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에서 시각장애인이 된
이영호의 휴먼 다큐멘터리
보이지 않는 삶이 더 소중하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소리로 보는 세상은 참 아름답다
헬렌 켈러는 사물과 사물의 이름을 나타내는 손가락 알파벳을 일
치시키는 순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존재와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
다.
시력과 청력을 가지고 있어도 사랑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
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
진 것보다 가지지 않은 것에 더 집착하므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
돈이 많지 않은 것, 남보다 잘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보다
배우지 못한 것, 남보다 건강하지 못한 것, 이런 것에 집착하다 보니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
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소유하는
것만을 배웠기 때문에 그것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생각
한다. 그래서 자신이 소유한 어떤 것을 잃게 되면 그때부터 불행해
진다.
나는 망막색소변성증(RP : Retinitis Pigmentosa)을 가진 장
애인이다. 이는 유전성 또는 진행성 질환으로, 유아기부터 서서히
진행되어 결국에는 시력을 완전히 읽게 되는 병이다. 나는 요즘 독
서확대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글을 볼 수 없으며, 낮과 밤을 겨우 구
별할 수 있는 시력이 있을 뿐이다. 컴퓨터 화면에 떠오른 글자를 최
대한으로 확대하면 10자 이내의 글이 화면에 놓이는데, 글은 그렇
게 쓴다.
시력을 잃은 내게 많은 사람들이 힘들죠 혹은 안됐군요 라는 말
을 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짐작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길을 잃고
헤맬 때는 물론 불편하다.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불행해 하지는 않
는다. 그냥 불편할 뿐이다. 시력을 잃고 나서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
은 더러운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자신도 타인도 사랑하
지 못하는 아름답지 않은 인간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다
행인지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십여 년 전의 모습이다. 그러니 얼마
나 행복한가. 나는 그 후로 전혀 늙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눈
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은 시각적 인식에서 시
작된다. 그러나 내 의식은 이제 시각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졌
다. 이제는 소리와 마음으로 의식한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은 사람
이 없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
름다운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으니 세상도 아름답다. 그래서 나는
이제 무엇이든지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무척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다른 사람과 같은 무
늬의 옷을 입는 것이 싫어서 무늬가 있는 옷은 사지도 입지도 않았
다. 그리고 좋아하는 색의 옷만 입었다.
지금은 손끝에 오는 촉감으로 옷을 고른다. 내 몸에 닿는 느낌
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색깔의 옷을 다 입게
되었다. 입어서 편한 옷이면 어떤 색이든 또 어떤 디자인의 옷이든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색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정상적인 시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시
력을 상실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까다로움과 편견에서 해방되었
다.
소리로만 보는 세상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초등학교 앞, 하드
보드 상자에서 들려오는 병아리들의 지저귐은 내 기억 속 노란 솜털
이 보송보송한 병아리를 떠올리게 한다. 골목길 아이들의 재잘거림
은 내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친구들을 생각나게 한다. 어느 집에서
흘러나오는 서투른 피아노 소리는 내 기억 속의 예쁜 소녀를 떠올리
게 한다.
소리는 형태가 없으나 기억 속에 축적된 시각적 기표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는 것이다. 노란 개나리 꽃잎을 한 움큼 따서 담장 위에 올
라가 노란 병아리들 위로 떨어뜨릴 때 빙글빙글 맴맴이를 돌며 떨어
져 내리던 노란 꽃잎의 윤무가 내 기억 속에 있다. 그것도 어린 시절
의 순수한 눈으로 보았던 그대로.
낮게 낮게 살기
우리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회를 꿈꾼다. 그러기 위해서
는 장애인의 비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사라져야 한다. 지금 자신의
장애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을 비장애인이라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정상인이 어떤 일을 수행하지 못
할 때 비웃는 것을 본 일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 시각장애인들에게
기적이 일어나 시력을 다시 찾는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은 있는 것이
다. 장애인이 만능이 아니듯 비장애인도 만능이 아니다.
무지는 항상 오해를 낳는다. 자신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다면 타
인에 대한 탐구도 하라. 자신이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으면 의
무부터 철저히 이행하라. 그러면 권리는 자연히 획득할 수 있다. 인
류의 과학이나 의학이 어디까지 발전할지는 모르겠지만 장애인이
없는 사회는 관념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구별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사회는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장애를 갖고 있어도 예외는
아니다. 문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지 못하는 데에 있고,
할 수 있는 일의 경제성만을 생각하는 데 있다.
물론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일을 한다는 자체에 있다. 누워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다른 장애인들을 위해 이동봉사 차량들을
무선으로 호출해 준다. 이 사람은 자신이 이용할 수도 없는 이동봉
사 차랑을 타인을 위해 누운 채 무전기로 호출해 주는 것이다. 우리
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은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평생
고생하며 먹지 않고 입지 않고 모은 재산을 대학에 기부하는,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할머니들이 만드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클래식 기타를 다시 시작했다. 20대에 시력이 좋을
때는 다른 할 일이 너무 많아 손을 놓았다. 그런데 이제 악보를 볼
수도 없으나 다시 시작했다. 아직, 이것을 배워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기타를 연주하는 데 눈은 악보를 보
는 것 이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오히려 눈을 뜨고 있으면 집중하
기가 더 힘들다. 연주자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들은 모두 눈은
뜨고 있으나 자신의 음악에 몰입되어 아무것도 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언어장애가 심한 사람이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각장애가 있다고 해서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진행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지체장애와 청각장애도 마찬가지이다. 지체나
청각의 장애가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는 경우
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장애란 그저 어떤 일에는 장애
일 수 있지만 인생의 장애는 아닌 것이다.
여우와 두루미의 우화에서 배울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언젠
가 우리나라의 장애인 편의시설에 관한 이야기를 이 여우와 두두미
의 우화에 빗대어 쓴 적이 있다. 물론 이것은 무지가 아니라 고의로
행했다는 조건이 주어졌지만, 그래도 타인에 대한 배려에 관한 이야
기임엔 틀림이 없다.
시각장애인을 안내할 때 안내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대개 시각
장애인의 팔을 붙잡고 안내하려고 한다. 이럴 경우 시각장애인은 꼼
짝도 할 수 없게 된다. 영화 「여인의 향기」를 보면 알 파치노의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자신의 팔을 잡고 안내하려는 아르바이트 학
생에게 네가 장님이야? 하고 고함을 지른다. 시각장애인을 안내할
때는 자신의 팔을 가만히 맡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시각장애인은
안내자의 팔꿈치 부분을 잡고 그 팔을 통해 전달되는 안내자의 움직
임을 따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장애인의 행동양식을 이해
하면 두루미와 여우의 관계는 해소된다.
시각장애인이 정상인을 초대해 놓고 자신에게 필요 없는 것이라
고 집안의 전등을 켜지 않겠는가? 그리고 청각장애인을 초대해 놓
고 조용한 음악을 감상하자고 하겠는가? 장애인에 대한 배려란 이
렇게 상식적인 수준의 예비지식만 가지고 있어도 가능한 것이다.
대중은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선량한 민중이
될 수 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도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버스 기사
도 택시 기사도 지하철의 역무원도 장애인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선량한 민중이 된다.
기억이란 추억의 창고
인간의 기억이 거의 모두 시각적 기표(Signifier,Significant)
로 의식 속에 재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사람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그렇
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최초의 기억 역시 시각적 기표로 의식의 심
층에 보전되어 있다. 결국 사람의 기억은 시각적인 것을 토대로 만
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나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다.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는 그의 걸
작 「아마르꼬르드(Amarcord, 나는 기억한다라는 뜻)」에서 자
신이 어린 시절 경험한 모든 것들을 매우 아름답게(때론 감상적으
로, 때론 회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모든 시각적 기표들을 하나하나 스크린 위에 재
현하였다. 이 수많은 기표들은 그의 섬세하고 감성적인 연출에 의해
아름다운 영상으로 환원되어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아마르꼬르드」의 시대적 배경은 무솔리니가 집권하기 시작할
무렵의 1930년대이다. 지금 40대 중반 이상의 세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전혀 낯설지 않고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은 착
각에 빠질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미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비디오
로 보았다
우리는 1930년대 중반의 이탈리아 촌락의 모습이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악동 펠리니와 그 친구들이 저지르
는 기발한 말썽들을 통해 마을의 인물들을 하나씩 소개하고, 산업화
이전 허물어지지 않은 마을공동체의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의 악동은 종이로 긴 대롱을 만들어 여선생의 발밑까지 연
결해 놓고는 그 대롱에 오줌을 싸서 흘려보내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거나, 몸집이 고래만큼이나 거대한 담배가게 여주인의 수박만한 젖
가슴에 파묻혀 기진맥진한 채 도망친 나머지 며칠 동안이나 끙끙 앓
아눕는다거나, 길을 지나가는 신부의 모자 위로 오줌을 싸고 아버지
에게 치도곤을 당한다거나, 성 미카엘의 종교의식에 참가해서도 자
전거를 탄 여자들의 엉덩이만 훔쳐보며 낄낄거리는 등의 온갖 개구
쟁이 짓만 골라서 한다.
코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한길이 넘게 내린 폭설, 그리
고 설국에 날아든 공작의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펼쳐진 꼬리.
이런 모든 사건들과 인물들이 빚어내는 이야기를 이끌고 가며,
아버지의 체포와 구금 그리고 고문을 통하여 파시즘을 고발한다. 무
솔리니의 대형 초상화를 희화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펠리니는 기억
속의 시각적 편린들을 퍼즐을 맞춰나가듯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영화는‘씰 부 쁠레’의 결혼식으로 끝을 맺는다.
펠리니의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기억은 수많은
시각적 기표들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음악과 같은 청각적 기억도
있고, 후각으로 촉발되는 기억도 있다. 그러나 나의 기억 역시 내
의식 속에 선명한 시각적 기표로 남아 있다 .
삶에서 규정지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나와
너, 남자와 여자, 사회와 자연, 이런 자연스러운 규정들에서부터 도
덕과 비도덕, 옳음과 옳지 않음, 사랑과 미움, 희망과 절망,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누가 누구를 규정지을 수 있을까.
나는 어느 날 불편함에서 장애인으로 규정지어졌다. 장애인으로
규정지어진 나의 삶에서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마
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정상인으로 바라본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그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서 꽃이나 동물들이 인간에게서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감탄하였다. 저 사소한 꽃
들이나 짐승마저도 저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는데 인간은 왜 자꾸 빛
을 잃어가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시력이 자꾸만 떨어
질수록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었다.
사람의 앞가슴에서 생기는 마음씨부터 사람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
워지기 시작했다. 삶이 막바지에까지 도달하면 사랑하지 못할 것이
없다. 서로 미워하고 싸움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서로
사랑함으로써 진정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보이는 삶에서 보이지 않는 삶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후자의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세상이 눈으로 보이지 않기 시작했을 때 보이지
않았던 세상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들은 예전에 시력이 어느 정도 있을 때의 영상들
로 시작한다. 그 기억들은 볼품없고 왜소한 것들이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것들이다. 이것을 깨우치기 위해 참으로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제 2 장
홍대 미대 조소과 71학번
모든 생물에게는 우성과 열성이 있다. 오랜 옛날, 아프리카의 어
느 종족에게는 열성적인 인자를 가진 사람을 제거해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건강하고 우성적인 인자들만 살아
남는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 뛰어난 우성들 속에서
도 열성과 우성은 나뉘어진다는 것을. 우성이라고 생각했던 자신들
이 언제 열성으로 남게 될지를….
사실 나는 한 번도 이 사회에서 열성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
다. 누구 못지 않게 건강하고 건전한 청년이었다.
나는 다섯 남매 중 위로 형 둘과 누이, 아래로 여동생 사이에 낀
넷째였다. 공직과 방송계에 몸담았던 아버지는 그 무렵 실직상태여
서 집안 형편이 썩 좋지 않았다. 영화감독인 둘째형 이장호는 조감
독을 하고 있었다. 함경도 북청 갑부였던 할아버지는 해방 전에 남
으로 내려와 명동에 빌딩과 수색에 땅을 사둔 부자였으므로 우리
집안의 고비고비마다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후로 계속
할아버지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했다.
1970년, 나는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낙방하고 재수를 하게 되었
다. 재수는 하게 되었지만 검정 교복을 벗고 사복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이 났다. 담배도 당당히 피울 수 있었고 머리도 기
를 수 있게 되었다. 다음해에 다시 불문과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은
지워버렸다. 고등학교 공부를 다시 한다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
됐다. 미술대학을 가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간단했다. 막연하게 시력에 불안을 느끼고 있
었다(나중에 대학에 들어가 입영 신체검사를 받고 내가 RP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력이 좋지 않은 나로서는 손으로 할 수
있는 무언가에 인생을 맡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조소(조각과 소
조)였다.
아무도 몰래 미술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이야기를 꺼내봐야
인간취급을 받지 못할 것은 뻔했다. 입시에 실패한 친구들은 입시전
문 종합학원에 등록을 했지만, 나는 이웃에 살던 엘라 누나를 찾아
갔다. 그 누나는 이대 조소과를 졸업했으므로 무언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라 누나는 동창인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영희 누나였다.
나는 영희 누나의 집에서 석고 데생을 배우기 시작했다. 누나의
집은 청계천 4가의 상가 사이에 있는 커다란 한옥이었다. 종합학원
등록금이 있었기 때문에 돈은 넉넉했다. 석고 데생은 그렇게 만만하
지 않았다. 중학교에서 미술반 활동을 한 것이 고작인 나로서는 처
음으로 하는 본격적인 미술수업이었다.
그때 나의 시력은 안경을 쓰고도 겨우 0.5였다. 그 시력으로 하얀
석고상에서 명암을 찾아내고 연필로 묘사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공부를 하는 것이 즐거웠다. 재수
를 하는 동창생들과 어울려 당구도 치고 가끔 무교동에서 낙지볶음
과 감자탕을 안주로 막걸리도 마셨다. 고작 막걸리 반 되를 마시고
도 토할 정도였으니 술을 마시는 것은 그저 어른 흉내에 지나지 않
았다.
데생 공부가 끝나면 남산에 있던 국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그 동안 읽지 못했던 니체, 사르트르, 카프카, 도스토예프스키 그리
고 이상의 책을 대출해서 읽었다.
4B 연필을 잡은 영희 누나의 가늘고 하얀 손이 내 가슴을 설레게
할 무렵, 누나는 레슨을 빼먹기 시작했다. 몸이 아프다고 했다. 사
실 나도 레슨을 그만두고 싶었다. 단둘이서 줄리앙을 마주하고 있다
가 누나가 데생을 고쳐주기 위해 화판 앞에 앉을 때마다, 하얀 손
때문에 가슴을 졸이며 죄의식에 떨어야 했다. 누나는 더 이상 레슨
을 할 수 없다고 털어놓았고, 나도 더 이상 가슴을 졸이며 하얀 목과
손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다.
수업이 이토록 허망하게 끝나자, 이대 앞의 한 화실에 등록을 하
고 데생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나는 미술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너
무 쉽게 여기고 있었다. 서울미대 조소과를 지원했지만, 다시 실패
했다. 변명 같지만, 어머니는 시험 보는 날의 날씨가 맑기만 기원했
다. 야맹증이 심한 나로서는 형광등 몇 개만 달랑 켜진 조명 밑에서
는 시험문제를 읽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필기시험을 보던 날도 실기시험을 보던 날도 날씨는 흐렸
고 추웠다. 태양은 짙은 눈구름 속에 갇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하
얀 옷을 입은 간호사가 모델로 나오던 인체 데생이 그해는 검정교복
을 입은 고등학생으로 바뀌어 나왔다. 내 시력으로는 도저히 명암을
구별할 수 없었다.
점토로 두상을 만드는 조소 실기시험에선 여자애들 심봉을 메어
주다가 시간을 손해보는 바람에 허겁지겁 마무리를 해야만 했다. 그
러나 코밑에서 균열이 가더니 턱이 떨어지려고 했다. 나무 조각칼
두 개를 좌우에 박아넣고 땜질을 했다. 그러나 점토가 마르면서 턱
이 떨어지리란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대학을 포기하고 기술 같은 것을 배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울대
학이라도 들어가야 그나마 조각을 전공하는 것을 허락할 텐데, 희망
이 없었다. 서울대학과 사립대학의 등록금은 엄청난 차이가 났다.
나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어느새 후기입시를 준
비하고 있었다. 현명하게 행동하자고 마음먹었다.
입시정보를 입수한 결과 홍익대학교에서는 시저의 두상이 나올
것 같다는 예상이 들었다. 시저의 데생을 외우기 시작했다. 어차피
뒷자리에 배정받게 되면 보이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일
주일 동안 하루종일 시저를 그렸다. 시저의 흉상은 비교적 단순해서
외우기가 쉬웠다. 후기시험을 치르는 날은 날씨가 좋았다. 예상했
던 대로 시저의 흉상이 나왔고, 외운 대로 그렸다. 그리고 합격했
다.
합격하고 나니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집안의 경제사정도 좋지 않
았고, 후기 대학에 다닐 생각을 하니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나
는 어머니 몰래 등록금 고지서를 찢어버렸다. 아버지는 졸업을 하고
도 고급 룸펜이나 될 미술대학은 무엇 하러 보내느냐고 반대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등록을 하셨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우울했고 친구들과 술만 퍼
마셨다. 술은 조금씩 늘기 시작했고 제법 많은 양을 마시고도 잘 견
디었다. 술에 취하면 친구들의 하숙방이나 화실에서 쓰러져 잤다.
나는 그렇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인간은 단지 던져진 존재일 뿐
1972년 대학 2학년 봄, 입영 신체검사를 받게 되었다. 야맹증
때문에 군대에 가면 조금 힘들거라고 생각하며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그 야맹증이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것을 알았다. 결코
병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심각한 병을 앓고 있지 않다고 믿었고, 그
렇게 생활해 왔던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망막색소변성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의학사전을 꺼내 찾기 시작했다. 먼저 안과를 찾고 망막난을
보니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증세를 읽어 보
았다. 내가 자각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 이르
렀을 때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다가 결국은 실명하게 됨.
결국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 된다는 거였다. 비로소 과거의 모
든 일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왜 어려서부터 교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판서를 베껴야 했고, 왜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눈이 저녁만
되면 몹시 어두워져 수없이 넘어져야 했는지, 중.고등학교를 다니
면서도 왜 그짓을 계속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칠
방법도 없고, 결국은 실명하게 되는 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지금
까지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며 엉엉 울었다. 울면서도 그 사실을 받
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의학사전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RP는 Retinitis Pigmentosa라는 안과질환의 약칭이다. 우리
말로는 망막색소변성증 혹은 색소성망막염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
래도 안과의사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에겐 낯선 병명일 것이다. 망막
색소변성증은 유전성 질환이며 또한 진행성 질환으로서 그 유전방
식과 진행양상이 너무 다양하여 치료는커녕 발생원인조차 막연히
짐작핳 수밖에 없는 고약한 병이다.
이 병은 진행양상으로 볼 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유아기부터 병이 급속히 진행되어, 소년기에 이르면 실명하
게 되는 조기진행형이다. 다른 하나는 비록 유아기부터 시작되지만
아주 서서히 진행되어 장년기 혹은 노년기까지도 비록 보잘 것 없는
시력이긴 하지만, 시력을 유지하고 있는 만기진행형이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치명적인가는 아무도 가릴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
나 그 고통과 좌절은 두 경우 모두 엄청난 것이다.
나는 만기진행형이었다. 시력이 언제까지 지탱해 줄지 오직 하느
님만이 알고 계셨다. 이제 열등을 넘어 장애인이 되는 거였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지금 어두운 곳에서 보이지 않듯이 언젠가 대낮에도 안 보일 수
가 있다.’
이 생각 때문에 몇 날 며칠을 술과 눈물로 지냈건만 해결책은 없
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르트르의 말이 내 의식 위로 떠올랐다.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그냥 던져진
것이다.
인간은 한시적 동물이다. 현실에 안주함으로써 실존한다.
그렇다. 지금은 생활하는 데 조금 불편한 정도니까, 언제 실명할
지도 모르면서 걱정하지 말자. 그냥 살자. 이제, 청춘의 문턱을 막
넘지 않았는가? 나는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잊기로 했다.
대학미전에 출품할 준비를 했다. 석고를 살 돈이 없어서 여학생들
의 작품을 석고로 떠주고 남은 석고로 작품을 떴다. 제목은 「야누
스」라고 붙이고 앞면은 미래를 바라보는 얼굴로 만들고, 뒷면은 과
거를 내려다보는 얼굴로 만들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지켜본 복학생 선배들이 나를 주목했다. 그들
중에는 고등학교 선배도 한 명 있었다. 모두 작은형과 같은 해방둥
이들이었다. 그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술도 얻어먹고 작업도 배웠
다.
선배들 중 지금은 이미 세상을 떠난 전국광 선배와 모 대학교 교
수가 된 노재승 선배, 그리고 장식 선배가 많이 도와주었다. 노재승
선배의 실내장식용 부조를 만들어 붙이는 일도 거들었고, 같은 과
학우들과 할 수 없었던 미학에 관한 이야기나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
며 따라다녔다.
어느덧 2학년 일학기가 끝났다. 어이없게도 두 과목이 F였다. 이
유는 간단했다. 지정해준 교과서를 사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교양
국어와 체육이었다. 그 교수들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유치
원 같은 학교였고, 나라도 박정희가 제마음대로 주무르던 때였다.
학교에 휴학계를 냈다. 누이동생이 대학에 입학한 것이었다. 나
는 가난뱅이 미대생이었다. 어머니는 내 등록금까지 마련하실 수 없
었다. 신체검사 결과 병종 불합격으로 군대 삼 년도 벌었으니 한 해
더 쉬겠다고 했다.
전국광 선배를 찾아갔다. 선배는 마침 노재승 선배 등과 동상제작
을 맡아 일을 하고 있었다. 석고돌이를 하게 되었다. 석고돌이란 동
상제작 등 큰 조각공사를 할 때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막내를
일컫는 말이다. 창전동 시장의 상가 두 군데를 빌려 만든 작업장으
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점토를 떡메로 치고 손으로 주물러 선배들이
작업하기 좋게 만들어놓는 일부터 시작했다. 당시는 군과 관련된 동
상 제작이 많았다. 전국광 선배가 맡은 공사도 2사단인가 3사단에
세울 태국 참전 기념비였다. 우리는 전신상과 부조를 만들어야 했
다.
이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세상이 얼마나 썩었고 부조리한 것인가
를 체험했다. 선배에게 동상제작을 맡긴 사람은 사립 초등학교 미술
교사인 삽화가였다. 조각가도 아닌 사람에게 기념비 제작을 맡기고
있었다. 그 삽화가가 선배에게 주기로 한 하청비는 턱없이 싼값이었
다. 기념비의 제작비는 이천만 원이었는데, 선배에게 주는 돈은 겨
우 이백만 원이었다. 물론 재료비나 다른 공사비도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모르는 나로서는 화가 치밀었다. 당시 사립대학 등록
금이 육만 원이었으니 이백만 원도 큰돈이었다.
어쨌든 나는 열심히 일했다. 조소작업이 끝나고 석고작업에 들어
갈 무렵에는 눈이 자주 내렸다. 전국광 선배는 일이 끝나면 곧잘 술
을 사주곤 했다. 선배는 거의 알코올 중독이었다. 우리는 신촌에서
술을 마시다 통금에 걸리면 연대 입구의 한 여관에서 자곤 했다. 여
관에선 전국광 선배의 야뇨증 때문에 이불을 주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일하고 마시고 하던 어느 날, 선배의 화실 겸 집에서 파티
가 열렸다. 선배의 생일이었다. 선배의 약혼자와 친구들이 모였다.
그 중에 유난히 키가 크고 마른 여자가 내 눈길을 끌었다. 술잔이
오가는 사이 우리는 취했다. 선배가 내게 기타를 주며 노래를 부르
라고 했다. 나는 그녀를 의식해서 지금도 즐겨 부르는 팝송을 불렀
다.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내게로 다가와 노래를 잘 들었
다고 하며 명함을 건넸다. 그녀는 나와 같은 대학의 회화과를 졸업
하고 대한항공의 스튜어디스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여자들의
직업으로는 일은 힘들지 모르지만, 보수도 좋은 직업이었다. 나는
지금 휴학중이며 선배와 함께 창전동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춤을 추고 술을 마셨다.
그로부터 한 주일이 지나갔다. 우리는 석고작업을 서둘렀다. 날
씨가 너무 추워지면 석고가 금세 얼었다. 나는 시장의 공동수도에
서 물을 길어다 이백 포의 석고를 개야 했다. 손이 시리면 석고 속에
손을 넣고 일을 했다. 석고가 굳을 때 나오는 열은 따뜻했다. 이런
내 꼴이 불쌍해 보였던지 시장 안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아가씨가
그렇게 힘든 일을 하지 말고 자기네 공장으로 오라고도 했다. 나는
그 아가씨의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져 선배들에게 얘기했더니 선배
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부조의 겉틀을 석고로 뜨고 있는데 눈이 내
리기 시작했다. 함박눈이었다. 나는 소리 질렀다.
국광이 형, 눈 온다. 함박눈이야!
선배는 힐끗 밖을 내다보더니 핀잔을 주었다.
인마, 눈이 오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기냐. 일이나 해!
일손을 놓고 일어나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큰길에서 까만 망토를 걸친 여자가 작업장 쪽으로 걸어오
는 것이 보였다. 순간 내 형편없는 시력으로도 그 망토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몸이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 선배를 불렀
다.
국광이 형, 손님이 오는데. 저 여자 서지숙인 것 같은데?.
누구? 서지숙? 인마, 네가 걔를 어떻게 알아. 맞다! 내 생일파티
에 왔었지. 근데 니 눈이 어디 눈 축에 끼냐? 걔가 여길 뭣 하러 오
냐.
형은 하던 일을 멈추지도 않으며 대꾸했다. 그녀는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나도 손을 흔들며 선배에게 말했다.
형, 서지숙이 맞는데. 손까지 흔드는걸.
선배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 일어나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쟤가 웬일이지.
안녕하세요. 눈이 와서 결항이 됐어요.
그녀는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하며 눈을 털고 들어왔다. 나는 의자
를 가져다주고 앉기를 권했다.
결항? 그러면 집에나 가지. 여긴 왜 왔어?
선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국광 씨 작업하는 것 구경 왔죠.
그녀는 웃으며 노래하듯 말했다. 우리는 작업을 정리하고 그녀가
가지고 온 술과 안주를 펼쳐놓고 앉았다. 눈은 펑펑 쏟아지고 있었
다. 축복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무슨 좋은 예감으로 저렇게 쏟아
지는 것일까? 선배와 나는 서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몸이 굳어진다고 했다.
우리는 기분 좋게 취하자 신촌으로 나갔다. 우리 셋은 쉴새없이
떠들어댔고. 선배는 이미 취해 있었다. 그녀와 나는 선배를 서강대
앞에 있는 선배의 화실로 데려다주고 눈길을 걸었다. 이제는 외톨이
신세를 면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아름다워 봄이 오고 있었다
다음날 작업장에 가니 선배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데이트 잘했냐?
데이트요, 누구하고요?
인마, 지숙이가 날 보러 왔겠냐? 널 보러 왔지.
정말 그녀가 날 만나러 온 것일까? 며칠이 지나 승무원 대기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우리는 데이트를 시
작했다.
작업은 마무리 단계였다. 석고로 뜬 동상을 주물공장에 넘기자 내
일은 끝이 났다. 선배는 고맙게도 삼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었다. 사
실 선배는 지출을 너무 많이 해서 그 삽화가에게 구걸하다시피 하여
돈을 더 받아내야 했다. 어머니에게 만 원을 드린 뒤, 만 원을 주고
기타를 샀다. 지숙과의 데이트 자금으로 만 원은 남겨두었다. 지숙
과 나는 이대 앞에 있는 「멕시코」라는 카페에서 주로 만났다. 그
녀의 웃음은 해맑았다. 그 웃음이 좋았다.
그녀가 아름다워서 봄이 오고 있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도 행복하고 달콤한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어머
니는 이번에는 꼭 복학해야 한다며 돈을 마련하셨다. 지숙과의 만남
으로 다시 공부할 의욕을 되찾았다.
그 무렵 홍콩의 신필름 지사로 갔던 작은형이 귀국했다. 계집아이
조카도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세상은 여전히 암담했지만 나
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상은 최인호의 신문 연재소설로 온통 이야
기꽃이 만발했다. 최인호와 동기동창인 작은형은「별들의 고향」
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다. 작은형은 돈이 없었고, 돈을 대줄 제작
자도 생길 리 없는 연출부 제2 조감독이었다.
어느 날 작은형이 술에 취해 들어왔다. 나에게 복학할 등록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렵게 등록금을 빌려달라고 말을 했지만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돈을 어머니가 어떻게 구했는지 나
는 알고 있었다.
"인호에게 원작료를 얼마라도 줘야 돼. 그렇지 않으면 별들의 고
향은 날아가 버려, 알지! 그러면 내 인생은 끝장이야."
그리곤 말을 덧붙였다. 자신이 영화감독으로 성공하면 나를 영화
배우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영화배우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작은형이 매일 술에 취해 사는 것이나 집안의 유리창을
깨부수는 것이 보기 싫었다. 집안의 평화를 원했다. 나는 작은형에
게 등록금을 주어버렸다.
지숙은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비난했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
다. 다행히 「별들의 고향」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작은형은 갑자
기 스타가 되었다. 집안에는 오랫동안 찌들었던 우울한 공기가 사라
지기 시작했다.
지숙은 유럽 노선을 타게 되었다. 파리를 다녀온 후로는 파리 얘
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도 파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
해졌다. 나는 돈을 벌어 파리로 유학갈 꿈을 꾸었다. 돈을 벌자! 지
숙도 비행기를 타는 이유가 파리 유학 자금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
다.
1973년 「별들의 고향」의 대성공으로 작은형은 두 번째 작품의
기획을 하게 되었고 제작자는 보너스도 미리 주었다. 세상은 요지경
이었다. 「별들의 고향」으로 수억을 챙긴 화천공사는 작은형에게
한푼도 주지 않았는데, 국제영화사에서는 시나리오를 보지도 않고
보너스를 주었다.
나는 세상에 나가기도 전에 이미 세상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작은형의 두 번째 작품은 최인호 형의 「정원사」라는 단편을 김승
옥 씨가 각색한 「어제 내린 비」였다. 작은형은 나에게 한 약속 때
문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영화에 출연해보지 못한 동생을
자신의 영화에 쓸 수는 없었다. 나는 모르는 척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도 완성되고 작은형은 더 이상 미적거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연기수업
을 받은 적도 없었고 눈도 나빴다.
하루는 술이 엉망으로 취한 작은형이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
무릎 앞에 시나리오를 던졌다. 그 중의 한 장면을 연기해 보라고 했
다. 내가 해야 할 신은 주인공이 울면서 전화하는 장면이었다. 작은
형의 갑작스런 행동에 가족들은 모두 긴장했다.
한 손에 시나리오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송수화기를 들고 대사를
읽어나갔다. 나는 그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내 처지가
서러워서였는지 눈물을 흘리며 연기(?)를 해냈다. 가족들도 이런
모습을 보고 놀랐고 작은형은 소리를 질렀다.
야 됐다, 됐어! 내가 얼마나 고민했는데. 이제 안심이다.
짐작했던 대로 작은형은 내 문제로 무척 고민했던 모양이었다. 본
인이 다급했을 때 아무 대책 없이 한 약속이었으니 걱정이 태산이었
을 것이다. 어쨌든 며칠 후 영화사로 가서 사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사장님도 역할에 맞을 것 같다고 하셨다. 거짓말처럼 영화배우가 되
어버렸다.
제 3 장
「어제 내린 비」로 스타가 되다
지숙은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이것
이 가장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아니냐고 설득했다. 촬영을
위한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의상이 문제였다. 당시
는 의상담당 코디네이터도 없었고 배우가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다.
지숙은 스카프나 벨트 등을 사다주었고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의상을 구했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었다. 동숭동에 있는 어느 사설학원 원장의
저택이었다.아주 잘 꾸며진 커다란 집이었다.「별들의 고향」의 성
공으로 더욱 유명해진 안인숙의 소꿉친구 역할이었다. 그 저택은 영
화 속의 우리 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촬영하는 동안 나는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내가
연기해야 할 장면은 단순한 것이었다. 영화 속의 이복형인 김희라
씨에게 방문을 열고 얼굴만 들이민 채로 형, 지금 뭐하는 거야?
하는 대사였다.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인숙 씨나
최불암 씨가 선배 연기자로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영화 속의 인물
은 실제의 나와 많은 면에서 일치했다. 소심하고 폐쇄적인 성격이
그랬고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그랬다. 눈이 나쁜 것이 오히려 많은
도움이 되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고 카메라의 렌
즈도 정확히 보이지 않으니 연기하는 데 유리했다.
첫 촬영은 얼떨결에 끝났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영화홍보를 위한
신문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출연료를 얼마나 받느냐는 질문에 나는
사실대로 얘기했다. 8만 원을 받았는데 배우협회 입회비 5만 원을
내고 나니 3만 원이 남았다는 발언이 화근이 되었다. 기자들은 이
이야기를 과장해서 보도했고, 배우협회에서 난리가 났다. 회원자격
을 박탈하겠다는 것이었다. 험한 세상에 첫발을 디딘 애송이가 겪는
당연한 통과의례였다. 나는 남은 돈으로 지숙과 그녀의 친구를 데리
고 영빈관에서 엄청나게 비싼 와인과 스테이크를 사주었다. 지숙에
게 근사한 저녁을 사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화배우가 된 보람을
느꼈다.
서울에서의 촬영이 끝나고 순천과 마라도로 로케이션을 떠났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신이 났다. 영화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
키는 대로만 하는 인형이었다. 촬영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촬영하면서 작은형으로부터 욕도 많이 먹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도 아침부터 욕을 먹고 나서 자동차를 후진한 다음 빠른 속도
로 전진시키는 장면을 찍게 되었다. 작은형은 할리우드 영화에서처
럼 멋있게 해주기를 바랐지만, 운전 미숙으로 후진은 멋있게 했는데
전진을 못하고 그대로 길가의 시계방으로 돌진해 버렸다. 운전면허
도 없었기 때문에 경찰서에 끌려갔다.
영화 촬영중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봐주었을 리는 없고 제작부에
서 손을 쓴 것 같았다. 너무 당황해서 담배를 피우다가 옷에 담뱃불
이 떨어져 타는 것도 몰랐을 정도였다. 이 사고가 나고 나서 비오는
장면을 찍게 되었는데, 소방차로 뿌리는 그 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도 아무 불평도 할 수 없었다. 한겨울에 그 엄청난 비를 맞고 나니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촬영이 거의 끝날 무렵 맹장이 말썽을 부
렸다.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이미 상영 날짜가 잡혀 있었기 때문에
실밥을 풀지도 못한 채 다시 촬영을 해야 했다. 배가 부어 바지가
맞지 않았다. 허리 뒤를 뜯어내고 상반신만을 찍으며 촬영을 강행했
다. 몸에서 악취가 날 것 같아 안인숙 씨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
그녀는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
해 주었다.
고가도로의 차단벽을 통과해서 강변으로 추락하는 장면의 촬영을
끝으로 작업은 끝이 났다. 무리한 촬영으로 인해 수술 부위가 터져
서 병원으로 실려가 치료를 받아야 했다. 지금도 내 맹장수술 자국
은 마치 복막염수술을 받은 것처럼 크다. 나의 첫 영화는 이렇게 아
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만들어졌다.
촬영은 끝났지만, 후반작업이 남아 있었다. 후반작업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계속 따라다니며 구경했다. 지숙은 유럽 노선을 타고
있었으므로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
1974년 설 연휴에 영화가 개봉되었다. 작은형은 덜덜 떨고 있었
다. 첫 영화의 엄청난 성공이 커다란 부담이었던 것이다. 첫 영화의
반의 반이라도 관객이 들면 성공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영화는 20만
정도의 관객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
도 출연해야 했고 라디오에도 나가야 했다. 학교에 다닐 때 백 원으
로 생활하던 나에게는 엄청난 수입이 생겼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CF 청탁이 들어왔고 하나도 거절하지 않았다.
지숙은 내 얼굴이 알려지자 데이트를 하면서 매우 불편해 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장소를 찾아다녀야 했고, 가장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용돈은 충분해졌지만 시간이 없었다. 씀씀
이가 조금씩 커졌고, 서서히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타락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이끌려 술집에 출입하는 것이
잦아졌고, 나이트 클럽에서 통금이 풀릴 때까지 술을 마시는 일이
많아졌다. 돈이 없어도 사인만 하면 술을 먹을 수 있었다. 여자들이
유혹하기 시작했다. 나는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어이없이 매춘부에게 딱지를 떼고 난 지 일년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와 잠을 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경험했지만 매우 두려워하
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Making love was Just for fun
지숙은 나의 모습에 실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크게 다툰 뒤 서
로 연락이 뜸해졌다. 어느 날 촬영이 끝나고 작은형과 여러 명의 여
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게 되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기타를 꺼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여자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기
시작했다. 지숙과의 문제로 가슴이 뻥 뚫려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
럽게 그 자리를 메웠다. 그녀와 밤을 함께 보냈다.
섹스는 두려운 만큼 유혹적이었다. 겁이 나면서도 무서운 이야기
를 계속 들려달라고 하는 아이처럼 나는 섹스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
은 인과응보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눈을 반짝이던 아
이는 임신을 했다. 그녀가 산부인과의 수술실에서 소중한 생명을 그
녀의 몸에서 제거하는 동안 한없이 자신을 질책했다. 거울을 보는
것이 싫었다. 내 얼굴이 그렇게 혐오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녀가 두
려워졌다. 내 자신의 잘못을 그녀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
녀는 다시 만나기를 원했지만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이 두려웠다. 아
담의 변명이었다. 이브가 사과를 주었기 때문에 먹었다고 말하고 싶
었던 것이다.
가슴 속에 죄 하나 심고서 우리는 헤어졌다.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하게 되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내가 출연한
4개의 CF가 방영되고 있었다.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박정수
씨와 함께 원천유원지에서 찍은 크라운 맥주, 정윤희 씨가 무명일
때 함께 찍은 해태 사이다, 한국화장품의 썬텐 오일 광고, 애플와인
파라다이스 등이 그것들이었다. 길거리를 다니는 것이 점점 어려워
졌다.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기가 힘들었다.
지숙과 다시 만났다. 그녀의 미술대학 친구들과 계를 하고 있었는
데, 어느 날 내가 탈 차례가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지숙은 태연하게
행동했지만 나는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지숙의 친구들은 대부분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술을 많이 마셨다. 그
녀는 나를 다시 받아주었다. 지숙과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녀
도 내 청혼을 받아줄 것 같았다. 우리 어머니는 그녀에게 만족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영화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더스틴 호프만의 「미드
나잇 카우보이」,「새벽의 칠인」,「미드나잇 익스프레스」등을
보면서 영화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제 내린 비」
이후에는 내 마음에 드는 배역이 주어지지 않았다. 작은형의 영화에
출연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다른 영화의 출연요청이 없어 다시 「너
또한 별이 되어」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처음의 제작의도와는 달리
미국영화인 「엑소시스트」를 닮아갔다.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윤
유선이 여섯 살의 나이로 신들린 아이 역할을 천재적으로 해냈음에
도 불구하고 흥행에 참패했다.
그 때문에 작은형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영화감독의 수명은 작품
의 예술성보다는 흥행이 좌우하던 때였다. 그후 나는 다행스럽게도
몇 편 더 신통찮은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영화계의 원로인 김수
용 감독의 「황토 」의 촬영을 위해 여주로 가게 되었다. 김지미 씨
의 아들 역을 맡게 된 나는 대배우와의 촬영 때문에 긴장하고 있었
다. 그녀는 당시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스타로서의 관록을 모든 면
에서 보여주었다.
신인의 입장인 나로서는 숙박장소나 식사 등에 관하여 불평할 수
가 없어 정해주는 대로 자고 주는 대로 먹었다. 그녀가 그것을 알고
는 제작부장에게 압력을 넣어 나와 다른 동료를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로 숙소를 옮기게 했다. 당시 젊은 배우들은 기껏해야 국산 자
동차인 브리사를 타고 다니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녀는 도요타 크
라운을 타고 다녔다.
「황토」를 찍으면서 배우들 중에도 눈이 나쁜 사람이 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가 다른 누이동생 서희 역할을
맡았던 젊은 여배우와 주증녀 씨의 눈이 나처럼 나빴다. 누이동생
서희를 배에 태우고 노를 젓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카메라가 언덕
위에서 이를 원경으로 잡고 있었다. 김 감독님은 카메라를 향해 배
를 몰아야 한다고 했다. 당시 열악했던 촬영 여건상 워키토키를 사
용하는 것은 바랄 수도 없었다. 나는 카메라가 보이지 않아 고민하
다가 서희에게 부탁했다. 사실은 내가 눈이 무척 나쁘니 카메라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다. 노를 저을 때는 돌아앉아 저어야 하는 것
이니 내 부탁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계속 방향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그 장
면을 찍고 나서 그녀에게 언짢은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대꾸도 없던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자신도 눈이 나쁘다고 고백했
다. 한편으로는 놀랐지만 그녀에게 동병상련을 느낄 수밖에 없었
다. 대구 근교 경산에서 과수원 장면의 촬영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
갈 때였다. 주증녀 씨가 내게로 오더니 나의 팔을 잡았다. 해는 이미
졌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미스터 리, 내가 밤눈이 어두워서 그러니 미남 팔 좀 빌리자.
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반문했다.
왜 싫어?
아뇨. 사실은 저도 야맹증이 있거든요
뭐라구? 그게 정말이야?
네.
난 이 세상에서 내 눈만 별난 줄 알았는데….
이 일이 있고 나서 주증녀 씨는 현장에서나 충무로에서 우연히 마
주칠 때나 매우 다정하게 대해 주셨다. 물론 주증녀 씨는 내 병이
망막색소변성증인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주증녀 씨의 증세도 비슷
하였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었다.
당시 자신의 병에 대해서 의학사전에서 얻은 정보 외에는 아무것
도 알 수 없었던 나는 지숙과 함께 「황토」를 보고 나서 지숙에게
이런 사실을 얘기했다. 그녀도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
도 나도 내가 사십이 되면 실명할 것을 알지 못했으니 사태를 심각
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십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안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의 막망색소변성증 환자가 만 명에 한 명 꼴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사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기이한 인연이었다. 주증녀 씨는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서희라는 여배우는 아직도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시력만이라도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
「황토」의 촬영을 끝내고 다시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영화에
서 나는 최은희 씨 그리고 문정숙 씨, 또 김진규 씨와 같은 원로들과
공연하게 되었다. 자신이 배우로 일하면서도 그들을 보면 묘한 감정
에 사로잡혔다. 내가 어린 시절, 그들은 이미 대배우였다.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내 자신이 배우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영화에서 엉망으로 연기를 했다. 동생 역을 맡았던 김보
연이 중학교 삼학년이었다. 이 영화와 함께 작은형의 세 번째 작품
인「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에 겹치기 출연을 했던 탓도 있었겠지
만 자신이 배우라는 느낌을 전혀 갖지 못하고 연기를 했다. 결과는
당연히 참패였다.
「어머니와 아들」의 촬영은 매우 짧은 기간 안에 끝이 났다. 나
는 이어서,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애마 부인」으로 큰
성공을 거둔 정인엽 감독의「청색시대」라는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
다. 이 영화는 당시 인기 있었던 코미디언(최미나)과 라디오 진행자
(장재훈) 그리고 가수(김인순) 등을 출연시켜 흥행에 도움을 얻겠
다는 의도로 기획된 작품이었다.
작은형의 작품과 이 영화에 출연하면서 나는 일에 치여 지숙과 만
날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두 작품의 촬영은 계속 늦어졌다.
그 해를 넘길 것 같았다. 당시 영화계의 사정이 좋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연이은 긴급조치로 사회가 무척 어수선했다.
촬영이 계속 지연되자 한국화장품의 사원교육용 문화영화의 출연
을 받아들여 제주도로 갔다. 상대역은 당시 한국화장품의 모델로 일
하기 시작한 유지인이었다. 유지인은 겨우 신인 여배우로서 발돋움
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공항에서 문제가 생겼다. 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주민등록증을 가
지고 오지 않았다. 당시 주민등록증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촬영팀을 먼저 떠나보내 놓고 지숙에게 연락했
다. 그녀가 스튜어디스로 일하고 있으니 어떤 해결책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외사과였는지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파
견나왔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문
제를 해결해 주었다.
혼자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내리니 눈이 펑펑 쏟아
지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바로 성판악으로 떠났
다. 성판악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듣던 송창식의 한 걸음만 한 걸음
만 가까이 오세요
하는 가사의 노래와 눈에 덮인 한라산은 아름다웠다.
성판악에는 유지인이 까불고 다니다 가슴까지 눈 속에 빠질 정도
로 엄청난 눈이 내렸다. 촬영은 차질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눈
에 덮인 한국의 유일한 남국인 제주에서 일을 하는 것이 정말 즐겁
고 신이 났다. 제주도는 여러 번 갔었지만 겨울의 제주도는 처음이
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키스할 줄도 몰랐던 풋내기 여배우, 유지인
허니문 하우스로 숙소를 옮기고 남은 장면들을 촬영하기 시작했
다. 당시 한국화장품의 홍보담당은 지금은 너무 명사가 된 이만재
형이었다. 우리는 허니문 하우스의 정원에 놓인 야외 테이블에서 신
혼부부가 되어 키스하는 장면을 찍고 있었다. 유지인이 키스 신의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만재 형은 그녀에게 장면을 설명해
주었고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사랑스럽게
들여다보다가 서서히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그런데 갑
자기 캇!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유
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야, 너 아직 키스도 한 번 못해 봤어?
아저씨, 이거 정말 비밀이니까 소문내면 안 돼요. 한 번도 못해
봤어요. 정말예요.
지금은 대전 어느 병원 원장님의 사모님이라고 들었는데, 25년
전의 유지인은 그처럼 순진한 어린 아가씨였다. 이미 25년이 지났
으니 그때의 약속을 어기는 것을 이해하리라 믿는다.
어쨌든 촬영을 모두 마치고 나자 그 테이블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술을 마셨다. 나는 이미 술꾼이 다 되어 있어 엄청나게 술을 마셨다.
지금도 그 이유는 기억해낼 수가 없다. 아마도 지숙과의 헤어짐을
예감했었는지, 아니면 겨울 남국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해서였는지
도 모르겠다. 나는 술에 취해 혼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음날 만재 형과 유지인 그리고 스텝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밖으로 나간 후 만재 형은 내가 RP 환자인 것을
알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 찾으러 나왔다고 한다. 군대에서 수색대가
하는 방법대로 바닥에 엎드려 살펴보니 내가 입고 있던 파카의 후드
가 보여 찾아 데리고 들어왔다고 했다.
나는 이런 얘기를 듣고 나서 손에 반지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지
숙이 홍콩에서 사다준 당시에 유행하던 세 마리의 뱀을 끼워 맞추는
반지였다. 그것이 없어진 것이다. 반지 때문에 한참 수선을 피우고
있는데 유지인이 식당으로 나와 커피를 마시면서 배시시 웃고 있었
다.
왜 웃어? 난 지금 반지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데.
그녀는 내 짜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 웃더니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펴보였다. 놀랍게도 반지는 그녀의 하얀 손바닥 위에서 반짝
이고 있었다.
먼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던 그녀는 창문으로 밤바다를 구경하
고 있다가 내가 절벽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되어 밖으
로 나왔다고 한다. 바위틈에 태아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흔
들어 깨웠더니, 내가 대뜸 ‘너, 이 반지 가져.’하면서 반지를 빼
주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서 그 반지의 사연을 들어 알고 있
었다. 다시 돌려주었는데도 강제로 손가락에 끼워주며 그 여자하곤
끝났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내가 너무 취해서 그럴 테지 하
며 반지를 가지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나는 기억을 더듬었지만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것
은 내게 다가올 환란에 대한 무언의 예고였던 것 같다.
어리석은 속죄양
서울로 돌아오니 대중매체에서는 대마초 연예인에 대해 난리법석
이었다. 이때가 1976년 겨울이었다. 매일 새로운 명단이 공개되었
다. 명단에 오른 인물들이 구속되기도 하고 무혐의로 풀려나기도 했
다. 나는 조소과 실기실에서 밤늦게 작업을 하다 아이들이 가져온
대마초를 피워본 경험이 있었다. 아무 맛도 없었다. 아니, 내게 맞
지 않아 기침을 해대고 속이 몹시 거북했었다. 그래서‘정신나간 놈
들, 그걸 뭐하러 피우나?’하며 아무 관심도 갖지 않았다. 아직 촬
영을 마무리짓지 못한 영화가 둘이나 있었다. 정인엽 감독의 「청색
시대」에 함께 출연하고 있던 여배우 한 명과 남자배우 한 명이 대
마초로 입건 구속되어 촬영이 무기한 연장되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보사부 마약단속반에서는 당시 ‘불면 풀어
주기’작전을 쓰고 있다는 소문이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함께 일하
고 있는 배우들도 조사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에 피워본 사실로 입건이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배우협회와 당국과의 물밑 협상이 한창 진행되고 있
었다. 물론 이 사실은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다음에 당시 협회에서
일하던 실무자의 고백으로 알게 되었다. 당국은 영화판에서도 속죄
양을 찾고 있었다. 이런 것을 새옹지마라 하지 않던가. 협회에서는
당시 출연 빈도수가 높은 젊은 배우들 중에서 몇 명을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구속된 무명의 배우들로는 ‘각하’의 구국적
결단의 명분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대마초 흡연인구는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
지만 특히 대중음악에 종사하고 있던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대마초
를 흡연하고 있었던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나는 사회학자도 아
니고 대마초가 당시 한국사회에 왜 만연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굳
이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동료들
과 친지들을 팔아넘긴 인물 중에 S씨도 있었다.
물론 그가 얼마나 힘들고 가난하게 소년기를 보냈는지는 전국광
선배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가난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이른바 통기타 가수로 활
동하던 가수 중 처벌을 받지 않은 이는 그가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
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쨌든 당시 대마초로 연
루된 모든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협회에서 잠시 들르라는 연락을 받고 당시 충무로 초설 다방 3
층에 있던 사무실로 갔다. 장혁 씨가 금테 안경을 낀 경위라는 사람
을 소개했다. 그가 물어볼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쪽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았다.
이영호 씨, 대마초 피워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순간 뺨에서 불이 번쩍 나고 안경이 날아가 버렸다.
이 새끼가 점잖게 대해 주니까. 야, 여기에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피웠는지 다 써!
그는 백지를 책상 위에 놓고 나가버렸다. 하도 어이가 없어 안경
을 주워 다시 쓰고 보니 옆에 하재영이 앉아 있었다. 그와 통성명을
한 적도 없지만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대마초를 최근에 피운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가 다시 들어오더니 하재영이 쓴 종
이를 집어들었다.
야! 이 새끼야, 얘는 다 썼잖아! 그러니까 너도 빨리 다 써. 버티
다가 혼나지 말고.
이때 협회에서 일하는 한 단역배우가 지나가며 거들었다.
너희들 잘 협조해야지 빨리 끝난다.
이 말을 듣고 나니 분노가 끓어올랐다. ‘내가 돈 벌러 딴따라판
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너 같은 것들하곤 상종도 안 했을 거다!’속
으로 몇 번씩 부르짖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다시 다가왔다.
안경 벗어.
다시 주먹이 날아왔다. 나는 어려서부터 단체체벌을 받을 때도 제
일 많이 맞았다. 자존심 때문에 엄살을 부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잠
시 돌아간 고개를 다시 세우고 앉았다.
이 새끼 독종이구만.
그는 수갑을 꺼내더니 내 손에 수갑을 채웠다. 수갑이 채워진 손
을 내려다보니 독재경찰국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사에 근무하던 누이동생이 시국성명서를 낭독해 긴급
조치 몇 호인가로 구속되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처절함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대학에 다닐 때 실기실에서 대마초
를 흡연했던 사실을 쓰면 되겠구나 하고 결심했다. 수갑을 풀어달라
고 했다. 그가 수갑을 풀고 백지 한 장을 다시 던졌다. 대학시절 흡
연한 사실을 적어나갔다. 그러다 보니 작은형의 조감독들과 남산에
있는 중국집에서 술을 먹다가 몇 모금 얻어 피우고 뱃속의 것을 다
토해 내느라 고생한 기억이 나 그것도 적었다. 어리석게도 모든 것
을 털어놓아 봐야 서너 번밖에 되지 않으니 아무 문제도 없을 것으
로 판단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적은 것을 보더니 또 한방을 먹였다.
누가 이런 옛날 얘길 쓰래? 니 형하고 또 여배우들하고 피운 걸
쓰란 말야.
그제서야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작은형이
대마초를 피우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마초를 흡연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목격한 적은 없었다. 나는 가
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와 하재영의 팔목에 수갑을
채우더니 협회 사무실에서 끌고 나갔다. 협회에서는 아무도 수갑을
풀어주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또 속으로 울부짖었다.
야, 이 개 같은 삼류 딴따라 새끼들아!
그는 우리를 도큐 호텔 앞의 여성회관 지하실로 끌고 갔다. 그곳
은 아수라장이었다. 의자에 수갑을 차고 앉아 각목으로 온몸을 얻어
맞고 우는 기지촌의 아가씨들과 양아치들의 신음소리을 들으며 처
참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사진기자들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미국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당신은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직원이 오더니 수갑을
풀어주고는 지문을 채취했다. 열 손가락에 검은 등사잉크를 바르더
니 서류 위에 찍었다. 다시 취조실로 끌려갔다. 진짜 형사같이 보이
는 배불뚝이가 책상을 잡고 엎드리라고 했다. 바보같이 아무 항변도
못하고 그대로 했다. 몽둥이로 엉덩이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처음 당하는 굴욕이었다. 엉덩이가 화끈거리
기 시작했다. 피가 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야! 어느 여배우하고 피웠는지 불어.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때리다가 지친 그가 각목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이 새끼. 생긴 건 계집애 같은데 아주 독종이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잠
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 방으로 작은형이 불쑥 들어왔다. 깜
짝 놀랐다. 작은형은 소식을 듣고 내가 촬영을 마치지 못한 영화가
있으니 자신의 보호하에 촬영을 끝내고 돌려보내겠다고 사정하러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찰이 농담처럼 묻길래 한 번 피워봤다고
했더니 이리로 들어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일 조간신문에 형제가
나란히 걸렸다고 대서특필하겠군,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밤이 되었다. 호송차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갔다. 창밖을 살펴보
니 불광동 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 철문이 열리고 간호사들이 보였
다. 정신병원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현행범이 아니었기 때
문에 구치소나 유치장에 수용할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정신병원의
풍경에 놀라 그저 멍한 상태였다. 우리는 철창이 없는 방으로 끌려
갔다. 그곳에 잘 알고 있는 선배들이 여럿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녀
석도 있었다. 그 방의 방장이었다. 학교시절부터 그를 좋아하지 않
았지만 그래도 동창인데 어쩌랴 생각했다.
내 판단은 어긋났다. 동창녀석은 경찰보다도 근엄하게 자신이 방
장이며 지금부터 방의 규율을 잡기 위해 신고식을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이 새끼들은 범죄자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나 영
화를 통해 알고 있는 신고식을 생각하고 이를 악물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그녀석이 일어나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내 직업
과 이름을 댔다. 순간 눈앞에 별이 반짝 했다. 안경은 다시 날아갔
다. 작은형이 뒤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동창녀석도 어쩔 수 없
었다. 이들도 작은형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지금은 이미 세상을
떠난 정찬승 형이 작은형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찬승 형은 작은형에게 악수를 청했고 1부 신입식이 끝났다. 2부
신고식이 또 있었다. 이들은 나에게 기타를 주며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나는 내 데뷔 영화인 「어제 내린 비」를 불러야 했다. 그들이
정해준 것이었다. 노래를 부르자 하루종일 끓어오르던 분노가 서러
움으로 바뀌어 눈물이 솟아나왔다.
비열함과 순수함의 경계선
다음날, 일어나니 방에는 30여 명의 사람이 자고 있었다. 전날
맞은 엉덩이와 뺨이 부어 화끈거렸다. 엉덩이를 만져보니 구렁이가
감고 있는 것처럼 부어 있었고 팬티가 상처에 달라붙어 있어 조심스
럽게 뜯어냈다.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일어
나고 배식이 시작되었다. 콩밥과 무짠지, 소금국이 전부였다. 밥을
보자 시장기가 밀려와 그것을 순식간에 먹어버렸다.
식사가 끝나자 보마(보건사회부 마약단속반)에서 직원이 나와 이
름을 불렀다. 호명된 사람은 삼십 분내로 준비하고 다시 여성회관으
로 끌나갔다. 한 녀석이 내 손을 잡았다. 놀라 쳐다보니 나와 함께
듀엣 활동을 했던 규대였다. 그들이 내게 왜 관심을 가졌는지 알
것 같았다. 이른바 청년문화의 기수라고 언론에 소개된 작은형을 잡
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러나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대통령의 아들로부터
시작된 파동은 나에게까지 온 것이고, 나도 대마초를 한 번도 피우
지 않았거나 완전히 시치미를 떼었으면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여성회관으로 끌려간 우리는 각자의 차례가 될 때까지 다른 마약
사범들과 판매책들이 몽둥이로 얻어맞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
것이 직접 맞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차례가 되면 다시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내게
함께 피웠던 여배우를 대라고 했지만 그런 사실이 없었으니 얻어맞
을 수밖에 없었다.
심문을 당하는 것은 우리의 일과였다. 아침을 먹고 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기를 바라며 모두들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웠다. 그러다 운이 좋아 이름이 불려지지 않으면 한숨을 쉬며 좋
아했다. 디스크 자키 겸 가수였던 이진 씨가 그 순간을 제일 견디기
어려워했다. 지금도 그의 침통했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가 얼마
나 심약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끔찍한 여성회관의 지하실에
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 바로 요즘 개그맨의 대부로
불리는 전유성 씨다.
며칠이 지나자 그들도 더 이상 우리를 때리지 않았다. 그 대신 히
로뽕이나 대마초 판매책들과 기지촌 아가씨들은 우리와 달리 동물
처럼 취급했다. 차츰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했다.
취조관이 다가왔다.
야 너희들 같이 피운 사람을 다 불었으면, 이제는 피울 만한 사람
이라도 불어. 좀 유명한 사람말야.
이때였다. 전유성 씨가 입을 열었다.
저, 최불암 씨하고 피운 적이 있는데요.
뭐, 정말이야? 어디서?
취조관이 긴장하며 물었다. 전유성 씨는 그의 긴 목을 몇 번 흔들
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방송국에서 담배 한 대 같이 피웠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취조관이 전유성 씨의 뺨을 후려치려 했
다. 그러나 키가 작은 그의 손은 키가 크고 목이 유난히 긴 전유성
씨의 뺨에 닿지도 않고 허공을 갈랐다. 그때까지 웃음을 참고 있던
우리는 그만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흥분한 취조관은 소릴 질렀
다.
머리 숙여!
전유성 씨는 키 작은 취조관에게 엉거주춤 머리를 숙였고 엉망으
로 얻어맞았다. 정말 훌륭한 개그였다. 그가 오랫동안의 슬럼프에
서 벗어나 지금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성회관에서 정신병원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저녁을 먹었다. 작
은형과 내 앞으로 영치금이 들어와 우리는 간호사에게 부탁해 짜장
통조림을 구입했다. 이것은 동창생 녀석이 관리했다. 짜장을 밥에
비벼 먹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는 짜장밥이었다. 이런 상황에
서도 짜장 한 숟가락을 더 얻기 위해 사람들은 내 동창생 녀석에게
그렇게 아첨을 떨 수가 없었다. 나는 녀석이 한 숟갈을 더 준다고
해도 사양했다.
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모두 둘러앉아 근식 형과 함께 활동하는 섹
션 맨들의 연주도 들었고, 석찬이나 다른 무명 가수들의 노래도 들
었다. 그것도 지겨워지면 명사 게임을 했다. 일종의 낱말 맞추기 스
무고개였다. 이렇게 조금씩 주어진 상황에 적응해 갔다.
여성회관으로 끌려가지 않는 날은 여기저기 다니며 환자들을 관
찰했다. 평생에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
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나는 한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녀는 항상 먼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깊은 생각에 빠진 사
람처럼 말이 없었다. 그 동안 조금 친해진 간호사에게 그녀에 대해
서 물었다. 모르겠다는 말만 하는 간호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집요하게 물었다. 간호사는 망설이다 그녀의 남편은 동백림 사
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받다 죽었고, 그녀 자신은 저
지경이 되었다는 것과 그녀가 불문과 교수였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그녀가 있는 방으로 다시 갔다. 그녀는 철창으
로 막힌 방에서 여러 명의 여자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불어로 말을 걸었다.
알루. 마담. 꼬망 싸 바?
손으로 밥을 집어먹던 그녀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황급히 다
가왔다.
부 파를레 프랑쎻?
위.
그녀의 불어를 할 줄 아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환
하게 웃었다. 나는 계속 불어로 물었다. 어디가 아프냐는 질문에 그
녀는 머리를 가리키며 알 라 떼뜨. 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여대에서
교수로 일했다고 얘기했다. 남편에 대하여 묻자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손으로 밥을 집어먹으며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가
슴이 아팠다.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누이동생이
고문을 심하게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가슴이 저
렸다.
그녀와 내가 불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본 사람들이 소문을 냈
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내 애인으로 불려졌다. 그녀가 불어로
사람들을 부르면, 그들은 내게로 달려와 야, 이영호, 니 애인이 찾
는다. 며 놀려댔다. 그녀는 처음 얼마 동안은 말을 잘하더니 며칠이
지나자 다시 침묵하기 시작했다. 나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간호사는 항상 저렇다고 대답했다. 나의 호기
심 때문에 그녀의 병이 더 악화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무서운 세상을 철없이 보냈다. 부끄러웠다.
빼갈 반입 작전과 간장도둑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났다. 고참들이 서대문 교도소로 이감되
고, 작은형이 방장이 되었다. 우리는 신입식을 없애고, 신입들을 따
뜻하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대마초를 피운 범법을 했지만 범죄자는
아니었다. 더 이상 여성회관에 불려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
던 어느 날 아침에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
는 소의 심정으로 여성회관으로 갔다. 다행히 형식적인 것들을 위한
호출이었다. 심문을 받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그때 가수 양병집이 들어왔다. 우리는 아는 체를 하였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미 우리가 겪은 과정을 다 겪
고 난 후 자유로운 상태였다. 나는 정신병원의 술꾼들이 부탁하던
빼갈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양병집은 한동안 생각하더니 알았
다고 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얼마 후 코트 안에 감춰 가지고 들어온 사 홉들이 빼갈 두 병을
받았다. 운반책을 정했다. 제일 순진하게 보이는 나와 다른 친구 하
나가 운반책이 되었다. 발각이 되어도 맞아죽지는 않겠지 하고 이를
악물었다. 나는 돌아갈 무렵 빼갈 한 병을 코트에 집어넣었다. 다른
한 병은 다른 친구의 코트 소매 안에 집어넣었다. 계속 태연을 가장
하며 돌아오는 지프 안에서 조금 친해진 수사관과 얘기를 주고받았
다. 그는 우리가 만난 수사관 중에서 가장 인간이었기 때문에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정신병원에 도착하자 나는 양손을 벌리고 그 수사관의 앞에 섰다.
그는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발목 등을 조사하고 나를 통과시켰다.
바람같이 달려가 침구 제일 밑에 술병을 감췄다. 그러나 사건이 벌
어졌다. 소매에 술병을 넣고 들어온 다른 운반책이 그만 발각이 된
것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수사관이 그 친구를 개처럼 끌고 들
어왔다. 그의 얼굴은 이미 코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며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수사관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를 개처럼 팼다. 모두들 쥐죽은 듯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
다. 수사관이 입을 열었다.
나는 여러분들을 지성인이라고 생각해서 인간적으로 대해 줬다.
그러나 배신을 하니 실망했다. 앞으로는 내게서 인정을 구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그리고 아까 이 친구하고 함께 들어온 사람들 이리
나와!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며 일어섰다.
이영호. 자네 혹시 술 갖고 들어온 건 아냐?
아까 다 조사하셨잖아요.
속으로 덜덜 떨고 있으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수사관은
여기저기 뒤져보고는 나갔다. 모두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우선 만신창이가 된 운반책을 치료해 주어야 했다. 당직 간호사에게
달려가 구급약을 구해 주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니 모두 술
을 마시자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작은
형이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자, 박기사가 저렇게 고생만 하고 한 병은 압수당했지만, 영호가
가지고 온 빼갈이 한 병 있으니 한 모금씩이라도 나눠 마십시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 몰려들었다. 빼갈 한 병을 서른 명이 나
눠 마신다는 것은 무리였다. 한 사람이 제안을 했다. 서른이 넘은
사람만 마실 자격을 주자는 것이었다. 모두 이의가 없었다. 나는 서
른은 되지 않았지만 공로(?)를 인정받아 조그만 병 뚜껑으로 한 잔
얻어마셨다. 모두 한 뚜껑의 술을 천천히 음미해 가며 마시니 상당
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평생 이런 술맛을 다시 볼 수 없으리라는 생
각이 들었다.
서대문 교도소로 이감되거나 석방이 되기도 하여 방이 썰렁할 정
도로 인원이 줄었다. 아침에 여성회관으로 불려나가는 일도 눈에 띄
게 줄어들었다. 늦잠을 자기도 하면서 한결 마음이 편한 상태였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이 가능한 동물이 아니던가.
하루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밥에 비벼 먹는 간장이 자꾸 없어
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누군가 간장을 훔쳐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다
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망을 보기로 했다. 당번이 정해지고 모두 자
리에 누웠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뜨니 당번을 맡았던 친구가 범인을 잡았
다고 소리를 질렀다. 범인은 가벼운 정신질환으로 입원해 있는 남자
환자였다. 그는 간장을 콜라 같은 청량음료로 알고 있는 듯 했다.
우리는 망연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것을 그
렇게 마시면 몸에 해롭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간장 값도 사
실 싼 것이 아니었다. 간호사들이 불법으로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었기 때문에 담배도, 모든 깡통 식품도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도 그 환자는 우리가 모두 모여 앉아 얘기를
하고 있는 중에도 자신이 투명인간인 것처럼 가만히 들어와 간장병
을 병째로 들고 마셨다. 조금만 방심해도 이미 그가 몇 모금을 마신
뒤에야 그를 제지할 수 있었다. 안타까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 깨닫게 해준 사
건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어가 틀리고, 생각이 틀리고, 지향하는 것
들이 모두 틀리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그래도 버릴 수
없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와 삶이다. 그를 바라
보면서 한없이 슬퍼졌다. 나도 언젠가는 저 사람처럼 남들과 틀리게
되리라. 남들은 나를 한없이 가엾게 바라보리라.
이런저런 사건을 목격하며 정신병원까지 간 나 자신의 운명을 곰
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책이나 영화를 통한 간접체험 속의 세상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을 절절히 느꼈다.
어느새 정신병원에 들어온 지 십여 일이 지나갔다. 구정이었다.
다음날이면 풀려나갈 것이라는 얘기를 이미 들었기 때문에 소지품
을 챙겨놓았던 나는 이름이 호명되자 수사관을 따라나섰다. 작은형
과 몇 사람도 함께 여성회관으로 갔다. 나를 협회에서 잡아온 그 경
위가 와 있었다. 그를 보는 것조차 끔찍했다. 그는 차 한 잔을 하자
며 작은형과 나를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고생들 많이 했네. 앞으로 얼마 있다가 약식재판을 받을 거고 벌
금 얼마 내면 될 거야.
우린 그저 예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우리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그가 007 가방을 들고다니는 행상을 부르더니‘낙타눈깔’이
있느냐고 물었다. 다음날부터 거의 매일밤 그 경위를 죽이는 꿈을
꾸었다
연애활동 전면 금지
응암동 시립 정신병원에서 나와서 거의 두문불출하였다. 지숙은
대마초 사건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과 만나는
동안 대마초를 피운 적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냐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설명을 해야 했다. 그녀는 그렇다면 자신도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물론 그녀가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연예인의 파급효과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그녀는 나를 연예
인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하는 말이었다.
무한정 집에만 박혀 있을 수가 없었다. 남은 촬영을 끝내야 했다.
영화사에 들러 인사를 했다. 그들은 위로의 말을 해주었지만 사실
그들이 더 위로를 받아야 했다. 영화를 완성해 보아야 흥행결과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매스컴에서는 대마초 연예인들의 모든 연예
활동이 전면 금지될 것이라는 보도를 하고 있었다. 나머지 촬영 때
는 연기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몇 달이 지났다. 모든 촬영을 끝냈다. 방영 중이던 모든 CF도 중
지되었다. 이제 연예활동은 끝이 난 것이다. 촬영을 마친 영화는 극
장에서 상영될 것이지만 모든 방송과 인쇄매체에도 홍보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흥행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
사실을 영화사나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세월을 허송할 수는 없었다. 「별들
의 고향」과 「어제 내린 비」의 성공으로 돈을 번 작은형은 우리가
살던 상도동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집을 사고 이사를 했다. 집에
는 어머니와 아버지뿐이었다. 누이동생은 아직 긴급조치위반으로
교도소에 수감중이었다.
지숙은 비행기를 그만 타겠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
을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타락하는 것은 나 하나로 족한데 지숙마저
그러는 것 같아 언짢았다.
지숙은 이대 입구에 양장점을 차렸다. 그녀의 회화과 동창들이 실
내장식을 하는 것을 거들다가 지숙과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잘 보이지 않아 사포질을 잘못한다고 계속 투덜거렸다.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었지만 내 눈에 대한 그녀의 불평은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전에도 말다툼을 하고 나면 내가 어두운 곳에서 보지 못한다
는 것을 알면서도 사라지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술 취한 망나니처
럼 고함을 질렀다. 어려서부터 내 약점을 악용해 비열한 짓을 하는
인간들을 너무 싫어했다.
양장점 개업식날 모든 것이 끝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음식을 장만
해 오셨고, 나는 양주 한 병을 혼자서 거의 다 마시고 취해 버렸다.
통금에 걸리지 않기 위해 11시쯤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차가 이미
끊어진 뒤였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택시비가 없었다. 다시 지숙의
양장점으로 돌아갔다. 지숙은 그녀의 어머니와 문을 닫고 나오는 중
이었다.
사태를 짐작한 지숙이 어머니에게 먼저 택시를 잡아주었다. 그 순
간 그녀의 어머니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지숙은 나를 상도동에 내려놓고는 화곡동으로 가버렸다. 택시를 타
고 오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다음날 장문의
편지를 써가지고 그녀의 양장점으로 갔다. 그리고 그 편지를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지숙과의 길고 행복했고 힘겨웠던 만남은 이렇게
4년 만에 끝이 났다.
라쇼몽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일본적 로고스를 서양적 파토스
영상으로 재현한 뛰어난 작품이다. 아내를 데리고 여행을 하던 한
서생이 산적에게 살해되고 그 산적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단순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죽은 자를 포함한 사건의 당사자인 세 명과 목격자의 진술
은 모두 다르다. 관객은 네 명의 진술을 통해 산적이 한 남자를 죽이
고 그의 아내를 강간했다는 사실만을 알게 되지만 그 사건의 진실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야기는 비를 피하기 위해 라쇼몽에 모인 나그네 중 한 사람인
승려에 의하여 서술된다. 이렇게 하나의 작고 단순한 사건도 사건의
주체인 인간이나 방관자에 의해서도 진실이 밝혀질 수 없는 것이고
또 역사로 기술되었다고 해도 그 진실은 영원히 밝혀질 수 없는 것
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자기 비하 혹은 미화로 인한 인식론적 오류
를 다룬 것이다.
갑자기 「라쇼몽」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이 시점까지 서술한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이 인식론적 오류를 피할 수 없고 또한 나
와 내 인생 여정에서 살을 비비고 살아온 많은 사람들의 서술 역시
이러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서생은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기 위해 죽은 후에도 무당의 입을 통
해 거짓을 말하는지도 모르고, 강간당한 아내는 자신의 음탕함을 호
도하기 위해 거짓증언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산적은 자신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목격자는 어떨까? 그는 범행현장을 목격하고도 용기가 없
어 살인행위를 막지 못한 죄의식 때문에 거짓 서술을 한다. 그는 카
뮈의 「전락」의 주인공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스스로 존
엄한 인간의 지위에서 전락을 택한 것이다.
음식점 모랑 시절
지숙과의 헤어짐은 황폐해진 생활에 겨우 남아 있던 실낱 같은 희
망마저 앗아가 버렸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강제 실업상태
에서 모든 의욕을 잃고 방황하였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친구들
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일이었다. 나이트 클럽의 웨이터들은 내 얼
굴만 보고도 여전히 외상을 주었고, 술값은 쌓여가고 갚을 길은 막
막했다. 내 인생은 파탄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채로
오후가 되어 일어나면 다시 명동으로 나가 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취해서 잠드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명동에서 옷가게를 하는 성진으로부터 전화를 받
고 나갔다. 성진은 그날 밤 가게의 손님인 한 아가씨의 생일이니 함
께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했다.
대연각 나이트 클럽으로 갔다. 세 여자가 성진을 기다리고 있었
다. 그들은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 성진이 미리 내가 눈이 나빠서
이렇게 어두운 나이트 클럽에서는 잘 보지 못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빨간 등의 숫자를 세어 머리 속에 입력했다. 술
을 마시고 춤을 추고 떠들고 하며 네 시까지 앉아 있다가 호텔을 나
와 마포에 있는 해장국집으로 갔다.
그제야 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생일파티의 주인
공은 미숙이라는 여자였고 다른 둘은 지은과 정인이었다. 나와 춤을
추며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던 여자가 정인이었다. 정인은 매우 수
줍어했다. 돈이 좀 있는 집에서 자란 재수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트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노는 여자애들이니 그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 정인이 전화를 했다. 명동에 있는 까페에서 보자는
것이었다. 약속시간이 되어 나가니 그녀가 미리 와 있었다. 나는 항
상 약속시간보다 십분 정도 일찍 나가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
다. 어두운 곳에서 상대방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
를 생각해 조명이 밝은 장소를 택했다고 했다. 기특한 생각이 들었
다. 하기야 지난번 어두운 나이트 클럽에서 잘 보이지 않아 실수를
많이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
런데 고작 열아홉 살이었다. 데이트 상대로는 너무 어렸다.
그녀가 놀라운 얘기를 했다. 응암동 정신병원에서 오빠가 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오빠의 이름을 묻자 망설이다 대답을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오빠는 당시 모 고관의 아들 대마초 사범
으로 구속 이라는 제호로 신문에 보도된 인물이었다. 그럼 이 여자
는 그 고관의 딸, 갑자기 난감해졌다.
그녀는 시사에도 전혀 밝지 않았고 내가 늘어놓는 문학이나 고전
음악에 대해서도 몰랐다. 그럼 지금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 재수생
이라고 했다. 나도 재수 경험이 있는데 그렇게 나이트 클럽에 다니
면 공부를 언제 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학교에 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와 얼굴에 묘한 매력이 있었다. 백치
와도 같고 천사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숙과의 헤어짐으로 입
은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그녀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
다. 친구들은 내게 도둑놈이라고 했다. 사실 너무 어렸다. 나는 이
미 이십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와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충무로에 있는 생선회
센터에 한 코너를 얻었다. 모든 연예활동이 금지되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장사는 제법 잘 되었다. 손님이 너무 많아 다른 코너의 테이
블을 빌려야 했다. 장사를 한다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차츰 적응해
나갔다. 장사밑천을 만들기 위해 방 하나만을 쓰고 전세를 놓았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항상 처량한 느낌이 들었
다.
그러나 불행은 아직도 나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회 센터 전체가 폐쇄되어 버렸다. 임대 사기에 당한 것이었다. 피해
자는 우리까지 20명 정도였다. 우리는 건물주인으로부터 보증금 몇
푼만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한심한 노릇이었다. 이상하게도 피해
자가 우리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이런 고통이 나에게
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내심으로는 안도가 생겼다. 그것
은 남들과 똑같아지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미래에 대하여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는 실명한다. 그 정확하고 명료한 고통에 새로운 고통이 나에게만
주어진다면 너무 억울했다. 충분히 나는 고통받고 있지 않는가. 그
사이 장사가 잘 되어 돈을 모아 놓은 것이 있었다. 그렇게 큰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와 나는 다시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명보극장 뒷골목에
‘모랑’이라는 간판을 걸고 식당 겸 술집을 차렸다. 그 집엔 방도
두 개나 있어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영화에 종사하는 옛 동
료들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찾아주어 식당은 곧 자리를 잡았다. 어
머니는 함경도 토속음식인 가자미식혜와 명태순대를 특별안주로 만
들었다.
손님은 점점 늘었다. 동창들이나 후배들의 모임이 있을 때는 모랑
을 이용해 주었다. 대마초 사건으로 일을 못하는 선배를 위로해 주
기 위해 온 후배들에겐 술을 원없이 먹여주었다. 가게문을 닫고 회
현동 여관으로 데리고 가 밤새도록 술을 먹이기도 했다. 술집을 하
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런 순간만큼은 즐거웠다. 고등학교 3
년 후배인 재두와 명석은 아직도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나에게 도움
을 많이 준다.
정인과의 데이트는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여섯 시가
넘으면 집으로 가야 했다. 물론 나도 저녁장사를 하기 위해 모랑으
로 가야 했기 때문에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
는 술이 제법 취해서 자신이 요정에 나가는 여자라고 고백을 했다.
정말 기가 막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인줄 알았는데 요정에
나간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자신은 모 고관의 첩에게서 태
어난 딸이며, 그 남자는 이들을 외면하고 찾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녀는 중학교만 마쳤다고 말했다. 그녀는 울고 있었고 나는 너무 놀
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얘기를 끝낸 그녀는 그 동안 너무 행복했
었다며 이제 자신을 만나주지 않아도 된다며 눈물을 흘렸다. 정신없
이 술을 마시고 우리는 밤을 함께 보냈다.
나는 그녀를 떠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내 의식 깊
숙이 자리잡고 있던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일학년이나 아니면 취학 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
북아현동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예쁜 여자가 우리집 아래에 이
사를 왔다.
동네에서는 그녀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았다. 누군가의 정부라는
것이었다. 아이들도 그 소문을 들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한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마치 모의
라도 한 듯 살그머니 그녀의 방이 들여다보이는 축대 위로 기어갔
다. 우리는 모두 숨을 죽이고 엎드려 방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사
를 훔쳐보았다. 나는 눈이 나빠서였는지 아니면 나보다 큰 아이들에
게 좋은 위치를 빼앗겨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남녀의 정사를 본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땅바닥에 엎드려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꼈던 기억만 난다.
얼마 후 그녀는 동네에서 쫓겨났다. 여자가 이삿짐을 실은 리어카
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보고는 홀린 듯 쫓아갔다. 리어카는 동네를
벗어나 마포경찰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따라가다가 문득
집을 잃어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답고도 처연한 눈빛과 눈이 시리도록 하얀 투피
스는 뇌리 속에 깊게 각인되었다.
왜, 정인을 보고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그 여자를 의식 위로 떠
올렸을까? 그건 아마도 연민이 아니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속에서
자라고 있던 알료샤 콤플렉스가 아니었을까.
남녀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되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밤을 보내게 된다. 우린 그녀가 처한 어려움과 내가 처한 곤경을 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랑을 나눴다. 그러나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은 죽기 전에는 없는 법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생겼다. 정인이 임신을 했다. 어떻게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어린 생명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
렇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설득한다는 것이 힘든
일이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약혼식으로 끝나버린 결혼
결혼하겠다는 얘기를 꺼내자 어머니는 펄펄 뛰셨다. 집안꼴이 이
모양이고 내가 일도 못하고 있는데 말도 안 된다고 하셨다. 마지막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지숙과 4년 동안이나 연애를 하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을 아는 어머니는 내 말을 믿지 않으셨다. 나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병원에 가면 알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셨다. 우리 집은 방 하나만을 놔
두고 전세를 준 형편이고, 작은형도 어렵게 산 집을 일을 하지 못해
팔고 50만 원짜리 전세에 살고 있는 형편이었다. 방 한 칸 마련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무렵 명동의 빌딩을 팔고 혼자 아파트에서 살고
계셨다. 내가 정인과 함께 할아버지를 모시겠다고 했다. 이 제안에
어머니가 흔들리셨다. 그 동안 할아버지의 재산은 시중을 들던 여자
들에 의해 거의 다 없어졌기 때문에 내 제안에 어머니가 흔들린 것
은 당연했다. 어머니에게 반승낙을 받고 할아버지를 뵈러 갔다. 할
아버지는 정인을 보고 좋아하셨고 제안을 받아들이셨다. 어느 손자
에게나 그랬듯이 결혼비용을 주셨다.
이젠 정인의 어머니를 설득하는 일이 남았다. 정인의 어머니는 완
강히 반대했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호소했다. 정인의
어머니는 조건이 있다고 했다. 정인이 진 빚과 이런저런 용도로 적
어도 40만 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로는 적은 돈이 아니었지
만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50만 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함께 사는 것은 허락하되 결혼식은 올려줄 수 없다는
어머니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얼마 전 결혼한 덕
용에게 시계와 반지를 빌렸다. 예물 살 돈을 정인의 어머니에게 주
어버렸으니 그 방법밖에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반지의 세팅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실 뿐 전혀
의심을 하지 않으셨다. 양가의 친척들만 모여 중국음식점인 태화관
에서 약혼식을 올렸다. 1977년 겨울이었다. 큰형의 도움으로 강릉
으로 여행을 떠났다.
즐거워야 할 여행이었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이미 황폐해져 있
었다. 티격태격 싸움만 하면서 이틀을 보내고 정인의 집으로 갔다.
할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정인은 할아버지의 아파트로
들어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나는 달래다 지쳐 화를 내고 말
았다. 모두 없었던 일로 하고 너는 다시 요정에나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정인은 훌쩍거리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일은 나에겐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정인
에겐 벅찬 일이었다. 나는 아침에 모랑으로 출근하고 저녁 늦게 집
으로 들어가니 불편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하
루종일 할아버지의 시중을 들고 저녁 늦게야 나를 볼 수 있는 정인
으로서는 무척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밤눈이 어두운 나를
데리러 가야 한다며 할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내곤 매일 저녁 모랑
으로 나왔다.
그런데 어머니가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술도 파는 가게에 나이 어
린 색시를 나오게 하는 정신나간 놈이라고 역정을 내셨다. 그렇지만
하루종일 할아버지와 좁은 아파트에서 답답하게 지내는 정인이 불
쌍해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어머니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나는 동창들이 찾아와
서 술을 마시느라고 몰랐는데, 손님 하나가 계속 정인에게 추파를
던졌던 모양이다. 나중에 그 녀석은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지 정
인에게 수작을 걸었다. 술이 몹시 취한 듯해서 나는 점잖게 내 아내
이니 그냥 가라고 했다. 술이 취해서인지, 정인이 너무 어려 보였는
지 녀석은 정인이 내 아내인 것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다. 녀석은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
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참고 참았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녀석의 배를 걷어차려다 그만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녀석의 가슴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동창녀석들이 길길이 날뛰는 나를 제지하지 않
았으면 나는 폭력전과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태어나서 타인에게
폭행을 가한 적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그날의 행동은 정말 스스로도
놀라웠다. 대마초 사건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그 녀석에게 터뜨린
것이었다.
그 사건 후 나는 정인을 모랑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정인은
몹시 슬퍼했다. 그녀는 함께 요정에 다니던 친구들 외에는 다른 친
구가 전혀 없었다. 물론 그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정인은
우울증에 빠졌다. 요정에 나가는 것이 지겨웠겠지만, 그래도 나이
트 클럽이나 이태원 등을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지냈던 때가 그리웠
을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정인과의 결혼을 후회했다. 설상가상으
로 정인은 김장을 혼자 하고 나서 유산을 했다. 정인을 친정에 데려
다주었다.
할아버지의 시중을 들기 위해 어머니가 모랑과 아파트를 자주 오
갔다. 정인은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나는 정인의 집으로
가서 그녀를 데리고 와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이해할 수 있
을 것 같은데 그때는 정인의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에 정말 화가 났
다. 한동안 정인은 잘 견뎠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
는 신승수가 당시는 이경태 감독이 운영하던 ‘이 프로덕션’이라
는 CF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 순진한 친구가 내 동창
녀석에게 나만 믿고 돈을 꾸어준 것이었다. 물론 나도 꾸어주라고
말하긴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사라진 것이었다.
신승수는 자기 형까지 데리고 와 나에게 책임을 물었다. 대신 갚
아주겠다고 안심을 시켰지만 막막했다. 또 할아버지를 속여야만 했
다. 나는 주식에 투자를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200만 원을 얻었다.
그리고 40만 원을 신승수에게 주며 조건을 달았다. 내 동창녀석에
게 돈을 받아줘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 돈을 받을 수 없음
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주식에 투자해서 40만 원을 채워놓아야 했다. 그 돈을 통장
에서 꺼내기 위해 창구 여직원에게 통장을 분실했다고 하고 새 통장
을 만들었다. 처음 만든 통장은 할아버지가 갖고 계셨기 때문이었
다. 할아버지는 매일 주가를 물어보셨지만 내가 산 주식은 계속 떨
어지고 있었다. 점점 불안해졌다. 무슨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막막
했다.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동창을 만나 도움을 청했지만 그도 묘안
이 없었다.
문득 내게 늘 상냥하게 대해 주던, 증권회사 창구의 키 큰 여직원
이 나를 도와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접근하
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녀와 저녁을 함께 먹으며 큰손들에 관한 정보
를 달라고 하자 그녀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에게 얻은 정보로 주
식을 샀다. 그러나 주가는 그렇게 오르지 않았다. 통장의 돈만 줄어
들고 있었다.
야반도주
나는 정인에게 이제 더 이상 할아버지를 속일 수 없다고 고백했
다. 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있는 춘선에게로 가겠다고 했다. 정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가방에
짐을 챙기던 그녀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정인은 내 가슴
에 안긴 채로 한없이 울었다. 나도 울었다. 정인을 곤경에서 구해
준다고 시작한 결혼이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6개월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6개월이면 모든 문제가 해
결될 거라고 정인을 달랬다.
그녀를 보낸 다음 할아버지가 잠이 드신 후 아파트를 나섰다. 경
부선 기차를 타고 거창으로 출발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서울을 떠
나는 것은 홀가분했지만 수중에 많은 돈이 남아 있지도 않았고 모든
일을 해결하지도 않은 채 도망가는 자신이 한심했다. 춘선은 제법
커다란 한옥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하숙집 여주인에게 요양차 내
려왔다고 말한 뒤 춘선과 함께 방을 쓰고 돈은 제대로 주겠다고 했
다.
거창은 아주 작은 읍이었다. 책방에 들러 책을 여러 권 샀다. 그
동안 읽지 못한 책이나 실컷 읽고 싶었다. 춘선이 출근하고 나면 방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었다. 배가 고파지면 장터에 나가 국
밥도 사먹고, 저녁에는 춘선과 소주를 마시면서 하루하루를 보냈
다.
읍에서 십분을 걸어가면 개울 옆에 근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그 앞에는 닭백숙을 하는 집이 있는데 촛불을 켜놓고 술을 마시는
것은 정말 신선놀음이었다. 서울 일을 아득히 잊고 있을 때 증권회
사의 그 여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가가 점점 떨어져 팔아야겠다
는 것이었다. 나는 서울로 올라갔다. 주식을 팔아버리고 돈을 찾아
모랑으로 갔다. 어머니는 왜 연락도 없이 사라졌느냐고 책망하셨
다.
할아버지는 출옥한 누이동생이 모시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백만 원을 드렸다. 어머니는 마침 상도동 집을 팔고 역촌동에 집을
샀는데 돈이 모자라던 차에 잘됐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사하고 나면
서울로 올라오라고 하셨다.
거창으로 다시 내려갔다. 춘선은 같은 학교의 여선생을 좋아하고
있었으나 워낙 숫기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녀석
을 장가 보내야겠다고 작정하고 계획을 세웠다. 토요일이 되자 녀석
과 여선생을 데리고 진주로 갔다. 그리고 둘이 만취하도록 술을 먹
이곤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는 거창으로 돌아왔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춘선과 나는 서울에서 온 국어교사와 수학교사
인 여선생들과 어울려 자주 술을 마시게 되었다. 바닥이 좁은 곳이
라 금방 소문이 났고, 춘선은 교장 선생에게 경고를 받았다. 그런데
억울하게도 서울에서 온 영화배우가 모든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었
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니 이사를 하셨다고 했다. 이제 서울로 올
라갈 때가 된 것 같았다.
서울로 올라와 모랑에서 다시 일을 하며 저녁에는 어머니를 모시
고 역촌동 집으로 가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작은형이 역촌동
으로 들어오겠다고 했다. 나는 반대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작은형
으로부터 50만 원을 받고 허락하셨다. 어차피 두 집 살림을 혼자
책임지고 계셨으니 한곳에 모아놓는 게 생활비가 덜 들 것이라는 계
산이었다.
내가 도망간 후 누이동생의 시중을 받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아파
트를 팔고 함께 살자는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는 복부인
들이 설치고 다녀 집값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던 때였다. 역촌동
집도 제법 올라 있었고 금방 팔렸다. 어머니와 나는 할아버지를 모
실 만한 큰 집을 보러 다녔다. 그런데 집값은 계속 올라갔다. 마땅한
집이 있어 계약을 하자고 하면 집주인은 또 값을 올렸다.
어머니와 나는 집을 보는 일에 지쳐버렸다. 우리는 아예 집을 짓
기로 마음먹고 땅을 보러 다녔다. 땅값도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작
은형이 어디서 정보를 입수했는지 염곡동이라는 곳에 농촌주택개량
사업을 한다는 것을 알아가지고 왔다. 지금은 서울시 서초구의 행정
구역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서울의 대부분 지역이 그러했듯이 온통
논과 밭이었다. 동네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희망의 집을 짓다
집을 짓기 위해 여러 가지 서류를 준비하느라 가야 할 곳이 많았
다. 상도동에 집을 지은 경험이 있는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인부들과 싸울 일이 걱정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저 할 일이 생긴 것
이 좋아 모랑은 어머니에게 맡기고 정신없이 구청과 설계사무실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정인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형이 술이
취해서 나를 보자고 했다. 정인을 이태원의 어느 룸살롱에서 만났다
는 것이었다. 자신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방에 들어와 인사
를 하길래 제수씨 하고 불렀더니 놀라서 도망가더라는 것이었다. 짐
작은 하고 있었지만 하필이면 작은형에게 발각되다니 어이가 없었
다. 어머니가 계속 추궁을 하시는 바람에 나는 정인의 비밀을 털어
놓았다. 어머니는 그렇게 음식도 잘하고 착한 아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믿을 수 없다고 하셨다.
다음날 정인이 모랑으로 전화를 했다. 정인은 울면서 이제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도 힘든 그녀의 집안 형편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녀를 책망할 자
격도 없었다. 내가 그녀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인과의 8개월간의 소꿉장난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집을 짓는 일은 정말 힘이 들었다. 이른바 오야지라고 하는 목수
가 창고 하나만 덜렁 지어놓고 돈을 챙겨 도망가 버렸다. 그 밑에서
일하던 목수들이 우리에게 임금을 달라고 독촉했다.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목수를 구하고 공사를 계속했다. 이번에는 경비를 보
던 친구가 시멘트를 몰래 팔아먹었다. 그 경비를 쫓아내고 나니 외
상값을 받으러 술집과 구멍가게에서 찾아왔다.
어머니가 우려했던 모든 일들이 하나씩 터졌다. 시멘트 파동이 일
어났다. 시멘트를 구할 수 없었다. 정말 살아가기 힘든 나라라는 생
각이 들었다. 박정희 정권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고 세상이 미
쳐가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청탁을 해서 시멘트
300 포대를 구했다. 돈은 계속 들어가고 집을 완성하는 일은 불가
능해 보였다.
막바지에서 만난 사랑
공사 현장에서 일을 마치고 술에 취해 자는데 전화가 왔다. 할아
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아파트로 달려가니 이미 장의사가 염
을 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할아버지의 용서를 받지 못한 죄인이 되
었다. 집을 다 짓고 나서 용서를 빌려고 했었는데. 후회해도 소용없
는 일이었다.
장례 치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불란서문화원의 양미을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불란서 영화학교를 알아보러 들렀다가 그녀의 책상 위
에 놓인 카드가 예뻐 누구 솜씨냐고 했더니 친구가 만든 것이라고
해서 농담처럼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연락을 한 것이었다. 상중이라
곤란하니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더위를 못 참는 아버지께서 지관을 데리고 묏
자리를 본다고 도망가셨다. 큰형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고 작은형
은 공사현장에 가 있고 혼자 상주 노릇을 하려니 정말 힘이 들었지
만, 할아버지께 지은 죄를 갚을 기회라 생각하고 견뎠다. 문상객이
많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할아버지를 포천의 선산에 모시고 다시 공사에 매달렸다. 양미을
씨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친구를 소개해 준다고 한 약속을 지키
겠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친구 엄보경은 호텔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큰 눈
이 마음에 들었다. 늘 그랬듯이 내 눈에 대하여, 또 내가 만났던 여
자들에 대하여 털어놓았다. 우리는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부터는 집을 짓는 일이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희망
이 생긴 것이었다. 좌절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
다. 집은 어머니가 모랑을 판 돈과 할아버지가 쓰고 남기신 800만
원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완성이 되었다.
집이 완성되고 나니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2층의 내 방에서 청계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녀와의 데이트에는 큰 문제가 없었고, 사람들이 언제 결혼하느냐
고 물으면 그냥 내년 5월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십년 가까이 다니
던 호텔을 그만두고 양품점을 차렸다. 자연히 그녀의 양품점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장사도 제법 잘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정인이 가게로 들어왔다. 정인과 나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른 정인을 끌고 나갔다. 그녀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결혼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정인을 보내고
나자 그녀는 아직도 만나는 거냐고 하며 화를 냈다. 아내에게로 가
니 아직도 만나는 거냐고 하며 화를 냈다. 아무 대답도 안하고 양품
점을 나와 집으로 갔다.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제일 싫었다.
집에서 음악을 듣거나 그러다가 지겨워지면 구룡산에 올라가거나
거창에서 그랬던 것처럼 염곡동을 구석구석 거닐며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확인도 하지 않고
몰아세운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이해할 수는 있지만 다시 그
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봄이 왔다. 사람들에게 공언했던 5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1979
년 5월, 결혼 준비를 했다. 가족들끼리 상견례를 치르는 따위의 번
거로운 일이 질색인 나는 모든 절차를 서둘러 끝냈다.
결혼식을 마치고 여행을 다녀오니 결혼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새
집에서의 새 출발.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단지 내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내는 양품점을 정리하고 무언가 새로운 일을 찾고
있었다. 나는 불란서 유학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알리앙스 프
랑세즈에 다니며 학교를 알아보았다.
좋은 학교(LIDHEC)를 찾았으나 나이 제한이 있었다. 너무 많
은 시간을 낭비한 것이었다. 우리는 운이 좋았던지 남대문에 399만
원을 주고 산 상가가 1200만 원까지 올라가 900만 원의 차액을 남
겼다. 그러나 일정한 수입이 없었던 아내는 그 돈을 이자를 받을 요
량으로 남에게 빌려주었다. 그 돈은 결국 날아가 버렸다.
아내는 십년이 지나서 그 돈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900만 원
하던 아파트는 1억을 훨씬 웃돌고 있었으니 무슨 가치가 있었겠는
가? 하여튼 노력하지 않고 번 돈은 의미가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10·26과 복권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이 시해되었다는 뉴스를 들으며 깨어
났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직접
적인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만세를 불렀다. 나는 지하실로
내려가 100개의 바늘이 꽂힌 박정희의 사진을 떼어냈다. 죽은 자를
더 이상 저주할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정치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무
슨 변화가 있을 것은 분명했다. 12·12 사태가 일어났고 전두환이
실력자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이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나는 이 무렵까지도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누이동생이 구속
되었어도 그저 가족의 일원에게 불행한 일이 생긴 것으로 생각했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쨌든 모든 대마초 연예인들이 복권되었다. 작은형도 다시 영화
를 만들 준비를 했고 나도 그 영화에서 역할을 하나 맡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야간에 촬영이 많아 내게는 무척 힘든 작업이었
다. 그리고 촬영이 진행되면서 세발과장의 성격이 퇴색되어 나는
흥미를 잃고 있었다. 작은형과 작품에 관한 언쟁이 자주 벌어졌다.
그러나 그는 감독이고 나는 배우였다. 그것도 연기에 대해 확신도
갖고 있지 않은 배우였다. 연기를 하는 것은 그저 밥벌이를 위한 일
이었다.
1980년 7월 10일 아들이 태어났다. 이 녀석은 스스로 나오지도
못하고 시저처럼 어미의 배로 나왔다. 참으로 신비한 경험이었다.
이름은 미리 지어놓았다. 딸이면 슬기, 아들이면 한울. 녀석의 이름
은 한울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작명가가 이름의 음양오행이 맞지
않는다고 샘물로 바꾸라고 해서 녀석은 어릴 때는 샘물로 불려지기
도 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고무 젖꼭
지를 사러 시내의 유아용품점을 다 뒤져야 했다. 당시는 수입이 자
유롭지 않아 그것 하나 구하기도 힘든 노릇이었다. 고무 젖꼭지를
일일이 빨아보고 골랐다. 구멍이 너무 커도 안 되고 너무 작아도 말
썽이었다. 밤마다 젖꼭지와 젖병을 소독하고 손목에 우유를 한 방울
떨어뜨려 온도를 확인하고, 이런 자질구레한 일로 항상 밤잠을 설쳐
야 했다. 한울의 눈이 나처럼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키웠다. 다
행히 눈은 이상이 없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을 끝내고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지만,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 더구나 한 영화사는 부도까지 나서
출연료가 모두 날아가 버렸다. 이 무렵 허병섭 목사님과 이철용 씨
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이철용 씨의 역할을 내가 맡게 될 것 같아
그를 연구하기 위해서 시작된 만남이었다. 『어둠의 자식들』이 베
스트 셀러로 엄청나게 팔리던 때였다.
민속촌으로 김금화의 굿을 보러 가자고 하여 약속장소인 동대문
으로 가니 목사, 신부, 노동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목사나 신부가 굿을 보러 간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나는 민
속촌에서 그들과 하루를 보내고 이철용 씨의 집에서 이틀을 묵었다.
삼양동의 그의 집에는 많은 노동자들과 운동권 사람들이 드나들었
다. 이틀 동안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무용하는 한상근, 국
악하는 김영동, 승려였던 석도수, 그리고 현숙, 남수와 같은 여공
들.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참으로 편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어울려 보지 못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어린 한울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허병섭 목사가 목회하는 동월교회를 매주 나가게 되었다.
허병섭 목사의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해 겨울에 세례도 받았다. 그
러나 사실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아니었다. 동월교회의 사람들과 목
사님에게 반했던 것이었다. 이젠 어디에서도 동월교회와 같은 곳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을 만나면서 세상의 문제에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되었고 머리
속으로만 생각하던 문제들을 몸과 가슴으로 느꼈다. 이들과 함께 인
천과 부천 그리고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것을 배
우게 되었다. 이들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사회의 정의니 부조리니 하
는 것을 관념적으로만 이해하는 패배주의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
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들과 함께 어울렸던 2년여의 세월이
정말 그립다. 이제는 그들도 모두 변하여 다른 사람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동월교회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무
렵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시각장애인 안요한 목사였다. 어려서부터 야맹증과 희미한 시력을
가지고 살아온 나에게 딱 맞는 역할이었다. 나는 시각장애인의 감정
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촬영이 시작되었고 연기를 해볼 만한 역할이었으므로 신바람이
났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서울역에선 정말 거지로 몰려
쫓겨나기도 했고 어려운 촬영도 많았으나 처음으로 연기하는 재미
를 느꼈다. 세 명의 눈먼 소녀들의 찬송가를 들으며 연기가 아닌 진
짜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촬영을 마쳤다.
촬영이 끝나고 후반작업이 시작되었다. 스텝들은 편집을 하고 녹
음 준비를 시작했다. 미 8군에서 통역관으로 일할 때의 장면들을
찍었다. 당시에는 동시녹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로 연기한 대
사를 소형녹음기로 녹음했었다. 조감독은 그 녹음테이프를 영어로
녹취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나에게 가지고 왔다. 그는 나를 만나지
못하고 마루의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갔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라져
버렸다.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술에 만취한 작은형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내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와 커튼을 다 뜯어버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통금이
풀리자 아내와 함께 누나의 집으로 갔다. 마침 어머니는 한울을 데
리고 누나의 집에 계실 때였다. 한울을 데리고 임시로 거처를 처가
로 옮겼다. 급히 아파트를 구해 이사를 했다. 어차피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끝내고 미국 유학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
에 마음은 가벼웠다.
영화 상영일자가 결정되자 작은형이 찾아왔다. 영화의 홍보를 위
해 내 도움이 필요했다. 어차피 마지막이니 모든 것을 잊고 도와주
기로 했다. 내 눈이 나쁜 것을 홍보에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당시는
장애인으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로서는 대중에게 내
가 망막색소변성증 환자라는 것을 공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사실 나는 단순히 유학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공부가 끝나면 미국
에 주저앉을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것까지 받아들였다. 기자들과 인
터뷰를 하고 텔레비전 토크쇼에 나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11
시에 만납시다」의 공동 MC였던 탤런트 오미희가 내 이야기를 들
으며 눈물을 흘렸다.
어쨌든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흥행에도 성공했고 대종상 작
품상도 수상했다. 작은형은 대종상 감독상을 받았지만, 남우주연상
은 본인 녹음이 아니라 상을 줄 수 없게 되었다 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와 함께 막판 뒤집기로 안성기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나는 전
혀 미련을 갖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내 눈으로는 더빙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들이 후보엔 올려놓고 나중에 물밑
교섭을 한 것이 기분 나빴다.
이미 마음은 영화배우를 떠나 있었고 한국을 떠나 있었다. 얼마
후 한국일보에서 신인상을 준다고 했으나 상을 받으러 나가지 않았
다. 74년에 이미 대종상 신인상을 받은 사람에게 신인상을 주겠다
니 뭐가 뭔지 모를 일이었다. 더 이상 한심하고, 끔찍하고 무식한
군사독재하의 한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낯선 곳에서의 외침
영화 일을 모두 정리하고, 오퍼상을 하는 친구의 사무실에서 외국
대사관과 관련된 업무를 보며 미국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TOEFL
준비도 해야 했고 돈도 마련해야 했다. 연대에서 처음 TOEFL 시
험을 보던 날 비가 왔다. 시험관에게 자리를 옮겨달라고 했지만 거
절당했다. 나는 어두워서 답안지의 빨간 동그라미가 잘 보이지 않았
다. 세 번째 시간, 답안지를 다 메우고 나니 하나가 남았다. 어디서
부턴가 밀려 쓴 것이었다. 서둘러 고쳐 쓰는데 벨이 울렸다. 결과는
뻔했다.
한달 후 다시 시험을 보았다. 이번엔 부천에 있는 신학대학이었
다. 나는 손전등을 들고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답안지를 신
중하게 메워 나갔다. 580점. 당시로서는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든
받아줄 만한 점수였다. 뉴욕의 School of Visual Arts에서 온 입
학허가서를 받아들고 미국 대사관에 갔지만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
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었다. 영자신문에 난 내 기사까지 첨부했는
데도 젊은 여자 영사는 그런 것엔 관심도 갖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틀어졌다. 개강 날짜는 얼마 남지 않았고 잘못 하면
다음해까지 연기해야만 했다. 앙드레 김을 찾아갔다. 그가 미국 대
사나 총영사를 잘 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의 패션
쇼에 모델을 해준 적도 있어 그는 나를 도와주었다. 다음날 아침,
바로 비자를 받고 오후에 비행기를 탔다. 1983년 9월의 어느 날,
대한항공의 007기가 소련 영공에서 피격된 바로 그날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착잡한
심정이었다. 스카치 몇 잔을 청해 마시고 잠이 들었다. 며칠 동안
잠을 설치는 바람에 무척 피곤했다. 안내방송 소리에 눈을 뜨니 앵
커리지였다. 트래짓 에리어에 내려 콜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비행
기를 탔다. 다시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사람들이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사촌동생들이 나와 있을까? 만약에 얘
들이 나와 있지 않으면 지갑에 2만 달러가 넘는 돈을 넣고 뉴욕을
헤매야 하는가?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케네디 공항에 내렸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가니 다행히 사촌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 4 장
뉴욕 뉴욕 뉴욕
아침에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냄새도 달랐다.
아! 내가 미국에 왔구나. 그것도 뉴욕에 와 있구나. 사촌 동생들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창문으로 다가갔다. 낯선 지붕들이 내려다보
였다. 거리에 흑인과 백인들이 서너 명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샤
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동생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동생들이 일어나서 아침거리를 장만하러 슈퍼마켓에 갔다. 엄청
나게 컸다. 미국에 온 것이 실감났다.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다
웠다. 사촌들이 자리잡은 곳은 흑인들과 백인 빈민들이 섞여 살고
있는 브루클린의 코텔유 로드였다. 집세가 싼 곳을 찾아온 것 같았
다.
우선 학교에 가서 등록을 해야 했다. 사촌의 차를 타고 맨해튼으
로 갔다. 학교는 23번가에 있었다. 거의 한 시간 가량이 걸렸다. 수
속을 하는데 다행히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3일 후가 개강이었
다. 서른이 넘어 다시 시작하는 공부였다. 시간을 줄이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외국학생 상담을 맡고 있는 백인이 친절하게 이것
저것 알려주었다. 안내책자를 보니 뉴욕에서 강도를 당하지 않는 방
법과 길을 찾는 법, 지하철 타는 법 등이 적혀 있었다. 영화 「미드
나잇 카우보이」가 떠올랐다.
일을 끝내고 사촌 여동생이 오길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해는 저물기 시작했고 집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한
심하기 짝이 없었다. 학교 앞에 멍하니 앉아 기다리다 보니 덜컥 겁
이 났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택시라도 타고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흑인 운전사들이 뭐라고 지껄이며 서질 않았다. 이것도 인
종차별인가 하고 있는데 노란 택시가 한 대 섰다. 브루클린까지 갈
수 있느냐고 물으니 잠깐 망설이는 듯 하더니 좋다고 했다. 기사가
선량해 보여 우선 마음이 놓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
서 왔다고 하니 대한항공 여객기 피격사건을 얘기하며 자신은 러시
아에서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보고 운이 좋다고 했다. 내가 가려
고 하는 브루클린 지역을 마침 자기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맨해
튼 택시는 부르클린으로는 잘 가지 않는다고 했다. 언제 미국에 왔
느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기사는 그
렇다면 당신은 진짜 행운아라며 웃는다. 나도 따라 웃었다.
아파트 앞에 내려 팁까지 얹어 넉넉히 주니 고맙다고 하며 손을
흔들며 떠났다. 속으로 고마운 건 나다 하며 집으로 들어가니 사촌
여동생과 남편이 싸움을 하고 나갔다고 사촌 남동생이 전해 준다.
저녁에 동생들을 모아놓고 한바탕 호통을 치곤 다음날부터 지하철
타는 연습을 했다. 홀로서기가 가장 급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파트 관리인을 만나 같은 4층에 있는 스튜디오를 얻었
다. 월세 200달러짜리였다. 혼자 쓰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싸구려
매트리스 하나와 베개 그리고 조립식 책상 하나를 샀다. 그리고 프
라이팬과 냄비 등을 샀다. 이것들만 있으면 충분했다.
지하철 타는 것을 익히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나니 개강일이 되었
다. 교무과에 들러 수강 카드를 받아들고 첫 강의를 듣기 위해 엠피
시어터로 갔다. 영화사 시간이었다. 머리가 홀랑 벗겨진 영감이 들
어오더니 자기 소개를 하고 강의 계획서를 나눠주었다. 바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심호흡을 하
고 온몸의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십분쯤 후부터는 들리기 시작했
다. 이 교수는 영국 액센트가 조금 있어 귀에 익숙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첫 강의 후 학교생활은 힘든 것이 별로 없었다. 슈퍼 8mm 제작
은 조애나 키어넌이라는 영국 아가씨가 담당이었다. 그녀는 아주 이
지적이고 잘생긴 아가씨였다. 나보다 서너 살 어릴 것 같았다. 계속
살 물건들이 늘어났다. 카메라, 영사기, 편집기 그리고 타자기 등
등. 이것들을 구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금을 가지고 뉴
욕을 걸어다닐 용기도 없었고 지리도 잘 몰랐다. 우선 34번가에 있
는 한국 외환은행으로 가서 체킹 어카운트를 개설하고 수표책을 받
았다. 낯선 나라에서의 정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워 나갔다. 전화로 전화를 신청하면 되
는 것을 일부러 전화국을 찾아가서 시간만 낭비했고, 전화기를 타러
가서도 흑인 계집아이가 인종차별을 해서 마냥 기다리다가 백인 남
자에게 부탁해서 해결했다. 그 흑인 계집아이는 백인 상사에게 혼쭐
이 났다. 이런저런 일을 혼자 처리하다보니 한국에서는 몰랐던 표현
들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서서히 자신감이 생겼다.
여유가 생기자 학교 앞에 있는 코헨이라는 안경점에 안경을 맞추
러 갔다. 너무 오래 전에 맞춘 것이라 수업시간에 선생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닥터 모겐스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검안의가 내 눈
을 검사하다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나는 시력이 교정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병이 무엇인지는 아는데 영어로는 모른다고 웃었
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검안경으로 다시 내 눈을 들여다
보았다.
내 병명이 영어로 Retinitis Pigmentosa라고 가르쳐 주었다.
어떻게 이런 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표정이 밝을 수 있는가
물었다. 오래 전부터 적응이 되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전
문의에게 검사를 받아보라고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녀의 친절함에
감동해서 비싼 안경테를 권하는데도 아무 말을 못했다. 나는 그녀의
성이 독일어로 새벽별이란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고, 안다고 했다.
안경을 새로 맞춰 쓰니 그래도 한결 잘 보이는 것 같았다.
닥터 모겐스턴이 써준 소개서를 들고 닥터 위트너의 사무실로 갔
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미국은 한국보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을까 하는 사대주의적 발상이었다. 동공확대검사를 해야 한다
고 해서 내키지 않았지만 내친 김이라 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마친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치료법이 있느냐고 물으니 없
다고 했다.
그러면 내가 왜 검사를 받아야 했느냐고 물었다. 검사를 해야 어
떤 병인지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병을 왜
내가 확인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의사는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
다. 카운터의 백인 할머니에게 얼마냐고 물었다. 140달러라고 했
다. 의사는 이 돈을 받기 위해서 동공확대검사를 한 것이었다. 다
알면서 검사를 받은 내가 바보지, 동양인 망신을 시키는 것 같아 수
표를 써주고 나왔다. 기분이 더러웠다.
닥터 모겐스턴에게 전화를 걸어 화를 냈다. 그녀는 미안하다며 그
렇게 비쌀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불
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한국 촌놈이 뉴욕의 유태인 일당에게 당한
것이었다. 그들이 유태인인 것은 성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약이 올라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동공이
수축되자 한국어 신문의 구인란을 뒤졌다. 브루클린 95번가의 이태
리 식품점에서 낸 구인광고가 있었다. 전화를 거니 다행히 한국 사
람이 받았다. 나는 유학생이며 경험도 없으므로 최저임금만 받으
면 된다고 말했다. 다음날 와보라고 해서 수업시간표를 보고 난 뒤
약속시간을 정했다.
유학생활의 은인 박석기 선생님
다음날 오전수업을 마치고 핫도그 하나와 콜라로 배를 채운 뒤 지
하철을 타고 식품점으로 갔다. 작은 가게였다. 안경을 쓴 주인의 인
상이 꼭 고등학교 선생님 같았다. 나는 미국에 온 지 일년 정도 되었
다고 거짓말을 했다. 일주일밖에 안 되었다고 하면 도저히 일자리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주인은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언제부터
일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부터 당장 할 수 있다고 대답했
다.
주인의 이름은 박석기 씨. 광주에서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재직하
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온 분이다. 내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지속
적으로 도움을 주신 고마운 분이다. 실명한 후 소식을 전하지 못해
항상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
박 선생님과 작업시간표를 짰다. 월, 화, 목, 금은 2시부터 9시,
토요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주일에 40시간. 시간당 3
달러 50센트, 도합 140달러. 일주일만 일하면 그 도적 같은 안과
의사에게 강탈당한 검안비를 벌 수 있었다. 사실 도착해서 한동안은
한국 돈으로 환산하는 버릇이 남아 있어, 1달러가 넘는 점심은 엄두
도 내지 못하고 75센트를 주고 핫도그 하나와 콜라 하나로 점심을
때웠다.
박 선생님의 가게에서 일을 하고부터는 배가 너무 고파서 견딜 수
가 없었다. 그래서 학교 옆의 중국집에서 3달러를 주고 튀긴 닭 반
마리와 볶음밥으로 메뉴를 바꾸었다. 그 정도는 내가 버는 돈으로
충당이 되어서 정말 신이 났다.
학교수업도 그렇게 어려운 것이 없었고 아르바이트도 구했으니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된 듯했다. 처음 주급을 받은 날 모처럼 마음놓
고 한국으로 전화를 걸어 상당히 긴 통화를 했다. 그래도 외로움을
달랠 수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 시간이 모자라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잘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7시에 일어나 콜라와 우유를 반씩 섞어 마
시고 학교로 갔다. 무성영화를 보는 영화사 시간에는 꾸벅꾸벅 졸기
도 했다. 사실은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교수가 강의하는 내용은 책 속에 다 들어 있었다. 교수가 추천한
모든 책을 다 샀다. 그것만이 시간이 없고 완전하게 알아듣지 못하
는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실수도 많았다. 영어 작문의 스케줄을 착각한 것이었다.
시간표에는 M/W라고 적혀 있고 모든 수업이 일주일에 한 번씩이
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월요일과 수요일 중 한 번만 가면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내 시간표 작성을 도와주던 학생지도사도 그것을 몰
랐던 것이었다. 미국도 학부에서는 출석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선생
과 직접 면담을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첫 학기가 끝나
고 나니 전부 A를 받았는데 영어작문만 C를 받았다.
첫 학기는 정말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적표와 시험지를 한국으로 보냈다.
공부와 일을 하는 것엔 쉽게 적응이 되어갔지만 외로움을 견딜 수
가 없었다. 사촌 동생과 사촌 매제는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있는 와
그너 칼리지에서 어학연수를 받고 있어서, 한 아파트에 살면서도 얼
굴 보기가 힘들었다. 어느 날 나는 술이 취해 무작위로 전화번호를
누르고 낯선 여자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쳤
다. 이러다간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를 만들
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교에서 나에게 호감을 보이던 이태리계 미국인 조 콤파니아에
게 자주 말을 걸었다. 그리고 점심을 함께 먹기도 하며 가까워졌다.
조금씩 외로움이 가셨다. 아무리 18살의 미국 아이들이었지만 아내
와 아들을 고국에 두고 온 서른이 넘은 한국인이 불쌍했던 모양이었
다. 그러나 아이들과 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아르
바이트를 하지 않는 수요일 오후에 수업이 끝나면 조를 데리고 뉴욕
시내의 식당을 순례했다.
뉴욕의 거리는 서울 거리의 조도보다 10배는 밝았기 때문에 내
야맹증도 그렇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이것도 조의 용돈이 충분
하지 않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녀석은 내가 저녁을 사준다고 하
여도 극구 사양했다. 하긴 조의 집에 잠시 들렀을 때 나는 소파에
앉아 그가 저녁을 먹는 동안 쫄쫄 굶어야 했다. 초대받지 않았으니
저녁이 없는 것이었다. 말로만 듣던 얘기가 사실이었다.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다. 120명이던 아이들은 80명으로 줄어
들었다.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했거나 영화학교를 우습게 보고 들어
왔다가 낙오한 아이들도 많았다. 미국 대학생들의 생활을 지켜보면
서 한국의 대학생들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편하게 공부하는가를 알
게 되었다.
미국의 대학생들은 18살에 독립하는 대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
져야 했다. 심지어 등록금조차도 집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정부에
서 빚을 얻어 다니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생활을 위해 아르바
이트를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이 풍요의 나라 미국 대학
생의 실상이었다. 물론 돈이 엄청나게 많은 집 아이들은 예외인 경
우도 없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에는 유럽으로 가서 스키를 타고 오
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극소수였다.
사진은 영화학교에서는 필수과목 중의 하나였다. 찍는 것은 문제
가 아니었는데 야맹증이 있는 나는 암실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 정말
힘이 들었다. 희미한 붉은 등불 밑에서 겨우 더듬어가며 작업을 해
야 했다. 항상 내 옆에서 작업을 하던 이태리계 미국인인 리사 귀도
라는, 몸집이 큰 여자애를 내 자리로 가면서 항상 건드리게 되는 것
이었다. 물론 건드릴 때마다 쏘리 라고 말을 했지만 그녀는 어느 날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나는 그녀를 암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내 눈의 질환에 대해서 자
세히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끌어안으며 미안하다고 했
다. 이 사건 이후 리사와 나는 급속히 친해져 함께 점심을 먹기도
하고 편집을 하기도 했다. 미국에 온 후 10kg이나 빠졌기 때문에
그녀의 몸은 거의 내 두 배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씨 착하고 용감
한 여자아이였다. 나는 그녀가 이스트 빌리지의 다 허물어져 가는
아파트에 사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그녀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견딜 수 없이 외로운 나날들
이렇게 아이들과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학교생활을 잘 견뎠다. 집
에 돌아오면 공부할 일이나 영화 편집이 밀려 있을 때는 외로워질
시간도 없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견디기 힘들어 혼자 술을 마시
게 될 때도 많았다. 전화를 거는 버릇은 없어졌지만 혼자 있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날도 오전수업이 끝난 뒤 급하게 점심을 먹고 식품점에 가니 박
선생님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씀하셨다.
영!(박 선생님은 나를 영이라고 불렀다) 개 한 마리 안 키울래?
무슨 개요?
왜, 우리 가게에 항상 롤러 스케이트 타고 오는 금발 계집애 있잖
아. 걔가 독일 셰퍼트를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어. 궁금하면 가서
봐. 지금 바쁘지 않으니까.
그 애의 집에 가니 잘생긴 독일 셰퍼트 한 마리가 줄에 묶여 있었
다. 프린스라고 했다. 녀석은 너무 순해서 사람을 전혀 경계하지 않
았다. 여자애는 나에게 잘 부탁한다고 하며 흔쾌히 승낙했다. 가끔
가게로 데려오면 좋겠다는 말만 덧붙였다. 나는 녀석을 끌고 가게로
갔다. 가게 앞에 매어놓고 개밥 통조림을 하나 따서 주니 잘 먹었다.
얼른 앞치마를 두르고 할 일을 점검하는데 녀석의 줄이 풀어졌다고
박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쫓아나가니 녀석은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아무리 불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묶여 있는 것이 갑갑했던 모양이
었다.
나는 가게 일이 걱정이 되었지만 어슬렁어슬렁 녀석의 뒤를 따라
다니며 이름만 부를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거의 한 시간 정도
녀석을 따라다니다 보니 슬그머니 화도 나고 박 선생님께 죄송한 생
각이 들어 녀석에게 소릴 질렀다.
야, 프린스! 난 지쳐서 더 못 쫓아다니겠다. 나는 갈 테니 네 마
음대로 해라!
개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지만 그렇게 소리 지르고 나서
뒤돌아서서 가게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뒤
를 돌아다보니 녀석이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신기
했다. 녀석도 나처럼 외로웠던 모양이었다.
녀석을 가게 안쪽에 있는 부엌에 묶어놓고 밀린 일을 했다. 일이
끝나고 박 선생님은 차로 녀석과 나를 데려다 주셨다.
녀석과 함께 살면서 바론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주었다. 녀석도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징그러울 정도로 나를 쫓아다
녔다. 심지어 화장실까지 따라들어와 내가 일을 보는 동안 옆에 앉
아 있곤 했다.
그러나 개를 키우는 일은 아이 하나를 돌보는 일과 비슷했다. 아
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시키고 데리고 나가 용변을 보게 해야 했고
개밥값도 만만치 않았다. 어쨌든 녀석이 있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
는 날은 집으로 바로 와서 녀석을 데리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흑인
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지만 바론을 데리고 다니면 녀석들이 슬슬
피했다.
그 무렵에는 우리 동네에서 가게로 가는 버스 노선을 찾아내 버스
를 타고 다녔으므로, 가게를 가기 전 집에 들러 녀석의 용변도 해결
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혹시 그렇지 못한 날은 오줌을 참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싸곤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부엌 바닥에 오줌
을 싸게 했다. 그것을 닦아 내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외로움은 해결
되었지만 녀석의 뒤치다꺼리가 너무 힘겨웠다. 공부할 시간도 너무
많이 빼앗겼다. 녀석이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공부하러 왔지 개를 키우러 온 것이 아니라고, 속으로 변명하였
다. 녀석을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풀어놓고 나 혼자 돌아왔
다.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녀석은 아파트 앞에서 왔다갔다 하며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아무도 녀석을 데려
가지 않고 녀석은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나를 기다렸다. 마음이 약
해진 나는 내려가서 녀석을 데리고 왔다.
며칠이 지난 아침이었다. 녀석을 데리고 아침에 늘 하던 대로 밖
으로 나갔다. 나는 녀석의 목줄을 풀어주었다. 녀석은 껑충껑충 뛰
며 좋아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마음속에 녀석이 차라리 자동차에
라도 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녀석이 갑자기 건너편
의 비둘기를 보고 주차한 자동차 사이로 달려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 한 대가 급정거를
했다. 주차한 두 대의 차 사이로 달려나오는 녀석을 피할 수가 없었
던 것은 너무 당연했다. 나는 놀라서 달려갔다. 녀석은 일어나려고
버둥거려지만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눈물이 솟구쳤다. 마음속으
로 녀석이 죽기를 바라는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쉰 살
정도로 보이는 백인이 차를 세우고 다가왔다. 자기 잘못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하며 그를 그냥 보냈다.
녀석은 세 발로 겨우 나를 따라왔다. 녀석의 다리 하나가 차의 어
딘가에 부딪친 것 같은데 외상은 없었다. 그러나 녀석을 데리고 수
의사를 찾아갈 용기는 없었다. 치료비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이 뇌에 충격을 받았다면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 장의사에게 전화를 하니
400달러나 든다고 했다.
우선 학교 가는 일이 급했다. 녀석은 모로 누운 채 떨고 있었다.
학교에 가서도 녀석의 일이 걱정돼서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
았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녀석은 신기하게도 살
아 있었다. 왼쪽 앞다리를 절긴 했지만 개밥도 잘 먹었다. 며칠이
지나니 녀석은 약간씩 절면서도 잘 걸었다.
하루는 같은 동네에 사는 한국 사람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아 가
게 되었다. 녀석을 데리고 갔는데 그 아파트는 개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었다. 녀석을 밖에 묶어놓고 들어가 밥을 먹는데 밖에서 개주
인을 누가 찾는다고 연락이 왔다. 나가보니 백인 여자 둘이 바론을
달래고 있었다.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동물애호협회에서 일
하는 여자들이면 어떡하나. 동물학대로 걸리는 것이 아닌가? 한국
에서 살던 사람이니 피해의식이 고개를 들었다. 왜 개를 밖에다 묶
어놓았느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 아파트 현관에 붙은 사인판을 가리
켰다. 당신들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들은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라
고 했다. 우선 안심하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내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바론이 내 개인의 것인지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순간 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개를 키우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들은 그제야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그들은 나의 은인이었다. 차에 타지 않으려
는 녀석을 두 여자의 차에 강제로 태우고 차는 출발했다. 나보다 잘
키우겠지 자위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동안은 어른거렸지만 녀
석만을 생각하기엔 일이 너무 바빴다.
미국으로 날아온 아내와 아들
어느덧 두 번째 봄학기도 지나가고 있었다. 소형영화의 주제를
‘한국인의 이민’으로 잡았다. 박 선생님이 모델이었다. 새벽부
터 박 선생님의 일과를 추적했다. 킹즈 브리지에 있는 도매상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모습과 가게에 도착해 정리하는 모습, 그리고 일요
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 등을 촬영했다. 향수에 젖
은 모습을 스케치했다. 좋은 작품이 될 것 같았다. 편집을 하고 있는
데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여름방학에 맞춰 미국에 올 준비
를 하고 있으니 서류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아 보내고 집안을 정리했다. 맨 바
닥에서 매트리스 하나, 책상 하나, 그리고 텔레비전 하나가 덩그러
니 놓인 채로 살던 나는 우선 바퀴벌레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아침
에 학교에 가면서 스모크 밤(훈연살충제)을 네 개 터뜨리고 창문을
꼭꼭 닫았다. 누군가 연기가 새면 불이 난 줄 알고 신고할 것을 방지
하기 위해서였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니 정말 기가 막혔다. 마룻바닥에 수천 마리
의 바퀴벌레가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모두 다 쓸어내고 보니 전화
기 속에서 한 마리가 기어나왔다. 전화기를 분해해 보니 그 속에도
몇 마리가 숨어 있었다. 타이프라이터, 텔레비전, 라디오, 심지어는
벽에 붙어 있는 전화 콘센트 속에도 들어가 있었다. 정말 지독한 생
명력을 지닌 벌레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들이 죽으면서 모두
알을 까고 죽은 것이었다. 까만 모래알 같은 알이 수만 개는 될 것
같았다. 뉴욕 빈민굴의 바퀴벌레는 정말 끔찍했다. 나는 아직도 엘
리베이터나 아파트에서 나는 바퀴벌레의 퀴퀴한 냄새를 기억한다.
바퀴벌레를 소탕하고 리놀륨을 깔았다. 우리는 신발을 벗고 사는 사
람들이니 그것이 가장 싸고 깨끗할 것 같았다. 벽장 속을 정리하고
할 수 있는 한 깨끗하게 집을 정리했다.
방학이 시작되고 아내와 아들이 뉴욕에 도착하는 날이 되었다. 아
침부터 한울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과 먹을 것을 준비해 놓고 박 선
생님의 벤을 타고 공항으로 나갔다. 아내가 서울에서 모든 것을 정
리해서 오느라고 짐이 열다섯 개나 되었다. 아들과 아내는 새벽 한
시나 되어서 출구로 나왔다. 짐이 너무 많아 수속이 오래 걸렸다.
한울은 제법 커 있었다. 녀석은 제 짐을 챙기느라 바빴다. 제 장난감
은 철저히 챙기는 녀석이었다.
아파트에 도착한 아내는 한심한 모양이었다. 영화 속에서 보던 근
사한 아파트는커녕 직사각형의 공간만이 덩그렇고. 그것도 사방이
페인트로 칠해진 사무실 같은 모습이었으니 오죽했으랴. 한울은 내
가 사놓은 바나나를 일곱 개나 먹어치웠다. 녀석이 두 살 무렵 한
개에 이천 원씩이나 해서 아쉽게 먹던 바나나였으니 그럴 만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난 아내는 너무 실망하여 풀이 죽어 있었다. 돈
을 조금 더 주면 서울에 있는 아파트보다 더 좋은 것도 구할 수 있으
니 조금만 참자고 했지만 마음이 아팠다. 사실 그런 아파트에 산다
는 것은 유학생의 신분으로는 재벌의 아들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울을 귀국시키다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월드 트레이드 센터, 자유의 여신상, 엠파
이어 스테이트 빌딩, 카네기 홀 등의 관광지와 코니 아일랜드 등을
구경시켰다. 사촌 여동생의 차를 얻어타기도 하도 지하철을 타기도
하면서 돌아다녔다.
코니 아일랜드에서는 놀랍게도 바다가재를 바위 밑의 구멍에서
두 마리나 잡았다.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한울은 미국 아이들
의 부러움을 독차지한 채 바다 가재 두 마리가 들어 있는 모래 구덩
이를 지키며 으스댔다. 녀석은 바다가재를 쪄주니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즐거운 시간도 잠시였다. 아내는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했
고, 한울은 유아원에 다녀야 했다. 당장은 내가 돌볼 수도 있었지만
앞날을 위해 적응을 시켜야 했다. 영어를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는
한울로서는 엄청나게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처음 녀석을 유아원에 데리고 가서 보니 아이들은 모두 적응이 안
된 신참들인지 울음바다였다. 그래도 마음을 독하게 먹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 한울이 여선생들의 팔을 물어뜯고는 아빠 하며 뛰어
나왔다. 나는 차마 녀석을 혼자 두고 나올 수 없었다. 원장에게 사정
을 하여 적응할 동안만 내가 옆에 있기로 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
나 한울을 혼자 노란 스쿨버스에 태우니 타지 않으려고 버텼다. 억
지로 차에 태우고 아내와 나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야 했다.
유아원에서 돌아오는 한울을 마중나가니 녀석이 나를 보자마자
통곡을 한다. 며칠이 지나도 녀석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유아원에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아내와 나는 녀석이 하나님으
로 알고 있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꿈속에서 물어보라고 했다.
다음날 자신이 꾼 꿈을 얘기했다.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앞에 서 있어 유아원에 가야 하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래. 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녀석은 전날 산타할아버지가 영어
로 물어보면 어떻게 하냐고 해서 가르쳐 주었는데 그 말을 외우며
잠이 들었었다.
녀석의 꿈 얘기를 듣고 나서 아내와 나는 한울을 유아원에 보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이에게 정신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나
는 유아원에 한울과 함께 지내면서 유아원의 시설이나 보모의 자질
이 엉망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결정한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의 유아원(Daycare Center)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낙후되어 있다. 그래서 미국 내에서도 비판의 소리가 높다. 우
선 유아원 보모들이 유아교육을 전공한 전문인이 아니고 고등학교
를 중퇴했거나 졸업한 정도의 여자들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돌볼 만
한 소양도 갖추고 있지 않다. 물론 이런 사실이 브루클린의 빈민가
에 있는 유아원에 국한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유아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부모가 모두 일을 해야 하는 서민들인 것이다.
나는 방학 동안 한울이 때문에 일을 할 수 없겠다고 박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아내는 계속 일을 배워야 할 입장이니 내가 일을 그만
두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녀석을 데리고 아내가 퇴근할
때까지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다. 더위가 시작되자, 당시 우리 형편
으로는 거금인 400달러를 주고 에어컨을 샀다. 이 에어컨은 아직도
사무실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벌써 15년째 쓰고 있는 셈이다.
한울은 토이즈 얼 아스라는 장난감 전문점에 가는 것을 제일 좋아
했다. 당시 텔레비전에서는 히맨이라는 만화가 아이들에게 가장 인
기가 있었다. 한울은 그 만화의 캐릭터들을 사는 것이 유일한 즐거
움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체조경기장만한 넓은 공간이 모두 장난
감으로 채워져 있으니 아이의 눈으로는 그곳이 천국이 아니고 무엇
이겠는가?
개학이 되자 문제가 정말 심각해졌다.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34
번가와 파크 애비뉴 코너의 한 목사가 운영하는 네일 살롱에 출근해
야 했고, 근무가 끝나면 한울을 데리고 집으로 가 저녁 준비를 했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 단지 한울을 계속 데리고
있으려면 영어도 가르쳐야 했고, 환경도 좋은 곳으로 옮겨야 했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 아내는 한국에서 충분히 돈을 가지고 올
수 없었다. 사업에 실패했던 것이다, 그리고 운전면허도 취득하지
못하고 왔다. 어느 날 사촌 동생들에게 저녁을 준비할 테니 집으로
모두 모이라고 연락을 하고 한울을 데리고 이것저것 음식을 준비하
고 있었다.
사촌 여동생과 남동생은 이미 와 있었고, 아내만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날 같으면 지하철역으로 마중을 나갔겠지만
음식을 준비하느라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내가 문을 열고 들
어서는데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아파트 로비의 우편함 앞에서 권총강도를
당했다는 것이다. 아내가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오는
데 야구 모자를 쓴 흑인 한 명이 따라 들어오길래 느낌이 좋지 않아
우편함으로 가서 우편물을 확인하는 척했다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는 것이 싫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그 흑인이 자신에게로 다가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는
데 하얗게 번쩍이는 권총이었다. 총을 들이대며 마니 하는 소리에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꺼내주고는 녀석이 돌아서는 것을 보고 살았
구나 했는데 녀석이 다시 돌아와 가방을 뒤져 돈을 마저 꺼내갔다고
했다.
아내의 설명을 듣고 경찰에 신고하니 경찰이 왔다. 그러나 뉴욕이
나 한국이나 사람이 죽지 않은 사건이면 경찰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뉴욕의 브루클린 빈민가에서는 매일 일어나는 사건
이다.
아내는 강도사건 후 며칠을 앓았고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며칠 안정을 취하고 다시 일을 하러 나가야 했기 때문에 지하
철을 타기 전 항상 전화를 했고 한울과 나는 지하철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한울은 어린 마음에도 벨트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연장들을
주렁주렁 달고 따라나섰다. 나도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던 모노 팟
(외다리 카메라 받침)을 들고 나갔다.
그런데 며칠 후 맞은편 아파트의 혹인 부부가 집을 비운 사이 몽
땅 털렸다. 창문을 뜯고 들어와 가전제품을 모두 가져간 것이었다.
그 친구도 야간에 사진을 배우러 다녔기 때문에 카메라 장비를 많이
갖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급히 이사를 하기로 결정
하고 집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돈이 없는 상태에서 마땅한 곳을 찾
지 못해 임시로 개인 주택의 이층을 세내어 살고 있는 아내의 직장
동료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집주인을 만나보니 경찰에서 정년 퇴
직한 이태리계 미국인이었다. 아이가 있는 것이 문제라고 해서 겨울
방학에 한국으로 다시 보낼 것이라고 했더니 입주를 허락했다. 이렇
게 해서 브루클린에서 벗어나 퀸즈의 우드사이드에서 몇 달을 살게
되었다.
겨울방학이 되자 나는 한울을 데려다주러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
했다. 녀석은 엄마 아빠와 헤어지는 것보다 미국생활이 더 견디기
어려웠던지 쉽게 가겠다고 말했다. 공항에서 녀석은 나를 재촉했
다. 제 어미와 헤어지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눈물을 흘
리지 않고 잘 버텼다. 그러면서 자꾸 내 손을 끌고 탑승구로 끌고
갔다. 녀석은 탑승구를 통과하자마자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
서 울었다. 그러면서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비행기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장난감을 꺼내 놀기 시작
하며 눈물을 거뒀다. 녀석은 겨우 다섯 살인 것이다. 나중에 커서
이런 것들을 기억하느냐고 물으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좋지 않은 기억은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 스스로의 방어책이니
더욱 그럴 것이다.
서울에 한울을 데리고 와서 한 달 가까이 있는 동안 나는 거의 매
일 술만 퍼마셨다. 아들을 두고 혼자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
신적인 부담과 오랜만에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공부와 일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윽고 미국으로 혼자 떠나던 날 한울은 나를 배웅하지도 않고 딴
청을 부렸다. 이별을 한다는 것이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으
면 그럴까 생각하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나는 공항까지 가는 차
안에서 흐느끼며 울었다.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아들까지 떼어
놓는 모진 짓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통곡을 했다. 누나가 달래
려고 애를 썼지만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뉴욕으로 돌아와 한동안은 아이가 없는 것이 무척 허전했다. 그러
나 시간이 흐를수록 돌볼 아이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아내와 자유로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자주 가질 수 있었고 공부할 시간도 충분해졌다. 그러나 서
로 잘 모르고 자라온 환경과 신분이 다른 두 부부가 함께 생활한다
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조금 무리를 해서 아스토리아에 방이 하나 있는 작은
아파트로 옮겼다. 아스토리아는 그리스 이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비
교적 안전한 동네였다. 여주인은 영어를 몇 마디만 겨우 하는 그리
스 할머니였다. 남편은 오래 전에 죽고 혼자 집세를 받아 생활하는
여자였는데 나는 관리인 노릇까지 해주었다.
아스토리아로 거처를 옮긴 후 다시 친구 춘선의 처가 근무하는
52번가의 옷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여자들이 옷을 잘 훔쳐가
기 때문에 손님들을 감시하는 것과 여자들이 들 수 없는 무거운 짐
을 나르는 것이 내 임무였다. 눈이 나쁜 내가 도둑을 지킨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하지만 내가 근무하는 동안은 다행히 도
난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 일을 하는 동안 함께 일하던 병윤과 함께 50번가 주변의 바를
돌아다니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소득도 있었다. 그러나 옷
가게에서 일하면서 눈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신용카드를 기계로 긁고 나서도 가격 등을 기입할 수가 없었던 것이
었다. 나는 주인에게 피해를 줄 것이 염려되어 그 일을 그만두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내는 자신의 일에 제법 익숙해져 벌이도 조금씩
나아졌다. 우리는 내가 4학년이 되면 한울을 다시 데려오기로 결정
했다. 그때는 수업이 거의 없고 졸업작품으로 16mm 소형영화를
한 편만 제작하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
한국식품점 동대문
아스토리아로 이사와서 알게 된 미스터 오를 통해서 한국식품점
인‘동대문’에서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일을 여기서‘하
게 되었다. 지금도 김치와 젓갈 등을 잘 담그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여기서 일한 덕분이다. 한국에서 20년이 넘게 냉면과 갈비집을 했
던 할머니가 만든 이 식품점은 뉴욕과 부근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거의 대부분이 먹거리를 사는 명소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1985
년 당시에는 뉴욕의 한국식품점 중매상이 가장 많은 가게였다.
여기서 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일을 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
다. 동창을 포함해서 문화인들, 그리고 연예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었다. 이들 중 몇몇은 내가 동대문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
러 찾아온 사람들도 있고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의
반응도 참으로 다양했다. 내 처지가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고 대단하다고 격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원세 감독님도 일부러
들러서 격려해 주셨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열심히 일했다. 궂은 일도 마다하
지 않았고, 60kg의 등심 박스도 날랐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
어 할머니의 아들인 젊은 사장 미스터 변과도 친해졌다. 또 함께 일
하는 불법체류자들과도 친해져서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미국에 밀
입국했는지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이민 사회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신군부 하에서 권력의 핵심에 있던 자들이 부정하게 갈취
한 돈이 모두 뉴욕으로 밀반입되어 부동산에 투자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필
리핀의 마르코스는 유서 깊은 34번가의 김불백화점이 부도가 나자
그 건물을 통째로 인수하기도 했다. 전세계 후진국의 독재자들의 부
정한 돈은 다 뉴욕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한동한 호황을 누리던 이 동대문 식품점도 신군부의 실력자였던
권씨의 사촌이 코앞에 커다란 한국식품점을 차리는 바람에 결국 문
을 닫았다. 신군부를 피해 미국으로 도망왔지만 그들을 피한다는 것
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동대문에서 일하면서 깨닫게 된 또 다른 사실은 한국 이민의 천민
자본주의에 대한 숭배였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장사를 잘하고 있는 한국인 가게의 바로 옆
에 같은 가게를 차리고 서로 경쟁을 해서 싸우다 함께 무너지는 일
을 아무런 도덕적 가책도 없이 저질렀다. 그리고 새로 이민온 사람
들을 속여 장사가 되지 않는 가게를 팔아넘기기도 했다.
나는 한국 교포들과 접촉이 없이 거의 3년 가까이 지내서 그런
사실들을 전혀 몰랐었다. 돈을 조금 번 사람들은 불법체류자나 돈이
없이 이민온 사람들을 하루 12시간이나 부려먹으면서도 최저 임금
을 지불했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으니 너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고였다. 식품점이나 야채가게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탈세로
돈을 벌고 있었다. 자신들의 소득을 3분의 1도 신고하는 것 같지
않았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돈을 조금 벌면 링컨 컨
티넨털 같은 커다란 차를 타고 허세를 부렸다. 이들은 특히 한국식
품점에 와서는 자신의 차를 자랑하기 위해 꼭 자동차까지 구입한 물
건을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제멋대로 자란 이민 1.5세, 2세
들이 교포 종업원들에게 영어로 욕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자신의 딸이나 아들이 영어를 잘 하는 것만이 대견해서 쟤가 어려
서 미국에 와서 한국말을 못해요. 하며 얼버무렸다. 이들에게 나는
미국에서 태어났어도 이렇게 한국말을 잘한다고 영어로 소리질렀
다. 함께 일하는 불법체류자들이 영어를 이해 못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싸움에 말려드는 일이 종종 생겼다. 정말 한심
하고 불쌍한 인간들이라 상대하기 싫었지만 그것이 동대문에서의
내가 할 일이라 생각하고 버릇없는 어린아이들을 혼내주었다.
솔직히 그들의 부모들이 측은했다. 미국 같은 살벌한 사회에서 아
이들과 한 마디 대화도 하지 못하면서 살아갈 그들의 앞날이 걱정되
었다. 그들은 모두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미국에 이민왔다고 말하는
데 자녀들의 교육에 성공하는 이민은 실제로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물론 한국의 입시제도가 얼마나 소모적이고 비교육적인 지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만 미국에서의 자녀교육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돈을 조금
번 한국 이민들은 엄청난 학비를 들이며 흑인 아이들이 없는 최고급
사립학교를 보낸다. 모국에서 보고 배운 작태를 그대로 행하는 것이
다.
동대문 식품점에서 만난 한국 이민들로 인하여 한국인이라는 사
실이 매우 부끄러워졌다. 비로소 유태인들의 자기혐오와 자기연민
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태인 지식인들은 많은 책에서 이런 것들을
스스로 지적했으나 나는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이런 모든 면에서 동대문 식품점에서의 경험은 육체노동의 기쁨
과 함께 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장과 종업원 사이에서 중
재역할을 하기도 하며 2년 가까이 일을 했다. 그래서 지금도 동양
식품의 영어이름을 많이 안다. 사장인 미스터 변은 종업원들에게 할
인 혜택을 주어 생활비를 절약하는 데에도 제법 많은 도움이 되었
다.
한국에서 맛본 달콤한 여름휴가
어느새 한울을 한국으로 보낸 지 일년 반이 지났다. 탈춤을 소재
로 만든 「마스크」를 편집하고 녹음하고 나니 여름방학이 시작되
었다. 아내와 한울을 데리러 함께 귀국하기로 했다. 학교에서 임시
귀국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고 선물을 사고 그럭저럭 준비가 끝났
다. 아내는 일년 반만의 고된 미국생활에서 처음으로 갖는 휴가였고
나는 3년 만에 갖는 여름휴가였다.
공항에 내리니 온 가족이 나와 있었다. 한울은 많이 커 있었다.
영어공부 좀 했냐? 는 내 질문에 녀석은 아니. 하면서 쑥스러워
했다. 한국에 가서 영어를 배워오겠다고 제 엄마와 약속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온 것을 계기로 5남매의 가족이 모두 함께 속초로 피서를
떠나기로 했다. 작은형은 「외인구단」의 흥행 성공으로 의기양양
해 있었으나 영화를 보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어쨌든 흥행에 성공
한 것은 축하할 만한 일이었고 모든 가족이 판영화사의 「외인구
단」광고판이 붙은 버스를 타고 속초로 갔다. 매부가 넓은 콘도를
여러 개 얻어 아주 호사스러운 휴가였다.
아이들은 수영장과 계곡에서 신나게 놀았고 한울은 오랜만에 아
빠와 엄마를 만나서 그런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이는 부
모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을 내 공부 욕심 때문에 일년 반이나 혼자
내버려두었다고 생각하니 녀석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일주일은 빨리 지나갔다.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친지들을 만
나고 여기저기 인사를 하다보니 예정했던 한달이 금방 지나가 버렸
다.
한울의 건강진단서와 예방접종 확인서 등 한울이 미국에서 초등
학교에 입학할 때 필요한 서류들을 챙기고 온 가족이 비행기를 함께
타게 되니 마음이 느긋했다. 혼자 허겁지겁 비행기에 올랐을 때와
한울을 떼어놓고 혼자 비행기를 타던 때가 생각이 나 만감이 교차했
다. 동대문에서 함께 일하던 종구가 쉬는 날을 맞춰서 미국에 도착
했다. 이 친구는 동대문에서 일하면서 매우 가까워진 마도로스 출신
의 부산 친군데 7년이나 불법체류를 하고 있었다. 나를 형이라고
부르며 매우 잘 따랐는데 나중에 아내가 중매를 해서 영주권도 받고
지금 뉴욕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미국에 온 한울은 다시 토이즈 얼 아스에 가서 장난감을 사고 백
화점 장난감 매장에서 트랜스포머 캐릭터를 사는 것으로 미국에 대
한 두려움을 잊으려 했다. 지난번에 미국생활의 적응에 실패한 것을
생각해서 녀석을 천천히 적응시키려고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피츠버그에 살고 있는 사촌 여동생의 시누이 집에도 데리고 가 같
은 또래의 미국 아이와 함께 놀게도 하고, 동대문 변 사장의 아이들
과도 함께 놀이공원에 가서 놀기도 했다. 주변의 이런 고마운 사람
들의 도움으로 가난한 유학생의 주제로는 할 수 없는 여가도 즐겼
다.
내가 동대문에서 일을 하는 날은 한울이를 아내가 가게로 데리고
나갔다. 어느 날 녀석은 집으로 돌아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양
말을 벗으려 하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양말을 벗기니 쿼터
가 20개 정도 쏟아졌다. 아내가 일하는 네일 살롱의 현금계산기에
서 쿼터를 빼 집어넣은 것이었다. 녀석에게 쿼터는 돈이 아니라 게
임을 하기 위한 동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이것
은 명백한 도둑질이라는 것을 차근차근 설명을 하며 엉덩이를 때렸
다. 가슴이 아팠지만 남의 돈이나 물건을 허락 없이 갖는 것은 도둑
질이고 나쁜 짓이라고 설명하며 엉덩이가 시퍼렇게 될 정도로 때렸
다. 녀석은 엉엉 울면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 사건 후로 녀석은 집안에 있는 돈에도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우리는 집에서 쓸 돈은 바구니에 담아놓고 누구나 필요한 만큼 꺼내
썼기 때문에 이런 체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 가기를 거부하는 한울
넉 달이나 되는 긴 여름방학도 다 지나고 한울이 학교에 갈 때가
되었다. 한울을 데리고 학교에 가서 등록을 했다. 녀석은 벌써 긴장
을 하고 있었다. 일년 반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아주
기본적인 영어를 가르치긴 했지만,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사이를 오
가며 부모와 떨어져 자라는 불쌍한 손자 녀석이라고 귀여움만 받고
지낸 녀석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처음 입학식을 하던 날 녀석은 벌써 울면서 교실에 들어가려고 하
지 않았다. 한울의 담임인 미스이즈 쉐러에게 허락을 받고 녀석의
뺨을 후려쳤지만 녀석은 막무가내였다. 담임선생은 다른 아이들에
게 미칠 영향을 걱정하며 상담 교사와 상담할 것을 권했다. 상담 교
사는 한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나는 녀석이 엉뚱한 대답을
하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거짓으로 통역할 수는 없었
다.
너, 한국에서 유치원에 다닌 적이 있니?
예.
유치원 다니는 것이 재미있었니?
녀석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상
담 교사가 다시 묻자 녀석은 머리를 저었다. 나는 정말 화가 났다.
한국에 있는 어머니와 장모에게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상담 교사
는 한울이 한국에서도 유치원에 다니길 원하지 않았으니 영어를 하
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회성이 결여된 아이라서 입학을 시킬 수 없다
는 것이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상담 교사는 못마
땅한 태도로 교장실로 안내했다. 교장 선생에게 장황한 설명을 했
다. 녀석이 영어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면 곧 적응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일 주일만 함께 수업을 참관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교장 선생은 딱 일주일만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사 학년 일 학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나도 학교에 가야 했지만
여유는 있었다. 졸업 작품만 만들어 제출하면 되었고 강의를 들어야
할 과목은 두 개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한울은 산수 시간에 손을 들
고 교단에 나가 계산 문제도 풀었다. 적어도 담임선생에게 녀석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은 증명되었다. 담임선생에게 부탁을 해서 녀석
이 학교에서 사용하는 영어 책과 산수 책을 얻어 집에서 가르쳤다.
꼭 일주일이 되던 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울을 데리고 학교로 갔
다. 녀석이 오늘도 혼자서 교실로 들어가지를 원하지 않으면 나는
녀석을 다시 한국으로 보내야 했다. 그런데 교실 앞에 선 한울이가
나를 돌아보며
아빠는 아빠 학교 가. 나 혼자 들어갈게.
나는 내가 방금 들은 녀석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울의 학교
문을 나서는데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녀석이 드디어 적응하기 시작
한 것이었다.
한울은 점심 급식으로 나오는 우유와 치즈를 먹지 못하는 것 외에
는 잘 적응해 나갔다. 나도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어 날아갈 둣한 기
분이었다. 졸업 작품은 살풀이를 주제로 만들기로 하고 시나리오를
제출하고 지도 교수인 매니와 의논을 했다. 삼 학년 때 이미 내 작
품 마스크 를 좋게 본 매니는 시나리오를 받아 들였다. 살풀이를 출
유학생을 찾아내는 일과 제작비 그리고 몇 명의 스텝만 확보하면 되
었다.
한울의 얼굴을 구별할 수 없게 된 눈
만사가 잘 풀리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작은형이 두 차례에 걸쳐
약속한 18,000불을 송금해 주었다. 아내가 네일 살롱을 개업할 자
금을 꿔달라고 부탁했었던 돈이었다. 작은형은 외인 구단 으로 돈
을 조금 벌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 눈이 또 방해하기 시작했다. 뉴욕
의 초등학교에선 부모가 아이들을 4학년이 될 때까지는 의무적으로
데리러 가야 한다.
그 날도 한울을 데리러 시간에 맞춰 학교 앞으로 갔다.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데 한울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고 있는
데 녀석이 어느새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시력이 다시 악화되고 있
는 것이었다. 사실 영화 편집을 직접하면서 눈을 너무 혹사했다. 그
리고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았었다. 다시 진행을 시작한 내 망막색
소변성증 은 이후 나를 계속 몰아세웠다.
나는 손을 최대한 뻗어 손가락을 펴고 한 눈씩 테스트했다. 왼쪽
눈의 중심 시력이 깨지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조금씩 일그러져 보
였다. 거의 십 년 동안 카메라를 작동할 때 사용하던 왼쪽 눈이 먼저
손상을 입은 것이었다. 그래도 오른쪽 눈의 초점은 괜찮은 것 같았
다. 내가 직접 카메라를 잡아야 하는데 졸업 작품이 걱정이었다. 음
향을 맡아 주기로 한 유태인 친구 줄리앙과 헌팅을 했다. 80가의
폐허가 된 분수대가 작품의 분위기와 잘 맞았다. NYIT를 다니는
한국인 후배 이중해와 송승환에게 카메라를 맡기기로 하고 NYU에
서 무용을 전공하고 있는 여학생을 소개받았다.
드디어 촬영을 하러 유부초밥을 준비하고 학교에서 카메라를 싣
고 현장으로 떠났다. 송승환이 카메라를 잡았다. 스케디 캠 대신 솔
더 브레이스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조금 불안했지만 촬영은 순조롭
게 끝이 났다. 현상소에 필름을 맡기고 다음 촬영 준비를 했다. 그런
데 현상된 러쉬를 보니 400피트 전부가 초점이 맞질 않았다. 송승
환이 실수한 것이었다.
다시 촬영을 해야 했다. 이번엔 내가 카메라를 직접 잡을 수밖에
없었다. 후배인 중해에게 여배우가 움직을 동선마다 테이프를 붙이
게 하고 한국에서 하던 방식으로 일일이 줄자로 재고 카레라 렌즈에
테이프를 감고 거리를 표시했다. 중해에게 각 포인트에 여배우가 당
도하면 일일이 초점을 맞추는 법을 가르치고 리허설을 서너 번 했
다. 여배우가 춤을 주는 것을 따라잡기가 힘들 정도로 시력은 악화
되어 있었지만 겨우 촬영을 마쳤다. 현상소에서 찾아 온 러쉬는 만
족할 만 했다. 나머지 촬영은 중해에게 카메라를 맡기고 잔여분의
촬영을 모두 끝냈다.
촬영을 마치고 아내가 개업할 장소를 찾기 위해 맨하탄을 도보로
헤매기 시작했다. 이 일은 제법 힘든 일이었다. 몇 군데 그럴 듯한
장소를 찾았지만 임대료가 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매일 맨하탄을 돌
아다니다 보니 지난 4 년 동안 공부와 일에 쫓겨 엄두도 못냈던
시내의 관광을 저절로 하게 되었다. 정말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도
시인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에서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 왔다.
집안에 끼기 시작하는 먹구름
누이동생이 신랑이 부도를 냈다는 소식이었다. 선배의 보증을 선
것이 화근이었다는 것이었다. 제재소를 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전
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이어서 자형이 쓸어졌다는 소식이 또 전
해졌다. 그리고 큰형도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전화가 왔다. 내 눈의
악화가 시작인 셈이었다.
어쨌든 촬영을 모두 끝낸 나는 편집을 해야만 했다. 다른 일에 신
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필름을 보고 구별하기가 힘들어 루페
(Lupe)를 사용해야 했다. 스틴 백과 일 주일 넘게 씨름을 하며 밤
을 세우며 편집을 끝냈다. 국악의 리듬이 변화무쌍한 것을 미리 계
산 못하는 바람에 나그라를 한 대만 들고 나간 실수를 범했기 때문
에 사운드와 그림을 맞추는데 엄청난 고생을 했지만 편집도 모두 마
쳤다.
어머니가 졸업식을 보러 오시겠다고 하여 초청장을 보내드리고
나서 녹음을 끝내고 네거티브 편집을 마치곤 현상소에 모두 넘겼다.
이제 4년간의 긴 학부 과정이 끝난 것이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시는 어머니는 오끼나와에서 복무했던 흑
인의 도움으로 입국 절차를 무사히 마치시고 공항 출구로 나오셨다.
어머니를 모시고 자유의 여신상을 관람하려 갔다. 관광객이 엄청나
게 많았고, 엘리베이터를 수리 중이어서 자유의 여신상 머리부분까
지 올라가는데 여섯 시간이 걸렸다.
이 끔찍한 경험을 하고 나서 어머님은 혼자 관광을 하시겠다고 하
셔서 시내 관광과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은 여행사에서 하는 단체 관
광을 따라가시게 해드렸다. 사실 아내와 나는 일과 공부에 쫓겨 나
이아가라도 가보지 못했었다. 고작 뉴욕을 떠나 여행을 한 것은 피
츠버그와 동대문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함께 아틀랜트 시티의
카지노에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나이아가라를 다녀오신 어머니는 그 웅장함에 감동을 받으시고
며칠 동안 나이아가라 얘기를 하셨다. 아내와 나는 미국에서는 값이
매우 싼 유럽 여행을 권했다. 어머니가 좋다고 하셔 여행사에 등록
을 했다.
그런데 인생이란 언제나 그렇게 좋은 일만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
아. 유럽 여행을 얼마 앞두고 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작은형이 교
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
에겐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그만 사촌들의 실수로 어머니가 알게 되
셨다. 어머니는 유럽 여행을 포기하셨다. 얼마 후 작은 형의 상태가
좋아진다는 연락을 받으시곤 내 졸업식만 참관하시고 귀국하시겠다
고 말씀하셨다.
링컨 센터에서 행해진 졸업식을 참석하시고 어머니는 생각이 바
뀌셨다. 내가 뉴욕 대학원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한울을
돌보아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머니에겐 또 다른
나쁜 소식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어머니가 돈을 빌려준
친구가 그 해 인삼 농사를 홍수로 망쳐 갚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누
나의 전화가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둘째 아들도 수술 경과가 좋아
위기를 모면하고 회복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잃어버린 돈을 벌어
서 가시겠다는 것이었다. 만류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은 아는 나
는 그러시라고 했다.
어머니는 집에서 재봉을 해서 공장에 갖다주는 홈 워크를 받아다
가 밤새 재봉틀을 돌리셨다. 대학원에 들어간 나도 학부와는 달리
영화학을 선택했기 때문에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 밤을 꼬박 새
워야 했다. 왼쪽 눈이 초점을 잃었기 때문에 오른 쪽 눈에 의존하여
책을 읽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경쟁하듯 함께 밤을
새웠다. 대학원의 첫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어머니는
잃어버리신 돈의 반을 모아 귀국하셨다.
눈이 점점 나빠지고 책을 읽는 것이 힘들어졌지만 나는 아무에게
도 얘기하지 않았다. 대학원에서의 공부는 의외로 쉬웠다. 학부 4
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덕인 것 같았다. 다만 나빠진 시력으로 영화
를 보아야 하는 것이 큰 고통이었다. 석사 학위를 여유 있게 취득할
형편이 아니었다. 석사 학위를 3학기에 끝나고 박사 코스를 3학기
에 끝낼 작정을 하고 시간표를 짰다. 내 눈이 얼마나 더 버텨 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다음 학기에 읽을 책들을 구입
해서 읽기 시작했다. 책읽기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시 학기가 시
작되고 한 학기에 네 과목씩을 수강하는 무리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78학점을 6학기에 이수한다는 것이 계산상으로는 쉬웠지만 정말
시간이 모자랐다. 저녁 6시 반에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고 집에 돌
아오면 10시 반 늦은 저녁을 먹고 밤을 꼬박 새고 8시에 아내가 한
울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출근하면 나는 12시에 알람을 맞춰 놓고
잠을 잤다.
알람이 울리면 깨어나 대강 세수를 하고 한울을 집에 데리고 와
점심을 차려 주고 다시 잠을 조금 자다가 5시에 학교로 갔다. 아내
의 귀가 시간이 9시였기 때문에 한국 여학생을 베비 시터로 채용해
야 했다. 다행히도 아내의 가게에서 리셉서니스트로 일하던 여대생
의 동생이 베베 씨터를 맡겠다고 해서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날은 알람이 울려도 깨어나지 못해 허겁지겁 학교로
달려가면 한울이 없어져 사방을 헤맸다. 그런 날은 녀석이 친구 숀
의 집에서 태연히 닌텐도를 하고 있었다. 내 사정을 들은 숀의 할머
니는 내가 늦으면 자신이 한울을 데리고 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친절하게 제안했다. 숀은 한울이와 같은 반의 백인 남자아이인데,
이혼해 혼자 사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두 녀석
은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아주 단짝이 되었다.
숀의 할머니는 아일랜드에서 열여섯 살에 미국으로 이민 와서 6
명의 자녀를 낳고 남편이 일찍 죽자 낮에는 전화 교환원으로 또 밤
에는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억척스럽게 키운 여자였다. 한국의 어머
니들의 모습과 너무 닮은 노부인이었다. 그녀와 나는 매우 친해져
한울이 숀과 함께 노는 동안 나에게 자신의 고생스러웠던 젊은 날의
아야기를 해주었다. 마침 그녀의 셋째 아들은 영화사에서 진행을 마
고 있어 내가 영화 공부를 한다고 하니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한울은 친구들을 한 명씩 사귀어 갔고,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29 인치 텔레비전과 닌텐도가 녀석의 무기였다. 나도 방학중
에는 한울의 친구 엄마들과 함께 야구장과 볼링장을 따라 다녀야 했
다. 한울이 적응해 가는 것이 신기했다. 한울은 입학할 때 부린 소동
으로 교장 선생님까지 알고 있었으므로 잘 적응한 모델로 내 세워졌
다. 영어도 많이 늘어서 성적도 일 이등을 다투게 되었다. 내 눈이
조금만 더 버텨 주었으면 모든 일이 마음먹었던 대로 될 수 있었다.
세 번째 학기가 다 끝나갈 무렵 그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한국
이민 1.5세 꼬마갱들의 이야기를 16mm 영화로 만들 계획을 하고
제작자를 구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몇
달 동안 꼬마갱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사재를 털어 준비를 했지
만 그 유령 같은 제작자는 사라져 버렸다.
악운은 계속되었다. 석사 자격시험은 일 주일 동안에 세 과목의
테이크 홈 이그젬(집에서 일 주일 동안에 논문을 쓰는 시험)을 통과
해야 했다. 일주일 동안 세 과목의 논문을 쓴다고 하는 것은 이틀에
논문 하나씩을 써야 한다는 의미고 이틀에 논문 하나를 쓴다는 것은
하루는 참고 문헌을 읽고 하루는 논문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
면 하루가 남는데 하루는 타이핑을 하고 교정을 해야 했다.
시험일인 월요일 시험문제를 받으러 영화학과 사무실로 갔다. 문
제를 보니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제출하면
되는 것이었다. 밤을 꼬박 새워 가면서까지 세 개의 논문을 끝냈다.
새벽에 자기 시작해서 12시에 깨어 한울을 데리고 와서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스미스 코로나에서 만든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하고 있었는
데 한참 타이핑을 하는데 기계가 작동하지 않았다. 운명이 또 방해
하는 것이었다. 일년 동안 탈이 없던 워드 프로세서가 하필이면 이
때 고장이 날까? 화가 치밀었다. 사촌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자동차
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이미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아 수리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 문이 아직 열려 있는 한 가게로 들어가니 흑
인 기술가 자신 있다고 해서 맡기고 한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이 망
할 놈이 분해만 해 놓고 못 고치겠다고 했다.
이제는 모든 게 끝났다.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
다. 타이핑을 대신 해줄 사람을 2명 고용했다. 대학원의 논문을 칠
만한 사람들이었다. 한 과목은 그들이 타이핑을 하는 동안 메모해
놓은 것을 도태로 다시 논문을 썼다. 토요일 오후에야 작업이 모두
끝났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했다. 시력이 악
화하기 시작했으니 당분간 계속 나빠질 것이다. 이것은 살아오면서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 되는 듯 하다가 중요한
시점에서 꼭 불상사가 일어났다. 대마초 사건이 그렇고 대학 졸업
작품을 찍을 때도 그랬고 석사 자격시험을 볼 때도 그랬다. 이제 여
기서 물러서야 하나 계획한 대로만 차질 없이 진행하면 적어도 3년
안에는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운명이 내가 공부하
는 것을 계속 방해했다. 좋다. 계속하는 거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이렇게 결심하고 4번째 학기를 등록했다. 공부를 하는 것은 어려
움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책 속의 글자들이 사라져 버렸다. 육안
으로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한울에게 읽어보라고 했지만 지나
친 요구였다. 닥터 모겐 스턴을 찾아갔다. 그녀는 차이나타운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내 눈을 검사하고 난 그녀는 공부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지금 시력으로도 영화를 연출하는 것은
가능할 테니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부를 더하고 싶으면 CCTV(확대 독서기)를 사용해 보
라고 했다. 사촌 동생의 차를 다시 빌려 그녀가 일러준 곳에 가니
나와 똑같은 RP 환자인 52세의 백인이 독서 확대기를 판매하고 있
었다. 나는 기계를 조작해 보면서도 그가 문을 열어 주고 벽을 더듬
으며 우리를 안내하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도 저 나
이가 되면 저렇게 되겠지. 그 짐작은 사실 적중했다. 나는 지금 그
때의 그 미국인보다 조금도 좋은 상태가 아니다.
3,500불 짜리 수표를 써주고 반품을 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고 기
계를 샀다. 한울은 커다랗게 확대되는 것이 재미있는지 자기 손을
집어넣고 장난을 했다. 그런데 책을 옆으로 밀 때마다 잔상이 너무
심하게 남아 눈이 아파 책을 볼 수가 없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독서 확대기는 5년 후 구입한 같은 회사의 제품인데 당시는 기술이
초보 단계였던 것 같다.
어쨌든 쓸모 없는 기계를 3,500불이나 주고 살 수는 없었다. 반
품을 하고 나서 지도 교수인 스클라 교수를 찾아갔다. 내 눈에 대한
얘기를 하고 학교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말했다. 스클라 교수는 자네
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무슨 걱정을 하느냐
고 위로했다.
언젠가 그의 세미나에서 내가 영화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내 영화
를 비평하는 엉터리 평론가들을 묵사발 만들기 위해서라고 얘기한
것을 기억하고 하는 위로였다. 학과 건물을 빠져 나오는데 눈물이
나왔다. 박사논문을 탈고하고 오럴 디펜스를 마치고 나서 흘리고 싶
었던 눈물이었는데 운명아 비켜라 하고 큰 소리를 쳤는데 결국 또
내가 진 것이었다.
아직도 승부는 나지 않았다
아내에게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우리
는 한울과 나만 먼저 귀국하고 아내는 일 년 정도 벌려놓은 일을 정
리하고 들어오기로 했다. 친구들과 후배들은 학교에 자리라도 생겨
서 가는 줄 알고 있었다. 굳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아직도 행동하
는 것은 예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박석기 선생님은 내 얘
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셨다. 박 선생님의 가게에서 일할 때 손전등
을 허리에 차고 지하실로 물건을 찾으러 내려가는 것과 잘 보지 못
하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하셨기 때문에 내 눈에 대해서 속일 수
가 없었다. 지금은 편안하게 지내시는지 이제 환갑이 다 되셨을 텐
데...
이삿짐을 정리하고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한 한국으로 돌아가려
니 심사가 착잡했다. 마침 모 대학에서 전임강사를 공채한다고 하니
시도나 해보자는 생각을 하며 LA행 비행기를 탔다. 한울에게 디즈
니 랜드와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구경시켜 주기 위해 LA의 사촌 집
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나는 전혀 흥미를 못 느꼈지만 한울은 매
우 즐거워했다.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늘
그랬던 것처럼 미국이 아득히 멀어지고 한국이 서서히 다가왔다.
미국에 서 체류한 6년 동안 얻은 것은 많았다. 그 중에서 자장
소중한 얻음은 내가 동양인이고 한국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
이다. 미국에서 처음 학교에 다니며 적응하기 시작할 때는 내가 미
국인인 아니라는 것을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적응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한국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으
니 더욱 그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껍데기만 동양인이지 머
릿속은 완전히 서양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
면, 동양과 한국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이 창피했다. 그래서 책방
에서 중국과 일본에 관한 책들을 여러 권 사서 읽어야 했다. 한국에
관한 책도 몇 권 구했다. 우리가 서양 교육을 받아 왔고 서양 우월주
의가 만연한 사회 속에서 자라 왔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
만 큰 자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하나의 얻음은 어려서부터 동경해 온 미국의 환상이 아닌 미
국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뉴욕만을 보고 미국 전
체를 이해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 미국의 장점과
단점이 모두 뒤섞여 있는 뉴욕에서의 생활은 적어도 미국의 자본주
의를 이해하는 데는 충분했다. 미국은 거대한 주식회사이지 국가라
고 할 수가 없다.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미국의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 와 성조기에 대
한 선서를 외우게 한다.
수많은 인종이 실제로는 WASP(백인 앵글로 섹슨 신교도)에 의
해 지배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노예의 종교와 국기에 대한 숭배
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나라이다. 이런 미국의 모습을 사회과학
적으로 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소득
이었다. 그래서 눈이 허락하면 다시 우리 나라와 동양에 대해서 공
부를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귀로만 하려니 무척 힘이 든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사람
1989 년 7월 10일 김포공항에 내렸다. 온 가족이 마중을 나왔
다. 가족들은 내 눈이 얼마나 심각하게 악화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
고 있었다. 한울은 사촌들과 친척들과의 만남과 자신의 생일 파티로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녀석에게도 이별의 아픔이 끝난 것이다. 나
는 오직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그러나 한가하고 편안한 시간도 금방 지나갔다. 이제 다시 한국
사회에 적응해야 했다. 이것은 한울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초
등학교 3학년 과정을 마치고 왔지만, 여름방학이 끝나면 3 학년 2
학기로 편입이 가능했다. 한글을 가르치긴 했지만 그 정도로 한국의
끔찍한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삿짐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와서 세관으로 이삿짐을 찾으로 갔
다. 나는 오자마자 범법을 해야 했다. 이삿짐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
다. 6년을 살면서 모은 물건이고 한국의 집값은 내가 떠날 때와 비
교하면 열 배가 올라 있었다. 그 손해를 만회해 보려고 사 갖고 온
물건도 더러 있었다. 환율도 떠날 때는 980 : 1이었는데 당시는
800 : 1 이었다. 그리고 단군이래 최고의 호황도 놓친 입장이었다.
세금을 600만원이나 내라고 했다. 세관이 원래 복마전 아닌가?
나는 도저히 그렇게 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들은 내 앞에서는 임무
를 철저히 수행하는 모법 공무원이었다. 세금을 못 내겠다는 나에게
큰형이 도움을 주었다. 나는 공부밖에 모르는 등신이 되었고 그들에
게 250만원을 주자 세금은 35만원으로 줄어들었다. 계산상으로 나
는 315만원을 번 셈이었다. 이것이 한국식 세상살기이고 아직도 군
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삿짐을 찾으면서 고국에 돌아온 것을 벌써 후회하고 있었다. 같
은 얼굴은 한 사람들과 이런 식으로 사느니 인종차별을 받으며 살아
가는 것이 날 것 같았다. 어쨌든 처분할 물건들을 빨리 처분해야 했
다. 그러나 모든 일이 쉽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서툴었다. 모든 물건들을 대강 처분하고 나눠주었다.
돈이 제법 생겼다. 그러나 사기도 당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면서
다 날려 버렸다. 솔직히 한울이만 없으면 목숨을 버렸을지도 모른
다. 또 대학의 전임 자리도 얻지 못했다. 내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백만원 상당의 선물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물건을 받은 자
는 아마 웃었을 것이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 놈. 전임 자리가 얼만
데...
그래도 보고 싶었던 후배들을 찾았다. 그들은 많이 변해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상근이도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을 다
니며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여전히 나를 반겼다. 한결같은 친구였
다. 또 고등학교 후배인 명석은 전문의가 되어 속초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재두는 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내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었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그들이 내 눈을 고
쳐 줄 수도 없는 것이고 내 인생을 대신 상아 줄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암담했다. 한울을 돌보지 않아 한울은 반에서 꼴찌를 겨우 면하고
있었다. 아내는 외국인 학교를 보내라고 했지만, 그런 미친 짓은 하
고 싶지 않았다.
내가 미국에 가기 전 오퍼상을 선택한 하영호는 제법 성공을 해서
공장도 짓고 비디오 테이프의 부품을 생산해서 납품하고 있었다. 관
택은 내게 용돈도 집어주며 술도 사 주었다.
신주쿠의 현우향 선생
이렇게 거의 일 년이 지나갔다. 이젠 술을 마시는 것도 지겨워졌
고,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판 영화사는 작은형의
교통사고 이후 큰형이 경영을 맡아 했지만, 계속된 흥행 실패로 무
너져 가고 있었다.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희박해졌다. 물에
빠진 놈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지압을 받으러 다녔는데, 그
때 한국일보 동경 특파원의 망막색소변성증에 대한 획기적인 치료
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나는 그저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에 관심을 보이는 의사가 있
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동경으로 장문의 팩스를 보내자 답이
왔다. 일단 동경으로 와서 치료를 해보자는 얘기였다. 기사의 주인
공은 현우향이라는 재일 교포 의사였다.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탕진하고 남은 돈이 별로 없던 나는 재두와
명석으로부터 100만원씩을 얻어 400만원의 여비를 만들었다. 일
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여행의 목적은 치료였지만 처음 가는
동경에 대한 기대로 설렜다.
예전부터 알고 있던 아오끼가 마중을 나와 주어 그의 조그만 오피
스텔에서 일단 짐을 풀었다. 다음 날 현우향 선생의 병원으로 갔다.
현 선생은 남자답게 잘 생긴 의사였고 나보다 열 살이나 위였다. 현
선생은 일본의 물가가 살인적이니 체제비만 해도 엄청날 것이니 치
료비는 걱정하지 말고 매일 통원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운 분이었다.
아오끼의 오피스텔에서 나와 와세다 호시앵으로 숙소를 옮기고
일 주일 정도 병원을 다녔다. 침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 처음이어서
기대를 걸었다. 침을 맞고 나면 눈이 잠시 동안이라도 좋아진 것 같
은 느낌도 들었다.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동경에 있는 것과
이제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 되었고 돈도 다 탕진했으며
이 치료가 효과가 없으면 나는 그냥 동경에서 사라질 지도 모른다.
그러니 늦기 전에 이혼을 하자. 한국에 나오지 말고 미국에서 살길
을 찾아보아라. 대강 이런 내용의 편지였다.
병원과 숙소를 오가며 저녁엔 아오끼나 현 선생님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동경의 선술집은 내 마음에 꼭 들었다. 절대로 남기지 않을
만큼의 안주와 주인들의 친절함에 놀랐다. 많은 안주와 비싼 값을
받는 한국의 술집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시력이 남아 있을 때 동
경에 온 것이 다행스러웠다.
동경의 생활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을 때 아내에게서 편지가 왔다.
뜯어보니 사랑합니다. 라는 문장만 적혀 있었다. 아내의 심정은 이
해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내 입장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숙소가 너무 비싸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오병호라는 유학생을 소
개받게 되었다. 함께 룸메이트를 하면 3만 엔 정도로 한 달 방값이
해결될 수 있었다. 요리하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불편할 것이 하나
도 없었다. 오병호의 집에 짐을 옮겨 놓고 아오끼와 연세대 한국어
학당의 동기들을 만나러 갔다. 그들은 아마 내가 영화배우였던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중 몇 명은 나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친구들이
었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만나 기분이 좋아졌다.
프린스 호텔 앞에서 헤어져 낮에 걸어 왔던 길을 더듬어 걸어갔
다. 간 길을 따라 걷다가 분명히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다른
집이었다. 나는 다시 프린스 호텔로 택시를 타고 갔다. 원점에서 시
작하는 방법이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속 다른 집이었다. 내가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지만 알 수 없었다.
이떻게 몇 차례 반복하다 보니 택시를 탈 돈이 없어 같은 길을 몇
번을 반복해서 거다 보니 넘어져 무릎 아래 정강이에서는 피가 흐르
고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온몸은 다 젖어 점점 추워졌다. 오
병호는 밤에 술집에서 일한다고 했으니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대답
이 없었다. 집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호텔 앞의 공중전화에서 계속
전화를 걸었다. 네 시가 지나서야 오병호가 전화를 받았다. 방금 들
어왔다는 것이었다.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니 내 눈에 대해
서 알 수도 없으니 무척 놀랐다. 오병호는 프린스 호텔 앞에서 비에
젖어 떨고 있는 나를 보곤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이 사건을 계기
로 금방 친해졌다. 녀석은 나를 형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아오끼를 통해 만난 일본 아가씨들이 김치를 담아 달라고 해서 김
치도 담아주고 술을 얻어먹기도 했다. 눈은 더 나빠지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현선생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점차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
었다. 현 선생은 내게 시각장애인이면서 연극 연출을 하는 일본인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리고 치료를 받고 있는 많은 RP 환자들에 대
한 이야기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18살에 제주도에서 밀항을 하여 일본에 왔고 고학으로 의과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시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 스스로
다짐했던 각오들이 떠올랐다.
인간은 한시적인 동물.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데 언제 실명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을 걱정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죽음과 비교하면 실명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이런 생
각이 들자 나는 우선 현 선생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다. 주부 생활
의 김은경에게 편지를 썼다. 현 선생에 대한 얘기와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 나에 대한 얘기도 소상하게 적었다. 한국에 전화를
거니 나와 같은 RP 환자들이 전화를 걸어온다고 했다. 일단 귀국해
서 같은 환자들을 만나 보자고 결정하고 현 선생에게 이런 저런 생
각을 털어놓았다.
한국으로 오니 여러 명이 전화번호를 남겨 놓았다. 나와 같은 환
자를 처음 만나는 일은 묘하게 가슴이 설레는 일이었다. 그들은 모
두 힘겹게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도 현 선생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김은경 편집장과 만나 일본으로 취재 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그녀는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나는 환
우들에게 현 선생의 치료를 한국에서도 받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장담했다.
김은경 편집장과 동경으로 갔다. 병호가 마중을 나왔다. 현 선생
과 만나 인터뷰를 하고 한국에서 많은 환우들이 치료를 받기를 원한
다고 말했다. 현 선생은 가능한 방법을 모색해 보자고 했다. 김은경
편집장이 나와 현 선생의 얘기가 실린 잡지가 발행되자 더 많은 사
람들로부터 연락이 온다고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심지어는 자기 혼
자만 치료를 받으려는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세상엔 항상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아내는 예정보다 일찍 동경으로 왔다. 마침 막내 처남도 지바 현
에 와 있었기 때문에 함께 만날 수 있었다. 뉴욕에서 온 아내에게
동경은 도시로서는 큰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내는 얼굴
색깔이 같다는 것 때문에 안도하는 것 같았고 안전한 밤거리에 놀라
는 것 같았다. 뉴욕에선 상상할 수 없는 밤거리의 북적거림은 분명
히 놀라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현 선생에게 인사를 하고 정초 연휴
를 맞아 한가하게 동경 거리를 구경하고 하꼬네로 갔다. 나는 그 동
안 서울에서 온 환우들을 안내하느라 세 번째 하꼬네 행이었지만 아
내는 하꼬네의 노천 온천을 매우 마음에 좋아했다. 서울에서 기다릴
한울을 생각해 일 주일을 머물고 나서 동경을 떠났다.
RP 협회를 만들다
한울은 오랜만에 보는 엄마가 낯설어서인지 서먹해 했다. 그래도
가족이 함께 지내는 것이 좋은지 녀석의 표정은 밝아졌다. 아내는
서울에서 살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고, 나는 나대로 환우들을 만나느
라 바빴다.
얼마 후 현 선생 병원에서 일하던 김 선생이 왔다. 누이동생의 친
구가 운영하는 서초동의 영인 한의원에 함께 가서 현 선생이 치료법
을 설명하고 시침을 하였다. 누이동생의 친구는 자신이 환자들을 치
료해 보겠다고 했다.
많은 환우들이 모였다. 모두 현 선생의 치료법에 기대를 걸고 있
었다. 환우들을 처음 만났는데도 서로 자신의 증세와 상대방의 증세
를 묻느라 정신이 없었다. 잘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의원에 드나
들기 시작하자 작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다른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
는데 그 위에 앉기도 하고 부딪쳐 집기가 부서지기도 했다.
이렇게 한 달 정도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김 선생이 다시 한
국으로 왔다. 환우들이 돈을 각출하여 사무실을 하나 얻었다. 집기
를 사고 옮겨야 하는데 사람이 없었다. 친구 상철에게 도움을 청했
다. 상철과 나는 집기를 옮기고 사무실을 꾸몄다. 김 선생과 많은
환우들이 모여 개소식을 가졌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형편이 어려운 사람
들도 많았다. 회원들이 자진해서 내는 회비로는 운영하기가 힘들었
다. 월회비를 정해서 내기로 했는데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
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공통점 외에는 모든 처지가 다른
사람들의 모임이니 의견을 일치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돈을 엄청나
게 갖고 있는 사람도 다른 사람보다 한 푼도 더 내려 하지 않았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덜 내는 것도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자신의
병에 대한 치료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김 선생이 자신
의 일본침구대학 선배라며 주 선생을 모시고 왔다. 예순이 가까운
노인이었다. 협회로서는 부담이 더 커졌다.
일 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치료에 회의를 느끼고 그만두는 사람
도 생기고 새로운 회원들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나 자신도 치료에 대
한 확신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실낱같은 희망만 가지고 치료
를 받고 있었다. 한계 상황에 처하면 인간의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나
는 법이 아닌가? 우린 모두 페스트의 주인공들과 같은 처지였다.
어떤 사람은 욕심을 내고 어떤 사람은 도움을 청했다. 협회의 책
임지고 있는 나로서는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면서도 보람을 느낄 수
없었다. 나 혼자 편안히 일본에서 치료를 받으며 공부를 더 할 수도
있었는데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러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치료
의 효과가 있던 없던 정신적 위안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계
속 꾸려 나갔다.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에겐 술을 사주며 위로도 해주었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겐 대접도 받았다. 특히 가슴이 아픈 것은 이제 사회
생활을 시작하려는 젊은 친구들이 나보다 진행이 빨리 되어 시력을
잃은 것을 보고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무력감이었다. 어쨌든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나서 시력을 잃었지만 그들은 시작도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시력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어린 환우들은 나이 먹은 환우들을 보면서 불안해했다. 자
신들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미래를
알고 나면 살아갈 수 없다는 현자의 말을 입증하는 현상이었다. 젊
은 친구들은 점점 협회를 떠나고 아직도 치료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
는 사람들만이 남았다. 그리고 부산의 환자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
며, 김 선생은 자주 자리를 비웠고, 주 선생은 김 선생이 없는 사이
에 주도권을 잡으려고 궁리하고 있었다.
새로운 저주파 치료법을 책에서 찾아내어 환우들에게 임상실험을
시작한 것이었다. 환우들은 눈 바로 밑의 구후 라는 혈에 치료를 하
다 혈관이 터져 출혈이 발생하면 눈동자에까지 혈액이 흡수되어 눈
을 제대로 뜰 수 없는 상태를 경험하고는 저주파 치료에 이끌리기도
했다. 이제 협회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치료의 효과도
없었지만, 치료의 주체인 김 선생과 주 선생의 태도의 변화가 심각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환자들은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
고 했지만, 사실은 한국에서는 인정해 주지 않은 일본침구사 면허로
돈을 벌어야 했고, 나는 그들을 위해 불법 의료 행위를 알선해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밀린 관리비를 내고 지분에 따라 나머지 돈을 돌려주고 나니 그렇
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이 무렵 나는 한 전문대학에 출강을 하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도 유치원처럼 느꼈었는데, 내가 가르
치는 입장이 되니 더욱 그랬다. 나는 강의가 끝나면 아이들을 데리
고 술을 마시면서 세상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특히 아이들의 전
공이 영화이니 영화계의 현실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러 주었다. 모
두들 커다란 꿈을 가지고 학교에 들어 왔지만 그 중에서 세속적 성
공을 거둘 수 있는 아이는 몇 명이나 되겠는가?
조각과 선배 중의 한 사람이 영화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해서
시나리오 준비도 하고 제작자를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
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눈이 나쁜 영화감독 지망생 이외에는 어
떤 특별한 존재도 아닌 것이다. 선배는 진행비만 날리고 시간만 버
린 꼴이 되었다. 갚아야 할 빚이 하나 더 는 셈이었다. 다음엔 이
철용씨가 공동 연출로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빈민 운동가이
며 왕년의 베스트 셀러 작가이고 전직 국회의원인이 영화감독을 하
겠다는 소식은 선정적 대중매체의 기사거리론 훌륭했지만 제작자들
이 돈을 내 놓을 정도의 관심은 끌지 못했다. 그저 신문사와 방송국
에 나가 헛바람만 일으키다 끝이 났다.
RP 협회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큰 소득이 있었다. 전문대에 출강
하면서 중고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물론 가장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 서울 방송의 사랑의 징검다리 에 출연한 내 모습을 본
한 학생의 아버지가 독서확대기를 사 주셨다 500만원이라는 거액
의 기계를 아무 조건 없이 사 주신 것이다. 정말 고마운 분이었다.
나는 아직도 이 기계를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RP 협회를 운영해
온 대가를 지불 받은 셈이었다. 인생은 이렇게 짐작할 수 없는 방법
으로 보상을 받기도 하고 대가를 지불하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은 아
마 이런 것을 주님의 역사하고 할 것이다.
극단 소리 의 탄생
협회의 짐을 일부는 염곡동에 옮겨 놓고, 일부는 약시협회 사무실
을 얻어 쓰고 있는 하상복지관의 지하로 옮겼다. 협회를 해산하고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 김소영이라는 젊은 여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망막색소변성증 환자였다. 만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잡지
에 난 내 기사를 언니가 전해 줘 나를 알게 된 것과 자신이 살아 온
이야기를 했다. 사무실을 정리하고 난 상태이니 그녀를 하상복지관
의 약시센터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만의 외출이라는 점을 고려해
그녀에게 세상에 다시 나오기 위해 점자와 컴퓨터 등을 배울 것을
권했다. 마침 하상복지관에서는 그런 재활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
녀와 함께 나도 컴퓨터를 배웠다. 교사는 대학을 졸업하고 시력을
완전히 잃은 김상병이라는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는 매우 친절하고
자상하게 컴퓨터를 가르쳐 주었다.
약시 센터에서 여러 가지 경로로 많은 약시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약시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얼굴이 필요했다. 모두들 모여
궁리하뎐 중에 최동익이 극단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했다. 아마도 내
가 영화배우 출신인 것을 감안한 제안인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나
는 연극에 대한 공부는 물론 연극행위에 가담한 적도 없었다.
소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민기씨를 만나 도움을 청했다. 그는 시
각장애인들의 극단을 설립한다는 것 자체에는 회의적이었으나 기술
적인 지원을 해 주겠다는 언질을 주었다. 그리고 연출을 맡아 줄 최
종률 선생을 소개해 주었다.
최종률 선생은 아이들에게 미술을 지도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교회에서 성극을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난 최 선
생은 매우 적극적으로 도와 주셨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로서는
신앙적 도전을 하는 것 같았다. 최 선생은 창단 공연작품으로 김지
하선생의 금관의 예수 를 선택했다. 자신이 대학시절 공연에 참여
했던 작품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시각 장애인 극단과 어울
릴 것 같다고 했다.
우선 시각장애인 중에서 연극을 하려고 하는 동지를 찾아야 했다.
얼마 전 만나게 된 김소영양이 연극을 하고 싶다고 해서 첫 번째 단
원이 되었고, 시각장애인들의 잡지에 공고를 내서 희망자들을 모았
다. 최동익이 자신의 맹인학교 후배들을 데리고 와서 합류했다. 일
단 희망자들 중에서 자질이 있는 인물들을 추려내야 했다. 이 과정
에서 두 명의 여자가 탈락되었다.
금관의 예수 에 필요한 인물은 주인공인 문둥이와 거지, 그리고
배불뚝이, 경찰, 창녀, 신부, 수녀, 예수상 등 적어도 일곱 명이 필
요했다. 그리고 스텝.
인원을 확보하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종률 선생이
집사로 사역하는 동숭교회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약시인들은 확대
한 대본을 만들고 맹인들에겐 점자대본이나 녹음대본을 만들어 주
었다. 톡수교육과에 다니는 학생들이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찾아와
대본 읽기를 도와주었다.
대본을 외우기 전까지는 일일이 대사와 지문을 읽어주어야 했다.
한 달이 지나자 대본을 외워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배우들이 대사를
외우고 나자 동선을 만들어 연습을 시작했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
다. 맹인들의 걸음걸이는 비장애인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연출자인 최종률 선생은 배우들의 뒤에 붙어 서서 그들의 팔과 다리
의 움직임을 가르쳐 주어야 했다.
맹인들은 대부분 머리를 먼 산을 바라보는 상태로 하고 팔을 몸에
바짝 밀착시키고 걷는 특징이 있어 그것을 교정하는 것도 매우 힘들
일이었다. 그리고 동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닥에 두꺼운 테이프를
붙여 주어야 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두 달을 연습하고 나니 대사
는 그럴 듯 했는데 움직임이 엉망이었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공연할 무대와 똑 같은 연습 무대를 만들어 줄 수 없는 것이
었다. 비장애인들의 경우 대강의 동선만 익히고 나면 공연 무대에서
자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파악해서 움직일 수 있지만 시각장애인들
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종률 선생과 나는 기적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서로의
심정을 토로했다. 우리는 결과에 상관없이 시도가 중요하다는 점에
의견을 같아 하고 매진했다. 공연장을 인켈 아트홀로 정하고 날자는
극장의 정기 휴관일인 월요일로 정했다. 단 하루에 2회만을 하는
공연이었지만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다행히 최종률선생은 무대미술도 맡아 주셨고 예수상은 내가 직
접 제작해야 했다. 문예진흥원에서 4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아 시작
한 작업이었으니 나머지는 사비로 충당해야 했다. 연극에 들어가는
경비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이 식비와 무대장치 비용인데 각
자 식사를 해결하고 모이기로 했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었으니 그
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어쨌든 공연 날짜는 임박했는데 예수상의 역
할을 맡을 배우를 구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는데, 명색이 영화배우 출신인 나로서는 아마추어들과 연기한
다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더욱이 연극 무대에는 한 번도 서 본
적이 없고 연기를 그만둔 지도 십 년이 넘어 있었다. 급하게 대사를
외우고 준비를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공연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집에서 예수상을 만들고 다른 소
품들을 챙겼다. 공연장으로 소품과 예수상을 들고 가니 최종률 선생
이 걸개그림을 무대에 달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상에 씌울 금관을
구하지 못했다. 최종률 선생이 남대문에서 꽃꽂이 용 바구니를 사
오라고 해서 스프레이를 뿌려 겨우 만들었는데 소품 중 가장 훌륭했
다. 바닥에 배우들을 위해 두꺼운 종이로 동선을 따라 붙였다.
드디어 손님들이 입장하고 일 회 공연이 시작되었다. 나는 예수상
뒤에 서서 얼굴만을 내민 채 진행되는 과정을 희미한 시력으로 내려
다 보았다. 첫 장면은 신부와 수녀의 대화 막이 오르고 조명이 켜졌
다. 신부 역할을 맡은 김소영이 엉뚱한 곳으로 입장했다. 그녀는
RP 환자이니 어두운 조명에서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
도 그럴 것이 무대장치가 늦어져 리어설도 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실
수였다. 그러나 신부 역할의 황병완이 재빨리 그녀의 위치를 잡아
주었다. 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배불뚝이 역할의 성재가 무대에
서 떨어졌다. 단이 그다지 높지 않아 큰 문제는 없었지만 그가 동선
을 찾지 못할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위치를 감각으로 찾아냈다. 이야기가 전개되
면서 무리 없이 연극이 진행되었다. 나는 예수상 뒤에 서서 이들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예수상이 눈물을 흘리는 기
적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나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배우들의 필사적
인 몸부림을 세상에 외치는 아우성을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보고 있
을 수 없었다.
막이 내려지고 커턴 콜을 받는 배우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모든
신문과 방송국에서 온 기자와 리포터들이 무대 뒤로 와 인터뷰를 원
했다. 인터뷰를 하는 배우들은 모두 울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두 번째 공연은 한결 차분하게 진행이 되었지만 역시 막이 내려지자
모두 벅찬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언론은 극단 “소리”의 처녀 공
연을 극찬하였다.
소리 의 처녀 공연
지금은 각자 생업을 찾아 떠난 단원이 많지만 소리의 처녀 공연에
참여한 시각장애인들과 자원봉사자들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배우로 참여한 손민준, 임흰남, 황병완, 김예소리, 김소영,
조성재, 최병모 그리고 스텝으로 뛰어 준 김영조, 양남규, 이성수,
최동익, 김상철, 오병호.
비장애인들과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 극단 소리는 유명한 단체가
되었다.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 시각장애인들이 참여하기를 원했
다. 극단 소리는 93년 11월부터 98년 5월까지 7회의 공연을 했다.
일 년에 적어도 2회의 공연을 하기로 결정하고 밀고 나갔다. 해 돋
는 골목길 , 헬렌 빛을 잡아라 , 유리 동물원 까지는 별 무리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유리 동물원 을 공연하면서 박복남과 같은 유
능한 조연출과 황윤희, 금비, 등과 같은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배우들도 지쳐 있었고,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헬
렌 빛을 잡아라 의 공연이 극단 소리의 마지막 공연이라고 할 수 있
다. 새로 참여한 정승아, 남금주, 김정과 황병완, 김소영 등이 빛나
는 연기를 해 주었고 단원 전체의 마음이 한마음으로 작품에 임했기
대문이었다. 비록 구민회관의 엉성한 무대에서 올린 공연이었지만,
헬렌 켈러와 애니 설리반의 치열한 삶을 그린 작품이었기 때문에 단
원들 모두가 벅찬 가슴으로 뛰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리 동물원 의 공연 이후 대부분의 배우들이 극단을 떠났다. 생
업을 찾아서 혹은 개인적 사정으로였지만, 결국은 내가 단체를 제대
로 끌어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힘들게 만든 극단 소
리를 방치할 수 없어 다른 단체와의 합동공연을 시도했다. 유일하게
남은 김소영을 데리고 5회와 6회의 공연을 강행했다. 그리고 재정
이 바닥이 나 공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RP 협회를 운영했던 때처럼 소득이 있었다.
유리 동물원 의 공연을 취재하려 왔던 교육방송 라디오의 장애인
프로그램에서 MC를 맡아 주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은 것이었다. 처
음에는 원고를 읽을 수 없는데 진행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망설였지
만 주어진 일은 무엇이든 하자고 결심한 후였기에 받아들였다.
사랑의 한가족 은 최불암씨와 유열씨가 진행해 왔던 한 시간짜리
주간 프로그램으로 일종의 라디오 매거진이었다. 장애인을 대상으
로 하는 몇 개 안 되는 프로그램 중의 하나였다. 나에게 진행을 부탁
한 찬충희 PD는 젊고 의욕적이었다. 첫 녹음을 하던 날 휴대용
CCTV를 통해 겨우 서너 글자만을 보면서 전날 외운 원고를 머리
속에서 끄집어내려니 정말 힘이 들었다.
여러 번 NG를 내고 나니 자신이 없어졌다. 한 PD는 나를 격려했
지만 그때의 심정은 정말 참담했다. 시력을 읽고 나니 정말 무능력
자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첫 녹음을 겨우 마치고 많
은 생각을 했다. 포기해서는 안 된다. 더 철저하게 원고를 외우자.
두 번째 녹음은 조금 나아졌다. 원고를 철저히 외웠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6 개월을 진행하다가 리포터로 일하던 최진희를 공동 진
행자로 맞게 되어 훨씬 부담이 줄어들었다. 그녀는 재치 있게 내가
놓치는 원고를 대신 처리해 주었다. 그리고 김소영을 나레이터로 기
용할 것을 제안하여 받아들여졌다.
사랑의 한가족 을 진행하면서 행복한 사람들 과 개 같은 날의
오후 를 무대에 올렸다. 극단 소리 의 5회와 6회 공연인 셈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호사다마고 새옹지마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캐나다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한국에서 재기하
기 위해 귀국한 동창생 녀석이 도움을 청해 와 도와주다 보니 다음
공연을 위해 마련해 놓았던 사천 만원이 몽땅 날아가 버린 것이었
다. 그 바람에 사무실도 날아가고 적지 않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극단 소리 의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
이 되어 버렸다. 이 동창 녀석의 일로 나는 모든 일에 대한 의욕을
상실했다. 또 다시 내 운명이 나를 방해하는 것 같아 미칠 것 같았
다. 그러나 인생은 역시 새옹지마 이철용씨가 이사장으로 일하는 장
애인 문화예술 진흥개발원(약칭 장문원)에서 연극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신인작가 김수미와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쳐 사랑아 사람아
의 대본이 만들어졌고, 두 달의 연습을 거쳐 무대에 올리게 된 것이
다.
유일한 소리의 단원인 김소영이 시각장애인 역할을 맡았고, 지체
장애인인 김미나가 주인공인 지체장애인 역할을 맡았다. 자원봉사
무대감독으로 박승만이 열심히 뛰어 주었고 내가 개 같은 날의 오
후 에서 처음 무대에 세운 하성광이 남자 주인공으로 열연을 했다.
장문원으로서는 관객동원에는 성공했지만 수익사업으로는 실패했
다. 그러나 이 연극의 공연이 끝나고 하성광과 김미나는 결혼을 했
다.
연극의 주제가 여성장애인의 사랑과 결혼이었으니 연극은 진짜
성공한 것이었다. 이 연극의 제작비는 사천 만원 정도 들었다. 그리
고 배우들은 뇌성마비 장애인 관객과 정신지체인 관객 앞에서 연기
하면서 모두 감동적인 체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소리의 8회 공연이
가능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동창녀석이 사업에 성공해서 공연자
금을 반납하면 좋겠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소리의 8회 공연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장판의 사람들
사랑의 한가족을 진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혼자
서 극단 소리 만을 운영해 오던 나로서는 참으로 뜻 깊은 수확이었
다. 이미 머리가 허옇게 센 나이에 새로운 사람들과 친분을 맺는다
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나이가 들수록 인
간을 사랑하게 되고 포용해야 하는 것이 현인들의 이상적인 가르침
이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아직도 사람을 가려 만나는 편협함
을 버리지 못 했으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고는 하나 결국 자신이
좋아할 만한 사람만을 만났을 것이다.
우리는 장애계를 장판이라고 부른다. 장판에서 만난 사람들은 크
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다. 한 부류는 장판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장애인과 다른 부류는 장판에서 일을 하는 비장애인이다. 장애인의
경우 비장애인들과 같은 입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판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냥 이름만 걸어놓고 뒷전에서 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닦
아 놓았기 때문에 자신을 장애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판
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장판에
도움이 될 수 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실은 장판에
서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문제는 장판에서 일하는 비장애인들이다. 이들도 몇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비장애인들의 세상에 끼어들지 못해서 장판으로 들
어 온 부류가 있고 장판이 어수룩하다고 생각해 들어온 부류가 있으
며 진정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장판으로 들어 온 부류가 있
다.
첫 번째 부류의 경우도 대부분 선량하고 어느 정도 무능한 사람
들이기 때문에 큰 피해를 주거나 문제를 야기시키지는 않는다. 이
부류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거나 장애를 무기
로 삼는 장애인보다도 장판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
두 번째 부류는 진정 장애판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들인데 이런 사
람들일수록 기회주의자의 기질이 강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출세 지
향적 인물이기 때문에 장판의 암과 같은 존재이다. 관변단체의 장들
이 대부분 이런 부류에 속한다.
어쨌든, 이런 세 부류의 사람들을 모두 만나게 되었다. 당연히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과는 인사만 나누고 교분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도 내게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아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다행이었다. 첫 번째 부류는 도와주어야 하니 자연히 만나면 밥도
사 주고 여러 자기 이야기들도 해주게 된다. 타고난 본능 때문에 남
이 모르는 것을 참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도 그저 답답할 뿐이지 별 문제 없이 잘 지낸다.
개인적으로 가장 골치 아픈 친구들이 세 번째 부류들이다. 미워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항상 만나 줘야 하고 술을 함께 마시면서 아름다
운 세상 만들기에 대해 떠들어야 한다. 그래서 힘이 든다. 몸이 피곤
해도 만나야 하고 일이 있어도 가능한 한 시간을 내서 만나줘야 한
다. 이 이상주의자들 중 마누라가 경제적인 능력이 있거나, 상속받
은 재산이라도 있는 친구들은 만나도 마음이 편한데 그렇지 않은 친
구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이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친구들은 장판에서 오래 버티지 못
한다. 그래서 내 마음이 더 아프다. 세상은 아주 서서히 그리고 사회
적 강자들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만 조금씩 변해 가기 때문이다. 사
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느 시대고 힘든 법이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가 갑자기 사회적 강자로 변하면 그들은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기억
하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이 올챙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언제 개구리가 될지 아
니면 영원히 올챙이로 남아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은 용감한
올챙이로 잘 살고 있다.
내게 컴퓨터를 가르치던 시각장애인이 있다. 대학 4학년 때 시력
을 잃은 친구다. 이 친구는 과묵하고 성실하다. 컴퓨터를 배우면서
그 친구의 인간성에 반해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 자신이 실명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 친구는 조용히
대답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전 정말
행복합니다. 어차피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인데 전 두 가지 인생
을 살 기회를 얻은 게 아닙니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보는 인생
을 살았고 지금은 보지 못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으니... 물론 불편
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나는 어리석은 질문이나 한 것처럼 부끄러웠다. 이 친구의 이름은
김상범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다른 시각장애인에게 컴퓨터를 가르
치고 있겠지만 이 친구를 생각하면 항상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별명이 내 주를 가까이. 또 이공작 이라는 친구가 있다. 복지체
육회에서 근무하다. 사표를 내고 엉뚱하게 화장품 장사를 해서 내게
구박을 많이 받았다. 이 친구를 처음 만난 것이 사랑의 한가족 식
구들이 저녁을 먹는 자리였는데 나는 이 친구가 누구인지도 몰랐었
다. 그런데 술잔을 권하면서 내 주를 가까이 하고 외치는 것이 아닌
가. 술 먹는 개신교 신자가 술자리에서 주님 타령을 하는 놈도 있나
생각했다. 원래 농담을 잘 이해 못하는 편이지만 그 주가 술을 뜻한
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 친구가 소위 법 없이도 사는 무골호인이다. 다행히 마누라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영어나라 말 선생을 해서 굶을 걱정은 없지만
새로 시작한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좋다 보니 여러 사람
에게 이용도 잘 당하고 손해를 많이 보고 조직사회에서 버티기 힘든
친구다. 나처럼 몸에 열이 많아 봄부터 가을이 깊을 때까지 반바지
를 입고 배낭을 메고 다닌다.
직장에 다닐 때도 출퇴근할 때는 반바지를 입을 정도다. 어릴 때
미삼을 간식으로 먹어서 그럴 것이라는 본인의 이야기가 그럴 듯 하
다. 이 친구는 술을 조금만 덜 먹으면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술이 좀 과한 편이다. 그래도 근본이 착하고 순수한 친구라 언제 보
아도 밉지가 안아 좋은 친구다. 이 친구의 이름은 이원석이다.
신문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것도 장애인 신문
사를 꾸려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이런 힘든 일을 10년 째
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 주간 장애인 복지신문 의 기획실장 안희진
이다. 이 친구는 발이 넓고 후배들이 잘 따른다. 직선적으로 말을
하는 편이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오해받기 쉬울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신문사를 운영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살
림을 꾸려 가는데는 손해를 볼 지도 모르겠다.
이 친구 덕분에 동경에서 있었던 장애인 예술제에 한국 대표단 단
장으로 참석한 적이 있다. 내가 술 먹고 실수할까봐 이 친구가 노심
초사했었는데, 마지막 날 영어 연설을 무난히 하고 나니 만루 홈런
을 쳤다고 좋아했다.
상하이에서 온 여인
동경에서 열렸던 장애인 예술제 에 한국 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했
었을 때 만난 중국 청각장애인 여성과 만남으로 빚어진 일이다. 맹
인학교에 필드 트립을 가기 전날 밖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와 조금
모자라는 것 같아 맥주를 사 가지고 들어와 마시고 있는데 주최측의
마끼 상이 몽고 술을 한 병 들고 들어와서 마시다 보니 엉망으로 취
했다.
아침에 자명종이 울어 눈을 뜨기 떴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겨
우 샤워를 하고 허겁지겁 나가니 일행이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으로 빈자리에 가서 그냥 앉았는데 앞에 동양인이 않아
있어 인사를 했더니 옆에서 안 실장이 청각장애인이라고 귀뜸을 해
줬다. 그 순간 갑자기 처연한 심정이 되었다. 청각장애인과 시각장
애인의 만남. 인사조차도 할 수 없는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였
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려면 몇 차례의 통역이 필요했다.
우선 내가 영어로 말하면 그것을 일본말로 통역을 하고 다시 중국
말로 통역을 해서 그것을 수회로 통역을 해야만 그녀와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일, 중 통역사가 없어 대화는 할 수 없었다.
나는 술이 덜 깬 상태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손을 잡고 모
나리자 를 불러 주었다. 그리고 함께 필드 트립을 무사히 마쳤다.
그날이 마침 공식 일정의 마지막 날이었고 저녁에 폐회식 겸 파티가
있었다. 각국의 대표가 나와 영어로 인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다가 이 상하이에서 온 중국 여인과의 만남에
서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상하이에서 온 청각장애인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말을 못하
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몇 사람
의 통역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
습니다. 그러나 함께 여술제에 참여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온
장애인들의 공연과 작품을 함께 보고 들으면서 우리는 교감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 함께 모인 것은 바로 예술의 힘을 증명하
기 위해서 아닙니까? 이 힘을 비장애인들에게 증명하고 그것을 증
언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닙니까?
연설이 끝나자 장내는 술렁거렸고 상하이에서 온 그 청각장애인
은 내게 조그만 선물을 전하며 울었다. 그녀는 내 연설을 몇 명의
통역을 통해서 이해했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도 내게 악수를 청했
다. 나를 미친 놈 정도로 생각했던 그녀의 남편의 오해도 풀린 것이
었다.
지렁이의 노래
이 예술제의 공연 중에서 나를 울린 감동적인 뇌성마비 장애인들
의 공연이 있었다. 텅빈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자 한 뇌성마비 남자
장애인이 힘겹게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오분 정도가 걸렸다.
나는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무대 중앙에 선 그는 니혼
고(일본어) 를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온몸으로 20 번 반복했다.
그리곤 에이 고(영어) 를 또 똑같이 힘겹게 20 번 외쳤다. 그리고
인사를 하다가 모자가 벗겨졌다. 모자를 손으로 집어 쓰려고 했으나
도저히 할 수 없자 그는 무대에 눕더니 기어가서 머리를 모자에 밀
어 넣고 일어나 힘겹게 퇴장했다. 나는 연출자와 배우에게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쳤다. 극단 소리를 끌어오면서도 그런 아이디어 하나
생각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대장암으로 대장의 일부와 결장을 떼어 낸 친구가 있다. 장애인의
권익과 복지를 위한 여러 시민 모임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친구다.
자신이 납품업을 하고 있으나 IMF 이후 힘들어하고 있다. 처음 이
친구를 만났을 때 어눌한 말 때문에 뇌성마비 경증 정도로 생각했었
다. 내 시력이 엉망이니 더욱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본인의
고백으로 대장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친구
와 식사를 함께 하거나 술을 마시면 화장실이 편한 곳을 찾아야 한
다. 다른 사람처럼 굳은 변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화장실을 자주
사용해야 한다. 이 친구의 선량한 마음이 나는 정말 좋다. 그래서
이 친구가 전화를 하면 거절할 수가 없다. 자신이 힘이 들어도 장애
인을 위한 일에는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 친구의 이름
은 김현수이다.
주변의 친지들이 똥팔이 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친구가 있다. 정
확히는 나보다 일 년 먼저 태어났다. 그렇지만 우리는 친구처럼 지
낸다. 이 친구는 사랑의 징검다리 라는 프로그램에 내가 출연했을
때 그 프로그램을 연출했다. 그리고 천의 얼굴을 가진 버섯 과 게
의 연출자로 또 인간 시대 의 연출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환경과 장
애와 그리고 일본에 관한 다큐멘터리만을 찍겠다고 하는 친구다.
장판에서 이 친구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서울방송국
에서 근무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성 때문이다 몇 년 전 엄청난
돈을 사기 당하고도 천신만고 끝에 사기꾼을 잡고 나서도 그 자가
불쌍하다고 하는 바보다. 이 친구가 아이를 입양했다. 두 딸이 다
자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
친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입양했다. 나는 이 친구를 존경하고 사
랑한다. 단지 낮 2시부터 새벽 2시까지 술을 함께 먹어야 하는 날은
예외다.
김정희 대장은 시집도 가지 않은 60의 노처녀다. 부름의 전화 라
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봉사단체의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여장부이
고 마음이 따뜻한 여인이다. 기분 좋은 자리에서 춤을 함께 출 수
있는 유일한 장판의 인물이다. 그녀와 내가 춤을 추어도 아무도 이
상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만큼 허물없는 사이다. 나는 사석에서
이 여인을 누님이라고 부른다. 장애인을 위해 죽을 때까지 일할 것
이다. 부디 건강하길 기원한다.
함께 걸음 에서 일하는 친구들도 빼 놓을 수가 없다. 장애인 권
익문제 연구소 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함께 걸음에서 일하는 친구들
은 특정한 인물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이다.
지금 일하고 있는 친구들만이 아니라 예전에 근무하던 모든 친구들
을 뜻한다. 내가 영화 이야기를 2년이나 연재한 인연도 있고 예전에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이성재 의원도 포함된다. 이들은 전에는 과격
하다는 평을 들었었는데 요즘은 대장이 여당의원이라 어떤 평을 받
는지 모르겠다.
사랑의 한가족 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다. 시력
을 잃고 나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나는 모른다. 그냥 달걀귀신처
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목소리와 이야기로 그들을
이해하고 기억한다. 만약에 그들이 아는 척하지 않고 지나가면 나는
그들을 만날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이 더 좋다.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을 굳이 만
날 필요가 없어서이다. 그리고 가끔은 내가 만나기 싫은 사람은 목
소리로 누구인지 알 수 있지만 모른 척한다. 못 보는 것이 꼭 불편한
것만은 아니다. 장애는 극복되기 위해 있다는 말이 있다. 참 좋은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는 극복할 수 없다. 그저 극복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자신이 장애를 극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도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다. 장애는 제거되어야 한다.
정신적이던 육체적이던 장애가 제거되고 나면 그때야 비로소 장
애가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어느 종교에도 귀
의하고 있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존재에게도 내 자유를 구
속당하기 싫어서이다. 계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어기기도 싫거니
와 그것을 어기고 나서 용서를 구하면 사함을 받는다는 것도 싫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는 많을 상처를 받았고 또 상처를 주었
다.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죽기 전에 그 상처를 가능하다면 치료해
주고 싶다. 내가 입힌 상처로 사후에 지옥을 가던 축생으로 태어나
던 지금의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로 생각한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예수님과 부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분
들처럼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도 모든 인간을 사랑하
지 못한다. 그저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인간만을 사랑한다. 죽기 전에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많은 것들과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다. 마음이 여린 나
는 잘 울었다. 영화를 보면서 소설을 읽으면서 또 힘겹게 살아가는
인간을 보면서 울었다. 그 눈물은 왜 흘린 것일까? 왜 자신과 관계
없는 사람들의 인생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눈물을 흘렸을까? 감
수성이 예민해서였을까? 아니면 심약해서였을까?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 보는 일은 매우 고통스럽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일이
다. 그리고 부끄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한 일이다. 하지만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참회할 수 있다는 일이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
시력을 잃고 나서 만나 사람들 중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 시
력을 잃기 전에 만난 사람들 중에도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지만,
시력을 잃은 후에 더 많이 만났다는 말이다. 지금의 나는 별로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된 것 같다. 오히려 귀찮은 존재이다. 길을 안내 받아야 하고
은행에 돈이 있어도 찾을 수 없고, 물건도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마
음이 따뜻한 사람들만이 내 곁으로 온다.
몇 년 전 대선을 치를 때 만난 승만이가 그렇다. 서소문동의 장애
인 대책본부 사무실에 드나들 때 몇 번이나 길을 잃어 헤멘 적이 있
다. 내가 있는 곳의 위치를 설명할 수 없으니 한번 길을 잃으면 무척
고생을 했다.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희미하게 보이는 주변을 설명하
면 승만이가 달려 나와 나를 찾아 헤멨다. 그 인연으로 혈당이 높아
져 시작한 체육관 나들이를 함께 했다. 그 덕분에 살도 빠지고 혈당
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 왔다. 심약한 것만 고치면 정말 좋은 후배인
데 마음이 약해 시행착오를 많이 한다.
요즘 거의 매일 붙어 다니다가 자주 못 보는 후배가 있다. 윤동혁
이 푸른별 영상 의 문을 열고 나서 본업인 촬영감독으로 돌아간 이
형만이다. 동물은 내 친구 라는 단체를 운영하던 수의사 홍하일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처음 만난 날 술이 먼저 취해서 횡설수설하
는 것을 보고 정을 주지 않았는데, 일 년 후 다시 만나서 극단 소리
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함께 하면서 형제처럼 가까워진 후배다.
말은 느리게 하지만 사고가 올바르고 내 허물도 곧잘 지적해 줘서
마음에 든다. 사람과의 만남을 타산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 이 친구
의 장점이고 그래서 손해도 많이 볼 것이다. 술이 취하면 더 논리적
이 되는 것이 이 친구의 특징인데 그래서 술 취한 아가씨들은 잘 울
린다. 아가씨들의 눈물 꼭지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후배들이 세상사는 맛이 나게 한다. 소리 의 창단부터 지금
까지 계속 후원을 아끼지 않는 고등학교 후배 재두도 이들 중 하나
다. 무용하는 상근이도 20년 가까이 변함없이 별 볼일 없는 선배
뒷치닥거리를 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이렇게 진 빚들을 다 갚으
려면 백 년을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인생이니
빨리 갚아야 할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 정신이야 계속 변화
해야 하지만 마음이 변하는 사람들을 보며 서글퍼진다. 사람과 사람
의 만남을 왜 그렇게 이해득실만 가지고 따지는지 슬퍼진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미워하는 것보다 그냥 슬
퍼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다. 사람이 살면서 항상 행복할 수
가 있겠는가 슬플 때도 있어야지. 하지만 세상이 보이지 않으니 세
상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마음 속에 있는 세상이니 마음이 아름
다우면 세상도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다시 찾은 독서의 즐거움
시력을 잃은 사람이 무슨 독서냐고 하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
은 녹음도서의 존재를 모르는 멍청한 사람이다. 내가 요즘 더 행복
한 이유가 이 녹음 도서 때문이다. 마음씨 착한 여자들이 책을 낭독
해서 녹음을 한 것이 녹음 도서다. 몇 군데 시각장애인 단체에서 대
출을 해 준다. 사실 이 녹음 도서는 시각장애인 뿐만 아니라 독서에
어려움을 겪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잘 몰라
서 이용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노인들과 운전을 오랜 시간 동안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평생회원으로 가입비가 어느
단체나 3,000원 정도이다.)
물론 전문서적은 소설이나 일반서적에 비해 적은 편이지만 요즘
은 미셀 푸코나, 움베르토 에코의 책과 같은 높은 수준의 책도 녹음
이 되어 있어 세상사는 맛을 더 나게 한다. 아마추어들이 녹음을 하
는 것이니 가끔 집중하기 힘들 때도 있지만 방바닥에 뒹굴뒹굴 구르
면서도 독서를 할 수 있으니 신선노름이 아니고 무엇이랴?. 청력을
잃지만 않는다면 치매에 걸리기 전까지는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얼마
나 행복한 일인가? 요즘 내 친구들이나 후배들도 돋보기를 끼지 않
고는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시력을 잃기 전보다 독서량이 많아졌다.. 아무리 오랜 시
간 동안 책을 읽어도(?) 눈이 피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벼
운 소설이나 수필인 경우 다른 일을 하면서도 들을 수 있으니 두 마
리 토끼를 잡는 일도 가능하다. 시력을 잃었다고 모든 것을 잃는 것
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쓸데없는 일에서 해방되는 즐거움도 있다.
예를 들면 쓸데없는 텔레비전의 저속한 드라마나 코미디를 보고
들을 필요없이 음악을 듣거나 녹음 도서로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번 것이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비교하는 것이 어리석은 노릇이
지만 따져 보면 그렇게 손해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녹음 도
서를 만들기 위해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마음씨 착한
자원 봉사 낭독자들에 감사할 뿐이다.
아직도 환한 나의 빛
미국에서 돌아 온 후 시나리오를 다섯 편이나 썼지만 어느 것 하
나 제작자가 나서지 않았다. 6년이나 떠나 있었던 한국의 실정과
대중의 취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원래 재주가 없다고 생각
하고 포기하려고 했지만 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가 힘들다. 파리
유학 자금을 마련하려고 시작한 영화배우에서 감독으로 변신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마쳤고 영화에 대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막
상 일을 하려고 하니 내 눈이 말썽을 부리는 것이다. 앞도 제대로
못 보는 사람에게 영화를 만들라고 돈을 대줄 정신나간 제작자가 있
을 리도 없겠지만 내 능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요즘 영화의 관객들이 많이 달라졌다. 우선 나이가 어려졌
다. 60년대와 70년대 국산 영화의 관객을 고무신족 이라고 비하해
서 표현했었는데 이제는 스니커족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모든 대중문화가 10대의 취향만을 따라가려고 기를 쓰고 있
으니, 나이 먹은 사람이 볼 영화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어린 사람
들이 가장 확실한 소비자라고 하는 경제 논리를 자본주의 경제하에
살면서 매도할 수도 없으나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게 모든 대중문화가 십대의 문화로 바뀌어 간다면 앞으로 다
가오는 문화의 세기인 21세기의 한국 대중문화가 어떤 모습일 지
짐작할 수 있다. 내가 귀국 후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이 모든 그런
영화들이다. 예외가 하나 있다면 서편제가 유일한 영화이다. 그러
나 서편제의 흥행 성공은 또 다른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보스의
행동이나 말에 무작정 따라가는 군사문화의 찌꺼기가 그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씨가 서편제를 관람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자 서편제는 이른바 블락 버스터가 되었다. 아무 판단력도 없
는 대중의 들쥐같은 행태를 드러낸 것이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일종의 사회적 현상이라고 고다르가 말한 적이 있는데 바로 서편제
의 경우가 한국의 사회적 현상 즉 대장을 맹목적으로 쫒아가는 군사
문화의 찌꺼기였던 것이다. 영화의 관객이란 다른 예술 행위의 관객
과 달리 질적 다양성 때문에 더욱 사회학적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
에서 한국 영화 관객의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 영화 관객의 양상
우리는 모두 영화를 감상하지만 제각기 다른 시각과 정서로 영화
를 이해하고 비평한다. 이것은 영화 매체의 시그니파이어(Signif
ier)가 갖고 있는 의미의 잉여성(Cinematic Excess)과 소설의
내러티브(Narrative)에서 빌어 온 구조적 특성을 갖고 있는 수많
은 영화의 영향이다. 이 문제는 지나치게 전문적인 토론이 필요하므
로 일반인에게는 흥미없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부연하지 않겠다.
물론 영화는 소위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의 범주를 넘나들 수 있는
매체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일반적 비
평인 경우 "나는 문외한이지만"이란 단서를 항상 붙이지는 않는다.
이것은 영화를 대중문화의 범주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에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마치 우리가 텔레비전의 연속극이나 쇼를 보고 들으
면서 비평하는 것과 같이 일상적인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조선왕조의 귀족 문화에 대한 향수가 어처구니없
게도 우리의 전통 음악을 밀어내고 들어온 서양의 새로운 문화를 고
급 문화로서 받아 들림으로써, 서양의 고전음악, 시, 연극, 소설, 무
용, 미술 등은 우리의 고급 문화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대중이 이
고급 문화에 대한 비평을 시도할 때에는 태도가 자못 저자세로 변한
다. 흔히 사람들은 상술한 예술 장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내
가 문외한이긴 하지만 이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미리 방어한다.
이것은 일반 대중의 소위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예이다. 대중은 일부 역사의식
이 결여된 식민 세대와 문화를 이해 못하는 군사문화의 추종자들에
의해 잘못 형성된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
고 있다. 해방 후 왕조의 몰락으로 졸지에 사라져 버린 귀족 문화의
대용물로 새롭게 자리잡은 서양의 고전음악을 당시의 집권층은 새
로운 귀족 문화로 선택하게 되었고 이후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되었
다.
70년대까지도 고급 주택가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
는 부와 권세의 상징으로 표현되곤 했다. 비근한 예로 전 세계에서
피아노 학원이 가장 많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것만 보아도 그것
을 잘 알 수 있다. 부연하면 서양의 고전음악은 고급 문화로 인식하
면서 이십세기의 총아인 영화는 저급 문화의 범주에 귀속시키고 싶
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 영화가 안고 있
는 많은 문제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점은 무시하고 우리 사회의 영화에 대한 인식을
관객론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자. 오해란 거의 모두 무지에서 기인한
다. 영화를 단순한 대중 예술로 인식하는 것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오해를 하는 부류의 관객은 대부분 우리 나라의 영리한 영화수입업
자들이 들여온 상업주의 영화에 길들여져 진정한 예술 영화를 구경
도 못한 사람들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낮은 단계
인 자기 동일시 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이들은 가장 순진한 관객
이며 영화가 상업주의를 지향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사람들이다. 이
들은 영화 속의 주인공과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며 함께 울고 웃는
다. 이들은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에서 악화는 양화
를 구축한다 는 경제 논리를 가능케 하는 부류이다.
두 번째 부류는 영화를 단순한 볼거리 로 간주하고, 영화는 간접
경험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영화를 감상하
면서 눈물도 흘리고 웃기도 하지만 완전한 자기 동일시는 거부한다.
이러한 부류의 관객은 자신이 영화를 보기 위해 많은 정보를 얻으며
신중한 선택을 한다. 이들은 소위 예술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
을 하기도 하며 그에 필요한 정신적 투자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예
술 영화의 제작도 가능하다는 근거를 마련해 관객이다. 그래서 이
부류의 관객이 그 나라의 영화의 수준을 좌우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역시 첫 번째 부류와 마찬가지로 영화를 구조적으로
또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점에서는 매우 미숙하며 영화의 판독에 있
어 종종 실수를 범한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무지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는 커다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영화를 통한 간접경험을
세상을 인식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하며 영화 감상의 즐거움과
함께 영화의 메시지를 감지할 수도 있다.
세 번째 부류는 소위 시네화일(Cinephile, Cinemane)이라고
하는 영화광들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무식한 자들이 매니아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매니아(mania)는
광증을 뜻하며 광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매니액(maniac)이라고
해야 올바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영화를 감상하는 수동적 자세에서
영화를 만드는 능동적 자세로 전환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 영화에 미
친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열렬한 영화의 광신자로 시작하여 차
츰 영화의 이론적 학습을 거쳐 비평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부류의 관객이 항상 정확한 판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영화라는 마법의 숲에 빠져 있어 숲을 보지 못하고
숲 속의 나무들의 배열만을 보게 되는 오류를 종종 범하기 때문이
다. 이들 중의 일부는 영화를 통하여 기호학, 역사학, 사회학, 미학,
철학 등의 학습을 하게 되고 백과사전적 지식도 얻게 된다. 이들은
예술 영화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고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을 제시
한다.
그러나 어떤 부류의 관객에 속하든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다양한
것이며, 관객이 존재하는 한 영화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한국 영
화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도 가끔 흥행에 성공을 거두고 영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외
국의 소설이나 영화 자체를 서브 텍스트로서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표절을 하는 것을 발견할 때는 정말 영화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환멸
을 느낀다.
강우석의 투 캅스 로부터 최근의 무한육면각체의 비밀 까지 젊
은 영화인으로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작태를 보여준 것이다. 투 캅
스 는 이미 감독인 강우석이 시인을 했으나 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의 경우 대중이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 라는 난삽한 소설을
읽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러티브와 구조적 유사
성의 지나침이 한국 영화인의 자질을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이것은
70년대 이장호 감독의 실패작 너 또한 별이 되어 와 엑소시스트
의 경우와 전혀 다르지 않다. 흥행의 실패와 성공과는 상관없이 에
코가 알았다면 저작소유권의 시비도 가능할 말한 일이다.
표절의 천재들
우리는 투 캅스 라는 제목에서, 강우석이 어떤 부류의 관객을 의
식하고 제작에 임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캅(cop)이란 영어
의 슬랭으로 경찰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우리 관객이 로보캅 이라
는 영화로 처음 알게 된 단어이고, 영어를 제법 잘 아는 사람이거나,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리
쉽게 알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허긴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는, 교
육열에 불타는 아줌마들이 많은 나라이니, 이것 역시 내가 무지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독자들이 강우석의 전작인 미스터 맘
마 역시 영어로 된 제목이란 을 기억한다면, 내 논지가 무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는 요즘 영화 관객의 연령이
낮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는 영리한 감독겸 제작자이다.
요즘 텔레비전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살펴보자. 공영 민영 3사가
모두 똑같은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모두가 십대를 의식하고 제
작한 프로그램이다. 외화의 줄거리를 그대로 사용하여, 말도 안 되
는 이야기를 꾸미고, 그것을 보는 아이들은 괴성을 지르며 좋아한
다. 투 캅스 는 이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길들여진 아이들과, 좀
지능이 떨어지는 어른들에게는 재미있는 영화일 것이다.
영화란 재미있어야 한다 는 말은 부인할 수 없는 평범한 진리이
다. 그러나 영화는 독창성이 생명이며 영화의 재미는 이 독창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특히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진가는, 소설이나 만
화를 각색한 시나리오와 달리, 그 작품의 우수성이나 승패의 여부가
독창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비 무비(B Movie:다른 영화를 희화적으로 모방
하고 그것을 숨기지 않는, 혹은 작품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영
화.)들을 많이 보아 왔다. 그리고 이런 한심한 영화에, 우리와 비교
하면, 엄청난 제작비를 투자하는 미국인을 은근히 경멸하고, 속으
로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도 보는 관객이 무궁무진한 미국의 시장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보가 폐쇄되어 살아온 오랜 세월의 탓으로 김수
연의 야망의 계절 (어윈 쇼의 부자와 빈자 , 청춘의 덫 (아메리카
의 비극), 송진아의 우리 마을 (Fort Apachee, the Bronx; 폴
뉴만이 우직한 경찰로 분한)을 보고도 그냥 웃어 넘겼다. 물론 시청
률은 대단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저작권 시비도 면제받았던, 또 수
천의 선량한 동포를 학살한 살인마도 쉽게 용서하는 관대한 백성이
니, 외국영화를 베껴 먹는 것 정도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회
에서 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표절을 못하는 자가 바보인 것이다. 하지만 텔레
비전 드라마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러
한 사회적 풍토가 외국의 광고를 공공연히 복제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철면피함을 가능하게 하고, 투 캅스 와 같은 영화의 탄생
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속언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개처럼 벌어 정승같이 써라 , 꿩 잡는데 매 . 아직도
독자들은 필자의 논지가 무엇인지 모르겠는가? 그런 독자들은 이
책을 버려라.
영화의 표절 시비는 초기 영화 시절부터 논쟁이 되었지만 시시비
비를 가리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에디슨이 영화를 제작하던 시절,
그들은 저작권의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재판을 하게 되자 영리한
에디슨은 자신의 영화를 페이퍼 스트립(paper strip)으로 만들어
국회도서관에 보관하여 그의 저작권을 주장하였고, 그 덕분으로 승
소했다. 그런 연유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에디슨의 초기 영화는
이 페이퍼 스트립을 다시 촬영하여 만든 것이다. 이렇게 저작권이
쟁점이 되는 경우에만, 표절 문제는 말썽의 여지를 제공하였다. 그
러니 우리도 그 문제는 덮어두고 영화 자체에 관한 것들을 살펴보
자.
이 영화는 두 명의 부패한 경관의 이야기를 익살맞게 그린 영화
다. 그러나 재미있게 만들어진 영화이기는 하나 텔레비전 개그의 수
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코미디란 운명적인 비극적
요소가 없이는 개그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데, 이 영화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 우리가 채플린의 영화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연민과 페이소스(pathos)가 없다는 말이다.
또한 이 영화를 보며 박장대소하는 관객을 통해, 우리의 현실이
당연한 것이고, 전혀 치유될 수 없다는 패배주의와 적당주의가 우리
대중의 의식 속에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한가지
의아하면서도 기쁜 것은 경찰청에서 협조해 주었다는 사실과 개신
교에서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영화비평이다. 영화의 비평이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루어져야 좋은 영화가 숨을 쉬게 되고 엉터리
영화는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영화계의 초기 비
평가들은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고 대학에도 아직 영화학과가 개설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전
문적 영화 비평의 존재 여부를 논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일지는
모르지만, 엄연히 영화평가들이 모임이 있고 자칭 영화평론가가 많
은 세상이니 간과할 수 는 없다.
물론 신문이나 잡지의 적은 지면에 실리는 영화평이라고 하는 것
은 실제로 영화평이라기 보다는 영화 리뷰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조차도 지나치게 유치한 것이 너무 많고 그것도 대학
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을 고려할 때 그냥
방치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국에 영화 비평은 존재하나?
한 영화를 비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영화학
을 전공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영화 평론은 신문이나 잡지의
영화 소개 혹은 단평(review)과는 자못 다르다. 물론 유럽과 미국
에서조차도 영화학과가 대학에 개설되기 전인 60년대 말까지는 본
격적인 혹은 학술적인 영화 평론이 체계를 갖추지 못했었다. 그저
몇몇 관심 있는 석학들에 의하여 쓰여진 영화에 관한 소고가 고작이
었고 일반 독자로서는 접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50년대 말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이런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뉴욕의 한 출판업자가 영화 비평에 관한 출판 제안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도대체 누가 이런 책을 보겠소? 영화 같은 것을
보는 사람들이 책을 읽을 리가 없고, 이 책을 이해할 만한 수준의
사람들은 영화를 볼 리가 없으니, 누가 이런 책을 읽겠소? 이렇게
영화평론이라는 것이 무용지물로 취급당했던 것이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대학에 영화학과가 개설되어 많은 영
화학 석사와 박사가 배출되면서 그들이 영화학자의 3세대로 자리잡
았다. 그 후 본격적인 영화 평론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아직은 영화학과가 개설되지는 않았지만 대학원
에서 쓰여진 석사 논문 증 몇 편은 아주 훌륭한 것을 본적이 있다.
이렇게 서양에선 짧은 기간 동안에 많은 학문적 축적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도 조만간 이런 학문적 축적을 기대할 수는 있다.
그러면 영화 평론이란 과연 무엇인가? 영화 평론은 서너 가지의
방법론을 취한다. 첫째로 지금은 그 이론이 빛을 바랜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작가론(auteurism)이란 것이 있다. 쉽게 말하면 영화작
가들을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처럼 서열을 정하여 분류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쟁(Andre Bazin)의 이론을 미국에 소개한 사리스
(Andrew Sarris)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미 사멸한 이론이나, 아직
까지 작가연구(diredtorial study)의 맥락에선 무시될 수 없는 방
법론이다. 즉 영화작가의 전기적 연구 및 작품의 시대적 분류, 분석
을 통하여 그 영화작가의 작품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는 것을 말한
다.
둘째 내러티브(narrative)의 분석이다. 환언하면 줄거리의 구조
적 분석을 통해 영화에 접근하는 방법론이다. 이것도 단순한 이야기
구성의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집단 무
의식을, 신화와 민화의 연구를 통하여 얻어진 내러티브의 구조적 특
징을 토대로, 영화의 내러티브의 원형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다. 부언하면 우리의 고전인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이나 다른 설화
등을 바탕(subtext)으로 한 내러티브를 분석하여 그 구조를 밝혀
내는 방법론이다.
셋째는 내러티브의 분석을 통한 이념적 탐색이다. 개인적으론 이
것이 영화 평론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조심스
럽게 행하여져야 하는 부분이며, 영화를 하나의 텍스트로 이해하여
야만 그것이 가능한 어려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스크린에 투
사되는 순간 영화 작가의 손을 벗어난 하나의 영상적 의미전달체
(Imagimary Signifier)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즉 영화가 스크
린에 투사되는 순간, 미셀 푸코의 표현을 빌면, 영화작가는 이미 죽
은 것이다.
넷째는 영화적 장치(cinematic apparatus)에 대한 분석이다.
상술한 세 가지 것들은 다른 예술매체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지만, 네 번째 접근 방법은 영화매체의 특성을 철저히 이해하
지 못하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촬영, 편집, 조명, 연기, 연출, 분장,
음악, 미술, 특수효과, 음향 등의 모든 기술적 협력으로 만들어지는
영화의 몸체에 대한 분석과 그것에 대한 비평을 하게 되는 부분이
다. 그러므로 영화적 기술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수행 불가능한 힘
든 작업인 반면 가장 명확히 분석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미학적 혹은 기호학적 해석에 있어 백과사전적 지식이 없이는 주관
적 오류가 빈발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이렇게 영화의 비평이란 많은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는 작업이며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 비평
이 어려운 것은 인용을 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언어로 한 폭의 그
림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작업임을 미셀 푸코는 그의 저서 사
물과 이름 에서도 역설한 바 있다. 이런 힘겹고 복잡한 작업이 그저
쉽게 이루어졌던 한국의 풍토에 좋은 나무가 자랄 수 있을 지는 모
르지만 최근에 영화학 전공자들의 학계 진출이 있는 듯 하여 기대해
본다.
그러면 도대체 영화란 무엇이기에 그냥 어두운 공간에 앉아 스크
린에 투사된 허상을 보면서도 그 허상과 허구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
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처럼 수많은 기표
(signifier, signifiant)들이 방출하는 의미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는가? 완전한 영화의 이해란 불가능한 것인가? 연출자는 또 이렇
게 방대한 시각적, 청각적 기표들을 어떻게 다루는가? 성실한 독자
라면 당연히 이런 질문에 당면하게 된다. 이런 질문에 얼마나 큰 도
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볼 만한 작업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영화 속의 인물과 자신
을 동일시하게 된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
무도 그 이유를 밝혀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현상은 영화학
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서양의
초기 영화학자들은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빌어와 이 문제를 규명해
보려고 노력했다.
물론 심리학의 이론을 빌어 온 것이 대부분이지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타당성을 인정받은 몇 가지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서, 소개하려 한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조금은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으나, 가능한 한 일반적인 언어
로 설명하고자 한다.
스위스 태생의 심리학자인 피아제(Piaget)에 의하면 인간은 두
세 살 무렵 거울을 통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게 된
다고 한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불란서의 영화학자인 크리스티앙 메
츠(Christian Metz)는 자신의 이론을 구축해 나갔다. 즉 거울을
통한 최초의 자기발견과 인지로 인간은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
것은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허상 이지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다. 메
츠는 인간이 최초로 인지한 자신의 모습이 바로 허상이라는 점에 착
안하여 그의 이론을 세워 나갔다.
영화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사물이 빛의 도움으로 필름 위
에 음화로 감광되고, 다시 그것이 또 다른 필름 위에 양화로 재생되
어 영사기를 통해 스크린에 투사되는 허상이다. 바로 이 허상이 우
리가 최초로 발견하고 인지한 거울에 비춰진 자기자신과 동일한 허
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스크린 위에 투영된 허상과 거
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동일시하게 되고, 영화의 이야기 흐름에 빠
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비록 한 석학의 뛰어난 직관에 의
해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이 이론을 뒤집을 만한 다른
이론이 등장하지 않고 있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끊임없이 영화를 보면서도 지겨워하지 않는가?
물론 혹자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와 수많은 다른 이야기를 다룬 영화
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생각
해 보려고 하는 것은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인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 중에서 누군가의 모습이나 행동을 훔
쳐 본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히 이성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
하기 위하여 문 틈으로 혹은 열쇠 구멍으로 목욕하는 이성의 나신을
훔쳐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일반적 용어로는 피핑 탐
(Peeping Tom)이라고 표현되고, 전문적으로는 보이어리즘
(Voyerism, 관음주의)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화
를 지치지 않고 보게 되는 원천적 에너지로 작용되며, 우리 무의식
속에 드라이브(drive)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모두에 우려했던 것처럼 조금은 전문적인 이야기가 되어서 송구
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그러나 전문적인 영화인이 아닌 독자들에게
도 조금은 지식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란다.
영화 연출 기법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관
객에게 모든 시각적 기표들을 숨김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사실주의
계열의 연출 기법과 연출자의 의도대로 모든 기표들을 나열하여 관
객이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몽타주 기법이 있다. 쟝
르느아르의 많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롱 테이크가 사실주의 기법에
서 많이 사용하는 장치이다.
관객에게 완전한 해석의 자유를 제공하는 수법이다. 반면 아이젠
슈타인의 영화에서처럼 관객으로부터 해석의 자유를 최대한 박탈하
고 연출자의 의도대로 관객의 해석을 유도하는 기법이 바로 몽타주
기법이다.
몽타주
우리는 몽타주 (Montage)란 용어를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타주란 용어는
영화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용어 중의 하나이다. 몽타주란 용어 자체
는 비록 사진학에서 기원하였지만 러시아 혁명기의 영화작가이며
이론가인 아이젠슈타인(Eisenstein)의 영화예술에 응용된 이후로
이론적으로 또 실용적으로 놀랄 만한 발전을 하였다.
현대의 영화 관객들은 많은 영화 속의 몽타주를 아무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이해하지만 아이젠슈타인이 활동하던 러시아 혁명기에
제작된 그의 일련의 영화들(전함 포템킨, 10월 혁명, 스트라이크)
에 나타난 몽타주 기법은 전 세계의 영화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
겨 주었다. 왜냐하면 영화라는 새로 태어난 예술에 관하여 예술 시
비 가 분분했었고, 그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유치한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아젠슈타인은 몽타주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간단 명료하게 설
명하였다. 몽타주란 두 개의 독립적인 장면이 충돌하여 만들어 내
는 새로운 개념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하나의 장면 속에서도 두 개
의 다른 이미지의 충돌로도 일어난다. 물론 언어적 해석만으로 영
화 기법을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 아이젠슈타인은 그의 저서 필름
폼(Film Form)에서 한자의 합의어를 이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설
명하였다. 한자가 뜻글자라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이 표의
문자는 독립된 글자와 글자가 만나 하나의 새로운 글자를 만들 수
있는데, 이 때에 충돌한 두 개의 의미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
예를 들면, 계집 女 와 아들 子 는 각각 다른 개념을 의미한다.
그러나 두 가지 글자가 합쳐지면서, 계집이 아들을 안고 있어 좋아
한다. 는 새로운 뜻의 호(好) 를 만들어 낸다. 이런 합의어의 생성
방식과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서 두 개의 이미지가 만나게 되어 새로
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이론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소위 클레쇼프의 실험이다.
아이젠슈타인과 동시대 영화작가이며 또한 이론가인 클레쇼프는
매우 흥미있는 실험을 하였다. 그는 한 사나이의 비통한 얼굴을 먼
저 보여준 다음 곧 이어 여러 가지 다른 영상들을 보여 주었다. 그리
고 각각의 연결된 영상에 따라 비통한 젊은이의 모습이 각기 다른
의미로 전달되는 것을 실험하였다.
즉 비통한 사내의 얼굴과 김이 나는 빵이나 커피의 영상이 붙여진
다면 사내는 배고픈 사내가 되고, 쓸쓸한 무덤의 영상과 충돌하면
애인의 죽음을 비통해 하는 사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몽타주의
기본적 기법은 단순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몽타주의 응용
은 아이젠슈타인의 영화 속에서 조형적, 시간적, 구도적 몽타주로
발전해 나간다. 그의 작품 10월 혁명 에서는 누워 있는 사자석상에
서부터 점차적으로 상체를 일으키는 사자석상의 모습을 순차적으로
보여줌으로 민중의 봉기 를 표현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의 영화 속에서는 양적인, 시간적인, 구조적인
대비로 발생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냈다. 이런 모든 몽타주의
기법은 아이젠슈타인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젊은
혁명가로서의 아이젠슈타인에게는 무지몽매한 대중을 교화하기 위
하여 자가 자신의 의도대로 끌고 가야 할 확실한 영화기법이 필요했
기 때문이다.
즉 주어진 영상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통제하는 방법으로써 몽
타주는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이렇게 아이젠슈타인에 의하여 이론
적, 실용적 검증을 통하여 발전해온 몽타주 기법은 현대 영화의 모
든 장르에서 응용되고 있다. 물론 아이젠슈타인의 영화처럼 전편을
통하여 계속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젠슈타인 이후로 영화 기법
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였고, 아직까지 새로운 연출 기법이란 없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초기 영화에서의 아이젠슈타인의
이론적, 기술적 업적은 영화 매체의 발명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다.
우리는 헐리우드의 상업 영화에 길들어진 감수성으로 도든 현대
영화를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시 말하면 하면 헐리우드 상업
영화를 모든 영화를 가늠하는 척도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러한 상업 영화도 처음부터 이러한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초기
영화 시대의 영화작가(?)들은 영화라는 놀라운 도구를 가지고도 이
러한 스토리텔링 조차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그저 지
나가는 사람들, 행사들을 기록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했었다.
그런데 그들과 동시대인인 아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과 그 검
증이 서방세계에 소개된 것이었다. 우리 모두 서방세계의 경악을 짐
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초등 학교 학생들이 대학생의 그
림을 보고 감탄하는 것과 같았다.
아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의 철학적 배경은 변증법이다. 변증
법이 기초가 되는 세 가지 개념인 정, 반, 합이 바로 몽타주 이론의
두 가지 상이한 이미지의 충돌로 발생되는 새로운 아이디어 를 잘
설명해 준다. 두 개의 상의한 이미지는 정과 반이 되고 새로운 아이
디어는 바로 합이 되는 것이다.
아이젠슈타인의 이론과 다른 이론으로 영화에 접근한 작가가 있
다. 그는 쟝 르느와르(Jean Renoir)이다. 그는 아이젠슈타인과는
달리 영화작가는 관객에게 많은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
시 말하면 영화작가는 관객을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가서는 안 되
고 관객이 자유롭게 주어진 모든 영상 속에서 관객 자신의 아이디어
를 찾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쟝 르느와르는 관객에게
걸러지지 않은 많은 아이디어들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했다.
두 사람의 영화제작에 대한 접근방법은 이렇게 달랐지만 두 작가
의 영화는 제각기 그 영화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지금까지 아이젠슈타인의 몽타주를 중심으로 기본적 영화 기법의
두 가지 갈래를 알아보았다.
SWEET SIXTEEN ***
원안: 이영호
각색: 문정윤
연출: 이영호
줄거리
미국!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 많은 한국인들이 이주해 간 나라.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민의 이유를 자식의 교육문제로 돌리지만, 그 자녀들의
교육문제는 정말로 해결되는가?
블랙로즈란 불량 서클의 보스인 제인은 그 동안 자신들을 괴롭혀 왔던
HISPANIC 아이들에게 더 이상 당하지 않기 위해. 패싸움을 벌인다. 싸
움은 블랙로즈파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제인이 싸움 중 버터플라이
칼에 찔려 팔에 부상을 입는다. 부상당한 제인을 집으로 데려다주는 가블
린들. 이때 가블린의 보스 토니가 제인에게 동업을 제의한다. 가블린들은
빈집털이 좀도둑들. 엄마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를 원했던 제인은
이 제안을 수락한다.
다음날 제인이 다니는 학교에 한국에서 온 마이클이 입학한다. 그러나
입학하는 아이들 대부분이 이 학교에 있는 자기나라의 폭력조직에 가입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학했던 것이 통례. 그런 이유로 미국아이들은
마이클을 질시한다. 아이들의 태도에 당황하는 마이클.
어느 날, 중국계 조직인 백호단의 여자아이들에게 당하는 마이클을 구
해 주는 제인. 마이클이 고맙다는 인사도 꺼내기 전에 제인은 마이클의
돈을 빼앗는다. 그러나 이 일로 제인은 마이클을 데이빗의 생일파티에
데려가게 되고, 마이클은 여기서 가블린의 행동대원으로 있는, 한국에서
초등 학교 시절 단짝친구였던 제씨를 만나게 된다.
제씨는 마이클을 자신들의 조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데이빗의 집을
털 때 마이클을 데려 가고. 마이클은 친구 때문에 점점 이들의 일에 휘말
리게 된다.
그리고 제인을 사랑하게 된다.
데이빗의 집에서 턴 돈으로 무기를 사려다 실패한 토니는 제임스라는
조직원에게 무기를 외상으로 얻고 본격적인 범죄활동을 시작한다. 처음
엔 한국인들의 가정집을 털지만 곧 슈퍼마켓, 보석상으로 행동무대를 넓
힌다. 마이클의 범죄의식도 점점 무뎌지고 이런 일들을 즐기게 된다.
마침 제인의 언니. 쎄디가 소속되어 있는 JKP파가 중국인 갱단(백호
단의 상부조직)에 의해 조직의 위기를 맞는다. 쎄디가 제인을 찾아와
도피자금을 부탁하면서 JKP파의 소식을 전해 주고 간다. 아이들은 JKP
파의 복수로 백호단이 운영하는 XX거리에 있는 마사지 팔러를 기습하기
로 한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흑인강도에게 살해당한 제씨부의 제삿날. 제
씨는 온종일 술을 마신다.
마사지 팔러를 터는 것으로 자신들의 조직이 완전한 갱조직이나 된 것
으로 생각하고 들뜨는 아이들. 토니는 술에 취한 제씨를 제외하려 하나
제씨의 고집으로 함께 행동한다. 아이들은 식품점 종업원처럼 꾸미고 마
사지 팔러에 침입하여 금품을 턴다. 그러나 제씨는 이곳에서도 계속 술을
찾아 마시고, 아이들의 어설픈 강도 짓을 보고, 한 중국인(중국갱단의 일
원)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제씨에게 달려들어 총을 뺏으려다 마이클과
몸싸움을 하게 되고 오발된 총에 맞는다. 이때 마이클의 가면이 벗겨지
고. 겁에 질린 아이들은 한 동안 숨을 것을 의논한다.
중국갱단은 백호단과 함께 경찰을 따돌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이 일을
해결하려 한다. 피신해 있던 마이클은 한국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처음엔
마이클을 이용하기만 하려했던 제인도 마이클을 사랑하게 되어 함께 집
으로 간다.
중국 조직원들의 조사로 가블린의 짓임을 알게 된 중국갱단은 제임스
의 중재로 한 명의 희생양만으로 일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고민하던 토니
는 이미 한국행이 결정된 마이클을 안심하고 희생 양으로 결정한다. 마
이클은 한국으로 출국하기 바로 전날 중국 조직원들에게 살해되고 부근
오락실에서 마이클과 토니가 오기를 기다리던 제인은 역 분위기가 심상
치 않자 마이클을 찾아 나선다.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마이클에게 주먹
질을 하며 일어나라고 외친다.
나오는 사람들
제 인(여,14) : 주인공. 한국 이름 미연. 블랙로즈의 리더.
마이클(남,16) : 주인공. 한국 이름 준영.
재 시(남,16) : 마이클의 친구. 가블린의 행동대원.
쎄 디(여,17) : 제인의 언니. JKP의 일원.
블랙로즈 아이들:
제시카(여,14)
베 티(여,15)
수 지(여,12)
가블린 아이들
토 니(남,18) - 가블린의 보스.
데이빗(남,15)
크리스(남,15) - 화교.
그 밖의 사람들
마이클의 부(40대)
마이클의 모(30대 후반)
프랭크(남, 10대) : 쎄디의 남자친구. JKP의 일원.
제임스(남, 30대) : 토니를 조정하는 조직의 사람.
첸 (남,19) : 백호단의 보스.
백호단 단원들.
승 재 : (남,16) : 제 2 의 마이클.
제인모(여,30대 후반)
조 셉(남,40대 후반) : 제인의 양부.
HISPANIC계의 여자 아이들.
그 외…….
영=영어, 중=중국어, 표시가 없는 것은 한국어
#1. EXT. 거리 (낮)
뉴욕의 거리 풍경. 백인, 흑인들과 섞여 있는 동양인의 모습들 여러 장
소와 여러 시각으로 보여진다.
#2. EXT. 공터 (초저녁)
(MAIN TITLE) (CREDIT TITLES시작)
벽돌이 부분부분 떨어져 나간 낡은 건물벽엔 스프레이로 뿌려진 낙서
들이 어지럽다. 범퍼를 버터플라이 칼로 긋는 Hispanic 여1(보스). 그 뒤
로 차안에서 낄낄거리며 병째 술을 마시고 있는 여2, 3의 모습이 보인다.
차에 기대어 담배연기로 도넛을 만들고 있는 여4. 담배꽁초를 손가락
으로 퉁겨 위로 던진다. 모두 가죽점퍼 차림, 떨어지는 담배꽁초. 바닥엔
무성한 잡초들, 뒹구는 쓰레기봉지들.
#3. EXT. 공터 부근의 거리 (초저녁)
쓰레기가 나뒹구는 거리. 오가는 차량이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다가
오는 검은 색 신들과 바지. 다리가 8개다. 건들건들 걷는 걸음(제인). 뻣
뻣한 걸음(수지). 걷다가 멈추고 걷다가 멈추는 걸음(제시카). 팔자로 터
덜터덜 걷는 걸음(베티). 모두 검은 색 옷차림의 블랙로즈 - 징이 박힌
옷의 제인(14). 몸 여기저기에 달고 있는 화려한 액세서리를 떼어내며 걷
는 제시카(14). 운동선수가 시합 전 몸을 풀듯이 양팔을 좌우상하로 흔들
며 걷는 통통한 베티(15). 긴 생 머리를 찰랑이며 걷는 수지(12). 수지는
긴장된 표정이다. 공터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자 서로 눈을 마주치며
끄덕이는 아이들. 제인이 앞장서서 들어간다.
#4. EXT. 공터 (초저녁)
경멸하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블랙로즈를 쳐다보는 Hispanic 아이들.
여 4 : 어딜 함부로 들어와. 꺼져. (영)
제 인 : (웃으며) 니네 땅이라고 이름이라도 새겨 놨나 부지? (영)
서로의 얼굴을 보다 여4 옆으로 서는 Hispanic 아이들. 여 1이 버터플
라이 나이프를 휘둘러 소리를 내며
여 1 : 죽고 싶다는 데야. (영)
제인이 주머니에서 작은 가위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낀다. 서로의 움
직임을 민감히 살피는 아이들. 베티와 제시카가 마주보고 있던 여3, 4의
얼굴에 갑자기 주먹을 날린다.
베 티 : 이 씨팔 년들. (영)
서로 욕을 하며 치고 받고 하는 아이들(욕은 한국말과 영어가 섞여서),
제인에게 버터플라이 칼을 휘두르며 다가가는 여 1. 제인은 마치 복서
같은 포즈로 여1과 대치. 서로 기회를 노린다. 제인의 주먹에 날카롭게
삐져 나온 가위가 반짝거린다. 어설프게 주먹을 휘두르던 수지는 달려드
는 여 2에게 순식간에 깔려 얻어맞는다.
여 2 : 어디서 까불어. (영)
치고 받다가 상대방과 서로의 옷과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땅바닥에
나뒹구는 베티와 제시카.
제시카 : 이쌍.
칼을 휘두르는 여1과 대치 상태로 빙빙 돌던 제인은 여1의 손목을 발
로 쳐 칼을 떨어뜨린 후 주먹으로 여 1의 얼굴을 긋는다.
여 1 : (얼굴을 감싸며) 악! (영)
수지를 깔아뭉갠 여2에게 달려가 발로 얼굴을 차는 제인.
여 2 : 악! (영)
얼굴을 감싸며 엎어진 여2. 떨어져 있는 버터플라이 칼을 발견한다. 싸
움을 멈추고 소리나는 쪽을 보는 다른 아이들. 여3,4는 겁에 질린 얼굴로
일어나 뒷걸음을 친다. 여 3, 4의 모습을 보고 득의의 찬 미소를 띄우는
제인.
제 인 : 별것도 아닌 것들이. 우리한테 까불면 죽는 줄 알아. (영)
서로 보며 웃는 블랙로즈. 제인의 말에 더욱 인상을 쓰던 여2는 칼을
슬그머니 집으며 일어선다.
제 인 : 수지 일어나.
제시카와 베티가 일어나 옷을 턴다.
제시카 : 새로 산 옷이 엉망이 됐어.
블랙로즈가 방심하는 틈을 엿본 여2. 제인에게 달려든다.
수 지 : 제인! 위험해!
달려드는 여2를 보고 몸을 비트는 제인. 칼이 제인의 팔을 스친다. 엎
어지는 여2. 제시카와 베티가 여2에게 달려들어 때린다.
여 1 : 그만해! 졌어. 우리가 졌어.(영)
제 인 : 다시 한번 우릴 괴롭히면 죽여버리겠어.(영)
여 1 : 알았어.(영)
제 인 : 꺼져버려.(영)
여 1과 여 2를 부축하고 공터를 빠져나가는 여 3, 4. 제인이 팔을 감싸
며 찡그리자 다가와 제인의 상처를 살피는 아이들. 수지는 눈물을 글썽인
다.
제 인 : (미소) 괜찮아. 좀 스친 것 뿐이야.
베 티 : 누구 묶을 거 있어?
제시카 : (수건을 건네며) 여기.
베 티 : (지혈하며) 애들을 불러야겠어.
(CREDIT TITLES 끝)
#5. INT. 거실 (초저녁)
할로윈 가면을 쓰고 거실을 뒤지는 제씨(16)와 데이빗(15). 제씨의 손
에 붕대가 감겨져 있다.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오는 토니(18,가블린
의 보스)와 크리스(15, 화교). 토니, 아래의 아이들을 보며 고개를 흔든
다.
제 씨 : (가면을 벗으며) 쌍, 꽝이잖아.
가면을 벗는 다른 아이들. 무스로 위 머리카락을 모두 세운 데이빗의
머리. 귀걸이를 한 토니, 앞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크리스.
토 니 : 가자.
(E) 삐이 삐이 삐이
깜짝 놀라는 아이들.
토 니: (멋쩍은 듯 웃고 삐삐를 보며) 삐삐야. 블랙로즌데...
제씨: 야, 삐삐를 틀어 놓고 있으면 어떡하냐?
안도하는 아이들.
데이빗 : 베티?
크리스 : 짜식, 그저 베티라면
창 밖을 살피는 제씨.
제 씨 : 나가자.
조심스레 밖을 살피며 나가는 아이들. 닫히는 문.
#6. EXT. 거리 (밤)
네온사인이 환한 거리. 창녀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천천히 오가는
차들. 그 차량 속을 빨리 달리는 차.
#7. INT. 차 안 (밤)
운전을 하고 있는 제씨. 그 옆에 토니. 뒤에 제인이 타고 있다.
토 니 : 제인, 우리 동업하자.
제 인 : 동업?
토 니 : 그래. 니들은 애들 파티에 가서 정보를 얻어 오고, 일은 우리
가 하는 걸로 말야.
제 인 : 글쎄?
제 씨 : 수지와 데이빗은 남매고 제시카는 토니 애인이잖아.
토 니 : 우리와 손 잡으면 히스페닉 애들을 니들이 직접 손 안 봐두
돼구. 어때?
제 인 : ....반반이다.
토 니 : 좋았어.
#8. EXT. XX High School (아침)
학교에 등교하는 여러 인종의 아이들. 백인은 드물게 보인다. 함께 들
어오는 데이빗과 수지. 앞서가는 제인을 발견하고 다가와
데이빗 : 제인.
제 인 : 베티와 붙어 있게 돼서 좋지?
데이빗 : (씩 웃으며) 이번 주 토요일이 내 생일이야.
수 지 : 파티를 근사하게 열거야. 언니 오는 거지?
제 인 : 응.
학교에 들어오는 마이클(16, 준영)과 마이클모(30대 후반). 학교 전경
을 살피며 걷는다. 마이클을 유심히 보는 제인. 중국계의 백호단 아이들
이 제인들을 가소롭다는 듯 보며 지나간다.
데이빗 : 저 자식들은 기분 나빠. 웃기지도 않게 거들먹거린다 말야.
#9. INT. 강의실 A (아침)
아이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소란스런 실내. 여러 인종의 아이들
이 섞여 있다. 대부분 같은 인종끼리 얘기하는 아이들. 강의실에 들어온
제인은 누구와의 인사도 없이 맨 뒤 창가 구석자리에 앉는다.
(E)수업 시작종.
아이 1 : 시계 메리앤이 웬일이지? (영)
아이 2 : 시계의 고장! 역사에 기록해야할 일인걸. (영)
아이 3 : 혹시 메리앤이 어젯밤 너무 힘을 쓴 거 아닐까? (영)
웃어대는 아이들. 강의실 문이 열리고 메리앤 선생(40대, 백인, 여)이
마이클을 데리고 들어온다. 무표정한 아이들의 얼굴. 마이클을 환영하는
표정들이 아니다.
메리앤 : 우리와 함께 공부하게된 마이클이예요. 마이클 자기소개를
하도록 해요. (영)
마이클 : 안녕. 난 마이클이야. 한국에서 왔어. 함께 공부하게 되어 기
뻐. (영)
여전히 무표정한 아이들의 눈길. 마이클의 표정을 살피는 제인. 당황하
는 마이클.
메리앤 : 다 끝났으면 저기 빈자리에 가서 앉아라. (영)
어색해 하며 빈자리로 가는 마이클. 마이클이 지나가도 쳐다보지 않는
아이들.
메리앤 : (소리) 준비된 페이퍼는 강의 끝나고 나갈 때 내요. 오늘
은......(영)
어색하게 앉아있는 마이클. 메리앤의 말소리가 점점 윙윙거리는 소리
로 바뀐다.
#10. INT. 복도 (낮)
여전한 윙윙소리. 다음 수업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아이들. 마이클은 시
간표를 적은 쪽지를 들고 아이들 틈새에 끼여 방향도 몰라 쩔쩔매고 있
다. 무심히 마이클을 지나치는 베티.
#11. INT. 강의실 B (낮)
선 생 : (소리) 다들 수열이란 게 어떤 것인지 개념이 생긴 것 같으니
이제는 좀 어려운 것을 풀어 볼까? (영)
조용히 열리는 강의실 문. 마이클이 들어온다. 강의 중 마이클을 본 백
인선생(남). 얼굴을 찌푸린다.
선 생 :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로 전학 왔나? 여하튼 나는 지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첫날이니 봐준다. 자리에 가서 앉아라.
당황해 하며 그 자리에 그냥 서있는 마이클.(영)
선 생 : 자리에 가서 앉으라니까?
마이클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던 말을 멈추는
선생. 어처구니 없어하며 빈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선 생 : (천천히) 가서 앉아. 아 안 자. (영)
선생의 행동에 '와' 웃는 아이들. 더욱 당황해 얼굴이 빨개지는 마이클.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걸 간신히 참는다.
#12. INT. 은신처 내 화장실 (오후)
변기에 앉아 일을 보고 있는 베티.
(E) 음악소리, 전자오락기의 소음.
데이빗 : (소리) 베티. 뭘 줄꺼야, 응?
베 티 : 왜 나한테만 그래.
데이빗 : 베티한테 꼭 받고 싶으니까 그렇지. 일년에 한번밖에 없는
생일이라구.
베 티 : 누군 일년에 생일이 두 번이야?
데이빗 : 베티야아 응?
베 티 : 똥싸는데 와서 지랄이야.
물을 내리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는 베티.
#13. INT. 은신처의 거실 (오후)
화장실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데이빗. 베티가 나오자 뒤를 쫓아
가며
데이빗 : 베티 꼭 사주는 거지.
거실 한구석에서 전자오락을 하고 있는 크리스와 수지.
제시카 : 베티, 그러지 말고 근사한 걸로 하나 해줘라.
음악소리에 머리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아 휴지를 꼬고 있는 제시카.
책상다리를 한 제시카의 무릎엔 이어지지 않은 제시카의 애정운이 여러
개 놓여 있다. 제시카 옆에 털썩 앉는 베티.
베 티 : 알았어. 비싸지도 않은걸 못 사 주겠니.
데이빗 : (스텝을 밟으며) 와우!
방문이 열리며 토니, 제씨, 제인이 나온다.
토 니 : (휴지를 들어올리며) 제시카, 우리가 이렇게 안 되는 거야?
제 인 : 글쎄 그게 같은 사람인가...
제시카 : (토니 눈치를 보며 제인에게) 말하는 싸가지 좀 봐.
제 인 : 쓸데없는 짓거리 집어치우고 가자.
베 티 : 어딜 갈껀데?
가스렌지로 담배불을 부치는 제씨. 무표정이다.
제 씨 : 파티.
제시카 : 와우! 누가 파티를 열지?
데이빗 : 나두 가면 안돼?
토 니 : 다음에 가. 다녀와.
제시카 : 음.
신나서 나가는 블랙로즈.
#14. EXT. 거리 (밤)
푸른빛 가로등의 거리. 가로등 몇 개는 깨져 어둡다.
거리엔 오가는 사람이 없다. 지친 걸음으로 걷는 제인.
#15. INT. 술집 (밤)
어두운 조명, 빛 바랜 싸구려 실내장식과 가구들. 낡은 건물에 보수나
페인팅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지저분한 실내. 손님은 구석자리에 술에
취해 크게 떠드는 두 명의 hispanic계의 남자 들뿐. 카운터엔 장부를 살펴
보는 제인모(30대 후반)와 TV 심야프로를 보는 양부 조셉(40대 후반).
카운터 뒤 싱크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 감이 보이고. 술꾼들이 떠드는 소
리와 크게 켜 놓은 TV때문에 소란스런 실내.
남 1 : 낄낄낄 조지 마누라는 어떻고, 아주 죽인다구. (영)
남 2 : 낸시는 아마 이번에 가진 애가 누구 앤지 자기도 모를걸.그런
여잘 아내로 데리고 사는 조지만 불쌍하지. (영)
남 1 : (혼자 빙글빙글 웃더니) 사돈 남 말하네. (영)
남 2 : 뭣? 다시 말해봐. (영)
당황하는 남 1. 남 2의 눈을 피하며 슬그머니 일어난다. 남 1의 얼굴을
치는 남 2. 그 바람에 탁자 위의 술병, 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진다. 남2는
남1에게 달려들어 미친 듯이 친다.
남 2 : 다시 말해 봐. 뭐라구? (영)
남 1 : 네 마누라나 잘 간수하라구 했다. 내가 틀린 말 했냐?
싸움이 난 것을 보고 총을 꺼내 식탁 쪽으로 가는 제인모. 조셉은 슬그
머니 일어나 싱크대로 가 설거지를 하는 척하며 힐끔힐끔 쳐다본다.
남 2 : (소리) 이 새끼. 아가리 함부로 늘리지 마. 개자식. (영)
제인모 : 무슨 짓들이야. (영)
치고 받는 남 1과 남 2.
남 1 : 그년이 먼저 날 꼬셨다구. 그 년은 헤픈 년이야. 나말고도 많다
구. (영)
남 2 : 뭐! 죽여 버리겠어. (영)
제인모 : 이 새끼들 남의 가게에서 뭐 하는 거야. 나가. 당장 나가지
못해. (영)
제인모를 무시한 채 계속 치고 받는 두 사람. 제인모 천장을 향해 공포
를 쏜다. 조셉은 설거지를 하면서 싸움구경에 재미있어 한다.
#16. EXT. 술집 밖 (밤)
창에 다가가 안을 살피는 제인.
제인모 : 나가. 꺼져버려. 어디서 행패야. (영)
투덜거리며 일어서는 두 사람 씨근덕거리며 나간다. 제인모가 총으로
위협하며 두 사람을 문으로 내몰고 조셉은 설거지를 하는 척한다.
얼굴을 찌푸리는 제인. 서둘러 집 옆 골목으로 들어간다. 어두운 골목
안에서 번쩍거리는 눈. 깜짝 놀라는 제인. 고양이가 튀어 나온다.
제 인 : (안심하며) 저놈의 도둑고양이가.
조심스레 뒷문을 여는 제인. 안을 살핀다.
두 남자가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제인모.
#17. INT. 가게 (밤)
문을 살그머니 닫고 계단을 올라가는 제인.
제인모 : (소리) 다신 내 가게 근처에 올 생각 말어. (영)
(E) 쾅하는 문소리.
제인모 : (소리) 원 재수 없으려니까.... 제인!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서는 제인.
제인모 : (다가오며) 이년아 넌 어딜 쏘다니다 이제 들어오는 거야?
(때리며) 이 망할 년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니년들 때문에 내가 늙어.
너 지금까지 뭘하다 왔니? 말 안해.
제인모의 무자비한 손길을 그냥 맞고만 있는 제인. 제인의 묵묵부답에
더 화를 내며 때리는 제인모.
쎄 디 : 엄마!
쎄디가 계단을 뛰어 내려와 제인모의 손을 잡는다.
쎄 디 : 이런 집구석이 뭐가 좋아 일찍 들어와?
제인모 : 뭐? 이년이.
쎄 디 : 제인, 올라가.
제인을 감싸며 위층으로 올라가는 쎄디.
제인모 : 저저 망할년들이...
조 셉 : (다가와) 하니, 저 애들은 신경 쓰지마. 당신의 고생을 알아주
지도 않는다구. 자 이리와. (영)
기막히다는 표정의 제인모를 안는 조셉.
제인모 : 왜 이래. (영)
제인모의 가슴을 만지는 조셉. 제인모는 싫지 않은 표정이다.
#18. INT. 제인의 방 (밤)
네온싸인의 불빛이 들어오는 방. 커튼이 없는 창. 침대, 옷장, 책상뿐인
썰렁한 방안.
쎄 디 : (소리) 신경 쓰지 말고 자. 잘 자.
제 인 : (소리) 언니두.
방에 들어와 그대로 벽을 기대고 주저앉는 제인. 옷장으로 기어가 문
을 열고 술을 꺼내 병째 마신다.
제 인 : 제기랄. (영)
침대에 누워 있는 제인 흥얼거린다.
(E) 덜거덕거리는 소리.
깜짝 놀라 일어나 술병을 거꾸로 쥐고 창 밖을 내다본다. 비상계단을
내려가는 쎄디. 웃으며 창문을 여는 제인.
프랭크 : (소리, 작게) 아주 잘하는데. 좋았어.
프랭크가 주위를 살피며 쎄디가 잘 내려올 수 있도록 코치를 하고 있
다.
제 인 : (작게) 쎄디, 쎄디!
제인을 본 쎄디.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조용히 하라고 한다. 아래에
있던 프랭크가 제인을 본다.
제 인 : (작게) JKP와 너무 어울리지마.
고개를 끄덕이는 쎄디. 걱정스런 얼굴로 쎄디를 보다 창문을 닫는 제
인.
#19. EXT. 거리 (밤)
바닥에 도착한 쎄디. 남자와 진한 키스를 나눈다.
프랭크 : 블랙로즈의 제인?
쎄 디 : 응.
프랭크 : (제인의 창을 보며) 가자. 늦겠어.
길 건너에 세워둔 차로 가는 프랭크와 쎄디.
#20. INT. 제인의 방 (밤)
밖을 내다보는 제인. 담배를 피며 침대에 눕는다.
(소리) 제인모의 신음소리.
제 인 : 저것들은 허구헌날 저 지랄이야. 제기랄.
베게를 바닦에 내팽겨치는 제인.
#21. EXT. 전철역 부근 (오후)
벽에 기대어 얘기하는 척하며 오가는 사람들을 살피는 백호단의 여자
아이들 (4명). 블랙로즈와 데이빗, 크리스가 다가온다. 베티를 안고 걷는
데이빗.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여 1 : 안녕, 크리스, 바쁜가봐. (중)
크리스 : (지나가며) 안녕, 다음에 만나. (중)
웃는 얼굴이나 서로를 경계하며 엇갈리는 중국애들과 한국애들.
데이빗과 크리스는 백호단 여자아이들의 다리를 훑어 보며 지나간다.
여 2 : 별것도 아닌것들이. (중)
제인들을 무시하고 다시 거리를 살피는 백호단의 아이들. 고개를 숙인
채 느린 걸음으로 오는 마이클. 여 3이 마이클을 보고 눈짓을 하자 서로
의 얼굴을 보며 눈웃음 짓는 백호단여자아들. 자연스럽게 마이클에게 다
가가는 여자아이들.
여 4 : (쎅씨하게) 안녕. 우리랑 어때? (영)
여 2 : 우리와 지내면 즐거울거야. (영)
마이클의 몸을 부드럽게 건드리며 말을 거는 중국 여자아이들. 마이클
은 놀라며 뒤로 물러선다.
마이클 : 왜 왜이래? 저 저리 비켜.
의외라는 표정을 짓다 웃으며 여3, 4가 양쪽에서 마이클의 팔짱을 낀
다.
마이클 : 뭐야? 이거 놔!
여 3 : (칼을 허리에 들이대며) 조용, 조용히 해. (영)
여 2 : 가! 걸어! (영)
놀란 마이클은 여자들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걷는다. 마이클 양쪽의
여자들은 마치 애인을 대하듯 다정스럽게 굴고. 마이클들을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
#22. EXT. 자하철 승하차장 (오후)
전철이 오기를 기다리는 제인들.
제시카 : (개찰구를 살피며) 백호단애들 한 건 할 모양이지?
크리스 : 백호단애들 일이라면 신경쓰지 않는게 좋아.
데이빗 : 맞어. 걔들은 조직의 아이들이라구.
전철 담에 다가가 아래를 살펴보는 제인. 백호단 아이들이 마이클을
끌고 가는 것이 보인다.
제 인 : 저것들이...
개찰구로 가는 제인.
제 인 : 따라와! 당하는 애가 한국애야.
제시카 : 어떻게 알아?
크리스 : 제인, 안돼! 제인!
개찰구를 나가는 제인. 다른 아이들은 내키지 않아 하지만 할 수 없다
는 표정을 짓고 따라간다.
#23. EXT. 거리 (오후)
번화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마이클을 끌고 오던 백호단의 아
이들. 주위를 경계하며 한 골목으로 준영을 밀어 넣는다. 번화가 한복판
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만큼의 지저분한 골목. 마이클을 벽에 세워
마치 키스라도 할듯 마주보고 선 여 4. 여 1, 2는 거리를 살피다 말고 안을
재미있어 하며 본다. 여 3은 마이클 목에 칼을 겨눈다. 꼼짝 않고 서 있는
마이클. 마이클의 몸을 쓰다듬으며 주머니을 뒤지는 여 4.
여 4 : 왜 자극이 안돼? 난 너무 기분이 좋은데 말야.
(지갑을 꺼내며) 와우 두툼한데. (중)
마이클의 지갑 속을 보는 여3과 여4. 지갑엔 지폐가 가득하다.
여 3 : 재수좋은데. 헤이 니 아버지 부자야? (영)
아무 말도 못하는 마이클. 여 3 마이클에게 칼을 바짝 갖다대며.
여 3 : 너 영어 못해. 여영어. (영)
(소리) 악.
입구에 있던 여 1, 2가 거꾸러지면서 블랙로즈들이 나타난다. 블랙로즈
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라는 여 3과 4. 마이클이 여3의 칼 든 손목을 내려
친다. 이때 재빨리 제인이 여3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면 비명을 지르는
여3. 제시카, 수지, 베티가 각각 한 명씩을 누르고 있다. 그 와중에 떨어진
마이클의 지갑.
제 인 : 조직애들은 서로 건들지 않기로 했잖아. (영)
여 4 : 이 벙어리가 블랙로즈 조직이라구? (영)
제 인 : 아니, 가블린. 가블린과 우린 합치기로 했어. 첸이 이 일을
알면 좋아하지 않을거 (영)
여 3 : 대신 거짓말이라면 각오는 돼 있겠지? (영)
제 인 : 그런 유치한 거짓말은 안해. (영)
기분 나빠하며 골목을 나가는 백호단의 아이들. 자주 뒤를 돌아본다.
마이클의 지갑을 주워 마이클에게 주려던 제인. 두툼한 속과 마이클의
얼굴을 보더니 돈은 빼 내고 지갑만 마이클에게 준다. 제인의 행동을 기
막혀하며 보기만 하는 마이클.
제 인 : 나한테 보답하고 싶어할 것 같아서. 이거면 됐어.
골목에 들어오는 데이빗과 크리스.
데이빗 : 다친데는 없어?
제 인 : 그럼. 가자! 늦었어. (영)
제인과 데이빗, 크리스가 골목을 나가려는데
제시카 : 그냥 가자구?
베 티 : 그 기집애들 어디서 지켜볼지도 몰라.
제 인 : (난처한 표정) 그럼 어떻게 해? 얠 데리고 가?
제인들의 말에 황당한 표정이 되는 마이클. 입구로 나간다.
데이빗 : 오늘 내 생일인데 데리고 가자.
크리스 : (마이클이 나가는 것을 보며) 이봐 어디가?
마이클 : 강도들하고 어울릴 생각은 없어.
크리스 : 뭐? 구해 주니까 저 자식이.
제시카 : 제인이 쓱삭했어.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데이빗과 크리스.
데이빗 : 만약에 너 혼자 나가면 몸에 총구멍이 날걸.
놀라는 표정의 마이클.
베 티 : 싫던 좋던 우리와 함께 하는게 좋을거야.
수 지 : 우리와 함께 가요.
#24. INT. 데이빗의 집 지하 (초저녁)
요란한 생일장식을 한 방.
베 티 : 내게 무-슨 마음의-병 있는 것-처럼 느낄 만-큼 -는 이-되어
그대 외-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왠지 나-를 그런쪽-에…….
노래방 기기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는 베티. 따라부르는 제시카와
제인. 탁자에 쌓여 있는 음식을 먹고있는 크리스. 데이빗은 베티가 사준
팬티를 바지 위에 입고 수지와 함께 손님 접대에 바쁜 모습이다. 홈바에
서 여러종류의 위스키를 맛보고 있는 토니. 제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다. 마이클은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 하고 가만히 소파 한쪽에 앉아 있다.
크리스 : 생일날에 칙칙한 노래는...
베티가 들고있던 마이크를 뺏는 크리스.
크리스 : 입술과 유방을 넘고 넘어 밑으로 밑으로 배꼽지나 숲속으로
제시카 : 야! 그만둬. 데이빗 엄마 아빠가 있단 말이야.
노래를 그치고 의자로 가 베티 위에 겹쳐 앉는 크리스. 제인, 토니 순으
로 달려들어 계속 겹쳐 앉는다.
베 티 : (웃으며) 야! 저리 비켜. 저리가.
데이빗 : 그러지마!
데이빗이 아이들을 밀어내 베티를 구하고. 모두 즐겨워한다.
데이빗 : 제씨가 너무 늦는데. 삐삐 좀 쳐봐.
수 지 : 알았어.
제씨에게 삐삐를 치는 수지. 문이 열리고 제씨가 들어온다.
아이들 : 뭐야? 너무 늦었잖아.
아우성치는 아이들.
제 씨 : 전화 대신 이몸이 오셨잖아.
데이빗 : 어서 와 제씨.
제씨를 본 마이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선다. 마이클을 본 제씨도
빤히 쳐다보고.
토 니 : 왜 그래 제씨?
제 씨 : 준영이 아냐!
마이클 : 재식아!
서로에게 달려가 안는 두사람.
제 씨 : 너 어떻게 된거야?
마이클 : 세상에 너를 만나다니....
제시카 : 제씨. 서로 아는 사이야?
제 씨 : 내 국민학교 단짝이였던 박 준영이야. 그런데 준영이가 어떻
게 여기에 있지?
제 인 : 으응. 그건 저 우리 학교에 전학왔거든. 그래서 데려 왔지 뭐.
제 씨 : 그래. 세상이 넓고도 좁다더니... 반갑다 준영아.
두 사람의 관계에 놀라는 다른 아이들. 제인은 어쩔줄 몰라 한다.
데이빗 : 모두 앉아. 내 생일인데 즐겁게 놀아야지. 자 이리 앉아.
제 씨 : 아주 많이 차렸는데. 너 언제 미국에 온거야?
마이클 : (제인을 보고 웃으며) 얼마 안돼.
제 씨 : 그래?
데이빗 : 둘만의 얘기는 나중에 하라구. 나가서 말야. 내 파티에선 노
는거야.
서로 어색해하는 블랙로즈. 실실 웃는 크리스. 발라드로 바뀌는 음악.
데이빗 : 베티, 나와 춤추자.
억지로 베티를 끌고 나가는 데이빗. 발라드 곡에 우스꽝스런 포즈로
춤를 춘다. 베티는 데이빗의 춤을 흉내낸다. 제시카와 크리스가 나가 데
이빗의 춤을 흉내낸다. 깔깔 웃으며 분위기는 풀어지고 마이클도 웃는
얼굴이 된다.
수 지 : 데이빗 오빠. 케잌 가져올까?
데이빗 : 아! 그래. 생일엔 촛불을 꺼야지.
수지 케이크를 가져 온다.
토 니 : 야. 촛불을 먼저 켜야지. 자 여기 성냥.
성냥을 건네 주는 토니. 데이빗 성냥을 켜서 초에 불을 부치는 순간
빵 하고 터지는 초. 놀라는 데이빗.
토 니 : 열 다섯번째 생일을 축하해.
생일 축하곡을 부르는 아이들.
데이빗 모 : (소리) 내가 못살어. 그 돈 어쨌어.
데이빗 부 : (소리) 이놈의 여편네가 소릴 지르고 지랄이야.
(E) 무언가 깨지는 소리.
데이빗 모 : (소리) 아악.
노래를 멈추고 서로의 얼굴을 보는 아이들. 인상을 쓰는 데이빗.
데이빗 : 오늘만은 참을수 없어. (위층으로 가려하자)
베 티 : 올라가지마.
제시카 : 그래. 이럴땐 가만히 있는게 상책이라구.
데이빗 : 오늘은 내 생일이야. 니들도 왔구. 그런데 ...
아이들의 손을 뿌리치고 올라가는 데이빗.
#25. INT. 데이빗 집의 거실 (초저녁)
헝크러진 머리의 데이빗 부(40대 초반). 화난 표정의 데이빗 모(30대
후반). 두사람 모두 생기없는 얼굴들.
데이빗 모 : 그돈이 어떤 돈인지 알고나 있어. 아니? 세낼 돈을 김씨한
테 꿔줘. 김씨한테 받을 수나 있을 거 같애.
데이빗 부 : 그럼 모른체 하란 말이야? 사람 인정이 왜 그 모양이야?
데이빗 : (나타나) 그만 싸워. 친구들도 와 있단 말이야.
놀라 데이빗을 보는 부모.
데이빗 : 오늘 같은 날만큼은 그 지겨운 돈싸움은 그만해.
데이빗 모 : 지겨운 돈싸움? 얘가 말하는 것 좀 봐. 다 너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뭐라구?
데이빗 : 나 때문이라는 소린 하지도 마. 난 돈이 싫어. 엄마 아빠가
돈때문에 싸우는 소리가 듣기 싫단 말야.
데이빗 부 : 부모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데이빗 모 : 저놈의 자식. 기껏 고생해 먹여주고 입혀주고 학교까지
보내주니 고맙다는 말은 못하고 엄마한테 대드네.
데이빗 : 먹고 자는건 연방정부에서도 다 해줘. 그런 걸로 생색내지
마.
데이빗 모 : 이놈의 자식.(때리며) 터진 입에서 나온다구 다 말인줄
알어? 아이고! 저게 미국에 오더니 애가 완전히 달라졌어.
데이빗 부 : 여보, 참아. 데이빗! 엄마한테 잘못했습니다 해! 어서!
이를 악무는 데이빗. 뒤돌아 지하실로 간다.
데이빗 모 : 아니 저애가... 여보, 쟤를 어쩌면 좋아요?
#26.데이빗집 지하 (초저녁, 실내)
울며 내려오는 데이빗. 데이빗 옆에서 흐느끼는 수지. 침울한 표정의
아이들.
데이빗 : 흑흑 엄마 아빠는 우릴 사랑 안해. 우린 고아라구.
베티 : 울지마. 기분도 그런데 우리 흔들러 갈까?
데이빗 : 으응.
#27 EXT. 거리 (초저녁)
침울한 표정으로 걷는 아이들.
베 티 : 데이빗 이러구 계속 갈꺼야?
데이빗 : 왜?
베 티 : 네 바지 봐.
바지 위에 그대로 팬티를 입고있는 데이빗.
토 니 : 짜식 그게 뭐야?
데이빗 : 뭐가 어때서? 난 좋은데.
제 씨 : 임마 벗어.
데이빗 : 싫어. 베티가 사준거라구.
황당해서 웃는 아이들. 아이들의 얼굴이 밝아진다.
수 지 : (무표정) 이번 주 수요일에 우리 집이 계를 탈거야.
놀라는 아이들. 토니와 제씨는 서로의 눈을 마주친다. 어리둥절해하는
마이클.
#28. INT. 디스코 택 (밤)
샴페인을 데이빗을 향해 터뜨리는 아이들.
아이들 : 생일을 축하해. (한)
데이빗 : (쑥스러워하며) 고마워. 난 너희들뿐이야.
데이빗을 끌고 훌로어로 나가는 아이들. 한쪽에 서서 가블린과 블랙로
즈를 감시하는 중국아이. 신나게 춤을 추는 가블린과 블랙로즈. 마이클도
합세해 즐거워한다. 제인에게 자주 눈길이 가는 마이클. 제인은 모른체
한다. 그런 마이클의 행동에 피식 웃는 제씨. 디스코 택 안쪽에서 백호단
이 나타나 마이클 일행을 지켜 본다. 전철역에서의 4명의 여자 아이들도
함께 있다. 음악이 발라드로 바뀐다서로 먼저 들어가려다 부딪치는 제인
과 마이클. 마이클이 제인에게 길을 양보한다.함께 춤을 추던 제시카와
토니가 보고 웃는다. 데이빗은 베티와 함께 집에서 추던 춤을 추고. 훌로
어에서 나가는 아이들 앞에 나타나는 백호단. 백호단에 밀려 훌로어로
밀려난다. 토니가 보고 백호단의 보스인 첸(19)앞으로 나간다. 춤추던 다
른 아이들도 토 니 옆에 서고. 백호단과 대치 상태가 되는 아이들. 마이클
은 긴장하며 대치하고 있는 두 패의 아이들을 본다.
첸 : 오늘 우리 애들을 건드렸다며. (영)
토 니 : 무슨 소리하는 거야? 저 애들이 먼저 우리 마이클을 건드렸다
구. (영)
첸 : 저 벙어리가 언제부터 니네 조직원이였다는거야? 저 앤 미국
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영)
제 씨 : 마이클은 내 불알친구라구. (영)
첸 : 말도 안되는 소리 집어 치워. 우리 애들을 골탕 먹이려는 수작
인줄 모를줄 알어? (영)
위협하듯 앞으로 나가는 백호단.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더욱 긴장하는
마이클. 쳄의 부하들 중 하나를 치는 제씨. 제씨에게 재빨리 총을 겨누는
첸 옆의 백호단원 두명.
크리스 : 왜이래. 마이클은 진짜 가블린의 일원이야. 늘 붙어 다니는
내가 모르겠어. (중)
첸 : 그럼 저애의 돈을 왜 뺏었지? (중)
크리스 : 그건 .. 저애가 조직의 돈을 갖고 있었거든. 그런데 영어가
서툴러서 말야, 위험하다 싶어 우리가 다시 가져 간거야. 정말이야. 첸은
같은 중국사람인 내 말을 못 믿어(중)
첸 : 한국사람도 중국사람도 아닌 네녀석 말을 믿어? 흥. 조심해.
걸리면 모두 죽여 버릴거니까. (중)
백호단을 이끌고 가는 첸. 첸의 아이들은 토니들에게 위협을 하며 간
다.
베 티 : 크리스, 잘 했어.
데이빗 : 뭐라고 한거야?
바닦을 노려보며 주먹을 쥐는 크리스.
제 씨 : (분해하며) 개새끼들. 총만 있었어두...
긴장을 풀며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는 마이클
#39. EXT. 거리 (밤)
고급 주택가의 거리를 나란히 걷는 마이클과 제씨.
제 씨 : 여기 학교로 오는 애들은 조직의 아이들한테 당하다 전학을
가던가, 아니면 조직원이 돼지. 학교로서도 전학이 반갑지 않아.
마이클 : 그래서 날 보던 아이들의 얼굴이.... 그런데, 부모님은 안녕하
시지?
제 씨 : 응. 아빠는 땅속에서 엄마는 야채가게에서 안녕하시지.
마이클 : 뭐?
제 씨 : 어떤 깜둥이한테 (손가락을 마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
처럼) 탕! 그러곤 끝이야.
마이클 : 무슨 소리야?
제 씨 : 가게에 흑인강도가 들어와 그렇게 됐어. 흥! 씨팔 그렇게 죽을
려고 미국까지 왔나(한)
마이클 : 한국에서도 고생만 하셨는데... (한)
제 씨 : 개새끼들. (한)
마이클 : 어머닌?
제 씨 : 그후 열심히 교회에 나가시지. 덕분에 나도 세례를 받고 교회
를 가긴 하는데 죽을 맛이야.
마이클 : (웃고) 여기가 우리집이야.
제 씨 : (보며) 서울에서나 여기서나 니네 집은 역시 잘 사는구나.
2층 건물에 정원이 있는 집. 거실에 불이 켜져있다.
마이클 : 들어가자. 엄마가 널 보시면 무척 반가와 하실거야.
제 씨 : 아냐, 늦었어. 다음에 갈께. 들어가라.
왔던 길로 되돌아 가는 제씨. 돌아보며 마이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다.
제 씨 : (시선은 마이클의 집에 두고) 씨발! 잘 사는 놈은 어딜 가도
잘사는구나.
집으로 들어가는 마이클.
#30. INT. 마이클의 집 (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이클. 마이클 모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다.
마이클 모: 얘, 왜 이렇게 늦었니? 아버지도 걱정 많이 하셨다.
마이클 : 죄송해요. 한국아이가 자기 생일이라고 파티에 가자고 해
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마이클 모: 그럼 전화라도 해아지.
마이클 : 금방 온다는 것이 그렇개 됐어요.
마이클 모: 그레. 알았다. 어서 씻고 자거라. 워낙 험한 곳이라 걱정이
돼서 그런다.
마이클 : 예, 안녕히 주무세요.
마이클 인사하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31. EXT. 학교 운동장 (낮)
벤치에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는 마이클. 난간에서 아래를 살피던 제
인이 마이클을 발견하고 마이클에게 다가온다.
제 인 : 안녕 마이클. 점심이니?
마이클 : 응. 너두 먹을래?
제 인 : (앉으며) 그래.
마이클 : (햄버거를 나눠주며) 자.
앞만 보고 어색해 하며 먹기만 하는 마이클. 어색해 하다 헛기침을 하
는 제인.
제 인 : 저 마이클.
마이클 : (동시) 저 제인.
마주보고 웃으며
마이클 : 먼저 말해.
제 인 : 아냐, 먼저해.
마이클 : 아니야, 먼저 말해.
제 인 : 그래. 마이클. 저... 미국 생활이 불편하지?
마이클 : 응. 아직은.
제 인 : 니가 싫지 않다면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마이클 : 그래, 사실 나도 제인에게 도와달라고 말을 하려던 참이였어.
제 인 : 그래. 잘됐네.
#32. INT. 강의실 (낮)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듣고 있는 제인과 마이클. 수업보다 서로에게 신
경을 쓰는 두사람. 서로 얼굴을 번갈아 보다 마주치자 웃는다. 제인과 마
이클의 모습을 탐탁치 않은 얼굴로 보는 강의실의 아이들.
#33. EXT. 학교앞의 거리 (오후)
차 안에서 xx High school 앞을 보는 토니, 제씨, 데이빗. 하교하는 아이
들을 살피고 있다. 교문에서 크리스가 나와 좌우를 살핀다.
토 니: 크리스!
토니들을 본 크리스, 손을 흔들며 차로 온다.
제 씨 : (담배를 피며) 왜 이렇게 안 나와?
크리스 : (들어오며) 가자!
제 씨 : 기다려!
크리스 : 왜? 다 모였잖아?
제 씨 : 나온다.
마이클이 블랙로즈와 함께 나온다.
제 씨 : (나가며) 데려올께.
마이클에게 다가가는 제씨.
베 티 : 제씨, 왠일이야? 학교엘 다 오구?
제 씨 : 자식. 여자들을 거느리고 나와?
제시카 : 거느리다니? 말 조심해 제씨. 우린 마이클의 바디 가드야.
제 씨 : (베티의 엉덩이를 치며) 알았어. 준영아, 일이 생겼는데 말야
니 도움이 필요해.
마이클 : 무슨 일인데? 도와줄께.
제 씨 : 좋았어.
마이클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제 씨 : 그럼. 니들은 가 있어. 끝나구 바로 갈께.
여자아이들은 알았다는 표정이다.
제 인 : 마이클 잘 해봐.
마이클을 데리고 차로 가는 제씨.
#34. EXT. 거리(차안) (오후)
거리를 달리는 가블린의 차 내부. 운전하는 토니, 옆엔 데이빗. 뒷좌석
엔 크리스, 마이클, 제씨 순으로 타고 있다.
마이클 : 그건 말도 안돼.
제 씨 : 너두 그날 봤잖아? 데이빗과 수지가 오죽하면 그러겠냐? 친구
를 돕는거라구.
데이빗을 보는 마이클. 데이빗은 표정없이 앞만 본다.
제 씨 : 쟤네 부모님은 돈이 없어야 정신을 차릴거라구.
마이클 : ......
제 씨 : 자기집을 터는 사람도 있냐? 돈만 아는 부모때문에 고통받는
친구를 돕는거라구.
(할로윈 가면을 주며) 자. 찡그리며 가면을 내려다보는 마이클.
마이클 : 니들은 네 명이니까, 굳이 내가 없어도 되잖아?
제 씨 : (답답한듯) 토니는 운전때문에 밖에 있어야 해. 데이빗은......
준영아, 넌 친구의 어려움을 모른척 할거야?
마이클 : (한숨)
자동차가 신호등 앞에 서자, 물통과 걸래를 든 흑인 하나가 다가와 앞
유리창을 걸레로 닦는다.
토 니 : 야 이 개새끼야! 꺼져버려. 그 더러운 걸레로 니 쌍판이나 닦
아라.(영)
제 씨 : 어이 씨발 재수 옴 붙었네. 꺼저! 씨발 놈아. (침을 뱉는다)
(영)
흑인1 : (계속 더러운 걸레로 닦으며)여. 너무 그러지 마, 칱구들. 나
도 먹구 살아야지.(영)
제 씨 : 시끄러. 개새끼야. 안꺼져.(영)
마이클 : (겁 먹은 얼굴로) 야. 그만 둬. 쌈 나겠다.
제 씨 : 야. 웃기지 마. 저런 쓰레기들은 겁낼 것 없어.
차를 출발시키는 토니. 흑인1 그제서야 물러선다. 백미러로 마이클을
보는 토니. 빙그레 웃는다.
#35. INT. 데이빗의 집 거실 (오후)
조용히 열리는 현관문. 살그머니 들어오는 4명. 모두 할로윈 가면을 쓰
고 있다.
(E) 데이빗 부의 코고는 소리.
데이빗의 지시로 거실 안 구석구석을 뒤지는 아이들. 마이클은 긴장으
로 떨고 있다. 돈을 못 찾은 아이들 제씨가 2층을 가르킨다. 제씨를 쳐다
보는 데이빗 끄덕인다. 2층으로 올라 가는 아이들. 크리스, 데이빗, 마이
클을 앞 세우는 제씨.
#36. INT. 데이빗의 집, 침실 (오후)
잠 들어 있는 데이빗 부. 코 고는 소리가 요란하다. 침실 문을 열고 들
어 오는 아이들. 극히 조심하며 뒤진다. 뒤척이는 데이빗 부 코 고는 소리
가 멈춘다. 제자리에 얼어 붙는 아이들. 다시 코 고는 소리가 난다. 안도
하는 아이들. 다시 뒤진다. 침대를 가르키며 데이빗을 보는 제씨. 한숨을
내쉬고 끄덕이는 데이빗 밖으로 나간다. 제씨가 데이빗 부에게 칼을 겨누
며
제 씨 : 야, 일어나! 일어나! (영)
눈을 뜨는 데이빗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난다. 데이빗 부의 행동에 움
찔하는 마이클.
제 씨 : 돈 어딨어? 돈. (영)
데이빗 부 :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사살려주세요. 우우리 집엔 도돈
이 어없어요. 사살려주세요. (영)
크리스를 보는 제씨.크리스 화병으로 데이빗 부의 뒤통수를 친다.
데이빗 부 : 으윽.(쓰러진다)
마이클 : 너무 심하잖아.
제 씨 : (단호히) 조용히 해. (영)
데이빗 부를 침대에서 끌어 내는 제씨와 크리스. 침대 메트리스를 들
추니 바닦에 깔려 있는 돈들. 준비해 온 가방에 돈을 넣는 제씨와 크리스.
뒤에서 둘의 행동을 보고만 있는 마이클. 돈을 다 넣은 후 제씨, 마이클을
끌고 나간다. 밖에서 쓰러져 있는 데이빗 부를 보는 데이빗을 데리고 가
는 크리스.
#37. INT. 은신처 (초저녁)
담배를 연달아 피우는 수지. 재털이에는 꽁초가 가득하다. 창밖을 내다
보는 제인. 전자오락을 하던 제시카와 베티는 소파에 와 벌러덩 눕는다.
제시카 : 심심해 죽겠다. 베티, 헉스란 애 어때? 괜찮지?
베 티 : 니 눈에 어련하겠니? 제인 뭘 보니?
제 인 : 아냐.
베 티 : 이리와 같이 놀자. 수지도 이리와. 담배 그만 죽이고.
수지는 엉금엉금 소파로 가나 제인은 계속 밖을 본다.
제 인 : 온다.
제시카 : 누가?
밖으로 나가는 제인. 수지가 뒤쫓는다.
#38. EXT. 은신처 밖 거리 (초저녁)
돈가방을 들고 오는 토니, 제씨, 마이클. 안에서 나오는 제인과 수지.
수 지 : 데이빗 오빠는?
제 씨 : 크리스랑 차 처치하러 갔어.
마이클의 얼굴을 살피는 제인.
토 니 : 들어가자.
마이클 : 난 가겠어.
제 씨 : 왜? 분배할거니까 들어가자.
마이클 : 관심 없어.
뒤돌아 가는 마이클. 제씨를 보던 제인이 마이클의 뒤를 쫓아간다.
토 니 : 내버려둬.
안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제씨가 비웃으며 힐끔 쳐다본다.
#39. EXT. 거리 (초저녁)
앞서 걷고 있는 마이클. 뒤따라 걷는 제인.
마이클 : 가. 잘난 좀도둑들하고 어울리라구.
제 인 : 마이클! 말 함부로 하지마!
마이클 : (돌아서며) 내 말이 틀렸어? (제인을 밀며) 니들이 도둑이
아니면 뭐야. 정의의 사도쯤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다신 내 앞에 니 꼴
을 보이지마!
가는 마이클을 서서 노려보는 제인.
#40. INT. 은신처(밤)
여러종류의 안주들. 위스키병. 즐거운 얼굴로 자축연을 하는 가블린과
블랙로즈.
#41. INT. 마이클의 방 (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마이클. 어두어지는 거리.
#42. INT. 은신처 (밤)
비어있는 안주접시. 빈 술병들. 자욱한 담배연기.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흔드는 제시카에게 키스를 하는 토니, 노래를 따라부르는 베티, 크
리스. 각자 멋대로 술 취한 모습들. 제인은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채
술을 계속 마신다.
#43. INT. 마이클의 방 (밤)
어두운 방. 같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마이클.
E(녹크 소리)
당황해 하며 책상으로 가 스텐드를 켜고 공부하는 척 한다. 과일접시
를 들고 들어오는 마이클모.
마이클모: 얘, 너무 무리하지마라. 조금 지나면 적응이 될거야. 어디
한국하고 같겠니? 이것 먹고 해라.
과일 접시를 책상위에 놓고 나간다.
마이클 : 예. 주무세요. 엄마.
짜증스럽게 책을 덥고 침대에 가 눕는 마이클.
#44. EXT. 가게 앞 (밤)
술에 취한 제인을 양쪽에서 부축하고 제인의 집으로 가는 크리스와 제
씨. 제인의 웃옷을 제씨가 들고 있다.
크리스 : 제인, 집이야. 정신 차려.
제 인 : 그래? 나 들어갈께.
크리스와 제씨를 뿌리치려는 제인. 비틀거린다.
제 씨 : 안 되겠다. 크리스, 니가 들어가서 쎄디를 불러.
크리스 : 알았어.
뒷골목으로 돌아 가는 크리스. 제인을 땅바닦에 앉히는 제씨.
제 인 : 흥, 웃기는 자식.
제 씨 : 누가? 누가 웃겨.
제 인 : 누구긴? 마이클이지. 지까진게 뭐라구.
제인모 : (소리) 이놈의 기집애를 그냥.
문이 젖혀지면서 제인모가 나온다. 제인에게 달려가 때리며
제인모 : 잘 하는 짓이다. 이제는 술까지 쳐 먹고 들어와.
제 씨 : (말리며) 왜 이러세요.
제인모 : (제씨를 노려보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술이나 퍼
마시고.
가게의 손님들과 함께 창으로 밖을 구경하는 조셉. 쎄디와 크리스가
뛰어 나온다.
쎄 디 : 미연아 일어나.
쎄디가 제인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제인모 : 어딜 들어가. 나가. 니들 필요 없으니까 나가.
쎄 디 : (제인모를 밀며) 나갈거예요. 걱정 말고 비켜요.
쎄디가 제인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다 대고.
제인모 : 니들 같은 것을 자식이라고 이 고생을 하며 키웠더니... 이
망할놈의 기집애.
#45. INT. 제인의 방 (밤)
침대에 잠들어 있는 제인. 문이 열리고 외출복 차림의 쎄디가 들어와
제인에게 다가가
쎄 디 : 미연아 미안해. 곧 데리러 올께.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눈물을 흘리는 쎄디. 나간다.
#46. INT. 강의실 (낮)
선 생 : .............................
제인의 자리가 비어있다.
제인의 빈자리를 쳐다보는 마이클. 표정이 어둡다.
#47. EXT.공장 건물 앞 (낮)
폐허가 된 공장 건물. 황량하다. 차 한대가 들어와 건물 입구에 주차한
다. 흥분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는 토니. 주변을 경계하며 살펴보는 제
씨. 가방을 들고 있다. 긴장된 표정의 제인. 얼굴에 멍이 퍼렇다.
#48. INT. 공장내 사무실 (낮)
건물의 골조가 흉하게 드러나 있다. 우악스럽고 거친 모습의 사내 1,2,3
이 소파에 멋대로 앉아 술과 담배를 하고 있다. 책상에 앉아있는 지미
- 무기 밀매단의 보스(흑인. 30대 후반)는 전화를 받고 있다.
지 미 : 뭣 우지로만? 좋아, 물론 돈만 가져온다면야 물건은 얼마든지
있지. 오늘? 아아 아아니 지미한테 물건이 없을리야 없지 않나. ... 있다
보세. (수화기 내려놓고) 오늘 한 건 하겠는데.(영)
(E) 여러명의 발자욱소리.
긴장하며 총을 꺼내들고 침입자를 대비하는 사내들. 지미도 책상0서랍
에서 총을 꺼낸다.
토 니 : (소리) 지미. 토니요. (영)
총을 치우라는 손짓을 사내들에게 하는 지미. 총을 다시 서랍에 넣는
다.
지 미 : 애들이 온다. (영)
모퉁이에서 나타나는 토니들.
토 니 : 약속한 돈을 가져왔오. (영)
들고 있던 가방을 책상에 올려 놓는 토니. 뒤에 서 있는 제씨는 인상을
찌푸린다.
지 미 : 솜씨가 좋은데! (영)
가방을 열어 안의 돈을 확인하는 지미.
지 미 : 좋아. 뭐가 필요하다고 했더라. (영)
토 니 : 우지. 메그넘 3자루. (영)
지 미 : 우지. 아! 맞아. 돈을 가져왔으니 (영)
서랍에 손이 가는 지미. 멈추며
지 미 : 물건은 니꺼야. 그럼 물건을 가지러 가지. 직접 고르라구. (영)
토니를 어깨동무하며 안으로 안내하는 지미. 좋아하며 안으로 들어가
려는 토니. 제인은 그 뒤에서 따라간다. 제씨를 앞에 세우려는 사내들의
눈치를 살피던 제씨.
제 씨 : 아니. 물건을 가져와요. 토니, 우린 여기서 기다리자. (영)
지 미 : 왜? 우리 창고도 구경하고 직접 물건을 골라 가져 가라구.
(영)
제 씨 : 우린 물건을 볼 줄 몰라. 가져다 주는데로 받아 가겠오. (영)
지 미 : 전시해논 총들을 구경하고 싶지 않아? (영)
제 씨 : 아니. 우린 여기 있겠오. (영)
지 미 : 좋아 좋다구. 그럼 내가 가져다 주지. (영)
지미와 제씨와의 신경전을 주시하는 토니와 제인. 사내 1의 손이 뒤로
가려는 것을 눈짓으로 못하게 하는 지미. 사내 1이 끄덕이면서 갑자기
사내들이 달려 들어 아이들을 붙잡아 안으로 끌고 들어가 려 한다. 빠져
나가려는 아이들과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사내들과의 치열한 몸싸움
이 벌어지고. 이 와중에 제인의 가방이 찟어져 내용물들이 쏟아진다. 쏟
아지는 피임약, 콘돔. 내용물들을 보던 사내들이 피식피식 웃는다. 사내
들이 떨어진 내용물에 잠시 눈을 팔때 발로 뒤에서 자신을 잡고 있는 사
내 1의 얼굴을 차는 제씨. 사내1이 제씨를 놓고 얼굴을 감싸자 명치를
친다. 동시에 한쪽 팔만 잡혀있던 제인이 자신을 잡고 있던 사내2의 아래
급소를 무릎으로 친다. 아래를 움켜쥐며 나뒹구는 사내2. 지미가 제씨에
게 달려든다. 가까이 있던 전화기를 들어 지미의 면상을 치는 제씨. 토니
를 잡고 있던 사내 3이 권총을 꺼내기 위해 한 팔을 푸는 사이 팔꿈치로
사내를 치며 벗어나는 토니. 총이 떨어진다. 재빨리 총을 주워 사내들에
게 겨누는 제인.
제 인 : 꼼짝마. 총을 꺼내 이쪽으로 밀어. 천천히. 그렇지 않으면 머리
가 없어질 거야.(영)
천천히 권총을 꺼내는 사내2 제인 앞으로 총을 민다. 사내1은 총을 옆
으로 민다. 제씨 사내2의 총을 집어 들어 겨누며 사내1에게
제 씨 : 개새끼들. 자 먼저 가!
계단을 향하는 뛰는 제인과 토니. 사내들을 겨누며 뒷걸음치는 제씨.
#49. INT. 공장의 계단 (낮)
계단 앞까지 뒷걸음치던 제씨 계단에 다다르자 필사적으로 뛰어 내려
간다.
지 미 : (소리) 쫓아가 죽여. (영)
헐떡거리며 뛰어 내려가는 토니와 제인. 계단을 구르듯 내려오는 제씨.
지미와 사내 1,3이 뒤를 쫓는다. 입구가 보이자, 뒤를 돌아보는 제인.
#50. EXT. 공장 건물 입구 (낮)
주차해 놓은 차에 타고 시동을 거는 토니. 앞에 앉아 입구를 주시하며
뒷문을 열어두는 제인. 제씨가 나와 차 뒷좌석으로 슬라이딩하듯 들어간
다. 출발하는 차. 지미와 사내 1,3이 뛰어내려와 멀어지는 차에 총을 겨눈
다.
지 미 : 놔둬! 애들이잖아. (미소) 돈은 우리꺼라구. (영)
#51. EXT. 도로 (낮)
텅빈 도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차.
#52. INT. 은신처 (낮)
크리스 : 뭣! 돈을 다 날렸다구?
제시카 : 니들끼리 뭘하다가?
토 니 : 총을 구하려다 뺏긴거라구 했잖아.
베 티 : 총? 정말? 좋아. 하지만 그런 일은 우리들과 상의한 후 했어야
하는거 아냐? 적어두 데이빗은 알아야 하잖아.
잠자코 듣기만 하는 데이빗과 수지.
크리스 : 그 일로 쟤네 엄만 밥도 안 먹구 누워 계셔. 그런데 그런 돈을
그냥 써보지도 못하고 날렸단 말야?
제 씨 : 우리도 날리고 싶어 날렸냐? 그 새끼들을 그냥.
벽을 주먹으로 치는 제씨.
제 인 : 우리도 잘 하려다가 그렇게 된 걸 왜 화만 내고 그래? 죽을
뻔 하다가 간신히 살아 왔다구. 그 놈들의 함정에 빠진거야.
밖으로 나가는 데이빗.
토 니 : 어쨋든 책임은 내가 진다. 무기를 구해 오겠어.
베 티 : 돈 들고 갔어도 못 구해 온 무기를 니가 어떻게 구해?
토 니 : 구해 오면 될거 아냐?
발로 문을 차며 안으로 들어가는 토니.
#53. EXT. 거리 (오후)
커피숖, 피자집 등이 있는 거리. 거리의 동양인 여자아이들의 얼굴을
살피며 걷는 마이클. 가게에 들어갔다 나온다.
#54. EXT. 거리 (오후)
야채가게 앞의 거리. 지나던 제인, 사과 하나를 집어 들어 먹으며 간다.
가게에서 나오는 종업원
종업원 : 야! 돈 내고 가야지. 야! 지옥에나 가라. (영)
빙그레 웃으며 사과를 맛있게 먹는 제인. 마이클이 제인을 보고 있다.
제 인 :(마이클을 발견하고) 제기랄. (영)
길을 무단횡단하는 제인. 마이클이 제인을 뒤 쫓는다. 마이클을 무시하
고 계속 걷는 제인. 마이클 제인을 쫓아가다, 길에 쓸어져 있는 사내를
보고 멈칫한다. 태연히 지나가는 행인들. 마이클 멈칫하는 사이 제인을
놓친다. 당황한 마이클 뛰어 간다. 멀리 행인들 속을 걸어 가는 제인. 마
이클 행인들 틈을 비집고 나간다.
마이클 : (잡으며) 제인.
제 인 : 아니, 왜 이래? 너........ 도둑년에게 무슨 볼 일이야?
마이클 : 사과할께. 미안해.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으며 무시하며 걷는 제인.
마이클 : 갈만한 곳은 다 찾아 다녔어.
제 인 : 왜?
마이클 : 만나고 싶어서. 그런데 눈은 왜 그런거야?
제 인 : 미친 개한테 물린거야. 저리 가.
마이클 : 보고 싶었어.
제 인 : (치켜뜨며) 뭐! (영)
마이클 : 널 좋아한다구.
제 인 : 웃기는군. (밀치며) 비켜.
마이클 : (잡으며) 이러지마. 너한테 한 말 때문에 나두 힘들었어.
마이클의 눈을 보는 제인.
#55. EXT. 바닷가 (초저녁)
지는 노을을 보며 모래사장에 앉아 있는 제인과 마이클. 마이클이 제
인의 어깨를 안는다. 마이클을 마주 보며 웃는 제인. 키스를 하는 마이클
서툴다.
제 인 : 너 처음이구나. 가만 있어 봐.
마이클을 리드하며 키스하는 제인.점점 뜨거워진다.
#56. INT. 은신처 방 (밤)
테이불 위에는 치우지 않은 라면남비, 소주병이 있다. 무기를 보여 주
며 자랑스러워 하는 토니.
제 씨 : 어떻게 구한거야?
토 니 : 제임스.
제 씨 : 돈은?
토 니 : 이게 있는데 돈이 문제야? 이제 거리의 돈은 모두 우리 꺼라
구. 천천히 주면 돼.
(E) 벨소리
재빠른 손놀림으로 무기들을 치우는 제씨와 토니, 나간다.
#57. INT. 은신처 거실 (밤)
제 씨 : 누구야? (영)
데이빗 : 우리들이야.
어안렌즈로 방문자를 확인하는 제씨.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문을 활
짝 열며
제 씨 : 어서 와. 어 준영아!
제 인 : 준영이가 뭐야? 마이클.
토 니 : 문 잠그고 이리 와 봐.
크리스 : 왜?
제 씨 : 아주 근사한 놈이 있어.
방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58. INT. 은신처 방 (밤)
토 니 : 놀래지 마.
들어온 아이들에게 무기를 꺼내 보이는 토니와 제씨.
토 니 : 우리도 완전한 조직이 된거야.
데이빗 : 그래! (총을 만지면서)
아이들은 무덤덤한 표정이다. 마이클은 암담한 표정이 된다.
#59. EXT. 소호거리 (낮)
(E) 바이올린 소리
평화스런 사람들의 모습. 다정한 모습의 연인들.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
는 거리. 모자를 앞에 두고 바이올린을 켜는 구렛나루의 남자. 제인을 안
고 거리를 걷는 마이클. 동양정취가 있는 작은 유화를 주의깊게 보는 제
인.
마이클 : 맘에 들어?
제 인 : (웃음)
(E) 삐삐소리.
마이클 : 누구야?
제 인 : (보고) 신경 쓰지마. 우리 어디로 갈까?
#60. 어느 수퍼마켙 앞의 거리(차안) (낮)
수퍼마켓을 살펴보는 토니, 제씨, 크리스, 데이빗. 바지에 자주 손바닥
을 문지르는 데이빗. 거리에 오가는 사람이 없자
토 니 : 가자.
할로윈 가면을 쓰고 나가는 아이들. 유리문을 통해 안을 살펴보는 아
이들.
#61. INT. 수퍼마켙 (낮)
손님은 없고 카운터에 앉아있는 한국인 주인. 물건을 정리하는 종업원
뿐. 제씨가 총을 겨누며 안으로 들어가니 뒤를 이어 토니, 크리스. 데이빗
이 쭈볏쭈볏 따라 들어간다.
토니, 제씨 : 손들엇. (영)
종업원을 겨누는 크리스와 데이빗의 총은 흔들린다.
주 인 : 쏘지 마세요. (영)
토 니 : (가방을 던지며) 여기다 넣어. (영)
손을 내리는 주인.
토 니 : 손들어. (영)
주 인 : 돈을 넣어야죠. (영)
끄덕이는 토니. 주인 가방에 돈을 넣으며 비상버튼을 누른다.
제 씨 : 빨리. (영)
(E) 경찰 싸이렌 소리
토 니 : 제기랄. 튀어. (영)
사이렌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가는 토니, 크리스, 데이빗. 제씨는 우지
방아쇠를 당기나 총알이 나가지 않는다.
주 인 : 뭐야? 고장 난거잖아. 이리와 꼬마야, 가면 뒤를 볼까. (영)
주인 웃으며 제씨에게 다가간다. 제씨 뒷걸음 치나 점점 가까이 다가
오는 주인. 계속 총을 만지는 제씨.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E) 따다다
연속으로 나가는 총알. 총알이 나가는 힘에 뒷걸음 치는 제씨.
난장판이 되는 수퍼. 제씨의 총격을 피하느라 엎드린 주인. 다리에 총
알이 박힌다.
주 인 : 으악!
다리를 움켜쥔 주인을 넘어 계산대로 가 가방을 집어 가지고 나가는
제씨.
#62. EXT. 하이웨이 (오후)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63. EXT. 교외 (밤)
차 본네뜨에 누워 밤하늘 별을 보는 제인과 마이클.
제 인 : 교외는 오래간만이야.
마이클 : 제인.
제 인 : 응.
마이클 : 왜 집에 안 들어가지?
제 인 : 나왔어.
마이클 : 왜?
제 인 : 말하기 싫어. 묻지마.
마이클 : 네가 말해 줄때까지 기다릴께. 이리와.
제인을 안는 마이클. 키스, 애무, 벗겨지는 옷.
마이클 : 제인!
제인의 손을 잡고 차로 이끄는 마이클. 제인이 숲으로 마이클을 잡아
당긴다. 제인의 손에 이끌려 숲에 눕는 마이클. 제인이 키스를 한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달.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64. INT. 은신처 (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토니와 제씨.
(E) 벨소리
어안렌즈로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는 제씨. 제인과 마이클이 들어온다.
토 니 : 제인, 어디 갔었어?
제 인 : 왜?
제 씨 : 블랙로즈의 보스면 보스답게 굴어.
제 인 : 무슨 말이야?
토 니 : 제인. 앞으로 어떻게 할래?
제 인 : 앞으론 마이클도 도울거야. 걱정마.
제 씨 : (마이클을 보며) 진심이니?
마이클 : 으응. 저....
토 니 : 그말을 들으니 기쁜데. 자 받어.
삐삐를 주는 토니.
마이클 : 이건 왜?
제 씨 : 니가 어디 있던지 연락이 되야 하잖아.
마이클의 입단을 축하하는 파티를 해야 하지 않을까?
토 니 : 물론이지.
어정쩡한 얼굴로 삐삐를 받는 마이클.
#65. INT. 가정집 (낮)
할로윈 가면에 총을 들고 들어오는 가블린과 마이클. 안에서 진공청소
기로 가사일을 하던 백인여자가 아이들을 보고 비명을 지른다달려가 여
자의 얼굴을 총잡이로 치는 제씨. 기절하는 여자. 뒤지던 데이빗이 어깨
를 으슥하며 고개를 흔든다.
#66. INT. 백화점 (낮)
마이클이 목걸이를 제인의 목에 걸어준다. 끄덕이는 제인.
#67. INT. 레스토랑 (초저녁)
제인과 즐겁게 음식을 먹고 있는 마이클.
#68. INT. 마이클의 방 (밤)
방에 들어오는 마이클. 따라 들어오는 마이클 모
마이클 모 : 요즘 많이 늦는구나.
마이클 : 미국의 역사와 영어를 재식이한테 배우느라구요.
마이클 모 : 언제 재식이를 저녁에 초대하자꾸나. 도움만 받아 쓰겠니.
마이클 : 예.
마이클 모 : (마이클의 볼을 쓰다듬으며) 피곤할테니 쉬어라.
나가는 마이클모. 침대에 누워 천정을 보는 마이클.
(E) 삐삐소리.
삐삐를 보며 미소짓는 마이클. 삐삐에 찍혀있는(3535)
#69. INT. 강의실 (아침)
소란스런 강의실. 마이클이 제인과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것 외는 여전
한 모습이다. 메리앤이 승재(16, 미국이름 브라이언)를 데리고 들어온다.
메리앤 : 오늘부터 함께 공부할 브라이언이예요. 브라이언 자기소개
를 해라.(영)
브라이언을 무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는 아이들.
브라이언 : 안녕. 브라이언이야. 너희와 함께 공부하게 되어 기쁘다.
(영)
아이들의 표정에 당황하는 브라이언. 브라이언을 외면하는 마이클.
#70. INT. 계단 (낮)
하교하는 아이들로 부산한 계단. 브라이언이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
고 있다. 제인과 함께 나오는 마이클. 계단을 내려가다 브라이언을 보는
마이클. 그냥 지나친다.
#71. INT. 장난감가게 (낮)
여기저기에서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손님이 없어지길 기다리는 가블린
과 마이클.
데이빗이 비눗물로 비눗방울을 만들고 있다. 크리스는 장난감 총을 뜯
어 두두두 쏘아보고. 마이클은 잡지를 보는 척 하다 손님이 없자 아이들
에게 신호을 한다. 아이들 스타킹을 뒤집어 쓴다. 비누방울을 발견한 종
업원. 데이빗에게 가며.
종업원 : 뜯었으니 계산하셔야 합니다.(영)
제 씨 : 돈은 내야지.(영)
제씨의 얼굴을 보고 놀래는 종업원. 제씨 총을 꺼내 종업원에게 겨누
자 다른 아이들도 총을 꺼낸다. 주인에게 총을 겨누는 마이클.
마이클 : 모두 바닥에 엎드려! (영)
바닦에 엎드리는 사람들. 토니가 가방에다 돈을 챙긴다.
토 니 : 튀어! (영)
나가는 아이들. 마지막에 나가던 크리스 주머니에서 장난감 수류탄을
꺼내 던지며
크리스 : 조심해!(영)
사람들 : (보고) 악! 수류탄이다. 피해! (영)
#72. EXT. 거리 (낮)
제인이 차를 몰고 간다. 혼비백산하며 뛰쳐 나오는 사람들. 바닦에 엎
드려 귀를 막는사람들. 터지지 않는 수류탄. 이상히 여기며 고개를 드는
사람들. 가게에서 한 종업원이 장난감 수류탄을 들고 나오며.
종업원 : 장난감이예요.(영)
주 인 : (아이들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망할 놈의 자식들. 지옥에나
가라. (영)
#73. INT. 디스코택 (밤)
춤을 추는 아이들. 멋진 춤솜씨의 제시카. 마이클과 마주하고 춤을 추
는 제인.
#74. EXT. 골목 (밤)
중국아이들에게 맞고 있는 쎄디의 남자진구 프랭크. 피투성이가 되어
쓸어진다. 골목을 빠져 나가는 중국아이들.
#75. INT. 은신처 복도 (밤)
복도 구석에 잔뜩 움츠린채 잠들어있는 쎄디. 몰골이 초췌하다
제시카 : 너무 신나!
데이빗 : 집에 가기 싫은데....
즐거운 표정으로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아이들. 크리스 쎄디를 발견한
다.
크리스 : 잠깐. 이게 누구지?
쎄디를 유심히 보는 아이들. 제씨가 다가간다.
제 씨 : 제인! 쎄디야.
제 인 : 뭐! (다가가며) 쎄디! 쎄디! 정신차려.
눈을 뜨는 쎄디.
마이클 : 문열어.
쎄디를 안으로 들이는 아이들. 소파에 눕힌다. 비스듬히 기댄 쎄디.
쎄 디 : JKP가 무너졌어. 아마 소생하지 못할거야.
제 씨 : 누가? 어떤 놈들이야?
쎄 디 : 백호단하고 관할지역 다툼이 있었어. 백호단 녀석들 사태가
불리해지자 윗조직을 동원한거야.
크리스 : 그럼 ....
쎄 디 : 뉴욕에 있을 수 없어. 제인, 돈이 필요해.
제 인 : 걱정 하지 말구 쉬어.
고개를 흔들며 힘겹게 움직이는 쎄디.
제 인 : 왜?
쎄 디 : 지금 떠나야 돼. 안 그러면 너희들도 위험해.
제 인 : 그 몸으로 간다구?
쎄 디 : 제인 급해. 빨리.
제 인 : 알았어
토니와 방에 들어가는 제인. 돈을 가지고 나온다.
제 인 : (돈을 건네며) 자.
쎄 디 : 고마워. (나가며) 제인 나 좀보자.
밖으로 나가는 쎄디. 제인이 따라 나간다.
#76. INT. 은신처 밖 복도 (밤)
쎄 디 : 제인. 이 바닦에서 떠나. 안 그러면 넌 죽어. 알았니? 내 말
명심해. 갈께.
제인을 안는 쎄디. 눈물을 흘리는 두사람. 계단으로 가는 쎄디를 쫓아
가는 제인.
제 인 : 언니.
쎄 디 : 따라 오지 마.
쎄디를 지켜 보는 제인. 운다.
#77. INT. 은신처 (밤)
데이빗 : JKP 복수를 해야 해.
제시카 : 그래. 중국놈들을 묵사발 만들어야 한다구.
제 씨 : 개같은 백호단 놈들을 다 죽여 버리겠어.
크리스 : 우리로선 걔들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만약 잘못 되면 트라
이어드가 우릴 가만 놔두질 않을거라구.
데이빗 : 니가 화교라구 백호단 편을 드는거야? 이번 일엔 빠져!
당황하는 크리스. 아이들의 표정을 보고 나간다. 들어오는 제인. 얼굴
이 빨갛다. 마이클이 가 제인을 안는다. 울음을 참지 못하는 제인.
제 씨 : 놈들을 어떻게 혼내 주지?
데이빗 : 놈들 사무실을 박살내는거야.
제시카 : 아냐. 놈들이 꼼짝 못하게 돈을 터는거야.
베 티 : 돈?
제 씨 : 그래, xx 거리에 있는 놈들의 맛사지 팔러다.
토 니 : 너무 위험해. 신중히 생각해야돼.
제시카 : 크리스가 배반하지 않을까?
수 지 : 크리스 오빤 그렇지 않아.
제 씨 : 그렇다 치구, 게획을 짜 보자구. 마이쿨 네 좋은 머리 한변
써 먹자.
마이클 : 생각헤 보자.
#78. EXT. XX거리(차안) (밤)
XX거리를 차로 돌며 살펴보는 제씨, 재인, 토니, 마이클. 밤이 현란한
거리.
제 씨 : 저기가 백호단 애들이 운영하는 맛사지 팔러야.
제씨가 가르키는 맛사지 팔러를 보는 아이들.
마이클 : 어디다 주차하고 지켜보자.
토 니 : 알았어.
맛사지 팔러 맞은편에 주차하는 토니. 쌍안경으로 보는 마이클. XX 맛
사지 팔러를 출입하는 사람들. 비비오 카메라로 사람들을 일일이 체크하
며 들인다.
토 니 : 어떻게 들어가지?
(E) 삐삐 소리.
제 씨 : (보며) 집이야. 못 들어가니까 전화하고 올께.
공중전화 박스로 가는 제씨. 제씨 전화를 건다.
(E) 신호음.
제 씨 : 엄마 저예요. 오늘 못들어가요.
제씨 모 : (소리) 오늘이 무슨 날인줄 알아? 니 아버지 제사야. 뭐가
바빠 아버지 제사도 잊어버리다니. 나쁜 놈 같으니라구. (울먹인다)
제 씨 : 죄 죄송해요.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 놓으며 유리에 머리를 기대는 제씨.
토 니 : 제씨! 제씨!
차안에서 제씨를 부르는 토니. 눈에 눈물이 맺혀 있는 제씨. 눈물을 닦
고 나간다. 전화박스에서 나와 차에 타는 제씨.
토 니 : 크리스를 불러야겠어.
데이빗 : 왜?
토 니 : 내부를 아는 건 크리스뿐이잖아? 그리고 우리랑 떨어지면
백호단에 붙을텐데, 위험해.
마이클 : 일은?
토 니 : 오늘밤 기습이야.
#78. INT. 디스코 택 (밤)
제인들과 함께 왔던 디스코 택에 혼자 온 크리스. 우울한 얼굴이다. 주
변을 두리번거린다. 크리스를 아는 백호단 아이들이 아는체를 하며 지나
간다.
#79. INT. 디스코 택 입구 휴게실(밤)
마리화나를 피우는 아이들. 크리스가 들어온다. 크리스에게 다가가 자
기가 피우던 마리화나를 권하는 중국계 여자아이. 크리스가 그 담배를
피자 여자는 크리스에게 몸을 밀착한다.
#80. INT. 디스코 택 (밤)
중국계 여자아이와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는 크리스. 삐삐를 본다. 불이
깜빡이는 삐삐.
크리스 : (기뻐) 친구들이야. 가야돼. (중)
여자에게 키스를 하고 껑충껑충 뛰며 홀을 나가는 크리스.
#81. INt. 은신처 (밤)
소파에 기대 앉아 술과 담배를 하고 있는 제씨. 발 아래엔 2개의 빈병
이 있고. 가방에 할로윈 가면과 총들을 넣고 있는 토니. 제인은 한 쪽에서
다리를 세우고 앉아 있다.
토 니 : 제씨 왜 그래?
제 씨 : 뭘?
토 니 : 계속 술이잖아.
총을 만지며 토니의 말을 듣고 있던 마이클.
마이클 : 재식아, 넌 이번 일에 빠져. 너무 취했어.
제 씨 : 짜식 뭐야? 난 안 취했어. 말짱하다구.
제시카 : (찌푸리며) 계획은 섰어?
토 니 : 그럼.
데이빗 : 이번 일이 성공하면 우린 완전한 조직이라구.
베 티 : 와! 대단한데.
(E) 벨소리.
수 지 : 크리스 오빤가 봐.
문을 여는 수지. 환한 표정의 크리스가 들어온다.
토 니 : 어서와.
크리스 : 다들 모였네. 파티라도 여나?
데이빗 : 파티? 파티라고도 할 수 있지.
가방을 본 크리스. 굳어진다.
크리스 : 오늘 하려구?
끄덕이는 아이들.
크리스 : 좋아. 날 불러 줘서 고마워.
가방을 드는 크리스.
데이빗 : 제인! 출발이야.
제시카 : 우린 배웅할께.
제인을 데리고 나가는 아이들.
마이클 : 제씨는 여기 있어.
제 씨 : 웃기지마. 흥, 니들끼리 할 수 있을 것 같애?
토 니 : 제씨, 마이클 말 들어.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나가는 제씨. 토니과 마이클이 걱정스런 얼굴
로 따라 나간다.
#82. EXT. XX 맛사지 팔러 앞 (밤)
껌을 씹으며 물건이 잔뜩 든 종이봉지를 들고 가게문 앞에 서있는 데
이빗과 마이클. 주위엔 토니와 크리스, 제씨가 지켜 보고 있다.
여종업원 : (소리) 누구야? (영)
데이빗 : 배달이요. (영)
문이 열리고 모자를 눌러 쓴 마이클과 데이빗이 들어가며 테이프를 붙
인다. 잠시후 살그머니 문을 밀고 들어가는 아이들. 크리스, 제씨, 토니가
들어오며 할로윈 가면과 총을 준비하고 계단 위로 올라간다.
#83. INT. xx 마싸지 팔러 (밤)
여종업원 : 어머 새로 왔나? 못 보던 얼굴이야. 이리 따라와.(영)
앞장 서 가는 종업원. 모자를 눌러 쓴 데이빗과 마이클 따라간다.
데이빗 : 알았어요. (영)
주위에 반나의 여러 인종의 여자들을 흘끔거리며 따라간다. 안으로 방
들이 양쪽에 나란히 마주 보고 있고 그사이엔 넓지 않은 통로가 있다.
통로 안쪽으로 더 들어 가니 부엌이 있다. 총을 들이대며 들어선 크리스,
제씨, 토니. 여자들 비명을 지른다. 가면을 쓰는 데이빗과 마이클. 돌아서
는 종업원.
여종업원 : 뭐야?
마이클 종업원의 얼굴에 총을 들이댄다.
마이클 : 꼼짝 마! (영)
여자들의 비명소리. 총을 보고 양손을 든다. 데이빗과 크리스는 방마다
다니며 안에 있던 남녀들을 끌어낸다. 제씨가 냉장고를 열고 술을 꺼내
들고 병나발을 분다.
제 씨 : (술을 마시며) 모두 옷을 다 벗어. 어서. (영)
데이빗과 크리스, 마이클은 금품을 챙기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행동을
눈여겨 보던 중국인 청년
청 년 : (다가가며) 이봐, 옷을 벗기는 것은 너무 하잖아. (영)
제 씨 : 뭐라구? 건방지게 (영)
청년에게 다가가 총으로 내려 치려는 제씨. 청년이 달려들어 총을 뺏
으려 한다. 이를 본 마이클이 중국인에게 달려 들어 몸싸움을 벌인다. 동
요하는 사람들을 총으로 위협하는 데이빗과 크리스.
(E) 탕!
마이클의 가면을 손으로 움켜 쥔채 쓰러지는 청년. 피가 튄 마이클의
놀란 얼굴. 마이클의 총에서 연기가 난다. 마이클을 보는 아이들. 당황한
다.
토 니 : 나가자. (영)
도망치는 아이들. 당황해 그냥 서있는 마이클을 데이빗이 끌고 나간다.
#84. EXT. 맛사지 팔러 압 거리 (차안) (밤)
길 한모퉁이 차 안에서 맛사지 팔러 입구를 지켜 보던 제인. 아이들이
가면을 쓴 채 뛰어 나와 두리면 거린다.
제 인 : 저것들이 미쳤나.?
차를 롤고 간다. 차에 구겨지듯 타는 아이들.
제 인 : 무슨 일이야? 왜 그래?
크리스 : 빨리 가. 어서.
움직이는 차. 유리창 밖으로 맛사지 팔러의 나신의 남자들이 총을 들
고 나와 달리는 차에 조준하는 것이 보인다.
크리스 : 숙여.
총을 맞는 차. 유리가 깨진다.
#85. INT. 은신처 (밤)
하얗게 질진 얼굴의 아이들. 마이클은 넋이 나간듯한 얼굴이다. 말라
붙은 피를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는 제인.
토 니 : 당분간 숨어 있는 것이 좋겠어. 자, 당분간 써.
돈을 아이들 앞으로 던진다. 말없이 돈을 들고 나가는 아이들. 제씨는
부엌으로 가 술을 들이킨다. 이를 본 토니, 다가와 제씨의 턱을 날리며
토 니 : 이새끼! 너 미쳤어! 왜 종일 퍼 마시는 거야?
제씨는 대답 대신 울어버린다.
#86. EXT. 거리 (차안) (밤)
거리를 달리는 차. 말이 없는 아이들. 제인, 마이클, 데이빗, 수지.
데이빗 : 어디로 갈까?
마이클의 얼굴을 보던 제인.
제 인 : xx로 가.
#87. EXT. XX 모텔 앞 (밤)
안내 앞에 서있는 제인.
백인주인 : 나이가 몇이지?(영)
제 인 : 25.
백인주인 : 동양인 나이는 종잡을 수가 없어. 여깃수. (열쇠를 준다)
(영)
열쇠를 받아 차로 가는 제인. 제인의 뒷모습을 보는 주인의 얼굴이 미
심쩍다는 표정이다. 차문을 열어 마이클을 나오게 하는 제인, 마이클은
넋 나간 얼굴이다. 마이클을 부축하는 제인.
제 인 : 고마워.
데이빗 옷을 가지고 내일 올께.
데이빗 차를 몰고 가다 멈추고
데이빗 : 제인! 제인!
제인이 돌아보자
데이빗 : 크리스를 조심해.
#88. INT. XX 모텔 방 (밤)
어두운 방안.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가 힘없이 앉는 마이클. 제인이 불
을 킨다.
마이클 : 불 꺼.
불을 끄고 마이클에게 다가가 나란히 앉는 제인. 마이클이 울자 안아
주는 제인.
#89. INT. XX 맛사지 팔러 안 (밤)
출동한 경찰들. 여기저기서 조사가 한창이다. 한쪽에 50대의 중국인
(상부조직의 중간보스)이 조용히 서있다. 치워지고 있는 시체.
경 찰 : 전혀 모르는 얼굴이란 말이죠? (영)
여종업원 : 네. (영)
경 찰 : 나이는? (영)
여종업원 : 모르겠어요. (영)
경찰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며
경 찰 : 철수하자구. (영)
나가는 경찰관들. 경찰이 나가자 사내들을 치는 첸.
첸 : 병신같은 놈들. 애들한테 당해. (중)
보 스 : 아이들을 소집해. (중)
첸 : 예. (중)
보 스 : 한국놈들이라면 JKP의 잔당이 틀림 없어. 이번에 놈들을 모
조리... (중)
#90. INT. XX 모텔 방 (새벽)
의자에 앉은채 새벽을 맞는 마이클. 피묻은 웃옷을 벗고 있다. 제인은
침대에 쓰러져 잠들어 있다.
제 인 : 아빠! 아빠! 마이클! 마이클!
잠에서 깨어 두리번거린다. 의자에 앉아 있는 마이클에게 다가가는 제
인.
제 인 : 꿈에 아빠를 봤어. 아주 어릴때 돌아 가셔서 전혀 생각나지도
않았는데 말야. 내가 살던 동두천 집에서 날 미연아 하며 부르셨어. 막
뛰어 갔더니 아빠가 아니라 너가 웃고 있었어.
마이클 : 내가? 내가 웃고 있었다고? 제인.
제 인 : 응.
마이클 : 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제인 마이클의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마이클 : 제인도 함께 가자.
제 인 : 그래, 나두 한국에 가고 싶어. 하지만 난 안 될거야. 너 혼자만
이라도 가.
마이클 : 아니, 너와 갈거야. 같이 갈거야.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서로를 꼭 안는 두사람. 격렬한 키스, 서로를 움
켜잡는 손. 둘은 그대로 바닦에 쓰러져 꼭 안는다.
#91. EXT. 거리 A (아침)
차량 등록번호, 관리 건물에서 나오는 첸의 아이들.
#92. EXT. 거리 B (아침)
거리의 중국인 아이들에게 묻고 있는 중국인 1, 2.
#93. EXT. XX HIGH SCHOOL 앞 거리 (아침)
차 안에서 등교하는 아이들을 첸과 살펴보는 중국인 3, 4.
첸 : 가블린과 블랙로즈의 아이들이 안 보여요. (중)
침묵한채 가만히 있는 3,4의 얼굴이 유리를 통해 보인다. 등교하기 위
해 걸어 오던 크리스. 차에 있는 첸과 중국인 3,4를 보고 도망친다.
#94. INT. 사무실 (낮)
호화롭게 꾸며진 중국풍의 사무실. 의자에 앉아있는 보스. 그 앞에 서
있는 첸과 중국인 1, 2, 3, 4. 그리고 첸의 아이들.
보 스 : 가블린인가 뭔가하는 녀석들의 행방을 알아와. (중)
#95. EXT. 거리 (차안) (낮)
도로를 달리고 있는 데이빗의 차. 뒷좌석에서 옷을 갈아 입은 마이클
과 제인이 타고 있다.
마이클 : 우리집으로 데려다 줘.
데이빗 : 안돼. 중국애들이 사방에 깔렸어. 우리가 발각되는 건 시간
문제야.
제 인 : 데이빗 괜찮을거야. 마이클이 우리 일원인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어.
데이빗 : 우린 최대한 조심을 해야해.
제 인 : 걱정마.
#96. INT. 은신처 (오후)
바닦에 나뒹굴고 있는 술병들. 자빠져 자고있는 제씨와 토니.
(E) 삐삐소리. 끊어지면 다시 울리고 다시 울리고.
겨우 듣고 삐삐를 보는 토니. 밖으로 나간다.
#97. EXT. 공중전화 (오후)
전화를 거는 토니
제임스 : (소리) 너 어디서 거는거야?
토 니 : 공중전홥니다.
제임스 : (소리) 그럼 됐어. 너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해.
토 니 : 예.
제임스 : 니가 XX맛사지 팔러 털었어?
토 니 : ......예.
제임스 : (소리) 야 이 미친 놈아. 총 몇 자루 쥐니까 뵈는게 없냐?
거기가 어다라고 감히.
제임스: 따이랜이 전화했어. 그놈만 내 놓으래. 그러면 다른 애들은
봐준데.
토 니 : 살러주세요. 제임스.
제임스 : (소리) 나도 몰라. 하여간 연락할 때까지 거기서 꼼짝 말고
있어.
#98. INT. 마이클의 집 거실 (밤)
마이클의 부모와 마주 앉아 있는 마이클과 제인.
마이클 :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요.
마이클 부 : 지금까지 잘 지내다가 왜?
마이클 : 사실 그동안 걱정하실까봐 말씀 안 드렸는데, 한인조직
아이들 때문에 괴로웠었어요. 더 이상 조직에 가입을 안 하고 버티다간
그 애들한테 당할 것 같애요.
마이클 모 : 진작 말하지 그랬니 준영아. 그러면 경찰에 신고했을거
아냐.
마이클 : 뭐 특별하게 당한 것이 없는데 뭘로 신고해요.
마이클 부 : 그럼, 지금 다니는 학교 말고 다른 학교로 가면 되잖니?
마이클 : 다른 학교든 어디든 이젠 미국이 싫어요. 한국으로 보내
주세요.
마이클 부 : 어린애처럼 떼쓴다고 되는게 아니다. 잘 생각해 보자꾸나.
마이클 : 아버지, 전 한국으로 돌아가는게 아니면 무조건 싫어요.
한국으로 보내 주세요. 한국에 가면 열심히 공부해서 꼭 좋은 대학에 들
어 갈께요.
마이클을 보는 마이클의 부모. 서로 쳐다보는 마이클의 부모.
마이클 부 : 네가 좋은 대학에 들어 가기만 한다면 굳이 미국에 있을
필요는 없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겠냐? 허지만 여기서도 이미 공부를
제대로 하긴 틀린 것 같구나..... .... 알았다. 일단 수속을 밟아 주마.
마이클 : 감사합니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제인도 함께 갈 수 있게
해주세요.
마이클 부 : (보다) 알았다.
인사하고 올라가는 마이글.
마이클 모 : 아니 여보 정말 보내실거에요?
마이클 부 : 글쎄. 이잰 내 일도 다 잊혀졌을 거 아냐? 엽전들은 건망증
이 심하잠아. 나도 눈치봐서 한국에 들어 강야지.
마이클 모 : 하여튼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마이클 부 : 알았어. 그만 잡시다. 그리고 여자애는 당신이 알아서 방
을 정해 줘요.
마이클 모 : 예. 그건 걱정 마세요.
마이클 부 방으로 들어가고,마이클 모는 이층으로 올라간다.
#99. INT. 마이클의 방 (밤)
방에 들어와 웃으며 제인을 안는 마이클.
마이클 : 한국으로 돌아가면 보통애들처럼 지내는 거야. 한국으로 간
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
제 인 : 나도 그래.
(E) 노크소리.
마이클 : 예.
마이클 모 : 마이클! 졔인은 손님방을 치워 놓을테니 그 방에서 자게
해라.
마이클 : 알았어요. 엄마. 금방 잘거에요.
제 인 : 안녕히 주무세요.
#100. INT. 사무실 (밤)
보 스 : 뭣들하는 거야. 그까짓 애들 서넛 못 죽여. (중)
앞에 고개를 숙인채 서있는 백호단과 부하들.
#101. EXT. 공중전화 (낮)
전화를 걸고 있는 토니.
토 니 : 이럴때 도와달라고 상납을 했는데 그러면 어떡해요. 살려줘
요. ... 알았어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는 토니.
#102. EXT. 거리 (낮)
뒤를 연신 돌아 보며 뛰는 크리스. 쫓는 그림자가 보인다. 막다른 골목.
공포에 질린 크리스를 마구 치는 중국인 청년 1, 2.
청년 1 : 마이클은 어디 있어? (중)
크리스 : 몰라요. (중)
크리스를 구타하는 중국청년 1, 2. 피투성이가 되는 크리스.
청년 1 : 마이클은 어딨어? (중)
크리스 : 집. 집에 있어요. (중)
골목 밖으로 나가는 중국인 청년. 비틀거리며 일어나 공중전화기로 가
는 크리스. 삐삐를 친다.
#103. INT. 마이클의 방 (낮)
초조해하며 여권과 비행기 표을 만지작거리는 마이클. 제인이 휴지를
꼬고 있다.
제 인 : 마이클, 이것 좀 잡아 줘.
마이클에게 꼰 휴지들의 중간을 잡게 하고 묶는 제인.
마이클 : 이게 뭐야?
제 인 : 우리의 사랑을 보는거야. 놔 봐.
펼쳐보는 제인. 하나의 원이 나온다.
제 인 : 이럴 줄 알았어. 우리 사랑은 하나야. 영원할거라구.
(E) 삐삐 소리.
각자 삐삐를 본다.
제 인 : 크리슨데.
마이클 : 나두. 어떻게 해야 하지?
제 인 : 글쎄?
(E) 전화벨 소리
마이클 : (받고) 토니구나. 응. 아니. 한국으로 가게 될 것 같아. 뭐!
갑자기 왜? 알았어, Jackson Heights 역으로 갈께. 크리스한테서 삐삐가
왔는데, .... 알았어. 있다 봐.
제 인 : 무슨 일이야?
마이클 : 모르겠어. 무조건 나오래. 크리스한텐 연락 말고. 나가자. 다
시 못 보게 될지도 모르잖아.
#104. EXT. 마이클 집 앞 (낮)
집을 나서는 마이클과 제인을 걱정스런 얼굴로 배웅하는 마이클 모.
마이클과 제인이 사라지자 마이클 집에 도착하는 중국인 청년 1,2. 안을
살피며 집 주변에서 얼쩡거린다.
#105. INT. Jackson Heights 역 부근 전자오락실 앞. (오후)
(E) 요란스런 전자음.
거리를 살피는 제인과 마이클. 건너편에서 제인과 마이클을 눈여겨 보
는 중국인 청년 3, 4. 제인을 오락실 앞에 두고 역 안으로 들어가는 마이
클. 유리창으로 오락실 밖을 보는 제인. 마이클을 뒤 쫓는 중국인 청년
3, 4.
#106. EXT. Jackson Heights 역 안 (오후)
역 안 여기저기를 살피며 걷는 마이클. 역 안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마이클에게 곧장 다가오는 중국인 청년 3, 4. 둘러 보느라 눈치채지 못
하는 마이클. 마이클에게 가까이 간 중국인 청년 3, 4. 이상한 낌새를 느
끼는 마이클. 도망치려는 순간 마이클의 심장에 꽂히는 칼.
마이클 : 헉!
마이클을 찌르고 유유히 사라지는 청년 3,4. 칼을 움켜 쥐고 비틀비틀
걷는 마이클. 쓰러진다. 일그러지는 마이클의 얼굴.
여 자 : (소리) 아악! (영)
남 자 : (소리) 경찰을 불러요. (영)
여 자 : (소리) 구급차. (영)
#107. EXT. Jackson Heights 역 부근 (오후)
거리 좌우를 살피는 제인. 역 쪽을 본다. 역에서 급히 나오는 중국인
청년 3, 4. 놀란 얼굴로 역으로 뛰어 가는 제인.
#108. EXT. Jackson Heights 역 안 (오후)
제 인 : 마이클! 마이클!
뛰며 역 안을 살피는 제인.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있다. 제인 달려
간다. 사람들을 헤집고 안으로 들어가는 제인. 쓰러져 있는 마이클. 제인
다가가며
제 인 : 준영아! 준영아!
마이클을 흔드는 제인.
제 인 :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힘없이 눈을 뜨는 마이클. 옅은 미소. 감기는 마이클의 눈. "미연아 하
는 입모양. 마이클을 주먹으로 치는 제인.
제 인 : 일어나! 나랑 한국에 가기로 했잖아. 일어나!
(E) 역으로 진입하는 전철의 굉음속으로 묻히는 제인의 목소리.
ENDING. CREDIT TITLES 시작
#109. EXT. 수퍼마켙 (낮)
스타킹을 뒤집어 쓰고 수퍼를 터는 승재의 모습. 얼굴엔 잔인한 미소
가 있다. 금고를 열어 돈을 가방에 넣는 토니.
#110. xx high school 정문 (오후)
학교 교문. 중국인 아이들이 장난치며 서있다. 나가는 크리스. 크리스
에게 침을 뱉는 중국아이. 그 옆을 지나치는 데이빗.
#111. INT. 한인교회 (밤)
교회 강단에 서서 회중 대표기도를 하는 제씨. 신자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 데이빗과 수지, 베티.
#112. INT. 보어딩 스쿨 (낮)
강의실에서 수업이 끝나 나오는 제인. 철책이 있는 복도를 걷는다. 한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철책이 있는 방에서 소호거리의 그 유화그림을
보며 미소를 짓는 제인.
CREDIT TITLE 끝난다.
책,영화,리뷰,
보이지 않는 삶이 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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