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 울 나 기(上)
이 외수
노란 옷을 입었다구요? 그런 간호원은 여기 없어요. 보시다시피 여긴 하얀
옷을 입은 간호원뿐이예요.
한 간호원이 내게 말했다.
혹시 가운 속에라도 노란 옷을 입은 간호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잘 좀
생각해 봐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모든 것이 침묵 속에서 엄숙하게 죽어 가고 있는 듯한 병원 복도에 나는 서
있었다. 천장에는 형광등이 밝게 켜져 있었고 병원 내부는 모든 것이 유리처
럼 투명하고 매끄러운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유령의 집 같았다.
글쎄요. 이 큰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원들의 가운을 제가 다 일일이 벗겨
본 적도 없고 직접 한번 찾아 보시죠.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어요. 속에 입은
옷의 색깔이 가운 겉으로 엷게 내비치니까요. 전 그럼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
어요.
간호원이 복도를 돌아 자취를 감추어 버리자 나는 다시 다른 간호원을 기다
리기 시작했다. 가끔 관리인 복장을 한 남자들이 수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내 아래위를 훑으며 지나쳐 가곤 했다. 어디선가 낮게 신음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농약은 외상이 없다......
어느 친구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농약을 먹으면 십중팔구는 천당행 이라는
거였다. 농약을 먹고 자살을 한다. 얼마나 서민적인 자살인가.
다시 한 명의 간호원이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나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가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속에 입은 옷이 붉은색 계통의 옷인 것 같았다.
저어, 사람을 하나 찾고 있는데요. 여자입니다. 나이는 스물 다섯 살 이하
이고 이름은 모릅니다. 얼굴은 깨끗한 분위기, 성격은 온순하고 마음씨는 착
합니다. 옷은 노란색...
여보세요.
이 때 좀 경직된 목소리로 간호원이 내 말을 갈로 막았다.
댁엔 지금 바쁜 사람 붙들고 농담하시자는 거예요 뭐예요.
그녀의 눈동자가 혐오와 경멸의 빛을 띠며 내 아래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찬바람을 느낄 정도로 쌩쌩한 태도였다. 만약 이 여자에게 간호를 받는 환자
가 있다면 병이 더 도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농담이 아닙니다. 절대로.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호원이 들고 있는 금속제 쟁반 위에는 탈
지면과 붕대와 소독약과 주사기 따위들이 담겨 있었다. 주사기는 바늘을 빛
내며 나를 향해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비키세요.
야무진 목소리였다. 나는 맥없이 비켜 주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어디선가
낮게 신음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농약
을 꺼내어 단숨에 꿀꺽꿀꺽 들이켜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참았
다. 웬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몇 명의 간호원을 더 만나 보았고, 역시 노란옷을 입은 여자에 관해
설명을 했고, 그러나 그녀들은 한결같이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잠시 후 나는 도립 의료원 정문을 나섰다.
환자들 중에서 한번 찾아볼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찾는 여자는 건강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와지고 있었다.아침부터 밤까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거의 한 달 동안을 나는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만나지 못한 채 날마다
마냥 거리를 헤매다니는 처지였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는
마치 이국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런 날은 어쩐지 그 여자를 만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라. 함박눈이 내리는 날에 누가 노란 옷을 입고
외출하겠는가를. 함박눈과 노란옷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조금이라도
센스가 있는 여자 라면 오늘 같은 날은 까만 옷을 입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혹시나 싶어 무작정 거리를 걷고 있었다. 열 시쯤일 거였다.
자동차들이 체인을 철꺽 거리며 지나갈 때마다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 무수
한 함박눈 송이가 반짝 거리며 살아나곤 했다.
연인들인 듯 싶은 맘녀들이 이런 날은 서로 바싹 붙어 있을수록 세계 평화
가 빨리 이루어진다고라도 생각 하는 사람들처럼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되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나는 곁에 누구든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밤만은 아무
여자하고라도 말이 통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 도시에 사는 사
람들은 모두가 짝짓기에 도사들인 모양으로 거의 전부가 쌍쌍 이었고 내가
주워 가지도록 스스로를 길바닥에 내버린 여자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다고 굳이 여자일 필요는 없었다. 말이 통하고 뜻이 통하면 남자라도
상관없을 거였다.
아가리가 벌어진 구두 속으로 눈이 스며 들어와 양말 앞부분이 온통 젖어
있었다. 발가락이 모두 떨어져 나가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가까운 다방 하나를 찾아 들었다.
밤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따라서 다방 안은 약간 한가했다. 나는 자리를
잡기 전에 다방을 한바퀴 휘둘러 보았다. 내가 찾는 노란색은 전혀 눈에 띄
지 않았다. 여름 새벽 강가에 피는 달맞이꽃이나 이른 봄에 불탄 논두렁 시
커먼 빈 터에 피는 민들꽃이나 또는 담장 밑에 덤불로 환하게 등불을 밝히는
개나리꽃같이 노란색, 그 노란색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징글벨인가 뭔가 하는 노래가 다방의 의자와 의자 사이로 필요 이상 신바람
나게 썰매를 타고 달리는 기분을 내고 있었고, 다방 가운데 심어진 한 그루
크리스마스 트리에서는 작은 새 전구들이 반짝, 이쁘지, 반짝, 안 이뻐, 서
로서로 자랑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구석진 곳에다 자리를 정하고 키피 한 잔을 시켜 마신 다음 오래도록
무료하게 혼자 앉아 있었다.
대체로 젊은 남녀들 뿐이었다. 개중에는 숫제 두 팔로 여자를 단단히 결박
하고 여자의 귀에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속삭이고 있는 친구도 있었고, 도망
치려는 여자의 스커트 자락을 잡고 술에 만취되어 협박적인 눈으로 노려 보
는 친구도 있었으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자를 앞에 앉혀 놓고 눈물을 찔끔
찔끔 짜 내는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내 나이 또래의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내가
보기에 그는 대단히 무료하고 쓸쓸해 보였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물끄러미 수조 속의 열대어들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며 나는 그에게 쉽사리 친근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쑥스럽지만 나는 그에게 메모라도 한 장 던져 보기로 작정하고 수첩을 한
장 찢어 내었다. 그리고 거기에다 이렇게 적어 넣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이 개떡같은 외로움. 제게 우리 하숙집 텔레비젼을 훔
쳐다 판 돈이 좀 남아 있는데 함께 술이라도 한잔 어떠실는지요.>
나는 그것을 레지에게 주어 그에게 배달을 주도록 부탁했다.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메모를 다 읽고 나
서 레지에게 뭐라고 물어 보는 것 같았고 이어 레지의 손가락이 곧바로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몹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흘깃 나를 한번 건너다 보았다. 그리고 이내 <거 별자식 다 보겠네.>
하는 태도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나는 약 오 분
정도나 더 기다려 보았다. 그러나 그는 나를 이따금 건너다 보기는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원 병신 같은 자식, 지가 무슨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코웃음
의 표정이 역력해져 갔다.
개애새끼....
나는 스스로에 대해 심한 수치감을 느끼면서 그만 다방을 나와 버리고 말았
다. 대게의 가게들이 문을 닫고 있었다. 함박눈은 아까보다 더 우라지게 쏟
아져 내리고 있었다. 다방을 나와서 계속 여기저기를 헤메어 보았지만 별 신
통한 일은 생겨 주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여기서 그만 사는 일을 끝내고 자살해 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품어 보았다. 웬지 가슴이 허전해져 왔다.
이른 새벽부터 집을 나섰다. 지독하게 추웠다. 살갗 전체에 서릿발이 돋아
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도시는 아직도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대단히 조용했다. 뒤꿈치를 접어
신은 내 낡은 가죽구두 끌리는 소리만 텅 빈 거리의 공간 속에 요란하게 울
려 퍼지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잠버릇이 고약한 주정뱅이의 이빨가는 소
리를 확성기에 공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걸을 때마다 신경이 거슬리
는 노릇이었다. 기회가 생기는 대로 어디서든 다시 구두 한켤레를 훔쳐 신어
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슈퍼마켓에서 계란 한 개를 훔쳐 먹는데 성공했다. 아무에게도 발각
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도둑질에 타고난 소질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몇 번 더 해 봐서 소질이 있다는 확신만 생기면 열심히 연습을 해서 그 소질
을 계발해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놈의 낡은 가죽구두. 나는 언제나 이놈의 낡은 가죽구두 때문에
걸음이 자유롭지가 못하다. 이놈의 낡은 가죽구두에 대해서만은 언제나 신경
과민이다.
아가리도 벌어지고 끈도 떨어져 나갔다. 몇 번 물에 젖은 걸 햇볕에 내다놓
고 말렸더니 숫제 가죽구두 아닌 돌구두가 되어 버렸다. 딱딱해서 발등이 다
벗겨져 버릴 지경이다. 게다가 아가리가 벌어져 발가락도 몹시 시리다. 하여
튼 하난 훔쳐 신긴 신어야 할 것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나는 우선 역 쪽으로 서서히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발들이 모두 가볍
고 편해 보였다. 그러나 내가 역으로 가고 있는 것은 구두를 훔치려는 생각
에서도 아니고 새벽 열차를 타려는 생각에서도 아니였다. 오직 여자 하나를
찾아 내기 위해서이다.
이 겨울에 내가 한 일은 방황 그것 한 가지 뿐이었다. 새벽에도 방황하고
한낮에도 방황고 밤중에도 방황했었다. 마치 방황과 자매결연이라도 맺은 놈
처럼 방황만 했었다.
방황에서 돌아오면 암담한 내 하숙방. 어느새 연타불은 꺼져 버리고 방바닥
엔 얼음불처럼 싸늘한 냉기만 한 양동이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었다. 거의 날
마다였다. 망할놈의 하숙집 여편네 같으니!
도무지 잠도 오지 않았다.
옆집에서 들려 오던 라디오 소리도 오래 전부터 끊어져 버리고, 한밤중, 사
방은 쥐죽은 듯 고요한데, 이따금 벽 속을 내달아 가는 한 무리의 바람소리,
커튼을 걷어 내고 도시를 내다보면 도시는 폐선처럼 문을 닫고 정박해 있고,
거기 뜬눈으로 밤을 새운 도시의 불빛이 몇개, 바람이 불면 젖은 눈시울로
깜박거리곤 했다. 나는 깊은 겨울밤 도시의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누
구에게든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완전히 겨울입니다. 비로
소 나는 버림받은 개가 되었습니다. 곧 날이 새고 나는 다시 방황할 것입니
다. 그리고 내 방황의 끝 어딘가에서 언제든 나는 미련없이 자살해 버리고
말겠습니다.....
그러나 웬지 자살해 버릴 수가 없었다. 다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다가 가까
스로 어쩌다 잠이 들면 타인에게 목죄어 살해당하는 꿈을 꾸었다.
더러는 머리카락이 무더기로 빠져 버리거나 손톱 발톱이 썩어 드는 꿈을 꾸
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아직도 캄캄한 밤, 사방은 적막하고 외로운데, 왜 그리 날
은 세지 않던지, 정말 참담했다. 그리고 또 날이 새면 도대체 어떻게 시간을
보내어야 할는지, 먹이는 어떻게 구해야만 할는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었다.
방황. 자살궁리. 방황. 자살궁리. 방황. 자살궁리....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서든 이 겨울을 무사히 견디어 내야만 한다
고 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당부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여자
하나를 찾아 헤매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아직은 춥고도 추운 겨울, 봄은 요원하기만 한 것 같았다.
봄이 되면 나도 취직이나 한번 해 볼까. 봄이 되면 나도 공장에서 드롭프스
껍데기라도 싸면서 생활이라는 것에 충실해 볼까. 아니면 묵은 내의를 벗어
무릎위에 얹어 놓고 햇빛을 쬐며 이나 잡고, 디오게네스 흉내나 내며 살아
볼까. 아 꽃 피는 봄이 되면.....
그러나 영영 봄은 올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썰렁한 분위기가 내 전신을 휩싸듦을 의식하면서 역 대합실로 들어섰
다. 아직도 개찰은 시작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 대합실의 매표구와 개찰구
앞에는 사람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차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표정해 보였
다. 이따금 추위에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도 보고 또 더러는 초조하다는 듯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고 있는 모습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보기엔 모두 한
공장에서 생산되어진, 개성도 없고 감정도 없는, 똑같은 모양의 인조 인간들
같았다.
그들은 지금 에너지가 거의 다 소모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에너
지 보충을 받기위해 배급표를 타려고 그렇게 줄을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방금 질이 우수한 새 에너지를 전신에 가득가득 채워 넣고 나온 듯 당
당하고 생기에 찬 모습을 그들에게 한번 보여 주고 싶었다. 나는 그들처럼
쫓기거나 묶이지 않고 싶었다. 영원한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나는 찬찬히 시선을 정리해서 그들을 훑어 보기 시작했다. 여자 하나를 찾
아 내기 위해서였다. 만약 내가 찾는 여자가 그들 중에 섞여 있다면, 그것은
칙칙하게 색바랜 플라스틱 조화들 속에서 방금 갓 피어난 달맞이꽃 한 묶음
을 찾아 내기만큼이나 쉬운 일일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찾는 여자는 거기에 섞여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매표구 앞에
서 있는 사람들 속에서도 개찰구 앞에 서 있는 사람들 속에서도 한 묶음의
달맞이꽃으로 보이는 여자는 발견 되어지지 않았다. 그들을 배웅나온 사람들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약간 맥이 빠짐을 의식했다. 그 때였다.
맞지. 틀림없이 만덕동 또라이지.
매표구 앞에 늘어선 줄의 중간쯤에서 낮은 목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 왔
다. 고등학생쯤으로 짐작되어지는 녀석들 둘이 나를 곁눈질로 흘끔거리며 은
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도라이?
짜식. 아직 그것도 모르냐. 머리가 돌아버린 사람이라는 뜻이야.
저 사람이 도라이라구? 뭐 멀쩡한 것 같은데.
들쑥날쑥한다구.
화. 저 사람 구두 좀 봐. 갑오경장 때 신던 구두 같은데.
쉿, 조용햄마. 우리 쪽을 빠개고 있잖암마.
그러나 나는 그들을 노려보다가 말고 한번 더 매표구와 개찰구 앞에 늘어
서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훑어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여자가 발견되었다. 그녀는 개찰구로 이어진 줄의 뒷부분에서
무슨 책인가를 골똘히 읽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나는
조금씩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자주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하얀 목도리
가 그녀의 목을 감돌아 자주색 코트의 어깨 너머로 약간 길게 드리워져 있었
다. 나는 긴장하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자꾸만 내 낡은 가죽 구두에 신경
이 쓰여졌다.
그녀는 골똘히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가 숙여져 있었고 따라서 긴
머리카락이 드리워져 그녀의 옆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마와 눈과 코만 아
주 조금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얼굴을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그녀의 앞쪽으로 두어
걸음 자리를 옮겨,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책에 가려서였다. 그리고 그 책의 제목 또한 <황야(荒野)의...>라고
밖에 확인해 볼 수가 없었다. 접질러 받쳐든 한 쪽 면에 가리워져 있었기 때
문이다.
황야(荒野)의...
무었일까. 황야의 말뼉다구. 그건 아닐 것이다. 그건 고등학교 때 영어를
담당하셨던 우리 담임 선생님의 별명이었다. 너무 깡마른 체구 때문에 붙여
진 별명이었고 그 선생님의 별명이 책 제목으로 선정될 리는 없을 거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황야의 무엇이까. 황야의 은화 일불. 황야의 삼상자. 황야
의 무법자. 황야의 칠인, 이건 모두 영화 제목들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비로소 나는 그 책의 <황야의....> 다음에 붙는 단어가 무엇인가를 짐작해
낼 수가 있었다. 그건 아마도 <황야의 이리>일 거였다. 헤르만 헤세가 쓴.
그렇다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도 언젠가 그 책을 읽은 기
억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한번 붙여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다시 가슴이 몹
시 설레이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설레이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어떻게 말을 붙여서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할지를 궁금해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헤르만 헤세 쪽에서부
터가 제일 만만할 것 같았다.
그쪽이라면 나도 쥐꼬리만큼은 알고 있었다.
저어, 아가씨.
그러나 그녀는 나를 의식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진히 고개를 숙인 채 책
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탓일 거였다. 나는 침을 한
입 모아 삼켜서 목구멍을 축여 주고는 다시 아까보다는 약간 큰소리로 그녀
를 불러 보았다.
저어, 아가씨.
그제야 비로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젖히면서 손가락
으로 가벼이 머리카락을 걷어서 등 뒤로 넘기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
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비로소 나는 그녀의 얼굴을 확실하게 볼 수가
있게 된 셈이었다.
껍질을 여러 겹 벗겨 낸 뒤의 양파의 속살처럼 깨끗한 얼굴이었다. 눈과 코
와 입이 비교적 단정해 보였고 해맑은 이마가 상쾌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스물 세 살쯤의 나이일 거였다.
말씀해 보세요.
명랑한 목소리였다. 표정 속에서 경계의 빛이나 불쾌해 하는 기색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친절한 태도로 대할 것 같은 그런
인상을 가진 여자였다. 나는 혹시 이 여자일는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하
면서 잠시 망설이던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는 혹시 바퀴벌레를 잡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리고 그녀가 내 질문에 불쾌감을 느끼게 되지 않기를 빌면서 그녀의 표정
을 눈여겨 살펴 보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는 내게 약간 웃어 보였다. 희고
고운 치아가 조금만 드러나 보였고, 나는 갑자기 세포가 모두 깨끗해지는 듯
한 느낌이었다.
바퀴벌레라면 저도 먹어 본 적이 있어요.
꾸밈없는 표정으로 그녀는 말했다.
이 도시 변두리에 있는 어느 중국집에서였어요. 잡채밥을 먹다 보니까 바
퀴벌레가 한 마리 잡채 가닥 사이에 섞여 있었어요. 그 바퀴벌레를 발견하기
전에 나는 이미 잡채밥을 몇숟갈 먹었더랬거든요. 근데 뭔가 어금니에 지끈
하고 씹히는게 있었어요. 맛도 좀 이상하고 감촉도 영 좋지 않았었어요. 하
지만 무슨 양념 따위겠거니 생각하고 그냥 삼켜 버렸었죠. 하지만 그건 분명
히 바퀴벌레였을 거예요.
말하고 나서 그녀는 다시 한번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가벼이 걷어 넘겼
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한번 들여다 본 다음 역 대합실 유리문 밖을 한참 동
안 내다보았다. 이 여자는 제법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낭랑한 목소리로 구김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여자는 우리
대한민국 땅에서는 그리 흔치 않다.
여자의 아름다움이란 백화점에서 사서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 스스로
속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여자는 벌써 오래 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
는지도 모른다. 쉽게 가까와질수는 있으나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 같은 여
자. 어디로 잠시 여행이라도 떠나려는 것일까.
나는 그녀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오늘도 기차는 연착입니다.
맞아요.
그녀가 맞장구를 쳐 주었다. 몹시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는 이제 완전히
그녀와의 말길이 열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시 그녀에게 하나 더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럼, 아가씨는 혹시 루트 뱅거라는 여자를 아시는지요.
그러나 그녀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신바람이 나서
그 루트 뱅거라는 여자에 대해 그녀에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바퀴벌레 같은 여자였는데 말입니다.
나는 잠깐 뜸을 들여 놓고는 호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 천천
히 불을 붙였다. 꽁초였다.
독일의 한 유명한 작가가 마흔 일곱 살에 데리고 살았답니다. 이십 년이나
연하였대요. 그러나 그 젊은 여자는 전혀 그 유명한 작가를 이해해 주지 않
았어요. 아무리 몸이 아파 신음을 해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고 아무리 주옥 같은 글을 써서 보여 주어도 알기를 개떡같이 알던 여자
였던 모양이예요. 밤새도록 써 놓은 원고에다 코나 풀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
로 형편 없는 여자였는지도 모르죠. 돈이 떨어지면 금방 질식해 버리는 시늉
을 하고 허영과 사치 없이는 도저히 세상을 살아갈 재미를 못 느끼는 여자였
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기거하고 있는 만덕동 산 삼십 육 번지의 하숙집 주
인 여편네처럼 말입니다. 어쩌다 남편이 술이라도 만취되어 돌아오면 후라이
팬으로 남편의 머리통을 후려쳐서 전치 이주의 상해를 입히거나 손톱으로 남
편의 얼굴에다 밭고랑을 파 놓는 그런 여자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그 루
트 뱅거라는 여자는 웬지 우리 마누라와 비슷한 생각이 자꾸 듭니다. 아니
우리 마누라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나는 만덕동 산 삼십 육번지의 하숙집
주인 여편네를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나는 우리 하숙집주인 여편네만큼
그 루트 뱅거인가 루트 벙거진가 하는 여자를 협오합니다. 어는 책에선가 읽
은 적이 있어요. 루트 뱅거인가 루트 벙거진가 하는 여자가 그 대 문호를 전
혀 이해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 문호가 심한 고민 끝에 작품도 제대로
못 쓰다가 결국 이혼해 버리고 말았다는 얘기를.
비극을 읽으셨군요.
비극이고 말고요. 자기를 이해해 주지 않는 여자와 한집에서 같이 살아 간
다는 것은 비극 중에서도 가장 못 말리는 비극입니다. 물론 여자 쪽에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남자가 희극으로 보일 때도 있겠지만, 하여튼 후에 그
대 문호는 노오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그 작가의 일생 중에서 그
여자와 보내었던 시간들이 가장 조잡하고 치사했었습니다. 그 여자는 문학으
로 닦아 놓은 한 인간의 청량하고 투명한 정신의 그릇 속에 빠진 지저분하고
노린내 나는 한 마리 바퀴벌레였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하숙집에도 바퀴벌레
가 시글시글합니다. 그건 모두 우리 마누라, 아니 하숙집 주인 여편네의 분
신들입니다. 그 때 이 도시 변두리 중국집에서 아가씨의 어금니에 지끈 씹혔
던 그 바퀴벌레는 아마 그 여자의 변신일 겁니다.잘 씹어 잡수셨어요. 암요.
백 번 씹어도 무방하죠.
그 위대한 작가의 이름이 뭐죠?
헤르만 헤세.
그녀는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아까처럼 역 대합실 유리문 밖
을 내다보았다.
연착일 겁니다. 틀림없어요.
알고 있어요. 언제나 그랬으니까요.
근데 아가씨, 들고 계신 그 책은 혹시 헤르만 헤세가 쓴 <황야의 이리>가
아니지요?
그러나 그녀는 아니데요, 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나
는 그 책이 그럼 황야의 뭐라는 책이냐고 다시 물어 보았다.
별이예요. 황야의 별, 최근 가장 잘 팔리는 동화 작가가 쓴 동화책이래요.
물론 이건 번역판이지만. 읽어 보셨나요?
모, 못 읽어 봤습니다.
나는 이 예상 밖의 일에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황야의 이리니 헤르만 헤세
니는 순전히 착각에서 비롯된 내 화제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루트 뱅거인지
벙거지인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서먹서먹하게 서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이제 이야기를 본론으로 끌고 들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가씨, 나는 지금 여자를 찾아 헤매고 있는 중입니다. 그 여자는 아마 노
란 옷을 입었을 겁니다. 아가씨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아가씨는 지금 자주
색 코트 속에 노란 옷을 감추어 입고 있지요. 그렇지요. 솔직히 말씀해 보세
요.
그러나 그녀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기는 코트 속에 짙은 청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저
히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저 여자들이란 거짓말을 악세사리 붙이고 다니
듯 수시로 몸에다 붙이고 다니면서 거짓말도 자기를 예뻐 보이게 만드는 장
신구의 일종이라고 착각해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그녀의 자주색 코트 속을 좀 보여 줄 수 없겠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내면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 하나를 끄집어 내었다.
아가씨, 내가 수수께끼를 하나 낼 테니 한번 맞춰 보십시오. 이 수수께끼
는 재미있습니다. 내가 찾아 헤메는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만나면 그 여
자에게도 이 수수께끼를 내어 볼 작정이었습니다. 이 수수께끼는...
그 때였다. 잠깐만요, 라고 그녀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얼굴에는 약간의
장나기가 새롬새롬 피어 오르고 있었다.
말씀 도중에 죄송한데요. 저어, 선생님께서는 목욕을 몇 달 간격으로 한
번씩 하시나요.
당돌하고 엉뚱한 질문이었다.
수수께끼입니까?
아니예요. 그냥 궁금헤서 물어 본 거예요.
세계 올림픽이 열리는 해마다 한 번씩 합니다.
나는 정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갑갑하지 않으세요?
연습을 많이 해서 괜찮아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마다 한 번씩 목욕을 한다는 사람도 나는 만나 본 적
이 있었다. 그는 십팔 년 동안이나 목욕을 한 번도 못해본 적도 있었다고 투
덜거렸었다. 하지만 나는 세계 올림픽이 사 년마다 한 번씩 열리다가 갑자기
사십 년마다 한 번씩 열리게 되었다고 해도 결코 투덜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목욕 따윈 아무래도 좋으니까.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나는 천천히 수수께끼를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큰 회사의 사장이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는 안 되
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죠. 그는 돈만 잇으면 처녀 불알도
살 수 있다는, 죄송합니다. 하여간 살 수 있다는 한국 속담을 자주 입에 올
리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자기는 실지로 처녀 불알을 이미 몇 가
마니ㅉ즘 예약해 둔 사람처럼 자랑스럽고 행복한 표정을 짓곤 했었습니다.
그는 인간을 절대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 회사에 있는 고성능 컴퓨터만
이 오직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어떤 어려운 문제든 자
료를 정리해서 집어 넣어 쭈기만 하면 거기에 대한 해답을 신속하고 정확하
게 뱉아 내어 주는 컴퓨터였죠. 사원 몇 십 명이 며칠 동안 땀을 뻘뻘 흘리
며 해도 못다할 업무량을 그 컴퓨터는 하루만에 거뜬히 해치워 버리는 겁니
다. 땀도 흘리지 않고, 그래서 그 사장님께서는 사원들에게 주는 월급이 아
까와서 죽을 지경이었어요. 마치 공돈을 날려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던 거
죠.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장은 뛸 듯이 기뻐하며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전날 밤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 올랐던 겁니다. 단돈 십 원을 밑천으로 하루
만에 십 억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마침내 사장은 생각해 내었던 것입니다. 사
장의 생각으로는 이제 온 천하의 황금이 모두 자기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전 사원을 모두 해고 시켜 버렸
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만은 팔지 않았습니다. 컴퓨터를 팔아 버리면 단돈 십
원을 밑천으로 십억을 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장은 그 어떤 어려운
문제든지 쉽게 해답을 뱉아 내어 주는 컴퓨터에게, 단돈 십 원을 밑천으로
십억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바로 그 컴퓨터에게 물어 볼 생각이었으니까요.
인간을 절대로 신뢰하지 않고 오직 그 컴퓨터 하나만을 신뢰하고 있던 그 사
장은 여러 가지 데이터를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컴퓨터의
아가리에다 밀어 넣어 주었습니다. 단돈 십 원으로 하루만에 십억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
그녀가 손목시계를 무심코 한번 들여다 보았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잠깐 이
야기를 중단했다.그녀의 시선은 다시 역 대합실 유리문 밖으로 옮겨져 갔다.
밖은 아직도 어둠이 짙게 누적되어 있었다. 아직도 개찰은 시작되지 않고 있
었다.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이
역에서 열차가 이삼십 분씩 연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승객을 배반하
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언제나 연착이었다.
나는 수수께끼를 계속 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했더라...
컴퓨터의 입 속에다 데이터를 집어 넣어 주었어요.
그랬죠.네. 단돈 십 원으로 하루만에 십억을 벌 수 잇는 방법은 무엇이냐.
데이터가 적힌 카드를 집어 넣자마자 컴퓨터는 갑자기 헐떡거리며 분주히 무
엇인가를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가지 기억장치들이 맹렬히 눈알들을
반짝거리며 신경질적으로 이 어려운 답을 산출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헐떡거
리면서 십 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십 분, 컴퓨터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허겁지겁 계산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사장은 긴장감으로 전신이 콩알만하
게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 속에서 손에 땀을 쥐고 집요하게 기다리고 있었습
니다. 전신이 좁쌀만하게 오그라들어도 좋다, 돈만 많이 벌게 해 다오. 아직
한 번도 답이 틀려본 적이 없는 나의 컴퓨터여. 그리고 마침내 한 시간 남짓
컴퓨터는 이윽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작동을 멈추었습니다.
망가져 버렸나요?
아닙니다. 답을 산출해 내었습니다. 모든 계산이 끝났다는 오케이 신호에
불이 들어왔고 컴퓨터는 지친 상태로 혀를 빼물 듯 카드 한 장을 입 밖으로
빼물어 내었습니다.
그 카드엔 뭐라고 씌어 있었죠?
네. 아가씨, 그게 바로 문젭니다. 한번 알아맞춰 보십시오.
그녀는 약간 비스듬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면서 답을 생각하는 듯 잠시 손
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 없는 투로 이렇게 말
했다.
강냉이 튀기는 기계에다 넣고 튀기면 돼요.
나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다. 다시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스트를 넣고 십 원짜리를 빵처럼 찌면 되겠군요.
나는 제차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녀는 몇 가지 더 답을 안출해 내었으
나 모두 애교만 있을 뿐 정답과는 거리가 좀 먼 편이었다.
아가씨는 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힌트를 주기 위해 그녀에게 물었다.
민족의 숙원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약간 한숨 섞인 어투로 대답했다. 나는 웬지 그녀가 몹시 사랑스럽
게 생각되어져서 다시 한번 이 여자일는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했다.
정답이 뭐예요, 도대체.
그녀는 궁금하다는 듯 내게 물어 왔다. 나는 가르쳐 줄까 말까 망설이고 있
었다.
그 때였다.갑자기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개찰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아까는 에너지를 모두 소모해 버린 인조 인간들처럼 무표정하던 사람들이 순
식간에 어떤 경쟁의식 같은 것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눈빛을 곤두세우기 시작
했다. 그들은 서로 밀치고 밀리면서 꾸역꾸역 좁은 개찰구를 빠져 나가고 있
었다.
정답을 가르쳐 드리죠. 단돈 십 원으로 하루만에 시벅을 벌 수 있는 방법
이 무엇이냐를 알아내기 위해 한 시간 남짓 땀을 뻘뻘 흘리다가 마침내 기진
해서 컴퓨터가 뱉아 낸 그 카드에는 이렇게 간단한 해답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떻게요.
개세끼, 웃기고 있네, 라고.
이제 그녀는 개찰구까지 거의 다 와 있었다. 그저 나는 까닭도 없이 가슴이
막막해져 옴을 의식했다. 불현듯 이 여자가 바로 내가 찾아 헤매던 여자라는
착각이 앞섰다. 놓쳐서는 안 된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네요. 고마와요. 그럼 아저씨
이제 그만 안녕.
그녀는 밝은 얼굴로 내게 가벼이 손을 한번 흔들어 보였다. 나는 어떻게 해
야 좋을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마악 표를 꺼내어 개찰원에게
내미는 것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황급히 그녀의 팔소매를 움켜 잡았다.
그녀는 약간 당황해 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태연한 자세로 돌
아와 나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러심 안 되요. 선생님. 빨리 집으로 돌아가 아침 식사를 하셔야죠. 사모
니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리고 선생님의 아이들도.
그러나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집도 아이들도 마누라도 없어요. 단지 하숙집과 하숙집 여편네와 하
숙집 여편네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 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 그렇게만 자꾸 생각하세요. 선생님은 절 모르시겠지만 전 선생님을 알
고 있어요. 만덕동에 살고 있거든요. 선생님이 사시는 집 부근이예요. 만덕
동 사람들은 모두 다 선생님을 미쳤다고들 하지만 전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외로운 분이예요. 하지만 힘을 내세요. 좀더 밝은 마음으
로 사세요. 아시겠죠. 보세요, 전 이렇게 다리를 절고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
은 표정이잖아요.
그녀는 태연히 내 곁을 벗어나 저만큼 걸어갔다가 다시 걸어와 보여 주었
다. 정말로 그녀는 다리를 가끔씩 절름거리고 있었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예요. 그럼 선생님 또 만나요.
다시 그녀는 내게 밝게 웃으며 가벼이 손을 한번 흔들어 주었다.그리고 개
찰구를 빠져나가 절름거리며 바삐 플랫포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
의 앞으로 뒤로 옆으로 온전한 두 다리를 가진 사람들이, 마치 오래도록 굶
주려 온 피난민들이 배급표를 들고 빵을 타러 달려가듯, 열차가 거대한 식빵
으로나 보이는지, 삽시간에 모조리 뜯어 먹어 버릴 듯한 기세로,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 또 만나겠지, 이 도시는 어린애 손바닥만하니까....
그녀는 밝은 표정이기는 했었지만, 절며 플랫포옴으로 바삐 걸어가던 뒷모
습이, 웬지 쓸쓸해 보인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느새 역은 텅 비어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나는 낡은 가죽구두를 끌며 대
합실을 나왔다.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구두를 하나 훔쳐 신기는 신어야겠다고 한번 더
각오를 굳혔다.
발이 얼어서 깨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몹시 춥고 떨렸다.
거리를 걸으며, 아까 그 여자는 아니야, 라고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
었다. 내가 찾는 여자는 애인이 없을 거였다. 그리고 반드시 노란 옷을 입고
있을 거였다.만약 찾지 못하면 자살하는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가 조금씩 꿈틀거리며 잠을 깨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하루종일 그 여
자를 찾아 헤맬 계획을 마음 속으로 정리하면서, 슈퍼마켙이 문을 열면 우선
계란부터 한 개 훔쳐 먹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도시는 함박눈 속에서 떠내려 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헤메었고, 그러나 헛일이었고, 이미 열한 시가 가까와지고 있
었으므로 이제 그만 오늘의 방황을 철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하숙집을 향해
발길을 옮겨 놓고 있었다.
호주머니 속에는 약간의 돈이 남아 있었다. 하숙집 주인 여편네가 한 달에
한 번씩 내게 주는 용돈에서 쓰고 남은 돈이었다.용돈은 언제나 쥐꼬리였다.
쥐꼬리 중에서도 생쥐꼬리였다. 망할놈의 여편네. 내가 뼈빠지게 일해서 벌
어 놓은 돈으로 그만큼 형편이 좋아졌으면 그만이지 또 뭐가 부족해서 밤낮
돈타령만 하는지, 그리고 내 용돈은 또 왜 고만큼밖에 안 주는지 한 달치 용
돈이라는 게 사흘 동안 거리를 헤메면서 하루 짜장면 세 끼 사먹고 차 한 잔
씩 마시고 소주 몇 병 홀짝거리면 그만 동이나 버리는 액수였다.
내일부터는 또 슈퍼마켓 신세를 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생
각이 났다.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싸구려 선술집을 하나 만났다.
한 사내가 남루한 모습으로 선술집 목로의자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을
뿐, 술집 안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선술집 주인 아낙은 이제 그만 폐점해 버려야겠다는 듯 피곤한 얼굴로 술잔
이며 안주들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 중이었다. 내 수중에 있는 돈은 오늘
이 선술집에서 소주 몇 잔으로 바닥이 나 버릴 거였다.
나는 소주 한 병과 곰장어 약간을 주문했다. 어딘지 모르게 아직 술장사에
익숙치 못한 듯이 보이는 선술집 주인 아낙이 커튼을 치고 밖으로 불빛이 새
어나가지 않도록 방비한 다음, 빨리 드시고 가셔야 해요, 라고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연탄불이 마지막 가슴을 활짝 열어 놓고 벌겋게 달아 있는 화덕에다 석쇠를
걸쳐 놓고, 거기에 토막난 곰장어 몇 점을 올려 놓자 갑자기 선술집 안은 풍
성해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 곰장어 토막들은 맹렬히 뭐라고 씨부렁거
리며 자욱한 연기를 뿜어 올리고 있었다.
선생, 아직도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던가요.
사내는 내 바로 옆 목로판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나와는 나이가 비슷해 보였
고 약간 취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비가 아닙니다.
나는 친절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렇지요. 눈이지요.
사내는 다시 소주를 한 잔 들이켠 다음, 선생도 한 잔, 자연스럽게 내게로
잔을 건넸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잔을 받았다. 이런 선술집 같은 데서 옆 사람이 건네는
잔을 사양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유랑민, 목마른 마음으로
잠시 여기 들러 한 잔의 술을 마시면서 뼈를 달랜다. 곧 우리는 떠나야 하고
그러나 우리는 가슴들이 따스하다. 네 술값을 네가 내고 내 술값은 내가 낸
다는 더치페이인지 더티페이인지 하는 계산법은 저 문명의 도시, 돈 많은 친
구들이나 하는 계산법이지 이런 선술집에서 함께 만난 우리들 유랑민들의 계
산법은 아니다.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잠시 후는 합석을 해서 서로
의 잔과 잔을 주고 받았다.
밖에 비가 아직도 내린다면 나는 못 가지..
사내가 취해서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빨리들 마셔야 해요. 열한 시 반이나 됐어요.
선술집 주인 아낙이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생, 선생께서는 연애를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갑자기 사내가 고개를 쳐들며 내게 물었다. 나는 없다고 대답해 주었다.
저는 연애를 무려 열세 번을 실패했어요. 연필 한 다스에서 한 자루가 더
남는 숫자입니다. 실패 끝에 마침내 제가 알아낸 것은 여자란 할머니로 변해
버릴 희망밖에는 못 가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내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연필을 한자루 가지고 있기는 있어요. 그런데 심이 곯아서 글씨를 쓰
려고 하면 영락없이 부러져 버리고 맙니다.
내가 말했다.
선생은 그 연필로 무슨 글씨를 쓰려고 했었는데요.
사랑...
선생,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그런 글씨를 쓰려고 든단 말입니까. 선생은
좀 웃기는 편이로군요.
네, 저는 좀 웃깁니다.
이때 선술집 주인 아낙이, 빨리들 마시세요, 라고 다시 외치듯 말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아 나는 끝끝내 떠나지 못하리라. 뼈아픈 사랑도 버
리고 뼈아픈 시도 버리고,모든 것 다 버렸는데, 그래도 밖에는 비가 내리고,
아 나는 끝끝내 떠나지 못하리라...
사내가 작은 술집을 높이 들고 슬픈 목소리로 읊조렸다. 슬픈 목소리는 아
마 사내의 버릇인 모양이었다. 나는 차츰 사내의 그 구김살 없는 태도를 마
음에 들어 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빨리 마시고 일어서세요. 통금시간이 다 됐으니까요.
걸리면 오늘 번 거 말짱 다 헛거예요.
선술집 주인 아낙이 애원섞인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했고 그러나 아직 우리
는 일어서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비가 내리면, 아, 비가 내리면....
사내는 다시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비가 내린다고 왜 못가요.
우산이라도 빌려 줄 테니 어서 가 달라는 듯 사내의 중얼거림을 선술집 아
낙이 가로막았다.
비가 아니고 눈입니다. 눈이라니까요. 아주머니.
나는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는 듯 잘못을 바로 지정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전신에 취기가 범람해 옴을 의식했다.
잠시 후 좀 더 취해서야 비로소 우리는 일어섰다.
눈은 아까보다 뜸하게 내리고 있었다. 취기 속에서도 천지가 완전히 청결해
져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가 있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군요.
사내가 여전히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하더니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 우리 함께 여자를 사러 가실까요. 제게 돈이 좀 있습니다. 선생께도
여자를 사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날은 창녀도 깨끗해요. 모든 여자의 살이
백설이 됩니다.
나는 사내의 이 뜻하지 않은 제의에 약간 난처한 기색이 되어 있었다.
혼자 있기가 싫습니다. 저는 언제나 혼자 있었어요. 이제 혼자 있기가 무
서워졌습니다.
사내는 애원조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저는 신인입니다. 이름도 없는 시인이죠. 하지만 시 하나만 믿고 오늘까지
살아왔어요. 시인은 가난합니다. 시인이 시를 써서 돈을 번다는 것은 부자가
돈의 힘으로 시를 쓰는 일보다는 한결 힘든 노릇입니다. 그러나 제게도 돈이
조금 생겼습니다. 시인의 명예를 더럽히고 번 돈입니다. 비참합니다. 빨리
써 버리고 싶어요.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이런 날은 창녀도 깨끗합니다. 과연 그럴까. 정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숙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었다. 거기엔 언제나 어둠. 더 이상 헤어날 수 없다는 폐쇄감만 내 가슴을
옥죄어 들고 아무리 살아 있어 보아도 별 낙이 없을 거라는 회의와 권태감이
눅눅한 이불처럼 무겁게 방 구석 자리에 쌓여 있었다. 내 삶의 죽은 비듬들
이 가득히 떨어져 있는 방바닥, 봄은 아직 멀었는데 누으면 춥기만 하고 곁
에서 말동무 삼을 사람 하나도 찾아주지 않았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여. 노
란 옷을 입은 여자여. 우리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내를 따라나서기로 작정해 버리고 말았다.
창녀촌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는 눈을 맞으며 입영 전야의
외로운 장정들처럼 야화(夜花)의 시장으로 가고 있었다.
저는 이제 시인이 아닙니다.
사내가 창녀촌 가까이에 다다라 비감한 어투로 내게 말했다.
무슨 얘깁니까. 창녀와 동침하면 시인의 자격을 박탈해 버리는 법률도 없
는데요.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돈 때문입니다. 나는 돈에 졌습니다. 더 이상 시만 믿고 굶으면서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시를 버렸습니다. 세상은 돈을 사랑하는 것만큼의 만분
지 일조차도 시와 시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옛날엔 시가 보석보다 값진 것
으로 평가되어지고 돈은 똥처럼 더러운 것으로 평가되어졌었는데 지금은 정
반대입니다. 돈이 시가 되고 시는 똥이 되었습니다. 이젠 끝장입니다. 썩었
어요. 모조리 썩었습니다....
그래도 시인은 영원히 시인입니다.
때는 이미 늦었어요. 저는 영원히 시를 쓸 수 없습니다. 시인의 이름을 똥
으로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사내는 약간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시인의 이름을 더럽혔다니 무슨 말씀이신가요.
어느 날 뱃가죽에 지방질이 겹겹으로 붙어 있는 무식한 놈 하나가 저를 찾
아 왔었습니다. 양조장을 경영해서 돈깨나 벌어 들인 놈이었습니다. 제 이름
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주제에 분에 넘치게도 어떤 감투까지 쓰고 있었지
요. 제게 찾아와서는 자기의 자서전을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거액의 돈을
싸들고 왔더군요. 그 돈을 보는 순간 저는 갑자기 눈이 뒤집혀 버리고 말았
습니다. 그래서 그만 그 일을 수락하고 말았지요. 그 동안 저는 너무 많이
굶어 왔었습니다. 탈진 상태였어요. 저는 누이동생과 단 둘이 셋방살이를 하
며 살고 있었습니다. 누이동생이 언제나 불쌍하게 생각되어지곤 했었습니다.
날마다 미안했어요. 좋은 옷 한 벌도 못 사 입히고 날마다 고생만 시켰었어
요. 저는 썼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썼습니다. 오직 돈만 생각하고 말입니
다. 정신없이 쓰고 나니 어느새 겨울이었어요. 곧 책이 나올겁니다. 그러나
저는 졌습니다. 영원한 패배입니다. 아, 눈도 참 억수로 쏟아지고 있군요.
옘병할......
우리는 어느새 창녀촌 입구에까지 다다라 있었다. 머리에 눈을 하얗게 뒤집
어 쓴 여자들 몇이 입구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가 너 잘왔다는 듯 우루루
우리에게로 달려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골목 안으로 들어갈 사이도 없이 그녀들에게 각각 사냥되어
졌다.
그녀들이 우리를 껍질벗기기 위해 들어간 집은 음침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였
다. 비록 함박눈이 내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이런 날은 창녀들의 살도
백설같이 깨끗해진다고 사내가 말하기는 했었지만, 이제 나는 완전히 그런
기대감을 가질 수가 없었다.
선생, 부디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사내가 나를 사냥한 여자에게 화대를 지불해 주고 나서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말햇다.
웬지 쑥스럽고 미안한데요.
나는 나를 사냥한 여자의 방문 앞에서 몹시 거북한 태도로 머뭇거리고 있었
다.
적어도 여기서만은 우리 당당해집시다.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함께 해장술이나 마시자는 말을 남기고 사내는 자기
여자와 함께 흐릿한 불빛이 번져 흐르는 복도를 걸어 어느 방으론가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결코 사내도 당당해 보이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멍청히 서 있는거야. 자, 우리도 빨리 들어가서 한탕 뛰자구.
옘병할 거.
나는 더욱 더 난감해져 가고 있었다.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작정 이렇게 밖에서 떨고 서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부득이 여자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는 수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방은 생각보다는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전축도 있고 침대도 있었다. 그
리고 훈훈했다.
자, 이거 쓸 테면 쓰라구.
여자가 화장대 서랍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로 내밀었다. 그것은 은박지
로 포장되어 있었고 납작하고 네모 반듯한 모양이었다.
이게뭐요.
괜히 순진한 척하구 있네. 뭐긴 뭐야. 장화지.
콘돔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콘돔. 콘돔. 콘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영화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없었던가. 없었.....다. 소돔과 고모라였다.
이 고무제품과 사랑이라는 말 사이에는 상당한 희극이 가로놓여 있다는 생
각이 들었다.
여자는 아무 꺼리낌 없이 옷을 벗어 던지고는 침대 위에 반듯이 드러누웠
다. 대단히 사무적인 태도였다.
빨리빨리해!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내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이 여자와 왜 그짓을 해야 하며, 게다가 빨리빨리까지
해야 하는지,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멍청하게 방 안에 서 있
었다. 그러자 여자가 다시 소리쳤다. 역시 신경질 적인 목소리였다.
고자야 뭐야. 왜 그러구 서 있는 거야. 안 해?
나는 그냥 자겠노라고 말했다. 여자는 침대에서 내려와 다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그리고 멋장이 멋장이, 호들갑을 떨며 간드러지는 동작으로 내
어깨를 떠다밀었다.
침대에서 자요. 난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알았지.
그리고 여자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혼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밤
이 깊어가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여자는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이제 그야말로 올 때까지 와 버렸다는 생각이 들기
도 했다. 완벽하게 밀어 붙여져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내게 있어 세상은 잘 설계된 하나의 미로상자(迷路箱子) 같은 것이었다. 그
미로상자는 출구도 먹이도 없었다.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좌절을 거듭하다가
결국은 그대로 기진해서 숨을 거두어야 하는 복잡한 무덤의 골목들 속을 날
마다 헤매면서 한 여자를 찾아 내어 함께 탈출하는 꿈을 꾸곤 했었다.
충분한 월급, 과장이라는 직책, 안정된 의자, 내가 그 모든 것을 내던지고
회사를 탈출한 것은 미로상자 속의 골목 하나를 벗어난 것에 불과했었다. 나
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고 하루에도 몇 번씩 좌절했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나는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단 한 번
도 자의에 의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외톨이었다. 사람들은 어느새 돈이나 기계나 제도 따위와 한패
가 되어 나와는 전혀 다른 시간들을 경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반 고호. 나도 한 쪽 귀라도 자르고 싶었다.
회사를 박차고 나와 나는 줄곧 그림을 그려 보려고 노력했었다. 그림에 소
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한 취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무
엇엔가 열심히 미친듯이 나 자신을 불테워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나는 그
아무 것에도 나를 불태워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가슴이 너무 많이 녹슬
어 있었던 것이다. 회사에다 모가지를 묶어 놓고 굽신거리고 쫒기고 밟히는
동안 내 가슴에 배어든 그 타성의 녹물. 나는 어느새 기계가 되어 있었던 것
이다.
나는 다시 살아나고 싶었다. 나는 내 가슴에 베어든 그 녹물을 닦아내고 싶
었다.
회사를 박차고 나왔을 때 나는 모두에게 비웃음을 받았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보험회사였다. 사표를 던지고 돌아서는 내게 실장이 물
었었다.
그래도 먹고 살 만한 돈은 있어야 할 텐데요. 앞으론 그래 어떻게 살아가
실 작정입니까?
나는 대답했었다.
권총을 하나 구해서 보험회사라도 털겠습니다.
그 많은 돈을 다 어디다 쓰시려고. 내가 알기론 김 과장은 대단히 검소한
양반이신데.
다시 보험에 가입해서 그 보험금을 지불하는데 쓰지요.
나는 그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와지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나는 차츰 삭막한 세상이 싫어지고 그들과 함께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이 가련하다고 생각되어지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든 삭막한 대화, 녹슨
가슴뿐, 나는 더 이상 견디어 낼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내가 만난 이 사내는 어딘지 모르게 나와는 뜻과 대화가 통할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사내는 미처 날이 밝기도 전에 내 방을 노크했다. 다섯 시쯤일 거였다. 인
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손바닥만한 세상인데, 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내가
막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찾아 나서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였다. 몇 번의 노크소리, 이어 내가 대답했었다.
난 괜찮으니 다른 손님한테 가서 편히 자요.
나는 아까 나갔던 여자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방문을 연 것은 사
내였다.
선생도.
사내는 내가 혼자 있었음을 확인하자 이렇게 말했다.
저도 줄곧 혼자 잤었던 셈입니다. 일을 치르고 잠든 사이 계집이 도망쳐
버렸던 모양입니다. 잠결에도 허전한 생각이 들어 곁을 더듬어 보았더니 허
덩이었어요. 아마 여관뛰기를 하러 갔을 겁니다. 우린 배반 당한 거예요. 세
상이 하도 추워서 이런 데 와서만이라도 잠시 따스해 보고 싶었는데 우라질,
안 되는군요.
사내는 해장을 하러 가자고 내게 말했다. 자기가 새벽에 문을 여는 해장국
집 한 군데를 알고 있다는 거였다.
해장국을 말아 놓고 막걸리라도 한 사발 쭈욱 들이켭시다.
그러나 나는 사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내와 함께 술을 마시면 마냥 붙
들려 있게 될 것만 같았다.
저는 오늘 하루 종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제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일이죠.
선생도 그럼 직장에 나가십니까?
사내는 적이 실망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내가 찾는 노란 옷을 입은
여자에 대해 대충 설명을 늘어 놓았다.
그랬군요. 역시 내 눈은 정확합니다. 저는 어제 술집에서 선생을 보았을
때부터 뭔가를 눈치챘었습니다. 멋집니다. 선생, 꼭 찾아내시기를 빌겠습니
다.
그러나 사내는 조금 쓸쓸해졌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창녀촌 골목을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눈은 그쳐 있었다. 밤
사이 내린 눈위로 쌀쌀한 새벽 냉기가 날을 세우며 스쳐가고 있었다.
제 누이동생을 선생께 보여주고 싶습니다. 노란 옷을 입혀서 말입니다. 제
누이동생은 착하고 예쁩니다. 하지만 요즘 연애 중에 있습니다. 제 누이동생
은 불쌍하게도...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사내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정말 헤어지기가 섭섭하군요. 모처럼 뜻이 통하는 분이었는데.
시내로 나와 헤어지며 사내는 말했다.
비가 내리면, 겨울비라도 내리게 되면, 어제의 그 선술집으로 나오십시오.
그 땐 제가 한잔 사 드리지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라고 내가 말했다.
나는 사내와 악수를 나누었다. 또다시 오늘 하루의 방황이 문을 열고 있었
다. 몹시 춥고 발이 시렸다.
나는 며칠 동안 심한 독감으로 내 방에 드러누워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해 낸 것이 없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도 찾아내지 못했고
구두도 훔쳐 신지 못했고 도둑질도 변변히 못해 보았다. 오히려 슈퍼마켓에
서 계란을 훔치다가 들켜 감시원에게 따귀만 몇 대 얻어 맞고 쫓겨났었다.
그래서 이젠 내 식당이 하나 없어져 버린 셈이 되었다.
요샌 어쩐 일로 계속 방구석에만 자빠져 누워 있지. 참 별꼴이야. 이그 저
웬수!
밥상을 들여 놓고 하숙집 여편네가 문을 닫으며 밖에서 긁어대는 바가지 소
리였다.
저런 위인을 남편이라고 데리고 사는 나도 미친 년이지.
이런 소리도 들려왔다. 망할 놈의 여편네!
언제나 저 모양이었다. 결혼한 지 삼년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완전히 하숙집
주인 여편네로 변해 있었다. 남편이 어디가 아파도 아픈 줄도 모르고 회사에
서 언짢은 일이 있어서 울적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도 기분 한번 전환시켜
줄줄 몰랐다. 언제나 내 신세를 남과 비교하면서, 월급이 적다느니 가정일엔
조금도 신경써주지 안는다느니 옷 하나 가지고 삼 년을 입었다느니 따위의
말로 내 신경을 긁어 놓곤 했었다.
나는 하숙생에 불과했었다. 돈 갖다 바치고 밥이나 얻어 먹는 하숙생에 불
과했었다. 양복 소매단추 같은 게 떨어졌을 경우 말을 안하면 일 년 내내 모
르고 지내는 여자. 나는 그런 여자의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출근을 할 때도 가슴이 무거웠고 퇴근을 할 떄도 가슴이 무거웠다. 어느새
나는 발기불능의 남자가 되어 있었다. 밤이면 언제나 경멸을 받아야만 했었
다. 그리고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몇 번이고 미안해, 소리를 연발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이젠 만사가 귀찮았다. 미안해고 뭐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
나도 이젠 당당하게 살 작정이었다. 돈과 기계와 제도에서 해방되어 무한하
게 자유롭고 싶었다. 그러다가 정 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면 농약이나 마시
고 자살해 버리 작정이었다.
아, 그러나 노란 옷을 입은 여자....
그 완전한 여자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 보고 싶었다.
나는 겨울이 끝나 주기를 빌고 있었다. 그리고 빨리 독감이 끝나 주기를 빌
고 있었다.문자 그대로 정말 지독한 감기<독감(毒 )이었다. 목구멍이 아프
고 골이 쑤시고 코는 코대로 전부 막혀서 숨을 쉬기가 몹시 거북했다. 심하
게 열이 나고 뼈마디가 쑤시고 가래도 끓었다.
그러나 아무도 걱정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약을 사먹기 위해 여편네에게
돈을 좀 달라고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해 버렸다.
빈둥빈둥 놀고만 있으니 뼈마디가 쑤시고 골이 아프지. 하다못해 노동판에
나가서 자갈질이라도 짊어져 보구랴. 어디 아플 새가 있는가. 남들은 취직을
못해서 눈이 벌개 가지고 날뛰는데 그 좋은 직장을 팽개치고 미친 놈 흉내나
내면서 돌아다녀? 아파도 싸지 싸.
그래서 나는 감기가 절로 나아 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
다. 밤이면 기침이 심하게 쏟아져 나오고 가래도 끓었다. 이러다간 더 큰 병
이라도 생겨 고생만 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개죽음을 당할 것만 같았다.
애들 역시 나를 거들떠도 안 보는 게 예사였다. 아빠 때문에 동네 애들 보
기가 창피해서 못 살겠다는 거였다.
애들은 애들대로 완전히 즈이 어멈에게 물이 들어서 차라리 아빠따윈 없는
편이 더 낫다는 식의 얘기를 내 앞에서도 공공연하게 떠들어 댈 정도였다.
다른 애들의 아빠와 비교해 볼 때 우리 아빠는 형편없이 쪼다라는 거였다.
여편네가 나를 괄시 할 때는 그런대로 참아낼 수도 있었지만 애들에게서까지
그런 얘기를 듣고 나면 공연히 울고 싶어지고 당장 손이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농약병으로 이끌려지곤 했다.
그러나 봄이 되면, 또는 노란 옷을 입은 여자라도 만나게 되면, 혹시 내가
이 세상을 더 길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발견되어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참
아야지. 어떻게 해서든 무사히 이 겨울을 넘겨야지. 나는 마음 속으로 혼자
다짐을 하곤 했었다.
여편네는 낮이면 언제나 외출해서 밤 늦게야 귀가하는 버릇이 있었고 더러
는 술에 만취되어 내게 주정까지 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춤바람이 났는지
도박에라도 미쳤는지, 하여간 막말로 개판 오분 전이 되어 있었다. 더러는
차라리 이혼이라도 해 버리자고 쨍쨍거리기를 서슴지 않기도 했다.
당연히 나는 비애감만 더해 갈뿐이었다.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나는 심하게 기침을 하며 메리야스 공장 정문 앞
에 서 있었다. 누우런 먼지들이 하늘 가득히 몰려 다니고 있었다. 그 누우런
먼지들이 몰려 다니고 있는 하늘 저 끝, 봄이 예감처럼 서려 있었다.
기침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가래를 뱉으면 피가 조금씩 섞여 나오기
도 했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초초해지고 있었다. 봄이 오기도 전에,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만
나 보기도 전에 뜻하지 않은 병으로 죽고 말 거라는 불안감이 앞섰다.
병으로 죽어서는 안된다. 죽으려면 차라리 농약을 먹고 떳떳하게 죽어야 한
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메리야스 공장 정문 앞에 서서 여공들이 나타나 주
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이제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있을 만하다고 짐작되어지는 곳이면 거의
다 뒤적거려 본셈이었다. 과연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메리야스 공장에
와서까지 일해야 할 정도로 형편이 각박할 것인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판단을 내릴 만한 처지가 못 되는 게 지금의 내 입장이었다. 우선 최선을 다
해서 찾아 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자꾸만 기침이 나를 괴롭혔다. 바람은 바람대로 내 옷섶을 열어젖히며 살갗
깊이 싸늘한 칼날로 와 닿고 있었다.
잠시 후 한 무리의 여공들이 버스에서 내려 도시락을 들고 이쪽으로 재잘거
리며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잖게, 그리
고 침착한 태도로 말을 걸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고 있었으므로 그 한 무리의 여공들의 모습은 저마다
펄럭거리며 내 앞으로 걸어 오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마른 땅바닥에서는
끊임없이 모래알 쓸려 다니는 소리가 싸그락싸그락 들려 오고 있었다. 바람
에 불려 온 휴지 나부랑이 따위들이 메리야스 공장 담벼락 밑에 모여 못 살
겠네, 몸살들을 앓고 있었다.
공주님들
이윽고 여공들이 완전히 내 앞에까지 왔을 때, 나는 비행기처럼 양쪽 날개
를 활짝 펴고 그녀들 앞을 막아섰다.
말씀 좀 물읍시다. 죄송하지만 말입니다.
여공들은 뜻하지 않은 이 진로 방해에 대해 적쟎이 흥미롭다는 태도들을 보
이며 왜 그러시냐는 듯 발길들을 멈추었다. 그녀들을 <공주님들>로 호칭한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하나 찾으려고 하는데요. 나이는 공주님들 또래라고 해도 좋겠고.
얼굴은 밝고 깨끗해요. 마음씨는 아주 착합니다. 겨울 내내 찾아 헤매던 여
자예요. 꼭 찾아야 합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예요. 네 그 노란 옷이 중요
합니다. 쿨럭쿨럭 쿨울럭....
나는 횡설수설 단숨에 말해 버리고 기침을 연발하기 시작했다.
그 여자의 이름이 뭔데요?
이름은 모릅니다.
키가 커요?
여자로서는 적당한 키예요. 머리가 내 턱 밑에 닿을 정도의 킵니다.
예뻐요?
예쁩니다. 나비처럼.
이 공장에 다니고 있데요?
모르겠어요. 무작정 찾아 헤메고 있습니다.
여공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질문을 던졌고 나는 되는데로 대충대충 대답을
해 주었다.
이름도 성도 모르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 여자를 찾겠다는
거죠?
글쎄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 헤매다 보면 우연히 만날 수 있을는지
도 모르죠. 혹시 이 공장 공주님들 중에 노란 옷을 입고 다니는 공주님을 본
적이 잆으신지, 한번 잘 생각해 봐 주십시오.
노란 옷. 꼭 노란 옷이라야 되나요? 노란 머리핀은 안 되나요? 노란 머리
핀만 꽃고 다니는 여자 애는 저애예요.
아닙니다. 머리핀이 아닙니다. 노란 옷입니다.
그 여자앤 아저씨하고 어떤 사이인데요?
뭐, 거 뭐랄까. 애인.....
내가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려 버리자 여공들 중의 하나가 자기들끼리 이야
기를 하는 투로 이렇게 한 마디를 던졌다.
저 사람 약간 돌은 거 같지 않니? 틀림없이 돌았을 거야.
그리고 이어 몸집이 뚱뚱하고 성격이 활달해 보이는 여공 하나가 내 앞으로
가슴을 쓰윽 내밀며 당당하게 나섰다.
아저씨. 애인이 없으세요? 그럼 전 어때요.
그러자 모여 섰던 여공들 사이에서 양철판 위에 호도알 굴러가듯 땍대구루
루 웃음이 굴러갔고 나는 차츰 놀림감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
공순이들을 보고 공주님이라고 하는 걸 보면 제 정신이 아닌가봐. 자길 무
슨 거지왕자로나 생각하고 있나봐. 얘, 뚱자야. 니가 공주님 행세를 하면서
저 거지왕자님 하고 약혼식이라도 올리렴.
그리고 다시 웃음, 웃음....
잠시 후 그녀들은 시간 됐다 얘, 어쩌구 저쩌구 왁자지껄 떠들면서 공장 안
으로들 몰려 들어 가버렸다. 나는 역시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메리야스 공장에서 저런 여자애들과 함께 실밥이나 뜯고
앉아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바람은 계속해서 세차게 불고 있었고, 내 허파는
계속해서 펄럭거리고 있었고, 기침이 자꾸만 터져 나왔고 터져 나왔고 터져
나왔, 쿨럭쿨럭쿨럭 쿨럭쿨럭 제기랄!
나는 이제 또 어디로 가서 노란 옷을 찾는 광대 노릇을 할 것인지, 과연 오
늘은 그 여자를 찾아낼 수가 있을 것인지, 막연하기만 했다. 구멍가게 문짝
이 바람에 쓰러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세워져 있는 문짝에는 세련되지 못한
글씨체로 3자가 그려져 있었다. 쓰러진 문짝의 번호는 2일까 4일까.
구멍가게 옆에는 미장원, 미장원 문짝은 완전히 엎어져 있었다. 나는 짚이
는 게 있어 미장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례합니다.
미장원 문을 열자 더운 기운이 곧 내 얼굴로 묻어 옴을 느낄 수가 있었다.
두 명의 미용사가 한 명의 손님을 의자에 앉혀 놓고 머리카락 튀김을 만들
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두 명의 미용사 중 키가 좀 작은 미용사가 내게 물었다. 나는 다시 노란 옷
을 입은 여자에 대해 물어 보았다. 나는 다시 노란 옷을 입은 여자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이 미장원 단골 손님 중에 혹시 그런 여자가
없는가를 물어 보았다. 만약 있다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이 미장원 앞에서
기다려 볼 심산이었다.
커트머리 아가씬가요. 파마머리 아가씬가요. 아니면 디스코머리 아가씬가
요.
이번에는 키가 좀 큰 미용사가 내게 물었다. 약간 빈정거리는 듯한 어투였
다.
글쎻요. 뭐 잘은 모르지만 비교적 단정한 머립니다.
학생이예요?
꼭 학생이랄 것까지야 없지만 비발디 정도는 알고 있는 여잡니다. 뭉크나
보들레르 정도는 알고 있는 여자죠.
그게 뭔데요.
역시 빈정거리는 어투.
먹는 거죠. 과일 종류입니다.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해 버렸다.이번에도 헛 짚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손님들 식성까지 우리가 일일이 다 어떻게 알아 낼 수가 있나요. 그리고
우리 미장원엔 그렇게 어린 여자분들보다는 좀 부티 나는 귀부인족들이 많이
오는 편이예요. 이래뵈도 기술엔 누구한테도 떨어지지 않는다구요.
나는 그만 돌아서기로 마음먹었다.
아, 지금 생각하니까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생머리였습니다. 아름다움
을 가꿀 줄은 알지만 허영을 좋아하지는 않는 성미죠.
나는 실례했노라는 말을 남기고 미장원을 나왔다.
내 하숙집 여편네는 조금만 신경질이 나도 머리카락을 가지고 농간을 곧잘
부린다. 꽁지빠진 씨암탉처럼 만들어 보기도 했다가 바글바글 볶아 보기도
했다가 지글지글 튀겨 보기도 했다가...하여간 변덕스러운 성격만큼이나 헤
어스타일 또한 변화무쌍하다. 일 년에 최소한 헤어스타일이 여덟 번은 바뀐
다. 그러니까 한 계절에 최소한 두 번씩은 바뀌는 셈이다.
한 번씩 바뀔 때마다 얼굴도 생판 다르게 보인다. 영락 없는 곗놀이 여편네
같기도 했고 무슨 요정이나 다방의 가오마담 같기도 했으며 바람난 과부상
같기도 했다. 따라서 나는 일 년에 최소한 여덟 번씩은 그런 식으로 여자를
바꿔가며 하숙을 하는 셈이 된다. 즉 일 년에 여덟 번은 하숙집 여편네가 바
뀌게 되고 그 눈치와 비위 맞추기 속에서 주눅이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내가 미장원엘 들러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찾으려 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결코 변덕이 팥죽 끓듯 한다거나 성
질 난다고 머리카락이나 못 살게 구는 따위의 자제력 없는 여자는 아닌 것이
다....
이제 또 어디로 가서 찾아 보아야 할 것인지....
나는 곰곰이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찾을 수 있을 만한 장소를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기침이 쏟아져 나왔고, 자꾸만 숨이 가빠져 왔으며, 어디 가서
단 십 분이라도 따스하고 편안하게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도
시 곳곳을 누비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대개의 사람들이 정면으로 바람을
맞으며 걸어다니지 못하고 비스듬히 옆으로 자세를 바꾸어 걷거나 완전히 등
을 돌려 바람을 막으면서 주춤주춤 걷다가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곤 하는 모
습으로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나는 문득 양장점을 찾아 들어가 물어 보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을 했다.
그럴듯한 생각인 것 같았다. 왜 진작 양장점을 생각지 못했을까. 나는 기침
을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그러나 양장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좀
더 걸었다. 그릭고 비로소 하나를 발견했다.
무슨 일로 오셨는데요.
내가 양장점 안으로 들어서자 크로키북에다 무엇인가를 끄적거리고 있던 삼
십대 초반 나이쯤의 여자가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러나 그 상냥한
목소리는 그녀가 오랫동안 옷장사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꾸며 낸 목소리일
뿐이지 그녀 본래의 목소리라고는 생각되어 지지 않았다.나는 그녀에게 최근
에 노란 옷을 입고 간 여자가 혹시 없느냐고 물어 보았다. 희디 흰 피부, 청
순한 자태, 착한 마음씨, 나지막한 목소리....
최근에라구요?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하더니 양품점 여자가 말했다.
최근에는 없는 것 같군요.
나는 적이 실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최근 말고 좀 오래 전에는
있었느냐고 다시 물어 보았다.
있었을 거예요.
양장점 여자의 자신 있는 대답이었다. 그녀는 양장점 한편에 드리워져 있는
커튼을 향해 김군아, 하고 누군가를 불렀다. 그리고 곧 커튼을 젖히고 김군
이라는 이십 대의 청년이 나타났다. 손에는 가위 하나가 들려 있었다.
쟤한테 한 번 물어 보세요.
양장점 여자는 다시 크로키북을 집어 들며 내게 말했다. 그녀는 이미 내가
자기의 장사와는 전혀 상관 없는 용무로 이 양장점을 들어섰음을 간파해 버
렸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염치불구하고 다시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에 대해 김군이라는 청년에게 대충 설명을 해 주었다.
작년 가을에 두 벌을 만들었어요. 노란 옷은 노란 옷이었지요.
김군이라는 청년이 내 얘기를 듣고 우선 이렇게 서두를 끄집어 내었다. 나
는 갑자기 머리속이 확 밝아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의
이름과 주소를 알 방도가 없겠느냐고 다급히 말했다.
주소는 모르지만 이름은 알 수 있을 거예요. 영수증철을 뒤적거려 보면 말
입니다. 하지만 아저씨가 찾는 여자는 아닌 것 같은데요 작년 가을에 옷을
마춘 그 여자는 우리 양장점 단골이기 때문에 제가 잘 기억 하고 있죠. 서른
네 살 정도나 되는 여자예요. 남편이 아마 주유소를 경영할 거예요. 까다롭
고 오만한 성격이죠. 요즘은 우리 양장점에서 옷을 마추지 않아요. 아마 단
골을 바꾸었을 겁니다...
나는 전신에 맥이 빠져 옴을 의식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가까운 양장점이 어디에 있으며 그 양장점 이름이 무엇인가를 물어 보고 난
다음 실례했노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양장점마다 찾아 다녀 볼 심산이었다. 물론 노란 기성복을 사 입을 수도 있
기는 있을 거였다.그러나 웬지 나는 그녀가 자기의 모습에 잘 어울리는 디자
인과 치수로 아름답게 만들어진 마춤복을 입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람에 점령당한 도시의 아침을 추위와 외로움에 떨며 걷고 있었다.
간판만 보며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양장점을 만나면 노란 옷을 마추어 입지 않았는가를 물어 보고,
거듭 실망하고, 거듭 기침을 하고, 또 더러는 미친 놈 취급을 받기도 하면서
하루 낮을 보내어 버렸다.
이윽고 밤. 밤에도 바람은 심하게 불고 있었다. 낮에보다 더욱 심하게 불고
있었다. 목놓아 마른 나뭇가지를 붙들고 울기도 하고, 난폭하게 건물들의 창
문을 뒤흔들어 놓기도 하면서 허공을 쓸려 다니는 먼지들이 얼굴을 스치는
감촉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찾아 내고야 말았다. 열흘 전에 노란 옷을 마춰 입은
한 여자의 이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어는 양장점에서였다. 내가 말한 여자와 아
주 흡사한 여자가 옷을 마춰 입었다는 거였다. 그것도 노란 옷을.
바로 이 천입니다. 아주 밝고 예쁜색이죠. 그 아가씨한테 썩 잘어울리는
원피스였어요. 잠깐 기다려 보세요. 그 아가씨의 이름을 가르쳐드리죠. 영수
증철에 있을 거예요. 어디보자...아 여기 있군요. 권 병희.
주소는, 주소는 적혀 있지 않습니까?
애석하게도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아요.
그럼 대략 어디 사는 여자인 짐작 될 만한 일이라도...
글쎄요.
잘 좀 생각해 봐 주십시오.
가만 있자...교선동, 그래요. 교선동에 산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언
덕배기여서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그 아가씨의 친구와 함께 가봉을
하러 와서 서로 불편을 털어 놓은 소릴 들은 기억이 있어요.
그 양장점 주인 여자의 얘기를 들으면서 비로소 나는 가슴이 환하게 밝아
옴을 의식했다.
기침이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기침은 여전히
내 몸 속 어딘가에 쌓여 있다가 채 오 분도 못 되어서 다시 터져 나왔다. 쿨
럭쿨럭 쿨럭쿨럭....
대단히, 대단히 고맙습니다. 만약 찾게 되면 반드시 이 은혜는 잊지 않겠
습니다.
어떻게 되는 사인데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하기가 곤란합니다. 상징의 여자니까요. 하여튼 제 생
명과도 관계가 있는 여잡니다.
어려워서 잘 모르겠네요. 전 다만 꼭 찾으시길 빌겠어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권, 병, 희.
나는 신음하듯 입속으로 되뇌이고는 혹시나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황급히 수첩을 꺼내 크게 그녀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나는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그 양장점 여주인이
오래오래 그렇게 아무 사람에게나 친절하고, 또 오래오래 창창하게 양장정을
경영해서 부디 자손만대까지 복되게 살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나는 세찬 바람을 한 모금씩 울컥울컥 들이켜며 교선동 공사무실을 향해 내
달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고 있었다. 무슨 소리든 외치고 싶었다.
중앙극장을 지나 행원동을 벗어나서 교선동으로 접어들면서 나는 완전히 어
떤 희망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마치 그 여자와 만날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래서 그 여자가 지금 노란 옷을 입고 교선동 언덕배기 어디쯤에서
바람 속에 옷깃을 여미며 초조히 나를 기다리고나 있는 것처럼, 전신에 노오
란 꽃물이 베어들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구두가 문제였다. 내 낡은 가죽구두가 문제였다. 좀처럼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기침도 문제였다. 달리다가 멈추고, 멈추어서는 기침을
해야만 했다. 목구멍이 아프고 뼈마디도 쑤시고 현기증도 났다.
그리하여 내가 교선동 동사무실을 앞에까지 당도했을 대 나는 탈진 상태가
되어 있었다. 숨이 너무 가빠서 질식해 버릴 것만 같았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불덩이 같았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다음 행동을 생각
해 보았다.
동사무소 사무실 안은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었다.현관문도 채워져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정직하게 이야기해서는
쉽게 집을 가르쳐 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상황에 따라 거짓말도 불사하겠
다는 결심을 굳혔다.
계십니까.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몇 번 계십니까를 연발했다. 바람소리 때문에 밖의
인기척이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참만에 문이 열렸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사십대 정도의 남자 목소리였다. 남자의 뒤로 엿보이는 방바닥에는 서류들
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바쁜 모양이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밤새워 여관방에서 회사의 서류를 정리해본 경험이 있었다. 삶에 대한 회의
는, 이렇게 바람부는 날 밤 한 잔의 술이라도 마시고 싶다는 충동을 참고 사
무적인 일로 혼자 밤을 새우는 도중 느닷없이 찾아온다는 사실도 나는 경험
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뜻밖의 방문객이 나타나 또 하나의
일거리를 맡기게 된다면 그건 정말 귀찮고 신경질 나는 노릇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몸둘 바를 몰라 몇 번 허리를 굽신 거렸다. 그리고 찾아 온 용건을 말
했다.
집을 하나 찾으려고 합니다. 어려우신 줄 압니다만 좀 도와 주시면 고맙겠
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주소를 말씀해 보시죠.
그냥 사람 이름 하나만 알고 있습니다. 권 병희라고 스물 두살 쯤되는...
그래가지곤 좀처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거의 불가능이죠. 내일 한번 사무
실로 찾아봐 보십시오.
나는 그냥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장 하숙집으로 들어가지는 않
았다. 밤 늦게까지 교선동 문패들을 읽으면서 돌아다니다가 통금 직전에야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열이 펄펄 끌허 오르고 심하게 호흡이 가빠지면서 자꾸만 기침이 터져 나왔
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내 방에서 끙끙 앓고 있었다. 그러나
언 땅 속 깊이에서 여린 싹 하나가 가만히 눈을 뜨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동사무실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기어이 권 병희
라는 여자의 주소를 알아 내었다.
교선동 산 14번지 7통 2반.
쌀가게에서 한 번, 부식가게에서 한 번, 단 두 번만 물어 보고도 쉽게 그녀
의 집을 찾아 낼 수가 있었다. 권씨 성이 그리 흔치 않은 탓도 있었겠지만
그녀의 집 마당에 유난히 큰 오동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는 사실도 내가 그
녀의 집을 쉽게 찾도록 만드느데 중요한 역활을 해 준 것 중의 하나였다.
중산층에 속하는 가정집 같았다. 오동나무는 잎이 모두 져버리고 가지만 앙
상하게 뻗어 있었다.조립식 담장 담벼락엔 <아버지 만세, 5+5=9, 참새, 태극
기, 우리 집이다. 경호 자지 크다.> 따위의 낙서들이 아기자기한 크레파스
글씨로 무슨 풀들처럼 번식하고 있었다.
바람은 어제보다 약간 기세를 죽이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도시의
하늘 위를 황사와 함께 누우렇게 몰려다니고 있었다. 봄이 오리라. 조금만
더참고 기다리면 봄이 오리라. 그러나 먼 산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었고
땅은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나는 잠시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살고 있을 교선동 산 14번지 7통 2반 대
문 앞을 떨리는 가슴으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의 모든 세포들은 신선하게
재생되어지고 사춘기의 어느 한때처럼 설레임의 물소리에 자욱하게 젖어 들
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을 서성거리고 난 다음에야 초인종을 누를 수가 있었다.
누구세요!
안에서 들려오는 어린애의 쨍쨍한 목소리, 곧 대문이 열리고 조그맣고 귀여
운 얼굴 하나가 대문 밖으로 내밀어졌다. 그리고 내 아래 위를 샅샅이 훑어
보기 시작했다. 수상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꼬마야. 이 집에 혹시 권 병희라는 여자가 살고 있지 않니?
나는 갑자기 대문이 닫혀 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 가슴을 죄며 조심스럽
게 물어 보았다.
우리 누난데요. 아저씨는 누구시죠?
겨울 나라에서 온 사람이야. 누나를 만나기 위해서 바람을 타고 왔지.
나는 동화적인 분위기로 아이에게 말해 주었다.
공갈.
공갈이 아냐.
그럼 증거를 대 보세요?
봐라. 아저씬 지금 계속 기침을 하고 있지 않니. 겨울 나라는 너무 춥기
때문에 모두들 감기에 걸려 있다구.
아저씨가 살고 있는 나라엔 왕자님 같은 것도 있어요?
있지. 꼭 너처럼 씩씩하고 귀엽게 생긴 왕자야. 왕자는 결코 감기에 걸리
는 법이 없지.
권투도 잘해요?
그럼 누구든 한 방이면 나가떨어져 버리고 말지.
햐, 신나는데.
축구도 잘 한단다. 순전히 바나나킥으로만 골인시켜.
근데 왜 한 번도 텔레비젼에 안나오죠?
겨울 나라 사람들은 텔레비젼을 아주 싫어하거든.
어? 왜 텔레비젼을 싫어하지? 만화 영화도 해 주고 연속극도 해주고 권투
중계도 해주고 별거별거 다 해 주는데.
하지만 기침을 멈추게 해 주지는 못하거든
병원에 가면 되잖아요. 병원에 가서 기침을 멈추게 하고 집에 와서 텔레비
젼을 보면 되쟎아요.
겨울나라의 기침은 의사들이 고치는게 아니예요.
그럼 왕자님이 고치나요?
아니야,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고쳐. 이 세상엔 단 한 명뿐이지. 그런데
꼬마야. 누난 집에 없니?
있어요.
있으면 좀 불러다 주렴.
그러나 아이는 안 된다고 고개를 완강히 가로저었다. 지금 누나는 엄마에게
매를 맞고 있다는 거였다. 왜 매를 맞느냐고 물으니까 자기도 모르겠다는 거
였다.
아까는 전혀 의식치 못했는데 귀를 모아 자세히 들어 보니까 그런 것도 같
았다. 이따금 꾸짖는 듯한 여자 목소리, 거기에 따라 낮은 여자 울음소리도
들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간 신경을 쓰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
도였다.
누나는 노란 옷을 입고있니?
나는 아이에게 물어 보았다.
아뇨 까만 옷을 입고 있어요.
노란 옷이 있기는 있지?
있어요. 며칠 전에 양장점에서 찾아 왔어요. 하지만 그 옷은 봄에 입을 거
래요.
누나는 책을 좋아하니?
네. 누나 방엔 책이 많아요.
나이는 몇 살?
스물 두 살
직장에 다니냐?
아뇨, 대학생이예요. 어구 춰라. 아저씨, 빨리 집에 가세요. 대문 닫고 내
방에 들어갈래요.
그래. 하지만 꼬마야 아저씬 누날 꼭 좀 만나야 할일이 있는데 어떻게 했
으면 좋을까.
낼부턴 누난 대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을 걸요.
그건 또 왜지?
몰라요. 엄마가 아까 그랬어요.
그럼 너라도 좀 만났으면 좋겠구나. 누나에게 편지나 전해 줄 수 있도록
말이지.
이때였다.
바로 댁이시군요.
어느새 나타났는지 중년 부인 하나가 아이곁으로 불쑥나서며 대뜸 내게 그
렇게 말했다. 바로 댁이시군요.
첫눈에 아이의 어머니라는 것을 짐작해 낼 수가 있었다. 교양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나를 분노에 찬 시선으로 노려
보고있었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이 부족해서 또 찾아오기까지 했어요. 우리 병희를 도대체 어떻게 할
셈이예요.
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채로 그녀의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
다. 아이는 자기 어머니와 내 눈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넌 들어가 있어,
라는 명령을 받고 슬그머니 뒤로 빠져 버렸다. 나 역시 어디로든 슬그머니
빠져버릴 수만 있다면 슬그머니 빠져버리고 싶었다.
그 어린 게 뭘 안다고 그 모양 그 꼴로 만들어 놓았어요. 그러고도 여기까
지 찾아와 또 꾀어 내려고 하는 걸 보면 댁은 정말 철면피예요. 가세요. 어
서 가세요. 책임을 지실 필요도 없어요. 다신 병희를 만날 생각조차 하지 말
아 주세요.
나는 무슨 얘기든 해 주어야만 될 것 같았다. 심하게 목이 말랐다.
아무 말씀도 하지 말고 돌아가 주세요. 부탁이예요.
어느새 여인의 목소리는 애원조로 변해 있었다. 바람이 여인과 나 사이를
파도처럼 넘나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어쩌면 여인의 마음 속에서 지
금 내게로 한아름의 어떤 탄식을 던져 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
는 도무지 그 탄식의 내용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무엇엔가 홀려 있다는 기
분까지 들었다.
그애가 도대체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여인은 이제 손등으로 가만히 눈물까지 찍어 내고 있었다.
세상에 나이 든 양반이, 고우면 고운 대로 아끼고 잘 보살펴줄 생각은 않
고 그 어린 것을 임신까지...
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엇다. 그리고 더 이상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거기 묵묵히 서 있을 수도없었다.
부인. 용서하십시오. 부인.
나는 한 마디를 던지고 묵묵히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여인의 머리 위에서
빙판보다 더 시린 겨울 하늘을 문득 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겨울 하늘에
뻗어 있는 오동나무 앙상한 어느가지 끝에서 마른 잎 하나가 뚝 떨어져 어디
론가 한없이 불려 가는 것도 문득 본 것 같았다.
그러나 하늘에는 황사, 이제 겨울은 끝나 가고 있었다. 오히려 하늘은 흐려
있었고 아까 보았지만 오동나무 가지에는 단 한 개의 이파리도 보이지 않았
다.
나는 교선동 산번지 비탈진 길을 내려오면서 봄이 되어도 영영 입지 않을
노란 원피스 한 벌이 벽에 걸려 있는 광경을 연상하고 있었다. 역시 권 병희
라는 여자도 내가 찾던 여자는 아니었다.나는 다시 농약병을 매만져 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비가 마지막 겨울비일 거였다.
나는 방 안에 드러누워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내 몸이 어디론가 떠내려 가
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문득 어느 시인의 시 한 줄이 생각났다.
밤이면 가문나무 숲이 울드라
무덤풀은 우거지고 쓰러지고
반딧불 한 점 불려 가드라
먼 강물 자욱히 물 넘는 소리
모두가 빈 집이드라
다만 자정 무렵 한 사내가
절룩절룩 젖은 양말로 돌아와
램프의 심지를 죽이며 낮게 울드라.
시를 생각 하니까 다시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함박눈 내리던 어느 날
밤 선술집에서 홀로 술만 마시고 있던 사내. 연애에 열 세 번이나 실패했다
던 사내. 시를 포기하고 말았다던 사내. 누이동생에게 언제나 미안하게 생각
하며 살아왔다던 사내....
우리는 한 순간만이라도 외롭지 않기 위해 입영 전야 장정들처럼 밤늦게 창
녀촌을 찾아 갔었다.
그래...우리는 비가 내리는 날 만나기로 했엇다.
나는 불현듯 그 사내가 보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떤 충동이 되어
내 가슴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내는 이 삭막한 겨울을 어떻게 보내었을까.
그날 아침 해장국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을 후회스럽게 생각 하면서 나는 그
선술집에서 지금 그 사내가 그 때처럼 홀로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인지를 한번
추리해 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있을 것도 같고 어떻게 생각하면 없을 것도
같았다.
나는 한번 더 그 사내를 만나보고 싶었다. 한번 더 그 사내와 술을 마셔보
고 싶었다. 나는 약속했었다. 비가 내리면 그 선술집에서 내가 한 잔 사겠노
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하숙집 여편네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고 여편네는 아직 귀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여편네의 방을 뒤적거려 보기 시작했다. 경대 서랍도 뒤
적거려 보고 옷장속도 뒤적거려 보고 옷들 속도 뒤적거려 보고....
그러다가 드디어 나는 부엌에 엎어 놓은 항아리 밑에서 한 묶음의 돈을 발
견해 내었다. 곗돈일 거였다. 텔레비젼을 훔쳤을 때도 그랬었다. 여편네가
경찰을 데리고 와서 나를 유치장에 부디 며칠간만이라도 집어넣어 달라고 말
했었다.
나는 유치장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에 길로틴이 철컹 하는 소리로 무겁
게 내림을 의식할 정도였다. 나는 항아리 밑에다 감추어 두었던 여편네의 돈
중에서 집히는 대로 조금만 뽑아 내었다. 그러나 충분히 술에 취할 수는 있
는 액수였다. 만약 비싼 술 비싼 안주만 아니라면 취한 끝에 여자라도 잠깐
사 볼 수가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호주머니 속에 돈을 쑤셔 넣고 선술집으로 향했
다. 마지막 겨울비. 시리고 아픈 겨울비에 가슴을 적시며 나는 생각했다. 이
비만 견디고 나면 곧 봄이 온다고, 봄이 오면 모든것 다 버리자고.
문둥이도 옷을 벗는 생금가루 봄햇빛, 나도 차라리 문둥이나 되리라. 문둥
이나 되어서 소록도로 가리라. 바다 쪽으로만 바다 쪽으로만 가슴을 열어 놓
고, 봄바다의 봄바람에 울며 취하며, 맨살 가득 매독 같은 버짐이나 꽃피우
며 살리라.
이제 거리는 녹고 있었다. 아직도 춥기는 추웠지만 그래도 물러가는 겨울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나는 사내를 만나면 한정없이 술을 마실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아가리가 벌
어진 구두 사이로 빗물이 새어 들어와 양말은 완전히 젖어서 질벅거렸고 발
가락은 발가락대로 사금파리를 밟은 듯 시려왔다.
그러나 내가 술집에 들어 섰을 때,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몇 몇의 남자들이 목로판을 차지하고 앉아 큰소리로 떠들어 대면서 술을 마
시고 있을 뿐, 내가 원했던 분위기는 간 곳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혹시나 싶
어 목로판 하나를 차지하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술과 안주를 시켜 혼자 마시
기 시작했다.
열 시가 넘어서까지 사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 둘 손님들이 자리를 뜨
고 있었다. 이제 남은 손님이라곤 나와 구석자리에서 마시는 두 사람 뿐, 술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마 그 때 비가 내리면 여기서 다시 만나자고 내
가 말했던 것을 건성으로 들어 넘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나는 떠나지 못하리라.....
나는 사내의 말을 생각하며 홀로 소줏잔을 비워 나가고 있었다. 구석자리에
서 술을 마시고 있던 두 사람도 이제 그만 일어서야겠다는 듯 큰소리로 주인
아낙을 불러 술값을 묻고 있었다.
이때였다. 한 사내가 흘러간 옛 노래 한 소절을 흥얼거리며 문을 연고 들어
섰다. 비 맞은 들개 같은 모습이었다.
웃고 오는 인생이냐
울고 가는 나그네냐
대장군 마루턱에
고향집이 그립구나
짖궂은 운명 속에
떠다니는 뜨내기 몸
돌부리 사나운데
눈물 속에 길은 멀다.
바로 그 사내였다. 사내는 내 쪽으로 등을 보이고 앉아 그 흘러간 옛노래를
끝까지 다 한다음 다시 되풀이 하다가 갑자기 주인 아낙을 향해 이렇게 외쳤
다.
아줌마, 술!
많이 취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마시다 남은 술과 안주들을 챙겨 들고 사
내에게로 다가섰다.
제 술 한잔 받으십시오.
그러자 사내는 정신을 차리려는듯 몇 번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술기운을 떨
어내고, 죄송함다, 괜찮슴다를 연발하다가 갑자기 나를 알아 보았다는 듯 벌
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와락 나를 끌어 안았다.
선생 정말로 오랜 만임다.
사내의 몸은 빗물에 흠씬 젖어 있었다. 얼굴도 많이 수척해져 있는 것 같았
다. 우리는 다시 옛날처럼 한자리에 앉아 술잔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밖에
는 비가 내리고 술집 안은 텅 비어 있는데, 우리들의 의식 깊이에는 외로움
의 터널이 길게 뚫리고, 우리들은 함께 술잔들을 주고 받으며 그 터널 속을
나란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선생, 제 누이동생 얘기를 하고 싶군요.
사내는 여전했다. 언제나 슬픈 목소리였다.
하십시오. 듣고싶습니다. 연애 중이라고 하셨지요. 아마.
지금은 아닙니다. 며칠 전에 실패했어요. 남자쪽에서 변심한 겁니다.
저런 죽일 놈이 있나.
첫사랑이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제 누이동생은
불쌍하게도....
사내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나는 술잔을 건네며 사내에게 말했다.
그만 둡시다. 매우 슬픈 얘기니까요. 저는 그 얘길하고 나면 울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사내의 목소리 속에는 정말로 울음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다시 화제를 바
꾸었다. 석유를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꽃을 이야기하고 시인들을
사랑했다. 겨우내 사람이 얼마나 그리웠는가를 이야기하고 서로 악수들을 나
누었다. 이윽고 우리는 몹시 취했다. 그리고 선술집 주인 아낙이, 시간 됐어
요, 어서들 나가세요, 라고 몇 번이나 외쳤음은 두 말할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비는 차디차게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밤새도록 마십시다 우리.
나는 말했다. 창녀촌으로든 여관으로든 들어가서 내장이 썩어 문드러질 때
까지 마시고 싶었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골목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골목은 끝이 없
었다. 사방은 캄캄했고 이미 우리는 몹시 취해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도무
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골목을 헤어나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헛일이었다. 사방은 빗소리뿐, 쥐죽은 듯 고요했다. 밤이 상당히 깊어 있는
것 같았다. 막막했다.
이제 우리는 완전히 골목속에 갇혀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 어떤 거대한
힘을 골목의 끝 부분을 모조리 막아버린 모양이었다. 아무리 헤매어도 큰길
로 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빗속에서 술취한 채로 지쳐 있었다. 막다른 골
목 담벼락 앞에서였다.
선생, 저는 오늘 자살해 버리고 말겠습니다.
사내가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내게 말했다.
제 누이동생은 불쌍하게도....
사내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제 누이동생은 불쌍하게도 다리를 절었더랬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실연당했습니다. 놈은....처음엔 호기심으로 제 동생과 사귀어 보았을 겁니
다. 제 동생은 예뻤습니다. 그리고 시를 썼었습니다. 얼굴이 예쁘고 다리를
약간 절고 시를 쓰는 여자. 그런 여자에게 호기심을 가지는 놈들도 많이 있
을 겁니다. 하지만...다리가 하나 짧은 사람들보다는 두 다리의 길이가 똑같
은 사람들이 더많이 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 동생은 현실에는 불편한
존재였지요. 놈은....더 이상 불편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제 동생
에게는 그것이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선생, 제 동생은.....만덕동에서, 아
니 이 도시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제일 아름답던 제 누이동생은....죽었습니
다. 자살을 ....했습니다.
갑자기 나는 술이 확 깨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리를 저는 여자, 만
덕동, 연애.... 그렇다면, 생각나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어느날 새벽. 역
대합실에서 만났던 여자. 황야의 별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고 있던 여자. 애
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며 내게 밝은 표정으로 가벼이 손을 한번 흔들어 주
던 여자. 그 여자도 다리를 절었었다.
혹시 자주색 코트에 하얀 목도리를 하고 다니지 않았는지요.
나는 다급하게 사내에게 물어 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걸 알고 계셨습니까.
사내가 흠칫 놀라는 시늉으로 담벼락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이 엄청난 우연 앞에서 잠시 망연히 서 있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
실이 아닐 수 없었다.
선생....
이제 사내는 마음놓고 큰소리로 울어 대기 시작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땅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다시 심하게 기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현듯 죽고 싶다는 충동이 치솟았다. 나는 젖은 호주머니 속에다 손을 집
어 넣고 농약병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죽고 싶다는 충동은 더욱 심해져
가고 있었다. 아니다, 나는 사내를 죽여 주고 싶었다. 사내가 나로 내가 사
내로 자꾸만 뒤바뀌어져 내 의식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한 충동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거기서 뭣들 하고 계쇼.
플래쉬를 희번거리며 두 명의 남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방범대원들이
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비에 젖으며 파출소로 끌려 가기 시
작했다.
이윽고 봄이 왔다. 나는 햇빛이 박살난 언덕 위에 앉아 있었다. 내려다 보
이는 도시의 머리위로 끊임없이 아지랑이들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고요했다.
모든 시간이 정지해 있는 것 같았다. 도시는 시간 저쪽에 놓여 있었고, 다시
는 그리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른편 언덕에는 복숭아꽃들이 화창한 햇빛 속에 몸살나게 피어 있었고, 그
변두리 밭뙈기 마다에는 무슨 싹들인가가 파릇파릇 연두빛으로 돋아나고 있
었다. 사방이 너무나 고요했으므로 나는 필름이 잠시 끊어진 무성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필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소리도 다시 들
리기 시작했다. 한떼의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언덕을 기어오르기 시작
했던 것이다.
여기서 부터 시작해보자.
그 한떼의 아이들 중의 하나는 무슨 기계인가를 앞가슴에다 받쳐 안고 있었
는데 가까이 왔을 때 확인해 보니 그 기계는 바로 고철 탐지기라는 것이었
다. 이 도시는 육이오 때 격전지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그 때 땅 속에
파묻힌 탄피나 폭박물 따위를 캐내기 위해 그 기계를 메고 다니는 사람들을
언젠가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한 트럭 나와주라.
여기 보단 저기가 더 많을 것 같은데.
새꺄, 아무데면 어떠냐. 어차피 다 훑을 건데.
맞았어. 우린 오늘 왕창 돈을 버는 거라구.
얌마. 김치국부터 마시면 부정탄다구.
자루가 너무 작은 건 확실해. 하나 더 가져 왔어야 하는 건데.
꺼럼. 분명히 그 자루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고물이 쏟아져 나올 거야
.
아이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떠들어 대면서 고철 탐지기를 가진 아이 뒤를
따라 가고 있었다. 그리고 고철 탐지기를 가진 아이는 기다란 막대기를 이리
저리 휘저으면서 마치 지질학자나 된것 같은 태도로 엄숙하고 심각하게 걸음
을 옮겨 놓고 있었다.
나는 내가 보낸 겨울의 그 견딜 수 없었던 시간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
고 그 견딜 수 없었던 시간들이 꿈만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와아!
갑자기 아이들 쪽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아마 무엇인가를 발견한 모양이
었다. 아이들 몇이 곡괭이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겨울만 생각하고 있었다. 겨울에 만난 사람들을 생각하고 겨울
에 만난 사건들을 생각하고 겨울에 만난 눈과 비와 바람을 생각을 하고 있었
다.
언덕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아이들이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있었다.
어느새 자루는 아랫배가 불러 있었다.
또 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약 이 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다시금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아이들은 분주히 곡괭이로 땅을 파 헤치기 시작
했다. 신바람이 난다는 듯한 행동들이었다.
걸렸다. 곡괭이 끝에 뭐가 걸렸어. 안 빠지는데.
갑자기 곡괭이질을 하던 아이 하나가 동작을 멈추었다.
굉장히 큰 걸지도 몰라. 신나는데. 다같이 한번 잡아당겨 보자구.
아이들 몇이 우루루 곡괭이 자루 하나에 달라붙었고, 영차 여엉차, 안간힘
이 시작되었고, 그래도 곡괭이 자루는 빠져 나오지 않았다.
아저씨. 좀 도와 주셔요.
한 아이가 나를 향해 도움을 청해 왔다. 나는 일어섰다. 곡괭이 자루를 잡
고 구덩이를 들여다보니 공교롭게도 곡괭이의 한 끝은 돌 밑에 박혀 있고 또
다른 한 끝은 무슨 금속물체인가에 박혀 있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곡괭이
자루를 힘껏 잡아당겼다. 금속물체가 있는 쪽의 땅이 몇 번 들썩들썩 허물어
지더니 마침내 어떤 물체 하나가 끌려 나왔다.
어? 이게 뭐지?
기분 나쁜데.
그것은 철모였다. 심하게 녹슨 철모였다. 그리고 그 철모 속에는 흙과 함께
시커먼 머리카락이 담겨 있었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계속 파보자구. 혹시 또 있을지 모르잖아.
탐지기를 한번 대 봐.
그러자 구덩이 속에 막대기가 드리워졌다. 그 막대기에는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곧 탐지기에서 삐이이 하는 신호가 울렸다.
와아!
아이들은 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역시 신바람나게 곡괭이질을 시작
했다.
덜그럭!
몇 번 곡괭이를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구덩이에서 어떤 반응이 전달되어졌
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물체는 아이들에 의해 구덩이 밖으로 끌어내어졌다.
둥그스름한 물체였다. 흙투성이가 되어있었다.
흙을 털어 내 봐.
한아이가 심상찮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몇 명의 아이들이 달라붙어
그 물체의 흙을 털어 내었다.
해골이다.
한 아이가 겁먹은 목소리로 외쳤다. 일시에 아이들이 확 흩어져 물러났다.
아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방이 더욱
고요해지면서 햇빛만 눈부시게 밝아 보였다. 눈부신 햇빛 속에 몸살나게 피
어 있는 복숭아꽃, 파릇파릇한 연두색 풀잎, 그러나 시간은 정지해 있었다.
다시 무성영화 같은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무성영화 속에는 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노랑 나비는 아이들의 머리 위를 지나 복숭아꽃이 만
발한 과수원 쪽으로 가고 있는듯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이들의 머리 위를
벗어나 과수원 쪽으로 잠깐 날아갔다가 다시 방향을 되돌렸다. 그리고 아이
들의 머리 위를 몇 번 왔다갔다 하더니 낮게 내려와 날개를 팔랑거리며 날아
다니기 시작했다.
죽음에도 향기가 있다고 했던가, 그 노랑나비는 이제 해골 주위를 맴돌면서
앉을 듯 말 듯 안타까운 날개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는 해골 위
에 가만히 내려앉아 조용히 날개를 접었다. 아주 선명해 보였다.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미와 칼 (0) | 2023.04.12 |
---|---|
보이지 않는 삶이 더 소중하다 (0) | 2023.04.12 |
고수 (0) | 2023.04.12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0) | 2023.04.11 |
왜란종결자 1~2 (0) | 2023.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