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칼
이 영 범
1 초소는 밤을 맞았다
강철수는 야간 투시경에서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 퍼런 하늘에 초
점을 모았다 성운에서 흘러내린 산광의 밀입자로 산의 윤곽은 희
염스럽하다 이따금 별똥이 하늘을 가로 지른다 엷은 성무의 틈에서
남십자성이 밝게 빛난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로 이어지는 대각선
의 성좌 영겁의 세월을 밝혀온 별무리는 시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
는 인간들과는 무관하게 명중한다
탐욕과 이해가 먹이 사슬처럼 얽힌 회색 전선 매일같이 자행되는
살상 행위가 답답했다
왜 서로 중호할까 왜 서로 죽이는 것일까 빛 업는 그늘이
없고 희망 없는 절망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 전선에는 빛과 희망
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다 음모와 독기만이 음습하게 흐르는 강
교묘한 변설과 궤변이 난무하는 형극의 오직 악이 절대적인 인식처
럼 판치는 극단적 대치 상황
사마邪魔 의 제 단 골든 트라이앵글 지대
를 강철수네는 이렇게 불렀다 ROtc 장교로 임관된 강철수는 베트
남어를 전공했고 무술 유단자라는 이유로 특전 부대에 배치되었다
오키나와의 미 CIA 훈련소에서 특수전 훈련을 받은 뒤 베트남 전선
에 투입된 것이다
처음 일 년간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적 후방에 침투하여
?고위 간부를 납치하거나 살해하는 일이었다 미 cia 실의
부에 파견되어 이곳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의 헤로인 해방전선을
도와주는 괴이한 작전에 말려든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특수작전 밀거 래를
강철수는 별무리 속에 하나의 환영을 떠올렸다 며칠 전 참쿠와프
에게 물려 죽은 무송이의 모습이다 그의 죽음에 부여할 의미는 무엇
인가 사자死者의 노랗게 염색된 눈동자에 스멀거리던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의 그림자를 본 순간 등줄기를 타고 내리던 그 싸늘한 냉
기를 잊지 못한다 코브라과에 속하는 이 참쿠와즈의 독성은 익히 듣
기는 했어도 들소 같이 옹골찼던 무송이가 그렇게 어이없이 죽게
될 줄은 몰랐다 찹쿠와프의 집단 서식처인 이곳 구릉 지대는 용맹한
전사로 알려진 무옹족族마저도 출입을 꺼리는 금단의 땅이었다 시
신 옆에서 또아리를 튼 채 강철수를 노려보던 참쿠와프의 핏빛 눈동
자에 서렸던 얼음같이 싸늘한 중호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MI6으로
참쿠와즈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순간에도 공포와 분노로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이런 종류의 기억은 쉽게 망각되는 것이 아니다 삼 일만 있으면
귀국한다고 좋아하던 무송이었다 녀석의 우울한 미소가 떠오른다
무송이가 그렇게 된 것은 단돈 1달러 때문이었다 황덕수가 배탈
이 났다고 초 먹은 쥐얼굴을 하는 바람에 무송이는 달러를 받기로
하고 잠복 근무를 대신하다 당한 것이다 1달러와 맞바꾼 어이없는
죽음 무송이의 시신을 수습한 뒤 벙커에 돌아 온 강철수는 병실 침
상에서 딩굴고 있던 황덕수의 턱을 개머리판으로 갈겨버렸다 강철수
의 이런 음산한 분위기에 파랗게 질려버린 황덕수는 얼마 후 도망치
듯 다른 부대로 가고 말앗다
강철수는 성단에서 흩뿌려진 무수한 별들을 응시하며 고국의 얼음
처럼 차갑고 투명한 밤하늘의 구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모태
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다 유아기 때는 어머니의 가슴을 성장
하여서는 그가 나고 자란 대지를 그리워한다
시퍼런 비수의 푸른 빛을 담은 고국의 겨울 밤하늘 그 하늘엔 은
쟁반 같은 달이 떠 있을 것이다 해면에 부서져내린 달조각은 수면
위에서 농어의 비늘처럼 파들파들 빛날 것이다 바다 위에 빛나는 것
은 달조각 뿐만 아니다 무수한 별떨기들도 은구슬처럼 빛날 것이다
이들은 가이없는 해연에서 피어오른 진주 무더기인지도 모른다 날개
처럼 가지를 드리운 해송 솔잎을 스치는 바람 어디선가 음산한 울
음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갯바위로 몰려 오는 파도 바위에 내던져
진 백마의 군단 푸른 창공을 향하여 새털처럼 날아 오르는 하얀 포
말 천상에는 구름이 빛날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이런 구도를 떠올리는 일은 쓰잘 데 없는 것임을 강
철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곳 회색 전선의 냉엄한 현실은 과거의 구
도를 그려보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수많은 목숨들이 허망하게 스러
져간 이곳 베트남 전선에는 생과 사를 가름하는 처절한 사투만이 존
재하고 있는 것이다
혜성 하나가 긴 꼬리를 소진시키며 산등성을 넘어갔다 뇌수마저
혼미하게 만들던 한낮의 더위는 한풀 꺾였다 스콜도 멈추었다 관목
숲에서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눅진한 빗기와 함께 방향이 강
한 약초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안남 산맥 중북부 지역 잔
인하기로 소문난 전사 무옹족의 땅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전인 미답
의 오지엿던 이 땅은 이제 생경한 모습으로 변했다 원시림으로 울창
했던 삼림은 베어지고 아편밭이 대신 들어선 것이다
어두운 관목 숲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강철수는 입술을 깨믈었
다 한심했다 작전이 끝날 때마다 달팽이의 점액을 뒤집어 쓴 듯 뒷
맛이 개운치 못했다
강철수가 트라이앵글로 오게 된 것은 황 대령 때문이었다
타이닌 지구에서 작전이 끝난 어느 날 저녁 신형철 한만수 강철
수 세 사람은 황석호 대령에게 불려 갔다 황석호 대령은 밑도 끝도
없이 트라이앵글 지역으로 전출 명령이 났다고 했다
전출이라뇨
신형철이 이거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CIA 의 SOD소속 해밀턴 대령이 자네들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해왔어
카멜 꽁무니에 불을 붙이며 황 대령이 말했다
무슨 일을 하게 됩니까
한만수가 따지듯 물었을 때 황석호의 작고 날카로운 눈동자엔 파란
분노가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황석호는 부하들의 이런 태도를
가장 싫어했다
가보면 알아 이세준 대령과 최오남 대령 나 그리고 자네들
세 사람 모두 함께 갈거야
황석호 대령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검게 탄 얼굴을 들었다 광대
뼈가 불거진 얼굴 매부리코 한 일자로 굳게 닫혀 있던 얇은 입술
상어의 눈빛이 무척 음험한 표정이었다
좀 특수한 작전이야 작전이 끝나면 상당한 보수도 준다고 했어
제대 말년에 빈손으로 귀국할 거야
부하들의 표정을 날카롭게 살피던 황석호는
자 사인하지
하고 서류를 내밀었다
신형철은 어깨를 으쓱한 뒤 못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
으며 사인을 했다 강철수와 한만수도 신형철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
었다 황석호는 서류를 흘끗 보고 나서 말했다
됐어 모두들 옮길 준비 하라구 그동안 사용하던 관물은 모두 버
려 모두 A급으로 지급될테니까
대령의 사무실을 나선 신형철은 땅바닥에 딩굴던 빈 깡통을 냅다
걷어 차면서
야 X할 제대 말년에 X뺑이 치는 것 아냐
하며 투덜거렸다
전출 명령서에 사인을 한 뒷날 그들은 이곳 트라이앵글 지역으로
옮겨 왔다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어이없게도 아편 밀매업자들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황석호는 매달 엄청난 액수의 아편 밀매 자금을
CIA 의 실력자인 해밀턴에게 넘겨 주면서 일부는 자신이 챙겼다 황
석호가 해밀턴에게 상납하는 액수는 얼마나 될까 십 만 아니면 이
십 만 강철수가 물었을 때 로버트 대위는 해밀턴이 누군데 일이십
만에 눈을 감아 했었다
강철수는 이 일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처해 있는 묘한 상황을 모래알처럼 씨부며 야간 투시
경을 통해 창고 건물을 감시하고 있는 신형철에게 시선을 보냈다 녀
석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렀는지 요즘 들어선 노골적으로 투덜대고
있었다 타이닌에서 베트콩 간부를 납치하고 살해하던 작전이 위험하
기는 했어도 곤혹감은 없었다 부엉이 같은 생활이었다 낮이면 자
고 밤은 하얗게 지새며 야간 투시경을 통해서 아편 창고를 감시하는
임무는 비위에 맞지 않았다
관측소 주위에는 네이팜탄에 의해 패인 물웅덩이가 많았고 어느
곳이나 모기가 들끓었다 이곳 모기는 유별났다 아무리 옷을 두텁게
입어도 그 길고 날카로운 침을 피할 수 었었다 모기에 믈리면 벌겋
게 부어 오르고 가려워진다 긁으면 화농하여 종기로 변해서 며칠 고
생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것은 말라리아였다 힘이 장사여서
코끼리로 블리던 고광수는 야 시시하게 겁낼 게 없어 모기를 겁
내 이러며 큰소리 치다 말라리아에 덜미를 잡혀 얼마 전 병사하고
말았다
어 피곤하다
신형철은 벌개진 두 눈을 비비며 투시경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는 길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강철수는 신형철로부터 투시경
을 인계받았다
관측소에서는 산 아래로 뱀처럼 기어 내려가는 작전 도로와 아편밭
과 창고 건물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 보엿다
정신 차리고 감시해 아편 거래량이 너무 차이난다고 해밀턴
대령이 투덜거리고 있어 잘못하면 우리가 의심받게 될지도 몰라 며
칠 전 산토스가 이 지역으로 잠입했다는 정보가 있어 산토스를 반드
시 잡아야 해
이런 말을 하면서 황석호 대령은 한 장의 서류를 강철수에게 건네
주었다 산토스의 사진과 인적 사항이었다 네모진 탑삭부리 얼굴에
암팡진 눈 새둥지같이 엉클어진 붉은 고수머리 왼편 뺨의 긴 흉터
짙은 콧수염 사진을 뜯어보며 강철수는 산토스의 생김새를 새겨 넣
었다
놈은 악어 같은 녀석이야 우리 요원 중에 놈들의 조직에 당
한 사람이 꽤 많다구 놈은 콜롬비아에서도 악명높은 곤잘레스 일당
이야 놈은 자기 애인과 동생을 사살한 마약 사범 수사관인 로드리게
스와 그의 어린 아들을 로드리게스의 아내가 보는 자리에서 산 채로
껍질을 벗긴 뒤 배를 갈라서 간을 꺼내 먹은 녀석이야
방을 나서면서 이런 말을 해주었다
곤잘레스 패거리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그리고 페루의 접경 지역에
서 코카인 밀거래로 한참 번창하고 있는 남미 최대의 마약 밀매 조
직 두목 페르난도 곤잘레스는 만삭이었던 로드리게스의 아내를 부하
들에게 능욕하게 한 뒤 그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냈다 곤잘레스
는 살아서 꼼지락거리는 태아를 검찰청장인 로드리게스의 아버지에게
보냄으로써 자신의 부하들을 검거하고 처형한 보복을 톡톡히 앙갚음
했었다 그는 조직을 배신하고 이탈하는 부하에게도 무척 잔인하게
보복을 가했다
어느해 가을 군경의 대대적인 마약 밀매단 소탕 작전이 안데스 지
역에서 벌어진 일이 있었다 이 작전에서 곤잘레스 부하 중 라파엘이
체포되었다 그는 수사관의 잔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곤잘레스의
근거지를 자백한 뒤 풀려났다 그는 곤잘레스의 보복이 두려워 볼리
비아의 깊은 산으로 몸을 피했다 곤잘레스의 추적은 집요했다 안데
스 산맥 깊숙이 은신했던 라파엘은 마침내 곤잘레스에게 잡혔고 혀
와 성기와 사지를 절단 당한 뒤 반송장인 상태로 가족에게 넘겨졌다
라파엘은 지옥 같은 상황에서 일 년을 더 살다가 어느날 식칼을 입에
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처절한 보복 행위 때문에 곤잘레스
를 배신하는 부하는 거의 없었다
곤잘레스 일당의 근거지는 주로 페루 칠레 볼리비아 등의 험준한
안데스 고산 지대에 분산되어 있어서 이들을 소탕하는 일은 쉽지 않
았다 이들은 남미 제국의 일부 부패한 독재자들과도 손을 잡고 일했
다 노리에가도 한때는 곤잘레스의 절친한 친구였다 안데스 산악 지
역에서 원주민들로부터 수집한 코카인은 파나마의 밀거래 조직을 통
해서 북미 지역과 유럽 등지로 흘러들어갔다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
로 한 라틴 아메리카 루트는 곤잘레스 패거리가 장악하고 있었고 안
남 산맥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 루트는 홍콩 최대의 폭력 조직인 트라
이어드 가 손에 쥐고 있었다
잔인하기로는 곤잘레스 못지 않는 트라이어드의 두목 왕추인
은 자신의 배후 조직을 수사하던 어느 수사관의 아내와 두 딸을
납치하여 능욕한 뒤 머리와 유방을 모두 잘라 얼음이 든 상자에 넣
은 뒤 수사관에게 우송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그 수사관은 정신
병원에 입원했고 얼마 뒤 독살되었다 왕추인은 부하가 배신하면 몽
골족의 흉내를 내었는데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이거나 끓은 쇳믈을
눈에 부어 장님으로 만드는 따위였다
두 악명 높은 마약 밀매 조직은 피라미드식 점조직으로 연계되어
있어서 좀체 전모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들 조직은 유럽과 북미
지역 그리고 일부 아시아 국가에 필요한 대부분의 마약을 공급하고
있었고 막대한 마약 밀매 자금으로 그 조직은 엄청난 규모로 성장해
왔다
미 마약 수사당국은 이들 루트를 봉쇄하려고 혈안이었지만 미 중
앙정보부의 엉뚱한 태도와 홍콩 정부의 미온적인 수사 관행 때문
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산 아래쪽에서 둔중한 엔진음이 들려왔다 강철수는 긴장하며 야간
투시경에다 눈동자를 들이밀었다 군용 트럭이 한 대 올라 오더니 창
고 앞에서 멈췄다 운전석에서 누가 내렸다 강철수는 투시경의 초점
을 조절했다 사내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더부룩한 고수머리
광대뼈가 블거진 얼굴 콧수염 6척 장신의 건장한 체격 산토스 같
았다 강철수는 팔꿈치로 신형철의 옆구리를 가볍게 내지르며 말했다
저기 봐
신형철은 피로에 지친 눈을 들며 강철수를 보았다 귀찮다는 표정
이 역력했다
뭔데
신형철은 군화끈을 풀던 손을 멈추었다
산토스 같은 녀석이 보여
뭐라구 산토스 틀림없어
신형철은 군화끈을 다시 고쳐 매며 되믈었다
그래 틀림없어
어디 봐
신형철이 강철수에게 다가왔다 강철수는 신형철에게 투시경을 넘
겨 주었다
흠 사진에서 본 얼굴이군 산토스가 틀림없어
신형철은 투시경에 눈을 밀착시킨 채 낮게 중얼거렸다 강철수는
신형철로부터 투시경을 다시 넘겨 받았다
산토스와 잭슨은 아편 창고 입구에서 악수를 했다 그리고 무슨 말
을 하면서 산토스가 잭슨에게 가방을 건네주었다 잭슨은 가방을 열
어 내용물을 한동안 들여다 보았다 잭슨은 산토스를 보며 빙긋 웃었
다 그 광경을 보면서 강철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달러 뭉치겠지
얼마나 될까 백 달러 지폐 뭉치가 백 다발 정도는 되겠지 한 뭉치
가 만 달러이면 백만 달러 은행의 수표도 석겨 있다면 엄청난 액수
일 것이다 녀석 해밀턴 모르게 남미 패거리에게 아편을 밀매하는
것이 틀림없어 오늘 수확은 대단하군 사이공 특별 휴가는 틀림없겠
지 며칠이나 줄까 일 주일 아니 그렇게 주진 않겠지 고작해야 삼
일 아무려면 어때 이 지역을 며칠 벗어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산토스 녀석 카스트로 같이 생겨먹었잖아
허기야 수염이 나고 건장한 남미인은 다 카스트로처럼 보이지 카스
트로가 정말 악당일까 미국이 카스트로를 매도했기 때문에 카스트로
하면 마치 도살자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언젠가 프랑스 기자가 말해주
었지 카스트로는 독재자라기 보다는 민족주의자다 카스트로를 독
재자라고 하는 것은 친미파를 처형했기 때문이라던 말도 기억이 났
다 그러나 장기 집권하는 놈치고 독재자가 아닌 놈이 어디 있어
국민의 열화같은 지지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나는 할 수 없이 이번
에도 정부를 맡게 되었다 독재자들이 한결같이 쓰는 수법이
지 권력의 속성은 어쩔 수 없는 거잖어 잭슨 녀석 돈 다발을 확인
하고 있군 하나 둘 백 다발도 넘겠는데 달러일까 엔화일까
아니면 파운드일까 모르지 군표일 가능성도 있겠지
잭슨은 가방을 확인한 후 산토스에게 중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들어 보였다 그리고 나서 잭슨은 아편 창고로 들어갔다 잠시 후 창
고의 문이 열렸다 아편 부대를 어깨에 멘 잭슨이
창고에서 나왔다
잭슨이 부대를 풀어 내용물을 보여주자 산토스는 아편
맡아보고 나서 엄지를 위로 세웠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아편 자루들을 산토스의 트럭에 싣기 시작했다 분말을 코에
대어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잭슨 녀석 소문대로군
신형철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대 말년에 한몫 챙기자는 거겠지
강철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잭슨은 베트콩에걔는 무척
잔인하게 굴었다 포로를 연행하다가도 조금만 이상한 눈치가 보이면
총검으로 등을 찌르고 온몸을 난자한 뒤 배를 가르고 목을 잘랐다
이런 잭슨의 악마 같은 행동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어느날 여자
베트콩 용의자를 한사람 연행하다가 여자가 소변을 보고 싶다고 애원
하자 갑자기 미쳐버린 잭슨은 여자를 동굴 속에 끌고 들어가 능욕한
뒤 실신한 여자의 그곳에 수류탄을 넣고 터뜨렸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해방전선측 전사들은 잭슨을 하얀 악마라며 이를
갈았다 잭슨은 군인이 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잔혹한 범죄자가 되
었을 것이다
강철수는 투시경을 보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심스런 작전에 말
려든 것이다 자유의 투사로 파병된 한국군 장교가 이런 아편 밀거레
에 관여하게 되다니 그것도 양키 자지나 빠는 더러운 작전에 말이
다 잭슨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녀석은 오키나와에서 훈련받을 때
양키 중에서는 최우수 요원이었다 그러나 해밀턴의 부인과 그짓을
하는 바람에 이곳으로 쫓겨 오게 된 것이다 미군 고급 장교 부인 중
에서 해밀턴 부인처럼 엉덩이가 근사한 여자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심심찮게 염문을 뿌렸다 흑인 병사와도 그 짓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
다 해밀턴은 자기 부인과 놀아난 녀석에게는 반드시 보복을 가했다
물론 그답게 음특한 방법으로 말이다
잭슨이 입만 다물었어도 해밀턴 부인과의 정사는 소문나지 않았을
것이다 잭슨이 술김에 털어 놓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해밀턴의
파티에 초청된 특수 요원들은 거나하게 마신 후 춤을 추었다 모두
부부 동반이었지만 잭슨은 혼자였다 잭슨은 구석진 곳에서 술을 마
시고 있었는데 해밀턴 부인이 잭슨에게 다가와 춤을 추자고 했다 잭
슨은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잭슨의 말에 의하면 부인쪽에서 먼저 도
발하더란 것이다 블루스를 추던 부인은 교묘하게 잭슨의 그곳을 자
극했고 잭슨의 그것이 바짓가랑이를 뚫고 나올 정도가 되자 그를 어
둑한 곳으로 유인하더란 것이다 그녀는 잭슨의 그것을 옷 위로 만져
보더니 우후 원더플 하며 잭슨을 내실로 데리고 가더란 이야기
였다
연회고 뭐고 필요가 없었다고 흠뻑 젖어 있는 거야 나는 그
런 여자 처음봤어 집어 넣자 마자 마구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소리를
내지르는 거야 고성능 오디오의 볼륨을 최대로 틀어서 라콤파르시타
의 음악에 맞추어서 그짓을 했지 너희들 라콤파르시타 틀어 놓고 그
짓 해봤어
잭슨이 술에 취해 토해낸 이야기를 누가 해밀턴의 귀에 넣어준 모
양이었다 해밀턴은 잭슨을 이곳 아편창고 관리요원으로 전출해 버렸
다 아편창고 관리요원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 누구든지 한
달 이상 버티지 못했다 라오스 게릴라에게 당하는 일도 있었지만
베트콩에게 희생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잭슨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하기 전에 한탕 챙겨서 어디
로든 잠적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것 같았다
산토스와 잭슨은 아편을 트럭에 다 옮겨 실은 모양이었다 산토스
가 트럭의 운전대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트럭은 숨가쁜 엔진음을
흘리며 험한 지형의 산비탈길을 뒤뚱거리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강철수가 신음하듯 부르짖었다
뭐야 이번엔
신형철이 얼굴을 들었다
놈들이야
강철수는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몇이나 돼
열은 넘겠는데
해방전선측 전사들이 산토스의 트럭을 향해 뛰어가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그 광경은 마치 병든 들소의 뒤를 쫓는 하이에나떼 같았다
트럭은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돌투성이 비탈길을 오리처럼 뒤뚱거리
며 느릿느릿 내려가고 있었다 트럭 꽁무니로 비쩍 마른 한 녀석이
접근해갔다 트럭을 향하여 수류탄을 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장
난같아 보이는 동작이었다 잠시 후 요란한 폭발음이 밤하늘을 뒤흔
들렸다 주홍색 불덩이가 하늘 높이 피어 올랐다 트럭은 불이 붙은
채 길옆으로 곤두박질해 들어가더니 하늘을 향해서 벌렁 드러 누웠
다
트럭에서 빠져 나온 산토스의 얼굴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산
토스는 두 손을 번쩍 들고 베트콩들 앞에 어색한 자세로 섰다 베트
콩은 두손을 머리에 얹고 있는 산토스에게 고함을 질렀다 산토스는
뭐라고 애원하는 듯했다 몇 마디 빠른 말이 오갔다 두목 같아 보이
는 자가 산토스에게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산토스는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산토스 앞에 서 있던 베트콩이 자동 화기로 산토스
를 겨냥했다 그리고 다시 뭐라 말했다 산토스는 아편창고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한 녀석이 자동화기로 산토스에게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산토스는 몸을 뒤틀며 살려달라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사
격이 끝 난 뒤에도 산토스의 비명은 온 산을 뒤흔들었다 산토스의
몸은 벌집이 된 뒤 물웅덩이 속으로 벌렁 나자빠졌다
산토스를 사살한 베트콩들은 창고로 몰려갔다 창고 속으로 들어간
베트콩들은 잭슨을 끌고 나왔다 잭슨은 무릎을꿇고 애원하는 것 같
았다 산토스를 사살했던 자가 잭슨에게 뭐라 말했다 잭슨은 창고
사무실을 가리켰다 베트콩 한 녀석이 착검한 총을 잭슨의 등에 겨누
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베트콩이 조금 전 산토
스에게 건네 받은 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들은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
했다 그리고 나서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날카롭게 소리쳤奏?한 녀
석이 잭슨의 등을 총검으로 찔렀다 잭슨은 가슴을 관통한 총검의 끝
을 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다음 순간 사람의 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
을 정도의 엄청나게 큰 비명이 밤의 정적을 산산조각내기 시작했다
여러 명의 베트콩이 달려들어 잭슨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한 녀석
은 잭슨의 배를 갈랐다 창자가 밀려 나왔다 한 베트콩은 내장을 꺼
내어 잭슨에게 보여주었다 자신의 내장을 보며 잭슨은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잭슨은 무척 끈질겼다 베트콩 한 녀석이 대검
으로 잭슨의 간을 잘라내어 잭슨의 입 속에 처넣을 때까지 비명을 멈
추지 않았다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권총으로 잭슨의 머리를 쏠 때까
지 이 광란은 멈추지 않았다 잭슨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는 웅덩이를
만들었다
강철수는 구토증을 느꼈다 복수치고는 너무 잔인했다 이런 잔혹
성과 처절한 ?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기야 전쟁터에서
잔혹 행위의 근거를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터였다
베트콩들은 우루루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창고에서 나온
그들의 어깨에는 아편 부대가 메어져 있었다 베트콩들은 숲으로 부
대를 옮기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다급하게 무전기에다 외치기 시작했다
여기는 AI 독수리 나와라 독수리 나와라
여기는 독수리 A 말하라
무전기에서 쏴아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응답 소리가 즉각 흘러나왔
다
B23C 지역에서 23D 지역으로 종달새 열마리 이동 중 오버
알았다 오버
5분도 되지 못해서 요란한 폭음을 울리며 두 대의 펜텀기가 독수리
처럼 덮쳐 왔다 두 대의 펜텀기는 숲속으로 잠적하는 베트콩은 놔두
고 엉뚱하게 강철수와 신형철이 은신해 잇는 관측소 주위에 미친 듯
이 네이팜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포탄들은 나무를 찢고 땅거죽을 뒤
덮고 집채만한 바위를 사방으로 흩날렸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파편
과 흙과 돌덩이를 피하면서 강철수는 무전기에다 마구 악을 쓰기 시
작했다
야 이 개새끼들아 어디다 퍼붓고 있나 좌표도 안보나
미안하다 빨리 그 자릴 피하라 오버
무전기에서 당황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버고 지랄이고 이 X새끼들아 좌표도 못 읽나
강철수는 입에 거품을 믈고 화풀이를 해댔다
빨랑 토껴 이 새까 뒈지고 싶지 않으면
무전기는 싸아악 소리를 내더니 응답이 끊겼다
에 이 쌍
강철수는 무전기를 땅바닥에 동댕이쳤다 두 사람은 황급히 관측소
를 빠져나왔다 숲을 향하여 죽을 힘을 다해서 내달렸다 사방이 불
바다였다 여기 저기서 네이팜탄이 작열했다 엄청난 폭발음이 고막
을 난도질했다 땅바닥이 마구 뒤흔들렸다 불덩이가 하늘로 치솟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펜텀기들은 네이팜탄 뿐만 아니라 기총 소
사까지 곁들였다
야 이 개새끼들아 똑 바로 보고 갈겨
신형철은 저공으로 비행하는 펜텀기에게 마구 악을 썼다 정신없이
내닫던 강철수는 몸이 새처럼 공중으로 떠오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 순간 그는 푸대자루처럼 땅바닥에 털썩 내던져졌다 그는 심한
피로를 느꼈다 그는 한없이 감미로운 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떴다 시야는 희미했다 하얀 천장이 보였다 심한 현기중에
다시 눈을 감아야 했다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는 다시 눈을 떠보았다 사람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강철수는 초점을 모으려고 애
썼다 명료하지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때 정신이 들어
아련했다 강철수는 음성이 들려오는 방향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려
고 했다 불가능했다 그의 코와 입에는 플라스틱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얼마나 당했을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닌
가
의식이 들면서 생긴 불안이었다 석탄산과 머큐로크롬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 대위 내 말 들려
목소리의 주인공이 신형철임도 알게 되었다
강철수는 다시 몸을 돌리려 해보았다
움직이면 안돼요 그대로 누워 계셔야 해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강철수는 눈을 감았다
강 대위 나야 알아보겠어
소리는 가까워졌다
믈론 알 수 있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강철수는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다첫는지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마치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은 무겁고 기운이 없었다
어디서 당했을까 그리고 이곳은 어느 병원일까 신형철도 다 첫을까
강철수는 감았던 눈을 떠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여의사에게
시선을 옮겼다 흐릿한 눈동자를 통해서 아련히 보이는 의사는 무척
예뻐보였다 여의사 옆에는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서있는 털복숭이
남자도 보였다
여의사가 허리를 굽혀서 귓가에 대고 물었다
기분이 어떠세요 내 말이 들리면 눈을 깜빡거려봐요
강철수는 눈을 깜빡거렸다 여의사에게서는 장미 향기가
났다
복숭이 남자 의사에게 여자 의사가 프랑스어로 뭐라 말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 병실을 나갔다
여의사가 말했다
다행이군요 차츰 나아질 거예요 저는 후에라고 합니다 당신은
쇄골 골절만 빼면 다른 곳은 괜찮아요 아참 호수를 빼드리는 것을
잊었네
그녀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간호사 이분 호스 제거하고 주사 놔 드려 자 나중에 다시 올
께요
여의사는 병실을 나갔다 간호사는 강철수의 코와 입에 연결되어
있던 풀라스틱 호스를 제거했다
당장 숨쉬기가 편해졌다 의식도 한결 맑아왔고 시야도 명료해졌
다 다만 두통이 심했다 강철수는 고개를 옆으로 비틀어 근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신형철을 응시했다 신형철이 말했다
임마 사흘됐어 사흘 흐흐흐 난 네녀석이 죽는 줄 알았다니까
뇌파검사를 여러 번 했었어 혹시 식물 인간이 되지 않을까 수근거릴
땐 환장하겠더라니깐 얌마 너 행운아야 저 후에란 여의사가 아까
함께 있던 콜린즈 박사를 도와 주지 않았으면 넌 지금쯤 저 높은 곳
에 있을 뻔 했다구
신형철은 후에란 여의사가 파리행을 포기하면서까지 콜런즈 박사의
수술을 도와주었다는 것과 그래서 목숨이 붙어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
를 들려 주었다
나중에 고맙다고 인사해 그런데 이상한 것은 황석호 대령이랑 이
세준 대령 최오남 대령이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 거야 한만수가 아
침에 다녀간 것뿐이야 미국 녀석들도 한녀석 보이지 않구 이상하지
않아
신형철의 이야기를 들으며 강철수의 뇌리엔 몇 가지 물음표가 만들
어졌다 후에란 여의사는 어째서 파리행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수
술을 도와주었는가 한국군 대위쯤은 미군 전용의 다낭 병원에선 동
물 취급도 해주지 않는데 말이다 아마 콜린즈 박사는 후에가 아니었
으면 자신을 수술할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전상자들
이 많은 경우 중상자들은 사이공이나 클라크 기지로 후송되는데 후
송 도중에 사망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또 한가지 의문은 그들과
함께 작전에 임하고 있는 세 사람의 상관들 태도였다 누구보다도 먼
저 달려와서 부하를 걱정해주어야 할 그들이 아닌가
넌 어느 정도야
강철수가 물었다
오른 발목만 부러진 것 뿐이야 이대로 의병 제대나 할까 아
니지 한몫 챙겨서 나가야지 빈털털이로 귀국할 수는 없잖아 이번
에 돌아가면 좀 챙겨야겠어 허구헌 날 양키 자지만 빨 순 없잖아
안그래
강철수는 두통이 심해졌다 주사를 끝낸 간호사가
어 떠세요
하며 믈었을 때 강철수는 두통이 심하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병실
인터폰을 들고 무슨 말을 했다 잠시 뒤에 후에가 나타났다
두통이 심하다면서요
그녀는 베트남 여인답지 않게 키가 컸고 피부색이 희고 맑았다 그
녀의 투명한 피부를 보면서 강철수는 백도 복숭아를 연상했다 강철
수는 베트남어로 대답했다
심한 편입니다 멀미하는 기분이에요
어머 베트남어 잘하시네요
후에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영어보다는 베트남어로 말하는 것이 편합니다
베트남어를 잘하는 한국군 장교는 처음입니다 대위님 소속은
그건 묻지 말아주세요
그럴 줄 알았어요
후에는 기분 상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 상했다면 말해주겠소
아뇨 알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강철수는 쓸데없이 여자의 감정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OD 에 있소 내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 이 정도는 알아도 되죠
여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소속을 밝히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신형철이 말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 같지 않았어요
간호사가 강철수의 엉덩이에 주사를 놓는 것을 눈여겨 보면서 후에
는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우린 베트남인에게 해로운 일은 하지 않습니다
신형철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강철수는 의문이 생겼다 과연 우리
는 베트남인을 위해서 무엇을 도와주고 있는 것일까 트라이앵글의
작전은 베트남인에게 이익이 될까 아니다 이 작전은 베트남인들의
이익과는 무관했다 오직 미정보당국의 비밀 자금만 키워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더러운 작전에서 흘리는 부스러기 돈을 줍는 거지
같은 신세고 말이다 어째서 미 cIA 요원들은 직접 작전에 나서지
않는 것인가 만약 작전 중 해방전선측에 포로라도 되는 날이면 트라
이앵글에서 벌어지는 마약 밀매에 대한 비밀이 알려질 것이고 미국
언론은 벌때처럼 미정보부와 정부를 쏘아댈 것이다 강철수나 신형
철 그리고 한만수네는 소모품이나 다름 없었다 그들이 작전 중에
포로가 된다면 그땐 아마 적당한 흥정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해
버릴 것이다
표정이 풀린 여자 의사는 자고 나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 말하며
병실을 나섰다
강철수는 흥건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안해 늦어져서 자네들이 입원해 있는 동안 작전 지역을 옮겼
지 창고도 다른 곳으로 옮겼고 그동안 베트콩과 접선하고 있는 마
을들을 소탕했어 전과도 좀 있었네
황석호가 말했다
헤 이 강 기분이 어때
해밀턴 대령은 강철수의 왼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해밀턴 대령이 온 것은 입조심하라는 거야 아무에게도 아편창고
사건을 입 밖에 내선 안돼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강철수는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부하를 못믿는 상관이라면 그
렇게 대해주면 되는 것이다 지극히 사무적으로 병문안을 마친 그들
은 잠시 후 떠났다
개새끼들 뭐 작전 때문에 오지 못했다구 전화는 뒀다 뭐해
신형철은 분통터진다는 듯이 그들이 가지고 온 장미 다발을 병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장미꽃 잎새가 병실 바닥에 흩어졌다 그때 마
침 병실로 들어서던 후에가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아니 왜 그러시죠 신 대위님
그녀는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저 사람들 때문이오
신형철은 지프에 오르고 있는 황석호 일행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같은 동료들 아네요
의아한 눈초리를 신형철에게 던지며 후에가 되물었다
네 동료는 동료죠
신형철은 낡은 신문을 집어들며 말했다 침묵이 병실을 짓눌렀다
산책하실래요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지 후에가 강철수에게 믈었다
신 대위 함께 가지 않올래
싫어
타운 신문을 뒤적이면서 신형철은 대답했다
함께 가세요
후에가 말했다
다녀오세요
신형철은 신문에 고정한 시선을 떼려 하지 않았다
병실을 나선 것만 해도 상쾌했다 미군 전용의 이곳 야전 병원은
시설이 좋았다 해밀턴 대령이 부상당한 두 사람을 이곳 병원으로 입
원하도록 주선한 것은 그의 비밀 작전이 누설될 우려 때문이었을 것
이다
병원 건물에서 멀리 떨어져서 환자들이 뜸한 외진 장소에 이른 두
사람은 벤치에 자리했다 먼 곳에 놓여 있는 벤치에는 부상당한 미군
병사들이 담소하는 모습이 아슴푸레 보였다
그곳에선 무슨 작전을 하죠
그녀의 검고 큰 눈동자가 강철수의 얼굴에 서늘하게 닿고 있었다
cIA의 마약 밀매 작전을 도와주고 있소
어느지역이죠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이오
위험한 작전인가요
많이 당하는 편이오
어떻게 그런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죠
명령이오 제대하기 한 달 전 트라이앵글로 전출된 거요
부도덕한 일이에요 미군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강철수는 미군과 부패한 월남 군부가 어떤 경로를 통해 전쟁 물자
를 해방전선측에 팔아 먹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 전쟁은 모순 투성이였다 미군과 월남군은 그들 자신의 군대가
은밀히 적측에 건네준 소화기와 박격포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셈이었다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탐색하는 듯한 여자의 눈길이 그의 눈동자를 파고 들었다
군인은 전쟁에 대해 말해서는 안되는 거요
이 회색의 전선에서 자라고 있는 혐오도 여자에게 말할 성질의 것
이 아니었다
당신은 군인같아 보이지 않아요
그럼 무엇으로 보이죠
대학에서 인도차이나어를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특히 베트남어와
라오스어를 말예요 그런가요
신형철이 말한 모양이었다
베트남과 베트남인을 좋아한다는 말 사실이세요
그건 틀림없소 나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쳐준 교수로부터 베트남에
대한 여러 가지를 들었소
베트남을 이해하는 외국인을 만나서 기뻐요
나도 아름다운 베트남 여인을 만나게 되어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제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소 내가 만나 본 여성 가운데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오
후에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몸에서 장미 향기가 풍겨 나왔다
강철수는 까닭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그런 말 들어보지 못했어요
후에는 찌르는 듯한 눈길로 강철수를 응시했다
강철수는 후에의 서늘한 눈을 보며 생각했다 여자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화장으로 꾸며지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은 그 사
람의 내면 세계를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텅빈 뇌수에서 흘러나오는
백치미 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지성과 교양에서 우러나와
야 한다 후에는 아름답다 그녀는 교양있고 세련미가 넘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특별한 거요 마치 진주와 같이 빛을 잃지 않
는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이오
고국에 애인 있으세요
강철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이세요
강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 대위님을 치료하면서 전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미군
병사와는 달랐어요 뭐랄까 같은 동양인으로서의 동류의식 같은 걸
느꼈다고나 할까요 또 강 대위님은 저의 첫 집도를 성공시킨 환자이
기도 하구요 그래서 좋아지는 것 같아요
단순한 환자로 좋아한다는 거요
환자로서가 아니라 남성으로 좋아한다면 안되나요
후에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강철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당신을 좋아하오 아니 굉장히 사랑하고 있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강철수는 내뱉지 않고 후에의 눈동자를 들여
다보고 있었다 먼곳에서 라팔로마가 바람에 실려 왔다 후에의 몸
에서 나는 장미향이 음악과 함께 묘한 앙상블을 이룬다는 생각이 들
었다 장미의 향기와 음악이라 배를 타고 하바나하를 떠날 때
나의 가슴 슬퍼 눈물이 흘렀네 음악은 감미롭게 장미의
향기는 연쇄적으로 강철수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갔다 후에도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음악이 베사메무쵸로 바뀌자 후에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며
약간 목이 쉰 소리로 물었다
음악 좋아하세요
실내음악 같은 가벼운 것은 좋아하는 편이오
특별히 좋아하는 것 있으세요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없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난 자신을 싫어하는 편이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
할 수 없다고 들었어요 자학하는 사람치고 에고이스트가 아닌 사람
없대요
그것은 맞는 말 같소
전대위님 같은 솔직한 남자가 좋아요
뭘 두고 하는 말이오
대위님은 우울하고 고독해 보여요 말이 없고 늘 생각에 잠겨 있
고 말많고 경박한 남자는 혐오스러워요
이상한 여자요 나같은 사람이 좋다면
네 전 이상한 여자예요
당신은 정말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자란 말을 해주고 싶
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후에의
손을 겻눈질 했다 작고 예쁜 손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대위님이 좋아지는군요
강철수는 후에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고 매끈한 손이 바르르 떨었
다 후에는 가만히 있었다 바람이 달아오른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
다 후에의 긴 머리칼이 얼굴에 닿았다 후에의 음습한 입술은 조금
열려 있었다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하얀 이가 빛났다 강철수
는 팔로 후에의 어깨를 감쌌다 후에의 어깨는 작은 새처럼 앙증맞았
다
그때였다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한 무리의 미군 병사들
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숀
헤 이 베트남 아가씨 안녕
위스키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헤 이 당신은 누군데 미군 전용 병원에 있는 거지
눈이 파랗고 밀이삭 같이 머리가 노란 미군 병사가 강철수에게 시
비조로 물어왔다 다른 두 녀석은
그래 여기는 노란 똥개를 치료해주는 동믈 병원이 아니잖아
하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폭소를 터뜨렸다
왼쪽 어깨에 석고 붕대를 한 강철수는 묵묵히 이런 조롱을 견디며
앉아 있었다
가요 무서워요
후에는 베트남어로 낮게 속삭이며 벤치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때였다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던 한 녀석이 느닷없이 후에를 껴
안으려 했다 깜짝 놀란 후에는 놀라 비명을 내지르며 강철수의 등
뒤로 피했다
이 월남 암캐년이
소리를 지르며 한 녀석이 사나운 기세로 후에를 덮치려 했다 강철
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후에를 막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그만 둬 무슨 행패야 이분은 이 병원의 의사야
비켜 이 노란 똥개야 넌 동물 병원에나 가라구
강철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보이는 녀석이 어깨를 떠밀며 말했
다
그만 돌아가 경고한다
강철수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이 조 너 이 노란 똥개가 영어로 짖는 거 들었지
녀석은 얼굴이 주근깨 투성이인 그의 동료를 돌아보면서 이죽거렸
다
믈론 프랭크 듣고 있어 겁에 질려서 왕왕 짖는데
조라고 불렸던 녀석이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녀석은 끼
고 있는 가죽 장갑을 감싸 쥐었다
헤이 제 임스 너도 들었니
프랭크란 녀석은 이번엔 다른 동료를 보며 어깨를 건들거렸다
물론 노란 똥개 한 마리가 지금 짖고 있어
회색곰처럼 덩치가 큰 제임스란 녀석은 강철수의 등 뒤에 숨어 있
는 후에에게 당장이라도 손을 내뻗칠 기세였다
잠깐만 기다려 이 노란 똥개가 꼬리를 말고 깨갱거리며 달아나게
만들어 줄테니
라며 프랭크는 갑자기 강철수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강철수는
피하며 그의 주먹을 가볍게 흘렸다 그리곤 공중으로 날아 올라서 뒤
꿈치로 녀석의 명치끝을 내질러 버렸다 불의의 일격에 녀석은 배를
움켜잡고 잔디 위로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두 녀석이 한꺼
번에 대들었다 강철수는 제임스란 녀석의 뒷목을 손칼로 쳐버렸다
녀석은 썩은 고목처럼 잔디밭 위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두사람의 동
료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조는 달아날 기세엿다 강철수는 조의
앞길을 가로 막아섰다
동물 병원이 어디지
강철수는 조의 멱살을 움켜쥐고 말했다
미 미안해 요 용서해줘 우린 너무 마셨어
조는 바들바들 떨었다
그래서 개가 되었나
그 그래
너의 동료들 동믈 병원으로 데리고 가라구 알았어 동물 병원
이야
강철수는 조의 멱살을 사납게 뿌리치며 말했다
그래 동물 병원이야
좋아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꺼져버려
조는 잔디 위에 쓰러진 동료들을 부축하고 허둥지둥 달아나버렸다
너무 놀랬어요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어요 무서워요
후에는 동그란 눈을 한 채 겁에 질려 있었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오
행정 병들이에요 질이 나쁜 녀석들이죠 지난 달에도 태국인 간호
사가 이 부근에서 세 녀석에게 당한 적이 있어요 저들 중에는 헤로
인 상용자가 많아요
그녀의 얼굴에 스멀거리는 공포의 그림자는 쉬 지워지지 않았다
좋은 코냑이 있는데요 제 숙소로 가실래요 대위님
후에는 강철수의 팔을 끼었다
그것 근사하군요 갑시다
두 사람은 후에의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엇때 기분은
출발 준비를 끝낸 신형철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써요
강철수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하며 벽에 걸린 달력을 올려다 보았다
병원에 입원한 지도 달포가 지나고 있었다
황 대령이 성화야 후에와는 잘 돼가
농담할 기분 아니야 네 녀석이 가고 나면 어떻게 지내지
능청은 얌마 후에가 있잖어
그런 소리 마 소문나
임마 다들 알고 있어 그리고 또 소문나면 어때 베트남 여의사
와 한국군 장교의 로맨스 이상할 것 없잖아 그건 그렇고 고생하라고
조심해 살아서 귄국해야지 그리고 이 서류 황 대령에게 전해줘
후에의 이민 신청 서류야
그러지 잘 지내게 모리스란 녀석이 헬리포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잘가
그럼 나 간다
신형철은 복잡한 표정을 강철수의 머리에 잔영처럼 남기며 병실을
나섰다 병원에서 지내면서도 진력이 나지 않은 것은 후에와 녀석의
농담이었다는 생각에 미치자 허전해졌다 자신도 빨리 퇴원해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병실 창문을 통해서 손을 흔들고 있는 신형철의
모습을 보면서 강철수는 쓸쓸한 미소만 보내 주었다
병실 문을 열고 후해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섯다
어때요
괜찮아요
자 봐요 유합되기 시작해요
후에는 그에게 X선 필름을 보여주었다 치료를 끝내자 강철수는
후에에게 물었다
뭐랍니까
콜린즈 원장님은 이 주 후면 퇴원이 가능하다고 했어요
주사를 놓고 나서 간호사가 병실을 나가자 후에는 강철수의 곁으로
다가왔다
퇴원하고 나면 어떻게 만나죠
병원에 자주 들리죠
강철수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의문이 생겼다 정말 병원에 자주 들
릴 수 있을까 트라이앵글과 이 지역의 거리는 거의 400킬로미터
차로 5시간 거리가 아닌가 생각 같으면 당장 후에와 합께 고국으로
귀국하고 싶었다 그는 후에의 서늘한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파리행을 포기한 것 후회하지 않소
아직은요
당신은 천사요
풋내기 수련의일 뿐인걸요
후에는 힘없는 어조로 말했다
잊지 않겠소 당신의 친절과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부상 당하면 너나 없이 마음이 약해지죠 퇴원하고 나면 마음이
달라질 거예요 나를 잊을지도 모르고
후에의 시선이 창밖의 붉은 란나를 스켰다
당신은 좋은 여자요
베트남 여자치고는 좋은 여자란 뜻인가요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인종과 국가에 대한 편견은 없소 베트남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
란 말 진심 이오
날카로웠던 후에의 눈빛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듣기 좋은 말이군요 난 내 조국을 사랑합니다 전화로 만신창이
가 되었지만 베트남은 아름답고 그리고 베트남인은 선량하다는 저의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이민 서류를 신 대위 편에 보냈소 서류만 되면 함께 한국으로 갑
시다
아버님에게 연락했어요 한번 찾아뵙겠다고 했어요
잘했소 나도 만나고 싶소
아버님은 대단히 완고하세요 아버님은 반대할지도 몰라요
예상하고 있는 일이오
그러나 아버님은 이해심도 넓은 분이에요
이해만 된다면 반대 쯤은 문제되지 않소 당신은 한국에서 멋진
의사가 될 수 있어요
몸이 이상해요
강철수는 눈을 크게 뜨고 후에를 바라보았다
임신 같아요
강철수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틀림없소
후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수는 후에를 포옹하며 떨리는 목소리
로 말했다
아 당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겠소 내가 아버지가 된다니
기쁘세요
말이라고 하오
저도 기쁘지만 불안해요
내가 있으니 걱정 말아요
강철수는 사슴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강철수는 빙하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 자학은 그만두자 귀국하는 것이다
전쟁의 모든 악몽은 잊어 버리자 홀가분한 마음으로 귀국해서 평범
하게 살자 후에와 아이와 더불어 삶이란 무엇인가 이런 것이 진정
한 삶이 아니겠는가 강철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은 것 같았다
저를 데리고 가는 것 틀림없죠
물론이오
행복할까요 우리
물론이오
강철수는 대답을 하면서도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존재
할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첬다 ?이 불확실한 전선에서 무엇을 확신
할 수 있단 말인가 강철수의 망막에 트라이앵글의 음산한 광경이 불
길하게 스쳐갔다
참 지난번 밤에 만났던 프랭크 일당 기억나세요
강철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알고보니 이 병원 인사계에 있는 작자들이었어요 일자리를 잃을
것 같아요
걱정말아요 쓰지 않고 모아둔 돈이 좀 있어요
돈은 필요 없을 거예요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탕 노인으로부터 무상으로 농토를 넘겨 받은 소작인들은 처음 몇
년은 후에의 가족에게 얼마간의 곡식을 주었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쌀은 해방전선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탕 노인은 티엔
대령에게 의심을 사게 되었다
강철수는 지갑에 있는 지폐를 모두 꺼냈다 삼백 달러 정도가 되었
다 후에는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태어날 아이를 생각해야 하오
강철수는 억지로 돈을 건네주면서 이민 서류만 완비되면 귀국을
서둘러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격화되고 있는 전쟁터에서 굼벵이처
럼 머뭇거리다가는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강철수
는 알고 있었다
박격포탄이 작열했다 병사들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강철수는 덤불
로 몸을 날렸다 그때 한 마리의 독사가 발목을 감았다 바늘 같은
독으로 발목의 피부를 뚫고 맹독을 쏜 다음 풀덤불 속으로 잠적했다
악 참 쿠와프 코브라과의 맹독성 독사 그는 발목을 손으로 감아
쥐었다 잠시 후면 뱀독은 혈관을 타고 흘러가면서 적혈구를 파괴할
것이다 호흡이 막혀올 것이고 전신이 붓고 시력을 잃어가면서 그
는 죽어갈 것이다 그는 불바다 속에서 저주를 퍼부으면서 또한 공
포에 떨고 분노하면서 미로와 같은 정글을 마구 내달렸다 그러나
그는 대나무 창살이 솟아있는 깊은 함정으로 곤두박질쳤다 대나무
창살에 옆구리를 꿰뚫린 강철수는 곤충 표본용 핀에 꿰여진 메뚜기처
럼 버르적거렸다
무옹족 전투원이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밍수이였다 밍수이의 손
에는 정글도가 들려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정글도에선 생선 비늘
같은 빛줄기가 희번뜩했다 강철수가 어 하는 순간 밍수이는
얍 소리와 함께 정글도로 강철수의 정수리를 내리 첬다 핏빛 무
지개가 하늘로 뿜어올랐다
강철수는 자신의 비명에 놀라 눈을 떴다 자기도 모르게 옆구리를
만져 보았다 손가락으로 머리칼도 헤적거려 보았다 악몽이었다 이
마에는 팥 알 만한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혔고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야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강철수는 바라크의 창을 열었다 떨리
는 가슴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산등성이에 반쯤 남아 있는 벌건 태
양이 보였다 땀이 배인 피부를 바람이 스쳐갔다 웬 악몽을 매일같
이 꾸는 것일까
병원에서 퇴원한 지도 이 주일이 넘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
다
신형철이 바라크 입구에 모습을 나타냈다
출동해야겠어
야전 침대에 털석 주저앉으며 신형철은 말했다 강철수는 신형철을
쳐다보았다
구엔 툭이란 자를 납치하라는 거야
신형철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어떤 녀석인데
아편 반출량을 속였거나 아니면 해방전선측에 반출 루트를 흘리
는 녀석이겠지
만수 녀석은
강철수는 쉬고 싶었다
브라운과 창고 당번이야
신형철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후에의 이민 신청 서류가 자꾸 늦어져
황 대령이 장난하는 걸까
신형철은 담배연기로 만든 둥근 고리를 불며 말했다
어떻게 하지
강철수는 신형철의 무덤덤한 표정을 살폈다
대사관에 직접 알아봐
사이공이 여기서 어딘데 황 대령이야 매일 사이공으로 가잖아
그 꿍꿍이를 누가 알겠어 해주고 싶으면 벌써 해줬지
임신했어 후에가
그럼 서둘러야겠네 전황이 심상치 않아
지프는 두 사람을 매복 장소에 내려 놓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울창한 대나무 숲에 몸을 숨긴 그들은 장
대같은 비를 견뎌야 했다 판쵸 우의는 소용이 없었다 쉴 새없이 거
떠리들이 떨어져 피부 깊숙이 파고 들었다 녀석들은 히루딘을 주입
할 것이다 그런 후 배가 터질 때까지 흡혈할 것이다 거머리가 빨든
모기가 달려들든 감내해야 했다 누가 코를 쥐어 잡아도 모를 어둠
속이었다 개구리 우는 소리는 한국이나 이곳이나 꼭 같다고 생각하는데
야 만수 녀석 조심해야겠어
신형철이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했다 강철수가 그를 바라보자
아무래도 밍수이 녀석이랑 자주 만나는 것이 수상해 해방전선 애
들과 내통한다고 누가 귀뜀해 주었어
형철은 머리에서 빗믈을 쓸어내렸다
만수가 헤로인을 홍콩 업자에게 밀반출시키고 있다는 것도 사실일까
강철수는 만수 녀석의 수상한 표정을 떠올리며 믈었다
그런 것 같아
신형철은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녀석 왜 그런 짓을 하지
돈이 필요해 봐 무슨 짓을 못해
신형철은 빗줄기 사이로 전방을 응시하며 나직이 말했다
돈이 왜
돈의 돈 자도 모르던 만수가 왜 돈을 밝히게 되었는지 강철수는 의
아했다
해방전선측에 그녀석 애인이 있는 거 알지
알아
그 여자가 지난번 월남군 수색대에 체포됐는데 아직 살아 있는 모
양이야 월남군 정보부대 녀석들이 2만 달러를 요구하더래 전쟁에
질 바에야 실속을 차리자는 게지 여자 베트콩 하나 죽여봐야 뭐하겠
어
신형철은 빗물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만수 뒤엔 누가 있지
브라운이야
그럼
그 자는 돈을 빼돌려선 스위스 은행에 입금하고 있어 아마 은행
에 3 4십 만은 넣어 두었을 거야
트라이앵글 지역에선 모두가 돈 때문에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라
오스 황실군과 무옹족은 아편 밀매로 엄청난 자금을 손에 쥐었고 이
들 자금으로 무기를 사들이고 있었다 이곳처럼 대단위 아편 밀경작
지대에는 많은 범죄꾼들이 모이게 마련이고 해방전선측도 아편을 탈
취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번에 납치하려는 구엔 툭이란
사내도 카오 반과 마찬가지로 해방전선측과 중앙정보부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신형철이 집게손가락을 세워 입을 가렸다 두 사람은 몸을 낮게 깔
았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풀섶에서 무슨 소리가 났
다 두 사람은 긴장했다 잠시 후 신형철이 허탈하게 웃었다 돼지였
다 돼지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았다
강철수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아홉 시였다 구엔 툭이란 사내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언덕 위를 올려다 보았다 구엔 툭의 집
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줄기차게 퍼붓던 스콜은 그첫고 구름 틈에
서 별이 빛났다
이상한 논리가 지배하는 전선이었다 전선에서 전사들이 수없이 죽
어가는 동안 구엔 툭이나 카오 반과 같은 부패한 관료들은 후방에서
부를 축적하며 마음껏 거들먹거리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그들이 매복해 있는 바로 코 앞의 풀덤불이 우수수 흔들렸
다 느닷없이 수십 명의 사내들이 나타나 두 사람을 포위했다 대항
할 틈이 없었다 중무장한 베트콩들은 총검을 강철수와 신형철의 목
에 들이댔다 수 틀리면 찔러버리겠다는 험악한 기세였다 눈매가 암
팡진 녀석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해치워버리라며 소리질렀고 간
부로 보이는 자가 이런 부하들을 말렸다 해치우자고 소리지른 사내
는 간부에게 대들었고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이 틈을 타서 강철수와
신형철은 숲속을 향하여 뛰기 시작했다 칠흙같이 어두운 숲속이 두
사람을 맞았다 그때였다 뒤통수에 둔중한 타격을 느끼며 강철수와
신형철은 풀밭에 코를 박았다
얼마 뒤 의식을 차려보니 두 사람은 뒷결박을 당해 있었고 싸늘
하게 웃고 있는 구엔 툭의 깡마른 얼굴이 보였다 구엔의 곁에는 해
방전선측 전사 몇 명이 서서 두 사람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황석호가 보내던가
신형철을 내려다보며 구엔 툭이 물었다
신형철은 침을 뱉었다 강철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엔 툭
의 잔인한 성격을 익히 들어 아는 강철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두 사람 다 당장 쥐구덩이에 넣고 싶지만 우리 동지와 포로 교환
에 사용해야겠어 얌전히 굴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 알고 있겠지
구엔 툭은 칼날 같은 어조로 말했다 강철수는 구엔의 잔혹한 방법
을 상기하면서 욕지기를 느꼈다 벌거 벗긴 채 깊은 구덩이에 던져진
사람의 살점을 뜯어내는 수천 마리의 굶주린 쥐때가 망막을 스쳐갔
다 구덩이에는 하얀 인골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삼엄한 경계를 받으며 폭우로 진창이 된 험한 숲길을
하얗게 밤을 새우며 끌려갔다 날이 밝을 무렵 해방전선측인 촐롱
마을이 산 아래로 보였다
마을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움막에 감금되었다 인상이 험악한 사내
가 입구를 지켰다
이상해 이건
신형철은 입구에 있는 사내를 보면서 낮게 말했다 강철수는 신형
철을 보았다
분명히 황 대령이 우리 둘만 알게 지시했었지 아무도 그 명령을
엿들었던 사람은 없어 만수도 현장엔 없었구
신형철은 골똘히 생각하며 말했다
황 대령이 구엔에게 귀뜀이라도 했단 말이야
우리가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
신형철의 어조는 무거웠다
말도 안되는 소리
누가 그러는데 황석호 대령이 미군측과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
다고 했어 난 이짓 그만 두고 귀국하고 싶어 조짐이 안 좋아
강철수는 입구를 흘끗 보았다 출입구에 있는 사내가 험악한 표정
으로 강철수를 노려보았다 강철수는 황석호의 음험한 눈동자를 떠올
리면서 신형철의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두 사람의 속삭이는 소
리가 신경에 거슬렸는지 입구에 있던 사내가 총을 겨누며 월남어로
한마디라도 더 지껄이면 죽여버린다며 날카로운 어조로 소리질렀다
정오 무렵 요란한 폭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신형철이 강철수를 보았다 강철수는 널빤지 틈으로 밖을 살폈다
산등성이를 타고 건쉽이 날아오고 있었다
건쉽 인데
강철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란한 폭음이 대기를 갈랐다 다
음 순간 고막을 찢을 듯한 폭발음이 들렸다 강철수와 신형철은 폭풍
에 날려 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재수없이 걸 렸어 네이팜이면 끝장이라구
쉴 새없이 포탄이 터졌다 콩 볶는 듯한 중기음도 들리기 시작했
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구엔 툭이 권총을 들고 그들이
있는 움막으로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그때였다 요란한 기총 소사
음이 들렸다 구엔이 앞으로 쓰러졌다 구엔의 등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 내렸다
튀어야겠어
신형철은 입구를 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움막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숲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사방이 불바
다였다 기총 소사와 로켓포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여기 저기에 시체
가 널려 있었다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신형철
의 앞을 달려가던 여인이 갑자기 쓰러졌다 업고 있던 어린애와 함께
여인은 눈을 까집고 죽어 있었다
산등성이에 이른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보았다 촐롱 마을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마을을 공격했던 헬기와 비행기는 기수를 돌려 유유히
살아젓다
누가 바라크로 들어섰다 후에였다
마침 헬기가 잇었어요
몸에 꼭 끼는 아오자이 차림의 후에는 백련꽃을 연상하게 했다
강철수는 후에를 힘차게 포옹했다
잘 왔소 보고 싶었소
저두요 얼마나 보고 싶었다구요
강철수의 품에서 후에는 파르르 떨었다
강철수는 후에의 입술부터 찾았다 아이리스 향이 코끝에 감겨왔다
강철수는 후에를 안고 야전 침대로 갔다 아오자이 자락이 흘러내
렸다 강철수는 실크 슈미즈도 벗겼다 후에의 나신은 불빛 아래서
진주같이 빛났다 후에는 팔을 벌렸다 강철수는 후에의 몸 위로 무
너져갔다 후에의 입술은 윤활하고 감미로웠다
사랑하오
강철수는 후에의 탄력있는 엉덩이를 만져나갔다
저두요 견디기 힘들었어요
후에는 헐떡이며 간신히 대답했다 후에의 단단한 유방이 강철수의
손끝에 만져졌다 강철수는 부드러운 손길로 후에의 유방을 감싸 쥐
었다 크고 탄력있는 유방이었다 강철수는 부드러운 손길로 유방을
천천히 만져나갔다 헐떡이던 후에는 신음을 토했다 아련한 향기가
코끝을 잡아 당겼다 강철수는 앵두를 입에 넣었다 후에는 흠칫 놀
랐다 혀끝은 앵두 주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후에는 길게 한숨을 토
했다 앵두는 서서히 경화되어 갔다 앵두는 작은 산딸기가 되었다
이태백의 귀절이 뇌리를 바쁘게 스쳤다 골짝 바위 서리에 빨가장이
여문 딸기 가마귀 먹게 두고 산이 좋아 사는 것을 아이들 종종쳐
뛰며 숲을 헤쳐 덤비네
강철수는 후에의 허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엉덩이에 비해
무척 가늘고 미끈한 허리였다 강철수는 허리를 쥐어보았다 후에는
헐떡이며 몸을 꼬았다 강철수의 손길은 후에의 허벅다리를 만져나갔
다 후에는 부르르 떨었다 강철수의 손길이 후에의 은밀한 부분에
닿았을 때 후에는 자기도 모르게 엉덩이를 뒤틀었다 강철수의 손길
이 부드럽게 스치게 되자 그곳은 윤활해졌다 엉덩이를 흔들던 후에
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에는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강철수는
연꽃잎을 어루만지는 느낌이었다 적요한 연못의 한가운데서 부끄러
운 듯이 피어난 백련 한송이 꽃송이는 젖어갔다 꽃송이는 한숨과
신음을 교대로 토했다 꽃송이는 열기를 토했다 그는 꽃밭을 거닐고
있었다 방향 짙은 네이쥬퍼뮴 향기가 날아왔다 강철수의 기억에서
하이네의 귀절이 빠져 나왔다 햇빛이 넘치는 여름날 아침 나 혼자
정원을 거닐었다 꽃들은 나직이 속삭였으나 나는 아무 말 없이 거닐
었다
후에는 헐떡이면서 말했다
아 아 사랑해요
사랑해 후에
후에는 강철수의 남성을 손에 쥐었다 엄청난 질량에 흠칫 놀란 듯
바르르 몸을 떨었다
당신 곁에 영원히 있고 싶어요
강철수의 남성을 감싸 쥔 채 후에는 속삭였다
당신은 장미같은 여인이오
강철수는 자신의 몸이 한없이 팽대되는 느낌을 받았다 강철수를
애무하던 후에는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강철수를 끌어당겼다 강
철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나갔다 후에는 숨을 삼켰다 후에는 터
져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삼켜 나갔다 강철수는 잠시 동작을 멈추
었다 후에의 커다란 눈이 강철수를 응시했다 강철수는 부드럽게 몸
을 움직여 나갔다 후에는 고통을 견뎌나갔다 마침내 그녀는 한송이
하얀 장미로 변했다 장미는 부끄럽게 미소짓기 시작했다
그는 만개한 장미의 가슴 속 깊이 파고 들었다 장미의 향기가 그
를 감쌌다 장미는 하얀 빛살 속으로 용해되어 갔다 장미는 남자를
영원의 세계로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빛의 세계였다 태양처
럼 뜨거운 생명의 세계였다 빛살은 더욱 강해졌다 태양은 더욱 뜨
겁게 달아 올랐다 별들이 부서져 내렸다 별의 잔해는 은빛 안개를
만들었다 눈부신 광채가 되쏘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눈을 감은 채 영원의 세계로 날아 올랐다 그들은 강을
건넛고 바다를 건넛다 그들은 새처럼 날아 올랐다 그리고
별무리가 되었다 그들은 구름이 되었고 비가 되었다 그들은
안개가 되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되었다 그들은
속박으로부터 풀려났다
땀으로 흥건히 젖은 후에의 머리칼이 강철수의 가슴에 놓여 있
다 여자는 남자의 가슴에 입술을 대며 금속성 목소리로 말했다
이 행복 영원했으면
강철수는 여자의 머리칼을 만졌다
난 당신같은 소박한 남자가 좋아요 야망이란 허망한 것이에요
야망이 없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고들 하는데
남자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예요 좋은 남자는 친절하
고 정이 깊은 법이라고 해요 그리고 위선자가 아니고 비겁하지도
않고
당신이 말하는 남자가 과연 존재할까 이 세상에
내 옆에 누워 있잖아요
나의 악마적인 부분을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겠지
인간은 신과 악마가 공존하고 있어요 자신의 악마적 부분을 부정
하는 인간은 위선자죠 당신의 악마적 부분까지 사랑할 거예요 당신
도 내 속에 내재된 악마적 부분을 수용해 주어야 해요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겠소
목이 말라요
냉장고에 스카치와 맥주가 있을 거요
뭣좀 마실래요
후에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맥주 마시겠소
좋아요
바라크지만 행복해요
이런 상황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오
기뻐요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후에는 강철수에게 다가와 안겼다 강철수는 후에를 안고 침대로
갔다 후에는 강철수의 몸을 만졌다 강철수는 다시 경화되기 시작했
다 후에는 터질 듯 경화된 강철수의 남성을 수용했다
사랑해요 영원히
후에는 신음하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몸을 움직여 나갔다 헐떡이던 후에는 참지 못하고 신음
소리를 질렀다
후에는 아침 늦게 헬기편으로 돌아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너무 마신 탓일까 목이 타는 듯 갈증이 심했다 시계를 보았다
이미 열 시가 넘고 있었다 로버트 대위가 신형철과 함께 바라크로
들어서는 것이 욕실 창문을 통해서 보였다
욕실에서 나온 강철수에게 로버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철수 대위 한만수 뒷조사 좀 해주어야겠어
무슨 뒷조사
강철수가 뜨악한 표정으로 로버트를 응시하자 신형철이가 대신 대
답했다
입금 액수와 헤로인 반출량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고 있대
브라운 상사가 무옹족 전투원들과 짜고 그러는 것 같아 밍수이와
만수도 관련되어 있어
이번엔 로버트가 말했다
밍수이도
응 그도야
신형철이 말했다
얼마나 차이가 나서 그래
매달 O만 달러 정도 그런데 매달 그 갭이 커지고 있어
로버트가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휴우 대단하군
강철수는 휘파람을 불면서 신형철에게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수 녀석은 지난 번 죽은 잭슨이란 자와도 한 패야
신형철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만수 녀석이
강철수는 베트콩 여자와 동거하는 그 녀석이 도무지 마땅치 않았었
다 그러고 보니 요즘 녀석의 태도가 전 같지 않고 무얼 자꾸 감추려
는 듯한 태도가 뇌리에 떠올랐다
내가 이 일에 끼어들면 이 사실을 누가 알고 있나
해밀턴 대령 한 사람 뿐이야
로버트가 담배를 붙여 물며 대답했다
내키지 않아 한만수는 내 친구야
적과 내통하는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지
로버트가 강철수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 보며 말했다
적과 내통한다는 증거를 잡기 전엔 믿을 수 없어 더구나 이런 개
같은 지역에선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거든
강철수도 지지 않으려고 대꾸했다
그러니까 증거를 잡아 오라는 것 아닌가
친구의 함정을 파란 말인가
아까도 말했지만 적과 내통하는 자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니깐
적이란 누굴 말하는 거지
강철수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자네의 태도는 나만 알고 있겠네 그런 식으로 해밀턴에겐 말하지
말게 당장 쫓겨나게 될테니깐
발끈해진 로버트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해밀턴과 그런 논쟁을 할 생각 없어 난 한국군이야
강철수는 말없이 맥주를 마시고 있는 신형철을 보면서 말했다 강
철수의 뇌리엔 다낭 병원에서의 차별 대우가 떠올랐다
나에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로버트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에겐 전혀 감정이 없네 자네는 우리 동지가 아닌가
그래 나는 당신네 동지야 다낭 병원의 일을 전해 듣고 콜린즈
원장에게 항의했네 자네 후에란 여자 의사의 이민 서류 때문에 고심
한다고 들었는데
강철수는 귀가 번쩍 뜨였다
누구에게 들었나
황석호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엿들은 내 부하가 그러더군
그래서
황석호는 자네 애인의 귀국 서류보다는 아편 밀매 작전에 혈안이
되어 있네 혹시 미국쪽으로 이민할 생각이 있다면 내가 주선할 수
있네 먼저 비자로 보내고 나서 이민 서류를 신청하는 방법도 있네
사이공에 있는 이민 심사관이 내 친구야 요즘 전황이 나빠지니까 정
식으로 이민 서류를 접수하고 있네 의사 성직자들은 우선적으로 접
수한다고 말했어
강철수는 미국이라는 말 때문에 망설여졌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서 부탁해 두기로 했다
황석호가 협조하지 않으면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알았네 서류가 되면 가져오게 최우선으로 처리하도록 부탁해두지
고맙네
강철수는 로버트의 털복숭이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어 주었다 작
은 서광 같은 것이 비치는 것 같았다
강 대위 한번만 봐줘 우리 사이에 그럴 수 있는거야
리꽝젠에게 헤로인을 넘겨주던 현장을 강철수와 그의 부하들이 덮
쳤을 때 놀란 것은 브라운보다 만수 녀석이었다 만수는 봐달라고
애걸했다 요원들은 막무가내로 만수에게 수갑을 채웠다 브라운은
로버트 대위에게 넘겼다
부대로 가는 동안 만수는 통사정을 했다 강철수는 냉정하게 말했다
우리 사이는 끝났어 군인이 명령을 위반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
은 알고 있겠지
야 임마 우리가 무슨 군인이야 cIA 총알받이지 야 강철수 사
정한다 내일까지만 기다려줘
강철수는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한만수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월남군 정보대에 끌려가서 고문받고 있어 툭 꾸앙이란 그
곳 책임자와 교섭했더니 2만 달러 내라는 거야 석방하는 대가로
임마 해방전선측 여자 첩자가 뭐가 그리 대단해서 빼내려고 그
래 전우들이 얼마나 그 애들에게 당했는데 그 빨갱이 계집을 살려
주려고 그 물건들을 뒤로 빼돌려 여러 소리 말구 솔직하게 털어
놔
강철수의 욱대김에 한만수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알았어 말하겠어 그러나 조건이 있네
강철수는 무슨 수작이냐는 듯 한만수를 쳐다보았다
24시간 후 나를 그들에게 넘기게
강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편 밀반출 루트를 캐는 것이 급선무
란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 믈건들을 빼돌리기 시작한 것은 6개월 전이야 황석호
대령의 지시였다네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한 후 풍전등화와 같이 된 지금과 같은 상황
에서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에서 한탕 벌지 않으면 두고 두고 후회가
될 것이라고 황석호 대령은 만수에게 말했던 것이다
물론 충분한 급료를 지불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의 위
험도에 비해서 수천 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엇다 백 달러
정도면 정제된 헤로인 을 무옹족으로부터 살 수 있었다 이 걸
홍콩인들에게 넘기면 천 달러 가까이 받을 수 있었다 더블백 하나가
50 정도라면 하나만 넘겨 줘도 4500 달러가 남는다는 계산이었
다 만수는 한마디로 찬성했다 이런 사선에서 목숨을 걸고 CIA 작
전을 도울 바엔 돈이라도 벌어서 꾸엔과 다른 나라로 가서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황석호 대령은 물량 중에서 정도를 빼돌려
서 홍콩인 중간 브로커에게 넘겼다 황석호 대령은 그 돈을 LJ를
통해 제네바의 인터내셔널 뱅크에 입금되도록 했고 만수의 몫은 나
중에 정산해서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작전을 마치고 귀대했더니 밍수이가 찾아 왔더란
것이었다 월남군들이 꾸엔의 마을로 들이닥쳐 남자들과 어린애들까
지 모두 사살하고 꾸엔을 끌고 갔다는 것이다 아는 선을 통해서 꾸
엔의 생사를 알아보니 꾸엔은 살아 있었지만 고문을 받고 엉망이더
란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들이 요구하는 몸값 2만 달러를 구하기 위
해 황석호 대령을 찾아 갔으나 거절당하고 할 수 없이 브라운과 짜
고 홍콩인 브로커를 만나다가 이렇게 됐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야 빼돌린 액수가
모두 합치면 5백 만쯤 될거야
네 몫은 얼마나 돼
준다고 했어
그럼100 만 달러
그런 셈 이지 허나 무슨 소용이야 당장 2만 달러만 있으면 그
100만 달러도 포기할거야 꾸엔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야 해
야 이 얼빠진 친구야 꾸엔이 뭐길래 그런 짓을 해
강철수의 욱대김을 받고 만수는 잠시 하늘 한 곳을 응시하다가 천
천히 입을 열었다
꾸엔 좋은 여자야 다 말하지 내가 왜 이런 일을 했는가
말을 듣고 보면 이해가 갈거야 꾸엔은
만수는 잠시 천장을 올려다 봤다
만수가 꾸엔을 처음 만난 곳은 메콩강변 어느 벤치에서였다 사이
공 통합 병원에 있는 민경섭의 소개로 꾸엔을 보는 순간 만수는 넋을
잃었다
뭣에 얻어 맞은 사람처럼 왜 그래
숙사에 돌아 와서 민경섭이 그렇게 놀렸어도 만수는 멍하니 한 점
만 응시했다
어때 꾸엔이라는 여자 괜찮았어
민경섭이 물었을 때 만수는 꾸엔의 환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민경
섭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이공 대학 불어과 3학년이다 대학 졸업하면 파리로 갈 모양이
고 카오민의 가장 친한 친구지 꾸엔의 아버지는 대학 교수야 역사
를 전공했다고 했어 급진주의 성향이 있는가 봐 마음에 들었다면
카오민에게 잘 말해줄께
만수는 매일같이 꾸엔을 만나서 카페에서 맥주를 마셨다 전공이
외국어라는 공통점도 있어서 만수와 꾸엔은 쉽게 가까워졌다
어쩌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죠
꾸엔이 믈었을 때 만수는 설명할 적당한 말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배속된 부대가 특공 부대였다 ROtc 仁 장교로선 이
례적인 일이었다 이유라면 깡마른 체격이 동남아시아인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는지 몰랐다 아니면 영어와 불어가 쓸만하다는 교관의 추천
때문인지도 몰랐고
삶이란 물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저 강물을 봐요 거슬러 올라가
는 물줄기는 없어요 전쟁도 마찬가지죠 자의로 전쟁에 뛰어드는 사
람이 있겠어요
한만수는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꾸엔은 한동안 맥주컵을 응시하
다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국군이 보는 베트남의 장래
둘 중 하나겠죠 미군이 이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해서 친미 정부
를 세우거나 아니면 호치민식으로 통일되거나 통일은 될거요
만수는 이미 월남전의 종말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이 늪같은 전쟁
에서 군화를 빼내고 싶어진 것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요성에 대
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었다 엄청난 전쟁비용 때문에 인풀레는 심화
되고 재정 적자로 인해 실업률 또한 중가하고 있어서 언론은 대정
부 공격을 더욱 강화했고 반전시위는 날로 격화되고 있었다 이런
내막을 가장 민감하게 감지하는 사람들이 cIA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이 전쟁의 전도를 알았다cIA 요원들은 미군이 철수해도 이
지역에 남아서 암약을 할 것이다 이곳엔 트라이앵글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었다 한 해 트라이앵글 지역에서 생산되는 아편과 헤
로인의 양을 돈으로 따지면 매년 2천 억 달러가 넘었고 이 중 미국
으로 흘러들어가는 양만 해도 1천 억 달러나 되었다 트라이앵글이
있는 한cIA 의 비밀 공작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만수는 알고 있
었다
난 내 나라가 싫어요 서로 뭣때문에 죽이는지도 모르고 죽이고
죽고 있어요 베트남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요
우리의 선조는 중국의 화남지방에 있던 낙월 에서 발원했지요
BC 1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에게 정벌된 후 1000년 동안 중국
의 지배를 받아왔고 938년 중국 원정군을 무찌른 오권 이 스스
로 왕위에 올라 왕조를 창건했어요 19세기 중엽 프랑스가 침입하기
전까지 베트남은 독립된 왕국으로 존속되었고 그동안 여러 왕조가 수
립되었죠
그녀의 말을 들으며 월남처럼 외세 때문에 시달린 민족도 드물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38년에 오권에 의해 독립 왕조가 세워졌다고
는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베트남에 대해서 압력을 넣고 있었다 그들
은 베트남을 안남국이라 블렀고 베트남 왕을 안남국왕이라
칭하며 3년에 한번씩 조공을 중국에 바치게 했다 18세기 말에는 타
이손이 난을 일으켜 阮朝가 궁지에 빠지게 된 일이 있
었다 그러나 완조의 가륭제 는 프랑스 선교사인 피뇨 드비엔
등의 도움을 얻어 타이손당을 괴멸시켜서 완조를 구했다
그러나 2대 황제인 성조명명제 聖朝明命帝가 선교사를 박해한 사
건이 일어났다 영국과 경쟁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출을 노리고
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이 사건을 빌미로 1858년 다낭을 공격
하고 다음 해에는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1884년에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
베트남 독립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싹트기 시
작했다 927년 월남국민당이 결성되었고 1929년에는 인도차이나 공
산당이 조직되었다 호지명 의 월남청년회가 조직된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민
족주의자들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베트남 독립 동맹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1945년 8월 세계 대전이 끝난 지 한 달 후인 9월 베트남 민주공화
국의 독립선언식이 거 행되었다 그러나 전쟁 전의 지배권을 되찾으려
는 프랑스가 949년 바오다이를 내세워 베트남국을 세움으로써 호지
명과 전쟁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8년이나 끌던 이 전쟁은 1954년 5
월 프랑스군의 거점이던 디엔비엠 푸가 함락됨으로써 7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북위 17도선 근처를 경계로 베트남
은 남북으로 허리가 잘렸다 그리고 북쪽엔 호지명의 베트남 민주공
화국이 남쪽엔 고딘디엠의 베트남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년 후 남북 베트남이 총선거를 치러 통일되도록 규정한 제네바 협
정은 지켜지지 않았다 디엠의 친미 정권이 반공 정책을 강화하자 남
부 베트남 내의 공산주의자들은 960년 2월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
베트콩을 결성하여 월맹에게 조종되기 시작했다
963년 1월 두옹 반 민 장군의 군부 쿠데타로 고딘디엠 정권이 실
각한 후 열 번의 쿠데타 악순환을 격은 뒤 965년에는 구엔 반 티우
의 정권이 들어섰다 티우 정권은 966년 새 헌법을 만들었고 967
년에는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 부통령과 상 하 의원을 선출하였는
데 1969년 2월에 공산군이 전면적인 공격을 나섰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베트콩이 결성되어 고딘
디엠 정권에 대한 테러 행위가 중가하기 시작하면서였다 96년 당
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F 케네디는 남베트남이 공산화될 경우 인
도차이나 반도 뿐만 아니라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 아래 처음으로 소규모의 미국 정규군을 베트남에 파견하여 특
수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케네디는 확전을 우려해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려 시도했다 미 군부는 이런 케네디의 태도에 분개했다
963년 3월 22일 케네디가 암살된 후 대통령이 된 존슨은 964년
통킹만에 정박해 있던 미 구축함을 북베트남의 어뢰정이
공격한 소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미군을 전투에 직접 참가시켰다 965년부터
는 북폭北爆을 개시했고 968년 베트남에 투입된 미군 병력수는 54
만 명이란 엄청난 숫자가 되었다 전쟁 비용 또한 288억 달러로 늘어
났다 1968년 5월부터 전쟁 종식을 위한 파리 회담이 계속되었으나
전투 지역은 캄보디아 라오스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제 2차 인도차이
나 전쟁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베트남인에게 진정한 독립은 없었어요 특히 프랑스가 우리 나라
에 저지른 행위는 만행이었죠 미국도 마찬가지예요 말로는 베트남
정부를 도와준다고 하지만 정부에 있는 그들은 독재자들이에요 다
군부 출신이죠 그들이 정부의 요직을 독점하고 미군 원조 믈자를 팔
아먹고 그리고 미국으로 달아나고
꾸엔 조심해요 당국은 사방에 귀를 열어놓고 있어요
만수는 월남군 첩보 기관의 잔혹성을 여러 번 보아 왔었다 반정부
시위자나 반정부 활동을 하는 인사들에 대한 고문은 눈뜨고 볼 수 없
었다
알아요 저도 목격했어요 그날 우리는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있었
죠 쾅트리 스님이 분신 자살을 한다는 은밀한 전단이 나돌았어요
쾅트리 스님의 분신을 막자는 측과 오히려 그 분신 자살을 계기로 정
부의 부패상을 알리자는 두 파로 나누어져 있었어요 그러나 다 소용
없는 일이었어요 우리가 운집한 인파를 겨우 뚫고 그 장소에 갔을
땐 쾅트리 스님은 이미 블덩이가 되어 광장 한복판을 내달리고 있었
어요 불이 꺼졌을 땐 스님은 불에 탄 고양이처럼 되어 있었어요 격
분한 우린 시민들과 함께 시위했죠 나와 내 친구 카오가 보안요원에
게 끌려간 것은 자정 무렵의 늦은 시간이었어요 그들은 우릴 덮어놓
고 발가벗기우고는 신문하기 시작했죠 시위 주동자가 누구며 시위
운동의 조직을 말하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날 새벽 그들은 나와 그녀
에게 짐승같은 짓을 저질렀어요 다섯 명의 사내가 차례로 우릴 범했
어요 뒷날 그들이 우리를 트럭에 태우려 할 때 정말 기적같이 아버
지와 함께 보안대장이 황급히 달려 왔어요 우리가 석방된 것은 아버
지의 친구였던 사이공 대학 총장이 검찰 총장에게 탄원했었기 때문이
었다고 나중에 들었죠 아버지는 울었어요
말을 잠시 멈추고 만수는 취조실 창문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나
서 만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만남이 있고 나서 나는 꾸엔을 사랑하게 됐어 꾸엔이 해방
전선으로 가게 된 것은 월남군 보안 부대에 체포되어간 그녀의 아버
지가 보안군에게 피살된 후였지
한만수의 말을 귀담아 듣던 강철수는 만수가 돈이 다급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만수 녀석은 이런 일을 하기엔 지나치게 감정적이
라는 전부터의 생각이 옳았다고 느껴졌다
좋아 마약 밀거래 루트를 말해줘 어떻게 물건을 빼돌렸고 어떤
루트로 거래가 이루어졌나 털어놔 만약 여기서 다 털어 놓지 않으
면 보안대로 넘어가 홍콩과 태국 남미쪽으로 간 물량은 얼마나 되
홍콩과 태국은 얼마 되지 않았어 대략 두 지역을 합쳐서 20 정
도 될까 대부분 남미패거리들과 거래가 이루어진 셈이야
남미패거리들이라면
산체스와 곤잘레스였어
산체스라면 페르난도 산체스
그래 칠레 녀석 이지
그리고 곤잘레스는 콜롬비아의 돈 후앙 곤잘레스겠고
맞아 녀석 살인마로 악명 높은 놈이지 그건 그렇고 날 어쩔텐
가 설마 미국측에 넘기진 않겠지
알잖어 나에겐 널 어떻게 해줄 재량권이 없어 로버트 대위가 알
고 있는 한 널 봐줄 수가 없어
같은 한국인끼리란 말을 하고 싶겠지
강철수는 만수의 말을 잘랐다 그리곤 냉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들어 여긴 그런 것 따질 만큼 여유있는 곳이 아니야
나쁜 자식
만수는 강철수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강철수는 만수를 로버트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후에에게 돌아갔다
만수 녀석이 문을 박차고 바라크로 들어선 것은 한밤 중이었다
후에와 함께 침대에 있던 강철수는 만수가 내지른 발길질에 벌렁
뒤로 나딩굴었다
이 더러운 자식 양키 자지나 빨 녀석 빨리 옷 입어
내뱉는 만수의 손에는 M6 대검이 쥐어져 있었다
강철수가 황급히 옷을 주워입자 만수는 강철수의 뒷덜미를 잡고 앞
뜰로 끌고 갔다 이성을 잃어버리면 맹수보다 더 표독한 만수의 성격
을 잘 아는 강철수였다 꼼짝 못하고 당할 판이었다
앞뜰 아편 밭에는 달빛이 얼음가루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아편꽃
떨기가 쏟아지는 달빛 아래 몸을 떨고 있는 그림 같은 광경은 죽음의
공조를 목전에 두고 있는 강철수로선 역설적인 풍경이었다
꾸엔이 조금 전에 총살됐다고 밍수이가 말해주더군 나쁜 자식
잘 들어 둬 황석호와 이세준 최오남이란 자들 그리고 그들의 뒤에
있는 작자들 모두 너희들을 이용하고 있어 전쟁이 끝날 때쯤이면
너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하도록 각본이 짜여 있어
누가 그런 소릴 해
임마 브라운이 어떤 여운데 브라운이 죄다 말해주더군
날 어쩔텐가
꾸엔의 복수를 해야겠어 네 놈만 아니었으면 우린 캄보디아로 갈
수 있었어 미리 탈출할 루트까지 마련했었지 그러나 이젠 틀렸어
언제 내가 죽을지 모르지만 네 놈은 내 손으로 죽여야겠어 더러운
녀석
만수가 대검을 높이 쳐들었다 강철수는 눈을 감았다
그때 총소리가 한 발 들렸다 강철수의 뒷덜미를 움켜 잡고 있던
만수의 손에 힘이 풀리면서 대검이 땅에 꽂혔다 두 손으로 권총을
겨누고 있던 후에가 보였다 하얀 치자색 아오자이가 달빛을 담고 바
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중대장님 왜 이민 서류를 기각시켰습니까
강 대위 후에의 오빠 키엠 때문이야
키엠이 어째서요
강철수는 책상을 내리치면서 따졌다
놈은 해방전선측 첩자야 월남군 첩보대 티엔 중령이 알려줬어
월남전은 막바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테트 기간에도 월맹군의 대공
세는 연일 계속되었다 전황은 나날이 긴박해지고 있었다 미국 여권
을 돈으로 얻은 사이공 정부의 전직 고위 관리와 거부들은 속속 출국
하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후에의 영주권이 나오지 않아 강철수가 본부 막사
를 찾았더니 후에의 이민 서류가 기각되었다는 소리를 인사계 민 중
위로부터 듣게 된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버린 강철수는 황석호
의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따지게 된 것이다
강철수의 입 속에서 개자식이란 말이 맴돌고 있었다 티 엔 황석
호 이세준 최오남 모두 썩기는 매 한가지였다 이들은 실전엔 한번
도 참전하지 안았다 전과나 보고하고 작전 계획을 짜고 명령만 내렸
다 미군 지휘관들처럼 전황을 살피기 위해 위험 지역을 병사와 함께
정찰하는 대담성도 없었다 이곳 트라이앵글 지 역에서도 마찬가지였
다 헤로인 밀매자와 접촉하고 무옹족으로부터 아편 수매를 하는 일
같이 위험이 수반되는 일은 피했고 마약 밀매자금을 챙기는 일은 눈
에 블을 켜고 달려들었다
강철수는 황석호 대령의 눈을 응시하며 나직이 말했다
모함입니다
황석호는 진력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티엔은 유능한 월남 첩보대 장교야
티엔은 부패한 월남군 장교일 뿐입니다
자네 내 앞에서 말조심 할 수 없나 아무리 특수전에 참가한다고
상관에 대한 예절마저 잊으면 쓰나
기각되었다는 말을 왜 진작 전해주지 않았습니까
틈이 없었어 자네 너무 안달하는 것 아닌가 월남 여자는 그런
식으로 다루는게 아니라구 발목 잡혀 그리고 자네 티엔을 조심하라
구 말을 함부로 해선 안돼 그자의 비위를 건드려봐 온갖 복잡한
일이 다 생긴다구 티엔은 사이공 군부와 연결되어 있어
황석호의 말을 들으며 강철수는 언젠가는 이 자식을 혼내줄 기회가
있겠지 하며 참았다
기각되었다면 서류라도 돌려 주십시오
전쟁터 아닌가 기각된 서류를 어떻게 일일이 찾는단 말인가
강철수는 황석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리고
이런 무책임한 사람에게 운명이 걸린 서류를 부탁한 자신의 어리석음
에 화가 났다 다시 이민 서류를 다 갖추려면 한 달도 더 걸릴 것이
다 강철수의 불안은 더욱 커져갔다
중대장님 저에겐 중요한 문제입니다 혼인 신고까지 한 상태입니
다 부탁합니다 접수가 되도록 힘써 주십시오
좌우간 기다리라구 지금은 그런 한가한 생각할 때가 아니야
황석호는 귀찮다는 투로 말하고 나서 서류에 시선을 깔았다
황석호의 사무실을 나선 강철수는 지프에 올라탔다 사나운 엔진
소리가 땅바닥을 긁었다 영내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 티엔이란 자를
떠올렸다 부패한 월남군의 전형적인 인물 이런 군인들은 전방에서
의 전투보다는 후방에서 반정부 인사를 탄압하는데 더욱 용맹을 떨치
는 법이다 월남이 패망한다면 티엔과 같은 부패한 정치 군인이 가장
큰 원인이 될 것이다 티우 대통령의 측근인 이들은 온갖 특권을 누
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남용하고 있었다
월남 군부는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라고 압력을 주는 반정부 인사
들을 좌익으로 몰아서 고문과 학살을 자행했다 반정부 인사에 대한
월남 정보부의 잔혹행위는 극에 달했다 티엔은 후에의 아버지 카오
탕씨를 특히 미워했다 반 년 전 티엔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 사건
의 진상을 카오 탕 노인이 푸랑스 기자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전엔 황석호 대령의 공정부대도 참가했었다 들리는 이야기는
수십 명의 무고한 월남인들이 학살당한 뒤 베트콩 용의자로 처리되
어 티엔과 황석호 등은 훈장까지 받았다는 것이었다
바라크에서 후에가 기다리고 있썼다.
어뗐써요
후에는 근심스런 눈동자로 강철수의 표정을 살폈다
서류를 새로 해야겠소 이번엔 미 대사관쪽으로 알아 볼 작정이요
강철수는 후에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미국요
후에는 무슨 말이냐는 투로 반문했다
그래 미국이오 로버트 대위가 서류를 준비하라고 했소
서류를 준비하는데 한 달이 꼬박 걸렸어요
한 달 아니라 두 달이 걸려도 서류는 해야 되오 전황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소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는 일 이었다 강철수는 황석호가 그렇게 야
비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생각 같으면 당장 황석호의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알았어요 집에 연락해서 서류를 다시 해달라고 부탁하겠어요 우
리 미국에서 살아야 하나요
미국을 거쳐서 한국으로 들어갈 계획이오
난 동양이 좋아요 백인들의 사회는 내키지 않아요 파리행을 포
기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서양이 싫기 때문이었어요
당신은 한국에서 훌융한 의사가 될 수 있어요
왜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들죠 티엔이라는 자가 마음에 걸려요
그 자가 우리 아버질 해칠까봐 두려워요
티엔 강철수는 티엔의 얼굴을 떠올렸다 트라이앵글의 돼지 사
람들은 티엔을 그렇게 불렀다 월남군 정보부의 핵심 멤버인 그는 이
곳 트라이앵글과 슈이엔 성도 타이닌 지구 등 접경 지역의 해방전선
정보 활동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막강한 권력의 칼을 휘두르며 마
음내키는 대로 그들 동족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었다
걱정 말아요 티엔이 당신 아버지를 의심해도 함부로 어쩌지는 못
할거요
아버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중얼거리듯 후에가 말했다
강철수는 후에의 가는 허리를 껴안았다 내일이면 후에는 떠난다
강철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강철수는 수화기를 들었다 후에였다
무슨 일이 있소
아버님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요 가능하겠어요
비상 근무중이었지만 강철수는 가겠다고 했다
강철수는 신형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형철은 바라크에서 기다리
라고 했다 얼마 뒤 신형철이 바라크로 들어섰다 그리고 강철수에게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은 바라크 밖으로 나왔다
황석호가 너를 노리는 모양이야 조심해야겠어
강철수는 신형철을 쳐다보았다
로버트 때문인가 봐 마약 밀매 자금을 몰래 빼돌리는 자가 황석
호라고 로버트에게 말했지
그래 한만수가 자백한 내용을 로버트에게 말해주었어
황석호는 이를 갈고 있어
강철수는 어깨를 흠칫했다 그러고는 후에의 전화 내용을 신형철에
게 말했다
알았어 모리스에게 부탁해 보자구
신형철은 어디로인지 전화를 걸었다
마침 모리스가 있군 서둘러 헬리포트에 가서 내가 보내더라고
해
뭘 줄까
놔 둬 내가 나중에 주면 돼 녀석이 뭘 원하는지 난 알지 황석
호 대령이 알면 펄펄 뛸텐데 내일 정오까지 꼭 귀대해야 돼 못 오
면 일난다구 황 대령이 너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 잊지 마
설마
황석호가 어떤 사람인 줄 알잖아 보기보다 음흉한 놈이야 내일
오전 중으로 꼭 귀대해
알았어 어지간히 겁줘
신형철과 헤어진 강철수는 헬기장으로 갔다 모리스는 헬기 조종석
에 앉아 있었다
헤 이 모리스 중위 신 대위가 보내서 왔소
어서 타슈
헬기의 기수가 동남쪽으로 고정되자 모리스는 이어폰을 내주었다
눈 아래엔 녹색의 카팻처럼 정글이 펼쳐져 있었다 군데군데 네이팜
탄 웅덩이가 험집처럼 보였다
O D 에 있소
모리스가 물었다
그렇소
앞으로 잘 부탁해요
뭘 말이오
헤헤 잘 알면서
그건 나에게 얼마나 협조해 주느냐에 달렸소
어디든지 가고 싶을 때 말하쇼 기꺼이 태워주리다
좋소 언제든지 필요한 것 말하시오 원하는 만큼 주리다
당신 맘에 들었어요 당신 영어가 원더풀이오
신 대위는 나보다 더 잘하오
어때요 이 좇같은 전쟁 난 하루 빨리 귀국해서 앨리스를 안아
주고 싶소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소
이 년
휴우
모리스는 휘파람 소리를 냈다
나는 4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개 같은 전쟁에 넌덜머리가 나
고 있소 베트남인들은 사랑을 모르는 종자들이오 서로 중호하고
불신할 줄밖에 몰라요 같은 동족이면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서로 살육을 일삼고 있소
당신은 전쟁을 싫어하는가 보군
강철수가 묻자
전쟁을 누가 좋아하겠소 난 징집을 피하고 싶었소 할아버지가
유명인사만 아니라면 난 캐나다나 스위스로 갔을거요 명분 없는 전
쟁에 끼어든 얼간이 같은 정치가들을 중호하오 그들은 무슨 오락처
럼 전쟁을 일으킨단 말이오 그들은 개인적인 이익 때문에 젊은이들
을 전쟁터로 몰아넣고 있소 우리가 왜 베트남에서 피를 흘려야 하
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승리할 수 없을 거요 베트남인들은 미국인
들을 근본적으로 미워하오 우리는 베트남의 통일을 방해하고 있소
우리가 사용하는 고엽제는 앞으로 엄청난 부작용을 줄 거라고 해리
슨이 말했소 전쟁이 끝나도 새로운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거
요 고엽제와의 전쟁말이오 당신도 조심해요 늘 손발을 깨끗이 씻
고 내일 몇 시에 귀대할 거요
열두 시면 좋겠는데
알았소 돌아 오는 길에 태워 주겠소
정 말 고맙소
천만에 도와주려면 화끈하게 도와 주어라 우리 할아버지가 하던
말이오 우리 할아버지 존 모리스는 인디애나 포트웨인 지역 하원 의원이오
좋은 할아버지를 두었소
우리 할아버지는 자동차광이오 그건 그렇고 이 전쟁 어떻게 생각
하오
군인은 전쟁의 당위성을 생각하지 않소
당신 꼭 피터슨 같이 말하오
피터슨이라니
우리 좇같은 중대장이오 잘난 체하고 멍청한 당신에게 한 욕은
아니오 난 원래 입이 수쳇구멍이오 징집돼서 오긴 왔지만 난 전투
따윈 흥미가 없소 포트웨인으로 돌아갈 날만 고대하고 있소 난 우
리 정부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오 무슨 근거로 남의 내전에 끼어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소 이 개 같은 전선에서 얼마나 많은 미국 청
년들이 희생될지 모르겠소 자유의 수호자 웃기는 말이오 베트남
에는 피흘리며 지켜야 할 자유가 존재하지 않소 부패한 남베트남 돼
지와 교활한 북쪽의 여우새끼들 사이에 일어나는 쟁탈전에 지나지 않
는 이 전쟁에서 무슨 명분을 찾겠다는 건지 모르겠소 당신은 언제
귀국하게 되오
모르겠소
강철수는 이 전쟁에 염증을 느꼈다 트라이앵글 지대에서 그들이
하고 있는 작전이란 추악했다 수백만 달러의 계약금이 걸렸지만 마
음 내키지 않는 일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독사와 독충이 우글거리
고 말라리아의 위협을 받으며 지내야 하는 정글 생활로 인내심은 한
계에 와 있었다
귀국했더라면 그러나 후에를 만났잖아 그렇다 후에를 만났
다 후에처럼 아름답고 다정한 여인이 있을까
당신 애인 있소
모리스가 믈었다
있소
한국에
슈이엔 성에 있소
아하 월남 아가씨갰군
그렇소
잘 해보슈
강철수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케 하는 이 청년이 마음에 들었 다
모리스의 바다빛 눈동자는 눈 아래 펼쳐진 녹색 정글을 줄곧 응시
했다
언제부터 헬기를 조종했소
고등학교 시절부터요 할아버지가 가르쳐줬소 아 그렇군 우리
할아버지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었소 무슨 강까지 진격했다가 후퇴를
하던 중 동상에 걸려서 발가락을 둘씩이나 잃었다고 했소 지긋지긋
하게 춥고 더럽게 어려운 철수 작전이었다고 했소 그리고 중공군의
야간 기습 작전에 대해서도 말해주었소 놈들은 왜 진격할 때 피리
를 불고 북을 치는 거요
심리 전술이오 적에겐 공포를 아군에겐 용기를 주는
현대전에도 그런 방법이 통하다니
아래를 내려다보니 작전 도로가 붉은 지렁이 같이 기어가고 있었
다
그 길 옆으로 후에의 집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슈이엔이라 그랬소
모리스는 항공 지도를 살피며 물었다
그렇소 이 근처 어디 같은데
저기 7번 도로 교차점이 슈이엔의 입구 같소
지도의 어느 지점을 가리키던 모리스는 그 길의 교차점에 있는 넓
은 공터에 헬기를 착륙시켰다
내일 정오에 오겠소
알겠소 태워주어서 고맙소
강철수는 모리스에게 가볍게 경례를 해주었다
천만에 내일 봅시다
모리스가 윙크를 하며 엄지손가락을 위로 세웠다
헬기는 요란한 폭음을 내며 상승해갔다
슈이엔으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아오자이 차림의 후에가 기다리고
있었다
헬기로 오셨군요
후에는 강철수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응 모리스란 사람이 태워줬소
아는 분이세요
신 대위가 아는 사람이오
신 대위님 잘 계세요
믈론 당신에게 안부전해 달라더군
아버지가 워낙 완고한 분이라 당신 마음 상하게 될까 두려워요
당신이 이해해야 할거예요
알겠소 걱정말아요 잘 될테니까
아버지는 겉으로는 반대하고 있어요 그러나 정말 반대했다면 아
예 만나려고도 안했을 거예요
후에의 집은 마을 중앙에 있는 높은 지대에 있었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저택은 웅장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잘 가꾸어진 넓은
정원이 보였고 가운데는 커다란 연못과 정자가 있었다
툭 청년은 그를 노인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카오 탕 노인은 하
얀 수염을 날리며 대나무 의자에 앉은 채 강철수를 맞았다 얼굴이
희고 기품 있는 노인이었다 눈빛은 차고 투명했다
어서 오시오 나는 모레 파리로 떠납니다 후에도 함께 데리고 가
려 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군요 파리에 가서 여러 가지 할 일이 있
어요 기자들과 만날 일도 있고 파리로 떠나기 전에 후에가 반한 사
내를 한번 만나고 싶었소 이번에 떠나면 오래 체류하게 될지도 모르
기 때문이오 자 여기 앉으시오
노인은 정중하게 자리를 권했다 강철수가 대나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노인이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소만 나는 결혼을 찬성할 수 없소
성장님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대나무 숲에 시선을 주고 있던 카오 탕저는 카랑카랑한 어조로 말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요 우리 카오 가문은 이민족과 결혼한 사
람이 없소 베트남이 이런 꼴이 되기 전에는 우리 가문은 전통과 자
존심을 지키며 살아왔소 당신들은 베트남인을 얕잡아 보지만 그것
은 베트남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베트남인의 정신 세계를 모르
는 탓이오 우리는 물질보다는 정신을 개인의 행복보다는 이웃의 불
행을 걱정하는 정신이 있소 지금 굶주린 베트남인이 몇 푼의 돈에
얼마간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 자존심을 버리고 천한 짐승처럼 전락한
것은 베트남인의 잘못이 아니오 그것은 프랑스라는 괴믈이 남긴 상
흔인 것이오 난 외국인을 좋아하지 않소 반 년 전 이 성도의 일리
에서 자행된 양민학살 사건에는 한국 군인도 참가했다고 들었소 이
전쟁은 외국군들이 참가할 전쟁이 아니오 물론 우리는 공산주의를
원치 않소 그러나 부패한 정부도 원치 않소 외국 군인들이 베트남
인을 멸시하고 공산주의자로 몰아 죽이는 것에 분노하오 우리 땅에
서 외국 군대가 철수하길 바라오
부드러운 인상에서 풍기는 날카로운 예지 카오 탕저는 사람을 흡
인하는 따뜻한 어조와 뇌장을 결빙시킬 듯한 냉철함을 가지고 있었
다
공산화되면 이 지역도 위험할텐데요
강철수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오 그러나 그들이 와서 우릴 죽인다 해도 이 전쟁
은 종식되어야 하오 전쟁의 와중에 외국군의 손에 죽는 것보다 동족
의 손에 죽는 것이 낫겠지요 그러나 잘못한 일이 없으면 죽이지 않
을 것이오 나쁜 일을 한 사람들은 마땅히 벌을 받겠지만
깡마른 카오 탕씨의 작은 눈에선 파란 광선이 일고 있었다
저는 후에를 사랑합니다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행복의 정의가 무엇이냐에 달렸지요 행복이란 채워질 수 없는 이
상한 그릇이오 아무리 무얼 넣어도 속은 공허하다오 우리가 느끼는
행복의 실체는 일시적인 망상일 뿐이오 행복한 순간이 지나가면 비
애가 그 자리를 대신 점유하는 거지요 본질적으로 인간의 존재는 행
복한 것이 아니오 신마저도 인간을 행복하게 못하오 인간이 왜 행
복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것에는 명료한 대답이 있소 태어난 것 자
체가 죽음의 시작이오 삶이란 무덤을 향하는 행보일 뿐이오 보람있
는 걸 남기지 못해도 추한 자취는 남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인
생이오 필연적으로 죽어야 할 인생이라면 사는 동안 죄업을 극소화
해야 하오 당신네 나라가 참전한 것은 잘못된 일이오 정부 지도자
의 오판이지요 그런 걸 악용하는 미국은 교활한 악당이고 인도차이
나 반도에서 군사적으로 승리한 외국 군대는 없소 궁극적으로 베트
남은 통일될 것이오 하나의 나라로 그리고 베트남은 다시 일어설
것이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난 베트남을 침략했던 나라들
을 경멸하오 프랑스 미국 그리고 당신네 나라마저도
우리 군대는 월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참전하고 있습니다
막대한 희생의 대가로 얻어지는 막대한 보상이 당신네 지도자에겐
탐났던 것이오 난 한국이 이 전쟁에 참전했다는 걸 알고 나름대로
연구해 보았소 한국의 역사와 현 정부의 구성 과정 그리고 당신네
정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 당신네도 우리와 흡사하게 불행한 국민
이란 것을 알았소 두 나라는 유사점이 많소 중국의 침략에 의한 속
화 열강에 의한 국토 분할과 동족상잔 국민 사이에 팽배한 불신
풍조 군사 쿠데타와 부패한 관리의 횡포 그러나 나는 두 나라의 장
래를 밝게 보고 있소 이념 투쟁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마련이오 인
간이란 본시부터 이념적 동물이 아니오 이념이란 소수의 인간이 만
들어낸 것이오 무슨 주의니 무슨 사상이니 떠드는 인간들 때문에 얼
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횡액을 당했는지 모르오
강대국에 의한 민족 분단은 세월이 가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요 다
만 중요한 것은 분단된 역사가 너무 긴 한국 같은 나라가 통일되기에
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오 그동안 깊어진 불신의 골과 쌓인 중
오의 더미가 너무 높소 이것이 통일의 장해 요인이 될 것이오 또
한 가지 이유는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의 이중적인 모호한 태도요
겉으로는 당신네 나라의 통일을 바라는 체 하지만 내심으로는 한반도
의 통일을 반대할 것이오 그들은 좋은 카드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을
거요
어느 나라든 같은 동족끼리는 싸우지 말아야지요
물론이오 그러나 인간의 내부엔 투쟁 본능이 있어요 중호 불
신 질투 욕망 허영심 공명심 등등 이런 것들이 결국은 투쟁을 초
래하고 서로 편을 가르고 싸우게 하는 거요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
요 대부분의 국민은 헐벗고 굶주리고 있소 미국이 이 전쟁에 쏟아
붓는 하루 전비면 우리 백성은 한 달이나 잘 먹을 수 있을 것이오
호전적인 북쪽과 남쪽의 군 수뇌부와 그리고 이념적 대립 때문에 일
어나는 이 전쟁은 베트남 국민의 불행이오 정부는 명분을 내세우지
만 명분 속에는 왕과 영웅의 허욕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오 독재자
는 중호의 대상을 창출해야 하는 법이오 그래야 국민들은 그들의 적
개심을 해소할 수 있는 거지요 주린 개에게는 물어뜯을 뼈다귀가 필
요한 것처럼 대학에서 인도차이나어를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라오스어도 베트남어만큼 할 수 있소
네 표준말이라면
당신의 베트남어는 상당한 수준인데 누가 가르쳐 주었소
레이 퉁 교수님입니다
아는 사람이오 하노이 대학 후배지
역사학을 전공하셨습니까
나는 프랑스어를 전공했소 밤이 늦었소 후에와의 교제는 허용하
오 그러나 결혼은 찬성할 수 없소 편히 쉬다 가길 바라오
말을 끝낸 카오 탕씨는 침소로 들어갔다 성장 곁에서 조용히 듣기
만 하던 툭 청년이 조용히 미소지었다
누나로부터 강 대위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의 아버님 말
오해마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들면 완고해지는 법이니까요
사이공 대학에 다닌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휴학 중입니다
왜 휴학했지
교수들이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그런 상황에서 학문이 무슨 필요
가 있겠어요 티우의 군사 정권은 이젠 방향 감각도 상실했어요 우
리 위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고 있고요
위원회라면 반정부 단체
반독재 단체죠 우리 위원회에는 교수 승려 성직자 대학생 그
리고 많은 민주인사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당수는 체포 구
금 상태이고 많은 수의 반정부 인사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되고 있습니
다 이들에 대한 탄압이 가중될수록 해방전선측으로 가담하는 사람들
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동료들 중에서 상당수가 해방전선의 전
사가 되었죠 그들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해방전선의 힘이라도 빌리자는 것이죠
해방전선의 힘을 빌려 독재정권을 타도한다는 생각은 위험한 생
각이오 해방전선이 추구하는 것은 사회주의 체제로의 통일이오 그
들은 지식인과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적대 세력이오 또한 반지성적
집단이구요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지식인과 종교인에 대한 탄압이 가
중될 것이오 지금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말이오 이런 일은 우
리 나라가 격것던 일이오 공산주의는 환상이 아니오 그것은 잔혹한
재앙인 것이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현재 베트남은 남쪽이 북쪽보다 더 부패
해 있고 소수의 재벌 때문에 다수의 빈민 계급이 고통을 당하고 있
습니다 국가의 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하고 있는 군사 정부의 고관들
과 정치 군인들 그리고 재벌 기업들의 이익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서 그들은 외국 군대까지 끌어들인 것입니다 지금 미국을 보십시오
연일 반전 데모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명분 었는 전쟁에 왜 개
입하느냐는 겁니다 우리 베트남인들은 공산주의보다도 독재 정부와
부패한 관료를 더 중호합니다 볼셰비키 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했던
이유도 부패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중호심 때문이었죠 사회주의를
이해해서라기 보다는 유산 계급에 대한 불만이 폭동으로 번진 것이지
요 우리 베트남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호감보다는
정부에 대한 반감 때문에 해방전선측으로 넘어가는 마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슈미엔 성도 처음에는 A급 지역이었지 만 지금은 아마
c 급 정도로 분류되고 잇쓸 겁니다 일 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죠 아
마 얼마 가지 않아서 이곳도 해방전선측에 동조하는 새력이 더 많아
질 겁니다
이곳에도 해방전선측 손길이 닿고 있습니까
이곳 뿐만 아니죠 해방전선측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고
있어요 원래 이 지역은 친정부 성향이 강한 곳인데 지난번 이웃 마
을에서 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난 뒤부터 변했죠 급진 진보 세력이 늘
어가고 있어요
당신은 그들과 연락이 됩니까
저와 저의 아버지는 중도파죠 이쪽도 저쪽도 아닌 그래서 더욱
위험하답니다 해방전선측에선 아버지를 기회주의자라고 매도하고 있
고 정부측에선 좌경분자로 낙인찍고 있답니다 그러니 좌우의 두 집
단으로부터 불신을 당하고 있는 판입니다 공산화가 되면 우린 무사
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 가문은 오래된 부르주아 계급이거든요 이
집도 수백 년간 물려 받은 집이죠
집이 좋군요
5대 선조가 지은 집이죠 사백 년 전쯤에 지어진 집 이랍니다
강철수는 툭의 시선을 따라 정원과 등신대의 입석들과 석등 석불
상 전각 등을 살펴나갔다 정원 여기저기에 자리한 입석들은 푸른
이끼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지의류로 무늬가 새겨진 석불상은 고요
한 눈길로 연못을 응시하고 있었다 강철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내가 소속된 부대가 트라이앵글 지대에서 벌이고 있는 공
작의 내막을 안다면 얼마나 나를 경멸할 것인가 베트남인들의 정신
세계는 우리보다 위다 우리는 덮어놓고 남을 깔아 뭉개는 습성이 있
다 이들이 따이한을 경멸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무지를 탓하
는 것이다 이 집에 자리한 우아미 이들 선조는 미적 감각이 상당했
던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강철수는 연못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격한 음성이 들려왔다 후에가 황급히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그
녀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왜 그래 누나
키 키엠 오빠가 왔어
후에가 벌벌 떨며 말했다 그 순간 한 사내가 강철수 앞에 바람같
이 나타났다 강철수가 미처 몸을 가눌 새도 없이 그의 목에는 칼끝
이 닿았다
미군측 스파이지 어느 부대 소속이야
끼 엠 오빠 이분은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후에가 사내의 소매에 매달렸다
가만있지 못해
광대뼈가 티어나온 불거진 얼굴과 핏발 선 눈에서 살기가 뿜어 나
왔다
말해 어느 부대 소속이야
사내는 강철수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다그첬다
말할 수 없소 스파이는 아니오 당신 누이동생과 결혼하려는 사
람일 뿐이오
거짓말 너희들은 베트남 여인을 능욕하고 속였어 너희들은 야만
인이야 여자 전사를 생포해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겠지
그때였다 벽력 같은 고함 소리가 들렸다 카오 탕 노인이 키엠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인의 눈같이 하얀 수염이 파르르 떨었다
키 엠 무슨 무례한 행동이냐 내가 초청한 손님이다 손님에게 예
절을 지켜야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너는 그런 것도 다 잊어먹
었느냐 손님에게 사과해라 키 엠
키엠은 맥풀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대검을 칼집에 넣으면서 말했다
용서하시오 아버님의 손님인 줄은 몰랐소 당신이 내집으로 들어
왔다는 말만 듣고 단숨에 달려온 길이오 하지만 당신이 다른 한국군
처럼 내 가족을 이용한다면 가만두지 않겠소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누를 끼치는 행동은 하지 않겠소
맹세할 수 있소
맹세할 수 있소
그럼 됐소 악수합시다 내 이름은 카오 키엠이라 하오
강철수는 베트콩 작전과는 관계없는 물자조달 업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후에 술과 안주를 내와야지
잠시 후 중국산 화주와 돼지 고기를 요리한 안주가 나왔다 몇 순
배 술이 돌자 키엠은 말이 많아졌다
나는 3년 전에 사이공 의과 대학을 졸업했소 프랑스로 가서 정형
외과를 공부하려던 결심을 바꾸게 만든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해방
전선측에 가담하고 말았소
키엠의 유학을 좌절시킨 53 항쟁
사이공 대학 부총장이던 구엔 창씨를 군인들이 연행하면서 일어난
5 3 항쟁 사건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불교계의 최고 실력자였
던 구엔 론 승녀가 분신하는 일까지 생기자 반정부 시위는 극에 달
했다 사이공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반체제 인사와 야당 정치
인 반정부 성향의 교수와 성직자 시위 주모자들이 속속 검거되었
다 이들은 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데 일부는 살해됐
고 더러는 장기수가 되었다 53 사태 시위에 참가했던 키 엠에게도
검거의 손길은 뻗어왔다
어느날 밤 여자 친구인 후안의 집에 숨어 있는데 소대 병력의 계
엄군이 집을 포위했다 그는 뒷문을 통해 탈출했다 그날 밤 계엄군
들에게 잡혀간 후안은 모진 고문을 받았다 며칠 뒤 후안은 능욕당한
시체로 인근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벌거벗은 시체의 음부는 대검으로
무참하게 난자당해 있었다
사이공 외곽 지대로 몸을 피한 키엠은 농부 차림으로 사이공에서
110여 킬로미터 떨어진 타이닌으로 갔다 그곳에서 키엠은 사이공 대
학 시절 그의 지도교수였고 해방 전선에 가담하고 있는 웅 곡 티엔
박사를 만났다
후안이 총살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티엔 교수에게 해방전선 전
사가 되겠다고 자청했소 며칠 후 캄보디아 국경 지대에 위치한 해방
전선 훈련 캠프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소 우린 모든 걸 자급 자족해
야 했소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모든 걸 식량으로 이용할 수 있
어야 하오 식물의 잊과 줄기 그리고 뿌리는 독만 없으면 생식해야
했고
베트콩 전사들은 모든 종류의 곤충을 영양원으로 삼아야 했다 심
지어는 모기까지도 불에 구워 먹었다 바퀴벌레 지 네 나방은 고급
식품에 속했다 들쥐나 뱀은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최고급 단백질원이
었다 B52기의 융단 폭격과 독뱀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말라리아였다 말라리아는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목
숨을 앗아갔다 더위와 습지와 웅덩이 투성이인 정글 지대에선 계절
을 가리지 않고 말라리아가 극성이었다 해방전선 전사들 중엔 B522
기의 폭격 충격으로 고막이 파열되어 귀 머거리가 되어버린 사람이 많
았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별로 장애가 되지 못했다 베트콩 전사들
은 수화에 능했다
나는 이야기의 상대자가 없소 해방전선측 전사 중엔 나처럼
대학을 다닌 친구가 있긴 하지만 만나기가 어렵소 그래서 하루 아
니 몇 주일간 대화를 잊어버리고 지내기 일쑤요 나처럼 사람들과 사
귀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고문같은 일이오 당신은 B52기의 공포를
모를거요 3킬로 밖에서 작열하는 폭음에도 고막이 터지는 거요 고
공에서 낙하하는 그 무서운 폭탄은 갑자기 대지를 연옥의 불구덩이로
만들고 말지요 포탄이 터지게 되면 반경 미터 이내에 있는 사람
은 내장이 터지고 고막이 터지고 어떤이는 눈알이 튀어나오고 대개
의 경우 걸레처럼 찢기우고 말죠 호 속에 들어가면 안전할까 하는
생각도 바보스런 발상이오 호 속에 숨었던 1개 소대 전체가 생매장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오 포탄이 터진 자리엔 직경 5미터의 깊
은 웅덩이가 패이고 비라도 오면 작은 연못으로 변하는 거요 가끔
늪으로 변한 곳을 전사가 지나가다가 실종되는 일도 있었소 bE52기
해방전선 전투원들이 강철 까마귀라고 부르는 이 비행기는 저주와 공
포의 대상이오
말을 하던 키엠이 갑자기 입을 다믈었다 그리곤 강철수를 응시했
다 적측 장교인 강철수에게 너무 많은 애기를 하지 않았나 하는 불
안한 기색이었다
걱정 마시오 나는 당신 이야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 것이오
우리 후에와는 어떤 사이요
결혼하고 싶소
후에도 동의했소
그렇소
제 아버님에게도 말씀드렸소
반대하시더군요
물론 그럴거요 우리 아버지는 가문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합니다
잘 쉬다 가시오 나를 만나지 않은 것으로 하는 게 피차간에 좋을 것
이오 전투지에서 만나는 일이 없도록 신께 빕시다
키엠이 떠나자 특 청년도 인사말을 남기면서 자리를 떴다
키엠 오빠 좋은 분이세요 전쟁만 아니라면 오빠도 결혼하고 자
신의 꿈을 펼쳐나갔을 거예요 아마 지금쯤은 의사가 되었겠죠 이곳
베트남 젊은이들의 장래는 암담해요 누구든 양심과 정의감이 있다면
그들은 탄압을 받고 희생된답니다
베트남 동양의 진주라고 불리던 천혜의 낙원
전쟁만 아니라면 이처럼 매혹적인 나라도 드물 것이다 전쟁은 이
아름다운 나라를 절망과 죽음의 도가니로 만들고 말았다 패권주의에
희생되어온 작은 나라 전통적으로 마음이 유약하고 농경 민족 특유
의 여유를 즐기며 살아온 베트남인들은 프랑스의 침략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감당하기 힘든 내전에 휩싸인 셈이다 부패한 관료들과 소
수 재벌들의 이익을 위한 이 저주받은 전쟁 열강들의 이해로 난타당
하고 있는 이 은총의 대지
당신 오빠가 걱정이오 저러다 체포되면
아버지가 말려도 안돼요 툭까지 형의 뒤를 따를 눈치예요
달이 떠 있었다 달이 형극의 대지를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다 바
람이 불 때마다 아오자이 자락에 매달린 달빛이 한 움큼씩 떨어졌다
우리 나라에도 평화가 올까요
후에의 질문을 생각하며 강철수는 생각했다
약소국가의 평화란 환상일까 해방전선 전사들의 강인한 투쟁 정신
은 어디에 근거하는 걸까 상상하기 힘든 어려운 조건하에서 미국 및
여러 강대국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작은 악마들 매월 지급되는 2
달러의 돈으로 그 수백 배의 전투 수당을 타는 외국 군대와 싸우는
그들의 옹골찬 표정에 굴종의 그림자는 없었다
이들 조직에도 불합리는 있었다 베트콩 지휘부는 계속된 B52기의
고공 폭격에도 살아 남았다 소련 감시 체제의 도움 때문이다 오키
나와나 괌에서 출발한 B52기가 남지나 해상을 지날 때면 트롤선으로
가장한 소련 첩보선에 의해 폭격기의 항진 방향과 항진 속도를 측정
하여 폭격 목표지점을 알아냈다 이 정보는 즉각 북베트남 노동당 남
부위원회 본부에 타전되었다 남부위원회 본부는 폭격 예정 지역에서
작전중인 해방전선의 지휘부와 북부요원들에게 공격예측 지역을 알려
주었다 정보가 하부 조직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폭격에
의한 사상자는 주로 하부 조직의 전투원들 뿐이었다
강철수는 후에를 응시하며 말했다
평화는 올거요 시간이 걸리고 많은 고통이 따른 후겠지만
한국은 어떤 나라죠
베트남과 비슷하오 어느 모로 보면 베트남보다 더 살벌한 나라인
지도 모르지 자원도 베트남보다 빈약하고 이곳은 지상낙원이라 할
수 있소 정치하는 사람들만 청렴하다면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오
빨리 한국으로 가고 싶어요
서류만 되면 떠납시다
전황이 악화되는 모양이에요 요즘 수술 환자가 많아지고 있어요
응급 환자만 받고 나머지는 클라크 기지로 후송하고 있지만 그나마
수송기 사정이 나쁘면 밤을 새워야 할 때가 많아요
후회하지 않을까 파리행을 포기한 것
물론 언젠가는 하겠죠 그러나 지금은 아네요
당신이 자랑스럽고 또한 사랑스럽소 당신네 가족 모두 좋은 사랑
들이오 아버님도 훌융하신 분이고
완고하시죠
당신네 카오 가문의 특징이겠지
맞아요
아버지도 항불 전쟁에 참가했었소
믈론이죠 그래서 지금의 군사 정부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어요
지금 권좌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지요 프랑
스가 물러가자 남베트남의 정권을 장악한 고딘디엠은 항블전쟁에 가
담했던 민족주의 인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죠 그 바람에 본의 아니
게 해방전선측으로 전향해버린 사람들이 상당수 있어요 그들은 공산
주의자라기 보다는 민족주의자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정부
활동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북 베트남의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지요
강철수는 신형철의 할아버지 신 별감을 생각했다
여주벌을 지나려면 신 별감 땅을 피해갈 수가 없다고 사람들은 말
했다 신형철의 백부인 신현우가 독립운동을 시작하자 신 별감은 아
들에게 전답의 일부를 독립 자금으로 내주었다 신 별감은 해방되기
삼 년 전 김달구라는 일제 고등계 형사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사망했고 대부분의 재산도 김달구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해방이 된
후 중국에서 귀국한 신현우는 경찰이 된 김달구에 의해 공산주의자라
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신현우는 좌익이라는 굴레를 벗지 못하
고 처형되고 말았다 독립운동가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처형했던 김
달구는 경찰국장과 국회의원을 지내다 얼마 전에 암으로 죽었다는 소
식을 들었다
내일 어떻게 되돌아가죠
응 모리스란 미군이 헬기를 몰고 오기로 했소
언제 오기로 했죠
내일 정오
그렇게 빨리 가야 해요
강철수는 대답 대신 후에를 안았다 장미 향기가 가슴에 강렬한 반
향을 일으키며 파고 들었다 강철수는 후에의 머리 뒤로 보이는 노란
호박같은 달을 보면서 아오자이를 입은 후에의 가는 허리를 서서히
땅으로 눕혀갔다 그의 귀에는 후에의 가쁜 숨소리만이 들렸고 귀뚜
라미 우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모리스는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헬기를 이륙한 지 십분만
에 월맹군의 화망에 걸려 헬기는 산산조각이 났고 모리스는 실종되
고 말았다는 소식을 신형철이 전화로 알려 주었다 강철수는 이 좇
같은 전쟁터를 떠나 앨리스를 안아주고 싶다던 엘비스 프레슬리를
판에 박은 듯한 모리스의 천진한 미소를 떠올리며 창자의 어느 부분
이 잘려 나간 듯한 아픔을 느꼈다
교통편을 알아 볼테니 후에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황석호 대령
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다 아침에 황석호 대령이 네놈이 슈이엔 성
에 있다는 소릴 듣고는 얼굴이 시 뻘개지 더라 때가 어느 땐데 월남
계집과 노닥거리느냐고 말야 아무래도 황 대령의 눈치가 심상치 않
다구
신형철은 이런 말을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형철에게서 두 번째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다음 날 꼭두 새벽녘이었다 숨이 넘어갈 듯한
다급한 신형철의 목소리가 고막을 마구 두들겼다
얌마 빨리 그곳을 피해야 되겠어 그곳이 작전 지역이 되었다구
D급 지역으로 말야 곧 공습이 시작될거야 황 대령과 이세준 대령
그리고 최오남 대령과 티엔 대령이 오랜지 부대의 스튜어트 소장의
지휘로 작전에 참가하게 됐어 후에네 가족이 모두 위험하다고 빨리
피신시키든지 아니면 네놈만이라도 즉각 작전 지역을 이탈해 서둘
러
강철수가 후에의 아버지가 사는 본채로 뛰어갈 때쯤 벌써 하늘에서
는 조명탄이 투하되기 시작했다 귀청을 찢는 톰켓의 요란한 폭음과
함께 건쉽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여기저기서 포탄이 작열하기 시작
했다 하늘과 땅을 찢어발기듯한 폭음 땅거죽이 팥죽 끓듯 뒤집히고
암석더미가 모래처럼 공중으로 흩날리며 사방이 불기둥으로 치솟았
다 아비규환이었다 여기저기서 옷에 불이 붙은 채 도망치는 사람들
을 향해 발사되는 기총의 둔중한 연발음 사람들은 제초기로 베어지
는 풀단처럼 쓰러졌고 네이팜탄의 작열로 고막이 터지는 사람 내장
이 파열되는 사람 부지기수였다
그런 와중에 폭격과 기총 소사가 뜸한 순간 헬기가 착륙했다 강철
수는 공정부대원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황석호 대령과 이세준 대령 그리고 티엔 대령 등이 우루루 강철수
에게 다가왔다 황석호 대령이 다짜고짜로 강철수의 따귀를 힘껏 올
려 붙였다
이 빨갱이 자식
다시 군화발이 정강이를 걷어찼다 땅에 쓰러진 그를 이번엔 이세
준 대령이 짓이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누가 머리를 걷어 찼는
지 불덩이 같은 것이 덮쳐왔다 강철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정신이 들었을 땐 등뒤로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후에의
아버지 탕 노인과 그리고 후에의 남동생 툭이 후에와 함께 뒷결박을
당한 채 땅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그때 티엔 대령이 탕 노인의 옆구리를 군화발로 힘껏 걷어차며 고
함을 내질렀다
키엠 어딨어 영감 키엠 어딨냐구
모른다 설사 알고 있어도 네놈에게 말을 할 것 같으냐
모로 쓰러진 탕 노인은 흡뜬 눈으로 티엔 대령을 노려보았다
이 더러운 빨갱이 영감이
티엔은 탕 노인의 머리를 군화발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툭과 후에
가 티엔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곁에 있던 월남군 대위가 툭
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갈겨 실신시킨 뒤 후에를 결박했다 티엔은
탕 노인의 두개골이 박살이 나서 뇌장이 흘러나올 때까지 잔혹한 발
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뒤 티엔은 탕 노인의 가슴을 겨냥하고
권총을 발사했다 탕 노인은 풀썩 마당에 코를 박았다 뒤이어 툭 청
년도 사살되었다 그 광경을 보고 후에가 악을 쓰며 달려 들었다 이
세준이 후에를 끌고 안채로 들어갔다 잠시 뒤 후에의 자지러질 듯한
비명 소리가 한동안 들렸고 한참 후 한 발의 권총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해졌다 이세준이 허리띠를 고쳐 매면서 안채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황석호가 티엔에게 눈짓했다 티엔은 월남군 정보부대 소속
군인들에게 명령했다
시체들 모두 소각해버려 빨리 서둘러
그런 광경을 황석호와 이세준과 최오남은 냉혹한 표정으로 응시했
다 눈을 부릅뜬 채 이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있던 강철수는 미친
듯이 외치기 시작했다 황석호 이세준 최오남 너희들 내가 반
드시 복수할 것이다
강철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의 뒤통수를 누가 개머리판으로
찍었기 때문이었다
해방전선측과 언제부터 접촉을 시작했어
그런 일 없습니다
강철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이 너무 많이 부어 있었다
부대로 끌려온 강철수는 이 주일 동안을 황석호와 이세준으로부터
교대로 심문을 받게 되었다 심문은 늘 그렇듯 잔혹한 구타로 시작되
었다
황석호가 다시 물었다
키엠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지
별다른 이야기 없었습니다
강철수는 힘없이 내뱉었다
다 알고 있어 해방전선에 대하여 말했잖아
그렇긴 해도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강철수는 고개를 떨구어야 했다
이 새끼 정신 덜 차렸군
이번엔 이세준이 탁자 위에 있던 스위치를 돌렸다 머리가 파열되
는 것 같았다 강철수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바짓
가랑이가 흠뻑 젖어 있었다
어떻게 거길 갔나 누구의 차로 갓어
모리스란 사람이 헬기를 태워 주었습니다
나쁜 자식 상관의 뒷조사나 하는 주제에 빨갱이와 선을 대
황석호의 주먹이 인중을 짓이겼다 앞니가 빼어저 나왔다
모리스란 사람과는 언제부터 알았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녀석에게 무얼 주었나
아무 것도 안 주었습니다
녀석 안되겠는데 독종이야 야 이자식 손좀 더 봐줘라
하사 두 명이 강철수의 발목을 묶었다 그리고 나서 거꾸로 매달았
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렸다 주먹질과 발길질은 의식을 잃을 때
까지 멈추지 않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병원이었다 늑골 세 개가 부러졌고 골반뼈와
대퇴골에 금이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철수는 병원에서 6주를
보낸 후 다시 수사대로 넘겨졌다 고문의 강도는 점점 더해졌다
신형철이 몰래 찾아온 것은 어느날 한밤중이었다 그는 간수 몰래
수류탄 하나와 면도날을 건네주었다
내일 플레이쿠로 이감된다 아마 가다가 사살 당할지도 몰라 기
회를 봐서 탈출해 탈출에 성공한다면 방콕으로 가서 임폐리얼 호텔
총지배인을 찾아 그 사람이 알아서 다 해줄거야 나도 이 전쟁이 끝
나기 전에 그곳으로 갈거야 요령껏 잘해
신형철이가 다녀간 후 강철수는 미리 숨겨둔 포크로 왼쪽 겨드랑이
에 상처를 내었다 그리고는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김 하사가
달려와서는 선혈이 낭자한 그의 상처를 보고 믈었다
이 새끼 왜 이래
넘어지는 바람에 다쳤습니다
김 하사는 날카로운 어조로 위생병을 불렀다 위생병은 부대 병원
으로 강철수를 데리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병원 막사에는 군의관 최 대위가 야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정 병
장에게 강철수의 가슴에 두꺼운 붕대를 여러 겹 둘러주라고 했다 그
동안 정 병장은 강철수가 기절하거나 다치거나 할 때마다 정성껏 치
료를 해주었다 이따금 정 병장은 미군 의무대에서 빼돌린 고가의 영
양제를 놓아주면서 이런 말도 귀에 넣어 주었다
강 대위님기회만 있으면 꼭 탈출하세요황 대령과 이세준
대령이 강 대위님 문제로 골머리를 찮는가 봐요 그 사람들이 쑥덕이
는 걸 귓전으로 들었는데 강 대위님을 해치려는가 봐요
어때요
군의관이 안됐다는 표정을 하며 다가왔다 강철수에게 경어를 쓰는
곳은 이곳 병원뿐이었다 수사대 사무실에서는 명색이 대위인 그에게
하사관이건 졸병이건 가리지 않고 이 새끼 저 새끼였다
좀 다첬쓸 뿐이요.
최 대위는 상처를 보면서 뭔가 짐작한 듯
소독하고 안티바이오틱스 인젝션하고 오인트멘트 바르고 밴데징
알았지
하고 지시했다
조심해요 너무 대들지 말구 어쨌든 귀국해야 할 것 아뇨 나도
2주 후면 귀국해요 이곳은 정말이지 역겹습니다 어디 무의촌 의사
가 되어 낚시질이나 하며 지내고 싶어요
K대 의대를 졸업하고 입대한 최 대위는 인정이 많았다 그나마 강
철수가 모진 심문을 견뎌내는 것도 최 대위의 배려와 정 병장의 보살
핌 때문인지 몰랐다 최 대위는 좀 심하게 당했다 싶을 때마다 이삼
일씩 입원을 시킨 후 미군 병원에서 빼돌린 여러 가지 치료제를 사
용하여 상처들이 덧나거나 뼈나 관절에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최 대위가 나가자 미스 리가 강철수에게 다가왔다
안즈세요
아니 견딜만 해
대위님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타이닌 병원에 후에란 의사와 친했다면서요
다낭 병원에서 일하는 내 친구가 알려 주었어요
참 전쟁이란 너무 참혹해요 그 분은 해방전선측과는 전혀 관계
가 없다고 들었는데
괜한 것 물어서 죄송해요 자 이젠 됐어요
병원에서 돌아온 강철수는 신형철로부터 받은 수류탄을 붕대 속에
숨겼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 면도날도 숨겨두었다 플레이쿠로 후
송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계략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먹구름이 낮게 하늘을 덮고 있었고 빗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강철수는 포승줄에 뒷결박을 당한 채 GMC에 올라탔다 강철수의
맞은 편 자리엔 호송병인 김 하사와 최 상병이 타고 있었다 두 녀석
다 황석호의 심복으로서 허구헌 날 강철수에게 린치를 가했던 자들이
었다 신형철은 운전병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방전선측이 출몰하는 지역에 도달했을 때는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이미 포승은 면도날로 잘려진 상태였다 강철수는 갑자기 배가 아프
다고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 자식아 좀 참아 곧 도착할거 아냐
못 참겠어 아 아 배야
그때 신형철이 뒤를 돌아보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왜그래
신 대위님 이 자식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나요
김 하사가 말했다
차를 세워
신형철의 명령에 차가 멈추었다 강철수는 갑자기 수류탄의 안전핀
을 뽑았다
손들고 꼼짝 마 말 안들으면 터뜨려 버려 운전병과 신 대위도
이리와
김 하사가 신 대위를 흘끗 보았다 신형철은
시키는 대로 해 놈은 특전대 소속이야 무슨 짓인들 할거야
라며 손을 들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총들 모두 이리 걷어와 빨리
김 하사는 빠른 동작으로 총을 걷어왔다
수갑들 모두 꺼내
그들은 수갑을 꺼내 강철수 앞에 던져 주었다
손을 뒤로 채워
강철수는 김 하사에게 말했다 김 하사는 모두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넌 차를 몰아
강철수는 권총을 겨누면서 운전석 뒷자리에 올라탔다
차는 플레이쿠를 향했다 검문소 못 미쳐 마을 입구에서 차를 내린
강철수는 숲속으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강철수는 정글로 접어 들었다
7월 하순이라 이곳 중부 베트남은 우기가 한창이었다 폭우는 때를
가리지 않고 퍼부었다 산길에는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탕이 나타나는
가 하면 개미 새끼도 빠져 나가기 힘든 덤불이 앞을 가로막기도 했
다 강철수는 등에 메고 있던 M6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정글도의
무게만 해도 힘에 겨웠다 트라이앵글 지역을 벗어나니 한번도 사람
이 다닌 적이 없는 전인 미답의 원시 정글의 연속이었다
강철수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국경선을 따라 태국으로 가는 도중
에 해방전선에 잡히는 경우와 또 월남군이나 미군 혹은 한국군에 생
조되는 경우 모두 위험했다 해방전선측에 잡히면 민간인 복장의 그
는 전쟁포로가 아니라 간첩으로 취급될 것이고 또 아군측에 잡혀도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강철수는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안남산맥을 횡단하려 했다 일주일
후 안남산맥의 능선에 도착한 강철수는 북동 방향으로 진로를 잡고
능선을 비스듬히 비껴 하산하기 시작했다 온몸은 성한 구석이 없었
다 김 하사에게 뺏어 신은 군화는 너무 작아서 걸을 때마다 발가락
이 아팠다 갈증은 공복의 고통보다 몇 갑절 심했다 높은 온도와 습
도 달걀이라도 삶을 듯한 정글은 말 그대로 불타는 연옥이었다 비
가 그치면 바람 한점 없기 때문에 오히려 폭우는 반가웠다 폭우가
오는 동안은 손바닥으로 빗물이라도 받아 마실 수가 있었다 간혹 믈
웅덩이가 나타났지만 그런 물은 독이 들어 있기 십상이었다 점점
체력이 떨어짐을 느꼈다 그가 나무 등걸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참쿠
와프 한 마리를 발견했을 땐 너무나 반가워 손을 뻗어 와락 잡고 싶
었다 참쿠와프 참쿠와프 제발 내손에 잡혀다오 그는 독사를 벌
건 눈초리로 응시하며 정글도로 잽싸게 내리쳤다 강철수는 껍질만
벗기고 그것을 씹어 삼켰다
정글을 걸는 동안 쉴 새없이 왕모기들이 덤벼들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곳곳에 있는 늪이었다 물소마저도 통째로 삼켜버리는 악마의
구덩이 늪은 때로는 꽃밭으로도 보이고 때로는 발목만 적실 정도의
얕은 웅덩이로 보이곤 했다
그러나 이런 육체적인 고생은 그가 받고 있는 정신적 고통에 비하
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감정 중에서 중호의 감정처럼 격렬하게
영혼을 마모시키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마음프지옥을 만들고 인간
의 본성을 병들게 하는 것이다 중호가 더욱 치열해지면 그것은 신
경 정신과적 중상으로 발전된다고 했던가 그는 걸으면서도 덩쿨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이세준 일당을 잊을 수 없었다
안남산맥의 정글을 그렇게 정신없이 헤매는 동안 그는 방향 감각을
상실해 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그는 유령처럼 밀
림을 방황하고 있었다 지니고 있던 나침반마저 잃어버린 강철수는
낮이면 나이테로 밤이면 별자리로 방향을 정했다 동북쪽으로 방향
을 정한 강철수는 호치민 통로를 피해서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국경
을 끼고 타일랜드쪽으로 향하려 했다
고통스러워도 그는 자살할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포로가 되지 않
고 태국으로만 갈 수 있다면 그는 가장 잔혹한 복수를 이세준 일당
에게 할 것이다 그는 이런 결심을 만들며 이를 갈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허적대며 걷던 어느날 그는 발바닥에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
다 지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왼쪽 군화의 밑을 보았다 나뭇잎이
덮여 있었다 군화발 밑에는 분명히 둥근 뇌간의 머리가 감지되었다
누가 설치한 것일까 베트콩 아니면 미군이 설치한 대인 지뢰 그
는 지뢰의 폭발음과 그 엄청난 작열음을 생각했다 미군이 설치한 최
신형 지뢰라면 반경 50 미터의 모든 나무와 모든 흙더미와 풀덤불
이 공중으로 흩어질 것이며 자신은 소입자로 분해될 것이다
그는 허리춤에서 대검을 꺼냈다 그리곤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찔
러보았다 금속음이 들렸다 마음이 놓였다 플라스틱이라면 제거하
기가 불가능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군화 주위를 파냈다 원통형의 중
국제 대인 지뢰가 나타났다 그는 뇌관에 연결된 전선을 잘랐다 그
리고는 잠시 풀밭에 누워서 울창한 나뭇가지와 담녹색 잎 사이로 보
이는 짙푸른 창공을 올려다 보았다
이 전쟁은 희극이다 한국과는 원한이 없는 나라와의 전쟁 어디
서 명분을 찾을 것인가 황석호 일당은 슈이엔 마을을 초토화시켰
고 수백 년 이어 온 카오 탕의 집을 불태웠으며 가족을 몰살시켰다
음모 때문에 희생된 억울한 죽음 전쟁의 얼굴은 무엇인가 피에 주
린 그 얼굴을 보고 싶다 후에
강철수는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후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럴때마다 마음 속에서는 불길이 일었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티엔의 권총에서 피어오르던 총연 그리고 그 더러운 짐승 앞에
풀썩 고개를 떨구며 고꾸라지던 탕 노인 또 그뿐인가 후에는 이세
준에게 끌려 가기 전에 나를 보았다 슬픔과 절망이 담긴 얼굴 같은
까만 눈동자를 잊지 말자 그 커다란 눈동자에 영글던 원한의 눈물을
잊지 말자 그리고 그 해맑은 뺨을 타고 흐르던 슬픔을 잊지 말자
아 후에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피가 하얀 아오자이를 붉게 물들이던
광경도 결코 잊지 말자 네놈들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다오 제발
내가 너희들 곁에만 갈 수 있다면 너희들은 나의 중호를 처절하게
맛보게 될 것이다 후에 가족에게 혐의가 있었다면 수용소로 데리고
가서 정당하게 조사를 해야 했다 황석호 일당의 티엔과의 추잡한 거
래 그리고 골든 트라이앵글 지대의 엄청난 이해 관계가 후에의 단란
한 가족을 도륙했고 내 인생을 파멸시킨 것이 아닌가 나에겐 인생
이란 것이 없다 오직 복수 복수만 있는 것이다 트라이앵글의 저주
만이 있을 뿐이다 황석호 이세준 최오남 그리고 그 졸개들까지
나는 용서하지 않으리라 네놈들을 응징하기 위해서는 네놈들이 나에
게 가르쳐준 대로 모든 교활하고 사악하고 음험하고 잔혹한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틈으로도 잠입하고 무슨 무기로든 사람
을 살해할 수 있는 그런 기술을 남김 없이 보여 줄 것이다
강철수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티엔과 황석호 일당이 탕 노인과
그 가족을 몰살한것은 양민학살 사건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있었고
탕 노인이 감지하고 있던 골든 트라이앵글 지대의 추악한 밀거래를
폭로할까봐 파리로 가기 전 전격적으로 제거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강철수는 누운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였다 바람 결에 풀잎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한국말이다
강철수는 소리없이 덤불로 뛰어들어 높이 솟은 나무 위로 올라가 무
성한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다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낮익은 목소리
가 들려왔다 꿈에도 못잊는 목소리 황석호의 목소리였다 그는 베
트남인을 앞세우고 풀덤불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살피며 강철수가 누
워있던 나무 그늘로 다가왔다 강철수는 나무 등걸에 도마뱀처럼 납
작하게 배를 깔았다
어디서 봤냐고 믈어봐
황석호가 베트남어를 하는 조명우 대위에게 명령했다
그 사람 어디서 보았지
주 여기 여기 누워 있었어요
베트남인이 강철수가 누워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임마 없잖아 이 새끼 콩 첩자 아냐
콩 첩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작전에도 우리에게 정보를
주었잖습니까
조 대위는 너무 순진해서 탈이야 작은 정보는 주고 큰 걸 캐내야지
알았어 한눈 팔지만 말라구 난 그런 인간 딱 질색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대 령님
야 근데 그 자식 지독한 놈이지 벌써 한달 반 동안 버티고 있잖
어
강철수 유명한 놈 아닙니까 오키나와에서도 특전 교관들이 혀를
내둘렀다니깐요 특히 칼 던지기와 마이크로 폭탄 제조기술은 따라갈
사람 없었지 않습니까
그뿐이야 녀석 사격술에다 태권도 솜씨도 끝내주는 놈 아냐
아까 이 월남 녀석이 보았다는 것이 정말 강철수였을까
뺨에 칼자국이 있고 눈썹이 시퍼렇고 키가 6척 정도에 미남형이
라면 강철수와 비슷한데요
보이면 사살하라구 잘못하면 우리가 다쳐 생포해도 골치 아파지지
그때 병사들이 우루루 나무 밑으로 몰려 들었다
대장님 아무것도 안보이는데요
이 새끼 거짓 말 했지 이 빨갱이 새끼
황석호는 권총을 꺼내들고는 월남인의 머리를 겨냥했다 월남인은
당장 얼굴이 잿빛으로 죽어가면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울부짖기 시
작했다 황석호는 방아쇠를 당겼다 월남인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황석호는 권총구에서 피어오르는 총연을 흑 불고는 가죽으로 된 케이
스 속에 권총을 찔러 넣으면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한바탕 갈겨버려
병사들은 둥글게 원을 짓더니 나무 위와 풀덤불을 가리지 않고 사
격했다 강철수가 숨어 있던 나믓가지들이 땅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만약 그들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어도 잔가지가 거의 떨어져 나간
나무 등걸에 숨어 있는 강철수를 발견했을 것이다 한바탕 미친듯이
사격을 가한 뒤 그들은 오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버렸다 나무에서 내
려온 강철수는 비명에 살해된 월남인을 묻어주었다
강철수는 길을 잃어 버렸다 정글 지대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죽
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거미줄같이 난 샛길들은 관목과 풀 때문에
자칫하면 사라지기 일쑤였다
길을 잃고 정글을 헤매던 어느날 그는 장딴지에 가시가 박히는 듯
한 느낌이 들어 발밑을 보니 자신의 왼쪽 군화가 커다란 참쿠와프를
밟고 있었고 참쿠와프가 그의 장딴지께에 머리를 내젖고 있었다 물
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그는 대검으로 참쿠와프의 머리
를 잘라버린 후 내의를 찢어 무릎 아래를 묶고는 나뭇가지로 지혈대
를 만들어 힘껏 조였다 그리고 나서는 바짓가랑이를 찢어저 믈린 자
리를 보았다 네 개의 구멍에 노란 액즙이 묻어 있었다 그는 믈린
자리를 대검 끝으로 우믈 정자 모양 깊게 절개해서 독올 빨아내기 시
작했다 벌써 뱀독이 퍼지고 있었다 장딴지는 놀라운 속도로 부어오
르기 시작했다 그는 미친 듯이 독을 빨아냈다 정맥이 터졌는지 엄
청난 양의 혈액이 입안에 괴었고 그럴 때마다 한입 가득한 혈액을
뱉어냈다 그는 의식을 잃을 때까지 그런 동작을 반복했다 그는 온
몸이 마비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며 깊은 나락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가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땐 모든 것이 황색이었고 물체가 여러
겹으로 보였다 견딜 수 없는 두통과 갈증 그리고 무기력을 그는 느
꼈다 의식을 잃고 며칠 그렇게 누워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고약
한 냄새가 나서 옆을 보니 반쯤 썩어 있는 뱀의 시체에 개미가 새까
맣게 끼어 있었다 일어설 수가 없었다 한동안 누워서 가쁜 숨을 내
뱉던 그는 낮은 지대로 기 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거의 하루 종일 정글을 기었다 저녁이 될 무렵에야 계곡을 발견했
다 이미 우기는 끝난 지 오래되어 며칠 동안 물 한방울 구경못한 상
태였다 계곡물로 목을 축인 후 피로해진 그는 그늘을 찾아들었다
눈꺼풀이 납덩이 같이 무거웠고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얼마를
잤는지 몰랐다 그는 떠드는 사람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
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철수는 자기를 겨누고 있는 여러 개의 총구를
보았다
강철수가 하노이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끌려간 것은 971년 2월
건기가 한창일 때였다 강철수는 근 4개월을 안남산맥 줄기의 미로
같은 정글을 정처없이 헤맨 셈이다 나침반과 지도가 없는 산행은 처
음부터 무모한 짓이었다 헛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잡힌 꼴이었다
수용소에 수감된 포로들 중에는 그린베레 소속의 몇몇 아는 얼굴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심한 공포가 있었고 강철수를 보고
도 외면해 버렸다 무옹족과 라오스 황실군 소속 병사도 몇 보였다
그는 다른 전쟁포로들 하고는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스파이 혐의로
심문을 받고 있는 그는 철저히 격리되어 있었다
어느날 그는 해방전선측 대미 첩보원이었던 구엔 반이란 사람의 심
문을 받게 되었다 하노이 대학에서 국제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그는
깡마르고 칼끝같이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나이였다
이름은
강철수
소속은
말할 수 없소
말해
말할 수 없소
소용 없는 일이야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소
그는 입을 벌려 싸악 웃었다 그리곤 손가락을 탁 꺽었다
뒷문이 열렸다 몇 명의 병사가 우루루 들이 닥첬다.
?그들은 강철수를
뒷결박 짓더니 개집같이 작은 나무상자에 가두었다 그는 그 상자 속
에서 한낮의 찌는 듯한 열기와 후덥지근한 습기 속에서 열사병에 걸
려 의식을 잃을 때까지 이틀 밤낮을 웅크린 상태로 보내야 했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어느 병원에서였다 구엔이 그를 내려다보
고 있었다 그는 강철수를 보더니 다시 싸악 웃었다
정신이 들었군 당신 헛고생했어 당신이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당신의 정체를 알아냈으니까 미군 중앙정보국에 파견된 한국군 대
위 민족해방전선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특수전 요원 당신은 우리 베
트남 인민들의 최대 적이야 당신들은 같은 아시아인인 우리 베트남
인들을 수없이 살육하고 우리 베트남 여인을 강간하고 우리 베트남
의 존경받는 사람들을 구타했어 우리 베트남 인민이 어째서 당신들
의 적이란 말인가 우리들 중 누가 당신네를 못살게 했고 괴롭혔나
우리 베트남인들은 한국인들에게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어 그
런데 당신네들은 우리 해방전선 전사들과 인민들을 죽였다
그는 강철수의 눈동자를 찌를 듯 내려다 보면서 침착하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이런 이야기 소용 없는 건 알지 당신들은 철저히 부패된 인
간이야 자본주의의 쓰레기지 전쟁은 미국의 완전한 패배로 끝나고
있지 베트남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이긴 민족은 없어 당신네는 쓸
데업는 전쟁에 개 입했어 당신은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겠지 당신처
럼 명령에 의해서 파견된 사람이라면 그러나 당신의 모든 행위에는
적극적 의지가 있었어 당신은 우리 인민해방전선에 자금 공급원이었
고 내 동생 꾸엔의 남편인 한만수를 살해했어 그게 사실이라면 당
신은 우리 인민의 영웅을 죽인 반역자야 당신은 응분의 대가를 치르
게 될거야
나는 전쟁포로일 뿐이오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죽이려거든 되도록 빠른 게 좋소 더 이상 나를 심
문할 생각은 마시오
당신은 전쟁 포로가 아니야 당신은 체포 당시 민간인 복장이었
어 당신은 스파이로 체포된 거야 스파이는 어떻게 된다는 것 알고
있겠지 우리는 당신을 처형하지 않을거야 당신네는 사람을 함부로
죽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죽이지 않아 당신의 썩어빠진 정신을 세척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지 당신은 당신 자신이 얼마나 사악하고
비열한 인간이었는지 알게 될거야
당신의 생각은 무리요 죽고 사는 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오 나는
두려운 것이 없소 고문하려거든 마음껏 고문하시오 세뇌하려거든
마음껏 세뇌하시오 그러나 당신들의 의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
이오
우린 당신을 이용할 의도가 없어 이미 미군은 철수를 시작했어
우리 베트남 기계화 사단은 사이공을 압박하고 있어 베트남의 통일
은 이제 시간 문제야
날 어쩔 셈이오
우선 우리가 당신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들어 보지 당신은 우리
들의 심문에 협조하지 않았지만 우리 정보기관은 당신이 트라이앵글
지역에서 자행한 활동 내용을 조사했어 당신에 대한 기록이야 읽을
테니 들어보고 의 의 가 있으면 말하라구 소속 한국군 미 ciA 산하
D 소속 계급 특전부대 대위 성명 강철수 범죄 내역 1969
년 말부터 970년 말까지 타이닌 지대의 비밀요원으로 암약 다수의
해방전선측 간부를 납치 살해했다 971년 무옹족 거주 지역인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에서 CIA 아편 밀거래 공작을 측면 지원하기 위하여
일했다 라오스에서 암약하던 미국 중앙정보국I씨 소속 공작원들
과 라오스 황실군 및 라오스 북부 산악지역을 장악한 무옹족과 긴밀
한 연대 관계를 맺으며 해방전선측 병참 수송 통로와 병력 이동 상황
에 대한 기밀을 탐지해서 미 정보 당국에 넘겨주었다 969년부터
1970년 사이에 해방전선에 막대한 피해를 준 B52기의 폭격을 유도한
혐의가 있다 기타 등등 어때 할 말 있나
할 말 없소
자 서류에 사인해 당신이 저지른 일은 이보다 더 많을 거야 이
정도의 선에서 마무리하자구
강철수는 서류에 사인을 해주었다
그가 행한 작전의 전모를 시시콜콜하게 캔다면 괴로운 일이고 더
입에 올리고 싶은 생각이 없는 악몽이었다 서류에 순순히 사인을 하
고 나자 구엔의 어조는 전과 달라졌다
당신은 강제 노역소에서 그동안 지은 죄를 반성해야 할거야
그리곤 그는 떠났다
강철수는 여전히 독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구엔이 넣어준 몇 권의
책이 없었다면 그는 정말 미쳐버렸을 것이다 수감자들이 가장 두려
워하는 독방
그것은 상상 이상의 징벌이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말해주겠소
옆에 있던 사내가 힘없는 어조로 물었을 때 강철수는 멍한 눈으로
사내의 창백한 시선을 응시했다 대답할 기력도 없었고 며칠인지 알
지도 못했다 사내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누구 아는 사람 없어요
아무도 사내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내는 고개를 떨
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징징거리면 가만두지 않겠어 일하지 않고 뭐해
광대뼈가 유별나게 불거진 간수가 사나운 표정으로 으르렁댔다
흐느끼던 사내는 흠칫 놀라서 삽을 집어 들었다 사내는 집요하게
날짜를 알고 싶어했다 강철수는 사내가 부러웠다 무엇이든 알고 싶
은 것이 있다는 것은 축복같아 보였다
교화소라고 부르는 강제 노역소는 지옥이었다 감자 세 덩이로 열
시간의 중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중노동이 끝나면 강철수는 독방으로
가야 했다 힘든 노동이었지만 강철수는 일하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우기였다 연일 폭우가 내렸다 강철수네는 무너진 교량을 복구하
거나 네이팜으로 패인 도로의 웅덩이를 메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노이 교외에 자리한 이 노역소로 옮겨진 것은 1972년 6월경이란 것
만 알고 있었는데 그동안 날짜가 얼마나 흘렀눈지 강철수는 알지 못
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건기를
한번 보냈고 우기를 다시 맞은 셈이니 한 일 년 지났겠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일 년 반 사이에 75 k 던 체중이 55으로 줄었다 많은 사람들
이 말라리아와 이질로 죽어갔다 강철수는 불안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이세준 일당이 살아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노역에서 돌아온 어느날 저녁 강철수를 찾아 온 구엔은 이런 말을
그에게 전해주었다
전쟁이 오래 가지 않을 것 같소 우리의 적들은 곧 비열한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주해 갈 것이오 며칠 전 파리에서 4자 회담이 열려서
휴전 협정이 조인됐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소
하긴 그렇소 전쟁포로라면 즉각 송환이 되겠지만 당신같이 스파
이인 경우는 베트남 법에 따라 종신형이오
나는 탈영병일 따름이오 당신들의 법를에 의해 형을 살 이유가
없소
그것은 당신 생각이지 그러나 당신은 이러나 저러나 죽게 되어
있소
미국측에서 당신의 생존 사실을 감지하고 있는 것 같소
그럼 오히려 잘된 일이지 그들이 날 석방시켜 줄테니까
그는 싸악 하고 웃었다
당신 정말 순진하군 해밀턴 대령이 당신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CIA요원들에게 내렸다는 거요 첩보국에 남아 있는 내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소
해밀턴 대령이 날 제거하라구
그렇소 그들은 동족도 배신하는데 아시아인이고 특히 마약 밀거
래 조직에 대한 정보를 환히 아는 당신이 위험인물이 된 셈이오 미
국은 아시아인을 결코 마음 속으로 도와주지 않소 그걸 알고 있어야
하오
강철수도 그들의 이중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공작원들에겐 우정이
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상부의 명령 하나로 어제의 친구를 살해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강철수는 그들의 무시무시한 이중성에 치
를 떨었다 그들의 진정한 실체는 무엇일까
975년 5월 어느날
구엔이 밝은 표정으로 강철수를 찾아 왔다
좋은 소식이 있소
구엔은 모처럼 활짝 웃었다
드디어 푸옥빈 성도가 우리 수중에 들어왔소 이제 베트남의 해방
은 눈앞에 있는 샘이오 이제 우리측은 결코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것
이오 티우 정부도 얼마 못가서 무너질테구 지금 사이공에선 반정부
데모가 연일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어요 대학생 승려 카톨릭 신부
교수 노동자 농민 할 것 없이 들고 일어나고 있죠 파업도 여기저
기서 일어나고 있고 말이오
전쟁이 끝나면 당신은 이곳 교화소를 떠나 후에로 옮겨질 거요
정치범 수용소이기 때문에 여기보다는 지내기가 한결 나올거요
난 상관하지 않소 석방되지 못할 바에야 더 나은 곳이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소
이상한 사람이오 당신은 다른 사람은 옮겨달라고 아우성인데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픈 데라도 있소
강철수는 위의 통증 때문에 거의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중상으로 보아서 위궤양 같아 보였다 새벽마다 통증
이 심했다
난 괜찮소
난 당신이 교화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진작부터 알았소 좌우
간 전쟁이 끝나고 봅시다 그때까지 몸조심하시오
구엔이란 사람은 처음 심문을 할 때는 모질게 대했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구엔이 가고 난 후 교화소장이 강철수가 있는 방으로
찾아와서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짐작했던 대로 다발성 위궤양
이었다
1975년 4월 30일 오전 시 25분 강철수는 병원에 설치된 확성기
를 통해서 즈온 반 민 월남 대통령의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는 방송을
들었다 방송 내용은 월남군 전 장병은 무기를 버리라는 포고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자의 포고였지만 병원에 있
던 의사와 수용소 간수들은 박수를 치며 서로 얼싸안고 난리들을 피
웠다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프랑스와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과 30년
에 걸친 지리한 싸움이 끝났으니 그들의 기뿜은 오죽할 것인가
1975년 5월 3일 이른 아침 구엔이 만면에 회색을 띄우며 병실로
들어섰다
드디어 베트남이 하나로 통일됐어요 이젠 이 땅에서 전쟁은 끝났
소 당신도 곧 후에로 옮겨가게 될거요
그는 두 손을 깍지끼고 감개가 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강철수는 몇
년이나 지난 잡지를 뒤적이며 무심하게 대꾸해 주었다
잘됐군요 전잼이란 인간에겐 언제나 재앙이오 그것이 이제 종결
됐다니 정말 다행이오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우리 해방전선측이 항전을 포기했다면
우린 통일이 되지 못했을 거요
전쟁이 끝나면 만사가 잘될 줄 알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심각할
거요
그건 무슨 뜻이오
구엔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보복이 따르죠 이 또한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될거요
우리 정부는 그렇지 않을 거요
해방전선의 반대쪽에 있던 사람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나쁜 일을 한 자는 응징을 받겠지
그것이 문제가 될거요 중호의 악순환이지 체제가 전복될 때마다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보복과 응징 이런 것들이 결국은 한동안 당신
네 사회를 낙후한 상태로 이끌 것이고 오히려 삶의 질은 더 나빠질
것이오
우린 빈곤한 생활에 익숙해 있소 그리고 물질적 풍요에서 오는
타락보다는 우리 고유의 자주적 이념과 사상을 지켜갈 것이오
이념이나 사상은 인간의 적이오 사상과 이념의 재단에 뿌려진 인
간의 핏자국을 보시오 이념이나 사상은 홉혈귀요 끊임없는 인간의
피를 갈구하오 생각이 다르다고 사상이 다르다고 서로 죽이고 미
워하는 동물은 인간뿐이오 어떤 생각 어떤 이념을 갖든 그것은 개
인의 자유가 아니겠소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하거나 무엇을 싫어한
다고 말했다 해서 잡아가두고 매질하고 심하면 죽이는 그런 것이 사
상이라면 사상이란 필요가 없는 것이오 오히려 인류에게 해만 되었
지 득이 될 것은 없는 것이오
당신의 사상은 가장 무서운 것이오 당신은 어느 편으로도 공격과
비난을 받을 것이오 사람은 사상과 이념을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오 어떤 행위에도 그 밑바닥에는 사상이란 것이 깔려 있는 법이오
나는 사상이란 놈을 죽이고 싶소 나는 그럴 것이오 내가 다시
세상에 나간다면 반드시 사상이란 괴물을 잡아 죽이고 말겠소
당신도 언젠가는 이데올로기를 학습할 날이 올거요 그건 그렇고
나와 함께 독립궁 광장으로 갑시다 전승기념 축하행사가 있소
난 가고 싶지 않소
가야 하오 수감자 모두 가도록 되어 있소
몸이 불편하오
구엔은 화난 표정을 지으며 가버렸다
강철수가 후에에 있는 수용소로 이감된 것은 975년 우기가 시작
될 무렵이었다
새로 옮겨진 수용소는 시멘트 바닥에 나무 침대가 고작이었지만
토엔과 레오라는 사람과 한방에서 지낼 수 있어서 견딜 만했다 토엔
은 해방전선의 지도자로 암약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혁명 정부의 요
직에서 일했던 사람이었고 레오는 사이공 정권이 붕괴되기 전 어느
국영 기업체의 사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토엔은 베트남 해방 정부를 비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전쟁 동안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당 간부들에게 가르 쳤소
그리고 남베트남 해방전선을 조직하고 반체제 인사들을 해방전선측
으로 넘어오도록 유도했소 그러나 결국 이꼴이 되었소 정부의 우매
한 정책을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된 모양이오 나는 당 위원회에 소환
되었고 자기 비판을 받았소 그들은 나에게 자본주의적 경향에 물든
변질된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는 혐의를 씌워 이곳으로 보냈소 통일
이 됐다지만 베트남의 장래는 암담하오
사이공 지구위원회 상임서기를 지냈다는 토엔의 이야기를 들으며
강철수는 운명의 무상함을 느꼈다 통일 국가는 경제 발전과 삶의 질
을 개선하는 노력보다는 이데올로기의 토론에 불필요한 정열을 쏟고
있다고 토엔은 허탈해 했다 강철수는 온순하고 소탈한 이 사나이에
게 호감이 갔다
어느날 그는 이런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내 아내도 강제 노역소에 수감되어 있소
여성지구위원회 상임서기였소
토엔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강철수는 루안이라는 여자를 기억해냈다
어느날 오후였다 아오자이 차림을 한 여자 베트콩 용의자가 수사
대로 연행되어 왔다 티엔 대령이 그녀를 심문하게 되었다
루안당신 남편 토엔은 어디 있지
티엔의 질문에 루안은
썩을 놈 모른다 찾고 싶으면 네 놈이 직접 찾아봐
이러며 티엔의 면상에다 침을 칵 뱉었다
얼굴이 시뻘개진 티엔은 화를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가죽 채찍을
사정 두지 않고 휘둘렀다 루안은 당장 피투성이가 되었다 뒷날 미
군 조종사와의 교환에서 그녀가 풀려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를 석방하는 대신 세 명의 미군 조종사가 풀려
난 것으로 미루어 해방전선에서 그녀의 존재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
던 것 같아 강철수는 그녀를 유심히 보아 두었었다
당신 아내는 어쩌다 강제 노역소에 갔습니까
북쪽에서 온 사람들에게 대들었기 때문이오 루안은
선적이고 용감했소 지난 5월 5일날 아침이었소 30년
어온 베트남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수십 만의
궁 광장에 모여 들었소
독립궁 광장으로 운집하는 군중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식이 시
작될 무렵이 되자 군중은 백만에 가까워졌다 모여 있는 군중들은 저
마다 북베트남 깃발을 들고 힘차게 흔들었다
베트남 통일 만세
위대한 호 주석 만세 민족의 영웅 호 주석의 영혼이여 영원
히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 만세 베트남 민족민주평화세력연맹
만세 베트남인이여 단결하자 마르크스 레닌주의 만세
베트남 노동당에 영광을 이루 헤아리기조차 힘든 격문들이
춤을 추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아침 태양처럼 밝게 빛났다 토엔과
루안 부부는 사열대에 마련한 자리에 임시혁명정부의 각료들 틈에 끼
어 환흐와 깃발의 물결을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이 받아왔던 시련은 물러간 것이다
군중의 함성은 도심을 뒤흔들었다
만세 소리가 뜸해지는 순간 탄 대통령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확
성기에서 울려 나왔다
먼저 이 베트남 전쟁 승리의 영광을 민족의 위대한 영웅 호 주석
께 바칩니다 이 순간부터 우리 북 남베트남 인민은 하나로 뭉쳐 새
나라를 건설하여 행복의 나라 희망찬 민족을 이룩합시다 이제 우리
에겐 절망이 없습니다 베트남 인민은 누구나 동등합니다 모두 새
나라의 주인입니다 베트남 인민 만세 사회주의 만세 호 주석 만
만세
탄 대통령의 뒤를 이어서 민족해방전선의 구엔 토 의장이 민족해방
전선과 임시혁명정부를 대신하여 연단에 나타났다
우리 베트남 인민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보여준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과 끝없는 애국심을 잊지 맙시다 전선에서 흘린 용사들
의 피와 땀을 결코 헛되이 맙시다 승리의 제단에 헌신한 그들의 죽
음을 영광되게 합시다 우리 베트남 인민은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민족해방전선 만세 통일 베트남 만세
토의 연설이 끝나자 이번엔 판분이 월맹 노동당을 대신하여 베트남
전쟁의 승리와 베트남 인민의 통일과 국가 재건을 제의했다
그는 연설이 끝나기 전에
미 제국주의자는 패망하였고 베트남 인민은 승리를 쟁취했습니
다 베트남 인민은 위대합니다 베트남의 피를 나눈 형제들이여 모
두 가슴을 열어 민족의 이 위대한 승리를 찬양합시다 사이공 시민
여러분 이 도시의 관리자는 지금부터 여러분입니다
라며 말을 끝냈다
축사가 끝나자 독립궁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의 행진은 믈결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맨 선두엔 청년들이 압장섰고 대학생과 고등학
생 불교도 카톨릭 교도 등 사이공 시내에 있는 각계 각층의 단체
가 뒤를 이었다 민간 단체들의 뒤를 이어 군대의 행진이 시작되었
다 선두에 나타난 것은 월맹 정규군이었다 엄청난 수의 군인이 대
거 정연히 행진해 갔다 장병들의 차림은 산뜻했다 의복도 모두 새
것이었다 이들을 선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차와 야포 장갑
차 그리고 소련제 미사일과 중장비 차량이 우렁찬 엔진음을 흘리며
뒤를 따랐다 그러나 남베트남 출신들이 고대하던 베트콩의 행렬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초라한 차림의 베트콩 일단이 북베트남 민주공화국 깃발
을 흔들며 나타났는데 그때 루안이 저 거지떼는 어디서 온 누구며
우리 베트콩 사단은 다 어디갔냐고 큰소리로 묻자 옆에 있던 월맹군
사령관이 베트콩은 이제 월맹군에 통합되었습니다 라고 했다 어이
가 없어진 루안은 단상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리는 큰 목소리로 외쳤
다
이것은 불법이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어째서 남베트남 해방
전사들이 월맹군에 예속되어야 합니까 이럴 수는 없는 거요
사람들은 놀란 시선으로 루안을 보았지만 루안은 마구 소리를 질렀
다
다음 날 루안과 토엔 부부는 당 위원회에 소환되었고 각기 다른 수용소에
수강되었다
토엔은 강철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노이 당국은 신속하게 남베트남의 치안을 장악했지요 북베트남
정치 세력이 사이공에 내려온 후로 남베트남의 분위기는 달라졌소
남베트남의 지식인과 종교 지도자는 처음부터 제거되고 축출당하도
록 각본이 짜여 있었던 거요 남베트남의 유능한 민족주의자들이 국
외로 망명한 뒤부터 북쪽에서 온 이데올로기의 노예들은 이 남베트남
을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것이오 이 나라는 희망이 사라졌
소 뛰어도 모자랄 판인데 매일 이데올로기 비판만 일삼아서야 되겠
소
그러던 어느날 월맹군 군사위원회에 불려간 토엔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간수에게 끌려온 토엔은 피투성이였다 간간이 신음을 내어
가며 토엔은 힘없이 말했다
놈들의 계략을 알았소 놈들은 우리 남베트남 혁명가들을 깡그리
제거하려는 거요 사이공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툭 교수도 며
칠 전 감방에서 동맥을 잘랐다는구료 그 사람보다 공산주의 이데올
로기에 정통한 사람은 없을 것이오 북쪽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독자
적으로 만든 당 강령과 이데올로기가 최선이라고 주장하고 있소 마
르크스 레닌주의와는 무관한 사상을 말이오 그들이 만든 이데올로
기의 허구성을 지적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숙청하고 있소
나는 그들에게 동조할 수 없소 어떻게 되찾은 조국인데
그의 얼굴은 무척 초췌했다
어느날 토엔은 한밤 중에 피를 토했다 엄청난 양이었다
녀석들이 배와 가슴을 군화발로 마구 짓이겼소
병원으로 후송되기 전 토엔이 강철수의 귀에 남겨준 말이었다 토
엔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병원에서 죽었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
며칠 후 레오와 태국인 롱도 어디론가 옮겨갔다 이때부터 무수히
많은 남베트남 지식인들이 강철수가 있는 감방을 거쳐 갔다 이 중에
는 베트콩 골수분자로 평생 동안 해방전선에 모든 것을 던져온 사람
도 있었다 그들은 북 베트남의 권력층으로부터 소외당했고 투옥되
고 은밀히 살해되기도 했다
어느날 딘 스이란 베트남인이 강철수가 수감되어 있는 감방으로 들
어왔다 사이공 정부 시절 신문 기자였던 그는 전쟁 후 체포되었다
어느날 수용소를 탈출한 그는 프놈펜에 살고 있는 형의 집으로 갓다
그러나 캄보디아로 진격한 월맹군에게 다시 체포되어 스파이 혐의로
붙들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캄보디아에서 본 끔직한 이야기를
수감자들에게 말해 주었다
내가 캄보디아로 탈출한 것은 976년 초였지요 이미 캄보디아는
크메르 루주의 수중에 넘어가 있었어요 누나의 집에 숨어 지내던 어
느날 크메르 루주의 어린 병사들이 누나의 집을 덮쳤답니다
?나는 예감이 불길해서 대나무 숲으로 피했어요 그들은 방에 있던 매형을 끌
어내더군요 그리고는 개머리판으로 매형의 머리를 난타하기 시작했
조 매형은 마구 비명을 지르더군요 매형은 당시 국민학교 교사였어
요 매형의 머리를 으깨고 있는 소년 중에는 매형이 가르친 제자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이들 크메르 루주의 소년 병사들은 피에 굶주린
악귀로 변해 있었어요 폴 포트 정권은 중년 정도의 연령층이며 교
육을 받아서 재교육의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어린
병사들은 교사나 승려 그리고 지식인들을 말살하려는 폴 포트 정권
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살인 도구로 변해 있었지요 심지어 소
년병들은 자신의 혈육까지 무자비하게 살해했어요
이렇게 시작된 광란적인 대학살의 결과 30옇만 명의 캄보디아인이
크메르 루주의 병사들로부터 타살 당했고 인구는 700만에서 400만으
로 줄게 되었다 폴 포트 정권이 왜 이런 악귀 같은 명령을 철없는
소년들에게 내렸을까 그것은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단기간에 주민들
에게 주입시키려 한 때문이었다 캄보디아를 장악한 폴 포트 정권은
사오백 만의 캄보디아 주민을 살해하면 나머지 이삼백 만의 캄보디
아인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혁명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원래부터 소승 블교도인 캄보디아인들은 전쟁을 싫어했고 은거 생활
을 하면서 석가모니의 법리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지고의 선으로 생
각하던 선량하고 평화스런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상이
쉽게 주민에게 침투할 수 없다고 폴 포트 정권은 생각했던 것이다
소년병들로 하여금 총살 대신에 개머리판으로 타살을 명령한 것도
부패한 인간을 청소하는데 총알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발상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소위 내부투쟁이란 것을 만들어 소년병 중에서 이데
올로기 학습에 열의가 없거나 부패한 인간을 청소하는데 소극적인 소
년 병사를 적발하여 타살하도록 유도했다 소년병들은 스스로 감시하고
밀고하고 고발해서 죽이기 시작했다 이런 내부투쟁으로 죽어간 소년
병의 숫자는 20퍼센트가 넘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고발하고 배
신자로 몰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온순한 소승 불교도의 집안
에서 곱게 자라난 아이들이 몇 년 사이에 야수로 변한 것이다
중국의 공산 정권은 캄보디아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전
을 미리 세워놓고 있었다
이유는 비옥한 캄보디아의 평야에서 생
산되는 쌀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패권주의와 제국주의를 배격한다 하
면서 내심으로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고 싶
었던 중공은 캄보디아의 인구를 줄이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계책을 사
용했다 캄보디아에 파견된 중국 고문관들이 캄보디아가 스스로 와해
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캄보디아의 동족상잔 행위는 중공과 소련 프
랑스와 미국 같은 강대국의 음모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다
캄보디아의 곡창지대를 탐낸 것은 중국 뿐만이 아니었다 매년 20
만 톤 정도의 식량이 모자라는 베트남도 캄보디아의 곡창지대를 탐냈
다 베트남은 정예화된 15개의 기계화 사단을 캄보디아에 투입해서
순식간에 폴 포트 정권을 분괴시키고 크메르 루주군을 산악 지역에
서 몰아냈다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 정권을 몰아내지 않
았다면 크메르 루주군에 의한 학살은 끝없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캄
보디아가 베트남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학살에 가담했던 어린 병사들
은 모두 정글로 잠적해서 게릴라가 되었고 이들 어린 병사들은 소탕
전과 기아로 죽어갔다
부모의 품을 떠나 숲속으로 잠적한 어린 병사들은 그들이 이해하지
도 못하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1979년 말 어느날 하노이 시의 경찰 책임자가 된 구엔이 찾아왔다
그동안 고생 많았소 어떻소 지내기가
오랜만에 강철수를 찾아 온 구엔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보면 모르겠소 왜 석 방시키지 않는 거요
당신을 하노이 시로 옮길까 하오
무슨 이유요
여기는 안전하지 못해요
무슨 말이오
당신은 전사자로 되어 있소
전사자라니
실종자 명단에 없다는 이야기요
그럼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오 그러니 석방 대상자가 될 수도
없는 거요
그럼
더 기다려야 될 것 같소 미국인들이 당신의 소재를 알려고 혈안
이 되어 있소
강철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밀턴 대령을 알거요 해밀턴 대령은 미 정부 고위층으로부터 라
오스와 베트남 캄보디아 등지의 접경 지역에서 아편밀매 작전에 투
입되었던 요원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소 또한 작전중에 실종된
미군이나 그 동조자에 대한 수색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었소 이들
이 본국으로 송환된다면 당장 해외 비밀공작 자금의 재원이
탄로날 것이고 그러면 불똥은 어디로 튀겠소 그래서 CIA 책임자
들은 정부에 압력을 넣었소 라오스와 베트남 전선에서 행방블명된
미군들의 생사 확인과 포로송환 교섭을 하지 못하게 말이오
그는 다시 덧붙였다
당신이 이곳으로 수감된 후 맥도널드가 cIA 국장으로 취임했소
그는 행방불명된 미군 문제를 처리할 기구를 중앙정보국 통제하에 두
었으나 그 기구를 활용하지 않았소 누가 자기 목에 올가미를 걸려
하겠소 만약 맥도널드가 포로 송환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 그
의 부하에 의해 저질러진 마약밀매 작전이 당장 들통날께고 그렇게
되면 마약 때문에 골머리를 알고 있는 미국 전역에 엄청난 파문이 생
길 것이오 맥도널드의 정치적 야망도 끝날 것이고
구엔은 미국내 사정에 밝았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미국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헤로인 중독자의 수가 격증했다 그에
따라 마약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스의 비호 아래 마약밀
매를 하던 라오스 황실군과 무옹족은 엄청난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CIA는 마약 대금 중 일부를 수중에 넣었고 이를 해외 비밀공작 자
금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콘트라 반군에 대한 지원과 라틴 아메리카
군사 정부에 대한 공작 자금 중 상당한 액수가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조성된 검은 돈이었다
당신은 여기 있는 것이 더 안전하오
베트남에 잔류하고 싶다면
영주권을 내줄 용의가 있소 혁명 정부의 민감한 작전을 도와 주어야
하겠지만
나는 돌아가야 하오 돌아가서 할 일이 있소
당신은 돌아갈 수 없도록 되어 있소
당신이 걱정할 바 아니오
당분간 당신의 명단을 빼놓겠소
마음대로 하시오 난 상관 않겠소
당신을 위한 일이오
나에 대해 관심 가질 필요 없소
하노이로 옮기면 자주 만날 수 있을 거요
상관 없는 일이오
당신은 고집쟁이오
그걸 이제 아셨소
물론 당신을 처음 심문하면서 알았소 그래서 난 당신을 좋아하
오
당신 감상주의자는 아니겠죠
난 감상주의자요
당신 생명도 멀지 않았소 공산주의 이념에 감상주의는 용납되지
않소
난 공산주의자요
내게 당신의 이념을 고집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소
구엔은 화가 난 얼굴로 돌아갔다
강철수가 하노이에 있는 정치학습소로 옮겨간 것은 1980년 건기가
한창이던 월 초였다
말이 정치학습이지 구엔이 보내주는 책을 읽거나 아니면 학습소
내에 있는 운동 기구를 만지면서 체력 단련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물 다섯 나이에 포로가 되었으니 그 동안 년 세월이 흘러간 셈이
었다
테트81 축제를 맞은 수용소는 닭과 돼지고기 등 특식이 배급되
어 수감된 사람들은 모처럼 밝은 표정을 지었다 요란한 폭죽음이 어
디에서든 들렸다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 이런 부산함은 일주일
동안 계속될 것이다 저길 좀 보지 굉장한 용춤이군 누가 창문
밖을 내다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구엔이 수용소에 들린 것은 그런 분위기로 수형수들이 한껏 기분이
좋을 때였다 구엔은 한국에서 왔다는 신문을 한 장 건네 주었다 몇
달 지난 신문에는 대통령이 만찬장에서 심복인 어느 장군에게 사살
당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놀라는 강철수를 조용히 바라보며 구
엔이 말했다
누가 뒤에서 암살을 조정했는지 아시면 놀랄께요
무슨 말이오
물론 이 작전도 CIA 짓일거요 당신네 대통령은 핵무기를 개발하
려다 제거당한 거요 대통령을 사살한 그 장군은 일회용 소모품이었
고 사전에 밀약이 있었다는 KGU의 정보가 있소 아마 다음은 엉
뚱한 장군이 대통령이 되겠지 권력의 맛을 아는 정치군인 말이오
두고 보시오
이 사건에 cIA 가 관련된 것 틀림 없소
소련의 정보는 믿을 만하오 KGb 는 정부의 통제하에 있소 그러
나 cIA 는 다르지 정부의 통제를 받기에는 너무 비대해졌소 그들은
자신들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대통령인 케네디도 암살한 자
들이오
강철수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살해당한 대통령이 황석호 이세
준 김태수 최오남 등 일단의 정치군인이 속해 있는 남성회를 지원
해 왔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CIa 측으로부터 대통령이던 그가 한동
안 용공주의자였다가 부하와 동료를 배신한 후 전향했다는 사실을 들
었을 때 혐오감을 느꼈다 언젠가 로버트 대위가 해준 말이 생각났
다
그때 로버트는 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미국에는 일단의 극우 세력이 있다구 유색인종과 공산주의자
를 중호하는 이들 집단은 정치 경제 군사 다방면에 권력 기반을
구축하여 거대한 이익 집단으로 성장해왔지 일부 정치인과 거대기업
가 군 고위 조직 CI FBI 등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기도 한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한다구 베트남 전쟁 개입 이
란이라크 전쟁 중남미 분쟁 중동 전쟁 등이 그 예야 이들은 자신
들의 이익에 부합된다면 독재자와도 결탁하는 거야 이들은 이익을
챙기는 대신 독재자들의 권좌를 비호해왔어 미국의 중요한 대외 정
책은 이들의 막강한 영향력에 좌우되고 있다구 필요하면 마피아까지
이용하지 미국 내에도 개혁 진보 세력이 있지만 미약해 말콤 킹
케네디 형제같은 개혁주의자들은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을 당
했어 이들 보수 집단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선 서부 개척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원주민인 인디언의 땅을 수탈하면서도 양심의
가책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던 이기적 정신이 거의 이백 년 동안 내려
온 셈이지 미국이 내세우는 프런티어 스피릿 이라는
기치 밑에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피와 눈물이 있는 거야 백 년 이
백 년 후의 미국은 유색인종이 절대 다수가 될걸세 그때 유색인종
을 차별하던 이들 보수세력이 당황하는 꼴을 보고 싶다구
구엔은 강철수에게 외국인 전범 수용소로 옮겨질 거라는 말을 남기
고 떠났다
테트 축제가 끝나던 날 밤이었다
잠결에 불이야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일어난 강철수는 깜짝 놀랐다
수용소 안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연기 때문에 탈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수감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허둥대고 있었다 연옥이었다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 이리뛰고 저리뛰던 강철수는 갑자기 정신이
멍해졌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병원이었
다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은 뒤였다
수감자들 모두가 깊이 잠든 이른 새벽에 발생한 화재여서 부상자
는 의외로 많았다
삼 개월 동안 병원에서 지낸 뒤 퇴원한 강철수의 얼굴은 흉하게 일
그러져 옛모습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강철수가 사이공 외국인 전범 수용소로 이감된 것은 건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이번에 옮겨진 외국인 전범 수용소는 지내기가 비교적
편했다 그동안 미국인과 프랑스인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강철수에겐
석방 소식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베트남 당국은 강철수의 존재를 망
각한 것 같았다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것은 고통이었다 강철수는 자신의 흉한 얼
굴을 보며 이세준 일당을 잔혹하게 죽이는 상상으로 몸을 떨었다
사이공에서 2년이 흐른 9월 어느날 간수가 강철수를 찾았다
투이라는 사람이 당신을 찾아왔소
그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키가 작고 깡마른 태국인 한 사람
이 서 있었다 강철수는 그 사내에게 다가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신형철이란 분이 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편지를 받아든 강철수는 명치끝이 칼에 찔린 듯 아파왔다
자네가 생존해 있다는 정보를 듣는 순간 나는 신의 존재를
믿게 되 었고 감격했네 자네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네 자네
가 탈출한 후 나는 황석호 일당에게 끌려가서 자네가 당한 그런 끔직
한 일을 당했다네 고문의 후유증으로 나는 왼팔을 잃게 되었네 잘
려나간 팔보다 괴로운 것은 그들에 대한 중호심을 참을 수 없다는
점이네 자네의 석방을 위해 베트남 당국과 접촉하고 있네 나
는 방콕에 머물고 있네 나오게 되면 임폐리얼 호텔 총지배인을 찾
게 될 수 있으면 빠른 시일 내에 만나게 되길 비내
봉투 속에는 미화 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강철수가 석방된 것은 1982년 초였다
수용소를 전전하는 동안 9년이란 세월이 덧없이 흐른 셈이었다
날 보자고 했습니까
체구가 작은 육십대 노인이 장부에서 시선을 들었다 눈빛이 날카
로웠다
그렇소 신형철을 만나고 싶소
강철수씨입니까
노인이 속삭였다
그렇소
강철수의 대답에 노인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함께 갑시다
강철수는 넓고 깨끗한 객실로 안내되었다
저는 신형철씨의 사업을 돕고 있는 왕정인이오 연락해 드릴 터이
니 이 방에서 쉬고 계십시오
왕이 방을 나가고 나자 강철수는 피로를 느꼈다 그는 모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 그것은 실로 10여년 만에 맛보는 자유로운 휴식이었다
강철수가 눈을 떴을 때는 밤이었다
신형철은 의자에 앉아서 그가 눈을 뜨길 기다리고 있었다
잘 잤나 고생 많았다
신형철은 강철수의 손을 감싸쥐고 흔들었다
고마워
강철수는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저녁이나 들면서 이야기하자구
그들은 레스토랑으로 갔다
넌 전사자로 처리되어 있었어 그래서 찾는데 애먹었다구
구엔이 도와주던가
물론 그가 아니었으면 힘들었겠지
많이 썼겠지
오십만 달러 정도는 나에겐 큰 돈이 아냐
내가 그정도 가치 있는 인믈일까
물론 자네가 앞으로 할 일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
내가 할 일이라니
녀석들을 모두 죽이는 일이지 감쪽같이 말일세 자내에겐 누워서
떡먹기 같은 일이야 우선 나와 함께 동경으로 가서 지내며 현실 감
각을 익히세
자네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탈출하기 전에 트라이앵글에서 좀 빼돌렸지
얼마나
꽤 많어 네놈 비석이 국민묘지 에 있더군
어떤가 유령이 된 기분이
그들은 어떻게 지내나
모두 고위층이 되어 있지 하늘의 별처럼 아득히 높은 곳에서 찬
연히 빛을 발하고 있지
황석호는
건재해 대단한 놈이야
이세준은
트라이앵글의 백곰 녀석도 잘 있어
최오남도 잘 지내겠지
그럼 잘들 지내지
녀석들을 다 죽일 때까지 나에게 진정한 안식은 없을 거야
강철수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다음 달 호주로 가 영주권을 얻어냈어 난 아열대의 이 후덥
지근한 기후보다는 해양성 기후가 체질에 맞을 것 같애 시드니에 정
착하기로 했어
엇떤가 내 모습
신형철은 텅빈 왼편 소매를 눈으로 가리켰다
강철수는 신형철의 분노에 찬 시선을 표했다
우리가 어디 있다는 걸 알면 해밀턴 장관이 당장 박살내려 들걸
해밀턴 장관이라니 패트릭 해밀턴이 장관이 되었나
최근에 승진했어 브라운 녀석은 숲속에서 걸레처럼 찢긴 채 발견
됐고 로버트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해 수년간 트라이앵글 지대
에서 암약하던 요원들이 꽤 많이 중발했어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우리가 마약밀매 자금을 입금시키던 은행 기억나
호주에 있던 LJ 은행 말인가
그래 그 은행도 파산했어
그럼 리처드와 존슨은
리처드는 원인도 모르게 죽었고 존슨은 실종됐지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LJ 은행은 서류상으로는 리처드와 존슨이 공동 소유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 은행은 미 CIA 가 관장했고 모든 마약밀
매 자금은 그 은행으로 입금되었다 그 은행은 중남미와 중동 지역의
은밀한 공작에 필요한 자금 공급처로 사용되었다 주로 홍콩이나 태국
필리핀 볼리비아 칠레 콜롬비아의 마약밀매 대금을 취급하고
있던 이 은행은 CIa 九자 관련된 마약 거래에 대한 방대한 비밀을 은닉
하고 있었다
리처드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고 존슨이 실종되고 나자 미 정부에
서 이 은행의 서류를 조사했다 기밀 서류를 뒤지던 그들은 비밀 서
류에 숨겨져 있던 봉급자 명단을 찾아냈는데 봉급자 명세서엔 리처
드와 존슨 그리고 그린베레 출신의 퇴역 미군장교들과 정보 당국 직
원들의 이름이 다수 발견되었다
리처드와 존슨이 그렇게 된 것은 아마 스미스의 야망 때문일지 모르지
지금 뭐하나 스미스는
국방차관이 되었어 마약 밀거래를 총괄하더니
마약 밀거래를 그가 총괄했었다는 사실 틀림없어
믈론이지
될 수 있는 한 빨리 귀국하고 싶어
믈론 그러나 일단 귀국하기 전에 도쿄에 들러야 돼 치밀하게 작
전을 세우자고 그들 일당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
누군데
박문태라고 전직 K CIA 요원인데 일본에 귀화했어 일당에 대한
파일을 모두 갖고 있어 믈론 그도 황석호를 중호해 믿을만 해 내
게 잡힌 약점도 있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걸 그들이 알고 있을까
모르겠지 아니면 우리 존재를 무시하고 있거나 망각이란 편리한
것 이지
나에겐 잊을 일이라곤 없어 하나도
요즘 황 대령은 잘 나간다고 하더라 마누라가 교통사고로 죽고
나자 여봐란 듯이 재혼했는데 누구와 결혼한지 알아 메이퀸 출신
모델이야 나영미라고
그의 행운도 이젠 끝장났어
강철수는 어두운 공간을 응시하며 차갑게 말했다
내일 반타오란 의사를 만나보세 성형 수술은 그를 따라갈 사람
이 없을 걸세
자네가 보기에도 내꼴이 그렇게 흉한가
나는 괜찮지만 시선을 끌 필요는 없잖아
강철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흉하게 일그러진 얼
굴이 음산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나리타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잠시 후 수평 비행으로 들어갔다
하늘은 티없이 맑았다 눈 아래는 퍼런 바다가 아련히 내려다 보였
다 가슴이 떨렸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다는 세훨을 이역 땅에서
갇혀 지내다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기대와 아무도 자신의 존
재를 반길 사람이 없다는 쓸쓸함이 소용돌이쳤다 무국적자 회색 전
선에서 유령이 되고만 자신 그는 우울한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강철수는 도쿄에서 일 년 남짓 신형철과 함께 지내며 현저하게 변
한 세상에 적응해갔다 두 사람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한국에 있는
황석호 일당의 정보를 낱낱이 수집했다
박문태를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호텔 커피셥에서 박문태를
처음 만나던 장면이 떠올랐다
인사하지박문태씨야
신형철은 턱이 뭉툭하고 눈빛이 날카로운 오십대 초반을 강철수에
게 소개했다 강철수는 이 낯선 사람의 두틈한 손을 잡고 악수했다
신형으로부터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베트남에서 오랫동
안 고생하셨다구요 나도 황석호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를 응징
하는데 힘이 된다면 돕고 싶습니다
그는 어느 술자리에서 평소부터 가까이 지내던 기자에게 광주에서
발포 명령을 내린 자의 이름을 꺼냈다가 치른 곤욕을 들려 주었다
술김에 뱉은 소리가 화근이 되어 끌려간 곳은 어느 지하실이
었습니다 지독하게 당했죠 며칠 뒤 나와보니 나와 술을 마셨던 그
기자는 교통 사고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
게 된 나는 신변에 위험을 느껴 도일했던 겁니다
박문태는 황석호 일당에 대한 자료를 건네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
다
여기 살면서 느린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얼마나 속고
살아왔나 하는 것입니다 군사정권은 국민의 귀와 눈을 철저히 봉쇄
해 왔습니다 나는 일부 학자들의 고뇌를 잘 알고 있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내란 행위임에 틀림없는 쿠데타의 필연성과 이론적 정당성
법적 근거를 확보하려고 이들 학자들을 위협했습니다 결국 힘있는
불의는 정의다 법과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이런 전도된 가치가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국민 위에 군림하게 된 것입니다 상당수의 정
상배들이 김형욱이가 그랬던 것처럼 어마어마한 재산을 국외로 반출
한 뒤 제 3국으로 도피했습니다 권좌에 있는 사람은 돈을 마음대로
써도 되는 이상한 논리가 지배하던 세상이었지요 부당한 정권이 국
민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는가를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스탈린이나 김 일성 모두가 다수의 우둔한 국민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지 않았습니까 대중은 정의에 둔감합니다 악을
보고 눈을 감는 것은 비열한 행위며 죄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
다 자신의 안일과 이익만 챙기려 드는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을 보
세요 김 일성이를 신처럼 받들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공포 때문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
니다 정부의 권력자를 마음대로 욕하지 못하던 그 시절 국가원수모
독죄란 괴이한 법률도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의 혈관 속에는 권력
에 약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공정성이나 정의감을 앞세우며 살기
보다는 노예가 되더라도 편하게 살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한 것입니
다 왜 일본인을 욕합니까 이 사람들 욕할 자격이 있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러세요 누가 봐도 틀림없는 친일 인사들이 버젓이 항일운
동가 대열에 끼어 있더라며 어느 일본인 역사학자가 어이없어 합디
다 나는 그 교수의 논문을 읽고 친일 인사가 누구란 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권좌에 남아 있는 한 나라꼴이 되겠습니
까 지난 세월 들추어서 뭐해 매사 이런 식이죠
신형철도 듣고만 있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 셈이죠 국민들은 독재자의 속임수를 쉽게 잊어버려요
그리고 독재자의 하수인들도 쉽게 용서해버리고 그러니 누구든지 권
력의 편에 서려는 겁니다 세월이 지나면 악행도 묻혀지거든요 악은
독버섯 같아서 응징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자꾸 생긴다는 것을 모르
는 것입니다
이런 소리를 강철수는 무관심하게 흘러넘겼다 강철수는 오로지 황
석호 일당을 살해할 계획에 몰두했다 정치니 국민이니 하는 것들은
강철수와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눈매가 시원한 여자 승무원이 다가와 뭘 마시겠느냐고 물었을 때
강철수는 커피를 주문했다 강철수는 신형철이가 건네준 노란 봉투를
꺼내 들었다 이세준과 황석호 그리고 최오남 김태수의 주소와 그
들의 근황에 대한 내막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강철수는 서류에 적힌
내용을 남김없이 뇌리에 새겼다
조심해서 처리해 여기 만 달러 있으니깐 우선 쓰구 돈 모자라면
시티 뱅크에 입금해 놨어 본색 드러내지 마 그래야 우린 함께 사
업을 할 수 있어
베트남 전쟁에서 성형 수술을 익혔다는 반 타오의 마술적인 솜씨는
그의 얼굴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형시켰다
히야 넌 누가 보든지 필리핀이나 중동 녀석이라 생각할 거야
쪽 뺐어 그래서 여권도 필리핀과 중동인으로 했지 후앙 곤잘레스와
압둘 하지스 어때 이름 한번 멋지지 안 그래
신형철은 나리타 공항을 떠나는 강철수 귀에 속삭였다
비행기는 오후 늦게 김포 공항에 착륙했다 강철수는 트랩을 내렸
다 그는 코 끝에 감기는 가을의 내음으로 폐부를 가득 채웠다
도시는 밤을 맞았다 수천만 화의 개안 명멸하는 빛의 축제 도
시의 벌판엔 추락한 별이 은비늘처럼 깔렸다
청담동 골목 이세준의 집 앞
강철수는 전신주 뒤에 몸을 숨기고 이세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퉁이를 휩싸고 도는 차고 매서운 바람이 코트자락을 잡아 흔들
었다
야채 자루를 실은 자전거가 바쁘게 지나갔다 뒤이어 종이 상자를
실은 오토바이도 뿌연 매연을 흘리며 지나갔다 강철수는 반사적으로
등을 돌렸다 큰 길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날아왔다 경적을 울리며
미친듯이 질주하는 차량의 소음 간헐적으로 터지는 고함 소리 이런
북새통이 지나가면 골목은 정적을 되찾았다
강철수는 으스스 한기를 느끼며 대검을 만져 보았다 차고 묵직한
대검의 질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더러운 생명을 노리는 맹수의 이
빨 잔혹한 복수의 도구 잠시 후면 이 칼날은 이세준의 심장을 난도
질할 것이다
골목길은 빙판으로 변했다 싸락눈이 바람에 쫓겨갔다 멀리서 날
아온 개짖는 소리가 밤의 고요를 찢었다 한 마리의 개가 짖어대니
다른 개들도 덩달아 짖어댄다 잠시 후 개짖는 소리도 시들해졌다
그때 싸아랑을 팔고 사는 혀가 풀린 취객의 노래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전신주 그늘로 몸을 숨겼다 두 사람
의 취객이 목로주점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비틀거리던 하나가 발
을 헛디뎌 길 바닥에 나딩굴었다 노란 봉투가 길 바닥에 떨어졌다
둘 중 하나가 쓰러진 동료를 일으키려 했다
놔아라 내 팔 놔
쓰러진 사내는 팔을 뿌리쳤다
자 가자구 늦었어
쓰러진 사내의 옷소매를 잡아 올리면서 타이르듯 동료가 말했다
호옹 도오야 우지 마하라 오빠가 이잇 따
쓰러진 사내는 한껏 목청을 돋구었다
정신 차리라구 신 부장
이 팔 놔 야 한잔 더 안 할거야
좋아 자 일어서라구
동료의 부축으로 겨우 일어선 사내는 담벼락에다 먹은 것을 토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내는 담벼락을 짚고 지퍼를 내렸다 오줌 줄기가
기운차게 내뻗치기 시작했다 오줌 줄기는 담벼락에다 한반도의 형상
을 그렸다 담벼락에 그려진 한반도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오줌 줄기는 차츰 기운을 잃더니 나중에는 방울져 내리면서
사내의 가랑이를 적셔갔다 사내는 토하는 동료를 돌아보며 씨부렁거
렸다
칠칠치 못하기는 아 그거 먹고 올려
사내는 바지의 지퍼를 끌어 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가 짬뽕하자고 했냐 쏘주면 쏘주 맥주면 맥주지 막걸리에다
쐬주 나중엔 양주까지 앵겼으니 지들끼리 전쟁이 안 일어나겠어
끄윽 아흐 나 죽겠다
토하길 멈춘 사내는 다시 오심이 나는지 담벼락에 머릴 처박고는
다시 으윽거렸다
약방에 가서 약부터 사먹고 한 잔 더 하자 어때
그것 초오치
하며 토하기를 끝낸 사내가 맞장구첫다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하
고 비척거리며 내려가더니 강철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골목길에는
취객이 버리고 간 노란 봉투 하나가 한풍에 몸을 떨고 있었다
강철수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심장박동 소리가 남에게 들릴 듯 커
져갔다 그는 대검의 손잡이를 꽉 잡은 채 기다렸다 엔진 소리가 들
렸다 강철수는 긴장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강철수의 얼굴을 할고
지나갔다 강철수는 반사적으로 담벼락에 붙었다 헤드라이트의 빛살
이 가까이 다가왔다 둥그런 빛살이 파동했다
최신형 볼보의 육중한 차체가 조용히 멈췄다 이세준이 차에서 내
려 한발을 내딛는 순간 은신해 있던 강철수는 어둠 속에서 바람처럼
빠져나왔다 이세준의 등 뒤로 소리없이 다가간 강철수는 이세준의
목을 억센 팔로 와락 휘감았다
누 누구 누구냐
이세준의 음성이 찌그러들었다 억센 팔뚝이 그의 인후부를 짓눌렀
다
소리쳐도 소용없어 강철수다
강철수는 얼음같이 차가운 어조로 나직이 말했다
윽 가 강철수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경악하는 이세준의 목소리
트라이앵글을 생각해보라구
흐윽 팔 좀
후에를 기억하겠지 그리고 슈이엔 마을도
전쟁판 아니었나
넌 죽어야 해
살려줘 하 한 번만 무 무슨 요구든 들어 줄테니
이세준은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억센 팔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
을 쓰면서 버둥거렸다
나쁜 놈
강철수는 대검을 꺼내 쥐었다 그리곤 이세준의 왼쪽 가슴을 겨냥
했다
사 살려
강철수의 손에 쥐어진 칼날이 번뜩했다
흑
성대가 짓눌린 이세준의 목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외마디 비명 칼
날은 이세준의 검상 연골 좌측 제6늑골과 제 7늑골 사이를 헤집고
심장으로 파고 들었다 이세준은 눈을 부릅뜬 채 칼을 쥔 강철수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희생자의 눈에서는 경악의 빛이 시퍼렇
게 피어올랐다 강철수는 칼날을 조금 비틀어 깊숙이 한번 더 찔러
넣었다
후에의 몫이다
강철수의 사려문 이 사이로 나직한 부르짖음이 흘러나왔다 칼날은
심낭막을 가르고 심장의 가운데를 관통했다 이세준의 입은 먹굴처
럼 딱 벌어졌다 벌린 입 속에서는 한줄기 허연 김이 흘러 나왔다
그의 전신은 죽어가는 생선처럼 파르르 경련했다 강철수의 손을 감
쌌던 이세준의 손에 힘이 풀려갔다 이세준은 바람이 빠져나가는 풍
선처럼 천천히 허물어져 갔다 그는 마치 동정이라도 구하듯 강철수
의 가랑이를 손으로 훌어 내리며 천천히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강철수는 땅바닥에 쓰러진 시체로부터 대검을 빼냈다
이세준의 부릅뜬 눈동자에 밤하늘이 투영되
고 있었다 강철수는 잽싼 동작으로 연기가 사라지듯 어둠 속으로 잠
적해갔다 이세준의 옷자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별들도 참담한 광경에 놀라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이보소요 그만하세요
우리 함부로 건드리다가 당신들 목 날라가 꺼억
청담동 파출소 두 사람의 취객이 번갈아가며 자신의 면상에 대고
삿대질하며 고함을 내지르는 것을 참고 있던 김 반장은 타이르듯 조
용히 말했다
네 알아모시겠습니다 자 오늘 밤 왜 그 장소에 있었는지 말해
보세요 그것만 말해주면 댁으로 보내드리죠 이 봉투 어느 분꺼
죠
봉투라니
봉투 임자 누굽니까
야 조 부장 이거 니꺼야
신 부장이 노란 봉투를 눈으로 가리키며 조 부장에게 물었다
뭐가
쌀뜨물에 빠진 바퀴처럼 눈동자가 풀린 조 부장의 눈길이 김 반장
이 들고 있는 봉투로 향했다
이 봉투 기억나십니까
김 반장이 조 부장의 코밑으로 봉투를 밀었다
내 봉투야 왜
조 부장은 봉투를 나꿔채며 눈알을 부라렸다
봉투를 어디서 잃어버렸습니까
봉투 글쎄 기억이 안나는데
기억해 내셔야 됩니다 기억 못하면 선생님은 오늘 밤 여기 계셔
야 됨니다
계셔야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여
진술을 해야죠
너희들 임자 잘못 만낫다구 내가 누군 줄 알아
조 부장이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고위층 아니십니까
김 반장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히야 알긴 아누만 그래 어쩔래
조준구의 집게손가락이 김 반장의 콧구멍을 들쑨실 듯 들려졌을
때 김 반장은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이 양반들 두고 보자니 형편 없구만
히야 혀엉편 없다구 그래 형편 없다 어쩔래
조준구의 턱 끝이 김반장의 코에 닿을 듯 들려졌다
미성 토건 조준구 부장 정말 이럴거요
김 반장이 고함을 첵 내질렀다
직함이 노출돼버린 조준구의 기세는 당장 칼 본 자라 목처럼 쑥 기
어들고 말았다
말해요 퇴근 후부터 지금까지의 행적을
김 반장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려치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기가 팍 꺾인 취객은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황망해 했다
말해보라구요 그 시간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
김 반장은 사나운 기세로 다시 윽박질렀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바닥으로 시선을 깔았다
그러는 양을 옆에서 바라보며 잇던 주 형사가 김 반장에게 다가
와서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치들 많이 취했어요 유치장에 넣었다 아침에 심문하시죠 너
무 취했다구요
알았어
반장님 댁에 가서 눈좀 붙이세요 토끼 눈이에요
취객을 유치장으로 데리고 가면서 주 형사가 말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아 주 형사 그럼 수고해 줘
대충 책상을 정리한 후 김 반장은 파출소를 나섰다 매서운 바람이
덮쳐 왔다 네온은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현란한 색채로 밤을 장식
하고 있었다 김 반장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범인이 아닌
것 같이 보인다
누굴까 대담하게 이세준의 집 앞에서 살인을 자행한 녀석은 돈
을 노린 범행은 아니었다 이세준의 악어가죽 지갑에는 수표로만 일
천여 만 원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고 일억 원이 넘는 다이아몬드 손
목시계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에메랄드 반지도 고스란히 있었다
사망 시간을 전후로 그곳을 지나친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살인을 할 수 있는 자들로는 보이지 않는다 살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다 지나치게 겁이 많거나 아니면 그 반
대로 대담하거나 그리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무척 모질고
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살인할 생각이 있어도 최후의 순
간 포기하기 마련이다
김 반장은 이세준의 집을 떠올렸다 한마디로 굉장했다 이태리 유
명 인테리어를 불러다 공사를 했다는 실내장식은 공사비만 해도 수십
억이 들었다고 조 형사가 귀뜀해 주었을 때 김 반장은 아직도 지하
전셋집을 전전하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의 파리한 얼굴을 먼저 떠올렸
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왜이렇게 삶이 다를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누가 김 반장의 어깨를 첫다 정세진이었다 수년 전에 뽕꾼을 검거
한 후 적당히 눈감아 준 대가로 수억을 받아 챙기고 옷을 벗어버린
녀석 그후 부동산 투기로 졸부가 되었다던가 정세진의 개기름 흐르
는 얼굴이 벌쭉 웃고 있었다
여 김 반장 퇴근길인가
정세진이 묻자
그래
하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마침 잘 만났네 내가 한잔 사지
집에 들어가본 지가 너무 오래 돼놔서
무슨 소리 형사에게 귀가 시간이 따로 있나 자가세
뒤가 챙기는 사람은 원래 이런 법이란 생각을 하면서 김 반장은 마
지 못해 그가 이끄는 대로 들어섰다
어떤가 요즘
을드파르를 한 병 주문하고 나서 정세진이 묻자 김 반장은 진력난
다는 투로 대꾸했다
잘 알잖어
이 장군 피살 사건 맡았다면서
귀가 여전히 밝군 너무 알아도 탈나 적당히 눈감고 살라구
이사람 내가 무슨 염탐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관계 없는 일이야
아냐 관계 있어
관계 있다니 무슨 소리야
며칠 전에 이 장군으로부터 개인 경호에 대해 의논하자는 전화를
받았는데 내가 바빠서 만나지 못했다구 누구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
는 눈치였어
언제 일이지
죽기 사흘 전 일이야
김 반장은 수첩을 꺼내선 간단히 메모를 했다 검시 보고서가 뇌리
에 떠올랐다 두 번의 칼질 그리고 단번에 급소를 관통한 솜씨 두
꺼운 외투를 단번에 관통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예사 솜씨가 아니
다 더구나 이세준 장군이 입었던 옷은 토스카나와 그 안에는 두꺼운
양털 스웨터가 아닌가
실마리 잡은 것 있나
없어 아직은
뭐같은가
전혀 짐작도 안가
용의자도 없고
주변 인물을 중심으로 조사중이야 그건 그렇고 화제를 돌리세
자네 사업은 어떤가
요즘 죽을 지경일세
죽일 놈 김반장은 그런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양주잔을
들어 꿀꺽 마셨다 녀석의 부정 행위를 송두리째 캐서 까발리고 싶은
생각도 한번씩 고개를 들었지만 녀석은 벌써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튼튼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라마다 르네상스의 5층 객실 무료를 죽여볼까 하고 tv 에 시선을
주던 강철수는 스위치를 켰다 채널을 세 군데나 옮겼지만 인내할 수
없었다 강철수는 일간지를 가져 오라고 했다 잠시 후 보이가 일간
지를 가져왔다 강철수는 팁으로 만 원을 주었다 보이는 깍듯이 인
사를 한 뒤 문을 닫고 나가면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블러달라고 했
다
신문을 집어든 강철수는 사회면 기사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세준 회장65 피습 사망 밤늦게 귀가하던 중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자택 대문 앞에서 사망 현장을 배회중이던 두 명의 용
의자 심문 중
청담동 골목에서 고성 방가를 하던 취객이 떠올랐다 녀석들이 잘
못 걸려든 모양이다 강철수는 호텔 맞은편 건물로 시선을 옮기며 생
각했다
이세준 트라이앵글 지대에서 네놈이 저지른 행위를 생각하면 한
번 죽이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배신자들이여 기다려라
너희 더러운 뇌수에 복수의 칼날이 파고들 때까지 너희 가슴에서 더
러운 양심이 시궁물처럼 흘러나올 때까지 오랫동안 갈려진 복수의
칼날은 생선 비늘처럼 섬광을 뿜고 있다 기다려라 내 가슴에서 자
라고 있는 중호라는 맹수는 지금 우리를 박차고 나가려 한다 기다려
라 후에의 원수들 내 삶을 송두리째 파멸시킨 트라이앵글의 배신자
들 너희들 모두에게 죽음을 안겨줄 것이다
강철수는 담배를 피워믈었다 황석호의 얼굴이 빤히 떠올랐다
황석호 다음은 네 차례다 지금쯤 너는 이세준의 죽음에 대해 생
각하겠지 그리고 나를 기억할 것이다 네놈 같이 교활한 놈은 죽음
에 대한 감각만은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법이다 너의 공명심을 채우
기 위해 네놈이 희생시킨 뭇 주검 앞에 고개 숙이고 너는 속죄해야
한다 나는 네놈보다 더 간교한 짐승이 되고 네놈보다 더 사악한 악
마가 되리라 나는 독사가 되어 네놈의 혈관에 독을 부어넣을 것이
고 하이에나가 되어 네놈의 살과 뼈를 씹을 것이다 인도차이나의
저주를 너는 홀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제 네놈은 군대란 조직에서
나왔고 그 숱한 경호의 껍질을 빼앗겼으니 홀로 외롭게 복수의 칼
날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후에와 나에 가한 죄업만으로도 네놈
목숨의 값은 모자랄 지경이다
철두철미한 황석호에게도 약점은 많았다
그동안 강철수가 은밀히 알아낸 사실은 황석호는 아내 몰래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것과
아내를 살인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들이었다 강철수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푸른 연기
가 뭉글거리며 천장으로 분해되어갔다 좋은 조짐이었다 나영미가
이 호텔 카사블랑카의 단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하나의
계획을 세워두었다 강철수는 같은 방법을 사용하기가 싫었다
강철수는 방심한 듯 신문을 내려 놓았다 강철수는 진드기를 밟아
죽인 그런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살인이란 행위는 개운치 못한 뒷맛
을 남기는 법이다 순서가 뒤바뀌지 않았다면 황석호의 죽음이 대신
이 지면을 메웠을 것이다 급한 일로 황석호가 동경으로 떠나는 바람
에 이세준이가 먼저 당한 것이다 그러나 상관 없는 일이다 시차만
다를 뿐 그들은 모두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의 순서가 하잘 것
없는 이유로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은 희극적인 일이었다
강철수는 창가로 가서 앉았다 어두워진 서울의 야경에 시선을 주
던 강철수의 뇌리에 조병화의 스카이라운지가 서성거렸다
불꽃의 잔치가 열리고 있는 이 별들의 바다엔 환희와 열기로 충만
했다 반도 호텔 옥상 글라스 룸은 서울의 스카이라운지 노을이 번
지는 유리창 안에서 이국적인 사람처럼 술을 마신다 하강하는 항공
기처럼 가벼운 날개를 밤이 내리면 서울은 창밖의 북극 슬픈 고도는
부부의 화해처럼 깊어만 간다
어둠은 도시의 음험함을 은폐하고 있었다 강철수는 십수 년 사이
에 이질화된 이 도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가 살았고 그의 조상
이 살았던 이 도시는 옛모습을 빠르게 상실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걸 발전이니 기적이니 떠들고만 있지 서울의 변모가 가져 올 재앙
을 인식하는 사람은 없었다
백 년 전만 해도 왕도였던 이곳 서울은 깨끗한 아침의 도시였고
고요한 묵상의 도시였다 도덕을 숭상했던 이 도시의 사람들은 검약
과 정직을 실천하는 일과 사색과 학문을 연마하는 일이 선비의 길임
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선비만이 정치를 할 수 있고 선비만이 백
성을 복된 길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 도시에는 학
문이 성했고 사람들은 높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다 가난하게 살았
어도 섬길 왕이 있었고 지킬 규범이 있었다 사람들은 정신적 지주가
있었다
그것은 왕을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고
예절을 지키고 법규를준수하고 도덕을 숭상하는 성리학적 가치관이었다 벤츠나 볼보 없이
도 그들은 산천을 돌며 시를 을었고 강변에서 노래를 지었고 계곡
에서 그림을 그렸다
현세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와 조상들의 용렬함을 비난하는 것은 식
민 교육의 영향이었다 일본은 36년 동안 이땅을 지배하면서 우리의
선비 정신을 말살시켰고 고유 전통과 역사를 왜곡시켰다 뿐만 아니
다 그들이 이땅에 자행한 가장 음습한 음모는 수천 년 동안 백성들
의 구심점이던 왕가를 멸한 일이다 그들은 왕가를 멸함으로써 민족
의 자존심과 정신적 지주를 말살시켰다 이민족의 침략으로 왕가를
상실한 경우는 많지 않다 왕을 잃어버린 백성은 슬픈 백성이다 그
것은 역사와 전통 그리고 민족 고유의 정신을 상실한 민족인 것이
다 일본을 보라 2차대전에선 참패했지만 그들은 천황제를 보존했
다 천황의 존재는 정치적 목적보다는 민족의 전통과 역사의 상징이
며 민족적 자부심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여왕개미가 없는 개미의 집단 여왕벌이 없는 꿀벌의 집단 이들은
쉽게 분열되고 쇠뇌하고 마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 왕가를 무너뜨린
것은 왕이 있는 민족은 통치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에도 왕실 부흥의 기회는 있었다 왕을 옹립하여 국민의 집
결력과 전통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재자는 자신의 카리스
마에 영향을 줄 그 어떤 모험도 하려 들지 않았다 948년 신생 정부
의 대통령은 왕실의 보존에 대하여는 냉담했었다 그의 건국 사상엔
왕실 재건이란 개념은 들어 있지 않았다
궁궐은 남았어도 왕이 없는 궁궐 그것은 뇌수가 빠져나간 텅빈 머
리일 뿐이다 서울은 예전의 고상했던 품위를 잃고 나날이 저속해 갔
다 퇴폐의 늪으로 침잠해가는 서울은 하루가 다르게 전통 문화가
상실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답고 고요했던 옛 도읍은 사라지고 콘크
리트 구조물과 자동차의 홍수로 인해 시끌벅적한 도시로 변모하고 말
았다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졌고 매춘부처럼 타락한 도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꾸미고 춤추고 섹스에 탐닉할 뿐이다 이들을 비난
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인지 모른다 적어도 자유와 민주를 표방하
는 나라에서 사생활까지 거론한다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 될 것이다
이 도시에선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 백주 대낮에 주부를
납치해서 외진 섬에 팔아치워도 폭력배들이 독일제 칼로 경쟁자들을
난자해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억대 도박판을 벌리던 주부가 경
찰에 적발됐다는 기사 카바레에서 알게 된 사십대 대머리에게 수억
이나 뜯긴 어느 바람난 마나님의 이야기 자기 아들 또래밖에 안된
고교생들로부터 해괴한 서비스를 받던 유한 마담들이 현장에서 적발
됐다는 이야기도 이젠 사건이 되지 않았다 모든 종류의 사기 모든
형태의 폭력 모든 경향의 파렴치 모든 종류의 범죄가 일어날 수 있
는 도시 이것이 서울이다
그러나 이 도시라고 해서 이런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
울은 어떻게 보면 정말 좋은 도시이다 서울은 숱한 별들을 배태하
고 숱한 신화를 창출하고 있는 도시다 환상과 낭만이 어우러진 도
시 이곳엔 이 나라 65의 부를 소유한 5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도시는 풍족하고 여유있고 세련된 냄새를 풍긴다 최고
급 호텔들이 있고 향락 시설이 있고 거리에는 어느 나라 여인에 견
주어도 손색이 없는 미녀들이 활보한다
전화벨이 울렸다 웨이터 녀석이 나영미가 클럽에 나타났다고 알려
주었다
강철수는 방을 나섰다 그는 클럽 카사블랑카로 향했다
정신들 좀 들었어요
김 반장은 테이블 건너에 앉아 있는 조준구와 신영수쪽을 건너다
보며 물었다 꼬박 날밤을 지샌 두 사람은 대가리같이 머리가
부시시한 게 꼴이 말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조준구가 토끼 눈을 뜨며 믈었다
살인 사건이 난 시간에 그 현장을 두 분이 지나갔기 때문에 조사
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살인 현장에 이 봉투가 떨어져 있었구요
김 반장이 노란 서류봉투를 보여 주었다
이 봉투가 그 곳에
조준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렇소 그래서 묻는 겁니다
우린 사건과 상관이 없어요
조준구는 피로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어제 저녁 시부터 1시까지의 행적을 말해보세요
내가 말하리다
신영수가 지난 밤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퇴근 길에 두 사람은 청담동 시장 곱창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이
차는 월선옥에서 동동주를 마신 뒤 삼차는 준 카페에서 양주를 몇
잔 마셨다 그 뒤 길바닥에 토하고 오줌 누고 그런 내용이었다
사모님 이름이 주영애씨 맞습니까
김 반장이 신영수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런데요
신영수는 놀란 눈으로 김 반장을 올려다 보았다
사모님과 이세준씨와의 관계를 언제 알았습니까
김 반장은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관계라뇨
신영수의 눈동자가 한껏 커졌다
언제 눈치챘죠
김 반장이 되물었다
무슨 소립니까
정말 눈치채지 못했단 말입니까
김 반장은 신영수의 표정을 읽으며 이 사내는 아내의 불륜을 모르
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걸 직감했다
신영수는 아내의 행적이 퍼뜩 떠올라 다시 반문했다
눈치라뇨
정말 모르세요
말해보세요 무슨 일입니까
신영수는 답답한 듯 되물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테니 미리 말씀드리죠 사모님과 이세준씨
는 일 년 전부터 앨리강스 마담의 소개로 알았더군요 이세준씨가 피
살되던 밤 사모님은 9시부터 11시까지 이세준씨와 힐사이드 호텔에
함께 투숙했다가 청담동 부근에서 헤어졌음이 밝혀졌어요 우리가 당
신들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죠 아내의 정부에 대한 복수심이 없는
사람이 있나요 모른다니 별 수 없지만 그 시각에 사건 현장을 지
나간 사람은 당신들 뿐이니 혐의를 둘 수밖에요
신영수는 쇠망치로 뒷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아내의 의상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를 동창생인 애경이가 준
것이라 둘러댔지만 김 반장의 말을 듣고 보니 의심이 한껏 부풀어갔
다
징벌이다 시골에 있쓸 때만 해도 아내는 얼마나 소박했었나
신영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김 반장은 신영수의 태도를 보
며 생각했다
이 사내는 사람을 죽일 자가 못된다 더구나 대검으로 사람을 살
해할 그런 위인은 더욱 아니다 그럼 누굴까 누구든 녀석은 대담한
놈이다 천하의 이세준을 집 앞에서 대검으로 살해한 녀석은 어떤 자
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김 반장은 서장실로 들어섰다
어때
서장이 결재 서류에서 시선을 떼면서 물었다
아닌 것 같습니다
김 반장은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서장이 짜증 석긴 표정으로 물었다
일단 귀가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진짜야
그런 것 같습니다
공연한 사람들 헛고생시켰군
봉투 때문입니다
술 때문이지 그나 저나 큰일이야 위에서는 닦달이구 빨리 손
써야지 전화통이 불날 지경이라구
김 반장도 알고 있었다 사건 후 상급기관에서의 관심과 독촉은 지
나칠 정도였다 정보부의 요직을 지낸 이세준의 권력 기반은 여전히
막강했다
짚이는 거 전혀 없나
아직은요
복잡한 사건이 될 것 같아 이세준 장군 동기들이 여러 명 전화
했었어 정신 차려야겠어
가보겠습니다
조심해
서장은 결재 서류로 시선을 주었다
김 반장은 취객 두 사람에게 귀가하라고 말했다 간밤의 호기는 어
디로 갔는지 두 사람은 힘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고약한 사건임에 틀림없다란 생각을 하면서 김 반장은 이세준의
가족 상황이 적힌 서류와 각종 수사 자료에 코를 박았다
이상해
보안 사령관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믈러난 정인기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뭐가
황석호의 묻는 시선이 정인기의 검붉은 얼굴로 향했다
이상하다구
정인기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이상하다 그래 술이나 들자구
허세조 사장이 정인기의 말허리를 자르며 술잔을 들었다
무작정 넘어갈 일이 아니라니깐
정인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럼 뭐야
허세조가 반문했다
단순 강도는 아니잖아
정인기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짚이는 게 있어서 그러는 거야
허세조가 짜증난다는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도 검시관의 말 들었지
정인기는 심각한 표정이다
심장이 아니었나
황석호가 대답했다
수법이 유사해
정인기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유사하다면
자네들이 더 잘 알테지 살인 전문가들 아닌가
황석호는 정인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트라이앵글 패거리 중에 생존자들이 있다면 문제는 심각해질 것이야
황석호는 술병이 즐비한 테이블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강철수가 살
아있다면 재앙이다 황석호는 불안한 생각을 털어내면서 양주잔을 거
푸 기울였다 마실수록 알콜은 대뇌의 피질을 마비시켰고 괴로운 기
억은 차츰 망각하게 만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여러 병의 시바스 리갈
이 얼음 속에 채워져 있었다 이들은 시바스 리갈이 들어있는 잔에
얼음을 넣지 않고 얼음 속에 시바스 리갈 병을 넣어 냉각시킨 다음
물처럼 마셨다
그들의 옆 자리엔 미끈하고 곱기가 씻은 쌀알 같은 스물 안팎의 영
계 들이 앉아 있었다 미스 지의 탄력있는 작은 젖무덤을 만지작 거
리던 황석호는 차츰 혈액이 한곳으로 몰리는 걸 느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엔 이세준의 죽음으로 생긴 석연치 못한 의혹이 자라고 있었
다 월남전 당시 트라이앵글 지대에서 작전에 참여하던 부하들을 제
거하도록 명령을 했던 이세준 신형철과 강철수 녀석들이 배신한 상
관에 대한 보복을 시작했다면 그 불똥은 자신에게도 틸 것이다
회장니임 뭐가 그렇게 심각하셔요
미스 지가 눈으로 웃었다
어 아무것도 아니다
한 잔 주셔야죠
미스 지는 잔을 들며 응석을 부리듯 코맹맹이 소리를 했다
그러지 자아
잔에 술을 붓고 나서 황석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껴안았다 그것
은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미스 지같은 여자는 드물다 시들해진 그 방면의 욕망을 부추기는
데 그녀는 천재적이었다 두달 전 그녀에게 아파트를 사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아내는 지나치게 풍만했지만 미스 지는 작고 예뻤다 또
한 젊고 발랄했다 산나물 같은 계집이었다 나영미처럼 남자들의 일
에 참견하지 않았다 그들 주로 예비역 장성의 모임회합 내용
을 녹음한 테이프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들의 원대한 계획은 무
산됐을지도 몰랐다 아내는 무슨 이유로 회합 내용을 녹음했을까 질
투 때문이었을까 미스 지를 계속 만난다면 이것을 공개하고 말겠
어요 하며 나영미는 그를 위협했었다 김태수 영감은 위험한 여
자야 알아서 처치하라구 했다 깜상은 회장님 무얼 신경쓰십니
까 큰 걸로 두 장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이랬다
두 장이라 나쁘지 않다 아내를 뒤에서 부추기는 박 변호사 녀석
도 손봐 줘야 할 놈이다 위자료로 이백 억이라니 젊은 제비 녀석들
과 놀아나고 남편의 비밀을 캐면서 무덤을 파는 계집에게 말이다 빠
를수록 좋다 미스 지도 안달이 아닌가 깜상이 나영미를 어떻게 하
든 알 바 아니다 팔아먹든 죽이든 말이다 그건 그렇고 태수 영감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다시 한번 일선에 복귀해서 보낼 놈은 보
내고 주물러 줄 놈은 주믈러 주어야겠어 태수 영감은 말했었다
때가 있는 법이오 자중하고 기다리시오 좋은 시절 올갭니다 황
석호는 김태수에게 건네준 돈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일이 잘되면
3십 억은 조족지혈이 아닌가
아유 회장님들 오셨어요
애뜨랑제 마담 성희경이 룸으로 들어서며 요란스럽게 인사를 했다
은퇴했지만 그녀는 한때 충무로를 주름잡던 은막의 신데렐라였다 나
이는 들었어도 성희경의 미모는 예나 다름없었다 이곳 술집의 영계
들이 한결가치 특급인 것은 그녀의 이러한 과거 경력 때문이었다 그
녀는 좌석을 빙 돌아가면서 술잔마다 시바스 리갈을 채웠다
살롱 애뜨랑제
술맛나게 하는 술집이었다 20여 억을 들여 루이 14세의 내실과
터키의 별궁을 본따서 치장했다는 이곳은 화려하다는 말로는 미흡할
지경 이었다 술판의 끝말 무렵 300여 만 원 정도의 계산서가 나와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한번의 술자리에 1000만 원권 자기앞 수표가 댓
장이나 생겨서 그런가 이곳 영계들의 애교는 간이라도 빼줄 듯했다
누가 그랬나 쓸만한 녀석은 감옥에 있고 쓸만한 계집은 술집에 있
다고 황석호의 허벅다리를 만지는 척하며 은밀한 부분을 눈뜨게 하
고 있는 미스 지는 여대생이었다 그녀와는 술자리가 끝나는 대로 청
평 리조트로 갈 것이다
황석호는 이 도시에서 사는 게 흡족했다 30평의 대지에 성채처럼
세워진 20평의 삼층 건물 그리고 골동품들 소장품 중에는 신안 앞
바다에서 건져낸 송대 청화백자도 더러 있었다 아들이 하나 있어야
겠는데
황석호가 나영미를 후려낸 것은 나영미의 미모도 물론이지만 건강
한 그녀라면 튼튼한 2세를 볼 수 있다는 그런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7년이 지나도 임신의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사장님 전화왔는데요
웨이터 녀석이 말했다
사장님 접니다
깜상 녀석이었다
왜 전화질이야
사모님이 블랙 호스로 들어갔는데요
알아서 처리해 뒤탈없이 깨끗하게 끝내버려 다시 전화질 말구
저희들 마음대로 처리해도 된다는 말 틀림없습니까 죽이거나
이녀석아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지 않았나
황석호는 낮은 소리로 질책했다
아 알겠습니다
자리에 돌아온 황석호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끝낼 바에는 빠를수
록 좋은 것이다 황석호는 음산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김남구 사장을 쳐다 보았다 멍청한 녀석 하고
입속에서 맴도는 경멸을 양주에 석거 마셨다
말도 말라우 사람 구하기가 별따기야 이거이 덩말이지 못해 먹
갔어
작은 전자부품 공장을 하고 있는 김남구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투덜거렸다 그 어른에게 미움을 산 것부터가 그에게는 재앙의 시작
이었다 그런 일이 없었으면 국영기업체 사장 자리 하나쯤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쓸 만큼 긁어 모아서 하산하는 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술자리에서 나사가 풀려 머리털 운운하다가 눈에 칼을 세운 어른의
표정을 못본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었다 어른이 자리를 박
차고 나가버린 후 그는 벼락맞은 소얼굴을 했지만 이미 물은 모래바
닥에 쏟아지고 만 셈이었다 어영부영하는 동안 군복을 벗기운 그는
털빠진 개꼴로 내쫓기고 말았다 강제로 전역된 그와 같은 사람은 쳐
주지도 않는 법이었다 그가 회사를 차릴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핸디
이하의 고수라는 것과 정직하고 순진하다는 이유로 동료들의 도움
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둑놈과 사기꾼일수록 정직하고 순박한 사람
을 알아보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법이 아닌가
일하는 애들이 다 어디로 가는가 하고 봤더니 아니 갸들 유흥가
로 흘러간다는 이야기야 니래서 어디 해먹갔어 나라 꼴은 어떻게
되갔구 말이야 땀 홀리면서 돈벌 생각은 하지 않구서리 몸팔아 돈번
다는 생각 이거 덩말 위험 턴만한 사고방식이라구 그리고 또 말이
야
일손이 없어서 수출에 타격을 받고 있다는 김남구 사장의 넋두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황석호는 술잔을 옆에 앉아 있는 지에게 내밀었다
제조업 근로자들이 환락가로 흘러 들든 사창가로 굴러 떨어지든 그
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여자가
수요보다 공급이 많다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기업가는 바보다 걸핏
하면 노사 분규다 뭐다 들고 일어나 회사 전체가 들썩거리고 부도
나고 도산하고 자살하고 도망가고 그런 고생을 왜 사서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임태호 사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좀팽이 녀석 입안에서 욕이 괴여갔다 중권투기로 3십 억을 날
렸다고 똥퍼먹은 곰 상판대기다 아이들을 시켜 조사해 보았더니 녀
석은 강남뿐만 아니라 청운동 역삼동 압구정동의 노른 자위 땅이란
땅은 가리지 않고 죄 주워먹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토초세로 인해
초토화가 될 판이다 세무서에 아는 선을 통해서 알아보았더니 이번
에 2억이나 추징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5남매의 이름으로
사놓은 남해안 무인도들이 세원으로 포착되어 자금의 출처를 조사당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돈을 걸태질하는 데는 악마적인 교활함을 갖고
있어도 그걸 요리하는 데는 쑥맥이었다
황석호는 주식이 폭락할 기미가 보이기 직전인 89년 말경 가지고
있던 주식을 모두 처분했다 모두 2백 억 정도가 되었다 이돈으로
폭락해 있던 신축 아파트를 매입했다 아파트를 산 지 6개월 후 주식
이 폭락하면서 아파트 값은 천정 부지로 뛰어 4천 정도에 매입
한 42평 아파트가 잠깐 사이에 2억이 되었다 남의 이름을 빌려 아파
트를 사고 팔면서 그는 9백 억 정도의 차액을 챙길 수 있었다 그리
고 이를 사채 시장에 풀었다
호주 영주권을 낸 것은 이럴 즈음이었다 그는 한반도의 장래를 낙
관하지 않았다 비록 반세기도 안되는 단절 기간이었지만 분단된 두
지역의 이질화의 골은 너무 깊었다 언어마저 서로 생경하게 변화되
었고 가치관의 차이는 일반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한
쪽은 발전했고 한쪽은 가난해졌다 부유한 쪽과 가난한 쪽의 대치
상황 이것은 불안의 요소임에 틀림 없었다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
고 동족끼리 대치해야 하는 일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여유
가 있는 사람들은 날개를 마련한다 장래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황석
호도 언제든지 이 나라를 뜰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는 행운아다 세
상에서 자기처럼 많은 돈을 감쪽같이 굴리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다 아내인 나영미 조
차도 몇 백 억 정도의 졸부로 알고 있을 것이다 3년 전에 인수한 하
이테크 회사는 견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돈이 돈을 낳는다란 말이
그에게 있어서는 귀신같이 들어맞는 말이다
도산 직전에 헐값으로 인수한 그 회사는 일 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
고 매출액은 2억 5천만 달러를 넘고 있어서 소일거리로는 제격이었
다 회사를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누군가 위에 군림해야 살맛이 나
는 천성 때문이었다 회사 직원들에게는 후하게 대우해주는 편이다
500명 정도의 기능직 사원과 60여 명 정도의 관리직 사원은 더욱 일
들을 잘해주었고 매출액은 매달 견실하게 중가하고 있었다 그는 사
업 확장이나 시설 투자는 생각하지 않았다 기업을 더 이상 키울 필
요가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발목 잡히기 십상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내심을 모르는 임원들은 주문량이 쇄도하는데 생산 시
설을 확충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지만 그는 최고의 품질을 만드는 것
이 생산량을 늘리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과제라면서 적당히 넘겼다
그러다 보니 제품은 불량률이 현저히 떨어졌고 상품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졌다 달포 전에는 클레임이 적은 기업에게 주는 모범 기업
가 상을 받기도 했다
돈만 있으면 황제가 부럽지 않는 서울 서울은 그에게 정말 멋진
도시가 아닐 수 없다
황석호가 룸살롱 애뜨랑제에서 이런 생각을 하며 양주잔을 비우는
그 시간 블랙 호스에는 중년 여인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블랙 호스란 이태원 골목에 위치한 최고급 호스트바였다 이 술집
은 여론에 못 이겨 몇 번 단속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단속이 일과
성이라 집중단속 기간만 피하고 나면 블랙 호스는 별 지장없이 영업
을 계속할 수 있었다 부유층 여성 고객만을 상대하는 이곳은 다른
싸구려 호스트바와는 달랐다 여성 고객을 상대하는 남자들은 대학생
이거나 아니면 일정 수준 이상의 젊은이들이었고 모두 헌칠했다
이곳 블랙 호스의 하루 저녁 매상은 주인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서너 명의
여인들이 이곳에서 기분좋게 마시기 위해서는 술값만도 기백만 원은
있어야 하고 남자들에게도 상당액의 팁을 주어야 뒷머리가 가렵지
않았다 그래서 이집을 출입하는 유한 마담들은 서울 장안에서 모두
내노라 하면서 방귀깨나 내지르는 위인들이었다
블랙 호스 주인 최삼태는 한때 장안을 주름잡던 주먹이었다 그는
모 나이트클럽의 경영권을 사이에 놓고 벌어졌던 치열한 쟁탈전에서
상대편 행동대원들로부터 온몸을 난자당한 뒤 동경으로 날아가 잠시
숨어 지냈다
삼태가 동경에 머물던 어느날 그는 야쿠자 중간 보스 구로 마사
오로부터 신주쿠에 있는 흑마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흑마는
일본 최고의 부유층 여자들이 젊은 사내와 은밀히 성애를 즐기는 곳
이었다 흑마로 찾아간 최삼태에게 구로 마사오는 하나의 사업을 제
의했다 흑마의 지점을 서울에 내고 싶다는 것과 최삼태더러 지점을
관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최삼태는 쾌히 응했다
블랙 호스는 문을 열자마자 대성황을 이루었다 최삼태는 구로 마
사오의 후원으로 조직을 재건했고 정계와 여러 기관 등 소위 끗발
있다는 줄은 죄다 잡아두고 있었다 집중 단속이 있는 경우 임시 휴
업을 하거나 밀실 영업을 했기 때문에 블랙 호스는 단속반에게 걸리
는 경우가 드물었다 최삼태는 이곳을 찾아오는 여자 손님들이 안심
하고 즐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황녀처럼 떠받들면 붕 뜬 여자
들은 돈을 물처럼 펑펑 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중년 여인들은 양주를 홀짝이며 앨범에 있는 사진들을 보고 있었
다 강 여사가 더 못참겠다는 듯 깔깔 웃었다 맵시 았는 손으로 입
을 가린 채 송 여사도 낄낄 웃음을 삼켰다 김 여사는 더 참지 못하
고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나영미는 그녀들처럼
대 놓고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알코올의 영향인지 앨범에 있는
사내의 나신 때문인지 가슴이 괜히 달뜨기 시작했다 앨범에는 사내
의 그 부분을 크게 클로즈업한 사진도 있었다
이녀석 꽤 쓸만 하겠는데
강 여사는 그것이 유난히 돋보이는 사내를 가리켰다
송 여사 어느 거로 할거야
강 여사가 야한 표정으로 물었다
호호 강 여사님께서 먼저 고르시구랴 난 천천히 고를 참이니깐
아냐 오늘은 내가 대접하는 자리니 송 여사가 먼저 고르지
그럴까요 7번 녀석 괜찮겠는데
송 여사는 유부녀와 통정을 함으로써 한동안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
던 어느 가수처럼 생긴 녀석을 지적했다
강 여사가 김 여사에게 물었다
이녀석으로 할까
그녀는 강 여사가 쓸만 하다고 했던 사진을 가리켰다
나 여사는 어느 걸로 할래
강 여사가 나영미에게 앨범을 건네주면서 물었다 갑자기 혐오감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어느 것으로 통하는 수컷들 그들은 이미 남
자의 자존심을 포기한 짐승들이었다 자존심을 포기한 한갖 짐승인
남자와의 성회란 무의미한 짓이요 그 결과 마음속에 남는 개운치 못
함은 견딜 수 없는 혐오이기도 했다
어서 골라봐 이녀석 아니면 이녀석
나영미는 강 여사가 건네준 사내들의 나신과 팽창해있는 성기에 시
선을 주면서 이런 타락한 의식은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서 시작된 것
일까 생각해 보았다 이런 행위들은 모계 사회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
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잠재된 샤머니즘적 성기숭배 사상이거나 남
근은 풍작을 기원하고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기 위한 상징믈이었다
그런 신앙의 대상이 이곳에선 혐오스런 형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다
그녀는 젊은 사내들의 나신을 응시하고 있는 강 여사를 생각했다
여자란 돈과 시간 여유가 많고 외롭게 되면 이런 방면으로 빠지는
모양이다 할 일이 없고 건전한 취미가 없으면 그리고 아는 것이 없
으면 그 허전한 공간을 이와 같은 동물적인 성희로 메우려 드는지 모
른다 어서 골라봐라며 그녀를 다그치는 강 여사만 해도 그렇다
허구헌 날 젊은 계집의 엉덩이를 쫓아다니던 남편이 어느날 교통사고
로 죽자 그녀에게는 몇 백 억이란 엄청난 유산이 고스란히 넘어왔
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거짓말같이 잠깐이라던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남편의 외도는 아내에게 어떤 중호를 심어주는 것인가 절실히 느꼈
다
강 여사는 매우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가끔 털어놓았다 그 참담했
던 세월에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돈을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같아 보였다 그녀는 삶을 최대한 즐기고 있었다
오전에는 골프를 친 후 사우나를 찾는다 그곳에서 남자 안마사로부
터 안마를 받는다 그리곤 호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런
후 그녀는 낮잠을 좀 잔다 잠에서 깨면 그녀는 한 시간 정도 가볍게
수영을 한다 수영이 끝나면 미장원으로 간다 그리곤 저녁을 먹는
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사람들을 블러 모온다 모두 그녀처럼 돈이
많고 허전하고 타락한 중년 여인들이다 그녀들은 화투를 치고 나서
이곳 호스트바를 찾는다 그녀들은 고독을 마치 끔직한 병처럼 생각
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니 뭘하고 있어
강 여사가 다시 채근하자
아무나 괜찮아요
라며 나영미는 술잔을 잡았다
그래 알았어
강 여사는 인터폰으로 사진에 적힌 사내들의 번호를 말했다 잠시
후 네 사람의 헌칠한 미청년들이 방으로 들어섰다 하나같이 씻어다
논 배추줄거리 같이 허연 얼굴의 젊은 남자들이었다
강 여사는 젊은 사내들에게 넌 저기 넌 저기 이런 식으로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남자들은 강 여사의 말에 길든 동믈처럼 고분고분하
게 순종했다 청년들은 여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온갖 서비스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정이었다 술병이 몇 병이고 비워지자 넓은
방의 분위기는 점점 음탕한 경향으로 흘렀다 강 여사는 갑자기
야 너희들 바지 홀랑 내려
하고 외쳤고 사내들은 거역하지 못했다 여자들은 사내들의 꼴을
손가락질하면서 눈믈까지 흘리며 까르르 넘어갔다 그리고는 별별 해
괴한 짓을 다 시켰다 남자들은 잘 길들여진 개처럼 여자들의 잡다한
요구에 순응했다 강 여사가 건네줄 백여 만 원의 팁은 젊은 남자의
자존심쯤은 한방울 이슬처럼 중발시켜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성의 노리개로 전락한 청년들도 술을 마시기 시작하자 그들은 수치
고 뭐고 없이 여자들이 하자는 대로 응해주기 시작했다 강 여사의
옆에서 강 여사의 모든 주문을 고분고분 들어주는 젊은 녀석은 강 여
사의 둘째 아들뻘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 여사는 그런 것
을 개의할 만큼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이러한 종류의 광란적인
유회는 오랫동안 남성들로부터 억압받아온 여인들 속에 잠재되어 있
는 남자에 대한 복수 심리인지 모를 일이다 이런 분위기에 식상해진
나영미는 속이 갑자기 거북하다는 핑계를 대고 블랙 호스를 나오고
말았다
나영미는 남대문로 쪽으로 차를 몰면서 남편 황석호의 얼굴을 떠올
렸다
남편 황석호가 애뜨랑제의 미스 지와 청평 리조트에서 지낼 것이라
는 말을 김 주임으로부터 듣는 순간 그녀는 외박하기로 작정했다 그
래서 강 여사네를 만나서 화투를 첫고 한 삼백 잃어주었다 이천여
만원 정도를 따낸 강 여사가 장원주를 내겠다며 데려간 곳이 블랙 호
스였다 블랙 호스를 나왔어도 그녀는 갈 곳이 마땅찮았다 아이라도
있었다면
나영미는 테헤란로로 핸들을 꺾었다 흥신소 김 주임을 만나고부터
그녀는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사모님 애뜨랑제 미스 지
란 기집애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애요 집에 가셔서 녹화한 것 보세
요 이러며 김 주임은 녹화 테이프를 건네주었다 녹화 테이프를 보
던 나영미는 파랗게 질려갔다 남편 황석호와 온갖 체위로 그짓을 하
던 젊은 년이 하는 말은 가관이었다
회장님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만날 수 없어요 제 자존심도
생각해 주셔야지요
염려 말라구 곧 처리돼
황석호가 숨가쁘게 말했다
처리라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나 낳을 꿈만 꾸면 되는 거야
나영미는 어이가 없고 불안해졌다 처리란 무얼 뜻하는 걸까 그렇
다 만일 황석호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뒤를 밟아서 불륜의 현장을
잡는 일쯤은 식은 죽먹기였다 그러나 체면을 중시하는 황석호였다
그런 식으로 처리할 위인은 아니다 혹시 그자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면 나영미는 닭살이 돋아 올랐다 미스 지가 다시 황석호
의 비만한 배 위로 기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세차게 몸을 움직여
갔다
나영미는 비디오를 꺼버렸다 무섭고 분했다 황석호는 산나믈 같
이 톡 쏘는 애뜨랑제 미스 지가 좋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나영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비디오의 장면이 망막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서른 두 살이라면 한창 나이다 쉐이브 로션 냄새만 맡아도 가슴은
야릇하게 울렁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그녀다 수영과 승마 그리
고 에어로빅으로 단련한 고무공 같이 탄력있는 육체 나영미의 건강
한 몸은 비명이라도 지를 듯 정열에 불타고 있었다 남편과의 잠자리
에서 이런 정염의 불을 끈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녀는 남편과의 잠자
리에서 한 번도 여자의 기뿜을 느끼지 못했다 가끔 카바레에서 만나
는 젊은 애들과 어울려 느끼는 절정감도 자위 행위만 못한 느낌이어
서 뒷맛이 개운치 못했다
그녀가 끌리는 사내들은 그녀에게 접근하는 걸 두려워했다 너무
아름다웠고 세련되어 보였기 때문일까 미스 지라는 그 기집애가 임
신이라도 하는 날이면 황석호는 감쪽같이 자신을 없앨지 모를 일이
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음험한 방법으로 말이다 그렇게 당해서는
안된다 내쫓기거나 죽음을 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영미는 입술을
깨믈었다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음주벽 도박벽에다 의처증까지 심한 아버
지의 구타를 견디지 못한 그녀의 어머니 청주댁은 두 남매를 데리고
야밤에 집을 나오고 말았다
을 시작했다 나영미가 국민학교 학년 남동생 영남이는 다섯 살 되
던 해였다 춘천에서 땅부자로 이름난 황부자를 청주댁이 만나게 된
것은 그무렵이었다 나중에는 재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영남이가 집을 나가 버렸다 몇 년 동안 동생의 행
방을 알기 위하여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몇 년
뒤 황 사장과 사별한 청주댁은 서울로 올라왔고 여지껏 아들을 찾기
위해서 방송국 등을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청주댁은 잃어버린 아들
때문에 잠도 편히 자지 못하고 늘상 눈물을 찔끔거렸다
살아 있다면 서른이구나 영미야 영남이 꼭 찾아라 왼손 식지
첫째마디가 없다 꼴베는 작두에 잘려 나갔다 오른 쪽 귀 밑에 콩알
만한 검은 사마귀도 있고
나영미도 남동생을 찾기 위해 남편인 황석호까지 동원해서 전국 고
아원과 아동 보호소를 다 뒤지다시피 했지만 동생에 대한 기록은 찾
을 수가 없었다 25년 동안 어머니는 남동생 때문에 한 번도 웃지 못
했다
아이고 어느 하늘 아래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청주댁은 나영미를 볼 때마다 동생을 찾지 못한다고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생활이 나아지고 여유를 찾을수록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집
념이 더욱 강해지는 모양이었다
차는 을지로 입구를 돌아 남대문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교통 체증
으로 차는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었다 회현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 교통사고가 난 모양인지 교통 순경들이 분주하게 차량 사이를 헤
집고 다니며 호각을 연신 블어대고 있었다
나영미가 청부 살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은 어느날 신문지상에
났던 이모란 부동산 투기꾼이 살해된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나영미
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황석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영미는 이런 막
다른 생각까지 해야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돈의 위세에 눈이 멀
었던 자신 그 아름다웠던 시절의 모든 걸 돈에 팔아버린 어리석음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은 무덤과 같은 것이라는 걸 그녀는 깨닫게 되
었다
지난번 친구 지숙이 집에 갔다가 그녀는 부러워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 했었다 동창생인 기수란 남학생과 학생 시절부터 연애를 하
던 끝에 결혼했을 때만 해도 나영미는 지숙이가 너무 어리석다는 생
각을 했었다 사랑이 뭔데 연애와 결혼을 혼동해서는 안되는 거야
연애는 연애로 끝내고 결혼은 현실이야라며 지숙이를 타이르기도 했
던 나영미였다 그러나 지숙이는 결혼하고 나서 이태쯤 후 우연히 찾
아간 나영미에게 사내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영미야내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까
뭔데
우리 그이 있지그렇게 오래 연애하면서도 내 몸엔 손을 안
댄다고 했었잖아 기억나
그래 기억나 왜
있지 결혼 첫날 밤에 그걸 할 줄 모르는거야 나도 몰랐구
그랫서 그날 밤은 무사히 지나갔지 그 뒷날 어쨌는 줄 알어 맣찬
가지야 밤새 여러 가지로 자세를 취해 봤지만 안되는 거 있지 그
렇다고 나도 모르는데 내가 어쩌자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그래서
둘째날까지 아무 이상없이 무사히 지나가자 그이도 초조해 하
고 나도 괜히 속이 상하드라 그래서 함께 간 신혼여행 팀 중에서 경
숙이라고 하는 애에게 물어봤지 그랬더니 어쩌구 저쩌구 가르쳐 주
는 거야 삼일 째 되는 밤 내가 거의 리드하다시피 했거든 처음엔
난 정말 실망했었어 그 당시는 너무 아프고 뭐 이런 걸 가지구 별
이 왔다갔다 하고 공중에 붕 뜨고 땅이 흔들거릴 듯한 쾌감이 있고
엉엉 울 수 있도록 좋다고 하는지 정말 알 수 없더라니깐 그래서 신
혼 여행에서 돌아오며 슬며시 몇몇 신부들과 이 문제에 대해서 의견
을 나누어 보았더니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거야 그리고 나보구
행운아라고 하더라 왜냐구 진짜 숫총각을 잡았다는 거야 호호호
요즘은 그이 정말 잘해 나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에 나오는 마
리아와 같은 느낌을 가끔 느껴 망디아르그의 오토바이에 나오던 레
베카 보다는 못하지만 호호호
3남매의 어머니가 된 그녀는 비록 전세 아파트를 전전했어도 건강
하고 소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부부싸움도 열심히 하고 바가
지도 바글바글 긁어가면서 사는 것같이 산다고 했다 유치원에 다닌
다는 영식이란 아이의 동그란 눈을 들여다보며 아 사는 게 별 게
아니구나 돈이라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크게 깨달은 적이 있었
다
그러나 지금나영미는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별종으로 변신해 있
었다 미장원 헬스 클럽 수영장 골프 승마 경마장 의상실 회
투나 포커 카바레 술집 등을 출입하는데 드는 비용이 매월 천여 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그녀는 이미 일반 가정주부들 생활의 범주를 벗
어나고 있었다 사치와 허영 그리고 거침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생활
에 빠져버린 자신을 보며 마치 마약중독자가 느끼는 자기 불신과 혐
오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고 자기 자신의 나약한 의지에 대해서 절망
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영태를 생각했다 황석호와 결혼하면 둘다 죽여버리겠
노라고 울부짖던 영태 만약 시간의 톱니바퀴를 과거로 돌릴 수만 있
고 지금의 타락한 소비 습성을 알지 못할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
다면 그러나 그런 걸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과거
에의 회귀는 허망한 망상일 뿐이었다 영태가 살았더라면 그는 연출
가가 되었거나 아니면 글줄이나 쓰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득량만
에서 수중 작업을 하다가 영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남
편과 함께 한달 동안 유럽 여행을 다녀 온 후 며칠 지나서였다 지숙
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기집애 영태 소식 들었어
아니왜무슨 일이 있어
득량 바다에서 작업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대
뭣심장마비
영태 친구 준구말로는 자살이라고 하드라
그때 나영미는 자기 내부의 어떤 부분이 몽텅 잘려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황석호와 결혼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을 때 그녀는 적당한 기
회를 틈타서 이혼하고 영태와 재결합한다는 구상을 제멋대로 하고 있
었다 그 뜻을 지숙이에게 말했을 때
그래 잘 생각했어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드라구 적당히
가난하게 살면서 갈등을 느끼며 살아야 사는 맛을 안다구 누가 그
랬잖어 배부른 돼지보다 굶주린 소크라테스갸 되겠노라고 말이야
돈 죽을 때 가져가니 알몸으로 태어나 수의 한벌 입고 가면 족한
거 아니니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더라 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낙
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말이야 넌 얼굴 이쁜애답지
않게 낭만적인 구석도 있구나
낭만이라 나영미는 다시 핸들을 꺾으며 중얼거렸다 나영미와 영
태는 문예 동아리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나영미가 동아리에 가입한
것은 문학에 대한 소질이 있어서라기 보다 글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세련되어 보였고 유머 감각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영미보다
2년 선배인 영태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는데 자기가 쓴 작품에 대
해 언제나 불만이었다
합평이 끝난 어느날 나영미는 의기소침해진 영태를 뢰벤브로이로
데려갔다
왜 얼굴이 그래 걸레 씹은 얼굴이네
난틀렸어
아까 작품 좋던데
야 그게 어디 축에나 끼냐 쓰레기지
경식이가 한 말은 뭐야 걔도 신춘으로 나갔다며
미안하니까 그러겠지 속으로 그랬을 거야 장영태 고작 그
정도냐 좀 알맹이 있게 쓰고 좀 새로운 내용 썹는 맛이 있는 문
장 그리고 참신한 내용 전개 뭐 그런 것 좀 없냐 하고 속으로 비
웃었을 거야 아 술 한잔 따라다오 이 사이비에게
영태는 걸신들린 듯이 마셨다
영태가 괴로워할수록 나영미는 자신의 영혼까지 주고 싶도록 그에
게 매력을 느꼈었다
공교롭게도 신호에 잘 걸렸다 라마다 르네상스로 가자 라는 생
각이 든 것은 이 순간이었다 영태의 환상을 지우기 위해선 뭔가 좀
덧 화려하고 딜럭스한 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신호가 바뀌자 나영미
는 다시 액셀을 힘차게 밟았다 남자를 차처럼 바꿀 수만 있다면
스텔라를 타는 기분과 벤츠를 타는
기분이 다르듯 남자도 그럴
것인가 벤츠는 힘차고 강하다 마치 말처럼 말이다 그녀는 영태처
럼 강한 남자가 필요하다 라마다 르네상스엔 그런 남자가 혹시 있을
지 모른다 지금쯤 남편은 리조트에서 미스 지와 어줍잖게 그짓을 하
고 있겠지 흥 그러나 마나다 나도 그보다 더 멋지게 할 수 있으니
까 영태를 생각할 때마다 경마장에 있던 종마가 생각났다
영태와 호텔에서 잔 것은 영태가 군에 가기 전날 밤이었다
야 너 정말
영태는 눈이 둥그레졌었다
왜 미인 대회에 나가려면 순결해야 한다는 것쯤을 알고 있
어야 되잖어 메이퀸에 대해서 영태씨 오해하고 있었어
영태는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왜또 그래
묘한 기분이야 난 마치 병아리를 밞아 죽인 느낌이 들어
말하지 않아도 돼 팬히 미안해 하고 부담 같은 거 느낄 필요
없어 자의적 행동이었어 난 영태씨에게 오히려 감사해 이 난각을
벗긴 벗어야겠는데 아무에게나 주어버리기엔 너무 허망했어 내
가 영태씨를 죽자 살자 사랑해서 이런 것은 아냐 술을 마셨고 분위
기 때문에 충동이 일었고 또 영태씨가 끌고 왔고 그것이 뭘까 하는
호기심이 있었구 그런 이유야 복잡하게 생각마 난 내 순결을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버렸다고 생각해
영태는 몇 번 편지를 보내 왔지만 나영미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졸업하고 나서 나영미는 어느 무역회사 광고기획부에 취직해서 모
델로 일하게 되어 바빴다 편지를 주고 받는 게 애들 장난 같다는 생
각도 들었다 오히려 새로 알게 된 기획부 직원들과 동료 모델들과
어울려 디스코텍이나 생맥주집으로 가는 일이 더 마음을 끌었다 부
와 명성과 가난과 열등감이 공존하면서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는 도시
에서 현명하게 사는 방법은 적당히 속물화되는 것이다 괜히 체하다
가는 낙상하기 십상이었다
득량만 물개 해마와 같이 건강했던 그는 결코 물에서 심장마비로
죽을 사람이 아니다 나쁜 새끼 나영미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
꼈다 욕을 삼켰다 그렇게 죽으라고 22년 동안 고스란히 간직해온
내 순결을 준 줄 알았냐 좀 더 살지
영태는 포구가 되어 주었어야 했다 방탕한 배가 거친 바다를 표류
하다가 돌아올 때 맞아줄 포구가 되어주어야 했다 남편의 통장을 흠
쳐 보고 짐작한 것은 현재 굴리는 현금이 약 100억 그리고 집이 100
억 정도 골동품이 대충 100억 정도는 되었다 남편이 죽으면 그녀
몫으로 적어도 300억 남짓한 재산이 굴러들어 오리라 그러나 이 정
도는 재산 축에도 끼지 않는다 이 나라는 정직한 사람들은 거지가
되고 사기를 치거나 부정한 짓을 저질러야 부자가 될 수 있는 비양심
적 인간의 천국이라 할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있다 82년 최대의 어음사기 사건을 저질렀던 모 여
인의 이야기다 어음사기 사건을 저지른 그녀는 옥중에서 거부가 되
었다 그 사건으로 15년 선고를 받고 9년 10개월 동안 복역해오다 92
년 3월 일 가석방으로 풀려난 여인은 10년간 옥살이를 하면서 사기
를 친 돈으로 사두었던 부동산이 폭등하는 바람에 천 억 재산가가
된 것이다 10년 동안 천 억이면 1년에 100억썩 벌었다는 계산이 나
오고 이를 일당으로 계산하면 매일 2천7백40만 원씩을 벌었다는 계산
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녀
는 잠자는 시간까지 다 쳐서 한 시간에 14만 원씩 번 셈이고 매 분
당 만9천원 매 초당 310원을 번 셈이다 생각해 보라 맥박 한 번
띨 때마다 300원의 돈이 생긴 것이다 방귀 한 번 내지를 때마다 300
월 재채기 한 번 할 때도 30원을 벌고 손끝하나 안대고 그녀는 1
천 억 재산가가 된 것이었다
그녀의 재산 명세서에 대한 기사를 보자 그녀의 큼직한 부동산 명
세는 국세청에서 적발한 것만 해도 제주의 성읍 목장 290여 만 평
경주시 구정동 공원묘지 20여 만 평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별장지 3
만8천 평 부산 해운대와 범일동 임야 및 대지 5천 평 강남구 청담
동과 논현동 대지 천3백 여 평 등이다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린 것
은 부지기수이고 알 방법도 없으니 덮어두기로 하자 그뿐이 아니다
국세청이 압류했던 재산 목록의 천 여 점의 골동품과 다이아몬드
금괴 등만 해도 엄청난 액수의 재산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로
800년 전 일본 성무천황聖武天皇의 친필과 마루야마 요코의 당인
붙人 등의 그림들은 싯가 천억엔에 달했다고 한다 이 큰손
은 이들 물건을 82년 4월 전일본 불교신도 협회장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연종 교주를 만나 매매 교섭을 한 결과 1천 억 엔에 사겠다
는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 부부는 수감 생활을 하
면서도 국세청 당국에 부탁하여 그 귀중품들을 위한 특수창고를 짓도
록 해서 훼손을 방지했다니 가관이었다 서화란 세월이 가고 그 나라
경제가 발달할수록 가격이 오르기 마련이다 지금 그 물건들의 가격
을 계산한다는 것은 공연히 머리만 아플 일이다 아무튼 그 여인은 1
조 원 정도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며 이 정도의 돈으로 서민
아파트를 짓는다 치면 2천만 원 정도 하는 13평 아파트 5만 세대분을
건립할 수 있다 한 세대당 5명 기준으로 25만 명의 사람들에게 집없
는 설움을 면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좋은 나라다
죄를 저질러도 고생한 만큼 부자가 되게 만들어 준다 어쨌든 부자
가 되어야겠고 부자일 바에는 거부가 되고 볼 일이다 누가 아나
자신도 몇 조 원의 부자가 될지 지금 그 여인은 40대 후반이라고 하
는데 서른 둘밖에 안된 자신이 2년 정도 알뜰하게 굴리면 그보다
더한 부자가 될지
이런 생각을 하며 테헤란로를 지나는데 빠앙경적 소리가 고막
을 긁었다 중형 택시 한 대가 그녀의 곁에 잠깐 섰다 얼굴이 험상
궂은 택시 기사가 그녀를 사납게 흘기며 퍼떡 몬 빼나 하며 지나
가는데 그녀는 몹시 불쾌해졌다 늘 쫓기듯 살아가는 사람들 왜 우
리는 매사를 서두를까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조금만 늦어지면
빨리 안나와요 하며 재촉한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리자 마자
트려이 내 려지기도 전에 미리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 동안이나 좌석
사이에 난 통로에 가방을 메고 든 돼 기다리는 사람 중에는 우리 나
라 사람들이 단연 많다 외국인들은 출입구가 열리고 이제는 내려도
좋다는 스튜어디스의 안내를 받고서야 좌석에서 느긋하게 일어나 입
구를 나선다
남편과 함께 일본 여행을 할 때의 생각이 난다 오사카에서 도쿄로
가는 열차에서였다 도쿄역 조금 못미쳐서 황석호가 히죽이 웃으며
당신이 열차에서 우리 나라 관광객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방
법이 뭔지 아나
이랬다 나영미가 모르겠다고 하자
잠시 있어 보라구
했다 객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5분 후 도쿄역에 도착합니다 승
객께서는 잊으신 물건 없이 잘 챙기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이곳 저곳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들을
내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당장 내려야 할 사람들처럼 부산을 떨면서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모았다 이들 일행을 어이없는 표정으
로 바라보며 입을 가리고 웃는 사람들의 시선엔 조롱과 경멸이 담겨
있었다 나영미는 한국말로 왁자하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보다가 얼
굴이 달아올라서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어때 금방 알겠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저렇게 설치는 바람
에 이만큼이라도 사는 거야 좌우간 바쁘게 살아야 한다구
나영미는 황석호의 말을 들으며 우리가 왜 이렇게 쫓기듯 행동하는
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이 또한 일본 통치의 잔재가 아
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한국 사람들을 개나 말처럼 뛰게
만들었지 않는가 국민학교 시절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 운동
장에 모이거나 체육 시간이거나 청소 시간이거나 모든 것이 선착순
일색이 아니었는가 무엇이든 빨리 서둘러야 징벌을 피한다는 강박
관념은 슬푸게도 교육의 장에서 형성된 행동인 것이다 학생들을 가
르치는 교사도 어릴 때부터 그와 같은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아
이들에게 선착순을 시킴으로 매사를 재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고 가르
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 터였다
커브를 꺾어 모퉁이를 돌자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의 웅장한 모습
이 나타났다 화려한 네온을 보는 순간 나영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호텔마다 나이트 클럽은 있다 그러나 카사블랑카는 다른 곳과 다
르다 다른 나이트 클럽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출입하고 있지만 이
곳 카사블랑카는 재벌 이세들 외국 바이어들 기타 졸부 등등 이 도
시의 생태계를 구성하는 먹이 사슬의 정점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이방인이 출입하기에는 술값이 엄청났다
이 나이트 클럽 특실에서는 서울의 야경이 환하게 내려다 보인다
3층 의 화려한 천계 밴드의 중앙에는 색소폰을 든 중년의 사내
가 라팔로마를 연주하고 있다 독주를 하는 것을 보면 휴식 시간인
모양이었다
나영미는 테네시를 주문했다 취하기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사모님 파트너 한 분 모셔올까요
뭐 하는
사업가라고 하더군요
알아서 해 난 괜찮아
흥 사업가 나영미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이런 장소에서 혼자 술마시는 것처럼 궁상맞은 것도 없을
것이다 웨이터의 안내로 나영미 앞에 나타난 남자는 오마 샤리프의
눈을 한 키가 크고 체격이 듬직했다
안녕하십니까 하지즈라고 합니다
세련된 영어였다
안녕하세요 나영미예요
하지즈 웃기는군 틀림없이 자신을 위장하고 다니는 범죄꾼이거
나 뭐 그런 녀석이겠지 나중에 트릿하면 내쫓아 버리면 될 것 아닌
가 아니 이런 기분일 때 파트너론 이런 녀석이 제격이지 모르지
중동인이든 한국인이든 무슨 상관인가
나영미는 사내의 얼굴을 탐색하듯 살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철수는 나영미를 보며 생각했다 장미같이 아름다운 여성이다
하얗고 가는 한번도 노동을 해보지 않은 손이다 마치 잘 씻은 도라
지 속살같다 웨이터 녀석이 이 여자가 황석호의 아내 나영미라는 걸
알려 주었을 때 강철수는 이번 일이 쉽게 처리될 것 같은 감이 들었
다 웨이터 녀석의 호주머니에 찔러 준 오백 달러는 그들 부부의 은
밀한 내막까지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좋은 곳이군요 이곳에 자주 오십니까
강철수가 묻자 가끔 오는 편이라고 나영미는 대답했다
사업가라면서요
나영미가 물었을 때 강철수는 미소를 지었다
사업가는 살인청부업자라는 내 고유의 직업을 은폐하는 간판이
죠
어머 유머가 지나치시네요
나는 부인과 같은 미인 앞에서는 거짓말 하지 못합니다
강철수는 나영미를 맑은 눈초리로 응시했다 나영미는 곤혹스러뒀
다 만나서 얼마 되지 않은 여자에게 살인청부업자라고 말하는 사내
야릇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국적은 어느 나라로 되어 있죠
난 무국적자입니다
흥미있군요 사실이라면
사실입니다 아무에게나 내 정체를 밝히지는 않죠 내 직업은 비
밀 유지가 생명이거든요
한국인이죠
물론 그러나 국적을 박탈당했어요
왜요
음모 때문이죠
한국말로 하죠
좋을 대로
나영미는 사내를 유심히 뜯어 보았다 미친 녀석은 아니다 한국인
이라면 유창한 영어로 미루어 상당한 학력의 소유자가 틀림없다 과
대망상증 환자 처음 만난 여자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청부살인자 농담이죠
나영미는 사내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농담으로 들렸다면 서운한데요
그럼 진담이란 말이세요
미인 앞에선 농담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몇 명이나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었습니다 다만 확실할 것은 제가 맡은 청부
살인은 실수가 없죠
그러면 아직까지 한 컨도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는 건가요
원인을 알 수 없는 살인을 창출해내는 것은 예술입니다 죽음을
구성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죠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은 자나
그 주위 사람들이 예견할 수 업는 그런 죽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라면
나영미는 이 사내와의 대화에 몰입되어 갔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독일과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의 선
진국에서는 생화학 물질을 만들기 시작했지요 그것을 사용하기 전에
전쟁은 끝났지만 월남전을 치르는 동안 그 물질들의 유용성은 충분
히 입증되었죠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 당시 정글 지대의 울창한 수
목을 제거하기 위해서 미군들이 사용한 엄청난 양의 고엽제는 식물
성장 호르몬 제제이긴 하지만 인체에도 치명적인 해독을 끼치는 그런
물질입니다 미세한 입자로 살포된 24D나 혹은 24HD 같은 제제
는 식물체에 흡수되면 과도한 성장을 통해 물질대사를 저해함으로써
원시림을 황폐시키죠 또 이러한 물질이 인체에 흡수되면 특수한 중
상이 나타나죠
예를 들면요
새 개 처음에는 피부 중상이 나타납니다 발진이 일어나서 가렵죠
그리고는 넓게 번지게 됩니다 심해지면 골종양이나 신경 계통의 마
비증상을 일으켜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그런 물질이죠 그러나
이 물질의 독성은 새로 개발된 물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요즘
새로 개발된 어떤 물질은 2시간 내에 심근 경색을 일으켜 사망에 이
르게 하지요 어떤 약품으로도 심장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도록 만들
어진 생물학적 독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개 인에게는 사
용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처음 보며 오마 샤리프의 눈이라
고 생각했던 것은 먹굴같은 까만 눈동자에 피어있던 불덩이 때문이
었다는 걸 상기했다 이런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잔인하고 대
담하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눈을 알고 있었다
부인의 남편 황석호씨 맞죠
어떻게 그걸
나는 아무 여자나 만나지 않습니다 미리 부인이 누구란 것을 알
고 만난 겁니다 그리고 부인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도 알고 있구요
처해 있는 상황이라면
당신 남편 황석호는 어떤 장소에서 여자와 함께 있겠죠 당신 남
편은 당신을 제거하려 할 겁니다 미스 지란 여인이 임신이라도 하면
당신은 곤란해지죠
난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죠
해결하다니요
죽은 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거죠
그럼 내 남편을
그럼요 제거하는 겁니다
나영미는 사내의 강렬한 시선을 보았다 이글거리는 안광 자신있
는 얼굴 확고한 표정 이 남자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얼마를 지불해야죠
자기도 모르게 쇳물이 쉬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얻어지는 규모에 따라서 결정되쵸
만약 한 2억 정도라면
나영미는 마른 침을 삼켰다
당신 남편의 재산은 그보다 굉장히 많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
은 일이 끝난 후 당신이 직접 알아낼 일이구 이번 일의 대가는 백만
달러입니다 일이 끝나면 제네바 인터내셔널 은행 I2247119900 구
좌로 입금해야 됩니다
나영미는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내
는 백만 달러란 숫자를 수백 만원 정도의 소액처럼 말한다 사인을
알 수 없는 죽음 어쩌면 황석호의 재산은 그녀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을지 모른다 기회를 놓치면 그녀는 평생 애완견처럼 불
안에 떨며 허망하게 시들게 될지 모른다 나영미는 마음을 굳혔다
좋아요 돈은 일이 끝나면 입금시키겠어요 됐죠
됐습니다
사내는 유리같이 투명한 눈으로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럼 우리 술이나 마셔요
자 건배
나영미가 잔을 들었다 쨍 하는 금속성 소리가 퉁겨 올랐다 황석
호의 죽음을 위하여 강철수는 속으로 응얼거렸다 살인청부업자와
사주한 여자 사이에 연결된 공범의 연대감 여자의 커다란 눈엔 별가
루가 부서지고 있었다 강철수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영글어가는 관능
의 신호를 감지했다
사람을 죽이는 일 좋아하세요
술잔을 내려 놓으며 나영미가 믈었다
사람이 죽는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죠
강철수는 반쯤 채워진 술잔에 시선을 주면서 음울하게 내뱉었다
음울하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죠
당신의 가슴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했었소
어떨 것 같아요
아름다운 가슴일 거요
직설적 표현이지만 듣기 싫지 않네요 여자를 잘 아는 것 같아
요
글쎄요
강철수는 속으로 반문했다 나는 얼마나 여자의 심리를 이해하고
있을까 후에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철수는 그녀의 모든 것을 낱낱이
기억한다 아름다운 후에 가련한 후에
댄스가 시작되는 순서였다
색소폰의 색정적인 흐느낌 강철수는 레미 마르틴을 잔에 채운 뒤 단숨
에 마셨다 불같은 액즙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여자의 시선이 춤
추는 남녀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추실까요
강철수가 말했다
전 춤이 서툰데요
나영미는 몸을 일으켰다 남편을 죽여달라는 독부와의 춤 장미의
아련한 향기가 전해져 왔다 샤를르 마르향일까 아니면 네이쥬 퍼품
일까 강철수는 무도장의 넓은 공간으로 스탭을 옮기며 생각했다
마시자 마시자 왈츠 아름답고 경쾌한 춤이다 궁성의 밤을 장
식하던 무도의 왕자 춤이란 좋은 것이다 춤이 없다면 세상은 삭막
할 것이다 춤은 낭만이요 사랑이다 춤은 빠른 속도로 남녀의 간격
을 업쌔는 마법을 지녔다 곡은 높아지고 웅장해지고 힘있게 이어
진다 때로는 흐느끼듯 호소한다 라콤파르시타로 템포는 바뀐다 탱
고 라틴의 정열 이 여자의 눈에 일렁이는 황홀한 불꽃의 정체는 무
엇일까
성적으로 흥분하기 직전 여자의 얼굴은 매혹적이었다 여자의 하복
부가 밀착해 왔다 오른쪽 허벅다리에 전해지는 부드러운 여체의 탄
력 홀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쾌락을 향하여 모여든 불나방떼
번뇌와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한 몸부림 블루스로 바뀐 무도장 강
철수는 끌어안고 있는 남녀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서로 모르는 남자와 여자가 마주 보면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물방울 무늬의 조명이 그물처럼 회전하는 무도장 이들 남녀
의 자세를 직각으로 전도시키면 바로 성교 자세가 아닌가 그들은 하
체를 밀착시킨 채 불꽃같은 감각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댄스는 마
약과 같이 사람을 유혹한다 소위 춤바람이 난 사람들은 저녁만 되면
발바닥이 간지러워서 견디기 힘들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들 중 상당
수는 호텔방으로 가리라
뭘 생각하세요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죠
왜 존재하죠
복수심이죠 중호는 나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이
죠
복수나 중호 같은 것은 나중에 생각해요 이런 분위기엔 어울리지
않아요
그녀의 하체가 더욱 밀착해왔다 남자의 허벅다리는 여인의 언어를
인식한다 불꽃이 너울거리는 이브의 언덕 색소폰으로 연주되고 있
는 음악 고양이처럼 미끄러운 바닥을 기어다닌다 안개낀 밤의 데이
트 봄과 안개 그리고 여인 이들은 어떤 함수 관계를 갖고 잇
는 것인가
해변의 길손이 연주된다 강철수는 나트랑 해변을 생각한다
후에와 거닐던 나트랑 해변 저녁놀이 봉선화 꽃잎처럼 물들었고
모래가 황금의 분말처럼 빛나던 곳 바다를 가로질러 온 황금의 바닷
길 저녁놀 빛살을 털며 날아가던 가마우지떼
쉬고 싶어요
나영미의 음성은 쉬어 있었다
강철수는 그녀와 함께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웨이터가 겁먹은 표
정을 한 채 나영미에게 다가왔다
사모님 빨리 피해야겠어요 깜상네 패거리예요 사모님을 자기
네 테이블로 불러달라고 그래요 모른 척 하고 나가세요 제가 알아
서 하겠
웨이터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뒤를 밟아 왔는지 한
녀석이 웨이터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 것이다 피가 흐르는 코를 감싸
쥐며 웨이터가 자리를 피하자 불곰같이 덩치가 큰 녀석이 나영미에게
다가왔다
녀석은 솥뚜껑같이 커다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하고도 한번 어울립시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었다 녀석이 왕방울 같은 눈알을 부라리며
나영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첵 뿌리치며 나영미는 꾸짖듯 말
했다
왜 이래요 무슨 실례예요
실례 좀 하면 안되나
징그러운 웃음을 홀리며 녀석은 나영미의 손을 나꾸어 잡았다 그
순간 강철수가 무게 실린 음성으로 말했다
그 손 놓으시지
아쭈 넌 뭐야
녀석은 여전히 벗어나기 위해서 버등대는 나영미의 손목을 잡고 있
었다
그 손 놓지 못해
강철수의 고함 소리에 녀석은 별 거지같은 놈 다보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느닷없이 강철수의 안면으로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녀석이
휘두른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어디를 어떻게 내질렀는지 녀석은 악
소리를 내지르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런 장면을 멀거니 보기만 하
던 녀석들의 패거리가 강철수에게 우루루 다가왔다 그들 중엔 깨진
맥주병을 들고 있는 녀석도 보였다
모두 덤벼 각오하고 말야
깨진 맥주병을 들고 있던 두 녀석이 덮쳐 들었다 그러나 두 녀석
도 강철수가 날아오르며 돌려 찬 발 뒤축으로 턱을 강타당하고 바닥
에 나딩굴었다
그 순간 깨진 맥주병들이 강철수를 향하여 날아 왔다 강철수는
하며 그들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맥주병을 던지던 세 녀석을 순
식간에 납작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때 이들 중 두목인 듯한 자가 강철수에게 다가왔다
누구냐 넌
알 것 없어 애들이나 데리고 가라구
강철수는 얼음같은 어조로 대답했다
두목은 구석에 쓰러진 패거리들을 흘끗 보더니 나머지 무리에게 눈
짓을 했다 그들은 의식을 잃어버린 동료들을 들쳐 업고 황급히 카사
블랑카를 빠져나갔다
여자가 말했다
하얀 육체가 강철수의 눈 아래 누워 있었다 큰 키 가는 허리 그
리고 커다란 엉덩이 여자의 피부는 상아처럼 매끄러웠다 살짝 들려
진 풍만한 유방엔 핑크빛 유두가 융기되어 있었다 복숭아색 살결은
거의 투명에 가까웠다
여자는 후에와 다르다 후에보다 풍만하고 아름답다 하얗고
깨곳하고 청결하다 향기좋은 비누냄새 후에의 몸에선 치즈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가 좋았다 가난하지만 신선한 냄새였다
여자의 나신을 잠시 응시하던 강철수는 자신도 나신이 되어갔다
나영미는 나신이 된 강철수을 보며 흠칫 놀랐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
게 숨을 삼켰다 강철수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은 눈동자에 자리
한 경악의 빛을 지우지 못한 채 강철수를 맞았다 강철수는 여인을
부드렵게 안았다 여인의 살결은 희고 탄력이 있었다 여인은 바르르
떨었다 강철수는 입술로 여인의 목을 가볍게 눌러 나갔다 여자는
긴장한 채 경직되어 있었다 강철수는 입술로 여인의 입술을 부드럽
게 흡입해갔다 여자의 입술이 조금 열렸다 장미의 냄새가 기분좋게
코에 감겼다 강철수의 혀는 여자의 경구개와 연구개를 미끄러지듯
스첫다
여자는 두 팔로 강철수의 목을 휘감았다 여자는 긴장을 풀기 시작
했다 강철수는 여인의 귓바퀴를 입에 넣고 부드럽게 잘근거렸다 여
자는 몸을 꼬았다 그리고 한숨을 길게 토했다 강철수는 여자의 귓
불을 가볍게 믈었다 여자는 강철수를 세차게 안으며 한숨을 토했다
강철수는 여자의 커다란 젖무덤을 천천히 만져 나갔다 유두가 서서
히 경화되어 갔다 여자는 다시 한숨을 길게 내뱉았다 여자의 유방
은 공처럼 탄력이 있었고 긴장되어 있었다 강철수의 커다란 두 손
이 유방을 감쌌다 아 아 여자는 헐떡이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가랑이로 여자의 다리를 휘감았다 강철수의 어느 부분이
여자의 허리에 다았다 여자는 흠칫했다 강철수는 여자의 매끈한 허
리와 배와 엉덩이를 차례로 만져 나갔다 여자의 허리가 파도처럼 흔
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여인의 어느 부분에 닿을 즈음 여자의
손도 강철수의 어느 부분에 닷게 되었다 여자는 부르르 몸을 떨었
다 엄청난 질량에 놀라는 모양이었다 남자를 감싸던 여자는 긴장된
표정을 풀지 못했다 강철수는 여자의 은밀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만
져나갔다 마치 장미꽃잎을 만지는 감이 들었다 진홍의 장미꽃은 이
슬을 머금고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그때 사디의 장미
를 홀연히 떠올렸다
여자의 그곳은 윤습해지고 있었다 그곳은 무척 미끄럽고 부드러
워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간간이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마치 파도가 치듯 물결이 치듯 여자는 몸을 꼬았다
강철수는 여자를 부드럽게 만지며 라마르틴의 호수를 생각했다
흐느끼는 바람 한숨짓는 갈대 호수의 향긋하고 가벼운 향
기 듣고 보고 숨쉬는 모든 것이 속삭이리니 그들은 서로 사랑
하였노라
강철수의 손길은 바위섬을 쓰다듬는 잔믈결처럼 여자를 만져 나갔
다 강철수는 이따금 여자의 허벅다리를 만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여
자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남자의 손길은 여자의 엉덩이와 허벅다리
를 미풍같은 부드러움으로 쉴 새없이 만져 나갔다 여자는 몸을 뒤틀
며 신음했다 강철수의 손길은 다시 장미꽃잎을 만졌다 장미꽃 무더
기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장미꽃잎을 어루만지던 강철수는 번즈의
아프턴강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아프턴강이여 초록빛 둑 사이를 고요히 흘러라 아
프턱강 이여 네 수정 같은 물 줄기가 나의 마리가 사는 오두막 근방
을 감도누나
여자는 강철수의 몸이 경직되자 더 참지 못하고 강철수를 끌어 안
았다 강철수는 옆으로 누운 자세로 여자와 한 몸이 되려고 했다 여
자는 고통스러워 했다 강철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나갔다 여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강철수가 다시 움직이자 여자는 비명을 터뜨렸다 강철수는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여자는 입을 크게 벌린 채 헐떡였다 강철수는 다
시 부드럽게 몸을 움직여 나갔다 무척 조심스럽게 천천히 어느 사
이에 여자의 일그러졌던 표정이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여자는 고통에서 벗어나 남자가 동작할 때마다 민감하게
감응하기 시작했다 아 아 아휴 아휴 여자의 신음은 더욱 빨라지
고 더욱 커져 갔다
강철수는 여자의 몸이 밑으로 가게 만들었다 여자는 강철수의 둔
부를 감싸쥐며 끌어 당겼다 강철수는 장미꽃 무더기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갔다 미끄러웠다 열기와 함께 부드러움이 전해져왔다 아
아 아 장미꽃 무더기는 몸부림치고 있었다 강철수는 천천히 그리
고 힘차게 장미꽃 무더기를 향하여 몸을 움직였고 그때마다 여자는
탄성을 터뜨렸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아 아 사랑해요 여자는 눈
을 감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강철수의 뇌리에 호수가 일렁거렸다
뇌리 속을 라마르틴의 귀절들이 바쁘게 스쳐갔다
오오 호수여 세월은 한 해의 운행조차 못했는데 그녀가 다시 보
아야만 할 정다운 이 물가를 보라 그녀가 전에 앉아 있던 이 돌 위
에 나 홀로 앉아 있노라 그때 너는 바위 밑에서 흐느끼었고 그때
도 너는 바위에 부딪쳐 갈라지면서 그때도 너는 물거품을 내던지고
있었다 사랑스런 그녀의 발에
강철수는 파동하는 여자의 커다란 엉덩이를 양 손으로 잡고 몸을
움직였다 더 더 여자는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힘차
게 움직여 나갔다 여자는 울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강철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강철수는 구름이 되었다 강철수는
성단의 별이 되었다 강철수는 해방되고 싶었다 남김 없이 부서져
소입자로 분해되고 싶었다 강철수의 움직임은 한층 커져갔다 여자
는 더욱 크게 소리를 내지르며 강철수의 허리를 힘차게 휘감았다
그리고는 파들파들 경련하기 시작했다 장미는 엄청난 힘으로 강철수
를 옥죄어 들었다 근육은 여러 차례 수축과 이완을 거듭하면서 파싱
운동으로 이어졌다 해방되고 싶은 욕구와 걷잡기 힘든 쾌감에 강철
수는 블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장미꽃 무더기에서 산화
되는 것 같았다 강철수는 장미꽃 무더기 속에서 길을 발견했다 그
는 꽃 속을 거닐고 있었다 하이네가 떠올랐다
여인이어 나는 마치
나는 꽃 속을 거닐고 있다 마음도 꽃도 활짝
꿈인듯이 거닐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휘청거리며 아아 내 사랑
아 날 놓지 말아다오 그렇지 않으면 사랑에 도취된 나머지 나는 네
발 아래 쓰러질 듯하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이 정원에서
여자는 두 발을 들어 강철수의 허리를 휘감았다 여자의 경련은 계
속되었다 그녀는 거듭 닥쳐오는 물결에 몸을 떨었다 강철수의 움직
임은 계속되었다 여자는 강철수의 한 동작마다 신음을 뱉어냈다 강
철수는 후에를 잊어버렸다 후에의 치즈 내음도 잊어버렸다 강철수
는 여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장미향에 취했다 신체 기관의 모
든 기가 한곳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해방되기 시작했다 온몸의 열기가 한꺼번에 방출되기 시
작하면서 강철수의 동작은 더욱 빨라지고 잦아졌다 아무것도 생각
나지 않았다 강철수는 장미꽃 무더기에 모든 힘을 발산했다 장미꽃
무더기 속에 모든 번뇌 모든 고통 모든 절망 모든 허무 모든 속
박을 남김 없이 방출했다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이 전신을 감쌌다
그때 경련하던 여자는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면서 해방되었다 강철
수는 더욱 세차게 장미꽃 무더기로 빠져들면서 별가루로 분해되었다
부르르 몸을 떨던 여자는 기운이 쇠잔해졌다 그녀는 서서히 이완되
어갔다 강철수는 한동안 여자를 안은 채 가볍게 움직였다 여자는
마지막 여열에 몸을 떨었다
여자의 하얀 몸은 온통 땀으로 번들거렸다 머리도 흠뻑 젖어 있었
다 여자는 강철수에게 안긴 채 말했다
행복해요 이런 것인 줄 알지 못했어요
여자의 커다란 눈은 부드러운 빛이 담겨 있었다 여자는 강철수의
몸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당신을 알게 되어서 기뻐요 다시 만나고 싶어요 괜찮죠
나도 그러고 싶어요
대답을 하면서도 강철수는 자신이 없었다 강철수는 불안했다
이 런 느낌 처음이었어요
강철수의 가슴을 쓰다듬던 나영미는 풀린 눈매로 강철수를 응시했
다
당신은 근사한 여자요
나영미 같은 여자는 처음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동안 강철수
는 후에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나영미는 건강하고 민감하고
풍만했다 그녀의 살결은 희다 못해 투명하였다
잠시 후 여자는 잠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철수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불면증 오랜 정글 생활의 후유증이었다 그는 잠이 깊게 든 나영
미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좋은 여인이다 남편을 죽여달라는 여인이
좋아 보인다는 것은 모순이지만 황석호가 어떤 위인임을 아는 그는
그녀를 이해한다 천박하고 비열한 짐승 녀석을 만나게 된 것은 처
음부터 악연이었다
광주 보병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때였다
어느날 누가 찾는다고 해서 인사계로 가보니 소령 계급장을 달고
있던 황석호 앞에 신형철과 한만수도 불려와 있었다 황석호가 관믈
정리하고 떠날 채비를 하라며 전출 명령서를 보여 주는데 교육도 끝
나기 전인데 특전 부대로 배속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강철수가
네가 뜨악한 표정을 짓자 황석호는
자네들은 인도차이나어를 전공했고 모두 무술 유단자더군
그래서 차출된 거야 자 시간 없어 떠날 채비들 하라구
이랬다
이 간단한 전출 명령이 그의 인생을 마구 어긋나게 할 줄은 몰랐
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 듯했다 눈이 뜨였다 커튼이 흔들렸다 창문
을 연 사람은 없었다 강철수는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을
켜지 않았다 오래도록 아무 기척이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
때 다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강철수는 침대에서
내려와 침대 란막이 뒤로 몸을 숨겼다 다시 소리가 들렸다 창가쪽
에서 나는 소리였다 창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자일끈이 하나
보였다 잠시 후 남자의 구두가 보였다 그리고 사내의 정강이와 허
리와 가슴이 차례로 나타났다 옥상에서 자일을 타고 내린 모양이었
다
괴한은 창턱에 소리없이 발을 딛고 섰다 그는 한동안 방안을 주의
깊게 살피는 모양이었다 강철수는 숨 죽여 기다렸다 괴한이 방으로
살며시 들어섰다 무척 건장한 사내였다 사내는 침대가 있는 곳을
주의깊게 살폈다 사내의 시선은 웅크린 채 베개를 안고 자는 나영미
쪽에 고정되었다 괴한은 품 속에서 은색 찬란한 비수를 꺼내 오른손
에 쥐었다 그리고 나영미가 자고 있는 침대로 소리없이 다가갔다
사내가 나영미의 가슴을 짓누르며 비수를 쳐드는 순간 잠결에 깨어난
나영미가 비명을 내질렀다 강철수는 비호같이 달려들어 괴한의 뒷목
을 손칼로 첫다 단 일격에 괴한은 나무토막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진 사내는 꼼짝못한 채 버르적거렸다 잠시 후 사내는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주먹을 쳐든 채 사내를 뒤집어
보았다 사내의 왼쪽 가슴에 비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깜상이었
다 자기가 들고 있던 비수에 가슴을 찔린 모양이었다 경련하던 사
내가 가쁜 호흡을 멈추었다 나영미는 놀라서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이 사람 우리 집에 몇번 놀러 왔던 사람이에요 왜 나를 죽이려
했을까요
엄청난 음모가 탄로날까봐 그랬을 거요
강철수는 시계를 보았다 세 시 였다
주 죽었어요 이 사람
그런 것 같소 자기가 들고 있던 칼에 찔렸소
어 어떡해요
나영미는 강철수의 손을 잡으며 부르짖듯 말했다
염려 마시오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내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
다려요
강철수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살펴 보았다 인적은 보
이지 않았다 강철수는 시체를 창가로 옮겨서 자일끈으로 튼튼히 묶
었다 그리고 시체를 어깨에 들쳐메고 자일을 타고 내리기 시작했다
O층에서 지상까지 내려가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엄청나게 무거운
시체의 무게까지 지탱해야 했다 어깨 근육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손바닥의 피부가 벗겨질 것도 같았다 강철수는 이를 악물고 버텄다
다행히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강철수는 건물벽을 발바닥으로
힘껏 찬 후 단숨에 몇 층씩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마침내 지상에 발
이 닿았다 강철수는 시체를 내려놓고 잠시 쉬면서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고 어깨 근육이 뻣뻣했다
눈을 부릅뜬 시체의 얼굴은 무척 검었다 강철수는 주위를 조심스
럽게 살폈다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은 업었다 강철수는 자일끈을 풀
어 내려 시체와 함께 어깨에 메었다 그리고는 걷기 시작했다 호텔
건믈 뒤로 돌아가자 신축 공사 현장이 보였다 기초 공사가 마무리
된 곳에 마침 깊은 웅덩이가 있었다 강철수는 시체와 자일을 웅덩이
에 밀어 넣고 흙으로 덮었다 일을 마친 강철수는 다른 길을 통해서
호텔로 돌아갔다
나영미는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걱정마시오 당신이 걱정되오 그자가 노골적으로 당신의 목숨을
노리는 한 앞으로 조심해야 될 거요
어떻게 해요 난
모르는 척 행동해야 하오 황석호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럼
황석호는 이 일을 알지 못해요 당신이 집에 돌아가 시치미를 떼
면 외박한 사실을 모를 것이오 그러면 당분간 시간을 벌 수 있소
무서워요 돌아가기 싫어요
그래도 가야 해요 더 복잡한 문제가 생겨요 염려마시오 약속한
대로 수행할테니
나영미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이었다
언제 다시 만나죠
내일 만납시다 올 때 당신 남편의 라이터를 가져오시오
라이터요
그래요 당신 남편 라이터 있지 않소
있어요 지난번 봄에 파리에 들렀을 때 구찌 백화점에서 산 것이
있어요 생일날 남편에게 선물했어요 순금제로 만든 꽤 고급스런 것
이에요 3천 달러나 준 거예요
그걸 늘 지니고 다닙니까
그럼요 얼마나 애지중지한다고요 그 사람 금으로 된 것이면 무
엇이든 아끼는 버릇이 있거든요 만년필 넥타이핀 혁대의 버클 반
지 목걸이 라이터 커프스 버턴 시계 등 모두 금이 아니면 안되
는 황금병 환자죠 그런데 라이터로 뭘하죠
라이터 속에 마이크로 폭탄을 장치할 거요 아무튼 눈치 보이지
않게 조심하시오 내 판단이 틀리지 않다면 당신 남편은 당신의 목숨
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오
나영미는 양 어깨를 내린 채 힘없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날은
이미 밝아 있었다
아침을 끝낸 강철수는 호텔 뒷길을 건너서 커피셥으로 들어갔다
강철수는 건축 공사 현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자리했다
시체가 묻혀 있는 웅덩이쪽으로 레미콘차가 후퇴하더니 시멘트를 쏟
아붓기 시작했다 레미콘차는 줄을 이었다 얼마 오래지 않아서 공사
장 밑바닥은 시멘트로 완전히 뒤덮이게 되었다
강철수는 시벨리우스를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녀가 찾아온 것은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두려운 표정은 여전
했고 피로한 얼굴이었다
라이터 가지고 왔어요
나영미는 라이터를 강철수에게 건네 주었다 되쏘는 찬란한 빛살에
눈이 부셨다
밖에서 잔 것 눈치챈 것 같소
가정부와 말을 맞추는 바람에 들키지 않곤 무사히 넘어갔어요 그
양반 낮에 집에 들렀다 회사 출근햇어요
잘된 일이오
강철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간수했다
여자는 손가락을 비틀었다 불안에 떠는 아이같은 동작이었다
어제 그 일은 잘 되었을까요
염려할 것 었소 잘 처리됐으니
녀석의 시신은 건물이 지탱하는 날까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이
런 식으로 잠적한 시체는 얼마나 될까
왜 그이가 날 해치려 하는지 이해가 안가요
나영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어떤 손님들이 주로 찾아 오는지 알고 있소
그야 대부분 퇴역 장성들이죠
그뿐이오
가끔 전방부대 사단장들이 들리기도 했어요
특히 기억나는 사랑들 있소
이세준 최오남 김태수 허화수 정 인기 정흥태 박종구 김형
우 이민찬 등이었어요
강철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모두 5 16과 10 26 12 12사태와
연관된 일단의 정치 군인들이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었소
정부에 대한 불평이 컸고 일부는 당장이라도 어떻게 하겠다며 비
분강개하는 것을 가끔 보았어요
강철수는 이해할 것 같았다 번화와 영락에 대한 미련만큼 치열한
것도 없는 것이다
녹음 테이프 때문일까요
나영미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강철수는 눈을 크게 뜨고 나영미를 쳐다 보았다
남편이 젊은 술집 계집과 놀아난다길래 화가 나서 내실의 대화
내용을 녹음한 적이 있었어요
대화 내용을 기억하고 있소
정부에 대한 전복 음모 같았어요
누가 우두머리 같았소
김태수 장군이 회의를 주도하는 듯했어요
녹음 테이프는 어디 있소
남편에게 빼앗겼어요
강철수는 황석호가 나영미를 음해하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강철수는 나영미가 전해 준 황석호의 순금제 라이터를 꺼내 들었
다 구찌 라이터였다 강철수는 라이터를 분해했다 개스 실린더 속
에 마이크로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해 넣은 뒤 폭발 방치는 라이터 뚜
껑 안쪽에 눈에 띄지 않게 조립해 두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감
쪽 같은 솜씨였다 강철수는 이곳 저곳을 세심히 살폈지만 이상한 구
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스위스 은행 그 구좌에 입금시켜요
강철수는 순금제 라이터를 나영미에게 건네 주었다
그렇게 할께요
녹음 테이프를 찾아요 중요한 물건이 될 테니까
어디 숨겼는지 모르지만 찾아볼께요
내일 아침 황석호가 출근할 때 그 라이터를 상의 안쪽 호주머니
에 넣어요
알았어요 무섭고 괴로워요 못견디갰어요
나영미는 강철수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강철수는 나영미를 힘껏
포옹해주었다 이 여자는 외로움과 불안에 떨고 있다 또한 남편에
대한 중호 때문에 괴로워한다
타락한 도시의 고독한 신데렐라 나영미를 포옹하고 있던 강철수는
여자의 옷을 하나씩 벗겨나갔다 마침내 뽀얀 우유빛 나신이 블빛 아
래 번들거렸다 아름답다 매혹적이다 터질 듯 몸매는 건강하다 이
런 찬사를 속으로 되뇌이며 강철수는 나영미를 침대로 안고 갔다 그
리고 자신도 나신이 되었다 나영미는 강철수의 등을 팔로 휘감았다
나 이상한 여자일까요 줄곧 당신만 생각했어요
나영미는 강철수의 강철같이 단단한 몸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은 나의 황녀요
강철수는 나영미의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놀리는 말 같지만 듣기 좋아요
나영미는 헐떡이면서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속에 궁전을 만들 수 있소
강철수는 나영미의 커다란 엉덩이를 만져 나갔다 여자는 몸을 뒤
틀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을 사랑하는가 봐요
헐떡거리며 나영미는 남자를 끌어 당겼다
나도 그렇소
나영미는 강철수의 남성을 손에 넣었다 나영미는 부르르 떨었다
손바닥 가득 전해지는 열기와 에너지 부드러움으로 회복된 강인함
그것이 기운차게 맥동하고 있었다 나영미는 손에 쥐고 있던 강철수
의 남성을 장미꽃밭으로 인도했다 강철수는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
갔다 장미꽃 무더기는 부드러웠다 그리고 따뜻하고 윤습했다 강
철수는 몸을 움직이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여자는 드물다 무척
건강하다 에너지와 정열로 충만된 여인이다
강철수는 장미꽃 밭을 거닐기 시작했다 불꽃이 너울거렸다 붉은
장미는 파동하고 있었다 붉은 장미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클라이슬러 임폐리얼의 붉은 꽃잎을 연상했다 번즈의 귀절이 떠올랐
다
오오 연인은 붉고 붉은 장미니 유월에 갓 피어난 신선한 장미여
라 오오 내 연인은 아름다운 곡조로 감미롭게 연주되는 노랫가락이
라
장미 송이는 파르르 경련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신음이 커져갔다
귀여운 사람아 네가 귀 엽기에 무척이나 나는 너를 좋아하노
라 바닷믈이 모조리 말라 버려도 나는 너를 사랑하리 그리운 이여
장미꽃밭은 더욱 세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철수의 움직임이 커질
수록 여자의 신음소리는 깊어졌다
진정 이다 바닷믈이 모조리 말라버리고 바윗돌이 햇빛에 녹
아버린다 해도 내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진정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
리라
여자는 남자의 허리를 감싸며 몸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여자의 하
얀 엉덩이는 격랑의 바다에 떠있는 배처럼 흔들거렸다 여자는 해방
되고 있었다 여러 차례 여자는 숨찬 비명을 토해냈다 강철수는 모
든 가치를 장미꽃 무더기에 발산하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모든 것을 망각해갔다
호텔을 옮기게 될거요
강철수는 나영미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했다
어느 호텔로 옮기세요
옮긴 다음 전화하겠소
오늘밤 김태수 장군집에서 파티가 있어요 남편과 함께 가기로 했
어요
염려말고 가봐요 조심해요
내일 전화해 주세요
알았소 호텔을 옮긴 후 전화하겠소
그녀는 호텔을 떠났다
강철수는 창가로 갔다 밖은 칠흙같이 어두웠다 잠든 도시 눈을
까뒤집고 달리는 자동차들 블빛 찬란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강철수는 나영미를 생각했다 좋은 여자다 여자의 어디에서도 독부
의 싸늘한 냄새는 나지 않는다 이 여자는 정당방위를 위해 남편을
죽이려는 것이다 단순한 논리다
강철수는 어금니를 사려 믈었다 열통 터질 일이었다 황석호 일당
에 의해 이름도 호적도 존재도 망각된 무국적자 유령같은 존재가 된
신세 견디기 힘든 고문이다 아무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는
옆에 걸린 거울을 흘끗 보았다 생경하고 음울한 얼굴이 물끄러미 응
지하고 있었다
강철수는 석간을 펴들었다
서울 근교에서 지하 기계음을 조사키로 총리가 지시했다는 내용이
있었고 47년 만에 일본 자위대 병력이 아시아 지역으로 출병하게 된
다는 기사도 눈에 들어왔다 멍청이 같은 놈들 언제까지 이런 기사
를 읽어야 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욕을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허기
야 북쪽의 흉계는 워낙 음험했기 때문에 경각심을 블러일으킬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머릿기사로 다룰 만큼 중대한 사안이라
면 어째서 서울 근교에까지 그 소리가 이르도록 방치했었던가 말이
다 한심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언제까지 동족끼리 물고 뜯으며
온 세상의 웃음거리로 남아있을 것인가 일본이 커진다 굉장한 녀석
들이다 일본 사람을 쪽바리라고 욕깨나 하던 그도 일본을 실제로 보
고 나서는 욕만 할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게
단결되어 있었고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었다
강철수는 욕탕으로 들어갔다 스위치를 틀자 얼음같이 차가운 믈이
쏟아져 나왔다 강철수는 얼음같이 찬 물로 샤워를 할 때마다 물은
생명의 원천임을 상기했다 그는 뜨거운 물보다 찬물 샤워가 좋았다
모든 생명은 물에서 비롯된 것이다 45억 년 전 멕양계의 개스와 우
주 먼지가 뭉쳐 생성된 지구는 그 후 1억 년 동안 냉각되면서 지각
이 형성되었고 마그마에서 흘러 나온 초생수와 지중에서 분출된 수
중기가 식어서 비가 되었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가 모여서 원시 해양
이 만들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수소와 수증기와 암모니아와 메탄과
같은 기체가 우주 방전의 에너지에 의해 유기물로 합성되었고 원시
해양에서 새로운 생명체로 진화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만물의 고
향은 물인 셈이다 시내나 강이나 바다나 모두 물에 의해서 태어났
다 물은 깊은 산협곡의 여울이 되기도 하고 대하를 만들어 대지를
적신 후 호수나 바다의 가슴에 안긴다
강철수는 샤워의 물줄기가 더욱 세차게 흐르도록 조정했다 그리고
는 비누칠을 하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은 더러움을 씻어준다 인
더스강과 갠지스 강물은 수천 만의 마음을 씻어주고 미시시피 강물
은 인디언의 눈물과 수많은 흑인 노예의 땀을 씻어 주었다 물은 더
러움을 씻어준 뒤 자신은 더러워지지만 돌 사이를 흐르며 다시 정결
한 몸으로 환생하는 것이다 세속의 먼지를 씻어주기 위해 스스로 오
수로 변질됐다가 다시 정화된 몸으로 태어나 도도히 흘러가는 물 세
상 천지에 이런 아름다움을 어디서 볼 수 있을까 물을 더럽히는 것
은 오직 인간뿐인데 물은 이를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수가 되어
준다 인간의 갈증까지 해갈해준다 그는 오욕의 마굴을 지나 배설된
다 그리고 그는 오믈을 싸안은 채 하수가 되어 바다로 나간다 그리
곤 망망 대해에서 스스로 정갈한 자태를 되찾는다 그리곤 안개가 되
어 공중으로 중산하여 구천 하늘의 구름이 된다 구름이 된 그것들은
케냐의 그늘이 되기도 하고 고비 사막의 때양볕을 가려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갈중에 시달리는 천형의 대지 사하라 사막에 한줌 눈물을
뿌리기도 한다
물은 메마른 대지에 비가 되어 낙수한다 그리고는 메마른 산을 적신
다 그것은 시내를 이루고 돌뿌리를 울리며 낮은 데로 흐른다 물은
거슬러 올라가는 법이 없다 오직 낮은 데로 흐를 뿐이다 이 보다
더한 사랑의 실천자가 있으며 이보다 더한 겸양의 도덕가가 있을까
물은 낮은 데로 흐르면서도 결코 비천함을 모른다 물은 계곡의 암석
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흐른다 물은 배 밑에 깔린
돌 무리를 다듬어 수석을 창조해낸다 수석을 보라 어느 장인의 손
길인들 이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빚어낼 것 인가 그러고 보면 믈처럼
위대한 예술가도 없을 것이다
흐르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큰 줄기를 이루면서 강을
만든다 강은 인간의 생활이 시작된 곳이다 그리고 문명의 탄생지
다 창하강 인더스강 나일강 유프라테스강 등이 그랬지 않은가
강물은 도도히 흐른다 그가 향하는 곳은 언제나 한 곳 넓은 대양이
다 흐르는 강은 아름답다 이 아름답게 흐르는 아프턴강을 보고 번
즈는 울었다
아름다운 아프턴강이여 초록빛 둑 사이를 고요히 흘러 내려라 그
대 기리는 노래 부르고 있나니 고요히 흘러 내려라 아름다운 아
프턴강이여 고요히 흘러내려라
이런 생각을 하던 강철수의 뇌리에 불현듯 후에의 아오자이 하얀
날개가 바람에 흩날리던 메콩강변을 떠올렸다 흘러간 사랑이 더욱
아름다운 법이다 흘러간 세월이 아름답듯이 말이다 그녀는 미라보
다리를 좋아했었다 메콩강변을 거닐며 읍조리던 미라보 다리
미라보 다리 아래를 흘러가던 세느강 아폴리네트의 사랑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랑은 물결처럼 흘러내리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만 간
다
후에는 이 시를 즐겨 암송했었다 강은 사랑을 담고 세월을 싣고
하류로 흘러 내려간다 가버린 사랑은 미련을 남기고 흘러가는 강물
은 솨픔을 씻는다 그리고 그것은 세월의 뒤안길로 흘러 내린다 이
렇게 흐르던 강은 이리 저리 갈라져 농부의 젖줄이 되고 공장의 기름
줄이 되기도 한다 혹은 돌 틈새에 스며들어 약수암 청량수로 용출되
기도 한다 다른 줄기는 들과 논과 밭을 누빈다 풀도 나무도 생기를
얻는다 벌레도 짐승도 가리지 않고 해갈해 준다 이렇듯 강물은 세
상 만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샤워를 마친 강철수는 호텔을 나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디 가십니까
지배인이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강철수는 지배인에게 10달러 짜리 지폐를 팁으로 주면서 대답했다
부산에 볼 일이 있소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수고해요
호텔을 나섰을 때는 이른 저녁이었다 비는 부슬거렸고 바람은 쓸
쓸했다 아스팔트 바닥에는 빌딩이 거꾸로 서 있었다 안개가 자욱히
깔리고 있었다 빗발 사이를 한마리 제비가 꿰 어질렀다 희끄무레한
하늘을 잿빛 구름이 가리고 있었다 강철수는 지하도를 건너서 한동
안 들끓는 인파 속을 걸었다 이런 것은 몸에 밴 습관이었다
근 한 시간을 붐비는 인파 속을 걷던 그는 종로 뒷골목으로 접어
들었다 조촐한 술집이 보였다 시인 샘터란 나무 간판이 눈길을 끌
었다 한잔 하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생겼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주점 안은 담배 내음과 사람들로 가득했다 비어 있는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인상이 험해 보이는 사내 세 명이
코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다른 한쪽 子석 자리에는 젊은 여
자가 혼자 방심한 표정으로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철수는 돌
아나가려 했다 그때 사십대의 주인인 듯한 여자가 그를 보았다 눈
이 크고 서늘했다 페이 더너웨이의 눈매가 생각났다
그 여자가 말했다
잠시만 합석하시면 자리가 날 거예요
이러며 강철수에게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여자쪽을 가리켰다 젊
은 여인은 주인 여자를 흘끗 보았다 주인 여자는
어때요 잠깐 합석해도
이렇게 젊은 여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젊은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
다 강철수는 여인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다 강철수는 여인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네 전 상관 없어요
아베마리아가 흘러나왔다 여자는 음악에 홀린듯 보였다 여자가
앉아 있는 탁자 위에는 거의 비어가는 소주병이 보였다 여자는 무척
외로워 보였다 우울하고 고독해 보이는 여자는 마음을 끄는 데가 있
는 법이다
강철수는 사내들이 있는 옆 좌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내들은 여
자의 거동을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의 손목에 감긴 파텍이 현
란하게 빛을 되쏘고 있다 사랑의 슬픔으로 곡이 바뀌자 여자는 남은
술을 모두 잔에 부었다 사내들은 낮게 쑥덕거렸다 한 녀석이 동료
에게 여자의 고급 시계를 눈으로 가리켰다 창백한 얼굴로 말없이 술
잔만 내려다보고 있던 여자가 술잔을 비웠다 여자는 일어서다 비틀
거렸다 술집 주인 여자가 넘 어지려는 여인을 부축했다 젊은 여자
는 죄송해요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자는 휘청거리며 주점을
나섰다 사내들이 밖으로 나갔다 그릇을 씻던 주모가 중얼거리는 소
리가 귀에 들렸다
말세지 말세 저런 녀석들이 설치고 다니다니
강철수가 주모의 얼굴을 보았다
보복이 무서워 함부로 고발도 못해요
강철수는 여전히 묻는 얼굴로 주인 여자를 쳐다 보았다
려 칠 전에도 여자 대학생이 저 녀석들에게 끌려갔다우
그녀는 분주한 손놀림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강철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길 건너쪽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여자를 뒤쫓아가던 사
내 하나가 여자의 목덜미를 잡아채는 광경이 보였다 녀석은 여자의
복부를 주먹으로 내질렀다 비명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여자는 힘없
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돈을 떼먹고 도망간 술집
여자라며 녀석들은 으름짱을 놓는데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강철수
는 달려갔다 한 녀석은 봉고의 운전석으로 올라가 시동을 걸었고
다른 녀석은 차문을 열었다 또 한 녀석은 쓰러진 여자의 양쪽 겨드
랑이를 끼고 봉고에 태우려 하고 있었다 여자는 울부짖으며 둘러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여인의 눈빛은 필사적
이었다 한 녀석이 주먹으로 여인의 뺨을 갈겼다 여인의 코에서 피
가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내는 여인의 머리칼을 거머쥐고
입 닥치지 않으면 죽여버린다고 협박을 했다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 보기만 했다
강철수는 사람들의 울타리를 헤치고 사내들에게 접근했다 여인은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여자가 마악 차에 올려지는
순간 강철수는 한 사내의 어깨를 잡았다 사내가 이거 어디서 굴러
온 말뼈다귀냐는 표정으로 강철수를 돌아 보았다
취한 여자 같으니 그냥 돌려 보내시죠
강철수의 음성은 공손했다
뭔데 남의 일에 나서 꺼져 이 새까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험한 기세였다
말버릇이 거칠구만 여자를 보내주시지 당신네 말대로 돈을 떼어
먹은 여급이라면 파출소로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냐
강철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운전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야 임마 너 정말 뒈지고 싶어 우리가 누군 줄 알기나 해
위협조로 욱대기고 나서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강철수에게 다가 왔다
어느 사이에 강철수는 세 사내에게 포위되었고 주위를 구경꾼들이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공연히 나서지나 않았나 후회가 되었다
경찰에 연행되면 복잡해진다 강철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찰관이
나 전경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갑자기 한 녀석이 강철수에
게 주먹을 날렸고 강철수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피했다 다른 녀석들
이 동시에 강철수에게 덤볐지만 이번에도 강철수는 몸을 피했다 한
사내가 품에서 무언가 꺼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생선회 칼이었다
강철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시간을 끌다가는 봉변 당한다 단번
에 해치우지 않으면 말려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강철수는 칼을 들
고 돌진해 오는 사내의 칼끝을 피하며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힘껏 강
타했다 둔탁한 반응이 주먹에 전해졌다 사내는 기침이라도 하듯
빅 하며 의식을 잃어버렸다 두 녀석이 역시 칼을 꺼내들고 양 옆에
서 찔러 들어왔다 강철수는 훌쩍 날아올라 피한 뒤 돌려차기로 한
녀석의 흉추를 강타했고 동시에 다른 녀석의 명치를 주먹으로 내질
렀다 모두 급소였다 일격에 사내들은 쓰러져 버렸다 사람들이 웅
성거 렸고 더러는 박수를 치기도 했다 비열하고 매정한 인간들 강
철수는 경멸에 찬 눈초리를 사람들에게 던지며 봉고차 안에서 떨고
있는 여자의 손을 잡아 주었다
고마워요
여자가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려왔다 강철수는 황급히 택시를 블러
세워 여자를 태우려 했다
댁이 어디시죠
강철수가 묻자 여인은 황급히 강철수의 팔에 매달렸다
호 혼자 가게 하지 마세요 무 무서워요 제 차가 길 건너에 있
어요
여자의 입술은 잿빛이었다 여인이 가리키는 곳에는 벤츠가 보엿다
강철수는 여자를 데리고 길을 건넛다 강철수가 핸들을 잡았다 얼
마 가지 않아서 병원이 보였다
치료부터 합시다
강철수는 손수건을 꺼내 여인의 코피를 닦아주며 말했다 출혈은
멎어 있었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치료는 필요 없어요 어디가서 좀 쉬고 싶
어요 두렵고 피곤해요 함께 가주세요 부탁합니다
여인의 애원하는 눈빛을 보면서 강철수는 정말 다친 곳은 없는가
다시 물었다
아픈 곳은 없어요 자주 들리는 곳이 있어요 좀 진정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함께 가주실래요
강철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벤츠는 힐튼 호텔로 방향을 틀었
다 카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정 말 고마웠습니다 황미라라고 합니다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그녀는 모 대학 영문과에 재학중인 학생이라
며 자신을 소개했다 웨이터가 다가왔다 그녀는 와인을 주문했다
두 남녀가 있는 자리에서는 서울의 야경이 손에 잡힐 듯이 내려다
보였다
몇 순배 술을 나누고 나자 여자는 원기를 되찾는 것 같았다 강철
수는 혼란스러웠다 반 시간 전만 해도 공포에 질려 어쩔 줄 모르던
여자가 아니었는가 여자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졌다 톰 존스의 고향
의 푸른 잔디가 은은히 흘러나왔다 한동안 음악에 귀를 기울이던 강
철수가 낮게 믈었다
황미라 본명은 아니겠지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본명이에요 저희 아버지는 고려 하이테크 회장 황석호구요
황석호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강철수는 쇠망치로 뒷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강철수는 멍한 시선으로 미라를 쳐다보았다
왜 우리 아버지를 아세요
강철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이 무슨 야릇한 운명의 장난인가 원수의
딸을 사지에서 구해주게 되다니 미라는 창가로 시선을 돌려 한동안
야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미라의 옆 모습은 후에와 무척 닮아
보였다 앤디 윌리엄스의 하와이안 웨덩송이 은은히 흘러나오기 시작
했다
아오자이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후에가 달려 오는 모습이 보였
다 누가 총을 쏘았다 후에의 아오자이 자락에 핏물이 번져갔다 강
철수는 격해지려는 숨결을 짓눌렀다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고 있
었던 모양이었다 잔에서 흘러내린 와인이 테이블 커버를 적시고 있
었다 곡은 스트레인저 온 더 쇼어로 이어져갔다 하얀 백사장이 망
막에 어른거렸다 강철수는 나영미를 떠올렸다
강철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영미의 투명한 나신과 신음이 생
각났다 삶의 법리가 이거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묻던 나영미의 음성이 생각났다 그렇다 삶에는 길이 없었다 오직
방황만이 있는 것이다 원수의 아내와 정사를 벌린 뒤 그 딸과의 우
연한 대면 어쩌면 이런 만남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우연
은 숙명이란 필연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모든 사건
이 우연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만나고 헤 어지고 뒤석여 살다
가 죽어가도록 각본이 짜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개연성 모든
가소성을 우연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에요 아무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술을 마시고 돌아가다 봉변을 당한 거죠
강철수는 미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라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냉
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미라가 물었다
아저씨는 어떤 일을 하세요
강철수는 투명한 와인잔을 내려다 보았다 나는 무슨 일을 하는 것
일까 복수와 테러의 근거를 설명할 적당한 논리가 있는 것일까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은 지금도 무척 떨려요 인신 매매
단이란 말은 들었어도 저에게까지 마수가 뻗칠 줄은 몰랐어요
강철수는 시선을 들어 미라를 응시했다 잔인한 구도가 떠올랐지만
밀어내고 말았다 이상하게 여자를 구해준 것이 후회스럽지 않았다
이 고독해 보이는 여자에게 적개심을 느낄 수가 없었다 후에를 연상
하게 만드는 맑고 서늘한 눈매 때문일까 강철수는 잔을 단숨에 비웠
다
외로워요 산다는 일이 지겹구요
비틀즈의 예스터데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후에의 콧노래가 고
막을 공명시켰다 후에 황석호의 잔인한 얼굴이 선하게 떠올랐다
아버지를 좋아하나
강철수는 잔을 내려다보며 나직히 물었다
미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도록 중호해요
이러며 여자는 와인이 반쯤 남아 있는 잔을 내려다 보았다 미라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이유 알고 싶으세요
강철수는 미라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해맑은 이국풍의 얼굴에
서 캔디스 버겐의 모습을 연상했다
아버지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동안 어머니는 친구들과
어울려 카바레 출입을 시작했죠 어머니가 민흥기란 사람을 만난 곳
도 카바레였구요
민흥기는 건설회사를 하는 청년 실업가였다 장현정보다 열 살이나
아래인 민흥기가 장현정의 정부가 된 것은 장현정의 미모도 미모려니
와 돈 때문이었다 그들은 황석호가 월남전에 참전하느라 집을 비운
동안 붙어 살다시피 했고 적잖은 돈이 민흥기의 회사로 흘러들어갔
다 월남전이 끝나고 나서도 황석호는 한동안 귀국하지 않고 트라이
앵글에 남아서 CIA 요원들과 함께 아편 밀매에 참가했다 그러다 귀
국한 황석호는 군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기반을 쌓게 되었다 황
석호가 월남에서 돌아온 뒤에도 장현정과 민흥기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난 아버지에게 복수를 할 거예요 어머니와 명수 오빠의 죽음을
뒤에서 조종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 말이에요
오빠가 있었나
황석호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철수는 의아했다
제 공부를 도와주던 오빠가 하나 있었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젖기 시작했다
그를 사랑했군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에 눈물이 괴어갔다 공연히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은 지루했다 그러나 두 죽음에 얽힌
내막을 알고 싶은 호기심도 생겼다
오빠는 왜 죽게 되었지
먼저 오빠의 내력을 말해주고 싶어요 듣고 싶으세요
강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3의 사춘기 소녀에게 키가 훤칠하고 잘생겼던 그 오빠의 존재
는 세상의 전부와 같았어요
명수는 그녀의 가정 교사를 하던 청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비
밀과외란 엄두도 못낼 때였지만 아버지의 막강한 권력의 그늘은 그런
것쯤은 쉽게 가려 주었다
그 오빠는 아폴론 동상을 뺀 듯이 닮았었죠 그리고 또
명석했어요
법대에 황명수가 입학하자 전체가 들썩거렸다 궁벽한
산골 마을은 큰 경사가 난 것처럼 며칠이나 잔치를 벌렸다 황명수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황명수의 누이동생 수희는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
한 채 구로공단에 봉제공으로 취업했다 황명수는 빈손으로 공부를
한다는 일이 얼마나 뼈저리게 서럽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미리 알았더
라면 진학보다는 공무원 시험을 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이란
도시는 가난한 자에겐 끝없는 좌절과 상대적 빈곤감을 절절히 느끼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는 공부를 하면서 사회적 모순에 개안하기 시작
했다 빈자는 끝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기득 계층은 투기를 통하
여 공릉처럼 부를 키워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소수의 부자와 다수
의 빈자 그는 절망했고 다음 순간 분노했다 그가 운동권 학생의 대
열에 끼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누이 동생이 술집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의 사회에 대한 의식의 굴절은 더욱 깊어졌다
명수 오빠가 시위에 앞장서게 된 것은 오빠가 과격해서가 아니었
어요 오빠의 성격은 오히려 여성적이기까지 했어요 살결도 곱고
또 소심하기까지 했어요 평생 누구에게 피해를 준 일도 거짓말을 해
본 일도 없는 그런 오빠엿지요
미라가 삼 학년이었던 어느 가을날 저녁 미라는 황명수에게 사랑
하노라고 고백했다
힘들었겠구나
황명수는 그뿐 침묵했다 가슴을 파닥이며 무슨 대답을 기다리던
미라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서울의 야경에 시선을 주고 있었던
황명수가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였다
정말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니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뭘
오빠의 모든 것을
나에 대해서 뭘 알지
알 만큼은 알아요
너는 나라는 사람을 아직 몰라 이야기해주지 나를 누군가가 사
랑하고 있다니 우선 감사한 일이지만 좌우간 내 이야길 듣고 나서
생각해봐
황명수는 그때 비로소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는 일본 사람들에게 빌붙어 엄청난 재산을 모은 욕심이
많기로 소문난 천석골 김 부자댁 머슴이었어 그것은 할아버지 때부
터 물려받은 천형같은 올가미였지 김 부자는 그 고을 일대의 거의
모든 전답과 임야를 헐값으로 사들였지 그리곤 고을 사람들을 소작
농으로 전락시켰어 고리채 놀이 양조장 여관 어장 그가 손대지
않은 것은 없었지 아버지는 그런 김 부자의 머슴이 되어 가난의 올
가미를 쓰고 개처럼 살고 있었어 아버지의 어릴 때 친구 중에 조문
수란 사람이 있었어 그는 열 다섯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학으
로 와세다 대학을 마쳤지 그리곤 독립운동을 하기 시작했어 일제
시대 그분은 서대문 형무소깨나 출입했었지 마을 사람들은 아예 나
쁜 사상에 물든 요시찰 인물로 그를 피했지 아니 피하는 정도가 아
니었어 그 분이 몰래 그의 가족을 만나러 온 낌새만 보여도 다람쥐
처럼 지서로 달려가 신고했었지 마을 사람들은 그를 무슨 질병같은
것 아니면 나쁜 음모를 꾸미며 다니는 범죄꾼으로만 생각했지 그가
찾으려는 조국은 너무 위험한 것이어서 무슨 잠꼬대 같은 헛수작을
하느냐고 삿대질 하기가 일쑤였어 그 통에 가장 고통을 받은 것은
그분의 연로한 부모님이었지 해방이 되었어 조문수는 개선장군처럼
마을에 나타났지 그리곤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놓고
조문수는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끔 마을
에 들러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가 의식화된 것은 조문수의 영향이
었다 조문수는 마을 청년들을 모아놓고 일제 시절 일본 놈들과 빌
붙어서 농민들의 등줄기를 파헤치던 친일파요 악질 지주였던 김 부
자를 처단해야 된다고 부추겼다
그러던 어느날 밤 천석골 청년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김 부자집으
로 몰려갔다 모두의 손에는 짼불이 들려 있었다 그 선봉엔 황명수
의 아버지 황민구가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날 밤 김부자의 고래
등 같은 안채며 사랑채며 심지어는 외양간까지 불타고 말았다 치안
이 한참 어지럽던 시절이었다 김 부자는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기
실 하소연한다고 해도 김 부자의 친일 행각을 아는 사람이면 어느 누
구도 김 부자를 동정하지 않았다 김 부자는 당분간 서울에 사는 동
생인 김문건의 집으로 피했다 고등계 형사였던 김문건은 당시 수도
경찰청 소속이었지만 세상이 뒤숭승하던 때라 힘을 못쓰고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찰조직이 강화되기 시작했
다 김문건은 일제 시대 때 고등계 형사반장이었던 장태성의 줄을 대
고 경찰 간부가 되었다
김 부자가 다시 천석골로 온 것은 1949년 겨울이었다 그의 동생
김문건은 여봐란 듯이 경찰서장이 되어 있었다 남로당에 대한 검거
령이 내리자 조문수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아버지는 경찰에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 김 부자는 그를
배신한 머슴에게 앙갚음을 한 셈이었지
다음해 6 25가 터졌다 인민군 기갑 부대가 천석골로 들이닥친 것
은 7월 초순 어느 날 초저녁이었다
기갑 부대를 뒤이어 일개 대대의 보병 부대가 밀고 들어왔다 그들
은 천석 국민학교 마당에 야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한 군인이 눈같이 하얀 말을 타고 마을 어귀로 들어섰
다 그의 까만 가죽 장화에선 저녁 태양 빛살이 부서져 눈이 부실 지
경이었다 길가에 있던 인민군들은 그를 위해 길을 열며 경례를 올려
붙였다 조문수 대좌는 그렇게 마을에 나타났다 마을에 돌아온 그는
김 부자부터 찾았다 황명수의 아버지는 양조장 창고에 숨어 있던 김
부자를 끌어냈다 그날 밤 김 부자는 인민 재판에 회부되었고 조문
수에 의하여 사형이 선고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김 부자를 죽칼로
찔러 죽였다
어느날 오후였다
우렁우렁 포성이 다가오자 인민군들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자 천석골 한 가운데를 관통한 신작로를 따라 군인을 가득 실은
트럭들 탱크들 지프들 야포 트럭 등이 뽀얀 먼지를 매단 채 인민
군의 뒤를 추격했다
그 마을에 김문건이 나타나 황명수의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을 부역
혐의로 경찰서에 끌고 간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들은 혹독한
고문과 구타를 당해야 했다 황명수의 아버지는 그 후유증으로 폐인
이 되었다
명수 오빠 이 세상에 정의란 게 정말 있을까요
정의는 지고의 가치야 그러나 정의의 편에 있는 사람들의 수는
적어 사회를 보라구 부동산 투기로 큰 돈을 번 사람들은 외국에 영
주권까지 마련해두고 마음껏 사치를 즐기는가 하면 햇빛도 들지 안
는 지하 골방에서 여러 명의 식구가 근근이 살아가는 현실을 이것
은 무능했던 군사정부의 탓이야 기득 계층은 감나무를 독점한 채 감
을 혼자서 따먹으려 들고 있어 누가 그 감나무를 흔들면 당장 흔내
려 들지 감을 나누어 먹을 생각은 못하는 거야 있는 자나 없는 자
나 하늘 아래선 평등한 거라고 했는데 없는 사람들의 삶이란 동물
이하라구
누가 그러던데 오빠같이 화염병 던지는 대학생들 좌경이라고 했
어요
나는 공산주의를 가장 중호하는 사람 중의 하나야 그들은 나치스
보다 더 인간의 영혼을 구속하고 타락시키고 동물 이하로 전락시켰
어 한 사람의 카리스마적 존재에 예속된 노예만 만들었어 저들은
자유인이 아니야 사상에 얽매인 광신자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지
우리 민족성 어떻게 생각해요
독재에 약해 총칼만 들이대면 놀라서 아부하고 빌붙고 그걷 습
성은 오랜 침탈의 결과 생긴 거라고 했어 우리들의 혈관엔 노예 근
성이 흐르고 있어서 자손에게 대대로 유전되고 있어 요즘 애들 시위
하는 것 중에서도 무슨 주의를 내거는 녀석이 있는데 그건 스스로
사념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는 어리석은 행위야 그들이 내걸고 있는
주의나 사상이란 것은 걸레보다 못한 거야
오빠는 무슨 주의자세요 그리고 왜 앞장 서구요
말과 생각하는 자유를 억압하니 튀어 오르는 것뿐이야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국민들이 잘 살게 해달라 군인은 전선으로 가고 정
치가는 정치판으로 가고 경제인은 경영 일선으로 가라는 거지 그리
고 법을 잔뜩 만들어 함부로 잡아 가두지 말라 많이 소유한 자는 세
금을 많이 내게 하고 못 사는 사람들은 도와주어라 대학도 대학답
게 발전될 수 있도록 자을을 보장해 달라 학문을 사랑하는 선비들이
교단에서 안심하고 연구하는 환경이 되도록 해달라 이런 거야 나는
급진주의나 혁신적 진보주의를 둘다 경계해 주의란 것 모두가 허황
된 수사의 덩어리요 어떤 주의도 모순을 갖게 마련인데 뭐하려고 주
의를 내거느냐는 거야 이데올로기는 그걸 만들어낸 사람이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그만이야 주의란 매춘부 같은 거라구 괜히 감격하고 신
봉할 것 없어
그러나 어느 시대에도 주의는 있었잖아요
주의 때문에 애매한 사람들 얼마나 죽고 다쳤는지 봉건주
의 전체주의 파시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들 때문에
죄없는 사람들 얼마나 희생됐어 이념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고 생각해
미라는 황명수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좌경이
아니란 걸 알고 마음이 놓였다
어느날 오빠랑 공부하는데 아버지의 부하들이 내방으로 들이닥치
더군요 그리곤 두 사람의 가죽 잠바가 오빠를 끌고 갔고 나머지 두
사람이 오빠 방을 뒤졌어요 그들은 오빠의 방에서 나온 편지와 전
단 그리고 책들을 압수해 갔어요 오빠는 연행된 후 얼마 안 잇다
입대했구요 오빠가 총을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입대한 날로부터 삼 개월 되던 날이었어요 난 아버지에게 복수할 거
예요 어쩌면 새엄마가 아버지를 살해하려고 노리고 있을 거예요 아
버지가 죽어 봐요 새엄마는 아버지의 재산 중 5의 지분을 유산으
로 믈려 받을 것 아네요 물론 저도 그만큼 물려 받겠죠 그렇게 되
면 난 가난한 이웃을 위해 그 돈을 값지게 쓸 거예요 아버진 나쁜
사람이에요 내 어머니까지 죽였으니까
어머닌 어떻게 돌아가셨지
어머니는 아버지를 나보다 더 경멸했어요 특히 명수 오빠가 그렇
게 된 후 내가 조울중에 걸리고 나자 더욱 아버지를 중호하게 됐지
요 그래서 민 사장과 더욱 열을 올렸고
황석호는 어느 덤푸트럭 운전사에게 돈을 주고 그들 남녀의 숭용차
를 깔아 뭉개게 한 것이다 그들 남녀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외과의사까지 동원해야 했다 사고를 낸 트럭 운
전사는 구속됐지만 6개월 후 풀려났고
서울은 넓고도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저녁은 황석호의 처와
동침했는데 오늘은 황석호의 딸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이런 이야기는 혼한 화제였다 이 도시에선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정치인과 깡패들이 짜고 추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백주 노상에서 납치된 주부가 어디로 끌려가 창녀가 되었다 해도 놀
라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여덟 살 어린애를 강간한 후 목졸라 죽였
다 부부싸움 끝에 어린 딸을 9층 베란다에서 아래로 던졌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은 남의 집 불 구경하듯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일들이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세상 인심 이었다
너무 제 이야기만 늘어 놓았군요 지루했죠
그녀는 말똥한 눈으로 강철수를 응시했다 고백은 가끔 가장 효과
적인 카타르시스였다 어머니의 제삿날 처음 만난 남자 앞에서 자신
의 비밀을 털어놓는 행위를 뭐라 설명하면 될 것인가 그때 여자의
눈엔 슬픔보다는 설명 못할 중호가 괴어 있었다
정말 아버지를 중호하오
그래요 중호하고 경멸해요
아버지를 중호하는 딸 이해 못할 인과관계 강철수는 혼란해졌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이야길 끝까지 들어주어서 고마웠어요 언제 다시 만나뵙고 싶어
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며칠 후면 출국합니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오늘 일 잊지 않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비틀거리며 자리서 일어났다
조심해서 돌아가시오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강철수를 빤히 응시한 후 바쁘게 문을 나섰다 강철수는 바
래다 줄까 하다 그만 두었다
모닝 콜이 울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9시 20분 전입니다
수화기를 타고 듣기 좋은 목청이 굴러나왔다 강철수는 느긋하게
눈을 떴다 커튼 틈으로 햇살이 날아들었다 뽀얀 먼지가 보였다 강
철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창문을 열었다 이른 봄의 차가운 대기가
코 속을 바늘처럼 찔렀다 상쾌했다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열린
창문을 통해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며 분주히 오가는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 아침을 맞는 도시는 활기차고 신선했다 사람들의 표
정은 기운찼다 사람을 죽이기엔 너무 맑고 좋은 아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맑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조각 구름 수정처럼 빛나는 이슬 새 움이 트는 잔디밭을 부드럽
게 스치는 봄바람 이런 것들을 송두리째 잊어버린 것이 얼마나 되었
을까 이런 것들이 주는 감상에 젖던 시절이 과연 나에게도 있었을
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강철수는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를 켰다 파
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라이터 속에 숨겨진 마이크로 폭탄은 녀석을
거짓말같이 분해할 것이다 녀석의 더러운 삶은 녀석의 폐부에서 흘
러나오던 더러운 호흡은 녀석의 몸에서 빠져나오던 더러운 배설물은
모두 중발하고 말 것이다 녀석은 어쩌면 행복한 죽음을 맞는 셈이
다 더러운 그의 죄업의 나날에 비한다면 마이크로 다이너마이트에
의한 폭살이야말로 얼마나 축복받은 죽음인가 녀석은 죽는 순간까지
도 죽음의 어떠한 조짐도 알지 못하고 먼지로 분해될 것이다 폭살은
잔인하고 끔찍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당사자로선 전혀 고통이 없는 죽
음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의 구덩이를 향
한 행보를 시작하는 셈이다 암에 걸려 죽거나 교통 사고를 당하여
죽거나 다른 질병에 걸려 죽거나 모든 죽음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
러나 황석호의 죽음은 고통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상관 없는 일이
다 자의에 반하는 죽음이란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벽에 걸린 시계
를 보았다 두 개의 침은 마치 교통 정리를 하듯 직각으로 팔을 올리
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강철수는 방을 꼼꼼히 정리했다 이런 습관
은 트라이앵글과 베트남 포로 수용소에서 체득된 것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프런트였다
손님 오늘밤 주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강철수는 가방에서 마이크로 다이너마이트의 원격 조정 스위치를
꺼냈다 그리곤 그걸 잠옷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다시 창
문 밖을 살폈다
황석호 수많은 파월 용사들이 자유 수호라는 기치를 내걸고 월남
전에서 산화해갈 때 녀석은 전우의 피를 흡혈귀같이 마시며 살찐 군
인이 아닌가
9시가 되었다 강철수는 건성으로 읽은 신문을 탁자 위에 올려 놓
고 나서 창문 밖을 살피기 시작했다 9시 5분이 되자 검정색
BM 한대가 미끄러지듯 나타나 대양빌딩 앞에서 정차했다 운전기
사가 차문을 열어 주었다 황석호는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그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황석호가 두 계단째 발을 딛는
순간 강철수는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마이크로 폭탄의 원격 조정
스위치를 눌렀다 붉은 섬광이 번쩍 했다 엄청난 폭발음이 대기를
뒤흔들었다 폭발 현장엔 푸른 연기가 펴어 을랐다 그가 있던 자리
엔 괴 한방울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중발하고 말았다 완벽
했다 황석호의 뒤를 따르던 운전 기사는 벼락 맞은 소얼굴을 한 채
넋을 잃고 멍청히 서 있었다 계단 밑으로 여러 명의 사람들이 우루
루 달려 내려 왔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서로 멍하니 보는 것
이 고작이었다
한심한 일이야 도대체 다들 뭐하는 사람들이야
잔뜩 부어올라 얼굴이 시뻘개진 서장은 쥐고 있던 신문을 책상 위
에 내동댕이첫다
수사과는 당장 냉기에 떨기 시작했다 모두들 슬금슬금 서장의
눈치를 살피며 사무실을 나갔다 서장은 팩스로 전송되어 온 서류를 회
가 잔뜩난 표정을 한 채 들여다 보았다 연이어 일어나는 살인 사건
여지껏 사건의 실마리도 파악 못한 채 수사는 공전하고 있었다 신문
마다 무능하다며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김 반장은 맥풀린 표정으로
서장이 동댕이친 신문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백주 노상에서 일어난 폭살 사건 가능한 일일까 이세준의 사건
도 오리무중으로 치닫고 있는데 이번엔 폭살 사건이라 누굴까 보통
범죄자의 소행은 결코 아니다 수법이 대담하고 잔인하다 돈을 노린
범행은 아니다 동일범임에 틀림없다 놈은 정면으로 도전해온 것이
다 마이크로 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자라면 흔치는 않을 것이다 놈
은 경찰을 비웃고 있다 놈은 교활하고 지능이 뛰어나다 이세준 황
석호 모두 트라이앵글에서 은밀한 작전을 했었고 또 신군부 세력으
로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손에 쥐고 있던 사람들이 아닌가 트라이앵글
과 정치적 음해 아니면 십여 년 전에 있었던 항쟁 사건 희생자의 복
수 그러나 수법으로 보아서는 민간인의 범행이 아니다
이세준 사건의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또 이번엔 황석호라 도대
체 단서라도 잡아야 할 거 아냐 단서라도 벌써 두 건이라구
서장은 사무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체면이 서야지 본부장은 독촉이 성화구
서장은 여전히 화가 난 어조로 내뱉었다 피살자의 집에 다녀오겠
다며 서장실을 나선 김 반장은 나영미가 사는 압구정동으로 차를 몰
았다
빈소에는 나영미와 황미라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분향을 한 후
김 반장은 나영미에게 믈었다
고인이 남긴 일기나 사진첩을 볼 수 있을까요
미망인 치고 나영미의 표정이 침착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첫다
그러세요 서재로 가시죠
나영미의 커다란 엉덩이에서 시선을 피하며 김 반장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김 반장은 황석호의 서재를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두터운 사
진첩이 여러 권 눈에 띄었다 임관 시절부터 최근에까지 찍은 사진들
이 연대별로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한참 뒤적이던 김 반장의 시선
이 한장의 사진에 고정되었다 969년 오키나와 캠프에서 한국
군은 여섯 명이었다 이세준 황석호 최오남 그리고 한만수 강철
수 신형철 여섯 명의 사진이었다
오키나와라면
혹시 황 회장님 살아계실 때 이 사람들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
니까
김 반장은 사진을 건네주면서 물었다
그 양반은 밖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어요 이 사진에 대해
말씀하는 것도 듣지 못했어요
김 반장은 하나의 사진에 시선을 못박았다 커다란 산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고 사진 밑에 트라이앵글에서란 글자가 희미하게 보
였다
트라이앵글
김 반장은 날카롭게 솟은 산봉을 눈여겨 보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석호 이세준 최오남 강철수 한만수 신형철 이들
여섯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인과관계를 알면 이 연쇄살인 사건에 대
한 실마리가 풀릴지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죽었고 세 사람
의 위관급 장교들은 모두 전사자로 처리되었다
유령이 복수를 한단 말인가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최오남일지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김 반장은 앨범을 나영미에게 건네 주면
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가시게요
나영미가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생 많으시겠습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영미의 배응을 받으며 황석호의 집을 나선 김 반장은 육군본부로
차를 몰았다
나영미의 태도는 지나치게 냉정했다 허기야 두 사람의 최근 행적
이 적힌 서류를 읽어 보고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을 청부살해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 않는
가 김 반장은 육군본부에서 멀지 않은 용마 다방에서 배 중령을 전
화로 찾았다
웬 일이야 자네가
뭐 좀 알아보려고 다방으로 나와줘
무슨 일인데
이번에 피살된 황 장군 알지
알지 왜
황 장군이 오키나와로 갈 때 동행한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알아
줘 가능하면 그 사람들의 인사기록 카드를 복사해서 와줘
알았어 기다리고 있으라구
배 중령이 다방으로 온 것은 삼십 분쯤 지나서였다
여기 있네
배 중령이 김 반장에게 건네주는 서류에는 한만수 신형철 강철수
의 인사기록 카드가 들어 있었다
이 세 사람 어떻게 됐지
세 사람 다 전사햇서
언제 전사했지
972년 말로 되어 있더군
그래
김 반장은 기운이 빠졌다 혹시나 하던 기대가 무너진 것이다
자네 마이크로 폭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나
좀 알지 특수한 재료로 만든 폭약이지
자네도 만들 수 있나
특수 요원 아니면 만들 수 없어
그럼 이 사람들은
김 반장은 문제의 사진을 배 중령에게 건네주면서 물었다
이 사람들은 만들 수 있어 오키나와에서는 특수전 훈련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친다구
마이크로 폭탄은 어떤 폭탄인가
군사 과학 기술 연구소에 있는 홍 중령을 만나면 알 수 있을 거
야 전에 동창회에서 만난 적 있지 왜 대머 리 말야
아 그래 내가 그리 간다고 전화해줘 그 부대 앞에 무슨 다방
있지
남강 다방에서 만나도록 하지
김 반장은 배 중령과 헤어져서 남강 다방으로 차를 몰았다
홍 중령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 반장은 홍무성 중령에게
마이크로 폭탄의 위력에 대해서 물었다
작지만 위력은 굉장해 콩알 만한 크기의 폭탄으로 소도 죽일 수
있을 만큼 폭발력이 강력하다고 들었어 살상 반경도 엄청나고
홍 중령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격 조정이 가능한가
김 반장이 물었다
반도체를 이용하니까 가능하겠지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가능할까
장해물이 없다는 조건이라면 약 500여 미터 정도 될까
5미터라면 굉장한 거린데
초단파를 이용하면 가능해
시한장치는
시한장치를 하려면 상당히 부피가 커지지
어느 정도
담배곽 두 개 정도의 크기는 되어야 시한장치가 가능할 거야
원격조정 장치만 한다면 주로 어떤 물건에 장치할 수 있을까
만년필 볼펜 라이터 구두 뒤축 혁대의 버끌 담배 케이스 뭐
이런 것들 속이겠지 실제 훈련 교본에도 그렇게 되어 있어
자네 트라이앵글이란 말 들어 보았나
아니
혹시 알게 되면 연락해줘
그러지
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
어때 가닥이 잡혀가나
오리무중이야 감이 안 잡혀 고맙네 언제 대포나 한잔 하세
그런 말을 주고받고 나서 김 반장은 서로 돌아왔다 연쇄살인 사건
이라면 다음 희생자는 최오남이 될 가능성이 컸다
나영미를 미행해보자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었다
시드니 항구
해면엔 수천 개의 조각으로 분해된 달이 바람에 떨고 있었다 하늘
엔 수없이 많은 별들이 빛났다
신형철은 등나무 의자에 앉아서 아름다운 항구의 야경에 홀린 듯
시선을 주고 있었다 이 호텔의 건너편 오페라 하우스에서 흘러나오
는 불멎은 해면에 현란한 불멎의 기둥.을 만들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색색의 불기둥들은 아라비아의 무희처럼 허리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평화의 바다와 녹색의 낙원 시드니의 밤 그러나
형철에겐 고국의 바다가 더 그립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생명의
꾸부정한 자세로 앉아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신형철은 이 축
복의 대지를 생각한다 760만 평방킬로미터의 드넓은 땅 6만 평방
킬로미터의 넓이는 남한의 60배의 넓이가 아닌가 이 대천지에 사는
천오백 만의 낙천적 인생들
대지가 넓으면 인간의 마음도 넓은 것인가 이곳 호주인들은 마음
이 너그럽고 여유가 있다 그들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그리고 인생
을 즐긴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인생을 즐기는 낭만적인 국민 그
중에서도 루이스는 정말 좋은 여자다 낙원같은 이곳에서 이브같은
루이스와 지내면서도 그는 고국의 짙푸른 바다와 쪽빛 하늘과 수려한
산들을 그린다 회귀본능과 향수 이 치열한 감정을 억제하는 것은
고문과 같은 것이다 지상낙원에서 갖는 고국에 대한 견디기 힘든 동경
어디간들 잊으리요 중호와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고 있는 마음
에도 남쪽 바다의 멜로디는 살아 있는 것이다
한국의 가을처럼 빼어난 것이 있을까 이곳 시드니에는 가을의 정
취를 느낄 수 없다 사계가 뚜렷하다는 것은 축복인지도 모른다
겨울의 설화 칼날 같은 바람의 매서운 맛 눈 덮힌 산사의 서늘한
아름다움 신형철의 뇌리엔 하얀 눈밭에 선명하게 찍힌 노루 발자국
이 선명히 떠오른다 노루뿐이랴 그가 살던 마을 부근엔 들짐승들이
많았다 눈이 올 때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따라 설신를 신고 눈밭
을 뛰어다니며 산짐승들을 사냥했었다 개짖는 소리가 하얀 산을 메
아리치는 묘악산 자락 청수마을
봄과 여름도 물론 좋았다 아련한 안개 사이로 살구꽃이 가슴을 열
면 대지에선 흙냄새가 피어 오르고 습한 바람이 겨우내 얼었던 가지
를 따뜻하게 감싸고 새움이 터오고 새가 울고 언 땅이 녹고 땅이
부드러워지면 쟁기질하는 농부의 소 부리는 소리가 산골에 메아리치
고 황갈색 산색이 담녹의 새옷으로 단장해가고 봄의 산빛과 견즐
색이 있을까 여름 산자락엔 여러 갈래의 계류가 있었고 돌 여울마
다 쏘가리 버들치 빙어 산천어 등이 맑은 물 속에 숨어 있었다
이들을 천렵해서 매운탕도 끓이고 기름에도 튀겨서 술안주 삼아 먹던
기억들 여러 가지 상념들이 시드니 항구에 고정된 눈동자에 떠오른
다 어디엘 가도 펄럭이는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이 나라는 이국인을 따뜻하게 맞아준다 은혜의 제 6대륙 이 땅에
도 슬픔의 그림자는 있다
3만 8000년 전에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이주해온 원주민들은 그들의
영토를 백인들에게 내준 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606년 스폐인
의 탐험가 토레스가 이곳 해안을 발견한 것은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불운의 시초인지도 모른다
초이 언제 깼어요
루이스가 리넨 시트로 가슴을 가린 채 물을 때까지 형철은 바다에
시선을 못박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폭살 사건을 보도한 일간 신문이
들려 있었다
황 사장 폭살되다 유력한 용의자 심문중
형철은 루이스의 우유빛 얼굴에 시선을 주며
아무것도 아냐
라 말해주고는 한국에 보낼 전문의 원안을 살펴 보았다
알았어요 잠이 와요 굳 나잇
오우케이 허니 좋은 꿈꿔
다음은 최오남의 순서였다
신형철은 최오남의 서류철을 훌어보기 시작했다
전직 대통령 경호실장 보안 사령관 제 7 공수 사단장 남국성회
멤버 경호 상태 전직 경호 요원 5명 취미 골프 나이 66
세 부인의 취미 정원 가꾸기 재산 상태 억 달러 가족 관계
처와 1남 녀
최오남 피스톨 최로 알려진 사내 그러나 그도 이젠 정계에서 물
러나 야인 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모시던 대통령이 살해되고 나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만 권력자 그의 군화발에 걷어채인 사람
들의 수는 얼마나 많았고 그의 폭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쳐
왔는가 걸핏하면 간첩단 사건을 조작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핍박하던
공화국의 핵심 멤버
8년 동안 그는 권력이란 칼을 마음껏 휘두르며 걸태질한 돈을 스
위스 은행에 은닉했고 국내에 있는 재산만 해도 300억 정도가 있다
고 했다 스위스에 얼마나 있는지는 본인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다
그는 일본에서 나서 일본에서 자란 까닭에 친일 성향이 농후했고
그래서 친일파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했다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하
다는 이유와 성격이 거칠고 맹목적이라는 이유로 또 상관에 대한 충
성심이 개처럼 깊다는 이유로 나중에 나라를 뒤엎고 스스로 황제가
된 상관의 후광을 입은 그는 세상의 영화와 권력의 단맛을 볼 대로
본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찬란했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 그에게는 죽음이
라는 절대절명의 수순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강철수는 잘해 나가고 있었다 세상이 끝나도 배신을 모르는 친구
를 둔 것처럼 행운은 없으리라 트라이앵글 지대에서 알게 된 우정
골든 트라이앵글 지대의 산그림자가 번히 떠오른다
어느날 골든 트라이앵글 지대의 라오스 국경 산악 지대에서 헤로
인 밀반출 루트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원들은 수색 작전을 나
갔다 맨 앞에서 정글도로 길을 내던 박 병장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
다 모두 놀란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한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맨 앞에 서있던 제주도 출신 고 상병이 풀썩 주저 앉았다
심장에 직격탄을 맞은 그는 이미 눈자위가 뒤집혀 있었다
매복에 걸렸다 모두 엊드려
신형철이 이렇게 외치는 찰나 그는 어깨에 둔중한 감각을 느꼈다
갑자기 피로해진 그는 풀덤불로 쓰러졌는데 강철수가 그에게 달려
오는 게 보였다
한방 먹었구나
강철수의 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총성을 입었다는 걸 깨달았다 강
철수는 위생병을 불렀고 황급히 달려온 위생병은 붕대로 총상 부위
를 감쌌다 출혈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어느 정도야
강철수가 위생병에게 믈었다
상박골이 나갔어요 복잡 개방 골절이고 또 쇄골하정맥이 절단된
것 같아요 내출혈이기 때문에 지혈도 어렵구요
위생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야 임마 고개만 젓지 말구 어떻게 해봐
강철수가 악을 썼다
이상 제가 할 게 없어요 수술밖에는 수술도 빨리 해야 해
요
무슨 소리야
빨리 병원에 가야 산다구요 출혈이 너무 심해요 이러다간 병원
에도 못가고 말 것 같아요
형철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공포를 실감했다 위기감을 느꼈다 그
리고 너무 피로를 느꼈다 이왕 죽을 몸이면
철수 이리 좀 와
강철수가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수류탄 하나 꺼내줘
형철은 기운없는 소리로 말했다
뭐하게
날 여기 두구 가라구 이러단 다 당하게 돼 난 틀렸어
안돼 가야 돼 자식 약한 맘 먹지 말어
강철수는 신형철을 들쳐 업으려 했다
그때였다 강철수 등 뒤에 서있던 지문오 대위가 말했다
강 대위 신 대위 말대로 하지 이러다간 우리 모두 당한다구
맞아요 지 대위님의 말이
다른 녀석들도 맞장구첫다
부상한 전우를 그대로 두고 철수하는 군인은 군인이 아니야 목숨
이 붙어 있는 한 후송해줘야 돼 그래야 병사는 용감해진다구 생각
해봐 부상당했을 때 내버려진다고 한다면 누가 부상당하면서까지 적
과 싸우겠어 잘 들어둬 내 말 다신 그런 말 꺼내지 말어 아무도
철거덕 소리가 들렸다 지 대위와 단짝인 황 대위가 강철수에게 총
을 겨누며 말했다
그대로 가자구 만약 우리 중에 누구라도 생포된다면 문제가 심각
해져
황 대위 그 총 치워
안돼 그냥 철수해
이 새끼 총 치워
강철수가 총을 집어들려는 찰나였다 요란한 사격 소리가 일제히
들렸다
베트콩이다
그렇게 외치는 강철수의 시야에 지와 황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다른 대원들은 모두 풀덤블로 몸을 숨겼다 강철수는 신형철을 들쳐
업었다 그리곤 숲속으로 뛰어 들었다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박격포
탄이 작열했다 강철수는 그를 등에 업고 20여 킬로나 되는 산길을
밤을 하얗게 지새며 옮겼다 형철은 수백 번이나 길섶에 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철수는 막무가내로 형철을 병원까지 옮겼다
그때 이십분 정도만 늦었어도 당신은 소생하지 못했을 거요
며칠 후 의식을 되찾은 형철에게 군의관이 들려준 말이었다
신형철은 강철수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최오남은 경계심
이 유달리 날카로워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화벨 소리였다
나영미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강철수였다
언제 오셨죠
나영미가 물었다
이틀 됐소
강철수의 음성은 우울했다
왜 전화하지 않으셨죠 줄곧 기다리는 줄 모르셨나요
바빴소
어디세요 곧 나갈께요
나영미의 어조는 다급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장례는 잘 치렀습니까
고인의 명복이라니 왜 엉뚱한 말을 하지 나영미는 속으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계셨어요
외국을 들러 온 길이오
이 사람은 도청을 경계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나영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랬어요
그곳에서 만납시다 같은 시간에
알았어요
나영미는 심상찮은 낌새를 챗다 혹시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면 조
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외출 준비를 했다
김 반장은 도청 장치를 내려다 보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곳이라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시간이라면
남자의 목소리는 톤이 굵었다 바윗장 같이 무게 실린 목소리
였다 어떤 자일까 여행했다는 것은 연막이다 도청을 눈치채고 있
는 자라면
김 반장은 황석호의 재산 관리를 맡고 있던 송 변호사로부터 나영
미에게 상속된 유산의 규모를 듣고 놀랐었다 딸인 미라의 몫과 합치
면 조 3천 억이 넘는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 나영미가 개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김 반장은 송신기를 집어 들었다
여기는 여자가 집을 나선다 실수 없어야 돼
알겠습니다 한 번도 실수 안했잖아요
박 형사의 음성이 날아왔다
그러니 더 조심하라구
알겠습니다
철문이 열렸다 눈부시게 하얀 실크 원피스 차림의 나영미가 벤츠
를 타고 대문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김 반장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 형사에게 눈짓했다 봉고차는 모
퉁이를 회전하는 나영미의 차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나영미는 성수대
교를 지난 뒤 핸들을 꺾어 올림픽 대로로 접어들었다 그런 뒤 나영
미는 갑자기 우회전하여 반포 대교를 건녔다 미행자가 있다면 상당
히 혼란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나영미는 충무로 1가를 지나 남대문
로로 접어들었다 잠시 후 청계천 대로로 접어든 나영미는 차를 우회
전 시켰다 공평동 입구에 차를 주차시킨 나영미는 택시를 잡고 라마
다 호텔로 갔다 남대문 가 못미쳐서 나영미를 놓쳐버린 김 반장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보고 싶었어요
나영미는 강철수의 가슴에 안긴 채 속삭였다
어디서 지냈죠
이곳 저곳을 옮겨 다녔소
이세준도 당신이
그런 질문은 않는 게 좋소
강철수는 나영미를 만나고 싶을 때마다 자제했었다 범죄와 여자의
연결고리처 럼 위험한 것은 없었다
그동안 전화 못한 이유는 알지만 너무했어요 한 달도 넘었잖아
요
만나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소 그러나 당신은 틀림없이 도
청당하고 미행까지 당하고 있소 오늘 어떻게 이곳까지 왔소
나영미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잘했소 미행자가 있었다면 녀석들 닭 쳐다보는 개꼴이 되어 있
을거요
녹음 테이프는 찾았소
네 금고 속에 감추어 두었더군요 여기 있어요
나영미는 핸드백에서 테이프를 꺼내 강철수에게 보여주었다
당신이 보관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물건이오 내가 보관해도 되겠
소
그럼요
나영미는 테이프를 강철수의 손에 넘겨 주었다 그리고 나서 강철
수의 허리를 껴안으며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강철수는 젖어서 윤기가 흐르는 나영미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
었다 나영미의 입술은 미끄럽고 윤습했다 여자는 입을 벌렸다 열
려진 여자의 입속으로 혀가 미끄러져 들어갔다 혀는 잇몸과 입 천장
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구강 점막이 충혈되기 시작했다 혀가
이르는 곳마다 감각점이 놀란 듯 몸을 떨었다
축제를 위한 촛불들이 점화되기 시작했다 연구개와 경구개에 흩어
진 감각 세포는 감미로운 흥분을 대뇌의 피질로 전달하면서 반응을
증폭시켜 나갔다 남자는 여자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남자의
이가 닿을 때마다 여자는 참기 힘든 쾌감에 놀라며 더욱 애타게 사
랑을 갈망하게 되었다 커다란 손이 옷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와 여자
의 가슴으로 갔다 손은 탄력있는 유방과 유두를 부드럽게 만져 나갔
다 핑크빛 유두는 긴장하며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석류알처럼
경직되 었다
여자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여자의 옷을 하나씩 벗겨 나
갔다 그리고 자신도 나신이 되었다 강철수는 여자를 안고 침대로
갔다 그리고는 힘껏 포옹했다 여자는 부르르 몸을 떨기 시작했다
행복해요
헐떡임 때문에 나영미는 겨우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요
남자는 입술을 여자의 귓불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여자의 귓불을
입속에 넣었다 여자의 입술이 열렸다 뜨거운 숨결이 가쁜 호흡과
함께 벌어진 입술을 헤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여자의 매끄러운 하복부에 커다란 손이 닿기 시작했다 손은 하복
부와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나갔다 여자는 더욱 안타깝게 사내
의 손길을 기다리게 되었다 사내의 손길은 여자의 엉덩이를 만져 나
갔다 엉덩이에 닿는 남자의 뜨거운 손바닥 여자는 몸을 뒤채며 길
게 한숨을 토했다 남자의 억센 손길은 여자의 매끄러운 엉덩이를 감
싸기도 하고 밀가루 반죽처럼 주무르기도 했다 여자의 엉덩이에 퍼
져 있는 미로 같은 감각 뉴런은 남자의 손길을 인식하며 그 찬란한
자극을 낱낱이 대뇌의 피질로 전해주었다
달콤한 감각은 걷잡을 수 없이 밀려 들었다 의식의 밑바닥에 침잠
해 있던 불안과 공포는 어느 사이에 중발되고 마음은 새털처럼 가벼
워졌다 그녀는 밀려드는 자극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
다
이 남자에게 모든 것 다 주어도 좋다 영혼까지도 난 결코 이 남
자를 놓치고 싶지 않어
이런 생각을 하며 나영미는 헐떡였다 여자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감싸쥔 커다란 남자의 손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등을 두
팔로 껴안았다 남자의 손은 다시 하복부로 향했다 나영미는 빠르게
지나가는 전율을 느꼈다 나영미는 신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뒤틀었
다 남자의 손길은 더욱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은밀한 이브의 샘은 늦처럼 되어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기 시작했
다 부드러운 손길이 감각의 정점에 이르렀다 여자는 흠칫 놀라며
조금 긴장했다 미풍이 스치는 듯한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새털같이 유연한 감각이었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뜨거운 욕망이 파
도처럼 일렁였다 그녀는 큰 소리로 신음했다 여자의 엉덩이는 의지
와는 무관하게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참지 못하고
강철수의 남성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엄청난 크기의 질량이 전류처
럼 지나갔다 스펀지로 피복된 강철의 지주 그것은 종마처럼 기운차
게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많은 남자를 알아왔지만 강철수 같은 사내
는 처음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영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 남자는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는 사바나의 용사다 용감한
마사이족의 전사 태양 빛살을 되쏘는 날카로운 창날 초원에 가득한
함성 이 사내는 마사이다
잔 파도 같은 손길은 쉴 새없이 이브의 늪에 밀려들었다 그녀는
남자를 갈망했다 견딜 수 없는 갈중에서 해갈되고 싶었다 참으려
했지만 한숨과 신음은 쉴 새없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연소되고 싶었
다 분해되고 싶었다 그때 그녀는 빛살 무지개를 보았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찬란한 아취를 그녀는 보았다 그녀는 불꽃이
되었다 견딜 수 없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별무리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성의 거센 맥동을 느꼈다 그녀는 그것을 수용하고 싶어
졌다 그녀는 남자를 세차게 끌어 안으며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못 견디겠어요
남자는 무릎을 끓었다 그리곤 부드럽게 여자의 꽃무덤 속으로 잠
입해 들어갔다 여자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고통스러웠다 남자는
동작을 멈춘 채 다시 여자의 가슴과 엉덩이의 깊은 골짜기를 어루만
졌다 해면 위를 기어다니는 바람처럼 산협을 건너가는 안개처럼 부
드러운 손길에 여자의 하체는 고통을 잊어버리고 다시 움직임을 고대
하게 되었다 강철수는 다시 몸을 움직여 나갔다 고통은 형언할 수
없는 기뿜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거대한 늪이 되어 사내의 움직임에 날카롭게 감응하기 시
작했다 남자는 자신의 온몸이 뜨거운 늪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둔부를 움켜 잡고는 부르짖기 시작했다
아 아 아 여자는 머리를 흔들고 허리를 비틀고 엉덩이를 움직이며
그런 동작을 쉴 새없이 반복하면서 더욱 가쁘게 뜨거운 숨결을 내뱉
었다 뜨거운 불기둥이 주는 따스한 감동 그녀의 전신은 불길에 휩
싸여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남자의 몸짓이 더욱 세차게 변하자
여자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남자가 동작을 할 때마다 쉴 새없이 빛
살이 작열했다 그녀는 사내의 둔부를 자신의 몸쪽으로 끌어들이며
뜨거운 감각에 몸을 떨었다 엄청난 폭발이 시작되었다 열락의 분화
구에서 용암이 분출했다
그녀는 구름이 되었고 안개가 되었다 그녀는 천상으로 훨훨 날아
오르기 시작했다 사내의 움직임이 걷잡을 수 없이 강렬해졌을 때
그녀는 새가 되었다 여러 번 거듭되는 해방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사로운 감동 그녀의 경직된 근육은 이완되고 타는 듯한 욕망의
불꽃은 감미로운 감각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하복부에서 온몸으로 퍼
지는 표현할 길 없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여러 번 하얀 빛의
가루로 분해되엇다 그녀는 간헐적으로 경련하면서 거듭되는 용암의
분출을 경험했다 마침내 그녀는 감미로운 골짜기로 침잠해갔다 헐
떡임은 한동안 계속되면서 마음 속은 형언할 수 없는 충족감으로 채
워지고 있었다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대기를 찢었다
드르륵 드르륵 중기의 둔중한 발사음 하늘로 튀어오르는 흙더미
와 불기둥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짖단이 베어지듯 쓰러지는 사람
들 집요한 로켓포의 공격 카오 탕 노인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마당은 홍건히 젖어 갔다 울부짖는 후에
강철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여인은 아직도 그의 곁에서 자고 있었다 망막에는 트라이앵글의
잔상이 스멀거렸다 후에의 비명 소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강철수
는 두 손으로 얼굴을 싸안았다 눈물을 흘리며 꿈을 꾸었음을 알게
되었다
강철수는 침대 머리를 더듬어 담배를 찾았다 담배는 만져지지 않
았다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강철수는 여인이 깰 새
라 고양이처럼 침대에서 내 려왔다 담배는 상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
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의자에 앉아서 창가를 향했다 희뿌
연 빛살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담배 연기가 한숨과 함께 토해졌
다 마음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햇살의 기둥.에서 담배 연기는 하느적
거렸다
강철수는 아침의 신선한 빛살이 좋았다 아침은 더 럽혀지지 않는
시간이다 관능의 내음을 풍기는 밤과 달리 아침은 맑고 깨끗한 숨결
을 토한다 강철수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빙결된 바람이 쏴아 들어
왔다 마른 낙엽이 바람에 쓸려가고 있었다 스산했다
이른 아침이지 만 거리는 인파로 분주했다 가로수의 가지는 세찬
바람에 떠밀려 바들바들 떨었다 새움이 트고 있지만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의 가지는 앙상했다 분주히 달리는 버스와 트럭들 거리는
소음과 에너지로 충만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명랑
해 보였다 바쁘게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강철수는 곤혹스러
워졌다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 박제가 된 기분이었다
강철수는 창문을 닫았다 소음은 멀어져갔다 대신 악몽이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 스콜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우뚝 솟
은 산봉의 그림자가 망막을 바쁘게 스쳐갔다
트라이앵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왜곡시킨 저주의 대지
포탄이 작열하는 소리가 고막을 두들겼다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날아가는 나무가 보였다
강철수는 비틀거리며 안락 의자에 앉았다 대기를 찢는 톰켓의 비
행음 중기의 둔탁한 발사음 하늘로 치솟는 블기둥. 비명 소리
그는 후에를 보았다 하얀 아오자이 자락에 번지는 핏자국을 보았
다 강철수는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 몇 줄기 포연이 한가롭게 피
어오르는 슈이엔 마을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강철수는 자기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찬믈로 샤워를 하면서 강철수는 최오남의 음침한 얼굴을 떠올렸다
최오남은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목
줄기를 노리는 이빨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을 것이다 사냥믈이 자신
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다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죽음의 공포처럼 치
열한 고통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불안과 초조함과 심리적 갈등을 블
러일으킨다 불면증 그리고 소화 불량 협심증 이런 증세도 나타나
게 될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의연하게 대처할 인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그 죽음은 먼 훗날의
일로 생각한다 죽음이 현실적으로 눈앞에 당도했을 때 사람들의 반
응은 한결같다 죽음의 올가미를 피하려고 몸부림쳐 보는 것이다 이
러한 몸부림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샤워를 마친 후 강철수는 침대쪽을 보았다 여자는 아직까지도 새
우같이 웅크린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여자의 평화스러운 표정을 내
려다보며 강철수는 갈등을 느꼈다 사랑은 임무에 대한 반역이었다
이런 일에 여자가 끼어드는 것은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자를 거부할 힘을 이미 잃었다 그는 이 사랑의 마력 앞에 무
릎을꿇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이것은 재앙을 예고하는 것인지 모른
다
여자가 눈을 떴다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일어나셨군요
잘잤소
너무 상쾌해요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는 나영미를 보면서 강철수는 생각했다 첫
밤을 보낸 신부처럼 이 여자는 신선해 보인다 숙면을 취한 여자의
얼굴은 아름답다 복숭아처럼 해맑고 핑크빛이 감도는 얼굴이다 여
자의 머리칼은 검고 윤기가 흐른다 여자의 목덜미는 씻은 무같이 하
얗다 이 여자는 볼수록 아름답다 황석호는 왜 이 여자를 내팽개치
고 젊은 여우에게 빠졌을까 아내를 두고 딴 여자를 탐하는 남자는
언젠가는 보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강철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여자에게 미소를 보냈다 여자는 눈
으로 웃었다 덧니가 빛났다
언제 깨셨어요
조금 전이오
나영미의 표정은 밝았다 강철수의 시선을 응시하던 나영미는 결심
한 듯 말했다
우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요 그리고 여행이나 즐기면서 평
범하게 살아가요 네
강철수는 흠칫 놀랐다 이것은 유혹이다 유혹은 위험한 것이다
적어도 자신과 같은 테러리스트에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강철수
는 믈었다
그런 삶이 나에게 맞을 것 같소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까만 눈동자가 남자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강철수는 생각하기 시작
했다
여자의 사유에 들어 있는 삶이란 평화와 낭만과 쾌락과 같은
그런 형태의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이 여자의 생각은 옳다 그러나
나의 삶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강철수는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나에겐 할 일이 남아 있소
복수 같은 거라면 그만 두세요
강철수는 대꾸하지 않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마음을 들킬 때
마다 그는 담배를 찾는 습관이 있었다
죄지은 자는 신만이 응징할 수 있는 거예요 평범한 인간으로 즐
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당신 같은 남자와
강철수는 여자의 말을 되새기면서 생각했다 이 여자는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다 이 여자는 영리하다 이 여자는 모든 것을 예견하고
있다 이런 여자는 위험하다 이 사업을 망칠지 모른다 신형철은 이
여자를 죽여 없애라고 했었다 이 여자를 죽이는 일은 블가능하다
너무 깊은 늪에 빠져 있다 사랑이라는 늪에
여자에게 경고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앞으로 조심해야 할 일은 내가 하는 일에 간섭을 않는 것이오 우
리는 서로 조심해야 하오 도청이라도 당하면 우린 끝장이오 당신
주위를 베테랑 수사관들이 에워싸고 있을 거요 생각해 보시오 대로
에서 폭살된 거부의 미망인 애송이 수사관이라도 의심하지 않겠소
전화를 바꾸시오 다른 사람 이름으로 말이오
강철수는 한마디 한마디를 끊어가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알았어요
여자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강철수는 여자에게 생각할 시간 여
유를 주었다 스스로 상황을 인식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여
자의 모든 신경과 판단은 예민하고 민첩하다 이런 점은 좋은 것이
다 둔감한 여인처럼 매력없는 존재는 없는 것이다 생각에 잠겼던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아파트를 하나 따로 마련하죠 이 근처면 어때요
여자의 말은 강철수를 기쁘게 했다 여자는 자기가 제안하려던 일
을 먼저 생각하고 말하지 않는가 남자의 말을 귀담아 듣고 생각하
고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이 해야 할 적당한 일을 발견해내는 이런
일련의 연상 작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자를 이해하
려고 노력하는 여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오랫동안 보호받고 무시 당했던 영향으로 여자들은 아마조네스의
야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여자만은 아마조네스의 야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 여자는 원시 모계사회의 혈통을 보존하고 있는 몇
되지 않는 여자다
여자는 하얀 나이트 가운을 입은 채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샤워 소리가 들렸다 새벽은 물러갔다
나영미가 호텔을 나간 뒤 강철수는 신형철로부터 온 편지를 집어
들었다
최오남 김태수의 심복인 이자는 여권의 막후 실력자로 자처
하면서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 최오남 상관이었던 김태수를
잘 알 것이다 고마다 요시오의 충직한 추종자 굴욕적인 한일 협정
을 고안했던 장본인 그것 뿐인가 그는 베트남 파병을 자청했던 인
믈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자부터 제거하고 싶었다 최오남은 자신이
저지른 숱한 악행을 생각할 것이다 그는 노련한 경호팀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국민의 보복이 두려워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는 심약한
자가 한 시절 정부 요직을 차지했다니 우리 국민은 인정이 많고 죄
인에 대하여 관대하다 그러나 죄에 대한 관대함은 죄인을 만드는 근
거가 된다 죄업에 대해서는 준열한 심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범
죄가 줄어든다 이 자는 조심성이 많다 어느 때보다 힘이 들 것이
다 조심해서 처리하기 바란다
최오남 낮은 목소리로 부르짖으며 강철수는 트라이앵글의 참혹했
던 구도를 떠올렸다 후에의 하얀 아오자이에 튀던 붉은 핏자국 강
철수는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펜텀의 요란한 폭음 네이팜탄의 작
열 높이 솟던 불기둥 비명 비명 강철수는 두 손으로 머리칼
을 움켜 쥐었다 땅바닥에 쓰러진 후에의 하얀 주검 아오자이 자락
에 번지던 붉은 핏자국 강철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강철수는 흐
르는 눈믈을 손등으로 닦았다 눈물은 쉬 멈추지 않았다
김 반장은 하품을 길게 흘렸다 밤을 하얗게 지새운 잠복 근무
모래라도 들어간 듯 눈꺼풀은 쓰리고 아팠다 김 반장은 남 형사를
흘끗 보았다 남 형사는 운전대에 코를 박고 있었다 불안감이 뇌리
를 첫다 나영미가 들어 오는 것을 놓친 것은 아닐까 그는 남 형사
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으윽 반장님 왜 이러십니까
남 형사는 피곤한 목소ㅂ리로 투덜거렸다
언제부터야 언제부터 잤냐구
방금 눈을 붙였어요
남 형사의 골이 나 부은 표정을 무시한 채 김 반장은 물었다
방금이라면
7시 45분부터요
김 반장은 시계를 흘끗 보았다 7시 47분 2분이면 안심이다 남
형사는 다시 눈을 붙였다 김 반장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하룻밤 내
내 서로 교대하며 나영미의 대문간을 지키는 동안 두 사람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김 반장은 길바닥에 길게 누워 있는 전신주의 그림자에 시선을 깔
았다 안개같은 녀석 김 반장은 마치 투명 인간을 뒤쫓는 기분이었
다 그녀는 밤을 세웠다 남자와 함께 톤이 굵은 목소리 그곳은 어
디를 뜻하는 것일까 호텔 오피스텔 아파트 리조트 콘도
남녀가 잠적할 곳은 수도 없이 많은 미로 같은 도시가 아닌가 두 사
람은 간단한 대화로 만날 약속을 했다 경계하고 있는 두 남녀의 대
화를 새삼 떠올리며 김 반장의 뇌리에는 하나의 가능성이 만들어졌
다
청부살해 이것은 점액처럼 끈적끈적한 기분이 들게 하지만 가능
성이 농후해 보인다 여자와 놀아나던 부유한 사내 그가 아내를 살
해하려고 한다 아내는 이 사실을 알고 두려워한다 아내가 살 길은
남편을 살해하는 길뿐임을 인식한다 길을 찾는다 살인 전문가를 만
나게 된다 계약이 이루어진다
남녀 관계가 얽힌 이런 사건은 역겨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집에서 날아 오는지 청국장 끓는 냄새가 공복감을 더욱 부추
겼다 지금쯤 아이들은 집을 나서느라 부산을 떨고 있을 것이다 아
내는 아내대로 바쁠테고
하필이면 강력계 주변에서만 줄곧 맴돌았던가 진급 시험을 첫다
면 지금쯤 무궁화 네 개는 달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무궁화
네 개보다 범죄꾼 사냥을 더 즐겼다 그는 천성적으로 이 직업을 사
랑했다 이것은 직업 이전에 그의 존재 의미를 부여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 학자는 학문을 음악가는 악상을 시인은
시어를 찾아 헤맨다 또한 사업가는 부의 추구를 위해 혼신을 바치
고 도적놈은 열심히 훔치고
청국장 냄새가 시들해지자 이번엔 고등어를 굽는 냄새가 코끝에 매
달렸다 고등어 굽는 냄새라 그는 이 냄새가 좋았다 그는 식탁을
상상한다 누런 청국장 두부와 바지락과 돼지 고기 조각 그리고 김
치 등껍질이 노렇게 구워진 고등어
김 반장은 어머니 추자댁을 떠올렸다 추자도 근해에서 잡힌 고등
어는 추자항으로 들어오기 마련이다 월명기 를 맞아 고등어
배가 포구로 돌아올 때면 추자댁은 어김없이 포구로 달려갔다 아버
지도 고등어도 모두 같은 냄새가 났다 추자댁은 고등어들을 건조시
킨 뒤 승주로 갔다 때로는 석곡 원동 순창을 거쳐 남원까지 원행
을 하기도 했다 추자댁은 돌아오는 길에 산나물 고사리 등을 힘에
부칠 정도로 사왔다 그리고 이들을 내다 팔았다 김 반장의 부모는
두 분 모두 갯촌에서 살다가 바다에서 돌아갔고 바닷가에 있는 선산
에 묻혔다
공복감은 고문이다 남 형사가 입맛을 다신다 밥상을 받고 있는
꿈을 꾸는 모양이다
이때였다 엔진음이 들렸다 김 반장은 골목길의 아래쪽을 긴장한
시선으로 살폈다 검은색 벤츠가 올라 왔다 핸들을 잡고 있는 나영
미의 모습이 보였다 눈같이 하얀 실크 차림 그녀는 운전대에서 빠
져나왔다 검정색 고급 승용차를 배경으로 서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
는 하얀 모습 아침 바람이 여자의 몸을 스켰다 육감적인 여자의 허
리와 엉덩이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여자는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여자는 차를 몰고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김 반장은 시계를 보았다 8시 였다 13시간의 잠적
남편이 죽은 지 한 달이 채 안된 미망인의 외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실비가 푸슬푸슬 내렸다 비에 젖은 도로는 번들거렸다 김
반장은 토끼굴을 발견한 닥스훈트처럼 여우 냄새를 맡은 비글처럼
죄수의 냄새를 맡은 브러드 하운드처럼 그녀의 집을 응시했다 이 여
자의 행동은 종잡을 수 없지만 어떤 감이 잡혀 왔다
그는 카폰의 다이얼을 돌렸다
여보세요
여자의 풀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주무셨습니까 김 반장입니다
웬일이세요 아침 일찍
힐난하는 어조였다
전화를 받지 않더군요 걱정이 되어 걸었습니다
지난 밤 밖에서 지 냈어요
대단한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먼저 앞질러가고 있다 이 여자는
여우보다 교활하다 여자는 덫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셨군요 좌우간 안심했습니다
걱정해주어서 고맙군요
빈정거리는 어조임을 김 반장은 느꼈다
오후에 들러도 되겠습니까
글쎄요 오늘은 좀 피곤하군요 다음날 만나면 안될까요
그녀의 어조에는 거부감이 내비쳤다
내일은 어떻습니까
내일 전화주세요
여자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 놓은 김 반장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자는 미
행과 도청 사실을 간파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최오남은 갓 피어난 나도 풍란의 향기를 맡으며 물을 주고 있었다
난에 물주기는 남에게 시키지 않는 그였다 난 가꾸기 십 년 베트남
에서 돌아온 뒤 포연을 잊기 위해서 시작한 취미였다 최오남은 난
실을 지을 때 온도와 습도 그리고 통풍이 자동적으로 조절되도록 전
문업체에 맡겼다 온도와 습도가 알맞고 통풍이 잘 되어야 뿌리가
실해진다 뿌리가 실해야 난은 건강하다 뿌리가 상하면 잎도 상하
는 법이다 이 난실에선 병이 생기 않았다 바이러스병은 난이 허
약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난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
면 난은 자연 상태와 마찬가지로 건강하게 자라서 병에 대한 저항성
이 강해지는 것이다
그는 새촉이 올라오는 중투를 살폈다 고흥반도가 고향인 중투는 2
년 전에 구했는데 처음 다섯촉이었던 것이 벌써 열촉이 되었고 새
로 나온 촉들도 건실했다 그가 아끼는 제주 한란 월광도 자줏란 새
촉을 내밀기 시작했다 어느 화분에서도 새촉이 움트고 있는 난실
난실에만 들어 오면 그는 세상사를 잊어버린다 난향처럼 사람의 마
음을 끄는 것이 있을까
장미가 좋다지만 너무 농염하다 난은 장미와 달리 고아한 느낌을
준다 물주기를 끝낸 최오남은 거제산 황복륜으로 눈길을 돌렸다 영
묘한 자연의 조화 그는 박 상무로부터 선물 받은 황복륜을 보면서
눈치 하나는 초상집 개처럼 빠른 녀석이라 생각하며 아쉬운 듯 난실
을 나섰다 그의 아내가 편지를 한통 건네주었다
그는 겉봉을 살폈다 발신인이 없는 편지 그는 내버릴까 생각하다
가 한자로 눌러 쓴 최오남이라는 필적을 보고 생각을 바꾸어 봉투의
겉봉을 뜯었다 엷은 상아색 편지지가 나타났다
최오남
당신은 죽음을 당할거요 당신이 행한 일은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나 본인 스스로 행한 악행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
소 과잉 친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쌓은 죄업을 열거해 보갰
소 당신은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부하를 사지에 몰아 넣고 혼자
만 영달을 꾀하려 했소 전쟁터에서 돌아온 당신은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해 온갖 권모와 술수를 동원했소 전쟁터에서 부하의 핏믈이 메콩
강으로 흘러들 때 당신은 사이공의 고급 바에서 샴페인을 터뜨렸소
그뿐이 아니오 귀국해서 당신이 한 일을 생각해 보시오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게 본분이오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이 정권을 침탈하
는데 앞장서고 그걸 정당화시키기 위해 온갖 일을 자행해왔소 당신
같은 정치 군인이 권력을 잡고 영화를 누리는 동안 최전방에 있는
전사들은 얼마나 분통을 터뜨렸는가 생각해본 적이 있소 당신네 일
당은 국방에 전념하고 있는 전사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소 나는
당신을 응징하려 하오 죽음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는 없을 거요 만
약 당신이 국외로 탈출한다면 그것은 더 무서운 결과를 불러일으킬
것이오
최오남은 편지를 잡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위엄있고 온화하던 표
정은 오간데 없고 얼굴빛은 시뻘개져 있었다 그는 황급히 다이얼을
돌렸다
박세광 전무가 최오남의 집에 나타난 것은 한 시간 남짓 지나서였
다
이것 보게
최오남은 박 상무에게 편지를 내보여 주었다 몇 번이고 편지를 거
듭 읽고 나서 박 상무는 자신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각하 저희들이 알아서 처리하죠 믈샐 틈 없는 경호를 시작하고
또 관계기관에 연락
기관에 알려서는 안돼 우리 힘으로 놈을 잡아야 해 사람들 불
러 모두 베테랑으로 말이야
최오남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게 하갰습니다 각하
신중히 해
정신나간 녀석이죠
미친 놈이 더 위험해
집 주위에도 경비를 강화하겠습니다
최오남의 뇌리엔 트라이앵글 지대가 떠올랐다
강철수 녀석이 틀림 없었다 슈이엔의 복수라면 바보같은 황
석호 녀석 강철수 녀석을 확실하게 죽여 없애라고 몇 번이나 말했던
가 그러나 차일 피일 미루다 독안에 든 쥐를 놓치고 만 셈이다 그
쥐가 이제 고양이를 물려고 덤비고 있다 만약 편지를 보낸 녀석이
강철수라면 만만치 않는 상대임에 틀림 없었다 특전 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녀석은 뱀보다 교활했다
조명우가 일행들을 데리고 최오남의 집으로 온 것은 저녁이었다
모두 5명으로 구성된 경비팀은 저택 내 요소 요소에 다섯 명이 배
치되고 나머지 열 명은 저택 밖 골목에 은신해서 침입자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모두 경호원 출신인 이들은 경비에 관한 한 최고의 수준이
었다 이들은 특수 화기와 야간 투시경까지 갖추고 있었다 집안에는
독일산 셰퍼드도 세 마리나 풀어 놓아서 괴한의 침입을 대비하고 있
었다
각하 이 정도라면 경비는 완벽할 겁니다
최오남이 경호실장을 하던 시절 그의 직속 부하였던 예비역 대령
출신 조명우는 최오남을 올려다보며 자신있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해 놈이 지금 행동하는 것은
혹시 다른 조직에서 우리의 일을 알고 음해하려는 것은 아닌지
요
글쎄
최오남은 정치권에 속한 어떤 단체를 머리에 떠올렸다
혹시 그자들이 우리의 기도를 알고 손을 쓰고 있다면 그
러나 그들은 살인까지 저지를 대담성은 없는 자들이 아닌가 혹시 항
쟁 사건의 희생자 중에서 나를 노리고 있다면 그러나 그들도 역시
나를 음해할 그런 수준은 아니지 강철수가 틀림 없다면 어디 숨었다
지금 나타났단 말인가
최오남은 황석호가 폭살된 후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세준과
황석호의 연이은 암살 사건 이세준 황석호 최오남 이 세 사람이
연결된 고리는 트라이앵글과 항쟁사건 진압인 것이다
김 반장이 최오남의 집을 찾아온 것은 밤 아홉 시가 넘어서엿다
안녕하십니까 시경 수사과 김 반장입니다
김 반장은 방에 있는 일행들에게 형사 수첩을 보여주었다
무슨 일입니까
최오남이 믈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김 반장은 주의를 의식하는 표정을 지었다
모두들 나가 있게 박 상무 집사람에게 양주 내달래서 마시고 있
어
저희들은 염려 마십시오
조명우와 박세광이 방을 나가고 나자 김 반장이 입을 열었다
혹시 이상한 연락이나 협박전화 같은 것 받은 적이 없습니까
그런 것 없었소 왜 그러십니까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좀 미묘해서요 이세준씨와 황석호
씨 그리고 선생님 세 분은 육사 동기생이라는 연분도 있고 해서 무
척 친교가 두터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요
외람된 말이지만 두분이 피해를 당했다면 선생님께도 위험이 있
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범인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무슨 이상한 편지나 전화를 받
은 것이 없는지 알고 싶습니다
없는데요
김 반장은 최오남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거짓
말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본다 해도 눈
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표정은 속일 수 있지만 눈동자의 움직임
까지 속이지는 못한다 베테랑 수사원이라면 사람이 거짓말할 때의
눈동자의 미세한 동요 정도는 감지하는 법이다
범인은 대담하고 교활한 놈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죠 개인적인
복수나 사형 행위는 범법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중호와 복
수심에 불타는 사람들은 평형 감각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한마디로
강박 관념과 집념 치열한 분노 잔혹한 복수에 대한 상상으로 정상
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죠 그러기 때문에 놈들의 다음
행동을 더욱 예측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자가 나를 희생자로 삼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려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황석호씨도 방심하다가 당했습니
다
난 당하지 않을거요 누구든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우리가 경호를 맡으면 어떨까요
고맙지만 저에게도 사람이 있어요 괜찮습니다
부하 중에 선생님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군인은 상관에 대해 원한을 갖지 않습니다 상관에게 원한을 갖는
자는 군인이 될 수 없지요 간혹 서운한 마음은 가질 수 있겠지만
무엇을 숨기려는 것이 역력하다는 것을 감지한 김 반장은
별일은 없겠지만 혹시 잡상인이나 수도 검침원 전기 수리원 등
이 방문할 때는 철저히 대비하셔야 될 겁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최오남의 집을 서둘러 나오고 말았다
김 반장이 그런 충고를 하는 동안 무슨 유치한 이야기를 하느냐는
표정을 짓던 최오남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짙푸른 창공엔 실구름이 한 줄기 서쪽으
로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가로 양편에 늘어선 은행나무 잎은 미풍
에도 몸을 떨었다 잎들이 사스락거리는 소리라도 들릴 듯한 청량한
아침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맑게 개인 하늘처럼 밝아 보
였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가볍고 기운이 넘쳤다 경적을 울리면서 차
들은 마구 달려갔다 에너지가 충만한 서울의 거 리 웅성거리는 인파
들 사람들은 거리와 거리를 가득 메운 채 저마다 바쁘게 움직여갔
다
전화국 직원의 복장을 한 강철수는 최오남의집앞에 서 있는 전신
주에 올라갔다 며칠 전에 강철수는 최오남의 집 전화선을 조작해서
전화를 걸 때마다 잡음이 나도록 만들었다 강철수는 케이블 박스를
꺼내서 최오남의 집에 연결된 전화선의 가닥에 송신기를 연결했다
발신음이 두번 울리더니 상대방이 나왔다
여보세요 전화 수리반입니다 잘 들립니까
강철수는 일부러 잡음이 심하게 나도록 한 뒤 말했다
감이 너무 먼데요 잡음이 심하고 감도 나뽑니다
박 상무는 창밖을 흘끗 내다 보았다 전화국 직원으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전신주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내부선에 이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빨리 와서 수리하지 않고 뭐하는 겁니까
박 상무는 최오남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가서 수리해 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야
최오남이 물었다
각하 전화선에 이상이 있다는 군요
전화기를 잡은 채로 박 상무가 최오남에게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
다
미리 단속해 철저히 말이야
최오남은 가죽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말했다
믈론이죠
잠시 후 전화국 직원이 나타나자 박 상무는 전화국 직원에게 양해
를 구했다
미안합니다 좀 수색해도 되겠습니까
수색이라뇨
몸 수색 말입니다
내 참 이짓도 못해 먹겠군 툭하면 의심부터 하려드니 말요 자
어서 하슈 나도 바쁜 몸이니
박 상무는 강철수의 전신을 철저히 수색했다 그리곤 호주머니와
도구 상자마저 ?살펴 나갔다 박 상무는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 미안합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세상 이렇게 못 믿어서야 원
이층에 있는 최오남의 서재로 올라 가면서 강철수는 투덜거렸다
이층에서 전화기의 내부선로를 점검해가던 강철수는 최오남의 책상에
놓여 있는 전화기쪽으로 다가갔다 최오남의 책상 위에 놓여진 무선
전화기를 분해한 강철수는 전화기 속에 들어 있던 배터리를 교환해
주었다 물론 곁에는 박 상무와 진도개라고 별명이 붙은 서민구가 칼
끝 같은 눈초리로 수리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배터리를 교체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배터리에 무엇이 들어 있으랴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화기를 제대로 조립하고 난 강철수는
자 끝났습니다 한번 걸어 보시죠
라고 했다 잡음은 없었다
수고 많았습니다 자 이건 수고비입니다
박 상무는 만 원권 지폐 두 장을 강철수의 호주머니에 찔 러주었다
강철수는 고맙다고 허리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이상이 있으면 불러주십시요 한 걸음에 달
려 오지요
라고 능청을 떨었다
저녁이 되 었다 하늘에는 먹빛 구름이 놀려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스쳐가는 바람에 떠밀린 빗줄기는 상점의 유리창에 흩뿌려져
눈믈처럼 흘러내렸다 이어지는 우산의 행렬 거리를 가득 메운 인
파 투덜거리는 차량 도시의 거리는 부산했다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마친 강철수는 짙은 회색 레인 코트를 입고
호텔을 나섰다 봄과 여름의 경계선인 유월 중순 덥지는 않았다 바
람에 습기가 느껴질 뿐이었다 그는 빗기 머금은 바람을 음울하게 느
끼며 길을 걸었다 이런 날에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은 내키지 않
았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괴로운 일이다 아무리 악인에 대한 응징
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자신에게 던져보는 숱한 질문들 테러의 정당
성에 대한 끝 모를 갈등 테러리스트에겐 생각은 금물이라고 언젠가
신형철은 말했다 또한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이 세상에 악을 심판
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테러는 그래서 필요한 것이라고
강철수는 최오남의 집에서 만난 박세광과 조명우의 얼굴을 떠올렸
다 권력의 그늘에서 성장한 독버섯들 박세광이 자신의 몸을 수색할
때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으려 얼마나 자제했던가
녀석의 몸에서 나던 역한 향수의 내음은 얼마나 메스꺼웠던가 상
사를 모반한 공로로 벼락출세를 한 자들 역모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반역죄로 단죄를 받았을 것이다 반역도 성공하면 충정이 되
는 논리 강자의 논리는 언제나 정당한 것일까 히틀러도 스탈린도
모두 자신의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했었다 독재자의 논리는 타협을
모르는 법이다 그러므로 독재자의 주위엔 그런 부류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최오남 그리고 그들의 졸개 모두 독재자의 측근에서 번
화와 영락을 누렸던 자들이 아닌가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이 정부를
밀어낸 뒤 구국의 결단이니 도탄에 빠진 조국을 건졌느니 미화시키
던 어느 시절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독재자의 죽음을 애도까지 하는
책을 출간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 시절 영화와 번영을 누렸던 사
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진실성을 결여한 역사는 역사가 될 수 없다
정과 부가 명백하게 가려질 때 역사는 바른 위치에 서게 될 것이며
사람들의 의식 또한 바르게 될 것이다
젊은이들 한 때가 강철수의 어깨를 스칠 듯 지나쳐갔다 모두들 신
주쿠나 긴자에서나 볼 수 있는 차림새였다 일본을 미워한다고 하지
만 왜색 문화는 젊은이들 사이에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는 것이다 반
세기 전만 해도 그들 조상을 짐승처럼 학대했던 자들의 의상을 동경
하는 풍조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최오남의 집은 길에서 보면 동산쪽에 위치해 있었다 붉은 벽돌의
장엄한 성채 황제의 궁전이 부럽지 안았다 최오남의 집 3층 서재
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며칠 전에 보낸 혐박 된지는 효과가 있
었다 최오남은 외출을 삼가했고 언제나 서재에서 지내고 있는 것같
았다 강철수는 으리으리하게 치장된 최오남의 서재를 기억에 떠올렸
다
가죽으로 된 소파와 값비싸 보이는 가구들 그리고 마호가니제 서
가들 진열대에서 은은한 빛을 던지던 청화 백자와 고려 청자 몇 점
신라 시대 금관의 모사품 벽에 걸린 추사의 액자 사슴의 머리 칼
걸이에 걸린 이조 장검 그리고 물소 뿔로 만든 국궁들 최고급의 골
프 세트 이런 물건들이 저마다 정연하게 40여평의 서재에 진열되어
있었다
누구든지 최오남의 서재에 들어서면 그의 고급 취향에 머리가 숙
여질 것이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전문서적들 역사 철학 그리
고 고전들 이런 것들은 그의 텅빈 뇌수를 가려주는 방패였다 머리
가 빈 자일수록 겉치레는 요란한 법이다 방에 있는 최고급 골프채
는 서민 아파트 한 채에 맞먹게 값이 요란한 물건임을 강철수는 알고
있었다 아파트 한 채 값에 맞먹는 골프 세트 한심한 이야기가 아닌
가
골프는 사치스런 스포츠임에 틀림엾다 장비가 비싸고 넓은
땅이 필요하다 골프 회원이 되려면 수천만 원에서 일 억 정도는 있
어야 되지 않는가 말이다 언젠가 한 점당 천만 원짜리 내기 골프를
치던 인사가 적발됐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누가 그랬나 골프
는 사치스런 스포츠가 아니라고 사람들의 정서를 잘 아는 사람이라
면 골프가 일반 시민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스포츠라고는 말 못할
것이다 호주나 뉴질랜드처 럼 땅은 넓고 인구가 적은 나라라면 수긍
이 간다 그러나 우리나라 겨우 1만 평방킬로미터 밖에 안되는 땅
에 4천3백여 만 명이 복닥거리는 실정이 아닌가 더구나 산지가 많아
서 가용 면적은 더욱 적은 셈이다 이런 나라에 골프장이 마구 들어
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수용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 취미를 두고 감놔라 배놔라 할 필
요가 없다고 반박할지 모른다
최오남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하철 입구가 있었다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간 강철수는 최오남의 집 이 층 창문을 응시했다 강철수
는 호주머니에 있는 원격조정기의 스위치를 올렸다 그리고는 다이얼
을 돌렸다
전화를 받은 자는 조명우였다
최오남씨 좀 바꿔요
누구시라 할까요
김태수란 사람이오
강철수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아 네 각하 바꿔드리겠습니다
당황한 목소리가 다급하게 흘러나왔다
각하 저 최오남입니다 안녕하셨습니까
강철수는 호주머니 속에 든 원격조정 스위치를 잡았다
최오남 강철수다 트라이앵글의 강철수를 설마 잊진 않았겠지
강철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트 트라이앵글 가 강철수 무슨 일이야
최오남의 목소리는 당장 찌그러들었다
베트남 수용소에서 10년을 지내며 네놈을 죽일 수 있도록 해달라
고 나는 매일 신에게 기도했다 네놈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일 잊지
않았겠지
강철수는 얼음같이 싸늘한 어조로 말을 했다
가 강철수 만나서 이야기하세
그런 말을 하면서 최오남은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부하들은 컴퓨터
로 전화거는 장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만날 생각 없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최오남은 다급하게 물었다
너와 네 졸개들의 목숨이다
강철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뭐 뭐라구
최오남이 다급하게 말하는 순간 부하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전화를
거는 장소를 찾아냈다는 표정이었다
네놈이 저지른 모든 죄악은 지옥 불구덩이에서 천천히 생각해 보
아라 트라이앵글에서 네놈들이 자행한 일들도 잘 생각해보구 자
잘 가거라
말을 마친 강철수는 스위치를 눌렀다 다음 순간 엄청난 폭발음이
작열했다 우뢰가 치듯 하늘이 메아리켰다 최오남의 이층 창문에서
시뻘건 불덩이가 밖으로 폭발되어 나왔다 다음 순간 삼층 저택은
힘없이 폭삭 내려 앉았다
얼음 같은 눈초리로 폐허가 되어 연기만 밤하늘로 피어오르는 최
오남의 집을 한동안 응시하던 강철수는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 붐비는
인파 속으로 잠적했다
형사반장 김상기가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먼저 눈에 뛴 사람은 서
장이었다 서장은 시뻘겋게 부어오른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김 반장을 쏘아보았다
어딜 쏘다녀
가시돋힌 음성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서장의 불같은 성미를 익히 아는 터라 김 반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물었다
휴대용 전화긴 폼으로 갖고 다니나
서장은 다시 역정을 버럭 냈다
고장나서 수리를 맡겨 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김 반장은 여전히 가라앉은 어조로 믈었다
따라와
서장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서장실로 들어섰다 김 반장이 무슨
일이냐는 듯 어깨를 으쏙하자 구 형사가 눈을 쩔끔했다
왜 저러지
김 반장이 묻자 구 형사는 서장실을 힐끔 보고 나서
터졌어요
라고 속삭였다
이번엔 누구야
김 반장도 목소리를 낮추어 믈었다
최오남 회장 예비역 중장이랍니다
난리 났군 인적 사항은
서장님 드렸습니다
내게 전화오면 서장실로 연결해 줘
조심하세요 아침부터 잔뜩 부어올랐어요 위에서 한소리 들었나
봐요
긴장한 목소리로 구 형사가 말했다
반장님 커피 타드려요
컴퓨터실 미스 구가 싱긋 웃었다
좋지 고마워
구양이 타온 커피를 홀짝이며 김 반장은 생각했다
일이 더럽게 꼬이고 있다 연이은 예비역 장성들의 죽음 처음 이
회장은 칼에 찔렷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폭사였다 사건의 실마리
는 고사하고 범인의 윤곽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둘다 고성능 다이너
마이트에 의해 먼지처럼 분해되고 만 것이다
구석자리에서 박 형사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에게 삿대질
을 하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파출소에 화염병 던졌어요
어느 파출소
신림동 파출소래요
한심하군
아 뭘 꾸믈거리나
서장의 화난 목소리가 사무실을 떨게 만들었다
문을 열고 서장실로 들어서자 서장은 부아부터 터뜨렸다
꾸믈대긴 이거 읽어봐
서장은 노란 봉투 하나를 김 반장 앞으로 던졌다 김 반장은 봉투
를 열었다
피해자 인적사항 최오남 나이 6세 전 보안사령관 예편 후
국방 연구원 원장으로 재임 중 사망
사망 원인 테러에 의한 폭사 사망 장소 방배동 자택 유족
부인과 남 녀
피해자 이려 1968년부터 1973년까지 정보대 소속으로 월남전 참
전 980년 광주사태시 계엄군 지휘 12 12 사태시 참모총장 연행
공통점이 세 가지군요
공통점이라니
미 중앙정보부 지원 정보부대로 월남전 참전 계엄군 지휘
주역 냄새가 슬슬 나는데요
말해봐
세 가지 문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월남전에 관련된 문제 광주
사태에 관련된 문제 12 12 사태에 관련된 문제 그러나 워낙 고위
층만 노리는 것으로 보아서 시시한 복수극 같지는 않은데요
이를테면
애숭이 반정부주의자거나 과격파의 소행은 아니라는 거죠
그럼
고도의 폭약 기술을 습득한 전문가의 소행 같아요 특수 훈련을
받은 제 생각 같아선 월남전과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월남전이라면 상관과 부하간의 갈등이란 말인가 북쪽의 짓은 아
닐까
글쎄요 북쪽의 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큰일이군 그림자도 못찾고 있으니
잠시 다녀올 데가 있습니다
또 어딜
설쳐야 실마리라도 잡을 것 아닙니까
전화기 찾아서 휴대하고 다니라구 수시로 연락하고
알았습니다 다녀 오겠습니다
서장실을 나선 김 반장은 민경섭 원장의 병원으로 차를 몰기 시작
했다
민경섭 베트남 전쟁 중 사이공 통합병원에서 군의관으로 일했던
인물 귀국해서 전역한 그는 베트남 전쟁 후유증 환자들을 전문으로
진료하는 특수 진료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병원 경영은 여의치 못했
지만 그는 수입 따위를 걱정하지 않았다 민 원장은 오랜만에 찾은
김 반장을 반갑게 맞았다
어쩐 일이야 바쁜 자네가
못 올데를 왔나
무슨 소리
병원 어때 할 만해
눈코 뜰 새가 없어
환자가 많은 모양이군
그런 셈이야 무슨 바람이 불었나
자네 최오남 장군 알지
알지 왜
그분 트라이앵글 지역에서 무슨 일 했지
이번 폭사 사건과 관계가 있나
아직 몰라 일단 그분의 행적과 주위 사람들을 알아야 실마리라도
잡지
아마 cIA 와 같이 트라이앵글 지대에서 마약밀매에 관련했
었다고 들었어
아편과 헤로인 따위라고 했어
누구에게 들었나
만수란 친구에게 들었어
그 사람
죽었어
왜
아편을 몰래 빼돌리다가 한국군 장교에게 당했다더군
한국군 장교 누구야 그게
강철수 대위라고 했어
어떤 사람이지
육군 문서국에 가서 알아보지
없어 이세준과 황석호 그리고 이번에 죽은 최오남은 육사 선후
배 사인데 모두 첩보대 소속이었고 직속 부하들은 모두 죽거나 실종
자로 처리되어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았어
그럴 만도 할거야
그럴 만도 하다니
트라이앵글 지대 작전은 극비 작전이었으니 알아내기 힘들께야
뱅뱅 돌리지 말구 속 시원히 털어 놔봐
이 사건은 트라이앵글 지대에서 암약하던 요원들 중 살아 남은 자
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것 같애 그들은 모두 베테랑들이라구 내 친
구 만수와 함께 암약하던 한국군 장교가 서너 명 있었다고 들었어
그들 중에 한 둘이 살아 있다면 그들은 반드시 복수할거야
그것뿐이야
이런 말 내가 했다고 말어 이런 일에 말려 들고 싶지 않다구 월
남은 잊고 싶은 악몽이야
자네같은 군의관이야 별일 있었을라구
그렇지만 워낙 험한 꼴을 많이 봐서 말이야 깡그리 잊어버리고
싶다구
트라이앵글에 관해서 아는 사람 또 없어
몰라 더 이상은 참 김태수란 사람 한번 만나보지 최 장군의 둘
도 없는 후원자였어
민 원장의 병원을 나선 김 반장은 방배동쪽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
다 트라이앵글 트라이앵글 김 반장은 두어 번 중얼거려 보았다
트라이앵글에는 어떤 비밀이 있었을까
김태수는 마침 집에 있었다 300여 평의 대지에 5평의 건물 조
선조 시대의 정원은 아담했다
김 반장은 현관으로 들어서기 전 아름다운 정원에 넋을 잃었다
마당 한 귀퉁이엔 두마리의 도벨만 핀셔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사
납게 짖어댔다 저녀석들 줄이 끊어진다면 달려와 목줄기를 믈고 늘
어지갰지 라고 생각하자 김 반장은 불안해졌다
네 1 오시지 않고요
반장을 온화한 미소로 맞았다 칠순을 바라보지만 얼
굴은 4십대로 보였다
네 정원이 아름다워서 잠시 정신을 팔고 있었습니다 개들도
빛은 좋아보이는군요
형 종자죠 작년 가을 독일에서 수입했어요 개를 좋아합니까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죠 형님이 개를 좋아하셨죠
이번 사건과 관계가 있습니까
모든 것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합니다 벌써 세 명의 희생자가 났
습니다 동일범의 소행인 것 같아요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 안으로 들어갑시다
노인은 김 반장을 서재로 데리고 갔다 서재의 가구는 대개 조선
시대의 고가구였다
가구가 좋아 보입니다
이조 중기에 궁가에서 사용하던 가구죠
가정부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향기 좋은 작설차를 내왔다
트라이앵글은 폭격에서 제외되었던 안남산맥의 분수령에 있는 아
편 경작지를 말합니다 이번에 차례로 죽은 세 사람은 모두 그 지역
에서 아편 밀거래 공작에 가담하고 있었지요
그럼 미 정보부와 함께 했다는 말도 사실이군요
덮어두고 싶은 사건들입니다 여러 사람이 작전에 참가헷엇
는데 세 사람은 돌아왔고 나머지 위관급 장교 세 사람은 전사했지
요 그러나 이상한 것은 세 사람 모두 이름만 전사자로 처리되었지
시신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유골함이 빈 채로 안장되었다는 이야기를 아는 선을 통해서 들은
바 있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국민묘지에 안장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문제요 전사하지 않고 실종된 채 살아있다면 자신들
을 배신한 상관에 대해서 복수를 하려 들거요 사실 그 지역에서 걷
어들인 상당한 액수의 돈이 은밀한 작전에 쓰여졌거든요 다 털어놓
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사건의 배후엔 트라이앵글 지역에서
생존한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수법이나 잔인성이나 대담
성이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강철수와 신형철이가 정말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두 사람 다 탈출했다고 들었어요 이세준이가 귀국 직후 말했어
요 이번 사건에 두 녀석이 개입하고 있다면 여간 큰 일이 아닙니다
벌써 신상치 못한 조짐이 나오고 있어요 희생자들이 속해 있는 정치
집단에서는 상대편 집단의 정치적 음해 사건이라고들 술렁대고 있습
니다 모두 은퇴는 했지만 막강한 영향력과 재력이 상당한 사람들입
니다 그리고 거미줄 같은 연결망을 구축하고 있구요 범인의 검거가
늦어질수록 어려운 일이 생길 공산이 큽니다
어려운 일이라면
오해란 무서운 결과를 빚어내지요
다음 희생자는 누구일까 아마 그자는 김태수를 노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자는 나를 노릴지도 모릅니다
김태수가 김 반장의 의중을 읽기라도 한듯 음험한 눈초리로 김 반
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그럴 까닭이라도
녀석은 미친 놈이오 무슨 짓인들 못하갰소
혹시 마이크로 폭탄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특수전에서만 사용하는 고성능 폭탄입니다 위력은 가공할 만하
죠 아랍권의 테러 분자와 일부 국가의 특전 요원이 사용하는 겁니
다
위력이 얼마나 됨니까
성냥 크기의 폭탄으로 아파트 한 채가 내려 앉을 만큼 위력이 클
니다 살상 반경도 O여 미터나 됩니다
강철수가 마이크로 폭탄 제조전문가란 말이 있던데 사실인지요
사실일 겁니다 강철수는 오키나와에서 핸더슨이란 미 정보요원으
로부터 마이크로 폭ㅂ탄 제조술을 습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 반장은 며칠 전 부대를 탈영한 김태수의 막내 아들 김도식이 생
각났다
아참 막내 자제분 연락이 있습니까
갑자기 김태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김태수는 울화를 참으려
는 듯 한동안 찻잔을 내려다 보았다
의절한 지 오래된 놈이오
전화도 없었습니까
전화할 녀석 같으면 빨갱이 운동에 앞장 서겠소
김 반장은 공연한 것을 믈었다고 후회했다
김태수로부터 김 반장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더이상 없었다
미라는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남해 바다가 아스라히 내려다보였다 녹청색 해면은 햇빛을 안고
파들파들 떨었다 은빛 파도는 갯바위를 쉬임없이 물어뜯고 있었다
아버지 황석호의 죽음은 미라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다 미라
의 가슴은 그토록 공허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백주 대로상에서 일
어난 폭살 사건의 배후 정도였다 부산하게 지나간 장례식 숨가쁜
뒤치 다꺼리 미라가 허정되는 동안 나영미가 모든 것을 처리한 셈이
었다 중병을 치른 뒤처럼 기운이 없고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암자에 온 지도 달포 남짓되는 셈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즐겨 찾
았고 도솔 스님이 은거하고 있는 이곳 청수암은 한 달이 지나도록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미라는 망연히 바다에 시선을 고정
한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흥청망청 쓰고 마시고 또 섹스에 탐닉
하고 코카인이나 마리화나를 하고 여행을 하고 뻐기고 남을 경멸
하고 그렇게 살아서 무엇을 얻자는 것일까 쾌락 그 순간적 감
각 그 뒤에 오는 허탈과 비애는 이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
불안은 무엇으로 해소할 것인가 결혼
그녀는 결혼이란 단어 속에 내재한 함정을 알고 있었다 사랑이라
는 감정에 속아서 그 감정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군상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어째서 삶의 질이 천박해지고 혐오스러워지
고 있는 걸까 이곳 인적이 드문 산사의 뒤 개울에도 쓰레기는 더미
를 이루고 있다 산을 즐기러 오는 것인지 아니면 죄없는 산을 학대
하러 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어제도 그랬다 관광버스가 한 대 왔는데 사오십 명의 중년 남녀를
꾸역꾸역 토해냈다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웃고 경박하게 행동하는 것
은 무식의 소치로 이해해줄 수도 있다 여자들이 종종걸음치며 풀덤
불로 가서는 엉덩이를 훌렁 까고 용변을 보는 것도 남자들이 나무
등걸에다 바보같이 히죽히죽 웃으며 오줌 즐기를 내뻗치는 것도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혐오스러웠던 일은 남녀들이 보여주는 작태였다 분명
부부는 아닌 이들 남녀들은 빠른 속도로 먹고 마시는 사이에 이성을
잃어버렸다 이들은 노래방에서나 봄직한 인스턴트 밴드를 장치하더
니 차례로 고성방가에다 원숭이 춤을 추어대는 것이다
이성이나 교양이나 양식이 중발해버린 이들의 추한 모습 혐오스럽
고 역겨웠다 왜 이렇게밖에 여가를 보낼 수 없는 것일까 그들은
엉터리 춤을 추면서 즐거움을 느낀다고 스스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
은 온산이 터져나가라고 마이크에다 악을 쓰더니 나중엔 너무 취했는
지 남녀가 부둥켜 안고 엉덩이들을 흔들고 부비고 하는 꼬락서니라
니 남녀들은 마시고 떠들고 흔들고 안고 춤추고 마음껏 이 산의 정
숙함을 유린했다 더구나 가관인 것은 그들 중 몇 쌍이 슬그머니 나
무 그늘쪽으로 사라지는 모습도 보였다 미라는 그들이 개울이나
그런 곳으로 가서 흘러내리는 얼음 같이 시린 개을물에 발이라도 담
글 그런 정서적인 모습을 볼 줄 알았다 풀덤블 뒤로 사라진 그들 남
녀는 잠시동안 부스럭소리를 내더니 여자가 내는 소리임에 분명한
괴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시간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은지를
알지 못하는 불행 오랫동안 침탈과 억압 속에서 짓눌려 온 후유증일
것이다 헐벗고 굶주렸던 가난의 공포에서 미처 벗어날 수 없는 군
상들 그들은 모여서 건전하게 놀 줄을 모르는 것이다 춤을 춘다는
것이 국적도 족보도 근본도 없는 엉덩이와 가슴을 내키는 데로 흔드
는 그런 것이었다
천장산 일대를 거닐던 그녀는 저녁 나절에 암자로 돌아왔다 도솔
스님은 여지껏 독경을 하는 모양이었다
식사 올릴까요 아가씨
여수댁이 미라의 표정을 살피며 믈었다
생각 없어요
미라는 청마루에 앉았다
먹구름의 터진 사이로 보이는 태양은 괴믈의 눈알처럼 회번뜩했다
빗기 품은 숲정이 바람이 그녀의 드러난 팔뚝과 등을 부드럽게 감싸
며 달아났다 바람에 실려온 풀잎의 내음은 향긋했다 쏴아 솔바
람 소리가 스산하게 정적을 뒤흔들었다
미라는 마당에 깔린 퍼런 이끼에 시선을 주었다 너무 외로웠다
그렇게 끼니를 거르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짜실라고 그런디야
나이든 황 보살이 참견했다
그러게 말이라우 도통 식욕이 없나봐유
여수댁이 거들었다
미음이라도 먹어야제
그녀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는 다시 기름이 된다는데 살아있을 때의 중호는 이제는
그리움으로 바뀐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의 감정 아버지에 대한 경멸
과 견딜 수 없었던 분노의 감정 모든 것이 헛된 감정이었다 스물
일곱 나이의 무기력
어머니는 이 암자를 지을 때 딸이 이렇게 찾아올줄 알았을까
이 암자는 어머니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있었다 본당 법당 서
실 그리고 세 채의 별채 암자 치고는 많은 정성을 드린 곳이다 더
구나 이 암자 주위엔 수백 년된 아름드리 잣나무와 편백 수리나무
밤나무 등이 울창했다 바다가 보이는 쪽엔 동백과 개암나무가 빽빽
했다
이 암자에서 마냥 살아버릴까 평화와 고요 그리고 청결함이 있
는 이곳 이 암자를 찾아 오는 사람들은 색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다 도솔 스님이 글을 쓰는 분이라 그런지 도솔 스님과 친분이 있는
묵객들이 찾았다 젊었던 시절 어머니와 도솔 스님 사이의 풍문은
사실일까 이 암자는 한 여름에도 서늘한 적막이 감돈다 도솔 스님
은 그답게 이런 곳에서 은거하며 삶을 불태우고 있다 대사찰의 주지
를 마다하고 세속적으로 되어가는 종단을 박차고 외진 산사로 찾아
온 스님
독경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목탁의 청아한 울림 사이로 어
떤 소리가 들렸다 육중한 발걸음 소리였다 배낭을 어깨에 멘 사내
가 암자의 입구를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사내의 얼굴엔 구렛나루
가 덥수룩했다 머리 또한 어깨에 치렁치렁했다 사내의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그녀는 묘하게 가슴이 철렁했다
도솔 스님 뵈러 왔습니다 지금 게십니까
눈이 맑고 큰 사내였다 얼굴이 희고 눈썹이 짙고 콧날이 선 것이
일본무사 영화의 어느 배우를 닮았다는 생각이 미라의 뇌리를 스첫다
독경중이십니다만 뉘시라 전해드릴까요
황 보살이 말했다
보살님 저 모르시겠어요 대전에서 내려온 이강산입니다
아이구 내 정신 좀 보소 이 장군 아들을 몰라보다니 아니 이
게 몇 년만이우 이렇게 장성했으니 못 알아볼 수밖에 없지 그래 장
가는 들었수
황 보살은 청년의 손을 덥썩 잡았다
못 갔습니다
잠시 기다리시우 곧 끝날 시간이우 시장하실텐데 먼저 간식좀 드
시지요
아닙니다 시장하지 않습니다 개울에 갔다 오겠습니다
비누랑 수건은 있수
그럼요
사내는 메고 있던 배낭을 내려 놓았다
어느 방을 쓰실라우
서재 옆방이 비었습니까
방이란 방은 죄 비어 있다우 아가씨 방만 빼구
그때 처음으로 사내는 미라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찌르는 듯 햇지
만 부드럽고 맑은 눈빛이었다
안녕하세요 이강산이라고 합니다
맑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였다
황미라라고 해요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두요
사내는 배낭을 방에 두고 나왔다
보살님 다녀오갰습니다
다녀 오구랴
사내는 미라에게도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성큼성큼 돌계단을 내려
개울을 향하여 난 오솔길로 모습을 감추었다
참 무슨 놈의 세상인지
사내가 사라진 등에 대고 뇌까리는 황 보살의 중얼거림이었다
무슨 놈의 세상이라뇨 보살님도 그런 말씀하실 줄 아세요
그러게 말이유 저 사람 양부가 그 뭐냐 12 사텐가 그 당시
에 이세준의 부하에게 당했다는구랴 양부가 그렇게 되고 나자 저
청년은 떠돌이 생활만 한다고 들었는데 아까운 청년이지
도솔 스님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다가왔다 양초와 같이 자신을 연
소시키면서 정갈하게 늙어가는 스님
누가 왔습니까
이강산 청년이 왔어요
나무관세음보살
도솔 스님의 감은 눈까풀이 바르르 떨렸다
어떠세요 산사 생활이
미라의 얼굴을 고요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도솔 스님이 물었다
참 좋아요
미라가 대답했다
좋기는요 아가씨가 통 음식을 먹지 않아요 스님 저러다 몸 상
할까 겁나네유
여수댁이 끼어 들었다
여수댁 걱정 마세요 속세의 기름기가 다 빠져야 되는 법이니
한두 달 곡기를 끊는다고 몸은 상하지 않지요 몸이 상하려면 정신이
산해야 하고 정신이 상하려면 마음이 상해야 하고 마음이 상하려면
번뇌와 근심이 있어야 하는 법이오 이곳에선 번뇌나 근심이 없으니
몸이 상할 것이 없지요 공기에도 바람에도 새소리에도 정기는 있는
거라오 그 정기가 곡기보다 더 몸에 이로운 법이지요 신선들은 이
슬과 산의 정기와 숲속의 고요와 해탈을 취하며 천수 만수를 누리는
게지요
스님 신선이 정말 잇습니까
여수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허어 있다 마다요 워낙 모습이 맑아 범속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
지 않아서 그렇지 산마다 신선이 없는 산이 어디 있소
그럼 이 산에도요
여수댁은 침까지 삼켰다
믈론이지요
오매 이를 어째
여수댁이 얼굴이 빨개졌다
왜 개울에서 홀랑벗고 목욕한 것 봤을까봐
황 보살이 여주댁을 놀리는 소리엿다
오매매 보살님은 못하는 소리가 없다여
허허허 염려마세요 신선은 가려서 본다오 허허허
도솔 스님이 너털 웃음을 흘리며 개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라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섬에는 새들이 많았다 저녁이 되
면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한층 요란해졌다 미라는 집에서 키우
던 카나리아의 울음을 떠올렸다 새장에 갇힌 새소리와 숲에 사는 새
소리는 왜 이렇게 다를까
아까의 사내가 터벅터벅 돌 계단을 올라왔다
어떤가
이곳은 축복의 땅입니다
무슨 바람이 불던가
절망의 바람이라고나 할까요
찾았는가
스님도 못찾는 것을 제가 어디서 찾겠습니까
안색이 달라졌네
많이 주린 탓이죠
눈도 맑아졌고
중찬노숙하면서 눈믈을 많이 흘린 탓이겠죠
굶주린 것만큼 마음은 가벼워지고 눈물을 많이 흘린 것만큼 번뇌
의 짐은 덜어진다네
그럴수록 절망의 무게는 더 가중되고요
어쩔텐가 공양부터 하려나 아니면 곡차부터 할까
곡차부터 하죠
미라도 함께 하지 오늘 저녁은 노을이 좋을 걸세
방심 상태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건성으로 듣고 있던 미라는 도솔
스님이 권하는 대로 약수터 옆에 있는 정자로 따라갔다
대나무 평상 여전하군요
오래된 걸세
대나무 평상은 정자의 바닥을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내도와 갈곳
섬 사이의 수평선상에 안경섬이 아련히 보였다
도솔 스님은 곡차를 잔에 부어주면서 미라에게 그 제조법을 간략하
게 설명했다 곡차라고 하는 것은 산 열매를 그늘에 말려 발효시킨
후 중류한 것으로 도수가 굉장히 높은 일종의 브랜디였다 그러나 그
향기란 어떤 술에도 비견할 수 없이 향긋했다
어떻게 내려 왔나
태백산 줄기와 소백산 즐기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얼마나 걸리던가
작년 봄 설악에서 출발해 지리산을 마지막으로 보고 하동 쌍계사
에 들렀다 온 셈이니 열댓 달 걸린 셈이죠
걸어서
물론이죠
고생했네
해원 스님이 한번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찰들은 어떻던가
청년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화가 난 표정이었다
좌우간 잘 왔네 여기서 곡차나 즐기며 지내세
진입로가 포장됐더군요
사내가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믈었다
말렸지만 이번에 신도 회장이 된 정 사장이 막무가내로 우겨서
그만
도솔 스님이 미안한 듯이 대꾸했다 사내의 성난 시선이 노을을 향
했다
저녁 하늘이 봉선화 색깔과 창포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갈매기가
날아가는게 보였다 도솔 스님의 하얀 얼굴에도 저녁노을이 일렁거렸
다
자 서로 알고 지내게
청년은 여전히 시선을 하늘 쪽에 두고 있었다
이쪽은 몇 달 전 고인이 된 황석호 회장의 따님 황미라고 이쪽
은 이강산이라고 팔자 좋은 친구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됩니까
사내가 미라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 달 정도 되나봐요
암자 생활 좋습니까
글쎄요 처음엔 서툴렀지만 지금은 견디는 편이죠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격식을 잘 모릅니다 혹시 제 언행이 거
슬리더라도 마음 상하지 말기 바랍니다
허허 이 사람 방패막이는 여전하군
그래 산행에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스님도 성급해지셨습니다 진입로를 포장하더니 마음까지 달라지
신 겁니까
예끼 이 사람 중을 공박하면 구천 지옥행이라는 걸 모르나
얻은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 자체
가 무위라는 것과 깨달음이란 찾아 헤맬수록 무지개와 같아서 뒤로
믈러서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깨달음이란 무라는 것
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산봉과 계곡을 돌며 무를 찾아 헤맨 격입
니다
그래서 어떤 결론을 얻었나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허무한가를 댜게 되었습니다
철이 드는 조짐이네
철이 드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망각하고 버리는 단계에
접어 들고 있는 것입니다
스님 공양시간입니다
가세나 뭣 좀 들게
오늘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습니다 모처럼 머리가 맑습니다
미라는
미라도 생각 없다고 말했다
그럼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게나 내가 가지 않으면 아무도 공
양을 하지 않으니 가봐야지
왜 식사를 하지 않으시죠
이강산의 물음에 미라는
왜 식사를 않으세요 먼 길을 왔다는데
이러며 응수했다
저는 식사를 하지 않아도 견디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이강산은 곡차의 향기를 코로 맡으며 말했다
저도 그 방법을 배우고 있어요
누구하고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까
누구하고 이야기해본 지가 꽤 됐어요
여기는 젊은 여자분이 지내기엔 불편할 텐데요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자연에서의 생활이란 것이
도회에서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을 깨닫게 해요 문명이란 것이 지나
친 사치란 것도 알게 됐구요
그렇습니다 문명 생활이란 너무 많은 것을 소비하고 너무 많은
해로운 것을 산출하고 있습니다 전기만 해도 그렇죠 원유를 실어오
면서 바다를 오염시키죠 그리고 화석 연료를 가공하고 그것을 사용
하면서 대기를 오염시키죠 뿐입니까 많은 공장을 가동하고 섬유를
가공하고 옷을 만들고 그러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폐수는 하천을 죽
이고 강을 죽이고 바다를 죽이지요 인간은 자연의 유일한 반역아인
셈이죠 농사를 생각해봅시다 보다 많은 양을 수확하기 위하여 화학
비료와 독성이 강한 농약을 뿌리고 그리고 농기구로 수확하고 그러
다 보니 벼나 보리나 야채 모두 허약해져서 병충해에 저항할 수 있는
면역성을 상실했죠 이래서 해마다 농약을 더욱 많이 뿌려야 하는 악
순환이 시작된 것입니다
자연보호자 같은 말투군요 허긴 그래요 요즘 신문광고를 보면
살 빼는 효소다 크림이다 무슨 약이다 야단들 하는 것을 보면 가관
이란 생각이 들어요
불과 20년 전만 해도 우리가 얼마나 가난하게 살고 있었는지 잊고
들 있어요 그 당시엔 지금처럼 너무 먹어서 비만한 사람은 없었거든
요
이 장군님 자제분이라고 들었는데요
양부였죠 양부가 돌아가시고 나자 형과 누나들의 태도가 달라지
더군요 그래서 나왔죠
앞으로 뭘하고 싶으세요
인간을 자연으로 복귀시키는 그런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요
자연의 위대함에 순응하고 자연 속에 내재된 신의 존재를 파악하
는 그런 인간을 키우고 싶습니다
그럼 명상가나 종교가를 양성하고 싶다는 이야기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자 중에도 과학보다는 자연과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르게 인재를 양성해서 빈사 상태에
빠져 있는 정신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너무 거창한 꿈 아닌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꿈마저 없다면 삶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
이겠습니까
그 꿈 이루어질 것 같애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겠죠
모호한 표현도 쓰시는군요
삶 자체가 모호한 것이 아닐까요
말을 하다가 이강산은 짙어진 노을빛을 바라보았다 새빨갛게 타오
르는 저녁하늘을 구름이 가리고 있었다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제 형상을 고집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던 구
름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정자 바로 밑에서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히 흐르는 개울물도 진리를 전해준다 자기의 자리에 연
연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무상 이강산은 삶을 생각했다 찰나에 지나지 않는 인생에 꿈
을 담고 애착을 갖고 무슨 소용인가
구름처럼 새소리처럼 스치는 미풍처럼 삶은 허망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꿈도 삶과 마찬가지로 허망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나
도솔 스님이 환한 미소를 띄우며 다가왔다
제 꿈 이야깁니다
허허허 또 그 맹랑한 꿈 이야기라
제가 그 꿈에 끼어들어도 되겠어요
미라가 흥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돈이 들 것 아니예요
그렇습니다만
제가 돈을 대드리면 안되나 하구요
막대한 자금이 들텐데요
얼마나 필요한데요
한 사백 억쯤
그 정도만 있으면 되겠어요
그 정도만이라뇨
이강산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도솔 스님 어때요 제 생각
미라가 빙그레 웃으며 도솔 스님을 보았다
나무관세음보살 참 좋은 생각들입니다 허허허
아니 스님 무슨 이야깁니까 지금
이강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도솔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게 마련이지 지금 자네 앞에 앉아 있는
아가씨는 엄청난 재산가네 사오백 정도는 문제가 아니지 이 암자도
이 아가씨 어머니가 지은 것이네
이강산은 미라의 얼굴을 놀란 듯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은 오랜만
에 발그레 홍조로 물들어갔다 미라의 시선이 도솔 스흼을 향했다
스님 스님은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이라고 생각하세요
도솔 스님은 빙그레 웃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 사는데는 불가에선 대개 세 가지 삶을 말하지요 자
기를 중심으로 자신의 입신양명과 욕망을 위하여 살아가는 범부의 삶
과 자기를 버리고 도道 만을 위해서 세속의 욕망을 멀리하며 살아
가는 소승의 삶 그리고 세상의 욕망도 즐기고 남을 위해 봉사도 하
는 대승의 삶이 있지요 대승은 소승의 삶이 편협하다고 하고 소승
은 범부를 천하게 생각합니다 누구나 범부가 되긴 쉽지요 그러니
범부의 삶이란 오욕칠정의 삶이니 번뇌와 망상에서 어찌 벗어나겠습
니까 이렇게 외로운 산사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새가 된듯 살고 바
람소리 들으며 바람같이 살고 흐르는 믈소리 들으며 물같이 살며 독
경을 하는 생활이 범부들의 눈에는 안타깝게 보이겠으나 무아의 의미
를 깨우치고 나면 이보다 더 평화스러운 삶도 없는 것이지요 물질
의 세계란 허망한 것 입니다 돈도 마찬가지 입니다 중생 제도를 위
해 값지게 쓸 때 빛이 나는 것입니다
잠자리에 든 미라는 잠을 쉽게 이를 수가 없었다 댓돌 밑에서 우
는 귀뚜라미 소리도 잠을 좇았지만 뒤뜰 대나무 숲에서 나는 스산한
나뭇잎 소리도 의식을 명료하게 각성시켰다
눈을 감으면 이강산의 서늘한 눈동자가 다가왔다
외 이럴까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리는 걸까 아무
리 물리쳐도 다가오는 까만 눈동자 그 찌를 듯한 눈길
미라는 몸을 뒤척이면서 내부에서 연소하는 불길을 잡으려고 안간
힘을 썼다 예사롭지 않은 감정이었다
산과 골을 헤매는 고독한 수행자 동키호테 같은 사람도 허황한
신을 찾아 헤매는 광신자도 아니다 사념의 늡에 빠져 허우적대는 괴
상한 사람도 아니고 그의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
잠들 것 같지 않았다
미라는 음악을 듣기로 했다 타이스의 명상곡에 이어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듣는 동안 이강산의 창백한 얼굴이 줄곧 떠올라 괴로웠
다 의식은 더욱 명료해졌고 이강산의 부드러운 음성이 고막을 공명
시켰다 사랑의 슬픔에 한동안 귀를 기울이던 미라는 스위치를 꺼
야 했다 벌떡 일어나 이강산의 방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누를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미라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떠올렸다 성적이
좋아서 명문대로 진학하여 일류 기업체에 입사한다 열심히 일하고
승진을 하고 봉급이 인상되고 저축이 늘면서 어느 사이에 속물이 되
고 만다 낭만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면서 층실한 가장이 된다 그들은
좋은 주택과 자가용 멋진 가구와 안락한 생활을 추구한다 가끔씩
친구들끼리 모여 술도 마시고 고스톱도 치고 더러는 다른 향락에 젖
는다 대학 다닐 때 한번씩 가담했던 여러 종류의 시위 전력은 전쟁
터의 무용담처럼 가끔 그들의 대화를 구성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관
심사는 이미 그런 진지함이나 치열함에서 아득히 멀어져 있는 것이
다
미라는 소시민적 기질을 혐오했다
말 많은 사람 난 체하는 사람 우둔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 경박
하고 무례한 사람 그들은 어쩌면 이 시대의 비운아들인지도 모
른다 낭만과 정서를 키워야 할 학교 시절을 공부 벌레가 되어 교과
서와 참고서만 갉아먹던 그들 어쩌면 그들의 정서가 메마른 것도 잘
못된 교육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그녀는 이강산으로부터 요즘 남자들에게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한 층
격 같은 것을 느꼈다 그가 하는 말이나 어조는 부드럽고 힘이 있다
울림이 좋은 목소리는 그녀의 가슴을 얼마나 떨게 했던가 이강산의
눈길이 스칠 때마다 두근거림이 그녀의 마음 한 구석을 질풍같이 내
달렸다
그녀는 내일 온다는 나영미를 떠올렸다 나영미는 전화로 미라에
게 네 어머니가 지은 절을 내가 가져서 뭐하니 변호사들이 내 이
름으로 명의를 변경했지만 서류를 새로 만들어 가져 갈테니 기다리고
있어 이렇게 말했다 미라는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일 수가 있었
다
눈이 뜨였다 새소리가 요란했다 새벽의 고요한 대기에 독경 소리
가 맑게 퍼지고 있었다 창호문은 퍼런 빛깔로 젖어 있었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이강산은 상쾌했다 방에서 나온 이강산은
심호홉을 했다 새벽의 맑은 공기가 머리를 맑게 했다 이강산은 타
월을 들고 마당으로 나섰다 몇 걸음 앞서서 개울로 내려가는 미라의
모습이 보였다 마당엔 까치 몇 마리가 요란한 소리로 우짖었다
이강산은 개울로 내려갔다 개울물 흐르는 소리 그것은 언제 들어
도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린 개울믈에 손을 담갔다
잘 주무셨어요
개울 건너편에 있던 미라가 문득 이강산씨깨 싱긋 웃으며 인사했
다
네 오랜만에 푹 잔 셈입니다
이강산은 수염이 더부룩히 자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까치 소리가 요란한 걸 보니 오늘 무슨 좋은 소식 오려나 모르겠
네요
하얀 손에 비누칠을 하면서 미라가 말했다
좋은 소식 올 데가 있는 모양이죠
수염을 깎으며 이강산이 명랑한 어조로 대답했다
오늘 새어머니가 오기로 했어요
그런 말을 하고 나서 미라는 퍼런 안개가 서린 아침의 하늘로 시선
을 들었다 멀구슬 나무에는 몇 마리의 찌르레기가 꼬리짓을 연방 하
면서 요란하게 지저귀는 것이 보였다 미라는 왜 자꾸만 이강산에게
말을 걸고 싶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간밤에는 꼬박 이강산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아서 잠을 설쳤다 그녀는 면도를 끝낸 이강산의 얼굴로
시선을 가져갔다 파리한 면도 자국이 무척 청결해 보였다 미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마저 화끈거려왔다
속마음이 내비칠 것 같아서 불안했다
새 어머니가 좋은 소식 가져올지 누가 압니까
이강산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갸름한 얼굴 시원한 눈매 선
명한 입술의 선 보면 볼수록 아폴로를 연상하게 하는 얼굴이라고 생
각하면서 계모인 나영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어머니를 좋아합니까
이강산이 묻자 황미라는
좋을 이유도 싫을 이유도 없어요
대답하면서 세수를 끝내고 일어서는 키큰 청년을 올려다 보았다
이강산은 훠이훠이 걸어서 산길을 올라가버렸다 미라는 이강산을
따라가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누르며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미라는 좋
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강산에 대한
열정을 감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음악을 들을 때마다 미라는
이강산이 사라진 숲길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영미가 청수암에 도착했을 땐 늦은 아침이었다 배례를 마치고
도솔 스님에게 인사를 한 후 미라를 찾자 도솔 스님은
아가씨는 개울에 갔으니 금방 돌아을 겁니다 기다리시죠
하며 나영미에게 자리를 권했다
암자가 정말 좋군요 이렇게 잘 단장된 즐은 몰랐어요
마루청에 엉덩이를 걸친 나영미는 암자 주위를 둘러 보면서 말했
다
타 도와주신 덕분이죠
도솔 스님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 암자를 미라의 명의로 해주려고 왔습니다
고인도 기뻐할 겁니다
도솔 스님의 표정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갖고 있어봐야 관리도 제대로 안될 것 같고
나영미는 천장산 자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암자의 부속지도
도솔 스님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얼마나 되죠 부속지 임야가
한 이백 사십 정보 될 겹니다 평수로는
70여만 평이 되는 셈이
상당하군요
이 산 전체니까요
암자 운영은 어떠세요
밤나무 단지에서 나오는 수확으로 운영비는 되는 셈입니다
그럼 운영비는 필요 없겠네요
믈론이지요 조금씩 저축도 하고 있습니다
도솔 스님이 개울가를 돌아보자 미라와 이강산이 함께 올라오는 것
이 보였다
저 남자는 누구죠
이무영 장군의 양자입니다
나영미는 미라에게 다가갔다
미라가 나영미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많이 말랐구나
나영미가 미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건강해졌는데요 두통도 없어졌구요 아참 소개할께요
이강산씨예요
미라는 나영미에게 잡힌 손을 어색하게 빼내며 말했다
이강산이 나영미에게
첨 뵙습니다 이강산이라고 합니다
하고 가볍게 인사를 했다
아 네 반갑습니다
나영미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눈에 무척 익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그래서 젊은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미라는 나영미와 이강산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며 말했다 도솔 스
님도 미라처럼 한동안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며 나영미는 무심코 젊은 사내의 손에 시선을 주
었다 나영미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식지 첫째 마디가 없었다
그녀는 눈길을 재빨리 사내의 오른쪽 뺨으로 돌렸다 사내의 귀밑에
는 까만 사마귀가 하나 있었다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어머니
가 늘 말하던 왼손 식지 첫째 마디가 없고 오른 뺨에 사마귀가 있는
삼십대라면
실례지만 좀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럽니다
나영미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림을 알았다
제게요
이강산은 의외란 듯한 표정을 만들었다
네
나영미는 이강산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뭘 알고 싶으시죠
이강산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어릴 때 일 기억 나세요
나영미의 눈빛은 치열한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릴 때라면
이강산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나영미는 다급하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혹시 어릴 때 집 나온 적 있으세요
네 다섯 살 때 어떤 아주머니를 따라 집을 나왔죠
혈액형은 무슨 형이죠
나영미의 음성을 떨렸다
아르에이치 마이너스 오형입니다
혹시 누나 이름 기억나요
누나의 이름은 영미라고 했었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영미는 이강산의 손을 와락 거머잡았다 나영
미의 급작스런 태도에 이강산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나영미의 얼굴
을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하늘은 유리알처럼 맑았다 너무 맑아서 천상에서 하프 소리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실구름이 가로걸려 있었고 몇 마리의 백로가 날
아가는 것이 보였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백로들의 날개짓에 잠시 시
선을 빼앗겼던 나영미는 대리석으로 만든 계단을 걸어서 정원으로 내
려갔다
정원에는 여러 종류의 장미들이 다투어 피고 있었다 유월의 장미
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장미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향
기가 좋았다 장미의 향기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마법의 향기였
다 요정의 꽃 장미 그녀는 장미꽃송이 하나를 코에 가까이 대고
장미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비수처럼 날카롭게 찔러오는
사랑의 갈증 밀물같이 밀려드는 하나의 그림자 나영미는 강철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불꽃이 활활 타고 있는 서글서글한 검은 눈 날카
로운 콧마루 선명한 입술 면도 자국이 파리한 얼굴 가끔 내비치는
천진한 미소 강철수의 미소는 특별하다 잘 웃지 않는 사내지만 가
끔 미소를 볼 때마다 나영미는 감전된 듯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장미 향기를 맡으며 그녀는 사내의 내음을 떠올렸다 미풍이 불 때
마다 코끝을 스치고 달아나버리는 아련한 향기 그녀는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그녀는 강철수의 모든 걸 떠올린다 나직한 톤의 목소리
부드러운 손놀림 그의 강인한 에너지를 기억한다 그녀는 그의 잔인
함까지도 사랑한다 남자의 모든 것을 그녀는 사랑한다고 확신한다
그와라면 지옥까지도 갈 것임을 다짐한다
남자들은 많지만 강철수와 같은 사람은 드물다 강인한 야성을 간
직한 순박한 남자 그는 보통 남자들이 주는 그런 평범하고 진력나는
느낌 을 주지 않아서 좋다 그녀는 남자의 허무까지 좋아한다 그녀는
강철수를 이해하는 유일한 여성이라 생각한다 사자와 같이 고독한
남자 그가 추구하는 음울한 복수의 삶도 그녀는 이해한다
트라이앵글의 비극을 강철수로부터 송두리째 듣던 밤 그녀는 울었
다 한 젊음이 갈갈이 찢기운 비극의 회색 전선 그녀는 강철수의 우
울한 과거를 들으며 얼마나 가슴이 아팠던가 강철수란 존재는 그녀
내부의 구심점에 자리한다 그녀 영혼의 한가운데 석주처럼 자리한
존재 그녀의 방황은 끝난 것임을 그녀 스스로 안다 그녀는 강철수
의 한마디 말을 영원히 기억한다
당신은 유별난 여자요 난 유별난 여자가 좋소 당신을 사
랑하오
강철수와 같은 남자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강철수와 같은 남자
는 배신을 모른다 그는 지적이고 정직하고 자존심이 강한 남자다
그는 세속적인 것을 경멸한다 그는 강인하지만 섬세하다 그는 여자
를 이해해준다 미세한 숨결의 의미까지도 그는 이해해준다 이런 남
자로부터 사랑한다라는 말을 듣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야누스의 얼굴을 한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여자와 바람
을 피우고 난 뒷날 보석을 선물해주던 황석호를 그녀는 기억하고 있
다 모든 죄악을 돈으로 덮으려던 황석호의 속물 근성을 그녀는 얼마
나 혐오했던가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약속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조의 맹세가 아닌가 황석호가 그녀를 배신하기 전 그녀는 다른 남
자와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되리란 것을 상상 못했다
여자는 남자의 이용물이나 장식품이 아니다 여자는 여자이기 전에
인간인 것이다 강철수는 그녀의 자존심을 무시하려 들지 않았다 그
는 나영미를 황녀처럼 대해주었다 남자로부터 이런 대우를 받는 것
처럼 기막히게 달콤한 기분은 없는 것이다 그는 많은 걸 알고 있다
많은 걸 경험했다 그는 말수가 적지만 많은 걸 전달해준다 그의 표
정만 보면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나영미는 알 수 있었다
나영미는 스프링 쿨러의 스위치를 눌렀다 잠시 후 쉿쉿 소리를 내
며 물줄기가 힘차게 하늘로 솟아 올랐다 그녀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장미꽃 송이에 시선을 주며 방심한 듯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장미의 아련한 향이 감미롭게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나영미는 장미 중에도 향이 좋은 장미를 특히 좋아했다 화단 배치
에도 관심을 기울이던 그녀는 크라이슬러 임폐리얼이나 뉴우요커 같
은 붉은색 계통의 장미는 대문 맞은편 하트형 화단에 심었다 그리고
아즈티크나 바카라와 같은 주홍 계열의 장미는 응접실 맞은 편에 심
었다 발레나 핑크라스터 오폐리아 등의 복숭아색 장미는 울타리 주
위에 심었고 리디아나 조네 등 황색 계통의 장미는 화단 중앙에 심
었다 응접실 가까이 심어둔 라일락 타임이나 네이쥬퍼뮴과 같은 순
백색 계통의 장미도 꽃망울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색 바탕에
분홍의 복륜을 한 피이스는 암석 정원에 화사하게 가슴을 열기 시작
했다 아치형 대문을 덮고 있는 분홍색이 도는 뉴우돈은 대단히 향기
가 좋은 덩쿨성 장미였다 울타리엔 아루벨티누라는 장미가 주황색의
꽃을 피우며 강한 향기를 발산했다
나영미의 요즘 일상은 장미를 가꾸는 일로 변했다 그녀는 거의 외
출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한남동 아파트에 들렀을 때 한 일주일
동안 일본에 다녀 온다는 말과 외출을 삼가하라는 강철수의 메시지가
메모리되 어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님 도서관에 갑니다
나영미의 등 뒤에서 이강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돌아올거지
나영미는 상냥한 표정으로 물었다
늦지는 않을 겁니다
네가 곁에 없으면 어머니가 걱정해
알았어요 일이 끝나는 대로 곧장 돌아오죠
이강산은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유전자 검사까지 해서 동생임이 밝혀졌지만 이강산은 한동안 서먹
해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모성 본능인지 처음부터 이강산을 알아보
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25년만에 다시 찾은 아들의 손을 한시도 놓으
려 하지 않았다 이강산은 요즘 건축관계 서적을 보느라 열심이어서
틈만 생기면 도서관을 출입하기에 바빴다 그는 아직도 청수암에 머
물고 있는 미라와 매일같이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는 눈치였다
이강산은 당분간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겠노라고 해서 어머니
와 영미를 서운하게 했지만 모녀는 참기로 했다 나영미는 동생에게
차를 사주려고 했지만 이강산은 한사코 거절했다 아무리 좋게 보아
도 동생은 고리타분한 남산골 샌님이란 생각을 털어버릴 수가 없었
다 아마도 도솔 스님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
아서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동생이 싫지 않았다 요
즘 같은 시대에 동생같은 녀석도 매력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도 들었다
그녀는 매일 강철수의 전화를 기다렸다 스프링 쿨러로 장미 정원
에 물주기를 끝났을 때 김 반장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하 장미 향기가 무척 좋군요 이건 샤를르 마르향이죠 아
마
김 반장이 붉은 장미를 가리키며 물었다
장미에 대해서 잘 아시는가 보죠
상아색 스웨터에 융기된 가슴을 가디건 자락으로 가리며 나영미가
반문했다
몇몇 유명한 품종은 알죠 오래 하셨나요
김 반장은 여전히 장미에 시선을 모으며 물었다
장미 가꾸기를 말하는 거예요
나영미가 반문했다
물론 장미 가꾸기죠
몇 년된 셈이죠 아직은 초보 단계에 지나지 않아요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나영미는 김 반장을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김 반장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나영미는 커피를 권했다
어서 드세요 오늘은 무슨 일이죠
혹시 주인 양반으로부터 트라이앵글이란 말 들어봤습니까
커피잔을 든 채 김 반장이 물었다 묻는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시선
은 면도날같이 날카로웠다 김 반장으로부터 트라이앵글이 란 말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황석호와 강철수가 말하던 음산한 저주의
땅 트라이앵글 그녀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 네 가끔요 그러나 자세한 내막 이야기를 하는 분은 아니죠
가끔 술김에 아편 밀거래에 대하여 말한 적은 있었어요 그러나 잊어
버렸어요 관심있게 듣지도 않았고 그런 이야기는 흥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왜 그런 것을 물으시죠
나영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트라이앵글 지대에서 미굳
과 암약하던 한국군 특수요원 중에 생존자가 이번 사건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 반장은 탐색하는 듯한 눈초리로 나영미의 표정을 살폈다 나영
미의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의 빛도 없었다 혹시 내가 수사의 방향
을 헛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라고 생각하면서 김 반장은 커
피잔을 내려 놓았다
황석호의 딸 미라쪽도 조사해봤지만 그녀의 행적은 의심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아무리 그의 아버지에 의해서 애인이 죽었다고 하지만
애인의 복수를 위해 아버지를 해칠 그런 여자는 아니란 것이 확실했
다 만약 이도 저도 아니라면 김태수 일당이 의심하고 있듯이 정치적
음해 행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영미의 거동을 지켜 보아도 요즘
은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장미 가꾸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김 반장
은 다시 수사의 방향을 돌릴까 하다가 며칠만 더 나영미의 주변을 감
시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김 반장은 자리를 일어섰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바쁜 시간을 공연히 빼앗았는지 모르겠습니
다 그랬다면 용서해주세요 가보겠습니다
아니 더 계시다가 가시지 않고요
찾아뵐 곳이 있어서요 그럼
김 반장을 배웅하고 나서 나영미는 가죽 소파에 앉았다 불길한 예
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김 반장이 뻔질나게 그녀의 집으로 오는
이유는 혹시 황석호의 죽음에 관련된 무슨 비밀을 캐려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김 반장이 가고 나서 한 시간 가량 지나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강철수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흘러나왔다
만나고 싶소
그의 말은 간결했다 오랜만에 강철수의 목소리를 듣고 나영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어 어디세요 지금
나영미는 쥐어짜듯 외켰다
그곳으로 나오시오
단지 이 말뿐이었다
그는 도청을 우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화를 황급히 끊
어버린 것이다 아니면 누구에겐가 쫓기고 있거나
이런 블길한 생각을 하면서 나영미는 외출 준비를 했다
남 형사는 녹음기를 틀었다 사내의 굵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남녀의 대화를 엿듣던 김 반장은 송신기를 집어 들었다
각 조 잘 들어 이번엔 절대 놓쳐서는 안돼 조심하라구
강철수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이상 그의 주위를 철통같이 감시
해야 한다는 결심이 서면서 나영미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색나비처럼
종잡을 수 없는 여인 여러 번 미행했지만 헛탕만 친 셈이다 허기야
벤츠를 소형차로 미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삼십대 중반이라지 만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 황석호의 죽음
에 그녀가 관련되어 있다면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교사한 독부다 그
러나 그녀에게서는 범죄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선입견 때문인가 김
반장의 고막이 긴장했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영미의 벤츠가 대문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김 반장은 수화기를 들어 한길가에 잠복해 있는 쥐색
르망을 불렀다
박 형사 지금 나영미가 출발했다 우회전할지 모르겠어
미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벤츠는 성수대교 입구에서 좌회전해
서 올림픽 대로로 접어 들었다 그곳에는 민 형사가 대기하고 있었
다 나영미의 차가 라마다 르네상스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
을 확인한 것은 최 형사였다 최 형사는 나영미가 1222호 객실로 들
어가는 것까지 놓치지 않았다 김 반장은 서둘러 라마다 르네상스로
차를 몰았다 나영미가 들어간 객실을 알아낸 김 반장은 총지배인을
블렀다 대머리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김 반장에게 다가왔다 김
반장은 경찰 수첩을 대머리에게 내보이면서 말했다
수고하십니다 미안합니다만 몇 가지 협조를 좀 해주어야겠는데
요
무슨 일이신데요
대머리는 정중하게 믈었다
1222호 손님 언제부터 투숙했죠
몇 달 되었습니다
룸 서비스는 누가 합니까
객실 당번이 하죠
고정되어 있습니까
아뇨 순번제로 합니다
룸 서비스를 우리 직원이 대신 하도록 양해 바랍니다
그건 곤란한데요 우리 호텔은
다른 호텔과 달리 투숙객의 프라이버시를 신용으로 하는 외국인
소유의 호텔이라 말하고 싶은 거죠
협조해 주세요
김 반장은 임검을 자주 해서 귀찮게 해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런 김 반장의 내심을 눈치챗는지 대머리는 불쾌함을 미소로 덮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협조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 반장은 대머리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대머리는 마치 아
랫사람 대하듯 어깨를 두드리는 김 반장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
는지 혼자 입술을 실룩거렸다
잠시 후 1222호 객실에서 음식을 주문했다 룸 서비스맨으로 가장
한 이 형사에게 김 반장이 말했다
될 수 있으면 침대 옆에 설치하라구
김 반장은 도청 차량에서 3222호실에 투숙한 남녀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일본엔 무슨 일로 다녀 오셨죠
룸 서비스맨이 나간 뒤 나영미가 믈었다
별다른 일 아니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보고 싶었소
얼굴이 까칠하네요
나영미의 시선이 강철수의 얼굴을 스첫다 강철수는 술잔을 만지작
거리며 말이 없었다 나영미는 강철수의 이런 동작을 보면서 남자가
불안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농담을 생각해서 이런 분위기를 바꾸
려했다
혹시 일본에서 여자 사귄 거 아니죠
그런 사람 아니란 것 알잖소
후후 괜히 그래본 거예요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 진작
알고 있어요
난 속믈이오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특별한 남자예요
난 속물이고 욕구 불만과 자기 학대 때문에 터무니 없는 중호를
살인이라는 수단으로 표현하는
이런 자조적인 감정으로 침울하게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는 강철수
에게 나영미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 나라를 뜨자구요
어디로
프랑스 이태 리 영국 독일 스위스 미국 등 어디든지요 마음
에 드는 곳이 있으면 정착하구요
이 여자도 불안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불안하다 죄를 지은 사람
은 더욱 그렇고 변절자들 이들은 모두 현실을 도피하려 들고 있
다
강철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영미의 시선을 피했다
일이 남아 있소
전 불안해요 김 반장이 집에 자주 들러요 이것 저것 캐묻고 오
늘은 트라이앵글에 대해서 믈었어요
트라이앵글이란 소리를 들었을 때 강철수는 긴장했다 벌써 그들은
나영미의 꼬리를 밟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오늘 을 때 어떻게 왔소
강철수는 나영미의 커다란 눈동자를 직시했다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바로 왔어요
미행은
없었어요 무슨 일이죠
아무 것도 아니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시 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해요
나영미가 강철수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잠시 후 여자의 아 아 하는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김 반장은 도청 장치의 스위치를 내렸다
나영미가 나간 후 강철수는 침대 곁을 더듬었다 침대 곁에는 담배
갑이 만져지지 않았다 그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담배는 탁자 위에
있었다 맥주병도 그대로였다 담배를 피울까 맥주를 마실까 잠시
망설였다 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
다 불면증 트라이앵글의 후유증이었다
자정이 넘은 밤거리는 한산했다 간간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자동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모통이의 담벼락을 비추었다 그럴 때마다
가로수의 잎사귀들은 불빛에 놀란 듯 화다닥 몸을 떨었다 강철수는
담배갑에서 담배를 한 개비 집어내어 불을 붙였다
트라이앵글 지역에서 보낸 2년간 야간잠복 근무로 얻은 블면증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치유되지 않았다 그는 박쥐와 같은 야행성 동
물이 된 것이다 베트남 수용소 시절 고엽제로 고통받던 베트남인들
을 기억에 떠올렸다
울창한 정글에 은신한 베트콩의 은거지를 없애기 위해 뿌렸던
24D 제제와 24OT 제재 그리고 다이옥신 계통의 고엽제들은 식
물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특히 정글에서 생
활하던 주민들 중 상당수가 고엽제의 영향으로 여러 가지 불치병에
걸려 사망했다 암은 다발성으로 나타났다 고엽제의 후유증은 다음
세대까지 이어져 기형아 출산율이 현저하게 중가했다 후유중에 시달
리던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나타났
다
전화벨이 울렸다 총지배인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문 밖에 형사들이 지키고 있어요 룸 서비스를 한 사람도 형사였
어요
그뿐 전화는 끊어졌다 형사들이라 그렇겠지 예상하고 있던 일
이었다 룸 서비스맨 그 친구 어쩐지 동작이 어색했었다는 것을 기
억해냈다
도청 장치를 했었구나 녀석들 정사 현장에 도청 장치를 해놓다
니
강철수는 룸 서비스맨이 얼쩡거리던 주위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살
펴 나갔다 그것은 테이블 밑에 붙어 있었다 백동전 크기의 도청 장
치였다 그들은 나영미를 미행했을 것이다 여자는 꼬리를 내보인 것
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사랑의 함정 그는 스스로 자초한
함정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창가로 갓다
2층에서 내려다 보는 세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먹굴같이
어두운 공간만이 있었다 그는 객실의 불을 켯다 그리고 한참 기다
린 뒤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빠져 나갔다 건믈 벽엔 손톱이 겨우
들어갈 만한 홈이 있었다 그는 그 홈에 손톱을 박고 거미처럼 앞가
슴을 타일벽에 붙인 채 코으로 한 발씩 이동해 갔다 공포 때문일까
전율이 전신을 스쳐갔다 그는 도시의 아련한 불빛을 흘깃 보았다
잘못하면 저 불빛을 영원히 볼 수 없겠지 옥상으로 연결된 송수관까
지 과연 갈 수 있을까 객실은 예약할 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옥
상으로 향하는 송수관을 미리 보아 두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
면 이런 경우 낭패를 당할 뻔 했구나
강철수는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한걸음씩 천천히 이동할
때 손가락은 떨렸고 장딴지 근육은 긴장했다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
거나 발끝을 제자리에 대지 못하면 40여 미터의 높이에서 떨어져 아
스팔트에 부딪칠 것이다 이런 상상은 끔찍한 것이다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한 상상이다 이럴 때 시간은 정지해 버린다 시간이란
묘한 것이다 이런 괴로운 상황에서 시간은 인간에게 마음껏 잔인한
고문을 가하는 것이다 송수관은 아직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는 벌써 손가락의 힘이 빠져나감을 느꼈다 너무 급하게 설첫다는 생
각이 들었다 아무리 여자를 만나고 싶었어도 충분히 상황을 살핀 뒤
에 만나야 했다 그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다시 한걸음을 옆으로 옮
겼다 시멘트 가루가 푸수수 떨어지면서 눈을 따갑게 했다 등줄기를
타고 진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결코 아래를 내려다 보지 않았다 그
것은 추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소 공포증이 없는 사람이라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순간적으로 아찔해지고 발을 헛디뎌 추락
하기 십상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키플링의 왕이 되고 싶은 사나이가 생각났다 천길 나락으로 추
락하는 다니엘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는 팔랑개비처럼 뱅글뱅글 떨어
졌을까 아니면 어떤 자세로 떨어졌을까 이런 상황에서 블길한
생각을 하다니 강철수는 불안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손가락이 마비
되는 느낌이었다
강철수는 깜짝 놀랐다 발을 헛디딘 것이다 하마터면 떨어질 뻔
했다 명치끝이 주먹에 쥐어박힌 듯 아팠다 망막에는 깊은 어느 골
짜기에서 푸줏간 고기처럼 와해된 다니엘의 처참한 시체가 바쁘게 스
쳤다 지루했다 송수관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한걸음 한걸음 옆으로 옮겼다 녹슨 송수관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
다 송수관의 상태를 미리 점검할 기회가 없었다는데 생각이 미첫다
송수관이 낡아서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면 그는 돌덩이처럼 추락해
서 여러 조각으로 분해되고 말 것이다
송수관까지 겨우 도달한 그는 송수관을 만져보았다 산화철의 벌건
분말이 푸석푸석 일어났다 그는 송수관을 가볍게 긁어 보았다 얇은
편은 아니었다 그는 송수관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송수관
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던 그는 아득한 밑을 내려다 보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에 땀이 났다 그는 점점 심해지는 맥박을 느끼며 생각
하기 시작했다
밑으로 추락한다면 충돌하기까지 몇 초나 걸릴까 5킬로그램의 체
증을 가진 사람이 40미터 높이에서 낙하할 때 그 가속도는 얼마나 되
며 지상에 충돌할 때의 힘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그는 물체의 낙하
속도와 가속도를 구하는 공식이 생각나지 않았다 손이 저려오고 다
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밑에서 누가 보는 자가 있다면 그
리고 도둑놈으로 오인하고 외치기라도 한다면 이런 부질없는 불
안감도 들었다 그러나 그럴 염려는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건물의 옥상 근저는 그의 행동을 은폐하기에 충분할 만큼 어두웠기
때문이다
녹이 슨 생명줄 당장이라도 건물벽에서 빠져나와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낡은 송수관 그는 가슴이 옥죄어 들었다 이런 모험은 무꼬하
고 어리석다고 생각하면서 죽음의 음험한 얼굴을 상상했다 그것은
찢긴 그의 시신을 삼키기 위하여 이빨을 드러내며 기다리고 있는 그
런 모습이었다 추락한다면 그때에 느끼는 감각은 어떨까 고공에서
의 추락사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죽음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정말일
까
건물 옥상에 이르렀을 땐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다리
가 후들거려 한동안 옥상 바닥에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잠시 후 그는 다음 건물의 옥상으로 몸을 날렸다
함정을 무사히 빠져 나온 강철수는 앰버서더 호텔로 차를 몰았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방울비는 폭우로 변해서 마치 양동이로 물을 퍼
붓듯 차도에 쏟아지고 있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아나운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와이퍼의 분주한 움직임 사이로 전방의 차도를
주시했다 차창은 습기로 뿌옇게 흐려서 마주쳐 오는 자동차의 헤드
라이트가 비출 때마다 충돌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자에 대한 사랑 그것 때문에 스스로 함정에 빠질 뻔했다는 자책
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부옇게 흐려진 유리창에 나영미의 얼굴이 투
영되어 왔다
후에가 죽은 후 그는 어떤 여자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나영미를 만나고 나서 그의 이런 생각은 성급했음을
알게 되었다 봄 안개처럼 부드러운 여자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탄
력있는 몸매와 뜨거운 체액을 기억한다 김태수를 처치할 때까지는
나영미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절제는 고문
이었다 그와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 생활해 온 사람이 뒤늦게 사랑에
빠진 것은 운명의 함정인지 모를 일이다 당신과 함께라면 지옥에라
도 가고 싶어요 나영미는 땀에 흥건히 젖은 얼굴로 이런 말을 그의
귓가에 넣어 주었다 여자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남자와 함께 지옥에라도 가겠다는 여자 순정과 낭만이 잠적해버린
사막 같은 이 도시에서 여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맹랑한 일인지 모른다
비는 줄기차게 차창문에 부서졌다 강철수는 신형철로부터 온 편지
를 생각했다
김태수 그 자는 여우같이 교활하고 하이에나처럼 사납다 녀
석은 거북의 갑주와 같이 튼튼한 경호망으로 보호되고 있다 트라이
앵글의 삼총사를 조종한 괴수답게 그는 대단히 간교한 인물이다 이
자를 제거하기 위해선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치의 헛점이
라도 보인다면 오히려 그에게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자의 주위를 둘
러싼 장막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현역에서 은퇴는 했지만 산전
수전을 다 겻끈 베테랑 경호팀들이 그의 성채를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자의 운명도 대단히 불행하다 복수의 칼날이 두려워
쥐 처럼 떨며 지내는 인생 죄 지은 자는 이승에서도 징벌을 받고 사는
셈이다 인내란 중요한 것이다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는 트라이
앵글의 삼총사가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원인을 감지하고 있을 것이
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녀석은 완벽하게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꼬리를 잡힐 만한 어떤 행동도 파멸의 원
인이 될 수 있다는 걸 잊어선 안될 것이다 이자만 제거하고 나면 우
리는 독수리처럼 자유스러워질 것 이며 우리의 의식을 좀먹게 하는
증오와 복수심은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아무튼 잘 해다오
강철수의 차는 앰버서더 호텔의 주차장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음날 아침호텔 객실을 청소하러 갔던 청소부 아주머니는 텅 비
어 있는 객실을 발견하고 형사에게 알렸다
남 형사와 최 형사는 천둥에 놀란 새앙쥐 얼굴로 마주 보았다 사
내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다
남 형사가 인터폰을 들었다
반장님 놈이 사라졌어요
사라지다니 무슨 소리야 그게
김 반장의 목소리가 쥐어박듯 흘러나왔다
객실이 텅 비어 있다구요
남 형사는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다려 올라갈테니
김 반장은 열린 창문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까마득한 밑으
로 자동차들이 분주히 오가는 것이 보였다 자동차들이 모두 장난감
같아 보였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벽 옆에 녹슨 송수관이
눈에 뜨였다
남 형사 망원경
남 형사가 망원경을 김 반장에게 건네주었다
아뿔사
김 반장의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 벌겋게 녹이 슬어 있는 송수관에
는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 높은 건물에서 송수관을 타고
탈출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귀신같은 놈 반드시 내손으로 잡고 말리라
김 반장은 이를 사려물었다 40미터 건물 벽의 손톱이 겨우
들어갈 만한 홈통을 타고 10미터를 옆으로 옮겨간 후 직경 20여 센티
의 송수관을 타고 옥상을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강철수가 아니고서
는 불가능하다는 추측이 강하게 피어 올랐다 옥상으로 올라간 뒤 옆
건물의 오피스텔로 건너가는 사내의 그림자가 망막을 스치고 지나갔
다
두 사람의 정사 현장을 덮쳤어야 했다는 후회가 생겼다 서장에게
변명해야 할 마땅한 말이 없다는 걸 느끼면서 김 반장은 맥이 풀렸
다 김 반장은 옥상으로 올라가 보았다 옥상엔 발자국이 있었고 옆
건물의 옥상으로 건너간 흔적이 보였다 김 반장은 사오 미터나 되는
넓이를 박쥐처럼 날아가는 강철수의 잽싼 동작을 그리며 소름이 끼쳐
왔다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는 강철수가 틀림없다는 생각을 굳히면서
육군 정보국에 있는 소 대령의 사무실로 차를 몰았다
소 대령은 반갑게 김 반장을 맞아주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막내딸 현경이가 유괴되었을 때 하루만에 딸을 무사히 찾아준 김
반장의 신세를 소 대령은 잊지 못해 하고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갑자기
미안합니다 미리 전화도 없이 찾게 되어서
무슨 일이 있으세요
어려운 일을 부탁하려고요
김 반장이 미안한 표정을 만들며 말했다
무슨 일이든 부탁하시죠
강철수의 기록을 찾고 싶습니다
계급과 생년월일을 아십니까
김 반장은 그가 그동안 조사한 강철수에 대한 정보를 말해주었다
30분 쯤 지나서 소 대령이 서류를 한 장 가져왔다
인사기록 카드와는 상당히 다른데요
여기 보관된 기록은 원본입니다
사진을 보면서 김 반장은 짙은 눈썹과 튀어나온 광대뼈 그리고 커
다란 눈동자 마치 오마 샤리프와 같은 인상이라 생각하면서 서류철
로 시선을 옮겼다
영어 일본어 베트남어 라오스어에 능통함 태권도 7단 검도 3
단 유도 3단 고공 낙하 훈련과 卞증 폭파 훈련 수료 칼던지기와
사격의 명수 오키나와 정보학교 우둥 수료 두뇌가 탁월한 특수 요
원임 특수 기술 마이크로 폭탄 제조와 화생방 무기 사용 요인
암살 전문
대강 이런 내용을 서류철에서 뽑아 수첩에 옮겨 적었다
대단한 사람이었죠
소 대령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사람 아십니까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전설적인 인물이죠
이 사람과 가까웠던 사람들 만날 수 있겠습니까
대학 동창들을 찾아보시죠 그리고 학군단 동기생들도 만나보시고
좌우간 감사합니다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만 해주세요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소 대령은 친절하게 말했다
정 말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소 대령과 헤어진 김 반장은 본서로 돌아오면서 강철수란 인물을
모자이크하기 시작했다
비교적 불행하게 자란 성장기 우수한 두뇌 트라이앵글에서의 부
도덕한 작전에 참가하면서 생긴 갈등 그런 심리적 억압은 강박 노이
로제를 형성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욕구불만의 원인이 되었고 배신
한 상관에 대한 복수심은 강박 노이로제의 극단적인 행동인 것이다
만약 강철수가 이번 살해 사건의 진범이라면 이것은 무서운 재앙이라
는 생각이 김 반장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자애원 궁사는 원만하게 진척되고 있었다 이
강산은 천천히 산길을 오르며 생각에 잠겼다 녹청색 남해 바다를 코
밑으로 굽어보고 있는 천장산과 노자산 자락의 3OO 만 평 대지에 건설
되고 있는 꿈의 낙원 자애원
이곳은 갖은 굴욕을 받으며 살아온 가련한 인간들의 보금자리가 되
어줄 것이고 또 아무런 억압을 받지 않고 장차 이나라의 미래를 건
설할 역군을 기르는 터전이 될 것이다 장애자란 이유 때문에 그리
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 때문에 몰인정한 인심 때문에 버림받은 가련
한 사람들 이들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짐승보다 더 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강산은 발길을 멈추었다 눈 아래 보이는 바다는 강한 햇살에 파
들파들 떨고 있었다 바다 빛은 곱지만 이 청정 해역도 오염으로 죽
어간다던 안타까운 기사가 생각났다 마산만과 진해만에서 유입되는
유기믈 각종 양식장에서 발생한 오염 물질 정화되지 않고 바다로
흘러드는 각종 오수 강이 썩고 바다가 죽어가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한심한 상황 당국이 원망스러웠다
혜인 스님이 은거하는 암자를 찾던 일이 생각났다 그를 찾아 나선
것은 단풍은 지고 스산한 바람에 나목이 벌벌 떨던 초겨울 어느날이
었다 그의 암자로 가는 오솔길은 없었다 벽파 스님이 손대중으로
저 골을 넘고 저 등성이를 돌아 한나절을 오르면 골 깊은 계곡이 나
오고 계곡을 오르면 돌출된 커다란 암석이 나오고 그 암석을 돌아
가면 등성이가 나오고 등성이 건너편 돼지 우리 같은 암자가 있다
이렇게 말했다
아침 나절에 출발했지만 정작 혜인 스님의 암자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고시 공부를 하다가 어느날 홀연히 머리를 깎
아버린 혜인 이강산보다 두 살 위인 그였지만 행동거지는 열 살도
더 위로 보였다 그와 대좌하여 이런 저런 말끝에 언제나 그렇듯 시
국에 대한 비탄으로 이어졌다 한숨을 깊이 쉬던 그가 말을 계속했
다
가장 불행한 인간이란 인정이 메마른 사회에 사는 인간이요
가장 행복한 인간이란 인정이 넘치는 세상에 사는 인간이구요 인정
이 있음과 없음으로 세상은 천국도 될 수 있고 지옥도 될 수 있는
겁니다 국가가 인정있는 정책을 펴나간다면 행복한 사회가 되겠지만
인정을 외면하는 정책을 펴나간다면 불행한 사회가 됩니다 독재 정
부는 사회 관리에 실패했습니다 소수 권력 계층과 졸부가 엄청난 부
를 형성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가난해진 것입니다 조세 정책도 불
공평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가 된 것이고 계층
간의 위화감이 중폭된 것입니다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들 부자들
고액 소득자들 대재벌들 이런 자들에게 걸맞게 고액의 세금을 부과
해야 했습니다 이 나라처럼 부자들에게 세금이 관대한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정부는 유리창처럼 환히 들여다보이는 샐러리맨들의 호주
머니나 노리는 유치한 조세 정책을 되플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기
야 조세 정책을 정하는 사람 자체가 기득 계층인데 자신들에게 불리
한 조세 정책을 필 까닭이 없겠지요 어느 사람은 볼멘 소리로 이렇
게 말합디다 군사 정부란 어느 나라든 사회정의 실현보다는 군사정
권의 유지 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정권 창출의
정통성을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강요하기 마련이다 집을 지켜야 할
충견이 되려 주인을 무는 것을 보고 가만있을 주인이 어디 있는가
주인의 자리를 빼앗은 개에게 돌을 던진다고 도리어 주인을 잡아 가
두고 고문하는 세상이 아닌가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가장
큰 종인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역대 대통령 중 종으로서
역할한 대통령이 과연 한 사람이라도 있었는가 그런 점에서 미국이
나 일본이라는 나라는 훌륭하다 미국은 워싱턴이 있었고 에이브러
햄 링컨이 있었고 루즈벨트가 있었고 케네디가 있었다 일본은 메
이지 유신을 통해서 근대화를 앞당긴 메이지 천황이 있었고 숱한 훌
륭한 정치가가 있었다 그래서 사회와 국가가 발전되었다 사리사욕
과는 무관한 깨끗한 정치를 핀 자유의 제왕들이 있었다 도덕적인 정
치가 청렴한 정치가 사리사욕이 없는 정치가가 있는 나라는 발전해
왔다 독일 영국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등등이 그렇다 자유 민
주주의는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실천인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어느 정도 찬성합니다 좀 격한 성향의 젊은이가 하는 말이기는 하지
만 귀담아 들을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 사회는 인정을 기대할 만한
아무런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은 빈자나 장애자나 고아나
노인들이 격는 불행을 덜어줄 노력보다는 차기 선거에 당선되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가치관이 상대적 가치관에
밀린 가치관 전도의 사회입니다 생명 존귀의 절대적 가치는 영원 불
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는 생명 존귀 사상이 없습니
다 그저 저만 잘났고 저만 잘 살갰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는 것입니
다 어디서든 부패의 악취가 진동합니다 아무도 이를 근치할 수 없
습니다 정부가 썩으니 국민도 썩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안썩었
내 나는 깨끗하네 하는 한 썩은 정신은 정화되지 못할 것입니다 금
수강산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이 산자수명한 금수강산도 얼마 가지
않아서 파괴되고 오염되고 죽어갈 겁니다 아니 며칠 전에는 이 계
곡까지 사람들이 몰려 와서 뱀을 잡아내고 개구리를 잡아내고 총으
로 새를 잡고 난을 캐고 그것도 모자라 담배 꽁초를 버려서 산에
불까지 내는 판국입니다 그뿐입니까 어민들은 저만 더 벌겠다고
양식장에 밀식을 하는 바람에 굴이 썩고 유묘가 사라지고 굴양식장
이 망하고 바다가 죽고 이런 국민이 우리 국민입니다 양보가 없습
니다 양심이 없습니다 정의가 없습니다 남해가 죽고 서해가 썩고
동해가 망가지고 그래도 모두 모른 척 할른지 원 자연존귀사
상 생명존귀사상 이 모두 절대적인 가치인데 군사 문화란 것
이 다 그런 것 아닙니까 돌대가리들이 모인 집단입니다 시위 학생
이나 잡아다 족치고 반정부 인사를 간첩으로 몰아 가두고 정작
해야 할 일은 외면하고 우리 국민들이 문제입니다 일제시대 때
부터 외압에 약했습니다 독재나 불의에 대한 저항 의식이 약했습니
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나라를 되찾은 것이 아니죠 미국 때문이었
습니다 미국은 어떻게 했습니까 친일 경찰을 이용하여 사회 치안
을 잡도록 했지요 친일 경찰들이 무슨 일을 했갰습니까 뻔한 것
아닙니까 자신들의 친일 행각을 아는 사람들 빨갱이로 몰아서 죽
이고 민족주의자를 잡아 족치고 친일파를 보호하고 이랬습니
다 민족의 배신자를 응징한다고 반민특위란 것을 만든 적이 있었지
요 그러나 그것도 여러 친일 세력의 방해 공작으로 흐지부지되고 말
지 않았습니까 그때 친일파를 정부 요직에서 몰아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화근이 된 것입니다 국민들을 정치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든 이유가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민족을 배신했던 사람이 버
젓이 권좌를 지키는 꼴을 보고 국민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하
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의해 일본이
물러가자 한반도에 돌아왔습니다 그가 한 일은 친일 세력을 키워주
고 민족의 지도자를 제거하고 폭정을 전개한 그런 일뿐이었습니다
그때 누가 독재자를 응징했습니까 오직 학생들이었습니다 정치가
가 아닙니다 다수의 국민이 아닙니다 젊은 학생들이었습니다 군사
정부는 4 9를 격하시켰지요 오히려 국가를 뒤엎은 어느 날을 더
성대하게 기념했지요 지금 이만큼 민주화된 것도 학생들의 힘이었씁
니다 수가 많은 국민 대중은 눈치만 보고 있었지요 이것이 우리 국
민입니다 피흘린 자가 따로 있고 거두는 자가 따로 있는 사회
그러나 일부 학생들의 주체 사상도 이해 못할 일이지요 어떤 학생
집단은 선 공산화 후 민주화를 주장한다고 하는데 북한이란 나라를
잘 몰라서 그런 겁니다 그들이 신봉하는 김일성을 보세요 거의 60
년 동안 일당 독재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온 세계의 역사를 살펴 보
아도 김일성처럼 오랫동안 절대 군주의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제
는 없었습니다 그가 신봉하는 주체 사상이라는 것도 광신자의 넋두
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국민은 사상 때문에 얼마나
죽고 다쳐야 합니까 우리 한반도는 천형의 땅입니다 북쪽에는 김일
성 일파의 광신적인 극좌 집단이 남쪽에는 부패한 집단이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죽어납니까 일반 국민들입니다 남북
지도자 모두 남북 통일을 정치적으로 교활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통일은 요원한 일입니다 차라리 통일보다는 헤어진 혈육의 왕래만이
라도 가능하도록 주선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마저 두 진영의 지도자
는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혜인 그는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산사에서 죽었다 사인은
폐결핵이었다 병든 육신을 돌보지 않고 병든 사회만 한탄하다가 요
절한 젊음
이강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망막에 어린 혜인의 송아지같이
맑은 눈빛을 지워내면서
잠시 걷자 자애원 일대가 보였다
유아원과 유치원국민학교 특수 중학교 특수 고둥학교 전문학교 등 종합교육 단지
와 장애자 재활교육원과 최신 의료장비를 갖춘 대단위 종합병원이 들
어서고 양로원 고아원 등의 복지시설 등도 함께 들어설 예정이다
대단위 종합건설 공사는 활발하게 진척되었다
어느날 나영미가 그를 불렀다
요즘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쁘지
나영미는 아직도 어색한 태도로 대하는 남동생에게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미라씨와 자애원이란 복지시설을 만들기로 했어요
복지시설
나영미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투로 말했다
네 복지시설요
무슨 복지시설인데
장애인들 고아들 보호자가 없는 노인들 그리고 교육 단지들이
들어설 복지시설을 말하죠
돈은
미라씨가 유산 전부를 재단에 기증하기로 했어요
나영미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미라가 물려 받은 유산 전부를 내놓는다
한참 동안 이강산을 뚫어지듯 응시하던 나영미는 독백하듯 말했다
그럼 너는
심부름만 해주는 셈이죠
심부름만
나영미는 이강산의 표정을 한동안 살폈다
그 사업 이야기 듣고 싶구나
나영미가 묻자 이강산은 비교적 소상하게 자애원 건설 계획을 설명
해 주었다 이강산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던 나영미가 무슨 결심이
선듯 물었다
돈은 더 필요하지 않갰어
모자라지만 규모를 적게 하면 되겠죠
나영미는 한동한 골똘히 생각했다 강철수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을 부패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돈이오 돈은
있는 것만큼 영혼의 자유를 속박하오 가진 자들의 사는 모습을 보시
오 음주 코카인 섹스 그리고 갖가지 유흥으로 일관하는 타락하고
방종한 삶을 얼마나 허망한 삶이오 그렇다고 가난해져야만 참된 삶
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니오 가난은 불행이오 인간을 가련하게 만
드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만큼 최소한의 경
제력은 있어야 하오 그러나 존엄을 유지할 최소한의 경제력의 범위
는 그의 삶이 얼마나 절제된 것이냐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오 욕심
이 적을수록 자유스러워지는 것이오 보시오 문민 정부가 들어선 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정 부패에 연관되어 직장과 명예를 잃고 수
감되어가는가 돈에 눈이 어두우면 미래가 없어요 그들은 자손 만
대에 죄인으로 기록이 될거요 얼마나 가련한 사람들이오
나영미는 결심했다 그렇다 조금만 남기고 모두 주어버리자 얼마
정도 남기고 주면 될까 십 억 불안하다 이십 억 이 정도면 너
무 많을까 나영미는 천천히 말했다
그럼 나도 투자할께 여자만 돈을 내고 남자가 심부름한데서
야 체면이 서겠어
아니 누님 정말이세요
나도 미라만큼 유산을 상속 받았어 좋은 일 같아서 주는 거다
많은 재산 어디에 다 쓰겠니 발가벗고 온 세상 수의 한 벌이면 족
하지 않겠니 네 명의로 통장 만들어라 입금시켜 줄테니
누님 감사합니다
이강산은 그때 뜨거운 무엇이 목구멍을 치받는 느낌을 받았다
자애원 건설에 필요한 300만 평의 임야 중 미라가 내놓은 7만 평
을 제하고 모자란 230만 평은 국유지를 사용해도 좋다는 관계 기관의
허가가 나와 있었다 건설 현장에는 이미 자애원에서 일할 기술자들
과 직원들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강산이 현장에 도착하자 미라는 건설 현장 사무실에서 설계 도면
에 코를 박고 건축 설계팀과 상의를 하고 있었다
아 마침 잘 오셨네요 건물의 외벽과 냉난방 시설을 어떻게 하느
냐는 문제로 의논을 하고 있었어요
이강산은 건설비가 많이 들어서라도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는 건
물을 짓고 싶었다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스한 그런 건믈
그러기 위해선 삼중 창문과 성능이 좋은 방열재를 사용해야 햇다 그
다음은 발전 시설이 문제였다 천장산 정상은 일년 내내 바람이 불었
다 풍력 발전소를 건설하는데 이보다 적지는 없었다 천장산 자락의
드넓은 급경사면은 정남향이어서 태양열 발전소를 건설하는 데도 최
적지라고 기술팀이 말해 주었다 자애원에 사용할 대부분의 에너지는
자체에서 발전된 전력을 사용하기로 하고 모든 건물은 처음부터 전력
을 이용한 냉난방 장치를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장애인이나 환자들
에게는 쾌적한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학생들에게 쾌적한 기온은
필수적이다 이런 그의 고집 때문에 당초 건설비보다 2 이상의 건
설비가 추가로 필요했다 그러나 이 비용은 해가 가면서 운영비에서
상쇄될 것이다
이강산은 이러한 그의 구상을 건설팀에게 말했고 미라도 찬성해주
었다
그는 병원 건축 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최신 의료장비를 갖춘 병
원 의료진도 오 박사의 노력으로 해결되었다 내국인 의사들은 이곳
과 같이 외진 곳으로 오길 꺼려했다 인술보다는 상술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는 상업주의에 물든 타락한 히포크라테스의 사생아들 그는
종합병원에 근무할 의사들을 초빙하기 위해서 얼마나 힘이 들었던가
다행히 몇몇 뜻있는 소수의 젊은 의사들이 자애원에 근무를 자원해
주었고 나머지 모자란 의사는 카톨릭 선교단체로부터 공급받는 외국
인 의사로 충당하기로 했다
병원 운영비는 매년 얼마나 들어갈까요
미라가 그런 질문을 했을 때 그는 오 박사가 계산해 냈던 엄청난
액수를 말해주었다 종합 병원에 들어갈 경비만 해도 30여 명의 의사
와 80여 명의 간호사와 의료기사 그리고 사무요원들에게 지블해야
할 22억의 인건비와 O여 억의 운영비 병원 예상 수입금 20억을 상
쇄하면 매년 2억 원이 소요될 것이다 학원 단지에 소요될 5억 장
애인 복지 시설 운영비 30억 원 고아원과 양로원 운영비 20억을 합
친다면 자애원에 필요한 경비는 매년 7여 억이란 천문학적인 액수였
다 정부 보조금 1억 원을 감안해도 순수 경비는 매년 60억 원이었
다
참 누나에게 고맙다고 대신 전해주세요
그러죠 건설 현장을 한바퀴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이강산은 750억이란 거금을 선뜻 내준 누나 나영미가 고마웠다 미
라가 내놓은 850억을 합치면 1600억이란 돈이 자애원 운영자금이
되는 샘이다 건설비 500억을 제하면 100억이 수익성 사업에 투자
되고 매년 대략 수십억 원의 이익이 발생할 것이다 매년 2억 정도
의 자금을 신탁에 재투자한다면 영구적으로 자애원은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단지에는 7백여 명의 고아 5백 명의 무의탁
노인 천여 명의 불우 장애인 2백 명의 학생 그리고 이들을 도와
줄 백여 명 직원들의 보금자리가 될 것이다
이강산은 누나로부터 황석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강철수에
대한 이야기도 누나로부터 들어 조금은 알고 있었다 강철수의 강렬
한 시선을 대하는 순간 이강산은 이유 모를 냉기를 느꼈다 결국 황
석호의 검은 돈은 이런 낙토를 건설하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아이러
니였다
이강산은 현장으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삼백만 평의 대지에
거미줄 같은 도로망 그리고 여기 저기에서 치솟는 건믈들 공사를
하는 인부들도 자애원을 건설하는데 신명이 나 있어서 공사기간은 예
정보다 앞당겨지고 있었다
그는 먼저 학교 건설 현장으로 가보았다 유아원과 유치원 건물은
이미 완공단계에 들어가 있었고 중학교도 거의 완공되고 있었다 중
고등학교와 전문 대학에 필요한 모든 교구도 이미 발주해 두었다 20
평의 교실에 2명을 수용하고 학생마다 컴퓨터를 지급한다고 하자 사
람들은 깜짝 놀랐다
정부 관리들도 자애원 학원 단지의 건설 계획을 보면서 눈들이 휘
둥그래졌다 그들의 경직된 사고로서는 자애원의 획기적인 건설 계획
이 과대망상증 환자의 무모한 행동으로 비쳤으리라 탓할 일만은 아
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받은 열악한 교육으로는 자애원의 시
설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교육부에서 나온 관리조차 이런 시설이 과연 필요하냐고 말했을
때 이강산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십 년만 지나면 자애원의 시설은
더 신기할 것이 못됨을 아직 모르는 사람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보건사회부에서 출장나온 관리는 초현대식의 양로원과 고아원 건물
을 보면서 이런 호화시설이 어렵게 살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냐
고 믈었다 이강산은 당신이 사는 집은 몇 평이며 당신과 불우한 사
람과 무슨 차이점이 있는가란 질문을 속으로만 하고 내색하지는 않았
다
잘사는 사람은 못사는 사람에게 인색하다 사랑이 메마른 불행한
민족 서로 불신하고 증호하고 시기하는 풍토 이러한 경향은 외세의
침탈로 형성된 슬픈 경향이 아닌가 900여 회 외세의 침략을 견딘 민
족 그러나 이러한 쓰리고 아픈 경험은 이기주의를 만들고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편협한 인간성을 만들었다 경쟁 일변도로 치닫던
교육도 책임이 크다 주입식 교육을 강요하면서 정신적 불구자를 양
산하는 교육의 현장 많은 양심적인 교사는 교육의 본질이 왜곡된
교육 현장에서 얼마나 개탄했는가 후세의 교육을 진정으로 걱정하기
보다는 교육을 생활의 수단으로 삼고 현실에 안주하는 교사는 결코
스승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자애학원 단지에 초빙된 교사들은 훌융한 사
람들이다 상당수의 교직원을 석박사 출신으로 초빙했을 때 그렇게
까지 고학력의 교사가 필요한지 고개를 내젓는 사람이 있었다 이강
산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지 않았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능가
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저질 교사는 수많은 어린 싹을 시들게 한다
저질 교사처럼 학생들에게 해악을 주는 것은 없다 이런 말을 하기
싫었다 학교 건물이 준공되어 교문을 열기 전에 미리 채용한 교직원
들을 해외로 보낸 것은 선진국 교사들이 학생을 어떻게 대하고 사랑
하고 있는가를 피부로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삼 년마다 일 년
씩 안식년을 교사들에게 주어서 신선한 기분으로 교직에 임할 수 있
도록 계획을 세워두었다
이강산은 병원 건축 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애원의 입구 근처
에 건설될 100여 병동의 최신식 종합병원 암센터와 핵자기공명장치
등 최첨단 의료장비가 설치된 자애병원엔 이들 장비 말고도 고액의
첨단 장비가 도입될 것이다 누구는 섬에 무슨 그런 병원이 필요하냐
고 할지 모르지만 사람은 대도시에 살든 농촌에 살든 질높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생명은 모두가 고귀한 것이다
이강산은 건축 현장에 있던 오 박사에게 다가갔다
오민세 박사 프린스턴 출신의 심장병 치료의 대가 이 오십대 중
반의 사내가 혼자 사는 것에 관해서 사람들은 구구한 억측을 했다
그러나 오 박사 자신은 이런 근거가 없고 중상에 가까운 억측들에 대
해서 초연했다 인간의 심리엔 자신보다 훌륭하거나 탁월한 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아울러 그런 사람을 질투하는 애증이 복합적으로 혼재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심리 구조 때문에 친구를 좋아하
면서도 짓밟고 싶은 심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오 박사와 같은 분을 병원장으로 초빙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
다 낙천주의자요 낚시광이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오 박사는 두
주블사로도 유명했다 가끔씩 인사불성이 되는 것만 빼면 그는 나무
랄데 없는 사람일 것이다 아마 과음을 하는 것은 그의 외로운 환경
탓이라고들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박사님 나오셨군요
오 박사의 동안에는 어린애 같은 웃음이 활짝 피어났다 오십이 넘
은 나이지만 그는 삼십대 후반의 건강과 젊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 이 선생 생각보다 병원 건물이 빨리 준공되겠어요 인부들이
여간 열심이 아니군요 저기 공사 감독을 하는 최필수씨는 건축이 끝
나면 병원 직원으로 채용하고 싶군요
박사님이 권해보시죠 병원에서 일할 사람은 박사님이 알아서 채
용하기로 했지 않습니까
허 허 정말 그일처럼 어려운 일은 없습디다 처음엔 모르고 그
러마고 했는데 사람을 채용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더군
요
의료진은 어느 정도 모였습니까
프린스턴에 있던 제자들과 카톨릭 의료 선교단에서 적극 도와주
어서 거의 채용한 셈입니다
간호사들은요
박 신부님의 주선으로 해결됐습니다
정 말로 수고가 많았습니다 좌우간 병원은 박사님에게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나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우진 말아주시오 허허허
밤에 낚시나 갈까요
그것 좋지요 아 참 헬기는 어쩔 겁니까
병원 준공 전까지 인도될 겁니다
오 박사가 가장 관심있는 분야는 응급센터였다 이곳과 같이 다도
해의 도서 지방에 위치한 병원은 응급 환자를 수송할 수 있는 헬기가
필요하다고 오 박사는 처음부터 역설했다 헬기를 운영함으로 발생할
적자가 연간 2억 정도가 발생할 것이지만 응급센터는 많은 인명을
구할 것이 틀림 없었다 섬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가끔 교통사고를
당해서 큰 병원으로 후송되는 도중에 사망하는 환자가 많았다
밤에 숙소로 가겠습니다 낚시 준비 해두세요
이강산이 말했다
오늘은 손대섬으로 가볼까요
좋습니다 박사님
오 박사와 헤어진 이강산은 자애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을 적당히 배치해서 자매 결연을 시키자는 미
라의 발상대로 건물이 가정과 같은 형태로 지어지고 있었다 처음에
는 아파트 형태로 지을까 생각했지만 화단도 가꾸고 토끼도 기르고
개도 키우는 그런 정서적인 분위기를 미라는 고집했었다
생각해 보세요 닭장같은 아파트에서 처량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외로운 얼굴들을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손녀와 손자들과 함께
지내도록 하면서 꽃도 가꾸고 토끼도 기르고 강아지와 뛰노는 그런
광경과 비교해 보라니깐요
미라는 그런 말을 했었다
집은 모두 24평 형의 단독 주택으로 건설되고 있었다 주택마다 6
명을 수용하도록 계획이 되었다 방 네란 아이들은 한 방에 두 명
씩 그리고 할아버지방과 할머니방 장애인들에게도 같은 넓이의 공
간을 배려했다
이강산은 경기도 어느 지역인가에 장애인을 위한 건믈을 지으려다
가 주민들이 들고 일어난 그런 보도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을 보면
서 이기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절실하게 느꼈다 그
들은 장애 시설이 마을에 들어서면 땅값이 내릴 것이라는 이유로 애
처로운 생명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었다
이 땅의 숱한 고아들 어떤 이는 외국으로 고아를 보낸다고 흥분하
면서 떠들어대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단 한 명의 고아를 입양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 이강산은 수현이 남매
를 떠올렸다 봉고차로 시골 장터를 돌며 행상을 하던 수현이 부모는
어느날 토사를 운반하던 8톤 트럭과 정면 충돌해서 현장에서 부부가
죽고 말았다 졸지에 발생한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수현이 남매는
결국 고아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웃이 많았지만 세 살과 다섯
살이던 수현이 남매를 키워주겠다고 나서는 이웃은 하나도 없었다
외국의 경우는 이런 경우 서로 입양시키기 위해서 쟁탈전이 벌어진
다는 소리를 들었다 외국이라고 생활 수준이 우리보다 월등히 높은
것은 아니다 외국인 중에는 우리 나라 근로자보다 수입이 훨씬 적은
데도 자선 단체에 돈을 내거나 고아를 입양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
에서도 고아를 입양한 가정에게 양육비를 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 정부에서도 그런 인도적인 발상을 하는 정치가나
관료가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이강산은 서글픔을 느꼈다
자애원을 한바퀴 돌면서 이강산은 존 폴 에잉거란 자선가를 생각했
다 67세의 독일계 미국인인 에잉거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외국
의 고아를 수십 명이나 도와주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이강산이 스무살 나던 해이니 십 년도 넘는 셈이다 이강
산이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이강산이 남달리 영어를 좋아한 까닭이었
다
어느날 고해 성사를 마치고 나자 신부님이 그를 불러서 서양인 노
신사를 소개했다
이군 이분은 에잉거씨라고 미국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에 살고 있
는 분일세 이번에 상계동 산동네에 사는 조영미 성도 집의 양친이
되었네 며칠 머물면서 조영미 성도의 가족과 함께 지낸다니 자네가
통역을 좀 맡아 해줘야겠어
이런 일을 계기로 이강산과 에잉거는 이 년마다 만나게 되었다
인디애나 포트웨인에 있는 화물수송 회사에서 근로자로 일하면서도
한국 태국 네팔 필리핀 스리랑카 인도에 있는 여섯 명의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장학금과 때로는 생활비까지 매달 송금해주는 이 노신
사의 삶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남모르게 수행하고 있는 자선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사랑의 실천이 아닌가 그는 이들 어려운 아이
들의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47년이란 세월을 휴일 근무까
지 자청했다고 한다 한국의 부자들이 외면하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
와주는 미국의 근로자 이강산은 에잉거와 교분을 나누면서 정말 많
은 것을 체험한 셈 이다 있는 자일수록 남을 도와주기 인색하다는 말
이 있는데 그것은 탐욕일까 아니면 우리 혈관 속에 용해되어 있는
냉혹함일까
이강산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조경희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조경희는 에잉거의 도움을 받고 간호 전문대를 마친 후
자애 복지원에 근무를 자청한 간호사였다
건믈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완공되면 더 멋지겠죠
어때 복지원에 근무할 사람들은
원장님이 거의 확보되었다고 하던데요
잘된 일이군 그럼 수고해요
안녕히 가세요
조경희를 뒤로 하고 이강산은 발길을 돌려 현장 사무실로 갔다
미라씨 오늘 저녁 약속 있어요
없는데요 왜요
오 박사님과 섬으로 밤낚시 가기로 했는데
어마 저도 가요 밤낚시는 한번도 못해봤어요
그럼 저녁에 갑시다 다포 마을에서 배를 타야 합니다
준비해야죠
그냥 가기만 하면 돼요 낚싯대는 내가 가져갈 테니
머리를 좀 쉬고 싶었다 이 몇 달 동안은 정신없이 흘러간 셈이다
이강산은 숙사로 향했다
갯바람이 싱그럽게 가슴에 안겼다
늦가을에 부는 바닷바람 이런 바람은 괜히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그래서 곁에 누가 있으면 한결 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미라 언
제부터인가 이강산은 거의 매순간 미라의 존재를 느꼈다 마치 육신
의 일부처럼 곁에 없으면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포 선창가 갈매기 몇 마리가 갯펄에 내려 앉아서 깃털을 다듬고
있었다 물이 빠져 나간 한적한 포구엔 잔물결만이 갯펄을 매만지고
있었다 한때는 대구 어장과 멸치 어장으로 풍성했던 이 갯마을은 무
슨 귀신의 조화인지 대구와 멸치때가 사라지고 나자 한적한 마을로
변해 버렸다 대구도 그 흔하던 멸치때도 어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나
자 사람들은 하나 둘 마을을 떠났다
이강산은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노을이 불타고 있었다 복숭아 빛
으로 시작되고 있는 저녁노을 벌개지는 구름들둥지를 찾는 갈매기의
비행 몇 마리 가마우지도 안경섬쪽으로 날아가는게 보였다
저녁놀이 너무 고와요
청바지차림을 한 미라의 몸매가 무척 육감적이라 느끼며 이강산은
명치끝을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라의 표정이 밝았다
주씨는 저녁노을 빛에 믈든 벌건 얼굴을 들어 헤벌쭉 웃음을 흘리며
일행들을 반겼다
어서 오시소 오 박사님
좀 있으면 오겠지요
손대섬으로 갈랍니까
오 박사님은 감성돔과 농어를 좋아하니 손대섬이 낫겠지요
손대섬 감성돔은 끝내준다 아입니꺼
선장 주씨는 어디서 한 잔 걸쳤는지 눈가가 블거져 있었다
미끼는 준비됐습니까
새우하고 홍합 참갯지렁이면 되겠지예
주 선장이 미끼가 들어 있는 얼음 상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상자를
열자 돌로 깨뜨려 파낸 참갯지렁이와 참홍합 그리고 새우가 산 채로
저장되어 있었다 이 지역에서 나는 참갯지렁이는 낚시 미끼로 최고
였다
오 박사가 오리 걸음으로 뛰어왔다 신바람이 나는지 대머리에서
몇 올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어이구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저희들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아 그놈의 낚시 바늘과 야광찌 통을 찾느라고 한참 헤맸네
오 박사는 씨근거리며 아이스박스를 뱃전에 내려 놓았다
저에게 다 있는데요
나는 낚시 도구는 남에게 빌리지 않습니다 미라씨도 낚시 해보았
어요
낮에는 한번씩 해 보았는데 밤낚시는 처음이에요
낚시는 밤낚시가 제격이지 낭만과 정취가 있어요
박사님은 언제부터 낚시를 하셨어요
미라가 물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즐겼으니 한 사십 년 되는 셈인가
낚시는 왜 하시죠
낚시질은 모든 도락의 진수지요 갯바람 파도 소리 구름 하늘
대양을 향하는 배 포구로 돌아오는 배 갈매기 우는 소리 바다의
냄새 이런 것들을 한번에 느끼면서 신선한 감동을 느끼고 인생을 생
각하고 미래를 설계하고 그리고 어신의 짜릿한 감촉을 즐기는 것이
낚시질이오
박사님도 꽤나 낭만적이세요
난 낭만이 좋아요 낭만적인 사람은 누구를 시기하거나 불신하지
않아요
오 박사는 뱃머리에 자리잡고 낚싯줄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배에 엔진이 걸렸다 배는 작은 포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녹슨
연통에서 동그란 고리를 만들며 빠져나간 푸른 연기는 한동안 바다
위에서 맴돌다 자취도 없이 공중으로 흩어져갔다
손대섬은 마치 고깔처럼 바다 한가운데 솟아 있었다 꿈꾸듯 명상
에 잠긴 듯 적요의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섬이란 것은 어느 섬이나
나그네를 유혹하지만 손대섬의 매혹적인 자태는 유별났다 짓푸른
동백이 자라고 바위 틈에는 석화수가 흘러내리고 동고비
가 둥지를 틀어 살고 벼랑 끝에는 원추리가 피어 있는 이 섬은 언
제나 나그내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뿐 아니다 손대섬에서 보는 저
녁노을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연분홍으로 시작된 노을빛은 점점 짙
어지 면서 볏빛으로 젖어들었다 날개 편 독수리 형상의 천장산의 어
깨를 짚고 있는 먹구름도 노을빛으로 발그레 물들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먹구름의 색은 흑장미 색으로 변했다 노을빛을
받아 자주색으로 물든 바다는 잔 주름으로 접혔다 펴지는 동작을 쉬
임없이 보여주었다 해면을 스쳐 지나온 바람은 상쾌하게 옷깃을 스
치며 지나갔다 가을의 바람 고독의 배달꾼
이강산은 갯바위에 앉아서 해면을 응시했다 침묵의 바다 고독의
바다 신비의 바다 그는 바다가 좋았다 그 신선함 그 경의로움
그 광대함이 좋은 것이다 육지의 윤곽은 아슴프레해졌다 몇 마리
갈매기가 깨애애 깨애액 울며 날아갔다 스토름의 노래가 생각났다
갈매기는 지금 해안 호수로 날아가고 저녁 어스름이 드리우며 개
울의 믈웅덩이에는 저녁 해가 비치고 있다 회색빛 새가 수면에 다
을 듯이 날아가고 바다를 흐르는 안개 속에 섬들이 둥둥 떠 있다
낚싯대 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 박사가 앉아 있는 곳으로 시
선을 주었다 이강산이 앉자 있는 곳에서 5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
에 낚싯대를 드리운 오 박사는 노을이 불타는 하늘을 줄곧 응시하고
있었다
바다빛이 너무 좋아요
한동안 해면을 내려다보던 미라가 방심한 어조로 말했다 여자의
어조는 바다가 좋다는 뜻이 담겨 있는지 아니면 이런 외진 분위기가
좋다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마 둘 다일지도 모른다고 이강
산은 생각했다 바람이 불어 서늘했다 이강산은 미라를 돌아보며 물
었다
춥지 않으세요
아뇨 견딜만 한데요
미라는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았었다 비누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여자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이 남자의 어깨에 닿을 만큼 가
까이 있었다
추워지면 말하세요
그는 여자가 춥다고 하면 그의 옷을 입혀줄 것이라는 말은 생략했
다
힘들지 않으세요 요즘
미라가 까만 눈동자로 사내의 파리한 면도자국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강산은 여자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매일 뛰 어다니느라고 말예요
아직 힘들 때는 아니죠
말수가 적은 여자가 자꾸 말을 시키는 것은 분위기 탓이리라 파도
가 치고 그리고 점점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하늘을 덮어가고이런 음
산한 분위기는 여자를 두렵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먹구름 사이로 도
깨비 눈같은 달이 잠깐 보이다 사라졌다 해면을 스치는 미풍에 잔물
결이 일었다
이런 기분 처음 느껴요
무슨 기분일까 무서운 기분 외로운 기분 아니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야릇한 기분
이강산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여자에게 물었다
두렵습니까
혼자라면 퍽 두려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강산씨와
함께 있으니 조금도 두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여자는 남자의 존재를 고맙게 생각한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지 모
른다
이런 장소는 별난 감정을 주지요 그러나 일시적인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장소란 늘 바뀌고 마음도 늘 한결같지 않지요
사귀는 여자 있으세요
몇 번 만나고 나면 여자들이 으레 묻는 상투적인 질문이다
없습니다
이강산은 대답하면서 정희의 건강한 웃음을 떠올렸다 카르멘의 정
열과 스칼렛의 격정과 캐서린의 사랑을 함께 갖고 있던 여인 미안
해요 전 당신과 맞지 않을 것 같아요 양부가 죽고 난 며칠 뒤 듣
게 된 그녀의 비수같은 말 3년의 관계를 청산하는 데는 단 분도 걸
리지 않았다
미라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전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어요 지금은 죽고 없지만
여자는 가끔 남자에게 필요없는 고백을 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를 한층 강조하려는 의식적 행동이 아닐까 여자로부터 남자가 있었
다는 고백을 듣는 것은 결코 상쾌한 일이 아니다 이강산은 해면에
시선을 깔았다
침묵을 지키는 사내
미라는 이강산의 의지적인 턱을 흘끔 보면서 황명수의 얼굴을 떠올
렸다 지나치게 이념에 집착하던 젊음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포효하
다 산화한 덧없는 죽음 그는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에 매달렸었다
그가 숭상하던 이데올로기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부르짖던
민중의 세상이란 정말 가능할 것인가 민중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나라에도 진정한 민중은 있는 것인가 누구를 민중이라 할 것인가
모두 거미줄처럼 인과관계로 얽혀 있는 작은 집단에 지나지 않는 나
라에 민중의 정의는 무엇인가 그러고 보면 민중처럽 모호한 집단도
없을 것이다 집단적 이기주의 기회주의 이런 부정적인 성향을 안
고 있는 민중의 실체
숱한 극단주의적 성향의 젊음이 죽어갈 때도 민중은 냉담했었다
소수의 대학생들과 근로자들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독재 정부에 항
거할 때도 수많은 민중은 이런 희생을 소 닭보듯 했었다 숱한 젊은
이들이 독재의 재단에 피를 뿌리며 산화해 갈 때 민중이 보여준 반응
은 무엇인가 일제시대 때 민중의 항쟁이란 무엇이었는가 극소수의
사람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고 그것을 전체 민중의 항쟁
이라 일컬을 수가 있는 것일까
황명수는 민중을 신뢰했고 짝사랑했었다 정작 그는 민중을 위한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지만 그의 죽음의 의미를 아는 민중은 과연 얼
마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는 미라의 귓가에 이강산의 부드러운 목소
리가 들려왔다
슬픈 기억은 오래가지요
전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의 죽음을 듣는 순간 난 차라리 잘된 일이다라고 생각
했어요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
던 모양이에요
괜한 소리 한 것 같군요
은쟁반 같은 달이 덩실 떠올랐다 달의 빛살이 얼음처럼 흘러내린
수면엔 수없이 많은 달조각이 생선 비늘처럼 파닥거렸다 바람은 차
가웠다 갯바위에 부딪치는 물결 소리 그리고 풀벌레 우는 소리 옹
잘거리는 새소리가 섬의 분위기를 호젓하게 만들었다
이 여자는 좋은 여자다 정녀와 같이 침착하고 유폐된 공주처럼 외
로워 보인다 천박스럽지 않고 고상한 척하지 않아서 좋다 고집이
있어 보이는 오똑한 콧날만 아니면 무척 부드러운 인상이다 바람은
쉬임없이 불어왔다 향긋한 내음이 바람에 실려 왔다 상쾌한 바람과
여인의 향기 늦가을 바람은 여러 가지를 연상하게 한다 이유모를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여인에 대한 그리움을 실어다
준다
전 비로소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은 것 같아요 전 자애원에 내 모
든 것을 바치고 싶어요 이제 더 이상 자학할 필요도 없고 사람들에
게 무언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축복받고 있다는 기분이에
요
미라가 너무 자신만만한 투로 말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이강산은 말
없이 미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미라와 같은 환경은 자칫 잘못하면
궤도를 잃고 이상한 방향으로 타락하기 십상이다 재벌 2세들의 탈선
과 얼빠진 행위에 식상했던 그에게 미라의 인생관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지난 몇 달 동안 남자도 감당하기 힘든 여러 가지 일
들을 해왔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애원 전체의 건축 설계도면과
씨름하는가 하면 엄청난 물량의 건축자재 구입과 조경에 사용할 수
목의 종류에까지 일일이 관심을 기울였다
누님이 왜 최 신부님을 원장으로 추천했는지 이유를 아세요
미라가 물었다
잘 생각한 일 같아요 미라씨가 나를 책임자로 했을 경우 남보기
가 좋지 않지요 그리고 이런 규모의 복지시설을 경영해 나가려면 최
신부님 같이 경험이 많은 분이 필요할 것이라 누님은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저도 잘된 일이라 생각해요
나는 자애원이 잘 운영된다면 언제든지 손을 뗄 각오를 하고 있습
니다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강산씨는 언젠가는 자애원을
직접 경영해야 해요 오히려 손을 뗄 사람은 저예요
나는 한 군데 정착할 그런 사람이 못됩니다
자애원을 시작하자고 말을 꺼낸 사람이 누구죠
자애원에서 일하겠다고 했지 자애원을 맡아서 하겠다는 말은 아
니였조
혹시 힘들어서 싫증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런 사람으로 보입니까
그만 두죠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을 누가 알까 두려워요
마음 상했어요
솔직히 그래요
마음 상하게 할 뜻은 없었어요
진력이 나는 대화란 생각이 들었다 자애원 같은 복지시설을 꿈꾸
어 왔던 것은 어쩌면 허망된 도전인지 모른다 길거리에 버려진 행려
병자들 자식들로부터 소외당하는 노인들 이웃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장애인들을 수었이 대하면서 마음 속에 자라던 알 수 었는 분노 그
것은 어쩌면 신에 대한 분노였는지 모른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불합
리한 숙명을 안겨주는 신에 대한 모반같은 감정이었다
이강산은 검은 해면에 시선을 주었다 절버 덕거리는 잔물결 소리가
쉬임없이 갯바위를 씻어내렸다 갯내음이 한움큼 바람에 떠밀려왔다
멀리 건너편 바위에 앉아 있는 오 박사의 모습은 한마리 외로운 새였
다 오 박사의 낚싯대 끝에 매달린 야광찌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
다 얼마나 흘렀을까 오 박사가 이강산을 보았다
이 선생 자리를 옮겨야겠어요 반대쪽에 가볼까 합니다
오 박사는 자리를 떴다
손대섬의 밤은 깊어만 갔다
모두 외로운 사람들의 만남이었다 고아가 된 미라나 혈육이라고는
일점도 없는 오 박사나 모두 쓸쓸한 존재였다 해면을 내려다보던 이
강산은 긴장했다 야광찌가 조금 몸을 추석이는 것 같았다 다음 순
간 야광찌는 스르르 바닷물 속으로 잠적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머머
미라가 부르짖듯 외첫다
낚싯대를 힘껏 당겨올려요
이강산은 외치며 미라에게 낚싯대를 잡게 했다 미라는 낚싯대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힘껏 당기기 시작했다 낚싯대가 우웅 울부짖었
다 낚시대는 절반 이상이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간 상태였다 이강산
은 자신도 모르게 미라의 허리를 안았다 물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아
서였다
너무 힘들어요
미라가 헐떡이며 말했다
힘껏 당겨요
부르짖듯 말하며 이강산은 미라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 안았
다 낚싯대가 조금 위로 들려졌다
낚싯대를 위로 세우세요 힘껏
미라는 낚싯대를 위로 세우려고 애썼다 활처럼 휘어진 낚싯대는
수없이 물 속으로 자맥질했다 고기는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낚싯대를 더 들어 올려요
그러며 이강산은 미라를 안아 세웠다 그리고 낚싯대를 뒤로 젖히
도록 했다 그러다 이강산은 흠칫 했다 얼결에 미라의 가슴을 잡게
되었다 미라도 깜짝 놀랐는지 이강산을 돌아보았다 이강산은 멋적
게 웃었다 미라도 푹 웃고 말았다
그때였다 수면에서 철버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강산은 손전등
을 수면에 비추었다 얼음처럼 빛나는 투명한 믈체가 보였다 은빛
찬란한 광채가 수면에 어른거렸다 보긴 드물게 큰 감상돔이었다
낚싯대를 그대로 세워야 합니다 뜰채로 건져야 하니까 힘들어도
버텨야 되요
알았어요 놓치면 안되는데
낚싯대만 힘껏 세우면 돼요
이강산은 뜰채를 들고 서들러 내려갔다 수면에 뜬 감성돔은 어렵
사리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신이 난 미라는 손뼉까지 치며 어린애처
럼 좋아했다 자로 재어보니 50나 되었다 이강산은 갯바위 틈에
있는 물웅덩이에 녀석을 던져 넣었다 한동안 미라는 낚은 고기를 살
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강산은 다시 참갯지렁이를 낚시 바늘에 꿰어 멀리 던져넣고 낚싯
대를 받침대에 고정시켰다
낚시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것 같아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놓
칠까 겁도 났구요 저 정도면 큰 편인가요
그렇고 말고요 대단히 큰 놈입니다
대답하며 이강산은 손바닥에 남아 있는 가슴의 감촉을 떠올렸다
작고 탄탄한 가슴의 감촉 그것이 손끝에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이강산의 옆에 앉은 미라는 한동안 말없이 해면을 응시했다 이강
산은 파도가 밀려 갯바위에 올라온 야광층의 반짝임을 내려다 보았
다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절 어떤 여자로 보세요
미라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여자라 생각하고 있어요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두 외롭죠
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미라가 물었다
숙명입니다 혼자 태어나고 혼자 죽는 겁니다 가족이나 친구는
외로움을 조금 덜어주기는 하죠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고 봅니다
산맥을 타고 열 몇 달을 홀로 지내는 동안 어떤 생각을 했었죠
늘 홀로 지낸 것은 아니죠 가끔 작은 산사에서 스님과 만나기도
한 셈이니까
라고 생각하던 시절 나는 산사의 토방으로 흘러 들어오는 풍경 소리
를 들으며 존재의 의미를 생각했죠 허망했습니다 나의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바람같이 구름같이 풀같이 새같이 지
구를 스치는 작은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혜인 스님과 죽음과 절망이란 화제로 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그
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죽음이란 유기체에서
무기체로의 전화이다 인간은 항상 죽음의 주변을 배회하면서 자기
의 종말을 목격한다 그러나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인 동시에 매력이다 석존은 생로병사를
자각하고 죽음을 무시하는 해탈에 의해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는 길을 찾았다 석존의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는 오히려 초연히 죽
음에 임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려고 하였다 쇼펜하우어의 영
향을 받은 몇 학자는 자살을 삶의 최상의 방법이라며 실천에 옮긴 사
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험결과를 남겨 놓지 못했다 해탈에
의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느냐 아니면 죽음을 실천하느냐는 개인
의 의지에 달렸다 결국 인간은 죽음 속에서 존재의 출발점을 찾게
된다 죽음은 우리가 도달할 종착역이 아니다 우리가 실존으로서의
자기를 자각하는 적극적 계기로 의미를 갖게 된다 혜인 스님은
다시 키에르 케고르의 말을 들려 주더군요 절망이란 인간이 참된
자기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신 앞에 나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절망에 대한 무지도 절망이지만 절망 가운데 있는 것도 절망이다
우리는 절망을 자각함으로써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 이것이 신앙이
다 절망이란 신을 거부하는 것 즉 죄이며 이 죄는 죽음에 이르는
불치의 병이다 신 앞에 자기를 버리는 것이 신앙이며 신앙 가운데
있을 때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없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실존은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과 자각을 가지며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행동의 결
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짊어진다 그 까닭은 자주적 결단에 의한
행동을 감행하기 때문이며 언제나 진정한 자기를 선택에 의해서 만들
어 나아가기 때문이다 실존은 자각 자유 선택 책임의 주체인 것
이다 키에르 케고르의 역설변증법에 의하면 실존에는 향락 속에서
자기를 찾는 미적 실존 양심에 의해서 자기를 지키는 윤리적 실존
신앙에 의해서 본래적 자기를 찾으려는 종교적 실존 등이 있다 그러
니 실존의 가치는 개인마다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혜인은 또
한 니체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계는 허무하므로 허무한 세계를
허무한 그대로 받아들여 이런 것이 인생이더냐 좋다 그러면 다시
한번 이렇게 외치며 생을 긍정하고 살아가는 운명애의 태
도 이것을 장래의 초인이 지녀야 할 태도라고 말했습니다 뒷날 나
는 스님을 남겨두고 산사를 떠났습니다 숱한 산봉과 계곡을 오르내
리며 풍찬노숙에 뼈속까지 시린 고독을 맛보았습니다 내가 발견한
사상이란 별 것 아니었습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존재를 부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삶이요 사랑이요
이웃을 도와주는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니체처럼 신의 존재를 부정하
는 사람은 지나치게 관념적이라는 것과 이런 관념은 인간의 허무주의
나 절망이나 고통과는 무관한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수암으
로 다시 되돌아오게 되었죠 이제 나는 비로소 존재할 이유를 찾았다
는 생각이 듭니다
이강산은 말을 끝내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고등어 배의 집어등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혜인의 맑은 눈빛이 망막을 서성였다 미라
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행이에요 난 아직도 산다는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두렵고
늘 불안해요
미라는 카세트에 테이프를 넣었다 잠시 후 솔베지송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미라의 표정은 쓸쓸하고 외로워보였다 몇 올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이강산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보름달은 중천에 걸려 있었다 바
람은 서늘하고 부드러웠다 절버덕거리는 파도 소리에 쉬억 듣는 솔
베지송에 가슴이 저렸다 가끔 구름 속에 숨었던 달이 빠져 나왔는
데 그럴 때마다 밝은 빛살을 사방에 뿌렸다 곡은 쇼팽의 이별곡으
로 바뀌었다
한동안 음악에 취해 있던 이강산은 자기도 모르게 미라의 어깨를
안았다 새처럼 앙징맞고 아담한 어깨였다 미라는 어깨를 파르르 떨
었다 미라가 이강산을 돌아보았다 입술이 석류알처럼 빨갛게 익어
있었다
말할 것이 있어요
미라가 머뭇거렸다
무슨
강산씨를 좋아하나 봐요
난 미라씨를 사랑하는데
그말 진심이세요
진심 입니다
아 전 정말 행복해요
미라는 이강산의 품으로 무너져왔다 이강산은 미라를 힘껏 포옹했
다
파도 소리는 두 사람의 거친 숨결을 삼켰다
밖에는 실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가에 앉아서 무심한 얼굴로 비오는 거리를 내려다 보던 강철수는
이런 빗속을 언제 걸었던가 생각해 보았다 기억은 그림자처럼 희미
하였다 마치 안개의 저편에 있는 실루엣 같았다 여자들 친구들
귓가에 쟁쟁한 웃음들 유쾌한 이야기들 그들은 과연 존재했던가
잊어버린 기억의 편린들 망각의 늡에 침잠한 시간들 꺼내 볼
기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항상 쫓기는 기분이었다 사람과 차
들 짐을 실은 자전거들이 바쁘게 왕래하는 거리는 활력이 넘쳐 흘렀
다 강철수는 불안했다 무서운 악몽의 연속이었다 가슴이 옥죄어
들었다
강철수는 석간을 집어 들었다 어떤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월남전
참전에 관한 외교 비사를 스크랩한 것이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의 처지가 수렁에 빠져 있을 때
한국측은 주미 대사를 통해서 개 사단의 병력을 파병할 용의가 있음
을올전달했다 휴전이 성립된 후 만 년 후인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
령은 브릭스 대사에게 한국은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아시아에서 살아
남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군 3개 사단을 인도차이나 반도에 파병
할 용의가 있다 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미국은 한국의 이러한
제안을 유보시켰다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은
61년 케네디에게 인도차이나 반도에 한국군을 파병할 용의가 있다
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러한 제의는 63년도에도 있었고 64년에는 김
현철 전 내각 수반이 개인 자격으로 파병제의를 반복했다
1964년 한국의 여론들은 입을 모아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자유 진영이 월남을 지원해야 한다는 호소를 했고 미 정부는 이러한
분위기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한국이 왜 이런 굴욕적인 파병 제의를 먼저 했는가 중요한 이유는
한국은 미국의 재정적 지원과 한국에 대한 방위 공약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인도차이나 반도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끈
질긴 제의를 하는 저의에는 한때 용공분자로 조사를 받았던 박정희의
전력에 대한 콤플렉스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열렬한 반공주의자를 자
처함으로서 과거의 의심스런 전력을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65년 1월 국회의 승인이 있고 나서 파병이 시작되었고 이후 월남
전이 끝날 때까지 수십만 명의 병사가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베
트남 참전은 그후 비동맹회의를 비롯한 국제 사회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외교적으로 고립화를 초래한 실패작이었다 특히 전쟁에 참
가했던 참전용사들에 대한 사후 관리에 소홀함으로써 많은 참전용사
의 고통은 해가 갈수록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을 통해서 이 문
제 특히 고엽제 후유증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켰어도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관심있게 검토하고 있는 눈치는 보이지 않는다
강철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먼저 군대를 보내겠다고 제의했으니 고엽제 후유증 환자에 대한 치
료를 미국측에게 떠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정부는 이런 내용을 번히
알면서 일부러 모른 체 하고 있는 것이다 전사는 다치거나 병들면
잘 치료해 주어야 된다 그래야 용감하게 전투에 임한다 고엽제의
후유증이나 전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가 사병들이다
장교는 드물다 장교에 비해서 사병의 전상자가 턱없이 많은 이유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강철수는 신문을 내려 놓았다 답답하고 울적했다 비라도 맞으며
거리를 걷고 싶었다 외출복으로 갈아 입고 프런트로 내려갔다
퇴근시간이었다 거리는 인파로 혼잡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의 표
정은 밝았다 레코드 가게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오고 있었
다 강철수는 레인코트 깃을 세우고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답답한
것은 풀리지 않았다
김태수는 빈틈을 주지 않았다 신형철은 당분간 기다리라고 했다
나영미의 말대로 잠시 외국 여행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태수
는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구실로도 접근할 수가 없었
다 몇번 변장을 하고 집 부근을 살폈지만 경호원들의 삼엄한 경계
에 걸려 번번히 돌아와야 했다 빈대떡 굽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
다 대학 시절 형철과 단골로 다니던 시장통 주막이 불현듯 생각났
다 빈 택시가 보였다
술집은 기적같이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강철수는 주렴을 헤치
며 술청으로 들어섰다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예전의 주모는 보이지
않고 주근깨 투성이 여인이 강철수를 웃는 낯으로 맞았다
뭐 드리까예 우리 집은 녹두 부침이 전문입니더
여인은 총알 쏘듯 말했다
강철수는 소주와 녹두 부침을 시켰다
손님 우리집 처음이지 예
여자의 묻는 말에 강철수는 처음이라고 대답하며 주위를 살폈다
모두 그만그만한 또래의 젊은 남녀가 코를 맞대고 있었다 주모가 술
과 안주를 날라왔다 술청 벽마다 즉흥시와 낙서가 즐비한 것도 예나
다름 없었다 젊은이들이 가끔 그를 살폈다 백열등이 형광등으로 바
뀌었고 낡고 때가 찌든 나무 탁자가 스테인리스판으로 변한 정도가
달라졌다면 달라진 것일까
강철수는 소주잔을 스스로 채웠다 단숨에 잔을 비웠다 알찐한 느
낌이 식도를 거쳐 위로 흘러내렸다 창자가 후끈 달았다 강철수는
다시 잔을 채웠다
녀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술만 들어가면 시도 때도 없이 시를
을조리던 한만수와 신형철
희망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 영혼 속에 머믈면서 언어 없는 가
락을 노래하며 결코 중지하는 일이 없다 거센 바람 속에서 더욱 아
름답게 들린다 이 작은 새를 괴롭히는 일로 해서 폭풍우도 괴로움
을 느낄 것이니 새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녹여 주었기에 꽁꽁 얼듯
이 추운 나라와 멀리 떨어진 바다 기슭에서 그 노래를 들었다 하지
만 괴로움 속에서 있으나 한 번이라도 빵조각을 구하는 일은 하지 않
았다
이쯤 되면 신형철이 다음을 이었다
가끔 바닷가에 위치한 아름다운 마을을 생각하노니 가끔 그 그리
운 길거리가 내 추억 속을 오락가락하게 되고 그때 내 청춘은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랩인의 옛 노래 가사 한 대목이 언제나 내 기억에
서 사라지지 않노니 소년의 마음은 바람처럼 자유롭지만 접은이는
언제나 한 가지만 생각하노라
형철이 녀석은 일어버린 청춘이란 롱펠로의 이 9행 연의 장시를
막힘없이 암송했었다
술병은 비어갔지만 취기는 오르지 않았다 강철수는 셀리의 귀절을
떠올렸다
멀리 지나간 옛날은 먼저 간 친구의 망령과도 같다 지나간 옛날
은 영원히 사라진 가락이요 이제는 영원히 자취 감춘 희망이며 너
무 감미로워 길이 계속될 수 없었던 사랑이라 멀리 지나간 옛날 밤
에 꾸는 꿈은 언제나 달콤하였다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말라고 바라
던 그림자를 날마다 내게 주었던 것은 슬픔이었는가 기뿜이었던가
멀리 지나간 옛날이여 멀리 지나간 옛날을 생각하면 뉘우침에 가까
운 애석한 정이 솟는다 그것은 아버지가 지켜보는 죽은 자식의 시체
와도 같아서 멀리 지나간 옛날로부터 던져지는 회상이 어느 새 아름
다운 존재로 바뀌어간다
강철수는 쓸쓸했다 키츠로 이어가던 만수도 뀌세나 고티에로 되
받던 형철도 없는 것이다 다만 곽자하게 떠들고 마시는 원숭이들 뿐
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들은 다 어디 갔는가 이 무슨 앙화
며 업보인가 모두 순탄치 못한 유년의 가시밭길을 함께 걸어온 고향
친구들이 아니었는가 한 녀석은 베트남애서 흙이 되었고 한 여석은
시드니에서 시들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으려니 한 청년이 자주 그의 얼굴을 흠쳐
보는 듯했다 그 청년은 취해 보였다 청년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강철수에게 다가왔다 그는 느닷없이 강철수의 멱살을 움켜
잡으며 외첫다
당신 형사지
강철수는 앉은 자리에서 침착하게 말했다
사람 잘못 본 모양이군
거짓말
봉변이었다 잘못되면 연행된다 연행되면 곤란해진다
강철수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 손 풀고 이야기하자구
강철수는 역겨웠지 만 참았다 그는 멱살을 잡고 있는 청년의 희고
부드러운 손을 움켜잡았다 경우에 따라선 비틀어버릴 생각을 하고
함께 앉아 있던 두 여학생이 우르르 달려와 청년의 팔에 매달렸다
도식씨 웬 행패야 아니라잖어
아냐 맞아 형사가 맞다구
청년은 비틀거렸다 강철수는 청년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침착
하개 말했다
내가 형사로 보이나
틀림 없어 우릴 염탐하려는 거야
청년은 쓰러질 것 같았다 눈동자는 풀려 있었다 청년이 탁자 위
에 얼굴을 묻는 것이 보였다
죄송해요 이 사람 너무 취했어요 저희들이 대신 사과할께요
키가 크고 세련되어 보이는 여자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안하다는 뜻으로 저희가 한잔 사도 되겠어요
키가 큰 쪽이 제안을 했다
내가 형사가 아님을 믿어 준다면
강철수의 말이 끝나자 두 여자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여자는 고
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말을 믿기루 하겠어요 우리가 한잔 사도 되는 거죠
좋아요
대답하면서 강철수는 탁자에 엎드려 있는 청년쪽을 흘끗 보았다
청년은 코를 골고 있었다 강철수는 여자들이 앉아 있던 자리로 갔
다 보조개가 고운 여자가 강철수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김현주라고 합니다 여기는 이정애구요 모두 휴학생이죠
기분이 다소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무얼하시는 분이세요
강철수는 눈썹을 모았다 사생활을 묻는 질문은 언제나 기분을 상
하게 만들었다
인간 쓰레기 청소부라 할까
호호 아저씨 이상한 말 하시네요
현주라는 여자가 웃었다 정애라는 여자는 까만 시선으로 강철수를
응시했다 강철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 휴학한
운동권 학생 잡혀가고 얻어맞고 훈방되거나 아니면 구속되고 가끔
씩 화염병이나 돌을 던지며 이 시대의 모순에 분노하고 기성 세대에
절망하고
이런 몸부림은 이 사회의 독소를 태
우기 위해선 필요한 소독 과정인지 모른다 이런 소독 과정도 없다면
이 나라의 오염은 무엇으로 멸굳할 것인가 정화 작업인 셈이다 이
들의 몸부림 때문에 나라는 궤도를 찾는 셈이다 그러나 너무 소모적
이고 비생산적 이다 너무 희생이 큰 것이다 이런 투쟁으로는 약간의
변화가 가능하겠지만 근본적인 흐름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변화란
흐르는 강물처럼 상류에서부터 자정 작용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법이
다
여기 처음이세요
이십 육 년 만에 들린 셈이지 학교 다닐 때 단골집이었어
어머 그렇게 나이 드셨어요 아저씨 낭만적인 분 같아요
낭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야
자 제 잔 한잔 받으세요 괜찮죠
강철수는 잔을 받고 단숨에 비웠다
아저씨 여기 김도식씨 이해해 주세요 거물 아버지 때문에 고민이
많은가 봐요
정애라는 여자가 빈잔을 채우고 나서 말했다 강철수는 말없이 잔
을 비웠다
도식씨 아버지가 이번에 요직에서 물러났거든요 혹시 김태수란
분 아세요
술기운이 단번에 달아났다 강철수의 표정이 괴이했는지 정애가 다
시 물었다
아는 분이세요
김태수라면
있잖아요 12 12 때 유명했잖아요
그럼 김 장군 말인가
그래요 그분이 도식씨 아버지예요 웃기는 이야기죠 아버지는
은퇴했지만 아직은 막강한 세력가 아들은 쫓기는 신세
강철수는 청년의 창백한 얼굴에 흘끗 시선을 주었다 김태수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준수한 얼굴이었다
탈영했어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개처럼 헤매고 있죠
여자들의 말에 의하면 운동권에 속해 있던 김도식 청년은 함께 입
대한 친구가 목을 매고 자살을 하자 탈영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매일 숨어 다니며 술만 마신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우울해
졌다
강철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아해 하는 두 여자의 눈길을 모른
체 하며 강철수는 술집을 나섰다 실비는 폭우로 변해 있었다
말없이 전송문을 읽던 강철수는 눈을 감았다
칼 자객들 이슬람의 저주들 머리 속을 달리는 기차의 굉음 신
형철의 처절한 비명 도살자들의 잔인한 보복
강철수는 눈을 떠 전송문을 거듭 읽었다 테혜란에서 아르슬란이
보낸 것으로 무척 서툴고 어색한 영어 문장이었지만 강철수는 암호
문을 해독하듯 꼼꼼히 단어를 재배열한 뒤 뜻을 새겼다
신형철씨는 어젯밤 알라무트 호텔에서 아부 아자르가 보낸 자
객 이브라임에게 당했습니다 경찰은 사망 시간을 어제 자정으로 추
정하고 있씁니다.
얘리한 칼에 찔려 있었고 잘린 목은 책상 위에 얹혀져 있었습니다 파
라의 시체는 참혹해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신형철씨의 모든 유산은 고인의 뜻에 따라 시아파의 지도자인 압둘
자하드씨에게 기증되었습니다
신형철씨는 어제 오후 이 편지를 부치라고 당부했습니다
나는 알라무트 호텔 베란다에서 테헤란의 아름다운 석양을 응시하
며 편지를 쓴다 언젠가 나는 나의 충실한 조수요 잔인한 암살자인
아르슬란과 함께 앨브르즈 산맥의 바위 꼭대기에 있는 이스마일리파
의 유적을 찾은 일이 있었다 하산 빈 사바의 족적을 더듬어 보지 않
겠냐는 아르슬란의 엉뚱한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르슬란의 여동생 파라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답지 않게 무척 젊고 예뻤다 나는 알라무트 호텔로
그녀를 정중히 초대하여 일주일을 함께 보냈다 나를 배신하고 이브
라임을 따라 잠적한 루이스 따위는 이제 안중에도 없다 내가 시드니
를 떠나 테헤란으로 간 이유는 루이스를 꼬여낸 이브라임의 심장을
도려내기 위해서였다
파라는 6명의 이스라엘 부호와 5명의 프랑스 정치인 그리고 여
명의 미국인 그리고 3명의 수니파 회교도의 암살을 뒤에서 조종하거
나 직접 가담했었다고 언젠가 나에게 털어놓았다 이 귀여운 매살리
나는 암살할 남자와 동침한 후 오빠 아르슬란을 시켜 살해한 다음
남자의 음경을 잘라서 방부제가 들어 있는 표본병에 넣어 벽장에 보
관하는 기벽이 있다 그리고 그녀는 잠들기 전 실오라기 하나 걸치
지 않고 벽장에 숨겨 둔 사내들의 음경 앞에서 배꼽 춤을 춘다 그녀
는 이런 의식을 모로코 출신인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샤머니
즘적 위령제라고 설명했다
그녀의 수집줌 중에는 몇 년 전에 티그리스 강변에서 살해된 시아
파의 지도자 무하드의 것도 있어서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스마
일리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압둘 자이안을 암살한 대가로무하드의 그
유명한 물건은 파라의 벽장에서 밤마다 나체춤을 감상하게 된 셈이
다 파라는 말의 그것을 연상하게 하는 무하드의 거대한 성기 앞에서
발가벗고 배꼽 춤을 추면서 정 말이지 무하드는 굉장한 사내였어요
나는 그와 같은 남자는 앞으로 결코 만날 수 없을 거예요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파라의 이런 불가해하고 극단적인 애증의 반응에서
폭력적 수단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과격 집단의 심리적 갈
등을 유추해낸다 그것은 파괴적 허무주의에서 출발한 절망적 몸부림
일 뿐이지만 나는 이런 이율배반적인 파라의 태도에서 알라의 오묘
한 진리를 접한다 그녀가 희생자들의 성기 앞에서 두 손을 머리 위
로 올려 배꼽춤을 출 때면 나는 이 장엄한 무대의 유일한 관객이 되
어 그녀의 커다란 엉덩이와 매끈한 허리의 곡선 그녀의 파동하는 배
와 가슴의 격렬한 율동에 전율한다 그녀의 매혹적인 몸매를 표현할
적당한 말을 나는 찾지 못한다
나는 밤마다 아라비아의 황제가 되어 위대한 예언자요 신의 아들
인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받거나 알라의 복음을 전파하던 성전의 역
사를 파라로부터 배운다 그리고 마호메트가 죽은 뒤 야지드 일파에
게 무참하게 암살당한 마호메트의 딸 파티마와 그의 남편 알리 그리
고 그들의 장남 하산과 차남 후세인의 참혹한 죽음에 대해서 듣는다
파라는 영원한 배신자 아부 바르크와 그의 추종자들의 이름을 들먹이
며 세 번 침을 뱉는다 배신자들인 수니파에 대한 영원한 저주의 표
시요 알리 부부에 대한 충성의 맹약이다 나는 파라로부터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의 끈질긴 투쟁의 역사를 배우고 그 웅장한 피의 족적
과 우마이아 왕조의 계승자인 수니파에 대한 무서운 저주를 들으며
감동한다 세상에는 종파가 많다 그러나 나는 코란을 믿기로 했다
나는 코란의 가르침을 따라 매일 기도 시간에 맞추어 마호메트와 그
의 진정한 후계자 알리 부부를 경배한다 나는 파라에 의해서 세상
을 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눈 없이 세상을 보아 왔었
다 세계 원리는 불합리하다라는 말은 이스마일리의 모임에서 철저
하게 배운다 마호메트의 정통적 계숭자요 알리의 후손인 시아파는
빈궁에 허덕이고 배신자들의 집단인 수니파는 부와 권력을 누리는
것이다 천삼백 년간 지속된 두 계파간의 투쟁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
다 나는 이들의 투쟁을 보면서 인간은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존재라
는 말을 부정한다 인간은 결코 선해질 수 없는 존재다 스스로 선하
다고 믿는 인간은 위선자일 뿐이다
사흘 전에 나는 파라에게 마이크로 다이너마이트를 몇 개 나누어
주었다 어제 유태계 미국 정보원 두 명이 인터내셔널 호텔에서 이스
라엘 여자 군인들과 혼음을 즐기다가 소입자로 분해되는 사건이 터졌
다 파라의 솜씨는 완벽했다 그녀는 감상주의자를 부패한 수니파에
못지 않게 혐오한다 나는 이런 그녀의 단호함을 존경한다 그녀는
잔인한 테러리스트지만 나에게는 귀여운 장미다 나는 그녀를 무척
사랑힌다
어제까지 파라는 여섯번의 암살 청부를 나에게 주선함으로써 나를
기쁘게 한다 어제 파라의 소개로만난 칼리프는 무척 부유했고 적
에 대한 증호 못지 않게 무지하게 큰 손을 갖고 있어서 무척 후한 대
우를 약속했다 정의에 근거한 테러는 정당한 것이라는 파라의 주장
에 나는 전적으로 긍정한다 나는 행복하다 새로운 진리에 접했고
새로운 전선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회가 생기면 나는 미국으로 건너가 해밀턴 녀석의 불알을 잘라낼
것이다 녀석은 우리를 철저하게 기만했고 배신했다 그리고 루이스
를 꼬여낸 이브라임도 코란의 가르침과 파라의 충고에 따라 루이스가
보는 앞에서 산채로 음경을 도려낼 것이다 루이스와 이브라임은 코
란의 계을을 범했고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나는 파라의 그 유명한 배꼽춤을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다 자
네는 모든 미의 극치 모든 환상의 본질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해치울 아부 아자르는 무기 밀매로 거부가 된 뒤 수
니파의 과격 단체를 뒤에서 지원하고 있는 자로서 무척 위형한 인물
이다
추신 전에 내가 보낸 명단에 누락된 인믈들이 몇 있어 적어 보낸
다 알라의 이름으로 이들 모두를 처리하기 바란다
강철수는 수십 명의 신상 명세서를 읽어 내려가다가 밀줄을 그어
놓은 어느 이름을 보고 흠칫 놀랐다 신형철은 이자에 대해 이렇게
주석을 달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개인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 복수 행위에 집착한
결과 송사리들만 제거해 왔다 그러나 나는 알라의 은총으로 이제
눈을 떴고 세상을 넓고 깊고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알라의 뜻을 충실히 추종하는 악마가 되기로 스스로 다짐했다
이자가 살아 숨쉬는 한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은 없다 나는
혐오 이상의 감정으로 이자를 경멸한다 모든 악행의 근거 모든 사
술의 원천 죄악으로 충만한 자기 확신 이런 자는 응징을 해야 정의
가 바로 잡힌다
강철수는 뽀얏게 김이 서린 창밖을 응시했다
밤이 되었지만 별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블빛은 너무 흐렸다
섬과 섬 그리고 이들을 싸안은 암청색 겨울 바다와 고독
나는 알라의 영광을 위해 돼지들을 죽일 뿐이다 이런 돼지들
이 많다는 것과 이들 모두를 내 손으로 응징할 수 있는 기뿜에 감사
한다
코란은 무슨 주술을 걸어 신형철을 테헤란으로 불렀는가
이브라임 루이스 신형철 아브 아자르 파라의 춤 간교한 악마
의 눈망울들 그리고 사마의 제단에 헌납된 신형철의 잘린 목 잘린
파라의 유방
강철수는 주먹을 불끈 줘었다 회색 전선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에도 존재했다 인간이 존재하고 무엇이든 배우고 알아서 영악해질
수록 투쟁은 더욱 격렬해지는 것이다
어때요 맑은 공기가
핸들을 꺾으며 나영미가 믈어 왔을 때 강철수는 시선을 들었다
국도를 벗어난 차는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신형철의 죽음을 곱
씹어 생각하느라 방심 상태였던 모양이었다 울창한 숲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풍에 몸을 흔드는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비처럼 내 렸다
바람의 내음은 신선했지만 무척 쓸쓸했다 혼자 세상에 버려진 느낌
이었다 파라의 배꼽춤을 감상하다가 무참히 살해된 칼리프 그가 추
구하던 삶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앞으로는 홀로서야 한다 녀석의
죽음을 생각하지 말자 철저히 잊어버리자 그러나 녀석의 빚을 갚아
주자 우정을 위해서 결빙된 의식은 조금 풀렸다
미행자들을 따돌리느라고 무척 애를 썼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불안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체포에 대한 두려움은 언
제나 의식을 짓눌렀다 차창을 스치고 지나치는 풍경은 정지한 시간
속에 응결되어 있는 그림같앗다 자애원을 향해 난 진입르로 들어서
자 나영미가 말했다
남동생이 미라와 결혼하겠다는군요
뭐라구
잘 놀라지 않는 강철수도 이 말에는 놀랐다
황석호의 딸과 나영미의 남동생인 이강산이 결혼을 한다 이
것은 또 무슨 해괴한 인연인가
나도 어머니도 깜짝 놀라서 말렸지만 말을 듣지 않네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도솔 스님은 뭐 어떠냐고 하시지만
강철수는 이것도 업보란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미라를 내가 잘 아니까 반대만 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래
도 어색한 것은 사실이에요
강철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윤회하고 회귀한다는 말이
생각나서였다 강철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목화 송이를 찢어 흩
뿌린 듯한 구름이 짙푸른 하늘을 여기저기 가리고 있었다
삶이란 묘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이강산과 황미라 나영미와
황미라 강철수의 마음 속에서 차가운 웃음이 만들어졌다
나영미가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사나흘 전에 웬 낮선 사내들이 집 주위를 서성였어요
얼굴들 기억나오
세 사람인데 모두 험상궂게 생겼더군요
김태수 일당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강철수는 나영미가 건네준 테
이프를 관계 기관에 우송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무섭고 불안해요
나와 함께 있는 한 걱정할 것 없소 집에는 당분간 가지 않는 게
좋겠소 어머니 병문안도 동생을 대신 시키시오
자애원 진입로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길섶에는 코스모스가 흐드러
지게 피어 있었다 차가 정문으로 들어서자 자애원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숲과 암석과 잔디로 꾸며진 녹원 하얀 벽에 붉은 지붕을
머리에 인 집들은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 재단 사무실 앞에는 여러
사람이 나와서 나영미 일행을 맞았다 나영미는 미소를 지은 얼굴로
미라와 이강산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고생 많았겠구나
고생은요 다 누님 덕택이죠
나 때문은 아니지
나영미는 죽은 황석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다 완성된 거야
일부만 제외하면 거의 완공된 셈이죠
저건 뭐지
나영미는 천장산 자락에 세워진 거대한 철 구조물을 손가락으로 가
리켰다
풍력 발전 시설이죠 저기 평평한 시설믈 보이죠 저것은 태양열
발전소구요 이 두 곳에서 10만W 정도 발전되고 있어요 남는 전
력은 이웃 마을로 송전하고 있습니다
그럼 전력 걱정은 없겠네
그럼요 모두 국내 기술진들에 의해서 완성된 겹니다 여길 다녀
판 외국인들도 깜짝 놀라더군요 그건 그렇구 개원식이 시작되려면
시간 여유가 있으니 한번 둘러 볼까요
그러자 나도 한번 보고 싶었어
나영미는 이강산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때 강철수는 미라
를 홀끗 보았다 미라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밤에 한 번
만났고 강철수가 콧수염을 달고 검은색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었으니
알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자 강철수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학교 건물에 도착했다 교감이 그들을 이사장실로 안내했다 이강
산이 나서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학교는 다른 학교와는 다릅니다 100년 앞을 내다보고 시설
한 셈이죠 그리고 교육 방법이나 교수 진용이나 학생들에 대한 복지
시설 모두 획기적입니다 단지에는 유아원 유치원 초 중 고 전문
학교가 들어서 있고 장차는 대학교를 설립할 계획 입니다 각급 학교
마다 20명씩 10개 학급으로 구성됩니다 완성되면 20학급 400명의
학생이 수용될 계획입니다 20평의 교실에는 2명의 학생이 공부하도
록 되어 있고 학생 테이블마다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모든
시청각 기자재는 교실 단위로 독립되어 있고 영사기 환등기
컴퓨터 영상기 프로젝션 등이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단지의 모든 건물에는 여름에는 냉각수 순환 방법으로 냉방이 되
도록 했는데 한 여름이라도 22도를 넘지 않습니다 겨울의 난방은
태양열 발전으로 25도 이상을 유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처음 설치
비는 많이 들지만 해가 갈수록 관리비가 적게 들기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 입니다 저희들이 가장 고심한 것은 훌융한 선생님들을 초빙하
는 문제였습니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결코 능가할 수 없다 이
것은 철칙 입니다 교사에 대한 대우는 파격적입니다 본봉에 해당하
는 연구비를 별도로 지급하고 30평의 단독 주택이나 4평의 아파트
를 제공했습니다 우리 학원 선생님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3년 근무
를 마치면 년 동안 안식년을 주는 것이죠 세 번째 안식년은 2년을
줍니다 그리고 4 번째 안식년은 삼년을 주고요 물론 안식년에도
보수는 동등하게 지급됩니다 해외 연수를 희망하는 분은 연수비도
보조해 줄 작정입니다 그리고 방학 기간도 선진국형입니다 여름 방
학 12주 겨울 방학은 3주를 실시합니다 그리고 주 5일 수업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쉬도록 교과를 편성하고 있습니다 수업 시간이
많아야 학력이 오른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지요 시간보다는 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학생이 공
부를 잘할 수 있도록 여건을 주면 되는 겁니다
학원 단지의 선생님들은 모두 몇 명입니까
도솔 스님이 학원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김인철씨에게 물었다
선생님들이 40여 분 기타 사무직원이 20여 분 자원 봉사자가 4O
여 분 모두 100여 명이 되는 셈이죠
그분들의 숙소는요
나영미의 질문에 김 국장은 손가락으로 바닷가를 가리켰다 바닷가
부근의 넓은 벌판엔 아파트와 수백 채로 이루어진 전원 주택 단지가
보였다
단독 주택이 4백 세대 아파트가 40세대죠 자원봉사자 가운데
출퇴근이 불가능한 사람은 단지 내에 거주하게 됩니다
학원에 소속된 교직원들에게 지급할 인건비만도 상당액수가 될텐
데
나영미가 묻자 김 국장이 대답했다
교직원 인건비는 정부에서 반은 보조해주겠다는 약속이 있었습니
다 학원에 소속된 60여 명의 교직원에 대한 인건비가 대략 연간 22
억 정도인데 이 중 정부 보조금이 약 O억 원 정도이니 재단에서 지
불해야 할 인건비는 대략 12억 원 정도 되는 셈입니다
자원 봉사자들에게 대한 대우는 어떻습니까
자원봉사자들에게는 약 2억 정도의 경비가 소요될 겁니다
그러고 있을 때 최요한 원장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오십대 초반의
깡마른 체구의 최 신부는 일행을 반기며 말문을 열었다
아이구 어서들 오십시오 나 여사님 도솔 스님 참 잘 오셨습니
다 함께 오신 분은
최 신부는 강철수에게 웃는 낮을 향했다
아 이분도 이 학원 단지 건설에 관심을 쏟아온 분입니다
나영미가 가볍게 응수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이구 몰라 봤습니다 좌우간 이렇게 좋은 시설이 되도록 여러
분께서 도와주신 것 감사합니다 만세에 빛날 큰 일을 하였습니다
이런 종합 복지시설은 이 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선진국에서도 보기
힘들 겁니다 이제 보호자가 없는 행려 병자나 고아나 노인들 그리
고 정신박약아나 정신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가난 때문에 만성
질병에 시달리는 하나님의 많은 생명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게 되
었습니다 마침 잘된 것은 정부에서도 이 자애원의 복지 사업에 소요
되는 운영비 중 20 정도를 보조해 주겠다고 하고 선교단체나 기타
자선 단체에서도 지원하기로 했으니 문제는 쉽게 풀린 셈이죠
자애원에 소요될 총 예산은 얼마나 될까요
나영미가 최 신부에게 물었다
인건비가 연간 대략 45억 운영비가 병원 정신 신경 계통의 장애
자 재활 교육원 고아원 양로원 기타 장애자 복지원 등 모두 6억
원 정도인데 정부 보조금이 대략 억 원 사회단체 보조금이 O억
정도이니 재단 부담금은 매년 85억 정도입니다
어 때 이 실장 매년 85억 가능할까
나영미가 재단 기획실장 직함을 맡고 있는 이강산에게 믈었다
건설비 500 억 지블하고 나서 950억 정도를 수익성 사업에 투자하
고 있습니다 매년 수익성 사업에서 대략 백 억 정도가 나올테고 미
라씨 회사에서 대략 1O억 정도 재단 지원금으로 전입될 예정이기 때
문에 매년 25억 정도를 적립할 수 있습니다 적립금은 대학 건설 자
금으로 쓰일 예정입니다 교육사업 분야는 앞으로 상당 부분 자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운영비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자애원의 식구는 모두 몇 명이나 될까요
나영미가 다시 최 원장에게 물었다
현재 200명 정도이고 3 4년 후면 2 400명 정도가 될 겁니다
그중 학생이 400명이고 수용자만 2000 명인 셈이죠
참 강 변호사님 그 서류 좀 건네주세요
나영미의 말에 황석호의 전속 변호사였던 강민호 변호사가 서류를
꺼냈다
자 이 서류 받아주세요 저에겐 자식이 없습니다 자애원에 기부
한 돈 외에 저에게 50억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도 약간의
돈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만일 어떤 사고라도 생기면 모
든 재산은 자애원 앞으로 귀속되도록 하는 유언장입니다 이 서류를
공증하겠습니다 여기에 최 신부님 사인 좀 해주세요
허허 축의금 치고는 굉장하군요 이제 자애원은 영원히 그야말로
복지기관이 되는 셈입니다 나는 가끔 사회복지 사업을 한다며 불쌍
한 사람들을 이용하는 소수의 악덕 사회사업가들을 보면서 식상했는
데 이번에 이 자애원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질 겁니다 정말 아무도
선뜻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셈입니다
누가 그랬죠 발가벗고 온 세상 수의 한 벌 관 하나면 족한 것
아니냐고요
나영미는 시계를 흘끗 내려다 보면서 말을 이었다
제 동생 대신에 최 신부님을 원장으로 모신 것은 미라와 동생의
간청이 있었기 때문이고 도솔 스님을 부원장으로 한 것도 여러 가지
생각이 있어서입니 다 신부님 것으로 생각하시고 잘 운영해 주십시
오 신부님이 부탁한 수녀원도 내달에 착공할 예정이라 듣고 있습니
다
미소 뛴 나영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최 신부가 이강산과 도솔
스님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여부 있습니까 더욱 규모가 큰 복지원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카톨릭 재단과 기독교 복지 재단 그리고 불교 종단 모
두 이 사업을 지원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더욱 많이 수용할 수 있을 겁니다
최 신부의 말이 끝나자 부드러운 표정으로 최 신부의 얼굴을 응시
하던 도솔 스님이 응수했다
저도 힘닿는 데까지 원장님을 도와서 자애원이 더욱 규모가 확대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일은 종교나 종파를 초월하는 법이죠
강철수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별세계에 온 느낌을 받았다 참
으로 오묘한 윤회의 법리였다 자애원 재단의 모든 자금은 황석호의
죽음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 아닌가 엄청난 자금의 근원은 트라이앵
글에서 시작된 것이다 안남산맥에서 시작된 죄업의 결과가 이런 형
태로 나타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트라이앵글 작전이 죽음과 죄악의
사업이라면 이 자애원은 삶과 사랑의 사업이 아닌가 트라이앵글에서
죽어간 숱한 목숨들 이러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나 잘된 일이다
강철수는 자애원의 사업 현황을 들으며 이강산이란 젊은이의 배포
가 부러웠다 죽음과 복수와 증호로 일관된 자신의 삶이 부끄러웠다
젊은 시절 전장에 투입되면서부터 그가 배운 것은 죽이지 않으면 자
신이 죽는다는 맹수와 같은 본능이었다
강철수는 잔디밭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들러보았다 병든 개처럼
쫓겨 다니던 행려 병자들 고아들 버림받은 노인들 장애인들 환자
들 모두가 잔디밭에 앉아 즐겁게 웃고 있었다
개원식 행사는 따로 없었다 준비한 음식과 선물 보따리를 나누어
주고 모인 사람들이 무대로 올라가서 재담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이강산다운 발상이었다
동생이지만 저 녀석 엉뚱해요
나영미는 흐뭇한 눈초리로 이강산을 바라보았다
좋은 동생을 두었소
나영미로부터 자애원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기는 했어도 이 정도
의 규모인 줄은 상상 못했다 인색한 기업가들이나 사이비 사업가들
이 벌리는 그런 형식적인 복지사업과는 성질이 달랐다
강철수는 모처럼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것은 밀물처럼 밀어닥첫다 그것은 온몸을 태우다가 잔물결이 되
어 멀어져 가기를 거듭했다 강철수의 강인한 동작은 계속되었다 나
영미는 두 발을 들어올려 강철수의 허리를 휘감았다 강철수는 천천
히 몸을 움직여 나갔다 강철수가 가까이 다가을 때마다 나영미의 망
막에는 블꽃이 너울거렸다 구심점에서 지펴진 뜨거운 불꽃은 원심력
에 의하여 점차 번지기 시작했다 나영미는 자신도 모르게 둔부를 들
어 올렸다 불꽃은 온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나영미는 어느새 새가
되어 창공으로 날아 올랐다 천상은 어둡고 별은 빛났다 나영미는
아이헨도르프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밤은 고요한 바다와 같다 기뿜과 슬픔과 사랑의 고뇌가 얼기설기
뒤엉켜 느릿느릿하게 물결을 몰아치고 있다
나영미는 타는 갈중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꼈고 짓눌렸던 속박에서
플려나기 시작했다 나영미는 구름이 되어 바람과 더불어 날았고 안
개가 되어 믈위를 스겼다 나영미는 들과 강과 바다를 내려다보며 아
이헨도르프의 노래를 이어나갔다
온갖 희망은 구름과 같이 고요한 하늘을 흘러 가는데 그것이
회상인지 또는 꿈인지 여린 바람 속에서 그 누가 알랴
나영미는 환희에 찬 오열을 마음껏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모든 삶의 진수 모든 가치의 극단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여인의 행복 실현된 여인의 환상 자랑스러운 여인의 존재
모든 기뿜의 원천 나영미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강철수는
더욱 부드럽게 여인에게 다가왔고 그럴 때마다 행복의 파장은 깊어
만 갔다 나영미는 강철수의 둔부를 끌어 당겼다 강철수는 더욱 가
까이 그리고 더욱 깊이 다가왔다 여자의 내부 깊고 깊은 심연에서
연소하던 불꽃같은 감각은 더욱 강렬하게 작열하기 시작했다 나영미
는 연기가 되었고 재를 남겼다 나영미는 별빛 찬란한 천상을 날면
서 아이헨도르푸의 마지막 귀절을 이어나갔다
별들을 향하여 하소연하고 싶다 가슴과 입을 막아버려도 마음 속
에는 여전히 회미하게 잔잔한 믈결 소리가 남아 있다
강철수의 동작이 더욱 격렬해지자 나영미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런 완전한 충족 이런 찬란한 환희를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나영
미는 마구 몸을 흔들며 소리 질렀다 마침내 나영미는 빛살의 가루로
분해되면서 소입자가 되었다 다음 순간 나영미는 걷잡을 수 없는 용
암의 분출을 경험했다 용암은 뜨겁게 흘러 강을 이루고 들을 덮첫
다 나영미는 용화되어 존재하지 않았다
나영미는 죽은 듯이 한참 동안 누워 있었다 믈결은 한켜 한켜 물
러가기 시작했다 나른한 피로가 기분좋게 찾아 왔다 나영미는 마지
막 여열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누워 있었다 이윽고 나영미는 눈을
떴다 강철수는 업드린 자세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영미는 생각
에 잠겨 있는 강철수의 옆 얼굴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속삭이듯 말했
다
뭘 생각하세요
강철수는 말이 없었다 오벨리스크처럼 과묵한 사내 나영미는 더
욱 사내가 좋아졌다
행복해요
나영미는 사내의 그곳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며 속삭엿다
당신은 멋진 여자요
강철수는 나영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여인의 머리칼은 땀
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병원에 가보아야겠어요
내일 가면 되지 않소
어머니가 서운해할 거예요
내가 함께 가겠소
안돼요 아직은 고향 친척들도 많이 와 있어요
혹시나 해서 하는 소리요 만약 김태수 일당이 우리를 노린다면
당신부터 납치하려 들거요 그러니 내일 가도록 해요
병원에 가본 지가 너무 오래 됐어요 별일 있을라구요
나영미는 욕실로 갔다
나영미가 호텔을 나설 때에도 강철수는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
며 만류했다
청계천을 지나 남대문으로 접어들자 차량이 밀리기 시작했다
나영미는 상젤리가를 떠올렸다 긴자의 화려한 네온도 보고 싶었
다
나영미는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면 어떻게 해서든 강철수와 여행을 하자
남자는 여행을 해야 스스로 쌓은 증호의 성채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될
지 모른다 불안하다 이런 생활은
한동안 꼼짝 못하던 차량의 행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영
미는 액셀러레이터를 가볍게 밟으며 강철수의 늠름한 나신을 떠올렸
다 그래 그 사람은 영락없는 마사이 전사다 드넓은 사바나 초원을
달리며 금단의 성역을 더럽힌 침입자를 살육하던 잔인한 마사이족의
최고의 족장 나영미는 자신의 몸을 가득 채우던 강철수의 강인한 육
체를 떠올리며 뜨거운 피가 용출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오랜 방
황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원 앞에 차를 세우고 몇 걸음 걷던 나영미는 깜짝 놀랐다 어두
운 덤플이 흔들렸던 것이다 다음 순간 가죽 잠바 두 사람이 그녀를
향해 질주해 오는 것이 보였다 나영미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차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곧이어 억센 사내의 팔에 안기우고 말
았다 사내는 나영미의 목에 비수를 드리대고 소리지르면 죽는다며
위협했다 곧이어 나영미의 코가 수건으로 덮씌워졌다 에테르 냄새
가 송곳처럼 코를 찔렀다 나영미는 사내의 팔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첫지만 잠시 후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시커먼 하수구에서 쥐들이 몰려 나오기 시작했다 나영미는 그 자
리에 얼어붙어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잠시 후 나영미의 주위에는 엄
청나게 많은 쥐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쥐들은 나영미를 향하여 달
려들기 시작했다 나영미는 공포에 질려 숨이 막혀왔다 달아나려 했
지만 오금이 저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영미는 울부
짖었다 곧이어 커다란 쥐가 나영미의 발목을 물어 뜯었고 다른 놈
은 나영미의 허벅 다리를 찢어 발기기 시작했다
쥐들은 나영미의 온몸을 물어뜯었고 나영미는 외마디 비명을 내질
렀다
나영미는 자기가 지른 비명에 놀라 눈을 떴다 햇빛이 눈에 부셨
다 나영미는 움직여 보려 했다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발가벗
겨진 채 사지는 큰 대자로 결박되어 있었다 갯내음과 양파 썩는 냄
새가 코를 쥐어 박았다 시궁창 냄새도 났다 몹시 추웠고 두통이 심
했다 나영미는 흠칫 놀랐다 체격이 우람한 두 사내가 나영미를 정
면에서 응시하다가 나영미가 의식을 되차리는 것을 보자 음산하게
웃었다 두 사내는 다리를 벌리고 있는 나영미의 그곳을 한동안 빤히
내려다 보다가 마주 보며 눈을 찡긋했다 고릴라 같이 생긴 사내는
총을 이노키같이 생긴 사내는 채직을 들고 있었다
소문대로 굉장하군 우 저 젖통 좀 봐 그리고 저 엉덩짝도
고릴라가 휘파람 소리를 냈다
형님 살결 한번 보슈 씻어놓은 배추 같구려
수치를 견디지 못하고 나영미는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바람을 가는 소리가 대기를 갈랐다 나영미의 엉덩이가
불에 데인 듯 아파왔다 놀란 나영미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견
디기 어려운 통증이었다 나영미는 오돌오돌 떨기 시작했다 공포 때
문에 숨이 막혔다
눈을 감지마 감으면 다시 이것이 이렇게 춤출 것이다
채찍은 다시 허벅지를 파고 들었다 나영미는 비명을 참을 수 없었
다 엉덩이쪽과 허벅지를 살펴보았다 붉은 피가 하얀 피부를 타고
흘러 내렸다
강철수 어디 있나
고릴라 같이 생겨먹은 사내가 물었다
나영미는 아래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강철수 어딨나
사내는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은 나영미의 허리에 깊은 홈을
만들었다 나영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영미는 공포와 분
노로 몸을 떨었다
이년이 아직도 정신을 덜 차렸군
채찍이 바람을 갈랐다 유방이 떨어져 나가는 듯 아팠다 숨이 막
혀왔다 이번에는 비명조차 내지를 수 없었다 한참 지나야 잃어버렸
던 호흡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다음 순간 권총을 들고 있던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누군 줄 알아 귀신이라도 우리 손에 걸리면 다 불게 되어
있어 정 말하지 않겠다면 내가 재미를 실컷 보게 해주지
고릴라같이 생긴 사내가 권총을 허리춤에 찌르고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사내는 음흉하게 웃으며 엄청나게 커다란 음경을 밖으로 집
어 내어 나영미에게 흔들어 보였다 나영미는 눈을 감았다
다시 채찍이 나영미의 종아리를 뱀처럼 휘감았다 나영미는 악 소
리를 지르며 눈을 떴다 자신을 덮치려는 사내와 사내의 커다란 성기
를 놀란 시선으로 보았다 사내는 억센 손길로 나영미의 유방을 움켜
쥐었다 그리고 무릎을꿇고 앉았다 사내가 마악 배 위로 무너져 내
리는 순간 나영미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애원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 마 말을 하겠어요
거짓말할 생각은 아예 말어 어디야 그놈이 있는 곳이
이것들을 풀어 주어야 말하겠어요
나영미는 손발에 묶인 끈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건 안돼 건방지게 굴지 말고 어서 말해 시간이 없다구
고릴라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제발 풀어주세요 말하겠어요 계속 이러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
겠어요
나영미는 세차게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정 그렇다면 원하는대로 해주지
고릴라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영미의 엉덩이와 유방을 만지기
시작했다
나영미는 사내의 손길을 느끼는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사내
는 나영미의 은밀한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나영미
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황홀한 눈초리
로 사내의 성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당신은 훌룽해요 당신을 애무하고 싶어요
고릴라는 나영미의 때아닌 반응에 아연한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성기와 여자의 홀린 듯한 눈초리를 차례로 내려다 보
았다 사내는 흡족한 듯 벌쭉 웃었다 나영미는 사내의 종마처럼 발
기한 거대한 성기를 타는 눈초리로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제발 끈을 풀어 주세요 당신을 애무하고 싶어요 당신같은 남자
처음이에요 당신과 그걸 하고 싶어요
사내는 잠깐 이노키를 돌아 보았다 이노키는 두 어깨를 추석이며
두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시키는대로 다 할거지
네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할께요 답답해서 죽겠어요 빨리 죽여
주세요
좋아 트릿하면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을 거야
고릴라는 나영미의 사지를 자유롭게 한 뒤 한손으로 나영미의 머
리칼을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나영미는 흠칫 놀랐다 바로 코 앞에
흉칙한 성기가 우람하게 솟아 있었다 고릴라는 권총을 나영미의 귀
에 들이밀며 나직하게 말했다
자 이걸 삼켜 내가 그만 할 때까지
좋아요 허지만 다른 사람이 옆에 있으면 부끄럽잖아요
나영미는 교태를 꾸몃다
쳇 주제에 더럽게 까다롭게 구는군
고릴라는 이노키에게 눈짓했다 이노키는 두 어깨를 추스렸다
형 님 적당히 한 후 제게도 넘겨주슈
이러며 이노키는 방을 나갔다
나영미는 눈을 감고 남자의 음경을 두손으로 살며시 잡았다 그리
고는 입술로 귀두 부분을 할아 나갔다 사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영미는 철저하게 배우가 되기로 했다 목숨을 건 일생 일대의 최
고의 연기를 보여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영미는 사내의 귀두 끝
을 조금 삼켰다 사내는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사내가 머리칼을 더
욱 세게 움켜 쥐는 바람에 아팠지만 나영미는 참았다 나영미는 사
내의 음경을 손으로 탐스러운듯 만지며
당신은 굉장하군요
하고 말했다
사내는 웃으며
나를 알게 되면 미치게 되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나영미의 혀는 사내의 혈관이 불거진 음경
의 피부를 할아 나갔다 사내는 몸을 뒤틀며 눈을 감았다 나영미는
불랙호스의 대형 화면을 떠올렸다 어떤 흑인의 거대한 성기를 한 입
가득히 머금고 있는 백인 여성의 모습을 상기했다 나영미는 사내의
귀두 전체를 입 속 깊숙이 삼키며 두 손으로 고환 부분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나갔다 정액 냄새와 오줌이 절은 냄새가 코를 쥐어박아 구
토가 나올 것만 같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최후의 순간 한가지 방법
을 알아 두면 궁지를 벗어날 수 있을 거다 고등학교 시절 성폭행
방지법을 자상하게 일러주던 생믈 선생의 말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
다
여자의 정조를 유린하려 드는 사람은 목숨까지 노린다 혼자
외진 곳에 가지 말라 노출이 심한 복장을 삼가하라 외진 곳에서 남
자와 단둘이 있지 말아라 블량배들은 데이트족을 노린다 밤길을 걷
는데 누가 따라 오거든 사람이 많은 곳을 향하여 힘껏 뛰어라 가급
적 이면 호루라기를 블면서 키스를 하려 들거나 어디에 눕혀졌을
때는 응해주는 체하며 상대의 귀와 눈언저리를 어루만지다가 엄지로
상대의 눈을 블시에 깊이 찔러 버려라 상대방에 앞에서 포옹할 때는
안겨 주어라 그 다음 무릎으로 상대의 음낭을 힘껏 차올려라
부모가 없을 때 낮 모를 사람이 찾아와 가스나 수도를 검침한다고
할 때는 결코 집안에 들여 놓지 말아라 렴스틱모양의 가스 분사기를
가능하면 호주머니에 넣고 다녀라 결정적인 순간 칙 뿌려라 치
한이 뒤에서 달려들어 갑자기 목을 조르면 당황하지 말고 기회를 보
다가 팔꿈치로 상대의 명치를 사정 없이 올려쳐라 이렇게 땅에 눕
혀졌을 때는 흙이나 모래를 집어 상대방의 눈에 뿌리거나 문질러라
상대는 무엇을 하려 했는지 잊어버린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 항
상 몸가짐에 조심하라 모르는 사람이 차를 세우면 무조건 사양하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걸려온 만나자는 전화는 정중히 거절하라 이도
저도 안되면 최후의 방법을 사용하라
여자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방법 중에서 나영미는 최후의 방법을
실행하려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목숨을 걸고 말이다
사내의 귀두는 한껏 팽창되어 나영미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마치
커다란 고구마를 한입 가득 넣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영미는 혀로 귀
두를 간지르면서 나무토막처럼 경화된 사내의 음경을 두 손으로 만
져 나갔다 사내를 완벽하게 속이려면 사내에게 반한 것처럼 철저하
게 가장해야 하는 것이다 나영미는 손가락 끝으로 사내의 음낭을 부
드럽게 만져나갔다 사내는 신음을 길게 흘리며 자기도 모르게 몸을
전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영미는 입 속에 들어 있는 사내의 성기
를 부드럽게 혹은 강하게 흡인했다 사내는 더욱 세찬 동작을 했다
나영미는 사내를 올려다 보았다 사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은
이르다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사내는 권총을 겨누고 있다
더 기다려야 한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영미는 사내의 고환을 집게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으로 젖소의 젖꼭지처럼 잡은 채 부드럽게 애
무해나갔다 사내의 신음은 더욱 커져갔다 나영미는 사내의 권총을
잡은 손을 몰래 곁눈질했다 총구는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나영미는
스펀지같이 부드러운 귀두를 입술로 강하게 조여주었다 사내는 황소
같이 소리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나영미는 귀두 전체와 음경을 입
속에 가득히 넣고 힘껏 흡인했다 입안에 고이는 분비믈 때문에 나영
미는 욕지기를 느꼈다 나영미는 혀로 귀두의 끝을 부드럽게 할으며
아 정말 당신은 너무 멋져요 안기고 싶어요
이러며 사내를 올려다 보았다 사내는 얼결에 권총을 옆에 내려 놓
고 두 손으로 나영미의 머리칼을 움켜 쥐었다 그런 뒤 사내는 둔
부를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귀두의 끝에서 허연 정액이
힘차게 사출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사내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이때다 속으로 외치며 나영미는 두 손
으로 잡고 있던 사내의 고환을 바스러져라 있는 힘을 다해 움켜쥐면
서 동시에 사내의 귀두를 사정두지 않고 단숨에 물어 뜯었다 사내
는 숨을 멈추며 눈을 부릅떴다 다음 순간 사내는 외마디 비명을 내
지르며 옆으로 벌렁 드러누웠다 사내는 귀두가 반쯤 잘려나간 음경
과 으깨진 고환을 두 손으로 움켜 쥔 채 눈을 까뒤집으며 버르적거렸
다
나영미는 침대 위에 있던 권총을 재빨리 집어들어 고릴라를 겨냥하
고 발사했다 다음 순간 문을 박차고 이노키가 들어왔다 나영미는
이노키의 배를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깜짝 놀란 이노키가 배를
움켜쥐더니 반사적으로 채찍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나영
미에게 걸어왔다 나영미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들리지 않았다
이노키는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나영미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이
역시 불발이었다 나영미는 일그러진 이노키의 무서운 표정 앞에서
공포로 얼어붙어 버렸다 이노키는 악귀같은 얼굴로 나영미를 응시하
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복부를 움켜 잡고 잠시 내려다 보았다 하얀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괴로운 표정을 하고
석상처럼 서 있던 이노키는 나영미에게로 비틀거리며 다가와 손을 들
어 나영미를 움켜 잡으려 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져가는 이노키의 표
정을 보면서 나영미는 공포에 질린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잠시 후 이노키는 힘없이 주저 앉더니 통나무처럼 모로 쓰러져 흰
자위를 떴다 그 순간 복도에서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곧이
어 사내들이 우루루 방으로 들이닥첫다 덩치가 커다란 사내가 들어
왔다 왼쪽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실룩거렸다 자세히 보니 죽은 남
편의 동생 황경호였다 나영미는 숨이 멎을 듯했다 황석호가 죽고
난 뒤 경호와 재산 문제로 크게 다툰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년 잘 걸렸다
이러며 사내는 주먹으로 나영미의 얼굴을 힘껏 갈겼다 나영미는
바닥에 쓰러졌다 사내는 나영미의 앞가슴을 내질렀다 나영미는 호
흡을 잃고 버르적거렸다 사내는 나영미의 면상을 발로 짓이겼다 코
와 입과 머리가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어디를 어떻게 맞
았는지 나영미는 퍼런 불덩이에 휩싸여 의식을 잃었다
나영미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의자에 결박된 채 앉아 있었다 사
내들 틈에 김태수의 비대한 몸집이 보였다 입 속에 이물감이 느껴졌
다 혀로 더듬어 보니 휩겨나간 이빨들이 몇 개 들어 있는 것 같았
다 나영미는 그것들을 뱉어냈다 앞니 네 개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
졌다 김태수가 잔인한 눈초리로 나영미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강철수 어디 있나
나영미는 김태수를 흡뜬 눈초리로 노려보며 악을 쓰듯 대답했다
몰라요 알아도 대답할 것 같애요
김태수는 황경호에게 눈짓을 했다 채찍 소리가 연달아 바람을 가
르기 시작했고 얼마 뒤 나영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나영미는 부르르 떨며 의식을 되찾았다 의식을 잃고 얼마나 시간
이 지났는지 몰랐다 얼음처럼 차거운 물이 가슴으로 흘러 내리고 있
었다 나영미는 주꺼를 돌아 보았다 김태수가 서 있고 그의 어깨
너머 시계가 보였다 바늘은 여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밖은 어둡고 방안에는 전등이 켜져 있었다 이 지옥 같은 곳에
서 밤과 낮을 보낸 것이다 빨리 죽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김태
수가 뚜벅뚜벅 다가와 나영미의 머리칼을 움켜쥐며 믈었다
강철수 어디 있나 말해
나영미는 고개만 흔들었다 말할 기력이 없었다 발작적인 기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남편을 죽인 년답게 독종이군 네가 불지 않아도 강철수는 오도록
되어 있어
김태수는 전화기를 집어 들어 나영미의 집 전화 번호를 돌렸다 잠
시 후 김태수가 나영미의 입에 송화기를 대어 주며 마지막으로 강
철수에게 할 말 있으면 남기라고 했다 나영미는 부르짖듯 말했다
오지 마세요 이곳은 함정이에요 우리 모두 죽이려 하는 거예요
그 녹음 테이프 관계당국에 보내세요
나영미의 곁에 있던 김태수는 나영미의 뺨을 힘껏 갈겼다
녹음 테이프라고 그것이 뭐야
말하기 싫어요
나영미는 얼굴을 사납게 흔들며 악을 쓰듯 부르짖었다 김태수는
황경호에게 눈짓했다 나영미의 곁으로 황경호가 다가 왔다 손에는
날카로운 생선회칼이 들려 있었다 황경호는 나영미의 왼쪽 유방을
움켜쥐며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대답해 말하지 않으면 잘라낼거야
나영미가 침을 뱉었다
더러운 자식들 차라리 날 죽여라
나영미는 울부짖듯 외첫다
사내가 김태수를 흘끗 보았다 한동안 나영미의 악귀처럼 변한 모
습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김태수가 천천히 말했다
녀석이 올 때가지 살려 둬 분풀이할 기회는 얼마든지 줄 터이
니
사내는 나영미의 뺨을 힘껏 갈기고 나서 일어섰다
저년에게 가릴 것을 주어라 네년도 별 수 없구나
김태수가 허화수에게 지시했다
잠시 후 허화수는 나영미의 바바리코트를 가지고 와서 알몸을 가려
주었다
강철수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오후 여섯 시 반 약속한 시간은 이미 다섯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을 어겨본 적이 없는 나영미였다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첫다 나영미의 집으로 여러 번 전화를 걸어보았지
만 허사였다 병원까지 바래다 주지 못한 것이 몹시 후회가 되었다
강철수는 헛일 삼아 다시 나영미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느닷
없이 수화기에서의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철수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김태수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었
다 음험한 목소리는 뇌수를 바늘 끝처럼 찔러 왔다 강철수는 부르
르 떨었다 부주의했던 행동에 화가 치밀었다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김태수의 음성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나영미는 우리와 함께 있다 여자를 살리고 싶으면 인천
김태수의 음성에 이어 울부짖는 듯한 나영미의 목소리를 상기하며
강철수는 이를 사려 물었다
비열한 놈들
분노에 찬 외침이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강철수는 황급히 트
렁크를 열었다 마이크로 폭탄은 여섯 개 남아 있었다 강철수는 그
것들을 모두 혁대의 가죽 사이로 밀어 넣었다 여섯 개의 마이크로
폭탄의 위력은 얼마나 될까 고는 마이크로 폭탄의 원격조정 스위치
를 상자에서 꺼냈다 반도체로 만든 정교한 폭파 장치 핸더슨 중
령의 걸작이었다 강철수는 폭파 스위치가 달린 반지를 손가락에 끼
웠다 그는 호텔을 나섰다 눈이 내렸고 어둠이 깔려 있었다
강철수는 빙판 길을 미친 듯이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나영미를 살리고 싶으면 제 3부두 하역장 앞에 있는 화물 창고
로 8시까지 도착하라
김태수의 음성은 송곳처럼 뇌리를 파고 들었다 제 3부두 하역
장 8시까지 강철수는 액셀러레이터를 마구 밟았다 얼마 달리지
않았는데 적신호에 걸렸다
강철수는 나영미와 헤어진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와 헤어진
것은 자정쯤이었다 나영미는 어머니를 문병하러 병원으로 가는 도중
에 납치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강철수와 헤어지기 전에 어머니만 아
니면 정말 가기 싫어요 이런 말을 남겼다
강철수는 시계를 보았다 7시 정각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길에는 차량의 행렬이 끝도 없이 밀려 있었다 강철수는 초조하게 시
계를 응시했다 7시 분이 되어서도 차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강철
수는 핸들을 힘껏 틀어 주행선을 이탈했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질주
하기 시작했다 순찰차가 맹렬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오는 것이
백미러에 보였다 강철수는 빨간 경고등을 보면서 갑자기 핸들을 왼
쪽으로 힘껏 틀었다 차는 요란한 비명을 내지르며 한동안 옆으로 미
끌어지다가 방향을 돌려서 달리기 시작했다
시계를 봤을 때 7시 반이 넘고 있었다 로터리에는 뭇 차량들이 신
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철수는 경인가도의 인터체인지로
미친 말처럼 차를 돌입시켰다 길가에 쌓여있던 눈가루가 부채살처럼
피어올랐다
경인가도에는 다행히 정체 현상이 심하지 않았다 백미러엔 순찰차
가 보이지 않앗다 강철수는 액셀을 더욱 힘차게 밟았다 계기판은
150킬로미터를 오르내렸다 뿌옇게 흐린 시야를 통해서 마주오는 차
들이 화살처럼 지나쳤다
가끔 마주오던 차량이 날카롭게 경적을
울리며 눈알을 희번득였다
부두길로 접어 든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폭설 주
의보가 내려 하역 작업이 중단된 부두엔 사람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강철수는 하얀 눈이 쌓인 길을 가로질러서 하역 창고 건믈
을 향하여 질주해갔다 사방은 칠흙이라도 개어바른 듯 캄캄했다
강철수는 차에서 내렸다 눈 앞에 하역 창고의 입구가 보였다 강
철수는 그 입구로 다가갔다 창고 문이 열리면서 갑자기 강한 빛줄기
가 덮쳐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사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
다
손들어
강철수는 손을 들었다 불빛이 가까이 다가왔다
움직이지마
인상이 고약하게 생긴 두 사내가 강철수의 양쪽 옆구리로 접근했
다 두 사람 모두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강철수지
한 사내가 물었다
그렇다
강철수가 대답하자 사내는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정확하군
여자는 어디 있냐
저 안에서 네 놈을 기다리고 있어
한 사내가 권총을 겨누고 강철수의 곁으로 다가 왔다 그는 강철수
의 옆구리에 총구를 들이밀고 전신을 샅샅이 뒤졌다 아무것도 발견
하지 못한 사내는 강철수의 두 손을 뒤로 돌려서는 수갑을 채웠다
그들은 강철수의 덜미를 잡고 창고 건물로 들어섰다 생선과 양파
썩는 냄새가 코를 쥐어박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으슴프레한 블빛
아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강철수는 김태수의 비대한 모습을 보
았다
강철수에게 가까이 다가온 김태수는 싸늘한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러나 이런 창녀 같은 여자를 구하려고 네 녀석이 목숨까지 걸
줄은 몰랐다
김태수의 식지가 향하는 곳에는 나영미가 의자에 묶인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그녀의 옷은 걸레처럼
찢겨 있었고 헤어진 옷 사이로 삐져 나온 커다란 유방에도 시뻘건 핏
자국이 붉은 지렁이처럼 엉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부어터져서 알
아보기 힘들엇다 잿빛 입술의 구각을 타고 붉은 핏줄기가 한가닥 흘
러내리고 있었다 고개를 떨군 채 의식을 잃고 있던 그녀가 신음 소
리를 내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김태수가 눈짓을 했다 그의 부하가 양동이에 담겨 있던 차가운 바
닷물을 나영미의 머리에 퍼부었다 나영미는 힘없이 머리를 흔들었
다 그녀는 간신히 눈을 떴다 웽한 눈동자가 주위를 살폈다 흐려진
여자의 눈동자가 강철수의 얼굴에 멈췄다 여자의 눈동자가 그를 알
아본 듯했다 여자의 커다란 눈동자엔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여자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 핏물이 핀 입 속엔
앞니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강철수는 여자의 입으로 귀를 가져갔
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요
왜 왔어요 이들은 우리를 모두 죽일 거예요
추위로 얼어 있는 나영미가 힘없는 어조로 말했다
누가 이런 짓을 당신에게 했소
나영미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강철수는 쥐어짜듯 말했다
저들이 날 이렇게 했어요 짐승들이에요
나영미는 공포에 질린 눈초리로 사내들을 둘러보면서 대답했다 강
철수는 분노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강철수는 어금니를 깨물며 분노
를 짓눌렀다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한 가지뿐이었다
강철수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틈을 이용하여 원격조정 스위치
가 장치되어 있는 반지를 손바닥쪽으로 향하게 했다 엄지로 힘껏 누
르기만 하면 허리띠에 감추어진 여섯 개의 마이크로 폭탄이 동시에
폭발할 것이다 강철수의 시선이 사내들 쪽으로 향했다 김태수의 주
위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둘러보는 강철수의 눈두덩엔 퍼런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김태수 허화수 정흥태 박종구 김형우 황경호 이민찬 이들의
얼굴을 잡어먹을 듯 노려보던 강철수는 날이 선 어조로 말했다
패거리들이 다 모였구나 네놈들을 하나씩 죽이려 했는데 차
라리 잘 됐다
권총을 들고 있던 허화수가 강철수에게 다가왔다
할말 있으면 지금 다 해보라구 황천 가면 더 말할 수 없을테니
이 여자와 할 말이 있다 자리 좀 비켜
실컷 해보시지
사람들이 몇 발자국 믈러섰다 나영미 곁으로 다가간 강철수는 잠
시 격정을 누른 후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잠시 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루가 될 것이요 각오되어 있소
왜 왜 왔어요 난 당신이 오지 말기를 빌고 또 빌었어요
당신 같으면 어떻게 했겠소
당신은 할 일이 남아 있잖아요
다 부질없는 일이었소 사랑하오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 저승에
서 다합시다
강철수는 피가 흐르는 나영미의 목덜미로 입술을 가지고 갔다
사랑해요 진심으로 당신같은 남자와 함께 죽고 싶었어요
나영미는 강철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두렵지 않소
두렵지 않아요
그녀는 떨고 있지 않았다
우리만 죽지는 않을 거요
강철수는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흘끗 보면서 말했다
그럼
저놈들도 모두 죽을 거요
강철수는 낮게 속삭였다
정 말이에요
나영미의 눈동자에 불꽃이 스쳐갔다
그렇소 우린 이제 빛이 될거요
좋아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척 행복했었소
저도 그랬어요 행복했어요
나영미의 잿빛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의 얼굴엔 공포의 그
림자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감겨갔다 나영미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나영미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 보던 강철수는 어떤 생각이 번개처
럼 뇌리를 스첫다
남 형사 좀더 밟을 수 없나
결빙된 경인가도를 달리고 있는 김 반장은 조바심이 났다 이미 여
덟 시가 지나고 있었다 김 반장은 남창우 형사에게 더 밟으라고 다
시 한번 다그쳤다
이런 차로 이 이상은 무리예요
남 형사는 침착하게 빙판길을 주시하며 대꾸했다 김 반장은 나영
미의 전화에 메모리되어 있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나영미를 살리고 싶으면 제 3부두 하역장 앞에 있는 화믈 창고
로 8시까지 도착하라 제 3부두 1하역장 8시까지
김태수의 음성은 음산했다 그리고 울부짖는 나영미의 음성 김태
수는 강철수와 나영미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차창을 스치며 불화살처럼 지나가는 차량들 흩날리는 눈송이들
남 형사는 얼굴을 찡그리며 날카롭게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김 반장은 나영미와 강철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강철수와
같이 음험한 자가 여자 때문에 스스로 죽음의 함정으로 들어가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자네 이번 사건 해결 못보면 각오하라구 영감께서 눈을 까집고
있어
서장은 걸핏하면 윽박질렀지만 강철수라는 여우가 쉽게 잡혀줄 리
는 만무했다
김태수와 트라이앵글 그리고 강철수와의 사이엔 무슨 함수관계가
있을까 김태수가 수사에 비협조적인 이유도 모를 일이다 자신을 노
리는 암살자를 잡기 위해선 누구보다 경찰에 협조해야 할 그가 아닌
가 옷을 벗을 때란 생각이 들었다 형사 생활 23년 그러고도 기
업체 신 입사원을 밑도는 수준의 봉급 강력계 형사로 늙은 자신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명예 돈 지위 안정된 노후 대책 아무것도
없었다
장녀인 미경 때문에 아내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국민학교 교사인
미경이가 의사인 박경태에게 시집을 간다고 했을 때부터 내키지 않았
다 정작 시 어머니를 견디지 못하고 딸애가 친정으로 왔을 때 그는
어이가 없었다 아들이 의사가 될 때까지 온갖 고생을 해온 모정은
이해가 갔다 그러나 혼수감이 적다는 이유로 사람을 박대하는 일은
분통이 터졌다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아온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병든 아내
와 이혼당한 장녀와 불만투성이 사춘기 남매들이 아닌가 아비를 잘
만났다면 구김살 없이 살아갈 아이들 누가 그랬나 도둑질을 하는
한이 있어도 자식은 귀하게 키워야 한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데 라디오에서 긴급 뉴스가 흘러 나왔다 일부
예비역 장성들과 전직 고위 관료 및 구정치인들이 관련된 국가전복
모의 사건을 아나운서가 다급한 음성으로 전했다 반란 모의에 가담
했던 소수의 군인들은 군경에 의해 대부분 체포되었고 모의에 가담
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수사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문민 대통령은 이번 국가전복 모의 사건을 특별히 중대한 사안으로
생각하고 앞으로는 이런 사건이 재현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라고 관계 부처에 지시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잠시 후 대통
령의 침통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이번에 발생한 국가전복 모의 사건의
전모를 국민들에게 밝히면서 이같은 엄청난 모의를 사전에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국민 여러분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올립니
다 아직도 우리사회 일각에는 개혁을 거부하고 구시대적 발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부 세력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반성해서 정화된 모습으로 새한국을 건설해 나가자는 나의
제의를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나는 이들의 놀라운 후안무치에 국민
여러분과 더불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정권을 탈
취한 뒤 국민들을 탄압하고 비리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서 국민으로
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정부 각료와 대통령을 시해하려고 음
모를 꾸민 이들의 죄업을 나는 국민의 이름으로 단죄할 것입니다 정
부를 뒤집어 엎어 정권을 찬탈하는 반국가적 반란 행위가 혁명이란
이름의 미사여구로 둔갑하는 일은 다시 없어야 하겠습니다 저와 우
리 국민의 결심은 화고합니다 민주주의는 이 땅에 확고히 뿌리내리
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는 불행한 과거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반란 모의에 가담했던 일부 군인들이 이성을 되찾
고 사전에 관계기관에 모의 사실을 알린 것은 다행스럽고 민주 국가
의 군인다운 쾌거와 참신한 결단이었습니다 나는 이들의 충정을 높
이 살 것입니다 군인은 나라와 정부를 지켜야 합니다 어떤 이유가
있어도 군인은 정부를 전복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관을 배신할 수는 더욱 없는 일입니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역
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김 반장은 어이가 없었다 죽일 놈들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
왔다 모처럼 국가의 기강을 잡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국민들
의 의지를 배신한 행위에 치가 떨렸다 남 형사의 혀를 끌끌 차는 소
리가 들렸다
반장이 부두길로 접어 들었을 때는 시간이 반 시간 정도 지나 있었
다
김태수를 앞세우고 일당은 강철수와 나영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
다
허화수 정흥태 박종구 김형우 황경호 이민찬들이 김태수의 곁
에 있었다
김태수는 곁에 있는 허화수로부터 리벌버 권총을 받아들었다
할 말 더 남았나
김태수는 권총을 강철수에게 겨누며 물어뜯듯 말했다
너희같은 놈들과 함깨 죽게 되어 불쾌하다
무슨 소린가
내 몸에는 폭파 장치가 되어 있다 마이크로 폭탄의 위력을 네놈
은 잘 알 것이다 하나만 터뜨려도 이 창고 전체가 가루가 되지 내
혁대에는 그것이 여섯 개나 장치되어 있다 자 이걸 봐라 내가 죽는
순간 자동적으로 폭발하도록 장치되어 있다
강철수는 몸을 돌려 폭발물과 연결된 기폭 장치를 보여주면서 말했
다
이걸 누르기만 하면 너희들 모두 가루가 된다 마이크로 폭탄의
살상 반경은 1미터도 넘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폭파 장치를 확인한 김태수의 얼굴은 하얗게 변해갔다
헉 이 이 도 독종 같은 놈
김태수는 부르짖듯 외치며 달아나려 했고 부하들도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꼼짝마 한발만 움직이면 폭탄이 터져
강철수의 벽력같은 고함 소리에 일당은 깜짝 놀라며 자리에 얼어붙
었다
모두 같이 죽는거야 김태수 기분이 어떠냐
강철수는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가 강철수 무슨 조건이든 듣겠네 우리를 가 가게 해주게
김태수가 와들와들 떨며 말했다
그럼 내말 들어
강철수의 어조는 명령조로 변해갔다
무 무슨 말이든 드 듣겠네
김태수의 눈빛은 필사적이었다
우선 이 수갑을 풀라고 해
강철수는 소리 질렀다
김태수는 황급히 허화수에게 풀어주라고 말했다 허화수가 벌벌 떨
며 강철수와 나영미에게 다가와 차례로 수갑을 풀었다
모두 무기를 땅바닥에 버려
강철수의 고함에 답하듯 무기들이 바닥에 버려지는 소리가 둔탁하
게 들렸다 강철수는 허화수에게 무기를 걷어오라고 말했다 허화수
는 허둥지둥 무기를 주워 모아서 강철수 앞에 늘어 놓았다 강철수는
기관단총을 하나 집어든 뒤 허화수에게 나머지 총들은 모두 한구석
에 치우게 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손을 등 뒤로 돌려서 모두 수갑을 채워
허화수는 곤혹스럽게 김태수를 바라보았다 김태수가 머리를 끄덕
였다 허화수는 일당 모두에게 수갑을 채웠다
강철수는 허화수마저 수갑을 채운 뒤 모두 꿀어 앉으라고 말했다
일행은 순순히 말을 들었다 강철수는 기관단총을 일행들에게 겨누며
부르짖듯 말했다
누가 이 여자에게 이런 짓을 했나
처음에는 서로 얼굴만 쳐다 보았다
강철수는 김태수의 발끝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총성
에 펄쩍 놀란 김태수는 사색이 되었다 그때 허화수가 황경호를 보며
눈짓을 했다 황경호가 볼멘 표정을 하고 나왔다
네 녀석이냐
강철수가 묻
자 그렇다 이 생쥐 같은 녀석아
도마 위에 오른 생선 칼 무서워하랴 라는 태도였다
불알 달린 녀석 같으면 정정당당히 겨루어 보자구
황경호가 비웃듯 이죽거렸다 순간 강철수는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너는 힘 없는 여자에게 폭력을 휘둘렀군 좋다 수갑을
풀어주마
강철수는 황경호의 수갑을 풀어주었다
갑자기 황경호가 강철수의 턱을 뒷머리로 강타했고 강철수는 불의
의 일격에 뒤로 나딩굴었다 황경호는 강철수를 찍어 누르며 억센
두 손으로 강철수의 목을 옥죄기 시작했다 호흡이 막힌 강철수는 버
둥거리기 시작했다 황경호의 억센 손가락은 강철수의 성대를 파고
들었다 강철수는 아득해졌다 눈 앞에 무수한 별가루가 스치고 지나
갔다 목줄기의 통증은 참기 어려웠다 죽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황경호의 손가락은 더욱 모질게 목을 조여왔다 호흡이 막혀왔다
강철수는 이때 유성처럼 흐르는 하얀 빛살을 보았다 어리석은 만용
에 화가 치밀었다 황경호의 억센 손아귀는 집요했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강철수는 최후의 힘을 다 모아서 무릎으로 황경호의 복부
를 내질렀다 방심하고 있던 황경호는 벼락맞은 소처럼 깜짝 놀라며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순간 황경호는 땅에 딩굴고 있던 쇠파이프
를 집어 들었다 황경호가 휘두른 쇠파이프가 바람을 갈랐다 강철수
는 어깨에 둔탁한 통증을 느꼈다 어깨뼈가 으스러진 것같이 아파왔
다 비열하기는 형 못지 않는 놈이군 이를 갈며 강철수는 공중을 날
아 발뒤꿈치로 황경호의 명치끝을 내질러버렸다 황경호는 둔중한 소
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져 한동안 호흡을 잃고 버둥거렸다
한동안 그러던 황경호는 벌떡 일어나 권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기관단총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황경호가
권총을 집어드는 순간 강철수는 황경호를 겨냥하고 탄창이 텅 빌 때
까지 기관단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황경호는 미친듯이 허우적거리며
몸을 뒤틀다 털썩 쓰러졌다 강철수의 잔혹한 응징에 모두들 부들부
들 떨었다
강철수는 김태수 일당을 모두 창고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강
철수는 일행들의 수갑을 로프로 연결해서 쇠기둥에 고정한 뒤 말했
다
김태수 오늘은 살려둔다 그러나 언제든지 너는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여기 폭파 장치를 해둘 테다 누구든 꼼짝만 하면 터질테니
살고 싶으면 움직이지 말아라
강철수는 허리띠에서 마이크로 폭탄을 하나 꺼내서 김태수의 수갑
에 연결했다 그리고는 누구든지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폭발하도
록 뇌관을 연결한 뒤 전화기를 들어 특수 수사대의 다이얼을 돌렸
다 사내의 음성이 흘러나오자 강철수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국가전복 모의에 가담했던 사람들과 그 증거물이 모두 여기 있소
폭파장치를 해 두었으니 조심하시오
강철수는 다급한 음성으로 위치를 묻는 질문에 대답해준 뒤 수화
기롤 내려 놓고 전화기 곁에 녹음 테이프가 든 봉투를 올려 놓았다
놀란 시선으로 그의 행동을 지켜보는 일행들을 모른 체하고 강철수는
의식을 잃은 나영미를 안아 올렸다 어깨의 통중은 견디기 힘들었다
강철수는 창고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밖은 칠흙같이 어두웠고 눈이 쌓여 있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이었다 세찬 눈보라 때문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강철수는
나영미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무척 창백했다
강철수는 대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음산한 바람 사이로 어떤
소리가 들렸다 인간은 누구나 무덤을 향한다 누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단 말인가 나영미의 말대로 꽃 피고 새 울고 부드러운 바람
부는 대지를 진작 찾아 나섰다면 나영미가 이렇게 처참한 꼴은 되지
않았을 거라는 자책이 들었다 강철수는 걸으며 항구쪽으로 시선을
잠깐 돌렸다 먼 곳에서 날아온 뱃고동 소리가 적막한 겨울 밤 하늘
을 공명시켰다 앞으로 혼자서 얼마나 죽여야 하나 강철수는 허탈했
다 그리고 비탈길에 선 느낌이었다 명단에 들어 있는 얼굴들을 떠
올리며 우울해졌다 언제인가 회색 전선에 평화가 올 날은
강철수는 나영미를 차에 실었다 차는 천천히 눈발 사이로 사라져
갔다
김 반장이 3부두 입구에 도착했을 땐 아홉 시가 거의 넘고 있었
다 1하역장 창고가 있는 방향으로 차가 머리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엄청난 굉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땅바닥이 미친 듯이 뒤흔들렸다 김
반장과 남 형사는 뒤미처 덮친 폭풍에 떠밀려 땅바닥에 나윙굴었다
하역장 창고가 있는 방향에서 나는 폭발음 같았다
다음 순간 두 형사는 먹빛 하늘로 피어오르는 시뻘건 블덩이를 보
았다 검은 연기는 버섯처럼 퍼지며 하늘을 가리기 시작했다 김 반
장과 남 형사는 눈을 털며 일어섰다 두 사람은 창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갓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김 반장은 텅빈 공간을 보면
서 블에 덴 소 얼굴을 한 채 입을 딱 벌렸다 마이크로 폭탄 그럼
강철수네와 김태수 일행 모두가 김 반장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치
솟은 불길 속에서 김 반장은 일렁이는 하나의 환명을 보았다 그것은
음산하게 웃고 있는 강철수의 창백한 얼굴이었다 김 반장은 우두망
찰하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가에서 메 아리치던 펑음의 파장은 서서히 흩어져갔다 굉음이
사라지자 폐허로 변한 창고의 빈터엔 몇가닥 푸른 연기만이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인생
은 허망하고
짧아서 절망할 때마다
나는 목숨을 걸 만한 가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며 스스로
위로한다 그것은 자유로워지기 위한
날개를 만드는 작업이다 결코
날 수는 없지만 날려는
환상은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책,영화,리뷰,
장미와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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