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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정재훈] 문화의 산길 들길

by Casey,Riley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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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문화유적 바로보기)
  문화의 산길 들길

 정재훈


         차례

  책머리에

  제1부 조선왕조의 도읍지 서울과 그 문화유적들

  우리 문화의 정수가 남아 있는 경복궁
  영원한 민화, 자경전의 굴뚝담
  뛰어난 조경예술이 담긴 경회루 연못
  창덕궁 비원
  조선의 시궁 종묘
  서울의 기념비적 건축물, 원각사 10층석탑
  세종로 네거리의 기념비전
  삼각산 승가사와 마애불
  북한산과 북한산성
  관악산 연주대와 한우물

  제2부 되살아난 영광의 백제문화

  백제사가 되살아난 석촌동 고분공원
  풍납동 토성과 서울
  올림픽공원이 된 몽촌토성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
  무령왕릉 발굴 이야기
  백제문화의 웅장미와 익산 미륵사지
  백제문화의 상징 정림사지
  동양 최고의 걸작 백제금동향로

  제3부 영원한 안식이 머무는 산사의 문화유산

  남한강과 여주 신륵사
  김시습의 행적이 머문 만수산 무량사
  십승지의 공주 마곡사
  계룡산과 갑사
  칠갑산 깊은 골의 장곡사
  최고의 건축물 수덕사 대웅전
  중원의 월악산과 미륵리 사지
  문화유산의 보고 법주사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
  소원을 들어주는 꿈의 낙산사
  석조미술의 야외박물관 실상사
  도솔천의 미륵세계와 금산사
  지리산의 명찰 화엄사
  승보사찰 송광사
  다도의 본산 해남 대흥사
  제주도 제일의 명당 법화사 구품연지
  부석사와 무량수전
  법보사찰 해인사
  불보사찰 통도사

  제4부 천년 고도 경주, 그 감동의 현장

  자연과 예술과 종교가 융합된 경주 남산
  신라 국신의 터전인 낭산
  생동하는 명상의 조각예술 석굴암
  사랑과 예술이 종교적으로 승화된 불국사
  신라 호국정신의 구심체 황룡사9층목탑
  원효의 대중불교사상과 분황사
  천년의 지하박물관 경주 월성
  시와 춤과 멋이 깃든 포석정 옛터
  신라의 물맛, 재매정과 천관사터
  비천백마도와 천마총
  신라의 조원, 안압지
  주물기술과 조형미의 걸작, 성덕대왕신종
  김유신 장군묘의 돼지상
  이색적 석굴사원인 월성 골굴암
  해룡설화의 대왕암과 감은사지석탑
  과학정신이 깃든 첨성대
  화랑 사다함의 사랑

  제5부 민족의 기상이 흐르고 있는 역사유적

  승리의 함성이 들리는 행주산성
  아픈 역사가 잠든 남한산성
  역사교육의 현장 강화도
  민족의 단심이 흐르는 남강과 진주성
  장보고와 완도 청해진
  삼별초 최후의 결전지 항바두리성

  제6부 멋과 정취가 살아 있는 생활문화유적

  강릉 오죽헌
  서울 민가의 명원 성락원
  생활문화가 살아 있는 제주 성읍마을
  자연과 선비의 절의가 조화된 소쇄원
  윤고산 문학의 산실 보길도
  청자의 고향 강진 도요지
  광주 상번천리 가마터와 백자
  한국의 연못, 그 절묘한 상징의 세계
  우리 나라 민가의 성신앙

    

    제1부 조선왕조의 도읍지 서울과 그 문화유적들

    우리 문화의 정수가 남아 있는 경복궁

  왕궁의 유적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의 정치이념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왕궁에는 
당대 최고의 건축, 조경, 조각, 공예, 회화 등 문화의 정수들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천지운행과 시간을 측정하는 최고의 과학기구와 시설들이 이곳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왕조시대의 왕궁은 나라의 가장 중심지인 동시에 문화사적으로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의 보고이기도 하다.
  서울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정궁이다. 궁에는 왕이 일시 머무는 이궁도 있고 행궁도 
있다. 창덕궁은 이궁이며, 수원성 내에 있는 궁은 행궁이었다. 왕이 죽지 않고 왕위를 
선위했을 때 선왕이 머무는 궁을 덕수궁 또는 수강궁 등으로 불렀다.
  경복궁은 1395년(태조 4)에 창건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서 273년간 
복원되지 못하다가 1865년(고종 2)에 중창을 시작하여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을 
보았다. 경복궁 중창공사를 추진한 사람은 흥선대원군이다. 중창된 건물은 
7,225칸이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중창된 경복궁이다.
  경복궁의 위치는 음양오행사상에 근거한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정해졌다. 원래 
북악산 산록 밑에 고려의 이궁이 있었는데 그 이궁터가 협소하여 앞으로 내어 
경복궁이 자리하였다. 경복궁은 주산인 북악산을 등지고 인왕산을 백호로, 낙타산을 
청룡으로, 남산을 안산으로 하여 정해졌다. 그래서 조선의 수도 한양성이 북악산, 
인왕산, 낙타산, 남산을 연결하여 쌓여졌고 그 경역은 5백만 평쯤 된다. 이 한양의 
명당수가 청계천이었다. 한강은 객수가 되어 전국에서 생산된 산물이 한강의 수로를 
통하여 서울로 집중되었다.

     수도 한양의 도시계획 중심축인 경복궁
  세계의 수도를 돌아보면 서울처럼 아름다운 산수를 구비한 도시도 드물다. 일본의 
교툐는 강이 없다. 중국의 북경은 아름다운 산이 없다. 서울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남으로 주작대로(지금의 광화문로)가 펼쳐지고 서쪽에 사직단이, 동쪽에 종묘가 
자리하였으며, 종로통에 상가가 설치되었다. 수도의 정궁은 도시계획의 중심축이 
되었다. 이러한 도시발전은 일본이나 중국 모두에 공통된 것이었다. 중국의 천안문 
광장이 북경의 주작대로이다.
  경복궁의 배치는 장방형의 궁성을 쌓고 남에 광화문, 동에 건춘문, 서에 영추문, 
북에 신무문이 있다. 이들 궁문은 음양오행사상에 있는 사신을 상징한다. 남문인 
광화문은 주작문이다. 동의 건축문은 청룡문이란 뜻이며 서의 영추문은 백호문이란 
뜻이고, 북의 신무문은 현무문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다.
  왕궁은 크게 네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정문내는 외조로서 신하들이 집무하는 
공간이며, 정전인 근정전과 사정전 구역은 왕이 의식을 거행하거나 정무를 보는 
치조공간이다. 치조공간 뒤에는 왕과 왕비 및 왕족이 생활하는 연조공간이 있다. 
연조공간 좌우와 후면에는 왕족이 연회를 베풀고 휴식하며 수신하는 후원공간이 있다. 
경복궁은 궁의 중앙, 남북, 일직선상에 광화문, 홍예문,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은 경북궁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대비가 거처하는 자경전은 
언제나 왕비의 침전 동쪽에 둔다. 그리고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도 왕의 침전 동쪽에 
배치한다. 경복궁은 이러한 궁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리고 모든 궁은 정전 
문 앞에 개울이 흐르고 그 개울 위에 돌다리가 놓이게 되어 있다. 이는 풍수사상에 
극길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경복궁에도 영제교란 돌다리가 근정전 문앞에 
있었으나 일제 때 총독부 건물을 건립하면서 지금은 근정전 서쪽에 옮겨져 있다.
  경복궁에 있는 중요한 문화유적을 살펴보자. 경복궁은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리고 국보로 지정된 것은 근정전(223호)과 경희루(224호)이다. 보물로 지정된 
것은 근정전회랑(812호), 자경전(809호), 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의 굴뚝(811호),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810호)과 풍기대(846호와 847호) 등이 있다.

     조선 후기 건축을 대표하는 근정전
  조선조 후기의 건축을 대표하는 근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건립된 2층의 웅장한 
건물로 왕이 문무백관으로부터 조하를 받고 즉위식 등 의식을 집행하던 곳이다. 
지금의 근정전은 1867년에 건립된 건물이다. 근정전에서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이 즉위식을 올렸다.
  근정전 월대에는 동서남북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남쪽 정면 답도의 석계단 
판석에는 두 마리 봉황이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좌우 
소맷돌에는 허리를 펴고 길게 엎드린 두 마리 해태상이 있다. 남쪽 월대계단의 상단 
돌기둥 위에는 주작상과 말상이 상하로 조각되어 있다. 동쪽 돌계단에는 용과 
토끼상이, 서쪽 돌계단에는 호랑이와 닭상이, 북쪽 돌계단에는 거북과 쥐상이 조각되어 
있다. 월대의 네 귀와 중간의 돌난간 기둥 위에는 수호신인 해태가 조각되어 있다. 
이는 방위신과 수호신이 근정전을 비호하는 상징이다. 이들 조각은 광화문 앞에 있는 
두 마리의 해태상과 더불어 조선시대 석조조각 예술의 최고 걸작품이다.
  근정전 내에는 어좌가 있고 어좌 위에 용상이 설치되었으며 용상 뒤에는 일월오악도 
병풍이 설치되고 어좌 천장에는 보개가 설치되어 있다. 근정전 천장에는 여의주를 
희롱하는 황룡 두 마리가 구름 속에서 요동치고 있는 목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근정전 
후면의 사정전은 왕이 정무를 보는 편전이다. 사정전 내에는 두 마리 용이 생동하는 
환상적인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정전의 동쪽과 서쪽에 부속 편전인 만춘전과 
천추전이 있다.
  사정전 뒤에는 왕의 정침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 있었는데 일제 때 
헐어 버려서 다시 복원하였다. 이 침전공간은 비록 영의정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드나들 수가 없었다. 이 연조의 공간에는 왕이 천지운행을 알고 계절과 시각을 알 수 
있는 혼천의, 자격루, 해시계, 성진도, 풍향기, 측우기 등 과학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봉건왕조의 정치이념은 천명사상에 근거하였다. 그래서 제왕은 하늘의 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린다는 이상이 있었기에 왕은 천지운행과 만물의 생성변화를 바로 알아야 
했다.
  경회루는 엄격히 외조와 치조, 즉 정치공간의 휴식처로서 우리 나라 다락건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인데, 방형의 연못 속 섬에 세워져 있다. 경회루 방지는 1412년(태종 
12)에 조성되었으며 경회루도 그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서 1867년에 중창된 
건물이다. 48개의 우람한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락건물을 건축했다. 그 뒤로는 
담을 쌓았는데 그곳은 보통 대신들도 들어가기가 어려운 자리였다. 담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곧 임금의 사생활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태전 후원인 아미산 굴뚝과 자경전 굴뚝 담벽에는 용, 학, 소나무, 매화, 모란, 
사슴, 바위, 구름, 산 등의 아름다운 장식이 조성되어 있다. 이들 꽃담과 굴뚝은 우리 
나라 담 중에 대표적인 것이다. 자경전은 대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방과 마루의 배치 
및 지붕의 높고 낮은 조화 등 우리 나라 왕궁 침전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후원에는 수림과 함께 향원지가 있다. 향원지와 그 부근이 바로 휴식공간인 후원이다.
  향원지 속 섬에는 육각형 정자인 향원정이 있는데, 이곳에는 목교가 설치되어 있다. 
원래 북쪽에 설치되었던 것인데 지금은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 향원지는 연못조경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 연못은 네모난 방지가 많다. 일본 연못은 
주병이라 하여 굴곡진 해안선처럼 만들고 중국은 타원형이나 자유형에 가깝고 너무 
크고 넓어서 호수나 바다 같다. 향원지 북쪽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청궁이 있었다.
  요즘 북경 고궁을 보고 온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고궁은 중국에 비하여 너무 작고 
보잘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중국문화는 광대하고 거칠며 
절대권력이 산도 인공으로 만들고 연못도 바다같이 파서 그 이름도 oo해(바다 
해)라고 붙여 자연을 억압한다. 그 크고 웅대함이 사람을 위압하며 따뜻한 인간적 
조화가 없다.
  우리의 고궁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에 조화시키면서 적정한 인간적 규모와 
절제가 있어 사람을 위압하거나 왜소하게 만들지 않는다. 우리의 고궁은 따뜻한 
인간의 정감이 자연과 동화되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경복궁은 많이 축소된 것이다. 경복궁 길 너머에 동십자각이 있는 
것을 보면 거기가 담모서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경복궁은 그 넓은 길을 
다 포괄해서 안고 있던 큰 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는 경복궁의 근정전을 막아서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이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던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과 민족정기를 말살하고자 한 비문화적 
행위였다. 경복궁을 가린다고 우리 역사가 멈추는 것도 아니며 민족의식이 단절되는 
것도 아닌데 일본은 인류문화사에 문화의 파괴자만 되고 말았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고 있던 총독부 건물이 머지 않아 완전히 철거되고 경복궁이 
복원될 것이다. 장차 서울은 통일정부의 수도로서 역사의 상흔을 씻고 민족의 기상이 
도도히 흐르는 우리 민족 역사의 고도(옛 고, 도읍 도)로서의 면모를 조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영원한 민화, 자경전의 굴뚝담

  경복궁의 자경전은 대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우리 나라 왕궁 건물 중 가장 아름다운 
침전이다. 자경전은 1865년 4월 13일부터 1867년 11월초까지 경복궁 중창 때 건립한 
집인데, 1876년 11월 4일에 화재가 나서 1888년에 다시 복구한 것이다.
  자경전은 꽃담으로 유명하다. 자경전의 서쪽 담은 모란, 매화, 국화, 대나무, 
천도복숭아 등 담벽의 부조가 아름다우며, 만수(일만 만, 목숨 수) 등 글자가 새겨진 
꽃담이다. 후원에는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십장생 굴뚝이 있다.
  이 굴뚝담에는 흙으로 구워 만든 영원한 민화의 십장생 부조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가로 381cm, 세로 236cm의 벽면에다 강회를 바른 흰 밑바탕을 만들고 그 
공간에 흙으로 구워서 만든 나무, 꽃, 불로초, 동물, 산, 바위, 바다, 구름, 해 등의 
부조를 박았다.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가면서 그 그림의 배열을 설명한다. 여러분께서도 
경복궁에 갈 때는 꼭 자경전의 십장생 그림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기 바란다.
  제일 오른쪽 밑에는 바위에 난 같은 풀 한 무더기가 나 있고 그 다음에는 세워진 
포도넝쿨이 밑에서 위까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포도넝쿨에는 탐스러운 포도가 
세 송이 달려 있다. 포도넝쿨이 있는 왼쪽 공간은 고요한 연못이다. 연못 위에는 
원앙새 한 쌍이 다정하게 놀고 있고 꺾인 연 줄기에 한 마리 새가 앉아 있으며, 또 한 
마리 새는 연꽃 사이를 펄펄 날고 있다.
  이 연못 공간에는 연과 갈대가 서 있는데 연꽃은 봉오리진 것이 한 송이, 활짝 핀 
것이 두 송이이며, 연꽃이 진 연밥이 두 송이이다. 연꽃 사이에는 갈대 한 포기가 
솟아나서 갈대꽃을 피우고 있다. 연꽃 잎에는 줄기를 도드라지게 새겨서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다.
  연못 왼쪽 공간에는 바위에 솟아오른 대나무 한 포기가 서 있고 대숲 위에는 흐르는 
구름이 높게 떠 있다. 대숲 왼쪽 공간은 바다이다. 바다에는 파도가 출렁이고 있다. 
파도 위에는 거북 두 마리가 동쪽을 향해 가고 있는데 앞에 가는 거북은 뒤를 
돌아보면서 입에서 불길 같은 두 줄기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거북 앞에는 동동 떠 
있는 불로초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 불로초 위에 학 두 마리가 서쪽을 향해 서 있다.
  학 위의 하늘에 꽃구름이 둥실둥실 떠가는데 그 꽃구름 위 하늘에 또 학 두 마리가 
긴 목을 돌린 채 서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학이 날아가고 있는 가장 위의 하늘에는 
구름이 높게 떠 있고 그 구름 속에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다.
  바다가 있는 왼쪽 지역은 불로초가 있는 초원 같은 곳이다. 암수 한 쌍의 사슴이 
다정하게 마주보고 서 있는데 암사슴이 숫사슴을 향하여 머리를 돌려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슴 위 공간에는 불로초가 동동 떠있고 그 위에 뿔이 위엄 있게 난 숫사슴 
한 마리가 뛰는 모습으로 배열되었다.
  이들 사슴이 있는 왼쪽 지역에 불로초가 난 바위가 있고 용트림을 한 노송 한 
그루가 서 있다. 노송은 가지가 다섯인데 무성한 솔잎을 달고 있다. 이 노송 위의 
하늘에는 구름이 떠 있다. 가장 왼쪽 공간에는 바위 사이에 소소한 국화 한 포기가 서 
있다.
  이상은 십장생 그림의 배치를 설명한 것이다.

     십장생 장식은 신선사상에 의한 불로장생의 뜻
  이 십장생도는 한 폭의 그림으로 구성된 구도가 아니라 여러 개의 주제가 한 공간 
속에 복합적으로 나열된 그림이다. 그러면서 하나의 장식적 구성으로 통일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래 십장생은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인데 이 굴뚝담의 
십장생 부조 속에는 연꽃, 원앙새, 포도, 국화, 대나무, 난초, 새, 갈대 같은 것이 
복합되어 있다.
  십장생 굴뚝의 장식벽 위에는 중앙에 용의 부조를 중심으로 좌우에 학의 부조전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십장생도 밑에는 두 군데에 해태의 부조전이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 측벽에는 박쥐와 당초문 부조가 배치되어 있다. 이들 부조들은 모두 채색을 하여 
화려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들 부조장식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전체적으로 자졍전에 사는 
대비의 장수를 비는 뜻이다. 용은 왕을 상징하고 학은 신하를 상징하며 해태는 재앙을 
물리치고 박쥐는 자손의 번성과 부귀를 상징한다.
  십장생 그림 속의 해, 바위, 바다, 구름, 노송,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은 장수를 
상징한다. 원앙새는 부부의 사랑을, 연꽃은 군자의 상징이며, 연밥과 포도송이는 
자손의 번성을 상징한다. 모란은 부귀를, 국화는 은일(숨을 은, 허물 일)을, 
천도복숭아는 장수를,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한다.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담은 민화를 보듯이 지극히 인간적이다. 중국 자금성의 
구룡장식담처럼 높고 커서 사람을 왜소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러한 한국의 꽃담들은 
일본 담이나 중국 담과 달리 사람의 키에 비례하여 조화시켰고 도자기 등 광택나는 
재료를 쓰지 않아서 온화한 무광택의 조화가 있다. 왕실에서 이렇게 십장생 장식을 한 
것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신선사상과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백제 무왕이 궁남지를 파고 방장선산을 모방한 선도(신선 선, 섬 도)를 만든 
것이나 신라 문무왕이 안압지를 파고 삼신도(석 삼, 신령할 신, 섬 도)와 무산십이봉을 
조성하여 신선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조영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자경전 굴뚝담은 한국의 꽃담 중에 가장 아름다운 담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화목을 심을 수 없을 때는 담 하나만으로도 조원할 수 있다.
  이러한 꽃담을 오늘날의 건축에 잘 활용하면 우리 문화의 창조적 계승이 얼마든지 
가능하게 된다. 

    뛰어난 조경예술이 담긴 경화루 연못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이다. 그러한 사람의 눈은 천태만별이다. 현상을 보아도 그 
진상이 보이지 않는 눈이 있고 보고도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눈도 있으며 생각 
하나만으로도 트이는 눈이 있다.
  우리는 우리 문화의 독창성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다. 국제화란 세계가 하나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가 
자기 개성으로 집합된 이합성(다를 이, 합할 합, 성품 성)의 총화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문화적으로 참으로 훌륭한 캐치프레이즈이다.
  이러한 국제화 속에서 민족적 고유성을 상실한 세계화란 민족문화의 소멸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 문화의 개성과 우수성을 찾아내어 세계 속에서 한국 문화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우리 문화가 다른 나라 문화와 무엇이 다른가도 비교 
연구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보편성과 객관성이 있어야 한다.
  일제식민통치의 상징인 조선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여 일제가 파괴한 경복궁을 
복원하여 민족적 자존을 회복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진작 했어야 할 일이었는데 
왜 이리 늦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다.
  우리는 경복궁 속에 담긴 우리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세계인에게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경복궁의 조영중에 가장 뛰어난 기술과 예술적 슬기로 조성된 
경회루(국보 제224호)와 그 연못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정궁으로 1395년 9월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 경회루 지역은 
습지여서 작은 연못만을 팠던 것인데 태종이 즉위하여 1412년 4월에 연못을 크게 
넓히고 경회루를 건립하였다. 이때 경회루의 돌기둥에는 용이 새겨져 있었다 한다. 이 
경회루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지금의 경회루는 1867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세운 누각이다. 경회루는 왕궁의 연회 장소였다.
  경회루와 그 연못의 현황을 살펴보자. 네모난 연못은 남북이 113cm, 동서가 
128cm인데 못 속에 세 개의 장방형 섬을 배치하였다. 동쪽의 제일 큰 섬에는 선착장이 
있고 경회루가 건립되어 있다. 못 가운데에는 장방형 섬이 두 개 있는데 송림이 
우거져 있다. 그리고 경회루가 선 섬으로 들어가는 곳에 돌다리 세 개가 설치되어 
있다. 다리들의 길이는 9m이다. 너비는 각기 다른데 남쪽 다리가 가장 넓어 주통로로 
사용되었다.
  경회루가 선 섬 외곽과 돌다리에는 하엽동자가 받친 돌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다리의 법수와 경회루 섬 귀퉁이에는 재앙을 쫓는다는 해태와 불가사리 등의 
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이들 조각은 조선후기의 조각예술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경회루는 정면 7권(112.5척), 측면 5칸(93.2척)의 거대한 누각인데, 48개의 육중한 
돌기둥(높이 4.7m) 위에 낮은 나무기둥을 세워 난간을 돌린 누각이다.
  이 누각의 외주는 네모난 기둥이고 내주는 둥근 기둥으로 구성되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인데 웅장하게 보이도록 물매를 급하게 하여 시각적으로 지붕면이 크게 
보이게 하였다. 건물 구조는 간결한 두익공의 구조를 하고 있다. 경회루 마룻바닥은 
3단을 이루고 있는데 35칸의 누각으로 문을 내리면 모두 방이 된다.
  경회루는 한국의 누각건물 중에 가장 장중하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큰 건물이다. 
이 누각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1865년 정학순이 쓴 '경회루전도'에 의하면 경회루는 주역의 원리에 의거한 우주적 
질서를 조영에 반영하고 있다. 마루의 제일 높은 중앙단은 8개의 기둥이 배치된 
공간으로 주역의 팔괘와 천지만물의 현상과 형태를 상징하여 중궁으로 하였다. 
중간단은 12개의 기둥이 배치된 공간으로 이는 12개월을 상징하고, 밑단은 24개의 
기둥이 배치된 공간으로 24절기를 상징하는 것이다.
  경회루 연못은 원래 사방이 담장으로 아늑히 싸여 있었다. 연못의 동쪽과 북쪽 
호안에는 화계(꽃 화, 계단 계)를 조성하여 화목(꽃 화, 나무 목)을 심었던 것이다. 
특히 북쪽 호안에는 2단을 만들어 석구(돌 석, 도랑 구)와 괴석(괴이할 괴, 돌 석)을 
배치하고 아래 윗단을 오르내리는 돌계단이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화계에 
꽃이 피면 화사한 꽃 그림자가 물 속에 비쳐 더욱 아름다웠을 것이다.
  현재 북쪽 못가에 있는 하향정은 원래 없었던 것인데 1950년대에 새로 지어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하던 곳이다. 경회루 연못 가운데에는 길이 약 16m, 너비 약 6m가 되는 
장방형 섬 두 개가 16m쯤의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길쭉하게 떨어져 있다. 이 섬을 
만세산이라 부르는데 송림이 조성되어 있다.
  이 두 섬은 경회루 서쪽 못 공간 속 거의 중앙에 위치하여 경관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경회루 위에서 내려다보면 선산의 송림이 물 속에 잠겨 지극히 아름답다. 그리고 
떨어진 두 섬 사이로 전개되는 수면이 깊어 보인다. 연못 서쪽 호안 위에서 경회루 
쪽을 보면 두 섬의 송림 사이로 깊숙이 경회루가 드러나고, 남쪽 못가에서 보든 북쪽 
못가에서 보든 두 섬의 푸른 송림은 오색단청한 누각을 가렸다 열었다 하면서 
변화무쌍한 경관을 연출한다.
  또 이 경치가 수면 속에 영상이 되어 누각과 송림이 거꾸로 서고 상하로 나타나서 
별천지를 이룬다. 경회루에 올라가서 침전과 근정전 쪽을 바라보면 궁전의 지붕들이 
높고 낮게 포개져서 왕궁의 배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흙과 자갈로 다진 천재적 토목기술
  이상의 조영미를 살펴보면 경회루 누각과 연못의 설계자는 대단히 뛰어난 미적 
구상을 창출하였다. 또 우리가 천재적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것은 48개의 육중한 
돌기둥 위에 선 35칸의 거대한 누각이 흙과 돌을 판축으로 다져 쌓은 섬 위에 
건립되었는데 지금까지 1cm의 부등침하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일 1cm 
정도라도 섬 어느 부분이 침하한다면 기둥이 내려앉고 누각의 창방이나 도리 등 
목부가 부러져서 경회루가 기울게 된다.
  그렇듯 흙과 자갈만을 단단하게 다져서 만든 섬 위에 큰 돌기둥과 누각을 받치게 한 
천재적 토목기술을 생각해 보라. 1980년대에 경회루 연못의 물을 빼고 못바닥을 
조사해 보니 땅의 침하를 방지하기 위하여 전주 같은 나무기둥이 못 바닥에 가득히 
박혀 있었다. 이 목주들은 1412년 경회루를 창건할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 경이로운 것은 경회루 연못이 4,800여 평에 이르는데 물이 썩지 않게 처리한 
것이다. 경회루 연못물은 괴어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있다. 경회루 연못 바닥은 
평면이 아니다. 동북쪽에서 물이 솟아나게 되어 있고 서남쪽 귀퉁이에 수구가 있다. 
물이 솟아나는 동북쪽 못 바닥은 높고 물이 흘러나가는 서남쪽 못 바닥은 낮게 
만들었다. 그래서 새 물이 낡은 물을 밀어내도록 물길을 만들었다. 수리를 잘 이용한 
것이다. 못으로 들어가는 물은 북악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경복궁 북쪽 향원지에서 
흘러오는 물을 못 속으로 넣어서 솟아나게 만들었다.
  우리 나라 연못에 물을 넣은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경회루처럼 못 속에서 
솟아나게 한 것을 잠류라 하고, 수면에 평평하게 흘러들게 하는 것을 자일이라 하며, 
폭포로 떨어지게 하는 것을 현폭이라 한다.
  연못의 물이 썩지 않고 고요한 수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려면 경회루 연못처럼 
잠류의 방법으로 물을 넣어야 한다. 이와 같이 경회루 연못은 뛰어난 미적 구상과 
과학적 기술이 깃들어 있다.
  그러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경회루 방지의 연회 장면 하나를 소개한다.
  1506년 연산군은 방지 서쪽에 만세산을 만들어 화려한 꽃을 심고 봉래궁, 일궁, 
월궁, 벽운궁 등 상징적인 모형궁을 만들어 배치하고 금은 비단으로 장식하여 또 못 
속에 비단으로 만든 연꽃을 띄우고 산호를 장식하여 왕은 궁녀들과 같이 화려한 
비단으로 꾸민 황룡주를 타고 만세산을 왕래하였다. 그리고 꽃 장식 등을 물 위에 
가득 띄워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경회루 연못의 밤이 낮같이 밝았다 한다. 이 경회루 
축제의 아이디어를 오늘에 되살려 본다면 경회루 조형예술의 장관이 더욱 빛날 
것이다. 

    창덕궁 비원

  봄이 오면 서울에서 가장 손쉽게 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창덕궁 비원(사적 
122호)이다. 서울을 찾아오는 외국의 중요인사는 꼭 비원을 관람하고 간다. 창덕궁의 
비원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이기 때문이다.
  역사 깊은 수도에는 이와 같은 명원들이 있게 마련이다. 프랑스 파리에는 베르사유 
궁원이 있고, 일본 교토에는 계이궁이 있으며, 중국북경에는 이화원이 있다. 비원은 
한국조원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세계적 명원이다.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 파리의 
베르사유 궁원이나, 북경의 이화원이나, 일본의 계이궁을 보게 되면 이들 궁원이 
비원과 어떻게 다른가를 알고 비교하는 안목을 가지는 것도 의의 있는 일이다
  베르사유 궁원은 17세기 프랑스식 평면의 기하학적 궁원이다. 왕궁건물을 중심으로 
직선의 원로가 뻗어 있고 좌우 대칭으로 화초와 회양목, 전정한 주목 등으로 구성된 
아라베스크 무늬의 화단이 있고, 분할된 수림구역이 배치되어 있다. 너도밤나무 등을 
전정한 가로수와 생울타리가 늘어서 있고,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조각분수의 
연못들이 곳곳의 원로중앙에 설치되어 있다.
  베르사유 궁원은 평면 기하학적 공간으로 분할한 인공적인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절대권력이 이루어 놓은 권위적 장식의 장엄함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자연에 동화하는 조화로움과 인간의 심성을 순화하는 성찰보다는 권위적인 사치가 
드러나 있다.
  북경의 이화원은 청나라가 만든 동양의 자연주의적 원림이다. 중국에서는 정원이라 
하지 않고 원림이라 한다. 이화원은 인공으로 쌓아올린 만수산과 인공으로 판 광활한 
곤명호가 90만 평 경역에 전개되어 있다. 만수산에 있는 8각 4층의 웅대한 불향각은 
장관을 이루는 불전이다. 곤명호 속에는 17개의 아치로 구성되고 길이가 70m에 이르는 
아름다운 대리석 석교가 환상적으로 무지개처럼 걸리어 있다. 이 다리는 용왕묘가 
있는 신비한 누각의 섬에 연결되어 있다.
  태호석으로 조성된 석가산들과 만수산의 웅장한 궁전건물들이 곤명호에 그림자로 
잠긴 광경은 별천지를 이룬다. 소주의 거리를 모방하여 만든 소주하나 강소성의 
명원인 기창원을 모방하여 만든 해취원 등은 대단히 아름답다. 곤명호에서 배를 타고 
이화원을 바라보면 선경 같은 환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화원을 거닐어 보면 중국문화의 광대한 위압감 속에 인간의 왜소함을 
느끼게 되고 절대권력이 창조한 비인간적 권위 속에서 따뜻한 인성을 찾을 수 없다. 
산도 옮기고 바다 같은 호수도 파서 자연의 순리를 제왕의 명령 하나로 바꾸어 버리는 
중국문화의 횡포는 너무 거칠어 인간과의 조화를 상실하고 있다.
  일본 교토의 계이궁은 17세기에 만들어진 일본 정원문화의 대표적 정원이다. 고서원, 
송금정, 죽림정, 다옥 등이 해안선 같은 연못변과 섬 속에 배치되어 있다. 좁은 원로를 
따라가면 고운 자갈이 깔리고 비석이 놓이고 석교, 목교 등이 설치되어 섬세한 변화가 
느껴진다. 때로는 괴석을 배치하여 선경을 상징한 축경식 공간들이 조성되어 있다. 
화목은 소나무, 대나무, 철쭉 등이 분재처럼 전정되어 가꾸어져 있다. 이 계이궁은 
축경식 정원으로 상징적 세계관을 조영한 것이다. 계이궁은 서울의 비원보다 좁은 
면적에 이루어져 있다. 일본 정원은 넓은 자연의 경치를 한정된 공간 속에 그림을 
그리듯이 축경시키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자연의 상징적 모형을 보는 것 같아서 
자연이 사람 밑에 깔리게 된다.

     서울 도심 속에서 사계절의 정취를 만끽
  서울의 비원은 15세기 동양의 자연주의 조원이다. 인간이 자연속에 묻히어 자연에 
동화하고 자연의 순리 속에 인성을 수양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비원 속을 거닐어 
보면 사람이 숲속에 푹 파묻히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 버린다. 정자나 다락건물은 잘 
드러나지 않게 터를 잡아 산세에 아늑하게 안기어 있다. 이들 건물이나 괴석, 담장 
등은 사람과 조화되도록 하여 너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아 인간과의 지극한 교감을 
이루고 있다.
  비원은 자연의 순리를 따라 봄이면 꽃과 신록이 움트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단풍이 곱게 탄다. 겨울이면 낙엽이 져서 나목의 고독을 느끼며 설경을 볼 
수 있도록 계절에 민감한 화목으로 구성되어 궁중의 임금도 사철의 변화와 자연의 
법칙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수목을 인공적으로 전정하지 않았다. 천지운행의 
순환하는 이치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자연의 산세를 절대 허물지 않는 자연숭배사상이 
배어 있다. 비원은 절제하고 겸양하는 심성을 기르는 기능과 즐겁게 유연(놀 유, 잔치 
연)하는 기능의 궁원이다
  창덕궁은 140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창건되었는데, 산세를 따라 궁전이 배치되어 
있다. 궁의 전체 면적은 144,299평인데 그중 비원의 면적은 9만여 평이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로 구성된 괴목(느티나무 괴,
나무 목)의 숲을 만난다. 원래 동양의 궁문에는 괴목을 심어 숲을 만드는 제도가 있었다. 
왕궁에 들어갈 때는 꼭 풍수설에 의해서 명당수인 개울을 건너 들어가게 되어 있어 이 
개울 위에 금천교가 설치되어 있다. 금천교는 140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서울의 
돌다리 중에 가장 오랜 것이다. 이 다리에 조각된 신령스러운 짐승조각은 15세기 
조선의 조각예술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정전인 인정전과 편전인 선정전이 남향하여 산세에 맞게 옆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안 협소한 골짜기에 대조전과 회정당의 침전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왕궁은 이렇게 산속에 배치한 것이 없다. 이는 산세와 조화시킨 조선왕궁의 특색이다.
  대조전 후원은 아름다운 화계로 조성되어 운치가 있다. 이곳을 지나 고개를 넘어 
후원 속으로 들어가면 비원이 된다. 비원 속에는 정자 17동, 누(다락 누) 1동, 당(집 
당) 2동, 민가형의 연경당 등 35동의 건물이 있다. 정자는 4각, 6각, 8각, 다각형, 
부채형, 원형 등 다양하다. 연못은 부용지, 애련지, 반월지, 반도지 등 6개소가 있으며 
수목은 160여 종에 29만여 주가 수림을 이루고 있다.
  수백년이 넘는 나무들로 느티나무, 주목, 회화나무, 밤나무, 음나무, 굴참나무, 
다래나무(천연기념물), 향나무(천연기념물), 매화나무, 배나무, 뽕나무, 측백나무, 
주염나무, 철쭉 등이 있다. 인공적인 관상수는 한 포기도 심지 않았고 전지한 나무가 
없다. 이것은 자연형태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취한 것이다. 괴석은 석분에 심어서 
연못가나 정자 옆에 배치하였는데 괴석의 형태에 따라 석분이 4각, 6각, 8각, 원형 
등등 다양하다. 이런 괴석들이 많이 들어온 것은 1610년('광해군 일기' 2년 2월)이다.
  비원은 산세에 따라 수림, 연못, 정자, 누각, 담장, 샘, 계곡, 언덕, 계류, 석교 등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비원이란 이름은 1904년부터 보인다. 옛날에는 후원, 금원 
등의 이름으로 불리었다. 비원에 들어가면 주합루와 부용지와 영화당과 부용정이 있는 
지역을 만난다.
  주합루는 1776년 영조가 규장각으로 건립한 다락건물로, 이 지역의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 비원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많이 한다. 이를 지나 
불로문으로 들어가면 1645년에 건립한 애련정과 애련지가 있고 서쪽 산록 깊숙이 
1828년 순조가 지은 민가형의 연경당이 있다. 안채, 사랑채, 서재, 별당 등 조선민가의 
운치있는 원형을 볼 수 있다. 연경당 너머 계곡에는 반도지가 있고 부채꼴의 관람정과 
사각형의 승재정, 6각형의 존덕정 정자가 연못가에 아름답게 서 있다.

     석간수가 사철 솟아나는 옥류천
  여기서 북쪽 고개를 넘어 들어가면 비원 속에서 가장 깊은 옥류천에 이른다. 이곳은 
1636년 인조 때 개척된 것이다.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이 개울가에 둘러서 있고 
인조가 판 어정에서 차고 맑은 석간수가 사철 솟아나고 있다. 청의정은 단청을 한 
초가집으로 우산같이 둥근 모양이 이채롭다. 소요암에는 유상곡수연을 하는 수로가 
파여 있고 이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은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 소요암 바위벽에는 
숙종이 1690년에 지어 새긴 5언시가 있다.

  흐르는 물은 3백 척을 나르는데
  멀리 높은 하늘에서 떨어져 온다
  이를 보니 흰 무지개가 피어나고
  온 골짜기에 천둥과 번개가 인다.

  옥류천은 정자와 폭포와 연못과 작은 석교와 수림이 어울려 깊고 유현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이를 지나 서쪽으로 넘어가면 심산의 수림지대이다. 숲속에 600년이 
넘는 다래나무가 용처럼 엉켜 있는데 이는 천연기념물 251호로 지정된 한국 최고의 
다래나무이다.
  이를 지나 숲길을 내려오면 비원의 서쪽 구역에 신선원전이 있다. 이 신선원전은 
1921년에 옮겨온 것이다. 출구 가까이 내려오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거대한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비원을 일주하는 원로는 2km가 약간 넘으므로 등산의 쾌감도 
느낀다.
  비원은 서울 도심 속에 자리잡은 깊은 심산이다. 산꽃도 피고 산새도 운다. 화사한 
봄의 생기와 여름 장마 속에 핀 푸른 이끼의 산길, 불꽃처럼 타는 가을 단풍의 향연, 
겨울 설경 속에 피는 얼음꽃의 장관 등 계절마다 새로운 경관을 연출한다. 우리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계절마다 변하는 비원의 정취를 느껴볼 시간을 가져봄도 좋을 
듯하다. 

    조선의 신궁 종묘

  서울 도심에서 가장 쉽게 한적한 숲길을 걷고 싶거든 조선왕조의 신궁인 종묘의 
원림을 걸어 보라. 종묘는 동양에 있어서 왕실의 신전으로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이 조성될 때 고대 중국의 '주례고공기' '장인건국' 편에 나오는 
'좌조우사 면조후시'의 제도를 따랐던 것이다. 좌조우사 면조후시란 정궁을 중심으로 
왼쪽에 왕의 조상을 제사지내는 종묘(태묘)를 두고, 오른쪽에는 토신과 곡신을 
제사지내는 사직단을 두고, 앞에는 신하가 정무를 보는 관청을 두고, 뒤에는 시장을 
두는 고대 왕도의 기본 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서울은 주례에 따르면서도 배산임수하는 입지에 따라 정궁 뒤에 
시장을 두지 않고 진산인 북악산이 위치해 있는 점이 다르다. 그러므로 종묘사직이란 
봉건왕조의 국가란 말과 같은 것이다. 왕이 나라를 영위하기 위해서는 종묘와 
사직단을 세워서 선조의 은덕에 감사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사랑하는 사상을 
만백성에게 알리며 천지신명에게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고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그러기에 옛날에는 정궁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 종묘요, 사직단이었던 
것이다.
  종묘의 기원은 중국의 상고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천자는 7묘제(7대조까지 묘에 
신위 봉안), 제후는 5묘제를 채택하도록 제도화 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통일신라 왕조는 5묘제를, 고려 왕조는 7묘제를, 조선 왕조는 5묘제를 채택하였다.
  종묘는 경복궁과 함께 1395년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정전만 있었는데 태실 
7칸에 좌우 익실 각 2칸이었다. 조선 초기 태조 때는 태조의 4대 선조로 추존한 
목조(화할 목, 조상 조), 도조(법 도, 조상 조), 환조(씩씩할 환, 조상 조)의 신위만 
모시게 되었다. 그후 세종이 즉위한 뒤 정종이 죽자 왕의 신주를 모실 정전의 
신실(신령할 신, 집 실)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본따서 별묘를 두게 되었다. 
그리하여 1421년(세종 3) 영녕전이 세워지고 추존한 4대 선조의 위패를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종묘의 정전(국보 제227호)은 초창의 건물이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608년에 중건한 것이다. 그간에 여러 
번 증축되어 19칸 건물이 되었다.
  이 정전은 한 칸에 한 실씩 19실의 신실이 있는데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신주가 
모셔져 있다. 원래 정전에는 7묘제라도 7대까지의 선왕 위패만 모시다가 후대가 되면 
조묘인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던 것이다. 이를 조천이라 한다. 그런데 치적이 큰 왕은 
만세불후(일만 만, 인간 세, 아니 불, 냄새 후) 조공숭덕(조상 조, 공 공, 높을 숭,
큰 덕)의 근본정신에 따라 조천하지 않고 그대로 정전에 모시게 되어 정전의 신주가 
많아진 것이다.
  영녕전(보물 제821호)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608년 재건되어 현재 16칸에 16실의 
신실이 있는데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와 이은 황태자와 그 빈의 신주가 모셔 있다.

     거대한 지붕, 당당한 원주의 열이 주는 장엄한 긴장감
  정전과 영녕전의 건물은 사고석 궁담으로 둘러싼 방형공간 속에 있다. 동서남에 
문이 있는데, 남쪽의 정문을 들어서면 높은 월대가 있고 정문을 중심으로 월대 중앙을 
잇는 어도가 기단까지 연결되어 있다. 월대는 거친 박석을, 어도는 전(벽돌 전)을 
깔았다. 정전과 영녕전의 건물은 맞배지붕에 추녀는 간결한 홑처마이며 이익공집이다. 
월대에 면하여 있는 맨 앞 한 칸은 모두 퇴로를 개방하였고 그 뒤는 매칸마다 모두 문 
두짝을 달아 안으로 열게 만들었다. 이 문 안은 각 칸의 벽이 없이 옆으로 탁터진 2칸 
넓이의 공간이 있다. 여기에 신주를 모신 감실이 있다.
  정전과 영녕전은 모두 동서 좌우로 꺾어지도록 동서월랑 5칸씩이 달려 있다. 이들 
신전건물은 붉은색과 청록색의 2색만으로 단청하여 담담하게 보인다. 거대한 지붕과 
긴 건물의 당당한 원주의 열이 장엄한 긴장감을 준다. 정전은 세 군대 계단이 마련된 
월대 위에 서 있는데 그 아래로 가로 약 110m, 세로 약 70m에 달하는 또 하나의 
월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들 월대는 부정형의 억센 판석을 깔아서 자연스럽다. 월대 
아래 담장 안에는 역대의 공신당이 있다. 신전의 긴 건물은 광대한 2단의 월대 위에 
서서 길고 먼 거리감을 창출하고 있다.
  원래 종묘 정전에서는 춘정월, 하 4월, 추 7월, 동 10월 상순과 남일(동지 뒤의 셋째 
술일)에 정시제를 올렸고, 영녕전에서는 춘정월과 추 7월, 동 10월의 상순 2회만 
제사를 지냈다. 그밖에는 나라에 큰 흉사나 길사가 있으면 임시로 고유제를 지냈다.
  지금은 종묘제례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어 있어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사단법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주관하고 정부는 행사를 
지원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제에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과 종친들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서 친히 제향을 올렸는데, 이를 친행이라 한다. 왕이 나가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이라 하였다. 왕이 종묘에 행차할 때는 
장엄한 어가행렬이 서울 장안을 가득히 메웠다.
  종묘제례 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춤인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묘제례악'은 세종 때 만든 '정대업(정할 정, 큰 대, 업 업)'과 
'보태평(보전 보, 클 태, 평할 평)'을 다소 개정하여 1464년 '종묘제례악'으로 정해졌다. 
춤은 일무(춤출 일, 춤출 무)인데 문무(글월 문, 춤출 무)와 무무(호반 무, 춤출 무)를 
춘다. 원래 중국 황실의 제사가 장엄하였으나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 이제는 
제례문화가 소멸되어 버렸다.
  종묘가 다른 왕궁과 다른 것은 정자가 없고 화려한 화목(꽃 화, 나무 목)을 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못 속의 섬에는 제사에 사용하는 향나무가 서 있는 것도 
특징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사람이 사는 양택의 집이 아니라 귀신이 머무는 
음택이므로 앞의 산줄기가 아늑히 오무라들어 있다. 조선왕조의 능이 있는 동구릉도 
입구는 좁고 들어가면 골이 깊게 열리어 있다. 이런 형국이 이른바 음택의 길한 
산세였다.
  종묘는 서울 도심 속에 자리잡고 있으나 그 원림은 심산의 수림같이 깊게 우거져 
있다. 종묘의 산책길에는 우리가 명절이 되면 고향을 찾아 떠나는 마음과 같이 조상을 
숭배하고 자신을 성찰하면서 살아가는 전통 제례문화가 깔려 있다. 

    서울의 기념비적 건축물, 원각사 10층석탑

  나라마다 수도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종교건축물이 남아 있다. 이들 유적들은 인류가 
만든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정신적 깊이가 있고 문화적 감동을 유발하고 있다. 이런 
점은 서양이든 동양이든 큰 차이가 없다.
  서양의 수도를 보자.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 독일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교회,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등이 있다.
  동양의 수도에는 불교사찰 건물들이 많이 있었다. 중국을 보면 북위의 수도 
낙양에는 높이 490척이나 되는 영녕사9층목탑이 있었고, 당의 수도 장안에는 
대자은사(큰 대, 사랑 자, 은혜 은, 절 사) 같은 불사들이 장엄 화려하였다. 지금 
북경에는 천단을 비롯하여 이화원의 불향각(부처 불, 향기 향, 누각 각) 같은 건물이 
남아 있다. 일본 나라에는 법륭사, 동대사 등이 있고 교토에는 광륭사를 비롯하여 
녹원사, 남선사, 청수사 등이 불교문화의 요람을 이루고 있다.
  우리 나라는 고구려 평양에 8각 목탑이 우람하게 솟은 정릉사 등이 있었다. 백제의 
수도 웅진에는 웅장한 대통사목탑이 위용을 자랑했고, 부여에는 정림사5층석탑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신라의 고도 경주에는 225척 높이의 황룡사9층목탑과 분황사석탑 
등이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고려의 수도 개성에도 안화사, 보제사 등의 
사찰이 있었는데, 보제사5층목탑은 200척이 넘었다고 '고려도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조선의 수도 한양의 기념비적 건축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양의 중심부인 
종로 2가 탑골공원에 서 있는 원각사10층석탑(국보 제2호)이다.
  원각사는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그 중심에다 세운 국가 수호의 상징적 
사찰이었다.
  원각사는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에 의하여 창간된 절이다. 세조는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세종의 명을 받아 '월인석보'를 지었으며 다시 그것을 요점만 추려서 가곡으로 
만든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세조는 계유정난 등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를 거쳐 왕위에 오르자 정신적으로 
불교에 귀의, 불교중흥정책을 펼쳤다. '세조실록' 10년(1464) 5월 12일조에 보면 
원각사가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원각사10층석탑은 건립되지 않았다. 
'세조실록' 13년(1467) 4월 8일조에 보면 그때야 비로소 원각사석탑이 완성되어 
연등회를 개최하였다고 되어 있다. 원각사10층석탑은 당시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있던 경천사10층석탑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경천사10층석탑은 1348년 원나라 
황실에 의하여 건립된 것이다.
  당시 원각사에는 법당인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선방, 오른쪽에 운집당, 뒤쪽에 
해장전이 있고 절 입구에는 해탈문, 반야문, 적광문의 3문이 있었다. 그리고 동 5만 
근으로 만든 종이 종각 속에 설치되어 있었다. 법당은 청기와를 이고 금칠단청을 하여 
대단히 장엄 화려하였다. 해장전에는 대장경이 봉안되었으며 법당 동쪽에 연지가 있고 
서쪽에 동산을 만들어 사원이 아름다웠다.
  1488년에 화재가 있었는데 성종은 재목과 기와를 내려 복구토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1504년 연산군이 절에 연방원이란 기생방을 만들었으며 1514년(중종 9)에는 절을 헐어 
버림으로써 폐사가 되었다. 이는 억불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1536년에는 원각사 대종을 
숭례문(남대문)에 옮겨 시간을 알리는 종으로 사용하다가 1594년 다시 종각으로 
옮겼다.
  지금 원각사 터에는 대원각사지비(보물 제3호)가 서 있다. 이 비는 돌거북 위에 
비신이 서 있는데 조각솜씨가 뛰어나다. 비문은 김수온과 성임이 쓰고 추기는 
서거정과 정난종이 짓고 썼다. '대원각사지비'란 큰 글씨는 강희맹이 쓴 것이다. 
원각사10층석탑의 상단 3층탑신이 땅에 내려져 있었는데 1946년 2월 17일 미군 
공병대가 기중기를 이용하여 원상태로 복원하였다.
  원각사10층석탑의 상단 3층이 땅에 내려진 것은, 연산군이 창덕궁에서 도심을 
바라보자니 절은 폐사되었는데 석탑만 우뚝 서 있으므로 보이지 않도록 탑신 3층을 
땅에 내려놓게 했다는 설이 있다. 당시 한양 중심에 우뚝 솟아 있던 건축물 중 
원각사10층석탑이 가장 드러나는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1993년 문화재관리국에서 
간행한 원각사10층석탑의 실측 조사보고서에 자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생동감이 넘치는 조선시대 석탑예술의 대표작
  원각사10층석탑은 높이가 12m인 대리석 석탑이다. 기단은 3단인데 아자형 평면에 
탑신은 목조건물을 포개놓은 누각식 석탑이다. 3층 탑신까지는 기단과 같이 아자형의 
누각형이고 4층 이상은 4각형 누각형이다. 이 석탑 150여 면에 불, 보살, 인물, 용, 
사자, 말, 사슴, 연꽃 등의 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데, 이들 변상도에 대하여 
원각사10층석탑 실측조사보고서에 상세한 해설을 수록하고 있다.
  1층 기단에는 구름 속에서 생동하는 용과 사자, 연꽃 등을 새겨 불상의 용상이나 
사자좌나 연화좌의 좌대 같은 상징을 하고 있다. 2층 기단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현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조각되어 현장법사의 구법여정(구할 구, 법 법, 
나그네 여, 법 정)의 설화가 새겨져 있다. 3층 기단에는 석가모니가 전생에 행한 
6도행업(여섯 육, 법 도, 행할 행, 업 업)과 석가일생의 팔정도(여덟 팔, 바를 정, 길 
도) 그림이 새겨져 있다.
  1층 탑신에는 20면의 조각이 있는데 삼세불회, 영산회, 미타회, 용화회의 4불회가 
조각되어 있다. 2층 탑신에는 화엄회, 원각회, 법화회, 다보회의 불회가 조각되어 있다. 
3층 탑신에는 소재회(꺼질 소, 재앙 재, 모을 회), 전단서상회, 약사회, 능엄회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밀교적 성격의 것으로 라마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4층 탑신은 
원통회, 석가회, 열반회, 지장회를 보여주고 있다.
  5층 이상 10층까지는 여래좌상을 조각하였는데 5층 탑신은 한면에 5여래씩 20여래가 
새겨졌고 6층 이상은 한 면에 3여래씩 각 층에 12여래를 새겼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여래상은 모두 과거불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원각사10층석탑은 이상과 같이 불교 생성과정과 전래과정뿐 아니라 8만 4천 법문을 
그림으로 수용한 장엄한 만다라이다. 공예품과 같이 섬세한 선과 입체감이 넘치는 
목조건물 등으로 인해 원각사10층석탑은 조선시대 석탑예술의 대표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지금은 빗물에 용해되고 습기에 침전되어 풍화가 심하다. 보호각 건립이 
시급한데 탑을 집 속에 보이지 않도록 격납시키는 건물은 안 될 것이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철골과 유리를 사용한 현대적 건물을 크게 지어 자연광선을 이용한 
전시관람 기능을 주고 충분한 공간을 두어 바라보는 공간의 여유와 조화를 가진 
원각사 석탑 박물관을 지었으면 좋겠다. 옛 석탑과 현대건축이 만나는 새로운 
민족문화 창조의 명소는 서울의 새로운 상징물이 될 것이다. 

    세종로 네거리의 기념비전

  세종로 네거리 교보빌딩 옆에 '기념비전'이란 황금빛 현관이 붙은 네모지붕의 정자형 
건물이 서 있다. 이는 사적 제171호로 지정된 고종 즉위 사십년 칭경 기념비의 
비각건물로, 비와 비각의 건립연대는 1902년이며 고종이 즉위한 지 40돌이 됨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
  비석의 형태는 귀부, 비신, 이수로 구성되어 경주에 있는 통일신라의 
태종무열왕릉에서 시작되는 한국비석의 전통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비신 맨 위쪽에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40년칭경기념비송'이라고 황태자(뒤에 순종)가 쓴 전자 
글씨가 4면에 둘러 새겨져 있다. 그 밑에는 전후면에 서(차례 서)와 송(칭송할 송)을 
새겼는데 비문은 영의정 윤용선이 짓고 글씨는 육군부장 민병석이 썼다.
  비문의 내용에 원구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가 되었으며 나라 이름을 
대한이라 하고 연호는 광무라 한 사실과 1902년이 황제가 등극한 지 40년이자 보령이 
망육순(51세)이 되는 해이므로 기로소에 입사한 사실을 기념하여 비석을 세운다 
하였다.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비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평면 건물이다. 
팔각형으로 다듬은 높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창방과 평방을 차례로 얹어 짜 
맞춘 다음 삼출목(석 삼, 날 출, 눈 목)의 공포를 짜 올려 네모지붕을 받친 다포식 
건물이다.
  남쪽에 삼문의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다. 가운데 문 위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설치한 뒤 얕게 감실을 파고 만세문이라 새겼다. 문 기둥돌에는 식물 무늬를 
새기고 위쪽에 석수들을 배치하였다.
  비전의 기단 둘레에는 돌난간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에 연꽃 잎을 새긴 받침을 
설치하고 동자 기둥 위에 방위를 따라 사신(넉 사, 신령할 신)과 12지신상을 돌로 
조각하여 배치하였다. 남쪽에는 말과 해태와 주작이, 동쪽에는 토끼와 용이, 서쪽에는 
닭과 호랑이가, 북쪽에는 쥐와 해태와 거북이 배치되어 있다.
  이 건물에 기념비전이라 편액한 것이 비각인데, 전(대궐 전)자를 붙여 건물의 품격을 
높인 것이다. 건물에 전자가 붙는 것은 가장 높은 품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경복궁의 
근정전, 사정전 등과 같은 격을 준 것이다. 비전의 건물 기단에 사신과 12지신상을 
배치한 것도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이 음양오행사상에 의해 방위신이 보호해 줌을 
상징하는 것이다. 옛날에 이 비전이 있는 북쪽에 인접하여 기로소가 있었다.
  비전은 경복궁 앞 육조거리의 주작대로와 한양의 동서대로인 종로가 십자로 만나는 
한성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경복궁과 덕수궁 등 왕궁건물을 조영한 조선 
말기의 우수한 목수들의 전통적 솜씨가 그대로 이어진 건축이다. 기념비전의 추녀와 
사래는 시원하게 빠져서 기둥과 사래 끝의 각도가 35도를 넘는다.

     높은 빌딩, 삭막한 도심 속에 선 인간적인 건축물
  나는 이 기념비전 앞에 서서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본다.
  1994년에는 정도 600년이라 하여 서울에서 갖가지 행사들이 펼쳐졌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수도 한양의 역사환경은 왕궁과 성곽을 제외한다면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기념비전은 고도(옛 고, 도읍 도)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유지하기 위해 세종로 네거리를 
지키고 서 있는 건물이다.
  기념비전은 도시공간에 전통과 현대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높은 직선의 
빌딩 사이에서 기념비전은 날개같이 휘어올린 곡선의 추녀선으로 날고 있는 건축이다. 
북악산을 막아선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리면 북악산의 자연스러운 곡선과 그 앞에 
조화롭게 전개될 경복궁의 궁전들과 연결된 세종로는 서울의 상징 거리가 될 것이다. 
자연과 동화된 우리 건축의 곡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서울 도심 속의 마지막 남은 
한국 건축의 자존심 같은 몫을 하고 있다.
  빌딩이 높아질수록 서정이 메말라가는 삭막한 도심 속에서 기념비전은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축이다. 조선 왕조의 기념비를 보호하는 비전이라 할지라도 
비의 시녀격의 부속건물로서만이 아닌 건축미술의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기념비전을 문화사의 원시안으로 한번 보자. 교보 빌딩은 몇백 년이 지나면 
어떻게 변모할까? 시멘트의 수명이 다 지나면 재개발 대상이 될 건물이다. 세월이 
갈수록 빌딩의 가치는 소멸되어 갈 것이고 기념비전은 목조의 수명이 천년도 넘게 
가므로 문화유산이 되어 가치가 더해 갈 것이다. 지금도 사적으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므로 보존만 잘 된다면 먼 훗날 보물이 되고 국보가 될 건물이다. 우리 
나라 정자형 건물 중에 기념비전만큼 추녀가 시원하고 아름답게 빠진 건물은 없다. 
이렇게 길게 빠진 사래 끝에 활주도 받치지 아니하였다.
  기념비전 앞에는 우리 나라 국민들이 알아야 할 도로원표가 서 있다. 기념비전을 
기점으로 하여 전국의 정확한 거리가 새겨져 있다. 부산 477km, 대구 320km, 목포 
439km, 춘천 93km, 해주 169km, 평양 270km, 신의주 505km, 원산 247km, 함흥 
362km, 청진 783km 등이다.
  이 도로원표를 보면 북한의 도시 거리가 너무 가깝게 느껴진다. 국토분단을 
초월하여 통일의 이정표를 알리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기념비전은 지금 우리의 
수도 서울의 중심기점에 서 있는, 누가 무어라 하여도 장차 통일조국의 수도 서울의 
상징적 기념물이 될 것이다. 

    삼각산 승가사와 마애불

  나는 공휴일이면 때때로 삼각산 승가사에 오른다. 50이 넘은 내 나이에 알맞은 
등산코스이며 답답한 마음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정신적 안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종로구 구기동에서 계곡이나 능선을 따라 천천히 걸어서 1시간 내지 1시간 
반이면 승가사에 이른다.
  내가 승가사를 찾는 이유는 첫째 서울의 가장 아름다운 명산이요 진산인 북악산의 
병풍같이 둘러친 비봉능선 산마루턱에서 나와 상념을 펼쳐볼 수 있고 둘째로 서울 
제일의 불적(부처 불, 사적 적)과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서 있었던 비봉(비석 비, 
산봉우리 봉)이 있으며,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이 이어져 굽이치는 역사의 향취가 서려 
있기 때문이다.
  봄의 북한산은 태고의 정적으로 굳어 버린 암산의 의지가 그 진한 분홍빛 
산철쭉으로 피어 화사한 파문을 이룬다. 비가 갠 여름이면 만산이 폭포로 변하여 
천지를 세척하는 안개 속의 냉기가 온 골짜기에 감돈다 가을이면 이슬한 벼랑마다 
불꽃처럼 타는 단풍은 세파에 찌든 인간의 무딘 육신과 번뇌를 활활 태워 버린다. 
겨울에는 숙연한 자세로 굽어보는 차고 냉혹한 암산의 위엄 앞에 미미한 인간의 
겸손을 배우고 설화가 피는 날이면 일순에 열리는 설경 속에 하얀 표백을 느낀다.
  나는 서울의 도심에서 이와 같이 명산의 산정(메 산, 뜻 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서울시민의 행복이라 생각한다. 안개 자욱한 날에 홀로 
승가사로 가는 산길을 걷노라면 지난날 인연을 맺었던 소중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고독의 길목에서 시린 손을 마주 잡던 손결이며, 서로 다른 발길을 스쳐 보내고 
뜨거운 눈빛 속에 가슴 떨리던 인연, 다시 그리워 처음 느끼는 것 같은 황홀한 모습도 
체험한다. 저 암벽 사이에다 꿈에 그리는 초옥 한채 지어 놓고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소박한 행복 초라한 보람으로 이끼에 화합하는 탈속적 삶도 그려본다.
  승가사는 신라 35대 경덕왕 15년(756)에 신라 낭적사 스님 수태가 당나라 신승 
승가대사의 성적(성인 성, 사적 적)을 깨달아 삼각산 남쪽에 석굴을 만들고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후 고려 현종 15년(1024) 지광법사에 의하여 중창되었으며, 
이때 지광법사 등이 승가대사의 상을 조각하여 승가굴에 모셨다. 그 상의 광배 뒷변에 
대평 4년(1024) 7월 1일 법광등이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새겨 있다.
  이 석상은 머리에 두건을 쓴 스님이 앉아 있는 모습인데 얼굴에 미소를 띠고 통견의 
법의를 입고 있다. 광배는 거신광인데 연화문과 화염문 등이 새겨져 있다. 
'동국여지승람' 승가사조에 보면 "나라의 재난과 이변이 있으면 이 스님상에 기도하여 
재앙을 물리쳤는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굴 
속에는 차고 맑은 석간수가 솟아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석굴 앞에는 근래 건립한 큰 불전과 요사들이 있어 여승들이 수도하고 있다. 
진흥왕순수비의 비문 가운데에도 석굴 속에 도인이 살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승가굴이 그 석굴이었다면 북한산에서 제일 오랜 수도처가 된다(혹자는 
문수사가 있는 문수굴이라고 주장한다).

     고려 조각예술의 걸작인 마애불
  이곳을 지나 암벽을 향하여 석계단을 오르면 높다란 석벽에 조각된 '북한산 구기리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제215호)'을 만나는데 이 앞에 이르면 고려 조각예술의 걸작 
앞에 모든 피로가 일시에 가셔지고 부처님의 미소 속에 다소곳한 예배심이 일어난다.
  이 마애불(전체 높이 5.94m)은 머리는 소발(흴 소, 터럭 발)이며 육계가 크다. 얼굴은 
풍만하고 유난히 큰 귀를 가졌다. 목에는 세 줄의 삼도가 뚜렷하고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법의는 오른쪽 어깨가 벗어진 우견편단(오른 우, 어깨 견, 치우칠 편, 
옷솔터질 단)을 하고 있다. 무릎 밑에는 복련앙련의 연화좌가 있다. 머리 위에는 
덮개돌을 설치하였는데 밑면에 아름답게 연꽃이 조각되었다. 광배는 선각으로 
거신광(들 거, 몸 신, 빛 광)을 표시하였다. 이 불상은 머리 윗부분 양쪽에 네모난 
구멍이 2개 있고 어깨 부분 양쪽에도 네모난 구멍이 패어 있어 마애불이 비를 맞지 
않도록 반지붕을 씌웠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고려초에 조각된 것이다. 비봉 능선 너머 삼천리골의 삼천사 마애석불과 
우이동 도선사의 마애석불 등이 있지만 서울지역에서는 최고의 마애석불이며 당당한 
위엄과 높은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이 석불 앞에 서서 남으로 보면 북악산이 
바로 앞에 있고 그 산너머로 서울의 도심이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도솔천에서 
속세의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얻는다. 조선의 태조도 이곳 승가사에 
올라와 "백운(흰 백, 구름 운) 중에 누워 있는 암자"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삼각산 승가사와 그 주변에 너무 화려하고 많은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그 옛날 
북한산 제일의 산사를 찾던 정감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승가사는 북한산의 어느 지세에 있는가를 살펴본다. 삼각산은 도봉산과 
잇대어 있으며 백운대(해발 836.5m)와 인수봉(해발 810.5m)과 만경봉(799.5m) 세 봉을 
삼각산이라 하는데 그 중 백운대가 가장 높다. 산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암산으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기상이 서려 있다. 만경봉은 국망봉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의 비류와 온조가 이 산봉에 올라 백제의 수도를 
정하였다('동국여지승람')고 전하는 산봉우리이다. 이 봉의 줄기가 동으로 굽어 돌아 
용암봉, 시단봉을 이어 보현봉, 문수봉을 만들고 보현봉의 줄기가 형제봉 능선을 거쳐 
서울의 진산인 북악산의 주맥을 이루고 있다.
  문수봉의 서쪽 줄기는 두 갈래로 나누어졌는데 한 줄기에는 나한봉,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을 거쳐 의상봉 능선을 이룬다. 그리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달려 
승가봉, 비봉 그리고 향로봉을 이루고 탕춘대 능선으로 이어진다. 승가사는 
진흥왕순수비(1972년 경복궁으로 이전)가 서 있던 비봉 남쪽에 있다. 

    북한산과 북한산성

  문화유산 중에 건축물이나 그림, 도자기 등 유형문화재는 예술적 보존 가치가 
높으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다. 산성이나 절터, 왕궁이나 고분 같은 것은 역사적 
기념물로 사적으로 지정된다. 국보나 보물은 아름답거나 슬기로워 문화적으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이다. 그러나 사적은 그렇게 아름답거나 문화사적 예술성이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 교훈이나 가치는 더욱 높다.
  사적은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기에 민족의 기상과 역사정신이 담겨 있다. 북한산성은 
사적 제162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으로 북한산과 더불어 왕도 한양을 지키던 보첩이다.
  서울의 기상은 북한산에서 뚜렷이 느낄 수 있다. 북한산(해발 837m)은 하늘을 
떠받치듯 우람하게 솟아 있는 서울의 주산으로 거대한 화강암 바위산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북한산은 양주 경계에 있는데 화산(빛날 화, 메 산)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이라고도 하였다.
  '북한지'에는 삼각산은 인수봉, 백운봉, 만경봉의 세 봉우리가 삼각과 같이 깎아 세운 
듯 우뚝 서 있어 이를 삼각산이라고 하였는데 북한산에 있는 모든 사찰은 '삼각산 
oo사'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백운대나 인수봉, 만경대의 산봉우리를 
보면 인간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위엄이 있고 영산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이 세 봉우리를 중심으로 북으로 상장봉, 남으로 용암봉, 일출봉, 보현봉, 문수봉이 
있고 분수봉에서 북서쪽으로 의상봉 능선이, 남서쪽으로 비봉 능선이 솟아 있다. 또한 
형제봉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으로 치닫는다. 그들 산봉우리 
사이사이에 깊은 골이 있고 풍부한 물이 흐르고 폭포와 깊은 소(못 소)가 형성되어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수도시민들의 휴식처를 마련해 
주고 있다.
  원시림과 기암절벽과 동식물의 생태가 특이하여 1983년 4월 도봉산을 포함한 북한산 
전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이러한 경승에 서울을 지키는 험한 산성이 
축성되어 성문과 산사의 유적들이 아름다운 자연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과도 같다.
  북한산성의 경치는 계절따라 새로워진다. 봄이면 신록이 움트고 홍옥을 뿌린 것 
같은 철쭉이 만발하면 화사한 산천이 된다. 여름이면 녹음이 짙은 숲에 비가 자주 
내려 계곡의 물이 불어나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귀가 멀 
듯하다. 안개 자욱한 북한산성의 여름 풍경은 신비한 산정과 선경같이 깊은 별천지를 
이룬다. 가을이면 만경대나 노적봉의 바위산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단풍 속에 휘감기어 
황홀경을 느끼게 한다. 겨울이면 우람한 산줄기와 굽이치는 산성의 성체가 더욱 
드러나고 눈이 내리면 설화가 가득 피어 은백의 설경 속에 인간미답의 경관이 열린다.
  이와 같이 북한산성 일대는 서울시민이 손쉽게 자연과 역사를 체득할 수 있는 
천혜의 관광지로 휴식하고 사색하는 명소가 되어 있다.
  북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북방을 지키는 요새로 132년에 북한산성을 축조하였다. 백제의 최전성기인 
근초고왕 때는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백제군이 북한산성에서 출진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을 전사케 하였다.
  그후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백제 도성을 칠 때 먼저 북한산성을 7일 동안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왕성을 쳐서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웅진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그후 신라와 백제는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고구려와 싸워 한성 
지역을 수복하였으나 신라는 553년(진흥왕 14) 한성지역을 빼앗아 버렸다. 이렇게 되어 
북한산성은 신라의 군사기지가 되었다.

     북한산 비봉에 우뚝 서 있던 진흥왕순수비
  진흥왕은 555년 10월에 북한산성을 순시하고 군사를 위무(위로 위, 어루만질
무)하였다. 그후 북한산 비봉에 진흥왕순수비가 건립되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국보 제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1972년 8월 17일 경복궁내로 옮겼다. 그 자리에는 
표석을 세우고 비가 섰던 자리를 사적 제228호로 지정하였다.
  진흥왕순수비는 1816년 추사 김정희가 김경연과 함께 조사하고 그 다음해에는 
조인영과 같이 비문을 정밀하게 조사하였다. 당시 김정희는 함경남도 황초령에 있는 
진흥왕순수비도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로 '금석과안록'을 썼다. '금석과안록'은 우리 
나라에 고증학이 들어온 뒤 처음으로 비문을 고증학적 연구를 통하여 쓴 보고서이다. 
그래서 '금석과안록'은 우리 나라 문화재관리사에 있어 최초의 연구조사서에 해당된다. 
그 전에는 이를 무학대사비로 오인하였던 것인데 김정희의 조사 이후 
진흥왕순수비임이 확인되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의 건립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561년 경남 창녕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북한산 순수비도 세웠을 
것이다. 현재 황초령과 마운령의 진흥왕순수비는 북한에서 함흥 역사박물관에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다.
  661년 5월 '삼국사기' 태종무열왕조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 장군 
생해와 함께 고구려군을 이끌고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북한산성을 지키던 성주 
동타천은 불과 2,800여 명의 군민을 모아 필사항전을 전개하였다. 이 공방전은 20여 
일간 치열하게 계속되었는데 결국은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싸움이었으므로 태종무열왕의 기록 속에 
상당한 분량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싸움에서 신라군이 패하였다면 당시 
백제 부흥군이 일어나 백제 영토를 수복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전선이 구축되어 역사의 물굽이는 다른 곳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북한산성의 
전과로 성주 동타천은 대사(12관등)의 벼슬에서 2계급 특진하여 대나마(10관등)에 
승진되었다.
  고려 때 거란의 침입이 있자 고려 현종은 왕실의 재궁(가래나무 재, 집 궁)을 
북한산성 속으로 옮겼다. 1232년 고종 때는 몽고군과의 격전이 북한산성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1387년 고려 조정은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국난에 
대비한 근거지로 삼고자 하였다.

     북한산성은 왕도를 지키는 보루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는 북한산성을 중요시하지 않았던 
관계로 왕도를 지키는 보루를 상실하고 말았다. 1659년 효종 때 북한산성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수축론이 일어나고 1711년(숙종 37)에는 숙종의 명령으로 북한산성의 
축성공사가 추진되었다. 당시 7,620보(약 9,500미터)의 석성이 북한산의 험한 산세를 
따라 축성되었다. 그리고 대서문,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 등 13개 성문과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건립되었다. 1712년에 130칸의 행궁과 140칸의 군창이 
건립되고 중흥사를 비롯한 12개 사찰이 건립되어 승군이 배치되기도 하였다. 이 
성내에는 99개소의 우물이 있었고 26개소의 연못이 있었다. 전시에는 왕을 비롯한 
조정이 산성내로 옮겨와서 싸울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북한산성의 축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북한지'에 실려 있다. '북한지'는 
1745년(영조 21) 축성에 참가했던 승군의 총책임자이며 팔도 도총섭이던 승려 성능이 
편찬한 책이다.
  지금 한창 북한산성의 성곽과 성문, 누각의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북한선성을 복원한다면 중국의 만리장성과 함께 세계적 명소가 될 것이다. 
저렇듯 아름다운 북한산과 산성과 왕궁과 군사시설과 성문과 누각과 연못과 사찰이 
험준한 산속에 조화롭게 배치된 유적은 세계인의 눈에 경이롭게 비칠 것이다. 
광대하기만 한 중국의 만리장성보다 훨씬 이채롭고 아름다운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지금 1970년대에 복원된 대서문과 성체 일부가 남아 있는데 서울시에서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과 문루 주변, 그리고 대남문과 대성문 사이의 성곽을 
복원하였고 나머지 암문 복원을 추진하고 있지만 좀더 과감한 정책사업으로 북한산성 
전체의 복원사업이 조속히 추진되기를 바란다.
  북한산 태고사에는 1385년 건립된 고려말의 명승 보우의 탑비인 
태고사원증국사탑비(보물 제611호)와 태고사원증국사탑(보물 제749호)이 있다. 이밖에 
북한산에는 문수사, 원통사, 도선사, 승가사, 진관사, 삼천사 등 30여 개의 유명한 절이 
있다. 중흥사지는 가장 큰 사찰로 승군장이 있던 곳인데 고종 말년에 불이 나서 
절터만 남아 있다.
  북한산은 등산객이 많아서 북한산장, 우이산장, 도봉산장, 백운산장 등의 산장과 
북한산계곡, 구기계곡, 평창계곡, 정릉계곡, 우이계곡, 도봉계곡, 송추계곡 등에는 많은 
유원지가 자연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하루 코스로 북한산성을 찾아 역사적 체험을 
해보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일 것이다.
  서울에 빌딩이 높아질수록 서울시민의 도덕수준은 낮아진다고 한다. 역사의식과 
자연에 대한 외경을 배울 수 있는 북한산성은 영원한 서울시민의 역사교육 현장이요, 
마음의 휴식처이다. 새로 복원되는 북한산성의 성곽과 함께 북한산을 잘 보존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야 할 것이다. 

    관악산 연주대와 한우물

  관악산(높이 629m)은 한양의 풍수로 보면 주산인 북악보다 높아 경복궁을 억눌러 
무섭게 넘보는 산이다. 또한 산세가 화기(불 화, 기운 기)를 지녔다 하여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창할 때 관악산의 화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벽사(물리칠 벽, 간사할 사)의 
뜻으로 광화문 앞에 해태 두 마리를 설치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북악(높이 342m)을 주산으로 하여 서에 인왕산(338m), 동에 
낙타산(125m), 남에 남산(265m)을 연결하여 서울성을 쌓았다. 한양은 약 5백만 평 
정도의 면적에 불과한 성내도시였다.
  당시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경복궁을 남향으로 놓을 것인가 동향으로 놓을 것인가 
쟁론이 있었다. 무학대사는 궁을 남으로 향하여 놓으면 관악산이 궁을 위합하여 
정권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외세의 간섭을 받는다고 주장한 반면, 정도전은 남에 
한강이 흐르므로 무방하다고 하였다.
  신라 때부터 전해 오는 '산수비기'에는 이미 한양이 왕도가 될 것을 예견하였는데 
터를 잡을 때 승려의 이야기를 들으면 번성하고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반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한다.
  그러나 현재의 서울은 주산이 북한산(837m)이며 서의 덕양산(125m), 동의 
용마산(348m), 남의 관악산(629m)에 이르는 약 630km2의 거대한 도시로서 진산인 
북한산이 관악산보다 높고 위세가 당당하여 옛 한양의 약산 풍수 따위는 벗어난 지 
오래이다. 북한산은 능히 산세로도 관악산을 눌러 거느리고 있다.
  오늘의 서울 풍수는 주산을 북한산으로 하고 안산(인도할 안, 메 산)을 관악산으로 
하여 관악산의 경승과 자연과 문화유적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 할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관악산의 주봉은 연주대이다. 연주대란 연모하는 사람이 그리운 날에 이 산봉에 
올라 시름을 푸는 장소이다. 관악산 연주대에 오르는 길은 험하고 가파르다. 나는 그 
산봉의 정감어린 이름으로 하여 일상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연주대에 오른다.
  연주대로 오르는 산중턱에 연주암이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라 전하는데, 
이곳에는 고려양식의 3층 석탑이 하나 있다. 이 탑은 조선의 태종이 첫째 아들 양녕과 
둘째 아들 효령을 제쳐두고 셋째 아들 충녕(후에 세종)에게 왕위를 계승하려 하자 
이를 안 양녕과 효령이 당시의 관악산인 이 절에 숨어살면서 세웠다고 전하기도 한다. 
연주암에는 높은 암산의 정상인데도 차고 맑은 석간수가 풍부하게 솟아나서 예부터 
절이나 인가가 있음직한 곳이다. 연주암에 들러 갈증을 축이고 잠시 쉬었다가 
연주대에 오르면 등산의 피로가 가신다.
  연주대는 기암 절벽의 암산이다. 677년 의상대사가 관악사에 머무를 때 때때로 이 
암봉에 올랐다 하여 의상대라 하였다 한다. 그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의 유신들이 이 산에 들어와서 숨어 살면서 의상대에 올라 멀리 개성을 바라보고 
두문동에서 순절한 고려의 열사들을 연모하였다 한다.
  그로부터 이 산봉의 이름이 연주대가 되었다. 그후 양녕과 효령 두 왕자도 연주대에 
올라와 멀리 경복궁을 바라보며 그리움에 잠겼다 한다. 당시 관악산은 인적이 드물고, 
깊고 유현한 심산으로 현세를 도피한 사람들이 숨어 살기에 좋은 곳이었다.
  나는 연주대에 올라 땀이 번진 이마를 닦으며 정상에 오른 작은 성취감에 희열을 
느꼈다. 세정의 명리에서 벗어난 해방감, 가슴에 바람구멍이 난 것처럼 시원하였다. 
나는 오늘 이 연주대에 앉아서 누구를 그리워 할 것인가? 가버린 선현을 그리워할 
것인가? 시대를 이끌고 갈 지도자를 그리워할 것인가? 어쩌면 정치란 비정하고 간교한 
것 같다. 나는 차라리 나와 인연을 맺었던 작은 사람을 그리워한다.
  떨리는 다리로 아슬한 벼랑 끝에 서서 그리운 이름을 소리쳐 불러본다. 나의 음성은 
자운동천(검붉을 자, 구름 운, 고을 동, 하늘 천)과 서폭(서녁 서, 폭포 폭)의 명승 
계곡을 넘어 과천까지 파문져 간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후련하다. 연주대 암벽 
밑에는 벼랑에 매달린 것 같은 위태로운 암자의 절집이 있다. 그 암벽에 새긴 마애불 
앞에 서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퇴메식 산성과 한우물
  관악산 서쪽봉이 삼성봉인데 이 봉의 서남쪽 줄기에 호암봉이 있다. 호암봉 산상에 
퇴메식 산성(성벽 1.25km)이 있는데, 서울 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한 바 있다. 이 
산성은 동쪽이 석성이고 서쪽은 자연암벽으로 남공불락의 요새이다. 성내에서 방형 
연못 2개와 많은 집자리가 발굴되었다. 그 연못 중 하나를 '한우물'이라 하는데 
조선시대에 축조한 호안 뒤에 신라의 연못 유적(길이 17,8m, 너비 13.6m, 길이 2.5m)이 
묻혀 있었다. 신라 안압지의 돌쌓기 기법으로 쌓았으며, 신라의 토기들이 발견되어 
확실한 연대가 입증되었다.
  한우물의 조선시대 석축 남벽에 '석구지(돌 석, 개 구, 못 지)'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산이 범뫼라 하여 산봉에는 호암(범 호, 바위 암)이 있고 개상도 세워 호암을 달래 
호환(범 호, 근심 환)을 막는 벽사의 뜻으로 돌개상과 돌개못 및 호압사(범 호, 압류할 
압, 절 사)를 둔 것 같다.
  또 하나의 못에서는 신라의 토기등잔과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출토된 
청동숟가락대에 '잉벌내 역시 내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금천현조에 보면 이곳이 잉벌노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잉벌내'는 이곳 옛 지명이며 '역지'는 사람 이름이고 '내말'은 신라 
11관등의 현령에 속한 나마의 관직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집자리에서 삼국시대 기와도 
출토되었고 잉대내란 명문기와도 많이 출토되었다. 이를 보면 이곳이 신라의 한 
치소였던 것 같다. 산상에 지하수가 솟아나서 이런 고대 성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성에 서면 서해와 용산, 남산 및 소래, 군자, 수원의 모든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라 진흥왕 때인 6세기경 신라가 한산주에 진출하면서부터 통일신라 
때까지 신라의 중요한 군사기지였다. 이를 정비하여 복원하면 관악산에 새롭고 특이한 
유적 하나가 생길 것이다.

    제2부 되살아난 영광의 백제문화

    백제사가 되살아난 석촌동 고분공원

  서울이 어찌 조선왕조의 수도로만 따져 정도 6백년 고도(옛 고, 도읍 도)인가? 
한성백제 5백년 도읍지가 서울이 아닌가. 우리 역사 속에 서울은 백제 5백년, 조선 
5백년을 합해 천년 도읍지였고 역사적으로 2천년 고도이다. 서울 강동구 석촌동 백제 
고분공원(면적 약 15,000평)에 가보면 석축단의 무덤가에 2천년 세월이 이끼 속에 
잠들어 있는데 영광의 백제사가 안개처럼 피어나고 있다.
  백제사 678년(기원전 18년 건국, 660년 멸망) 동안 서울에 493년간, 공주에 63년간, 
부여에 122년간 도읍하였다. 그런데 한성시대 백제 493년간의 역사와 문화는 
일반인들의 관심 속에서 아득히 멀어져 가고 웅진시대(공주)와 사비시대(부여)의 
백제문화만을 거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 식민사관과 무관하지 않다.
  우선 일본 아스카시대(538-645년) 문화를 중심으로 백제문화를 논하려고 하는 
일본식 문화사관이 있고, 또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기록과 우리 '삼국사기'의 
백제사 기록이 맞아떨어지는 것이 475년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는 기록부터이다. 
이보다 앞선 한성백제의 기록은 '일본서기'와 대략 120년이나 차이가 난다.
  이는 간지(천간 간, 지지 지)로만 기록되었던 역사자료를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높게 올리기만 하면 좋은 줄 알고 이주갑(둘 이, 두루 주, 첫째천간 갑)씩 올려잡아 
허위로 기록한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문화사는 아스카문화 이전을 고분시대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성백제시대가 일본문화사의 기준에 따라 고분시대로 
분류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공주와 부여를 찾아서 일본문화의 새벽을 열었던 
아스카문화의 근원지를 구경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일제시대에 
한성백제문화를 보존하고 연구하기보다는 자기 나라 아스카문화와 관련이 있는 부여의 
백제유적을 조사하고 연구하려 하였고, 부여의 부소산성에 일본신궁을 지어 정신적 
구심점을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근초고왕 21년(366)에 처음으로 일본의 사신이 백제에 
와서 철정(철의 원자재), 비단, 각궁(뿔 각, 집 궁)등 진귀한 보물들을 얻어 갔다. 
그리고 372년 왜(외국 왜)는 칠지도(일곱 칠, 가지 지, 칼 도), 칠자경(일곱 칠, 아들 자, 
거울 경) 등 귀중한 보물들을 백제 근초고왕으로부터 하사받아 갔다. 이렇게 가져간 
칼, 거울, 곡옥이 일본황실이 대대로 계승하는 삼종의 천황신기(하늘 천, 임금 황, 
신령할 신, 그릇 기)가 되었다. 지금도 칠지도는 일본 천리시 석상신궁에 신기로 
모셔져 있다. 이 칠지도에는 금으로 상감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 왕세자가 
후왕인 왜왕에게 내려준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백제의 왕세자가 제후격인 왜왕에게 
하사한 물건이라는 뜻이다.
  백제는 왜의 상국(윗 상, 나라 국)이었다. 일본에 한문을 전하는 서수(글 서, 머리 
수)가 된 왕인의 기록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아신왕이 죽자 전지왕이 왜국에서 
돌아와 왕이 되는 405년의 사실로 되어 있고, '일본고사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이 
횡도(비낄 횡, 칼 도)와 대경(큰 대, 거울 경) 등을 보내면서 '논어' 10권과 '천자문'을 
보내고 쇠를 다루는 기술자와 옷감을 짜는 오복사 서소와 술 만드는 양조기술자 
인번을 보냈다고 되어 있다. 일본에서 지금도 직물을 오복이라 하는 것은 백제 
직조기술자에게서 연유된 말이다.
  403년에는 옷 만드는 기술자 진모진이 일본에 가서 의상제작을 가르쳐 
일본봉제기술의 시조가 되었다. 일본황실을 상징하는 삼종의 천황신기도 백제에서 
가져간 것이고, 한문을 전해 주고 제철기술과 직조 및 의상 침재기술과 양조기술도 
모두 한성백제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것이다. 오늘날 일본과의 무역역조현상과 
기술이전 문제는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국토에 남아 있는 최대 최고의 적석고분
  백제 역사상 가장 강성한 왕국을 건설한 때는 근초고왕대(346-375년)이다. 이때 
비로소 전남지역의 마한이 백제영토로 들어왔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중국 동진과 외교 관계를 터 중국문물을 받아들였으며, 
고흥으로 하여금 최초로 백제의 역사책인 '서기'를 편찬토록 하였다. 이 영광의 
백제역사는 모두 한성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영광의 백제사가 이 석촌동 적석고분의 돌무덤 속에서 다시금 살아나고 
있다. 방단(네모 방, 단 단)의 적석분들은 475년 백제가 고구려군의 침공에 의하여 
웅진으로 밀려내려가기 전의 왕릉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누구의 왕릉인지 주인을 알 
수 없다. 발굴 결과 금제영락, 흑색도기, 칠기그릇, 연질토기와 동진의 중국 청자편 등 
3세기 내지 4세기에 걸치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적석분 주위에 옹관묘, 
토관묘, 목관묘들도 가득 깔려 있었다.
  제일 큰 방단인 제3호고분은 1단의 한변 길이가 50m에 이르며 2단은 40.5m에 
이르고, 지금 무너져 있는 전체높이는 약 4.2m이다. 백제 최대의 적석고분일 뿐 아니라 
중국 집안에 있는 장군총보다 더 크고 시대가 앞서며 우리 국토에 남아 있는 최대 
최고의 적석고분이다.
  이러한 기단식 적석고분을 만든 것은 고구려 민족이다. 이를 보면 백제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고구려 민족과 동일족이다.
  이러한 기단식 적석분으로 중국 길림성 집안에 그 유명한 장군총(1단 한변 30m, 
7단)과 태왕릉(1단 한변 63m, 3단)이 있으며, 태왕릉 앞에 광개토대왕의 능비가 서 
있다. 북한에는 평복 자성군 자성강 하류지역과 시중군 독로강 유역에 이러한 기단식 
적석고분이 남아 있으나 작은 것들이다.
  서울 석촌동 제4호고분은 정방형의 기단식 적석분으로 제1단은 한변이 17.2m, 너비 
2m, 높이 52cm, 제2단은 한변이 13.20m, 너비 2m, 높이 95cm, 제3단은 한변이 9.2m, 
너비 30cm, 높이 45cm이다.
  제일 윗단 위에 점토로 다진 묘곽이 있었다. 제2단에는 큰 판석을 틈틈이 기대 
세웠는데 이는 석축단이 무너지지 않게 한 시설이다. 제4호고분은 백제의 석축이 
비교적 원형대로 남아 있었다. 제5호고분은 흙으로 봉토를 쌓은 뒤 사람 머리 크기의 
강돌로 덮고 그 위에 흙을 덮을 양식이다. 이 고분은 묘곽을 발굴하지 않았다.
  1916년에 행해진 조사기록을 보면 석촌동에는 89기의 고분이 남아 있었다. 이들 
적석고분의 무너진 돌로 인하여 석촌동이란 마을이름이 지어졌다. 만일 그때의 
적석분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정말 애석하기 그지없다. 이 
고분 속에는 근초고왕의 무덤도 있었을 것이다.
  백제 왕릉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현재 백제고분로를 지하 터널로 조성하여 양분된 
고분공원을 하나의 경역으로 연결하였다. 고분지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큰 도로를 지하 
터널로 시설한 예도 세계에 없는 일이다. 석촌동 고분공원은 한성백제의 역사를 
오늘에 되살리며 서울이 천년고도임을 입증하는 기념비적 유적이다. 

    풍납동 토성과 서울

  도시 속에 남아 있는 문화유적은 그 도시를 역사의 도시, 문화의 도시, 인간의 
도시로 만드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서울 강동구 풍납동토성(사적 제11호)은 
한성백제 5백년의 도성으로 서울이 2천년 고도임을 실증하는 역사적 문화유적이다. 이 
토성의 발굴조사는 1966년 7월 서울대학교 발굴팀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그 결과 
무문토기, 조질유문토기, 김해식토기, 흑도, 신라토기 등이 출토되고 그물추, 
방추차(물레가락바퀴) 등과 낙랑식 기와쪽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토성의 성채를 
단면으로 잘라서 조사한 결과 돌을 쓰지 않고 모래와 찰흙을 판축으로 다져서 쌓은 
성채임이 밝혀졌다. 이러한 고고학적 학술연구 결과 풍납동토성은 1세기경에 축성되어 
475년 백제가 웅진성(공주)으로 천도하기까지 사용한 성으로 확인되었다.
  풍납동토성의 문화사적 실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25년 한강 대홍수로 토성의 
서북쪽 성채가 유실되어 성내 남단의 토사 중에서 삼국시대 청동초두 2개와 많은 
토기들이 출토되면서부터였다.
  청동초두는 삼족이 달리고 날씬하게 굽은 곡선의 손잡이 끝에 용이 조각된 훌륭한 
것이었다. 초두란 술이나 약을 숯불 위에 얹어 데우는 용기로서, 일반평민은 쓸 수 
없고 왕이나 귀족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이 청동초두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는 풍납동토성 내에 백제 초기부터 낙랑식 기와를 얹은 기와집이 
있었고 청동초두를 사용하는 왕이나 왕족이 살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경이로운 백제의 토목기술
  풍납동토성은 타원형의 성벽이 약 3.5km에 이르는 우리 나라 최대의 토성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북벽이 300m, 동벽이 1,500m, 남벽이 200m, 서북벽이 250m로 총 
2,250m이다. 동벽에는 4개의 성문이 조성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286)에 나오는 "고구려 침략이 두려워 아차성과 사성을 수리하였다"는 기록 속의 
사성을 풍납동토성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또 개로왕 21년(475) 기록에는 "국인을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 궁실, 
누각, 대사 등을 지었는데 모두 장려하였다. 또 유리하(한강)에서 큰 돌을 캐다가 곽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개장하고(석촌동고분군) 강(한강) 연변을 따라 둑을 쌓되 사성 
동쪽에서 시작하여 숭산 북에까지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위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백제 왕궁이 대단히 화려하였고 토성을 쌓는 데 있어서 
흙을 쪘다는 것이 특이하다. 지금 풍납동토성의 성벽은 판축 기법으로 다져 쌓은 
것인데 이 단면을 잘라보면 진흙을 층층이 다진 것 같은 단단한 층을 이루고 있는데 
살짝 구운 것 같은 견고한 구조이다. 흙을 찌는 방법으로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토목기술은 경이적이기까지 하다.
  돌을 사용하지 않고 모래와 흙으로만 다져서 더구나 한강변의 모래 언덕에 쌓은 
성벽이 1천5백여 년 넘게 견디어 오고 있는 것이다. 1994년 10월 서울 한강의 
성수대교는 20년도 못 견디고 무너졌다. 오늘의 토목기술이 자재나 기구의 발달로 
문명지수는 높지만 정신문화적지수로 보면 백제토목기술이 높았음을 우리는 
풍납동토성의 성벽구조에서 알 수 있다.
  토목기술자들은 풍납동토성의 성벽에 한 번 가보기 바란다. 풍납동토성을 거닐어 
보면 아득한 백제문화의 여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느낌이 얼마나 
소중한 문화의 꿈인가.
  풍납동토성 땅속에는 분명히 한성백제의 궁궐터와 도로와 샘터와 토기류와 기와쪽 
등 감동어린 유물들이 가득히 묻혀 있을 것 같다. 우리 나라 역사적 유적지 중에 
이처럼 중요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될 수 있는 땅이 얼마나 되겠는가. 
한성백제문화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
  풍납동토성의 사유지를 매입하여 서울의 발굴전문기관과 대학들이 정밀발굴하여 
한성백제의 문화적 실체를 규명하여야 한다. 풍납동토성 유적이 소멸되는 것은 우리 
나라 문화사 한편이 무너져 가는 것과 같다.
  그간 몽촌토성, 석촌동 백제적석고분군, 가락동고분군, 이성산성 등 한성백제지역 
유적을 발굴조사한 결과 풍납동토성의 유적을 백제시대 하남위례의 주성으로 본다. 
한성백제시대 유적 중에 풍납동토성만큼 시기적으로 오래되고 규모가 크며 궁궐의 
기와집과 왕궁의 용기 등이 발견된 곳도 없다.
  따라서 풍납동토성은 한성백제문화사를 밝혀 줄 핵심적인 유적이며 수도 서울의 
역사적 감동을 새롭게 열어줄 수 있는 사적지이다. 한 왕조가 5백여년간 한 지역에서 
도읍하면 궁성은 여러 곳에 조성되게 마련이다. 왕성의 수리나 개축 공사기간에 
옮겨갈 궁성이 있어야 하며 왕족이 불어남에 따라 여러 궁이 필요하게 된다. 
하남위례의 백제왕성은 하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울 조선왕조의 궁을 보면 알 수 
있다. 왕궁이 여러 곳에 있지 않은가. 

    올림픽공원이 된 몽촌토성

  20세기에 들어와서 서울에 조성된 가장 대표적인 역사적 기념물이라면 무엇이 될까? 
아마도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조성된 서울올림픽기념공원이 될 것 같다. 서울이 
아시아의 도시로서는 두 번째로 올림픽을 개최하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제24회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은 동서냉전의 벽을 허물어버린 인류화합의 장을 
열었던 것이다.
  올림픽공원은 체육관을 비롯하여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작품 191점이 녹지 공간에 
전시되어 있는 국제조각공원이다. 또 제24회 서울올림픽의 모든 기록을 새긴 
올림픽기념비가 조성되어 있다. 언젠가는 이 공원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영구히 보존할 
문화유산으로 관리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점차 새로운 시설들이 들어서서 
이곳의 역사적 원형을 변형시킬 것 같아서이다.
  서울올림픽공원 중심에는 백제의 도성이 남아 있는데, 몽촌토성이란 이름으로 사적 
제297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올림픽공원이 있는 지역이 옛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 지역임이 틀림없다고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다.
  백제 최강의 시대는 근초고왕 때였다. 이때가 4세기로 중국문화를 전취적으로 
받아들이고 일본문화의 새벽을 열게 하였으며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케 하는 강력한 군사력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광된 백제역사의 유적이 현재 몽촌토성과 풍납동토성 및 석촌동고분군이 
있는 강동구 지역에 남아 있다. 백제 고도유적에 20세기 서울올림픽유적이 만나서 
옛날과 오늘이 공존하는 것은 새로운 감동을 줄 수 있는 문화유산의 창조적 계승이라 
할 수 있다.
  옛 유적과 현대 기념물이 한 공간에서 대비되어 조성될 때는 옛 유적에 대한 철저한 
원형적 보존영역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래서 몽촌토성 사적지 133,630평 경내에는 
새로운 시설물을 하나도 설치하지 않고 백제 그날의 자연이 그대로 느껴지도록 
하였다. 이 복잡한 서울의 도시 속에서 솔밭 속에 갈대가 우거지고 시원한 풀밭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 몽촌토성이다. 이러한 역사를 알고 이곳을 거닐어 보면 백제 때의 
그날로 돌아간 듯 아득한 역사의 전설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몽촌토성은 남한산성에서 뻗어내린 표고 약 45m의 타원형 구릉을 이용하여 외성과 
내성으로 중첩된 성책을 마련하였다. 성책의 총 길이는 2,285m에 이른다. 성책은 
급경사진 구릉을 이용하여 흙을 다져 토성을 쌓았고 그 토성 경사면에 나무기둥을 
세워서 견고한 울타리를 설치했던 것이다. 성책 주위는 주호를 파고 물을 담아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였다.
  성문은 북문과 동문, 남문 자리가 발굴 조사로 확인되어 정비되어 있다. 몽촌토성의 
학술적 발굴조사는 서울올림픽 시설을 토성 주위에 조성할 때 실시되었다. 한양대, 
승전대, 단국대, 서울대 박물관팀이 발굴 조사에 참여하였다. 특히 서울대 발굴팀은 
3년간 성내 집자리 발굴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막연하게 백제토성이 
아니었을까 추정하였을 뿐이었다.

     새로 정립된 한성백제시대의 문화사
  몽촌토성이란 백제시대의 성 이름이 아니다. 역사적 문헌에 보면 '고려사 열전' 
조운흘조에 고원강촌에 조운흘이 살았다 하였고, '동국여지승람' 광주부조에 보면 
조운흘이 몽촌에 살았다 하였으므로 고원강촌이 곧 몽촌이다. 서거정의 '사가문집'에도 
몽춘이 보이고 '동국여지승람' 광주부산천조에 망월산이 몽촌에 있다 하였다. 기록을 
종합해 보면 조선시대 초기인 15세기경 이 백제의 성유적에 있는 마을이 몽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가 3년에 걸친 성내 유적발굴에서 확인한 것으로 
한성백제시대 문화의 한 장이 새롭게 정립되었다. 삼국시대 초기의 토기가 많이 
출토되었고 확실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중국 서전(265-316)의 회유전문도기(재 회, 
빛날 유, 돈 전, 글월 문, 질그릇 도, 그릇 기)와 중국 육조시대 도자기가 출토됨으로써 
백제가 3세기부터 중국과 많은 교류가 있었음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성내에서는 
수천 점에 이르는 백제토기와 철제칼, 낫, 도끼, 화살촉, 갑옷, 창, 기왓장이 
출토되었다.
  건물유적을 보면 한성시대 백제는 궁전이나 관아는 기와집으로 짓고 일반 민가는 
모두 초가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은 전시에는 2만명 정도의 군이 주둔할 
수 있고 평상시에는 약 1만명 정도의 상주 인구가 살 수 있는 성이었다.
  토성 성벽의 정상부를 따라서 참호처럼 판 저장혈(쌓을 저, 감출 장, 구멍 혈)이 
발견되었다. 이런 시설은 13개만이 발굴 조사되었는데 성벽 전체를 발굴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저장혈이 땅속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저장혈은 단단한 
땅이나 암반을 파고 내려가서 주머니 같은 구덩이를 형성하고 있는데, 깊이는 1m에서 
2m가 넘는 것도 있다. 저장혈 속에는 중국의 도기, 백제토기, 골제갑옷, 마구의 발걸이, 
무기류, 시루 등 다양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를 저장혈이라고 하는데 이 
저장혈은 성곽을 지키던 지하초소로 보인다. 땅속 깊이 파고 위에 초가지붕을 얹으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병사가 이 속에 들어가서 거처하면서 적을 
감시하기 좋게 되어 있다.
  토성 정상부 가까이에만 있어 이러한 저장혈을 지하참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 삼국시대 성을 발굴한 결과 이러한 저장혈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저장혈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을 하나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부여 
부소산성에서도 저장혈이 발견되어 일반 관람객이 볼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유물을 보면 5세기를 넘는 것이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한성이 무너져 475년 웅진(공주)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에는 이 성을 점령한 고구려군이 여기에 오래 머물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토기는 한 점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 신라가 진흥왕 12년(551)부터 한성지역을 점령하였는데 신라토기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신라군도 이 성에 살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신라군은 북한산성과 
이성산성, 관악산의 한우물이 있는 호암봉사성 및 현재 행주산성 등 높은 산봉우리에 
조성한 산성에 주둔하고 있었음이 그간의 발굴결과 확인되고 있다.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특이한 토기로는 원통형토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일본의 하니와(찰흙 치, 
바퀴 륜)와 흡사하다.
  몽촌토성과 풍납동토성은 약 750m 거리에 인접하여 있다. 한강 건너 현 워커힐 
산자락에는 아차산성이 있어서 북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는 기능을 하였다. 몽촌토성은 
한성백제유적 중에 가장 잘 보존된 도성이다. 여기서 발굴된 유물과 한성백제시대의 
문물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몽촌토성 내에 건립되어 있다.
  서울 올림픽기념공원과 함께 역사의 산책지로 그 뜻을 되새기면서 시간을 내어 꼭 
한 번 둘러보아야 할 곳이다.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

  감동을 주는 '백제의 미소'를 만나고 싶거든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가야산 깊은 계곡을 찾아들어 아슬한 벼랑의 바위벽에 조각된 마애삼존불을 보라. 
엄숙한 종교를 뛰어넘는 인간의 정감이 넘치는 미소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한국 불교미술사에 있어서 백제시대처럼 밝고 부드러우며 인간적인 미소의 불상을 
만든 예는 없다.
  고(연고 고) 김원룡 박사는 그의 저서 '한국미술사연구'의 총설인 '한국미의 
흐름'에서 말하였다. "가장 한국적 불상은 먼저 백제에서 만들어진다. 백제의 불상은 
처음 고구려를 따라 위불(위나라 위, 부처 불)의 전통이 그 기류였지만 바다를 통해 
중국 남조, 이어서 수, 당의 영향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백제불은 6세기 후반쯤부터 
그러한 고구려적, 중국적 구속에서 벗어나 정말 인간적인 그야말로 백제적인 불상을 
만들어 내게 된다. 백제불은 불상으로서의 종교성보다 인간적인 소탈함과 수수함 
그리고 편안함이 앞으로 나온다. 얼굴은 둥글고 편편하고 순진한 웃음을 띠고 있다. 
나는 이 특유의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고 있다."

     백제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불상들
  백제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대표적인 백제불로 다음의 것들이 있다.
  1936년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발굴된 금동보살입상(보물 제330호)은 높이가 
11.5cm에 불과하나 소년 소녀 같은 둥근 얼굴에 순진하고 밝은 미소가 가득차 있다. 
또 같은 곳에서 발굴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은 상현좌를 하고 있는데 흰 
납석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북제, 북주가 백대리석으로 불상을 만들었는데 백제도 
6세기에 이처럼 흰 납석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고구려나 신라는 백색 돌로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이 불상도 소년 소녀 같은 둥근 얼굴에 순진한 미소가 특색이다.
  1968년 서산군 가야면 보원사 절터에서 발견된 9.3cm의 금동여래입상은 6세기 
백제불로서 역시 둥근 얼굴에 순진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1959년 부여 규암면 
신리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이나 금동관음보살입상(보물 제195호) 등은 모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삼산관(석 삼, 메 산, 갓 
관)을 쓴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 제 83호)은 종교성과 인간성의 절묘한 융합으로 
어디다 비교할 수 없는 세계적 걸작이다. 여성 같은 얼굴에, 가는 허리, 잔잔한 웃음, 
생동감 넘치는 조형감각으로 사람의 마음을 정일(고요 정, 허물 일)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백제 미소를 지닌 마애불들은 서산지역에서 완성을 보게 되었으며, 마애불 
조성의 기법이 경주로 전파되어 경주 남산의 석불조각 예술이 꽃피게 된 것이다. 
서산군 태안면 백화산에는 마애삼존상(보물 제 432호)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를 시초로 
서산군 운산면의 마애삼존불의 완성을 보게 된다. 보원사 절터는 운산 마애삼존불에서 
2km 거리에 있다.
  이곳 서산 운산면 용현리 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은 1961년에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중앙에 본존여래상(2.8m)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보살상(1.7m), 왼쪽에 미륵반가사유상(1.66m)이 배치되어 있다. 사람 키보다 약간 큰 
본존불을 중심으로 사람 키만한 협시 보살들이 배치된 것이다.
  본존여래상은 복련의 연화좌 위에 서 있는데 수인은 시무외인(베풀 시, 없을 무, 
두려울 외, 도장 인)과 여원인(더불 여, 원할 원, 도장 인)을 하고, 법의는 통견의를 
입고 목에는 삼도(석 삼, 길 도)가 없으며 얼굴에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특히 
눈은 동그랗게 뜨고 있으며 머리는 소발이다. 광배는 보주형 두광을 하고 있는데 광배 
외곽에는 불꽃무늬가 새겨지고 안쪽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법의의 무늬는 U형 주름을 이루고 좌우 대칭적이며 앞가슴에 치마끝을 묶은 매듭이 
있다. 이 매듭은 북위가 493년 낙양으로 천도한 후 용문석굴을 열었는데 이때 불상의 
옷을 중국 황제의 정복인 면복의 외관을 닮도록 만들었다. 그때 면복의 치마끈인 
신(큰띠 신)을 대의(큰 대, 옷 의) 밖으로 늘어뜨리는 형태를 불상의 법의에 표현한 
것이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머리에는 연화문 두광을 하였으며 복련의 연화좌 위에 서 있다. 왼쪽의 협시보살은 
미륵반가사유상인데 머리에 관을 쓰고 얼굴에 순박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왼발은 
늘어뜨리고 오른발은 무릎 위에 얹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오른팔은 팔꿈치를 오른쪽 
무릎 위에 대고 손끝으로 턱을 받치고 있다. 상체는 나체이며 상현좌를 하고 있다. 
좌대는 복련좌이며 두광은 보주형으로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은 서기 600년경에 조성된 마애불이다. 상현좌란 좌불의 불상 앞을 치마처럼 
가리고 있는 것인데 중국의 운강석굴에서 처음 나타나서 용문석굴에서 완성을 본 
중국적인 양식이다. 누구든지 이 마애삼존산 앞에 서보면 백제미소의 불성(부처 불, 
성품 성)에 감동을 느끼게 된다. 

    무령왕릉 발굴 이야기

  1971년 7월 5일, 참으로 우연히 백제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다. 이는 한국 고분 
발굴사의 최대 거사였으며 백제 문화의 찬란한 영광이 되살아난 기념비적 성과였다.
  무령왕릉 발견에는 기이한 인연이 있었다. 당시 국립공주박물관에는 김영배 관장이 
있었다. 김 관장은 백제 문화의 주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호걸다운 기개가 있는 
분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파출소 앞에서 서슴없이 방뇨를 하고 "백제주인이 
오줌 싼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날인 7월 4일 김영배 관장이 꿈을 꾸었다.
  꿈에 김 관장은 공주박물관 뜰에서 정원수를 손질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산돼지 한 
마리가 뛰어들어 돌진해 왔다. 물리지 않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진땀을 흘리다가 
집으로 도망쳐 들어가 방안에 숨었다. 그런데 산돼지는 집까지 쫓아와서 방문을 
부수고 머리를 방안으로 쑥 들이미는 게 아닌가. 이제는 속절없이 죽었다고 생각한 김 
관장은 비명을 질렀다. 비명 소리를 듣고 옆에서 자던 식구들이 김 관장을 깨웠는데 
꿈이었다. 몸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는데 불길한 예감에 도둑이 들었나 싶어 일어나 
박물관을 순시했으나 아무 일도 없었다.
  그 이튿날 낮에 우연히 공주 송산리 고분에 가고 싶어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런데 
송산리 제6호분 뒤의 산록에서 지하수를 차단하기 위한 배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파고 
있는 배수구 바닥을 보니 생땅이 아니고 회 같은 것이 약간 부서져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공사하는 사람에게 물으니 바위가 부서진 것이라고 했다. 김 관장은 다시 그 
곳을 좀 깊이 파보게 했다. 점점 파들어가니까 검은 벽돌이 드러나 그곳이 묘실의 
입구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7월 8일 발굴이 시작되었다. 당시 김원룡 중앙박물관장과 공주박물관장이 
묘실의 입구를 막아 놓은 벽돌을 헐어 내고 구멍으로 묘실 내부를 들여다보았는데 두 
사람은 흥분과 놀라움에 환성을 질렀다. 특히 김 관장은 기절을 할 뻔했다. 묘실로 
들어가는 연도 입구에 바로 꿈에서 본 산돼지 같은 석수(돌 석, 짐승 수) 한 마리가 
버티고 서서 응시하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기이한 현몽이구나! 천오백여 년의 비밀을 간직한 채 묘실을 지켜온 석수의 
혼령이 무슨 인연으로 나에게 예시를 주었을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알 수 없는 힘에 휘몰리는 신비한 전율이 전신에 
흘렀다(김영배 관장은 고인이 되었으나 이 꿈이야기를 본인이 살아있을 때인 1978년 
11월 1일 박물관신문에 필자가 게재한 일이 있다).
  묘실(길이 4.2m, 너비 2.7m, 아치형 천장 높이 2.9m)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검은 
벽돌로 정교하게 쌓았는데 그 오랜 세월 속에 한치도 어그러짐이 없었다. 처음 
들여다보았을 때는 묘실 내에 실 같은 나무뿌리들이 거미줄처럼 바닥까지 엉키어 있어 
유물들이 잘 보이지 않았으며 안개 같은 서기(더울 서, 기운 기)가 배어나고 있었다.

     천오백 년의 신비를 드러내는 발굴현장
  발굴 당시의 유물 배치 상태를 간략히 살펴본다. 연도 입구에는 중국 청자 항아리 
두 개가 놓여 있고 작은 놋주발과 숟가락 두 벌이 있으며 그 안쪽에 돌로 만든 돼지 
같은 진묘수(중국 한나라 때부터 묘를 지키는 신의 동물로 석수를 설치하는 관습이 
있었다)가 밖을 향하여 서 있었는데 머리에는 쇠뿔이 하나 나 있었다.
  진묘수 앞에는 왕과 왕비의 매지권(지석 '기록할 지, 돌 석) 두 장이 놓여 있었으며 
지석 위에 중국 양나라 무제가 523년에 만든 오수전 한 꾸러미(약 90개)가 놓여 
있었다. 묘실 바닥은 넓은 벽돌이 정연하게 깔려 있는데 관이 놓인 관대는 21cm로 
높게 만들고 왕의 관이 동쪽에, 왕비의 관이 서쪽에 놓여 있었다. 시신의 머리는 
남쪽을 향해 있었다. 이들 목관은 반쯤 썩어 허물어져 있었는데 검은 옻칠을 하였고, 
관 표면에 손잡이 고리와 장식들이 화려하게 붙어 있었다. 목관의 머리맡에는 술병과 
술잔과 거문고(추정)가 놓여 있었고 발치에는 청동거울이 놓여 있었다.
  왕의 시신은 금제 꽃무늬 관식(금화식:쇠 금, 꽃 화, 꾸밀 식)을 한 왕관을 쓰고 
금판 장식이 붙은 목제 베개를 베고 있었다. 귀에는 귀고리를, 목에는 목걸이를 하고, 
허리에는 은제 과대에 금은 장식의 요패(허리 요, 찰 패)를 하고, 발에는 금동신을 
신고 왼손에 큰칼을 잡고 반듯이 누웠던 상태였다(시신은 썩어 뼈 한쪽도 남아 있지 
않았으나 유물의 발견 상태로 추정하였다).
  왕비의 시신은 금제 꽃무늬 관식이 붙은 왕비관을 쓰고, 연꽃, 어룡(고기 어, 용 용), 
봉황 등을 그린 화려한 목제 베개를 베고 있었다. 귀에 귀고리, 목에 목걸이를 하고, 
팔에 금은제의 팔찌를 끼고, 허리에 작은 장도를 차고 발에 금동신을 신고 반듯이 
누워 있었던 상태였다(시신은 뼈까지 모두 썩어 없었으나 30대 여인의 이빨 하나가 
나왔다). 묘실 내의 동벽에 2개, 서벽에 2개, 북벽에 1개의 보주형 등감이 있었는데, 그 
속에 중국 백자 등잔이 놓여 있었다. 기름을 부어 불을 켰던 것으로 등잔의 기름 
심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묘실 벽에 쇠못이 박혀 있는데 여기에는 
사신도(넉 사, 신령할 신, 그림 도) 같은 것을 그린 장막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묘실의 축조 방법은 벽돌 4장을 눕혀서 쌓고 한 장은 세워서 나란히 쌓은 방법을 
반복한 것으로 대단히 뛰어난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다. 벽돌로 축조한 묘(전축분 
:벽돌 전, 쌓을 축, 봉분 분)는 중국 남조의 묘제인데 무령왕릉과 아주 비슷한 것으로 
중국 남경, 부귀산의 동진시대 전축분이 있다.
  무령왕릉 입구를 막았던 벽돌에 '임진년작'이란 글이 새겨 있어 무령왕 12년(512) 
임진년에 만들었음도 알 수 있다. 무령왕이 523년에 죽었으므로 왕이 살아 있을 때 
이미 왕릉은 축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예는 중국에도 많다.

     고분발굴사의 최대성과, 매지권 두 장
  무령왕릉 발굴이 한국 고분 발굴사의 최대 성과였던 것은 매지권이란 지석 두 장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왕의 지석(기록할 지, 돌 석)
  세로 35cm, 가로 41.5cm, 두께 5cm의 섬록암에 6행 52자의 한문이 새겨져 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년 육십이세 계묘년 오월 병술삭
  칠일 임진붕도 을사년 팔월 계유삭
  십이일 갑신안착 등관 대묘 입지여좌

  이를 풀어보면 '영동 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가 되는 계묘년(523) 5월 7일에 
돌아가시니 을사년(525) 8월 12일에 대묘에 안장하고 다음과 같이 증서를 
작성한다.'이다.
  여기서 영동 대장군이란 양나라 고조에게서 받은 외교적인 칭호이다. 사마왕이란 
무령왕의 이름이며 '무령왕'이란 왕이 죽은 후에 칭한 시호이므로 지석에는 쓰지 
않았다(모든 왕명은 왕이 죽은 후에 붙인다). 왕의 죽음을 붕(무너질 붕)이라 표현한 
것은 중국 황제의 죽음과 같은 격으로 쓴 것인데, 제후나 왕의 죽음은 훙(죽을 훙)이라 
쓴다.
  백제는 왕릉을 대묘(큰 대, 무덤 묘)라 표현하고 있다. 이 지석에서 백제의 
장례제도를 알 수 있다. 무령왕이 523년 5월 7일에 죽었는데 대묘에 장사지낸 것은 
525년 8월 12일이다. 이 기간은 빈소 같은 곳에 시신을 모셔두기 때문에 뼈까지 모두 
썩어 버리게 된다.

  왕비의 지석
  세로 35cm, 가로 41.5cm, 두께 4.7cm로 전면에 4행 41자가 새겨져 있고 후면에 6행 
58자가 세겨져 있다.

  전면
  병오년 십이월 백제국 왕대비
  수종 거상유지 기유년 이월 계미삭
  십이일 갑오 개장환 대묘 입지여좌

  후면
  전 일만문우 일건 을사년 팔월 십이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이전 건전송
  토왕 토백 토부모 상하 중관 이천석
  매신지 위묘 고립권 위명 부종율령

  왕비 지석 전면을 풀어 쓰면,
  '병오년(526) 12월 백제국의 왕대비가 천명대로 살다가 죽어 서쪽 땅에서 삼년상을 
지내고 기유년(529) 2월 12일 다시 옮겨 대묘에 장사지내면서 다음과 같이 증서를 
작성한다.' 왕과 왕비의 지석 끝에 '입지여좌'(좌와 같이 증서로 작성한다)라 표현한 
것은 모두 왕비 지석 후면의 글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왕비 지석 후면을 풀어 쓰면,
  '돈 일만문우 일건, 을사년(525) 8월 12일 영동 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와 상하 지방관의 지신(땅 지, 신령할 신)들에게 보고하고 
서서남(신지)의 토지를 매입하여 무덤을 쓴다. 이를 위하여 증서를 작성 증명하며 모든 
율령에 구속되지 않는다.'
  여기서 '돈 일만문우 일건'이란 지석 위에 놓여 있던 오수전 한 꾸러미를 말하고 
토왕, 토백, 토부모, 상하 중관 이천석은 지하에 있는 신들도 왕과 제후 및 지방 
관리의 조직으로 생각하여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 지석에서 서서남(신지)의 땅을 지신에게서 산다 한 것은 백제 왕궁을 중심으로 
묘지 자리를 말한 것이므로 당시 왕궁은 무령왕릉에서 동동북(인지)의 방향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왕궁은 공주 공산성 내에 있어야 지석의 기록과 맞게 된다. 이 지석의 
글씨는 중국 육조의 해서체로서 원숙한 필력이며 문장도 정연하다. 백제는 중국과 
꼭같은 한문을 사용하였으며 신라처럼 이두문을 쓰지 않았다. 또 하나의 유물인 
왕비의 팔찌는 용 두 마리가 머리를 반대로 서리고 있는 조각인데 안쪽에 '경자년 
이월 다리작 대부인분 이백주 주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다. 풀어 쓰면 '경자년(520) 
2월에 다리가 대부인용으로 만들었는데 무게가 230주이 이다'란 내용이다. 주이란 
무게단위는 알 수 없고 다리란 금속공예 작가가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작가의 
이름을 왕비 팔찌에 새길 만큼 당당한 지위를 인정했던 것이다. 왕비를 대부인이라 
칭한 것은 신라와 같다.
  이처럼 무령왕릉의 유물에서 기록이 나온 것은 삼국시대 고분출토 유물의 
발달과정을 상고하는 데 확실한 연대의 기준을 얻게 된 성과이며, 기록의 발견은 곧 
역사의 소생을 입증하는바 당시의 확실한 문화적 상황을 알게 한다.
  백제는 중국의 선진문화를 외교적으로 직수입하는 진취적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선진문화를 신라나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라는 
보수적이고 자주성이 강해서 선진문화의 수입이 늦었다. 그래서 신라의 고분에서는 
지석이 없고 묘제도 건축 기술상 적석 목곽분이란 원시적 수준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한문도 이두문을 써서 중국 사람은 읽을 수 없었다(그런 면에서 신라는 자주적 
창조성이 높았다).
  무령왕(501-522)은 동성왕의 아들로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길 때 
14세였으며 왕위에 즉위할 때 40세로서 백제사의 험난한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백제를 강국으로 만들어 그 아들 성왕대에는 백제문화사의 황금 시대를 열게 한 
중흥의 왕이다.
  30대의 왕비 이빨은 진정 성왕의 어머니 것이었을까? 이들 유물은 모두 
공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백제문화의 웅장미와 익산 미륵사지

  백제문화라 하면 부드럽고 조화로우며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말들을 한다. 그렇게 
보면 백제문화는 웅장하지도 않고 역동적인 힘도 없는 문화라는 말도 된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익산 미륵사 절터를 한 번 가보기 바란다. 익산 미륵사 
절터는 전북 익산군 금마면 용화산의 남록(남녁 남, 산기슭 록)에 자리잡은 대담한 
구상 아래 웅장한 경륜이 전개되어 있는 우리 나라 최대의 사찰지이다.
  또한 위대한 구상을 현실에 조영할 줄 아는 행정가와 기술자와 예술가가 있었다. 한 
시대를 여는 지도자가 아무리 좋은 구상과 강력한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 꿈을 
현실로 실현할 수 있는 인재가 있어야 하고 그를 따르는 학문과 기술, 예술적 
뒷받침이 없이는 허황한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익산 미륵사 절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감동은 한 시대의 지도역량과 사상과 
기술과 예술의 웅대한 융합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굴 조사 결과 이 절터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못을 메운 습지 위에 조영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가람의 규모는 
동서 172m, 남북 148m에 이르는 광대한 절이었다.
  절터를 조성한 토목기술이 경이롭다. 어느 건물터 하나 침하된 곳이 없이 평면으로 
잘 다져졌다. 천재적 토목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석탑의 판축 기법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원래 9층탑인데, 석탑의 평면은 한 변의 길이가 10m인 정방형 터 
위에 서 있다. 이 화강암 석탑의 무게를 계산해 보면 2,577톤에 이른다. 그러면 
탑자리는 1제급미터당 26톤 이상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지내력이 있어야 한다. 
석탑자리가 1cm의 부등침하라도 일어나면 탑의 석재는 불균형의 무게로 인하여 
일시에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백제의 토목기술을 자갈과 돌과 흙을 다녀서 100제곱미터의 땅 위에 
2,577톤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지내력을 조성했다. 만일 오늘날 발달된 토목기술로 
못을 메워 흙과 자갈만을 다져서 이 탑자리를 조성케 한다면 자신 있게 감당할 
기술자가 있겠는가? 실로 쉽지 않을 것이다. 백제에는 천재적 토목기술자들이 있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 조영기술이다. 이 탑의 조성연대는 7세기 
초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 무왕조에 나타나는 미륵사 창건설화가 흥미롭다. 백제 무왕은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사랑을 하여 용화수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다. 부인이 이곳에 절을 세우도록 
소원하므로 무왕이 허락하여 미륵사가 창건되었다.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미륵삼존과 불전, 탑, 회랑을 각각 세 곳에 세워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신라 
진평왕은 백공(일백 백, 장인 공)을 보내어 이 절의 창건을 도왔다 한다.
  발굴 결과 3탑 3금당이 각각의 회랑 속에 있는 동서병렬식의 특이한 가람 배치를 
하고 있었다. 중앙불전 앞의 탑은 목탑이고 동과 서의 불전 앞에는 석탑이 서 
있었으며 현재 서석탑만 반파되어 6층으로 남아 있다. 1992년에 동석탑을 복원하였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백제의 독창적인 것이다. 이 석탑의 건축과 조각예술에 대하여 
알아본다.

     건축과 조각의 조화, 미륵사지 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은 가구식(시렁 가, 지을 구, 법 식) 목조건물을 
보고 석재를 사용해 조적식(짤 조, 쌓을 적, 법 식) 구조로 다듬어 쌓은 석탑이다. 이탑 
이전에 목조건축을 석조건축으로 이렇듯 조화롭게 조형한 것은 없었다. 석탑을 최초로 
설계한 천재적인 건축가는 누구였을까? 탑의 규모도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크다. 9층의 
석탑을 층층이 알맞게 체감하여 전체 높이가 26.44m에 이른다. 탑 전체 석재의 체적이 
968세제곱미터이며 무게는 2,577톤에 이른다.
  그간 탑 복원을 위한 연구가 있었고 컴퓨터 영상으로 복원설계도 했다. 그리하여 
석재의 축조 순서까지 알아내게 되었다. 첨단과학의 기술을 동원하여 보니 더욱 
경이로운 건축기술에 놀라게 되었다.
  당시 석재가공은 오늘날과는 달랐다. 폭약을 써서 화강암을 깨는 채석장도 없고 
기계를 설치하여 돌톱으로 잘라내는 석재가공법도 없는 때였다. 밭둑이나 산자락에 
있는 큰 자연바위를 정으로 떼어 풍화된 겉돌은 버리고 단단한 속돌만을 인력으로 
운반하여 거대한 석탑 2개를 조성하였다. 탑을 쌓을 때도 밑에서 위층으로 석재를 
끌어올리기 위해 흙무더기 산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탑을 조성하는 데 
수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기술적 측면 외에 석탑의 조형 또한 아름답다. 1층 탑신은 3칸 정방형으로 중앙칸에 
문이 있고 기둥돌, 별체돌, 지붕돌, 지붕받침돌들이 꼭 목조건축물처럼 하나하나의 
부재로 구성되어 있다. 2층부터는 간결한 구조체로 정리하였는데 층층이 올라갈수록 
작아지게 만든 체감비례가 조화롭다.
  지붕들은 살짝 추녀 끝을 들게 만들고 얇게 다듬어 육중한 석탑체가 경쾌한 
아름다움을 뿜도록 만들었다. 석탑 추녀 끝에는 풍경이 달려 있었다. 석탑의 조영미는 
석재를 눕히거나 세우는 방법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하고 석재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여 햇빛이나 달빛 속에 음영의 다양한 입체감을 내게 만들었다.
  간결함 속에 변화를 주고 웅장함 속에 경쾌함을 보태서 조형의 아름다움을 
천재적으로 창출하였다. 탑 기단부에 돌사자를 배치하여 건축과 조각의 조화적 구상을 
엿보게 한다. 미륵사 앞에는 두 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강당 뒤에는 목교를 
설치하고 사시사철 아름다운 화목(꽃 화, 나무 목)이 심어져 있다.
  우리는 미륵사 절터에서 이와 같이 경이로운 백제건축과 조원기술과 조각예술을 
만나게 된다. 

    백제문화의 상징 정림사지

  부여는 백제 사비시대의 수도이다. 백제 성왕이 538년 협소한 웅진성에서 나와 
이곳으로 왕도를 옮겨 부여는 123년간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부여 왕도는 동양문화의 중심지로서 자못 화려하고 장엄한 도시였다. 당시 부여 
왕도는 동양문화의 중심지로서 자못 화려하고 장엄한 도시였다. 부여 왕도 건설에는 
중국 양나라 예술가와 기술자들까지 동원되었다. 이는 '삼국사기'와 중국 '양사'의 
기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1980년 정림사지 발굴에서 중국 도용(질그릇 도, 허수아비 
용)들이 발견되어 '사기'의 기록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당시 부여는 동양의 문화적 국제도시였다. 이처럼 찬란한 문화가 일본 
아스카문화(비조문화)의 새벽을 열게 하였고 신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의자왕의 실정으로 660년 7월 13일 이 찬란한 고대 왕도 부여가 나당군에 
의하여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그 속에서 오늘까지 남아 백제 수도임을 입증하고 
서 있는 상징적 건축물이 정림사 터에 서 있는 5층석탑(국보 제9호)이다.
  부여의 지형은 북에 표고 106m의 부소산을 등지고 북서 남으로 백마강을 활처럼 
에워싸고 흐르며 동으로 금성산, 청마산 등이 있어 천연의 요새이다. 정림사는 이 부여 
왕도의 가장 중심에 있는 절이다. 백제 때는 분명히 왕궁 앞에 있던 왕실의 
대찰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백제가 부여로 왕도를 옮기는 계획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시작되고, 성왕 초기부터 왕도건설에 착수해서 538년(성왕16) 봄에는 왕궁이 완성되고 
모든 시설이 완비되었기에 중앙 조직이 부여로 옮겨갔을 것이다. 이때 정림사도 
건설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는 백제시대의 절 이름이 아니다. 1917년 절터에서 '대평팔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큰 대, 평할 평, 여덟 팔, 해 년, 천간 무, 별 진, 정할 정, 수풀 림, 절 사, 큰 
대, 감출 장, 마땅 당, 풀 초)'란 명문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정림사로 이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림사는 백제 사기에 나오지 않는 절 이름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부여 왕도의 가까운 절은 천왕사, 도양사, 왕흥사, 호암사, 백석사 등인데 
고유섭 선생은 정림사를 백제 백석사로 추정하기도 했다.
  충남대박물관과 부여박물관 합동으로 1980년에 정림사지, 1984년에 정림사 앞 연지 
발굴이 있었다. 그 결과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밝혀졌다. 정림사지에는 국보로 지정된 
백제 5층석탑이 남아 있고 강당지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 석불이 남아 있다.
  이 절의 건물터와 가람 배치를 보면 중문은 길이 11.3m, 너비 5.4m로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이었다. 중문터에서 북으로 탑 중심부까지의 거리는 19.98m이다. 
금당지(쇠 금, 집 당, 터 지)는 석탑 중심부에서 북으로 26.27m거리에 있으며 길이 
18.75m, 너비 13.8m로 정면 7칸, 측면 5칸 집이다. 강당은 금당 중심에서 북쪽으로 
31.7m 거리에 있는데 길이 24.6m, 너비 10.70m로 정면 7칸, 측면 3칸 집이다. 
회랑지(돌이킬 회, 월랑 랑, 터 지)는 절터의 남북 중심선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23.10m지점을 통과하고 있는데 동쪽과 서쪽의 회랑 규모는 각각 길이 83.5m, 너비 
5.2m가 되었다. 이 정림사지의 가람배치는 일탑일금당식(한 일, 탑 탑, 한 일, 쇠 금, 
집 당, 법 식) 사찰로서 중심건물은 남에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일직선상에 세워졌으며 주위를 회랑으로 둘러쌌다.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은 발굴조사 결과 창건 당시부터 현위치에 
건립되었음이 지하유구 조사 결과 확인되고 있어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이 더 선행되는 
탑이라 생각했던 종전의 학설에 대해 재고의 여지를 남기게 되었다. 물론 탑의 구조를 
보면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이 목조구조의 원형을 더 모방하고 있으며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좀 더 발달된 정제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림사의 창건은 왕궁 바로 앞에 있어 사비성으로 천도한 538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때에 이룩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익산 미륵사의 창건은 600년대로 보고 
있는 실정에서 60여 년간의 간격이 있다. 이 문제는 후일 학술적 검토를 필요로 한다.
  정림사지5층석탑(높이 8.33m)에는 660년 7월 13일 백제 왕도가 함락되고 660년 8월 
15일 당장(당나라 당, 장수 장) 소정방이 '대당평백제국비명'의 전자와 탑신 4면에 
117행의 전공을 새겨놓고 있어 백제 당대에 있었던 석탑임이 확실하고 그 탑이 원래 
목탑에서 후에 석탑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석탑으로 조성된 것이라면 
6세기 석탑이 되어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최초의 석탑이 되는 것이다.

     중국식 도용은 우리 국토에서 처음 발견된 것
  이 백제탑은 한국문화사에 있어서 지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첫째, 삼국시대 석탑 중에 완전한 모습으로 오늘까지 남아 있는 것은 
정림사지5층석탑 하나밖에 없다.
  둘째, 익산 미륵사지석탑이 목조건축의 모방에 충실했다면 정림사지5층석탑은 석탑 
구조로 간결하게 정제한 창조성을 보여주는 시원적(비로소 시, 근원 원, 밝을 적) 
석탑이다.
  셋째, 백제인의 기발한 건축 설계와 디자인 기술을 보여주는 조형미가 뛰어나다. 
탑신의 층별 줄임에 있어서 일정한 비례를 적용하여 균형미를 형성하고 건축 구조적 
안정성을 유지시킨 절묘한 조화성을 보여주고 있다.
  넷째, 석조조각예술의 우수성이다. 석조물이 가지는 둔중함을 없애기 위하여 넓고 
얇은 지붕돌의 휘어올린 경쾌한 추녀선과 화강암이 가지는 흰 색깔의 평면성을 
고려하여 길게 빠진 지붕돌이 던지는 음영효과로 조화로운 입체감을 조성하였다.
  다섯째, 우리 나라 석탑 미술에 있어서 백제 석탑계의 조형요소를 형성시킨 본보기 
탑이다.
  만약 이 석탑의 여러 조형적 조화성과 구조적 안정성을 면밀히 연구하여 현대건축의 
한국적 특성을 창출할 수는 없는가. 그냥 옛 탑 하나라고 무심히 지나쳐 버리거나 
아니면 국보급의 백제탑이라고 지나치게 상징화하여 불가침의 영역에 두고 보는 일은 
우리 문화의 창조적 계승이 되지 못한다. 고정관념을 깨고 다시 한번 이 탑을 
쳐다보는 눈이 필요하다.
  정림사지5층석탑은 당시의 목조건물처럼 한단의 기단을 가졌다. 1층 탑신에는 네 
기둥을 세우고 한 칸짜리 집을 상징하였다. 기둥은 당시 목조건물이 엔타시스양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건물의 벽면은 판석을 세워서 짰다.
  1층은 석탑의 안정감을 주기 위해 탑신을 넓고 높게 만들었다. 2층 탑신부터는 폭과 
높이가 일정 비례로 위로 올라가면서 차례줄임을 하였다. 2층과 3층 탑신은 4개의 
돌로, 4층은 2개의 돌로, 5층은 하나의 돌로 탑신을 구성하여 간결하게 정체성을 
창출하였다.
  2층 이상 탑신 밑에 탑신을 받치는 괴임돌을 두드러지게 설치한 것은 목조탑의 
난간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탑신의 윗면에 가로 지른 돌을 설치하여 
목조건물의 창방 같은 부재감각을 냈다. 지붕돌을 받치고 있는 돌은 목조건축의 
포작을 상징하여 비스듬히 깎아서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탑 정상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는데 원래 상륜부에는 원형의 연화문을 새긴 
돌로 만든 보륜이 찰루에 끼여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근년에 정림사 절터에서 석조 
보륜이 발견되었다.
  지붕돌 추녀 끝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바람이 불면 댕그렁거리는 풍탁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1층 탑신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큰 대, 당나라 당, 평할 평, 일백 백, 
건늘 제, 나라 국, 비석 비, 새길 명)'이 새겨 있고 끝에, 
'현경오년세재경신팔월기사삭십오일계미건낙주하남권회소서(나타날 현, 경사 경, 다섯 
오, 해 년, 햇 세, 있을 재, 길 경, 납 신, 여덟 팔, 달 월, 몸 기, 뱀 사, 북방 삭, 열 십, 
다섯 오, 날 일, 열째천간 계, 아닐 미, 세울 건, 물 낙, 고을 주, 물 하, 남쪽 남, 권세 
권, 품을 회, 휠 소, 글 서)'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현경 5년은 660년에 
해당한다. 즉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고 660년 8월 15일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정림사는 660년 사비성이 함몰되는 날 불탄 것 같고 고려 대평 8년(1028)에 재건된 
것으로 보인다. 1980년 회랑 서남 모퉁이에서 출토된 중국식의 도용 63점은 우리 
국토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유물이며 1965년 중국 낙양 북위 원소묘 출토 도용과 아주 
같다.
  그리고 소상(인형 소, 형상 상)의 소형불두(적을 소, 형태 형, 부처 불, 머리 두)들과 
남석제 삼존불, 토기벼루 등이 출토되었다. 백제 연화문 기와는 단판 8엽 연화문 
와당과 치미 서까래 기와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정림사 중문 중심에서 남쪽으로 
24m거리에 남문터로 추정되는 석축기단 일부가 발견되고 기단 정면에 한 장의 
판석(길이 1.5m, 너비 48cm)으로 된 돌다리 같은 것이 경사지게 놓여 있다. 지표에서 
4m 깊이를 파고 내려가니 남으로 4.2m전방에 두 개 연못이 동서로 나타났다. 동쪽 
연못은 동서 길이 15.3m, 남북너비 11m이며 연못의 북안(북녁 북, 언덕 안)과 
서안(서녁 서, 언덕 안)에 호안석축(30-40cm정도의 돌로 상하 2단으로 쌓았다)이 있고 
동안(동녁 동, 언덕 안)과 남안(남녁 남, 언덕 안)은 석축이 없었다. 석축 높이는 50cm 
미만이었다.
  특이한 것은 동북모퉁이 바닥에 직경 10cm 내외의 나무말뚝을 연못의 북안을 따라 
좁은 간격으로 열을 지어 박았는데 이는 석축보다 앞서 만든 호안시설 같다고 
보고되고 있다. 연못에는 연꽃을 심었던 모양으로 연꽃줄기와 연잎이 탄화된 대로 
남아 있었다. 연못물 깊이는 50cm 정도였으며 동안의 남단 가까운 지점에 집수(모을 
집, 물 수)를 위한 작은 유입구가 발견되었다. 못바닥에서는 백제시대 유물만이 
출토되었다.
  서쪽 연지는 동서 길이 11.2m, 남북 너비 11m로 거의 정방형인데 호안석축은 
북안과 서안에만 설치되었고, 동안과 남안은 땅을 파서 윤곽만 만들었다. 역시 
물깊이는 50cm 내외였다. 못바닥에서 출토된 기와나 토기들도 모두 백제유물이며 
연꽃을 심었던 것을 확인했다. 동서 두 연못 사이로 중앙통로가 있는데 너비가 
2.1m였다. 이 통로가 정림사 가람의 남북 중앙축과 일직선은 아니며 통로 북쪽 끝은 
중앙축에서 서쪽으로 1.9m, 통로 남쪽 끝은 서쪽으로 3m 벗어나 있었다.
  이를 보면 정림사도 연지보다 4m정도 높은 언덕 위에 장엄하게 서 있었던 것이며 
절로 들어가려면 방형 연지 사잇길을 통하여 계단을 올라 돌다리를 지나 남문과 
중문을 통하여 절 경내로 들어갔을 것이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궁원의 
조성기록이 보이는데 백제 사찰의 사원도 아름답게 조성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무를 
박아서 연못 호안을 만드는 방식이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바 이런 방법이 백제에도 
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일본서기' 612년 백제인 노자공이 황남 남정에 수미산과 오교를 설치해 일본 조원의 
창시자가 된 기록이 보인다. 일본 아스카시대 사찰인 사천왕사(오사카에 있다)는 593년 
백제인이 건립해 준 절인데 부여 정림사와 꼭같은 가람배치인 일탑일금당식 가람을 
하고 있다. 이로써 정림사는 일본사찰 건축과 조원기술 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동양 최고의 걸작 백제금동향로

  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에서 백제시대 절터로 발굴조사되었다. 절터의 
공방자리에서는 세상을 놀라게 한 금동용봉봉래산향로(쇠 금, 구리 동, 용 용, 새 봉, 
더부룩할 봉, 쑥 래, 메 산, 향기 향, 화로 로)가 발견되었다.
  절터에서 출토된 유물은 향로 외에 반경이 60cm나 되는 불상의 금동광배조각과 
유리구슬, 칠기편, 토기편들도 있다. 공방은 불을 지피던 자리와 구들의 고래같이 
만들어 연기가 돌아 빠져나가게 한 배연구가 있는데 배연구 옆 구덩이 속에서 
금동향로가 발견된 것이다.
  구덩이를 타원형으로 파고 얇은 판석을 외곽으로 두르고 그 속에 금동향로를 묻고 
덮개를 덮고 흙으로 묻었던 것이다. 왜 이 진귀한 향로를 공방의 땅바닥에 묻었을까? 
깊은 의문이 앞선다.
  아마도 660년 7월 백제왕도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던 날 어느 백제의 장인이 
적에게 귀중한 금동향로를 탈취당할까 보아 공방 바닥을 파고 급히 묻은 것은 아닌지. 
그렇지 않고서야 공방의 땅 속에 저렇듯 걸작의 금동향로를 파묻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 절터는 백제왕도를 둘러싸고 있는 나성의 동문 밖에 있으며 동쪽에 인접하여 
백제왕릉들이 있다.
  향로란 인도나 중국 등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종교의식이나, 구도자의 수양정진이나, 
냄새를 없애기 위해 향을 피우던 도구이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부터 한대에 
이르기까지 선산형(신선 선, 메 산, 형상 형)의 박산향로(넓을 박, 메 산, 향기 향,
화로 로)가 많이 만들어졌다. 박산향로는 삼신산(석 삼, 신령할 신, 메 산)을 상징한 도교의 
신선사상에 의한 조형이다. 박산은 동해 속에 있어 불로장생의 선약(신선 선, 약 약)이 
난다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의 산신산을 상징한 것이다. 이러한 박산향로는 
중국에서 많이 만들어졌으나 우리 나라에서도 불교가 전래된 후에는 불교의식 등에 
사용되었다. 백제금동향로는 이때까지 발견된 중국향로보다 월등한 솜씨로 만들어진 
동양 최대의 걸작품이다.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높이가 64cm, 무게가 11.8kg이나 되는 대형 향로이다. 
개인이 사사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국가가 최고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만든 것이다.
  금동향로의 형태를 살펴본다.
  향로받침은 머리를 들고 수중에서 솟구쳐 오르는 용이 뒷발로는 몸을 차고 앞발로는 
공중을 할퀴며 비천하는 형상으로 조형되었는데 강인한 힘을 표현한 역동적인 
모습이다. 징그러운 용의 비늘이나 용머리의 무서움을 나타내지 않고 흡사 새가 
비상하는 것 같은 유연한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향로의 조각적 공예솜씨는 받침의 용 조각이 압권이다. 용은 입으로 반쯤 핀 연꽃을 
물고 수직으로 서 있다. 이 부분이 향로의 몸통이다. 향로의 연꽃 몸통은 만물이 
탄생한다는 정토의 연화화생관(연밥 연, 꽃 화, 될 화, 날 생, 볼 관)을 상징하고 있다.

     삼신상을 상징하는 도교의 신선사상을 조형화한 향로
  연꽃잎 사이에는 인물상과 수중동물로 보이는 26마리의 동물상들이 있다. 이 연화형 
향로 몸통 위에는 불꽃처럼 타는 첩첩 선산(신선 선, 메 산)이 조형된 향로 뚜껑이 
있다. 향로 뚜껑에는 수십 개의 산봉우리와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5인의 악사(풍류 악, 선비 사)를 포함한 10인의 인물상이 표현되었다. 향로 
뚜껑 정상부에는 봉황 한 마리가 날고 있고 그 밑에 5마리의 원앙이 봉황을 바라보고 
있으며 5인의 악사가 현악기와 관악기와 타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봉황은 봉래산에 살고 있는 성서로운 새로 천하가 태평할 때에만 나타난다고 하는 
상징적 새이다. 향로 뚜껑에는 향불을 피웠을 때 연기가 피어오르는 구멍들이 
선산(신선 선, 메 산)의 봉우리 사이에 뚫려 있으며 봉황의 앞가슴에도 큰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이 향로에 향불을 피우게 되면 첩첩선산의 골짜기에서 운무 같은 연기가 피어나서 
선산은 아득한 형상이 될 것이다. 향로에 용을 대좌로 표현한 것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이며 향로 몸통을 연꽃으로 표현한 것은 중국 남북조시대인 520년경부터이다.
  이 금동향로는 신선사상과 불교사상이 융합된 향로로 7세기 작품이다. 
백제금동향로는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이 중국을 뛰어넘었던 사실을 입증한다. 그리고 
백제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명분 사리감 발견은 무령왕릉 매지권 발견에 비견
  백제시대 절터는 국립부여박물관이 3년에 걸쳐 발굴하였다. 1995년 10월에는 목탑지 
중심에서 명문이 새겨진 사리감이 발견되었다. 이 사리감에는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에 누이동생 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백제 창왕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을 말하며 위덕왕의 여동생이 사리를 공양한 것이다. 이 능산리 
절이 백제 왕릉에 딸렸던 원찰로 보인다.
  그렇다면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능산리에 왕릉이 
있었다면 성왕의 능 또한 그 왕비의 능 이외에는 없었으므로 이곳이 성왕의 
원찰이었는지 모르겠다. '일본서기'에 보면 위덕왕은 부왕을 위하여 출가 수도하려 
하다가 신하들과 백성들이 말려서 왕위를 계승했다 한다.
  창왕 13년인 정해년은 서기 567년이 되는데 이 절의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백제 무령왕릉 매지권 발견에 비견되는 명문자료이다.

    제3부 영원한 안식이 머무는 산사의 문화유산

    남한강과 여주 신륵사

  여주는 시원한 경승지다. 월악산에서 시작한 강물이 달천이 되고 오대산에서 
흘러내린 강물이 섬수가 되어 한강으로 합하여 흐르는 여강가에 자리잡고 있다. 
첩첩이 둘러싼 산맥과 시원한 들녘이 펼쳐 있어 예부터 살기 좋은 곳이었다. 지금도 
여주 이천 쌀은 유명하며, 여주 여강에서 잡은 쏘가리탕은 별미 중에 별미다.
  여주의 옛 이름은 고구려 때는 골내근이며 고려 때는 여강, 조선에 와서 여주라 
하였다. 조선왕조 때는 세종의 영릉(꽃뿌리 영, 능 릉)과 효종의 영릉(평안 영,
능 릉)이 이곳에 있어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여주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옛 글들은 
너무 많다. 그 중에서 몇 구절의 시를 옮겨본다. 고려의 이곡은 여강(여주)을 이렇게 
노래했다.

  만일 이 경치를 붓끝으로 표현한다면
  글은 소동파, 황산곡이어야 하고
  글씨는 안진경이어야 하겠다.

  또 고려의 이색은 이렇게 썼다.

  천지는 끝이 없으나 인생은 끝이 있다
  호연히 돌아갈 곳은 어디냐
  여강 한 굽이에 산이 그림 같으니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 같구나.

  조선의 서거정은 이렇게 썼다.

  인생은 백 년 동안인데 이 백 년도 다 채우지 못한다
  더욱이 티끌의 그물 속에 얽혀 있으니
  어찌 청한(맑을 청, 한가할 한)하게 살 수 있으랴.
  저 강물을 바라보니 물이 맑아 갓끈을 씻을 만하구나.
  내 세속에 영합된 취미 없어 시세의 차고 더움을 따르지 못하네.
  늙었도다, 벼슬을 버리고 가서 소나무와 짝하리라.

  여주는 이와 같이 시인 묵객이 한가로이 풍류를 즐기는 이상향이기도 했다.
  여주 신륵사는 여주 읍내에서 여강 다리를 건너 시원한 강가에 자리잡은 명찰이다. 
북내면 청송리 봉미산 자락에 있다. 절 앞에는 물고기가 뛰고 물새가 날며 어선이 
한가롭다.

     세종대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정확하지 않다. 
신륵사라는 절 이름은 미륵에서 연유하였다는 설도 있고, 고려시대 왕사 나옹스님이 
날뛰는 용마를 신력으로 제압하여 유순하게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연유하였다 하기도 
한다.
  신륵사가 대찰이 된 것은 나옹스님이 이 절에서 돌아가시자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며, 수많은 사리가 나오고 용이 나타나 
호상(보호할 호, 죽을 상)을 하는 등 이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1376년 8월 
15일 절의 북쪽에 나옹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고 대대적인 중창사업이 
이루어졌다. 이때 나옹스님의 영정을 모시는 선각진당과 불전 등이 건립되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을 봉안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경기도 광주 대모산에 있던 세종대왕의 영릉(뛰어날 영. 능 릉)이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 아니라는 이론에 따라 1469년 현 여주의 영릉 자리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신륵사는 세종대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지정되었다. 그리하여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의 중창공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에 이르는 
대찰이 이루어졌다.
  1473년 대왕대비는 세종대왕의 원찰로 지정된 신륵사를 보은사라 이름을 고쳤다. 
그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신륵사는 1671년에 복구되었다. 1858년(철종 9) 순원왕후는 
왕실의 내탕금을 절에 보내어 불전을 수리하기도 했다. 지금 이 절에는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조사당, 명부전, 심검당, 정묵당, 노전, 칠성각, 종각, 구룡루등이 있다. 
신륵사에는 우리 나라 문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화 유산들이 간직되어 
있다.
  첫째, 조선의 석조조각 예술의 으뜸이 되는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이 있다. 
이 탑은 높이가 3m이며 백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현재 8층까지는 원형으로 남아 
있고 그 위의 탑신과 옥개석은 원형이 아니다. 이 탑의 기단부에는 구름 속에서 
생동하는 용(용 용)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 탑은 1472년 영릉의 원찰이 된 후 
신륵사를 중창하면서 왕실에서 가장 우수한 조각가를 동원하여 만들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석조예술품이다.
  둘째, 석종형 부도의 선구적 양식을 보여주는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이 있다. 
높이 1.9m인 이 석종은 나옹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통일신라 이후 스님의 
부도는 팔각원당형(여덟 팔, 뿔 각, 원할 원, 집 당, 거푸집 형)을 정형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 부도에 와서 종(쇠북 종) 같은 형으로 바뀌는 선구적 양식이 된다. 이 
부도는 정통의 양식을 벗어난, 라마탑계에 속하는 특유의 부도이다. 통도사와 
금산사에서 볼 수 있는 금강계단형의 기단 중앙에 석종형 부도를 설치하고 주위에 
박석을 깔았다.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것을 탑이라 하고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것을 부도라 한다. 
통도사나 금산사의 금강계단의 석종형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여 불상과 같은 
격이며, 신륵사 석종형 부도는 통도사나 금산사의 금강계단의 석종형 탑과 같은 
형태이지만 스님의 묘탑인 것이다. 이 석종형 부도는 1379년에 조성되었다.
  셋째는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로, 비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은 새로운 형태의 비이다. 그 이전의 비는 신라 태종무열왕릉의 능비에서 
시작되는 비 형태로 돌거북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용이 새겨진 비머리돌)를 얹은 
형태였는데, 이 보제존자석종비에서 달라진 것이다. 높이가 2.21m인 이 비는 
1379년(우왕 5)에 세워졌는데, 석종형 부도 앞에 서서 나옹 왕사의 기록을 새긴 
것이다. 이 비의 비문은 당대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글씨는 명필인 한수가 썼다.
  넷째는 보존존자 석종 앞에 세운 석등(보물 제231호)이다. 고려말의 새로운 양식의 
석등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섬세한 조각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석등의 높이는 
1.94m에 불과하다. 석등은 불전이나 탑 앞에 서는 것이 상례인데 승려의 부도 앞에 
서서 나옹 왕사의 부도를 탑처럼 예우하고 있다. 이 석등의 화사석(불을 켜는 불집돌) 
조각은 특출하다. 8각형 화사석에 8면의 화창(불 화, 창 창)을 뚫었는데, 화창 상면은 
화형(불 화, 형상 형)으로 되어 있다. 또한 화창의 모서리 기둥에 생동하는 용을 
입체감 있게 조각하고 목조건물의 구조처럼 창방, 평방을 조각하였다. 기둥 사이 
면에는 하늘에서 날아 내리는 비천상을 조각하였다. 이 석등의 화사석은 무른 
납석이므로 섬세한 조각이 베풀어졌다. 지붕돌은 간결하여 기왓골이 새겨지지 
않았으며, 정상에는 보주가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화려한 
조각장식이 돋보이는 석등이다.
  다섯째는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이다. 전탑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구조에서 시작된 것인데, 이 다층석탑은 신라전탑 양식에서 벗어난 특이한 양식의 
고려 전탑이다. 높이는 9.4m이며, 화강암 장대석으로 7층의 기단을 쌓고 4단의 층단을 
조성하여 6층의 탑신을 축조하였다. 6층의 탑신부분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벽돌에는 
연주문, 당초문 등이 양각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벽돌 사이를 넓게 떼어서 쌓아 
벌어진 사이에 강회를 채워 발랐다는 점이다. 이 탑은 1726년에 크게 보수를 하였으며 
이 보수 기록을 비에 새겨 세워놓았다. 이 다층전탑은 남한강을 굽어보는 암반 위에 
서서 특이한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탑이란 불전 앞에 서는 것인데 이처럼 강가에 서 
있는 것도 색다른 점이다.

     기둥과 대들보가 없는 건물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방형건물로 내부는 통칸(통할 
통, 문 간)이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이며, 다폿집 구조로 팔작지붕이다. 특이한 것은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아서 대들보가 없다는 점으로, 조선중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고식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고려시대 왕사인 나옹, 지공, 무학 세 분의 영정이 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금석문의 자료가 되는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가 있다. 대장각은 원래 현재 
극락보전 서쪽 언덕 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 비는 1380년 대장각을 세우고 
그 기록을 새긴 비이다. 많이 파손되어 내용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비문은 당대 
명필인 권주의 글씨이다.
  이와 같이 여주 신륵사에는 고려, 조선을 이어내리는 시대적 특성의 문화유산들이 
간직되어 있다. 여강의 시원한 풍경과 여주 영릉의 유적을 아울러 보면서 신륵사를 
답사하는 것도 삶의 여백을 가꾸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김시습의 행적이 머문 만수산 무량사

  무량사는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의 깊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절 이름이 말해주듯 아미타 삼존불을 주불로 모신 극락정토이다. 이 절의 창건은 
신라말 범일스님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그후 신라말의 고승 무염이 머물기도 했다.
  절에 남아 있는 석탑이나 석등을 보면 고려시대에 크게 중창한 절이다.

  새로 돋은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
  산사의 저녁종이 울리기 시작하네
  달그림자 아른아른 찬이슬에 젖는데
  뜰에 서늘한 찬기운 창틈으로 스며드네

  조선왕조 세조 때의 생육신 가운데 한 분인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시다. 
매월당은 이 절에 와서 머물다가 59세로 세상을 떠나 그의 부도와 영정이 남아 있다.
  무량사 극락전(보물 제356호)은 장중한 조선중기 건물로, 2층 불전이다. 1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정면에는 모두 벽이 없이 살문을 달았다. 그 밖의 벽면은 모두 
판자로 벽을 쳤다.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낮은 벽면에는 판자벽을 하고 있다. 
원래는 빛이 집 안에 들어오게 광창이 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공포는 기둥 사이에도 
포가 있는 다폿집이다. 천장은 종보 위에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극락전 내에는 1633년에 흙으로 빚어 만든 거대한 아미타불(높이 5.4m)과 
관음보살(높이 4.8m), 세지보살(높이 4.8m)의 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이 
삼존불에서는 불상 속에 넣어두었던 복장(옷 복, 감출 장) 유물이 발견되어 조성연대가 
확실한 것이다. 이는 곧 극락전 건물의 연대 추정에도 단서가 되었다.
  극락전 앞에는 백제 정림사지의 석탑 기법을 계승한 고려초의 5층석탑(보물 
제85호)이 서 있다. 이 5층 석탑은 장중하면서도 경쾌한 아름다움이 있다. 각 층의 
체감비율이 알맞아 우아한 조형감각을 보여준다. 옥개석은 너비에 비하여 낮아서 
목조건물의 지붕 모양과 같이 처마곡선이 우각(모퉁이 우, 뿔 각)에 이르러 날씬한 
반전을 나타내고 있다. 참으로 정제된 정연한 직선과 경쾌한 지붕돌의 살짝 든 곡선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옥개석 처마 밑에는 빗물이 탑 속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게 절수구(끊을 절, 물 수, 
도랑 구)를 파놓았다. 이것은 신라말 고려초에 조성된 탑에서 보이는 특수한 수법이다. 
탑의 상륜부에는 노반이 있고 그 위에 복발과 앙화(우러를 앙, 꽃 화)가 남아 있다. 
1971년 탑을 수리할 때 5층 탑신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고 4층 탑신에서는 고려 시대 
금동아미타 삼존불이 발견되었다.
  5층석탑 앞에는 단아한 고려초 10세기의 석등(보물 제233호) 하나가 서 있다. 높이는 
2.5m로 알맞은 높이이다. 하대상부에는 통통하게 살이 찐 여덟 잎의 연꽃이 엎어져 
새겨 있고 팔각의 석등 기둥돌이 그 위에 서 있다. 팔각 기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겨받쳐올린 중대석이 있고 중대석의 불집돌은 팔각이다. 불집돌은 4면에 불창이 
있는데, 불창이 있는 면은 넓고 불창이 없는 면은 좁다. 불집돌 위의 팔각 지붕돌은 
추녀선이 경쾌하게 곡선을 이루었다. 지붕돌 위에는 연봉형의 보주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극락전 내에는 1627년에 그린 거대한 괘불 한 점이 남아 있다. 이 쾌불은 
모시 바탕에 미륵보살을 그린 것으로 세로 12m, 가로 6.9m에 이른다. 미륵은 두 손에 
연꽃을 들고 연꽃대좌 위에 당당히 서있으며 두광과 신광 주위에 16화불(될 화, 부처 
불)이 둘러싸고 있다. 범종각에는 범(범어 범)자가 두 줄로 배치되고 네 곳의 유곽 
사이에는 삼존불이 배치되고, 유곽 밑에 패(신주 패)가 새겨지고 하대에는 당초문이 
연속되어 있다. 매우 화려한 범종이다.

     김시습의 풍모와 도도한 절개가 깃든 절
  무량사에는 김시습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다. 1493년 김시습이 이 절에서 죽자 
승려들이 영각(초상 영, 누각 각)을 지어 봉안하다가 그뒤 이곳 선비들이 김시습의 
풍모와 도도한 절개를 사모하여 학궁(배울 학, 집 궁) 곁에 사당을 짓고 청일사(맑을 
청, 편안할 일, 사당 사)라 하고 초상화를 옮겨 모셨던 것이다.
  김시습의 부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는 팔각원당형 부도로서 대단히 
화려하고 아름답다. 하대석에는 복련의 8엽 연꽃이 새겨졌고 8각 중대석에는 두 마리 
용이 구름 속에 싸여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상이 새겨 있다. 상대석은 연꽃이 받쳐 올린 
조각이고 탑신은 무늬 없이 팔각이며, 지붕돌은 팔각 귀꽃을 하고 엎어진 연꽃잎을 
상면에 새겼다. 그 위에 둥근 복발과 보개 및 보주가 얹혀 있다.
  무량사 입구에는 거대한 당간지주가 서 있다. 무량사는 조선시대에 불경의 
판각작업도 많이 이루어졌던 명찰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관심을 끄는 것은 김시습이 
만년에 이 절에 와서 그 생애를 마친 일이다.
  김시습은 5세에 이미 신동으로 소문나서 세종까지도 관심을 기울일 만큼 영민한 
재주가 있었다. 그의 10대는 이와 같이 학문에 전념하였고 20대에 들면서 특히 
1455년(세조 원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집현전 
학자들을 학살하자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천하를 돌아다녔다. 30대에는 
사색하며 수도하고 특히 31세부터 37세까지는 경주 남산 용장사에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쓰고 많은 시작(글귀 시, 지을 작)에 몰두하였다. 40대에는 
냉철한 현실비판을 가하였으며 그것을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50대에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버리고 자연에 의학하여 선문(좌선할 선, 문 문)에 들었다. 김시습의 
저작은 '금오신화' 외에 '매월당집 23권이 전하는데, 그중 15권이 시로서 2,200여 수에 
이른다.
  김시습의 근본사상은 유학에 있었으며, 불교적 사색을 병행하여 선가(좌선할 선, 집 
가)의 교리를 취득하고자 하였다. 퇴계는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김시습을 
'색은행괴(찾을 색, 도지개 은, 행할 행, 괴이할 괴)하는 이인(다를 이, 사람 인)'이라 
비판하기도 하였다. 율곡은 '김시습전'을 지어 "재주가 그릇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은 경청이 지나치고 중후함은 모자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의(옳을 의)를 세우고 윤기(인륜 륜, 기록할 기)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품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용동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 되기에 남음이 있다" 하였다.
  한강의 압구정 강정(강 강, 정자 정)에 걸려 있던 한명회의 "청춘부사직 
백수와강호(푸를 청, 가을 추, 도울 부, 모일 사, 기장 직, 일백 백, 머리 수, 누울 와, 
강 강, 호수 호)"라는 시구의 '부(도울 부)'를 '망(망할 망)'으로, '와(누울 와)'를 
'오(더러울 오)'로 고쳐 써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로 
뜯어고쳐 놓은 것은 그의 절의를 엿보는 일화로 오늘까지 전한다.
  김시습의 귀신론은 특이하다. 귀신을 초자연적 존재로 보지 않고 자연철학적으로 
인식하여 '만수지일본 일본지만수(일만 만, 다를 수, 갈 지, 한 일, 근본 본, 한 일, 근본 
본, 갈 지, 일만 만, 다를 수)'라 하여 기(기운 기)의 이합집산에 따른 변화물로 보았다. 
그의 시문 가운데는 사랑을 노래한 염정시가 가장 많다. 김시습은 현실의 명리를 
버리고 몸을 산수에 맡기며 구름처럼 왔다 간 사람이다. 

    십승지의 공주 마곡사

  마곡사는 충남 최대의 사찰로서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614m) 남쪽 기슭의 
아름다운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절 앞으로 산내물이 굽이돌아 흘러서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은 경관을 조성하였다.
  '정감록'이나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마곡사 계곡은 난세를 피할 수 있는 한국의 
십승지(열 십, 이길 승, 땅 지) 중의 한 곳이다. 십승지는 공주 유구의 마곡, 무주의 
무풍, 보은의 속리산, 부안의 변산, 성주의 만수동, 봉화의 춘양, 예천의 금당곡, 영월의 
정동상류(바를 정, 동녘 동, 위 상, 흐를 류), 운봉의 두류산(지리산), 풍기의 
금학촌이다.
  삶의 틀에서 쫓겨나 갈 곳 없이 막막한 사람이나 번민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런 
십승지를 찾아가 자연 속에 동화되어 자신을 지우면 그지없는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십승지란 원래 산이 깊고 물이 풍부하여 세상을 떠나서도 사람이 조용히 살아가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산은 모든 것을 품안에 받아들인다. 문명의 오염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하기도 하고 삶의 어지러움을 깨끗하게 씻어주기도 한다. 산은 생명의 원초적 
모습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생명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영원한 안식처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체할 수 없는 번민이 있는 날이거나 쇠잔하게 삭아가는 육신을 회복하고 
싶으면 산에 가서 신선한 숲의 공기를 마시고 산의 말씀을 들으면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깊은 산에 산사가 있으면 더욱 좋다. 이런 산사에 문화의 보물들이 남아 
있고 깊고 맑은 자비의 말씀이 있으면 육신과 영혼을 정화하는 생기를 준다.
  마곡사의 창건역사를 전하는 자료로는 1851년 임원모가 쓴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클 
태, 빛날 화, 메 산, 삼 마, 골 곡, 절 사, 생각할 사, 자취 적, 세울 립, 생각할 안)'이 
있다. 여기에 보면 643년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백제의 웅진성 옆에 
신라의 자장이 와서 마곡사를 창건했다는 것은 당시 백제와 신라의적대 관계로 보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사료인 '연기략초(인연 연, 일어날 기, 간략할 략, 베낄 
초)'에는 보조선사가 840년에 창건했다고 되어 있으나, 고려에 들어와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1199년 왕명을 받아 마곡사를 중창한 것이다.
  이를 보면 고려 이전에 작은 암자 같은 절이 있다가 보조국사에 의해 대찰이 된 
것이다. 그때 이곳은 도적떼의 소굴이었는데 보조국사의 신술로 도적떼를 모두 
물리쳤다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조가 마곡사를 유림하고 그 아름다운 경승을 
찬탄하면서 연산전(신령 령, 메 산, 대궐 전)의 현판글씨를 써주었다 한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60여 년간 폐사가 되었다가 1650년에 재건되고 
1782년 큰 화재가 나서 법당 등 천오백 칸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사적입안'의 기록에 
의하면 1785년부터 1788년 사이인 건륭연간에 대법당 등을 중수하였고 1791년에 
나한전, 1797년에 신검당을 중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류를 중앙에 두고 교화가람과 수행가람으로 나뉘어
  이 절에는 김구 선생이 숨어 살기도 했다.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범인 
중 한 사람인 일본군 장교 쓰치다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살해하고 
체포되어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1898년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전전하다가 
마곡사에 은신하여 승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심었다는 향나무 한 
그루가 절마당에 있다. 그 옆에 "김구는 위명(거짓 위, 이름 명)이요, 법명(법 법, 이름 
명)은 원종(둥글 원, 으뜸 종)이다"라는 푯말이 서 있다.
  마곡사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학술적 기록은 1989년에 문화재 관리국이 발간한 
'마곡사 실측조사 보고서'이다. 마곡사의 몇 가지 특징은 사찰의 배치가 계류를 중앙에 
두고 사역(절 사, 구역 역)이 남북 양쪽으로 나누어져서 교화(가르칠 교, 될 화) 가람과 
수행(닦을 수, 행할 행) 가람으로 배치되어 있는 점과 5층석탑에 라마교식의 청동 
상륜부가 있어 밀교적인 요소를 짙게 풍기고 있다.
  이 청동 상륜부를 풍마동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라마교식 상륜부는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청동 상륜부는 상륜이라기보다는 인도의 탑파를 
축소하여 올린 것으로, 2단의 기단과 복발, 평두, 산개의 4부분으로 되어 인도 
산치탑에서 보는 것 같은 형식이다.
  마곡사의 문화재를 보면 대웅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 
5층석탑(보물제799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감지은니묘법연화경권 제1(보물 제 
269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감지금니묘법연화경권 제6(보물 제27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종(지방유형문화제 제62호), 동제은입사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 천왕문(문화재자료 제62호), 국사당(문화재자료 제63호), 명부전(문화재자료 
제64호), 응진전(문화재자료 제65호), 해탈문(문화재자료 제66호)이 지정문화재이며, 옛 
절간 변소와 2층 창고건물, 신검당과 그 뒤의 고식 굴뚝 등 예스러운 고찰의 풍치가 
남아 있다.
  마곡사에 들어가면 개울 남쪽 사역에 해탈문, 천왕문, 영산전, 명부전, 국사당, 
매호당, 흥성루, 수신사가 있고 세심교를 건너서 북쪽 사역에 남북 축선으로 5층석탑, 
대광보전, 대웅전이 배치되고 좌우에 신검당, 영각, 응진전, 요사등이 있다. 그런데 
남쪽 구역의 해탈문과 천왕문은 개울 건너의 대광보전과 대웅전을 향하여 같은 
축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남쪽 사역의 건물은 주지실 등 요사와 영산전, 명부전 등 교화적(가르칠 교, 될 화, 
적실할 적) 기능의 건물들이다. 그리고 세심교 건너의 5층탑, 대광보전, 대웅전 등은 
수행적(닦을 수, 행할 행, 적실할 적) 기능의 불전이다. 계류는 속계와 불계를 구분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대광보전은 18세기 건물인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폿집으로 
팔작지붕을 한 꽤 웅장한 집이다.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셨는데, 천장에는 정교한 
닷집이 있다. 이 불전 마룻바닥에는 참나무로 짠 30평 정도의 삿자리가 깔려 있다. 이 
자리는 어떤 앉은뱅이가 부처님께 불구의 몸을 낫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드리면서 
완성하였는데, 자리를 다 짜고 법당 문을 나설 때 자기도 모르게 일어서서 나왔다는 
일화가 전한다.
  대웅전은 2층으로 된 조선후기 건물인데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다폿집이다. 특히 
지형의 경사를 잘 이용하여 덤벙주초를 놓고 집을 지었다. 불단에는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셨다. 영산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기둥머리에만 공포가 있는)집에 
맞배지붕(지붕면이 앞 뒤 두 면으로 구성된 지붕)의 건물이다.
  5층석탑은 높이가 8.4m이며 2중기단 위에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 돌로 된 
석탑으로, 고려탑의 특징인 옥개석의 추녀끝 반전이 심하다. 탑의 체감비율이 적고, 
탑신과 옥개석의 비례와 상륜부의 라마교식 청동 상륜이 특이하다.
  동제 은입사 향로는 고려후기의 우수한 금속공예품으로 높이 20.2cm, 입지름 
19.5cm의 크기인데, 구름무늬가 배치되고 네 곳에 여의문을 둘러 원을 만들고 그 안에 
범자를 새겼다. 나머지 공간에는 아름다운 당초문이 채워져 있고, 맨 아래쪽에 굵은 
선으로 앙련의 연꽃잎을 새겼다.
  동종은 1654년에 주조한 것으로 높이 1m, 입지름75cm의 범종이다. 종고리는 힘찬 
두 마리 용이 웅크리고 있고 종신에는 네 곳에 두광을 가진 보살상이 배치되었으며, 
하대(아래 하, 띠 대)에는 보상화문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이 종은 대흥 안곡사에서 
주조한 것으로 만든 때와 그 내력이 새겨져 있다.
  마곡사는 인간의 고뇌를 자연에 세척할 수 있고 문화의 감동을 느낄 수 있으며, 
불심의 자비로운 기도가 가득한 유서 깊은 옛 절이다. 

    계룡산과 갑사

  자연을 숭배해온 우리 민족은 우리 국토의 산맥을 민족정기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산맥은 영기(신령 령, 기운 기)의 본체요, 산맥 사이로 흐르는 강물은 혈관이며, 
그 위에 솟아난 바위산은 뼈요, 나무와 풀은 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우리 민족은 
이 자연을 외경(두려워할 외, 공경할 경)하고 숭배했으며, 자연의 순리를 존종하여 
자연에 동화하는 문화를 형성했던 것이다. 오늘날 현대문명의 공해 속에 시달리며 
인류의 소멸이 자연의 파괴로부터 도래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 민족의 사상은 
인류를 구제하는 근본이 아닐 수 없다.
  계룡산은 우리 국토의 중앙을 수호하는 신령스러운 영산이다. '삼국사기' 제사조에 
보면 신라는 큰 제사로 삼산(내력, 골화, 혈예)에 제사 지냈고, 그 다음
중사(가운데 중, 제사 사)는 
오악(질함산,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 부악산)에 제사 지냈다.
  우리는 이 산제를 지내는 일을 당시의 신앙적 관습으로만 보기 쉽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산제는 국토를 수호하는 국민의 절대적인 결의의식이며, 만일 나라의 
제사를 지내던 산을 상실했을 때 국민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다시 그 산을 쟁취해야 
하는 신앙적 정신영역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종교의 터전을 상실한 신앙의 무리가 
종교의 터전을 되찾기 위한 싸움에서 목숨을 잃는 것은 전사가 아니라 순교인 것이다. 
민족정기라는 말 속에는 시대 속에 소멸하는 한 개인의 유한한 생명성보다 그 민족이 
살아가는 영원한 영토에 대한 애정과 정성이 더 많이 포함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공주목조에 보면 계룡산에 대한 영기어린 서거정의 시구가 있다. 
'계룡산의 한가로운 구름'이라는 시제이다.

  계룡산이 높고 높아
  층층이 푸르게 솟았는데
  맑은 기운은 굼실굼실
  장백산(백두산)에서 달려왔네.
  산에 못이 있어 용이 서리었고,
  산에 구름이 있어 혜택을 주네.
  전날에 시험삼아 산속에 거닐어보니
  신령함이 다른 산과 다르다.
  마침내 비를 내려 천하에 혜택을 줄 때
  용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용을 따르네.

  이러한 관계로 계룡산은 예부터 길지(길할 길, 땅 지)라 하여 조선의 태조는 계룡산 
남쪽에 수도를 정하여 궁궐을 짓다가 조운(배저을 조, 옮길 운)의 길이 멀다고 하여 
중지했는데 이곳이 곧 신도(새로울 신, 도읍 도)이다. 지금도 왕궁을 짓던 주춧돌이 
남아 있다.
  계룡산은 천황봉(845m)이 주봉이고, 능선을 따라 연천봉, 삼불봉, 관음봉, 신선봉 
등이 닭벼슬 같은 모양을 하고 용처럼 휘감고 있어 계룡산이라 했다 한다. 
풍수지리적으로는 회룡고조(돌아올 회, 용 룡, 돌볼 고, 조상 조)의 형세이며, 산태극(메 
산, 클 태, 가운데 극), 수태극(물 수, 클 태, 가운데 극)의 형세로 보아 명당이라고 
여겼다. 계룡산 주능선 사이로 계곡이 흘러서 용문폭포와 은선폭포가 있으며, 산봉에는 
의남매가 평생을 이 산에서 수도하다가 죽자 그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7층과 5층의 
남매탑이 나란히 서 있다.
  계룡산의 동쪽에 동학사가 있고 서쪽에 갑사가 있으며, 남쪽에 신원사가 있다. 
동학사에서 계룡산을 넘어 갑사로 오는 길은 울창한 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어 깊은 
산정무한(메 산, 뜻 정, 없을 무, 한정 한)의 경지에 몰입되는 등산로이다. 계룡산에서 
가장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절은 갑사이다.

     '월인석보' 목판은 국문학사상 귀중한 문화재
  갑사는 계룡산 연천봉 아래 있는데 한때는 계룡사라고도 했다. 갑사의 창건은 
아도의 창건설과 556년 혜명의 창건설 등이 있다. 그러나 679년 의상이 절을 크게 
짓고 신라 화엄십찰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갑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전 사찰이 
왜병에 의해 불타버려서 1654년에 중창되었다. 이 절에는 특히 임진왜란 때 승군을 
지휘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영규대사의 영전을 모신 표충원이 1738년 건립되었다. 
갑사에는 많은 지정 문화재가 집중되어 있다.
  보물 제256호인 갑사철당간, 보물 제257호인 갑사부도, 보물 제478호인 갑사동종, 
보물 제582호인 '월인석보' 목판이 있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대웅전(제105호), 
강당(제95호), 대적전(제106호), 표충원(제52호), 삼성각(제53호), 팔상전(제54호), 석조 
약사여래입상(제50호), 석조 보살입상(제51호)이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영규대사묘(제15호)이며,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것은 
갑사중사자암지 3층석탑(제55호), 영규대사비(제56호), 천진보탑(제68호) 등이 있다. 
그리고 암자로 내원암, 신흥암, 대성암, 대적암, 대자암 등이 있다. 이중 중요한 
문화재에 대하여 살펴본다. 갑사부도(보물 제257호)는 높이가 2미터쯤 되는 고려시대 
팔각원당형(여덟 팔, 뿔 각, 둥글 원, 집 당, 형상 형) 부도이다.
  이 부도는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를 보여주는 뛰어난 석조 조각물로, 3단의 
기단석 위에 놓여 있다. 가장 밑의 하대석에는 연꽃이 피어나는 모양을 새기고, 각 
면에 형태를 달리하는 사자를 강한 입체감이 나도록 조각하고 위쪽으로 구름 속에 
생동하는 용을 조각하여 웅휘한 신비감을 주고 있다. 중대석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상(하늘 천, 사람 인, 형상 상)이 아름답게 하늘을 날고 있고 상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 있다. 탑신은 팔각인데 사천왕상이 입체감 있게 조각되었다.
  지붕돌에는 서까래가 섬세하게 표현되고, 지붕 위의 추녀마루와 기왓골이 상세히 
조각되어 고려시대의 팔각정자 건물 양식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참으로 숙련된 
조각 솜씨로 대담한 입체감과 정교한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다.
  갑사 철당간 및 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당간 높이가 15m에 이른다. 당간은 
절의 깃대인데, 철제당간은 대나무 마디처럼 만든 철통을 포개어 고착시켰다. 이 
당간은 지름이 50cm이며, 철통마디가 24개 남아 있다. 원래는 28마디였는데 1893년 
7월 25일에 4마디가 부러져 떨어졌다 한다. 우리 나라의 많은 절에는 이런 당간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그 지주만 남아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갑사 철당간처럼 깃대가 남아 
있는 것은 무척 드물다.
  이 당간 꼭대기에는 용두가 설치되고 당(기 당)을 올리는 도르래가 장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인석보' 목판은 '월인석보'를 인쇄한 목판이다. '월인석보'는 한글을 
창제한 후 처음으로 불경을 한글로 해설한 책인데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편한 책으로 1459년에 간행되었다.
  이는 우리 국문학사상 귀중한 문화재이다. '월인천강지곡'에서는 처음으로 'ㅌ'과 
'ㅍ'의 받침글자가 나타난다.

     문화의 향취와 호국의 기상이 흐르는 곳
  갑사동종은 1584년에 제작된 범종으로 높이가 131cm이다. 조선초기 국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만든 것인데, 제작연대와 만든 사람들을 잘 알 수 있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종의 특징인 음통이 없고, 종 고리가 두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통일 신라시대 종과 고려시대 종은 음통이 있고, 종 고리에 용이 한 
마리이다. 종 몸에는 네 군데에 당좌(두드리는 곳)가 있고, 석장을 짚고 구름 위에 떠 
있는 스님의 모습인 지장보살상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종의 하단에는 두 줄의 
띠를 돌리고 그 안에 아름다운 보살화문을 새겼다. 이 종은 조선시대 범종 양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문화재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다폿집이다. 조선후기 건물인데, 
덤벙주초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우고 창방과 평방을 설치했다. 공포는 삼출목(석 삼, 
날 출, 눈 목)이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불단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했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다폿집이다. 자연석 위에 덤벙주춧돌을 
배열하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우고 창방과 평방을 설치한 조선후기 건물이다. 
덤벙주추란 건물의 터가 평면이 아닌 산록에 집을 지을 때 각 기중의 길이가 다르게 
하여 건물의 평면을 유지하게 한 주추를 말한다. 갑사의 건물들은 조선후기 것이기는 
하나 장중한 사찰 건물의 전통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절에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신 표충원이 있는 것은 
호국사찰의 중심 사찰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특히 영규대사는 공주 청련암에서 
선장(좌선할 선, 몽둥이 장)을 익혀 그 무예를 따를 자가 없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명의 승군을 이끌고 청주성을 최초로 수복하고, 후에 조헌의 부대와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칠백의총 조용사에 안치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승군장 중 가장 뛰어난 무술을 지녔으며, 충청도 승군을 대표하는 승군장이었다.
  갑사는 계룡산의 명찰로서 문화의 향취와 호국의 기상이 영원히 흐르고 있는 
곳이다. 

    칠갑산 깊은 골의 장곡사

  장곡사는 한국 건축사와 철불조각사를 살펴보는데 있어 꼭 가보아야 할 절로서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칠갑산 절골 속에 있다.
  청양읍은 칠갑산(561m)의 첩첩산중에 자리한 두메산골의 소읍이다. 칠갑산은 울창한 
자연의 수림이 깊어서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장곡사 절골 일대는 구기자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칠갑산은 백제 때 칠악산이며 '삼국사기'에 보면 법왕은 비가 오지 않자 칠악사에 
와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이 칠악사의 소재는 지금 알 길이 없다. 칠갑산에는 
백제 왕도인 부여의 북방을 지키던 자비성(일명 도솔성)의 성터가 남아 있다.
  장곡사는 참으로 세속과 멀리 떨어진 한적한 절이다. 세상의 번거로운 일로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적 혼란이 오거든 이런 깊은 산사에 의탁하여 현실에서 
벗어나보는 것도 정신을 맑게 하고 육신을 소생시키는데 한 방편이 된다. 우리는 
오늘날 문명의 공해 속에서 감각과 직관이 점점 마비되어 가고 있다. 이럴 때 뜻있는 
산사를 찾아 자연에 동화되거나 사색과 명상 속에 몰입해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장곡사는 통일신라 때 보조선사(804-880)가 창건한 절이라 한다. 장곡사에 대한 
믿을 만한 문헌기록은 세 가지가 있다. 1777년 장곡사 상대웅전을 중수한 
'칠갑산장곡사 금당중수기(일곱 칠, 갑옷 갑, 메 산, 길 장, 골 곡, 절 사, 쇠 금, 집 당, 
거듭할 중, 고칠 수, 기록할 기)'와 1695년의 '장곡사철조여래상복장중수기(길 장, 골 
곡, 절 사, 쇠 철, 지을 조, 같을 여, 올 래, 형상 상, 입을 복, 감출 장, 거듭할 중, 고칠 
수, 기록할 기)' 및 '장곡사금동약사여래복장축원문(길 장, 골 곡, 절 사, 쇠 금, 구리 
동, 즐길 락, 스승 사, 같을 여, 올 래, 입을 복, 감출 장, 빌 축, 원할 원, 글월 문)'이다. 
장곡사 약사여래복장 유물 속에는 태정 3년(고려충숙왕 13)에 간행된 '금강경'이 들어 
있어 불상의 연대를 알게 한다.

     천상의 설법장과 지상의 설법장
  장곡사는 상하 두 개의 대웅전 구역을 가진 특이한 사찰 배치를 하고 있다. 
하대웅전(보물 제181호) 구역은 운학루를 들어서면 대웅전과 설선당(말씀 설, 좌선할 
선, 집 당)과 봉향각이 있다. 하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집으로 다포의 구조를 
가졌는데,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조선 중기 건물이다. 원래는 팔작지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대웅전 내에는 보물 제337호로 지정된 금동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 속에서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는데, 1346년(고려후기)에 조성된 불상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 약사여래는 목에 삼도가 있고 머리는 나발이며, 손에 약단지를 들고 
건장한 체구에 단아한 얼굴을 가진 고려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약사여래를 모신 집을 보통 약사전이라 하는데, 대웅전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옛날에는 석가불을 주불로 모시고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를 좌우에 모신 삼존불 
체계의 불전이었다가 석가불과 아미타불이 없어지고 약사불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하대웅전 구역에서 계곡 위쪽으로 50m쯤 올라가면 상대웅전 구역이 있다. 이곳에는 
상대웅전과 응진전, 산신각이 함께 있다. 상대웅전(보물 제162호)은 한국 건축사에서 
주목되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에 주심포계 공포를 하고 있으며, 
고식의 배흘림 기둥이다.
  이 건물은 기둥과 보 등은 고려 양식을 보여주고 연목과 공포 등 작은 부재는 
조선중기 양식이다. 쇠서 위에 연꽃을 조각한 수법과 우물천장 등은 조선 중기 이후의 
양식이다. 고려 건물을 조선중기에 수리하면서 변형시킨 것으로 보인다. 상대웅전 
바닥에는 아름다운 고려시대 녹유연화 문전이 깔려 있다.
  1777년 상대웅전을 중수하고 남긴 '중수기'에 의하면 이 불전 내에는 석불 2구, 금불 
3구가 안치되었고 동쪽 벽에 오도자의 그림이라 전하는 불벽화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철불 2구와 소조불 1구가 있는데, 금불이라 한 것은 철불에 금도금을 한 
불상을 말한 것으로 보이며, 석불 2구는 모두 없어져버렸다.
  상대웅전 내에 원래 5불이 있었다면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불로 추정된다. 이렇게 5불이 있으면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는 화엄사상의 
불전이나 밀교사찰의 불전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고려 출불인 비로자나불(보물 
제174호)과 신라 철불인 약사여래(국보 제58호)와 소조불인 아미타여래가 있다.
  상대웅전은 분명히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는 화엄신앙의 불전이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할 때는 비로전이거나 대적광전이거나 대광명전이라고 해야 옳다. 그런데 지금 
대웅전이라 한 것은 석가불을 주불로 하는 불전 이름이므로 좀 이상하다. 아마도 
후대에 변경된 것이 아닌지 의문스럽다. 상대웅전 내에 있는 철조 비로자나불은 불신 
높이가 61cm로 높다란 석조좌대(1.65m) 위에 앉아 있다. 오른쪽 어깨가 벗겨진 
우견편단의 법의를 입고 상체는 짧은 편이며 길고 가는 눈매, 작은 입, 작은 코에 
무표정한 얼굴이다. 하얗게 호분을 발라놓았는데 두 손은 지권인을 하고 있다.
  또 하나의 철불은 불신 높이가 91cm로 상, 중, 하의 3단형 불단 위에 앉아 있다. 이 
불상은 신라 철불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국보 제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을 입고 눈, 코, 입 등 단아한 표정에 목에 삼도가 완연하다. 이 
철불의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 원래 약호가 있어 약사여래였다고 한다. 
불상에 비하여 불단이 너무 큰데, 상대웅전 중수기에 보이는 석불이 앉았던 대석으로 
보인다. 이 3단 형식의 불상 좌대에는 지대석에 기둥자리가 있어 원래 목조불감(나무 
목, 지을 조, 부처 부, 불탑 감)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좌대는 9-10세기의 
시대양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장곡사의 상대웅전 지역은 법신불(법 법, 몸 신, 부처 불)의 
세계로 천상의 설법장이며, 하대웅전 지역은 석가의 세계로 지상의 설법장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고의 건축물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절에는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 최고의 건축물인 대웅전이 있다. 이것은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려 건물로 1308년에 건립되어 690여 년간을 이어오는 
건물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려의 목조미술품이다. 건축의 비례나 
구조의 절묘한 기교, 목공의 정교한 솜씨 등이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품이다.
  우리는 국제화, 세계화를 지향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세계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민족문화의 고유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제화란 세계 각 나라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다양하게 집합된 이합성(다를 이, 
합할 합, 성품 성)의 집단이다. 한국 건축에 있어서의 국제화는 서양 건축에 예속되어 
자아를 상실해 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민족적 고유성이 없는 세계화는 민족문화의 
소멸을 불러올 뿐이다.
  한국의 현대건축이 남에게 의존하여 제 자신 스스로가 설 수 없는 불구자가 된다면 
결국에는 국제사회 속에서도 존재가치를 상실해 버린다. 국제화란 동질화하는 것이 
아니라 특질화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덕사 대웅전은 한국 건축의 현대적 창조성에 있어서 전통의 인자를 
찾아볼 수 있는 건물이다.
  우리는 전통의 창조적 계승에서 고급의 문화요소를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서민적 
생활문화 요소에만 치중하여 저급의 문화전통이 대중적이고 본원적인 것이라고만 
주장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상층문화의 건물도 결국은 건축가와 목수가 창조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우수하고 뛰어난 것을 계승, 발전시켜야 세계 속에서 경쟁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주위에 건립되고 있는 고층 건물이나 아파트 건물들을 보면 그 어디에도 
한국 건축의 창조적 인자가 보이지 않는다. 문화의 계승에 있어서 옛것을 그대로 
복사하여 복고적 조형물을 만드는 것은 문화의 창조가 아니라 후퇴이다. 우리 문화의 
전통 요소 중에서 현대적으로 창조할 수 있는 특성을 찾아내야 한다.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을 느껴보려 한다면 현대건축을 전공하는 건축가라 하더라도 
수덕사 대웅전에 가서 겸허한 마음으로 살펴보라. 외국의 많은 건축가들이 경탄하는 
수덕사 대웅전을 만나보는 일만으로도 수덕사 여행은 의의가 있다. 더불어 덕숭산의 
산정(메 산, 뜻 정)과 종교적 감흥을 얻으면 더욱 좋은 일이다.
  1937년 수덕사 대웅전의 해체수리 공사가 실시되었다. 이때 수덕사 대웅전 벽에는 
고려 불화들이 가득 남아 있었다.
  이 벽화에서 지대원년무신 4월 17일 입주라는 먹 글씨가 발견되었다. 지대원년 무신은 
1308년으로, 그해 4월 17일에 기둥을 세웠다는 것이다.
  고려 건물 중 수덕사 대웅전처럼 건립연대가 확실한 것도 없다. 그래서 수덕사 
대웅전을 통해 고려시대 건물의 양식이나 특징을 알게 되며, 그로 인해 고려시대 
목조건측의 편년이 가능하게 되었다.

     목공예품을 만들듯 정교하게 다듬은 대웅전
  우리 나라에는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목조건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 가장 오랜 
건물은 고려시대 건물이 될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 건물로서 남한에 있는 것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 강릉 객사문, 은해사 거조암의 영산전이 있다. 북한에는 심원사 보광전, 
성불사 응진전, 관음사 원통전 등이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정면 4칸, 측면 4칸의 주심폿집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기둥은 중간이 배가 부른 배흘림기둥을 하고 추녀선은 겹처마로 절묘한 선을 
이루었으며, 측면 박공부분의 구조 형태가 아름답다.
  수덕사 대웅전의 특징은 지붕의 무게를 받치는 우미량(소 우, 꼬리 미, 들보 량)의 
곡선미가 이채롭다. 우미량이란 도리나 보에 걸쳐 대어 동자기둥을 받치고 있는 보를 
말한다. 수덕사 대웅전은 주심폿집이므로 천장이 없는데, 그 때문에 건물 내부의 모든 
부재가 노출되어 있다.
  노출된 부재는 천장에 감추어진 부재보다 아름답게 다듬어야 한다. 그래서 대웅전은 
목공예품을 만들듯이 정교하게 다듬어진 건물이다.
  원래 수덕사 대웅전의 벽면에는 아름다운 그림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1937년에 
수리하면서 이 벽화들을 떼어냈는데, 6.25전쟁 중에 모두 파손되고 말았다.
  다행히 당시 임천 선생이 이 고려 벽화들을 묘사하여 남긴 묘사도 40여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장구를 치고 피리를 불면서 하늘을 날아가는 천인의 
모습을 그린 주악비천도(연주할 주, 음악 악, 날 비, 하늘 천, 그림 도),
공양화도(바칠 공, 봉양할 양, 꽃 화, 그림 도), 소불삼례도(작을 소, 부처 불, 석 삼,
예도 례, 그림 도), 극락조도(지극할 극, 즐거울 락, 새 조, 그림 도), 나한도(비단 나,
한수 한, 그림 도) 등이다.
  이 벽화들은 섬세한 필치로 경쾌한 생동감이 나게 그린 그림들이었다. 지금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고려시대의 단청 일부를 볼 수 있다. 대들보에는 금니로 그린 용이 
완연히 남아 있다.
  이 유서 깊은 수덕사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수덕사 창건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 
미미하다. 사기에는 백제말 숭제법사가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 혜현구정(은혜 혜, 지금 현, 구할 구, 고요할 정)조에 보면 혜현스님은 
백제 사람으로 법화경을 잘 외웠는데, 복(복 복)을 청하는 기도가 영험이 있었고 
신묘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는 처음에 북부 수덕사에 머물렀다 한다. 그후 고려 
공민왕 때 나옹스님이 중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말에는 경허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을 일으켰고, 그 제자 만공스님이 있었다.
  이를 보면 수덕사는 백제 때에 창건된 절이라 할 수 있다.
  이 절 경내 조인정사(조상 조, 도장 인, 깨끗할 정, 집 사) 앞에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이 하나 서 있어 통일신라시대에도 이 절이 계속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수덕사 입구에 들어서면 '덕숭산 수덕사'라는 큰 현판이 일주문 위에 걸려 있다. 
이것은 손재형씨의 글씨이다.
  덕숭산은 바위산의 산봉우리와 맑은 계곡의 개울과 송림이 아름다워 등산하기도 
좋은 곳이다. 또한 견성암을 비롯해 금선대, 환희대, 정혜사 등이 있다.
  금선대에는 진영각이 있는데, 이곳에는 경허스님의 제자였던 만공스님의 영정과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또 정혜사로 오르는 중간지점에는 높이 25미터나 되는 미륵불 
입상이 있어 잠시 발길을 멈추고 합장하게 한다. 만공스님이 조성한 것이다.

     여승들의 수도처로도 유명해
  수덕사는 여승들의 수도처로도 유명하다.
  환희대는 '청춘을 불사르고'를 써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김일엽스님이 건립하여 
기거하던 곳이며, 견성암도 여승의 수도처로서 김일엽스님이 머물던 곳이다.
  한때는 많은 여학생들이 김일엽스님을 만나보고자 견성암과 환희대를 찾아들기도 
했다.
  산꽃이 만발하는 봄이나 단풍이 붉게 타는 가을에 덕숭산 수덕사를 답사해 보면 
문명의 공해 속에 찌들대로 찌든 피곤한 육신과 혼미한 정신이 맑아지기도 한다.
  수덕사는 덕숭산 산록의 송림을 등지고 높다란 단 위에 대웅전이 중앙에 배치되고, 
그 좌우 단 밑에는 명부전을 위시하여 백련당, 청연당 종각 조인정사가 건물의 일곽을 
이루면서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수덕사 대웅전 건물을 둘러싸고 받들고 있는 격이어서 대웅전 앞뜰의 
깊숙하고 고요한 포장미를 더하고 있다. 그런데 근년에 대웅전 경역 앞에다 거대한 
누각건물을 새로 짓고 산사에 조화되지 않는 연지를 팠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부처님의 고요한 선정을 깨뜨려 버린 느낌이다.
  이제 만일 수덕사 대웅전과 큰 누각과의 사이에 있는 건물을 헐어내버린다면 저 
아담하게 건립한 한국 최고의 건물인 대웅전이 이 거대한 누각 건물과 바로 비교되어 
얼마나 왜소하게 보일까 걱정이다. 수덕사 대웅전과 누각건물과는 그만큼 심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새로 건립한 누각건물은 나라의 보배를 억누르고 부처님의 성역을 훼손한 결과가 된 
것 같다. 앞으로 천수백 년 이어내린 문화의 영역, 종교의 도량에 새 건물을 지을 때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행하는 사려 깊은 조심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수덕사는 오늘도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과 문화의 운치를 전해주는 도량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중원의 월악산과 미륵리 사지

  봄볕이 따스한 3월 하순인데 소백산맥의 기암 준령에는 아직도 흰눈이 상봉에 남아 
있었다. 수안보 온천에서 연진을 깨끗이 씻고 맑은 마음으로 계립령 너머 
하늘재(한훤령)를 바라보고 20km를 들어가니 포암산과 부봉산 사이의 아늑한 계곡에 
높이 10.6m의 미륵대불이 우뚝 선 미륵리 사지가 있다.
  부봉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시냇물에 손을 담그자 차가운 감각이 전신을 짜릿하게 
한다. 우리 나라 가람은 남쪽을 향한 것이 많은 데 비해 미륵대불은 북쪽 월악산을 
향해 장엄하게 서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에 들어갈 때 문경을 지나 
북로인 하늘재를 넘어 이곳에 들렀다가, 월악산 덕주사에 머물고 있던 누이 덕주 
공주를 만나고 이 절을 창건했다는 속전(풍속 속, 전할 전)이 전할 뿐 사서의 기록 
속에 사력(절 사, 지낼 력)이 아득하다.
  1977년 충청북도에서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건물터에서 출토된 기와 중에 미륵당과 
'명창삼년 금당개개ooo 대원사주지o와립비(밝을 명, 창성할 창, 석 삼, 해 년, 쇠 금, 
집 당, 고칠 개, 덮을 개, 큰 대, 집 원, 절 사, 주인 주, 가질 지, 기와 와, 설 립,
비석 비)' 등의 명문이 출토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미륵대불을 모셨던 불전은 미륵당이거나 미륵전이었으며, 
'명창'은 금국의 연호로서 삼년은 고려 명종 22년, 서기 1192년에 해당된다. 또한 이때 
금당 지붕을 고치고 이 역사를 주관한 사람이 대원사 주지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미루어보면 이 절은 이미 이때 보수해야 할 만큼 퇴락된 고찰이었다.
  '고려사'에는 고종 19년(1232)에 승(중 승) 우본이 충주대원사 주지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바로 충주대원사가 이 절임직도 하다.
  애석하게도 화재를 입어 일시에 소진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13세기 몽고의 
난 중에 병화를 입은 것 같다. 1255년 10월의 '고려사' 기록에 몽병(어릴 몽,
군사 병)이 대원령을 넘자 충주에서 정예한 군사로 천여 사람을 격살했다는 것이다.
이 대원령이 바로 대원사가 있는 한훤령을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고 1256년 4월 
몽고군이 충주성을 침공하자 성 안의 사람들이 다 월악신사로 올라갔는데 홀연히 
구름과 안개와 비바람이 몰려오고 번개가 치니 몽고군은 신령이 돕는 것으로 알고 
겁이 나서 퇴각했다는 것이다.
  월악산은 신라의 월형산이며 대사(큰 대, 제사 사)의 삼산(석 삼, 메 산)과 
중사(가운데 중, 제사 사)의 오악(다섯 오, 큰산 악) 다음에 소사(작을 소, 제사 사)를 
올리던 신령스러운 산이다. 월악산 남쪽 계곡에 월광사지와 사자빈신사지 및 
덕주사지가 있으며 동쪽에 신륵사지가 있다. 산상(메 산, 위 상)에는 월악신사가 있고 
난공불락의 석성(돌 석, 재 성)이 성문과 함께 완연히 남아 있다.

     화랑의 모습처럼 인간적인 미륵불
  월악산은 미륵리 사지와 마주 보며 북으로 불과 4km 거리이다. 한훤령은 죽령과 
조령 사이의 가장 낮은 곳으로, 신라는 일찍이 이곳을 기점으로 북로를 개척했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선이었다. 고구려 온달장군이 계립령 이북의 옛 
고구려 땅을 회복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곳이 바로 이곳이요, 신라가 
북진정책을 펴면서 일차적으로 넘었던 고개가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한훤령과 조령을 따라 성곽이 구축되어 있다. 조령성(새 조, 재 령, 재 성)은 
조선후기에 더욱 견고히 수축되어 삼관문(석 삼, 관 관, 문 문)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 중요한 길목을 신라의 저 화랑들이 무심히 지나갔겠는가. 명산대천을 두루 살필 
때 월악산의 영험한 산정과 계립령의 깊고 아늑한 계류에 하루쯤 쉬어 가기도 했을 
것이다.
  마의태자가 하늘재를 넘어 이곳에 와서 머물다 갔다면 그때 태자를 따라온 한 
무리의 화랑들이 이곳에 남지나 않았는지, 그래서 이 미륵불이 조성된 것은 아닐까. 
화랑을 일컬어 미륵 선화(신선 선, 꽃 화)라 하였기에 말이다.
  이런 연유로 미륵불은 북녘을 바라보고 섰는지도 모르겠다.
  소사(작을 소, 제사 사)인 월악산과도 무슨 관련이 있음직하다. 아니면 고구려 
구강을 회복하려던 고려인의 염원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발굴중에 출토된 기와막새 무늬들이 통일신라의 수법을 그대로 계승하고 미륵불 
앞의 팔각석등이나 미륵당 동편 밭가의 3층석탑과 초석의 주좌에서 통일신라의 기법이 
보이며, 미륵리 학교 운동장 앞에 옮겨져 있는 반가상도 그러하다. 미륵전 앞의 
5층석탑이나 4각석등과 당간지주 등은 완연한 고려의 석조물인데, 탑 앞의 4각석등은 
미륵전 앞의 8각석등과는 형태도 만든 솜씨도 달라, 같은 시대의 석등이 아님을 
알겠다. 기와도 고려시대의 범자문(범어 범, 글자 자, 글월 문)이나 일휘문(날 일, 빛 
휘, 글월 문) 와당이 나온 것은 시대를 두고 번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암막새의 들림새가 길게 밑으로 처진 것이 없다.
  미륵대불은 입상인데 머리에 갓을 쓰고 반달 같은 눈썹이며, 직선으로 감은 눈과 
두터운 입술이 신비감은 없지만 화랑의 모습처럼 인간적이다.
  아마도 대범한 사람이 만든 것 같다. 굵은 목에 삼도(석 삼, 길 도)는 가늘고, 법의는 
통견(통할 통, 어깨 견)인데 몸 전체는 적당히 처리하여 네 돌을 겹쳐 만든 것으로 
보아 웅장하고 큰 것에만 뜻이 있었나 보다.
  팔이나 손은 빈약하고, 왼손에는 약병을 들고 있다. 이 석불은 장방형 
석실 속에 있는데 동, 서 남의 내벽 높이가 6.1m로서 긴 장대석으로 정자형(우물 정, 
글자 자, 형상 형) 구조로 짜올려서 그 사이에 잡석을 채운 것이다. 천장은 목조건물로 
덮었던 것인데, 석불을 가운데 두고 굴내에 동서 4m 남북 5.3m간격으로 사천주(넉 사, 
하늘 천, 기둥 주)를 세웠던 초석 4개가 남아 있다.
  이 미륵전은 사천주를 고주(높을 고, 기둥 주)로 올리고 삼면의 석축 위에 기둥을 
세워, 높다란 중층 불전이 서고, 이 불전 앞에 오간(다섯 오, 사이 간)의 반 지붕 
전실이 섰던 것임을 초석 배치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불전 삼면의 석벽 동, 서, 남면 하단에 각 6개씩 18개의 감실이 있고, 상단 감실은 
동, 서로만 각각 6개씩 12실이 있다. 감실 내에는 소형 불상을 안치하였던 것이다.
  동쪽 벽 입구 하단의 첫 감실에는 높이 43.5cm, 너비 62.5cm의 석판 두 장에 
나한상을 둘씩 조각하여 포개 놓았다. 두 번째 감실에는 입체의 보살상 1구가 있는데 
높이가 53cm이다. 화상을 입어 몹시 손상되었다. 원래 이 감실에 모셨던 불상은 아닌 
것 같다. 세 번째 감실에는 불두(부처 불, 머리 두)가 없는 파불이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수인(손 수, 도장 인)은 항마촉지를 하고 있다. 다섯 번째 감실에는 파불이 
된 보살상 1구가 앉아 있다.

     미완성의 작품인가, 파손된 석불인가
  미륵대불 뒷면 서쪽 끝의 감실에는 둘씩 조각한 나한상의 석판 두 장이 포개져 있고 
남면 석축과 서면 석축이 직각으로 꺾이는 첫 번째 감실에 삼존을 조각한 석판 두 
장이 포개져 있다. 그리고 서쪽 벽의 두 번째 감실에는 불상을 둘씩 조각한 석판 한 
장이 들어 있다.
  그외 감실에는 파불의 조각 등이 보이나 어떤 상이었는지도 분간하기 어렵다. 원래 
하단 16개 감실에는 나한상 보살상 등이 모두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언제 누가 
가져갔는지 참으로 아쉬움이 앞선다.
  상단의 감실도 불 보살들이 들어 있었던 곳인데 하나도 없다.
  석불 뒷면에는 높이 101cm*너비 76cm의 석면에 여래좌상이 우견편단을 하고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데 반양각의 조각이다. 그 왼쪽 하나의 석면에 보살상인지 
신장(신령할 신, 장수 장)인지 음각으로 조각한 법의가 완연히 보인다. 아마도 석실의 
큰 돌 벽면에는 장엄한 불 보살이 가득히 조각되었던 것인데 화상을 입어 떨어져나간 
것 같다.
  이 절은 금당 전실 기단에서 축선고저를 보면 금당 앞 팔각석등이 3m 낮게 서 있고 
5층석탑이 4m 낮고, 중문은 11m 낮게 서 있어 미륵전을 밑에서 올려다보면서 오르게 
되어 장엄한 조화의 효과를 내었다.
  절 경내의 기암괴석 사이로 시내가 흐르고, 동쪽과 서쪽으로 시내를 두고 건물들이 
자연지세를 따라 배치되었던 것인데 동쪽의 건물지가 흙에 덮여 모두 걷어내었다. 
사각석등은 파손이 심하지만 완전 복원이 가능하고 미륵석불 앞에 파손된 석상도 
접착하면 본래 모습을 찾겠으며, 당간지주도 육엽연화문(여섯 육, 잎 엽, 연밥 연, 꽃 
화, 글월 문)이 새겨진 장중한 것인데, 지주돌 하나가 부러져 있어 접착하여 꽂이만 
끼우면 복원이 가능하다.
  돌거북은 비좌가 분명하다. 길이가 6m가 넘고 높이가 1.8m되는 한국 최대의 
크기인데, 음각으로 새긴 새끼거북 두 마리가 옆에 붙어 있고 구갑(땅이름 구, 껍데기 
갑)이 없는 소문(흴 소, 글월 문)이다. 행여나 옆의 축대 속에 비신이나 묻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부봉산 계곡에서 물길이 미륵전 후면의 석벽과 서쪽 지반을 침식하고 있어 석축으로 
쌓았는데, 이를 좀더 안전하게 보강해야 하겠다. 석실 서쪽 기단을 4m쯤 시내 속으로 
덧씌워 쌓고 미륵전 후면에 바로 때리는 물줄기를 상류에서 계류를 막아 서쪽 지류로 
물이 흐르게 돌려야 하겠다.
  또한 미륵전 동쪽의 300m 거리의 하늘재 산자락에 있는 거대한 석불 1구가 
파손되어 있다. 불두(부처 불, 머리 두)가 부러져 나가서 앞면을 땅에 박고 있는데, 옆 
귀만 보인다. 석불 상체는 그대로 앉아 있는데 법의는 통견이며, 양 어깨가 완전하고 
삼도가 뚜렷한 목이 있다. 그리고 한돌은 좌상의 하체로서 수인과 법의의 끝부분이 
가냘프게 조각되었다. 원래 미륵불처럼 조립하여 하나의 불상이 형성되도록 되었던 
것인데, 무릎과 어깨 사이의 하체 부분이 없어져 버렸다. 미완성의 작품인지 파손된 
석불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시대 무지한 석수가 정을 대어 석재로 떼어 썼나 보다. 파불의 부러진 
석면에 정 자리의 깊은 상흔이 남아 있다.
  미륵리는 더운 삼복에 오면 냉천의 시냇물에 더위를 씻을 만한 곳이며, 기암절벽과 
선인의 숨결을 따라 세상의 번거로움을 접어둘 수 있겠다. 가을이면 만산이 홍엽으로 
덮여 뜻있는 이와 조용히 숲길을 걸으며 시원한 산바람 속에 은밀한 자연을 느끼며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중원문화권(가운데 중, 근원 원, 글월 문, 될 화, 범위 권)의 
비경을 더듬어 취할 만하다.
  돌아오는 길섶에는 당산숲이 유난히도 눈길을 끌었고, 퇴락한 서낭당의 이끼낀 
기왓골이 한결 아름답게 느껴졌다. 송계계곡과 충주호로 이어지는 월악산의 진경은 
미륵리 사지와 덕주사가 있어 더 한층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잇게 한다. 

     문화유산의 보고 법주사

  법주사는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깊은 계곡에 있는데 조각과 건축의 박물관이다. 
우리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목탑건축인 팔상전(국보 제55호)과 조각의 천재가 기발한 
착상으로 조성한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및 한 송이 연꽃이 만발하는 모습으로 
조각된 석조의 걸작인 석련지(국보 제64호)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보물 제15호인 
사천왕석등, 보물 제216호인 마애여래상, 보물 제848호인 신법천문도 병풍, 보물 
제915호인 대웅전, 보물 제916호인 원통전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인 세존사리탑(16호), 
회견보살상(38호), 석조(70호), 벽암대사비(71호), 사천왕문(46호), 자정국존비(79호), 
괘불(119호), 당간지주, 석옹 등이 있다. 그리고 1989년에 완성을 본 높이 33m(160톤)의 
거대한 청동 미륵대불이 서 있다.
  또 법주사에 딸린 속리산 속의 암자에도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복천암에는 수암화상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과 학조등곡화상탑(충청북고 
유형문화재 제13호)등이 있고 수정암, 중사자암, 여적암, 탈골암, 상환암(위 상, 기뻐할 
환, 초막 암), 상고암 등 유서 깊은 많은 암자가 있다.
  또 1968년 팔상전 해체보수공사 중에 중심 초석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 속에 한글을 혼용한 축원문이 있었다. 이를 보면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버린 팔상전을 1605년에 승군 대장인 사명대사가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리장치는 우리 나라 목탑 속에서 나온 유일한 것이다.
  문화유산의 보고인 법주사가 우리나라 8대 명산 중의 하나인 속리산의 명승과 
어울려 더욱 경이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법주사 창건은 553년(진흥왕 14) 의신이란 승려가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와서 이 절을 세웠다는 설화가 '동국여지승람' 보은현조에 보인다. 그러나 완전한 
대찰이 된 것은 전북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의 제자인 영심 등에 의해 8세기에 
이룩되었다. 진표는 제자에게 속리산으로 들어가 길상초(길할 길, 상서로울 상, 풀 
초)가 난 곳에 절을 지으라 하여 그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 하였다. 이 길상사는 
미륵신앙의 절이었다. 고려 때인 1101년 숙종이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법주사에서 인왕경회(어질 인, 임금 왕, 다스릴 경, 모일 회)를 열었는데 당시 3만 명의 
승려가 모였다 한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태조가 상환암에 와서 기도한 일이 있고,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복천암에서 3일 동안 법회를 열기도 했다. 세조는 법주사에 올 때 속리산 
입구의 정이품송 밑에 쉬면서 소나무에게 판서(장관)의 품계인 이품직을 내렸던 
것이다. 법주사는 신라 승려 영심의 중창 이후 역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번창하여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전 사찰이 불타버렸고, 1624년 벽암스님에 의해 중창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기발한 착상, 생동감 넘치는 석조 예술품
  법주사의 팔상전은 1605년에 중창된 5층 목탑인데, 밑층에서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조화롭게 체감되어 특이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5층의 지붕은 사모지붕으로 그 위에 
탑의 상류부를 갖추고 있다. 이 목탑은 방형의 기단 위에 서 있는데 1층은 
주심폿집이고 2층 이상은 다폿집 양식이다. 길게 빠진 추녀 끝에는 풍탁이 달려서 
바람이 불면 방울소리가 맑게 난다. 내부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8폭 그림으로 그린 
팔상도가 있고 석가모니불과 나한상이 있다.
  팔상전은 한국에서 유일한 목탑으로 건축사 연구에서 지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쌍사자석등은 높이가 3.3m에 이르는데, 두 마리 사자가 뒷발을 하대석에 버티어 
가슴을 대고 마주 서서 앞발로 화사석(불 화, 집 사, 돌 석)이 얹혀 있는 상대석을 
받치고 있다. 이 두 마리 사자는 머리를 위로 향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갈기가 있고 
다리와 몸에는 근육까지 표현되어 있다.
  화사석은 8각으로 네 곳에 화창(불 화, 창 창)이 있다. 석등의 지붕돌도 8각이며 
처마선은 거의 수평인데 추녀끝만 약간 들려 있다. 지붕돌 정상에는 보주(보배 보, 
구슬 주)가 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8세기 석등 중 기발한 착상과 숙련된 조각 
솜씨가 돋보이는 최고의 걸작이다.
  석련지는 높이 195cm의 활짝 핀 연꽃 모양의 석조이다. 장대석으로 짜여진 방형 
지대석 위에 8각의 대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잘룩한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연꽃형 
석련지가 얹혀 있다. 석련지 표면에는 하단부에 여덟 잎의 연꽃이 새겨 있고 그 위에 
또 겹쳐서 커다란 여덟 잎의 연꽃이 위로 향해 피어 있는 형상으로 새겼다. 연꽃잎 
속에 보상화문을 넣어서 화려하고 장중해 보인다.
  석련지 상단에는 작은 기둥을 새기고 난간을 돌렸으며, 그 난간 벽에는 하늘을 나는 
천인상과 보상화문을 화려하게 돌려 새겼다. 이 석련지는 8세기 작품으로 우리 나라 
석조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장중하며 상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걸작이다.
  석련지 옆에는 돌 향로를 머리에 이고 천 년도 넘게 공을 들이고 서 있는 보살상이 
있다. 희견보살(선할 희, 볼 견, 보살 보, 보살 살)이라고 한다. 무엇을 잘못했기에 
저렇게 오래도록 벌을 서고 있는 것일까.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참아온 인고가 
엿보인다.
  대웅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 다포계의 2층 팔작지붕인데 170평에 이르는 장중한 
불전으로 1624년에 중창되었다.
  불전 안에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화신불(될 화, 몸 신, 부처 
불)인 석가모니불과 보신불(갚을 보, 몸 신, 부처 불)인 노사나불이 안치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이 주불인 경우는 불전 이름이 비로전이거나 대적광전, 대광명전 등이 
되어야 하는데 석가불을 주불로 하는 '대웅전'이라는 불전 이름을 하고 있어 어느 때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 경내 절벽에 새겨 있는 마애여래상은 보물 제216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다. 높이 5m의 큰 불상인데 연화좌 위에 두 다리를 크게 벌리고 앉아 있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잘룩한 허리, 삼각형적인 상체, 수평적인 무릎과 직선적인 다리, 
날카로운 연꽃잎, 미소를 약간 머금은 얼굴, 그리고 손은 설법인을 하고 있다. 이 
석불은 미륵불로 볼 수 있다. 이 마애불 앞에는 지장보살상과 설화도(말씀 설, 말할 화, 
그림 도)가 새겨 있다.
  사천왕 석등은 보물 제15호인데, 통일신라 팔각석등 중 우수한 것이다. 8각의 하대석 
위에 8각의 기둥돌을 세우고 8각의 화사석 4면에 창을 내고 4면에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8각 지붕돌 위에 보주가 얹혀 있다. 화사석과 지붕돌과 기둥돌의 비례가 
훤칠하게 조화를 이루는 사천왕상은 사실적인 생동감이 있다.
  원통보전(둥글 원, 통할 통, 보배 보, 대궐 전)은 보물 제916호로 정면 3칸의 정방형 
주심폿집이다. 1624년 중창되었는데 사모지붕의 정자형 건물로 집안에 높이 2.8m의 
목조 관세음보살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외에도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법주사 
산호전에 금신장육상(쇠 금, 몸 신, 어른 장, 여섯 육, 형상 상)과 구리로 만든 높은 
깃대(당: 기 당)가 있는데 그 깃대는 통화 24년(1006)에 세웠다고 새겨 있다"고 하였다. 
이 금신장육상은 1872년 대원군이 경복궁 복원을 할 때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압수해 갔다. 산호전 자리에는 현재 청동 미륵불이 서 있다.

     문장대의 가마솥만한 천연 구덩이
  법주사에는 흥미있는 제사가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대자재천왕사(큰 대, 
스스로 자, 있을 재, 하늘 천, 임금 왕, 사당 사)가 속리산 마루에 있는데 그 신(신령할 
신)이 매년 10월 인일(12지의 셋째로 동물로는 범 인) 법주사에 내려오면 산중 
사람들이 풍류를 베풀고 신을 맞이해 제사를 지냈으며 신은 45일간 머물다 
돌아간다"고 했다. 일본인 학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제사는 나무로 만든 
남근으로 성희(성 성, 희롱할 희)를 하여 신을 위안시켜 법주사의 재앙을 막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화유적 외에 속리산의 자연 또한 절승이다. 속리산(1,508m)은 한국 8대 
명산 중 하나이다. 산봉은 천왕봉을 중심으로 자라봉, 비로봉, 문수봉, 관음봉 등 
기암고봉이 북서쪽으로 활처럼 휘어져 뻗어 남서쪽의 수정봉과 법주사를 아늑히 
감싸고 있다.
  천왕봉 골짜기에서는 맑고 찬 지하수가 대량으로 솟아나는데 세 줄기로 흘러나간다. 
동의 한 줄기는 낙동강 상류가 되고 남의 한 줄기는 금강의 상류가 되며, 북의 한 
줄기는 한강의 상류가 되어 삼파수(석 삼, 물갈래 파, 물 수)라고도 한다.
  산봉우리에는 높고 넓은 암벽 위에 대(정자 대)가 형성되어 절경을 이루는데 8대가 
있다. 8대는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은선대, 봉황대, 산호대이다. 또 
산봉우리가 겹겹이 솟아 유연한 계곡이 도처에 형성되어 8석문이 있다. 이 8석문은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상고내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이다. 
그리고 계곡에는 수정 같은 맑은 물이 폭포가 되고 소(못 소)가 되면서 흐른다.
  '동국여지승람' 속리산조에 보면 "9요(멀 요) 속에 물 한 줄기가 돌고 돌아 굽이쳐 
꺾이는데, 한 굽이마다 다리가 있어 그 다리가 모두 여덟이기 때문에 8교(여덟 팔, 
다리 교)라 했다"한다. 속리산은 중사(가운데 중, 사당 사)에 오른 신령스러운 산으로 
산과 내는 무릉도원과 같은 절승이어서 봉래산과 같은 선경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문장대 기록도 재미있다. "산마루에 문장대가 있는데 층이 쌓인 것이 천연으로 
이루어져 높게 공중에 솟았고, 그 높이가 몇 길인지 알 수 없다. 그 넓이는 사람 3천 
명이 앉을 만하고 문장대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 만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많아지지 않는다"하였다.
  이 기록과 같이 문장대는 속리산 등산로의 절정이 되고 있다. 이같이 비경의 영산인 
속리산 법주사에는 한국 문화사에 감동어린 문화유산이 남아 있어 문명의 공해로부터 
벗어나 맑은 정서와 건강한 휴식을 얻을 수 있는 명소이다.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

  산길의 정취를 느끼고 싶으면 강원도 평창군 진부의 오대산을 답사해야 한다. 
오대산에는 음양오행사상의 방위신과 불교의 방위불(방향 방, 방향 위, 부처 불)이 
융합된 특이한 신앙의 세계도 열려 있다.
  오대산에는 한국 문화사의 정수들이 간직되어 문화적 감동을 함께 주기도 한다. 
한국 범종 중 최고의 국보(제36호)가 상원사에 있는 동종(구리 동, 쇠북 종)이다. 또 
월정사에는 고려시대의 이채로운 조영미술을 보여주는 8각9층석탑(국보 제48호)이 
있다.
  조선시대 목조불상을 대표하는 불상이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한글로 쓴 최초의(1464년작) 필사본인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보물 제140호)이 월정사에 있다. 세조 때 입던 조선의 품격 높은 
의상들(보물 제793호)도 보존되어 있다.
  오대산은 일찍이 역대 왕실과 인연되어 깊은 역사를 간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신(정자 대, 메 산, 다섯 오, 일만 만, 참 진, 
몸 신)조와 '명주오대산 보질도태자전기(바다 명, 고을 주, 다섯 오, 정자 대, 메 산, 
보배 보, 꾸짖을 지, 무리 도, 클 태, 아들 자, 전할 전, 기록할 기)'가 있고 민지가 쓴 
'오대산월정사사적(다섯 오, 정자 대, 메 산, 달 월, 깨끗할 정, 절 사, 일 사, 자취 
적)'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태종의 원찰로 사자암을 중창한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권근의 기문(기록할 기, 글월 문)으로 남아 있다. 세조는 온몸이 
곪아 들어가는 난치병을 앓다가 오대산 계곡 물에 목욕을 하고 문수동자를 친견한 후 
회복되고, 고양이에 의하여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일화가 서려 있는 깊은 
인연으로 상원사를 중창하게 되었는데, 이 일은 신미의 권유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신라의 보천과 효명 두 태자가 오대산에 숨어들어 산의 영기에 몰입되어 종교의 
체험을 얻고 문수진신을 공양하며 지내다가 동생 효명태자는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후에 왕이 되었는데, 신라 성덕왕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자장은 문수진신을 
만나고자 오대산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했다.
  조선왕조는 오대산을 삼재가 미치지 못하는 길한 곳으로 여겨 1606년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사기 사, 곳집 고)를 오대산에 건립하였다. 이 사고의 왕조실록은 일제 
때 일본인이 본국으로 가져갔다가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었고, 건물은 6.25전쟁
때 소실되어 1991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우리 나라 사고 건물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오대산(1,563m)은 강원도 평창군, 홍천군, 명주군에 걸쳐 있는 태백산맥에 속한 
고산준령이다. 산의 형태는 중대를 중심으로 북대, 남대, 동대, 서대의 다섯 봉우리가 
오목하게 연꽃처럼 둘러싸고 있다.
  오대산 계곡의 물은 오대천이 되며 남한강의 원류이다. 이 오대천은 서대 밑의 
샘에서 솟아나는데 그 샘물을 우통수(소 우, 통 통, 물 수)라 한다. 이 우통수가 
남한강의 시원(처음 시, 근원 원)이 된다. 여기에 수정암이 있다. '삼국유사'의 
'명주오대산 보질도태자전기'를 보면 음양오행사상과 방위불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청색방(푸를 청, 색 색, 방향 방)인 동대 만월산에는 관음 진신 1만이 상주하고, 
적색방인 남대의 기린산에는 8대보살을 수반으로 1만의 지장보살이 상주하며, 
백색방인 서대의 장령산에는 무량수(아미타)여래를 수반으로 1만의 세지보살이 
상주하고, 흑색방인 북대의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수반으로 오백나한이 상주하며, 
황색방인 중대의 풍로산에는 비로자나불을 수반으로 1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진여권(상원사)에는 문수대성이 아침마다 현신하여 36형으로 나타났다.

  신라의 보천, 효명 두 태자는 차를 달여 진여원에서 이들 문수진신을 공양했던 
것이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중국의 오대산(일명 청량산) 신앙과 같은 것으로 
사방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천년의 신비와 적막감을 맛보는 길
  월정사의 창건은 자장이 초막을 짓고 문수진신을 기다렸다는 643년에 시작되는데, 
이는 오대산 개산을 의미한다. 월정사 8각9층석탑(높이15.2m)을 보면 고려시대의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초기부터 8각의 석탑이 유행했는데 이는 8각의 목탑만을 
건립했던 고구려적 특색인지도 모른다. 이 석탑은 미소한 체감으로 9층까지 올라갔다. 
옥개석에 달린 풍경이 바람에 은은한 소리를 낸다. 상류부가 온전히 남아 있는데 노반, 
북발, 양화, 보륜은 석제이고 보개, 수연은 청동제로 이채롭다.
  탑 앞에는 석조보살상(보물 제139호)이 앉아 있는데 활달하고 부드러운 조각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고졸한 미소, 눈, 입이 작은 풍만한 얼굴과 머리에 관을 쓰고, 왼쪽 
무릎을 세워 왼쪽 팔꿈치를 동자상이 받치고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이런 보살상은 강릉 신복사지에도 남아 있는데, 이 지역에 고려시대의 뛰어난 
석조미술가들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월정사 적광전 등의 건물은 6.25전쟁
때 소실되어 뒤에 복원한 것이다.
  상원사는 705년 진여원으로 창건되었고 신라의 보천, 효명 두 태자가 은거하였던 
곳이다. 그후 조선의 세조에 의해 1466년 중창이 완료되어 불전과 승방이 대단한 
규모였다. 왕실이 참가하는 거대한 행사가 열리기도 했으며 세조의 원찰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6년 큰불이 나서 모두 타버리고 1947년 금강산 마하연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하였다. 6.25전쟁 때는 이 절을 지키면서 수행, 정진하던 당대의 고승 한암에 의해 
월정사 등의 다른 오대산 사찰과는 달리 전화를 모면하였다.
  이 상원사에는 성덕왕 24년(725)에 주조한 명(새길 명)이 있는 동종이 있다. 종 몸에 
있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하늘을 나는 천인과 당초문띠나, 종 고리의 용 조각 등이 
대단히 생동감을 주면서 조화롭고 아름답다. 이 종은 원래 안동에 있던 것을 세조 때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상은 얼굴은 동안이고 머리는 두 갈래로 땋은 동자상인데, 
이는 오대산 문수신앙을 상징하는 대표적 불상이다. 근년에 이 불상의 배 속에서 
복장유물이 발견되어 발원문, 불경, 의상들이 현재 상원사에 진열되어 있다.
  중대(가운데 중, 정자 대)에 있는 적멸보궁은 석가의 진신이 상주하는 곳으로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적멸보궁 자리에는 용의 눈의 지세로 샘이 솟는데, 이 샘을 용안수(용 
용, 눈 안, 물 수)라 한다. 이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
  적멸보궁에 오르는 계곡길에는 수백 년 늙은 전나무숲이 울창하여 천년의 신비와 
적막감을 맛보게 한다. 동대에는 관음암, 남대에는 지장암이 있고 지장암에는 여승들이 
거처하고 있다.
  한국 명승 제1호인 청학동 소금강에는 기암괴석과 층암절벽, 폭포, 담소 등이 절경을 
이루는데, 율곡 선생이 금강산의 축소판이라 하여 소금강이라 이름했다. 천하대, 
십자소, 연화담, 삼선암, 청심대, 학유대, 세심대, 구룡연, 만물상 등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명상에 잠기게 한다. 

  소원을 들어주는 꿈의 낙산사

  낙산사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해안가 낙산에 있다. 절 앞에는 망망대해가 
전개되어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낙산사에 갈 때는 이기심이나 오만한 집착을 
벗어버리고 가야만 자비의 감흥과 원(바랄 원)의 꿈을 볼 수 있다. 미혹에 감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낙산사는 관음신앙의 도량이다. 그래서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이 있을 뿐이며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같은 불상이 없다. 낙산이란 원래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보타낙가산의 준말이다. 낙산사는 삶의 원을 들어주는 자비로운 절이며, 우리 
나라 사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담장이 있고 조선 종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범종이 
남아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설화가 있다.
  '삼국유사'의 낙산이대성(물 낙, 메 산, 둘 이, 큰 대, 성인 성) 관음(볼 관, 소리 음) 
정취(바를 정, 추창할 취) 조신(고를 조, 펼 신)조에 창건의 설화와 조신의 사랑의 꿈이 
기록되어 있다.
  낙산사는 671년(문무왕 11) 의상에 의해 창건되었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관음의 진신이 낙산 동쪽 바닷가 굴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친견하기 위해 찾아갔다. 
굴 입구에서 7일 동안 재계하고, 깔고 앉았던 자리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중(용 용, 무리 중)과 천중(하늘 천, 무리 중) 등 팔부신장이 굴 속으로 그를 인도했다. 
공중을 향해 예배드렸더니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주므로 받아서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여의주 한 알을 다시 바쳤다. 이들을 가지고 나와서 의상은 7일 동안 재계하고 
나서 비로소 관세음보살의 참모습을 보았다.
  관세음보살이 말하기를 "자리 위의 저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좋으리라"했다. 의상이 이 말을 듣고 굴 속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이에 그 자리에 불전을 지어 관음상을 모시고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며, 그가 받은 두 구슬을 불전에 모셨다. 창건 이후 원효도 관음을 
친견하기 위해 이 절을 찾았다. 원효는 절에 이르기 전에 관음의 화신을 만났으나 
알아보지 못했고, 낙산사에 와서도 풍랑이 심해 관음이 상주하는 굴에 들어가지 
못했다 한다.

     인생의 허무를 꿈꾸는 불당
  낙산사 승려 조신의 사랑의 꿈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의 장원이 명주 날이군에 있었는데, 낙산사의 
중 조신을 보내 장원을 관리하게 했다. 조신은 장원에 있을 때 태수 김흔공의 딸을 
보고 반하게 되었다. 그는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가서 남몰래 그 여인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지 몇 해 동안에 그 여인은 이미 배필이 
생겼다. 그는 또 불당 앞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 소원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면서 해가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잠이 들었다.
  꿈에 갑자기 그 여인이 기쁜 얼굴로 나타나더니 문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면서 
말하였다.
  "저는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된 뒤로 마음 속으로 사랑하여 잠시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서 억지로 딴 사람을 좇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부가 되기를 원해서 왔습니다."
  조신은 매우 기뻐서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40여 년을 같이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었다. 그러나 집은 다만 네 벽뿐이요, 나물죽마저도 먹을 길이 없어서 드디어 
식구들을 데리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걸식하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로 두루 
다니니 옷이 백 갈래로 찢어져 몸을 가릴 수가 없었다. ...큰 아이가 굶어 죽었다.
  그러자 부인이 말하기를 "처음 만났을 땐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옷도 
깨끗했습니다. ...집을 나온 지 50년 동안에 정이 깊어 뗄 수 없고 사랑도 
굳어졌으니 가히 두터운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몸이 쇠약해지고 
병은 깊어 주림과 추위에 견디지 못하게 되었으니 부부간의 사랑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고운 얼굴과 아리따운 미소도 풀잎의 이슬이요, 지초와 난초같이 굳은 
약속도 버들가지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는 내가 있어 근심되고 나는 
그대가 더욱 근심되니 헤어지는 게 좋겠습니다."하였다.
  이렇게 헤어지는 순간에 조신은 꿈에서 깨어났다. 불전 속의 등잔불이 깜박거리고, 
수염과 머리털도 모두 희어졌고, 넋을 잃은 듯 그는 세상일에 뜻이 없었다. 조신은 
생의 허무를 느껴 후에 사재를 털어 정토사를 세우고 수도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한다.
  춘원 이광수는 조신의 사랑을 다룬 '꿈'이라는 소설을 써서 발표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설화들이 있는 낙산사는 역대 왕실의 비호를 받는 사찰이 되었다. 고려 
태조는 봄, 가을로 관리를 보내 재를 올리게 하였다. 몽고침략 때 전 사찰이 불탄 것을 
1468년 조선의 세조가 크게 중창하도록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또 불타버려서 
1643년에 복구했는데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지금 원통보전 건물은 1953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낙산사 동산 위에는 1977년부터 
5년간에 걸쳐 조성한 높이 16m에 이르는 석조해수관음보살 입상이 동해를 바라보고 
웅장하게 서 있다. 낙산사 홍련암에는 해식동굴이 있는데, 이곳이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한 굴이다. 의상이 좌선했던 자리에 의상대가 서 있다.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일출 광경은 장관을 이룬다.
  한국의 절 담장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낙산사 담장(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이다. 조선초기에 조성된 담으로 높이 3.7m, 길이 220m에 이른다. 담장 안쪽은 
황토와 암키와를 수평으로 쌓고 원형의 화강암을 정연하게 박았다. 이 담 바깥쪽은 
막돌담이다. 2단의 장대석 위에 한단의 장대석을 놓고 쌓은 후 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낙산사 동종(보물 제479호)은 1469년에 주조된 것으로 높이 158cm, 입지름 
98cm이다. 세조를 위해 그의 아들인 예종의 명으로 만들었다. 용두의 용비늘은 
생동감이 넘치고 용통, 유곽, 유두가 없는 대신 아름다운 보살입상 넷을 배채하고 
있다. 종 밑 띠에는 구름무늬를 부드럽게 새겼다. 이 종은 주조 연대와 조각장 
주성장의 이름이 명문으로 새겨 있다. 신라나 고려 종의 양식을 벗어난 조선 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낙산사 7층석탑(보물 제499호)은 높이 6.2m인데 원통보전 앞마당에 서 있다. 탑 밑 
받침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 있고 탑신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조각했다. 탑 
지붕돌의 추녀끝이 심하게 들려 있으며 얇은 지붕돌로 인하여 경쾌한 아름다움을 주고 
있다. 상륜부는 모두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라마탑의 모양을 하고 있다.
  낙산사 홍예문은 1466년 세조가 이 절에 왔을 때 세운 것으로 홍예틀이 26개나 돌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당시 강원도 고을이 26개였으므로 고을을 상징해서 26개로 
조성했다 한다. 이 홍예문은 토성의 성문이 되어 있다.
  설악산 등산객이나 한여름에 해수욕 가는 사람들이 낙산사에 많이 들르는데, 이 
곳에 가면 사랑의 원(바랄 원)을 드리고 허무의 꿈을 꾸어 보기 바란다. 인생이란 
어쩌면 허무의 꿈 때문에 사는지도 모른다. 
 
  석조미술의 야외박물관 실상사

  실상사(참될 실, 모습 상, 절 사)는 선종 사찰이므로 육신이 마음을 앞세우고 가는 
절이다.
  불교의 경전을 몰라도 좋다.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치면 된다. 세속의 
인간사에 얽매어 연민에 괴로워하는 고뇌가 겹치면 밖으로부터의 모든 인연을 끊어라. 
그리고 지리산 깊은 계곡 맑은 산내가에 터잡아 천왕봉과 마주한 실상사에 들러보라. 
거기서 눈을 감으라. 몸과 마음이 모두 고요한 정(고요할 정)의 경지에 들어 좌선해 
보라. 생이 무엇인가를 진실로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이 족하면 모든 뜻이 일어나는 것이다.
  88고속도로 지리산 휴게소에서 갈려들어 20분만 차로 달려가면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가 되는데, 맑은 산내를 건너 평평한 분지에 실상사가 있다.
  이 절은 828년 우리 나라 최초의 선종 사찰로 창건되었다. 선종이란 석가가 
영산에서 설법할 때 말없이 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을 때(점화시중:집을 점,
꽃 화, 보일 시, 무리 중) 제자인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달아 미소를 지었다는 데서 
시작되었으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이심전심), 마음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종파이다.
  중국에서는 달마대사가 전파한 이래 널리 퍼졌으며 우리 나라는 9세기부터 당나라 
유학승들에 의하여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처음에 9개의 선종 산문(메 산, 문 문)이 개창되었는데, 이를 
구산선문(아홉 구, 메 산, 고요할 선, 문 문)이라 한다. 즉 홍척의 실상선문(참될 실, 
모습 상, 고요할 선, 문 문), 도의의 가지산문(부처이름 가, 알 지, 메 산, 문 문), 
혜철의 동리산문(오동나무 동, 속 리, 메 산, 문 문), 도윤의 사자산문(사자 사, 아들 자, 
메 산, 문 문), 낭혜의 성주산문(성인 성, 살 주, 메 산, 문 문), 범일의 
도굴산문(성문층대 도, 산높을 굴, 메 산, 문 문), 지증의 희양산문(햇빛 희, 볕 양,
메 산, 문 문), 현욱의 봉림산문(봉새 봉, 수풀 림, 메 산, 문 문), 이엄의 수미산문을 
말한다.
  최초의 선종 사찰인 실상사를 창건한 홍척은 장흥 가지산의 보림사를 창건한 도의와 
함께 당나라에 가서 선법(고요할 선, 법 법)을 배우고 돌아왔던 것이다. 선종이 
들어오면서 사찰에 승려의 탑인 부도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9세기 팔각원당형 
석조부도가 선종의 승려탑으로 설치된 것이다.

     통일신라 3층석탑의 완전한 원형
  실상사는 1468년 큰 화재로 소실되어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1700년에 30여 
동의 대찰이 중창되었다. 그후 여러 번 중수했으나 퇴락이 심했는데, 근년에 사역을 
정비하고 사천왕문을 세우고 옛 건물과 석조건물들을 보수하여 선풍이 다시 감돌게 
되었다.
  이 절에는 통일신라 3층석탑의 상륜부까지 남아 있는 완전한 원형을 볼 수 있어 
대단히 귀중하다.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를 복원할 때 실상사의 3층석탑 상륜부에서 
그 모형을 떠갔던 것이다.
  실상사의 중요문화재들은 다음과 같다.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3층석탑, 보물 
제33호인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 보물 제34호인 실상사 부도, 보물 제37호인 
실상사 3층석탑 2기, 보물 제38호인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 보물 제39호인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비, 보물 제40호인 백장암석등, 보물 제41호인 실상사 철제여래좌상, 
보물 420호인 백장암 청동은입사 향로, 보물 제421호인 실상사 약수암목조탱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인 극락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인 실상사 
위토개량성책, 민속자료 제15호인 실상사 석장생이 있고 사역 전체가 사적 제309호로 
지정되어 우리 나라 석조미술의 야외박물관 같은 사찰이다.
  특히 4천 근의 철로 주조한 철조여래좌상은 우리 나라 철불 중에서도 대단한 걸작일 
뿐 아니라 통일신라 철물 주조의 과학기술사적 자료로도 중요한 문화재이다.
  그리고 지금은 파괴된 범종이지만 실상사 범종은 그 아름다운 비천상과 당좌, 유곽, 
연주문, 당초문, 인동당초문 등 경주 성덕대왕신종과 비슷한 세련된 주조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백장암 3층석탑이나 실상사 3층석탑의 상륜부에서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노반, 복발, 보륜, 보개, 수연 등의 섬세한 조각을 볼 수 있다. 우리 나라 신라 석탑 
중에 이곳과 같이 상륜부가 완전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실상사에 가을이 오면 사역에 선 감나무들이 또한 경이로운 경관을 연출한다. 곱게 
익은 붉은 감과 돌각담, 이끼낀 기와지붕과 석탑이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가 된다.
  지리산 깊은 산골이라 산내물도 맑고, 서늘한 바람이 몰고가는 들의 맑은 풍광은 
사람의 마음을 구름처럼 가볍게 세척해 준다. 

  도솔천의 미륵세계와 금산사

  전주시에서 약 30분가량 모악산을 향해 차로 달려가면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에 
이른다. 금산사는 모악산 계곡 속 널찍한 산록에 웅장하게 터잡고 있다.
  금산사에 가면 우리 나라에서 제일 높은 3층의 장엄한 미륵전(국보 제62호) 건물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한국 건축사를 전공하거나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꼭 가보아야 
할 것이다. 또 고려의 석조미술을 연구하려면 금산사의 석등(보물 제828호), 석종(보물 
제26호), 석련대(보물 제23호), 5층석탑(보물 제25호), 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혜덕왕사진응탑비(보물 제24호), 심원암 3층석탑(보물 제29호), 노주(보물 제22호) 등을 
꼭 볼 필요가 있다. 금산사는 고려 석조미술의 박물관 같은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 보면 도솔천의 미륵세계가 지상에 전개된 법상종(법 법, 서로 상, 으뜸 
종)의 근본도량인데, 대적광전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한 장엄한 화엄세계가 
펼쳐져 있다.
  금산사의 사적을 알 수 있는 가장 신빙성 있는 기록은 1635년 해안이 편찬한 
'금산사사적'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산사의 창건연대는 백제 법왕 원년이다. 당시에는 작은 사찰에 
지나지 않았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통일신라시대 진표에 의해서이다. 
당시 금산사 중창은 762년에 시작하여 766년에 끝났다. 이때 미륵장육상이 조성되고 
미륵전이 건립되었다. 이 미륵전 남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계법을 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후 후백제 견훤이 935년 이 절에 머물면서 절의 보수가 
있었다. 견훤은 결국 그 아들 신검(신령할 신, 칼 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당시 법상종의 대종사이며 왕사인 혜덕이 1079년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다시 한 번 대찰로 중창하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석등, 석종, 석탑, 
석련대 등이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금산사가 가장 장엄하고 
번창한 대찰이었다. 그러나 1598년 임진왜란 때 모든 불전이 왜병에 의해 불타버렸다. 
임진왜란 때 이 절에는 1천여 명의 승군을 이끌고 싸우던 처영이 주둔하고 있었다.
  1601년부터 복구공사가 시작되어 1635년에는 주요 불전이 완공되었다. 그후 고종 
때에 미륵전, 대적광전, 대장전 등의 건물 보수가 있었고 1934년에도 큰 보수가 
있었다. 1989년 대적광전이 화재로 소실되어 1991년 복원되었고,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미륵전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미륵전과 사리계단
  금산사의 중요한 문화유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금산사미륵전(국보 제62호)은 우리 나라 불전 중 하나밖에 없는 3층 건물이다. 
최초의 창건은 766년 진표에 의해 이룩되었으나 지금 있는 건물은 163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미륵전 속에는 높이 11.82m에 이르는 거대한 소조(토우 소, 지을 조) 미륵불이 
중심에 서고 좌우에 8.79m에 이르는 협시보살이 서 있다. 건물은 3층 전체가 탁 트인 
통층건물이다.
  1층에는 네 개의 높은 기둥을 세우고 이 기둥을 중심으로 바깥기둥이 서 있는데, 
높은 기둥과 바깥기둥 사이에 퇴량을 걸었다. 이 퇴량 위에 2층의 바깥기둥을 세우고 
중심의 높은 기둥과의 사이에 또 퇴량을 걸었다. 3층은 1층에서 올라온 높은 기둥 네 
개만으로 팔작지붕을 받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목탑구조에서 중심에 심주(마음 심, 기둥 주)를 세워 보를 거는 
구조와는 다른 건축기법이다. 그러기에 이 건물은 목탑의 구조로 건립된 것이 아니라 
3층의 전각 구조로 건립된 것이다. 각 층의 추녀를 길게 빼기 위해 추녀 끝에 활주(살 
활, 기둥 주)를 세우고 있다. 이 불전은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인데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창방(창성할 창, 박달나무 방) 
위에 평방(평평할 평, 박달나무 방)이 있고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있는 다폿집이다. 188점의 벽화가 층층이 그려져 있는데, 1992년 보수하면서 벽화들에 
대한 과학적 보존처리를 하였다.
  미륵전에는 1층에 대자보전, 2층에 용화지화(용 용, 꽃 화, 갈 지, 모일 회), 3층에 
미륵전이라는 편액에 붙어 있다. 건물양식은 조선 중기에서 말기로 넘어가는 시대적 
양식이 공포 등에 나타나 있다.
  석등은 높이가 3.9m인데 여덟 잎의 복련이 조각된 대석을 받치고 훤칠한 팔각기둥이 
서고, 그 위에 팔각 불집돌과 지붕돌, 보주가 설치되어 모든 부재가 온전히 남아 있는 
고려 석등이다. 백제 계통의 연꽃무늬를 새긴 아름다운 조형을 보여준다.
  석련대는 한 개의 돌로 상, 중, 하대를 만들었는데 뛰어난 조각 솜씨가 엿보인다. 원래 
불상을 모셨던 대석으로, 이 석련대에 조각된 겹겹의 연꽃잎은 잎체감을 높였고, 
출렁이는 흐름의 율동감을 표현한 고려 석조 조각의 뛰어난 작품이다.
  금산사 사리계단(집 사, 이로울 리, 경계할 계, 제터 단)은 아주 특이한 것이다. 이런 
사리계단은 고려시대에 와서 조성되었는데, 경남 양산 통도사, 개성 불일사(부처 불,
날 일, 절 사)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사리계단은 2단의 정방형 기단인데 하층 기단은 한 변의 길이가 12.5m, 높이가 
0.8m이며, 상층 기단은 한 변의 길이가 8.5m, 높이가 0.6m이다. 상하 기단 면에는 
불상과 신장상(신령할 신, 장수 장, 형상 상)이 조각되어 있다. 하층 기단 외곽은 원래 
난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석주가 남아 있다. 이 석주에 기이한 인물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석란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 석상이 세워져 있다.
  사리계단 위의 중앙에는 석종이 설치되어 있는데, 석종의 기단 네 귀퉁이에는 
사자의 머리를 조각하였고 석종이 자리하는 주위는 활짝핀 복판연화문을 조각하였다. 
석종의 정상에는 아홉 마리의 용머리를 조각하고 그 위에 앙련의 연꽃을 조각했으며, 
그 위에 보주석이 얹혀 있다. 이는 인도의 불탑 형식에서 연유되는 것으로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사리계단 남쪽 정면에 5층석탑(높이 7.2m)이 서 있다. 이 석탑은 추녀선을 약간 들고 
있어 경쾌한 아름다움을 주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육각다층석탑(높이 2.18m)은 원래 봉천원에 있는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데, 현재 
대적광전 앞에 있다. 점판암으로 만들어 6각의 앙련석과 복련석이 접해 있는데, 그 
사이에 탑신이 있었으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상부 2층만 탑신이 남아 있다.
  이 탑신에는 음각선으로 조각한 좌불이 새겨져 있다. 옥개석 아랫면에는 중심에 
용과 초와문이 선각되어 있다. 이 탑은 현재 11층의 옥개석이 남아 있는데, 까만 
점판암에다 섬세하고 우아한 조각을 하여 공예적 기교가 넘치는 고려초의 석탑이다.
  대장전은 원래 경판을 모셨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불상을 모시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팔작집인데, 본래 목탑구조 건물로 지붕 위에는 복발과 보주가 
설치되어 있다.
  이 건물에는 아름다운 조각으로 치장한 이채로운 문살이 특이하다. 
혜덕왕사진응탑비는 1111년에 세워진 탑비로 혜덕왕사의 생애를 알게 한다. 지금은 
글씨가 마멸되어 읽을 수 없으나 비문은 '해동금석원(바다 해, 동녘 동, 쇠 금, 돌 석, 
동산 원)'과 '조선금석고(아침 조, 깨끗할 선, 쇠 금, 돌 석, 헤아릴 고)'에 실려 있다. 이 
석탑의 귀부 조각은 대단히 정교하고 환상적이다. 

  지리산의 명찰 화엄사

  세상이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하거든 지리산에 들어가, 몸은 산정(메 산, 맑을 정)에 
맡기고 정신은 화엄세계에 머물러 보라. 후련히 가슴을 씻을 수 있을 것이다.
  지리산의 봄은 세석평전에 피는 광활한 철쭉밭에서 장관을 이룬다. 여름이면 
불일폭포의 백척단애에서 떨어지는 오색 물줄기와 노고단의 훈풍 속에서 서늘한 가을 
기운을 맛보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운무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 가을이면 피아골에 
타는 만산홍엽이 온 산을 불바다로 만든다. 겨울이면 기암괴석과 울창한 원시림의 
바다가 은빛으로 빛나는 설화로 전개된다.
  천왕봉에는 신령스러운 영기가 서려 있다. 이 봉에 오르면 운상(구름 운, 위 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구름의 바다 위에 섬처럼 떠 있는 산봉우리들과 그 사이로 태양이 
붉게 솟아오르는 광경은 또 하나의 별천지이다.
  지리산은 백두산의 정기가 태백산맥을 타고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소백산맥 끝에 
와서 우람히 뭉쳐 솟은 머리산이다. 그래서 두류산이란고도 한다. 지리산은 수많은 
영봉(신령 령, 산봉우리 봉) 준령이 줄기줄기 뻗어서 수십 리씩에 이른다. 깊은 
계곡에는 기암절벽과 폭포와 소(늪 소)를 이룬 산내물이 흐르며,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인적미답(사람 인, 자취 적, 아닐 미, 밟을 답)의 계곡들이 많다.
  지리산은 참으로 높고 웅장한 산이다.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 전북 남원군, 
전남 구례군의 5개군에 걸치는 산역(메 산, 구역 역)으로 동서가 60km, 남북이 30km가 
넘는다. 지리산의 주봉은 천왕봉(1,915m), 노고단, 반야봉의 세 봉우리이다.
  '삼국사기'에 지리산은 신라가 중사(가운데 중, 제사 사)를 지내는 오악(다섯 오,
큰산 악) 중 하나이며 남악신(남녁 남, 큰산 악, 신령할 신)을 모시는 남악사를 세워 매년 
제사를 모신 신령스러운 산이다. '택리지'에는 "금강산을 봉래산이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하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하여 이른바 삼신산(석 삼, 신령할 신, 메 
산)이다"라고 하였다. '제왕운기'에 "지리산의 주신(주인 주, 신령할 신)은 
선도성모(신선 선, 복숭아 도, 성인 성, 어미 모)이며 또한 노고단이라고도 불린다. 
우리 태조(왕건)가 늘 이곳에서 기도하며 지리산신의 감몽(감동할 감, 꿈 몽)을 
받았으므로 남악사를 남원소의방에 옮겨 세웠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지리산에는 많은 명찰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동쪽의 산청군 덕산쪽에 
법계사, 대원사, 남쪽에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 북쪽에 실상사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절은 화엄사이다.
  화엄사는 한국 미술사의 보고로서 신라말 화엄종이 북악 부석사파와 남악 
화엄사파로 갈라섰을 때 남악파의 종찰(마루 종, 절 찰)이 되었던 중요한 절이다.

     조선시대에 승군의 중심 사찰이 되어
  화엄사 창건에 대한 기록은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호수 호, 남녁 남, 길 
도, 구할 구, 예도 례, 고을 현, 지혜 지, 다를 리, 메 산, 큰 대, 빛날 화, 엄할 엄, 절 
사, 일 사, 자취 적: 1636)', '봉성지(봉황 봉, 재 성, 기록할 지: 1797)', '구례속지(구할 
구, 예도 례, 이을 속, 기록할 지)' 등이 있으나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인도 스님 
연기조사가 진흥왕 5년(544)에 창건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확실한 근거가 없다. 신라에 
화엄사상을 소개한 것은 643년 중국에서 귀국한 자장율사이며, 최초의 화엄사찰 
부석사를 창건한 것은 676년 문무왕의 명을 받은 의상대사이기 때문이다.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석탑은 8세기말-9세기초의 것으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 
'봉성지'의 의상이 왕명을 받아 3층의 장육전(어른 장, 여섯 육, 대궐 전)을 건립하고 
그 벽 둘레에 석각(돌 석, 새길 각)의 화엄경을 둘렀다는 기록도 맞지 않는다. 현재 
석각화엄경(돌 석, 새길 각, 빛날 화, 엄할 엄, 경서 경)은 '정원본사십화엄(곧을 정, 
으뜸 원, 근본 본, 넉 사, 열 십, 빛날 화, 엄할 엄)'으로 797년에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이므로 의상 당대에는 없었던 경(경서 경)이며, 이 석경의 글씨는 신라말 최치원 
선생이 쓴 하동 쌍계사 진감국사비문(참 진, 거울 감, 나라 국, 스승 사, 비석 비, 글월 
문)과 비슷한 해서체이다.
  아마도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 의상대사가 화엄 십찰(열 십, 절 찰)을 전교(전할 전, 
가르칠 교)의 도량으로 삼았다는 십찰에 의상이 열반한지 백 년 후에 창건된 해인사 
등을 열거하고 있어 화엄사도 자장이나 의상의 문도들이 창건하고 화엄사상을 전수한 
절이라는 의미가 합당할 것이다.
  화엄사가 대찰로 중창되는 것은 도선국사 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선은 826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 898년 72세로 열반하기까지 화엄사가 주처(살 주, 곳 처)였다. 
신라 헌강황은 화엄사에 있는 도선의 도력을 흠모하여 궁궐로 불러 법문을 듣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왕실은 화엄사 중창에 대대적인 지원을 하였다.
  고려 태조는 도선의 풍수지리설(도참설)을 훈요십조(훈계할 훈, 중요 요, 열 십, 가지 
조)에 인용할 만큼 도참설에 심취하였다. 그리하여 도선이 머물던 화엄사 중수를 
각별히 배려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운 승군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어 전 사찰이 불타버렸다. 이러한 연유로 선조, 인조, 숙종 등 
조선왕실의 각별한 지원을 받고 벽암(푸를 벽, 바위 암) 등 대덕의 재건 노력으로 
각황전 같은 한국 최대의 불전을 만들게 되었다.
  지금 화엄사의 건물들은 모두 17세기 이후의 건물들이다. 화엄사는 일주문을 
들어가면 금강문(쇠 금, 굳셀 강, 문 문)이 있고, 이를 지나면 사천왕문이 있어 삼문(석 
삼, 문 문)의 양식을 취하였다. 천왕문을 지나 50m쯤 가면 7칸의 보제루가 있고 
보제루 옆에 종루(쇠북 종, 다락 루)가 있다. 정면 단 위에는 대웅전과 원통전이 있고 
측면 단 위에는 각황전이 서 있다.
  각황전은 원래 신라 때 장육전이 있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99년(숙종 25)에 짓기 시작하여 3년의 공사 끝에 1702년에 완공되었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의 웅대한 다폿집이다. 한국 사찰의 불전 중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이다.
  건물의 기단은 신라 때 것이며, 각황전의 현판은 숙종이 내려준 것이다. 내부의 
불상은 높이 3m가 넘는 거상들로 1703년에 조성되었는데, 중앙은 석가모니불, 좌우에 
문수, 보현보살, 그 좌우에 아미타불, 다보여래, 그 좌우에 관음, 지장보살이다. 각황전 
앞 석등은 9세기 것으로 높이 6.36m의 한국 최대의 석등이다. 석등의 기둥돌이 
원통형의 북 같은 고복형(북 고, 배 복, 형상 형) 석등이다. 불집돌과 지붕돌도 유난히 
크다. 지붕돌 위에 보주도 온전히 남아 있다. 조각은 소박하면서 웅건하여 각황전과 잘 
어울려 보인다.
  사사자3층석탑(넉 사, 사자 사, 아들 자, 석 삼, 층 층, 돌 석, 탑 탑)은 '효대(효자 효, 
정자 대)'라는 절 사북쪽 고대(높을 고, 정자 대) 위에 있는데 불국사의 다보탑과 
쌍벽을 이루는 기발한 착상의 예술품이다. 밑 기단에 천의(하늘 천, 옷 의)를 휘날리는 
천인상들이 앉아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어 불천(부처 불, 하늘 천)을 받치고 있다.
  분황사 모전탑이나 불국사 다보탑에는 사자가 탑 기단에 나와 앉아 사방을 지키고 
있는데, 화엄사 탑에서는 석사자가 3층석탑의 기둥돌처럼 탑을 이고 있고 중앙에 
승상(중 승, 형상 상)이 서 있다. 이 탑은 다보탑보다는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8세기말이나 9세기초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가 되면 충북 제천군 한수면 송계리의 
사자빈신사지석탑처럼 석사자가 낫게 앉아 탑을 받치는 양식으로 바뀐다.
  사사자3층석탑 앞에는 공양상이 있는 석등이 있다. 대웅전 앞의 동서 5층석탑은 
기단에 팔부중상, 탑신에 사천왕상이 조각된 석탑으로 사사자3층석탑보다 후대인 
9세기 것이다. 원통전 앞에도 네 마리 석사자가 한 층의 탑신을 이고 있는 석탑이 
있다. 이 석탑도 9세기 신라말의 것이다.
  화엄사 석경(돌 석, 경서 경)은 정강왕대에서 경순왕대(927-935)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1630년에 건립되었다. 
화엄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대웅전의 편액은 선조의 아들 의창군의 글씨이다. 
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 

  승보사찰 송광사

  송광사는 호남의 명산인 승주 조계산(887m) 깊은 계곡 맑은 계류가에 터잡고 있다. 
송광사는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선풍(고요할 선, 바람 풍)의 본산인 수선(닦을 수, 
고요할 선)의 총림이며, 문화유산의 정수들이 가득히 간직된 보고이기도 하다.
  송광사에 관한 기록은 '송광사사적비', '보조국사비명', '승평속지' 등에 전한다. 
송광사의 창건은 신라말 혜린선사에 의해 길상사라는 작은 절이 이룩되고 1200년경 
보조국사에 의해 정혜사로 크게 중창된 후 1204년 고려 희종이 글을 내려 수선사로 
이름을 바꾸게 하였다. 고려 때는 절을 사(모일 사)라 하기도 하였다.
  수선사 시대는 조선초기까지 계속되었다. 송광사는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폐사가 
되다시피했고, 그후 다시 중창되었다가 1842년 큰 화재로 1252칸의 건물이 불타고 
그후 복구되었으나 1951년 5월, 6.25전쟁시 공비의 방화로 절 중심 건물이 모두 
불탔다.
  1955년부터 일부 건물이 재건되었으며 1983년부터 대웅전, 지장전, 박물관 등이 모두 
중창되었다. 중창된 대웅전은 개성 만월대의 궁전건물처럼 익사가 양쪽에 달린 장중한 
건물이며 불상 또한 웅위하고 자비로운 상으로 조성되었다. 대웅전 후면의 축단과 
사찰의 담장 등은 전문가의 지도하에 옛 조화를 살려서 송광사의 면모를 새롭게 했다.
  우리는 송광사에서 한국 문화사의 몇 가지 귀중한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계류를 이용한 사원의 기발한 조영성이다. 절 앞을 휘감아 흐르는 계류 위에 
무지개다리(홍교)를 설치하여 선계(고요할 선, 세계 계)와 속세를 구분하는 기능을 
상징화하였다. 계류가 굽이치는 동구에 무지개다리를 쌓고 그 위에 청량각(서늘할 청, 
서늘할 량, 누각 각)을 세웠으며 이를 지나 들어가면 일주문을 쌓고 그 위에 작은 건물 
두 채를 짓고 척주각(씻을 척, 구슬 주, 누각 각)과 세월각(씻을 세, 달 월, 누각 각)의 
현판이 걸려 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재(재계할 재)를 올릴 때 신위를 정하게 목욕하는 곳으로 
척주각은 남자의 영가를, 세월각은 여자의 영가를 목욕하는 곳이다. 이 관욕처(씻을 관, 
목욕 욕, 곳 처) 왼쪽에 보조국사가 심었다는 높이 15m나 되는 고향수(마를 고,
향기 향, 나무 수)의 늙은 나무가 서 있다. 이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가려면 계류에 단을 
쌓아 연못처럼 물을 담고 그 계담(시내 계, 못 담) 위에 능허교의 무지개다리를 놓고 
다리 위에 4칸짜리 우화각의 루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다리는 홍예루교(무지개 홍, 무지개 예, 다락 루, 다리 교)의 형식으로 세워져 
있는데, 1700-1711년에 건립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창출하고 있다. 이를 
지나 천왕문을 들어서면 종각과 박물관이 있고, 이를 지나면 보물 제302호로 지정된 
약사전(약 약, 스승 사, 대궐 전) 건물이 있다. 1칸짜리 정방형 법당인데 대들보가 
없고, 공포와 도리로만 짜올린 우리 나라 법당 중 제일 작은 조선중기 건물이다.
  약사전 옆에 영산전(보물 제 303호)이 있다. 이것은 1639년에 건립되었는데, 주칸 
사이가 아주 짧으며 장중하게 보이도록 과중한 3출목의 공포가 특이하다. 새로 지은 
웅장한 십자형 대웅전을 지나면 후면 단위 오른쪽에 국보 제56호로 지정된 
국사전(나라 국, 스승 사, 대궐 전)이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일통칸 5량집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조선초기의 아름다운 건물이며, 천장의 연화문 단청과 대들보의 
용문(용 용, 글월 문) 단청은 희귀한 것이다.
  이 조사당 내에는 보조, 진각, 진명, 원오, 원감, 자정, 자각, 담당, 혜감, 자원, 혜각, 
각진, 정혜, 홍진 등 15명의 국사와 조선시대의 고봉(높을 고, 산봉우리 봉) 화상의 
영정이 있다. 그 옆 하사당(아래 하, 집 사, 집 당)은 보물 제263호로 원래 선실(고요할 
선, 집 실)이었다. 1칸은 부엌, 2칸은 온돌방인데 부엌 위에 연기를 뽑아내는 환기공이 
있어 지붕 위에 또 하나의 새끼지붕이 솟아 있다. 조선초기의 특이한 선방집이다. 이 
외에 일주문, 십자각, 우화각 등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집들이다.

     고려시대 경제, 사회상을 알게 하는 문서들
  송광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번째 귀중한 특성은 성보각(박물관)에 고려시대 
경제와 사회를 알 수 있는 특이한 문서들이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국보 제43호인 
고려고종제서(높을 고, 고울 려, 높을 고, 으뜸 종, 제도 제, 글 서)는 당시 명필인 
탄연풍의 글씨이다. 이것은 1215년 고려 고종이 혜심에게 대선사(큰 대, 고요할 선, 
스승 사)를 제가한 문서로 관직, 성명, 수결(손 수, 정할 결)등 고려시대 문서의 원형을 
볼 수 있다.
  보물 제572호인 노비첩(종 노, 계집종 비, 문서 첩)과 수선사형지기(닦을 수, 고요할 
선, 모일 사, 형상 형, 거동 지, 기록할 기)는 당시 경제와 사회상을 알게 한다. 
노비첩은 1281년 작성된 것인데 우리 나라 노비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내용은 
출가한 원오국사가 속가의 부모로부터 유산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부모로부터 받은 
노비를 사찰에서 일하게 한 것이다. 수선사형지기는 당시 수선사(지금의 송광사)의 
실태를 국가관리가 조사하여 보고한 문서이다. 형지기란 형황 보고서라는 뜻이며, 
당시의 가람배치, 보조국사의 비문, 수선사 중창기, 절의 논밭수량, 승려수, 재산목록이 
적혀 있고 관직, 성명, 수결이 있다.
  보물 제134호 경질(경서 경, 질 질)은 마포 같은 천을 붙이고 그 위에 닥지를 깐 
다음 그 위에 대나무 발을 접착시킨 것으로, 내부에 꽃무늬를 그렸다. 이것은 불경을 
읽을 때 받치는 받침이다.
  보물 제175호인 경패(경서 경, 신주 패)는 길이 15cm, 폭 3cm의 상아 전면에 
불보살을 새기고 후면에 불경 이름을 새겼다. 이는 원감국사(1226-1292)가 글안장경을 
봉안할 때 경전을 분류하기 위해 붙였던 표찰이다. 모두 43개가 남아 있다.
  그 외에 보물로 지정된 경장이 5점 있다. 국보 제42호인 목조삼존불감은 중국 
당나라 불상으로 높이 13.9cm, 폭 7cm의 작은 불감이다. 중앙의 불감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비(문 문, 문짝 비)를 만들어 열고 닫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을 열면 세 쪽이 
연결된 삼존불이 되고 닫으면 포탄형이 된다. 중앙 본존불은 석가여래좌상이며, 좌우에 
가섭과 아란이 배치되고 본존대좌 밑에 반나체의 시자(모실 시, 놈 자)가 공양을 
올리고 있다. 오른쪽 감실은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있고 그 밑에 관음보살과 
반나체의 시자가 있으며 천장에는 3구의 비천상이 있다.
  왼쪽 감실에는 보현보살이 코끼리를 타고 있는데, 그 밑에 세지보살이 있고 
반나체의 시자가 보현보살의 왼발을 받들고 있다. 참으로 정교한 삼존불감이다. 보물 
제176호인 금동요령은 4면에 네 마리 용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고려 금속공예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그외에 자정국사 사리함이나 금강저, 고봉국사 주자원불, 
팔사파문자(여덟 팔, 생각 사, 땅이름 파, 글월 문, 글자 자) 등은 중요한 유물이다.
  송광사의 세 번째 특징은 18세기 조선시대의 중요한 불화가 많이 소장되어 있어 
불화 연구의 보고라는 점이다. 1780년에 그려진 보조국사 영정, 1725년에 그려진 
영산회상도, 1858년에 그려진 산신도(메 산, 신령할 신, 그림 도), 1725년에 그려진 
오십삼불도(다섯 오, 열 십, 석 삼, 부처 불, 그림 도)와 팔상도(여덟 팔, 서로 상, 그림 
도), 1770년에 그려진 화엄변상도 등은 홍색, 녹색이 주조를 이루는 화면을 보여주며 
조선시대 불화 연구의 귀중한 자료들이다.
  송광사 천자암에는 수령 800년이나 되는 곱향나무 쌍향수(천연기념물 제88호)가 
있다. 높이가 13m쯤 되고 몸통둘레가 4m쯤 되는 두 포기 향나무가 나란히 선 채 
몸통이 몹시 꼬여 있어 진기하고 신비스럽게 보이는데, 이 나무에 손을 대면 극락에 
간다는 전설이 있어 신성시하고 있다. 

  다도의 본산 해남 대흥사

  해남 대흥사는 경승지(명승 제4호)인 대둔산(두륜산)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대둔산(672m)의 두륜봉, 도솔봉 등은 규암과 반암으로 구성된 기암절벽들로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산봉우리에 오르면 푸른 남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수량이 풍부한 계곡에는 버들치와 은어 등 신선한 물고기가 살고 있으며 골짜기에는 
동백나무, 단풍나무, 차나무 등과 난대림에 핀 동백꽃을 보면 정훈의 시 '동백'이 
생각난다.

  백설이 눈부신 하늘 한 모서리
  다홍으로 불이 붙는다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뜻 정, 불 화)
  그 뉘를 사모하기에
  이 깊은 겨울에 애태워 피는가.

  숲 속에는 솔새, 박새, 파랑새, 꾀꼬리 등이 날아다니며 고요한 산의 정적을 깨고 
있다. 서산대사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85세로 입적하였는데, 유품을 두륜산 대흥사에 
전할 것을 유언하면서 두륜산은 "기화이초(기이할 기, 꽃 화, 다를 이, 풀 초)가 
아름답고 골이 깊고 그윽하여 만세토록 훼손되지 아니할 곳"이라 하였다.
  대흥사는 몇 가지 위대한 정신의 터전이다.
  첫째, 다시 선(고요할 선), 교(가르칠 교) 양종의 대립을 지양하기 위한 서산대사의 
선교합일(고요할 선, 가르칠 교, 합할 합, 한 일) 사상이 깃든 곳이다. 그가 집필한 
'선가귀감(고요할 선, 집 가, 거북 귀, 거울 감)'과 '선교결(고요할 선, 가르칠 교, 비결 
결)'에 보면 "선도 교도 모두 부처님의 법이다. 그러나 선이 부처님의 마음이라면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교란 유언(있을 유, 말씀 언)에서 무언(없을 부, 말씀 언)에 이르는 
길이요, 선은 무언에서부터 무언으로 가는 길이다. 따라서 선과 교는 타당성을 논하기 
이전에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수행방법이다"라고 했다.
  그는 염불을 중시하여 '아미타불탱발'에 "염불에는 네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입으로 
외는 것이요, 둘째는 생각으로 그리는 것이며, 셋째는 관상(볼 관, 모양 상)하는 것이고 
넷째는 실상(사실 실, 모양 상)이다"라고 했다. 실상은 곧 선의 경지와 같은 것이다. 
서산대사의 선교합일 정신은 불어(부처 불, 말씀 어)는 입문이요 그 입문을 거쳐 참 
불자는 불심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고, 교와 선을 겸하여 수행하여 궁극적으로는 
좌선을 통해 견성(볼 견, 성품 성)을 이룩하려는 한국 불교의 전통을 확립하게 했다.
  둘째, 한국 불교의 구국정신의 본산이다. 대흥사에는 1669년 조선 왕조에 의해 
유교식 영당인 표충사가 건립되었다. 이 사당에는 임진왜란 때 승장인 서산, 사명, 
처영의 영정이 있다. 표충사 현판은 정조의 친필이며, 이 사당의 제사는 봄 가을에 
국가에서 직접 올렸다. 한국 불교에 있어서 호국정신은 '인왕호국반야경(어질 인,
임금 왕, 보호할 호, 나라 국, 돌이킬 반, 범어의 음역 야, 경서 경)' 등에 근거하고 있지만 
옛 스님들은 나라가 위급할 때 구국의 길에 생명을 초개같이 던졌던 것이다.

     초의선사가 심은 영산홍과 매화
  해인사 묘길상탑지에 보이는 신라말의 승군을 시작으로 고려 예종 때는 여진족의 
침략에 승군으로 대처했고, 1232년 몽고침략 때 처인성의 승장 김윤후는 몽고군의 
총사령관인 살례탑을 사살했던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군이 왜군에게 유린된 청주성을 최초로 탈환했으며, 평양성 탈환의 선봉에 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이끄는 5천의 승군이었다.
  권율 장군이 행주대첩을 이룰 때 방어하기 어려운 서북쪽 능선을 맡아 7차에 걸친 
격렬한 왜군의 공격을 막아 필사항전한 것은 처영이 거느리는 승군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수많은 해전에서 승첩할 때도 돌격선의 선봉에는 승군이 있었던 것이다. 
파사현정(깨뜨릴 파, 간사할 사, 나타날 현, 바를 정)하는 불교의 이념으로 승첩을 
이루고도 공명과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던 승군은 불교를 배척한 조선조의 유교정책 
속에서도 나라를 위한 구국의 길에서는 섧다하지 아니하고 생명을 초개같이 던졌던 
것이다.
  셋째, 초의선사의 다도(차 다, 길 도)의 본산이다. 한국에 차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828년 신라 흥덕왕 때 대렴이 중국에서 차 종자를 들여와 지리산에 심은 
이후이다. 초의(1786-1866)는 두륜산에 들어와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을 차도삼매(차 
차, 길 도, 석 삼, 어두울 매)에 들어 지(그칠 지), 관(광대뼈 관)에 힘쓴 불교와 유학에 
능통한 학승(배울 학, 중 승)이었다. 지란일체의 경계를 끊어버리고 조금도 분별하는 
바 없는 것을 뜻하며, 관이란 세상의 만물이 지니는 본질적 의미를 분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초의는 현실적 생활에서 긍정적인 진리를 찾고자 하였다. 그는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와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 초의가 쓴 '동다송(동녁 동, 차 다, 칭송할 송)'과 
'다신전(차 다, 신령할 신, 전할 전)'은 한국 다도에 관한 대표적인 책이다. '동다송'은 
정조의 딸 숙선옹주의 남편인 홍현주가 청탁하여 쓴 글로 한국의 차(차 차)를 
예찬하고 있다.
  '다신전'은 차를 채취하는 데서 시작하여 제조, 감별, 물의 선택, 끓이는 방법, 차의 
향기, 맛, 색과 차 마시는 아취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차의 
모체가 되는 물과 물의 신이 되는 차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차의 신기(신령할 신, 
기운 기)가 건실하고 더불어 물이 신령스러우면 이것으로 다도에 다 통하게 된다"고 
하였다.
  '동다송' 말미에서 그는 다인(차 다, 사람 인)의 멋을 다음과 같은 시로 읊었다.

  옥화차 한잔을 기울이니 겨드랑이에 솔솔 바람이 일어 몸은 가벼이 하늘을 나네. 
밝은 달을 촛불 삼고 또한 벗을 삼아 흰구름을 자리하고 산허리를 병풍 삼으니, 대나무 
젓대소리 솔바람 소리 시원도 해라. 기골이 청산해지고 마음이 맑아 온다. 흰구름 밝은 
달을 손님으로 모시고 홀로 차를 마시니 이보다 더한 경지가 없구나.

  지금 대흥사 뜰에는 초의가 심은 영산홍과 매화가 고운 꽃을 피우고 있다.

     사명대사의 유품이 있는 유물전시관
  대흥사의 창건역사를 상고할 기록으로는 '죽미기(대나무 죽, 미혹할 미, 기록할 기)', 
'만일암고기(당길 만, 날 일, 초막 암, 옛 고, 기록할 기)', '북암기(북녁 북, 초막 암, 
기록할 기)' 등이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초의 등이 편집, 교정한 '대둔산지(큰 대, 
둔나무 둔, 메 산, 기록할 지)'가 1823년 간행되었는데 이것이 가장 충실하다. 확실한 
창건연대는 불확실하지만 응진전 옆에 통일신라 3층석탑(보물 제320호)이 남아 있어 
신라말에 창건된 사찰임을 입증하고 있다.
  대흥사가 임진왜란 이전에는 그리 큰 절이 아니었다. 구국의 승장인 서산대사의 
공로에 의해 그의 유품이 이 절에 보존되고 표충사가 세워지면서 사찰이 번창하게 
되었고, 초의선사의 법력에 의해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대웅보전은 1667년에 건립된 것인데, 현판은 당대 명필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백설당에는 '무량수각'이라는 추사의 편액이 남아 있다. 표충사 정면에 있는 
의중당(옳을 의, 중요할 중, 집 당)은 당시 6개군의 군수가 봄, 가을 제사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던 집이다.
  표충사에는 정조가 하사한 6폭의 금병풍(쇠 금, 병풍 병, 바람 풍)이 보존되어 있다. 
천불전(일천 천, 부처 불, 대궐 전)은 1813년에 건립된 건물로 그 속에는 6년에 걸쳐 
만들었다는 천불이 모셔져 있다.
  근년에 건립한 유물전시관에는 사명대사의 유품들과 탑산사동종(탑 탑, 메 산, 절 사, 
구리 동, 쇠북 종: 보물 제88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대광명전은 1841년 건립된 
불전으로 초의가 단청을 했으며, 그가 그린 관음상이 남아 있다. 대흥사 절 입구에는 
사명대사 부도 등 많은 부도가 담 안에 모셔져 있다.
  대흥사에 소속된 암자로는 북미륵암이 유명하다. 북암에는 1754년 중건한 마애불 
전실이 있고, 그 안에 높이 4.2m에 이르는 거대한 고려시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48호)이 있다. 또 고려시대 3층석탑(보물 제301호)이 마당가에 서 있다. 이외에 
두륜봉 밑의 남미륵암 터에는 음각된 불상이 남아 있다.
  만일암 터에는 고려시대 5층석탑이 서 있고 진불암에는 특이한 목조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절 입구에서 들어가는 청신암에는 여승들이 사는데, 조선후기의 범종 
하나가 보존되어 있다. 

  제주도 제일의 명당 법화사 구품연지

  법화사는 제주도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 한라산 남쪽의 아늑한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절이 있는 지형을 보면 후면에 북풍을 막아주는 작은 산봉우리를 등지고 
오른쪽과 왼쪽에 두 개의 산줄기가 절을 감싸고 있어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를 가진 
혈(구멍 혈)에 놓여 있다. 절 앞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구름과 바다가 맞닿은 망망한 
해원(바다 해, 멀 원)이 전개된다.
  맑은 날 푸른 바다 위에 떠가는 배는 작은 나뭇잎처럼 가물거리고, 달밤에는 파도에 
부서지는 달빛이 은색 구슬을 뿌린 것 같은 별천지를 이룬다.
  절 뒤에는 맑고 찬 석간수가 대량으로 솟아나서 절 밑에 있는 온 마을의 식수로 
넉넉하다. 아마도 제주도 제일의 명당지에 법화사가 자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법화사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963년 발굴조사 결과 10-12세기에 걸쳐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었다.
  법화사는 고려초 제주도 제일의 대찰이었다. 금당은 108평이나 되는 큰 건물이며, 
월대는 건물 앞이 넓게 조성된 개성 만월대의 고려 궁전 건물과 같았다. 그리고 
기와도 운용문(구름 운, 용 용, 글월 문)이 새겨진 수막새들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개성 
만월대의 고려 궁터에서 출토되는 것과 같다. 이를 보면 이 절은 고려 궁전과 같은 
격식으로 건립된 절이다.
  이러한 건물 기단과 운용문의 막새가 절터에서 발견된 예는 법화사 외에는 없다.

     노비 280명을 두었던 대찰
  '조선왕조실록' 태종 6년(1406)조에 보면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와서 제주 법화사의 
아미타삼존불은 원나라의 양공이 만든 것이니 돌려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명나라 황제 
성조는 조선의 태종에게 칙서를 보냈다. 그 칙서의 내용은 "짐이 선황고 선비(먼저 선, 
임금 황, 상고할 고, 먼저 선, 죽은 어미 비)의 은덕을 거듭 생각하여 찬양하는 제전을 
올리고자 하여 특별히 사례감태감 황엄 등을 보내어 그대 나라 탐라에 가서 동불상 
수좌를 구하려 하니 잘 도와 성사시켜 짐의 뜻에 부응하여 주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로 인하여 제주도 법화사의 삼존불을 서울로 이송하여 태종이 
교외까지 나와서 삼존불에 예배드리고 명나라 사신 황엄등이 중국으로 운반해 갔다.
  여기서 중국정부가 원나라 명공이 만든 아미타삼존불이라 한 것은 제주도가 
1269년(고려 원종 10) 고려 삼별초의 김통정군이 제주 항파두리 성에서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게 격파 당한 후부터 1294년까지 원나라가 제주도를 지배하는 기간에 원나라 
명공에 의해 법화사의 아미타삼존불이 조성되었다는 말이다.
  이 아미타삼존불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대단한 불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제주도가 원나라 왕실의 직접 지배하에 있을 때 원나라 왕실의 원찰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법화사의 금당 기단 앞이 넓게 조성된 것이나 운용문의 기와를 쓴 
것은 중국 사찰의 기단과 같은 점이며, 운용문 막새기와는 중국 황실이나 고려 궁전에 
사용한 격이 높은 기와이다. 당시 고려의 일반 사찰은 연화문이나 범자문, 태양문 막새 
등을 사용했다.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사찰을 혁파할 때인 태종 8년(1408)의 왕조실록을 보면 제주 
법화사에는 노비가 280명 있는데 30명만 남기고 모두 이송시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까지도 노비가 280명이나 있는 대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노비가 280명 있었다면 승려는 500명이 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수많은 건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법화사는 임진왜란 등을 
겪으면서 폐사되었고, 현재 대웅전의 복원공사가 이룩되었다. 그런데 이 절 앞에는 
3,800여 평에 이르는 큰 구품연지(아홉 구, 등급 품, 연밥 연, 못 지)가 있다.
  우리 나라 사찰 중에 이와 같이 큰 구품연지를 가진 절은 드물다. 물론 익산 
미륵사지와 불국사 앞에도 구품연지가 있다. 구품연지는 극락정토의 구품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사역에서 대량으로 솟아나는 지하수를 수원으로 하여 이 산 중턱에 맑고 큰 연못을 
만들었으니 못 속에는 법화사의 그림자가 고요히 잠기어 정토의 신비감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제주도같이 물이 귀한 곳에서 이러한 사원의 경관은 주위의 아름다운 난대림 
상록수와 더불어 경이로운 별천지를 형성했던 것이다.
  지금은 이 연지가 일부 메워졌고, 연못 중앙에는 섬이 남아 있는데, 이를 발굴하여 
복원할 계획이다.
  제주도 법화사의 사원이 옛 모습대로 복구되면 우리 나라 고려 사원의 대표가 될 
만할 것이다. 

  부석사와 무량수전

  부석사는 영주 봉황산 중턱 명당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태백산과 소백산의 두 
줄기 산맥이 갈리는 깊은 계곡으로 수려한 산세와 맑은 산내가 흐르는 경승지이다. 
부석사는 676년 2월 문무왕의 명에 의해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사상의 발원지이다.
  의상은 중국에 유학하여 8년간 화엄사상을 공부하고 48세에 돌아와 신라에 화엄종을 
연 조사(조상 조, 스승 사)이다. 그는 산천을 두루 답사하여 고구려의 먼지와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아니하고 말이나 소가 접근하지 못하는 신령스러운 땅을 찾아 부석사를 
창건했던 것이다.
  해인사, 화엄사, 갑사, 보원사, 범어사, 옥천사, 불국사 등은 신라의 화엄종 사찰인데 
이들 사찰의 종찰이 부석사이다. 원래 화엄종 사찰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는데, 
부석사는 화엄종 종찰이면서도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정토사상의 세계가 열려 있는 
것도 특이하다.
  부석사에는 한국 미술사 최고의 미술품들이 모여 있다. 고려시대 건물인 
무량수전이나 최대의 소조여래좌상, 고려 벽화, 통일신라 석등, 조화로운 석축단 등은 
우리 나라 문화유산 속에서 정수가 되는 것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의상을 사랑하다가 바닷속에 몸을 던진 선묘의 영정을 모신
선묘각(착할 선, 묘할 묘, 누각 각)이 있어 이채롭다.
  어찌하여 신라 화엄종찰인 부석사에 선묘라는 여인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 자리하게 
된 것인가? 선묘에 대한 기록은 988년에 기록된 북송의 '송고승전(송나라 송, 높을 고, 
중 승, 전할 전)' 속 의상전에 수록되어 있다. 의상은 669년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중국 등주 해안에 도착하여 한 신도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집에는 선묘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선묘는 의상의 용모가 매우 뛰어남을 보고 연모하게 되었지만 
승려인 의상은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선묘는 불가에 귀의하여 일생 동안 스님께 필요한 생활용품을 바치는 시주가 
되겠다고 발원하였다. 그후 의상은 중국 장안 종남산에서 8년간 지엄에게 화엄학을 
배우고, 신라로 돌아오는 길에 옛날에 신세를 졌던 그 신도 집에 가서 인사를 하고 
배를 탔다. 이때 선묘는 미리 준비한 법복(법 법, 옷 복) 등을 함에 넣어 의상에게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의상이 탄 배는 멀리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주문을 외우며 "나의 본심은 법사를 공양하는 일입니다. 원하옵건대 이 
옷함이 저 배에 닿기를 빕니다"하며 옷이 든 함을 바닷 속에 던졌다. 때마침 질풍이 
불어 그 함이 의상이 탄 배에 닿게 되었다. 그녀는 또 발원하기를 "내 몸이 변하여 큰 
용이 되어 저 배가 무사히 신라 땅에 닿아 스님이 법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하면서 몸을 바닷 속에 던졌다.
  이 선묘의 원력에 신이 감동하여 과연 용이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여, 배는 무사히 신라에 도달하게 되었다.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고자 할 때 
이곳에는 다른 종과 승려 500여명이 모여 의상이 화엄사상을 펴는 데 반대했다. 이때 
선묘의 혼령이 떠다니는 큰 반석이 되어 반대파를 모두 몰아내었다. 그래서 '뜬 돌의 
절'이라 하여 부석사라 이름하게 되었다 한다.
  이러한 기록은 선묘의 사랑을 신기한 내용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의상을 열렬히 사랑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한 여인의 애절한 원혼이 깔려 있다. 
그리하여 화엄사상의 발원지인 부석사에 선묘의 원당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무량수전
  무량수전(국보 젠18호)은 한국 건축사에 있어 최고의 건물이다. 1916년 보수시에 
먹글씨가 발견되었는데, 1376년 재건된 고려 중기 건물이다. 전면 5칸, 측면 3칸, 
주심포의 팔작지붕이다. 기둥은 배흘림을 하고 간결한 주심포의 포작과 알맞게 든 
추녀선, 귀솟음의 수법, 섬세한 창살, 시원스러운 포벽 등 아름답기 그지없다.
  무량수전 속에 모셔진 소조 여래좌상(국보 제45호)은 한국의 소조불상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아름다운 불상이다. 법의는 우견편단을 하고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취했으며, 풍만한 얼굴에 바로 뜬 눈과 목에 삼도가 있는 엄숙한 표정이다. 목조광배가 
붙어 있는데 외곽에는 화엄문이 조각되었고, 내곽에는 보상화문이 조각되었다.
  조사당(국보 제19호)은 의상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1377년에 건립된 고려의 
맞배집이다. 전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폭 집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아름다움이 있다. 
의상의 지팡이에서 잎이 났다는 비선화수(날 비, 신선 선, 꽃 화, 나무 수)라는 
상록수의 식물이 축단에 나 있다.
  이 조사당 벽에는 사천왕상과 보살상 등의 고려 벽화가 장식되었던 것인데, 지금은 
따로 떼어내어 무량수전 내에 보존하고 있다. 이 벽화는 1377년 조사당 창건 당시의 
것으로 한국 최고의 건물 벽화이다.
  무량수전 앞에 있는 석등(국보 제16호)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8각석등으로 화사석(불 
화, 집 사, 돌 석)에는 4면에 창, 4면에 보살상이 조각되어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3층석탑, 석조삼존여래좌상(보물 제220호) 등이 있고 무량수전 내에 깔았던 
녹유전도 귀중한 문화재 자료이다. 사명대사의 중창기가 걸려 있는 안양루는 조선시대 
문루 건물의 장중하고 시원한 멋을 보여준다.
  부석사는 자연과 아름답게 조화된 가장 아름다운 신라 석축 기법을 볼 수 있고 
산자락에 흩어져 있는 고승들의 석비와 석조, 건물들이 잘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처럼 
정일한 산사의 고요한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법보사찰 해인사

  천지를 진동하며 쏟아지는 물소리와 수억 년 물결에 정갈하게 씻기운 암반, 
용트림한 노송숲, 하느작거리는 단풍잎의 채색, 그 속에 넘나드는 새소리, 바람소리가 
별천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 해인사 입구의 홍류동 계곡(사적 및 명승 제5호)이다.
  세속의 번뇌를 씻어버리고자 하거든 호젓이 이 길을 걸어 보라. 고요한 선정을 느낄 
것이다. 일찍이 신라의 시인이며 대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이곳에 와서 여생을 마쳤다. 
최치원 선생의 시가 홍류동 석벽 치원대에 새겨져 있어(우암서'더욱 우, 초막 암,
글 서'라 새긴 것은 후의 가필로 보임) 이곳 산수의 아름다운 정경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첩첩 산을 포효하며 미친 듯 쏟아지는 물소리에
  사람의 소리는 지척 사이에도 분간하기 어렵네
  시비의 소리 귀에 들릴까 항시 두려워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모두 귀먹게 했구나.

  해인사의 주산은 가야산(1430m)이다. 무릉교, 홍필암, 음풍뢰, 취적화, 공재암, 
광풍대, 제월담, 낙화담, 접석대, 홍류동의 아름다운 경치는 가히 선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예부터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들어 시정을 남겼다.
  가야산은 예부터 정견모주라는 산신이 머무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정견모주는 수로왕의 어머니이며 해인사에는 정견천왕사의 사당이 있어 
정견모주를 제사지냈다 한다.

     임진왜란 때도 왜적이 미치지 못한 곳
  가야산은 골이 깊고 인적과 멀어진 심산이라 전란이 와도 병마가 이르지 않아 
전화를 입지 않는 곳으로 유명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가야산, 오대산, 
소백산은 임진왜란 때도 왜적이 이르지 않아 삼재가 들어오지 않은 곳이라 하였다. 
병화가 미치지 않는 곳이기에 해인사에 고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게 된 것이다. 
해인사는 802년(애장왕 3)에 창건되었다.('삼국사기', '삼국유사').
  이 절의 창건은 순응, 이정의 양 대사에 의해 이룩되었으나 신라 왕실의 특별한 
도움이 있었다. 이러한 해인사에 대한 기록으로는 최치원이 쓴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와 943년에 쓴 '가야산해인사고적'이 있고, 조위가 
1491년에 쓴 '해인사중창기'가 있다.
  그리고 1630년에 세운 해인사사적비가 있으며, 이들을 모두 종합한 기록으로는 
1874년에 쓴 '가야산해인사고적'이 있다.
  해인이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으로, 이것은 석가가 
화엄경을 설하기 위하여 들어간 선정의 경지를 말한다. 그래서 해인사는 화엄종 
대찰인 것이다. 화엄종 사찰의 주불은 비로자나불이며, 이 불을 모신 불전은 
비로전이거나 대적광전이라 한다.
  해인사는 고려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 한다.
  화엄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이다. 대승불교는 삼라만상이 다 부처님의 법을 
드러내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다는 법보관을 가지고 있어 경전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언어를 초월하여 모든 언어의 근본이요, 한마음에로의 복귀를 목표로 삼는 
참된 불교수행의 길은 바로 경전 속에 명시되고 있기에 경전은 중요한 것이다.
  불교 경전은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된 것을 4세기 이래 활발하게 한역되어 8세기에 
모든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대장경이란 이름은 6세기말 수대에서 나왔다. 원래 인도에서는 경, 율, 논을 합해 
삼장이라 불렀다. 이러한 불경이 최초로 목판에 새겨진 것은 중국 송대인 983년인데, 
이 경판을 촉판대장경이라 부른다. 이 촉판대장경은 1,078부 2,048권의 불경이 수록된 
것이었다.
  그뒤에 고려 현종이 1011년 대장경판을 새겨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했는데 
1232년(고종 19) 몽고 침략군에 의해 전부 소실되었다. 지금 해인사에 보관된 
고려대장경은 고려가 16년간의 국력을 기울여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 1251년에 완성한, 
제2차로 조판한 경판이다(국보 제32호), 현존 경판의 종류는 1,516종이요, 권수는 
6,815권이며, 경판수는 81,258판이다.
  이들 고려대장경은 거제도 등지에서 잘 자라는 자작나무로 만들었는데, 한 장도 
뒤틀린 것이 없다. 이 대장경판은 중국의 경판과 비교하면 오자 한 자도 없는 완벽을 
기하여 새겨졌다. 이는 당대 석학인 이규보 같은 분이 직접 참여한 결과이다. 정말 
세계 으뜸의 경판이다.

     자연통풍을 이용한 경판 보존
  이 대장경을 보관한 대장경판고(국보 제52호)는 대적광전 후면 높다란 지대에 
세워져 있다. 전면 15칸, 측면 2칸의 집 두 채(법보전, 수다라전)이다.
  이 집은 1488년 건립된 건물로 자연통풍을 이용하여 경판의 보존이 완전무결하게 
되어 있다. 보존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실시한 결고, 통풍을 이용한 절묘한 위치와 
구조로 밝혀졌다.
  1966년 보수를 하다가 수다라전 중앙 중도리 속에서 중수 상량문과 함께 광해군 
내외 및 상궁의 옷(중요민속자료 제3호)이 발견되었다.
  이를 보면 해인사는 조선에 와서도 왕실의 원찰로서 많은 지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해인사 중창을 뜻하였고, 그후 덕종의 비 인수왕비와 
예종의 계비 인혜왕비가 해인사 중창을 이룩하게 하여 1488년 대장경판고와 대적광전 
등 건물이 이룩된 것이다. 현재의 대적광전은 1817년에 다시 중수한 건물이다.
  불전 내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협시보살이 모셔졌고, 
불전 벽에는 19세기에 그린 비로자나불, 후불탱화를 위시하여 팔상(여덟 팔, 모양 상), 
칠성(일곱 칠, 별 성), 신중(신령할 신, 무리 중), 삼장(석 삼, 곳집 장), 영산(신령할 영, 
메 산) 등의 불화가 걸려 있다. 이 건물의 상량문이 1961년 보수 때 발견되었는데,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었다.
  그외에 사찰 건물로 명부전, 응진전, 삼성각, 조사당, 관음전, 강학당 등 근세 
건물들이 있다.
  석조물로는 대적광전 앞에 신라 3층석탑과 석등, 배례석이 있다. 석탑은 1926년 
기단을 잘못 고쳐 조화를 상실했다.
  해인사 일주문 남쪽 길가에 높이 3m에 불과한 통일신라 양식의 3층석탑이 있는데, 
이 탑이 묘길상탑이다. 1966년 탑 내에서 탑지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최치원이 895년에 
쓴 것으로, 신라말 난세에 희생된 56명의 승군 이름과 그들의 명복을 위해 탑을 
세우는 내력에 대한 내용이다.
  해탈문 계단을 오르면 왼편에 몹시 마모된 고려 때의 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가 
서 있다. 이 비는 원래 가야면 반야사터에 있던 것을 1961년에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그리고 해인사에는 많은 유물이 남아 있는데 1491년에 주조한 범종이 대표적이다. 
종 고리에 쌍룡이 새겨 있어 조선시대 종의 특징을 보여준다. 보상전에는 오백나한도, 
사경과 조선 세조 영전, 상아탑향로, 옥등잔과 진주가 장식된 등, 은제 화병, 은제 
다기, 감로병, 봉황촛대, 거북형 촛대, 관복, 옥으로 만든 조화 금강저, 수놓은 병풍, 
헌종과 숙종의 글씨, 팔상병풍, 범종 등 중요한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암자로는 원당암과 홍제암이 특이하다. 원당암은 802년 창건되었는데, 원래 
봉서사였다. 대적광전에서 건너다 보이는 비봉산 중턱에 있다. 원당암에는 통일신라의 
다층석탑(보물 제518호)과 석등이 있고, 불전의 기단에 새겨진 정교한 안상조각 등이 
이채롭다. 이 석탑과 석등은 점판암으로 조성된 희귀한 석조물로, 아름다운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이 절은 신라 51대 진성여왕이 그가 사랑하던 각간 위홍(후효부인의 남편)이 죽자 
혜성대왕이라 추존하고 그의 원찰로 삼았고, 그후 여왕은 왕위를 버리고 해인사에 
와서 지내다가 이곳에서 죽어 죽은 혼령이라도 연인과 같이 가고자 원하였다 한다.
  위홍은 진성여왕의 명을 받아 대구화상과 함께 신라의 향가를 모아 '삼대목'을 
편찬하였다. 만일 이 책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일본의 '만엽집' 같은 한국 
문학사의 고전이 되었을 것이다.
  1490년(성종 21) 해인사 중창시에 비로전 도리 속에서 신라의 전권 43통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 진성여왕대의 기록이 나왔다. 이는 조위가 쓴 
'서해인사전권후'라는 글로서, 그의 문집 '매계집'에 실려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헌강왕 11년(885) 이전까지는 해인사를 북궁해인수라 불렀는데 
진성여왕 4년(890) 이후부터는 혜성대왕원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이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이후 이곳 홍제암에서 
은거하였는데, 1610년 67세로 입적하자 광해군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리고 사명대사의 비를 세우게 하여,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비문을 썼다.
  홍제암에는 사명대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그의 석종형 부도가 남아 있다. 
그리고 가야산 상봉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높이 7.5m의 통일신라시대 마애불(보물 
제222호)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고 가야산 상봉 칠불암 터에 높이 2.1m의 석조 
여래입상(보물 제264호)이 외롭게 서 있다.
  가야산 상봉에 오르면 구름과 산백이 아득히 펼쳐져 구름 위에 뜬 기분으로 속세를 
해탈하는 일순을 맛보게 한다. 

  불보사찰 통도사

  소슬한 가을 바람이 만산홍엽을 흔들고 지나가는 날에 영취산 산내를 따라 양산 
통도사 오르는 길은 청정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입구 냇물을 가로질러 한 틀의 홍예로 짠 무풍교를 지나 울창한 송림을 걸어서 
1km쯤 오르면 삼성반월교의 무지개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일주문에 이른다. 
일주문에는 '영취산통도사'라는 큰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대원군의 글씨이다. 
좌우 기둥에는 해강 김규진이 쓴 '불지종가', '국지대찰'이라는 주련(기둥 중, 쌍 련)이 
걸려 있다. 당대 명필들의 웅휘한 필치만으로도 이 절의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통도사는 불보의 종찰이요, 율종의 근본 도량인 것을 알리는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들어서면 영산불국의 세계가 전개된다. 여기가 하로전 
구역인데, 영산전과 극락전이 있다. 석가가 성도한 후 최초로 설법한 곳이 인도 
마가다국의 왕사성 동북에 있는 영취산이었다. 자장법사가 양산의 주산을 인도의 
영취산과 서로 통하는 산이라 하여 643년 이곳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산 이름을 
부처님의 성산인 영취산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일주문에서 서쪽으로 100m쯤 들어가면 일승교라는 아담한 다리가 기암 사이로 맑게 
흐르는 개울 위에 무지개 모양으로 걸쳐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다리를 넘어서면 
화엄전에 이른다. 불이문에 이르면 '불이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송나라 명필인 
미불의 글씨이다.
  문으로 들어가면 불교전문강원이 있다. 학승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불이문 내를 
중로원이라 하는데, 이곳엔 법신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명전이 주전이다.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도 있는데, 미륵불의 출세를 
기다리는 뜻에서 부처님의 신표인 법기로 특이한 봉발대(보물 제471호)가 미륵전 
마당에 조성되어 있다. 이 위쪽이 상로전 공간이 되는 대웅전과 금강계단이 있는 
곳이다.

     불상이 없는 대웅전
  불교는 불, 법, 승의 세 요체로 구성된 종교이다. 그래서 이 세 요체를 중심한 
사찰로 불보사찰은 통도사, 법보사찰은 해인사, 승보사찰은 송광사라 한다. 그런데 
불보사찰인 통도사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무슨 연유일까? 이 대웅전에는 불상보다 
더한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불상을 예배 대상으로 
삼은 것은 서력기원을 전후한 때부터이다.
  석가의 생존연대는 B.C. 566-486년설과 B.C. 623-544년설이 있는데, 아무튼 불교가 
성립되고 한 500년간은 예배 대상이 석가를 다비하여 나온 사리였으며, 이 사리를 
봉안한 곳이 탑이었다. 그러나 석가가 성도한 사리인 금강좌나 보리수나무, 석가의 
발자국, 설법을 상징하는 법륜 등도 예배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불상을 
예배하지 않은 시대라 하여 무불시대라고도 한다.
  석가가 살아 있을 때의 절은 죽림정사와 기원전사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탑은 인도의 산치탑이다. 어째서 500여 년간 예배하지 않았던 불상을 AD 1세기경에 
이르러 조성되게 되었을까? 원래 동양에서는 지극히 존엄한 것에 대해서는 형체로 
나타내지 않았다. 하늘이나 신(신령할 신)은 무형의 것이었다. 그래서 공(공간 공)의 
개념이 더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제우스 신상이나 비너스 신상이 모두 사람의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을 정벌하여, 인도 갠지스 강 서쪽 
지방까지 그리스 식민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리스 문화와 인도의 불교문화가 
혼합되어 헬레니즘 문화가 형성되었다. 여기서 사람의 모습과 같은 불상이 조성된 
것이다.
  불상 조성의 중심지는 간다라(Gandara)와 마투라(Mathura) 두 지역이었다. 간다라 
불상은 콧날이 높고 눈이 푹 들어간 서양인의 모습이며, 마투라 불상은 코가 낮고 
얼굴이 갸름하며 곱슬머리에 눈두덩과 입술이 두꺼운 인도인의 모습이다. 이 두 
종류의 불상은 200여 년 후에 서로 양식이 혼합되어 굽타(Gupta)불상이 되었다.
  이러한 불상의 한 갈래는 남인도를 거쳐 동남아로 퍼져갔고, 한 갈래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으로 퍼져갔다. 통도사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것은 
사리를 봉안하던 무불시대의 불교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불상이 없는 불전으로는 오대산 상원사의 적멸보궁,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 사자산 
법흥사의 적멸보궁이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 계시는 곳이란 뜻이다.
  통도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자장법사가 643년 당나라에서 
불사리와 가사를 얻어서 귀국하여 불사리 일부는 황룡사구층탑에, 또 일부는 
태화사탑과 통도사 금강계단에 봉안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사도 통도사에 모셨다 한다. 
자장법사가 통도사를 창건할 당시는 대웅전과 금강계단, 대광명전 및 약간의 승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후 고려, 조선을 이어 내려오면서 지금과 같은 큰 
사찰로 발전한 것이다.
  현재 통도사에는 고려시대 석물과 17세기 이후의 조선시대 건물들이 남아 있다. 
또한 통도사만이 지닌 독특한 가람 배치인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의 분할된 구획으로 
불전이 배치되어 각각 건립된 건물로 특이한 팔작지붕이며, 지붕 위에는 청동보주 
위에 뾰족한 철주가 선 찰간대가 있다. 이는 큰 절을 표시한 상징이다.

     호랑이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
  대웅전 후면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 
중앙에 복련과 앙련의 대석 위에 석종형 부도가 안치되어 있다. 이 석종에는 천인상과 
사리함이 조각되어 있고, 금강계단의 단에는 여래좌상, 사천왕상, 천부좌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후대에 중수를 거치면서 신기한 설화가 감돌던 예스러운 조화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대웅전 서편에는 5평 정도의 구룡지가 있는데, 돌다리 하나가 연못 
위에 걸쳐 있고 수련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옛날에 구룡이 살았다는 신지이다.
  이곳에는 삼성각과 삼신각이 있는데, 불교는 토속신앙과 융합성이 있다. 중국에서는 
도교와 결합된 칠성 신앙이, 한국에서는 산악신앙과 결합된 산신각이, 일본에서는 
신도와 결합된 신사가 절 경내에 있다. 옛날 통도사 영취산(1050m)은 수림이 우거져 
호랑이가 나와서 때때로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통도사에 전하는 재미있는 호랑이 이야기가 있다. 통도사 가장 깊은 산중에 있는 
백운암에서 젊은 학승 한 명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어느 깊은 밤에 양가의 처녀가 
나물을 캐러 왔다가 길을 잃고 백운암에 찾아와서 학승과 한방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다. 이날 이후 그 처녀는 젊은 스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스님은 승려의 
몸으로 연정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이런 관계로 처녀는 상사병이 들어 죽어서 
호랑이가 되었다.
  학승이 열심히 공부하여 통도사 강백(불경을 가르치는 강사)에 취임하는 날 밤, 이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물고 갔다. 이튿날 모든 승려가 강백을 찾았는데, 그는 백운암 
옆 숲속에 아무 상처 없이 죽어 있었다. 그의 시신을 살펴보니 남근을 호랑이가 
잘라가 버렸다. 사랑의 원혼이 호랑이가 되어 그리워하던 님의 남근을 따 먹어버린 
것이었다. 그후 호환을 막기 위해 산신각과 극락전 옆에 호혈석이 놓이게 되어 지금도 
남아 있다.
  통도사에는 가사와 향로, 불상, 그림, 경문 등 중요한 유물들이 가득하여 아담한 
불교 박물관이 건립되어 전시되고 있다. 옛날 통도사 사역은 광활한 것이었는데, 이를 
알리는 국장생석표(보물 제74호)가 1085년에 세워져 특이하게 남아 있다. 통도사는 
불교적 지식과 종교적 감흥을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명찰이다.

  제4부 천년 고도 경주, 그 감동의 현장

  자연과 예술과 종교가 융합된 경주 남산

  경주 남산은 조각예술로 보면 자연과 예술이 절묘하게 융합된 감동적인 옥외 
박물관이며 종교적으로 보면 극락정토이기도 하다.
  민중의 소망과 기원들이 향불처럼 승화하던 성지이다. 화랑들이 노닐던 삼화령과 
신라시대 충담이 사색하던 생의사와 헌강왕이 산신과 함께 춤을 추던 포석정과 미륵의 
화신인 미녀가 야밤에 절방을 찾아들어 아기를 낳고 조선의 문인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쓴 곳이 모두 남산이다. 수많은 신라인이 살아서 찾아들던 마음의 
안식처요, 죽어서 귀의하고자 한 정토의 영산이다.
  인도의 아잔타나 바루라, 중국의 돈황과 운강, 용문의 불적에 결코 뒤지지 않는 신라 
석공의 300년 원력이 바위마다 새겨져 있다.
  남산은 동서 12km, 남북 8km, 정상 높이 468m의 암산에 30여 계곡이 첩첩이 싸고 
있는 천태만상의 산이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깊은 계곡과 기암절벽에 가득히 
피어서 굳은 암산에 화사한 꽃향기가 가득히 넘친다. 여름이면 바람이 구름을 몰아 
돌고 비가 개인 뒤엔 울창한 송림 사이 계곡마다 넘치는 계류가 여울과 폭포와 담소를 
이루며 삼복에도 냉기를 느끼게 한다. 가을이면 석불 사이 아슬한 단애마다 단풍이 
붉게 타서 풍악의 선경으로 변한다. 겨울이면 앙상한 개골산이 되어 손시린 고독이 
청태를 말리고 숲속에 숨었던 석불들이 확연히 나타나서 산길을 가는 길손의 발길을 
더욱 머물게 한다.
  경주 남산은 이같이 계절 따라 변한다. 아침 해뜰 무렵과 저녁 노을이 깃들 적의 
모습이 또한 다르다. 밖에서 보면 한 덩이 자라 같은 모양의 바위산이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변화무쌍한 깊은 계곡들로 길을 잃기가 쉽다. 이 산에는 7세기부터 
10세기에 걸치는 300여 년간의 불적으로 60여 개처의 절터와 38기의 석탑과 59체의 
석불이 발견되었다.
  신라 그날의 남산을 생각해 본다. 안개 자욱히 깔린 신비한 정적의 새벽이면 
천상에서 들리듯 그렇게 골골마다 가득히 산사의 종이 울렸을 것이며 연등절 밤에는 
온 산이 불등으로 별천지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 산을 넘나드는 소슬한 바람결에는 
불전의 향연이 가득히 묻어 흐르고 영혼의 간살을 헤집고 파문져 오는 범패가 
독경소리와 함께 정토의 화음이 되어 은은히 퍼져 나갔을 것이다.

     남산의 불적을 보지 않고 불교미술을 논할 수 없다
  경주에 가서 남산을 보지 않고 신라의 유적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내부를 보지 않고 
외부만 본 격이며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는 남산의 불적을 보지 않고 
신라불교미술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때때로 시인, 화가들이 이 산을 찾아들어 세 
속의 명리를 버리고 불적에 도취되어 탈속의 순간 속에서 글 짓고 그림 그리기를 
수도하듯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진작가는 마애불 앞에 앉아 햇빛 따라 하루종일 
변하는 영상을 포착하기도 한다.
  남산 불적 중에 가장 이른 7세기 석불은 석굴의 감실 속에 안치하였던 원각불들이며 
불곡의 석불좌상(보물 제198호)과 생의사의 삼존석불(경주박물관에 이전) 및 승방곡 
입구의 삼체석불(보물 제63호)이다. 이들 불상에는 불성과 함께 인자한 미소가 넘치는 
인간미가 있다.
  8세기 불적은 미륵곡 석불좌상(보물 제136호), 신선암, 마애보살상(보물 제199호), 
삼릉곡 여래좌상, 용장사지, 삼륜대 여래좌상 등이다.
  9세기 불적으로는 창림사지 석탑, 남산동 석탑, 탑곡의 마애불(보물 제201호), 
삼릉곡의 여래좌상 등이다.
  10세기 것으로는 삼릉곡의 마애여래 좌상과 약수계의 마애대불, 백운계의 
마애장육상, 윤을곡의 마애삼존좌상 등이다.
  남산 석불의 조성은 입체불에서 반양각의 마애불로 되고 그후 선각불로 퇴화되어 
갔다.
  이곳 경주에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남산의 불적과 옛날 신라인들의 체취를 
느껴볼 수 있다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이들 불적을 답사할 수 있는 남산의 대표적 등산 코스를 소개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통일전 앞으로 하여 봉화곡을 들어가서 칠불암, 신선암의 마애불을 보고 정상에 
올랐다가 북쪽으로 내려가서 용장사지를 보고 삼릉곡으로 내려오면 천천히 걸어서 
5시간 정도 걸린다.
  2) 칠불암과 신선암의 마애불을 보고 정상에 오른 뒤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산중턱에 
천룡사지가 있는 마을을 만나게 되는데, 이를 지나 천룡계로 내려오면 4시간 정도 
걸린다.
  3) 불곡을 거쳐 삼화령에 올랐다가 남산성을 보고 창림사지로 내려오면 2시간 정도 
걸린다.
  4) 보리사를 거쳐 탐곡의 불적을 보고 해목령, 남산성, 포석정으로 내려오면 3시간 
정도 걸린다.
  5) 승방곡의 삼체석불을 보고 국사곡 남산동 사지로 내려오면 2시간 정도 걸린다.
  6) 국사곡에서 개선사지를 거쳐 남산 정상에 올랐다가 약수계로 내려오면 2시간 
정도 걸린다.
  7) 칠불암 석불, 신선암 마애불을 보고 약수계로 내려오면 4시간 정도 걸린다.

     육감적인 생동감이 넘치는 불상들
  한번은 20여 명의 남녀 일행과 봉화곡을 들어서서 칠불암과 신선암 불적을 보고 산 
정상에 올랐다가 북쪽으로 내려와 용장사지를 보고 삼릉계로 내려오는 5시간 코스를 
답사하였다. 보행은 동남산의 서출지(사적 제138호)에서 시작하였다.
  서출지 못가에는 천수를 다한 늙은 백일홍나무가 서너 주 비스듬히 서 있었고 
1664년에 임적이 세운 이요당의 누각이 못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소지왕 때 
왕비가 궁내의 내불당에서 수도하던 승려와 육체적 사랑을 나누다가 죽음을 당한 
'삼국유사' 사금갑의 이야기를 상고하면서 자유연애 시대인 신라의 풍습을 이해하기도 
했다.
  봉화곡을 오르는 길은 송림과 계류를 지나 평탄한 산록을 걷다가 급경사의 비탈을 
올라 죽림을 지나니 산중턱에 칠불암의 마애불상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1시간쯤 
등산한 피곤이 일시에 가셔지고 경이로운 희열의 생기들이 돌았다. 삼존마애불의 
중앙석불은 우견편단의 법의을 입고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여래좌상(높이 2.7m)인데 
근엄한 표정에 당당한 체구를 가졌다. 오른쪽 협시보살(높이 2.1m)은 오른손에 
감로병을 들고 본존을 향하여 약간 몸을 틀어 서 있다. 왼쪽 협시보살(높이2.1m)은 
왼손에 천화(하늘 천, 꽃 화)를 들고 오른손에 연꽃을 들고 서 있다.
  이들 삼존불은 살냄새가 풍기도록 육감적인 생동감이 넘친다. 협시보살은 관음과 
세지보살로 보인다. 삼존불 앞에 사면석불이 있는데 동서남북 4면에 1m 내외의 
석불좌상이 각각 새져겨 있다.
  동쪽은 약호가 있어 분명 약사여래이다. 이들 불상도 풍만한 얼굴에 유감적 
생동감이 넘치고 장엄하고 엄숙한 영감을 주고 있었다.
  이어 가파른 비탈을 오르다가 위태로운 단애의 절벽을 타고 옆으로 들어가니 암벽에 
구름을 타고 창공을 떠가는 아름다운 신선암 보살상이 있었다. 오른손에 연꽃을 들고 
천의는 구름 위에 나부끼며 육체는 굴곡을 지었다. 실로 자연주의적 작풍의 자비의 
신앙미가 흐르는 유려한 관음보살상이다. 이 보살상 앞 벼랑에 서서 불국사 쪽을 
바라보니 절과 들과 마을과 산이 발 아래 깔린다. 떨리는 다리 아래는 십여길 
벼랑이며 전개된 시야는 구름을 타고 천상에 오른 기분이다. 가슴 속에 쌓인 
속세의 찌꺼기가 정결히 가시는 듯하다. 그곳에서 화사한 철쭉이 가득 핀 암벽 산길을 
지나 정상에 올랐다. 등산의 어려움도 있었으나 미답의 경지를 가는 행군처럼 서로 
의지하는 마음이 연결되어 험한 산길의 피곤을 잊었다.
  정상에서 북으로 내려가 용장사지에 들렀다. 용장사는 신라 고승들이 머물렀던 
절이며 조선의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쓴 명소이다. 아름다운 마애불이 있고 
원형삼륜의 높다란 대석 위에 상현좌를 한 목 없는 석불이 용장계를 굽어보고 있었다. 
산정 암반 위에 석탑을 절묘하게 세웠다.
  삼릉계 정상에는 상사바위(높이 15m)가 우뚝 서 있었다. 상사병이 걸린 남녀가 이 
바위에 와서 빌면 상사병이 나았다 한다. 상사병을 빌던 자그마한 신라석불도 남아 
있다. 불면의 그리움에 병든 연인들이 모여 사랑을 해후하던 곳이기도 하다.
  삼릉계 정상 밑에는 거대한 상사암의 마애불(높이 5.4m)이 일행의 발길을 멈추게 
하였다. 통견의 법의를 입고 연화좌 위에 앉아 항마촉지인을 한 대불은 삼릉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불을 드리고 발 아래 펼쳐진 서남사의 광활한 시계를 
바라보느라고 그만 시간을 잊었다. 암자에 내려와 약수 한 그릇을 마시니 땀 번진 
가슴이 후련하였다.
  비탈진 돌계단 길을 급히 내려오다가 맑은 개울 건너 비스듬한 자연 암반에 
선각으로 아름답게 조각된 6구의 마애불을 만났다. 참으로 완숙한 화공이 그린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자연과 예술과 종교가 절묘하게 융합된 마애삼존불(높이 2.4m) 두 
기였다. 필자에게는 남산 제일의 아름다운 불적으로 느껴졌다. 탁본을 해서 벽에 걸면 
신라의 탱화가 될 것 같았다. 이를 지나 내려오니 개울가에 목부러진 채 앉아 있는 
원통불(높이 2.7m)이 있었다. 석굴암을 조성한 석공의 솜씨를 엿보게 하는 아름다운 
석불이었다.
  기회가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위에 설명해 놓은 남산의 어느 한 코스라도 꼭 
답사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신라 국신의 터전인 낭산

  낭산은 경주국립박물관에서 보면 동남쪽으로 해발 115m의 나지막한 동산이 
남북으로 길쭉하게 누워 있는 산이다. 낭산의 면적은 25만 평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라가 가장 큰 제사를 지내던 주산으로서 국신의 제단이 있던 곳이다.
  '삼국사기' 제사조의 삼산, 즉 낭산, 골화, 혈례 중 왕도에 있던 유일한 중심산이다. 
'삼국사기' 실성왕 12년(413)의 기록에 보면 왕이 낭산에 상서로운 구름이 서린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선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이니 응당 복지이다. 이제부터 
낭산의 나무 한 포기도 베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리하여 낭산 남쪽 
지역에는 신령이 노니는 신유림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7세기부터는 불교의 성산으로 왕실의 기복처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낭산 남쪽 
기슭에 한국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무덤이 있고 중간쯤에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화장터인 능지탑이 있다. 그리고 12지신상이 조각된 능지탑 동쪽 산록에는 
신라 왕실의 원찰인 황복사 절터와 3층석탑이 서 있다. 또 낭산 남쪽 신유림의 터에 
제단을 설치하여 명랑법사가 문두루의 비법을 써서 신라를 침범해 오던 당나라 군사를 
황해에 수장시킨 사천왕사터가 남아 있다. 낭산 북쪽에는 최치원 선생의 독서당 
건물이 있고 현 중생사 근처에는 석조 11면 관음보살상과 마애삼존불, 석조불상좌대, 
석탑, 석등 등이 흩어져 있다.
  이 산에 들어서면 신비한 영감들이 떠오른다. 신라 그날의 혼령들을 만날 수도 있다. 
유적지를 발굴하지 않고 모두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무한한 기대감을 주기도 
한다. 어쩌면 제한된 발굴보고서와 말끔하게 정비된 유적보다 황폐한 아쉬움이 있지만 
처녀지로 남아서 상념의 날개들을 펼치게 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면이라 생각된다.
  불교미술학자들은 황복사지3층석탑에서 나온 순금불상과 아울러 마애삼존불이나 
석조관음보살상 등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신라 능묘조각을 연구하는 미술학자들은 
황복사 남쪽의 무너진 무덤을 신문왕의 능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며 황복사터의 
12지신상들이 신문왕릉의 호석돌이 아닐지 생각 속에서 수없이 짜 맞추어 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낭산 남쪽의 현 신문왕릉이라 한 능묘가 효소왕릉이라고 하여야 
'삼국사기'에 망덕사 동쪽에 효소왕릉이 있다는 기록과 부합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향가를 연구하는 학자는 월명사가 거처하던 사천왕사터에 앉아 그가 지은 '도솔가'와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서 지은 '제망매가'를 음미해 보고 사색에 잠길지도 모른다. 어느 
음악가는 낭산 남쪽 월명리를 걸으며 월명사가 피리를 잘 불어 그가 달밤에 부는 피리 
소리에 천지가 감동하여 하늘의 달이 멈추어 섰다는 그 신묘한 음악의 여운을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선덕여왕의 초라한 무덤 곁을 서성이며
  신화를 연구하는 사람은 신라 산악신의 제단과 신유림을 거닐고 싶을 것이다. 
필자는 선덕여왕의 초라한 무덤(봉분둘레 73m) 곁을 돌면서 인평(인자할 인, 평평할 
평) 연간의 여왕 당대를 생각하였다. 선덕여왕은 634년에 분황사를 창건하고 635년에는 
호국영령을 모시는 영묘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신라 삼국통일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황룡사9층목탑을 645년에 건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문관측의 기념비적 
구조물인 첨성대도 여왕 당대의 창조물이다.
  선덕여왕은 이러한 문화적 사업에만 힘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날로 압박해 오는 
백제의 군사력을 방어하기 위하여 김유신, 김춘추 같은 영걸을 잘 지도하였고 국무를 
총괄하는 상대등의 지위에 있는 비담의 반란도 잘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여걸이었다. '삼국유사'에 여왕의 남편은 음갈문왕이라 하였고 선덕여왕을 
사모하다가 상사병이 난 지귀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이 영묘사에 행차하여 향을 피우고자 지귀를 불렀다. 지귀는 탑 아래에 
와서 여왕을 모시고 있다가 갑자기 잠이 들어버렸다. 여왕은 지귀가 자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알고 지귀의 가슴 위에 여왕의 가락지를 빼어 놓고 궁으로 돌아갔다. 지귀가 
잠을 깨니 가슴이 답답하여 한동안 기절하였다가 안타까운 마음에 심화(마음 심, 불 
화)가 터져 나와 불길이 되어 결국 영묘사의 목탑을 불태우고 말았다 한다. 얼마나 
상징적인 사랑의 설화인가. 선덕여왕은 미천한 지귀와도 사랑의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선덕여왕이 예언한 세 가지 일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첫째는 3색의 모란꽃 그림과 모란꽃씨를 당 태종이 신라에 보냈는데 꽃그림에 
나비가 없자 모란은 향기가 없는 꽃이라고 예견한 일이다.
  둘째는 영묘사의 옥문지에서 겨울에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백제군의 침범을 미리 
알아 여근곡에 몰아 넣어 섬멸시킨 것이다. 여왕은 남자의 성기가 여자의 성기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어서 나온다는 남녀 합궁의 이치를 군사의 전법에 쓰고 있다.
  셋째는 자기가 죽을 해와 달과 날을 미리 알았고 자기가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물으니 낭산 남쪽이라 했다. 정말 
그날이 되니 여왕이 죽었으며 낭산 남쪽에 묻었는데 그 뒤 10년 후에 낭산 남쪽, 
선덕여왕 무덤 밑에 사천왕사가 창건되었다. 과연 사천왕사 위에 도리천이 있으니 
여왕의 예언이 맞았다.
  이렇게 그녀는 영특한 여왕이기도 했다. 신라는 제사장도 여자가 하였듯이 여권이 
강한 나라였다. 남녀평등사상의 문제나, 여권신장 등의 문제가 일찍이 없었던 
나라였다.
  필자는 사촌왕사터에 앉아 선덕여왕 당대의 신라 최고의 예술가인 양지를 생각하며 
그가 만든 소조의 사천왕상(경주국립박물관 소장)이 설치되었던 목탑을 상상하면서 
목부러진 돌거북 위의 비신들이 어디엔가 묻혀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을 가졌다.
  그리고 760년 4월 1일 왕궁의 청양루에서 사천왕사에 살던 국선 월명사가 
경덕왕에게 지어 올린 향가 '도솔가'를 외어 본다.

  용루(대궐)에서 오늘 산화가(흩을 산, 꽃 화, 노래 가)를 불러
  청운에 한송이 꽃을 뿌려 보내노라.
  은근하고 정중한 곧은 마음의 시킴이니
  멀리 도솔천의 부처님을 맞으라.

  그리고 월명사가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사천왕사에서 제를 올리며 지은 향가인 
'제망매가'는 다음과 같다.

  죽고 사는 길이 여기에 있으니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버렸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도 간 곳을 모르누나.
  아아 미타찰(극락세계)에서 만나볼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

  여기에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다음과 같은 찬시를 덧붙였다.

  바람은 지전을 날려 저 세상 가는 
  누이동생 노자를 쓰게 했고,
  피리소리 밝은 달을 흔들어
  항아(달 속의 선녀)가 발을 멈추었네.
  도솔이 하늘처럼 멀다 하지 말라
  만덕화(일만 만, 큰 덕, 꽃 화) 한 곡조를 즐겨 맞았네. 

  생동하는 명상의 조각예술 석굴암

  우리 민족이 예술적 재능을 최고로 발휘한 것이 석굴암일 것이다.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이든 동양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이든 석굴암에 가보면 동서의 조각예술을 
뛰어넘어 공감이 느껴지는 예술적 감흥을 얻게 될 것이다.
  석굴암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 구차하게 외국어로 설명하지 않아도 언어를 초월한 
경건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인도의 아잔타석굴이나 엘로라석굴이나 중국의 돈황석굴, 
운강석굴, 용문석굴, 천용산석굴을 돌아보고 와서 경주 토함산 석굴암을 다시 한 번 
가보기 바란다. 요즈음은 중국 여행이 쉬워져서 석굴사원을 본 사람들이 많아졌다.
  돈황석굴은 366년에 개굴하여 명대까지 조성된 486개굴(북위 32, 수 110, 당 247, 
오대 이후 97)이 있다. 거친 사암의 암벽에 조성된 자연석굴사원인데 불상은 모두 
흙으로 만든 채색의 소조불이며 벽면은 극채의 벽화로 가득 차 있다. 돈황의 
석굴사원에서 굴 수의 방대함과 굴 조성의 장구함에 놀랄 것이다. 그러나 굴 하나를 
뚝 떼어 냈을 때 석굴암 만큼 조화로운 석굴은 없다.
  대동의 운강석굴은 5세기 때 북위가 만든 중국 제일의 석굴이다. 40여 개 굴 속에 
50만체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담요오굴이다. 굴 속에는 높이 
17미터가 넘는 거상들이 있고 불상앞 공간이 1미터에서 수미터에 불과하여 불상을 
쳐다보면 콧구멍과 턱과 귀가 보일 뿐 장대함에 놀라지만 종교적 형식주의에 흘러 
비인간적인 사암질의 거친 돌이기 때문에 석굴암같이 인간적 생동감이나 고요한 
명상이 적다.
  하남성 낙양의 용문석굴은 6세기 전기에 북위가 개굴하였다. 당 고종 때(672-675) 
조성된 봉선사가 대표적인데 봉선사의 비로자나불상은 85척, 협시보살상은 70척의 
거상이다. 용문석굴의 석질은 회색의 석회암으로 치밀한 조각에 중국적 불상의 완성을 
본 석굴이지만 거상 앞에 서면 사람만 왜소하게 만들고 기만 질리지 석굴암 석굴처럼 
사람을 따뜻이 감싸서 종교의 세계로 인도하는 예술적 감동이 떨어진다.
  천용산석굴은 당대의 섬세한 조각으로 거상을 탈피하고 있지만 불상의 미련한 
표정과 종교의 형식적 틀을 벗어나지 못해서 석굴암과 같은 숭고한 경지의 인간적 
예술성이 없다. 중국 석굴들은 모두 자연 굴사원이므로 굴 자체가 석굴암처럼 
인공굴의 건축예술과의 조화적 융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류가 만든 불교 조각예술의 최고 경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 석굴의 불상조각은 거상이어서 우선 인간을 왜소하게 
만들고 종교의 형식주의로 흘러 위압적이다. 석굴암 석굴의 불상 조각은 사람보다 
약간 큰 규모이므로 위압감이 없이 인간과 불상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또 중국 
석굴사원은 불상 자체를 크게 만드는데 주력하여 공간을 배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석굴암 석굴은 본존불의 두광을 후면벽에 연화문으로 새겨서 사람이 바라보는 
공간의 적절한 간격을 지극히 조화롭게 배려하였다. 중국 불상은 때때로 극채의 
채색을 한 소조불이거나 벽화로 인하여 혼란스럽도록 화려하지만 지나치게 
육감적이거나 미련스러운 표정이 많은데, 석굴암 석굴은 육체는 생동하고 표정은 
미소가 없으나 고요한 명상과 엄숙한 침묵 속에 인간적이면서 불성이 높은 경지에 
도달한 법열(법 법, 기쁠 열)이 있다.
  석굴암은 이런 점으로 인류가 만든 불교조각예술의 최고의 경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딱딱한 화강암을 그토록 숙련된 솜씨로 다듬어 놓은 석공의 경지도 놀랍기 
그지없다. 그리스나 로마의 조각은 연질의 대리석으로 만들어 그 조성이 용이하지만 
견고한 화강암에 저리도 섬세한 조각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에 만들기 시작하여 9세기 경에 완성을 본 것으로 보인다. 
전면에 장방형 전실을 두고 전실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복도가 있고 복도 속에는 
원형의 본실이 있다. 본실 중앙에 여래좌상이 앉아 있는데 여래상의 높이는 272cm의 
통돌로 조각되었다. 여래상은 높이 160cm의 연화좌대 위에 앉아 있다. 전실 
좌우벽에는 팔부신장(가루라, 건달바, 천, 아수라, 긴나라, 야차, 용, 마후라가)이 
조각되어 있다. 이 조각들은 석굴암의 다른 조각에 비하여 솜씨가 떨어지는데 아마도 
가장 나중인 9세기쯤 조각된 것으로 보인다.
  복도 앞 벽면 앞쪽에 금강역사가 서 있다. 웃옷을 벗고 주먹을 쥐고 패기 넘치는 
자세로 눈을 부릅뜨고 한쪽 상은 침묵하고 한쪽 상은 고함을 지르고 있다. 배와 가슴 
부분의 힘살 근육이 탄력적이다. 이 조각은 완전입체에 가깝게 조각하였다. 복도 
양쪽에는 사천왕이 무복(군사 무, 옷 복)을 입고 무사처럼 서서 악귀를 발로 밟고 
있다. 동방 지국천은 칼을 들고, 북방 다문천은 탑을 들고, 서방 광목천은 칼을 어깨에 
메고, 남방 증장천은 두 손으로 칼을 잡고 있다. 이들 사천왕은 희열이 넘치는 밝은 
표정이다. 전실의 팔부신상과 문 앞의 금강역사와 복도의 사천왕은 모두 여래를 
수호하며 불력을 시위하는 상징이다.
  본실 주위의 원형 벽면에는 높이 242cm, 너비 121cm의 규격을 가진 15매의 판돌에 
범천, 제석천, 문수보살, 보현보살, 11면 관세음보살, 십대 제자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범천, 제석천,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상은 젊은 여체인데 육체의 생동함이 
얇고 투명한 옷 속으로 속살이 비치는 감각을 잘 살렸다.
  그러나 얼굴은 고요한 침묵의 명상 속에 있어 높고 깊은 종교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관세음보살은 20대의 처녀 몸매 같으며 범천, 제석천, 문수보살, 
보현보살상은 30대 같은 성숙한 여체의 완숙미를 보인다. 십대 제자상은 장년으로 
경건한 침묵 속에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인간적 덕성과 소박성과 간결성으로 잘 
표현되었다. 중국이나 일본의 십대 제자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경지이다. 천장 10개의 
감실 속에 8체의 유마거사상과 보살상 등이 앉아 있는데 부처의 세계를 찬미하는 
희열에 넘치고 있다.
  본존불인 여래좌상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우견편단의 법의를 입고 원만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굽타식의 나발과 간다라식의 어깨, 남성적 체구에 자애로운 입과 코, 
늘어진 귀, 반쯤 뜬 눈, 여성인지 남성인지 분간 못할 부드러운 살결, 소박성, 순수성, 
자연성의 극치로 고요한 명상 속에서 석굴암 석굴의 모든 상을 하나로 귀일시키고 
있다. 인간이면서 불성을 지닌 자비로운 성품, 이상적 경지의 예술적 승화이다.
  종교의 세계를 살아 있는 인간의 세계와 융합시킨 절정의 예술을 본다. 종교의 
형식주의를 이같이 성공적으로 탈피한 불교조각예술은 석굴암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신라인의 예술적 재능은 참으로 뛰어났던 것임을 석굴암은 실증하고 있다. 
석굴암에 가서 우리는 이 시대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자문하면서 민족문화의 
황금시대가 연 위대한 예술의 감흥에 잠겨본다.
  1995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조사를 거쳐 
유네스코 베를린 회의에서 국보 제24호인 석굴암과 국보 제52호인 팔만대장경판, 사적 
제125호인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들 
문화재에 대해서는 훼손방지와 영구보존을 위하여 국제적인 기술지원과 재정보조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인류공동의 문화유산으로 전세계 국민에게 영원히 인식될 
것이다. 

  사랑과 예술이 종교적으로 승화된 불국사

  우리 민족문화의 황금시대를 8세기 신라문화로 꼽는 학자들이 많다. 우리는 경주 
토함산에 오르면 생동하는 인간의 이상과 숭고한 종교의 명상과 아름다운 예술의 
조화를 감동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것이 곧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불국사에는 사랑과 종교와 공학과 예술이 한곳에 조화롭게 응결된 꿈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불국사를 무심히 보지 말라. 한 종교의 터전으로 외지게 보지 말라.
  불국사와 석굴암에 이르러,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예술의 영감 앞에 찡하는 
감동의 전율을 느껴 봄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물질만능에 찌든 답답한 가슴 속에 
시원한 강물 같은 것이 흐를 것이다. 불국사는 신라적 문화요소만을 지닌 유산이 
아니다. 중국 벌판을 내달리던 막강한 고구려의 강인한 힘의 문화와, 온화하고 
조화로운 백제의 문화와, 균형 잡혀 정연한 신라의 문화가 융합되어 경주 토함산에 
하나로 승화된 것이다.
  불국사 석조미술 속에는 인간적 사랑의 설화도 담겨 있다. 석공 아사달과 그를 
사랑하던 아사녀의 애잔한 설화이다. 무영지 가에 앉아 아사달이 조성하고 있는 
석가탑의 그림자가 못 속에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사랑의 열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구원한 연정의 표상이 되어 무영지 가에 돌부처로 화해 버린 
아사녀, 그녀의 그리움은 지금도 석가탑 둘레를 천년이 넘도록 돌고 있는지 모른다.
  불국사는 종교적으로 보면 신라인이 죽어서 극락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극락에 
가는 부처님의 나리이다. 원효의 중생구제의 현실적, 실천적 불교관이 여기 있고, 
의상의 화엄사상으로 세계의 실상은 보이지 아니하는 염원한 비로자나불의 
현현(나타날 현, 지금 현)이라고 생각한 그러한 불국정토관이 깔려 있다. 대웅전 
일곽에는 법화경의 세계로 법신불인 다보여래(탑)와 보신불인 석가여래(탑)가 상주하는 
상징이 있다. 서쪽 극락전 일곽에는 아미타경에 근거한 영원한 안식의 극락정토가 
또한 펼쳐져 있다. 북쪽 비로전 일곽은 화엄경에 근거한 화엄불국사의 주전이며 
법신의 연화장 세계이다.
  불국사는 구품연지(앞마당이 연못이었음)를 지나면서 속세의 진애를 씻고 청운교, 
백운교를 통하여 33계단의 33천에 올라 부처님의 몸에서 발하는 자색안개가 가득히 
서린 자하문을 들어서서 현세불인 법화경의 석가모니불을 예배하면서 구도의 정신을 
구현하고 그뒤에 있는 무설전에서는 강론을 듣는데 무설이란 불교의 심오한 진리가 
말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음전에 들러서 원을 드리고 비로전에 들러서 법신의 세계인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에서 생멸하는 세계의 실상을 명상하고 극락전에 이르러 아미타여래의 
극락세계에 안주하여 영원한 생의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통일신라 석탑의 극치, 다보탑과 석가탑
  공학적인 건축기술상으로 보면 기막힌 조영의 높은 수준을 엿볼 수 있다.
  구품연지는 발굴 결과 동서가 40m, 남북이 26m, 깊이 2m정도의 타원형 연못이다.  
불국사의 그림자가 이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우면 거울현상이 일어나서 2배의 높이로 
보이게 만들어 불국사가 하늘에 떠보이는 절묘한 효과를 주었다.
  백운교, 청운교의 뛰어난 공학적 구상이다. 두 다리의 밑은 홍예로 짠 구조인데 
경사도 45도이다. 백운교 17단을 오른 후에 평보로 몇 걸음 걷다가 다시 16단의 
청운교를 오르게 만들었고 계단 한 단의 높이가 20cm로 그 넓이도 발걸음에 알맞다. 
이 청운교, 백운교는 사람이 계단으로 오르는 데 가장 편안한 공학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불국사 석축의 구조공법이다. 밑에서 자연석으로 쌓고 그 위에 돌기둥을 
세워 건물의 기초 구조를 받치는 기능을 하도록 하였으며 돌기둥 사이에 자연석을 
채워 쌓은 석축으로 견고한 구조이다. 특히 극락전 전면과 서쪽 축대는 가로 세로의 
장대석을 짜올리고 그 사이에 돌을 채운 가구식 석축으로 대단히 견고한 구조이다.
  이러한 공법은 현대에도 다리를 가설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법영루 
바깥기둥 밑에 석재로 +자형으로 짜올리고 상하는 넓고 중간은 가늘게 하여 법영루가 
하늘에 뜬 효과를 주었고, 다보탑과 석가탑의 구조는 밑에서 상륜부까지 중심기둥 
하나를 중심으로 짜올린 특이한 구조이다. 통일신라 건물의 석조기단으로 대단히 
안정감을 주고 있다.
  끝으로 불국사에 남아 있는 석조물과 금동불상 등의 미술사적으로 뛰어난 
예술성이다. 석가탑의 간결한 정제미와 다보탑의 기발한 기교미가 서로 대칭되어 
대비된 조화미를 주고 있다.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의 조화미와 변화미이다. 석조계단과 홍예와 난간과 
문양조각 등은 어느 한곳에도 안일한 구상이 없이 하나하나의 조형이 각기 다른 
변화의 이채로운 조형감각을 지니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돌을 세워 받치는 기법을 
쓰고 어떤 경우는 옆으로 포개는 기법을 써서 같은 기능의 구조에도 각기 다른 변화를 
주었다.
  그리고 땅과 접하는 축대는 자연석으로 쌓아 자연의 결합을 조화적으로 
처리하였으며 건축물이 서 있는 윗단으로 올라갈수록 인공적 기능을 강화시켜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건물기단의 안정적 비례 또한 통일신라 석조기단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형을 
보여주고 있다. 주춧돌의 몰딩처리 또한 정연하고 다보탑의 상륜부는 청색 돌로 
조각된 것인데 이는 탑신이 회백색의 화강암이므로 상륜부를 같은 돌로 조각할 경우에 
가볍게 보이게 되므로 청석을 써서 무겁게 보이도록 안정감을 주었다.
  그리고 석가탑 주위의 팔방금강좌의 연화문 조각이나 다보탑의 팔각정자형 조형의 
그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수법 및 4각과 8각의 결합미와, 대웅전 앞의 석등과 봉로대의 
조화적인 조각수법은 8세기 신라 석조미술의 표본적인 조형을 지니고 있다. 국보로 
지정된 금동아미타여래상이나 비로자나불을 9세기 경의 것이지만 원만하고 풍만한 
체구에 통일신라 금동불을 대변하는 유물이다. 약간 응결된 힘이 없어 유약한 감을 
주기는 해도 신라인의 너그러운 관용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비로전 내에 있는 고려 초기 부도는 중대석의 고형(북 고, 형상 형)의 운문이나 
탑신의 여래상과 보살상의 현란한 조각솜씨가 뛰어난 것이다.
  불국사는 528년에 작은 절로 창건되었다가 751년 경덕왕 때 대찰로 중창되었다. 
지금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나 석가탑, 다보탑은 모두 
8세기 중창 때의 것들이다.
  목조건물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서 대웅전은 1765년, 극락전은 1750년에 중창된 
건물이며 자하문도 그때 건물이다.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과 회랑은 1973년에 복원된 
것이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다라니경'은 목판 인쇄물로 세계 최초의 것이다. 
'불국사고금역대기'란 책은 1740년에 기록된 것인데 현재 일본 동경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그 사본이 불국사에 있다.
  불국사는 불경의 세계를 천재적 건축가가 절묘하게 현상화시켰으며 천공(하늘 천, 
장인 공)의 재주를 가진 조각가가 숙세(오랠 숙, 세상 세)의 원력을 풀어내어 조형의 
아름다움을 절정에 이르게 한 것이다. 

  신라 호국정신의 구심체 황룡사 9층목탑

  우리 나라 불교사찰 중에 가장 크고 장엄하며 호국사찰의 구심체가 되었던 곳이 
경주 황룡사이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옛 자취를 회고하게 하지만 오늘도 
한국문화사의 현장으로 중요한 터전이 되고 있다.
  한국 건축사나 불교문화사, 고대 도시계획을 연구하는 학자나 학생 등은 경주 
황룡사 절터를 가보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국가를 보위하는 직무에 종사하는 
사람이거나 군의 간부가 되고자 하는 사관학교 학생들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정신적 구심체가 되었던 경주 황룡사 절터를 꼭 가볼 필요가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김춘추같이 외교적 수완을 지닌 지도자나 김유신 같은 
명장만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다. 신라인의 마음을 한곳에 웅집시킬 수 있는 사상적 
구심체가 있었고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성덕대왕신종 같은 당시 세계 첨단의 
주물공업기술과 신라고분에서 출토되는 수십만점의 철강제품인 무기생산 능력이 
결합되어 삼국을 통일한 것이다.
  경주 황남대총 남분의 한 무덤에서 창과 도끼 등 무기류가 1,500여점이나 
발굴되었다. 이들 철기류는 단촐로 만들어졌는데, 신라는 삼국 중에 강철생산 기술이 
가장 뛰어났고 대량의 철 생산능력을 갖춘 그야말로 국력이 앞섰던 나라였다.
  경주 황룡사에는 불교라는 종교를 통하여 호국의 일념으로 온 국민을 뭉치게 한 
상징적 건물인 장엄한 9층목탑이 세워져 있었다. 탑의 높이가 80여 미터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경이로웠던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당시 사찰의 탑은 불상보다 높은 
예배물이었기에 사찰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신라군이 전투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한 것은 어릴 때부터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정신교육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화랑제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화랑의 무리는 풍월주라하여 예술에 뛰어난 청류의 도를 익히고, 
국선이라고도 하여 무술을 연마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의기를 길렀다. 또 
용화향도라하여 불교를 중심으로 한 정신적 수행도 체험하였다.
  불교의 윤회사상에 의해 사람의 죽음은 단지 현상의 변화일 뿐 영원한 소멸이 
아니기에 다시 태어나면 되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종교정신으로 무장한 군인을 
양성할 수 있었다. 화랑 관창이 그런 청년 중의 하나였다.

     진흥왕 때 시작하여 92년 만에 완성
  이제 황룡사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간 발굴 조사한 
결과를 통하여 드러난 유적을 설명하고자 한다.
  황룡사가 창건된 것은 553년(진흥왕14)이다. 처음에 왕궁으로 짓다가 용이 나타나자 
절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절의 배치가 왕궁의 배치와 비슷하다.
  그후 574년(진흥왕 35) 청동 3만 7천 근으로 장육상을 만들고 1만 2천 근의 
보살상이 좌우에 배치되었다. 이들 불상은 모두 금으로 도금하였다.
  645년에는 선덕여왕이 황룡사에 9층목탑을 건립하였다. 이를 보면 황룡사는 진흥왕 
때 시작하여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92년 만에 완성된 
셈이다. 황룡사9층목탑 건립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본다.
  탑을 세우도록 왕에게 건의한 사람은 자장율사였다. 자장율사는 9층탑을 세우면 
인접국가의 항복을 받고 9한이 와서 신라에 조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라고 
했다. 선덕여왕은 건의를 받아들여 군신들과 이를 논의하였다. 신하들은 9층목탑을 
세우기 위해서는 백제에 공장(장인 공, 장인 장)을 요청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는 
백제의 건축기술이 앞서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선덕여왕은 귀한 물건과 비단 등을 
백제 조정에 보내어 건축기술자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백제 건축가인 아비지가 와서 
나무와 돌을 다루고 이간인 김용춘이 소장(작을 소, 장인 장) 2백명을 거느리고 공사의 
책임자가 되었다. 김용춘은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이다.
  9층목탑의 높이는 상륜부가 42척, 상륜 이하가 183척, 합해서 225척(약 80m)이었다. 
탑 중심 기둥엔 사리를 안치하였다. 중심기둥의 초석 밑에서 1964년 금동 탑지가 
발견되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았다. 이 9층탑은 9한을 누르기 위하여 세운 
호국탑이었다.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 제4층은 탁라, 제5층은 응유, 제6층은 
말갈, 제7층은 단국, 제8층은 여적, 제9층은 예맥을 제압하는 상징이다.
  신라는 이 9층탑을 세운 지 23년 후인 668년에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래서 
'삼국유사'에 "탑을 세운 후에 천지가 태평하고 삼한을 통일했으니 탑의 영험이 아니고 
무엇이랴"라고 기록하였다. "고려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려다가 말하기를 신라에 세 
가지 보배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 하였다. 무엇을 이름하느냐 하면 황룡사 장육상과 
9층탑과 진평왕 천사옥대를 이름하니 마침내는 정벌할 계책을 그만두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 삼보는 호국신의 신물이 되어 있다. 신라 삼보 중 
장육상과 9층탑이 황룡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9층목탑이 너무 높아서 당시 피뢰침이 
없는 때이라 다섯 번의 벼락을 맞고 여섯 번의 중수를 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황룡사는 계속 보수되었으나 1238년(고종 25) 몽고군의 병화로 탑과 장육상과 불전이 
모두 소실되었다.
  황룡사의 소실은 우리 민족문화사에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 황룡사에는 경덕왕의 
첫 번째 왕비인 삼모부인이 시주하여 754년에 주조한 무게 497,581근의 신라 최대의 
종이 있었고 솔거가 그린 신필의 노송 벽화가 금당벽에 장식되어 있었다.
  황룡사가 불탄 후 730여 년간의 폐허로 논밭이 되고 마을이 조성되었던 것을 
1976년에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민족문화의 재조명사업이 진척되었던 것이다. 발굴 
결과를 보면 황룡사의 사역은 24,480평이었다. 담장은 동서 길이가 288m, 남북 길이가 
281m에 이르렀다. 회랑 내의 면적만도 8,800평으로 현재는 불국사의 8배가 넘는 
대찰이었다.
  건물 배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절의 정남에서 들어서면 남문이 있고 남문을 지나 
들어서면 60평의 중문이 있다. 중문 좌우에는 긴 회랑이 동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동쪽 
회랑은 길이 102m에 50칸 건물이며 서쪽 회랑은 길이 139m에 68칸 건물이었다.
  중문안 절 마당에는 정면 7칸, 측면 7칸, 건물 면적 149평에 높이 80m에 이르는 
9층목탑이 서 있었다. 1978년 이 탑지에서 청동거울과 백자 항아리(당나라백자), 
귀고리 등 탑을 세울 때 의식을 행한 진단구가 발견되었다. 9층목탑 가까이 북쪽에 
425평에 이르는 거대한 중층의 금당이 있었다. 정면 11칸, 측면 6칸의 한반도 최대의 
불전이었다.
  금당 속에 장육상과 보살상 등 장엄한 불상이 보셔졌던 것이다. 지금도 이들 불상이 
앉았던 좌대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금당 동서로 나란히 남향한 좌우 금당이 또 
있는데 각각 건물 면적이 277평에 이르는 중층 건물들이었다.
  금당구역 동서에 긴 회랑이 섰는데 길이 128m의 긴 집으로 전면 31칸, 측면 2칸의 
건물이었다.
  그리고 중문 내의 좌우 절마당에 종루와 경루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금당 
정북에는 263평의 큰 강당이 있고 강당 좌우에 277평의 긴 건물 두 채가 배치되어 
있었다.
  발굴과정에서 불상, 기와, 막새, 토기 등 16,000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중에 
용마루 끝에 장식되었던 거대한 치미가 출토되었는데 사람 얼굴과 연꽃 등 다채로운 
장식이 붙어 있다. 이 치미만 살펴보아도 황룡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절터는 경주를 찾는 모든 사람이 관람할 수 있도록 정비되어 있다. 


     원효의 대중불교사상과 분황사

  염원과 희망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과 같다. 목마른 갈구는 생명의 
기운을 촉진시킨다. 생에 기다림이 없으면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없다. 꿈이 없는 시대, 
바람이 없는 시대는 참혹한 시대이다. 신라의 선덕여왕(632-647) 시대는 현실적으로는 
어려웠어도 갈망이 넘치는 시대였다.
  선덕여왕은 첨성대를 세워 천문을 관찰하고 천지만물의 순환을 살피도록 하였다. 
황룡사에 높이 80여m에 이르는 9층목탑을 세워 구한의 항복을 받고 나라가 
태평하기를 비는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그리고 전투에 나아가 전사한 영령의 명복을 
비는 영묘사를 세워 여왕 스스로 제단 앞에 나아가 향불을 올리고 눈물을 뿌렸다. 또 
분황사를 지어 원효, 자장 같은 선각자를 머물게 하여 위대한 한국의 불교사상을 낳게 
하였다.
  왕명은 지엄한 것이었다. 김유신까지도 여왕 앞에서는 한치의 어김이 없었다. 또한 
김춘추에게 명령을 내려 죽음을 무릅쓰고 구국의 외교 길에 나서게 했다. 그러나 
때로는 지귀 같은 미천한 청년이 여왕을 사랑함에 그 정을 받아주고 금가락지까지 
뽑아주던 연정도 있었다.
  경주의 신라 유적을 돌아보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선덕여왕 때 조성한 인평 
연간의 것들이다. 선덕여왕은 인평이란 신라의 자주적 연호를 썼다(신라는 법흥왕 
23년부터 진덕여왕 4년까지 고유한 연호를 사용하였다).

     한국 대중불교의 위대한 선각자 원효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절이다. 분황사에는 신라 최고의 석탑(국보 
제30호)이 남아 있다.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유학갔던 자장을 불러 분황사의 주지로 
삼았다. 자장은 당시 계율학을 연구하고 당나라에서 화엄경을 강설할 정도의 
고승이었다. 국제정세에 밝고 신라 불교교단의 조직을 탁월하게 이끌고 간 지도자였다.
  그리고 원효는 분황사에서 '화엄경소'와 '금광명경소' 등을 쓰고 화엄철학을 
정립하였다. 원효는 사변(생각할 사, 분별할 변)의 불교를 중생구제의 불교로 바꾸고 
귀족과 산간의 불전을 민간으로 끌어내려 머리로 생각하는 종교를 실생활 속에 옮겨 
인간의 고뇌를 해결하고자 한 한국 대중불교의 위대한 선각자이다. 원효의 독창적 
한국불교를 해동종이라 부르기도 하고 분황종이라 부르기도 한다.
  분황사는 원효, 자장 같은 선각자와 깊은 인연이 있는 절이다. 원효가 입적하자 그 
아들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원효상을 소상(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던 것이다. 원효의 소상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던 고려말까지 
분황사에 남아 있었다.
   '삼국사기' 열전의 솔거조에 보면 분황사에는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다. 
분황사의 좌전 북쪽 벽에 있던 천수관음상은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하는 영험이 
있었다 한다. '삼국유사' 분황사 천수대비맹아득아조에 보면 경덕왕 때 한기리에 사는 
회명의 아이가 다섯 살 때 눈이 멀게 되자 아이를 안고 천수관음상 앞에서 향가를 
지어 부르며 빌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 한다. 이렇듯 분황사는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을 이루는 절이기도 했다.
  '삼국유사' 분황사약사조에 보면 경덕왕 14년(755)에 본피부 사람 강고내말이 청동 
30만 6천 7백근으로 만든 약사여래불이 분황사에 있었다. 이 불상은 신라 최대의 
불상이기도 했는데 조선 세조 때까지 남아 있었음이 서거정의 시에서도 보인다.

  분황사가 황룡사와 마주 대하여
  천년 예터에 풀만 새롭고
  백탑(분황사 모전석탑)은 우뚝 솟아 객을 부르듯
  청산은 묵묵히 사람을 슬프게 하네
  전 삼생의 말을 능히 풀이할 스님 없고
  장육의 불상만 속절없이 남았네

  또 어세겸의 시에 "외로운 탑은 이미 앞뒷면이 허물어졌네"라는 구절이 있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분황사 석탑이 허물어졌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분황사 절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 분황사 모전석탑이 9층이라는 기록은 '동경잡기'에 처음으로 
보인다.
  1915년 일제 때 분황사 탑을 수리하였는데 그때 2층과 3층 사이에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사리함 속에는 옥류, 가위, 금바늘, 은바늘과 함께 숭녕통보와 
상평오주(고려 숙종 및 예종 연간의 화폐)가 들어 있었다. 이를 보면 고려시대에 
분황사 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창건 당시의 사리함 속에 고려의 동전을 추가하여 넣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위, 금바늘, 은바늘은 여인의 물건으로 아마도 선덕여왕이 넣은 
것 같기도 하다.
  분황사 석탑은 안산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특이한 석탑이다. 9층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다. 1층 탑신의 사방중심에 감실을 만들었다. 감실 
양옆에 장방형의 돌을 세워 붙이고 거기에 반나체의 험한 금강역사를 조각하였다. 4면 
감실 입구에 선 8체의 금강역사는 옷의 무늬가 모두 다르고 얼굴은 분노상이며 
머리에는 음각의 광배가 있다. 탑 기단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가 조각되어 있다.
  모전석탑은 벽돌로 쌓았기 때문에 지붕면 상하에 층단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탑신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알맞게 작아지고 있다. 잿빛 안산암의 어두운 
돌벽돌과 대비되도록 감실 부분은 밝은 화강암으로 짜서 분노하는 모습의 힘찬 
금강역사를 조각한 조화적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이는 신라의 건축과 조각의 절묘한 
배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전탑의 형식은 중국에서 들어왔는데 자장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황룡사9층목탑 
건립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였다. 아울러 분황사9층석탑 건립에도 관여한 것 같다. 
1991년에 분황사터를 발굴한 결과 고구려 사찰과 같이 품자형 금당배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절터에서는 고구려의 날카로운 연꽃 무늬 막새가 출토되었으며 탑의 
건축에 사용한 자도 고구려시대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분황사는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절임을 알 수 있다.
  분황사에는 신라의 샘을 대표하는 훌륭한 팔각석정이 있는데 이 샘에는 호국용이 
살고 있다는 설화가 있어 호국정이라고도 한다. 이 샘의 물맛은 아직도 정갈하다. 
1965년에는 분황사 뒤뜰의 우물 속에서 8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석불 14체가 
발견되어 지금 경주박물관 뜰에 진열되어 있다. 

  천년의 지하박물관 경주 월성

  신라의 고도 경주에는 신라 천년의 왕성유적 월성이 있다. 우리 국토에 남아 있는 
문화유적 중 귀중한 문물들이 가득 묻혀 있는 곳이다.
  월성은 고분이나 절터와는 다른 문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고분유물은 한 시대 
유물과 부장품이란 한계성이 있다. 절터 발굴은 불교의 종교적 유적으로 모든 
생활상을 규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월성은 신라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심장부로서 천년이란 긴 세월의 
생활상이 잠겨 있다. 1975년에 월성의 지하유물층에 대한 검증 발굴을 실시한 바가 
있다.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에서부터 초기 철기시대 유물과 신라가 멸망하는 10세기 
유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많은 유물층의 노출로 다음날의 학술 발굴을 위하여 조사를 중단하고 유물층을 모두 
매몰하였다. 언젠가 먼 후일 우리 문화사를 연구하는 후세들을 위하여 중요한 
유적으로 남겨 둔 것이다. 경주의 유적은 모두 발굴하면 안 된다. 신비하고 무한한 
처녀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문화에 대한 감동적인 꿈을 꾸게 하는 소재가 
된다. 문화는 유한한 것보다 무한한 영원성이 더 큰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월성의 솔숲을 거닐 때면 천년 신라의 지하박물관을 디디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발끝이 짜릿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월성은 남북 약 260미터, 동서 약 900미터 되는 
반달같이 생긴 자연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이 구릉 외곽을 흙과 돌로 판축하여 쌓은 
성의 길이가 2600미터에 이른다. 성에는 목책을 설치했던 것이 일부 확인되었으며 성 
외곽은 물을 채운 해자(주호)가 파여 있다.
  월성 남쪽은 남천이 흘러서 자연의 해자시설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월성의 방비는 
굳건할 수밖에 없었다. 월성 서북쪽에는 계림숲이 연결되어 있고 북쪽에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인 첨성대가 서 있으며 동쪽에는 신라 동궁터와 안압지가 연결되어 
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저녁 무렵 이 월성에 앉아 천년 그날의 신라 왕도를 
그려보고는 자못 황홀감에 젖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보면 파사이사금 22년(101) 2월에 월성을 쌓고 왕이 월성내로 왕궁을 
옮긴 것이 그해 7월이다. 이때 나라이름은 계림이었다. 원래 월성 서북의 숲을 
시림이라 하였는데 탈해이사금 9년(65) 이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금괴 
속에 사내아이가 있어 성을 김이라 하고 이름을 알지라 하여 데려다 길렀다. 이가 
바로 신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시림을 계림이라 고치고 국호로 삼았다.
  계림이란 국호는 탈해이사금 9년(65)부터 기림왕 10년(307)까지 사용하였다. 그래서 
충북 중원군의 미륵사지 남쪽 고개가 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156) 4월에 열린 신라 
북로의 고갯길로서 신라 영토 즉 계림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계입령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월성에 왕궁의 정전을 건립한 것은 첨해이사금 3년(249) 7월에 궁남에 남당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에서 보인다. 왕국의 정전으로 조원전의 이름이 보이는 것은 
진덕여왕 5년(651) 1월의 기록이며 "1월 1일 왕이 조원전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았는데 
이것이 신라왕실이 하정을 받는 예의 시작이라 하였다."
  왕궁내에 고루를 세운 것은 태종무열왕 2년(655)의 일이었다. 북을 쳐서 행사나 
시간을 알리는 통신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월성의 왕궁 문은 귀정문이 누문이며 
가장 큰 정문으로 보인다. 그외 인화문, 현덕문, 무평문, 준례문이 있었다. 전으로는 
정전인 조원전을 비롯하여 정사를 보는 편전인 평의전이 있었고 연회를 하는 숭례전이 
있었다. 애장왕 6년(805)에 왕이 군신을 모아 숭례전에서 잔치하는 기록이 보인다. 
"왕이 스스로 금을 타고 이찬 충영이 춤을 추었다."
  당의 건물로는 남당, 서당, 월정당과 내성의 건물들이 있었다. 누각건물로는 월상루, 
고루, 망은루, 오학루가 있었다. 이중에 월상류는 신라의 왕도를 사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높다란 위치에 있었다. 헌강왕 6년(880) "왕이 이 누각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왕도의 모든 민가가 기와집으로 덮이고 나무를 때지 않고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 
기록이 보인다. 왕궁의 창고로 유명한 것은 신라의 국보인 만파식적을 보관하였던 
천존고이다.

     한국 고유의 왕궁인 월성
  월성은 중국의 궁제가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조성된 왕궁으로서 남북 
축선상에 외조, 치조, 연조, 상원이 배치된 조선의 경복궁 궁제와는 다른 것이다. 
자연구릉지대에다 왕성을 구축한 것은 서울 몽촌토성이나 공주 웅진성의 백제왕성과도 
같다. 대구에 있는 달성도 삼국시대 초기의 도성형태이다. 이러한 왕성의 형태가 
한국적 고유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월성의 남천에는 원효대사가 다리를 건너다가 일부러 물에 빠져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은 유교와, 경덕왕 때 조성한 석교인 일정교, 월정교 등이 있었다. 그리고 다리에 
누각을 세워 아름답게 만든 누교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다리의 누각은 왕궁으로 
들어오는 다리이므로 군사가 지키는 감시처의 기능에, 장엄하고 화려한 위엄도 갖추게 
한 것으로 보인다.
  월성 주위의 해자와 왕성 가까이 있던 관청건물로 보이는 집터들이 모두 발굴되어 
현재 정비되어 있다. 또한 월성 북쪽 지역에서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신라 당대의 
실개천도 찾아내 그 위에 아름다운 신라의 돌다리를 원형대로 고증하여 복권하였다.
  경주에 가서 자동차를 타고 고분공원의 천마총 공개시설이나 황룡사지, 안압지, 
불국사, 석굴암, 경주박물관 등을 둘러보고 와서 신라 천년의 유적과 유물을 다 
보았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들을 때때로 본다. 문화보다 그 유적을 직접 두 발로 
걸어서 땀에 젖어 보아야 문화의 체득이 이루어진다.
  신라 월성 솔숲을 마음의 여백을 가지고 가을 바람 속에 한 번 걸어 보면, 천년의 
시간을 '타임머신'과 함께 거슬러 올라가는 일순의 감동 같은 것을 느낄 것이다. 

  시와 춤과 멋이 깃든 포석정 옛터

  경주시 배동 남산 기슭의 포석정 옛터에 와서 취하여 눈을 감으면 남산 산신령의 
황홀한 오색의 율동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포석정 옛터에 와서 명상에 잠겨 
일상의 속기를 벗으면 광대한 우주 속에 포말 같은 인생이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며 
꽃이 되는 무변한 생각의 바다로 흘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포석정 옛터에 와서 시대와 나이를 지워버리면 젊은 화랑의 무리 속에 섞이어 
청류를 즐기고 협기를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포석정 옛터는 천하명필 왕희지의 
'난정기'에 나오는 격조 높은 유상곡수연을 하던 신라 이궁의 유정한 원정(동산 원, 
정자 정)터다.
  그리고 신라 헌강왕 때 '어무상심'이란 신라의 산신춤이 창작된 현장이다. 
진성여왕(888-897년) 때는 화랑인 효종랑이 낭도들을 이끌고 심신을 단련하던 
경승지이다. 927년 경애왕 때는 왕과 왕비가 궁녀들과 함께 연회를 열다가 후백제 
견훤군의 습격을 받아 비운을 맞은 곳이기도 하다.
  포석정은 신라의 춤과 놀이와 시가 창조된 산실이다. 문화란 태평한 날에는 만민이 
즐기는 감흥나는 일이지만 나라가 위급한 때에는 투쟁의식을 상실하는 위약성도 있다. 
그러나 문화를 평가함에 있어서 전시의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왕희지가 신필로 썼다는 '난정기'를 보면 영화 9년(354) 3월 3일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 남서쪽에 있는 회계산 북쪽 난정에 42명의 현사가 모여서 흐르는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신에게 재앙을 없애기 위한 계제사를 올리고 술 한잔 마시고 시 한수 
지어 읊는 연회를 열었다. 이 연회에는 거문고나 피리 등의 악기는 연주하지 않았다.
  당시 난정의 풍치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험한 산과 무성한 숲과 죽림이 있었고 맑은 
시냇물과 여울이 정자의 좌우로 흐르는데 이 시냇물을 끌어들여 술잔을 띄울 굴곡진 
수로를 만들고 그 물가에 왕희지를 비롯하여 42명의 선비가 줄지어 앉아서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 한수를 지어 읊었다. 이때 시를 짓지 못한 사람은 벌주 세 
잔을 마셨던 것이다.

     유배거가 전복 같아 정자 이름을 포석정이라 불러
  이러한 운치있는 모임을 상고하여 동양의 원림 속에는 난정과 유상곡수연의 시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포석정의 석구(돌 석, 도랑 구)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유배거(흐를 류, 잔 배, 개천 거)의 유적은 중국 송나라 숭복궁 터에도 남아 
있고 일본의 나라시 평성경에 곡수연의 원지가 발굴되어 정비되어 있다. 중국의 
'영조법식'이란 책에는, 유상곡수연을 하는 유배거는 국자(나라 국, 글자 자)나 
풍자(바람 풍, 글자 자)의 형태로 만든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포석정터의 유배거는 전복같이 생겼기 때문에 그 옆에 있던 정자 이름을 포석정이라 
한 것이다. 포석정의 유배거는 타원형의 긴 외측지름이 6.53m, 짧은 중앙 외측지름이 
4.76m이며 포석형의 첫 돌과 끝 돌의 구배 차는 5.9cm이다. 수로의 너비는 굴곡이 
있어 일정하지 않으나 약 30cm, 깊이는 20cm이며 수로의 길이는 약 22m에 이른다.
  유배거에 흐르는 물의 유속은 쿠터(Kutter)나 매닝(Manning)의 공식에 대입하면 1분 
50초를 넘지 않으나 그 공식은 수로의 유속을 절묘하게 감속시키고 있는 굴곡을 
일일이 계산한 것이 아니고 그냥 직선의 수로로 흐르는 유속의 계산방법이기 때문에 
적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수로의 깊이가 20cm이므로 가득 차서 넘쳐 흐르는 경우와 
반쯤 차서 흐르는 경우 유속이 다르다.
  1991년 3월 5일 물을 가득 채워 넘쳐 흐르게 하고 술잔을 띄워 시간을 재는 실험을 
경주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하였다. 두 가지 형의 술잔을 사용하였는데 접시형의 밑이 
납작한 작은 잔에 3분의 2쯤 물을 담아 띄운 결과 포석형 수로(22m)를 따라 흐르는 
시간이 10분 30초가 걸렸고, 사발형 큰 잔에 역시 물을 3분의 2가량 담아 띄운 결과 
8분이 걸렸다.
  이 시간은 사언시를 지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리고 흐르는 물이 굴곡된 
지점에서는 맴돌기 때문에 술잔이 가에 붙어 정지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유배거의 수입(물 수, 들 입) 시설에는 물을 토하게 하는 용두의 석조물이 놓이는 
법인데 포석정 유배거에도 그런 조각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은 남산 포석계에 
흐르고 있는 개울물을 나무 흠대 같은 시설로 끌어들여서 대었던 것으로 보인다. 
포석정 유배거 옆에는 교란된 정자터가 있다.
  '난정기'에 보이는 유상곡수연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주의 광대함을 우러러보며 그 위대한 섭리 앞에 고개 숙이고 만물의 생성을 살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구경하면서 마음에 품은 생각을 자유롭게 시정으로 구사하는 것이 
생의 줄거움이란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래와 위를 바라보면서 
평생을 살아감에 있어 어떤 사람은 친구들과 마주앉아 회포를 풀거나 또 어떤 사람은 
육신을 초월하여 자기가 가진 사랑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다른 자기도취에 취하여 살다가 때때로 좌절이 올 때는 여러 
가지 회포에 젖게 되고 생의 즐거움이 일순의 과거가 되고 만다. 그래서 삶이 짧든 
길든 모두가 자연의 조화를 따라 결국에는 생이 끝나게 된다. 이같이 유한한 인생의 
덧없음을 슬퍼하면서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삶의 감회를 남기는 것이 중요한다는 
것이다.
  '난정기'는 당시 유상곡수연을 하면서 쓴 시문의 서문이다. '난정고' 상(윗 상)에는 
왕희지, 왕풍지, 사안 등 16인의 시(사언시와 오언시) 37수가 수록되어 있고 시를 짓지 
못한 16인은 벌로 큰잔에 술 세잔씩 마셨다 한다. 이를 보면 유상곡수연이란 
문기(글월 문, 기운 기) 진한 단아하면서 기품 있는 술잔치이지 환락적인 놀이가 
아니다.
  경주 남산의 포석정터도 '난정기'에 보는 것같이 남산의 아름다운 산기와 울창한 
수림과 푸른 죽림 속에 포석계의 맑은 물이 여울지어 흐르는 경승지에 터잡고 있다. 
우리는 포석정 옛터를 거닐면서 927년 경애 왕이 비빈, 궁녀와 여러 신하들과 같이 
이곳에서 놀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는 슬픈 역사의 
현장이라기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신라인들의 격높은 문화적 수준과 서정을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여유가 있었으면 한다. 

  신라의 물맛, 재매정과 천관사터

  신라의 아름다운 사랑의 설화가 안개처럼 가득 피어나는 곳은 경주 반월성 남쪽에 
흐르는 남천이다.
  여기에는 연연한 그리움을 연결시켜 주던 사랑의 다리들이 놓여 있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을 성사시킨 유교와 김유신이 천관녀를 찾아가던 연정의 다리, 그리고 
과부가 저녁마다 정부를 찾아 넘나들던 효불효교도 남천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진평왕이 절세의 미인인 도화녀를 유부녀인데도 사랑하여 비형을 낳아, 비형의 
설화가 감도는 언덕도 남천가에 있다. 신라는 남녀간의 사랑이 대단히 자유로웠다. 
남천을 따라 고적한 새벽길을 걸으면 신라 연인들의 짜릿하고도 진한 정담들이 
술렁거리고, 풀섶 속에 남녀가 밀회하는 것 같은 인기척을 느낀다.
  남천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건너다 보이는 자리에 김유신 장군의 저택이던 재매정 
집터와 천관녀가 살았던 집자리에 세운 천관사의 터가 1400여년을 마주보고 있다.
  재매정 집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라벌에 있었던 35채의 부유한 저택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 경주에는 신라 민가의 유적으로는 오직 이 재매정 집의 우물인 
재매정이 사적 제246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재매는 김유신 장군 부인의 이름이다. 
재매정은 반월성에서 서쪽으로 약 400m 거리에 있다.
  재매정은 벽돌처럼 다듬은 화강암으로 독 안처럼 원형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정사각형의 2단 장대석을 짠 큰 우물이다. 우물 속의 가장 넓은 원형지름이 약 2m이며 
상부 장대석의 한변 길이는 1.8m이다.
  이곳이 재매정 집자리임을 알려주는 비가 서 있다. 1872년 경주 부윤 이일운이 글을 
지어 세운 비로 신라 태대각간 개국공 김선생 유허비라 새겨져 있다.
  재매정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삼국유사' 김유신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 
14년(645) 3월 김유신 장군이 백제의 침략군을 무찌르고 돌아와서 선덕여왕에게 
전과를 보고하였다. 바로 그때 백제대군이 매리포성(거창)을 친다는 보고가 있다 
다급해진 선덕여왕이 김유신에게 그 자리에서 급히 출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김유신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반월성에서 나와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만나지 
않고 무심히 지나다가 말을 멈추고 자기 집의 재매정 우물의 물을 한그릇 떠오도록 
하여 마신 뒤 "우리 집 물맛은 아직도 예전과 같구나"하면서 전쟁터로 나아가 
백제군을 물리쳤다.
  이 기록은 김유신이 공과 사에 엄정하였던 일화의 하나로 역사 속에 묻혀 갔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두레박으로 재매정의 우물물을 떠 마시면서 신라 그날의 물맛을 
음미하고 있다.
  재매정 집에서 월성 쪽으로 올라와 남천의 월정교를 건너서 경주시 교동 145번지 
들가에 이르면 김유신이 청년시절 사랑한 여인 천관녀의 집이 있던 곳에 세운 
천관사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천관사터는 경주시 교동, 오릉 동쪽 논 가운데에 있는데 2,700여 평이 사적 
제340호로 지정되어 있다. 논둑에는 무너진 석탑재가 남아 있는데, 그 모양이 
특이하다. 4각의 탑재에다 8각의 구조물을 받쳤던 턱이 조각되어 있다. 아직 절터를 
발굴하지 않아서 가람배치가 어떻게 되었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천관사는 
김유신이 사랑하던 천관녀를 위하여 세운 원찰이라는 점 때문에 인간적인 정감이 
흐르는 곳이다.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영웅이다. 그의 극적인 일생 중에 이렇듯 인간적인 
사랑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전기를 살펴보면 너무 성인군자같이만 기록되어 있어서 오히려 삭막한 느낌을 주는 
것이 많다. 이런 점에서 천관사터는 따뜻한 인간의 피가 도는 유적으로 중요하다.
  우리 나라 문화사 가운데 가장 서정적인 꿈이 있고 인간적인 감동을 주는 것은 신라 
문화이다. 고구려나 백제의 문화사 속에는 신라의 향가 같은 시문이 없다. 삼국의 
역사기록은 쉴새없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살벌한 정벌의 역사기록이 대부분이다.
  천관사는 '동국여지승람'을 쓰던 조선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절은 김유신이 삼국을 통일하고 
경주에 돌아와서 자신을 연모하다가 죽은 천관녀를 위해 세운 절이기 때문에 통일신라 
초기의 것이다.

     매정한 님의 처사를 원망하며 지어 부른 노래
  김유신이 청년이었을 때 천관이란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에 김유신의 어머니는 
"너는 장차 나라의 대들보가 되어 공명을 세우고 왕에게 충성하여 부모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랐는데 천한 여인과 더불어 음탕하게 놀아나다니 이게 웬말이냐"하고 울며 
꾸짖었다. 김유신은 천관녀의 집에 드나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김유신이 술에 취하여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그만 
말이 늘 가던 천관녀의 집으로 가고 말았다. 천관녀는 한편으로 반기고 한편으로 
원망하여 울면서 나와 김유신을 맞이하였다. 김유신이 정신을 차려 보니 어머니와의 
약속을 어긴 꼴이 되어 차고 있던 칼로 말의 목을 베고 말안장을 버린 채 돌아오고 
말았다. 그후 천관녀는 매정한 임을 그리는 일로 일생을 보내면서 사랑의 원사(원망할 
원, 글 사)를 지어 노래로 불렀다.
  우리는 위의 기록에서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다. 김유신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어머니인 만호태후가 낳은 딸 만명부인이다. 
김유신의 가계는 가야 수로왕의 12대손으로 신라의 왕족과 혼인관계로 진골의 품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유신이 골품에 들지 않는 육두품이나 오두품의 여인과 
결혼하면 신라의 골품사회에서 정치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은 진평왕의 누님의 남편이다.
  김유신은 후에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인 지소부인과 결혼하였는데 지소부인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낳은 딸이다. 문희는 김춘추와 연애를 하여 아이를 배고 정식 
결혼이 잘 안 되자 김유신이 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인다고 연극을 꾸며 선덕여왕이 
김춘추(태종무열왕)에게 결혼하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김유신(595-673)은 
태종무열왕(604-661)보다 9살이 더 위인데 무열왕의 셋째딸과 결혼한 것이다. 그러니 
김유신은 문무왕에게는 여동생의 남편이 되는 동시에 어머니인 문명왕후의 오빠가 
되므로 외삼촌이 된다.
  신라는 골품제 사회로 이와 같은 근친혼 관계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보면 아찬 벼슬을 한 군승이란 김유신의 서자가 있다. 군승은 그 
어머니의 이름을 모른다 하였다. 어쩌면 군승의 어머니는 천관녀인지도 모른다. 
김유신이 무열왕의 셋째 딸과 결혼한 것은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인데 그 앞에 
천관녀와의 연인관계는 지속되었던 것이며 천관녀는 원사를 지을 만큼 지식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천관녀란 이름도 재미있다. "김유신이 화랑이 되어 보검을 들고 열박산 깊은 골에 
들어가 하늘에 삼국통일의 소원을 빌자 천관신이 빛을 내리어 보검에 영기를 주었다." 
이 천관신은 도가에서 말하는 삼관신인 천관신, 지관신, 수관신 중 천관신을 말하는 
것이다. 김유신의 연인을 촨관녀라 한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정식결혼을 하지 못하였어도 김유신은 천관녀를 위해서 집자리에 원찰을 지어줄 
만큼 대단히 사랑이 깊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천관녀가 죽고 난 후 때때로 천관사에 
들러서 그녀의 극락왕생을 빌며 그리움에 잠겼을 것이다.
  천관사 창건의 연유가 이와같이 애절한 연정의 역사가 되어 고려 명종 때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이공승(1099-1183년)이 여기에 와서 천관사란 시를 남겼다.

  천관사 옛 사연을 들으니 처연하다.
  정 많은 공자(김유신)가 꽃 아래 놀았더니
  원망을 품은 가인이 말 앞에 울었네
  말은 유정하여 옛길을 알았는데
  하인은 무슨 죄로 부질없이 채찍을 더했던고.
  남은 한 곡조의 가사가 묘하여
  "섬토(달그림자 섬, 면할 토)가 함께 산다는 말"
  만고에 전한다

  조선 성종 때 대제학과 좌찬성을 역임하고 시문에 능하여 해동의 기재라는 찬탄을 
받으며 '동인시화', '동문서' 등을 남긴 서거정(1420-1488년)이 김유신 장군 묘 앞을 
지나면서 '과유신묘'란 시문을 남겼다.
  이 시구 속에 김유신과 함께 그 이름이 전하는 천관녀의 사연을 남겼다.

  천관사 오래이니 지금 어드멘고
  만고에 아름다운 여인 그 이름이 (김유신) 따라 전하네 

  비천백마도와 천마총

  1973년 7월 27일은 경주 천마총에서 찬란한 금관이 발견되던 날이었다. 그날 아침 
날씨는 구름 한점 없이 맑고 밝았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작업은 시신이 들어 있던 목관 속 유물을 들어내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금관은 토압에 눌려서 납작하게 되어 있었다. 처음 드러나는 금관의 황금빛은 
하나도 때묻지 않은 찬란한 순금의 본색이었다. 금관은 공기와 접촉되지 않고 물기가 
촉촉한 부드러운 흙속에 묻히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 막 금을 녹여서 새로 만든 순금의 
빛깔과 같았다.
  발굴하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죽은 시신이 금관을 머리에 
쓰고 누워 있었던 것이다. 시신의 허리 부분에는 금띠가 매여 있었는데 금띠는 과판과 
요패로 구성되었다. 요패란 허리에서 아래로 드리워지는 긴 장식으로 끝에는 물고기, 
집게, 숫돌 모양의 장식들이 매달려 있었다.
  시신의 목과 가슴 부분에는 금구슬, 은구슬, 유리구슬, 곡옥들을 실에 꿰어 여러 
줄로 장식한 목걸이가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로 드러났다. 시신은 왼손에 큰 칼을 잡고 
있었고 두 팔의 손목에는 금팔찌를, 열 손가락에는 모두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손은 
모두 썩어서 뼈도 남아 있지 않았으나 시신이 주먹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금반지가 
드러났다.
  시신의 양쪽 귀 자리에는 금귀고리가 있었고 발 자리에는 금동신이 한 켤레 놓여 
있었다. 허리에 맨 금띠의 둘레를 보아 몸집이 좀 큰 사람이었으며, 금관과 신발과의 
거리를 보아 키가 장대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뼈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완전히 썩어 버렸다.
  관 속의 유물 상태를 그대로 놓고 사진도 찍고 정밀한 실측도를 작성하고 기록도 
하였다. 그런 후에 금관을 들어내기로 하였다.
  발굴하는 사람의 표정이 엄숙해지고 긴장된 순간이 왔다. 손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금관을 들어낼 순간이 되었다. 두 사람이 금관을 막 들어내는 순간, 
하늘에서 "우르르 꽝"하고 날벼락이 치는 것이었다. 모두 깜짝 놀라 멈추어 섰다.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칠흑 같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뇌성벽력 속에 억센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발굴현장에 쳐 둔 텐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유난스레 
무섭게 들리고 있었다. 무덤 속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 채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겁에 질린 몇 사람은 소름이 끼쳐 움직이지도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천오백여 년을 무덤에서 잠들었던 영혼이 금관을 들어내는 순간 승천한 것일까."
  더운 7월이었으나 무덤 속에는 싸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향불이라도 피울걸."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금관을 들어낸 후 발굴을 중단하고 쉬었다. 그리고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무덤에 
위령제를 지냈다.
  천마총 발굴로 우리가 잘 몰랐던 신라문화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식민지시대에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발굴에서 금관이 출토된 적이 있다.
  제일 먼저 발굴된 금관총 금관은 정밀한 학술적 발굴이 아니었으며, 무덤의 목관내 
유물이 흩어진 상태에서 발굴되었다. 그래서 금관이 어떻게 놓여 있었는지를 확실히 
모르는 상태에서 일본사람들은 외관, 내관, 새 날개 모양의 관장식을 한 금관으로 짜 
맞추어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렇게 되어 신라금관은 외관, 내관, 새 날개 모양의 
관장식이 하나의 금관으로 구성된 것이란 학설로 정립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1945년 광복 이후 천마총 발굴 결과가 발표되기 이전까지 우리 나라 
교과서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었던 것이다. 얼마나 위험한 역사의 왜곡인가.
  천마총 목관 속의 시신은 이때까지 외관이라고 했던 금관 하나만을 쓰고 있었다. 이 
금관에는 머리띠에 직물이 썩어 붙어 비단모자가 머리띠 안에 있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천마총 금관은 신라고분 속에서 발견된 여러 개의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했다. 
머리띠 위에 사슴뿔 모양의 장식과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이, 비취곡옥과 얇은 금판을 
원형으로 오려 만든 영락이 금실로 정교하게 꼬아 매달려 있었다.
  머리띠에 매달린 비취곡옥은 크기가 크고, 사슴뿔 모양과 나뭇가지 모양으로 세운 
장식에 매달려 있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졌다. 이는 머리띠 부분이 장중하게 
보이고 안정감을 주며 얇은 금관인 영락이 바람에 흔들리면 그 반사되는 빛에 따라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든 것이었다.
  천마총에서도 내관이라고 한 금모자와 새 날개 모양을 한 관장식이 다른 꿰짝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관들에도 썩은 유기물이 붙어 있어 각각 별개의 모자였음이 
증명되었다.

     천마총 발굴로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목관 머리맡에 놓였던 궤짝 속에는 무쇠솥과 질그릇, 금그릇, 은그릇, 칠기그릇, 
유리그릇, 금동그릇 등 살림살이 용기가 바닥에 들어 있었다.
  또 소 10마리를 잡아서 넣었기 때문에 소뿔 20개가 남아 있었다. 달걀도 많이 
넣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질그릇 단지 속에 든 달걀 하나가 천오백여 년을 지난 
오늘까지 깨어지지 않고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지금 이 신비한 달걀은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다른 궤짝 속에는 말안장, 말다래, 말방울, 마구장식 등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말의 배 양쪽에 붙여 말의 앞발에서 튀어 오르는 흙을 방지하는 말다래에는 하늘을 
나는 생동하는 천마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말다래는 가로 75cm, 세로 65cm, 
두께 0.6cm인데 자작나무 껍질을 종이처럼 여러 겹 붙여서 실로 누빈 것으로 갓테에는 
가죽을 대어 기웠다. 이 천마 그림은 입에서 불을 토하고 갈기가 날개처럼 바람에 
세차게 나부끼면서 구름 위를 달리는 모습이다. 대단히 환상적인 신라 최고의 
그림이다. 천마 그림 때문에 이 무덤을 천마총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또 다른 그림도 발견되었는데 둥근 모자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과 봉황 같은 새가 그려져 있었다.
  이 천마총에서는 화살촉, 도끼, 창, 칼 등의 무기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수많은 
비단에 차곡차곡 싸서 넣었던 것인데 상당한 두께로 썩어 있었다.
  신라의 금관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균형 잡힌 아름다운 
형태와 순금 빛깔과 비취곡옥의 푸른색과 바람에 흔들거리는 영락의 동적 반사빛은 
조형의 극치를 이루었다.
  신라는 유리공업이 발달된 나라였다. 유리제품의 잔이나 병, 구슬 등에 다양한 
색깔과 그림도 넣고 오늘날 볼 수 있는 크리스탈 유리와 같이 유리잔에 거북무늬를 
커팅식으로 새긴 것이 있다. 용강동고분에서 나온 구레나룻을 기른 토용의 얼굴 
모습과 유리잔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는 멀리 사라센지방과도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마총 발굴을 통해 780여 점의 순금제품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는 신라의 금 
제련기술이 뛰어나고 정교한 금공예예술이 발달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고고학자들은 신라의 왕이거나 귀족이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였으나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유물을 통하여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치는 고분으로 
확정지었다. 천마총 발굴은 세계적인 뉴스가 되어 찬란한 우리 민족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왜 옛 사람들은 무덤 속에 저토록 많은 물건들을 묻었을까?"
  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저승에 가서도 산다고 생각하여 생사와 같이 
살림살이와 무기와 마구와 금관 등의 장식품을 묻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덤을 살고 
있는 집과 같이 생각하여 꾸몄을 것이다. 신라금관이 나온 무덤은 나무방을 짜고 그 
속에 시신이 든 관을 넣고 일용품이 든 궤짝을 넣었다. 그리고 이 나무방 위에 냇돌을 
덮고 그 냇돌 위에 흙을 씌워 봉분을 만들었다.
  천마총은 현재 경주시 대릉원 고분공원내에 있는데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시켜 
공개하고 있다.
  우리 나라 국민은 누구나 꼭 한 번 가볼 만한 곳이다. 

  신라의 조원, 안압지

  1974년 어느 봄날, 나는 신라의 영화로움을 생각하며 경주 안압지 주변의 동궁터를 
걷다가 땅바닥에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작은 물체 하나를 발견하였다. 나무 
꼬치로 파올려보니 선녀의 고운 손 같은 금동불의 오른손 하나였다.
  황금빛 도금은 그대로 잘 남아 있었는데 원래 불상의 팔 끝에 붙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손만을 따로 만들어 끼웠던 것으로 독립된 조형물이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참으로 고운 여인의 섬섬옥수였다. 손바닥에 감싸 잡으니 신라 
어느 미녀의 체취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이 예쁜 금동손을 경주박물관에 
보존케 하여 지금 안압지관에 진열되어 있다.
  문화유산의 조사연구나 관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유적지에 가면 땅만 내려다보고 
걷는 습성이 있다. 그것은 땅바닥의 토기 한쪽, 기와 한쪽이 시대를 말하고 문화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습성이 신라 동궁의 폐허에서 아름다운 '신라의 
손'을 만나게 하였다. 나는 아직도 그날 느꼈던 신라 여인의 황홀한 체온을 잊지 않고 
있다.
  안압지나 그 주위의 건물 터들은 모두 이같이 신비한 신라의 유물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1973년 안압지의 물을 좀 맑게 하고 못 주위의 호안을 보수하고자 물을 빼고 
못바닥의 진흙을 걷어내는 준설작업을 하다가 이 진흙층 속에 많은 유물들이 잠겨 
있어 본격적인 발굴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5년 3월 25일부터 1976년 12월 
30일까지 안압지와 동궁지를 발굴조사하였다.
  안압지에 대한 기록을 보면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 경주조에 "안압지는 
천주사 북에 있다. 문무왕이 궁내에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무산십이봉을 
상징하고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를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 터가 있는데 초석과 
섬돌이 아직도 밭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문무왕 14년(674) 2월의 기록에는 '궁내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와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하였고 문무왕 19년(679) 기록에 "동궁을 
창건하였다"고 되어 있다. 임해전이란 궁전 이름은 효소왕 6년(697) 9월, 군신이 모여 
잔치하는 장소로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안압지 가의 집터에서 기와에 '의봉사년개토'라 새긴 명문이 나왔다. '의봉'은 
당나라 연호이며 의봉 4년은 신라 문무왕 19년(679)에 해당되어 '삼국사기'의 동궁 
창건 기록과 부합된다. 그리고 안압지는 동궁 정원 내의 못인데 동궁의 터를 닦을 
때인 674년에 못을 먼저 만들고 5년 후인 679년에 동궁의 공사가 완료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 동궁내에 천주사라는 내불당(왕궁 내에 있는 불전)이 있었고 임해전이란 
궁전 건물이 있었다.

     초나라 양왕이 선녀와 노닐던 무산십이봉
  안압지란 신라 때 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조선 초기 기록에서부터 보인다. 
'삼국사기'에 동궁의 관청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월지악전이란 조원(만들 조, 동산 
원)을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 신라 때는 안압지를 월지라 했던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이나 '동경잡기'의 기록에 나오는 안압지 동쪽의 가산을 
무산십이봉이라 했는데 이는 중국 고대 초나라 양왕이 운몽에서 선녀와 노닌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산은 중국 사천성에 있는데 십이봉의 이름은 망하, 취병, 조운, 송만, 
집선, 취학, 정단, 상승, 초운, 비봉, 등룡, 성천이다.
  그런데 지금 있는 산봉우리 중 어느 것이 어느 봉우리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안압지는 바다를 상징하고 있으며 그래서 못가의 궁전 이름을 임해전이라 했다. 못 
속에는 세 개의 섬이 있는데 이는 영주, 봉래, 방장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삼신도이다.
  원래 동양의 제왕들은 궁내에 못을 파고 삼신산을 모방한 신선도를 조성했던 
것이다. 제일 먼저 만든 사람이 중국의 진시황인데 그는 난지궁의 못 속에 봉래산을 
조성하였다. 한나라 무제는 미앙궁의 태액지에 봉래, 방장, 영주의 세 섬을 만들었다.
  백제의 무왕도 637년 부여의 궁남지에 방장선산을 만들고 망해정을 지었는데 
임해전과 같은 뜻의 건물이다. 발굴 결과 안압지는 동서 약 190m쯤 되는 방형 공간 
속에 조성된 곳이다.
  동쪽과 북쪽 호안은 절묘한 곡선으로 조성되고 서쪽과 남쪽은 직선을 이용하여 
조성되어 있는데 궁전은 직선의 공간인 서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궁전이 배치된 서쪽 
호안 높이는 540cm이며 동쪽과 북쪽, 남쪽의 호안 높이는 210cm로 건물이 있는 
공간에서 연못을 조감도 보듯이 내려다보게 만들어져 있다. 호안은 모두 다듬은 돌로 
쌓았다. 연못의 크기는 4,738평인데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지척에 있는 것이 
아득한 원경처럼 느껴지도록 하였다.
  못바닥에는 물을 맑게 하기 위해 회와 진흙을 다지고 검은 조약돌을 깔았다. 호안 
주위에는 괴석을 배치하여 바닷가의 암산처럼 만들었다.
  괴석은 변성퇴적암인데 크기는 1m에서 2m 내외의 것들이다. 괴석을 놓는 기법은 
입석이 많은데, 뜸뜸이 흩어서 땅에 박아 놓은 산치가 있고 두 개나 세 개의 돌을 
모아서 무리로 놓은 군치가 있으며, 괴석을 첩첩이 쌓아서 놓은 첩치가 있다. 또 가장 
크고 아름다운 괴석 하나만을 드러나게 설치한 특치가 있다.
  안압지의 서쪽과 남쪽에서는 건물터가 발굴되었다. 건물 배치는 남북 축선상에 
일직선으로 3동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이들 건물은 모두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이 회랑과 연결하여 못가 호안 위에 5동의 건물이 배치되었다. 5동 중 3동은 
현재 복원되어 있다. 이들 건물들은 정사를 보는 정전과 편전 그리고 생활하는 침전과 
휴식하는 정자들로서 동궁의 배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임해전은 이들 중 한 
건물의 이름일 것이다.
  무산십이봉에는 원래 화초만 심었는데 지금은 나무들이 서 있다. 인공적으로 만든 
가산들이므로 산봉우리의 아름다운 능선이나 괴석들의 절묘한 배치를 보여 주려면 큰 
나무가 가려 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표현된 기이한 화초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는 진평왕 때 중국에서 
처음 들어온 모란을 비롯하여 향초, 국화, 치자, 지초, 난, 철쭉, 대나무 등이었을 
것이다.
  안압지 연못은 바닥에 회와 자갈을 깔아 물을 맑게 하고 배를 띄웠던 곳이며, 발굴 
결과 연못 중앙섬 옆에서 나무로 정형틀을 짜서 (한변 길이 134cm, 높이 102cm) 그 
속에 진흙을 채워 연이나 수초를 한정되게 심어 운치를 더하였던 것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신라 배도 3척 발견되었다. 그중 완전한 것은 하나였는데 뱃놀이를 즐길 
정도의 소형선이었다.
  안압지의 물 깊이는 약 180cm 정도인데 수면을 인공적으로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북쪽에 물을 빼는 수출구가 있는데 여기에는 높고 낮게 단을 지어 
물을 빼는 구멍이 있고 여기에는 나무로 만든 물마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못에 물을 
넣는 시설은 남쪽으로 수로가 있었으며 수입시설은 두 개의 석조에 고였다가 넘쳐서 
아름다운 계단을 지나 폭포로 떨어져 들어가게 만들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안압지에는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발굴 결과 거위, 오리, 
산양, 사슴, 돼지, 말, 개의 뼈들이 못 속에서 출토되었다. 그리고 많은 물고기가 
있었다.
  안압지는 신선의 세계를 상징하는 인공적 조원으로 바라보는 기능을 가진 축경식 
조원이다. 그래서 사람이 무산십이봉이나 바다를 상징한 연못 속에 들어가 거니는 
곳이 아니라 신선이 사는 이상의 피안으로 그림을 감상하듯 바라보게 만든 
윈(동산)이다. 이곳이 자강 아름다운 계절은 봄과 가을이었다. 이는 '삼국사기'에 3월과 
9월에 임해전에서 잔치를 한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독특한 놀이기구 14면 주사위
  안압지의 발굴에서는 이때까지 보지 못한 수많은 통일신라의 생활용품이 나왔다. 
그리고 많은 불상(내불당에 모셨던 불상으로 추정)과 기와, 전돌, 집의 난간이나 포작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 속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장례용으로 만든 것인지 실생활에 쓰던 것인지가 
의문스러운 것이 많다. 그러나 안압지의 못 속에 버려진 유물들은 장례와는 관계가 
없는 생활용품들이었다. 통일신라의 토기 편년을 새롭게 정립할 수가 있었고, 특히 
금동가위 등은 일본에만 있다고 한 유물인데,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 만들어 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숟가락이나 놀이기구 등도 재미나는 것들이었다. 특히 14면의 
주사위는 주먹만한데 술잔치를 하면서 놀던 놀이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각 면에 새긴 내용을 보면

  자창자음(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마신다),
  임의청가(임의로 노래를 청한다),
  삼잔일거(세 잔의 술을 한 번에 보낸다),
  금성작무(소리없는 춤을 춘다),
  중인타비(여러 사람의 코를 때린다),
  음진대소(한잔 마시고 크게 웃는다),
  유범공과(범함이 있어도 탓하지 않는다),
  추물막방 (추물을 버리지 않는다),
  양잔즉방(양잔을 옆에 준다),
  곡  즉진(팔을 꼬부려 옆사람과 술을 다 마신다),
  공영시과(시를 읊는다),
  자창괴뢰만('괴뢰만'이란 노래를 부른다),
  월경일곡(월경 한 곡조를 부른다),
  롱면공과(얼굴의 구멍:입, 코, 눈구멍 등을 희롱한다)

  이 놀이는 노래와 춤과 시가 있고 술에 만취하게 만들며 코도 때리고 궁녀 같은 
여인을 범해도 좋고 입술을 희롱하기도 하고 징그러운 물건을 주기도 하며 요즘도 
때때로 볼 수 있듯 팔을 꺾어 옆사람과 술마시는 행위도 하는 등 아주 재미있고 
흥겨우며 격의 없는 놀이였다.
  그리고 남근이 몇 개 발견되었는데 대개 길이가 16cm정도였다. 아주 사실적으로 
만든 것인데 이는 우리 민속신앙의 대상인지 아니면 궁녀들이 가지고 놀던 것인지는 
의문이다.
  신라 때는 성에 대해 관대했음을 기록이나 유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통일신라 
문화는 어두운 면이 없고 밝고 경쾌하며 생동감이 넘친다.
  꽃이 만발하는 봄철 밤에 달이 뜨거든 조용히 안압지 연못가를 거닐어 보라. 14면 
주사위의 환상적인 장면과 함께 어여쁜 화랑과 원화의 은은한 노랫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른다. 


   주물기술과 조형미의 걸작, 성덕대왕신종

  국립경주박물관 뜰에 우람하게 걸려 있는 성덕대왕신종 앞에 서면 신라문화의 
경이로움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세계 첨단의 수준에 있었던 신라의 주물기술에 
놀란다. 중국이나 일본의 종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신라인의 창조적 조형미에 
탄성을 올린다. 종의 표면에 새겨진 명문에서 보이는 상징성과 우람하면서 맑은 
음향이 5분 정도 울려퍼지는 긴 여운은 무한을 느끼게 한다.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엔젤파크에 걸려 있는, 미국독립 2백주년을 기념하여 
한국국민이 미국국민에게 보낸 '우정의 종'을 만들 때 나는 이 사업을 주관하였는데 
주물공학자들의 자문과 지도를 받은 일이 있다. 그때 카이스트에 와 있던 한 독일 
주물공학자는 경주에 가서 성덕대왕신종을 보고 8세기 신라의 주물기술은 세계적 
첨단에 있었다고 감탄했다.
  지금도 청동을 용해하는 도가니는 1톤 이상을 녹일 수가 없다. 성덕대왕신종은 
18톤쯤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수십 개의 용해로가 동시에 가동되었을 것이다. 
현대에는 코크스나 전열 등으로 쉽게 고열을 올릴 수 있으나 그때는 모두 숯불로 
청동을 녹였던 것이다. 종은 구리, 놋, 아연, 은, 금, 석회, 인 등의 합금으로 
구성되어야 소리가 아름답고 잘 깨지지 않는데 신라는 이러한 합금기술이 뛰어났다.
  종을 주조할 때는 여러 곳에서 녹인 쇳물을 한 저장기에 모아서 종의 거푸집에 
일시에 주입시켜야 하며 거푸집은 종에 기포가 생기지 않게 밑으로 가스를 빼는 
시설이 과학적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우정의 종'을 만들 때 보니 쇳물의 주입시간은 
20분만에 끝나는 것이었다. 18톤 이상의 쇳물을 일시에 주입시키는 시설 또한 
당시로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거대한 종의 거푸집을 만드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성덕대왕 신종은 높이가 
333cm, 입지름이 227cm에 종의 윗부분에 음통이 있고 한 마리 용으로 종 고리가 되어 
있다. 이 거푸집에는 비천상 같은 아름다운 부조물들과 830자에 이르는 명문이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어 거푸집을 만들기에도 복잡하고 섬세한 작업과정이 필요하다.
  '우정의 종'을 만들 당시 거푸집을 만드는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1) 만들고자 하는 
종과 같은 형태를 진흙으로 조형한다. (2) 이 모형의 종 위에 석고를 발라서 음각의 
틀로 떼어 낸다. (3) 음각의 틀에 쇳물을 부어서 양각의 견고한 쇠틀로 만든다. (4) 종의 
거푸집은 땅을 파고 구덩이 속에 조성하는데 종의 표면이 될 거푸집 표면에 내화토를 
발라 습기없이 말린 후에 양각으로 된 쇠틀의 문양들을 간격을 잘 맞추어 망치로 때려 
찍는다. 그러면 종의 둥근 거푸집에 음각의 문양이 찍힌다. (5) 음통과 종의 고리는 
밀납으로 만들고 그 위에 내화토를 발라서 불에 구우면 밀납이 녹아서 빠지고 음각의 
거푸집틀이 된다. 이 틀을 종의 위쪽 거푸집에 설치한다. 종의 내부를 비게 하는 
거푸집을 설치하여 용해된 쇳물을 부어 넣어 주조하게 된다.
  신라의 성덕대왕신종의 주조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런데 '우정의 종'을 
만들어 보니 그 부조의 정교함이나 음양이 성덕대왕신종을 따를 수가 없었다. 사람과 
신이 어울려 신기를 만들었다고 명문에 새긴 그 오묘한 뜻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신라 주물기술의 수준을 짐작
  왜 신라 범종은 중국이나 일본 범종에 없는 음통을 가졌으며 중앙띠를 없애고 
하늘을 나는 천인상을 새기고 종 고리는 한 마리 용(중국 종은 두 마리 용으로 되어 
주조할 때 중심잡기가 용이함)으로 절묘한 균형의 조형미를 창출했는가? 신라인의 
창조적 고집이었을까? 철학적 상징을 형태로 나타낸 것이었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신라 범종은 위 아래에 띠를 둘렀고 연꽃을 새긴 두 개의 당좌를 배치하고 하늘을 
나는 천인상 2구를 상대적으로 배치하고 위에 유곽을 만들어 유두를 새겼다. 
성덕대왕신종의 형태는 연꽃이 반쯤 피어나는 형상으로 종구가 팔릉형을 이루고 있다. 
길이와 폭의 아름다운 비례며 종띠에 새겨진 보상화문의 화려한 문양들은 독일 
국립박물관의 큄멜 박사가 세계 제1의 종이라 칭한 것을 접어두고라도 실로 그 
아름다움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 생동하는 힘찬 형상의 용모양 고리며 음통 표면에 대마니 같은 구절마다 새긴 
복련과 앙련의 정교한 솜씨들은 조각의 천재들이 창조한 세계 제1의 예술품이다. 
성덕대왕신종은 771년에 만들었는데, 주종박사는 4인이었으며 그들은 모두 신라 관직 
17등급 중 10등급인 대나마나 11등급인 나마, 12등급인 대사의 벼슬에 있었고 성씨가 
모두 박씨였다. 종의 명문 중 나마인 박한미의 이름은 뚜렷하게 읽을 수 있다. 이들 
박씨집안이 주물기술의 전문집단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종을 만드는 기술은 신라에 보편화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724년에 제작한 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이 있고 고려시대 
몽고병화 때 불타버린 황룡사와 함께 몽고군이 탐을 내어 약탈해 가다 동해바다에 
빠뜨렸다는 754년에 만든 황룡사대종은 무게가 49만7천 근으로 
성덕대왕신종(12만근)보다 4배나 무겁다. 755년 강고내말이 만든 분황사의 
약사여래동상은 무게가 30만6천 근이었으니 신라의 주물기술이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의 종명을 쓴 사람은 한림랑 김필오이다. 글의 내용은 혜공왕이 
성덕왕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왕이라는 왕권에 대한 옹호와 부처님의 소리인 종소리를 
통하여 만민에게 복락이 퍼져가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명문의 글 속에서 
무한한 상징성을 엿볼 수 있다. "도의 근원은 형상의 밖을 포함하기 때문에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음향은 천지를 진동하기 때문에 들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다만 가설을 설정하여 삼지의 오묘한 일을 살피고 신기를 달아서 일승의 원음(원효의 
'대승기신론소'에 보면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유정천에서 
무저지방에까지 들리어 소리를 듣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라고 씌어 있다.
  이를 보면 성덕대왕신종은 가설로 설정한 신기이며 형태를 초월한 상상의 세계가 
포함되어 있고,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없는 천지를 진동하는 초월적 음향이 파문지고 
있는 것이다. 이 종소리는 곧 부처님의 말씀이며 극락왕생의 염원을 받아주고 있는 
것이다. 

   김유신 장군묘의 돼지상

  1973년 5월 13일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 포항제철에 근무하는 
김덕환 씨가 경주유적 답사를 왔다가 김유신 장군 묘역 표토에 이상한 석조물이 
노출되어 있다고 경주사적 관리사무소에 신고해 왔다.
  나는 그때 문화재관리국 경주사적 관리사무소장의 소임을 맡아 천마총 발굴과 
경주지구 유적보존정화사업을 맡고 있을 때였다. 직원들과 같이 현장에 달려가 보니 
김유신 장군묘의 봉분에서 북북서쪽 16m거리 표토에 손바닥 정도로 납석제 유물이 
드러나 있었다.
  이는 표토가 빗물에 유실되어 땅속에 묻혀 있던 12지신상이 지표에 노출된 
것이었다. 김덕환 씨가 한없이 고마웠다. 한국고고미술사에 의문으로 남아 있던 문제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납석제 12지신상이 몇 점 국립박물관에 수습되어 있었으나 
확실한 출처를 모르고 있었다.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유물이란 학술적으로 큰 가치가 
없다. 이러한 납석제 12지신상의 가치를 소생시키고 통일신라 묘제의 제도 하나를 
새롭게 규명한 업적이었다. 김유신 장군묘 봉분호석 둘레에도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외곽묘역에 또 12지신상을 묻어 이중으로 방위신을 배치한 예는 없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였다.
  김덕환 씨가 유물의 위치를 그대로 두고 신고했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정밀조사에 
의하여 원래부터 묻혔던 것임이 확인되었다. 김덕환씨는 문화재에 대한 높은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박일훈 씨였는데 사적관리사무소와 합동으로 묘역에 대한 
실측조사를 하고 발굴작업을 실시하였다. 12지신상은 높이 40.8cm, 중간너비 21cm, 
두께 12.5cm의 납석판에 조각한 돼지상이었다. 암산 정상의 벼랑끝을 디디고 선 
해상은 몸은 사람인데 머리만 돼지상이었다. 튼튼한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 대도를 
잡고 바람에 나부끼는 천의자락과 뒤로 약간 제친 위엄 있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이 
해상은 봉분 둘레에 새겨진,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든 12지신상의 조각수법과 같았다.
  이 일로 인하여 김유신 장군 묘역에는 12방향으로 봉분외곽 묘역에도 12지신상을 
묻었던 것임을 확인하게 되어 묘역 주위 전부를 발굴해 보았다. 그 결과 정동에 
묘상의 잔재로 보이는 납석부스러기가 일부 출토되었다. 다른 방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김유신 장군묘는 풍화된 암반층을 깎아내고 그 위에 부토하여 묘를 조성한 
것이었다. 오랜 세월, 빗물에 흙이 유실되면서 묻혔던 12지신상이 노출되어 없어져 
버린 것 같았다. 다행히 봉분 북쪽 지표가 높아 원래 산의 표토가 깊어 이 해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발굴 당시 보니까 김유신 장군묘의 봉분 서쪽 솔밭 땅속에는 
산신제를 지내던 제단 같은 장방형 판석이 묻혀 있었다. 이는 그대로 묻어 두었다.

     갑옷 또는 평복을 입고 있는 12지신상
  신라의 묘제 중 12지신상이 조각된 것은 성덕왕릉, 경덕왕릉, 괘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진덕왕릉, 김유신 장군묘, 구정동 방형분 등이 있다. 성덕왕릉의 12지신상은 
봉분 둘레에 방위를 따라 완전 입체상으로 독립되도록 서 있고 돌사자가 사방을 
지키고 무인, 문인석과 봉분 앞에 혼유석이 배치되어 있다. 그외 고분들은 봉분호석 
둘레에 반양각으로 붙어 조각되어 있다. 12지신상은 갑옷을 입은 것과 평복을 입은 두 
가지가 있고 몸은 사람이며 머리만 12지 동물인데 손에는 모두 무기를 들고 있다.
  이와 같은 묘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신라인만의 독특한 창안이다. 중국의 
경우 평복을 입고 앉아 있는 소형 12지신상을 묘 안에 묻는 풍습은 있었다. 
신라에서도 이런 묘제가 발굴되었다. 12지신상을 묘에 배치하는 이유는 
고구려, 백제에서 묘 안에 정룡(동벽), 백호(서벽), 주작(남벽), 현무(북벽)의 사신도를 그려 
잡귀를 쫓고 유택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하는 벽사의 사상과 같은 것이다.
  통일신라는 12방위로 구분하여 북에 자상(쥐), 북북동에 축상(소), 동동북에 인상(범), 
동에 묘상(토끼), 동동남에 진상(용), 남남동에 사상(뱀), 남에 오상(말), 남남서에 
미상(양), 서서남에 신상(원숭이), 서에 유상(닭), 서서북에 술상(개), 북북서에 
해상(돼지)을 방위신으로 배치한 것이다. 신라가 12지신상을 묘봉분에 배치한 것은 
성덕왕릉(737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 장군묘는 1974년 발굴조사 및 정밀실측 결과에 따라 무너졌던 호석과 난간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보수하고 봉분 앞 석상도 복원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이나 
'동국여지승람' 기록을 보면 묘 앞에 비를 세웠던 것으로, 서악에 있는 것으로 된 
기록도 있어 의문도 있으나 현재 김유신 장군묘가 확실하다면 흥무왕으로 추존된 후에 
왕릉 규모로 조성되었을 것이다. 묘 앞에 선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묘의 비는 1710년 
경주부윤이 세운 것이다.
  673년 7월 1일 김유신 장군이 79세로 돌아가자 문무왕은 채색미단 1천 필과 2천 
석의 조를 내리고 군악대(북과 나팔수) 100명을 보내 후한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한다. 

   이색적 석굴사원인 월성 골굴암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색적인 석굴 사원인 월성 골굴암을 
꼭 한 번 가보도록 권하고 싶다. 골굴암은 경주 보문관광단지, 감은사지와 문무왕의 
수중릉이 있는 동해 바닷가의 감포로 가는 길을 따라 차로 30여 분 달리다가 지림사로 
들어가는 갈림길의 입구 산록에 있다. 골굴암의 소재지는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이다.
  골굴암은 특이한 석굴사원으로 시원적 불교사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골굴암은 
보물 제581호로 지정된 마애불을 중심으로 12개의 자연형 석굴이 있다. 월성 골굴암의 
마애불은 9세기에 조성된 불상이지만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굴사와 마애불은 기원전 3-2세기부터 인도에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굽타왕조시대 
데칸고원 남서부에 만들어진 아잔타 석굴이나 엘로라 석굴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마애불은 북인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전해져서 바미얀의 대불(높이 53cm)이 
만들어지고 중국에는 4세기 중엽에 전해져서 돈황의 천불동이나 운강, 용문 등의 
석굴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한국에는 7세기 초에 들어와서 서산마애불, 태안마애불 등이 
조성되어 경주 남산 등으로 점차 번져갔던 것이다.
  석굴사원에서는 불교사원의 자연동화성을 엿볼 수 있다. 바위벽에 조각하던 불상이 
나중에는 자연의 바위 자체가 불(부처 불)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는 
삼라만상이 다 부처님의 법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는 화엄경의 법보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월성 골굴암은 가파른 산록의 바위산에 있다. 이 골굴암은 우리 나라의 
자연숭배사상과 연결되어 민속신앙인 성(성품 성)신앙과도 융합되어 있다. 골굴암 절 
입구에 들어서면 승방건물이 있다. 이 승방 뒤에 호랑이 형상을 한 남근바위와 그 
위쪽에 산신당이라 부르는 여근바위가 있다. 이 여암의 동쪽 가장 높은 절벽에 골굴암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조성된 불상이다. 마애불이 조각된 절벽 높이는 
8.3m이며 밑 폭이 11.8m이다. 이 암벽의 동남쪽 면을 다듬어서 높이 4m에 이르는 
여래좌상을 조각하였다. 이곳 암산은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고 연질의 수성암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마애불의 풍화가 심하다. 그래서 유리지붕을 설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마애불의 조형은 강건한 기품을 보이고 있다. 머리 위에는 육계가 큼직하고 머리는 
소발이며 얼굴의 윤곽은 뚜렷하다. 타원형의 눈썹, 길게 옆으로 찢어진 눈, 두툼한 
입술, 짧은 인중, 길고 큰 귀 등이 개성적이다. 눈썹과 눈썹 사이에 백호 자리가 있고 
입술에는 인자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불상의 얼굴 부분은 입체감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으며 몸은 평면적인 조각이다. 
마애불은 두 어깨를 다 감싼 통견의를 입고 있는데 옷주름이 옆으로 작게 접혀 있고 
오른팔 부분은 풍화로 많이 손상되었다. 광배는 머리 주위에 연꽃을 새겨 두광을 
삼았는데 연꽃잎 끝이 뾰죽한 단판이다. 불신(부처 불, 몸 신)의 광배는 불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마애불 밑과 옆의 바위 벼랑 사이사이에 12개의 굴이 있다. 이들 굴에 불상을 
안치하기도 하고 승려가 수도하는 수도처로 삼기도 하였다. 이들 굴을 연결하는 
계단과 통로가 매우 위태롭고 험난하다.
  어떤 굴 앞에는 전실을 건립하였던 기둥자리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굴의 바닥은 
모두 인공을 가하여 평면으로 조성되어 있고 천장은 둥근 형태이다.
  이들 굴은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도 있고 연질의 수성암이라 인공으로 판 것도 있다. 
가장 큰 것은 법당굴인데 길이가 8.4m, 폭이 3.7m이다. 이 굴내에는 높이 1.85m의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는데 오랜 세월 풍화로 인하여 많이 마멸되어 있다
  법당굴 서쪽에는 산신당 석벽이 있다. 이 석벽 상하로 두 개의 석굴이 있다. 밑의 
석굴은 깊이가 4m쯤 되고 위의 석굴은 3m쯤 된다. 이들 석굴 벽에는 불상을 모셨던 
여러 개의 감실이 남아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의 진경
  마애불 아래 암벽에도 두 개의 석굴이 남향으로 뚫려 있는데 한쪽 굴에 '부윤'이란 
각자가 새겨 있다. 굴의 깊이는 2.4m 정도 된다. 이 석굴 동남쪽 아래 석굴은 깊이가 
2.5m 정도 되는데, 석굴 북쪽 벽에 이옥서가 쓴 '골굴'이란 각자가 새겨져 있다.
  골굴의 각자가 있는 우측에 또 석굴이 있는데 S자형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 
통로는 폭 1.2m에 7단의 석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 석계 통로에는 지붕을 씌운 장랑 
같은 건물이 섰던 기둥자리 홈들이 패여 있다. 초가지붕을 한 굴곡진 긴 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S자형의 굴곡진 통로를 따라 내려오면 깊이가 얕은 작은 석굴들이 있다. 한 사람 
정도 들어가서 수도할 수 있는 그런 굴이다.
  이 골굴암은 예부터 특이한 경관과 이색적인 사원으로 유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1676-1759년)이 골굴암에 와서 
'골굴석굴'이란 화제를 붙인 골굴암의 진경을 그린 그림이 전하고 있다.
  또 조선의 유학자 정시한(1625-1707년) 선생이 이 골굴암을 답사하고 기행문을 
남겼는데 '산중일기'에 실려 있다. 정시한 선생의 '산중일기' 속의 골굴암 기사에는 
법당굴, 사자굴, 설법굴, 정청굴, 승당굴, 달마굴, 선당굴 등의 이름이 보인다.
  홍옥을 뿌린 것 같은 철쭉이 붉게 피는 봄날이거나 만산홍엽이 불꽃처럼 타는 
가을날의 골굴암 풍경은 더욱 아름답다. 

   해룡설화의 대왕암과 감은사지석탑

  경주에 가득한 천년 신라의 감동적인 유적들은 봄과 가을에 가보면 더욱 아름답다. 
그러나 여름에 가보면 강물도 없고 첩첩산중으로 막힌 분지 속에 들어 있어 무덥고 
답답함을 느낀다.
  그런 유적 중에 마음을 확 트이게 하고 시원한 바람과 푸른 파도 속에 아늑한 
설화를 느낄 수 있고 가슴에 뜨거운 충격을 주는 유적이 토함산 북동쪽 감포(경주에서 
35km)에 있는 대왕암과 감은사지이다. 감포는 당시의 수도 경주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였다. 그래서 왜구가 신라에 침범해 들어오는 길목이 되기도 하였다.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의 대경을 새롭게 건설하고 해로의 관문인 이 
감포에 감은사를 지어 신라의 해상통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 하였던 것이다. 옛 
신라 때는 감포의 동해에서 운하처럼 관수로가 감은사 절 앞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무왕은 죽으면서(681년) 유언하기를 자기가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고 
침범해 오는 왜구를 막기 위하여 동해를 지키는 해룡이 되겠다고 원을 드렸던 것이다. 
그는 불교신자로서 왜 죽어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거부하고 해룡으로 화신하기를 
빌었던 것일까?
  당신 신라의 해군력은 미미하였다. 그래서 그의 생전에 동해바닷가의 감포항에 절을 
지어 항구를 지키는 거점도 되고 종교의 힘으로 왜구를 융화하여 평화적인 해상통로를 
확보하고자 했던 국가경영의 큰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큰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자 감포항을 지키는 해룡이 되어 신라를 
수호하는 국신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보면 감포 앞바다 
대왕암은 해룡의 호국신이 된 문무왕의 혼령과 천신이 된 김유신 장군의 혼령이 
함께 하는 신라국신의 신성한 성지가 되어 있다. 이 성지에서 난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자 천하가 화평하고 나라의 재난이 방지되었다고 한다. 이 피리가 곧 신라에 
하나밖에 없는 국보인 만파식적이요, 이를 귀중하게 보관한 곳이 월성 왕궁내의 
천존고였다.
  신라에는 찬란한 보물이 수없이 많았으나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의 혼령이 내려준 그 
피리가 신라제일의 국보였던 것이다. 이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나라를 이끌고 
가는 이념적, 정신적 터전이 감포의 대왕암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파식적은 신라 제왕의 국새와 같은 것
  만파식적이 신라 왕궁의 존엄한 행사에서 불려질 때 이 소리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신라 국신의 소리였다. 바로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 혼령의 
음성이었던 것이다. 이 피리 소리 앞에서 신라인의 정신은 하나로 응집되었다. 그 
소리는 신라인의 깃발 같은 표상이며 어지러운 혼란을 화평으로 잠재우는 구원의 
소리였다.
  그러기에 만파식적보다 귀중한 물건은 신라에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만파식적은 
적에게 잡혀간 국선 부예랑을 구해 오는 백률사의 영리한 부처님의 기적 속에도 잘 
보인다(삼국유사), 월성 천존고 속에 보관하였던 만파식적을 도난 당한 효소왕은 얼마나 
당황하였던가? 피리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1년간 받은 조세를 전부 상금으로 주겠다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피리를 찾아온 부예랑은 국선의 지위에서 일약 대각간으로 간택되고 그 아버지는 
태대각간으로 진급하였으며 백률사에 금은기를 포함하여 가사와 비단과 밭 1만 이랑이 
하사되었다. 그뿐인가. 죄인을 사면하고 관리들을 특진시키고 백성들에게는 3년간 
세금을 면제하여 주었다.
  실로 만파식적은 신라 제왕의 국새(나라 국, 옥새 새) 같은 것이었다. 신라인의 
정신적 구심점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왕룡사의 9층목탑이었으며 통일 후에는 
감포 대왕암에서 얻은 만파식적이었던 것이다.
  대왕암은 경주시 양남면 봉길리 앞바다 가운데 있는 자연암석의 섬이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죽자(681년) 그의 유언에 따라 시체를 경주 낭산 능지탑 자리에서 
화장을 하여 그 유골을 이 대왕암에 산골하였던 것이다. 대왕암은 사방에 십자형 
수로가 나 있는데 수로가 십자로 겹쳐지는 가운데 물속에 큰 바위 하나가 잠겨 있다.
  682년 문무왕이 화신한 대왕암의 해룡을 보고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만든 대나무를 
얻었다는 곳이 바로 이견대이다. 그 이견대의 건물이 해변의 언덕 위에 복원되어 남아 
있다.
  감은사 옛터는 대종천을 따라 1km쯤 육지로 들어간 산록에 남향으로 터잡고 있다. 
이 절은 원래 문무왕이 건립하기 시작하여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그 아들 신문왕이 
삼국을 통일한 부왕의 위업과 은혜에 감읍하여 682년에 완성하여 문무왕의 원찰로 
삼은 절이다.
  감은사에서 동해를 바라보면 대왕암이 잘 보인다.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김양상(후에 선덕왕)이 감은사란 직명으로 나온다. 이는 감은사에 장관급의 
직책을 가진 정부조직이 있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를 보면 감은사가 신라에서 
어떤 위치였는지 알 수 있다. 감은사 금당 밑은 문무왕의 화신인 해룡이 들어와 
서리도록 만든 굴 같은 특이한 구조이다. 그리고 동해에서 이 감은사까지 해룡이 
드나들던 수로가 있었고 그 유적은 지금도 확연히 남아 있다.
  감은사 금당 앞에 서 있는 동서 3층석탑은 건립연대의 확실함이나 그 장중한 
위용으로 보나 그 속에서 나온 사리기의 미술적 가치로나 단연 신라 일급의 자리에 
있다. 감은사지3층석탑은 통일신라 3층 정형탑의 시원적 모형이다.
  그 탑 앞에 서 보면 거대한 석조 조각의 웅장한 자태 앞에 누구나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3중 기단 위에 3층 탑신이 서 있는데 탑을 크게 짜기 위하여 1층 답신은 
돌기둥과 면석들을 모두 각각의 돌로 짰다. 2층 탑신은 각면이 한판 돌이며 3층은 
탑신과 지붕돌을 각각 한판 돌로 짰다. 상륜부에는 노반이 남아 있고 3.3m의 찰주가 
창살처럼 날카롭게 꽂혀 있다.
  1960년 서탑 3층에서 나온 사리기는 동자상, 팔부중상, 사천왕상 등을 비롯, 악기를 
연주하는 다양한 천인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통일신라의 장중한 감은사지3층석탑과 대왕암에 서려 있는 감동과 당시 신라인의 
정신을 마음속에 다시 새겨본다. 

   과학정신이 깃든 첨성대

  경주시 월성 북쪽, 원통형의 우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첨성대(국보 제31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의문을 갖게 한다.
  신라 천년의 왕궁이 있던 월성과 신라 왕조의 시조 탄생설화가 깃든 계림에 
인접하여 자못 신비한 예스러움을 자아내고 있는 첨성대는 우선 조형적으로도 
특이하다.
  첨성대는 돌로 축조되었는데 이 구조물을 보면 목조로 되었던 것을 석조로 조형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첨성대의 구조를 자세히 보면 흙벽돌로 쌓아 만든 원통형의 
구조물을 석조로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보면 선덕여왕(632-647년) 때 축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신라 선덕여왕 때 축조하였는데 천문을 관측한 곳이라고 적혀 
있다.
  후대의 기록인 '증보 문헌비고'에는 "선덕여왕 16년(647)에 첨성대가 만들어졌는데 
돌을 다듬어 쌓았다. 상부는 모나고 몸체는 둥글다. 높이는 19척이다. 속이 비어 있어 
사람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한다."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경주조에도 "선덕여왕 16년(647)에 축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문헌기록을 
보면 신라 선덕여왕 때 만든 것은 틀림없으며 첨성대 속으로 사람이 들어가서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하던 곳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제사를 올리던 제단이거나 기념물적 석조물이란 의견을 
제시한 바도 있다. 그러나 첨성대는 분명히 천문을 관측하던 시설물이다.
  고대 제왕의 정치이념은 천명사상이었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지운행을 알아야 했다. 변하는 낮과 밤의 길이와 농경에 
있어서 절대 필수인 절기를 정확하게 측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고대 천문학은 천문과 역법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며 천문과측은 또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역법을 만들기 위해 태양, 달, 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일과, 다른 하나는 
점성이란 이름으로 보는 견해인데 항성의 별자리를 국가 또는 지방으로 분배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일이다.
  이러한 점성은 고대 국가에서 성행하였고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계속되었다. 
첨성대는 신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고구려 수도 평양에도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에 보면 "성 안에 구묘와 구지가 있다. 구묘는 곧 
구요(아홉개의 별)가 날아 들어가는 곳이다. 그 못가에 첨성대가 있다."하였다. 
'동국여지승람' 평양부에는 "첨성대 터가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세종 
때까지 남아 있던 고구려의 첨성대가 후에 무너져서 그 터만 남아 있음을 알게 하는 
기록이다.
  백제에도 이런 천문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천문학자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675년 일본에 첨성대를 세워 주었던 기록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과학적으로 천문을 관측하였던 것이다. 
경주에 있는 신라 첨성대는 동양에 남아 있는 최고의 첨성대이다.
  경주 신라 첨성대의 구조를 살펴본다. 첨성대의 기단은 정방형(한변 536cm)이고 그 
위에 원통형 항아리처럼 몸통을 둥글게 다듬은 돌로 단을 쌓았다. 일찍부터 옛 
선현들은 하늘을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돌의 
단은 27단으로 기단을 합쳐 28단으로 한 달을 뜻하고, 돌의 수는 모두 365개로 한 해를 
의미한다.
  정상부에는 정사각형(한변 220cm)으로 2단의 정자석이 짜여 있다. 그리고 원통의 
중간인 13단과 15단에 걸쳐 정사각형(한변 95cm)에 가까운 창이 정남에서 16도 
동쪽으로 치우쳐 나 있다.
  창 아랫변의 돌은 큰 판석으로 원통형 내부 반쯤을 차지하고 있는데 사다리를 
설치하여 창까지 올라간 사람이 이 판석에 걸쳐 첨성대 내부에다 또 하나의 사다리를 
놓으면 정자형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첨성대의 전체 높이는 9.5m가 
된다.

     첨성대는 동서남북 방위표준일 수도
  첨성대는 사다리를 통하여 창까지 올라가서 판석에 반듯이 누워서 동, 서, 남, 북 
사각형의 돔(dome)을 통하여 밤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의 남중시간과 각도를 측정하고 
1년의 역을 제정하고 추분, 춘분, 하지, 동지 등과 또는 일식, 월식을 예측하고 혜성과 
유성 등의 운행을 관측, 기록할 수 있다.
  또 태양광선에 의하여 생기는 해 그림자를 측정하여 태양의 고도를 알아서 춘분, 
추분, 하지, 동지점을 찾아내고 낮의 시간을 측정하는 측경대 기능도 갖추고 있다. 
723년 당 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측경대를 만든 사실이 있는데 이와 비교하여 보면 
신라 첨성대는 규표의 형식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남으로 난 첨성대의 창문을 통하여 태양광선이 들어오는 각도에 따라 계절과 시간을 
측정할 수도 있다. 또 첨성대 정상의 정사각형 틀의 동, 서, 남, 북 방향이 신라의 방위 
표준이 될 수도 있다. 첨성대가 왕궁인 월성 북쪽 계림에 인접하여 신라의 자오선을 
결정하는 표준이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라는 당시 각 지방과의 거리를 명시한 지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도가 없이는 각 지역에 설치되어 있는 성과 긴밀한 연락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김춘추는 통일 전야의 외교관으로 중국이나 고구려 등지를 왕래했던 것인데 
거리를 측정하는 지도가 없이는 여행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지도에 
명시된 거리를 재는 표준 기점이 있어야 한다. 이 기점을 왕궁이 있는 월성을 
중심으로 측정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 첨성대는 신라가 거리를 측정하는 표준 기점이 
될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남아 있는 해시계판의 유물을 보면 신라는 해의 그림자를 통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과학지식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석광이 많이 
있어 나침반이 발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작전에 
필요한 지도나 지형 지물의 여러 자료들이 과학적으로 조사되고 구비되어 있었다. 
불행하게 이러한 자료들이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성의 배치나 전투 기록에서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다.
  첨성대를 보면 선덕여왕은 신라가 삼국통일의 역사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기초를 다져 놓은 여왕이었다. 
우리는 한 시대의 위대한 역사가 창조되는 데는 한순간의 시대적 운이나 반짝 하는 
기지로만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주 첨성대를 가버린 신라의 한 역사적 석조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첨성대에는 
우리 민족의 빛나는 과학정신이 담겨 있다. 그리고 천지 운행을 알고 천명에 순응하여 
백성을 다스리고자 했던 어진 정치이념이 담겨 있다.
  건축 구조물로도 뛰어난 천재성을 찾아볼 수 있다. 원과 사각의 기발한 배합, 천 몇 백 
년이 흘러간 오늘까지 지탱하고 있는 구조의 과학성, 차갑고 단단한 화강암의 질감을 
저렇게 부드럽게 곡선으로 축조한 미적 감각 등을 통해 뛰어난 건축예술 감각을 
엿보게 한다.
  1970년에 첨성대 주위를 정비하면서 발굴조사가 있었다. 지금 첨성대가 서 있는 
자리는 5-6세기의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었던 지역임을 확인하였다. 신라는 왕궁의 
서쪽과 북쪽에 인접하여 왕릉이나 묘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첨성대 주위 
땅속에는 옛 신라의 고분들이 깔려 있다. 이들 고분은 발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땅속에 남아 있다.
  첨성대 주위를 걸으면서 신라인이 무변광대한 우주를 향하여 응시하던 과학정신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화랑 사다함의 사랑

  신라 화랑 중에서 가장 청신한 화랑은 사다함이다. 그는 12세에 이미 검술에 뛰어나 
많은 낭도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15세에 화랑이 되어 1천여 명의 낭도를 
거느렸다. 16세에 귀당비장이 되어 진흥왕 23년(562) 5천의 기병을 이끌고 선봉장이 
되어 가야를 정벌하였다.
  진흥왕은 그의 영웅적 전공을 포상하여 많은 논밭과 가야군 포로 300인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사다함은 논밭은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포로는 모두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 이때 사다함과 함께 가야 정벌에 출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무관랑이 
있었는데 무관랑은 신분이 진골이 아니어서 미천하다 하여 왕으로부터 포상을 못 받은 
채 상심하다가 병들어 죽었다.
  무관랑은 사다함과 죽음을 같이하기로 맹세한 사우였다. 사다함은 무관랑이 죽자 
애통함을 금할 수가 없었고 또 사다함이 사모하고 있던 미실이 사다함이 전쟁터에 간 
사이 진흥왕의 동생 세종의 아내가 되어 버려 연인을 잃은 슬픔도 겹쳐 마음의 병을 
얻어 죽으니 17세였다.
  사다함은 내물왕의 7세손으로 진골 출신이다. 그의 짧은 생애가 '삼국사기'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 새로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을 보면 사다함의 자세한 
가계와 사랑에 대하여 흥미 있게 기록하고 있다. '화랑세기'는 후대에 옮겨 쓰면서 
인명의 존칭 같은 것이 변하고 탈자, 오자도 보이나 그 내용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과 비교하여 상충되는 것이 없어 당신 신라사회의 혈족관계와 
화랑사에 대하여 자세한 사료를 제공하고 있다.
  사다함의 아버지는 구리지이며 어머니는 김진부인이다. 구리지는 신라의 절세미인인 
벽화부인(왕의 후궁)과 왕족 비량이 변소에서 만나 정을 통하여 낳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똥 구린내가 나는 변소에서 잉태한 아들이라 하여 구리지라 이름하였다 한다. 
사다함의 할머니인 벽화부인에 대하여는 '삼국사기' 소지왕 22년(500)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벽화는 당시 16세로 날기군(현 영주)에 사는 절세미인이었는데 
소지왕은 그를 연모하여 정사도 돌보지 않고 날기군까지 숨어서 왕래하다가 결국 
후궁으로 삼아 왕궁에 데려왔던 것이다.
  소지왕은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랑에 지나쳤던 때문인지 그해 죽고 말았다. 그 
다음왕은 지증왕인데 즉위할 때 64세의 노인이었으므로 벽화부인은 왕자였던 
원종(후에 법흥왕)과 정을 통하여 삼엽이란 딸을 낳기도 하였다.
  원종(법흥왕)이 왕이 되자 벽화부인은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다. 벽화부인은 후궁의 
몸으로 비량과 변소에서 밀회를 하여 아들 구리지를 낳았다. 이때 법흥왕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다 한다. '삼국유사' 사금갑조에 보면 소지왕 때 후궁이 왕궁에 
분향하는 스님과 거문고를 넣어 두는 통 속에서 정을 통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후궁들이 왕 이외의 사람과 통정하는 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골품제도를 통해 근친결혼을 하였으며 남녀간 자유로운 성의 개방사회였다. 
사다함의 어머니 김진부인은 벽화부인의 남동생인 위화랑과 오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러므로 사다함의 아버지 구리지와 어머니 김진부인은 사촌간이 된다. 
김진부인은 구리지와 살면서 미남 낭도였던 설성과 정을 통하여 설원랑(나중에 
화랑국선이 됨)을 낳았다. 그래서 설원랑은 사다함과 아버지가 다른 세 살 아래의 
동생이 된다.

     화랑 사다함이 사랑했던 여인 미실
  사다함이 사랑했던 미실은 뛰어난 미인으로 아버지는 미진부이며 어머니는 
사도부인(법흥왕의 후궁)이다. 미실은 사다함이 가야 정벌에 출정하는 날 길목에 나와서 
연인을 싸움터에 보내는 여인의 심정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전송하였다. 사다함이 
싸움터에 나간 사이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는 아들 세종과 미실을 결혼시켜 
버렸다. 지소태후는 진흥왕의 아버지 입종이 죽은 후 병부령(현 국방장관)이던 
이사부와 정을 통하여 아들 세종을 낳았던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진흥왕과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였던 것이다.
  사다함이 가야를 정벌하고 서라벌에 돌아오니 여인 미실은 이미 왕궁에 들어가 
세종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사다함은 미실이 그리워 '청조가'를 지어 부르면 
슬퍼하였다.

  내 죽어 신병이 되어
  전군부처(세종과 미실)를 보호해 주리라

  지소태후는 당시 7세에 왕이 된 진흥왕을 섭정한 여인으로 사실상의 통치권을 
행사한 여인이었기에 사다함은 왕권에 도전할 수도 없어 미실을 빼앗긴 비통함과 
절망감에 병을 얻어 죽었다.
  사다함이 죽은 후 미실의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려 아들을 낳아야 하겠다."하였다. 이 꿈을 꾼 후 아들을 잉태하여 
하종(후에 화랑이 됨)을 낳았다.
  미실은 미인을 뿐 아니라 교태가 넘치고 지략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그래서 당시 
신라 사람들이 "미실의 가슴 속에는 사다함의 혼령이 들어앉아 좋은 지략을 준다"고 
하였다.
  사다함은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의 원을 죽음으로 이루고자 했는지 모른다. 
미실은 사다함의 연인이었다가 세종의 부인이 되고 후에 진흥왕과 진평왕의 후궁이 
되었다. 화랑과 국선의 파벌싸움이 일어나 진흥왕 29년(562) 원화제도가 부활될 때 
원화가 되기도 하였으며 사다함의 동생 설원랑의 연인이 되기도 하는 등 한 시대 
신라의 왕실을 휘어잡았던 여인이다.
  미실이 사다함을 전송하던 길목을 찾아서 사다함이 미실을 그리워하며 '청조가'를 
지어 부르던 연정의 빗돌이나 하나 세웠으면 한다.

   제5부 민족의 기상이 흐르고 있는 역사유적

   승리의 함성이 들리는 행주산성

  행주산성은 서울 사람들이 한두 시간 가벼운 산책을 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행주동 한강 강안에 솟아 있는 험준한 동산이다. 
김포공항으로 연결되는 강변도로나, 고양시, 일산 신도시, 임진각으로 이어지는 자유로 
등에서 쉽게 행주산성 입구로 접근할 수 있어 서울 시민과 이 지역 주민들이 큰 
부담없이 둘러볼 수 있는 뜻깊은 사적지이다.
  산성에 올라보면 남으로 서울 강서구 가양동과 공항동이 건너다 보이고 북으로 
고양시와 일산 신도시가 바라보이며 동서로 도도히 흐르는 한강의 기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풍납동의 광진나루에서 흘러오는 강물이 강화해협을 향해 흘러가는 대하의 
장관이 전개되어 있다.
  한강은 그냥 흘러가는 강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가 흐르고 있는 강이다. 
역사는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간다. 우리는 그 역사의 강물 위에 한방울의 물방울이 
되어 흐르고 있는 존재이다. 맑은 물방울이 되어 정한 강물을 형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더러운 물방울이 되어 강물을 오염시키기도 한다.
  이와 같이 역사는 엄숙한 것이다. 인생은 살고 나면 작든 크든 간에 역사적 
존재이므로 평가를 받게 되어 있다. 역사적 평가와 질책은 항상 준엄하고 교훈적이다.
  도심의 차량 속에서 시달리다가 정신이 나른해지면 행주산성에 올라가서 시원한 
한강의 강바람을 쐬며 통쾌한 역사의 목소리를 느껴보는 것도 혼미한 정신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 될 것이다.
  행주산성은 1593년 2월 12일(음력) 임진왜란 당시에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1만군과 
우키타를 비롯한 이시다, 마쓰다, 고니시, 구로다, 요시가와, 고바야카와, 모리 등 
조선을 침략한 왜장들이 지휘하는 3만 왜군과 싸워 대첩을 이룩한 전승지이다.
  권율 장군은 1592년 7월 이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호남을 보위하였으며, 그 
다음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상하다가 수원의 독산성에서 왜군과 접전하여 또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왜군은 조선군과 명군의 연합작전에 몰리어 평양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여 서울에 집결하고 있었다. 권율은 명군과 연합작전으로 서울 수복작전을 
전개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막하에 있는 중군장 조경으로 하여금 서울 수복의 교두보를 물색케 
하였다. 조경은 지금의 서울 양천 공암나루에서 밤에 수색대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요충지를 발견하고 교두보를 확보하였는데, 그곳이 행주산성이다.
  조경은 행주산성에 튼튼한 이중 목책을 설치하게 하였다. 권율은 처음에 교두보를 
서울 안형에 설치하려 하였으나 막하제장들이 모두 반대하여 조경의 의견을 따랐던 
것이다.
  권율은 정예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행주산성에 들어갔다. 승장 처영이 거느린 승군 
1천 명도 같이 들어갔다. 행주산성 외곽을 지원하는 부대로는 전라병사 선거이가 
지휘하는 4천군이 금천(지금 시흥)에, 소모사 변이중이 지휘하는 1천군이 양천(지금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창의사 김천일의 군이 강화 해안에, 충청감사 허욱이 지휘하는 
군이 통진(지금 김포)에서 응원하기로 하였다.
  행주산성 목책공사가 완성된 지 사흘 만에 왜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왜장 중에는 
한번도 전투에서 진두 지휘한 바가 없었던 총대장 우키타가 참전하고 본국의 장군을 
직접 보좌하던 봉행직의 최고 무관인 이시다, 마쓰다, 오타니를 비롯하여 조선침략군 
제장들이 7진으로 나뉘어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조선군의 무기는 화차와 수차석포를 비롯하여 총통, 진천뢰, 활, 칼, 창 
등이었다. 왜군의 조총에 대비하여 흙으로 둑을 쌓았으며 백병전에 사용하기 위하여 
매운 재를 넣은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권율은 전투 직전에 개인의 생사는 
물론이요, 국운이 달린 전투이므로 필사항전할 것을 결의하였다.
  왜군은 조선군을 대단히 얕잡아 보았다. 왜장들은 조선군을 발로 차서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행주치마의 유래
  전투는 묘시(아침 6시경)에 시작하여 유시(저녁 6시경)까지 약 12시간 계속되었다. 
아침 6시경에 100여기의 기병이 선두에 나타나더니 고니시가 선봉에 선 제1대가 
공격해 왔다. 조선군은 화차에서 대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쏘아대며 
진천뢰와 총통으로 공격해 왜군은 괴멸되어 퇴각하였다. 제2대는 이시다가 지휘했는데 
역시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제3대는 구로다가 지휘했는데 장제를 만들어 그 위에 
소총수를 수십 명 올려놓고 조총공격을 해왔다. 조경이 이 장제에 대포를 쏘아 모두 
즉사시키자 적은 물러갔다.
  제1대에서 제3대까지의 패전상황을 보고 있던 총대장 우키타(당시 22세)가 크게 
노하여 전투에 참가하니 제4대 왜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뒤를 따라 공격해 왔다. 
왜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제1성책을 넘어서 제2성책까지 접근해 왔다.
  한때 조선군은 동요하였다. 그러나 군율의 독전으로 전세를 극복할 수 있었다. 
화차와 총통의 공격을 받은 적장 우키타는 부상을 입고 말에서 내려 부하의 부축을 
받으며 퇴진하였다. 제5대는 오시가와가 지취하였는데 왜군도 화통으로 공격해 성채에 
불이 붙고 치열한 근접전이 벌어져 요시가와는 결국 부상을 입고 퇴각하였다. 제6대는 
모리가 지휘했는데 제2성책을 넘어서 성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승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이 백병전을 감행하여 허리에 차고 있던 재 주머니를 적에게 뿌리자 적은 눈을 뜰 
수가 없어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다.
  제7대는 고바야가와가 지휘하였는데 고바야가와는 60의 노장으로 전투에 노련한 
장수였는데 행주산성 서쪽의 완만한 곳으로 공격해 왔다. 이곳은 승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백병전이 벌어지고 인마의 고함소리가 성내를 진동하였다.
  조선군은 돌진해 오는 왜군을 향해 총통과 화살을 계속 쏘았으나 화살을 다 
소모하게 되자 성내에 있는 돌을 모아서 투석전이 벌어졌다. 이때 부녀자들까지 
치마에 돌을 날라왔다고 해서 치마 위에 덧입는 짧은 치마를 행주치마라 했다고 
전한다.
  위급한 전황 속에 경기수사 이빈이 수만 개의 화사를 배 두 척에 싣고 통진에서 
올라와 적의 후방을 찌를 기세를 보이자 적은 마침내 성내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물러나는 왜군을 추격하여 130급을 베고 갑주, 칼, 창 등 7백여 건의 
무기를 획득하였으며 적이 버리고 간 시체가 2백 구가 넘었다.
  이 대첩의 공으로 권율은 도원수가 되고 조경은 자선대부, 승장 처영은 절충장군이 
되었으며 모든 장사에게 상과 벼슬을 내렸다. 이때 명장 이여송은 벽제관전투에서 
고바야가와군에 패하여 개성에 후퇴하여 있었는데 행주대첩 얘기를 듣고 부끄럽게 
생각했다. 명의 선봉장 사대수는 권율을 청하여 만나보고 진법에 감탄하여 "조선국에 
이러한 참다운 장수가 있었구나"하면서 칭찬하였다.
  권율 장군은 이빈과 협력하여 파주산성으로 들어갔다. 권율 장군은 2월 12일 대첩을 
이루고 2월 17일 행주산성에서 파주산성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행주산성은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성내에는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비각 속에 서 있다. 
비는 풍화되어 글을 읽을 수 없다.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있다.
  1970년 대대적인 유적정비사업을 추진하여 성내 목책터를 정비하여 250m의 토성이 
보존되어 있으며 행주산성 대첩의 기념관과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와 
덕양정, 진강정 등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행주산성을 발굴조사한 결과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토기와 토성지도 발견되었다. 
행주산성은 삼국시대부터 한강 연안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현대전에 
있어서도 행주산성은 서울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요충지이다.
  6.25전란 때에도 인천으로 상륙한 한국 해병부대는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을 장악한 
후에 서울로 입성했던 것이다.
  권율의 조선군은 북족과 서쪽만 지키면 되는 행주산성의 묘한 지형을 잘 이용하여 
많은 적을 협소한 지형 속에 넣고 격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주산성에는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산성의 수림도 울창하게 가꾸어져 있다. 
진강정에 앉아 한강을 내려다보면 강물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조금도 꾸밈없이 실은 
채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 있다. 산성의 험한 바위 사이에는 지금도 칼날같이 날이 
서서히 불길 같은 빛을 내는 역사의 함성이 들리고 있다. 

   아픈 역사가 잠든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데 우리 민족의 가장 아픈 역사의 
상흔이 깃들여 있는 곳이다.
  나라의 국방정책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 남한산성을 답사하여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이 성에 들어가 45일간 청나라 태종이 거느린 10만 
대군과 항전하다가 삼전도 수항단에 나아가서 치욕의 항복을 하였다. 당시 조선정부는 
중국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흥세력인 청나라에 관한 정세에도 어두웠고, 이들과의 
결사항전의 결의도 약했다. 그리하여 당시 백성들은 갖은 고초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국론은 주화파니 척화파니 하고 분열되어 있었을 뿐 
전쟁에 대비하는 전략도 없었다. 그저 우왕좌왕하다가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조선은 청나라에 예속되었다. 청나라가 
요구한 세폐 등은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나라의 경영에 있어서 국제정세에 밝아야 하고 냉엄한 현실을 명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임을 병자호란의 역사적 교훈에서 본다. 당시 조선정부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를 배척할 수 없는 혈맹적 명분이 있었기에 후금이 명나라를 
침공하는 데 동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조선의 정치사상은 한족을 숭배하고 그 변방의 
보족을 오랑캐로 보는 사대적 시각이 짙었던 것이다.
  병자호란의 결과는 어떤 면으로 백성에게 임진왜란보다 더 참혹한 피해를 주었다. 
우리는 병자호란의 결과를 보면서 얼마나 전략적 지략이 없었던가도 생각하게 된다. 
병자호란의 영웅 임경업은 북방에서 백마산성을 결사항전으로 지켜 청군은 이 
백마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조선 영토 깊숙이 들어왔던 것이다.
  청나라 태종은 1636년 12월 12일 심양을 출발하여 조선을 침입하였는데 겨울이 
아니고는 중국군이 조선을 침범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압록강, 대동강, 임진강, 
한강이 모두 꽁꽁 얼어야 대군의 군마가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큰 강에 
다리가 없어서 강물이 얼지 않으면 군마의 이동이 어려웠던 때이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인조 임금은 1637년 1월 30일 송파 나루의 삼전도에 나아가서 
항복하였다. 아무리 강화성이 떨어지고 왕자들이 체포되었다 하더라도 전쟁을 하기로 
하였으면 결사의 전략과 정신으로 싸워야 한다. 조선군이 만일 큰 강물이 풀리기 
시작하는 봄까지만 버티었다면 한강, 임진강, 대동강, 압록강 강물이 청나라 10만 
대군의 퇴로를 막아 조선 전역에서 벌떼같이 일어난 항전군과 북방을 지키고 있던 
임경업 장군의 수비군 등에 의하여 청군은 괴멸되었을지 모른다.
  역사는 큰 주기를 가지고 반복하고 있다. 현대전이 과학무기의 발달로 옛 전쟁과는 
달라졌다 하더라도 국방정책을 세우는 전략에 있어 필승의 목표와 필사의 항전정신은 
시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북방에 북한산성, 동남에 남한산성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키는 군사기지로는 북방에 북한산성, 동남에 남한산성이 
있었다. 남한산성은 옛 백제 때는 한산성으로 보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한산주를 지키는 주성인 주장성이 되었다. 주장성은 일명 일장산성이라고도 하며 
신라가 북방을 지키는 주력군이 주둔하고 있던 성이다.
  '삼국사기' 문무왕 12년(672)조를 보면 "한산주에 주장성을 축성하니 주위가 
4,360보이다"라고 쓰여 있다. '동국여지승람' 광주고적조에도 "일장산성은 신라 때 
주장성으로 문무왕이 축성한 것이다. 그 안에 우물 6개가 있고 개울이 있으며 둘레가 
86,800척이며 높이가 24척인바 석축으로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 지역의 산성발굴 조사결과를 보면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한강유역을 
장악하였다. 한강을 방위선으로 하여 광진나루를 지키는 이성산성과 안양 방면으로 
내려가는 곳을 지키는 관악산 서남 줄기의 호암봉산성이 있다. 이성산성은 
한양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였고 호암봉산성은 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였다.
  행주산성에서는 신라의 옛 성곽유적이 발굴조사되었다. 삼국통일 후에는 
주장성(남한산성)에 신라군의 주력이 주둔하고 이성산성, 관악산 호암봉산성, 행주산성 
등에는 단위 부대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을 현재의 규모로 개축한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1642년(인조 2)이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에게 남한산성을 개축하도록 명령하여 2년 
뒤에 완성을 보았다. 당시 성 둘레가 6,297보(약 8km), 여장이 1,897개, 옹성 3개, 성랑 
115개, 동서남북에 성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 등을 파고 광주읍의 
치소를 산성내로 옮겼다.
  당시 축성에는 승려를 동원하였는데 승려 각성을 도총섭으로 삼아 팔도의 승려를 
동원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성내에는 장경사를 비롯한 사찰 7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장경사만이 남아 있다.
  그 뒤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 시설이 설치되어 유사시에 왕이 거처할 행궁 
73칸과 하궐 154칸이 있었다. 궁실에 따른 건물로는 1688년 숙종 때 좌덕당을 세우고 
1711년에는 종묘의 신위를 옮겨서 모실 수 있는 좌전을 세우기도 했다.
  남문 안에는 사직을 옮겨 모실 우실도 있었다. 정조는 1798년 한남루를 세웠다. 이 
성내에는 좌승당, 일장각, 수어청, 제승헌, 비장청, 교련관청, 기패관청 등의 군사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또 종각, 마구, 죄인을 가두는 옥, 온조왕묘, 서낭당 등을 설치하였고 승군을 
지휘하는 승도청도 있었다.
  남한산성의 방비는 처음에 총융청이 맡았다가 따로 수어청이 설치되었다. 수어청의 
군사편제는 전, 후, 좌, 우, 중의 5관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은 남장대에 진을 치고, 
중영장은 북장대, 후영장은 동장대, 우영장은 서장대, 좌영장은 후영장과 같이 
동장대에 진을 쳤다. 이러한 군사편제는 조선군의 수성방어 편제로서 중요한 
연구대상이 된다. 이러한 장대 중에 지금은 서장대만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성내에는 홍익환, 윤집, 오달제의 신위를 모신 현절사와 군사훈련을 
시키던 연무관과 지수당, 영월정 등 유적이 남아 있다. 홍익환, 윤집, 오달제는 
삼학사로서 척화파의 강경론자들인데 청나라에 잡혀가서 죽음을 당하였다. 그들의 
높은 절의를 현창하기 위하여 현절사가 세워진 것이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이 성에 옮겨와 있을 때의 방어태세를 보면 수어사인 
이시백은 서쪽 성을 지키고, 총융대장 구굉은 남쪽성을, 도감대장 신경진은 동쪽성 
망월대를, 원두표는 북문을 지켰다.
  남한산성은 제3공화국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연차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동문, 서문, 남문의 문루와 연무관, 현절사, 연무대, 영월정 등 
건물이 보수되고 성내 연못과 성곽과 여장 등이 비교적 잘 보수되었다. 성내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여관, 음식점 등 관광객의 편의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1971년에는 남한산성의 역사적 풍치를 보존하고 유적의 파괴를 막기 위해 36km2의 
산성구역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남한산성은 우리 나라 산성 중에 대단히 규모가 큰 성이며 유적이 가장 잘 남아 
있다. 남한산성에 대한 기록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 속에 남한지도가 남아 
있는데 담채로 그린 그림(세로 131cm, 가로 84.5cm)으로 산성내의 시설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국방유적으로 
산의 수림과 개울 등 경관도 아름답고 등산하기에 편리한 곳이다. 주말이나 휴일 같은 
날에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가족과 함께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여 
가버린 시대를 오늘에 재조명해 보는 것도 뜻깊은 일일 것이다. 

   역사교육의 현장 강화도

  회사나 조직을 경영하는 책임자가 되든, 군의 지휘관이 되든, 교육자가 되든, 
역사의식이 필요한 사람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여유 있는 시간을 내어 강화도 유적을 
답사해 보도록 권하고 싶다. 남 앞에 서는 사람은 역사 창조의 높은 기상과 문화의 
깊은 감동을 지니고 앞날을 위하여 때로는 결단하고 때로는 초연히 자기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책을 많이 읽고 전문가로부터 강의를 받거나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현장에 서서 머리를 치고 가는 시대의 
소명의식과 가슴을 흔드는 감동을 느끼며 마음의 여백 속에 살아 있는 역사를 
체득해야 한다.
  강화도에는 어기찬 우리 민족이 국난을 극복한 강인한 항쟁의 피흘린 현장이 도처에 
널려 있다. 경주가 감동어린 민족문화가 생동하던 꿈의 현장이라면 강화는 민족사의 
반성과 기상을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역사와 문화는 도서관이나 박물관 진열장 
속에서 체득하는 것보다 그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것이 더 생명력이 있다.
  강화도 마니산(해발 468m) 정상에 있는 제천단인 참성단(사적 제136호)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우리 민족의 아득한 경천사상이 감돌고 있는 곳이다. 국조 단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내린 역사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청동기시대 무덤인 북방식 고인돌(사적 제137호)이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다. 
현재 남한에 있는 북방식 고인돌로는 최대(길이 7.1m, 너비 5.5m)의 것이다.
  강화읍에 있는 고려궁터(사적 제133호)는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39년간 싸우던 심장부이다. 몽고의 칭기즈 칸이 중국을 석권하고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정벌하고 동쪽으로는 만주를 거쳐 1231년 고려를 침략해 
왔다. 당시 고려 조정은 집권자 최이가 결사항전의 결의로 1232년 6월 고종을 모시고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유목민인 몽고군은 해전에 약하여 섬이 안전하였던 것이다.
  당시 항몽세력의 주축은 삼별초의 무인들이었다. 고려 원종이 1270년 5월 
몽고세력에 굴복하여 개성으로의 환도를 결정하자 이에 불복한 삼별초의 배중손, 
노영희, 김통정 등이 왕족인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새 정부를 수립하고 몽고와 끝까지 
싸울 것을 천명하였다.
  삼별초군은 진도에 들어가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1271년 진도 용장성에서 패전하여 
온은 자결하고 배중손 등은 전사하였다. 김통정이 잔여부대를 이끌고 제주도 
항바두리성에 웅거하여 싸우다가 1273년 패하자 김통정 이하 삼별초의 군사들은 
한라산에 올라가 자결하고 말았다.
  우리는 여기서 고려 무인의 필사항전하고 자주보위하는 불굴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고려 무인의 정신 속에는 중국 대륙을 제압하던 옛 고구려 무사의 강인한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이후 고려는 자주정신을 상실하고 몽고의 속국이 되어 충렬, 충선, 충숙, 충해, 
충정이라는 왕의 이름에 충자가 붙는 치욕의 역사를 연출하고 말았다. 한 나라 제왕의 
시호 위에 어찌 다른 나라의 왕에게 충성했다는 충자가 붙는단 말인가.
  고려는 강화 천도기간 동안 그렇게 싸우면서도 우리 민족문화사에 위대한 금자탑을 
세웠다. '동국이상국집'에 보면 1234년 금속활자로 '고금상정예문' 28부를 강화에서 
찍어냈던 것이다. 이는 1450년 서양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든 것보다 
2백여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리고 해인사에 보관된 고려 팔만대장경이 1237년부터 1251년까지 강화 선원사에서 
생겨졌다. 고려청자도 강화천도 기간에 가장 우수한 것이 생산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는 강화도를 수도 방위의 일급 요새로 지목하여 영진체제를 
확립하여 강화성의 수비군으로 중앙에 시위패와 기병인 진군을 두고 보병인 수성군과 
해군인 기선군을 두었다. 강화성의 행궁은 1637년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함락되어 
인조가 청나라 황제 앞에서 항복하는 슬픈 역사를 엮어내고 말았다.
  이런 역사의 자취들이 강화성의 성문과 관아건물들과 성돌 사이에 이끼로 피어 
있다. 강화대교를 막 건너서면 강화역사박물관과 갑곶돈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외성의 
요새로 몽고군을 방비하던 것이며, 1866년 9월 7일 병인양요 때 로즈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나폴레옹군과 싸운 격전의 현장이다. 그해 10월 3일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의 습격을 받고 프랑스군은 패주하고 말았다.

     신미양요의 격전의 현장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은 1871년 4월 23일부터 48시간 동안 미국의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시아함대와 싸운 신미양요의 격전의 현장이다. 조선의 어재연 장군이 
지휘하는 진군이 미군의 9인치 함포 등 우세한 무기 앞에 결사항전하다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고 순국한 전적지이다. 광성보전투에서 전사한 미국의 맥키 중위는 
미국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최초의 전사자이기도 하다. 어재연 장군의 군기가 미국 
아나폴리스 사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당시 전황을 기록한 미국의 문서들 
속에 조선군은 한 사람도 살아 남기를 원하지 아니하였고 포로가 되어서도 물속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한다.
  이곳 전적지에는 그날의 조선군 대포들이 포대에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아름답고 
절묘한 용두돈대의 복원된 모습은 이채롭다. 강화해협의 굽이치는 역사의 물결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초지진 늙은 소나무에는 1875년 8월 21일 일본 군함 운양호가 함포사격을 가하여 
포탄에 맞은 역사의 상흔이 완연히 남아 있다. 이 운양호가선으로 조선이 일본에게 
강점당하는 비운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고 결국 36년간 국권을 상실하는 치욕을 맛보게 되었다.
  강화 정족산성 안에는 유서깊은 전등사가 있다. 정족산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오랜 산성이다. 고려가 이 산성내에 이궁을 지었고 조선은 1660년 선원각과 
장사각을 짓고 1678년부터는 사고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다. 이 실록본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전등사의 창건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의 원찰이었음은 
확실하다. 정화궁주가 이 절에 옥등을 시주했기 때문에 전등사라 했다 전한다. 대웅전, 
약사전, 명부전, 대조루의 옛 건물이 남아 있다. 1097년 송나라 승명사에서 주조한 
희귀한 중국종(보물 제 393호)이 하나 있다. 이 범종은 신라종과 달리 음통이나 
비천상이 없어 한국종과 비교가 된다.
  1544년 정수사에서 새긴 법화경 목판이 전하고 있고 고려유물로 보이는 거대한 청동 
수조와 옥동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19세기 불상과 탱화들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1855년 건립된 3칸짜리 다폿집인데 공포 위의 보머리에 귀면을 조각하고 기둥머리 
위에 여인상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한 특이한 집이다.
  추녀를 받친 네 기둥 위의 여인은 대웅전을 건립할 때 모목수가 마을의 어느 여인과 
열렬한 사랑을 했는데 집이 다 되어갈 무렵 그 여인이 도망가 버렸다 한다. 도목수는 
그 여인을 사랑하던 정열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증오로 변하여 그 여인의 모습을 
나무로 조각하여 수백년간 고통을 느끼며 법당의 지붕을 받들게 만들었다 한다.
  약사전과 대조루 등은 모두 조선후기의 건물들이다. 절 주위 우거진 수림과 역사의 
자취들이 어울려 사찰의 경관이 아름답다. 강화 마니산 중턱의 정수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아름다운 법당이 있고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 낙가산에는 관음도량인 보문사가 
있다. 보문사 석굴의 나한상은 많은 설화가 남아 있으며 절 후면 자연암벽에 조각한 
높이 9.7m의 거대한 11면 관음보살상은 이채롭다.
  보문사를 참배하면 망망한 해운이 전개되고 그 해풍 속에 육신이 구름처럼 
가벼워진다. 

   민족의 단심이 흐르는 남강과 진주성

  진주성 촉석루 앞 남강의 벼랑 위에 서서 도도히 흐르는 푸른 강물을 바라보면 
우리의 가슴을 흔드는 감동이 인다. 한국의 전적지 중에 진주성만큼 극적인 전적지는 
없다. 임진왜란 3대첩지 중에 가장 치열한 전쟁터가 진주성이다.
  임진년 그날 조선 전역의 군사기지가 왜적 앞에 낙엽처럼 떨어져 갈 때 오직 진주성 
하나만이 육전에 이겼고 그 전과 또한 가장 큰 것이었다. 만약 나가오카가 거느린 
2만의 왜적이 진주성에서 패퇴하지 않고 호남으로 진출하였다면 호남이 어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보급창 역할을 할 수 있었겠는가?
  진주성전투는 한 명의 중국원병도 참여하지 않은 조선의 자주적역량으로 왜적을 
격파한 싸움이며,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장 치욕적으로 여긴 패전이었다.
  계사년에는 군은 물론이고 6만의 성민 모두가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이라며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물러서는 것을 택하지 아니하였다.
  불꽃같이 타오르는 거룩한 민족적 결의만을 태풍처럼 몰아간 현장, 곱고 연약한 한 
여인 논개까지도 왜적을 안고 남강 물속에 뛰어들어 순국의 길을 간 뜨거운 단심이 
흐르는 진주성이다. 그러기에 수많은 시인묵객이 진주성을 지나면서 거룩한 민족의 
사랑 앞에 많은 시문을 남겼다. 그중에서 변영로 선생의 시 '논개'가 생각난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임진왜란 7년 항전의 전력의 원천
  진주성 1차전투는 1592년(임진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을 나가오카가 
지휘하는 2만의 왜적과 김시민 장군이 지휘하는 3,800명의 조선군이 싸워 왜적을 
격멸한 혈전이었다. 부산진이나 동래성이 불과 몇 시간의 전투 끝에 함몰되고 
말았으며 조선의 모든 성이 하루 이상 버티지 못한 상황에서 진주성은 5배가 넘는 
왜적을 6일간이나 버티며 무찔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부 경남과 호남으로 진출하는 적을 진주성에서 차단하여 호남을 지키게 
됨으로써 호남이 전선군의 모병처와 군량미와 병기의 보급창이 되어 조선이 임진왜란 
7년을 항전하는 전력의 원천을 확보하게 하였다. 김시민 장군은 전상을 입어 결국 
전사하였으며 이순신 장군보다 앞서서 충무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진주성 2차전투는 1593년(계사년)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9일간 벌어진 전투였다. 
일본의 도요토미는 진주성 패전을 가장 치욕적으로 생각하여 조선에 출병한 최강의 
부대를 전부 투입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가토, 고니시, 우키타 등이 지휘하는 
3만 7천의 병력과 조선군은 김천일, 최경희, 황진, 장윤, 고종후, 이종인 등이 지휘하는 
3천 4백의 병력이 6만의 진주성민과 함께 싸워 전원이 순국하였다.
  조선군은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양단간의 결의로 혈전을 감행하여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았다. 2차전에는 많은 호남군이 참전하였는데 진주성이 함몰되면 호남을 
지킬 수 없었기에 끝까지 항전했던 것이다. 진주성이 떨어지자 이어 남원성과 전주성이 
연이어 떨어졌다.
  진주성 2차전투에서 관기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촉석루 벼랑 앞 남강에 떨어져 
구국의 한떨기 민족의 꽃으로 산화하였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미천한 신분이었으므로 
정사의 기록에는 없으나 당시 진주성민들의 입으로 전해져 1620년경부터 기록으로 
나타난다.
  유몽인이 '어우야담'에 수록하고, 진주성민들은 논개가 순국한 강 속의 바위를 
의암이라 이름하여 새기고, 논개의 충절을 마땅히 표창하여야 한다고 청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1721년 조정에 논개의 봉작과 사당 건립을 건의하였다. 
이에 비변사에서 그 근거자료를 요창하자 최진한 병사는 진주성민들과 합동으로 
의암사적비를 세우고 그 인본을 조정에 제출하여 조정으로부터 논개의 순국사실을 
공인 받게 되었다.
  그러나 논개의 사당은 1739년(영조 16)에 와서야 경상우병사 남덕하에 의하여 
촉석루 옆에 의기사가 건립되었다. 1868년 진주목사는 3백여 명의 여기(계집 여, 기생 
기)를 모아 춤과 노래로써 해마다 6월에 3일간 의암별제를 올리게 하였다. 논개는 성이 
주씨이며 장수 출신이었다.
  진주성은 백제 때 거열성이며 고려 공민왕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수축한 일이 있다. 
이 성은 남쪽은 남강의 절벽으로 막히고 북쪽은 해자 같은 못이 에워싸고 있어 천험의 
요새이다. 성곽은 내성 600m가 남아 있고 외성 4km는 없어졌다. 1607년에 포루 
12개를 새로 설치하였다.
  진주성 내에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선열의 신위를 봉안한 창렬사가 있고 고려 때 
건립된 후 6.25때 소실되어 복원한 촉석루와 촉석장충단비, 김시민전공비,
쌍충사적비 등과 포정사, 북장대, 서장대의 옛 건물이 남아 있다. 1987년에 성내에
진주박물관이 설립되었으며 진주성 한가운데 임진계사순의단이 조성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 그날의 선열을 추모하고 있다. 

   장보고와 완도 청해진

  우리 나라의 국력이 세계로 쭉쭉 뻗어 나가려면 해양국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 
역사상 해양국가의 실현을 보여 주었던 사람은 장보고이다. 장보고가 이끄는 신라 
해군은 9세기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면서 해상무역과 상권을 장악하고 해적을 소탕하는 
등 무적의 함대로 중국해로와 일본해로의 모든 제해권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그 장보고의 해상기지가 사적 제308호로 지정되어 있는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에 있는 장도(면적 37,794평)이다. 장보고와 정년에 대한 것은 당시 당나라 시인 
두목(803-852년)의 문집속에 전기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은 신라로부터 당의 서주에 와서 군중소장이 되었다. 
장보고는 30세이며 정년은 그보다 10세 연하이다. 두 사람은 싸움을 잘하여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면 그들의 본국에서는 물론 서주에서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 또 정년은 
잠수를 잘하여 물 속에서 50리를 가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용맹과 
건장함을 견주었으나 장보고는 다소 정년에 미치지 못하였다. 장보고는 나이가 위라는 
이유로, 또 정년은 무예에 능하다는 이유로 서로 상대방의 아래에 있기를 꺼렸다.
  뒤에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가서 국왕(흥덕왕)을 배알하고 '중국 도처에는 신라인이 
잡혀와서 노비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 청해에 진을 설치한다면 해적들이 사람을 
잡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자 국왕은 그에게 1만군을 주어 그의 청대로 
하였다. 이후 태화(827-835년) 연간부터는 신라인을 잡아가는 해적들이 없어졌다.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로 있을 무렵 정년은 실적하여 신라로 돌아와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때 신라 조정에는 왕위 쟁탈전이 벌어져 패사한 김균정의 아들 우징이 청해진에 
내려와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자 장보고는 그를 도와 5천의 군사를 정년에게 주어 
환난을 평정케 하였다. 정년은 신라 대경으로 쳐들어가서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 우징이 바로 신라 제45대 신무왕이다. 이 전공으로 장보고는 
재상이 되고 정년은 청해진의 대사가 되었다."
  두목의 이 전기는 중국의 정사인 '신당서'에 인용되고 또 우리 나라 '삼국사기'에 
수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장보고와 정년은 신라인으로 중국인도 대적할 수 없는 
뛰어난 무예와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일본의 승려 원인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신라인의 중국 활동과 장보고의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인은 838년 7월부터 847년 초겨울까지 거의 9년 반 
동안 당나라에 머물면서 그때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이 여행기록은 중요한 
역사적 문헌이 된다.
  원인의 여행기록에 보면 중국 양주, 초주, 연수 등 양자강과 회수 하류 연안 및 
대운하 변을 따라 신라인 촌락이 많고 산동성, 문등현, 청녕향, 적산촌은 신라방의 
중심지였다. 이중 적산은 신라와 일본이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거나 중국 연해안으로 
들어가는 중심 항구였다.

     적산법화원은 신라인이 결집하던 중심지
  820년대에 장보고가 이곳 적산에 건립한 적산법화원은 연간 500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장전을 소유한 사원이었다. 법화원은 장보고 휘하의 장영과 임대사 및 황훈 
등에 의하여 경영되었다. 상주하는 승려가 24명, 비구니가 2명, 노파 3명이 있었다. 
그리고 법당, 승방, 객사, 식당, 창고 등의 건물이 있었다.
  원인의 기록에 의하면 이 법화원에서 839년 11월 16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 
법화경 강회가 열렸다. 그때 신라풍속과 신라말로 법회가 진행되고 마지막 단계에는 
200-250명의 사람이 참례하였다고 한다. 이는 적산법화원이 신라인이 결집하는 
중심지이며 정신적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보고는 중국에 있는 
신라인 사회를 법화원을 통하여 통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원인의 기록을 보면, 장보고는 824년 일본 북큐슈 박다진에도 다녀왔고 북큐슈 
태재부의 재수와도 친분 관계가 있었다. 당시 일본은 신라인의 도움과 신라배를 
이용해 중국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보면 당시 신라인에게는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기술이 있었던 것 같다.
  중국과 일본의 해상교통로에 와도 청해진이 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인가? 이는 
당시 항로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신라 남해 연안을 통과하지 않고는 중국에 갈 수 
없었다. 당시는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육지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로 항해하지 않았다.
  일본배는 북큐슈를 떠나 이끼섬을 지나 대마도에 이르고 대마도에서 부산이나 거제 
남쪽 섬이 보이므로 이 해로로 와서 신라의 남해 연안을 지나 완도 청해진 앞을 
통과하여 서해 연안을 타고 북으로 올라가서 중국 연안으로 항해했던 것이다. 당시는 
육지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배가 가지 않았으므로 필리핀 군도는 일본보다 중국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중국문화가 유입되지 못했다.
  중국과 일본의 교역선은 14세기까지도 한국 연안을 통하여 항해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1976년부터 9년간 신안군 지도면 앞바다에 침몰된 교역선의 신안 해저유물 발굴 
인양작업이 실시되었다. 이 교역선은 약 450여 톤에 이르는 거대한 목선으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도자기, 약재, 향료, 은괴 등을 가득 싣고 가던 배였다.
  가장 많은 화물은 도자기였는데 월주요, 용천요, 경덕진요 등의 청자와 백자이고 
후추 등 향료와 24톤에 이르는 중국 동전과 은괴 등이 실려 있었다. 물표인 목관이 
발견되었는데 '지지 3년 6월 1일'이라 씌어 있었다. 3년은 1323년이 되므로 이 배는 
1323년이거나 1324년 어느날에 침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해진의 유적지인 장군섬은 바닷물이 빠지면 완도 본섬과 이어지고 물이 들어오면 
170m 거리로 섬이 된다. 1991년부터 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이 청해진 장도를 발굴조사한 
결과 자갈과 진흙으로 다져 쌓은 성새와 건물터가 드러났고 통일신라의 기와쪽, 토기, 
화살촉 등과 해무리굽이 있는 청자편들이 발견되었다. 이 청자편은 고려청자가 아니라 
신라청자임이 전문가들에 의하여 밝혀졌다. 청해진 주위에서는 중국 자기 기술을 
습득한 신라청자 생산기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군섬 주위 갯벌 속에는 목책을 세웠던 기둥 크기의 목책 밑둥이 지금도 줄을 지어 
박혀 있다.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신라 문성왕의 왕비로 천거하였는데 중앙 귀족들의 반대로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자 846년 봄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장보고는 
염장이란 자객에게 암살당하고 851년에 청해진은 폐진되었다. 당시 청해진에 살던 
주민은 모두 벽골군으로 옮겨져 완도는 무인도가 되었던 것이다.
  청해진에 서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파도소리 속에 우람한 북소리가 들리고 
바다를 가르며 달리는 청해진 장보고 함대의 기폭이 나부낀다. 해양국가를 건설했던 
장군의 포부를 오늘 다시 만나고 싶다. 그 강인한 기상 속에 소리치며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삼별초 최후의 결전지 항바두리성

  제주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20분간 차를 타고 달리면 북제주군 애월면 고성리에 
이른다. 여기에 고려 항몽투쟁의 최후 결전지였던 항바두리성(제주도 기념물 제28호)이 
있다.
  1271년 삼별초 최후부대인 김통정의 군대가 쌓은 토성으로 외성과 내성을 갖춘 큰 
규모의 성이다. 성 전체의 길이가 6km쯤 되는데 내성의 주위가 약 4km쯤 된다. 현재 
2km 정도의 성체가 완연히 남아 있고 그 중에 1km의 성체는 잘 복원되어 가꿔져 
있다.
  항바두리성 내에는 대대적인 군영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건물터를 간이발굴한 결과 
주춧돌과 기와쪽, 청자쪽, 토기쪽들이 많이 출토되어 고려시대 유적임을 입증하여 주고 
있다. 이 항바두리성을 중요사적지 정비사업으로 1976년에 대대적으로 보존 
정비하였다. 그래서 역사적 기록화를 전시한 전시관과 항몽투쟁의 사적비도 서 있으며 
조경사업도 추진하여 주위환경도 아름답다.
  항바두리성은 강인한 고려무인의 기개를 엿볼 수 있으며 당시 세계를 정복한 
몽고제국과 39년이란 긴 세월을 싸운 항몽정신을 되새겨볼 수 있는 곳이다. 
무인에게는 의기가 있어야 하고 이 의기를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항바두리성 우거진 솔숲을 거닐어 보면 적에게 영합할 수 없었던 삼별초의 
고뇌 어린 역사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1273년 2월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 의하여 항바두리성이 함몰되었는데 이때 참으로 
처절한 격전이 있었다. 삼별초 최후의 지휘관인 김통정은 패전하자 스스로 자결을 
함으로써 몽고군 앞에 끝내 머리를 숙이지 아니하였다.
  고려 삼별초의 난은 하나의 반란으로만 볼 수 없는 역사성이 있다. 몽고의 고려 
침략은 1232년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고종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39년간 줄기차게 
항전하였다. 당시 강화도를 지키던 주력군은 삼별초였다.

     삼별초는 강화 수비의 주력군
  삼별초란 좌별초, 우별초와 신의군의 3개 별초군을 총칭하는 말이다.
  삼별초군은 무술에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조직한 특수부대였다. 본래는 전시에 
대응하는 임시적 군대조직이었으나 고종 때 최우가 자기의 권력을 확보 유지하기 위해 
별동대를 조직한 것이다.
  처음에는 야별초만 조직되었는데 당시 도둑이 성행하여 수도와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야별초가 확대 개편되어 좌별초, 우별초의 두 부대로 편성되어 
몽고군과 싸우다가 몽고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사람 중에 용감하게 탈출해 온 장정들을 
모아 신의군이란 또 하나의 별초군을 만들었던 것이다.
  신의군은 몽고군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히 강하였다. 고려 정부가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 고려의 정규군은 2군 6위의 조직이 있었으나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강화도의 
주력군은 삼별초였다. 1258년 강화도에서 최씨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삼별초의 무력은 
정변이 있을 때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최의를 죽임으로써 최씨정권을 타도한 
김준과, 김준을 살해하여 마지막 집정무인이 된 임연이 모두 삼별초의 협력을 얻어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삼별초는 사병적 성격도 있었지만 국가의 녹봉을 받는 군대로서 사사로운 
군사집단과는 다른 것이었다.
  1259년 고려 왕조는 태자 전(후에 원종)을 왕을 대신하여 몽고에 입조케 함으로써 
고려와 몽고의 적대관계를 완화시켜 화평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조정 
내부는 대단히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몽고는 고려 정부에 항전을 포기하고 수도를 강화에서 개성으로 옮기라고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자 몽고와 싸운 군대세력은 개성환도를 반대하였다.
  고려 왕실은 적국인 몽고에 접근하여 무인들의 세력을 제거하고 황정복구에 
노력하였다. 몽고는 배후에서 왕실을 조종하여 항몽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획책하고 
있었다. 1270년 정변이 일어나 무인세력을 대표하는 임유무가 살해되면서 무인정권은 
완전히 타도되고 말았다.
  이 무렵 원종은 몽고에서 돌아와 있었는데 몽고의 지시에 따라 수도를 개성으로 
옮기고 말았다. 삼별초는 몽고의 대병력이 포위하고 있는 개성으로 간다는 것은 
항복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결사반대하였다. 왕은 이에 삼별초의 해산명령을 
내리고 삼별초군의 명부를 압수하였다. 삼별초군의 입장에서 보면 만일 이 명부가 
몽고군에게 넘어갈 경우 삼별초군은 죽음을 당하게 되는 위험이 있었다.
  이에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 지휘관 노영희를 우두머리로 삼아 1270년 6월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원종을 폐위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반란 3일 만에 삼별초는 1천 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강화도에 있는 재물과 고관의 
가족과 곤대를 싣고 진도 용장성으로 옮겼다. 이는 해전에 약한 몽고군에 대비한 
방책이었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전라도 일대를 제압하였으며 해안 도서지방에 세력을 확장해 
갔다. 심지어 전라도 토적사 신사전과 전주부사 이빈이 삼별초의 위세에 겁을 먹고 
개성으로 도망을 치기도 했다. 전주, 나주 등 내륙 도시도 삼별초의 포위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고려 정부군만으로는 삼별초군을 제압하기가 힘들었다. 고려 조정은 추밀부사 
김방경을 전라도 초토사로 임명하여 삼별초의 토벌을 명하였다. 이때 몽고군의 
사령관인 아해도 합세하여 고려, 몽고연합군이 삼별초 토벌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삼별초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남해, 거제, 함포(마산), 감해 등지가 
삼별초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11월에 제주도가 삼별초의 수중에 들어가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고려, 몽고연합군은 진도 용장성을 수차 공격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1271년 5월에 
몽고군 지휘관으로 홍다구가 부임하면서 김방경의 고려군과 합세하여 진도 용장성 
총공격전을 감행하여 성공하였다. 이때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삼별초 주장 
배중손은 전사하였다. 진도 용장성 함락 당시 남녀 포로가 1만 명에 이르렀다.
  살아남은 삼별초의 여당들은 김통정을 수령으로 받들고 멀리 제주도로 옮겨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때 제주도 항바두리성이 삼별초 근거지로 축성된 것이다. 삼별초는 
제주도를 근거지로 1272년부터 다시 활동을 전개하여 전라도, 경사도 해안지대에 
피해를 입혔다. 몽고의 세조는 장차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로 탐라를 지목하고 있던 
터라 같은 해 8월 사신을 고려에 보내 탐라 공략에 대한 방책을 촉구하였다.
  몽고군의 홍다구는 김통정에게 선무공작을 했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1273년 2월 고려군 6천과 몽고군 2천, 한군 2천, 도합 1만군이 160척의 
병선을 타고 탐라 항바두리성 공략에 나섰다. 이리하여 항바두리성에서 최후결전이 
전개되었다.
  시일이 갈수록 삼별초군은 무너져 갔다. 결국 김통정 이하 삼별초의 지휘관들은 
같은 해 4월 한라산 산속으로 피신하여 모두 자결하고 말았다. 이때 항바두리성에서 
포로가 된 사람은 1,300여 명이었다 한다. 결국 고려왕조는 몽고에 예속되어 나라의 
종속적 수치를 감수하게 되었다.
  삼별초의 난은 3년 만에 진압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삼별초의 정신적 전력이 얼마나 
강했던 것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당시 농민들은 몽고군에 대한 적대감이 대단하여 
삼별초의 난에 동조하였다. 제주 항바두리성은 고려 무인의 강인한 자주정신이 깃들여 
있는 곳이다.

   제6부 멋과 정취가 살아 있는 생활문화유적

   강릉 오죽헌

  강릉은 태백산맥 동쪽 동해 문화권의 중심지역으로 전통문화의 정취가 깃들여 있고,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1536-1584)이 태어난 곳이다.
  '삼국유사' 마한조에 보면 "명주(강릉)는 옛 예국인데 야인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을 얻어 바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강릉이 부족국가였던 예맥의 고도임을 
말하는 것으로, 강릉의 토성지가 그 치소로 보이기도 한다.
  강릉은 신라 때 화랑이 국토를 순례하던 경승지이기도 했다. 관동팔경 중에 제일 
명승인 경포대와 경포호가 있고 한송정의 솔숲은 유명한 것이었다. '파한집'에 의하면 
신라의 사선인 영랑, 술랑, 남석, 안상 등 무리 3천이 와서 소나무 한 주씩을 심어 
한송정 솔숲을 조성하였다 한다. 이 솔숲은 해안선을 따라 길이가 약 4km, 폭이 약 
1km로 전국 최대규모의 송림이었던 것이다.
  지금 강릉에는 우리 문화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유산들이 잘 남아 있다. 
강릉 객사문(국보 제51호)은 고려시대 관아 건물로 유일한 것이며, 선교장이나 
해운정은 모두 우리 나라 민가 중의 대표적인 살림집으로 규모 있고 운치 있는 조원을 
볼 수 있게 한다. 강릉 단오제(중요 무형문화재 제13호)는 전국의 단오제 중 가장 
대표적인 민속제이다. 설악산이나 동해안을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꼭 한 번 보고 가야 
할 유적이 강릉 오죽헌(보물 제165호)이다.
  오죽헌은 강릉시 죽헌동에 있다. 이 집은 원래 단종 때 병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집으로 우리 나라 민가 중에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자형 건물인데 4칸 크기의 대청과 1칸 반 크기의 방, 반 칸 폭의 툇마루가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인데 기둥 위에 첨차와 소로가 있는 이익공집이다. 이 오죽헌의 
방은 몽룡실이라 하며, 이곳에서 1536년 율곡이 태어났다.
  율곡의 아버지는 이원수이며, 어머니는 신사임당이다. 율곡이 출생하던 날 밤 
신사임당의 꿈에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서 서리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율곡의 아명을 견룡이라 짓고 그 방을 몽룡실이라 한 것이다.
  당시 이 오죽헌은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의 집이 아니고 신사임당의 친정 아버지인 
신명화의 집이었다. 신사임당의 어머니는 용인이씨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오죽헌은 
아들이 없어서 대대로 사위에게 집을 물려준 특이한 내력이 있다.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인 이사온은 아들이 없어서 딸을 남자처럼 학문을 가르치고, 출가 후에도 
친정에서 살도록 했기 때문에 사임당은 외가에서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부덕과 
학문을 배웠다.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도 아들이 없어 딸인 사임당을 아들 삼아 학문을 가르쳤다. 
사임당은 19세에 결혼했으나 결혼 후에도 어머니와 같이 시가에 가지 않고 친정에서 
살다가 셋째 아들인 율곡을 오죽헌에서 낳았다.

     남성과 대등한 입장에 섰던 신사임당
  사임당은 조선시대 유교적 여성상의 한계를 뛰어넘은 여성이다. 자기 자신의 독립된 
개성과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 예술가로서 시, 서, 화에 
능통하였다. 섬세하고 사실적인 그림으로 풀벌레, 포도, 화조, 어죽, 매화, 난초, 산수 
등을 잘 그렸으며,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전한다.
  1868년 강릉부사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후세에 전하고자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썼다. 그 발문에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 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며,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뜻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했다. 또 명종 때 어숙권은 '패관잡기'에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고 하였다"한다.
  사임당이 이와 같이 재능을 발휘한 것은 당시 강릉이란 지역적 특성도 있었던 것 
같다. 즉 여자들이 학문과 예술을 배워 남성과 대등한 입장에 설 수 있는 지역적 
문화환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임당보다 뒷사람이기는 해도 조선의 여류 시인인 
허난설헌(1563-1589)도 강릉 여인이었다. 허난설헌의 고택이라 전하는 민가가 강릉시 
초당동에 남아 있다.
  신사임당의 남편은 아내의 그림을 사랑방의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그 재능을 
존중하고 이해했으며, 아내의 시국관에 따르기도 했다. 이런 일은 당시 남성 우위의 
사상에서 보면 좀 모자라는 남성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원수가 아내를 
존중할 만큼 신사임당의 재능과 성품이 특출했고, 이러한 남편의 크나큰 이해가 율곡 
같은 위대한 아들을 키워낸 것이다.

     오늘날에도 재조명되는 율곡의 개혁 논리
  율곡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서 13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리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요 한 시대를 이끌고 가는 경륜 있는 정치가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퇴계(1501-1570)와 율곡은 중국의 유학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의 
유학사상으로 발전시킨 대철학자이기도 하다.
  퇴계는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이기이면론으로 발전시켰다. 즉 주자는 하나의 물을 
이와 기의 두 성분으로 보았으나, 퇴계는 이는 보이지 않는 대신 이상의 선이며 순수 
이성으로 보고, 기는 감각과 감성에 접할 수 있는 것으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불완전한 것이므로 마음의 주관으로 분석하는 것이라 하였다.
  율곡은 퇴계의 이원론적 경향을 극복하여 기에는 반드시 이가 나타난다는 것을 
밝혔다. 즉 이는 나타나는 모든 것의 까닭이며 근원이지만 나타나는 것은 기이다. 
그러므로 이와 기는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것은 풀라톤의 이데아와 칸트의 선험적 대상론, 
헤겔의 관념론과도 상통하는 점이 있다.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제의 일에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하여 실공에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효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율곡은 의리와 실리를 불가분의 관계라고 보고 시대마다 행해야 할 일이 각기 
다르다고 하였다. 시대는 창업의 시대, 수성의 시대, 경장의 시대가 있으며 당시를 
경장의 시대로 보았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율곡의 개혁 논리가 주목된다. 그의 개혁 이론은 점진적인 것이며, 
개혁의 대상이 되는 계층은 목전에 손해가 나타나므로 적이 되지만, 개혁으로 인해 
이익을 보는 일반 민중은 얼마의 이익이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개혁을 하는 
주체는 고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은 점진적,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개혁 이론은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이 시대에 깊이 생각해 볼 만한 것이다. 
율곡은 수많은 상소문을 통해 정치, 경제, 문교, 국방 등에 관한 정책을 제시하였다.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일개인이나 일부 지도자로부터 정책이 나와서 하향식으로 
추진될 것이 아니라 언로를 개방하여 국민이 다 말할 수 있고, 위정자는 민중의 뜻에 
따라 정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공론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민의 정당한 
일반 의사가 곧 국시라 하였다.
  이를 보면 언론의 개방성과 여론의 존중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율곡의 이러한 
정치 이론은 시대가 달라진 오늘날에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죽헌은 1975년에 정화사업을 하여 새롭게 단장되어 있다. 율곡의 영정을 모신 
영당인 문성사가 있고, 율곡기념관 등이 신축되어 있다. 강릉 오죽헌에서 신사임당의 
행동양식을 사표로 하는 현대 여성의 활동양식을 생각하면서 이 시대 개혁과 율곡의 
정치철학을 다시금 음미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서울 민가의 명원 성락원

  성락원은 서울 성북구 성북2동 2의 22번지, 구준봉에서 뻗어 내린 산록의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사적으로 지정된 조원의 면적은 4,500여 평에 이른다. 성락원은 
철종(1849-1863)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서였다. 그후 이강공이 살기도 
하였다. 이 성락원의 조성연대는 1843년으로 보인다.
  지금 서울은 심각한 전통문화 상실의 시대를 달려가고 있다. 서울에는 조선왕조의 
왕궁과 도성의 유적만 남아 있을 뿐 민가나 우리 고유의 격조 높은 생활문화가 소멸된 
지 오래다. 어떤 민족이든 제모습을 상실하면 가치관의 혼란이 오고 문화의 구심점이 
흔들려서 외화주의에 표류하게 되며 자기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자아를 상실한 
삶처럼 무서운 병폐는 없다.
  '동국여지승람'이나 '동국여지비고'에 보면 서울에는 아름다운 민가와 품격 있는 
생활문화가 있었으나, 우리 문화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의식이 이를 모두 
소멸시키고 말았다. 거리에 일식집의 간판은 늘어도 우리의 음식을 제대로 만들어 
파는 집은 드물고, 온전한 전통민가 하나를 보전하기가 힘든 현실이다. 서울에 있던 
명원 몇 곳을 소개한다.
  안평대군이 꿈에 본 도원을 당대 산수화의 대가인 안견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한 
것이 저 유명한 '몽유도원도'이며, 이는 조선 최고의 그림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일본 천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그 꿈에 본 도원을 현실에 조영한 것이 
자하문 밖 인왕산 북쪽(현 종로구 부암동 329번지)의 무계정사였다. 지금 이 무계정사 
터에는 '무계동'이라는 각자가 암벽에 남아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무계동 밑 부암동 산16번지에 조선 상류사회의 대표적 사랑채였던 
대원군의 석파정이 있었는데, 지금의 상명여대 앞 삼거리에 있는 석파정은 원위치가 
아니라 손재형 씨가 옮겨간 것이고, 원위치는 여기서 약 1km 정도 떨어진 당시 
영의정 김홍근 별장이었다. 순조의 장인이던 김조순(1765-1831)의 집도 종로구 삼청동 
133번지에 아름다운 민가의 조원을 구비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옥호정도'란 
그림으로만 남아 있다. 이러한 명원들이 모두 소멸되어 버린 오늘날 성락원은 서울에 
남아 있는 마지막 별서원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용두가산의 줄기로 아늑하게 감싼 성락원 내원
  성북동은 원래 봄이면 복숭아꽃이 가득 피어 무릉도원 같은 명승지가 되었으므로 
한양의 사람들이 꽃구경을 가던 곳이다. 성락원은 진산을 등에 지고 청룡백호의 
산세가 양 옆으로 벌려 선 명당지에 자리하였다. 성락원 입구를 들어서면 두 줄기 
계류가 하나로 모이는 산문 같은 계곡이 있다. 여기에 '쌍류동천'이라는 각자가 새겨 
있다. 쌍류동천이란 두 줄기 계류가 하나로 모여 흐르는 선경이란 뜻이다. 그 옆에 
용두가산의 줄기가 성락원 앞을 막아서고 있다. 이는 용머리처럼 산줄기를 인공으로 
조성하여 성락원 내원을 아늑하게 감싸도록 한 것이다. 이 용두가산에는 200-300년 
된 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말채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다.
  성락원 내원에 들어서면 깊은 계류의 암벽 밑에 조성된 고요한 소를 만난다. 이 
소는 장축이 16m, 단축이 12m쯤 되는 넓이인데 물 깊이는 1.5m쯤 된다. 소의 주위는 
자연암벽과 암반으로 이루어졌는데, 물이 흘러내리는 북쪽 암벽에는 인공으로 수로를 
파고 3단의 폭포가 조성되어 있다. 제일 위의 폭포는 낙차가 15cm인데 물이 직경 
30cm, 깊이 15cm의 둥근 석구에 떨어진다. 중간 폭포는 낙차가 30cm로 위와 같이 
직경 30cm, 깊이 15cm의 둥근 석구에 물이 떨어진다. 제일 밑의 폭포는 낙차가 
150cm로 직경 80cm, 깊이 20cm의 석구에 물이 떨어졌다가 소 속으로 넘쳐 
흘러들어간다.
  폭포로 떨어지는 3단의 물줄기는 물의 생동감을 주어 이채로운 경치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물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반석에는 물에 접근할 수 있게 석계를 
팠는데 자연스럽다.
  이 석계가 있는 반석의 동쪽에 두 개의 원형 석구가 파여 있다. 위의 것은 직경 
20cm, 깊이 5cm이고 아래의 것은 직경 35cm, 깊이 10cm이다. 바위 틈에서 새어나오는 
석간수를 가느다란 수로를 파서 이 석구 속에 고이도록 하였다. 상하로 배치된 석구는 
흡사 암반에 구멍이 뚫린 옹달샘 같기도 하다. 때로는 둥근 거울처럼 수림의 그림자가 
잠기고 푸른 하늘과 흰구름이 담긴다. 차를 끓이는 석간수를 모으는 용기 같기도 하다.
  소의 서쪽 암벽에는 행서체로 쓴 '장빙가', '완당'이란 각자가 있다. 장빙가란 겨울에 
고드름이 매달린 집이란 뜻이고 완당이란 김정희가 썼다는 그의 호이다. 그 장빙가의 
각자가 있는 암벽 위에 또 다음과 같은 각자가 있다.
  이 글을 보면 '영벽지'라는 세 글자는 초서체이고 해성이란 호이며, 그 다음 
오언시는 해서체로 내려쓴 8행의 글씨이다. 시의 내용을 풀어보면 이렇다.

  온갖 샘물을 모아 괴게 하니
  푸른 난간머리에 소가 되었네
  내가 이 물을 얻은 후부터
  약간의 강호놀이를 하네.

  다음 계묘 5월은 1843년으로 추정되며 손문학이란 사람이 쓴 것이다. 이를 보면 이 
소의 명칭이 '영벽지'이다.
  이 영벽지 각자 위의 바위에 또 하나의 각자가 있는데, 전서체로 내려쓴 8행의 
시문이다.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샘물은 돌 위에 흐르며
  푸른 산이 몇 겹 싸인
  나는 이 여막을 사랑하노라.

     영벽지 속의 괴석은 선도를 상징
  영벽지 속에는 물 밑에 단을 조성하여 아름다운 괴석 하나를 섬처럼 받쳐 세우고 
있다. 이는 선도를 상징한 것으로, 아득한 피안의 세계를 연상케 한다. 영벽지 동쪽 
언덕 위에 변형된 고가 한 채가 있다. 이곳이 원래 농막의 본채였으며 이강공이 살던 
집이다. 영벽지에서 숲 속의 돌계단을 오르면 또 하나의 소가 있다. 이 못의 크기는 
장축 25m, 단축 19m로 자연형 못이다.
  못 동쪽에 근래에 지은 '송석정'이란 누가 있고 이 못 북쪽의 계류가에 '석송'이란 
각자가 있으며 바위를 뚫고 선 소나무 한 그루가 고사한 채 서 있다. 이 계류에도 
인공수로와 인공폭포를 섬세하게 조성했다. 이 수입 시설 북쪽 계곡에는 흘러내리는 
깊은 계류가 있는데, 여기에도 2단의 폭포를 만들었다. 이 못의 서쪽 산자락에 근래 
지은 한옥이 한 채 있고 그 옆 암반에 약수가 나오는 샘이 있다. 이 샘물을 고엽수라 
하여 철종, 고종, 순종에 이르기까지 왕궁에서 떠다 마셨다 한다.
  이 뒷못이 있는 지역이 성락원의 후원격이다. 후원 주위는 참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 수림이 울창하다. 나는 이 후원의 못을 송석지라고 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송석'이란 각자가 있기 때문이다. 송석지 위 산록에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모으는 두 개의 연못이 있다. 원래 하나가 있었는데 근래에 하나 더 팠다고 한다. 이 
못에도 잉어가 살고 연꽃이 심어져 있으며, 밑의 송석지와 영벽지로 보내는 물의 
집수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니 성락원은 세 개의 못이 산록의 구배를 따라 
상중하로 배치된 것이다.
  현재 성락원에 있는 석탑, 석인상 등 석물과 왜식 축대 등은 원래 없던 것이며 이는 
제거해야 할 것이다. 원내에 일부 건물과 큰 길이 나서 옛 정취가 변형되기는 했어도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의 민가 명원으로 손색이 없다. 성락원은 점점 삭막해져 가고 
있는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민가 조원으로 귀중한 것이다. 

   생활문화가 살아 있는 제주 성읍마을

  제주도 하면 이국적 풍치가 떠오른다. 대부분 비행기로 왕래하는 섬이 되어 
김포공항에서 제주공항까지 비행시간은 1시간 미만이 되므로, 요즘처럼 자동차 여행에 
시달리는 육로에 비하면 아주 편한 여행길이다.
  제주도의 관광자원은 자연관광자원과 문화관광자원으로 대별될 수 있다. 제주도의 
기후는 온난한 해양성 기후로 겨울이 되어도 기온이 영하 5도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귤밭이 많고 야자수, 용설란, 유도화, 유채꽃 등 아열대 식물이 
무성하다.
  한라산은 아열대 식물에서 한대식물에 이르기까지 1,700여 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국립공원이다. 다공질의 현무암으로 생성된 화산의 
분화구들과 기암절벽의 해안에 천지연, 천제연, 정방폭포 등이 있으며 만장굴, 협재굴 
등 용암동굴과 중문, 협재, 함덕 등 시원한 해수욕장들이 있어 육지에서 볼 수 없는 
별천지를 이룬다.
  이러한 제주도의 자연은 현대 문명의 번잡 속에서 지친 도시인들의 피로를 시원하게 
씻어주는 좋은 휴양지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관광자원만 있으면 지극히 향락적인 
관광지가 되기 쉽다. 여기에 제주의 역사와 민속은 중요한 문화광광자원이 된다.
  관광자원이란 문화적 유적과 유산이 없으면 지적 충족을 얻을 수가 없다. 
문화관광자원은 때로는 감동적이고 때로는 교육적인 것이 되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있게 된다. 제주도의 문화관광자원 보존과 계발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제주의 
자연관광자원이 특출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자연문화와 인문문화의 조화로운 
활용이 제주 관광의 최상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주도가 세계적 관광지가 될수록 문화관광자원은 더욱 중요한 것인데, 
오히려 소멸되는 추세이다. 이런 관점에서 제주 성읍은 제주도의 문화가 남아 있는 
최후의 보루와 같은, 살아 있는 민속촌이다. 옛 살림집 몇 채를 옮겨 놓고 인위적으로 
꾸며서 연출하는 민속마을은 죽은 민속촌이다.
  제주 성읍 민속마을(중요민속자료 제188호)은 제주시에서 동남쪽을 향해 자동차로 
약 40여분 거리의 준산간지대인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에 있다. 이곳은 옛 
행정관아지역으로, 우리 나라에서 옛 행정치소인 읍성마을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제주 성읍과 전남 승주 낙안마을 두 곳이 있다.
  읍성마을의 구성은 관아를 중심으로 이에 종사하는 병사나 지방관리와 주민들이 
사는 민가가 있고, 동헌 및 객사 등 관아 건물이 있으며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다. 읍성 
내의 민가는 모두 초가이다. 민가가 기와집인 것은 씨족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상류 
민가촌인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 마을에서 볼 수 있다.

     육지의 민가와는 다른 독특한 구조
  제주도는 태종 16년(1416) 안무사 오식의 건의 따라 한라산 북쪽을 제주목으로, 
한라산 남쪽의 서는 대정현, 동은 정의현으로 3분하여 통치했다. 당초 정의현의 
도읍지는 성산읍 고성이었다. 그러나 고성이 너무 치우쳐 7년 만에 성읍으로 옮겼다. 
성읍은 1423년(세종 5)에 정의현의 현청 소재지가 되어 조선말까지 500여 년간 치소가 
되었다. 마을 외곽에는 튼튼한 석성이 쌓여 있고 성문은 동, 서, 남에 있다. 성곽은 
원래 둘레가 2,986척, 성 높이가 13척이나 되었다.
  이 읍성 내에는 동헌이었던 일관헌, 향교건물인 명륜당과 대성전이 남아 있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보면 옛날에는 갯사, 향청, 무학청, 진무청, 작청, 현사, 사창, 
서별창, 군기고, 대동고, 평역고, 형옥, 남성루, 의두정, 한동루, 남대문, 서대문의 건물이 
있었다.
  읍성 내의 길은 북쪽 관아를 중심으로 남북과 동서로 큰길이 있다. 성읍 마을의 
민가는 지금 약 300여 호가 있는데 1826년(순조 26)에는 성 안에 큰 화재가 나서 80여 
동이 불탄 일이 있다고 전한다. 지금 민가는 대체로 18-19세기에 건립된 것이 많다.
  제주 민가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어 육지의 민가와 다르다. 대부분 일자 겹집으로 
안거리(안채), 밖거리(바깥채) 두 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민가의 배치형태는 이자 
형태와 모로 앉은 형태 두 가지가 있다. 마을 내에서 중요한 민가 5채는 따로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조일훈 가옥(중요민속자료 제68호)'은 객사 옆에 있는 옛 객주집으로 18세기말 
건물인데, 서쪽 돌담에 '참봉 이기선 휼궁비'가 서 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우측에 
바깥채(밖거리)가 있으며, 바깥채의 맞은편에 안채(안거리)가 있고 안채 앞의 마당 
좌우측에는 안채와 바깥채 사이에 가로놓인 모커리 창고가 있다.
  이 집의 배치는 모두 일자 건물 4동이 마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배치되어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3칸집으로 중앙에는 대청이 있고 
대청마루 좌측에 부엌(정지)과 작은방이, 우측에 안방과 고방이 각기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안방과 작은방에는 난방을 위해 불을 때는 부엌(굴묵)이 있다. 바깥채에는 
농기구와 마소에게 물을 먹이던 돌구유가 마당가에 남아 있다. 창고에는 마소가 끌어 
돌리게 하여 곡식을 찧는 큰 매인 말방애도 있다.
  이 집의 벽채는 다공질의 현무암으로 쌓아 흙을 발랐으며 기둥, 보, 도리, 서까래 등 
가구는 큰 목재를 쓰지 않고 가늘고 작은 목재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억새로 
이고, 바람에 날리지 않게 억새로 꼰 두꺼운 새끼줄을 그물처럼 떠서 덮었다. 제주 
민가는 모두 이와 같이 억새로 이은 초가이다. 논이 없어서 짚으로 지붕을 이는 
초가가 없었다. 변소는 안채 옆에 있는데, 제주도는 인분으로 돼지를 키우기 때문에 
변소 바닥은 돼지우리가 된다.
  '고평오 가옥(중요민속자료 제69호)'은 성 남문 옆에 있는 18세기에 건립된 집으로 
안채와 바깥채를 근년에 보수하였다. 안채는 3칸으로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대청마루 좌측에는 앞뒤에 안방과 고방이 있다. 대청마루와 안방 전면에 설치된 
툇마루의 상부에는 서가래와 연결시킨 풍채가 달려 있다.
  '풍채'란 비바람이 칠 때 내려서 비바람을 막고 햇볕이 날 때 올려 땡볕이 방에 드는 
것을 막아주는 가리개 시설이다. 안채 후원에는 오래된 동백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바깥채 뒤에는 텃밭이 있다. 대문간의 맞은쪽 길 건너에는 식수를 공급하던 
'남문통'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주민의 생업은 축산업이었음을 알 수 있어
  '이영숙 가옥(중요민속자료 제70호)'은 정의향교 옆에 있다. 주민들이 
'여관집'이라고도 하는데, 한때 여관으로 사용되었다. 안채는 3칸 집으로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그 우측에 안방과 고방이 있다. 부엌 앞에는 '물구덕'을 얹어두는 
'물팡'이 있다. 물구덕이란 식수를 등에 져서 길어 나르는 '허벅'이라는 물동이를 넣는 
바구니를 말한다. 물팡은 좌우로 벌려 세운 2개의 기둥돌 위에 넓적돌을 가로 얹은 
것이다. 헛간채는 통칸으로 멍석이나 남방애(통나무로 만들어진 제주도 특유의 절구) 
등을 두었던 곳이다.
  '한봉일 가옥(중요민속자료 제71호)'은 마을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조금 들어선 곳에 
북향한 집으로 대문 앞에는 거대한 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집 주위에는 울타리를 
따라 심은 팽나무, 동백나무 등이 서 있다. 대문간(이문간)을 들어서면 마당의 좌측에 
바깥채가 있고 우측에 안채가 있다. 안채는 중앙칸이 대청마루이고 좌측에 부엌과 
작은방이, 우측에 안방과 고방이 있다. 부엌 앞에는 물구덕을 얹어두는 물팡이 있다.
  '고상은 가옥(중요민속 자료 제72호)'의 안채는 옛 정의 고을의 대장간으로 
상용되었다고 전한다. 19세기말에 건립되어 그후 다소 개조되었다. 이 집은 고평오 
가옥과 인접해 있는데 대문 없이 건립되어 정낭의 정주석이 집 입구 양쪽에 서 있다. 
정낭이란 제주도 집의 입구에 긴 막대기 두세 개를 정주석이나 정주목에 걸쳐 주인의 
부재를 표시하는 대문 역할의 시설을 말한다.
  성읍이 오랜 마을임을 실증해 주는 것으로는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된 
느티나무와 팽나무인데, 이들 나무의 수령은 천 년에 이른다. 이들 나무는 고려 충렬왕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서낭당의 신목이라 한다. 성읍의 동, 서, 남 성문 앞에는 
'벅수머리' 또는 '무성목'이라 불리는 돌하루방 12기가 남아 있다. 한 성문에 4기씩 서 
있다.
  그리고 무속신앙처가 남아 있는데, 주민의 신수와 건강을 관장하는 '안할망당'과 
부인병이나 모유 등을 관장한다는 '광주부인당'이 있다. 마소의 질병과 양육을 
관장하는 '쉐당'이 있으며 유교식 부락제인 포제가 아직도 행해진다. 이 제사에 
'목동신지위'가 들어 있는데, 이는 주민의 생업이 축산업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제주 성읍마을은 제주를 여행하는 사람이면 꼭 들러서 옛 제주의 생활문화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성벽과 성의 남문루가 복원되어 있고 원위치를 돌하루방이 
지키고 서 있다. 

   자연과 선비의 절의가 조화된 소쇄원

  소쇄원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데, 양산보(1503-1557)가 은둔생활을 하던 
조선시대 선비의 별서원이다. 소쇄원이라 한 것은 이 원의 주인인 양산보의 호가 
소쇄옹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담양 지곡리에 은둔한 시기에 
조성된 것이다.
  이 원이 조성된 사상적 배경을 보면 주자가 무이구곡에 은둔하듯이 조선의 
유학자들이 부정한 현실을 버리고 맑고 순수한 자연 속에 은둔한 행동철학이 깔려 
있다. 원의 구성을 보면 북쪽 장지봉에서 흘러내리는 계류가 암반을 타고 오곡으로 
흐르다가 폭포로 떨어져 작은 담을 이루는 계곡의 좌우에 조성되어 있다. 계곡 좌우의 
임간에 광풍제월의 광풍각, 제월당, 그리고 초정, 화계, 연지, 석천 등이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물레방아와 석가산 등도 있었던 것이다.
  계류 위에는 외나무다리와 죽교가 설치되어 원의 외곽을 아담한 토석담이 감싸고 
있다. 담벽에는 '애양단', '오곡문', '소새처사량공지허'의 글씨가 석판과 목판에 새겨져 
있어 예스러운 운치를 한결 더한다.
  소쇄원의 화목은 대나무, 매화나무,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복숭아나무, 벽오동, 
버드나무, 목백일홍, 단풍, 사계화치자, 국화, 연꽃, 파초 등이다. 소나무와 느티나무, 
목백일홍 등은 수백 년 수령의 것들이다.
  연못은 두 곳에 있는데 하나는 2.5m의 정방형이고, 하나는 세로 5.5m, 가로 4m의 
장방형이다. 이들 연못에는 물을 나무 홈대를 연결하여 넣고 있다.

     소쇄원 담벽에 깃든 선비의 운치
  소쇄원에는 양산보와 사돈간인 김인후가 1548년에 지은 오언절구의 48영시가 남아 
있는데, 이것을 통해 소쇄원의 당대의 아름다운 모습을 알 수 있다.
  또 고경명이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 임훈과 함께 광주 무등산을 
유락하면서 4월 23일 소쇄원에 들러서 보았던 원의 현상이 사실적으로 기록된 
'유서석록'이 남아 있다.
  소쇄원의 배치를 그림으로 그려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는 가로 35cm, 세로 
25cm이며 양각으로 새겨서 찍어내게 되어 있다. '소쇄원도'를 판각한 해는 1775년 4월 
하순이라 새겨져 있어 소쇄원의 원형을 상고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목판 위쪽에 김인후의 소쇄원 48제영이 새겨 있어 그림과 김인후 시와의 관계를 잘 
해석해 주고 있다.
  '소쇄원도'에는 건물명칭, 식물명칭, 연못, 계류, 물이 고인 조담이나 바위이름, 다리, 
물레방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소쇄원 담벽에는 원래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시가 편액으로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담벽에 시를 묵서로 써서 운치 있게 건 
것은 선비 조원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광풍각은 중앙칸에 온돌방을 배치한 전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이다. 이 정자에 
앉으면 오곡류의 물소리와 숲 속의 바람소리가 맑게 드리고 건너다 보이는 언덕에 
목백일홍과 노송이 우거져서 한적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소쇄원의 담은 경사진 면을 단을 지워 쌓았는데, 계류를 가로질러 쌓은 것이 
특이하다. 담 밑으로 계류의 수로를 두고 밑에서부터 자연석을 위태롭게 받쳐서 
수문처럼 담을 쌓았다. 이런 담도 자연에 동화시킨 한국 담의 특징이다.
  소쇄원에는 우리 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곧고 맑은 절의가 엿보이는 문아한 
아름다움이 있다. 
 
   윤고산 문학의 산실 보길도

  보길도는 전남 완도에서 해로로 32km 떨어진 남쪽 섬이다. 쾌속정이 왕래하고 있어 
1시간이면 간다.
  이곳은 우리 나라 국문학사에서 단가의 대표적 작가인 고산 윤선도 선생이 1637년에 
처음 들어갔다가 7차에 걸쳐 드나들면서 1671년 그가 죽을 때까지 13년간을 머문 
곳이다. 고산은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짓고 30여 편의 한시도 남겼다.
  고산이 보길도에 은둔하게 된 이유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여 국치를 당한 데 대한 대의명분으로 현세를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당시 추잡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초속적 자유를 
얻고자 한 은둔의 행동양식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보길도는 지기가 청숙하고, 격자봉을 중심으로 산들이 둘러서 있어 바닷 속의 
섬이면서도 부용동에 들어가면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속이다. 골짜기에는 
기암절벽이 절승을 이루는 물외의 가경이라 부용동이라 이름했다 한다. 보길도에는 약 
3km쯤 되는 개울이 흐르고 있고 난대림의 동백숲이 조성되어 있다.
  고산은 격자봉 밑에 낙서재라는 초가집을 짓고 그 집뒤의 바위를 소은병이라 하고, 
잠을 자던 집은 무민당이라 하였다. 이는 고산이 주자의 무이구곡을 이상향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이 낙서재 지역의 유적들이 모두 훼손되어 그 
터와 소은병 등 바위의 일부만 남아 있다. 낙서재 터에서 200m쯤 남쪽 계곡에 이르면 
곡수당터가 남아 있다.
  낙서재에서 정면으로 건너다 보이는 산봉우리 중턱에 동천석실이 있고, 부용동에 
들어오는 골 입구에 세연지와 세연정의 유적이 남아 있다.
  고산은 부용동의 아름다운 산줄기와 기암절벽에 상징적인 이름을 붙여서 자연의 
경승을 마음의 벗으로 삼았다. 승룡대, 오운대, 상춘대, 옥소대, 언선대, 하한대, 혁의대, 
조산, 미산, 석전 등이다.
  보길도 부용동이 유명해진 이유는 윤선도라는 당대의 안목 높은 문인이 만든 기발한 
착상의 조원유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조원유적으로는 세연정 
주위와 동천석실 지역의 두 곳이다.

     물에 씻은 듯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
  세연지와 세연정이 있는 공간은 약 3천여 평이 된다. 계류의 하류에다 길이 약 11m, 
너비 2.5m, 높이 1m쯤 되는 판석으로 보를 축조하여 600여 평의 자연스러운 계담을 
조성하였다. 보의 구조를 보면 큰 판석을 철봉형으로 짜고 그 속에 강회를 다져 
채워서 견고하게 개울을 막았다.
  이 판석으로 짜여진 보는 평상시에는 개울물을 막아 물길을 세연지의 인공방지 
속으로 돌리는 역할을 하면서 운치 있는 돌다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비가 많이 
와서 개울물이 불어나면 물이 보를 넘쳐 흘러가기 때문에 긴 폭포가 된다.
  세연지는 약 250여 평의 작은 연지로, 보를 막은 암반으로 구성된 계담가에 
조성되어 있다. 보란 원래 논에 물을 대기 위해 개울이나 강을 막아 설치했던 
취수시설인데, 이를 잘 이용한 조원을 만든 것이다.
  또 세연지와 계담 사이에 방형의 축단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세운 것이 
세연정이다. 세연정은 1992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보길도 윤고산의 유적에 대해서는 1748년 윤위가 쓴 '보길도지'가 남아 있어서 
당시의 상세한 현황을 알게 한다.
  '보길도지'에 의하면 세연정 남쪽에는 낙기난, 서쪽에는 동하각, 동쪽에는 호광루, 
북쪽 중앙에는 세연정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었다. 세연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세연정 계담 속에는 칠암이 배치되어 있고 세연정에 들어가는 돌다리인 비홍교가 
있다. 또 세연정 동쪽에 축단을 쌓은 동대와 서대가 있는데, 이 대는 채색옷을 입은 
여자들이 춤을 추던 곳이다. 세연지 남쪽 산 중턱에는 큰 암석이 있는데, 이것이 
옥소대이다. 고산은 이 계담 위에 배를 띄우고 옥소대에서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며, 
동자들로 하여금 '어부사시사'를 노래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세연정에서 1 km쯤 부용동 계곡으로 들어가면 낙서재 터 건너편 산자락에 
동천석실이 있다. 이곳은 45도의 급경사인 바위산 중턱에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대 
및 희황교의 유적이 남아 있다.
  석문 안에는 두어 칸 되는 반석이 있고, 고산이 다도를 즐기던 오목 파인 바위가 
있다. 이 옆에 한 칸 정자를 세웠던 건물 터가 남아 있다. 고산은 이곳을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했다.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건물을 세우고 바위 사이에서 솟아나는 석간수를 받아 작은 
연지를 만들었는데, 이를 석담이라 했다. 이곳에 오르면 부용동 전 지역이 한눈에 
전개된다.
  이 동천석실 지역에 대한 고산 당대의 기록을 살펴본다. '고산연보'에는

  마을 북쪽 산허리에 있는 암석이 절승이다.
  육중의 석문을 지나면 푸른 절벽과 층층대가 있는데,
  그 위에 작은 집을 짓고 동천석실이라 하였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동천이라 한 것은 산천에 두루 경치 좋은 곳이란 의미도 되고,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다. 또 동천은 하늘로 통한다는 의미도 있다. 고산이 
동천석실이라 이름한 것은 책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란 뜻으로 쓴 
것이다. '윤고산의 석실'이란 시를 보면 그가 동천석실에서 독서하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주레엔 소동파의 시요
  집에는 주문공의 글이다.
  어찌 육중문이 있으리요마는
  뜰에는 샘이요 대와 소가 갖춰 있네.

     다도의 흥취가 깃든 동천석실
  윤고산은 '적벽부'로 유명한 소동파의 시를 사랑하며 무이구곡에 은둔했던 주자의 
선비정신을 흠모하였다. 은거처를 황궁으로 상징하여 육중문을 말하였으나 실은 문이 
없는 것이며, 마당에는 샘이 있고 대와 소가 구비되어 아름답다는 뜻이다.
  윤고산의 '희황교'라는 시에 보면 소 속에 연꽃을 심어 연꽃 향기에 흥이 인다는 
구절이 있다. 또한 윤고산은 동천석실에서 다도에도 높은 흥취를 느꼈던 것이다. 
부용동 팔경에 들어 있는 '석실모연'이란 한시를 풀어 옮겨본다.

  바다에서 부는 만풍 향연을 끌어와서
  높고 험한 산에 들어 석실가에 흩어진다.
  옛 부뚜막엔 선약이 남아 있고
  움켜온 맑은 물은 차 사발에 끓고 있네.
  석실의 부엌에선 차 끓인 연기이니
  구름인 듯 안개인 듯 꽃가에 맴돈다.
  바람따라 날아가다 섬돌에 도로 남고
  달빛에 실려가다 냇물 위에 머무네.

  이렇듯 고산이 차를 끓였던 장소는 이 석실의 움푹 팬 석대 위에 있는 반석이라 
전한다.
  현재 동천석실 자리를 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하여 한 칸짜리 목조 기와집을 
1993년에 복원하여 놓았다.
  암벽 사이에서 솟아나는 석간수를 모아 만든 석담에는 하얀 수련꽃이 피어 있다.
  동천석실 앞에 U형으로 생긴 용두암의 바위가 있다. 윤고산이 동천석실에 거주할 
때는 바위에 도르레 같은 고정시설을 하고 음식물을 통 속에 넣어서 줄에 매달아 산 
밑에서 석실까지 운반하게 했던 것이다.
  동천석실 동쪽 산기슭에 깎은 듯이 서 있는 승룡대라는 절벽 바위가 있다. 이 절벽 
위의 바위는 뒷면이 평평하여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윤고산은 이 승룡대에 올라 
바위에 걸터앉아서 시가를 읊기도 했으며, 승룡대의 아슬한 암반 위에서 우화등선의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격자봉 밑의 낙서재 지역은 고산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며, 세연정 지역과 곡수당 
지역은 경관을 완상하며 거닐던 곳이다. 앞산의 동천석실은 고산이 신선처럼 자연에 
동화하고자 한 사색의 공간이었다. 

   청자의 고향 강진 도요지

  청자는 비취옥같이 아득히 깊고 푸르러 세 속의 손결로는 함부로 만지기 어려운 
고귀함이 엿보인다. 어쩌면 만물이 생장하여 일어섰다가 그 근원으로 돌아간 무의 
경지에 이른 고요함, 그 고요함의 세계가 청자 속에 가라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입신양명하는 기쁨보다는 이별의 슬픔 속에 잠긴 지순한 정감이 흐르는 그릇, 차라리 
고려가요 '가시리'가 생각난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라 마나난 선하면 아니올세라
  서른님 보내오노니 가시난 듯 도셔오쇼서.

  청자는 슬픔의 고려 문학과 정감을 같이하는 그릇인 것 같다. 이 고려청자 도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발견된 고려청자 도요지는 35개 지역, 400여개소가 있다. 
이중에서 3분의 1에 해당하는 160여 개소가 전남 강진군 대구면 일대에 있다. 강진 
도요지는 10세기 청자의 초기 도요지부터 14세기 청자 쇠퇴기까지 400여년간 이어진 
도요지들이다. 이렇게 오래도록 한 지역에서 청자들을 구워낸 유적은 없다. 
  고려 문화의 세계적 자랑은 금속활자를 위시한 팔만대장경 등 인쇄문화와 
고려청자인데, 청자의 최대 생산지가 강진인 것이다. 강진 도요지는 10세기초에 중국 
절강성 월주요의 청자 기술이 해로를 통해 들어온 후 중국 것과 다른 고려인의 독특한 
창의성이 가미된 청자를 생산한 것이다.
  고려 청자가 중국의 것을 능가했다는 것은 중국의 청자 기술이 절정에 이른 
1123년(인종 1) 북송 사신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이 자기 나라 황제인 철종에게 
보고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잘 나타나 있다. "고려자기의 제작이 정교하며 때깔이 
매우 아름답다"고 한 것이다. 또 북송의 '유중금'에서도 "고려 청자의 비색이 천하 
제일"이라고 하였다.
  이는 세계 최고의 도자기 국가이자 중국 도자기가 최고 절정에 다다랐던 북송시대에 
중국인이 고려청자를 칭찬한 것이었으므로, 그 신묘한 아름다움이 어떠했던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청자 가마는 경사진 비탈에 만들어져
  강진 도요지의 시대별 유적은 고려자기의 편년을 알 수 있게 한다.
  고려청자 전기(10세기-1100년) 유적으로는 대구면 용운리, 사당리, 삼흥리, 계율리 
요지들로서 해무리굽에 직선적 선을 가진 그릇들과 순청자, 음각청자, 양각청자, 
상형청자, 철화청자, 퇴화문청자의 그릇들이 생산되었다.
  청자 중기(1100-1250) 유적으로는 사당리, 계유리 도요지들이 있다. 청자 중기는 
고려청자가 고려인의 창조적 미의식에 따라 가장 이채롭게 발달한 시기이다.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 기법인 상감청자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상감청자의 아름다운 무늬들은 구름무늬, 학무늬, 당초무늬 등 다양하며 12세기초에 
완성되었다.
  또 고려의 진사청자는 중국보다 200년이나 앞서서 세계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졌다. 
철채청자, 퇴화청자, 백자, 흑자기 등도 생산되었다. 그리고 고려 왕궁의 건물을 
호사스럽게 덮었던 청자기와도 강진에서 생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물들이 모두 
발굴, 조사되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청자 후기(1250-1392) 유적은 사당리, 수동리, 계율리 도요지들인데, 이때가 되면 
그릇의 기벽이 두꺼워지고 그릇 색깔이 회청색, 암갈색, 암록색으로 변하며, 상감문은 
도식화된다. 조선초기까지 이러한 청자 제조가 계속되면서 분청사기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청자 가마는 경사진 비탈에 등요로 길게 만들었는데, 198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한 것을 보면 전체길이가 8.4m이며 가마 바닥 폭이 1.25m, 높이 1.05m이다.
  고급 상품에 속하는 청자는 그릇 하나를 도짐이 위에 놓고 그 위에 갑발을 씌워서 
파란 불꽃인 환원염에 구운 것이다. 환원염에 구운 그릇은 아름다운 비취색이 난다. 
그러나 후기가 되면서 불꽃이 바로 닿는 산화염에 구웠으므로 암갈색, 암록색의 다소 
하품의 청자가 생산되었다.
  강진의 도요지와 그 많은 파편들은 이러한 모든 청자 생산과 제작과정의 현장을 볼 
수 있게 하며, 고려 청자의 역사적 향훈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광주 상번천리 가마터와 백자

  고려는 흙으로 비취옥 같은 청자를 구워내고 조선은 흙으로 백옥 같은 백자를 
구워냈다. 고려 청자가 허무와 무상의 적막한 슬픔이 있는 내세적 그릇이라면 조선 
백자는 질박하고 범연한 여백이 있는 현세적인 정갈한 그릇이다.
  순백자 항아리를 바라보고 앉아 있으면 무명옷을 입고 웃으시던 내 어머니 얼굴같이 
순박하다. 어쩌면 대금의 음률도 들리는 듯하고 조선 선비의 담담한 절의를 보는 듯도 
하다. 수많은 갈등과 고뇌가 고여서 바랜 희디흰 둘레처럼 언제나 변함없는 항심이 
있다.
  도자기는 옛 것이라도 낡지 않고 세월이 가도 변함이 없으니 그 몸에 불멸할 
기록이나 그림을 새기면 부서지는 한은 있어도 지워지는 일은 없으므로 영원히 머물 
것이다.
  인류 문화 속에 동양 문화가 남긴 가장 위대한 것은 도자기 문화이다. 한국 문화의 
독창성 중에 청자에 상감하는 기법과 붉은 무늬를 넣은 진사의 기법은 고려인이 
12세기에 이룩한 도자기 문화의 고유한 창안이었다. 그리고 15-16세기에 생산된 
조선의 분청사기는 어느 나라 도자기에서도 볼 수 없는 순후한 질박미와 건실한 
생활문화의 꾸밈없는 인간성이 담겨 있다.
  고려청자가 고고하고 차가운 귀족적 그릇이라면 조선의 분청사기는 만민이 향유하는 
소박하고 따뜻한 서민적 그릇이다. 분청사기에는 우리의 민족성을 잘 표현한 독창성이 
있다.
  도자기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킨 세계적인 국가는 중국이다. 중국 서안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의 주대 유적에서 녹색 유약을 바른 그릇이 발견되고 있다. 
전국시대가 되면 청동 제기를 모방한 삼족기나 고배형의 두를 도기로 만들기 
시작한다.
  중국 육조시대에 절강성의 월주요나 항주 덕청요에서는 청색과 흑색의 자기들이 
대량 생산되어 3세기경에는 금속 용기에서 도자기 용기로 바뀌어 가는 변혁이 
일어났다. 중국의 4,5세기 도자기들이 신라나 백제의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서울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에서 중국 동진의 4세기 자기가 발굴되었고, 강원도 
원성군 법천리 고분에서 중국의 남경 동진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4세기 
중국 청자양형기가 발견되었다. 경주 황남동 대총에서도 5세기 중국 남조의 자기병이 
발굴되었다. 공주의 무령왕릉에서는 중국의 6세기 청자 항아리와 백자 등잔이 여러개 
발굴되었고, 경주 황룡사9층목탑의 가운데 주춧돌 밑에서는 당나라 백자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중국 당대에는 강서성의 길주요나 경덕진요에서 청색이 도는 백자를 생산했는데, 
월주요의 청자 찻잔은 세계적인 미술품이다. 중국의 청자가 절정에 이른 것은 
송대였다. 북송의 관요 생산품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들이었다. 중국은 
청도기부터 자기 그릇에 이르기까지 동물이나 식물의 무늬를 가득 새기는 것이 미술적 
특성이었으며, 송대에 와서 청자와 백자에 아무 무늬도 없는 소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중부고속도로 건설시 발견된 백자 도요지
  우리 나라가 청자나 백자를 사용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 
것을 수입해 왔던 것이며, 도자기를 직접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부터이다. 
강진과 부안의 청자 도요지는 고려청자의 대표적 생산지이다.
  토기라 하는 것은 섭씨 700도 정도의 온도에서 구운 그릇이며, 도기라 하는 것은 
섭씨 1,100도 정도에서 구운 옹기 같은 그릇이다. 자기는 섭씨 1,200-1,300도에서 구운 
그릇으로 태토가 유리질화한 것이며, 자기를 만들려면 태토인 고령토가 있어야 한다. 
유럽에서는 고령토를 발견하지 못해 도자기를 만들지 못했고, 네덜란드에서는 
1709년에 가서야 처음으로 진정한 도자기를 만들었으니 동양보다 천수백 년 
뒤떨어졌다. 일본도 고령토가 없어 도자기를 못 만들다가 1616년 임진왜란 때 잡혀간 
김강삼평(성씨는 이씨)이 일본 사가현에서 고령토를 발견하고 처음으로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는 이 고령토가 많이 매장되어 있어 세계적인 도자기 문화가 발달된 
것이다. 청자나 백자는 모두 초벌구이(약 800도)를 한 후 다시 유약을 발라서 
두벌구이(약 1,250-1,300도)를 하는데 청자의 태토 속에는 철분이 1-3퍼센트 정도 
들어 있고 백자의 태토는 자석 등을 이용하여 철분을 모두 제거한다. 태토 속에 
철분이 1-3퍼센트 정도 있으면 재물과 장석의 혼합물인 유약과 결합하여 푸른색이 
나는 청자가 되고, 철분이 3퍼센트 이상 되면 갈색이 나며 8퍼센트 정도 있으면 
적갈색이나 암갈색이 된다. 청자는 섭씨 1,230도 정도면 구워지지만 백자는 섭씨 
1,250도 정도 되어야 구워진다. 철분이 들어 있는 흙이 더 빨리 녹기 때문이다.
  백자는 고려 초부터 만들었으나 청자에 밀려서 고려시대에는 발달하지 못하고 
조선시대에 와서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1985년 서울과 대전 사이에 중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광주로 들어가는 진입도로 
예정지에 조선시대의 백자 도요지 세 곳이 발견되어 긴급 발굴을 하게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15세기초 한국의 도자기 생산지인 자기소 136개소, 도기소 
185개소가 기록되어 있다. 이중 광주에는 벌을천, 소산, 석굴리, 양현 등 4개소의 
자기소가 명기되어 있다.
  성현(1439-1504)이 쓴 '용재총화'에는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사기를 광주 사기라 
했으며, 사옹원 관리가 나가서 제작을 감독하여 왕궁에 납품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종조에는 왕이 백자만 썼다고 씌어 있다. 그러기에 순수한 백자는 조선 자기 중 
가장 격이 높은 그릇이었다. 광주 지방은 조선시대 관요(나라에서 운영하는 도자기 
생산소)가 밀집되어 있었는데, 이는 땔나무와 태토인 고령토의 생산이 용이했고 서울로 
운반할 해상교통인 남한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광주에는 자기소 139개소, 도기소 185개소가 있었으며, 현재 조사된 도요지는 
170여개소이다. 광주에는 사옹원의 분원이란 국가 관청이 있어 여기에 소속된 도공이 
386명이나 되었다. 이 분원이 폐요된 것은 1884년이다. 폐요된 이후부터 광주 지역 
도자기 생산이 중단되어 기술의 계승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도로 공사로 인해 불굴된 도요지는 상번천리(광주군 중부면 상번천리) 5호와 선동리 
2호, 3호의 도요지였다. 발굴은 이화여자대학교 발굴관이 담당하여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당시 최경숙(관장), 최건, 강경숙(강사), 나선화 김인호 씨 등이 조사자가 
되었다.
  발굴기간은 1985년 12월 3일부터 30일까지 1차 발굴을 하고 다음해인 1986년 4월 
1일부터 5월 3일까지 2차 발구를 하였다. 발굴 결과 상번천리 5호 가마는 거의 완벽한 
형태를 알 수 있게 유구가 잘 남아 있고, 작업장 등 한국의 조선백자 요지 발굴사상 
최대의 성과가 있었다. 선동리 두 곳은 가마의 유구가 파괴되어 전모를 알기가 
어려웠다.
  상번천리 5호 가마를 보면 사질점토인 경사면에 진흙으로 구축한 지상식 등요이다. 
경사는 10도로 완만한 편이며, 가마의 길이가 23m 정도, 폭이 1.7-2.2m로 최하단에는 
큰 봉통이 있었다. 가마의 벽은 높이 20-30cm 정도 남아 있어 규모를 알기가 쉬웠다. 
이 가마는 반원형의 돔 형식이었다. 가마 바닥에는 정연하게 도짐이가 깔려 있고 
갑발편도 출토되었다. 도짐이란 그릇을 구울 때 그릇 밑을 받치는 받침으로, 둥근 
떡처럼 내화토로 만들었다. 갑발은 그릇 위에 씌워서 구운 내화토로 만든 용기였다.
  그런데 이 가마는 대부분 갑발을 씌워서 굽지 않고 도짐이 위에 그릇을 놓고 
나적하여 구웠던 것이다. 이 가마 옆에서 작업장 두 곳이 발견되었는데, 온돌을 만들고 
작업기구를 설치한 자리가 있었다. 또 자연 암반을 깔아서 원형 구덩이 세 개를 
경사면에 서로 연결되게 만든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이 구덩이들은 유약의 원료인 
회를 수비하는 시설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가마의 화창, 벽돌, 불구멍마개 등과 작업에 
필요한 조각칼, 굽통도 발견되었다.
  이렇게 완전한 가마와 작업장, 작업기구들이 잘 보존되어 발굴된 조선 도요지는 
아직 없었던 것으로, 우리가 아름다운 도자기는 많이 보지만 그것이 어떤 제작과정과 
시설에서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는 것이기에 한국의 과학사를 
위해서도 이 도요지 발굴은 대단히 중요하다.

     여백의 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어쩌면 우리 문화사는 아름다운 도자기 미술품에 주안점을 두기보다 그러한 
예술품을 창조한 과학적인 기술사의 측면에서 더 연구되고 발전되어야 바람직한 것일 
게다. 여기서 사발, 잔, 접시, 단지, 동물형 제기, 항아리, 병 등 수천의 도자기편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중요한 몇 점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 34년(1554) 명이 있는 묘지편 세 쪽이 발견된 점이다. 
백자판에 음각으로 글씨를 새긴 것인데, 만일 이 묘지편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어느 
연대의 가마인지를 모르게 된다. 그리고 저 많은 수천의 도자기편에 대한 절대연대를 
알 길이 없어서 형태만 보고 추정하게 된다.
  사실 도자기의 편년을 하는 데 있어 만든 해가 기록된 것은 지극히 드물다. 간지를 
쓴 것은 있는데, 간지란 6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것이므로 정확하지 않다. 그러므로 
같이 출토된 수천의 도자기편들의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게 하는 데 있어 묘지편은 
지대한 공헌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명나라의 청화 백자편 두 개와 나뭇가지를 
그린 청화백자 접시편이 발견되었다.
  청화백자란 코발트의 광물로 백자 위에 그림을 그려 구우면 잉크빛 같은 푸른색이 
나는 자기를 말한다. 원래 코발트로 그릇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13세기 페르시아에서 
많이 행하던 기법이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9세기에 코발트로 무늬 넣는 방법이 
행해졌다. 중국의 경덕진요에서는 페르시아에서 코발트를 구입하여 14세기부터 
청화백자를 생산했다. 가장 오래된 중국의 청화백자는 영국 런던의 퍼시벌 데이비드 
파운데이션에 소장된 꽃병이다.
  우리 나라에는 1428년(세종 10) 명나라에서 세종에게 크고 작은 청화백자 접시 
10점을 보내왔다. 이를 보고 코발트를 수입하여 한국이 직접 청화백자를 생산한 것은 
1457년 세조 때이다. '경국대전'에 보면 사족은 술그릇 외에 금, 은, 청화백자의 사용을 
금한다고 했으니, 청화백자는 술그릇이나 문방구류가 많고, 서민이 사용할 수 없는 
그릇이었다.
  우리 나라는 명나라 그릇을 보고 상번천리 가마에서 청화백자를 생산했다. 중국의 
청화백자는 무늬가 그릇 가득히 그려져 있어 여백이 없는 반면 한국의 청화백자는 
그림을 그리되 흰 여백의 공간이 많다.
  상번천리 가마에서는 철회백자 동물형 제기도 발견되었는데, 철회란 산화철로 
그림을 그려서 구우면 갈색의 무늬가 나타나는 것이다.
  진사백자는 드물었다. 이것은 산화동으로 문양을 그려서 불에 구우면 붉은 색깔의 
무늬가 나타나는 것으로, 대단히 귀한 것이었다. 철회백자는 많아도 진사백자는 
드물다.
  자토(석간주)로 그림을 그려 구우면 검거나 암갈색의 무늬가 나타나고 그릇 몸을 
파고 백토를 채워 구우면 백색이 나타난다. 분청사기란 백토분을 발라서 구운 
그릇이다. 한국 도자기와 중국 도자기가 다른 점은, 중국 그릇은 완벽한 기술로 기계가 
만든 것같이 인공적인 것인 데 비해 한국 도자기는 그릇의 형태가 좀 기울기도 하고 
무심하게 만든 것 같은 자연주의적인 부드러움과 안전성이 있다. 중국 것이 
상품이라면 우리 것은 예술작품이다.
  우리 나라 백자는 청화, 진사, 철회, 상감백자 등이 있다. 중국의 명나라 때는 연유를 
써서 청록색, 검푸른색, 자주색의 삼채 그릇도 만들고 청대에는 연유로 화려한 원색을 
낸 오채 그릇도 만들었다. 연유는 납성이므로 섭씨 1,000도 이상이 되면 유약이 
타버리기 때문에 700도 정도에서 굽는다. 그래서 연유로 색을 낸 빨강, 노랑, 자주, 
파랑, 녹색 등 화려한 오채 그릇은 청자나 백자같이 견고한 자기가 아니며, 한국에서는 
오채 그릇을 만들지 않았다. 광주 상번천리 백자 가마는 가마터 위에 건물을 지어 
유적과 유물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다. 

   한국의 연못, 그 절묘한 상징의 세계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또한 인간의 심성을 기르는 어진 어머니이다. 물같이 
아름답고 고요하고 부드러운 것은 없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상선약수'라 하여 "가장 
선한 것은 물과 같다"하였다. 물은 메마른 사람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기도 하고 
혼탁한 번민을 정하게 씻어주기도 하며, 목마른 갈증을 시원하게 해갈시켜주기도 한다.
  이러한 물의 순리는 흐르고 고이고 넘치는 것이다. 연못은 이 물의 순리 속에서 
고이는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우리 나라 조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에 
동화하는 조화의 아름다움을 생명으로 했기 때문에, 물을 역리로 하늘에 쏘아 올리는 
분수를 만들지 않았다.
  옛 기록들을 살펴보면 연못에 대한 내용이 상당히 많다. 우선 '산림경제' 복거의 
방앗간조에 보면, 산림집에 있어서 왼쪽에 흐르는 개울과 오른쪽에 긴 길, 집 앞에 
연못과 집 뒤에 언덕이 있으면 가장 길한 집이라 하였다.
  '고문진보' 권1에 실려 있는 낙지론(중국 후한 때 중장통이 쓴 글)에 보면 "거처하는 
곳에 좋은 논밭과 넓은 집이 있고 산을 등지고 냇물이 곁에 흐르고 도량과 연못이 
있으며, 대나무와 수목이 둘려 있고 타작마당과 채소밭이 집 앞에 있고 과수원이 집 
뒤에 있는" 집이 즐거움을 누리는 가장 이상적인 집이다.
  그렇다면 풍수사상에서는 연못을 어떻게 보았을까?
  물은 산과 마찬가지로 음양 2원기의 발현체로 보고 산과 물이 합치면 생기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때로는 산을 양으로, 물을 음으로 보고 물이 동적인 것보다 
정적이기를 바란다. 물은 유동하는 본성이 있지만 본성대로 유동해서는 좋은 산과 
만나도 생기의 순화를 이룰 수 없으며, 때로는 산의 생기까지도 씻어가 버린다. 
그러므로 고이지 않고 흘러가는 물을 흉수라 하였다.
  물을 사신의 주작(남향집 앞의 물)으로 삼은 경우에는 결코 약동해서는 안 된다. 
물은 고이지 않으면 흘러가버려 성국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산은 물을 만나면 
멈추게 된다. 양수가 합하는 곳에 내맥이 멈추는데, 이 내맥이 내룡이다. 이렇게 물이 
모이는 곳에서 용기가 모인다. 풍수에 있어서 물은 질병을 막아주고 재화를 취득케 
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묘소 앞에 물이 합수되는 풍수의 이론을 보면 혈의 뒤쪽 현무에서 좌우로 
나뉘어 출발하는 양수가 있어, 그 모습이 흡사 팔자형을 이루는 물을 팔자수라 한다.
  이 물은 현무에서 주룡의 기맥을 전송하면서 흘러내려 그 기를 혈에다 모으기 위한 
것이므로, 양수는 반드시 묘 앞에서 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묘 앞에서 합수되지 
않고 흘러가버리면 그 혈은 가혈이 되고 생기를 순환하는 진혈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인공을 가하여 합수하는 연못을 만들기도 한다.

     한국의 연못에는 네모난 방지와 둥근 곡지가 있어
  '임원경제십육지'의 대소지당편에 보면 연못을 축조하여 얻는 점은 고기를 기르면서 
완상할 수 있고 논밭에 물을 대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사찰의 조원공간 속에서 연못을 보면 극락세계의 구품의 세계관을 상징하고 있다. 
경주 불국사 앞마당의 연못이 '불국사고금창기'에 극락세계의 구품연지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동궁의 원지인 안압지는 신선의 세계관인 봉래, 방장, 연주의 삼신도가 있는 
바다를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연못은 단순한 조원공간 속의 수경만을 창출하는 시설이 아니고 
풍수사상으로 보면 음양의 생기가 화합하는 곳이다. 불교에서는 극락정토의 구품의 
세계관이며, 유학자의 별서원에서는 인성을 수양하는 세심의 터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을 초월하여 불로장생하는 신선의 세계이기도 하였다.
  그러면 못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설문해자'에 보면 "둥근 것은 지이고 호안이 
굴곡진 것은 소이다"라고 하였다. 못의 큰 것을 호라 한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를 보면 
난지, 태액지 등과 곤명호, 오호 등 지와 호의 구별이 모호하다. 중국은 인공호에다 
해를 붙여서 중남해, 북해, 서해라 하기도 한다.
  한국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거의 모두 지인데, 당이라는 것도 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자를 합해서 연못을 지당이라 부르는 것이 많다.
  소는 자연적인 시내를 막아서 물이 깊이 고인 곳을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의 
인공 못 중에 호나 해를 붙인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의 연못은 중국에 비해 소형이며, 
인간적인 아늑함이 있다.
  한국의 연못에는 네모난 방지와 둥근 곡지가 있으며, 직선과 곡선을 배합한 경주 
안압지와 성곽의 외호가 되는 해자같은 것도 있다. 곡지에는 원지와 타원형, 반월형, 
연지가 있으며 해안선같이 절묘한 굴곡을 조성한 것도 있다.
  그런데 한국의 연못 중에는 부여의 백제 정림사 앞 연못을 비롯하여 조선에 
이르기까지 120여 개가 조사되었는데 그중 3분의 2가 방지 형태이다.
  중국의 연못은 너무 광대하여 인공 연못 같지가 않고 호수나 바다처럼 느껴지는데, 
타원형이거나 직선과 곡선을 이용한 해안 같다. 이는 중국 황제의 절대권력이 창출한 
광대성 때문이다. 일본의 연못은 방지가 거의 없고, 절묘한 굴곡으로 해안선같이 
표현된 곡지들이 대부분이다. 같은 동양에서 연못 하나를 보아도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문화적 전통과 민족적 개성이 나타나 있다.
  연못을 중심으로 정자나 누, 사, 당, 대 등 건물이 배치되기도 하고 괴석 등 
아름다운 경물이 배치되기도 한다. 연못 속에는 섬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 섬은 
한 개의 섬이 있는 경우와 두 개나 세 개의 섬이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먼저 연못을 만들고 궁원을 가꾼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에서 
"391년 백제 진사왕이 연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어 기이한 새와 화초를 길렀다"고 나와 
있다. 백제 무왕은 634년 궁남에 큰 못을 파고 못 가운데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선산을 
상징한 섬을 조성하였다. 이 방장도를 만든 것이 우리 나라 연못에 처음으로 선도를 
조성한 기록이 된다.
  이러한 기법은 통일신라에 와서 안압지에 삼신도가 조성되고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어 
남원 광한루 연못 속에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도가 조성되어 있다. 이렇게 연못 속에 
섬이 있는 곳에는 아름다운 다리가 설치되게 된다. 그러나 섬에 다리가 없는 경우도 
있다.
  원래 이 섬은 속세의 사람이 함부로 이르지 못하는 아득한 피안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바라볼 수만 있을 뿐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신선의 섬이었다. 그래서 백제 
무왕이 조성한 궁남지나 신라 문무왕이 조성한 동궁의 원지인 안압지의 섬에는 다리가 
없다. 원래 이 연못들은 바다를 상징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바다에 다리를 설치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상효과를 노린 연꽃 없는 연못
  못에는 대개 연꽃을 심어 연못이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연꽃을 심지 않은 못도 
많이 있다. 연못이라 하면 엄밀한 의미에서는 연꽃을 심은 연못만을 말해야 한다.
  연못 중에는 그림자를 이용한 영상효과를 얻고자 조성된 연못도 있고, 때로는 
뱃놀이를 하기 위해 조성된 연못도 있다. 또 영양 서석지 같이 물 속에 바위의 
요철현상을 완상하기 위하여 조성된 연못도 있다.
  연꽃이 가득 차면 연못이 답답해지고 넓어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의 효과와 
뱃놀이를 하는 기능을 가진 연못은 경주 안압지나 경복궁의 경회루 방지 같은 것이다. 
불국사의 구품연지도 불국사의 영상이 연못에 잠길 때 거울현상을 나타내어 두 배의 
높이로 보이는 효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연못 중 일부에는 연꽃을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압지 못 바닥은 수초나 연꽃이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강회를 다지고 자갈을 
깔았다. 수초나 연꽃이 없어야 약 4,700평의 연못이 바다같이 넓게 보이고 배를 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압지 못 가운데에는 나무로 우물틀처럼 방형틀을 묻어서 
그 속에서만 연꽃이 살 수 있게 한 특이한 시설이 만들어져 있었다.
  연못에는 어떤 화목이 심어졌던 것일까? '임원십육지'에 보면 지당에는 연꽃을 심고 
못가에는 참나무, 왕골, 쑥, 갈대를 심으면 좋고, 가산 위에는 소나무, 오죽, 신나무, 
두견화, 철쭉, 석죽, 버드나무 등을 심는다 하였다. 대개 연못 속의 섬에는 소나무, 
대나무, 목백일홍, 버드나무, 철쭉 등이 많이 심어져 있다. 그리고 동백나무가 잘 
자라는 남쪽 지방에는 그 지역의 기후와 토질에 잘 적응하는 나무도 배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보길도의 세연지가에는 동백나무, 소나무, 대나무가 아름답게 원림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연못에 가장 많이 심는 것은 연꽃이다. 왜 연꽃이 그리도 많이 심어졌을까? 
우선 연꽃은 물 속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그러면 우리 조상들이 연꽃을 좋아한 내력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불교에 있어서 연꽃은 극락정토의 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찰의 원지에서는 연꽃을 심었다. 그리고 작은 연못 격인 석조 속에도 수련 등 
연꽃을 심었다. 이 석조는 백제 것은 곡선으로 조성된 원형이며, 신라 것은 거의 
방형이나 장방형을 하고 있는 것이 서로 다른 점이다.
  유학의 선비들이 연꽃을 좋아한 이유는 중국 주돈이의 애련설이 크게 작용했다. 
주돈이는 애련설에서 "국화는 꽃 중의 은자이며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자이고, 
연꽃은 진흙 속에서 나왔으면서도 진흙에 물들지 않고 맑은 잔물결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은 것을 사랑한다. 줄기는 속이 비었고 겉은 곧으며, 덩굴로 자라거나 
가지를 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우뚝하고 깨끗하게 서 있어서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연꽃은 군자의 꽃이요, 진흙 속에서 피지만 더러움에 물둘지 않고 
아름답지만 요염하지 않으며 곧은 절개가 있고, 멀고 맑은 향기와 깨끗한 자태로 서 
있으나 못 속에 피어 있어 함부로 범할 수 없는 고고한 꽃이기 때문에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퇴계 선생은 도산서당 앞에 작은 연못을 파고 
이 맑고 고고한 연꽃을 심어 '정한 벗'이란 뜻으로 그 연못 이름을 정우당이라 하였다. 
창덕궁 비원의 애련지나 부용지, 경복궁 후원의 향원지가 모두 이러한 주돈이의 
애련설과 관계되는 연못 이름이다.

     방형으로 상징된 무위자연사상
  연꽃을 연못 속에 심어서 즐긴 역사는 이집트가 가장 먼저이다. 테베(Thebae)에서 
출토된 고대 이집트의 정원도에는 연못 속의 연꽃이 그려 있다. 그리고 이집트 
태양신의 흉상을 받치고 있는 것도 연꽃이다. 이집트에서는 연꽃이 생명의 탄생과 
부활을 상징한다. 불상의 연화좌도 고대의 연꽃을 좋아한 문화적 산물에서 연유된 
것이다.
  연못에 물을 넣는 기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어 폭포로 
떨어져 들어가게 만든 현목의 기법이 있고, 물이 조용히 자연스럽게 흘러넘어 
들어가게 한 자일의 기법이 있으며, 물이 지하로 잠겨 스며들게 하여 연못바닥에서 
솟아나게 한 잠류의 기법이 있다.
  한폭의 기법으로 물을 넣은 연못은 신라의 안압지, 창덕궁 비원의 애련지 등이며, 
자일의 기법으로 물을 넣은 연못은 백제 때 조성된 익산 미륵사 앞의 연못과 경복궁 
후원의 향원지 등이다. 잠류의 방법으로 물은 넣은 연못은 경주 불국사의 구품연지와 
경복궁의 경회루 방지 등이다. 특히 잠류의 방법으로 물을 넣은 연못의 수면이 
고요하게 물보라가 없고 영상효과가 뛰어나다. 이 두 연못은 불국사의 그림자와 
경복궁 경회루의 그림자가 연못 속에 잠기는 아름다움을 완상하던 연못이다.
  연못에 물을 끌어들이는 방법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수로를 만들어 물을 
흘러들게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나무 홈대를 만들어 연결하여 물을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나무 홈대를 이용하는 방법은 지표상에 수로를 낼 수 없는 지형일 때 
이용된다.
  연못의 축조방법에 있어서 왕궁의 연못과 사찰이나 민가, 서원, 별서의 연못은 
다르다. '삼국사기' 옥사조를 보면 신라 때부터 민가에서는 다듬은 돌을 쓰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경국대전'에도 민가에서는 다듬은 장대석을 쓸 수 없게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왕궁의 연못은 모두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여 연못 
호안을 축조하였다.
  이에 비해 사찰이나 서원, 민가 등의 연못은 모두 자연석을 써서 호안을 축조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왕궁의 연못은 강한 인공의 질감을 나타내게 되었고, 절이나 
서원이나 민가의 연못은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를 나타내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연못은 왜 방지를 많이 조성하게 되었을까? '여씨춘추'에 보면 
천원지방의 사상이 기록되어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는 사상이다. 그런데 
노자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라는 무위자연의 사상을 제시했다. 이를 보면 사람은 땅을 본받아 땅에 
의지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땅을 상징한 것이 방형이다.
  그래서 사람의 생활공간 속에 조성되는 구조물은 땅을 상징한 방형이 가장 많다. 
건물에 있어서도 둥근 기둥과 네모난 기둥의 집이 있는데, 사람이 생활하는 살림집 
기둥은 모두가 네모난 방형 기둥을 쓴다. 둥근 기둥의 집은 절의 금당이나 왕궁의 
정전 등 공식적인 건물에만 쓴다. 둥근 기둥은 하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궁에 
있어서도 왕이나 왕비 등 왕족이 생활하는 침전의 건물은 모두 방형 기둥을 쓰고 
있다.

     사색의 깊이가 있는 연못
  이러한 땅을 상징하는 방형과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을 연못에 반영한 것도 있다. 
창덕궁 비원 속의 부용지는 방형의 연못 속에 원형의 섬을 조성하여 천원지방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사람의 발은 땅을 
디디고 머리는 하늘의 덕에 부합되게 사는 것이 이상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연못은 방형이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동 병산서원에는 타원형의 소형 연못이 있고, 창덕궁 비원 내에는 
반월형과 원형 연못도 있었다. 이러한 연못들은 앉아서 완상하는 건물이 가까이에 
있었다. 우리 나라 조원은 정자나 누 등 앉아서 바라보는 기능 때문에 정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 바라보는 기능의 가장 대표적인 대상이 바로 연못이다.
  서양의 조원은 보도를 설치하여 거니는 기능이 강하며 동적이다. 서양 조원은 
사람의 휴식과 미적 감상, 동적 운동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조원은 
그 조원 속에 어떤 사상을 표현하거나 영적 세계관을 상징화했기 때문에 사색의 
깊이가 있다.
  한국의 조원은 이처럼 상징적 세계관의 조형적 표현이므로 그 공간이 담으로 
구획지어져 있다. 한국의 집이나 연못은 주위의 담이 없으면 옷을 발가벗고 거리에 
나선 사람처럼 불안한 것이 된다. 신라의 안압지도 주위를 담으로 아늑히 둘러 막은 
공간 속에 신선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담을 복원하지 않아서 넓은 
들에 노출되어 있으며, 고요하고 유현한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있다.
  연못 속의 섬이나 연못가의 무산십이봉 등에 괴석을 배치함에 있어서도 때로는 
아름다운 명산의 형상을 축소하여 조형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묘한 바닷가의 
기암절벽을 형상화하기도 했다.
  경주 안압지의 경우 한 면이 아름다운 괴석을 땅 속에 깊이 묻어 흩어 놓아서 산치의 
기법을 썼고, 두 면이나 세 면이 아름다운 괴석은 두세 개를 무리지어 놓아서 
아름다운 형상을 살린 군치의 기법을 썼다. 돌이 납작납작하거나 겹쳐 놓아 아름다운 
괴석은 첩치의 기법으로 쌓았다. 어떤 면도 모두 아름다운 당당한 괴석은 하나만을 
드러나게 놓아서 특치의 치석 기법을 살렸다.
  이러한 치석 방법은 조선시대에 오면 석분 위에 하나의 돌을 심어서 놓았다. 어떤 
괴석의 석분 면에는 '소영주'라 새긴 것도 있어 이들 괴석이 선산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연못은 한국 조원공간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상징적인 경관을 조성하고 
있다. 

   우리 나라 민가의 성신앙

  선사시대부터 사람의 신체부위 중에서 가장 신성시한 곳이 성기였다. 성기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게 하고 사랑의 강렬한 충동을 유발하기 때문에 신령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성기를 숭배하는 신앙이 생겨났다. 사실 인류의 문화는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사랑은 근본적으로 성에서 연유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선돌이나, 성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축제와 사냥을 하는 그림이 새겨진 
울주군 대곡리의 암각화에서 원시 성기숭배신앙을 엿볼 수 있다. 신라 토우 중에는 
성기를 세우고 있는 것이 많다. 국보 제195호로 지정된 토우 장식 항아리는 발가벗은 
여자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엉치를 뒤로 내밀고 있는데, 뒤에서 발가벗은 남자가 
성기를 빳빳하게 세워서 뒤로 삽입하는 모양의 토우가 붙어 있다.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배 모양의 토기에는 뱃사공이 성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노를 젓고 있다.
  이런 고분 출토 유물들은 자손의 번성과 풍요를 비는 부장품들이다. 1974년 경주 
안압지에서는 길이 17.5cm의 나무로 만든 남자 성기가 출토되었다. 이 목제 성기는 
귀두를 버섯같이 조각하고 콩알 같은 돌기가 귀두 밑에 붙어 있어 매우 흥미롭다. 
고려시대 유물로는 동경 뒷면에 남녀가 성교하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왕들의 성기가 컸다는 것을 자랑삼아 써 놓았다. 지증왕의 
남근은 길이가 1척5촌이나 되었고 경덕왕의 남근은 길이가 8촌이나 되었다 하니 
방망이만한 것이었다. 아마도 당시 왕의 성기가 큰 것이 숭배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은 백제군이 신라 영토를 침범해 왔을 때 여근곡에 남근인 백제군을 
몰아넣고 치면 남근이 여근 속에 들어가 살아나오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 여근곡은 
꼭 여자의 음부처럼 생긴 지형인데, 푹 들어간 중심지점에 샘이 있고 주위 언덕에는 
솔밭이 우거져 있는 경주군 신평2리의 산자락이다. 지금도 이곳 마을 사람들은 
여근곡을 신성시하여 보호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보은현 묘사조에 대자재천왕사의 제사 지내는 기록이 있는데, 신이 
매년 10월 인일에 법주사에 내려오면 산중 사람들이 풍류를 베풀고 제사를 올렸는데 
신은 45일간 머물다 간다고 하였다.
  일본인 무라야마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 제사에서 나무로 만든 남자 성기로 음희를 
하여 신을 위안시키고 법주사의 재앙을 막았다 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이규경의 '오주연문'에 성신앙에 관계되는 부군당의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성신앙에는 인간의 본성적 순수성이 깔려 있어
  서울 서대문구 안산의 말바위는 아이를 못 낳는 부인들이 말바위 엉덩이 부분에서 
두 다리를 쫙 벌려 타고앉아 엉덩이로 굴려서 말바위 머리부분을 향해 기어가서 목을 
꽉 끌어안았다가 다시 앉은 채로 미그러져 말바위 엉덩이 부분으로 돌아오기를 세 번 
반복하면 반드시 아이를 잉태한다고 하여 많이들 그대로 했다 한다.
  강원도 화천군 삼일에 있는 보지바위는 형태가 음부같이 생겼는데 밑은 비어 있다. 
산길을 가는 사람들이 돌을 던져 이 바위를 맞추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길가는 
사람들이 돌을 많이 던지고 지나간다.
  남근석에 제사를 올리는 곳은 우리 나라 전국의 마을에 많이 있었다. 전북 순창 
창덕리 남근석(전라북도 민속자료)은 높이가 165cm, 둘레 150cm 규모이다. 음력 1월 
14일 제사를 드리는데, 이 돌 앞에서 빌면 아들을 낳는다 한다. 이 남근석은 발기된 
남자의 성기처럼 조각되었는데, 혈관 같은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 있다. 또 순창 산동리 
남근석(전라북도 민속자료)은 높이 188cm, 둘레 147cm인데 남자 성기를 정교하게 
조각하고 연잎을 감싼 듯 귀두가 매우 사실적이다.
  남해군 남면 바닷가의 남근석과 여근석(경상남도 민속자료) 등에는 동제를 지내고 
있다. 남원시 동충동의 남근석은 높이 105cm,둘레 87cm로 버섯 모양이다. 경기도 
안양시 삼성산의 삼막사 칠성각 옆에는 자지바위와 보지바위(경기도 민속자료)가 있다. 
4월 초파일과 칠월 칠석날 이곳에 와서 빌면 자식을 낳고 장수한다 하여 지금도 
치성드리는 사람들이 많다.
  민속놀이 속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창녕 영산의 줄다리기는 암줄과 수줄을 
꿰맞추어 겨루는 제례놀이이며, 역시 중요 무형문화재인 꼭두각시놀음의 흥동지는 
크고 새빨간 남근을 휘둘러대고 있다. 이러한 성신앙이나 의식은 다른 나라에도 많이 
있다.
  일본 아이치 현에서는 매년 3월 15일 신사에 봉안된 길이 10여m의 나무로 만든 
남근을 가마에 싣고 장정 10여 명이 메고 시가행진을 하는 축제를 연다. 이 신사는 
평상시 참배할 때 크고 작은 목제 남근을 봉납한다. 일본 아키타 현에서는 부인들이 
한아름이나 되는 목제 남근의 중간 부분을 백지로 덮어 싸서 저마다 하나씩 안고 
행렬을 지어 신사에 봉납한다.
  일본 니가타 현 지역에서는 가면을 쓰고 70-80cm의 목제 남근을 국부에 대고 북을 
치면서 춤을 추는 행사를 한다. 일본의 성 신앙도 잉태, 사랑, 풍요를 비는 신앙으로 
되어 있다. 태국의 사원에서도 남근석을 모시고 5색 천을 감아서 우유와 꽃을 뿌리며 
소원을 비는 신앙이 있다 한다.
  동뉴기니아에서는 남자가 전투에 나가거나 사냥을 나갈 때 여근의 분비액을 
화살촉에 발라서 나가면 운이 트인다는 민간신앙이 있다 한다.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남녀의 성교상을 숭배하고, 라마교에서는 남녀의 성교상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만들어 
신으로 숭배한다.
  이와 같이 성기를 숭배하는 데에는 인간의 본성적 순수성이 깔려 있다. 우리 나라 
성신앙 유적들이 날로 인멸되어 가고 있어 이러한 문화유산의 보존도 소홀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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