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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역사를 바꾼 통치자들 미국편

by Casey,Riley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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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바꾼 통치자들 미국편

임용순

         차례

  머리말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앤드루 잭슨
  에이브러햄 링컨
  우드로 윌슨
  프랭클린 루스벨트
  존F.케네디
  후기


      머리말

  이 책을 펴내게 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특히 그 중의 하나가 미국에서 18년간 교수 생활을 
하면서, 또 유학생 시절을 보내면서 깊이 느낀 점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짧은 역사를 갖고 있는데, 이 짧은 기간 동안에 자연을 정복하고 다양한 인종 문제를 
극복하면서 오늘의 미국을 탄생시켰다. 미국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내가 느낀 것은 
미국을 건설하고 발전시키는 데 어떤 사람들은 대단히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특히 뛰어난 정치 지도자들은 오늘의 미국을 만든 주역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의 역사를 
이끈 대통령들은 42명이 있고, 그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 7명만을 
선정하여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는 미국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미국적인 것의 핵심에는 항상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타협과 양보라는 실용주의 정신이 
깔려 있음을 바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소개하는 7명의 미국 대통령들은 미국의 역사를 움직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이들의 개인적인 역사, 정치 철학 및 인생관을 더듬어 보면, 진정한 미국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진실한 삶의 자세 또한 배울 수 있다. 
이들이 남긴 역사적인 의미와 정책, 그리고 개인적인 면모와 특유한 얘깃거리를 듣다 보면, 
우리는 '진정한 영웅에게 있는 인간적 면모'보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민하고 놀고 웃고 우는 
속에서 자신의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이 작은 책자는 이들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이나 잡지, 
저서 등을 통해 이미 알려졌던 사실들을 보다 깊이 있고 재미있게 서술한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인간이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오르게 되기까지, 그리고 '고독한 정상'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들이 지녔던 인간적 고뇌, 그리고 부단한 노력을 그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전달하려고 애썼다.
  이들 개개인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이끌며 그 역사의 방향을 바꿔 놓기도 했지만, 이 
책은 이들의 업적을 찬양하거나 사회의 변혁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흔히 모든 
일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인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운명도 
인간의 노력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도록 하자는 데 있다.
  인간은 대부분 경험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한다. 그러나 아무리 영특한 사람도 자신의 직접 
체험만으로는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힘들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남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바꿔, 보다 폭넓게 세상을 보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쓸모가 있으리라고 자부한다.
  마지막으로 밝혀 둘 것은 여기서 이야기된 대통령들에 대한 사실들은 널리 알려져 있고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기에 참고 문헌을 제시하지 않았다.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가급적이면 형평을 취하고자 했으나 필자 나름대로 해석한 
부분도 있다. 이 점 오해 없기를 바란다.
      [조지 워싱턴

    1. 미국인의 영원한 우상

  미국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그는 아직도 미국인들의 가슴에 뜨겁게 살아 있는 인물이다.
  워싱턴이 대통령으로 재임할 때 만든 헌법이 아직도 미국 헌법으로 남아 있고, 그가 세운 
정치적 전통이 지금도 이행되고 있다. 또 워싱턴의 생일은 전 미국인이 휴일로 지키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붙인 거리가 있고, 학교가 있고, 기념관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거쳐 간 곳은 
전설과 신화로 점철되어 있다.
  이처럼 워싱턴은 미국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제 이 신화적인 존재인 
워싱턴의 생애를 살펴보자.

    2. 영국군 장교를 꿈꾼 버지니아의 농부

  많은 사람들이 워싱턴을 부유한 미국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워싱턴은 버지니아 주 포토맥 강 부근의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1732년 2월 
11일에 태어났다.
  워싱턴의 할아버지인 존 워싱턴은 거지와 다름없는 상태로 버지니아에 이주했고, 아버지인 
오거스틴 워싱턴은 가난한 농부였다. 그의 어머니인 메리 워싱턴은 아버지의 후처로, 25세 되던 
해 시집을 왔다. 워싱턴에겐 배다른 두 형이 있었고 다섯 명의 친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의 
맏이가 워싱턴이었다.
  어렸을 때 워싱턴의 꿈은 영국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1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그의 꿈은 버지니아의 산골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적으나마 재산을 워싱턴의 
형제들과 생모한테 물려주고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는 일생 동안 자기 자식인 워싱턴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다. 어린 워싱턴은 어머니의 냉대 속에서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 즈음, 그가 가장 존경하고 아버지처럼 따랐던 이복형인 로렌스 워싱턴이 영국군에 복무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워싱턴의 가슴속에도 영국군 장교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싹 텄다.
  워싱턴은 당시 버지니아에 많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던 영국의 귀족인 페어팩스 가족과 사귀게 
되었다. 페어팩스 가문의 덕택으로 워싱턴은 영국 해군 장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어머니의 심한 반대로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워싱턴이 16세 되던 해에 페어팩스 가문에서는 그들의 광대한 땅을 측량하려 했는데 워싱턴은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워싱턴은 넓은 서부 지역을 다니면서 측량술을 배우기도 하고 당시 
서부 지역에 퍼져 살던 인디언들과 만나기도 하였다. 이 경험은 뒤에 워싱턴이 영국군 장교로 
복무할 때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워싱턴은 17세 되던 해인 1749년에 정식 측량사가 되었고, 이듬해 생애 처음으로 
1천4백59에이커의 땅도 소유하게 되었다. 워싱턴으로서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나쁜 일이 따르는지, 그 무렵 워싱턴의 배다른 형 로렌스 워싱턴이 버지니아 민병대 
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워싱턴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슬픈 
사건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이 일을 계기로 당시 버지니아에서는 지원병 형식인 민병대의 
장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군사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안정된 생활을 유지시켜 줄 수도 있던 
측량사를 버리고 과감하게 군에 지원하였다.
  워싱턴이 군에 지원하던 그 무렵은 영국과 프랑스가 오하이오의 광대한 계곡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어 서로 다투던 시절이었다. 당시 영국의 버지니아 식민지 부총독으로 있던 
페어팩스 등 영향력 있는 버지니아인들은 오하이오 지역에 50만 에이커에 상당한 땅을 개간하여 
영토를 늘리려고 분주했는데, 캐나다로부터 진군한 프랑스군의 방해를 받게 되었다. 이에 
버지니아에서는 민병대를 충원하고, 그 지역의 측량 사업 일을 위해 그 곳의 실정을 잘 알고 
있던 워싱턴을 선봉 대장으로 발탁하였다. 워싱턴으로서는 최초의 군사 경험이 시작된 것이다. 
인디언과 프랑스 합동군과의 전투에서 지리에 밝고 인디언의 전술을 잘 알고 있던 워싱턴은 
승리를 거듭하여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워싱턴은 버지니아 민병대의 중령으로 빠르게 
진급되었고, 버지니아 식민지 주민들은 그를 영웅으로 환대하였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중령이 된 워싱턴은 버지니아 민병대가 영국의 정규군에 편입되기를 
원했다. 만일 민병대가 편입되면, 그가 소망하던 영국군의 장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망한 워싱턴은 군에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워싱턴은 로렌스 형의 형수로부터 고향 마운트버넌의 땅과 집을 세내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워싱턴은 전부터 연모해 오던 사라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연모하던 사라는 이미 그의 친구 페어팩스의 아내가 외어 있었다. 위싱턴은 2년 연상인 
사라를 16세 때 만나 마음속으로 늘 흠모해 왔었다. 사라도 역시 워싱턴을 좋아하여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 주었고, 두 사람은 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라의 부모님이 가문이 좋은 페어팩스에게 그녀를 시집 보내는 바람에 두 사람은 안타깝게도 
결합하지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시 만난 것을 계기로 사랑의 정념이 솟아올라 연정 관계는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1755년 3월 워싱턴에게 다시 군에 복무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 해에 영국에서 육군 소장인 
에드워드 브래독이 2개 연대를 이끌고 버지니아에 도착했다. 이 때는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전쟁을 선포하기 직전이었는데, 서로의 감정 악화로 이미 도처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브래독 장군의 임무는 오하이오 지역에 있는 프랑스군의 듀케인 요새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워싱턴은 군에 복무하게 되었다. 
  워싱턴은 이번 기회에 영국의 정규군에 장교로 복무하고 싶었으나, 브래독 장군은 특별한 
계급을 주지 않고 군사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더구나 듀케인 토벌 작전 동안 브래독 장군과 
워싱턴은 자주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브래독 장군은 유럽에서 익힌 전투 방법으로 이 작전을 
수행하려고 하였다. 이에 반해 워싱턴은 인디언과의 전투는 이 지역에 적합한 작전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워싱턴을 얕보던 브래독은 화가 나서 공개적으로 식민지 민병대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1755년 6월 9일 워싱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브래독 장군은 듀케인을 전면 공격하다가 
병사들만 희생시키고 참패를 당하였다. 이것은 영국이 미국을 식민지화한 이래 가장 큰 참패였다. 
결국 브래독 장군도 부상을 입어 입원 중 전사하게 되었고 영국군은 필라델피아로 패주하여 
후퇴했다. 영국군은 산간 지역의 전투에 익숙지 않았고, 말을 탄 기병들은 산에 숨어서 쏘는 적의 
탄알에 속수 무책으로 쓰러졌던 것이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듀케인 전투에서 영국 정규군은 패배를 당했으나, 워싱턴은 미국 식민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영웅이 되었다. 브래독 장군이 부상당한 후에 워싱턴이 지휘관이 되어서, 살아 
남은 영국 정규군과 식민지 민병대를 성공적으로 철수시킨 공훈을 세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식민지 민병대의 정규군에 대한 반발이 그를 더 큰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철수한 다음 
워싱턴은 다시 낙향하게 되었으며, 사라 여사와의 교류도 다시 시작되었다. 
  이즈음에 프랑스와 인디언의 동맹군이 버지니아 지역까지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유럽 대륙에서 선전 포고를 하고 교전 중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프랑스군은 캐나다 지역에서 남하하여 영국의 팽창을 저지하려고 했고, 영국은 
이에 맞대응하여 곳곳에서 전투와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초기의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밀렸다. 그 이유는 인디언이 프랑스측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오는 영국의 팽창 정책에 불안해 하고 있었다. 이런 인디언의 상태를 알아챈 
프랑스군은 미국의 남서부 지역에 거주하는 인디언들과 동맹을 맺어, 영국군을 몰아내면 
인디언에게 영토를 주겠다고 협정한 것이다. 그래서 인디언과 프랑스의 동맹군이 오하이오에서 
버지니아로 공격해 들어온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버지니아 식민 의회는 버지니아 군을 창설하였고, 워싱턴은 22세의 젊은 나이로 
버지니아 군의 사령관이 되었는데 계급은 대령이었다. 인디언, 프랑스 연합군과 영국, 식민지 
민병대의 싸움은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는데, 사령관으로서의 워싱턴 앞에는 많은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버지니아 식민 의회는 군사력이나 전쟁 물자를 충분히 뒷받침해 주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웃인 메릴랜드 식민지와의 분쟁 때문에 워싱턴은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좌절감에 휩싸인 워싱턴은 전투는 뒷전인 채 날마다 술을 들이켰다. 또한 도박도 즐겼다. 
이 틈을 타 프랑스군과 인디언은 영국인 거주 지역을 공격한 후 마을을 불살랐다. 그러나 
워싱턴의 군대는 워낙 수가 적은데다가 사기마저 떨어져 이들을 상대하기가 힘겨웠다. 이렇게 
일이 안 풀리자 술과 도박으로 지새우다가 결국 워싱턴은 병이 들어서 고향인 마운트버넌으로 
이송되었다. 다행히도 워싱턴의 연인이었던 사라 여사가 그를 따뜻이 간호하여 몸은 회복될 수 
있었다. 
  영국은 듀케인 요새를 정복하기 위하여 다시 포브스 장군을 사령관으로 파견하였다. 포브스 
장군은 워싱턴을 싫어하였으나, 그의 능력은 높이 평가하였다. 그래서 그는 워싱턴에게 
준장이라는 임시 계급을 주고 듀케인 요새를 공략하기 위하여 정예병으로 구성된 전위대의 
지휘를 맡겼다. 1758년 11월 24일 워싱턴의 전위대와 포브스 장군의 본대가 듀케인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인디언과 프랑스 연합군은 이미 후퇴한 다음이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렇게 영국군을 괴롭히던 듀케인 요새를 워싱턴은 총 한 번 쏘지 않고 정복한 것이다. 워싱턴은 
다시 고향인 마운트버넌으로 돌아갔다. 또다시 영웅이 된 그에게 버지니아 식민 의회는 칭송의 
결의문까지 통과시켰다. 
  고향에 돌아온 워싱턴은 그 때부터 16년 동안 사업가로서 맹활약하여 재산도 축적하게 되었다. 
포브스 장군과 함께 듀케인 원정에 나서기 전인 1758년 초, 건강을 회복한 워싱턴은 자기보다 
연상이며 과부인 마타 커티스 여사와 약혼을 하였고,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마타 여사는 미인이 아니었다. 키도 작고, 몸도 뚱뚱한 여인이었다. 또한 재치가 있는 여인도 
아니었다. 전남편과의 사이에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둔 평범한 과부였다. 그러나 이 평범한 여인이 
뒷날에 워싱턴을 큰 인물로 만든다. 
  워싱턴은 마타 여사와 결혼하기 몇 개월 전만 해도 사라 여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열렬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깊은 
좌절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자신의 출세의 길을 열어 준 집안의 아들이자 가까운 친구인 
페어팩스의 부인 사라를 사랑한다는 죄책감 때문에 심한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마타 여사와 1759년 1월 6일에 결혼함으로써 그러한 문제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처음에는 
사랑하지도 않던 여인과 결혼했으나, 워싱턴은 마타 여사의 진실하고 겸손한 모습에 자신의 
과거를 잊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먼 후일 나이가 들어 워싱턴은 손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충고를 하고 있다. 
  "결혼 전에 완전한 결혼을 기대하지 마라... 시적인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는 없단다. 사랑이라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모든 아름답고 달콤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사랑도 
싫증 나기 마련인 것이란다. 정열이 사라지면 사랑도 식는 법. 사랑이란 그것만 갖고 살기에는 
너무나 까다로운 음식이란다. 남자를 택할 때는 그가 훌륭한 센스를 갖고 있는가, 좋은 성격을 
소유하고 있는가, 네가 마음껏 살아갈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경제적 수단이 있는가를 
고려하거라... 즉 우리가 즐기는 것에는 항상 결함이 있기에 늘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는 
못하는 거란다."
  이 같은 충고는 어쩌면 워싱턴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워싱턴은 
결혼함으로써 우선 상당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마타 여사는 버지니아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고 
부유한 가문의 딸이었다. 마타 여사의 전남편인 커티스도 재력이 있는 사업가였다. 워싱턴은 마타 
여사와 결혼함으로써 커티스 시의 유산 중 3분의 1을 갖게 되었고 나머지 3분의 2도 커티스의 
자식들에게 상속되었지만 워싱턴이 보호자로서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워싱턴은 결혼과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워싱턴의 결혼 생활이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식이 하나도 없었고, 마타 
여사의 전남편의 자식들만 둘 있었다. 워싱턴으로서는 그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도 없었기 때문에 
단지 보호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더욱 어려운 문제는 두 아이가 엄청난 
문제아들이어서 워싱턴을 수시로 괴롭혔다. 
  이 무렵 워싱턴의 죽은 형 로렌스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워싱턴은 뜻하지 않게 마운트버넌의 세 들어 살던 집과 땅 전체를 상속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워싱턴은 평범한 농부에서 일약 부유한 농장주가 되었고, 버지니아 상류층 인사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워싱턴이 이러한 행운만으로 부를 축적한 것은 아니었다. 농장주인 워싱턴은 당시 다른 
농장주들과 마찬가지로 흑인노예를 사용하여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주로 담배의 원료인 
엽초를 재배했다. 이 엽초는 보통, 수확기에 영국의 중간 상인에게 팔았다. 당시 관세 제도상 
식민지에서는 직접 유럽에 수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버지니아의 농장주보다는 영국의 중간 
상인이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런던에 있는 중간 상인들과 거래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거래를 하면 할수록 버지니아의 엽초 재배자들은 손해를 보게 되어 있었다. 
이같이 불합리한 제도로 인해 버지니아의 농장주들 중 많은 이들이 파산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넓은 토지를 획득하여 농장주가 된 워싱턴은 다른 농장주들과는 다르게 농장을 
운영했다. 먼저 그 자신부터 앞장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였다. 워싱턴은 담배의 계속적인 
재배가 토지를 산성화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토비를 사용함으로써 수확을 늘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워싱턴은 농지 경작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출판된 농지 경작인데 
관한 저술에 의존하지 않았다. 즉 미국 식민 대륙은 특유의 농업 방법을 개발해야 된다고 믿었다.
  워싱턴은 자기가 소유한 각 지역의 흙을 채취해서 그 토지에 적합한 특유의 농작물을 재배하는 
실험을 본인이 직접 해보기도 했다. 워싱턴은 포도주를 만드는 데도 관심이 있었으나 절대 
런던에서 수입한 포도는 사용하지 않았다. 워싱턴은 이런 여러 과학적인 영농법을 연구하는 한편 
당시의 실정에서 손해를 주고 있던 엽초 재배를 포기하고 밀과 옥수수를 주로 재배했다. 그리고 
수확된 밀과 옥수수는 미국 식민지에 판매했다. 이렇게 되자 수입도 높아지고 고용인도 늘었다. 
런던에서 독립을 하면 할수록 버지니아 농장주가 수익을 더 올리게 된다는 사실을 워싱턴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 산 경험이 그가 뒤에 독립 전쟁에 가담하는 데 결정을 내리게 
도와준다. 
  방대한 농장을 경영하는 데에서도 워싱턴은 거의 군사 조직과 흡사한 제도를 활용하였다. 
그리고 노예 제도의 비인간적 요소를 깨달아 노예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하려고 애썼다. 5년 
이상을 이렇게 농장의 혁신적 경영에 집중하고, 영국의 중간 도매상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워싱턴은 점점 더 부유한 종장의 주인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워싱턴은 손님을 모아 놓고 어울리는 것을 무척 즐겼다. 기록에 의하면 1768년부터 
1775년까지 7년 동안 2천 명의 손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환대했다고 한다. 즉 워싱턴이나 마타 
여사 둘 다 조용한 생활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성격으로 인해 워싱턴은 
많은 사람들과 알게 되었고 누구에게서나 좋은 평판을 받게 외었다. 그래서 워싱턴은 버지니아 
식민 의회의 의원으로 뽑혀 오랫동안 활동했다. 그러나 의원으로서는 그다지 성실한 편이 못 
되었다. 의회에 불참하기가 일쑤였고 특별하게 신경 써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관철시키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동료 의원의 부탁이 있을 때는 꼭 들어 주고, 의회의 회기 
중에는 비교적 성실하게 참여하려고 애쓰는 편이었다.
  워싱턴이 대농장주로서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노예를 대하는 태도였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소유한 노예를 절대 팔지 않았다. 그 이유는 노예를 사고 팔면 노예의 가족들이 서로 헤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예의 식구가 늘어나도 일감을 늘려 
주며 데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워싱턴은 많은 이웃을 도와 주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겐 보호자가 되어 주기도 했다. 
  이처럼 워싱턴은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영국 식민 정부를 부패한 정부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이들과 사업을 위한 흥정도 하였고, 때로는 로비 활동을 하기도 했다. 과거 측량사로서의 
경험이나 인디언과의 전투 경험을 통하여 서부에 방대한 토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 
토지를 별다른 투자도 하지 않고 쉽사리 획득하기도 하였다.

    3. 독립 전쟁의 멀고 먼 길 

  미국 식민지 대륙은 1760년대에 들어오면서 격동기에 진입하게 된다. 영국이 미국 대륙과 
캐나다에서 인디언과 프랑스 연합군을 무찌르고 패주시키게 되자 식민지의 영토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이렇게 영토가 확장되자 식민지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토지를 늘리는 등 많은 혜택을 
입었다. 그러자 영국 정부와 의회는 식민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혜택을 입었으니 전쟁 비용을 
부담해야 된다고 주장을 하며 급기야는 각종 세금을 부과했다. 설탕법(Sugar Act), 인지법(Stamp 
Act) 등 식민지인들의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품에 과세하는 법들이 그것이다. 식민지의 
거주인들은 이에 맞서, 식민지의 대표가 참여하지 않는 런던의 의회는 식민지 주민에게 세금을 
부과할 권리가 없다고 하면서 영국 정부에 반항하기 시작하였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유명한 
말은 이때 나온 말이다. 이렇게 사태가 발전하자 식민지 거주민들은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며 
식민지 대표권은 물론이고 식민지에서의 정책 결정의 자율권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이 같은 상황에서 워싱턴의 초기 반응은 신중론 쪽이었다. 그러다가 미국 식민지 거류인들이 
영국에서의 소모품 수입을 거부하며 영국 상품 불매 운동을 전개하자, 워싱턴은 태도를 바꿔 
이를 환영했다. 워싱턴은 미국인이 런던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항상 
주장했던 터라 이 같은 사태는 환영했던 것이다. 
  사태는 점차 걷잡을 수 없게 식민지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나, 영국 정부는 본국만이 식민지를 
통치할 법을 제정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법'을 선포하면서 식민지인들을 억압하게 되었다. 
1773년에는 이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소위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 사건이 일어났다. 
식민지인들은 1767년 차, 종이, 유리 등에 과세하는 법이 제정되자 격렬한 반대 운동을 벌였으나 
차에 대한 과세만은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차에 대한 과세는 식민지에 대한 차별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차를 싣고 보스턴에 정박해 있던 동인도 회사 소속의 상선에 인디언 차림으로 
변장한 시민들이 들어가 선적해 둔 차 상자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이 
사건을 난동으로 보고 보스턴 항을 봉쇄하고 영국군을 파견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전 식민지인들은 흥분하여 이제 무력 대응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그 때까지도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던 워싱턴도 영국에 저항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마침내 1774년 9월과 10월에 걸쳐 2개월 동안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제1차 
대륙 회의를 열었다. 워싱턴은 버지니아 대표 7인 중의 하나로 이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이 회의에서 식민지 대표들은 본국 의회의 입법권을 부정하고 본국과의 
통상을 중지하기로 결의 하였다. 이 결의가 있은 바로 직후 렉싱턴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무력 충돌하게 되었고 이로써 미국 독립 전쟁의 봉화가 지펴지게 되었다. 워싱턴은 
다시 군으로 복귀하여 버지니아 민병대를 철저히 훈련시키며 전쟁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1775년 5월에 제2차 대륙 회의가 열려 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미국 대륙의 통합된 
대륙군을 창설하기로 결의했다. 문제는 누가 최고 사령관이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미국은 
동북부와 남부가 모든 정치적, 경제적 주도권을 나눠 갖고 있었다. 그런데 독립 혁명을 강력히 
주장한 세력은 동북부의 사람들이었다. 다행히도 매사추세츠 주의 대표이며 후일 대통령이 된 존 
애덤스가 워싱턴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자고 강력히 추천하였다. 결국 1775년 6월 16일 만장 
일치로 워싱턴은 미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워싱턴이 대륙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남북 사이의 
분열을 막고 국민을 동원하려먼 남부의 인사가 사령관이 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당시 
식민지에는 영구에 충성을 하자는 충성파와 독립을 하자는 애국파가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지방에 따라 각양 각색이었다. 하지만 남부의 대지주들은 상당수가 충성파에 가까웠다. 따라서 
남부의 유력 인사가 독립 전쟁의 총사령관이 된다면 남부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둘째는 워싱턴이 이미 프랑스와 인디언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미국 식민지 
거류인들에게는 영웅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워싱턴의 개인적인 인격이었다. 그는 체구도 크고 당당한데다가 말수가 비교적 적은 
과묵한 사람이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덕이 있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또한 의리의 사나이로 
알려져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잘 이루며 아량이 넓은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었다. 이렇게 
되어 워싱턴은 봉급도 받지 않으며 군의 운영 경비만을 대륙 회의에서 부담하는 조건으로 
사령관직을 수락했다.
  워싱턴은 사령관이 되면서 4명의 특별 보좌관을 임명했다. 첫번째 인물은 찰스 리 장군으로 그 
역시 이미 미국 대륙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그 무렵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이었으나, 본래 
영국의 정규군 장교로 봉직하면서 폴란드에 가서 육군 소장이 되고, 러시아 군과 함께 터키 군을 
물리치는 데 크게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영국으로 귀국하면서 극단적인 팜플렛을 
저술하고, 국왕 조지 3세를 면전에서 모독하여 미움을 사는 바람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머리가 좋고 군사 작전에는 뛰어났으나 말버릇이 고약한 단점이 있는 인물이었다. 당시 그는 
워싱턴을 업신여기며 그의 휘하에서 일하게 된 것을 자신의 큰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두번째로 워싱턴의 보좌관이 된 인물은 호래시오 게이츠 장군이었다. 그는 영국의 공작 
집안에서 식모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공작의 아들이므로 귀족이라고 
생각했다. 게이츠는 영국 정규군의 소령으로 근무했는데 능력은 있었지만 신분의 제약 탓으로 더 
이상 진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워싱턴의 권유로 버지니아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는 
고집이 세고 자신감이 강하며 야심이 대단했다.
  한편 워싱턴은 2명의 보좌관은 민간인으로 임명했다. 한 명은 조지프 리드로 변호사이며 혁명 
위원회 지도자였다. 다른 인물은 토머스 미프린이라는 사업가였는데 그는 대단한 웅변술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보좌관들을 임명하고 군을 지휘하기 시작한 워싱턴에게 닥친 최초의 고민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가 임명한 이 4명의 보좌관들과의 갈등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을 
임용한 워싱턴을 배반하고 심지어는 무서운 정적으로까지 되었다.
  게다가 전쟁 초기에는 난처한 일이 수없이 많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워싱턴이 케임브리지로 진군하다가 중간에 있는 뉴욕 시에 들르게 되었다. 마침 그 때에 
영국을 다녀온 식민지 뉴욕의 총독인 윌리엄 트리온이 뉴욕 시에 도착했다. 뉴욕 시민은 누구를 
환영해야 할지 망설였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뉴욕 시민들은 독립전쟁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결국 뉴욕의 민병대는 워싱턴을 환영하고, 뉴욕 주 의회 의원들은 총독을 
환영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환영한다는 해괴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워싱턴이 그 날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많은 시민들의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파티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 나갔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막 도착한 영국 총독의 환영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였다. 영문을 모르는 워싱턴이 사람들이 빠져 나가는 것을 의아히 여겨 주변의 민병대 장교에게 
묻자 그는 이런 사연을 말해 주었다. 그 때 워싱턴은 깨닫게 되었다. 즉 미국 혁명의 승리를 
결정짓는 관건은 영국군과의 전투가 아니라 이들 민간인의 향방이며, 혁명의 성공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민간인의 지지와 성원을 획득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이후 워싱턴은 독립 전쟁 내내 늘 최종의 전투는 미국 시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전투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 두었고 민심을 획득하려고 노력하였다. 더구나 워싱턴이 지휘하는 대륙군은 
전투 경험도 없고 군기도 전혀 잡히지 않은 시민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이었다. 또한 식민지의 
시민들 중 상당수가 영국 정부에 충성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워싱턴은 전투를 하면서 군대를 
조직하고 충원하며 훈련시켜야 했다. 더욱이 추위를 이길 군복도 제대로 비치되어 있지 않고 
식량이나 의약품 등 보급 물품은 항상 부족하였다.
  이 같은 군대를 이끌고 워싱턴이 초기의 접전에서 승리를 거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영국군이 미국 대륙군을 너무나 업신여겨 방심하였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영국군의 
후속부대 충원이 늦었고 보급선이 자주 차단되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영국군이 주로 공격을 하고 
미국군은 숨어서 방어를 하기 때문에 기동력이 좋고 지리 지형에 익숙한 대륙군이 전투에 
유리했다. 넷째는 워싱턴이 마음에 새겨 둔 것처럼 매사추세츠 주의 시민들은 대륙군을 열렬하게 
지원했기 때문이다.
  1776년 7월 4일 미국 대륙 회의는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 선언서"를 
공포했다.

  "...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신은 인간에게 몇 가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그 권리 중에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이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하였으며,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피치자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정부이건 이러한 목적을 위배했을 경우 그 정부를 변혁하거나 무너뜨려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 국민의 권리이다..."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로버트 리빙스턴, 로저 셔먼 등이 기초 위원으로 
작성한 이 "독립 선언서"는 프랑스 "인권 선언"과 더불어 억압받으며 자유와 평등을 찾으려는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복음서와 같다. 
  1776년 독립과 더불어 미국의 13주는 미합중국을 창설하였다. 하지만 독립과 동시에 워싱턴은 
대륙 회의와 계속 충돌해야만 했다. 워싱턴의 군대는 충원이 필요했으나 의회가 경비를 제대로 
부담해 주지 않아서 계속 병력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북군의 경우 워싱턴의 휘하에 
있었으나 준독립적인 군처럼 행동해서 워싱턴이 통솔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문제 때문에 
워싱턴은 대륙회의에 경비 조달과 군 인사권을 요구했으나 대륙 회의는 들어 주지 않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워싱턴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더욱 많은 문제를 제기하였다.
  1776년부터 1783년 4월 18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워싱턴은 이런 문제들을 안고 항상 마음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이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전쟁이 지루하게 진전되고, 또한 방대한 지역에서 전투를 해야 하므로 미합중국군의 
통솔과 통합 조절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반면에 영국 본토에서는 미국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하여 
군을 대거 증원하였다. 여기에 하위 장군이나 콘와리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도 점차 미국에서의 
전투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영국군은 점차 미국군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효과적인 대응을 하기 시작하였다. 1777년에는 급기야 콘와리 장군이 통솔하는 영국군이 
미합중국의 당시 수도였던 필라델피아를 점령하고 만다.
  워싱턴이 다음으로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비난과 질시였다. 미국은 워낙 방대한 땅덩어리이기 
때문에 군사 작전을 수행하다 보면 때로는 방어망이 뚫리기가 쉬웠다. 그런데 워싱턴이 몇 곳에 
서 패전하자 몇몇 정치인들은 그를 지휘관에 임명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워싱턴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비난은 워싱턴의 군 통솔력에 영향을 미쳐 휘하의 장군들이 워싱턴의 지시를 
따르려 하지 않게 만들었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일사 불란한 지휘 체계인데 그것이 
흐트러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워싱턴이 작전상 불가피하게 결단을 내린 일방적인 명령, 때로는 독재적 결정에 
미 의회 의원들이 비난을 퍼부었다. 군의 충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워싱턴은 각 주에 
흩어져 있는 민병대를 일방적으로 미합중국군으로 편입시켰다. 이 조치는 아직도 각 주가 주권 
국가라고 믿고 있던 의원들을 격분시켰다. 비난의 말들이 벌떼같이 쏟아졌다. 그러나 
워싱턴으로서는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지리하게 의회의 결정을 기다리느니 비난을 
받더라도 독자적인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워싱턴은 작전 수행 중 주민에게 보여 준 관대한 조치 때문에도 비난을 받았다. 당시 상당수의 
시민들이 영국군에 협조를 하는 편이었다. 과격한 의원들은 이들을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심을 얻는 것이 최상의 전투라고 믿는 워싱턴은 이러한 시민들을 모아서 영국군 
경계선으로 보내고, 그들이 원하면 부녀자들은 집에 거주하도록 허락하였다. 더불어 이들을 적의 
경계선으로 보낼 때 전투에 영향을 주지 않는 소유물은 갖고 가게 했다. 이 같은 워싱턴의 
조치는 인간적이기도 하지만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볼 때 훌륭한 전술이었다. 그러나 혈기에 
찬 과격한 시민이나 정치인들은 이런 조치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워싱턴이 영국군과 
내통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며 비난했다.
  한편 프랑스는 세계 도처에서 영국과 경쟁 대립하고 있어서 미국의 독립 전쟁을 지지하고, 
나아가 군을 파견해 미합중국군을 도우려고 했다. 이렇게 프랑스군이 미합중국군에 합류하여 
전투병력이 늘어나 도움을 주기도 했으나, 총지휘관인 워싱턴에게는 문젯거리였다. 미국에 온 
프랑스군은 대부분이 장교였다. 이 엄청난 수의 장교를 수용하기도 어려운 형편인데 때로는 
그들이 터무니없는 계급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워싱턴은 1천 7백 77명에 이르는 이들에게 알맞은 
계급과 임무를 주느라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러나 연방 의회에 속한 전쟁 위원회는 이들의 
임명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워싱턴은 또다시 의회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들 프랑스 군 가운데도 뛰어난 사람은 있었다. 그중 세 사람이 가장 돋보였다. 듀로테일 
대령은 훌륭한 엔지니어로 워싱턴이 요새를 구축하고 다리를 놓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콘웨이장군은 유럽에서 전쟁을 해본 경험자로서 유능한 사람이었으나 후일 워싱턴에게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프랑스 장교는 라파에트 백작을 예우하기 위해 임시 
계급이긴 하나 소장이라는 계급을 주었다.
   라파예트 백작 같은 사람은 후일 워싱턴과 부자지간 비슷한 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상당수의 
프랑스 장교들은 워싱턴을 무시하거나 때로는 경멸하기까지 했다. 특히 콘웨이 장군은 본인이 
프리드리히 대제 휘하에 있었고, 미국군 중에서는 가장 경험이 많은 군인이라고 호언 장담하며 
워싱턴을 은근히 무시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진급하고자 애썼는데 그의 속마음에는 미국군에서 
소장이 되면 프랑스군의 준장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남다른 속셈이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그를 진급시켜 주지 않았다. 그는 의회에 있는 워싱턴의 정적들과 내통하여 워싱턴에게 압력을 
가하였으나., 워싱턴은 사임하겠다고 의회를 협박하여 이를 저지하기도 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워싱턴이 전쟁 동안에 직면한 문제 중 가장 당혹스러운 일은 휘하에 있던 
보좌관들의 반란이었다. 게이츠 장군은 공공연히 워싱턴 사령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서 
워싱턴의 작전이 실패하게 만들었다. 미프린과 리는 의회를 통해서 대륙 회의 전쟁 위원회의 
목적을 바꾸어 놓으려고 했다. 본래 의회가 전쟁 위원회를 구성할 때는 워싱턴의 작전 수행을 
돕기 위한 기구로 설립했는데, 미프린과 리는 이 기구를 워싱턴의 작전을 감시하는 기구로 
바꾸려고 하였다. 또한 리와 미프린은 콘웨이를 진급시켜 워싱턴을 격하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화가 난 워싱턴이 사임서를 편지로 의회에 보내고, 워싱턴의 부하 장군인 카드와라드가 
콘웨이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권총으로 콘웨이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난데다 워싱턴 
휘하의 부관들이 들고일어나 이들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워싱턴에게 가장 크게 상처를 입힌 사건은 워싱턴이 아끼고 신임하던 
아널드 장군이 미국을 배반하고 영국에 투항한 일이었다. 그리고 인간적인 배반감을 맛보았던 
사건은 워싱턴이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페기 쉬픈 양이 영국군 장교인 안드레와 밀통하여 군사 
기밀을 누출한 사건이었다. 후일 쉬픈 양을 체포하여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관대한 처분을 
내렸지만 워싱턴으로서는 진정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1779년 프랑스의 정규군이 미국에 파견되었다. 프랑스 군 사령관은 로샴보 백작으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가문과 경력을 믿고 워싱턴을 업신여기는 데다 
그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워싱턴을 미개한 군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영어를 할 줄 
몰라서 루드비히 본 크로센이 중간에서 통역을 맡아서 작전을 이행해야만 했다. 로샴보 장군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워싱턴이 작전을 이해하는 데 문제가 생기곤 하였다. 그는 실전에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면서 워싱턴에게 장시간 군사학 강의를 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워싱턴은 
인내력을 갖고 들어 주었다. 비록 그가 진심으로 그 강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을 
도우려고 온 성의를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워싱턴은 이러한 악조건과 역경을 이겨 내고 미국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항상 
어떤 어려운 문제가 닥쳐도 낙망하지 않고 굳은 의지로 헤쳐 나가고자 했다. 독립 전쟁이 일어날 
당시 미국에는 각 주의 대표자 회의인 대륙 회의만 있었고 행정부는 없었다. 전쟁의 바쁜 
와중에서도 워싱턴은 수도인 필라델피아로 자주 찾아가야 했다. 군의 동원, 보급의 증대, 
군인들의 봉급 지불 등을 요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의회는 일종의 국가 연합의 
의회에 지나지 않아서 워싱턴의 요구에 제대로 응해 줄 형편이 못 되었다. 병사들은 보급이 
차단되어 배고픔과 장비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겨울이 됐는데 방한복은 커녕 입을 옷도 없어서 
사병들은 전신 동상에 걸리는 고생을 했다. 군인들의 봉급마저도 당시에 별로 신용이 없던 대륙 
회의에서 발행한 지폐로 지급했으나 그것은 돈으로서의 가치도 없었다. 그러나 이나마도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병들의 불만은 대단했으며 때로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온 최악의 사태가 전쟁의 막바지인 1783년 3월에 일어났다. 대륙 회의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장교와 사병들이 전문을 돌려 의회로 쳐들어갈 것을 선동한 것이다. 
워싱턴은 이 소식을 듣자 곧바로 달려가 장교들에게 민간 정부에 도전하는 것은 스스로 자유를 
버리려는 행위와 같다고 역설하면서 즉각 중지할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들의 불만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3월 15일 수백 명의 장교와 사병들이 모였다. 워싱턴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자리에 직접 찾아가서 장문의 연설을 하며 이 반란의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군사들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무기력함을 느낀 워싱턴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한 의원이 반란의 
부당함을 지적하려고 워싱턴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려 했다. 
  편지를 읽기에 앞서 늙은 워싱턴은 말했다.
  "여러분, 제가 안경을 좀 써야겠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전쟁을 하다 보니 이제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눈은 장님이 될 정도로 침침해졌습니다..."
  이 말에 그 곳에 모였던 수백 명의 장교와 사병들은 엉엉 울고 말았다. 물론 군인들의 
쿠데타는 실현되지 않았다. 후일 제퍼슨 대통령은 이 일을 언급하며 워싱턴이 아니었으면 미국의 
자유는 수호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술회하였다. 
  이미 말했듯이 당시 미국은 행정부가 없어서 워싱턴이 사실상의 행정부 수반 노릇을 했다. 이 
때 워싱턴의 이런 태도와 지위에 대하여 강한 의심을 품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상당수의 
영향력 있는 미국인들이 워싱턴을 정점으로 하는 일인 행정부를 세우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극단적인 경우는 워싱턴이 왕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전 유럽이 
왕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다. 버지니아 출신인 루이스 니콜라 대령은 워싱턴에게 편지를 보내 
왕이 될 것을 간곡히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워싱턴은 전쟁 중에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커다란 불행이라고 답하였다.
   이렇게 온갖 유혹과 역경을 겪었지만 워싱턴은 언제나 끊임없이 성실하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오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그런 면모가 돋보인 것은 실제로 행한 전투에서였다. 전쟁 
초기에는 유럽식의 전투 방법으로 싸웠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꿔 후일 
트렌턴과 프린스턴에서는 그 나름대로 연구하고 개발한 미국식 전투 방법을 구사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유럽식의 전투는 대형 편대에 의한 전투였다. 이 방식은 규율과 훈련을 필요로 하고 조직을 
중심으로 한 전투였다. 그러나 워싱턴의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니 많은 훈련과 경험을 쌓은 
영국군을 이기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워싱턴은 인디언과 사냥꾼들의 작전을 활용하여, 
편대가 아니라 개인의 전투 역량을 다할 수 있게 일종의 유격대식 전투 방법을 개발하였다. 
이렇게 되자 워싱턴의 군대는 승리를 거듭하게 된다.
  이러한 미국식의 전투를 이해하지 못한 영국군은 패전의 이유도 모른 채 점점 겁을 먹게 
되었다. 계속 패전만 하자 진노한 영국의 왕 조지 3세는 영국의 미국 파견군 사령관을 네 번이나 
교체했다. 그러나 작전의 실패를 거듭하고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한 영국군은 결국 
요크타운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연합군에게 패주하고 만다. 여기에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자, 국제 정세와 전투 상황을 감안한 영국 정부는 1783년 
4월 18일 미국과 평화 협정을 맺고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영국군이 1783년 11월 25일 
뉴욕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함으로써 8년여에 걸친 독립 전쟁은 막을 내린다.

    4. 마운트버넌의 인심 좋은 장원주

  8년간 총사령관에 봉직한 워싱턴은 전쟁에 승리한 후 고향인 마운트버넌으로 내려가 한 
시민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이미 평범한 개인이 아니었다. 그는 예전의 일개 농장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 마운트버넌도 개인의 장원이 아니었다. 매일 손님이 
찾아오기 때문에 워싱턴은 이들을 맞이하여 접대하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다. 물론 
손님들은 꼭 집에서 재웠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많은 토지를 사들여서, 그의 토지가 포토맥 강을 
끼고 10마일이나 되었다. 그가 전쟁을 하는 동안 마티 여사가 착실하게 집안을 돌본 결과였다. 
이렇게 토지는 늘고, 또한 노예를 절대 팔지 않는 원칙 덕택에 식구가 엄청나게 늘었다.
  그는 매일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성격이 
원래 사교적인데다가 호방한 탓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때로는 먼 프랑스에서까지 사기꾼이 찾아와서 워싱턴과 함께 전쟁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워싱턴의 인격은 여기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그들이 사기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워싱턴은 이들을 집에 재워 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데까지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 경비가 말할 수 없이 많이 들게 되어 워싱턴은 심지어 빚까지 지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많은 독지가들과 버지니아 주 정부는 그에게 경제적으로 보조해 줄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워싱턴은 이 모든 호의를 거절했다. 그는 천성이 남을 도와 주면 도와 주었지 
남의 도움이나 은혜를 입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싱턴은 마운트버넌으로 은퇴한 후 개인적으로 사업을 벌이기도 했으나 예전과는 달리 전념할 
수 없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여기에 손님 접대로 펑펑 쓰게 되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그 
많은 재산으로도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그런데 워싱턴이 이런 고통을 겪는 것처럼 
새로 탄생한 미합중국도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 워싱턴까지 괴롭히는 것은 전쟁 중 
구에 복무한 사람들에게 약속한 봉급의 지불이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대륙 회의로서는 전쟁 중 
약속했던 군의 봉급 지불을 이행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독립이 된 각 주는 전쟁 중의 빚을 갚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중앙 정부는 조세권이 없어서 기금을 조성하지 못했다.
  더욱이나 각 주는 서로 경쟁을 하면서 때로는 다른 주의 주민에게 해코지하기가 일쑤였다. 각 
주는 따로따로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이런 실정이니 서부에 이주한 사람들은 
융자받을 길이 없어서 농지를 수탈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결국 농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1786년 매사추세츠 주에서 농민 봉기에 가까운 셰이스 반란이 일어났다. 만일 이 같은 반란이 
전국적으로 퍼진다면 연방 정부가 이를 제압할 방도가 없었다. 군대도 없었고, 또한 군을 
창설한다 해도 이를 유지할 연방 정부의 재원도 없었다.
  이런 중앙정부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한 가지는 중앙 정부에 
조세권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 중앙 정부로서 강력하게 모든 정책을 책임있게 운영할 수 있다. 또 
한가지는 국가가 번영하려면 외국과의 통상이나 각 주사이의 교역을 일관성 있게 규제하는 
표준이 있어야 했다. 즉 중앙 정부가 객관적인 상업 행위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의 미국 중앙 정부는 조세권도, 상업 행위의 규제권도 없었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중앙 정부가 의회만 있고 행정부는 없으니 각 주 사이의 대립이나 
갈등이 일어나면 처리하기가 어려웠다. 행정부는 의회가 그때그때 한시적으로 맡게 되어 
있었으나 각 주 대표들의 연방 의회 참석률이 낮은데다 각 주가 동의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사안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번번이 휴회되곤 하였다. 더구나 행정부만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연방 사법부도 존재하지 않았다. 연방 재판소도 의회가 한시적으로 창설하게 되어 
있었지만 구성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정이 이러하니 중앙 정부는 범법자를 처벌할 때도 실권이 없어 주 정부에 요청을 해야 했다. 
문제는 주 정부가 이들의 처벌을 거절하기가 일쑤라는 점이다. 연방 정부가 개인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없으니 범법자들이 활개를 치며 돌아다녔다. 여기에 연방 정부의 운영을 위해서 각 
주에 연방 정부를 위한 금융 지원을 요청하지만 주 정부들은 번번이 이를 거절했다.
  또한 중요한 사안을 중앙 정부가 결정할 때는 최소한 9개의 주가 이를 동의해야 한다는 
현행법도 문제가 있었다. 9개 주의 동의를 중앙 정부가 획득하기란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했다.
  이러니 결국 1776년 대륙 회의에서 만든 연합 헌법으로써는 미합중국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은 1786년 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제1차 연방 총회를 필라델피아에서 열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미국 역사의 새 장을 열 총회가 1787년 5월 25일 시작되었다. 워싱턴은 
내키지 않았지만 주요한 인사들이 강력하게 요청하여 이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 워싱턴이 
회의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전국에 알려지자 이 회의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지지가 
높아졌다. 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총회는 13주 가운데 로드아일랜드 대표가 불참하여 12주의 대표 
55명이 참석,1787년 5월 25일부터 그 해 9월17일까지 약 4개월간 열렸다. 이 기간 동안 각 주의 
대표들은 열심히 일했다.
  이 헌법 개정 회의에서 크게 활약한 사람은 워싱턴, 프랭클린, 제퍼슨, 해밀턴 등이었으나 가장 
공헌을 한 사람은 버지니아 주의 대표 제임스 매디슨이었다. 매디슨은 몽테스키외가 구상한 삼권 
분립의 원칙을 기초로 연방과 주 정부의 이해를 상호 조정하면서 강력한 연방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묘안을 짜내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미국인들은 제임스 매디슨을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 헌법 개정 회의는 각 주 사이의 이해 관계가 얽혀 초기부터 상당한 난항을 겪었다. 먼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내세운 에드먼드 랜돌프의 '버지니아 안'이 제출되었다. 이 안의 골자는 중앙 
정부를 입법, 사법, 행정부로 삼권 분립하고, 국민들이 선출하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되는 
양원제 입법부가 행정부와 사법부의 관리들을 임명하며, 각 주가 배당 받는 의석 수는 자유민의 
수와 세금 부담액에 따르자는 것이었다. 이 안이 채택되면 주 정부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고 
인구가 많은 주가 유리하게 된다. 그러자 소수 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윌리엄 패터슨의 '뉴저지 
안'이 제출되었다. 이 안의 핵심은 기존의 연합 헌법을 일부만 고쳐 일종의 위원회로 행정부, 
사법부를 구성하고 각 주는 같은 수의 의원을 선출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또 종신제 대통령 
중심제의 강력한 중앙 정부를 세워 주지사도 대통령이 임명하자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안이 
제출되었다.
  이렇게 각기 정치적 소신과 이해에 기반하여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자 워싱턴, 프랭클린 
등이 나서서 중재와 설득으로 타협안을 모색했다. 약간의 불만을 서로 인정하는 양보 정신이 
발휘되어 미국의 헌법은 각 주 상호간, 남과 북 지역간의 대타협으로 결말 지어졌다. 예를 들어, 
큰 주와 작은 주의 타협으로는 상원은 각 주가 2명씩 보내기로 하고 하원은 인구 비례에 의해 
뽑는다는 식으로, 남과 북의 타협으로는 남부측의 요구대로 5명의 노예를 3명의 자유민으로 
간주하여 선거권을 인정하고 노예 수입은 1808년까지만 인정한다는 식으로 결정되었다.
  결국 이 회의에서 개정된 헌법이 불과 27개의 부칙만 첨가하여 아직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새로이 개정한 헌법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방 자치를 핵심으로 하여 주의 독립성과 중앙 
정부의 통치권을 조화시킨 연방 정부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 헌법이 비준되면 이제 중앙 정부가 
삼권 분리를 기초로 하여 의회와 행정부 및 사법부를 창설할 수 있게 되었다. 의회도 대륙 
회의와는 달리 양원제를 채택하여 상원은 주의 대표로 구성하고, 하원은 국민 전체를 대표로 한 
인구 중심제로 구성했다. 연방 정부는 최고의 정부 기구로서 국민에게 직접 세금을 부과하고, 
누구든지 연방법을 어겼을 때는 연방 정부가 직접 처벌하는 권한도 가졌다. 연방 헌법과 주 
헌법이 충돌했을 때는 연방 헌법이 우선하도록 만들었다.
  진통과 논쟁 속에서 만들어진 이 헌법을 가지고 총회는 각 주로 보내 비준을 받아야만 했다. 
각 주마다 이 새로운 헌법의 비준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여기서 새 헌법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연방주의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반연방주의자'로 불렸다. 이들은 서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열띤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대세는 차츰 연방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787년 12월 델라웨어가 만장 일치로 비준을 마치고, 이어 큰 주인 버지니아, 
매사추세츠, 펜실베이니아, 뉴욕 등이 비준을 마치자 나머지 주들도 이를 따랐다. 하지만 
노스케롤라이나 주와 로드아일랜드 주는 끝까지 반대에 부딪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된 후에야 새 
헌법을 주 의회에서 승인했다. 결국 1790년에 가서야 새로운 헌법이 전 미국에서 승인되어 연방 
정부가 확립된다. 1789년 1월 새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고 연방 의회를 구성했으며 
선거인단이 선출되었다. 1789년 2월 4일 선거인단은 만장 일치로 워싱턴을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물론 워싱턴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선거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당시 
미국인들의 마음에는 누가 초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명백했던 것이다.

    5. 인화로 이룩한 건국 신화

  1789년 4월 30일 뉴욕의 연방 홀에서 백발이 성성한 워싱턴은 거구를 이끌고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엄숙한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본인은 미합중국 대통령으로서 그 직무를 충실히 이행함은 물론 능력이 미치는 한 우리가 
제정한 미합중국 헌법을 보존하고 수호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이 선서를 시작으로 미합중국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 워싱턴 대통령은 먼저 새로이 조직된 
각 행정부의 장을 임명하는 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부통령은 선거인단이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자로 뽑은 존 애덤스를 지명했다. 이 선택은 정치적인 타협이었다. 워싱턴은 남부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므로 매사추세츠 출신으로 북부를 대표하는 그를 지명한 것이다. 즉 북부와 남부의 
정치적 균형을 이루려고 한 워싱턴의 배려였다. 헨리 넉스는 국방 장관으로, 토머스 제퍼슨은 
국무 장관으로, 알렉산더 해밀턴은 재무장관으로, 존 제이는 대법원장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여담이지만, 대통령의 칭호를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가 문제가 되었다. 부통령인 존 애덤스는 
대통령과 부통령은 유럽의 왕에 대한 칭호와 마찬가지로 '히스 하이니스(His Highness)'로 
부르자고 제의했으나 워싱턴 대통령은 단순히 '미스터 프레지던트(Mr.President)'라고 칭할 것을 
명했다. 이 관행이 전통이 되어 지금도 미국에서는 대통령을 단순히 미스터 누구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워싱턴이 국민의 임기를 등에 업고 독재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은 
가졌으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임기를 제한하지 않은 헌법 규정에 따라 세 번 이상 
연임할 수도 있었으나 재임을 마치고 과감하게 퇴임하는 전통을 세우는 등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손색이 없게 스스로 앞장서서 실천했다.
  하지만 워싱턴의 이러한 인격과는 다르게 그의 행정부는 첫 각료 회의부터 말썽을 일으켰다. 
워싱턴이 평소 신뢰하고 있던 해밀턴과 제퍼슨 때문이었다. 해밀턴과 제퍼슨은 강직하고 판단이 
명석한 인재들이었으나 서로가 다른 철학을 갖고 양보할 줄을 몰랐다. 해밀턴은 강력한 
연방주의자로 중앙 정부가 막강한 권위와 권력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제퍼슨은 
대표적인 공화주의자로 지방 자치의 실현을 위해 주 정부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렇게 정치 철학이 다른데다 둘 다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하니 매사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첫번째의 충돌은 전쟁 동안 연방 정부가 발행한 채권의 상환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해밀턴은 연방 정부가 강력해지기 위해서는 전쟁 동안 발행한 채권을 연방 정부가 배상을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제퍼슨은 강력한 공화주의자답게 그런 조치를 취할 경우 
농민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반대했다. 왜냐하면 당시 가난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그들이 보유한 
채권을 이미 채권 브로커, 즉 부유층에게 헐값에 팔아 넘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민들은 
자신들의 세금으로 부유층의 채권을 갚아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는 것이 제퍼슨의 
주장이었다. 이런 논란 끝에 결국 해밀턴의 주장이 의회에 상정되었으나 농업이 중심인 남부측의 
반대로 부결될 위기에 놓였다.
  그래서 해밀턴은 제퍼슨에게 남부측이 요구하는 수도 이전을 승인하는 대신 이 채무 인수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제의했다. 원래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었는데 전쟁 중에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옮겼다. 그런데 제퍼슨은 미국의 영원한 수도를 교통과 통신의 문제를 고려하여 
버지니아의 포토맥 강 쪽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면에는 수도가 자신들의 지역으로 
오면 명예와 실리에서 유리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북쪽이 주장하는 채권 상환 
방안을 수락하는 대신 북쪽은 남쪽이 원하는 수도의 이전을 받아들인다는 타협안이 서로에게 
인정되어 이 법안은 통과된다.
  해밀턴과 제퍼슨은 연방 은행의 설립 문제로도 의견의 충돌이 일어났다. 해밀턴은 상공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의 금융 지원과 기반 시설 조성이 필요하다고 보고 의회에서 중앙 은행인 
미합중국 연방 은행을 설립할 것을 주장했다. 즉 연방 은행은 다른 은행을 통솔하는 것은 아니되 
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큰 사업만을 다룬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정부가 연방 은행에 투자하는 
금액도 은행 주식의 50퍼센트에 불과하며, 정부의 이사 임명도 절반으로 제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매디슨과 제퍼슨은 연방 정부가 은행을 창설하는 것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지 
모르나 헌법에 없는 권한을 연방 정부가 갖는 것이므로 위헌적인 행위라고 반대했다. 결국 
워싱턴은 해밀턴의 의견을 지지했고 미 의회는 해밀턴의 의사를 반영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해밀턴과 제퍼슨이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명석하고 학벌이 좋았다. 워싱턴 대통령은 초등 학교를 겨우 졸업한 사람이었으나 
제퍼슨은 윌리엄 메리 대학을 졸업하고, 해밀턴은 오늘날의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수재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수재라는 점만 비슷하지 모든 점에서 서로 달랐다.
  우선 두 사람은 자라 온 가정 환경이 너무나 달랐다. 제퍼슨은 모든 의미에서 버지니아의 
명문이며 부유한 집 귀공자였다. 이미 젊었을 때 상당한 토지를 유산으로 받아 거대한 장원의 
주인이었다. 반면 해밀턴은 영국의 보통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성도덕이 문란하다는 
이유로 체포당하여 감옥에 갔다. 당시 영국에서는 죄수를 해외로 보내서 노동력으로 사용하는 
관행이 있었다. 해밀턴의 어머니는 서인도로 이송되었고 그 곳에서 해밀턴을 출산하였다. 
해밀턴은 성장하자 미국에 극빈자로 이주하였다. 해밀턴은 이렇게 밑바닥 생활을 하다가 본인이 
노력하여 학교도 가고 재산도 모은 자수 성가한 인물이었다.
  이같이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라면서 서로 다른 인생관과 정치적 입장을 갖게 된 두 사람은 
서로를 미워했다. 제퍼슨은 해밀턴을 저속한 벼락부자라고 생각했다. 해밀턴은 제퍼슨을 
평등주의를 모독하는 사이비 신사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또한 자기들이 대표하고 있는 지역의 
이해에서도 상충되어 있었다. 
  당시의 미국은 대략 4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었다. 북쪽의 뉴잉글랜드 지역은 돌이 많고 
산과 계곡으로 가득 차 농사 짓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장원이 발달하지 않았고 그런 문화나 
계급을 형성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이 곳은 농장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이 형성될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곳은 강을 끼고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교통이 편하여 많은 중소 
상인을 배출한 상업 지역이었다. 중간 지역은 농업과 상업 문화가 비교적 잘 섞여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뉴욕이나 필라델피아가 급성장하여 대도시로 되자 상대적으로 그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뉴욕과 필라델피아는 신흥 도시로 영국의 식민지 개발이 진행되면서 많은 이주민이 붐비는 
화려한 도시로 자라났다. 식민지의 신흥 부르주아들은 주로 이 곳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반면에 미국의 건국 당시 국경 지역이던 서부는 남부와 마찬가지로 넓은 농지가 있었고 농업 
문화를 형성하는 초기 단계에 있었다. 서부와 달리 남부 지역은 일찍부터 면화와 담배 등을 
재배하는 대농장이 발달하고 농업을 중심으로 한 귀족 문화를 형성했다. 이들은 생활 방식도 
귀족적이어서 영국의 농업 귀족인 피그당을 방불케 하였다. 결국 남쪽의 이들 귀족과 서부의 
농민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해를 같이했다. 반면 북쪽의 신흥 부르주아와 중소 
상인들은 상업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해를 같이했다. 그래서 북부와 남부는 서로 충돌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제퍼슨을 따르는 사람들은 농업을 중심으로 지방 분권을 실현하려는 공화당원이 되었다. 
해밀턴의 추종자들은 영국과 같이 상업이 발전하려면 무역 제도와 금융 제도 등을 집중하여 
지원할 강력한 중앙 정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강력한 연방 정부를 주창하는 연방당원이 
되었다. 
  이들이 이렇게 파당을 형성하여 대립, 갈등하였지만 워싱턴 대통령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이들의 장점들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의 성장 배경으로 보면 남부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당연할 듯싶었으나 그는 오직 불편부당하게 처신했다. 워싱턴은 미국의 상업과 농업이 함께 
조화롭게 발전해야 된다고 믿었다. 그는 버지니아의 귀족이었으나 뉴욕이나 필라델피아와 같은 
도회지 문화도 이해하며 적응을 잘했다. 이 점은 어쩌면 그가 이 대립하는 두 사람과 달리 
이론이나 입장보다도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화파와 연방파의 
감정 대립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었다. 
  워싱턴은 이런 내부의 갈등을 조절하며 착실하게 행정부의 안정을 이루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아직 신생 공화국을 둘러싼 문제들은 끝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에 거주하는 인디언과의 문제였다. 영국은 이들 인디언과 동맹을 
맺고 인디언들을 충동질하여 미국에 맞서 봉기하라고 부추겼다. 이들 인디언이 국경을 침범하는 
바람에 워싱턴은 의회에 요청, 연방군을 충원하고 1791년 아서 세인트크레어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여 인디언을 정벌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인디언 지역으로 진군 도중 기습을 당하여 
참패하고 말았다. 워싱턴은 다시 혁명 당시 휘하 장군이던 안토니 웨인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 
인디언과의 전투를 계속하도록 하였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시일만 지체하는 소강 
상태였다. 전투 양상이 이러하니 서부에 정착한 미국인 농부들만 계속 희생당하게 되었다. 물론 
죄 없는 인디언의 피해도 막심했다.
  워싱턴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의회에 인디언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요청하였다. 
인디언과 화약을 맺자는 것이다. 그리고 조약에 따라 인디언의 재산을 보호하고 인디언의 살해는 
백인의 살해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조약에 규정한 것이면 
미국이 인디언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사거나 이용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그래서 워싱턴 
행정부는 인디언과 조약을 맺고 인디언들과 새로운 관계의 정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워싱턴 행정부는 영국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조약을 협상하였다. 당시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은 쟁취했으나 경제나 문화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예속되어 있었다. 
농산물과 수산물을 수출하고 공산물은 수입하는 구조였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영국과 교역을 
중단한다면 미국은 당장 파산할 정도로 영국에의 의존도가 높았다. 여기에 전쟁 중 진 부채까지 
가중되어 현실적으로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워싱턴 
행정부는 영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워싱턴 대통령은 헌법의 미흡한 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도 해서 1791년 12개의 부칙을 의회에 
통과시켰다. 그 부칙 중 1조에서 10조까지는 새 헌법에 미비하다고 지적 받은 국민의 권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즉 집회, 결사의 권리, 정당 방위를 위해 무기를 보유할 권리, 법정의 소환장이 
없는 가택 수색을 거절할 권리, 묵비권, 배심원에 의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등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부칙이었다. 미국인들은 이 10개의 부칙을 권리 장전이라고 부르고 개정된 
헌법을 수정 헌법이라 부른다. 
  이같이 워싱턴 대통령이 국가의 틀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는 사이에 어느덧 4년의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공적이 인정되어 1793년 2월 13일 대통령 선거인단은 워싱턴을 
만장 일치로 재당선시켰다. 워싱턴 개인적으로는 대통령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으나 공화파와 
연방파의 심한 갈등이 미합중국을 두 조각 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재임을 수락하였다. 즉 
많은 사람들은 워싱턴만이 이 양측을 중재하여 나라를 제대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고, 공화파나 
연방과 모두 워싱턴이 대통령에 재임하는 데는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연임 기간 동안에도 정치적인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인디언과 다시 전쟁에 들어갔다. 
전쟁은 갈수록 소모전의 양상을 띠고 수렁으로 빠져들어 갔다. 여기에 덧붙여 서부에 정착한 
농부들이, 중앙 정부가 위스키에 세금을 부과한 데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위스키 반란이라 부르는 이 폭동은 서부의 농민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곡물을 운송하기가 어렵자 
위스키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는데, 재무 장관 해밀턴이 세 수입을 늘리기 위해 위스키 등 
소비품에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서부의 농민들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곡물에 
과세하는 것과 같은 이런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하여 펜실베니아를 중심으로 결집, 대대적인 항의 
시위를 벌였다. 워싱턴은 1만 5천 명의 민병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했으나 그 후유증은 정치 
문제로 이어졌다. 공화파는 이러한 강경 진압이 인권 탄압이라고 비난했고 이에 맞서 연방파는 
폭동 주모자들에 대한 사면 조치가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했다.
  이같이 국내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워싱턴 대통령은 이번에는 심각한 외교 정책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미합중국이 수립되던 초기 외교 정책의 기조는 프랑스와 동맹 조약을 체결, 
상호 방위 조약과 같은 협정을 준수하기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1789년 프랑스에서 시민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프랑스 귀족들이 혁명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 중의 한 명이 워싱턴과 가까웠던 라파예트 백작이었다.
  당시 워싱턴의 마음 같아서는 숱한 귀족들을 희생시킨 로베스 피에르하의 공포 정치를 
반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이 프랑스의 왕정 복고를 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국 정부는 
프랑스의 군주 정치를 반대한다고 이미 세상에 천명한 바였다. 미국 국내에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정치적 시비가 붙었다. 특히 미국 내에는 라파예트 백작과 같은 귀족들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미국 정부가 엄정한 중립을 선언한 것에 문제를 제기하며 반대하였다. 
  그런데 워싱턴이 재선된 1793년, 이번에는 영국이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선전 포고하였다. 
그러자 프랑스 혁명 정부는 미국 혁명 당시 체결한 프랑스와 미국의 조약을 지키라고 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독립 전쟁 당시 프랑스인들이 미국에 도움 준 것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론은 프랑스를 도와 파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영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데다 영국 등지로 가는 미국의 상선을 
보호해야 했다. 만일 미국이 프랑스를 도우면 막강한 영국 해군은 미국 상선을 공격할 형편이니 
워싱턴 정부로서는 그야말로 진퇴 양난이었다. 거기에 또 프랑스가 이기게 되면 영국과의 
전쟁에서 빼앗겨 버렸던 루이지애나 영토를 요구할 가능성도 높았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영토를 
잃으며 프랑스를 도와 주는 꼴이 될 한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한 워싱턴은 냉정하게 유럽에서의 어떤 전쟁에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국제적 중립을 선언했다. 이 같은 워싱턴 대통령의 태도는 영국과 프랑스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프랑스와 영국이 모두 미국의 상선을 나포하여 자기 국가의 
함대로 편입시키곤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워싱턴은 6대의 해군 전투선을 급히 주조해서 파견, 
미국 상선들을 보호했는데 이것이 미국 해군력 수립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워싱턴은 영국의 
승리가 예견되자 존 제이를 영국에 보내서 다시 평화 조약 협상을 계속했다. 
  이 같은 워싱턴의 태도에 상당한 미국인들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들은 워싱턴이 
친영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프랑스 주미 특사인 에드몽 쥬네는 펜실베니아 주에서 시민들을 선동, 
'민주주의 사회'라는 집단을 만들고, 이 같은 기구를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친 프랑스, 반워싱턴을 
구호로 내세워 반정부 운동을 전개했다. 
  사태가 이렇게 외교 문제에서 정치 투쟁의 성격으로 전환되자 이번에는 해묵은 공화파와 
연방파의 대립이 재연되었다. 연방파는 중립을 고수하자고 주장했고, 공화파는 친프랑스 정책을 
주장했다. 하지만 에드몽 쥬네의 이러한 움직임이 극단적인 정부 전복 운동으로 치닫자 공화파의 
지도자 토머스 제퍼슨은 미합중국을 건강한 민주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밝히고 쥬네의 
운동에 쐐기를 박았다. 그 결과 그는 체포되어 투옥되고 만다. 워싱턴의 중립화 선언은 나름대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해상 수송을 통해 전쟁 물자를 국내와 그들의 
식민지로 공급하였다. 당시 미국은 많은 상선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영국과의 무역을 주로 하고, 
프랑스와도 어느 정도 교역을 했다. 이 같은 처지에서는 전쟁에서의 중립만이 미국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추구할 수 있다고 워싱턴은 믿었다.
  그래서 워싱턴 행정부는 영국과 조약을 체결했는데 당시 미국인들은 워싱턴 대통령의 이러한 
깊은 속을 모르고 무조건 감정적으로 프랑스 편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워싱턴의 인기는 급속히 
하강했다. 그러나 워싱턴이 다시 스페인과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이 미시시피 강 유역의 통치권을 
획득하고 무역 여건이 호전되자 워싱턴의 인기는 다시 상승했다. 
  이렇게 실리 외교 노선을 지키며 난마처럼 복잡한 국내 문제로 시달려 지칠 대로 지친 
노대통령은 1797년 9월, 8년 동안의 대통령 임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은퇴를 결심했다. 워싱턴 
대통령은 자신의 결심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유명한 '고별사'를 밝힌다.

  "... 새로 출범한 미합중국 연방은 우리가 반드시 유지해야 하며 기존의 헌법과 정부는 
존중되고 복종되어야 합니다. 특히 정치적인 파벌의 위험성과 북부와 남부의 지역 감정을 잘 
조절해야 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미국이 어떤 나라와도 영구성을 띤 동맹 관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제 사회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미국은 
가능한 한 다른 나라의 정치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단지 통상을 대외 정책의 기본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이 고별사에서 그는 후세의 정치인들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정치적 교훈을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은 더 이상의 재선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후대에도 대통령의 임기는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의 헌법은 미국을 단결시키는 기구이며 오랫동안의 경험을 
통해 불합리하다고 검증되었을 경우에만 개정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렇게 충정으로 가득 찬 
고별사를 발표한 다음 1797년 3월 15일  자신의 임기가 끝나자 그가 그토록 원했던 
마운트버넌으로 내려갔다. 
  워싱턴이 마운트버넌으로 은퇴했을 때 그의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일은 그의 버지니아 장원을 
다시 복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치 활동 기간에 많은 빚을 졌기 때문에 우선 그 빚을 정리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토지의 상당 부분을 팔아서 빚을 갚았다. 그러나 그의 농장은 아직도 상당히 
큰 편이었고 그의 여생을 보내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다시 평범한 버지니아의 농장주로서 즐겁게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러나 이 거구의 
사나이도 죽음의 신에게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1799년 12월, 눈이 오고 비가 오는데도 
장원에서 일을 하다가 연쇄 구균에 전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만으로 66세 되던 해였고 
대통령 직을 떠난 지 2년이 채 못 되는 날이었다. 그가 이렇게 홀연히 세상을 떠나자 온 
미국인은 물론이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애도의 마음을 금치 못했다. 영국의 왕 윌리엄 4세는 
"워싱턴은 아마도 이제까지 생존해 온 인간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라고 애도사를 보내 왔다. 

    6. 큰 바위 얼굴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꿈꾸는 것이 명예와 행복이라면 그 점에서 워싱턴은 참으로 
행운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운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지닌 인격과 
노력의 총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워싱턴도 바로 그러한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워싱턴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성공한 인물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주변의 도움을 받거나 행운이 따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성공한 이면에는 그의 
인품과 성실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워싱턴은, 흔히 영웅을 그릴 때 그러하듯, 고매한 인품과 타고난 천재성을 지닌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적인 결함도 많은 사람이다. 그는 공부도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도박이나 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더구나 그는 돈을 벌자 호화판으로 
생활하며 사치와 향락을 즐기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는 처녀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여념이 
없었고 친구 부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하는 예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한마디로 겸손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성실하게, 
과학적으로 하려고 애썼다. 그저 주어진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의 최선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했다거나 틀렸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인정하는 솔직함을 지녔다. 이런 점들이 남들이 보기에는 행운처럼 보이는 일이 일어나게 
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워싱턴 대통령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불행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빈곤하게 
자랐으며, 그에게 애정이 없는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워싱턴의 어머니는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아들을 폄하하며 괴롭혔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는 결혼하지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과 결혼했으며, 또한 친자식도 없었다. 전쟁 기간 동안에는 자기가 임명한 보좌관들로부터 
배반을 당하기도 했고 아끼던 장군이 적군에 붙는 곤경에도 처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가 
임명하고 누구보다 가까웠던, 버지니아의 친구인 법무부 장관 랜돌프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워싱턴 대통령은 마음이 넓고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불행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워싱턴은 그를 속이려고 찾아온 사기꾼에게도 자애를 베풀었고 자기를 배반한 
모든 이들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다. 그는 자신을 전복시키려 했던 프랑스 공사 쥬네에게조차 
미국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고 그의 신분을 보장해 주었다. 워싱턴은 소유하고 있던 노예를 
팔기를 거부했는데 노예라도 가족을 분리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역사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후일 워싱턴은 소유하고 있던 노예를 전부 해방시켰다. 
그리고 크든 작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려고 애썼다. 그런 
애정 어린 삶의 자세가 다른 이들을 끌어당기고 존경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 그의 인간적 
매력이었다. 
  그의 이러한 인간적 면모를 여기에서 하나 더 소개하겠다. 워싱턴과 부통령인 존 애덤스는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워싱턴은 애덤스 부통령의 지적인 능력을 존경했지만 그는 매사에 
옹졸한 편인데다 정치적 입장도 달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애덤스는 늘 자신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따르는 워싱턴에 대해 질투심을 갖고 있었다. 워싱턴이 국가의 단결을 위하여 애덤스를 
부통령으로 지명했으나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른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워싱턴 대통령은 이 같은 관계를 보완하기 위하여 대통령 관저에서 파티가 있을 때는 반드시 
애덤스의 부인을 자기 부인 옆에 앉게 했다. 그런데 실수로 자기 부인 옆에 딴 여자가 앉아 
있으면, 친한 매디슨의 부인을 조용히 불러서 상대방이 알지 못하게 자리를 바꾸게 하라고 
시켰다.
  워싱턴 대통령에게 천부적으로 타고난 장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건강일 것이다. 그는 체구가 
크고 힘이 무척 좋았다. 그의 건강은 그를 인내력이 무척 강한 인물로 만든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는 타고난 체력을 바탕으로 힘들고 귀찮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비교적 
말이 적어 과묵한 편인데다 성질이  느긋하였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무어라 해도 이를 참아 
넘기며 후일을 기하곤 하였다. 이 같은 인내력은 독립 전쟁 동안 보여준 그의 작전에도 잘 
나타나서 승리로 이끄는 요인이 되었다.
  이렇게 워싱턴은 한 인간으로서 지닌 장점과 단점을 자기 방식으로 통제하고 조절하여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 받고 있다. 그러면 이제 그의 업적과 영향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만일 워싱턴의 지도력이 없었더라면 미국의 독립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자. 역사의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아마도 실패했을 확률이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미국의 독립 혁명은 뛰어난 지도자들과 미국민의 합심 단결이 이루어 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승리의 관건인 민심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방향을 잡아 준 사람은 독립 혁명 
지도자들 중에 워싱턴밖에 없었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해밀턴, 제퍼슨, 
애덤스 등 거의 모든 독립 혁명이 실패했다 해도 언젠가는 다시 독립 혁명이 일어나 
성공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워싱턴의 지도력 때문에 미국의 독립이 적어도 50년은 
앞당겨졌다고 해도 무리한 주장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워싱턴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그가 미국 
독립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워싱턴은 미국적 민주주의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워싱턴은 군인으로서 독립 혁명을 
이끌었지만 군인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권위주의적이고 상명 하복식의 독재적 의식이 
없었다. 워싱턴은 일찍이 민간인의 지지를 받아야 독립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고 그런 그의 신념 때문에 미국은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워싱턴은 군이 의회를 
전복하려고 했을 때 그것의 위험성을 깨달아 누구보다 앞장서 그 시도를 막아냈다. 이 점은 
나폴레옹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그에게 일인 정부를 수립하라거나 심지어 
왕이 되어 달라고까지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워싱턴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만일 그가 원했다면 종신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지만 워싱턴은 대통령도 꼭 8년만 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일찍이 에드먼드 버크가 "권력은 부패한다. 그러므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했던 말을 귀감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워싱턴은 후손들에게 이를 따라 주기를 요청했다. 
헌법상 계속적인 연임이 가능한데도 미국의 대통령들이 두 번의 연임만 지켰던 것은 워싱턴이 
남겨 놓은 전통 때문이었다. 물론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시 상황 때문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네 번 연임을 한 예외는 있었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 미국은 헌법에 부칙을 부가하여 
이제는 법적으로도 2선 이상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렇게 워싱턴 스스로가 법과 민주적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미국의 민주주의는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워싱턴은 미국적 입헌주의, 법치주의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물론 
영국이 미국에 앞서 입헌주의와 법치주의를 실천했다. 그러나 국가 체제가 입헌주의에 입각하여 
통치되는 나라는 미국이 처음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법에 의한 통치라는 이념이 확고하게 자리 
잡을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삼권 분립이라는 민주 정치의 이념에 따라 헌법의 제정은 국민을 
대표로 하는 의회에서, 그 법을 기반으로 국민을 통치하는 것은 행정부에서, 법의 적용과 해석은 
사법부에서 각기 고유한 권한을 행사하며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전통의 수립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렇게 법이 제대로 실현되고 하나의 전통을 세우려면 그것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실천이 
중요하다. 이 점에서 미합중국 초기에 절대적 권위와 권력을 가졌던 워싱턴의 헌법 준수 정신은 
참으로 위대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의 예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헌법을 고쳐 가면서까지 권력을 연장하려고 
하였던 데 비해 워싱턴의 태도는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가!
  넷째, 워싱턴 대통령은 실용주의 정치의 전통을 미국에 뿌리내렸다. 미국 독립 전쟁 이전에 
워싱턴은 거대한 군대를 지휘한 경험도 없었다. 더구나 워싱턴은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직업군인도 아니었다. 그는 오합지졸에 불과한 미국 민병대를 이끌고 영국 정규군과 싸워 이겼다. 
워싱턴이 그렇게 한 데에는 그의 실용주의 정신이 크게 작용했다. 상황과 조건에 맞게 
군사전략을 세우고 임기 응변에 능했던 것이다. 즉 신대륙에 도착하여 적응하면서 생긴 미국적 
기질을 잘 활용한 것이다. 
  정치에도 워싱턴은 이념적이거나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이었다. 젊어서 농장을 운영할 때 
수확이 좋지 않은 연초 재배를 중지하고 수확이 좋은 옥수수와 밀을 심었던 것처럼 정치에서도 
상황과 실정에 맞게 대응했다. 대륙 회의에서 각 주의 이해 관계를 절충한 헌법을 만들 때도 
그러했고, 부통령을 임명할 때도 지역적 안배를 고려하여 애덤스를 임명했다.
  나아가 중립 외교 노선을 채택할 때도 그러했다.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사상은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가 제창한 실용주의 철학이다. 이 
철학처럼 미국의 정치는 항상 타협과 절충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미국인들도 또한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미국식 실용주의가 정치의 장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전통을 확립한 
것은 건국 초기의 정치 지도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 중심 인물이었던 워싱턴의 정치 노선은 
대화와 타협, 그리고 실리의 추구라는 실용주의 정치의 본보기라 할 만하다. 
  다섯째, 워싱턴은 정치만이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덕과 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모범을 
보여 주었다. 워싱턴의 각료는 해밀턴, 제퍼슨, 랜돌프, 넉스 등 머리가 우수한 사람들이었으나 
이들은 서로 질투와 적개심으로 충돌이 심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서로는 싫어했으나 
워싱턴만은 존경하고 따랐다. 애덤스 부통령을 위시해서 이들은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나 
워싱턴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그를 따르며 결국 서로 
융화하고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워싱턴이 지닌 덕의 결과였다. 워싱턴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인화로 해결하려 했고 모든 사람을 널리 아끼려는 덕이 있었다. 그래서 정파와 입장을 
떠나 유능한 사람을 적재 적소에 기용하고 활용했던 것이다. 이 같은 전통은 아직도 계속되어, 
미국인들은 명석한 사람보다는 덕이 있고 인화력이 있는 사람은 지도자로 선출하기를 원한다. 이 
같은 덕과 인화의 자세는 오늘날 각박한 경쟁 관계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도 교훈을 주고 있다. 
그리고 정치 보복과 심복 거느리기에만 열중하는 정치인들에게도 귀감이 될 것이다. 
  여섯째, 워싱턴은 중립 외교 정책을 수립하여 미국이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워싱턴은 힘이 약한 미국이 유럽의 정치에 간섭하면 이것이 반대로 유럽에 의한 미국에의 간섭을 
초래한다고 믿었다. 또한 워싱턴은 미국이 정1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 국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미국은 독립성을 잃어버리고, 결국 국가에는 불이익이 온다고 믿었다. 제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가 먼로 독트린이라는 불간섭 고립주의를 선언하여 이후 미국 외교의 
기초가 된 배경에는 워싱턴 행정부에서 시작한 중립 외교 정책이 있었다. 물론 이 같은 전통은 
미국이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간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바뀌어 
반대로 패권주의 외교 정책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 패권이 축소될 우려가 있을 
때마다 일부 미국인들은 고립 정책을 주창하기도 한다. 

    7. 종신제를 거부한 국부

  미국의 마이클 하트 교수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의 인물을 선정하면서 워싱턴 
대통령을 26번째로 꼽았다. 물론 세계 역사 속에서는 26번째인지 모르지만 미국 역사에서는 조지 
워싱턴만큼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없다. 워싱턴의 생전에는 그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든 미국인들은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미국의 도시마다 그의 이름이 없는 곳이 
없으며 수많은 대학, 예술관, 연구소, 또는 중고등 학교가 조지 워싱턴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정도이다.
  미국인들은 조지 워싱턴을 신처럼 만들었다. 그의 초상화는 성스럽게 그려져 있고 그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가 되어 전해 오고 있다. 심지어는 워싱턴이 벚나무를 도끼로 자르고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고백하여 용서를 받았다는 신화까지 윤색되어 널리 전해 오고 있다.
  아직도 미국에서는 헌법을 해석할 때나 독립 선언문을 해설할 때 워싱턴과, 미국을 건국한 
국부들이 생각하던 뜻에 가깝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지금도 워싱턴이 그의 
언행이나 고별사에서 원했던 대로 정치를 운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찌 보면 조지 
워싱턴이야말로 대다수 미국인들에게는 아직도 살아 있는 대통령인 셈이다.
  이렇게 역사의 시공을 뛰어넘어 존경받는 워싱턴 대통령과 같은 인물이 우리나라에서도 
하루빨리 나오기를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
      [토머스 제퍼슨

    1. 민주 정치의 대명사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다. 워싱턴 대통령이 미국 정치의 
전통과 제도를 확립한 대통령이라 면 제퍼슨은 미국 정치 사상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 혁명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독립 선언문"을 
기초하였다. 그는 워싱턴과는 달리 지방 자치를 기반으로 한 민주 정치를 주장한 공화론자였다. 
그는 자신의 출신 배경인 농업을 산업의 중심으로 보고 건전한 소농의 육성을 통해 민주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가 대통령에 재직하는 동안 루이지애나 영토를 나폴레옹으로부터 
매입하여 미국 국토를 배로 늘렸던 것도 이런 그의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워싱턴과 달리 그는 버지니아의 대농장주인 명문 집안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비교적 평탄하게 
출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의 생활이나 사상은 
소탈하고 서민적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 엄청난 빚을 남기고 갔는데 그 빚의 원인이 낭비와 
사치 때문이 아니라 학문 연구와 대학 설립,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접대 때문이었을 정도로 
학자적 풍모를 지닌 정치가였다.
  제퍼슨은 죽을 때 묘비명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 달라고 유언했다.
  "여기에 미국 독립 선언문과 종교의 자유를 위한 버지니아의 법을 저술하고,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토머스 제퍼슨이 묻혀 있다."라고.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왜냐하면 이것이 내가 살아온 증거이고,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 걸친 업적에 비해서 이 묘비명의 
내용은 무척 겸손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제퍼슨이야말로 미국의 건국 초기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실현한 가장 비범하고 특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2. 명문가에서 태어난 자유주의자

  토머스 제퍼슨은 1743년 4월 13일 버지니아에서 태어났다. 당시 버지니아는 대농장이 발달하고 
인구도 많아 영국 식민지의 중심지였다. 토머스 제퍼슨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 피터 제퍼슨은 
이미 버지니아에서 손꼽는 부유한 장원의 주인이자 주 법원의 판사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제퍼슨이 어렸을 때 버지니아 식민 의회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제퍼슨의 어머니는 
버지니아에서 최고의 부호이며, 또한 가장 정치적 영향력이 큰 집안인 랜돌프 가문의 딸이었다.
  제퍼슨은 그의 나이 아홉 살 되던 해에 집을 떠나서 사립 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만 해도 
정규적인 교육 제도가 미비하여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은 대부분 사립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가 이 사립 학교에서 공부하던 14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런 부친의 
사망으로 장남인 제퍼슨이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다. 제퍼슨의 어머니는 8형제를 낳았는데, 그는 
일찍부터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제퍼슨이 17세 되던 해인 1760년 그는 버지니아의 명문교인 윌리엄 메리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제퍼슨은 평소부터 학문에 관심이 많아 철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당시 이 대학의 
소재지인 윌리엄스버그는 식민지 총독부의 수도로서 많은 명사들이 모여드는 정치와 학문의 
중심지였다. 명석한 두뇌와 학문적 열정으로 가득 찬 제퍼슨은 곧 교수들의 사랑을 받았고 많은 
명사들과 사귀게 되었다. 이 곳에서 그는 당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스말 교수와 친교를 맺고, 
뒤에 그에게 법학적 사고를 일깨워준 조지 위츠 밑에서 법철학을 배웠다. 또한 식민지 상류 
사회의 사교 생활을 통해 식민지 총독인 포키머와도 알게 되었는데, 제퍼슨의 신사다운 의젓함과 
박학 다식한 지식에 반한 그는 스말 교수, 위츠 교수, 제퍼슨 등을 총독 관저로 초대하여 오찬을 
같이하곤 하였다.
  이제 어엿한 젊은이로 성장한 제퍼슨은 바로 이 곳 윌리엄스버그에서 대학 친구의 여동생인 
레베카 버웰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열여섯 살의 아름답고 재치에 넘치는 처녀였는데, 그는 
그녀를 베린다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열렬히 사랑했다. 그녀 때문에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공부도 
뒷전으로 내팽개칠 정도로 그는 그녀와의 달콤한 사랑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아직 
공부를 계속해야 할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영국으로 유학을 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가 생애 처음으로 겪은 쓰라린 좌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실연의 아픔에 자신을 허비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제퍼슨은 윌리엄 메리 대학에서 2년간 철학 공부를 마치자 영국 유학을 포기하고 조지 위츠 
교수 밑에 들어가 5년간 법률 공부를 했다. 당시 미국에는 법과 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유명한 법률가 밑에서 법을 사사받은 후 변호사 시험을 치르게 되어 있었다. 머리가 좋은 
제퍼슨은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되었다.
  제퍼슨이 이렇게 공부를 하는 동안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준 5천 에이커 이상의 토지와 
22명의 노예는 어머니가 대신 관리하고 있었다. 이제 그가 21세의 성인이 되자 본인이 스스로 
나서서 토지를 관리하는 한편, 어머니로부터 더 많은 토지를 빌려 농장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동시에 그의 변호사업도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는 유능하고 실력 있는 변호사로 
소문이 나 그의 변호사업은 나날이 번창하였고 곧 버지니아 전역에서 고객들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농장 경영과 변호사업으로 바쁘게 활동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오랜 관심인 학문에 대한 
열정은 버리지 않았다.
  제퍼슨은 2년 동안 정열을 쏟아 사업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 놓자 마음의 여유가 생겨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여행길에 나섰다. 그는 2개월간 아나폴리스, 필라델피아, 뉴욕 등지로 
여행을 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생활 모습을 보며 자신의 견문을 
넓혔다. 사실 제퍼슨은 버지니아 영토를 한 번도 떠나 보지 못했던 터였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식민지인들의 고통과 불만에 눈을 뜨게 된다.
  여행을 마치고 난 제퍼슨은 곧 그동안 농장을 경영하며 쌓은 지식을 종합해서 정원 및 농장의 
작물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그는 철학, 법학만이 아니라 생물학, 농업, 건축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제퍼슨의 작물에 관한 저술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계속되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도 책을 출판할 정도였다.
  제퍼슨은 변호사업을 하는 까닭에 버지니아 전역을 여행하며 많은 사람을 사귀기도 했지만, 
그는 그 여행을 통해 미국의 자연과 동물에 대한 그의 관심을 충족시키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그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심과 탐구는 일생 동안 학문적 관심과 연결되어 
독서와 저술로 이어진다.
  이런 그의 삶을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예는 그가 소장한 장서이다. 변호사 개업을 한 지 3년 
되던 해부터 제퍼슨은 자기가 소유한 토지의 가장 높은 지역에 자기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1769년에 짓기 시작한 이 집은 후이 '몬티첼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제퍼슨은 스스로 건축학을 
공부하여 집을 설계하였다. 그런데 1770년 불행히도 제퍼슨이 태어난 집인 쉐르웰에 화재가 나서 
집이 전소했다. 당시 부유한 제퍼슨으로서는 집이 불탄 것은 별로 애석하지 않았으나, 아버지 
때부터 심혈을 기울여 모은 장서가 전부 불에 탄 것을 몹시 애석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내에 제퍼슨은 1천 2백 54권의 장서를 다시 구입했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책값이 무척 비쌌다. 그런데도 그가 이렇게 많은 책을 구입하여 독서를 했다는 것은 그의 
관심과 취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다.
  당시에 제퍼슨은 34명의 식구들과 83명의 노예를 먹여 살려야 했다. 이런 와중에 1년 평균 4백 
권 이상의 책을 사들이는 데는 엄청난 경비가 들었다. 이렇게 제퍼슨이 사들인 저서들 중에는 존 
로크, 몽테스기외, 장 부라마키, 안토니 아리스, 아람 퍼커슨 등 당대 유럽의 사상계에서 내노라 
하는 저자들의 저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저서를 통해 제퍼슨은 자연법을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 제퍼슨은 특히 로크와 몽테스키외의 자연법 사상에 많은 공감을 하였다. 이와 같은 
공부는 제퍼슨으로 하여금 인권 변호사로 명성을 날리게 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제퍼슨이 
이렇게 전념하던 변호사업도 1774년 9월에 그의 친척인 에드먼드랜돌프에게 이양했는데 그것은 
제퍼슨이 본격적인 정치가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미국 독립 혁명이 시작된 다음부터 그는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건국의 지도자로 더 바쁜 일상을 보내야 했다.

    3.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다

  1768년이 되면서 제퍼슨은 10월에 있는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의원에 출마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위한 준비 작업에 나섰다. 그러면 먼저 당시의 의원 선거 제도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로 있던 당시의 식민지 의회는 실제로는 특별한 권한이 없고 영국 본국의 
의회와는 격이 달랐다. 식민지 의회는 식민지 내의 여러 가지 규칙을 제정하고 정치적으로는 
식민지 총독이나 본국의 의회에 건의하는 정도의 권한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거도 공개 투표를 
한 후에 당선자의 이름만 공표하게 되어 있었다. 제퍼슨이 출마한 알버멜 군의 경우 선거일에 
샤론트빌에 투표 자격을 갖춘 군민이 모여서 투표권 행사를 했다. 당시의 선거 제도는 오늘날의 
선거 제도에 비해서 상당히 비민주적이었다. 우선 선거 자격의 요건은 백인 성인 남자로서, 
최소한 25에이커의 경작지와 집을 소유하고 있어야 했다. 집이 없을 경우에는 백 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해야만 유권자의 자격이 있었다. 선거구인 군 단위의 재판소에 모인 유권자는 군의 
보안관에게 구두로 자기의 지지자를 선언하고 이것을 전부 수집한 군의 보안관은 그 현장에서 
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선거 결과를 공표한다.
  당시 제퍼슨이 출마한 알버멜 군에서는 2명의 주 식민 의회 의원을 선출하게 되어 있었는데 
3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다. 의원 후보자 중 워커와 카터는 이전부터 의원이었으나 제퍼슨은 초년 
후보였다. 개표 결과 워커는 재당선되었고, 젊은 제퍼슨이 카터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패배한 
카터는 알버멜 군에서 가장 큰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지만 인심을 잃어 제퍼슨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말았다.
  1769년 5월 8일 개원되자, 제퍼슨은 약관 26세로 버지니아 주 식민지 하원 의원으로서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윌리엄스버그에서 의회의 회기가 시작된 지 불과 10일 만에 
총독은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다. 1767년 런던의 본국 의회가 통과시킨 '타운센드 조례'에 
반대하는 결의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타운센드 조례는, 인지 조례가 식민지인들의 거센 항의로 
폐지되자 재무장관 찰스 타운센드가 제안한 새로운 과세법으로, 그 내용은 식민지가 영국에서 
수입하는 유리, 종이, 잉크, 페인트, 납, 차등에 대해 과세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퍼슨은 불과 
10일밖에 안 되는 의원 생활을 했지만 이 때 타운센드 조례에 항의하기 위해 조직한 두 개의 
특별 위원회에 소속되어 식민지 총독의 연설을 반박하는 결의문을 초안하는 등 맹활약을 한다. 
버지니아 식민 의회는 타운센드 조례가 영국 헌법에 위배되는 폭거라고 규정하고, 나아가 식민 
의회만이 식민지에 과세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결의문을 만장 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러자 화가 
난 식민지 총독 보테투르트가 의회를 해산시킨 것이다.
  이 무렵 제퍼슨은 정계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과 연결이 잘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패트리 
헨리 등 타운센드 조례에 반대하는 편과도 잘 어울리는 사이였다. 한 예로 제퍼슨의 어머니의 
사촌인 페이튼 랜돌프가 의회의 의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퍼슨은 자신의 소신에 따라 타운센드 조례의 저지에 앞장서 행동했다. 
이렇게 활약한 덕분에 제퍼슨의 탁월함이 의원들 사이에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1769년 8월 총독은 새로운 선거를 지시했고, 9월에 선거가 있었다. 제퍼슨과 대부분의 의원들은 
당연하게 재당선되었다. 새 의회는 9월 7일에 다시 열려 6주 동안 회기를 계속하였다. 제퍼슨은 
또다시 같은 위원회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리고 그는 식민의회에서 점차 중요한 인물이 되어 
갔다. 그 후 제퍼슨은 식민지의회의 하원 의원으로 계속 당선되면서 정치 경력을 쌓아 갔다. 
  하원 의원으로 봉직하면서부터 그는 건축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집인 
몬티첼로를 짓기 위해서 건축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점차 공공 건물을 짓는 데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제퍼슨은 건축에 관한 서적을 다양하게 구입해서 탐독하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집의 설계에도 나섰다. 미국의 많은 건축학자들이 오늘날에도 제퍼슨을 일러 '미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위대한 건축학자'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건축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에 널리 알려진 제임스 기브스의 건축법과 디자인, 로버트 모리스의 건축학 서적 등을 
탐독했고,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학자인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건축학에까지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서 제퍼슨은 자기의 특유한 건축 설계의 모형을 개발했다. 오늘날에도 버지니아에 
보존되어 있는 제퍼슨의 개인 집 몬티첼로와 버지니아 대학교의 본관 및 정원이 그가 연구하고 
고안해 낸 특유한 건축법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워싱턴에 있는, 뒤에 영국의 침략으로 전소된 
최초의 백악관 건물, 리치먼드에 소재한 버지니아 주지사 집무실 등도 제퍼슨이 직접 설계한 
건물들이다. 
  몬티첼로를 건축할 때 의회 의원으로 봉직하고 있던 제퍼슨은 윌리엄스버그와 몬티첼로를 
수시로 왕복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제퍼슨은 친구인 존 워커의 부인 벳지 워커와 잠시 동안 
사랑에 빠졌다. 그러다가 제퍼슨은 마타 스켈톤과 사귀게 되었다. 
  마타 여사와 관계가 깊어지면서 제퍼슨은 윌리엄스버그에 자주 들렀다. 물론 식민 의회가 
윌리엄스버그에 있기도 했지만, 마타 여사의 아버지인 존 웨일러스가 윌리엄스버그의 인근에 
있는 찰스 시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마타 여사는 제퍼슨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그녀는 18세 때 벳드허스트 스켈톤과 결혼하고, 
19세에 아들을 출산했다. 그러나 그녀는 불행히도 20세에 과부가 되었다. 남편이 죽은 지 2년 
후인 22세 때 그녀는 제퍼슨과 염문을 뿌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자 
1772년 1월 1일 마타 여사가 23세, 제퍼슨이 28세가 되던 해 설날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781년 제퍼슨의 장인 존 웨일러스가 사망했을 때 마타 여사는 1만 1천 
에이커 이상의 토지와 1백 35명의 노예를 상속받았다. 이로써 토머스 제퍼슨은 공직 생활을 하며 
사회 봉사에 전념할 수 있었다.
  1774년 5월 버지니아 의회가 개회되었을 때 모국인 영국과 미대륙의 관계가 악화되어 무척 
험악해졌다. 전해인 1773년 5월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미국 대륙에 홍차를 판매할 수 있는 
독점권을 부여받았고 더불어 이 독점적인 홍차를 판매할 수 있는 독점권을 부여받았고 더불어 이 
독점적인 홍차에 대한 세금도 내야 하는 '차세법'이 제정되었다. 미국인들은 이러한 부당한 
조치에 반대하여 항의하였다. 전국적으로 불매 운동이 일어났고 곳곳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다. 
그러다가 흥분한 미국인들이 보스턴 항구에 도착한 동인도 선박에 진입하여 홍차 궤짝을 바다에 
집어 던진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식민지인들의 저항에 영국 정부는 한술 더 떠 
1774년 6월 1일부터 보스턴 항구의 모든 상행위를 금지하면서 군을 동원해 항구를 폐쇄해 
버렸다. 이 같은 소식이 버지니아 의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에 버지니아로 전해졌다.
  버지니아 의회 의원들 가운데 영국에 비판적이던 이들은 이 사태에 강력히 대처하기를 원했다. 
패트릭 헨리, 리처드 리, 토머스 제퍼슨 등은 보스턴의 미국인들을 지지하는 의미로 하루 동안 
단식하며 기도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와 더불어 영국의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만장 
일치로 가결하였다. 이 같은 의회의 결의에 대하여 식민지 총독은 의회를 해산하는 조치로 
대응했다.
  의회가 해산되자 의원들은 파레이라는 여관에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였다. 여기에 모인 
의원들이 무려 89명, 버지니아 의원의 대다수였다. 이들은 밤을 새워 논의한 끝에 주민들에게 
홍차의 사용을 당분간 자제하자고 호소하고 동인도 회사에서 판매하는 물품은 일절 사지 말자는 
결의를 발표했다. 특히 제퍼슨을 비롯, 이 곳에 모여서 결의문에 서명한 의원들은 앞으로 
식민지의 자매 지역인 다른 주에서 미국인들이 피해를 입게 되면 버지니아 주민들뿐만 아니라 
전체 미국인들의 피해로 간주하기로 결의하였다.
  동시에 제퍼슨과 버지니아의 의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전 미주, 식민 지역의 대책 위원회를 
결성할 것을 호소했다. 동시에 버지니아 대책 위원회는 전국에 버지니아의 결의를 통보하고 각 
주에서 대표자를 선정하여 전 미주 대표자 회의를 개최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몬티첼로에 돌아온 제퍼슨은 자기의 생각을 널리 알리려고 많은 글을 써서 지면에 
발표했다. 그의 이러한 호소에 호응하여 알버멜 군의 주민들은 여러 개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문들은 한결같이 미국 식민지인의 문제는 오직 식민 의회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동시에 미국인의 법적인, 또는 자연권적인 권리가 영국에 의해서 침해당하고 
있으며, 보스턴 항만이 정상화되기 전에는 영국 물품의 수입을 거부할 것임을 밝혔다.
  제퍼슨은 또 하나의 결의문을 초안하여 제1차 대륙 회의에 참여할 버지니아 대표들에게 
보냈는데 제퍼슨의 이 글이 윌리엄스의 신문에 "미국 국민의 권리에 대한 소고"라는 제목하에 
실렸다. 이 글은 곧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다시 필라델피아와 런던의 신문들에 게재되었다.
  제퍼슨의 이 글은 당시로서는 제시하기가 힘들 정도로 대담한 자연법 사상을 담고 있어서 그를 
미주 대륙에서뿐만 아니라 모국인 영국에서도 유명하게 만들었다. 제퍼슨은, 왕은 국민의 수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국민의 의사에 따라 법에 의해서 임명되어야 하며 권한도 법에 의해 
제한되어야 하고 나아가 국민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주권 재민과 
천부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연법 사상은 뿌리로 하여 국민의 권리를 제한 또는 억압하는 왕은 
타도해도 된다는 혁명 사상으로 발전할 소지를 안고 있어서 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당시의 영국에 커다란 충격을 줄 만하였다. 
  1774년 9월 5일에서 10월 2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 회의가 소집되었다. 제퍼슨은 
버지니아의 대표단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그의 글은 대륙 회의 의원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당시 제퍼슨은 병이 들어서 문티첼로에서 휴양을 하고 있었다. 버지니아의 대표는 리처드 리, 존 
브랜드, 벤저민 해리슨, 에드먼드 펜델튼, 패트릭 헨리, 조지 워싱턴 등으로 모두 제퍼슨과는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1차 대륙 회의에서는 보다 강력하게 영국에 대응하자는 의견과 그냥 현 
상태를 유지하며 영국의 부당한 압력만 철회시키자는 의견이 대립하다가 10월 14일 '선언과 
결의'를 채택하고 해산했다. 이 '선언과 결의'의 내용은 식민지에 대한 모든 입법은 오직 식민지 
의회만이 갖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천명하면서 식민지 의회의 동의 없이 영국군이 주둔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 '대륙 협정'을 발효하여 모든 주가 영국 상품에 대한 강제적 불매 운동에 
들어간다는 것, 영국이 제정한 식민지에 관한 악법들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이듬해 5월 다시 
대륙 회의를 열어 그 대응책을 수립하겠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미 곳곳에서는 일종의 혁명 정권이라 할 '협의회'나 '의회'를 구성하고, 발생할지도 
모를 무력 충돌에 대비하여 '1분 대기반'이라는 민병대를 조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보다 
강력한 대응을 외치던 버지니아에서는 협의회를 구성하고 회의를 열었을 때 패트릭 헨리가 나와 
그 유명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연설을 했다. 

  "쇠사슬과 노예화를 대가로 치러야 할 만큼 생명은 값비싸고, 또 평화는 감미로운 것인가? 
전능하신 신이시여, 이런 짓은 이제 그만두게 해주십시오. 저는 다른 사람이 어떤 길을 택할지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에 관한 한 내게 자유를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게 죽음을 
주십시오."

  이렇게 양측의 분위기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인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마침내 미국 민병대와 영국군 사이에 무장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실은 곧 
버지니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급박해지자 제2차 대륙 회의가 같은 해 5월 
10일부터 개최되었다. 버지니아의 대표단은 전과 동일하였으나, 이번에는 제퍼슨이 교체 대표로 
대륙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당시 제프슨의 나이는 32세였다.
  제퍼슨은 6월 21일에야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는데, 대륙 회의는 회의를 진행하던 중 
'벙커힐'에서 민병대와 영국군이 전투를 하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서둘러 워싱턴을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제퍼슨은 평소에 늘 만나고 싶었던 사무엘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등을 이 회의에서 만나게 되었다. 제퍼슨 또한 이미 그의 저술로 대륙 회의 
의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다. 제퍼슨이 대륙 회의에 참여하자 존 애덤스는 "이 회의가 문장과 
학문을 겸비하게 되었다"는 찬사를 보냈다.
  제퍼슨이 회의에 참여한 후 곧 워싱턴 장군이 대륙의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 이유를 천명하는 
선언문을 채택하기로 했다. 이 선언문을 기초하는 위원으로 제퍼슨과 저명한 소설가 디킨슨이 
임명되었다. 제퍼슨은 디킨슨과 상의하여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대륙 회의는 이 초안을 
수정하여 미 대륙에 전쟁의 당위성을 천명했다. 그리고 48명의 대표가 서명하여 이 선언문은 
조지 3세에게 전달되었다. 제퍼슨은 독립 전쟁의 당위성에 대한 선언문을 기초함으로써 나이 
32세에 전 미 대륙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제2차 대륙 회의 기간에 제퍼슨이 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영국의 노스 경이 대륙 회의에 
보낸 '화해의 제안'에 대하여 답변하는 결의문을 기초한 일이었다. 이 답변 위원회의 위원은 
제퍼슨을 포함하여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리처드 리 등 당대에 명성이 높은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제퍼슨에게 이 결의문의 전체를 기초하게 했다는 것은 그만큼 제퍼슨이 인정받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대륙 회의는 노스 경의 '화해의 제안'을 거절하고 만다.
  6주 동안 대륙 회의에 참여하는 동안 제퍼슨은 의회가 결의한 가장 중요한 두개의 문서를 전부 
기초하는 성과를 올리고 제2차 대륙 회의가 산회함에 따라 몬티첼로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제퍼슨은 가까운 친구인 존 랜돌프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서로 정치적 
견해가 다르지만 우정을 계속 유지하자는 것인데 이들 사이는 그만큼 가까웠다. 그들이 어느 
정도 가까웠는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도 알 수 있다.
  1771년 존 랜돌프와 제퍼슨은 일종의 협정문을 교환했다. 즉 제퍼슨이 먼저 죽으면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장서 중에 백 파운드어치의 책을 랜돌프가 선택하여 갖기로 하고, 랜돌프가 먼저 
죽게 되면 랜돌프의 바이올린을 제퍼슨이 상속받기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무렵 랜돌프는 
바이올린을 사기 위하여 런던으로 떠나기 전이었다. 이렇게 흉허물 없이 지내는 사이였지만 
랜돌프는 영국의 왕정을 지지하여 미국의 독립 혁명을 반대해서 결국 영국으로 돌아간 
인물이었다. 제퍼슨은 편지에서 랜돌프에게 영국에 가면 미국의 사정을 소상히 전하고 미국의 
입장을 이해시켜 줄 것을 요청하며 영국의 정치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동봉했다. 랜돌프도 비록 
서로 입장은 달랐지만 제퍼슨의 편지를 영국의 중요 정치인들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1775년 10월에 영국 왕 조지 3세가 영국 의회에서, 미국의 반란은 독립을 목적으로 일어난 
것이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의회는 왕의 미국에 대한 전쟁 선언을 지지했다는 소식이 
이듬해 5월 대륙 회의에 전해졌다. 더욱이 영국 왕은 영국군 외에도 독일의 용병을 사기 위하여 
독일과 접촉했다는 소식도 같은 시기에 미 대륙에 전해졌다. 이제 본격적인 독립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제2차 대륙 회의에 참석했던 버지니아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지 불과 2주일도 
못되어 버지니아 의회는 대륙 회의가 미국의 독립을 선언하라고 결의했다. 또 이러한 결의를 
하는 주가 늘어나 1776년 6월에 열린 대륙 회의는 공식적으로 모국인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자 했다.
  대륙 회의가 독립 후 수립할 새 정부의 헌법 창제를 논의할 때, 제퍼슨은 그보다 앞서 독립을 
결의한 버지니아 헌법의 기초를 위해 시간을 보냈다. 조지 메이슨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 이 
버지니아 헌법은 그러나 제퍼슨의 사상이 주축이 되었다. 그리고 버지니아의 권리 장전이 
메이슨에 의해 기초되었을 때, 제퍼슨은 아무도 종교를 강요할 수 없다는 종교의 자유를 권리 
장전에 삽입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제퍼슨이 버지니아 헌법을 창제한 후, 대륙 회의에서는 제퍼슨, 애덤스, 프랭클린, 셔먼, 
리빙스턴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어 미국 독립 선언서를 기초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위원회의 위원들은 제퍼슨 혼자 미국 독립 선언서를 기초하라고 위임했다. 
  미 대륙 회의는 1776년 7월 2일, 미합중국이 영국 왕이 통치하던 미 대륙 전체를 흡수하고 
영국과의 모든 관계를 차단한, 자유로운 새로운 국가로서 발전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 선언서를 3일 동안의 논쟁과 수정을 거쳐 1776년 7월 4일 공식적으로 채택, 
선포하였다. 대륙 회의는 7월 4일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여 전 미주 지역에 배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독립 선언서야말로 미국 국민의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고 미합중국의 정치적 
원칙을 분명히 한 문서로서 미국 국민만이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전 세계 모든 
민중이 오늘날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있는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국민이 다른 국민과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정치적 속박을 끊고 세계의 
모든 국가 사이에서 자연법과 하느님의 법이 부여한 자유와 평등의 지위를 차지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때, 인류 일반의 공정한 견해에 따라 그 국민은 독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렇게 시작되고 있는 미국 독립 선언서는 이어서 존 로크의 자연법과 계약설에 기초한 독립 
선언의 정당성을 밝히고 영국 왕 조지 3세의 실정과 폭압을 준엄하게 공격한 다음 결론에 가서 
미합중국이 천부의 권리에 따라 독립된 자유 국가임을 밝히고 있다. 제퍼슨은 독립 선언서를 
기초하면서 로크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데, 그는 방대한 로크의 사상을 간결하고 쉽게 
표현함으로써 전 미국인의 심정을 대변하였다. 이 독립 선언서에 반영된 사상과 정신은 미국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 근거가 되고 있다. 남미의 독립 운동가 
볼리바르 같은 사람은 이 독립 선언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토머스 제퍼슨은 다른 
업적은 그만두고라도 이 독립 선언서 하나만으로도 역사에 길이 기억되는 인물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우아한 매너를 지닌 탁월한 철학자

  미국의 독립을 선언한 1776년, 제퍼슨은 버지니아로 돌아왔다. 그의 부인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한편으로는 새로이 형성된 버지니아 정부에 직접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였다. 
당시 미국은 독립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대표 기구인 대륙 회의는 각 국가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주 정부가 실질적 권한을 쥐고 있었다. 제퍼슨은 애초부터 지방 자치를 
전제로 한 국가 연합체를 강력히 지지하였고 국가의 최종적 권한은 주 정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제퍼슨은 대륙 회의에서 일하는 것보다 버지니아 주 정부의 구조와 주민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776년 10월 11일에는 의회에서 종교의 자유문제를 다루는 19명의 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 위원회에는 제퍼슨과 일생의 교분을 나누게 된 제임스 매디슨도 선임되어 있었다. 
매디슨은 당시 약관 25세의 청년으로 법학을 공부한 수재였다. 제퍼슨은 그를 만나자마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임을 알아채고 여러 가지 방면에서 도와 주었다. 이렇게 제퍼슨과 교류하게 된 
매디슨은 과연 제퍼슨의 기대대로 뒤에 미국 연방 헌법을 기초하여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게 되고 또한 제퍼슨의 강력한 천거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다.
  어쨌든 제퍼슨은 종교 위원회에서 활약하며 종교의 자유를 버지니아 헌법에 삽입시키고, 
1779년에는 국가에서 목사에게 주던 봉급 제도를 폐지하도록 했다. 또한 특정한 종교에 특권을 
주는 것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영국의 성공회가 주의 종교가 
되는 것도 폐지했다. 
  제퍼슨이 원하고 생각하는 미국의 독립 혁명은 단순한 영국으로부터의 분리 이상의 변화를 
의미했다. 풀뿌리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부 구조의 민주화, 종교의 자유 외에도, 제퍼슨은 토지 
소유를 소시민들에게 확대하고 토지 소유 상한선을 정하여 대토지 소유 귀족의 영향력을 
제한시키는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고자 했다. 심지어 제퍼슨은 토지의 상속권을 제한하고, 또한 
전통적인 장자상속권을 제한해야 토지의 집중화가 방지된다고 생각했다. 
  제퍼슨은 교육이 장래 미국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다고 보고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의 의무 교육과 같은 선진적 제도를 버지니아에 소개하고 도입하고자 했다. 그리고 
전인교육을 위해 교과 과정에서 읽기, 작문, 산수뿐만 아니라 희랍어, 로마어, 영어 및 미국사를 
배우도록 규정했다. 또한 학생의 부모가 가난할 경우 주 정부가 교육비를 부담하게 만들었다. 즉 
제퍼슨은 사립 교육과 공공 교육을 겸비한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새로이 수립된 버지니아 주 정부를 민주주의의 이념에 맞게 바로 세우기 위해 제퍼슨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했다. 이런 제퍼슨의 공로로 버지니아는 다른 어떤 주보다도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노력이 버지니아 주민들에게 인정되어 1779년 7월 
1일 패트릭 헨리에 이어 버지니아의 양원 합동 회의에서 버지니아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당시 주지사의 임기는 1년으로 주 헌법에 의해서 3번의 재임이 허용되었다. 제퍼슨은 2년간 
주지사에 봉직했다. 그러나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던 이 기간에 그는 매우 어려운 
일들에 부딪친다. 제퍼슨이 주지사가 되었을 때도 미 대륙은 여전히 전쟁의 와중이었다. 미국의 
독립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제퍼슨은 물심 양면으로 전쟁을 지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의 
제도상 주지사는 독자적인 권한이 없고 모든 것을 주의회에 의존해야 했다. 모든 행정부의 
권한은 의회로부터 승인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의원들은 겉으로는 독립 
전쟁에 찬성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어느 편도 아닌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막상 전쟁 
비용을 청구하면 소극적이거나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퍼슨은 전쟁을 
준비하고 지원해야 했다. 1779년 5월 더 이상 이 상태로는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제퍼슨은 의원들을 설득해서 전쟁 이사회와 무역 위원회를 주 의회가 승인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나중에는 상무부와 해군성, 전쟁성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제퍼슨은 주지사 재임시에 버지니아의 수도를 윌리엄스버그에서 리치먼드로 옮겼다. 
제퍼슨은 오래 전부터 수도를 주민이 많고 교통이 편한 곳으로 옮겨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버지니아 의회를 설득하여 수도를 서쪽의 리치먼드로 옮겼다. 그러나 리치먼드는 
허허벌판이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건물도 없었다. 주 의회는 제퍼슨은 건축학 실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식 건축 양식을 따 주 정부 청사를 설계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수도인 리치먼드가 영국에 점령당할 위기에 처했다. 1780년 봄이 되자 미국 
대륙군은 충원과 전쟁 물자 지원이 줄어 곳곳의 전투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 버지니아 주 
정부도 새 수도의 건설 등으로 재정이 거의 바닥 날 형편에 처해 있었다. 그에 비해 영국군은 그 
해 10월 증원군이 오자 60척의 함선을 이끌고 버지니아의 체사피크 만으로 진공해 들어왔다. 
더욱이 육지에서는 영국에 투항한 아널드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리치먼드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당시 버지니아 주는 다른 주와 마찬가지로 전쟁 지원 체제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못했다. 
그래서 주지사인 제퍼슨이 나서서 군수 지원을 일일이 감독하고 관장해야 했다. 동시에 전쟁을 
위한 작전까지도 세워야 했다. 제퍼슨은 긴급히 민병대를 모집했으나, 주민들의 대다수는 자기 
희생을 꺼리는 형편이었다. 주민들이 이처럼 소극적이었지만 제퍼슨은 결코 낙망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 했다. 그러나 1781년 1월 영국의 
함대는 제임스 강을 차고 서쪽으로 리치먼드를 향해 진군해 오고, 아널드의 군대는 이미 
리치먼드에 거의 닿아 있었다.
  제퍼슨은 일단 중과 부적으로 적을 상대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민병대를 리치먼드에서 
철거하였다. 덕분에 아널드의 군대는 리치먼드를 쉽게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텅 빈 도시를 
점령해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널드의 군은 리치먼드 시를 전부 태우고 마구 
약탈한 다음 철수하였다. 이 철수는 대륙군을 유도하기 위한 잠정적인 작전이었다. 그러나 일단 
적이 물러갔다고 판단한 제퍼슨은 다시 리치먼드로 들어왔다. 하지만 제임스강을 따라 진군해 
오던 윌리엄 필립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이 다시 리치먼드의 남쪽을 점령하였다. 다행히 
라파예트가 대륙군을 이끌고 리치먼드를 구하기 위하여 달려왔다. 하지만 라파예트의 군이 
도착하고 보니 겨우 9백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민병대를 충분히 동원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라파예트의 대륙군은 7천 2백 명에 달하는 영국군에게는 중과 부적이었다. 결국 영국의 
콘윌리스가 리치먼드를 공격하자 라파예트는 리치먼드에서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이제 제퍼슨도 
퇴각해야 했다. 그는 얼마 되지 않는 민병대를 이끌고 고향 몬티첼로로 퇴각했고, 버지니아 
의회도 샬럿빌로 쫓겨가야 했다.
  영국의 콘월리스 장군은 탈레톤 대령에게 기병 25명을 주고 샬럿빌에 진군하여 주 의원들과 
주지사 제퍼슨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다행히도 버지니아 민병대 대위인 쥬에트가 밤을 새워 
말을 달려와 이 위급 상황을 알려 주어 제퍼슨과 주 의회 의원들은 스탠튼 쪽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 참으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이었던 것은 전선이 전 대륙에 걸쳐 있어서 이런 
일시적인 후퇴가 버지니아 군의 결정적 패배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영국군은 다시 리치먼드를 
떠나 대륙군의 주력 부대인 그린 장군의 부대를 추격하러 리치먼드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콘월리스 부대는 지치고 피곤한 상태에서 대륙군의 공격을 받아 결국은 
패주하고 만다. 
  이렇게 제퍼슨이 주지사로 있던 시기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제퍼슨은 최선을 
다해 전쟁과 건설이라는 두 개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제퍼슨도 주지사 
임기를 마치면서는 심한 모욕을 받기도 했다. 주지사의 임기가 끝난 직후인 1781년 6월 12일 
조지 니콜라스 의원이 의회에서 지난 1년 동안 행정부가 펼친 활동 내용을 감사하자고 제의했다. 
그런데 대다수 의원들이 이에 동조하여 이 제안이 주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런데 제퍼슨의 
동지이자 친구인 패트릭 헨리도 이 결의문에 동의하였다. 제퍼슨은 헨리의 이런 행위에 배신감을 
느껴 일생 동안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회가 국정 조사를 위해 모인 1781년 12월 12일, 제퍼슨은 본인 스스로가 나가서 
행정부가 시행한 활동과 행위에 대해 일일이 자료를 제시하고 또한 질문에 대해 상세히 
답변했다. 이렇게 되자 행정부의 업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주 의회는 제퍼슨에게 사과를 겸해서 
그의 훌륭한 업적에 대하여 감사하는 결의문을 만장 일치로 결의하였다. 물론 제퍼슨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그러나 버지니아 의회와 패트릭 헨리가 행한 이러한 모욕에 일생 동안 그는 비통한 
심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은퇴한 후 제퍼슨은 오래 전부터 준비한 버지니아의 자원에 대한 저술을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인 말보이의 요청에 따라 버지니아의 총람을 1778년에 끝마치고, 수정 보완하여 
1785년에는 이것을 책으로 발간했다. 이 총람은 버지니아의 국경, 산, 강, 기후, 동물, 식물, 광물 
등 자연 자원만이 아니라 버지니아의 법률, 관습, 노예제도, 흑인 및 인디언 종족에 대한 역사와 
내용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비판한 일종의 박물지였다. 그는 이 저서에서 특히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논리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기술하였는데 오늘날 
생각해 보면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하겠다.
  1782년에는 프랑스의 로샴보 사령관 휘하에 있던 세바리아 샤스테루 장군이 몬티첼로로 
제퍼슨을 방문하고 그와 함께 여러 날을 보냈다. 샤스테루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여러 
분야에서 박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제퍼슨과 대화를 나누고 그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제퍼슨은 마흔도 채 안 되었지만 매너가 좋은 우아한 미국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생각이다. 그는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훌륭한 음악가요 건축 설계사요 측량사이며, 
천문학자이고 생태학자이다. 또한 그는 법률가이자 정치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탁월한 철학자라는 사실이다."
  제퍼슨이 몬티첼로에 은거해 있는 동안 그에게는 엄청난 비극이 닥쳐왔다. 그의 부인 마타는 
항상 건강이 좋지 않아서 병을 앓고 있었다. 이렇게 신병에 시달리던 마타가 1782년 9월 6일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제퍼슨은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1783년 6월 3일 버지니아 의회는 제퍼슨을 대륙 회의 의원으로 선출했다. 그 해 파리에서 평화 
도약이 조인되었다. 이로써 미국은 명실공히 국가 연합체인 독립 국가로 서게 되었다. 대륙 
회의는 조지 워싱턴이 미국 대륙군 총사령관 직에서 퇴임하는 이임식을 갖기로 했는데, 제퍼슨은 
이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784년 3월 1일 제퍼슨은 연방 의회를 위하여 서부 영토를 통치할 정부 기구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후일 미국 영토 정책의 골격이 되는데 서부 지역에 대한 각 주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골자였다. 즉 당시 특허장만 있으면 각 주는 서부 영토를 무한정 확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서부와 거리가 먼 주들은 이 영토 확장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문제로 서로 갈등과 분쟁이 있었다. 그래서 제퍼슨은 서부를 16주로 분할하여 
인구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연합의 일원으로 하자는 안을 제출했다. 그리고 이 새 주들의 
체제는 공화정 체제로 하되 노예 제도는 폐지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 안에서 노예 제도 폐지는 
삭제되고 수정된 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렇게 되어 서부의 영토 문제가 확립되었는데 이 
보고서를 '1784년의 조령'이라고 부른다. 
  그 밖에도 제퍼슨은 연방 정부의 채무 이행에 관한 법, 연방의 화폐 주조에 관한 법 등을 
새롭게 제정하여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다가 그의 의회 활동은 돌연 차단되었다. 1784년 
5월 7일 의회는 제퍼슨을, 유럽에 파견한 애덤스, 프랭클린과 합류하여 유럽 국가들과 우호 및 
통상 조약을 협상하는 전권 공사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제퍼슨은 1784년 8월 6일에 그의 장녀 
팻지와 함께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불어를 좀 알기는 했지만 능숙하지 못하여 첫해에는 많은 
고초를 겪었다. 특히 파리에서의 첫해 겨울은 견디기 힘들었는데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였다. 
그러던 1785년 1월에는 그의 둘째 딸이 그만 죽었다는 비보를 듣기도 했다. 
  제퍼슨은 프랑스에 체류하는 동안 프랑스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이 기록에서 프랑스 서민들의 생활이 무척 비참한 상태에 
있으며 권위적이고 부패한 정부가 이같은 사태를 야기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건축, 조각, 그림, 음악 등 예술에 대하여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런 관찰과 더불어 제퍼슨은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등이 맺고 있는 조약을 철저히 
분석하여, 앞으로 미국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활용할 수 있는 모델 조약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제퍼슨은 조약을 협상할 때 문서를 체계적으로 준비하였는데, 특히 상업 문제에서는 철저하게 
전례들을 연구하여 대비하였다. 그는 다른 나라와의 상무 조약은 곧바로 미국의 국익과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문구 하나 하나에도 신경을 써가며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려고 노력했다. 
제퍼슨은 당시 외국과의 조약이 유리하게 맺어지면 신생국인 미국의 국제적 지위를 상승시켜 
새로운 국제 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785년 5월 79세의 고령으로 프랭클린이 귀국하게 되자 의회는 제퍼슨을 프랑스 주재 정무 
공사로 임명하였다. 프랭클린의 뒤를 이어 제퍼슨은 5년 동안 프랑스에 체류하는 바람에 
본국에서 있었던 연방 헌법 개정이라는 역사적 사건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발생했던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목격하고 참여하게 된다. 
  공사로서 제퍼슨은 모로코, 알제리, 트리폴리 등과 상무 조약을 협상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만다. 상무 조약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의 영국 주재 공사 애덤스가 트리폴리, 포르투갈과 
상무 조약을 협상하러 파리에 왔다가 제퍼슨에게 런던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제퍼슨은 6주 동안 영국에 머무르면서, 영국을 비롯해서 다른 국가들과 상무 조약을 협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전부 실패였다. 영국이 미국을 미워하여 상무 조약의 원만한 타결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제퍼슨은 이런 국제 사회의 냉엄한 모습을 보며 어서 빨리 미국이 강대국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고 파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런던에 체류하는 동안 제퍼슨에게는 일생을 통해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 사건과 만나게 
된다. 런던에 전시회를 열기 위해 온 미국 화가 존 트럼블을 만난 것이다. 트럼블은 당시 30세로 
코네티컷 전 주지사의 아들이었다. 그는 미국 혁명 전쟁 기간에는 워싱턴 장군의 참모진으로 
활약하기도 했는데 미국 독립 혁명을 화폭을 통해서 세계에 소개하려는 의욕과 야심을 갖고 
있었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제퍼슨은 곧 트럼블과 깊은 우정을 맺게 된다. 제퍼슨은 파리로 
돌아올 때 그를 파리로 초대하고, 파리에 오면 제퍼슨의 거처를 사용할 것을 제의했다.
  제퍼슨의 호의를 받아들인 트럼블이 1786년 8월 파리로 왔다. 여기서 운명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트럼블은 코스웨이 부부와 함께 왔는데 제퍼슨은 이 코스웨이 부인을 보자마자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부인과 사별한 중년의 신사인 그가 돌연 사랑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정염을 불태우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도 이 아름다운 비너스가 다른 사람의 
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망설였다. 그러나 그녀의 처지를 알게 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부터는 황홀한 사랑의 밀애에 도취하게 된다. 
  마리아 코스웨이의 남편 리처드 코스웨이는 영국인 화가로 제퍼슨과 동년배였다. 그는 이미 
유럽의 화단에서 널리 알려진 성공한 화가였다. 마리아의 부모는 영국인이었지만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런던으로 귀국하였는데, 마리아가 
22세 되던 해 부유하고 명성이 있는 코스웨이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코스웨이 부인 마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인 1786년 8월 
마리아는 28세였고 그는 43세였다. 마리아는 젊고 아름다운데다 재능이 많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파리의 예술계에서도 매력적이고 여성적인 섬세함을 지닌 여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중년의 
홀아비 제퍼슨은 그가 꿈꾸어 오던 가장 이상적인 여인을 발견하게 되자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사랑에 빠져 매일 그녀가 참석하는 파티를 찾아 다니며 그녀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다행히도 마리아의 남편 리처드 코스웨이는 그의 부인이 참석하는 파티에 빠지는 때가 많았다. 
  제퍼슨은 그녀의 아름다움, 겸손한 자세, 음악적 재능, 부드러운 향취에 반해서 그녀를 '이 
시대의 여성을 대표하는 가장 매력적인 여인'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되자 그는 자신의 공사 
업무로 만나야 하는 프랑스 귀족들의 공식적 초대에도, 본국에서 중요한 교신이 온다고 핑계를 
대고 빠져 나가 마리아와 어울리곤 하였다. 후일 제퍼슨은 고백하기를, "그녀와 하루를 보내고 
밤늦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 달이 지난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마리아에게 느끼는 깊은 사랑 때문에 이제 중년이라고 느끼지 못하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데이트를 하는 동안 제퍼슨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껑충껑충 뛰다가 발목을 삐기도 했다. 
  제퍼슨은 이 기간 동안 마리아에게 장문의 연애 편지를 쓰기도 했다. 편지는 때로 12페이지를 
넘기도 하였는데 편지 내용은 주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기록한 서정시이거나 감정의 토로였다. 
예를 들어, 1786년 크리스마스 전야에 그는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만일 내가 날 수만 있다면 당신 곁으로 날아가서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현실이 
그러지 못하니 이제 나는 그 같은 상황을 상상만 하겠소..."
  이렇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가 수없이 마리아에게 전해졌다. 마리아가 영국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이 편지들을 몰래 인편으로 보내곤 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프랑스와 영국 사이를 
오가는 편지는 당국에서 검열을 하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트럼블이 제퍼슨의 편지를 마리아에게 
전하는 사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편지는 대다수가 마리아에게 어서 다시 파리로 
돌아오라고 간청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남편이 눈치를 채면 곤란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된다는 답서를 보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마리아의 결혼 생활이 비록 불행한 것이기는 했으나 
재정적으로 남편에게 절대 의지하고 있던 마리아로서는 이혼하고 제퍼슨에게 가기에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마리아는 한때 수녀가 되려고도 했는데 
제퍼슨과의 밀회가 그녀의 도덕적인 양심에 찔렸으리라고 본다. 이렇게 제퍼슨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다가 실연의 상처를 입고 1787년 2월 파리를 떠나서 4개월 동안 
여행을 하게 된다. 이 여행은 제퍼슨의 일생 중 가장 긴 여행이었는데 그는 이 여행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되었다. 
  제퍼슨이 파리로 돌아와 보니, 그의 작은 딸인 메리와 여자 노예 헤밍스가 파리에 도착하여 
있었다. 그의 딸 메리는 폴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 귀여운 아이였다. 이들과의 만남은 
제퍼슨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하였으나 더불어 고향 생각이 나게 하기도 하였다. 흑인인 헤밍스는 
제퍼슨과의 염문으로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한 여인이다. 샐리 헤밍스와 제퍼슨이 
언제부터 연정의 관계에 있었는지는 사람들 사이에 논란이 되기도 했으나 그들 사이의 깊은 
관계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파리에 있을 때부터 
그랬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두 사람은 주인과 노예라는 신분의 장벽을 넘어 서로 학문적 토론을 
나누기도 하고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제퍼슨이 파리에서 염문에 휩싸여 있는 동안 그의 앞에는 골치 아픈 사건이 발생했다. 앞서 
독립 전쟁 기간 동안 대륙 의회는 전쟁 자금 조달이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네덜란드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전쟁 자금을 충당했다. 이런 관계는 독립이 되고서도 
지속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누군가 유럽에 거주하는 외교관이 전담해야 했다. 존 애덤스가 
헤이그에 거주하면서부터 위임받아 갖고 있었다. 애덤스가 영국의 공사로 있을 때도 같은 권한을 
행사했다. 그리고 이렇게 빌린 돈의 일부로 미국의 유럽 주재 외교관저의 경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한데 1788년 애덤스가 미국으로 귀환하게 되자 이 권한을 제퍼슨에게 위임하고 의회로부터 
승인도 받았다. 
  문제는 네덜란드 은행이 더 이상 융자를 해주지 못한다는 편지를 제퍼슨에게 보낸 데서 
발생했다. 이 융자가 끊기면 미국 정부로서는 당장 이제까지 여러 곳에서 빌린 돈의 이자도 갚지 
못할 형편이었다. 만일 이자를 물지 못하면 유럽에서 미국 정부의 신용이 실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황한 제퍼슨은 애덤스와 함께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다른 은행과 협상하여 충분한 융자를 
받아 내는 응급 조처를 취했다. 참으로 불행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새로운 융자 덕택으로 
미국 정부는 신용을 잃지 않게 되었고, 독립 전쟁 기간에 생긴 프랑스인들에 대한 정부의 채무를 
전부 이행할 수 있게 되었다. 
  제퍼슨이 파리에 거주하고 있던 1789년 5월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친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다. 그 이전 제퍼슨 스스로가 관찰한 바와 같이 파리는 빈민들의 소굴로 전락하고 
있었고 시민들의 왕에 대한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파리시에서는 시민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 때까지 형식적으로만 있던 
삼부회를 소집했다. 
  이 때 제퍼슨은 프랑스와 영사 조약을 성공적으로 맺고, 두 딸을 데리고 귀환하려고 정부에 
요청했으나 미국 정부는 구헌법 체제에서 신헌법 체제로 전환하는 와중에 있어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했다. 그 바람에 제퍼슨은 뜻하지 않게 프랑스의 혁명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제퍼슨은 사상적으로 프랑스 혁명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교관은 주재국의 정치 문제에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이 관례인데도 프랑스 국내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제퍼슨은 
오랜 지기인 라파예트에게 적극적인 충고를 하기도 하고 다른 프랑스 친구들과도 은밀히 의견을 
교환했다. 제퍼슨은 왕에 의해서 선포되어야 한 권리 장전까지 초안을 해서 라파예트에게 
전달했다
  1789년 6월 평민 대표들과 일부 귀족들만이 모인 삼부회는 귀족과 승려들의 동의도 없이 
삼부회를 프랑스 의회라 개칭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선포했다. 이에 대응해서 루이 16세는 의회를 
폐쇄하는 강경책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잠자는 화약고를 건드린 실수였다. 파리 시민들은 즉각 
결집하여 7월 19일에는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시내로 들어와 무기와 바리케이드로 
정부에 대항했다. 
  라파예트는 프랑스 의회에서 시민의 권리 선언문을 제출하기 전에 제퍼슨과 초안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프랑스 의회는 1789년 8월 26일 라파예트가 기초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이 무렵 프랑스 의회는 헌법의 제정을 놓고 심한 논쟁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라파예트가 
제퍼슨에게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그의 관저에 영향력 있는 프랑스 의회의 의원들을 불러 저녁 
만찬을 베풀어 줄 것을 요청했다. 제퍼슨은 쾌히 응낙하고 이들을 불러 만찬을 베푼 후에 
밤늦게까지 이들이 협상의 절차를 거쳐서 헌법 초안을 절충하도록 하였다. 결국 이들은 타협을 
하고 헌법의 골자를 확립한 후 밤늦게 헤어졌다. 
  이렇게 프랑스 혁명의 한가운데 서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자연법 사상을 전파하던 제퍼슨은 
혁명이 진행되던 초기인 1789년 8월 말에 미국 의회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부득이 
귀국하게 된 제퍼슨은 프랑스 의회의 의원들은 현명하고 중도파들이 많아서 프랑스 혁명은 
점진적인 혁명이 되고, 영국식의 헌정제도를 수립하라고 믿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 제도야말로 
프랑스가 미래에 모방해야 될 정치 체제라고 생각하면서 그 해 9월 26일 파리를 떠났다. 

    5. 주의 자치가 미국 민주주의를 지킨다

  1789년 11월 23일 제퍼슨이 미국 해안에 도착했을 때 새로이 대통령에 당선된 워싱턴이 
제퍼슨을 국무 장관에 임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이미 획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제퍼슨이 
버지니아의 노르폭 항구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이 환영 행사를 열어 그의 조국에 대한 봉사에 
감사를 보내고, 앞으로 수행할 업무에 대하여 축하했다. 
  워싱턴 대통령이 보낸 공식 임명장이 12월 11일에 제퍼슨에게 전해졌으나 그는 이를 즉각 
수락할 수가 없었다. 당시 행정부는 국무성을 창설할 때, 국무성보다는 외무성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재무성과 전쟁성을 수립한 다음에 국외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내의 문제도 여러 
가지로 해결해야 해서 국내외 문제를 함께 통괄할 국무성을 창설하게 되었다. 결국 오늘날 
대통령 중심제하에서 국무 총리와 비슷한 제도를 창설한 것이다. 
  제퍼슨은 존 애덤스가 부통령이 된 이상 외국 문제에 관한 한 자기가 가장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신은 외무 장관에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잡다한 국내 문제까지 취급하기에는 너무 
벅차다고 생각해서, 제퍼슨은 프랑스로 다시 부임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워싱턴 대통령을  비롯, 
매지슨 등이 강력하게 권유하여 1790년 2월 14일 몇 개월간의 망설임 끝에 국무 장관에 취임할 
것을 수락했다. 
  제퍼슨이 버지니아를 떠나 임시 수도인 뉴욕에 도착했을 때 신정부가 수립된 지 어느덧 1년 
가까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어수선한 상태 그대로였다. 
제퍼슨이 국무성을 인수하고 보니 사무실에 근무하는 인원은 2명의 사무관과 2명의 상무 보좌관, 
1명의 외국어 번역관이 전부였다. 국무성 전체의 1년 예산도 해외 근무자에게 보내는 경비를 
제외하고 8천 달러였다. 이 1년의 경비 중 3천 5백 달러가 장관의 봉급이었으니 나머지 4천5백 
달러로 1년 동안의 경비를 감당하기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부득이 제퍼슨은 자신의 집에서 
돈을 갖다가 일상 경비에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정부의 초기에는 각료 제도가 확립되지 못하여 장관들은 워싱턴 대통령의 보좌관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특히 워싱턴은 전쟁성을 중심으로 일을 처리하였고, 재무 관계는 해밀턴 
재무장관에게 자율권을 주고, 국무성도 비교적 자유롭게 운영하게 하였으나 외국과의 관계에서 
최종 결정권은 워싱턴 대통령이 가졌다.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지사를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국무 장관으로서 맨 먼저 한 일은 미국민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무게와 거리의 측정법을 표준화한 일이다. 그리고 온도기 측정법을 
국회에 상정해서 채택하고 화폐 주조법도 십진법을 이용해서 화폐를 주조하도록 만들었다. 이 
일은 미국같이 여러 개의 주로 구성된 연방 정부로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뒤에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제퍼슨이 뉴턴의 물리학 원칙을 수용하고 존 로크의 이상에 따라 정부를 
수립했다고 논평했는데 여기서 뉴턴의 물리학 원칙이란 다름 아닌 도량형 측정법이 오늘날에도 
통용되고 있다. 
  이어서 제퍼슨의 앞에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큰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에 생긴 정부 부채의 상환 문제가 그것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해밀턴 재무 장관은 혁명 
전쟁 동안에 각 주가 전쟁 때문에 지게 된 채무를 연방 정부가 인수하여 국채를 발행하자는 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제퍼슨은 각 주가 자율적으로 채무를 상환하는 것이 실정에 맞다고 
주장하였다. 전쟁  동안에 진 채무가 주에 따라 달랐고 더욱이 전쟁 당시 발행한 채권이 일부 
투기꾼들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즉 어떤 주는 채무량이 많고 어떤 주는 채무량이 비교적 
적어, 만일 연방 정부가 이 모든 것을 인수한다면 채무가 적은 주는 채무가 많은 주의 부채까지 
짊어지는 이중의 부담을 지게 되는 것이다. 또 전쟁에 참여하여 봉급도 받지 못한 채 복무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갖고 있던 채권을 헐값에 팔아 넘긴 데다 외국에 발행한 채권도 
국내외의 일부 투기꾼들이 사들인 지 오래였다. 이런 실정에서 연방 정부가 새로 채권을 
발행하여 전쟁 당시의 채권을 상환한다는 것은 국민의 세금을 걷어다가 일부 자본가나 부유층에 
특권을 주는 행위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제퍼슨과 해밀턴은 서로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대립했다. 하지만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첫째는 외국에 대한 미국정부의 신용이 실추되고, 둘째는 특정한 주는 엄청난 채무를 
갚아야 하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제퍼슨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보다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매지슨을 설득하여 의회가 이 법안을 원안대로 통과시키게 했다. 
  제퍼슨이 국무 장관으로서 첫번째 당면한 국외 문제는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의 위기였다. 즉 
1790년에 밴쿠버 아일랜드에서 스페인이 영국의 배를 나포했다. 이 사건으로 영국이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위협을 했다. 제퍼슨은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의 미시시피 유역과 대서양의 
항해권이 침해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제퍼슨은 중립을 지키면서 외교적 협상을 통해 양국의 
전쟁 분위기를 진정시켜 미국의 입장이 좋아질 때까지 시간을 벌자고 제안했다. 결국 영국과 
스페인은 전쟁을 하지 않게 됨으로써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1791년이 되면서 해밀턴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791년 3월 제퍼슨은 대 영국 정책에 
대한 보고서를 의회와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제퍼슨은, 영국은 미국이 그들과 
동맹관계를 맺기 전에는 미국 땅에서 철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영구의 이런 적대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도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미국 어선을 보호하고 미국의 해산물을 수출할 수 있는 
시장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 친하게 지내는 국가에게는 이에 상응하는 조처를 
해야 된다, 그러므로 프랑스는 미국의 미래의 시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제퍼슨의 보고서는 지적했다. 또한 영국의 미국 무역에 대한 제한은 다른 우호적인 국가와 
협력하여 제거할 수가 있으며, 만일 다른 국가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미국이 단독으로라도 
영국에 강력히 대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마디로 친불 반영 정책을 외교 정책의 골간으로 
삼자는 내용이었다. 
  1791년 12월 제퍼슨이 각료 회의에서 영국의 적대 행위에 대해 강력한 대응책을 준비해야 
한다고 보고하자 해밀턴은 정면으로 이 정책을 반대했다. 해밀턴은 만일 미국이 영국에 보복을 
하면 영국과 미국 영토에 대해 진행하고 있는 현재의 협상이 완전 수포로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결국 제퍼슨과 해밀턴은 프랑스와 영국에 대한 정책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 대한 정책도 서로 
다른 입장을 드러내었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해밀턴은 북부의 상공업 지역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당시 미국 무역은 70% 이상이 영국과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실정에서 영국과 적대 관계가 지속되면 당장 타격을 받을 사람들은 북부의 상공업자들이었다. 
  이 같은 대외 정책에 대한 두 사람의 분쟁은 국내 정책의 수립에도 이어졌다. 새로이 제정된 
연방 헌법의 해석을 둘러싸고, 해밀턴은 연방 정부가 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도록 융통성 
있는 유권적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제퍼슨은 연방 정부의 헌법에 대한 유권 해석은 
법률적인 문제이므로 문자 그대로 이행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연방 헌법의 해석을 둘러싼 이 두 사람의 논쟁은 후일 미국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양대 주류를 
형성하여 오늘날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재무부 장관 해밀턴이 보다 강력한 상공업 정책을 펼치기 위해 연방 은행 설립을 의회에 
신청하였을 때, 제퍼슨은 의회가 연방 은행 설립을 허가하는 것은 연방 헌법을 위배한 처사라고 
반대했다. 제퍼슨은, 연방 은행의 창설은 위헌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이해 집단을 도와 주는 
정책이기 때문에 공공 정책으로 수립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제퍼슨과 해밀턴의 대결은 정책과 정치적 입장에서 출발했으나 나중에는 개인적인 감정 
싸움으로 번져 언론을 통해 서로를 비난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특히 자존심이 유달리 강한 
해밀턴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퍼슨을 공격했다. 그러나 제퍼슨은 때로는 해밀턴과 
대립하다가도 보다 근본적인 중요한 문제에 부딪치면 항상 타협하는 아량을 보였다. 이 점을 
놓고 후세 역사가들은 "해밀턴은 이론가이고 제퍼슨은 정치가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1792년 워싱턴이 대통령에 재당선되었을 때 제퍼슨은 국무 장관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가고자 
했다. 해밀턴이나 연방론자들과의 투쟁이 제퍼슨을 피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싱턴 
대통령은 당분간만이라도 국무 장관으로 복무하게 된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워싱턴이 재선될 당시 해밀턴, 존 애덤스를 중심으로 하는 연방파와 
제퍼슨을 중심으로 하는 반연방파(공화파)의 대립이 치열한 편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제퍼슨이 당장 사임을 하면 국민들이 그가 해밀턴과의 싸움에서 졌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제퍼슨에게는 매우 곤란한 일이 생겼다.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후 프랑스는 공화 
정부를 선언하고 프로이센 군을 물리쳤다. 이 같은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많은 미국인들은 
축하했다. 그러나 1793년 1월 21일에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라파예트의 처형 소식이 전해졌다. 이 일은 미국인들로서 용서하기 힘든 처사였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라파예트는 자신들의 독립 전쟁을 지원한 프랑스의 
영웅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793년 프랑스는, 대불 동맹을 맺어 혁명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하던 영국과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하고, 이어 스페인에도 선전 포고를 하였다. 
  이 때 프랑스 공사 쥬네가 미국에 도착했다. 문제는 그가 프랑스에 공화국 정부가 집권하기 
전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대통령이 그를 인정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다시 
해밀턴과 제퍼슨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워싱턴 대통령은 제퍼슨에게 1788년 프랑스와 맺은 
조약이 아직 유효한가를 물었다. 제퍼슨은 그 조약이 아직 유효하기 때문에 대통령은 쥬네 
공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쥬네는 공사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 해 4월 
19일 각료 회의에서 대통령은 해밀턴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럽의 전쟁에서 미국은 중립을 
선언하겠다고 주장했다. 제퍼슨은, 중립 선언은 우호국을 버리고 국제적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반대하며, 헌법상으로도 대통령이 중립 선언을 할 권리가 없으니 오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의회에 보고해서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제퍼슨은 일방적인 중립 
선언을 하기보다는 중립을 선언하는 대가를 교전국(영국 등)으로부터 받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워싱턴 대통령은 교전국인 유럽의 열강에게 미국의 중립을 선언하고 만다.
  물론 제퍼슨도 미국의 국익을 위하여 유럽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의 미국은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고 국민들의 정서도 프랑스를 지원해야 한다는 
편이 많았다. 워싱턴의 중립화 선언이 있자 많은 미국인들이 신의를 배반하고 영국에 붙은 
매국노로 워싱턴과 해밀턴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국민의 분노에 해밀턴은 필명으로 언론 
기관을 통해 중립화 입장을 변명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국민들은 해밀턴의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퍼슨도 이에 대해 매디슨을 통해 해밀턴의 변명을 공격하였다. 이 때 프랑스 공사 
쥬네가 워싱턴 정부를 비난하는 국민 여론을 업고 정부를 전복하려는 비밀 클럽을 결성했다. 
결국 쥬네는 체포되지만 이 같은 사태로 인해 제퍼슨도 중립화 선언을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일을 기점으로 공화파와 연방파 사이는 넘어설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꼴이 되었고 각기 자기의 길을 찾아 정당을 창당하게 된다. 
  워싱턴 대통령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제퍼슨은 1793년 12월에 국무 장관 직을 사임하고 
몬티첼로로 낙향했다.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낙향한 제퍼슨은 경작법을 개조하고 못을 생산하는 
공장을 만들어 이를 소매하기도 하는 등 가사를 돌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1796년 가을이 되면서 
제퍼슨을 따르는 공화당원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제퍼슨도 공화당을 대표하여 대통령 후보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그 해 말 선거인단의 선거 결과 연방파의 존 애덤스가 71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퍼슨은 차점으로 68표를 얻었고, 핑크니는 59표, 아론 버는 30표를 얻었다. 당시의 
관행상 선거인단 선거에서 최고 득점자가 대통령이 되고 차점자가 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제퍼슨은 부통령이 되었다. 이 같은 관행은 1804년 헌법을 개정하여 부칙이 발효될 때까지 
이어진다. 제퍼슨은 명목만 있는 부통령에 취임하고 싶지 않았으나 많은 사람들의 설득으로 결국 
수락하고 만다. 이렇게 되어 그의 공직 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1797년 3월 제퍼슨이 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제퍼슨은 처음에는 
연방파인 애덤스와는 그다지 나쁜 사이가 아니라서 큰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취임식이 있은 지 이틀 후에 제퍼슨이 프랑스 주재 미국 공사의 인선을 둘러싸고 애덤스의 
의견에 반대하자, 애덤스 대통령은 연방파로 각료를 조직하고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는 제퍼슨과 
상의하기를 꺼렸다. 이렇게 행정부 내에서 따돌림을 받자 제퍼슨은 친구들에게 "부통령 
직책이라는 것이 상원 의장으로서 입법 활동을 하는 것에 제한되어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때 그가 미국 철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너무나 기뻐했다. 
정적들로 둘러싸여 재미없게 지내던 그에게는 이보다 즐거운 소식이 없었을 것이다. 제퍼슨은 이 
직책을 1815년까지 맡았다. 
  이후 제퍼슨은 공화당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상원 의장으로서 연방파가 주도하고 있는 
사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의회 내에서도 연방당의 횡포를 견제하는 활동으로 일관한다. 
제퍼슨은 의회에서 군 증원 및 군비 확장 문제, 국적법, 내란 음모죄에 관한 법 등을 놓고 연방당 
의원들과 격렬하게 싸웠다. 특히 군 증원을 위해 토지, 주택, 노예의 소유 등에 연방 정부가 직접 
과세를 하겠다는 데 제퍼슨과 공화당원들은 적극적으로 반발하였다. 더구나 '보안법'이라 불리는 
내란 음모죄에 관한 법이 대통령이나 정부에 대해 명예를 훼손시키는 행위도 처벌하겠다고 하여 
공공연하게 야당인 공화당을 얽어매려고 하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 법들은 결국 
통과되고 만다. 하지만 이런 반민주적인 법들이 시행되자 국민들은 행정부와 연방파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1800년 4월에 시작하여 12월까지 진행된 대통령 선거는 연방당과 공화당의 
목숨을 건 결전과도 같았다. 연방당은 제퍼슨을 "입에 칼을 물고 있는 무신론자이며 
자코뱅당원"이라고 인신 공격하고 "공화파가 승리하면 뉴잉글랜드의 집들은 모조리 불타 버릴 
것이며 젊은 여자들은 능욕 당할 것"이라는 흑색 선전을 일삼았다. 그러나 국민들 마음은 이미 
연방파에서 떠나 버린 뒤였다. 더구나 같은 연방파지만 애덤스를 싫어하는 해밀턴은 애덤스를 
지원하지 않았다. 국민 투표에서는 제퍼슨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였으나 연방당의 선거구 조작에 
의해서 마지막 선거인단의 투표가 끝났을 때는, 제퍼슨 73표, 아론 버 73표, 현직 대통령인 
애덤스 65표, 핑크니 64표, 존 제이는 1표를 각각 획득했다. 결국 같은 공화당인 제퍼슨과 버가 
73표를 획득하여 동표가 되었다. 
  당시 선거법상 동수의 표가 나오면 하원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이 경우 
하원에서 각 주는 한 표밖에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의원들간에 합의를 이루어야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1801년 2월 하원에서 표결을 한 결과 제퍼슨은 8개 주의 표를 받고 버는 6개 
주의 표를 받았는데, 메릴랜드 주와 버몬트주의 대표들은 기권하였다. 제퍼슨이 당선되려면 
과반수를 넘어야 하는데 1개 주의 표가 없어서 재투표를 해야 했다. 결국 며칠에 걸쳐 36차의 
표결을 한 결과 제퍼슨이 10개 주의 표를 얻어, 1801년 2월 17일 미국의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렇게 제퍼슨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해밀턴의 덕분이었다. 해밀턴은 내심 제퍼슨보다 더 강경한 버를 
두려워해서 오랜 정적인 제퍼슨을 밀었던 것이다. 

    6. 1800년에 이룩한 제2의 아메리카 혁명

  제퍼슨은 1801년 3월 4일 57세의 나이로 제3대 미국 연방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제퍼슨은 
아직 진흙 벌판에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새 수도 워싱턴 시에서 취임식을 거행했다. 
그는 취임식이 끝나자 그가 설계를 구상하는 데 참여하여 짓고 있는 의사당 건물을 바라보면서 
걸어서 숙소인 콘래드 여관으로 갔다. 
  1800년 선거에서 제퍼슨이 당선된 것을 역사가들은 '제2의 아메리카 혁명'이라거나 '1800년의 
혁명'으로 부른다. 이런 표현은 다소 과장이 있게 마련이지만 제퍼슨이 취임하면서 미국의 역사가 
민주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점에서는 사실이다. 전임자들인 워싱턴이나 애덤스는 자유를 
신봉하고 독립을 원했지만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퍼슨은 달랐다. 그가 신념으로 믿고 있던 것은 미국 민중, 특히 미국이라는 나라를 
개척한 농민들이 잘사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로크나 몽테스키외 같은 자연법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서 위대한 민중의 힘을 보았다. 
  그는 미합중국이 이상적인 공화국이 되려면 세 가지의 이념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첫째, 
지방 자치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이 참여하고 감시하는 정치 제도의 실현이다. 그가 연방파와 
그토록 대립하며 주 정부의 권한을 키우려고 했던 까닭도 그것에 있었다. 둘째, 농촌 문화와 
성실하게 땅을 일구는 정신이 도시 문화나 장사꾼 정신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는 평생 
농부가 밭을 가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위라고 예찬했다. 셋째, 연방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태도를 우려하며 권력의 사법부에 대한 지배를 부당한 권리의 침탈이라고 주장했다. 
  제퍼슨이 새로운 수도에서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 것도 또 다른 상징적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연방파들이 새 헌법과 정부가 확립된 이래 계속 집권해 왔다. 그런데 공화당이 
집권하는 새로운 시대가 새 수도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이제 중앙 정부의 무한 권력, 그리고 
어찌 보면 유럽적 귀족주의를 추구하던 연방파의 시대는 물러가고 민권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공화파의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권력의 교체는 항상 빛과 그늘이 있기 마련인 
모양이다. 은퇴하는 존 애덤스 대통령은 제퍼슨이 취임하는 모습을 보기가 싫어서 취임식 날 
새벽 4시에 수도를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제퍼슨의 등장은 그와 연방파가 저지른 역사적 실책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었을 뿐이다. 
  제퍼슨은 내각을 구성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제퍼슨이 3월 4일에 취임했는데 5월 
15일에 가서야 전체 각료 회의를 처음으로 개최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연방파와 공화파의 
싸움이 남긴 후유증이었다. 현실적인 정치가인 제퍼슨으로서는 유능한 연방파 인물들을 포용하여 
자신의 국정 수행이 원활하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제퍼슨은 매디슨을 국무 장관에, 앨버트 
갤러틴을 재무 장관에 임명했다. 지역의 안배와 공화당의 약체 지역을 지원하기 위하여 뉴욕 
지역을 대표하는 헨리 디어본을 전쟁성 장관에, 레비 링컨을 법무 장관에 임명했다. 해군 장관을 
임명하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세 사람이 제퍼슨의 제의를 거절했다. 제퍼슨은 결국 볼티모어 
출신인 로버트 스미스를 해군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면 제퍼슨이 재임시 이행한 중요한 정책을 살펴보자. 
  먼저 1801년 연방파 정권하에서 성급히 통과된 재판부에 관한 법령을 제퍼슨 행정부하에서 
폐기했다. 1801년 2월에 통과된 재판부에 관한 법에 의거해서 은퇴하는 애덤스 대통령은 새로 
생긴 연방 법원의 판사들을 대거 임명했다. 그 이유는 새로 들어서는 공화당이 연방 법원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 여파가 제퍼슨 행정부에도 왔다. 
  '마버리 대 매디슨의 판례'로 이름 붙여진 이 사건이 제퍼슨 행정부의 첫번째 시련인 셈이다. 
퇴임하기 직전 애덤스 대통령은 윌리엄 마버리를 워싱턴 연방 지방 법원의 판사로 급히 
임명했다. 공교롭게도 임명은 했으나 금요일 오후여서 임명장을 전달할 수가 없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취임한 제퍼슨 대통령은 임명장이 아직 전달되지 않은 마버리를 비롯해서 다른 3명의 
판사의 임명장을 폐기하고, 판사 임명을 취소했다. 이 같은 대통령의 처사에 대하여 마버리와 
다른 3명의 판사 예정자들은 대법원에 청원하여 매디슨 국무 장관의 임명 취소를 철회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연방파인 대법원장 존 마셜이 이 사건을 심의할 것에 동의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제퍼슨 대통령은 이에 강력히 항의하고, 연방파들이 이제 사법부를 
이용하여 대통령의 의지를 꺾으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동조한 공화당 의원들이 1801년 
2월에 통과한 재판부 개정 법안을 즉각 폐기했다. 
  1803년 2월 대법원장 마셜은 재판부의 결정을 통고하였다. 그 결정은, 대법원은 의회가 결정한 
법률의 위헌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며 마버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대통령의 위법 행위를 
힐난했다. 그러나 대법원장 마셜은 행정부의 인사권을 사법부가 침해하는 것도 위헌이기 때문에 
마버리의 요청대로 임명장을 부여하라는 사법부의 명령서를 발부할 수는 없다고 판결하였다. 
  이 같은 사법부의 결정에 부유한 마버리는 자기의 정당성이 입증되었기에 판사직을 맡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행정부에서는 제퍼슨 대통령에 대하여 마셜 
대법원장이 비난한 것은 불만이나 행정부의 일에 사법부가 간섭하지 않는다는 결정에 만족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본래 미국의 헌법에는 사법 심사권이 명기되어 있지 않았다. 제이, 해밀턴, 매디슨이 저술한 
연방제에 관한 책에서 미국 헌법에 대해 설명하면서 명기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사법부의 
결정을 행정부가 수락함으로써 대법원의 사법 심사권이 관례로 인정되었다. 
  사실 존 마셜은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같은 
무결정이 미국 사법부가 독자성을 수호하고 행정부와 입법부의 위헌 여부를 판결하는 사법 
심사권을 갖게 되는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다. 
  제퍼슨은 또한 애덤스 행정부가 제정한 악법들을 무효화시켰다. 잠정적이던 보안법은 
사문화되었고 이민법은 거주 기간 15년에서 다시 5년으로 환원되었으며 워싱턴 행정부가 
제정했던 위스키 주세법도 철폐시켰다. 
  더불어 그는 행정부의 예산을 최소화시키는 한편 전임자들이 화려하게 열던 파티도 소박하고 
활기가 넘치는 담소를 즐기는 분위기로 만들었다. 
  제퍼슨 대통령의 첫 임기 동안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어려웠던 외교적 문제도 해결됐다 
제퍼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해인 1801년 5월 프랑스와 스페인이 비밀 조약을 맺고 루이지애나 
영토를 프랑스에 이양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1802년 봄에 제퍼슨은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처음에는 프랑스에 강력한 항의를 하고 이 같은 결과를 뒤집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스페인은 당시 미국의 미시시피 강 항행권과 뉴올리언스에 상품을 출하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퍼슨 대통령은 파리에 있는 리빙스텬 대사를 통해 미국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군비와 병사를 
증강해서 무력으로 대처하겠다고 프랑스를 협박했다. 그리고 듀퐁을 파리에 보내 대통령의 
강력한 항의문을 나폴레옹에게 직접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제퍼슨 
행정부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연방파는 이 문제가 친프랑스 정책을 쓰는 공화당 
정부의 온건한 태도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무력을 써서라도 루이지애나를 획득해야 한다고 
정치 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연방파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제퍼슨은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마침 
프랑스로 파견한 듀퐁이 제퍼슨 대통령에게 보낸 비밀 편지로 프랑스는 영국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루이지애나 영토와 서부 플로리다 영토를 팔 의사가 있다는 희소식을 알려 왔다. 
1803년 3월 8일 제퍼슨은 제임스 먼로 특사를 파리로 보내 루이지애나 영토를 프랑스로부터 
매입하려는 외교 전략을 폈다. 의회는 협상을 위해 2백만 달러의 경비를 행정부에 할당했다. 
그러나 먼로 특사에게 보낸 비밀 편지에는 루이지애나와 플로리다를 사기 위하여 9백만 달러까지 
써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만일 이 협상이 실패하면 즉시 영국으로 가 동맹 협상을 
하라고도 지시했다. 
  나폴레옹은 아메리카 대륙을 방어하기도 어렵고, 영국과 전쟁도 해야 하기 때문에 외무 장관인 
탈레랑을 시켜서 루이지애나의 전체 영토를 매매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때 먼로는 프랑스 정부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하고 뉴올리언스만 사겠다고 협상을 제의했다. 그러자 탈레랑은 "왜 
뉴올리언스만 하려는가? 루이지애나는 전부 필요치 않은가?"라고 반문하여 협상은 급진전되었다. 
1803년 5월 2일 미국과 프랑스는 루이지애나 영토 매매 조약을 맺었다. 미국은 6천만 프랑의 
현금을 프랑스에 지불하고, 미국 민간인들이 프랑스에 요구하던 2천만 프랑의 채무를 미국 
정부가 맡는 조건으로 루이지애나를 매입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당시의 달러로 환산하면 1천 
6백만 달러에 해당하는데 이 영토가 당시 미합중국 땅의 크기와 맞먹었고 이후 미국이 서부로 
진출할 수 있게 된 근거가 되었으니 참으로 헐값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상원은 이 조약을 
그 해 10월 20일에 비준함으로써 루이지애나는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토의 크기를 측정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미국이 구입한 
루이지애나 토지도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이 프랑스에 양도했을 때의 경계선으로 이 영토가 
규정되어 있었으나 구체적인 경계선은 불명료했다. 그래서 제퍼슨은 자기의 비서였던 메리웨더 
루이스 대위와 윌리엄 클라크를 지휘자로 한 측량팀을 구성하여 새로 구입한 땅을 측정하도록 
보냈다. 그것이 1804년 봄이었다. 이들이 2년 반 동안 9천 마일을 측정했는데 이것은 전체 영토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루이지애나 영토를 구입함으로써 미국의 영토는 배로 늘어났는데 그 후 
제퍼슨은 계속적으로 사람들을 서부로 파견, 그 서쪽에 있는 또 다른 영토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새로이 병합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통치하는 데도 문제가 있었다. 첫째 많은 외국인을 미국 
시민으로 수용해야 했고, 둘째 프랑스와 스페인이 이룩한 다른 종류의 행정 조직을 이해하고 
주민들을 통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지침을 마련했는데 그것이 다른 
나라의 전통과 관행을 미국의 영토 내에서도 인정해 주는 복수주의 전통이다. 
  이렇게 되자 연방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제퍼슨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제퍼슨은 
"두번째의 임기를 역임하고 싶지 않았으나 연방파들이 국가를 분열시킬까 두려워서 재출마하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1804년 12월에 조지 클린턴을 부통령 후보로 하여 재출마하였다. 그는 
압도적인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고 코네티컷과 델라웨어만 빼고는 모든 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제퍼슨의 절대적 승리로 연방파의 세력은 엄청나게 줄어들고 만다. 1805년 3월 4일 제퍼슨은 
두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제퍼슨 대통령의 두번째 임기 동안 두 가지의 국내외 문제가 발생했다. 첫번째 문제는 국내의 
내분 문제였다. 아론 버는 제퍼슨 첫번째 임기 동안에 그의 부통령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기간에 
제퍼슨을 돕기는커녕 연방파와 연결되어 사사건건 제퍼슨을 괴롭히기만 하였다. 그래서 버는 
부통령 후보로도 나서지 못하는 수모를 겪고, 뉴욕 주지사에 출마했으나 그것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제퍼슨이 있는 한 미국 정계에서는 매장될 처지임을 깨닫고 이번에는 영국 공사인 
메리와 줄을 대려고 하였다. 메리는 본국 정부에 전통을 보내서 버에게 50만 달러를 주고 그로 
하여금 미국 서부의 영토를 연방으로부터 분리하는 공작을 책임지게 했다. 버는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스페인 공사와도 접촉하고 미국군의 장교들과도 접촉했다. 특히 그는 이튼 장군, 
윌킨슨 장군 등 군의 고급 수뇌와 접촉을 시도하였다. 
  제퍼슨 대통령은 이 같은 반란 음모를 감지하고 버를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일은 초기에 
음모를 함께 했던 윌킨슨 장군이 사태를 파악하고 제퍼슨 대통령에게 이 음모를 밀고함으로써 
드러났다. 결국 버는 체포당하고 반란은 좌절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제퍼슨은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두 번째의 큰 문제는 영국, 프랑스와의 외교 문제였다. 프랑스는 미국이 플로리다 영토를 
스페인으로부터 매입하려는 노력을 방해하곤 했다. 한때는 제퍼슨 행정부가 프랑스에 2백만 
달러를 지불하고 프랑스로 하여금 플로리다 영토의 매입을 중재해 달라고 요청하려 했지만 이에 
대한 의회 내의 반발이 심해서 좌절된 적도 있었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하여 유럽을 
정복하면서부터 미국에 대해서도 점점 냉혹한 태도로 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미국에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국가는 영국이었다. 당시 6백만 미국인들의 
생활은 주로 외국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많은 상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와의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영국의 군함이 미국의 상선을 나포하고, 때로는 미국 
항해사를 영국 해군에 강제로 징발하곤 하였다. 당시 상당수의 영국인들이 봉급이 높은 미국 
상선에 고용되어 있기도 하고 그들 중 일부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영국 
군함은 수시로 미국 상선을 검열하며 영국식 억양이 조금만 있으면 영국인으로 체포하여 군으로 
징발하였던 것이다. 미군은 해군력이 부족하여 영국의 이러한 부단 행위를 막을 수가 없었다. 
제퍼슨 행정부는 이 문제로 여러 차례 영국에 항의하였으나 영국 정부는 그런 일이 없다거나 
사망했다고 핑계를 대기 일쑤였다. 
  그런데 1807년 여름, 미국의 군함인 체사피크 호가 미국 해안에서 영국 군함 레오파드 호에게 
공격을 당해 미국 해군 3명이 죽고 18명이 중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레오파드 
호가 체사피크호를 검열하겠다고 해서 이를 거부하자 포격을 가해 일어난 일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외국인과 연방파가 들고일어나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자고 역설했다. 
  하지만 제퍼슨으로서는, 흥분하여 전쟁을 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는 냉정을 잃지 않고 
사태를 진단했다. 전쟁을 선언하면 국민들은 단결할 것이나 미국은 영국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우선 전력의 증강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은 제퍼슨은 1백 88척의 군함을 건조했다. 당시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69척의 적은 군함으로는 스스로를 방위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해군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조하여 구축한 함선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바람만 세게 불어도 밀려 
나갈 정도였다. 그러니 애써 건조한 군함이 전혀 쓸모 없게 되어 버렸다. 
  연방파들은 옳다구나 하면서 제퍼슨을 조롱하였고, 영국은 제퍼슨의 강력한 항의를 무시한 채, 
오히려 미국에 더 강경책을 썼다. 영국은 1807년 11월에 모든 유럽의 항구에서 출발하는 선박은 
영국의 검열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폴레옹이 나서서 선언하기를 영국의 검열을 받은 선박은 모두 프랑스 
함대에 의하여 나포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제 미국은 진퇴 양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사태가 계속되면 미국의 해운업계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생활에도 치명적인 타격이 될 
형편이었다. 그러나 제퍼슨은 영국과 프랑스를 동시에 상대해서 싸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궁여지책 끝에 나온 것이 영국에 대한 경제적 봉쇄 정책이었다. 
  하지만 제퍼슨의 이 봉쇄 정책은 영국을 당황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미국 스스로를 묶는 
족쇄가 되었다. 그는 봉쇄 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요건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미국이 
영국에 대해 봉쇄 정책을 이행하려면 영국의 미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높아야 했다. 그래야만 
영국은 위기감을 느껴 미국에 대한 억압을 풀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미국으로부터 
식량이나 모피 등을 수입하기는 했으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못 되었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정책을 정부가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할 
미국의 많은 중소업자들이 도리어 밀수로 재미를 보려고 들었다. 그러나 큰 제조업자들은 밀수를 
할 형편이 못 되므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봉쇄 정책을 감행한 이래 미국의 수출은 1년에 1억 
1천만 달러에서 2천만 달러로 엄청나게 감소되었다. 그래서 곳곳에서 도산하는 업체들이 
늘어났다. 뉴욕 시에서만 5개월 동안에 1백 25개의 회사가 파산했다. 
  이렇게 되니 제퍼슨으로서도 1809년 3월 1일을 기해 경제 봉쇄 정책을 해제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연방당과 상공업자들은 노골적으로 제퍼슨을 비웃기 시작했다. "협잡꾼 농촌 
평화주의자가 우리를 파멸시키려 한다"고 하면서 그들은 제퍼슨을 비난했다. 
  이렇게 제퍼슨은 재임 기간 동안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공화당의 재집권이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에게 3선을 종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제퍼슨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퍼슨은 65세의 나이로 이제는 정치에 싫증이 났고 지치기도 
했다. 그는 좀더 젊은 사람이 정권을 인수해야 된다고 믿었다. 게다가 워싱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미국 대통령은 2선으로 끝나는 정치적 전통이 지켜져야 된다고 제퍼슨은 굳게 
믿었다. 다행히 그는 그의 정책을 계승할 수 있는 제임스 매디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안심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7. 버지니아 대학의 아버지

  제퍼슨은 대통령 직을 물러난 후 상당히 오랫동안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시민으로서도 괄목할 
만한 활동을 했다. 제퍼슨이 1809년 3월 중순에 몬티첼로에 귀향했을 때 알버멜 군에 많은 
시민들이 모여서 그를 환영했다. 그는 이러한 환영에 감사하며 보다 더 열심히 고향을 위해 
일하고자 했다. 
  그는 곧 일을 시작했다. 그는 밀가루 방앗간과 못 공장을 세우고 농사일과 정원 가꾸기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의복 생산 공장도 만들고 농작물의 개량에도 힘썼다. 
  몬티첼로에 은퇴하면서 제퍼슨을 즐겁게 한 일도 생겼다. 그것은 전 대통령인 존 애덤스와 
단절되었던 우정을 회복한 일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존 애덤스는 제퍼슨과 함께 미국 독립 
선언문을 기초하기도 했고 신헌법이 발효한 뒤 워싱턴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함께 일하기도 
했다.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봉직할 때 제퍼슨은 애덤스 정부의 부통령으로 재직한 바도 있었다. 
문제는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인 제퍼슨이 연방당인 애덤스를 밀어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 선거 과정에서 애덤스는 많은 정치적 모독을 당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고 생각해서 제퍼슨에 대한 감정이 아주 나빴다. 
  반면에 제퍼슨은 애덤스가 퇴임하면서 마지막 순간에 많은 연방파를 공직에 임명함으로써 
제퍼슨 행정부에 부담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제퍼슨은 애덤스의 이러한 행위는 그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고의적 행위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사연으로 1800년 이래 11년 동안 이들 수 사람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에 화해의 기회가 오게 되었다. 의사인 벤저민 러시는 독립 선언문에 
서명한 인사로서 두 사람 모두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러시의 중재로 이들의 우정이 
회복되었다. 먼저 애덤스가 제퍼슨에게 편지를 보내 홈스펀 양복 기지에 대하여 문의하였다. 이에 
감복한 제퍼슨은 서신을 보내어 자기의 신상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 주고 사과했다. 이후 이들은 
서신으로 정치, 경제, 교육, 철학, 법률, 과학 등 평소 생각하는 바를 토의하곤 하였다. 이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환한 편지는 1백 50통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들의 우정이 
하늘에도 닿았는지 이들은 같은 날짜에 나란히 죽기까지 했다. 
  제퍼슨은 74세 되던 해인 1817년 초에 그가 평소 구상하였던 교육 제도 개혁안 초안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그 해 말 그는 3단계로 구성되어 있는 교육 제도 안을 완성했다. 즉 국민 
학교에서는 독서, 작문, 산수, 지리, 등을 가르치고, 모든 교육비는 주가  부담하게 된다. 그러므로 
국민 학교 과정은 모든 사람이 교육받는 의무 교육이 된다. 
  고등 학교  과정에서는 과학과 외국어를 전수하고, 또한 직업 교육을 중시한다. 고등 학교는 
전체 주에 골고루 수립하되 기준은 말을 타고 하루를 갈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세운다. 고등 학교 
교육비도 주 정부가 부담한다. 
  대학은 여러 개의 전문 영역별로 나누고 과학을 중심으로 구성한다. 전문 과정에서는 건축학, 
음악, 조각, 조경, 경제, 군사 과학, 농업 경작학, 농업 경제학, 의학, 역사학, 신학과 법학 등으로 
나누어서 교육한다. 
  이 같은 상세한 계획을 세운 그는 이 안을 버지니아 주 의회에 제출했으나 그만 예산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1818년 제퍼슨이 75세 되던 해 버지니아 의회에서 1만 
5천 달러를 대학 설립을 위해서 배정하고 24명으로 구성된 대학 설립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이 
위원회의 위원으로는 제퍼슨, 매디슨, 제임스 먼로 등 3인의 전직 대통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위원회의 의장은 제퍼슨이었다. 
  제퍼슨은 버지니아 대학교를 샬럿빌에 세우자고 했다. 샬럿빌에는 이미 작은 규모지만 센트럴 
단과 대학이 있었다. 이 대학은 1817년 10월 6일 제퍼슨에 의해서 설립된 학교였다. 제퍼슨은 이 
대학이 세워질 때 1천 달러를 기증하고, 건축 설계, 건설 공사 등을 전부 맡아서 감독하는 한편, 
재단 이사장을 겸하고 있었다. 제퍼슨은 이 대학을 세울 때 이미 대규모의 주립 대학교를 
구상하고 건축 설계, 교과 과정 내용, 교수의 확보 등 상세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818년에 대학 설립 위원회가 대학의 소재를 결정한 다음 6년간 제퍼슨은 버지니아 대학을 
창설하는 데 혼신을 다 바쳤다. 제퍼슨은 설계를 하고, 건축을 감독하고, 대학의 종합 기획도 
거의 혼자서 준비하고 마련했다. 조각을 위해서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하고 노동자를 
고용할 때도 직접 나서서 했다. 당시에는 기능공이 부족하여, 제퍼슨은 돌 쌓는 방법과 목공 
기술까지 직접 가르쳐야만 했다. 그러나 버지니아 대학의 건립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재정적 
지원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제퍼슨은 주 의회 의원들을 설득하고 또한 유지들의 기증을 받아서 
대학교 설립을 위한 기금을 조성했다. 이렇게 하여 대학교의 건축이 끝났을 때 제퍼슨은 30만 
달러 이상을 썼다. 당시의 화폐 가치로 볼 때 이 돈은 엄청난 액수였다. 
  제퍼슨은 최고급의 교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사람을 영국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또 대학의 교과 
과정도 제퍼슨이 직접 섬세하게 준비하였다. 이렇게 그의 노년을 바친 버지니아 대학교는 1825년 
3월 7일 개교하게 되었다. 그 때 제퍼슨의 나이는 82세였다. 

    8. 독립 기념일에 죽은 이상주의자

  제퍼슨은 이렇게 자신의 신념에 따라 미합중국이라는 나라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가 
말년에는 경제적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고 그 자신도 많은 
돈을 벌었지만 제퍼슨이 이같이 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제퍼슨은 30대의 이른 나이에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공직 생활이란 것이 일종의 무보수 봉사와 
같은 것이었다. 더구나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몬티첼로를 방문하여 이들을 
환대해야 했다. 여기에 많은 수의 노예와 농장에서 일하는 가족의 생활을 꾸려 나가야 했다. 
노년이 되어 농장에서의 수입이 충분하지 못하자 다른 사업을 했으나 모두 실패해서 채무만 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아는 사람들의 빚 보증을 섰다가 그들이 망해서 채무만 인수하게 되기도 했다. 
물론 제퍼슨은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810년대에 미국은 경기 후퇴로 토지 
가치가 엄청나게 절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토지의 매매도 활발하지 않았다. 
  1812년 영국과의 전쟁으로 미국의 국회 도서관이 전소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국회 
도서관은 책을 구입하기로 했는데 제퍼슨은 그가 그토록 아끼며 소장하고 있던 책을 팔아야만 
했다. 국회 도서관은 제퍼슨의 6천 4백 87권의 장서를 2만 3천 9백 50달러에 매입했다. 이 돈과 
친우들의 후원금으로 제퍼슨은 지고 있던 채무의 일부를 갚았다. 그러나 눈덩어리처럼 부풀어 
가는 이자를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제퍼슨은 파산했다. 그가 1826년 7월 4일 83세로 눈을 
감았을 때 이행해야 될 채무는 10만 달러였다. 
  제퍼슨은 죽기 전에 계속해서 지금이 7월 4일이냐고 그의 가족과 의사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는 독립 50주년 기념일을 마지막으로 보고 죽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소망대로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 조용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제퍼슨이 파산하고 가난에 
시달리다 죽어 갈 때 그를 찾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세상 인심이 그렇게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철학자답게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것이 정말로 그다운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날 매사추세츠 주의 퀸 시에서는 존 애덤스가 죽어 가고 있었다. 그는 그의 오랜 친구인 
제퍼슨이 이미 운명한 것도 모른 채, "토머스 제퍼슨은 아직도 건재하겠지"라는 말을 남기고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올리는 7월 4일 오후 늦게 운명했다. 
  오늘날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 역사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토머스 제퍼슨을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제퍼슨이야말로 가장 미국적인 민주 정치의 이상을 
꿈꾸고 실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기초하고 미국의 건국 원로들이 받아들인 미국의 독립 
선언서는 미국 정치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정치인들은 이런 제퍼슨을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독립 선언서는 존 로크의 자연법 사상을 모태로 독립 전쟁 당시의 
미국인들이 지녔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아 내었다. 자연권인 생존권, 평등권, 
자유권 등은 오늘날에도 미국만이 아니라 모든 민주주의 국가들이 실천하려는 정치적 이상이다. 
  그리고 제퍼슨은 민주주의를 하나의 신앙으로 굳게 믿으며 이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귀족과 
같은 농장주 집안에서 자랐고 변호사이기도 한 제퍼슨이었지만 그는 항상 서부의 소농들을 
위해서 투쟁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을 믿었기에 다수 민중의 정당성을 항상 신뢰했고 
이들을 위해, 그리고 이들과 함께 투쟁하려고 하였다. 이 같은 정신은 오늘날 건강한 시민 
정신으로 표현되는 미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고 있다. 
  제퍼슨이 주장했던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현대 민주주의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원리이며 
전제이다. 종교는 때로는 독선적이 되기가 쉽다. 민주주의는 종교 단체와 같이 운명할 수는 없다. 
하느님의 이름을 빌려 정적을 처형하고 대중 운동을 억압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수없이 보아 
왔다. 이런 점에서 제퍼슨은 참으로 선견지명이 있던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제퍼슨은 미국의 영토를 엄청나게 넓혔을 뿐 아니라 오늘의 미국 영토가 있게 그 토대를 
마련한 공로자이다. 미국은 이 거대한 영토를 배경으로 풍부한 지하 자원을 얻고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방대한 미국의 영토는 후일 미국이 세계적인 국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점에서 미국인들은 제퍼슨 같은 대통령을 가졌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그리고 제퍼슨이 마련한 과학적 도량형이나 화폐의 통일 등 하나의 국가를 
이루게 하는 기초적 조건도 오늘의 미국이 있게 한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제퍼슨이 제시한 교육 제도는 오늘날에도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버지니아 주립 대학은 
오늘날 미국 교육의 모델이 되고 있는 명문으로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많은 
나라에서 미국 교육 제도를 배우고 따르는데 그 밑바탕에는 제퍼슨의 이러한 헌신과 노력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퍼슨은 미국 역사에 공헌한 바가 큰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간적으로는 그다지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던 부인은 일찍 죽었고 사랑하는 자식들도 여럿 잃었다. 
그리고 그 많던 재산을 잃어버리고 말년에는 빚만 지고 세상을 떠났다. 
  또 제퍼슨의 인생도 그가 살아온 연륜만큼 복잡하였다. 친구의 부인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고, 
젊은 여인과 사랑을 속삭이기도 했다. 실제로 샐리 헤밍스가 낳은 자식들이 제퍼슨 대통령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그럴싸한 증거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염문도 삶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가 이러한 삶의 역경을 헤치며 미국인들의 가슴에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했듯이 
"인간의 정신에 가해지는 모든 학정에 대하여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그의 신념을 그 자신의 
인생을 통해 실현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앤드루 잭슨

    1. 시대가 만든 영웅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은 미국의 제 7대 대통령이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방법으로 당선되었으며, 미국의 서민을 대표한 민주주의적인 대통령이었기에 미국 사람들은 이 
시대를 잭소니언 민주주의 시대로 칭하고 있다. 
  잭슨 이전의 미국 대통령은 전부 동부와 남부의 귀족적인 지배 계급 가문에서 나왔다. 이에 
반해서 잭슨 대통령은 당시 서민들이 개척한 서부 지역인 테네시 주의 소농 출신이었다. 
  앤드루 잭슨이 지휘한 1815년 영국군을 상대로 한 뉴올리언스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전투였으며 미국 국민의 사기를 엄청나게 앙양시켰다. 그러나 잭슨은 군사학을 배운 일도 없는 
테네시 민병대의 사령관에 불과했다. 당시 잭슨은 문장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나 가장 
설득력 있는 연설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앤드루 잭슨은 변호사였으나, 권총으로 결투를 신청하여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곤 하였다. 
그는 '히코리나무 고목'으로 불릴 정도로 의지력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약한 사람에게는 
동정심이 강했다. 그의 서부 농민 출신다운 강건한 저돌적 성향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당시 
서부 농민들의 원성의 표적이었던 미국 연방 은행을 일거에 마비시킬 정도였다. 
  잭슨은 훈련과 기강을 강조한 사람이었으나, 본인은 상관의 명령을 받아들이기를 곧잘 
거절하곤 하였다. 잭슨은 거의 독재자에 가까운 보스 기질을 지녔으나, 그가 대중을 대표해야 
된다는 강력한 신념은 잃지 않았다. 그는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일을 
시작하면 끝까지 달라붙어 성공시키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이렇게 상반된 여러 측면을 갖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으나, 미국의 정치 제도를 현대적인 민주주의 제도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제퍼슨 대통령과 함께 미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기도 했다. 

    2. 의리만은 꼭 지켰던 말썽꾸러기

  앤드루 잭슨은 스코틀랜드계의 사람으로, 그의 부모는 아일랜드의 비참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미국 대륙으로 이민하였다. 잭슨의 부모는 1765년에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해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 사이에 있는 왁샤권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잭슨의 가족이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 큰 이유는 잭슨의 어머니 쪽의 친척이 이 곳에 먼저 
와서 정착했기 때문이었다. 잭슨의 아버지는 이 곳에 정착한 뒤 2년 동안 열심히 일하여 작은 
집을 가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한숨을 돌리려는 이 가족에게 또다시 불행이 
닥쳐왔다. 어머니가 잭슨을 임신했을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뜨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잭슨은 1767년에 3월 15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앤드루 잭슨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잭슨의 어머니는 일손이 없어 아버지가 운영하던 농장을 포기하고 병들어 있는 언니를 간호할 
겸, 언니의 집안을 돌보면서 3명의 아들을 양육했다. 잭슨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는 의지가 
강하고 용기가 대단한 여인이었다. 잭슨의 어머니는 잭슨이 자라서 후일 장로교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잭슨이 자라나면서 성질이 급하고, 때로는 욕설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것을 
보고 잭슨의 어머니는 그가 목사가 되는 희망을 포기하였다. 잭슨은 어릴 때부터 성미가 급하고 
화를 낼 때는 주위 사람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갈 정도로 거친 면이 있었다. 
  잭슨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형들과 함께 이모인 크로포드 가정에서 자랐다. 잭슨은 장로교 
목사가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으나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서 잭슨은 문장을 쓸 때 
때로는 문법에 문제가 있기도 했고, 때로는 철자가 틀리기도 하는 등 엉망이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교육에 비해서 연설을 잘했고, 글을 쓸 때와는 달리 말하는 내용도 분명한 편이었다. 
  잭슨은 수학이나 과학에는 문외한이었다. 문학에도 별로 취미가 없었다. 뒤에 그가 정치가로 
성장하여 셰익스피어를 인용하기도 하였으나 실제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잭슨은 성경만큼은 여러 번 읽었다. 아울러 많은 종교 서적을 읽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독실한 장로교회 신자가 되었다. 아마도 이런 점은 그가 어릴 때 장로교회를 다녀서 그럴 것이다. 
  유년 시절의 잭슨은 한마디로 말썽꾸러기였다. 성품은 사납고 고집이 셌으며, 때로는 아이들과 
싸움도 잘했다. 그러나 약한 아이들을 보면 보호하기도 하는 등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어릴 때 
그는 닭싸움을 무척 즐겼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쉽게 사귀기 어려운 문제아이긴 했지만 일단 
한번 사귀면 우정을 오래 지니는 면도 있었다. 그래서 말썽이 많은 것에 비해 잭슨에게는 친구가 
많았다. 잭슨은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키가 컸고 마른 편이었다. 
  잭슨이 아홉 살 나던 해 미국은 독립 선언을 했는데 이 독립 전쟁을 통해서 그는 현실적인 
교육을 많이 받았다. 1780년 영국군이 잭슨의 고향에 침범했을 때 1백13명의 미국인이 죽었고, 
1백 50명이 부상을 입었다. 붉은 제복을 단아하게 차려 입은 영국군이었지만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고 방화를 일삼았다. 여기서 잭슨은 깨끗한 옷차림이라 하여 인간성도 
깨끗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더욱이 이 사건으로 잭슨에게는 불행이 
닥쳐왔다. 잭슨의 큰형인 휴가 군에 입대하여 열 여섯 살의 나이로 전쟁터에서 병사한 것이다. 
영국군의 이러한 학살에 보복하기 위하여 윌리엄 데이비드 대령과 토머스 숨터 대령이 민병을 
동원하였다. 잭슨의 그의 형과 함께 13세의 어린 나이로 미국의 민병대에 참여하였다. 
  잭슨이 처음 전투 경험을 하게 된 것은 1780년 8월 1일 한 강둑에서였다. 이 전투를 통해 
잭슨은 용감하면서도 병사들을 잘 돌봐 주던 데이비드 대령을 존경하게 되고 자기도 군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미국의 민병대는 패배하였고, 잭슨과 그의 형은 
사론의 집에 숨었으나 영국군에게 발각되어 포로가 되었다. 
  잭슨과 그의 형이 포로 수용소로 끌려가는 동안 일어났던, 잭슨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일화가 
있다. 수용소를 끌려가는 도중에 영국군의 한 종교가 나이가 어린 잭슨에게 그의 장화를 
닦으라고 명령했다. 이에 대하여 잭슨은 장화를 닦는 일을 거절하면서 자신을 전쟁 포로로 
취급해 달하고 요구하였다. 화가 난 영국군 장교는 대검을 뽑아서 휘둘렀다. 잭슨은 얼른 머리를 
땅에 박아 칼을 피했다. 그러나 영국군 장교가 휘두른 칼에 잭슨은 뒤통수와 손가락을 다쳤고, 
그는 이 상처를 일생 동안 항상 자랑스러워했다. 
  포로 수용소에서 2백 50명의 다른 포로들과 함께 수용되어 있는 동안 잭슨과 그의 형은 병을 
앓게 되었다. 다행히도 영국군과 미국군의 포로 교환이 있을 때 잭슨의 어머니가 수용소에 
도착했다. 잭슨의 어머니는 말 두 필을 구해서 병든 두 아들을 고향에 데려와 치료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잭슨의 형은 세상을 떠났다. 
  다행이 잭슨은 어머니의 정성 어린 간호로 서서히 회복되었다. 잭슨이 완전히 회복된 후 그의 
어머니는 1백 60마일 떨어져 있는 영국군 포로 수용소로 2명의 조카를 간호하러 떠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잭슨의 어머니는 그 곳에서 콜레라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 때 잭슨의 나이 불과 15세 밖에 안 되었다. 잭슨의 어머니는 용기가 대단하고, 목적 의식이 
강하며, 의지가 강한 여인이었다. 잭슨은 이 같은 어머니의 성품을 물려받았다. 
  잭슨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미국의 독립 전쟁도 끝나 가고 있었다. 1782년 12월 영국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수도인 찰스턴에서 물러갔고, 잭슨은 그 곳으로 이주했다. 찰스턴에서 
잭슨은 멋대로 살았다. 그 곳에서 그는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돈을 도박판에서 전부 잃어버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잭슨은 맥컬러가 운영하는 학교를 마치고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잠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784년 잭슨은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7세의 나이로 고향을 다시 떠났다. 
  잭슨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솔즈베리 시의 유명한 변호사인 스프루스 맥케이의 문하생이 되어 
변호사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곳에서 뒤에 잭슨의 가까운 친구가 된 존 맥내이리를 만나게 
된다. 
  잭슨은 2년 동안 변호사 맥케이의 지도에 따라서 법률 공부를 하였다. 공부를 하면서 사무실 
청소도 하고, 맥케이의 심부름도 하고, 법률 문서를 대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법률 
공부를 열심히 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솔즈베리에서 법률을 배우는 동안에도 잭슨은 패거리를 지어 놀기를 좋아했다. 잭슨은 여전히 
도박을 즐기고, 닭싸움을 즐겼다. 여기에 잭슨은 경마를 좋아했고, 술 마시기를 즐겼다. 잭슨은 
춤도 즐겨서 크리스마스에 댄스 파티를 열기도 하였다. 
  잭슨은 여전히 짓궂은 장난을 좋아했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하면서, 잭슨은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매춘부인 모리 우드와 그의 딸을 파티에 초대했다. 그녀는 잭슨의 초청이 장난인지도 
모르고 크리스마스 파티에 나타났는데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녀를 피해 나가는 바람에 
파티를 망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장난이 심한 잭슨이었지만, 그에게는 크리스마스와 같이 즐거운 날이 있었고 법률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즐거웠고 또 그들 학생들의 지도자 노릇도 톡톡히 해냈다. 
  1786년이 되자 정신을 차린 잭슨은, 그 지방에서 최고의 변호사로 꼽히던 사람이며 독립 혁명 
당시 대령이었던 존 스토크 밑에서 사사했다. 그의 지도로 1787년 9월 26일 잭슨은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잭슨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개업했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행이 그의 옛 친구인 
맥내이리의 주선으로 뒤에 테네시 주가 된 서부 영토의 검사로 임명되었다. 이 곳 서부 지역은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된 개척지였고 새로이 정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변호사를 필요로 했으나 
변호사가 극히 적었다. 특히 1779년부터 정착하기 시작한 내슈빌은 점차 큰 도시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앤드루 잭슨은 1788년 봄에 신흥 도시인 내슈빌로 전근하게 되자 사무실도 
이전했다. 잭슨은 이 곳 내슈빌에서 정착하여 점차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닦아 나갔다. 

    3. 사랑을 위해 결투를 신청한 열렬 청년

  테네시로 옮긴 잭슨은 생애 처음으로 여자 노예를 사게 되었다. 당시의 풍습으로는 신사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잭슨이 이 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처음으로 권총을 가지고 결투를 하게 되었다. 
  잭슨이 결투를 신청한 사람은 테네시에서 널리 알려진 변호사인 웨이트스틸 에이버리였다. 
에이버리와 잭슨은 가끔 송사를 통해 반대 입장에서 변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존스보론의 
법정에서 에이버리가 잭슨을 비꼬면서 그의 변론을 반박했다. 성질이 급한 잭슨은 그의 
비신사적인 태도에 화가 나서 에이버리에게 결투 신청을 했다. 하지만 겁이 난 에이버리가 
잭슨의 명예 회복을 보장하겠다고 화해를 신청해 두 사람은 권총을 하늘에 발사함으로써 파국을 
피하게 되었다. 비록 불발로 끝이 났지만 이것이 이후 잭슨이 요구한 많은 결투 신청 중에 
첫번째 사건이었다. 
  내슈빌에서 점차 변호사로서의 기반이 잡힐 조짐이 보이자 1788년 10월 26일 잭슨은 내슈빌로 
이주했다. 그런데 아직 혼자이고 집을 살 만한 돈이 없었던 잭슨은 과부인 도넬슨 부인 집에 
하숙을 하게 되었다. 도넬슨 집안은 테네시 초기의 이주자 집안으로 재산도 많고 이 곳에서는 
명문가에 속했다. 잭슨이 이 집에 하숙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집의 막내딸 레이첼이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이첼은 이미 로바드란 사람과 결혼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레이첼은 켄터키에 있는 남편과의 불화로 남편을 떠나 이 곳 어머니 집에 임시 기거하고 
있었다. 레이첼은 명랑하고 춤을 잘 추며 활달한 여인이었다. 잭슨은 그런 레이첼을 댄스 
파티에서 보고 첫눈에 반해 결국 그녀의 집에서 하숙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신경성 질환이 있는 데다 의처증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잭슨이 그의 장모 
집에 거처하면서 레이첼과 가깝게 지내자 그의 질투심은 절정에 달했다. 레이첼의 남편 로바드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부인이 잭슨과 놀아나고 있다는 비난을 하고 다녔다. 화가 난 잭슨은 
로바드에게 그 같은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이런 협박 때문에 잭슨은 
로바드에게 고소를 당하기도 하였다. 결국 로바드와 레이첼은 완전히 별거하게 되었다. 
  잭슨이 이렇게 레이첼에게 빠져 있었지만 내슈빌에서 그의 변호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이 
지역의 검사로 있으면서 변호사업도 겸하고 있었다. 검사로서의 잭슨은 명성이 높았다. 당시 서부 
지역의 검사는 대다수가 총을 잘 쏘고 범인을 잘 잡는 일종의 보안관 역할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잭슨은 어릴 때부터 담력이 있고 망나니 생활을 해본 경험이 많아 범죄자들을 잘 
잡아내고 치안 유지도 잘했다. 그는 죄를 지은 많은 사람을 처벌했고, 때로는 빚을 지고 다른 
군으로 도망 간 사람들까지 추적해서 처벌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그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변호사업도 번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평생 친구가 된 변호사 존 
오버턴과 사귀게 된다. 
  이 시절 잭슨의 성격과 행동을 알게 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검사인 잭슨으로부터 
사소한 일이지만 처벌을 받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잭슨에게 모욕을 줄 셈으로 심한 욕을 
퍼부으면서 고의적으로 잭슨의 발을 밟았다. 그러나 잭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가까이 
쌓아 둔 장작더미에서 장작을 하나 뽑아 들고 그를 후려쳤다. 그는 이 갑작스런 공격으로 정신을 
잃고 기절하고 말았다. 정말로 잭슨다운 대응이었다. 하지만 거친 서부에서는 이런 야성적인 
잭슨식 일 처리 방식이 통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잭슨이 내슈빌로 이전했을 때 인디언의 주민에 대한 공격이 자주 있었다. 잭슨은 내슈빌에 온 
지 6개월 정도 되자 인디언을 토벌하기 위해 모집한 민병대에 일등병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몸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잘 싸워서 훈장까지 받았다. 그 후에도 수년 동안 인디언과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어 잭슨은 주민들 사이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즈음 미국 연방 의회는 후일 테네시 주가 된 지역을 노스캐롤라이나로부터 분리해서 남서부 
영토로 재편했다. 그래서 워싱턴 대통령은 윌리엄 브라운트를 주지사로 임명하였다. 이 때 잭슨의 
가까운 친구 하나가 브라운트 지사의 각료로 임명되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던 잭슨은 
이 친구의 추천으로 1791년 2월 15일 메론 지역 경찰청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곳에 부임한 잭슨은 정상적인 검찰 업무 외에 인디언과 싸운다든가 정부가 인디언과 맺은 
조약을 몰래 어기던 백인 범법자를 처벌한다든가 하며 주민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리고 
매사에 법 집행을 공정하고 단호하게 처리했다. 이렇게 잭슨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주민들의 
안전과 편안함을 위해 노력하자 곧 공정하고 일 잘하는 검사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1792년 9월 10일 브라운트 지사는 이런 소문을 듣고 잭슨을 데빗슨 군에 주둔한 한 기병 
연대의 법무관으로 임명하였다. 비록 비전투 요원이기는 하였으나, 잭슨으로서는 처음으로 군의 
장교 직책을 맡게 된 것이다. 잭슨은 검사와 변호사로서 그 이름이 나기 시작했는데 이제 
군인으로서도 점차 명성이 높아져 갔다. 이와 동시에 많은 토지를 획득하게 되어 재산도 
축적하게 되었다. 
  생활과 지위 모두 안정되어 가자 잭슨은 이즈음 결혼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 때까지 
레이첼과 교제하고 있었다. 레이첼은 남편과 별거하고 있다가, 남편을 피해 당시 스페인이 
통치하던 미시시피 유역에 있는 나체스 지역으로 옮겼다. 잭슨은 레이첼이 나체스로 이사할 때 
그녀와 동행했다. 레이첼은 나체스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그린 대령의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 레이첼이 나체스에 자리 잡자 잭슨은 1791년 5월에 내슈빌로 돌아왔다. 
  잭슨은 내슈빌에 돌아와 로바드가 버지나아 법정에서 레이첼과 이혼 수속을 끝마쳤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잭슨은 즉시 나체스로 다시 돌아가 그 해 여름 레이첼과 결혼을 
했다. 두 달 동안의 꿈 같은 신혼 생활을 마치고 그 해 가을 잭슨부부는 내슈빌로 돌아왔다. 
  그런데 잭슨이 서둘렀던 이 결혼에 문제가 일어났다. 결혼한지 2년이 지난 1793년 12월에 잭슨 
부부는 놀라운 소식을 접한다. 레이첼의 전남편인 로바드가 버지나아 법정에서 정식 이혼 허락을 
받은 것이 1793년 9월 27일이라는 소식이었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는 법적으로 간통을 하게 된 
셈이었다. 아찔해진 잭슨은 친구 오버턴의 권고에 따라 1794년 1월 17일, 결혼식을 다시 올리고 
결혼 증명서를 획득하였다. 
  부주의로 일어난 이 사건은 잭슨이 내슈빌에 사는 동안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당시에는 도리어 
테네시에서 명성이 높은 도넬슨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잭슨의 사회적 지위가 더욱 확고하게 
다져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잭슨이 대통령에 출마하였을 때 이 사건이 
커다란 정치적 문제로 되었다. 그의 정적들은 "간통한 자가 대통령 자리를 노린다"며 인신 공격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잭슨으로서는 이런 모함에 분노를 터뜨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이 문제를 진화하려고 해명했다. 
  이렇게 레이첼과 결혼하면서 일어난 해프닝은 그가 하원 의원, 상원 의원, 장군으로 사회적 
출세를 하면 할수록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결혼할 당시나 이후의 결혼 생활을 보면 그는 이 
결혼으로 인생의 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내슈빌의 명문가와 혈연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의 사회적 지위가 확고해졌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결혼으로 그의 사회적 활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레이첼은 훌륭한 반려자로서 잭슨의 급하고 거친 성질을 누그러뜨리고 그가 사회적 명망을 
얻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타고난 용기와 성실성을 일시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던 급한 성격과 무지 등의 단점을 이 여인을 통해 극복해 갈 수 있었다. 

    4. 서부 농민들 속에서 입지를 세우다

  1795년 테네시 주민들은 투표에 의해서 테네시를 연방의 독립된 주로 승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연방 헌법에 따라 일정한 인구가 되면 주민들의 투표에 의해 새로운 주로 편입할 권리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1795년 12월 잭슨은 데빗슨 군의 대표로 선출되어 주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의회에 파견되었다. 
  잭슨은 주민들의 의견을 참조하여 정부 구조와 헌법에 대한 나름의 입장을 정리하여 그것이 주 
헌법에 반영되도록 노력했다. 먼저 재산 소유권과 노예 문제에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정부의 
간섭이 있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선거권에 관해서는 민주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모든 
거주민들에게 평등하게 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공직에 봉사할 사람은 
일정량의 재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공직자는 명예직과 같아서 급여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796년 2월 6일 헌법 회의는 주 헌법을 제정하고 테네시 주라는 
주의 공식 명칭을 채택한 다음 해산했다. 
  이 회의를 통해서 잭슨은 당시 서부 지역의 농민들, 특히 대지주와 중소 지주들의 입장을 
강력하게 옹호하였다. 이 회의를 계기로 잭슨은 주지사 브라운트와 더욱 가까워졌고 테네시 
주에서 그의 성가를 한껏 높였다. 특히 스페인, 영국, 그리고 인디언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당시의 서부인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감정을 반영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그가 인디언 문제로 연방 의회의 입장을 강력하게 반박하는 연설을 할 때면 듣고 있던 
주민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환호하곤 하였다. 그는 열정적이며 날카로운 연설로 청중들을 
매혹하였다. 
  1796년 6월 1일 테네시 주가 연방의 16번째 주로 편입되었을 때, 윌리엄 브라운트와 윌리엄 
코크는 연방 정부의 상원 의원이 되었고 잭슨은 하원 의원으로 무난히 선출되었다. 그가 연방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던 이 때 그의 나이가 29세였으니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1796년 가을부터 참여한 연방 의회 회기 동안 잭슨이 처음 부딪친 문제는 워싱턴 대통령의 
고별사에 대한 연방 의회의 답변서 문제였다. 당시 워싱턴은 건국의 아버지로서 온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의회의 답변서는 워싱턴에 대한 찬사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 해 12월 
11일 소위원회에서 초안한 답변서를 전체 회의에서 논의하게 되었다. 이 때 압도적인 다수 
의원들이 워싱턴을 찬양하는 이 결의문에 찬성했다. 그러나 표결 과정에서 잭슨은 몇 명의 다른 
의원들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다. 
  잭슨이 이같이 반대표를 던진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워싱턴 행정부는 존 제이를 
파견하여 영국과 우호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어릴 때부터 영국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잭슨은 영국과 조약을 체결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이 일은 미합중국의 불명예라고 
생각했다. 또한 잭슨은 워싱턴 행정부가 서부의 인디언들에게 너무나 관용을 베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잭슨은 이러한 찬사 일변도의 답변서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잭슨은 이 같은 생각으로 
반대표를 던졌지만 이 문제도 후일 잭슨의 정치적 상처를 주게 된다. 
  이 회기 동안 잭슨이 부딪친 또 다른 문제는 잭슨이 부딪친 또 다른 문제는 테네시 주의 
화이트라는 사람 문제였다. 화이트는 세비어 장군 휘하 군인으로 1793년 인디언의 대공세가 
있었을 때 용감하게 싸워 물리친 사람이었다. 잭슨은 워싱턴 대통령에게 그를 포상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워싱턴은 이 일은 국회가 처리해야 한다며 결정을 미루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하원으로 이관되었다. 한편 하원의 담당 분과 위원회에서는 화이트의 행위가 대통령이나 
전쟁성으로부터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방 정부가 화이트에 대해 보상할 필요가 없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본회의에 상정했다. 
  잭슨은 위원회의 이러한 결정에 분노하여 본회의에서 자기가 인디언과 전쟁을 치렀던 예를 
들어 가며 위원회의 결정은 번복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인디언들이 쳐들어와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을 학살하고 주 정부의 생존을 위협할 때 주민들은 자기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결연히 싸울 권리가 있으며, 이 같은 전투에 연방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곧 
죽으라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라고 공박하고서는 상황이 연방 정부의 허락을 받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음을 설명했다. 
  잭슨의 이 연설은 많은 의원들을 감복시켰다. 특히 동부의 어민을 대표하는 의원들이나 서부의 
농민을 대표하는 의원에게 잭슨의 연설은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본회의는 이 안건을 잭슨의 
주장대로 번복시켰다. 잭슨은 이 연설을 계기로 동료 의원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고, 화이트는 
연방 정부로부터 2만 2천 8백 16달러의 포상을 받았다. 1797년 3월 의회의 회기가 끝나자 잭슨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잭슨이 테네시로 돌아왔을 때 새로운 주지사로 세비어가 당선되어 있었다. 그런데 잭슨은 이 
새 주지사와 곧 충돌하게 된다. 1797년 테네시 주 군의 최고 사령관 격인 민병대 소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그러자 야심 만만한 잭슨은 이 자리를 탐냈다. 당시에는 테네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에서 민병대 사령관인 소장을 투표로 결정했다. 다만 표가 동수일 때만 주지사가 
결정하였다. 
  한데 잭슨의 이 야심에 주지사인 세비어가 쐐기를 박았다. 세비어는 잭슨의 군 경력이 짧다는 
이유로 잭슨을 반대하고 콘웨이를 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렇게 되어 결국 조지 콘웨이가 
소장으로 당선되었다. 이 선거 경험을 통해 잭슨은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철저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는 했지만 자신을 반대한 세비어와 대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잭슨에게는 또 다른 정치적 기회가 왔다. 연방 상원 의원이었던 브라운트가 영국군과의 
내통 혐의로 의원직을 사임하였다. 그래서 잭슨은 6년의 임기인 연방 상원 의원에 출마했는데 
당선된 것이다. 
  상원 의원이 되었기 때문에 잭슨은 다시 필라델피아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상원 의원으로서 
그는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였다. 잭슨은 너무나 젊었고 경험이 없어서 상원 의원 노릇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인과 오래 떨어져 있어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고, 
사업의 실패로 빚을 지게 되기도 했다. 여기에 잭슨은 의원 활동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게 되었고 
자연히 상원 내에서 불평이 많은 사람으로 소문이 났다. 이런 형편에서 설상가상으로 1798년 2월 
잭슨은 빙판길에서 넘어져 왼쪽 무릎에 부상을 입었다. 도대체 되는 일이 없다고 여긴 잭슨은 
미련없이 의원직을 사임해 버리고 낙향하였다. 

    5. '늙은 히코리나무'라 불리운 장군

  테네시로 다시 돌아온 잭슨은 때마침 선출하는 주의 대법관이 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였다. 
1798년 잭슨은 주 의회에서 선출하는 대법관에 31세로 당선되었다. 한번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 
먹으면 그것이 달성될 때까지 열성을 다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이 대법관에도 무난하게 당선된 
것이다. 
  잭슨은 그 후 6년간 대법관으로 재직하게 된다. 원래 잭슨은 법률에 깊은 지식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의 정직성과 성실성 때문에 그는 대법관으로서 성공하게 된다. 그의 판결은 
신속했고, 사람에 따른 차별이 없이 공정했다. 또한 그는 법정에서도 솔직하게 말하는 용기가 
있었다. 잭슨은 정의감이 있는 데다 개인적인 정리에 얽매이지 않고 일반 주민의 편에 서려고 
노력했다. 
  잭슨의 판결은 정말 신속하기로 유명했는데 15일 동안 50건의 판결을 내린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는 판사로서 일화도 많이 남겼다. 한 번은 자식의 귀를 자른 남자를 재판하기 위하여 
작은 마을에 있는 재판소로 순회 재판을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힘이 장사인데다 
아무에게나 총질을 마구 하는 사람이었다. 재판정에서도 그는 배심원과 판사에게 욕을 퍼붓고 
사라졌다. 잭슨은 경찰관에게 그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경찰은 수차례 그를 체포하러 갔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화가 난 잭슨은 권총을 양 허리에 차고 직접 출동해서 범인을 체포한 다음 
재판정으로 끌고 와서 판결을 하였다. 
  테네시 주의 대법관으로 있는 동안에도 잭슨은 주지사인 존 세비어와 계속 앙숙 관계에 
있었다. 세비어는 주지사 임기를 세 번이나 계속해서 역임하였는데 주 헌법에 의해 더 이상 
출마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콘웨이 소장이 그를 대신하여 출마했다. 반면 세비어는 테네시 
군부를 계속 장악할 욕심으로 사령관에 입후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를 용납할 잭슨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번에 당했던 패배를 설욕할 생각으로 세비어에게 도전했다. 세비어는 독립 전쟁 때 
장군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다. 또한 그는 주지사를 세 번이나 역임할 정도로 
테네시 주에서는 영향력이 큰 정치인이었다. 이에 비해 잭슨은 젊고 인디언과의 전투 외에는 큰 
전투 경험이 없는 민간인이었다. 그러나 1802년 2월 5일 막상 선거의 뚜껑을 열어 보고 나서 
세비어는 진노하고 말았다. 상대도 안 된다고 생각한 잭슨이 자신과 같은 17표를 얻고, 윈체스터 
장군이 3표를 얻은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당시의 헌법상 표가 동수일 때는 주지사가 이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한데 당시 새로 주지사에 당선된 사람은 잭슨의 친구인 아취발드 
호안이었다. 호안은 당연히 친구인 잭슨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세비어와 콘웨이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믿고 자신하다가 열심히 발로 뛴 잭슨과 호안에게 한 방 먹고 만 것이다. 
  잭슨이 민병대의 소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5세였다. 이 젊은 나이에 잭슨은 
자신의 탁월한 정치적인 능력을 보여 준 셈이다. 1800년 3월에 전 주지사였고 테네시 정치의 큰 
파벌을 이끌던 브라운트가 죽자, 잭슨은 이제 브라운트 파벌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한편 젊은 잭슨 일파에게 당하고 절치 부심하던 세비어는 다음해 주지사에 다시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주지사 선거 기간 동안 세비어가 저지른 불법적 행위를 잭슨파는 신문에 
보도하게 하였다. 주지사에 당선된 세비어는 이 일에 앙심을 먹고 주 의회를 설득하여 테네시 군 
사령부를 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으로 이등분하여, 잭슨은 서부 지역 사령부만을 통솔하게 되었다. 
세비어에게 결투를 신청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인디언 지역에서 결투를 벌였다. 다행히도 서로 
상처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양자가 사격을 중지하는 바람에 무사하게 내슈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잭슨이 민병대 사령관으로 복무하면서 정부로부터 최초의 작전 명령을 받은 것은 1803년 
제퍼슨 대통령 때였다. 제퍼슨 대통령은 루이지애나 영토를 나폴레옹으로부터 매입한 후 혹시 
프랑스가 조약을 이행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그래서 제퍼슨은 잭슨 장군에게 만일을 
대비하여 스페인 군을 루이지애나 영토로부터 몰아내기 위한 작전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프랑스는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으로부터 물려받았지만 프랑스군이 이 영토를 지배한 적은 없었다. 
대신 스페인 군이 이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다. 
  잭슨은 명령을 받자마자 곧 군의 동원령을 내렸으나, 다행히도 스페인 군이 미국과 프랑스가 
맺은 조약에 따라 물러가서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잭슨은 젊은 혈기에 스페인 군과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스페인을 미국의 힘으로 몰아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통탄하였다. 
  그 후 잭슨은 새로 매입한 영토인 루이지애나의 지사가 되기를 원해서 연방 정부 쪽에 
청원했다. 그러나 제퍼슨 대통령은 잭슨의 친구인 크레어본을 루이지애나 영토의 주지사로 
임명하였다. 이 일로 잭슨은 제퍼슨 대통령을 미워하게 된다. 
  1804년 7월에 잭슨은 대법관의 자리를 사임했다. 잭슨은 그 동안 정치를 하느라고 자신의 
사업체를 거의 돌보지 않아 잘못하면 파산할 우려가 있었다. 그는 소유하고 있던 토지나, 
싼값으로 새로 매입한 토지를 비싼 가격으로 팔아 넘기는 토지 브로커 노릇을 하여 금방 다시 
재산을 불렸다. 한마디로 잭슨은 오늘날로 말하면 땅 투기로 한밑천 잡은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잭슨이 부당한 이익을 취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 당시로서는 대지주라면 누구나 
이런 토지 거래를 통해 치부를 했기 때문에 그다지 양심에 꺼리는 행동은 아니었다. 
  이렇게 재산을 다시 불린 1804년, 잭슨은 내슈빌에서 10마일 남쪽에 있는 4백20에이커의 땅을 
구입해서 집을 세우고 이 곳을 헤미티지라 불렀는데 이 건물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어서 관광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잭슨은 토지 거래뿐만 아니라, 소매상을 위주로 한 점포도 여러 개 
운영하였다. 그리고 잭슨의 부인 레이첼은 노예를 관리하며 농장을 운영하였는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레이첼은 면화, 옥수수, 밀을 기업적으로 경작하여 적시에 팔아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잭슨에게는 실수와 불행이 겹쳐 일어나기도 했다. 맨 먼저 일어난 사건은 
과거의 동업자 조카인 디킨슨이라는 청년이 그의 부인 레이첼의 과거를 들먹이며 모독한 
사건이었다. 잭슨은 그러잖아도 자신의 결혼과 관련한 구설수가 나오면 신경과민 상태였는데 그 
청년이 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만 것이다. 격분한 잭슨은 곧바로 결투를 신청하였고 결국 
이 청년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잭슨은 잔인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내슈빌 주민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은 아론 버 사건이었다. 1805년 이후 잭슨은 제퍼슨 대통령 시절 
부통령이었던 아론 버와 깊이 사귀게 되었다. 잭슨은 버의 반란 계획을 모르고 물질적으로 
도왔다. 잭슨은 국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스페인을 미대륙에서 몰아내려는 
계획이라는 버의 설득에 속아 영국과 내통한 군사 쿠데타를 지원한 셈이었다. 그가 이런 음모에 
쉽사리 넘어갔던 것은 제퍼슨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감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 음모는 
제퍼슨 대통령에게 알려졌고, 1807년 1월 제퍼슨은 잭슨에게 버의 음모를 분쇄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잭슨은 명령을 받고 갈등했으나 군 통수권자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군인의 
의무라 생각하여 이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버의 음모가 탄로 나고 체포되어 법정에 섰을 때 
잭슨은 옛 의리를 생각하여 버를 변호하기 위해 리치먼드로 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잭슨의 모순된 성격에서 나온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잭슨은 중년에 접어들자 사업도 성공하고, 농장 경영도 탄탄해진데다가 그가 소유한 
말들이 경마에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도 하는 등 재산가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잭슨 부부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포기하고 부모를 잃은 친구의 
자식들을 양육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다가 1809년 12월 잭슨과 레이첼은, 레이첼의 조카를 
입양하여 그를 앤드루 잭슨 2세로 삼았다. 
  재산을 모은 잭슨은 테네시 주의 저명 인사로서는 비교적 조용한 생활을 즐겼는데, 돌연 그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사태가 일어난다. 1812년 미국이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잭슨의 나이 45세였다. 
  잭슨은 즉각 이 선전 포고를 환영했다. 그는 이제야말로 미국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여 매디슨 대통령에게 2천5백 명의 테네시 민병대를 동원하여 전쟁에 나가겠다고 
자원했다. 그러나 매디슨 대통령은 잭슨이 버의 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잭슨의 요청을 무시했다. 
잭슨은 자신의 호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망하였다. 
  한데 미영 전쟁이 시작된 다음 미국군은 여러 곳에서 패전하여 전세는 미국측에 불리하게 
되었다. 매디슨 대통령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테네시 주지사에게 뉴올리언스의 방어를 위해 1천 
5백 명의 민병대를 동원할 것을 명령하고 사령관은 잭슨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당시 주지사인 부라운트는 잭슨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그는 민병대를 동원하면서 
매디슨의 당부를 무시한 채 잭슨을 사령관에 임명해 버렸다. 이렇게 되어 잭슨은 연방 자원군의 
소장이 되었다. 
  1813년 주지사인 브라운트의 명령에 따라 잭슨은 2천 71명의 자원대를 이끌고 39일 동안의 
강행군을 하며 내슈빌로부터 1천마일 떨어진 나체스 방면으로 출정했다. 잭슨의 군대는 나체스에 
도착하여 나체스 근교에 주둔한 채 몇 주일 동안 영국군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런 고생도 보람 없이 그 해 3월 15일 잭슨은 당시 새로 임명된 연방 정부의 국방성 
장관으로부터 기가 막힌 명령을 받았다. 즉 잭슨이 지휘하고 있는 연방 자원군을 해체하고 
귀가하라는 명령이었다. 잭슨은 격노했다. 이 많은 군인을 인디언 영토인 나체스에서 해체하면, 
그들은 식량도, 군복도, 의약품마저도 없어서 광야에서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게 되지 않으면 
인디언에게 살해될 형편이었다. 잭슨은 이 명령에 분노를 느껴 그의 보좌관들에게 국방성 장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전군이 함께 고향으로 귀환하라고 명령했다. 
  이 거대한 부대가 5백 마일 이상의 퇴각 작전을 이행하는 동안 잭슨은 말할 수 없이 많은 
고생을 겪었다. 그러나 잭슨은 모든 작전을 직접 지휘하며 병사들을 일일이 돌봐 주었다. 이 
군인들은 테네시의 사방에서 애국심 하나로 모여든 자원대였다. 그들은 직업도 다양하고 성격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군사 훈련을 받은 정규군처럼 군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잭슨의 이러한 조치와 지휘에 감복한 이들은 하나같이 잭슨을 믿고 존경하며 따랐다. 그들은 
잭슨의 명령이라면 어떤 어려움이라고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잭슨은 새벽에 일어나서 
밤중까지 군을 지휘하며, 때로는 하루에 19마일 이상을 진군하였다. 잭슨은 병든 병사를 자기의 
말에 태우고 본인은 도보로 행군하기도 하였다. 
  잭슨이 퇴각하는 동안 인디언, 스페인 및 영국과의 많은 결전에서 승리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런 정신 때문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낙오자가 없게 하겠다는 지휘자의 각오가 병사들에게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병사들과 함께 밥도 굶고 전투를 하는 지휘자의 정신이 사기를 높였던 
것이다. 거기에 승리해야 산다는 집념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모험을 하면서도 과감하게 
작전을 펴는 용기, 끝없는 인내력 등이 결합되어 잭슨 군은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듭했다. 잭슨은 
전술과 전략이 뛰어난 장군은 아니었다. 그러나 임기 응변할 수 있는 탁월한 안목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고집이 그를 위대한 장군으로 만들었다. 
  잭슨 군이 이렇게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내슈빌로 퇴각하는 동안 군인들은 그의 강한 의지를 
히코리나무에 비유했다. 히코리는 가래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인데 원체 단단하기 때문에 그 
뿌리로 담배 파이프를 만들기도 하였다. 한 사병이 그를 일컬어 히코리 나무와 같이 굴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자, 다른 사병이 그가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에서 늙은 히코리나무라 받았다. 그 
이후 잭슨의 별명은 '올드 히코리'가 되었다. 
  잭슨은 이렇게 군을 지휘하며 한 달 만에 고향인 내슈빌에 도착했다. 이미 잭슨의 영웅적인 
작전과 전투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던 주민들은 잭슨의 용기와 병사들에 대한 그의 배려에 
감동하여 내슈빌로 대거 운집하여 그들을 환영했다. 이제 잭슨은 서부인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자 사랑 받는 장군, 서부를 기키는 보호자였다. 특기할 것은 이 많은 병사들의 철수 비용을 
잭슨 개인이 상당히 부담하였다는 사실이다. 
  고향에 돌아와서 쉬는 동안 잭슨은 그의 수하였던 토머스 벤튼대령과 말다툼 끝에 대낮에 
거리에서 총격전을 벌이다가 크게 부상을 입었다. 부인 레이첼의 간호를 받으면서 총상에서 
회복되고 있던 중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1813년 8월에 크리크 인디언 추장인 레드 이글(붉은 
독수리)이 밈스 요새에서 2백 50명의 백인을 학살한 것이다. 레드 이글은 유명한 크리크족 
추장으로 백인들과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며 테네시 주 정부를 괴롭혔다. 
  이 소식을 접한 테네시 주 의회는 즉시 5천 명의 민병대를 동원할 것을 결의하고 주지사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브라운트 지사는 2천 5백 명의 민병대를 소집하고 잭슨에게 인디언 토벌을 
명했다. 동시에 동부 테네시에서도 존 코크가 지휘하는 2천 5백 명의 민병대를 동원하였다. 
  당시 잭슨은 아직 총상에서 회복되지 않았으나 사령관직을 수락하고 인디언과의 전투를 
시작하였다. 이후 일명 레드 스틱이라고도 불리는 레드 이글과 몇 년에 걸쳐 전투를 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잭슨은 많은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민병대 내부의 반란에 부딪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위기가 있을 때마다 잭슨은 용기와 기지로 이를 
극복하곤 하였다. 잭슨은 2년간의 전쟁 동안 수천 명의 크리크 인디언을 죽이며 초토화 작전을 
펴서 대다수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결국 1814년 3월 홀스슈 벤드의 전투에서 잭슨의 
민병대는 레드 이글의 크리크 인디언을 9백 명 이상 몰살시키는 전과를 올린다. 이 전투에 
패배한 다음부터 인디언은 기가 꺾여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침내 레드 
이글은 스스로 잭슨 진영에 나타나서 항복하게 된다. 
  잭슨 장군과 레드 이글 사이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자진해서 항복한 레드 이글은 잭슨에게 
말했다. 
  "나는 전사다, 전사로서 나는 백인들을 해치울 수 있는 데까지 끝까지 싸웠다. 나는 백인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으며 용감히 싸웠다. 만일 지금이라도 나에게 병사가 있다면 나는 다시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 싶다. 그러나 나에게는 병사도 없고 백성도 없다. 이제 내가 우리 부족의 
불행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은 통곡뿐이다. 이렇게 항복한 나의 운명은 당신에게 달렸으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라."
  잭슨은 레드 이글의 전사다운 솔직함과 용기에 감복하여 그를 사면해 주고 자유로이 살게 
했다. 그 후 레드 이글은 다른 인디언들을 항복하도록 종용하고 농부가 되었다. 그 후 레드 
이글은 종종 헤미타지로 잭슨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잭슨이 지닌 도량과 풍모에 이끌린 레드 
이글의 진정한 우정이었다. 
  크리크 인디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잭슨은 장군으로서의 명성을 전국에 떨치게 되었고, 
특히 서부인들에게는 영웅으로 우상시 되었다. 그러나 잭슨은 이런 명성을 얻은 대신에 이들 
인디언과의 장기 전쟁으로 지치고 부상당해서 일생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다. 
  매디슨 대통령은 잭슨이 이렇게 영웅으로 떠받들리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잭슨을 미국 연방 
정규군의 소장으로 임명하고 미국 제7지역군의 사령관으로 삼았다. 제7지역군은 테네시, 
미시시피유역, 크리크 인디언 지역을 총망라한 서부 지역을 관할했다. 
  매디슨 정부는 크리크 인디언과 강화 조약을 맺을 것을 잭슨에게 지시하면서, 인디언들에게 
너그럽게 대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잭슨은 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인디언들에게 
냉혹하며 비인간적으로 대했다. 그는 전쟁으로 치른 희생의 대가를 엄청나게 요구하였다. 잭슨은 
인디언 족장들에게, 그들이 영국, 스페인과 협조하여 수많은 미국인을 죽인 대가로 2천 3백만 
에이커의 땅을 백인에게 양도하라고 강요하였다. 이는 오늘날 앨라배마 주의 3.5배에 해당하고, 
조지아 주의 5배에 해당하는 광대한 영토였다. 이와 함께 잭슨은 인디언들은 앞으로 영국이나 
스페인과 어떠한 교류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크리크 인디언들은 이러한 요구가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불만을 품었지만 힘이 없는 그들로서는 엄청나게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미국의 영토는 다시 거대하게 확장되었다. 잭슨은 인디언들에게 이렇게 
잔인한 인물이었지만 미국인, 특히 서부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 주고 영토를 늘린 
영웅이었다. 
  잭슨을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부각시킨 사건은 영국군과 대접전을 한 뉴올리언스 
전투였다. 인디언과 조약을 체결한 다음 잭슨은 스페인과 인디언이 힘을 합해 미국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군을 남하시켜 위력을 과시하게 하였다. 그런데 당시 영국은 멕시코 만에 
상륙하여 미국을 서부 플로리다주와 루이지애나 영토에서 몰아내려고 준비하였다. 나폴레옹과의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를 체포한 영국은 미국 대륙으로 많은 군을 동원할 수가 있었다. 
  영국군은 버지니아의 체사피크 만에 상륙한 다음 워싱턴 시를 점령, 백악관에까지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면서 영국군은 멕시코 만에 진주하여 미시시피 유역을 봉쇄하려고 하였다. 
이 같은 의도를 간파한 잭슨 장군은 그의 군을 잭슨 요새에서 앨라배마 강으로 파견하여 
영국군의 작전 계획을 무산시켰다. 그러자 화가 난 영국은 대규모의 군을 동원하여 뉴올리언스를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소식을 들은 잭슨은 영국의 거점인 플로리다를 먼저 평정하기로 결정하고,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는 플로리다 주의 요새지를 기습 공략하여 이 곳 지역에서 스페인 군과 이에 
협조하는 인디언, 그리고 영국군을 몰아냈다. 
  플로리다의 공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잭슨은 군을 다시 앨라배마의 모빌로 이동시켜 이 
곳에서 영국군과 결전하려고 기다렸으나 영국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잭슨은 영국군이 
뉴올리언스로 진격하려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의 주력 부대를 뉴올리언스로 옮겼다. 
  뉴올리언스에 도착했을 때 잭슨은 건강이 무척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군사들의 훈련을 독려하는 한편, 토목 기술자들과 함께 도시의 방어를 위한 방어막 설치를 
감독하였다. 잭슨은 이 곳에서 유명한 해적 존 라피트와 만나게 된다. 라피트는 루이지애나의 
바라타리아 만에 근거지를 두고 주로 스페인 선박을 털었다. 또 그는 뉴올리언스 시에 밀수품을 
반입하여 수익을 올리기도 하였다. 파라피트는 머리가 좋은 지도자로 해전을 할 때마다 승리를 
거둘 뿐만 아니라 능란하게 사업을 벌여 나가기도 하였다. 잭슨 장군은 이들이 전투 경험이 
풍부하여 영국 해군을 방어해 줄 수 있다고 판단, 이들과 동맹을 맺었다.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을 
때 해적 라피트는 2개의 포병대를 이끌고 사람들을 동원하여 용감하게 싸워 미국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병력이 모자란다고 판단한 잭슨은 자유인이 된 흑인들도 군에 편입시켜 전투에 임하게 
하였다. 이 같은 처사에 걱정스러워진 백인들이 잭슨에게 항의를 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무장한 흑인들이 영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 백인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잭슨은 이들의 항의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싸우는 마당에 백인 흑인이 어디 
있느냐고 일축했다. 
  그리고 잭슨은 뉴올리언스 시에 계엄령을 포고하여 영국군과 내통하는 사람들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드디어 1814년 12월 22일 영국군이 뉴올리언스 부근에 도착했다. 선봉 부대는 킨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였다. 초반의 접전에서 영국군과 미국군은 상당수의 사상자를 냈다. 원래 
잭슨의 전략은 초기 접전에서 기선을 제압하여 영국군 주력 부대의 집결을 막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군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전략을 바꿔 기동전을 펼치기로 했다. 
  잭슨 장군은 공격과 후퇴를 자유 자재로 할 수 있는 소규모 기동 부대를 구성하여 유리한 
지형에서 다시 공격하였다. 이렇게 계속되는 공격에 영국군은 점차 잭슨 장군의 전략에 
말려들었다. 신경전에서 밀린 영국군을 유인하기 위해 잭슨은 미국군을 로드리그 운하 지역으로 
후퇴시키고 참호를 깊게 팠다. 이 곳은 지형상 공격하는 측이 절대 불리하게 되어 있었다. 이런 
미국군의 작전을 간파하지 못한 영국군은 총력전을 펴기 위해 함선에 대기 중이던 주력군을 모두 
이 곳으로 이동시켰다. 당시 영국군의 숫자는 7천 명이었고 미국군은 3천 명이었다. 
  영국군의 사령관은 새로 부임한 에드워드 파캔함이었는데 그는 웰링턴의 처남이기도 했다. 
파캔함은 육군 중장으로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명성이 있는 장군이었다. 
  1815년 1월 1일 아침부터 영국군의 포격을 시작으로 사활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1월 8일 
전투가 끝날 때까지 양군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격렬하게 싸워 나갔다. 마지막 전투는 1월 
8일 로드리그 운하 옆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전투가 끝났을 때 영국군은 철저한 패배를 맛보았다. 
잭슨 장군은 지형을 이용하여 적의 부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매복한 미국군이 공격할 수 
있게 했다. 그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영국군은 미국군이 후퇴하는 것만을 보고 
추격하다 전멸되곤 하였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2천 37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이 중 2백 91명이 사망했고, 1천 2백 
6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4백 84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에 반해서 미국군은 13명이 사망했고, 
39명이 부상, 19명이 실종되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의 사령관인 파캔함 중장도 전사했다. 
영국군은 1월 18일 참담한 패배를 기록하고 조용히 퇴각했다. 
  뉴올리언스 전투는 세계 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방적 승리를 거둔 전쟁이었다. 잭슨 장군의 
기민한 작전술과, 미국 병사들의 기동력, 영국군의 작전 오판 등으로 이 전투가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결말을 맺은 것이지만, 잭슨은 항상 말하기를 운이 좋아서 승리한 전쟁이라고 겸손해 
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뉴올리언스 전투가 양군에게 불필요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전쟁이 시작되기 2주일 전에 유럽에서는 이미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당시 통신 사정상 
뉴올리언스까지 이 소식이 전해지지 못해서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어쨌든 전쟁의 결과가 알려지자 미국은 온통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뉴올리언스의 승전은 미국 
국민의 자존심을 크게 높여 주었다. 미국은 그 동안 유럽 강대국들의 군사력에 두려움을 갖고 
소극적으로 대응해 왔는데 이 전투로 미국은 자신감을 되찾고 독립 국가로서의 위력을 과시하게 
된 셈이다. 
  이 전쟁으로 앤드루 잭슨은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는 미국적 영웅의 상징이자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미국 의회는 잭슨에게 감사의 표시로 최고의 무공 훈장을 수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뉴올리언스 전쟁의 승리는 미국 영토의 확장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일 미국이 영국에 패배하였더라면, 힘들여 차지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빼앗길 위험이 있었고, 
미국의 서부 진출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미국 국민들과 언론은 잭슨 장군을 나라를 
구한 국가의 수호자라고 불렀다. 
  1815년 미 연방의 육군이 재조직되었다. 미 육군은 북쪽 지역과 남쪽 지역의 사령부로 
재편되고, 잭슨은 남부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미국 정부는 잭슨의 거처인 헤미타지를 
사령부 본부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잭슨에게 일 년에 2천 4백 달러를 지불하였다. 
  1816년 새로 임명된 국방성 장관인 크로포드는 잭슨, 매리워터장군, 프랭클린 등 3명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이 인디언과의 조약을 협상하도록 지시하였다. 위원회의 위원장은 잭슨이 
되었다. 이 위원회는 1816년 체로키, 치카사와 인디언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1820년에는 촉타우 
인디언과 조약을 맺었다. 물론 인디언과 맺은 이 모든 조약은 잭슨이 협상하였고, 또한 그의 
계획대로 실행되었다. 이들 조약으로 미국의 영토는 다시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이제 잭슨은 서부 
개척의 대명사가 되었다. 새로 연방에 가입한 미시시피 주는 주도의 이름을 잭슨이라고 지을 
정도로 그는 미국민의 우상이 되었다. 
  이 무렵에 미국 정부는 플로리다 지역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플로리다가 서부 지역의 
대서양 통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로리다에는 영국, 스페인만이 아니라 인디언과 흑인까지 
이해가 얽혀 있었다. 그런데 잭슨의 전공으로 영국과 스페인 세력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일어났다. 그 첫번째는 니그론 요새의 문제로, 흑인 지도자 한 명이 스페인의 도움을 받아 
플로리다의 한 요새를 점령하고 다른 흑인들을 이 곳으로 이주하도록 유인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이 지역의 세미놀 인디언과의 갈등 문제였다.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잭슨 장군에게 플로리다 원정을 명하였다. 잭슨은 수천 명의 연방군과 
자원대, 인디언 동맹군을 이끌고 플로리다 원정에 나섰다. 먼저 흑인 요새를 정복하고, 이어서 
세미놀 인디언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전광 석화와 같이 플로리다를 평정하자 
스페인은 잭슨은 더욱 무서워하게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잭슨을 '숲 속의 나폴레옹'이라 
부르며 감히 그와 대적하여 싸우려 들지 않았다. 이런 실정이어서 미국 정부는 1819년 2월 22일 
애덤스-오티스 조약을 유리하게 맺고 플로리다 주를 스페인으로부터 양도받았다. 물론 이 조약을 
성공시킨 사람은 국무 장관 존 퀸시 애덤스로 미국 대륙화의 꿈을 실현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했지만, 이런 미국인의 꿈을 실현하는 수단을 제공한 것은 잭슨의 군사적 능력이었다. 

    6. 대중 민주주의 시대를 연 '잭소니언 운동'

  먼로 대통령은 잭슨을 플로리다의 주지사로 임명했다. 1821년 6월 1일 잭슨은 그의 영광에 찬 
군 생활을 끝내고 민간인으로 전역하여 새로 취득한 영토인 플로리다의 주지사로 취임했다. 
  그러나 잭슨은 주지사 취임과 동시에 문제에 봉착했다. 스페인 총독인 카라바가 행정부를 
잭슨에게 이양하는 데 협조를 하지 않아서였다. 여러 가지의 이유를 들어 가며 카라바는 잭슨의 
업무 협조를 거부했다. 당시의 플로리다 주민도 대부분이 스페인 계통의 사람들이라 정권이 
미국으로 이양되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여기에 워싱턴의 먼로 행정부도 잭슨에게 비협조적이었다. 주정부의 중요한 직책인 판사, 검사, 
세무사, 주 정부 각료 등을 잭슨과 논의도 없이 중앙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임명하였다. 
  이 같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잭슨은 플로리다의 주 정부가 제대로 수립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행정 명령을 내려 플로리다 영토를 2개의 군으로 나누었다. 그는 각 군에 민간 정부를 수립하고 
시당과 군수, 지원의 판사 등을 임명했다. 이와 더불어 잭슨은 플로리다에 민주 정부가 들어설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워싱턴에서 임명한 관리들과 충돌이 심했다. 특히 먼로가 임명한 연방 
법원의 판사 프로멘틴은 스페인 총독과 가까이 지내면서 잭슨의 개혁적인 정책을 좌절시키려 
들곤 하였다.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잭슨은 플로리다를 미국화시키는 데 비교적 성공하였다. 민간 정부의 
수립과 적절한 인사 조처, 공정한 행정 관행 등으로 주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먼로 대통령의 협조를 받지는 못했다. 그래서 플로리다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자 잭슨은 
1821년 12월에 플로리다 주지사를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55세 때의 일이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자주 병마에 시달렸다. 그의 몸 속에는 두 개의 총알이 깊숙이 박혀 
있었는데, 이 총알로 인한 내출혈 때문에 고생하곤 하였다. 부인인 레이첼은 이런 잭슨을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지치고 병에 시달리는 잭슨에게 부인 레이첼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들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양자인 잭슨 2세만이 
아니라 관리 사업 동업자의 아들인 허친스, 그리고 인디언과의 전쟁 때 고아가 된 인디언 소년 
린코아를 데려다 양육하였다. 잭슨은 이들을 사랑하였으나 이들은 말썽을 자주 부렸다. 그 밖에도 
레이첼의 조카 도넬슨을 양육하였는데, 말썽 없이 잘 자랐다. 그는 후일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서 잭슨을 돕다가 법과 대학을 졸업하여 변호사가 된 후에는 잭슨의 비서관이 
되었다. 또 잭슨은 형편이 어려운 친구의 자식들을 여러 명 양육하기도 했고 자기를 위하여 
일하던 사람이 사망하면 그 자식들을 데려다 양육하기도 했다. 
  잭슨은 나이가 들어서도 레이첼을 끔찍이 사랑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레이첼만을 사랑했다. 
그래서 레이첼의 말이라면 언제나 귀 기울여 들어 주었다. 잭슨은 레이첼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의 급한 성질과 무례한 태도 등을 고치기도 하였다. 심지어 그는 그녀의 충고에 따라 공공 
정책을 바꾸기도 할 정도였다. 친구들과 파티를 열거나, 또는 한가한 시간에 친구들과 잡담을 
하다가도 레이첼이 중단하라고 하면 즉각 중지하곤 하였다. 
  레이첼은 잭슨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나 집에서 병으로 고생할 때, 농장과 사업체 및 가사 
전체를 책임지고 돌보았다. 그녀는 유능하고 관대한 여성으로 잭슨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보살폈다. 그녀는 헌신적으로 종교를 믿었다. 잭슨은 레이첼을 위하여 헤미타지 근방에 교회를 
건립해 주기도 하였다. 장로교회 신도로서 레이첼은 교회에 많은 자선금을 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잭슨 부부는 대단한 재산가이기는 했으나 그들의 생활이나 도덕관은 서부 개척민답게 당시의 
전형적인 서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잭슨은 레이첼의 정성 어린 간호로 병상에서 회복되면서 점차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되었다. 미국은 당시 미 연방의 제2은행 설립에 따른 과다한 재정 지출과 경직된 화폐 통화 
정책으로 인해 미영 전쟁으로 침체된 경기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은 또한 
정치적으로도 대립과 갈등, 부패로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그는 자신의 정치 사상과 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담은 비망록을 쓰기 
시작했다. 잭슨이 쓴, 냉정하게 현실을 비판하는 비망록을 여러 신문에서 다투어 싣기 시작했다. 
잭슨의 비판은 주로 정부의 정책과 부패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전 미국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는 근본은 타락한 정치에 있다고 그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특히 그는 먼로 행정부와 
의회에서 일어난 부정과 음모의 스캔들을 고발하며 당시 재무 장관인 윌리엄 크로포드를 부패한 
정치인의 대표로 비판하였다. 잭슨은 워싱턴 정가가 위에서 아래까지 전부 부패하였고, 집권당인 
공화당도 파벌간의 이해 관계에 얽매여 부패한 정당으로 타락했다고 개탄하였다. 
  잭슨은 이 같은 정권 내의 부패를 정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특히 공화당이 대통령 후보를 
지명할 때 크로포드와 몇몇 의원들이 중심이 된 내부 조직인 '코커스(CAUCUS)'에서 후보를 
선택한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성토했다. 물론 의회의 간부들이 모인 비공식 조직인 코커스가 여러 
파벌의 이해를 조정하여 대통령 후보를 선정하는 것이 당시로서 이상한 관행은 아니었다. 그러나 
공화당이 연방당을 완전히 압도하여 연방당이 소멸하고 정당이 공화당 하나뿐인 상황에서 국회의 
코커스 그룹이 대통령 후보를 결정한다는 것은 대통령직을 국민으로부터 훔치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잭슨은 강경한 어조로 비판했다. 
  국민들은 이제 제한된 정부 체제를 요구했고, 과거 제퍼슨이 주장했던 최소 정부론을 지지하며 
예산의 절감을 요구했다. 특히 1819년 미영 전쟁과 영국의 덤핑 정책으로 수입 관세가 강화되어 
발생한 경제 혼란 이후 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정부의 권한이 국민의 의사를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으며 권력과 국민 중 어느 것이 우위인가에 대한 논쟁을 계속해서 벌이고 있었다. 
  잭슨은 당연히 연방 정부의 권한을 제한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주 정부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상론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현실적으로는 교묘하게 평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잭슨은 제한된 정부론을 
요구하는 국민 여론에 따랐고, 헌법에 부여된 정부의 권한은 문자 그대로 지켜야 된다는 제한 
해석론에 동조했다. 그는 주 정부의 권한을 강조했지만 연방 권한을 능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정했고 주 정부에 연방 탈퇴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잭슨은 연방 정부가 현재 
국민들의 신뢰를 잃은 가장 큰 요인을 무리한 공공 정책, 즉 상공업에 대한 과다한 투자 때문에 
늘어난 부채에 있다고 보고 이 공채 발행을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잭슨은 정부의 지나친 
채무는 국민의 자유를 위협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잭슨의 이 같은 의견이 많은 미국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자 주변에서는 잭슨에게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잭슨은 국민이 원하면 이를 거절하지는 않겠으나 스스로 나서서 
출마하지는 않겠다고 공언하였다. 테네시에 있는 잭슨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 
것을 결의했다. 잭슨의 정적들이 '내슈빌 도당'이라 부른 이들은 판사인 오버턴을 비롯하여 존 
이튼, 윌리엄 루이스, 페릭 그룬디 등으로 후일 잭슨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크게 기여할 뿐만 
아니라, 그의 행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잭슨의 참모들은 먼저 테네시 의회에 잭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할 것을 건의하였고 주 의회는 
만장 일치로 이를 결의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잭슨을 테네시 주의 연방 상원 의원으로 
재선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잭슨과 그의 참모들은 민중의 지지를 얻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잭슨을 각 주에 소개하는 작전을 세웠다. 그리고 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둬 각 
주에서 예기치 못했던 엄청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잭슨이 전쟁 영웅으로 국민적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그가 존 퀸시 애덤스, 존 칼훈, 윌리엄 크로포드 및 헨리 클레이 
같은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정치인들 이상으로 인기가 있다는 데는 잭슨의 참모들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참모진들은 즉시 존 이튼이 초안한 잭슨의 정치 이념, 프로필, 정책 목표 등을 수록한 선거 
강령을 각 신문에 게재해서 널리 선전하기 시작했다. 이 선거 운동 방식은 당시의 
정치인들로서는 감히 생각도 못했던 완전히 새롭고 대중적인 방식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대중적 
민주주의 운동의 시작이라고 보고 '잭소니언 운동' 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1824년 대통령 선거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들이 투표로 대통령 후보에 대한 국민의 
선호도를 표시할 수 있었다. 당시에 6개 주는 주 의회가 선거인단을 선정했고 나머지는 주민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서 선거인단이 선정되었다. 
  선거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잭슨이 99표, 애덤스가 84표, 크로포드가 41표, 클레이가 37표를 
획득했다. 잭슨이 돌풍을 일으키며 최고의 득표를 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과반수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당시 미국 헌법 부칙 12조에 의하면 선거인단의 과반수를 획득한 사람이 없을 
때는 연방 하원이 대통령을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결국 국민들의 선거에서 최다표를 획득했지만 
선거인단의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하여 하원에서 행한 선거에서 잭슨은 존 퀸시 애덤스에게 
패배했다.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아들인 존 퀸시 애덤스가 미국의 제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잭슨은 깨끗이 승복하고 애덤스의 당선을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불굴의 사나이 잭슨답게 그는 선거에서 패배한 바로 그 다음날부터 다음 선거 준비에 
들어갔다. 상원 의원 직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온 잭슨은 선거 준비 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이들은 물론 주로 잭슨의 가까운 친구들로 구성되었다. 
  잭슨이 선거 운동을 위한 조직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당인 '민주당'이 서서히 
태동하게 되었다. 미국의 건국 당시 해밀턴을 중심으로 한 연방파와 제퍼슨을 중심으로 한 
공화파 사이에 논쟁과 정치적 대결이 있었다. 그러나 제퍼슨 이후 연방파는 국민들의 외면을 
받아 없어지고 공화당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화당은 장기간 일당 집권을 하는 동안 그 
성격이 서서히 변하였다. 즉 공화당을 이끌고 있는 지도부는 주로 명문가인 남부의 대농장주와 
동북부의 대자본가 중심이 되어 갔다. 그러나 미국이 서부로 팽창하며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이들 소수 엘리트집단은 점차 대중적 지지를 잃어 가게 된다. 
  잭슨은 이 새로운 시대의 조류를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제 국민들은 자신들이 직접 
발언하기 시작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정치를 원하고 있었다. 잭슨은 공화당이 종래의 
전통을 잃어버리고, 엘리트화하여 비민주적이고 부패한 정치를 한다는 국민 여론을 바탕으로 
새롭게 민주적인 정당을 수립하려고 했다. 특히 새로 대통령이 된 애덤스는 연방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거대한 미국의 발전 계획을 선언하였다. 그는 도로와 운하의 건설, 국립 대학교와 
국립 관상대의 설립, 연방 은행의 육성, 수입 관세에 의한 산업 보호 등 국가주의적인 정책을 
발표하면서 이를 위해 헌법의 자유 해석을 의회에 요구했다. 애덤스 대통령의 이 거대한 발전 
계획은 과거 해밀턴의 연방파 행동을 상기시켰다. 이러한 애덤스의 정책은 미국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근거가 있었으나 남서부의 농민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희생을 통해 
동북부의 자본가만 키우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상당수의 공화당원들이 잭슨 쪽으로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칼훈, 크로포드, 밴 뷰렌 등 남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던 정치인들이 애덤스 
진영에서 이탈하여 잭슨 진영으로 왔고, 대부분의 신문들은 여론에 따라 잭슨의 운동에 호의적인 
기사를 썼다. 
  잭슨이 이렇게 선거 운동을 시작하자 애덤스를 비롯한 정적들의 잭슨에 관한 개인적인 비난이 
신문에 실리기 시작하였다. 잭슨이 총격전을 벌인 결투, 인디언들의 살해, 서부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획득한 사례들이 보도되었다. 특히 잭슨을 괴롭힌 기사는 그의 부인 레이첼에 관한 
얘기였다. 잭슨의 정적들은 레이첼이 이혼 수속도 끝나기 전에 잭슨과 결혼한 것은 간음을 한 
것이며 두 남편을 거느린 창부와 같다고 비난했다. 
  잭슨은 항상 워싱턴 정부의 비도덕성, 비윤리성 및 정부의 부패를 비난함으로써 도덕적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잭슨의 정적들은 그의 결혼 문제를 들추어냄으로써, 우리말로 
표현하면,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식으로 잭슨을 공격했다. 
  이렇게 되자 민주당원들도 애덤스 대통령의 정치적 협상과 연합체를 매춘 행위에 비유하고, 
공공 기금을 사용하여 백악관을 사치스럽게 장식한다고 비난하였다. 그 당시 애덤스와 잭슨의 
경쟁을 미국 역사상 가장 지저분한 경쟁이라고 언론이 보도할 정도로 쌍방은 인신 공격을 했다. 
  그러나 애덤스와 잭슨의 이 4년간의 경쟁도 1828년 막을 내리게 되었다. 1828년 11월의 선거 
결과 잭슨은 54만 7천 2백 76표를 유권자들로부터 받아 1백 78표의 선거인단 표를 획득한 데 
반해, 애덤스는 50만 8천 44표를 얻어 불과 83표의 선거인단 표를 획득했을 뿐이었다. 애덤스와 
클레이가 자기 목소리를 갖기 시작한 국민들의 열망을 누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잭슨의 승리는 세 가지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잭슨은 미국의 서민들 
사이에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애덤스 대통령은 국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셋째, 잭슨의 민주당은 탁월한 조직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보다도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이제 미국 민중 스스로가 
정치적 주체로 성장하여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잭슨은 이렇게 압도적인 승리를 했으나 그가 기쁨에 들뜨기도 전에 커다란 비극을 맞아야만 
했다. 선거가 끝난 후 레이첼이 우연한 기회에 내슈빌의 조카가 운영하는 신문사에 들렀다가, 한 
신문에 그녀에 대한 기사가 실린 것을 읽었다. 그녀의 결혼 문제와 이에 대한 힐난의 기사였다. 
그녀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 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육체적인 허약함까지 
겹쳐 병이 악화되었고 선거 다음날 운명하고 말았다. 182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녀는 
헤미타지의 가족 묘지에 묻혔다. 잭슨의 마음은 비통함으로 가득 차 대통령의 당선마저 의미가 
없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내의 죽음이 애덤스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전임자에 대한 관례적인 
인사도 거부했을 정도로 상심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선거가 지나치게 
과열되어 서로 인신 공격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발생한 불상사였다고 할 수 있다. 

    7. 서부로 뻗어나간 팽창 정책

  대통령에 취임한 잭슨은 밴 뷰렌을 국무 장관, 잉그함을 재무장관, 이튼을 전쟁성 장관, 
브랜치를 해군 장관, 배리를 체신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잭슨의 초기 조각은 이류급 
인사들을 각료에 임명했다는 언론의 호된 비판에 부딪쳤다. 그러나 잭슨은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기식의 인사를 단행했다. 그리고는 곧 바로 그의 정치 개혁을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정부 관료의 임명 제도를 윤번제로 바꾸었다. 즉 그는 정부 관료를 정기적으로 
순환시켜야만 부패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는 변호사나 의원으로 있으면서, 
금권정치가 이루어지는 이면에는 관료와 이권자의 결탁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취임 후 18개월 동안 9백19명의 관료를 교체했다. 이 관료직의 윤번제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개념이었다. 
  잭슨 대통령이 집권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각료들간에 내분이 일어났고, 이는 곧 전 
국민에게 알려졌다. 내분은 부통령인 칼훈파와 국무 장관인 밴 뷰렌파의 싸움이었다. 부통령 
칼훈은 남부 출신으로 처음에는 잭슨과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작은 마술사'라 불리는 밴 뷰렌이 
내각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칼훈은 자신이 차기 대통령으로 나서지 못할까 싶어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잭슨의 특근들이 차기에도 잭슨의 출마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잭슨 
내각의 이단자로 나섰다. 
  이 싸움은 곧 '페기 이튼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전쟁성 장관인 이튼은 젊은 여인 페기 오닐과 
결혼했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워싱턴에서 여관을 하고 있었다. 이튼은 상원 의원 시절 이 여관에 
투숙했다가 과부인 그녀와 알게 되어 결혼까지 했다. 그런데 워싱턴의 상류층 부인들이 그녀가 
여관집 딸이라는 것을 트집 잡아 그녀가 남편이 살아 있던 시절부터 이튼의 정부였다고 소문을 
냈다. 그러나 잭슨은 천성적으로 의협심이 상한 데다 이런 유의 인신 공격은 일종의 계급 
의식이라 여겨 그녀를 감쌌다. 잭슨은 각료들의 부인들에게 페기 이튼 부인과 화목하게 지내라고 
타일렀으나 칼훈의 부인이 앞장서서 반대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바람에 이튼과 칼훈의 
사이도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잭슨 내각의 이런 파벌 싸움과 페기 이튼 스캔들이 잭슨의 개혁 정책 시행에도 차질을 
가져오게 했다. 그래서 잭슨은 각료 회의를 자주 열지 않고 개인적으로 가까운 친구들과 국가 
정책을 의논했다. 이 일이 또 언론의 가십거리가 되어 잭슨이 '키친 캐비닛', 즉 주방 내각을 
꾸미고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결국 이러한 물의로 뒤에 밴 뷰렌과 이튼이 내각에서 사임하고, 
칼훈은 잭슨이 재출마할 때 부통령 러닝 메이트에서 제외되고 만다. 
  잭슨은 행정부의 개혁과 더불어 긴축 재정 원칙을 세우고 나아가서 공직자의 부정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연방보다 주의 권한을 우선시하려는 칼훈 등 남부 주들의 
분리주의에 강력한 쐐기를 박았다. 그는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직접세와 공채를 최소화하는 
정책을 펴는 한편 연방의 통일과 주의 자치권이 조화되기를 원했다. 
  잭슨은 1825년의 선거와 같이 국민의 다수표를 얻지 못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선거인단 제도를 없애고 직접 선거를 주장했으나 이것은 의회의 반재오 실행되지 못했다. 
잭슨은 또한 남부의 불만이 되고 있던 고율의 관세 제도를 개혁하여 관세율을 낮추었다. 잭슨은 
행정부가 지고 있는 부채를 줄여 나가기 위하여 국회에 재정 예산의 절감을 요청해 실행했다. 또 
연방 정부의 예산이 남을 때는 인구에 비례해서 남은 예산을 주 정부에 골고루 이월시킬 것을 
제안했다. 잭슨은 이러한 작은 정부를 실현하기 위해 연방 정부가 공공 복지 사업이나 건설 
사업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인디언이 미국 내에 거주하는 것이 미국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인디언을 
미시시피 서쪽의 특정 구역으로 이주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뒤에 인디언이 완전히 패주하게 
되었을 때 정책으로 실행되었다. 그렇지만 이 정책은 비인도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정책이라는 점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심한 논란이 있었다. 
  잭슨은 서부인들이 가진 일반 정서와 마찬가지로 미 연방 은행을 무척 싫어했다. 그래서 연방 
은행의 재허가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는 부결권을 행사했다. 이에 대하여 공화당은 그를 반은 
행인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다수 서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던 연방 은행의 확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1832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잭슨은 압도적인 다수표로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밴 뷰렌이 
부통령이 되었다. 잭슨이 재집권했을 때, 미 연방 의회가 새 관세법을 제정한 것에 불만을 품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가 이 법의 무효화를 선언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연방을 
탈퇴하겠다고 결의하였다. 이 사태가 확산되면 앞으로의 통치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본 
잭슨은 강력히 대처할 것을 거듭 밝혔다 .그는 어떤 주도 연방 헌법을 무효화시킬 수 없으며, 주 
정부는 연방을 탈퇴할 권한이 없다고 못박았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단언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이렇게 강력한 
잭슨의 대응에 자신들의 결의를 철회하고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였다. 
  대통령으로 재집권한 후 잭슨 정부는 연방 은행을 정부의 통제하에 두려고 했다. 그러나 
현행법상 정부는 연방 은행을 감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잭슨 대통령은 모든 공공 자금을 연방 
은행에 저축하지 않고 각 주의 지방 은행에 저금했다. 이 같은 조처로 미국 연방 은행은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사업가들은 잭슨에게 협박도 하고 애걸도 하면서 연방 은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연방 은행이 건재하지 않으면 국가의 경제가 흔들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잭슨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결국 잭슨은 이 싸움에서 이겨 정부가 은행을 감독할 권한을 
국회로부터 위임 받았다. 더불어 이 싸움으로 대통령의 경제 문제에 대한 권한이 확대되었다.
  잭슨 행정부는 외교 정책에서도 비교적 성공하였다. 과거의 적이었던 영국과 협상하여 서인도 
제도와의 무역을 재개했다. 잭슨의 조처는 과거 대통령들의 정책을 전환한 처사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잭슨 대통령은, 이제 미국의 안전 보장은 확립되었고, 외교 정책은 형식적인 
것보다 실리적인 것을 추구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현실 노선을 취했다. 이 조치로 스페인, 
프랑스와 잠시 마찰이 있었으나 결국에는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타결되었다. 
  잭슨이 재임 기간에 그렇게 원했는데도 성취하지 못한 일이 있다. 잭슨은 항상 텍사스를 미국 
연방의 일원으로 병합하려고 했다. 잭슨의 논리는 루이지애나 영토의 매입 때 텍사스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스페인은 완강하게 그런 사실을 부인했다. 그렇다고 전쟁을 
일으켜 텍사스를 합병할 형편도 못 되었다. 그래서 그의 재임 기간에는 이 일을 이룰 수 없었다. 
텍사스는 멕시코로부터 독립한 다음에야 연방에 가입, 공화국으로 병합되었다. 잭슨은 
텍사스야말로 미국이 태평양 연안으로 진출하는 중요 거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인들에게 텍사스로 이주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고, 이를 돕기도 하였다. 뒤에 텍사스의 
대통령이 된 샘 휴스턴도 잭슨이 텍사스 진출을 권한 친구 중 하나였다. 
  잭슨은 미국인들과 텍사스에 거주하는 멕시코인들이 산타안나 정권에 도전해서 독립 투쟁을 할 
때 은밀히 부추기거나 돕기도 했다. 잭슨은 그의 각료인 버틀러에게 멕시코 정부에 5백만 달러를 
주고 텍사스를 매입하도록 지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멕시코 정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잭슨은 텍사스가 독립하여 미국의 주로 편입하도록 물심 양면으로 도왔으나 그의 
임기에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1836년 11월 잭슨의 퇴임을 앞두고 잭슨의 부통령이었던 밴 뷰렌이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또 그의 오랜 참모였던 로저태니가 대법원장에 임명되었다. 정치적 소망을 거의 모두 
이루고 자신의 후계자까지 지명한 잭슨은 1837년 고향으로 조용히 은퇴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 후인 1845년 6월 8일 헤미타지에서 임종하여 그의 아내 곁에 묻혔다. 이 때 그의 나이 
78세였다. 

    8. 개척자 정신으로 민주주의 원칙을 세운 선구자

  앤드루 잭슨은 미국의 대통령으로 보나 한 인간으로 보나 그 시대를 가장 철저하게 살아간 
대단한 인물이었다. 잭슨은 가장 미국적인 영웅이었다. 미국이 서부로 팽창하며 그들의 '프런티어 
정신'을 구현하고 있을 때 그는 바로 그것을 대변하는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는 거칠면서도 
호쾌한 면이 있었고,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목적한 바를 추구하면서도 성실하고 검소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지닌 최고의 장점은 가난하고 소박한 그의 이웃들, 민중에 대한 애정이었다. 이 
점이 가난한 서부의 농민이었던 그를 대통령까지 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러면 잭슨이 남긴 업적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잭슨은 미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장군으로서 뉴올리언스 전쟁에 
승리하여 미국인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증대시키는 한편 미국의 서부 진출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미국 정부는 제퍼슨 대통령 때 루이지애나 영토를 매입했으나, 이 영토를 완전히 
미국화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잭슨은 도처에서 영국군과의 전투나 인디언과의 전쟁을 통해 
루이지애나 영토를 포함, 광대한 서부 지역이 미국의 영토로 편입될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또한 
오늘의 미시시피, 조지아 주의 일부를 인디언들로부터 탈취하여 미국의 영토로 귀속시켰다. 
잭슨은 플로리다 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미국의 영토로 귀속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인디언의 거주 지역을 정하여 미국의 안전을 도모했다. 물론 잭슨은 
미국의 인디언 부적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기에 오늘날 그의 인디언 정책에 대한 비판도 많이 
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미국 국민 모두가 영토의 확장을 원했고, 잭슨은 국민이 원하는 바를 
실천하였던 것뿐이다.
  둘째, 앤드루 잭슨은 새로운 대통령의 스타일을 형성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 
전체의 의사에 의해서 뽑힌 대통령이었다. 그는 또한 당시의 상류층 중심의 귀족적인 정치를 
바꿔 국민의 대통령이 되었고 국민들의 정치 의식이 성숙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셋째, 잭슨은 미국 연방 정부가 진 부채를 전부 청산함으로써 정부가 건실한 재정을 운용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공공 부채의 탕감으로 미국 정부는 공신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경제 발전의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넷째, 잭슨은 부패한 연방 은행을 정리하여 연방 은행의 불공정한 행위를 행정부가 규제할 수 
있는 제도를 확립하였다. 그래서 후대에 미국의 산업이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그러나 잭슨 행정부는 실책도 적지 않았다. 잭슨은 인사 행정에 크게 실패했다. 무능한 
사람들을 중요한 자리에 임명함으로써 많은 스캔들을 일으켰다. 심지어 잭슨이 임명한 새뮤얼 
스와트는 엄청난 정부의 자금을 훔쳐 외국으로 도주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잭슨이 정실에 
치우쳐 인사를 한 탓이었다. 또 잭슨은 임기 동안 미국 의회를 상대로 해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미국 의회는 한때 잭슨 행정부를 감사하자는 결의문까지 통과시킨 적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의회의 국정 감사가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잭슨은 
이처럼 즉흥적이거나 미숙한 정책을 펼쳐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잭슨은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유복자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까지 잃고 이모 집에서 자랐다. 그는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얻었으나 그들이 
젊어서 세상을 떠나 말년에는 쓸쓸하고 고독하게 살았다.
  그리고 잭슨은 부인과의 결혼 문제로 숱한 사람들과 결투를 해야 했고,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부인 레이첼과 사별해야만 했다. 
  더구나 잭슨은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암살 대상이 되기도 했다. 리처드 로펜스라는 인물이 
1835년 잭슨 대통령을 향해 두발의 총을 쏜 것이다. 다행히 전부 빗나가서 그는 생명을 구하기는 
했지만 이런 일은 그가 그만큼 적을 많이 가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잭슨의 생애를 보면서, 도대체 이런 다혈질인 사람이, 이런 건달 같은 사람이 어떻게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을까 의심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잭슨의 삶을 자세히 보면 그에게는 
남다른 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성실함과 집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남다르게 집념이 강했는데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쓰였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라 항상 이웃이나 친구와 어울리는 친화력이 있었기에 그의 집념은 좋은 방향으로 
돌려질 수 있었다. 만일 그가 탈선했더라면 그는 어쩌면 권총 강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친화력, 이웃에 대한 진실한 애정이야말로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1. 노예 국가에서 민주 국가로 가는 길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며, 아마도 미국 대통령 중에 
세계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일 것이다. 링컨 대통령은 학교 교육은 일 년도 받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독학으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연방 의회 의원, 그리고 대통령이 된 근면하고 
성실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 끊임없이 노력하여 대학 교육을 마친 사람보다도 유려한 
문장으로 유명한 연설문을 남기기도 했다.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이 되어 미국을 분열의 위기에서 구했다. 링컨 
대통령은 미합중국이 분열과 갈등, 그리고 마침내 남북 전쟁이라는 미증유의 내전에 들어갔을 때 
단호하게 국가를 지켜 내고, 흑인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미국이 하나의 통일 국가로 발전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더불어 그는 앤드루 잭슨 이후 최초로 평범한 서민들의 정치적 
열망을 수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라면 
어디에서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이 
링컨의 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링컨은 그의 꿈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암살자의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2. 통나무 집에서 호롱불로 독학한 꺽다리 소년

  링컨 대통령의 아버지인 토머스 링컨은 여섯 살 때 고아가 되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켄터키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인디언이 농장을 공격하는 바람에 부모를 잃고 말았다. 고아가 
된 토머스 링컨은 가난한 농부 생활로 연명했고 때로는 목수 생활을 겸하기도 하였다. 
  링컨의 어머니는 더욱 어려운 가정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링턴의 
외할머니는 후일 헨리 스파토라는 사람과 결혼해서 켄터키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그 가정은 빈농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후일 그의 정적이 링컨을 인디언의 후예라고 비꼬았는데 이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다 누구의 태생인지도 모르는 것을 일컬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링컨의 외조부가 인디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링컨의 얼굴 
모습이나 건장한 몸, 그리고 어색한 걸음걸이가 미국의 인디언을 닮은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오직 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링컨의 부모는 켄터키에서 결혼을 했고, 하딘 군에 있는 조그마한 농토를 매입하여 근근이 
살아갔다. 1809년 2월 12일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 궁벽한 서부의 통나무 집에서 태어났다. 
  링컨의 아버지는 빈농에 문맹인 사람인데다 냉정한 판단력도 없어서 비옥하지도 않은 토지를 
외고집을 피워서 사들이고 말았다. 그러나 곧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 그는 링컨이 세 살 
되던 해 이 토지를 팔고 다른 토지를 매입하였다. 그러나 그 곳으로 이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사기꾼에게 속아 산 남의 토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무능한데다 인내력도 없는 링컨의 아버지는 자신의 돈을 되찾을 궁리는 하지 않고 다시 짐을 
꾸려 가지고 이번에는 인디애나 주로 이주했다. 링컨이 일곱 살 나던 해였다. 
  인디애나로 옮긴 링컨의 가족은 고생을 많이 했다. 이 곳에서 링컨의 가족은 통나무집을 짓고 
야행 동물을 사냥하여 식량을 공급해야만 하였다. 링컨 자신도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가시에 
찔리고 나무에 긁히며 야생 칠면조를 사냥해야 했다. 링컨은 평생 사냥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어렵던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기가 싫어서였다. 
  이렇게 링컨 가족이 인디애나로 이주한 후 얼마 되니 않아 링컨의 이모 가족이 이곳으로 
이주했다. 이들 두 가족은 힘을 합해 가난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그래서 겨우 두 가족이 
입에 풀칠할 정도의 땅을 일구어 소유하게 되었을 때 링컨의 가족은 다시 불운을 맞게 된다. 
1818년 여름 인디애나 지역에 전염병이 돌았는데 불행히도 이 전염병은 링컨의 어머니, 이모, 
그리고 이모부의 생명을 앗아 갔던 것이다. 
  이 불행에서 살아남은 링컨과 아버지, 누나, 사촌인 데니스 행크스 등 4명은 좁은 집에서 방 한 
칸에 모여 살았다. 그리고 어린 링컨은 곡물을 농장에서 동네의 방앗간으로 이송하는 일을 해서 
집을 도와야만 했다. 링컨은 마차를 가지고 방앗간에서 빻은 곡식 분말을 집으로 가져오거나 
이웃에 팔거나 하였다. 링컨은 마차를 끌다가 때로는 말에 채어서 의식을 잃기도 하였다. 
  1819년 겨울에 링컨의 아버지는 켄터키에 가서 그의 두번째 부인을 맞이했다. 새어머니가 된 
사라 여사는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 자녀를 함께 데리고 왔다. 이제 8명이 작은 집에 함께 
살게 되었다. 링컨과 새어머니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사라 여사는 링컨의 공부에 대한 열정과 
뛰어난 두뇌를 인정하여 어린 링컨에게 공부를 하라고 격려하였다. 더구나 사라 여사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기 때문에 인디애나로 이주하면서 몇 권의 책을 가지고 왔다. 링컨은 
새어머니에게 읽기와 쓰기를 배운 다음 그녀가 가져온 "성서", "이솝 우화", "로빈슨 크루소", 
"천로역정", "아라비안 나이트"등의 책을 몇 번씩 읽었고 산수 독본을 마쳤다. 
  링컨은 지식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책도 없었고 종이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석탄을 가지고 나무판에다 글씨를 쓰거나 했다. 이런 링컨의 배우려는 자세에 
새어머니는 헌 종이 뭉치를 사주었다. 또 링컨은 책을 구할 만한 돈이 없었기 때문에 책을 
빌리려고 몇 마일 떨어진 곳까지 가기도 하였다. 링컨은 그야말로 주경야독,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읽으며 교양과 안목을 넓혀 갔다. 이 당시 읽은 책들 가운데 링컨은 파손스 
윔스가 쓴 "워싱턴의 생애"라는 저서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장차 워싱턴과 같은 인물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링컨이 11세가 되던 해인 1820년 3월 미국의 의회에서는 미주리 협정이라고 불리는 법안을 
제정했다. 이 법은 루이지애나 영토의 북쪽 지방에서 노예를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었다. 
당시 서부인들에게는 이 법안이 많은 화제가 되었고 어린 링컨도 이때 처음으로 노예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링컨이나 그의 친구들은 주변에서 어른들이 노예의 수입을 
반대하는 주장을 펴는 것을 보고 들었다. 가난한 서부의 백인 농부들은 부유한 귀족이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면 자신들의 땅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노예 제도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링컨도 자연스럽게 노예 제도에는 반대하는 사고를 형성할 수 있었다. 
  서부로의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인디애나 지역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게 되었고 
산골 벽지에 불과하던 일대가 번화한 거리로 변모하였다. 이 무렵에 대농인 젠트리라는 사람이 
1천 에이커에 이르는 자기 땅에 상점을 짓고 조그마한 마을을 형성했다. 링컨과 그의 외사촌인 
행크스는 이 곳 상점에 자주 가서 동네 젊은이들과 어울렸는데 링컨은 젠트리의 아들 알렌과 
친구가 되었다. 
  링컨은 천성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여 친구가 많았다. 게다가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는데, 그 이유는 링컨이 매사에 성실할 뿐만 아니라 키가 크고 힘이 
장사였기 때문이었다. 링컨은 종종 도끼로 단숨에 나무를 쓰러뜨려 그의 친구들에게 힘 자랑을 
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말을 타고 재주도 부릴 정도로 말타기를 잘했고 친구들에게 재미있는 
농담도 자주하곤 하였다. 
  링컨의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침례교회 신자였으나, 링컨은 어느 교회도 나가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교회의 신자가 아닌 사람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뒤에 그의 정적이 링컨이 
무신론자라고 공격하자 그는 이렇게 반박했다. 
  "나는 교회의 신자는 아니지만 성경을 누구보다도 많이 읽었고 성경의 진리를 결코 부인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 종파를 의식적으로 멸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특정한 교회를 
다니는 사람보다 못한 점이 무엇인가?"
  당시의 많은 서부인들은 위스키를 즐겨 마셨는데 링컨은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 이 점이 
그의 의지의 한 면모를 보여 주는 요소인지도 모른다. 남보다 특이한 장신의 체격, 자기의 감정을 
특유한 유머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 남달리 폭넓은 독서량 등과 더불어 링컨은 남다른 인내력과 
의지를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서부인들은 거친 서부의 땅에서 생존해야 
했기 때문에 아량이 없고 성질이 급한데다 언동이 불손하고 성도덕이 문란했으며,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링컨은 이런 서부인의 표준에서 비추어 볼 때 남들과 다른 인물이었다. 이 점은 어쩌면 
그의 가정이 너무 어려워서 어릴 때부터 몸에 밴 강한 자제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링컨이 열 일곱 살 되던 해에 그의 누이가 결혼하여 집을 떠났다. 링컨은 누이가 집을 떠나는 
것을 계기로 이제 자신의 앞날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세 되던 해에 처음으로 집을 
떠나 보다 넓은 세상 구경을 하고자 알렌 젠트리와 함께 오하이오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가는 여행을 했다. 참나무를 잘라서 만든 뗏목에 젠트리의 농장에서 생산한 
야채를 싣고 1천 마일이나 되는 강의 하류를 항해했다. 이들은 강 유역을 따라 항해하면서 
밤에는 나무에 배를 묶어 놓고 쉬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7명의 괴한이 배를 기습했다. 
칼과 몽둥이를 든 이들을 상대로 링컨과 젠트리는 사력을 다해 싸워 결국 이들을 물리쳤다. 
하지만 이 싸움으로 링컨의 얼굴에 상처가 났는데 이 상처를 바로 치료하지 않아 영원히 남게 
되었다. 링컨과 젠트리는 뉴올리언스에 도착하여 야채와 배를 팔고 상선을 타고 무사히 돌아왔다. 
링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시를 구경하고 도박장, 노예 시장, 프랑스 포도주 등 신기하고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그 때 링컨은 노역의 대가로 24불을 받았는데 그로서는 돈을 번 것보다는 
그가 머리 속으로만 상상하던 넓은 세계를 경험한 것이 보다 값진 것이었다. 
  1830년 2월 링컨의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다시 일리노이로 이주했다. 링컨의 가족은 
인디애나에 있는 농장을 1백 25달러에 팔고 마차 3대로 2백 마일을 여행하여 일리노이에 
도착하였다. 
  링컨의 가족은 상가몬 강을 끼고 있는 둑 위에 통나무집을 짓고 처녀지인 토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링컨은 이 곳에서 다시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1831년 링컨은 일리노이에 와서 사귄 
친구 오푸트가 경영하는 방앗간과 상점의 관리인으로 취직했다. 이 방앗간과 성점은 샐럼에 
있었다. 샐럼은 여관, 술집, 상점, 의료원 등이 있는 조그마한 도시였다. 그러나 이 곳은 그 
발전상이 눈에 띌 정도로 급속하게 커가는 도시였다. 링컨은 이 곳에 정착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는 학교 교장이던 멘토 그래함, 판사인 보울링 그린, 다트마우트 대학 출신의 의사 존 
알렌 등과 사귀게 되었다. 링컨은 이들과 사귀게 됨으로써 그의 청년 시대를 그 어느 때보다도 
알차게 보낸다.
  그는 이 지적인 인물들과 어울려 독서를 하고 새로운 사상, 새로운 정신과 만나게 된다. 특히 
그래함은 링컨에게 기번의 "로마제국의 흥망사", 페인의 "이성의 시대" 등 역사와 철학에 관한 
많은 서적을 빌려 줘 그의 정신적, 사상적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린은 링컨에게 계약서와 
집문서의 작성법을 가르쳐 주었고, 때로는 그의 법정에서 변호인의 역할도 하게 했다. 이 
영향으로 링컨은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잭 켈소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였는데 그는 링컨이 이제까지 잘 모르고 있던 문학의 세계를 알려 
주었다. 
  샐럼에 있는 동안 링컨에게는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이 도시의 깡패 두목 격인 암스트롱은 
링컨이 힘깨나 쓸 것으로 보였는지 그에게 레슬링 대결을 제의했다. 링컨으로서는 이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도전을 피하면 비겁자가 될 것이 뻔했다. 두 사람이 결투를 한다는 소문이 
돌자 동네 사람들이 전부 모여들었고 심지어 도박판까지 벌여졌다. 레슬링이 시작되고 30분쯤 
지난 후에 링컨이 암스트롱을 거의 꺾었을 때 암스트롱의 부하 패거리들이 그를 구하기 위하여 
링컨에게 덤벼들었다. 다행히 암스트롱은 부하들을 막고 링컨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비겼다고 
선언하였다. 덕택에 싸움판이 벌어지는 사태는 모면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암스트롱의 
패거리들은 링컨을 자기들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하여 길거리에서 부딪쳐도 깍듯이 대했다. 
  링컨의 친구 오푸트가 남부로 이주하게 되어 샐럼을 떠날 때 링컨은 다른 사람과 동업 
형식으로 그의 사업체를 매입했다. 그러나 링컨의 사업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결국 링컨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액수인 1천1백 달러의 부채만 진 채 파산하였다. 당시의 관례상 사업체가 
파산하면 채무자는 손 털고 그 지역을 떠나면 되었다. 그러나 링컨은 그렇게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샐럼에 남아서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을 것을 약속한 다음 이를 실행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에게는 '정직한 에이브(Honest Ave)'라는 별명이 주어졌다. 
  파산한 후 링컨은 친구들이 주선해 주는 일은 무엇이든지 했다. 동네 우체국장, 측량사, 때로는 
임시 고용인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리고 파산 선고를 할 때 링컨은 자신의 물건을 전부 
경매에 부쳤다. 친구들이 링컨의 물건을 비싸게 사주었으나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이런 지경이 되자 링컨이 소유한 것이라고는 이제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영국인 
블랙스톤이 지은 "법의 논평"이라는 법률 서적 하나뿐이었다. 링컨은 그의 유일한 재산인 
블랙스톤의 법률 서적을 탐독하며 이 어려운 시기를 버텨 나갔다. 그러나 도리어 이것이 그에게 
전화위복의 기회를 제공했다.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열독했던 블랙스톤의 저서는 뒤에 
링컨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3. 의지와 근면으로 변호사가 되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재기한 링컨은 25세 되던 해 상가몬 군에서 주 의회 의원으로 출마했다. 
당시만 새도 일리노이 주는 많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아니었고 젊은이들이 정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과 조용히 상의해서 선거 전략을 짰고 그만이 지닌 특유의 
친화력으로 유권자들에게 접근했다. 그 결과 무난히 상대 후보를 물리치고 주 의회 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링컨은 생애에 처음으로 60달러 짜리 양복을 빚을 내어 구입했다. 링컨과 함께 일하던 의회 
의원들은 대부분이 그와 마찬가지로 젊고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링컨은 학식과 
신념이 뚜렷하여 자연히 돋보였고 따라서 그가 속해 있던 휘그당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반다리아에는 스테판 더글러스라는 젊은 민주당의 지도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대조적인 외모에 출신, 태도 등 모든 점에서 달랐다. 그는 작은 체구였지만 명석하고 집안도 좋은 
인물이었다. 후일 그는 링컨의 정적이 되어 링컨을 유명하게 만들어 준 장본인이다. 
  링컨은 법안을 입안하고 의회의 회기 중에는 당을 대표하여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런 
링컨의 모습을 지켜 본 당의 지도자인 스튜어트는 링컨이 변호사가 되는 것을 도와 주었다. 
1835년 2월 주 의회의 회기가 끝난 수 링컨은 회의의 대가로 2백58달러를 받았는데 그것을 
가지고 그는 곧 스튜어트와 함께 스프링필드에 가서 법률 서적을 빌려 왔다. 그 중에는 치티의 
"법정의 변론법", 스토리의 "물권법"과 같은 법률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링컨은 여기서 
본격적인 변호사 수업을 시작한 셈이다. 
  뒤에 링컨이 3정치적으로 성공한 다음 변호사가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한 다음과 같은 충고가 
그의 이러한 젊은 시절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하면 이미 반은 성공한 셈이다. 책을 구입한 후 이해할 때까지 읽는 
것이 중요하다. 책이 있으면 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1835년 초 링컨은 뉴샐럼에서 앤 러드리지라는 처녀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이 귀엽고 아름다운 처녀와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는 그 해 여름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일은 링컨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링컨은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녀가 죽은 후 상심하다가 하이퍼곤드리아라는 
우울증에 걸렸다. 몇 주일 걸쳐 그는 주변의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틀어 박힌 채 침묵만 지켰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본 친구들은 링컨을 염려하여 파티를 연다, 야외에 나간다 하면서 그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링컨은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아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메리 
오웬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서로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약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앤 러드리지를 잊지 못하고 있던 그는 곧 자신의 섣부른 행동을 
후회하고 파혼하였다. 이 일로 링컨은 다시 우울증에 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스스로 우울증을 
극복하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일부러 농담을 하거나 쓸데없는 이야기라도 마구 하여 우울증에서 
벗어났다.
  링컨은 성격상 정치가가 맞았는지 정치가로서는 비교적 순탄하게 일이 풀렸다. 그는 주 의원 
선거에서 상대편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그리고 다른 휘그당 의원들이 보다 많이 
당선되도록 끈질기게 노력한 끝에 휘그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1837년 2월 주도를 
반다리아로부터 스프링필드로 옮기는 수도 이전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 무렵 그의 직업에도 변화가 왔다. 그 동안 각고의 노력을 한 결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1837년 3월 일리노이 대법원으로부터 변호사 자격증을 받게 되었다. 링컨은 스프링필드로 
옮겨가서 당시 휘그당의 지도자이며 링컨의 가까운 친구가 된 스튜어트와 합동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당시 스프링필드는 약 2천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서부의 개척지로, 작지만 번영하고 있는 
도시였다. 
  스튜어트와 링컨이 운영하는 법률 사무소는 링컨의 이런 붙임성과 사교술 덕택에 날로 
번창하였다. 동시에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도 비교적 성공하고 있었다. 스튜어트는 연방 의회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링컨은 주 의원을 역임할 수 있었다. 
  1835년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은 휘그당의 후보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위하여 일리노이 주의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선거 운동을 했다. 링컨은 민주당 후보인 밴 뷰렌에 
대해 혹심하게 비판했다. 링컨은 워싱턴이 악의 기운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고, 정치적 부패는 
극심하고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다고 밴 뷰렌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밴 뷰렌이 한때 뉴욕 
의회에서 흑인 선거권을 주자는 데 표를 던졌다고 비난했다. 당시로서는 흑인 선거권을 
주장한다는 것이 일종의 금기였기 때문에 이런 정치 공세는 흔한 것이었다. 그러나 뒤에 가면 알 
수 있듯이 링컨이 정적을 공격하기 위해 흑인에게 선거권을 주자는 정당한 주장을 비판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태도였다. 물론 당시에 노예 해방론자들이 뉴잉글랜드 지역과 뉴욕 지역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서부 지역에서는 아직 이 문제가 직접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어 노예 해방을 했을 때 과연 링컨이 진심으로 노예 해방을 원했는가에 
대해 많은 역사가들이 논란을 벌이고 있으나, 이 당시 링컨이 취한 태도는 분명 지나치게 
정치적인 술수였다. 그렇다고 링컨이 적극적인 노예 해방론자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항상 대중의 
의사로부터 너무 앞서는 것을 꺼리는 정치가였을 뿐이다. 링컨은 미연방의 안정은 투표를 하는 
국민에게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국민의 의사가 자신의 정치 이념보다도 먼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링컨도 물론 노예 제도는 근본적으로 악이며 비인간적인 제도라고 생각했다. 또한 노예 
제도는 연방의 분열을 초래할 위험이 있는 '뜨거운 감자'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노예 제도는 
폐기되어야 하나 그 같은 결정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예 해방은 반드시 연방 제도 
내에서 유권자의 의사를 반영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믿었다. 그에게는 미연방의 
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링컨이 능변으로 선거 유세 연설을 하며 일리노이 전역을 돌자 링컨의 존재는 
스프링필드에서만이 아니라 전체 일리노이 지역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장신인 링컨이 
연통같이 높은 신사모를 쓰고 다니며 특유의 유머와 당당한 연설로 청중들을 사로잡자 그는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링컨의 이런 명성이 메리 앤 토드라는 처녀와 결실을 맺게 하였다. 메리는 21세의 처녀로 
결혼한 그녀의 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메리는 스프링필드의 사교계에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언니가 당시 일리노이 주지사의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메리는 갈색의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키가 작을 뿐만 아니라 약간 뚱뚱했다.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으나 학식과 재치가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사교장에서 불어를 종종 사용할 정도로 
세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 때로는 변덕스러운 점도 있었다. 
  사람들은 링컨과 메리가 서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으나 두 사람은 약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1841년 1월 링컨과 메리의 약혼은 여러 가지 여건상 파기되었다. 그 바람에 링컨은 다시 
우울증에 빠졌다. 스프링필드의 사교계에서는 링컨과 메리에 관한 구설수가 떠돌았다. 메리가 딴 
남자 때문에 링컨을 버렸다는 둥 헛소문도 있었다. 이런 구설수는 메리 자신이 친구들에게 
링컨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링컨이 메리와 헤어진 후 우울증에 걸려 있을 때 그의 친구이며 룸메이트였던 스피드가 그의 
상점을 팔고 고향인 루이빌로 돌아갔다. 링컨은 소중히 여기던 사람을 둘씩이나 함께 잃어버리는 
바람에 더욱 마음이 심란하였다. 우울증에 깊이 빠진 링컨은 그것을 극복하고자 그 해 8월에 
스피드의 고향인 루이빌로 여행을 했다. 링컨은 스피드의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 이 때 처음으로 
흑인 노예로부터 접대를 받게 된다. 링컨이 스프링필드로 돌아올 때 스피드는 그를 동행했다. 
링컨과 스피드는 여자 문제로 너무나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에 서로 위로하고 도와 
주었다. 그러나 링컨의 권고로 스피드는 결혼을 하게 되고, 링컨도 메리와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링컨과 메리는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싫어서 남들의 눈을 피해 밀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신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서신을 제임스 쉴드라는 사람이 몰래 
입수하여 신문에 싣고 말았다. 화가 난 링컨은 쉴드에게 결투를 신청하였다. 쉴드는 링컨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사과를 함으로써 문제는 해결되었다. 
  메리는 링컨이 그녀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렇게 결투까지 신청한 일에 감동하여 그가 
이제 신사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의 서부와 남부에서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권총을 갖고 결투를 신청하는 것은 신사임을 증명하는 관행이었다. 이렇게 되어 
링컨과 메리는 1842년 11월 4일에 결혼하게 된다. 메리는 가족들에게 두 사람의 결혼을 결혼 
전날까지 숨겼다. 메리의 가족은 링컨이 비천한 가문 출신인데다 전에 약혼을 파기한 일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이들의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리는 링컨과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언니에게만 말했다. 언니는 급히 가까운 사람들만 모아 놓고 그녀의 집에서 
결혼식을 하도록 도와 주었다. 이 때 링컨의 나이는 33세였고 메리는 23세였다. 
  결혼한 링컨 부부는 당장 살 집도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래서 이들은 글로브라는 
여인숙에서 일주일에 4달러씩 주기로 하고 방을 얻었다. 이 곳에서 링컨 부부는 일 년을 
보냈는데 첫아들인 로버트가 이 곳에서 출생하였다. 링컨은 아직도 오래 전에 샐럼에서 진 빚을 
갚아 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자신들이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절약해야 했다. 
  링컨의 변호사업은 일거리가 많아서 그는 항상 바빴다. 때로는 멀리 여행을 하면서 소송을 
해야 했다. 3개월씩 말을 타고 여행을 하기도 해서 링컨은 자주 집을 비워야 했다. 그러다 보니 
메리는 어떤 때는 생활비도 없이 집에 혼자 있는 날도 있었다. 부잣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던 
메리에게 가난은 지옥과도 같아서 친구에게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이 때 경험한 가난 때문에 
메리는 일생 동안 가난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1844년 1월에서야 링컨은 1천 2백 달러짜리 집을 사게 되었고 빚도 전부 갚았다. 또 수입도 
늘어서 링컨은 일 년에 1천 5백 달러 이상을 벌게 되었다. 결혼 2년 동안 엄청난 고생을 한 끝에 
겨우 안정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1846년 둘째 아들 에드워드가 태어났다. 이 무렵에는 메리도 
하녀를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가졌다. 
  링컨은 변호사업이 번창하자 1844년 12월 스튜어트에게서 독립하여 조슈아 로건과 새로이 
동업을 시작했다. 로건과의 동업은 다시 3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847년 변호사 시험에 막 
통과한 젊은 변호사인 윌리엄 헌든과 동업을 시작했다. 헌든과의 동업은 링컨이 운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윌리엄 헌든은 남부 출신이었으나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상주의자였고, 일찍이 휘그당에 
가입한 인물이었다. 그는 노예 제도의 폐지와 금주령을 지지할 정도로 경건하고 진실했다. 그는 
급진적인 공화당원이었지만, 링컨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때 젊은이들을 조직하여 선거 
운동을 도와 주기도 했다. 
  링컨이 이렇게 변호사로서 성공함에 따라 그의 정치적 야심도 상대적으로 커졌으나 그의 
인기는 그다지 올라가지 않았다. 목사나 교회 관계자들은 링컨이 아무 교회에도 속해 있지 않은 
무신론자라는 점을 들어 그를 비난했다. 그의 정적들은 그가 과거에 결투를 신청했던 사실을 
들먹이며 비난하였다. 일반 주민들은 링컨이 상류 사회 출신의 부인과 결혼한 후 서민의 애로를 
잊어버렸다고 비난했다. 노예 제도 반대자들은 링컨을 의심했고, 노예 소유자들은 링컨의 노예 
제도에 대한 속마음을 파악했다. 

    4. "노예주가 될 것인가 자유주가 될 것인가?"

  링컨은 휘그당에서 연방 하원 의원 후보로 지명을 받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링컨이 대중적 인기나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꾸준한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며 대화를 통해 자신의 조직력을 강화했다. 
이런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846년 봄, 당으로부터 연방 하원 의원 후보로 지명을 받았다. 
  그 해의 하원 의원 선거에서 링컨의 반대당인 민주당은 감리교회 목사를 지명했다. 그는 
감리교회 부흥사였는데 링컨에 대해 죄를 회개해야 천국에 갈 것이라고 인신 공격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꾸준히 표밭을 다져 온 링컨은 무난히 그를 물리치고 연방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제30회 미연방 국회의 회기가 시작된 것은 1847년 12월이었다. 당시에 미국은 멕시코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링컨은 선거 기간 동안에도 멕시코와의 전쟁을 반대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자 
링컨 의원은 제임스 포크 대통령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포크 대통령은 1844년 텍사스를 병합하고 
서남부 영토를 재점령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847년에 포크 
대통령은 자카리 테일러 장군을 멕시코 영토 내로 진공시켜 요새를 구축했다. 분노한 멕시코 
군이 이 요새를 공격하자 포크 대통령은 즉시 멕시코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한마디로 전쟁을 
유도한 것이다. 링컨은 이 전쟁이 미국에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고한 
젊은이들만 희생시킨다고 적극적인 반대 의견을 폈다. 그러나 테일러 장군은 첫 전투에서 5일 
만에 멕시코 군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미국군이 멕시코를 자극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고 
대통령의 도덕성을 비난했다. 
  1848년이 되어서도 링컨은 포크 대통령에 대한 공격의 화살을 늦추지 않았다. 링컨은 포크 
대통령 스스로가 이 전쟁의 부도덕성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멕시코를 이겨 인기를 얻으려 하고 
있으나, 멕시코는 굴복하지 않고 항전하자 이제는 어쩔 줄 모른다고 맹공격했다. 그러나 포크 
대통령은 링컨의 비난을 묵살했고 전쟁은 1개월 만에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더구나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뉴멕시코를 획득했고, 캘리포니아가 독립, 공화국을 
수립하여 미연방에 가입하게 되는 성과를 이룩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링컨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 국민들은 전쟁의 승리를 환영하였고 
테일러 장군은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더불어 포크 대통령의 인기도 상승하였다. 링컨이 완전히 
상황판단을 잘못하고 만 셈이다. 더구나 링컨은 이렇게 반전론을 주장하는 바람에 그 다음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하고 만다. 
  연방 의회의 회기가 끝나자마자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다. 휘그당은 자카리 테일러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링컨은 자신의 정치적 좌절을 보상하는 심정으로 테일러의 선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링컨은 뉴욕, 펜실베이니아, 일리노이 등에 있는 휘그당원들에게 격려의 
편지도 보내고, 그의 동업자인 헌든 변호사를 시켜 일리노이의 젊은이들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 
의회에서는 테일러 장군을 지지하기 위한 연설도 하였다. 링컨은 자신이 직접 뉴잉글랜드 지방을 
순회하면서 테일러의 선거 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 결과 테일러는 민주당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링컨은 테일러 대통령이 링컨과 일리노이에 크게 신세를 졌기에 당연히 자신에게 각료의 
자리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테일러는 링컨을 무시한 채 내각을 조직했고, 더구나 
링컨이 연방 정부의 요직에 임명되어야 할 일리노이 출신의 인사들 명부를 만들어 그에게 보낸 
편지에도 아무런 회답을 하지 않았다. 링컨은 토지 관리청장의 자리에 자신의 친구를 강력히 
추천했으나 테일러는 휘그당의 버터필드에게 아무런 기여도 없는 그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데다 자신을 무시하는 테일러의 태도에 화가 났다. 
  테일러 대통령은 이런 링컨의 불만을 달래려고 그에게 새로운 영토인 오리건 지역의 지사를 
제의했으나 링컨은 이를 거절했다. 부인이 이 제의를 거절하라고 종용하기도 했고 링컨 자신도 
일리노이 지역에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고 했기 때문에 멀리 오리건까지 부임하고 싶지 않았다. 
  중앙 정계에서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고향에 돌아온 링컨의 심정은 착잡했다. 그는 당분간 
정계를 떠날 생각으로 그의 지지자들에게 연방 하원 의원에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의 
본래 직업인 변호사업으로 되돌아갔다. 
  링컨이 다시 변호사로서 열심히 활동하던 1850년 초에 링컨의 둘째 아들이 그만 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링컨 부부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아이를 갖기로 했고 그 해 12월 세번째 아들인 
윌리엄 월라스를 낳았다. 
  1852년 3월, 전 미국은 한 권의 소설로 떠들썩해졌다. "엉클 톰스 캐빈(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이 출판된 것이다. 이 소설은 해리어트 엘리자베스 비처 스토라는 여류작가가 
당시 도망 노예들이 북부로 가기 위해 거치던 통로인 오하이오에 살면서 직접 겪고 켄터키를 3일 
동안 방문하여 노예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 쓴 일종의 고발 소설이었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미국에서만 30여만 권이 팔리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유럽에도 소개되어 백만 권 이상이 팔렸으며 비인도적이고 반인간적인 노예 제도의 폐지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설은 당시 노예 제도를 둘러싼 남부와 북부의 정치적 갈등에서 북부를 승리하게 만든 
거대한 정치적인 문서가 되었다. 북부 사람들은 이 소설에 환호성을 질렀고 이런 반응에 
남부인들은 이 소설이 양키들이 남부를 왜곡하기 위해 꾸며낸 작품이라고 비난했다. 이제 노에 
제도를 둘러싼 남부와 북부의 분쟁은 그 마지막을 향한 파국만이 남아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1853년 4월 링컨 부부는 네번째 아들인 토머스를 낳았다. 1854년 4월에는 링컨 
법률 사무소의 동업자인 헌든이 스프링필드의 시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해 5월 30일에는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가 첨예한 정치적 쟁점으로 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령에 서명했다. 링컨은 이 
법령을 폐기하기 위한 정치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정치 일선에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은 캔자스, 네브래스카, 남북 다코타, 몬태나, 콜로라도 지역의 주민이 
노예를 소유할 것이냐, 소유하지 말 것이냐를 주민 투표에 의해 결정한다는 내용의 법이다. 즉 
명목상으로는 주권 재민이라는 논리가 이 법안의 골자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 지역에서는 
노예 제도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에 심한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절충안으로서 생긴 
법안이었다. 더구나 이 법안이 통과되어 1820년에 제정된 북위 30도 36선을 기준으로 남부에서는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북부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법안이 실질적으로 폐기되므로 남부는 
새로운 노예주를 얻을 수 있게 되고 서부는 새로운 영토를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캔자스를 노예주로 만들려는 노예 제도 지지자들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노예 제도 
폐지론자들은 심지어 무기까지 들고 캔자스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폭력과 살상이 이어졌다. 
유명한 노예 폐지론자인 존 브라운이 그의 아들 5명을 거느리고 노예 소유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사건도 이 무렵 캔자스에서 일어났다. 
  이 법안은 원래 스테판 더글러스에 의해 제안되어 제정된 법안이다. 더글러스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링컨 일생의 정적이었다. 더글러스는 당시에 이미 명성이 있는 정치인이었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지닌 '작은 거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남부의 표와 서부의 표를 얻어낼 심산으로 
이 법안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계산은 남북의 대립이라는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역할만 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때로 어떤 이해 관계보다도 명분을 위한 싸움에 휘말려 현실적 
이해 득실을 잊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탁월한 웅변가이자 냉정한 조정자였지만 바로 이 
점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링컨이라는 '상대도 되지 않는' 정적에게 지고 만다. 
  그러면 이러한 분쟁이 일어나게 된 당시의 미국 사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미국은 건국 이래 끝없이 서부로 진출하는 영토 확장을 거듭했고 산업의 발전에 치중했다. 그 
결과 인구는 급격하게 불어났고 특히 서부의 인구는 계속 증가 추세였다. 실정이 이렇게 되자 
농업을 기반으로 인구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던 남부는 북부와 서부의 발전 앞에서 점차 
밀리게 되었다. 
  당시 남부 지역의 인구는 약 9백만이었는데 그 중에 4백만이 노예였다. 그리고 1820년 이래로 
미국은 노예 수입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노예 수입이 금지되자 노예의 값이 폭등하게 되고 
남부의 장원을 소유한 귀족들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남부 장원에서는 연초와 면화의 재배에 
절대적으로 소요되는 인력이 모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계속되는 연초와 목화의 재배로 
토지가 산성화되어서 수확이 줄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인도의 면화 생산이 늘어나면서 유럽 
시장에서 면화의 값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남부인들은 생산한 농작물을 내수 시장인 
북부의 시장에 팔아야 했고, 이 같은 사정은 남부의 경제가 북부의 시장에 의존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더욱이 남부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북부 사람들이 노예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를 비판하며 공공연하게 노예 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북부의 경제는 번영 일로에 있었다. 1천 4백만이나 되는 인구가 북부에 몰려 있었고 
그런 만큼 점차 산업은 확대되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값싼 노동력이었는데 
남부의 흑인 노예들이야말로 바로 그 적임자였다. 따라서 인도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현실적 
이해로도 남부의 노예가 해방되는 것이 곧 북부의 이익이었다. 
  그런데 정치 구조는 다소 복잡했다. 과거 남북의 타협에 의해 유지되어 온 정치 제도는 입장이 
바뀔 때마다 유리하기도 하고 불리하기도 했다. 이제 북부의 인구가 늘어나자 연방 하원은 
북부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원에 비해서 상원은 문제가 달랐다. 상원은 각 주에서 2명씩 
동등하게 대표자를 선출하였다. 당시 31개 주 중에 남부는 15개 주를 차지하고 있었고 북부는 
13개 주, 서부는 3개 주를 차지했다. 북부와 남부 사이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는 반면 
서부는 적은 수이긴 하지만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표가 새로 연방에 가입하는 서부의 주에서 나오는 상원 
의원이었다. 만일 새 영토가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주가 되면 이는 남부를 지지하게 될 것이고 
반면 새 영토가 자유주가 되면 북부를 지지하게 될 것이었다. 그 어느 쪽이든 새로 편입되는 
주의 태도에 따라 연방을 유지하던 균형은 무너지고 어느 한편이 승리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서부 영토의 개발은 양쪽 세력 모두에게 사활이 걸린 사안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더글러스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제정함으로써 상원이 이 문제를 전혀 관여할 필요 없이 각 
주가 스스로 노예 문제를 결정하자는 교묘한 타협안을 내놓은 것이다. 
  1854년 가을 연방 의회의 회기가 끝난 후 더글러스 상원 의원은 불안한 선거구민에게 자기의 
입장을 설명하고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에 관한 설명회를 가졌다. 링컨은 곧바로 그를 반박하는 
연설회를 개최했다. 
  그 해 10월 스프링필드에서 열린 집회에서 링컨은 3시간에 걸친 연설을 통해 더글러스는 선과 
악이 대립할 때 중립을 지킴으로써 악을 지원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피오리아에서도 비슷한 
연설을 했다. 이 연설문은 곧 신문에 전재되었다. '피오리아 연설문'으로 알려진 연설을 링컨을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시킨 첫번째의 연설문이다. 
  "...나는 남부 사람들이 노예 제도의 수립에 책임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정하겠다. 그리고 
그들이 노예 제도를 쉽게 폐지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도 이해하겠다.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노예를 당장이라도 해방시켜 그들의 
고향으로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희망이 쉽사리 이루어지리라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사정이 그러하다고 해서 자유로운 영토에 노예 구입을 허용하는 것은 마치 법으로 
아프리카 노예 판매업을 부활시키는 것과 같다. 노예 제도는 인간의 이기심이 낳은 산물이다. 
우리는 이 잘못된 제도를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되며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노예 제도는 정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며 영원히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양심의 소리에 따라 이 불의의 제도가 없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런 제도를 더 이상 용납해서도 안 되며 그런 제도를 묵인하려는 
사람들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
  링컨은 더글러스를 공박하여 궁지로 몰아넣음으로써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인기를 바탕으로 링컨은 1855년 일리노이 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 의원에 출마했다. 주 
의회에서 개표되었을 때 링컨은 45표를 획득했으나 과반수에서 6표가 모자랐고 차점자는 링컨이 
젊었을 때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던, 친더글러스계인 제임스 쉴드였다. 그리고 민주당 내의 
반더글러스파인 리먼 트럼블이 5표를 획득했다. 재투표가 실시되자 링컨의 표가 점차 줄게 
되었다. 링컨은 마음을 바꾸어 그의 표를 트럼블을 위해서 던졌다. 그래서 트럼블이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 
  링컨은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조수와 스피드와도 결별하게 되었다. 
스피드는 본래 노예 제도를 반대하던 사람인데 켄터키로 돌아간 후 서서히 남부의 입장을 
지지하게 되었다. 스피드는 링컨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방이 해체되어도 남부의 노예 제도는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부는 남부의 일에 참견할 합법적인 권리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링컨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결별을 선언하자 비통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어쩌면 그 시대가 사람을 관용 할 수 없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노예 문제로 인해 미국에는 점차 위기와 혼란의 기운이 돌았다. "집을 둘로 쪼개면 그 집은 서 
있을 수가 없다. 연방은 전부가 노예주가 되거나 아니면 자유주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는 링컨의 
말대로 남부와 북부는 자신들의 의지를 힘으로 해결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1856년 5월 21일 캔자스 주의 자유시였던 로렌스가 노예 제도를 지지하는 한 보안관이 
지휘하는 7백50명의 민병대에게 기습을 당했다. 이들 민병대는 노예 주인들이 다른 주에서 사온 
일종의 용병들이었다. 노예 제도를 반대하던 존 브라운은 캔자스 주의 오사와토미라는 마을에서 
5명의 노예 제도 지지자를 처형함으로써 로렌스 시의 공격을 보복했다.
  이 같은 사태가 캔자스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을 때, 워싱턴에 있는 의회에서는 또 다른 사태가 
발생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상원 의원 프레스턴 부륵스가 매사추세츠 주의 상원 의원 
찰스섬너의 머리를 지팡이로 때려서 거의 실신 상태로 만들었다. 섬너는 이 때 받은 상처 때문에 
4년간 전신 불수로 고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섬너 의원은 북부에서는 순교자로 추앙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하여 남부에서는 부륵스 의원이 가문의 명예를 수호한 당연한 처사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발생한 원인은 섬너 의원이 연설 중에 부륵스 의원의 외삼촌인 
앤드루 버틀러를 조롱했기 때문이었다. 
  이즈음에 북부에서는 휘그당과 민주당의 현 정책에 불만이 있는 민주당원들이 모여서 새로운 
정당인 공화당을 창당했다. 이 공화당은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는 바로 그 공화당으로 '위대한 
성숙한 정당'이라고 스스로 별명을 붙였다. 1856년 5월 일리노이주 공화당 전당 대회가 열렸다. 
이 때 링컨도 당의 핵심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는데 그의 나이 47세일 때였다. 
  1856년 공화당의 전국 전당 대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링컨은 이 전당 대회에서 주제 
연설을 하게 되었다. 링컨의 연설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는 당에서 주목 받는 지도자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존 프리먼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링컨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1백 10표를 획득하는 데 그쳐 후보로 지명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프리먼트는 민주당의 제임스 뷰캐넌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뷰캐넌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대법원에서는 흑인 문제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1857년 흑인인 드래드 스코트가 자기의 자유권을 인정받기 위하여 연방 대법원에 제소하였다. 
본래 드래드 스코트는 샌포드 스코트 집안의 노예로 노예를 허용하는 미주리에 살다가 자유주인 
일리노이 주로 이주했다. 스코트는 자유주에서 살기 때문에 시민으로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리노이 주의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서 미주리 협정에 근거하여 스코트가 자유인임을 
확인했다. 그러자 남부를 대표하고 있던 뷰캐넌 행정부는 이 판결에 불만을 품고 연방 대법원에 
제소하였다. 
  1857년 3월 6일 대법원은 유명한 드래드 스코트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당시 대법관들 중에 
공화당원인 2명의 대법관은 스코트편을 들었으나 나머지 대법관들은 전부 스코트의 반대편을 
들었다. 당시 대법원장인 로저 태니는 판결문에서, "흑인은 열등한 족속으로 백인들과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울리기에는 부적합한 인종이다. 그러므로 흑인은 백인과 같은 권한이 
없으며, 독립 선언문의 정신은 흑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그 해 6월에 더글러스 상원 의원은 스프링필드에 와서 대법원의 판결을 변호하였다. 링컨은 
대법원과 뷰캐넌 대통령의 조치가 연방 헌법을 지나치게 축소 해석한 부당한 조치임을 지적하고 
이에 항의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캔자스에서는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다. 친노예 제도파들이 입법 위원회를 
개최하여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그러나 자유주를 소망하는 파들은 주 의회를 
장악하여 이 입법안을 거부하였다. 이런 지경이 되니 결과적으로 캔자스는 2개의 대립하는 
정부가 수립된 셈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연방 정부는 더글러스가 옹호한 국민 주권의 원칙을 밀어 
버리고 주민들에게 국민 투표를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의하면 만일 캔자스 주민들이 노예 
제도를 찬성하면 연방의 주로 편입되고, 노예 제도를 반대하면 연방의 주로 편입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 같은 연방 정부의 지시에 더글러스도 화가 나서 대통령에게 항의 하였다. 
더글러스가 이런 태도를 취하자 남부의 열광적인 노예 제도 지지자들은 더글러스의 애매한 
태도를 비판하였고 민주당은 남부측과 중서부측으로 분열되었다. 
  캔자스 주는 연방 정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반노예 제도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국민 
투표는 1858년 1월 4일에 시행되었는데 선거 결과가 이렇게 나오자 노예 제도를 지지하는 세력은 
남부 외에서는 발을 붙이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제 남부의 고립은 눈에 보이는 결말이었다. 
  1858년 6월 16일 일리노이 주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링컨은 노예 제도의 철폐를 강력히 
주장하는 연설을 하였다. 공화당은 링컨을 연방 상원 의원 후보로 지명하였다. 링컨은 다시 
숙명적인 정적인 스테판 더글러스와 상원 의원을 놓고 맞붙게 되었다. 더글러스도 아직은 
일리노이에서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남쪽의 노예 제도뿐만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민주당의 
대통령도 강력히 비판한 강직한 인상이 대중의 호감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링컨과 더글러스의 선거 유세가 시작되었다. 1858년 7월 9일 합동 유세장에서 더글러스는 
링컨이 위험할 정도의 전체주의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 더글러스는 링컨이 미연방은 
노예 국가가 되거나, 아니면 자유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을 가지고 다양성을 
무시한다고 비난하면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결국 독재를 옹호하는 자라고 링컨을 
공격했다. 더글러스는 "미국 정부는 백인에 의해서 창설되었고, 백인은 백인에 의해서 통치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링컨은 이런 더글러스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일리노이 
주를 순회하며 공동 토론회를 갖자고 도전장을 보냈다. 더글러스도 마지못해 이에 응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일리노이 주 전체를 순회하면서 토론회를 개최했고 7차에 걸쳐 합동 연설을 했다. 
합동 연설회는 일리노이 주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주민들은 합동 연설회가 열릴 때마다 
구름같이 몰려들어 누가 이 논쟁에서 이기는지를 지켜 봤다. 
  이렇게 되자 각처의 신문들이 두 사람의 연설 내용을 대서 특필하기 시작했고 때로는 두 
사람의 주장에 대한 논평까지 실었다.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 등지의 신문에 이들의 연설문이 
소개되었다. 이 바람에 두 사람은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되었다. 
  1858년 11월 2일 4개월에 걸친 선거전이 끝나고 투표가 진행되었다. 공화당의 링컨은 19만 
표를, 민주당의 더글러스는 17만 6천 표를 획득하였다. 이번에는 직접 선거로 상원 의원을 
선출하게 되었으므로 링컨이 상대적으로 유리했으나 또다시 과반수 표를 획득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시 주 의회에서 상원 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당시 일리노이 주 의회는 아직까지 
민주당이 우세하였다. 그래서 더글러스가 당선되었고 링컨은 또 한번 눈물을 삼켜야 했다. 링컨은 
더글러스보다 유권자의 지지를 더 많이 얻고도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지 못했다. 
  그러나  링컨은 비록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전 미국인에게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성과를 얻었다. 링컨은 당시 미국에서는 가장 유명한 웅변가로 알려진 더글러스를 
상대로 선전했고 국민들을 이 키 크고 얼빠진 듯한 사람의 정열적인 연설과 달변을 보고 그가 
대통령 재목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이즈음에 남부는 노예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자 남부에서는 공공연하게 
노예를 아프리카로부터 밀수하기 시작하였다. 1859년만 해도 한 해에 1만 5천 명의 흑인 노예를 
밀수입했다. 이런 사태는 과격한 노예 제도 폐지론자인 존 브라운은 버지나아에 있는 하퍼스 
페리의 연방 군수 창고를 점령하였다. 브라운의 목적은 무기를 약탈하여 남부의 노예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무장을 갖추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해병대의 공격을 받고 체포되고 만다. 
브라운을 체포한 사람은 후일 남부군의 사령관이 된 로보트 리였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라운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분을 느끼게 하였다. 브라운은 비록 사형을 
당했으나 노예 폐지론자들의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렸고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5. 전장의 상혼 속에서 피어난 민주주의라는 꽃

  1860년 5월 공화당은 시카고에서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전당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전당 대회 이전에 이미 공화당 내에서는 유명한 언론인 호래쇼 그리어리와 뒷전에서 대통령 
후보를 만들기로 유명한 서로우 기드와 같은 인물이 링컨의 장래성을 보고 그를 적임자로 보고 
있었다. 또한 많은 공화당원들도 링컨이 대중들과 잘 어울리며 뛰어난 연설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대통령 후보로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전당 대회는 시카고에서 열렸다. 
링컨의 지지자들은 링컨을 부르며 마치 인디언 부족의 전투 환호성같이 열렬하게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 때 링컨의 외사촌인 존 행크스가 울타리의 가로대 두 쪽을 들고 전당 대회에 
참여하였다. 행크스는 사람들에게 30년 전에 링컨이 이 가로대를 맨손으로 쪼개었다고 전당 
대회에 참석한 대표자들에게 뽐내면서 설명하였다. 
  얼핏 듣기에는 우스운 얘기였으나, 행크스의 이런 행동이 도리어 링컨의 지지도를 높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말았다. 항상 큰 키에 연통 같은 모자를 쓰고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소 어설퍼 보이는 변호사라는 링컨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광활하고 거친 평원을 제압하려는 
서부의 거인이자 소박한 서민의 대변자라는 이미지로 전환되었다. 링컨은 위대한 자연인으로 
불의와 싸울 수 있는 공화당의 거인이 된 셈이다. 특히 가로대를 반으로 쪼갠 강한 서부인의 
이미지를 갖게 됨으로써 링컨은 시워드를 비롯한 여러 명의 거물급 정치인들을 물리치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 때의 링컨은 51세였다. 
  링컨은 그의 숙명적인 정적인 더글러스와 다시 싸우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링컨의 우세가 
확실했다. 1860년 11월 6일 투표 결과 링컨은 1백 86만 표, 더글러스는 1백 37만 표, 
브레킨리지는 85만 표를 획득했다. 링컨이 유권자들로부터 얻은 표는 과반수에 미치지는 
못하였으나 선거인단의 수는 압도적이었다. 링컨은 남부에서는 완전히 패배했으나, 북부의 큰 
주와 자유주에서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더욱이 일생의 정적이었으며 링컨이 싸워 매번 
패배한 더글러스에게 승리한 것은 링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이미 선거 기간 동안에 남부에서는 링컨이 당선되면 연방을 탈퇴하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현실로 나타났다. 1860년 12월 20일에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에서 탈퇴하였다. 이어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주 등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뒤를 따라 탈퇴하였다. 1861년 2월 4일 앨러배마 주에 있는 몽고메리 시에 
모인 남부의 대표들은 새로운 연합체인 남부 동맹 정부를 결성하였다. 
  링컨이 대통령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남부는 새 대통령으로 미시시피 주 상원 의원인 제퍼슨 
데이비스를 선출했다. 또 남부 6개 주의 동맹 정부는 즉각 각료를 임명하고 수도를 버지니아 
주의 리치먼드로 정하였다. 
  1861년 3월 4일 링컨은 52세의 나이로 미국의 16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링컨은 윌리엄 
셔워드를 국무 장관에, 살몬 체이스를 재무 장관에, 몽고메리 브래어를 체신부 장관에, 에드워드 
베이트를 법무 장관에, 그리고 전쟁성 장관에는 시몬 캐머런을, 대내성 장관에는 카레브 
스미스를, 해군 장관에는 기데온 웰레스를 각각 임명했다. 
  링컨이 취임하고 나서 맨 먼저 해결해야 될 문제는 섬터 요새의 사건이었다. 섬터 요새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시의 항구 입구에 있는 군사 요새로 연방군이 통솔하고 있었다. 이 
요새는 남부 내에 있는 군사 요새로 연방군이 통솔하고 있었다. 이 요새는 남부 내에 있는 
유일한 연방 산하 군사 기지였다. 남부군은 이 기지를 차지하려고 1860년 12월부터 포위 작전을 
벌였다. 남부군은 이 곳 요새의 대장인 앤더슨 소령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공격을 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총격전은 시작되지 않았으나, 섬터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연방군은 식량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만일 연방군이 식량 보급을 하지 않으면 병사들이 굶어 
죽게 될 형편이었다. 링컨은 처음에는 이 일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남부측이 
완강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각료들에게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 해 4월 1일 국무 장관 셔워드는 링컨 대통령에게 몇 가지의 가능한 대책을 제안했다. 
첫째는 다른 요새들은 유지하나 섬터 요새는 포기하는 방안, 둘째는 섬터 요새에 연방 정부의 
가기 꽂혀 있는 동안은 흑인 노예 문제를 일절 거론하지 않는 방안, 셋째는 국가의 결속을 
위하여 외국과의 전쟁을 시작하는 방안 등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마땅하지 않다고 판단한 
링컨은 결국 각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섬터 요새에 보급 물자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링컨 
대통령은 섬터 요새로 원정군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동시에 링컨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인 
프랜시스 피컷에게 정중하게 연방군의 의도를 전달했다. 
  1861년 4월 12일 남부군은 섬터 요새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요새에 주둔하던 연방군은 
항복하고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본격적인 전쟁이 불가피했다. 링컨은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교전 상태에 진입했음을 선언했다. 링컨은 한 때 포크 대통령이 전쟁을 유발했다고 비난했는데 
이제 본인이 그 같은 비난을 받으면서 전쟁 준비에 착수하게 된 셈이다. 
  연방 의회가 교전 상태를 선언하자 버지니아, 테네시,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는 남군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부의 버지나아와 동부의 테네시는 연방 정부에 남기로 결정하였다. 
  1861년 4월 15일 링컨 대통령은 7만 5천 명의 지원병을 모집한다고 포고를 발표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곳곳에서 지원병이 쇄도하였다. 링컨은 즉각적으로 남부의 항만을 
봉쇄하도록 명령했다. 이 전략은 남부 연합체를 봉쇄하여 그들을 고립시키면 생활 필수품의 수입, 
연초와 목화의 수출이 어려워져 저절로 자멸하게 만들려는 작전이었다. 
  링컨은 남부 연맹과의 전쟁을 선언했으나 이를 실행해 줄 군을 충원하고 이를 지휘할 사령관을 
선정하는 문제로 고심했다. 섬터요새가 함락된 다음부터 워싱턴에는 얼마 되지 않는 연방군 
부대만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처에 요청한 민병대의 도착을 기다리는 한편 군 지휘 계통을 
구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남부 출신의 연방군 장교들이 잇따라 사임하는 바람에 지휘 장교가 
모자랐다. 사령관으로는 1847년 1만 4천 명의 군을 이끌고 멕시코와의 전쟁에 참여한 스코트 
장군이 있었으나 그는 너무나 나이가 들어 사령관직을 제대로 수행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스코트 장군은 링컨 대통령에게 후일 남군 사령관이 된 로버트 리 대령을 북군의 사령관으로 
추천했다. 링컨 대통령은 이 추천을 받아들여서 리 대령을 북군 사령관으로 영입하려고 
교섭하였다. 
  리 장군은 버지니아의 연방 탈퇴를 반대하였고 흑인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리는 자기의 고향인 버지니아를 배반할 수 없고 친지들과 친구를 배반할 수 없기 때문에 링컨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자기의 보직을 사임하고 버지니아로 돌아갔다. 후일 그는 
버지니아 군의 사령관이 되었다가 남부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리 장군의 문제가 이렇게 결렬되자 링컨은 늙은 스코트 장군과 젊은 장교들에 의지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속에서 그 해 4월 19일 워싱턴에서 멀지 않은 북쪽에 위치한 
볼티모어 시에서 총격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매사추세츠 주에서 동원된 제6민병대가 
볼티모어 시를 지나갈 때 총격전이 발생한 것이다. 이 총격전으로 4명의 보병이 사살되었고 
9명의 민간인이 생명을 잃었으며 상당수의 부상자도 생겼다. 이 사건은 워싱턴 시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포토맥 강을 끼고 건너편에 있는 버지니아에서는 남부 동맹의 선봉기가 
휘날리고 있는 형편에 퇴로마저 차단되면 워싱턴은 고립 무원의 상태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링컨을 비롯한 각료들이 초조하게 지원병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다행히 매사추세츠 
제6민병대가 워싱턴에 도착했다. 4월 25일에는 뉴욕 제7민병대가 워싱턴에 도착했다. 이렇게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때 북부의 여러 주에서 자원대가 속속 워싱턴에 도착했다. 
  이제 워싱턴 방어에 한시름을 놓은 링컨 대통령은 남부 해안의 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하여 2만 
2천 명의 민병대를 정규군에 편입했고, 그 중 1만 8천 명을 해군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4만 2천 
명의 지원 부대를 모집하여 병기 생산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와 더불어 링컨 대통령은 전쟁 
수행을 위해 초당파적으로 군 인사를 단행했다. 군의 지휘관을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가리지 않고 
골고루 배정하였다. 동시에 남부의 첩자나 남부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냉혹하게 
처벌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한편 링컨은 켄터키, 메릴랜드, 그리고 미주리 주 등 중립적이거나 흔들리고 있는 주들이 
연방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우선적으로 노력했다. 미주리 주는 프랭크 블레어와 나타니엘 리온 
장군의 노력으로 연방에 남아 있었다. 특히 리온 장군은 연방 탈퇴군을 단번에 무찔렀다. 
  메릴랜드 주도 반란을 일으켰으나 볼티모어 시장을 체포하고 연방군이 볼티모어 시를 평정하게 
되어 합중국 연방에 충성하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켄터키 주였다. 켄터키 주는 링컨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미시시피 강을 봉쇄할 수 있는, 연방군의 군사 작전 수행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당시 켄터키 주의 루이빌 시에서는 한쪽에서는 연방을 지지하는 민병대가 행군을 하고 다른 
쪽에서는 남부 동맹을 지지하는 지원병이 행진을 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런 
형편이므로 켄터키 주 정부는 중립을 선언했다. 링컨은 연방 탈퇴자인 주지사를 무시하고, 
연방파인 주 의원들과 직접 상대했다. 링컨은 켄터키 주의 노예들에 관해서 연방 정부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동시에 링컨은 켄터키 주의 연방 협조자들을 은밀히 접촉하기도 
했다. 링컨은 켄터키 출신 연방군 장교를 고향으로 보내서 연방군을 충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켄터키의 입장이 점차 연방측으로 기울어지자, 남부 동맹은 군을 동원하여 켄터키를 점령하려고 
시도했다. 이 무력 점령 야욕이 켄터키 주민들을 자극해서 켄터키가 연방에 남아 싸우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지속되자 링컨 행정부의 조직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각료들은 자기의 직무에 
관한 명확한 실천 규범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고 더구나 공무원이 부족하여 일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전쟁은 빠르게 확산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행정부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서 통솔이 어려웠다. 
  이런 어려움을 가장 크게 겪고 있는 부서는 캐머런이 관할하고 있는 전쟁성이었다. 별안간 군 
병력을 증강하다 보니 오합지졸인 자원자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을 정규군에 편입시켜야 하니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링컨이 전쟁의 승리를 위해 대화합을 꾀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장군 직책을 민주당, 공화당 등 각 정파에 골고루 나누어주는 바람에 대부분의 장군이 
군사학에 밝은 사람이 아닌 '정치 장군들'이었다. 심지어 정파를 배려하다 보니, 옛날 그와 
권총으로 결투를 하려던 제임스 쉴드까지도 장군의 직책을 갖고 있었다. 링컨은 이들과 협의하여 
작전 수행을 해야 했는데, 대다수의 장군들이 군사학이나 군사 전략을 잘 모르고 있어서 그가 
직접 군인들과 지도를 펴놓고 지리를 익히면서 군사 작전을 연구해야 했다. 링컨은 국회 
도서관에서 군사학에 관한 책들을 대출하여 읽으면서까지 효과적인 전략 방안을 마련하느라고 
고심하였다. 
  1861년 5월 링컨은 평생의 정적이던 더글러스가 일리노이 주에서 연방을 위한 군 동원을 위해 
뛰다가 류머티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링컨은 이 정적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며 그의 애국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전쟁은 단순한 군사 작전만으로 승리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링컨은 외교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당시 영국은 남북 전쟁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남부측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를 
취했다. 이 때문에 링컨은 영국의 태도를 바꾸려고 애를 써야 했다. 당시 영국인들은 약자인 
남부를 동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남부는 6백만의 백인이 싸우는 데 비해 북부는 2천만의 백인과 
강력한 산업 구조가 있었다. 영국인들의 눈에는 이런 상태에서 남부가 전쟁을 한다는 것은 
아이가 어른과 싸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여 남부를 지지하자는 여론이 많았다. 또 영국은 다른 
실리적인 북미가 두 개의 독립 국가로 존재하게 되므로 영국과의 실질적인 경쟁자가 없어지는 
셈이었다. 또한 이들 국가들은 그 산업력이 약화되어 영국에 의존하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남부 
해역의 봉쇄로 영국은 당장 남부에 수출할 수 없다는 것을 불만스러워 하고 있었다. 이 같은 
계산에서 미묘한 태도를 취하는 영국에 링컨은 강경한 태도로 설득하였다. 링컨의 이런 외교 
전략이 성공하여 영국은 연방군의 남부 해역 봉쇄를 존중한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무기와 물자, 그리고 인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갖고 있었지만 연방군은 초기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였다. 첫번째 남북 대전은 버지니아의 블런 강변에 있는 마나사스에서 벌어졌다. 2만 명의 
연방군은 남군을 향해 물밀듯이 공격하였다. 압도적으로 병력이 많은 북군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군이 어떻게 지는가를 보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이 전투를 구경 나올 
정력이 나타나자마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후퇴하고 말았다. 구경 나온 시민들은 아비 
규환이었다.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은 시민들과 함께 섞여서 도주하게 되었다. 어이없는 
패전이었다. 
  불런 전투에서 패배하자 의회는 링컨의 군 인사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링컨은 
군사령관을 스코트 장군에서 젊은 조지 맥크렐란으로 교체하였다. 맥크렐란은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육군 사관 학교인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 34세의 재능 있는 
군인이었다. 그는 멕시코 전쟁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고 크림 전쟁을 관찰하고 군사 교본을 
저술하기도 한 바 있었다. 그는 재능을 인정받아 군에서 빠른 진급을 했고 오하이오 주 방위군 
사령관인 육군 소장이었다. 링컨이 그를 사령관에 임명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러나 이 젊고 유능한 장군은 군사령관으로서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먼저 그는 좋은 
가문 출신인데다 민주당원이었으므로 링컨을 얕보고 허영심이 강했다. 그리고 우유 부단하여 
과감한 전략을 구사하기는커녕 도리어 전투를 지연시키기나 했다. 연방군의 작전은 제 1전선으로 
버지니아를 선제 공략하고, 제2전선은 미시시피를 공략하며, 제3전선은 신시내티에서 서부의 
테네시를 공략하는 전략이었다. 여기서 특히 버지니아의 공략은 수도 워싱턴의 방위와 관련하여 
중요했다. 그러나 새로이 임명된 맥크렐란은 버지니아의 공략은 물론 모든 전투를 지연시키고 
있었다. 시간을 번 남군은 버지니아 방위선을 구축하였고 이제 연방군은 버지니아 공략을 손쉽게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무렵 연방군 함대가 영국의 상선인 트렌트 호를 나포했는데 이 상선에는 2명의 남부 동맹 
관리가 타고 있었다. 연방군 함대는 이들을 체포해서 보스턴으로 데리고 갔다. 이 사건으로 
함장인 윌크스는 국민의 영웅이 되었으나. 영국에서는 강력하게 항의가 들어왔다. 링컨은 영국과 
관계가 악화되어 영국이 참전하여 남부군을 지원하는 사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였다. 링컨은 
서둘러 영국과 타협하고 남부의 관리 2명을 풀어 주는 한편 영국에는 공식적으로 사과하여 
사태를 수습했다.
  링컨 행정부에서 전쟁성 장관 캐머런은 무능하기로 소문 나서 온갖 부정, 부패가 일어나도 
수수 방관하고 있었다. 그러니 언론은 그의 무능과 육군성의 부정 부패를 지탄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링컨은 전쟁성 장관인 캐머런을 면직하고 에드위 스탠튼을 새로운 전쟁성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스탠튼은 인간 관계에서는 다소 편협한 점이 있었지만 합리적이고 능률적으로 
전쟁에 필요한 물자, 인원, 무기 등을 잘 관리하여 연방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맥크렐란이 진군을 주저하고 있는 동안 1862년 2월에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은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를 공략하는 데 성공하고 남군을 켄터키에서 테네시로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그랜트는 육군 소장으로 진급되었다.
  1862년 3월 11일 링컨 대통령은 맥크렐란을 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링컨 자신이 총사령관직을 
맡아서 전쟁을 이끌어 갔다. 반면에 링컨의 부인인 메리는 아들 위리의 죽음을 계기로 사람이 
변하여 백악관을 비싼 가재 도구로 치장하고 사치스러운 파티를 자주 여는 등 말썽을 피웠다. 
워싱턴의 사교계는 이러한 메리의 행위에 대해 비난했고 메리는 그 바람에 백악관을 떠날 때까지 
워싱턴의 사교계에서 백안시 당했다. 
  링컨이 전쟁 수행에 전념하는 동안 연방 의회는 서부의 토지 분배법, 농과 대학 지원법 등을 
통과시켜 민생의 안정을 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전쟁은 여전히 소강 상태로 장기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링컨은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이 있자 어떤 획기적인 전기가 있어야겠다고 
판단하였다. 링컨은 전쟁 초기부터 계획하고 있던 노예 해방 선언을 과감하게 발표하기로 
결심했다.
  1863년 1월 1일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연방군이 남부 
동맹의 수도 리치먼드 근교에 있는 애티에텀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 발표되었다. 그 이유는 
이것이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미합중국 연방의 확고한 
의지라는 점을 표명하기 위해서였다. "1863년 1월 1일을 기해 연방에 반란 상태에 있는 주의 
모든 노예에게 이 날 즉시, 그리고 영원히 자유를 부여한다"라고 시작되는 이 선언문은 미국 
역사상 가장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선언문은 각의와 의회의 협의를 
거쳐 수정된 최종안을 링컨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완성된 것인데 이로써 1820년 미주리 협정 
이래로 노예 해방을 둘러싼 찬반 논쟁에 최소한 법률상으로는 종말을 고하는 조치였다. 하지만 
이 선언문으로 즉각 노예들이 해방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일부 버지니아 점령 지역, 서부 
버지니아의 군들, 앤드루 존슨 사령관이 통치하는 테네시 주는 잠정적으로 이 주티의 예외 
지역으로 인정됐다. 그러나 자유인이 된 흑인 노예는 누구나 연방군에 지원할 수 있고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함으로써 흑인 노예의 법적 권리를 인정했으며 의도적으로 남부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유도하였다.
  노예 해방 선언을 계기로 심기 일전한 연방군은 점차 전선에서의 우세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선언으로 남부도 이제 필사적이 되었다. 남부군은 1863년 6월 14일 리 장군의 
지휘하에 메릴랜드 주를 공격하여 펜실베이니아 주와 다른 북쪽 지역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남부군의 작전 의도는 연방군의 그랜트 장군이 미시시피 주의 빅스버그를 포위 공격하자 그 
보급로를 차단하여 연방군을 동서로 분리시키려는 것이었다. 링컨은 10만 명의 연방군은 
파견하여 후커 장군으로 하여금 리 장군의 부대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후커 장군은 
리의 부대를 공격하지 않고 증원을 요청하는 소극적 대응에만 급급하였다. 링컨은 이런 후커 
장군을 즉각 해임하고 조지 미드 장군을 새 지휘자로 임명하여 리 장군의 주력 부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리의 주력 부대를 찾아다니던 미드 장군의 포토맥 주력 부대는 1863년 7월 
3일 게티즈버그라는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리 장군의 주력 부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게티즈버그 전투라고 알려진 이 접전에서 리 장군은 7만 명의 병사를, 미드 장군은 10만 1천 
명의 병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서로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백병전이 계속되었다. 수도 
리치먼드를 무방비 상태로 방치한 채 총력전을 펼치는 남부군에 맞서 연방군은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1863년 5월 말부터 7월 3일까지 무려 한 달 반에 걸친 대접전이 
끝났을 때 연방군은 2만 3천 명, 남군은 2만 8천 명의 희생자를 냈다. 남군은 막대한 전력 손실을 
입고 리 장군의 주력 부대는 다시 포토맥 강 유역으로 후퇴하였다. 
  같은 날 북군의 위대한 용장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이 미시시피의 마지막 남군 거점인 
빅스버그를 점령했다. 그랜트 장군은 이미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서부 
전선에서 남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는 과거 음주 행위로 군에서 쫓겨나기도 한 인물이었으나 
과감하고 빠른 작전 수행, 그리고 민심은 얻는 군사 전략 등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연이은 승전으로 켄터키를 확보하자 곧 남부군의 서부 보급로인 빅스버그를 공격했던 것이다. 
게티즈버그와 빅스버그의 전투에서 패배한 남부군은 이제 자력으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남부군은 공세를 취할 기력을 잃고 방어에만 급급하게 되었다.
  이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난 후 11월 19일 링컨은 게티즈버그로 가서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 곳에서 연설을 하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이다.
  "87년 전 우리의 조상들은 자유롭게 태어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를 
신봉하면서 이 대륙 위에 새로운 국가를 창조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나라, 다시 말해서 
자유와 평등을 위해 이룩된 나라가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시련을 받기 위하여 
커다란 내란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의 위대한 전쟁터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존속시키기 위해 스스로 생명을 버린 사람들에게 이 전쟁터의 일부를 최후의 안식처로 
바치기 위해 여기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려는 이 과업은 어디까지나 정당하고 적절한 
것입니다...
  이 곳에서 싸운 그들이 존귀하게 추진해 온, 아직 끝나지 않은 과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할 사람은 바로 살아 남은 우리들입니다 ...명예로운 전사자들이 숭고한 목적을 위해 최후의 
충성을 모두 바친 고귀한 희생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우리는 전사자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굳은 결의를 바치며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에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가져오고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소멸하지 않도록 하는 위대한 과업에 우리의 몸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와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에 비견되는 이 명문의 연설은 오늘날까지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로 널리 인용되고 있다. 특히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라는 
마지막 구절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863년 가을, 링컨은 그랜트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링컨은 
그랜트 장군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켄터키에서 취한 독특한 포고 때문이었다. 
그랜트는 포고문에서 켄터키 주민들을 위로하면서 "우리는 여러분의 적이 아니라 친구로서, 같은 
시민으로서 온 것이다. 의견 차이는 문제 삼지 않으며 오직 무장한 반도와 그 방조자, 그리고 
교사자만 상대할 것"이라고 밝혀서 주민들의 호감을 샀던 것이다. 또 그랜트는 전투를 할 때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연방 정부에 증원을 요청하지 않고 갖고 있는 병력만으로 전투에 
임하면서도 신속 과감하게 작전을 수행하여 연전 연승을 거두었다. 이 점이 링컨에게 다른 
장군들과 다르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흔히 보통의 연방군은 다른 부대와 차단되었을 때 원군 
요청에 급급한 데 비해 그랜트는 자력으로 싸우는 전투 형태를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술을 많이 마시기 때문에 언론의 비판을 받곤 하였다. 때로는 
정치인들이 그랜트가 술을 너무 마신다고 그를 해직하라고 링컨에게 요구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링컨은 그 특유의 유머로 "그랜트가 마시는 술의 이름을 알고 싶군. 다른 장군들도 
같은 술을 마시게 말이야"하고 대응했다고 한다. 
  1863년 링컨은 국회에 보낸 연두 교서에서 전쟁이 끝난 다음 재건설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며 
남부인들과의 대화합 방안을 내놓았다. 링컨은 모든 남부인들을 사면할 것을 약속하고 흑인 
노예를 제외한 모든 재산은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남부의 고위 관리, 
고의 장교, 포로를 학대한 자 등은 법에 의한 처벌을 받는다고 명시했다. 
  링컨은 그랜트를 자주 워싱턴으로 초청하여 전쟁을 조속히 승리로 이끌 군사 전략을 
논의하였다. 링컨과 그랜트는 남군을 항복시킬 방안으로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를 사방에서 
일제히 공격하여 점령하는 방안을 세웠다.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을 비롯 셔먼, 쉐리던, 토머스 등 용장들은 모두 공격적인 전투로 승리를 
거둔 군인들이었다. 게다가 북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병사들로 편성한 막강한 부대와 충분한 
보급품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남군은 서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보급로를 빼앗겨 
서부로부터의 보급이 차단된 데다가 해안마저 봉쇄되어 고립 무원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병사들은 지치고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그랜트와 셔먼 두 장군은 리치먼드를 좌우에서 협공하기 
위해 그랜트는 동쪽에서, 셔먼은 서쪽에서 남부군은 압박해 들어갔다. 특히 셔먼 장군은 조지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거쳐 버지니아로 진격해 들어갔는데 그가 거쳐 간 지역은 초토화되어 
남부인들은 그를 지독하게 미워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쟁이라면서 당당하게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며 진격했고 이미 전의를 상실한 남군은 변변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전쟁이 점차 승전 분위기로 흐르던 1864년 링컨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을 받아 
1864년 11월 8일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고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당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링컨에 의해 총사령관에서 면직 당한 맥크렐란 장군이었다. 
  링컨은 재선되자 노예 해방 선언문을 실효화하기 위해 헌법의 13조 부칙으로 명문화시킬 것을 
국회에 요청했다. 링컨은 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대승한 여세를 몰아 의회에서 만일 노예 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세상에서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노예 제도의 
불법화를 제안했다. 그러자 연방 의회는 이 부칙을 119 대 58로 통과시켰다. 링컨 대통령은 이를 
위대한 도덕적 승리라며 의회를 찬양했다. 
  이제 전쟁의 종말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전쟁의 종말이 가까워지면서 링컨은 북군의 남군에 
대한 불법적 보복이 염려되었다. 특히 장기간 계속된 전쟁과 이에 따른 많은 희생 때문에 북군은 
감정이 날카로워져서 야만적인 보복을 행할 가능성이 많았다. 링컨 대통령은 전쟁이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초토화된 남부를 재건하고 남부인들의 마음을 위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링컨 대통령은 1865년 3월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아무에게도 원한을 가져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865년 4월 9일 버지니아 주의 아포마톡스 군 법정에서 북군의 그랜트 사령관은 남군의 로버트 
리 사령관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리 장군은 항복문에 조인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 국민이 전쟁의 종결을 기뻐하였고 링컨은 남부의 재건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항상 인간이 가장 큰 기쁨을 누리는 순간에 찾아오는 것인지 1865년 4월 14일 배우이며 
광신적 분리주의자 존 윌크스 부스가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링컨을 저격했다. 
바로 그리스도 수난의 날인 성 금요일이었다. 링컨 대통령은 다음날 그의 아들 로버트와 국무 
장관 스탠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한때는 링컨 대통령을 일리노이의 원숭이라고 
놀리며 그를 업신여기던 국무 장관 스탠튼은 "그가 역사적 인물이 되어 영원히 사라졌군..."하고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고 한다. 

    6. 포드 극장을 울린 단발의 총성

  미국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링컨이 죽었을 때처럼 많은 사람들이 애도한 적은 없었다. 그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그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던 사람들, 그를 무능한 돌대가리라고 무시하던 
사람들, 그를 원숭이로 비유하고 조롱하던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미국 
사람들은 남북 전쟁의 엄청난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암살 
당한 이 사건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더욱이 남부인들은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누구보다도 링컨이 가장 온건하고 유화적으로 남부인들을 
대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4월 21일 아홉 칸으로 이루어진 장례 열차가 1천 6백 마일의 여행을 시작했다. 열차가 지날 
적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떼를 지어 나와서 조용히 장례 열차에 대하여 애도를 
표했다. 장례 열차가 뉴욕 시에 도착했을 때 8만 5천 명의 사람들이 장례차를 따라서 거리를 
행진했다. 뉴욕 주의 수도인 알바니의 주 청사에 운구가 지체하는 동안 밤을 새워서 사람들이 
링컨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고 찾아왔다. 클리블랜드의 공원에 운구가 지체하는 동안에는 
15만 명의 사람들이 오하이오,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주 둥지에서 찾아와 링컨에게 경의와 애도를 
표하며 영구차를 따라갔다. 
  인디애나폴리스를 지나갈 때 시민들은 심한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꼼짝도 하지 않고 
묵도를 했다. 열차가 시카고를 거쳐서 스프링필드로 갈 무렵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고 열차를 뒤따랐다. 이 행렬 속에는 관리들, 평민들, 이민온 사람들, 목공들, 시카고의 
배우들, 유태인들, 흑인들, 그리고 학생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링컨의 업적을 몇 가지만 정리해 보자. 
  첫째, 링컨은 노력하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인류에게 본보기로 보여 준 인물이다. 
그는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측량사가 
되었고 마침내 성공적인 변호사가 되었다. 링컨은 타고난 천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노력 
하나로 위대한 대통령까지 된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토머스는 성격이 난폭하고 인내력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링컨은 인내력이 강하고 양순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개인적으로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잘했으나 그는 농담을 의식적으로 하면서 우울증을 
극복하려고 할 정도로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더구나 그는 타고난 지도자도 아니었다. 그는 
사업에서도 자주 실패했고, 정치에서도 계속 실패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그는 연방 하원 
의원을 잠시 역임했을 뿐 세상에 자랑할 만한 업적이 없는 정치인이었다. 
  링컨은 자기의 성격을 스스로 개조하고, 삶을 의식적으로 개척한 사람이다. 그의 정치적 행로를 
보면 링컨이 얼마나 계획적으로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가려 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개인적인 
탁월함은 그다지 없었지만 끊임없이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문제를 파고들어 그 시대의 
쟁점을 잘 포착했다. 그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기회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시대와 민심의 흐름에 부합하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링컨은 개인의 노력으로 대통령까지 
된 것이지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우연히 대통령까지 된 것이 아니다. 링컨은 꼭 정치인으로 
성공해야 하겠다는 집념을 젊어서부터 가지고 있었고 결국 이것을 노력으로 성취한 인물이다. 
링컨이 정규적인 교육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남는 문장을 쓰게 된 것까지도 이런 
그의 개인적인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 링컨은 탁월한 행정적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미국의 대통령들을 보면 대개의 경우 
군의 사령관이나 또는 주지사로서 많은 행정 경험을 쌓고 후일 대통령이 되게 마련이다. 워싱턴 
대통령, 제퍼슨 대통령, 잭슨 대통령 등 대다수가 대통령 취임 이전에 행정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링컨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군을 통솔해 본 적도 없고, 당의 지도자도, 또 지방 행정 
책임자도 아니었고, 주지사도 해본 적이 없다. 이같이 행정상의 문외한이 당시로서는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거대한 관료 조직을 짧은 시간에 조직하고 통솔했다는 것은 그의 행정적인 능력이 
탁월했음을 알려 주는 증거이다. 그는 많은 인물을 적재 적소의 직책에 임명해야 했고 그들의 
됨됨이를 파악해야 했다. 물론 링컨도 인사에 실패한 적이 있었다. 그가 임명한 관료가 뇌물을 
받는 등 부패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행정 경험도 없고, 정치적으로 갑작스럽게 부상한 
링컨이었지만 사람을 보는 탁월한 혜안이 있었다. 그 점이 때로는 하루에 수십 명의 관료와 
장군을 임명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실수하지 않고 행정부를 이끌어 가게 한 요인이었다. 
  셋째, 링컨은 인재 활용의 귀재였다. 전쟁 초기에 막강한 힘을 보유한 북군이 번번이 패전했다. 
그 이유는 북군에 비해 남군에 탁월한 장군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리, 스튜어트, 잭슨, 롱스트리트 
등 남군은 농장을 유지하기 위해 말을 타고 총을 쏘는 일에 익숙했기에 탁월한 장군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북군의 장군들은 대부분이 사회에서 일을 하다가 전시에 복귀한 
정치적 장군들이었다. 링컨은 전쟁 초기에 맥크렐란, 프리먼트, 후커, 미드 등의 사회적 경력이 
화려한 장군들을 기용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링컨은 곧 이들을 면직하고 본인이 
총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링컨 특유의 독학으로 군사학을 익힌 다음 실전에서 탁월한 
장군들을 기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랜트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전쟁을 신속히 
끝냈다든가 자신을 심하게 무시하고 조롱하던 스탠튼을 전쟁성 장관으로 임명하여 후방의 업무를 
확실하게 한다든가 했다. 이같이 링컨은 정적이든 자기를 무시하든 적재 적소에 알맞은 인물이면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기용했다. 이 점은 아마도 그가 오랜 세월을 개인적인 모독마저 참아 
가면서 목적을 달성하던 그 인내력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인재를 
활용하고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탁월한 안목과 재주가 있었다. 
  넷째, 링컨은 정직한 민주주의 신봉자였다. 젊어서 링컨이 소유하고 있던 상점이 파산되었을 때 
그는 부채를 장기간에 걸쳐 전부 갚았다. 그 결과로 링컨은 '정직한 에이브'라는 별명을 일생 
동안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링컨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무척 강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믿었기에 자기와 같이 비천하게 태어난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노력을 
기울였다. 
  링컨의 민주주의와 노예 제도 폐지에 관한 신념은 정직한 것이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노예 
제도는 악의 제도라고 생각했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표현했다. 물론 그가 노예 
제도를 혁명적으로 폐지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노예 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분명했다.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실로 노예 제도의 반대라는 한가지 이유에서 결정된 
것이다. 
  링컨은 하원 의원 시절이나 상원 의원에 출마했을 때, 그리고 후일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 
시종 일관 두 가지 점만은 유달리 강조했다. 즉 연방의 유지와 인간의 평등한 자유권이 그것이다. 
이런 신념이 있었기에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한 투쟁을 했고, 연방의 존속을 위해서 남부와 
전쟁을 했다. 링컨이 케티즈버그에서 행한 연설에서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부는 
지상에서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그의 이러한 신념이 집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링컨은 박애와 관용의 정신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링컨은 그를 비난한 사람들, 
조롱하고 업신여긴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의 행정부에 중용했다. 링컨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피폐하고 사나워진 북군의 마음을 우려하여 남부를 용서해 줄 것을 강조했다. 그는 전쟁의 
결과를 법으로 처리하지 않고, 용서하는 인간의 마음으로 실천하려고 하였다. 링컨은 교회는 
다니지 않았으나, 성경을 늘 곁에 두고 읽으며 기독교의 박애 정신과 관용에 공감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불행한 점을 지적하면 그의 죽음으로 미국은 남과 북이 보다 빠르게 
화해와 용서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허비한 점이다. 링컨의 암살은 남부를 
박애와 관용의 정신에 입각해서 재건할 기회를 없애 버렸다. 링컨 대통령을 계승한 앤드루 
존슨을 부통령으로 지명하였고, 존슨은 링컨의 정책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더욱이 그는 
남부인이었기 때문에 남부의 사정에 밝았으며, 링컨의 정책이 훌륭한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존슨이 남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북부의 연방 의원들이 이런 그의 정책을 비판하며 그를 
탄핵하려고 했다. 존슨은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여 과감하게 링컨의 이상을 실천하지 못하였다. 
그런 탓으로 북부의 정치인들은 남부에 대하여 혹독한 보복 정책을 실행하게 된다. 북쪽의 
승전자들이 대거 남쪽으로 이전하여 재산을 탈취하고, 강간과 노략질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던 
것이다. 
  북이나 남이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형제를 잃고, 부모 자식을 잃고, 
재산을 잃었다. 이 같은 상태에서 서로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런 격앙된 감정 상태에서 
북군은 힘으로 보복을 하였고, 패배와 좌절감을 갖고 있던 남부인들은 북부인들의 행패에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링컨은 이 같은 사태를 염려하여 남부인들을 사면하고 남부의 재건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다음 곧 암살되어 그의 
이러한 포부를 펼칠 수 없었다. 당시에 받은 상처 때문에 남부인들은 북부의 양키들에 대한 
악감정이 몇 세대를 이어 내려오게 된다. 
  링컨의 삶을 보면 인생은 마라톤 경주와 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링컨은 대통령이 될 때까지 
계속 실패만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대통령이 될 때까지 계속 실패만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대통령이 됨으로써 끝을 멋지게 장식했다. 반면에 링컨의 일생의 정적이던 
스테판 더글러스는 젊어서부터 유능한 정치인으로 각광 받으며 화려한 정치 경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하원 의원, 상원 의원을 계속해서 역임하면서 링컨을 정치적으로 좌절시키곤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그의 명망은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오늘날 더글러스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링컨을 모르는 사람은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인생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하는 
교훈이다.
      우드로 윌슨

    1. 지적인 자유주의자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인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은 우리 나라와도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그가 공표한 민족 자결의 원칙은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되었고, 그가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치학 강의를 할 때 대한 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그의 학생이었다. 
  윌슨은 미국 역사상 유일한 대학 교수 출신의 대통령이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미국 
대통령은 그 전직이 변호사거나 군의 장성이었다. 그러나 윌슨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브린마, 웨슬리,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까지 역임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우드로 윌슨은 미국 역사상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과 더불어 미국에서 가장 지적인 
대통령으로 꼽힌다. 그는 학교에서 강의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국제 시대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으로 세계 정부론을 주창하여 국제 연맹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미국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고 제국주의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 윌슨은 세계 평화주의를 내걸고 미국의 세계적 역할을 
재조정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므로 그를 정치적 이상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윌슨이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국제적인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진 미국에서는 자기 나라의 세계적인 역할을 
둘러싸고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로 대분되는 논쟁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윌슨은 외교 
정책에서는 실리를 중시하는 먼로주의의 전통을 지키려 했으나 국제 문제에 관해서는 세계 
정부인 국제 연맹을 통해 국제 분쟁을 조정하려는 소박한 이상주의를 꿈꾸었다. 윌슨이 꿈꾸던 
세계 평화와 민족 자결이라는 이상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깨어지지만 전후 그의 이상은 국제 
연합(UN)을 통하여 부분적으로라도 실천되고 있다. 
  윌슨은 자유주의자이며 개혁주의자였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던 학교 제도를 개혁했고, 정치인이 된 후에는 그의 소속 정당인 민주당을 개혁했으며, 
대통령이 된 후에는 미국 정치의 개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 되었다. 
  또 윌슨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지도자로서 베르사유 조약을 성사시킨 
주역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병과 성격 탓으로 자신이 주창하고 창설한 국제 연맹에 
미국이 가입하지 못하게 만든 비극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2. 자존심 강한 남부 소년의 야망

  토머스 우드로 윌슨은 1856년 12월 28일 버지니아 주의 스탠튼 시에서 조 루글스 윌슨과 제시 
우드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윌슨의 아버지 조 루글스 윌슨은 스코틀랜드계의 
영국인으로 미국에 이주했다. 아버지의 가족과 친척들은 오하이오 주로 이주해서 상당히 
성공했다. 윌슨의 어머니도 영국에서는 꽤 알려졌던 목사의 딸로서 태어났다. 
  윌슨은 주로 미국의 남부에서 자라났다. 그는 2년간은 스탠튼에서, 12년간은 조지아 주의 
오거스타 시에서, 다시 2년간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컬럼비아 시에서 살았다. 윌슨의 아버지는 
남부에서는 널리 알려진 장로교회 목사로서 노예 제도를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흑인 노예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윌슨이 오거스타에 거주할 때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남북 전쟁 기간에 윌슨의 아버지는 
남군의 종군 목사로 전투에 참여했다. 윌슨의 아버지는 적극적인 노예 제도 지지자는 아니었지만 
남군에 참여하여 봉사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어린 윌슨에게 얘기해 주곤 하였다. 윌슨은 
아버지로부터 전쟁 동안의 체험이나 전쟁 후 남부의 재건을 위한 투쟁 과정에 대한 얘기를 종종 
들으며 컸다. 
  남북의 갈등과 전쟁으로 미국의 장로교회가 남장로교회와 북장로교회로 분리되었을 때, 윌슨의 
아버지는 남장로교회의 사무장으로 근무하였다. 윌슨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남부인으로서 남부의 
문화와 문물을 무척 사랑했다. 윌슨도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남부 장원 문화의 특징인 
신사도와 자존심 강한 고집 등을 물려받았다. 
  윌슨의 어머니 제시 우드로 여사는 자존심과 긍지를 지닌 자상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신앙심이 
강하여 경건했고 자식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모성애를 지녔다. 뒤에 윌슨은 자신의 신사도가 
어머니 때문에 생겼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녀는 전형적인 남부의 귀부인이었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윌슨에게 사색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조용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윌슨은 이런 
어머니와 누나들에 대해 항상 애정과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영향으로 그는 매우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윌슨의 아버지는 윌슨에게는 스승이자 친구처럼 존경스러우면서도 친밀한 존재였다. 아버지는 
교회의 목사답게 윌슨에게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윌슨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교회에서 강론하는 것을 들으면서 정확한 표현법과 설득의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윌슨은 아버지를 존경했으며 그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따라 생활 태도가 건실했다. 윌슨의 
아버지는 그에게 독서를 다양하게 하기보다는 책을 가려서 깊이 파라고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런 
독서 습관은 그에게 깊이 있는 교양을 쌓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미남이어서 따르는 여성들이 많았지만 기독교적인 윤리관을 철저히 지키며 이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도덕적인 인물이었다. 
  윌슨은 자신을 이끌어 준 이런 아버지께 감사하여 그의 첫번째 저서를 아버지에게 증정하였다. 
그는 또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에 어머니의 성인 우드로라는 이니셜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토머스 윌슨이라 부르지 않고 우드로 윌슨이라 불렀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남부의 재건이 시작될 무렵에 윌슨은 남부에서 유년 생활을 보냈으나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 아버지인 윌슨 목사는 부자는 아니었으나 늘 풍족한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지성적인 목사로 남부 장로교회의 중요 인물이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윌슨의 가족이 컬럼비아에 살 때 아버지는 신학 대학의 교수로 있기도 했다. 
이런 가정 환경 덕택으로 윌슨은 비교적 풍족하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집안의 자식들과 함께 
사립 명문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윌슨은 소년 시절에 공부를 잘하거나 머리가 특출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는 바다와 함선에 관해 관심이 많았고, 운동도 꽤 하는 편이어서 학교의 축구팀과 
야구팀에서 뛰기도 하였다. 그러나 윌슨은 그저 평범한 소년은 아니었다. 그는 집안의 전통에 
대한 긍지가 강했고 경건한 신앙심을 지닌, 그리고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파고드는 학생이었다. 윌슨은 이런 기질과 환경에 힘입어 항상 야심이 많은 
소년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위대한 정치가가 되겠다는 야심과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윌슨은 어려서부터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며 독실한 장로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자란 
남부의 환경과 정서로 전쟁을 증오하였다. 윌슨은 특별한 인간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아서 
하느님의 의사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하느님이 
소명을 내린 사람이 있다면, 또한 지상에는 악을 저지르며 후세에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도 따로 
정해져 있다는 기독교적 소명론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런 사상은 그의 일생 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가 뒤에 정치가로 입신하면서 자신과 신념이 다르면 때로는 매몰찰 정도로 친구조차 
버리게 된 바탕에는 이런 기독교적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었다. 
  윌슨은 자라면서 아버지가 즐겨 읽던 "뉴욕 네이션"과 "에든버러 리뷰"라는 신문을 탐독했는데, 
이 남부 자유주의 신문의 사설은 그의 정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찍부터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기독교적 사명감에 불타던 소년 윌슨은 16세 되던 해에 영국 
수상 윌리엄 글래드스턴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아 그의 사진을 자기 방의 벽에 붙여 놓을 정도로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윌슨은 글래드스턴이 권력만을 추구한 정치가가 아니라 진실을 추구한 정치 철학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글래드스턴이 시장을 중심으로 한 자유 방임주의 경제 체제를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생각한 것에 깊이 공감하였다. 윌슨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회상의 정부는 시장 
경제에 최소한의 간섭을 하는 정부라고 믿었다. 그래서 국가간의 보호 관세는 일종의 악으로 
하느님의 의사를 배반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더불어 윌슨은 칼뱅의 종교적 윤리관을 
정치에서 실천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즉 하느님이 선택한 앵글로-아메리칸이 특별한 미덕을 
가지고 세계를 통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미국에서 백인이 흑인을 통치하는 것은 
신의 섭리라고 믿었다. 하느님의 소명을 따르는 칼뱅주의 교리와 흑인을 열등한 인종이라고 
생각하는 남부의 인종 차별 사상이 기묘하게 결합된 정치관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상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소년 시절의 윌슨은 글래드스턴과 같이 의회에서 선출된 수상이 되고 싶었다. 글래드스턴처럼 
수상이 되어 멋진 농담과 재치있는 언사로 의회에서 논쟁을 하고 싶었다. 소년 윌슨은 열변을 
토하며 정치적 견해를 펼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웅변 연습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래의 소년들을 모아서 모의 의회를 만들어 토론하고 웅변 연습을 하며 정치 지도자로의 꿈을 
키워 나갔다. 
  1873년 윌슨은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데이비슨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집을 
떠났다. 이 대학은 그의 아버지가 재단 이사로 있었고 가족이나 윌슨은 목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한다고 믿었다. 이 대학에서 윌슨은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노력을 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윌슨은 논리학이나 웅변술에는 좋은 성적을 냈지만 
수학에서는 소질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실망시킨 것은 자신이 
성직자로는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안 것이었다. 윌슨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부친을 돕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다가 1875년 윌슨에게는 다시 공부의 기회가 왔다. 이번에는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했다. 
윌슨은 아버지가 장로교회 목사였기 때문에 학비를 면제 받았다. 윌슨의 아버지도 프린스턴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했을 때 윌슨은 공부를 열심히 했으나 그의 반에서 20등 안에 겨우 
들어가는 성적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2학년이 되면서 그는 공부에 소질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4학년 졸업할 때까지 평균 90점 이상을 획득하고 우등생이 되었다. 윌슨은 
과학이나 수학보다는 인문 과학 쪽의 성적이 훨씬 좋았다. 
  윌슨이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도 그의 아버지는 계속 충고하고 지도하였다. 그는 아들에게 
공부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공부하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연설문은 
간결하고 본론을 빨리 끄집어내서 간명하게 쓰라고 충고하면서 연설문을 총알에 비유했다. 즉 
"총알은 빠른 속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 연설문도 짧으면서 효과적이어야 
듣는 사람의 마음에 남는다"고 말했다. 
  윌슨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점차 식견이 있고 훌륭한 정치인이 되기 위한 교양을 쌓아 갔다. 
그는 정치 과목을 수강하면서 자주 토론하였는데 친구들에게 "우리가 이 곳에서 논쟁한 것을 
후일 미국의 상원에 모여서 하자"고 농담하기도 하였다. 윌슨은 명함을 만들어서 버지니아 상원 
의원 토머스 우드로 윌슨이라고 쓰기도 하였다. 
  윌슨은 미국 정치에는 웅변과 토론을 통해 설득하는 풍토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미국의 
의회가 위원회로 나누어져서 주로 뒷전에서 타협에 의해서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에 논쟁의 
문화가 없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영국 의회에서는 정책적 의제를 논쟁을 통해서 토의한 
후 설득에 의해서 결정하기 때문에 보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윌슨은 이런 그의 
생각을 발전시켜 영국 의회를 모델로 한 미국 정치 개혁안을 4학년의 졸업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의 첫번째 저서에서 이 논제를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프린스턴 대학 재학 중에도 
윌슨은 친구들과 자유 의제로 논쟁을 하는 웅변 클럽을 만들고 스스로 국무 장관의 역할을 주로 
맡았는데 이것은 미국의 국무 장관이 영국의 수상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윌슨은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자 정치인이 될 것을 결심하고, 1879년 버지니아 대학교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한다. 법과 대학 재학 중에도 윌슨은 웅변 클럽을 조직하고 웅변 연습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윌슨은 특히 웅변의 억양이나 발성을 연습하였다. 이런 연습 덕분으로 그는 
뒤에 명연설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법과 대학 재학 중 웅변 연습을 지나치게 하며 
불규칙적인 학교 생활을 하는 바람에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건강을 되찾으면서 법학을 독학할 도리밖에 없었다. 
  윌슨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청년이 된 그는 때마침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 외사촌 해리엣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듯이 그녀에게도 적극적으로 사랑의 공세를 
취했다. 그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매일같이 그녀의 집에 가거나 그녀를 만난 다음에는 그녀의 
집까지 먼 길을 데이트하기도 하였다. 윌슨은 그녀에게 롱펠로의 시집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한때 그는 그녀에게 "만일 해리엣이 나와 결혼해 주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변호사가 되는 일도 마찬가지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윌슨이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윌슨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윌슨과의 관계를 끊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만다. 
  이런 사랑의 상처가 아물게 된 뒤 조지아 주의 로마에서 해리엣은 윌슨에게 후일 그의 부인이 
될 엘렌 액선을 소개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윌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윌슨의 손녀와 해리엣의 
손자가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윌슨은 첫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실연하였지만 그 꿈을 손녀가 
이루게 된 셈이다. 
  윌슨은 실연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열심히 법률 공부를 하여 1882년에는 버지니아 대학 시절의 
친구 레닉과 함께 조지아 주인 애틀랜타 시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된다. 윌슨이 남부에 있기로 
결심하고 애틀랜타를 선택한 데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애틀랜타 시는 산업화가 진행되는 
신흥 도시였다. 새로이 부흥하는 도시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면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변호사업도 
번창하고 자신도 정치적 기반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윌슨은 생각했다. 그러나 윌슨의 
생각과는 달리 변호사업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애틀랜타에는 변호사가 많았는데 윌슨은 
소소한 소송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 법정에 자주 가서 법률적 사무를 보고 재판을 하는 일도 
윌슨에게는 고역이었다. 윌슨은 상원이나 하원에서 국가의 정책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지, 사소한 물건을 훔치다가 잡힌 흑인이나 변호하는 일은 관심이 없었다. 윌슨이 이렇게 
소송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데다가 사소한 소송은 맡으려 하지 않자 윌슨이 담당하는 
소송은 점차 줄어들었다. 
  결국 윌슨은 변호사업을 포기하고 1883년 존스 홉킨스 대학원에 입학하게 된다. 장학금을 
받지는 못했으나 정치 사상과 정치사 연구를 하기 위하여 존스 홉킨스 대학원에 지원한 것이다. 
이때 윌슨과 엘렌 액선의 사랑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예술에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윌슨의 야심 만만한 태도와 경건한 신앙심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고 그는 그녀의 예술과 
문학에 대한 조예에 공감하고 있었다. 윌슨은 그녀의 예술과 문학에 대한 조예에 공감하고 
있었다. 윌슨은 그녀를 만나기 위하여 로마, 뉴욕, 애틀랜타, 윌밍턴 등지로 여행을 하기도 하면서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 엘렌 액선의 아버지 역시 당시 널리 알려진 장로교회 목사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엘렌 액선은 뒤에 윌슨과 결혼하여 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처음 윌슨을 만나서 그가 세상을 뜰 때까지 사랑과 진실로 헌신했다. 그녀는 윌슨이 다른 
사람들의 공격을 받을 때는 그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고, 윌슨의 편협한 성격상의 결점을 고쳐 
주었다. 그녀는 윌슨에게 결여되어 있던,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심과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윌슨 자신도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라고 생각하여 그녀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또 엘렌은 너무 강한 성격과 자존심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그를 고독에서 구원할 수 있었다. 완고한 고집의 소유자인 윌슨을 그녀는 부드러운 여성의 
마음으로 달래 주었다. 
  엘렌의 이런 부드러운 품성은 그녀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뜬 후 장녀인 그녀가 아버지를 
포함해서 가족을 돌보게 된 데서부터 비롯했다. 엘렌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4명의 동생들에게 
어머니 노릇을 하였다. 아버지의 건강도 악화되어 한때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도 생각했다. 
1884년 5월 엘렌의 아버지는 정신병으로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그리고 엘렌과 윌슨은 1885년 6월 
24일 조지아 주에 있는 사바나 시의 장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윌슨은 많은 책을 탐독하며 연구와 자료 
수집에 전념했다. 그러나 윌슨의 세계관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원에서 맨체스터 
학파의 경제학을 심도 있게 연구하였고 미국, 특히 서부의 형성과 역사를 연구하는 한편 국가 
유기체론에 입각하여 미국의 성장 과정을 분석하고자 했다. 
  당시 존스 홉킨스 대학은 독일의 교육 제도를 수용하여  학생들에게 역사학과 정치학에 많은 
비중은 두게 했다. 이런 점이 윌슨의 관심과 맞아떨어져서 윌슨이 이 곳에서 자신의 정치 철학을 
완성할 수 있었다. 윌슨은 이 곳에서도 여전히 웅변술에 관심은 가졌다. 그러나 자기가 관심 있는 
책만 읽고 자기의 신념을 벗어나지 않는 범주의 지식만을 습득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하였다. 
아직도 그의 목적은 정치 지도자가 되는 것이었고 정치인이 되는 수단과 방법은 웅변과 
설득력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존스 홉킨스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의회 정부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이것을 졸업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그의 졸업 논문이기도 한 "의회 정부론"은 1885년 책으로 출판되었다.
  홉킨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윌슨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정치가는 글래드스턴에서 월터 
바조트로 바뀌었다. 월터 바조트는 영국 경제지의 편집장으로 영국 헌법 전문가이기도 했다. 
바조트는 보수주의자로 자유 방임주의 경제학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다윈의 생물학을 
사회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보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적자 생존의 논리가 사회에서는 
자유 방임의 원리와 결합하여 자율적 조정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바조트도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법률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였다. 당시 바조트는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다.
  홉킨스 대학에 있는 동안 바조트가 "영국의 헌법"이라는 저술을 내자 윌슨은 "의회 
정부론"이라는 저서를 낼 정도로 바조트의 사상에 심취했고 공감했다. 윌슨은 이 책에서 미국의 
법률 제정 과정, 미국 국회의 위원회의 구성 국회 의원들이 권한 행사 방법 등을 총체적으로 
살핀 다음, 미국 정부가 연방 의회에 의해서 너무나 심하게 견제되고 통제 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의 의회는 영국과 비교해 볼 때 각 상임 위원회로 분리되어 있어서 권력이 
분산되고 책임의 소재가 불분명하다고 주장하며 이의 개선책을 제시했다. 즉 윌슨은 영국의 의회 
제도를 의회 민주주의의 모범이라고 보고 미국은 영국의 의회 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각에 행정적 권력이 집중되어 있어 수상이 권한과 책임을 지며 전체 의회가 정책을 논의하여 
정책을 입안하는 영국식 의회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윌슨의 주장은 
월터 바조트를 비롯하여 미국의 정치 개혁을 주장하는 개혁파들의 영향도 많이 받은 것이었다. 
당시 많은 개혁파 인사들이 의회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부를 주장하고 있었다. 
  윌슨의 이런 정치 개혁론은 미국의 경제 구조나 사회적인 상황이 미국의 정치 형태에 미친 
영향을 고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윌슨은 이런 견해를 펼치기까지 미국 
의회를 직접 방문한 적도 없었고, 상임 위원회의 실질직 운영 과정을 관찰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다만 머리 속으로 이상적 정치 형태만을 생각한 것이었다. 오늘날 생각하면 대통령 중심제와 
의원 내각제의 장단점을 고려하지 않고 의원 내각제가 일방적으로 우수한 제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윌슨의 의회 정치론은 미국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당시 
정치의 개혁을 주장하던 사람들이나 미국의 정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윌슨의 저서가 그들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연방 우위냐 
의회 우위냐를 가지로 지속적으로 논쟁해 왔던 미국적 정치 전통의 산물이기 때문이었다. 
1860년대 이래 미국은 산업 혁명의 물결이 하나의 조류였고 이 산업 혁명을 지지하는 연방파, 즉 
공화당이 계속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성장하고 있던 노동자와 시민, 그리고 남서부의 농민들은 
자신들의 희생 위에 자본가와 부유층만 살찌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개혁파는 미국 정치 구조의 전반적 재편을 요구하고 나왔던 것이다.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지는 못했지만 윌슨은 브린마 여자대학에서 첫 강의를 맡게 
되었다. 당시 미시간 대학에서도 윌슨에게 상당히 좋은 조건으로 교수직을 제의했었다. 그러나 
윌슨은 결혼도 했고 엘렌 여사가 예술을 더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동부에 남기로 
결심하였다. 
  당시의 브린마 대학은 퀘이커교에서 운영하는 대학으로 소수의 여학생만이 수강하고 있었다. 
1885년 9월 21일 윌슨이 이 대학에 부임했을 때 학부의 전체 학생은 겨우 25명이었고 대학원생은 
7명에 불과했다. 전체 교수도 7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윌슨을 제외하고 전부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곳에서 윌슨은 지성적이고 명쾌하게 강의하는 진보적 
교수로 이름 났고 그 사이에 두 자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 곳에서 "현대 민주주의론"이라는 
저서를 써서 그의 정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윌슨은 브린마 대학에서 1888년까지 근무하고 웨스레안 대학으로 옮겼다가 1890년에 그의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다. 그리고 브린마 대학에 재직하던 1886년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 세 학교에 근무하던 16년 동안 여러 권의 책과 많은 
논문을 저술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손꼽히는 것은 1889의 저술인 "민주주의 국가론", 
1893년의 "분열과 통합론", 1896년의 "조지 워싱턴", 1893년의 "한 위대한 학자의 다른 정치론", 
1902년의 "미국 민중사"등이었다. 
  윌슨의 저서는 이렇게 다양했지만 그 학문적인 수준이나 창의성은 그다지 대단한 것은 못 
되었다. 그러나 학문적인 수준과는 상관없이 그의 강의는 항상 수강생들로 가득 찼고 많은 
곳에서 강의 신청이 쇄도했다. 그의 저서들은 대다수가 미국의 중류 계급을 옹호하고 있었고 
그의 강의는 뛰어난 연설과 합리적인 논리가 결합된 명강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보수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에 당시 미국의 어느 계층에서도 윌슨을 환영했다. 
  그러나 윌슨은 학자로서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여전히 자신은 정치인으로서 훈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윌슨의 이런 점은 교수직에 있는 동안 
두번이나 국무 차관보가 되기 위해 국무성에 로비를 한 사실로부터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의 
경력은 아직 모자랐고 정치적 영향력도 그리 큰 편이 아니어서 대통령이나 국무 장관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곤 했다. 그러나 윌슨은 실망하지 않고 강연을 통해서, 그리고 잡지나 신문에 글을 
기고하면서 당면한 정치적 문제를 예리하게 비판하고 그 개혁 대안을 제시하여 많은 공감을 
얻었다. 
  윌슨은 기업의 대형화와 독점화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연방 정부가 
미국의 기업에 너무 심하게 간섭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윌슨은 대기업과 독점 기업이 등장하면 
연방 정부는 국민의 이해보다도 이들의 이해에 의해 좌지우지될 우려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연방 정부가 기업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은 주 정부의 고유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미국 
헌법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윌슨은 동시에 노동자들의 격심한 파업과 과격한 농민 운동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하였다. 
윌슨은 미국 중산층에 자신의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대기업과 노동 운동, 농민 
운동에 대해 양비론적인 애매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명백한 근거를 바탕으로 강도 높게 
비판하거나 지지하였다. 한마디로 윌슨은 에드먼드 버크 식의 보수주의적 자유주의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윌슨은 지도자라면 대중을 교육시키고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서정적인 직관력과 시를 쓸 수 있는 감성도 갖춘 전인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지도자는 전통의 지혜를 국민에게 전수할 수 있으며 국민을 이끌어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윌슨은 미국 정치의 개혁을 주장하고 국내 문제에 관해서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대외 정책에서는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윌슨은 필리핀이나 푸에르토리코와 
같은 미국 식민지에 미국의 정치 제도, 문화 등을 도입하는 것이 식민지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윌슨은 백인이 다른 유색 인종에 비해 우수한 종족이며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식민지인들의 경제적 수탈을 
위한 문화적 외피이며 인종 차별주의라고 볼 수 있다. 

    3. 프린스턴 대학 총장 우드로 윌슨

  1902년 윌슨은 재단의 만장 일치로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기독교 계통의 
프린스턴 대학은 과거 목사가 총장을 역임했는데 목사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총장이 된 것은 
윌슨이 처음이었다. 윌슨은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프린스턴 대학을 교육과 학문의 위대한 
전당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하였다. 뒤에 윌슨은 대학 총장으로 취임사를 할 때 마치 수상이 
의회에서 취임사를 하는 것같이 느꼈다고 그의 부인에게 고백하였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윌슨은 여전히 정치에 대한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윌슨이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이 됨으로써 그의 정치적 입지는 오히려 확고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 
사회에서 대학 총장은 초당파적으로 예우를 받는 사회 지도층 인사였고 신문 등 언론은 그들의 
연설이나 글을 게재하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이다. 
  윌슨은 총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프린스턴 대학을 개혁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먼저 
당시 프린스턴이 전통적인 명문으로 인정받고 있는 하버드와 예일, 그리고 신흥 학교인 시카고 
대학과 존스 홉킨스 대학에 비해 뒤떨어진 이유가 대학의 보수적이고 안일한 자세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 대학을 능가하려면 대학 제도를 개혁하고 교과 내용을 바꾸는 한편 훌륭한 
교수를 충원하고 새로운 시설을 확충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시행하려면 약 1천 2백 
50만 달러가 필요했다. 당시 그만한 돈은 대학으로서는 엄청난 자금이었다. 윌슨은 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몸소 나섰다. 제일 먼저 동창회를 통해 모금하기 위해 윌슨은 여러 곳으로 
여행을 하였다. 시카고, 뉴욕 등에서 동창회는 윌슨의 취지를 크게 환영했다. 윌슨은 이미 
프린스턴 출신의 유명한 교수로서 미국 전역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윌슨은 프린스턴 동창회의 
이러한 환영과 열기에 자신감을 갖고 유력한 동창들을 모아 놓고 그 특유의 연설로 설득했다. 한 
번은 윌슨이 미네소타 주의 세인트폴에 도착했을 때 멀리 다코타 주에서까지 윌슨을 보기 위하여 
동창생들이 찾아왔다. 윌슨은 부유한 동창들에게 한 사람당 10만 달러씩 학교에 기증해 달라고 
호소하며 종종 자기는 대학의 기금을 구걸하는 공식적인 거지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윌슨이 대학의 기금을 모으는 동안 그의 저서인 "미국 민중사"가 출간되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저서는 자유주의적인 정치 개혁을 원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고 그는 
많은 사교계의 모임에 초대를 받는 저명 인사가 되었다. 이런 윌슨의 지명도는 대학 기금을 
조성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윌슨은 총장이었지만 프린스턴 대학의 문제는 신학이 주된 교육 과정으로 되어 있어 학생들이 
원하는 공부를 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존스 홉킨스 대학의 세미나 형태와 영국 대학들의 튜터 
제도를 프린스턴에 도입하였다. 이와 더불어 윌슨은 재단에 프린스턴 대학이 신학 대학만이 
아니라 법과 대학, 공과 대학, 자연과학 대학을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현대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리고 이런 교육 과정의 혁신을 위하여 대학의 행정 조직을 
재정비하고, 교과 내용을 개정하고, 또 학교의 시설을 확충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한편 이런 
대개혁은 동창회, 교수 회의, 재단 이사 회의 단결에 의해서만이 가능했기 때문에 윌슨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윌슨의 활약으로 그는 곧 프린스턴 대학 중흥의 지도자로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미국 대학 교육의 개혁자로 인정된다. 
  윌슨이 3년 동안 프린스턴 총장으로서 이룩한 대학 제도 개혁의 내용은 후일 미국 대학 교육의 
모델이 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윌슨이 교수 회의를 중심으로 대학을 운영하려 했다는 
점이다. 교수 회의에서 대학 운영의 전반적 사안들을 토론하고 교육 개혁 위원회를 설립하여 이 
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대학의 교과 과정을 결정했다. 이 개혁으로 대학의 교과 과정을 전문 
분야에 따라 짜는 현대적인 제도가 수립되었다. 오늘날로 보면 농과 대학, 공과 대학, 인문 대학 
등으로 상호 연관이 있는 전공 분야끼리 모아서 재정비한 것이 윌슨의 개혁안이었다. 이 같은 
방법으로 학생들은 공통의 교양 과목과 특별히 집중하게 되는 전공 과목을 이수하게 된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몇 개의 제한된 과목이지만 보다 깊이 공부하는 전문 분야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너무나 당연한 교육 과정이나 당시로서는 대단한 교육 개혁이었다. 이 
개혁을 통해서 저학년은 다양한 교양 과목을 선택할 수 있고 상급 학년은 전공 분야를 공부하게 
된다. 
  특히 이 교육 개혁에서 중요한 것은 당시의 대학 교육이 주로 교과서의 내용과 교수의 강의를 
암기하고 복습하는 방식의 교육이었는데 이것을 토론식 교육으로 전환한 점이다. 학생들은 
단순하게 교수의 지시를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의 코치와 안내로 학생들 스스로 
공부하는 교육 방법이었다. 그래서 프린스턴 대학은 많은 젊은 조교수들을 고용하여 학생들을 
지도함으로써 스스로 사고하는 교육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런 획기적인 조치에 대해 프린스턴 대학의 동창회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학교 발전을 위한 충분한 지원금은 제공하였다. 프린스턴 대학은 교육 개혁의 덕택으로 우수한 
교수와 학생이 모이게 되었고 그 명성은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프린스턴 대학이 이렇게 
우수한 대학이 된 것은 윌슨의 탁월한 능력과 판단력에 크게 힘을 입었던 것이어서 이후 윌슨은 
교육자로서 더욱 유명해졌다. 
  윌슨이 이같이 훌륭한 대학을 만드는 데는 많은 도전과 시련이 있었다. 교수들의 봉급 책정, 
진급, 새로운 건물의 증축, 연구 기금의 배분 등에서 교수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을 건설하는 동안 친구와 헤어지기도 했다. 
  1906년 윌슨은 2개의 중요한 개혁안을 선언했다. 한 가지는 새로 건립하는 대학 건물을 
사각형의 구조로 만들겠다는 방안으로 대학 전체를 이 청사진에 의해서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다른 하나는 당시에 4학년 학생들만이 이용하는 귀족적인 클럽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이 클럽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민주적인 모임이었다. 당시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중에 3학년 
내지 4학년에 이를 때까지 이 클럽에 가입하지 못한 학생은 대학 생활에서 소외되어 외톨이 
신세가 되었다. 문제는 이 클럽에 가입하는 조건이 개인의 취향과 개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클럽의 가입 조건은, 첫째 가문이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야 하고, 둘째 
재산이 있어야 하며, 셋째 상류 사회의 예절에 익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윌슨은 대학 생활에서는 진리를 탐구하는 한편 여가를 선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클럽 제도가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학생들 사이의 위화감을 조성하고 건전한 여가 
생활을 가로막았다. 더구나 이런 클럽이 있어 학생들이 자신의 창의적인 활동에 의해 성장하지 
못하고 귀족적인 생활 습관에 젖어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을 버리지 않았다. 윌슨은 이런 
퇴행적인 제도와 관습이 미래의 미국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대학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윌슨이 4개의 정방형 건물이 한군데 모이게 한 의도도 교수, 상급 학생, 하급 학생이 모두 
모여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논의해서 서로의 인격 도야를 이루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교육의 
평등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윌슨의 의지대로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1907년 6월 윌슨 총장은 재단 
이사회에 2개의 개혁안을 제출하고 이에 대한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프린스턴 대학의 전통을 
고수하자는 일부 교수들과 학생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항의하며 클럽 폐지를 반대했다. 더구나 
동창회에서도 윌슨 총장에게 반대 의사를 전달했다. 동창회마저 이렇게 반대하고 나오자 재단 
이사회도 그에게 이 문제에 대한 재고를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윌슨은 자신의 자존심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 교수 회의, 동창회 등에서 민주주의 시대의 교육에 대한 철학을 소개하면서 
강연했다. 사태가 이렇게 대립적인 분위기로 흐르자 윌슨 총장과 프린스턴의 학생들 및 동창들의 
클럽 폐지를 둘러싼 투쟁은 학교 밖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윌슨은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반대파도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평소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중시하던 윌슨 총장의 노기 어린 태도와 이를 합리적으로 
설득하려 들지 않고 강압적으로 누르는 방법에 많은 교수들이 반발하게 되었다. 전에는 윌슨을 
지지했던 교수들도 그의 곁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윌슨이 점차 클럽 문제에서 불리해지자 
사각형의 건물 설계 계획도 이제는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 문제로 윌슨은 불같이 화를 내며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던 밴다이크 교수, 히벤 교수 등과도 절교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편협하고 반대론을 용서하지 않는 그의 성격 탓으로 벌어진 히벤 교수와의 절교는 윌슨을 일생 
동안 괴롭혔다. 결국 대학의 재단 이사회가 전에 허가했던 결정 사항을 취소하자 대세에서 밀린 
윌슨 총장은 이 일을 더 이상 추진하지 못했다. 윌슨이 겪은 뼈저린 첫 패배였다. 
  그러나 윌슨은 학교에서는 패배했으나 이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고 
그래서 뉴저지 주의 민주당 지도층은 이러한 윌슨을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윌슨이 총장 재임 중 겪은 또 다른 시련은 대학원장인 앤드루 웨스트와의 불화와 갈등이었다. 
웨스트 교수는 1883년부터 프린스턴 대학에 근무하던 교수로 고전 강의를 담당했고 야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1900년 프린스턴 대학이 대학원을 설립하는 계획이 수립되었을 때 그가 
대학원장에 선임되었다. 그 당시 대학 당국은 그에게 인사 문제를 비롯해서 대학원의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주었다. 그는 명분상으로는 재단 이사회와 총장의 지시를 
받아야 했으나 실제적으로는 누구의 간섭도 배제한 채 황제처럼 군림했다. 
  윌슨의 초기 개혁 정책에 대해서는 웨스트도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건립될 
대학원 건물의 소재를 정하는 문제로 두 사람은 의견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윌슨은 대학원이 
다른 단과 대학과 긴밀히 협조해야 하기 때문에 대학의 심장부에 대학원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웨스트 원장은 캠퍼스로부터 떨어져 있는 머윅이라는 곳에 대학원의 임시 
건물을 세우자며 대학원은 특수한 연구 기관이기 때문에 조용한 외곽 지대에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8년 봄, 대학원을 캠퍼스의 중심부인 총장의 저택이 있는 곳에 건립하기로 하였다. 
동시에 대학원을 재정비하기로 결정하고 대학원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교수 회의로 이양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학원장인 웨스트는 윌슨 총장에게 다시 도전했다. 웨스트는 후원자인 윌리엄 
프록터로부터 50만 달러를 기증 받게 되었다. 그러나 프록터는 웨스트와 친분이 있어 기증을 
하긴 했지만 대신 조건을 달았다. 그것은 이 자금으로 대학원을 건립하되 대학의 캠퍼스에서 
떨어져 있는 한적한 곳에 건립하라는 것이었다. 이 문제로 학교 내의 논쟁은 다시 불붙었다. 
동창회에서는 프록터의 자선금을 받아들이기를 원했고 교수 회의는 윌슨 총장의 편을 들었다. 
결국 재단 이사회는 절충안으로 프록터의 자금을 수용하되 대학원 건립지는 캠퍼스에서 약간 
떨어진 골프장으로 정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대학원 건립지 문제로 설왕설래 하다가 결국 
윌슨의 양보로 매듭이 지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뿐만 아니라 교수들조차 윌슨파와 
웨스트파로 나뉘어 끊임없이 의견 대립을 하였다.
  1910년 9월 윌슨은 프린스턴 대학 총장직을 사임하고, 뉴저지 주의 주지사 후보로 민주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다. 이 때 윌슨의 나이가 54세였다. 윌슨은 대학에서 받은 상처를 정치에서 
만회하고자 하였다. 더욱이 윌슨에게는 교육계가 너무나 협소한 무대였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그토록 꿈꾸던 정치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4. 우연히 찾아온 행운

  윌슨의 정치 입문은 그에게는 일종의 행운이었다. 그는 예전부터 정치가가 되려고 애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데 윌슨이 학교에서 개혁을 추진하다가 동창회, 동료 교수 등과 대립할 
때 학교 안에서는 패배했지만 밖에서는 많은 시민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고 있었다. 때마침 
뉴저지 주의 민주당 지도부는 자신들을 대표할 참신한 정치인을 찾고 있었다. 당시 뉴저지 주의 
민주당은 시민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었다. 뚜렷한 정치적 성과는커녕 오히려 부정 부패한 
인물들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당의 지도부는 선거 자금의 동원도 어려울 
정도로 지지를 잃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다수 민주당원들은 지도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이런 불만은 노동자층에서 심하게 터져 나왔다. 
  미국의 언론은 뉴저지 주의 대기업체들의 천국이라고 조롱하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몇 개의 
대기업이 정당의 고위층들을 매수해서 주 의회의 정책 결정 과정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반면에 정당의 고위층들은 풍부한 자금을 이용하여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후보들을 지명하여 공직에 앉혔다. 그리고 승리한 정당은 서로 짜고 
공직을 나눠 먹기에 정신이 없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시민들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기존의 정치가들을 불신하게 되었다. 윌슨이 학교의 개혁을 추진할 무렵 시민들의 불만과 불신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래서 이들 정치 개혁을 바라는 서민의 마음은 윌슨의 학교 개혁에 박수 
갈채를 보내고 지지했던 것이다. 
  이 때 윌슨의 저서인 "미국 민중사"를 출판한 조지 하베이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하베이는 
뉴저지 주에서 하베이 대령으로 알려졌으나 군대 경력은 없는 사람이었다. 하베이는 현실 정치에 
능숙한 사람으로 후일 1920년에 워렌 하딩을 대통령 후보로 만드는 데 성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베이는 당시 민주당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인데 윌슨과 같은 개혁적인 인물이 민주당이 권력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베이는 당시 민주당의 지도자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으로부터 윌슨 같은 인물이 당권을 인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윌슨의 모든 저서를 탐독하며 예의 주시하였다. 
  하베이는 당시 인기가 있던 주간지인 "하퍼"지의 경영주로 윌슨의 글을 13주 동안 연재하기로 
하였다. 그는 윌슨을 당시 유명하던 뉴욕의 로터스 클럽에 연사로 초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뒤에 하베이가 편집하는 "하퍼"지와 "북미 리뷰"지는 윌슨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해야 
한다고 단언하기도 하였다. 
  당시 미국 금융계의 거물인 J.P. 모건 같은 사람도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나 민주당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윌슨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같이 
윌슨에게 관심을 가진 인사들이 1907년 윌슨을 미연방 상원 의원 후보로 지명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 
  윌슨은 프린스턴 대학 총장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외부 초청을 받아 공공 정책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히는 연설을 많이 하였다. 그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보수성이 있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연방 정부는 기업체를 규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기업의 규제권은 전통적으로 주 정부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연방 
정부의 기업에 대한 간섭은 위헌이며 재산권에 대한 침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또 그는 물론 
대기업의 횡포는 개탄할 만한 것이었지만 대기업의 악덕은 기업인 개인의 악성에 기인한 것이지 
기업체 자체의 악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법을 제정해서 악덕 기업인과 기업에 
악성을 제공하는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하였다. 
  윌슨은 색다른 자본주의 윤리관을 설교하기도 하였다. 그는 노동 조합 운동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노동 조합이 개인이 기업과 자유로운 계약을 맺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물론 악덕 기업가도 많이 있으나 자본 자체에 악성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본가들은 국민 
전체를 고려하여 자본을 사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무시하고 정부가 규제하는 것은 
자유라는 건국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에 기업인들은 자율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도 했다. 윌슨은 
또 은행의 설립 목적은 금융의 이해 관계보다는 국민들의 도덕적인 기초를 세우는 것을 지원하는 
데 있는 것이므로 은행가들은 계급적 입장을 떠나서 사려 깊게 애국적인 견지를 유지해야 하며 
대기업가, 중소 기업가, 가난한 행상인 등 모든 국민들에게 차별 없이 융자를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윌슨의 자본주의 윤리는 오늘날 생각하면 유치하고 비과학적인 것이지만 당시의 
대기업인들에게는 환영할 만한 견해였다. 자본가들은 행정부의 의지 없이 사법부의 판결로만 
자신들을 처벌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연방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신들을 규제하는 것보다 자유 방임적이며 도덕론적인 윌슨의 
논리를 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베이는 윌슨의 이런 견해를 그의 출판사에서 출간하여 선전하곤 하였다. 그러자 윌슨의 개혁 
성향 때문에 꺼리던 많은 사업가들이 윌슨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하베이는 이 같은 
소식을 당시 뉴저지 주 민주당의 당수인 스미스에게 알리고 그를 설득하였다. 그러잖아도 윌슨을 
새 주지사 후보로 고려하고 있던 스미스는 이런 지원이 있자 곧 윌슨을 민주당의 주지사 후보로 
지명하려고 하였다. 
  이제 윌슨에게 오랜 정치적 꿈을 활짝 펼칠 기회가 왔다. 더구나 이 무렵 공화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중심으로 한 진보파와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로 갈라져 분당의 
위기에 있었고 1909년 태프트는 대기업가에게 특혜를 주는 '페인-알드리치 관세법'을 제정하여 
중서부 지역의 농민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고 있었다. 1910년에 접어들면서 중서부 지방의 
민주당원들은 윌슨을 주지사 후보로 지지한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표명하였다. 이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자 윌슨은 스미스에게 만일 주지사에 당선되어도 기존의 당 조직을 변경하지 않겠다고 
은근히 미끼를 던지기도 하였다. 이제 스미스는 윌슨을 지명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민주당의 자파 
세력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윌슨의 지명에 갑자기 걸림돌이 나타났다. 민주당 내의 진보 세력이 윌슨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윌슨을 당의 부패한 기존 조직이 내세운 꼭두각시로 보았다. 진보파는 
윌슨이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이민자들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윌슨으로서는 
다행이었던 것이 자금력, 조직력 등에서 스미스는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스미스는 당의 진보 세력과 타협하기 위해 그들이 당 선거 강령 기초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마련되자 마침내 당의 전당 대회가 열려 윌슨을 민주당 주지사 
후보로 지명하였다. 
  윌슨은 진보파의 지원을 받아야 선거에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의 
지명을 수락하는 연설에서 그는 분명히 말했다. 
  "저는 주지사의 지명을 진심으로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의 지명을 받은 이상 저는 
특정인이 아니라 국민 모두를 위하여 투쟁하겠습니다."
  이런 약속에 진보파는 만족해 했고 윌슨은 일반 주민들이 진보파가 내세우는 개혁적인 강령을 
선호한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선거 공약을 결정했다. 윌슨은 지난 10여 년 동안 전 미국에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이 중요한 대세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윌슨도 
정치 개혁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윌슨은 전 당원이 직접 참여하는 예비 선거, 국민이 직접 
상원 의원을 선출하는 직접 선거, 공공 요금의 책정을 공정 거래 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것 등의 
개혁 정책을 내세웠다. 
  윌슨의 개혁 약속이 주민들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졌고 공화당 후보는 분열되어 출마하는 
바람에 윌슨은 무난하게 뉴저지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윌슨은 주지사에 당선되기는 하였으나 
주지사로 취임도 하기 전에 정치적 문제에 봉착했다. 
  윌슨을 도와 준 스미스는 연방 상원 의원이 되기를 원했다. 당시로서는 주 의회가 연방 상원 
의원을 선출하였는데 민주당이 새로운 선거를 통해 주 의회의 다수당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윌슨에게 그의 협조에 대해 보상을 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진보파는 
부패한 스미스를 반대하고 브라이언파이자 진보파인 제임스 마틴을 상원 의원으로 선출하려고 
했다. 윌슨은 자기를 정치인으로 키워 준 스미스를 도와야 하느냐, 아니면 그를 배반하더라도 
미래를 위하여 마틴을 도와야 하느냐로 고민하였다. 윌슨은 만일 진보파, 중도파를 뉴저지 주에서 
잃으면 다음 대통령 후보가 되는 데에 큰 지장이 있다고 계산하고 스미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았다. 
  의리가 없는 윌슨에게 화가 난 스미스도 상원 의원 후보로 나와 윌슨에게 도전했다. 윌슨은 
최선을 다하여 마틴을 도왔고, 결국 마틴이 연방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주지사에 취임한 후 윌슨은 서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지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초당파적으로 민주당, 공화당을 가리지 않고 서민들과 밀착되어 있던 진보파들과 주 정부의 
정책 수립에 관해서 자주 의논하였다. 윌슨의 첫 과제는 주의 공직자를 당원들의 선거를 통하여 
선출하는 개혁안을 주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이 안은 부패를 척결할 수 있는 첫 
관문이기도 했는데 그는 주민들의 여론을 배경으로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부패 금지법, 부패한 관리의 소환법, 군 정부의 개선안 등 주 정부를 개혁하는 많은 
법안을 입안하여 주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렇게 정치 개혁에 힘을 쏟자 1911년 5월에 이르러서는 뉴저지 주가 전국에서 정부의 개혁 
모델이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같은 개혁을 짧은 시간에 신속히 이룩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개혁의 성과로 윌슨은 개혁 정치인으로 그 명성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윌슨을 풋내기 교수로 알고 호락호락하게 보았던 당의 실력자들은 쓴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윌슨은 과거의 때묻은 정치인들과 과감하게 절연을 하며 마치 크롬웰처럼 
종교적인 자세를 취하며 공정하고 엄격하게 인사 조치를 하고 법 집행을 하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브라이언파와 연합하여 자기 세력을 확대하여 갔다. 이런 태도는 당연히 
대자본가와 은행가들로부터의 후원금을 끊기게 만들었다. 의연한 윌슨의 자세는 그가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서서 자금 각출을 할 때도 주로 프린스턴 대학 동창회의 모금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제까지의 정치인들이 지니지 못한 든든한 지원군, 즉 
민중이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곧고 깨끗한 정치인으로 칭송 받았고 미국 구민은 그를 
진정한 지도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윌슨을 대통령 후보로 삼는 것을 거부할 민주당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의 
늪에는 언제나 함정이 도사리고 있고 정치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1912년에 접어들면서 
윌슨에게는 점차 경쟁자들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중 앨라배마 출신의 언더우드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경쟁자였다. 그는 전통적인 남부 보수주의 강령으로 민주당의 남부 지역의 
선거인단을 거의 독점하였다. 그리고 당시 연방 하원 의장인 미주리 주 출신의 클라크가 민주당 
실력자들의 지지를 받고 나왔다. 클라크에게는 당시 신문왕인 랜돌프 허스트가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허스트는 윌슨의 저서에서 보이던 많은 논리적 약점과 허점을 뽑아 내 윌슨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았다. 이렇게 되자 클라크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부상되었다. 그는 1912년 
5월경 있었던 각 주의 예선전에서 계속 승리하여 민주당 전당 대회 대의원의 과반수를 획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윌슨의 지지자들도 최선을 다했고 그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윌슨은 남부와 서부를 
중심으로 한 펜실베니아, 텍사스, 위스콘신, 뉴저지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전당 대회 
대의원의 3분의 1을 훨씬 넘는 대의원 수를 확보하였다. 이 3분의 1이상의 대의원 확보는 매우 
중요했다. 당시의 당규약상 전당 대회 대의원의 3분의 2이상의 지지표를 얻어야 대통령 후보로 
지명 받을 수 있었다. 결국 윌슨, 클라크, 언더우드의 3파전이라고 볼 때 윌슨이 3분의 1 이상의 
대의원을 확보한 것은 최소한 클라크의 지명을 일차전에서는 봉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민주당 전당 대회는 메릴랜드 주의 볼티모어에서 열렸다. 윌슨과 그의 지지자들은 보수적인 
클라크의 승리를 막기 위하여 처음에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파와 협상했다. 브라이언은 과거 
두 번이나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갔던 민주당의 진보파에 속했다. 브라이언은 과거의 연속된 
실패로 많은 대의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윌슨파와 연합하기로 결정했다. 윌슨은 
다시 언더우드와 협상을 제기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투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후보 지명에 필요한 표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10차 
투표가 끝났을 때 하원 의장 클라크가 다수를 넘는 대의원을 확보했으나 3분의 2에는 못 미쳤다. 
브라이언은 전당 대회에서 자기의 지지표를 윌슨에게 이양한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절대 
지지를 못한다고 선언했다. 이 같은 선언은 클라크를 자극했으나 26차의 투표가 끝났을 때는 
클라크의 지지표가 점차 줄어들어 과반수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46차 투표를 거쳤을 
때 당내의 소수파들을 구슬 꿰듯이 모은 윌슨이 3분의 2를 넘기는 데 겨우 성공하였다. 1912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나갈 후보로 윌슨이 뽑히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5. '신자유론' 강령을 발표하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윌슨은 본격적인 선거 운동으로 시작했다. 공화당은 현직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재지명했다. 그러나 공화당은 여기서 심각한 내분을 일으켰다. 
전직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중심으로 한 공화당 진보파는 태프트를 절대 지지할 수 
없다고 선언한 다음, 새로 진보당을 창당한 것이다. 그래서 진보당은 루스벨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결국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 공화당, 공화당의 진보파가 결성한 수사슴당(진보당의 상징인 
수사슴을 가리켜 부른 이름)과의 3파전이 되었다. 
  윌슨은 민주당 내에서 소수파로 시작하여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까지의 경험을 살려서 다양한 
이해 관계의 연합체를 형성했다. 윌슨의 선거팀은 개인당 1달러씩 민주당에 기부하는 소위 1달러 
캠페인을 시작하여 국민들과의 일체감을 조성하면서 큰돈은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조용히 
거두어들이는 작전을 폈다. 동시에 중서부의 표를 겨냥해서 선거 본부를 시카고에 두었다. 
민주당은 카톨릭, 유태인, 흑인, 노동자, 외국 이민자 등을 연결하는 연합 공동체를 형성했다. 
  루스벨트는 신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미국 경제의 강화, 산업의 현대화, 연방 정부의 
광범위한 권한의 적극적 이용 등을 주장하며 선거 운동을 전개했으나 조직력이 약하여 고전하고 
있었다. 태프트 대통령은 당내의 내분과 그의 보수적인 정책으로 현직 대통령이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윌슨은 선거 운동을 하는 동안 기대치 않았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전국 노동 조합 위원장인 
새뮤얼 곰퍼스가 전에는 루스벨트를 지원했으나 이번 선거에서는 윌슨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여기에 위스콘신 주의 상원 의원이며 진보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로버트 라포레트가 
공화당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윌슨을 도왔다. 라포레트 상원 의원 덕분에 상당수의 공화당 
진보파가 윌슨 진영으로 넘어왔다.
  1912년 8월에는 당시 최고의 법률가로 손꼽히던 유태인 루이스 브랜다이스가 윌슨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섰다. 브랜다이스는 노동 조합과 기업 양측에서 인정받는 법률가로 
우드로 윌슨의 '신자유론' 강령을 수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윌슨을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고 선거 운동에서도 크게 도와 주어 그가 대통령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에드워드 하우스였다. 주위 사람들에게 하우스 대령으로 알려진 그는 
1911년 가을에 처음 윌슨을 만난 다음 이 사람이야말로 다음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하여 윌슨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발벗고 나섰다. 두 사람은 곧 급속히 가까워졌다. 하우스는 
텍사스에서 하원 의원을 여러 차례 역임했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미국의 재벌들과도 친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민주당에서도 막후 실력자로 인정받고 있었고 그의 인간 관계는 
광범위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윌슨의 참모로 규정하고 미국의 남부와 뉴욕의 증권가 큰손들을 
동원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윌슨이 들고 나온 '신자유주의'는 윌슨이 평소에 주장하던 내용이었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정부의 역할이 증가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의 역할은 경찰의 
역할로 만족해야 한다. 경제 문제에 정부가 개입하고 법을 제정하여 경제 행위를 규제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부정으로 기업 활동의 위축을 가져온다. 따라서 연방 정부는 최소의 권한만 갖고 
대부분의 문제는 주 정부가 해결해야 하며 나아가 계급간의 갈등과 같은 사회 문제는 당사자끼리 
인간의 양심에 따라, 선의의 경쟁과 논쟁을 통해 풀어 나가야 한다. 이런 것이 신자유주의의 핵심 
내용이었다. 
  오랫동안의 선거 운동을 거쳐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윌슨은 4백 35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고, 
루스벨트는 88명, 태프트 대통령은 8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여 윌슨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국민들은 이제 특권층 중심의 정책이 더 이상 지속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윌슨은 각료 인선에도 당내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배치했다. 국무 장관에 
브라이언, 재무 장관에 윌리엄 맥카두, 노동부 장관에 노동 조합 간부였던 윌리엄 윌슨, 체신부 
장관에 텍사스 출신 하원 의원인 앨버트 버레손, 비서실장에 천주교 신자인 조셉 투물티를 각각 
임명했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의 정책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여전히 에드워드 
하우스였다. 그는 공식적인 직함은 가지지 않았으나 윌슨의 지시에 따라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를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를 막후에서 교섭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윌슨 
대통령은 한 때 그를 제2의 실력자, 또는 자신과 가장 비슷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그를 믿고 
있었다. 
  대통령으로서의 윌슨에게 주어진 첫 과업은 수입 관세의 인하 문제였다. 당시 미국은 해외에서 
수입하는 물품에 대한 관세가 높았다. 즉 국내 산업을 보호한다는 목적에서 생긴 관세법이 
서민들에게는 물건 값만 올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높은 관세율로 서부의 농민들이 필요로 하는 
농기계 값도 비쌌고 도시민들의 일상 소모품도 가격이 높아서 서민들은 불만이 대단하였다. 이 
관세법은 물론 동부의 생산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었으나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이 법이 
일부 부유한 특권층만을 위한 특혜 조치이기 때문에 관세율을 낮추거나 폐지하기를 원했다. 
  윌슨은 이 관세법이 서민들의 불만을 사고 있는 이유를 들어 관세율 인하를 국회에서 
역설했다, 그리고 미국 산업은 이제 불필요한 정부의 보호에 의지하지 말고 자체의 기술을 
개발하고 경영 합리화를 꾀해 외국 상품과 경쟁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윌슨의 열성적인 
설득, 그리고 의원들에 대한 로비 활동 조사와 암묵적인 위협으로 1913년 5월 수입 관세율을 
11퍼센트 이하로 인하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윌슨은 기업가들과 손을 잡고 활동하고 
있던 의원들의 반대를 꺾고 과거 수없이 제안했다가 부결된 개정법안을 불과 몇 개월 만에 
양원에서 통과시켰다. 
  이어서 윌슨의 개혁 조치는 시대 착오적인 낡은 화폐 제도와 은행 체제를 현대화하는 작업으로 
나아갔다. 윌슨 대통령은 과감한 결단과 집요한 노력에 의해 1913년 12월에 중앙 연방 은행법을 
통과시켰다. 오늘날의 미연방 지불 준비 은행(Federal Reserve Board)이 이 법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이 법안으로 남북 전쟁으로 조급하게 만들어진 은행 제도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약간의 자본금만 가지고 일정액의 국고 채권을 인수하면 은행 설비 허가를 
받아서 채권 상환을 하며 은행권을 발행하던 무정부 상태와 같은 은행 제도였는데, 이제 연방 
중앙 은행을 중심으로 각 지역별로 12개의 연방 지불 준비 은행을 설립하여 각 은행의 지불 
보유금을 관리하게 되고 이들 연방 지불 은행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연방 지불 준비 이사회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이제 중앙 연방 은행이 미국의 모든 은행을 규제하게 됨으로써 정부가 개인 
은행의 운영을 감독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연방 중앙 은행이 산업, 특히 농업이나 공업 등 국책 
산업을 지원하고 필요에 따라 금융 통화량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연방 중앙 은행은 화폐만이 
아니라 신용 통화 및 채권까지도 관리하게 되었다. 이 조치로 그 동안 금융 자본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특권적 은행 제도가 정부 책임하의 공공적 은행 제도로 개선되고 국민들의 원성을 받던 
대금융가와 대기업인, 그리고 부패 정치인의 삼각동맹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세번째로 윌슨 행정부가 개혁했던 사항은 대기업의 독과점 행위를 연방 정부가 규제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대기업들은 중역 겸임의 방식을 통해 여러 개의 기업을 차지하고 일종의 
트러스트를 형성, 부당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 즉 몇몇 대기업 중역이 여러 회사의 중역을 
겸임하며 회사들 사이의 연대 보증은 물론 물품의 상호 구입, 자금의 상호 대여 등을 통해 
독과점 기업군을 형성하고 제품의 가격 조작을 일삼으며 엄청난 이윤을 남기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중소 기업체들은 불공정한 거래를 감수해야만 했고 심지어는 대기업에 흡수되기 
십상이었다. 이 문제를 시정하기 위하여 윌슨 행정부는 트러스트 금지법인 '클레이턴법'을 
제안하여 통과시켰다. 동시에 윌슨은 1914년 연방 통상 규제 위원회를 창설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연방 통상 규제 위원회는 몇몇 대기업의 가격 협정이나 소매상에 대한 일방적 가격 
요구 등 불공정한 상행위를 규제하고, 중역 겸임을 금지함으로써 대기업의 횡포를 제재하게 된 
것이다. 이 법안은 당시로서는 혁명에 가까운 개혁 조치로 대기업은 이제까지 누리던 특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문어발식 기업 독점을 더 이상 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 법에는 
노동 조합의 파업에 대한 일방적 규제를 완화하여 국가적 위기 또는 중대한 산업 질서의 파괴가 
아닌 한 파업 금지 명령을 함부로 내릴 수 없게 하였다. 노동 조합 지도자 곰퍼스는 그래서 이 
법을 '노동 자유의 헌장'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획기적인 개혁 조치를 취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윌슨은 1916년 봄에 또 하나의 
중요한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윌슨 대통령은 그의 당선을 크게 도왔던 루이스 브랜다이스를 
미연방 대법원의 대법관으로 지명하고자 했다. 원래 윌슨은 브랜다이스를 법무 장관에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민주당 내의 반발로 실패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의 대법관 지명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반대하였다. 브랜다이스가 유태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이런 
반대자들은 대다수가 보수파들이었다. 윌슨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진보파를 동원해서 
브랜다이스의 대법관 임명을 상원에서 승인하게 하려는 작전을 펴서 결국 성공하였다. 
  윌슨은 진보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노동자를 위한 법안도 제정하였다. 윌슨은 8시간 노동제를 
의무화하고 특히 철도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하고 10시간의 보상을 받도록 하는 노동법을 
마련하였다. 과거와 달리 윌슨은 성장하고 있는 노동자의 힘을 새롭게 인식했고 그래서 노동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 문제에 대한 개혁 조치와는 달리 윌슨 행정부가 부딪친 최대의 난제는 
외교 정책이었다. 윌슨 행정부가 그 틀을 잡은 다음에는 외교 정책에서도 대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경험 부족으로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외교 경험이 
적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브라이언 국무 장관이 외교를 담당한 것이었다. 외교에 경험이 없는 
국무 장관 브라이언은 해외의 중요한 외교관을 그가 정치적 신세를 진 정치인들로 임명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외교 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들이었다. 이렇게 되자 윌슨 행정부는 해외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하였고 나아가 곳곳에서 실책을 연발했다. 
  당시 국제 정세는 복잡하게 얽혀 가고 있었다. 유럽 열강은 산업 혁명 후 제국주의 정책을 
노골화시키며 상호 대립하여서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 가고 있었다. 남미, 중동, 아시아 등 여러 
지역에서 식민지 쟁탈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첨예한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윌슨 행정부는 미국의 힘은 '도덕적 원칙'에 있다고 
선언하면서 군비를 확장하지 않았다. 윌슨은 "미국의 세계에 대한 임무는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으며 따라서 세계의 갈등에 미국은 중립 정책을 지킴으로써 세계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만일 필요하다면 미국은 열강 사이의 협상을 조절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또 영미법과 같이 도덕으로 무장한 헌법을 국제 정치에서 실현해야 하며 
후진국은 미국의 이러한 헌정주의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같은 애매한 원칙의 선언은 냉혹한 국제 정치를 모르는 한낱 이상론에 불과했다. 
더구나 윌슨 행정부는 이전 행정부에서 외국과 협상한 조약을 취소하거나 재협상함으로써 미국 
외교의 지속성을 파기했다. 동시에 니카라과, 산토 도밍고, 아이티 등 남미에 대해서는 원칙이 
없는 무력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멕시코에서 일어난 혁명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미국은 불필요한 간섭을 하게 되었고 스스로 천명한 도덕적 원칙인 중립성을 지키지도 못했다. 
  이렇게 윌슨은 원칙 없이 외교 정책을 들쑥날쑥 펼치다가 외교 정책의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다행히도 하우스 대령이 윌슨의 이러한 정책 변화를 지지하여 
아메리카 대륙 각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범미주 조약을 맺을 것을 제안하자고 하였다. 윌슨은 
1914년 12월 하우스를 특사로 파견하여 남미 국가들과 이 문제를 협상하여 범미주 조약을 
조인하도록 하였다. 하우스 대령은 윌슨의 특사로 맹활약하여 1916년 1월에 범미 대륙 과학자 
회의를 열고 이 자리에서 범미주 조약을 공표하기로 하는 비밀 합의를 이루고 돌아왔다. 
  윌슨과 하우스는 과거의 먼로 선언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어서 남미 국가들의 
반감을 사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편 이 범미 조약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각국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여 하나의 국제적 지역 블록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윌슨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범미 조약이 발효되면 이런 평화적 국제 관계가 유럽인들에게도 파급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윌슨의 이런 바람은 냉정한 국제 관계에서 성공을 기대할 수 없는 도덕적 이상론에 
불과했다. 
  한편 이 무렵 윌슨 행정부는 멕시코의 산적 두목인 판초 비야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1916년 
1월 판초 비야는 멕시코의 열차를 기습하여 미국인들을 납치, 학살하였고 심지어 미국의 영토인 
뉴 멕시코까지 침투하여 19명의 미국인을 학살하였다. 이런 만행에 대처하기 위하여 윌슨은 
미국군을 멕시코 영토 내로 진입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판초 비야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미국군은 멕시코 영토까지 진입했으나 판초 비야를 체포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국경 
침범으로 양 국가는 반목하게 되어 미국과 멕시코는 거의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고 있었다. 특히 
미국인들 중에 멕시코에 투자한 미국인이나 천주교 교도들은 미국이 멕시코와 일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평화주의자인 윌슨은 마지막까지 멕시코와 협상을 하여 멕시코 정부의 
묵인하에 미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이 일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영리한 판초 비야는 체포되지 
않았고 미군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멕시코 영토에서 철수하고 만다. 
  윌슨 대통령이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런 온건한 조치로 끝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이었다. 
첫번째는 미국은 아직도 국내의 제도 개혁을 완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멕시코와 전쟁을 하면 
무고한 국민들만 희생시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윌슨의 이러한 처사는 곧 현명했음이 
드러났다. 미국은 멕시코를 단숨에 정복했을지는 모르나 그랬을 경우 멕시코 민중의 저항은 물론 
유럽 열강의 개입, 남미 국가들과의 관계 단절이 일어나 득보다 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윌슨 행정부가 유럽의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걱정하기 시작한 것은 1914년 6월에 
이르러서였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페르디난트 공이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에 의해 저격 당하였다. 이런 사태는 그러잖아도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로 이루어진 3국 동맹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 이루어진 3국 협상 사이의 팽팽한 
대립에 불을 질렀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공화국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이런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미국 경제의 중심부인 뉴욕의 증권 
시장은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선포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윌슨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윌슨 대통령은 당시 멕시코 등 남미 국가들과의 외교 문제에 전념하고 
있어서 유럽의 문제는 그 다음의 문제라고 여기고 이었다. 윌슨은 그같이 작은 문제로 
유럽인들이 극심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전쟁에까지 이른 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14년 8월에 접어들면서 유럽 대륙은 상호간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독일군은 벨기에 국경을 
단숨에 넘어서 벨기에 군을 섬멸하고 벨기에를 점령했다. 이렇게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의 
회오리를 부르며 전 유럽 대륙이 총성과 화염으로 덮여 있던 8월 6일 윌슨 대통령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그의 부인 엘렌 여사가 오랜 기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윌슨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던 부인을 잃은 비통한 마음을 달랠 새도 없이 이 위기 
국면에 직면한 국사에 전념해야 했다. 유럽의 전쟁에 대하여 윌슨은 우선 국내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교전국들에 대하여는 중립을 천명했다. 동시에 유럽의 전쟁에 미국이 
중재자가 되겠다고 제의했으나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여기에 미국 국민들은 미국이 유럽의 전쟁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동부를 중심으로 한 상공업자들은 참전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유럽과 아무런 
관련도 맺고 있지 않던 서부와 내륙의 농민들은 전쟁 참여를 반대하였다. 영국의 문화와 전통에 
깊이 공감하고 있던 윌슨은 심정적으로는 영국을 지지하고 싶었으나 대통령으로서의 그는 객관적 
현실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미국이 관망하고 있을 때 유럽의 전쟁은 대규모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동맹국이 되었고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터키가 한편이 되었다. 윌슨은 유럽의 
전쟁에 미국이 구태여 참견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들어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인 중립 
노선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윌슨은 참전을 주장하는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강대국들의 
이기심과 상업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욕망이 유럽을 부패하게 만들고 전쟁으로 이끌었다는, 다분히 
도덕적인 논리를 들고 나왔다. 
  미국은 이 세계적인 전쟁에 중립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참전국들에 전쟁 물자를 수출하여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었다. 특히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에 막대한 식량과 의류 등을 팔아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프랑스의 마른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음과 싸우고 있을 때 미국의 카바레와 
술집은 밤새 불야성을 이루며 흥청거렸다. 그러나 이런 부도덕한 어부지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군은 영국의 해양 봉쇄 때문에 물자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영국 근해에 
잠수함과 어뢰를 대거 투입하여 어떤 나라의 선박이라도 구역을 침범하면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마침내 이 선언이 현실로 나타난 사태가 1915년 5월에 벌어졌다. 영국의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가 독일의 잠수함 공격에 의해서 침몰되고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중에 상당한 숫자가 
미국 시민들이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의 독일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었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은 이 때까지도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윌슨의 이런 유화적 태도에 불만을 
품은 국무 장관 브라이언은 곧 사임하고 만다. 윌슨은 후임으로 로버트 랜싱을 국무 장관에 
임명하고 중립 정책을 계속 고수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희생은 점점 늘어났고 그에 따라 참전의 목소리는 높아져 갔다. 1917년 2월 
독일이 멕시코에 각서를 보내 미국이 참전하면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발각되었고(치머만 각서 사건), 그 해 3월 24일에는 독일의 잠수함이 미국의 상선 서섹스 호를 
경고도 없이 격침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제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대결 국면으로 
들어갔다. 1917년 4월 결국 윌슨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6. 민족 자결주의를 내놓은 국제법 학자

  윌슨 대통령은 전쟁에서 중립 정책을 채택하고 평화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상황은 그를 
전쟁으로 몰고 갔다. 윌슨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데다가 어떤 일을 하게 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답게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이제까지의 유화적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참전 
태세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윌슨은 연방 정부의 관료화와 비대화로 권력의 집중이 일어나면 
이로 인해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최소 정부를 추구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비상 사태는 연방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윌슨은 자신이 반대했던 연방 정부 권한의 증대를 앞장서서 시행했다. 윌슨은 
이런 점에서 또한 현실적인 정치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윌슨은 전쟁 준비를 하는 동안 두번째 부인을 맞이하였다. 윌슨의 새 부인이 된 에디트 컬트 
여사는 윌슨의 주치의 그레이슨씨가 윌슨 대통령에게 소개한 사람이었다. 윌슨은 엘렌 여사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당장 그를 돌봐 줄 여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에디트 여사와 만났을 때 
그녀의 진실하고 꼼꼼한 성품에 곧바로 교제를 시작했다. 이런 실정을 모르는 일부 정치인과 
언론사에서는 부인이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새 여인과 교제한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이런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1916년 12월 18일 윌슨과 에디트 여사는 결혼식을 올렸다. 에디트 
여사는 윌슨이 필요로 하는 정신적 안정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엘렌 여사를 잃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던 윌슨의 고충을 따뜻하게 감싸며 극진하게 보살펴 주었다. 
  윌슨은 1916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윌슨의 재선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는 미국이 유럽의 전쟁에 휘말리는 위험을 막았고 미국을 안정과 평화 속에 있게 한 공로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화와 중립을 내세워 재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득이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전쟁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객관적 상황이 요구한 
일이었다. 
  미국이 참전할 무렵 연합국측은 전선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 참전에 필요한 
준비가 부족했다. 먼저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윌슨은 병력 충원을 위해 징병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군은 약 3백만 명의 병사를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군사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어서 시급하게 이들의 훈련을 강화해야 했다. 
그래서 약 1년 정도 훈련을 쌓고 1918년 가을에는 백만 이상의 군을 유럽에 파견할 수 있었다. 
  유럽 파견군의 총사령관으로 존 퍼싱 대장이 임명되었다. 해군 사령관으로는 윌리엄 심스 
제독이 임명되었다. 이와 동시에 윌슨 대통령은 식량청을 신설하여 허버트 후버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후버는 다양한 식량 증산 정책을 시행하여 유럽 전선에 충분한 군량을 제공함으로써 
전쟁을 훌륭하게 지원하였다. 
  1917년 7월에는 전쟁 산업 위원회를 신설하여 전쟁에 필요한 물품과 생산품을 통제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철도를 새로 설치하고 도로를 확충하여 생산품의 신속한 공급을 돕게 했다. 
동시에 전시 기구들을 운영하기 위하여 개인 기업의 중역들을 대거 영입하여 국가의 공기업에 
봉직하도록 하였다. 전시 여론을 통제하기 위하여 공공 정보 위원회도 창설하였다. 이 기구는 
언론 등을 검열하는 한편 정부의 비밀 정보가 적에게 빠져 나가는 것을 감시하였다. 
  1917년 미국 의회는 국가 보안법을 통과시켰다. 간첩 활동, 태업이나 파업 활동 등 고의적인 
반국가 행위를 처벌하도록 한 것이다. 어찌 보면 윌슨은 전쟁 동안 많은 악법들을 제정하여 그가 
그토록 추구했던 자유와 민권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비극적인 
대통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강력한 통치권을 바탕으로 전시 동원 체제를 빠른 
시간 내에 구축하여 유럽 전선으로 투입하였다. 미군이 대거 전선으로 투입되자 전세는 곧 
역전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풍부한 군수품과 대규모 병력을 바탕으로 동맹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더구나 미국 해군이 기동력 있는 구축함으로 독일 잠수함을 무력화시키자 전쟁은 아연 
역전되었다.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겨로가 독일군은 서부 전선의 군을 빼서 동부 전선으로 투입할 여유가 생겼고 미군의 
참전으로 뒤바뀌던 전세를 다시 만회하기 시작했다. 
  윌슨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18년 1월 8일 서둘러 전후 평화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14개조로 정리하여 발표했다. 오늘날 '14개조의 평화 원칙'이라 부르는 이 원칙은 
자유주의와 민족 자결주의에 따라 전후 세계 질서를 재정립하려는 지침과 같은 것이었다. 
  14개 항목 중에 5개 항목은 보다 넓은 원칙을 표명한 것으로 1) 공개 외교, 2) 평화시나 전쟁시 
항해의 자유, 3) 군비 축소, 4) 자유 무역의 원칙, 5) 식민지의 요구에 대한 공정한 판결 등이다. 
나머지 9개 항목은 민족 자결의 원칙을 이행하기 위하여 영토적 해결을 표명하는 것으로 6) 
독일군의 러시아 영토로부터의 철수, 7) 벨기에의 독립, 8) 알사스 로렌 지방의 프랑스 반환, 9) 
폴란드의 독립과 해양 출구 제공, 1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여러 민족의 독립, 11) 이탈리아 
국경의 변경, 12) 터키 제국 내 각 민족의 자결과 다르다넬스 해협의 자유 통상, 13) 발칸 지역의 
재조정, 14) 영토 보전을 상호 보장하기 위한 국제 연맹 창설 등이다.
  이 14개 조항이 발표되자 연합국측은 즉각 환영의 뜻을 나타냈고 동맹국측은 이것을 휴전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그 해 10월 패전의 기미가 확실해지자 독일은 미국에 휴전을 제의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설득하여 1918년 11월 마침내 휴전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켰다. 
  1919년 윌슨 대통령은 파리 강화 조약을 협상하기 위하여 프랑스로 떠났다. 그런데 그가 
파리로 갈 때 미국 대표단을 선정하는데 실수를 했다. 윌슨은 대표단에 전통적 관례에 따르지 
않고 상원 외교 위원이나 야당 의원을 한 명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윌슨 대통령은 이 강화 
회의의 중요성에 비추어, 당시 상원 외교 분과 위원장인 헨리 캐보트 롯지 의원이나 공화당에서 
존경을 받는 에리우 루트 의원, 그리고 공화당의 전직 대통령인 태프트 등을 포함시켜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슨은 자신이 믿고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대표단을 구성하고 말았다. 
대표단은 국무 장관 랜싱, 대통령의 개인 참모인 하우스 대령, 직업 외교관인 헨리 화이트, 
태스커 브리스 장군 등이었다. 이 미국의 외교 관례를 깬 윌슨의 오만한 처사는 후일 국제 연맹 
가입안이 상원에서 부결되는 화를 자초하게 된다. 
  윌슨 대통령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유럽을 구한 영웅으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지난 
수십 년간 유럽에서는 이렇게 한 개인을 영웅으로 대접한 예가 없었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그는 전쟁을 종식시켜 유럽의 민주주의를 수호한 미국의 상징으로서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파리 강화 회의가 시작하자마자, 각국의 대표들은 윌슨이 주장하는 세계 평화나 자유와 
같은 막연하고 고귀한 제안에는 관심이 없었고 하나같이 자국의 이익만을 챙기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윌슨은 자신만이 이해 관계를 주장하지 않는 공평한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윌슨은 인류의 영원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만들 유일한 인물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파리 평화 회의에서 가장 어려웠던 사항은 영국의 수상 로이드 조지와 프랑스의 수상 
클레망소가 독일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발언의 
배경에는 독일이 점유하고 있던 식민지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하여 14개 조항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의해서 해결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나 
어느 나라도 윌슨의 이런 이상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 등 모든 
나라는 나름대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려고만 들었다. 이런 지리한 이해 다툼에 지친 윌슨은 
장차 항구적으로 국제 평화를 보장해 줄 국제 연맹의 창설에 모든 나라가 동의한다면 자신이 
주장했던 '승리 없는 평화'를 철회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식민지의 처리를 비롯, 독일의 전쟁 
배상금 등 어찌 보면 실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혹한 조약 내용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 평화 회의를 통해 윌슨이 만들려고 했던 국제 연맹은 그의 정치 사상을 그대로 국제 무대로 
옮긴 것이었다. 국제 연맹의 규약은 다분히 윌슨이 젊었을 때부터 존경했던 영국의 의회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각 국가는 소국이든 대국이든 투표권은 한 개 뿐이고 연맹 총회의에서 토론을 
통해서 의결한다. 9개국으로 구성된 상임 이사회가 제네바에 상설 사무소를 두고 운영한다. 국제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국제 재판소를 설치한다. 연맹 가입국은 모든 회원국의 영토 보전 및 
정치적 독립을 존중하며 나아가서 타국의 침략에 대해 이를 수호한다. 연맹 규약을 집행하기 
위해 이사회는 그들 정부의 육해군 출동을 요청할 수 있다.' 이러한 규약은 윌슨의 정치적 
이상론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의 평화 회의를 끝내고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이 성립되자 윌슨은 귀국하여 이 
조약안을 비준 받기 위해 1919년 7월 10일 상원에 제출하였다. 윌슨으로서는 이 조약안이 
통과되고 국제 연맹이 공식적으로 활동하면 자신은 위대한 인류의 공헌자가 되고 미국은 국제 
무대의 지도자로 등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윌슨의 이 국제 연맹안에 대해 공화당이 지배하던 상원에서는 국제 연맹의 규약 제 
10조 "가맹국은 각 가맹국의 영토 보전 및 정치적 독립을 존중하고 나아가서 타국의 침략에 대해 
이를 수호한다"라는 내용이 먼로주의라는 미국의 외교 노선과 배치되며 다른 나라의 내전에 
미국이 개입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규약 조항의 부분적인 유보를 요구했다. 그러나 윌슨에게는 
이 10조가 있어야 국제 연맹이 현실적 힘을 가질 수 있는 데다 인류의 평화를 위한 국제 
연맹안을 자신들이 참석하지 못했다고 딴죽을 거는 상원 의원들에게 분노하여 글자 한 자 바꾸지 
않은 안을 제출했다. 결과는 당연히 부결이었다. 공화당의 원내 총무이며 윌슨의 무례한 태도에 
개인적인 반감을 가졌던 헨리 케보트 롯지의원이 공화당 의원들을 결속시켜 이 법안을 
부결시켰다. 이렇게 상원에서 부결되자 윌슨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것을 이루겠다'고 
결심하여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국민들에게 호소하려고 했다. 국민들은 당연히 윌슨의 
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편협한 성격과 건강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무려 30여 회에 걸친 순회 
연설을 강행하는 동안 상원의 의지를 꺾지도 못한 채 윌슨은 콜로라도의 푸에블로에서 쓰러지고 
만다. 윌슨은 상원과 타협하라는 사람들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은 그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하고 혈전증에 걸려 왼쪽 반신이 마비되는 중병만 얻게 되었다. 결국 이런 
우여곡절로 미국은 국제 연맹에 가입할 수 없게 되었고 그에 따라 국제 연맹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더구나 베르사유 조약도 조인되지 않아 미국과 독일은 법적으로는 여전히 적국의 
상태로 있다가 1921년 7월 상하 양원 합동 회의에서 전쟁 종결을 선언하고서야 우호국으로 될 수 
있었다.  
  윌슨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손상을 입고 반신 불수까지 되자 부인인 에디트 여사는 남편을 
외인으로부터 격리시켰다. 특히 에디트 여사는 남편이 롯지 의원 때문에 이 같은 병에 걸리게 
되었다고 생각해서 롯지의 세력이 윌슨의 병태를 알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윌슨은 
완전히 격리되어 의사와 부인만 만날 수 있는 신비의 인물이 되고 만다. 이 같은 상태에서 
미국인들은 대통령의 거취에 대하여 전혀 모르게 되었다. 특히 각료들까지도 대통령을 접견할 
수가 없게 되어서 모두들 윌슨의 건강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윌슨의 상태는 
전혀 호전의 기미가 없었다. 
  윌슨의 측근인 국무 장관 랜싱은 이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각료 회의를 정상화시키려고 
했다. 미국 헌법에는 대통령이 유고시에는 부통령이 이를 대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랜싱은 
부통령 토모스 마셜이 대통령직을 대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담당 주치의가 
대통령이 병으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증언을 해줄 것을 거절하고 말았다. 부통령인 
토머스 마셜도 이렇게 되자 대통령직 대행을 거절하였다. 그 자신이 대통령직에 대한 욕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 스스로가 직무 대행을 승인하지도 않았고 주치의가 소견서를 
써주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차로 윌슨의 건강은 회복되었고 각료 회의도 집행하게 되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 
외부인들을 접견하기도 했다. 병상에서 회복되면서 윌슨은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3선에 
도전하겠다는 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회복되지 않았다. 
  1920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는 반신 불수의 몸을 이끌고 참석한 윌슨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을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로 보여주었다. 이어서 대의원들마다 그를 찬양했으나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윌슨도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결국 오하이오 
주지사인 제임스 콕스가 대통령 후보로, 뉴욕 주지사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워렌 하딩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윌슨은 워싱턴에 거주하면서 가끔 공공 행사에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언젠가는 미국이 국제 연맹에 가입할 것을 하면서 1924년 2월 3일에 세상을 조용히 떠났다. 

    7. 도덕 정치를 펼친 개혁의 표상

  윌슨 대통령을 미국의 마지막 지성인 대통령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평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윌슨이 재임중 과감한 개혁을 행한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윌슨의 개혁적 성향은 그가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개혁의 칼날을 들이대는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윌슨은 뉴저지 주지사로 재직할 때도 부패한 정치 풍토를 과감하게 개혁했다. 뉴저지 주의 
정치 제도가 뒤에 전 미국의  주 정치 제도를 개혁하는 데 모델이 되었던 것도 그의 이런 민주 
정치에 대한 높은 안목에서 나온 것이다. 
  윌슨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과거의 고루하고 부패한 제도를 철저하게 개혁했다. 윌슨 대통령은 
관세법, 독점 금지법, 노동법, 은행법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국민의 자유와 편의를 억누르는 
제도는 모두 개혁하고자 했다. 윌슨의 업적 가운데 가장 손꼽히는 것은 미연방 중앙 은행을 
창설하고 금융 거래의 현대화를 꾀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미국 경제 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또 윌슨은 미국의 여성 투표권을 헌법의 부칙 19조에 추가하여 남녀 평등의 
이념을 실천한 사람이기도 했다. 실로 윌슨은 미국 개혁 정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와 더불어 윌슨은 미국과 세계에 도덕 정치를 역설했다. 이런 윌슨의 주장은 뒤에 미국 
정치에 이상주의 정치의 전통을 세우고 국제 정치에서는 민족 자결주의와 세계 평화를 전파한 
고매한 이상과 위대한 덕망을 가진 정치인으로 추앙 받고 있다. 
  윌슨은 또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키고 국제 연맹을 제의하여 국제 분쟁과 무고한 인명 
피해를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의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하고 편협한 성격 탓으로 미국이 국제 
연맹의 가입에 실패하여 그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은 좌절되었지만 그는 국제 연맹, 그리고 
그것을 이은 국제 연합이라는 세계 정부를 창안한 박애주의자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국제 정치 
체제는 윌슨의 덕택으로 생긴 셈이다. 
  그러나 윌슨은 이러한 여러 업적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나 공직자로서 결점도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하고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오만한 지식인상의 
전형이기도 했다. 불굴의 용기와 현명한 판단이 없었더라면 그는 종교적 광신이나 독단적 
도그마의 노예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이런 자신의 이론상의 결함이나 성격상의 
결함을 딛고 일어섰던 것은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헤쳐 
나갈 꿈이 있는 사람이며 진실한 정신의 소유자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다소 
이치에 맞지 않고 어찌 보면 어리석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이론과 사상을 가지고도 국민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을 본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윌슨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은 바로 이 점일 
것이다. 다소 섣부르고 억지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이상을 
실현하려는 용기와 노력이야말로 진정 윌슨이 보여 주는 가장 위대한 교훈일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1. 소아마비를 딛고 일어선 불굴의 인물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우리에게도 
무척 낯익은 인물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미국 침략을 패퇴시킨 인물이자 유럽에서는 
나치스 독일군을 상대로 미군의 참전을 결정하여 우리들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인물이다. 
  루스벨트는 우리 민족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미국의 대통령이다. 그는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직전 한국에서 신탁 통치할 것을 제의한 바 있다. 그는 얄타 회담에서 소련과 협상하며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 때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38도선 이남은 미군이 항복을 받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한 군사상의 항복 절차로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은 냉전의 격화와 
더불어 각기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고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나 뼈아픈 민족 분단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4선을 기록한 대통령이다. 그는 또 어릴 때 앓은 
소아마비로 불구의 몸이 되었으나 놀라운 노력과 집념으로 뉴욕 주지사를 역임하고, 미국의 
대통령에 4번이나 당선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윌슨 대통령이 시작한 개혁 정치를 완성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 역사상 
미증유의 경제 공황에 대처하여 케인스 이론을 도입, 소위 뉴 딜 정책으로 미국 경제의 재생을 
꾀하여 성공시켰다. 
  루스벨트는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일생 동안 경제적 곤란을 겪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미국 민중을 위해 헌신하다가 임기 중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기도 하였다. 
  루스벨트는 뉴 딜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미국 행정부를 비대하개 만들었지만, 
큰 정부가 반드시 악한 정부는 아니라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미국이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했을 때 대통령이 되어 국제 정치를 이끌어 간 인물이었다. 

    2. 동부의 명문가 루스벨트 가의 사람들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는 1882년 1월 30일에 스프링우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명문인 루스벨트 가의 대저택에서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받으며 자라났다. 
  루스벨트의 조상은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영국의 뉴욕 식민지로 이주하였다. 미국에 이주한 
루스벨트의 선조는 신대륙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그리고 말년에는 뉴욕의 
명문 귀족이 되었는데 이렇게 시작된 루스벨트 가는 대대로 자손들이 늘어갈수록 더욱 번창하게 
된다. 미국의 제26대 대통령을 역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이 가문의 일원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직계 조상인 이삭 루스벨트는 미국의 건국 당시 뉴욕 은행의 총재가 된 
대표적인 연방파였으며, 1787년 헌법 개정 회의에 참석하여 신헌법을 기초한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이삭 루스벨트의 가문은 뉴욕의 두체스 군에 소재한 허르 강변으로 
옮겨서 장원을 건립하였다. 프랭클린의 조부는 의학을 공부했으나 의사로 활동하지 않고 부모의 
가업을 이어받아 농장을 운영하였다. 그는 자신이 배운 의술을 활용하여 가축을 사육하며 집안의 
사업을 키우는 데 전념하였다. 그 결과 집안은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프랭클린의 아버지 제임스 
루스벨트 역시 대학을 졸업한 다음 그의 재능을 집안의 사업에 쏟았고 사업은 다양한 방면으로 
확장되었다. 
  프랭클린의 어머니도 당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인 델러노 집안의 딸이었다. 어머니 쪽의 
가문도 미국이 식민지이던 시절에 미주 대륙으로 이주하였고 그녀의 조상들 대부분이 선박을 
소유하고 선박업에 종사하였다. 어머니 사라 여사의 부친은 중국과의 무역으로 횡재를 한 
사람이었다. 사라 여사는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내다가 열 살이 되자 교육을 받기 위하여 
파리로 이주했다. 파리에서 교육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사라 여사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아버지인 제임스와 결혼하였을 때, 이미 제임스는 사라 여사와 비슷한 연령 차이에도 불구하고 
불같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는 결혼한 지 2년 만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분만했다. 
  남편과 26세가 차이가 있었지만 사라 여사는 제임스와 그녀의 사랑의 결실인 어린 프랭클린을 
애지중지하였다. 그녀는 프랭클린을 양육하는 것을 거의 생업으로 삼다시피 하였다. 집안에 
유모와 하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사라 여사는 프랭클린을 목욕시키는 것에서 옷 
입히는 것까지 직접 하였고 모유도 먹였다. 프랭클린이 8세가 되어서야 그가 혼자서 목욕하도록 
놔둘 정도로 그녀는 프랭클린을 돌보았다. 그러면서 사라 여사는 프랭클린이 20세가 될 때까지 
그녀의 자식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하는 섬세하고 자상한 면이 있었다. 사라 여사는 자식인 
프랭클린 뿐만 아니라, 훗일 손자나 증손자들에게도 그녀의 헌신적인 애정을 보여 준 매우 
가정적인 여성이었다. 
  이렇게 극성스러울 정도로 어머니가 옷 입는 것 하나까지 챙겼지만 프랭클린은 아주 사내답게 
성장하였다. 프랭클린의 아버지 제임스는 여유 있는 부자답게 때로는 항해하며 함께 낚시질을 
즐기는 등 중년에 얻은 이 영리한 어린 아들에 정을 흠뻑 쏟았다. 아버지는 자상하게 정원의 
관리법, 나무의 관리법 등을 전수했는데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프랭클린은 일생 동안 분재와 
정원 가꾸기를 즐겨 했다. 때로 그들 부자는 가족이 소유한 기차를 차고 집안의 토지를 
순시하기도 하였다. 프랭클린은 어릴 때 바다를 항해하는 것을 즐겼는데 아버지는 이런 
프랭클린을 귀여워하여 소형 요트를 사주기도 했다. 부유한 가정 환경 덕택으로 프랭클린은 
어려서부터 가정 교사를 두고 독일어와 불어를 배우고 다른 교양도 쌓았다. 어린 프랭클린이 
좋아했던 학문은 독일의 군사 지리학이었다. 프랭클린의 유년 시절은 모든 면에서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큼 특권층의 화려함으로 가득 찼다. 
  이처럼 부유하고 귀족적인 부로의 보호 아래 생활하던 프랭클린은 15세 되던 해에 고등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부모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 1896년 가을 뉴잉글랜드의 명문으로 유명한 글로톤 
고등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이 사립 명문에서의 생활로 프랭클린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다. 당시 글로톤 고등 학교의 교장인 앤리콧 피바리는 명문가의 자제들이 입학한 
글로톤 사립 고등 학교에 기독교 정신을 함양시켜 불쌍한 시민을 도와 주고 국가와 세계에 
봉사하는 학교로 만들 것을 목표로 세웠다. 그는 학생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단련은 물론 
기독교적인 시민 정신과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강조하였다. 피바리 교장이 가장 흠모하는 
사람은 당시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을 창시한 킹슬리였다. 
  루스벨트는 이런 피바리 교장 선생의 교육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뒤에 자기의 생애에서 
가장 큰 정신적인 영향력을 준 사람은 피바리 교장이라고 술회했을 정도였다. 이런 영향으로 
한창 감수성이 강한 청소년기에 루스벨트는 자기 자신의 집안과 집안의 사업에만 매달리는 
평범한 소년의 모습을 벗기 시작했다. 훗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 딜 정책을 수행하고 노동 조합 
운동을 활성화시킨 배경에는 이런 정신적 영향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루스벨트는 글로톤 고등 학교 시절 성적이 뛰어나거나 특별한 재능을 과시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평범하지만 활달한 학생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남다르게 보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개인적 취미나 공부보다도 항상 국가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실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정치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자 그의 먼 친척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이 학교를 방문하여 강연하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관심을 가졌고 이런 
인연으로 시어도어의 집에 초대 받기도 하였다. 
  고등 학교 시절의 루스벨트는 해군이 되어 국가에 봉사하기를 원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항해를 즐겼고 외가 쪽 집안이 선박 사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시절에 이미 
앨프레드 미한이 지은 해양권을 중심으로 한 지정학 서적들을 탐독하고 동료 학생들과 논쟁을 
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시작했을 때 친구들과 모의하여 보스턴에 가서 
해군에 지원하자고 하였으나, 그만 병이 나는 바람에 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루스벨트는 해군 사관 학교 진학을 원하였으나 부모들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버드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하버드 대학에 진학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그가 원하던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였다. 글로톤 고등 학교가 루스벨트에게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정신적 
영향을 주었다면, 하버드 대학은 그에게 사회에 봉사하는 공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정책의 
구체적인 실천 방도를 가르쳐 주었다. 하버드 대학 재학 중에 루스벨트의 성적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대신 그는 다른 학생들보다 폭넓게 많은 학과목을 수강하며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특히 그는 경제학과 역사학 과목을 두루 수강했는데 이런 그의 성향은 뒤에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가 특히 친밀했던 교수는 에이브러햄 앤드루였는데 그는 
나중에 태프트 행정부하에서 재무부 차관이 되었고 루스벨트가 정치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많이 
도와 주었다. 
  하버드에 재학 중이던 그에게 정치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하고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그의 친척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1896년 시어도어가 주지사에 출마했을 대 
프랭클린은 그를 직접 찾아가 격려하기도 했고, 1900년 그가 부통령에 출마했을 때 프랭클린은 
생애 처음으로 투표를 하는 성년이 되어 시어도어의 선거 운동을 돕기도 했다. 그래서 
프랭클린은 민주당원이면서도 하버드 대학교의 공화당 청년 당원 모임에도 자주 합류했다. 
  정치에 뜻을 두고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루스벨트는 여러 분야의 학생 활동에 
참여하였고, 여러 학생 단체의 장 노릇을 겸하기도 하는 등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 나갔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프랭클린은 나중에 부인이 된 엘레아노 루스벨트와 교제를 
시작하였다. 프랭클린은 원래 앨리스 소하이어라는 동급생과 사랑에 빠져 있었는데 그만 실연을 
당했다. 실연의 아픔이 점차 극복되어 갈 무렵 엘레아노와 교제하게 되었다. 
  엘레아노 루스벨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딸로 열 살 때 고아가 된 불우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엄한 할머니의 교육 덕분으로 영국으로 유학갈 수 있었고 귀국해서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프랭클린과 엘레아노의 사랑은 얼핏 
보기에는 좀 이상할 정도였다. 프랭클린은 멋지게 생긴 남자였고 엘레아노는 별로 아름답지 않은 
여성이었다. 프랭클린은 정치적 야심으로 불타고 있었고 엘레아노는 사회 봉사에 더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프랭클린이 앨리스와의 사랑을 잊지 못하여 엘레아노와 같은 
여자를 선택했다고도 하고 시어도어의 권유로 마지못해 사귀게 된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엘레아노와 프랭클린은 사회 운동에 대한 사상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고 이 점이 
외적인 용모와 상관없이 이들의 사랑을 진전시킨 것이다. 두 사람은 동지이자 연인으로 몇 년 
동안 교제하다가 1905년 뉴욕에서 결혼했다. 결혼식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엘레아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신부를 인도하고 신랑에게 위임하기도 했다. 
  프랭클린과 엘레아노가 처음 정착한 곳은 뉴욕 시였으나, 집은 프랭클린의 어머니인 사라 
여사가 구입한 집이었다. 사라 여사는 가구를 비롯하여 모든 살림 장만을 손수 했고, 두 젊은 
부부의 살림에 일일이 참견하였다. 엘레아노는 이런 시어머니의 처사에 불만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가사에 열중할 도리밖에 없었다. 루스벨트 부부는 1906년에 딸 하나를 낳았고, 1907년에서 
1916년 사이의 15년 동안에 다섯 명의 아들을 보며 다정하게 살았다. 
  루스벨트는 1904년 가을 자신의 정치적 꿈을 실현시키는 첫 단계로 칼럼비아 대학교의 법과 
대학에 등록했다. 루스벨트는 3년간 법과 대학에서 공부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그는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월 스트리트에 있는 한 명성이 높은 법률 사무소에 취직하게 
되었다. 루스벨트가 근무하던 법률 사무소는 대기업인 스탠다드 석유 회사, 아메리카 연돌 회사 
등 많은 대기업을 고객으로 지닌 곳이었다. 
  루스벨트는 유명한 법률 사무소에 근무하기는 했으나, 그의 관심사는 변호사로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주로 형사 사건과 같이 빈민들에 관계되는 소송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는 지방 법원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서로 논쟁을 벌이다가 절충하는 등 미묘한 관계를 
맺는 것을 즐겼다. 그는 이런 점에서 훌륭한 변호사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맡은 소송에서 검사와 
맞서 유능한 변론을 했고 특히 빈곤한 서민들의 소송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는 고등 학교 시절 
이래로 서민들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어서 그들과 접촉하며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가급적이면 
그들이 소송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노력했다.

    3. 의원 직선제를 내세운 진보주의자

  루스벨트는 가문의 재산 관리나 변호사업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1910년 그는 
정치가로 나서기로 결심하고, 뉴욕 주 의회의 상원 의원에 출마하고자 하였다. 이 무렵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뉴욕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명한 정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이런 시어도어의 후광을 업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민주당을 선택하기로 결심하였다. 
  프랭클린은 집안의 명망과 자신의 능력으로 무난하게 민주당 공천을 따냈으나 선거구 선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공화당이 생긴 이래 민주당이 한 번밖에 못 이긴 선거구를 배정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패기와 도전 의지에 불타는 28세의 청년이었다. 
  루스벨트는 4주간 정력을 쏟아 선거 운동을 했다. 그는 그 지역의 실태를 면밀하게 조사한 
다음 획기적인 선거 전략을 세웠다. 먼저 전통을 깨고 자동차를 몰고 선거 구역의 곳곳을 누비는 
기동력 있는 전략을 썼고, 이어서 뉴욕이 당면한 경제 문제를 선거민에게 설명하며 자신의 
지지를 호소했다. 당시 뉴욕 시민들은 정직한 정부와 경제 문제의 해결을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결국 루스벨트의 이런 선거 전략은 시민들의 광범한 호응을 끌어냈고 그는 당당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1911년 1월 29세에 뉴욕 주 의회 상원 의원이 된 것이다. 
  루스벨트가 이렇게 화려하게 정치 무대에 등장하자 그는 일약 유명한 정치가로 부각되었고 곧 
민주당 진보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 이념에서나 시민들의 요구에서나 
민주당만이 아니라 정치권 전체의 개혁이 절실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당시 뉴욕 정치는 금권과 권력이 유착하여 시민들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이 특혜와 특권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정치 부패를 상징하는 것이 타마니 홀이라는 정치 집단이었다. 이들의 
두목은 찰스 머피라는 상원 의원이었는데 루스벨트는 곧바로 그에게 도전했다. 
  그 첫 번째 대결은 연방 의회 상원 의원을 뽑는 문제로 시작되었다. 찰스 머피는 타마니 
홀파의 표를 총동원하여 빌리 시한을 연방 의회 상원 의원으로 선출하려고 하였다. 20여 명의 
진보파 의원들은 루스벨트를 중심으로 뭉쳐 타마니파의 전횡을 막으려고 하였다. 
  연방 상원 의원의 선출 문제는 1월에 시작하여 3월이 되어도 결말을 보지 못했으나 루스벨트의 
명성은 뉴욕 주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루스벨트는 당시의 선거 제도를 개혁하여 연방 
상원 의원을 국민의 직선으로 할 것을 제창하였다. 이런 제안은 곧 국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그의 명성은 뉴욕 주 밖에서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루스벨트와 진보파의 표는 다른 사람의 지명을 막기에는 충분하였으나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선출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래서 시한을 지명하는 것을 부결시킬 수 있었으나, 결국 
타협하여 과거에 타마니의 일원이었던 오고만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부패한 정치 
지도자와 맞서 당당하게 싸웠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루스벨트는 진보적이기는 했으나 아직은 농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뉴욕의 북부 농업 지대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들의 여건을 개혁하는 데는 소홀히 했다. 루스벨트는 노동 운동, 반음주령 문제, 
여성의 투표권 문제 등에 대하여 애매 모호한 입장을 취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농민들을 
위한 많은 법안들을 주 의회에 제출해서 이것을 관철시켰다. 또 뉴욕 시민들을 위한 투쟁도 하고 
타협도 하면서 뉴욕 주의 진보파 자리를 굳혀 갔다. 
  이 무렵 루스벨트에게 중요한 정치적 발전의 계기가 왔다. 그는 뉴저지의 윌슨 주지사가 여러 
가지 개혁 조치를 취해 성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뉴저지 주로 그를 찾아갔다. 그래서 윌슨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윌슨이 민주당의 대통령 지명전에 
나섰다. 루스벨트는 타마니파와 대항해서 싸우면서 뉴욕의 대의원들을 윌슨 편으로 몰아가는 
작전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윌슨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승리하였다. 
  루스벨트는 이 일을 계기로 새로운 자신감을 갖고 뉴욕으로 돌아와서 진보적인 민주당을 
구축하려고 하였으나, 다시 타마니파에 의해서 좌절되었다. 윌슨의 성공에 비해 자신은 계속 
실패만 하자 루스벨트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루스벨트를 더욱 약하게 만든 것은 
갑자기 그를 덮친 장티푸스였다. 장티푸스로 시달리던 루스벨트는 때마침 있었던 주 상원 의원 
선거에 재선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렇게 되자 루스벨트는 의기 소침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즈음에 루스벨트는 그의 정치적 장래에 큰 역할을 하게 된 로이스 맥킨리 하위를 만나게 
되었다. 
  로이스 하위는 본래 뉴욕 시의 언론인으로 정치적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으나 본인은 정치적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전술에 수완이 있었고 홍보 전략에는 최고의 
베테랑이었다. 그러나 하위에게는 자신이 열성을 다해 일해 줄 만한 정치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루스벨트가 하위의 소문을 듣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루스벨트를 만나 본 하위는 이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보좌하여 정치적 성공을 거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비록 일시적으로 좌절을 맛보았지만 도리어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최고의 정치 참모를 얻게 된 
것이다. 
  뉴욕 주에서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루스벨트에게 다른 공직 생활의 기회가 왔다. 1913년에 
윌슨 행정부에서 그를 해군성 차관으로 발탁한 것이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해군성 차관을 지낸 적이 있었다. 루스벨트는 윌슨 행정부에서 7년간 근무하면서 
윌슨에게서 커다란 정신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워싱턴에서 근무하는 동안 루스벨트는 윌슨 대통령을 접견하여 그의 개혁 정치와 청교도적 
정치 신념을 들으며 신자유주의 정책에 많은 공감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정책의 
수립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고 주로 해군 문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뒤에 그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민주당의 진보적이며 지도적인 인사들과 사귀게 되었다. 
  윌슨 행정부에서 일을 했지만 루스벨트는 공화당의 진보파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동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의 파티에도 자주 참여하였다. 여기서 그는 헨리 애덤스, 올리버 
호머스, 헨리 캐보트 롯지 등 윌슨 대통령은 싫어하지만 진보적이며 명망 있는 공화당 인사들과 
친교를 돈독히 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해군성 차관으로 있으면서 해군 전력의 강화와 함대의 개선을 위해 정진하는 한편 
뉴욕 주의 정치에도 계속 관여하였다. 특히 그는 워싱턴의 영향력 있는 민주당 지도자들을 
이용하여 뉴욕 주와 뉴욕 사람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이 무렵 루스벨트의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던 로이스 하위는 타마니파의 진보주의자들과 연대하여 알 스미스를 뉴욕 주지사 후보로 
공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루스벨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1913년 유럽에서 전운이 감돌자 미국은 해군력 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야 했다. 
당시 미국이 보유한 해군과 해병대는 불과 6만 5천 명으로 영국과 독일에 비해 월등하게 
뒤떨어졌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해군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윌슨 
대통령에게 건의하였고 윌슨은 이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그는 군함 제조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공개 입찰제를 실시하는 등 전력 증강에 만반의 준비를 해나갔다.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 표고를 하였을 때 루스벨트의 이러한 준비 조치는 그 진가를 
발휘했다. 미국이 참전한 다음에 루스벨트는 해군 훈련장을 건립하고 함대 건조를 신속히 
수행하는 한편, 대서양에 어뢰 장치를 하여 독일 함대가 미국 근해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러한 해군의 힘으로 미군은 풍부한 보급 물자와 신속한 충원을 하며 유럽에서 
독일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1918년 루스벨트는 윌슨을 수행하여 유럽에 갔다. 유럽에서 그는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 
프랑스 수상 클레망소, 윈스턴 처칠 등 국제적으로 유명한 정치인들과 안면을 익혀 두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윌슨의 국제 연맹안을 찬성하여 이 안이 관철되도록 애를 썼다. 30대의 
루스벨트로서는 나이에 맞지 않게 많은 일을 했고 커다란 정치적 경험을 한 셈이었다. 
  1918년 유럽에서 돌아온 루스벨트에게는 뜻밖의 사태가 벌어질 뻔했다. 부인 엘레아노 여사가 
루스벨트와 엘레아노 여사의 비서인 루시 멀서 사이의 깊은 애정 관계를 알아채게 된 것이다. 
엘레아노 여사는 두 사람이 열렬하게 주고받은 사랑의 편지를 읽고 엄청난 배신감과 충격을 느껴 
이혼을 요구하였다. 나중에 엘레아노 여사는 "이 때 받은 충격으로부터 일생 동안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사태가 이런 지경에 이르자 루스벨트의 어머니 사라 여사가 
나서서 그에게 만일 루시 멀서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겁을 주었다. 이렇게 되자 루스벨트는 루시 멀서를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엘레아노 여사의 양해를 얻어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루스벨트는 부부 사이의 성격 차이로 결혼 생활에서 고통을 겪기도 하였는데 그 때문에 루시 
멀서와 불륜의 관계를 맺게 된 것이었다. 결혼 초기 엘레아노는 근면하고 엄격한데다 조용하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반면에 루스벨트는 자유 분방하고 사교적이었으며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 두 사람 사이에는 여러 가지 의견 충돌이 벌어졌다. 먼저 자식들의 
교육 문제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루스벨트는 아이들을 자유 분방하게 키우려 했으나 
엘레아노는 조용하고 지적으로 키우려 했다. 
  다음으로 부딪친 것은 워싱턴의 사교계에서의 처신이었다. 엘레아노는 조용하고 때로는 고적한 
것을 좋아해서 파티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반면에 루스벨트는 미남인데다 파티를 즐겼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엘레아노는 기피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 루스벨트는 자유 분방한 성격 탓으로 사교계의 여성들과 
오픈카를 함께 타고 거리를 질주하는 등 엘레아노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곤 하였다. 때로 
엘레아노는 속이 상해서 파티 장소를 일찍 떠나 집에 먼저 가곤 하였다. 물론 루스벨트는 이런 
부인을 고려하여 일찍 들어오지 않고 밤늦게야 집에 돌아오곤 하였으니 자연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기고 마음도 멀어지게 된 것이다. 
  루스벨트의 이런 연애 사건이 있고 난 다음부터 엘레아노 여사는 점차 소극적인 현모양처에서 
벗어나 그녀가 처녀 때부터 하고자 했던 적극적인 여성 사회 활동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적십자사에서 하루 16시간씩 일을 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서 1921년 
사이에는 속기, 타이핑, 요리 기술 등을 습득하여 사회 봉사 활동을 했고 뉴욕 시에 있는 
여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자가 되기도 하고 뉴욕 하이드 파크에 가구 공장을 세우기도 하였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남편이 자신의 비서와 바람을 피워 사회 활동에 나선 엘레아노가 나중에는 
이런 활동을 벌임으로써 남편이 대통령이 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루스벨트는 이 일로 엘레아노와 마음이 멀어졌고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루스벨트는 여전히 정치로의 복귀를 꿈꾸며 뉴욕 주지사로 출마할까, 뉴욕 주 
상원 의원으로 출마할까 등의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으나 현실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포기하고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할 것을 계획했다. 1920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은 오하이오 주지사인 제임스 콕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고, 그래서 루스벨트의 정치적 꿈은 점차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망성은 거의 없었다. 윌슨이 재임 중 병에 들어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데다가 공화당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아직 
38세의 젊은 나이로 부통령 후보가 되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인기가 올라갈 것이라는 계산으로 
부통령 후보에 나섰다. 실제로 그는 전국을 돌며 선거 캠페인을 벌이고 많은 사람들과 새로 
사귀는 한편 대중 연설 기법을 습득하였고 전국에 자신의 사조직을 꾸리는 등 엄청난 정치적 
경륜을 쌓게 되었다. 
  예상대로 선거에 패하였고 그 후 루스벨트는 일단 개인 사업으로 친구들과 동업하여 사업체를 
만들었으나 관심은 여전히 정치에 있었다. 1922년 연방 상원 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노력했고 실제로 그런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21년부터 그는 별안간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소아마비에 걸리게 된 것이다. 루스벨트는 수개월 동안 병원에서 
병마와 씨름했다. 보통 사람들은 회복하기 어려운 병이었지만 루스벨트는 인내력을 가지고 이 
병과 싸워 이기려고 했다. 그러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어머니 사라 여사는 이 기회에 루스벨트가 하이드파크의 장원에 은퇴하여 집안을 
돌보면서 여생을 보내라고 권했다. 그러나 부인 엘레아노 여사와 친구인 로이스 하위는 
루스벨트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는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루스벨트 자신이 
정치에 대한 집념 때문에 투병에 열성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루스벨트는 플로리다, 조지아 등 
따뜻한 남부 지방을 다니면서 물리 치료를 받았다. 이렇게 그가 소아마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며 온갖 방법으로 치료를 시도하며 몇 년을 보내자 그의 병도 호전되었다. 그는 이런 
투병 생활 경험으로 1927년에는 팜 스프링 재단을 건립하고 자기 소유 재산의 3분의 2를 들여서 
소아마비 장애자를 치료하는, 당시 미국 최고의 특수 병원을 건립했다. 
  1928년 9월이 되었을 때 루스벨트는 양다리를 사용할 수는 없게 되었어도, 강한 양팔과 어깨를 
이용하여 휠체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정도가 되었다. 휠체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던지 
대부분 미국인들은 루스벨트가 운명한 후에야 그가 반신 불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루스벨트는 7년 동안 투병하면서 거의 초인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고 했고 7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병이 더 이상 호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루스벨트가 투병하고 있는 동안 엘레아노 여사와 로이스 하위가 그를 그 때까지 정치 
무대의 중요한 존재로 남아 있도록 계획하고 홍보했다는 사실이다. 
  엘레아노 여사와 하위는 책임을 분담하여 이 일을 수행했다. 하위는 지모가 있는 전략가답게 
홍보 업무를 맡아서 루스벨트의 이름으로 중요한 민주당 인사들과 교신을 계속했다. 반면에 
엘레아노 여사는 남편의 대변인 노릇을 하며 남편을 온갖 정보를 모아서 읽어 주는 역할을 했다. 
동시에 하위의 지도 아래 엘레아노 여사는 정치 연설을 자주 하였다. 
  루스벨트도 이런 모습을 보며 여성 유권자의 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루스벨트에게 
있어서 엘레아노 여사는 이렇게 커다란 정치적 자신이었다. 루스벨트가 정치적으로 재기하게 된 
것은 1928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알 스미스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면서였다. 그는 
휠체어에 팔걸이를 하고 스미스를 지지하는 연설을 정열적으로 하였다. 이 일로 비록 스미스는 
대통령 선거에서 실패하였지만 루스벨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28년 말경 루스벨트는 민주당 외교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외교 정책의 전문가들을 소집하여 
민주당의 외교 정책에 관한 백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병을 딛고 일어나 
루스벨트는 정열적으로 정치 활동을 벌여 나갔고 이런 활동은 당의 인정을 받게 되기에 이른다. 
1932년이 되자 루스벨트는 뉴욕 주지사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나가게 되었다. 민주당 지도자 알 
스미스는 루스벨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는데 특히 재정 문제에서 보수파인 존 라스코브의 
후원을 얻었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활발하게 선거 운동을 해나갈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자동차로 뉴욕의 곳곳을 다니면서 선거 운동을 벌였다. 그는 다리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자동차의 뒷좌석에 서서 시민들을 환영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면서 점차로 뉴욕 주가 
당면하고 있는 정책적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농업 문제, 노동자 문제, 인간의 기본 생활권 
문제 등 훗일 민주당의 중요한 정책으로 전환된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라디오 
방송을 선거에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이것은 하위가 세운 선거 전략으로 많은 효과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방송을 활용한 최초의 미국 정치인이 되었다. 이렇게 획기적이고 참신하게 선거 
운동을 펼침으로써 루스벨트는 강력한 공화당 후보를 물리치고 뉴욕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당시 
뉴욕의 유권자는 4백만 명 정도였는데, 루스벨트는 겨우 2만 5천 표의 근소한 차이로 뉴욕 
주지사에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시 전국에서 공화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였고 
특히 대도시를 휩쓸었는데 루스벨트만이 미국 최고의 주 뉴욕에서 승리했다는 점이다. 반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알 스미스는 공화당 후보인 허버트 후버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1929년 10월 돌연 미국 증권 시장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 끝을 모르고 오르던 주가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쳐 버렸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루스벨트는 이 엄청난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재빠르게 시카고 대학의 폴 더글러스 
교수를 초빙하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더글러스는 노동자의 장기 고용 
계획, 현존 경제 체제의 개혁 등 다양한 대응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 점에서 루스벨트는 당시의 
주지사들 중에 가장 시대에 앞선 주지사였다. 
  후버 대통령의 낙관적인 예측에도 불구하고 1930년이 되자 미국은 더욱 극심한 경제 공황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제 공황은 미국에 머물지 않고 유럽으로 파급되었고 그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1931년이 되자 엄청난 경제적 파국이 밀어닥쳤다. 곳곳에서 대량 실업과 도산이 잇따랐고 
은행은 대다수가 파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후버 행정부는 이런 사태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후버는 이미 파국의 깊은 수렁이 사람들을 덮치고 있는데도 정부 차원의 적극적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여전히 '자발적인 기업 활동'을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수많은 
실업자들에게는 배고픔을 견디라면서 연방 차원의 구호 계획조차 거부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사태를 올바르게 보고 있었다. 그는 1931년 8월 주 의회에 요청하여 임시 
긴급 구호 행정부 설립 법안을 제출하여 승인을 받고 새 행정부의 장에 해리 홉킨스를 임명했다. 
해리 홉킨스는 유능한 행정가로서 경제 공황으로 실직된 노동자를 구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한때는 이 구호 대책 본부가 뉴욕 주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다. 절망적인 
위기를 극복하려는 루스벨트의 노력은 수많은 시민들을 그이 편으로 만들었다. 

    4. '뉴 딜 정책'으로 공황을 탈출하다

  1930년 루스벨트가 주지사에 재출마했을 때 공화당은 그에 대한 전면적 공세에 나섰다. 이제 
루스벨트가 재선되면 1932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전에 민주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누구보다도 
높아졌기 때문에 공화당에서는 당시 정치권의 거물인 국무장관 스팀슨, 재무 장관 밀스, 전쟁성 
장관 허리 등을 뉴욕으로 보내서 공화당 주지사 후보를 도왔다. 공화당은 심지어 당대의 저명한 
언론인 월터 리프먼 같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루스벨트가 취하고 있는 정책의 애매한 모습을 
공격하였다. 리프먼은 루스벨트가 금주령에 대한 태도가 분명치가 않고, 타마니 홀의 부패를 
척결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루스벨트는 빵이 문제지 술이 문제가 아니라고 재치 
있게 응수하기도 하였다. 공화당의 집요한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첫 번째 선거와는 
달리 압도적인 표차로 뉴욕 주지사에 재선되었다. 그는 재선되자마자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다. 
공화당의 두려움이 도리어 그의 성가만 높여 준 것이다. 
  루스벨트가 주지사에 재선되자 윌 로저스와 같은 유명한 코미디언은 "민주당이 어제 대통령 
후보를 지명했습니다"라는 농담까지 하였다. 사실상 루스벨트의 당내 조직은 이미 하위의 
지휘하에 1932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대다수의 민주당원들은 그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나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1932년 전당 대회에서 루스벨트가 3분의 2의 대의원을 획득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뉴욕의 민주당은 루스벨트를 위하여 제임스 파레이를 파견하여 전국적인 조직체를 준비하고, 
하위는 서신 교환과 언론을 통한 홍보를 담당하였다. 루스벨트도 사회 정치적 문제를 정리하고 
정책 입안을 위하여 참모진을 확대하였다. 칼럼비아 대학의 저명한 교수들을 자신의 두뇌 
집단으로 고용했다. 그리고 농업 경제 전문가인 리처드 터그웰, 칼럼비아 법과 대학 교수인 
아돌프 벨 등도 참모진에 참여하였다. 루스벨트는 이들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와 수시로 
회동하여 현안의 정책적 과제들을 논의하곤 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1932년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갈 것이 확실해지자 이에 대한 반대 
세력들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다. 타마니파들과 알 스미스파가 연합하여 스미스를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하려고 하면서 루스벨트를 괴롭혔다. 루스벨트는 당의 분열을 막으면서 이들을 
물리쳐야 하는 부담을 안아야 했다. 
  언론에서도 루스벨트를 공격했다. 리프먼은 루스벨트가 자기 스스로의 정책 대안조차 없는 
위인이라고 공격하였다. 당시 신문왕이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도 전국에 있는 그의 신문을 통해 
루스벨트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들의 공격이 거세질수록 루스벨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갔다. 
  1932년 6월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3차의 투표가 진행되었다. 루스벨트가 
압도적 다수표를 획득하였으나 3분의 2의 대의원을 획득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루스벨트의 참모 
파레이와 하위가 다른 파들과 협상을 진행한 후 네 번째의 투표에 들어가서야 루스벨트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 받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 후보를 수락하면서 한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정책 비전을 정부가 지도하는 
경제 체제, 금주령의 폐지, 증권과 채권 매매의 규제, 정부 차원의 직업 창출, 산림의 재활용, 
관세의 인하, 곡물의 자발적인 규제, 개인의 저택과 농지에 대한 금융 지원 등의 프로그램으로 
선언하였다. 동시에 국민들에게 정부는 지원 등의 프로그램으로 선언하였다. 동시에 국민들에게 
정부는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겠다고 '뉴 딜(New Deal)'을 약속하였다. 이 새로운 정책을 언론이 
받아 '뉴 딜 정책'이라고 불렀다. 
  뉴 딜은 새로운 관계라는 의미이다. 루스벨트는 과거의 정부가 특정인과 특정 계급에게만 
혜택을 주고 일반 국민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면서 자신은 이러한 낡은 관계를 끊고 새로운 
관계, 즉 정부가 국민들을 위해 보다 많은 것을 해주는 관계를 맺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약속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공화당의 후버 대통령처럼 공황이 닥쳐왔는데도 작은 정부론의 환상에 사로잡혀 사회 
문제를 개인과 기업, 사회 집단에 맡겨 버리는 것은 국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버리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이 엄청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연방 정부가 능동적으로 
사회 전반의 문제에 개입하고 실업 문제, 경제 문제, 정치 문제 등을 해결하겠다고 했다. 
  선거전이 시작되자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루스벨트는 뉴욕에서의 경험을 살려 발빠르고 
영리하게 선거전을 펼쳤다. 공화당은 현직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를 다시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루스벨트를 개인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런 전략이 통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의 경기는 
후퇴하였고 실업자는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국민들은 자신들을 구제해 줄 사람을 원했지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반신 불수의 몸을 이끌고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선거 캠페인을 벌였고, 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진보적 정책을 약속하였다. 후버 대통령은 루스벨트의 뉴 딜 정책이 결국에는 
미국의 경제를 황폐하게 만드는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역설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국민들은 이미 
후버의 통치하에서 배고픔과 어려움을 겪을 대로 겪었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루스벨트는 42개 주에서 승리한 반면 후버는 겨우 6개 주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는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루스벨트는 1933년 3월 4일에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루스벨트는 자신이 이 대공황이라는 
괴물과 맞서 싸워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의 
취임사에서 비관적 견해를 대담하게 일축하면서 과감한 대처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전망을 
제시했다. 
  "나도 여러분과 같은 정신을 가지고 우리에게 닥친 이 일대 재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곤란은 물질적인 측면에만 국한된 것입니다. 물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하락되었습니다... 어리석은 낙관론만이 현 시국의 처참한 실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야말로 예부터 이어져 온 진리의 전당을 재건해야 합니다. 재건의 여부는 우리가 
사회적 가치를 금전적 이익보다 얼마나 더 높이 존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국가는 행동을, 그것도 즉각적인 행동을 요망하고 
있습니다. 제일 중대하고 근본적인 우리의 과업은 국민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정력적으로 뉴 딜 정책을 추진해 갔다. 
그가 맨 먼저 처리한 문제는 은행 체제의 위기 극복이었다. 공황으로 전국의 은행은 상당수가 
도산되거나 도산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루스벨트는 금융 기관 재건 위원회 위원장인 제시 
존스와 협의하여 10억 달러에 해당하는 자금을 전국의 6천 개 은행에 융자를 해주었다. 동시에 
재무부 장관인 윌리엄 우딘은 특혜를 활용하여 개인적 이익을 취하려는 대은행가들의 독점을 
방지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새로 4백10개의 지점을 설치하려던 아메리카 
은행의 의도를 좌절시켰다. 
  두 번째로 착수한 일은 정부의 예산을 줄이는 일이었다. 먼저 루스벨트는 국회로부터 정부의 
예산 절약권을 위임받았다. 그래서 예산 국장인 더글러스는 연방 관리의 봉급을 줄이고 불필요한 
인원을 축소했다. 
  이어서 루스벨트 행정부는 실업자들의 구제를 위하여 민간 자원 보호단, 연방 긴급 구호청, 
공공 토목청 등의 설립을 위한 법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민간 자원 봉사단이란 18세에서 
25세에 이르는 약 30만 명의 젊은이들을 전국 산림에 파견하여 식목, 홍수 방지, 토양 보전 등의 
일을 시키고 일당을 지급하는 단체였다. 연방 긴급 구호청법은 연방 정부가 주 정부에 5억 
달러를 직접 제공하고 구호청을 만들게 하여 실업자를 구호하게 하는 법이었다. 또 공공 
토목청은 전국에 걸쳐 토목 사업을 진행하여 국민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잠정적으로 실업자를 
구제하고자 하는 기관이었다. 
  그리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들이 부정 증권에 투자하여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채권 발행 은행을 엄중하게 감독하는 증권 외환 위원회를 설립하게 만든 연방 유가 증권 통제법, 
개인 집의 차압을 중지하기 위한 차압 중지법, 테네시 계곡 개발을 통해 실업자를 구제하고 
전기를 얻는 이중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법, 정부 감독하에 산업을 
규제하고 지원하는 국가 부흥청 설립을 위한 국가 산업 부흥법, 과잉 생산된 농산물을 폐기하는 
데 정부가 지원하고 농산물 가격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농업 조정청을 설립하도록 한 농업 조정법 
등의 승인을 국회에 요청했다. 국회에서는 보수파의 반대가 있었으나, 대체로 루스벨트의 뉴 딜 
프로그램을 위한 이러한 법안들을 통과시켜 주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렇게 갖가지 사회 개혁을 위한 입법을 하고 
실행했지만 1934년 말 미국의 실업률은 17퍼센트로 여전히 높은 상태였다. 루스벨트는 실업 
대책이 시급하다고 느껴 대량 고용을 위한 직업 발전 관리청을 신설하였고 이런 사상은 그의 2차 
집권기에 사회 보장 제도의 수립으로 발전되었다. 루스벨트는 뉴 딜 프로그램을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해 1935년부터 테네시 계곡 개발과 같은 대규모 토목 공사를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이 사업은 대단히 많은 정부 지출을 요하기 때문에 일부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이 사업안을 통과시켜 집행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공황으로부터 서서히 그 
탈출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종 보험과 연금을 통해 노후나 산재에 대비하게 하는 사회 
보장법도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또 1935년에는 경영진이 노동 조합을 약화시키는 행위를 금지하고 노동자가 자주적으로 조직을 
구성하여 사용자와 단체 교섭을 할 권리를 보장한 전국 노동 관계법(와그너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노동자들을 단결하게 만드는 한편 노동자들의 루스벨트 지지를 이끌어 
냈기 때문에 루스벨트의 가장 큰 정치적 승리의 하나가 되었다. 

    5. '좋은 이웃 정책'으로 화려하게 펼친 국제 무대

  1936년에 접어들면서 루스벨트는 대통령의 재선을 계획해야 했다. 1936년 4월에 로이스 하위가 
죽었다. 그는 1912년 루스벨트가 뉴욕 주의 상원으로 출마할 때부터 계속해서 막후의 참모장 
역할을 한, 루스벨트로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을 찾아야 했는데 그런 사람은 파레이 밖에 없었다. 파레이 하나만으로는 불안하다고 느낀 
루스벨트는 스스로 선거 운동에 깊이 참여하면서 외국에 대사로 나가 있는 몇 명의 참모들을 
국내로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1936년 6월에 공화당은 클리블랜드에서 전당 대회를 갖고 앨프레드 랭던을 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민주당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서슴지 않고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하였다. 당시에 
루스벨트가 당의 후보로 쉽게 재지명된 이유는 그의 참모인 파레이가 전당 대회 규칙을 수정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었다. 민주당은 앤드루 잭슨 대통령 때부터 전당 대회에 참여한 대의원의 
3분의 2의 동의를 받아야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규약은 시대가 
발전하고 파벌이 늘어남에 따라 오히려 후보 지명을 어렵게 만드는 족쇄로 작용했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규약을 바꾸어 참여 대의원의 과반수 동의로 당의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게 만든 
것이다. 
  선거전이 시작되자 랭던은 허스트계 신문의 지원을 받으며 엄청난 선거 자금을 마련했다. 
랭던은 무려 1천 4백만 달러의 기부를 받았던 것이다. 반면 루스벨트의 민주당은 선거비가 
너무나 부족하였다. 루스벨트에게 최고액을 기부한 것은 전국 광산 노조였다. 그러나 공화당의 
랭던은 루스벨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선거 결과, 루스벨트는 메인 주와 버몬트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압도적 승리를 하여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에 재선되자 곧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미주 대륙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루스벨트는 '좋은 이웃 정책(Good Neighber Policy)'을 선언했다. 그가 이 정책을 
선언한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미대륙이 장래에 히틀러의 희생물이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미주 대륙의 안전 보장을 위해서였다. 둘째로는 미국 내의 고립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한 수단이었다. 고립주의자들은 평화주의자들은 아니지만 미국이 유럽 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반대했다. 루스벨트의 이 선언을 그들은 루스벨트가 아메리카 대륙에만 관심을 
집중하겠다고 한 것으로 풀이하였다. 셋째는 미국의 국방 예산이 급격히 증가하면 당장 그의 
국내 정책에도 지장이 올 뿐만 아니라 지성인들로부터 군비 축소라는 세계적 추세를 역행하는 
처사라고 비판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와 당시 국무 장관인 코델 헐은 '좋은 이웃 정책'을 선언하면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발전을 권장하는 한편 미국 정부는 남미 국가에 대해 '냉정 불간섭 
정책'을 선언하면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발전을 권장하는 한편 미국 
정부는 남미 국가에 대해 '내정 불간섭 정책'을 펴겠다고 밝혔다. 이 선언을 실천하기 위하여 
쿠바에 정치적 위기가 왔을 때도 루스벨트 행정부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또 루스벨트 
행정부는 파나마 운하의 운항 문제를 재조정하여 협상하였고, 아이티에 잔류한 미 해병을 
철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루스벨트 행정부는 국민이 소유하고 있는 남미 국가의 
채권에 대한 상환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런 기조에서 미국 석유 회사의 남미 영토 소유권 
역시 보호하려 들지 않았다. 
  동시에 국내의 평화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만일 남미가 유럽 국가에 의해서 침략을 당하였을 때 
미국은 이 외부의 침략에 대하여 군사적인 수단으로 저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설득하였다. 
루스벨트는 이는 지난 백 년간 유지해 온 미국의 정책이라고 역설하였다. 이 정책은 미국이 
불안해져 가는 국제적 현실에 대처하기 위하여 마련된 미국 정책의 새로운 출발이며, 과거 윌슨 
행정부를 상기시키기도 한 정책이었다. 즉 루스벨트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현하기 위하여 
남미에서 이를 위한 첫 단계의 실험을 한 것이다. 
  1937년 제2차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1787년의 미국 헌법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무기력하게 만들지는 않았다"고 역설하였다. 이런 그의 발언은 그의 뉴 딜 
정책에 대한 사법부의 반대를 의식한 것이었다. 특히 1935년 대법원이 행정부의 국가 부흥청 
수립법안에 대하여 위헌 판시를 한 후부터 루스벨트는 대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문제는 대법관의 
임기는 영구적인 것이어서 공석이 자주 생기지 않고 일단 대법관이 되면 평생 동안 복무하기 
때문에 대통령으로서도 대법원의 행위를 제어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루스벨트는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당파를 초월하여 헌법의 해석을 융통성 있게 해야 하며 다수의 국민들도 이런 
생각에 동의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의 대법원은 공화당 정권하에서 임명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보수파들이 많아서 이런 사회의 변화를 헌법 해석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이 임명하는 진보적인 대법관이 다수가 되도록 대법원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법부의 재조직 법안을 제출하면 의회에서 통과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법무 장관 커밍스의 제안에 따라 대법관의 정년을 70세로 제한하는 법을 제출하기로 결심했다. 
만일 대법관의 정년을 70세로 정하게 되면 루스벨트가 6명의 새대법관을 지명할 수 있었다. 당시 
고등 법원이나 지방 법원에서도 나아가 많은 판사들이 뉴 딜 정책을 좌절시키려 들었기 때문에 
행정부는 자주 사법부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7년 2월 5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른 
사람들과 사전 협의도 없이 사법부 개혁법을 국회에 급작스레 제출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미국 의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의회 밖에서도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다. 
보수파들은 루스벨트를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이 법안에 대해 민주당 내의 
진보파들도 상당수가 민주주의를 위협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결국 이 투쟁에서 
명분에 밀린 루스벨트 대통령측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문제를 두고 투쟁하는 도중에 
상당수의 대법관이 스스로 은퇴하게 되었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루스벨트 대통령은 휴고 블랙, 
스탠리 리드, 페릭 프랑크푸르트. 윌리엄 더글러스, 프랭크 머피 등 진보적인 대법관들로 
대법원을 채울 수 있었다. 
  1939년이 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점차 대외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유럽에서는 
히틀러가 팽창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태평양에서는 일본 제국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맞아 루스벨트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러나 국내의 공황 타개 문제로 
군비를 늘릴 형편이 못 되었다. 고심하던 루스벨트는 영국의 해군과 프랑스의 육군을 주축으로 
하고 미국은 이들을 지원하여 유럽에서 평화를 유지하려고 계획하였다. 
  이렇게 국제 정세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루스벨트는 행정부의 개혁을 
추진하여 자신의 뉴 딜 정책을 집권 2기에 마무리 지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행정부의 개혁은 
역대 대통령들이 누구나 하려고 했으나 항상 실패하고 만 고질적인 문제였다. 1937년 1월 
루스벨트는 의회에 행정부 재조직 법안을 제출했다. 
  당시 행정부가 안고 있던 문제는 각 부처나 특별 행정 기구가 늘어나고 생길 적마다 규모는 
커지고 확대되고 있는 데 비해 그 존속의 필요성이나 효율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 
기구들은 의회의 해당 의원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로비를 하여 의원들은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 기구를 보조하려고 들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행정 기구는 비대하고 방만하게 
운영되는 것은 물론 때로는 정치적 보상으로 주어지는 자리가 되곤 하였다. 이런 실정이니 
의회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이들 기구는 대통령의 명령에도 복종하지 않고 때로는 대통령의 
정책을 방해하기조차 하였다. 
  루스벨트는 뉴 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이런 썩어빠진 행정부를 
대폭적으로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행정부 관리들을 임명하는 객관적인 기준을 
확립하고 전문 인력을 고용한 다음, 필요 없는 기구는 통폐합을 거쳐서 기구를 축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취지에서 국회에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이 제출되자 위원들은 명분상 이 
법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는 못했으나 뒷전으로는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게 은밀한 공작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이 법안은 결국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였다. 
  루스벨트는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다음 해인 1939년 법안을 수정하여 행정부 개편 
법안을 다시 제출했다. 이번에도 방해 공작의 입김은 거셌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국민 여론을 
동원하여 압력을 가하자 그 해 3월 의회는 마지못해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으로 백악관 
내에 대통령 직속의 행정 사무처가 생기게 되어 대통령의 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악관에서 예산국을 직접 관장하게 되어 대통령이 각 행정 
부처의 고삐를 쥐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행정부 개혁에 열중하는 동안 국제적 위기는 1938년 4월부터 9월에 이르러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독일은 4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9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으로 진격하였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러한 독일의 침략에 엄중 경고하고 그 해 9월 
뮌헨 협정을 맺어 더 이상의 침략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히틀러로부터 받아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서둘러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태는 미국에도 군사력을 증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8년 프랑스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동시에 미국도 전투기를 대량 
생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 내에는 고립주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공공연히 군비 
증강 계획을 실천하기가 어려웠다. 루스벨트 행정부 내에서도 대량의 전투기 제조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고, 군 통수권에 대해서도 통일된 의견이 없었다. 루스벨트는 고심 끝에 외국에 대한 
무기의 무상 원조보다는 유상 판매를 하겠다고 조건을 내세워 의회와 반대자들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안도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심지어는 전쟁성 장관인 해리 워드링조차 무기를 
외국에 판매하는 것에 반대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유럽 사태를 강 건너 불 보듯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무 장관 헨리 모겐소를 프랑스로 
파견하여 전투기 판매를 협상하게 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는 미국에 6백 대의 전투기를 주문했고, 
1940년까지 1천5백 대의 비행기를 더 주문하기로 하였다. 1939년 9월 독일이 뮌헨 협정을 어기고 
폴란드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졌다. 그러나 미국은 이번에도 중립을 지키고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독일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확대하여 전선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제 더 이상 독일의 이러한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고 보고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6. 연합국의 지도자로 떠오른 노련한 정치가

  1940년 유럽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다.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은 대통령 선거를 위한 총력전에 들어갔다. 공화당은 로버트 태프트와 
토머스 듀이가 후보로 거론되었다. 민주당의 관심은 루스벨트가 미국의 정치적 전통을 이어받아 
정계에서 은퇴할 것인가, 아니면 이제까지 없었던 3선을 위해서 출마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문제는 루스벨트 자신의 결단이었지만 그도 마음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루스벨트가 주저하고 있는 동안, 1940년 4월 9일 독일이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침공했다. 영국이 
노르웨이와 함께 독일에 저항해서 싸웠으나 무기력했다. 1940년 5월에 히틀러 군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을 공격했다. 불과 몇 주일 만에 독일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네덜란드는 항복하고 말았다. 
  루스벨트는 이제 미국도 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국회에 군비 증강을 요청했다. 이 
무렵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도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1940년 6월 프랑스의 방어선인 
마지노선이 힘없이 무너지고, 독일군은 파리에 입성했다. 프랑스의 레이노 수상은 페탱 원수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그 해 6월 22일 페탱 정권은 독일과 휴전 협정에 조인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항복하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긴급 행정 명령을 내려 대통령 직속의 행정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백악관에 
국가 긴급 대책 위원회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그 해 6월에는 전시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는 
프랭크 녹스를 해군 장관에, 헨리 스팀슨을 전쟁성 장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이미 그와 일하던 
모겐소, 아이커스, 마셜 장군, 사트크 제독 등과 팀을 이루어 전쟁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 해 공화당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웬델 윌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민주당은 이런 공화당의 실책과 정책의 일관성을 들어 루스벨트를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하였다. 
루스벨트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후보를 수락한 다음 헨리 월라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 무렵 루스벨트는 전쟁을 준비하면서 원자탄의 조립 가능성을 연구하라고 지시하여 이 일을 
하버드 대학 총장 제임스 코넌트에게 위임하였다. 1940년 1월 2일에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4백49명의 선거인단 수를 확보한 루스벨트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3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공화당 후보인 윌키는 겨우 82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3선이 확정되자 루스벨트는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40년 12월 말 루스벨트는 유명한 
노변 담화를 통해 "누구라도 지금 불타고 있는 이웃집에 호스를 빌려 줄 때, 먼저 대금부터 
지불하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럽의 국민이 나치를 반대해서 싸우는데 미국은 전쟁 물자라도 
공급하여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미국은 민주주의의 무기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자신도 아직은 미국이 참전해야 할 시점이 아니라고 보았다. 
  1941년 1월 6일 국회에 보내는 연두 교서에서 그는 4개의 자유론을 주창했다. 
  첫째,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세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둘째, 전 세계에 걸쳐 종교의 자유가 수호되어야 한다. 
  셋째, 인간은 경제적 빈곤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해야 한다.
  넷째, 인간은 전 세계에서 공포로부터 자유를 획득해야 한다. 
  이 단순하고 명료한 4개의 자유론은 미국의 이상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국민을 
단결시켜 전쟁에 대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론은 전쟁 참여냐 중립이냐를 
가지고 분열되어 좀처럼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1년 6월 12일 독일의 잠수함이, 뉴욕을 떠나 남대서양을 항해 중이던 미국의 상선 
로빈 무어 호를 국제 수역에서 침몰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루스벨트는 독일에 강력히 항의하고 
미국 영토 내에 있는 독일과 이탈리아 소유 재산을 전부 차압하는 한편, 외교관의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지는 않았다. 참전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해전이라도 벌이자고 주장했으나 루스벨트는 어떻게 하든 전쟁만은 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소련을 기습하였다. 소련도 이런 사태를 맞아 연합군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군비가 모자라서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은 소련에 6천5백만 달러를 
군사 보조금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히틀러가 소련과 전쟁을 하는 동안, 미국으로서는 태평양에서 계속 팽창해 가는 일본이 
걱정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과거 미국은 일본의 문제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제는 문제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루스벨트는 느끼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태평양에서 전투를 회피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이 유럽과 태평양 양 방면으로 전선을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1년 9월 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3자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 일본은 
인도지나 침략을 감행했다. 미국은 일본을 제재하기 위해 전쟁 물자의 일본 수출을 금지하는 
봉쇄령을 내렸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태평양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영국과 
상호 협조 방안을 논의하였다. 
  1941년 8월에 루스벨트는 영국 수상 처칠과 회동하여 뉴펀들랜드의 남단에 미 군함 오거스타 
호를 정박시키고 갑판에서 며칠을 함께 보내며 장래의 전쟁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처칠과 몇 가지 합의를 보았다. 
  첫째, 태평양에서의 전쟁은 가능한 한 지연시켜야 한다. 즉 히틀러와 싸우고 있는 유럽이 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둘째, 미국과 영국은 독일을 패퇴시키기 위하여 전반적 전쟁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군사 전략으로, 히틀러의 추축국이 진출하는 주변국이나 주변 지역을 먼저 봉쇄하고 
서서히 추축 국가들의 목을 조르는 정책이, 일시에 전면 전쟁을 하는 것보다는 상책이라는 데 
동의하였다. 
  이와 더불어 루스벨트는 이번 회담에서 중요한 선언문에 합의했다. 소위 대서양 헌장이라 
알려진 공동 선언문을 채택한 것이다. 이 공동 선언문의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양국은 영토의 확장에 대한 욕심이 없다. 둘째, 양국은 거주민의 자유로운 동의 없이는 
영토의 변경을 금한다. 셋째, 양국은 전 세계의 국민이 자유로이 정부의 형태를 선택하는 것을 
보장한다. 넷째, 양국은 세계의 자유 무역을 보장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다섯째, 양국은 
세계적으로 사회 보장, 경제적 발전, 그리고 노동 조건의 개선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한다. 여섯째, 
독일과의 전쟁에서 이기면 모든 국가가 영원히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기틀을 확립하고, 모든 
인간이 공포와 빈곤으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국가를 만든다. 일곱째, 평화의 보장을 통해 각 
국가의 항해의 자유를 인정한다. 여덟째, 평화를 위하여 각 국가는 군비를 축소한다. 
  대서양 헌장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세계 질서를 수립하는 기초적 원리가 되었다. 이 회담 
이후 루스벨트도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서서히 전쟁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미국인의 75퍼센트 이상이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여론 조사가 
발표되었다. 미국의 참전파들은 루스벨트가 전쟁을 서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민심의 향방을 예의 주시하며, 전쟁 준비를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1941년 9월 11일 루스벨트를 일생 동안 보살펴 주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러나 
루스벨트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미국의 함선 그리어 호가 독일 
잠수함에 의해 공격을 받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해 10월 16일에는 미국의 구축함 
커니 호가 독일 함대의 공격을 받았고 11명의 해군이 생명을 잃었다. 10월 31일에는 미국의 
구축함 루빈 제임스 호가 격침 당하고 백 명 이상의 미군이 죽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제 미국인들은 하나같이 격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의외로 태연하였다. 
루스벨트는, 국회 내의 고립주의자들도 함께 흥분하며 전쟁을 요구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는 게을리 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 해 12월에 이르자 미군 
육군 병력은 8배로 증가했고 이제 히틀러를 공격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생겼으나 루스벨트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의 측근 스팀슨, 넉스, 아이커스, 모겐소, 스타크 등도 루스벨트의 이런 
속마음을 모르고 불평을 털어놓기도 했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을 기해 일본이 미국 하와이에 소재한 진주만을 공격했다. 12월 8일 
루스벨트는 긴급 소집된 양원 합동 회의에서 일본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 선포문은 
간결했고 명료했다. 
  "1941년 12월 7일은 우리에게 치욕적인 날이고 일본 제국은 해군과 공군으로 미국을 
계획적으로 돌연히 공격하였다. 따라서 미합중국은 일본의 이런 만행을 응징하기 위해 전쟁을 
선포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쟁 결의문은 즉각 양원을 통과했다. 이 전쟁 결의문에 부표를 던진 
유일한 의원은 공화당의 몬태나 주하원 의원 지넷트 랭킨이었다. 
  국민들의 반감과 육군의 제의에 따라, 1942년 2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인 조상을 갖고 있는 
미국 시민을 강제 수용소로 이동하는 법안에 조인했다. 이 법안으로 11만 이상의 일본계 
미국인이 10개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었다. 이 비인도적인 정책이야말로 루스벨트 정책의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다. 
  1941년 12월 11일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양 국가의 행위는 오히려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 주어 미국은 유럽 전선에서도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비록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지만, 일본은 미국의 적수가 아니며 더욱 위험한 적은 
히틀러의 독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해 12월 22일 처칠과 그의 참모진은 미국에 도착해서 루스벨트와 알카리아 회의를 
시작했다. 처칠과 그의 보좌관들은, 영국이 전쟁의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루스벨트와 그의 
참모진은 자기들의 방안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처칠의 오산이었다. 
루스벨트도 치밀하고 영특했지만, 그의 참모진도 막강하였다. 명장 조지 마셜 장군은 합참 
의장이었고, 그의 밑에는 아이젠하워 준장이 참모로 있었다. 해군 참모장은 킹 제독이었고, 
태평양 함대 사령관에는 니미츠 제독이, 대서양 함대 사령관에는 스타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알카리아 회담이 진행될수록 점차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이 전쟁 전략의 기획과 전쟁의 
이행 과정 문제에서 처칠과 그의 참모진들을 압도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로 미군을 자신들의 
의사대로 휘하에 두려던 영국의 의도는 무산되고, 양국이 효과적인 전쟁 수행을 위하여 합동 
사령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 
  루스벨트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있은 지 몇 개월 후에 행정부 내에 전쟁 물자 생산 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도널드 넬슨을 임명하였다. 이와 더불어 물가의 폭등을 막기 위하여 물가 
관리청도 설립했다. 전쟁 물자 생산 위원회는 낡은 전쟁 무기의 생산을 중단하고, 새롭고 
효과적인 무기의 생산을 위해서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루스벨트는 
의회에 엄청난 예산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렇게 국내에서 전쟁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다음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제 전쟁 수행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 수뇌부와 협의하여 아직은 미국이 충분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하였으므로, 적을 기습 공격하여 미국군의 사기를 높이는 전략을 세웠다. 그래서 미국은 전력이 
열세인 태평양 방면으로 해군을 파견했다. 당시 일본군은 이미 필리핀까지 정복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필리핀 대통령 마누엘 쿠존은 필리핀을 중립화시키자고 제의했으나 루스벨트는 이를 
거절하였다.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맥아더 장군은 바탕 군도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호주로 
군비와 병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한편 루스벨트는 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 인도와 협조하여 참전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전선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은 중국에 방대한 원조를 하고 
스틸웰 장군을 장개석 총통의 군사 고문으로 파견했다. 또 루스벨트는 처칠을 설득하여 전쟁이 
끝난 후 인도가 독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줌으로써 인도가 일본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싸우게 
했다. 
  미 해군은 이렇게 서두르지 않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미드웨이 섬에서 야먀모토의 
함대를 괴멸시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에 일본이 하와이를 점령하게 되면 미국의 서해안이 
위태롭게 되어 있었다. 미드웨이 전투에서 일본은 43개의 항공 모함을 잃었고, 3백 30대의 
전투기가 격추되었다. 반면 미국은 1대의 항공 모함과 1백 50대의 전투기를 상실했을 뿐이다. 
미드웨이에서의 대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끈질긴 공격으로 태평양 방면의 미군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특히 남태평양에서의 전투는 치열했고, 공방전은 계속되었다. 미 해군은 2개의 
항공 모함을 남태평양 전투에서 잃을 정도로 전투는 격렬했다. 그러나 우세한 전쟁 물자를 
바탕으로 막강한 병력을 지닌 미군은 1943년 1월 무렵 태평양에서 점차 일본군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결국 패퇴시키게 된다. 
  마셜 장군과 아이젠하워 장군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하여 독일의 심장부를 공격할 것을 제의 
했으나. 처칠은 루스벨트를 설득하여 미군을 먼저 프랑스 영토인 북아프리카에 진주시켰다. 
그래서 1942년 11월 7일 미군은 북아프리카로 진격하였고, 이런 전세의 유리함을 이용하여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독일의 롬멜 군을 이집트에서 몰아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실책으로 
이 승리를 독일의 프랑스 괴뢰 정부인 비시 정부에 넘김으로써 북아프리카는 계속해서 독일군의 
통치하에 있게 되었다. 이 일로 한때 드골 장군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1943년 여름이 되면서 루스벨트는 태평양 방면의 군사 전술을 바꾸었다. 태평양에서의 전쟁은 
니미츠 제독, 맥아더 장군 등 용장들의 전략에 힘입어 호전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이렇게 
전세가 호전되자 종전의 기습 전략을 바꿔 일본군을 측면 공격하면서 일본군의 요새를 피해 
본토를 공략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루스벨트는 일본군의 모든 요새를 점령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측면 공격과 봉쇄전을 통해 일본 스스로 항복하게 하는 전술을 취한 것이다. 당시 
미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무척 강해서 여론은 일본을 즉각 패퇴시키라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태평양전을 위하여 유럽의 병력을 줄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대세는 연합국 측으로 흐르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전후의 국제 질서에 대해 
고려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 외상 이튼에게 국제 연합을 창설할 것을 제안했고, 지역적인 안보 
정책보다는 세계적인 집단 안전 보장 체제를 갖는 것이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4대 강국인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중심이 되어 집단적으로 세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전후 유럽의 재건을 위한 계획도 생각하고 있었다. 
  1943년 7월 25일 무솔리니 정권이 와해되었고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했다. 그 해 
카이로에서 루스벨트는 처칠 수상, 장개석 총통과 회동하고 중국에는 좀더 적극적으로 일본군과 
싸울 것을 권유했다. 수일 후 테헤란에서 루스벨트는 처칠, 스탈린을 만나서 미국이 전쟁 동안, 
그리고 전쟁 후에 국제 질서를 수립하는데 중재 역할을 할 것에 동의했다.
  1944년에 들어오면서 루스벨트는 국내외 여러 가지 문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항복과 더불어 유럽 전선에서의 승리는 눈앞에 있었고 태평양에서도 미군은 일본군을 
막바지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안정이 지속되고 있었다. 인플레도 비교적 심하지 
않았고, 생활 필수품의 생산이나 전쟁 물자의 생산도 차질이 없었다. 물론 부분적인 갈등은 
있었다. 철도 노조와 금속 노조가 연방 정부의 임금 지표 이상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부분 
파업에 돌입했다. 루스벨트는 전쟁에서 승리할 중요한 시점에서 이런 극단적 행동을 마지막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선언하고 군을 투입하여 열차 운행을 강행하였다. 루스벨트의 이런 강경책으로 
노조는 파업을 중단하고 직장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1944년에 '지아이 빌(GI Bill)'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군 복무자에 대한 국가적 혜택에 관한 
법안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 법으로 2차 대전에 참여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군 복무 후에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제대 후 사회 적응을 앞당기게 되었다.
  그러나 1944년 루스벨트의 건강이 악화될 무렵 가정 불화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루스벨트의 
부인 엘레아노는 국내외 여행을 많이 하면서 사회 활동을 열성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한때 급진 운동을 했던 젊은 청년 조지프 래쉬를 항시 대동하고 다녔다. 언론은 래쉬의 
과거 경력, 두 사람의 관계 등을 계속 가십거리로 만들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괴롭혔다. 
보수파들이 이런 호재를 놓칠 리 없었다. 그들은 대통령의 부인이 공산주의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을 냈다. 여기에 루스벨트를 더욱 곤경에 빠뜨린 것은 두 사람이 모종의 연인 
관계라는 점이었다. 한 미군 장교가, 래쉬가 루스벨트 부인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를 입수하여 
대통령에게 전한 일도 있었다. 반면에 루스벨트는 옛날의 애인이며 과부가 된 루시 멀서 
러더퍼드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루시는 과거에 루스벨트와 연애를 하다가 발각되었을 때 그와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루시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루스벨트와 만나곤 하였다. 두 사람은 남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항상 다른 사람과 
함께 만났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부인의 문제로 복잡해진 심경을 따뜻한 루시와 함께 지내면서 
해소했다. 때로는 루스벨트의 친척집에서 두 사람이 밀회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가정 불화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루스벨트의 건강도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어, 여러 
명의 의사들이 그를 돌보기 위해서 배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의 임무 수행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5월 26일 뉴햄프셔 주에 소재한 브레턴우즈에서 
열린 국제 금융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후일 이 회의에서 토의된 내용을 구체화시켜 국제 통화 
기금(IMF)이라는 기구가 설립된다. 그리고 7월에는 덤버턴 오크스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 
참석하기도 한다. 영국, 소련, 중국 빛 미국의 대표들이 모인 이 회의는 전후 국제 질서를 이끌어 
갈 국제 연합의 헌장을 확립했다.

    7. 미국 역사상 전무 후무한 4선 대통령

  1944년에 루스벨트는 4선을 위해 대통령 후보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에 그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루스벨트로서도 상당히 망설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전후 세계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 세계 역사에 길이 남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의 의지가 
작용하여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루스벨트는 세계 평화를 신속히 이룩하기 위하여 대통령 
선거전에 자신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 무렵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독일이 노르웨이에 중수 공장을 건립하여 핵무기를 개발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미국은 아직 핵무기 개발을 성공시킨 상태가 아니었다. 만일 독일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하면, 전쟁은 독일의 승리로 끝나고 엄청난 인명 살상이 우려되기 때문에 
루스벨트는 히틀러와의 전쟁을 속히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개월의 준비와 사전 계획이 결실을 맺어 마침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감행되었다. 수많은 
병사들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로 진격해 들어갔다. 1944년 6월 5일 새벽이었다. 
아이젠하워 사령관은 악천후가 마음에 결렸으나 더 이상 지연하면 적에게 정보가 샐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과감하게 작전을 결행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군사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을 위하여 4천 대의 함정이 동원되고 백만여 명의 군이 투입되었다. 독일군은 이 
엄청난 기습 작전에 당황하여 대패하고 말았다. 이제 승리는 눈앞에 있었다. 
  루스벨트는 노르망디 작전이 성공하고 파리가 탈환되자 선거준비를 하면서 프랑스의 드골과도 
관계 개선을 꾀했다. 그는 프랑스의 해외 임시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7월 11일 
루스벨트는 민주당의 지명을 수락하겠다고 천명했다. 공화당은 이미 뉴욕 주지사인 토머스 
듀이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선거 캠페인을 시작했다. 듀이의 선거 전략은 젊고 유능한 후보 
대 피곤한 영감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켜 승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에게는 
다행히도 승전보가 계속 날아 왔다. 미군은 유럽에서만이 아니라 태평양에서도 승전을 거듭했고 
B-29 폭격기는 동경까지 출격하여 공습을 감행하고 있었다. 이런 승전보는 루스벨트 선거 진영에 
자신감을 주었다. 이제 승리는 국내외 어느 곳에서도 부동의 것으로 굳어 갔다.
  국민들도 루스벨트의 당선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도리어 루스벨트가 누구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할 것인가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월리스, 번스, 레이번, 더글러스, 트루먼 등을 
저울질하다가 결국 전당 대회에서 미주리 주 상원 의원인 해리 트루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1944년 11월 총선거가 끝났을 때, 루스벨트는 4백 32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으나 
듀이는 불과 99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을 뿐이었다. 루스벨트의 4선이 확정된 것이다.
  1945년 1월 대통령 취임식이 있은 지 이틀 후에 루스벨트는 처칠과 스탈린을 만나기 위하여 
얄타로 떠났다. 얄타로 떠날 때 루스벨트는 국무성의 외교 전문가들, 마셜 합참 의장, 홉킨스, 
해리만, 레이히 제독, 번스, 히스 등 측근의 중요한 참모들을 얄타 회담에 대동했다. 
  얄타 회담에서 처칠, 스탈린, 루스벨트는 그 동안 협의했던 전후 세계 질서 구상을 현실화하는 
방안을 세웠다. 이 회담에서는 프랑스의 연합군 점령 지역 통치권에 참여하는 문제, 베를린의 
공동 통치, 독일의 배상 문제, 국제 연합, 특히 안전 보장 이사회의 구성 문제, 폴란드 및 해방된 
지역의 통치권 문제, 극동에서의 소련 참전 및 전후 통치 문제 등이 논의되고 합의되었다. 얄타 
회의에서 협상은 마치 포커 게임과도 흡사했다. 처칠, 스탈린, 루스벨트는 전 세계라는 대상을 
놓고 협상 테이블에 앉아 서로 패를 돌리며 이권을 주고받았다. 이런 게임의 한 결과가 한반도 
문제였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사이 좋게 반씩 나눠 가졌는데 우리 민족은 분단이라는 비극에서 
아직까지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개월이 넘게 진행된 얄타 회담은 1945년 2월 10일 세 
강대국이 각자 분할하여 가진 만족스러운 전리품을 손에 쥐고 헤어졌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얄타 회담에서 돌아온 지 2개월 정도 후인 1945년 4월 14일 새벽 3시 
35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8. 비전 제시보다 실천에 앞장 선 현실적인 지도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현대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대통령이다. 윌슨 대통령이 미국의 
20세기를 여는 제도 개혁을 하는 데 이론적인 틀을 세운 사람이라면, 루스벨트는 윌슨의 비전을 
현실에서 실천한 대통령이다. 물론 개혁을 실천하는 데 루스벨트는 자신의 정치 철학을 세워서 
그것을 강력히 추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정치인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의 현실적 요구를 뛰어넘어 너무 앞서가거나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개혁도 시대에 
맞게 한 정치인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진보적인 대통령으로 평가 받았지만 진보적인 사상 체계를 
갖춘 대통령은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신중하고 현실적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나치 독일과 일본 군국주의에 맞서 싸울 
때도, 명분에 집착하여 서두르지 않고 일본이 침략할 때를 기다렸다가 전쟁을 시작하는 용의 
주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후세의 평자 중에는 루스벨트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리라는 
정보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유인해서 무고한 미국인들을 희생시켰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국민의 정서를 그때그때 제대로 파악하여 이를 조작할 줄 아는 
능소능대한 정치가이지 인류 평화와 박애 정신을 표방하는 사상가는 아니었다. 
  루스벨트가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에 당선된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탁월한 정치가였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마지막 임기는 채우지 못하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많은 업적을 
남기며 미국의 사회, 정치를 현대화하고 안정시켜 미국이 세계를 제패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루스벨트는 소아마비로 반신 불수였으나 이를 극복하고 성공한 의지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생 동안 생계를 위하여 돈을 벌어 본 일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사회 보장 제도를 수립하고 노동자, 농민, 소수 민족 등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기 위해 애쓴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점에서 그는 미국의 정치 구조를 민주적으로 정착하게 
만든 몇 안 되는 대통령의 하나라고 높이 평가 받을 수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작은 정부가 최상'이라고 가르친 존 로크의 사상을 신봉하던 미국 정치 
전통을 뒤바꿔 '큰 정부라고 반드시 나쁜 정부는 아니다'라는 점을 세상에 보여 줬다. 미국은 
애덤 스미스의 자유 방임주의에 따라 경제를 운용하다가 거대한 경제 공황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케인스의 수정 자본주의 이론을 적용하여 이 공황을 타개하였다. 즉 정부가 나서서 
임금과 물가를 통제하며 동시에 정부가 공공 사업체를 조직하여 실업자를 구제하는 한편, 독점 
기업을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공황과 인플레이션을 막고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정책을 펴서 위기를 
극복하였다. 물론 이같은 정책은 거대한 관료 기구를 탄생시켜 훗일 비대해진 정부 기구 때문에 
정부의 비능률화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 루스벨트의 
선례에 따라 정부를 운영하고 있다. 
  루스벨트는 대중 매체를 통해 자신의 정치 목적을 달성한 선진적인 선전 선동가였다. 그는 
라디오라는 현대적인 대중 매체를 이용하여 대중과 의사 소통을 하고 대중의 인기를 끌어낼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대통령이 의회와 충돌할 때나 선거를 할 때 텔레비전을 이용하는 것이 
관행인데 이것의 효시가 루스벨트였다. 
  루스벨트는 국제 연합의 창시자이다. 국제 연합이라는 말도 그가 창안했고, 윌슨 대통령이 
이루지 못한 세계적인 규모의 집단 안전 보장 체제를 그는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를 통하여 
이룩하였다. 루스벨트가 제안한 국제 연합은 아직도 건재하며 세계 평화 유지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정치 사상 최초로 '브레인 트러스트' 제도를 도입한 사람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대통령은 유능한 측근자를 두어 매사에 의논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행정령으로 
백악관이 보좌관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루스벨트는 개인적으로는 탁월한 
머리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고 다른 사람의 머리를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윌슨과는 달리, 루스벨트는 정치에 대한 깊은 이론적 식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제 등에 식견이 높은 학자들이나 관료, 정치인을 
브레인으로 두고 이들의 식견을 참작하여 현명한 결정을 하곤 하였다. 사회 구조, 경제 구조, 
국제 구조가 복잡하게 된 20세기에, 대통령은 불과 일개인이지 이 모든 문제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이런 현실을 파악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브레인 트러스트를 제도적으로 이용하여 그의 
정책에 반영하였다. 이렇게 루스벨트에 의해서 제도화된 백악관 체제가 오늘날에도 거대한 
미국을 운영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정신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는 윌슨의 
정치적 이상을 정책으로 만들어 실현했다. 이런 윌슨의 영향에 대한 좋은 예가 하나 있다. 
베르사유 회의가 끝난 후 귀국하던 윌슨이 젊은 루스벨트에게 말했다. 
  "여보게, 루스벨트. 인간 사회에서 정치적 개혁을 할 기회는 한 세대에 한 번, 또는 한 세기에 
불과 한두 번밖에 없을 거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보수파들이 정치 권력을 잡고 있지 
않나. 그러니 우리에게 개혁의 기회가 왔을 때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개혁을 해야 한다네. 
만일 기회가 왔을 때 개혁을 하지 못한 정치인은 무능한 정치인이지. 아니, 사회에 대한 범죄인인 
셈이네."
  루스벨트는 이런 윌슨의 충고를 일생 동안 잊지 않았다. 그는 윌슨의 말대로 기회가 오자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이런 점이 그를 역사에 남는 정치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존 F. 케네디

    1. 현대판 동화 속의 왕자

  존(일명 잭)피츠제럴드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제35대 대통령은 클린턴 현 미국 
대통령을 제외하고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인 43세로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듯이 케네디 대통령은 많은 신화를 남긴 대통령이다. 또 케네디 대통령은 가장 
미국적인 대통령으로 손꼽히며 미국 역사상 평화시의 경제 체제로서는 최대 규모의 미국 경제를 
달성한 대통령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아직도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텔레비전이 등장한 이후 어느 
배우보다도 유명한 스크린의 스타였다. 멋진 용모에 아름다운 부인, 엄청난 부를 소유한 현대의 
전형적인 스타였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조차도 어쩌면 이런 스타의 측면을 더욱 부각시켜 주었다. 
  케네디는 이렇게 대중의 우상이 되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여러 가지 
훌륭한 정책을 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과 같은 참상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며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세상에 천명했다. 쿠바에 미사일 위기가 닥쳤을 때 
흐루시초프와 타협해서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막았다. 또한 그는 '평화 봉사단'을 조직하여 
후진국의 빈곤 퇴치와 개발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케네디는 미국의 불평등한 사회 제도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새로운 복지 제도의 수립, 흑인을 
위한 인권 제도의 확립, 빈곤한 사람들에게 기회의 균등을 부여하려고 시도한 개혁 등, 뒤에 존슨 
행정부에서 실천한 개혁 조치는 원래 케네디 행정부에서 이미 골격이 세워진 것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윌슨 대통령에서 시작하여 루스벨트가 많은 부분을 실현하였고, 케네디가 최종으로 
완성하려던 민주단의 이상이 애석하게도 케네디의 죽음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케네디는 
정치적으로 진보파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윌슨과 루스벨트의 정통적인 계승자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케네디는 어느 면에서 보면 갑작스런 죽음으로 더 유명해졌다. 그가 1963년 11월 22일에 
암살되었을 때,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이 애도하였고, 어떤 신문 기자는 "서구 문명의 
자랑거리가 쓰러졌다"고까지 하였다. 1964년 1월까지 미망인 재클린 여사는 무려 80만 통이 넘는 
애도 전문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전기와 영화는 미국과 세계의 관심거리이다. 그는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리던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고, 아버지가 만들어 낸 대통령이라는 평가도 
받았으나, 대통령이 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인간적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미국에서도 신화로 남아 있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신화로 존재할 
것이다. 

    2. 백만장자의 아들로 태어난 미남 귀공자

  존 에프 케네디의 증조부인 패트릭 케네디는 아일랜드의 덩가스타운이라는 곳에서 1848년에 
미국의 보스턴 시로 이주했다. 아일랜드의 척박한 땅을 버리고 미국으로 온 그는 보스턴에서 
겨우 겨우 살아가는 정도였다. 케네디의 조부인 패트릭 조지프 케네디는 보스턴 시에서 술집을 
경영하였다. 1887년 그는 보스턴의 중류 가정 출신인 메리 리키와 결혼하였고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일하여 케네디 가문을 중류 가문으로 올려 놓았다.
  패트릭 조지프 케네디의 장남인 조 패트릭 케네디가 뒷날 미국의 대통령이 된 존의 
아버지였다. 당시 아일랜드에서 보스턴으로 이민 온 사람들은 대부분 민주당원이 되었다. 
케네디의 조부는 민주당에 가입하여 보스턴의 유력한 민주당 지도자가 되었다. 케네디의 조부는 
28세에 매사추세츠 주 의회의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어 1893년에는 주 의회의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보스턴 시의 중요한 정치인이 되었다.
  케네디의 할머니는 꿋꿋하고 대가 센 여성으로 자식들이, 특히 장남인 조가 시카고의 좁은 
바닥에 있는 술집과 아일랜드계 정치인의 세계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할머니 메리는 아버지 
조를 어릴 때부터 엄하게 교육시키고 성공하도록 독려하였다. 조는 막일을 하기도 하고 신문을 
팔기도 하였는데 이는 당시 케네디 가문이 빈곤해서가 아니라 조가 자립심을 키워 경쟁에서 
이기게 하기 위하여 어머니가 강제로 시킨 것이었다.
  조는 어머니 덕택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하버드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부는 잘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여기서 많은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다. 조는 당시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에게는 
문호가 열려 있지 않은 하버드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이 있었던 것이다. 
  조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은행에 취직하였다. 그리고 은행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25세 되던 해에는 최연소 은행장이 되었다. 그는 이제 신문에 이름이 가끔 실릴 정도로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 그리고 당시 보스턴 시장을 역임한 존 피츠제럴드의 딸 로즈 
피츠제럴드와 결혼하였다.
  조는 결혼과 함께 돈을 벌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는 은행을 경영하면서도 냉정한 마음과 
치밀한 계산에 의해 모든 결정을 내렸다. 빚을 진 회사가 돈을 제대로 갚지 못하면 즉시 차압을 
하곤 하였다. 그리고 조는 은행을 운영하면서 매사추세츠 전력 회사의 이사가 되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의 하버드 대학 동기생 대부분은 
군에 지원했으나 조는 냉정하게 지원도 하지 않고 당시 미국 최대 기업이던 베를레헴 강철 
회사의 로비스트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이 강철 회사가 소유한 퀸 시 소재 선박 주조 회사를 
인수, 경영하기도 했다. 
  1919년 봄, 조는 증권 회사인 스톤사에 취직하여 증권에 대하여 배운 다음 독립해서 자신의 
증권 회사를 설립하고 엄청난 자산을 모았다. 그는 천부적인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여 증권 
투자를 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부동산에도 투자하였다. 1924년 35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수백만 달러를 가진 백만 장자였다.
  그러나 조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미국에 금주령이 내리자 더 많은 재산을 모으기 위해 
마피아 두목인 프랭크 코스텔로와 손잡고 술을 밀수하여 재산을 불리기도 하였다. 또 당시 망해 
가던 영화 제작 회사를 인수한 다음 영화 제작에 손을 대어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였다. 그는 
당시 미국 최대의 영화 회사인 R.K.O.의 회장직을 맡아 영화 사업에 관계한 지 3년도 되지 않아 
5백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조는 돈을 벌자 여성 편력에 나서기도 했다. 영화사 회장답게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며 
때로는 집을 떠나서 수개월씩 미모의 여성들과 지내기도 하였다. 조는 나이가 들어서도 이 
버릇을 고치지 못했는데 당대의 유명한 여배우인 글로리아 스완슨 같은 여인과도 염문을 뿌렸다. 
그러면서 돈이 되는 것은 여전히 무엇이든 손을 대어 1930년에는 재산이 1억 달러가 넘었다. 
돈과 여성에 이어 그의 관심은 이제 전국적인 정치에 쏠렸다.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1917년 5월 29일 이런 억만 장자 아버지 조의 두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와 로즈 케네디는 9남매를 두었다.
  1926년에 케네디 일가는 뉴욕 시로 이주하였다. 케네디는 대단한 재산가의 집에서 태어났으나 
근면하게 자랐다. 그의 어머니 로즈 여사는 자식들을 엄하게 키웠다. 아버지는 사업과 여선 
편력으로 집을 자주 비웠으나, 어머니는 가족을 돌보는 것을 그녀의 필생의 업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자식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학교 공부를 돌보며 자식들의 성장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로즈 여사는 자식들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 힘든 일을 많이 시키면서도 케네디 대통령은 10세 
되던 해에 아버지에게 '일주일에 40센트를 주는 것은 너무 적다'고 편지를 보냈을 정도였다.
  조와 로즈는 그들의 자녀들을 카톨릭식으로 엄하게 양육했다. 미사에는 매주 반드시 참여해야 
했고,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이들의 의무였다. 로즈 여사는 특히 딸들에게 엄해서, 당시 
미국 상류 사회에서 흔히 있던 혼전 성 관계와 같은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런 로즈 여사도, 미국이 경제 공황을 겪고 뉴 딜 정책이 시행되고 있을 무렵 남편 
조의 여성 편력이 극심해지자,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홀로 유럽 여행을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일 때 유럽에 가서 비싼 옷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존은 
어머니의 이런 변화에 실망하여 "우리 어머니는 파리의 여성 패션 가게에 있거나,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 주된 일과이다"라고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우리 어머니는 우리가 
필요할 때는 항상 없었으며, 나를 안아 준 일도 없다"고 나중에 회고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케네디 가문은 문제도 있었지만, 그러나 자식들의 교육과 형제간의 우애에 관해서는 
남달랐다. 로즈 여사는 자식들에게 항상 아버지를 존경하라고 가르쳤다. 자녀들은 생존 경쟁을 
위해서 얼마나 냉혹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했고 동시에 케네디 가문에 대하여는 무조건 충성심을 
갖도록 교육받았다.
  원래 아버지 조가 가장 사랑한 자식은 장남인 조였지, 존이 아니었다. 장남인 조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를 닮았다. 생김새며, 성격이며, 야심 만만한 태도며 모든 것이 아버지를 꼭 닮았다. 아버지 
조는 이 미남이며 재능이 있는 아들이 성장하여 북쪽의 양키와 투쟁하여 이기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를 당시 유명한 학자이던 런던 대학의 해롤드 래스키 교수의 수제자가 되었고 래스키 
교수는 소련으로 여행할 때 그를 데리고 갔다. 야심 만만한 조는 그가 미국에서 최초의 카톨릭 
교도 대통령이 된다고 래스키에게 말했다고 한다. 조는 런던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후 미국에 
와서 하버드 대학에 다녔다.
  조는 맏형으로서 부모가 집에 없을 때는 가장 노릇을 했다. 집안 일을 결정하고 동생들에게 
일을 지시하였다. 불과 두 살 연하인 케네디 대통령은 이런 형의 권위적인 태도에 반항하여 형과 
자주 싸웠다. 그러나 싸우게 되면 동생인 잭이 항상 지곤 하였다. 잭은 형에 대한 열등 의식이 
아주 강했다. 형은 공부도 잘하고 체격도 좋은데다가, 운동도 잘했고 생긴 것도 미남이고 의지도 
강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형과 늘 싸웠지만 그를 무척 존경했다고 뒤에 고백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의 선생에게 나는 형인 조처럼 머리가 좋지 못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들 형제들은 때로 다투고 경쟁하기는 했지만 사이는 아주 좋았다. 
  사실 잭은 건강이 좋지 않고 성격이 나약해서 아버지와 형의 그늘에서 성장했다. 특히 그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체질인데다가 항상 허리 통증으로 시달렸다.
  1931년 케네디는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명문 조에이트 고등 학교에 입학했다. 이 때 그의 형은 
이미 이 학교에서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형은 미식 축구 선수였고, 학생 신문의 주필이었으며, 
공부도 잘해서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반면에 잭은 운동 선수가 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했고, 
공부도 잘하지 못하여 110명의 졸업생 중에서 65등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물리학과 역사학을 
비교적 잘하는 편이었고, 특히 역사학을 좋아했다.
  잭은 고등 학교에 다닐 무렵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잭은 친구를 사귀는 데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성격이 비교적 온화하고, 약간 수줍은 편이었으나 때로는 고상한 면도 있었다. 그는 
당시 명문 집안의 자식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그들과의 우정은 깊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 
곳에서 사귄 필립스와 홀튼은 케네디 대통령의 일생의 친구가 되었다.
  1935년 가을, 케네디의 가족은 런던으로 여행을 하였다. 당시 아버지 조는 이미 런던에 많은 
투자를 했고, 런던에서 생산되는 헤이크 스카치 위스키와 고든 진의 미국 판매를 독점하면서 
연간 백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1946년 이 사업체를 매도했을 때 8백만 
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조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선거 자금을 도와 준 덕으로 증권 
감독원장으로 있다가 케네디 가족이 런던으로 여행 갔을 때는 증권 감독원장직을 사임한 뒤였다.
  잭은 형의 뒤를 이어 런던에 체류하며 런던 대학에 등록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때 아버지는 하버드로 진학하기를 원했으나. 잭은 그의 친구인 필립스와 홀튼이 
프린스턴 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에 그 곳으로 가겠다고 우겨 결국 성공하였다. 그는 친구들과 
더불어 프린스턴 대학 기숙사에 체류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영어, 역사, 군사학, 불어 등을 
수강하려고 했으나 병이 재발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결국 프린스턴 대학도 
자퇴하였다. 이후 그는 애리조나에 가서 휴양하였다.
  1936년 가을 학기에 잭은 하버드 대학에 등록하였다. 그의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영향력으로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하버드 대학 시절의 
성적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주로 운동에 관심이 있어서 운동 선수들과 사귀기를 좋아했고, 
유명한 미식 축구 선수인 맥도널드와 방을 함께 쓰게 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일생의 친구가 
되었다. 
  하버드 대학에 다니는 동안 케네디는 학생 활동이나 서클 활동에 참여하였으나 별로 두각을 
나타낸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케네디는 많은 여성들과 어울리기 시작해 그의 
바람둥이로서의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1937년 12월에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조가 영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조가 
그의 재선에 공헌한 보상으로 그를 영국 대사에 임명한 것이다. 이것은 케네디 가문만이 아니라 
미국 정가에서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조 케네디는 아일랜드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한창 전운이 감돌고 있던 1939년 봄 학기에, 케네디는 하버드 대학교를 휴학하고 
7개월간 해외 여행을 하면서 공부하였다. 잭은 프라하, 모스크바, 부다페스트, 이스탄불, 그리고 
서부 유럽 등지를 여행하면서 유럽 문화의 진수를 배우고 국제 정치에 대한 견문을 넓히면서 
나름대로 정신적 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그 해 9월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자 잭은 하버드 
대학교로 귀교했다. 당시 잭의 아버지는 고립주의 입장을 갖고 미국이 유럽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행정부는 조의 이런 입장을 거북해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측근들 중 몇몇은 조가 194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입지를 세우기 위한 
제스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잭은 하버드에서 공부하는 동안 저학년에서는 성적이 좋지 않았으나 상급 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성적이 좋아졌다. 그는 졸업 논문의 주제로 영국의 뮌헨 조약에 대한 입장을 잡았다. 그리고 
논문을 완성하자 이를 곧바로 아버지에게 보냈다. 잭의 아버지 조는 이 논문을 읽어 보고 즉시 
뉴욕 타임스의 편집 책임자 크로크에게 보냈다. 그러면서 조는 잭을 도와서 이 논문을 수정하여 
출판하도록 요청했다. 결국 잭은 크로크의 도움으로 논문을 끝냈고 학위 논문으로 제출함과 
동시에 출판도 했다. 1940년 그의 저서인 "왜 영국은 잠을 잤는가"는 이렇게 책으로 출간되었다. 
책의 서문은 당시 타임지와 타이프지의 창설자인 헨리 루스가 써주었는데 이 책은 몇몇 주요 
신문에서 좋은 평을 받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을 베스트 셀러로 만들기 위해 조가 수만 
권을 사들였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구매 작전이 있었고 유럽의 전쟁도 끝나 이 책은 몇 번이나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1941년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재선된 후, 심한 견해 차이로 조는 영국 대사직을 사임했다. 이 
무렵 잭은 법과 대학에 갈 생각이었으나 병이 다시 도졌다. 잭은 의사의 권유로 캘리포니아로 
휴양차 여행을 떠났다. 다시 동부로 돌아와서 그는 미 해군에 입대하였다. 
  케네디는 해군에 있는 동안 여러 곳으로 전출되었다. 적군과 전투를 원하던 잭은 
PT보트(어뢰정)를 타겠다고 자원했다. 어뢰정 훈련이 끝난 후 그는 또다시 여러 곳으로 
이동하다가 PT보트의 지휘자가 되어 태평양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해상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잭의 PT보트가 일본의 구축함 아마기리 호와 충돌하는 바람에 배가 
산산조각이 났다. 다행히 살아난 잭과 선원들은 태평양상에서 여러 날을 표류하다가 미 해군에 
의해 구조되었다. 잭은 이 전공으로 후일 은성 훈장을 받게 되었다. 
  케네디는 다시 PT보트의 지휘자로 복귀했으나 등의 통증이 재발하여 1944년 마이애미로 
전근되었다. 그리고 그 해 6월 디스크 수술을 받고 병원에 몇 달 동안 입원하였다. 그런데 1944년 
8월 12일 그의 형 조가 프랑스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형의 죽음으로 마음이 약해지고 
건강도 나빠진 케네디는  1945년 3월에 전역하고 말았다. 

    3. 대중 문화는 새로운 영웅을 원한다

  1945년 케네디는 애리조나 주로 휴양을 떠났다. 이 때를 전후해서 아버지는 그에게 정치인이 
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존은 정치인이 되는 것이 싫었다. 그는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조는 집안의 이 새로운 장남인 잭을 반드시 정치인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원래 조는 죽은 맏아들 조를 정치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준비했었다. 그러나 이제 
조가 없으니 잭이 이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잭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에게 정치인이 
되라고 강요하였다. 케네디 가에서 아버지의 뜻은 곧 지상 명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존 에프 
케네디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치인이 되었으나 그는 도리어 정치인이 됨으로써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아버지 조는 케네디가 고향인 매사추세츠 주에서 하원 의원으로 출마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비밀리에 이를 위한 준비를 했다. 케네디도 할아버지가 당선됐던 보스턴의 한 지역구에서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케네디가 눈독을 들이고 있던 이 지역구의 민주당 의원 제임스 
컬리가 보스턴 시장으로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이 지역이 비게 되자 잭은 1946년 1월에 
보스턴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선거 준비를 위하여 조는 사촌인 조 케인, 조 피밀티와 함께 노동자 출신의 젊은 청년들을 
동원했다. 이들은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지도자로!'라는 슬로건을 만들고 나서 케네디를 태평양 
전쟁의 영웅이라고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후보로 선정되기 전에 선거 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 이미지 부각 작전이 성공하여 케네디의 인기는 날로 높아 갔다. 엄청난 재산, 수려한 용모, 
쾌활한 성격 등이 많은 여성 유권자들을 매료했고, 젊고 패기 있는 진보적 이미지가 보스턴의 
중하층 계급에게 호감을 주었다. 늙은 부인들은 그를 자식처럼 생각했고, 젊은 여인들은 그를 
동경하게 되었다. 특히 형식에 구애되지 않은 매너, 자유롭고 서민적인 차림, 친절하고 개방적인 
성격 등은 많은 남성들에게서도 인기를 끌었다. 
  1946년 2월부터 잭은 선거구에서 열심히 선거 운동을 했다.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에게 
생소한 자신을 소개하고, 집회가 있을 때마다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특히 그는 매력적인 매너로 
연설을 하는 편이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노련한 연설가가 되었다. 이런 케네디를 보고 보스턴의 
많은 기성 정치인들은 케네디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케네디를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라고 비웃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케네디 가의 엄청난 재력과 놀라운 
단결력을 잘 몰랐던 것이다.
  케네디는 등에 심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연설을 하러 다녔고 수없이 많은 서민들을 방문하였다. 
또한 케네디 가의 전 가족과 친척들이 선거 운동에 나섰다. 아버지 조는 뒷전에서 조용히 선거 
전략을 세우고 막대한 경비를 사용하면서 선거전을 지휘하였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여성표를 
노리고 여러 차례 다과회를 열었다. 심지어 열네 살 밖에 안 된 동생 로버트(테디)도 나와서 
심부름할 정도였다. 상상을 초월한 가족의 단결력과 힘을 보여 준 것이었다. 물론 엄청난 선거 
자금을 뿌리기도 했다. 1946년 6월 18일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그는 민주당의 예선전에서 
승리하였다. 그의 승리에 대하여 한 신문은 장난기 있는 광고를 다음과 같이 실었다. '국회 의석 
판매, 경험은 필요 없음, 지망자는 뉴욕에 살거나 또는 플로리다에 거주해야 함, 오직 백만 
장자만 지원할 수 있음.' 엄청난 돈을 뿌린 케네디에 대한 야유였다.
  민주당의 지명을 받은 후 가을에 있었던 하원 의원의 선거는 형식에 불과했다. 젊은 케네디는 
연방 하원 의원으로 무난하게 당선되어 정치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그의 나이 불과 
29세일 때였다.
  연방 하원 의원이 된 케네디는 사무실과 집을 보스턴과 워싱턴 두 곳에 전부 두고, 두 도시를 
수시로 왕복하였다. 하원에서 케네디는 워싱턴 시의 관리 위원회, 교육 및 노동 위원회, 재향 
군인회 관리 위원회 등에 임명되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노동 문제와 퇴역 군인의 주택 문제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이었다. 따라서 케네디는 신임 의원이었지만 언론에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하원 의원의 생활에 그다지 즐거움을 못 느꼈다. 의원으로서의 일보다 워싱턴의 
사교계 생활을 더욱 즐겼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있었다. 상당수의 언론인들도 
케네디의 솔직한 성격이나 대화 등을 좋아하여 그는 항상 언론에 자주 거론 되었다. 케네디는 
의회 의원들 중에는 비교적 보수적인 사람들과 사귀었다. 그러나 그는 선거구민들의 요구에는 
항상 관심을 보이고, 그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49년 보메 케네디의 여동생과 그녀의 남편이 비행기 추락으로 유럽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에게는 이것이 두 번째로 형제를 잃은 사건이었다. 그 자신은 이 때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형제들은 그 자신을 포함하여 여러 명이 이렇게 불운하게 죽게 된다. 
  케네디는 1948년 하원 의원으로 재선되었고, 1950년에도 다시 당선되었다. 이렇게 정치적인 
경력이 쌓이자 아버지 조는 잭에게 1952년에 있는 매사추세츠 주 상원 의원에 출마하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케네디 자신도 상원 의원에 출마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케네디는 이 선거를 
위해 매사추세츠 주 곳곳을 누비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연설을 자주 하였다. 또 국제 
문제에도 지식을 쌓기 위해서 5주일 동안 유럽으로 연구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 여행 기간에 
유고슬라비아에 가서 티토 대통령과 면담하기도 했다. 그 해 10월에는 이스라엘과 극동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여행할 때마다 언론에 보도되곤 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언론인들과 
친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와 참모들의 로비 덕택과 친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와 참모들의 로비 덕택이었다. 
  1952년 4월 아버지 조는 당시 주지사이며 상원 의원 출마 가능성이 있는 폴 디버와 
회동하였다. 두 사람의 회동이 있은 후 디버는 주지사에 다시 출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도 
그의 아버지가 디버를 설득하여 주지사 선거 비용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케네디가 상원 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막후 협상에 의한 결과였다. 그래서 1952년 4월 6일 케네디는 
매사추세츠 상원 의원으로 출마할 것을 선언하고 래리 오브라이온을 선거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케네디는 "시민의 이해 관계와 미국 국가의 원칙을 수호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출마의 변을 대신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아버지 조는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선거 전략의 결정에서부터 
참모진까지 아버지가 전부 관여했다. 아버지 조는 랜지스, 변호사인 존스톤, 슈라이버 등의 일급 
참모를 그 자신이 임명하다시피 하였다. 동시에 케네디를 도와 줄 수 있는 언론인, 학자, 재정 
전문가 등도 선정하였다. 결국 케네디의 선거 전략, 주요 정책, 연설문 작성까지 거의 전부 
아버지가 선정한 브레인 트러스트에 의해 이루어진 셈이다. 
  당시 매사추세츠 주의 연방 상원 의원은 공화당의 헨리 케보트 롯지로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통령 선거를 성공적으로 도왔고 매사추세츠에서는 대를 이어 상원 의원이 된 
사람이었다. 또 연방 의회 외교 분과 위원장을 지낸 막강한 공화당의 중진 의원이었다. 이런 
롯지를 꺾기 위해 케네디 진영은 두 가지 전략을 세웠다. 첫째, 당시 공화당을 지배하던 오하이오 
주의 상원 의원 태프트 등 보수파들을 끌어들이는 전략이었다. 케네디 측에서는 은행가인 월터 
테일러를 의장으로 한 후원 기구를 편성하고 보수파의 거물인 태프트를 지원하면서 케네디가 
태프트와 가깝다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퍼뜨렸다. 이렇게 되자 공화당 진영은 물론 보수적인 
성향의 시민들도 케네디를 진보적인 인물로 공격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전통적인 민주당의 
진보파들을 대거 활용하였다. 이들 진보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케네디를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명한 진보파 정치인이며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상대로 싸웠던 아드라이 
스티븐슨이 케네디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만들었다. 
  케네디의 이 같은 이중 정책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케네디가 진보적인지 또는 보수적인지 
매우 애매하여 유권자들은 각기 자기편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마디로 양다리 걸치기 작전이 보기 
좋게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 케네디가 연설을 하면 텔레비전이 꼭 중계를 하고, 또한 케네디의 
전쟁 동안의 영웅적인 행동을 소개하는 책자를 만들어 사방에 뿌렸다. 케네디는 젊고 매력적이며 
지성적인 전쟁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전 주에 걸쳐 홍보한 것이다. 
  상원 의원 선거전에서도 케네디 가문은 엄청난 돈을 뿌렸다. 항간에는 아버지 조가 언론인들을 
돈으로 매수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또 전국적으로 이름이 있는 민주당의 지도자들을 
돈으로 초청하여 케네디를 위한 연설을 하게 하였다. 
  아버지 조는 잭의 동생인 26세의 젊은 보브 케네디를 선거 사무장으로 앉혔다. 보브는 능률을 
중요시하여 방만한 선거 운동 기구를 효과적으로 잘 통제하였다. 그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선거 운동원들을 쫓아내기도 하였다. 때로 그는 잭을 위하여 일하는 중요한 정치인과 싸우기도 
하였다. 아버지인 조는 보브의 이런 모습을 무척 만족해 하였다. 그는 보브가 자기를 닮았다고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잭 케네디가 약하다고 생각한 조는 보브의 강한 기질을 
일부러 찬양하기도 하여 잭을 자극하였다. 잭도 또한 동생이 하루에 18시간씩 일하는 것을 보고 
감사하는 한편 상당히 감동하기도 하였다. 
  이번 선거에도 케네디의 전 가족과 친척들은 각자 분담하여 선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케네디 가문의 여성들은 선거 기간 동안 무려 7만여 명의 여성들을 초대하여 
다과회를 열고 환대했다. 대다수 여성들은 미남이며 엄청난 부자의 아들을 한 번쯤 만나 보고 
싶은 심정을 갖고 있었다. 이런 여성들을 겨냥한 선거 전략은 케네디를 위하여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어머니인 로즈 여사는 텔레비전에 자주 출연하여 아이들을 양육하는 동안의 
고충을 이야기하면서 항상 잭의 전쟁 동안의 영웅적 행동을 들먹였다. 이렇게 케네디 가문의 
놀라운 단결력은 일반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선거 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한 사람은 존 에프 케네디 자신이었다. 그는 계속되는 등의 
통증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계속 미소 띤 얼굴로 선거 운동을 하였다. 때로는 
너무 피곤하여 헛구역질을 하기도 하였다. 케네디는 수없는 사람들과 악수하고 상대방에 대한 
공격을 하며 동일한 예기를 반복하는 것을 싫어했으나, 선거 기간에는 이런 것을 참아 가며 
열심히 노력하였다. 
  선거 결과 케네디는 51.1퍼센트의 득표률로 미 연방 상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때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였다. 케네디의 승리는 사실상 케네디 가문의 승리이자, 특히 아버지 조의 
승리였다. 
  1952년 5월 케네디의 친구인 버틀레드가 재클린 부비어를 잭에게 소개했다. 1929년에 태어난 
재키는 어릴 때는 유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부모가 이혼을 하여 어머니와 살다가, 어머니가 
재혼하는 바람에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의부인 오친크로스는 백만 장자로, 재클린의 
교육비를 충분하게 주었다. 재클린은 바사 대학과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51년에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 재클린은 워싱턴 
타임스-헤럴드 신문의 기자로 근무했다. 그녀는 뉴욕 증권 회사에 근무하는 허스테드와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하려고 했다. 허스테드는 중류 가정에서 자란 청년이었다. 그러나 재클린의 
어머니는 그가 명문 대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재클린도 어머니의 의사를 
받아들여 이 결혼을 포기했다. 재클린은 유달리 금전과 명성에 약했다. 
  1952년 재클린은 직장에서 받는 월급 외에는 돈이 전혀 없었다. 그녀의 의부는 부유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재산을 전처에서 낳은 자식들에게 전부 상속하고 재클린에게는 남겨 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무렵 케네디를 만났다. 당시 케네디는 천만 달러 정도의 자기 재산이 있었고, 
상원 의원으로 막 당선된 장래가 촉망되는 정치인이었다. 
  1953년 잭의 아버지는 그에게 결혼할 것을 강력히 권유하였다. 건강한 결혼 생활은 정치 
활동의 필수 요건이라고 조는 강조하였다. 그는 이제 케네디를 대통령으로 만들 욕심을 갖고 
있었다. 
  케네디는 재클린을 좋아하였고 그녀의 미모와 외국어 구사 능력에 반했다. 케네디는 외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더구나 재클린은 고전을 비롯한 책과 예술에 대한 조예도 깊은 지성적인 
여성이었다. 이에 비해 케네디는 지적이지 못했고 때로는 저급한 말을 쓰기도 했다. 케네디는 
재클린이 케네디 가문을 빛낼 수 있는 지성과 미모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1953년 5월 
재클린이 런던 특파원으로 나가 있을 때 케네디는 전문으로 결혼을 제의했다. 물론 그녀는 이를 
곧 수락했다. 
  케네디와 재클린이 결혼하는 데에 아버지 조의 역할이 컸다. 조는 그녀가 우아하고 지적이라는 
점을 들어 장래 대통령의 아내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 후에도 재클린과 두 
사람의 관계는 무척 좋았다. 그러나 재클린은 시어머니인 로즈 여사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로즈 여사는 재클린의 낭비벽과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싫어했고 재클린은 
시어머니가 구세대의 사고 방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케네디 부부에 대한 많은 신화와 전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결혼 초부터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재클린은 히아니스 폿에 있는 시부모와 함께 있었고, 케네디는 워싱턴에서 
의원 생활을 했다. 그는 몇 달씩 워싱턴에 있을 때 주말에만 집에 오고, 집에 왔을 때도 항상 
친구들이나 정치인들과 함께 어울려 케네디 부부만이 따로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이에 대해 
당연히 재클린의 불만이 높았다. 또 항상 검소하게 살던 케네디 가에서 재클린의 사치가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케네디는 다른 여성과 시귀기도 했다. 재클린은 
그녀의 아버지도 바람을 심하게 피웠기 때문에 미국 상류 사회의 남성은 모두 그러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케네디의 이런 태도는 그 도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시 
관계를 개선하였다. 함께 살면서부터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일종의 
친구처럼 우정과 애정을 갖게 되었다. 재클린과 함께 있는 동안 케네디는 명랑해지고 교양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물론 언론에서는 이들 부부가 잉꼬 부부로 널리 홍보되었다. 
  1953년 케네디는 상원 의원이 되자 곧 테드 소렌슨을 그의 보좌관으로 임명하였다. 소렌슨은 
네브래스카 출신의 젊은 변호사로 지성적이며 머리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시카고 출신 더글러스 
상원 의원이 소렌슨을 케네디에게 소개하면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소렌슨은 
진보주의자였다. 소렌슨의 아버지도 진보주의자로 루스벨트를 지지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여성 
운동가였다. 젊은 소렌슨도 이러한 부모의 영향을 받아 미국 민주주의 행동 위원회라는 진보주의 
단체의 링컨 시 지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야심이 강한 소렌슨은 케네디에게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고, 
케네디는 그의 탁월한 식견과 조직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한때 케네디는 그를 자기의 지식 
은행이라고까지 칭하였다. 
  소렌슨은 케네디의 연설문이나 신문에 기고하는 논문 등을 저술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소렌슨이 보좌관이 된 이후 케네디의 글은 미국의 중요한 잡지와 신문에 실리기 
시작하였다.
  케네디 자신도 이러한 참모를 통해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1945년에 속독법을 
배우기도 하는 등 자신의 지식을 넓히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재클린이 그의 정신적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어 그는 나날이 지적으로 성숙하게 되었다.
  케네디는 국내 정책뿐만 아니라 외교 정책에도 전문성을 갖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베트남 정책을 비판하고, 미국은 인도지나에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도미노 이론은 이미 현실화되었기 때문에 베트남을 독립시켜 민주 
정부로 발전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더불어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기 위한 
미국의 국방력 강화를 역설하였다.
  1954년 선거에서 케네디는 전국적으로 민주당원을 당선시키기 위한 캠페인에 참여했다. 전국을 
다니면서,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하여 미국은 내부 혁신을 이루어야 한다고 진보적인 
국내 정책을 널리 선전했다. 그리고 캠페인을 하면서 케네디는 이미 부통령을 후보로 출마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1954년 진보적인 사람들에 대한 음해와 공격을 일삼던 극우파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에 대한 
의회의 조사가 문제되었을 때, 케네디는 그의 진보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를 조심해서 
회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케네디는 험프리, 몰스 등의 상원 의원과 더불어 1954년 공산당 
통제 법안에 서명했다. 이런 그의 행위는 민주당 진보파로부터 불신을 받아 뒤에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올 때 문제가 된다.
  케네디는 이 무렵 다시 등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 때 케네디는 소렌슨, 
아서 슐레진저, 제임스 번즈, 줄 데이비드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은 미국 의회에서 뛰어난 일을 한 의원들의 이야기를 쓴 
것으로 1957년에는 퓰리처상을 받게 된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곧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케네디는 지성적이며 바른 이상을 가진 정치인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 책은 뉴욕 타임스 
같은 신문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텔레비전에서도 방영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상원 의원 
케네디는 이제 단순히 젊고 수려한 용모의 돈 많은 정치인이 아니라 사고가 깊고, 사회적인 여러 
문제를 깊이 있게 보는 안목이 있는 정치가로 부각되었고, 민주주의 원칙을 수호하는 대변자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한국 전쟁 특수로 시작된 경제적 번영은 1956년 무렵에 가서 점차 가속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고도의 경제 성장, 기술의 발달, 고등 교육 기관의 확충, 도시의 발전, 대가족 제도와 
교회의 번성 등 미국 역사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이 같은 시절이 되자 존 에프 케네디의 
이미지는 진보적이고 부유하며, 미남이자 미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일종의 미국 문명의 상징처럼 
부각되었다.
  1956년 케네디는 일리노이 주지사였던 아르타이 스티븐슨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 받을 
것을 확신하고, 일찍이 그를 지원하였다. 동시에 케니 오돈넬과 래리 오브라이온을 참모로 
매사추세츠 주의 대의원들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케네디의 이런 정치적 승리가 알려지자, 
매사추세츠 주민들은 그의 저서인 "용기 있는 사람들"을 구입해서 케네디의 서명을 받으려고 
몰려들기도 했다. 루크지는 "천주교인이 부통령이 될 수 있는가"라는 논문을 싣기도 하였다. 
이렇게 케네디가 돌풍을 일으키자 민주당 전국 주지사 회의에서 코네티컷 주지사인 리비코프와 
로드아일랜드 주지사 로버츠는 케네디를 부통령 후보로 하자고 공공연히 지지하였다.
  당시 부통령 후보로는 미네소타 상원 의원 험프리와 테네시 상원 의원 키포브가 케네디와 
더불어 출마를 선언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케네디는 카톨릭이고, 험프리는 너무 진보적이고, 
키포브는 남부인으로 너무 보수적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1956년 8월 13일 시카고에서 민주당 전당 대회가 개최되었다. 스티븐슨은 쉽게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부통령 후보 중 어느 누구도 결정할 수 없으니까 전당 대회 
대의원들이 결정하라고 선언했다. 전당 대회에서 고어, 케네디, 키포브, 험프리 등이 부통령 
후보를 놓고 격심한 경쟁을 벌였다. 결국 고어 상원 의원이 포기하는 바람에, 3차 투표에서 
키포브가 부통령후보로 지명 받게 되었다. 케네디는 무척 실망하는 한편 스티븐슨을 원망하였다.
  그런데도 스티븐슨은 케네디에게 그의 지명 연설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실망한 케네디였지만, 
표면상으로는 미소를 짓고 미국의 이상을 민주당과 스티븐슨이 중심이 되어 이루자는 멋진 
연설을 하였다. 미주당 전당 대회는 전국으로 텔레비전 생방송을 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미국 
시민들은 미남의 케네디가 열정적이면서 이지적으로 멋있는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케네디는 전당 대회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지는 못했으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휴식을 취한 후 친구인 조지 스마터와 몇 명의 젊은 여성들을 데리고 요트를 
타고 지중해고 떠났다. 그런데 그가 지중해에서 즐기고 돌아오니 재클린은 제왕 절개 수술을 
하여 아이를 낳다가 중태에 빠져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는 친구인 스마터의 권유에 따라 
부인이 있는 병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일로 케네디와 재클린의 결혼 생활이 다시 불편한 
상태로 되었다. 그 무렵 케네디 부부가 이혼하리라는 소문이 워싱턴에 나돌기 시작했다. 또 
아버지 조가 이혼을 막기 위하여 재클린에게 백만 달러를 주었다는 헛소문도 나돌았고, 이런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한때 재클린은 친구에게 "부인에게 충실한 남편은 세상에 한 
명도 없나 봐. 아마도 남성은 악과 선의 복합체인가 봐"라고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케네디가 이렇게 소문에 시달리는 동안 동생 보브 케네디는 스티븐슨을 수행하여 대통령 
선거전에 몰두하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전에 대한 사전 지식을 얻기 위한 아버지 조의 치밀한 
배려였다.

    4. 강력한 미국을 꿈꾼 '뉴 프런티어'의 기수 

  스티븐슨이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케네디는 1백50번의 연설을 했고 3만 마일의 여행을 했다. 
26개 주를 순회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대장정을 하는 동안 루이빌에 있는 울수린 
대학에 들렀을 때는 여학생들이 몰려와 자동차를 가로막고 사인을 해달라고 몰려와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표면상으로는 스티븐슨의 선거 운동을 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케네디 자신의 다음 선거를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려고 노력했다. 동생 보브 케네디는 스티븐슨을 수행하면서 선거 
조직이나 선거 전술의 운영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하지만 스티븐슨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엄청난 표차로 참패했다. 
  1957년 초기부터 케네디와 소렌슨은 다시 전국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많은 연설을 했고, 가는 
곳마다 중요한 민주당의 지도자들을 만나 얼굴을 익히고 이름을 알아 둔 뒤에 다시 접촉하곤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해 한 해 동안 케네디와 소렌슨은 7만 명의 이름을 수집하기도 했다. 
특히 그들은 남부 쪽을 집중 공략하였다. 남부는 반카톨릭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상원 민주당 원내 총무인 린든 존슨은 명성이 높은 외교 분과 위원회에 케네디를 배치했다. 이 
무렵 케네디는 민권 법안을 제안하였다. 이 법안은 법무 장관에게, 인종을 차별하는 사람에게 
강력하게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내용이었다. 케네디는 이 민권법을 관철시키는 한편, 
노인에 대한 복지 정책을 제의했다. 또 최저 임금을 상승시키고, 연방 정부가 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같은 그의 태도에 동부의 진보파들은 케네디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보파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진보파나 보수파에 자신의 
이미지가 고정되는 것은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케네디는 자신을 그저 민주당원이라고 강조하였다.
  1957년 6월 6일 케네디는 "용기 있는 사람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 때 퓰리처상을 받은 
사람은 작가 유진 오닐, 역사분야에서는 조지 케넌, 시인 리처드 윌버, 언론상에는 제임스 레스턴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미국의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케네디가 이들과 나란히 
수상했기 때문에 그의 지성정 이미지는 더욱 높아졌다. 전국의 언론들은 케네디를 앞다퉈 다루기 
시작했다. 미국의 저명한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는 "케네디 상원 의원은 말끔하게 생긴 얼굴로 
늘 미소를 아끼지 않는 미국의 희망이며 믿음성, 충성심, 용기, 결백성, 신앙심이 있는, 핵무기 
시대에 도전할 수 있는 인재"라고 극찬했다.
  1957년 소련이 인공 위성 스푸트니크 호를 먼저 발사했을 때, 케네디는 미국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주 개발에 앞장서야 하며, 미국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케네디의 의회 활동으로 그는 1957년 타임지의 송년호 커버 스토리에 실리기도 
했다.
  1958년 매사추세츠 주에서 상원 의원 선거가 있었다. 케네디 진영의 전략은 이번 상원 의원 
선거에서 케네디가 압도적인 승리를 해서 그가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공화당은 
케네디의 승리를 확신하고 이탈리아계 노동자 출신 서레스터를 상원 의원 후보로 지명하였다. 
서레스터는 케네디 집안을 가차없이 공격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케네디와 그의 
아버지에 대하여 심한 인신 공격을 하였다. 케네디 측은 이러한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저자세로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 아버지 조는 아들과 함께 있는 기회를 될 수 있으면 피했다. 
명목상으로는 26세인 동생 테디 케네디가 선거 사무소 소장으로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아버지 
조 케네디가 선거 운동을 지휘하였으며 엄청난 돈을 뿌렸다.
  선거 결과 케네디는 전체 투표의 73.6퍼센트를 획득하여 압도적인 차이로 서레스터를 눌렀다. 
이제 남은 일은 1960년의 대통령 선거를 위한 힘찬 도약뿐이었다. 
  케네디 진영이 1960년에 있는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는 동안, 상당수의 민주당 중진 인사들이 
케네디 후보에 대하여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엘레아노 루스벨트는 휴버트 험프리 상원 의원을 
지원한다고 말하며, 케네디 의원의 정책이 애매하다고 비난했다. 특히 그녀는 텔레비전에서 
공개적으로 케네디는 조지프 매카시 문제에 선명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였으며 진실한 
진보주의자기 아닐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힘으로 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전 국무 장관인 
딘 애치슨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해야 된다는 케네디의 연설에 비판을 하고 나섰다. 훗일 
그는 린든 존슨 대통령 후보를 지지했다. 
  케네디는 정책 문제에서는 융통성 있는 태도를 취했다. 특히 그는 진보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인권 정책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고, 엘레아노 루스벨트를 위한 저녁 
파티에도 참여하곤 하였다. 케네디가 카톨릭이라고 걱정하는 소리들에 대해서는 정치와 교회의 
엄정한 분리를 내세워 대응했다. 케네디는 1958년 12월에 학계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자문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주로 하버드와 MIT대학의 교수들로 구성되었으며 아치볼드 콕스, 
위스너, 아서 슐레진저, 갤브레이스, 로스토, 폴 니제, 새뮤얼슨 등의 저명한 교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참모진들은 주로 소렌슨에 의해서 관리되었다. 이 같은 자문 위원회 구성은 
케네디가 참신한 정책을 개발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고 지성적인 케네디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59년 4월 케네디 진영은 다음해의 대통령 선거를 위한 작전을 구상하였다. 이들은 팜 비치에 
있는 케네디의 집에 모여서 작전을 짰다. 작전 회의에 모인 사람들은 케네디의 처남인 스티브 
스미스, 케네디의 오랫동안의 정치 참모인 오돈넬, 오브라이온, 소렌슨, 케네디 상원 의원의 
보좌관인 보브 월라스, 동생 로버트, 슈라이버, 맥도널드 등이었다. 
  선거 전략에 따라 신문과 잡지 등에는 케네디와 그의 가족에 대한 글들이 전국적으로 실리기 
시작했다. 특히 루크 같은 잡지에는 형제들의 사진, 자녀들의 사진들까지 아름답게 실렸다. 
'화목하고 용기 있는 가족'이라는 이미지를 심는 작전이었다. 이와 더불어 케네디의 강연회, 연설, 
파티 등이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마침내 1960년 1월 2일 케네디는 공식적으로 대통령 후보로 나가겠다고 선언하였다. 동시에 
그는 각 주의 민주당 예선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케네디는 뉴햄프셔 예선전에서는 쉽게 
승리하였으나, 위스콘신 예선전에서는 휴버트 험프리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격렬한 
선거전 끝에 케네디는 아슬아슬하게 험프리를 물리칠 수 있었다. 
  케네디와 험프리는 또다시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예선전에서도 맞부딪치게 되었다. 이번에도 온 
가족이 예선전에 동원되었다. 부인 재클린, 어머니 로즈 여사 등이 민주당의 예선전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케네디는 계속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교 문제를 이번에는 결말 
지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모간타운 시에서 있은 연설회에서 케네디는 열변을 토했다. 
  "저는 국가를 위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때 우리 나라는 저에게 카톨릭이기 
때문에 참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도 묻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제가 대통령에 출마하겠다고 
해서 새삼스레 카톨릭이냐 아니냐를 묻는 것은 수백만 미국 시민의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업습니다. 저의 형님이 신 조 케네디 2세는 2차 대전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지금 하늘에서 통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카톨릭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이 나라를 위해 아까운 생명을 잃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케네디의 이 같은 작전은 효과를 얻게 되었고, 그이 종교 문제를 중화하는 데 크게 성공하였다. 
그러면서 케네디는 2차 대전의 영웅인 데 비해 험프리는 군 복무도 회피한 병역 기피자라는 
소문도 나돌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케네디 진영의 선거 전략이 주효하게 되어 케네디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예선전에서는 압도적인 승리를 하였고, 험프리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전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민주당 전당 대회가 열리기 수일 전에 텍사스 출신 상원 의원인 존슨이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본래 존슨은 케네디를 아버지의 등에 업힌 
미소년이라고 얕잡아 보고 있었다. 그는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의 아버지 조가 미국을 
지배한다고 야유하기도 하였다. 케네디는 존슨을 이제까지 상대했던 후보 중에서 가장 강력한 
상대라고 생각했다. 존슨은 당 내외의 신망을 받고 있는 중진 의원이었고 조직력 또한 
막강하였다. 
  1960년 7월 11일 민주당의 전당 대회가 개최되었고, 케네디는 일차 투표에서 8백6표를 얻어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존슨은 4백 9표, 사이밍톤은 86표, 스티븐슨은 79표를 
획득하였다. 
  케네디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후에 부통령 후보를 선정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케네디가 대의원 확보를 위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부통령 후보 가능성을 암시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민주당의 대동 단결을 위해 대통령 후보전의 맞수 린든 존슨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케네디의 대통령 후보 지명에 대하여 많은 미국인들은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케네디 
개인의 매력만이 아니라, 미국은 50년대의 고도 성장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케네디와 같이 젊고 용기 있는 영웅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이제 미국적 이상을 실현할 젊은 사람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케네디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수락하는 연설에서 '뉴 프런티어'라는 새로운 정책을 
천명했다. 그는, 미국은 이제 새로운 도약을 위한 에너지, 아이디어와 이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과거 선조들이 서부로 진출하며 가졌던 프런티어 정신을 계승하여 세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프런티어 정신, 즉 뉴 프런티어 정신으로 무장하자고 주장했다. 케네디는 뉴 프런티어라는 
개념이 윌슨의 신자유론과 루스벨트의 뉴 딜에 버금 가는 개념으로 국민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케네디는 미국민들이 봉사 정신을 발휘하여 세계적인 빈곤을 척결하고 무지를 극복하고 
전쟁을 없애자고 역설하였다.
  케네디의 후보 수락 연설을 들은 공화당과 닉슨은 케네디 후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많은 진보주의자들도 온건하고 중도적인 케네디-존슨 티켓에 실망했다. 여기에 종교가 
다시 문제로 대두되었다. 남부 침례 교회 전체 회의에서 카톨릭 교도가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해 
강한 반발을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빌리 그래이엄과 같은 유명한 부흥 목사도 닉슨을 지지한다고 
의사를 표명했다. 또 케네디의 여성 편력 문제가 서서히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의 막대한 선거 
자금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이렇게 사생활과 종교 문제로 공격을 받자 케네디 
진영도 닉슨의 개인적인 결함을 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가면서 케네디와 닉슨은 
상대방의 사생활 문제를 들추어 내며, 선거 운동은 정책 대결이 아니라 지저분한 인신 공격의 
장이 되어 갔다. 1960년 9월 26일이 되자 케네디와 닉슨은 텔레비전을 통한 정책 논쟁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텔레비전이 선거전에 활용된 것으로 유명한데, 이후 
대통령 선거전의 관례가 되었다. 1956년 선거에서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스티븐슨이 텔레비전 
논쟁을 제의했으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를 거절한 일은 있었다. 
  케네디 측에서 텔레비전 논쟁을 제의했을 때 닉슨은 이 기회를 통해 경험이 없는 케네디를 
일거에 괴멸시키리라고 생각하고 선뜻 이에 응했다. 9월 12일 첫 텔레비전 논쟁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6천만 명 이상의 미국 시민이 시청했다. 4명의 언론인들이 후보들에 대한 정책적인 
문제를 질문하고, 두 사람은 이에 대해 답변하는 형식이었다. 첫 대결에서 두 사람은 정책적인 
측면에서 큰 차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논쟁은 쉽게 끝났다. 문제는 논쟁의 내용보다 국민에게 
주는 이미지였다. 라디오를 들은 미국인들은 닉슨이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시청한 미국인들은 완전히 반대였다. 케네디는 침착하고 세련되고 자신감이 있어 보였으나, 
닉슨은 질문에 대답을 주저하였고 땀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케네디는 스마트한 용모로 시종 
일관 웃음 띤 모습을 보였으나 닉슨은 병상에서 나온 것처럼 창백하고 추레해 보였다. 한마디로 
닉슨 진영의 대실책이었고 케네디 진영의 대승리였다.
  첫 TV 논쟁이 끝나자 국민들은 케네디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가 너무 젊어 경망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여성 유권자들은 그의 매너와 용모에 반해 
버렸다. 케네디가 가는 곳마다 많은 여성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전국적으로 케네디 
지지자들이 엄청나게 늘었고, 정치 후원금도 부쩍 늘어났다. 이 텔레비전 논쟁으로 우세하던 
닉슨은 급격하게 인기를 잃어버렸고 케네디는 역전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 이제는 게임의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4차에 걸친 텔레비전 논쟁이 약 한 달간 이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책 자체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유권자들의 관심은 누가 더 자신들의 열망을 실현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었다. 여기서 케네디는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이렇게 바쁜 선거 운동의 와중에서도 케네디의 여성 편력은 여전했다. 그의 매부이며 당시에 
인기가 높던 미남 배우 피터 로버트와 인기 배우 프랭크 시나트라 등과 더불어 케네디는 미모의 
여배우와 염문을 퍼뜨렸다. 이 점에서는 아우이며 선거 사무장인 보브 케네디도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못 말리는 난봉꾼 집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케네디가 이러는 
사이에 그의 부인 재클린과 다른 가족들은 전국을 여행하면서 그의 당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으니 정말 미국적인 코미디 한 편과 같았다.
  1960년 11월 8일에 선거가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미국 역사상 최대의 국민들이 참여한 
선거였다. 선거 결과는 케네디가 국민 투표의 49.7퍼센트를, 닉슨이 49.6퍼센트를 각각 차지했다. 
케네디가 겨우 11만 2천8백3표를 더 획득하여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셈이다. 
  선거가 끝난 후 부정 선거가 있었다는 약간의 파동이 일기도 했다.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에서 
시장인 데이리가 부정 선거를 지휘했다는 소문이다. 이 같은 사태에 공화당은 선거 결과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재검표를 해달라는 법정 소송을 준비했다. 이에 대하여 닉슨이 나서서 
공화당을 만류하였다. 닉슨은 "미국 대통령직은 훔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자신은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고 선언했다. 닉슨은 만약 그가 법정 소송으로 이긴다 해도 미국 
대통령의 신화만 깨질 뿐 아무런 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되어 다소의 문제는 있었지만 최초의 카톨릭 신자이자 최연소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는 대중 매체인 텔레비전이 낳은 최초의 대통령이자 미국의 번영이 낳은 새로운 방식의 
영웅이었다. 

    5. "오, 노...하느님, 그들이 내 남편을 쏘았습니다"

  존 에프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선결 문제는 각료와 비서진을 비롯하여 1천2백 명에 
해당하는 연방 전부의 공직자를 임명하기 위하여 적절한 인재를 구하는 일이었다. 케네디는 
매제인 서전트 슈라이버를 위원장으로 하는 인재 인선 위원회를 구성하여 인물을 추천하도록 
하였다. 케네디는 그가 마음놓고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최고의 두뇌와 능력을 가진 사람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케네디가 선정한 내각이나 백악관의 참모진은 당대에 가장 능력 있고 
명성 있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록펠러 재단 이사장이던 딘 러스크가 국무 장관, 포드 자동차 회사 
사장인 맥나마라는 국방 장관에, 재무부 장관에는 전 정권하에서 재무부 차관을 지낸 은행가인 
더글러스 딜런 등 저명 인사들이 임명되었다. 법무 장관을 임명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 
조는 차남인 보브 케네디를 법무 장관에 임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법무성은 3만 명의 
직원을 갖고 있는 방대한 기구였다. 케네디나 그의 측근들은 34세의 젊은 보브를 법무 장관으로 
임명하기를 꺼려했다. 또 변호사 경험도 없는 보브 자신도 법무 장관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 조의 고집으로 결국 보브가 법무 장관에 임용되었다. 이 인사는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아야 했다. 
  잭은 대통령이 되었고, 보브는 법무 장관이 되었고, 테디는 매사추세츠 주 상원 의원이 
되었는데 3명의 아들이 전부 미국 정치의 요직에 앉게 되어 아버지 조의 평생 소원이 
실현되었다. 
  중요한 장관들이 임명된 후에 여타의 각료는 지역적, 종교적, 정치적으로 배려하여 골고루 
임명하였다. 이렇게 조각을 하고 보니 케네디 내각은 평균 연령이 불과 47세인, 그야말로 젊은 
내각이 되었다. 그의 백악관 참모진은 더욱 젊었다. 소렌슨은 32세, 대변인 셀린저는 35세, 
오브라이온은 43세, 오돈넬은 36세, 번디는 41세, 로스토는 44세, 펠르맨은 44세, 예산국장인 벨은 
41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내각과 백악관 보좌관은 당대 최고의 지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다음으로 차관급 인사들을 임명했는데 이들도 대다수가 지식인들로 꽉차 있었다. 체스터 
보울스는 국무 차관에, 하버드의 유명한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인도 대사로, 하버드의 저명한 
역사가 슐레진저는 백악관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백악관의 운영 방식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기계적이라고 할 만큼 통수 계통이 명확했으며, 그의 비서실장인 셔먼 애덤스는 일정을 빈틈 
없이 짜고 대통령은 일정대로 움직였다. 이에 반해 케네디 대통령은 특별히 비서실장도 없었고, 
대통령 자신이 사람들을 직접 만나기도 하는 등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은 
정책적 문제에 의문이 생기거나 알고 싶으면 수시로 관계자를 불러 대담하거나 질문했다. 
  그리고 케네디는 여러 가지 정책적 문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진지하게 배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많은 보고서를 직접 읽기도 하였고, 때로는 하위직 관리들에게 전화를 해서 
문의하기도 하였다. 
  뉴 프런티어를 제창한 케네디 대통령은 이 정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공부를 하고, 정부 
내외의 개인이나 단체에 의뢰하기도 하였다. 그는 전국에서 들어온 많은 보고서와 제안을 손수 
읽으며 검토하였다. 미국의 대학교, 연구 재단, 정부 기관에서는 그들의 제안을 백악관에 
전달해서 정책에 반영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뉴 프런티어 정책은 
골격이 마련되었다. 
  뉴 프런티어의 핵심은 국내에서는 빈곤 퇴치와 복지, 그리고 평등 구조의 창출에 있었다. 고도 
성장과 해외 진출로 이루어진 풍요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빈곤, 그리고 구조적 빈곤에 대해 
체념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복지, 이와 더불어 흑백간의 갈등이나 지역간, 계층간의 
갈등을 조화롭게 해결할 평등 구조 등이 그것이다. 이에 비해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미국의 
모습을 과시하고 약소국에 대해 경제적, 문화적 지원을 통한 세계 평화 달성이었다. 그래서 
미국이 과거의 고립주의 외교에서 벗어나 '세계의 경찰'로서, 세계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런 뉴 프런티어 정책을 달성하여 그 자신이 민주당의 적자이며 정통 
후계자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러나 취임 초기부터 그는 의회와의 관계에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대다수 의원들은 아직도 케네디를 젊은 플레이보이 정도로 생각하고 그를 
자신들의 진지한 파트너로 보지 않았다. 당시 민주당이 양원에서 다수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민주당 의원들은 연로한데다가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젊은 대통령 케네디에게 
별로 협조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자신이 국민들에게 약속한 뉴 
프런티어 정책의 일환으로 시민들, 특히 흑인의 권리를 확대하는 민권법, 애팔래치아 빈곤 지대를 
개발하려는 지역 개발법, 사회 보장 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노인 의로 보험법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야당인 공화당과 보수적인 남부 민주당이 결탁하여 이 개혁법들을 부결시키고 말았다.
  케네디는 이런 의회의 보수주의 벽에 부딪치자 현실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1961년 대통령령에 의해서 직업의 기회 균등을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 위원회에서는 
직업의 차별대우, 고용의 차별 대우 등을 각 기업체에서 금지하도록 행정 지도하였다. 동시에 
흑인들을 연방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하였다. 케네디의 조치는 많은 흑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또 
케네디는 상당수의 흑인들을 연방 사법부의 판사직에 지명하기도 하였다. 비록 케네디가 현실의 
벽에 부딪쳐 대폭적인 개혁을 하지는 못하였으나, 미국 정부 자체의 노력으로 진보적인 방향의 
정책을 다소나마 실천한 것이다. 
  케네디는 선거전에서도 텔레비전을 이용하여 성공하였듯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텔레비전을 
자주 이용하여 국민들에게 그의 정책을 설명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때로는 
보수파들을 누르기 위해 계획적으로 텔레비전을 이용하여 기자 회견을 하기도 하였다. 
텔레비전만이 아니라 그는 다양한 언론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신문 기자들이나 잡지사 
주필들, 유명한 칼럼니스트 등으르 자주 만나서 케네디 행정부의 정책을 설명하였다. 
  1961년에는 두 번째 행정령을 내려 세계 평화를 위한 식량 보급 행정 기구를 창설하였다. 이 
기구는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행정부가 구입하여 기아에 허덕이는 후진국에 공급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는 후진국을 돕기도 했지만 미국 내의 곡물 값을 유지하게 하여 농민들을 돕는 
정책이었다. 
  그 해 3월 1일 케네디는 미국의 유명한 '평화 봉사단'의 조직을 위한 행정령을 발의한다. 이는 
미국 시민이 자원 봉사대를 조직하여 후진국에 들어가 미국의 기술과 문화를 전함으로써 
후진국의 빈곤 퇴치에 도움을 주는 정책이다. 동시에 자원 봉사대원들이 후진국의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미국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여 민간인 외교관 노릇도 하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미국 
젊은이들이 후진국으로 파견되어 교육, 기술 개발, 의료 등의 봉사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1961년 3월 13일에는 '진보를 위한 동맹' 정책을 선언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제껏 
등한시해 오던 남미의 여러 나라들과 새로운 관계 개선을 위해 대량의 보조를 하고, 경제 발전, 
교육이 개선 등을 돕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이 비용으로 백억 달러를 책정했다. 
  진보를 위한 동맹은 라틴 아메리카의 민주 국가들이 협조하여 빈곤을 퇴치함으로써 민주 
정권을 공고히 하는 한편,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케네디 행정부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는 쿠바의 피그스만 침공 작전이었다. 쿠바에서는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이 무너지고 카스트로의 공산 정권이 집권하였다. 그래서 쿠바에 많은 
투자를 하였던 자본가와 쿠바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불안함을 느꼈던 미국 정부는 카스트로 
정권을 몰락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미 아이젠하워 행정부하에서 미국의 중앙 정보국이 쿠바 침공계획을 세우고 쿠바의 
망명자들을 중심으로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당시의 중앙 정보국장 알렌 덜레스는 쿠바인들 뿐만 
아니라 마피아도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하여 정보국과 협력하고 있다고 케네디에게 보고했다. 
마피아들이 이 전쟁에 끼어 든 것은 바티스타 정권하에서 거대한 도박장을 운영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도박장 등 유흥장을 다시 장악하려고 하였다. 
  공화당 정권하에서 준비된 이 계획은 케네디 정부로 넘어왔고 케네디도 카스트로를 무너뜨리는 
것에 이의가 없었다. 중앙 정보국에서는 케네디에게 미국군이 직접 쿠바를 침공하지 않고도 
충분히 쿠바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 
  4월 15일 아침 6대의 B-29 폭격기가 쿠바의 공군 기지를 폭격하였다. 그리고 4월 17일 
쿠바로의 해상 침공이 시작되었으나 작전 초기부터 문제가 생겼다. 쿠바 정부는 미국의 침공을 
예측한 듯이 반격을 시작했다. 미국이 보급한 상륙정이 바다의 암초에 파괴되기도 하고, 쿠바의 
로켓포에 배가 파괴되기도 하였다. 또한 낙하산 부대는 낙하 지점이 잘못되어 간선 도로를 
차단하는 데도 실패하였다. 탄약과 통신 기자재를 수송하던 배는 상륙도 하기 전에 파괴되었다. 
그 결과 쿠바 침공군은 도리어 카스트로가 지휘하는 쿠바 군에 의해서 포위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피그스만의 침공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 이제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쿠바의 
망명 정부는 미국 중앙 정보국과 행정부에 미국의 현역군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 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쿠바 침공에 참여했던 미국인 군인 가족들은 케네디에게 미국 정부가 자국의 
국민들을 버리려고 한다고 비난하였다. 결국 쿠바 침공군의 상당수는 전사하였고, 1천 명 이상이 
카스트로의 포로가 되었다. 카스트로는 엄청난 양의 미국제 무기를 노획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공으로부터 승리하였다고 국제적으로 공표하면서 미국의 침략 
의도를 세계적으로 폭로하였다. 
  이렇게 실패한 쿠바 침공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짐이 되었다. 진보파는 아예 정부가 이런 상식 
이하의 일에 관여한 사실을 비난하였고, 보수파는 케네디의 미온적이고 결단력이 없는 정책을 
비난하였다. 전 대통령 아이젠하워조차 케네디의 정책은 결단력이 없는 겁쟁이 정책이라고 
토로하였다. 케네디 참모들 가운데 몇 명은 군을 동원하여 쿠바를 다시 점령하자고 제의하기도 
하였다. 이같이 미국 내의 여론이 비등할 때, 소련의 흐루시초프는 만일 미국이 쿠바를 침략하면 
세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국제적으로 미국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였다. 결국 쿠바 
침공은 케네디 행정부와 대통령 개인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고 말았다. 
  1962년 카스트로는 침공군을 재판에 회부하고 총살형에 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보브 케네디를 보내 물자와 포로를 교환하자고 제의하여 그 해 크리스마스에 포로들이 
석방되었다. 미국은 석방의 대가로 식량과 의약품 및 현금을 카스트로에게 지불했다. 결국 미국은 
쿠바를 침공했다가 본전은커녕 손해만 잔뜩 보고 국제적 망신까지 당한 채 물러나고야 말았다. 
  케네디 행정부는 동남아의 문제들도 해결해야 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도미노 이론을 
강조하여 동남아에 반공 정권을 지원하여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는 정책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해 왔다. 그런데 케네디 행정부가 집권하면서 라오스, 베트남 등에서 문제가 
생겨났다. 라오스에서는 콩래 대위의 공산 정권이 집권하게 되어, 보수파의 상당수는 미군을 
출전시켜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고 케네디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케네디는 쿠바 침공의 
경험을 살려서 라오스에 군을 파견하지 않았다. 베트남에도 군을 파견하지 않고 미국의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는 정도의 정책을 이행했다. 이렇게 미국이 소극적 대응을 취하는 사이에 
베트남의 고 딘 디엠 정권이 점차 위태해졌다. 그래서 케네디 행정부는 베트남에 대거 군사 
보조를 하게 된다. 특히 맥나마라 국방 장관과 테일러 특사는 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원조를 
총지휘했다. 1961년 말에는 1만 명 이상의 군사 고문단을 대거 파견하기도 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세계적인 군사 전략에 있어 아이젠하워의 대량 보복전 개념에서 융통성 있는 
대처 방안으로 바꾸게 된다. 즉 공산군이 핵전쟁을 꾀할 때는 미국도 핵무기로 대응하고, 재래식 
전쟁이나 게릴라전을 사용할 때 미국은 거기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대처한다는 군사 전략을 
수립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케네디 행정부는 미국 군사력을 대거 확장하였고, 게릴라전에 
대비한 군사 훈련도 강화했다. 
  1961년 여름 흐루시초프는 독일의 재무장을 우려하고 미국의 군사력 강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핵실험을 재개하였다 이에 대하여 케네디는 소련에 항의하는 한편, 재래식 군의 증강과 
민방위에도 상당한 예산을 배정했다. 동시에 케네디는 소련이 유인 우주선을 쏘아 올린 데 
자극을 받아 우주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소위 아폴로 계획이 그것이다. 1969년 미국이 달을 
정복한 것은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시작한 우주 개발 계획에 의한 결과였다.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의 요청에 따라 케네디와 흐루시초프는 비엔나에서 정상 회담을 갖게 
된다. 이것은 최초의 대통령 해외 순방길이었다. 비엔나에 가는 도중에 케네디 부부는 파리에 
들러서 드골 대통령과 회동하였다. 파리 시민들은 젊은 미국 대통령 부부에게 매혹되었다. 
비엔나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엔나에서 정상 회담을 끝내고 귀국길에 런던에 들렀을 
때도 영국 시민은 케네디 부부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케네디 부부는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연기자처럼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케네디는 소련과 협상하여 동서 냉전에서 평화 
공존의 시대로 들어가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하였다 .
  1961년 8월 13일 동독군과 경찰은 동베를린에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당시 베를린은 지역을 
둘로 갈라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베를린이 동독의 영토 내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소련은 또한 베를린을 봉쇄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베를린 
위기였다. 베를린 위기에 케네디는 강력히 대처하였다. 그는 서베를린에 군을 파견하고, 부통령 
존슨을 서베를린에 보냈다. 동시에 1948년__1949년  베를린 공수 작전에서 영웅이 된 퇴역 장군 
클레이를 베를린에서 파견하고 미국이 다시 공수 작전도 하겠다고 베를린 시민에게 밝혔다. 결국 
소련은 이런 봉쇄 작전을 포기하고 유화 정책으로 나왔다. 그래서 가을이 되어 베를린 위기는 
해소되었다. 
  케네디의 이런 강력한 대처는 미국 국민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 무렵에 케네디의 막내 
동생인 테디 케네디가 매사추세츠주의 연방 상원 의원에 30세의 젊은 나이로 당선되었다. 이 
선거를 위해 예전과 같이 가족이 동원되고 엄청난 선거 자금을 투입했다. 이렇게 집안과 외교 
문제에서 기쁜 일이 연이어 터져 케네디는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 해 12월 19일 아버지 조가 
질녀와 골프를 치다가 심한 뇌졸중에 걸려 반신 불수가 되었다.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가 가장 신임하고 존경하는 참모를 잃은 셈이다. 
  1962년에 접어들면서 케네디는 워싱턴에 미국 문화 센터를 건립할 것을 제안하고, 
과학자들이나 예술인들을 표창하는 '자유의 훈장'을 제정했다. 케네디 부부는 오페라 공연, 연극 
공연 등에 참여하고 백악관에 당시의 최고의 지성인들을 자주 초청했다. 이것은 미국 
대통령사에서 새로운 관례였다. 
  1962년 여름에 유명한 여배우인 마릴린 먼로가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이 일로 케네디 
대통령과 동생인 보브 케네디가 먼로와 정을 통해서 그녀를 상해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국 자살로 판명되어 케네디 형제는 이런 구설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케네디를 곤혹스럽게 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었다. 이후 케네디도 함부로 
여자들과 놀아나지 않았다. 
  1962년은 또 남부의 인종 차별이 심각한 정치 문제로 등장한 해였다. 그 해 10월 제임스 
메러디스라는 청년이 미시시피 대학에 입학하려고 연방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인종 
차별주의자인 미시시피 주지사 로스 버넷은 이런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그의 입학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 곳의 백인들도 법원에 항의하는 소동을 벌였다. 케네디 행정부는 폭력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조치를 취하는 한편, 이 문제를 타협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진보파와 보수파들이 모두 케네디 행정부에 불만을 표시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케네디 행정부는 민권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의회에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결국 1964년 법적인 차별을 금하는 이 법안이 통과되었다. 1964년 민권법안으로 
미국에서 인종 차별은 불법화되고 미국의 민권 수립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1962년은 국제적으로 중요한 해가 되었다. 그 해 봄에 카스트로는 미국이 다시 쿠바를 
침공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소련과 이를 대처하기 위한 방법을 논의하였다. 7월에는 카스트로가 
동생을 소련에 파견하여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흐루시초프도 이 문제를 생각하다가 
미사일을 쿠바에 설치하면 미국도 함부로 쿠바를 침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련은 상당수의 소련 군사 고문단을 쿠바에 파견하고 대공 미사일인 샘(SAM)을 쿠바에 
가설했다. 10월이 되었을 때 수천 명의 소련 군인과 기술자들이 쿠바에 파견되었고, 쿠바 군은 
야포, 장갑차, 탱크, 경폭격기, 전투기, 고사포 등으로 중무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련이 쿠바에 설치하려는 미사일이 단거리 미사일이 아니라 장거리 
미사일이라는 점이었다. 미국의 U-2정찰기는, 중거리 미사일은 이미 설치되었고, 장거리 미사일도 
곧 설치될 상황임을 포착했다. 이것은 미국에 대한 중대한 군사적 위협이었다. 10월 21일 저녁 
7시에 케네디 대통령은 단호하게 쿠바 봉쇄를 선언했다. 이것이 유명한 미사일 위기이다. 미국 
전투함은 당일로 쿠바를 봉쇄하였는데, 다행히 소련의 배들은 미국의 봉쇄선을 건드리지 않고 
본국으로 되돌아가곤 하였다. 결국 케네디와 흐루시초프는 신경전을 주고받으며 서로 양보를 
요구했다. 그러다가 케네디와 흐루시초프는 소련의 미사일을 쿠바에서 철거하는 대신 미국은 
터키의 기지를 철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결과를 놓고 양국은 서로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케네디는 공산국이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려는 행위를 제지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승리라고 했다. 흐루시초프는 미사일을 쏘지 
않고도 쿠바의 독립을 보장했기 때문에 소련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누구의 승리든 
관계없이 인류가 제3차 세계 대전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더구나 이 
일을 계기로 미소간에는 '핫라인(hot line)'이라는 직통 전화를 가설하여 우발적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케네디 행정부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 신속하고 과감하게 대처함으로써 미국인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또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아졌고, 강력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제 국내의 문제들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자, 자신감을 얻은 케네디 대통령은 인류 평화를 
영구히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할 것과 세계적인 군비 감축을 주창했다. 동시에 행정부에 
군비 축소와 군비 절약을 위한 행정 기구를 창설하였다. 이 같은 조처로 케네디는 세계적으로도 
사랑 받는 인물이 되었다. 외국을 여행할 때면 그를 보려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케네디로부터 시작된 군비 축소는 1963년 7월 25일 그 첫 열매를 맺었다. 모스크바에서 미국, 
소련, 영국의 대표들이 모여서 핵무기 실험의 제한을 골자로 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이 
조약으로 인류는 지구의 특정한 지역에서는 핵실험을 할 수 없게 되었고, 핵무기를 감축하게 
되는 역사적인 장을 열게 되었다. 
  이렇게 케네디가 국내외의 인기를 모으며 인류 평화와 인간의 진보를 이끄는 인물로 부각되고 
있을 때, 미국의 남부는 여전히 흑인에 대해 인종 차별을 하며 케네디를 외면하고 있었다. 
케네디는 자신의 흑인 정책을 남부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텍사스의 댈러스로 떠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수차례의 암살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1963년 11월 21일 
그는 무개차로 댈러스의 거리를 유유히 행진하며 그에게 보내는 환영의 인파에 미소로 답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그는 쓰러졌다. 
  "오! 노... 아 하느님, 그들이 내 남편을 쏘았습니다."
  재클린의 울부짖음과 더불어 그는 극단적 인종 차별주의자 하비 오스왈드의 흉탄에 맞아 
생명을 잃게 된다. 그의 나이 46세 때의 일이다.

    6. 자본과 성장 시대의 새로운 스타 

  케네디는 여러 면에서 특유한 인물이었다. 그가 국민에게 주는 이미지와 실제의 인물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는 명문 학교를 졸업했으나 그의 능력으로 명문 학교에 진학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 후광으로 명문교에 입학했다. 그는 명석하고 머리가 좋은 사람으로 국민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다지 명석한 두뇌를 소유한 인물은 아니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공부를 그다지 잘한 편이 아니었고, 그가 저술한 책들도 인류 역사에 남을 만큼 훌륭한 책도 
아닐 뿐더러 그나마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저술한 것이었다. 또 케네디의 연설문은 
당대에 감동적이고 유명한 연설문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연설문도 다른 사람들이 대신 집필한 
것들이다. 
  케네디는 삶에서도 그다지 건전한 편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어 본 일이 
거의 없는, 단지 부자인 아버지를 둔 행운아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여성 편력이 심하여 대통령 
시절에는 미 연방 수사국의 조사까지 받아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다음으로 그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대통령직에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하원에서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는 막대한 금전을 사용한 금권 정치의 표본이었다. 숱한 
사람들과 대의원들을 매수하기도 하고, 숱한 언론 기관을 매수하기도 하였다. 시카고에서는 
선거의 부정이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또 그는 이상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소심할 정도로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더구나 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텔레비전이 만든 대통령이었다. 또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아버지가 계획해서 만든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문제가 많은 대통령이었지만 미국 국민들은 케네디 대통령을 사랑했다. 그가 
생존해 있던 시절만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그러하다. 이것은 단순히 매스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에 국민들이 속아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또 그가 흉탄에 의해서 암살되었기 때문에 
아쉬움에서 국민이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국민들이 케네디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비록 실책도 있었지만,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으로서의 케네디는 평화 봉사단을 창설하여 후진국을 도와 주는 인류애를 발휘했다. 또 
그는 미래를 준비하여 우주 개발 계획을 세워서 미국이 최초로 달에 착륙할 수 있게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케네디는 흑백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안을 만들고 이를 국회에서 통과시키기도 했다. 
1964년의 미국 민권법은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완성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케네디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핵무기 실험을 제한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맺은 핵확산 방지 조약은 훗일 핵무기 제한 조약의 선구 역할을 하였다. 
  사회 개혁이나 사회 보장을 위한 복지 정책, 흑인을 위한 기회균등 정책은 뒤에 존슨 정부에서 
실현되었으나, 이는 케네디 행정부가 이미 실현시키기 위해 준비한 정책들이었다. 
  물론 케네디 본인이 이런 진보적인 정책을 직접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부레인을 거느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믿고 그것을 정책으로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모르는 것은 물어 보고 일반 서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언제나 
귀를 열어 둠으로써 미국의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된 것이다. 이런 면모는 그가 단순히 부잣집 
귀공자였다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케네디는 부잣집 귀공자로, 현대판 왕자로 대중의 
영웅이 되었지만 그 자신이 겸손하고 노력하는 인물이었기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이다. 

      후기

  앞에서도 말했듯이 미국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특정 인물의 역할은 대단히  큰 편이다. 미국의 
역사를 살펴볼 때 두드러진 정치 현상의 하나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미국인들의 노력이라 
하겠다. 미국인들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 인류 최초의 지방 자치 제도인 연방주의 
정치 제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 연방은 아직 불안정한 결합이었고 반민주적인 요소를 안고 
있는 정치 제도였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남북 전쟁을 통하여 흑인 노예를 해방시켰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하고 빈곤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기회 균등을 줌으로써 
민주주의를 완성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국의 정치사는 민주주의를 위한 개혁사이기도 하다. 
  미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위대한 대통령들은 이 개혁의 역사 속에서 중요하나 역할을 한다. 
영국과의 독립 전쟁에서 워싱턴 대통령은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워싱턴이라는 인물이 
없었더라면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어려웠거나 독립이 상당히 지연되었을 것이다.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을 하면서 동시에 미 연방을 유지하는 데는 링컨 대통령의 탁월한 능력이 
필요했다. 은행을 비롯하여 금융 기관의 독점적 특권을 없애고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게 만드는 
데는 잭슨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필요했다. 
  민주주의의 이상을 정치적인 현실에 적응시키면서 이 이념을 미국의 보편적인 이념으로 
제도화하는 데는 제퍼슨의 명석한 두뇌와 지도력이 필요했다. 미국의 독점 자본을 견제하고 많은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경제 체제로 개혁하는 데는 윌슨 대통령의 비전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고, 루스벨트와 케네디의 영도력은 윌슨의 비전을 실천하는 데 절대적이라 할 만큼 필요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란 곧 개혁을 실천한 대통령들이었다. 그리고 그 
개혁의 방향은 항상 시민들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신념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미국이 초기에는 제한된 민주주의 정치 체제였으나 오늘날에는 
보편적인 민주주의 정치 제도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상당한 부분이 이들 7명의 대통령 
때문이었다. 
  이들 7명의 대통령의 특징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첫째, 대통령 자신이 미국의 장래와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갖고 있었는가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경우 비전을 지닌 경우는 지성적인 대통령이거나 아니면 미래의 미국에 대한 확실한 
대안이 있는 대통령이었다. 이 범주에는 제퍼슨, 잭슨, 링컨 및 윌슨이 속한다. 
  반면에 본인은 지성적이지도 못하고 별다른 미전도 없이 대통령직에 오르거나 정치에 
참여하였지만, 미국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경우이다. 이들의 특징은, 
본인들은 비전이 없어도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국민의 요구를 간파하는 데 출중했다는 점이다. 
워싱턴, 루스벨트, 케네디가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은 두뇌가 명석한 인물들은 아니었으나 
상식을 가지고 주위의 참모진이나 남의 의견을 경청하여 시대의 흐름을 잘 읽는 사람들이었다. 
  둘째,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미 국가와 사회를 위해 얼마나 공헌했는가로 나눌 수 있다. 
일부의 대통령들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국가에 대한 공훈이 대단하여 국민이 잘 알고 있었으며 
여론에 의해서 대통령이 된 경우가 있다. 워싱턴, 제퍼슨, 윌슨 등은 전국적으로 오랫동안 알려진 
인물들이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 전쟁의 명장이었고, 제퍼슨은 미국 독립 선언문을 기초하고 국무 
장관 등 화려한 관직 생활을 했으며 당대의 지성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윌슨은 명문 대학 
총장으로 뉴저지 주의 정치 개혁을 한 사람으로 정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대통령 후보로 자주 
거론되던 인물이었다. 
  반면에 링컨이나 루스벨트, 케네디 등은 일찍이 전국적인 명성을 세운 사람들은 아니었다. 
링컨은 하원 의원을 잠깐 역임하였을 뿐 다른 관직을 맡아본 바가 없었다. 상원 의원으로 
출마하면 번번이 실패하였다. 루스벨트와 케네디는 엄청난 부를 지닌 가정에서 태어나 일생 동안 
손에 흙 한 번 만져 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개인들의 탁월한 능력에 의해서보다는 집안의 
재산이나 명성으로 대통령이 된 인물들이다. 
  셋째, 이들 대통령들은 대다수가 인재의 등용에 탁월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를 비난하던 
정적들도 필요에 따라서는 적절히 등용하였다. 물론 잭슨과 윌슨의 인재 등용에는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다른 대통령들은 인재의 등용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넷째, 7명의 대통령들은 일반적으로 이상주의자들과 현실주의자들로 나눌 수 있다. 
이상주의적인 대통령들은 제퍼슨, 링컨, 윌슨 등이고 , 보다 현실주의적인 대통령들은 워싱턴, 
잭슨, 루스벨트, 케네디 등이다. 
  다섯째, 이들 대통령 중에는 명문 대학을 나온 화려한 대통령과 그렇지 않은 대통령으로 나눌 
수 있다. 제퍼슨, 윌슨, 루스벨트, 케네디 등은 명문 대학 출신들이다. 제퍼슨은 윌리엄 메리 
대학을, 윌슨은 프린스턴 대학을, 루스벨트와 케네디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다. 이들 대학은 
미국 동부의 명문 대학들이다. 
  반면에 워싱텅, 잭슨, 링컨 등은 정규 대학을 졸업한 일도 없고, 스스로 독학하여 장군이나 
변호사가 된 인물들이다. 삼수를 시키면서까지 일류 대학을 보내려는 오늘날의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이들 대통령은 훌륭한 교훈이 될 것이다. 
  여섯째, 대통령의 통치술로 나눌 수 있다. 워싱턴, 링컨, 잭슨 등은 덕으로써 통치하였다. 
각료들의 실책이나 불화를 용서해 주기도 하고 눈감아 주기도 하며 스스로 복종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제퍼슨, 윌슨, 루스벨트, 케네디 등은 덕보다는 머리를 사용하여 수하들을 조직하면서 
통치하였다. 
  일곱째, 이들 대통령들은 출신 배경이나 삶의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제퍼슨, 루스벨트, 케네디 
등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고 남의 힘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반면에 워싱턴, 잭슨, 링컨, 윌슨 
등의 대통령은 자수 성가하여 개인의 힘으로 성공하였고, 대통령이 된 것도 개인의 엄청난 
노력에 의해서였다. 
  여덟째, 정책 결정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워싱턴, 잭슨, 링컨, 케네디 등은 정책 결정을 
하부인들에 위임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참모들이 토의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정책 
결정을 하였다. 
  이에 반해 제퍼슨, 윌슨, 루스벨트 대통령 등은 남에게 정책을 위임하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본인들이 직접 나서서 정책을 결정하였다. 
  흔히들 위대한 인물은 시대가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위대한 인물이 시대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위대한 인물은 자기에게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바르게 활용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우리는 
심사 숙고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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