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녕의 에세이 시화전
다시 읽는 한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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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정지용「향수(鄕愁)」 2
〈2〉정지용「春雪」 5
〈3〉김상용「南으로 窓을 내겠소」 7
〈4〉김영랑「모란이 피기까지는」 9
〈5〉柳致環「깃발」 11
〈6〉金光燮「저녁에」 13
〈7〉李陸史「청포도」 15
〈8〉韓龍雲「님의 침묵」중「군말」 17
〈9〉이 상「오감도」 20
〈10〉朴木月「나그네」 23
〈11〉金光均「外人村」 25
〈12〉尹東柱「自畵像」 27
〈13〉윤동주「序詩」 30
〈14〉김소월「엄마야 누나야」 33
〈15〉김소월「진달래꽃」 35
〈16〉노천명「사슴」 38
〈17〉박두진「해」 40
〈18〉심 훈「그날이오면」 42
〈19〉조지훈「승무」 44
〈20〉김현승「가을의 기도」 47
〈21〉김동명「파초(芭草)」 50
〈22〉서정주「국화옆에서」 53
〈23〉김기림「바다와 나비」 56
〈24〉김동환 웃은 罪 58
〈25〉오장환 The Last Train] 60
〈26〉유치환 귀고(歸故) 62
〈27〉김수영 풀 65
〈28〉박남수 새 68
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워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긴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조선일보 96.05.19 20면 (문화) 기획·연재」
다시 읽는 한국시
〈1〉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정지용「향수(鄕愁)」
「빈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이것은
가요곡으로 널리 알려진 지용의 시「향수」가
운데서도 특히 이름난 구절이다.「누가 바람
을 보았는가」라는 크리스티너 로제티의 귀여
운 시도 있지만 누구도 보지 못한 바람을 그것
도 칠흑 같은 밤,빈 들판을 지나가는 겨울 바
람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시인 정지용이었다
입체음향의 효과를 시험하려고 할 때 사람들
은 흔히 말발굽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이용
한다.그 거리감과 속도감 때문에 말이 달리는
소리는 금시 눈으로 보는 것같은 생동감을 주
기 때문이다.소리가 가까이 다가올 때에는 나
부끼는 말 갈기가 보이고 멀리 사라져가는 소
리에서는 휘날리는 말꼬리의 잔상이 어린다.
줌인 줌아웃 되는 달리는 말의 이미지는 그것
이 사라지고 난 뒤의 텅 빈 공백까지도 보여준
다.지용은 그러한 정적을「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영
상으로 보여준다.
청각적인 것을 시각의 이미지로 바꿔놓는 공
감각의 기법은「향수」의 첫머리에 나오는「얼
룩 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
는 곳」에서도 발견된다.지용은 황소의 울음
소리를 금빛으로 칠해 놓은 것이다.금빛이라
는 시각언어 때문에 우리는 그 울음소리를 무
게로 달 수가 있고 느릿느릿 걷는 황소의 걸음
과 몸짓의 내면성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심
지어는 금빛이라는 그 말에서 우리는 황금빛으
로 물들어 가는 가을 들판을 연상하기까지 한
다.황소의 황과 금빛의 금은 무의식적으로 두 이미지를 연결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더구나 황소도
그냥 황소가 아니라 얼룩백이 황소라고 되어 있다.이렇게 황소울음소리는 이중 삼중으로 시각적 장치
에 의해서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지용의「향수」는 눈(시각)으로만 그린 고향풍경은 아니다.「빈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의 시구는 소리를 동영상으로 보여준 시각적 이미지의 절정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다채로운
두운과 모운이 연주하는 황홀한 음악 상자이기도 한 것이다.
「빈밭」과「밤바람」에 근접되어 있는 두 어휘에는 무려 네 개의「ㅂ」자음이 중첩되어 있고「밭」,
「밤」,「바람」,「말」,그리고 달리고의 「달」에는 모두 여섯 개의「ㅏ」모음(모음)이 반복되어
있다.그러므로 이 시를 소리내어 읽으면 깊은 겨울밤 바람소리가 귓전으로 스친다.자수율에만 의존해
있는 한국시의 층위에 서 보면 가히 반란에 가까운 운율 혁명인 것이다.
또 첫째 연의「넓은 벌 동쪽 끝으로 흐르는 실개천」은 시각적 대상을 청각적으로 옮겨「옛이야기 지
줄대는 것」으로 묘사했다. 청각적인 것을 시각적 영상으로 바꿨던 것과는 정반대이다.이렇게 시각과
청각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이라는 마
지막 연에서도 극명하게 드러 나 있다.흐릿한 불빛은 시각적인 것이고 도란도란 거리는 것은 청각적인
것이다.그리고「돌아앉아」와「도란도란」의「도」음의 중첩은 앞에서 본 것처럼 두운 효과를 최대한
으로 이용한 것이다.「향수」의 정서는 낭만적인 시제에 속하는 정서이다.그것은 도시의 감정도 농촌
의 감정도 아니다.향수는 장소로는 도시와 농촌의 차이, 시간으로는 현재와 과거의 그 차이에서 우러
나오는 감정이다.그래서「소리만 들리고 그 모습을 볼 수 없는」뻐꾹새를 찬양했던 낭만주의 시인들은
「향수」를 노래하는 경우에도 그 차이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그 감각의 균형도 깨뜨리는 일이 많다.그러나
지용의 「향수」는 감각만이 아니라 시의 소재나 구조에서도 고전적인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시간 축을 이루고 있는 계절도 어느 한 계절에 얽매이지 않고 사계절 전체를 균등하게 재현한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의 2연은 겨울이고「따거운 햇볕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의 4연은 여름
철 전후(이삭이 보리 이삭이냐 벼 이삭이냐로 이른 여름일 수도 있고 늦은 여름일 수도 있다)이다.
나머지 연도 확실한 언급은 없으나 대체로 봄과 가을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낮과 밤도
그렇다.「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의 2연과 「하늘 에는 성근 별」의 마지막 연은 밤 풍경이고 나
머지 연들은 낮 풍경이다.고향에 있는 화자의 연령도 화살을 쏘던 유년 시절에서「사철 발벗은 아내가
…」에서 암시되어 있듯이 성인시절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넓다.
지용의「향수」가 건축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첫째 연과 마지막 연을 비교해 보
면 자명해진다.첫 연의「넓은 벌 동쪽 끝으로 흐르는 실개천」의 공간구성은 수평적이며 확산적이다.
그리고 실개천이 흐르는 들판은 열려진 바깥공간이다.그러므로 소의 울음소리도 벌판으로 퍼져가는 수
평성 확산성 그리고 바깥공간의 개방성을 지니게 된다.(황소의 울음소리는 종달새 같은 수직성이나
귀뚜라미 같은 내부공간의 폐쇄성과는 다르다.)그런데 끝 연을 보면 그 공간구성이 정반대로 되어 있
다.즉 하늘의 성근 별에서 시작하여 서리 까마귀로,서리 까마귀에서 지붕으로 그리고 그 지붕에서 흐
릿한 불빛으로 점차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수직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첫째 연은 실개천이 동쪽 끝으
로 흘러 갔지만 마지막 연은 하늘의 별빛이 방안의 불빛으로 귀착되어 있는 것이다.그리고 실개천이
흘러가는 벌판이 확산적인 외부공간이라면,마지막 연의 등불 밑에 돌아앉아 도란거리는 그 방안은 응
축적인 내 부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지용의「향수」는 햇빛 아래 밝고 넓은 벌판을 향해 우는 금빛 황소 울음으로 시작하여 희미한 불빛
아래 방안 구석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인간의 속삭임으로 끝나있는 것이다.수평과 수직,밝은
태양과 희미한 등불,벌판의 확산과 방안의 응축,그리고 황소울음과 속삭임소리….정지용이 건축한
향수의 공간은 이렇게 바깥과 안의 대칭적 언어에 의해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정지용의「향수」는 그의 다른 시에 비해서 결코 그 격조가 높다고는 할 수 없다.오
히려 부분을 보면 시적 이미지와 은유로 넘쳐나 있지만 그 전체의 내용은 수필의 한 대목처럼 설 명적
이다.「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같은 시구는 수식에 수
식을 첨가해 가는 과다한 시적 수사로 되어 있으면서도 연마다 반복되는「그 곳이 참하 꿈엔 들 잊힐
리야」의 구절은 직설적이고도 상투적인 산문형태의 글로 되어 있다.
감각이나 시간과 공간의 구성이 그랬듯이 서술의 양식에 있어서도 시와 산문의 이질적인 두 특성을
다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이 지용의 시「향수」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바로 그 점이 많은 사람으로부
터 사랑을 받게 된「향수」의 비밀이기도 한 것이다.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은 끝내는 땅으로 추락하고 만다.잃어버린 화살을 찾아 풀섶의 이슬에
온 몸을 적시고 돌아오는 아이처럼 우리는 고향도 시도 그렇게 잃었다.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서 태어
난 우리의 아이들은 잃어버린 화살조차 쏜 적이 없다.그래서 아직은 가요곡의 가사로나마 불리어지고
있는 정지용의 「향수」는 바로 잃어버린 시에 대한 향수이기도 한 것이다.
◎ 이어령 교수의 ‘에세이 시화전’/‘소리’에 색입혀… 반짝이는 ‘ 시각언어’/‘밤바람소리 말달리고…’는 황홀한
운율의 ‘동영상’/시 와 산문 서술방식 조화이뤄 오래도록 사랑받아
春雪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힌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어름 글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롬 절로
향긔롭어라.
웅숭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끔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고기입이 오믈거리는,
꽃 피기전 철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시집 「백록담(白鹿潭)」(1941編) 중에서
다시 읽는 한국시
〈2〉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정지용「春雪」
봄추위를한자말로는「춘한」(春寒)이라 하
고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로는「꽃샘」이라고
한다. 손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다. 詩的인
감각으로 볼 때「춘한」과「꽃샘」은 분명 한
자리에 놓일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꽃샘」은 어감도 예쁘지만 꽃피는 봄을 샘
내는 겨울의 표정까지 읽을 수가 있어 미소
를 자아내게 한다. 계절까지도 이웃 친구처
럼 의인화하며 살아왔던 한국인의 유별난 자
연감각이 이 한 마디 말 속에 축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꽃샘추위의 한국적 정서를 보다 시
적인 세계로 끌어올린 것이 정지용의「春雪」
이다. 그리고 지용은 그 시에서「문열자 선
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라는 불후의 명구
를 남겼다.「시는 놀라움이다」라는 고전적인
그 정의가 이처럼 잘 들어맞는 시구도 드물
것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의 관
습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굳은살이 박힌
일상적 삶의 벽이 무너질 때 비로소 나타나
는 것이 그「놀라움」이며「詩」이다.
「春雪」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침에 문을
여는 순간 속에서 출현된다. 밤사이에 생각
지도 않은 봄눈이 내린 것이다. 겨울에는 눈, 봄에는 꽃이라는 정해진 틀을 깨뜨리고 봄 속으로
겨울이 역류(逆流)하는 그 놀라움이「春雪」의 시적 출발점이다. 그것이 만약 겨울에 내린 눈이었다
면「선뜻」이라는 말에 느낌표가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냥 차가움이 아니다. 당연히 아지
랑이나 꽃이 피어날 줄 알았던 그런 철(시간), 그런 자리(공간)에 내린 눈이었기 때문에 그「선뜻
」이란 감각어에는「놀라움」의 부호가 요구된다.
그리고 그러한「놀라움」은 손발의 시러움같은 일상의 추위와는 전혀 다른「이마」위의 차가움이
된다.「철 아닌 눈」에 덮인 그 山은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視覺)의 산이 아니라 이마에 와 닿는 촉
각적(觸覺的)인 山이며, 이미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이 아니라「이마받이」를 하는「서늘옵고 빛난」
거리가 소멸된 산이다. 그렇게 해서「면 산이 이마에 차라」의 그 절묘한 시구가 태어나게 된다.
「이마의 추위」는 단순한 눈 내린 山頂의 감각적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춘설」과「꽃샘추위」
에 새로운 詩的 부가가치(附加價値)를 부여한다.「춘설이 분분하니 필동말동하여라」의 옛시조나 「
春來不似春」같은 漢詩의 상투어들은 봄눈이나 꽃샘추위를 한결같이 봄의 방해자로서만 그려낸다.
그러한 외적인「손발의 추위」를 내면적인「이마의 추위」로 만들어 낸 이가 시인 지용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꽃 피기전 철도 아닌 눈」은 어느 꽃보다도 더욱 봄을 봄답게 하고 그 감각과
의미를 새롭게, 그리고 진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봄눈이 내린 산과「이마받이」를 한 지용
은「흰 옷고름 절로 향긔롭어라」라고 노래한다.
꽃에서 봄향기를 맡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다. 일상적 관습 속에서 기계적으로 봄을 맞이하는 사람
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용과 같은 詩人은 오히려 봄눈과 같은 겨울의 흔적을 통해 겨울옷의
옷고름에서 봄향기를 감지한다.「새삼스레……」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듯이 지용에게는 시간을 되감
아 그것을 새롭게 할 줄 아는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얼음이 금가고 파릇한 미나리의 새순이 돋고
물밑에서 꼼짝도 않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그 섬세한 봄의 생동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리고 겨울
과 봄의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이마의 추위」(꽃샘추위)가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활
짝 열린 봄의 생명감은「웅숭거리고 살아온 겨울의 서러운 삶」을 통해서만 서로 감지될 수 있기 때문
이다. 그러니까 봄눈이야말로 겨울과 봄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하고, 끝내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그 차이화를 보여주는「놀라움」이 되는 것이다. 봄의 시는 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용의 상상력에 의하면 그것은 봄눈에 덮인 서늘한 뫼뿌리에 혹은 얼음이 녹아 금이 간 그
좁은 틈사이에 있다.
그래서 지용의 시「춘설」은「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로 끝나 있다. 달리는 자동차 속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달리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우리의 몸은 앞으로 쏠리게
되고 그 충격을 통해 비로소 달리는 속도를 느낀다. 봄눈이 바로 봄의 브레이크와도 같은 작용을 하
는 것이다.
그러나 봄눈은 밤낮 내리는 것이 아니잖는가. 그러므로 꽃샘이나 붐눈을 통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겨울의 흔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꺼운 솜옷을 벗고 도로 추위를 불러들여야 한다.「새삼스레」「철
아닌」「도로」와 같은 일련의 詩語들이 환기시켜주는 것은 시간의「되감기」이다. 그래서「핫옷 벗고
다시 칩고 싶다」라고 말하는 지용의 逆說 속에서 우리는 스위스의 산 골짜구니 깊숙이 묻혀살던 드
퀸시 의 오두막집을 상상하면서 쓴 보들레르 의 글 한 줄을 생각하게 한다.
시인의 방과 그 나날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문열기」이전의 닫혀져 있던 방, 핫옷을 입고 있
는 좁은 공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이전, 지용 자신의 표현대로 하
면「웅숭거리며」사는 겨울 시간이다. 바깥이 추울수록 그 내부의 공간은 한층더 아늑하고 따뜻하며
눈보라가 치는 긴 밤일수록 그 시간은 더욱 고요하고 천천히 흐른다.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닫쳐진 공간과 그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만이 문을 열고 바깥 세상과
「이마받이」를 하는 행복한 충격을 얻을 수가 있다. 그리고「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다」는 지금껏 어
느 누구도 느끼지도 말하지도 못하던 소원을 품게 된다. 그러한 소망의 원형이 바로「봄눈」이며「꽃
샘추위」라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용에 의해서 한국 시의 역사상 처음으로「봄의 훼
방꾼」이었던「봄눈」과「꽃샘」이 봄을 발견하고 창조하는 詩學의 주인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南으로窓을내겠소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가리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오
새 노래는 공으로 드르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시집 「망향(望鄕)」(1937년판) 중에서
다시 읽는 한국시
〈3〉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김상용
南으로 窓을 내겠소
거울은 모든 것을 거꾸로 비춰준다. 다만 그
반사된 모습이 똑같아 보이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사람의 얼굴은 대칭형으로 되어
있어서 더욱 그렇다. 좌우가 뒤바뀌어 있는데도
그것을 자기 얼굴이라고 믿는다. 조우만이 아니
라 사실은 앞뒤까지도 뒤바뀌어 있다. 내가 북
쪽을 보고 있을 때 거울 속의 나는 정반대로 남
쪽 방향을 보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거울이 정
직하게 자기 모습을 비춰 준다면 거울 속에는
자기 얼굴이 아니라 그 뒤통수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시간까지가 그렇다.
거울 속에서는「과거」가「현재」처럼 혹은 다가
오는「미래」처럼 보이기도 한다. 달리는 자동차
의 백미러를 보면 이미 지나온 그 길들이 다시
다가 오고 있지 않던가.
시의 텍스트도 때론 거울과 같은 작용을 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의 생활을 시의 언어에 비
춰 보면 아마도 김상용의「남으로 창을 내겠소」와 같은 풍경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대낮에도 형광 등
을 켜야 하는 도시의 빌딩 창문들은 동서남북의 구별이 없다. 그것을 시의 거울에 비춰 보면「남으로
창」이 나 있는 우리들의 작고 따뜻한 옛집이 보일 것이다. 그것은 죽어서도 남향받이가 아니면 묻히려
하지 않았던 한국인들의 오랜 삶을 가리켜 온 화살표이다.「북」으로 창이 난 회색의 도시가 압박해 올
수록「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시 첫구절은 절규처럼 들려 올 것이다.
창이 밀봉된 빌딩 속, 플라스틱 사무 용품과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화이트칼라의 하얀 손
가락 위로「밭이 한참가리/괭이로 파고/호미론 풀을 베지오」라고 한 그 흙묻은 손이 오버랩 된다. 그리
고 컨베이어 벨트의 온갖 기계 부품들 사이로 사람의 손때 묻은 괭이와 호미가 얼비치게 될 것이다.「
시인과 농부」라는 곡목도 있듯이 시인들은 현대 문명의 아스팔트 위에서 밭갈이를 하고 있는 농부들이
다. 시를 뜻하는 영어의 버즈(VERSE)가 바로 밭을 간다는 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지 않던가!
노동만이 아니다. 놀이와 휴식의 양상도 뒤집혀 있다. 밭갈이의 노동은「땅」이「하늘」(「구름」과「새
」)의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휴식과 놀이의 상황으로 옮아간다. 그것이「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오/새 노래
는 공으로 드르랴오」라는 구절이다.
생각해 보면 도시인들은 모두 구름의 꼬임 때문에 흙을 버리고 떠나온 사람들이다. 이 떠돌이의 도시
문화는 농경 문화와 대립하는 것으로「신 유목민」(네오 노마드)이라고 불려진다. 그 들의 놀이는 관광
처럼 끝없이 돌아다니거나 노래도 돈을 주고 부르는 노래방 같이 소비 위주의 오락이다. 그러나 농경민
들의 놀이와 휴식은 한 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 그리고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 자적(自適)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자연과의 관계는 그대로 인간과의 관계로 이어진다.「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가 그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것은「강냉이가 익걸랑」이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바로 계절이라는 자연의 리듬이다. 그것은 시장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인간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
다. 시장은 자신들이 생산한 것을 매매하고 거래하기 위한 것이지만 강냉이가 익는 곳은 함께 먹고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한 잔치이다.
사회학자「일리치」의 용어를 빌리자면「컨비비얼리티」(conviviality)라고 불리는 공식(共食)과 상생(相
生)의 장치 문화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김상용의 거울은 경쟁의 전리품인 도시인들의「먹이」를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식의 의식(儀式)같은「빵과 포도주」로 바꿔 놓은 셈이다.
이렇게 이 시인은 산업 문화의 생활양식을 그 전후좌우가 모두 바뀌어 버린 농경 문화의 전형적인
풍경으로 비춰 준다. 시적 메시지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시의 구성도 그렇게 되어 있다. 이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땅 다음에는 하늘, 그리고 마지막에는「사람」으로 天-地-人 三才 思想의 삼태극
도형처럼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이 시의 화룡점정(畵龍點睛) 같은 구성은「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최종 악장의
스타카토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남쪽으로 낸 창문, 밭갈이, 구름과 새노래, 그리고 강냉이를 함께
먹으며 지내는 그 생활은 모두가「어떻게 사느냐」에 답하는「삶의 양식」이다. 그런데 그 어떻게가 갑자
기 튀어나온「왜」라는 그 물음에 의해서 핸들을 꺾고 급회전을 한다.
「삶의 양식」이「삶의 본질」로, 요즘 말로 하자면「노 하우」에서「노 와이」로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다. 개미들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왜?」라는 원인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어떻게!」라는 해결
로 돌진한다고 한다. 그러나 까다로운 인간은 그렇지가 않다. 잘된 일이든 못된 일이든 우선「왜」라고
묻는다.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바로 근대 합리주의의 삶이며 모든 것을 이성과 법칙으로 설명하려고
한 서구의 로고스 중심주의 사상이다.
그러나「왜」라는 물음에 대해서 말로, 논리로 답하려고 할 때 이미 그 삶은 삶 자체의 빛을 잃고 생
명의 선혈은 싸늘하게 굳어 버린다.
석가도 시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 대신 그냥 웃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염화시중(염
華示衆)이라고 하고 기호학에서는「폴리세믹」(복합적이고 암시적인 多기호체계)이라고 한다.「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과학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시(예술)이고, 설명해서는 안되
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종교」라고 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과학(논리)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미소이다. 모나리자는 검은
상복을 입고 있지만, 그 모델 조콘다의 이름은「생의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죽음의 슬픔과 생의 기쁨이
엇갈려 있는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다빈치의 그 신비한 미소는 살 수 있다.
왜 사느냐라는 말에 그냥「웃지요」라고 대답한 김상용 시인의 미소는 말로는 표현할 수도 논증될 수
도 없는 삶 그 자체이다. 애매성과 모순성으로 뭉쳐진 삶 자체의 다의성(多義性)을 그대로 옮긴 것이 그
웃음이며 시의 언어이다.
과학과 법과 정치와 경제가 우리의 삶을 해부하고 정의하고 설명하려고 할 때 시인은 오직 침묵으로
웃음으로 삶과 마주 본다. 그래서 우리는 김상용의 그 시적 텍스트를 요술 거울 속에서 본다. 도시인들
이 차고 다니는「스마일」배지의 뒤통수를 뒤집어 놓은 참신하고도 은밀한 한국적 미소의 그 반사체(反
射體)를 .
모란이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서름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로 무덥든 날
떨어져 누운 꽃닢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든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한양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핏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
의 봄을
「문학」(1934년 3월)
다시 읽는 한국시
〈4〉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김영랑
「모란이피기까지는」
꽃을 뜻하는 한자의 花 는 풀초 밑에「변
화한다」는 化 자를 붙여놓은 글자이다. 민주
화니 정보화니 딱딱한 말에 따라 다니는 그
글자가 왜 하필 꽃처럼 아름다운 것에 붙어
있는지 이상한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원
래 化 자는 사람이 서 있는 것과 구부리고 있
는 것의 모양을 나타낸 상형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자세처럼 수시로 변화(變化)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꽃처럼 변화무쌍한 것도 드물
다. 어제까지 비어있던 풀잎이나 나뭇가지에
갑자기 티눈같이 작은 봉오리가 틔어난다. 그
것이 몽우리지고 부풀어 오르고 터지면서 형
형색색의 꽃잎과 향내가 피어난다. 그러다가
어느새 시들어 흔적도 없이 져버리고 그 빈자
리에 열매가 열린다. 이렇게 트고 부풀고 터지고 피고 시들고 지고 열리는 것―그「동사(動詞)로서의 꽃
」이 바로「花」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꽃을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읽어 온 경우가 많았다. 아름답다. 향기롭다와
같이 시화(詩畵) 속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꽃들은 영화(榮華), 가인(佳人)을 수식하는「형용사로서의 꽃」
이었다. 영화(榮華)란 말 자체가 그에 속하는 글자다. 榮 은 벚꽃처럼 꽃잎이 자잘하면서 부리져 피어있
는 꽃을 나타낸 것이고, 華 는 송이가 크고 그 꽃잎이 화려한 꽃을 가리키는 글자다. 특히 이「형용사로
서의 꽃」을 대표해 온 것이 모란이다. 그 색이 화려하고 모양이 탐스러워 신라 때 설총의 글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귀공명을 상징해 온「花中王」이다. 그래서 베갯모나 수연(壽宴)의 병풍
속에서 모란꽃은 영원히 질 줄 모르는 꽃으로 수놓여져 왔다.
그러나「형용사」에서「동사」로,「공간」에서「시간」으로 새롭게 바꿔놓은 것이 바로 김영랑의 시「모
란이 핏기까지는」이다. 우리가 그 시의 첫행에서 만나게 되는 말도 모란의 색깔이나 그 화려한 꽃잎에
대한 수식어가 아니라「피다」라고 하는 그 동사이다.「…까지는」,「아직…」과 같이 시간의 한계와 유예
를 나타내는 말을 덧붙여「피다」라는 동사를 더욱 강렬하게 못질해 놓았다. 그래서「모란이 핏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라는 독백 속에서 우리는 모란만이 아니라 꽃이 핀다는 그 동
태성과 봄이라는 계절의 지속성을 읽을 수가 있다.
「피다」로 시작된 이 시는 당연히「지다」라는 거기에서「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
을 여윈 서름에 잠길테요」라는 시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모란은「피다」보다도 오히려「지다」 쪽
이 더 강조되어 있어서「뚝뚝 떨어져버린」이라는 묘사까지 등장한다. (「뚝뚝」은 벚꽃처럼 일시에 폈다
지거나 그 꽃잎이 자잘한 것에는 쓰일 수 없는 의태어이다.)
이렇게 피다와 지다의 시간축(時間軸)으로 펼쳐지고 있는 영랑의 그 꽃은 이미「목단(牧丹)」이라는
한자말보다는「모란」이라는 보다 부드럽고 약간은 나약하기까지한 토박이말에 더 잘 어울리는 꽃으로
변신한다. 그 이름만이 아니라 꽃의 형태도 색채도, 심지어 그 피는 시기마저도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엄격하게 말해서 모란꽃은 화투에서도 육(六) 목단으로 나와있듯이 여름 꽃에 속한다. 하지만 영랑은 봄
을 극한까지 연장시키기 위해서 모란을 봄과 여름의 경계선인 오월에 설정한다. 그래서「지다」와「피다
」의 그 시간차는 한 계절차이 만큼 벌어지게 된다. 필 때는 봄꽃이고 질 때는 여름꽃으로 말이다.
「오월 어느날 그 하로 무덥든 날/떨어져 누운 꽃닢마저 시들어버리고는」에서도 필 때보다 질 때의
모습이 더 강조된다. 꽃을 의인화한 표현은 많지만 떨어진 꽃잎을 보고「누웠다」라고 한 것은 영랑이
처음일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진 꽃이 아니라 꽃의 시체이며 흙에 묻는 매장이다. 비극이나 아이러니의
효과는 그 대조가 크면 클수록 커지는 법이다. 꽃모양이 크고 화려할수록 그것이 져서 사라지는 허무의
자리도 크다.
「피다」와「지다」는 생성과 소멸을 낳는 시간의 모든 비극이고 갈등이며 그 모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축을 타고 전개되는 영랑의「모란」에서는 모든 삶의 의미와 정서 역시 그와같은 대립과 모순의
언어로 양분되어 진다.「기다림」은「여윔」으로, 「뻗쳐오르는 보람」은「서운케 무너졌느니」로, 그리고「
찬란함」은「슬픔」으로 화한다.
그러나 영랑은 대부분의 한국문화가 그런 것처럼 시간을 처음과 끝으로 이어진 직선으로서가 아니라
둥근 순환의 고리로 생각한다. 봄은 다시 오고 모란은 계절의 모서리 위에서 다시 피어난다. 소망이 좌
절로 이어졌듯이, 좌절은 다시 소망으로 이어진다. 피다와 지다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순환의 고리 속으로, 어쩌면 영원 회귀의 반복 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는 것같다. 그것이 돌로 나
타난 것이 까뮈의 「시지푸스의 신화」라고 한다면, 그것이 꽃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영랑의「모란이
핏기까지는」이라고 할 수 있다.
「삼백예순날 한양 섭섭해 우옵내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봄까지 합쳐서 일년내내 통틀
어 운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뻗쳐오르는 보람」과 그 기다림의 찬란했던 시간가지도 소급해서
모두 뻬어버린 시간이다. 하지만 이 시의 끝행은「모란이 핏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테요」라
는 첫행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다시 모란이 필 때까지 기다리는 찬란한 시간들이 삼백예순 날의 슬픔
위에 오버랩 되어 나타난다.
그러한 시간의 모순 감정을 통합한 것이 바로「찬란한 슬픔의 봄」이고, 그것을 가시화한 것이 바로
영랑의「모란꽃」이다. 영랑은 모란꽃을 통해서 봄의 보람을 극한까지 떠받치는 튼튼한 버팀목과 동시에
그 봄의 죽음을 장례하는 가장 화려한 상복을 마련해 준 것이다. 그래서 귀족적이고 화려하고 중화적(中
華的)이었던「목단」이 김영랑의 시에 이르러 비로소 서민적이고 진솔하고 향토적인「모란」의 이미지로
바뀌게 된 것이다. 청요리집 같은 모란꽃의 찬란한 빛 속에 슬픔의 깊은 그림자를 드리움으로써 평면적
인 꽃의 이미지를 입체화한 것은 한국의 시인 영랑이었다.
「미녀를 맨처음 장미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다 그러나 그 똑같은 비유를 두 번째 사용한 사람은 바보
다」라는 말이 있다. 영랑은 천년을 두고 부귀영화를 상징해온 중국 문화의 모란 패러다임을 대담하게
바꿨다.「형용사로서의 목단꽃」을「동사로서의 모란꽃」으로 돌렸다. 그리고「공간 속에 수놓여진 꽃」을
「시간 속에서 피고 지는 꽃」으로 끌어냈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매화의 의미밖에 몰랐던
사람들에게 영랑은 봄과 여름 사이에서 피어나는 경계의 꽃, 모란을 노래하는 즐거움을 보여 준 것이다.
깃 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야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시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런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안 그는
「조선문단」(1936년 1월호)
다시 읽는 한국시
〈5〉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柳致環「깃발」
청마(靑馬) 유치환이라고 하면 누구나「깃
발」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깃발과 함께
떠 오르게 되는 것은 바다다. 푸르고 투명한
바다를 향해 나부끼는 한폭의 깃발―그것이
지금까지 그 시를 읽어온 사람들의 가슴 속에
박혀 있는 인상이다. 국어 참고서에서도 학술
논문에서도 유치환의「깃발」은 예외 없이 바
다를 향해 꽂혀 있는 기(旗)라고 풀이되어 있
기 때문이다.
청마의 고향은 바닷가에 있는 통영이다. 실
제로도 그 자신이 바닷가 산허리에서 나부끼
는 기를 묘사한 시(「釜山圖」)를 쓴 적도 있
다. 그러고보면「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야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을「바다를
향한 언덕같은 데 세워진 기(旗)」로 풀이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일본말「우나바라」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기는 하나,「해원」이라는 말이 넓은
바다를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손수건」이「깃발」의 은유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 시 전체를 꼼꼼히 읽으면 읽을수록「정말 그것이 바닷가의 기(旗)를 묘사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청마의「깃발」은 특정한 장소에 꽂혀있는 특별한 기(旗)의 모습을 묘사하려
한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뜻보면 깃발이 나부끼는 풍경을 그린 시처럼 보이지만, 그 시의 구조를 보
면 깃발의 일반적 특성을 여러 가지 메타포(은유)로 기술해 놓은 관념 형태의 시라느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시 전체의 언술(言述)을 하나의 통사구문으로 요약하면「누가 깃발을 맨 처음 공중에 매달았
는가」라는 수사적 의문문이 된다. 그리고 깃발이라는 말 대신「소리없는 아우성」에서「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에 이르는 총 여섯 개의 은유를 상감(象嵌)해 놓은 것이 바로 이 시의 형태이다. 그리고 동시에「
해원을 향해 흔드는…」이라는 구절은 그 여섯 개의 은유 가운데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 구절 하나를 가지고「바다를 향해 나부끼는 깃발」을 그린 시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
히 위험한 독해(讀解)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앞서 밝힌대로 시 전체를 결정짓는 것은「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
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한 마지막 시행이다. 그가 묻고 있는 기(旗)의 의미는「바다」가 아
니라, 공중(하늘)에 매달린 깃발… 바다이든 산이든 상관 없이 하늘을 향해 나부끼는 원초적인 그 깃발
의 의미요, 이미지이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그 깃발은 반드시「바다」를 향해 나부끼고 있어서가
아니다. 시인 자신의 언표(言表)대로 그것이「공중」(하늘)에 매달려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공중에 매달린 기」를「바다로 향한 기」로 한정해 버리면 깃발의「보편성」은「개별성」으로,
그「수직성」은「수평성」으로, 그리고「상승적」높이를 지닌 나부낌은「확산적」넓이를 지닌 나부낌으로
머물고 만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푸른 해원」에 대한 풀이 자체도 달라져야 한다. 그것은 바다가 아니라, 하늘을
뜻하는 은유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손수건」만이 아니라,「해원」(바다)까지도 은유 구조로 읽으
면「바다를 향해서 흔드는 손수건」의 시행 전체가「하늘을 향해 나부끼는 깃발」을 비유하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바다 → 하늘」,「깃발 → 손수건」의 병렬적(竝列的) 구조를 지닌 비유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읽으면 그동안 많은 사람을 괴롭혀 온「영원한 노스텔쟈」라는 수식도 그 뜻이 명확해진다. 바
다 너머로 영원히 떠나는 사람이 육지를 향해 흔드는 손수건이라면 몰라도 뭍에서 바다를 향해 흔드는
손수건이 「영원한 노스탈쟈」가 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바다 ― 손수건」을「하늘
― 깃발」의 관계로 바꿔보면「영원」이라는 말,「노스탈쟈」라는 말이 실감 있게 가슴을 친다. 東西를 가
릴 것 없이 시인들은 자신의 고향을「지상」아닌「하늘」로 생각해 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태백은 자
신을 땅에 귀양살이 온 시선(詩仙)이라고 불렀고, 보들레르는 밧줄에 묶여 퍼덕이는 알바트로스의 긴 날
개에서 자신의 운명을 보았다. 땅[現實]에 살고 있으면서도 영원하고 무한한 하늘[理想]을 그리워하는 시
인의 마음을 가시화하면 바로 공중에 매달려서 펄럭이는 그 깃발이 될 것이다. 그래서「영원한 노스탈
쟈」는「슬프고 애달픈 마음」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고 맨처음 그러한 마음[깃발]을 공중에 매단 사람은
原初의 시인, 시인의 元祖가 되는 것이다.
시인의 경우만이 아니다. 실락원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영원한 노스탈쟈」의「하늘」(天國)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은 인간 본래의 근원적인 감정이다. 世俗의 重力에서 벗어나 한치라도 하늘을 향해
높아지려는 발버둥과 그 처절한 초월의 의지… 그것이 바로「소리없는 아우성」이고, 물결처럼 흐르는
「순정」이고, 푯대처럼 곧은「이념」이고, 백로처럼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애수」이다. 허공 속에서 펄
럭이고 있을 뿐 언제나 높은 하늘이 아쉬움으로 남는 깃발의 마음… 끝없이 비상하면서도 끝없이 깃대
에 묶여 있는 그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 그것을 가시화한 것이 다름아닌 청마의 깃발이다.
깃발만이 아니다. 공중에 매달려 나부끼고 있는 모든 형태 모든 생물, 그리고 모든 운동과 그 몽상이
야말로 청마의 시를 꿰뚫고 흐르는 중요한 시의 모티브이다. 그래서 우리는 왜 기회주의자인 박쥐가 청
마의 시에 오면 갑자기 슬프고 아름다운 시인의 상징이 되는지, 그리고 왜 장대에 매달아 놓은 생선이
바다 밑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보다도 더 생명적인 물고기로 묘사되어 있는지 그 비밀을 알 수 있다. 땅
바닥에서 척추를 세우고 꼿꼿이 일어서는 것, 그리고 수직의 그리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면 그것이 연
이었든 소리개였든, 혹은 담장을 기어오르는 덩굴이나 담배연기라 할지라도 모두 아름답고 슬프게 나부
끼는 청마의 깃발이 된다.
「과연 바다를 향해 나부끼고 있는 깃발인가」라는 그 질문은 청마의 시 전체를 따지는 본질적인 물음
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서 해답을 얻게되면 시인과 깃발과 박쥐가 왜 청마의 시에서는 같은 혈통
을 지닌 족보에 올라 있는지도 밝힐 수 있게 된다. 파리한 환상과 몸부림과 그 안타까운 울음 속에서
날개를 키우기 위해 시인은 시를 쓰고, 깃발은 펄럭이고, 본래 박쥐는 밤마다 서러운 춤을 추며 새처럼
난다. 그것들은 모두 땅이 아니라 지붕 위의 공중, 하늘을 향해 매달려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저 녁 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시집「겨울날」(창작과비평사刊 1975년)
다시 읽는 한국시
〈6〉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金光燮「저녁에」
이산(怡山) 김광섭(金光燮)은 오염되어가는
지상의 문명을 고발한「성북동 비둘기」의 시
인이면서도 동시에 천상의 별을 노래한「저녁
에」의 시인이기도 하다. 지상과 천상은 그렇
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의 세계에서는
한 울타리 속에 있다. 인간은 땅위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 까닭이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
는 것을 영어로 컨시더(consider)라고 하지만
원래의 뜻은「별을 바라다본다」라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실제의 바다든 삶의 바다든
별을 보고 건너갔다. 점성술과 항해술은 근본
적으로 하나였던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
(천문학)이 지배하는 시대에도「이 세상에서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밤 하늘의 별이요,
마음 속의 시(도덕률)」라는 칸트의 경이(驚異)
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저녁이 되어서야, 그러
니까 어둠이 와야 비로소 그 정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
다 본다」로 시작되는 그 詩題가「저녁에」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시의 의미를 더 깊이 따져 들어가면 알 수 있겠지만, 엄격하게 말해서「저녁에」의 시를 이끌어가
는 언술은「별」(천상)도「나」(지상)도 아니다.「별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라는 언술의 주체는「나」가
아니라「별」이다. 나는「보다」의 목적어로 별의 피사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그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하나를 쳐다본다」의 다음 시구에서는 지상의 사람이, 그리고「나」가 언술의 주체로 바뀌어
있다. 시점이 하나가 아니라 병렬적으로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 별과 사람, 그리고「내려다
보다」와 「쳐다보다」가 완벽한 대구를 이루며 동시적으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과는 달리 언어로 표현할 때는 불가피하게 말을 순차적으로 배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러기 때문에 자연히 그 순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저녁에」의 경우도「별」이「나」보다 먼저 나와 있
다. 즉 별이 먼저 나를 내려다 본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시선에 있어서 나는 수동적이다. 첫행의 경우
시점과 발신자가 별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점의 거리를 결정하는「이」,「그」,「저」
의 지시 대명사를 보면 별의 경우에는「저렇게 많은 것」이라고 되어 있고, 사람의 경우는「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시점 거리가「저렇게(별)」보다「이렇게(사람)」가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르트르처럼 본다는 것은 대상을 지배하고 정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보고 남이 나를
본다는 것은 끝이 없는 격렬한 싸움인 것이며, 인간의 삶과 존재란 결국 이러한 눈싸움에 지나지 않는
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명제「타자(他子)는 지옥」이란 말이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그 시선이 그러한 눈싸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정반
대로 정다운 것이 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저렇게 많은 별중에」라고 불렸던 별이 나중에 오
면「이렇게 정다운 별하나」로 바뀌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
저렇게에서 이렇게로 변화하게 만든 그 시점은 누구의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저녁에」
라는 시 읽기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다.
답안을 퀴즈 문제처럼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펼쳐보면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시의
제목처럼「저녁」이라는 그 시간이다. 별이 나를 내려다본 것이나 내가 별을 쳐다본 것이나 그 이전에
저녁이 먼저 있었다. 저녁이 없었다면, 어둠이라는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내려다보는 것도 쳐다보는
것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저녁이란 어둠의 시작이 운명처럼 나와 별을 함께 맺어주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저녁이라는 한 순
간의 시간 속에서 우연처럼 별하나와 나하나가 만난다. 이러한 우연, 그러나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이
마주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차원(異次元)과 그 절대 거리를 소멸시키는 저녁인 것이다.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
서 저녁은 정다운「너하나 나하나」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
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저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라는 둘째연의 시구
이다. 만남은 곧 헤어짐이라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그 진부한 주제가 여전히 이 시에서 시효를 상실하
지 않고 우리 가슴을 치는 것은 그것이 시적 패러독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에서 볼 수 있듯이 빛과 어둠의 정반대 되는 것
이 그 사라짐의 명제 속에 교차되어 있다. 그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이면서도 사라지는 시간과 장소
는 빛과 어둠이라는 합칠 수 없는 모순 속에 존재한다. 저녁의 시간이 빛과 어둠으로 다시 분리될 때
나와 별은 사라진다. 이것이 슬프고 아름다운 별의 패러독스이다.
그러나 김광섭은 한국의 시인인 것이다. 사람들은 멀고 먼 하늘에 자신의 별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오고
있다고 믿는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천문학의 별을 배우기 전에 멍석 위에서 별하나 나하나
를 외우던 한국의 어린이였다. 그러기 때문에 별의 패러독스는「타자(他子)는 지옥이다」가 아니라「타자(他
子)는 정(情)이다」로 변한다. 그리고 그 한국인은 윤회의 길고긴 시간의 순환 속에서 다시 만나는 또하나의
저녁을 기다린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슴 속에 그렇게도 오래오래 남아있는「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마지막 그 시구
이다. 그 시구가 화가와 만나면 한폭의 그림이 되고, 극작가와 만나면 한편의 드라마가, 그리고 춤추는 무희
와 만나면 노래와 춤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만나서는「정다운 너하나 나하나」의 만남이 된다. 저렇게 많은 별 중의 하나와 마
주보듯이 박모(薄暮)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상의 별하나와 만난다.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도 모르는
운명의 만남을…….
그리고 그렇게나 먼 빛과 어둠의 두 세계로 사라진다해도 우리는「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시구를 잊
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만나랴」라는 의문형으로 끝나있지만 그러한 시적 상상력이 존재하는 한「정다운
너하나 나하나」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과 따의 몇광년의 먼 거리를 소멸시키고 영원히 마주 보는
시선을 어떤 시간도 멸하지 못한다.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수직적 공간, 그리고 그것을 에워싸는 저녁의 시간……. 그 순
간의 만남을 영원한 순환의 시선으로 바꿔주는 것이야말로 시가 맡은 소중한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청 포 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
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문장」(1939년 8월)
다시 읽는 한국시
〈7〉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李陸史「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李陸史의 그 유명한 청포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고장」은 일정한 장소를 의미하는 공간적
요소이고,「칠월」은 일정한 계절을 한정하는 시
간적 요소이다. 그리고 청포도는 그 시간과 공
간 속에 자리하고 있는 특정한 사물(object)이다.
그러니까 청포도의 시작은「내 고장/칠월/청포
도」의 의미 단위로 시간-공간-사물의 세 꼭지점
을 지닌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삼각구도의 모태 속에서 여러가지 의미와
이미지가 탄생된다. 청포도를 읽는다는 것은 다
름 아닌 그 삼각형의 변화를 추적해 가는 언어
의 위상기하학이라 할 수 있다.
청포도의 모양을 묘사한 다음 연을 보면 그
의미가 더욱 확실해 진다.「이 마을 전설이 주
저리 주저리 열리고 /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
알이 들어와 박혀 」에서 금세 눈에 띄는 것은
「전설」과「하늘」, 그리고「주저리주저리」와「
알알이」의 대구(對句)일 것이다.「주저리주저리
」는 포도송이의 선조성(線條性)과「전설」의 지
속적(持續的) 시간을 수식하고 있는 말이다. 포도는 줄줄이 열리는 그 연속성 때문에 예로부터 대(代)를 이
어가는 다산성(多産性)의 상징이 되어 왔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처녀들이 포도를 먹는 것을 망측하게 생각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알알이」라는 말은「주저리」의 반복어와 대조를 이루는 말로 파랗고 투명하고 무한한 구형의 하
늘을 압축해 놓은 공간성을 묘사한 것이다. 내 고장 칠월로 시작된 청포도는 어느덧 전설의 무궁한 시간과
하늘의 무한한 공간 속에 용해된「우주의 포도」로 심화되어 있다.
그 하늘의 꼭지점이 다시 바다로 변하고 전설의 옛 시간이 약속의 새 시간으로 뻗어간 것이 3연째의 시구
들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이다.
자연 그대로의 층위로 제시되었던 청포도의 삼각형이 우주와 일체화한 삼각형으로 심화되고 그것이 3 4연
에 오면 인간의 층위, 즉 사회와 역사의 층위로 가 삼각형의 구도가 바뀌어진 것이다. 이 새로운 삼각형에서
청포도가 있었던 곡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나」자신이다. 멀리 떨어져 있던 하늘과 아득한 전설
이 청포도로 들어와 익어가는 것처럼, 먼 바다에서 어렴풋한 약속을 한 청포입은 그 손님이 찾아옴으로써
「나」의 계절은 익어가는 것이다.
이와같은 삼각구조를 통해서 유추해 보면 지금까지 청포 입은 손님이 누구냐로 논란을 빚었던 일들이 참
으로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청포(靑袍) 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푸른 도포로 조선조 때 4품에서 6품
의 관원들이 입던 관복 이라고 적혀 있다. 그 사전적인 뜻풀이가 아무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평자
들은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많은 답안들을 만들었다. 심지어 그 중의 한 답안에는 「내 고장 칠월
을 양력으로 치면 8월이 되니까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고 바다에서 온 청포 입은 손님은 우리에게
광복을 가져다 준 미군 병사들」이라고 한 어느 국문학자의「예언설」까지 있다.
하늘과 전설이 청포도 속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처럼 청포 입은 손님은 내게로 오는 것이다. 그것을 우선
음운적 층위에서 보면「청포」는「청포도」와 음이 같다. 글자 하나가 틀릴뿐인 것이다. 그리고 색채 이미지
역시 같은 청색 계열이다.
이 시의 전체 기조색이 청색인 것이다. 하늘도 바다도 전설도 모두가 청포도와 같은 푸른 색조이므로 그
손님의 옷이 청포라는 것은 조금도 부자연스러울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청색은 흰 돛이나 마지막의 은쟁반,
그리고 모시수건 같은 백색 계열과 대응하는 중요한 색채적 이미지를 자아낸다.
이를테면 음성이나 영상으로 보면 왜 하필 청포인지 금세 납득이 간다. 다만 소리나 영상의 감각적 기
능과 어울리게 되는 관념(이미지)의 부분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관념을 분석하기 위
해서는 시의 구조를 결정하는 삼각형의 꼭지점들의 변화를 보면 된다. 마지막 연(聯)에 등장하는 삼각형의
구조를 앞의 것과 비교하는 청포 입은 사람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저절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에서 우리는「보는 포도」,「상상하는 포도」가 마지막에는「따먹는 포
도」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1의 삼각형은 내고장 칠월의 청포도이고, 제2
의 삼각형의 하늘과 전설로서의 우주적 청포도, 그리고 제3의 삼각형의 따먹는 청포도 .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의 마지막 시행을 놓고 생각해 보자. 공
간의 꼭지점은「마을→하늘→바다」에서「식탁→은쟁반」으로 응축되었다. 시간은 아득한 옛날의 전설에서「
마련해 두렴」으로 기다리고 예비하는 근(近)미래의 시간으로 수렴되었다. 그것은 이미 열리고 익어가는 시
간이 아니라, 먹는 것을 예비하는 종결의 시간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대상물의 꼭지점이 청포도 하나에서 그것을 먹는 나와 손님까지 셋이다. 최후 만찬의 식탁에
서 빵과 포도주를 먹으며 예수는 그것이 나의 피와 살 이라고 했다.
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은 곧 예수와 그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관념적인 메시지가 신체성(身體性)
을 갖고 살과 피로 화(化)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식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포도를 함께 먹는다는 것은
나와 손님이 하나의 신체성(身體性)을 획득한「우리」로서 일체화한다.
육사(陸史)는 그의 시『황혼』에서도 외로운 수녀(修女), 수인(囚人), 그리고 아프리카의 흑인들이나 아라
비아의 대상(隊商)들처럼 한 번도 보지 못한 지구 끝의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황혼의 골방을 몽상했다.
청포도를 먹는다는 것은 곧 하늘의 공간과 전설의 시간을 먹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제1의 자연삼각
형, 제2의 우주삼각형, 그리고 제3의 인간(사회, 역사)의 그 삼각형이 오버랩될 때 그의 시적 행위는 종결된
다. 그것이 육사(陸史)가「우리의 식탁」이라고 부르고 있는, 바로 모든 것이 일체화하는 그 종결의 장소이
다.
『황혼』에 있어서의 골방처럼 은쟁반의 작고 둥근, 그러나 눈부신 빛의 금속 위에 육사(陸史)는 인간과
자연과 우주의 모든 것을 하나로 담았다. 아니다. 마지막 시행들이「 좋으련」,「 마련해 두렴」의 원망(願
望) 종지형으로 끝나 있듯이 모든 것을 하나로 담으려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시란, 그리고 삶과 인간의 역사란 청포도를 함께 먹기 위해 마련하는「우리의 식탁」, 그리
고 그것이 한층 더 응축된 은쟁반을 예비해 두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몽상의 끝에 있는 것은
언제나 진솔하고 정갈한 다공질(多孔質)의 섬유, 그 모시수건이 아니겠는가.
「 군 말 」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
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
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뿐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름
조은 自由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밧지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잇너냐. 잇다
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긔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 시집 「님의 침묵」(회동서관刊 1926년)중에서
다시 읽는 한국시
〈8〉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韓龍雲의 「님의 침묵」 중 「군말」
만약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모르는 외국의 문학 독자가 아무 선입견 없이 「님의 침묵」을 읽는
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틀림없이 아름다운 연시(戀詩)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남성이 아니라 님을 향한
한 여인의 시시절절한 사랑을 노래한 사포의 서정시를 연상하게 될느지 모른다. 그러나 만해가 불교의 승려이
며 기미독립운동을 일으킨 애국지사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님의 침묵」을 사
랑의 시로서 읽으려 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연시 같으면서도 속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했던 사군가(思
君歌)의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 결과로 님은 님이 아니라 조국을 가리킨 것이며, 침묵은 이별이 아니라 그 조국을 잃은 식민지 상황을
의미한 것이라는 모범답안을 썼다. 그래서「아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는「님의 침묵」은 기미 독립운동의
좌절을 노래한 삼일절 노래가 되어버린다.
그런가 하면 또 만해의 님은 님이 아니라 니르바나의 마음을 현상화한 부처님이며, 그 침묵은 깨달음을 향
한 끝없는 구도(求道)의 길을 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시를 증도가(證道歌)의 하나로 바꿔버린다. 만해의
님은 수많은 비평서 속에서 이렇게 속(俗)과 성(聖)의 양극을 오가는 시계추가 된다.
그러나 정말「님의 침묵」은 기미독립선언문이나 혹은 불교 유신론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야 하는 것인지.
그에 대해서 만해 자신이 직접 대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시집「님의 침묵」의 첫머리에 실린「군말」이라는
서시(序詩)이다. 만해는 그 글에서 자기가 시의 키워드로 삼은 님 이란 말에 대하여 분명한 정의를 내리고 있
다. 그것인 바로「님만 님이 아니라 기리운 것은 다 님이다」라는 구절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구에 대해서 주
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만아니라」의 그 조사용법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님을 조국 또는 부처님으로
풀이해온 사람들은「님만 님이 아니라 」를「만」자를 빼고 그냥「님은 님이 아니라 」로 읽어온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님의 침묵」은 연시적(戀詩的) 요소가 전연 배제된 애국시 또는 종교시의 이데올
로기로서만 남게 된다. 하지만 만해는 분명히「군말」에서「님은 님이 아니라」라고 하지 않고「님만 님이 아
니라」라고 읊고 있다. 그가 말하는 님 속에는 일상적인 님[戀人]의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만」이라는 토씨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영어의 구문형식으로 대치해 보면 보다 명확히 할 구
있을 것이다. 만해의 님 은「not A but B」가 아니라,「not only A but B」로 A와 B는 배제적 관계가 아니라
포함적 관계다.
엄격하게 말해서「군말」에서 나오는 님 의 정의는 그야말로 만해 자신만의 정의가 아니라 한국말의 고전적
정의라고 하는 것이 옳다.
「님」이라는 한국말의 원형적 의미는 황진이의「정든 님」의 그 에로스적 사랑만이 아니라 형님, 어머님과
손님, 선생님이라고 할 때의 그 에필리아적 사랑 그리고 햇님 달님의 자연과 초월적인 존재의 하느님에 이르
는 아가페적인 사랑의 모든 대상과 관련된 것이다. 마음 속으로「기리는 것」이면 모두다「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님을 어느 한정된 대상에 국한시키려 하는 태도는 한국의 전통적인 말뜻은 물론 만해의 그 정의에
서도 어긋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용운의「님」은 한국말 그대로 모든 영역을 횡단하고 수용하는 열려진 의미로서의 님 이라는 것을 우리
는「군말」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
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석가의 님이 종교적
층위에 속하는 것이라면 칸트의 님은 사상적 층위에, 장미화의 님은 자연에, 그리고 마시니의 님은 정치적 층
위에 각기 위치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해는 이렇게「님」이란 말을 한가지 층위에 국한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이 종교, 사상, 정치, 자연의
모든 영역을 횡단하고 넘나드는 메타 언어였기 때문에 그 말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정녕 궁금하게 여겨야할 것은「님」이란 말의 대상보다는「기리운 것」이라는 그 사투리의 말뜻이다.
그것이 민족이든 중생이든 이성(異性)이든「기리워」하면 모두 다 님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도 님이 아닌 것이다. (「너에게도 님이 있더냐. 있다면 그것은 너의 그림자니라.」)
사람들은「기리움」을 간단히「그리움」의 사투리라고 풀이한다. 그렇게 아무일 없이 표준말로 옮길 수 있는
것이라면 만해는 시를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세 살때부터 사전이 아니라 삶을 통해 학습한 그 체험의 말은 시로써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기에 그는 독립
운동가요, 승려에서 그치지 않고 시를 써야만 했던 것이다.「님의 침묵」에서 님과 동격을 이루는 그「기리움
」은 사랑, 그리움, 찬미, 존경, 연민, 아쉬움 등 가지각색의 감정과 관념의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뭐냐. 만해가 애써 찾아서 갈고 닦아낸 님 이라는 그 귀중한 한국말 열려져 있는 말, 모듬 계
층과 그 영역을 횡단하는 말, 어느 대상에 가 붙든 그것을 끝없이 새롭게 변형시키고 심화시키는 말, 우리를
목마르게 하는 말, 침묵 속에서 노래를, 어둠 속에서 빛을, 그리고 타다 남은 재를 다시 기름이 되게 하는 기
적의 말 그 입체적인 시의 말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망치로 두들겨 펴서 납작하게 만
들어 놓았는가. 자유롭고 아름다운 한국말의 그 님 을 정치와 종교의 울 안에 가두어 가축처럼 길들이려 했는
가.「군말」에서 불교도인 만해는 연꽃 대신 장미화나 길잃은 양(羊)과 같은 기독교적 상징어를 사용하고 있으
며, 민족운동가인 그가 충무공의 이름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통일한 마시니의 이름을 거명(擧名)하고 있다. 예
수도 부처도 산신령도 한국에 오면 예수님 부처님 산신령님이 되듯이, 만해의 님 은 세계의 모든 것을 싸버릴
만큼 크고 넓기 때문이다.
님의 뜻보다는 아무래도 그「님」이 누구인지 궁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군말」의 맨 마지막 시행
을 정독(精讀)하면 될 것이다.「군말」의 구조는 석가, 칸트, 마시니로 시작하는「그들의 님」에서「너희들에게
도 님이 있더냐」의「너희들의 님」, 그리고「나는 해저문 벌판에 」로 끝맺음하고 있는「나」의 님으로 구성
되어 있다. 즉「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돌아갈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리워서 이 시(詩)를 쓴다」
의 마지막 대목에서 만해는 나의 님이 누구인지 명시(明示)하고 있다. 만해가 기리워하고 있는 대상은「돌아
갈 길을 잃은 어린 양」이다. 그리고 그 기리운 것들은 그에게 시를 쓰게 한다. 그에게 예불을 하게 하는 님
이 있고 독립선언문을 읽게 하는 님 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시를 쓰게 하는 또하나의 님 이 있었던 것이다.
늑대에 잡혀먹히는 양(羊)이 아니다. 길 잃은 어린 양들―미로 위에 서있는 어린 양들[無垢性]은 시를 갈망하
는 존재―자기자신까지를 포함한 세계의 독자들인 것이다.
언제나 미로는 시를 요구하고, 시는 또한 미로를 필요로 한다. 한국 고유의 님 이란 말리 있었기에 만해는
독립운동가로서의 목소리, 불교 승려로서의 목소리,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으로서의 목소
리를 한데 묶는 화성법을 일힐 수 있었다. 이 화성(和聲)을 단성(單聲)으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미로의
어린 양들의 이름으로 단죄(斷罪)해야 할 것이다.
님의 침묵
한 용 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 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
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난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오감도(烏瞰圖)
- 詩제1호 -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
兒孩와그러케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의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의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의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의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조선중앙일보」(1934년7월24일)
다시 읽는 한국시
〈9〉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이상「오감도」
「장
미 병들다」라는 블레이크의 유명한 시
를 60명의 대학생들에게 읽히고 그 시
가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를 물었다. 어느 학생
은 뱀에 유혹된 이브를 그린 것이라고 했고, 또
어느 학생은 처녀성의 상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답했다. 종교적 의미에서 에로티시즘에 이르기
까지 실로 그 해답들은 백인백색(百人百色)이었
지만, 단지 원예과 학생 하나만이 벌레먹은 장
미를 읊은 시 라고 대답했는 것이다. 이것은 캐
나다의 문예평론가 <노드롭 프라이>의 방송강
연을 통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이야기
이다.
시를 우유(寓喩)로 착각하는 오류는 이상(李
箱)과 같이 이른바 난해한 시를 읽으려고 하는
경우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오감도(烏
瞰圖)》 詩 제1호 를 놓고 지금까지 많은 평자
(評者)들이 소모전을 계속해 온 것도 바로 13
이란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려고 한 것인가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3인의 아이 를
예수의 최후 만찬과 결부시키기도 하고, 혹은
조선 13道의 숫자와 관련지어 풀이하기도 한다.
그리고 예외없이 그러한 논자들은 13 이란 숫
자의 우유적 의미(寓喩的意味)만 알면《오감도
(烏瞰圖)》 詩 제1호 는 단숨에 풀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상(李箱)의 시는
시가 아니라 난수표(亂數表)로, 그리고 비평가
는 비평가가 아니라 암호해독의 판단관으로 대
우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누구든지《오감도(烏瞰圖)》 詩 제1호 를 읽었을 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13
이라는 숫자보다는 시의 통념을 뒤엎는 여러 가지 양식의 일탈성(逸脫性), 그리고 시적 언어의 코드 위
반(違反) 같은 것들이다.
제목부터가 오감도 이다. 조감도(鳥瞰圖)를 오감도라고 한 것은 그만두더라도 어째서 시의 제목에 건
축 용어가 등장하고, 또 어째서 第一號, 第二號와 같은 비정적(非情的) 숫자 번호판이 달려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13 이라는 숫자도 그같은 일련의 낯선 시적 조사법의 하나로 인식된다.
질
조사법만이 아니라 시 전체가 건축 설계도처럼 직선이나 사각도형을 이루고 있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도형성은 더욱 강조되고, 모든 문자들은 매스게임을 하듯 기하학적으로 정렬되어 있
다. 숫자적이며 기하학적이고, 획일적이며 반복적인 그 도형을 볼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자연보다는 인공적인 것, 그리고 근대성(모더니티)이나 도시성 같은 인상일 것이다.
실
「여러 아이가 길을 달린다」와「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사이에는 또 어떤 의미, 어떤 느낌, 그
리고 어떤 인식의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대두할 것이다. 전자(前者)가 언어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라
면, 후자(後者)는 숫자적이고 개념적이다. 길/도로 , 달리다/질주하다 의 차이는 토착어 對 한자어, 구
어(口語) 對 문어(文語)만의 차이가 아니라 그 내포적인 뜻에서도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냥 길 이라
고 하면 시골의 오솔길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도로 라고 하면 최소한 직선으로 뻗친 근대적이고 인
공적인 도시의 길을 연상하게 된다. 인생은 나그네 길 이라는 전통적 비유에 익숙해 왔던 사람들은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 라는 진술에서 그와는 색다른 길의 은유적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
다. 어쩌면 그것은 저 감동적인 영화 포레스토 검프 와 같은 끝없는 질주와 맞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라는 말은 그냥 뛰다 달리다 라는 말과 다르다. 스피드, 관성, 맹목성과 같은 근대문명의 메커니
즘과 쉽게 손을 잡게 되는 말이다. 원래 도로라는 말 자체에 질주라는 공시적 의미가 잠재되어 있
다. 모든 도로는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달리도록 명령지어져 있다. 길 위에서 멈춰 서 있다는 것은 남
자의 경우라면 부랑자요, 여성인 경우에는 창녀와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도로의 질주라는 말에 속도를 더해주는 것이 바로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에서 시작하여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로 반복 나열되어 있는 시행들이다. 무서움이라는 말 때문에 질주란 말은
도주와 도피의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그러나 다시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라는 말이 등장함으로써
아이들을 달리게 하는 무서움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질주
는 쫓기고 쫓는 끝없는 무한 질주라는 것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
라도좋소 는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로 바뀌게 된다. 즉 무서운 아이가 곧 무서워
하는 아이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이상(李箱)의 시 속에서는 무서운 아이 와 무서워하는 아이 의 그
차이와 대립함이 말소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만이 아니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 라는 처
음의 진술 역시 뒤에 오면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라고 뒤집힌다. 골목길이나 뚫린 길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질주하는 이 도로 상황은 이상(李箱) 이후의 시대
에 유행했던 부조리 라고 불려지는 그 세계와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무서워하는 아이가 곧 무서운
아이이기도 하다는 진술은 사르트르의 타자(他者) 이론 과 같은 것이 된다. 즉, 내가 타자(他者)를 바라
본다는 것은 나의 시선 속에 타자(他者)를 구속하고 정복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타자(他者)가
나를 볼 때에는 나의 존재가 그의 시선 속에서 징발된다. 거미가 먹이를 녹여 먹듯이 남을 본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자신의 의식 속에 흡수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보고, 동시에 보임을 당한다. 즉, 우리는
무서워하는 아이이며 동시에 무서운 아이의 역할을 한꺼번에 하고 있는 것이다.
험실에서 실험관을 관찰하고 있듯 이상(李箱)은 부조리한 인간의 상황을 모순 그대로 관찰하고 기
술한다. 그것은 전30편으로 된 연작시의 제목을《오감도(烏瞰圖)》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원래
조감도(鳥瞰圖) 라는 말은 새가 높은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것과 같이 그려놓은 도형(圖形)을 가리
키는 말이다. 이상(李箱)은 바로 그 새 鳥 에서 획 하나를 떼내어 까마귀 烏 로 바꿔《오감도(烏瞰圖)》
라고 한 것이다. 아이를 아해(兒孩) 라고 한자말로 고쳐놓은 것처럼 굳은 살이 박혀버린 그 한자말에 새
로운 비유적 이미지가 살아나게 한 것이다. 그 순간 우리 눈앞에는 겨울날 고목나무 가지에 앉아 마을
전체를 굽어보고 있는 까마귀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음산하고 불길하며 흉칙한, 그리고 황량
한 불모의 풍경이 그 까마귀 밑에 펼쳐진다. 그 중의 하나가 도로를 질주하는 13인의 아이들 의 모습인
것이다.
詩
장미 병들다 란 시를 있는 뜻 그대로 벌레먹은 장미 라고 대답한 원예과 학생의 말이 의외로 블레
이크 의 시에 접근해 있었던 것처럼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 역시 마찬가지이다. 13인의 아이 를
예수의 최후 만찬에 모인 사도 혹은 조선 13道에 비겨 도민 대항 체육대회 같이 만들 것이 아니라, 있
는 그대로 읽으면 자연히 서로를 무서워하면서 무한질주를 하고 있는 도시의 우리들 모습이 보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13 이라는 숫자 역시 단순한 우유(寓喩)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기능적인 시어의 하나로
인식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숫자가 지닌 절대적이고 비정적(非情的) 이미지, 기하학적 도형 즉 文明의 鳥瞰圖 를 만
들어내는 숫자의 순차적 나열성) 시의 구조상, 十 의 정수에서 일단 끝나고 한 行을 비운 다음 十一 로 새로 시작한 것, 그리고 도 란 조사를 가 로 바 꾸어
놓은 것 등에서 이상(李箱)이 시도한 숫자의 순차적 나열성 을 찾아볼 수 있다.
, 그리고 까마귀와 조응 관계를 이룬 13 이란 숫자의 불길 불안한 이
미지 등에서 우리는《오감도(烏瞰圖)》에 내재된 복합적이고 다기능적인 시어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는 정답을 감추어 놓은 퀴즈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침(鍼)을 놓듯이 시 전체의 신경망(神經網) 그
리고 상호 유기적인 상관성에서 시적 언어의 혈(穴)을 찾는 작업이다.
이상(李箱)에 의해서 한국시는 처음으로 표현(表現)이 아니라 관찰(觀察)이 되었고, 느낌의 방식이
아니라 인식(認識)의 양식(樣式)으로 바뀐 것이다.
朴木月 「나그네」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상아탑」(1946. 4 )
다시 읽는 한국시
〈10〉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한국말 가운데 아름답게 들리는 말은 대개가
다 세음절로 되어 있다.거족적으로 치렀던 행
사 때마다 새롭게 등장한 조어들을 보면 알 수
있다.서울 올림픽의「호돌이」,대전 엑스포
의「꿈돌이」와「도우미」가 그렇다.유행가
가사나 시에서 사랑을 받아온「나그네」란 말
역시 세음절이다.더구나 유음인「ㄹ」자가 앞
뒤로 포개져 있어 음색도 곱고 부드럽다.
이 세음절의 미학을 최대한으로 살린 것이
박목월의「나그네」이다.그의 시에서는「나그
네」라는 말이「강나루」「밀밭길」과 같은 낱
말들과 세음절을 기저로한 리듬을 타고 그 말
의 아름다움이 더욱 증폭되어 있다.뿐만 아니
라 목월은「나그네」를 음악적 휴지부로 삼고
있다.「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
듯이 가는 나그네」의 시행에서 나그네라는 말
은 맨 마지막 자리에 못박혀 있다.그렇다. 나그네는 최종적인 울림으로 못박혀 있는 종지부다.
「있다」「있었다」「있을 것이다」와 같이 한국말의 종결어미는 모두「다」로 끝난다.그래서 현재
형이든 과거형이든,혹은 미래든 글의 끝에 이르면 언제나 다다다의 기관총 소리를 낸다.그러니
시의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 말운의 효과와 변화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시는 그만두고 산문이
라 할지라도 한국말로 글을 쓰다보면 누구나「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데 목월은 단조롭고 멋 없는「다」의 종결어미를 그야말로 깨끗하게 종결시켜 버린 것이다.「나
그네」의 시행은 총 10행이지만「다」로 끝나는 행은 단 한 개도 없다.「나그네」「삼백리」「저녁
놀」등 모두가 다 체언으로 끝나 있다.그래서 시각적 이미지만이 아니라 박목월의 나그네는「다」의
돌뿌리에 채이는 법 없이 달처럼 조용히 무중력 상태에서 떠서 흘러간다.
시의 음악성만이 아니다.강나루(강물)→밀밭길→술익는 마을로 이어져 가는 공간의 이미지는 남도
삼백리의 외줄기의 길로 이음새 없이 연결된다.그리고「타는 저녁놀」에서는 아침해가 떠서 지기까지
온종일 걸어가고 있는 나그네의 지속하고 있는 시간이 내일 모레로 순환하는 시간으로 이어져간다.그
러한 공간과 시간의 이음새를 보면 그것을 결코 산문적인「다」의 종결어로는 아우를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마을에서 마을로 황혼에서 황혼으로 끝없이 이동하고 지속하는 그 시간과 공간의 궤적(
토포로지)을 스냅숏으로 찍은 원거리 풍경….그러기 위해서는 초점거리는 무한대로 놓아야 하며 셔터
는 열려져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땅과 하늘을 나란히 놓은 비유법(juxtaposition)「구름에 달 가듯이」가
는 나그네의 모습이 떠오른다.밀밭이 구름이라면,나그네의 모습(둥근 머리)은 달인 것이다.그리고
달과 같은 나그네의 동작을 유포니(유쾌하고 듣기 좋은 소리)로 나타낸 것이「밀」「달」「길」「술
」「놀」「마을」과 같은 「ㄹ」자로 끝난 시어들이다.그래서「나그네」의 음운 조직은 곧바로 나그네
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시각적 이미지(구름에 달가듯)와 부합한다.나그네의 시적 리듬은 바로 나그네
가 길을 걷고 있는 도보의 리듬과 일치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시에 있어서의 음이나 이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의미의 요소이다.시에 있어서의
소리가「의미의 메아리」라면 그 이미지는「의미의 그림자」인 것이다.우리의 시선은 그 메아리와 그
림자를 가로질러 의미의 심장으로 향한다.그리고 나그네의 뜻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된다.본래 나그네
라는 말은「나간이」「나간 사람」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그러므로 일상적 차원에서 보면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나그네를 뜻하는 영어의 트러벨러(traveller)가 고통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교통이 발달한 오늘날이라 하더라도 나그네는「길고생」을 함유하고 있는 말인 것이다.하
물며 도보의 여행자,그리고 농경시대의 정주형 문화 속에서 살았던 나그네의 함축적 의미는 결코 긍정
적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시적 차원으로 보면 그 고통과 외로움과 물질적인 결핍마저도 새로운 의미로 역전된다.
산문적 의미로 보면 김삿갓은 거지이지만,시적 차원에 놓으면 사랑 받는 방랑 시인이 되는 것과 같다
.나그네는 집을 나간 가출자에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창조자가 된다.나그네의 한 발짝 한 발짝
은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풍경을 펼쳐가는 보행이다.운명과도 같은 지평의 둘레는 나그네의 보행에
의해서 변화하고 물질의 결핍은 오히려 가벼운 봇짐이 된다.멈추지 않는 것,소유하지 않는 것,모든
방향으로 열려진 도주로(스키조라인)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그네다.쟁기로 굳어버
린 흙을 뒤엎듯이 시인은 일상적 의미의 밭을 갈아 새흙을 들어낸다.의미의 경작자인 이 시인의 영토
에서는 모든 나그네들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다.그리고 그것은 아주 멀리 보인다.그것이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이며,그 걸음이 멈춰서는 곳이 저녁놀이 타는 술익는 마을이다.「술익는 마을
」과「저녁놀」,그리고「나그네」가 최초로 하나의 의미 단위로 합성된 것은 시인 조지훈의「완화삼」
에서였다.
그 시는 목월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었고 목월이 그에 화답하기 위해서 쓴「나그네」에 되풀이되어
나타난 것이「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는 그 시구이다.저작권을 두 시인이 공유하고 있는
이 유명한 시구는「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가 왜 시가 아닌가를 밝혀주는 시론의 좋은 예문이
될 것이다.동시에 시가 늘 음악적 상태를 동경하고 있으면서도 왜 음악이 되어서는 안되는가! 시가
항상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림이 되어서는 안되는가! 그리고 또 시는 어째서 의미를 창
조하면서도 어째서 철학이 되어서는 안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본보기이기도 하다.
「타는 저녁 놀」이 나그네와 결합되면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정지된 시간이 되어 그 시적 의미가
한층 더 강렬해지고,마을과 연결되면 술이 익어가는 평화로운 발효의 시간이 된다.그래서 저녁놀은
잔치날을 위해서 혹은 손님을 맞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정밀한 시간이 된다.그것은「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처럼 척늘어진 저녁놀」(T.S. 엘리어트)이 아니라 술에 붉게 취한 주막의 나그네와
농부의 얼굴과 같은 것이 된다.
「나그네」(인간)「저녁 놀」(시간)「술익는 마을」(공간)이「소리」와「이미지」와「의미
」의 세가지 요소로 융합한 연금술 속에서 한국말,한국 마을,그리고 고통스러운 나그네의 모습은 우
리가 한 번도 만져 보지 못한 신비한 광석으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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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 리듬과 향기 빼어난 우리말의 풍요로움/밀밭이‘구름’이라면 나그네의 모습은‘달’/밀달길술마을의「ㄹ」자
운율은 발걸음 리듬과 같아/인간(나그네)시간(저녁놀)공간(마을) 3요소의 신비한 결정
金光均 「外人村」
外人村
하이얀 暮色 속에 피어 있는
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驛燈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花園地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다.
외인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한 하늘에 걸려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조선중앙일보」(1935년 8월 6일)
다시 읽는 한국시
〈11〉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시인 김광균의 이름이나 외인촌 이라는 시를
모르는 사람들도 어쩌면 이 시구절만은 외우고
있을지 모른다. 귀로 듣는 종소리를 눈으로 보는
분수로 나타낸 이 비유는 지금 읽어도 참신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청각에서 시각으로 시를 혁명하
려던 30년대의 모더니스트들이 종소리에 파란 색
칠을 해놓은 이 대담한 비유를 가만히 놔두었을
리 없다. 모더니즘의 선교자였던 김기림은 말할
것도 없고, 시의 繪畵性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
을 둔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시론의 로고로 삼으
려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시구는 시각 이미지나
共感覺의 샘플로 인용되었을 뿐 시 전체의 구조
를 통해 본격적으로 검증된 적은 거의 없었다. 공
룡의 뼈나 발자귀는 그 생체의 구조와 관련되었
을 때만이 의미를 갖는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
른 종소리 는 외인촌 의 그 시 전체와 유기적인
연관을 지닐 때 비로소 제 생명의 모습을 드러내
게 될 것이다.
우선 분수 라는 말붙터 보자.
분수가 내포하고 있는 일차적인 意味素는 물 (水)이다. 그런데 외인촌에는 이와 관련된 바다, 시냇물, 물방
울과 같은 물의 물질적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마차가 사라지는 것까지도 그림 속으로…잠겨 간다 라고 표
현한다. 잠긴다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물체가 물속에 침몰하는 것을 뜻한다.
붉게 타는 노을 역시 불이 아니라 물과 관련되어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이다. 사라지는
것을 잠긴다 고 하고, 타오르는 것을 젖는다 고 한 것은 종소리를 분수(물)로 비유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외인촌의 풍경 전체와 그 공기는 수족관 처럼 투명하고 차갑고 조용하게 보인다.
그러나 김광균의 물의 물질성은 무거움을 상실한 가벼운 물, 상승하는 물, 그리고 수직의 공간성을 지닌 물
이다. 그것이 분수 의 분(噴) 으로 그 두번째의 의미소를 이루고 있는 솟구치다 (噴)이다. 외인촌 에는 …
전신주 위엔 …벤치 위엔 …어두운 수풀 위엔 …언덕 위엔 …지붕 위엔 등 위 라는 장소를 나타내
는 전치사만 해도 무려 다섯개나 등장한다. 그리고 직접 수직성을 나타내는 물질로는 산마루 전신주 갈
대밭 외인묘지 (비석들), 그리고 고탑(古塔)과 성교당(聖敎堂)을 들 수 있다. 마을 전체가 산협촌(山峽村)
으로 수직적 공간이다. 그러므로 날카로운 고탑처럼 언덕 위에 솟아있는… 의 구절은 분수의 수직적 상방적
이미지에 선행하는 것으로, 날카로운 솟아있는 의 수식어 등이 모두 그 높이와 수직성을 강조하고 있다.
분수 의 세번째 속성은 도시적 서구적 근대문명의 의미소이다. 폭포나 냇물이 자연의 물 이라고 한
다면, 분수는 인공(人工)의 물 도시의 물 이다. 그래서 외인촌의 마차 는 달구지가 아니라 프랑스 영화처
럼 파란 역등 을 달고 있으며, 산마룻길 에는 소나무가 아니라 전신주 가, 그리고 꽃은 노변의 야생화가
아니라 화원지 와 벤치 위의 흩어진 꽃다발 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외인촌의 그 성교당 종소리는 자연히 산
사(山寺)의 범종 소리와 그 이미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낙산사나 통도사의 종소리를 들으며 누가 분수처
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라고 할 것인가.
이러한 분수의 물질적, 공간적, 문명적 이미지들이야말로 우리의 전통적인 시골마을과 색다른 외인촌의 시
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중심축인 것이다.
그러나 솟구치는 분수의 이미지는 흩어지는 이라는 용언에 의해서 다시 역동적 이미지의 복합성을 띠게
된다. 울리는 종소리는 솟구쳐 오르는 분수요, 여운 속에서 사라지는 종소리는 흩어지는 분수의 물방울들이다.
솟구치다 (噴)와 흩어지다 (散)의 모순을 지닌 분수의 역동적 이미지는 외인촌 전체의 구조에 간여한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에 앞서 우리는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다 라는 구절을 읽을 수가 있다. 소녀들의 웃음소리 가 시각화하여 꽃다발과 같이
흩어져 있는 것이다. 소녀들이 한낮에 남기고 간 그 웃음소리는 종소리의 사라진 여운보다도 더 들을 수 없는
부재(不在)의 음향이다. 그렇기 때문에 흩어지다 의 속성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흩어진 꽃다발의 꽃잎은 흩어지는 분수의 물방울과 같고, 시들어가는 꽃다발은 사라져가는 종소리의 여운
과 같다. 그리고 벤치 위에는 은 성교당의 지붕 위엔 과 대구를 이룬다. 그렇다면 벤치는 바로 옆으로 누운
성교당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수직의 높이를 잃고 수평화할수록 흩어짐 의 역동적 이미지는 강화된다.
분수의 마지막 의미소는 푸른 종소리 의 그 푸른 빛깔이다. 외인촌의 시적 공간은 하이얀 모색으로… 로
시작하여 파…란 역등 , 그리고 새빨간 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푸른 종소리로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그
푸른 종소리의 푸른 빛 은 분수(물)의 팔레트에서 선택된 물감의 하나일 뿐 외인촌은 먹으로 그려진 동양
산수화 같은 모노크롬과 강력한 대조를 이루는 다채색의 회화공간인 것이다. (그 자신이 외인촌의 풍경을 그
림 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가 연출해 내는 외인촌 의 그 시적 공간은 한국인들이 전통 공간 속
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서구문명 즉 모더니티라는 2차원의 공간인 것이다. 그러니까 분수처럼 흩어
지는 푸른 종소리 의 그 외인촌 은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회색 범종소리 의 우리들 내부의 마을 (內人村)에 의해
차이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인촌은 파리나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바로 한국의 시골속으로 들어와 있는 서양
인들의 마을이므로 外-內 , 성교당/산사 의 그 공간적 대립항 역시 서로 오버랩 되어질 수밖에 없다. 제목은
외인촌 인데 본문 속에서는 그것이 산협촌 이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 은 바로 뒤에 나오
는 성교당의 그 종소리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대단히 중요한 시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공백
한 하늘에 걸려있는 촌락의 시계 에 대해서는 전연 언급이 없었다. 촌락의 시계와 야윈 손이 무엇인지, 그것이 가
리키는 열시가 밤 열신지 열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조각 달(야윈 손)의 위치인지조차 검증되지 않은 채 분수처
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만을 공염불처럼 외웠다. 우리 촌락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 외인촌의 종소리가
알리는 그 시간의 시차(時差)…. 그 시차 적응의 긴장 속에 김광균의 진정한 시적 공간이 숨어있는 것이다.
분수처럼… 의 그 구절이 모더니즘 이론의 표본이 된 것처럼 이제 외인촌 한 편의 시는 왜 우리가 지금 다
시 한국시를 읽어야 하는 지를 밝혀주는 좋은 본보기로 남게 될 것이다. <이어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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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국 정서 를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 / 웃음-종소리 를 꽃다발-분수 로 시각화 / 분수처럼 흩어지는… 은 30년대 모더니즘의 표본
/ 시계 여윈 손 열시 에 숨겨진 의미는….
尹東柱「自畵像」
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1939년 9월
다시 읽는 한국시
〈12〉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노래한 작푸믄 옛날부터 있어 왔다. 냇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서 열렬히 사
랑을 했다는 나르시스(수선화)의 희랍 신화가 그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향가에도 구리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죽은 자기 짝인줄로만 알고 부리로 쪼며 그리워하다가 죽었다는 앵무가 가 있었다고 전한다.
윤동주의 자화상 역시 그와같은 경상(鏡像) 모티브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우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나르시스 신화나 앵무가 의 경우처럼 완전히 남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점
에서도 똑같다. 자화상 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으면서도 우물속에 비친 그의 모습을 나 가 아니라 한
사나이 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映像을 하나의 실체로 생각하고 있는 것까지 같다. 윤
동주는 마치 그 사나이 가 우물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
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윤동주의 자화상 은 나르시스의 얼굴과 전혀 다른 이미지로 우리 앞에 나타나 있다. 바슐라
르 는 물과 몽상 에서 나르시스의 신화를 낳은 그 물의 물질적 이미지를 밝은 물, 봄의 물과 흐르는
물, 나르시시즘의 객관적 조건, 사랑하는 물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거울 속에 익사한 사람까
지 많았다 라는 세르나 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사람의 얼굴을 반영하는 물과 거울을 같은 이미지로
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자화상 의 물질적 이미지는 바슐라르 가 제시한 그것들과는 정반대이
다. 밝은 물 은 어두운 물 로, 그리고 흐르는 물 이라고 한 것은 고여 있는 물 로 뒤바뀌어 있는 것
이다. 그리고 나르시시즘의 객관적 조건 은 오히려 주관적 행동 으로 현시되고, 사랑의 물 은 미움
의 물 로 설정된다.
그러한 차이는 윤동주의 자화상 이 나르시스와 같은 시냇물 이 아니라 (혹은 거울이 아니라) 우물
물 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바꾸면 윤동주의 자화상 읽기에서 가장 중심적인 코드를 이루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우물 이라는 이야기다.
소설 같으면 발단부라고 할 수 있는 자화상 의 첫행은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
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로 시작된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우물물의 물질적 이미지는 얼음이
막 풀린 봄의 냇물가에 피어나는 수선화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우물물 속에 갇
힌 영상은 오히려 짝잃은 앵무새의 새장 속에 넣어준 구리거울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기의 우
물물은 임의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거울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윤동주가 설정한 우물물은 보통 우물물
로 환원할 수 없는 고정된 장소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우물은 들판과 산의 境界領域인 산모퉁이 를 돌아서 가야만 하는 곳에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일상적 삶의 장소인 마을이나 도시에 있는 우물이 아니라 논가 외딴 곳의 孤立領域에 있는
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홀로 찾아가서 들여다 보려는 의지와 행동이 없으면 그 우물도, 우물 속의
나 의 모습과도 만나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물물은 흐르는 시냇물과는 대조적이다. 그것은 한곳에 고여 있으며, 무거움과 어두움을 간직한 물이
다. 단절과 비연속적인 이 물을 더욱 차별화하고 강화하고 있는 것이 산모퉁이라는 境界領域이며, 논가
의 외딴 곳이라는 孤立領域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우물은 경계와 소외(고립)의 공간만이 아니라 地下에 있으면서도 天上界에 속해 있는 역
설의 물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거울은 좌우가 뒤바뀐 鏡像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비해서
우물은 상하가 뒤바뀐 假想空間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화상 의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 이 있다. 달,
구름, 바람 그리고 가을은 모두 하늘에 속해 있는 것으로 垂直 上方向에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우물은 垂直
下方向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 깊은 바닥에 비쳐있는 영상은 垂直 上方向에 있는 하늘인 것이다.
높은 것일수록 깊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우물물은 동시에 밝은 것을 어둠에 의해서 보여주는 의미
론적 역설도 함께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물속에 비친 하늘은 밤하늘이며, 그 계절 역시 가을로 되어
있다. 태양이 있는 대낮의 봄하늘과는 상반된다. 시냇물은 공자도 탄식했던 것처럼 주야로 쉬지 않고 흘
러 사라진다. 그러나 그러한 유동적인 물을 한 곳에 가두어 고이도록 한 것이 우물물이다. 그것처럼 윤
동주의 우물속에 비치는 달, 구름, 바람 역시도 그 의미의 공통적인 요소는 다같이 물처럼 흐르는 것이
지만 한 공간의 프레임 안에 유폐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 우물속에 비쳐 있는 사나이 로서 발견되는 나 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그 우물물의 물질적
이미지를 통해서 쉽게 그 코드를 해독할 수 있게 된다. 우물처럼 심층적 의식속에 가라앉아 있는 나, 그
리고 시간이 정지된 원초적인 어둠의 공간인 하늘을 바닥으로 디디고 있는 나… 그것은 모태 속에 있는
나, 어둡고 무거운 생명의 양수 속에 빠져 있던 나의 映像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경계적-고립적-심층적 공간인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한 사나이 … 모태의 우물물인 그 양수 속에서
살고 있는 原人間으로서의 그 나 는 누구인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나 인가. 우리가 흔히 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 는 라캉 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象徵界에 속해 있는 나 인 것이다. 상징계 속
의 나 란 바로 언어로 인식되는 나 ,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제도나 법규-규범, 그리고 외부에
서 작용하는 온갖 記號作用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 인 것이다.
그러한 나 는 어머니의 몸 의 일부로서 모태 속에 있었던 現實界의 나 와는 아주 딴판의 나 인 것이
다. 그러나 상징계 속에 있는 우리는 언어 이전의 그 현실계 속의 나 와는 만날 수가 없다. 이 현실계와 상
징계 사이에 존재하는 나 가 바로 우물 속의 사나이로 드러나고 있는 鏡像 속의 나 인 것이다.
라캉 의 이론을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것보다 시의 텍스트 속의 두 나 의 만남과 헤어짐을 보면 그
관계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나 는 우물을 찾아가 의식적으로 들여다 본다. 그 행위는 바
로 모태 속의 나 와 만나서 그것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행위와 의지를 나타낸다. 그러나 나 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기를 그만두고 떠나버린다. 왜냐하면 反나르시스 행위로서 나 는 그 사나이 를 미워하
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볼 때에는 미움이 憐憫(가엾음)으로 바뀌고, 다시 떠나면 그리움으로
변한다. 이러한 미움과 사랑의 앰비밸런스(兩價性)로서의 나 (자신의 원모습)는 결국 추억의 나 , 부재
하는 나 로서 정착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체가 아닌 그림자 로서의 나 인 것이다. 일상적인 나
와 원초적인 나 와의 끝없는 갈등, 그러면서도 그것과 결합하려는 나르시스와 反나르시스의 드라마가
윤동주의 시를 탄생시키는 자화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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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의 나 와 원초적 나 의 갈등 / 산골 논가 우물 은 일상서 떨어져 있음을 강조 / 구름-바람-가을
하늘 과 달밤의 우물 역설의 조화 / 나르시스의 냇물에 비친 얼굴 이미지와 전혀 달라.
다시 읽는 한국시
〈13〉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1941년 11월 20일)
윤동주「序詩」
개화이전의 우리 조상들은 성조기를 화기(花
旗)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그 별 모양을 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고구려 벽화의 성좌도(星座
圖)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원래 한국의 별은
단추처럼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
이들이 먹는 별사탕에서 장군들의 계급장에 이
르기까지 그 별표 모양은 우리에게도 아주 친
숙해졌지만 그것이 인체(人體)를 도안화한 것
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생소한 것같다. 펜터그
램(☆표)은 위로 솟은 머리와 수평으로 올린
두 손, 그리고 양쪽으로 벌린 두 다리의 모습
을 표시한 것으로 人體와 天體(별)를 동일시하
고자 한 인간이 비원을 담고 있다. 그러고 보면 별표 밑에는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 싱앙이나
별 하나 나 하나 라고 노래한 우리 민요의 정서와도 통하는 구석이 있다.
윤동주의 별 (시) 읽기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해 온 틀은 기독교적 사상이 아니면 일제에 대한 저
항시인이었지만, 실제로 그 서시 나 별 헤는 밤 에 나타난 것들은 그보다 훨씬 고태형(古態形)을 지닌
별이다. 서시 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의 인유(引喩)로부터 시작하고 있
는 것만 해도 그렇다. 고전을 들출 것도 없이 그것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무엇을 다짐하거나 자신의
결백성을 주장할 때 곧잘 쓰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 하늘은 특정한 종교성보다는 소박한 민간신앙의 경
천(敬天)사상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神보다도 하늘-땅으로 대응해 온 신화적 공간의 무대에 가
까운 그 하늘인 것이다.
그러므로 1-2행의 하늘 다음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 했다 의 3-4행이 짝을 이룬다.
하늘은 땅, 우러러 보다는 굽어보다 로 그 공간을 교체하면 잎새에 이는 바람이 출현하게 된다. 그래
서 하늘을 우러를 때의 그 무구한 마음(부끄러움이 없기를)이 땅을 향할 때에는 그 잎새에 이는 바람을
보고 괴로워하는 마음으로 변한다.
그리고 다시 땅에서 하늘로 공간을 바꾸면 그 잎새는 별이 되고 그 괴로움 역시 별을 노래하는 마음
으로 반전된다. 이렇게 하늘-땅으로 교체되는 윤동주의 시선과 마음은 마치 정교한 대위법(對位法)으로
구성된 음악처럼 하늘의 별 과 땅의 잎새 를 완벽하게 연주해 낸다.
그래서 하늘 은 별 로 응축되고, 잎새 는 모든 죽어가는 것 들로 대치되면서 별을 노래하는 마
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5-6행)라는 새로운 하늘-땅의 관계가 나타난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괴로워했다 가 사랑해야지 로 바뀐다. 잎새 와 모든 죽어가는 것 들은 동격인데도 불구하
고 그에 대한 감정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역전되어 있는 것이다. 괴로움이 사랑으로 바뀌는 드라마는 지
금까지 하늘과 땅, 별과 잎새의 대립항을 이룬 병렬구조를 통사축의 사슬관계로 눈을 돌리게 한다. 즉
지금까지 관계없이 보였던 ①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다 ②풀잎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다 ③별을
노래하다 ④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다 가 일련의 계기성(繼起性)을 지닌 사슬구조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시 의 공간구조가 하늘, 땅, 바람의 삼원구조로 되어 있듯이 그 시간구조 역시 과거(1-4행
괴로워했다 ), 미래(5-8행 사랑해야지 걸어가야겠다 ), 그리고 현재(9행 스치운다 )로 삼등분된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7-8행)는 직설적인 산문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길 은 바로 서시 의 병렬구조와 통사구조를 결정짓는 중요한 매개항으로
공간(하늘-땅)과 시간(어제-내일)을 통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은 공간에 속해 있지만 화살표와 같이 방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성
을 표시하기도 한다. 나에게 주어진 길 이라고 할 때는 과거의 시간을 나타내지만 걸어가야겠다 라고
할 때의 그 길은 사랑해야지 와 마찬가지로 의지와 행동을 내포하고 있는 미래의 시간으로 출현한다.
그 길은 공간성으로 볼 때에는 땅(잎새)에서 하늘(별)로 오르는 언덕길 같은 것이 될 것이며, 시간성
으로 볼 때에는 과거(괴로움)에서 미래(사랑해야지)로 향하는 그 도상(途上)의 현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서시 는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로 끝맺고 있다. 일행으로 단독 연(聯)을 이루고
있는 이 시행은 본문으로부터 외롭게 떨어져 나가 앉은 섬처럼 보인다. 앞의 시들이 과거나 미래형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서 이 마지막 연(聯)만이 스치운다 로 현재형이다. 그냥 현재가 아니라 오늘밤에도
라는 도 의 조사가 의미하듯이 그것은 끝없이 반복하고 있는 오늘 인 것이다. 지금 나의 눈앞에 있는
것은 밤과 바람, 그리고 별이다. 공교롭게도 모두가 ㅂ 음으로 시작되어 있는 이 세가지 단어들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로 얽혀있다.
어둠과 빛은 대립된 개념이지만 별빛은 밤의 어둠없이는 빛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동전의 양면처
럼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 밀착되어 있다. 그리고 별빛과 결합된 어둠은 부정축에서 긍정축으로 그 의
미의 화학변화를 일읕키기도 한다.
바람 역시 그렇다. 땅의 잎새와 하늘의 별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접촉할 수가 없지만, 그
단절을 메워주는 것이 바로 그 바람이다. 풀잎에 이는 바람은 저 무한한 높이의 별들을 스치는 바람이
기도 한 것이다. 일다 와 스치다 라는 한국말이 이렇게도 절묘하게 어울린 예를 우리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밤을 통해서 별을 만나듯 바람을 통해서 풀잎은 별과 만난다. 하늘과 땅사이를 매개하고 있는
바람은 길 과도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그것은 소멸의 잎새와 불멸의 별 사이의 바람부는 공간, 그리
고 끝없이 되풀이 되는 오늘 이라는 그 도상성(途上性)이다. 하지만 괴로워하다 가 노래하다 로, 노래
하다 가 사랑하다 로, 그리고 사랑하다 가 걷다 (실천하다)로 바뀌어가는 행동은 별과의 스침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별은 바람과 밤의 부정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들려주는 낮은음자리표이며 지상적인 언어의
네가를 반전시키는 감도높은 인화지인 것이다.
만약 윤동주의 별을 일제에 대한 저항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잎새 는 일제 식민
지 치하에서 고통받고 있는 한국민족이 될 것이고, 바람과 그 밤은 일제의 압제(壓制)가 될 것이다. 그
리고 그 별은 광복의 별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죽어가는 것들 에 대한 사랑은 민족애(民族愛)로 축소
되고 만다.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말 역시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맹세로 들린다.
반대로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보면 잎새와 모든 죽어가는 것 들은 원죄를 지은 모털(Mortal)로서의
인간이 되고 그 안에는 일제 관헌들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사랑해야지 라는 말은 기독교의 박애(博愛) 정신과 직결되고 그 길 역시 신앙의 길이 된다.
그 결과로 종교와 정치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별을 만들어 내고 만다. 그 어느 시각으로 보아도 우
리가 서시 에서 읽는 그 별 이야기와는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인체의 모양이 그대로 빛나는
천체(별)의 모양과 하나가 되는 펜터그램이 그 도형처럼 작은 잎새들이 하늘의 별자리가 되어 빛나는
신화의 마당에서는 그런 모순들이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그 서시 는 정치론이나 종교론이 아니라 고통에서 사랑을, 그리고 어둠에서 빛을 탄생시키는
희한한 시의 마술… 별을 노래하는 마음 의 시론(詩論)이 되는 것이다. <이어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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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0.01(화) 조선일보 문학의 해 연중시리즈 >
◎ 어둠에서 빛을 탄생시키는 詩의 마술 / 정치-종교 초월… 별을 노래하는 마음 / 소박한 敬天사상 깃든 하늘 / 길 은 공간
과 시간을 통합하고 / 바람은 잎새와 별의 단절을 메워.
다시 읽는 한국시
〈14〉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김소월「엄마야 누나야」
문학의 해를 맞아 한국인의 정서와 그 정신의 원풍경을 찾기 위한 특별기획「이어령의 다시 읽
는 한국시」를 주간연재 합니다.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우리 민족이 애송해온 명시를 골라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하고 재음
미케 하는 문학 에세이로,유명 화가들의 원색 작품을 함께 실어 한국인의 진한 정서를 맛볼 수
있는 시화전으로 꾸밀 것입니다.첫회는 우리나라 서정시의 대표적인 시인 김소월의「엄마야 누나
야」를 선정했습니다.〈편집자주〉
가난한 나무꾼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날 나무에 치인 요정을 도와준 그는 산신령으로부터 세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뜻밖의 행운
을 얻게 된다.나무꾼은 아내와 상의해서 결정하겠다고 하고 급히 산에서 내려온다.그러나 그들에게
는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서 해가 저물도록 세가지 소원을 정하지 못
하고 있었다.그때 마침 이웃집에서 순대굽는 냄새가 풍겨오자 아내는 무심껏 순대하나만 먹었으면 좋
겠다고 말한다.그러자 순대 한 대가 하늘에서 떨어진다.화가 난 나무꾼은 아내를 향해서『평생 그놈
의 순대를 코에다 달고 살라』고 욕을 한다.이번에는 순대가 아내의 코에가 붙었다.이렇게 되어 하
나밖에 남지 않은 그 소원은 그 순대가 아내의 코에서 떨어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결국 그들이 산신
령으로부터 얻게된 것은 먹을 수조차 없는 순대 하나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현실욕망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데 곧잘 인용되어온 유명한 전래동화이
다.크든 작든 우리가 현실 속에서 추구하고 있는 욕망 그리고 그 결과로 얻어지는 산물이란 대개가
다 이 동화 속에 나오는 허망한 순대와 다를 것이 없다.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그 뻔한 이야기
의 되풀이가 아니라 그 뒤 나무꾼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그 속편이다.만약 그 가난한 나무꾼이 그뒤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속편은 동화가 아니라 시로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겠는가.동
요와도 같은 김소월의 시『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를 읽어보면 그 같은 상상이 결코 비약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지 모른다.
그렇다.『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의 그 시구는 손 안에 싸늘하게 식은 순대 하나를 들고 서 있는
나무꾼의 새로운 소원처럼 들린다.『살자』라는 한국말처럼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과 치열한 의지를
나타내는 말도 드물 것이다.구애를 할 때 한국 사람은 서양 사람들처럼『아이 러브 유』라고는 하지
않는다.그냥 『살자』라고 말한다.그리고 한국인에게 있어서 어떻게 사느냐하는 삶의 문제는 바로
어디에서 사느냐의 삶의 장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청산에 살어리랐다』의 고려가요와『서울에서
살렵니다』의 오늘의 대중가요에는 천년 이상의 시차가 있지만 삶의 욕망을 공간으로 표현해 주는 그
방식은 달라진 것이 없다.이렇게『살자』라는 말 속에는『누구』와『어디』라는『인간』과『공간』의
두 욕망이 숨어 있다.더구나『강변에 살자』가 아니라 처격조사『에』마저 빼어 버려『강변살자』라고
한 이 시구는 하나의 공간이 삶 그 자체의 목적으로 나타나 있다.욕망은 결핍과 부재에서 나온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라는 말은 곧 화자가 현재 강변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는 말
이기도 하다.말하자면 강변의 자연 공간과는 정반대인 문명 공간일 것이며,동시에 그것은『엄마 누나
』와 대립되는『아빠 형님』의 근육질의 남성 공간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엄마야 누나야』라는 말투에서 드러나 있듯이 그 욕망의 주체자는 어린 아이로 되어
있지만 그 진짜 주체자는 바로 이 시를 쓴 시인 김소월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그러니까 이 시의 특성
은 어른이 어린시절의 시점을 통해서 즉 미래의 시간(살자라는 미래의 바람)을 과거의 시간을 기점으
로해서 말하고 있다는 데 있다.강변이 현실 공간이 아니듯이 화자로서의 어린이 또한 현실의 주체자가
아니다.그러고 보면 엄마와 누나 그리고 강변은 말할 것도 없고 살자라고 말하는 욕망의 주체자마저도
부존한다.
이 부재하는 욕망의 공간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하는 것.그것이 시인의 특권인 이미지라는 힘이다.
거기에서『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가 탄생된다.여기의 뜰이 전방성과
수평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뒷문밖에는』이라는 대구에 의해서 명확히 드러난다.즉 뜰앞에는 강
물이 흐르고 뒷문 밖에는 산이 솟아 있다.앞과 뒤 수평적인 것과 수직적인 것 그리고『뜰』은 열려져
있는 세계를 그리고 뒷『문』밖은 닫혀져 있는 세상을 보여 준다.그러한 이항적 대립을 더욱 첨예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금모래 빛』과『갈잎의 노래』의 대조이다.『반짝이는』의 의태어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뜰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모래는 시각적인 것이다.그래서 모래는 금모래가 되고 빛이 된다.또
한 모래의 그 물질적 이미지의 뒤에는 태양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뒷문 밖 산을 덮고 있는 것은 모래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이파리들이다.그리고 그것은『금모
래빛』의 빛과는 달리『갈잎의 노래』라고 되어 있어 청각적인 것을 나타낸다.앞뒤로 분할되어 있던
공간은『빛』과『노래』의 시각과 청각의 감각 공간으로 대응관계를 띠게 된다.모래에서 태양빛을 느
꼈던 사람들은 이제『갈잎의 노래』에서는 숨어 있던 바람소리를 듣게 된다.그래서『반짝이는』의 의
태어와 짝을 이루고 있는『살랑이는』갈잎의 의성어마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앞과 뒤,개방과 폐쇄,무기물(모래)과 유기물(이파리), 수평성과 수직성(강과 산)그리고 시각
과 청각…음악의 대위법처럼 시의 병렬법(패러랠리즘)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간,대체 그 살고 싶은
그 공간이란 어떤 것인가.20여자의 이 짧은 시구 안에 상감되어 있는 그 공간은 산의 부동성과 강물
의 유동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저 한국 산수화의 공간,뒤에는 청산을 지고 앞에는 강물을 끌어
안고 있는 초가삼간,몇천년 동안 한국인의 마음에 깊숙이 각인되어 온 그 삶의 원풍경인 것이다.그것
은 분명 엄마와 누나라는 말로 상징되는 존재의 그 시원적인 모태 공간이다.그리고 그것은 모든 경계
를 나타내는 중간 공간이기도 하다.강변에 있는 모래는 땅과 물의 중간적인 물질이 아닌가.모래는
한 알 한 알이 고체이면서도 물처럼 흐르는 유체적 성질을 갖고 있지 않는가.
김소월은 우리에게 산수화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아버지와 형님의 남성의 생존공간-빼앗고 피흘리
는 경쟁과 금모래 빛이 아니라 네온사인의 빛이 휘황한 쾌락의 문명공간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다.『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고 되풀이 할수록 자동차에 치이며 살아가는 문명의 공해에 살아가
고 있는 현존공간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게 된다.소월의 시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존하는 아버
지 형님들의 문명적인 공간과 엄마와 누나의 부재하는 자연 공간의 그 틈사이 강변의 모래와도 같은
경계의 그 문지방 위의 긴장 속에서 탄생되고 있는 것이다.<이어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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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시의 새로운 해석「엄마야 누나야」
◎이어녕교수의 ‘에세이 시화전’/앞강물과 뒷산… 평화로운‘이상향’노래/공해찌든 문명공간 벗어나고 싶은 의지/20
여자 시구에「음악적 대위법」아로새겨/‘뜰’은 열린 세계‘뒷문’은 닫힌 세상 형상화/‘금모래빛’‘갈잎의 노래’
시각청각 대응관계 뚜렷
다시 읽는 한국시
〈15〉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개벽(開闢) 1922년 7월 序詩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김소월「진달래꽃」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시.그러나 가장
잘못 읽혀져 온 시-그것이 바로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다.거의 모든 사람들은「진달래
꽃」이 이별을 노래한 시라고만 생각해왔으며
심지어는 대학입시 국어 문제에서도 그렇게
써야만 정답이 되었다.하지만「나 보기가 역
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 우
리다」라는 그 첫행 하나만 조심스럽게 읽어
봐도 그것이 결코 이별만을 노래한 단순한 시
가 아니라는 것을 간단히 알 수가 있다.왜
냐하면「가실 때에는…」「…드리우리다」와
같은 말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듯이 이 시는
미래 추정형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영문
같았으면「If」로 시작되는 가정법과 의지
미래형으로 서술되었을 문장이다.이 시 전체
의 서술어는「…드리우리다」「…뿌리우리다
」「…옵소서」「…흘리우리다」로 전문에 모
두 의지나 바람을 나타내는 미래의 시제로 되
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 의미로 보면 지금 님은 자기를 역겨워하지도 않으며 떠난 것도 아니다.오히려
그들은 지금 이별은커녕 열렬히 사랑을 하고 있는 중임을 알 수가 있다.그런데도 이 시를 한국 이별가
의 전형으로 읽어온 것은 미래추정형으로 된「진달래꽃」의 시제를 무시하고 그것을 현재나 과거형으로
진술한 이별가와 동일하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고려때의 가요「가시리」에서 시작하여「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라는「아리랑」의 민요에 이르기까
지 이별을 노래한 한국시들은 백이면 백 이별의 그 정황을 과거형이나 현재형으로 진술해왔다.오직 김
소월의「진달래꽃」만이 이별의 시제가 미래추정형으로 되어 있고 시 전체가「만약」이라는 가정을 전
제로 해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진달래꽃」의 시적 의미를 결정짓는 것.그리고 그것이 다른 시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인 요소는 바로 이같은 시의 시제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가령 미래추정형의 시제를 실제 일어났
던 과거형으로 바꿔서「나보기가 역겨워 가신 그대를 말없이 고이 보내 드렸었지요」로 고쳐보면 어떻
게 될 것인가.그것은 이미 소월의 진달래꽃과는 전혀 다른 시가 되고 말 것이다.그렇기 때문에「진달
래꽃」을 이별의 노래라고 생각한다는 것은「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은…」이라는 옛가요를 듣고 그
것이 백만장자의 노래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시 음치에 속하는 일이다.그같은 오독이「진달래꽃」을
읽는 시의 재미와 그 창조적인 의미를 얼마나 무참히 파괴해버렸는가는 췌언할 필요가 없다.그러한
오독으로 인해서「고이보내 드리 우리다」나「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와 같은 시의 역설이 한국 여
인의 부덕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급기야는 이 시를 명심보감이나 양반집 내훈의 대역에 오르도록 했다.
자기를 역겹다고 버린 님을 원망은커녕 꽃까지 뿌려주겠다는 인심좋은 한국 여인의 관용이,그리고
눈물조차 흘리지 않겠다는 극기의 그 여인상이「진달래꽃」의 메시지였다면 그 시는 물론이고「진달래
꽃」의 이미지조차도 우스워진다.그렇다.그런 메시지에 어울리는 꽃이라면 그것은 저 유교적 이념의
등록상표인「국화」요「매화」일 것이다.
「진달래꽃」은 결코 점잖은 꽃,자기 억제의 꽃이라고는 할 수 없다.그것은 울타리 안에서 길들여
진 가축화한 완상용 꽃이 아니다.오히려 겨우내내 야산의 어느 바위틈이나 벼랑가에 숨어 있다가 봄과
함께 분출한 춘정을 주체할 바 모르는 야속(野屬)의 꽃인 것이다.더구나 영변 약산에 피는 진달래꽃은
그 색깔이 짙기로 이름나 있다.온 산 전체를 온통 불태우는 꽃으로, 신윤복의 그림「연소 답청」에서
보듯 남자들과 나귀 타고 산행을 하는 기녀들의 머리에 꽂았을 때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인 것이다.그런
진달래가 이별의 슬픔을 억제하고 너그러운 부덕을 상징하는 자리에 등장하는 꽃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유교사회에 있어 진달래꽃은 그 흔한 화조병풍이나 화투장에서마저도 멀찌감치 물러나 앉은
반문화적 꽃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째서「진달래꽃」이 어둡고 청승맞은 4 4조의 우수율이 아니라 밝고 경쾌하
며 조금은 까불까불한 느낌조차 주는 7 5조의 기수율로 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그것은 이별가의
침통한 가락이 아니다.약간은 수줍게 그러면서도 철없이 불타오르는「진달래꽃」같은 사랑의 언어들,
때로는 장난기마저 깃든 천진난만한「소녀의 기도」소리의 율동을 들을 수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밤의 어둠을 바탕으로 삼지 않고서는 별빛의 영롱함을 그려낼 수 없듯이 이별의 슬
픔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사랑의 기쁨을 가시화할 수 없는 역설로 빚어진 것이 바로 소월의「진달
래꽃」인 것이다.즉 이별의 가정을 통해 현재의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낸 시이다.이별을 이별로써 노
래하거나 사랑을 사랑으로 노래하는 평면적 의미와 달리 소월은 사랑의 시점에서 이별을 노래하는 겹시
각을 통해서 언어의 복합적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라는 대립된 정서,대립된 시간 그리고 대립된 상황을 이른바「반대의
일치」라는 역설의 시학으로 함께 묶어 놓는다.그래서 사랑을 반기고 맞이하는 꽃이 여기에서는 반대
로 이별의 객관적 상관물이 되고,향기를 맡고 머리에 꽂는 꽃의 상부적 이미지가 돌이나 흙과 같이
바닥에 깔리거나 발에 밟히는 하부적 이미지로 바뀐다.그러한 꽃의 이미지 때문에 가벼움을 나타내는
「사뿐히」와 무거움을 나타내는「밟다」라는 서로 모순하는 어휘가 하나로 결합하여「사뿐히 즈려밟고
」의 당착어법이 되기도 한다.
소월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산에 핀 진달래거나 혹은 여인의 머리나 나무꾼의 지게에 꽂아진 진달래
의 그 아름다움밖에는 모를 뻔했다.그러나 반대의 것을 서로 결합시키는 소월의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바위 틈에서 피어나는 진달래만이 아니라 슬픈 발걸음 하나하나에서 밟히우면서 동시에
희열로 피어나는 또 다른 가상공간의 진달래꽃의 아름다움과 만난다.
그것이 바로 이별의 슬픔을 통해서 사랑의 기쁨을 가시화하는 역설 또는 아이러니라는 시적 장치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시의 복합적 의미는 반드시 한 항목만을 골라 동그라미를 쳐야 하는 사지선다의
객관식 답안지로는 영원히 도달될 수 없는 세계이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의 마지막 구절을 눈여겨 보면 산문과는 달리 복합적 구조를 가진
시적 아이러니가 무엇인지를 알게될 것이다.어느 평자도 지적한 적이 있지만 산문적인 의미로 볼 때에
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와「죽어도 눈물 아니 흘리우리다」는 조금도 뜻이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부정을 뜻하는「아니」가「눈물」앞에 오느냐 뒤에 오느냐로 시적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아
니가 뒤에 올 때에는 단순히 평서문으로서 그냥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진술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
다.하지만 아니가 눈물 앞에 올 때에는 그 부정의 의미가 훨씬 강력해진다.「아니」라는 말이 의도적
으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눈물을 흘리지 않겠
다는 다짐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강력한 부정일수록 긍정으로 들리는 시의 역설이 생겨
나게 된다.
김소월의「진달래꽃」은 한 세기 가까이 긴 세월을 두고 오독되어온 셈이다.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이별의 노래가 아니다.역겨움과 떠남이 미래형으로 서술되고 있는 한「사랑」은 언제나「지금」인 것
이다.사랑을 현재형으로,이별을 미래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소월의 특이한 시적 시제 속에서는 언제
나 이별은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랑의 기쁨과 열정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구실을 한다.그러한 모순과 역
설의 이중적 정서를 가시화하면 봄마다 약산 전체를 불타오르게 하는, 그러면서도 바위틈 사이에서 하
나 하나 외롭게 피어나는 진달래꽃잎이 될 것이다.<이어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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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시의 새로운 해석 「진달래꽃」
◎「사랑의 기쁨」을 역설적으로 노래했다/한 세기 가까이 이별가의 전형으로 잘못 읽혀/‘…뿌리우리다’등 의지바램의
미래시제로 표현/경쾌한 7·5조… 수줍음과 정열의‘이중적 정서’함축
다시 읽는 한국시
〈16〉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노천명「사슴」
오래된 이야기지만 대학입시에 노천명의 시
「사슴」이 출제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의 시구가
무슨 짐승을 가리킨 것이냐는 물음에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기린」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 그 충격은 젊은 세대들의 시적 독해력 부족
에서가 아니라 전통의 단절감에서 오는 것이었
다.
사슴은 학, 거북이와 함께 십장생의 하나로
한국인과는 참으로 오랫동안 친숙하게 지내온
짐승이다. 불로초를 입에 물고 있는 사슴의
그림은 신선도가 아니라도 시골 농가의 베갯모
에서도 곧잘 찾아 볼 수 있다.
무(武)를 숭상하는 영웅형 문화에서는 사자, 독수리와 같은 힘센 생물이 찬양되고 문장같은 상징물로
등장하고 있지만, 문을 숭상하는 성자형 문화에서는 사슴, 학처럼 힘없는 짐승들이 오히려 고귀하고
신령한 것으로 대접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짐승들은 웬일인지 목이 무방비 상태로 길다. 쫓기고 잡혀
먹히는 그 약한 짐승들을 오히려 장수의 상징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여간한 역설이 아니다. 그런점에서
사슴은 약하기 때문에 강하다는 도교적 논리의 모범답안라고 할 수 있다. 목이 긴 짐승이라고 금시 기
린을 생각하는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사슴만이 아니라 목이 긴 것과 슬픈 것의 상관성 역시 모르는 문제
의 하나 일 것이다. 순수한 한국말로는 생명을 목숨이라고 한다.
생명이라고 하면 추상적으로 느껴지던 것이 목숨이라고 하면 손으로 만질 수 있듯이 가깝게 느껴진다. 「목
숨」은 곧 「모가지」라는 육체성을 지니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우만은 국어 순화가 통하지 않
는다. 만약 「목이 길어서 슬픈 동물이여」라고 한다면 우리는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할 것이다.
노천명의 시만이 아니다.「모가지여 모가지여 모가지여 모가지여」라고 네번 되풀이한 서정주의 시
「행진곡」에서 우리가 처절한 생명의 절규를 듣게 되는 것도 그것이 「목」이 아니라 「모가지」이기
때문이다.
「모가지」라는 말 속에는 인간과 동물이 다같이 공유하고 있는 원 초적이고 본능적인 생명의 알몸뚱
이가 들어 있다. 목이 짧으면 오히려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공격적 존재로 보이지만 목이 길면 수동성
과 생명의 무력성이 드러나게 된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여인들의 초상이 조금씩 슬퍼 보이는 이유는
예외없이 그 목이 길게 그려져 있는 탓이다.
슬픔은 짐승이든 인간이든 간에 그 존재를 내면화한다. 노천명의 시적 시각으로 보면 초상집에서 만
나는 사람들의 목은 누구나 다 길어보이고 슬퍼보이고 조금씩은 정신적으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 노천
명은 사슴의 목, 침묵 그리고 그 뿔의 순서로 묘사대상을 이행해가면서 슬픔에서 점잖음으로, 점잖음
에서 고귀함으로 그 내면화과정을 심화해가고 그 차원을 높여 간다.
그러나 이러한 사슴의 속성은 「높은 족속이었나보다」의 과거형으로 묘사하고, 또 다음 연에서는 「먼
데 산을 본다」라고 하여 사슴의 본래성과 현존성의 괴리를 나타내고 있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노천명의
사슴은 십장생도에 등장하는 심산유곡의 사슴이 아니라 동물원에서 사육되고 있는 문명 속의 사슴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동물원이 아니라면 사슴목장 속의 사슴이거나 일본 나라(내량)에 가축처럼 기르고 있는 그
런 사슴인 것이다. 많은 평자들이 이점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작가의 자아니 자화상이니 하는 어려운
말들을 붙여서 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슴이 먼데 산을 본다는 것은 곧 그 사슴이 지금 산에 있지 않
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며 「잃었던 전설」이나 「향수」라는 말은 그 「먼산」(불로초가 있는 전설의 공
간, 인간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연)에 있었던 때의 사슴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존하고 있는 그 사슴과
는 시간도 공간도 모두 멀리 떨어져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먼데」라는 말은 지리적인 거리
만이 아니라 내면적인 거리, 의식 속의 거리를 가리키는 것이며 사슴의 본래성과 그 현존성의 괴리를 보여
준다. 사슴만이 아니라 「본래의 나」와 「현존하는 나」의 괴리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모두가 슬픈 모
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슴」을 노천명 시인의 자화상이라고 말하는 평자들 은 그야말로 사슴을 동물원에
가둔 사육사와 다를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시가 지닌 보편적 감동을, 그 전설을 빼앗아 버리는 것
이 되기 때문이다.
동물원 속의 사슴은 세속화한 사회, 물질 문명속에서 사육되고 있는 모든 시인의 모습이고 동시에
목에 갈기를 세우고 돌진해오는 권력자나 실리자 앞에서 슬픈 모가지를 내밀고 있는 무력한 지식인들의
초상화이기도 한 것이다. 이 천박한 시대 속에서, 상상력이 없는 목 짧은 그 사람들이 생존의 땅을 독
점하고 있는 이 도시에서 몰락해 가는 모든 정신주의자에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과거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향기로운 관 뿐이다.
사슴 뿔은 해마다 떨어졌다가는 다시 새뿔이 돋아나는 재생의 힘을 지니고 있다. 옛날 임금들이 사
슴 뿔 모양의 왕관을 썼던 것도 바로 이 거듭나는 신비한 재생력과 그 영원성을 동경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누가 향기로운 관을 쓰려고 하는가. 손과 발이 머리를 압도하는 행동의 시대에 누가 머리를 장식
하려하는가. 누가 재생의 신비한 의식의 가지치기를 믿으려 하는가. 사슴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먼
데 산을 보는」 눈이 있는 한 그 향기로운 관은 거듭태어 나는 재생의 전설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
고 사슴의 슬픈 모가지는 먹이를 물어뜯고 포효하는 늑대의 그 이빨보다 더 오랜 세월을 시 속에서 그
리고 십장생의 베갯모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어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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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96.06.09 20면(문화)기획·연재 2,829자
◎ 화려한 전설 간직한 ‘우리에 갇힌 사슴’/시인의 자화상 아닌 무 력한 지식인 모습 그려/‘목’대신‘모가지’… 인간과 동
물의 원초적 생명 표현/목→침묵→뿔순 묘사 ‘슬픔→점잖음→고귀함’
다시 읽는 한국시
〈17〉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
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
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
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
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
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
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박두진「해」
열대와 사막지대에 있는 나라치고 태양을
국기로 삼고 있는 경우는 없다.대개는 초승
달이 그려져 있다.파키스탄 알제리 튀니지같
은 아랍국가들이 그 본보기다.만국 공통의
적십자기마저도 이슬람 문화권에 오면 붉은
초승달로 바뀐다.모든 것을 태워 죽이는 열
사의 햇빛보다는 서늘한 달빛이 더 고마운 풍
토탓이다.인도에 연원을 두고 있는 불교 역
시 달의 상징성이 해를 앞지른다.그래서 불
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신라향가에서는 해보다
달이 절대우위를 차지한다.「찬기파랑가」에
서 화랑의 얼굴을 상징하는 것은 태양이 아니
라 구름을 열치고 나타나는 달인 것이다.
한국문화의 뿌리는 남방적인가 북방적인가.
이런 문제를 이 자리에서 다루기란 힘겨운 일이
다.하지만 한국문화의 원형은 북방과 남방,그
리고 유목과 농경의 양극 문화를 융합한 매개형
문화라는 것만은 밝혀둘 필요가 있다.
북방적인 온돌방과 남방적인 마루방이 공존
하고 있는 한국 특유의 건축양식처럼 조선조
의 궁중 상징물인 오봉일월도(五峰日月圖)
에서는 해와 달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한국민족의 정서와 그 시가의 주류가
달쪽에 치우쳐 온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생활
문화의 기층을 이루어온 십장생도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달이 아니라 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
서는 안된다.
그러한 시점에서 보면 한국시에서 해를 복권한 박두진의 시 「해」는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태백 문화권에서 살아온 우리는 그 시에서 처음으로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
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라는 달빛 부정의 선언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 대신 애띤 것
고운 것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으로 향한 대낮의 화살표를 보게 된다.
그렇다고 박두진의 「해」가 「존재의 절정」을 추구하는 말라르메의 태양과 같은 것은 아니다. 시
의 첫 행만 읽어봐도 그것이 세계의 모든 그림자를 소멸시키는 정오의 태양, 사물의 정수리위에서 빛
나는 그 절대의 태양과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박두진이 노래하고 있는 해는 「솟아 있는 해」가 아니라 「솟아라 !」고 말하고 있는 화자의 욕망
속에 잠재해 있는 해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그의 눈앞에는 해가 아니라 달이, 그리고 대낮이 아니
라 밤이 있다. 즉 달밤속에서 노래부르는 해라는 사실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아 솟아라」로 시작되는 그 첫 행은 「해」
라는 말과 「솟아라」는 말이 무려 3번씩이나 반복되어 있다. 반복은 시에 있어서 리듬을 만들어내는
소리의 층위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의미론적 층위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다. 「날자 날자 날자-
」라고 외치는 이상의 「날개」 의 마지막 절규가 오히려 희망의 언어가 아니라 날 수 없는 절망의 말
로 들리는 것처럼 「해야 솟아라」는 반복속에서 우리는 깜깜한 밤이나 쓸쓸한 달빛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해야 솟아라」라는 말은 바로 그 다음 시행…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란 말과 대조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해」는 「달」로,「낮」은「밤」으로, 그리고 「솟아라」라는 희망의 말은 「싫여」라는 부정의 말
로 뒤집혀 있다. 더구나 우리는 「눈물같은 골짜기」와 「아무도 없는 뜰」이란 말에 서 달의 공간성과
의미소를 추출해 낼 수가 있다. 달의 무대는 골짜기와 빈 뜰의 폐쇄성과 공허성이며, 그 의미소는 슬
픔과 고립감(아무도 없는)이다. 그러나 그와 대응하는 해의 공간과 그 의미소는 바로 그 시행뒤를
잇는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
로라도 좋아라」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싫여」는 「좋아라」가 되고, 눈물과 아무도 없는 쓸쓸함은 깃을 치는 춤과 신명으로 바뀌어진다.
특히 중요한 것은 「눈물같은 골짜기」와 「아무도 없는 뜰」에 대응하는 「청산」 공간의 의미소이다
. 그것은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노는」 교감과 공존 그리고 열려져 있는
개방성이다. 슬픔의 골짜기, 고립의 뜰과는 정반대의 공간이다. 밤의 공간에서는, 만남은 놀이가
아니라 도주이며 살육이다.역리로 말하자면 박두진의 「해」는 음(달)과 양(해)의 두 텍스트로 구
성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양의 텍스트는 해를 찬미하고 있고 속에 숨어 있는 음의 텍
스트는 달밤을 혐오하고 있다.
그리고 양의 텍스트는 상상과 자연과 관념의 축을 나타내고, 음의 텍스트는 현실과 사회적 상황축을 이
룬다. 시제를 봐도 달의 텍스트 는 「달밤이 싫여」와 같이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해의 텍스트는
「솟아라」 「늬가사 오면」 「누려 보리라」처럼 모두가 권유 가정 미래 추정으로 되어 있다. 박두진의
「해」는 바로 「달」을 뒤집은 것으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 텍스트를 바꿔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해의 마지막 시행을 보면 시의 통사적 축은 아무 것도 발전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야
,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로 첫 행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의 어원을 통해서
「산문(PROSE)이 앞으로 나가는 행진이라면 시(VERSE)는 뒤로 되돌아 오는 회귀」라고
풀이했던 야콥슨의 말 그대로다. 의미론적으로 그것은 끝이 아니라 첫 머리의 언술로 회귀하고 있는
되풀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두진의 「해」를 읽는다는 것은 매일 매일 떠오르는 해를 보는 것
처럼 바로 그러한 반복과 그 반복이 자아내는 차이를 읽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해와 대립항을 이루는 달이라는 범열축(paradigm-aticaxis)이 있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해의 시적 의미는 통사적 서술이 아니라 달과의 차이에서 생겨난다. 아무도 없는 달밤의 그 빈
뜰과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에 앉아 애띠고 고운 날 을 누
리게 하는」, 「청산」의 차이… 해의 시적 의미는 그 빈 것과 채워져 있는 것, 폐쇄성과 개방성의
공간적 대조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된다.
해는 어둠이 있어야 말갛게 얼굴을 씻을 수 있고, 또 그것을 살라먹고 애띤 얼굴의 활력을 되찾는
것처럼. 그래서 박두진에게 있어서 해란 청산까지도 새처럼 깃을 치게 하는 생령의 힘이며 인간과 사슴
과 칡범이 한자리에서 교감하고 조응하며 살아가는 십장생도의 새로운 가상공간이다. 그리고 박두진에
게 있어서 시란 눈물의 골짜기에서 해를 솟아나게 하는 주술인 것이며 꽃과 새와 짐승을 한자리에 앉히
는 마법의 조련사인 것이다.<이어령 교수> 조선일보 96.08.06 24면(문화)기획·연재 3,241자
◎ 절망의 골짜기서 ‘동트는 환희’ 기다려/해와 달 대조… 십장생도 같은 가상공간/시인은 꽃새짐승을 한자리에 앉히는 조련사.
다시 읽는 한국시
〈18〉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 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우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
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그날이오면」
사람들은 수백 수천의 시를 쓰고도 시인의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심훈은 「그날이 오면」의 단 한편의 시로 불
멸의 시인이 되었다. 한국에서만이 아니다.
심훈은 옥스퍼드 시학교수 바우러의 역저 「
시와 정치」(1966년)에서 파스테르나크와 세
페레스와 같은 노벨문 학상 수상자와 당당히
어깨를 겨루고 있다.공공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정치시에 있어 「개인적인 열렬한 기분
」과 단순성이 얼마나 특수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 바우러는 그것을 실증하는 모형으로
「그날이 오면」 전문을 분석했다. 한국 시
인은 독일 시인처럼 잔악한 사실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비록 먼
훗날의 일이라 하더라도 감격적인 그 미래가
일깨우는 자극적이고도 숭고한 그 기분인 것
이다. 그는 한국의 산과 강, 종로와 같이
친숙한 환경에 그의 비전을 설정한다. …자
연은 그와 기쁨을 함께 나누고 일어나서 함께
춤을 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자연환경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바우러 교수는 서구의 저항시인들에게서 맛볼 수 없는 색다른 감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이 정치시로서 성공하게 된 이유를 좀더 정밀하게 검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
우러 교수가 지적한 「개인적인 열렬한 기분」,「감격적인 그 미래가 일깨우는 자극적이며 숭고한 그
기분」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있
다. 그 시의 1연 맨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는 시구를 한데 이어보면 「그날이 오면, …무슨 한이 남으
오리까」라는 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인경을 머리로 받아 죽는 옛 전설
의 까마귀 비유이기 때문에 1연의 시를 한 형태로 축약하면 「그날이 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가 된
다. 즉 한국민족이라면 누구나 속으로 외우고 살아온 말이다. 심훈은 바로 한국인의 뿌리깊은 민족정
서와 그 삶의 본질에서 저항의 언어를 가져온 것이다. 그 한의 언어를 어떻게 희랍 고전시의 연구가가
알았을리 있겠는가. 더구나 그가 인용한 「그날이 오면」의 번역시에는 바로 그 한의 구절이 삭제되어
있다. 그러니 영어로 번역조차 할 수 없는 그 「한」의 정서가 그에게는 그저 「개인적인 열렬한 기분
」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한이란 외부의 어떤 힘이나 방해로 이루지 못한 욕망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모든 것을 멸할 수 있
어도 평생동안 마음 밑바닥에 쌓인 그 한만은 없앨 수가 없다. 한국인이 종교로부터 구하려고 한 것은
영생이 아니라 바로 그 한을 푸는 일이다. 오구굿과 같은 무속의식 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한
」에 뿌리를 둔 저항시는 「원」에서 출발한 그 정치 시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원과 한은 어떻게 다
른가. 춘향이에게 있어 변학도에 대한 감정은 원이지만, 이도령에 대한 그것은 한이다.
춘향의 시가 변학도에게로 향하면 「원의 언어」가 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면 원수를 갚는 복
수로 발전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변사또를 복수한다 해도 이도령을 만나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한
은 풀 수가 없다. 춘향이 심훈이 되고 일제의 극악한 지배가 변학도가 된다면, 그리고 이도령과의 극
적만남이 민족 강토가 해방되는 그날이라고 한다면, 그 시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독일형 저항시와
는 분명 다른 「그날이 오면」과 같은 시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감격적인 미래의 자극적이고도
숭고한 기분」이란 곧 「한을 푸는 미래」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2연째의 그 시를 읽어가면 「인간의 자연환경과 기쁨을 나누는 사상」이라고 한 그 비평이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가도 알게 된다. 점잖은 영국의 그 시학자는 춤추는 삼각을 「감상적 오류의 멋
진 변형」이라고 칭찬하고 있지만, 산과 강물을 춤 추게 하는 기쁨…. 육조 넓은 거리에서 울고 뒹굴
고 춤춰도 복받쳐 오르는 주체할 수 없는 그 기쁨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한국인들에게 물어보면 금세
신바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1연의 시가 죽음보다도 강한 「한풀이」를 노래한 것이었 다면,
2연의 그것은 죽음보다 강한 「신바람」의 세계를 읊은 것이다. 1연에서는 제 머리로 인경을 받아
종을 울리지만, 2연에서는 칼로 제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 친다. 그 종소리가 민족의 한을 푸는 소
리라면, 이 북소리는 민족의 행진을 이끄는 신바람의 소리인 것이다. 신바람은 존재의 저 근원으로부
터 절로 솟아나는 힘이다.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고 안과 밖의 담벼락이 무너지고 인간과 자연이 하
나가 되는 문자 그대로의 해방공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는 북과 북을 치는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다. 자기 가죽으로 만든 북을 자기가 친
다고 했다. 치는 것도 자기요, 울리는 것도 자기다. 사람이 북이 되고, 북이 사람이 된다. 그러한
신명의 북소리는 삼각산 한강수와의 교감은 물론이고 생과 죽음의 문지방마저도 횡단한다. 바우러는
그것을 그저 「황홀한 순간」이라고 했지만 한국인들은 사물놀이나 탈춤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신바람인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의 종소리와 신바람의 북소리는 다같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그날이 오면」에서 한을 푸는 기쁨의 그 종소리는 바로 자신의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소리
이고, 신명의 그 북소리는 자신의 살가죽을 칼로 벗겨내는 소리이기도 한 것이다. 종소리든 북소리든
그것은 울려 퍼진다. 끝없이 진동하고 넘치고 확산하고 상승하다가 침묵속으로 사라진다. 두개골이
파열되고 가죽이 벗겨지는 아픔이 희열의 종소리와 북소리로 바뀌어지는 그 한과 신바람의 위대한 아이
러니야 말로 시를 창조하는 자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의 기쁨을 뒤집기만 하면 가혹한 일본
압제의 상황인 「오늘」에 대한 고발과 분노의 심판이 된다.
바우러는 말한다. 일본 사람들의 어떤 압제도 한국 시인들을 죽일 수 없었다고. 그러나 한국 시인
의 가슴에는 죽음보다 강한 한과 신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과연 알았을까. 그리고 사적
인 것과 공적인 것을 대립개념으로만 생각해온 그의 시학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사회나 민족
그리고 우주전체를 넘나드는 한풀이와 신바람의 그 담벼락없는 리듬을 포용할만한 자리가 과연 있었을
까. 그 시가 쓰여진지 한세기 가까이 지나고 「그날」을 맞이한지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우리는 심훈의
언어에서 여전이 자신의 머리와 자신의 가죽으로 울리는 생생한 그 종소리와 북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기쁨과 아픔이 한데 어울려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가락들을 만약 바우러와 같은 서구의 비평가들이 제
대로 들을 수 있는 그날이 오면 한국의 시는 세계의 지붕위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이어령 교수>
조선일보 96.08.27 27면(문화)기획·연재3,377자
◎ 일상의 ‘한’ 풀어줄 ‘광복 신바람’ 기대/원의 ‘정치시’와 다 른 한에 뿌리 둔 ‘저항시’/광복은 ‘살가죽’으로
만든 북이라도 치고픈 ‘희열’/두개골이 깨져도 좋은 기쁨 뒤엔 ‘일제압제’ 담겨.
다시 읽는 한국시
〈19〉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僧 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
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
레라.
조지훈「승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
레라./파르라니 깎은 머 리/박사 고깔에 감
추오고…」. 우리가 애송하고 있는 조지훈의
「승무」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에
서 우리는 곧바로 그 시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정보의 회로속으로 들어간다. 처음에
는 「얇은 사」 「고깔」 「박사」와 같은 의
상 정보에 관한 것이고, 다음은 「나빌레라」
의 비유어에서 보듯이 나비와 같은 자연물에
관한 정보, 그리고 마지막에는 「파르라니 깎
은 머리」의 그 신체 정보이다.
셰익스피어의 「기저귀」와 「수의」가 탄
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기호로 사용되
고 있는 것처럼, 이 시에서도 의상은 인간의
「미와 진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문화코드로
작용한다. 반복형으로 강조된 「얇은 사」와
「박사」는 우리가 보통때 입고 다니는 「두터
운 무명」 옷감의 재질과 대립하는 것이고,
「하이얀」 빛깔은 삶의 쾌락을 나타내는 색동
옷과 대칭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절제와 정화를
나타낸다. 그래서 그것들은 「남성에 대한 여
성」 「속에 대한 성」 「축제에 대한 제례(
祭儀)」의 탈중력상태의 문화코드를 형성한다
. 그리고 1연과 2연에 나오는 고깔은 은유
와 환유의 각기 다른 비유의 양상을 통해서 「
자연코드」와 「신체코드」에 연결된다. 즉
1연의 「나빌레라」는 고깔을 나비에 비유한
것으로, 얇고 하얀 천의 재질이 나비의 나래
와 동일시되고 그 형태는 나비의 모양과 결합
된 은유이다. 의미만이 아니다. 부드러운 순음과 유음이 겹친 「나빌레 라」의 기호표현(어감)은
무엇인가 가볍게 나부끼고 있는 것과 관련된 의태어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1연의 그 비유의 구조가 「고깔은 나비이다」라는 유사성에 의해 이루어진 「은유」인데 비
해서,2연의 그것은 「고깔을 머리에 쓰다」의 근접성으로 구성된 환유이다. 말하자면 왕관이 그것을
쓴 왕을 상징하듯이 「고깔을 쓴 삭발한 머리」는 바로 여승, 승무를 추는 무희를 나타내는 환유적 상
징물이다.뿐만 아니라 신체의 최상 부를 가리키는 머리는 당연히 그 최하위에 있는 발과 대립되는 신
체어로서 땅에 대한 하늘,육체에 대한 정신,쾌락에 대한 금욕,감정(발산)에 대한 이성(억제)을
나타내는 문화적 코드이다. 더구나 「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승려라는 신분만이 아니라 금욕적인 탈
속의 의지를 강화해 준다.
단순하게 말해서 고깔의 의상코드가 나비의 자연코드와 합쳐진 것이 춤(무)이며, 삭발한 머리의
신체코드와 결합한 것이 불교(승)이다. 그러니까 「의상=자연=신체」의 세 코드가 은유와 환유의
시적 장치를 통해서 하나로 수렴되고 승화된 것이 바로 그 「승무」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조지훈의 「승무」를 읽는다는 것은 그 첫머리에 제시된 고깔(의상)나비(자연)머리(신체)의
관계가 어떻게 선택, 결합되어 진전되어 가는가를 추적하고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신체코드로 볼 때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3연에 이르면 「두 볼에 흐르는 빛」(얼굴)이 되고,
56연에 오면 손과 발의 춤사위로 변한다. 그리고 다시 그 신체코드는 「복사꽃 뺨」과 「까만 눈
동자」로 올라가 본래의 머리부분으로 돌아간다. 의상코드 역시 1연의 고깔이 5연에 오면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로 장삼과 외씨버선으로 바뀐다. 그러나 하늘로
비유된 그 긴 장삼과 사뿐히 위로 올린 외씨버선의 모양은 다시 하늘로 상승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 물론 의상은 신체의 연장이고 또 춤사위와 관련된 것으로 「손소매장삼」에서 「발버선외씨
버선」으로 내려오는 신체기술과 동일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 볼에 흐르는 빛」처럼 의상의 환유체계로는 나타낼 수 없는 경우에서도 빈대에서 소리없
이 녹아내리는 황촉불로 그 하강의 이미지를 지속시켜 준다. 촛불은 신체를 에워싸고 있는 「빛의 의
상」이 된 것이다. 자연코드는 신체와 의상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인접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도 「
나비지는 오동잎과 달빛별빛」의 순으로 역시 「상승 하강상승」의 율동을 반영하고 있다.그
러기 때문에 「오동잎 잎 새마다 지는 달빛」은 두 볼에 흐르는 빛과 빈 대위에서 소리 없이 녹아 내리
는 황촉의 불빛과 삼중의 동심원을 그리면서 침하해 간다.신체의 빛,문화의 빛,자연의 빛… 이 세
빛은 서로 다른 코드에 속해 있지만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운」소멸의 빛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그
리고 그 빛들은 모두가 「먼 하늘 한 개 별빛」을 향해 합장을 한다.
손이 소매가 되고 소매가 장삼으로, 장삼이 하늘로 바뀌어 가듯이 두 볼에 흐르는 빛은 촛불이 되고
그 촛불은 다시 떨어지는 오동잎 이파리마다 지는 달빛이 된다. 그러나 외씨버선이 하늘을 향해 위로
솟아오르듯이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지던 두 검은 눈동자는 먼 하늘의 한 개 별빛으로 향한다. 그 별
빛은 촛불처럼 녹아 흐르지도 않고 달처럼 기울다가 소멸되지도 않는다. 무는 이렇게 세사에 시달리는
번뇌와 복사꽃 육체의 들뜬 열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날아오르는 몸짓인 것이
다. 그것은 밤과 침묵 속에서 배어 나오는 빛이다.
원래 승무라고 하면 고깔, 장삼과 함께 으레 법고가 나오게 마련인데 웬일인지 조지훈의 시에는 법
고를 비롯해 모든 소리가 일절 배제되어 있다. 무성영화를 보듯이 시 전체가 말없이 녹는 황촉불같이
빛과 몸짓에 의해 연출된다. 이 침묵을 깨는 것이 마지막 귀또리의 울음소리이다. 묘사가 설명으로,
즉 발신코드가 수신코드로 바뀌는 순간인 것이다. 승무의 아름다움이나 신비함, 그리고 그 성스러움
이 결정체를 이룬 「먼 하늘 한 개 별빛」을 지상으로 가져오고, 그 심연 속의 빛을 소리로 옮기면 승
무의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가 될 것이다. 의상, 자연, 신
체의 세 코드는 다같이 춤의 발신코드에 속해 있는 것이지만, 귀또리는 그 어느 코드에도 속하지 않는
다. 의미론적으로는 나비와 달빛과 같은 자연코드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 기능을 보면 춤과는 직접
관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귀또리는 춤이나 춤을 추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감상하며 묘사하고
있는 시인과 관계된다. 발신코드 에서 고깔과 나비, 검은 눈동자와 별빛이 하나인 것처럼 수신코드에
서는 귀또리시인이 동격이 되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빛은 너무 멀고 너무 조용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발밑에
서 우는 가냘픈 귀또리소리에 의해서만 어둠에 둘러싸인 그 빛의 감응을 겨우 짐작할 수가 있다. 춤을
굳이 언어로 바꿔놓은 이 시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승무의 진정한 메시지는 한국의 고전미나
불교의 열반을 나타내는 「승무」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의 의미는 그 침묵하는 것들을 귀뚜라
미같은 가냘픈 소리로 옮기는데 있다. 「누가 춤을 보면서 춤과 춤추는 사람을 떼어낼 수 있는가」라
는 유명한 말대로 「승무」의 세계는 번역 불가능한 것이다. 하늘의 별빛을 땅의 귀또리 소리로 옮기
는 작업, 그것이 시인 조지훈이 평생을 두고 썼던 그 시의 의미였을는지도 모른다.<이어령 교수>
조선일보 96.09.10 21면(문화)기획·연재3,504자
◎‘하이얀 고깔… 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절제의 표현/나비→오동잎 과 달빛→별빛 순으로 율동을 그려/고깔과 나비, 눈
동자와 별빛, ‘귀또리’와 시인은 동격
다시 읽는 한국시
〈20〉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
「가을의 기도」
시를 이야기할 때 이따금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가 인용된다. 원래 이 동화는 프랑스 지
방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리구두가 아니라 「
가죽구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죽(vaire)
이란 말이 유리(verre)란 말과 그 음이 비슷해
서 영어권으로 건너올 때 유리구두로 잘못 번
역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진짜
보다도 더 널리 퍼지게 되어 이제는 프랑스의
본고장으로까지 역수입되어 「유리 구두」로
정착되고 말았다. 본래의 가죽구두보다도 유
리구두의 이미지가 신데렐라의 이야기에 더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일단 시가 태어나게 되면 그 언어들은 그것
을 낳은 시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기 자체의
이미지로 홀로서기를 한다. 그것을 증명해 보
인 것이 바로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이다. 김현
승의 시 「가을의 기도」에 등장하는 「백합의
골짜기」도 마찬가지이다. 백합이라고 하면
서구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화병이 아니라 골짜기에 핀 백합꽃이라고 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 왜냐
하면 우리 골짜기에는 진달래나 혹은 할미꽃들만이 피어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서양의 경우라 해도 「
백합의 골짜기」는 현실속에서도, 그리고 시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미지의 근원은 신데렐라
의 유리구두처럼 오역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골짜기의 백합」은 「은방울 꽃」(Lisdes
Valles)이라는 발자크의 소설 제목을 일본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옮겨놓은 데서 생겨나게 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덕분에 여지껏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이미지 하나를 얻게 된
셈이다.
사생아로 태어난 「골짜기의 백합」은 당당히 홀로서기를 하고, 김현승의 시 「가을의 기도」에 와
서는 아주 절묘한 시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그말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는 공자가 보며 크게 탄
식했다는 「골짜기의 난초」(난향유곡)가 되었거나 혹은 백합의 경우라해도 성경에 있는 구절대로 「
들에 핀 백합」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가을의 기도」에서 「백합의 골짜기」는 단순한 장식적 은유
가 아니라 「굽이치는 바다」와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를 잇는 중요한 매개공간으로, 눈으로
볼 수 없는 「영혼」을 가시화하는 결정적 작용을 한다. 「굽이치는 바다」란 말은 시인 자신의 말대
로 「겸허한 모국어」에 비추어 보더라도 어법에 잘 맞지 않는 표현이다. 냇물이나 산맥이라면 몰라도
넓고 편편한 바닷물은 굽이친다고는 할수 없다. 그리고 연극이나 소설의 경우라면 대단원에 해당되는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처럼」은 누가 봐도 진부한 비유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합의 골짜기」가 끼어들면 거짓말처럼 그 모든 시구들은 갑자기 새롭고 긴장된
이미지로 살아난다. 「굽이치는 바다와/백합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
이」를 분석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다른」이라는 말이 보여주고 있듯이 이 마지막 시행들은
시인의 내면속에서 변화해 가는 영혼의 모습을 세단계의 은유적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영혼은
「바다→골짜기→마른 나뭇가지」의 순서로 공간을 옮겨가면서, 그 단계마다 영혼의 모습은 「파도」
(바다)와 「백합」(골짜기)과 「까마귀」(마른나뭇가지)로 변신한다. 넓은 바다는 좁은 골짜기
로, 골짜기는 다시 앙상한 나뭇가지로 면에서 선으로 이동하면서 축소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한편으
로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수평의 바다가 점차 수직화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골짜기가 되고 이윽고 높은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다. 물론 그 공간에 자리한 대상물들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변화해 간다. 바다
의 영혼은 파란색 파도로 굽이치고(그렇다. 바다가 골짜기의 백합과 연결되었을 때만이 굽이치는 바다
의 시적 일탈성은 허락된다). 골짜기의 영혼은 백합처럼 흰빛으로 조용하게 피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앙상한 나뭇가지에 이르면 바다의 파도들은 날개를 접은 까만 까마귀가되어 정지된다. 그러니까 영혼
의 색채는 청백흑으로, 그 움직임은 동부동정으로, 그리고 상태는 무생식물동물 로 변모
해 가고 있는 과정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그 패러다임 읽기를 통해서 푸른 바다에서는 봄(젊
음)의 영혼, 골짜기에서는 하얗게 정화해가는 여름(노장)의 영혼, 그리고 이윽고 마른 나뭇가지에
서는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에 있는 영혼의 사계절을 보게 된다. 그리고 움직임도 넓이도 색채도 모두
떨어져 나간 가을의 영혼이지만, 그것이 다다른 곳은 바다와 골짜기보다 훨씬 높은 수직의 자리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영혼의 위치야말로 「홀로 있게 하소서」의 마지막 고독에서 얻어질 수 있다.
「가을의 기도」는 그 형식만 3연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패러다임도 역시 세국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연의 가을은 「기도하게 하소서」로 기도하기와 시쓰기를 위한 모국어(언어)에 대
한 욕망을, 가운데 연의 가을은 「사랑하게 하소서」로 시간에 대한 욕망을, 그리고 마지막 연의 가
을은 「홀로 있게 하소서」로 고독한 영혼에 대한 욕망을 나타낸다. 가을의 욕망을 나타내는 이 세가
지 패러다임은 단순한 공간적 비교 축으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비교축으로도 전개되어 있
다 . 처음 연은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로 초추를, 가운데 연 은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
하여」로 중추를, 그리고 「마른 나뭇 가지」의 마지막 연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인 만추의 상황을 내
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가을의 기도는 마지막 연에서 완성하도록 되어 있다.
첫째연과 둘째연은 「가을에는 …하소서」로 시작하여 역시 「…하소 서」의 종지형으로 끝낸 완벽한
병렬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마지막 연만은 같은 병렬구조를 지니면서도 도치법을 써서 「하소서」가
아니라 「까마귀처럼」으로 끝맺음으로써 그 틀을 깨고 있다. 형식만이 차별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 첫연의 기도하기시쓰기는 모국어라는 대상이 있고, 가운데 연의 사랑하기는 「오직 한 사람만」
이라는 뚜렷한 대상이 있다. 하지만 마지막 연에는 그런 목적 대상이 없다. 마른 가지위의 까마귀처
럼 절대 고독의 내면 세계만이 존재한다. 끝연은 첫연과 가운데 연과 대응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1
,2,3연의 전구조를 그 내부속에 복사해 놓은 프락탈 구조로 되어있다. 즉 1연의 「기도하기시
쓰기」는 굽이치는 바다에, 그리고 가운데 연의 「사랑하기」는 골짜기의 백합에, 그리고 「홀로 있
기」는 「마른가지 위의 까마귀」에 대응한다.
「가을의 기도」는 시와 종교(유일자에 대한 사랑)를 거쳐 최종적 인 죽음의 자리에 다다르는 삶의
과정을 성숙과 조락의 가을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을의 기도」에는 봄의 바다와 여
름의 백합,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인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로 삶의 사계절이 내포되어 있다. 첫
연의 낙엽과 마지막 연의 고목 사이에는 백합 꽃이 피어 있는 골짜기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백합과 까마귀의 절묘한 결합으로 「가을의 기도」는 비로소 높은 음자리표를 지닌 화음처럼 아름답게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음성을 너무 닮았다고 나무
라서는 안된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골짜기 의 백합」처럼 오히려 오역의 경우가 보다 아름다
운 시의 이미지를 낳듯이 릴케의 기도를 닮았다해도 이미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는 홀로 있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영혼의 시로 남아 있는 것이다.<이어령 교수>
☞ 골짜기의 백합 옳은 번역
17일짜 22면 다시 일근 한국시-이어령교수의 에세이 시화전 을 읽고 오류 한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골짜기기의 백합 은 은방울꽃 이라는 발자크의 소설 제목을 일본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옮겨 놓은데
서 생겨나게 된 말이다 라는 설명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모르겠다. 10여년 전부터 프랑스 문
학을 하는 사람들의 귀에 들려오긴 했으나 이건 완전히 틀린 설명이다.
발자크의 소설제목 정확히 Le lys dans la vallee 이고 골짜기의 백합 은 틀린 번역이 아니다. 프랑스
어 vallee(영어의 valley) 는 강 양편으로 넓게 이어지는 지역이며 문제의 소설에서는 프랑스 중부지역을
흐르는 앵드로강 옆으로 펼쳐진 초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곳 저택에 사는 여주인공 모르소프 부인을
상징한 제목이다. 백합은 순결의 상징인 동시에 아름답고 순결하고 고귀한 여주인공을 뜻하고 있다.
은방울꽃은 프랑스어로 muguet(뮈게)라고 적으며, 일명 Lis des vallees라고도 하지만 이는 실제로는 별
로 쓰이지 않고 주로 muguet로 통한다. 발자크의 소설 제목은 Lelys, La vallee 처럼 정관사를 가진 단수
명사로서 정해진 하나의 초원지역에 핀 하나의 꽃, 백합을 뜻한다.
조선일보 96.09.17 22면(문화)기획·연재3,678자
◎ 가을풍경에 스며있는 시와 신앙과 삶/‘골짜기 백합’은 오역에서 나온 말이나 새 의미로 탄생/‘백합과 까마귀’의 절
묘한 결합… 시의 긴장감 높여/릴케의 「기도」와 닮았지만 ‘한국의 미’ 담아
다시 읽는 한국시
〈21〉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파초(芭蕉)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렬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朝光 1936년 1월호 -
金東鳴 파초(芭蕉)
『이 시는 亡國의 설움을 달래는 詩情이 파
초라는 한 열대 식물에 대한 열애로 승화된 것
을 본다. 원산지인 남쪽을 떠나온 파초와 나라
잃은 시인과의 아름다운 유대가 시의 전체적
골격이다.…』이 글은 金東鳴 시인의 파초(芭
蕉) 를 풀이한 某氏의 말이다.
대학수험생을 염두에 두고 쓴 것같은 이러한
글을 읽으면 우선 누구 안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시를 읽는 일종의 불안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쉬운 시라고 해도 그 허슨한 문맥과
사전적 의미에서 일탈된 시어들은 확실히 밤길
을 걷는 것같이 발을 헛디디게 할 때가 많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적인 시읽기에 필요한 것
은 차근차근 시를 맛보아가는 과정보다는 빨리
결론을 내려주는 모범답안인 것이다. 파초는 망국의 설움이다. 이렇게 시 를 口號 로 고쳐주면 불투
명했던 의미들이 단순명료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시의 텍스트를 아예 덮어버리고 지은이의 약력
을 덧붙이면 된다. 과연 某氏의 그 글에서도 金東鳴 시인이 이 시를 썼던 곳이 함경남도 서호진(西湖津)
의 妻家라는 것과 그 우거(遇居)에서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있을 때였다는 전기적 사실을 빼놓지 않고
있다.
만약에 그 妻家 마당에 파초가 몇 그루 심어져 있었는 지를 밝혀 줄만한 자료가 있었다면 금상첨화였
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시 비평과 독해를 이념적인 구호로 대치해 왔기 때문에 金東鳴 시인의 파초(芭蕉)
에서 보듯 시의 한 부분만이 강조되고 그 주제와 관련이 없는 듯이 보이는 부분들은 노이즈(雜音)로 제
거되어 왔던 것이다. 말하자면 파초의 경우에 있어서 풀이의 초점이 되어온 부분은 맨 첫행의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와 맨 마지막 행의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이다. 조국을 떠나온
파초는 바로 조국을 상실한 시인과 처지가 같다.
그리고 우리의 겨울 은 일제 식민지의 가혹한 상황을 나타내는 정형구다. 그래서 머리맡 의 가련 한
金東鳴의 파초(芭蕉) 는 울밑의 처량 한 홍난파의 울밑에 선 봉선화 와 일란성 쌍둥이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 파초(芭蕉) 를 문자 그대로 거두절미(去頭截尾)해서 읽지 않고 텍스트를 총체적으로 읽으
면 어떻게 되는가.
무엇보다도 이제 밤이 차다 의 이제 는 무엇인가. 앞으로 겨울을 예고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때까
지의 일제 식민지 상황은 봄이며 여름처럼 따뜻했다는 것인가. 파초가 일제 식민지 상황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한 가지 의미로만 읽으려고 할 때 우리는 시의 많은 부분을 제거하거나 눈감아 버려야만 된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다.『이 시에서 파초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려고 한 것인가』라는 질문을『이
시에서는 파초(사물)와 나(시인)의 관계가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라고만 돌려도 시는 총체적으로 읽혀
질 수밖에 없으며 그 재미와 자극도 커진다.
나와 그 대상(파초)의 관계를 두고 조국을 언제 떠났노 /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의 첫연과 나는 즐
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의 끝연을 읽어보면 금세 이상한 느낌이 들게 된다.
첫연은 너가 아니라 파초 라고 되어 있는데 끝연에 와서는 그것이 너 라고 2인칭으로 묘사되어 있다
는 점이다. 두말 할 것없이 같은 대상을 놓고 그 호칭이 달라진다는 것은 나와 파초와의 관계가 말하자
면 그 거리가 달라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좀더 자세히 읽어보면 김동명의 파초는 대상을 부르는 형식적인 호칭의 변화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먼데서 가까운 것으로 점차 접근해 오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첫연의 파초는 나 와 파초 와의 거리는 내가 살고 있는 장소와 남국만큼 떨어져 있다. 파초의 이미지
는 나와 무관한 위치에 독립해 있다. 의인화는 되어 있지만 파초는 어디까지나 파초로서 그려져 있다.
그러나 둘째연에 오면 파초는 한결 나 와 가까워져서 파초 라는 객관적인 호칭은 너 라는 2인칭으
로 불려지면서 하나의 여성으로 의인화된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수녀 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로 여전
히 자기와는 단절되어 있는 접근 불능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3연에 오면 비로소 나 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내 쪽에서 능동적으로 파초에 다가간다. 소
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렬의 여인 / 나는 샘물을 길어 네발등에 붓는다 로 파초의 관찰자로서의 화자가
하나의 행위자로 바뀌면서 나와 너 의 그 관계가 시작된다.
동시에 파초의 이미지도 변화한다. 속세와 단절된 고절(孤節)의 수녀에서 정열의 여인으로 변한다. 그
래서 나와 파초의 관계를 나타내는 거리 공간은 신체적인 공간으로 좁혀져서 네 발등 으로까지 다가간
다. 그리고 그런 접근을 가능케 하는 것이 여름 소낙비로 상징되는 여름의 계절이다.
4연에 오면 이제 밤이차다 /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로서 계절은 가을 밤(서리)의 계절
로 옮겨지고 나와 너의 거리는 더욱 더 가까워진다. 그래서 바깥 공간은 보다 은밀한 실내 공간으로 옮
겨지고 3연의 네 발등 은 내 머리맡 으로 교체된다. 파초와 나의 관계는 밖에서 안으로 아래(발등)에
서 위(이마)로 이동하면서 내면화하여 정신적인 일체감을 이룬다.
5연에서는 나와 너의 관계는 독립적인 존재로부터 주인과 종처럼 완전히 종속관계로 합쳐진다. 물론
이때의 종이라는 것은 계층적 용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끼리 흔히 쓰는 당신의 노예 와 같은 일체
화를 나타내는 애칭이다. 그냥 겨울이 아니라 우리의 겨울 이라고 한 것은 완전히 나-너 의 관계가 하
나로 결합되어 있는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파초 의 텍스트 전체를 정밀하게 읽으면 그 호칭이 파초 에서 너 로, 너 가 다시 우리 로 변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이방의 먼 땅에 있었던 대상이 그 거리가 축소되어 실내의 머리맡
까지 이르고, 너의 발등 나의 머리맡은 하나의 치마로 가려진 따뜻한 하나의 공간으로 합쳐진다.
너와 나 사이의 거리를 변화시키는 공간의 의미는 계절의 의미와 밀착되어 있다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직접적인 것은 없으나 향수 , 외로움 등 봄철의 애상이 암시되어 있고 3,4연에는 직접적으로
여름과 가을이 겉으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끝연에는 첫연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올 겨울이 암시되어 있다. 이를테면 봄에서 겨울로 계절
이 변할수록 나와 파초의 거리는 좁혀지고 종국에는 겨울 추위에 의해서 나-너의 관계는 우리 라는 일
인칭 복수로 마무리된다.
서정시란 무엇인가. 너 속의 나 , 나 속의 너 를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 속에서 서정시의 세계가 열
린다. 서정시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 사랑의 시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김동명의 파초는 여
인으로 그려져 있다.
우리의 겨울을 치맛자락으로 가리운다는 상상 속에는 강렬한 에로티시즘까지 내포되어 있다. 이 이상
의 연시(戀詩)가 어디 있겠는가.
시에서 안정을 추구하려는 세력은 파초 가 정치시인가 연시(戀詩)인가 모범답안을 빨리 써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시에서 일상의 논리와 길들여진 언어가 해체되는 그 거북스럽고 불안한 떫은 맛을 보고
자 하는 사람들은 단지 먼 남국의 파초가 밀실의 머리맡으로 다가오는 그 경이로운 시의 축지법을 즐기
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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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1.12(화) 조선일보 문학의 해 연중시리즈 >
◎ 먼 남국서 밀실까지 찾아온 정열의 여인 / 계절따라 파초→너→우리 로 가까워져 / 亡國설움 한정은 受驗用 즉석
해설 / 純粹詩 - 戀詩로 음미해도 재미
다시 읽는 한국시
〈22〉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 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경향신문 (1947년 11월 9일)
서정주 국화옆에서
모든 풀들이 시드는 가을철, 서리 속에서도
국화는 홀로 향기롭게 핀다. 그 고고한 품격
때문에 국화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시인
묵객(詩人墨客)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중
양절(重陽節)에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의 꽃이
라 하여 술에 담그고 전(煎)으로 부쳐 먹는 풍
습도 있었다. 은군자(隱君子)의 유교적 이념이
든 혹은 신선을 나타낸 도교적 상징이든, 국화
는 워낙 우리 의식 깊숙이 배어있는 꽃이어서
잘못 노래하다가는 그야말로 똑같은 틀로 찍
어낸 국화빵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서양에는 맨 처음 장미를 미녀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지만 그 말을 두번다시 쓴 사람은
바보다 라는 속담이 있다. 마찬가지로 제일
먼저 국화를 군자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지만
두번째로 그와 똑같은 말을 한 사람은 바보
가 되고 만다.
만약 시인 서정주(徐廷柱)의 국화(菊花) 옆에서 가 은둔을 노래한 도연명이나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예찬한 이정보의 국화였다면 우리는 이 시를 읽지도 기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당(未堂)의 국화옆에서 를 읽는다는 것은 곧 국화를 노래한 다른 텍스트와의 차이를 읽는 것과 다
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이 국화를 누님 에 비유한 바로 그 은유이
다.
봄에 피는 봉숭아가 여성적인 것이었다면, 국화는 지금까지 남성 그것도 고결한 사대부의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미당은 그것을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
님같이 생긴 꽃이여 라고 국화의 성(性;젠다)을 바꿔 버렸다. 군자=국화 가 누님=국화 로 패러다임을
바꿀 때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첫째는 관념적인 이념의 남성 원리가 감각적인 미(美)의 애정의 여성 원리로 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거울 앞에 선 누님 의 모습은 췌언(贅言)할 필요없이 먼 남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은일자(隱逸者) 혹
은 책 앞에 앉은 선비 의 모습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군자라고 할 때의 도덕적 가치 규범과는 달리 누님 이라고 하면 아무리 나이 든 여성이라도 심미성
이나 애정과 관련된 세계를 연상하게 된다. 거울 앞에 선 이라는 거울 은 용모를 가꾸고 다듬는 도구
로 책-선비 에 대응하는 거울-여성 의 환유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시의 평자(評者)들은 누님의 모습을 흔히 오랜 세월 격정과 고통을 견디어 낸 성숙한
인간의 인고(忍苦)를 상징 하는 것으로 풀이해 왔다. 그렇게 되면 서정주의 국화 역시 군자의 모습과 다
를 것이 없게 된다.
윤리적인 원숙이 아니라 미(美)의 원수성,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관능적인 애욕이나 유혹에
들떠 있던 젊음의 미(美)가 아니라 실연의 고통이나 삶의 환멸과 좌절같은 것을 다 겪고난 뒤에 비로소
얻어지는 중년 이후의 여인에게 맛볼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봄에 피는 붉은
도화(桃花)와 가을꽃인 노란 국화의 의미론적 차이를 결정짓는 서정주의 시적 전략이다.
머언 먼 젊음 이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거울 앞에선 누님은 인생의 봄과 여름을 지나 겨울철로
접어든, 적어도 중년을 넘어선 여인이다. 그 얼굴의 화장 밑에는 처연하면서도 침잠된 미-젊음의 미와는
또다른 진짜 여성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두번째의 지향점은 그냥 누이가 아니라 나의 누님이라고 했듯이 매우 가까운 개별성과 혈연성을 느
낀다.
군자는 이상적이고 이념적인 존재로 우리와는 먼 존재로 느껴진다. 은자(隱者)는 세속과 단절된 것으
로 그 품격은 오상고절처럼 주위로부터 단절된 배제적 가치로 이루어진다.
미당의 국화가 다른 국화와 차이성을 지니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
(三月東風) 다 지나고 /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느냐 /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
가 하노라 라는 전통적인 그 국화는 네 홀로 , 너뿐인가 하노라 로 강조되어 있듯이 홀로 있는 절개
(고절)의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미당의 국화는 정반대이다. 주위의 모든 것과 친연(親緣) 관련을 이루며 피어난다. 시간의 단
위로 볼 때에는 봄과 여름과 가을이 하나의 고리쇠로 지속하고, 사물의 층위에서 보면 모든 사물이 무
생(無生), 유생(有生)의 담쟁이를 넘어 일체화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화는 봄의 소쩍새, 여름의 천둥과 인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연과 대응되는 인
생의 경우에서는 누님 과 나 와 동일성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너뿐인가 하노라 의 초절성(超絶性)이 아니라 모든 것과 결합된 친연성(親緣性)으로 새롭게 태어난
미당의 국화는 봄의 소쩍새 소리와 여름의 천둥소리와 인과 관계를 갖게 된다.
국화꽃은 가을에 피는 꽃이다. 그것은 봄철에 우는 소쩍새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하나는 식물이고 하
나는 동물이다. 보는 것과 듣는 것, 향기를 지닌 것과 날개를 지닌 것, 땅에서 사는 것과 공중에 사는
것, 국화꽃과 소쩍새는 어느 모로 보나 같은 자리에 앉힐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전설과 시의 상상적 세계라고 해도 소쩍새는 지금까지 국화가 아니라 같은 봄철에 피는 진달래 꽃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서정주의 시 속에서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밤마다 운 것으로 되어
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고 되어 있다. 봄부터 란 말에서 우리는 금시 국화꽃의 시원(始源)
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시간적 인과 관계만이 아니다. 꽃은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는 시각과 후각의 대상물이다. 그런데도
미당의 국화는 소쩍새의 울음소리와 먹구름 뒤에서 울리는 천둥소리의 청각물과 어울려서 감각적 세계
에 있어서도 통합 관계를 이루고 있다.
왕이 죽었다. 그리고 왕비도 죽었다 라고 하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왕의 죽음과 왕비의 죽음에 슬
픔이라는 인과성을 부여할 때 비로소 소설의 플롯(plot)은 형성된다.
이 유명한 정의처럼 미당은 관계없이 흩어져 있는 사물이나 그 현상 속에서 어떤 인과율을 찾아내는
것으로 시의 구성을 이끌어 간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봄-소쩍새-국화 , 여름-천둥소리-국화 에서
가을-서리-국화 에 도달한다. 그리고 서리는 직접적으로 노란 꽃잎을 피운다. 그리고 동시에 거울 앞에
선 나의 누님과 국화의 관계 역시 나 와 국화의 관계로 옮겨지면서 노란 네 꽃잎이 필라고 /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의 마지막 시행이 되는 것이다. 처음엔 한 송이
국화꽃 이라고 부르던 것이 마지막에 오면 네 꽃잎 으로 그 인칭이 바뀐다. 너라고 직접 불린 국화는
이미 밖에 있는 꽃이 아니라 은유의 거리마저 소멸한 나-국화 의 동일성으로 변한다.
봄과 여름의 계절, 그리고 누님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이 나에게 오면 간밤 이라는 아주 가까운
시간이 되고, 가슴 조이는 그 의미 역시 무서리와 직접 연결된다. 시가 진행되어 갈수록 먼데서 가까운
곳으로, 넓은 데서 좁은 데로 국화는 우리 옆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국화옆에서 의 그 옆 이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
국화 속에서는 모든 생명을 죽이는 서리가 오히려 꽃을 피우는 초월의 힘으로 작용한다. 누님도 나도
이 서리의 역반응에 의해서 비로소 삶의 노란 꽃잎 은 그 아름다움을 얻는다.
누님의 그 노란 꽃잎이 여성으로서의 최종적인 아름다움의 도달점이라고 한다면 잠 오지 않은 간밤의
무서리 속에서 피어나는 나 의 그 노란 꽃잎은 시인이 고통 속에서 얻어낸 아름다운 몇 줄의 시일 것
이다.
신라의 스님 월명(月明)이 밤길을 가며 피리를 불면 가던 달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이 천체
의 운행이 멈추는 순간, 만물이 교감하고 조응(照應)하는 그 순간에 시가 태어난다. 가을에 피는 국화꽃
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거울 앞에선 누님, 그리고 밤에 잠 못이루는 나(시인)는 서로 구별할 수
없는 것이 되고, 그 행복한 은유는 서리 내린 이 현실 세계를 교감과 조응으로 가득 채우는 시적 공간
이 되는 것이다. <이어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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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0.15(화) 조선일보 문학의 해 연중시리즈 >
◎ 누님 같은 꽃 국화의 새 이미지 창출 / 군자-은둔-절개 의 꽃으로만 예찬했다면 평범한 詩 될 뻔 / 소쩍새 울음-천둥소리
와 어울려 시각-후각-청각 통합 / 생명 죽이는 서리가 꽃 피우는 초월의 힘 으로….
다시 읽는 한국시
〈23〉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바다와 나비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힌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공주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여성 (1939년 4월)
金起林 바다와 나비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孤掌難鳴)
는 속담이 있다. 혼자서는 싸움이 되지 않는다
는 뜻이다. 의미 역시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기호론자(記號論者)들이 잘 인용하는 해골표
를 두고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만약 해골 표
시를 한 깃발이 길가에 꽂혀 있었다면 그것은
교통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위험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바다의 배에 그런 기(旗)가 달려 있
었다면 해적선이라는 전연 다른 의미가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작은 병에 해골 표시가 있으면 독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함부로 먹지 말라는 것이고, 큰 상자에 그런 표시가 달려 있었다면 방사성 물질이 담
겨 있으니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가 될 것이다.
김기림(金起林)의 바다와 나비 를 읽는데 있어서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론으로 접근해야 할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바다와 나비 라는 제목부터가 두 단어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비라고 하면 탐화봉접(探花蜂蝶) 이란 숙어대로 꽃과 관계된 의미로 굳혀져 왔다. 그러나 그 틀을 깨
고 꽃을 바다로 바꾸면 바다에도 나비에도 다같이 화학작용 같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나
비와 꽃 , 바다와 갈매기 같이 굳은 살이 박힌 정형구에서는 도저히 지각(知覺)할 수 없었던 심상과
감동이 생겨난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바다 와 나비 의 두 단어가 와 라는 연결 고리에 의해서
결합되는 순간이 바로 이 시가 태어나는 기점(起點)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바다와 나비를 결합시킨 것은
김기림이 처음은 아니다. 네르발 의 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종래의 꽃-나비 에서 바
다-나비 의 낯선 관계항(關係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다
와 나비 는 그것을 동기화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 힌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나비는 그게 바다인 줄 몰랐기 때문에 바다 위를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
을 일러준 일이 없다는 말은 그 나비가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들처럼 순수한 존재임을 나타낸다. 불
에 덴 일이 없는 어린아이들은 불을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고, 그것을 손으로 잡으려 한다. 그 무구(無
垢)한 눈과 순수한 의식으로 바라본 불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그것과는 전연 다른 불꽃일 것이다. 바다
의 두려움을 모르는 나비의 눈 앞에 나타난 그 바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배가 깨지고, 상어의 이빨이 번
득이고, 태풍이 산호초를 뒤엎는 그런 바다가 아닐 것이다.
나비가 날고 있는 그 바다는 즉물적(卽物的)인 바다, 어떤 선입견이나 관습에 오염되지 않은 의미 이전
의 그 바다일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유리 바다와도 같이 투명한 바다이다. 바다와 나비의 대조 자체가
극소(極小)와 극대(極大), 점(點)과 면(面), 그리고 가벼운 공기와 무거운 물의 만남으로 초현실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실제로 그 나비가 철없는 어린 나비라는 것은 일련의 시를 좀더 구체적으로 기술한 다음 연을 보면 알 수 있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 공주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어린 날개 그리고 공주처럼 과 같은 표현들은 그 나비가 이 세상에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어린 나비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순진한 어린 나비이기 때문에 거대한 바다 전체를 순식간에 청무밭 으로 바꿔놓을 수가 있다.
이 지구의 공간은 바다와 육지로 되어 있으며, 모든 생물 역시 그 양대 영역에 의해서 분할된다.
칼 슈미트 는 <육지와 바다>에서 우리는 육지의 아들인가, 바다의 아들인가 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
여 이 대립적 의미로 세계의 전 역사를 읽어간다. 그런데 김기림은 바다와 나비 에서 어린 나비 한 마리로
바다-육지의 그 거창한 대립 체계를 해체시키고 역사의 공간, 정치의 그 공간을 시적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섬[島]이란 말이 시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를 바다-육지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있
게 하기 때문이다. 나비가 바다 위를 나는 상상은 바다 가운데 육지가 있는 섬을 생각하는 것과 닮은데
가 있다. 김기림의 나비는 극소화한 섬이며, 환상으로 변한 섬들의 파편인 것이다.
바다와 나비의 병치(竝置)는 색채의 세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흰 나비와 청무밭의 백(白)-청(靑)의
색깔은 청룡 백호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주를 나타내는 한국인의 오방색(五方色) 체계의 전통적 색채 대
응과도 통하는 것이다. 바다-갈매기, 꽃밭-나비의 낯익은 배합이 이렇게 바다-나비로 짝이 바뀌어지면
바다에서는 온통 꽃향기로 물들고, 나비의 어린 날개에는 하나 가득 해조(海潮)의 짠바람이 배게 된다.
바다 위를 나는 나비는 꽃잎 그늘에서 쉬고 있는 그런 나비가 아니다. 파도 위에 내릴 수 없는 그 나비
는 온종일 날아다녀야 하는 동적(動的)인 나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꿀을 따는 노동과는 관계 없는 무상(無償)의 비상(飛翔)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비가
꽃보다도 바다와 결합되었을 때 더욱 시에 가까워지게 되는 이유이다. 공주 는 노동하지 않는다. 공주가
지치는 경우는 오직 무도회에서 춤을 출 때 뿐이다. 공주처럼 지쳐서 라는 표현은 바로 나비의 비상을
춤에, 그리고 바다를 무도회장에 비기는 은유의 역할을 한다. 이것이 나비가 꽃밭 보다도 바다와 결합되
었을 때 더욱 그 춤이 춤다워지는 이유이다.
나비-바다의 결합이 이 시의 마지막에 이르면 나비-하늘로 그 병치법(竝置法)이 변화한다. 뭍으로 다
시 돌아온 나비가 만나게 되는 것은 여전히 꽃밭이 아니라 하늘의 초생달이기 때문이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바다와 나비의 공간은 시간적인 좌표를 얻게 된다. 그것은 그냥 바다가 아니라
3월의 이른 봄바다이다. 그리고 나비 역시 꽃보다 먼저 이 세상에 나온 철이른 나비이다. 이런 계절감을
전제로 했을 때 비로소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라는 종구(終句)가 현실감을 얻게 된다.
우리는 벌이나 개미허리라는 말은 들었어도 나비허리라는 말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비
의 육체성을 강조하려면 그것은 아무래도 나비의 날개가 아니라 허리여야 한다. 그리고 의상을 걸치지
않은 맨살의 느낌을 주는 것도 역시 날개가 아니라 허리이다. 그리고 그 허리는 2연의 날개와 짝을 이
루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다의 물결에 날개가 저렸던 나비가 3연에서는 하늘의 초생달에 그 허리가
시린 것으로 묘사된다. 예민한 시독자(詩讀者)라면 바다가 하늘로, 물결이 초생달로, 그리고 날개가 허리
로 병렬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와 밀착된 나비는 이제는 하늘과 맞닿
는다. 삼월달 바다가 아니라 삼월달 밤하늘의 초생달은 얼음처럼 차갑다. 허리가 시리다 라는 촉각과
온감각은 시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보다도 훨씬 대상과의 접촉거리가 가깝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봄볕과 봄바람의 따뜻한 한늘에서 나는 나비가 아니다. 새파란 초생달 빛과 그 냉기를 품고
있는 참으로 낯선 나비이다. 그래서 시적 상상력으로 채집한 언어의 나비 표본실에는 지금껏 우리가 경
험해 보지 못한 진귀한 신종 나비 한 마리가 더 진열된 것이다.
시가 하나의 생명체와 같다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DNA의 결합에 따라서 그 형태와 성격이
다른 무수한 생명체가 생겨나는 것처럼, 시인의 언어 역시 그 배함과 구성의 변화에 의해서 색다른 영
상과 의미의 생명체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어녕 교수> <1996.10.22(화) 조선일보 문학의 해 연중시리즈 >
◎ 바다에 꽃향기 넘치게 하는 詩語의 마력 / 한 마리 나비가 바다-육지를 시적 공간으로 / 나비와 바다 는 점과 면의 초현실
적 대조 / 흰나비와 청무밭… 白과 靑의 전통적 色조합.
다시 읽는 한국시
〈24〉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웃은 罪
즈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었지요.
평양성(平壤城)에 해 안 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 신세기 (1938년 3월)
金東煥 웃은 罪
巴人 金東煥은 國境의 밤 으로 널리 알
려져 있는 시인이다. 남성적이고 대륙적인 굵
은 골격으로 이루어진 그의 敍事詩는 敍情詩
위주의 한국 詩史에 매우 희귀하고 특출한 자
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드시 장편 서사시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웃은 罪 와 같이 아주 짧은 시에서도
우리는 국경의 밤 과 같은 파인의 서사시적
특성을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서사 문학을 쉽게 말하자면 이야기 란 말
이 될 것이고, 이야기를 풀어서 말하면 여러가지 사건이나 행동을 엮어나가는 사슬 이라고 말할 수 있
을 것이다. 웃은 죄 는 다섯행 미만의 단시(短詩)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서사 문학이 갖고 있는 모
든 요소가 압축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서사 문학의 가장 큰 요소인 행위의 코드를 보자.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는 소설로 치면
발단에 해당하는 행위(사건)이다. 행위 코드를 요약하면 지름길을 묻다 와 대답하다(가르쳐주다) 이다.
이 문답은 하나의 행위 사슬에서 한 단위를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의 단위를 이야기 구조 의
기능적인 요소로 요약하면 요구하다 와 들어주다 가 된다.
작은 이야기이든 큰 이야기이든 서사 예술에서 다루는 행위의 사슬은 예스 와 노 의 두 선택지(選
擇枝)의 가지를 타고 전개되어 간다. 그러므로 예스의 긍정축으로 서낵된 이야기는 다시 새로운 행위로
이어진다.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주고 가 그것이다. 길을 묻는 행위가 물을 달라는 행위로 이어지고, 길
을 가르쳐 주던 응답은 샘물을 떠주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 구조는 똑같이 요청하다…들어주다 이다.
그리고 다시 그 행동은 3행째의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었지요 로, 인사하다(답례하다) 로 끝난
다. 행동 코드로 보면 요청하다…들어주다 의 두 행위를 마무리짓는 종결 분에 해당된다. 사사예술의
구조를 시작…중간…끝 으로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이론 그대로 길을 묻고 대답하는 첫행은
발단 부분의 시작 (起)이고, 두 행째의 물 한 모금 달라기에 떠주었다는 것은 중간 (承), 그리고 마지
막 인사를 주고받다는 끝 (結)에 해당한다.
그러나 요청 하고 받고 하는 행위는 행위의 주체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웃은 죄 에서는
표면적으로는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행위주(行爲主)의 신분과 성격을 나타내는 인물 코드가 곳곳에 숨
어 있다. 지름길 묻길래 라는 행위를 행위주의 신분과 성격을 나타내는 코드로 분석하면 나그네 가
되고, 길을 가르쳐주는 측(側)은 그 고장에 사는 사람으로, 마을사람/바깥사람 , 定着者/旅行者 의 대
립적인 인물 코드를 형성한다.
그러나 두번째의 물 한 모금 달라와 샘물을 떠주는 행위항(行爲項)에서는 男/女의 성별을 드러내게
된다. 샘물을 떠주는 것으로 그 화자는 행동의 장소가 샘터라는 사실과 샘물을 떠주는 행위주는 샘터에
서 일하고 있었던 여성이었음을 알려 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서사 예술의 또다른 요소인 문화적 코들르 찾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샘터는 문화 풍속으로 볼 때 여성에 속하는 젠더 공간 이며, 봉건적인 규방(閨房) 문화에
얽매어 있던 여성들에게는 유일한 열려진 공간으로 낯선 외간 남자와 만날 수 있는 로맨스의 극적 장소
의 하나인 까닭이다. (목마른 나그네에게 샘물을 떠주고 거기에 버들잎을 띄워주는 것으로 남녀의 사랑
이 싹트는 이야기들은 민요, 민속, 속담과 같이 문화적 코드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기술된 행동의 연쇄가 사사예술로 의미를 갖는 것은 마지막 연의 평양성에 해 안
뜬대두 / 난 모르오 // 웃은 죄밖에 의 그 두 행이다. 왜냐하면 이 두 행에 의해서 수수께기 코드라고
하는 해석학적 코드와 상징코드를 발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웃은 죄 라는 말은 웃음이라는 행위 속에 감춰진 진짜 의미를 알려주는 것으로, 실은 인사하다…인
사받다 가 행위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길을 묻다 , 물을 달라고 하
다 , 인사를 하다 의 세 행위항의 연쇄에서 마지막 인사하다 도 실은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요청하
다…받아들이다 로 풀이된다. 즉 인사는 구애(求愛)의 프로포즈이고, 인사를 받다에서 그 웃음은 단순한
인사에 대한 받아들이다 가 아니라 그 프로포즈에 대한 예스로, 또 하나의 긍정축이었던 셈이다.
그뿐아니라 행위코드에서는 단순히 인사를 받아들이다 의 표시지만, 상징코드로 보면 웃음은 욕망의
금제(禁制)나 억제(抑制)와 대림하는, 닫힌 것으로부터 열린 곳으로 나가는 의미가 된다.
즉, 사랑의 상징코드인 것이다. 평양성에 해 안 떠도 나는 모르오 는 일종의 문화코드이기도 하지만
해석적 코드와 상징코드에 속한다.
해석코드는 규방 처녀가 길가던 나그네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숨겨진 사건 찾기가 되고, 문화코드
로 보면 남녀유별의 도덕적 파계(破戒)나 사회적 관습에서 일탈(逸脫)된 한국적 애정이나 그 정서를 보
여주는 것이다.
평양성에 해가 안 뜬다는 것은 천륜을 어기거나 사회적 질서의 일탈성과 파괴로 일어나게 되는 것을
천변(天變)과 관련시킨, 일종의 속담같은 봉건사회에서의 문화코드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러한 말에서 우리는 사랑을, 어쩌면 첫사랑을 하게 된 시골처녀의 수줍고 천징한 성격을 짐
작하게 한다.
즉, 인물코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화자의 연극적 대사를 통해서 우리는 앞에서 읽은 모든
행동의 연쇄를 거슬러 다시 읽게 만든다.
처음에는 그냥 단순한 길묻기, 물달래기, 인사하기로만 보여졌던 일련의 행위들이 다시 거슬러 읽게됨
으로써 실은 그 두 사람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그 요청과 응답도 역시 심도(深度)와 은밀성(隱密
性)을 증대시켜 가는 것으로 인식된다. 말하자면 해석학적 코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웃은 罪 에는 일체의 정감적 언어가 배제되어 있다. 사랑이라는 말, 그리움이라는 말, 혹은 그 비밀
을 간직하고자 하는 혼자만의 고민 등이 단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서사
예술의 기법과 연극적 대사를 통해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행위코드, 인물코드, 해석적코드, 상징적코드, 그리고 문화적코드의 다섯가지 코드에 의해서 국경의
밤 과 같은 사랑의 서사시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행위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그려진 한 여인과 그 사
랑의 발견…. 평양시가 아니라 평양성이라고 부르던 옛날 북녘 시골 여인의 정감을 우리는 마치 장터에
서 팔던 딱지소설이 아니면 구성진 변사의 목소리와 함께 돌아가던 무성영화처럼 그리움 속에서 바라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어녕 교수> <1996.11.26(화) 조선일보 문학의 해 연중시리즈 29회분>
◎ 수줍은 시골처녀 모습 보이는듯 / 길묻기→물달래기→인사 샘터의 대화 / 웃은 죄밖에… 사랑-그리움-고민 감춰 / 평양
市 아닌 평양城 … 옛정취 물씬!
다시 읽는 한국시
〈25〉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The Last Train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냇다.
비애야!.
개찰구에는
못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흐터져잇고
병든 역사가 화물차에 실리여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즉도
누귈 기둘러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맛나면
목노하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름 펼처잇다.
오장환
The Last Train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오장환이라는 시인
도, 그리고 그가 쓴 [The Last Train](더 라스
트 트레인)이라는 시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오랫동안 금제의 월북문인 목록에 올라있었던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60대 이상의 문학
애호가들이라면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칠 때
마다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비애야!]
라는 그 시구를 한번쯤 속으로 외쳐보지 않았
던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날이 저문다던가, 역두라던가, 그리고 너라
고 의인화해서 부른 비애라던가, 누가 읽어도
어두운 종말의식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비애
야]라는 짧은 한마디 말이 시행 전체를 한숨
처럼 메우고 있는 운율감도 처절하다.
실상 이 시에는 [비애]란 말을 비롯하여 [청
춘] [추억] [슬픔] [목놓아 울리라]와 같이 감
상적이고 통속적인 낱말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인생을 역이나 기차에, 그것도 막차에 비기는 우유는 아무리 호의적으로 평한다 해도 참신하다
고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이 시가 주는 독창성, 그리고 그 매력은 그러한 감상의 흐름을 갑자기 절단하고 돌연한
이미지로 전환하는 그 의외성에 있다. 기호론적으로 말하자면 코드전환이다.
그 첫번째의 의외성은 개찰구에서 대합실로 기차와 역의 코드전환에서 발생한다. 개찰구란 말은 차
표를 내고 기차를 타기 위해 통과하는 출구로서 [타다] [출발하다] [떠나다] [보내다] [헤어지다]와 같
은 일련의 행위와 관련되는 코드를 생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찰구는 [너를 보냈다 비애야!]와 같은 시적 코드로서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찢긴 청
춘의 조각이 흐터져 있고/병든 역사가 화물차에 실리여 간다]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때 독자들은 누
구나 화자를 배웅하는 사람, 즉 누군가를 떠나보내기 위해서 역에 있는 사람으로서 인식한다.
[개찰구에는…]으로 시작되는 2연과 [대합실에…]로 시작되는 3연은 똑같은 병렬구조로 되어 있으나,
[개찰구]와 [대합실]은 전연 색다른 코드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개찰구와 달리 대합실은 문자 그대로 만남과 기다림의 코드로서 배웅이 아니라 마중의 장소
이다. 그래서 대합실의 코드는 역과 기차를 출발에서 도착으로, 헤어짐에서 맞이함으로 바꿔버린다.
그래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자로서의 화자 입장이 3연에 이르면 갑자기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마중나
온 자로서 바뀌게 된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아즉도/누귈 기둘러/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목노하 울리라.] 이렇게 대합
실의 코드는 출발의 장소인 역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전환하고, 화자 역시 누군가를 기다리
고 있는 사람으로 변신하게 된다.
대합실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아직도]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막차가 떠난뒤에도 기대를 버리지
않고 기차를 타고 찾아올 사람을 기다린다. 개찰구의 사람들과 대합실의 사람들은 전연 다른 코드에서
존재하고 있다. 같은 역, 같은 차인데도 그 코드에 따라서 의미는 아주 달라진다.
두번째의 코드전환은 [카인을 만나면]이라는 구절에서 발견된다.
문맥적 보완이 없어 그 뜻이 아주 애매하게 들리지만 그것이 비애니 청춘이니 하는 코드와 구별된다
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비애와 청춘은 개인적 차원의 코드에 속해 있는데 비해서 카인은 창세기적
코드로서 인류전체의 역사나 그 종말론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갑자기 이 시에서 서정적 요소는 서사적
인 요소를 띠게 되고, 감상적인 정서는 원죄와 같은 역사적 의식으로 변한다. 즉 정서에서 의식으로의
전환인 셈이다.
그래서 개찰구 코드에서 숨겨져 있던 [병든 역사]란 의미가 전면으로 나서게 되고, 정서를 의인화했던
그 대상은 상징적 대상으로 변한다.
끝없이 이마에 죄인의 표지를 달고 지구의 끝에서 끝으로 방황하는, 그래서 언제나 막차뒤에 오는 손
님으로서의 카인-- 라스트 트레인의 종말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카인인 것이다.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이라는 시구에서 강조된 이곳은 막차가 떠나고 난 다음의 대합실이며 [고
도를 기다리며]와도 흡사한 절망의, 그러나 기다림의 [희망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세번째의 코드전환은 종련의 거북이다. 기차가 거북이로 변신하는, 너무나도 돌연하고 엉뚱한
이 전환은 [라스트 트레인]의 전 시의 구조를 바꿔버리는 작용을 한다. 기차는 문명의 코드에 속해있는
것이고, [기차는 빨러…]라는 아이들의 노래처럼 스피드를 나타내는 코드와 관련된다.
그러나 거북은 십장생의 하나로 전통적인 코드에 속해있고 이솝우화의 코드대로 저속을 나타내는 가
장 느린 동물이다. 시의 첫연은 [비애야!]라고 불렀는데, 이 마지막에서는 [거북이여!]로 바뀌어진다.
기차를, 막차의 이미지를 쫓아오던 사람들은 예상치 않던 거북이의 패러다임 변환으로 충격을 받는다.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로선이/너의 등에는 지도처름 펼쳐있다.]
놀라운 전환이다. 막차는 거북으로 변신되어 있다. 기차길의 선로가 거북의 잔등이 무늬로 변하고 다시
그것은 지도로 확산된다. [거북무늬 선로 지도]의 변환과정속에서 이미 화자는 전송객도 출영객도 아닌
거북의 승객이다. 어디로 가나 그 종착역은 슬픔이다. 어두운 종말의식은 변하지 않았으나 종말을 유예
하는 지속(느린 속도)과 장수의 상징마저 지니고 있는 지속의 시간-- 거북이에 의해서 어쩌면 문명을
횡단하는 전통문화이기도 한 그 거북이에 의해서 오장환의 종말의식은 아주 작은 희망의 언어로 바뀌
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상상력이 풍부한 독자라면 거북의 잔등이에 실은 이끼낀 비석의 금석문자, 이제는 판독조차 할
수 없는 그 이상한 상형문자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기차가 비석을 등에 실은 거북이의 대석으로 변하는 이 전율적인 시인의 상상력속에서는 카인의 후
예들이 겪고 있는 슬픔의 노선(역사)까지도 견고한 거북무늬로 응축되고 마는 것이다.
오장환은 이 의외성에 의해서, 그리고 패러다임 전환에 의해서 통속적인 역이나 기차의 상징적 가치
를 높였다. 그리고 그 의미를 개인의 차원에서 민족의 차원으로, 민족의 차원에서 전인류의 차원으로 시
적 의미를 심화하고 확산시켰다. [라스트 트레인]은 식민지의 지식인만이 한숨으로 외우는 시가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건 카인의 자손으로서 상징되는 모든 사람들의 시인 것이다. 그가 막차라는 한국말
을 사용하지 않고 영어로 시의 표제로 삼아 라스트 트레인이라고 한 것도 그런 뜻 때문이었을까.
<이어녕 교수>
< 1996.10.28(화) 조선일보 문학의 해 연중시리즈 >
다시 읽는 한국시
〈26〉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귀고(歸故)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船을 내리면
우리 故鄕의 선창가는 길보다도 사람이 많았소.
양지 바른 뒷산 푸른 松柏을 끼고
南쪽으로 트인 하늘은 旗빨처럼 多情하고
낯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내가 트던 돌다리와 집들이
소리높이 창가하고 돌아가던
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 있고
그 길을 찾아가면
우리 집은 유약국
行而不信 하시는 아버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冊曆처럼 愛情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新刊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청마집 중에서
柳致環 귀고(歸故)
정지용의 故鄕 과 靑馬 유치환의 시 귀
고(歸故) 를 놓고 어느쪽이 더 시적으로 느껴
지는가라고 물으면 어떻게 될까. 백이면 백
모두가 정지용쪽을 손꼽을 것이다. 노래 가사
로 널리 불려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향 풍
경을 묘사한 이미지도 음율도 그리고 그 정서
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에 비해 선창가에서부터 고향집에 돌아와
부모님에게 절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순서대로
나열해 놓은 청마의 歸故 는 시(詩)라 하기
보다는 무슨 중학교 학생이 쓴 작문 한 토막
같다고 할 지 모른다.
그러나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
향은 아니로뇨 의 지용의 시에서 반복적인 음
악성을 제거하고 아니로뇨 와 같은 종결어미
를 아니다 로 바꿔놓으면 고향에 돌아와도
옛날 고향이 아니다 라는 지극히 밀도 없는
산문적 서술이 되고 만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산문적인 것은 지용쪽이라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말은 귀향객들 누구에게라도
쉽게 들을 수 있는 상투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어떤 현란한 시적 수식어를 붙여도 지용의 고향 은 근
본적으로 고향은 옛날 고향이 아니다 의 예문(例文)처럼 항목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헌 冊曆처럼 愛情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新刊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라는
歸故 의 고향은 일상적 의미 공간으로는 환원 불가능한 시적 고향인 것이다. 고향 선창가 의 바다로
부터 시작한 그 물리적 고향 은 책력이나 그림책과 같은 책의 공간 으로 전환(轉換)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歸故 의 고향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일상적인 고향 공간이 시적 언어공간
으로 바귀어가는 그 변형과정을 읽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넓은 바다가 남쪽으로 트인 조각난 하늘과 송백의 산으로 바뀌고, 그것이 다시 돌다리와 집들이 들
어서 있는 마을로, 그리고 그 마을은 다시 유약국이라는 고향집으로 좁혀진다. 이러한 공간의 수축작용
은 집에서 대문으로, 대문에서 문지방으로, 문지방에서 방안으로 이어지고, 이윽고 그 내부의 구심점에
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리하게 된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공간 이동은 행동축과 연계되어 있다. 배에서 내리다 로 시작된 고향으로의
접근 행동은 무수한 경계 영역을 통하여 아버지에게 절을 하다 로 이어진다. 절하기 는 아버지의 몸
과 자기의 몸의 거리를 최소한으로 좁혀주는 접근 운동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고향과 자신의 거리는
절하기 에 의해서 거의 제로(zero) 상태가 된다. 하지만 고향에의 접근을 멈추지 않고 거기에서 더 한
발짝 들어간 것이 이 시의 마지막 행에 나타나 있는 어머니의 몸 이다. 아버지의 신체 공간이 돋보
기 로 줄어들듯이 어머니의 몸 은 책력 이라는 비유에 의해서 공간과 그 시간이 모두 응축된다. 돋보
기가 아버지의 시간을 나타내는 환유(換喩)이고( 아버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
고 ), 冊曆은 어머니의 시간을 나타내는 은유(隱喩)이다( 헌 冊曆처럼 愛情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
돋보기, 책력들은 모두 책읽기 라는 행위소(行爲素)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靑馬는 이 독서의 추상 공
간 으로 고향의 물리적 거리를 넘어선다.
실제 물리적 거리를 놓고 보더라도 인사를 하고 받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어머니 옆 에서 신간(新刊)을 읽고 있는 나는 거의 거리를 느낄 수 없게 좁혀져 있다. 내가
끼고온 신간이라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여기의 신간은 자기 자신의 몸과 일체성을 나타내는 환유
로써 어머니의 몸으로 비유된 헌 책력(冊曆)의 은유와 대비를 이룬다. 이 대비를 통해서 지금까지 나와
고향 사이의 공간적 거리가 시간적 거리로 그 위상이 바뀌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새 책과 헌 책으로 상
징되는 나와 어머니의 신체적 차이는 책읽기에 의해서 소멸되고, 내가 모태(母胎) 속으로 회귀해 가는
시간의 소급 운동이 시작된다. 그것이 바로 新刊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라는 언표에 의해서 드러난다.
어머니의 곁에서 책읽기 란 어른들이 읽는 신간 을 유아들이 보는 옛날 그림책 으로 바꿔놓는 내면
적 행위이다. 책읽기에서 책보기 로, 문자에서 그림으로 , 어른의 몸에서 아이의 몸 으로 어머니의
몸(고향)은 그 시간성을 역류시킨다. 그렇게 해서 고향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신체성)으로 수축되고,
그 몸은 다시 책으로 상징되는 언어 공간으로, 그리고 그것은 시간을 나타내는 책력장의 숫자나 유아의
그림으로 환원된다. 고향의 섬이 육지=도시와 대비되는 공간을 해체하고 있듯이 신간을 그림책처럼 읽
고 있는 어머니 몸의 그 공간은 지식(책읽기)과 역사성(신간)을 모두 해체해 버린다.
그래서 육지에서 섬으로, 어른에서 아이로, 책읽기에서 책보기로 끝없는 구심점을 향한 공간의 수축작
용과 모태로 돌아가는 시간의 소급행의의 이중 렌즈에 의해 찍힌 歸故 의 고향은 우리가 추석 때 돌아
가는 그런 고향의 의미와는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시적 공간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고향인
것이다.
일상적 공간은 많은 경계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歸故 의 시에도 다섯 개의 경계 영역이 나타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번째 경계가 바다와 뭍 사이에 있는 선창가 이고, 두번째 경계가 마을 안과 마을 밖을 나누는
돌다리 의 경계 영역이다. 세번째는 유약국 으로 이 시에서는 무표항(無標項)으로 되어 있으나 그것은
담이라는 경계 영역으로 표시된다. 넷째 경계 영역은 아버지 어머니와 나의 몸이라고 하는 생체적 경계
영역으로 성명(姓名)처럼 추상적인 것과 피부처럼 구상적인 것으로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경계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경계 영역은 완전히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추상적인 내면의 경계 영역에 속한다. 절을 하다 와 절을 받다 는 아버지와 나의 경계 영역과 그것을
넘어 들어가는 행위를 나타낸다. 그리고 어머니 곁에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되돌아가 신간책을 그림책
처럼 보고 있는 것이 바로 내부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들이다.
고향은 이같이 많은 삶의 경계 영역을 돌파하여 보이지 않는 내부의 구심점으로까지 돌아가려는 공간
과 시간으로 출현한다. 인간의 행위와 역사는 크게 말해서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원심 운동과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구심 운동으로 되어 있다. 그 원심 운동에서 생겨난 것이 객지(客地)이고, 그 구심 운
동에서 탄생되는 것이 고향(故鄕)이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라고 한탄한 지용의 고향이 시적으로 표현된 산문적인 고향 이라고 한다면
어머니 옆에서 내가 끼고 온 신간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라고 한 청마의 歸故 는 산문적으로 표현된
시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마는 고향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무수한 경계 영역을 넘어 끝없이 수축해 들어가는 구심적 공간,
그리고 출생의 모태를 향해서 끝없이 역류하는 시간으로서 고향의 의미를 창조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어녕 교수>
<1996.12.03(화) 조선일보 문학의 해 연중시리즈 30회분>
◎ 옛시절로 시간여행하는 詩的고향 //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향의 구심점/ 선창가→돌다리→시골집→부모님…/ 고향과 자신의
거리 제로상태 로…
다시 읽는 한국시
〈27〉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현대문학 1968년 8월호>
김수영 풀
순응하듯 저항하는 `풀들의 혁명'
―――――
형용사 안쓰고 부사로
풀들의 미묘한 변화 표현
왜 당구대는 초록색인가. 이상스럽게도 카
드놀이나 룰렛판이나 서양의 놀이판은 모두가
초록빛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유럽의 색
채]를 쓴 미셀 파스투로는 그것이 16세기때부
터 내려오는 풍습이라고 말한다. 여러가지 원
인이 있겠지만 푸른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고
골프를 하는 스포츠를 보면 그것이 어디에서
부터 비롯되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유럽의 지중해성 기후는 농작물을 기르는데
는 적합치 않지만 양떼나 젖소가 뜯는 목초를
기르는데는 이상적이다. 그래서 유럽사람들의
생활은 목장의 풀밭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서구문학에서는 풀이 생명과 활
력의 상징물이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월트 휘트먼의 [풀잎]이다. 서구사람들이 이상
으로 삼아온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당구대에 깔린 초록색 나사는 지금도 집집마다 잔디를 심는 서양사람들의 풍속처럼 초지
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는 목장문화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김수영 시인의 [풀]읽기는 당구대의 놀
이판과 대단히 흡사한데가 있다. 풀에 대한 그리움과 찬양만이 아니라 당구대 위에 흩어진 당구공처럼
그 시인의 언어 역시 희고 붉은 양색깔로 선명하게 나뉘어 있다.
[날이 흐리다] [바람이 불다]와같이 기상조건을 나타내는 말들이 [흰 공]이라면 풀에 관한 말들은
그와 대비를 이루는 [붉은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는 [바람]과 [풀]의 두 언어가 서
로 부딪칠 때 생겨나는 [눕다]와 [일어나다]의 서술어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간다. 이 시에는 거의 명사
를 수식하는 형용사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행위(동사)에 관련된 부사들은 도처에, 그리고 시적 메시
지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로 등장한다.
풍미한다는 한자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바람이 불면 모든 풀잎은 일제히 한쪽 방향으로 나부끼며 쓰
러진다. 풀이 눕는다는 것은 곧 바람에 굴복하고 순응하는 풀의 패배이며, 일종의 작은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풀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와는 정반대로 생명과 자유를 되찾는 것이며, 독립적인 의지를 나타내
는 승리인 것이다. 이렇게 눕다/일어서다의 대립항을 어떻게 선택해 가고 또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서 그 언어의 공이 굴러가는 성질과 속도, 그리고 그 방향과 미묘한 부딪침이 결정된다. 그러므
로 이 시에서는 그 움직임을 제어하는 부사가 당구대의 쿠션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눕다에 중점을 둔 1연의 풀들을 보면 안다. 그 풀들은 바람부는 대로 움직인다. 바람의 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억눌리고 쓰러지는 순응의 풀이며 수동적인 풀이다. [풀이 눕는다]로 시작하는 그 시행은 계
속 그 뒤에도 [나부끼다]와 [울다]로 이어져 갈 뿐이다. 그러나 주어와 술어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
지 않지만, [드디어 울었다]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에서 [드디어] [더] [다시]와같은 부사가 누워있는
풀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미묘한 움직임의 변화를 나타낸다. 드디어 울었다는 것은 참고 있었던 풀의
의지를, 그리고 [더 울었다]는 증대되어가는 좌절의 의미를, 그리고 [다시 누웠다]의 그 다시는 계속 일
어나려고 노력하던 풀의 잠재된 행위와 그 지속성을 묻어둔다.
그래서 풀의 의지를 숨겨두었던 그 부사들이 2연째에 오면 [빨리]와 [먼저]로 발전해서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와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운다]의 능동적인 풀을 만들어 낸다. 바람보다 빨리 눕는다는
것은 수동적이었던 풀이 이제는 자기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능동적 풀로 변해 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바람과 풀의 행위는 이미 같지 않은 것이다. 이 같지 않은 속도의 그 작은 틈새속에서 [풀]의
자유와 의지가 번뜩이기 시작한다. 그것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이다.
일어난다는 것은 저항이며 생명이며 희망이자 승리이다. 그것은 풀들의 작은 혁명이다.
눕다/일어나다의 대비를 극대화한 것이 3연의 풀이다. 1연의 바람에 눕는 풀이 2연에 오면 바람보다
빨리 눕는 풀로, 그리고 그것이 3연에 오면 바람보다 늦게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서는 풀이 된다.
그래서 이 전체의 시적 구조는 음악용어로 말하자면 크리센도로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1연의 나부끼
는 풀이 3연에서는 뿌리째 눕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바람의 강도와 흐린
날씨의 정황은 [발목까지] [발밑까지] 내려와 결국엔 [풀뿌리가 눕는다]로 증대된다.
풀뿌리가 눕는다는 말은 이미 그 풀이 단순한 식물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적인 풀의
경우는 뿌리가 뽑히는 경우는 있어도 바람에 눕는 일은 없다. 그래서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할 때의 바
로 그 풀뿌리처럼 이풀들은 식물 언어에서 정치적 이념어로 전환된다. 그러므로 바람에 눕는 1연의 사
실적인 풀이 바람보다 빨리 눕는 2연의 비사실적인 풀로 옮겨가고, 그것이 다시 3연째의 바람보다 늦
게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서는 반사실적인 풀로 바뀌어가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눕다/ 일어서다의 대립적 행위를 수식하는 언어들 역시 [다시]에서 [빨리]로, 그 [빨
리]에서 [늦게]로 바뀌어 지면서 시 전체의 긴장과 풀의 의미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눕다와 동격인 [운다]란 말이 3연에 오면 웃는다로 바뀌고 바람과 풀의 대응관계를 나타내
는 비교어 역시 빨리/늦게, 먼저/늦게의 대비로 무력한 풀의 의미를 반전시켜 [거대한 풀뿌리]를 만들
어 낸다.
[풀이 눕는다]로 시작한 이 시가 마지막에 오면 [풀뿌리가 눕는다]로 그 상황이 한층더 가열한 것으
로 변해 있는데도 [우는 풀]은 [웃는 풀]로 변신되어 있다. 김수영의 식물원에서 자라는 풀들은 이파리
를 나부끼게하는 바람보다도 뿌리를 흔들어 놓은 바람속에서 더욱 자유롭고 강한 풀이 되는 까닭이다.
풀을 압도하고 압도하는 바람, 이파리와 줄기와 그 뿌리까지 누이는 거대한 바람의 힘, 그리고 비를
몰고 오는 흐린 날의 기상은 대체 무엇인가. 그 풀이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할 때의 바로 그 풀뿌리라
고 한다면 그 바람과 흐린 날은 민초, 그 당시 유행하던 말로 하자면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고 그 생존
을 위협하는 정치세력들이라는 것은 너무나 뻔하다. 그런데도 김수영 시인의 언어들이 다른 정치이념
을 구호화한 시와 비교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뻔한 알레고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예츠의 말
이었던가. 시를 쓰는데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알레고리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일이다.
당구는 직선운동이면서도 그것을 치는 큐의 변화에 의해서 그리고 쿠션을 이용한 간접적인 작용에
의해서 표적구를 때린다. 김수영 시인은 시를 총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구대의 큐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흰공 붉은공의 그 단순한 도식의 언어들을 갖고서도 무한한 변화와 우연성, 그리고 최대의 유희성을
획득한 초원의 시학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어령·이화여대 석학교수>
발행일 : 96년 12월 09일 입력일 : 96/12/09 17:41:48 자료량 :132줄
새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읽는 한국시
〈28〉- 마지막회
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박남수 새
시인은 노래하는 새…시로 쓴 시론
――――
박남수 시인은 [새]에 대하여 많은 시를
썼다. 더구나 그것들은 보통시와 달리 [메타
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
목할 만하다. 말하자면 새에 관한 그 시들은
보통 시가 아니라 시나 시인을 대상으로 한
[시로 쓴 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새는 여
러가지 점에서 시인과 유사한 점이 많다.
[새]의 촉매어는 [운다]와 [날다]이고, 시인
의 그것은 [노래하다]와 [상상하다]이다.
[운다]는 시인의 [언어](노래)를 그리고, [날
다]는 시인의 [상상력]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땅과 대칭을 이루는 하늘에
속해 있다.
그래서 [이제까지 무수한 화살이 날았지
만/아직도 새는 죽은 일이 없다]라는 [새]의
시작행에서 [새]를 시나 시인으로 바꿔놓아
도 별로 어색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더
구나 새를 죽이는 화살이 2연에 오면 포탄
으로 바뀌고, 3연에서는 철조망과 수용소 그
리고 원자탄으로 바뀐다.
화살이라면 몰라도 포탄이나 원자탄은 새를 죽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보다
는 [인간]과 관련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새에 대한 언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새는 죽은 일이 없다]라는 첫연의 시구가 2연에 오면 [아
직도 새는 노래한다]로, 그리고 다음에는 다시 [아직도 새는 주장한다]로 바뀐다. 병렬법으로 된 그 언표
를 보면 새의 생명은 곧 노래하는 것이고, 노래한다는 것은 자기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역시 죽은 일
이 없다는 새의 생명은 뒤에 갈수록 인간화하여 주장이라는 말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원자탄이 새를
죽이는 것과 관계가 없듯이 주장이라는 말 역시 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이렇게 처음 시작한 새와 화살의 관계가 새와 전쟁무기(포탄, 원자탄)로 추상화하면 새를 가둔 조농
역시 철조망과 수용소처럼 새와는 관련이 없는 인간들의 감금장소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끝없이 새
와 인간(시인)이 병렬관계를 이루면서 전 시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이러한 시적 구조에서 당연히 문제되는 것은 시의 첫행과 마지막 행에 다같이 반복되어 있는, 무료
히 저녁이면 주검의 껍데기를 허리에 차고 돌아오는 포수와 새의 관계인 것이다. [새와 화살]에서 [새
와 원자탄]의 관계를 수렴하면 결국 새를 죽이는 [포수]로 수렴된다. 표면상으로는 포수가 새를 쏘아 죽
이는 것으로 되어 있고, 새는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주검의 껍데기]일 뿐이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허리에 차고 저녁에 돌아오는 포수의 행동을 [무료히]라고 말함으로써 새
는 결코 죽지 않았다는 말을 정당화한다.
그 짧은 시에 [아직도]라는 말이 네번씩이나 되풀이 해 나오는 것을보아도 알 수 있듯이포수는 어떤
특수한 시대의 한 상황을 대표하는 인간들이라기보다 역사를 지배하고 그 문명을 이끌어 오는 지상적
인 힘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뜨겁게 노래하고 자유롭게 날고 무한과 영원의 하늘을 지
향하는 생명체, [새=시]의 세계와 반대편에 있는 세속적인 현실들이다. 포수들은 [저녁에--돌아온다]라
는 말에서 매일 매일 아침에 직장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일상의 생활, 반복하는 삶 속에서 살아
가는 바로 우리들 자신일 수도 있다. 감동도 꿈도 노래도 없는 산문적인 무료한 나날들은 새를 죽이며
살아가는 반시적인 행동으로 영위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더럽혀진 하늘에 아직도/일군의 새들이 날고 있다.] 우는 새에서 시작하여 나는 새로 끝나 있는 이
시의 마지막 상황은 [더럽혀진 하늘]로 요약된다. 물리적인 의미로는 공해로 오염된 자연파괴를 의미하
는 것이기도 하고, 기호론적 의미로는 무한 영원 성스러움과 같은 온갖 세속 문화와 대조를 이루는
신성문화의 붕괴 또는 물질과 육체와 땅의 언어에 대한 정신과 영혼의 세계가 더럽혀진 것일 수도 있
다. 그 어느 것으로 해석되든 포수는 도식적으로 한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에워싸
고 있는 비시적 환경을 총칭하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인간의 역사와 문명은 날이 갈수록 비시또는 반시의 방아쇠를 당긴다. 노래하는 것, 아름다운 것, 순
수한 것, 사랑하는것, 작고 가볍고 날개를 가진 모든 것들이 추락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새=시를 조롱이나 철조망과 수용소 속에 가두는 것은 전쟁과정치만이 아니다. 박남수 시인은
[새1]이라는 다른 시에서 [새는 울어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라고 말
하면서 [포수는 한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포수는 어마어마한 역사, 문명만이 아니라 작게는 시인자신이나 비평가들일 수도 있다. 노랫속에 뜻을
담으려 하는 이데올로기지향, 그리고 억지로 가식하여 시를 꾸미고 풀이하는 시인과 비평가들까지도
실은 새를 죽이는 음모자의 편에 서 있는 자이다.
새의 노래를 노래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듣지 않고 그 속에서 무슨 목적성을 지닌 뜻을 찾으려고 한
그 많은 시비평과 시론가들이야 말로 어쩌면 [몇마디의 이념적 언어로 그 순수를 겨냥한] 포수들이라
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다시 읽는 한국시]의 마지막 회를 박남수 시인의 새로 끝맺게 된 것은 우연 이상의 의
미를 갖는다. [신은 죽었다]가 19세기의 선언이었다면, [시인은 죽었다]는 20세기에의 선언이다. 오역된
영화제목이기는 하나 우리는 정말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박남수 시인은 [새는 죽
은 일이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반명제를 내놓는다.
아마도 내 자신이 이 연재에서 보여주려고 하였던 것도 시인들의 부활, 결코 시인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시를 다시 읽는 행위를 통해서 포수들의 옆구리에 찬
껍데기뿐인 새의 주검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작업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소망으로 이 글을 쓰
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언젠가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시인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오식이 시인을
죽인다. 오식을 오독이라고 고쳐도 좋다. 시를 몇가지 틀과 목적론에 의해서 자의로 해석하려는 순간
비평이라는 그납덩이의 언어들은 살아 있는 새의 날개를 찢고 심장을 꿰뚫는다.
그 결과로 단지 껍데기의 주검만이 남는다. 비평가의 허리에 찬 그러한 시의 주검들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다. 시에 정독이 있다는 개념 자체가 오독을 낳는 요인이기는 하다. 시는 끝없이 의미를 생성하
고 있는 텍스트로, 그 의미는 복합적이며 그 구조는 변형적인 것이다. 새소리를 새소리 그대로 들으려
는 노력과 태도만이 더럽혀진 하늘에서도 시를 자유롭게 날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써온 내 자신이 그 [순수를 겨냥해 산탄을 쏜] 그 많은 포수꾼들의 하나일런지 모른다. 하지
만 그것은 단지 오발이었을뿐 껍데기의 주검을 허리에 차기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상을 당한 가운데서 이 글을 모두 끝낸다. 나의 아버지는 19세기 말에 태어나셔서 101세로 세
상을 떠나셨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의 죽음이자 마지막 남은 19세기의 죽음이기도 하다. 10년전에 아
버지는 우리를 위해 작은 책자 하나를 남기셨는데, 그 책 제목은 [새는 울되 눈물을 흘리지 않나니--]였
다. [이제까지 무수한 화살이 날았지만 아직도 새는 죽은 일이 없다.] 이 말이 왜 이처럼 위안이 되는가.
<이어령·이화여대 석학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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