했다.
  1980년 세갈은 인류 복지 향상에 뛰어난 기여를 한 공로로 국제 다그마하슐드상을 
받았다.
  최근 세갈이 정열을 쏟고 있는 일은 브레따뉴 지방의 에르뀌에 신체장애자를 위한 
휴향소를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 신체장애자들을 정상 생활로 복귀시키기 위한 나의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 
고 한 말로 미루어 보아 그 일에 대한 집념을 읽을 수 있다.
  세갈은 최근에 펴낸 저서 ' 역풍을 받으며 달리는 말 ' 에서 그 자신은 1972년 4월 
6일에 죽었으며 동시에 다시 태어났다고 썼다.
  또 세갈은 이 제 2의 인생을 다른 어떤 인생이나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세갈처럼 제 2의 인생을 시작해야 할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제 2의 인생은 어떤 인
생이나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꾸지 않을 거라고 할만큼 제 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
끌기는 무척 힘들다.
  세갈은 아주 현명했다. 되돌려 받을 수 없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재빨리 새 인
생을 시작했다. 또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하는 직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었고 물리치료사라는 기술로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었다. 그리고 고통을 
이기기 위해 여러가지 스포츠에 몰두했던 것이 그를 만능 스포츠인으로 만든 것이다.
  만약 세갈이 장애자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여름휴가나 즐기며 사는 평범한 소
시민이었을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85년 5월호에 실린 세갈의 얘기를 읽고 난 무한한 부러움을 느
꼈다. 과연 실존 인물일까 하는 먼 나라 사람으로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세갈을 만난 사람이 있다. 장애자 올림픽조직위원회의 조일묵 총장이 세갈
을 만난 장본인이다. 총장은 어쩌면 세갈이 한국에 올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 두팔, 두다리 *
  팔이 하는 역할을 다리로 하면서 불편해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니 왜 사람
들이 감동하지 않겠는가?
  오빠와 함께 집 근처 철로변에서 놀다 기차에 치어 양 팔을 잃은 오순이 양의 그때 
나이는 3살이었다.
  오순이 양은 국민학교 4학년 때 당시 미술부를 지도하던 담임 노상인 선생이 오야
의 발가락에 붓을 끼우게 하고 사군자 그림을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발로 그림 그리는 학생의 눈물 겨운 얘기가 78년 단국대 장충식 총
장에게 전해졌다. 장총장은 오양의 집념어린 화폭에 감동하여 리치마오 장학금의 첫
번째 수혜자로 선정, 학기마다 20만원씩 지급해오고 있다.
  이 장학금은 당시 단대에 객원 교수로 근무하던 대만의 리치마오 화백이 한국에서 
두차례 연 전시회의 모든 수익금을 오양과 같은 역경을 이기고 그림에 전념하는 학생
을 위해 쓰도록 기탁한 돈으로 마련된 것이다.
  오양은 그 후에도 리치마오 화백으로부터 자주 편지를 통해 격려를 받아왔으며 함
벽이라는 아호까지 선사받았다.
  그래서 85년에는 대만에서 리치마오 화백과 공동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2년째 오
양을 지도하고 있는 김구 화백은 오양이 감각이 뛰어나고 오랫동안 발가락에 힘을 길
러왔기 때문에 공간이용에의 한계만 극복할 수 있다면 대성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85년 11월 1일 제 24회 전국남녀 고교 미술실기대회에서 오양이 동양화 사
군자 부문 최우수작 수상자가 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오순이 양의 이런 극복은 이란의 권위있는 일간지 테헤란 타임즈에 크게 소개되기
도 했다.
  오양은 미대에 진학해서 교수가 되는게 꿈이라고 했는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첫발
을 내딛었다.
  가톨릭대의 장애 학생들에 대한 불학격의 비보 속에 두팔이 없는 오양은 당당히 합
격을 했다.
  오양은 실기 시험 때 발가락에 붓을 꽂고 그림을 그려 심사위원들의 감탄을 샀을 
뿐더러 단국대학에서는 그녀의 불 같은 의지에 감동하여 4년간의 등록금 전액을 면제
해주고 천안 캠퍼스 미술실에 특별히 제작한 전용의자를 마련 그녀의 미술 수업에 불
편이 없도록 배려하기도 했단다.
  오순이 양과 같은 일본 아가씨 생각이 난다.
  84년 장애자 재활의 날 기념으로 영화를 보여줬는데 제목이 ' 노리꼬는 지금 ' 이
라는 것이었다.
  아시아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인데 노리꼬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다.
  발로 밥먹고 세수하고 옷벗고 바느질하고, 정말 손처럼 사용했다.
  특히 공무원 시험을 치룰 때 노리꼬는 차에 자기 책상을 따로 준비해 가서 발가락
에 연필을 꽂고 시험을 치루는 장면은 무척 감동스러웠다. 그런데 노리꼬는 아무런 
문제없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근무하는 데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시민이 찾아와 부탁하는 것을 발가락으로 해주는 데도 그들은 이상하다는 눈빛 하
나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그것을 과시하는 듯도 했지만.
  화면에서 본 노리꼬는 20살의 소녀티가 나는 처녀였기 때문에 그 후에 어떻게 됐을
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일본 나가사끼에 갔을 때 노리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결혼을 해서 아
들을 낳았다고.
  노리꼬는 아주 정상적인 길을 걷고 있는 평범한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 허리 이하의 두다리가 없는 케니 군의 얘기도 책이나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
졌다.
  케니 군은 선천적 등뼈 결손과 다리와 골반부의 연결부분에 암이 발생하여 하반신 
절단의 대수술을 받은 11살의 소년이다.
  케니는 두 팔만으로 농구나 야구를 하는가 하면 늑목오르기를 잘 한다. 케니는 차
를 닦기도 하고 정원의 풀을 뽑는 등의 아르바이트도 한다.
  두손으로 땅바닥을 짚고 있으면 허리가 팔꿈치 조금 아래에서 끝나는 어떻게 보면 
마술사 소년같기도 하다.
  하지만 케니는 대통령이 되어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많이 나누어 주고 싶다며 장가
가는 얘기까지 했다.
  세상은 참 공평치 못하다. 사지가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반을 덜렁 잘라내다니.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쓰지는 못하지만 그대로 제 자리에 있는 내 팔과 
다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 끝없는 도전 *
  의족을 한 복서가 KO 승을 거둔 이야기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 생각난다.
  크레이크 모자노프스키라는 미국인 선수는 84년 6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충돌사
고를 일으켜 우측 다리를 절단 ( 다리 밑에서 23cm ) 당하는 부상을 입고 재기 불능
의 상태에 빠졌었다.
  사고를 당하기 전만 해도 그는 프로 데뷔 이래 13전 전승의 무패로 장래가 촉망되
는 예비 스타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자노프스키는 고무로 만든 의족으로 다시 복싱을 시작하여 85년 12월 14
일 일리노이의 팔로스에서 열린 크루저급 논타이틀전에서 프랜시스 샤전트 ( 9전 8승 
) 를 2회 1분 5초만에 KO 로 눕히고 눈물겨운 승리를 거두었다.
  사고 후 18개월 만에 의족의 복서로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프로데뷰 14연승을 올
린 모자노프스키는 " 장애자들에게 용기를 주게 되어 한없이 기쁘다. 나는 오늘의 승
리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 고 울먹거렸
다고 한다.
  다리가 기둥인 권투 선수가 다리를 잃었지만 팔 힘을 더욱 보강시켜 이렇게 멋진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미국 일리노이주 체육위원회는 샤전트의 행동이 복싱의 명예를 실추켰다는 
이유로 샤전트에게 징계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샤전트는 그때의 KO 는 일부러 져준 연출국이었다고 해 매스컴을 긴장시켰
다. 왜냐하면 모자노프스키를 입지전적인 인물로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중 취
재가 시작되자 샤전트는 져주기로 사전에 협의한 것은 아니지만 모자노프스키에 대한 
관객들의 일방적인 응원에 질려 시합을 포기했다는 말이 와전된 것이라고 꽁무니를 
뺐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주정부 교육국에서 조사를 했지만 역시 모자노프스키는 결백했
다.
  이렇게 승리를 승리로 보아주지 않고 의심할 여지를 남긴 것은 그의 절단된 다리 
때문이리라.
  외다리 선수에게 졌다고 복싱의 명예를 운운하는 것이 웃긴다. 미국도 암암리에 장
애자에 대한 불평등 의식이 흐르고 있다는 얘기가 되어 실망했다.
  아뭏든 완전한 승리으 모자노프스키는 정상인들의 성역의 도전에 성공한 극복자이
다.
  도전의 의욕이 창조해내는 탄생은 눈부시도록 성스럽다. 우리는 라벨의 왼손을 위
한 D 장조 협주곡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만들어진 연유는 잘 모른다.
  이 왼손을 위한 협주곡은 1차 세계 대전으로 오른 손을 잃은 한 피아니스트의 눈물
겨운 혼이 담겨져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도 이 곡을 사랑하는 아니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황재환 선생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대구 취재에서였다. 시각장애자를 위한 특수학교인 대구 광명
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4살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불운아였다.
  그러다 6살 때 폭발물을 주워갖고 놀다가 두 눈과 오른손을 잃었다. 황재환선생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원까지 나왔고, 직업을 가졌고, 또 결혼을 해서 두 아이의 아버지
가 되었다.
  그는 인생의 필요로한 것을 거의 다 소유했다. 잃은 것 이상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끝없는 도전의 산물이었다.
  아마 그가 왼손으로 피아노를 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잠재하고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극복은 형이상학적인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는 인간 힘의 표출이다.

     * 빛과 그림자 *
  의자에 앉아서 지휘봉을 흔드는 지휘자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현재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훌륭한 오페라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 주목받는 인
물인 제프리 테이트가 바로 그 지휘자다.
  그는 왼쪽 다리가 마비되어 서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의자에 앉아서 지휘를 하지
만, 최근 미국 워싱턴에서 유명한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단의 공연 로엔그린과 코지 
판 투테 등을 지휘하여 호평을 받은 테이트는 메트 오페라단 뿐 아니라 제네바 오페
라단 수석 지휘자이며 곧 영국 코벤트 가든의 로얄 오페라 하우스에서 수석의 자리를 
맡을 예정이어서 앞으로의 활동이 크게 기대되는 실력가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천부적 재능을 보여준 테이트는 배고픈 예술가의 말년을 염려하
는 부모의 권유대로 케임브리지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70년 런던 병원에서 인턴 수련
까지 마쳤지만 결국 오페라에 일생을 걸기로 결심했다.
  테이트는 인턴 시절 런던 오페라 센터에 등록 오페라 공부를 처음 시작했으며 이때 
코벤트 가든에서 연습용 피아노 주자를 모집한다는 것을 알고 의학을 버리고 음악계
에 뛰어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막 뒤의 사람으로 활약하다가 뒤이어 메트 오페라단으로 자리를 옮
겼다. 그는 지휘자가 되려는 생각은 전혀 없이 성악 지도 또는 음악 행정을 맡으려 
했는데 메트오페라단 지휘자 제임스 레빈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 지휘를 맡게 됐다.
  처음에 코지를 지휘할 예정이었으나 파업으로 인해 취소되고 전혀 연습도 없이 다
른 곡으로 대체했으나 의외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로 인해 테이트는 정상에 올라섰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장애 때문에 목숨을 끊어야 했던 비운의 성악가도 있다.
  시력을 잃은 김경환 군은 베에토벤의 비창 소나타를 놀라웁게도 1악장에서 마지막
까지 외고 있기는 하였지만 아무래도 눈이 보이지 않아 음정이 고르지 않은 데가 있
었다. 하지만 악보를 완전히 외워서 공부했을 그 노력과 집념에 이인영 교수 ( 서울
대 음대 ) 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때 김경환은 대학 교육을 받으려 했지만 입학이 불가능했다.
  김씨는 이인영 교수의 권유대로 진로를 성악으로 바꾸어 일본 대학에 진학했다. 무
사히 학업을 마치고 4년 후 귀국하여 명동에 있는 시공관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그는 독창회가 끝난 후 얼마 지나 직장 알선을 이교수에게 부탁했다.
  이교수는 " 현재 서울에서는 연주가로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 없고 교편을 잡자
니 대학에서 시간 강사 자리 하나 얻기도 매우 어렵다네. 알아보기는 하겠지만 별로 
자신은 없네. " 하며 확답을 대신했다.
  김군은 아무말없이 돌아섰고 그런 일이 있은 후 한동안 소식이 끊어졌다가 대구에
서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내면의 세계를 육성으로 토해내던 그는 그렇게 허무하게 그 아까운 능력을 땅에 묻
은 것이다.
  그의 의지가 부족한 탓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그때의 그 사회가 너무 너그럽지 
못했던 탓이라고 해야할까?
  그동안의 노력, 그동안의 한을 그대로 간직한 채 차갑고 어두운 땅속에 있을 그의 
영혼의 절규가 들리는 듯 하다.

     * 거 제법인데 *
  제 33회 세계 양궁 선수권 대회가 육사 화랑 연병장에서 85년 10월 2일 개막이 되
었는데 개막식에서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동료선수인 셔록과 나란히 입장하는 장애자 
선수를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바로 뉴질랜드의 네롤리 페어홀이었다. 그녀는 '84 LA올림픽 개막식 때에도 7,800
여명의 올림픽 참가 선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휠체어를 타고 입장한 선수여서 보는 이
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었는데 1년 후에 이렇게 한국을 찾아온 것이다.
  위성 중계되는 화면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난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었다. 그런데 한국 땅에서 그녀를 보게 되다니 감개무량했다.
  페어홀은 1969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20m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녀는 승마선수 시절의 건강은 잃었지만 휠체어에 앉아서도 정상인들과 똑같이 할 
수 있는 활궁을 손에 잡았다.
  기록도 중요하지만 그녀에겐 시위를 당기는 자체가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그녀는 성적은 부진하지만 그녀를 보는 우리들은 그녀의 목에 수많은 극복의 메달
이 빛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리.
  이런 페어홀이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나지 말란 법은 없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85년 9월 19일에 열린 제 5회 서울특별시 양궁 종별 선
수권 대회 단체전에서 2위에 입상한 쾌보가 있었다. 일반 선수권 대회에서 장애자가 
참가한 것도 처음이었지만 출전하자마자 입상을 한 것이다.
  너무나 자랑스럽다. 대학 일반부 남자부에 정립회관 소속의 이석구, 김대성, 곽철
주, 김천식이 종합 점수 2,883점으로 2위를 차지했는데 2위는 1위 밑이 아니라 어깨
를 나란히 했다는 것에 더 의의가 있었다.
  장애자 스포츠를 하나의 오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사건들이 장애자 스
포츠에 대한 재평가를 하도록 해준다.
  페어홀에게 또 우리나라 사상 처음 입상한 우리 선수들에게 아무리 칭찬과 격려를 
많이 보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텐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칭찬과 격려에 너무 인
색한 것 같다.
  하지만 속으로는 ' 거, 제법인데 ' 라고 양반답게 치하를 했을지도 ……

     * 걷는 기적 *
  영화에서나 보던 소머즈 같은 개조 인간이 현실로 나타났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올해 나이 30살의 모델 출신의 미인, 제니퍼 스므
스 양이다.
  그녀는 5년 전 호놀롤루 마라톤 출전을 앞두고 연습 도중 한 마약 중독자가 난사한 
권총 탄화을 등에 맞고 하반신이 마비됐다.
  휴스턴대학 시절부터 육상, 스쿠버 다이빙 등 만능 스포츠 우먼이었고 특히 수상스
키의 여성 세계기록을 보유한 그녀가 걸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은 곧 사형선고나 마찬
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휠체어에 몸을 싣고 다시 일어섰다. 그래서 2년전 일본 오이따 국제
휠체어 마라톤 대회에서 역주한 바 있다.
  그런 그녀가 걷는 기적을 낳았다고 하는 놀랍고도 흥미로운 기사가 가슴을 설레이
게 했다.
  핫팬츠라는 별명이 붙은 컴퓨터 덕분으로 말이다. 단절된 신경을 컴퓨터 장치의 전
기 자극에 대한 반사 작용으로 근육을 움직일 수 있는 장치이다.
  라이트 스테이크 대학의 제럴드 페트로스키 박사가 연구한 이 장치로 그녀는 하루 
8시간씩 보행훈련을 하고 있다고 한다.
  페트로스키 박사는 이 장치의 시험을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했지만 5년 안에 1만달
러 ( 약 9백만원 ) 의 가격으로 시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을 보이고 있다.
  이 장치는 허리에 차는 도시락 크기의 소형 컴퓨터 ( 약 2kg ) 와 여기에 부착된 
전선과 전도 고무로 이루어져 있다.
  전도 고무를 허벅지 무릎등의 관절에 2개씩 붙이면 수십 볼트의 전류가 척수 손상
으로 끊어진 신경을 자극, 다리의 근육을 움직인다.
  하나의 관절에는 펴는 근육과 오무리는 근육 두가지가 붙어있는데 여기에 각각 동
작 신호를 보내 교대로 움직임으로서 보행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동장 신호는 페트로스키 박사가 미리 프로그래밍 해둔 허리의 컴퓨터에 기록되어 
있어 두뇌에서 보내는 신호를 대신한다고 한다. 
  그럼 미리 아는 길은 가도 처음 찾아가는 길은 못간다는 얘기가 되지만 그것도 곧 
수정될 것이다.
  참 놀라운 세상이다. 그녀는 12월 8일, 5년전 사고를 당해 장애자가 된 호놀룰루 
마라톤 대회에 특별 출연을 해 현대 과학의 기적을 온 세계에 보여준다고 했다.
  그녀는 완주하지는 못해도 두다리로 달려 장애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 후의 얘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녀가 휠체어를 던져 버리고 일어나서 몇 걸음만 걷는다 해도 그것은 기적이다. 
그런데 전기 자극으로 다른 부분까지 마비되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 하
지만 앞으론 걷는일이 중요하지 않게 되리.

     * 부끄러운 차이 *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계적 맹인 가수들이 있다. 호세 펠리치아노, 레이 찰스, 스
티비 원더, 킨 칸즈 등 그 이름을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호세 펠리치아노는 원래 푸에르토리코의 빈농의 아들로 미국에 이민와 뉴욕의 스페
인 이민촌 빈민굴에서 성장했다.
  어릴적부터 아코디언과 기타을 치기 시작한 그는 천부적인 음악소질로 인해 매우 
빠른 음악적 성장을 거듭해 17세 때부터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Rain, Destiny, Suzie Q 등의 히트곡을 내놓았고 그리고 TV 극 쿵후에서의 
열연으로 인기를 쌓았다.
  또 ' 막켄나의 황금 ' 영화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던 그는 40살이 된 현재까지 20년
이 넘는 가수 생활 동안 꾸준한 레코드 발표, 끊임없는 공연으로 정력을 과시하고 있
다.
  스티비 원더도 요즘 빌보드 싱글 챠트의 정상을 차지했다. Part Time Lover 가 싱
글 톱 10에 진입한지 5주만에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스티비 원더는 미 음악협회로부터 앨런조나스 생명보존상을 수상했다. 그가 박애주
의 운동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톱 40에도 그의 Part Time Lover 가 5위로 껑충 뛰어 지금까지 톱 10안에 
26곡을 진입시키는 진기록을 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38곡 비틀즈가 33곡이었는데 엘비스와 존레논이 고인이 되었다
는 점을 고려할 때 앞으로 스티비 원더는 새로운 기록을 낼 것으로 팝 전문가들은 내
다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맹인 가수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유일한 맹인 가수였던 
이용복씨는 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씨가 검은 안경을 쓰고 ' 마음은 짚시 ' 라는 노래를 히트시켰을 때의 그 인기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눈을 감으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다정한 목소리∼
  ' 그 얼굴에 햇살을 ' 이란 노래를 사람들은 얼마나 흥얼거렸던가. 그의 이야기가 
영화화 되어 그가 직접 출연하기도 했었고 81년의 세계장애자의 해 행사마다 대중에
게 모습을 보였었는데 이젠 그의 무대가 없어졌다.
  아무리 철새와 같은 인기인이라지만 그의 생명이 이렇게 단명한 줄 미처 몰랐다.
  화면에 비친 그의 유난히도 하얀 살결에 검은 안경을 쓴 모습을 보고 가슴이 섬뜻
해서였을까.
  아니면 자연스럽지 못한 뻣뻣하게 경직된 모습이 눈에 거슬린 탓이었을까.
  요즘 문공부는 맹인 등 장애자 가수들이 보다 많은 대중들 앞에 설수 있도록 방송 
출연등의 기회를 줄 것을 요청하는 보사부의 협조 공문을 받고 이 내용을 방송국에 
보내 프로그램 제작에 참조토록 했다.
  하지만 그저 참조만 할 것이다. 다리를 절던 예쁘장한 가수 지망생 아가씨가 생각
난다. 모든 것을 다 들여 디스크를 만들었지만 위 아래를 훑어본 방송국 PD들이 출연
을 거절하더라고 아픔을 토해내던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하고 있을까?

     * 무릉도원 *
  중앙대학교 사회복지과의 최경석 교수는 미국유학 시절 크리스토퍼 길벗이라는 장
애자와 1년 남짓 한집에서 생활할 기회가 있었다.
  최교수는 그떄를 통해서 복지 사회의 실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길벗은 소아마비로 사지가 건강한 어른의 손가락 2개 정도의 굵기로 야위었고 마비
되어 흔들거리는 몸을 휠체어에 의지해 자기 몸을 전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남의 
도움 없이는 물 한모금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50대 후반의 매우 활동적인 부모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독신 생활을 
하면서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그 극심한 장애를 극복하고 최교수님이 다니던 대학
교의 법과 대학 교수직을 훌륭히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입으로 글씨를 쓰고 타자도 쳐 서류며 강의안을 작성했다. 변호사이기도 한 
그는 그곳 집권당의 당료로서 자기 당의 모든 법률 문제에 대한 자문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한번은 당료 회의에 참석했던 그를 상원의원이 밤늦게 집에까지 업고 와 새벽녘이 
되도록 담소를 즐기는데 최교수님도 한몫 끼었단다.
  그는 음악에도 해박하여 바흐 소사이어티라는 음악 동호인의 총무직을 맡고 있었고 
종종 방송에 출연하여 음악해설을 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주위의 눈길을 끌만큼 아리따운 여자 친구들이 있어서 일주일에 두세 번
은 연극이며 음악회, 영화, 오페라 등에 여자친구들을 번갈아 데리고 다니며 데이트
를 즐기고 여자 친구들의 파티에 초대되어 술에 취해 돌아오기도 했으며 그중 리라는 
여자 친구와는 결혼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의논 할 정도였다.
  정기적으로 가정의가 찾아와 그의 건강을 진단하고 매일 아침 간호원이 찾아와 목
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그의 월급은 3만달러 정도나 되어 생활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고 방학때는 유럽이
며 동남아 등 해외 여행을 즐기는 정도였지만 장애 때문에 특별히 쓰여지는 모든 비
용에 대해서는 소득세가 면제되고 있다고 한다.
  그가 해외 유학을 결심하고 유급휴가를 얻어 박사과정의 공부를 하러 떠나기 직전
에 최교수는 귀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가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자기 
나라에 돌아왔노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대학에는 길벗 외에도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교수가 10여명이나 되었고 
그들은 모두 학교 내에서 가장 편리하고 넓은 연구실을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로선 가히 무릉도원이 아닐수 없다.
  이런 분위기의 사회라면 장애를 느끼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능력을 능력만큼 인정해주는 것이 장애자 복지의 이상이다.

     * 세계를 휠체어로 *
  TV 영화에서 ' 나의 청춘 500마일 ' 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KBS의 사랑의 대행진이 
끝난 후에 맞추어 방영한 것으로 보이는 테리 폭스얘기는 40억이 넘게 모금된 그 사
랑의 의미를 살리는 편성이었다.
  테리 폭스는 골절암으로 절단된 다리를 이끌고 캐나다 횡단을 시도했었다. 의족을 
짚신처럼 버려가며 뛰었지만 그래서 캐나다 국민을 열광시켰지만 병이 악화되어 완주
를 못하고 숨지고 말았다.
  그것이 80년도의 이야기인데 4년 후 북미 대륙횡단에 성공한 미국 청년이 나타났
다.
  5,300m 의 장정은 84년 6월 4일에 보스톤을 출발해서 85년 2월 18일 캘리포니아로 
도착하는 것이었는데 그 주인공은 12세때 권총오발로 우측 다리를 잃은 제프 키스이
다.
  키스는 하루 평균 20km 를 달리는 놀라운 정신력을 보였다. 키스에게 전 미국시민
은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며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냈고 레이건 대통령도 축하의 전화
를 걸어 키스를 격려했다고 한다.
  이제 5월이면 우리나라에 올 손님이 하나 있다. 휠체어로 세계를 일주하고 있는 릭 
한센이다.
  그는 15살때 타고 달리던 트럭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척추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
었지만 그 몸으로 정식 체육 대학을 나온 석사이고 몬트리올, 오스트리아, 보스톤, 
일본 등지에서 열린 국제 휠체어 마라톤에서 열아홉번 우승했고 1982년 팬암 경기에
서도 9개의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1984년 LA 올림픽 대회때 1,500m 휠체어 경기에도 
출전했었다.
  하루에 70마일은 달리는 무서운 속력은 가히 마라톤의 새 분야가 될 법도 하다.
  Expo 86은 한센의 휠체어 세계일주를 적극 승인 지지하는 기념 행사로 하여 85년 3
월 21일 척수연구소 설립 기금 ( 1천만 달러 목표 ) 을 마련하기 위해 34개국 4만km 
를 주파하기 위해 세계 마라톤을 시작했다.
  캐나다 밴쿠버 출신인 한센씨는 수백명의 환호를 받으며 출발점에서 가진 기자 회
견에서 " 갖은 고생을 다 겪겠지만 꼭 성공하고 말겠다. 세상 사람들에게 장애자도 
뭔가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시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 고 했다.
  캐나다로부터 미국, 멕시코, 유럽 각국, 소련, 이집트, 중동 3개국, 뉴우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싱가포르, 중공, 일본 그리고 한국을 거쳐 캐나다에 도착하게 된다
고 한다.
  그래도 우리나라를 찾아준다고 하여 고맙다. 88장애자 올림픽 덕분이겠지만, 그래
도 우리나라가 잊혀지는 나라는 아니구나 싶어 자랑스럽다.
  우리 나라에서는 정립회관이 한센씨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 세계 마라톤에 
대한 비디오 테이프를 보니 한센은 아주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동안 우리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 침묵의 영웅 *
  30만 청각장애자들의 대부, 운보 김기창 
  그는 이 땅에 우뚝 솟은 거목이다. 그는 적막의 세계에서 무한히 들려오는 아름다
운 선율을 따라 화폭 위에서 붓끝과 함께 춤을 춘다. 그러다 그것은 이내 울분의 폭
발인양 야성적인 힘으로 변해 우리에게 뭉클한 감동을 준다.
  운보는 한국청각장애자복지회의 회장직을 맡아보면서 한국의 장애자들에게 아낌없
는 사랑을 쏟고 있다.
  ' 농아복지사업은 하늘이 내리신 명령이어서 나의 모든 재산과 시간을 쏟으면서 즐
겁게 일하고 있다 ' 는 그의 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 한국청각장애자복지회는 해방 직후 창립되었다가 6.25 동란 때 소멸되었는데 지
난 80년에 재건하여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그래서 청각장애자의 권익 옹호와 재활에 
필요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청음회관을 세웠고 남양주군에 있는 청각장애자의 실
질적인 재활을 위한 기능 훈련원인 운보원을 세워 다른 장애 분야보다도 완벽한 시스
템을 갖추어놓았다.
  또 국제농아연맹문화예술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고 있어 우리 나라 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의 명성은 높아지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거울 삼아 청각장애자들의 비뚤어지기 쉬운 성격을 바로 잡아서 사
회에 적응토록 해주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데 그의 희생에서 난 절로 존경심이 우러나
왔다. 흔히 성공한 장애자일수록 장애자 문제에 더 냉담함을 익히 많이 보아왔기 때
문이다.
  운보는 청각장애자 복지에 들어가는 관리비를 충당하기 위해 뼈를 녹이는 듯한 고
통을 당하고 있다. 운보의 수입원은 그림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30만 청각장애자를 위해 더욱 열심히 붓을 잡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세간에서는 운보는 팔리는 그림만 그린다는 비난을 하기도 하지만 운보는 달게 받기
로 결심했다. 영웅의 희생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오늘날의 운보가 있기까지의 그의 일생은 한 인간의 극복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운보는 학교에 입학하던 해인 8살 때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장티푸스의 고열은 운보
에게서 소리를 빼앗아갔다. 침묵의 세계에 갖힌 것이다.
  장티푸스란 병을 앓다 살아난 운보는 언제나와 같은 아이였지만 학교의 책상 앞에 
앉은 운보는 늘 혼자 있는 듯했다. 너무도 고요했기 때문이다.
  운보는 노트에 낙서를 했다. 낙서는 점점 낙화로 변해갔다. 그렇게 국민학교 졸업
장은 겨우 받았지만 1920년대의 우리나라 실정으로는 청각장애자에 대한 특수교육이
라는 것이 전무했던 시대였었다.
  방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운보는 무서울만큼의 적막 속에서 고민할 줄도 모르
는 그저 천진스런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 모친은 커가는 운보에게 더 큰 절망과 더 커다란 아픔을 느꼈으리, 운보
의 모친께선 늘 낙화를 하는 운보에게서 그의 재능을 발견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이당 김은호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때가 17살이었다.
  운보가 입문한지 6개월이 되었을 때 이당은 큰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그것이 선전
에 출품되어 첫 입선을 할 줄이야!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였다.
  댕기를 늘어뜨린 소녀들이 널뛰는 장면을 그린 판상도무란 놀라운 걸작이었다. 그 
후 4회 연속 특선을 하는 기록을 낳았고 27살부터는 추천 작가로 화단에 군림했다.
  그런데 운보의 모친께선 선전 입선만을 보시고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
다. 그 슬픔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침묵에 지진이 난 듯 울부짖는 운보는 마치 굶주린 들짐승 같았다.
  하지만 그에겐 어머니의 모성을 이어줄 또 하나의 천사를 만나게 된다. 바로 그의 
아내 우향 ( 우향 박협현 ) 이다.
  1943년에 열린 마지막 선전에 추천 작가로 아악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는데 이때 
일본 여자미술전문학교 3학년생으로 선전에 특선한 우향이 운보를 만나러 왔다.
  작품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는데 그때, 우향은 운보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왜냐하면 그녀는 운보를 50이 훨씬 넘은 노장으로 생각했는데, 그는 혈기 넘치는 
총각이었으니 스스로 찾아온 쑥스러움이 왜 크지 않았으랴. 또 한가지, 운보는 상상
하지도 못했던 귀머거리였다.
  그때 운보 역시 깜짝 놀랬다고 했다. 우향의 미모에 말이다.
  그 인연으로 3년동안 열렬히 연애를 하다 결혼을 했는데 처가집의 냉대 속에서 한 
결혼이었지만 운보는 소리를 찾은 기쁨이었다.
  우향은 동고동락하면서 아내요, 비서요, 친구요, 동지였다. 우향은 운보에게 말을 
가르쳤다. 운보가 잃은 것은 청력이지 언어는 아니였지만 잃은 청력이 언어까지 깊은 
침묵속으로 빠뜨렸었다. 그런데 그 함정에서 우향이 구해주었던 것이다.
  남이 들으면 부부 싸움을 하는 줄 알았겠지만 - 속삭이듯이 해서는 운보의 오랫동
안 잠기웠던 입을 열게 할 수가 없었으므로 - 우향은 손에 종이와 연필을 들고 발음
교정까지 하고 있었다.
  또 그들은 한길을 걷는 부부로서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17차례의 부부전이 국내외
에서 성황을 이루었고 그들의 화려한 수상 경력이 한층 그들을 돋보이게 했다. 
  운보는 54년부터 74년까지 홍익대와 수도여사대 ( 현재의 세종대학 ) 의 동양화 교
수로 후진을 양성시켰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청각장애자 대학교수라는 역사를 창조하
는 것이었다.
  그런데 운보에게 또 한차례의 가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바로 사랑하고 또 사
랑하는 아내 우향의 죽음이다.
  운보의 아내로 30년 동안 남다른 고초를 겪어야 했던 그녀가 56세의 나이로 운보를 
남겨두고 홀연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운보는 우향과의 이별을 도저히 정말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마 그녀도 1
남 3녀의 장성한 자식들이 운보곁에 있기에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으리라.
  그의 모친께서 지어주신 운보라는 호가 붙은 작품이 2만을 헤아리는데 그 작품에는 
침묵의 심연에서 폭발한 예술의 극치를 엿볼수 있다.
  운보는 고희를 넘긴 노익장이면서도 수백 호짜리 대작 50점을 제작하는 10년 계획
을 세웠는데 이는 바로 침묵에서 용솟음쳐오는 극복의 힘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한국청각장애자 복지회의 상임이사로 아버지를 돕고 있는 김완 씨를 만난 순
간 김기창 화백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 했다.
  김기창 화백은 언제나 입술을 굳게 닫고 계셨지만 이렇게 고함을 치시는 듯 했다. 
' 이놈들, 우리 장애자들을 업수이 여기는 너희들이 바로 불구자인 게야 '
  김기창 화백이 없는 한국의 청각장애자 복지는 벙어리인 채로 방치되어 있었으니.
      
      <제 2 부> 
    1. 병신별전
  이 얘기는
  시각, 지체, 청각, 정박의 
  각 장애별에 따른 실상이다.
  연극의 형식으로 쓴 것은 
  이들의 아픔을 관객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판별해 주십사해서이다.

  등장인물
  재판장, 검사, 변호인, 사회자, 피고들.
  무대
  현세에서 생을 다한 사람들이 내생엔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가를 재판받는 중음천 
재판소.
  제 1 막
  막이 오르자, 정돈된 법정의 사람들이 기립하여 재판장을 맞이한다. 재판장 당당하
고 위엄있게 걸어들어와 가장 높은 가운데 자리에 가 앉는다.
     * 깜깜이전 *
  사회자 : 모두 자리에 앉아주십시요. 중음천 재판소의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오
늘은 특종계열처벌에 관한 재판입니다.
  등록 번호 무수해번 깜깜이 입정하시오.
  ( 깜깜이 흰지팡이를 짚고 더듬거리며 나온다 )
  사회자 : 앞으로 3보, 좌로 1보, 히프 안착! 지금부터 검사의 논고가 있겠습니다.
  검  사 : ( 일어나서 복장을 단정히 매만지고 ) 피고 깜깜이의 직업은 점술가였습
니다. 점술이란 인간의 운명을 감히 미리 예언하는 행위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부
자가 되게 해 준다고 했고, 아들 못낳는 사람한텐 아들을 낳을 수 있게 해준다고 했
으며, 실력이 없는 입시생을 좋은 대학에 보내준다고 했고, 심지어는 아픈 사람의 병
도 고쳐준다는 거짓말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액운이 닥치기 전에 미리 비방을 써야 
한다고 돈 받아놓고 절을 하면서 기만원씩을 갈취하곤 했습니다.
  피고의 이런 행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열심히 노력해서 살려는 의지보다는 요행주의
의 분위기로 물들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피고는 공갈죄, 사기죄 그리고 인간오염죄까지 범했습니다.
  그래서 본 검사는 중음천법 제 0조 0항에 따라 최고형인 지옥형의 구형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 마치 구형이라도 내린 듯 만족해하며 앉는다. )
  사회자 : 검사의 논고가 끝났습니다. 이어서 변호인의 변론이 있겠습니다.
  변호인 : ( 땅을 보고 일어서며 머리를 든다 ) 친애하는 재판장 각하 그리고 이 자
리에 모이신 여러분!
  본인은 이 중음천 법정에서 수억겁이 넘게 변론을 해왔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가슴
이 뛰기는 처음입니다.
  본인의 감정이 안정이 안된 상태이기 때문에 제 변론이 다소 순서가 뒤바뀌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십사 하는 부탁을 먼저 드려야겠습니다. ( 고개를 약간 숙이
다가 천천히 들며 ) 피고는 나이 일흔 셋입니다. 그러나 피고는 그 나이가 되도록 자
기를 낳아 키워주신 부모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살을 섞은 아내가 미
인인지 추녀인지도 모릅니다. 또 자기 눈속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의 모습을 
상상해내지도 못합니다.
  왜 일까요?
  피고는 왜 그들의 모습을 모를까요?
  이유는 딱 한가지 피고는 안타깝게도 빛이란 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피
고는 인간세상에서 장님이라고 불리워지는 눈 병신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온갖 멸시를 다 받았습니다. 아침에 그를 보
면 재수가 없다고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고가 왜 이런 멸시를 받고 살아야했을까요? 그를 멸시한 사람들이 더 큰 
죄를 지은게 아닐까요? 아니 그를 이지경으로 만든 하늘님한테 더 큰 잘못이 있는게 
아닐까요?
  검  사 : (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서며 ) 이의 있습니다. 지금 변호인은 피고의 죄상
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변론을 하므로서 재판장님의 동정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다.
  재판장 : 인정합니다. 변호인의 피고의 죄상에 관한 변론만 하십시오. 
  ( 검사 의쓱해서 앉는다. )
  변호인 : ( 절을 하며 ) 죄송합니다. 
  그럼 피고인 심문을 하겠습니다. ( 피고한테 다가가서 ) 피고는 몇살 때부터 점을 
쳤습니까?
  깜깜이 : 50살 때부터였죠.
  변호인 : 그럼 언제까지 그 직업을 가지고 있었나요?
  깜깜이 :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이곳에 오기 3일 전까지 했습니다.
  변호인 : 왜, 3일 동안은 하지 않았죠?
  깜깜이 : 죽을려고 그랬는지 몹시 아팠습니다.
  변호인 : 그랬군요. 그럼 피고는 점술가란 직업에 23년 동안 종사를 하셨군요?
  깜깜이 : ( 한숨 ) 한 10년밖에 안됐으려니 했는데, 벌써 그렇게 됐군요.
  변호인 : 아, 그만큼 짧게 느껴진다는 얘기로군요. 그럼 피고는 점술을 하기 전에
는 무엇을 했나요? 점술은 50부터 시작했다고 했으니까 한 30년 동안에 했던일이 많
았을텐데요?
  깜깜이 : 네, 그렇습죠. 태어났을 때부터 장님이었던 저는 철이 들기까지는 늘 방
안에만 틀어박혀있었어요. 밥도 혼자 먹었지요. 흐리고 먹는다고 같이 먹기를 꺼려했
기 때문이예요. 반찬도 언제나 한 가지였어요.
  그때는 그것이 서러웠지만 막상 딱 한가지의 반찬 밖에 없던 그 밥마저도 못먹게 
되자 더 이상 방안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읍죠.
  그래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어요. 하지만 다리가 휘청거려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더군요.
  온통 까만 세상인데도 별이 보이는 듯 했어요. 결국은 길바닥에 쓰러졌답니다.
  그런데 어떤 마음씨 좋은 할머니가 저를 구해주셨지요. 전 그 할머니가 고마워서 
안마를 해드렸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랬더니 그 할머니께서 안마사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피리를 불며 이 골목 저 골목 더듬거리고 다니면서 안마를 했어요. 그러
나 생각처럼 쉽게 돈이 벌리지 않더군요. 하루 종일 걸어도 입안에 풀칠하기가 힘들
었어요. 그러던 중 한 여자를 알게 됐지요. 그래서 그 여자의 도움으로 호텔에 취직
을 했어요. 그때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어요.
  변호인 : 그 이유가 뭡니까?
  깜깜이 : 미니 스커트를 입은 예쁜 아가씨들한테 자리를 뺏긴거지요.
  변호인 : 아니, 법적으로 안마는 맹인 이외는 할 수 없게 돼있지 않던가요?
  깜깜이 : 물론 법에는 그렇게 명시되어 있읍죠. 하지만 손님들은 우리 앞 못보는 
장님들보다는 늘씬한 각선미의 부두러운 아가씨들을 더 좋아하지요. 그러니 자연 호
텔에선 그런 아가씨들을 쓸 수 밖에요.
  변호인 : 불법으로 말이군요.
  깜깜이 : 그렇습죠. 우리의 호소는 처절했지만 아무도 우리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
았어요. 오히려 불법 행위를 하는 그들을 더 두둔했지요.
  변호인 : 그러니까, 권리마저 박탈당하게 된 거로군요?
  깜깜이 : 그렇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호텔에서 쫓겨나왔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인 
침술이었습니다. 침통을 가지고 다니며 아주 염가에 침을 놔주었어요.
  다행이도 내 침만 맞으면 금방 금방 효험이 났기 때문에 돈을 곧 모을 수가 있었
죠. 그래서 조그만 가게를 하나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쉬운 것을 아니더군요. 거의 매일같이 찾아오다 시피하는 
순경의 입을 막으려구 벌어도 벌어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였으니까요. 그러다 마침
내는 불법 영업으로 벌금만 잔뜩 물구 파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변호인 : 아니 맹아 학교에선 침술을 가르치고 있지 않던가요?
  깜깜이 : 가르치고야 있죠. 하지만 우리 맹인들에겐 자격증을 내주지 않습니다.
  변호인 : 그래요? 그거 참 아이러니칼하군요. 인가를 받아 운영하는 맹아학교의 정
규수업 과정에 있는 침술이 바로 그 인가를 허락해준 정부에서 인정을 안해주고 있다
니 말입니다. 아뭏든 좋습니다. 그 가게를 그만둔 다음은 어떻게 됐습니까?
  깜깜이 : 그땐 이미 자식 새끼들까지 딸린 몸이라 부끄럽구 뭐구를 가릴 여유가 없
었습니다. 그래서 기타를 들고 거리로 나왔지요. 거리의 악사가 된 것이죠. 하루 종
일 목에서 피가 나도록 노래를 불렀지만 깡통엔 100원짜리 동전 몇닢만이 뒹굴고 있
을 뿐이었습니다. 그래 깊은 비탄에 빠져있는데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장님은 점을 
쳐야 먹고 살 수 있는거라구요.
  그래서 침을 놔주던 그 침통을 흔들며 점을 치기 시작했읍죠.
  변호인 : 듣고보니,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상관있겠습니까. 점술가도 직업인데 직
업을 가지고 죄의 유무를 논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점을 치면서 남을 속이
고 돈을 갈취했다는 것입니다. 피고는 정말로 점을 쳐주고 받는 복채 외에 부당한 이
익을 취하기 위해서 많은 돈을 요구했던 적이 있습니까?
  깜깜이 : 복채이외에 비방료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로 돈을 갈취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비방에 드는 비용에다 나의 수수료를 조
금 보태어 받은 것 뿐이니까요.
  변호인 : 알겠습니다. (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 현명하신 재판장님, 지금 피고가 
진술한 내용 그대로입니다. 점이라는 것이 맞는다느니 틀린다느니 또 비방이라는 것
이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는 것은 이 법정 안에서 논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가 살아있는 한은 영원히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수수
께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본 법정에선 피고가 살아온 73년 동안의 피고의 행위 그 자체를 놓고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의 6도 중 어디로 보내야 그 사람이 전생에 지은 업에 
가장 적합하느냐 하는 것을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확증을 갖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피고는 보통 사람들이 값진 물건
을 보고 탐심을 낸다거나,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낸다거나 하는 눈으로 짓는 죄만
은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럽게 살아온 이 불쌍한 피고가 내생은 밝은 빛을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선처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 가볍게 절을 하며 앉는다. )
  사회자 : 피고 깜깜이에 대한 재판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판결은 검사의 논고
와 변호인의 변론을 참고하여 엄중한 심의를 거쳐서 모든 재판이 끝난 후 공포가 된
다는 것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 네발로전 *
  사회자 : 다음은 등록번호 무량해번 네발로에 대한 재판이 있겠습니다. 네발로 입
정하시오. (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나와 의자 옆 땅바닥에 앉는다. )
  사회자 : 피고는 의자에 앉으시오.
  네발로 : ( 머뭇거리다가 ) 혼자서는 일어날 수가 없어서…….
  사회자 : 좋습니다. 피고 네발로에 대한 검사의 논고가 있겠습니다.
  검  사 : ( 총알처럼 일어선다 ) 피고 네발로의 죄목은 자기 학대죄, 부모행패죄, 
사회저주죄, 인간혐오죄, 무위도식죄, 자학자살죄, 이상 5가지나 됩니다.
  즉 피고는 신성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학대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낳아 
길러준 부모에게 서슴치않고 온갖 행패를 부렸습니다. 또 자기가 속해 있는 이 사회
를 저주하고 사회의 모든 체재를 비난했을 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개심을 품고 
마치 원수인양 독기를 품으며 온갖 욕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을 무위도식
하면서 남들이 땀 흘려가며 벌어놓은 것을 편안히 앉아서 받아 먹으며 마치 기생충처
럼 살다가 끝내는 자기의 목숨을 끊었던 악질 중의 악질입니다.
  고로 본인은 중음천법 제 0조 0항에 따라 최고형인 지옥형의 구형을 요청하는 바입
니다. ( 네발로를 쏘아보며 앉는다. )
  사회자 : 이어서 변호인의 변론이 있겠습니다.
  변호인 : ( 일어서더니 )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 피고에게 가 피고를 안아 의자에 
앉혀주고 돌아온다 ) 사랑이 충만하신 재판장님, 변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죄많은 
피고를 위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요.
  재판장 : ( 한참을 숙고하고 ) 허락합니다.
  변호인 : ( 공손히 절을 하며 ) 감사합니다. ( 손을 모으고 눈을 감으면서 ) 전지 
전능하신 하늘님, 피고는 하늘님께서 내려주신 고귀한 생명을 스스로 끊은 죄인이옵
니다. 
  이 우주에는 참으로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습니다. 작은 미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
지 생명을 가진 것들은 그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
큼 생명이란 소중하기 그지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그 수많은 귀한 생명체 중에
서 인간은, 그 모드를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이올시다.
  다시 말해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입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피고는 인간사표를 냈습니다.
  왜였을까요? 그건, 이 인간 사회의 생존 커트라인인 적자 생존의 법칙에서 탈락했
기 때문이었습니다. 적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 사회의 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피고는 왜 적자가 될 수 없었을까요? 그건 간단합니다. 보시다시피 피고는 
두 다리로 걸어야 할 인간인데 짐승처럼 네발로 길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참혹한 운명 
때문이었습니다.
   하늘님, 하늘님은 왜 그에게 그런 형벌을 주셨습니까? 그리고 그는 이미 발에 족
쇄를 차고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살았는데 왜 또 다시 지옥행이란 형벌을 내리려 하
십니까? 자비하신 하늘님, 이 가련한 죄인이 다음 생에는 두 다리로 저 푸른 초원을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도록 그에게 건강한 다리를 내려주십시요.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나이다. (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눈을 뜨더니 재판장을 
향하여 다시 머리를 숙이며 ) 기도를 끝까지 할 수 있도록 해주신 재판장님의 너그러
우신 관용에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 피고인 심문에 들어가겠습니다. ( 피고를 향하여 ) 피고는 지금 나이가 몇이
나 됐습니까?
  네발로 : 마흔 하나입니다. 
  변호인 : 불혹의 나이군요. 그런데 어쩌다 그런 불구자가 됐습니까?
  네발로 : 세살 때 소아마비란 병에 걸렸습니다.
  변호인 : 그럼, 아장아장 걸어다니셨겠군요. 치료는 해봤나요?
  네발로 : 많이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변호인 : 기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죠?
  네발로 : 철이 든 후에는 병원을 찾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변호인 : 왜죠?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인가요?
  네발로 : 아닙니다. 오히려 어렸을 때가 더 가난했습니다. 어머니가 부동산에 손을 
대신 후에는 우리집도 남부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변호인 : 그런데 왜 병원에 가지 않았을까요? 내가 알고 있기론 수술로 교정을 하
곰 보조기를 신으면 목발에 의지해서 걸어다닐 수 있게 된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네발로 : 저도 철이 들면서부터는 수술을 시켜달라고 여러번 간청을 했습니다. 하
지만 부모님은 돈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있었어요. 내가 이런 병신 몸이 된 것은 팔
자라는 거예요. 그러니 수술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거였죠.
  변호인 : 그렇다면 수술을 한번도 해보질 않았군요.
  네발로 :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는 가난해서 못했고, 여유가 생겼을 때는 부모님이
시켜주질 않아 이렇게 다리가 오그라붙고 말았습니다.
  변호인 : 그럼 그것때문에 부모한테 행패를 부렸나요?
  네발로 :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나의 생각과 부모님들의 생각이 맞지 않았기 때문
이죠.
  변호인 : 구체적으로 어떤점이 맞지 않았는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네발로 : 내 생각은 몸이 이럴수록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거였지만, 부모님은 몸
이 이렇기 때문에 배워도 소용이 없고 돈만 있으면 된다는 거였습니다.
  변호인 : 그렇군요. 대단히 죄송한 질문이지만 학교교육은 어디까지 받았나요?
  네발로 : 전혀 못했습니다. 난 동생들이 학교에 갈 때마다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는
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나의 이런 마음을 털끝만큼도 이해하지 못했습니
다. 아니 오히려 저를 완전히 사회로부터 결리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난 세상이 그
리웠습니다. 맑은 공기도 마시고 싶었고, 뜨겁게 내리 쬐는 태양 아래에서도 있고 싶
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모님은 나의 외출을 몹시 싫어하셨습니다. 외출 뿐만이 아니라 내가 
내 방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손님이 와 축제 분위기가 되어도 
나는 혼자 내방에 갇혀 소외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렸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요.
  변호인 : 피고의 죄목 중에 부모행패가 있는데 부모한테 어떤 식으로 행패를 부렸
나요?
  네발로 :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지 못한 거지요. 내 몸을 이렇게 만든 것
은 부모니까, 고쳐내라고도 했고 죽여달라고 악을 쓰기도 했습니다.
  변호인 : 그렇다면 육체적인 행패는 없었군요.
  네발로 : 딱 한번 있었습니다.
  변호인 : 그때가 언제였나요?
  네발로 : 서른살이 되던 봄이였지요.
  변호인 : 그땐 왜 행패를 부렸습니까?
  네발로 : 사귀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변호인 : (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 놀랍군요! 외출을 전혀 못했다고 했는데 어떻
게 아가씨를 알게 되었죠?
  네발로 : 잡지책 펜팔 코너를 보고 편지를 했었습니다.
  변호인 : 아, 그랬군요. 그럼 데이트는 어떻게 했나요?
  네발로 : 우리는 1년 가깝게 편지를 했지요. 만나고 싶은 것을 꾹꾹 참으며 전 겨
우 전화만을 허락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전화로 데이트를 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달
아올라 전화기를 붙들고 신음했던 적이 많았어요. 그러다 결국 그 여자를 집으로 초
대했습니다.
  변호인 : 부모님께서 허락해주시던가요?
  네발로 : 물론입니다. 그때가 가장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을 때였으니까요. 사랑이
란 것이 저를 그렇게 순화시켰던 것입니다. 난 그 여자를 무지무지하게 사랑했어요. 
그 여자도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나를 위해 한평생을 바치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결혼을 결심하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모님은 
펄펄 뛰시며 반대를 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집 재산을 노리고 나 같은 병신한테 
시집을 오려구 하는 거라는 것이였죠. 그래서 부모님은 그날부터 그 여자를 집에 오
지 못하게 했고 전화는 물론 편지도 저한테 전해주지 않았습니다. 
  난 미칠것만 같았습니다. 난 그때 꿈이 있는 대로 다 부푼 상태였는데 일순간에 모
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죠. 그래서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대로 
마구 깨부셨습니다.
  변호인 : 그럼 부모를 직접 구타하지 않았군요?
  네발로 : 불행하게도 저한텐 그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변호인 : 아 그렇겠군요. 때리라고 머리를 들이박고 있지는 않았을테니까요. 그때
가 서른 살이라고 했는데 그 후의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네발로 : 더 이상은 사육당하고 싶지가 않아서 나도 뭔가를 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내 자신이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싫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난 정상적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세상이 그
것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변호인 : 그것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네발로 : 궁리궁리 끝에 시계포를 해보려구 시계학원에 간 일이 있습니다. 부모님
도 기술을 배우는 일은 대찬성이었습니다. 또 내가 그 여자 생각을 못하게 하려는 방
편이기도 했죠. 그런데 며칠 다니자 학원에선 저를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다른 원
생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말입니다.
  변호인 : 무슨 방해가 된다는 거죠?
  네발로 : 그건 구실이었죠. 내 모습이 보기 싫었던 겁니다.
  변호인 : 저런, 수강료를 주고 당당히 배우는 하나의 고객인데.
  네발로 : 그것이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난 사람의 탈만 쓰고 있을 뿐 사람다운 대
접을 받아본 기억이 한번도 없습니다. 
  변호인 : 그래서 사회를 불신하고 인간을 혐오하기 시작했군요?
  네발로 : 그렇습니다.
  변호인 : 그런 분위기 속에선 살 의욕이 없어지기 마련이죠.
  검  사 : (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서며 ) 지금 변호인은 피고의 죄를 정당화시키려고 
억지를 쓰고 있습니다. 
  재판장 : 인정합니다. 변호인은 더 할 변론이 있습니까?
  변호인 : ( 머리를 숙이며 ) 죄송합니다. 딱 한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재판장 : 좋습니다. 
  ( 검사, 변호인을 향해 눈을 흘기며 앉는다. )
  변호인 : ( 피고 쪽으로 몸을 돌리며 ) 피고는 자살을 했는데 어떤 방법으로 목숨
을 끊었습니까?
  네발로 : 면도칼로 동맥을 끊었습니다.
  변호인 : 왜 그렇게 잔인한 방법을 택했나요? 약을 먹는다거나, 연탄 가스를 이용
한다거나 하는 등의 좀더 쉬운 방법이 있었을텐데 말이죠?
  네발로 : 나의 목숨이 40을 넘은 것은 죽을래야 죽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약을 사러갈 수도 없었고, 연탄가스를 이용할 수도 없었고, 밧줄로 목을 매달 수도 
없었습니다.
  변호인 : 알겠습니다. 피고인 심문은 이것으로 마칩니다. 친애하는 재판장님, 그리
고 많은 방청객 여러분, 우리는 집에 개를 키웁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쇠사슬로 묶
어두지요. 그러니 그 개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그 끈의 길이가 반지름이 되는 원
입니다.
  그런 개만 남겨두고 여행을 갔다오니 그 개가 굶어죽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주
인은 그 개가 불쌍해서 혀를 차며 술퍼했죠. 하지만, 그 개가 굶어죽기까지 겪었던 
그 고통은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화초에 햇볕을 쬔다고 마당에 내다
놓고 한참 일을 나가보니 그 화초는 태양에 수분을 다 빼앗기고 시들시들해져 있었습
니다. 불과 30cm 만 가도 뜨거운 햇빛을 가릴 수 있는 그늘이 있는데도 화초는 움직
일 수가 없기 때문에 그저 당하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피고는 뭔가를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꼼짝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피고한텐 이 개나 화초와는 달리 느낄수 있는 감정이 있고, 말할 수 있는 
입이 있기 때문에 이런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 호소도 죄가 되는지 본
인은 반문해 봅니다. ( 침통한 표정으로 앉는다. )
  사회자 : 이상은 피고 네발로에 대한 재판이었습니다.

     * 막막해전 *
  사회자 : 다음은 피고 막막해의 재판이 이어지겠습니다. 등록번호 무량무수번 막막
해 입정하시오. 
  한참을 기다려도 막막해가 나오지 않자 사회자, 나오라는 손짓을 한다.
  그때야 막막해 싱글레 웃으며 걸어나와 자리에 앉는다.
  사회자 ( E ) : 아니 앉으라는 말도 안했는데 제멋대로군.
  사회자 : 죄송합니다. 피고 막막해에 대한 검사의 논고가 있겠습니다.
  변호인 : ( 황급히 일어서며 ) 잠깐! 피고도 검사의 논고를 들어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수화 통역자를 출두시킬 것을 요청합니다. ( 앉는다 )
  재판장 : 허락합니다.
  사회자 : 수화 통역자 나오십시오.
  ( 수화 통역자 나와서 피고 앞에 선다. )
  사회자 : 이제 논고를 시작하십시오.
  검  사 : ( 기분 나쁘다는 듯이 일어서며 ) 피고는 18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에 
그것의 무려 100배가 넘는 1986건 이라는 경이적인 수치의 크고 작은 폭행 사고를 저
질러 많은 사람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혔으므로 중음천법 제 0조 0항에 따
라 최고형인 지옥형의 구형을 요청합니다. ( 변호인을 쳐다보며 앉는다 )
  사회자 : 변호인, 변론하십시오.
  변호인 : ( 목을 가다듬으며 일어선다 )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론의 자유입니다.
  즉 인간은 모든 감정이 바로 이 말로 표현된다고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피고는 겉보기에는 아주 멀쩡합니다. 두 눈이 있고, 튼튼한 다리가 있으니
까요. 하지만 피고는 자기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열여덟 살이라는 꽃다운 청춘에 
요절을 했습니다.
  왜였는줄 아십니까? 고도로 발달한 문명사회가 피고에겐 오히려 해가 되었습니다. 
가엾게도 피고는 차의 크랙션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다가 자동차 바
퀴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피고한테는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더듬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행
동보다는 말이 앞서게 됩니다. 해라, 하지마라, 가라, 오라, 먹자, 놀자, 이런 말들
이 그것을 잘 말해 줍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피고한테는 이렇게 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에 행동이 앞서게 
됩니다. 
  그들한테 수화라는 언어가 있지 않느냐고 따지실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세상 모
든 사람이 다 수화를 할 줄 아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피고에 있어 언어란 같은 농
아 친구들과 수화를 알고 있는 몇몇 사람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피고가 알아듣지 못한다고 마음대로 흉을 보고 비웃기도 하고 심
지어는 욕지거리까지 하며 놀려대기가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피고는 그들의 표정으로 또 자신의 감각으로 그런 조롱을 다 느낄 수 있었
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수화는 그들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글로 써가지고는 감정과 속도를 맞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 주먹이 앞설 수 밖에요.
  그런데 그 주먹의 강도에 대해서도 한번 짚고 넘어가야 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
네마스코가 발명되기 전에는 무성영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성영화는 아무런 소리의 효과도 없는 영화이기 때문에 관객들의 상상력에 따라 
대단한 차이가 났었습니다.
  이처럼, 피고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주먹의 강도를 조절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코피를 터트리게 했고, 때로는 이빨을 부러뜨리기도 하는 등의 예기
치 못했던 사고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큰 사고도 있었습니다. 바로 작년 그러니까 피고가 17살 때의 일입니다.
  피고는 2층 자기 방에서 혼자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둑이 2층 베란다로 
들어와 피고의 방까지 침입을 했습니다. 하지만 피고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기 때
문에 그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요. 그러니 도둑은 얼마나 신바람이 났겠습니까. 내 
세상이구나 하고 귀한 물건들을 주섬주섬 줏어 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피고가 
잠결에 눈을 떠보니 시커먼 도둑들이 우뚝 서서 피고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망을 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깨어났으니 도둑들은 잽싸게 베란다를 거쳐 밖으로 도
망을 쳤지요.
  그러나 피고는 도둑이야 하는 소리를 지를래야 지를 수가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왔
겠습니까? 도둑이 귀중품을 가지고 도망가는데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
까? 그래서 피고는 베란다에 있던 큰 화분을 들어 올려 달아나는 도둑을 향해 던졌지
요. 그렇게 해서 도둑은 잡혔지만 도둑은 전치 5주의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피고의 행위는 물건을 훔쳐가는 도둑에 대한 정당방위였습니다. 자기 보호
에 대한 본능은 누구한테나 다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피고는 18년 동안에 1986건의 폭력 사고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3건 이
상의 폭력 사고가 있었다는 거지요.
  정말 검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경이적인 숫자입니다. 하지만 싸움은 혼자서는 못하
지요.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지 않습니
까. 그러니 피고한테만 잘못이 있다고 몰아붙일 것이 아니라 피고가 하루에 3번 이상
이나 주먹을 휘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사정을 우리는 헤아려줘야 합니다.
  피고는 사람들 속에 있어도 함께 융화되지 못하고 항상 물에 뜬 기름처럼 빙빙 돌
며 고립당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본인이 애써 변론은 하고 있지만 피고의 생각과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피고는 자신에게 지옥형이 떨어져 지옥으로 끌려가면서도 내가 왜 지옥으로 가야 
하느냐고 말 한마디 못하고 끌려 가겠지요.
  다만 피고는 자기를 끌고 가는 사람에게서 풀려나오려고 몸을 뒤틀거나 발을 구르
는 등의 육체적인 반항을 할 뿐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변명이 없기 때문에 피고가 자기의 죄를 인정한다고 생각하겠지요.
  끝으로 제가 수화를 모르기 때문에 피고와 충분한 의사 교환을 나누지 못해 만족스
럽지 못한 변론이 된 것을 대단히 죄스러워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사회자 : 이것으로 피고 막막해에 대한 재판을 마치겠습니다.

     * 한심이전 *
  사회자 : 마지막으로 등록번호 끝까지번 한심이의 재판이 있겠습니다. 피고 한심이 
입정하시오. 
  ( 한참을 기다려도 한심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사회자 들어가서 데리고 나와 
의자에 앉힌다 )
  사회자 : 대단히 죄송합니다. 자 피고 한심이에 대한 검사의 논고, 시작해 주십시
요.
  검  사 : ( 활기가 나서 ) 피고 한심이는 할 수 있는 일을 헤아리는 것이 할 수 없
는 일을 헤아리는 것보다 훨씬 빠른 그야말로 인간 폐품입니다.
  그 자체가 대죄이지만 그래도 피고의 죄상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피고 한심이의 손에서는 남아나는 게 없었습니다. 뭐든지 부서졌지요. 그래서 파괴
죄입니다. 그리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저지른 냄새 및 미화 불쾌죄, 식사 때마다 
밥의 절반을 흘리는 낭비죄, 주의 사람들을 이유없이 때리는 구타죄, 또 피고가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항상 불안감을 주는 공포 유발죄입니다. 
  한 마디로 피고는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저지를 소양을 가진 예비범입니다. 그래
서 본인은 중음천법 제 0조 0항에 의하여 지옥형을 요청합니다. ( 큰 기침을 하며 앉
는다 )
  사회자 : 이어서 변호인의 변론이 있겠습니다.
  ( 변호인은 일어나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는다 )
  재판장 : 변호인의 변론을 촉구합니다.
  변호인 : ( 머리 숙여 ) 대단히, 정말 대단히 죄송합니다. 잠시 피고의 흉내를 내
봤습니다. 피고를 처음 보는 사람은 지금처럼 당황이 되고 답답할 것입니다. 그럼 피
고가 왜 이러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피고 나를 쳐다보시오.
  한심이 : ( 딴청을 부리고 있다 )
  변호인 : 한심이, 나를 보시오.
  한심이 : ( 그제야 변호인에게 눈길을 준다 )
  변호인 : 피고가 누군지 아십니까?
  한심이 : ( 머리를 흔든다 )
  변호인 :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한심이 : ( 또 머리를 흔든다 )
  변호인 : 여기 왜 왔는지 아십니까?
  한심이 : ( 역시 머리를 흔든다 )
  변호인 : 여기 오기 전에 어디서 살았지요?
  한심이 : 집, 우리집.
  변호인 : 집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한심이 : 원장 선생님이랑, 또 많은 선생님이랑, 그리고 많은 더 많은 친구들이랑.
  변호인 : 거기서 뭘 했죠?
  한심이 : 거기가 어딘데요?
  변호인 : 집, 한심이가 살던 집 말예요.
  한심이 : 아, 네, 놀았어요.
  변호인 : 뭘하고 놀았어요?
  한심이 : 흙장난도 하고 물장난도 하고 …… .
  변호인 : 나이가 몇 살이죠?
  한심이 : 아홉 살요.
  변호인 : 정말 아홉 살이예요?
  한심이 : 아, 열두 살이예요.
  변호인 : 좋습니다. 엄마 아버지가 누군지 아십니까?
  한심이 : ( 말없이 고개를 흔든다 )
  변호인 : 학교에 다녔나요?
  한심이 : 그럼요. 선생님들이 공부 잘 한다고 칭찬해줬는 걸요.
  변호인 : 집을 떠나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한심이 : 집을 떠나다뇨? 선생님들은 대문 가까이만 가도 야단을 치는 걸요.
  변호인 : 그럼 언제나 집안에만 있었군요?
  한심이 : ( 고개를 끄덕인다 )
  변호인 : 피고의 심문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피고한테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
가 없습니다. 피고는 자기 이름이 한심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었습
니다. 그래서 피고의 변론을 위해 별도로 자료를 수집하지 않을 수 없었죠.
  피고 한심이의 나이는 아홉 살도 열두 살도 아닌 서른두 살입니다. 그리고 피고가 
집이라고 하는 것은 정박아 수용 시설이죠. 또 피고가 말하는 학교란 그 시설 내에 
있는 특수학교입니다. 피고는 미혼모의 뱃속에서 태어났지요. 그러니 피고는 당연히 
원치않는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피고는 지우려고 먹은 약이 피고를 이 지경으로 만들
었습니다. 피고는 태어나자마자 아동 복지회로 보내졌는데 아이에게 이상이 있음이 
발견된 후 입양될 기회를 잃고 정박아 수용시설로 보내졌습니다. 그때 나이 세 살이
었습니다. 
  그러니까 29년 동안 이 시설에서 보호를 넘어선 감금을 받았던거지요. 피고의 기록
부에는 피고의 지능 지수가 40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세 살 나이의 지능이지요. 세살 
난 아이는 오줌 똥을 완전히 못가려 바지에 그냥 쌀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손에 들
고 있던 컵 같은 것을 잘 깨뜨리지요. 또 숟가락질도 불완전합니다. 게다가 치고 받
고 싸우면서 노는 것이 그들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늘 불안해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
도 없습니다. 그런데 피고는 그 아이보다 덩치는 훨씬 크지만 그 아이 수준밖에 안된
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피고를 서른 두살의 나이로 판단하지 말아주십
시요. 피고는 마음 속에 악이 없는 성인중의 성인입니다. 예비죄는 당치 않습니다.
  죄란 저지르고자 하는 의식이 들어가야 범행이 되는 것이지 자기도 모르게 발생한 
결과를 죄로 삼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피고의 저 천진스런 얼굴보다 그 죄를 논하
고 있는 우리들의 표정이 더 평화롭지 못한 것은 왜일까요?
  그 이상은 얘기하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앉는다. )
  사회자 : 한심이의 재판을 끝으로 오늘의 모든 재판은 끝이 났습니다. 잠시 후, 재 
판장님의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휴정을 하겠습니다. ( 재판장이 일어서자 모두 일어
나 재판장의 뒤를 따라 퇴정한다. 막이 내려진다. )

  제 2 막
  ( 막이 오르자 정돈된 법정의 모습에 적막이 흐른다. 재판장이 입정한다. )
  사회자 : 대단히 죄송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연됐음을 사과드립니다. 자, 그럼 피
고 깜깜이, 네발로, 막막해, 한심이에 대한 재판장님의 판결문 낭독이 있겠습니다.
  재판장 :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현세와 인연을 끊고 다음 
생은 6도 중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재판받기 위해 이곳 중음천 법정에 오고 있습니
다. 그런데 본인은 여지껏 판결을 잘못 내렸던 것 같습니다. 사물을 볼 수 있고, 마
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고, 소리를 들으며 말을 할 수 있고, 그리고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유리한 신체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의 고마움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서 나쁜 짓을 일삼아 왔습니다. 
  나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앞으로 더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해준 오늘의 특
종 계열 처벌에 관한 재판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이들 피고가 이렇게 불편한 몸이 된 것은 본인의 잘못도 아니고, 부모의 잘못도 아
니며 그렇다고 사회의 잘못도 아닙니다. 이것은 똑같이 평등한 건강을 주지 못한 하
늘님의 실수입니다. 
  물건을 제조하는 공장에서 일부러 불량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듯이 인간도 역시 마
찬가지 겠지요.
  그런데 그 불량품은 폐기 처분을 하지만, 피고들은 인간이기에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들이 그들의 어려운 점들을 도와주면서 용기를 북돋
아 주었어야 하는 건데 그들은 그 반대로 그들을 멸시하고 그들의 모든 권리를 빼앗
아갔습니다. 
  즉 건강인들은 피고들이 죄를 짓도록 방조했던 방조 죄인들입니다.
  그렇다고 피고들을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피고들은 최선을 다하
지 못했다고 하는 잘못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는 그 고통은 너무도 엄청난 것
이기에 보상 받아야 마땅합니다. 
  고로 본 재판장은 중음천법엔 명시된 바가 없지만 유죄도 무죄도 아닌 공죄라는 이
례적인 판결을 내리는 바입니다. ( 재판봉을 두드린다. )
  사회자 : 이것으로 폐정하겠습니다. 
  ( 막이 서서히 내려진다. )

    2. 혼자 부르는 노래
  시라고 하기엔 너무 부끄럽고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을
  외마디 소리를 외치듯이 
  가끔 이렇게 써내곤 합니다.
  정제되지 못한 걸죽한 찌꺼기인채로.

  < 색계 >
     * 인생 *
  타오르듯 붉게 물들었던 단풍들이
  어느덧 낙엽으로 변하여 
  땅위에 소복히 쌓이고 있습니다.

  쉽게 지나가 버리는 계절이 
  안타까웁도록 씁쓸한 인생의 맛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하얀 눈을 기다리는
  철없는 생각들이 점차 시들어집니다.
  그건 세월의 흐름이 빠를수록
  어느샌가 젊음을 보내고
  무기력하게 늙어가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워서 입니다.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을
  명예나 부귀, 권력의 탐욕에 빼앗기지 말고
  언제나 맑게 조용히 우러나오는 샘물처럼
  깨끗하게 진실된 삶을 보내고 싶어집니다.

  님께선 샘물이 되어주십시요.
  전 작은 돌이 되어
  그 속에 영원히 잠겨있고 싶습니다.

     * 정복자의 아픔 *
  하늘에서
  하얀 솜사탕을 선물합니다.
  인심좋게도 펑 펑 펑

  그 솜사탕은
  입속의 달콤함을 녹여냅니다.
  손을 뻗어
  간신히 손끝에 닿은 그 보물은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사라졌습니다.

  헛입맛 다시며
  크림으로 장식된 은세계에
  발을 내려 놓았습니다.
  무중력 상태의 우주인처럼
  둥- 둥- 둥 떠납니다.

  흰 빵가루가 뿌려진 산
  얼음을 띄운 우유같은 강
  눈에 보이는 것 마다
  하늘에서 주신 선물을 휘휘 감고 있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백야를
  빨리 정복하고 싶었습니다.
  광란스런 몸짓으로
  공격하라! 진격하라!
  요란한 말발굽소리로
  온 들판이 유린되어 갑니다.
  계속 진격하라. 공격하라.

  정복자의 광기어린 환희로 
  가슴이 터져옵니다.

  승전의 목소리로 뒤돌아보니
  고요한 은세계는 그대로
  아무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 고독 *
  사람은 고독을 즐기는 동물
  그러나 나에게 고독은
  결코 즐길 수 없는 고문이다.

  혼자가 되면 
  난 두렵고 무서워진다.
  음악이 있는 작은 찻집이 
  나에겐 역시 어색한 장소이다.
  빨간색 원피스가 낭만을 자아내기는 커녕
  불자동차 같은 적신호이다.

  사람들의 음성이
  아스라이 멀게 느껴진다.
  난 그들과 융화될 수 없는
  이방인임을 느낄 땐
  글을 쓴다.

  작은 흰종이 위에
  가늘고 까만 길이 요리조리 새겨져 나간다.
  알맹이 없는 너저분한 넋두리

  요즘 연인들의 몸짓이
  왠지 마음에 안든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갈겨놓은 책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듯이

  문을 쳐다봤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이제는 또 어떤 사람이 들어올까.
  야릇한 그대에 빠져본다.
  둘둘씩 짝지어 들어오는 남자와 여자

  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난 언제나
  춥고 배고픈 고독을 느낀다.

     * 밤 비 *
  어둠이 짙게 깔려왔어요.
  빗소리만이 친구가 되어 주었죠.
  저 빗소리.
  나의 눈물인냥
  잔잔히 흘러내려 가슴을 적셨어요.
  갑자기 님이 견딜 수 없으리만치
  보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님한테 가려면 
  이 빗속을 뚫고 나가야해요.
  하지만 나에겐 
  비를 막아줄 우산이 없어요.
  아니 저 빗속으로 나갈 
  용기가 없어요.
  아니요, 비에 젖은 내 모습을 보고
  님이 나를 싫어하게 될까봐
  두려워요.
  나는 언제나 님에게
  곱게 보이고 싶어요.
  비는 자꾸 세차게만 내렸어요.
  비가 뿌려질 때마다
  그것이 그리움으로 변했죠. 
  그리워지니까 미워지고
  미워지니까 사랑하게 되는
  알 수 없는 마음
  못찾는 그리움은
  허무하고 슬픈 것이지만
  찾는 그리움은 
  기다림처럼 기쁘다는 것을 알았을 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어요.
  레인코트만을 걸치고
  빗속의 요정이 되었죠.
  불꺼진 님의 창을 두드렸어요.
  불이 켜졌어요.
  유리창에 비쳐진 초라하디 초라한 
  비에 젖은 날짐승
  불을 켜지 말아요. 불을 켜지 말아요.
  내 모습에 질려
  어둠속으로 도망쳤어요.
  어둠이 나를 감춰줬어요.
  가려줬어요.
  감싸줬어요.
  아, 이 비가 멈추기를 기도하면서
  단장하며 기다릴 것을 그랬나봐요.

     * 빈 잔의 축배 *
  빨, 주, 노, 초, 파, 남, 보.
  고운 일곱빛 무지개
  깨끗한 유리 글라스를 보면서
  그 안에 담을 빛깔을 생각했다.

  주홍빛을 담았다.
  늘 먹는 쥬스 때문이었다.
  하지만 담고나니 맘에 안들었다.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잔을 내려 놓으니
  주홍빛 선이 가운데 있었다.

  그 속에 
  미워하는 증오하는 얼굴이 떠 있었다.
  괴로웠다.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확대되어
  잔을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나머지도 입속에 쏟아 버렸다.
  드디어 빈 잔이 된 것이다.
  이 빈 잔 속에는
  미움, 질투, 시기, 모략
  이런 더러운 것은 담지 않으리
  자, 축배를 들자
  빈잔의 축배를

     * 바닷새 *
  동해 바다의 파도는
  나를 희롱하듯
  손을 잡아줄 듯이 다가 섰다가는
  화난 사람처럼 쑥 달아난다.
  붙잡아도 떠나고
  뿌리쳐도 돌아오는 
  이기주의자

  조개줍는 아이는 태평스럽고
  모래밭 뛰는 처녀는 싱그러운데
  나는 바다 바람에
  깃발처럼 나부끼누나.
  내 목소리 파음에 묻히고
  내몸은 파분에 휩싸여 곡예질한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나의 존재는
  희미해져가는 의식
  부풀어지는 감상으로
  파드득 파드득 날개짓하며
  시퍼런 바다 위로 떠오른다.
  한마리 바닷새가 되어,

     * 그날은 웬지 *
  그날은 웬지
  가방을 챙겨 어깨에 둘러메고
  아는 이없는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날은 웬지
  괜스리 슬퍼져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내어 울고 싶었습니다.

  그날은 웬지
  미지인을 만나
  서로 다른 인생에 대한
  긴 애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날은 웬지 우울했지만
  그날은 웬지 대인인 기분이었습니다.

     * 후회하기 위해서 *
  매섭도록 차거운 바람이 볼을 스치면
  웬지 모든 것이 후회스러워집니다.
  뭔가 잃어버린 것 같고
  뭔가에 손해본 것 같고
  아무튼 허전합니다.

  따뜻했던 봄볕에 생명을 키우지 못했고
  이글거리는 태양을 즐기지 않았으며
  낙엽지는 가을의 우수를 느껴보지도 못한 채
  겨울의 하얀 소복을 입게 된 것에 대한
  회한에서 일겁니다.

  무엇때문에
  무엇에 이끌려
  이런 고귀한 선물을 외면해 버렸을까요.
  생활이라는 건
  너무도 허무 맹랑한 요술장이인 것 같습니다.
  기대하고 속고 또 기대하고 속고
  번번이 속아도
  여전히 기대하는 것은
  후회하기 위해서인가 봅니다.

  알몸을 드러낸 고목들이 슬퍼 보이면
  웬지 모든 것이 후회스러워 집니다.
  뭔가 놓친 것 같고
  뭔가에 유린당한 것 같고
  아무튼 쓸쓸합니다.

  아지랑이처럼 나타난 당신과 새싹을 틔우지 못했고
  뜨거운 밀어에도 황홀해하지 않았으며
  사랑의 고뇌를 안타까와 하지도 못한 채
  찬바람처럼 냉정하게 스쳐가버린 것에 대한
  회한에서 일겁니다.

  무엇으로 인해
  무엇에 홀려
  이런 소중한 인연을 외면해 버렸을까요.
  산다는 건
  너무도 속물적인 장사꾼의 속임수인 것 같습니다.
  희망하고 실망하고 또 희망하고 실망하고
  번번이 실망해도
  여전히 희망을 갖는 것은
  후회하기 위해서인가 봅니다.

  < 속계 >
     * 엄마에게 내 젊음을 나누어 줄 수 있게 해주소서 >
  엄마의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린 것을
  처음 보았을 때
  내 머리에도 차거운 얼음눈이
  내리고 있음을 느꼈고
  엄마의 이마에
  강줄기가 만들어진 것을
  처음 보았을 때
  내 이마에도 
  보이지 않는 주름이 
  깊숙이 패어지고 있음을 느꼈고
  엄마의 눈에
  볼록렌즈가 얹혀져 있음을
  처음 보았을 때
  내 눈에도
  희미한 눈물안경이
  씌워져 있음을 느꼈고
  엄마의 이가
  엄마의 잇몸을 떠났음을
  처음 보았을 때
  나의 이도
  고무처럼 물렁해짐을 느꼈고
  엄마의 귀에 
  내 속삭임이 아득해져가고 있음을
  처음 알았을 때
  내 귀엔
  나의 속삭임이 큰 소리로
  고동치고 있음을 느꼈고
  엄마의 손이
  많이 거칠어지고 있음을
  처음 보았을 때
  내 손도
  눈에 보이게 짝째기가
  되어가고 있음을 알았고
  엄마의 몸에서
  점점 윤기가 달아나고 있음을
  처음 보았을 때
  내 몸은 
  보기 흉하게 오그라져가고 있음을
  알았어요.
  엄마!
  우리 엄마!
  작은 목소리
  아주 작은 몸
  아주 아주 작은 손
  엄마의 크지 않은 모든 것들이
  나를 감싸며 위로할 때
  나는 가슴에 날개를 달고
  달려가 안기며
  자그마한 엄마의 모든 것들이
  아주 포근함을 느끼며
  아주 아주 
  거대해 보였어요.
  나는 엄마의 눈에서 
  눈물을 마르게 했고
  까만 머리는 하얗게
  아니, 
  엄마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갔어요.
  모든 것을
  있는 힘을 다해
  엄마를 부르며 
  외치겠어요.
  엄마에게 내 젊음을 
  나누어줄 수 있게 해주소서.

     * 나는 무엇일까? *
  나는 무엇일까?
  사람?
  그래, 사람
  사랑하는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눈
  자상하신 아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내 의사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입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머리
  그리구 응- 그리구
  손에 풍선을 쥐고 달릴수야 없지만
  그래도 제 위치에 
  얌전히 놓여있는
  팔과 다리가 있으니
  사람은 분명 사람이지
  그럼, 나는 누구일까?
  여자?
  아냐, 그냥 사람.
  그럼 나는 무엇이 될까?
  있어서는 안될 사람
  있어서도 안될 사람
  있어도 좋은 사람
  있어야할 사람.
  그래, 꼭 있어야 할 사람

     * 동정은 싫어요 사랑해 주세요 *
  나를 사랑한다구요?
  고마워요.
  하지만 
  사랑이 아녜요. 그건
  동정일거예요.
  남들이 그러더군요.
  나에 대한 사랑은 동정이라구
  동정, 우정, 애정.
  동정과 우정은 같아질 수 있고
  우정과 애정도 같아질 수 있지만
  동정과 애정이 같아질 순 없어요.

  동정은 애정으로 변할 수도 있다구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도 있더군요.
  하지만
  동정에서 시작된 애정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거예요.
  아니.
  사랑이 될 수가 없어요.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나는 동정이란 단어를 제일 싫어해요.
  동정은 싫어요.
  사랑해 주세요.

     * 행복한 사람 *
  눈, 귀와 입, 머리, 팔과 다리
  이들 중의 하나를 가질 수 없는
  운명이라면
  나는 무엇을 내주어야 하나.
  파란 하늘도
  사랑하는 이의 모습도
  볼 수 없는
  칠흑과 같은 어두움 뿐일 눈을.
  아름다운 새 소리도
  즐거운 노래도
  듣고 부를 수 없는 
  진공과 같은 적막뿐일 귀와 입을.
  사랑도 미움도
  자기의 존재조차도
  느낄 수 없는 
  뜬구름처럼 덧없을 머리를
  푸른 들판을 마구 뛰어다닐 수도
  밀려오는 하얀 파도속에 묻힐 수도 없는
  바람이 불어야 흔들리는
  식물과 같을 팔과 다리를
  과연 어떤 것을 내주어야 하나.
  어떤 것을 내주어야
  살아갈 수 있을까?
  나를 대신해서
  보고, 듣고, 말하고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바람이 되어줄 당신이
  내 손과 발이
  되어 줄 수는 있겠지
  그래, 그래
  그러면 나는 행복한 사람
  바람아. 불어라
  아주 힘차게

     * 그대 나의 속살이라 부르는 것은 *
  이 한밤 진실을 안은 밤 입니다.
  그대 어여쁨은 어여쁨만이 아니라
  그대 겸손한 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걸어왔던 곧은 길 뿐만이 아니라
  서툴게 남모르게 넘어질 때마다
  속으로 눈물로 일어서던 모습이었고
  벗겨지고 추한 그대 살이나마 그 속살을 내가 알기 때문이고
  그대 서러운 속살을 내가 하나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느낌은 항상 바르고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벗겨진 인생 앞에 춥디 추워 몸을 사릴망정
  벗은 속살 그 이상이 아니되기에
  내가 사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제 나의 진실이라 이름지어도 될런지요.
  내가 그대의 속살을 느끼려했던 것은
  그대의 속살이 내 살이기에
  내가 사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번연히 그리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나의 잘남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인생의 그 끈적한 소리를 알아 들었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사랑한다 말씀드릴 때
  그 말이 가장 깊은 속살의 소리였기에 그리 말씀드렸다면
  그대 나만큼이나 내 살 앞에서 벗을 수 있을런지요.

  그대 우리네 서러운 살 앞에
  입었던 속옷이 벗어지는 겸손과 사랑의 부끄러움을
  들을 수 있을런지요.

  그대 오죽 걷고 싶다 말하고 싶어했습니까.
  그대 오죽 사랑한다 말하고 싶어했습니까.
  그대 나의 속살이라 부르는 것은
  그대가 단지 어미의 젖내음을 준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단지 정숙하게 앉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 성스런 온몸이
  그대 서있는 자랑스럼이
  그대의 속살 순결한 진실이었기에
  그대 나의 속살이라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면
  그리 말씀 올려도 될런지요.

  그대의 속살은 꽃이 아닙니다.
  꽃은 한해로 피면 그만이지만
  그대는 꽃보다 더 아름답기에 더 영원하시기에
  그대 젖내음에 아이처럼 잠들기를 원하며
  그대 마음 가장 깊은 속살 안에
  그대의 발이 되고저 손이 되고저 하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눈물과 내 눈물을 하나로 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한밤 진실이 속살을 건드립니다.

  < 무색계 >
     * 시가 *
  봄, 
  너 언제 왔니?
  난 니가 영영 떠나버렸는 줄 알았어
  이렇게 돌아올 걸
  왜 그다지도 내 마음을 시리게 만들었니
  얼마나 야속했는지 몰라
  얼마나 가슴 태웠는지 몰라.

  꽃,
  넌 언제 봐도 이쁘다.
  난 니가 진짜 부러워
  어떻게 그처럼 순수할 수가 있지
  왜 나는 아름다울 수 없는 걸까
  정말로 깨끗해지고 싶어
  정말로 사랑하고 싶어.

  꿈,
  넌 항상 밝구나
  난 니가 내 곁에만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웃어 줄꺼면서
  왜 심술을 부리니
  너무나 반가워 와줘서
  너무나 고마워 어서 와

     * 부부 *
  땅, 언덕, 산의 높이로 깊게
  시내, 강, 바다의 깊이도 깊게
  별, 달, 태양의 밝기로 밝게
  서로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비, 바람, 천둥 막아내며
  다람쥐, 고양이, 강아지를
  토끼, 호랑이, 사자로
  예쁘고 씩씩하게 키우면서

  꿈, 사랑, 행복의 꽃잎 세례 속에
  학, 사슴, 거북이처럼 오래 오래
  진실, 믿음, 봉사로
  잡은 손에 힘주어 걸어가는 부부
  - 나의 친구 연순이의 결혼축시
              83. 10.  3. 

     * 한줄기 빛 *
  일출후 계속
  내 눈을 가득 메우는 빛들은
  밝다는 느낌을 갖게 하지 않습니다.

  일몰후에도 
  찬란한 네온사인으로 물드는 세상은
  어둡다는 느낌을 갖게 하지 않습니다.
  난 이렇게
  빛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눈을 떴을 때
  어둠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겁에 질려서
  탈출구를 찾으며 헤맸지만
  사방이 온통 벽이었습니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나에겐
  팔도, 다리도,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건 숨통을 조이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때 한줄기 빛이 느껴졌습니다.
  빛이었습니다. 분명히
  비록 한줄기 빛이었지만
  내 동공을 확대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달려갔습니다. 그 한줄기 빛을 따라
  아- 그 한줄기 빛은
  나의 모든 고뇌를 씻어 주는
  생명의 열쇠였습니다.

     * 님께서는 *
  님께서는
  우리의 무엇 이시오니까.

  님께서는
  왜 그토록 큰 아픔을
  몸소 짊어지셨나이까.

  님께서는
  아마도 석류알 같은 사랑으로
  뼈속 시린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기 위함인가 보옵니다.

  님께서는
  우리의 님이시옵니다.

  - 정립회관 정은배 이사님의 국민훈장 석류장 수상에 올리는 글
                                85.  6.  7.

     * 또다른 이산가족 *
  누구를 찾으세요?
  부모, 형제, 친척,
  아니라구요.
  그럼 누구죠?

  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잃어버렸어요
  언제 잃었는지 기억이 잘 안나요.
  또 어떡하다 잃었는지도 확실힌 모르겠어요
  하지만 너무 절실하기에
  목숨을 걸고 찾고 있지요.
  어디 있는지도
  언제 만날 수 있는지도
  그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예요.
  그것을 찾아나선 후부터
  난 눈물로 세월을 보냈어요.
  기쁨은 슬픔으로
  쾌락은 고통으로
  밝음은 어둠으로
  신은 악마로
  사랑은 동정으로
  모든 것이 탈색해버렸어요.
  그래도 되찾을 수 있을거란 기대를 걸 때는 행복해요.
  그런데 영원히 내 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아차릴 땐
  숨을 쉰다는 것이 무의미해져요.

  당신 뿐만이 아니라
  인간은 모두가 다 이산의 아픔을 갖고 있어요.
  태어남도
  늙음도
  병듦도
  죽음도
  모든 것은 고정되어있지 않고 
  찰라 찰라 변하며 떠나고 있다구요.
  이산 가족 사이의 33년은
  다시는 펴지지 않는 주름을 만들어 주었듯이
  당신이 찾는 그 건강도 이미 쇠약해졌을거예요.
  혼자의 아픔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의 아픔이예요.

     * 나무야 나무야 나의 나무야 *
                              방귀희
  1. 하늘의 새는 날아가고 
     바다의 물고기는 헤엄치며
     어디론가 한없이 가고 있지요
     그런데 땅위의 나무는
     비바람 천둥을 받아도
     언제나 그곳을 떠나지 못해요
     나무야, 나무야 나의 나무야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나무야 나무야 나의 나무야
     너의 푸른 꿈을 펼쳐라

  2.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고
     빗물이 부려야 목 축이며
     태양의 열기도 피하지 못해요
     그러나 깊은 뿌리와
     변하지 않는 푸르름으로
     세상을 깨끗이 하여 주지요.
     나무야 나무야 나의 나무야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나무야 나무야 나의 나무야
     너의 푸른 꿈을 펼쳐라
                
  - 85. 8. 16 일본에서 열린 제 8회 와다보우시 콘서트 출품곡 가사

     * Tree, Tree, My Tree *
                            Gui Hee, Bang
  1. Birds are flying in the sky,
     Fishes are swimming in the sea,
     And they are going somewhere
     But trees cant't depart their places,
     Even though they are attacked with the rain,
     the wind and the thunder.
     Tree, tree, my tree,
     What is your wish?
     Tree, tree, my tree,
     Be ambitious of your greenish dream.

  2. You are trembling by the wind,
     Your thirst is wetted with the raindrops,
     You can't avoid the heat of the sun,
     However, you would give good luster to the world,
     By your deep and strong root,
     And by your evergreen leaves.

    3. 날지 않는 새
  꼭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꼭 없었던 일도 아닙니다.
  허구의 옷을 입혀
  허구이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가장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 침입자 *
  " 왜 그래요? 아저씨. "
  " 빵군가 봐요. "
  " 맙소사, 빨리 오라고 했는데. "
  윤화는 차문을 열고 나가는 이 기사의 뒤통수에 대고 그 큰 눈을 흘겼다. 삼복 더
위의 뙤약볕 아래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바퀴를 갈아 끼우는 사람의 고통을 알 턱없는 
그녀는 뙤약볕에 차를 세웠다고 또 한차레 눈을 흘겼다. 그 때였다.
  " 저 동전 좀 바꿔주세요. "
  무방비한 상태로 습격을 받은 윤화는 어리둥절해 아무런 반응도 없이 재빨리 지갑
에서 십원짜리 동전 두 개를 꺼내 침입자의 손바닥에 얹었다.
  " 감사합니다. "
  침입자는 동전을 받아들고 쏟살같이 전화 박스로 몸을 숨겼다. 윤화는 그제야 되살
아 난 의식으로 중얼거렸다.
  ' 별 미친놈 다 봤네. 아유, 재수없어. '
  " 감사합니다. "
  그 소리와 함께 차안으로 그 침입자의 손이 또 불쑥 들어왔다. 손바닥에는 아까 그 
100원짜리 동전이 쟁반 위의 구슬처럼 빛나고 있었다. 
  "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냥 가져갔지 뭐예요. "
  " 아녜요. 10원짜리가 8개는 안돼요. "
  " 괜찮습니다. "
  " 저도 괜찮아요. "
  " 그러면 제가 너무 죄송하잖아요. 아, 제가 커피를 사죠.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
  " 없어요. 시간. "
  윤화는 쳐다보지도 않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침입자는 계속 추근댔다.
  " 나 나쁜 사람 아녜요. 이름은 민재, 구 민재구 졸업반이예요. "
  윤화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무섭고 두려웠다. 그런데 구사일생으로 이기사
가 들어와 시동을 걸었다. 이기사에 대한 미움은 곧 고마움으로 변했다. 이기사는 침
입자의 동정을 살피며 윤화를 쳐다봤다.
  " 늦었어요. "
  다급해진 침입자는 차에 매달려
  " 이름이 뭐예요? 전화 번호 좀 가르쳐주세요. "
  하며 소리쳤다.
  " 이름은 윤화예요. 전화번호는 263 - 2927이구요. "
  " 고맙습니다. "
  윤화는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이렇게 순순히 불어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침
입자는 더 큰 침입을 할 것 같이 빨리 모면하려고 요구대로 다 들어주고 말았다. 하
지만 윤화는 곧 후회했다.
  ' 어떡하지, 가짜로 말해주는 건데. 에이, 전화 안 할거야. 외우지도 못했을텐데 
뭐 '
  윤화는 곧 잊을 수 있었다. 윤화가 티파니에 도착했을 땐 이미 철근 앞에 술잔이 
놓여 있었다.
  " 벌써 시작이야! "
  " 왜 이렇게 늦게 와? "
  " 재수가 없나봐. 빵구가 났지 뭐야. "
  " 흥, 나하고 똑같군. "
  " 철근씬 뭐가 빵구났는데? "
  " 이 가슴이. "
  " 치! 그러면 그렇지. 날 왜 만나자고 할까 이상하다 했어. "
  단정한 나비 넥타이를 맨 웨이터가 들어왔다.
  " 오셨어요. 한참만에 나오셨군요. "
  " 네, 너무 너무 더워서 만나는 일도 잊었었어요. 스카치 콕으로 주세요. "
  " 네, 안주는 역시 오징어로? "
  " 물론이죠. "
  윤화는 밝에 웃으며 대답했다.
  철근은 담재를 물며 윤화를 빤히 쳐다봤다.
  " 너 같아 봤으면 좋겠다. "
  " 그게 무슨 소리야? "
  " 너 같이 그렇게 걱정이 없어 봤으면 좋겠다구. "
  윤화는 더 활짝 웃으며
  " 걱정이 없는게 바로 내 걱정이야. 근데 정말 오늘 철근씨, 안돼 보인다. 무슨 일
이 있었어? "
  윤화는 짐짓 걱정이 되었다. 명주실처럼 섬세한 여자의 직감이, 아니 재활원의 어
린 시절에 같이 먹고 자고 하며 살았는데 철근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 날개를 잃었어. "
  " 잃을 날개가 또 있었어? "
  윤화는 심각한 철근의 말에 이런 가벼운 농담으로 희석시켰다. 늘 그랬듯이.
  " 그나마 잃은 거지. "
  불길한 예감에 윤화는 다그치듯 물었다.
  "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말해봐. "
  철근은 단숨에 잔을 비우고 독액이 퍼져 나가는 것처럼 몸을 움추렸다. 그 독액은 
슬슬 불게 하는 마취제로 변했다.
  " 인사 이동이 있었어. 내 날개가 되어주시던 분이 밀려났어. "
  " 새로 되신 분이 더 힘찬 날개를 달아줄지 알어. "
  " 모르는 소리, 검은 것은 흰색으로 흰 것은 검은 색으로 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
어. "
  " 맙소사, 지금이 이조시대야. "
  " 원시시대야. 더 미개해. 더 무식해. 내가 만든 기획안이 휴지통으로 들어갔어. 
그리곤 나한테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 거야. "
  " 그럼 내달라고 얘길하면 되잖아. "
  " 그랬지. "
  " 그런데? "
  " 건방지데, 수석으로 입사한 사람이라 그런지 몹시 건방지데. "
  " 철근 씨가 설득력있게 얘기를 못했나 보지? "
  " 인생은 문학 작품이 아냐. 노우면 노우, 예스면 예스지 어떤 수식어도 필요없다
구. "
  철근은 긴 한숨과 함께 폭탄을 터트렸다.
  " 사표 낼거야. "
  폭탄 파편 조각이 윤화의 가슴에 와르르 꽂혔다.
  "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그 회사 철근 씨가 어떻게 들어갔는지 벌써 잊었
어. 합격, 불합격. 다시 합격, 합격과 불합격의 곡예짓을 하다가 겨우 붙은 거였어. 
또 이 문, 저 문, 문마다 다 두들겼었지만 아무도 철근씨한텐 문을 열어주지 않았었
지. 그런데 또 두들릴 문이 남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것을 또 반복할 자신있어? "
  철근은 대답 대신 또 한 잔의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 난 사회 경험이 없는 사람이니까. 철근 씨한테 충고할 자격은 없지만, 철근씨가 
여기서 그만 두면 그래, 너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하고 등 두들겨 주지 않아, 
오히려 비웃는다구. 그래 넌 그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이였어 하구 말야. 점수는 나중
에 내는거야. 왜, 지금부터 그래 유들유들할 정도로 참아봐. "
  윤화의 말은 언제나 철근의 정신을 충전시켜 주었다.
  " 진짜로 참는게 이기는 걸까? "
  윤화의 긴장했던 가슴도 풀려
  " 그럼 자, 그런 의미에서 부라보. "
  윤화는 술잔을 철근 앞에 내민다. 배꽃처럼 환한 미소로, 철근은 그 미소를 닮아ㅗ
려는 듯 조심스럽게 웃어보이며 술잔을 부딪친다.

     * 신세계 *
  윤화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이알을 돌렸다.
  " 여보세요. 김철근씨 좀 바꿔주세요. "
  " 기다리세요. "
  여자의 목소리는 로보트에서 나오는 파열음 같았다.
  " 전화 바꿨습니다. "
  " 나야 부러진데 없나 싶어서. "
  " 부러지다니? "
  " 어제 그렇게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셨는데 괜찮았어? " 
  " 지금 근무중이야. "
  " 알았어, 무사한 것 알았으니까 내 용건은 끝났어. 끊을께. "
  철근이 전화기를 놓는 소리가 마음을 끊는 소리 같이 들렸다. 윤화는 한참이나 수
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러다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 이 못된 이기주의자, 그러니까 회사에서도 욕을 먹지, 자기 잘못하는 생각은 하
지 않고, 남 핑계만 대는 쪼다. 1등만 하면 최고야, 인간이 먼저 돼야지, 싸다 싸. 
실컷 시달려라. 혼이 쑥 빠지도록. "
  인상을 북북 쓰며 한바탕 악다구를 퍼분 윤화는 수화기를 메치듯 내려놓았다.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 여보세요. "
  윤화는 악을 쓰듯이 말했다.
  " 아, 윤화 씨군요? "
  " 누누구세요? "
  " 구민재 입니다. "
  " 구민재요? 전화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
  " 10원짜리 동전 두 개. "
  10원짜리 동전이라는 말에 어제의 그 침입자 사건이 생각났다.
  " 아- 네에- "
  " 감사합니다. "
  " 뭐가요? "
  " 내 친구하고 내길했는데 내가 이겼거든요. "
  " 근데 왜 나한테 고마워요? "
  " 윤화 씨가 정답을 가르쳐 주셨어요. "
  " 제가요? 무슨 정답을요? "
  민재는 알 수 없는 얘기로 윤화의 호기심에 불을 붙였다. 
  " 그건 만나서 얘기해요. 오늘은 어떠세요? 시간이. "
  " 없어요.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 "
  윤화는 아까 철근한테 했던 화풀이를 민재에게까지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전화를 
끊는 것이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벨이 또 울렸다.
  " 여보세요. "
  " 미안해요. 또 걸었어요. 하지만 너무 오해를 한 것 같아서 변명이라도 하고 싶군
요.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너무 보수적인 것 같습니다. "
  윤화는 지성인이 아닌 행동을 꾸짖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 죄송해요. 차 한잔을 사주셔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면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
어요. 하지만 너무 번거롭군요. "
  " 내가 윤화 씨 편한 쪽으로 갈께요. "
  " 좋아요. "
  " 고맙습니다. "
  윤화는 전에 없이 착찹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빨리 매듭을 짓고 벗어나고 싶었다. 
  ' 내가 먼저 가서 앉아 있을까? 아냐, 내가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얼른 보여주는 
게 빠르지. 아냐, 어느 자리인지 몰라 기웃거리고 싶지 않아. 헤어질 때가 좋겠어. '
  머리 속에 혼란이 일어났다. 공연한 일로 머리 아파하는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
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부담감이 짓눌렀다. 그래서 윤화는 일찍 집을 나섰다.
  혼자 듣는 티파니의 음악은 감미로웠다. 윤화는 구민재란 이름이 머리속에 확 들어
가 있었다. 이름을 쉽게 기억하게 해주는 기술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런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 죄송합니다.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
  침입자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윤화는 읽던 척하던 책을 덮으며
  " 아녜요. 여기서 친구하고 약속이 있었어요. "
  하고 내숭을 떨었다.
  " 아, 그러세요. "
  " 고맙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
  " 네, 그래요. 고마워하셔야할 것 같아요. 빨리 차 시켜주세요. "
  " 아 그러죠, 뭘로 하시겠어요? "
  " 커피 사주시겠다고 했잖아요. "
  민재는 겸연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 아, 그랬던가요? "
  하고 손을 번쩍 들어올려 웨이터를 불렀다. 철근과 만날 때는 윤화가 항상
  ' 여기 좀 보세요. ' 하고 외쳤었는데 민재의 모습이 듬직해 보였다.
  웨이터가 왔다. 
  " 여기 커피 둘. "
  웨이터가 허리를 굽히고는 뒷걸음질쳐 나갔다.
  민재는 윤화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윤화가 부끄러워 불안해할 만큼.
  " 제가 너무 무례했죠? "
  " 네, 앞으론 절대 동전 같은 건 안바꿔주기로 결심했어요. "
  민재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다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 그날은 나에겐 특별한 날이었어요. "
  윤화는 이유를 묻는 대신에 민재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조금 아까의 민재의 
눈길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 아주 기쁜 날이였죠. "
  민재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가 송글송글 나오는 입으로, 
  " 3차 합격을 집에 알리려고 전화통을 들었는데, 주머니 속에 백원짜기 동전만 있
잖아요. 그래서 무조건 밖으로 뛰어나왔는데 윤화씨가 차에 있었어요. 천사 같은 모
습으로. " 하고 말했다.
  천사란 말이 윤화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율시켰다.
  " 나한테 내려온 천사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망설이지도 않았고 또 그런 행동이 
우스꽝스럽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 
  " 다행이군요. 나의 동전 두 개가 그렇게 큰 기쁨을 전하는 곳에 쓰였다니, 그런데 
어떡하죠. 난 천사가 아니예요. "
  " 무슨 말씀을요. 천사예요. 지금 이렇게 제 앞에 앉아 있는 윤화씨는 더욱 아름답
군요. "
  윤화는 철근과의 만남의 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항상 불만스런 얼굴로 불평만을 
늘어 놓으며 윤화의 위로에 기대던 철근이였다. 윤화는 마치 솜사탕에 묻힌 기분이었
다. 민재는 윤화의 엉키고 엉킨 마음을 용케도 풀어내는 마술사였다.
  윤화는 어느덧 날카로운 발톱을 넣고 윤화 특유의 티없는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 어머 저런, 그럼 오늘 커피값은 버셨네요? "
  " 네, 그 친군 보나마나 가짜 전화 번호일텐데 헛수고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하지
만 난 확신이 있었어요. 천사는 거짓말을 못하니까요. "
  " 아뇨, 머리가 나쁜 탓이예요. 거짓말도 머리가 좋아야 하는 거라구요. "
  윤화와 민재는 서로를 쳐다보며 또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을 잘라낸 것은 ' 딱 ' 
하는 소리였다. 윤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자 앞에서 방구를 뀐 것 같은, 자기 몸에
서 나온 소리마냥 수치스러웠다. 
  민재가 윤화의 표정을 놓칠 리가 없었다. 민재는 허리를 굽혀 윤화의 목발을 집어 
올렸다. ' 이 다리가 네 다리냐? ' 하는 신령님 처럼, 윤화도 나무꾼처럼 솔직할 수 
밖에 없었다.
  " 고마워요. "
  " 윤화씨, 신경쓰지 마세요. 그때 차 안에 있는 이 목발 보았어요. '
  " 그래요. "
  " 윤화씬 그래서 내가 만나자는 말에 그렇게 거절을 하셨던 거죠? "
  민재는 윤화의 겹겹이 입은 두꺼운 옷을 완전히 벗겨 버렸다.
  윤화는 당황하며
  " 아아니예요. 그렇진 않아요. 그런 생각이었으면 여기 나오지도 않았어요. 자 이
제 커피 다 마셨으니까 됐죠? "
  이번엔 민재가 당황해하며 더듬듯 말했다.
  " 내 질문이…… ? "
  윤화는 무우를 자르듯이
  " 아뇨 " 하고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우고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민재는 윤화가 넘어지면 받치려는 듯 뒤를 따랐다. 윤화가 나타나자 마자 차는 쏟
살같이 윤화 앞에 멈췄다. 윤화도 급히 차에 올랐다. 민재는 손이 아닌 몸의 침입자
가 되었다. 윤화 얼굴 가까이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었다.
  " 연락 또 하겠습니다. "
  윤화의 대답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문을 닫아주며 부드러운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아주 오래된 연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듯이.
  달리는 차속에서 윤화는 민재의 말고 행동을 리뷰시켜 천천히 필름을 돌려갔다. 확
실히 멋있는 남자였다. ' 차 안에서도 보았지요. ' ' 그럼 내가 정상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접근을 해왔단 말인가. ' 
  윤화는 그 말에 안심이 되었다. 집에 들어오자 윤화의 호기심은 자꾸 자꾸 불어났
다. 
  ' 고향은 충남 예산, 나이는 28살, 학교는 S대 법대, 3차 사법고시 패스 '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부모는? 형제는?
  그때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렸다. 윤화는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 윤화씨? "
  민재였다. 너무도 반가운 목소리였다.
  " 어머, 웬일이세요? "
  " 잘 들어가셨나 걱정이 되서요. 너무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윤화씨가 안받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고마워요. "
  " 어디세요? "
  " 집입니다. "
  " 그럼 민재씨도 잘 들어가셨군요? "
  " 네, 덕분에요. 오늘 고마웠어요. 윤화 씨한테 아직 못다한 얘기가 많아요. 하지
만 알고 나면 실망할 꺼예요. "
  " 무슨 얘긴데요? "
  " 윤화 씨한테 우리 집안 얘기를 안 해줬잖아요. "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 하고 있던 윤화는 뭐가 있구나 하는 직감에 더 한층 궁금해
졌다. 
  " 집에 무슨? "
  " 얘기가 길어요. 하지만 윤화 씨가 원한다면 "
  윤화와 민재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좋은 쪽으로 멋있는 쪽으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 이불 잘 덮고 잘 자요. 좋은 꿈 꾸구요. "
  민재의 마지막 인사는 윤화에게 민재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했다.
  수화기를 잡은 손이 저리도록 통화를 했지만 아쉬운 여운이 남았다.

     * 갈등 *
  윤화는 하루를 완전히 민재 생각으로 보냈다. 이렇게 빨리 한 남자의 마음 속에 휘
말리게 될 줄 윤화로서도 알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 다닐 때 가끔 말 붙여 오는 남학생에게 그 다음 말을 못하게 할 정도의 윤화
였건만 민재는 용케도 비집고 들어갔다.
  " 야, 요즘 너 만나기 힘들다. 만나자는데 왠 사설이 그렇게 길어? "
  철근과 마주 앉은 윤화는 철근의 그런 말이 짜증스러웠다.
  " 용건이 뭐야? "
  " 어, 점점. 우리가 언제 용건으로 만났니 " 
  " 그럼 뭐야, 얼굴빛이 좋은 걸 보니 정부장한테 깨진 것 같지도 않고 뭐 좋은 일
이 있나 보지? "
  " 니 충고가 맞았어. 시간이 흐르다 보니까 그게 그거야. 내가 면역이 돼 버렸나봐 
"
  " 슬픈 일이군 "
  " 그래 정말 슬픈 일이야. 하지만 그것이 편한 방편이란 걸 알았어. 목이 터져라 
외치고 덤벼봤자 상처는 나한테만 생기더라 "
  " 포기야? 해탈이야? "
  " 오늘 왜 그래? 정말 내 편이 돼주지 않을 꺼야? 칭찬받고 싶었는데 "
  " 그래 칭찬해 줄께 철근씨 아주 장해 훌륭해. "
  " 근데 너야말로 좋아보인다. 옷도 그렇고 머리 모양도 달라진 것 같은데 스트레스 
해소 요법치곤 꽤 괜찮다 "
  철근은 윤화의 모습을 두루두루 살피면서 오래간만에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러나 윤
화에게는 철근과의 이런 시간이 무료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선제 공격을 했다. 
  " 나 결혼해 "
  윤화가 쏜 대포는 철근을 그 자리에서 고꾸라트렸다.
  " 뭐라구? "
  " 결혼한다구 "
  너무도 태연자약하게 두번 씩이나 똑떨어지게 말하는 윤화가 창녀같이 느껴졌다. 
철근은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 어떤 자식이야? "
  " 자식이라니? "
  철근은 더 큰 소리로 되물었다.
  " 어떤 자식이냐구? "
  윤화는 찔끔하여
  " 이번에 사시 패스했어 "
  " 큰 고기를 낚았군. 이름은? "
  " 구민재 "
  " 학교는? "
  " S대 법대 "
  " 제법이군 "
  " 그렇게 불손하게 얘기하지마. 기분나뻐 "
  "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더니 "
  철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 말에 윤화는 철근이가 비로소 남자로 느껴졌다. 
  ' 닭, 닭, 내가 닭? '
  윤화는 철근의 얼굴이 자꾸 밟혔다. 상상밖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윤화의 마음 속
은 온통 민재로 꽉 차 있었다. 
  윤화는 부모님께 민재 얘기를 해야 하는 일이 또 가슴을 짓눌렀다. 그러나 더 미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윤화가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데 거실에서 박여사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 아유 글쎄 이제 우리 딸 없어요. 그때도 얘기했는데 또 왜 그럴까? 전화 끊습니
다 "
  그 말을 들은 윤화는 계단에 우뚝 서서 박여사를 향하여 소리쳤다. 
  " 이제 우리 딸 없어요? "
  박여사는 큰 일을 들킨 듯이 화들짝 놀라 일어서며 윤화를 올려다 봤다.
  " 너 거기 있었니? "
  " 미안해요. 심장약 갖다 드려요? "
  " 윤화야, 하도 귀찮게 굴어서 "
  " 귀찮다고 존재까지 부정할 수 있어요? 난 이 집 딸 아녜요? "
  " 윤화야! "
  " 앞으론 없다고 하시지 말구요. 막내 딸까지 다 결혼했다고 얘기하세요. 아셨죠? 
"
  " 사과하구려. 당신이 잘못한 것 같소. "
  부친 강교수가 이 사건을 해결하려는 듯 나왔다.
  " 그리고 윤화야. 너도 너무 예민한 것 같구나. 엄마 마음을 헤아려드릴 수 있잖니 
"
  " 그래서 그 방안을 말씀해 드린 거예요. 결혼했다고 하라고 말예요. "
  " 그런 거짓말까지 할 필요가 "
  " 진짜 하면 되잖아요 "
  " 윤화야! "
  강교수도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렀다.
  " 아빠 장난하고 있는 거 아녜요. 저 지금, 정말 결혼할 꺼예요. 아빠! "
  강교수와 박여사는 거의 혼이 나간 사람처럼 윤화 앞으로 다가섰다. 박여사가 물었
다. 
  " 누구랑? 철근이? "
  " 아녜요. 더 근사한 사람예요. 목발쟁이가 아니라구요 "
  윤화는 아주 자랑스럽게 강교수와 박여사에게 민재에 대한 얘기를 늘어 놓았다. 박
여사는 확인하고 싶어 다시 물었다. 
  " 그 민재란 사람도 너와 결혼하기를 원한다 이거지? "
  " 네, 엄마. 결혼식만 남았어요. "
  박여사는 윤화의 말에 반가움보다는 얼떨떨한 두려움과 걱정의 빛이 역력했다. 그
러나 강교수는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 고마운 일이구나. 윤화가 좋아하게 된 사람이라면 우리 마음에도 들께다. "
  윤화는 생기가 나서 종알거렸다.
  " 그럼요. 아빠, 그 사람은 아빠가 좋아하는 학구파예요. 그리고 엄마, 형부들 수
준에 미달되지도 않아요. "
  윤화는 박여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여사의 반응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는데 전
화벨이 울렸다. 
  " 오, 철근이, 그래 있어. 윤화 바꿀께 "
  윤화는 철근의 출현이 몹시 귀찮았다. 그러니 목소리가 부드러울 리가 없었다. 
  " 무슨 일이야? "
  " 윤화야, 어머니가 옆에 계시니까 얘기할께. 놀라지 말고 잘 들어. " 
  " 뭘 말야? "
  심각한 철근의 서두가 더욱 짜증스러웠다.
  " 이번 사법고시 합격자 명단엔 구민재라는 이름이 없어. 그 비슷한 이름도 "
  "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군. 지금 뭐하자는 거야? "
  윤화는 수화기를 내동댕이치고 자기 방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
음 뿐 전혀 움직여지질 않았다. 윤화의 힘없는 다리는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 윤화
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 윤화야, 무슨 일이냐. 왜 그래 윤화야,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구. "
  윤화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민재의 전화도 
시큰둥하게 받았다. 
  "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퍼? "
  " 네, 좀 "
  " 저런 감기들었구나.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잘 때는 이불 잘 덮고 자라고 했
잖아. "
  " …… "
  " 듣고 있어? "
  " 네에 "
  " 윤화 옆에서 내가 간호해줬으면 좋겠다. 지금 갈까? "
  " 아- 안돼요. "
  " 왜 그래? 오늘 "
  " 피곤해요. 잠이 오려고 해요. 자야겠어요. "
  민재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윤화는 눈을 감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하셨지요. 사람이 성을 바꿔 산다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것이라구요. 마지막 가는 길까지 숨길 수가 없다구 "
  민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윤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민재에게 새로운 상
처를 줄까봐서, 민재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어머니는 날 낳으시고 바로 돌아가셨죠. 남자 형제 뿐인 우리 집안에선 나를 키
울 사람이 없었대요. 그래서 아들이 없었던 지금의 우리 집으로 내가 양자를 갔지요. 
그땐 한동네에 살았는데 어머니께선 불안하다고 아주 멀리 이사를 하셨다고 하더군
요. 난 아무것도 모르고 아주 행복하게 살았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나에게 각별히 
잘 해주셨거든요. 아버지의 말이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핏줄이 뭔지 친아
버지가 어떤 분인가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난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
아버지를 찾아 나섰지요. 친아버지는 아주 근사한 분이 되어 계시더군요. 형들도 모
두 훌륭한 모습이였구요. 난 가난한 부모님 밑에서 그동한 고생하며 공부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어요.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나 하나만을 위해 희생하시던 그분들의 은
혜를 배반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어머님 모시고 동생들과 살고 있어요. 하지만 이
젠 고생 다 끝났어요 "
  윤화는 민재가 너무 커다랗게 보였다. 
  당장이라도 편하게 살 수 있는데 키워준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그 의리가 너무 믿
음직스러웠다. 하느님 만큼이나.
  그런 민재를 의심한다는 것은 죄악이었다. 윤화는 철근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 난 뿌리가 없이 살아온 사람이예요.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이런 얘긴 하지 않
았는데 이상하군요. 윤화 씨 앞에선 숨길 수가 없어요. 윤화 씨는 백설같은 천사니까
요. 이게 전부예요. 윤화 씨가 뿌리없는 자식이라고 싫다고 하면 난 또 거리를 헤매
며 방황하게 되겠지요 "
  윤화는 황급히 말했다.
  " 그렇지 않아요. 민재 씨, 그렇지 않아요. "
  깔끔한 남학생에게 정이 가지 않았던 것은 그가 너무 단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민재의 단점은 윤화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윤화의 눈에 맺힌 이슬이 이미 민재에 대한 이해를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민재는 
윤화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손을 윤화의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그것은 
부드러운 따뜻함이 아니라 딱딱한 차거움이었다. 그것은 윤화의 단점이었다. 
  윤화의 눈에 맺힌 이슬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와 함께 민재는 침입자를 너머 
정복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윤화는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 민재 씨가 가짜? 그럴 수는 없어. 아니 그래선 안돼 '
  윤화는 철근의 말을 잊기로 했다.
  윤화가 이런 홍역을 앓고 있던 그날 밤 철근은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 바보 같은 계집애. 바보 같은 계집애. '
  철근은 윤화 때문에 실성한 사람처럼 정신이 흔들렸다. 회사에서 장애 때문에 겪어
야 했던 아픔은 경쟁 사회 속에서의 약육강식이었지만 순수한 사랑에서까지 제물이 
돼야 하는 것이 철근의 뜨거운 가슴을 분노심에 들끓게 했다. 
  " 손님 놀다가세요 "
  철근의 팔짱을 낀 것은 여자였다. 장애자라고 거절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가장 인간
다움이 있는 파라다이스는 바로 이 거리의 여자들 세계였다.
  철근은 온몸 가득 퍼진 알콜 기운이 야릇한 복수심을 일으켰다. 
  " 제 이름은 옥이예요. 구슬 옥자, 옥이요. "
  여자는 브리핑을 하듯 자기 소개부터 했다.
  " 그 밖에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
  철근이는 여자를 째려보며 물었다. 
  " 넌 나한테 궁금한 것이 없니? "
  " 궁금한거요? "
  " 그래, 알고 싶은 거 "
  " 우린 손님에 대해서 질문할 권리가 없어요. 가르쳐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죠. "
  " 그거 한번 좋은 규율이구나 "
  " 하지만 난 다 알아요. 손님은 공부를 많이 했을꺼구. 좋은 직장에 다니고 계실 
거예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인텔리지요. "
  " 왜 그렇게 생각하지? "
  " 또또또 하면 이 골통 컴퓨터에 쫘악 나타난다구요. "
  혀 꼬부라진 소리를 지껄이는 여자의 말에 철근은 웃음이 났다. 
  " 그럼 내가 이바지를 벗으면 무엇이 나타날지도 알겠구나? "
  여자는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 뭐가 나타나다니요? 파충류 꼬리라도 나타난단 말인가요? "
  철근은 큰 소리로 웃어제켰다. 철근은 그놈의 손에 점령되어가는 윤화의 얼굴이 떠
올랐다. 윤화가 당한 만큼 이 여자에게 복수를 해야겠다는, 윤화가 유린당했듯이 이 
여자도 똑같이 짓밟아야 한다는 분노가 솟구쳤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 아악, - 아파요. 아파요 "
  아프다는 여자의 말에 철근은 더욱 광기에 찬 정복자가 되었다.
  " 아야, 아야, 무슨 다리가 이렇게 쇠뭉치예요 "

     * 믿음 *
  윤화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민재를 만나러 갔다. 
  " 민재 씨, 언제 연수 들어간다고 했죠? "
  " 아참, 그러고 보니까 얼마 안남았구나. 25일부터잖아. 참, 우리 연수교육 들어가
기 전에 서둘러야겠어. 우리 어머니한테 말씀드렸어. 우리 어머님부터 뵙도록 해 윤
화 "
  " 그래요, 나도 얼른 뵙고 싶어요. 난 오늘이라도 좋은데? "
  " 오, 오늘? 아이 이렇게 귀한 손님을 아무 준비없이 맞을 수가 있나, 어머니께서 
그건 원치 않으실 꺼야 "
  윤화는 민재의 얼굴에서 당황하는 빛을 읽을 수 있었다.
  " 참, 민재 씨 78학번이라고 하셨죠? "
  " 응 그건 왜? "
  " 알고 보니까 내 친구 신랑하고 같은 과더라구요 "
  " 그래! 잘 됐군. 이름이 뭔데? "
  너무도 당당한 민재였다. 유도 심문을 하는 윤화가 오히려 더 초조하고 가슴 떨렸
다. 
  " 치, 친구 신랑 이름까지 어떻게 알아요 "
  " 한번 물어봐. 하지만 잘 모를꺼다. 난 군대 3년 갔다 왔지 휴학 한번 했었지. 들
쑥 날쑥이거든 "
  " 그럼 학교를 몇년이나 다닌 거예요. 군대 3년, 휴학 1년, 8년이네요? "
  " 그렇지 그러니까 올해 졸업을 하는 거지. 근데 오늘은 신상조사 날이야? 부모님
이 자세히 알아 오라고 하던가? "
  " 아, 아뇨. 친구 신랑 얘기를 하다보니까 "
  윤화는 아무리 아무리 민재를 뜯어봐도 나쁜 마음을 가질 사람이 아니었다. 양처럼 
순하고 시골 사람처럼 순진한 남자였다.
  「 그래, 민재씨는 이름이 두개일지도 몰라. 호적엔 딴 이름으로 되어 있을꺼야 」
  우수에 잠겨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민재를 향하여 윤화는 사랑스럽게 불렀다.
  " 구민재 씨! "
  " 으응, 날 불렀어? "
  " 내앞에 앉아 있는 사람 구민재 씨가 아니던가요? "
  민재는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물었다.
  " 윤화는 내 기분 이해 못할꺼야. 늘 혼자인 것 같은 외로움을 말야. 친구들과 허
허거리고 웃을 때도 내 가슴은 텅 비어있어. 친구들과 같이 융화될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지 "
  그것은 바로 윤화의 외로움이기도 했다. 윤화는 자신도 모르게 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 구민재란 이름을 찾은 것은 불과 1 년 밖에 안돼. 나에겐 아직도 낯설어. 윤화가 
민재라고 부를 때마다 내 뿌리를 일깨워주지. "
  " 호적을 바꾸지요? "
  " 호적을 바꾸는 건 어머니를 배반하는 일이 되는데 "
  " 난 민재씨가 여태까지 살아온 이름이 더 좋아요. 그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요 "
  " 그건 왜? "
  " 민재 씨가 옛날처럼 그대로 살아가는데 왜 난 민재 씨가 그렇게 낯설어 하는 이
름을 불러야 하죠? 그건 민재 씨의 그림자와 같이 있는 거지 민재씨 자신이 아니라구
요. 내가 말하는 것을 자기가 아닌 딴 사람한테 얘기하는 것으로 들었을 지도 모르잖
아요? "
  " 그렇지 않아. 윤화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오해야, 미안해. 그런 생각 가지고 있는 
줄 몰랐어. 하지만 윤화를 처음 봤을 때 나의 초라한 과거의 이름으로는 감히 얘기도 
붙일 수가 없을 것 같았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구민재란 이름이 튀어나왔지 나도 내 
스스로에게 놀랬어. 윤화! 내 이름은 아니 나란 놈은 송용권이야 "
  " 고마와요. 민재씨, 아니 용권 씨 "
  윤화는 민재의 가슴에 몸을 던지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민재를 의심했던 참회
의 눈물이기도 했다. 민재도 소리내어 흐느꼈다. 그 흐느낌이 윤화의 가슴에 흔들리
지 않을 깊은 신뢰의 뿌리를 심어 주었다. 
  민재에 대한 오해가 풀리자 철근한테 빨리 그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만날 
약속을 했다. 언제나처럼 티파니의 그 자리였다. 
  철근은 벌써 와 기다리고 있었다. 무척 수척해보였다. 
  " 오래간만이다. 윤화야 "
  " 그래 "
  " 어때? "
  " 실망했어. 사람 뒷조사나 하고 "
  " 나쁜 의미로 한 건 아냐. 널 위해서 "
  " 그만둬. 구민재 씨의 호적 이름은 송용권이야. 오늘 만나자고 한건 그걸 알려주
고 싶어서야. 그렇게 매사를 불신의 눈으로 보지마. 철근 씨의 단점은 바로 그거야. 
뭐든지 확인하지 않으면 못믿는 그 결벽증이 병이라구. 또 확인하려 들겠지. 하지만 
그 결과는 나한테 얘기하지마. 난 설혹 그 사람이 고시 낙방생이라 해도 내 사랑에 
변함이 없어 " 
  윤화의 독기 품은 목소리가 철근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냈다. 
  " 너, 그 정도니? "
  " 그 정도보다 더 해 "
  철근은 윤화가 자기 가슴에 꽂은 비수를 보고야 자기가 윤화를 무지무지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철근은 윤화에게 한번도 사랑한단, 아니 그와 흡사
한 표현도 하지 않았었다. 발설해선 안될 것 같았다. 더 솔직한 심정은 굳이 그렇게 
묶어놓지 않더라도 날아가지 않을 새로 생각했다. 
  철근은 수없이 마음 속으로 윤화의 손을 잡았었고 철근은 날마다 마음 속으로 윤화
를 품속에 안았었는데 윤화는 자기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너무나 거리낌없이 날
아가버렸다. 철근은 왜 자기가 윤화에게 좀 더 솔직하고 좀 더 용감하지 못했나를 후
회했다. 하지만 그것은 철근의 두 손에 쥐고 있는 목발 때문이었다.
  그 후 철근과 윤화는 단 한번의 전화 통화도 하지 않았다. 실컷 다이얼을 돌리고도 
그냥 놔버리곤 했다.

     * 설녀 *
  윤화와 민재는 졸업식 닷새 후로 결혼 날짜를 잡았다. 
  " 용권 씨, 졸업 선물로 뭐 갖고 싶어요? "
  " 갖고 싶다면 줄꺼야? "
  " 그럼요. 얼마나 영광스런 졸업이예요. "
  " 좋아, 그럼 약속 먼저 해. "
  윤화가 새끼 손가락을 내민다. 민재가 그 손가락에 자기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 약속했다. "
  민재의 다짐에 윤화는 밝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민재는 윤화를 아이처럼 번쩍 
안았다. 
  " 아이, 왜 이래요? "
  " 내가 갖고 싶은 건 바로 윤화란 말이야 "
  " 아이 몰라요, 몰라. 어서 내려줘요. 우리 엄만 불시에 습격하신단 말예요. "
  " 윤화, 졸업식장에서 인사시킬 사람이 너무 많아. 이쁘게 하고 와야 해 "
  윤화는 이쁘게 하고 와야 한다는 말에 갑자기 풀이 죽었다. 
  " 나 안가고 싶어요 "
  " 아니, 자기 남편을 축하해 주지 않는 아내가 어딨어? "
  " 자신이 없어요. "
  " 또 바보같은 소리 "
  철근은 윤화의 클럽 친구를 통해 윤화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날아가버린 새였지만 
여전히 그 새는 철근의 가슴 주위를 맴돌았다.
  불현듯 윤화의 앙칼진 목소리가 떠올랐다.
  " 구민재 씨의 호적 이름은 송용권이야. 또 확인하려 들겠지 "
  철근은 부지런히 사법고시 합격자 명단을 뒤졌다. 송용권 송용권 …
  눈을 뒤집고 찾고 또 찾아도 송용권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철근은 숨가쁘게 
학교로 전화를 했다.
  " 여보세요. 송용권 씨가 이번에 졸업을 하는지 봐 주십시요. "
  역시 학교에도 송용권이란 이름은 없었다. 철근은 모세 혈관까지 터져나가는 듯 했
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 가슴만 뛰었다. 
  그 시간에 윤화는 학교 졸업식장에 있었다. 민재는 춥고 복잡한 데 오지 말라며 강
교수와 박여사의 축하를 사양했다. 그리고 더 큰 이유는 친아버지도 오신다고 했기 
때문에 복잡해질 것 같다는 것이었다.
  박여사와 강교수는 민재의 입장에 동정이 갔다. 그리고 윤화도 먼 발치에서 민재의 
졸업을 축하하기로 했다. 윤화는 교문 앞에서 민재를 기다렸다. 
  홍수를 이룬 인파 속을 윤화는 도저히 헤집고 들어갈 힘도 용기도 없었다. 한참 후 
민재가 꽃다발과 선물을 들고 윤화 앞에 나타났다.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 윤화, 빨리 가자. 붙들릴 것 같애 "
  윤화는 놀래서 물었다.
  " 누구한테요? "
  "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하자고 하지,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붙잡지 식은 땀이 날 정
도야 "
  윤화는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자기에게로 온 민재를 빨리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차에 태워 집으로 향하였다. 윤화는 학교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집에서 졸업 파티를 준비하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강교수가 들어왔다.
  " 어머, 아빠. 어디 갔다 이제 오세요? "
  " 그래 졸업식은 잘 끝났나? "
  " 네, 아버님 어머님 모두가 염려해주신 덕분으로 무사히 마쳤습니다 "
  윤화가 기분 좋은 얼굴로
  " 아빠, 아빤 용권 씨한테 무슨 선물하실꺼예요. 오늘 용권 씨 선물받을 거 보니까 
굉장하던데요 "
  " 선물이 뭐가 중요하냐. 그동안의 노력의 결실인 졸업장이 귀중한 거지. "
  " 참, 용권씨 졸업자이 안 보이더라? "
  민재는 그답지 않게 무척 당황했다.
  " 응, 졸업장은 어머님이 가져 가셨어. "
  " 아, 그랬군요 "
  윤화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자네, 내방으로 좀 들어오게 "
  " 네, 아버님. "
  민재가 강교수를 따라 들어가자 윤화는 고개를 가웃거리며 물었다.
  " 엄마, 아빠가 용권 씨한테 무슨 말씀을 하실려고 저러시는 걸까요? "
  박여사 역시 납득이 안되었다.
  " 글쎄다. "
  " 아빠가 비밀리에 줄 선물을 준비하셨나 보죠? "
  " 그래, 너희 아버지 학교에서 하시던 식으로 저렇게 사람 불러다 야단치듯이 선물
을 주실려나 보다. "
  " 엄마, 우리 차 끓여가지고 가서 박수쳐줘요. 그래야 선물 증정의 의미가 더 깊어
지지요. "
  " 그러자꾸나. "
  박여사는 찻쟁반을 들고 윤화와 강교수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에 문밖으로 새
어나온 강교수의 목소리는
  " 나쁜 자식, 뭐 할것이 없어서 멀쩡한 사지를 갖고 사기를 쳐먹어. 내 딸이 그렇
게 만만해 보이던가? 다리를 못쓰는 윤화가 병신이 아니라 인간 쓰레기인 네 놈이 진
짜 병신이야. "
  박여사의 찻잔 떨어뜨리는 소리와 동시에 윤화는 정신을 잃었다.
  윤화는 무중력의 세계에서 둥둥 떠다니며 사고가 정지된 채 숨만 쉬고 있었다. 떠
올릴 상상력마저도 잃었다.
  창밖에는 소담스런 하얀 덩이가 쿵쿵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눈이었다. 해마다 보
는 눈인데 처음 보는 것 같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윤화는 밖으로 나왔다. 눈 속에 묻혀 미이라가 되고 싶었다. 한없이 끝없이 눈 속
으로 눈 속으로 들어갔다.
  끝없이 펼쳐진 은빛 들판에서 윤화의 몸뚱아리는 작디 작은 티끌이었다. 그 티끌이 
조금씩 조금씩 눈 속에 침강하기 시작했다. 
  " 윤화야! "
  귀에 익은 정다운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는 아득한 꿈 속의 현실이었다.
  윤화를 마구 흔드는 사람의 얼굴은 처음으로 간절히 보고 싶었던 철근의 얼굴이었
다. 
  " 윤화야, 세상을 원망해선 안돼 "
  ' 알어, 난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 '
  " 윤화야, 그 사람도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꺼야. "
  ' 그래, 불쌍한 사람이야. 순간순간은 진실했다고 믿어 '
  " 윤화야, 결코 네 장애 때문이 아냐 "
  ' 물론이야. 죽어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
  " 윤화야, 인생의 허물을 벗기 위한 하느님의 시험이었어 "
  ' 많은 것을 깨달았어. 나의 허영심이 빚은 욕망의 늪이였어 '
  " 윤화야, 저기를 봐 네가 걸어온 발자국도 내가 걸어온 발자국도 모두 지워졌어. 
목발 네짝의 흔적까지 "
  ' 미안해. 철근 씨 우리의 닮은 꼴이 우리의 사랑을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됐어. 그 장애를 뛰어넘지 못하는 허영심 때문이지만. '
  " 윤화야, 눈을 떠. 자면 안돼. 잠들면 안된다구 윤화야, 윤화야 … "
  생생히 들리던 철근의 목소리가 윤화의 귀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하지만 철근의 뜨
거운 가슴의 체온은 끊임없이 윤화의 가슴으로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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