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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임어당]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by Casey,Riley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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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임어당
  
         차례

         1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
  욕망은 아름답다
  완전한 것은 없다
  무엇을 행운이라 하는가
  참으로 신비로운 것
  우리 몸은 살아있다
  음악처럼 살아가라
  행복은 내 안에 있다
  마음의 숲으로 돌아가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우리들은 연극배우이다
  왜 먹어야 하는가
  풀을 씹는 사람이 되라
  오직 인생만을 사랑하라
  뜨겁게, 더욱 뜨겁게
  인간임을 자랑스러워하라
  재미있게 살아가라
  두 발의 두 얼굴 
  정신이여 반항하라
  안데르센을 찾아가라
  당신에겐 유머가 없다
  우리는 나그네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2

  창 밖의 새소리를 들으라 
  누구와 이야기할 것인가?
  느낌이 있는 만남 
  차와 함께 나누는 마음
  담배연기를 바라보라
  어떻게 취할 것인가
  배고프지 말라 배부르지 말라
  마음속에 그리는 집
  떠남, 그리고 버림
  있는 대로 바라보라
  꽃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꽃을 즐기는 멋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마음의 빛깔을 보라
  인간의 향기를 읽으라
  책장을 덮어야 할 때

         3

  불행 끝 행복 시작
  성공의 노예가 되지 말라
  당신은 어리석다
  사람의 마을로 돌아오라
  그는 이렇게 살았다
  무엇이 사는 것인가
  행복은 느낌이다
  동심으로 돌아가라
  문명을 집어던져라
  천국은 지상에 있다
  인간은 동물이다
  왜 혼자라고 생각하는가
  여자여! 남자여!
  헛된 꿈에서 벗어나라
  인생은 유전된다
  노년은 아름답다
  
    서문

  임어당은 중국의 작가이며 문화비평가로 특이하게 동, 서양의 문화를 한몸에 
흡수하여 독특한 필체로 관조해 낸 인물이다.
  1895년 중국 복건성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하버드 대학과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북경 대학의 교수를 지냈으며 저술 활동은 
주로 미국에서 했다. 
  임어당 철학의 정수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이 책이 발표되었을 당시 서구인들의 
문화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해박한 지식으로 두 세계의 문화를 비교하고, 동양적인 것으로 서구적인 것을 
압도하는 놀라운 이론을 펼쳐 보이는 그의 필치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 그는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서구 문화에 대하여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양 문화의 깊은 원리를 설파하고 있는데, 특히 실용주의적 
사고방식과 능률을 중시하는 서구의 개척 정신에 대한 임어당의 비판은 가히 
군계일학이 아닐 수 없다.
  임어당 사상의 중심은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또한 
도처에서 나타나는 유머 감각은 단순한 익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깊은 휴머니즘을 
내포하고 있기에 그 향기가 더욱 진하게 퍼지는 듯하다.

  이 책의 텍스트는 영문판 "The Importance of Living"으로 임어당의 인생에 관한 
성찰과 경험에서 우러난 깊은 사색의 산물이다.
  그는 책의 머리글에서 마치 친구를 놀라게 하기 위해 담을 넘어서 먼저 집으로 
돌아와 친구를 놀라게 하는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고 고백한다.
  "나는 담을 넘거나 샛길을 통해 집에 돌아오는 것을 즐긴다. 적어도 친구들은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나 동네의 지리에 익숙하다는 것을 인정해 줄 것이다."
  때문에 임어당은 자신이 머문 동, 서양의 문화와 철학의 동네를 오가면서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사상을 인용하고 그 지혜의 보석들을 독자들에게 
권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너무 도취하지 않도록 은은한 다향을 보탰다.
  그리곤 먼 산이 보이는 초당에서 함께 마음을 나눌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지친 마음으로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 행복의 파랑새를 좇아 아득히 먼 데를 
그리워하는 세상의 벗들에게 너무나 가까운 곳에 소중한 삶의 보석들이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열면 선비 임어당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는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들에게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카렌 케이시--
  
    1

  훌륭한 사상도 좋지만
  한 접시의 맛있는 돼지고기도 좋다.
  여색을 경계하는 글도 가치 있지만 
  미인도 버리기 아깝다.
  
  모든 인간은 제각기 인간으로서의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웨인 W.마이어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관념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완전하고 천진난만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의 뜻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지식과 지혜가 
주어졌고, 그로 인하여 타락과 고난이 시작되었다.
  그 고난이란 다름이 아니라 남자는 땀흘려 일해야 하고, 여자는 종족의 보전을 
위해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된 것을 말한다.
  하지만 신의 뜻에 따라 천진난만하게 창조된 인간이 어찌하여 지식과 지혜라는 점 
때문에 타락하고 고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본질적으로 인간 역시 신과 같은 행복을 누려야만 되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신을 닮은 존재가 아닐 것이며, 그의 
피조물로 규정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본질적인 의문에 대하여 기독교단에서는 어떤 정리된 대답이 필요했다. 곧 
최초의 인간, 그 순결한 존재를 타락된 원죄를 가진 존재로 변질시키기 위해서 어떤 
새로운 요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영혼과 악마였다.
  영혼은 인간의 높은 천성을 상징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으며, 신의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란 문제는 인간과 동물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하나의 표식이었다.
  또 악마란 지혜를 가진 인간을 타락시키는 장치로서 인간에 대한 신의 징벌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도구였다.
  그런데 이렇듯 자체적인 필요에 의해 탄생된 관념들은 곧 심각한 모순에 빠지고 
만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악마의 기원을 설명해야 했지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지혜와 삶을 준 신과 그를 타락시키고 죄에 물들게 하는 악마, 그 둘은 어떤 
면에서 비슷한 신격을 가진 존재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정통 
기독교도들에게 악마가 신과 같은 반열인 영생의 존재로 인정되어서는 곤란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분히 억지적인 발상을 꺼내들었다. 곧 타락천사라는 개념이다. 
신의 대리인인 천사가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 위해 신을 배반하고 인간을 그 도구로 
이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선이었던 천사가 타락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악의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신학자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억지 
발상을 천계의 사건으로 돌려버리고 침묵해 버렸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나온 것이 속죄이다. 악마의 유혹으로 잉태된 죄악을 신 앞에 
진심으로 고백함으로써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 사상의 사장 기묘한 면은 위와 같은 완전과 타락, 속죄로 이어지는 교리에 
있다.
  이 신앙은 기원 자체가 고대 사회가 무너지면서 생긴 것이었다. 그러므로 부패와 
혼란 속에 잠겨 최후의 파멸로 내닫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구세 사상의 사고 방식과 상통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기독교 사상은 필연적으로 불멸에 관한 문제로 기운다. 하지만 이 역시 
하느님이 인간의 영생을 바라지 않았다는 성경 속의 창세기의 내용과 모순되고야 
만다. 그 증거로 창세기 3장 21__24절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이제 사람이 우리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다.
  그리고 그가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짓게 하셨다.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완전한 인간을 원했지만 기독교의 하느님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완전함을 거부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의 인간에 대한 시각은 모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타락된 존재라는 죄의식에 꽁꽁 묶여 있다. 
그리하여 인생의 쾌락, 곧 즐거움과 행복을 지향하는 것은 죄이며, 스스로를 
학대하고 가책하며 불쾌하게 사는 것이 훌륭한 행위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론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으면 기독교도로 재생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하여 불신앙이 생길 것을 우려한 위대한 각본 탓은 아닐까?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지은 존재라는 기독교의 목소리는 내게는 그 교리만큼이나 
모순적으로 비쳐진다.
  에덴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죄가 없다. 이렇듯 무죄인 인간의 
모습으로부터, 행복한 인간을 지향하는 것으로부터 삶은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욕망은 아름답다

  기독교도들이 그들의 완전한 신과 닮기를 원하는 데 반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이 인간을 닮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창조한 신들은 쾌활하고 여자를 좋아하며, 사랑하고 질투하며 
결혼하며, 걸핏하면 화를 내고 싸운다. 또 그들은 인간을 사모하고 미워하며 아끼는 
한 세계의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보통의 인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단지 영생의 존재로서 멀쩡한 사람을 
소로 둔갑시키거나 천둥 벼락을 일으키는 등의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인들이 이처럼 신과 인간의 정신 세계를 동일시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신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때로는 잔혹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기도 
하였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함으로써 그들은 행복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인들은 우주와 인간을 더불어 사랑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이 
자연계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가는 재미에도 흠뻑 빠져들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기독교의 에덴 동산과 같은 황금 시대는 없었다. 따라서 
타락이나 원죄도 없었다.
  그들 자체는 대홍수 뒤에 평원으로 이주해 온 듀칼리온과 아내 피르하가 손으로 
들어올려 어깨 너머로 내던진 돌멩이로 이루어진 인간일 뿐이었다.
  그들이 때때로 겪는 고난, 즉 병이나 가난이나 불화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그 
속을 보고 싶어서 안달하는 젊은 여성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절망 속에서도 최후까지 간직한 최고의 보물은 '희망'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상할 수 있었으며, 아름다움을 꿈꾸는 권리를 가졌다. 그들은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체념을 가지기도 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 행복을 구현한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해와 자유로운 사색 정신은 그런 바탕 위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위대한 스승 중의 한 사람인 플라톤은 인간을 욕망과 정서와 
사상의 혼합물로 간주하였다.
  이상적인 인간의 삶이란 참된 이해에 따라 위의 세 가지가 조화롭게 
어우러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념이란 불멸의 것이지만, 인간 개개인의 심정은 정의나 학문, 
절제와 미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에 따라 고상해지거나 비천해진다고 
여겼다.
  또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이 단독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육체에서 분리되어 있거나, 또 육체가 
영혼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곧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살아 있으므로 욕망에 부응하는 행복을 얻고, 그를 위해 신과 한바탕 놀이를 펼칠 
수 있는 것이 그리스인들의 삶의 모습이었다. 
  욕망은 아름답다. 그로부터 행복한 삶은 비로소 방향을 찾고 그 바다를 향해 노를 
저어갈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것은 없다

  한 남자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다. 그런데 그의 저승사자의 실수로 잘못 끌려온 
것으로 판명되었다. 염라대왕은 그를 다시 속세에 환생시키고자 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인간 세계로 가기 싫습니다. 하지만 대왕께서 제가 바라는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명을 따르겠습니다."
  염라대왕이 물었다.
  "그 조건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러자 그 남자가 대답했다.
  "이번엔 제가 인간으로 환생한다면 장관의 아들이나 장원급제한 아들을 가진 
아버지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넓은 땅과 연못, 온갖 과일이 열리는 
과수원과 아름답고 상냥한 아내, 어여쁜 첩들이 있어야 합니다. 또 온갖 보물과 
곡물이 가득한 창고를 주시고, 마침내 제가 제왕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고 
백살까지 살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환생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염라대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야, 속세에 그런 부귀영화가 있다면 차라리 내가 환생하고 말겠다. 어찌 
너에게 그런 복을 준단 말이냐?"

  중국인들의 세계관은 이 우화에서 말하듯 불완전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인간 
사회는 이런 불완전을 개선하려 하지만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애초부터 
완전한 평화나 완전한 행복 따위는 바라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적당히 하자' 하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즉 무슨 일이든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도 말고 너무 적게 기대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가 어떤 번뇌와 욕망 그리고 활력을 가지고 인생을 출발한다. 그것은 
유년과 장년, 노년을 통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스승 공자는 그런 삶의 
다양함을 걱정하며 이렇게 가르쳤다.
  "젊었을 때는 여색을 경계해야 하고, 장년에는 다툼을 경계해야 하며, 노년에는 
이득을 경계해야 한다."

  이 말은 곧 청년은 이성을 사랑하고, 장년은 투쟁을 사랑하며, 노년을 돈을 
사랑한다는 뜻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욕망과 절제, 이것은 중국인들의 삶의 근본적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늘과 땅, 이상주위와 현실주위, 숭고한 사상과 비천한 번뇌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식에도 갈증을 느끼지만 물에도 갈증을 느낀다. 훌륭한 사상도 좋지만 
한 접시의 맛있는 돼지고기도 좋다. 여색을 경계하는 글도 가치 있지만 미인도 
버리기 아깝다.
  이러한 중용적 태도에서 관대한 중국인들의 철학이 탄생되었다. 그들은 
법률적이든 도덕적이든 정치적이든 간에 정상적인 인간의 번뇌의 부류에 속하는 
인간적 과실이나 품행은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하여 하늘, 즉 신은 말이 통하는 존재라고 여겼다.
  인간은 자신이 최선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중용적 생활을 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고, 양심의 평안이라는 최대의 보람을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맑은 사람은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신은 중용적인 신이기 때문이다.
  폭군은 죽고 반역자는 자살하며, 탐욕으로 모은 재산은 남의 손에 넘어가기 
마련이다. 살인자는 죽음을 당하고, 용을 당한 여인은 다른 사람이 원수를 갚아주게 
되어 있다.

  그들은 자연을 이해한다. 그것은 어떤 중국 여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누군가 우리를 낳았고, 우리는 누군가를 낳는다. 그밖에 또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을 무서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결론은 결국 인간이 생물에 
불과하며, 불멸론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손자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5년이나 10년 뒤에 나는 땅 속으로 들어간단다. 우리 조상님 곁으로 말이야. 
너와는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최상의 행복이란 망신스런 자식이나 손자를 
두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곧 그들이 사는 법이다.
  
    무엇을 행운이라 하는가

  우리들은 모두 지상의 존재이다. 지상에 태어나 지상에서 자란다. 말하자면 70여 
년 동안 길손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조금도 불행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설사 움막일지라도 그곳을 가장 즐거운 
움막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하물며 우리는 움막이 아니라 아름다운 땅 위에서 살고 있다. 이 땅위에서 무려 
70여 년을 살아가는 데도 즐거워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배은망덕하다.
  때로는 야심이 너무 지나쳐서 겸손하고 관대한 지구를 경멸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신의 조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다면 이 육체와 정신의 임시 
거처인 지상에 대하여 '어머니이신 대지' 라는 기분으로 참된 애정과 집착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이 지상의 생명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곧 자기 
자신을 흙과 동일하게 느끼고, 겨울에는 봄볕을 고대하는 흙처럼, 느긋하게 참을성을 
가지고 숲을 찬양해야 한다.
  숲의 시인 도로는 아무리 실망에 빠져 있을 때라도 정신을 찾는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며, 자신을 찾는 일이야말로 정신의 할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의 행복은 스스로 두더지의 행복이라고 했다. 하늘은 실재가 아니지만 지구는 
실재이다.
  실재의 지구와 실재가 아닌 하늘 사이에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행운인가?
  
    참으로 신비로운 것

  사람들은 언제나 정신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육체적 기능에 대하여 좀더 고찰하게 된다면 동물적이라고 하는 표현에 대한 불쾌한 
감정도 다소 바뀌게 될 것이다.
  분명 인간의 육체란 경멸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이해하고 보듬어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라고 나면 왠지 좀더 외경스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에 충치가 생기면 육체가 썩어버릴 징조라고 생각한다거나, 영혼의 
행복만을 소중히 생각하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라면 단지 치과를 찾아가 치료를 받고 나은 이를 더욱 소중히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리하여 현재보다 더 큰 기쁨으로 사과나 닭 뼈를 씹으면 되는 것이다.
  형이상학자는 이런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악마의 짓이라느니 어쩌니 하며 비난할 
것이다. 작은 아픔조차 신의 어떤 경고라고 믿는 그들에게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치통에 시달리거나, 낙천적인 시인이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하는 것을 보면 좀 짓궂기는 하겠지만 일종을 즐거움을 
느낀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런 순간 치통 같은 아픔을 무시하고 철학을 말하지 못하는가.
  그렇다. 나의 말은 그들은 왜 자신의 창자에 대한 은덕을 잊고 쓸데없이 정신이나 
읊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기실 우리에게 몸을 경이감과 신비감으로 바라보게 한 것은 과학이다. 그것은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전 동물계의 맨 꼭대기에 위치한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감격이다. 과학은 정신 나부랭이나 외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그 신비에 빠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인류의 위엄이 정신만이 
아니라 육체에도 있음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사람의 육체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띠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인체 내부기관의 활동과 그 상호간의 놀라운 작용을 알게 되면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것 같은 황홀경에 빠져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육체의 신비를 알려준 과학도 내부의 비밀스런 작용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인체밖에 있는 우주 만큼이다 신비롭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육체를 경솔하게 무시하면 안 된다. 그것은 정신과 함께 삶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그것은 또 바로 나 자신이다. 신비스런 몸이 가져다주는 희열과 영광, 그 진실을 
바로 보아야 한다.
  
    우리 몸은 살아있다

  사람의 육체는 신비 덩어리이다. 그것은 그 어떤 정신적인 감동보다 더 위대한 
기적을 보여준다.
  인생의 즐거움은 몸으로부터 시작되고 행복은 그런 자신의 육체를 깨닫고 그 
능력을 사랑함으로써 시작된다.

  우리 몸 안에서 만일 창자가 상처를 입었다면 어찌 될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창자는 즉각 모든 활동을 정지한다. 이런 일시적인 마비 현상으로써 변이 
복강으로 새어나오는 것이 방지된다. 자발적인 치료 활동이 시작된다. 그것은 생명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자생력의 표현이다.
  그리하여4, 5시간 안에 창자의 상처는 아문다 설혹 외과의사의 바늘이 상처를 
꿰맸다 할지라도 치유되는 본질적인 이유는 이런 자연적인 생명 현상의 구현일 
뿐이다.
  우리들의 육체는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 육체를 경시할 수 있겠는가?

  육체는 자연처럼 스스로를 조절하고 수리하고 움직이며 재생산해내는 고도의 정밀 
기계와도 같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우수한 컴퓨터보다도 더 복잡한 
기능을 가진 시스템이다.
  육체가 정보를 처리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는 중요하지 않은 서류는 깊은 창고에 저장해 놓고 당장 필요한 서류만을 눈에 
보이는 가까운 곳에 놓아둔다. 그러나 오래된 서류가 필요할 때는 번개 같은 속도로 
창고를 뒤져 꺼내오는 것이다.
  우리들의 육체의 힘은 그뿐만이 아니다.
  한쪽 신장이 사라져도 남은 신장이 그만큼 커져서 정량의 오줌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기능을 자체적으로 증대시키는 위력을 지닌다.
  또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정상 체온을 유지하고 음식물을 생리 조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화학 약품을 만들어 낸다.
  더욱 오묘한 것은 인체가 생명의 리듬 감각과 시간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몇 시간, 며칠의 감각만이 아니라 수십 년의 감각까지도 가지고 있다.
  즉 유년기와 성년기, 중년기를 조정하고, 성장을 멈추어야 할 때 멈추며, 재생이 
필요한 부분은 적극적으로 재생시킨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적 지혜는 사랑니를 나게 않게 하지 못한다.
  육체는 아무리 힘들어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그 덕분에 잘난 체하는 철학자들은 자기 몸 안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작용으로 
말미암은 소음의 걱정 없이 마음껏 사색을 즐기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몸은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정신만은 아니었다. 생동하는 
몸이 정신을 좀더 깊은 세계로 안내해 주는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우리들의 인생은 나름의 의미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음악처럼 살아가라

  생물학적인 입장으로만 보더라도 인생은 한 편의 시에 가깝다. 인생에는 특유의 
리듬이 있고 맥박이 있으며 자라나고 늙어 가는 주기가 있다.
  인간은 천진한 어린 시절에서부터 시작되어 청춘의 황금기에 이른다. 그 시기에는 
야심과 절망과 고뇌가 있다.
  그런 격렬한 시기가 지나면 사회와 인간을 알아 가는 성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술이 익듯이 성숙해지는 중년기에 이른다. 그 시기에는 배포도 커지고 냉소를 
이해하며 인생을 다정한 눈으로 관조하게 된다. 그러다가 노년이 되면 평안과 
자족을 맞이한다. 마침내 최후에 이르면 생명은 꺼지고 영원히 잠들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이러한 인생의 리듬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곧 아름다움이다. 교향악을 
들을 때처럼 어지러운 가락이 교차되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화음인 것이다.
  만일 불협화음이 일어나 주된 가락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인생은 참으로 엄숙하게 행진해 나갈 수 있다.
  그 물결은 밤낮으로 유유히 흘러 영원의 바라로 향한다. 그것은 저 갠지스강의 
장중하고 위대한 템포와 하등 다를 게 없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저절로 갖추어지는 이 인생의 아름다움, 하루에 아침 낮 
저녁이 있고, 일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이 있다. 그 모습은 참으로 좋지 
않은가?
  우리들의 삶이 이와 같은 자연의 흐름에 순응한다면 한 편의 시처럼 넉넉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 공연히 우쭐대거나 공허한 야망을 따르지 말라는 뜻이다.
  
    행복은 내 안에 있다 

  우리가 인생의 미와 리듬을 감상할 수 있다면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도 바라볼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물을 보게 되면 동물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한층 더 
뚜렷하게 그릴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 자신과 인간 세상의 어떤 진보를 체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동물을 조상으로 하여 시작된 인간의 심성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면 모든 사물에 대한 동정심이 깊어지고, 거기에 대범한 풍자까지도 
가능하게 된다.
  인간이 네안데르타인이나 북경원의 자손, 아니 더 나아가 유인원의 자손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주들에 대하여 감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스스로 그 한계까지도 비웃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서유기"에서 상징하는 인간의 예지력과 통찰력을 음미해 
보기로 하자. 인류사의 진보란 저 불완전한 반인간적 동물들의 서방 정토 순례기와 
다름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인간의 지식을 상징하는 원숭이 손오공, 미련한 욕심을 상징하는 
저팔계, 상식을 상징하는 사오정, 그리고 인간의 맑은 마음과 예지를 상징하는 
삼장법사이다. 
  삼장법사 일행은 불경을 얻기 위해 머나먼 천축으로 향하면서 천신만고를 
겪어간다.
  장난꾸러기인 원숭이, 색골인 멧돼지, 이들은 자신들의 비열한 생각 때문에 갖은 
고난을 자초한다.
  인류사의 진보란 이들과 마찬가지로 약한 의지, 힘없는 행동, 분노, 복수, 성급함, 
호색 등등의 여러 가지 성격으로 말미암은 갖은 에피소드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은 
분명할 것이다.
  곧 그 길은 현대의 인류가 걸어가는 어둠과 절망의 터널이었다. 
  "서유기"의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세계의 모델은 너무나 예리하고 명확해서 
전율을 느낄 정도이다. 그들은 파괴가 심해지면 기술 또한 진보한다는 증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들은 오늘날 신통력 있는 손오공처럼 구름 위를 걷고 공중에서 맴을 돌 수도 
있다. 원숭이의 다리에서 털을 한 움큼 뽑아 작은 원숭이로 만들 수 있는 과학적 
성과도 있다.
  이렇게 영리한 만큼 자만심도 보통이 아니었다. 손오공은 지상에서 생물들과 
더불어 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영리해서 천국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가 천국에서 평화롭게 살기에는 정신에서 정신의 수준이 낮았고 겸양의 
마음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천계의 반역자로서 관음보살의 부드러운 꽃가지에 
발목이 잡혀 사로잡히기까지 갖은 광기를 발산하고야 말았다.
  인간도 손오공처럼 영구히 반역한다. 하늘로부터 어떤 결계가 내려 정복될 때까지 
그들의 마음에는 평화와 겸양의 생각은 일지 않을 것이다.
  과학이 우주의 한계를 탐구할 때까지는 인간은 참된 겸양의 가르침을 받지 못할 
것이다. 손오공은 석가여래와의 최후의 대결에서 패배한 후 비로소 겸양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자만과 지나친 장난은 그치지 않을지라도 사랑의 마음을 품고 있는 
존재,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
  인간성이란 약점과 결점 투성이지만 손오공처럼 귀엽고 순수로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강제이든 아니든 간에 겸양이란 모습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잡기 위해서는 분명 겸양의 발길을 떼어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마음의 숲으로 돌아가라

  그렇다. 인간의 분명 원숭이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어졌다. 인간이 완전한 신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개미와 인간의 차이만큼이나 분명하다.
  인간은 지극히 영리한 동물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이 영리함을 뽐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이란 생각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련의 동물적 본능이 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해서, 개인적이나 집단적인 생활을 하면서 나타나는 각종 불미스러운 일은 
이에 연유하곤 한다.
  인간이 자랑하는 생각하는 능력의 자부심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지구를 
파괴할 만큼의 위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힘은 너무나도 불완전하다.
  위험에 대처하고 예비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모든 생명체들이 갖고 있는 능력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모든 생명체들이 갖고 있는 능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벨푸어 경은 '인간의 두뇌는 돼지의 코와 마찬가지로 먹이를 찾는 
기관일 뿐이다'라고 극언하였던 것이다.

  진실로 우리의 조상들은 물에서 헤엄치기도 하고, 정글 속에서 이 가지 저 가지로 
뛰어다녔으며 팔이나 꼬리로 나무에 매달려 다녔다.
  그들의 진화는 너무나도 쾌속하고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이제는 너무나 진보하여 
스스로 건설한 문명의 발전 속도를 늦추어야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인간이 문명을 만들어내자 그 성과는 만물을 창조한 신까지도 당황할 정도가 
되었다.
  자연계의 온갖 생물은 놀라우리만큼 완전하게 환경에 적응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멸종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도 자신들이 창조한 문명에 현명하게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은 본능은 훌륭하고 건전하고 건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는 
그것을 야만으로 치부하는 기이한 경향이 있다.

  어떤 쥐를 막론하고 쥐들은 광에서 쌀을 훔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은 쥐가 
부도덕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 고양이가 밤에 집에 돌아오지 않거나,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다고 해서 
흉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말은 위험을 느끼면 도망친다.
  그러나 이것을 오늘날의 문명이란 용어로 표현한다면 쥐는 다 도둑놈이고, 개는 
시끄러운 존재이며, 고양이는 야만족이다.
  사자나 호랑이는 살인자이고 말은 겁쟁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발상인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인간이 영리한 존재라면 저물어 가는 생명의 태양을 다시 산 위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 지극한 발상으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떠올려야만 한다.
  잘못된 문명을 사수해야 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신은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들의 정신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과 어울려야 한다. 문명과 어울려야 한다. 모든 것을 창조할 줄 아는 
인간들이기에 또 그렇게 후퇴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이 부정할 수 없는 두 가지 정의가 있다.
  첫째,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둘째, 위장과 억센 근육과 호기심이 있다.

  이것은 자명한 진실이다. 이것을 부정하고서는 인간과 그가 만들어낸 문명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왕이든 거지든 그들에게는 주어진 육체와 수명이 있다. 
  그로 인하여 모든 노래와 철학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사실 그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가 나를 낳는 이치와 같다. 그것만으로 완전하다는 기분이 든다.
  속담에 '만석지기 땅이 있을지라도 다섯 척 평상에서 잔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 면에 있어서는 제왕 부럽지 않은 것이다.
  또 수명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무소불위의 진시황제도 주어진 삶 외에 달리 사는 
도리는 없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손님일 뿐이다. 누구나 이 지상의 나그네로서 씨를 뿌려 수확을 
거두는 농부가 될 수 있고 땅의 소유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주라든지 주인이라든지 하며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은 참으로 
괘씸하다. 세상에는 진정으로 집을 소유하는 사람도 없고 논밭을 소유하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시인 은 이렇게 읊었다.

  황금 같은 산기슭의 옥토여!
  새로 온 자 남이 가꾼 곡식을 거둔다. 
  그러나 기뻐하지 말라. 새로 온 자여.
  그대 뒤에서, 또 남이 기다린다.

  우리들은 죽음의 평등을 즐겨야만 한다. 죽음이 없다면 나폴레옹에게 있어 세인트 
헬레나 섬조차도 시시한 곳이 될 것이며, 유럽의 번영된 오늘은 상상할 수 없게 
된다. 하물며 영웅이며 정복자가 어찌 존재할 것인가.
  우리는 위인이나 영웅들을 관대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들처럼 위대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황혼녘의 강에 조각배를 띄우고, 흘러가는 그 배 안에서 꾸는 꿈에 
불과하다.
  꽃은 피었다 지고 달은 차다 기울며, 인간의 목숨도 고고성과 함께 시작되어 
세월에 따라 성장하다가 결국에는 뒷사람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간다.
  이런 반복은 자연의 영원한 이치에 다름 아니다. 이런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들은 
노래부를 수 없다. 애상에 젖을 수도 없으며 꿈을 꿀 수조차 없다.
  
    우리들은 연극배우이다

  중국의 철학자 유대성은 인간의 삶을 연극과도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기실 
엉뚱한 야망이 그 진실을 왜곡하여 바라보게 할뿐이다.
  다음은 편지는 그가 친구에게 보낸 글로써 인간의 참 삶에 대한 그의 식견이 
절절하게 우러나 있는 글이다. 

  '모든 것들 중에서 우리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관리가 되려는 욕구이다. 그리고 
가장 시시하게 여기는 것은 연극배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모두 어리석다. 무대의 배우들이 저마다 현실의 
인간이라고 믿으면서도 노래하고, 울고, 서로 욕하고, 농담하는 장면을 나는 본적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연출되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인물로 
분장하는 배우 자신들의 것이다. 
  그들은 모두 부모와 처자가 있으며, 그들을 부양하고 싶어한다. 그 때문에 웃고 
욕하고 농담하면서 그 양식을 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자기들이 분장하려는 
진짜 무대의 인물인 것이다. 
  배우들 중에는 관복을 입고 관리의 모자를 쓰면 자기가 진짜로 관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연극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연기를 하는 동안 굽신거리고, 조아리고, 자리에 앉고, 이야기하고, 주위를 
응시하며, 아니 엄숙한 관리로 분장하고 그 앞에 죄인들이 떨고 있을 때조차, 자신이 
노래하고 울고 웃고 욕하고 농담을 해서 부모의 처자를 부양해야만 하는 하찮은 
배우에 불과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정말 자신의 창자와 본능적인 감정이 모조리 연극에 지배당할 때까지 자신의 실은 
배우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어떤 연극, 어떤 배역, 어떤 대본, 어떤 대사의 
억양이나 형태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다.'
  
    왜 먹어야 하는가

  인간이 동물임을 입증하는 가장 중대한 사실 중의 하나는 위장이라는 밑 빠진 
독이 있다는 것이다. 
  쾌락주의 이립옹은 그의 저서 "식물편"의 머리말에서 인간에게 이 위장이 있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하고 있다. 

  '인체의 여러 기관, 귀, 눈, 코, 혀, 곤, 발, 몸통 등이 각기 필요한 기능이 있음은 
익히 아는 바이다.
  그런데 우리 몸에는 아무 필요도 없이 부여된 두 가지 기관이 있다. 그것은 입과 
위장이다. 입과 위장이 있으므로 해서 인류는 탄생 이래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것이다.
  이 입이 있고 이 위가 있으므로 먹어야 한다는 복잡한 문제가 새겼으며 인간 
세상에 교활과 거짓과 위선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교활과 거짓과 위선이 나타나면 
이를 다스릴 형법이 생겨난다. 그러면 왕은 어진 정치를 펴서 백성을 감싸줄 수가 
없게 되며, 부모는 사랑을 베풀 수 없게 되고 만다. 
  이것은 인간을 만든 조물주의 선견지명이 모자란 결과이다. 왜 인간에게 입과 
위장을 주었는가?
  식물은 입과 위가 없어도 살 수 있고, 바위나 흙은 아무런 영양이 없어도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왜 입과 위라는 두 기관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꼭 필요한 것이라면 왜 물고기나 조개가 물에서 양분을 취하고 귀뚜라미나 매미가 
이슬에서 취하듯 해주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은 다 이슬이나 물로 성장해서 정력을 얻고 헤엄치고 날고 뛰며 울고 있지 
않는가. 만일 그랬다면 인간은 허덕이는 일도 없을 것이고 슬픔도 없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물주는 인간에게 식욕이라는 욕망까지 주었다. 때문에 
우리들의 커다란 독은 밑 빠진 것이라기보다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은 골짜기나 
바다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이 두 기관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충분치는 
않으나 다른 모든 기관이 있는 힘을 다해서 일을 해야 하게 되었다.
  나는 이 문제를 거듭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조물주를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도 이 사실에 대해서 후회했으리라 확신해마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설계나 견본이 모두 완성되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저것 비교해 생각해 보면 법률이나 제도를 제정할 때는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 위장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과소평가한다고 해도, 
먹거리에 대한 욕망은 식욕과 성욕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용케 성욕을 극복한 
사람은 많지만 식욕을 극복한 사람은 없었다.
  어떤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은 성자라 할지라도 음식을 거르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인간성에 대하여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다툼이나 언쟁이 재판소가 
아닌 식당에서 해결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 때문이다.
  성공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식사의 효과를 알아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하나의 
욕망의 입구이면서 출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상 생활의 면에서 좀더 확장시켜 말한다면, 혁명이나 평화, 전쟁, 
애국심, 국제적 분쟁의 조정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가지고 있다.
  저 유명한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의 주요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루소나 볼데르, 톨스토이가 아니라 먹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일찍이 '군대는 위장으로 싸운다'라고 부르짓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식욕이 충족되면 정신은 맑아지고 성욕이 생기며 문화를 그리워하게 된다.
  향수니 뭐니 하는 것도 기실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에 먹었던 맛난 음식에 대한 
추억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풀을 씹는 사람이 되라

  나는 현재의 인류에서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의 두 모습을 보고 있다. 본능적인 
투쟁의 기질과 다정한 기질 말이다.
  초식 동물적인 사람은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내지만 육식 동물의 
기질을 가진 사람은 남의 생활에 참견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권투나 통나무 굴리기, 줄다리기를 즐겨하며, 사람을 배신하거나 기선을 
제압하는 일에서 절대적인 기쁨을 느낀다.
  이런 것들은 물론 진정한 흥미와 실력이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기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본능이다. 전투적인 사람은 그런 본능을 향락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동시에 
참된 창조적인 재능, 즉 자신의 일을 하고 자신의 문제를 깨닫는 재능에서는 그리 
두각을 보이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고상한 선비들과 교수들이 경쟁의 무대에서 소외되어 있는가. 하지만 
그 사람들은 진실로 예찬받을 자격이 있다.
  세계의 모든 창조적인 예술가들은 남의 일에 참견하기보다는
  자신의 일을 생각하고 고양시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즉 초식 동물적인 
것이다. 
  인류의 참된 진보는 먹는 본능을 가진 존재이면서도 초식 동물적인 인간을 많이 
길러내는 일이다. 물론 현재는 육식 동물들의 지배하에 있음은 분명하다. 강인한 
근육을 신봉하는 저차원의 세계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들은 자연스런 식욕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긍정과 
부정을 잉태하는 시작인 까닭이다.
  
    오직 인생만을 사랑하라 

  흔히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우주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고상하고 빛나는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예로써 상대성 이론을 창시한 아인슈타인이라든지 축음기를 발명한 에디슨, 
멀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이르기까지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정신이란 고상하기보다는 애교가 있다고 하는 편이 낫다.
  만일 보통 사람들의 정신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만들어져서 죄도 약점도 하나 없는 
존재가 되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시시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노변에 구르는 자갈만큼이나 멋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불합리성도 있고 모순도 있으며, 축제일에는 취하여 이리저리 
쏘다니고, 편견과 옹고집으로 똘똘 뭉쳐 있으며, 게다가 건망증까지도 있다. 한데 
인간의 재미는 바로 이런 점에 있지 않을까?
  만일 두뇌가 완전하다면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새로운 결심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해의 마지막 날에 일년을 회고해 보면 실행한 것과 못한 것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인간 생활의 장점이다. 전체가 완벽하게 계획대로 실행되고 
이루어진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질 것이 뻔한 게임을 벌이는 사람은 없다. 또 소설을 읽을 때 그 결론을 알면서 
읽는 것처럼 맥빠지는 경우는 없다. 
  인간 정신의 매력이란 거기에 불합리성이 있고, 구제하기 힘든 편견이 있고 
변덕스러움과 예측 불가능의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정신 속에 아직도 
원숭이와 같은 목적이 없는 암중모색의 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정신이란 본래 위험을 발견하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는 
기관이다. 이 정신이 마침내 논리학이나 정확한 수학의 방정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정신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음식물의 냄새를 
파악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문득 추상적인 방정식을 풀어낼 수도 있게 된 것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정신의 기능이 사고에 있다는 오해를 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대한 
편견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굉장한 의미를 두고 있는 것과 같은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정신은 현재와 같이 무엇인가 애교 있고 불합리한 편이 좋다.
  완전무결한 이성적 세계를 꿈꾸지 말라. 과학적인 진보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성인군자처럼 완벽함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오직 인생과의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을 믿지 않는다. 
  
    뜨겁게, 더욱 뜨겁게

  줄리어스 시저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 때문에 이성을 망각하고 자신의 영광과 
애써 차지한 로마 제국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선지자 모세는 시내 산에서 40일이나 기도하여 얻은 신성한 석판을 황금송아지를 
숭배하는 동족의 행위에 격분한 나머지 깨뜨려버렸다.
  공자는 손님이 오면 집에 없는 체했고 그가 돌아가려고 하면 그제서야 자신이 
집에 있음을 알리려고 2층에서 노래를 불렀다.
  괴테는 열 아홉 살 난 아들을 옆에 세우고 아내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과연 이런 위인들의 행동이 이성적이었던가?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우리는 그들의 행위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보다도 저열이다. 이는 뻔한 사실이 아닌가.
  그러므로 위에 열거한 위인들에게 사랑스런 인간성을 부연한 것은 그들의 이성이 
아니라 그들의 '이성의 결여'는 아니었을까.

  영국인들은 건전한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국민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윤리는 
별로 신통치는 않지만 위험을 발견하고 대처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를 관찰해 보면 실제 논리적인 모습은 별로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이 대학이나 헌법, 교회 등은 최초에는 실로 별볼일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다.
  위대한 대영제국의 힘은 기실 영국인들의 판단이 옳고 자신들의 능력만이 
최고라는 편협된 정신에서 초래된 것이다.
  만일 영국인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강렬한 자기 신뢰를 상실한다면 그 순간 
제국은 붕괴할 것이다. 자신에게 의혹을 품은 존재가 타인의 세계를 욕심내기는 
어려운 까닭이다.
  또 영국인들의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란 알고 극히 빈약하고 순진한 애정에 
불과하다. 그 결과 국왕은 국민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눈치껏 적당하게 
행동해야만 왕조를 가까스로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또 영국은 어느 시대에도 적당한 적에 대해 적당한 동맹국과 더불어 적당한 측에 
서서 적당히 전쟁을 해 왔다. 이러한 연기는 분명 논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감각이며 
정열이다.
  그러므로 나는 과학의 정복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다. 인간의 지능이 자연계나 인간 
관계 이외의 문제를 다룰 때의 능력이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적 문제를 
다루는 비판 정신이 어디까지 발전할지는 의문이다.
  개인으로서 인류는 고도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사회의 집단으로서는 여전히 
원시적 욕정에 사로잡혀 야만적인 본능을 때때로 노출한다. 그것은 또 광신과 
집단적 히스테리에 공격당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류는 자신들의 과거사를 좀더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 인간에게는 
동물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 또 동물에 아주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동물과 같은 
어느 정도 자제가 되지 않을까.
  우리들은 동물 우화나 수필, 즉 "이솝 우화" 초서의 "새들의 이해"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등을 읽으면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깨닫는다.
  이런 우화들은 이솝 시대에도 훌륭한 것이었지만 4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공감을 사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정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차가우며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철저하지 못하다. 
이성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여기에는 오직 중용적 사려분별만이 필요할 따름이다.
  그것은 온정에 불타고 정서가 풍부하며 직관적인 사고 방식으로, 인간을 그 
조상의 형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뿐이다.
  인간의 생활이 본능과 조화되도록 해야만이 인간은 구제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인간이 사상보다는 감각과 정서를 중시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고 믿는다.
  
    인간임을 자랑스러워하라 

  인간의 권위는 끊임없이 의심받고 있다. 그것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창조의 
힘보다 파괴의 정도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 자체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도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인간은 동물 중에서 
가장 경탄스러운 동물이라고 생각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론!'
  왜인가? 그것은 지구상의 생명체 중에서 문명을 만들어낸 존재는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동물 중에는 인간보다 나은 특징을 갖고 있는 종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강력한 근육을 가진 말이나, 화려한 갈기를 가진 사자, 예민한 후각과 
충성심을 갖춘 개, 날카로운 부리와 시력을 가진 독수리, 방향 감각이 유달리 예민한 
비둘기,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앵무새나 공작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여러 장점을 가진 동물들보다는 원숭이에게 남다른 호감을 
갖는다.
  하지만 이 원숭이보다 인간인 편이 낫다는 것은, 인간 속에 있는 원숭이의 
호기심과 영리함 때문이다.
  부지런함이나 조직적인 면으로 보면 개미가 인간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훈련된 
기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처럼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짓지는 못한다.
  만일 개미나 코끼리가 거대한 잠망경을 발명하거나 별을 관찰한다면, 혹은 
바다표범이 복잡한 미적분을 풀어낼 수 있고, 비버가 파나마 운하를 개통시킬 수 
있다면 나는 언제라도 그들에게 세계의 지배자나 창조자로서의 영광을 양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확실히 인간은 자신을 자랑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자랑만큼 
자신의 권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먼저 발견해야만 할 것 같다.
  그것을 나는 곧 유희적 호기심, 꿈꾸는 능력, 그 꿈을 고쳐가는 유머감각, 그리고 
행동의 변덕스러움과 자유분방함이라고 생각한다.
  이 네 가지를 합하면 이른바 미국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동양식으로 바꾸어 
놓은 꼴이 되는 것 같다.
  동양 문학에 묘사되어 있는 자유인의 모습, 그것이상으로 개인주의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릴 스는 없지 않겠는가?
  
    재미있게 살아가라 

  인간이 숱한 종들 중에서 놀랄만한 생명체로 발전할 수 있었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동기란 인간의 유희적 호기심이었다.
  인류 문명의 발달은 인간이 두 다리로 걷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때부터 비로소 두 손이 자유를 찾게 된 것이다. 자유로워진 두 손은 무엇을 
더듬고 의심하고 즐기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동물원에 가서 원숭이들의 모습을 살펴보라. 그들이 두 발로 자신들의 몸뚱이를 
지탱한 채 마주앉아 손으로 귀를 잡아당기고 털을 매만져 준다.
  그런 행위로부터 아인슈타인은 출발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과학적인 진실이 있다. 
  손의 자유는 인간에게 연장을 사용할 수 있게끔 하였으며, 수치심을 알게 하였고, 
여성을 예속하게 하였다. 
  또 언어의 발달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이 두 발로 
무엇인가를 찾아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을 찾아다녔을까? 그것은 곧 
만족감이며 쾌감이며 즐거움이었다.
  그렇다. 우리들은 사는 재미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본능이며 축복이다. 그것은 그 
누구도 찾아줄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이다. 
  아무 재미도 없이 호흡만으로 연명하는 삶은 곧 뇌사 상태의 식물인간과 다를 게 
없다. 삶인가 죽음인가는 뭔가를 추구하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두 발의 두 얼굴

  이간의 직립이란 대자연이 창조를 계획함에 있어서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동물들에게는 전혀 수치심을 발견할 수 없다. 한데 인간만이 두 다리로 
일어섬으로 해서 본래 신체의 뒷면이 있던 부분이 정면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 놀라운 사태와 더불어 주로 여성들에게 난처하고 불편한 일이 일어났다. 즉 
유산이 많아지고 월경이 불순해진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네 발 짐승이 순응하기에는 불편한 자세임에 분명하다. 그 
자세 때문에 여성의 기관은 오랫동안 비능률적인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것이 그렇지 
않은 남성들에 대한 예속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한편 이 무렵에는 남녀가 매일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호기심이 많고 놀이를 
좋아하는 동물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유스런 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색욕을 키워나갔다. 손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많은 오락들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직립 자세는 어린아이가 걷는 번을 배우는 데 곤란을 주었고 유아 기간을 길게 
만들었다.
  소나 코끼리의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설 수 있지만, 인간의 새끼는 같은 것을 
배우는 데만 2, 3년이 걸려E자. 또 살아가는 법을 스스로 깨우치는 데는 맙소사 
수십 년이 걸려도 모자랄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인간의 여자들은 힘센 남자에게 저항하지 않고 유혹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익혔다. 그녀들을 그런 생존 전략의 한 방편으로 언어를 보다 활발하고 다양하게 
발전시켰다.
  
    정신이여 반항하라

  두 발로 걸어다니는 인간의 새로운 자세는 그 정신으로 하여금 온갖 문제들, 또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회적 질환들을 자유롭게 유희적으로 탐구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호기심이었다. 이 호기심은 먹이를 찾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인간 정신의 작용일 뿐이었다. 그 행위 자체는 진실로 가치 
있는 인간의 학문과 학식이 갖는 특징이다. 즉 사물 자체에 갖추어진 재미이며, 있는 
그대로를 알고 싶어하는 한가한 유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경찰관을 싫어하고, 사상을 단속하려 드는 정부의 모든 기관과 
형식을 싫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인간의 예지를 모욕하고 있다. 사상의 
자유가 인간 정신의 최고 활동이라면 자유에 대한 압박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불명예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식견이 좁은 정치가나 종교인들은 신앙과 사상이 인간 세상의 평화나 질서에 
공헌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를 비추어보면 
언제나 인간을 짓누르는 압제가 되곤 했다. 
  그들은 인간의 외부적 행동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내부적 사상과 신앙을 지배하려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지독한 믿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획일성을 견디어 나가리라. 그들은 연화가 좋아지거나 싫어지거나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정부가 선전으로 문학을 혼란시키고, 정책으로 예술을 교란시키고, 
애국심으로 인류학을 교란시키고, 현존통치자에 대한 예배로서 종교를 혼란에 
빠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상을 단속하는 자가 인간성 그 자체에 
지나치게 위배되는 행위를 하면, 그 순간 그러한 시도는 몰락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천하에 인간의 사상을 훔치는 것보다 더 큰 도둑질은 없다.
  사상과 자유를 빼앗겨 버리면 사람은 다시 네 발로 기는 시대로 회귀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에게 도덕적 신앙과 종교적 신앙만큼 귀하고 소중하며 친근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믿는 것을, 또 믿을 권리를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자에 대한 증오만큼 큰 
것이 없다.
  인간에게는 반항심이 있으며 양심에는 억제하기 힘든 자유가 있음으로, 반드시 
싸워 일어서는 것이다.
  
    안데르센을 찾아가라

  세상 사람들은 불만을 신성한 것이라고들 말한다. 아무튼 불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듯싶다.
  불만이라는 생활의 권태로움에서 나온다, 요컨대 모든 철학은 이런 감각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이상에 대한 슬픔, 종잡을 수 없는 동경의 늪 속에 빠져 있는 
인간들.
  인간은 현세에 살면서도 또 다른 차원을 꿈꾼다. 하지만 인간은 지루해 하지만은 
않는다. 거기에 상상력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한 인간과 원숭이의 
차이점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현실이나 과거에서 탈피하고 싶어한다.
  누구든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외의 다른 무엇을 하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군대에서 하사는 중사를 꿈꾸고 상사는 장교를 꿈꾼다. 그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낮은 시선조차 흥겨워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의미에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인간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상력이 크면 클수록 불만의 키도 자라난다. 때문에 인간은 소처럼 
행복하고 만족해하기보다는 원숭이처럼 슬픈 듯한 표정을 짓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꿈꾸는 사람은 슬픔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 지극한 슬픔과 방황으로 인해 인간은 더 큰 황홀이나 감동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어린 시절의 꿈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듯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생 
동안 가슴에 남아 그의 진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다면 그 모델은 안데르센이 될 것이다. 
인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공상, 인어로서 육지의 왕자님을 만나 보고 
싶은 감정, 그런 마음으로 동화를 쓰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섬세하고 큰 기쁨이 되지 않겠는가.
  어린이들은 길거리에서나 다락방, 헛간이나 물가에 뒹굴면서도 항상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은 대개 이루어진다.
  토머스 에디슨이 그러하였으며 링컨이나 나폴레옹이 그러했다. 그러나 꿈이란 
분명 이런 유명인사들만의 경우는 아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환상과 내용은 
다르더라도 정도에 알맞은 기쁨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동경에 가득한 눈은 아침에 일어나면 대개 아쉬움으로 바뀌지만 그것이 
불행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생기발랄한 하루의 시작을 예고해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린이가 성장하고자 하는 자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인간에게나 현재와 다른 자기가 되고 싶다는 욕망,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든 변화를 주는 것이라면 대중의 심리를 가공할 
매력으로 끌어당기곤 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유토피아의 꿈, 영생 불사의 꿈과 같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지는 말기로 하자. 그것은 거꾸로 해석하면 정 반대의 자살 심리와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현실을 아름답게 보고 그에 걸맞는 꿈을 꾸라. 봄 햇살을 맞으며 멋진 자신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꿈을 꾼다는 것, 그런 생활은 참으로 행복하지 않겠는가?
  
    당신에겐 유머가 없다

  유머는 오늘날 쓰기에 따라 인간의 모든 문화 생활의 수준이나 성격을 변화시키는 
정치, 학문, 인생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나는 이를 의심한다. 유머는 기능은 그처럼 물리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어서 사상과 경험의 기본적 조직을 변질시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빌헬름 황제는 웃지 않았기 때문에 한 제국을 잃었다. 이것을 미국식으로 
표현하면 독일 국민은 빌헬름 황제가 웃지 않았기 때문에 수십억 달러를 탕진한 
셈이다.
  물론 그도 사생활에서는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웃음을 던진 대상이 
누구였느냐 하는 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의 웃음은 승리와 성공의 웃음, 군림의 웃음이었다. 그는 언제 웃어야 할지 
무엇을 보고 웃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했던 것이다. 
  이처럼 기묘하게도 유능하고 영리하며 야심만만한 사람들은 동시에 가장 
겁쟁이이며 얼간이들이다.
  그들은 유머리스트로서의 용기와 깊이와 명민성이 모자랐다.
  단지 시시한 문제만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했을 뿐이다. 
  진정한 유머리스트들은 보다 넓은 정신의 힘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가령 
외교관에 비위나 맞추고 굽신거리는 사람을 임명한다면 그는 분명 실패하고 말 
것이다. 외교관의 유머는 전쟁조차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머는 하나의 굳은 사고를 풀어주는 작용이다.
  인류의 이상 세계는 합리적인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 불완전성으로도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최선의 방법일는지도 모른다. 
  유머에는 사고의 소박성, 철학의 쾌활함 등이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이런 도구로 
만들어진 세계를 사람들은 쉽게 꿈꾸지 못한다.
  현실이 너무나도 혼란스럽고 학문은 진지하며 철학은 음울하고 사상조차 너무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세상을 유머러스한 행복한 
삶보다는 투쟁하여 이겨내 가야만 하는 전장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활과 사상의 단순성은 문명과 문화에 대한 최선과 최고의 
시상이라는 것, 문명이 단순성을 상실하고 난해한 이론이 순수한 본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문명이란 하층 고달프고 퇴폐적으로 변해가리란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야심과 사회 조직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한데 이런 모든 개념과 사상을 초월하여 미소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유머이다. 유머리스트는 프로 골퍼가 유연하게 스윙을 하듯 숙련된 
여유와 확실성으로 그 문제를 풀어낸다.
  결국 자신의 사상을 소탈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사상의 주인공이다. 
그런 사람만이 사상에 예속되지 않는 진실성을 찾게 될 것이다. 진실성이란 곧 
노력이다. 
  노력이란 여전히 숙달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다. 때문에 졸부들은 돈 쓰기를 
어색해 하고, 진지한 작가도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아직 자신의 
사상에서 여유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석으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대학강사의 강의는 대체로 난해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숙련된 노교수들의 강의는 단순하면서 소탈하고 나름의 깊이와 여우를 
가지고 있다. 
  전문적인 세계에서 한 경계를 넘어 단순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 그 단순함이 곧 
성숙인 것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우리들의 사상은 점점 더 명료해지고, 우리를 불안에 빠뜨리는 
실수는 적어진다.
  관념은 더욱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되고, 장황한 사상의 연속은 차츰 간편하게 
정리된다. 따라서 비로소 예지라고 불리는 절대 진리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깨달음의 진리.

  유머리스트는 어떤 복잡한 문제일지라도 단순하게 만들어낸다. 그들은 번갯불처럼 
상식이나 기지의 번득임을 마음대로 구사한다. 그들은 현실 속에 있으므로 탄력성이 
있으며, 경쾌하고 섬세한 묘미를 갖추고 있다. 온갖 형태의 자세, 허위, 현학적 
난센스, 아카데믹한 어리석음, 사회적 허식을 슬쩍 요령 있게 쫓겨나고 만다.
  생각하는 바가 섬세해지고 기지를 이해하게 되므로 자연히 현인의 품격을 갖추게 
된다. 모두가 단순하고 모두가 명료하다. 유머러스한 사고방식,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더욱 건전하고 분별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개인 역시도 그런 유머의 
세계로 발전해야만 된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나그네이다. 

  자유인, 집 없는 선비.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찬미하곤 한다.
  왜인가? 사람은 어떤 사슬에 묶여 끌려 다니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오늘날 유럽의 개인주의적 전통이 시간이 갈수록 잊혀지고 동양의 
인간적인 사고방식이 각광을 받게 된 이유에 대한 해답일는지도 모른다.
  모든 종류의 집산주의가 발흥하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는 인간이 인간적 반항성을 
잊어 그것을 상실하고, 개인의 위엄을 잃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모든 형태의 인간적 사고를 압도하는 경제 문제와 경제 사상이 버티고 
있으므로, 개인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인간미가 담긴 지식, 인간미 넘치는 철학 
따위에 대하여 우리는 무지하고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위궤양 환자가 언제나 위에 대한 것만 생각하듯이, 경제적으로 
문제성이 있는 사회는 언제나 경제만 생각하고 있다.
  그 결과 개인이란 전혀 무관심한 존재가 되고, 자기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가 되어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인간다움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은 자동인형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인간이란 존재보다는 톱니바퀴의 톱니 하나로서, 조합이나 계급의 
일원으로서 또 소시민의 일원으로서, 자본가로서, 노동자로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인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환경에 맞서 대담하게 싸우는 
소질조차 흔적이 묘연해지고 말았다.
  개성 대신 맹목적인 힘이 있고, 개인 대신 인간의 활동 일체를 제약하고 예시하는 
사상만이 있다. 결국 모두가 개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이 과학에 기울어지면서 집단화되고 개인은 수학의 방정식처럼 갈아치울 수 
있는 숫자가 되어버린 지금에도 외계에 대한 개개인의 반응력은 물질적 환경과 
마찬가지로 생명 발전의 중요한 요인이다.
  그것은 마치 현명한 의사가 환자의 기질과 개인적 반응이 투병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론적으로 회생이 불가능한 
환자가 순식간에 완쾌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두 명의 환자에 대하여 똑같은 치료를 한 다음 동일한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의사가 있다면 일종의 사회적 위협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의사에 못지않게 사회를 위협하는 것은 개인을 잊고 저마다 다른 반응력을 
잊고 자유분방한 인간의 행동을 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범주에서 인간 정신의 자유로움을 긍정하고 지향해야 한다. 
그것은 살맛 나는 인생을 위한 필수 요건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오늘날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제도와 사상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경우든 간에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진 개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개인이란 생명의 궁극적인 실체이다. 그러므로 철학조차 개인에서 시작되어 
개인에서 끝난다.
  개인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것은 인간 정신이 다른 것을 창조하게끔 하는 
수단이 결코 아니다. 어떤 제도나 사상, 제국이나 법이란 것까지도 개개인의 
나름대로 행복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부류의 인간들은 거꾸로 인간이 한 국가나 제도를 위해 생활하는 
존재라고 고집하고 있다.
  그런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은 병적으로 그릇된 정신의 산물임은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

  이러한 문제를 인간 문화의 면에서 바라보자.
  나는 온갖 형태의 문화에 대하여 최종적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 문화가 
빚어내는 남녀의 타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월트 휘트먼은 모든 문명의 최종 목표로써 개성주의를 밝히고자 
노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한 나라의 시가와 미학 등이 무엇 때문에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주로 그것들이 
그 나라의 여성과 남성에 대해 개성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재료와 암시를 주고, 
무수히 유효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역설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개성에 대해 궁극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이 가장 건전한 마음일 때 의식 있고 뚜렷하게 높은 사상이 있다. 일체 
의지하지 않고 홀로 있으며 별처럼 조용하게 영원히 빛나는데, 이것이야말로 
본체론의 사상이다.
  네가 누구건 네 것은 네 것, 내가 누구건 내 것은 나의 것.
  그것은 언어를 초월한 기적 중의 기적이며 지상의 꿈 중에서 가장 심령적이며 
막막하고, 게다가 가장 엄연한 기초적 사실이다.
  온갖 진리로 통하는 문이 그 경건한 황홀 속에 있다. 우리가 거기에 심취하고 그 
경이를 받아들인다면 대체 그보다 깊고 깊은 게 무엇이란 말인가.
  천지의 중추에 내가 앉았거늘. 옛부터 내려온 신조나 전통도 모조리 힘을 잃고, 이 
간단한 자아의 관념 앞에서는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만다.
  환상이 진실로 빛나는 곳에 자아의 사상은 홀로 존재하여 광채를 발한다. 그는 
이야기 속의 난쟁이처럼 한번 자유를 얻어 지상을 떠나면 천지에 퍼지고 천상에까지 
이른다.'

  결국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간혹 신문의 부고란을 보면 같은 시대 같은 날에 죽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본다. 즉 같은 환경 속에서 그처럼 많은 변화로운 삶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열성적이고 확신을 가진 직업에 종사하며 행복을 발견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고생했지만 어떤 목표를 앞두고 좌절하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일을 가다가 지나가는 자동차에 치여 졸지에 세상을 하직하기도 
한다.
  진실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 생활을 고도로 발달한 산업시대에서도 어이없을 
정도로 기묘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동안에는 이런 갖가지 양상에 부딪친다. 이것이 
한편으로 보면 바로 인생의 묘미인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생각하는 사람들의 최고의 화두는 어떻게 인생을 즐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완전주의가 아니다. 알 수 없는 의혹을 풀어내기 위한 집착도 아니다. 
'단지 우리들의 인생을 직시하고 평화롭게 일하며 의연하게 참으며 유쾌하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일 뿐이다.
  우리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이것은 최초의 질문이면서 몹시 곤란한 질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밖에 대답할 수가 없다.
  일상 생활에 분주한 우리들의 자아는 결코 진실한 본연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을 찾는다면 뭔가 모자란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뭔가를 분주하게 찾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어떤 현자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저 사람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맞춰 보거라.'

  하지만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을 아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과 신일 뿐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대답은 듣지 않아도 틀린 말이다. 물론 현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사람은 뭔가 몹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오.'

  이 말이 지당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생활도 현자가 들어준 예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바삐 살아가면서 참된 자신을 잃어버리곤 한다.
  그것은 마치 사마귀를 노리는 새가 독수리를 보지 못하고, 사마귀 또한 여치를 
노리느라 새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노자가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듯이 맹자는 
장자와 동시대에 살았다. 맹자와 장자는 각기 다른 스승으로부터 배웠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일치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이란 그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위인이란 그 어릴 때의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문명의 기교적 생활이 인간의 출생부터의 천진함에 끼치는 영향을, 산의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맹자가 말하기를 우산의 나무가 전에는 아름다웠다. 그런데 마을 근처에 있어서 
도끼에 찍혀 고이 자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밤과 낮이 숲을 쉬도록 해주고 비와 이슬이 거름을 주어 그루터기에 싹이 
돋아나지만 소와 양을 방목하자 다시 벌거숭이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벌거숭이산을 보며 우산에는 큰 나무가 없었던 줄로 알지만 그게 
어찌 산의 본모습이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난 자 어찌 본디 인의의 마음이 없었으랴. 그 양심을 잃음이 또한 
도끼로 나무를 찍음과 같은 것이다.
  날마다 이를 찍어내면 양심이 밤낮으로 되살아나고 새벽공기에 소생하나, 인의를 
좋아하고 불의를 미워함이 남과 같지 못함은 낮에 하는 행위가 또 이것을 어지럽혀 
잃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고난 본성을 쉬지 않고 도끼질하면 밤 동안의 휴식과 건강의 회복 또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밤사이의 휴식이 전혀 효험이 없으면, 그 인간은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람들이 그 짐승 같음을 보고 본디 인의의 재질이 없는 줄로 알지만, 이것이 
어찌 인간의 본성이겠는가.
  그러므로 만물이 자랄 만한 힘을 얻으면 반드시 자라고, 그 힘을 잃으면 반드시 
소멸된다. 공자가 '꼭 잡아 지키면 남아 있고 방치하면 없어진다. 드나듦이 일정치 
않고 머물러 있는 일정한 장소를 알 수 없다.'고 한 것도 바로 이 마음을 가리킨 
것이다.
  
    2

  무엇을 보고자 하면서 걷는 나그네들은 
  실상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아무 것도 보지 않고 걷는 나그네만이
  실제로 많은 것을 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온전한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언제나 강하지 
않는 법이다.--칼 힐티
  
    창 밖의 새소리를 들으라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먹고, 자고, 친구들과 만났다가 헤어지고, 울고, 웃고, 
이발하고, 목욕하고, 화초에 물을 주는 등의 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단순한 
현상에 대하여 현학적인 장광설을 편다면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다 철학적 완성의 대부분은 깊은 
밤, 혹은 새벽녘의 침대에서 떠오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싶다.
  잠을 자는 데도 방법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편안한 자세는 '잠잘 때 시체같이 않도록 하라.' 는 공자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
  이 말은 곧 시체처럼 반듯하게 눕지 말고 항상 좌우 한 쪽을 아래쪽으로 기울여 
웅크리고 자라는 것이다.
  잠자리에 누워 있다는 것, 그것은 인생의 커다란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잔다는 것은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동시에 잔다는 말과 일치한다.
  여기에서 육체적이라는 것은 휴식과 안정과 명상에 가장 적합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다. 곧 바깥 세상과 동떨어져 완전히 자기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낮에 만난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 수다를 떨던 친구들, 충고하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로부터 녹초가 된 뒤에 취하는 최고의 휴식이 곧 잠이다.

  그런데 이런 완전한 휴식에서 좀더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심야 1시든지 새벽 6시든지 관계없이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이불 속에서 
홀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거추장스런 옷에서 해방되어 완전히 육체적인 자유를 얻은 그때야말로 정신도 
함께 해방되어 있을 때이다.
  그와 같은 편안한 상태라면 어제의 성과와 실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오늘의 
계획 중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노예처럼 출근하거나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할 일에 대하여 완전하게 파악하고 나서 10시쯤 사무실에 나타나는 것이 훨씬 낫다.

  잠자리에서 한 시간 정도 조용히 있는 다는 것은 사색가나 발명가, 사상가에 
이르기까지 매우 큰 효과가 있다.
  글쓰는 사람은 아침부터 밤까지 책상 앞에서 무얼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잠자리에 잠시라도 누워 있는 편이 그 주제의 방향을 포착하기에 용이하리라 
믿는다.
  그 시간에는 전화라든지, 선의의 방문객, 일상사의 자질구레한 번거로움에 
관계없이 자신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다.
  그때 눈에 비쳐드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인생이 아니라 깊은 영감으로 그려진 
그림처럼 현실을 초월한 참된 회상이다.
  모름지기 누워서 아침에 누운 채로 창 밖의 새소리를 들어 보라. 그것을 얼마나 
감미로운 영혼의 아늑함인가.
  
    누구와 이야기할 것인가 

  옛날 어떤 현인은 친구와 대화를 나눈 뒤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는 하룻밤은 내가 10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네.'

  그렇다. 사랑하는 친구와 밤을 새워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인생의 더없는 
기쁨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참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눌 상대를 
만나는 것처럼 행복할 때는 없다.
  그것은 천문학자가 새로운 별을 발견하고, 식물학자가 새로운 변종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과 대동소이할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 이런 대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음이 적이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어쩌면 왕래가 잦던 가정이 닫힌 아파트 생활로 바뀐 것이 도화선이고, 
빨리 달려야만 하는 자동차가 그 파괴를 완성시킨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저 나누는 이야기와 느낌이 있는 대화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느낌이 있는 
대화란 소탈하고 한적한 맛이 있으며 결코 사무적인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기쁨으로 밤을 새울 수가 있다. 우리는 옛 친구와의 유쾌한 
재회, 추억을 이야기하는 친구, 출장길의 여관에서 종종 그런 기쁨을 발견하곤 한다.
  이야기하기 가장 좋은 때는 물론 밤이다. 낮의 대화는 어쩐지 매력이 없을 것만 
같다.
  장소는 어디라도 상관이 없다. 프랑스 풍의 카페에서는 문학이나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또 오후의 햇볕이 드는 농원에서 옛사랑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불빛이 
비치는 호수에서 뱃사공과 함께 어떤 전설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다.
  참으로 담화의 참 맛은 그 환경과 상대는 바뀌는 데 있다.
  어떤 때는 진달래가 필 무렵의 달밤이었고, 어떤 때는 벽난로가 벌겋게 달아오른 
해변의 방갈로, 또 바닷가에 가득한 쪽배들을 기억해 내기도 한다.
  그런 정경은 당시 누군가와 나눈 이야기들을 기억해 내기 쉽게 만들어준다.
  정말로 좋은 이야기는 언제나 친근한 수필과도 같다. 그리하여 친숙한 사람까지 
만나면 아무리 엄숙한 주제라도 편하고 한가롭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나눌 때는 편안한 기분이어야 한다. 
  친구끼리라면 한 사람은 옆 테이블에 두 다리를 걸치고 누워 있으며, 한 사람은 
창턱에 앉아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방바닥에 비스듬히 베개를 끌고 누워 있다.
  이렇듯 몸이 편안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위를 둘러보면 그 모습은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다.
  '둘러보니 흉금을 털어놓는 친구들뿐. 주위에는 눈에 거슬리는 놈이 하나도 없다.'

  이와 같은 열린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인생의 또 다른 행복이며,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이다.
  "수호전"을 쓴 시내암 역시 그런 행복을 느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수호전"서문에 친구와 담화를 하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유쾌한 문장으로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친구가 다 내 집에 모이면 열 여섯 명인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이는 일은 
좀처럼 드물다. 그러나 비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 아니라면 반드시 모두 
모여든다.
  평소에는 예닐곱쯤 집안에 모여 있지만 오자마자 생각에 잠기거나 하는 사람은 
없다. 마시고 싶어지면 마시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둔다. 즐거움을 술에 있지 않고 
담화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런 것은 성질이 다른 이야기이다. 또 
이렇듯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그런 주제는 소문일 경우가 많다.
  전해들은 소식은 풍설이며, 그것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우리는 또 세상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잘못이,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절대로 그들을 비방하지 않는다.
  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단지 우리들의 말을 사람들이 이해해 주기를 원하지만 아직 
그렇지는 못하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것들이므로 바쁜 세상 사람들은 
귀를 기울일 만한 여유가 없을 것이다.'
  
    느낌이 있는 만남

  인간의 문화와 행복이라는 면에서 볼 때 나는 담배와 술과 차의 발명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정과 사교와 한담을 즐기는 데 이만큼 직접적인 
효력을 지닌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모두가 만남에 소용이 된다는 점이다.
  둘째, 음식처럼 배가 부르지 않으므로 식사 중에도 즐길 수 있다.
  셋째, 후각을 자극시켜 코를 통해서도 즐길 수 있다.

  이런 담배와 술, 차를 즐기는 풍습은 한가롭게 우정이나 사교를 나누는 분위기가 
아니라면 결코 발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정을 알고, 심성이 
세심하면서 천성이 한가로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들을 즐기기 위해서는 적당한 상대가 있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꽃은 
어떤 인물과 어울리는 정감이 있다. 빗방울 소리는 한 여름 산사에서 듣는 것이 
제격이다. 또 어떤 경치는 그에 알맞은 여성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즉 사물의 기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물에는 저마다 정감이 있어서 적당한 
상태와 함께 하지 않으면 제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성격이 잘 맞는 친구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 온 정성을 기울여야만 한다.
  마치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유지하고자 애쓰고, 바둑의 고수가 천리가 멀다 않고 
적수를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분위기란 이처럼 중요하다. 함께 즐기고자 하는 친한 친구가 있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와 즐기고자 하는 종류가 다르면 그에 알맞은 친구를 선택해야 한다.
  학문과 사색을 즐기는 사람과 운동을 같이 하려 하거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을 
음악회에 초청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이다.
  
    차와 함께 나누는 마음 

  차를 즐기는 핵심은 그 색채와 향기와 풍미를 감상하는 것이며, 그 만드는 원칙은 
청순, 건조, 청결에 있다. 따라서 차를 마시는 데는 조용한 분위기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차에 대한 평론서인 "다소"에서는 차를 마실 때 어울리는 분위기를 
서술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도 손도 한가로울 때
  시를 잃고 난 후 피로할 때
  마음이 산란해졌을 때
  음악을 감상하고 있을 때
  노래가 끝났을 때
  휴일에 집에 있을 때
  그림을 감상할 때
  깊은 밤 대화를 나눌 때
  아름다운 벗이나 고운 애인과 함께 할 때
  소나기가 내릴 때
  잔치가 끝나고 손님이 돌아간 뒤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
  한적한 별장에 있을 때

  차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냉철한 머리로 세계를 관조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주위가 소란스럽거나 신통찮은 사람이 시중을 들거나 하면 맛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고 무심코 마셔 버리게 되고 만다. 그래서야 어찌 차의 참맛을 느낄 
수 있겠는가.
  함께 마시는 상대도 적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란스러워지고, 차의 고상한 
매력이 사라진다.
  그리하여 혼자서 차를 마시면 속세를 떠났다고 하며, 둘이서 마시면 한적하다고 
하고, 서너 명이 마시면 유쾌하다 하며, 대여섯이 마시면 저속하다고 하고, 예닐곱이 
마시면 비꼬는 말로 박애라고 한다.
  또 차를 마실 때 커다란 주전자에서 거듭 따르거나, 단숨에 꿀꺽 들이마시거나, 
식은 차를 데워 마시거나, 진한 차를 원하는 것은 심한 노동 끝에 배를 채우고자 
하는 농민이나 노동자의 기갈일 뿐이다. 거기에 무슨 차의 풍미가 있다고 할 것인가.
  그리하여 예로부터 다도에 정통한 사람은 깨끗한 심신을 갖춘 다음 손수 차를 
끓여내는 즐거움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다도처럼 까다로운 의례로 발달하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평온하고 
고상한 취미로 승화될 수 있다. 그것은 수박 씨를 깨무는 것처럼 차를 끓이는 
행위조차 차를 마시는 즐거움만큼의 만족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옛날 채양이란 사람은 늙어서 차를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손수 차를 
끓이고 그 내음을 맡은 즐거움을 가졌다.
  또 주문보라는 학자는 매일 여섯 차례씩 정해진 시간에 차를 끓여 마시고, 죽을 
때 자신의 관에 찻주전자를 넣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이렇듯 스스로의 정결한 
마음과 취미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차이지만 다음과 같은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도를 
갖춘다면 그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차는 순하여 냄새가 옮기 쉽다. 그러므로 술이나 진한 향이 나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둘째, 차는 시원하고 습기가 없는 곳에 보관해야 한다.
  셋째, 차의 맛은 물에 있다. 산의 샘물이 가장 좋고, 냇물, 우물물이 순이다. 혹 
논물이라도 방죽의 물이라면 본래 산간의 물이므로 괜찮다.
  넷째, 진귀한 찻잔을 감상할 때는 조용한 친구와 함께 한다.
  다섯째, 일반 차의 순수한 빛깔은 엷은 황금색이다. 검붉은 색깔의 차는 우유나 
레몬 등 향이 강하여 차의 맛을 지울 수 있을 만한 것을 넣어서 마셔야 한다.
  여섯째, 좋은 차에는 뒷맛이 있다. 그것을 마시고 나서 30초쯤 지났을 때, 차의 
성분이 침샘에서 작용하는 신간이 지난 뒤에 느껴지는 맛이다.
  일곱째, 차는 신선한 것을 끓여 곧 마셔야 한다. 그리고 한번 따를 뒤에 나머지도 
너무 오랫동안 두어서는 안 된다.
  여덟째, 차는 갓 길어온 물로 끓여야 한다.
  아홉째, 순수한 차에 다른 것을 넣는 것은 좋지 않다. 단지 사람에 따라서 약간의 
향료를 넣는 것은 괜찮다.
  열째, 최상의 차에서는 마치 갓난아이의 살갗처럼 미묘한 향이 있다.
  
    담배연기를 바라보라 

  담배가 금연가에게는 어느 정도 괴로움을 끼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개중에는 담배연기를 참아내는 사람들도 많다. 
  최근에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어떤 문제를 갖고 있다는 등의 비판적인 
목소리가 많이 들리고 있다. 
  그것이 애연가들에게는 어떤 약점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거꾸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처럼 떠벌이는 일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끽연 이 하나의 약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약점 하나조차 
없는 인간을 우리들은 경계해야만 한다. 약점이 없는 인간이란 도대체 신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토록 이성적인 인간은 싫어한다. 그들은 어떤 경우든 냉정하기 때문에 
쌀쌀맞은 것이 사실이 아닌가.
  재떨이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가 보면 그 분위기는 언제나 
딱딱하고 서먹서먹하다. 그처럼 지나칠 정도로 말끔한 집에서 인간미를 찾아볼 수가 
없다.
  허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실로 유쾌하지 않는 방문이 되기 
십상이다.
  이같이 엄격한 사람들, 감정이 없고 시적인 맛을 모르는 사람들은 담배의 도덕적 
이익과 정신적 품격을 결코 음미할 수 없다.

  우리 골초들이 공격당하는 것은 예술적 방면이 아니라 도덕적인 부분이다.
  그러므로 골초들이여, 당신의 예술적인 체취는 그대로 놓아두자. 다만 사소한 
도덕적인 공세를 받아넘기기 위해서 약간의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그것은 우리들이 담배를 피울 때 평상시보다 더욱 쾌활하고 사교적이며 소탈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말이다.
  골초였던 대커리는 이런 노력의 적극적인 실천자였다. 그는 담배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말했던 것이다.
  '파이프는 철학자의 입술에서 예지를 끌어내고, 어리석은 자의 입을 다물게 한다. 
파이프는 명상적이고 사려 깊으며 상냥하고 소탈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담배 피우는 사람의 손톱은 누렇게 그을려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만 
따스하다면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아무튼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명상적이고 사려 깊으며, 상냥하고 소탈한 자리를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그런 낙을 맞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비싼 
희생을 치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내 말의 요점은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은 항상 행복하며, 행복은 결국 
도덕적 가치의 최고라는 점이다. W.매긴은 이렇게 단언하지 않았던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중 자살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담배의 예술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는 우리 끽연가가 잠시 금연했을 때 무엇을 
잃어버리는가를 상상해 보면 금방 깨달을 수 있다.
  끽연가는 누구를 막론하고 니코틴 여사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자 하는 어리석고 
못난 경우를 경험한다. 하지만 그 공상적인 양심과 싸우다가 결국은 제정신으로 
돌아가고 만다.
  나도 그런 바보 같은 생각으로 몇 주간 담배를 끓었던 적이 있다. 한데 막바지에 
이르자 내 양심은 다시 정도를 찾아가라고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나 스스로를 얼마나 책망했는지 모른다.
  결국 나는 다시는 사도에 빠지지 않겠노라고 맹세하였다. 또 절대로 니코틴 
신전의 경건한 혈족임을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어떻게 취할 것인가

  술이란 다른 어느 것보다 문학적으로 위대한 공헌을 했다. 또 술은 담배와 함RP 
절묘한 파트너로서 인간의 창조적인 정신을 일깨워준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음주의 쾌감, 이른바 거나함이란 것은 신비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 여성이 
술취한 기분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저는 얼근한 기분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가 제일 좋고 행복하답니다.'

  사실 그런 기분일 때는 의기양양하여 어떤 장애라도 극복할 자신이 생긴다. 
감수성도 예민해지고 현실과 공상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는 듯한 예지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런 기분은 곧 해방감이다. 정신의 해방감, 육체의 해방감. 그리하여 그것은 예술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술을 욕심내는 마음은 당연하다. 사람이 어떤 감흥을 갖기 
위해서 술과 차를 마시는데, 이 두 가지는 가장 극적인 대비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가장 좋은 표현이 있다.
  '차는 세상을 버린 사람과 같고 술은 기마무사와도 같다. 술은 아름다운 우정을 
위해 있고, 차는 덕 있는 조용한 사람을 위해 있다.'

  중국의 한 작가는 음주에 알맞는 심경과 장소를 이렇게 분류해 놓았다.
  '엄격한 자리에서의 술은 유장하게 마시고,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은 
로맨틱하게 마셔라. 병자의 술은 소량이어야 하며, 슬픔의 술은 취할 정도로 마셔라.
  봄 술은 정원에서, 여름 술은 들판에서, 가을 술은 쪽배 위에서, 겨울 술은 집에 
틀어박혀서, 밤 술은 달빛 아래서 마시는 것이다 좋다.'
   
  또 다른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취하는 데는 때와 장소가 있다. 꽃의 색향과 조화되려면 햇볕 아래서 꽃을 대하고 
취해야 하며, 상념을 씻으려면 눈을 향해 취해야 한다.
  성공을 기뻐하여 취하는 사람은 그 기분에 화합하여 노래를 한 곡 불러야 하고, 
송별연에 임하여 취하는 사람은 이별의 저에 곁들여 한 곡의 음악을 연주하라.
  선비가 취하면 수치를 면하기 위해 행동을 삼가야 하며, 군인이 취하면 위용을 
높이기 위해 크게 술을 분부하여 위엄을 더해야 한다.
  누각 위에서의 잔치는 서늘한 기운을 이용하기 위해 여름이 좋으며, 강물 
위에서의 잔치는 의기양양한 자유 감회를 갖기 위해 가을이 좋다.'
  술에 대한 여러 가지 예의 범절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 비난할 점도 있다. 
반면에 칭찬할 점도 있다.
  비난할 점이라면 술을 억지로 권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쾌하고 허물없는 기분에서 
나오는 것으로 술자리의 활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시끌벅적한 흥취가 술맛을 나게 
한다.
  한데 이런 분위기에서는 자칫 술 많이 마시기 경쟁으로 치닫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최고의 술자리는 유쾌하고 신나게 마시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얼근하게 취하도록 
마시지 않는다면 술을 마시지 않는 것만 못하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도도한 즐거움을 갖지 말란 
법은 없다. 일자 무식이라도 시흥을 알고 기도를 하지 못해도 신앙이 있으며 술 한 
방울 못해도 함께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함께 임하는 사람들의 어울리고자 하는 마음일 뿐이다.
  
    배고프지 말라, 배부르지 말라

  청명한 아침 잠자리 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대체 이 세상에서 참으로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항상 나에게는 음식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의 판단으로는 집안에서 좋은 것을 먹느냐 먹지 못하느냐가 사람의 어질고 
악함을 아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현대의 생활은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는 까닭에 요리나 음식문제에 무신경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패스트푸드나 통조림으로 식사를 때우곤 하는 것이다.
  그것을 먹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먹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모습이 아닌가.
  남에게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기 전에 우선 자신에게 그렇게 대해야만 한다.
  아무리 일을 통하여 자부심을 얻고 세상에 어떤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몸에 번개처럼 밥을 밀어 넣는 행위는 이해할 수가 없다.
  옛날에 공자는 요리가 서툴다고 하여 아내와 이혼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요즈음의 아내들은 대부분 공자에게 이혼장을 받아든 상태가 아닐까 한다.

  공자의 식사에 대한 주문은 이랬다.
  '쌀은 아주 새하얀 것이어야 하고, 다진 고기는 잘디잘게 썰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는 조건에 부합되지 않았을 경우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이런 
까다로운 남편의 입맛에도 그 부인은 견뎌냈었다. 언젠가 그녀가 하루는 신선한 
재료가 떨어져서 아들을 시장에 보내 술과 얼린 고기를 사오게 했다. 한 끼니를 
인스턴트 식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자가 또 투정을 부렸다.
  '난 집에서 담근 술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가게에서 사온 고기도 먹지 않겠다.'
  이쯤 되면 어떤 부인이라도 도망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공자가 아내에게 가혹한 행동을 보인 증거는 "논어"의 '향당' 제10편 
가운데 남아 있다.
  음식은 사람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제 일의 처방이다. 그것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행동이 시작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병의 원인과 결과가 음식에 있다.
  중국의 옛 의학자인 손사막은 음식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참된 의사는 먼저 병의 원인을 찾아낸다. 그 다음에서 우선 음식물로 치료하려고 
한다. 이것이 실패하면 비로소 약의 처방을 쓴다.'

  원나라의 어떤 명의는 또 이러한 음식의 효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건강에 유의하는 사람은 적게 먹고, 걱정을 없애고, 욕망을 줄이고, 감정을 
억제하고, 체력에 주의하고, 말을 적게 하고, 성패를 경시하고, 슬픔과 고통에 
초연하고, 어리석은 야망을 몰아내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피하고, 시력과 
청력을 안정시키고, 내장의 섭생에 충실하라.
  정신을 고달프게 하고 영혼을 괴롭히는 일이 없다면 어찌 병이 생기겠는가. 
그러므로 심신을 수양하고자 하는 자는 배가 고플 때만 먹고 결코 배를 채워서는 안 
된다.
  또 갈증이 날 때만 물을 마시되 배불리 마셔서는 안 된다. 오랜 시간을 두고 
조금씩 먹어야 하고, 너무 많은 양을 쉴 새없이 먹어서는 안 된다.
  배부를 때에 약간 배고픔을 느끼고, 배고플 때에 약간 배부름을 느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배를 잔뜩 채우면 폐를 해치고 공복은 정력 활동을 방해한다.'
  
    마음속에 그리는 집 

  집이라는 말은 일체의 생활 조건, 즉 물질적인 환경 모두를 이르는 말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집을 선택할 때는 집의 내부 구조를 중시하지만 한편으로 집밖의 
전망이나 조건을 경시하지 않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커다란 저택을 가진 어떤 
부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집안에 작은 연못과 동산을 만들고 자랑하였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많은 서민들이 산기슭의 오두막에 살면서 산이나 냇물, 너른 
호수를 정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경치가 아름다운 고장에 작은 집을 짓고 산다면 소유가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담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집을 나서면 걸음을 떼어놓는 곳, 산 위의 흰 구름, 하늘을 나는 새들, 폭포수, 
아지랑이 등이 모두 자신의 것이 된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비하면 도시인들의 하늘은 얼마나 쓸쓸한가.
  그곳에 떠 있는 구름은 짝을 이룰 만한 산이 없다. 들도 없다. 그야말로 창백한 
공해의 가림막일 뿐이다,
  집이란 전원의 일부여야 한다. 집이 인공적인 냄새를 풍길 때 그것은 이미 집이 
아니다. 사람을 가두는 창고일 뿐이다.
  그리하여 중국의 한 작가는 자신이 꿈꾸는 사장 이상적인 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문 안에 길이 있다. 길을 구부러져 있어야만 한다. 길모퉁이에는 뜰과 낮은 
담장이 있다. 그 담장 뒤로 평평하고 높은 땅이 있다. 그 땅 양쪽의 높은 곳에는 
싱싱한 꽃이 있다. 꽃 저쪽에는 나직한 담이 있고 그 곁에는 늙은 소나무가 있다. 또 
그 아래 기이하고 가파른 정취의 바위가 받쳐 있어야 한다.
  바위 저쪽에는 아담한 정자가 있으며 그 뒤에 대나무가 드문드문 자라나 있다. 그 
대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집이 있다.
  집은 한적하고 고요해야만 한다. 집 옆에는 길이 두 세 줄기 갈라져 있다. 그 
길들이 모이는 곳에 손님이 건너고 싶은 다리가 있다.
  다리 옆에는 나무숲이 있다. 그것은 하늘을 찌를 정도의 위용을 과시한다. 숲 
그늘에는 푸르른 잡초가 자라고 그 위쪽으로 가는 도랑이 흐르는데, 그 도랑을 따라 
올라가면 물이 콸콸 솟는 샘이 나타난다.
  샘 위에는 산이 있다. 산은 깊은 계곡의 풍취가 풍긴다.
  그 산기슭에 반듯한 서원이 있고 그 곁에는 학이 춤추는 채마밭이 있다.
  손님이 오면 학은 주인에게 알린다. 주인은 손님에게 술을 권한다. 손님은 결코 
술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술잔을 거듭 비우는 사이에 취기가 돈다. 취객은 술이 
깨지 전에는 집에 돌아가서는 안 된다.'
  
    떠남, 그리고 버림

  옛날에는 여행이 수준 높은 놀이의 일종으로 대접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생활의 
양념쯤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 관광이 중요한 산업으로 시행되고 있고, 교통 수단의 발전으로 인하여 
현대인들은 선조들보다 여행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오늘날 사멸한 예술로 전락한 듯한 기분이 든다. 
왜일까?
  그것은 여행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여행의 참다운 방법이다 효험을 모른 채 사람들은 길을 떠난다. 그 때문에 여행의 
결과는 항상 아쉬움과 노곤한 몸만이 남는다. 여행이란 얻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다. 
버리기 위해 가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우선 잘못된 여행에 대하여 
알아본다면 보다 명확하게 다가올 것이다.

  여행의 목적으로 잘못된 것 중의 첫째는 정신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그렇게 쉽사리 향상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클럽의 모임이나 강연에서도 우리는 정신의 향상을 바라겠지만 실상 
그렇지 못하다.
  여행에 대한 이런 잘못된 생각이 여행 안내인이란 참을 수 없는 제도를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여행지의 어느 길모퉁이나 동상 앞에서 누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다는 등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나는 전에 묘지에서 수도원의 수녀들이 인솔하고 있는 학생 일행을 만난 일이 
있다. 그 일행이 어떤 묘비 앞에 서자 수녀는 학생들에게 묘지의 주인에 대한 
잡다한 강의를 늘어놓고 있었다. 여기에 어떤 성실한 여행자들은 고지식한 학생처럼 
열심히 메모를 하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여행의 잘못된 목적 두 번째는 후일의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위한 여행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기보다는 그곳에 서 있는 자신의 사진을 더욱 
중요시한다. 때문에 진정으로 가슴에 왕 닿는 감상보다는 정해진 프로그램에 의해 
더욱 많은 장소를 바쁘게 뛰어다니고 셔터를 눌러대곤 한다.
  이런 한심스러운 여행자들은 떠나기 전부터 완전한 일정표를 만들고 그것을 
철저하게 지킨다. 집에 있을 때도 시계와 달력에 묶이던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서도 
시계와 달력의 노예임을 자랑스러워하는 격이다.

  참된 여행이란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어야 한다. 잊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들은 생활하면서 많은 면에서 구속받는다. 체면도 지켜야 하고 예절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서는 그 누구도 알아보지 않는 보통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여행의 참된 동기일 것이다.
  참된 여행자에게는 언제나 방랑의 기쁨과 유혹과 모험심이 있다. 여행이란 곧 
방랑이다.
  방랑이 아닌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여행의 참뜻은 아무런 의무감 없이,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훌훌 털고 떠나가는 목적 없는 길이어야 한다.
  진짜 나그네는 방향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것이다.
  여행에서 어떤 감흥이나 소재를 얻으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목적을 
가질 때 당신은 먼 나라를 여행하거나 앞뜰에서 서성대거나 마찬가지가 되고 만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느끼는 마음과 무엇을 보는 눈을 갖추었느냐 아니냐인 
것이다. 이것이 없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시간과 돈의 낭비에 불과할 뿐이다.
  무엇을 보고자 하면서 걷는 많은 나그네들은 실상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아무 
것도 보지 않고 걷는 나그네만이 실제로 많은 것을 보는 것이다.
  아무 것도 보려하지 말고,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고 떠나야 한다. 그리하여 문득 
눈에 들어오는 신선한 감동과 만나야 하는 것이다.
  
    있는 대로 바라보라

  '꽃을 심음은 나비를 유혹하기 위함이고, 바위를 쌓음은 구름을 부르기 위함이며, 
소나무를 심음은 바람을 맞이하기 위함이다. 파초를 심음은 비를 기다리는 위함이고, 
버드나무를 심음은 매미를 초대하기 위함이다.'

  위의 말은 중국의 학자이며 문인이었던 장조의 말이다. 이처럼 사람은 새의 
지저귐을 나무와 함께 즐기고 귀뚜라미 소리를 바위와 함께 감상한다. 새는 나무 
그늘에서 노래하고, 귀뚜라미는 바위틈에서 운다.
  이렇듯 사람의 마음이 자연 속에 융화되면 동물이나 식물이 자유스러워야만 인간 
또한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가둠이 주는 어두움보다 열림이 주는 
밝음이 자연의 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정은 정판교가 아우에게 쓴 다음과 같은 편지에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나는 새를 새장에 넣어 길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덧붙이고 싶은 말은, 
새가 싫어서가 아니라 새를 사랑하는 데는 자연스런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새를 기르는 최상의 방법은 집 주위에 수백 그루의 나무를 심어 새의 왕국과 
가정이 나무 그늘에서 잘 보이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동이 틀 무렵 잠이 깨어 
침상 속에 누운 채 하늘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새들의 합창을 듣게 된다.
  침상에서 나와 옷을 입고 세수하고 이를 닦고 아침 차를 마실 때 화려한 새의 
날개가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것이 보여 그들을 맞기에 정신이 없다.
  한 마리의 새를 조롱에 넣고 바라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생활의 즐거움은 우주를 공원으로 보고, 호수나 내를 연못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생물은 다 저마다 자기의 특성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 기쁨이 오죽하겠는가!
  이 친절함과 저 냉혹함, 세상의 많은 즐거움 가운데 새를 새장에 넣고 물고기를 
병 속에 가두어놓은 채 즐기는 것과 나의 이 즐거움에 비교해 보라.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꽃처럼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꽃을 감상할 때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것은 그 향기이다. 꽃향기에는 
재스민처럼 강렬하고 뚜렷한 것들도 있고 라일락처럼 미묘한 것이 있다. 또 
난초처럼 더없이 맑고 고상한 내음을 가진 것도 있다. 그러나 꽃향기 중의 제일은 
역시 맑고 은은한 것이라 하겠다.
  두 번째로는 꽃의 빛깔과 모양의 아름다움이다. 이것 역시 천차만별한데 어떤 
것은 풍만한 처녀를 연상시키고, 어떤 것은 청초하고 풍취가 깊어 침착한 숙녀를 
연상시킨다.
  어떤 것은 그 미모로서 유혹하려 하고, 어떤 것은 교만에 겨워 스스로 만족하는 
듯한 몸매를 지녔다.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는가 하면 얌전하고 조심스런 심성을 
은은하게 표출하는 꽃도 있다. 이러한 꽃들은 우리에게 변화무쌍한 자연의 모습과 
계절을 연상시키곤 한다.
  장미는 화사한 봄날을, 연꽃은 시원한 여름날의 아침을 떠오르게 한다.
  물푸레나무는 가을의 달과 한가위를 보여주고, 국화는 늦가을에 먹는 꽃게를 
떠올린다. 매화는 흰 눈을 그리워하게 하고 그 곁에는 수선화가 함께 있어야만 한다.
  이처럼 어느 꽃이나 그에 어울리는 환경에 있어야만 그 참맛이 느껴진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계절과 사람과 정경을 떠올리는 데 가장 쉬운 
도구일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몇 가지 꽃에 대하여 그 감상을 말해보고자 
한다.

  난초와 국화, 연꽃은 소나무와 대나무처럼 어딘지 모르게 고상하여 사랑을 받고 
있다.
  또 모란은 그 빛깔과 꽃잎의 풍만함으로 부귀와 행복의 상징이 되었으며, 매화는 
시인의 꽃, 차분하고 청빈한 선비의 자세로 상징되고 있다. 곧 모란은 물질이요 
매화는 정신의 표상이다.
  모란은 특이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당나라 때의 일이다. 측천무후가 그 
과대망상적인 변덕을 일으켜 한 겨울에 궁정의 꽃 전부에게 일시에 피어날 것을 
명령하였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단지 황제의 권위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꽃들이 순종하였지만 모란만이 몇 시간 늦게 피어서 무후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화가 난 무후는 궁궐의 모란을 모두 뽑아 낙양으로 옮겨 심도록 했다. 
일종의 추방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선비들은 이런 모란의 지조를 극구 
예찬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일화로 낙양은 모란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

  난초는 모란과는 달리 스스로 고독의 미를 즐기는 미덕이 있다. 이 꽃은 산중에 
살다가 사람들의 마을로 옮겨지면 자신의 독특한 특성에 따라 재배되지 않으면 곧 
말라죽기 십상이다. 이러한 까닭에 난초는 예로부터 세상에 아부하지 않는 군자의 
상징, 우정의 상징으로 불려져 왔다. 
  능금꽃과 비슷한 해당화는 다른 꽃들과 마찬가지도 시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데 
시인 중의 두목 격인 두보만이 이 꽃에 대하여 한 마디도 읊지 않았다.
  그 이유는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어머니의 이름이 해당인 까닭에, 효성으로 
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꽃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철쭉은 예쁘고 맵시 있는 아름다움과는 달리 비극의 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뻐꾸기의 피눈물에서 싹튼 꽃이라고 알려져 있다.
  계모에게 학대받고 집을 쫓겨난 형을 찾는 소년이 뻐꾸기로 변한 것이라고 
알려진다.
  
    꽃을 즐기는 멋

  꽃을 바라보고 감상하는 것은 실로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좋아하는 
꽃의 향기를 즐기고 외모를 바라보는 것은 생활의 풍요로움이면서 한가한 즐거움일 
것이다.
  여기에 꽃꽂이의 즐거움이 더한다면 한결 예술적인 흥취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내려온 기쁨의 한 가지이다. 19세기 초에 씌어진 책 
"한정기취"에서는 꽃꽂이의 기술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나는 가을이 되면 국화를 열렬히 사랑한다. 한데 나는 국화를 화분에 심기보다는 
꽃병에 꽂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화분에 심는 것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집에 뜰이 없기 때문이다. 한데 
시장에서 사오는 꽃은 손질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국화를 꽃병에 꽂을 때는 짝수가 아니라 홀수로 꽂아야 하고, 어느 병에나 한가지 
빛깔만을 꽂아야 한다.
  꽃병의 주둥이는 꽃을 한꺼번에 쉽게 꽂을 정도로 넓어야만 한다. 하나의 꽃병에 
꽂은 꽃이 여섯 송이건 수십 송이건 한결같이 꽃병의 주둥이에 똑바로 서도록 
꽂아야 한다.
  너무 한쪽으로 몰려도 안 되고 흩어져서 너무 넓게 되어서도 안 된다. 꽃병 
주둥이에 기대어 꽂는 것도 금물이다. 이렇게 위치를 정하는 것을 뿌리맺음이라고 
한다.
  꽃은 고상하게 똑바로 서 있는 일도 있고 여러 방향으로 뻗어 있기도 할 것이다.
  너무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꽃봉오리를 곁들여 일종의 분위기 있는 
불균형을 살려 꽂는 것이 좋다. 잎이 너무 많아서는 안 되고, 줄기는 너무 
딱딱해서는 안 된다.
  줄기를 바늘로 붙들어 맬 때는 바늘 끝이 드러나면 잘못된 것이니 긴바늘을 잘라 
버려야 한다. 이른바 병 주둥이는 깨끗해야 한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대접이나 큰 접시를 이용할 때는 꽃은 옆으로 기울게 하는 것이 좋고, 복판에서 
비죽 내밀게 해서는 안 된다. 줄기와 잎이 맞붙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꽃이 달린 가지를 꺾어 병에 꽂을 경우에는 미리 가지 손질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항상 자기가 직접 가지를 꺾어올 수 없고, 남이 꺾은 
가지로는 만족스럽지 않은 까닭이다. 우선 그 가지를 손에 들고, 전후 좌우 여러 
방향으로 살펴보고서 어느 방향이 가장 아름다운지 확인한다. 그 다음 늘씬하고 
색다른 가지 모양을 위해 쓸데없는 잔가지를 잘라 버린다.
  그리고 나서 줄기를 어떤 상태로 꽃병에 꽂을까, 줄기를 꽃병에 꽂았을 때 잎이나 
꽃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려면 어떤 상태로 줄기를 구부리면 좋을까 생각한다.
  만일 되는대로 묵은 가지를 손에 쥐고서 그 곧은 부분을 병에 꽂는다면, 줄기는 
뻗어 나오고 가지는 너무 빽빽하여 꽃이나 잎이 다른 쪽을 향하게 되어 매력이며 
표정 등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릴 것이다.
  곧은 가지를 구부리려면 줄기의 한 가운데쯤에 칼로 상처를 내고 그 상처에 깨진 
기와나 돌멩이의 부서진 작은 조각을 끼워 넣는다. 그렇게 하면 곧은 가지는 알맞게 
구부러진다.
  큰 가지가 너무 약할 때는 두세 개의 바늘을 꽂아서 단단하게 한다. 이 방법을 
쓰면 단풍잎이나 대나무 가지, 또 그 밖의 가시나무까지 훌륭한 장식이 된다.
  몇 개의 구기자나무 열매에 푸른 대나무의 작은 가지를 곁들이거나, 고상한 
풀잎에 몇 개의 가시나무 가지를 배합해도 배치만 잘 되면 참으로 우아한 정취를 
낳을 것이다.'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교양 있는 사람이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나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좋아해야 할 것과 싫어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무엇을 사랑하고 싫어해야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은 식견이 있다는 것이다.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이론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태도나 인격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우리는 자주 접하곤 한다. 그런 사람들은 학식은 있으나 
판단력이 전혀 없는 존재들이다.
  가령 한 역사책이 최대의 학자적인 양심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할지라도 그의 
통찰력이나 식견 때문에 사건이다 인물에 대한 독창적인 이해의 깊이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기실 사실을 수집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하지만 그 사실에 근거한 상황의 판단은 오로지 그것을 다루는 인물의 식견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교양 있는 사람이란 좋은 것, 싫은 것에 대한 태도가 분명한 사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식견이다.
  식견을 갖기 위해서는 사물에 대한 깊은 탐구와 판단의 독자성, 어떤 방면의 
기만적인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성인들의 세계에는 많은 거짓과 
굴복이 담겨 있다. 명성이나 재력, 애국심, 정치, 신앙, 문학 등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마찬가지의 기만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누구라도 잘못되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최소한 
잘못된 그들에게 감탄하고 위압당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가나 
문인들은 유년 시절부터 지성에 용기가 있었으며, 그 독자성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분야에 아무리 위대한 인물들이 있을지라도 절대 감명 받지 않았다.
  그들은 마음속에서 납득하는 것이 아니면 그가 누구이든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납득했다면 호탕하게 승복하곤 했다.
  이와 같은 지적 용기와 판단의 독립성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어린이다운 소박한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것을 사수할 수 있는 
자신감이다.
  공자는 사려 없는 학식이 학식을 수반하지 않는 사려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배우더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사물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생각하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져 위험하다.'
  
    마음의 빛깔을 보라 

  예술은 창조인 동시에 오락이다. 여기에서 나는 창조보다는 오락, 즉 정신적인 
유희로서의 예술이 훨씬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참된 예술적 정신이란 불후의 걸작을 남긴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더 가치가 있다.
  이 말은 곧 예술의 전 분야의 아마추어리즘을 주장하는 것이다. 악기를 겨우 다룰 
줄 아는 친구가 들려주는 한밤의 소나타가 어떤 일류 음악가의 능숙한 연주보다 
못할 것이 없다. 우리는 거기에서 무한한 기쁨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 속에서 친구가 보여주는 서툰 마술의 묘기를 보는 것처럼 행복한 일도 
드물다.
  또 서툰 아이들의 연극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셰익스피어의 극을 보는 것보다 
훨씬 감동적이지 않겠는가.
  아마추어 예술은 자발적인 것이다. 예술의 참정신은 오직 이 자발성에만 있다. 
우리가 이런 자발적인 유희 정신을 잃지 않을 때 예술은 비로소 상업주의의 틀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예술의 본질이 유희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그것은 예술이 단순한 육체적 에너지와 정신적 에너지의 흘러 넘치는 여유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유롭고 속박없는 그 자체를 위한 행복의 
기술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이 곧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론이다. 이것은 어떤 정치가도 참견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상업 예술이 예술적 창조 정신을 해치는 것이라면 정치적 예술은 그것을 아예 
말살하고 만다. 왜냐하면 예술의 넋은 자유인 까닭이다.
  사실 춤추고 있는 동안 애국이니 돈벌이를 생각하는 예술가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용의 유희성을 파괴하고 쓸모 없는 목적을 갖게 만들 것이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약간의 휴식, 정신적인 창조의 예술조차도 국가나 돈이라는 
괴물에 침식당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다.
  예술의 본질은 분명 유희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운 
자태일 뿐이며, 그것은 명화나 아름다운 다리와 마찬가지로 행위에도 있다.

  예술이란 의미는 회화나 음악, 무용보다도 훨씬 그 범위가 넓다. 그것은 아름다운 
자태이기 에 운동 선수에게서나 공원에서 배회하는 노인의 걸음걸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작전에 최선을 다하는 군인에게도 있고 땀흘려 일하는 노동자의 
땀방울에도 그 자태는 존재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자태와 표현이 있고 그것은 당연히 예술의 범위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조화가 잘 이루어진 시의 운율처럼 우리 몸의 운동도 
우아한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침착한 우아함은 자신이 육체적으로 
능력이 있다는 의식, 즉 일을 보통 이상으로 해낼 수 있다는 의식에서 태어난다.
  이처럼 깨끗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런 아름다움이 있다. 깨끗한 
일, 즉 솜씨 있는 일을 하고자하는 충동은 본래 미적 충동이다.
  교묘한 살인이나 재간 있는 교묘한 음모, 그런 것들은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지만 
예술적일 때가 있다. 이처럼 좀더 구체적인 일상의 사소한 일 중에도 이런 침착함과 
우아함의 능력은 실제로 있거나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생활의 예절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가 이런 범주에 속한다. 사람에게 
정중하고 때에 맞는 인사를 하면 얌전한 사람들이라고들 하지만, 격에 맞지 않으면 
경박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좋은 형식에는 전부 움직임이 있다. 그것이 골퍼의 스윙이든 미식축구선수의 
돌진이든 최선의 것에는 최고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처럼 예술에는 개성적 표현이 
넘쳐흘러야 한다. 그것은 어떤 기법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의 약동이다.
  커브를 돌 때의 기차, 돛에 바람을 가득 안은 요트에도 그것이 있다. 공중을 나는 
제비나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 결승점을 통과하는 마라토너에게도 그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술가의 품격이다. 품격이 없으면 예술 작품의 생명은 끊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미적 식견이나 기능이 최고라 할지라도 그것이 없다면 그 자체는 평범하고 
저속해진다.
  예술의 품격, 거기에는 학식과 교양이 모두 필요하다. 교양은 취미 쪽에 가까운 
것으로 예술가에게는 절로 생겨나는 것이겠지만, 최대의 기쁨을 주는 것은 역시 
학식의 뒷받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성된 작품의 미와 예술가의 넋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거기에는 변덕스럽고 자유분방한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고 난폭한 
힘의 미도 있을 것이다.
  또 웅혼한 기상, 로맨틱한 속삭임, 소박하고 둔탁한 미, 단정하고 깊은 미, 어떤 
면에서는 고의적인 누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단 하나 보이지 않게 때문에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불가능한 
미의 형식이 있다. 그것은 분투 노력의 미, 즉 분투하는 생활의 미이다.
  
    인간의 향기를 읽으라 

  책을 읽는 즐거움은 예로부터 생활의 매력으로 알려져 왔다. 책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책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에게조차 부러움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왜 그리 선망의 대상이 되는가?
  그것은 평소 책을 일지 않은 사람의 생활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자신의 틀에 갇혀 있다. 그들의 친구는 
극소수의 사람들뿐이며 그가 갖는 즐거움이란 대부분 가까운 신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일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일단 책을 손에 들기 시작하면 사정이 너무나 확연하게 
바뀐다. 그는 홀연 세계 제일의 이야기꾼과 만난다. 그 이야기꾼은 그를 별천지로 
데려가 고민을 덜어주고 그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인생의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그는 아득한 옛날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먼 미래의 일을 예측하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색과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하여 책은 우리에게 현실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명상으로까지 이끌어가곤 
하는 것이다.
  송나라 때 시인이며 소동파의 친구였던 황산곡은 책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선비가 사흘을 독서하지 않으면 스스로 깨달은 말에 맛이 없고, 거울 속의 자신을 
대해도 가증스럽게 보인다.'

  이것은 책이 자신을 읽는 사람에게 매력과 품격을 준다는 것이다.
  독서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책을 읽는 이유를 정신의 향상으로 꼽는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독서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런 부산물을 생각하면서 책을 대한다면 독서의 
즐거움은 금방 고역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셰익스피어를 읽어야만 한다, 나는 엘리어트의 황무지를 독파해야만 
한다.' 등등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사람일 것이다. 그와 같은 독서는 단지 의무이며 
악몽일 뿐이다.
  황산곡에 따르면 독서의 목적으로 인정해 줄 만한 것은 사람의 얼굴에 매력을 
더하고, 그 말씨에 풍미를 주는 것밖에 없다고 한다.
  그것은 물론 단순한 매력이나 미모가 아니다. 오로지 인간의 향기뿐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말투는 그 사람의 독서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가 어떤 
책을 읽었는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가에 따라 사람마다 맛이 틀린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음식에 대한 기호와 마찬가지로 책을 고르는 것 역시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몸에 어울리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교사는 자신의 독서 취미를 학생에게 강요해서는 곤란하다. 읽는 데 
흥미가 없다면 독서란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원중랑은 이렇게 
말했다.
  '읽기 싫은 책은 주저없이 버려라. 그리고 다른 사람이 읽게 내버려두어라.'

  세상에 누구나 읽어야 하는 책이란 없다. 있다면 오직 누군가, 언제, 어디서, 어떤 
사정 하에서, 생애의 어느 시기에 읽어야만 할 책뿐이다.
  나는 독서가 결혼처럼 운명이나 인연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성경과 같은 
종류의 책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독자 같은 책이라도 읽는 시기가 다르면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이를테면 
저자와 직접 이야기를 나눈 후, 혹은 그의 강연을 들은 후 읽은 책의 맛은 그저 
손에 집히는 대로 읽는 책의 맛과는 다르지 않겠는가.
  
    책장을 덮어야 할 때

  어떤 사람은 밤에 독서를 하다가 졸리면 송곳으로 정강이를 찔러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녀를 곁에 세워두고 자신이 졸면 깨우도록 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그 동안 어떤 찬사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게 보일 뿐이다.
  책을 펼치고 고인들의 말을 경청하다가 졸리면 지체없이 자야 한다. 송곳으로 
정강이를 찌르고 하녀가 잠을 깨우게 해서 읽는 책이 그 사람에게 무슨 이득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는 데는 때와 장소가 없다. 읽고 싶으면 읽고 피곤하면 읽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책을 읽는 데 방이 춥다거나, 불빛이 어둡다거나, 모기가 많다거나, 
종이가 너무 빛이 나서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등의 푸념을 늘어놓는다.
  이런 사람들은 책 읽는 진정한 재미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책을 학대하는 사람들이다. 만일 당신이 
그런 타입이라면 한 여름에 벌거벗고 책을 읽었던 구양수의 다음과 같은 말을 
경청해야 한다.

  봄에 책 읽는 것은 봄의 뜻을 어기는 것이며,
  여름은 그저 잠자기 좋은 계절이니라.
  겨울이 저물어 조급해지거든
  잠시 기다리라. 다시 올 봄을.

  책을 읽는 것은 자유로움이다. 그 기쁨은 실로 자신의 마음이 시킬 때만이 느낄 
수 있다. 어느 계절이든 날씨가 어떻든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어느 날 문득 시집 한 권을 들고 연인과 강가로 나가 시를 읽어라. 그때 아름다운 
구름이 눈을 잡아당기면 책을 덮어라. 그리고 조용한 즐거움으로 구름을 음미하라. 
그때 담배 한 대, 차 한 잔이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으리라.
  혹은 눈 내리는 한밤, 난로 위에서는 차 끓는 소리가 들리고 그윽한 음악이 
공간을 흐른다. 그때 당신은 손에 들려 있는 오래된 책 한 권.....
  이것이야말로 독서의 참맛이요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 분위기는 책을 읽는 
사람만이 갖추어 낼 수 있으리라.
  
    3

  행복한 인생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주말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저수지의 담이 무너지면 사방에서 물이 밀려든다.
  불안과 미망의 한계가 명상으로 제거되면 인간의 의식은 무한히 퍼져나가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영혼으로 합쳐진다.--파라마한사 요가난다
  
    불행 끝 행복 시작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성격이 있다면 그것은 따뜻한 마음과 
너그러움, 그러면서도 용기까지 겸비한 성격일 것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일찍이 위대한 현인이 이루어야 할 덕으로 지, 인, 용 세 가지를 
강조하였다.
  이 중에서 나는 인을 정(Passion)으로 바꾸고 싶다. 정이나 영어의 Passion이나 
모두 성적 열정이라는 좁은 뜻에서 나왔지만 그보다는 좀더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다.
  장조란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정이 있는 사람은 항상 이성을 사랑하지만,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정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정은 인간 세계의 바탕을 지배하는 것이지만, 재주는 그 
지붕을 채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이 없으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인생의 기쁨, 빛나는 별, 음악의 곡조, 꽃의 환희, 새의 날개, 여자의 아름다움, 
학구적인 생활..., 이것들은 모두 정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표현이 없는 음악을 생각할 수 없듯이 정이 없는 마음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정이란 인생을 유쾌하게 살 수 있는 따스한 생명력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다감한 성격조차 환경에 휩쓸려 냉각되고 위축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이런 순수한 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은 개인의 태만이거나 
무력감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쉽게 냉혹해지고 기교에 빠져든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재주와 굳센 결의만이 드러날 뿐 인간으로서의 인정이란 
남아있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는 인정 같은 것은 감상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터부시하기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정열이나 인정이란 간혹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짓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세상은 한 장의 만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할머니가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나의 78년 동안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죄를 저질렀을 때처럼 기분 좋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미련하게 행동했던 때가 떠오르면 이 나이가 되어서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도량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철학을 
가지고 자신을 지켜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가혹해서 온정만으로 살아가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은 지와 용과 함께 있어야 한다. 슬기로운 용기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용기란 인생을 잘 이해할 때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언제나 용기가 있다. 우리가 쓸데없는 야심을 
닫고, 사상이라든지 생활에 있어서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슬기와 용기가 접속이 
되는 것이다.
  정이 있는 삶, 그것은 분명히 현명한 판단과 실행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정을 이어가자. 그것의 행복의 시작이다.
  
    성공의 노예가 되지 말라

  교양 있는 사람은 부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유혹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우리들은 진실로 위대한 인간이라는 찬사를 
보낸다.
  한 승려가 세속적인 번뇌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명예욕을 버리는 것보다는 금전을 버리는 것이 보다 쉽다. 숨어사는 학자나 
승려들조차도 동료들보다 앞서기를 원한다. 많은 신도가 있는 자리에 나가 설교를 
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너와 나 단 둘이서 스승과 제자로 깊은 산골에 숨어 있고 
싶어하진 않는다."

  이런 종교적인 설명은 완전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현인의 
고백은 오히려 우리 인간들의 욕망이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생의 욕망은 이 승려의 시각에 하나를 더하여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곧 명예, 부귀, 권력이다.
  이 세 가지를 미국적인 한 가지로 통합시킨 단어가 바로 '성공' 일 것이다.
  이 성공이란 말은 어쩌면 실패, 빈곤, 무명이란 공포를 벗어나기 위한 완곡한 
모델이다. 실제로 이러한 공포는 누구에게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단 명성이나 권력에 집착하게 되면 인간은 그를 따르는 숱한 집착의 노예가 
되고 만다.
  남의 생활을 개선하고 덕성을 높이며 악을 뿌리뽑겠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은 
실제로 자신이 가치 있는 어떤 일을 한다고 생가하며 스스로 우쭐대곤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집착의 서열에 다른 사람에게 멋있게 보이고자 하는 '체재' 라는 것을 
포함시키고 싶다.
  자기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유지하는 용기 있는 사람은 사실 드물다. 그리하여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스토는 자신이 두 가지의 가장 큰 공포, 즉 신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으므로 위대하다고 자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죽음과 신의 공포만큼이나 보편적인 또 하나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지는 못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공포이다.
  실제로 이웃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된 사람이 누가 있는가를 살펴보라.

  우리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생의 배우이다. 배우들은 관중의 갈채가 크면 클수록 무대 뒤에서 고뇌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대중이 좋아하는 
식으로 자기역할을 연출한다 할지라도 결코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단지 우려되는 것은 그 연극의 대사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은 결코 연극에 빠져들지 않는다. 그것은 
연극일 뿐임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간소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삶의 모범으로 추앙받는 것은 그런 환각에 
빠져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위대함을 내세우는 
사람들이다. 거만한 관리들이나 국회의원, 졸부들, 허풍선이 작가들이 그런 착각에 
빠져 있는 대표적인 군상들이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연극적인 본능은 
심각하다. 그 무대가 진실로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잊는 것이다. 우리들은 
땀흘려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것은 참된 본능이 아니라 사회의 시선에 걸맞는 몸짓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각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삶을 살아간다.
  중국 속담처럼 '다른 처녀의 혼례복을 만들고 있는 노처녀' 가 되지 말자. 그것은 
자신의 호구지책이 될지라도 결혼이라는 순수한 욕망을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욕망, 그것을 이루어나가도록 힘써야 한다. 남의 시선보다는 
스스로 바라보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직시하자.
  
    당신은 어리석다

  큰 지혜는 우둔함과 같고
  뛰어난 웅변은 오히려 눌변과 같다.
  자꾸 움직이면 추위를 이기고
  가만히 있으면 더위를 이긴다.
  조용히 덕을 베풀면 천하의 주인이 된다.

  자연의 큰 도에 있어서는 영원히 우위에 있는 것도 없거니와, 평생 역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큰 어리석은 자도 없다.
  이런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당연한 결론으로서 인생은 하등 다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노자는 '현자는 그 다투지 아니함으로써 천하 또한 다투는 일이 없다.' 
고 말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힘으로 밀고 나가는 자는 곱게 죽지 못한다. 나는 이 교훈을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으리라.'
  지금까지 약자의 힘, 평화애의 승리, 스스로 낮추는 것의 유익함을 노자보다 
효과적으로 설파한 사람은 없었다.
  노자에게 있어서 물은 영원히 약한 자의 힘의 상징이었다. 조용히 한 방울씩 
떨어져 바위에 구멍을 뚫는 물의 힘, 그는 이렇게 말했다.
  '큰 강이나 바다가 온 골짜기의 왕이 됨은, 그것이 낮게 처하여 겸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은 중국인들에게 깊숙이 스며 있는 어리석음의 힘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짜 완전한 것은 어딘지 모자란 듯 보이고, 진짜 웅변은 도리어 
눌변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자는 '작은 지혜에서 떠나라.' 고 소리쳤던 
것이다.
  중국 문학에서도 이런 '어리석음' 에 대한 찬미는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으뜸가는 
현인은 때로는 몹시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역사에는 이 때문인지 유명한 광인들이 꽤 많다. 그들은 모두 정말 미쳐 
있거나 미친 체하는 사람들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원나라 때의 화가 예운림은 속세에 대한 공포감과 까다로운 결벽증으로 유명하다.
  시인 한산은 쑥대머리에 맨발로 나다니며 절간의 배회하면서 삯일을 하고는 
승려들이 먹다 만 밥을 얻어먹고, 절이나 부엌의 벽에 불후의 시를 남겼다.
  또 제정이란 괴짜 승려는 마법과 영약, 괴벽과 만취의 세계에 살면서 수만 리 
밖의 외국을 제집 드나들 듯이 날아다녔다고 전한다.

  18세기 사람 정판교는 이런 괴이하고 익살스런 풍채나 언행을 지닌 현인들을 
평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어리석음도 어렵고 현명함도 어렵다. 그러나 현명함을 끝내고 어리석음으로 
들어가는 길은 더더욱 어렵다.'
  
    사람의 마을로 돌아오라

  중국에는 노상 사상보다 좀더 위대한 철학의 숨결이 살아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철학이다.
  중국 사상의 최고의 이상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행복을 지키기 위해 
인간 사회와 인간 생활로부터 도피해 버릴 필요가 없다는 견해이다.
  인간의 마을에서 도피하여 산 속에 홀로 사는 은자는 지금도 여전히 환경에 
지배를 받는 이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큰 은자는 시장에 숨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키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으므로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로 돌아와서 돼지를 잡아먹고 술을 마시며 여자를 가까이 
하고도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현자인 것이다.
  때문에 유교와 노장 철학의 모순은 상대적이고, 단지 두 극단에서 출발한 
교의이며, 둘 사이에 많은 중간 단계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간 단계를 중용이라고 한다. 반은 속세에 머물고 반은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중용의 미묘한 정신이 간직되어 있다.
  즉 반쯤 게으르고 반쯤 부지런하며, 바쯤 일하고 반쯤 노는 정도, 가난하지 않고 
부자도 아니며, 독서는 하되 지나치지 않고, 학문은 하되 전문가가 되지 않는 
안빈낙도의 생활, 이것이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건전한 생활의 모습으로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이밀암의 '중용의 노래'에는 이런 철학이 적나라하게 담겨져 있다.

  세상일은 중용이 최고라고 믿고 살았네.
  그러나 이상하군.
  이 중용은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네.
  중용의 기쁨보다 더한 것 없네. 
  재미있다. 모든 것이 절반.
  당황치 않고 서둘지 않으니,
  마음도 편하다.
  천지는 넓은 것.
  도시와 시골 사이에 살며,
  산과 산 사이의 농토를 갖네.
  알맞게 지식을 얻고, 알맞은 지주가 되어.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노네.
  아랫것들에게도 알맞게 대한다.
  집은 좋지도 않지만, 추하지도 않고,
  가꾼 것도 절반, 가꾸지 않음도 절반.
  입은 옷은 헌옷이 아니고, 새옷도 아니네.
  먹는 것도 적당하게.
  하인은 바보와 똑똑이의 중간.
  아내의 머리도 알맞은 정도이고
  그러고 보니 나는, 반은 부처이고 반은 노자일세.
  이 몸의 절반은 하늘로 돌아가.
  나머지는 자식들에게 남기고,
  자식의 일도 잊지는 않되.
  죽어서 염라대왕께 올릴 말씀,
  이럴까 저럴까 생각도 절반.
  술도 알맞게 취함이 좋고,
  꽃도 반쯤 올린 배가 제일 안전하고,
  말고삐는 반 늦추고 반 당김이 제격일세.
  재물이 지나치면 근심이 있고,
  가난하면 둔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
  인생은 달고도 쓴 것임을 깨닫고 보면
  절반 맛이야말로 제일이라네.
  개인이 가장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생활에 걱정이 없으며, 그렇다고 전혀 
근심이 없는 것도 아닌 정도의 유명 속의 무명이다. 그것은 일면 하찮게 보이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높은 것만을 지향한다면 끊임없이 
불만과 불안밖에 없을 것이다.
  분수를 알고 자신의 안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것만이 바른 생활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그는 그렇게 살았다

  우리들은 마음의 소극적인 부분과 적극적인 견해를 적당히 융합시키면서 중용의 
삶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매사에 안달하지 않고 헛되이 수고하는 것도 아니며 인생의 책임에서 
도피한단,s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으로써 조화로운 개성을 배양하여 인생의 기쁨과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애를 산 대표적인 사람으로 나는 중국 문화가 낳은 최대의 시인이며 
조화로운 인간 도연명을 떠올린다.
  그는 기실 높은 벼슬을 지낸 것도 아니고 권세나 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의 삶은 몇 권의 서책에서 우러나오는 참되고 솔직한 맛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은 활기차고 이론을 숭상하는 무리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세속적인 욕망에 반항하였으되 도피하려 하지 않았으며 관용을 잊지 않는 
생활과 조화를 잘 유지해 나간 인물이다. 도연명은 4세기 말 세상에 나왔다.
  그는 젊은 날 아침에 일어나면 한 무더기의 기왓장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나르고, 오후에는 그 반대의 일을 되풀이하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청년 시절 노친을 부양하기 위해 말단 관직에 나서기도 했지만 곧 은퇴하여 
전원으로 돌아가 평범한 농부가 되었다.
  그의 유일한 약점은 술을 좋아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손님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술만 있으면 누구와도 흔쾌히 잔을 
기울였다. 간혹 자신이 초청한 술자리에서는 먼저 거나해지면 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취해서 졸립군. 이제 그대는 돌아가게나.'
  그는 술에 취해서 음악적인 감흥이 일어나면 줄 없는 칠현금을 쓰다듬으며 
'거문고 속의 흥취를 얻었거늘 어찌 줄로써 소리내기를 원하랴.'하면서 흥겨워했다고 
한다.
  그가 가난하지만 담백하고 빼어난 인물임을 안 강주자사 왕홍이 사귀기를 원했다. 
그러나 사귐을 즐겨하지 않았던 그는 이런 말로 그 제의를 물리쳤다.
  '내가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천성이 사교에 둔하고 또 건강이 좋지 않은 
까닭이다. 결코 명성 때문이 이런 것이 아니다.'

  그 무렵 도연명이 살고 있던 여산에는 선종이라는 불교 종단이 있었다. 이 종단은 
당시 사영운이라는 대시인도 가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한 종단이었다.
  그런데 이 종단의 주지인 혜원법사가 도연명의 명성을 듣고 그를 흠모해 
마지않았다. 어느 날 도연명은 그 장단의 사람들로부터 술을 마셔도 좋다는 
조건으로 초청을 받았다.
  그는 흔쾌히 기분으로 가마를 타고 산을 오르는 데 입구에서 종단가입 서명을 
종용받았다. 그러자 도연명은 이마를 찡그리고 곧장 가마를 집으로 돌려버렸다.
  혜원법사는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았지만 이후에는 호의를 버리지 않았다. 어느 
날 노장파의 친구인 육수정과 함께 도연명을 술자리에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불교를 대표하는 혜원법사, 유교를 대표하는 도연명, 노장을 대표하는 
육수정이라는 3인이 모여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당시 혜원법사는 매일 산책할 때 호계교란 다리를 넘지 않는다는 규칙을 세우고 
엄히 지키고 있었는데, 이날 친구와 함께 도연명을 전송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규칙을 깜박 잊고 다리를 건너버렸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달은 세 사람은 다 함께 껄껄껄 웃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세 노인이 웃고 있는 장면은 호계삼소도라고 하여 중국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제가 되었다.
  그것은 거침없는 세 현인의 즐거운 대화와 쾌활함의 상징이었다. 유, 불, 도 세 
종교의 가르침이 하나의 유머 감각으로 일치되었음을 그 상황은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도연명은 이런 열린 삶을 살다가 떠나갔다. 그가 생전에 술이나 전원을 노래한 
작은 시편, 산문들, 편지 등을 살펴보면 얼마나 완전무결하게 자연에 도달하고, 또 
어느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조화로운 생활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가 405년 태수 자리를 내놓고 귀향을 결심하며 지은 시"귀거래사"는 그가 
지녔던 그런 인생에 대한 사랑과 성찰의 깊이를 담고 있다.

  돌아가거라. 고향의 전원이 황폐해 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요.
  이미 마음은 육체의 종이 되었으니 어찌 헛되이 슬퍼하리요.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장래의 일은 이제부터 늦지 않았음을 알았다.
  실로 길 잃음이 오래되지 않았으니, 오늘이 옳고 어제가 잘못되었음을 알겠다.
  배는 가볍게 미끄러지고, 바람은 가만히 옷깃을 스친다.
  길손에게 앞길을 물으니, 새벽빛의 희미함을 원망한다.
  이제야 누추한 내 집을 보고 기뻐 달려가니, 하인들이 반겨 맞이하고 아이들은 
문에 나와 기다린다.
  정원의 오솔길은 황폐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만은 여전하구나.
  한 손으로 어린것의 손을 잡고 방에 드니 술독에 술이 가득하다.
  술잔을 당겨 자작하여 뜰의 나뭇가지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
  남쪽 창가에 기대여 앉으니 집은 좁으나 편안함이 그만이다.
  뜰을 날마다 거닐어 정을 붙이고, 무는 있으나 종일 닫혀 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뜰을 거닐다, 때로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본다.
  구름은 무심히 산간을 빠져나가고, 날기에 지친 새는 둥지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
  바야흐로 해는 뉘엿뉘엿 지려 하는데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쓰다듬으며 거니노라.
  돌아가리라. 세상과 인연을 끊으련다.
  세상도 나도 서로 잊어버렸으니, 다시 수레를 타서 무엇을 구하리요.
  친척과 정담을 즐기고 거문고와 책을 벗삼아 세상사를 잊으리라.
  농부가 내게 봄이 옴을 고하니, 장차 서쪽 밭에 일이 생기겠구나.
  혹은 포장 달구지를 몰고, 혹은 외딴 배를 젓는다.
  때로는 조용한 골짜기를 찾고, 또 허위허위 언덕을 오르내린다.
  초목은 나날이 무성해가고, 샘물은 졸졸 흐르기 시작한다.
  만물이 때를 만나 생동함을 볼 때 내 인생은 휴식을 찾는구나.
  두어라 몸이 세상에 머묾이 언제까지냐.
  가고 머무는 일을 어찌 자연에 맡기지 않으리요.
  어찌 황황히 떠나고자 하리요.
  부귀는 내 소원이 아니며, 하늘나라는 기약할 바 못되느니라.
  알맞은 때에 혼자 생각에 잠겨 거닐며,
  혹은 지팡이를 세워놓고 밭고 갈리라.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냇가에 앉아 시를 쓴다.
  얼마간 자연의 조화에 다다르다가 천명대로 돌아가리니, 천명을 한껏 즐긴다면 또 
무엇을 염려하랴.

  도연명은 결코 은자가 아니었다. 그가 도피하려 했던 것은 정치였지 인생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인생에서 도피하고자 했다면 승려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에게는 참으로 사랑하는 삶이 있었다. 아내와 자식들은 그에게 참된 존재였고, 
전원이나 안뜰의 나뭇가지, 언덕의 외로운 소나무주차 하나의 의미였다.
  그는 세상에 속한 인물이었다. 험한 세상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때라 
싶으면 밭에 나가 김매고 북도 돋워주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전원과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생활, 도연명의 조화로운 삶은 
그것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무엇이 사는 것인가

  인생의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신의 즐거움, 가정 생활의 즐거움, 삼라만상을 보는 즐거움, 또 어떤 형태의 
마음의 교류, 시가, 미술, 사색, 우정, 유쾌한 대화, 독서의 즐거움 등이 그것이다.
  또 좋은 음식, 모임, 단란한 가족과 같이 분명한 즐거움도 있고, 음악, 미술, 사색, 
등의 즐거움처럼 그 형체가 불분명한 것도 있다. 이런 것을 일러 우리들은 흔히 
물질적이라든가 정신적인 즐거움으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런 구분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공원에 소풍 나온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어느 것이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즐거움인지 구별할 수 있겠는가.
  한 아이는 잔디밭에서 깡충거리고, 어머니는 과일을 깎고 있다. 삼촌과 조카는 
공을 차고 있는데 아버지는 먼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
  할아버지는 담배연기를 뿜으며 어린 손자들이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또 누군가는 조용히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멀리 계곡에서 물소리가 난다.
  이러한 즐거움 중 어느 것이 물질적인 것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인 것이겠는가?
  그런 경계선을 긋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음악의 
즐거움이 물질적이라 일컫는 사과를 베어 무는 즐거움보다 더 고급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즐거움이란 어떤 모습이 아니라 
마음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행복한 인생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주말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광대한 우주 속에서 인생의 신비가 찾아가는 길이 무엇이냐 하는 어려운 
철학적 문제보다는 훨씬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생의 목적을 목청 높여 외치는 것은 기실 우리들의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을 어떤 목적적인 존재로 보는 사회나 종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만일 인생에 있어서 목적이나 설계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그다지도 어렵고 난해할 리 만무할 것이다. 여기에 집착한다면 문제는 결국 
신을 위해 살 것이냐, 인간을 위해 살 것이냐라는 두 가지로 고착된다.
  하지만 인간의 지능으로 신을 추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같은 이론의 최종 결과는 신을 우리 군대의 기수로 삼아 인간과 마찬가지로 
맹목적 애국자로 만들고야 만다.
  인간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아니다. 즉 실제 문제이며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월트 휘트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런 방향에서 바라보면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즉 인생을 즐기는 것 외에 인생에 
다른 어떤 목적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구원이나 천국 등등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즐거움에 대한 인간의 위치는 다소 
빈약해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인간에게는 인간의 위치가 있으므로 주위와 조화로운 생활을 한다면, 인생 그 
자체에 대해 실질적으로 분별 있는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행복한 느낌이다 

  인간의 행복은 생물적인 행복이다. 곧 관능적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뒤따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동안 행복에 대한 정신적인 측면에 너무나 많이 기만당해왔다.
  나는 정신적 행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정신이란 내분비선의 기능이 완전히 이루어진 어떤 상태이다. 만일 그렇다면 
도대체 정신적 행복이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내게 있어서 행복이란 주로 소화기관의 문제이다.
  나의 말에 어떤 증명이 필요하다면 나는 미국의 저명한 한 대학 총장의 연설 뒤로 
숨어야만 하겠다. 그는 신입생에게 훈시할 때 항상 이렇게 현명한 표현을 썼다고 
한다.
  '제군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즉 성서를 읽을 것과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정말 지혜롭고 훌륭한 연설이다. 내장을 움직이면 행복하고, 
내장을 움직이지 않으면 불행하다. 문제는 오직 이것뿐이다.

  행복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슬픔과 괴로움, 육체적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이런 행복의 적극적인 모습을 환희라고 
부른다.
  나의 경우는 이렇다. 아침에 눈을 뜨고 새벽 공기를 마시면 허파가 신선한 
기분으로 가득해진다. 그러면 더 깊이 숨을 들여 마신다.
  가슴 주위의 피부나 근육에 기분 좋은 운동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곧 어떤 
일이든 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손에 파이프를 쥐고 의자에 발을 쭉 뻗고 
앉으면 담배연기가 천천히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그런 때.
  여름날 여행길에서 목이 마른데 맑은 샘물이 눈에 띈다. 구두와 양말을 벗어 
던지고 그 콸콸 솟아나는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는 그런 때.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난 뒤 안락의자에 기대앉는다. 뜻이 맞는 사람과 함께 
앉아 흥겹고 즐거운 이야기를 끝없이 한다. 몸과 마음도 천하 태평인 그러한 때.
  아이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거나, 그 통통한 다리를 보거나 할 때, 도대체 나는 
아이들을 육체적인 의미에서 사랑하고 있는지 정신적인 의미에서 사랑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환희와 육체의 환희를 구별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육체적으로 이성을 사랑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또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움, 즉 그 웃음과 미소와 몸짓, 온갖 사물에 대한 
각각의 태도, 그런 것을 해부하거나 분석한다는 것이 남자에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
  어떤 여성이라도 좋은 옷을 입었을 때 행복을 느낀다. 루즈나 향수는 여자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무엇이 있다.
  그런 것들은 여성 자신에게는 참되고 명료한 것이지만 세상의 정신주의자들에게는 
이런 기쁨이 전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생명이 있는 육신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정신의 차이란 미미한 
것이다. 어떤 섬세한 정서나 위대한 정신의 아름다움의 극찬을 받는다 해도 감각을 
무시하고 그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촉각, 청각, 시작에는 도덕성이 없다.
  우리가 인생의 적극적인 환희를 받아들일 힘이 없어지는 것은 대개 관능적인 
감수성이 줄었기 때문이다. 또 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로 세상은 우리의 관능에 의해서만 즐길 수 있도록 펼쳐진 인생의 향연이다. 
그러나 이같은 관능적 기쁨을 인정할 만한 교양이 있어야만 그것들을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은 참으로 분명하다.
  자신의 관능에 떨고 있는 이 호화로운 세상에 대해 우리가 눈을 감는 것은 
유심론자들이 관능을 죄악시하고 세뇌시킨 결과물이다. 좀더 고상한 철학이란 
우리가 육체라 부르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감수 기관에 대한 신뢰를 고쳐 세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 경멸 사상을 몰아내고 관능의 공포를 몰아내야 한다.
  우리는 현실에서 느끼고 있는 자신의 진실을 숨기지 말아야 한다. 그것만이 참된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그것은 또 참으로 건전하고 건강한 모습이다. 
  
    동심으로 돌아가라 

  일반적으로 고상하다고 생각되는 지적인 쾌락과 정신적인 쾌락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것들은 언제나 인간의 감각 속에 있으면서 다른 여러 가지 사물이나 행동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문학, 미술, 음악, 종교, 철학 등 고급의 정신적 쾌락들은 대개 인간의 감각이나 
감정에 비해 매우 무력하다.
  미술의 경우에도 풍경화나 초상화의 경우 실제 풍경이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관능적인 즐거움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문학의 경우 인생의 모습을 그 안에 재현시켜 그 정취와 명암을 묘사하며, 목장의 
아름다운 내음이나 뒷골목의 실상을 유추하게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종교가 타락하고 있다는 것은 대개 그 종교가 이론 그 자체에 빠지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산타야나는 '불행하게도 종교는 이론의 옷을 입은 미신이 되기 위해, 공상 세계의 
예지이기를 그만둔 지 오래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종교가 타락한 이유란 분명히 신조와 신앙 형식과 신앙 개조에 빠진 교설 
및 그 변명 등의 연구에 몰두하여 현학적 정신에 빠졌기 때문이다.
  신앙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여 옳다고 믿음으로써 경건한 마음은 감소하게 된가. 
모든 종교가 오로지 자기만의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편협에 빠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결과 자신들은 정당화하면 할수록 그 편협의 골은 깊어져만 간다. 그리하여 
종교는 가장 질이 나쁜 집착과 고루와 편파, 더불어 이기주의까지 결부되기에 
이른다.
  미술과 시와 종교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그것들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공상의 
신선미와 보다 큰 정서적 미감과 발랄한 생명력을 부활시키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나이가 듦에 따라 차츰 무감각해지고 고통과 부정과 잔인 등에 대한 
희로애락의 정서도 희미해진다. 냉혹한 현실의 포로가 되어 인생에 대한 꿈도 
왜곡되어간다.
  그런데 다행히도 세상에는 소수의 시인들과 예술들이 있다.
  그들의 날카로운 감수성, 섬세한 정서적 감응이나 공상의 신선미가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들의 양심이 되고 무감각해진 공상을 바로잡는 거울이 되며 위축된 
신경을 조정해 주는 의사가 된다.
  예술이란 우리들의 마비된 정서나 생기 잃은 사고나 부자연스러운 생활을 
풍자하고 경고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이론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치며 생활의 건강함과 건전성을 
회복시키고, 열광과 착란을 바로잡아준다.
  곧 우리의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이성과 인간성과의 관계를 재건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복귀시킴으로써 균형 잃은 생활의 파편을 모아 완전성을 되찾아주는 
것이다.
  이해가 없는 지식, 감상이 없는 비판, 사랑이 없는 아름다움, 정이 없는 진실, 
자비가 없는 정의, 온정이 없는 의례가 판치는 세상은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우리들은 생활을 사색보다 소중한 것으로 여겨야만 정신적인 열광이나 압도의 
분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리하여 동심으로 돌아가 직관의 신선함과 소박함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문명을 집어던져라

  인생의 향연은 우리들의 눈앞에 있다. 요컨대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식욕은 
느끼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먹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자연계의 모든 동물들이 빈둥빈둥 
놀면서 먹고 있는데 대체 왜 인간만이 사회 생활 속에서 애써 먹이를 찾아 일을 
해야만 되는 걸까?
  만일 한 마리의 들짐승이 도시 한복판에 풀려나 인간들의 행위를 지켜본다면 깊은 
회의와 곤혹감에 빠져들고 말리라.
  집을 지키는 개도 대개는 집안에서 놀고 있으며, 부잣집 고양이는 하루 종일 졸고 
있다. 말이나 소를 제외하고는 어떤 가축도 먹기 위해 노동을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인간만이 날 때부터 길들여지고 교육받고 복잡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둥대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인간 생활에도 좋은 점은 있다. 그것은 지식의 기쁨과 공상하는 즐거움, 
완성의 보람 따위이다. 그러나 그 외의 90퍼센트의 행위는 먹이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문명이란 먹을 것을 찾는 일이고 진보란 먹이찾기가 점점 심각해짐을 의미한다. 
먹이를 찾는 일이 그처럼 어렵지 않다면 인간이 지금처럼 부지런히 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간들은 대도시의 어두컴컴한 건물 안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퇴색된 더러운 
굴뚝과 빨랫줄과 전깃줄이 교차된 멋없고 우중충한 공간에서 단지 몇 송이의 꽃을 
장식해 놓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대체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들의 참다운 생활이란 무엇일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한 뒤 남편이 직장으로 가면 아내는 걸레를 빨아 집을 
청소한다. 그리곤 이웃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고 아이들의 공부를 돕다가 밤이 되면 
지쳐 돌아온 남편과 잠자리에 든다. 대체 이것이 참다운 삶의 모습이란 말인가. 좀더 
여건이 좋다면 돈걱정을 하지 않는 가족도 있을 것이고, 문화 생활을 즐기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성가신 다툼이 있고 이혼이 있으며, 기분전환을 위해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골에 사는 사람은 도시가 하나의 탈출구로 보이고, 도시인들은 시골이 
하나의 안식처쯤으로 보곤 한다. 그렇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가령 도시의 경우 한 시간쯤 돌아다니면 약국, 슈퍼, 이발소, 세탁소, 식당, 극장, 
주유소 등의 세트일 뿐이라는 것을 금방 느끼게 된다.
  그 단순함, 그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는가? 해답은 간단하다. 세탁소 주인은 
이발사와 식당종업원의 옷을 세탁하고, 식당 종업원은 세탁소 주인과 이발사의 
식사를 배달하며, 이발사는 세탁소 주인과 식당 종업원의 머리를 손질해 준다.
  어처구니없지만 이것이 소위 문명이란 것이다.
  이쯤 되면 인생의 행복이란 무엇일까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행복의 의미, 행복의 배경은 언제나 단순한 무대 장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들은 알 수 없는, 아니 의미없는 문명이란 적군에 포위되어 있다. 
백발이 될 때까지 먹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끝내는 즐거움을 잊어버리는 문명이란 
존대.
  아아, 무섭도록 현명한 인류들이여. 어찌 이런 상황에서도 그대들은 문명을 
그리워하는가.
  
    천국은 지상에 있다 

  우리들은 죽음을 생각할 때면 알 듯 모를 듯한 애련에 물든다. 인생무상, 이런 
단어를 생각하게 되면 사람들은 오히려 강하고 과격하게 인생을 즐기려는 시도를 
하곤 한다.
  이 땅 위의 생명이 인간에 주어진 전부라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마음껏 즐기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헛되이 영생을 원하면 삶의 즐거움은 손상된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삶을 사랑했던 아더 키드 경의 말과 같다. 
  '지상이야말로 유일한 천국이다. 이 한 가지를 나와 더불어 세상 사람들이 
믿는다면, 이 지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데 더욱 힘쓰게 될 것이다.'

  중국 문학을 읽고 나면 우리들은 종종 인생무상과 생자필멸의 감상에 젖곤 한다.
  우리들이 놀이와 환락에 빠져 있을 때 가끔 어두운 마음이 되는 것은 인생이 
덧없다고 생각하는 슬픈 감정 때문이다.
  이백이 '뜬 세상 꿈과 같으니 기쁨을 이룸이 그 얼마랴'라고 읊은 것은 봄 밤에 
도리원의 잔치를 베풀고 술잔을 들었을 때였다. 또 왕희지가 불후의 명문 
"난정집서"를 지은 것도 벗들과 한자리에 모여 마음껏 즐거움을 나눈 다음이었다.
  그러나 이런 애틋한 감정이 없다면 인생은 하나의 아득한 명제가 될 것이다.
  인간은 죽는다. 인간에게는 한정된 수명이 있다. 그러므로 주어진 조건 아래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들은 생활을 안배해야만 한다. 이것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유교의 가르침과 통하는 바가 있다.
  그리하여 인간이 동물이고, 정상적인 본능이 충족되었을 때에만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 이런 사실을 믿어야만 본능과 관능의 인생에 눈을 뜰 수 있다.
  인간의 감각은 영과 육, 두 개의 문은 가지고 있다. 음악이란 우리들의 정신을 
높은 세계로 이끌어가지만 그것은 청각이라는 육신의 기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실적으로 연인을 생각해 보라. 연인의 마음과 육체를 구별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한 여성을 사랑한다면 그 모습의 가하학적인 비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몸짓과 미소와 성격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몸짓과 미소가 
정신적인 것인지 육체적인 것인지 결론을 내리기가 모호해진다.
  그러므로 서구인들의 논리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그들은 인생 그 자체를 
통찰하기보다는 정신만을 강조하여 우리들의 인생을 절름발이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구애와 구혼만을 할 뿐 결혼이나 출산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전장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보무 당당히 행진하는 영국군인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독일의 철학자들은 너무나 시시하다.
  그들은 열렬한 연인처럼 진리에 구애는 하지만 결혼을 신청하는 법이 없다.
  지적이니 관능적이니 하는 말들은 생활에서 우리가 즐거움을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어느 한 켠에 집착하여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자.
  우리들의 삶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보다는 인생을 알기 위한 과정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동물이다

  유사 이래로 아무도 남자에게 여자와 사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묘하게도 남자는 언제나 여자와 함께 살아왔다.
  남자들이여, 명심하라. 여자 없이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진리를 안다면 아무리 가벼운 입이라 할지라도 여자에 대해 경멸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남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머니로서의 여자, 아내로서의 여자, 또 딸로서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설사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윌리엄 워즈워드처럼 자기 누이에게 의지하거나 
허버트 스펜서처럼 가정부의 신세를 져야만 하는 것이다.
  어머니나 누이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철학이라도 
워즈워드의 마음을 구제하지 못할 것이며, 가정부와의 사이마저 원만하지 못할 
정도라면 신이여, 스펜서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가정에서 적절한 관계에 이르지 못하고 비뚤어진 도덕적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가련하다. 저 문제아 오스카 와일드처럼 '남자는 여자하고는 살 수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4000년 전의 힌두교의 한 작가와 
20세기의 오스카 와일드 사이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힌두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창조설은 오늘날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남녀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신이 여자를 만들 때 꽃의 아름다움, 새의 고운 소리, 무지개 빛깔, 미풍의 입맞춤, 
물결의 웃음, 양의 얌전함, 여우의 교활함, 구름의 분방함, 소나기의 변덕 같은 
것들을 모아 여성의 몸에 집어넣었다.
  이런 아내를 얻은 힌두의 아담은 행복했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지상에서 뛰놀며 
창조주를 찬양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아담이 신에게 달려와서 말했다.
  "이 여자를 어디로든 쫓아내 주십시오.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신의 그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아담의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래서 아담은 다시 신을 찾아가 간청했다. 
  "여자를 제게 되돌려 주십시오. 생각해보니 여자 없이는 못살 것 같습니다."
  신의 또 그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또 아담이 신 앞에 나타났다.
  "제발 이 여자를 데려가 주십시오. 맹세코 말씀드리지만 그녀와는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신은 무한한 예지와 자비로 아담의 말을 다시 들어주었다.
  드디어 아담이 네 번째로 찾아왔을 때 신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서약하게 하였고, 
이는 종신토록 인간 세상에 유전되었다.
  첫째 다시는 변덕을 부리지 말 것
  둘째 좋든 싫든 여자와 운명을 같이할 것
  셋째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이 지상에서 함께 살아갈 것.
  
    왜 혼자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인간이 세상을 홀로 살아가려 한다면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반드시 
자신의 주위보다 큰 집단과 결합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출발해야만 하는 것이다.
  자아는 신체의 크기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사회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한 고립된 자아보다는 더 큰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가정에 속해 있고, 이후 계속 가정 안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곧 자연이다.
  또 핏줄이란 것이 자아를 좀더 뚜렷하게 해 준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진실이다.
  이런 가정 생활을 잘 해나가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집단 생활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그리하여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젊은이여. 가정에서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경하며, 삼가 성실하게 한 후, 널리 
사랑하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라. 그런 다음에 여유가 있으면 그때 글을 배우라.'
  가정의 중요성을 덮어두고 생각한다면, 남자가 자신을 표현하고 자기를 충실케 
하며 그 개성을 최고로 발전시킬 수 있는 공간이란 적당한 이성으로부터 주어지는 
조화호운 마음에 의해 가능할 뿐이다.
  남자보단 강한 생물적 감각을 가진 여자는 이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모성 본능이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온갖 정신적 도덕적 특질이 나타나고 결합된다. 이를테면 여자의 
판단력, 현실주의, 참을성, 동정심, 감상적인 눈물, 이기주의적인 성격 등이다.
  여성이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심신 전체를 변화시키고 성격과 습관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또한 인생의 사명이나 목적에 대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느 부유한 가정의 응석받이 외동딸이 성장에서 결혼을 한 후 몇 달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자기 아기의 병간호를 하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있다.
  자연에서 아버지의 본능은 이렇게까지 강하지 않다. 그런 본능조차 없다. 이것이 
자연적인 본성일지라도 여자들은 심리적으로 괴로워한다.
  결국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외형적 생활의 피상적인 영달보다는 좀더 높은 곳에 깊숙이 가로놓인 남녀의 
본성의 근원에 접촉하여 정당한 배출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다.
  개인 경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독신 생활에는 뭔가 
개인주의적인 데가 있을뿐더러, 쓸데없는 주지주의적인 점이 있다. 그 후자 때문에 
독신주의는 배격당해 마땅하다.
  단지 좋다는 이유만으로 쓸모없는 주지주의자가 된 독신주의자나 미혼여성은 그 
외형적인 모습에 너무 치중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가정 생활 이외의 다른 면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싶은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지적인 흥미와 예술적인 흥미, 직업적인 흥미를 어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충족된 생활을 하지도 못하면서 그 대용물로 경력이니 공적이니 무슨 운동에 
끼여든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고 우스워 보인다.
  
    여자여! 남자여!

  현대 여성들의 권리와 사회적 특권은 표면적으로 매우 증대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여권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하는 미국에서조차 그렇다. 미국 여성이 지닌 
참된 주권은 여전히 그 전통적인 왕좌, 즉 가정이라는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현대 여성들은 어느 정도 통솔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가족을 수호하는 행복한 천사로서 그럴 뿐이다. 결코 사무실에서는 그렇지 
않는 것이다.
  여성들이 사무실에 있으면 남성들은 가정과는 달리 동료로서 냉정한 비판의 
화살을 쏘아대곤 하는 현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편견의 저울과는 달리 
여성들은 놀라우리만큼 일의 요령을 터득한다. 그리하여 어떤 종류의 일에 있어서는 
남성보다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곤 하는 것이다.
  남성들은 이런 여성들이 능력보다는 우아한 분위기나 부드러운 환경에 기여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다수의 여성들은 그런 믿음에 기대여 자신을 연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이런 여성의 모습을 또 남성들은 성적인 매력으로 받아들이곤 하는 
것이다.
  때문에 여성들은 그런 자신의 매력 포인트를 사회 생활에서 활용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가 지나쳐 여성 자신의 존재가치가 손상되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아왔다. 또 그런 시도는 불공평한 사건을 초래하기 일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름다움과 젊음이 성적인 매력의 전부라는 생각에 미혹되면 
중년의 여성들은 흰머리와 화살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원수로 삼고 승산 없는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청춘이나 여성을 무기로 싸우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찍이 한 시인이 다음과 
같이 경고한 그대로이다.
  '청춘의 샘이란 한낱 허망감이다. 그 누구도 태양을 힘으로 멈추게 하고, 가는 
청춘을 되돌리 수는 없다.'
  그것은 실로 무의미한 행동이다. 자신을 이겨내는 것은 오로지 실력과 불편부당한 
사회에 대한 시각뿐이다. 그리고 잘못된 개념을 웃으며 극복해 가는 유머러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또 늘어가는 자신의 백발에도 흥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헛된 꿈에서 벗어나라

  인간은 어떤 동물들보다 성적인 욕망이 강한 존재이다.
  때문에 인간은 그림이나 영화를 보고 성적인 자극을 받으며, 지나치게 변태적인 
교양에 빠져들어 인간으로서 어버이로서의 본능을 누르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남성과 여성의 결혼이란 실로 비정상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여성이 어머니가 아닌 남성의 상대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이상적인 여성이란 완전한 육체적 균형과 매력을 갖춘 젊은 여성이라는 정의로 
귀착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환상에 불과하다. 여성이 아기의 요람 곁에 있을 때만큼 
아름다운 경우는 없다. 나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여성만큼 아름다운 위엄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은 어쩌면 지극히 동양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런 나의 시각이 옳다고 믿고 있다.
  
    인생은 유전된다

  중국인의 전통적인 인생관은 한 개인이란 생사와 더불어 소멸해 버리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식과 손자의 생명과 더불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축구 경기에 비유하면 센터나 하프백이 무너지더라도 게임은 계속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인생의 성패란 개념은 전혀 다른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개인의 
인생이란 조상들로부터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왔고 자신은 또 자손들의 생명에 대한 
한 시대의 끈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그들의 생활의 이상은 조상에게 욕된 삶을 살지 않으며, 자신에게 욕되지 
않도록 자식을 잘 교육시켜야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거운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는 누구나 마치 자신이 아이가 되어 세상을 다시 
사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그 아이의 손을 잡거나 볼을 부비면 자신의 뜨거운 피가 
그 안에서 펄떡이는 듯한 감동을 받게 된다.
  그 생애는 가족이란 나무의 한 마디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커다란 생명의 
흐름의 일부임을 확신하기에 죽음까지도 기꺼워진다.
  그들에게 있어 최악의 비극이라면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고 재산조차 지키지 
못하는 못난 아들을 두었을 때이다. 이것은 만석지기 부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반대로 일찍 남편을 잃은 과부라 할지라도 똑똑한 자식만 있으면 빈곤이나 
굴종, 때로는 박해조차도 몇 년이라도 참고 견뎌낸다.
  중국의 역사나 문학을 보면 이런 여성들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남자들보다 현실적인 여성 감각으로 아이들에게 도덕적인 교육을 해나가는 여성들을 
보면 간혹 아버지란 존재는 불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도 된다.
  공자의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인을 이루면 늙어서는 화평을 즐기고, 젊어서는 정절을 배워, 안에 홀어미가 없고, 
밖에 홀아비가 없다.'

  그는 인간의 모든 본능이 먼저 충족될 것을 요구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만족한 생활 속에 정신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며, 그것만이 참된 평화일 
것이다.
  또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마음속 깊이 뿌리 박혀 흔들리지 않는 평화이다.
  
    노년은 아름답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며 높은 데로 거스르지 않는다.' 란 말이 있다. 이처럼 사람의 
본능은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사람의 교양은 그 부모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노인에 
대한 존경의 가르침은 만인의 교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효도의 기회를 잃고 있다. 마치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처럼 말이다.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멎지 않고, 자식이 공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이 만일 이 세상을 한 편의 시로 생각한다면 그 생애의 황혼녘은 가장 행복한 
때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연스런 노경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경험과 지혜가 쌓인다는 말과 같다. 때문에 
30세의 사람이 말할 때 20세 청년은 듣는 입장이 되어야 하지만, 그 30세의 사람도 
40세의 사람이 말을 할 때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전혀 편파적인 것이 아니다. 누구든 나이를 먹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우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훈계를 할 때에도 할머니가 입을 열면 그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더 많은 세월의 다리를 건넌 사람이기 때문이다.
  종종 미혼여성이나 부인들이 자신의 나이보다 젊어보이기를 원한다. 그만큼 
젊음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자의 일생을 통해 가장 긴 해는 29세 때라고 한다. 때문에 어떤 여자는 4, 5년 
동안 29세를 고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처럼 쓸데없는 일이 있을까.
  상대방에게 연장자라는 믿음을 주지 않는다면 어찌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또 나이가 어리고서야 인생이나 결혼, 또는 세상의 모든 참된 가치에 대해 어떻게 
지식을 얻었다 할 것인가. 나이는 어떤 경우 그 만큼이 지혜와 가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있으므로 자식들이나 젊은이들은 보다 즐겁게 나이를 먹을 수 
있다.
  그들에게 내가 가진 무엇인가를 나누어주고 그들 또한 그들의 뒤를 쫓아오는 
세대에게 그것을 고루 분배해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이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 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군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다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수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넣고
  떠나라.

  김새진 시집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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