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상상력 1
우리말 어휘의 기원을 통해 본 겨례의 정서와 의식구조
정호완
I. 언어적 상상력의 바탕
우리 사람들은 제한된 상황 속에 살면서도 그 지평을 넘어서고자
언어적 존재로서의 영역을 넓히고 깊게 해 가면서 생존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윽한 의미를 전
달하는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입을 나와 퍼져 울리는
순간, 그 말은 영원한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리하여 사람
들은 처음에는 그림 또는 매듭이나 조개띠와 같은 구체적인 물건을
통하여 서로 약속을 정해 의사소통을 하다가, 마침내는 의미와 소
리를 담아 놓을 수 있는 '말'의 체계를 이루게 된다 이른바 문자언
어를 이용하여 생각과 느낌을 적게 된 것이다. 문자언어가 생겨난
뒤로, 사람들의 귀증한 체험이나 슬기는 기록으로 남아 후손에게
물려짐으로써 문화유산이 후대에 전 달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인
류만이 누리는 이른바 '문화'라는 것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그에 상응하는 많은 새로운 문화들이 형성되
고, 일단 형성된 문화는 무리 없이 특정한 언어에 반영되어 담겨 쓰
이게 된다. 사람이 보고 듣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에 층동을 주고,
상상력은 강물처럼 출렁이며 언어라는 논과 밭에 여러 가지 모양의
싹들을 틔운다. 사람들의 언어적 상상력은 특별히 뛰어나서 문학과
같은 정서적인 언어의 상상력을 촉발하기도 하며, 실용문과 같은
언어표현을 통하여 어떤 판단이나 생각을 듣는 이에게 층실하게 전
달하기도 한다. 상상력이 없는 개인이나 민족 흑은 그러한 인류를
생각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만 본능적인 다른 동물들의 세계와 조
금도 다르지 않은, 문화의 침체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러한 언어적 상상력의 바탕은 무엇인가.
심리 학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나 사물을 재료 삼아 새로
운 사실이나 관념을 만들어 내는 정신작용을 통틀어 상상(想像 ;
이라 이르고 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분별 있는 인식(認識)을 뜻한다. 인식이라 하면 단순히 사물
을 분별하고 의식하고 지각하는 작용을 총칭하는 것이지만 학문 체
계로서의 인식론은 특정한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참값 truth value
을 찾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로 삼아 사물의 기원. 본질. 범주
에 대하여 더듬어 보는 것이다. 칸트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인
간이 인식하는 모든 대상의 한계는 그들이 인식하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된다. 인간이 지니는 언어적 상상이란 결국 인간 인식의 공간
이나 시간에 기초하는 것이다. 필자는 언어적 상상력의 바탕이 되
는 대전제를 분절성, 유추, 모방, 가정 및 문화의 반사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 한다
1-1. 분절의 조건
이 세상에서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참으로 다양하다. 아이가
울거나 웃는 소리에서 시작하여 병으로 신음하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의 소리가 있다. 그러나 언어와 관련하여 중요한 가치를 갖
는 것은 음성적인 특질에 따라서 구별할 수 있는 부류의 소리들이다
(훈민정음)에서는 자음을 조음위치에 따라서 아음.설음.순음. 치
음.후옴으로 나누고, 다시 음향감에 따라서 전청. 차청. 전탁. 불청
블탁으로 나누어 분절음의 기준으로 삼았다. 현대 음성학의 관점에서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 방법을 가지고 가를 수 있다. 첫째는 혀의
위치에 따라 설첨성. 전방성 등으로 가르는 것, 둘째는 혀의 조음
방법에 따라 파열성. 지속성. 파찰성 등으로 가르는 것, 셋째는 모
음을 변별하는 혓몸의 특질로 가르는 것이다. 이들 음성적인 분절
성에 바탕을 두어 '달/탈/딸' 이 서로 다른 말로 들리게 되고, 서
로의 의사소통이 원만해지는 것이다.
소리의 분절과 함께 의미의 분절은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소
리가 처음에는 한 소리로서 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음과 모음으
로 분화되듯이, 의미 곧 전달하고자 하는 뜻도 분화되지 않은 상태
에서 분화되는 특징을 보인다.
낱말의 집합은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낱말 하나하나의
가치는 그 체계 안에서 결정된다. 즉 낱말의 의미는 그러한 계열관
계 속에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부분으로서의 낱말은 전체 속
에서만 통용가치가 실현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
향이 설정될 수 있다. 하나는 트리에르처럼 전체에서 개체로
가는 방향이며, 또 하나는 포르치르 에서와 같이 개체에서 전
체로 가는 방향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이스게르버 의
주장대로 언어로 드러나는 언어기호와 자연물 사이에, 특정한 언어
대중이 이해하고 있는 중간세계 를 생각해 볼 수 있
다. 더 자세히 풀이하면 어떤 추상적인 낱말의 의미특성은 서로 변
별적인 특징으로서 분절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땅' 이란 낱말의
밭은 제일 주요한 의미특성이 '공간성' 인데 여기에서 접촉. 분화.
연소 닫힘 근거' 등과 같은 의미 특질들로 하위분류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특징은 이에 맞먹는 낱말의 겨레 로 드러나
게 된다. 배해수는 생명종식어를 생명체적이고 추상적이고 내세관
적인 특징으로 분절시켜, 각각의 영역에 들어가는 낱말의 밭을 그
예로 들고 있다(l982). 생물진화를 보아도 미분화 단계에서 분화
단계로 설명하는 게 보편적이다. 따라서 필자는 변별적인 의미의
특징을 전체의 큰 범주로부터 하위범주로 나누어 가는 것이 부분(개
체)에서 전체로 가는 것보다 합리적이라고 본다. 앞의 것은 특정한
분야의 낱말밭을 플이하는 데 쏠모 있고, 뒤의 것은 한
문장이나 단락을 설명하는 데 알맞다고 판단되기 때 문이다.
소리이든 의미이든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또다른 상
황을 미루어 짐작하는 힘이 상상력인 만큼, 소리와 의미의 변별적
인 특징들이 있고 없음으로 구조화하는 작업은 가볍게 다룰 수 없
다고 하겠다. 따지고 보면 음성을 분절시켜 알아차린다는 것 자체
가 인식론상의 한 가정으로부터 비롯되어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
에, 원천적으로 언어의 전달과정이 공통의 약속이라고는 하여도 인
간의 상상력에서 우러나온 결과라고 하겠다. 의미 또한 그러할 수
밖에 없다. 언어적인 기능을 하는 음운 자체가, 연속체인 음성을 끊
올 수 있는 불연속의 상태로 놓고 보는 한 가정,
곧 상상력의 조건을 층족시켜 주는 정신활동과 심리적-생리적 -물
리적인 과정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정해진 소리의 체계는 구속성을 갖고 있
기 때문에 개인이 마구 바꿀 수는 없다. 여기에 언어의 사회성이
있다.
1-2. 유추작용
말의 소리나 형태는 그 수가 무한정일 수는 없다. 그 수가 무한
정이어서는 사람이 그것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같고 다른
형태나 의미를 구분하여, 비슷한 것들이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는
단어나 문법을 모형으로 하여 단어가 만들어지거나 변화된다. 혼히
논리학에서는 어떤 특수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그와 비슷한 성
질을 가진 다른 특수한 사실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을 유추(類推 ;
로 정의한다. 여기에서 모형 이라고 함은 물론 절대
적인 것은 아니다. 원래 이미지라는 말은 모방을 의미하는
말이었다는 것이 암시하는 것처럼, 유추는 어떤 원래
의 이상적인 원형을 전제로 한 개념이기도 하다.
유추의 본질은 변화를 통한 일종의 언어창조라고 보아 무리가 없
을 듯하다
처엄>처음, 일홈>이름, 소곰>소금'과 같이 '-음'꼴로 만들어
가거나, '호랑>호랑이, 배암>배암이, 납>나비'와 같이 동물의 이
름을 '-이'꼴로 만들어 가는 예는 그 좋은 본보기라고 하겠다. '처
음' 과 '이름', '소금' 은 처엄', '일홈', '소곰' 에서 각각 말음이
'-음'으로 바뀌는 작은 변화를 보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이름
씨 (명사)' 라는 공통 요소를 가지고 기억하기 편하게 '-옴'으로 통
일하는 유추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위에 든 동물 이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설명이 가능하다.
유추의 모형은 크게 통합관계에 따른 형과 계열관계에 따른 형으
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배암十-이>배암이'와 같은 통합관계
에 따른 모형이 있다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이 계열성 조건
이라고 할 것이다. 문장 단위로 볼 때, 기본문형은 일종의 글의 모
형 으로 여기에 알맞은 어휘만 넣으면 얼마든지 문장을 만들
어낼 수 있다. 언어의 유형으로 한국어, 독일어, 영어 등과 같이
단일어가 모여 합성어를 이루는 경향이 짙거나, 특히 음소문자를
쓰는 언어에는 유추에 따른 언어창조가 가장 알맞다
우리말의 경우, 중세어 조어법에서 명사를 어근으로 하여 여기에
정동사 어미 '-다'를 붙이는 틀은 매우 생산적으로 이 모형에 따라
많은 용언이 생겨날 수 있었다(신 十다>신다, 배+다>배다, 새+
다>새다 등).
경덕왕 때에 인명. 지명. 관명을 한자식으로 모두 갈았다고 하는
데, 예를 들면 사람의 이름을 석 자로 짓는다든가, 땅 이름을 '-주
(州).-군(郡).-현(縣)'을 붙여 고친다든가, 한자의 소리만을 쓴
다든가 하는 식으로 새롭게 고침도 일종의 유추현상으로서,
언어의 모양을 바꾸어 놓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아무리 일상적인 형태에서 유추된 모형을 따르는 어휘나 문법형
태소라도 말을 직접 사용하는 언중이 쓰지 않으면 사어
가 되고 만다 반대로 많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작가의 말은 다소
생소하더라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사어가 되이 버렸던 '아스
라이'가 어느 서정시인의 시에서 쓰인 뒤로 보편적인 말이 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한때 정치 경제적으로 유력했
던 사람의 방언이 특수성을 쉽사리 뛰어넘어 보편적인 말로서 자리
잡는 말도 있었다.
유추는 음운변화와 함께 언어변화의 증요한 원리가 된다. 음운변
화는 일정한 형태 안에서의 음절구조의 변동에 한정되지만, 유추는
음질구조의 제약과는 관계없이 새로이 고쳐진 형태로 닮아 가는 경
향을 띤다. 음운의 변화는 미시적이고 유추는 보다 거시적인 언어
변화의 주요한 통로라고 할 것이다. 형태의 변화를 보면 음운변화
는 자음과 모음, 모음과 모음, 모음과 자음, 자음과 자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음절구조 내의 변동이지만, 유추는 아예 음절을 달리하여
덧붙이거나 완전히 이동시켜 버리는 일이 있다.
공시적 (共時的)으로 볼 때, 지명자료나 인명자료에서는 유추작용
의 결과는 생산적이다. 유추작용은 일정한 틀을 마련한다. 새로운
문화가 수용되어 기존의 어휘자료가 다시 분석되어 새로운 말이 만
들어질 경우, 유추작용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유추작용과 관련한 언어적 상상력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공
간지각에 따른 심상을 바탕으로 하는 표상(衰象)이라고 할 수 있다.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물을 포함한 '공간성'으로부터 사실을 포함하
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로 유추 전이되어 간다는 것이다. 인
식의 기초로서 공간은 우리의 존재가 존재일 수 있는 밑바탕이 된
다 우리는 사고작용을 통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선(線)과 색채와
사물의 모양들이 있는 공간에서 그 존재들에 대한 인식에 눈을 떠
간다. 공간 상황을 인식하는 기본요소를 몇 갈래의 범주로 나누어
보면, 밝기. 길이. 높이. 넓이. 무게. 거리. 크기. 두께. 방향. 생
김새. 요철(凹凸). 강도. 속도. 온도. 맛 등이 있다.
공간상에 또는 공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위와 같은 기
본요소들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판단을 통하여 제대로 인식된다. 구
체적인 사물 대상에 대해서는 이러한 인식상의 여러 요소들을 우리
가 직접 경험할 수 있지만, 일단 어떤 사실이나 추상적인 개념 등에
접어들면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그 좋은 예로 시간
을 들 수 있다. 시간은 공간의 개념에서 전이되어 이제는 인식의
기초가 된 아주 대표적인 보기이다. 시간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
으나, 운동의 주기라든가 지구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상환
을 미루어 물리적인 시간과 심리적인 시간 등을 짐작할 수 있지 않
은가. 순수하게 공간적인 개념에는 시간을 설정하기 어렵지만, 일
정한 공간을 움직이거나 특정한 사물이 운행하여 변화가 생길 때 우
리는 시간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말에서 본래는 장소를 뜻하는 말이었다가 시간을 가리키는
말로 변한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말로 '때.끼니.
쯤.녁 즈음' 등이 있다. 독일어의 경우도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
다. 방면이나 방향을 뜻하는 Seite 와 시간을 뜻히는 Zeit
는 본래 같은 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일본어의 경우 도코로
는 위치도 되고 경우, 때로도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공간에서 시간으로의 유추, 전이는 우리말에서만 드러나는 현상은
아니라고 하겠다
이떻게 의미상의 유추. 전이로 말미암아 언어적 상상력은 언어의
기능을 확대하여 나아간다.
심상(心像)은 드러내려는 물체를 닮거나 거울에 비친 물체의 모습
과 같이 우리의 청각영상으로 이루어진다. 근원적으로 심상은 코실
린이 설명한 바와 같이 상사형 표상을 중심된 내용으로 한
다. 이를테면, '사과'라고 했을 때 머리속으로 이에 상응하는 물리
적 장면을 상상하면서 구성하는 표상이 바로 상사형 표상이 된다
그러나 언어로 드러낼 수 있는 모든 형태가 청각영상으로 치환될 수
는 없다. 필자가 보기로는, 일단 가장 알기 쉬운 심상에서 파악된
기본적 인 인지요소들의 속성에 맞도록 의미상의 유추가 일어남으로
써 추상명사와 같은 비실체적인 명제표상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열렬한 사랑' 이라고 할 때 '사랑' 이란 명제표상은
뜨겁고 환한 사물의 속성으로 그 심상이 환기된 것이다. 이처럼 근
원적으로 상사형 표상에서 유추. 전이된 높은 수준의 개념들을 연
상함으로써 마음대로 언어적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비교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반드
시 그 기준이 될 인지의 속성이 있어야만 한다. 인지의 속성에 따
른 전이가 바로 유추로서의 주요한 구실을 한다. 부룩스 의
실험에 따르면, 언어적인 조건보다는 시각적 조건에 따른 반사로서
의 기억이 횔씬 쉽다고 한다. 이른바 양식의존적
인 논거는 상사형 심상으로서 시각적인 정보가 중심을 이루게 된다
우리의 감각기관에 와 닿는 것들이 직접적인 자극이라면, 언어적
상상력에 따른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인 청 각영상들은 간접적인 반
응과 자극으로 그 구실을 해 낸다. 상사형 표상은 일차적이고, 언
어에 의한 명제 표상은 이차적인 것이다. 앞서도 말한 바, 증간세계
라고 일컫는, 사물과 언어 표상 사이에서의 언어적 심상의 형성과
정은 상사형 표상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1-3. 모방과 언어적 사고
아무리 훌륭한 예술가라고 하더라도 그의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
된다. 플라톤은 창작을 이데아에 대한 모방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모방층동 이 있어 예술활동의 동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언어의 경우는 어떠한가. 처음 말을 배
우는 시기의 언어를 남어 라고 한다. 어린이는
몇 마디의 말을 배우기 위하여 엄청난 시행착오를 거친다. 어린이
자신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함께 사는 주변 사람의 말을 모방하
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언어모방설 이 그것이다
어린이는 이처럼 모방을 거쳐 올바른 발음과 의사 전달에 이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소리를 내는 방법 또는 위치, 소리감각
을 모두 흥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을 배우기 이전의 상태
에서는 아무리 홀륭한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시각. 청각. 후각 촉
각 등 감각에 따르는 언어 감정을 몸짓으로, 흑은 울음과 웃음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시각적인 사고가 가
장 두드러진다. 인간의 사고작용이란 본래 시각적인 사고에서 싹
이 튼다(김춘일, 미술과 교육론,1989). 우선 말하는 모습을 보
아야 입술의 모양을 홍내내고 혀의 놀림을 모방할 수 있으니까. 말
의 본질은, 가장 소박하게 정의하면, 보이지 않는 생각과 느낌을 소
리로 전달하는 것인 만큼 소리 자체가 가지는 상징성이 관여되지
않올 수 없다. 빗소리도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다양한 느낌과 상징
을 드라낸다. 이슬비가 내릴 때와 소나기가 올 때, 부슬비가 내릴
때의 소리는 서로 다른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물론 지표면
올 흐르는 물의 소리와도 사뭇 다르다
'미/비/피'에서 보듯이 세 형태는 모두가 물과 관련이 있지만
존재하는 양상이 다름으로 해서 별개의 형태로 쓰이게 되 었다. 이
가운데 '비'는 다른 것에 비하여 보통의 파열성을 드러내는 소리의
상징을 갖고 있다_ 이와 같이 모방의 대상이 되는 소리는 모두가
상징하는 느낌이 있는데, 자음에서는 터짐과 갈림, 그리고 터짐 갈
이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성대의 떨림과 같은 소리의 상징도 있으
나, 앞의 세 갈래의 상징보다는 확실하지가 않다. 자음은 특히 말
의 머리에서 '예사소리/거센소리/된소리`와 같이 강하고 여린 정
도에 따라 구별되기도 한다_ 한편 모음에서는 입의 벌림에 따라서
'고설/중설/저설' 로, 혀의 위치에 따라서 '전설/중설/후설' 로,
입술의 모양에 따라서 '원순/평순'으로 상징적이고 가시적인 소리
의 차이들이 각각의 상징으로 드러난다.
상징성이 제 일 두드러지는 것이 의성어나 의태어일 것 이다. 특히
의성어의 경우를 보면, 소리가 나는 느낌을 이용하여 실제로 나고
있는 소리를 모방한다. 이를데면 물이 냄비에서 끓는 소리를 들으
면 파열성의 비읍(ㅂ)으로 시작되어 정말로 '부글부글`하는 듯하다.
일단 소리의 상징으로 채택된 형태는, 모음이나 자음의 교체를 통
하여 뜻은 같으나 소리의 느낌이 다른 형태로 언어적 사고와 상상
력을 다양하게 늘려 나아간다. '부글부글/보글보글/버글버글' 이
나 '찰랑찰랑/촐랑촐랑/출렁출렁/철 렁철렁 / 쩔 렁쩔 렁'의 경우
모음과 말머리의 자음이 바뀌어 서로 조금씩 다른 느낌을 자아내니,
그 각각에 각기 다른 정서들이 실려서 듣는 사람에게로 옮아가게
된다.
이와 같은 모방은, 언어학습기의 아이들에 있어서는 '감각적 사
고에 의한 되돌림으로서의 언어적인 반영'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림 l은, 감각적 사고가 직접적인 자극으로서 모방을 수반하는
언어적 사고를 일으키는 말미암음이 됨을 표현한 것이다. 근윈적으
로 언어는 행위이며, 행위는 자극과 반응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모든 언어가 꼭 상사형 표상, 곧 실물 반영에 해당하는 형
태로만 이루어지지 않음은 어떻게 설명할 것 인가. 이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추작용을 따라서 일어나는 속성의 전이로 풀
이 하면 될 것이다. 구체적인 사물대상의 상사형 표상이 가장 기
본적 틀이 되어 비가시적인 명제 표상들을 가능하게 하나고 생각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방이라고 하여 한없이 많은 양의 모방이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
다. 우리말의 경우 그것은 한정된 수의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지
는 형태소, 일정한 언어운용의 고리들, 이들 형태소로 만들어지는
문장의 규칙 안에서의 모방이어야 한다. 그것은 모방의 결과가 언
어 공동체 속에서 통용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어학습기가 지나면서 모방의 단계는 가고 자기화의 단계가 이
루어진다. 이 단계에 이르면 때때로 일어나는 복잡한 생각과 느낌
을 언어적 상상력을 따라 명제 표상으로 바꾸어 놓게 된다.
모방의 원리는 앞에서 플이한 바, 분절과 유추작용의 질서를 포괄
하는 일반성을 갖고 있다. 언어적인 모방은 곧 분절의 과정을 전제
로 하며, 상사형 표상에서 추상적인 명제 표상으로의 언어적인 여
과가 가능하려면 유추작용이 활발하게 밑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4. 가정 (假定)파 언어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공간과 시간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고작해
야 일백 년을 헤아리는 세월을 살고,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 삶의
조건을 해결하기 위한 공간들을 헤매며 산다. (명심보감),의 이야기
처 럼, 한 사람이 하루 쌀 석 되, 사방 여섯 자 방이면 족한 것을 가
지고 끝없는 욕망의 언덕에서 허우적거리다 마침내 자신에게 굴레를
씌우고 만다. 하지만 생활은 오늘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간접 체험을 통하여, 특히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설을 만들어 가게
된다. 누구든지 하나의 가정이나 상상을 할 수 있고, 단체도 그러
하다. 그 가설이 어떤 방법으로 증명되어 누구에게나 보편성 있는
설득력을 지닌다면, 다시 말해 거듭 검증해 봐도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 재현성이 있다면 그것은 지식이요, 학문적인
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 반대인 경우에는 그저 상상일 뿐이요, 경
우에 따라서는 헛된 생각에 그치고 말게 된다. 학문이나 예술이나
모두 하나의 가정을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언어기호는 본디 하나의 약속이며 체계적인 가정인 것 이다. 인간
의 생각을 전할 수 있는 소리 자체는 같은 소리일지라도 같은 사람
이 같은 조건에서 발음을 했더라도 그 발음의 세기나 색깔은 다르
게 마련이다 하물며 인종이 다르고 시대와 공간이 다른 사람끼리
의 경우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사과'라고 말을 하면 우리말
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먹는 과일로서 동일하게 이해한다. 물리적
인 실제의 소리는 추상화되어 심리적으로 같은 소리로 인식되는 것
이다. 우리가 '사랑' 이라고 발음할 때 그 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으로 이어져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을 들을 때는 마치
음운들이 끊어져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 따라서 머리의 자음을 바
꾸어 '자랑'으로 발음하면 금세 다른 말로 알아차리게 된다. 이를
테면 연속으로 발음되는 소리들을 연속하지 않은 소리로, 즉 동적
인 소리를 정적인 소리로 인식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서 사람은 그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하고 산다. 어디 그뿐인가. '사과'란 구체적으
로 과일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고 실은 한 덩어리의 소리에 불과
하지만, 언어적 상상력은 곧바로 생리적인 조건으로 전이되어 마치
사과가 앞에 있는 것처럼 듣는 이는 먹고 싶은 욕구를 일으킨다
한마디로 계속하여 이어 나는 음성의 연결체인 음절을, 심리적으
로 분리하여 뗐다 붙일 수 있는 소리의 조각, 곧 음운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보는 가정을 대전제로 하여 언어 인식이 비 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언어적 상상력은 한 언어공동체의 약속을 바탕으
로 '가정' 을 전제하여 이 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언어생활
이 이러한 약속과 가정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언어생활을 해 나아간다. 그것은 언어로 표현되는 음성형식과
그 내용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큰 언어공동체 속에서 유기
체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패문이다.
언중이 말을 만들어 내기는 하지만, 일단 만들어진 말은 언중의
사고에 큰 영향을 끼 치고, 인식의 도구로서 작용하며, 개인의 사회
화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언어라는 무형의 끈은 민족의 경
계를 만들고,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민족의 큰 유산이면서 중요한
재화가 된다 언어에는 그 민족이 누렸던 역사와 철학, 종교와 정
치, 경제적 인 혼적들이 투영되어 나뭇가지처럼 벋어 나아간다. 이
러한 언어의 투영현상은 상황에 의존하는 특성을 지녀, 언중의 문
화와 함수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면 언어로 드러나는 상황의 바탕
은 어떠한 것 인가.
철학에서도 흔히 지적하는 바와 같이 언어적인 상황은 우선 시간
과 공간, 그리고 인간 상황이 중심을 이룬다. 어떤 언어에도 가정
의 상황을, 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드러내지 않는 경우는 드물
다. 이른바 가정법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리말에서는 접속법의 동사
나 형용사의 활용어미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영어
를 포함하는 인도-유럽어의 경우 시제별로 많은 가정법의 유형이 있
다. 과거와 현재, 또는 미래 사실에 대한 가정이 다양하게 갈래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 시간의 상황은 원천적으로 공간을 그 밑으로
하고 있다고 본다. 적어도 인간이 구분하고 있는, 언어 표현으로서
의 시간은 공간적 표현에서 옮아 온 경우가 많다. 우리말에서 시간
을 의미하는 '때'도 역사적으로 보아 후기 중세어 자료에서는 장소
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처럼 공간인식을 근거로 하여 언어적인 시
간관념이 발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더 많은 시간적 상항
을 표현할 수 있는 형태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룬 것이다.
반드시 칸트나 사르트르를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상상은 의식현상의 하나이며, 철저하게 우리 사람들의 인식에 기초
한 인간증심의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하나의 약속이자
가정으로서의 언어기호가 불러일으키는 감각적인 영상은 현상 그
자체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대한민국의 지도가 대한민
국의 영토 그 자체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나 인식의 활동은 인간의 의식 위에서 재 구성되어 사물이나 사실들
을 판단하며, 이것이 다시 언어적인 모방과 사고를 형성하여 마침
내 언어왈동을 가능하게 한다고 본다. 인식의 기초가 공간과 시간
에 대한 형식이므로 언어적인 사고 또한 이에 따를 수밖에 없는 젓
이다. 의식과 언어기호는 일종의 거울과 같은 것이어서 감각적인
기능을 하는 대뇌부는 언어적인 기능을 하는 대뇌부에 심리적인 반
사현상을 일으킨다. 이를테면 실물 대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약속
과 가정으로서의 언어기호에 익숙한 언증은 언어기호가 불러일으키
는 공간과 시간 인식을 바로 떠올리게 됨으로써 마치 실물대상이
있는 것처럼 느끼며 그러한 생각들을 말하게 되고, 말을 듣는 이는
아무 이상 없이 그 말의 내용을 알아차리며 그에 걸맞은 정서를 느
끼고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앞으로 다가을 미래, 곧 죽은 뒤를 가정하니 설정해 놓은
공간과 시간에의 확고한 신념은 하나의 종교로서 표출되며 이른바
이데아 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난다 비록 그것이 의식상의 공
간과 시간이라 할지리도, 그것이 삶의 토대가 되고 삶을 구원해 주
리라는 의미를 부여한다면, 적어도 믿는 이들에게는 그것은 하나의
실상이며 영원한 아름다움이며 참된 빛이 흐르는 공간이 되는 것이
다. 그 위에서 일어난 문화를 역사란 관점에서 살펴보면 굳건한 하
나의 맥으로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이 세
상과 저 세상의 문제, 즉 삶과 죽음의 구도에 대한 문제를 풀이함
에 있어 의식 속에 설정되는 시간과 공간의 상황은 분명한 삶에의
청사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낱말 하나하나는 소리가 드러내는 그 의미를 불러일으
키는 기억 소자(柰子)가 된다고 하겠다. 실제로는 연속해 있는 자
연의 세계를 수심만에 달하는 낱말과 이 낱말들을 이루고 있는 몇
개의 자음과 모음으로써 분리하기도 하고 결합하기도 하여, 자신이
필요로 하는 가정의 공간과 시간상에서 사물과 사실을 인식하게 되
고, 자신도 잘 모르는 꿈과 같은 무의식의 언덕에시 헤매이며 삶의
조건을 풀기 위하여 방황한다. 자음과 모음이 컴퓨터의 글자판이라
면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어 음절 단위토 이루어지는 단어들은 기억
의 소자들이 되는 셈이라고나 할까. 우리들의 의식은 모니터와 같
은 반영의 공간이 되고, 여기에 비치는 다양한 언어형식 (단어와 문
장과 단락)을 통하여 일정한 생각을 전달하게 된다. 자음과 모음이
분절되고 다시 통합하여 새로운 단어를 이루어 내는 것은 이른바
이합과 집산이라는 컴퓨터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정은 언어적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큰 원리요, 인간정신의 중
요한 작용이라고 하겠다. 이른바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조건
과 그에 따른 반응으로서의 언어기호는 추상화된 대용자극
이며, 대용반응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실
물이 없는 언어적인 내용은, 가정의 약속인 언어기호에 저장된 언
어적인 사고의 장을 자극함으로써 기억소자에 갈무리된 여러
가지 정보들을 떠올려 사람들의 의식이라는 거울의 화면에 원하는
참된 뜻을 비추게 된다. 이른바 거울영상과 같은 속
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문화 반사체로서의 언
어기호의 성격과 인간의 상상력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1-5. 문화의 투영
인간 사회의 변천이나 발전의 과정을 기록하여 놓은 것을 '역사'
라고 정의한다. 같은 뜻은 아니더라도 인간의 정신 활동으로 말미
암은 모든 결과를 '문화' 라고 풀 수 있다. 거울 앞에 서면 자신의
모습이 되비치듯이 역사에는 특정한 민족이 살아온 여러 가지 모습
들이 반영되어 있다. 일정한 시대를 중심으로 하여 이해하려고 할
때 역사는 세대를 달리하는 일정한 시기들의 집합이다. 따라서 각
시대의 사회 변천이 역사에 드러나게 된다. 각 시대는 그 시대를 살
다 간 겨레들의 문화가 모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역사는 문화의
반영체라 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는
가. 인간정신이 만들어 낸 문자에 의하여 기록.보존된다. 물론 언
어도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 낸 문화의 범주 안에 드는 주요한 것이
다. 무엇을 기록하거나 말을 한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어떤 문화의
내용이나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투사시켜 듣는 사람에게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원천적으로 어떤 대상을 안다는 것은 지각하는 사람의 의식에 대
상의 모습이나 속성이 반영되어 인지됨을 뜻한다. 언어공동체를 이
루는 사람들은 의식에 반영된 대상을 말로써 전달하여 필요한 만큼
의 정보를 주고 받는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사이의 이러한
상호작용에 의해 한 시기의 문화는 이루어진다. 문화의 형태가 분
화되지 않은 고대로 을라 갈수록 문화의 투사체로서의 언어기호에
는 문화반영의 모습이 뚜렷해진다
절대적으로 혼자서 사는 사람에게 언어의 필요성은 반으로 줄 수
밖에 없다. 인간에게 자기표현의 욕구가 있다고 해도, 근원적으로
자기의 말을 들어 줄 대상이 없다면 그 표현은 의미를 잃고 만다.
적어도 자신의 말을 들을 대상이 있을 때 의미가 살아나게 되며, 언
어를 사회적이라고 함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언어공동체다는 말
을 혼히 듣게 되는 바, 진정 하나의 겨레는 그 겨레만이 쓰는 언어
를 함께 씀으로써 그 언어로 기록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각과 느
낌을 더불어 누리고 살게 된다. 말은 소리를 본질로 하는 공동의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은 개인에게 상당한 강제성을 행사한다. 이
를테면 '보리쌀'을 '좁쌀'로 말한다면 고의든 아니든 그것은 약속
위반이 되어 오해를 일으킨다. 약속으로서의 말 속에는, 역사를 통
하여 이루어진 공감대를 갖고 있는 문화의 화석과도 같은 특질들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거기서 더러는 가지를 쳐 더욱 많은 낱말의
겨레가 생 겨나고, 더러는 쓰이지 않게 되어 죽은 말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언어를 문화의 투사체로 보는 관점에서 언어의 원형성을 특
정한 겨레의 문화에서 찾고자 한다 이름하여 '문화 투영 이론'이
라 해 둔다.
문화의 반사체인 언어에 되비친 말은 그 나름의 질서에 따라서
굴절한다 그래서 복합어라든지 파생어, 또는 문법형태소로까지 번
져 나아가게 된다. 문화의 반사체로서의 언어의 원형성은 종합문화
의 시기로 거슬러 갈수록 뚜렷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고맙다`
라는 말을 예로 들어 보자. 이 형태소를 쪼개 보면 '고마+-ㅂ다
가 되는데 '당신은 고마와 같이 은혜로운 사람이다' 라는 역사
적인 뜻으로 되풀 수 있다. 여기서 '고마' 는 무엇인가. ((삼국유사1,
의 기록에 나오는바, 단군의 어머니 신인 곰을 뜻한다. 동물
상징으로는 곰이요, 용이요, 거 북이지만, 본디는 물과 땅의 신이요
생산을 맡고 있는 여성신, 곧 지모신 (地母神)이다. 그러니까 단군
이 제사를 모셔 배달겨레의 번영과 넉넉한 생산을 빌던 대상신이
곧 고마였던 것이다.
이러한 제천의식을 드러내는 원형적인 의미와 형태로서의 '고마'
가 오늘날 '고맙다'와 같은 형용사나 '꼬마'와 같은 명사에 화석처
럼 남아 쓰이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단군만 해도 그렇다. 제
사장이자 행정의 우두머리였던 '단군'은 지금에 와서는 방언에 따
라 다르지만 전라도 지 역어에서는 '당골' 혹은 '단골레'라고 하여
무당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어쨌든 제천시대의 종합문화를
대표할 만한 대상들이 변천하여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의 기
본을 이루고 있음은 언어가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문화의 반사체로서의 말은 잠재 의식이나 개념을 언어에게
옮겨 줌으로써 낱말겨레의 분절, 언어적 사고의 유추, 가정에 대한
주요한 실마리를 마련해 준다
이를테면 땅 이름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신라가 경주 중심의 문
화를 이루고 한반도를 통일한 뒤 경덕왕 때 땅 이름을 -주. -군 ' -
현의 틀로 바꾼 일이 있었다 이리하여 서라벌에 담긴 새롭다는 뜻
을 나타내려는 정치사회의 의지가 상당한 지명에 투사된다. 예를
들어 '草. 東. 金. 新. 鳥. 鐵. 牛. 理' 등의 한자로 표기되는바, 고
쳐진 지명은 거의가 새 롭다의 의미를 투영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소리와 소리의 관계에서 목청의 울림이 큰 소리가 작은 소리
에 영향을 주어 소리의 변동을 일으키듯이, 문화와 문화의 관계에
서도 가장 영향력이 있는 문화의 유형이나 세력이 그렇지 못한 쪽
에 영향을 주어 투사되는 경우가 많다
언어기호를 문화의 투사체로 보는 입장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
면, 문화는 곧 인간정신이 가져온 결파로서 당연히 인간의 언어적
상상력의 바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종족의 보존과
번영을 꾀하는 데 직간접으로 결정적 구실을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이 곧 인간의 현실 그 자체는 아니어도 현실에
바탕을 둘 때에만 개연성을 지닐 수 있는 만큼 언어에 반영되는 상
상은 다분히 현실적이다. 언 어기호가 환기하는 인간의 상상력은 크
게 정서적인 것과 지시적인 것 (상징)으로 나누어진다. 앞의 경우는
주로 문학적인 표현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뒤의 경우는 실용적이
거나 논리적인 표현에서 흔히 만나게 된다. 언어의 정서적인 기능
은 낱말 하나하나로서도 드러나지만 하나의 문장 안에서 연상(聯
작용을 통하여도 나타난다
데카르트 집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 로서 규정하였거니
와 인간이 생각한 바는 거의 언어로 드러난다. 언어의 내용은 사람
들의 생각이요 느낌이기 때문에 언어와 상상은 서로 데어 놓을 수
없다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이 어느 지역이나 특정한 시기에 보편
성을 얻었을 때, 반대로 특정한 집단의 보편성이 개개인의 특수성
과 서로 어울릴 싸 이른바 문화의 싹이 트게 되는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내용으로 하고, 언어는 인간의 사고작용(정신활
동)과 감각을 드러내는 것이니, 언어는 문화를 반명할 수밖에 없
다. 개인의 문화란 말은 쓰지 않는다. 흔히 어느 집단이 이룬 정신
활동의 집합을 문화라고 하는 만큼, 사회 구성원의 약속인 언어기
호를 바탕으로 하는 상상력은 당연히 문화를 뿌리로 하여 덛어 나
아간다.
2. 땅과 존재
2-I. 굿파 혈거생활
어떤 일에 회망을 걸거나 몹시 기대하는 것을 희롱하는 투로 얘
기할 때, '굿에 간 어미 기다리듯 한다'고 한다 굿을 치르면 그에
따르는 이바지 물건이 있기 때문이다.
새에게는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에게는 굴이 있듯이 우리 사람도
문화가 발달하기 이전에는, 모두가 굴살이(혈거)를 하였으며
다시 굴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였다. '굴살이'에서 '굴' 은 '굿'
과 같은 의미로 쓰이다가 지금은 다른 뜻으로 굳어진 말이다. 두
말을 비교해 보면 음절.구조는 같고 다만 받침이 다른데, 받침 소
리가 시옷(ㅅ)에서 디굳(ㄷ)으로, 다시 리을(ㄹ)로 넘나드는 변이
형태는 우리말에서 흔히 발견된다.
무당이 노래나 춤을 추며 귀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의식이나, 연
극과 같이 여러 사람이 모여 떠드는 볼 만한 구경거리를 통틀어
'굿'으로 정의한다. 또는 구덩이가 줄어서 변한 말로서 묘를 쏠 때
에 구덩이 안에 널이 들어갈 만큼 잘 다듬어 놓은 속 구덩이를 '굿'
이라고도 하는데, 구덩이가 무너지지 않도록 단속하는 일을 일러 '굿
단속한다' 고도 한다. 지금도 방언에 따라서는 '소구시' 라는 말이
쓰이는데 (상주 지역 등) 소먹이 통을 뜻한다. 강원도 지방에서는 혼
히 '구유. 구융'이라고 하는바, 모두가 '굿'의 변이형태로 보면 무
리가 없을 듯하다. 그러니까 '굿/굳/굴' 은 하나의 단어족을 이루
어서 쓰인 말인데, 이들 형태들은 배달겨레가 혈거생활(굴살이)을
했던 까닭에 그것이 언어적으로 투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당시
는 '굴(굿/굳)'이 곧 삶의 보금자리였으니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굿'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낱말의 떼 (단어족)는 뒤에 살펴
보기로 하고, 먼저 굴살이와 관련한 옛적 문헌에 대하여 대강을 알
아보도록 한다.
우리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 ((삼국유사),의 기록들인데 먼저 단
군신화의 경우, 한 마리의 호랑이와 한 마리의 곰이 같은 굴에서 살
면서 [同穴而居]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환응신에게 빌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호랑이와 곰은 신화학적으로 보아 각각의 부족을
상징한다는 풀이도 있거니와 일종의 토템신이기도 하다 곰은 '곰/
고마'로 표기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고마(곰)'은 태음신으로서 물
과 땅, 결국은 생산을 주재하는 여성신이었으며, 환응은 니 마(님>
임)'계의 태양신으로 하늘과 불을 다스리는 제우스격의 신이었으니,
님과 곰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단군왕검이었던 것 이다. 태
어난 곳이 바로 굴이었고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장소도 굴이었으며
부족을 다스리는 공간(관청)도 굴의 형태였으니 '굴'은 모든 삶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공간이었다. (석보상절), 같은 중세어 자료에는
관청을 '구위'라고 하였는바, '굿>구위'의 변모과정을 거쳐서 된
말로 보인다. 시옷(ㅅ)이 반치음(△)으로 읽히다가 아예 음운의 탈
락이 일어나고 한 음절이 덧붙어 '구위'가 된 것이다 (삼국유사),
의 고구려조에 해모수가 유화를 압록강변의 굴에 감금하고
햇빛을 쬐어 잉태하게 한다는 기록도 역시 굴과 무관하지 않다. {(고
구려국본기,, 에 따르면 삼신을 제사함에 있어 굉양의 기 림굴(끄林
篇)에서 제사를 모셨으며, 맞이하는 의식은 무덤과 같은 굴(수혈 ;
隱穴)에서 행하였다고 한다.
한편 중국의 문헌에서는 어떠한가 ((후한서 (後舊書)),에는 동이
전(東夷傳) 조의 일부분에서 '성곽을 쌓지 않고 흙으로 방을 만들었
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파 같고(室形如舊) 그 위에다 문을 만들
었다'고 하였으며, {(삼국지), 에는 '큰 집은 굴의 사다리 아흡 개를 놓
아야 들어갈 만하고 깊이가 깊을수록 좋다(常穴房大家澤九構以多爲
好)' 고 하였으며, {(진서 에는 동이전 부분에서 '여름에는 나
무 위에서 살고 겨울이면 굴속에서 산다(夏則舊居冬則穴處)'고 하
였다. 이산의 기록들로 _=_아?_ 우리 서조들이 굴살이를 하였던 것
은 분명하다.
박용숙의 {(한국의 시원사상), (1987)에 따르면, 여기 무덤과 같은
굴은 일종의 거룩한 성역이요, 그런 굴은 성전이었으니 이를
테면 하늘신을 제사하는 스투파 곧 절대적인 탑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소도(蘇塗)라는 종교적인 성역에
큰 나무를 세우고 가지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겼다고 했
다. (삼국지)등에서는 '소도'를 불가에서의 부도(浮居)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의 장군총이나 광개토왕의 묘는 그 자체가
곧 소도였다. 지금도 무당의 집에 성황목(城皇木)을 세우는데, 이
는 소도의 퇴화한 화석과 같은 것이며 약식화한 상징물포 보면 된
다.
(삼국유사),의 석탈해조에 탈해가 토함산에 올라 돌무덤을
지어 약 7일을 거기에서 살면서 왕성의 터를 물색하였다고 하니,
돌무덤이 곧 신전이 아닐까 한다. 고대의 신전이란 천문지리라든가
시간과 방향을 측정하는 공간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바,
신과 교통하는 영험스러운 장소였다. 글자의 발달과정을 보면 고
(古) 자도 신전을 뜻하였다. 백천정 (白川靜)은 다음의 두 가지로 풀
이한다 하나는, 신전과 그 내부의 모습으로 신상을 모신 집안에서
제사장이 여러 가지 제단 위에 제기를 벌여 놓고 예배를 드리는 광
경이라는 것이다. 즉, (덮개.움막) + (물)+(그릇) +(제사
장)十(음양의 접합)-舊이다. 다른 하나는, 신전의 모양은 드러
나지 않지만 장막이 드리워진 상자 속에 우상이 앉아 있는 형상이
라는 풀이이다. 즉, (그릇)+(장막) +古(우상)-圍이다. 결국
글자의 모양이 간추려지는 과정에서 모시는 대상의 뜻만 남아 古로
쓰이게 되었으니 본래는 신전을 드러낸 글자였다는 것이다. 그 신
전이 바로 굴의 형태로 상징되었다
'굴'과 연관되는 낱말 겨레들은 어떻게 발달해 나갔는지를 좀더
알아보도록 한다. 지금은 무당이 치성 을리는 의식을 '굿` 이라고 하
지만, 제정일치 시대에는 '굿' 이 국가적 차원에서 신을 제사하는
대회 (國中大會)로 치러졌으며, 제사를 모시는 사람도 부족의 통치
자이자 제사장이었으니 지금 서양의 교황에 맞먹는 구실을 하는 인
물이었던 것 이다. 제사를 모시는 신전은 거룩한 장소로, 오늘날의
'굴'과 같은 공간이었다. 공간을 조금 확대하면 거룩한 숲(聖林 ;
) 으로서 산과 교통하는 장소였고, 공간을 축소하면 속은
굴이지만 겉으로는 솟아 있는 '소도(蘇塗 ;)' 였다. 오늘날에
도 소수 남아 있는 국사당t國師棠)이나 심지어는 절간이나 기독교
의 교회당이 모두 높은 곳에 자리를 잠고 있는 것도 이 '소도'의
특성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요컨대 '굴'은 '궂/굳'과 같은 의
미로 쓰였는데, 증세어로 오면 그 의미가 갈라져 쓰이게 된다. 그
중 '굳'은 단독으로 쓰일 수 없는 형태지만 분화의 모습을 살펴 보
기 위하여 함께 비교해 보기로 한다
'굴/굿/굳'의 의미와 낱말겨레
1) 굴-의 미- 땅이나 바위의 깊숙히 파인 곳. 흑은 산이나 땅
속을 인공적으로 길게 뚫어 만든 공간
[관련형태] 구르다, 구름, 구렁이 (굴헝 十이>구렁이), 구렁말[栗
色馬], 구레, 구리 (굴+이>구리 ; 굴에서 나온 것), 구리다[굴(구
멍)+-이다>구리다], 꾸리, 꿀(굴>꿀), 굴(굴의 모양을 한 바
닷조개), 굴다리, 굴대, 굴레, 굴렁쇠, 굴러다니다, 굴림대 등.
2) 굿-[의미] 잡귀나 불행을 피하기 위하여 무당이 노래.춤으
로 치성 올리는 일. 무덤 속 널이 들어갈 만큼의 속구덩이.
[관련형태] 굿것, 굿드리, 굿바얌(굿뱀 ; 土桃蛇-{유씨명), 구
슬(-굴의 모양이 둥근 데서 연유), 구석 (방언에서는 구시.구
역), 구실[굿+일>굿일>구실(稅役 ; 굿을 위한 부역과 물자)]
굿거리, 굿막(광부들이 연장을 두기 위하여 구덩이 밖에 지은 집),
굿병 (광산의 굴 안에서 생기는 병), 굿옷(굴 안에서 입는 작업
복), 구스르다 등.
3) 굳-[의미] 굴. 땅을 우묵하고 깊게 파 놓은 곳
[관련형태] 굳복(굴 안에서 입는 옷), 굳잠(깊은 잡), 굳다, 굳
세다, 굳어지다, 구들(구들골), 구들목, 구들미, 구들장, 구데기
(굳+에기 >구데기), 구덩이, 구덕구덕 (-어떤 모양의 굴이든 단
단하게 만들어야 그 안에 들어가 살 수 있으니까), 구두질(구들
을 뜯어 다시 놓는 일) 등.
이상의 판련된 형태 가운데에는 두음이 바뀌거나(굿굿하다>꿋꿋
하다, 구들구들>꾸들꾸들), 말음이 바뀌어(긋-궂다) 새로운 어휘
를 생산하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본 '굴/굿/굳'은 모음이 바뀌
어 양성모음계의 형태로 이어지기 도 한다. 예컨대 '골/곳/곧' 이
그것이다. 음성모음계의 '굴/굿/굳' 이 내면의 잘 보이지 않는 공
간이라면, 양성모음계의 '골/곳/곧' 은 보다 환하고 겉으로 드러
나는 장소를 이른다. 이들의 의미와 분화형태를 알아 보면 다음과
같다.
'골/곳/곧'의 의미와 날말겨레
4) 골- [의미 ] 물체에 얕게 파인 긴 흠과 같은 줄, 또는 그런모
양으로 된 금. 지명 (밤나무골 가마골 ; 고구려의 '-홀(忽)'계와
같은 뜻으로 보임).
[관련형태 ] 골감, 골갈이, 골골샅샅, 골갱이 (밭에서 쓰는 살써
레의 한가지), 골바람, 골목, 골방, 고랑(두둑 사이의 길고 좁게
파인 곳), 쇠고랑, 고랑창(물이 있는 좁고 깊은 고랑), 고로록고
로록(목구멍에서 나는 소리의 한 가지), 고름(곪아서 생기는 것),
고름(옷고름), 고름하다(골막하다) 등
5) 곳-[의미 ] 일정한 자리나 지 역. 이수(里數)의 단위(완전명사]
로서의 독립성이 거의 없는 의존적인 형 태임).
[관련형태] 곳(>곶>꽃 ; <월석> 1-9), 곳갈(>곶갈, ((초두헤,,
7-2I), 곳광이 ((한청), 3IOb), 곶의, 곶(>꽃 ;위로 솟고
좁은 골이 졌으니까) 등
6) 곧-[의미 ] 곳((용가), 26). 바(((석보), 6-7). 일정한 장소
[관련형태] 고둥(곧+-웅>고둥, 소라 우렁이와 같은 것의 총
칭), 고달(송곳 따위의 자루에 박홴 부분), 고달이 (노끈 등으로
고리처립 만든 것), 산고뎅이 (산꼭데기), 고두리 (물건 끝의 뭉툭
한 곳), 고드름(얼음이 아래로 길게 얼어붙은 것) 등.
앞에서 예를 보인 음성모음계의. '굴/굿/굳'과 양성모음계의 '골
/곳/곧'등은 여기에서 그 가지벌음이 끝나지 않고 중성모음계의
'길/깃/긷'으로 낱말의 떼를 형성해 나간다. 여기에서 풀이하고
있는 양성과 음성, 그리고 중성모음의 대립이나 자음의 교체 현상
이 모든 형태에서 다 발견되는 구조는 아니다. 그러면 '길/깃/긷'
계의 낱말들이 어떻게 가지를 벋어 나아갔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우
선 '길-' 계를 살펴보자
'길/깃(짓)/긷' 의미와 낱말겨레
7) 길-[의미]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 도중. 두루마기.저
고리 따위의 섶과 무 사이의 그 옷의 주장이 되는 넓고 큰 폭. 광
산 구덩이의 통로, 키의 높이
[관련형태 ] 갈갈래 (광산 구덩이 안의 이리저리 통하는 길), 길갈
림, 길길이 (물건이 높이 쌓인 모양), 길동무, 길마(소의 등에 얹
어 짐을 싣는 안장 ; 보금자리 또는 날개와 같은 도구에 해당함),
길들다(짐승을 잘 가르쳐서 부리기에 뭉게 되거나 잘 따르게 되
다), 길속(전문적인 일의 속내, 특정한 공간이나 영역) 등.
길은 사람이 다니는 통로요, 삶의 본거지이다. 서로는 한 길에서
만났다가 자신의 일이 끝나면 다시 헤어지게 되어 있다. 어찌 보면
사람은 나그네 속성을 갖고 있어서, 늘 길을 걸으며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이 걸었든 안 걸었든 자기의 길을 걸어 가야 한다. 군인
은 군인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정치인은 정 치인대 로, 모두가 그
나름의 길이 있다. 보이는 길이 있는가 하면 전혀 보이지 않는 길
이 있 어, 죽음에 이른 뒤까지도 우리 인생의 길은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도 한다. 번연 은 <천로역정 >,
이란 글에서 영흔이 하늘의 길을 가는 미래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진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
해주고 있지 않았던가
우리 배달겨레의 경우, 겨레와 올바른 삶의 도리를 위하여 끊임
없이 순국하는 정신, 순교하는 정신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 간 선지
자들을 쉽게 기억할 수 있다. '길' 은 '굴' 도 아니요, '골' 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통로요, 삶의 여로인 것이다. '굴'이 보이지는 않으
나 신전을 모시던 제단이요, 보통 사람들의 삶의 보금자리였다면,
`골'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겉으로 튀어나온 모습
을 한 공간이었다 결국 '길'은 굴과 골의 공간을 오고 가도록 만들
어진 굴과 골의 연결통로라고 할 것이다.
다음에는 깃-'계의 의미와 낱말겨레를 살펴 보도록 하자.
8) 깃-[의미] 짚이나 대싸리로 바구니 비슷하게 만든 등우리(깃
爲巢 ; {훈례). 새 날개에 달린 털. 짐승 우리에 까는 짚이나 마
른 풀(새집 ; {(훈몽,, 하 7). 차지할 자신의 몫
[관련형태 ] 깃다(풀이 무성하다), 깃것 [깃옷 : 졸곡(卒哭) 때까지
상제가 입는, 생 무명이나 광목으로 지은 상복], 깃고대, 깃깃다
(깃들이다 ; {(초두해), 9-2o), 깃들다, 깃털, 깃 (어린 아이의 포대
기 ; (삼강), 열 3l), 깃목숨(남은 목숨 ; (보권문), 39), 깃그다(기
쁘다, 가장 좋은 곳은 집이니까), 기숫잇 (궁중에서 이불을 덮는
횐 보자기), 기숭('구유'의 강원도 방언, 궂. 굴과도 같은 뜻으로
통용됨), 기음(논밭의 풀 ; 일종의 숲의 뜻으로 쓰이며 방언에서는
기심), 기저귀 (깃'의 어말자음이 파찰음화한 형태), 짓다(깃'
이 구개음화한 형태) 등.
위의 보기에서 (훈몽자회), (훈민정음해례본), 등 중세어 자료를 보
면 깃' 은 새의 보금자리를 뜻하는 둥우리와 같은 형태이며 '기숭'
은 강원도 방언으로 구유와 같이 움푹하게 들어간 곳을 말하고, 기
숫잇은 덮는 보자기의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보기들로 보아, 깃이 굴이나 골이 드러내는 '굴살이' 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진서), 동이전 (東夷傳) 에 보면 '여
름에는 나무 위에서 살고, 겨울이면 굴 속에서 산다(夏則렸居冬則
穴處)'고 하였으니,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선조들도 새와 같
이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았음을 엿볼 수 있다 굿과 깃, 다시 말
해 굴과 나무는 소도(蘇塗)의 계절 변화에 따른 형태임을 짐작하게
된다. <단군>의 기록에서 '신단수(神壇樹)'가 나오는바, 그 나무는
신을 상징하는 성황목(城皇木)으로 거룩한 신전의 공간이 그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군의 어머니가 그 신전에서 빌어 잉태를 하
였으니 계절로는 겨울이 아닌 여름이었을 것이다. 웅녀가 살았던
공간은 굴이었으니 그곳은 시련의 도장이요, 이미 조건화되어 제의
를 통과하면 신분변동이 일어나는 성지 (聖地)였다. 인도의 불교가
보이고 있는 탑문화 와 비슷한 속성을 갖고 있다
집을 세우는 동작, 재료로 무엇을 만들어 이루는 일을 통틀어 '짓
다. 라고 한다. 짓다'는 깃다'의 깃'이 구개음화하여 된 말로 오
늘날에도 물건을 만드는 것을 이른다. 원래는 삶의 보금자리를 만드
는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수풀은 곧 보금자리였고 삶의 조
건을 해결하는 곳이었다. 숲이 삶의 터전이었으니 거기에 보금자리
를 만들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우에 따라서 보금자리로서 깃'은
삶의 안식처요, 피난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같은 겨레가 모여 만
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다시 모여드는 자리, 삶과 죽음, 젊음
과 늙음의 바탕을 이루는 터전이었으니 말이다. 짐의 의미로부터
가지가 벋어 새의 날개 깃이라든가 옷깃과 같은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던 것 이다. 짓다'의 짓'과 연관을 보이는 말들의 겨레와 그
문헌 자료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9) 짓_[의미] 일을 행하는 노릇. 깃[깃 우(羽) ; <훈몽> 하 3].
집 [어즈러온 짓 (逆家), (내훈) I-77].
[관련형태] 짓거리 (홍겨워 하는 짓), 짓다, 짓내다, 짓두돌기다,
짓둥이 등
짓' 이 집의 의미로 쓰인 <내훈>의 경우를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
다. 깃을 숲이라 하였고, 숲은 바로 삶의 터전이요, 거기에 보금자
리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결국 플과 나무, 굴 속의 어떤 장소에
보금자리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풀을 '김' 이라고 하는데 오늘
날 반찬으로 먹는 김도 바로 바다에서 생산되는 플인 것이다.
집을 만드는 재료로서 김 ' 곧 풀을 빼 놓을 수가 없었으니 김과 집
은 서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김'은 방언에 '기심/지심,/
짐'으로 쓰이는데 집과 관련되는 형태는 '짐'으로 생각할 수 있다.
풀 곧.짐'으로 사람 사는 '집'을 만들었으니 '짐/집'은 같은 겨
레의 낱말로 볼 수 있다. 어말자음이 교체되어 '짐' 은 풀섶이요 재
료인데 '집'은 그것을 재료로 만들어 놓은 짓/집'이 되 었으니, 혈
거생팔을 하던 시대에 풀, 나무를 이용하여 살 보금자리를 만들던
습속이 언어 속에 메아리처럼 깃들어 쓰여지면서 오늘날의 집, 곧
주택문화에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길/깃/긷'계에서 마지막으로 '긷'의 의미와 형태, 쓰이는 분
포에 대하여 살되 보자.
10) 긷_[의미 ] 기둥(긷爲柱 ; (훈례), / 네긷 寶帳이잇고 ; (월석),
8-l9). 그룻
[관련형태] 긷다(우물이나 내 같은 데에서 물을 퍼서 그릇에 담
다), 깃들이다, 긷티다((내 훈), 1-58), 긷그다(왜해,상 21), 기
들오다(기다리다 ; (초두해) 21-3; 집으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
리니까), 기둥, 기둥서방, 기등뿌리 등
집과 관련된다는 점에서는 '깃'과 대동소이하다. '깃'이 보금자리
요, 둥우리라면 '긷'은 넨'을 받쳐 주는 받침나무요, 보금자리와
비슷한 그릇을 나타낸다. 앞의 보기에서 '기다리다' 를 증세어 자료
.기들오다'와 연계지은 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
니까 그렇게 본 하나의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기들오다'의 형태
를 긷 十_을十오다>기들오다'의 과정으로 풀어 본 것이다. 어버이
가 집을 나간 자식을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요, 어린 자식들이 어
버이를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루에 배를 놓아 먼 곳으로 가
버린 임을 그리는 <서경별곡>의 주제도 기다림의 미학에 있는 것이
다. 우리는 그립고 안타깝고 아름다운 공간과 시간을 만들며, 모두
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삶의 보금자리를 빚어 나아가야 한다. 그 거
룩한 소명이 있기에 우리는 어려운 삶의 고비를 끈기 있게 넘겨 나
아가는 것이다.
2-2. 고마움과 태음신(太陰神)
흔히 우리들은 고마움에 대한 표현으로 '감사합니다' 또는 '고맙
습니다/고맙다'는 말을 한다. 앞의 것은 한자어 계통의 말이고 뒤
의 표현들은 고유어 계통의 말이다. '2-3. 믿음과 대지'에서도 다
시 제기되겠지만, 이 중 고마움과, 신과 인간을 섬기는 문제에 대하
여 살펴 보기로 한다. '고맙다'는 그 됨됨이를 풀어 보면, '고마+
-ㅂ다' 와 같다. 이때 '고마 는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나오는
말로, 두 음절로 쓰이면, '고마'요, 한 음절로 줄어 쓰이면 '곰'이
되는 것이다. 소박하게 '곰/고마'를 짐승인 곰으로만 보면 그저 그
뿐이겠으나, 신화학의 통설을 따라 가지 않더라도 상징적인 표상임
을 간과할 수 없다. 한마디로 '고마'는 물과 땅과 여성 등으로 일
컬어지는 태음신 (太陰神)으로, 니마/님(>임)'으로 표상되는 태양
신 (太陽神) 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였다고 하겠다(필자의 책 <낱말
의 형태와 의미>, 1988)
중근세어의 자료로 미루어 보아 '고마'는 '신(神). 크다. 많다.
곰. 뒤. 구멍 소리 및깔. 물. 첩. 깃발 거북' 과 같은 복합적인
뜻을 드러낸다. 신이라면 태음신이요, 방위로는 뒤 곧 북방이 된
다. 빛깔로는 검은색, 별로는 북두칠성, 계절로는 겨울, 소리로는
후음(목구멍 소리), 깃발로는 후군(後軍)으로 상징된다. 성으로는
여성이 되어 생산과 주거와 물과 소리의 통제자 역할을 담당한다.
중세어 자료에서 '고마'는 첩의 의미로 쓰인 경우도 나타나는데 이
는 신앙의 대상에서 아끼고 그리워하는 여인으로 위상이 전락해 버
린 경우라고 할 것이다 현대어로 오면서 어두자음이 된소리되기를
따라 귀엽고 어린 아이를 애칭으로 '꼬마'라 함도 고마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고마'는 우리 조상들이 숭배하던 신이었음을 지적하였다.
쓰이는 형태에 따라서 I 음절어, 2음절어의 형태가 지명자료라든가
고문헌에서 검증된다. 1 음절어의 형태로는 '곰/감/금' 과 같은 것
이 있으며, 2 음절어의 형태로는 '고마/구마/개마/가마' 등의 형
태가 있다. 일본어에서 신 (神)을 뜻하는 말인 '가미' 도 우리말
'곰/감'의 변이형으로 보인다. 주로 한자로 표기되었던 지명을 증
심으로 보면, I음절 형태에는 '.龜. 黑. 漆. 釜'와 같은 뜻
을 중심으로 나타내는 훈차(訓舊) 계열의 한자가 쓰였으며, 2 음절
형태로는 '金馬. 甘勿. 舊廊. 古莫 加莫 久麻 蓋馬 乾馬' 등의
한자표기들이 확인된다. '고마' 계열의 지명은 거의가 물의 북쪽이
나 뒷편에 있는 장소에 붙여진 이름들이다
'곰' 또는 '감'의 변이형들이 관련되어 쓰인 낱말들로는 '고마(고
맙다.고마하다), 검 (검다 거미 검어리), 감[감감하다(>깜깜하
다). 가물가물. 가물], 금(그믐. 금적이다), 굼(굼다. 굼벙이 구
멍. 굼틀대다)' 등이 있다. 이 중 '고마. 검' 계열의 단어들이 가장
폭넓은 분포를 보인다
'고마' 는 태음신을, 니마' 는 태양신을 드러내면서 대립개념으로
쓰인다고 하였다. '니마'는 말 그대로 '고마'에 대립적인 표상으로
서 태양. 앞. 붉은색. 불. 남성. 여름. 헛소리. 군왕. 남칠성.
낮. 벌판'의 뜻으로 쓰인다. 필자는 단군왕검이 바로 '고마/니마'
와 연관됨을 지적한 일이 있다. '단군'은 비는 제사장이고, '왕검'
은 '님금'으로서 님 (니마 ;태양신)十금 (고마 ;태음신)'으로 풀이
된다. 결국은 태양신 '니마(님>임)'와 태음신 '고마(>곰)'에 제
사지냈던 부족 대표자가 단군왕검이라고 보는 것이다.
단군왕검에서 단군은 후대에 내려 오면서 아예 쓰이지 않게 되고
빌고 숭배하는 대상으로서의 '니마'와 '고마'가 제사장 곧 통치자
를 상징하는 말인 님금(>임금)'이 되어 버렸다. 단군은 본래 '단
골' 이라고 읽었으니 지금은 '단골집. 단골서리' 등의 말에서나 화
석처럼 그 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방언, 특히 전라도 지역
어에서 무당을 지금도 당골 흑은 당골레라고 쓰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단군'이란 말 속에 담긴 제사를 모시는 제사장이라는 뜻이 아
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하겠다. 말이란 쓰이는 정도의 차이
가 있을 뿐 갑자기 블쑥 나타났다가 훌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경
우에 따라서는 아주 오랫동안 쓰이거나 어떤 지역에서만 쓰이는 수
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좋은 보기라고 할 것이다.
비는 사람을 제사장 '단골(당골/당골레)'이라고 하였는데, 이때
'빌다' 는 칠성신앙이 비는 동작으로 투영된 것이라고 본다. 말의 됨
됨이를 보면 빌 十-다>빌다'로 플이할 수 있다. 여기서 '빌'은 광
명의 실체로서의 별'을 뜻하는 말이다. 빌'을 별'에서 비롯된 것
으로 볼 수 있는 근거를 살펴 보자. 방언자료에서 강원도(고성. 통
천. 장전), 경북(봉화. 문경. 예천. 상주. 의성. 포항 염천 `. 김
천.금릉. 달성), 경남(창녕) 등의 지 역에서는 별을 빌로
읽고 쓰는 일이 많이 있다. 이와 함께 (삼국사기), 권 34에 보면 그
런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빌다'가 별에서 비롯되
었다는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고마'는 북두칠성으로 니마(>이마
>임)' 는 남칠성으로서 별 (광명)로 대표되는 신을 믿었던 신앙이 우
리말에 끈질기게 반영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하나같이 광명
정신 곧 태양숭배로 이어지는 맥을 짚을 수 있음은 우연의 일이 이
니다. 모든 빛은 태양에서 말미암으니까.
'믿음'은 대지를 밑으로 하는 동작을 드러내는 '믿다'에서 갈라
져 나은 말이다. 배달겨레의 전통적인 믿음의 대상은 태양신 '님'과
태음신 '고마'였으니 하늘과 땅으로 이어지는 자연에 대한 신앙이
요, 친화사상이 잘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목숨은 본디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 나무의 뿌리에서 서로 가지가 다르게 벋듯이 나는 사
람, 그대는 짐승 혹은 플과 꿎으로서 삶의 한 주기를 살다가 가는
것이다. 보잘것없다고 여겨지는 플벌레 한 마리도 반드시 사람을
위하여 태 어났다가 죽어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같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같은 목숨을 타고 나서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하여 살
아 갈 뿐,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다. 환경에 적응하면 살아남
고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요, 자연스러운 질
서인 것이다. 구태여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만이 절대자의 가호를
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같은 공간에서 삶을 함께하는 이상 서로
는 존중하고 감사하면서 고마운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지
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밑바닥으로 Io킬로미터를 못 가서, 우리의 상
상을 뛰어넘는 뜨거운 불덩어리가 그 무엇을 위하여
이글거리며 타고 있지 않은가. 삶과 죽음의 연속선을 우리의 관념
으로써 아주 정확하게 한계를 긋기란 매우 힘드는 노릇이다. 현대과
학에서 생명의 기원을 이른바 수층기원 (水層起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말 그대로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생
명은 물과 땅의 신인 '고마'가 태양신 '니마'와 더불어 함께 만들
어 낸 최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존재론적으로 생명에 대하여 끊
임없이 정의하고 속성을 규정하지만, 분명 지구가 하나인 것처럼 생
명은 하나다. 죽음과 삶도 생명의 말미암음을 보면 서로 둘이 아니
요 하나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들은 단군의 아버지 환웅(舊雄)이
하늘에서 환인(琢因)으로부터 받았다는 천부인(天符印)에 실린 뜻
이요, 최치원 선생에 의하여 81자로 적혀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
(천부경 (天符經) 에 담긴 뜻이다. 거기에서도 '모든 것은 가고 또
온다(萬往萬來)' 고 하였거니와 시작과 끝은 서로를 향한 조화로움을
잃지 않으면서 하늘의 섭리를 실상으로 이루어 내곤 한다. 절대자
와 대자연에 대한 고마움으로 우리의 삶이 충만하도록 힘써 간다면
바로 그러한 시간과 공간은 하늘의 시간이요 공간이며, 하늘의 백
성이 되는 첩경이 되지 않겠는가. 목숨이 하나일진대 그에 수반하
는 모든 것은 단지 부속 가치일 뿐. 예부터 성현들이 겉옷을 달라
거든 속옷까지 주라고 한 것이나, 모든 존재를 허무로부터 설명한
것이나, 그 기본 정신은 평등과 화합으로 이 땅에 천국을 실현하는
것이다. 단군왕검의 홍익인간이 곧 평화주의요, 인본주의라는 점도
그 후예로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배 달겨레에게는 암시하는 바가
크지 많을까.
2-3. 믿음과 대지
분명히 잘 되어 가려니 하고 믿고 있던 일에서나, 그런 사람으로
부터 뜻밖에 어떠한 낭패를 당할 경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고 한다. 또는 믿는 나무에 곰이 핀다'고 이르기도 한다. 반드시
어떻게 되리라고 여기는 마음을 흔히 믿음으로 정의한다. 믿음의
의미적 특성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관계'를 필요층분 조건
으로 삼는다. 믿음은 흔히 약속으로 이어진다. 여러 가지의 행위가
있는데 특히 언어행위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 음성적 기호
를 매개로 하는 계약성을 기초로 한다. 언어의 계약성은 아리스토
벨레스 로부터 비롯되어 소쉬르 에 와서 이른바
자의성 (恣意性)으로 요약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언어의 계약성과
함께 인간관계에서 드러나는 믿음의식이란 어떤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동과 서를 불구하고 믿음이란 언어 이전의 생활이
며 삶의 뿌리와도 같은 것이다. 믿음이란 인간생활에 있어 필요하
고도 충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존엄의 주촛돌과도 같은
근거로서의 '믿음'은 자연을 두렵게 여기는 자연외경 (自料畏敬)에
서 시작되어 제도적인 차원의 법조문이나 언어나 종교와 같은 문화
현상으로 되비치어 발돋움을 하였다
믿음이란 낱말을 중심으로 하여 욱리 민족의 가치판이 어떻게 언
어적으로 반영되었는가를 알아 보는 일은 낱말의 밭 이라
는 관점에서뿐 아니라 일반적 관점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
을 것이다. '우리'란 말이 보여 주듯이 참으로 운명공동체로서의 우
리 겨레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중요한 믿음이 전제되고 있다. '사람
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하거니와 우리 인간 사이에 기본적인 믿음이
허물어겼을 때 쓰는 말이다. '우리'란 말은 본래 소 우리, 돼지 우
리라고 할 때의 '우리'에서 비롯된 말로 이처럼 처음에는 공간 명
사로 쓰이다가 후에 복수 인칭을 나타내는 대명사로 쓰이게 된 것
이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는 '울+이>우리'로서 워낙은 몸을 둘
러싼 울타리와 같은 것, 말하자면 너와 나의 공간을 뜻하였다. 이때
'울'은 '웃'의 시옷(ㅅ)받침이 리을(ㄹ)르 바뀌어 된 말인바, 그 원
초적인 의미는 몸에 걸치는 옷과 바탕을 같이하고 있다고 하겠다.
'믿음'은 '믿다'란 말에서 온 명사로 믿는 동작이 명사화해서 된
말이다. '믿다'는 사전적인 의미로 볼 때, 인정. 감정. 의지. 바람.
쓰임. 선호 등의 여러 가지 속성으로 풀이된다. 떵다'라는 동사의
지배관계를 만족시키는 대상으로서는 인간과 신 (절대자),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물, 인간과 자기 자신을 들 수 있다
우리말의 발달이란 관점에서 보아, 흔히 명사의 어간에 정동사 어
미 '-다'를 붙여 동사나 형용사를 만들어 내곤 한다. '믿다'의 경
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믿 十-다>믿다' 로 그 생성과정을 풀 수 있
다. 오늘날에는 '믿'이란 형태가 흘로 쓰이지는 않지만, (훈몽자회
(訓蒙字會)와 같은 증세어 자료를 보면 오늘날의 밑'에 해당하는
형태가 바로 '믿'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세어에서 믿' 이 들어가
이루어진 말을 찾아 보기란 어렵지 않다 맏가지(본가지), 믿겨집
(본처), 믿글월 (원문), 믿곧(본고장), 믿나라(본국), 믿성 (본성),
믿얼굴(본질), 믿집 (본집), 믿퍼기 (본기둥), 믿흙(본토)'와 같은 보
기들을 찾을 수 있는바 믿'을 '밑'으로 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믿'은 본래 볼기. 항문, 밑. 밑천 등의 뜻으로 쓰였으며, 중심
이 되는 뜻은 역시 '밑' 으로 보인다. 현대 국어에서 밑 ' 은 어떤 뜻
으로 쓰이는가. 무엇이 있는 자리의 아랫속이나 아래쭉 또는 일의
근본으로 쓰이며, '밑동. 밑구멍. 밑바닥. 밑절미'의 줄임말로서 쓰
이기도 한다. 한마디로 가치기준의 공간적. 시간적. 심리적인 바탕
이라고 하겠는데 땅의 의미로 대표될 수 있다. 중세 어에서는 '믿다'
가 '밋다'로도 표기되었다({(두해),).
믿지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풀어 보면 '믿이 떨어지
다(심층구조)-믿지다(삭제 변형)-믿지다(표층구조)' 와 같이 그 생
성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믿'은 본전 곧 원래의 자본
을 뜻함이 아니겠는가. 밑'은 바탕이요, 근원의 의미로 환치될 수
있다고 하였다. 보다 실체적인 뜻으로 보아서는 그것이 곧 땅이요,
우리가 목숨을 이어가며 무리지어 살고 있는 공간인 것이다. 이러
한 공간의식에 기초하여 믿지다'와 같이 공간성을 가지는 형태소
를 포함하는 새로운 형태의 언어로 발전해 나아간 것이다.
믿음과 관련하여 믿고자 하는 대상 곧 '믿다'의 동작을 층족할 수
있는 대상은 종교적인 절대자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도, 자연물일
수도 있다. 흑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
는 것이다. 믿음은 '믿다'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인바, '[어떤 대상
을] 밑으로 하다(여기다)'의 뜻으로 플이된다. 종교적인 경우 절대
적인 존재로서의 신은 모든 가치의 출발점, 곧 근본이자 종착점인
셈이다. 이를테면. 촐발과 종점이 하나인 원구조를 이루고 있다고나
할까. 실재하는 모든 사물의 아르케가 둥근 원의 모양을 하고
있는 점과 궤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미세한 원형의 세포와
우주의 형태가 서로 같다는 아인슈타인 의 장이론
과 맥을 같이한다고나 할까.
삶은 밑 곧 땅에서 시작되어 생물학적으로 죽음에 이르면 다시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다. 종교적인 믿음의 구경(究竟)을 삶과 죽음
을 통제하는 신의 나라에 두고 있는 것은, 우리 배 달겨레의 언어인
식으로는 절대자가 대지(밑)와 같은 속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믿고 바라는 것이라고 정의되기도 한다
'바람'은 절대자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요, 미래 지향적인
꿈인 것이다. 원래 '미래 (未來)'라고 함은 블가에서는 죽은 뒤에 올
세상의 시간을 일컫는다. 신의 영지, 곧 신의 대지를 그리워하고 절
대자의 섭리를 가장 확고하게 모든 행위에 앞선 가치의 절대기준으
로 삼고 판단의 뿌리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적인 믿음의 바
탕인 것이다. 농경사회에서의 대지란 모든 태어남의 바탕이 됨과
동시에 종착점이 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믿음의식은 사랑의 표현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니 <서
경별곡>의 '信(믿음)이야 그칠 수가 있는가' 하는 데에서 그러한 가
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은 믿음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 다. 믿
음이 없는 곳에 어떻게 사랑이 있겠는가. 시대에 따라서 상이는 표
현이 달라지기는 했으나, 믿음 곧 인간신뢰가 없는 사랑이란, 적어
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한한 사랑으로
가득찬 절대자도 절대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늘 백성이 됨
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의 섭리를 알아차
려 그러한 믿음의 가치인 진리를 토대로 하여 인간은 활동을 전개
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소망으로 일컬어지는 바람은 믿음이 확고할
때 일어나는 감정이며, 영원히 부인할 수 었는 그리움인 것이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대지는 인간에게 무수한 시련과 고통을 주기는
하지만, 우린 하늘과 땅과 신과 인간을 믿기에 하늘이 푸르듯 변함
없는 믿음을 길러가야 하는 것이다. 가족간의 믿음이 그러하고 국
가간의 믿음이 그러하다. 신의가 깨지면 거기에는 배신과 미움과
갈등의 시간과 공간이 전개될 것이다. 때 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가 미더운 존재인가를 살피면서 믿음과 사랑의 공간을 가꾸어 나아
가야 한다
2-4. 땅과 존재
'땅을 파다가 은(銀)을 얻었다'고 한다. 별것 아닌 일을 하다가
뜻밖의 소득을 얻게 된 경우에 쓰는 속담이다. '땅'은 바다를 제외
한 지구의 겉 또는 논밭을 모두 통틀어 이르는 말로서, 흔히 영토
흑은 영지, 특정한 장소 등으로 쓰인다. 한마디로 땅은 공간을 드
러내는 순수한 우리말 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들은 땅이 있음으로써 그 존재가 가능하다 태어나서 목
숨을 거두고, 세대를 이어가는 터전이 바로 땅인 것이다
공간개념으로서의 땅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객관적으로 관찰된
위치. 방향. 대소가 서로 같은 시간에 이루는 상호작용으로 정의되
기도 한다. 한뛴 철학적으로 보면 공간은 시간과 함께 사믈의 체계
를 이루어 내는 기초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공간은 원초적으
로 보아 언어적인 개념이 이 루어지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던 삶의
장소이며 죽음의 터이기도 하다. 하늘에 빗나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그 힘을 숭배하고,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을 보며 탄생과 죽음에 이
르는 별자리의 수를 헤아렸던 곳도 다름 아닌 땅이었던 것이다. 우
리 겨레에게 우리가 살아갈 한반도야말로 삶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숙명적인 공간이라고 하겠다. 단군왕검이 태양신 '니마'와 태음신
'고마'를 향하여 종족의 안녕과 번영을 빌었던 곳이 바로 아사달의
거룩한 성소, 소도(蘇捨)가 아니었던가. 왼시신 앙의 판점에서 보면
바다나 땅은 모두가 하느님의 존재하시는 공간이지만 점차 분화되
어 우리가 사는 '땅' 은 신을 제사하는 신전이 되 었다. 예컨대 오늘
날의 무덤과 같이 생긴 굴 곧 굴은 어떤 통과제의 initiation를 거쳐
특별한 신분의 지도자가 되거나 죽게 되면 다시 돌아가게 되는 영원
한 안식처로서 인식되었던 것이다.
부(富)의 상징이 땅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땅이 소유와 존재의
근거를 마련헤 주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살아 존재하
느냐 죽느냐가 문제'라는 셰 익스피어의 명제는 오늘날에 와서, 특
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갖느냐 못 갖느냐의 문제로 바뀌어 간다.
이러한 소유의 개념은 개인과 개 인, 민족과 민족 사이의 모든 분쟁
의 불써를 지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세상이 무엇인가를 소
유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세상이거나, 사람들의 생존과 생식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존재들의 집 합이라고 하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소유하는 양과 질에 따라서 개인이나 단체 흑은 국가에 계
층아 생기게 마련이고, 아들 계층은 서로가 같고 다른 한계로 인식
되기도 하지 않는가, 땅이란 개념을 대소의 범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크게는 지구 전체의 땅덩이를 하나로 상정할 수도 있으나 이
를 작게 쪼개어 보면 모래알보다도 작은 단위, 먼지와 같은 작은 입
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른바 나늄 separation 과 합일 unification
의 두 상반되는 개념이 바로 땅에서 비롯되는 하나의 중요한 인식
의 준거로도 보인다.
일단 땅 위에 살아 움직이는 가시적인 동작을 하는 동물의 경우,
뛰든지 걷든지 누워 자든지, 아니면 삶의 세계를 벗어나 주검이 되
어 다시 대지의 일부분이 되든지, 언제나 서로가 일정한 부분만큼
땋게 된다. 일러 서로의 닿음이랄까. 돌과 돌이 서로 부딪히면 불
이 일어나고, 나무와 나무가 바람에 서로 심한 마찰이 일어나면 불
이 난다. 우리가 밟고 살아가는 땅, 곧 흙의 셍성과정을 상기해 보
자.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식으면 흘러 가다가 굳는다. 그것은
다시 퐁화작용을 따라 부스러져 부드러운 흙이 되고, 그것이 생명
체들의 삶의 보금자리가 된다.
원천적으로 모든 힘이 태양의 에너지로부터 비롯한다는 진제를
받아들인다면 살아 가는 생명현상 자체도 일종의 연소현상의 한 변
이형태로 보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연소현상은 느린 것과 급작스
런 것으로 나뉘는데, 앞의 경우는 음식물의 소화나 두엄이 썩는 괴
겅 같은 것이고, 뒤의 경우는 불이 타서 빛과 높은 열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땅은 지구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 근거가 되어 인식의 바탕을 제공해 준다. 그러면 시간은 공긴
과 어떤 상관이 있을까
사전적으로 시간은 어떤 일정한 시각과 시각의 사이, 곧 때를 의
미한다. t때t는 증세국어에서 장소, 즉 공간을 듯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시간의 의미를 증심으로 하는 말이 되었다. 한마디
로 시간의 개념은 공간의 개념에서 비 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긴
이 흐르는 것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 볼 수 없다. 그러나 공
간은 일정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 사이의 넓이를 선이나 색깔이니
겉표면의 모습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말의 땅은 이상에서 풀이한 것처럼 '시간. 소유. 근거 ' 연
소. 분절. 접촉. 지표면. 공간. 닫힘'둥의 의미적인 특징을 바탕으
로 하는 낱말이라고 간추릴 수 있다. 물론 이 특징들은 공간의 의
미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말의 쓰임에 있어서, 널리 두루 상이는 어떤 일정한
뜻은 일정한 형태에 담겨 말하는 이로부터 듣는 이에게로 옮겨가게
마련이다. 아울러 일정한 형태들은 그 형태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
고 가지를 년어 나아간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의 낱말의 밭 또는
낱말의 겨레 word family를 이루게 된다. 공간의 뜻을 중심으로 하
는 '땅'의 낱말겨레는 어떻게 이 루어지는지 시대를 달리하는 자료
들과 사투리 또는 지명자료를 참고로 하여 더듬어 보기로 한다.
'땅'은 아래아(`)롤 쓰는 ㄷ에서 시작하여 '다>따>땅'
으로 발달해 온 형태이다. 각각의 형태는 시대에 맞게 가지를 변고
떼를 이루어 쓰이게 되었는테, 앞절에서 플이한 바의 의미특징과
연관을 지어 분화형태들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한다.
공간을 드러내는 경우 'ㄷ' 는 중세어 자료 (월인석보), <화음
계몽언해>, 등에서 장소를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공간의 '다'는
다시 시간을 나타내는 '때.덧'과 같은 말로 분화되어 쓰이면서 오
늘에 이르렀다.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시간은 공간과 함께 상황인
식의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옛 사람들은 12지(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와 같은 시간을 헤아리는 단위개념을 받아들여
12진법 흑은 so진법으로 시간을 셈하였다. 이렇게 공간개념에서
시 간개념으로 개념이 전이된 말로는 몇시쯤.아침녁.한 끼 ' 등의
'쯤(즈음>쯤). 녁 끼'가 있다.
공간.시간을 나타내는 '다(>땅)' 계의 분화어와 함께 지표면을
나타내는 형태로는 '더 (>터). 들. 다'와 같은 말의 떼를 들 수 있
다. 정녕 땅은 어떤 사물이 존재하거나 특정한 사실이 일어날 수 있
는 자리이다. 인간이 하는 활동의 모든 것이 공간과 시간의 상호작
용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가.
옛말에서 '다'는 히뭏(ㅎ)말음 체언으로, 모옴으로 시작되는 조
사나 어미 앞에서 자동적으로 히읗(ㅎ)이 개입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말음이 아예 받침으로 쓰이게 되면서,
어말의 위치에서 비슷한 음가를 지닌 'ㅅ-ㄷ-ㅎ-ㅇ-ㅊ' 등으로
넘나든다. 처음에는 같은 말로 서로 넘나들다가 나룽에는 서로 다
른 말로 굳어져 가기도 한다. 이때 양성모음이 음성모음으로 바뀌
면서 대립되는 말을 만들어 가는 것은 생산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닻/덫, 닷(>탓)/덧'과 같은 말들이 이런 범위 안에 드는 형태
라고 할 수 있다. 일본말에서 밭(田)을 '다' 라고 하는 것도 우
리말 'ㄷ'에서 옮아 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동물이 땅 위로 빨리 가는 것을 '달리다'라고 하는데 본래 '닫다
'에서 비롯된 말이다. 여기서 '닫-' 은 바로 땅을 뜻하는 말이
다. 사람이 모여 부족 혹은 국가의 단위를 이루어 살게 되면 그곳에
는 반드시 통치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다
스리다'라고 한다. 필자는 '닷(땅)+-으리다>다스리다'와 같이 통
치자가 특정한 영토를 이끌어 나아가는 행위를 드러낸 것으로 생각
한다. 아무리 흘륭한 국민과 통치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토(땅)가
없으면 그 의미를 잃고 만다. 그러니까 통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일정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사물을 보살펴 처리하고, 예
상되는 상황에 미리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스림에는 여러 갈래의 형태가 있다. 개 인적으로 볼 때, 스스로
의 정신적인 내면 세계를 다스리는 일에서 자신의 건강이나 집안의
문제, 또는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이 맡고 있는 구실의 전체
적 흐름을 다스리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런가 하면 짐단 생활의 다
스림에는 크고 작은 집단의 생활을 이루어 가기 위하여 끊임없는
다스림의 움직임이 요구된다. 개 인적이든 집 단적이든 간에, 생존의
공간이라는 땅의 개념에서 유추되어, 땅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통치
행위를 '다스림' 으로 드러낸 것은 일종의 연산작용에 따른, 의미의
옮겨짐으로 풀이할 수 있다
땅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들 가운데에서, 큰 것을 더 작은 것으로
쪼개는 분절의 뜻으로 쓰이는 형태들이 있다. 하긴 땅을 이루고 있
는 구성요소로서의 흙도 용암 상태의 덩어리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
서 갈라지고 부서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근원적으로 용암 자체가 불
덩어리이기도 하지만 돌과 돌이 서로 맞부딪히면 불이 난다. 한마디
로 땅의 속성 가운데 분절현상과 연소작용은 불가분의 성질로서 이
것이 바로 언어로 투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방아타령>에서 방아를 찧는다고 한다. 이때 '찧다'는 중세어로
넘다'에서 비롯된 말인데 'ㄷ-' 이 바로 땅을 뜻하는 '다'가 변이를
하여 이루어진 중성모음 계열의 말이다(필자의 논문 <의존명사 '다'
의 형태분화>, 1989) 따위가 부서져서 작은 단위의 돌로, 다시 흙
으로 되듯이 벼나 보리 등의 곡식을 방아에 넣어 껍질과 속알을 분
리시키는 과정을 쪼개어 가르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한꾄
불올 지핀다고 할 때의 '지피다'도 중세어를 보면 널 '딛다~딧다'의
헝태였음을 알 수 있는데, 뒤로 오면서 형태가 바뀌어 이른바 입천
장소리되기를 따라서 '지피다'의 형태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
다. 불을 땐다고 할 때의 '때다'도 '다히다>대다'에서 말미암은
말로서 땅의 속성을 투영시킨 형태로 보인다.
땅이란 말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변이하는데, 예컨대 달
마다 보름날 밤이면 그리운 임처럼 돋아 오는 보름달의 '달'도 '다
(ㅎ)~달/들/뜰/탈'과 함께 땅의 변이형으로 보인다. 우리가 생
존하면서 인식하는 대상은 모두가 우리가 보고 듣는 말을 중심으로
하여 표현되는 것이므로, 결국 달도 또다른 땅, 높은 곳에 솟아 있
는 공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지명에서 '-달(達)'
계의 말도 높은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늘에 높이 떠 았는, 지구
와 같은 땅을 가리켜 '달'이라 하게 되었고, '달-'이 어간이 되어
달의 속성과 같이 높은 곳에 매어 두는 것을 '달다' 라고 하였
으니 우연한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땅을 바다의 물과 그
공간적인 위상을 놓고 본다면, 가시적으로 바다의 표면보다는 솟아
있어 높은 위치라고 볼 수 있으니, 높은 속성을 부분적으로도 인정
하지 많을 수 없다
앞에서 분절작용에 따르는 문제를 제기한 일이 있거니와 흙. 먼
지 등이 묻었을 때 '때가 묻었다/더럽다' 와 같은 표현을 하는데,
이때 '때/더럽다' 도 땅에서 유추되어 나온 표현이다 '때' 는 '다히
>다이>대>때 '로, 러 럽다'는 '덜 +-업다 >더럽다'의 과정으로
비룻되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더럽다'고 할 때 그것은
비단 흙이나 먼지가 묻은 것만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음이 천
하다든가, 보기 싫다든가, 비겁하다든가, 아니면 명예나 지조(정조)
를 상한 경우에도 유추하여 쓴다. 근원적으로 흙과 땅은 그것을 떠
나서는 인간이 살 수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우리말에서는 땅의 속
성이 부정적인 개념으로도 발달해 온 것이다.
땅이 드러내는 특성 가운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닫힘'이
다. '문을 닫아라'고 할 때의 '닫다'는 '닫+-다>닫다'와 같이 풀
이할 수 있타. 열려 있는 상태의 공간이 무언가로 덮이면 그 공간
은 닫힌 것으로 인식된다. 흙으로 덮어서 닫아 줌으로써 싹이 튼다
든지 뿌리가 내려 자란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 다. 굴 생활의
시대를 되돌아 보면 결국 흙 또는 바위로 특정한 공간을 닫고 열어
줌으로써 비로소 생볼이 가능했던 것이다. 새의 보금자러인 둥지도
그러한 특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흔히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땅은 생명이 움트
고 자라는 가장 구체적인 공간이며, 삶의 영원한 고향이다. 지옥 또
는 천국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신앙의 차원까지 포함하여, 우리 인
간이 실존할 수 있는 현장은 바로 이 땅이라고 하여 달리 무슨 말
이 필요하겠는가. 현생 인류가 지구상에 살기 시작한 삼만 년 이래
의 자취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죽은 사람이든
살아 있는 사람이든 앞으로 태어나 살 사람이든, 그 형태를 불문하
고 존재의 현장은 여기 이 한반도를 포함한 '땅'이라는 실체인 것
이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중세어 자료를 보면 '사랑한다'는
뜻으로 '닷다'가 쓰였다. 삶과 죽음, 그리고 소유와 생산이 있으니
그곳에 대한 애정이 있을 수밖에. 영토를 얻기 위하여 개인 또는 집
단이 서로 그리도 엄청난 싸움을 해 왔고, 하고 있고, 할 것이다.
우리말에 서로 겨루어 승부를 내는 일을 '다투다'라고 하거니와 이
말도 '닫+호-다>다토다>다두다'의 과정을 밟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틈은 영토 싸움이요, 이는 곧 생존의 싸움이다. 정신적인
할동도 영역의 다틈이라고 풀이한은 지나친 유추일까.
땅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 한반도와 같이 좁은 영토에 많은 사람
이 모여 서로가 서로를 믿으며 살기 위해서는 토지의 공개념과 같
은 가치들이 다스림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 사회
는 다퉁 없는 살기 좋은 땅이 될 것이다
2-5, 기원과 별 신앙
한번 잘못을 저질떴을지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알고 발면 아무리
모진 마음을 가진 사람도 용서하게 된다. 이를 두고 속담에 니 는데
는 무쇠도 녹는다'고 한다.
자신의 소원대로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거나 잘못을 용서해 달라
고 바라는 것을 우리는 '빌다'는 말로 드러낸다. 비는 동작은 요컨
대 비는 사람이 았어야 하고 비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문화가 분
화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비는 사람이 제사장으로서 정치와 종교를
함께 관장했고, 온 부족의 안녕과 질서, 풍성한 생산을 기도드렸던
것이다. 고대 한국사에서는 단군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맡았는데,
단군이 비는 대상으로 삼은 것은 무엇알까 ?
태양신으로서의 니마(>님>임)' 와 태음신으로서의 '고마(> 곰
~금)'에게 빌었으니, 북방의 별로 상징되는 물과 땅을 다스리는
단군의 어머니 신이었던 '고마'에 대한 믿음이 오늘날까지 별 신앙
의 뿌리 갗은 흐름을 이루어 준 것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 태양신
과 태음신의 상징적인 본래의 관념은 불과 물이었다. 사람의 삶에
가장 중요한 자연물로 인식하였던 결과 마침내 그것에 신성(神性)
을 부여하게 되었고, 이를 숭배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연과의 친화와
합일 (合一)을 꾀하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별을 뜻하는 진(辰) 자를 두고 '미르 辰(광
주본 (천자문,,), 별 辰(신미본)천자문),' 으로 플이하고 있다. '미
르'는 '용(미르 龍: 신미본 <천자본>), 또는 '물'을 뜻하였으니 물
과 밀은 어떤 언어적인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오늘날의 지방 사투리를 보면 별을 빌 (강원 층남. 층북. 전남.
전북 경남)'이라고 하고 있다. 비는 동작을 '빌다' 로 한 것은 농
경사회에서 물신[水神]에게 기도했던 정황을 설명해 준다. 여기 물
신은 고마신 (단군의 어머니 신)이며 북방의 북두칠성의 별신을 뜻
한다. 그럼 '빌다' 는 어떻게 '별~빌'과 관계가 있는가. 동작이나
상태를 뜻하는 동사나 형용사가 만들어지는 언어적인 특징을 보면,
명사에 접미사 '-다'가 달라붙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빌다'의 경우도 그러한 보기로 플이하면 될 것이다. 결국 별의 방
언형태인 빌'에 접미사 '-다'가 붙어 만들어진 셈이다. 이러한 짜
임으로 볼 수 있는 말들의 떼는 상당히 넓은 분포를 보인다
별을 향하여 비는 사람을 제사장인 단군, 무당이라고 하였는바,
지금도 전라도 방언에서는 무당을 '단골' 혹은 '단골레'라고 한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별 또는 빌과 같은 두 가지 형태가 이미 쓰
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보상절) 9-33 에는 '별'이, 같은 자
료 6-53 에는 '빌다'가 나오고, (신증유함), 상 2에는 별자리신
(辰)' 이, (월 인석보), 7-31 에는 '빌먹다'가 나온다. 현대 어에서도
별과 관계된 말의 떼를 찾아 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별,
별나라, 별 빛, 빌붙다(남에게 아첨하다), 벼르다(별 +으+-다>벼
르다), 벼름벼름' 등을 쉽게 열거할 수 있다.
흔히 하늘의 별자리 중 큰곰자리우 별 가운데에서 가장 뚜렷하
게 보이는 국자 모양으로 늘어선 일곱 개의 별을 북두칠성이라고
한다. 북두. 북두성. 칠성 (七星)이라고도 하며, 불교에서는 칠원성
군(七元星君)이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북두칠성이 곧 고
마별(곰별)로 아주 위대한 별로 보고 빌었으니 지금도 칠성신앙은
도처에 화석처럼 그 형태가 남아 있다. 사람이 죽어 무덤으로 갈 때
등 뒤에 별이 홉어진 모양을 본떠 일곱 개의 구멍을 뚫은 널빤지를
깔고 그것을 칠성판이라고 하는 예가 그러하며, 오늘날까지 싱이
는 칠성바위, 칠성시장 등과 같은 땅이름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불
가에서는 일곱 별에 모두 임금에 해 당하는 군호(룸號)를 붙여, 탐
랑(貪淡)성군.거문성군.녹존(祿存)성군.문곡(文曲)성군.
염정 (廉貞)성군.무곡(武曲)성군.파군(破軍)성군이라 하여 일곱 별
신으로 모셨던 것이다.
저 아름다운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의 경
우를 보자. 한자로 표기는 하지만 우리말의 '빌(별)'을 비슷한 한자
의 소리로 적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곧 높고 제단이 있는 것을 상
징한 것으로 보이니, 묘향산의 비로봉이나 속리산의 비로봉이나 치
악산의 비로봉이나 소백산, 지리산의 비로봉이 모두 별과 관계가 있
는 것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불가에서 연화장세계에
살며 그 몸은 법계(法界)에 두루 차서 큰 광명을 주는 부처를 비로
자나불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는 범어로 바이로자나
였는데 한자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비로자나가 된 것으로
본디는 광명을 뜻하는 말이었다, 천태종에서는 법신불(法身佛), 화
엄종에서는 보신불(報身佛), 밀교(料敎)에서는 대 일여래 (大日如來)
라고도 부른다.
별의 속성 가운데에서 가장 중시했던 것은 밤 하늘에 빛나는 불,
곧 광명으로서의 특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명의 뿌리는 태양으
로서, 이를테면 별은 해의 변형이며 어두운 정신과 삶의 누리에 비
치는 최 망이었다. 마치 우리의 육신을 밝히는 것이 얼굴의 눈이듯
이 별은 밤에 맞나는 저 멀리의 촛불이요, 영흔의 등대라 할 것이다
별처럼 수많고 아름다운 나라에의 그리움으로 우리가 살아 간다면,
인간 의식의 언덕에는 늘 푸른 하늘에의 꿈이 자랄 수 있을 것이다.
2-6. 임과 해
한 가지 일뿐 아니고 그 이상의 좋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날 때,
일석이조 (一石二,옳) 라고도 하지만 속담으로는 '임도 보고 뽕도 딴
다'고 한다.
앞서 살다 간 선인들의 문학작품이나 오늘을 사는 우리의 언어생
활의 밑바닥에는 개인 또는 집단이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랄까
신의 모습으로서의 임에 대한 지향성이 두드러진다. 만해 한용운이
<님의 침 묵>에서도 노래하였듯이 우리는 생애를 살면서 가장 아름
다운 임, 바로 이데아의 임을 찾아 평생을 헤매는지도 모른다. 그
러한 임이 다스리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펴 보이고자 하
여 끝없이 인간의 상상력이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임의
목소리는 영뭔한 시간으로 메아리치며, 임의 눈빚은 온 우주에 가
득하여 더함도 덜함도 었다. 인간은 그런 믿음을 갖고 이제까지 살
아 왔고, 뒤에 을 날들도 그떻게 살 것이다. 필자가 보기로는 그런
임의 세상은 바로 이 땅이며 과거와 미래가 함께 숨쉬는 바로 이
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을 함께하게 하는 임은 불행
도 행복도 아닌 공평무사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높여 부를 때, 접미사 '-님'을 붙여 공대어로 쓴
다. 스승님, 할아버님, 임금님이라 할 때의 '-님'이 그런 경우이다
참으로 인간존중의 셍각을 생활화하는 좋은 언어관습으로 보인다
임은 넘 '에서 구개음화된 소리가 말머리에서 떨어져 생겨난 것이
고, 더 오래된 전단계의 형태는 '니마'였다. 지금도 얼굴의 한 부
분으로 눈썹 위에서 머리털이 난 부위의 사이를 이마라고 하는바,
니 마' 라는 말이 그 뜻이 바뀌어 신체부위의 명칭으로 화석이 되어
남은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일종의 의미전성이라고나 할까. 그
떻다고 해서 본래의 뜻파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니마 혹은 님
이 태양을 뜻하는 불의 신이며 방위로는 남쪽(앞)이니 신체부위 중
높으면서 앞쪽이 됨은 본래의 의미에서 갈려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니마와 고마는 더불어 하나의 짝을 이루는 하늘신과 땅신의 상징
이었으나, 고마에 대한 자료는 상당한 분포를 보이지만 니마에 대
한 것은 드문 편이다. 니마의 상징성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신으로는 땅과 물의 신, 계절로는 여름, 동꿀로는 주작, 빛
깔로는 붉은색, 성으로는 남성, 소리로는 헛소리가 된다. 또한 계
층으로는 군왕(君王)에 해당하는 상징성을 보인다. 신체의 한 부위
의 명칭인 '이마'라는 말에 니마의 형태가 남아 있다고 하였는데,
우리쪽 자묘와 더불어 일본어의 형태가 큰 암시를 주고 있다. 이마
를 일본어로 히타이라고 한다. 여기서 히는 해를,
타이는 흙을 둥글게 쌓아 제사를 위한 장소를 뜻하는 말로서 제
단의 모양과 같이 높고 툭 뒤어 나온 몸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많은 분포는 아니지만, (삼국사기), 지명자료를 보면
'니마'의 너 '와 '日/熱/尼(魯)'의 관련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
다. 일본어의 자료에서도 너' 가 주로 '赤.熟.紅.日'의
뜻으로 대응이 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이런 가능성을 받아들인
다면 '니마'는 태양신으로, '니 +-마(존칭의 전미사)>니마'의 과정
을 거쳐 이루어진 말로 풀어 볼 수도 있다. 이에 상응하는 '고마'
는 물과 땅의 신으로서 생산을 맡는다. 니마는 단군의 아버지 신격
이고, 고마는 단군의 어머니 신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단군왕검에서 우리는 임금이란 말의 원형을 볼 수 있는데, 임금
은 니마와 고마신의 변이형으로 보이며 제사를 모시던 대상신의 뜻
은 없어지고 오히려 신을 제사하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
었다. 즉 '님금(태양신과 태음신-불의 신과 물의 신)-님금 (>임
금, 태양신과 태음신을 제사하는 사람)'으로 간추릴 수 있다. 제사
장으로서의 '단군' 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오늘날 전라도 지방의 방
언에서 무당을 뜻하는 '당골. 단골레'로 삽이고, 혼히 '단골짐' 이
라고 할 때의 단골을 뜻하게 되었다. 임금의 복장을 보면 붉은색에
용 무늬를 놓은 곤룡포를 입는다. 붉은색은 태양신, 용은 태음신 (물
의 신)을 슬배하는 상징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니 왕의 원형
은 태양신과 태음신을 제사하는 제사장이었다고 하겠다.
군왕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 으로서, 그 권력은 신으로부터 비롯된
다고 믿어 왔다. 이집트의 경우 왕을 파라오라고 하는데,
이는 '큰 집' 곧 신전(神穀)이란 뜻이었다. 이 파라오가 태양신인
라 Ra의 아들이며 제사장을 가리키게 되었음을 상기하면, 고대국가
의 왕의 위치는 신을 모시는 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여 지나치지
많을 것으로 보인다.
<훈몽자회>,에서 '님 쥬(主)' 로 풀이하는 임금을 뜻하는 말 '主
(주)'도 등불을 뜻하는 글자 화산불 곧 태양을 상징하는 '王'
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 이니, 임금은 태양숭배의 책 임자였음을 미루
어 알 수 있다.
현재 누가 '임'에 대한 역사적인 뜻을 생각하면서 그 낱말을 쓸
까마는, 임은 따지고 보면 태양신 곧 광명의 신으로 숭앙되었으며,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 이다. 앞에서 풀이한 별 신앙도 결국은
태양숭배의 밝음 지향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루어 보건대
상대방을 '-님'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관습은 태양신과 같은 존재로
본다는 의식이 그 밑바닥에 있으니 참으로 소중한 인본주의의 드러
냄이 아닐 수 없다. '니마'는 태양신을 뜻하는 말에서 제사하는 군
왕으로 다시 상대방을 높이는 접미사로 쓰였으니, 말 그대로 언이
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셈이라고나 할까.
태양처럼 빛나는 밝음에의 지향을 갖고 사는 배달겨레는 예부터
어두움, 사악하고 블의에 찬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가장 종교적인
개념에서 비롯한 임의 뜻과 정서가 이제 인간적인 개념으도 쓰이고
있다. 하늘과 땅에 사는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전제가 없고서
는 참다운 임의 세계는 저만치 있을밖에. 서로는 임이 될 수 있다
는 신념을 가지고 이상적인 삶에 그 빛을 더하면서 하늘의 큰 복을
기다려야겠다.
2-7. 스승과 푸닥거리
'선생의 뒤는 개도 먹지 않는다' 고 한다. 인간적 인 접촉을 바탕
으로 하여 젊은 학도들을 지도하느라 속을 태우다 보니 그들의 뒤
는 개도 먹지 않게 됐다는 속설이 생긴 듯하다.
가르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생활을 끊임없이 되 돌아보고 미래
지향적으로 자신을 힘써 갈고 닦아야 한다. 그가 이루는 일체의 가
르침은 원천적으로 그가 갈고 닦은 학문과 인격의 수준을 넝을 수
없기 때 문이다. (중용,,의 말씀에도 '성실한 것은 하늘이요, 성실하
게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길이다'라고 하였는바, 쉼 없이 흐르는
냇물처 럼 선생은 힘이 자라는 데까지 옆을 돌아 보지 말고 앞으로
걸을 일 이다.
자기들은 제 아들 딸올 잘 이끌어 주지 못하면서, 선생은 마땅히
자기 아들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생의 역할에 대한 학부모들의 이림한 기대를 선생들은 저
버릴 수가 없고, 그 기대에 못 미친다고 판단되면 꾸지람의 화살도
당연한 듯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한민족의 전통으로는 군사부일체
(君師父一體)라고 하여 선생의 역할에 상당한 무게를 두어 왔기 때
문에, 서구화한 지금에 와서도 선생에 대한 그러한 기대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생산적인 방향으로만 승화시켜 나간다면 이런 문
화적인 맥은 그 어느 겨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흘륭한 정신적 전
통이라고 본다.
가르침의 바탕은 참과 거짓, 옳고 그름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일
깨우며 학습자의 창의력을 블지름으로써 전 인격적 인 인간의 꿈을 키
워 주는 데 있다고 본다. '참'이란 동사 '차다[滿]'에서 갈라져 나
온 파생명사이고, 거짓'은 거죽 또는 겉[表面]에서 나온 말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참이 없는 교육, 그런 가르침을 원하는 사람이 어
디에 있올까. 혹 엉터리로 가르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참된 가르침을 바라며 그런 욕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그러기 위하여는 선생 자신이 거짓을 물리치며 잘못된 일을
과감하게 떨쳐 버려야 한다. 그는 늘 깨어 있기를 향한 몸부림으로
자신의 인생을 채워서 제대로 익은 향기로운 가르침에 가까이 가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흘륭한 선생을 그리워하며 기린다. 어렸을 때에 감
명깊게 읽었던 책을 잊을 수 없듯이, 마음 속에 깆이 아로새긴 선
생님의 가르침은 깊은 샘물과 같아서 세월이 흘러도 마를 줄을 모
른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움이 되어 푸른 강물처럼 한 인간이 살아
가는 삶이라는 언덕에 굽이쳐 흐르게 된다. 그리움이 머무는 공간
과 시간을 만드는 사람, 선생은 특히 젊은이의 생애에 있어 이정표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항상 어두움을 밝히기 위하여 등과
기름을 마련한다. 행여 그 등블이 꺼지지 않나 하여 마음을 졸인다.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 교원. 사부(師舊). 스승'이라고 한다.
'스승'은 선생을 높이는 말로, 아무 데에나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선생' 이란 호칭은 아주 많이 쓰이는데, 저 유명한 공자도 선생이
었고, 또 선생이면 그만이다. 이율곡 선생 흑은 이퇴계 선생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시대와 공간이 달라지면서 일정하게 특수한 사람
에게 싱던 말이 아주 보편적으로.쓰이게 되었다. 부처님의 말씀마
따나 '깨달으면 모두가 부처(卽心是佛)'이니, 누구든지 도리를 깨
달아 알면 곧 선생이 되는 것은 그럴 듯하지 많은가.
옛말에 '스승'은 '무당<두해>, 선생 <능엄>, 고덕한 승려[화
상(和尙) ; <석보상절>, 왕<유씨물명고>' 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소리가 나는 형태로는 '고덕한 승려'라는 뜻의 '사승(師僧,중국
어 발음으로 스승)'이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언어는
사회와 그 역사의 산물이란 관점에서 볼 때, 더 가까운 말은 무당
이 아닌가 한다. 함경도. 황해도. 평안도 지역에서는 무당을 스
승이라 하고, 전라도 지역어에서는 당골.단골레라고 한다.
고대사회에서 무당은 위대한 제사장이자 행정의 머리였다. 신라
시대까지만 해도, (삼국사기),에서 보듯 왕을 '자층(慈充)' 이라 하
고 있다. 이 무렵에는 파찰음 계통의 소리가 없었음을 감안해 보면
'사승/스승'으로 발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필자는 '스
승' 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소도' 에서 비롯한 것으로 생각
한다.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단을 모으거나 높은 산에 성황
목(城皇木), 곧 신의 나무[神樹]를 세운 곳을 '소도'라고 하였다.
그곳은 살인자가 들어와도 체포하지 않는 거룩한 장소였다. 그곳에
서 제사를 모시는 사제가 곧 '스승'이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소도'가 '숟~솟~슷~스승'의 변이형으로 쓰인 것으로 볼 수 있
기 때문이다. 환응(琢雄)도 따지고 보면 '거룩하고 위대한 스승' 이
란 말로 뒤칠 수 있다. 수컷 웅(雄)이라고 하는바, '숫~솟~숟 ~
스승'파 같이 '소도'와의 걸림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바뀜을 따라 '스승' 이 담당한 영역의 변천을 간추리면 '제
사장(종교+정치)>정치>교육/종교>교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점을 치는 무당도 마찬가지인데, 제사장은 길홍화복(솜凶禍福)을
알아서 미리 알려 주는 '예언'의 기능과 응어리진 마음을 풀
고 닦아 주는 '해원 (解怨)'의 구실을 해 냈다. 이런 두 기능과 선
생의 역할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퇴지 (轉退之)는 '스승이란 도
리와 문화 유산을 전달하고 의흑을 풀어주는 자(師者傳道授業解慾)'
라고 하였다. 해원과 해흑이 서로 통하는 맥이 있다고 판단된다. 응
어리진 마옴을 스승(무당)이 풀어 주듯이, 잘 모르는 의혹을 스승
(교원)이 플어 주지 않는가. 그것이 꼭 예언자적인 성격은 아닐지
라도.
공부 때문에, 교육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였으며 잠 못 이루는 외
로운 밤을 보냈는지. 교육의 본질로 가는 길목에서 걸림돌이라도
되지 말아야 하겠다는 바람일 뿐이다. 내일의 새벽이 있기에 교원
의 길을 걸으면서 끈질기게 교육사회의 봄이 옴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스산한 겨울의 계절이더라도
2-8. 귀와 구멍
옳지 못한 일을 저질러 놓고 그게 드러날까 하여 제 귀를 제가 막
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속담말로 '귀 막고 방울 도둑질한다' 함
은 바로 앞의 경우를 두고 이른 말이다. 만일 인간에게 귀가 없다
면, 제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라 하더라도 하등의 쏠모가 없으며, 인
간은 결코 언어적 존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감각기관 중의 하나로서 얼굴의 좌우에 있으면서 소리 듣는 일을
맡은 것을 귀'라고 한다. 귀는 귀싸대기와 귀밑대기를 바탕으로
하여 귓부리. 귓불. 귓구멍. 귓전. 귓바퀴와 같은 여러 부분으로 이
루어진다. 말하는 이의 뜻은 흔히 심리적-생 리적 -믈리적인 단계를
거쳐 말듣는 이에게 소리로 전달된다. 다시 거꾸로 말듣는 이는 믈
리적 -생리적 단계를 거쳐 말소리에 담긴 뜻을 이해하게 된다. 이들
과정 중에서 생리적 과정과 물리적 과정은 귀의 기능과 밀접한 연
관을 보인다고 하겠다 귀를 이루는 여러 부위 중에서 가장 결정적
인 곳은 귓구멍이다. 따라서 귀의 모양은 구멍으로 상징될 수 있다.
말하자면 말소리를 포함하는 모든 소리가 담기는 구멍이요, 소리꼴
담는 통이라고나 할까. 이 소리의 통, 소리의 구멍을 롱하여 인간
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이 사람에게서 사람에게 오고갈 수 있
게 된다.
귀의 본바탕이 '구멍'이란 점과 '귀'의 형태 자체와는 어떤 상관
이 없올까. 필자는 러'가 구멍을 뜻하는 '쟈'에서 나은 말이라고 본
다. 즉 '굿+-이>구시>구미>구이>귀'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형태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굿'은 오늘날에는 무당이 행하는
일체의 연희과정을 말하지만, 원래는 굴, 곧 움푹 들어간 구멍을 뜻
하는 말이었다. 지금도 방언에 따라서는 말이나 소의 먹이를 담아
주는 움푹 들어간 통을 '구시'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알 것이다. 표
준어로 '구유'인 이 '구시'와 관련한 방언의 분포를 찾아 보면, '구
수(층청. 전라), 구숭(강원 통천. 장전. 고성), 구시 (경상. 충청.
전라. 제주. 함경), 구시통(전남 담양. 진도. 영암. 강진. 여수),
구유(전북 부안), 구이 (경남 울주), 귀 (경기 옹진/황해 은율 안
악), 귀숭(강원 간성. 평창), 귀영 (황해 금천 재령. 서홍), 귀융
(경기 장단/황해 해주/강원 간성. 양양. 횡성. 영월. 평창. 원주
춘천. 홍천. 인제), 귀이 (경북 경주. 영천. 포항. 홍해. 영덕), 쇠
구시 (경남 납해), 밥구시 (전남 장성)' 등과 같다.
'구유'의 방언으로서 음운론적인 시옷(ㅅ)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형태로는 '구시/구이/귀'를 꼽을 수 있다. 물론 '구
시>구이'의 과정에서 더 순탄한 진행을 보여 주려면, 반치음(△)
단계의 '구시'가 있어야 하는데, 방언의 분포로는 확인할 길이 없
다. 그러나 중세이 자료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전척 없는 것도 아
니다. (초간본박통사), 상 21을 보면, 일체의 우묵한 통을 중세어로
는 '구△ㅣ[措子]'라 했음을 알 수 있으니, 방언 자료를 함께 고려한
다면 '구시>구쇠>구이>귀'의 과정을 모두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굿'은 자음교체를 통해 '굿/굳/굴'
의 단어족을 이루는, 요컨대 '굴'을 가리키는 말이다. 굴은 굴이지
만 특별히 작은 모양의 굴을 구시, 구이, 귀라고 썼던 것으로 보인
다 모음의 소릿값으로 보아 귀'는 복모음으로서 중세에는 '구이'
라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구시>구△ㅣ>구이>귀'로 그 변
천과정을 상정함에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귀'의 낱말겨레로는, '귀, 귀 개, 귀 거 칠다(듣기에 노떱다), 귀
걸이, 귀걸이 안경, 귀고리, 귀구양('귓구멍'의 함경도 방언), 귀긋
기 (단청에서 처마 등에 색칠을 하는 일), 귀긋기 뱃바닥[첨차(柰
嬌). 장여 등의 뱃바닥에 귀긋기를 하는 일], 귀기둥(건물 모퉁이
에 세운 기둥), 귀까리 ('귀때 기 '의 방언), 귀꽃(돌탑 등의 귀마루
끝에 새긴 플꿎의 장식), 귀꿈스럽다(보기에 아주 궁벽하여 혼하지
않다), 귀나다(한쪽으로 기울다), 귀돌(석축의 모퉁이에 놓는 돌),
귀동냥(남의 말을 귀로 얻어 들음), 귀먹당수(귀 머거 리), 귀밝이 (귀
밝이술), 귀뿌리, 귓바퀴' 등이 있다.
칸트는 '가장 숭고한 명령이 양심의 소리'라고 하였는바, 저절로
들리는 게 소리지만 그것도 올바르게 듣고자 하는 의식이 있을 때
비로소 옳게 들리는 법이다. 하물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상상의 소리를 물어 무엇하리.
귀가 있어 인간이 언어적 존재로서 바로 설 수 있으니 이는 진정
한 축복이며 삶의 가능성을 크게 더해 준 능력의 징표라 할 것이다
들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들음으로써, 우리의 언어적 상상력은
더욱 그윽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배달
의 나라는 대단히 '싹수'가 있는 영지가 될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
의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리는 곳, 바로 그런 공간을 우리
모두가 세워 나가야 한다
2-9. 미래와 용 신앙
문예사조를 살펴 보면 2o세기초에 미래파(未來派)가 나온다. 이
탈리아에서 일어난 새로운 예술운동으로 과거의 전통과 정적 (靜的)
인 예술에 대한 반동으로서 새로운 예술의 창촐을 지향한 문학운동
이었다.
아직 다다르지 않은 시간을 비 래'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의 세상을 이르기도 한다. 미래(未來)'는 한자어인데 이와
는 좀 다르지만 미래 개념을 지닌 순우리말로 니 리'라는 부사가
있다. 너떤 일이 생겨나기 전에'란 뜻을 가진다.
인간은 현재로만 만족하지 않고, 더 좋은 미래의 시 간과 공간을 그
리며 산다. 그것은 개인이나 집단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음 속에 그
리는 바람이나 이상을 꿈이라고도 하는바, 다분히 심리적 존재인 우
리 인간에게 앞날에 대한 의식이 없는 상황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
이다. '꿈' 이란 말도, 없는 것을 다른 데서 빌리는 동작 '꾸다'에
서 파생되어 나온 이름써이니, 꿈은 시간적으로 미래와의 관계 속
에서 그 갓을 드러낸다. 누구나 보다 오래, 그리고 잘 살기를 바란
다. 그 누가 이 세상에서 일꺽 죽기를 바라겠는가. 대담은 분명하
다. 신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오랫동안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을 이루어 내기에 이른다. 그 대
표적인 정신문화 중의 하나가 바로 '종교' 라고 할 것이다. 어떤 종
교, 어떤 신앙에든 미래의 병원한 공간이나 시간이 설정된다. 무속
신 앙에도 죽은 뒤의 세상 이야기가 있다
자연의 순환이란 큰 흐름 속에서는 죽음이란 자연의 질서에 따르
는 것이니, 우리 사람들만 영원한 삶의 시간과 공간을 그리떠 괴로
워하고 맴돌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후의 세계란 특정한 종교의 교
리를 굳게 믿는 이들에게는 진리가 되겠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
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직 분명한 것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가장
확실한 공간, 여기 우리의 조상들이 살다 갔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있다는 사실뿐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있음과 없음이 본시
하나이며, 죽음과 삶도 같은 뿌리에서 돋아나온 존재의 양상(樣相)
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고양이를 놓고 어떤 이는 귀엽다고 하고,
어떤 이는 무섭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까. 그러나 어쨌든
사람들은 미래로 연결되어 있는 무의식의 끈을 놓아 버릴 수가 없다
우리말의 부사 '미리'는 미래의 예 언자이자 물을 다스리는 '미르
[龍]' 곧 용 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용 신앙[사
신 (蛇神) 신앙]은 호랑이 신앙에 못지 않게 아주 폭넓은 분포를 보
인다. 흔히 농경문화권에서는 비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만큼
물을 다스리는 용신이야말로 증년과 흥년을 좌우하는 두려운 존재
라고 믿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용(龍)'은 만주어로는 '륑'으로,
영흔(신)의 뜻으로 쓰였다. 고유어로는 '미르(밀/미르기)'였으니
우리 조상들은 물과의 깆은 연관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장덕순의 <한국 설화문학 연구>, (1971)에 따르면, 용은 종교에 따
라서 수호신으로 그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교세를 지
키는 수교자(守敎者)로, 유교에서는 호국룡(護國龍)으로 나타난다
절의 모양도 잘 보면 용의 머리가 있고, 지붕의 기와는 용린갑(證
辣甲 ; 용의 비늘 모양으로 비늘을 달아 만든 갑옷)의 형상이며, 네
기둥은 용의 다리를 본뜬 것으로 판단된다. 용은 그것이 지니는 초
자연적인 힘 때문에 제사장의 권위를 뜻하는 동시에 마침내 왕권을
상징하기에 이르렀으니, '용상(임금이 정무를 볼 때에 앉는 평상)
용안. 용루(龍淚, 임금의 눈물). 용발(龍髮 ; 임금의 머 리털)' 등이
그 좋은 보기라고 하겠다. 짐작하건대, 용신 (물의 신)은 농경사회에
서 쇠대한 신이니 태 양신 (불의 신)과 더불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고 보인다. 신라의 문무대왕이 죽은 뒤 바다에 묻혀 호국룡이 되겠
다고 한 것이나, 조선조 태종이 백룡과의 관계를 드러낸 것 둥은
뚱은 참고자료라고 볼 수 있다.
용은 지존자(至尊者), 믈의 지배자, 예언자, 인간적인 성품을 지
닌 존재로 파악된다. 용파 관련된 지명도 많다. 지 명에서는 '용
미르.미리.미르기' 둥의 변이형으로 표현되는데, 용은 한자어이
고 나머지는 고유어계의 말이다. 예컨대 '미르기재[龍阮]'라는 지
명이 널리 분포하는데, 이로써 본다면 석가모니 다음으로 증생을 건
질 원대한 꿈을 가진 비륵보살' 속은 '미륵'도 용과 관련이 있는
말로 보인다. '미륵'은 향찰식으로 읽으면 일' 이요, 중국어 발음으
로는 비르'이다. (훈몽자회),의 '미르 龍'의 '미르'와 우연스럽게
도 일치한다. 미르, 용의 주기능은 물을 다스리는 일이고, 물을 다
스리는 일은 짬날의 일에 대한 예언과 관련이 있다. 물은 삶의 원
천인 만큼 물을 다스림은 곧 모든 생물의 살고 죽음을 다스리는 일
이기 패문이다. 물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목숨을 좌우하는
요소인 탓에 물이 없는 곳에서는 삶이 그 의미를 잃고 만다. 물이
너무 많아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용을 섬기는 지역, 용을 섬기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
용은 예언자이며 지존의 통치자이자 삶의 희망이뎌 아울러 두려움
의 대상이었다. 먹는 양식으로서의 '말 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마시는 물을 용, 즉 밀이 다스린다면 그로
인한 '밀' 은 직접적인 양식으로서 상여 삶에 활력을 주니 말이다.
오늘날 서양을 비롯한 빵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의 사람들이 길러 덕
는 밀도 우리나라 남부에서 채취한 '앉은뱅이 말'을 개량한 것이라
하니, 참으로 미르가 모든 사람에게 희 망이요, 앞날의 식생활을 보
장하는 복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민족에게나 용 신앙을 찾기란 쉽겠지만, 특히 우리 배달겨
레의 말에서는 용(밀)의 예언자로서의 기능이 고착되어 '미리'와
같은 부사어가 상이니, 돋보이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낱말의 겨레라는 관점에서 보아 '미르(밀)-' 계에 드는 말로는 '미
루다(이미 안 것으로 다른 것을 비추어 보다), 미루적거리다, 미룩
미룩, 미륵도(경남 통영), 미륵봉(금강산), 미륵산(울릉도), 미륵
치 (굉남 맹산), 미르기재 (강원 횡성), 미리' 등을 들 수 있다.
밤 하늘의 아름다운 미리내(은하수)를 보고 누가 용(밀)을 연상
할까마는, 미리내는 용 신앙과 깊은 상관 속에서 쓰이는 표현으로
보인다. 은하수의 위치를 보아 수확의 때를 알아차렸던 것도 결국
은 물을 다스리는 용에 대한 신앙의 잠재된 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앞날의 일에 대하썩 미리 가치 있는 일
을 예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
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닐는지.
2-10. 만남과 헤어짐
서로 만나서 바로 헤어질 때, '만나자 이별'이라고 한다. 상대방
과 마주보게 되거나 재앙 또는 앙화를 입을 경우, 또는 어떤 때를
당하거나, 인연으로 말미암아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을 일러 '만난
다'고 한다
작은 시내들이 만나 큰 내를 이루고, 다시 가람이나 바다를 지어
내듯이, 사람들은 서로 만나 관계를 맺으며 모듬살이를 이어 나아
간다. 불가에서는 만남과 헤어짐을 하나의 말미암음으로 이해하여
살아감의 주요한 계기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러한 만남과 헤어짐의
섭리 속에서 세상 만물이 나고 사라진다.
사람들의 삶도 그 예외는 아니다. 잊을 수 없는 친구간의 아름다
운 우정도 서로의 만남에서 그 실마리가 생겨나뎌 애끓는 남녀간의
사랑도 그러하다.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도 서로가 만나 교통함
으로써 관계가 이루어지 니, 신과 인간의 만남이다고 어찌 다를 수
있으랴.
'만나다'라는 말의 짜임으로 보아 '맞다十나다>맞나다>맏나다>
만나다'로 그 형성과정을 풀이할 수 있다. 현대 국어에서는 '만나
다'가 표준'어이지만, 원래는 '맞다'가 합성되어 이루어진 복합어이
다. 오는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을 '맞이'라고 하고, 오는 사람을 기
다려 받아들이거나 불러서 오게 하는 동작을 '맞다'라고 한다. 그
러니까 '만나다'는 사람을 오게 해서, 또는 사람을 맞아들이기 위
하여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말의 쓰임을 보아, '맞다'는 대체로 행위의 대상이 높임의 대상
일 때 쓰인다(맛조이 ; (신어, 5-l8). 오늘날에도 '해맞이.달맞이
손님맞이. 봄맞이' 라고도 흔히 쓰지만, '원수맞이. 재 앙맞이. 거지
맞이' 라고는 잘 쓰지 많는다. 쓰더라도 자연스럽지 않다: '맞-'은
'맛/맏/맡/말(머리)'과 같은 단어족으로 으뜸가는 지도자, 앞
또는 위를 말한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마한(馬轉)'도 '말한'이
라고 읽어, 제일 큰 한족의 나라라고 새겨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
다 혈거생활과 연관지어 보면 재미있을 듯싶다. (후한서), 나 더삼국
지),와 같은 중국의 문헌자료에서처럼 굴이 수직으로 무덤같이 생
겼올 경우엔, 굴에서 나와 누굴 만나려면 우선 머리 위쪽, 곧 머리
맡으로 나와야 한다. 수굉의 경우도 그러하다. 안으로부터 굴의 입
구(맡)로 나와야 한다.
어느 쪽이든지 맞이하기 위하여 집에서 나옴은 배달겨레가 지닌
인간관계의 적극성을 뜻함이요, 인간존중의 소산이라고 하겠다. 때
에 따라서 만남은 하나의 약속, 곧 계약일 수 있다. 우리가 쓰는
말을 통하여 우리는 직간접으로 온갖 모양의 계기를 마련한다. 말
은 특정한 겨레의 정신이 담기는 그릇이요, 우리 겨레를 동여매는
질기고 단단한 끈이기도 하다. 말은 만남의 바탕스런 약속으로, 우
리는 서로 언어공동체를 이루고 더불어 살고 있다. 말은 징검다리
이기도 하다. 아무리 특별히 화려한 삶을 누린 세대라 할지라도 곧
사라져 가지만, 다음 세대들에게 그들이 살던 동안의 경험과 슬기
만큼은 문자언어인 글로 옮겨 주고 간다. 뒤로 갈수록 지식과 경험
의 고원은 넓어지고 더욱 높아질밖에.
사람들의 만남에 대한 욕구는 다양하다. 살아서 정들었던 이들은
죽은 뒤에도 신앙의 힘을 빌려서, 아니면 자연현상의 윤회를 따라
만날 것을 기대하며 살아 간다. 기다림은 아름답다. 작가가 온 마
음을 쏟아부은 문학작품이라면 그 글에 글을 쓴 사람이 지닌 영혼의
목소리가 담기기 마련이다. 종교의 경우 십중팔구 죽음과 관련하여
사후에 펼쳐질 만남의 공간과 시간이 설정된다.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만나서 신과 더블어 살기를 바락는 것이지만, 만남
이 있는 곳에 반드시 헤어짐이 있으니 그것이 곧 신의 섭리요 보이
지 않는 만남의 철리인 듯하다.
만남이 서로간의 관계로 플이되거니와 형태에 따라서 단일어나
복합어로 싱이는 일이 있음은 널리 아는 일이다. 보기를 들면, '맞
닥뜨리다, 맞당기다, 맞담배질, 맞두레 (물을 푸는 두레의 히나), 맞
모금, 맞미닫이, 맞바느질 (바늘 두 개를 양쪽에서 한 구멍에 마주
넣어서 꿰매는 바느질), 맞바람, 맞부꽤 (광산에서 하는 두 사람의
동업), 맞이, 맞자라다(서로 같이 자라다)' 등으로 '맞-'계가 중심
을 이룬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규정되거니와 흔자서는 살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길지 않은 한평생을 살면서 여러 모양의 사람과 일을
만나게 된다. 아름답고 소박한 만남을 위하여 서로가 맞이하는 마
음가짐과 의지 (힘)를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움을 꽃피우고 참된 만남의 기쁨을 얻기 위하여 이 땅에 밭을
일구고 믿음을 심어야 한다. 혹여 만났다가 안타까운 헤어짐을 간
직한 채, 서로 그리면서도 만나지 못하며 가슴닳이를 하게 되더라
도. 아마도 우리의 육신과 영혼 속에는 삶과 죽음이 함께 일어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변하지 않는 만남을
찾아 긴 나그네의 길을 걷는다 그 길은 또 길로 이어질텐데.......
3. 풀과 목숨
3-1. 싹과 사이
'싹수가 노랗다'고 한다. 처옴에 나오던 싹이 노오랗게 메말리
더 이상 자라지 못하므로 기대한 결과가 없음을 드러낸 표헌이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어떤 회망도 보이지 않는 상태를 이르고 있다
입버릇처럼 사람들은 '싹 쏠어 버려' 혹은 '싹쏠이'라고한다 참
으로 무서운 정서를 일으키는 말이다. 씨앗으로부터 이제 갓 나온
싹을 쏠어 없앤다면 엄청난 가능성을 모두 앗아 가는 결과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씨앗에서 처음 움터 나오는 어린 잎이나 줄기를
'싹'이라고 한다. 새싹은 어린이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어린
이가 지닌 앞으로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까닭이다.
원형적 인 형태라는 관점에서 볼 패, 싹은 사이를 뜻하는 중세어
'삿/슷 '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가 어떤 판계를 가짐으
로써 우리는 상호간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며, 이에 따라 삶의 조건
들을 하나씩 풀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부분의 가치는 전체
와의 관계 속에서 올바른 값매기기가 이루어지듯이, 자잘한 삶의
조건들도 혼자가 아닌 서로의 걸림틀 가운데에서 그 지위가 튼튼히
자리를 잡는다.
짐승의 새끼들은 암컷과 수컷 사이에서 태어나며 자라난다. 좀더
미시적으로 자라나는 정황을 보면, 어미의 다리 사이에서 솟아 나
와 개체를 드러낸다. 식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봄이 되어
싹이 트는 걸 보면 잎 사이에서 새순이 돋아 오르고, 뿌리와 뿌리
사이에서 새싹이 나온다.
형태의 특징을 보면 '삿'은 기역(ㄱ)특수곡용을 한다. 기역 (ㄱ)
곡용 어미가 아예 본래 말에 달라붙어 하나의 꼴로 되면서 꼴바썹
이 일어나 싹으로 발전하였으니, 그 과정은 '삿(ㄱ>사>삯>쌍>
싹'으로 풀어 볼 수 있다. '삿(?)' 에 접미사 '-이'가 붙으면 새끼
가 된다[삿(ㄱ)+-이>삿기>사끼>새 끼>새끼. 오늘에 와서는 식
물의 새끼는 '싹'이 되고, 동믈의 싹은 새 끼'로만 드러나게 되었
으나 그 말 겨레의 뿌리는 하나라고:하겠다.
형태들이 분화하는 가장 보꾄적인 틀은, 모음이 바뀌거나 음절머
리 또는 끝에서 자음이 바뀌거나 점미사가 더 붙는 경우라고 할 것
이다. 모음교체의 경우는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이 대립하는 수가
제일 많고 여기에 증성모음의 계열로까지 발전하는 일이 있는데,
한마디로 간추려 '양성-음성-중성' 형은 가장 체계적인 분화의 틀이
라고 하겠다.
먼저 '삿. 샅'을 중심으로 한 분화형태의 말 겨레를 보면, '손
삿, 삿갓(대오리나 갈대로 엮어 만든 갓으로서 그 사이에 들어가
볕이나 비를 피한다), 삿갓가마(초상 중에 상제가 타는 가마), 삿
갓구름, 삿갓나물, 삿갓반자(천장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바른 반
자), 삿기낫(오정이 채 안된 낮), 삿쟁이 (새끼), 삿춤(돌이나 벽돌
을 쌓을 때 돌과 돌 사이에 양회나 흙을 바르는 일), 삿갓연(내부
의 지봉 밑에 천장 없이 보이게 한 서까래)'과 같은 말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보통 일을 해 주고 그 대가로 받는 몫을 '삯'이라고 한다. 이 말
도 '삿(ㄱ)'에서 갈라져 나온 말로, '파>삯'과 같이 받침자음의
앞뒤가 바젼 형태이다. 일한 사람이 일을 시킨 사람에게서 노동의
대가로 받는 것이니 노동가치를 이루어 낸 셈이 된다. 일을 했기
때문에, 어턴 물건을 빌려 주었기 때문에 노동과 시설이 새끼를 쳐
서 벌어 들인 싹이라고 생각해 봄직하다. 이와 관계있는 말로는 '삯
꾼(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 산돈(삯으로 받는 돈), 삯말[세를 주
고 빌려 쓰는 말(馬)=, 삯메기 (먹지 않고 품삯만 받고 하는 농삿
일), 삯방아(삯을 받고 찧어 주는 방아), 삯일(삯을 받고 하는 일),
삯전 (삯돈), 삯팔이(삯을 받고 막일을 하는 품팔이)'와 같은 낱말
들이 있다.
곁들여서 플이할 것은 '샅'의 경우다. '삿'은 말음법칙과 같은
소리의식 때문에 '섣'으로도 표기되는데, '삼>샅'과 같이 음절말
자음이 유기음화한 결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말 겨레에는 '샅(두
다리가 갈린 사이), 샅바, 샅걸이 (씨름에서 오른발을 상대방의 다
리 사이에 넣고 왼다리를 뒤로 뻗치는 것), 샅샅이 (빈틈없이 모조
리, 사이사이마다), 샅폭(바지 따위의 샅에 대는 좁다란 헝겊), 사
타구니 (샅十아구니>사타구니)'와 같은 말들이 있다.
'싹'은 '삿'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말 겨레에는
'싹눈, 싹독(연한 물건을 토막쳐 자르는 모양), 싹수(앞길이 트일
징조), 싹트다'의 형태가 있고, '새끼'와 관련이 있는 말로는 '세
끼발가락, 새끼가락(새끼발가락과 새끼손가락의 통칭), 새끼똥구멍
(항문 위의 조금 옴폭 들어간 부분), 새끼발돕, 새끼집 (짐승의 자
궁), 새끼 치다'와 같은 말이 있다. 짚으로 꼬아 놓은 줄을 새끼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새끼는 두 줄의 짚을
꼬아 만든다는 데 그 실마리가 있을 것 같다. 결국은 두 개의 끈을
꼬아 하나의 또 다른 끈을 만드는 생산성을 바탕으로 하여 '싹-새
끼 ' 로 이어지는 공통의 속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삿'의 분화형태는 앙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모음이 바뀌거나 자음
이 바뀌는 음절구조의 변동을 따라서 말들의 떼를 거느려 가게 된
다. 우선 모음이 바뀐 경우 '삿/섯'의 보기를 살피기로 한다 갈
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사물이 뒤섞여 있는 것을 네 갈리다'라고
한다. '섞-' 은 '삿>파>삽>싹'의 '삯'과 대립되는 형태로 보인
다. 모음의 음상(붐理)이란 관점에서 보면 '싹'은 안에서 밖으로
드러나는 밝은 상태이며, '섞'은 사이사이에 끼여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어두운 소리의 상징을 표현하고 있다. 어떤 물건에 다른
물건을 넣어 구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동작을 '섞다'라고 하는바, 기
실 이 말도 따지고 보면 사이를 뜻하는 네-' 에 접미사 '-다'가 붙어
이루어진 동사라고 볼 수 있다. 네-'과 상관을 보이는 말의 겨레
를 들어 보면, '섞갈리다, 섞다, 섞바꾸다(먼저 것과 다른 것으로
바꿈), 섞 박지 (절인 배추나 무우, 오이를 넓적하게 썰고 고명에 젓
국을 넣어 한데 버무린 김치), 섞사귀다(환경이 다른 사람끼리 서
로 사귀다), 섞이다, 섞 임월 [混文]'과 같은 말의 떼들이 있다. 이
와 함께 섯/섣/설'과 같이 '섯'은 자음이 바뀌면서 또 다른 형태
들을 만들어 낸다. '섣'과 걸림을 보이는 말에는 '섣달, 섣달받이
(섣달 초순경 함경도 앞바다로 몰려드는 명태의 떼), 섣부르다(솜써
가 어설프고 설다)' 등의 말이 있다. 굳이 년 달'을 풀어 보면, '한
해의 마지막과 또 다른 새해가 시작하는 가운데에 끼이는 달'로 설
명할 수 있다. 요컨대 '삿/섯'은 사이 공간이나 사이에 끼이는 시
간의 의 미자질로 간추릴 수 있다. '설 (초두해), 8-24)' 의 경우도 예
외는 아니어서 '새해의 첫 머리' 로, 묵은해와 새해 사이의 경계선
구실을 한다. 그래서인지 중세어 자료를 보면 델'은 년령((초두
해), 8-24)' 을 뜻하기도 하였다. 현대국어로 오면서 살과 설은 별개
의 형태로 나뉘어 쓰이게 되었다. 그럼 피부를 뜻하는 '살' 은 어떻
게 볼 것인가. 피부와 뼈 사이에 있는 근육조직 모두를 통틀어 '살'
이라고 한다 이는 '삿'의 분화형태로서 두 물체 사이에 생겨난 생
성물을 뜻하는 낱말의 겨레라고 판단된다
'삿/섯'계와 합께 모음이 바뀌어 사이를 뜻하는 말의 계열로는,
중성모음으로 바뀌어 쓰이는 '슷(숯)/숟/슬/(숯)' 계의 말 겨레
가 있다. '슷'계에는 '슷다({(가례해), 1-25), 슷봇다(셋어 흠치다 ;
(석보), 11-25), 슷이다(시끄럽다 ; {(월석), 7-19), 숫이다(시끄럽다 ;
(삼강)열 14)' 등이 있고, '슬`계로는 '슬다(알을 낳다 ; ((한청,, 446
d), 쏠다(송강,, 1-9)' 등이 있다. '숫'계에 드는 형태로는 '숫다
(씻다 ; ((중두해,, 5-22), 숫돌({(동문,, 상 48), 숫등걸 ((유씨명), 5
火), 숫불(((동문,, 상 63), 숯((계축)' 과 같은 낱말겨레가 보인다.
'슬'과 관련하여 발달한 말에 ㅅ다((용가, 91), 슬프다((초두해:,
8-21)'가 있다. 유추하건대, '싫어함'은 인간관계에서 상대를 서로
꺼려하는 일이요, '슬퍼함`은 싫은 상황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
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슷(숯)'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선 숯은
나무를 불에 태우되 완전하게 재간 된 것이 아닌 중간 상태의 가연
물질이란 특성을 갖는다. 숯은 '숫' 에서 파찰음화하여 발달한 형태
로 보면 되고, '숫~숯'으로 넘나들며 쓰이다가 뒤로 오면서 '숯'으
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숫(숯)'은 방언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숙껑 (경북 영천), 수깡(경북 문경), 수꿍(경북 울
진 대구), 숫겅 (경북 영천 포항. 영덕. 의성. 안동. 영주), 숫기
(함경도 일원), 쑥(평북 영변. 희천. 정주. 선천. 강계. 자성. 후
창/전북 순창)'과 같은 변이형들이 있다. 이들은 '숫'이 '삿(ㄱ)'
과 마찬가지로 기역(ㄱ)곡용을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형태
들이다 '숫'이 '삿(ㄱ)' 과 같은 뜻으로 발달하여 오늘날에는 접두
사로 쓰이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예 컨대, '숫총각, 숫색시 (남자와의
교접이 없는 여자), 숫접다(순박한 모양-새싹과 같이 세상물정을
모르니까), 숫하다(순박하다)'와 같은 말의 겨레가 있다. '숫' 은
'술'계의 말로도 발달하여 쓰이는데, 음절말의 받침이 흘림소리 리
을 (ㄹ)로 바뀌어서 가지덛음을 한 것이다. '술'계에 드는 형태로서
는 '술술(물. 가루 등이 잇대어 새거나 흘러 나오는 모양), 술(장
식용 실/숟가락 ; (증두해,, 6-2), 술렁거리다 (시끄럽다)'와 같은
꼴이 있다. 음상으로 보아 '술'계는 흐르는 모양을 상징하였으며,
'숟가락'의 뜻으로 쓰이는 것은 음식 사이에 꽂아 먹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모음이 바뀌어 발달한 '삿'계의 또 다른 한 계열은 '실'계의 낱
말 겨레로 보인다. 그러니까 '슷>싯/싣/실'과 같이 전설모음으
로 되면서 형태가 갈라져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서 가
장 쉽게 실례를 풀이할 수 있는 것은, '싯/실'의 낱말겨레라고 할
수 있다 '싯-' 계로서는 싯다(능엄 9-9), 씻다<동문> 하 55),
씻기다, 씻부시다(그릇 따위를 씻어 깨끗이 하다), 씻김굿' 등이 있
고..실_'계로는 실고추, 실구름, 실꾸리, 실국수/질경이, 질기
다, 질금거리다' 등의 형태가 있다. '질-'계를 '실' 과 관계지은 것
은 파찰음화에 따라서 발달한 '실'의 의미자질이 드러나기 때문이
다. "'
앞에서는 모음이나 자음이 바뀌어 이루어진 형태들에 대하여 알
아 보았다. 이제 음운이 덧붙어 만들어지는 형태들을 간추려 살펴
보면 '삿'계의 변이형에 접미사 '-다, 이'가 붙어 이루어지는 것들
이 증심을 이룬다. '-다'에 대하여는 '섞다. 싯다. 슷다'와 같은
예들을 보았으므로 줄인다. '-이'계의 낱말에는 '사이'. 서로.서
리' 등이 있다. 사이는 '삿十-이>사이~새'로 쓰였으니, 공간이든
시간이든 틈을 뜻하는 말이다. 한편 '서로'는 '설 十-오>서로'와
같이 발달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걸리는 사물들의 관계가 복잡하듯이 '사이'
를 드러내는 '삿/섯'의 말겨레들은 폭 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우리들의 인식이란 언제나 관계 속에서 그 값이 결정되기 때 문에,
이를 되비추는 말의 갈래가 여러 모양으로 펴 나아갈 수밖에 없었
올 것이다.
3-2 풀과 목숨
'풀베기 싫어하는 놈이 단 수만 센다' 고 한다. 베라는 풀은 베지
않고 얼마 베지도 많은 풀단의 수만을 헤아림을 이른다. 하는 일에
싫증이 나서 해 놓은 일의 성파만 만지작거리면서 빈등거림을 꼬집
는 말이다.
초본과의 식물에 속하는 모든 것을 혼히 '풀'이라고 한다. 모름
지기 살아 있는 생물은 물과 함께 풀이나 나무와 같은 녹색식물이
있어야만 지속적으로 삶을 누릴 수 있다. 물과 풀, 그리고 불(태
양)이 있을 때, 비로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세계는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잣으로, 자연을 어떤 방법
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언어사고의 장(場)이 달라진 다. 이는 다
시 음성부호인 소리의 체계로 되비치어, 그 형식들은 형식들 나름
으로 굴절하여 혹은 사라져 가기도 하며 혹은 되살아나기도 하며,
흑은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풀의 경우, 우리 배 달겨레
에게는 어떤 자연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언어형식으로 투영되어 분
화. 발달하엿을까.
일반적으로 자연물에 대한 인식은 그 모양이나 성질, 크기 등에
서 비롯되는 것이 있고, 빛깔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 특
히 및깔로써 대상을 가리는 것은 시각상의 효과로 보아 가장 두드
러진 인식의 실용가치를 더하여 준다 이른바 모든 감각은 시각적
인 전이가 아주 자연스레 일어난다
물과 불이 없는 세상이란 생명의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요컨대 물과 불은 삶을 이어가는 가장 윈초적인 요소이며, 그 색깔
은 자연물 인식의 기본 바탕이 됨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불(태 양)은 빛의 원천이니 빛나는 모습에 관계없이 태양은 위대한
가능성이요, 희망이다.
우리는 '푸른 바다' 라고 하여 푸른색으로써 물을 알아차린다. 그
럼 물과 풀의 푸르름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풀의 빛
은 불의 빛으로 보이는 금빛의 주황, 그리고 물의 푸른색이 서로
어울려 이루어진 자연의 위대한 징표라고 할 수 있다. 한마더로 생
명의 색깔이라고 하겠다 땅 속에 뿌리를 내려 물과의 관계를 통하
여 빨아들인 영양을 태양열로 광합성작용을 일으켜 사는 것이 식물
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시험 삼아 필자는 색의 배합과정을 살펴 본 일이 있다. 블의 색
으로 보이는 주황과 물의 푸른색을 섞어 보았더니 초목의 푸른색이
됨을 확인하였다. 자연현상 가운데에서 벚의 갈래, 즉 빛깔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무지개가 아닌가 싶다.
태양이 없는 믈체의 빛깔은 검은색이다. 어두운 밤에 바라다 보
이는 바다의 빛깔은 바로 이러한 방증이 될 수 있다. 솟아 오르는
밝은 태양이 있으매 무지개 및깔의 자연계는 더욱 멎나 제 모습을
드러내 살이 숨쉬게 된다. '빛칼' 이란 말도 따지고 보면 '빛의 갈
래'란 뜻인바, 그 빛이 서로 다름으로써 밝고 어두운 공간과 대상
을 확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초목의 푸른 빛깔은 생명의 원천 같은 것이어서 물과 더불어 하
루도 없어서는 안 될 주요한 먹거리로서의 풀의 의미를 더하여 준
다. 식물이 없이 동물은 살아갈 길이 없으니까. 먹이의 사슬에서도
풀이되는 바와 같이 그 비롯됨은 푸른 녹색식물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다.
소리의 상징체계로 본 '플'의 푸르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국어사적으로 보아 유기음 피읖(ㅍ)은 푸기음 미음(ㅁ)과 비읍(ㅂ)
보다 뒤에 발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물
과 불의 빛깔이 먼저 언어에 투영되고 그 뒤에 '풀'의 빛깔이 인식
됨으로써 '물/불/풀'의 자음체계에 맞는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풀' 은 증세어에 '플(월석), 9-23)' 로 나타나며 그 변이형에 '풋
(중두해 17-57)' 이 보이기도 한다 '플'에서 모음이 바뀌거나 접
미어가 붙어 다양한 낱말의 겨레를 이룬다. 이를테면 '푸르-/퍼
떻-/파랗-' 이 그러한 분화유형에 드는 형태들이다.
'퍼 렇-'에 드는 말로서는, 퍼렇다, 퍼렁, 퍼렁이, 퍼르스름하
다, 퍼르죽죽하다, 퍼릇퍼릇' 등이 있고 '푸르-'계에 드는 말로는,
'푸르다, 푸렁(푸른 물감이나 및깔), 푸르대콩(열매의 껍질과 속살
이 다 푸른 콩), 푸르디푸르다, 푸르락누르락, 푸르무레하다, 푸르
죽죽하다, 푸르퉁퉁하다, 푸른곰광이, 푸릇푸릇'과 같은 낱말의 겨
레들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 '풀'은 그 받침이 바뀌거나 탈락하여 일정한 말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풋-/푸-' 따위가 그것으로, 주로 접두사로
십이는 일이 많다. 예컨대 '푸새, 푸서리 (잡풀이 무성한 땅), 푸성
=, 푸대접 (~고기대접)/풋나기 (-이제 갓 돋은 풀에 비유한 말),
풋감, 풋걸음, 풋머리 (햇것이나 맏물이 나오는 무렵), 풋바심 (채
익기 전의 벼나 보리를 떠는 것), 풋밤, 풋술(맛도 모르고 마시는
술), 풋윷(서투른 윷 솜씨), 풋잠, 풋장(잡목의 가지를 푸른 채로
말린 것). 풋콩' 등과 같은 형태가 있다.
옷에 풀을 먹인다고 할 때, 혹은 '풀 먹은 개 나무라듯 한다`고
할 때의 '풀'과, 앞에서 풀이한 초목으로서의 '풀'과는 어떠한 유
연성'이 있을까. 둘 다 먹이의 감이 된다는 점에서 그 효용성이
다르지 않다고 본다. 물질의 구성요소로 보더라도 그러하다. 푸른
쭐이 물과 불(태 양)의 빛이 합성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옷에 입
히는 풀은 밀가루 등에 물을 타서 불에 끓여서 만드는 것으도 서로
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보인다. 이렇게 '액체에 다른 액체나 가루 같
은 것'을 타는 것을 '풀다' 라고 하는데, 이 말도 원한을 씻어
없애듯이 응어리진 것 또는 얻고자 하는 정도의 감으로 다시 만들
어 내는 '만들어 냄'의 특징을 보인다. 풀이 있으므로 다른 생명들
이 식량과 같은 삶의 중요한 문제를 헤결하여 살아가므로 그러한 풀
의 생산성을 중심으로 풀의 뜻을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물과 불과 풀을 소리 상징으로 보면, 물이 가장 부드럽고 불은
두 입술이 닿았다가 터지는 파열의 느낌을 환기한다. 한편 풀은 완
전한 유기성 히웅 (ㅎ)이 첨가되어 있는 거센소리의 상징을 불러일
으킨다.
아름답고 그윽한 꽃내음을 바람에 날리는 풀꽃의 일생을 생각해
보라. 울긋불긋한 여러 빛깔의 씨 앗에서 움이 돋고 잎이 피어 푸른
빛의 삶이 하늘과 땅 사이에 너울댄다. 그 고운 꽃은 타오르는 불
처럼 피 어나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씨앗의 상태로 돌아가 흙에 묻
힌다
물과 불은 어울려 푸른 산과 들에 엄청난` 목숨살이를.길러내고
삶과 죽음이라는 생명현상의 연금술을 꽃피운다. 때로는 풀꽃으로,
목련으로, 호랑이로, 양으로, 사람으로의 죽살이를 빚어 내어 이른
바 삶과 죽음의 교향악을 연주한다. 그것은 무지개의 빛을 모두 어
울리게 흐트러 놓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아마 횐색으로 보일
것이다. 빛을 모두 어우르면 회게 보이니까. 살아 있음도 죽어 있
음도, 물과 불을 다스리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어 이루어지나
니,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은 태양(빛)의 밝음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3-3. 꽃과 두드러짐
꽃의 빛깔이나 모양이 좋아야 나비가 그 꽃을 찾아온다. 그래서
'꽃이 좋아야 나비가 모인다'는 말이 있다. 자기의 상품이 좋아야
고객을 끌어모을 수 있고, 딸이 고와야 사위를 골라잡을 수 있음과
같은 경우를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다.
식물의 씨받이를 하기 위한 생식의 기관이면서 특유한 냄새와 가
루가 있고, 꿀맛 나는 샘이 있는 부분을 일러 '꽃'이라고 한다. 여
기 이런 뜻에 바탕을 두어 아름다운 여인 흑은 번창하고 영화스러
운 사물이나 사실을 꽃으로 빗대어 쓰기도 한다. 기능으로 보아 꽂
은 종족 보존을 위한 기관이다.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고 때로는 꽃
말을 지어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꽃 그 자체는 식물의
성을 뜻한다. 수꽃이나 암꽃에 따라서 특성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꽃이 있음으로 해서 세대가 이어지며 번영을 약속할 수 있으니, 꽃
은 씨알이며 부활이요, 생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
서 꽃이야말로 식물의 정수리이며 가장 두드러져 뛰어난 곳이다. 꽃
은 수직으로 그 봉우리가 솟아 옆으로 둥그런 꽃잎을 펴서 특유의
향취와 언어를 바람에 날린다. 보이지는 않으나 그 냄새를 따라 나
비와 벌이 날아들어 서로 함께 살아 가는 지혜로운 생존과 생식의
욕구를 채워 나아간다. 식물의 부분 가운데에서 가장 두러져 솟은
기 관이니, 수직성향은 태양을 지향하는 흐름이라고나 할는지
꽃은 꽃받침과 꽃부리(꽃잎)로 이루어지는 꽃껍질과, 가장 중요
한 알맹이인 꽃술로 짜여진다. 입술이 입을 보호하듯이 꽃껍질은
꽃의 내부를 보호하고, 꽃받침과 꽃부리(꽃잎)는 벌레가 꼬이게 하
는 구실을 한다. 꽃부리와 꽃잎은 같은 부분으로, 가장 부드러우며
무지갯및의 고운 치마 저고리를 입는다. 그래서 꽃이라고 하면 우
리는 우선 꽃잊을 떠올리게 된다.
본디 '부리' 는 새나 짐승의 주둥이를 말하는바, 물건의 끝이 뾰
족하거나 병과 같이 속이 비고 한 끝이 터진 데를 이른다. 부리와
잎이 같은 맥락으로 쓰임을 고려할 때, 꽃잎은 특정한 나무나 풀잎
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물폰 나무와 풀
의 잎이 비교적 오래 가는 것이라면, 꽃잊은 피었다 쉬 지는 것이
긴 하지만.
옛말에서 꽃은 '곳((월석),), 곧(두해),), 곶(용가),) ' 과 같은 여
러 가지 꼴로 쓰이었다. 오늘날에 와서 서로 독립한 낱말이 되었는데
이 형태들이 드러내는 뜻과 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 '곳'
은 꽃의 뜻으로도 쓰이나, '장소'를 뜻하기도 한다. '장산곶'에서
의 '곶'처럼 육지로서, 바다에 튀어나온 부분을 기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땅은 만물이 나서, 자라고, 죽고, 다시 나는
죽살이의 본고장이요, 영왼한 서식처이다 땅이 없는 국가와 민족을
생각헤 볼 수 있겠는가. 땅은 성으로 보아 분명 여성으로 상징된다.
마찬가지로 꿎은 열대, 즉 생명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니 그 모양과
느낌이 다르긴 하지만 그 본성은 생산을 뜻하는 아주 주요한 부분
이라는 점에서 모두가 같지 않은가. 원래 땅(뭍)은 바다 위로 솟아
을라 존재하는 공간이다. 지구를 이루는 성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
면 물이나 뭍이나 같지만, 인식의 대상으로서는 육지는 분명 물 위
에 솟아오른 물체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눈으로 보아 뒤어나온 곳
을 '곳. 곶>꽃'이라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꽃이 지닌 생명의 신
비는 마침내 모든 종교에서 꽃이 생명과 부활의 상징으로 쓰이게
한다. 대부분의 무녀들이 꽃을 쓰고, 불가에서는 연꽃으로 상징을
삼으며, 모든 나라가 나라꽃을 가리어 정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으
로 보아 화랑의 시초였던 원화(源花)도 꽃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쓴
것이라고 보이며, 부여의 유화(柳花)도, <헌화가>의 수로부인도 모
두가 꽃과 관계를 지어 상징적으로 쓰고 있음에 틀림없다.
'곧'의 경우도 장소를 가리키는데, '곳(곶)/곧/골'로 자음의
바씸을 따라 이루어지는, 두드러진 장소를 의미하는 낱말의 데에
포함된다. '골'은 여러 가지 꼴과 뜻이 있지만, 특히 산골짜기가
대롱과 같이 긴 굴의 모양을 한 장소를 이른다. 굴의 변형으로 이
해하면 될 것이다 꽃도 안으로는 생명이 만들어지는 조그만 하나
의 신비스런 굴이다. 참으로 꽃은 성스러운 삶이 만들어지는 생명
의 고향이다. 사람의 목숨이나 풀꽃의 목숨이나 목숨은 다르지 않
다 존재하는 방식이나 모양이 다를 뿐, 우리 사람도 짐승들이나
마찬가지로, 따지고 보면 어미의 태에서 태 어나, 자궁이라는 굴 속
에서 자라나서, 이 세상에 나온다. 이를테 면 합일의 공간이 굴이요,
그 굴에서 나오면 분리가 되는 것이다. 요약건대 식물이 퍼져나아
가는 생명의 굴이 골이라면, 동물이 싹터 생식하는 골이 바로 굴이
라고나 할까. 굴은 말의 분화형태로 보아 '궂/굳/굴/궂' 같은
음성모음 계열의 낱말과 '깃-긷-길' 계와 같은 증성모음 계열로 발
달해 왔다.
아울러 덧붙여 둘 것은 우리 얼굴의 코도 '골'에서 멀지 많은 낱
말이라는 것이다. 중세어로는 '고((초두해), 20-17)' 인데 히ㅇ(ㅎ)
종성체언으로서 '곳/곧/골' 과 서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즉 코는
얼굴에서 가장 두드러져 솟아 있는 부분으로, 속은 굴과 같은 모양
을 하고 있다. 코를 곤다고 한다. 이때의 '골다' 라는 말은 코가 바
로 대롱과 같이 울림성이 좋은 기관임을 단적으로 드러낸 경우라고
하겠다.
우리말의 발달이란 관점에서 볼 때, 근대국어 이후로 오면서 어
두자음의 경음화와 어말자음의 격음화를 거쳐 '곶'이 '꽃'으로 적
어 쓰이게 되 었다. 그러면서 '꽃[花].곧[卽. 直]/곳[所]/골'은
각기 볍개의 낱말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각 단어를
중심으로 하는 낱말의 떼를 현대국어에서 더듬어 보기로 한다
'꿎/곧/곳/골'의 낱말겨레
1) 꽃-꽃가루, 꽃구경, 꽂(용수 안에 괸 술국), 꽃놀이, 꽃다지
(가지, 오이, 호박 따위의 맨 처음 달린 열매). 꽃말, 꽃무늬,
꽃받침, 꽃샘, 진달래꽃, 연꽃, 나리꽃/꼬장(꽃의 제주 방언),
꼬지 (꽃의 함경 방언), 꼬치 (꽃의 함남 풍산 방언), 꼿(꽃의 경
상. 강원. 전라. 제주 방언) 등
2) 곧- 곧, 곧다, 곧날대패, 곧은결, 곧은금, 곧은불림(자백), 곧
이, 곧잘, 곧장, 곧추, 곧은바닥(수직으로 된 광산 구덩이), 곧
은창자(직장) 등
3) 곳- 곳, 곳곳, 꼿꼿하다 등
4) 골-골골샅샅, 골골이, 골다, 골고루(골골十-우>골고루), 골
무, 골목, 골마루(안방이나 건넌방에 딸린 골방 모양의 좁은 마
루)/세모꼴, 꼴값 등.
'꽃'의 경우 방언에 따라서는 '꼬지'와 같이 파찰음이 유기음화
되지 않은 중간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경우도 있음은 흥미롭다. 꽃
이름 중에서 '-꽃'파 같이 꽃이 뒤에 붙어 꽃 이름을 나타내는 경
우는 아주 생산적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 풀이가 다르긴 하지만 <헌화가>에서의 꽃은 진
달래로 판단된다(삼유, 권 2). 중세어 자묘나 경북 경산
지역의 방언을 보면, '진달배>진달외>진달래'로 되었을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무슨 연유로든지 꽃이 위에 든 <헌화가>와 같은
문학작품이나 종교설화에 등장하는 건 이미 오래다.
한마디로 '꽃/곧/곳/골'의 낱말겨레들이 '두드러져 솟음'을
의미특성으로 하는 데에서 분화 발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무
나 풀의 꽃은 다른 어느 부분보다도 횔씬 돋보인다. 꽃이 핀디고
하거니와 사람들은 피는 꽃을 불이 피는 것과 같은 사물인식을 바
탕으로 하여 쓰는 듯하다. 환하기에 차이는 있더라도 꽃이 핀 모습
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상징을 드러낸다 불은 모든 것을 태운다.
꽃은, 나무가 타 연기 냄새를 내듯, 자신을 불사름으로써 향기를
내어 벌과 나비의 눈길을 모은다. 모든 일에서 이러한 자기연소와
자기회생이 없는 변신이란 거의 불가능한 법. 진통과 시련을 겪고
난 뒤에 거룩한 삶의 장이 열리는 것 이니, 불이 타는 원리에 따라
에너지의 변동이 일어난다. 연소현상은 생명을 이어가는 값진 사물
의 근본이고, 신진대사를 따라 생물이 자라는 것도 불사름의 원리
가 있음으로써 가능한 현상이다. 연소현상이 급하면 폭발과 파괴가
일 어나지만, 느리면 동물의 소화작용과 같이 적절한 생명현상을 이
루어 나아간다. 이런 연소현상의 한 헝태로 아름다운 많은 꽃송이
들은 쉬임 없이 피어서는 이내 지고 만다. 산다는 것 자체가 꽃이
피뜻 자신을 불살라 태움으로써 활동의 근거를 마련하는 과정이지
않은가
3-4. 뿌리와 생식
뿌리가 깊은 나무는 심한 바람이 불고 흥수가 나도 혼들림 없이 제
철에 꽃을 피워 퐁성한 열매를 맺는다. 어떤 사물이나 사실의 바탕
이 튼튼하면 웬만한 시련이 다가오더라도 본래의 꿈을 이룬다는 이야
기이다. 그래서 (용비어천가), 제 2장에서는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
람에 꺾이지 않아 꽃도 좋고 열써가 많이 열리며, 샘이 깊은 물은
가물에도 그치지 않아 냇물이 되어 깊은 바다에 이른다'고 하였다.
뿌리는 땅속에서 식물체를 떠받들고, 수분과 양분을 빨아올리는
중요한 부분이다. 뿌리는 고등한 식물에게만 있는데, 그 종류는 여
러 갈래다. 땅속에 내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물 속에 내리는 뿌리
도 있다. 더러는 대기 중에서 활동하며 호흡을 맡는 것도 있으며.
탄소동화작용에 따른 영양을 저장하는 뿌리도 있다.
옛말에서 뿌리는 '불휘 (용가1)' 의 계열로 드러나기도 하고, '부
리 ((두해)). 의 계열로 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뒤로 오면서 '불
휘.는 뿌리[根]로 분화되었고, '부리'는 새의 주둥이 또는 산이나
꽃의 한 부분을 뜻하는 말로 분화되어 삽이고 있다. 나타내고 있는
속성으로 보아 부리나 뿌리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 둘을 한
단어족으로 보놓 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나무의 뿌리와 새나 병의
주등이 부분을 틸펴 보자. 사물의 끝 부분에서 무엇인가 처음으포
받아들이고 맞이하며 점차 파고드는 성질이 서로 같다고 할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이 자신의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영양이
될 만한 것을 섭취써야 한다는 점에서는 식물과 동물이 서로 다를
바 없다. 영양을 섭꺼하는 가장 앞선 부분이란 점에서 뿌리의 기능
은 제일차적 이다. '먹는 것이 하늘'이라고 모든 생물은
먹어야 사니까. '뿌리가 든든해야 잎이 무성하다(擇固葉茂)'고 하
였거니와 뿌리는 삶의 원천 또는 밑으로도 이해되기도 한다. 제 구
실을 하는 뿌리를 가진 나무는 무성한 잎과 꽃, 그리고 열매를 맺
어, 동식물의 보금자리인 그윽한 숲을 이룬다.
'숲'이 거룩한 삶의 고향으로 상징되는 것은 단군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에서 드러나거니와, 이는 우리들의 문화가 나무와 풀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집.이라는 말도 그렇다. 집'은 짐'이란 형태에서 어말 자음이
파열음으로 바뀌어 이루어진 말인데, 짐 '은 먹는 김, 혹은 논이나
밭의 풀인 '김'이 구개음화하여 이루어진 형태다. 논밭의 풀을 매
는 것을 김매다(경상. 전라. 평안), 기심매다(경북 안동. 군위.
예천. 봉화), 지심매다(경북 울진. 영양. 청송. 대구 성주/전남
강진. 완도. 구례)'로 표현한다.
풀을 뜻하는 '김'은, '기심/지심'으로 쓰이는 방언형으로 미루어
.기심 (>지심)에서 비롯한 말로 보이며, 이때 '기심(>지심)' 은 새
깃이라 할 때의 '깃 (>짓)'에 걸맞은 말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러니까 '집'이 김 (기 심/깃)' 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을 받아들인다
면, ((삼국지), 나 <진서>의 기록대로 선조들이 나무 위나, 풀로 만든
집에서 살았으며 의복도 풀이나 나무껍질로 해 입고 살았으리라는
언어적 인 추리가 가능하다. 떨어지거나 해진 부분에 조각을 대거나
또는 그대로 궤매는 동작을 닙는다' 고 한다. '깁다'의 '깁 -'은 옷
감을 뜻하는 말로서, 풀을 뜻하는 '김>깁'에서 비롯한다.
혼히 남근(男根)을 숭배하는 습속이 있다고 한다. 종족에 따라서
는 남자의 성에 장식을 하여 거리를 활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재
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남자의 뿌리에 대한 숭배는 남자로 상징
되는 나무를 숭배하는 습속으로 이어진다. 이미 유명한 신화학자 프
레이저의 <황금가지 Golden bought>에서도 풀이해 놓았지만
나무숭배는 상당한 분포를 보이며 고대인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관
습이다. 중국에서는 산소 위에 측백이나 소나무를 심어, 그것을 죽
은 사람의 넋으로 생각하는 관습이 있었고, 몽고인의 졍우에는 우주
산(宇宙山) 중심에 있는 나무에 신들이 그들의 말을 매어 둔다고 믿
었다. 그들은 또한 자무부 라는 나무가 그 뿌리를 수멜산의
밑둥에까지 내믹고 산꼭대기를 덮고 있다고 믿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들은 나무의 열매를 먹고 살며, 악마들은 산골짜기에 숨어서 그
들올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 엘리아데는 (샤머니즘)에
서 기륵하고 있다. (고조선기)에는 신(神)나무가 등장하고 그 신나
무의 거리롤 신시(神市)라고 불렀다고 하는 기륵이 있다. 그 뒤에
와서 옥저는 '와지'라고 불렸는데, 이는 '수풀'을 뜻하였다. 신라의
경우도 시립(始林)이라 하였으니, 나무는 신성한 존재로서의 상징
성을 갖고 있음을 옛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무가 생명의 상징
이라면, 그 생명은 하늘로부터 신이 주신 것이니 그 나무는 신올 드
러내는 이정표 구실을 하였다고 할 것이다. 신나무가 서 있는 지역
을 '소도'라 하여 감히 범할 수 었는 거룩한 성소(聖所)가 되었으
니. 나무는 겨레의 뿌리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그 뿌리에서 가
지가 번어 하늘의 백성은 번식을 하게 되고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
어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을 것이다.
뿌리는 지역에 따라서 '뿌래기 (층청), 뿌랙지 (경상), 뿌랭기 (전
라), 뿌렁거지 (강원), 뿌렁구(전라), 뿌레기 (경상 충청. 강원),
뿌팽이 (전라. 경상. 충청)'와 같은 여러 형태롤 분화되어 쓰이고
있다. 사람들은 남자의 뿌리를 '블알/불'이라고 하며. 고구마나
감자의 뿌리로 비유하기도 한다. '블알'의 '블'은 타오르는 불의
뜻으로 보인다. 불은 생성과 창조의 원천이니, 남자의 뿌리가 가지
는 기능과 서로 통하는 점이 있지 않을까. 쏠데없는 믈건을 비유
해서 '블 없는 화로, 딸 없는 사위'라고 한다. 생명의 뿌리로서의
불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의식 속에 뿌리내려 쉬임 없이 언어적
상상력을 충동시키며 가지를 벋고 있다.
3-5. 움과 구멍
겉으로 보이는 외양은 별로 좋지 않으나 그 내용에서는 흘륭한
점이 있을 때 '움 안의 간장' 흑은 '투가리보다 장맛'이라고 한다
움 안은 우중충하지만 그 안에는 중요한 조미료의 하나인 간장이
있다는 것이요, 투가리는 별 볼일 없으나 끓인 장맛은 그럴싸하다
는 것이다.
땅을 파고 그 위를 거적으로 덮고 다시 그 위를 흙으로 덮어 겨
울의 채소나 화초를 두는 데를 '움' 이라 하며, 베어 낸 나무의 뿌
리에서 나온 싹도 '움'이라고 한다 어두운 굴과 같은 장소에 넣어
둔 채소에서 싹이 돋는 것이나 나무의 뿌리에서 싹이 터 나오는 것
도 '움이 튼다'고 한다 중심을 이루는 의미가 주변적인 것으로 전
이되어 간 예라 할 것이다
움은 또 다른 굴의 변형으로, 생 산적이고 여성적인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웅녀도 움 속에서 사람의 몸을 입었다 함은 대단히 암시
적이다.
'우물' 이라는 말도 '움의 물'에서 비롯한 것으로, 어떤 삶의 본
거지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움물(경기. 강원. 층청. 경기 황해 등)'이라
고도 하며, '웅굴(경북 안동 대구 등)'이라고도 한다.
가도가도 끝없는 사막의 길에서 움물이란 평안이 깃드는 안식처
요, 보금자리요, 희망인 것이다. 그 움물에 마시는 물이 없을 때
거기엔 오로지 이리저리 물을 찾아 헤매이는 무리가 있을 따름이다
'움'과 관련하여 한 무리를 이루는 꼴에는 '움나무, 움돋이(초
목의 베어 낸 자리에서 다시 돈아나온 움), 움딸(시집간 딸이 죽은
뒤에 다시 장가를 든 사위의 후실), 움막살이, 움벼 (가을에 베어
낸 그루에서 움이 나서 자란 벼), 움뽕(봄에 한번 뽕잎을 딴 뽕나
무에 다시 돋아 난 뽕잎), 움실대다, 움씨 (뿌린 씨가 잘 싹트지 않
을 때, 덧뿌리는 씨), 움잎(움에서 돋아난 잎), 움직이다, 우묵하
다, 우묵주묵(군데군데 크고 작게 우묵하게 들어간 모양), 우믈거
리다, 우물곁, 우물지다(뺨에 보조개가 생기다), 우물질(우물 물을
퍼 내는 일)'과 같은 겨레붙이들이 있다.
움과 물은 아주 가까운 관계로 인식되어 온 것 같다. 우물에 따
라붙는 속담이나 성구들이 상당수 있음도 우연한 일은 아닌 듯싶다
예 컨대, '우물길에서 반살기 받는다(-뜻밖의 음식}, 우물 들고
마시겠다, 우물에 가서 숭능 찾겠다(-급한 성미), 우물 안 개구리
(세상 물정을 모름), 우물 옆에서 목말라 죽는다(-꾀가 었고 고
지식함), 우물을 파도 한 우물 파라(-한 가지 일에 몰두하라), 우
물가에 애 보낸 것 같다(미숙하여 마음이 놓이지 않음)' 둥의 표현
이 있다.
물이 있는 곳에서 곧 삶이 시작되고 발전되기 때문인가. 이름하
여 생명수라는 말도 있으니. 움물의 형태는 구멍이다. '움물'은 '움
물>우물'로 미음(ㅁ)이 동음생략된 것이다. 우물에서는 이웃 사람
들이 모이고, 거기에서 물올 길어다 목을 축이고 밥을 짓는다. 작
은 오아시스라고 할 수 잇올까. 움에 성 (性)이 있다면 여성일 것이
요, 소리로는 음성모음계열이 며, 우면(羽面)조에 해당하는 겨울의
상징을 자아낸다고 할 것이다. 밤이면 하늘에 뜨는 별이 우물을 비
추고 기러기는 철을 따라 하늘을 난다. 애절한 사연이 담긴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도 우물에서 돋은 무지개로 끝이 난다. 어린이의
우물은 어머니의 품이요, 젖가슴이 아니겠는가. 여성적인 것에 의하
여 인간의 구왼이 있다고 괴테 가 지적하였듯이, 물은 목숨
살이를 가능하게 하는 젖줄이고 삶의 고향인 것이다. 단군임금의
어머니 신인 '고마' 가 바로 물의 신이요, 어두운 공간을 떠돌며 신
비의 생명력을 북돋우는 지모신이었음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감사하다는 뜻으로 '고맙다'라는 말을 쓰는데, 이때
의 '고마'가 바로 물신이며 어머니 신인 것이다. 고대인의 주생할
이 굴살이였음을 돌이켜 볼 때 움, 곧 구멍은 우리 생할의 오래고
낯익은 공간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든 생할이 움 안에서
이루어겼다. 필자의 언어 감자으로는 '움'의 모음이 바뀌어 엄
十이 >어미 '가 되어 어머니로 발달하였으며, 모음이 바뀌어 '암
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움/엄/암'은 하나의 낱말겨레
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샘각된다. 움, 곧 싹이 있는 곳에 아름다운
꽃파 소담스러운 열매를 기약할 수 있으니까 '아이를 업는다'고
할 때의 넙 다'도 '엄'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어말자음이 바뀌
어 넘 >엎>업'의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닐까 ? 업다'는 등 뒤에 어
떤 사람이나 사물을 떴어 놓음을 가리킨다. 이는 뱀 '의 방위가 '뒤'
라는 것과 깊은 상관성을 보인다. 모음의 대립으로 보아 '아비 (암
小-이>아비)' 의 '압'은 넘 '과 대립되는 낱말의 조각이라고 판단
된다. 방위로 보아 아비는 앞인데, 어미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우리의 위대한 어떠니 (엄)은 고마님이시고, 그의 움은 단군이며,
그 가지의 잎과 열매로 이어지는 우리들은 배달의 겨레이니, 겨레
는 하나되기를 힘써 '우리'이고자 하는 이상을 반드시 이루어야 한
다.
4. 돌과 원운동
4-1. 봄과 꿈
손님을 대접하는 데 사돈이 제일 어렵다고들 한다. 식량 사정이
안 좋은 봄에 사돈을 만나 대단히 난감한 정황을 일러 '봄 사돈은
꿈에도 보기가 무섭다'고 한다. 이렇듯 주머니 사정이 뜻같지 아니
한 때 대접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는 수가 더러 있다.
봄은 가을과 짝이 되는 계절로서, 이제 막 이 누리의 생명이
약동함으로 붐비는 계절이다. 절기로 보이 대략 입춘에서 입하에 이
르는 시기로, 참으로 봄은 꿈으로 가득한 신의 선물이다.
뒤에서 가을이 '되돌림의 계절, 거두어 들이는 계절' 로 풀이되었
거니와 봄은 대조적으로 논과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기다림과
생산을 기약하는 계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봄이 '보
다'에서 비롯한 말로 본다. '보다'는 '사물의 모양을 눈을 통하여
알다, 알려고 두루 살피다, 보살피어 지 키다, 일을 맡다, 시험을 치
르다, 사고 팔기 위하여 장으로 가다, 값을 매기다, 참고 기다리다
좋은 때를 만나다, 자손을 낳다, 자손을 결흔시키다, 음식을 차리
다, 운수 같은 것을 점치다'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봄'은 '보_+_ㅁ>봄'으로 그 형태의 짜임새를 쪼개 볼 수 있는
데, 여기서 '보다'는 위에서 설명한 것 가운데에서 '기다리다, 아
이를 낳다, 자손을 결흔시키다'의 의미와 깊은 유연성을 가지는 것
으로 보인다. '보다'의 어간 '보-'는 중세국어의 '보[보(쟁기) ;
(훈몽), 보(방축 ; (유씨명), 보(ㅎ) (包料 ; (역해),), 보(ㅎ)
(법화)' 와 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모두가 생산성과 가능성의
뜻을 갖고 있다. 쟁기는 밭갈이에 사용되니 생산의 도구이며, 방축
도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농사에 물을 대어 주니 역시 생산성과 관
계가 있다. '보자기'는 어떤 사물(씨앗. 아이 등)을 간수하거나 기
르고 '대들보'는 집을 장만하여 정착할 수 있게 하니 보다 큰 것을
위한 바탕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이 '봄' 과 상관을 보이는 형태로는 '봄갈이(봄철에 논밭을 가는
일), 봄낳이(봄에 짠 무명), 봄놀다(뛰놀다), 봄맞이, 봄새 (봄철 동
안), 봄철, 봄타다, 봄바람, 봄물(봄에 얼음이나 눈이 녹아서 흐르
는 물)'과 같은 꼴이 있다.
덧불여 둘 것은 '보다'의 제일 중심이 되는 뜻이 눈으로 보는 것
인데, 이때 '보-' 는 집에서 가장 중요한 '들보'의 의미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한다. 보는 것은 사물인식의 가장 중요한 대들보의 구
실을 하니까.
무엇을 보고 듣고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기초에 해당하는 일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보는 것, 즉 시지각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보는 일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우리의 어두
운 육체를 밝혀 주는 등대의 구실을 한다. 보지 못한다면 그저 막
넌한 추상이나 어림짐작이 있을 뿐. 그 중요성은 두번 다시 되플이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감각과 모든 동작을 시각화하려는 경향이, 특히 우
리 말에서는 두드러진다 '입어 보다, 먹어 보다, 만져 보다, 맡아
보다, 들어 보다, 느껴 보다'의 경우처럼 인간의 모든 감각을 시각
화하고 있다. ('-보다'는 다른 동작 동사와 함께 복합어를 만들어 쓰
지만 형용사와는 결합되지 않는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봄은 계절 중에서도 시각의 구실을 하는 계절이다. 봄의 꿈은 부
할과 생장을 의미한다. 봄은 대지에 생명의 불을 붙이는 신의 음성
이요 신의 심부름꾼이 아닐까.
4-2. 여름과 해
'여름 불도 쬐다 나면 섭섭하다'고 한다. 더운 여름에 불을 쪼일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쏠데없는 것이라도 있다가 없어지면 서
운하다는 말이다.
절기로 보아 여름은 입하(立夏)에서 입추(立秋)에 이르는 기간으
로서, 네 계절 중 제일 덥고, 낮은 길며 밤은 짧다. 역리학 (易理學)
에서 여름은 불로 비유되며 소리로는 헛소리(치음)가 된다
지금은 계절로서의 '여름'이나 열매를 맺는 '열음'이나 음상
이 같지만, 옛말에서는 계절을 녀름(석보)' 으로 열매는 '여름
(능엄)' 으로 나타내었다. '녀름'은 '녈음'이라고도 하거니와 지
금도 평안도 방언에서는 너름'으로 쓰고 있다.'
우선 '녈음'의 형태를 보면 녀十으十-ㅁ>녈음'으로 보인다.
'녀-' 는 니-'로도 표현되는바, 니-' 는 원초적으로 태양을 뜻한
다. 만주어에서 '닝구'는 위 또는 머리란 뜻으로 쓰이며, <삼국사
기>,의 지명자료를 보면 '日/熱 의 대응관계가 확인된다. 이러
한 이유에서 필자는 여름을 태양의 계절, 진행의 계절로 보고자 한
다. 음식을 익히는 것을 중세어에서는 '니기다/닉다((월석)' 로 쓴
다. 또 머리에 물건을 얹어 놓는 것을 니다((두해)) 라고 한다. 한
펀 일본어에서도 '니'는 '丹. 赤. 熟.' 등의 의미로 쓰임을
생각하면, 그러한 가정에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지금도 함경도 선
천 정주 등에서는 익 다'를 '닉다'라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해가 뜨고, 해가 진다고 하였다. 지구는 가만히
있고 태양이 움직여서 모든 만물이 운행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던 것
이다. 해가 돌고돌아, 봄에 이어 여름을 오게 하여 모든 생물을 자
라게 한다. 특히 식량을 대변하는 말인 '벼'를 '니 (>이 ; (구급간),
-86)' 라고 한 것도 관계가 있다고 보겠다. 공자님도 밥을 먹어야 산
다는 말이 있지만 참으로 벼는 인간이 삶을 이어 감에 있어 특히
한국인에게는 두말할 나위 없이 증요한 자원이다. 마치 태양이 없
으면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태양과 식량, 이 둘은 결코 부
인할 수 없는 삶의 필수 조건으로 우리의 생활을 크게 좌우한다.
태양은 숭배의 대상으로 가장 위대한 '니마'신으로 표현된다. 지
금은 구개음화되어 눈썹에서 머리털이 난 부분 사이의 얼굴 한 부
분을 말하는 '이마' 정도로 남겨져 상일 따름이다. 비유컨대 태양
은 하늘에 및나는 가장 위대한 이마요, 눈이요, 광명이니 에너지의
총본산이라 할 것이다. 계절과 관계지어 볼 때 태양은 '진행'의 뜻
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듯하다. 봄에 싹이 트고 꽃과 잊이 핀 것을
그대로 성숙되도록 잘 이끌어 나아가는 것이 태양 아닌가. 꽃이
피었던 자리에 열매를 맺게 해 그 씨앗 속에 생명을 거두어 넣는 것
이 태 양이다. 태양은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목숨살이의 장을 열
어 나아가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가을에 열매가 맺혀 땅에 묻혔다가, 봄이면 새
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든 만물이 영원
히 그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니,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팥이요
영생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것은 죽음과 삶이 뫼임없이 이어지
는 반복의 연속이며, 그러한 연속은 생명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여름은 한창 활동하고 성장하는 계절이다. 따라서 일할 때 부지
런히 일을 해야 함을 강조하는 권유도 있다. 넉 름에 하루 놀면 겨
울에 열흘 굶는다'와 같은 성구가 바로 그것이다: 퉁구스의 말에는
열매가 맺음을 '일' 이란 어간으로 나타낸나. 그 영향관계를 소
상히 밝힐 수는 없으나, 서로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넉 름`에 관계되는 중세 어에서의 낱말겨레에는, '녀름((소해)) 5-
5), 녀ㄹ지이 (농사 ; ((속삼강), 효), 녀름ㄷ외 다(농사가 잘 되다 ; <석
보>, 9-34), 녀름됴타(풍년이 들다 ; 훈몽), 하 19), 녀름디을아비 (농
부, (중두해), 3-3), 녀름지△리 (농부, (능엄), 3-88), 녀름지△아비
(농부 ; ((두해), 3-5), 녀 름지△ㅏ (농사 ; ((초두해), 2l-41), 녀름짓다(농
사짓다 ; 월 석,, 10-21)' 등이 있다.
주로 녀름-'의 형태가 중심을 이루며, 전체적으로 구개음화된
니은(ㄴ) 소리가 자리하고 있음을 눈여겨보게 된다. 그러면 현대어
에서는 어떤 형태로 어휘가 분화되는지 알아 보도록 한다 낱말겨
레로는 t여름, 여름고사리삼(고사리삼과에 딸린 여러해살이 양치
류), 여름낳이 (여름 동안에 짠 피륙), 여름밀감, 여름살이 (여름에
입는 베로 지은 흩옷), 여름지이 (농사), 여름지기 (농부), 여름털 (새
나 짐승의 여름 틸)' 등이 있다. 두음에 구개음화된 니은(ㄴ)이 오
는 것은 현대어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녀름됴타, 녀름ㄷ외다'와
같은 말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와 함께 오늘날의 말에서는 '여름`이
식물의 명칭과 같은 학술용어에 덧붙여 쓰이는 경우를 찾을 수 있다.
4-3. 가을과 되돌아감
'동냥 얻으러 다니는 승려가 추수할 가을철이면 매우 바빠진다'
는 말이 있다. 일러 '가을 중 싸대듯한다'고 하는바, 몹시 바쁜 정
황을 드러내고 있다
가을은 입추(立秋)에서 입동(立冬)에 이르는 계절로, 모든 곡식
이 익어 가고 열매를 맺음으로써 겨울을 준비하는 철이다. 더욱이
낙엽이 지고 쇠락함으로써 많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가을에 대한 정
서를 여러 모양으로 표출한다.
낙엽은 떨어져 다시 뿌리로 돌아간다(舊葉歸根). 마찬가지로 많
은 열매들은 겨울을 지나 봄애 뿌려졌던 상태로 돌아가되, 봄보다
는 그 수와 양을 더한다. 퉁구스말에서는 가을을 '가시[kasi]라
고 하고, 우리말에서도 방언에 '가슬(가실)'이라고 한다. 흑시 가
을과 t되돌아감' 사이에 무슨 상관은 없는 것인지.
'가을(秋)' 의 방언 분포를 보면 '가을(경기. 강원 층청.경상),
갈(경기. 강원 층청 경상), 가슬(경상. 함경 강원 비주), 가살
(층북. 전라. 경상 제주), 가실게 (경북 울진)' 등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에서 '가슬.가실'은 바로 거울의 옛말인 '거스르(거
슬)'와 같은 어형으로, 모음교체를 따라서 '가슬. 가실. 가실게'로
나타났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거울의 되비치는 속성이 가을에도 나
라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슬'계에 드는 분화형태로는 '가스랭이 (가시랭이,풀이나 나무
의 가시 부스러기), 가스러지다(성질이 온순하지 않고 거친 것), 가
슬가슬(베옷이 깔깔한 모양)'과 같은 꼴이 있다. '가실'계에는 '가
시다(변하거나 달라지거나 없어지다), 가시라기 (가시 랭이), 가시세
다(앙칼스럼고 고집이 세 다)' 등이 있다. 또 '가을'계로는 '가을갈
이, 가을걷이 (가올페 곡식을 거두는 일), 가을내 (가으내의 본디말),
가을비, 가을하다(가을걷이를 하다), 가올일, 가을장마'와 같은 형
태들이 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길러 가올에 거두어 들인다. 이러한 주
기는 그 다음해에 되풀이 되어, 자연계는 운행되어 나아간다. 이렇
듯 '가을'이라는 이름은 되돌림으로써 재창조의 과정을 마련해 주
는 속성에 어울리게 붙여진 것으로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생
각한다.
중세어 자료에서 'ㄱ △' 과 관계되는 낱말의 겨레를 찾아보면
'ㄱ△(ㅎ) (초두해), 7-32, ㄱ ㅅ (ㅎ)<유합> 상 2, ㄱ ㅇ 졀<태광>
1-36, ㄱ ㅅ (ㅎ) <칠대> 13, ㄱ을 미암이<물보> 등이 있다. 모
음 사이에서 시옷(ㅅ)이 약화하여 덜어지는 것을 전제할 때, 'ㄱ ㅅ>
ㄱ△>ㄱ ㅇ(ㄱ을)>가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앞에서 각 방언
을 증심으로 하는 현대어 자료를 들었거니와, 어사분화를 일으켜
'가실/가슬/가을'계의 낱말겨레로 발달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가올과 같은 낱말겨레에 넣을 수 있는 '거울'과 관련지어 가을과 되
돌림의 상관성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가을과
거울의 특성은 되돌림이 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거울 깬 머슴을 사위 삼는다'는 말이 있다. 거울을 고쳐 준다 해
놓고 거울을 깨서 그 값으로 거울 주인에게 머슴으로 들어가 결국
그 집 딸에게 장가를 들어 살았다는 옛이야기이다. 이는 곧 최치
원 선생의 유명한 <파경노(破鏡奴)>에 얽힌 이야기이 다.
매일같이 거올을 보면서 우리들은 자신의 용모를 가다듬는다. 이
때 거울은 거울 앞에 서 있는 대상을 되돌려 비추어 준다. 이러한
되돌림은 경우에 따라서는 되돌아 봄의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꺼 울.이란 되돌림, 곧 반조(反照)의 작용을 뜻하는 말로 생각된
다. 옛말에 '거우루((능엄)), 거우로(훈몽)' 와 같은 형태가 보이
며, '거역하다.대적하다'라는 뜻으로 '거우다((월 인))' 가 나타나
기도 한다. 되돌아섬은 경우에 따라서는 등을 돌리고 대적하는 뜻
으로도 쓰이게 되는 것이다. 더 적극적인 뜻으로는 공격하는 모양
으로 된 물건을 이르기도 한다.
'거우루/거우로'와 더불어 되돌림의 의미를 드러내는 형태에 거
슬다((금삼))' 혹은 '거스리다(능엄)'와 같은 꼴이 있다. 분명 어
떤 상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소리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바뀌어 온 것을 생각해 보면 그럴 가
능성이 더욱 짙어진다. 시옷(ㅅ)이 모음을 포함한 울림소리 사이에
서 반치음(△)으로 약해겼다가 아주 탈락되는 현상이 있음을 참작
할 때, 거슬-(거스라-)' 이 어떻게 '거우로(거우루)'와 이어지는가
를 알게 된다. 지금도 '거스름'이란 말을 쓴다. 돈을 주고 되돌려
줄 경우에 쓰인다.
요컨대,.거스르>거스르>거으르~거울로 보는 것이다. 즉 거
울은 거스르의 짜임 'ㄱ+모음十人十모음十ㄹ+모음'에서 끝음절의
모음이 탈락하여 생겨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거스르' 계열에 드는 형태로는 '거스러미 (나무의 결이 가시처럼
얇게 일어난 것), 거스러지다(성질이 거칠어지다), 거스르다, 거스
름돈, 거슬거슬, 거슬러 올라가다' 등이 있다. 모음이 '가스'계열로
도 바뀌어 나아간다. 그래서 '가스러지다(<거스러지다>), 까시레미
(거스러미), 가시, 가시개 (가위)'와 같은 꼴이 쓰이기도 하는 것이
다. 여기에서 '가위'를 말하는 '가시개'가 공격적이고 베어 치우는
정서를 환기함은 '거스르'가 기본적인 중심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
문임을 알 수 있다. '가시'도 같은 짝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가시
에 찔리어 상처를 입는 경우의 느낌과 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
'거우르'계열에는 너우르다(기울이어 쏟다), 거우듬하다(조금 기
울어진 듯하다), 거울삼다, 거웃(논밭을 갈아 넘긴 골. 양쪽에 경
사진 기울기가 모여 한골이 됨)'과 같은 꼴이 있다.
'거스르'는 모음교체에 따라 '기스르(기슭)'으로도 실현된다. '기
스락(초가의 처마 끝. 기슭의 가장자리), 기스락물(방언에서는 기
스랑물~지스랑물), 기슭'과 같은 형태가 이 부류에 드는데, 모두
가 되돌림의 의미를 바탕으로 갈라져 나온 말이다. 비탈진 곳에 물
건을 올리면 다시 되돌아오니까
4-4. 돌과 원운동
흔히 돌림의 현상을 윤회라고 한다. 블가에서는 윤회를 '어리석
은 백성이 해 탈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그들의 영흔과 육채가 업
(業)을 따라서 삶과 죽음의 과정을 되플이하는 것'이라고 줄이
한다.
한편 지리학에서는 지각의 발달단계를 유년기-청 년기-장년기-
노년기로 나누는데, 그러한 과정이 되풀이된다고 한다. 그런가 하
면 정치학에서는, 페르겐부르크같은 이들은 홍망성쇠
의 반복 속에서 국가의 형태가 발전해 나아간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음도 자연계의 돌림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밤과 낮으로 돌아가는 지구가 그러하고 대기권의 기상현상
또한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몸 속에서 돌고 있는 피 또한 그
러하다.
본시 '돌다' 라는 말은 '돌 十-다'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돌'은
'사람이 나거나 죽어서 한 해에 한 번썩 해마다 돌아오는 날'로 이
해하면 된다. 여기에서 파생된 '돌아가다'는 사물이 '원래 있던 자
리로 다시 가는 것이나, 사람이 죽는 것을 높여서 말하는 경어이다.
죽는 것을 일러 '돌아가다' 라고 하는 경우, 원래의 태어나기 이전의
어떤 시간과 공간을 전제하는 것으로 삶의 영원성, 곧 영원회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돌아가다' 는 표현으로서의 설득력을 잃게 된다.
생각해 보니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다. 우
리가 '돈' 이라고 부르는 화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화폐는 유통
이 안 되면 올바른 제 구실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정신이 아주 돌
았어' 라고 할 때는 수평면에서 보아 일백팔십 도를 돌았다는 얘기
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돌림현상의 하나이다. 바다에서 피어
오른 수증기가 모여 구름이 되고, 기압의 골짜기를 따라 구름이 모
이면 비가 된다 비는 대지에 내려 모이어 냇물이 되고 냇물은 다
시 강으로, 다시 바다로 흐르는 것. 결국은 모든 것이 돌아가는 것
이라고나 할까. 동물의 혈관에 흐르는 '피'는 어떠한가. 그 피도 온
몸을 돌며 영양을 공급하거나 필요없는 물질을 가지고 가 버린다
마치 들의 풀꽃들이 피고지고 하여 계절을 살아가듯이 말이다
그럼 '돌다'의 '돌-' 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의미적인 특징을
갖고 있을까. 필자는 '돌'의 의미적 특성은 '돌림'에 있으며
기본 형태는 '돌' 에서 비롯한 것으로 생각한다. 바위의 조각으
로서 모래보다는 크고 바위보다는 작은 것, 또는 암석이나 광석을
통칭하여 우리는 '돌' 이라고 이른다. 돌이 생성되는 과정은 쪼개어
지고 서로 부딪혀 구르는 모습을 전제로 한다. 분절파 회전이 거듭
되어 더 작은 돌뗑이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때로는 산사태에 의해
돌기도 할 것이고, 홍수에 떠내려 가면서 씻기어 점차 작아지고 등
글어져 가기도 할 것이다. 바위에서 쪼개어져 돌이 되고, 다시 쪼개
어져 돌껭이가 되었다가 결국 자갈이 되고 다시 모래로 된다. 부딪
혀 쪼개져 흙이 되고, 흙은 모이어 다시 바위를 만들어 내기도 한
다. 돌고 돌아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대지의 토양을 살찌우는
것이 '돌'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돌' 의 순환성에 바탕을 두고
다른 동사나 복함어가 파생되어 간다. 그 낱말겨레는 다음과 같다.
'돌'의 낱말겨레(증세 어)
돌개 (石浦 ; ((용가), 1-38), 돌고(돌달구 ; (박해) 중간 상 10),
돌 ㄷ리 (역해), 상 14), 돌다(월석) 1-25), 돌덩이 다신속삼강행
실도), 효 4-89), 돌매 (월석 23-79), 돌보다((송강, 2-3), 돌저
귀 ((청구) p. 119), 돌보치(한청) 17l C), 돐((소해), 4-22), 돐
서리 (石間 ; ((초두해), 7-l0), 돌탕관(청구,, 대학본 86) 등.
'들'의 낱말겨레 (현대 어)
1) 돌-'계-돌, 돌계집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돌고드름, 돌
공이, 돌곪기다(종기가 겉은 딴딴하나 속으로 몹시 곪다), 돌구
멍, 돌구유, 돌기둥, 돌기와, 돌길(돌아가는 길), 돌날, 돌담, 돌
대 (회전축), 돌덩이, 돌돌(여러 겹으로 둥글게 마는 모양), 돌돌
하다(영리하다-머리가 잘 돌아가니까), 돌라내다(남의 물건을
슬쩍 빼돌리다), 돌라놓다(각자의 몫으로 나누어 놓다), 돌라대다
(돈이나 물건 따위를 변통하여 대다), 돌라막다(둘러막다), 돌라
버리다(게워 버리다), 돌라방치다(무엇을 빼돌리고 그 자리에 다
른 것을 살짝 대신 넣다), 돌라붙다(<둘러붙다), 돌라서다(<둘
러서다), 돌라싸다(<둘러싸다), 돌라쌓다(<둘러쌓다), 돌려내
다(남을 샅살 꾀어서 있는 곳에서 빼돌리어 내 다), 돌려 능다, 돌
려보내다, 돌려보다, 돌림, 돌림병, 돌림자(항렬자), 돌립장이 (따
로 돌림을 받는 사람), 돌뗑이질, 돌물레(고삐를 꼴 때 새끼 한
끝에 달고 돌리어 꼬게 만든 기구로 '자세' 라고도 함), 돌보다.
돌부리, 돌부처, 돌비알(가파른 돌언덕), 돌샘 (돌 사이에서 솟아
나는 샘), 돌순, 돌아가다, 돌아내리다, 돌아눕다, 돌아다
니다, 돌아들다, 돌아서다, 돌아앉다, 돌아오다, 돌알(돌로 만든
안경알), 돌우물, 돌이키다, 돌잔치, 돌잡이(돌잡히는 일)
돌잡히다(돌날에 여러 가지 음식과 믈건을 상 위에 차려 놓고 돌
쟁이에게 마음대로 잡게 하다), 돌장이, 돌절구, 돌집, 돌
짬(갈라진 돌과 돌의 틈), 돌쩌귀 (문짝을 문설주에 달아 여닫게
하기 위한 암수 한 벌의 쇠붙이 물건), 돌탑, 돌팔매, 돌함(돌로
만든 함), 돌확(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돌비늘 등.
2) 도르_.계_도르다(먹은 것을 토하다, 둘레를 돋려 감다), 도르
래, 도르르, 도르리 (음식을 돌려 가며 제각기 내는 일), 도리기
(여러 사람이 돈을 내어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 도리깨, 도리
깨침 (탐이 나거나 먹고 싶어서 저절로 삼키어지는 침), 도리깨열
(도리깨 채에 달아 곡식의 이삭을 후려치도록 되어 있는 서너 개
의 회초리), 도리다, 도리도리 등
3) 도로_'계 도로가다. 도로. 도로 오다 등.
이상에서, 원운동을 하는 물체나 원형의 물체 또는 돌과 같이 단
단한 물체에 '돌_, 도르_, 도로_'가 붙어 어휘를 만들어 냄을 알수
있다. 이에 대해 과연 이러한 순환성을 드러내는 말들에 돌이 만들
어지는 과정이 반영된 것일까 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의 속성은 언어표현의 바탕을 이
룬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하는 여러 가지 인식방법이나
관점에서 언어적인 사고가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인 표현들이 내적. 외적 재구에 따라서 호응하는 형태를 보인다면
한 언어의 변천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유익할 것이다
'돌' 의 경우, 돌고 돌아서 이루어지는 '원운동.원형'의 속성을
층족시키는 외연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돌-'은 현대로 내려을
수록 더 많은 함성어를 만들어 낸다.
물이 수증기로, 구름으로, 다시 비가 되어 대지와 바다로 돌아가
듯, 이 지구 위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도 '돌림'의 속성을 지니
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둥글게 돌아가는 물체 위에 존재하기
때문일까.
4-5. 죽음과 뒤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이 힘이 센 사람에게 겁도 없이 달려드는 일
이 있다. 속담에서도 이를 '죽은 고양이가 산 고양이 보고 아응한
다.고 이른다. 어느 곳에나 허세가 있는바, 이를 옹자하는 말이기
도 하다.
삶과 반대되는 뜻으로서, 삶올 이어가는 데 필수적이고 결정적인
활동이 마비되고 파괴되는 일을 '죽음' 이라고 하며, 동사로는 '죽
다'라고 한다. 죽음은 구체적으로 숨이 끊어지는 뜻을 중심으로 하
여 쓰이지만, 비유적 인 의미로 '자살하다, 그림 같은 예술품에 생
기가 없다, 블이 꺼지다, 움직이던 물체가 정지하다, 생생한 기운
이 없어지다, 경기 또는 오락에서 상대방에게 잡히다, 음식이나 철
물류가 산화에 따라 빛이나 맛을 잃다'와 같이 여러 가지의 주변적
인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벽에 부딪혀 막다른 데까지
이른 상항을 한계상황 이라고 하거니와 그 가운데에
서도 죽음처럼 절박한 것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
에 대하여 진지한 자세로 풀이하려 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종교는
죽음을 새롭고 영적인 삶의 출발로 보아, 죽은 뒤의 새로운 하늘과
땅을 설정하여 영원한 삶에의 기약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곱
육체적 죽음을 넘어서려는 지향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천국이라
든가 극락과 같은 개념이 그 좋은 실례라고 할 것이다
죽음이란 말은 어떤 문화적인 배경에서 만들어진 말일까. 주거생
활의 왼시 단계인, 굴살이나 수상생활(樹上生活)과 연관하여 잠시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중국의 기록이긴 하나 <진서 (辰書) >,에는 동
이 (東夷)들의 생활에 대하여 녀.름에는 나무 위에서 살았으며, 겨
울에는 굴과 같은 곳에서 살았다(夏則眞居冬則穴處)' 고 기록되어 있
다. 또한 (후한서 (後舊書)에는 '흙으로 무덤과 같은 집을 짓고 살
았으며, 여닫이문은 무덤 같은 흙집 위에 설치하였다(作土로如家
開戶在上)'고 전해지니, 우리 조산들이 이른바 움집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대갓집은 무덤과 같은
굴의 깆이가 사다리 아홉 개를 놓고 들어갈 만하다고도 한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우리가 거주하는 집들도 흙집의 모양을 옮
겨 변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몇 계단을 지하로 내려가서 타야
하는 지하철 정거장을 보면 위의 기록이 그다지 생소하지만은 않
다. 말 그대로 모든 생물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 무덤파
같은 굴 속에서 태어난 우리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무덤으로 돌아
가서 묻히니, 요람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돌림의 질서를 따르
고 있는 것이다.
생명종식어 '죽다'는 '죽十_다>죽다'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때
'죽'이란 말의 바탕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풀이가
있다. 서재극은.기운이 떨어지고 앞으로 기운다' 는 뜻을 드러내는
'숙다' 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중세국어의 단어족
연구), l979). 의미론적 인 유연성으로 보아 전혀 무관하지 않을 뿐
더 러, 음운의 변화로도 설명할 수 있다. 고대 국어에서 는 터짐갈이소
리(파찰음)가 없었음을 감안할 때 '숙다>죽다'의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숙'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물
음과, 끼 운이 줄고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곧 죽음인가 하는 물
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히지 못하는 여백이 남는다
필자는 말의 짜임새로 보아 '죽다'는 명사 '죽'에 접미사 '-다'가
붙어 된 것으로, 여기서의 '죽'은 '둑'에서 비롯한 짓이라고 생각
한다: 둑은 홍수의 예방이나 저수(貯水)를 위하여 돌이나 흙 따위
로 높이 쌓은 언덕이나, 높은 길을 내려고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언덕을 말한다. 한마디로 이러한 '둑'의 원형(原形)은 거처하기 위
하여 만든 무덤파 같은 집이요, 죽은 뒤에 돌아가는 무덤과 같은
공간을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둑>죽'으로 되었을 가능성은 같은
낱말겨레의 방언자료를 통해 예측할 수 있다. '둑'의 방언분포를
들어 보이면, 둑(경기 포천. 강화. 광주/강원 흥천/충북 충주.
제천/경북 울진 경주 월성. 청도/경남 사천. 고성), 뚝(한반도
대다수 지역), 개뚝(경기 안성), 두거리 (강원 홍천), 걸뚝(경남 진
주), 방죽(층남 서천/경남 함양), 방축(경기 파주/강원 양구),
방천 (전북 무주 전주 진안. 순창/경북 영주. 영양 청송 영천.
선산. 금릉. 청도/경남 거창. 울산. 합천. 진주. 하동), 데부(경
기 가평/층북 옥천), 데부뚝(강원 양구 화천 춘천. 인제. 원주)
등과 같다
이상의 보기 중에서 '둑~죽'의 상관성을 보이는 형태는 '방죽'
의 꼴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물을 막기 위한 것을 '방죽'이라
한다. 이는 사람의 주거나 무덤의 의미로 상이던 말이 오늘날에 와
서 확대. 유추된 경우라고 할 것이다.
또 다른 플이의 바탕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둑'의 낱말겨레에
드러나는, 죽은 뒤 바로 무덤에 묻히는 상태나 과정과의 연관성이
다. '둑' 은 모음교체를 따라서 양성모음이 되면 '독(궤. 항아리 ;
(구급간), 6-29. (능엄 8-88)' 으로 드러나고, 음성모음이 되면 '둑
(유씨명) 5, 덕 (나뭇가지 사이 등에 걸쳐 맨 시렁 ; (금삼),
2-25)' 으로 쓰이게 된다. 시루에 안쳐 곡식가루를 찌거나 굽거나 흑
은 소댕에 부쳐서 익혀 만든 음식을 '떡'이라 함도 '덕'에서 비롯
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중성모음으로 바뀌면 '딕다(찍다 ; (박
해), 하 6)' 가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박물관에 가서 옛 사람들의 무덤에서 나온 것을 보면 뼈를 따로
담아 두는 항아리인 '골호(骨豪)'가 있는 데 일종의 '독'에 해당한
다고 볼 수 있다. 넉'의 경우만 해도 그러하다. 원래 여름 더운 때
면 나무 위에 덕대를 매 놓고 살았다고 하거니와 풍장(風葬)을 하
는 고장에선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일정한 장소에 덕대를 매고 그
위에 시체를 놓아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 뼈만 거두어 다시 장례를
모신다. '둑'이 '죽'과 관련이 있음을 드러내 주는 좋은 보기라 하
겠다 닉 다'의 경우는 어떠한가 ? '딕다' 는 어떤 표 같은 데에 구
멍을 내어 뚫을 때에 쓰이는 말로, 굴살이나 무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죽음'을 '독/둑/덕/딕-'과 관련짓는
또다른 바탕은, '죽다'와 뜻을 함께하는 이른바 생명종식어에 땅과
관련한 형태가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말의 생 명종식어를 들어 보이면, 밥숟가락 놓다, 입이 닫히다,
입다물다, 눈감다, 숨소리 멈추다, 목숨이 끊어지다, 눈감기다, 목
숨이 사라지다, 목숨이 없어지다, 꼭숨이 떨어지다, 숨지다(이상은
주로 신체 부위의 변화)/거꾸러지다, 쓰러지다, 죽어 자빠지다, 죽
어 넘 어지다, 몸이 식 어지다, 몸이 굳어지다(이상은 외양의 변화)
뒈지 다(뒤지다 ; 비속어) 등과 같다
이는 주로 고유어의 경우를 든 것인데 이들 형태 중에서 가장 많
이 드러나는 것이 '-지다'이다. 아주 생산적으로 쓰이어 많은 용언
들과 함께 복합동사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 '-지다'는 옛말에서 어
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 중세어 자료를 보면, '지다'는 니 다'
로 드러난다. '죽다(월석, 21-215), 떨어지다((용가), 85)' 가 증심
된 뜻으로 삽인 것으로 확인되며, 낱말의 짜임새는 니 十-다>디다
(>지다)'로 풀어 볼 수 있다. 이때 '디-'는 공간명사 '뜰'에 니 '
가 결합한 'ㄷ十이 >더 (>지)' 로 보든 디 (地)>지'로 보든 간에
땅(ㄷ)'과 관련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죽다.쓰러지다'로 싱인
예로 보아, 디다'가 죽음에 이르러 다시 땅으로 가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위에서는 '죽음'이란 낱말이 만들어지는 의미의 바탕이 땅과 상
관이 있음을 보았다. 과연 '죽음'은 방위의 개념으로는 어느 쪽을
나타낼까 ? '죽다'의 비속한 표현으로 '뒈지다'라는 말을 종종 듣
게 된다. '뒈지다'는 '두어지다'의 줄임말로서 '두다+지다>두어
지다>뒈지다(~뒤지다)'로 풀어 볼 수 있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두다'는 '뒷다(석보 6-2)' 의 변이형임을 알게 되는데, 이때 뒷'
은 '뒤 (ㅎ)>뒷'과 같이 히읗(ㅎ)종성체언이 변형된 것이다. 흔히
뒤가 방위로는 북쪽을 뜻하고, 계절로는 겨울을, 동물로는 곰이나
뱀을, 별로는 북두칠성을, 소리로는 우면조를, 성으로는 여성을 상
징한다. 특히 여성상징과 연계지을 때, 대지 (땅)이나 물 역시 여
성 흑은 어머니의 성격을 띰을 상기하게 된다. 땅으로의 회귀, '죽
다'가 '뒤'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지 않을까 ?
우리 배달겨레의 북두칠성에 대한 별 신앙은 원시신앙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손꼽을 만하다. 이름 있는 유명한 산의 봉우리 가운
데 비로봉은 '별'의 방언형인 빌'에서 비롯된 것이고, 우리말의
빌다'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북쪽의
별이 중시되는 것을 고아시아족의 원거주지가 시베리이 부근이었기
때문이라고 플이하기도 한다. 흔인 예식의 자리에 기러기를 놓는다
든지 사람이 죽어 초혼(招魂)을 할 패, '복복(復復)'이라고 부름도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귀향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뒤'는 두고 온 우리 고향의 방위 (북쭉)
이 며, 다시 돌아갈 영원한 마음의 공간이라고 하겠다. 형태상으로
보아 히읗(ㅎ)종성은, 기역 (ㄱ)으로 소리 나는 일이 종종 있다. 띠
라서 '뒤 (ㄱ)다>ㄷ다>쥑다>죽다'의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
은가. 그러니까 '뒈지다~뒤지다'는 살아있는 현재의 삶이 아니고
이미 과거시제가 된, 멀어진 저승의 삶이라고 보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마침내 본래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매, 땅을 드러내는 '디'에
접미사 '-다'가 붙어 '디다>지다'로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는 '죽다'의 발달과정을 '둑 >죽'과 '뒤 (ㄱ)다>쥐 (ㄱ)다
>죽다'리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필자는 이중 '뒤 (ㄱ)다'에서
발달한 것으로 봄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둑'과 '뒤'
모두 공간을 드러내는 말이기는 하지만, 소리가 변하는 규칙성이라
는 면에서 볼 때, '둑>죽'의 가능성보다는 '뒤 (ㄱ)>쥐 (ㄱ)>죽'의
가능성이 더 늦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등의 자료를 보
면, 뒤'가 '디' 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지금도 경상
도에서는 '죽인다'를 '지긴다'로 쓰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해 볼 때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배해수는 죽음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낱말밭은 추상적인 것, 내세
관적인 것, 생명체적인 것 등의 세 개의 분절상(相)을 보이고 있다
고 한다(현대국어의 생명종식 어에 대한 연구, l982). 이 가운데
에서 '뒤 (ㄱ)' 의 내용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내세판적인 것의 분
절상이다. 배해수는 종교적인 교리의 바탕 위에서 죽은 뒤 영혼의
이동에 대해 풀이한 낱말의 겨레와, 이승과의 인연을 끊는 내용을
담은 낱말겨레를 보기로 들고 있다. 영흔이 이동하는 방향에 따른
낱말겨떼는 산승이동에 대한 것과 하강이동에 대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영흔의 상승이동에 대한 낱말겨레로는, 승천 (昇天)하다, 승하(昇
速)하다, 예척 (禮陟)하다, 척방(陟方)하다, 등선 (효仙)하다, 신선
(神仙) 되다, 천당가다 하늘나라 가다, 극락 가다, 왕생극락하다, 입
멸 (入減)하다, 원적 (圓寂)하다, 피안(彼岸)으로 가다, 입적 (入寂)
하다, 귀화(練化)하다, 귀원 (歸元)하다, 귀진 (歸眞)하다 등이 있다.
일단 죽은 뒤의 공간에 대한 표현은 종교에 따라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은 공통적인 이상향으로서 추구되고 있다.
그러한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하늘'은 후에 임금의 죽음과 관련하
여 특별하게 다루어지기도 하였다 '피안(彼岸)으로 가다'의 '피 안'
도 이상향으로 일컬어지는바 모든 번뇌에 얽매인 고통의 바다를
넘어선 가장 이상적인 언덕을 뜻한다.
이와는 반대로 죽은 뒤 영흔이 현재보다 나쁜 곳으로 가는 하강 이
동에 대한 낱말 겨레로는 지옥 가다, 아귀 (餓鬼) 되다, 축생
되다, 명부(冥府) 가다, 창천 (黃泉) 가다, 지하(地下) 가다, 구처
(九泉) 가다 등이 있다. 이들은 공간의 위치로 보아 낮은 곳이거나
나쁜 곳에로의 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상승하는 것도 하
강하는 것도 아닌 장소에로의 이동을 드러내는 말로, '연옥 가다(천
주교), 환생하다(불교), 귀신 되다(민속신앙)'와 같은 표현들이 있
다. 죽음과 관련한 내세관적인 표현에는, 앞에서 상승, 하강, 상승
도 하강도 아닌 것으로 나누어 살펴 본 영흔의 이동상태에 따른 것
외에, 이승과의 인연을 끊는 내용을 담는 말들이 있다. 녕흔이 떠
나다, 흔백이 떠나다, 혼이 떠나다, 영흔이 없어지다, 영흔이 사라
지다, 영흔이 나가다'와 같은 말들은 모두 영흔이 육체로부터 멀어
짐을 뜻하고 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은 분명 영원한 이별을 할 수밖에 없다. 사
람은 누구나 한평생 동안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겼다 만나면서 살아
간다. 이상(李繪)의 <봉별기 (逢別記)>에서도 나타난바,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과 헤어짐을 드러내는 말로는 '생 리사별 (生離死別) 하
다, 사별(死別)하다, 여의 다, 영결 (永訟)`하다, 영결종천 (永訟終天)
하다' 등의 낱말들이 있다. 직접 사람은 아니더라도 세상과의 인연
을 끊는다는 내용의 낱말겨레가 있으니 '세상을 버리다, 기세 (棄世)
하다, 세상을 하직하다, 별세 (別世)하다, 하세 (下世)하다, 타계하
다, 세상을 달리하다, 유명 (幽明)을 달리하다' 등의 형태가 그러한
보기들이다.
이 세상에 살아서 숨을 쉬고 감각할 수 있는 누리가 이승이요 현
재요 앞이라면, 죽은 뒤의 세상은 저승이며 과거요, 분명한 뒤가 된
다. 죽은 뒤의 세상에 대하여 아무도 객관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우리말의 '깜깜하다/캄캄하다/감감하다'의 '감감'은 어두운 신의
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중세어의 '감. 곰. 검. 금' 등은 신을 가리
키는 말로서, 현대 일본어에서도 신을 '가미' 라고 하지 않는
가. 가장 잘 죽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인간답
게 살다가 인간스레 죽는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으로 보인다. 결국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펑무사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섭리이기에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확연하게 보석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소
크라테스보다 산 돼지의 코가 되는 게 좋다고도 하지만, 사람은 영
원한 생명의 본향을 그리며 사는 게 아닐까 ? 사망의 그림자를 자
연스레 인정하면서 욕망을 조금씩 줄이고 모두가 함께하는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가야 함은, 죽어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삶의 방향성일 것이다.
4-6. 흙과 살
'흙의 냄새가 고소하다'는 말이 있다. 흙의 냄새를 볶은 콩의 냄
새처럼 고소하게 느낄 정도로 죽고 싶은 생각이 들 경우를 이르고
있다.
지구의 겉표면을 이루는 물질로서 바위가 부스러져서 가루로 된
것을 '흙'이라고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기름기가 있으며, 물기를
보존함으로써 풀과 나무를 길러 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생물이 호흡하는 공기를 지구의 옷에 비유할 수 있다면 흙은 지
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육체, 그 가운데에서도 살에 해당하는 부분
이라고 하겠다. 흙은 용암(마그마)이 굳어지고 굳어진 용암이 풍화
되고 이리저리로 흩어져 생성된다.
흙이 전혀 없고 용암상태의 바위만이 있는 골짜기. 거기에 무슨
목숨살이가 가능하겠는가 ? 그곳은 공허한 바위굴과 바위굴의 연속
일 뿐, 참으로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옛말에는 '흙'이 '흙 (석보), 13-51)' 이었는데 뒤로 오면서 모음
이 바뀌어 '흙'이 되었다. 일부 지역(경상.평 남)에서는 흙을 '흘
이라고도 한다. 생각하건대 이 '흘'은 증세어에 태양 또는
하루를 가리키는 '흘 (능엄), 4-72)' 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모음이 바썹으로써 그렇게 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중세어의 '흙'과 이 '흘'은 서로 어떤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
는데 '흘' 곧 태양은 그 본질에 있어 불이요, 라오르는 사름이
다. 조금 더 생각을 이어 보면, 흙이 끓어오르는 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결과라는 점과 '흘'의 연관성을 맺을 수 있다 필자는 흘'
이 그 뜻으로나 형태(음운)의 변천 혹은 넘나듦으로 보아 '슬(歲 ;
((삼역),, {(계축),) ' 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먼저 뜻으로 본다면, '슬'은 앞서 말한 보기처럼 태 양을 뜻히며 불
이 타오르는 연소과정을 나타낸다. '슬다(>사르다 ; (원각), 2-1 :48)
가 '불을 사르다'의 의미로 대응하고 있음은, 불 곧 태양의 뜻과 상
통함을 보여 준다. 그러던 '실'이 '나이'를 뜻하는 연령의 단위로
바뀌어 간 것이다.
흙이 나타내는 모양이나 성질은 여러 가지로 갈라져 나아간다. 이
를테면 흙이 용암의 상태에서 액체상태로 움직이는 것을 '흐르다'
라고 하던 것이 물이 움직이는 것도 '흐르다'로 표현하게 된 것으
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하거나 세워 놓은
집을 부수는 것을 '헐다'라고 함도 '흙'의 생성과정이나 그 모양
또는 성질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흙'이 관여함으로써 이루
어진 것으로 보이는 형태로는 얼 (할)-/흐(느.리.르)-/흘(ㄱ)-
/흩-'과 같은 어형들이 있다.
헐-'계에 해 당되는 말로는 헐다, 헐다, 헐다,, 헐떡거리다, 헐
겁다(낄 자리가 너르다), 헐뜯다, 헐 렁 헐렁하다' 와 같은 꼴이 있고
'흐-' 계에는 '흐너지다(포개 있던 작은 물건들이 낱낱이 헐리다),
흐느적이다(하늘거리다), 흐늘거리다, 흐리다(흙이 물에 풀리면 흐
려지 니까), 흐르다,(물 따위가 낮은 곳으로 내려가다), 흐르다(짐
승이 교배를 하다), 흐르르하다, 흐리디 흐르다, 흐리멍덩하다, 흐
리터분하다, 흐릿하다'와 같은 말들이 있다.
한편.흘(ㄱ) 계에는 '흘러 가다(쓰인 예 :홀러 가는 물 퍼 주
기 ; 주는 사람은 대수롭지 않으나 받는 이는 고마울 경우), 흘러 나
오다, 흘러 내리다, 흘러 보다(남의 속을 슬그머니 떠보다), 흘렁
거리다, 흘레붙이다(암수를 교배시키다), 흘리다, 흘림, 흘림이 ('술'
의 심마니말), 흘미죽죽(일을 여믈게 끝맺지 못하고 흐리멍덩하게
질질 끄는 모양), 흘쩍거리다(일올 질질 끌어가는 것), 흙다리, 흙
내, 흙감태기 (흙을 온몸에 뒤집어 쓴 사람이나 물건), 흙더미, 흙
들이다(논에 새 흙을 들이다), 흙받이, 흙밥(가래 팽이 호미. 삽
연장 따위로 한번 떠서 올리는 흙, 또는 쟁기. 긁정이 등으로 깔려
넘어가는 흙), 흙질 (흙을 바르는 것), 흙탕' 과 같은 말이 있다. 또
한 I흩_*계에 드는 것으로는 '홉날리다, 흩다, 흡뜨리다, 홉어뿌리
기 (여기저기 씨를 홈어 뿌리는 일), 흩어지다, 홍이다(흩어지게 하
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시대를 거슬러 을라가 중세의 '흘 (흘)-슬-' 을 중심으로 하는 낱
말겨레의 분포는 어떤지 알아 보도록 하자.
'흘(흘)-슬-' 의 낱맡겨레
1) 흘_ 계 _흘 ((석보)11-26), 흙 ((석보, 13-51), 흙고개 (용가)
1-44), 흙구들(노걸대 상 23), 흙ㄷ리 (역해), 상 l4), 흙무디
((훈몽, 중 9), 흙덩이 ((소해), 5-52), 흙ㅂㄹ다 (유합, 하 41),
흙벽 (훈몽, 중 8), 흙비 (훈몽), 하 2), 흙빚다(훈몽), 하 20),
흙성녕 (도기 만드는 일 ; (유합)하 7), 흙손(혼몽), 증 16), 흙집
(초두해) 21-2) 등
2) '흘'계_흘리다((능엄), 5-82), 흘림ㅅ장(문서초안 대장 ; <역
해>, 상 12) 등.
3) '슬_계'-슬(ㅎ) (능엄, 8-7), 슬다(燒, (원각), 상 2-l :48), 슬
다(生 ; <계초> 초26), 슬이다(살라지다 ; ((석보), 9-37), 삶다(삼
강) 열 28), 사로다(송강, 1-5),,사라느다 ((화해), 상 31) 등.
1)의 예에서 본래 '흘'은 기역(ㄱ)특수곡용을 하는 말이었옴을 알
게 되는데. 말의 형태가 바뀌는 과정에서 아예 기역(ㄱ)이 붙어 오늘
날의 '흙'이 되었음이 눈에 뛴다. 결론적으로 '흘-/홀-/슬-' 계의
어휘들은 태양의 '불사름'에 바탕을 두어서 이루어진 낱말의 겨레
라고 생각하여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흙을 밟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흙은 삶의 근거
인 것 이다. 흙은 블사름의 소산으로 우리는 대지의 품 속에서 따스
한 신의 정서와 은혜를 느낀다. 우리는 흙의 내음을 그리워하며 살
다가 죽음에 이른다. 죽어 땅에 묻히면 결국은 흙이 되어 또 다른
나 곧 꽃이 되기도 하고 새가 되기도 하며, 삶의 섭리를 따른다. 그
러다 닷시 사람으로 환생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며 온 날을 기다
릴지도 모른다.
지구의 육신이 흙이요, 피가 물일진대, 그 흙은 숙명적인 존재들
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이다. 이 보금자리에서 존재들은 끊임없이
삶과 죽음의 옷을 갈아입으며 자기 나름의 모양으로 머무르는 것이
다.
5. 물의 순환
5-1. 솟음과 거룩함
민속놀이에서 '솟대장이'란 탈을 싱고 솟대 꼭대기에 올라가서
몸짓으로 온갖 재주를 부리는 재주꾼이다. 여기에서 '솟대' 는 농사
를 크게 짓는 대농가에서 세 안에 다음 해의 풍년을 바라는 뜻으로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늦이 달아 매는 장대를 뜻하기도 한
다 한마디로 '늦이 솟은 장대' 를 가리킨다. 그것은 하늘을 향하여
더 높이 올림으로써 경건하고 간절한 씨 천의식을 드러냄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솟대는 또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보다 잘 되게 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높이 세우던 붉은 장대로, 우러러 보는 대상물
이기도 하였다. 솟대의 끝부분에는 푸른 칠을 한 나무로 용을 만들
어 달아 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솟대'는 우리의 역사기록에도 나
오는 바, 소도(蘇塗)와 어떤 상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도는
마한. 변한. 진한 시대에 하늘의 신에게 제사지내던 지 역이었는데,
각 고을에서는 제사지내는 신단(神壇)을 베풀어 그 앞에 방울과 북
을 단 큰 나무를 세우고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단은 언제나 단을 쌓아 올리든지 아니면 나무를 세워 마련된다
거룩한 공간은 정신적으로도 높은 곳이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숭배하기에 알맞은 곳이어야 한다. 오늘날의 '솟대'가 바로
이러한 말에서 기원하엿을 것임을 유추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
니다.
필자는 '소도(蘇塗)'가 '숟'을 표기하였던 것이라 생각한다. '흔'
은 시간과 공간을 따라 바뀌어 가면서 '숟[蘇塗]>솟'으로 되었으
며, 받침 글자의 넘나듦으로 '훈(솥)/솟/솔'의 꼴들이 쓰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형태들온 다시 자음과 모음이 바뀌면서 '솟아
있는 모양'을 드러내는 말들로 발달해 간 것이다. 신을 제사하기
위하여 만든 제단에서 비롯한 일종의 솟음의식의 결과라고나 할까.
'훈'계는 그리 많은 보기는 찾아지지 않는다. '숟 덩(料). ㅅ 확
(鎖) ((훈몽) 증 IO)' 과, '距賊數十里壹料山훈뫼峯料山在雲峯縣東十
六里(용가)' 의 땅이름 'ㅅ뫼' 정도에서 '솜(>솥)'이 확인된다.
제사를 지내는 데 있어 제물을 만드는 '숟(>솥)' 은 신성한 것이었
다. 밥솥조차도 불을 땔 아궁이의 제일 두드러진 곳에 걸지 않는가.
'솥' 과 같이 생긴 그릇에 제사 음식을 담기도 하였다 한다. 이렇돗
오늘날의 '솥'은 '숟'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데, 디굳(ㄷ) 받
침이 거센소리로 된 결과 티올(ㅌ)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솔'계는 '숟'의 받침이 유음(ㄹ)으로 되면서 갈라져 나간 말인
바, 소나무를 가리키는 '솔'이 그 대표적인 어형으로 보인다. 지금
은 무당이 솟대로 대나무를 쓰지만 옛적에는 소나무를 샜다는 기록
이 나온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의 '솔' 도 제단에 쓰는 신성한 솟대
로서 '숟'으로 기록하다가 뒤에 '솔'로 바젼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솔'파 관계 았는 말은 그 보기가 상당히 딱다. 이를테면 '솔1
(소나무)', 솔(먼지를 떨거나 물감 따위를 칠할 패 쓰는 도구 ;뾰
족해 솔잎에서 유추하여 쏜 것으로 보임), 솔가리(말라서 땅에 떨
어진 솔잎), 솔가지 (꺾어서 말린 소나무 가지의 뻘나무), 솔과(科),
솔나물, 솔나방, 솔딱새, 솔방울, 솔포기(비늘 같은 소나무 껍질),
솔뿌리, 솔새 (벼과의 다년초), 솔부엉이, 솔밭, 솔이끼, 솔잎, 솔
장이 (플칠하는 솔을 만드는 사람), 솔포기 (가지가 다보록한 작은
소나무), 소나무, 소나무 겨우살이'와 같은 말들이 있다.
'숟'이나 '솔'과는 달리 '솟'으로 발달해 간 '솟'계가 있는데 소
릿값의 실현으로 보면 '숟'이나 '솟'이나 다를 게 없다. 모두가 무
성 내파음 디굳(t)으로 소리가 나기 때 문이다. 이 형태가 접미사
'_다'와 합하여 동사를 만들어 간다. 그 보기를 들면, '솟다, 솟고
라지다(솟구쳐오르다), 솟구치다, 솟대, 솟대장이, 솟아나다, 솟아
오르다, 솟을 꽃살창(창살을 꽃무늬로 만든 창), 솟을대문(행랑채
보다 높이 솟은 대문), 솟올동자(머름의 간막이를 한 작은 기등),
솟을무늬(피륙의) 도드라지게 놓인 무늬, 솟치다(위로 높이 올
리다)'와 같은 형태들이 보인다. 나물이나 풀싹이나, 나무가 배게
나 있는 것을 사이가 뜨도록 하기 위하여 뽑아 내는 동작을 '휴다'
라고 히는데 이 '휴다' 도 '솟' 계에 드는 말로 추정된다. 중세어를
보면 '솟고다(>솟다>휴다 ; (한청)' 에서 발달해 온 것으로 검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대어 자료로서 오늘날의 '솥'이 '솟(동문,
하 14)' 으로도 기록된 것을 보면 확실한 음운의식은 아닐지라도
'숟/솟/솥'이 같은 말 '숟'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솟'에서 모음교체나 자음교체로 말미암은 형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오(ㅗ) 와 우(ㅜ) 의 교체를 들 수 있다. 명사 위
에 붙어서 본디의 성질을 드러내는 '숫'계의 말들이 '솟'에서 분화
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은 신성해야 하
며 아무도 손을 대서는 안 되는 특성이 있기에, 사물 인식에서 그러
하다고 본다. 불이 탄 뒤에 나무의 등걸을 재나 아궁이에서 처리
하여 만든 '숯' 도 증세어에서 '숫爲炭(((훈례),)' 이라 한 것을 보면
상관성이 있올 듯싶다. 여기에 속하는 말들로는 '숫겅 (숯의 경상
도 방언), 숫가락(-솟대처럼 솟아 있는 모양에서 유추한 듯하다),
숫국(아주 진솔한 사람이나 물건), 숫되다(어수룩하다), 숫돌(칼을
갈기에 알맞게 솟아 있는 돌), 숫색시, 숫접다(순박한 태도가 있
다), 숫지다(인정이 후하다), 숫처녀, 숫하다(순박하고 어수룩하
다)'와 같은 말의 무리가 있다.
다음으로 '솟' 의 모음 오(ㅗ) 가 어(ㅓ)로 바뀌어 이루어진 경우
가 있다. 보통 저 있다>섰다'로 풀이하지만. 원래의 기본형이
'섯 (_섣)'으로 보인다. 앉았다가 일어서면 높이 솟아 있는 상태를
이루게 된다. 물가에 배를 매어 두기 좋은 곳이나, 서슬이 불끈 일
어나는 감정 또는 물건의 두께를 '삯'이라고 한다. 칼날이나 물건
의 날카로운 곳을 '서슬' 이라고 하는바, 이러한 보기에서 '섯' 의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모옴교체와 더블어 자음교체를 따라 '솟'계의 말들은 같은 속성
의 다른 말들을 분화시켜 나아간다. 자음교체를 따라 '솟'은 '줏/
젓/잣'으로 그 음성을 달리하면서 말의 뜻이 달라진다. 그렇지만
그 솟이 있는 모양은 다를 바가 없다. 이 말들은 모두 생식이나 생
명, 흑은 성장과 관계가 있는 말들로 가지 변어 나아간다. 성숙한
남자의 생식기를 '좇'이라고 표기하지만 지금도 많은 방언에서는
'줏'이며, '젖' 또한 넷' 인 것이다. 남근 숭배의 사상과도 멀지
않음이니, 그 썽명의 비롯됨을 신성시하는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젖'도 그 모양을 보면 후대를 양육하기에 알맞도록 솟아 있다. 이
처럼 언어는 자연을 인식하는 방법이나 그 소리의 느낌을 따라 말
의 꼴들이 분화해 가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5 -2. 속과 솜
속이 텅 비어 있는 강정이 먹올 것이 없듯이 속으로는 아무런 실
려도 없으면서 겉치레만 일삼을 패, '속빈 강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깆숙히 안에 들어 있어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유형 또는
무형의 사물을 가리켜서 '속'이라고 한다. 여기서 유추하여 마음의
한가운데, 배의 속 자리를 뜻하는 수도 있다. 속은 겉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참' 과 동일한 뜻으로 쓰인다.
겉만 있고 그 내용(속)이 차 있지 않은 상태가 거짓이요, 그 반
대가 참이지 않은가. '속'이란 명사에 접미사 '-다'가 붙어 '속다'
가 만들어진다. 남의 꾀레 넘어 가거나 거짓을 참인 줄로 아는 것
이 '속다'라면, 거짓을 참으로 곧이듣게 하거나 거짓말로 다른 사
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이롭도록 꼬이는 것은 '속이다'라고 할 수
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과 자기자신이 속은 것 모두 내
용(속)에 관한 관단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우선 명사 '속'이 관여하여 이루어지는 보기들을 찾아 보면, 다
음과 같다. 속가량(속으로 대강 쳐 보는 셈-겉가량), 속가루(쌀이
나 고추 같은 것을 빻을 때 나중에 되는 가루). 속가죽(겉가죽 안
쪽에 있는 가죽), 속가지(삽요어 ; 擇腰語), 속감(쌍시의 속에 든
감), 속갱이 ('관솔'의 경삼도 방언), 속겨 (고운 겨-겉겨), 속고갱
이, 속고름, 속고샅(지봉을 이엉으로 이을 래 먼저 지붕 위에 건너
질러서 매는 새끼), 속고의 (속바지), 속곳바람, 속커 (안쪽의 귀),
속긋(글씨나 그림을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덮어 씌우게 하기 위하
여 먼저 가늘게 그리어 주는 획), 속긋넣다(속긋을 그어 주다), 속
꺼풀, 속껍데기, 속끓이다, 속나깨 (메밀의 고운 나깨), 속내평 (속
내용), 속눈 뜨다(겉으로는 눈을 감은 체하면서 속으로는 무엇을 조
금씩 보다), 속눈셉, 속다, 속다짐(속셈), 속닥이다(쏙닥이다 ; 동아
리끼리 가만히 이야기하다), 속달거리다, 속달다(안타까와지다), 속
대, 속대쌈(배추의 속대로 싸는 쌈), 속더께 (찌든 물건에 낀 속의
째), 속등겨, 속뜨물(곡식을 여러 번 씻은 뒤에 나오는 깨끗한 뜨
물), 속마음, 속말, 속바람(숨을 고르게 쉬지 못하고 몸이 떨리는
현상). 속버선, 속벌(속에 입는 옷의 각 벌), 속보이다(속에 품은
마음이 드러나다), 속뽑다(속을 알아 내다), 속삭이다, 속살(옷에
가리어진 부분의 피부), 속살다(속으로는 버티고 겨루는 뜻이 있
다), 속살이(게의 일종), 속살찌다, 속서근풀 (황금초 ; 黃후草), 속
속들이, 속아리(속병), 속없다(줏대가 없다), 속이다, 속적삼, 속
주다(숨김 없이 말해 주다), 속창(구두에 덧까는 창), 속치마, 속
치레, 속치장, 속탈(소화가 안 되는 병), 속힘 (실 력) 등.
시대를 거슬러 중세어의 자료를 보게 되면 '속' 의 형태는 '솝 리
(舊)(훈몽), 하 34), 솝 정(精) (훈몽), 상 33), 솝서근풀((사성),
하)' 등에서 '솝' 으로 확인되는데, 같은 뜻을 드러내는 변이헝으로
서 '씁(몸쏘블보리옥 ; (능엄) 1-64)' 의 형태가 보이기도 한다. 그럼
'솝/속'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많은 보기는 아니지
만 말의 받침으로 쓰이는 비읍(ㅂ)이 변천과정에서 이른바 자음교
체를 따라 기역(?)으로 바뀐 결과로 보면 좋을 듯하다. 예컨대
거봅/거북(능엄)), 붐>북((석보), 6-82), 부섭>부엌' 등에서
그러한 보기를 찾을 수 있으니, '솝>속'도 예서 벗어나는 것이라
고 할 수 없다. 지금도 지명에서는 '속'에 해당하는 말이 '솜
[이리 (理里)-솝리>솜니] 으로 쓰이고 있으니, 그것은 중세어
자료에 보이는 것과 같은 형태가 아직 어휘의 고도(孤島)처럼 살
아 있는 경우라 하겠다.' 하나의 음절과 또 하나의 음절이 만나
그 소리가 달리 쓰이다가 아예 달리 소리 나는 대로 굳어져 하나의
형태로 쓰이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다. 이를 이른바 형태음소적인
변동에 따른 말의 변천이라고 풀이한다. 옷을 해 입을 때에 쓰이는
'솜'도 따지고 보면 열매 부분의 속이라는 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
다. 목화도 삭과 즉 터지는 열매의 하나로서 그 속이 여러
개의 칸으로 나뉘고 각 칸에 많은 씨가 들어 있다.
한마디로 '솝'과 '솜'이 넘나들며 쓰이다가, 아예 '솝'으로는 그
형태가 인식되지 압고 '솜' 으로만 굳어져 버린 결과이다. '솝' 이
쓰이지 않은 그 빈 자리에 받침이 바뀌면서 '속'이 쓰이게 되니 같
은 뿌리에서 나와 '속/솜'으로 갈리어 그 가지마다 서로 다른 모
양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솜은 목화씨에 달라 붙이 있는 섬유질
의 한 부분이다. 파란 다래는 가을을 살다 검은색 다래로 변하여
마른다 다시 다래는 세로로 갈라져 그 사이로 하얀 솜의 속살을
드러내 어, 말라가는 목화에 또 다른 계절의 꽃인 양 피어오른다.
솜은 회고 부드러우며 가벼운 것으로서 목화의 씨를 감싸는 옷이기
도 하며 겉껍잘과 씨의 사이에 끼어 있어 겨울을 지내기에 알맞도
록 그 씨앗에 견 딜성을 더해 주지 압는가. 이러한 보온과 탄력, 가
벼움의 장력을 이용하여 사람들은 솜을 틀어 실로 옷감을 짜기도
하며, 고 자체를 옷의 겉과 속 사이에 끼워서 쓰기도 한다. 그 쓰
임에 있어서나 그 본질에 있어 솜은 속올 내용으로 삼고 있음을 알
겠다. 결국 솜은 목화씨를 감싸는 옷일 뿐더러 사람을 감싸 주는
옷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솜'과 상관을 보이는 말의 형태로는 '솜, 솜돗(솜을 얇게 펴서
솜반을 만드는 돗자리), 솜몽둥이, 솜방망이 (엉거시과의 다년생
플), 솜버선, 솜병아리(알에서 갓 깬 병아리), 솜붙이(겹옷 빕을
철에 임는 솜옷), 솜사탐, 솜옷, 솜털, 솜채 (솜올 잠재우기 위해
두드리는 대나무), 솜화약(솜을 황산과 질소의 혼합액에 적셔 만든
화약)' 등이 있다
냉수 마시고 속을 차린다고 하거니와 참으로 속이 찬 사람, 속이
차 있는 세상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을 보호하는 보호막 곧
솜이 알맞게 마련되어 있는 공간이라고 하겠다. 솜은 솜으로서의 고
유한 구실이 있듯이 겉껍질은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능이 있다.
겉과 속이 걸맞은 그러한 누리야말로 살아 볼 만한 세상일 것이다.
5-3. 불의 겨레
개가죽이 불에 타면 우선 오그라들기 마련이다 하는 일이 늘어
가지는 못하고 자꾸만 오므라들고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불에 탄
개가죽 같다'고 한다
사람이 오늘날과 같이 문명생할을 할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로
불의 구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힘이 세고 큰 동물이라도
블에 타지 않는 것은 없다. 호랑이도 불을 보면 도망을 간다고 한
다. 불은 그 속성으로 보아 빛과 열을 수반한다. 그런 의미에서 환
한 것에는 불을 붙여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불이 빨갛고 환하게
보이기 때 문에, 꽃이 벌어지는 것을 핀다고 하며, 아픈 얼굴이 건
강하고 고와지는 것을 핀다고 하지 않는가
옛말로는 '블(석보), 9-37)' 이었는데 뒤로 오면서 '불'이 되었다
'블'은 받침으로 기역(ㄱ)을 취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블'이
'붉다/ㅂ다'로 쓰이는 보기들이 확인된다 '블근섬, 블근못
등은 '붉다'가 다른 말과 합성하여 드러난 지명이고,
기다, 블곰 등은 용언으로 쓰인 경우이다. '
오늘에 와서 '불'을 중심으로 한 말들은 하나의 겨레를 이룰 만
큼 다양하게 발달되어 쓰인다. '불그덩덩하다, 불그데데하다(좀 야
비하게 불그스름하다), 불그레하다, 불구무레하다(태가 나지 않고
엷게 불그스름하다}, 불그스름하다(조금 붉다), 불그죽죽하다(칙칙
하게 불그스름하다), 불끈거리다[(마치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걸
핏하면 성을 잘 내다=, 붉디붉다, 붉히다' 등 상태 또는 과정을 나
타내는 표현들이 낱말의 밭을 이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이들 '붉-' 계의 형태들은 자음이 갖는 소리의
느낌을 따라 더욱 강한 말로 바뀌어 쓰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같은
형태인데도 된소리의 자음이 옴으로써 보다 강한 느킴을 받게 된다.
'쁠그스럼하다, 뿔구무레하다, 뿔그죽죽하다, 뿔끈거리다'와 같이
형태의 변이를 가져 오는 일이 때때로 있다.
이어서 '밝-' 계의 낱말로서 그 무리를 보게 되면 '발갛다(>빨갛
아), 발가벗다(<빨가벗다), 발깍(<발칵/벌컥), 발간(<빨간 ; 아
주 터무니 없는), 발강이 (<빨강이), 발개지다(<뻘개지다), 발그
레하다(약간 곱게 발그스름하다), 발그스름하다(<빨고스럼하다)'
등의 형태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중세어에서 '블(붉)/ 블(ㅂ)' 올 중심으로 하는 낱말의 겨레는 어
떠한 것들이 있는가.
'블/블계의 낱말겨레 (중세어)
1) '블- 계-블(석 보) 6-33), 블강도(火賊 ; 동국삼강; 열 4-61),
블거ㅎ다(구급간 6-8). 블찌디다(유합)하 62), 블곧(동국삼
강), 효 4-88). 블그트렁이 (유합 하 52), 블근못((용가), 7-25),
블근섭((용가) 1-8), 블내다((한청 317), 블똥((한청) 317), 블
디 ㄹ다(유합), 하 4I), 블딛다(블을 때다, ((훈몽) 하 12), 블리
다((한청) 311 d), 블묻다(노해) 상 23), 블붙다((능엄) 8-
75), 블빛(유항) 하 54), 블사개 (한청), 398 d), 블퇴 (((한청),
317), 붉다{(두해1 초 7-26), 붉히다((한청) 230), 붉나올(불꽃;
(금삼, 3-29) 등.
2) '블-'계-블가하다((월석) 2-58), 블기다((용가) 30), 붉가숭
(발가숭이 ; (청구), 대학본 p. 136), 밝다(용가) 71) 등.
이상의 '블 (블)-'에 대한 보기 1) 2)에서와 같이 현대어에 비교
하면 경음화를 경험하지 않은 어휘들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세어에서 현대어에 이르도록 '불'이 기역(ㄱ) 특수곡용을 하는
형태적인 특성을 보임에는 변함이 었으나, 점차 리을(ㄹ) 발음은
약화되고 기역(ㄱ) 받침으로만 발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음 셋이 연속될 때는 중간자음이 묵음이 된다. 폐구조음원칙
에 따르면 입술이나 연구개(혀뿌리)에서 나는 소리
가 살아 남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ㄱ' 계가 더 이상적이지만
언어현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어서 '밝다'의 방언분포에서 보는
것처럼 '-ㄹ' 계도 많은 방언분포를 갖고 있다
'밝다'의 방언 분포
1) [발따]-경북 영천. 포항. 영덕. 대구. 김천. 의성. 예천. 안
동. 영주. 청송. 울진. 평해스경남 울주. 양산 울산 동래. 김
해. 부산. 마산 창녕 등
2) [볼다]-경남 마산 등.
3) [박다]-경북 고령 영양.성주/경남 합천. 함양. 산청 진
주 충무. 저창. 밀양 진양 고성. 의령 등.
4) [복따]-경남 거제. 남해. 함양 등.
5) [뽁다]-경남 남해 등
6) [북따]-경북 영천了경남 하동. 합천. 산청.사천 등
5-4. 물의 순환
가뭄이 들고 논에 물은 넉넉지 않은데, 자기 논에만 물을 댈 때.
결국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경우를 비유하여 '아전인수(我田引
水)'라고_한다.
물은 지구 표면적의 약 7 할을 차지하고 있으며, 생물체의 몸 속
에는 7할에서 9할에 이르는 수분이 있다. 진실로 물은 생명의 고
향이요 원천임을 알겠다. 공기가 지구의 옷이라고 한다면 물은 지
구의 피라고 하여 지나침이 없다.
끝없는 사막도 물만 있으면 옥토가 될 수 있으며, 온갖 생물이
새끼를 치게 된다. 물이 전혀 었다면 부패는 물론이요, 생물체 내
의 영양분 공급과 노폐물의 신진대사도 이루어질 수 없다 물은 흐
른다. 둥근 지구를 따라 흐르니 마침내 큰 원형의 바퀴를 이루고
돌아가뜬 셈이다.
옛말에 물은 '믈'이었고, '물'은 하나의 무리 곧 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옛말에서 '믈'에 대립되는 형태로서 '블'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분명 '맑' 계의 꼴로 드러나는 것이 있으니, 'ㅁ'계의 꼴
과 서로 대립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대어에 '물'이 쓰이는 모양은 '물(ㄱ)' 계와 '말(ㄱ)' 계
가 있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계열은 구체적으로 어
떤 꼴로 나타나는가 살펴 보도록 한다.
'물(ㄱ)'계에는 '물거품, 물결, 물긋물긋하다(묽은 듯하다), 물
쿠다, 물덤벙 술덤벙(대중없이 날뛰는 모양), 물렁하다, 무르다,
무르녹다, 물잡다(마른 논에 물을 대어 두다), 물집, 물큰거리다
(물컹한 감각), 물큰물큰, 물타작(미처 마르기 전에 물벼를 그대로
하는 타작), 물컹이 (물컹한 물건), 물할머니 (샘의 귀신), 물호랑이
(범고래), 묽수그레하다(조금 묽은 듯하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한편 '맑-'계에는 '말갛다, 말개지다, 말그스름하다, 말긋말긋
(액체 속에 덩어리가 섞인 모양), 말끔하다(티없이 깨끗하다), 말
랑거리다, 말랑하다, 말캉거리다(평안도에서는) 말큰거리다 ; 너무
익거나 옳아서 좀 무르다, 말캉하다, 몰칵(냄새가 코를 찌르듯이
갑자기 나는 모양), 몰캉거리다, 몰캉하다, 꼴큰(연기나 냄새가 갑
자기 나는 모양)'과 같은 형태들이 있다.
'물'은 옛말을 보면 지명에서 '매 /미'로도 드러난다. '매끄럽
다, 매 끈거리다, 매끈하다, 매끈둥하다(퍽 매끄러운 맛이 있다),
미끄름, 미끈유월[(빠르게 지나가는 유월이란 뜻으로) '음력 유월'
을 달리 이르는 말], 미꾸라지, 미끄러뜨리 다' 등이 '매 /미'와
물의 관련성을 보여 주는 말들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타나는 '水-買' 의 대응이 말해주고
있듯이 '믈' 계는 '미 '계로도 발달하였다. 어두자음의 소리상징을
따라서 분화된 형태로 보이는 것은 바로 '미/비/피'의 대림적인
낱말의 겨레들이라고 하겠다. 이들 형태 가운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형태는 미 '이다. 소리 상징으로 보면 가장 평범한, 정지상태
이거나 운동상태이더라도 파열성 없이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음성
상징을 드러낸다. 물이 수증기가 되어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
가 되어 내린다. 그러니까 땅에서 하늘로,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순환하여 하나의 고리를 이루는 것이다. 비는 농경사회에서 생명과
도 같은 구실을 하였다. 제때 비가 안 오면 기우제를 지내고 온 부
락이 회동하여 부정탄 사실들을 처단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피'
는 직접 동물의 몸 속을 돌아 흐르는 가장 생명적인 미 '의 변형이
된다. 미 /비/피'와 관런한 낱말의 떼 중에서 미 '는 현대어로
을수록 분포가 얼마 안 되고 '비/피'를 증심으로 하는 낱말겨레는
상당히 넓은 분포를 보인다. 중세어 자료에서 보이는 '믈-'계의 낱
말겨레는 다음과 같다.
'믈-/맑-' 계의 낱말겨레
I) 믈-'계-믈(석보), 13-33), 믈ㅅㄱ래 (한청,, 29 c), 믈가지
(역해), 하 11), 믈견흠(물 깊이 겨냥 ; (유합, 하 IZ). 믈결 ((유
합), 상 6), 믈고기 (소해; 3-25), 믈구뵈 (혼몽), 하 35), 믈그여
디다(믈크러지다 ; (유합), 하 59), 믈끄이다(큰물지다 ; (훈몽), 상
3), 믈담다(물에 빠지다), 믈떰(물방울 ; (유합), 하 6o), 믈되야
지(돌고래), 믈쯔다(젖다 ; (동문) 상 8), 믈방울(송강), 2-14),
믈미다(물밀다), 믈불회 (물의 근원 ; (유함) 하 8), 믈쇼(역해
보) 48), 믈언덕 (훈몽) 상 3), 믈에군사(水軍 ; (삼역) 3-6), 믈
여위다(물이 마르다 ; (유합)하 5o), 믈줄(유합)하 41) 등
2) ㅁ-'계-묽다((구급방) 상 27), 맑다(초두해) 8-24), 맑안츠
다(맑게 가라앉히다 ; (구급방) 상 10) 등.
위의 보기에서와 같이 'ㅁ +모음十ㄹ/ㅁ+모음'의 어근형태에서
파생하여 상당한 말의 겨레를 이루었다. 음운론적으로 원순모음화
를 겪어 '믈>물'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론적으로는 특
수곡용을 하는 '물(ㄱ)' 계의 말들이 보이는데 오늘날의 방언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물(ㄱ)' 은 모음이 바꿩을 따라 '맑(ㅁ)-' 계의 어
휘들을 분화시켜 나아갔다.
물이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물이 있음으로써
풀. 나무 등의 식물이 있고, 다시 동물의 삶이 가능한 것은 자연의
이치일진대 물을 비롯한 자연에 대한 조심스러움이야말로 우리 인
간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자세라 할 것이다.
5-5. 내와 높낮이
일반적으로 부모와 같은 윗사람은 자식 같은 아랫사랑들의 작은
잘못은 너그럽게 보아 넘겨 준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는 드물게
표현되니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짜지 한 것이 아닐
까 ? 이 말은 형제가 여럿 있을 때 부모들이 나이 어린 형제를 더
욱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이르기도 한다
방위로 보아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상태나, 시간의 흐름으로 보
아 처음부터 끝까지를 내 리'라는 부사로써 나타낸다. 이와 같은
형 태이면서 움직임을 드러내는 말에 '내 리다'가 있다. 내 리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로 다 같이 쓰인다. 자동사의 경우 '높은 데서 낮
은 데로 옮다, 먹은 것이 삭아 아래로 가다, 신이 몸에 붙다(귀신
이 내려서 병을 닳다), 뿌리가 땅으로 들어가다'위 같은 의미로 싱
이며, 타동사일 경우,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옮다, 윗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주다'와 같은 뜻으로 상인다.
'내리.내리다'는 시냇물을 뜻하는 '나리'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모음이 거꾸로 닮아 '나리>내리'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리(냇
물)는 지구의 표면을, 또한 지구의 어느 정도의 깊이까지를 감돌아
흐른다. 물은 한결같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다. 하늘에서 물의
또 다른 형태인 구름이 기압의 골짜기를 따라 모여서 땅으로 내리
는 것이나, 비가 내려 시냇물이 되고 다시 강. 바다로 흘러드는 것
이 모두 그러하다
'나리'가 물을 드러내는 경우는 방언의 '나리다`, 고려가요의 '정
월나릿므른 아으 어저녹저 하는데 ((악범))`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증세국어에서는 명사에 접미사가 붙어 동사
또는 형용사를 이루는 경우가 많이 있는바, '나리[川=+-다>나리
다'의 근거를 댈 수 있을 듯하다. '나리'가 주로 운동의 방향, 운
송의 기능을 중심으로 쓰이는 말이라면, 일부 방언에서 '나리'를
'그랑(동래)', '거랑 (영주, 예천)', '걸'(청송. 영양. 의성. 군
위. 칠곡. 대구)' 등으로 부르는 이름은 '가람'의 변이형으로서 양
쭉 땅과 땅을 갈라 놓는 모양이나, 기능을 중심으로 쓴 것이라고
하겠다.
물은 생물의 서식처로서 혹은 그 보금자리로서 오랫동안 인간의
모듬살이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 왔다. 진실로 자연물
가운데 물만큼 엄청난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드물다. 그래서 예
부터 강이나 바다를 이용한 해운이 발달했고, 강이나 바다 속에 많
은 목숨살이들이 깃들어 살아 왔다. 저 깊고 너른 바다는 진실로
우리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삶의 무진장한 가능
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내리다'는 시냇물(나릿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속성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시냇물의 흐름을 드러내
는 가장 중심이 되는 원래의 의미로부터,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물건이나 사랑을 베푸는 것이나, 신이 무당과 같은 사람에게 아래
로 옮아 오는 것 또는 새나 사물들이 위에서 아래로 옮는 동작이
나 상태 등의 주변적인 뜻으로 펴 쓰이게 된 것으로 간추릴 수 있
다
'나리'의 낱말겨레는 내려가다, 내 려갈기 다, 내려긋다, 내려깔기
다, 내려 놓다, 내려누르다, 내려다보다, 내 려다보이다, 내려 두
다, 내려디디다, 내려뜨리다, 내려비치다, 내려쏘다, 내려쏟다, 내
려앉다, 내려오다, 내 려조기다(위에서 막 두들겨서 꺾어지거나 으
스러지게 하다), 내려지다, 내려질리다(값이 얼마씩 싸게 치이다),
내려쫓다, 내려치다, 내리, 내리긋다, 내리깎다, 내리내리 (언제까
지나), 내리다, 내리닫다, 내리뜨다, 내리매기다, 내리먹다(집의
번지나 번호가 위에서 아래로 정하여지다), 내리밀다, 내리키다(아
래로 떨어지게 하다), 내리패다, 내리퍼붓다, 내리흩다(아래쪽을
향하여 내려가면서 훌다), 내 림(혈통으로 보아 윗대에서 유전되어
오는 특성), 내 림굿(무당이 되려고 할 때 신이 내리기를 비는 굿),
내 림내 림 (대 대 로), 내 림대 (신을 내리게 하려고 무당이 사용하는 소
나무나 대나무의 가지), 내 림바탕(유전형질), 내 림표, 내 림떠보다
(눈을 아래로 뜨고 노리어보다) 등이다.
같은 말의 뿌리에서 나왔지만 '내커다'와 '내리'는 서로 다른 말
과 결합하여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리_' 의 '내' 와 같은 형태이면서 그 내용은 다르게 이해해야
할 내 [川]'가 있음도 우리는 지나칠 수 없다. 앞의 '내 리-' 의 '내'
는 뒤의 모음을 닮아서 이루어진 형태음소적인 변동의 경우이고,
뒤의.내 [川]'는 '나리>내'의 과정을 겪어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모음과 모음 사이에서 리을(ㄹ)이 떨어져 쓰이는 예는 우리말에서
혼히 나타나는 음운변천이다, 흔히 순서가 뒤집힌 경우를 보고 '내
건너 배 타기' 라고 한다. '내'와 관련된 '냇가. 냇둑 냇물. 시냇
물.냇버들' 등이 있다.
냇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자연의 섭리려니와 이러한 사
물인식에 터를 둔 말들이 낱말겨레를 이루어, 존재. 상태.동작의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5-6. 값과 동등성
'값도 모르고 싸다고 한다'는 속담이 있다_ 값도 알지 못하는 사
람이 값을 따짐은 아무 뜻이 없다. 어떤 일에 대하여 그 자세한 사
정도 모르면서 그 옳고 그름을 따질 때 혼히 그런 비유를 한다
보통 사람이나 사물 자체 안에 남아 있는 중요성이나, 물건을 사
고 팔 때에 주고받는 돈 또는 바꿀 만한 물건을 '값'이라고 한다.
인간의 욕구를 채우는 사물을 얻기 위하여 활동하는 것을 경제라고
하거니와 그것은 관계를 갖는 이들 서로간의 약속을 전제로 한다.
이 약속은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적어도
승복할 수 있는 속성을 띤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 너무 지나치게 잃고 얻음이 없음
으로 해서 값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도 중간에서
소개를 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증권거래소가 그렇
고, 은행 또한 그 범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복덕방 역시 그 대표에
해당하는 직종이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값은 팔고 사는 사람이 함
께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감의 특성인 '동등성'을 하위 속성으로 한다
이 동등성은 내 칭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정한 값을 중심으로
서로가 대칭의 상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대칭성과 동등
성은 반드시 둘 이상의 복합관계가 있음으로써 가능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인식으로 보면 쌍방간에 동등한 영역이 되는 것을 중간 곧
중심이라 하겠다. 바로 이러한 중심을 두고 하나의 사물은 둘로 갈
라져 인식되는 '분절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때 하나의 공간과
다른 공간의 경계가 만들어져, 요컨대 '간극성' 이라는 특성을 부여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값' 은 그 낱말이 가지는 '대칭성. 분절성.
간극성' 등의 특성에 의해 낱말겨레를 펴 나아가게 된다.
먼저 대칭성과 관련하척 '값'을 생각해 보면, 가운데를 뜻하는
공간명사 '갑'과 어떤 관계가 있어 보인다. ((동문류해), 나 {(한청문
감I과 같은 문헌에서 '값'은 '갑'으로도 나타난다. 따라서 필자는
'값'이 중앙을 뜻하는 공간명사 '갑'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터를
대고자 한다." "갑'은 다시 접미사 '-다'를 허용하여 '갑다'로 되
었는데, 그 분포는 흔하지 않다. 대칭성은 사물을 가운데로 하여
부피나 두께를 겹침으로써 배로 늘어나는 특징을 가진다. '값了겸了
곱' 등은 바로 '갑'의 변이형이라고 하겠다. 모음교체에 따라서
느낌과 의미의 차이가 생겼을 뿐 대칭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대
동소이하다
이 형태들이 관여하여 이루어진 말들의 겨레로는 '갑-' 계에 '감
시 다(물이나 바람이 목구멍으로 들어갈 때 가운데의 숨이 막히는
것), 갑절, 가운데, 가운데치마(갈퀴코를 잡아 매도록 갈퀴의 위
아래 두 치마 사이에 가로 지른 나무), 가운뎃소리, 한가위, 가윗
날, 가웃(되 말 자 따위로 되거나 잴 때, 그 단위의 절반 가량에
해당하고 남는 분량을 이르는 말)' 등이 있다. '값-'계에는 '값나
가다, 값늦다, 값놓다, 값땋다, 값매다, 값보다(값을 어림짐작하여
보다), 값 부르다, 값싸다, 값어치, 값없다. 값지다. 값치다, 값치
르다' 등이 있다.
겹 -'계는 아주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본래 졍 '이란 넓고
얇은 물건이 포개어진 것으로 사뮬이 거듭된 것을 이른다. 그러니
까 가운데의 공간을 중심으로 하여 대칭을 이룸으로써 겹이 만들어
겼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사물이나 사실, 관계에서 겹쳐지는
평행선 상태의 것에 대하여 '겹'이라는 말이 붙어 낱말겨레를 이
룬다. 석기에 속하는 말에는 '겹간통(-間通 ; 집의 앞칸과 뒤칸이
서로 통하게 지은 짐), 겹것 (겹으로 된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
겸겹 이, 겹꽃, 겹 닿소리, 겹대패, 겹도르래, 겹문자[예 :청청 (靑
옴)=, 겹사돈, 겹사라지 (헝겆이나 종이를 겹쳐 만들어서 기름에 결
은 쌈지), 겹옷, 겹월 (복합문), 겹저 고리, 겹집 다, 겹거 마, 겹 창,
겹치 다, 겹 치마, 겹솔소리' 둥이 있다
'갑'에서 모음이 바뀌어 십이는 것으로 '곱'을 또한 들 수 있다
여기에 들어가는 말로는 '곱걸다(두 번 겸치어 얽다), 곱꺾 이 (뼈마
디 등을 오그렸다가 다시 펌). 곱놓다(노름에서 먼저 태운 돈의 곱
을 다시 걸어 놓다), 곱되다(배가 되다), 곱들다, 곱배기, 곱삶다
(두 번 삶다), 곱새치기 (돈을 곱을 걸어 하는 노름), 곱셈, 곱솔
(꺾어 박은 솔기를 다시 한번 더 꺾어 박는 일), 곱씹다(말이나 생
각 따위를 거듭 되풀이하다), 곱쟁이 [곱절이 되는 수량), 곱치다
(반으로 접어 한데 합치다), 곱하다'와 같은 꼴들이 있다. 구부러
짐을 드러내는 '곱다[曲]' 도 곱하는 현상 곧 겹으로 되는 현상을
뜻하는 '곱'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하나의 사물을 겸치노
라면 그 형태는 굽을 수밖에 었는데, 이때 굽는 형태를 가리켜 '곱
다'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원형으로 된 사물을 일러 '곱다(<굽
다)'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굽이져
흐르는 강물을 보라. 구부러진 부분에서 보면 강물이 두 갈래를 이
루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 이도 '값'의 분절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감'과 관련한 것으로, 제 흘로는 쓰이지 못
하는 의존형식 '줍' 이 있다. 우선 '줍-'계에 드는 말을 살펴 보면
'갈비 (겹), 굶다 (아울다/맞서다), ㄱ션므지게 (쌍무지개), ㄱ(겹),
ㄱㅅ닛다(나란히 잇다)'와 같은 옛말들이 있다. 현대 어에서는 갈비
(늑골, 쇠갈비, 나란히 있는 뼈란 뜻으로 쓰인 듯), '갈비,(앞 추
녀 끝에서 뒤 추녀 끝까지의 지붕의 넓 이), 갈비뼈, 갈빗대, 갈피
(일이나 물건의 부분과 부분이 구별되는 어름)' 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이러한 대칭성은 결국 사물이나 사실인식의 가늠을 드러내기
도 하며 공간의 나누임 곧 분절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분절성은 벌
어진 틈 곧 간극성으로도 표현되는 것이니 앞에서 보기를 든 '좁-'
계의 '갈비,'이 그러한 경우라고 하겠다. '조'은 받침의 탈락을 따
라서 '갈' 계로 분화해 나아가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형태가 먼젓
것 대신에 새것으로 바뀜을 뜻하는 현대어 '갈다'라 할 수 있다
잘_,계에는 '갈다[替], 갈아들다, 갈아내다, 갈아대다, 갈아서
다(묵은 것이 나간 자리에 새것이 대신 들어서다), 갈아입다, 갈아
주다(물건을 팔아 주다), 갈아 치우다, 갈아태우다' 와 같은 말들이
있다.
공간명사 '갑(굶/ 굼)'은 사물이나 사실을 알아차림에 있어 중앙
에서 양쪽으로 갈리는 과정을 나타내는 대칭성과 분절성을 기본으
로 하는 낱말겨레의 밭을 이룬다고 하겠다.
5-7. 해의 변이
'회고도 곰땅이 핀 놈' 이라는 속담이 있다. 겉으로는 회고 깨끗
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 어둡고 더러운 데가 있는 것을
이른다. 실상 외모로는 그럴싸한데 실속이 없는 사람을 비유하고
있다.
눈빛과 같이 깨끗하고 모든 광선이 한데 어울린 상태를 '회다'고
한다 횐 옷을 입고 살았다 하여 예부터 우리민족을 일러 백의민
족(白衣民族 ; (위 서), 동이전)'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태극기의 바
탕이 횐 것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닐까.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물든 옷을 벗어 버림은 바야흐로 모든 겉치레와 거추장스러운 걸
비우고 오로지 자식으로서의 도리와 예의를 바치는 것으로 보인다.
옛말을 더듬어 보면 '희다'는 '히다(석보), 6-43)' 에서 비롯하였
음을 알게 된다. 히 다'는 태양을 뜻하는 히'에 집미사 '-다'가
붙어 태양빛의 밝은 속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본다. '히'의 모음이
바뀌거나 탈락함으로써 여러 가지 분화형이 생겨나며 음성상징을
따른 표현감각이 달라진다.
음운의 변천과 방언 및 중세어 자료를 되돌아 볼 때, 히 '의 기
원형은 '세 (셰)'가 아닌가 한다(이남덕, (한국어 어왼연구 I, II, III,
Ⅳ, l985~l986). 지금도 '날이 샌다, 머리가 세다, 눈이 시다'고
할 때의 '시-' 계의 분조는 '해'와 함께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의미
의 유연성을 보여 준다. '히'의 기원형을 '세 (셰)'에서 비롯한 것
으로 보는 견해에 함께하는 것은 'ㅅ~ㅎ올' 의 넘나듦은 마찰음으로
서 일어나기 쉬운 구개음화 현상이라고 플이되기 때문이다.
ㅎ-' 가 분화하는 과정에서 '하-/허-해/-회-' 따위의 낱말들
이 생겨났으며, '시-'계는 아직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우선
히 -'계의 분화 형태를 들어 보이면 다음과 같다.
'하양, 하얗다, 하애지다, 허옇다(어느 정도보다 지나치게 회다),
허예 지다, 헤멀끔하다, 해말갛다, 해말쑥하다(얼굴이 회고 말쑥하
다), 해거름(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 해거리 (한 해를 거름),
해껏 (해가 질 째까지), 해끄무레하다(반반하게 생기고 빛깔이 해끔
한 듯하다), 해끔하다(벚깔이 조금 회고 깨끗하다), 해끗해끗{횐
빛이 군데군데 나타난 모양), 해납작하다(얼굴이 하얗고 납작하다),
해넘이 (헤가 막 넘어가는 째), 해 님, 해동갑(해질 패까지의 동안),
해돋이, 해뜩발긋(빛이 해끔하고 발그스럼하다)' 등이다.
'회-' 계에 속하는 것으로는 '회 디회다(아주 회다), 회떰다(겉으
로는 호화롭다), 회뜩머룩이 (아무렇게나 돈올 쓰는 사람), 회뜩회
뜩, 회멀겋다(얼굴이 회고 맑다), 회묽다[얼굴이 회고 보기에 여믈
지 못하다), 회 번덕거리다(회번드르르하게 번덕거린다), 회번드르
르하다(회멀쑥하고 미끄럽다), 회번주그레하다(얼굴이 회넓적하고
번주그레하다), 회번하다(동이 르며 허연 빛이 조곰 비치다), 회부
영다(회고 부옇다), 회블그레하다(빚이 회고 블그레하다), 회붐하
다(새벽의 밝은 및이 조금 휘다)'와 같은 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시-/셰-' 계에 속하는 낱말겨레에는 '새다(날이 밝
아 오다), 새 달, 새 벽, 새되다(목소리가 늦고 날카롭다), 새뜻하다
(새롭고 산뜻하다), 새롭다, 새 벽' 등과 같은 꼴이 있다 특히 '새
롭다'는 뜻의 접두사 '새-'는 많은 꽈생어를 만들어 내는데, 모두
가 '밝음.새로움'의 의미이다. 한펀 '셰-' 는 뒤로 오면서 '세-/
시-' 로 바뀌기도 하는데, '해=年='를 뜻하는 의미가 셈을 헤아리는
동작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뀌어 갔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여기에
속하는 형태를 보면 '세다, 셈, 셈나다(사물을 분별하는 슬기가 나
다), 셈낱씨 (양대명사), 셈본(셈의 법칙), 셈판(사실의 형편 또는
까닭), 셈펴이다(생활이 나아지다)' 등이 있다. 강세를 드러내는
접두사 '시'도 '세-' 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점두사 '시'는
강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바, 특별히 형용사에 앞서서 상이는 경우
가 많은데 '새-'로도 변이하여 상인다. 예 컨대, 시 퍼떻다, 시누래
지다, 시뻘겋다, 새노랗다, 시누렇다'와 같은 보기들이 그러한 경
우이다.
'Jt' 가 '해'와 더불어 쓰이는 예는 종종 볼 수 있다. '세다'가
'헤다(헤아리다)'로 되는 경우나, '형'이 '싱'에서 넘나들었음을
생각해 보면, '새'계의 말이 '해'계의 말보다 음운사적으로 보아
기원형 임올 알게 된다.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찮은 떠돌이 별들이 제자리에 머물러 살아
가듯이 태양을 드러내는 말들은 '해-' 계 및 '새-' 계로 혹은 접두사
피-/새-' 등으로 분화하여 태양을 인식하는 우리 조상들의 의식
올 되비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히 (회)-' 를 중심으로 하는 낱말겨레에는 어떤 말들이 있는
지 중세어 자료에서 찾아 보도록 한다
'히- (회) ' 계의 낱말겨레
1) '히-'계-히다(용가) 50), 히도디(월석) 2-35), 힛모로(해
무리 ; [한청] 9 b), 해바라기 (물보) 화훼), 히포(여러 해 ; (계
축), 햇빛(초두해) 7-3) 등.
2) '희-'계-회다(초두해), 25-2), 희옵스러하다(결백하다, (두방),
25), 회조츨하다(회고 조촐하다 ; (박신해) 3-l3), 횐ㄱ믈(白獲 ;
(마경) 상 1OO), 횐꼿개나리 (물보), 화훼), 흰권모(횐떡,
{(청구) 대학본 p. 117), 횐노(훤비단 ; (역해) 하 4), 횐바곳(白附
子 ; (동의), 탕액꾄 3-22), 횐ㅈ의 (동문), 하 55) 등
하얀 눈을 바라다보는 한국인의 정서에는 박꽃을 보는 듯한 그리
움이 있다. 기원적으로 보아 우리민족이 기마민족으로서 '눈이 쌓
인 지역에 익今한 탓만은 아닐 듯싶다. 해가 비치고 있는 동안과
그 반대의 시간들은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 빛과 그림자를 이루어
낸다. 우리에게는 환하고 하얀 것을 가까이하려는 본능 같은 욕구
가 있는 것이 아닐까.
6. 가루와 분절
6-1. 겉치레
밖에 드러나는 모습은 부드럽고 안으로는 굳센 경우를 '외유내강
(外柔內剛)'이라고 한다.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아주 냉철하게 대하는 것을 이르는 교훈이
담긴 말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안파 밖이 다른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나,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밖이 형식이라면 안은 내용에 해당한다. 안과 밖은 언제나 함께 있
기 마련인데 밖에만 치중하여 꾸밀 경우를 보고 겉치레한다고 한다
옛말에서는 밖이 '밧(능엄),' 혹은 '받(소해)'으로 쓰이었다.
'밧(받)'이 '밖'으로 바홴 것이다. '밧'에서 비롯된 형태를 보면 흥
미롭다. 입고 있었던 옷올 벗을 경우에 옛말로는 '밧다(((초두해), s-
47)' 또는 '벗다(용가 36)' 로 샜으니 '밧/벗'은 넘나들엇다. '밧'
은 '발' 의 의미로도 쓰였으니, 그러면 '밖'을 의미하는 '밧'과
는 어떤 유연성이 있는 걸까. 생각건대, 발로 걸어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나돌아 다닐 수가 있다는 데 근거하지 않을까. 분화
과정에서 '밧>발'로 됨은 'ㄷ>ㄹ'의 유음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밧가락 (법화, 4-141), 밧목((구급방)하 26) 등]
친구 사이에 가면을 쓰지 말고 벗으라고 하는 수가 더러 있다. 가
면을 '벗다', 이는 짐작하건대, 안과 밖이 다르다는 가정 아래 안에
있는 생각을 밖으로 내어 놓으라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밖과 안을
일치시키는 결과를 가져 오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옷을 벗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밖에 걸치던 옷을 벗으면 속옷이 나오니 안
이 곧 밖이 되는 게 아닌가. '바꾸다'와는 또한 어떠한 관계를 가
지고 있는가. '바꾸다'는 엣말로는 '밧고다(원각), 상 1-2 : 135)' 였
다 한마디로 서로가 갖고 있는 생각이나 물건을 드러내 놓고 교환
하는 동작을 뜻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바꾸다'는 어떤 자리나 계
획을 변경할 때에도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면 똑같이 '밖'을 뜻했던 옛말 '받'은 어떻게 되 었을까. 받
아들이고, 받들고, 받치고 할 때의 '받다'와 어떤 의미
상의 유연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것을 자기 소유 밖으로 내놓으면 누군가가 그것을 받게된다.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을 때 잘 모셔야[奉]
한다는 것이 사회 관습이다. 상대방과 생각이나 힘이 같아서 맞부
딪히면 맞대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말에서 '밧(ㄱ)[外]' 과 관계되는 낱말겨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밧(ㄱ)' 의 날말겨레(중세어)
밧(ㄱ) ((월석), 1-9), 밧겻(바깥 ; ((어록), 17), 밧고다(능엄) 2-
I3), 밧기다(벗기다 ; (용가) 58), 밧나라(ㅎ) (외국 ; (삼역) 3-
10), 밧니기 (밖걸기 ; (한청) 117 a), 밧다(받다 ; (한청) l74 b),
밧도리 (바깥둘레 ; (노해)하 32), 밧번던(外舊鎭 ; (어제소학언해),
6-90), 밧삼다(셈 밖으로 치다 ; ((초두해,, 16-l8), 밧장조아리(한
청), 222 d), 밧집 鄕((훈몽)중 55), 밧쳔량(外財 ; (월석) 18-31,
밧치다(받치다 ; (한청), 291 b), 밧침 ((역해 보), 41), 안밧(박해),
상 61) 등
'밧(ㄱ)' 의 낱말겨레(현대어)
1) 받-'계-받다, 받들다, 받들어총, 받아넘기다, 받아들이다, 받
아쓰기, 받침, 받히다 등.
2) '밖-'계-밖, 밖에, 안팎 등.
'밧->받-' 과 '밧(ㄱ)>밖' 등 두 가지 계열이 생긴 것은 음소인
식에 변이를 가져와 변별적으로 씀으로써 오해 었이 더 많은 어휘를
생성헤 낼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밧'이 중세어에서 지녀야
했던 의미변별의 부담이 줄어지면서 별개의 의미소를 분화시켜 나
간 셈이다.
밖과 안은 불가분의 것이니, 참으로 밖이 튼튼하고 안이 견실하
다면, 무슨 일에서든 종은 결과를 기다려 볼 수 있을 것이다
6-2. 굳음과 곧음
무른 땅에는 물이 고이지 않고 아주 여물고 단단한 땅에 물이 고
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굳은 땅에 물이 괸다' 고 하여 절약하는 사
람이 재산을 모으고 살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땅이나 사물의 견고한 상태를 '굳다'고 한다 땅이 '굳다'고 할
때의 '굳' 은 (훈몽자회)와 같은 자료에서는 굴[穴] 의 뜻으로 풀
이하고 있다. 고대인은 오랫동안 굴에서 살아 왔다. 너무 물러서
흐너지는 '굳'에서는 살 수가 없고, 견고한 토질이나 암벽으로 된
'굳'이라야 생활이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굴/굳'은 여문 땅이
거나 암벽으로 둘러싸인 곳에다 건조한 경우가 많다. 굳은 곳은 한
번 잡힌 모양이 무른 데에 비하여 비교적 변하지 않고 늘 그러한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곧다'는 그러한 '굳'의 성질에서 비롯된 '굳
다'가 모음의 바찝으로 갈라져 나온 말이라고 본다. 곧음과 굳음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이 두 형태의 음절구조는 'ㄱ十모음+
ㄷ'이다.
'굳다'와 연관되어 쓰이는 말에는 '구덕구덕 (물기가 약간 마른모
양), 구두쇠, 굳이, 굳은 돌, 굳히다, 구덩이, 구덥다(아주 미덥
다), 구들, 구들돌' 등이 있다. '구들'에 대하여 좀더 풀이하자면,
방의 바닥으로서 진흙으로 단단하게 만들어 놓은 부분을 일컬은 것
으로 짐작된다.
한편, '곧다'와 관련되어 쓰이는 것으로는 '고두밥(된 밤), 고들
고들(물기가 적어서 된 모양), 꼬드러지다(말라서 뻣뻣하게 된 모
양), 곧다, 곧이, 곧이곧대로, 곧이곧솔(곧이곧대로의 방언), 곧이
듣다, 곧추, 곧추다'와 같은 꼴들이 있다. 사물의 상태가 변함없음
을 '곧다' 라고 하고, 여기에서 유추하여 직선과 같이 변화가 없는
모양을 이를 때도 쏜다. 반대로 구부러진 것은 변화가 있다고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성품이 정직한 상태를 '곧다'라고 함도 굴절됨 없이 변함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고치다'도 형태 바뀜의 속을 들여다보면
'곧十히 +_다>곧히다>고치다'로서, 구부러진 것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즉 가변적인 것을 불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고침' 이
니, 아마도 우리 조상들은 가변적인 것은 틀린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 같다.
그러면 중세어에서 '굳'을 중심으로 하는 낱말의 겨레에 어떤 형
태들이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한다.
'굳-/곧-' 계의 낱말겨레 (쫑세어)
1) '굳'- 계_굳(굴 ; (월 인), 60), 굳다((용가), l9), 굳ㅂㄹ다(구급
간), 1-19), 굳세다((유합), 하 2), 굳이 (소해 2-50) 등.
2) '곧'_.계_곧다(석보), 19-7), 곧티다(소해), 2-61) 둥.
현대어보다 어휘들이 짧게 쓰임이 눈에 띈다.
증세어에서 종성의 변이로 말미암아 '곧>골((석보, 6-4), 굳>굴
((유합), 하 56)' 의 과정을 거침은 홍미롭다. 골은 ㅅ(시옷)을 더하
여 꼴(形 ; (월석) 8-28)' 이 되며 굴은 '꿀" ((훈몽), 중 2l)' 로 가
지 벋어 나아간다.
6-3. 가까움과 가장자리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키라고 한다. 가깝다고 마구 대하면 오히려
멀어지고 인간관계가 나빠질 것을 경계하고 있다. '정에서 노여움
난다'고 함도 이와 같은 상황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속담으로 보
인다.
거리나 시간이 멀지 않거나 친족관계로 보아 8촌 이내로 당내에
속할 경우 흔히 '가깝다'고 한다
옛말에 가깝다는 '갓갑다(월석), 2-50)' 로 표기된다. 갓갑다의 변
이형태로는 '갓갑다((한청), 264 b)'가 있으며 같은 뜻으로 쓰인다.
갓갑다의 형태를 풀어 보면 '갓'에 접미사 '-갑다'가 붙은 것이다.
결국 '갓/갓'은 동사의 어근으로서, '가장자리'라는 의미를 중심
으로 갈라져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이기
때문에 다른 부분과 공간적으로 가장 밀접해 있으며, 경계선이 되
기도 한다.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넘어가는 마지막이자 처음이
기도 하다. 또한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로 가는 것은 가장 멀다.
사람의 계획에 비유하자면, 목적을 달성해 내기까지의 역경이라고
나 할까.
모음이 바뀜에 따라서 '갓' 은 '긋(끗) (청구), p. l14, (한청),
32 d)' 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긋은 다시 받침이 변동되어 '굳/긋/
ㄱ'으로 가지 벋어 나아간다. '갓/긋/끝/궂'계에 드는 것에 '가
깝다, 가까스로, 가꾸러지다[머리를 가꾸로 박음으로써 땅 표면(끝.
경계 선)에 닿게 하는 것], 가쁘다(힘에 겨워 어렵고 괴롭다), 가장
(제일 먼저), 가장자리, 끗끗이 (끝내). 끝마치다, 끝막다(어떤 일
의 끝을 내어 더할 나위가 없이 하다), 끝빨다(끝이 뾰족하다), 끝
장(일의 마지막 결과), 끝전 (끝돈), 끝판(일의 마지막 판), 긋다(줄
을 치거나 금을 그리다, 비가 잠깐 그치다, 쉬다, 끊다)'와 같은 형
태들이 있다. 이것들은 '가깝다'의 어근형인 '갓/긋/귿/궂'
의 뒤에 접미사가 붙어 만들어진 파생어나 합성어들이다.
'가(갓)[邊]'의 방언분포를 살펴 보면, 가(ㅅ) (층남 천원.아산.
당진 서산. 예산. 청양. 서천 부여. 논산. 대전. 대 덕), 갓(제주
전역), 가상(전북 무주 김제 부안. 임실. 정읍. 순창/전남 장
성. 곡성. 구례. 광주. 나주. 순천 여수 고홍. 강진), 가생이 (경
기 여주/충남 연기. 공주. 홍성. 보령. 대전 대덕 금산/전북
장수. 남원/전남 구례/경남 밀양. 산청), 가싱이 (경남 창녕), 가
서리 (경북 예천), 가상다리(전남 담양. 보성. 장흥. 강진), 가상사
리 (층북 단양) 등이다. 이들 방언의 형태를 보면, 점미사 '-앙,/-앵
이/_잉이/_어리 (_아리)'가 어근에 붙어 파생되어 나아간다.
시작이 곧 끝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 사물의 가장자리는 다른 사
물에 있어서는 들어가는 입구가 되는 것이니 처음과 끝은 사실상
상대적인 인식의 차입임을 알겠다.
6-4. 느리광이
평소 느릿느릿 움직이며 일만 하는 소도 상항에 따라서는 공격과
방어의 본능을 드러내는 일이 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사람도 화
를 낼 때가 있음을 나타내 주는 좋은 비유이다.
행동이 느린 사람을 '느리광이' 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빠
르지 못하거나, 꼬임이나 조임의 정도가 성근 모양을 '느리다'고
한다.
옛말울 더듬어 보면 느리다는 '날외다(초두해), 16-65), 날회다
((초박해), 75)' 라는 말로 드러난다. 느리다는 개념은 공간지각으로
보아 '너르다'와 서로 그 맥을 같이 하며, 공간의 연장을 바탕으로
한다. 지금도 강원. 층북. 전남 일부 지역에서는 널을 '늘' 이라고
한다. 너르다와 느리다는 '널/늘'에서 파생된 형용사임을 알 수 있
다. '날'은 앞에 든 예와 같이 중세어에서 '날'로 표현되기도 하
였는데 필자는 '날'이 기역(ㄱ)곡용을 하던 말이 아닌가 한다. 결
국 '날'계의 원형적인 어근은 '날(ㄱ)_' 로 볼 수 있다. '날(ㄱ)' 에
접미사 '_다'가 붙은 '낡다'는 '늙다'와 서로 모음의 대립을 보이
면서 앞의 것은 사물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삭아 헐어지는 것을,
후자는 나이가 들고 오래된 상태를 이른다.
지금도 방언에서는 '늘고대기 (늙은 소의 평안도 방언), 늘구다(늘
리다의 함경도 방언)'와 같은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국어의 변천
과정으로 볼 때 '날구다(늘구다)'의 '날구(늘구)-' 가 어말모음의 탈
락올 따라서 '낡(늙)-'으로 바뀌어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럼 '날구'
는 무엇인가. 오늘날, 함경도 방언에서는 강의 나루를 '날구'라고
하거니와, ' 날구'에서 'ㄱ'이 떨어져 '나르'가 되고 이것이 다시 어
말의 모음이 바뀌어 '나루'가 된 것이다. 강이나 바다의 좁은 목에
다 배가 건너 다니도록 만들어 놓은 일정한 곳을 나루라고 하거니
와 나루는 이쭉에서 저쪽으로 옮아 가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때
로 사람들은 좁은 도랑이나 구덩이와 구덩이 사이에 널을 놓아 건
너 다닌다.
늙음의 본바탕은 낡아 가는 것이다. 즉 매가 나루에서 물의 흐름
을 따라 가듯이, 가다 보면 출발지점에서 종착지점에 이르듯이 젊
음도 사랑도 그떻게 훌러 인생이 가는 것이다.
요컨대 '낡(늙)-'계의 분화형태를 이루는 어간의 모형은 '낡(늙)
-/날(널)-/낙(늑)-' 과 같은 꼴을 갖는다고 하겠다. 그 보기를 들
어 보면 '낡(늙)-'계에 드는 것으로서 '낡다, 낡아빠지다, 낡은이
(노인을 얕잡아 보고 하는 말), 늙다, 늙다리, 늙마, 늙수그레하다
늙은이, 늙직하다, 늙히다'와 같은 꼴이 있다.
'날(널)-'계에 드는 것으로는 '나루, 나루질(나룻배를 부리는
일), 나루터, 나릇배. 나르다, 나른하다, 너르다, 너럭바위 (넓은 반
석), 너름새 (떠벌이는 솜씨), 널다, 널대문(널빤지로 만든 대문), 널
감(널의 재료가 될 목재, 죽을 날이 가까워진 늙은이를 농조로 이르
는 말). 널구다(넓히다의 함경도 방언), 널따랗다, 널려지다, 널리,
널어 놓다, 널찍이, 넓다[널웁다(널과 같다)의 준말 ; (여사서),], 넙
치 (넓은 고기, 넙치과)'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낙(늑)-' 계에 드는 말로는 '낙낙하다(조금 남음이 있다), 느긋
하다(부족함이 었다), 느꾸다(늦추다 ;결국 본래의 약속보다 시간을
늘리어서 보다 넉넉한 시간이 되게 했음을 드러낸다), 늑장(곧 볼
일이 있음에도 블구하고 딴 일을 하고 있는 느린 짓), 늑줄주다(엄
한 감독을 늦추어 줌), 늑하다(느긋하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다음으로 중세어에서 '널 (늘)-' 을 중심으로 하는 말에는 어떤 형
태가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한다.
'널-/늘-' 의 낱말겨레
1) '널'_계-널(초두해) 15-2), 널다((해요) p. 68), 널뒤기 (물
보), 널문((초박해), 상-58), 널오다(넓히다 ; (역해보), 29), 널쭉
(역해), 상 66) /너ㄹ다(번소), 10-29), 너러바회 (송강), 1-4),
너럭이소라(물보), 주식), 너룹다(여사서), 4-2) 등.
2) '늘_'계_느러가다(느릿느릿 가다 ; (유합), 하 51), 느러나다(유
합), 하 62), 느러지다(한청 2O5 a), 느리다((한청), 280 C), 느
리혀다(능엄), 2-48), 늘횟늘횟(역해보), 60) 등.
모음이 바뀜에 따라 말의 겨레가 불어남은 현대어와 다름이 없
고, ' \ ' 등의 음운이 소실되거나 '널오다, 너룹다, 널문' 처럼 사용
빈도가 줄어 죽은 말이 된 것도 보인다.
6-5. 뚫림과 막힘
나무에 뚫어진 구멍을 메운다고 자꾸만 깎으면 끝내 그 구멍은 커
질 도리밖에는 없다. 그때서 '구멍은 깎을수록 커진다'고 했을까.
허물을 감싸고 얼버무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 허물은 더욱 크게 드러남을
비유하고 있다.
물건이나 땅이 뚫어지거나 파인 자리를 구멍이라고 하거니와 이
때 구멍을 내거나 막힌 것을 갈라서 통하게 하는 동작을 '뚫다'라
고 한다. 한 부분 곧 한 쪽을 증심으로 하억 물체에 구멍을 냄으로
써 다른 부분파 이어진 하나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롱해 두 개의 양면이 이어져 서로 통하게 되고. 한 물체가 부분적
으로나마 두 면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뚫려야 할 곳이 막히고 막혀야 할 사물이나 장소가 뚫릴 때, 말
그대로 구멍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삶의 순환
과정에서도 알 수 있는바, 순환과정의 한 과정이 막히면 다른 곳
도 잇따라 막히게 되 어, 모두는 제 본래의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
고, 반대로 막혀야 할 데가 뚫릴 경우도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상수도를 생각해 보라 어느 한 곳이 잘못되면 다른 장소에도 수돗
물이 나오지 않는다. 혼히 누수현상이라고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일을 뚫림현상이라고 이름 붙이고자 한다.
엣말에서 '뚫다'는 '뚤다(박해) 중 35), 듦다(두요), 상 8), ㄸ
다(역해보), 45), 뜻다(박해), 하 52), ㄷ다(남명), 하 27)' 와 같은
여러 가지 변이형으로 실현된다. '뚫다'의 형태를 풀어 보면 '뚫-十
-다>뚫다'인데, 이때 '뚫'은 '둘[二]'의 변이형으로 보인다. 첫
소리에서 된소리되기 (>ㄸ)가 일어난 것 이고. 히웅(ㅎ) 종성체언
이라는 점에서는 '뚫'이나 '둘(ㅎ)' 이나 마찬가지이다. 구멍을 뚫
는 것은 상반된 두 개의 면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
둘의 상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뚫린 구멍을 통해서 두 면을 다
보게 되니 떱 은 이치에 통하다'라는 뜻으로도 '뚫다'를 쓰게 되었
을 것이다.
'뚤(ㅎ)-' 과 상관을 보이는 말로는 '뚤뚤(물건을 여러 겹으로 감
거나 맛는 모양), ㄸ다(뚫다의 경상도 방언), 뚫리다, 뚫어 내다,
뚫어뜨리다, 뚫어새기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6-6. 똥과 뒤
뒤를 볼 부인이 국거리를 썰 일이 바쁠 경우를 일러 '똥 마려운
계집 국거리 썰 듯'이란 속담을 쏜다. 급한 일이 있을 경우 그만큼
관심이 쏠리지 않는 일은 아무렇게나 해치움을 이르는 말이다.
사람 또는 동물이 음식물을 먹고 삭이어 항문으로 내보낸 찌끼
또는 갈아 쓰는 먹물이 벼루에 말라서 붙은 찌끼를 '똥'이라고 한
다. 똥은 배설작용의 결과이고 배설작용은 신진대사를 바탕으로 이
루어진다. 우리 몸에서 음식이 들어가는 데는 입이요, 다시 나오는
곳은 항문이다. 좀 예스럽긴 하지만 변소에 가는 것을 '뒤 보러 간
다'고 한다. 창피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 '뒷간 개구리한씨 하문(下
門) 물렸다'고 하며, 변소가 가까우면 냄새가 나고 사돈집이 가까
우면 말이 많다고 해서 '사돈과 뒷간은 멀어야 된다'고 하는데 여
기서 '뒷간'은 변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지금도 경기. 강원. 층청.
전라.경상 지 역에서는 혼히 쓰는 말이다. 변소를 뒷간이라 함은
냄새가 나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항문이 몸 뒤에 있기 때
문으로도 추측해 볼 수 있다.
필자는 '똥'이 바로 이 '뒤'에서 비롯한 말이 아닌가 한다. 음식
이 들어가는 입이 앞이라면 음식이 소화되어 나오는 항문은 뒤인
것이다.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고 한다, 겉으로는 얌전한 체하
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짓을 다 함을 비유하는데, 이때의 뒷구멍은
똥을 누는 구멍 곧 항문을 듯한다.
증세어에서 '뒤'는 히읗(ㅎ)종성체언으로서 '따(ㅎ)>땅>땅, 집
우(ㅎ)>집웅>지붕'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뒤 (ㅎ)>뒹>둥>동
(똥)>똥'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자료를 살피건
대 표기되는 형태로 보아 '뒤'는 두 갈래로 발달해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뒤 (ㅎ)>뒹>둥>동(똥)>똥'과 '뒤 (ㅎ) >뒷 [뒷다((월석)
21-1l8), 뒷치다(삼역), 6-3)]' 이 그것이다. 음식이 들어가는 '입'
은 옛말에 '문. 창문'과 같이 앞올 뜻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기능
면에서 보아 입과 대립되는 '항문', 그리고 항문과 깊은 연관을 보
이는 '똥' 이 뒤를 뜻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앞과
뒤는 방위 개념으로서 '님了곰'에 해당하는 말이다. '앞(남)/뒤
(북)'으로 쓰인 적도 있다[뒷심골]; (용가) 2-32), 뒤北((훈
몽), 증 4)].
배설물로서의 '뒤'와 관계되는 말의 겨레를 살펴보면 '뒤보다(똥
누는 일을 점잖게 일컫는 말), 뒤틀(매화틀 ; 방안의 변기통을 미화
한 말), 뒷간, 뒷거름(인분), 뒷구멍, 뒷물(항문올 씻는 일), 뒷물
대 야, 둥개다(쩔쩔매다 ; 똥을 으깨어 플려니까), 뒹구르다(똥에서
구르다)' 등과 같은 형태들이 있다.
먹는 것 못지않게 배설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흘러 가야
할 물이 흐르지 않고 괴어 있듯이 소화돼야 할 음식이 밥통에 그냥
있는 상태를 '체하다' 라고 한다. 앞과 뒤는 따로 중요한 몫을 차지
하는 것으로서 입이 받아들이는 기능을 제대로 하고 항문이 내보내
는 기능을 잘 하여야만 사람은 알찬 건강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6-7. 가루와 분절
체로 치는 가루는 칠수록 곱게 되나, 말은 입에서 입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거칠게 되기가 쉽다. 그래서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
은 할수록 거칠어진다'고 했던가.
가루는 특정한 사물이 분화하여 쪼개진 결과 생겨나는 것이다. 생
믈의 생성과정을 보면, 생물계의 진화가 그러하듯 단일에서 복합으
로 갈라져 나아간다.
중세어에서 가루는 'ㄱ ㄹ((원각), 상 2-2 의 154)' 였다. 이 형태에
터를 둔 낱말들이 여럿 확인된다. 'ㄱㄹ (용가), 2o))' 의 예를 들어 보
자. 물이 흐르면 그것을 경계로 하여 반드시 지역파 지역으로 나누
어진다. 선의든 악의든 간에 마을과 마을, 고을과 고 을, 부족과 부
족, 나라와 나라가 갈리어 금을 긋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
럼 마을이 이루어지는 요건 가운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물이
다. 강올 가운데로 하여 서로가 독림된 취락 흑은 부족을 이루어
감은, 강이 갈라짐 곧 가루의 속성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세 갈래 길에서 지역이 갈리듯이 모든 생물들은 갈라짐(분화)의
질서를 따라서 그 종족의 번영과 보존을 꾀한다. 쪼개어 갈라지는
곳에 생식의 기능이 부여됨은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가루'는 오늘날 방언에서 '가루. 갈기. 갈구'와 같은 변이형태
들로 나타난다 '가루(한반도 전역), 가리 (전북 부안. 고창. 정읍.
순창/경북 안동 의성 청송. 영덕. 영일. 포항. 영천. 군위. 칠
곡 대구), 갈기 (경남 고성/강왼 속초 양양), 갈구(강원 강릉
명주) 등이다. 가루는 '가락'으로도 그 모습을 갈래지어간다. 물
레로 자은 실을 감는 쇠꼬챙이를 가락이라고 하거니와 이것은 실을
갈라 가지런히 감음으로써 셈의 단위가 된다. 실 한 가락이 이어져
뽑아 나옴을 연상하여 노래의 어울림을 '가락'이라고 한다 가락국
수나 가락엿 또한 예서 크게 벗어나지 아니한다.
'가루'는 어말모음이 떨어져 '갈-' 계의 꼴로 나타나기도 한다
'갈다'는 굵은 곡식알을 잘게 쪼개어 놓는 동작을 말하며 기차 또
는 자동차를 옮겨 타는 일을 '갈다. 갈아타다' 라고 한다. 생각건대
차를 갈아탐은 새로운 방향으로 갈림, 즉 바로 앞서 풀이한 분화의
분기점울 전제로 한 것이 아닐까 ' 갈기갈기 (여러 가닥으로 찢어진
모양), 갈태'와 같은 형태도 가루의 특성을 바탕으로 분화된 꼴로
판단된다. 흔히 종류를 '갈래'로 말하는데, 갈라진 한 무리 혹은
그러한 흐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의 족속(族屬)을 '겨레'라고 하는바, 이는 갈라진 사람들의
무리 혹은 흐름을 이르는 말이다. 때로는 켤레'와 같이 짝을 드러
내가도 한다. 원몸에서 갈라져 나간 지체란 뜻이 이 말들 속에 담
겼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몸의 껴 드랑이'도 이러한 테두리에 들어
가는 말의 한 가족이라 하겠다.
7. 아이와 알
7-1. 아이와 알
'아이 자라 어른 된다'고 하거니와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는
건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불완전하고 보잘것없는 사물이 차츰
발달하여 기능면에서 더 완전에 가까운 것으로 되는 자연의 이치를
이르는 말이다.
어린 사람 또는 자기의 아들을 낮추어 부를 때 '아이' 라고 한다.
워즈워드 의 <무지개> 라는 시에 나온 '아이는 어른의 아
버지' 란 시구는 그 내용을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럴 듯함이 있다.
낡은 것은 점차 사라져 가고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이 자리를 잡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섭리라고 할 밖에. 육체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서적으로도 또한 그러하다 노인이 되면 되돌아을 길이
없는 젊은 날을 그리며 산다. 그래서 노인은 과거에 살고 젊은이는
미래에 산다는 건지.
젊은이는 '아이'로, 노인은 '어른'으로 대표하여 가리킬 수 있다.
아이들은 항상 어떤 일을 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틀
에 박혀 있지 많아 젊음 그 자체만으로도 노인들의 부러움을 사기
에 층분하다, 가능성은 씨앗에 비유되기도 하는바, 경우에 따라서
는 일이 이루어지는 계기 또는 실마리로 되풀어지기도 한다.
사람의 '아이' 에 상웅하는 말로 짐승의 새끼는 '아지 ((훈몽: 상
18)' 라고 이르는데, 이는 궁중에서 유모 또는 보모를 가리키는 말
로 쓰이기도 했다. '아이'는 증세어에서도 '아기 ((석보) 9-15)' 로
쓰이는데, '아 (훈몽), 하 12)' 가 그 전단계의 형태이다. 이는 다
시 '아시' 혹은 '앗'에서 그 비롯됨을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한
다. 지금도 방언에 따라서는 '아시당초, 아시 벌매기 (층청. 경상.
강원)'와 같은 형태가 쓰이는 것으로 그 근거를 잡아 보는 것이다.
음운변천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ㅅ> > o'의 과정을 생각하면 금
세 이해할 수 있다.
좀더 덧보태어 풀이하자면 '아 '의 단계에서 하나는 '아 >아
이 (>애)'의 과정을 거쳐 '아이' 가 되었으며, 다른 한 쭉으로
는 '아씨'에서 음운의 강화현상이 일어나 '아지' 또는 '아기'가 되
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아시/앗'은 근왼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낮'과 '아
침'의 부분에서 풀이한 바와 같이 '앗'은 시작'이요 '태동'의 뜻
으로 보인다. '앗'은 받침이 바뀌어 '앗'(신어) 4-12)' 으로도 드
러나며 다시 'ㄷ>ㄹ'의 변화를 따라서 '알'로 드러나기도 한다.
'알'은 생명이 촐발하는 공간이요 시간이라면, 보이지는 않으나
'알' 이 있게 한 내면의 과정 혹은 하나의 힘이 '얼' 이 아닌가 한다.
물론 모음의 교체를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앗'이
표면상에 드러난 것 또는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어시 (엇)' 는 '앗
(아시)'이 있게 하는 하나의 근거로 생각한다. 부모를 가리키는 중
세어의 '어 (석보)'는 바로 '어시 >어 >어 이 '의 증간단계라
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아시'를 부모의 몸을 이어받은 생명체로
가정할 수 있지 않올까.
'아이'는 어른들이 낳은 자식이지만 생명을 이어 가는 가장 기본
이 되는 단계이기도 하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니, 서로는 삶
을 이어 감에 있어 반드시 교체되어야 하는 위상에 속한다.
'앗_/엇-' 계와 '알-/얼-' 계에 해 당하는 형태들을 찾아 보자
먼저 '앗_' 계에 들어가는 말에는 '아스라이 (흐릿하고 아득하게 ; 태
초의 시간과 공간이 멀 듯, 인식하기 어려운 사실이나 사물을 이를
패), 아시 (아씨 ; 미흔녀로서 생산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 아
시빨래 (애벌빨래 ; 경상도 방언), 아예 (처음부터), 아우, 아수(아
우 ; 충청 경상 방언), 아이, 아이다(빼앗기다), 아이배다, 아저씨
(부모와 한 항렬의 남자. '앗>엊'의 과정을 거쳐, 부모를 뜻하는
.어시 '가 블어 만들어겼다), 아주먹이 (더 이상 손을 댈 필요가 없
이 깨끗한 쌀), 아주, 아직, 아침, 애 (아이), 애 갈이 (애 벌 갈이),
애기, 애호박, 애기플, 애늙은이 (나이는 어리면서 하는 짓이나 체
질이 아주 노숙한 사람), 앳되다(어려 보이다), 애띠다(앳되다 ; 층
청 방언), 애새끼, 애시 (당초). 애송이 (애티가 나는 사람), 애잇
기름(애벌기름), 애저녁 (초저녁), 애 젊다(아주 젊다)'와 같은 형태
들이 있다. 여기에서 '아이>애'의 과정을 거쳐 내 (아이)'가 접두
사로 쓰이면서 많은 파생어를 만들어 내는 일은 흥미롭다.
'엇_'계에 드는 말로는 어시('어이'의 함경도 방언), 어이 (짐승
의 어미), 어이없다(어처구니가 없다. 터무니가 없음을 일컫는
말), 어이아들[母子], 어이 딸[母女]'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엇'
은 접두사로 쓰이어 서로 어긋나게 되어가는 뜻의 파생어들을 만들
어 가는 경우가 많다. 그 의미로 보아 아이에서 부모는, 부모에서
아이로 넘어 오는 것과 달리 거슬러 을라 가야 하는 속성을 드러내
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대'의 의미로 쓰이는 '엇'이 붙어 이루
어지는 말에는 '엇가게 (한 쪽으로 어슷하게 기울여 덮은 헛가게의
한 가지), 엇가다(언행이 서로 엇나가다), 엇갈리다(서로 만나지
못하다), 엇결 (나무의 결이 비꼬인 것), 엇노리 (에누리 ; 받을 갔보
다 더 많이 부르는 일), 엇대다(어긋나게 대다), 엇된놈(좀 건방진
놈), 엇뜨다(빗보다 ;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잘못 보다), 엇먹다(사
리에 맞지 않게 비꼬다), 엇물리다, 엇셈 (서로 맞물리는 셈), 엇비
슷하다(거의 같다-부모가 같으니까), 엇섞 다(서로 어긋매껴 섞다) '
와 같은 형태가 있다. 그러니까 '엇'이 '거꾸로'의 뜻으로 쓰이는
것은 자손의 대에서 부모의 대로 이르는 억행의 순서이고, '앗'이
'앞으로 나아감'을 뜻하는 것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순행
의 순서가 전제되기 때 문이다.
'앗다'는 '나아가는'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며, '빼앗음'의 뜻으
로 쓰이기도 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있던 뒤의 것을 부정해
야 한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도 사람은 그 부모의 소질이나 능력
혹은 재산을 물려받는다. 아이는 어머니의 몸 안에서 가장 소중한
영양을 공급받아 살아 간다. 제 흘로 영양을 섭취하기까지는 어머
니의 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얻어내야 하는 필연성이 있으므로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어머니는 의무적으로 아이에게 필요한
일들을 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형태로 보아 '앗/ㅇ/알'은 '엇/얻/얼'과 대립되는 짜임새를
갖는다. 척기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알/얼'이다. 앞에서 살
펴 보았듯이 '앗'은 어린이요 '엇'은 부모이다. 따라서 '알/얼'이
그에 상응하는 계열이라면, 결국 알은 얼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부모가 만나 아이를 낳고 기르듯이 알은 얼에서 말미암는다. 남
녀가 서로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중세에는 '얼다(두해)'라고
하였다. 부모들이 가정을 이루고 결합함으로써 그 아이들이 태어난
다. 일반적으로는 '씨알(씨앗)'의 '씨' 는 아버지의 혈통으로, '알'
은 어머니의 혈통으로 말하지만, 필자는 얼을 부모로 알을 자식으
로 보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알-'계에는 '알, 알나리 (어린 사람이 벼슬한 경우에 놀리는 말),
알도요(작은 물새떼), 알뚝배기 (작은 뚝배기), 알땅(비바람을 막올
수 없는 땅) ' 등의 형태가 있고 '얼-'계에는 '얼갈이 (겨울에 대강
논밭을 갈아 엎어 놓는 일), 얼다, 얼녹이다. 얼어붙다(어우러져
붙다)' 등이 있다.
부모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듯이 얼'에서 '알'이 비롯된다고 생각
해 볼 수 있다. '얼다'는 옛말에서 물이 어는 것과 남녀가 성적인
결합을 하는 것을 일렀다. 결국 부모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애
기로 굳어져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그럴 듯한 논리
정연함이 있다.
7-2. 앎과 진통
'아는 놈 붙들어 매듯한다'고 한다. 죄를 다스리는 사람이 죄인
을 맬 패 죄지은 사람을 잘 아는 경우에 아무래도 사정을 보아 주
어 아프지 않게 맬 수 있다는 애기다. 어쨌든 물건을 느슨하게 잡
아맴을 비유하고 있다.
어떤 사물이나 사실에 대하여 직간접으로 인식하거나 인정하는 일
을 '안다'고 한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한다. 무슨 일에 대한 정
확한 이해가 없이는 어느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성취를 하기란 어
렵다.
안다고 하는 건 적어도 어떤 사실을 플기 위한 비롯함이요 출발
점이 된다. 할 일의 앞뒤를 을바르게 정할 수 있고 잘되고 못된 점
을 가려 낼 수 있으려면 '알아야' 한다. 한편 모르면 마치 눈먼 사
람이 길을 가듯 그 방향과 상태를 바르게 파악하기가 어려우며 환
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된다. 육체를 밝히는 등불이 눈
이듯이 앎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밝게 하는 햇불이며 신호등인 것
이다.
'알다'는 명사 '알'에 접미사 '-다'가 들어붙어 이루어진 동사로
보인다. '아이'에 대한 말의 뿌리를 플이하는 부분에서 살펴보았듯
이 '알'은 '앗~ㅇ>알'과 같은 과정을 통하여 낱말이 분화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알'이 개체 생명의 비 롯됨이요 효시이면서 동시에
'얼 (엇/얻)' 에서 얻어진 소산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알다'차 사물인식의 과정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사물을 대하여 인식함에 있어 우리 사람들은 눈, 입, 코, 귀, 피부
등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보고, 먹고, 냄새를 맡고, 듣고, 점촉하여
사물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즉 우리의 감각기관이
사물에 관한 동작이나 상태를 판단한 결과로부터 우리는 어떤 수준
의 앎에 이르게 된다. 한마디로 우리의 감각기관과 인식하고자 하
는 사물과의 상호작용을 '얼(바탕)'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 '앎'에
이르는 일련의 의식현상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뭘 안다고 하는 것은 얼에서 알로 이어지는 순행적인 흐
름이며, 나아감인 것이다. 이를테면 '얻다'의 경우, 중세어에서의
뜻은 '찾다, 결혼하다, 갖게 되다'의 의미로 쓰였는바, 감각과 사
물 상호간의 교호작용이 가져다 준 것이 앎이라는 또 하나의 개연
성올 더해 준다.
더 확고하고 실증할 수 있는 지식의 탐구와 연마를 위하여, 이른
바 진리탐구를 향하는 학문의 영역은 꾸준히 깊어지고 넓어져 왔으
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으로 짐작된다. 낡은 지식은 새로운 지식으
로 대신하게 되며 그릇된 지식은 바른 지식에 의하여 고쳐지지 않
으면 안 된다.
언제나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는 하나의 명제는 아는 것에 만족
하지 않고 이에 걸맞은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
여는 올바른 정신 곧 얼이 바르게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얼이 가
버린 사람을 '얼간이'라고 하거니와 얼이 빠지고 건강하지 못한 사
람에게서 그럴 듯한 인식 (앎)이나 행동을 기대할 수는 없다. 정신
병을 밞고 있는 사람에베 산황에 알맞으며 모두에게 공감이 될 만
한 일을 수행할 것을 기대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
의 밀알이 떨어져 엄청난 열매를 거두게 하듯이 진정한 하나의 앎
(지식)은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사회를, 인간을. 문명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 지식이 바로 하나의 큰
결과를 낳게 하는 말미암음이 되기 때문이다.
중세어에서 보면 '까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로 'ㅇ(금삼))'
이라는 형태가 있다. 이 말도 '앗/ㅇ/ㅇ/알'의 계열에 드는 것
으로서 알은 하나의 큰 까닭이 되는 것이다. 한 개의 성냥불이 온
산을 불사르듯이 바른 지식 (앎)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을 수도 있다.
원자병기를 지키는 한 병사의 오판이 제동을 받지 않고 원자폭탄을
상는 행위를 가걱을 경우 인류의 파멸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말미암
음을 생각해 볼 때 그럴 듯함이 있지 않은가.
'지식인의 윤리'라는 말이 어떨지는 모르갰으나. 참으로 지적인
산업이나 할동을 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큰 것은, 그들의 판단이나
지식이 우리 인류가 앞날을 살아감에 커다란 교두보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알다'와 관계되는 말로서는 앞의 '아이'에서 알아 븐 것은 제외
하고, '아랑곳(남의 일에 나서서 알려고 들거나 참견하는 짓), 아
랑곳없다, 아리송하다(비슷한 것이 뒤섞여 있어서 무엇인지 또렷이
알아 내피 어렵다), 알쏭달쫑(생각이 헛갈리어 분간할 수 있을 듯
하면서도 얼른 분간아 안 되는 모양), 알음알이 (꾀바른 수단), 알
음알음(서로 아는 관계)'` 과 같은 형태들이 있다.
7-3. 어둠과 얼
어두운 밤중에는 아무리 증요한 눈끔적이기를 한다고 해도 정확
하게 그 뜻을 전달할 길이 없으니, 쏠데가 없다. 이를 일러서 속담
으로는 '어둔 밤에 눈끔적이기' 라고 한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흑
은 남이 알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은 인정을 받지 못함을 암시하고
있다.
밝은 빛이 없으므로 환하지 않고, 눈으로 보는 힘이 약하거나 밝
지 못한 상태를 '어둡다' 고 한다. 우리 주변에는 참으로 어두운 일
이나 장소가 많이 있다. 때로는 '어두움' 을 인간이 불행해지는 까
닭으로 이르기도 한다. 개인의 탓으로 일어나는 불행도 있지만, 전
반적인 사회구조의 모순과 엇갈림으로 인어나는 불행들이 많이 있
음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더러 역사의 새 벽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새벽에는 어둠과는 대립되는 아침의 밝음이 서리기 시
작하므로 그러한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닐까.
흔히 어둠과 밝음, 밤과 아침은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이와
관련하여 어둠이란 말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낱말겨레란 관
점에서 살펴 보고자 한다. 밤이 가면 낮이 오듯이 어둠이 물러가면
밝음 곧 아침의 빛이 찾아 온다. 시간이나 상태의 이어짐으로 보아
어두운 밤은 아침의 터전이 되는 것이니, 둘의 관계는 대립관계이
면서도 연접현상이 아닌가 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아침'은 '앗(자식)/ㅇ/알'의 낱말겨레
에서 비롯한 분화형태로 보인다. 다시 말헤서 '앗' 에서 어말자음이
터짐갈이소리 (파찰음)가 되면서 '앗>ㅇ(ㅇ)'이 된 것으로 풀이된
다. 한편 '앗/ㅇ/알'의 계열이 모음이 바뀌면 '엇 (부모)/얻/얼'
의 계열이 만들어진다. 이 '얻'과 상관되는 형태가 곧 '어둡다
로 보면 될 것이다. 오늘날의 '어둡다'는 중세어에서는 '어듭다((용
가) 30)' 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 풀어 보면 '얻 十으十 ㅂ다>어둡
다'로 그 과정이 설명된다. 결국 '얻'은 '엇'에서 비롯하였으며
'앗/ㅇ/알'과 대렵되는 것으로 보인다.
'엇/얻/얼' 로 드러나는 어둠의 뜻이 담긴 낱말겨레에는 어떤
형태들이 있을까. 먼저 '엇-'계의 형태를 보면, 어스름(저녁이나
새벽의 어스레한 빛 또는 그때), 어스레하다, 어스름 달밤, 어슬
어슬(날이 어두워지거나 밝아지는 모양), 어슴막(초저녁의 경상도
방언), 어슴푸레하다, 어슷어슷(여럿이 조금씩 다 기울어진 모양)
어슷썰기 (한 쪽으로 비슷하게 써는 일), 어슷하다(물건의 모양이
한 쪽으로 비뚤어져 았다), 어슬렁거리다(몸이 크고 다리가 긴 사
람이나 짐승이 천천히 걸어가는 동작)'와 같은 낱말들이 있다.
'얻-'계에 드는 말로는 '어두컴컴하다, 어둑새벽(여명), 어둑어둑
하다(물건이 보일락 말락 보이다 ; 어둡-'의 비읍(ㅂ)이 자음교체
를 하여 기역(ㄱ)으로 바뀐 결과임), 어둠침침하다, 어득하다(>아
득하다), 어뜩하다(갑자기 어지럽다), 얻다(어떤 원인으로 결과를
가져 오는 동작)'와 같은 형태가 있다.
'얼-' 계에 드는 말에는 '어른, 어른거리다(그림자가 회미하게 움
직이다), 어름대다 (우물쭈물 명확하지 않게 움직이다), 어름적거리
다(느릿느릿하다), 어리다(나이가 젊어 모든 게 똑똑하지 않다), 어
리대다(공연스레 어정거리다), 어리둥절하다(정신이 얼떨떨하다),
어리뜩하다(말이나 행동이 똑똑하지 못하다), 어리마리 (잠이 든 둥
만 등한 모양), 어리벙벙하다(갈피를 잡을 수 없다), 어리석다(어
리숭하다(>아리송하다 ; 보기에 어리석은 듯하다), 어리치다(너무
심한 자극으로 정신이 흐릿해지다), 어린이, 어림없다(짐작할 수
없다), 어릿거리다(말과 행동이 생기가 없이 움직이다)'와 같은 형
태가 있다.
'얻/엇/얼'의 낱말 겨레에서 우리의 인식작용과 증요한 관계를
드러낸 것은 '얼' 이 아닌가 한다. 인간의 모든 인식작용과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그 바탕이 바로 얼이다. 얼은 다른 사물이나 사실과
관계하여 어떤 앎에 이르도록 한다. 개인이나 겨레나 온 인류로
보아서도 생산적이고 참된 얼이 있는 데에서 올바른 일이 만들어짐
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배달의 겨레는 흥익인간의 정신을 살려
인간이 인간다운 우리의 누리를 빚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겨레
가 하나 되기를 지향해야 한다. 얼이 알의 심층구조라면 알은 얼의
표면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얼은 알과 함께 모든 일을 처리
함에 값진 말미암음이 된다.
7-4. 젊은이와 짧음
'젊은이의 망녕은 몽둥이로 고친다'고 한다. 아직 망녕이 들 때
가 안 된 사람이 정신없이 함부로 굴 때는 매로라도 다스려야 한다
는 교훈적인 내용을 이르고 있다.
나이가 비교적 어리고 혈기가 왕성한 상태를 '젊다'고 하는데,
혈기가 왕성하고 나이가 젊기 때문에 짧은 점도 많으나, 하는 일이
진취적이다. 살아 온 시간보다는 살아 갈 시간이 횔씬 길어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 힘이나 그 패기에서라면 나이 든 사람은 비길
바가 못 된다. 청춘을 인생의 황금기로 비유한 이도 있듯이, 정신
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층분히 예찬의 대상이 된다.
젊음의 가능성에 적절한 자극과 반응을 꾀하는 조건화 과정을 거
쳐, 더 성숙한 인간으로 이끌어 가는 문화유산의 전달작업이 교육
이다. 가르칠 교(敎)를 글자의 짜임으로 보더라도 그러하다. 이끌
어 감과 매로 침의 뜻을 합한 것이니, 여기서 매는 적절한
자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직접 매로 다스리는 것도
물론 포함된다.
젊음은 계절로는 이제 막 싹이 돋아 오는 첫봄이요 꽃으로 이르
자면 봉오리가 맺혀 삶의 열기를 불사르는 개화기에 비교할 수 있
다. 그러기에 노인은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그리워한다. 비록 시행
착오가 많지만 언제나 넘치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옛말에 '젊다'는 '져므니 ((초두해) 25-29)' 혹은 '졈다(능엄) 4-
64), 'ㅈ다(역해보), 19)' 로 쓰이었다. 이남덕이 지적한(1985) 바와
마찬가지로 필자도 '젊다' 는 '뎌르다(短 ; 법화, 2-167)' 에서 비롯
한 것으로 본다. 그는 '젊다'가 발달하여 온 과정을 '뎌 ㄹ(르)다>
져르다>졈다>젊다'로 상정한 바 있거니와, '뎌ㄹ(르)-+오十ㅁ>
뎔옴>덞 (ㄷ)'의 과정이 앞선 것으로 보인다. 구개음화가 이루어진
젓은 근대국어에 와서의 일임을 미루어 보아, '덞>젊>젊'으로 바
뀌어 갔다고 풀이하는 것이 좋을 듯하기 때문이다. '뎌ㄹ(르)->
ㄷ-' 이 된 것은 마치 'ㅅ로-十오十ㅁ>ㅅ->삶-' 이 된 것과 같이,
용언의 어간에 명사형 어미 (ㅁ)가 붙어 어간을 이룬 형태로 생각한
다. 요컨대 '젊다'는 '뎌 ㄹ(르)다>덞다(덤다)>ㅈ다>젊다'와 같
은 과정을 거쳐 오늘에까지 쓰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뎌ㄹ(르)-' 의 꼴은 어디에서 비롯하고 그 뜻은 무엇인지
살펴 보기로 한다. '뎌ㄹ(르)다'가 '뎔다((법화), l-190)' 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으로 보아 '뎌ㄹ(르)-' 의 모음이 줄어 '뎔-' 이 되
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일본어에서 절을 '데라'
라고 하거니와 범어의 '데라 ' 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한다.
결국 '뎌ㄹ(르)' 는 사찰을 뜻하는 범어의 '데라'에서 빌려쓴 말로
보인다.
그런데 '절'과 '짧다' 그리고 '젊다'는 어떤 의미의 유연성
울 보이는가. 세속적으로 보면 절에서 이루어지는 수도생활이란 금
욕이며 절제요 삼가하는 것이다. 단(短)은 긴 것[長]의 반대요, 짧
게 자르는 것 (斷)이라고 본다. 필요한 것을 더 적게 그리고 작게
줄이는 속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금욕의 수도생활이 이루어지는
'절'과 '짧다' 사이에 서로 관련성이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럼 '젊다'와의 상관성은 어떠한가. 앞 부분에서도 플이한 바와
같이 늙은 사람에 비하면 젊은 사람은 살아 온 날이 짧으며, 세상
욕심에 그래도 덜 찌들었으니, 금욕적이라고 할 것은 없으나 순수
하며 영흔의 맑음을 가지려는 지향이 강하다. 그들은 이상에 치우
친 나머지 갈팡질팡할 때가 많이 있다. 비약이 될지 모르겠으나 '짧
다'고 하는 속성은 결국 순수함이요, 현실보다는 미래지향을 갖고
있다.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동식물의 싹이나 새끼를 보아
도 그러하다. 우선 그 크기에 있어 짧고 경험 또한 넉넉하지 못하
지 않은가.
모음의 바뀜을 따라서 '뎌ㄹ(르)-' 는 '댜ㄹ(르)-' 로 바뀌어 쓰이
었으며, 뒤로 가면서 '쟈르-(ㅈ-)>자르-(짧-)' 의 과정을 거친다.
현대국어에서 보아 '뎌ㄹ(르)'에서 파생되어 온 형태들은 '젊-/
절-/자르-/짧-/덜-' 과 같은 계열의 말들로 무리를 지어 나아간
다. 이제 그 보기를 들어 보자.
'젊-'계에 드는 말로는 '젊다, 젊으신네 (젊은이의 존칭), 젊은것
(젊은이)'과 같은 형태가 있다. '절-'계에 드는 것으로는 '절, 절
다(걸음을 절뚝거리며 걷다, 한 쪽 다리가 더 짧으니까.), 절뚝거
리다, 절뚝발이, 절렁태 (절름발이의 핑안도 방언), 절렁거리다, 절
름거리다, 절버덩거리다(절름거리며 걷는 사람의 걸음을 의성화한
소리), 절써덕거리다, 절쑥거리다, 절음나다(짐승이 다리 저는 병
이 나다)' 등의 꼴이 있다.
'자르-' 계에는 '자르다, 자르르(자르는 데에서 느끼는 감정의 표
시), 자리자리하다, 잘가닥(자물쇠 같은 것이 잠기거나 열리는 소
리), 잘각거리다, 잘강거리다, 잘그다(자르다), 잘그랑(>짤그랑>
찰그락), 잘라 먹다, 잘록하다, 잘름거리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아울러 '잘되다(사물 또는 신분이나 처신이 좋게 되는 것)' 의 경우
도 절과 상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절에서 불공을 어떻게 드리느
냐에 따라서 생과 사를 뛰어넘어 소원을 성취하기도, 이루지 못하
기도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
이 가능한 것이라면, '잘(옳고 바르게)'도 절의 뜻에서 비롯되었다
고 하겠다. 절에서 이르고 가르치는 내용은 선한 것과 바른 것을
중심으로 하니까.
'짧-'계에 드는 형태로는 '짧다, 짤따랗다, 짧아지다, 짧은작(길
이가 짧은 화살)' 등이 있고, '덜-'계에 드는 말로서는 '덜다(적게
하다), 덜되다(하는 짓이나 생각이 모자라고 온당하지 못하다), 덜
렁거리다(덤벙거리다 ; 단점의 하나일 수 있음), 덜름하다(아렛도리
가 드러나도록 옷의 길이가 짧다), 덜리다(덜어짐을 당하다), 덜
(한도에 다 차지 못함을 드러냄)'과 같은 형태들이 있다.'
덧붙여 두고 싶은 것은, 같은 말무리에 드는 것으로 '절하다'가
있는데, 절에서 부처님께 예배를 을리듯이 웃어른에게 인사하는 것
을 이르는 말이다. 앞에서 설명한 문화적인 전통이 우리 말에 되비
쳐 살아 남아 쓰이고 있다 하겠다.
8. 힘과 해
8-1. 입과 잎
윗사람이 시키는 일에 기민하고 영리하게 행동하는 것을 '입에
혀 같다'고 한다. 입이 있는 곳에는 혀가 있어 입 본래의 구실을
해 준다. '병은 입으로 들어가고 화는 입에서 나온다
는 <청장판전서>의 기록이 있다. 입을 통하여 먹은 음식으로
병도 얻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말을 잘못하여 화를 입는 일이 있으
니 말을 삼가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입은 동물이 몸 밖으로부티 음식을 받아들여, 음식이 밥통에 들
어가 소화가 잘 되도록 씹어서 침올 섞어 보내 주는 일을 한다. 또
혀와 입술은 하고 싶은 행동을 대신하여 말을 하는 구실도 한다.
입은 한반도로 이르자면 부산항이나 인천항에 해당하는 첫 관문이
요 어귀가 되는 것이다. 성문이 튼튼해야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를
잘할 수 있듯 입이 제 구실을 잘해야 몸 전체를 잘 유지할 수 있다.
때에 따라서 아직 어떤 일올 처리할 만큼 준비와 능력이 없는 사람
올 일컬어 '이도 아니 나서 황밤을 먹는다'고 한다. 여하튼 입은
목숨을 부지하는 제일의 관문이며 ㅁ거지인 셈이다.
옛말에 문어귀나 동네입구를 '잎(용가) 1-11)' 이라고도 하였는
데, 앞에서 플이한 신체부분의 하나로서의 '입' 과 같은 성질을 띠
고 있다. 동네나 어떤 집을 들어가려면 문이나 동네 어귀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입은 나무의 '잎'과는 어떠한 관련을 가지는가. 옛말에
잎은 '닙(해요), 113), 닢(용가) 84)' 이었다. 해 내는 구실을 보
면 '잎'은 동물의 입과 크게 보아 같은 맥락에 놓인다. 잎은 식물
의 영양기관의 하나로서 호흡작용과 탄소 동화 작용을 한다. 좀더
자세히 풀어 보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필요없는
산소를 내어 놓음과 동시에 뿌리로부터 빨아들인 영양소를 결합하
는 일을 해 낸다. 잎은 식믈의 관문이니, 그 관문으로 들어간 공기
증의 상당량이 식물의 밥통이라고 할 만한 뿌리와의 상호작용을 따
라서, 식물이 필요로 하는 물질을 만들어 낸다. 이 관문으로 들어
가야 할 것이 들어가고 나와야 할 것이 나오지 않으면 큰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다.
입과 관련한 말의 무리에는 '입거옷, 입ㄱ (토), 입길 (흉보
는 놀림), 입내쟁이 (흉내를 내는 사람), 입노릇(식사하는 것의 비
어), 입덧, 입뜨다{입이 무겁다)' 등이 있다.
닙 (닢)'과 관련한 중세어 자료를 보연 다옴과 같다.
'닙 (닢)'의 낱맡겨레(중세어)
1) '닙-'계- 닙 <보권문> 32), 닙니피 <월석> 8-12), 닙다<월인>
155; 옷을 입음이 나무가 잎을 두른 것과도 같으니까), 닙담ㅂ
(청 구), 대 132), 닙성 (계축) 등.
2) '입-'계-입 ((용가) 88), 입거ㅇ (초두해) 8-19). 입ㄱ(훈해),
입내 <월석> 17-52), 입ㄷ다(식성이 좋음 ; (동문) 상 62). 입뎌
르다((동문) 상 62), 입비우다(말못하다 ;(능엄) 7-43), 입시울
(석보), 9-29). 입아괴 (훈몽) 상 26), 입웃거엄 ((무원)
1-30), 입졍 (입버릇, (역해보) 57), 입ㅊ말(역해보) 56), 입일흠
(말다툼 ; (한청), 66 a), ㅇ거웃(입수염 ; <초두해> 8-55), ㅇ김
(구급방), 상 10) 등.
위의 보기로 보아 '닢/잎'의 낱말겨레로 '입'이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동물의 '닢' 은 '입 ' 이며, 식물의 '입' 은 '닢' 이 되는
셈으로 오늘에 와서는 서로 다르게 쓰인다. 이들은 무엇인가 필요
한 음식을 받아들이거나 필요한 햇빛을 받아들여 그 생명을 이어나
가는 역할을 하는 기관들이다. 이러한 입 (잎)이 없다고 가정할 때
우리의 삶은 그 의미를 잃고 만다.
입의 가장 큰 기능은 먹고 숨쉬는 것으로, 때로는 상대방을 공격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다음으로 큰 것은 말하는 기능이다. 폐
에서 나오는 날숨[呼氣]을 이용하여 소리와 뜻을 결합시켜 사람의
샘각을 전달한다. 분절작용에 따라서 자음과 모음을 이합집산시킨
다. 분절작용은 사람의 머리 속에서 다시 신경을 타고 입술로부터
다시 공기를 울림으로써 분명한 말소리로 상대방에게 알려지게 된
다.
매일같이 우리가 하는 말은 '전달성'이라는 값진 기능을 갖는다.
같은 소리이면서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것으로 '말[馬]' 이 있다(경상
도 방언에서는 타는 '말'은 소리가 더 높고, 입으로 하는 '말'은
낮고 길게 난다).
타는 '말'도 짐이나 사람을 나름으로써 옮겨 주는 구실을 하며,
입으로 하는 '말'도 이 사람의 생각을 저 사람에게로 옮긴다. 한
말, 두 말 할 래의 '말'도 수량을 헤아리는 단위로서 곡식을 담아
옮기는 일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위의 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한다. 말만 잘하면 어려운
일도 풀어 헤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심지어 모든 종
교는 신의 언어까지도 사람의 말로 뒤치어 경전으로 만들어 내니
실로 사람을 언어적인 존재 homo loquens 라고 할 만하지 많은가.
말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낱말로는 '말 내다, 말눈치(말 속에서의
암시), 말대답, 말더듬이 (평안도에서는 말더투워리), 말동무, 말 되
다, 말맛(말의 느낌). 말머리, 말문, 말밑, 말본, 말본새 (말투),
말소리, 말씀, 말썽, 말언(未言 ;보잘것없는 말), 말일키다' 등이
있다.
'말[語]'과 관계 있는 중세어로는 '말((능엄) 1-l7), 말거동(신
어) 9-l4), 말 라-(몽어유해보) l4), 말겯(말투 ((신어) 9-17),
말겯고다(말다툼하다 ; (능엄) 4-8), 말구듸ㅎ다((훈몽) 하 28), 말
더두어리다((동문) 하 8), 말디다(말 마치다, (송강) 1-l0), 말ㅅ
((원각) 서 11), 말ㅈ이 (잔말하는이 ; (훈몽) 하 29)' 등인데 매우
생산적으로 파생되어 쓰이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말을 아주 조심하여 실수가 없도록 함을 언어교
육 제일의 대강으로 삼아 왔다. 하지만 진정으로 전달해야 할 올바
른 말은 해야 하며, 그에 따른 행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8-2. 맛과 멋
맛도 좋으려니와 값이 싸서 마음껏 음식을 만들어 먹는 갈치자반
을 일러 '맛 좋고 값싼 갈치자반' 이라고 한다: 일석이조와 같이 한
가지 일로 두 가지가 이로움을 지적하고 있다.
물건을 혀에 댈 적에 느끼는 감각 또는 사물에 대한 재미있는 느
낌을 '맛'이라고 한다. 많은 음식은 그 맛을 따라서 사람들의 기호
가 결정되며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집에서 만드는 음식은 물론이
고 맛을 겨냥한 식품산업이 얼마나 많은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음식은 가장 소중한 것일진대 맛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된
다. '
맛이란 말은 모음교체를 따라 '멋' 으로 드러난다. '멋' 은 세련되
고 풍채 있는 몸매, 아주 퐁치 있는 맛, 온갖 사물의 진짜 맛' 등
으로 그 개념이 정의된다.
음식은 맛이 있다고 하지 멋이 있다고는 아니한다. 생활의 비중
으로 보아 맛이 제일차적인 음식의 가치라면, 멋은 미적 또는 수식
의 가치라고 하겠다. 우선 식생활이 해결될 때, 다른 욕구에 대한
층족을 찾게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분히 심리적인 존재인 까
닭으로 멋 또한 결코 소흘히 여길 수 없다.
중세국어를 되돌아 보면 '맛'은 음식을 뜻하기도 하며, 음식에
대한 감각적인 면올 드러내기도 하였다. 음식의 뜻올 중심으로 하
는 '맛' 과 관련하여 발달한 말에는 '마시다(물이나 술 같은 것올
목구멍으로 넘기다), 맛나다(맛이 좋다), 맛난이 (음식의 맛을 돋우
기 위하여 치는 장물), 맛들다(익어서 맛이 좋게 되다), 맛들이다
(맛이 들게 하다), 맛맛으로(마음이 당기는 대로), 맛바르다(맛있
게 먹는 음식이 양에 차기도 전에 다 없어지다), 맛보다, 맛부리다
(싱겁게 굴다), 맛있다, 맛장수(싱거운 사람), 맛피우다(맛없이 굴
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맛' 이 음식과 관련한 느낌으로 쓰임은, 음식은 반드시 입으
로 들어가 혀로써 그 맛을 바로 알게 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멋' 과 관련하여 쓰이는 말로는 '멋갈 없다(멋없다), 멋거리 (멋
이 있는 모양), 멋대로, 멋들어지다, 멋쟁이, 멋적다(동작이나 모
양이 격에 맞지 아니하다), 멋질리다(아주 멋들어진 기상을 지니
다), 멋모르다(아무것도 모르다), 머쓱하다(멋없이 키가 커서 싱거
워 보이다)'와 같은 꼴이 있다.
중세어에서 '맛'과 관련한 낱말의 겨레로는 '맛((석보) 9-19),
맛갓다(마땅하다 ; 맛이 입에 맞으니까 ; ((역해보) 33), 맛갓(음식,
맛 ; (소해) 6-71)' 등이 있다. 현대어와 비교하면 낱말의 겨레가
풍부하지 못하다.
맛이 육신의 양식과 관련한 물질적인 것이라면, 멋은 심미적, 정
신적인 풍치와 관련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음성모음과 양성모음이,
같은 말의 뜻이나 느낌을 달리하듯이, '맛'과 '멋'은 언어감각에
따른 분화어로 보인다. 진정한 음식의 맛은, 음식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절제하는 멋을 바탕으로 하는 고마움의 생활에서 비롯하는
것이리라.
무엇인가를 먹고 마시는 일은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활동이다
소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일만 계속 시켰을 경우 그 결과는 간단하
다(요즘에는 일소도 없지만). 그 소는 밥통이 텅텅 비어, 경련을
일으키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된 다. 하여간 먹는 일은 더없이 중
요하며 이른바 본능 중의 본능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
보전과 이어지니까. 그래서일까 ? 먹는 일에 대한 속담이나 성어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드러난다.
'먹기는 파발(수송원)이 먹고 뛰기는 역마가 뛴다(-엉뚱한 사람
의 횡재), 먹는 개도 아니 때린다(-식사는 편안하게 할 일), 먹는
떡에도 실 박으라고 학다(,-*같은 값이면 모양도 중시), 먹은 죄는
없단다(-배고파서 흠쳐먹은 죄의 가벼움), 먹을 콩으로 알고 덤빈
다(-먹지 못할 일에는 무관심이 상책), 먹지도 못하는 제사에 절
만 죽도록 한다(-소득도 없이 수고만 함), 먹지 못할 풀이 오월에
겨우 나온다(~되지 못한 것이 저레는 퍽 한다), 먹지 않는 종 투
기 없는 아내(-이치에 어그러진 일을 바라지 말라)'와 같은 꿰를
들 수 있다
이들 성어만큼이나 '먹다'는 그 뜻이 여러 가지이다. 웬만한 일
들은 음식을 먹는 페 비유하여 그 쓰임새를 터잡아 놓은 것이다.
물론 가장 알맹이가 되는 뜻은 '음식 을 씹어서 삼키다' 이다. 이 밖
에 '술이나 믈을 마시다, 담배를 피우다, 가로채어 차리다, 상금을
타다, 꾸지람이나 욕을 듣다, 뜻을 품다, 겁을 느끼다, 나이가 들
다. 더위 등의 병에 걸리다, 남으로 하여금 비방을 당하게 하다,
귀로 소리를 듣지 못하다, 칼 따위가 잘 들다, 맷돌이 잘 갈리다.
화장품 등이 잘 배어들다, 돈어 들다' 등의 아주 다양한 쓰임을 알
수 있다.
생각하건대 '먹다'는 '막다'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막다'
는 '막(腹) +-다>막다'로 모음교체를 함으로써 넉 다'가 되었다
삶의 연속적인 유지를 위하여 몰동 에너지의 끊임을 막아 주는 활
동이 곧 '먹다'인 것이다. 배고픔을 막아 주는 것이 음식을 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발장은 빵 한 개 때문에 열아홉 해의 윽살이를
하였다, 살아 있는 생물은 먹어야 하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행
여 그 '막(隱)'은 우리 몸 속에 있는 밥통의 '막'이 아닌지 ? 그
막'올 채우기 위해, 공허한 영혼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먹을 밖
에.....
8-3. 거짓과 참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하여도 곧이듣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콩
으로 메주를 만드는 것같이 명백한 사실도 말하는 사람이 워낙 거
짓말을 잘하여 도저히 믿을 수 었는 경우를 이르고 있다.
거짓말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해서는 안 될 거짓말이 있고 참말
같은 거짓말도 있다. 또한 예술적인 빛깔을 더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소설과 같은 그럴싸한 거짓말도 있다 뒤의 경우는 보다 적극적으
로 하나의 이상과 현실에 대한 문제를 풀어 보기 위한 가상의 공간
이요 시간이다.
어느 나라의 말이든지 그 나라 말의 말본에는 가정법이란 게 있
기 마련이다. 표현상의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거짓스런 상황을 설
정하여 놓고 여러 가지 조건화의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제기한 거
짓이 과연 합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를 찾아 헤매는 가운데, 놀
라운 진리가 발견되고 인간생활에 전혀 새로운 삶의 장이 마련되는
일이 때때로 종종 있어 왔다. 그것이 학문이요 예술이요 종교가 아
닌가 한다. 하지만 악의를 가지고 흑은 악의는 없더라도 거짓말의
탓으로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다면 참말로 불행한 일이 된다.
'것짓'은 껍질을 뜻하는 '거죽[皮]'에서 온 말이다. 옛말에 겉
부분을 이르는 형태로 '것 (皮 ; ((초두해), l5-5), ㄱ ((월석) 1-42)'
이 쓰이었는바, 다시 '거줏>거짓'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속과
겉이 다른 것을 '거짓'이라 하고 그런 말을 '거짓말'이라고 한다.
아니면 속이 텅텅 비어 헛된 말을 '거짓말'이라고도 한다. 증세어
자료에서의 분포는 아주 폭이 넓다. 거ㅈ(거짓 (유합), 하 18), 거
적눈(한청 153 b), 거줏 ((월석) 2-71), 거줏말((석보), 6-10)/거
출뫼 (荒山-실속이 없고 엉성하니까 ; ((용가) 7-8), 거ㅊ다((소해),
6-20) 등.
한펀 그 반대가 되는 것이 참이요, 그런 말이 참말이 되는 것이
다. 속이 비어 있지 않고 속과 겉이 잘 들어맞는 사실을 '참' 이라
고 하는 것이다. 속 따로 겉 따로일 때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
가 ? '참(참말)'은 이지러진 데 없이 아주 완전한 상태를 가리키는
'차다[滿]'에서 비롯한다. 차면 넘친다고 한다. 너무 분수에 맞지
않으면 도리어 불완전하게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어떰게 생각해 보면 참과 거짓은 속과 겉, 내용과 형식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루도 속이 차지 않으면 제 모양을 찾지 못하고
바로 설 수 없다. 속과 겉은 떼어 놓아서는 안 될 것이어서 따로 떼
어 놓으면 그 순간부터 참뜻을 잃고 만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에
게 혼히 속임을 당한다. 생각건대 '속다'도 허위의 거죽을 속으로
안다는 말이 아닌가 한다.
8-4. 머리와 마립간(麻立干)
'머리카락 뒤에서 숨바꼭질한다'는 속담이 있다. 머리카락 뒤에
숨어서 어찌 안 보이기를 바랄까. 얕은 꾀로 사람을 속이려고 하나
곧 들통이 나는 것을 이른다.
머리는 사람의 신체 부위로 보아서 가장 높은 데 있기도 하거니
와 사람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생물학적으로도 모태 속에
서 태아가 머리부분부터 성장한다는 보고가 있다. 피부의 감각에 따
른 촉각만 제외한다면 시각, 청각, 미각, 후각이 모두 머리 부위에
달려 있다. 감각기관은 물론 언어기능이 뇌의 우쪽 반면에서 이루
어지는 것은 유의해야 할 일이다.
요컨대 머리는 사람의 몸을 움직이는 의사결정의 총지휘부이다.
지휘부가 바로 서면 나머지 지체들은 탈없이 환경에 적웅하게 되고
부분들이 맡은 바 구실을 해 내는 것이다.
옛말을 더듬어 보면 '머리 ((용가) 95)' 는 '마리 ((석보) 6-44)' 로
도 쓰인다. 일종의 모음교체에 다른 형태의 바뀜이라고 하겠다. '마
리'는 '머리털'의 뜻으로 쓰이다가 '머리'에 와서 머리[頭]를 가리
키게 되 었다. 오늘에 와서는 '마리' 가 수량의 단위를 나타내는 의
존명사로 쓰이게 되었는바, 기본적인 속성은 한가지로 보인다. 즉
윗부분이면서 가장 높은 것,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치환할 수 있으
니까.
'마리'가 '말'로 줄어들어서 '크다. 좋다'의 뜻을 드러내는 접두
사로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때 임금의 칭호로 불리던 '말한
'이 그러하며 현대어에 와서 '말개미, 말거머리, 말곰, 말
나리, 말냉이, 말다래, 말매미, 말박(큰 바가지), 말벌, 말선두리
(물방개)' 등이 바로 그러한 보기들이다.
'머리'와 '마리'를 하나의 뜻에서 분화되어 나온 것으로 가정할
수 있을 때 '멀리'와 '멀다'도 하나의 장으로 묶일 가능성이 있다.
'마리/머리'는 높이 있는 공간상의 특징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새
가 높이 날아오르면 넓게 바라다 볼 수 았는 것처럼 낮은 장소에서
보다는 높은 장소에서 더 많이 더욱 널리 살필 수 있게 된다. 결국
'멀리'와 '멀다'도 높은 데서 보는 그러한 공간지각을 바탕으로 해
서 분화되어 나간 형태가 아닌가 한다.
'마루'를 생각해 보자. 산마루, 고갯마루 흑은 대청마루와 같은
형태들이 그러한 테두리에 드는 것들로, 좀더 높은 곳이라는 의미
를 갖는다.
중세어 '마리 (머리)-' 를 중십으로 한 낱말의 겨레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마리-/머리-'의 낱말겨레
1) '마리_'계-마리 ((석보), 6-44), 마리ㅅ골((한청), 150 b), 마리
다((한청), 145 d), 말 더휘가((유씨명) 말마얌이 (유씨명))
등.
2) '머리-'계-머리 (頭, 遠 ; (석보), 6-32, (석보) 6-3), 머리맡((월
석), 10-10), 머리ㅁ놈((훈몽) 상 29), 머리보다(멀리보다, ((유합),
하 32), 머리지어 ((한중록) p. 450), 머리크락((가례해), 5-34), 머
리털 ((소해), 3-lO), 머리터럭 ((능엄) 10-82), 머리톄 ((번소), 1O-
27), 머리ㄷ골 ((구황간), 6-44), 머리뎡바기 ((월석), 2-41), 머릿
조조리 ((월석), 2-41) 등.
보기에서와 같이 '머리-' 계의 말이 더 넓은 분포를 보이고, 특히
'마리-'계는 접두사로서의 발달이 눈에 뛴다. 이는 다시 현대어에
와서 '크다, 으뜸'의 의미를 더하는 접사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오늘날 방언에서는 '대갈-'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방언분포를 살펴 보면, 머리 (한반도 전역), 대가리 (경기, 강원
충청, 전북 대부분 지역/전남 영광 장성 담양, 곡성, 구례, 광
주, 광산, 함펑, 목포, 무안, 영암, 나주, 고흥, 장흥 해남, 완
도/경북 울진, 봉화, 영주, 영양, 청송, 영덕, 안동, 상주, 선산
금릉, 연천, 경주, 월성, 대구 경산 청도 성주 고령/경남 함
천, 밀양, 울주, 울산, 하동, 진주, 진양, 마산, 동래, 부산), 대
갈(함남 신고산, 안변, 덕원, 문천, 영흥, 정평, 함흥, 오로 신
흥, 홍원), 데구리 (제주 전역), 대갈통(전남 지 역/경북 김천, 금
릉/경남 함안, 산청, 진주, 진양, 사천), 대 갈뺑이 (전북 김제 정
읍/경남 합천, 밀양, 진주, 진양), 대가빼기 (전북 김제, 정읍了경
남 함천, 밀양, 진주, 진양, 통영 마산 거제 남해), 대그삥이
(경남 함안, 고성, 마산), 대가빠리 (경북 김천, 금릉, 영일, 칠곡),
대갱이 (전남 광주, 광양, 함평,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진도, 완
도/제주 전역), 대 망생 이 (제주 전역), 골(함남 신고산, 안변, 덕
원, 문천, 영홍, 정평, 함흥, 오로, 신흥, 홍원) 등과 같다. 중세어
에서는 '대가리 ((월석), 23-94)' 가 본시 '껍질'의 뜻으로 쓰이었다.
그러니까 머리는 얼굴을 포함한 상체부위지만, 대가리는 머리의 겉
부분 곧 껍질인 셈이다. 오늘날에는 흔동하여 쓰는 말이 되었다.
흔히 '머리'에 대한 비속어 정도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8-5. 팔과 발
'팔이 들이굽지 내굽나 ? ' 생김새로 보아 팔은 안쪽으로 들이굽
게 되어 있다. 자신과 자기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이익이 되게 하고
정이 쏠리는 것은 모두에게 공통된 마음, 인지상정이라 할 것이다.
머리에서 결정된 판단의 대부분은 팔의 움직임을 따라서 그 목적
이 이 루어진다. 원시적인 농경과 목축에서 시작하여 고도한 문화형
태에 이르는 인간의 활동 중 팔이 관여하지 많는 것이라곤 아무 것
도 없다. 우리의 마음을 파고드는 감명 깊은 음악과 그림이 그러하
고 문학작품이 그렇다. 팔은 사람이 곧게 뒤로 기어다닐 때의 부담
에서 벗어나 공간적인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옛말을 보면 지금의 팔은 ' ㅂ ((능엄), 8-1O4)' 이었고 오늘의 발
[足]은 그대로 '발-((능엄경), 1-68)' 이었다. 모음의 음상만 다를
뿐 거의 같은 형태로 보인다. 그러니까 몸의 윗부분에 있는 'ㅂ'은
팔이 되었고 아랫부분의 '발'은 그대로 발이 된 셈이다. 오늘의
'팔'이 된 'ㅂ'은 히읗곡용(ㅎ)의 특징을 보이는 말이었는데 합쳐
져서 'ㅂ~ㅍ>팔'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ㅂ'은
'발'과 표기가 다른데 무슨 근거로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느냐고 반
문할 여지가 있다. 옛말에서 오늘의 '밟다'에 해당하는 말이 'ㅂ다
(踏 ; ((월석), 21-1O2)' 였으니, 자연 그 둘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발과 팔은 몸에 달려 있는 지체로서 다 함께
땅을 기어다니고 나무를 기어 오르는가 하면 물 속에서도 앞과 뒤
의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보아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
팔에 관련하여 '수완이 있다, 솜씨가 좋다'는 말을 한다. 수완이
나 솜씨는 사람의 재능을 손이나 팔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순간순
간 일어나는 상황에 알맞게 큰 무리 없이 적응해 가거나, 같은 일
을 했는데 다른 사람보다 횔씬 보기 뭏고 효과 있게 하는 경우에
수완이 있고 솜씨가 좋다고 한다. '솜씨'는 손의 쓰임 곧 손놀림을
의미하는데 어떤 일을 해 놓은 결과를 일컫기도 한다.
그럼 'ㅂ/발'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어의 낱말겨레를 알아 보도
록 한다.
'ㅂ'과 '발' 의 낱말겨레(중세어)
1) 'ㅂ-'계 -ㅂ (ㅎ)((능엄) 8-1O4), ㅂ덩(팔짱 ; (금삼), 3-4), ㅂ독
(팔꿈치 ; (중두해) 16-24), ㅂ쇠(팔쇠 ; (초두해) 20-9), ㅂ다(踏
; (월석) 13-58) 등.
2) '발-'계-발(능엄), 1-68), 발 휘 (발더퀴 ; (역해보) 51), 발
돕(발톱 (박해), 중 상 47), 발뒤측((동문) 상 16), 발등거리 (倒
掛 ; (물보), 발목(역해) 상 36), 발바당((역해보) 32), 발ㅂ다
(발을 베다 ;(중두해), 1-52), 발ㅆ개 (한청), 332 b), 발자곡(발
자국 ; ((역해보) 22), 발자최 ((월 인) 4), 발ㅊ((가례해), 5-16), 발
헤엄 ((유씨명) 5), ㅂ귀머리 (복사뼈 ; (구급간) 1 -44), ㅂ둥(발등
; (월석) 2-4O) 등.
3) 'ㅍ-'계 ㅍ((훈몽) 상 26), ㅍ거리 ((한청) 17 d), ㅍ구미 ((왜
해) 상 17), ㅍㄷ ((어록), 39), ㅍ독((사성), 상 61), ㅍㅁㅎ다 ((한
청) 208 d), ㅍ목((역해), 상 29), ㅍ버히옷((물보), ㅍ쇠 ((초박
해), 상 20), ㅍ지((훈몽) 중 28) 등.
'ㅂ~ㅍ'이 공존하다가 'ㅂ~발'이 음운론적으로 층돌하는 까닭
에 아예 'ㅂ>ㅍ>팔'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본시 언어의 공
시태란 순수히 공시적인 모양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통시태란
전단계의 시대에 쓰이던 언어들이 쌓인 것임을 생각해 볼 때, 공시
태는 통시태의 복합형태라고 할 수 있다 헌재 쓰이고 있는 '팔`의
방언들을 보면 잘에 접사들이 붙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파리 (함
북 경원, 경흥), 팔때기 (한반도 대부분 지역), 팔띠기 (경북 경주,
칠곡. 월성), 팔팅이 (경북 안동. 의성) 등. 이에 비하여 '발[足]'
은 접사의 달라붙음이 활발하지 않다. 발보다 팔이 더 많이 쓰인다
는 점이 반영된 것일까.
8-6. 힘과 해
어떤 물체에 작용하는 두 힘이 맞서 결국은 아무런 힘도 작용하
지 않은 것과 같게 되는 수가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물체가 '힘
의 균형상태'에 놓여 있다고 한다.
가만히 있는 물체에 어떤 운동을 일으키거나 움직이고 있는 믈체
의 속도를 변화시키거나 정지시키는 데 작용하는 기운을 '힘'으로
정의한다. 힘은 사람이나 동물이 스스로 움직이거나 다른 것을 움
직이게 하는 데도 작용한다. 우리가 살아 가는 과정이나 위대한 대
자연의 움직임은 결국 나름대로의 에너지 곧 힘에 따라서 좌우된다.
에르곤이라 하여 정지상태에 있는 힘을, 에네르기아
라고 하여 운동상태에 있는 힘을 표현하거니와, 만믈은 어떤 상태
에 있건 힘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이런 힘을 알아차림에 있어 그 근원은 어디에서부
터 비롯하는 것으로 보았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해의 속성에서
힘의 원천이 촐발한 것으로 본다. 우리 조상들은 우리가 밥을 먹고
사는 일, 아궁이에 불이 타오르는 것, 꽃이 계절을 피어서는 지는
것, 밤과 낮이 서로 바뀌어 하루 또는 한 달, 그리고 한 해를 이루
게 하는 모든 힘이 해를 중심으로 하는 데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보
았던 것이다.
지금도 지역에 따라서는 '힘'의 방언형이 '힘 -/심-' 계로 나뉘어
쓰이고 있다. '힘' 은 경기 포천/충남 논산/전북 익산, 이리, 진
안/경북 봉화, 영주, 영덕, 안동, 영천, 경산, 경주/황해 장연/
함북 성진, 청진, 회령, 종성, 경흥/평남 전역에서, '심 '은 경기,
강원, 층청 전지역/황해 해주, 옹진, 은율, 장연/함경 대부분 지
역에서 쓰인다.
'심 '의 형태를 분석해 보면 '시-+ㅁ>심'으로 풀 수 있다. 여기
서 '시다' 는 힘이 강하거나 마음이 굳고 세력이 큼을 나타내는 '세
다[强]가 단모음화하여 쓰이는 방언형(핑안, 강원 등)이다. 세
다'는 중세국어에서는 '셰다'로 나타난다. 이남덕이 지적한(1985)
바와 같이, '셰-' 의 '셰 '는 '닷쇄, 엿쇄 '의 '-쇄'와 같은 계통의
말이며, '한 살, 두 살'의 '살'이 중세어의 '설'과 같은 형태이며
동일한 의미 해 [年]'를 뜻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그는 특히 '새
~쇄'가 넘나듦을 지적한다. 음운의 변천으로 볼 때 시옷(ㅅ)은 히
읗(ㅎ)으로 넘나들거나 음가가 소멸되거나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를
보인다. 간추려 말하자면 '해 (ㅎ)'는 한편으로 '새 ~쇄 (셰>세 ~
셔'의 꼴로 살아남기도 하고 해 -' 계열로 바뀌거나 아예 '-웨 ~애'
계열로 변해 버렸다는 말이다.
태양의 속성은, 고도의 열과 빛을 수반함으로써 태 양계에 존재하
는 모든 항성을 움직여 간다는 데에 있다. 거기다가 그 엄청난 무
게 곧 중력에 따르는 힘은 우리 조상들에게 크나큰 경이로움과 숭
배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켰을 법하다.
이같이 태양을 숭배하는 사상은 인류의 어떤 사회에서도 그 혼적
이 엿보인다. 중국의 '왕(王)'이 그러하며 이집트의 '파라오
, 신라의 '박혁거세 (朴赫居世)'가 그러한 경우이다. 고대 글
자의 변천과정을 보면 '왕(王)'은 불이 타오름을 상징하였다. '파
라오'는 '큰 집'이라는 뜻으로 왕은 태양의 신인 '라' 의 아들이
며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박혁거세는 '태양의 밝
음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자'라고 규정되어 있 다.
모든 자연현상의 기본원리 가운데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
은 힘의 원리라고 샘각한다. 힘에는 여러 가지의 갈래가 있다. 소
유의 힘, 지식의 힘, 인격의 힘, 신앙의 힘, 무게의 힘 등 실로 많
은 힘이 있다. 힘이 있는 쭉은 없는 쪽을 지배하며, 힘이 없는 쪽
은 그 다스림을 받게 된다. 개인적으로든지 민족적으로든지 간에
우리들은 힘을 길러야 한다.
'힘 '과 관련된 말로는 '심-/힘-'계의 형태가 있다. '심-'계에
드는 것으로는 '심들다, 심다(풀, 나무 등을 땅에 파묻어 나름대로
힘껏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동작), 심기다'와 같은 형태가 있고,
'힘-'계에는 '힘껏, 힘내다, 힘닿다, 힘들이다, 힘부치다, 힘쓰다.
힘없다'와 같은 꼴들이 있다.
9. 겨레와 분화
9-1. 사회와 제의(祭儀)
세상은 아무래도 혼자 살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일찍이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했고, 겨레란 말이 암시하여 주듯이 우리는
운명공동체가 되어 삶의 누리를 함께 살고 있다.
옛날의 제도를 보더라도 소박한 의미에서 사회(社會)는 동네 부
락의 사람들이 사일(社 日)에 모이던 모임을 뜻한다. 스물다섯 집
을 일조(一組)로 하여 이를 일사(一社)로 하였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사회의 개념과는 조금 달라 토지신에 대한 제사를 모시
기 위하썩 가졌던 모임이었다. 그러니까 사회는 신에게 제사함으로
써 부락과 종족의 번영을 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공동의 목표로
추구되었다. 따라서 같은 겨레끼리 모이어 이루는 집단을 사회의
보편적인 개넘으로 쓰게 되었다. 사회의 공동 목표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사회는 아주 많은 갈래로 나누어진다. 이를테면 겨레는 혈
연 또는 지연과 같이 생활에 근거를 둔 자연발생적인 공동사회
이고, 노동조합이나 회사는 자유 의지도 개개인의 셈
속을 따라서 결합된 이익사회 이다
사회란 개념은 원초적으로 개인을 포함한 부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토지신. 곡식신에게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모인 공익성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다. 글자의 `짜임을 보면 '사(社)'는, 흙을 수
북히 쌓아을려 소나무 따위를 심는 것(土)에 신을 모시는 제단(示)
이 합하여 이루어진 글자이다. 말하자면 토지의 신체 (神體)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社)는 '땅귀신, 제사 지냄, 단체, 사일
등의 뜻으로 새겨진다. 여기 사일(社 日)이란 입춘과 입추 뒤
의 다섯번째 무일 (戊 日)을 말하는데, 입춘의 제사를 춘사(春社),
입추의 것을 추사(秋社)라고 한다. 춘사에는 대략 곡식의 순조로운
자람을 빌고, 추사에는 곡식의 수확을 감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까 부족이 모이는 가장 큰 목적은 부족의 번영을 위하여 신에게 제
사를 드려 빌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그 곳에는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밖에. 그
리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으며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여 더 잘 살 수 있는 모듬살이 곧 사회생활을 꾀하였을 것
이다.
국가를 예전에는 '사직 (社稷)'이라고 하였거니와 '사(社)'는 토
지의 주신이며 '직'은 오곡(五穀)을 다스리는 신이었다. 예로
부터 천자와 제후는 반드시 사직의 제단을 세우고 나라의 흥망성쇠
를 함께 하였으니 사직은 곧 국가란 개념이 이루어지게 되 었다. 사
직단의 위치를 보면 왕궁의 오른편에 두었으며 종묘(宗廟)는 왼편
에 세워서 제사를 모셨다. 남좌여우(男左女右)라 하여 왼편을 더욱
높은 방위로 보았지만 그 이전의 시대에는 바른편 곧 여성을 더 높
이 생각하였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한데, 이는 모계사회의 질서를
반영하는 화석 조각과도 같은 것이다. 덧붙여 둘 것은 '사(社)'는
토지신이어서 땅의 신인 기(祝)와 같은 말이며, 이는 하늘의 신 (神)
과 서로 대립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이 복잡한 사회도 제사를 모시기 위한 모
임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신올 모시기
위한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점차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
는 개념으로 바뀌어 나아간 것이다. 사회와 관계되는 말에는 참으
로 많은 형태가 있다.
몇 가지의 예를 들어 보이면 다음과 같다. '사회개량주의, 사회
경제, 사회계약설, 사회과학, 사회관, 사회관계론, 사회학, 사회구
조, 사회규범, 사회극, 사회동학(일정한 사회체계 안의 여러 부문의
시간적, 계속적인 공존관계의 변화를 대상으로 하는 이론), 사회문
제, 사회물리학, 사회위압(개인에 대한 사회의 강제)' 등이 있다
'사회 경제 (社會經料)'란 말이 있는바, 사회와 경제는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본디 경제란 말은 '경세제민 (經世濟民)'
올 줄여서 쓰는 말로, 모두가 함께 공생공존한다는 개념이 전제된
것이다. 사회 또한 부족 모두의 번영을 위하여 이룩된 모임임을 고
려해 보면 사회와 경제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와 같다고나 할는지
앞에서 '사(社)' 를 수북히 쌓아 놓은 흙더미 위에 소나무 같은 것
올 심는 것(土)에 신을 모시는 제단(示)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플이하였는데, 오늘날에도 무속신앙에서는 대나무와 같은 높이 솟
은 장대를 사용한다. 종교는 서로 다르지만 서구에서 들어온 기독
교의 교회들이 높고 뾰족한 탑에 십자가를 세우고 종을 달아 울리
는 것을 보면, 더 높은 곳에 제단을 마련하려는 문화적인 관습은
거의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인위적인 것을 떠나 자연물로 본다면
역시 가장 큰 제단은 높은 산의 마루에 세운 것이리라. 구월산의
단이 그러하고 마니산의 신단이 그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으로 보인다.
모두가 함께 잘 살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빌었던 처음의 그 마
음으로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 나아간다면, 그곳에 땅의 축복이
꽃처럼 피어 오르고 하늘의 감화가 땅 끝까지 열매를 맺게 될 것
이다.
9-2. 딸과 따름
'딸이 셋이면 문 열어 놓고 잔다'하거니와 딸을 여윌 때 혼수 비
용이 많이 들어감과, 옛부터 딸이 물건을 가져 가는 풍습이 묵인되
어 온 데서 비롯한 속담이다. 하나도 제대로 출가시키자면 어려운
데 하믈며 셋은 말하면 잔소리가 되는 것이다. 집안의 살림이 너무
줄어들다 보니까 도적이 들어와도 가져 갈 게 없을 정도로 딸이 많
으면 어렵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자로 태어난 자식을 딸이라고 한다. 딸을 낳으면 기와를 회롱
하는 경사로, 아들을 낳으면 구슬을 회롱하는 경사로 좋아하였다.
말인즉슨 아들을 낳음에 비하여 딸을 얻음은 그 기쁨이 떨어진다고
하겠다. 심지어 산모조차 딸을 낳으면 운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남존여비 (男尊女卑)'에서 비롯된 남아선호의식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를 살피건대 여성을 더 높이는 이른바 모계사회가 있
었다. 지금도 성씨 뒤에 '_씨 (氏)'를 붙이는데, 이 씨 '가 바로 자
시 곧 여성의 성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가부장의 부계사회
로 넘어오면서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예컨대 고
구려의 서옥(塔屋)제도만 해도 그러하다. 장가를 든다고 할 때, 여
기 장가(丈家)는 장인의 집 곧 아내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서 처가
에 들어 사윗감으로서의 시험을 거쳐 통과하면 혼인을 맺고 다시
아이를 낳아 신랑의 집으로 되돌아오는 제도인 것이다.
혼인 (婚姻) 이라고 하거니와 (석보상절)에 보면 사위 쪽에서 며느
리 쪽을 보고 혼(婚)이라고 하며, 며느리 쪽에서 사위 쪽을 인(姻)
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혼(婚)은 '女(여 인)'와 '昏(해질 녁)'이
더하여 이루어진 말로 혼기가 찬 여인이 흔례를 치를 때 해가 질
무렵부터 흔례식이 시작된 데서 비롯한 말이다 밤은 방위로는 별
과 물의 신이 다스리는 북방의 공간을, 성 (性)으로는 여성을, 그리
고 생산을 상징한다.
한편 인(姻)은 여인[女]이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말미암음
이며 의지하게 되는 것을 이른다. 요컨대 인은 잠자
리 모양(ㅁ)에 누운 남자(大)의 모양을 더하여 남자의 집을 뜻한다
고 볼 수 있다. 결국 여성은 남편의 집으로 가서 남편에게 의지하
여 살게 된다. 삼종지도(三從之道)라 하여 여성은 모름지기 어려서
는 친정의 부모를 따르고, 흔인하여서는 남편을 따르고, 나이가 들
어서는 자식을 따르는 도리를 이른다. 여성의 일생을 이런 점에서
보면 순종의 질서 곧 따름의 원리로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특
히 이조시대에는 여성에게는 성씨가 있을 뿐 정당한 이름이 없었다.
물론 벼슬길에는 나아갈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상당한 기록
들에는 '-씨 부인' 흑은 '-집' 등으로 적히기 일쑤다.
옛말에서 보면 딸을 ' ((능엄), 6-33), ((속삼강), 효 116)' 로
썼거니와 여기서 이들 말이 람스테트의 설명대로 보달(寶捨)에서
초성의 모음이 떨어져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딸'이 갖는 따름의 논리가 바탕이 되어 '따르다'가 만들어져 쓰
인 것으로 보인다. '따르다'는 여러 가지 뜻으로 드러난다. '남의
뒤를 좇다, 남이 하는 일을 본떠서 하다, 어린 아이가 자기에게 친
절한 사람을 종아하다, 남을 그리워하며 붙좇다, 나란히 가다, 복
종하다'와 같은 쓰임은 모두가 따름의 논리로 풀이할 수 있다. 동
음이의어로서 '따르다'는 '물이나 기름 같은 액상의 물질을 기울
여서 붓다'로도 풀이하지만 이 말 또한 근본에 있어 다를 바가 없
다. 물과 같은 액체는 높은 데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액체를 기울여 붓는 '따르다'도 위치의 다름을 따라서 이 루어지는
말이라 할 것이다.
이 '딸'과 관련하여 이 루어지는 말에는 '따라가다, 따라다니다,
따라서, 따라오다, 따라지 (노름판에서 '한 끗' ; 다른 패에 따라다니
니까), 따라지 목숨(남에게 딸려서 자유 없이 사는 목숨), 따름수
(함수), 따리 (키의 아랫부분에 달린 넓적한 나무), 따리 (아첨하는
말). 따리붙이다, 따리꾼(따리를 잘 붙이는 사람)'과 같은 형태들
이 있다.
'딸'의 방언 분포를 보면, '따님 (경북 울진/층북 음성/전북 남
원, 진안, 장계/강원 횡성), 딸(한반도 전역), 딸아(경북 포항,
영천/경남 양산), 딸내미 (층북 단양, 영동/강원 호산, 춘성), 딸
따니 (경남 진주, 사천), ㄸ(제주)' 등으로 쓰인다.
여성에게만 요구되었던 순종의 질서는 옛말이 되었다고 할 것이
다. 따라가야 할 것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겨레가, 직
장이, 가정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떤 부름을 주었을 때, 우리는
모든 명예를 걸고 사람답게 사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칸트가 이미 지적하였거니와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가장 큰 명
령이요 사명은 양심의 명 령인 것 이다. 양심을 따라서 우리의 모듬
살이가 이어져 갈 때, 이 누리에 자유와 평등이 지배하는 낙원이
실현될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면서 살아가기 위하여는 때로
자신을 버리고 큰 옳음과 참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따름의 질서는 주종(主從)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신과,
신하는 군왕과, 자식은 부모와, 여성은 남성과 주종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 생각건대 '종'은 '종인(從人)'이라
고도 하는 '종자(從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종자(從
者)는 주인(主人)에 대림되는 말이다. 원래 한자의 새김으로 보면
'주(主)'는 임금이요 '종(從)'은 신하에 해당한다. 이러한 주종관
계는 격을 달리하며 계 속돼, 신하가 다시 주인이 되고 그를 좇는
이가 다시 종자가 된다.
글자의 발달이란 측면에서 보면 '主'는 등불(?)에 촛대(王)를
더한 것으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뜻한다. 한편 '종(從)'은 사람
뒤에 사람(人人)이 따라 가는 것을 바탕으로 하며, 발자국의 모
양을 더하여 나아감을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종(從) '
은 사람이 잇따라 나아감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사를 지내는
주인을 도와 이런저런 일로 따라다니는 사람이라는 원초적인 뜻을
드러낸다.
'종{從)' 은 집안을 얘기할 때 같은 항렬에 딸린 친척의 계열을
드러내기도 한다. '종조부모, 종숙(아버지의 사촌형제), 종형제 (사
촌인 형과 아우), 종자(조카)' 등이 그러한 쓰임이며, 신분의 계급
을 말할 때 종일품에서 종구품에 이르는 품계 또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주'와 '종'은 인간관계로는 주종의 관계로, 말의 성분으로는 주
술의 관계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 세상에서 누가 종속관계에 들기
를 원할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독립관계로서 인간관계를 맺기 원
한다. 그러나 주종이란 상대적인 개념일 뿐 절대적인 개념은 아니
다. 먹이사슬이 순환의 흐름을 보이듯 우리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
를 필요로 하는 상호 보완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뒤엉켜 살아가
는 것이다. 종속관계를 보완관계로 개선하려는 의식을 가질 때 우
리는 서로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
종은 일반적으로 주인을 섬긴다. 정치.경제적으로 직접적인 주
종의 관계가 아니라면 서로를 섬기는 마음으로 일을 처리함이 옳을
것 같다. 성현의 말씀대로 섬기는 자가 다스리니까.
9-3. 며느리와 이바지
속담에 며느리가 미우면 손자까지 밉다'는 말이 있다. 미운 며
느리는 물론이려니와 그가 낳은 자식까지 밉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
떤 한 사람이 밉게 되면 그에 딸린 사람까지도 미웁게 보이는 수가
있다. 며느리와 시 어머니의 관계는 넉넉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오
거니와 반대로 시 아버지는 며느리를 귀여워하는 것이 보통이다.
며느리는 방언에 따라서 '메누리(전라, 경 남), 매느리 (전남 완
도), 메느리 (전남 영양, 강진, 보성, 구례 곡성 여수 순천, 광
양, 진상, 영광, 함평,해남/펑북 희천/평남 대동, 개 천), 미누
리 (전남 구례, 여수), 미너리 (전남 화순)' 등으로 쓰인다.
'메누리'에서 '메'는 '뫼 ((소해) (악장))' 와 같은 말로 '진지,
산' 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 며느리는 '메ㄴ리' 였으니 '메'
는 '메누리'의 '메'와 같이 '음식' 을 뜻하는 말이고, 'ㄴ리 '는 ' ㄴ
르_十이'로 '나르는 사람'을 뜻하는바, 곧 조상의 산소에 제사음식
을 나르기도 하고 살아 있는 부모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음식 이바
지를 도맡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닐까. 옛날에는 일손이 부족
함은 물론이고, 조상을 섬기는 일이 지금보다 더욱 극진했으므로 거
기에 따르는 뒤치다꺼리를 며느리에게 시켰던 것이다. 이를테면 부
모의 상을 당하면 빠지지 말고 상청에 음식을 바쳐야 하고 초하루
삭망으로 성묘를 해야 하는 등 참으로 힘드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며느리는 아이를 낳아 기르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
를이 없다. '민며느리'라는 말이 그것을 잘 대변하여 준다. '짐승
을 기르고 아이를 기르는 자부(豚養繪婦 ; ((역해), /童養鴻婦 ; ((한
청)' 로서 기록될 정도였으니 알 만하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생활의 가장 바탕(밑)이 되는 모든 과정을 겪는 사람이 '민 며느리'
였던 것이다. 여기서 '민' 은 '밑' 이 다음의 말(며느리) 앞에서 소
리가 바젼 것으로 생각하면 될 일이다.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사람이 장점파 단점을 잘 아는 법이다. 정
에서 노염이 난다고 시 어머니와 가장 가까이 지내야 되는 며느리가
시어머니 눈에 미운 경우가 혼하다. 마침내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밉게 보아, 좋은 것도 홈을 잡을 때를
일러 '며느리가 미우면 발 뒤축이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 고 한다.
전통적으로 며느리는 시부모를 모시기에 밤낮없이 애쏜다. '모시
다'는 윗사람의 가까이에서 조심하여 받들거나 살피는 것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유교의 가르침에는 '살아 있는 부모를 모시는 것이나
돌아가신 부모를 섬기는 것은 같은 것이다' 고 규정하
기도 한다. 인간관계로 보아 부모에 버금하여 모시는 대상으로는
오늘날에는 직장 상사, 옛 봉건시대에는 군주(임금)가 해당될 것
이다.
옛말에 '모시다'는 '뫼시다((월석), 8-94)' 로 나타난다. '뫼시다'
에서 어간모음 'ㅣ'가 떨어져 오늘날의 '모시다'가 된 것으로 보인
다 '뫼시다'의 기본형은 '뫼다(倍 ; (석보), 11-4)' 이다. 이 말은
명사 '뫼'에 접미사 '-다'가 붙어 이루어진 것인바, '뫼'는 어른들
에게 드리는 식사를 높이거나, '산'을 뜻하기
도 한다. 이밖에 '뫼'는 사람의 무덤 곧 묘(舊)를 가리키기도 한다.
'추원보본(追遠報本)'이라고 하여 대대로 옛조상 모시기를 잘하
면 복을 받는다고 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부모가 이 세상을 뜨면
혼히 명당이 어더인가를 골라 극진히 모시기를 힘썼다. 설날, 한가
위와 같은 명절이나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 또는 조상의 생일에 차
례를 모시는 것과, 돌아가신 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 등이 그러한
보기라고 하겠다.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산 부모를 모시듯이 제상 위에 올리는
밥 곧 '메'를 올린다. '메'는 복모음이기 때문에, 옛말에는 '머이'
로 읽었다. 결국 네'와 '뫼'는 똑같이 조상을 섬기는 데에 요구되
는 음식으로부터 나온 말이라 할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상제는 산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삼 년
동안 살아 계실 때처럼 음식[메 (뫼)]을 올린다. 보통 사람 아무나
그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여서 여막살이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
들이 전해 온다. 자칫 잘못되면 부모 잃고 집안 망하고 살 길이 막
연해지는 것이다.
'뫼'가 나타내는 중심된 의미는 역시 '산(山)'이라고 할 젓이다.
우리는 산에서 먹올 것을 얻어 내기도 하며, 죽어서는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그런가 하면 산은 푸른 마음의 고향으로서 언제나 우리
들 가까이에 있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뫼' 에서 '메`가 나온
것이 아닐까.
'뫼'는 쓰이는 지역에 따라서 '메-, 매 -, 뫼-, 미-'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메-'는 경남, 경북 지 역에서, '매-'는 '매아리' 등의
헝태로 충북 연풍 등지에서, '뫼-'는 '뫼아리'의 형태로 전북 무
주, 층남 조치원 등지에서, 미 -'는 '미아리' 등의 형태로 경북 경
주. 영천. 예천/경남 산청 등지에서 확인된다
무속에서 이르기를 모든 큰 산에는 그 산을 주재하는 신령이 있
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깊고 그윽한 산골짜기에는 신 당이 있
었다. 그러한 신앙의 공간이 뒤에 오면 절로 바뀌게 된다. 산에는
산신 (山神)이 있으며 물에는 수신 (水神)이 있다고 믿었기에 큰 산
은 늘 숭배의 대상이 되 었다. 그러니 산을 잘 떠받들 수밖에 없었
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바로 자신들의 조상 또한 산에 모시게
되니 어찌 산 곧 '뫼' 를 멀리할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을 간추리면, 이른바 '뫼시기 ' 는 산신숭배에서 시작
되 었으며, 이는 다시 산신과 더불어 돌아간 조상을 포함한 윗사람
을 높이어 대접하는 개념으로 발전해 나아갔다는 것이다. 산신숭배
에서 인간숭배로, 그 질서가 달라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뫼'와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말에는 '뫼나리, 묍쌀[밭에서 나는
쌀 ; ((훈몽)), 뫼쓰다(묏자리를 잡아 송장을 묻다), 뭣골(산골)
모시다, 묏대추, 묏돼지, 뭣밭(산밭), 뭣봉오리 (산봉우리), 묏자
리 등이 있다.
산맥은 저 푸른 바다에 출렁이는 파도처럼 높고 낮은 산들로써
그 나름의 리듬을 드러낸다. 그 골짜기 골짜기마다 하늘의 별만큼
이나 많은 목숨살이의 묻거지가 이루어지 나니, 진실로 신령스러운
삶과 죽음이 상서로운 안개처럼 산의 주변을 맴돌아 나아간다.
백두와 한라에 이르는 그 줄기에 우리의 할아버지들의 뼈가 묻히
고, 무지개는 그 위를 덮으며, 꽃은 피어서 질 것이니, 바로 우리
겨레의 삶의 뿌리가 내릴 곳이다. 우리 모두는 아름답고 진실한 마
음의 뫼봉우리를 그리워하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9-4. 가랑잎파 갈라짐
바짝 마른 잎에 불이 붙으면 걷잡기가 매우 어렵다. 성질이 아주
급하고 아량이 적은 사람을 드러내 '가랑잎에 불 붙기' 라고 한다.
밑동이 둘 혹은 셋으로 갈라진 무우를 가랑무우라 하거니와 가랑
잎 또한 본래의 푸른 활엽수의 잎이 저절로 떨어진 뒤에 말라 버린
잎을 뜻한다. 시대와 장소가 바뀌면 문화의 형태와 생리가 변하기
마련이다. 더러는 서로 한 몸으로 미분화 상태에 있다가 갈라져 나
아가며, 더러는 아예 형태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무엇인가 다른 문
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좋은 뜻으로 보아 갈라짐은 개척이요 선의의 경쟁을 의미하지만,
반대의 뜻으로 보면 배신이요 패망이요 어두운 사망의 그림자를 드
리우는 실마리라 할 것이다.
말을 사람들의 정신할동으로 말미암은 결과라고 정의할 때, 언어
또한 문화의 분화과정파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가랑잎'도 본래의 잎에서 갈라져 나감으로써 생겨난 분화의 형
태라고 볼 수 있다. '가랑'은 독립되어 쓰이지 않는 의존적인 형
식으로, '가랑니 (이의 새끼), 가랑머리 (두 가닥으로 땋아 늘인 머
리), 가랑비 (가느다란 비), 가랑이 (원몸의 끝이 갈라져 벌어진 부
분)'와 같은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랑비'의 방언 분포를 보면, '가락비(경남 진주), 가늘비(전남
여수, 순천, 장성/평안/함북), 가시랑비 (경남 창원, 창녕, 김해)'
등과 같다. '가랑잎'과 마찬가지로 왼래의 몸에서 갈라져 나온 것
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중세어에서 '가랑-'은 '가람-' 또
는 '가랍-' 의 형태로 드러나는데 '가랍-' 은 '가람-' 의 표기적인 변
이형으로 보인다. 예컨대 '가람 기 (峽) ((유합) 하 54)' 와 같온 보기
에서 기본형을 확인할 수 있으며, '가랍남기오((내훈), 가랍나모
((사성), 하 38), 가랑나모(料木 ; (역해)), 가랑남우((물보) 잡
목) ' 등에서 '가랍-/가랑'이 동일한 형태의 변이형임을 알 수 있
다.
분화되어 갈라짐을 드러내는 '가랑-' 은 '가닥(한 곳에서 갈려나
간 낱낱의 줄)'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도 `가
닥'이 관여하는 형태로는 '가닥가닥, 가닥수(가닥의 수효)'와 같은
꼴들이 있다. 모음과 모음 사이에서 디굳(ㄷ)이 리을(ㄹ) 소리로
약화되어 유음화되는 것은 흔히 찾아 볼 수 있는데, '가닥>가락'
도 그러한 보기라고 할 것이다. '가락'은 본래 '가느스름하고 기름
하게 토막진 물건의 낱개, 손이나 발의 갈라진 부분의 하나, 물레
로 실을 자을 때 고치솜에서 풀려 나오는 실을 감는 쇠꼬챙이, 노
래 같은 데에서 소리의 길이와 높낮이의 고운 어울림'을 뜻하는 말
이다. '가락' 이 들어가 만들어지는 말에는 '가락가락(가락마다),
가락고동(물레의 왼쭉 괴머리 기둥에 가락을 꽂기 위하여 박은 두
개의 고리), 가락국수, 가락나무, 가락떼다(몽류를 치다), 가락엿,
가락옷(가락에 끼어 실을 감아 내는 댓잎이나 종이 또는 지푸라기),
가락잡이 (굵은 물레가락을 바로잡아 주는 사람), 가락지 (손에 끼는
고리), 고락지 (물건을 걸어두는 쇠굽), 가락토리 (물레로 실을 겹으
로 드릴 때, 가락의 두 고동 사이에 끼우는 대롱)'와 같은 꼴이
있다.
'가락'은 독립해서 쓰일 수 있는 형태인 반면에 '가랑-' 은 제 흘
로 쓰이지 못하는 형태이다. 믈론 '갈라짐'을 뜻함에 있어서는 조
금도 다르지 않다.
같은 뜻이라도 소리의 어감을 달리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 음상
이라고 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가닥'의 경우 'ㄱ>ㄲ'의
된소리되기를 좇아서 갈라겨 나간 말의 무리들이 있으니 그것이 바
로 '까닥'계라고 할 수 있다. 그 보기를 들면, '까닥거리다(갈라진
줄기가 바람에 휘날리듯이 좋아서 까불거리는 것), 까닥까닥(물기
가 실낱만큼이나 마른 모양), 까닥이다(고개를 앞뒤로 가볍게 움직
이다), 까딱(고개를 앞으로 꺽어 가볍게 움직이는 모양), 까딱없다
(실오라기만한 변동도 없다), 까딱하면 (조금이라도 그르치면,실오
라기만한 것이라도 잘못되면)' 등과 같다.
'까닥'에 'ㄹ' 음 받침이 덧붙어 '가닥'치 무리를 이루는 것이 있
으니, 오늘날 '이유, 연고, 일의 근본 흑은 실마리'의 의미로 쓰이
는 '까닭'이 그 대표적인 형태라고 하겠다. 이러한 범주에 들어가
는 말로는 '까닭수(까닭의 수), 까닭표(이유의 표시)'가 있고 받침
의 'ㄹ'은 남고 'ㄱ'은 떨어져 쓰이는 '까다롭다, 까다로이'의 꼴
들도 있다. 중세어에서 '가닭[실 한 가닥(線一續) ; (역해보; 39)' 이
확인되는 바 '까닭'이 실뭉치의 한 오라기에 해당하는 뜻이 아닌가
한다. 미루어 보건대 실뭉치가 엉켜 있을 때 엉킨 결을 따라 한 오
라기씩을 찾아 풀어 내면 큰 실뭉치를 헤쳐 냄과 같은 의미로 '까
닭' 을 생각한 것이리라. 따라서 '까닭을 모르겠다'는 말은 일을 해
결해 가는 계기 곧 이유, 근본을 모르겠다는 내용으로 되풀 수 있
다.
다시 '까닭'에서 모음이 바뀌면서 그 형태와 소리가 달라지는 말
의 무리가 있으니 '꺼덕-'계가 그것이다. 보기를 들면, '꺼덕치다
(모양, 차림새 따위가 상스럽거나 어울리지 아니하다), 꺼덕거리다
(신이 나서 건방지게 행동하다), 꺼드럭거리다(자꾸 잘난 체 거만
을 떨다), 꺼들먹거리다(신이 나서 자꾸 도도하게 굴다)'와 같은
꼴들이 있다.
'가닥'과 같은 의미로서 경기,강원,경북의 방언인 '가달'이 있
다. 이는 다시 모음교체를 따라 '거 덜'로도 상인다. 보기를 들면,
'가달(바지가달), 거덜나다(살림이나 무슨 일이 흔들리어 결딴나
다), 거덜거덜하다(살림이나 무슨 일이 위태하다), 까들거리다'와
같은 꼴들이 있다.
참으로 무슨 일이나 사물의 까닭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것에
서 일어나 큰 일을 만들어 간다. 작은 실오라기가 모여서 큰 뭉치
를 이루듯이 말이다. 정녕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큰 일올
이루는 지름길임을 알겠다.
9-5. 겨레와 분화
같은 조상으로부터 태어나 같은 겨레를 이룬 사람을 일러 겨레
붙이라고 한다. 샹물이 종족보존을 하는 모습은 다윈이 지적한 바
와 같이 하나의 개체와 다른 개체가 서로 만나 하나의 무리를 만들
어 냄으로써 이루어진다.
나무의 줄기에서 가지가 벋어 나아가듯이 같은 조상의 자손들이
점차 많은 수효로 갈라져 간다. 씨족(氏族)이란 말을 쓰거니와 같
은 성씨를 가진 족속을 이르고 있다. 우리는 한민족을 배달겨레라
고 부르고 단군 할아버지의 피를 이은 운명공동체로서의 의식을 함
께하고 있다.
겨레의 본질은 갈라짐 곧 갈래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기능이
나 형태로 보아 모든 생물들은 갈라짐으로써 번식의 과정을 이루어
나아가지 않는가.
사람들의 겨레붙이가 살아 가는 모양이 그러할진대 그들, 곧 겨
레가 이루어 내는 문화도 그 예외일 수는 없다. 모든 문화는 시대
를 거슬러 올라가면 분화되지 않은 종합문화의 성격을 보인다. 음
악, 미술, 문학, 무용 등의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종합적인 상태에
서 한 동아리씩 갈라져 나와 오늘날에 이르렀다. 학문의 경우도 마
찬가지이다. 한 사람이 박물학자격으로 철학에서 시작하여 거의 모
든 학문을 섭렵하는 경우를 찾아 보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아리스
토텔레스가 그 좋은 본보기라고 할 것이다.
한 민족의 언어, 역사, 학문과 예술은 하나의 원형성을 띤다. 갈
라져 나오기는 했으나 본래 한 가지에서 나온 것이므로. 따라서 다
른 겨레와 비교할 때 한 겨레는 서로가 같은 속성을 갖는 집합으로
묶이는 것이다. 겨레는 한 가지에서 나온 갈래로, 공간,시간적으
려 항상 운명을 함께하는 가장 가까운 무리라 하겠다.
중세어 자료에 '걷' 흑은 '곁'이 보이는데 '걷'에서 '결'이 온
것은 아닌가 한다. 음운의 변천과정을 보더라도 'ㄷ>ㄹ'의 호전현
상이 많이 나타나기 대문에 미더운 바가 있는 추정이다. 그러한 전
제에서 살펴 보면, '결 十ㅇ (에)>겨ㄹ ~겨 레'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겨레'는 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갈래'의 뜻에서 그
밑뿌리를 찾을 수 있고, '갈래'가 점차 형태의 꼴바꿈과 뜻의 변
이를 입어 '걷 (곁) ~.결'로 바뀌어간 것이 아닌가 한다. 씨와 날이
서로 어긋매끼게 엮어 짜는 것을 '걷다'라고 하니 겨레야말로 운명
공동의 집단이라고 할 밖에.
'우선 '걷-'을 중심으로 하는 낱말겨레를 들어 보면, 걷고틀다
(이리 걸고 저리 틀어 대항하는 것), 걷지르다(엇결어 딴 쪽으로
지르다), 겯질 리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곁'은 옆이라고 하거니와 사물의 중심이 되는 부분에 딸린 한
쪽을 뜻한다. 원형에서 벋어 나간 갈래라고나 할까. 이 말이 관여
하여 이룬 낱말을 보면, 곁가닥, 곁가리 (갈빗대 아래쭉에 붙어 있
는 짧고 가는 뼈), 곁가지 (가지에서 다시 곁으로 돋은 가지), 곁군
(옆에서 남의 일을 도와 주는 사람), 곁길 (큰 길에서 곁으로 갈라
진 길), 곁눈질, 곁들이다, 곁마(따라가는 말), 곁마름(많은 전답을
관리하기가 힘이 드는 경우에 마름을 돕는 사람), 곁말(빗대어 하
는 말 고드름 장아꺼 같다고 하는 따위), 곁매 (싸움판에서, 씨삼
자가W곁에서 한쭉을 편들어 치는 매), 곁바대 (겨드랑이 한쭉에 덧
붙이는 기역자 모양의 헝겊), 곁방, 곁방살이, 곁부축, 곁붙이 (한
조상의 자손이기는 하나 촌수가 먼 일가붙이), 곁비다(부축할 사람
이 없다), 곁순, 곁쫴기, 결자리, 곁집, 곁쪽(가까운 일가붙이),
곁하다(가까이하다)'와 같은 꼴들이 있다.
사람의 몸 가운데에서 양편 팔 밑에 오목한 곳을 '겨드랑' 혹은
'겨드랑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몸에서 갈라져 나간 지체 곧 가지
임을 드러내는 형태로 보인다. 형태의 짜임을 보면 '겯+으랑>겨
드랑'으로 보이는데 아무든 쪼개져 갈라짐을 본바탕으로 하는 기능
적인 이름으로 보인다. 혼히 신발을 헤아릴 때에 한 켤레, 두 켤레
라고 한다. 이때의 '켤레'도 겨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항상
신발은 짝으로 제 구실을 다하는 것이니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
겨레의 '겨 -'가 거센소리로 굳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겨레는 한 몸(조상)에서 가지 덛어 나와 하나의 떼를 이루고 사
는 무리다. 말도 기본이 되는 말은 다시 여러 가지의 언어적인 꼴
바꿈을 하여 그 갈래의 골짜기를 따라 오늘에 이른다. 조상의 얼
흑은 그 원형성은 겨레의 맥을 타고 내려와 가지마다 소박한 쫓으
로 피거나, 열매로 맺히어 조상이 살던 그 공간, 그 마당 위에 묻
히 며, 또다시 태어난다. 그러기에 우리 겨레 모두는 서로가 서로를
기워 주는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
그러면 중세어의 자료에 나타난 '겨레'의 낱말겨레를 알아 보도
록 한다.
'겨레'의 날말겨레(중세어)
1) '겻-'계-겻눈질 ((한청) 437), 것도라이 (곁달아 ; (한중륵) p.
146), 겻문((한청), 287), 겻셔다(角立하다 ; (법 화), 5-8), 겻자리
(법구)), 켯조치일 (곁 따른 일 ; (청구)), 겻칼(粧刀 ; (청 구),
116), 겻곳비 (한청), 134) 등.
2) '겯(결)-'계-겯방(소해) 6-79), 겯디르다(결어지르다 ; (유합)
하 61), 겯주름(노박집람), 상 2), 겯아래 (겨드랑 ;(월석)) 2-13).
결에 (유합), 상 13) 등.
3) ㄱ-'계-입 ㄱ ((월석)서 1) 등.
이상의 보기를 보면 '겻/겯(>결)/ㄱ'의 표기적인 변이형이 보
이는데, 모두가 '갈라져 붙음'의 속성을 지닌 낱말들이다. 한 몸(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겨레는 분명 뿌리가 같은 족속들이다. '겨
레' 란 말만 들어도 그 어떤 운명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필자
흔자만의 정서는 아닐 것이다. 겨레는 겨레답기를 힘써야 한다. 가
장 우리다운 모습으로 삶의 터전을 갈고 닦아야 하는 부름이 있는
것이기 째 문에.
10. 막다른 골목
10-1. 낮과 늦음
'낮에 난 도깨비'라 하여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이 인사불성이고
체면도 없이 기괴망측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이른다.
해가 떠 있는 동안으로서 밤과 대립되는 시간대를 '낮'이라고
다. 시간의 순서로 생각해 보면 하루는 아침-낮-저녁으로 이루어
져서 주기적으로 되플이된다. 아침은 하루 증 가장 이른 시간이고,
낮은 그 뒤에 오는 시간이며, 이어서 밤이 된다. 우리 조상들은 이
렇듯 시간의 앞서고 뒤섬에 따라 때를 가리키는 말들을 만들어 나
아갔다.
심재기가 지적한(l982) 바와 같이 아침은 (조선관역어) 등의 중
세어 자죠에서 '이르다[早]'와 서로 대응하고 있다. 아침은 방언에
서 '아칙 (강왼), 아적 (경기, 서울)' 등으로 나타난다. 대략 열두시
를 전후하여 그 이전을 아침, 그 이후를 낮이라 한다. '낮-'은 '날
, 저물다[暮], 저녁, 늦다[晩]' 등의 뜻으로 쓰이는바, 이
가운데에서 중심을 이루는 뜻은 '늦다[晩]'로 보인다. 오늘날에는
하루 중 해가 저무는 때를 '저녁'이라고 하지만 옛말로는 '나조(ㅎ)
((능엄) 2-5)' 였다. 지금도 방언에 따라서는 저녁을 '나조, 나주왁
(함경)'이라고 한다.
그러면, '낮-' 은 그 중심된 의미인 '늦다'의 '늦-' 과 어떠한 관
련성을 보이는 것일까 ? '늦다'의 '늦-'은 '낮-'이 모음교체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파생, 또는 합성을 하여 이루어지
는 '낮_' 계와 '늦-' 계의 낱말겨레를 살펴 보기로 한다.
'낮_' 계에는 '낮거리 (대낮에 하는 남녀간의 성관계), 낮곁 (한낮
으로부터 해지기까지의 시간을 둘로 나누었을 때의 전반), 낮다, 낮
때, 낮잠, 낮추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한편 '늦-'계에는 '늦
다, 늦더위, 늦둥이(나이가 많이 들어 늦게 본 자식), 늦마(늦장
마), 늦심기 (곡식이나 식믈을 제철이 지나서 심는 일), 늦은불(그
리 심하지 않은 곤욕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늦잡죄다(늦게 잡두
리를 하다), 늦하늬 (서남풍)'와 같은 말들이 있다. '낮(늦)-'계의
말이 중세어에서 '낫_' 계로 나타남은 '낫-' 계가 더 기원적인 형태
임을 드러낸다. 'ㅅ>ㅈ'의 마찰음이 파찰음으로 발달한 단계를 생
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해'의 뜻을 드러내는 '나
(ㅎ) ((법화1 5_18)' 의 단어족으로도 묶일 가능성이 있다(서재극,
((중세국어 단어족 연구) l980).
여기서 '낮'의 형태로 돌아가서 몇 개의 뜻을 같이하는 변이형들
을 찾아서 그들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 어떤 까닭으로 '아침'
과 시간적인 순서로 이어지게 되었는가를 살펴 나아가기로 한다. 중
세어의 자료를 더듬어 보면 '낮'은 '낫(훈몽)' 으로도 표기되며,
'낫'은 다시 '낫(穀 簡 ; (중두해))' 의 뜻으로도 쓰인다. '낫'
은 또한 '낟(훈례)), 낟(嫌 ; (훈례))' 으로 드러난다. 앞부분에서 지
적하였듯이 '낮'이 '해' 를 뜻하는 것임을 고려해 보면 어떤 연
관성이 있지 않올까 싶다. '해'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곡식이나 플은
자라고 성장하며 마침내 완성된 개개의 알맹이로 익어 가게` 마련이
다. 아울러 플올 베는 '낫(낟)'도 곡식이나 자란 풀을 베어 들이거
나 거두어들일 때 사용하는 것올 생각해 보면, '곡식'의 뜻을 나타
내는 '낫'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낮'과 '아침'은 서로 시간의 순서로 보아 '아침'이 앞서
는 것을 어떻게 플이할 수 있올까. 방언에서 '아침' 올 '아적, 아
칙'이라고 하거니와 '아사(阿斯)' 또는 '앗'이라고 했올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앗'은 '아우(석보))` 의 의미로도 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을 방언으로 '아시 (흑은 아이)'라고 하거니와 본시 동
일한 어근 '앗'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오늘날 일본어에서 아침
올 '아사'라고 함도, 어떤 경로를 거쳐 이루어겼는지는 모르
지만, 동일한 형태 '앗'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첫번 논매기
를 '아시논매기 (혹은 애벌논매기)'라고 하고, '아시당초'라는 말을
쓰는 것으로 보아 분명 '아시' 는 '처음' 곧 순서의 머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앗' 이 '동생' 올 뜻하는 것은 어떻게 순서의 머리로 볼 수 있을
까.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부모편으로 보면 맏이보다는 더 나이
가 어리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와 사랑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따라
서 바로 위의 형제로 보면 부모의 사랑을 아우에게 빼앗긴 셈이 되
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를 뜻하는 '앗'에 '-다'를 붙여 '앗다>빼
앗다'로 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우를 일부 방언에서는 지금도 '아
수' 라고 하는데, 이는 '앗'에서 발달한 형태로 보인다.
결국 하루 해가 떠오르는 아침은 '처음'의 개념으로 그 중심된
의미를 삼아 '이르다[早]'의 듯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앗' 은 음
성 인식으로 보아 '디굳(ㄷ)' 과 같이 드러나는데, 디굳 (ㄷ)이 리을
(ㄹ)이 되어 '알'로 갈라져 나아감으로써 생명의 씨앗을 나타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플이나 곡식으로 보면 아침은 이제 막 싹이 터서 움이 솟는 때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루를 해에 비유한다면 이제 해가 떠을라 환
한 빛을 이땅 위에 비추는 단계로 볼 수 있다. 또한 '낮'은, 풀
이 자라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과, 그리고 해가 만물의 성장을
돕기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것과 같지 아니할까. 이처럼 아침과 낮
은 마치 플의 싹이 틈과 그 싸이 자라 피어남과 같다.
이내 해는 기울어지고 어두워져, 낮은 가고 밤을 맞게 된다. 저
녁올 중세어에서 '나조(ㅎ)' 라고 하거니와 이 말은 '나중'이란 형
태와도 같은 뜻을 드러낸다. '나조'가 되면 해가 짐과 함께 밝음은
물러가 다음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해가 지는 것을 '져
믈다((훈몽) 상 l; 져[彼]十므르[>믈 ;退+-다)' 라고 했다. 또한
저녁도 이쪽 아닌 저쪽의 공간이라고 보아 '뎌[彼]十녁 [方, 所]>
뎌녁 >져녁 >저 녁 '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으로 '낫다(능엄), 9-72)' 를 쓴 것도 해가
아침에 처음 떠오른 뒤 점점 제 모습으로 펴 나아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모든 사물은 때가 있다고 한다. 태어날 때가 있고 숨을 거두어
들일 때가 있는 것이다. 하루는 해가 처음 떠올라(아침), 제 모습
으로 세상을 밝히다가(낮), 이내 저물어 가는 흐름인 것이다. 그
끝은 곧 '물러남[退]'의 상황이다.
해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해를 바탕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다시
그것을 언어 형성의 기본으로 삼았으니, 말에 사람의 얼이 비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알게 된다.
10-2. 갓과 한계
'갓 이사온 집에 볶음질 않는다'는 금기어(禁忌語)가 있다. 새롭
게 이사를 해서 바로 볶음질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삼가라는 내용
이다. 딴은 이제 이사를 한 뒤 아직 새로운 환경에 적응도 채 안 되
고 마음이 조금은 불안정의 상태인데 콩과 같은 식품을 볶아대면
십증팔구 가족들의 심적인 안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를 이야기할 때 '갓 스물' 이라고 하는데, '이제 막'의 뜻을
드러내고 어떤 동작이 끝난 뒤 오래 되지 않음을 뜻하는 말로서
'갓'이란 형태를 흔히 쏜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니제 막, 겨우, 방금' 등의 뜻으로 쓰인 말
에 '갓 ((석보) 6-35)' 이 보인다. 아울러 같은 형태이면서 '끝,가
장자리'의 뜻으로서 쓰이는 '갓 (邊 ; ((월석) 23-90)' 도 확인된다.
'갓/갓'은 그 형태와 의미에서 어떤 상관성을 보이는 것일까.
우선 형태로만 보면 같은 음절의 짜임새를 바탕으로 '아래아(?)
가 '아(ㅏ)'로 바뀜을 따라서 만들어진 표기적인 변이형으로, 같은
낱말겨레로 묶을 수 있다. 즉 '갓>갓'의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
는 것이다.
그럼 의미상의 관계는 어떠한가. '가장자리'의 뜻을 나타내는 공
간명사 '갓'은 '갓갑다(近 ; ((한청), 264 b)'에서도 보이듯이 어떤
사물이 서로 가까이 있는 상태로 그 뜻을 풀이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둘 이상의 사물이 잇닿는 경계선 곧 한계선은 그 둘
혹은 그 이상의 사물이 가장 가까이 맞닿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쳐
음'으로 그 뜻을 새길 수 있음도, 한 사물로 들어가는 첫부분이니
시간 흑은 사실의 '첫머리'로 유추가 가능하다.
'한계'는 사물에 있어서 '거죽[表面]' 을 의미할 수도 있는데 증
세어 자료에서 확인되는 '갓(갓)-' 계열의 낱말겨레는 크게 '갓(갓)
/것(겉)/긋(귿>끝)'의 형태로 무리지을 수 있다.
'갓 (갓)' 의 낱말겨레
1) '갓(갓)-'계-갓 ((목결) 20), 갓갑다((한청) 264 a), 갓다(같
다 ; (중두해), 11-42) /갓갑다((월석) 2-50), 갓가ㅅ로(>가까스
로 ; (석보, 6-5) /ㄱ다(한계를 함께 하다 ; ((용가) 85) 등.
2) '것(걸)-'계-것 (皮 ; (초두해), 15-5), 것거플((한청), 197 c),
것다(같다 ; (한청), 255 c), 것ㅁㄹ죽다(까무러치다 ; (석보) 11-
20), 것보리 ((구황) 7), 것조((역해), 하 9)/겉다(같다 ; (오륜),3
-62) /ㄱ (거죽 ;(구급방) 하 73) 등.
3) '긋'-'계-긋(끝 ; (내훈) 1-26), 긋긋다((법화) 3-156), 긋누르
다(그처누르다 ; ((몽법) 32)/귿((석보) l1-29) 등.
'갓' 은 다시 'ㄱ장(>가장)'계로 발달하여 오늘날의 '가장자리/
까지/까장(꺼정)'계로 갈라져 나와 한 낱말겨레를 이루게 되었다.
'갓/갓'의 관계가 모음의 바뀜을 따라 이루어지듯이 '긋' 또한 마
찬가지의 과정을 거쳤다고 보인다. 결국 'ㅈ/갓/긋'은 동일한 형
태소 '갓'이 분화하여 된 변이형태로 보인다.
'갓'은 접미사 '-갑다'가 붙어 '가 다>가깝다'의 과정을 거쳤
으며, 받침의 다름을 따라서 '갖(겆)'으로 변이한 것이 아닐까 싶
다. '긋'은 '끝`을 뜻하는 말로서 '긋>귿>ㄱ> >끝'과 같은 과
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본다. 그러니까 '끝'은 가장자리가
사물의 한계를 이루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와 같
이 하나의 형태가 갖는 가장 중심을 이루는 의미는, 그 말을 사용
하는 사람들의 시대나 공간에 따라서 조금씩 달리 가지 벋어 나아
간다.
먼저 '갓(갖~겆)-'계에 속하는 형태를 들어 보면, '가깜다, 가
까워지다, 가까스로(간신히, 겨우), 가까이, 갓나다(막 태어나다)
갓나오다, 갓난아기, 갓난이(갓나온 아이), 갓밝이 (밝은 무렵), 가
죽, 가죽다(가깝다의 경상도 방언), 가지다(손에 들어와 있게 하
다 ; 소유의 한계 즉 경계선을 다르게 하여 소유자를 바꾼다는 뜻을
바탕으로 한 듯), 가지런하다, 갖바치(가죽신 만드는 사람), 갖옷
(가죽으로 만든 옷), 갖다 주다, 갖벙거지, 갖춘마디'와 같은 형
태들이 있다. 아울러 풀이해 두고 싶은 것은 '같다'의 경우이다.
'같_'은 '갓'에서 받침이 자음교체되어 분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뜻으로 보면 '같다' 는 '두 개 이상의 대상이 서로 다르지 아니하
다'로 정의된다 서로가 다르지 아니함은 그 성질이나 상태가, 흑
은 정도가 다르지 않다는 말이지만, 우선 사물인식에서는 표면 곧
시각적인 공간이 가장 두드러진 인식의 초점이 된다. 한마디로 표
면에 드러난 모습 곧 겉모양이 동일한 것이다. '겉/같'은 동일한
어근 '갓(갓)'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물론 모음교체에 따라서
이루어진 형태들이다.
'겉_' 계에 드는 말로서는 '겉가루(먼저 되는 가루), 겉고삿(지붕
올 이을 때, 이엉 위에 걸쳐 매는 새끼), 겉꺼풀, 겉꾸미다, 겉날
리다(대충 되는 대로 해치우는 것), 겉넓이, 겉놀다(건성으로 따로
따로 노는 것), 겉눈감다(속으로는 눈을 뜨고 무엇을 보고 있으면
서 남 보기에는 눈올 감은 듯이 보이는 것), 겉늙다, 겉맞추다, 겉
보리, 겉볼안(겉으로 보아 안을 짐작할 수 있음), 겉봉, 겉수작, 겉
여믈다, 겉잠(선잠), 겉장, 겉잣(껍데기를 까지 않은 잣), 겉짐작,
겉치레, 겉절이다(김장할 래 배추의 억센 잎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
여 우선 소금을 뿌리어 절이다), 겉치레 (-속치레), 겉피 (겉껍질을
벗기지 아니한 피), 겉흙'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같_'계로는 '같다, 같이, 같이하다, 같잖다(실상은 그렇지 못하
다), 같지다(씨름에 두 사람이 같이 넘어지다)' 등의 꼴이 있다.
'긋'에서 비롯한 '끝(귿)-' 계에는 어떠한 말의 무리들이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한다, '귿-'계에는 '그지없다(한이 없다), 그지없이,
그치다(계속되던 일이 멈추게 되다)' 등이 있고, '끝-'계에는 '끝
걷기 (서까래 등을 흩어 까는 일), 끝나다, 끝내기, 끝닿다, 끝돈
(믈건 값의 나머지를 끝으로 마저 치르는 돈), 끝마치다, 끝바꿈
(어미의 변화), 끝반지 (노느매기할 때 맨 끝판의 차례), 끝빨다(끝
이 뾰족하다), 끝소리(말음), 끝장, 끝장나다, 끝지다(끝에 이르
다), 끝판(일의 마지막 관)'과 같은 형태들이 있다.
가장자리 곧 한계는 사람들이 사물이나 사실을 파악하는 데 증요
한 기준이 된다. 사람들은 그것이 시간이든 공간이든 관계없이 서
로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러한 의식은 '갓(끝)'이란 형
태의 낱말밭을 통하썩 많은 갈래를 드러내고 있다.
가장자리는 동일한 물체가 갈라져 나아간 분기점이며, 시간이 오
래 지나면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되어 버리는 근거가 된다. 그러면
서도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좁히고 가깝게 느끼면서 살고자 하는
것 역시 이상과 현실의 가장자리를 맴도는 일 아닐까.
10-3. 끼니와 때
형제 또는 이웃에 양식이 없어 굶는 사람이 있게 되면 누군가는
걱정을 하게 된다. 몹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에 대해 우리는
'끼니를 굶는대서야' 햐며 혀를 찬다.
일정한 때에 밥을 먹는 일을 '끼니'라고 한다. '끼니'는 '끼 [時]
十니[稻]'로 분석된다. 한마디로 '끼 ' 는 특정한 때를 이름이요, '니 '
는 벼를 뜻하는 말에서 유추하여 식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
마도 때만 되면 주기적으로 아침, 점심 저녁에 맞추어 밥을 먹어
야 하니 그러한 말이 샘긴 듯하다. 옛말에 '끼 ' 는 '끼 ((월석), 2-
26), 끼 ((용가) 113), 끼 ((노해)상 47)' 의 형태로, '니 '는 '니
(稻 ; (구급간), l-86), 닛딥 (稻草 ; (역해) 하 10)' 의 꼴로 나타난다.
여기 벼의 뜻으로 쓰이는 '니'는 벼 그 자체가 쌀을 대신한 것으로
보이며 식 량을 원관념으로 하는 형태로 풀이할 수 있는데, 아침밥,
점심밥, 저녁밥의 의미로 써 온 지가 오래다. 'ㄲ/끼'는 본래 장
소를 드러내는 말이었는데, 시간의 뜻을 드러내는 말로 전이되어
쓰인 것으로 보인다. 공간적인 거리가 시간적인 간격으로 인식된
것이 니, 시간의 인식은 공간적인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앞에서
도 말한 바 있다. 곧 일종의 유추현상에 따른 의미의 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불을 끄다의 '끄다'는 중세어서는 'ㄲ+-다>끄
다'와 같이 쓰였는바, '끄'는 공간적인 틈으로 풀이된다. '끄다'의
파생명사는 '끔'으로, (훈민정음해례본),에는 '끔爲際'로 대응되니,
현대어의 '틈'은 분명 공간적이 거리 '끔'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
다 하겠다.
한숨을 너무 크게 쉬면 '땅이 꺼질 듯하다'고 한다. 이때 '꺼지
다'는 정상적인 땅의 표면에 일정한 공간이 푹 내려알아 그 사이가
벌어진 것을 뜻한다. '끼니'의 지역에 따른 방언분포는 '끄-/끼-'
계가 중심을 이룬다. 끄녁 (전남 담양,화순), 끄니 (전남 여수, 담
양, 곡성, 구례, 함평/강원 평창), 끄니때 (경남 남해/층남 홍산,
예산/전남 구례, 곡성 여수 순천, 광양, 강진, 화순, 보성, 영
광), 끼니 (전남 구례, 곡성, 순천) 등.
따지고 보면 시간도 어느 시점과 또다른 시점 사이를 말하는 것
으로 공간의 개념과 아주 가까이 연접해 있음을 알겠다. (설문해자
(認文解字)에 보면 '時'는 '日十土+寸'으로서 공간에 나타나는 해
그림자의 길이로써 시점과 시점 사이를 이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끄-' 의 계열에 드는 형태로는 '끄다, 꺼지다(불이나 거품이 없
어지다, 속이 곪아서 우묵하게 들어가다), 끈(일정한 공간을 제거
나 잇는 줄), 끈질기다, 끊기다, 끊어뜨리다, 끊다, 끊어치다, 끊
임없다' 등이 있다.
'끼-'의 계열로서는 '끼니, 끼니때, 끼다(안개나 연기가 끼다,
겨드랑이 같은 페에 넣어 빠지지 않게 죄다), 끼들다, 끼리 (일정한
공간에서 일정한 집단으로 전이), 껴안다, 끼얹다, 끼웃끼웃(기웃
기웃 ; 이쪽 저쭉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과 같은 꼴로 분화되어 한
무리를 이루어 나아간다. 마치 손자에 손자를 치듯이.
10-4. 아침과 알
'아침 놀 저녁 비 저녁 놀 아침 비'라고 한다. 전해 오는 말에
아침에 놀이 서면 저녁에 비가 오고, 저녁에 놀이 서면 아침에 비
가 온다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비가 오고 안 오는 것을 짐작하는
방법을 이르고 있다.
하루의 일은 아침에 있고 한 해의 계획은 봄에 있다고 하였거니
와, 아침 또는 한 해의 봄, 곧 시작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는 한국은 아침의 정신에 기초하여 문화의 맥
을 이어 왔다. 아침 정신, 그것은 첫머리 의식이며 및을 그리워하
는 지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침이 환기하는 뜻과 첫머리 의식
사이에 어떤 상관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침에 대응되는 개념
은 중세어로 '이르다'의 뜻으로 드러난다 아침(朝 ; (여사서),
3-9), 이르다 ((초두해), 15-l7). 새벽 (晨 ; (동문), 상 3) 등이 그것
이다.
말을 하는 사람의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서 말은 분열되기도 하고
통일되기도 한다. '아침'의 지역적인 변이형은 어떤 것들이 있을
까 ? 아저게 (경남 울산, 양산/전남 순천), 아적 (평안 황해), 아
척 (경남 양산, 울산, 합천/전북 남원, 순창, 정읍/전남 강진, 고
흥/경기 연천/제주 전역), 아칙 (경남 밀양/전남 해남, 강진, 화
순. 보성/평북 박천, 영변, 구성, 강계, 철산) 등이 있다. '아+
ㅈ(ㅊ)-' 계가 중심을 이루어 널리 분포하고 있다.
아침의 방언형들은, 오늘날 부사로서 '이제까지'의 뜻으로 쓰이
는 '아직'과 같은 낱말겨레로 볼 수 있다. 시간이 '아직 이르다'고
하거니와 시간이나 공간 상황이 정해 놓을 때보다 앞서 있음을 뜻
한다. 방언의 분포에서 아침이 '아저게, 아적, 아척, 아칙' 으로 상
이고 있음은 '아직'과 관계 있음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침은 시간적으로 점심이나 저녁에 비하면 더 이른 시점
임에 틀림없다. 낱말의 음절구조란 관점에서 보아 그 바탕이 되는
음절의 원형은 'ㅇ-' 으로 보이는데 '앗-' 에서 비롯한 것으로 판단
된다. '알'의 낱말 겨레에서 지적하였듯이, 원형적인 뜻은 '시작,
생명, 자식' 등으로 파악되며, '앗(ㅇ)/맏/알/맞' 이 바로 이 계
열에 드는 말들이다.
아침과 관련하여 쓰이는 말로는 '아침, 아침밥, 아침결'과 같은
복합어가 많이 있으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음), 아직까지, 아주
(매우 앞서서 뛰어나 있음)' 등의 꼴도 있다.
옛부터 배달겨레는 보다 이른 시기에 아침을 몰고 온 사람들이었
음을 우리는 어떻게든 보여야 하리라.
10-5. 저녁과 나중
'저녁 굶은 시어미 상'이란 말이 있다. 가뜩이나 며느리를 못마
땅하게 여기는 시어머니가 며느리 때문에 저녁을 굶었다고 가정했
을 때 그 모습이 아주 좋지 않음을 이르는 경우다.
해가 지고 밤이 오는 때를 저녁이라고 한다. 저녁은 아침과 서로
대립되는 상대적인 뜻으로 쓰인다. 방언에 따라서는 조금씩 다른
변이 형태들이 있다. '저녁'의 방언분포를 보면, '지녁 (경기 강원,
전라, 경상, 황해, 함경), 지 역 (강원, 경상, 함경), 지 악(강원 속
초/경남 고성/경기 고양), 나조(함남), 나주곽(평북)' 등이 있다.
<두시 언해>와 같은 중세어 자료에서 저녁이 '나조(ㅎ)' 이었음을
고려할 때, 방언형의 '나조, 나주왁' 은 고어의 잔재형으로서 지금
도 쓰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조'는 '늦다[晩]. 저물다[暮]'의
뜻이었는데 근대국어로 오면서 '낮'으로 바뀌어 '아침'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나조'와 연관을 보이는 형태로는 '나중(얼마 지난 뒤), 낮, 낮
거리 (대낮에 하는 남녀간의 성관계), 낮곁 (한낮으로부터 해지기까
지의 시간을 둘로 나눈 그 전반), 낮대거리 (광산에서 밤과 낮으로
패를 갈라 일할 때 낮에 들어가 일하는 대거리), 낮도둑, 낮잠' 둥
이 있다.
특히 '나조'가 앞과 뒤의 '뒤'로 쓰인 것이 '낮-'이라면 이 '낮'
이 파생어간이 되고 접미사가 붙어 형용사 '낮다'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낮다'의 '낮'은 높지 않은 것, 좀 떨어지는 상태를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낮'과 관련된 말로는 '나즈막하다, 나즉
나즉, 나즉이, 나즉하다, 낮다, 낮보다, 낮추다, 낮춤말'과 같은
형태가 있다.
'낮-'계의 말과 같은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늦-'이 있다. '낮'
에서 모음이 바뀜에 따라서 된 형태로, 시간적으로 이르지 않음'
올 뜻한다. '늦다'가 그 대표적인 형태다. '늦-'계에 해당되는 말
로는 '늦가올, 늦거름, 늦깍이(나이가 많아서 중이 꾄 사람), 늦
다, 늦더위, 늦둥이(나이가 많아서 낳은 자식), 늦되다(늦게서야
이루어지다), 늦모(철 늦게 낸 모), 늦바람, 늦배 (늦게 낳은 새끼).
늦은블(그리 심하지 아니한 욕이나 괴로움), 늦은씨(만생종), 늦잠,
늦틀이명주말이(명주말이 과에 딸린 연체동물), 늦하늬(서남풍, 西
南風謂之緩柰意或팠緩琢-성호)' 등 여러 형태가 있다.
'나조(낮)'의 변이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잊어 버린다'의
'잊다'도 그 형태나 의미로 보아 서로 가까움을 알 수 있다. 중세
어에서 '잊다'는 '낮다((용가), l05)' 로 나타나는데, 한마디로 'ㄴ'
은 '낮/늦/낮'과 같이 대립적으로 짝을 이루는 낱말겨레의 한 형
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조(낮)-/늦-' 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
어의 낱말겨레 분포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나조'의 낱말겨레(중세어)
1) '낮 '계-나조(ㅎ) ((초두해) 8-9), 나죵내 ((동문), 하 49) /낫도
적 ((역해), 상 66), 낫맛감(한낮의 때 ; ((온역방) 6}, 낫밤(日夜 ;
((능엄,) 8-137) 등.
2) '늦-'계-눗왜ㅈ(늦벼 ; (금양잡록)) 등.
3) ㄴ- 계-ㄴ다((용가) 1O5), 닛다((용가), 11O) 등.
'ㄴ다'의 형태를 보면, 모음의 교체를 따라서 '낮/늦/낮' 으로
분화한 것이요, 의미로 본다면 '어떤 기억이나 지식을 잃어버림으
로써 과거의 일 곧 뒤의 일이 되어 버린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시간이 홀러 감으로써 아침을 과거로 생각하게 됨을 드러내는 것으
로 보인다. 'ㄴ (>잊)-'계열의 낱말겨레를 현대어에서 찾아 보면
'잊다, 잊어 버리다, 잊히다/니지 삐리다(잊어 버리다 ; 평안 방
언)'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경험한 일 또는 알던 지식을 모두 기억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
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는 것이 보통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러
도움이 안 되는 일들을 기억하곤 한다. 다른 사람들의 홈을 많이
알고 기억하여 뭐 그리 도움이 되겠는가.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기
억을 과거시제로 돌려 주고 잊어 버려 주는 미덕은 삶의 진정한 슬
기로움이 되기에 층분하다.
10-6. 어디와 여태
'어디 개가 짖느냐'고 한다. 사실상 개가 짖고 있어도 관심이 었
으면 들은 둥 만 둥하게 지나간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동네 개가 짖는 정도로 지나침을 이른다.
'어느 곳, 아무 곳'의 뜻을 드러내는 '어디'는 처소대명사로서의
구실을 하고, 옛말로는 '어되(何處 ; (용가) 47)' 로 쓰이었다. 오늘
날에 와서는 '어디'로 그 형태가 바뀌어 쓰이고 있는바, '어느[何]
十디 [處]>어디'로 풀이된다. 장소를 나타내는 '어디'는 의문의 조
사 '-여'와 함께 '어디여'와 같은 소몰이 소리로도 쓰인다.
'어디'는 지시관형사 '이'와 결합하여 '이어디>여디>여지 (끗)'
의 형태로 바뀌어 왔다. 여기 '여디,여지 (끗)'는 'ㅇ今((훈몽), 하
1)'의 'ㅇ'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본다. 그럼 '지금까지'의 뜻으로
쓰이는 '여태(껏)'는 어떻게 풀이해야 할는지. 'ㅇ' 이 이어디' 에
서 음절이 줄어들고 모음이 한데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풀어
볼 수 있겠다. 본디 '-디'는 의존명사 'ㄷ'에 다른 형태소가 들러붙
어 만들어진 것이므로 'ㄷ'의 분화어로 ㄷ/듸'를 상정할 수 있
다. 그런데 'ㄷ'가 히읗(ㅎ)말음체언인 까닭에 'ㄷ(ㅎ)>ㅌ'의 과정
을 거쳐 '이어ㄷ>여ㅌ>여태 '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ㅇ/여듸/여ㅌ'보다 '이제((석보) 6-5)' 가 더
많이 쓰이게 됨으로써 현재를 드러내는 말로 '이제'가 대종을 이루
게 되었고, 다시 한자어 현재(現在)'와 함께 쓰이다가 밀려나, 오
늘날에는 '현재'가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다.
'ㅇ'이 (한청문감)에서는 '엿ㅌ'로 쓰이는 것을 보면, 'ㅇ~엿'이
섞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ㅇ'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말로서 '엿
보다'를 생자해 볼 수 있다. '엿보다'는 '남 모르게 가만히 보는
것'을 이른다. 겉으로 보면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지만 실상은 어
떤 특정한 사물이나 사실에 비밀스례 관심을 둔다.
같은 계열에 들어가는 형태로, 엿듣다, 엿어 듣다(엿듣다 ;강
원, 함경 방언), 엿살피다'와 같은 꼴들이 있다. 옛말로는 '엿다
((청구)) ' 가 있다. 생각건대 지금 이 시점에서 특정한 공간을 나타
내는 '엿 (ㅇ)'에서 비롯된 말이 아닌가 한다. 물론 지금은 '엿보
다. 여태 '와 같은 꼴들에서 그 상징적인 화석을 찾을 수 있올 뿐이
지만.
10-7. 막다른 골목
가다가 더 이상 길이 없으면 돌아설 수밖에 없다. 해서 '막다른
골이 되면 돌아선다'는 속담이 생겼을 것이다. 어떤 일이, 막다른
궁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새로운 피와 방법이 생김을 비유한 것이
다.
어떤 물체와 물체 사이를 가리거나 사방을 둘러싸며 물리치는
것을 '막다' 라고 한다. 살다가 보면 시간이나 공간의 상황에 따라
공격을 해야 할 때도 있고 방어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사나운 진승
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피하여 도망하거나 맞서 싸우지 않으면, 생
존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디 그뿐인가. 천재지변이 일어나 무서
운 재난이 닥쳤을 때도 효과적으로 그 재해에 대 처해야만 한다 또
한 배가 고플 때에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면 큰일이다. 굶주리다
견디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 하든지 식 량문제를 비롯
한 주거와 의복문제를 해결해야만 자기보존을 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자손을 잇지 않는다면, 그 집안이나 씨족은 번영을 기약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인류의 멸종을 막을 길이 없어진다. 방어본능
은 우리가 삶의 전과정을 펴 감에 있어 주요한 몫을 차지한다.
우리는 혼히 인생을, 연극에서 말하는 삼막오장으로써 가늠하기
도 한다. 짐작하건대 우리말의 '막다'도 '막(幕/隱)'의 기능과 관
련하여 비롯된 것이 아닐까. 모든 생물체는 그 기능이 서로 다른
여러 막으로 구성된다. 우선 세포막이 그러하고 나무의 껍질, 사람
의 위막이 그러하다. 우리의 옷도 또한 막과 같은 구실을 한다 종
이에 많은 문화유산이 기록, 보존됨으로써 오늘날 고도의 문화가
이룩된 것 또한, 인간이 식물의 막을 이용히여 종이를 만듦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막다'가 모음이 바뀌어 넉 다'가 됨은 어떠한 의미상의 연관성
을 지니는가. 먹는 행위 역시 삶의 위협을 막는 본능적이고 제일차
적 행위라는 데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예부터 벅 는 걸로 하늘을
삼는다(食以爲天)'고 하여 먹는 것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우
선 먹어야 살고, 그때 비로소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되
니까.
중세어 자료를 중심으로 '막다'의 계열에 드는 낱말의 겨레를 찾
아 보도록 하자.
'막다'계열의 낱말겨레 (중세어)
1) '막 '계 막다((월석), 8-66), 막다 ㄷ다(끝까지 다닫다 ; ((유합),
하 37), 막디 ㄹ다(막히다 ; (어륵), 5), 막ㅈㄹ다((초두해) 16-17),
막키다((소해) 6-15) 등.
2) '먹-'계-먹다((석보), 6-32), 먹다(막다 ; (능엄), 7-43), 먹통
((한청), 309 a), 먹이다((소해), 4-4) 등.
한편 현대국어에 나타난 '막다'계열의 낱말겨레는 훨씬 다양하다.
'막다'계열의 낱말겨레 (현대어)
1) '막-'계-막간(행랑채), 막걸다(노름판에서 가진 돈을 모두 털
어 걸다), 막깎다(머리털을 짧게 깎다), 막나이 (아무렇게나 짠
막치 무명), 막내, 막놓다, 막다르다(더 갈 길이 없다), 막동
이, 막되다, 막바지, 막벌이, 막일, 막살이, 막서다(맞서다), 막
아내다, 막장(갱도의 막다른 곳), 막지르다, 막짠, 마구, 마구잡
이, 마구리 (길쭉한 물건이나 상자 등의 양쭉 면) 등.
2) '먹-'계-먹다, 먹먹하다(귀가 잘 들리지 압다), 먹보, 먹새
(먹 음새), 먹어나다(먹어 버릇하다), 먹어대 다(남을 해롭게 하려
고 자꾸 헐뜯어 말하다), 먹은금(치인 돈의 값), 먹음직하다, 먹
이풀(가축의 사료로 쓰이는 플), 머구리 (개구리), 머그락지 (개구
리) 등
이와 함께 오늘날 지역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쓰이는 '먹다'의
변이형을 보면 입술소리 아래에서 모음이 둥글게 바뀌는 원순모음
화에 따라 '무-'계로 바찝을 알 수 있다. '뭉는다(경상, 전라 대부
분 지역/강원 춘성), 무근다(경남 전역/전남 고흥, 화순), 묵다
(경남 대부분 지역/전남 강진)' 등의 형태가 바로 그러한 보기
이다.
먹는 것은 비어 있는 속을 채워 막음으로써, 삶을 연장tI켜 주는
중요한 작업이다. 군인이 나라를 지켜 주듯 먹는 동작이 우리의 생
존을 지켜 준다. 그러나 사람은 밥과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우리
는 육체의 배고픔뿐 아니라 더 나아가 영흔의 황폐와 부패를 막음
으로써 건전한 삶을 꾸려 나아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하여는 삼시세
때 밥을 먹듯이 영흔의 양식을 하루도 빠짐없이 먹어야 한다.
11. 고움과 원형(圓形)
11-1. 인지 (認知)와 아름다움
'꿈에 세수 그릇을 보면 아름다운 아내를 얻게 된다'고 한다. 물
론 그 말에 필연성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면 기분이 전환되므로 꼭 아름다운 아내를 얻지는 못한다 할지라
도 룽은 일이 아닌가. 세수하는 것은 얼굴을 깨끗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손과 얼굴,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동작이 이루어짐으로써
운동도 된다.
세상 사람들은 나이나 성, 동과 서를 불문하고 아름다운 몸과 마
음씨를 갖기 원한다 사물의 상태가 아주 원만하게 어울려, 예쁘고
고운 모양을 일컬어 '아름답다'고 한다. 키츠가 말한 대로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일 수 있다.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사
라져 가는 아름다운 감정이나 사물들을 보존하거나,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예술이란 미적인 표현 행위를 한다.
사람의 성격이 좋은 것을 원만하다고 하고, 보기에 좋은 것을 곱
다고 하거니와, 아름다움의 가장 기본이 되는 형태는 '등근 모양
(圓形)'과 '구부러진 모양(曲形)'이 아닌가 한다. 아무래도 직선의
고갯길보다는 굽이져 앞이 똑바로 보이지 않는 고갯길에서 상상을
통한 마음의 움직임이 싹트는 법이니까. 우리는 흔히 '각선미가 있
다: 허리가 잘록하다'고 하여 몸매가 아름다운 여성을 표현한다
이 모두가 그 대상의 조화 있는 구부러짐을 아름담게 인식한다는
증거이다.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 형태의 전형은 둥근 모양이다. 사람의
모습을 보라. 어느 것 하나 기본구조가 둥글지 않은 것이 없다. 우
선 눈이나 얼굴이 그러하며 원초적으로 세포의 원형질이라든가 생식
을 위한 난자의 모습 또한 그러하다 이렇게 둥근 모양을 갖추게 되
는 것은 지구가 둥근 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둥근 모습
을 하는 것이 살아가기에 가장 편안하기에 그렇게 되는지도 모른다.
'아름답다'에서 접미사 '-답다'를 떼면 '아름'이 남는다. 이 '아
름'에 대하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알다, 안다
, 아름'과 각각 관련지어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세 어에서는 '아름'에 해당하는 말로 동음이의어인 '아름[私,
抱]'이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름' 에 '-답다'가 붙어 이
루어진 말인 듯하닥. 그러면 파연 동사의 명사형에 '-답다'가 붙어
형용사가 된 경우가 있느냐고 되물을 수 있다. '아름[抱]'은 본시
'안다[抱]' 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명사형이 아니고 파생명사이기 때
문에 그러한 의문은 큰 어려움 없이 줄어나갈 수 있다. 파생명사는
대개의 경우 용언의 어간에 'ㅇ/으'와 '-ㅁ' 이 붙어 이루어지는데
완전한 자립명사로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아 ㄹ [抱]'의 원형은 '안다'이며, 그 듯은 두 팔을 벌려서 껴안
은 둘레의 길이로 풀이할 수 있다. 그 동작으로 보아 두 팔로 껴안
으려면, 즉 안으로 끼려면 팔을 둥그렇게 해야 한다. 구부리는 동
작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두 팔로 껴안아 보고 난 뒤에라
야 그 길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안는 행위는 대상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된다. 또한 자신의 두 팔로써 품안에 넣어
자신의 것으로 느끼고 소유하는 경우도 있으니, 때에 따라서는 자
신만이 아는 비밀스러움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아 ㄹ [抱]' 은 그 동작의 과정이나 결과로 보아 원형의식
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아 ㄹ ' 이나 '알음' 과 상당히 가까
운 의미의 유연성을 띤다. 원형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인식의 자기
화라고나 할까. '아름답다'의 세 가지 가정, 抱 知, 私는 따라서
결코 서로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단,
'알다 ' 를 기본으로 삼는 것은 그 명사령으로 '알옴' 은 보이나
'아ㄹ'은 찾아지지 않아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이 세 형태의 기본
형은 '알-' 이라고 생각한다. '알' 은 동물의 생명을 간직하는
가장 소중한 공간이며 물체로서는 등근 모양을 하고 있다.
'곱다(曲 ; (석보), l1-6)' 도 곱다고 인식하는 본바탕이 '곱음(굽
음)'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곱음은 굴절이요 변화다.
조지훈이 한국의 미의식을 '곱다/아름답다'로 갈래지은 것은 이
러한 의식에 그 터를 둔 것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공감이 가는 풀
이라고 하겠다.
11-2. 그림과 상징
'그림의 떡 ' 이라고 한다. 그밉 속에 있는 떡은 먹음직스러워 보
여도 먹을 수가 없는 것이어서 자기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도 욕구
를 층족할 수 없음을 비유하고 있다.
어떤 물체가 있을 때 그 물체의 모양과 비슷하게 모습을 그리어
나타낸 것을 '그림'으로 풀이한다. 그림은 '그리다'에서 갈라져 나
온 말이다. 중심이 되는 의미는 '사물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며,
부차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뜻을 지
닌다. 마음 속에 어떤 물체나 정황을 그리는 애틋함이 간절할 때
'그립다'고 하며 이에서 말미암은 파생명사는 '그리움'이 된다. 누
구나 무지개 같은 그리움이 피어오를 때 삶의 참다운 보람을 느끼
고 삶이 축복임을 느끼게 되는 것. 또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리
며, 기펴고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사물을 그리는 그림은 원형적인 관점에서 보아 상징성을 갖고 있
다 구체적인 어떤 도상 으로 상징화되는 것이다. ((삼국유사),
의 기록에서 환웅천왕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았다고 기록하
고 있는바, 도장은 하나의 도상이요 상징인 것이다. 도장에
새겨진 그림이 보여 주는 상징은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어
서, 제사장격인 군왕들만이 그러한 상징적인 도상(圖像)을 가졌으
며, 거기에서 진정한 군왕의 권위가 인정되었던 것이다. 필자가 보
기에는 글씨도 그림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의 상
징적인 특징을 살려서 변형시켜, 더 편리한 모양을 갖춘 것이 오늘
날의 문자가 아닌가 한다. 상형문자의 경우에는 이러한 특징이 더
욱 강하다. 표음문자라고는 하지만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를 보
면,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자음을 만들고, 천지인의 삼재 (三
才)를 흉내내어 모음을 만들었다 하니, 이 역시 일종의 그림의 성
격을 강하게 퐁기는 게 아닌가.
바라다보기만 써도 낯익은 태극기는 참말로 우리들에게는 위대한
가치를 드러내는 도상이요 상징이다. 이른바 음양오행에 입각한 우
주의 생성 원리를 따라서, 불과 물을 드러내기 위하여, 붉은색과
푸른색을 써서 태극을 만든 것이다. 천부인과 관련하여 김양기는
(한국의 신화 전설),에서 천부인 세 개를 칼, 방울,거울로 풀이하
고 있다. 이에 대해 박용숙은 ((한국의 시원사상),에서 '칼-산술,
거울-천문지리, 방울-음악'으로 대응할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요
컨대 그림의 본질은 상징이며, 이러한 상징을 드러내는 도상은 특
정한 종교나 집단을 드러내는 징표가 되어 쓰이는 일이 혼히 있다.
지금은 오락 기구가 되었지만, '윷놀이 판'은 단군시대에 자부선생
(紫府先生)이 만든 것으로서, 신성 (神性)을 뜻하는 거북이의 둥에
그려지는 그림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물론 그림에 대한 풀이나 의미부여는 보편
성을 갖는 범위 안에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다.
빛이 있고 어떤 실체가 있으매 그 형체에 해당하는 그림자가 있
기 마련이다. 옛말로는 그림자를 '그리메 ((월석), 9-22)' 라고 한다.
'그리다'와 상관을 보이는 증세어의 낱말겨레에는, '그리다((용가
50), 그리메 ((금강) l51), 그리이다((초두해), 22-46), 그림((초두
해) 16-25), 그림재 ((역해보) 1), 그립다((윌석) l7-15) 등이 있다.
'그리다'는 '글十이 十-다>그리다'이며, 여기에서 '글'은 '긋/
글/굳'의 계열로 간추릴 수 있다. 오늘날에는 지역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분화되어 쓰이는데, 그 꼴은 아주 다양하다. 거렁지
(경북 영주, 안동, 봉화, 영 양), 거름자(강원 삼척), 거림자(전남
장성), 그럼자(경남 합천, 함양, 층무, 거제), 그늘(경남 함양, 합
천, 진양), 그렁지 (경북 군위, 선산, 예천 문경), 그링지 (경북 상
주), 기림자(경북 경산, 군위, 대구/경남 충무 남해/층북 연풍,
단양/전북 임실, 진안, 장계/전남 여수, 순천, 광주, 완도, 영
암, 해남, 진도) 등.
우리 겨레가 하나됨은, 정녕 거리도 멀고 척러 모양의 어두운 그
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나, 계절이 끊임없이 피고 지듯 우리의 하나
됨에의 그리움 또한 마구 솟구처 오르나니......어릴 적 하늘에 높이
아롱져 빛나는 무지게를 보며 그리움을 키우다가, 자라 높은 산 위
에 올라 무지개가 발 아래 드리우매, 몹시 실망한 일이 있다 그러
나 우리의 마음 속에 무지개에 대한 그리움, 곧 하나의 위대한 가
정 흑은 이상이 없을 때 삶은 메마르고 보잘것없어지 리 라.
11-3. 고움과 원형(圓形)
'고운 일 하면 고운 밥 먹는다'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럴싸한 몫을 차지하는 건 아니지만, 대 략 자신이 어
떤 원인 행위를 하였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결정된다. 원천적으
로 좋은 일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이미 보상을 받은 것이니까 고
운 밥은 이미 떼어 놓은 당상이렷다.
겉모양이 산뜻하고 아름답거나 말 또는'소리가 귀로 듣기에 좋을
때 '곱다'는 말을 쓴다. '곱다'에서 나온 고움의식은 둥그렇게 생
긴 원형(圓形)의 사물인식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본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더라도 원형은 하늘의 상징이요, 시간의 순서로 보아
맨 첫번인 자시(子時)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곧은 직선에서
보다는 꼬부라진 길이나 산의 능선을 바라다보면서 마음의 펀안함
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꼬부라져 있는 모습들은 원형에서 그
완성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인격이 원만하다'고도 하며, '예
술이 원숙한 경지에 이 르렀다'고도 한다. 이는 모두 둥그런 원형에
마지막 구경(究竟)을 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곱다'와 첫 음절의 모음이 다른 말로 '굽다'가 있다. '굽다'는
큰 모양의 원형으로 생긴 것을 이른다. '곱다'가 주는 음상이 '굽
다' 보다 작고 귀여우니, '곱다' 가 작은 모양의 원형으로 생긴 것을
이르는 줄을 알 것이다. 따라서 '곱다'는 작은 것이 잘 어우러져
있을 때 느끼는 마음의 만족 곧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겠다.
자연의 누리에는 정말 둥근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이 많이 있다.
당장 우리의 눈과, 손발의 끝부분이 그러하며, 얼굴 또한 그러하다,
봄철이면 다투어 피는 꽃들의 모양이 그러하며, 식물의 열매며 가
뭄 끝에 내리는 빗방울이 그러하다. '곱다'와 한 동아리를 이루는
말로는 '곱다랗다(아주 곱다), 곱다래지다, 곱살스럽다, 곱살하다'
와 같은 꼴이 있다.
방언 분포를 보면 아주 다양한 형태를 확인하게 된다.
'곱다'의 방언 분포
1) 어간의 비읍(ㅂ)이 유지되는 경우-고바서 (경상 대부분 지역/
전남 전역/강원 삼척), 고벙께(경남 층무, 거제), 고붕께 (경남
함천, 거창), 고바(경상 전역/전남 돌산, 여수, 순천 구례/강
원 삼척).
2) 어간의 비읍(ㅂ)이 떨어지는 경우-고아(전라 대부분 지역/
층남 금산), 고옵다(강원 호산), 고웁다(층남 예산), 고읍다(전
북 무주).
3) 기타-미하다{경남 창녕), 야무다(경남 남해), 에쁘다(전남
진상), 예뿌다(경남 산청, 울주/전남 광양), 이뿌다(경남 합천,
창녕, 김해/전남 여수, 순천), 이쁘다(전남 화순, 광양, 진상)
요컨대 어간의 '-ㅂ-' 이 유지되기도 하고 탈락되기도 하며 활용
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가 중세어에서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보자.
'곱다'의 낱말겨레
1) 어간의 비읍(ㅂ)이 유지되는 경우-곱다(曲 ; ((석보), 11-6),
곱돌다((악장), (이상곡)), 곱숑그리다(꼬부리다 ; (가곡원류) p.
26), 곱흐리다((한청), 198 C) 등.
2) 어간의 비읍(ㅂ)이 떨어지는 경우-고ㅂ며뷔트디아ㅎ며 ((월
석), 17-53), 너추른고바((초두해) 15-8), ㄱ장고오ㄷ((초
박해) 상 63), 얼구리고오몬 ((법화), 2-74), 고우닐스ㅅ옴널셔 ((동
동) (악범)) 등.
위의 보기를 보면 오늘날의 방언 분포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비
읍(ㅂ)'이 어말에서 다음 음절 초성으로 이어나는 활용의 과정에서
보존되기도 하고 그러하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주시경 선생은
'-ㅂ-/-순경음 비읍-'의 양계열로 기본형을 재구성하기도 하였다.
11-4. 단단함과 동그라미
마음이 야무지고 단단해야 재물이 모인다고 하여 '단단한 땅에
물이 괸다'는 속담이 쓰인다. 상대적으로, 낭비벽이 있는 사람에게
재물을 모을 수 없다는 내용으로, 무서운 결심과 절약하는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혼히 속이 꽉 차서 실속이 있거나, 약하지 않고 굳센 상태를 '단
단하다'고 이른다. 단단하다는 말은 '단단(團團) +-하다>단단하
다'로 풀이할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하고자 함은 단단(團團)이 드
러내는 물체의 모양이라고 하겠다. 가장 안정되고 견고한 사물의
상태를 '원형(圓形)' 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근원적으로 이땅 위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원형의 지구가 둥글
게 돌아가는 질서의 제약 속에서 그 가치를 실현해야 하기 때문에,
원형지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달이나 이슬과 같은 물체를 묘사한
자료에서 그런 가능성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團團似明月 ((만첩여)),
團團滿葉露(江捨의 時), 心若磨廳月夜團團轉((僧惠洪))].
'단단'은 우리말에 수용되어 하나의 어근을 형성하여 발달하여 가
는 과정에서 파생어와 합성어를 이루며 낱말의 겨레를 만들어 왔다.
낱말의 겨레를 이루는 틀은, 음성상징에 따른 자음의 바뀜으로 일
어나는 것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모음의 바뀜에 따른 분화형태
들의 집합이라 하겠다. 먼저 자음교체에 따른 분화형태를 이루는
말무리는 예사소리와 된소리, 그리고 거센소리의 형태를 뿌리로 하
여 각각의 계열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단단하다/딴딴하다/
탄탄하다'). 이들 형태들은 다시 모음의 교체를 따라서 말의 무리
를 만드니, '단단하다/든든하다, 딴딴하다/뜬뜬하다(방언), 탄탄
하다/튼튼하다'와 같이,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의 대립을 따라서 분
화한 것으로 보인다.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이라고 할 때 '튼튼
(하다)'도 사실은 '단단(하다)'에서 비롯함을 알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옴절의 끝부분(받침)에서 자음의 바뀜을 따라 만들어지는
같은 계열의 이형태 (異形態)들이 있어 홍미를 더해 준다. '딴딴하
다'가 'ㄴ>ㅇ'에 따라 '땅땅하다'로 다시 모음교체를 입어 '땡땡
하다/띵띵하다'로 바뀜이 그러한 경우다. 속이 꽉 차는 그 정도가
강하여 마주 켕기어서 몹시 괭팽함을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땅땅하다'는 모음교체에 따라 '땅땅하다/뚱뚱하다/똥똥하다'와
같은 말로 계열울 늘려 가기도 한다. '탄탄하다, 탱탱하다, 팅팅하
다, 퉁퉁하다, 통통하다'도 역시, 모두가 실속이 꽉 차고 등그런
원 모양의 '차 있음, 원형성'올 특질로 하는 말로, '단단하다'와
같은 겨레의 말로 보인다.
이상에서 한자어 '단단(團團)' 올 어근으로 하여 갈라지는 말의
무리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그러면 고유한 우리말 가운데 '단단하
다'와 같이 왼형 (圓形)을 드러내는 형태는 없었을까. 현대국어에
'둥글다 동글다, 담기다, 담다'와 같은 말들이 있는데, 중세어 자
료의 지명이나 중세어 이전의 형태에서는 '두무(ㄱ)/도무(ㄱ)'의
꼴을 확인할 수 있다. 몇 가지 실례를 들어 보기로 한다.
1) 舊拏山在州南二十里鎭山其日舊拏山者以雲舊可拏引也一云 頭 無岳
峯峯뿜주츠一云圓山((동여) 권 37)
2) 道康郡本百濟道武郡新羅景德王改爲陽武郡((삼사) 35)
3) 耽津郡本百濟冬音縣新羅改耽津縣爲道康領縣高麗改靈쌍 任 內((세
종실록) 지리지 전라도조)
4) 표音山, 효毛曉 豆尾山, 豆땋只, 豆毛山, 斗理, 豆잘領 豆毛
浦 豆無山, 豆廊川, 都麻時, 豆無領, 杜門洞 豆붐洞, 斗흄里,
斗武里,볐無谷(<대동여지도>)
5) 딜둠기 쪼 豆도 푹니 라(陶盆亦可 ; (자초))
d) 두무골(전남 완도), 돔방골(전남 노화도), 두멍 (큰솥, 水鐵大料
貯水者 ; (行吏))
이상의 보기에서 '도무(두무) ~돔[둠(ㄱ)]' 은 둥그런 모양이거나
적어도 둘러싸인 모양의 특성을 드러내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도무[돔(ㄱ)]' 계열보다는 '두무[둠(ㄱ)]' 계열의 형태가 더 많은
보기를 드러낸다. '둠(ㄱ)>둥(ㄱ)[동(ㄱ)]' 의 형태로 갈라져 나아
가기도 하였으며, 모음이 바뀌어 '담' 으로 쓰인 경우도 확인된다.
먼저 '동-'계에 드는 낱말들로는 동그라미 (원 모양), 동그랗다, 동
그래지다. 동그마니(둥글게 따로 떨어져 있는 모양), 동그스름하다
(모나지 않고 좀 둥글다), 동글갸름하다(동근 편이면서도 좀 긴 듯
하다), 동글납대대하다(생김새가 둥글고 납작스름하다), 동글납작
하다(<둥글넙적하다), 동긋하다(동그스름하다), 동글다(중심에서
둘레 가장자리의 거리가 어느 곳이나 같다), 동글반반하다(생김새
가 둥그스름하고 반반하다), 동글동글, 동글리다(동글게 만들다),
동긋이 (동긋하게)와 같은 꼴들이 있다.
한편 '둥-'계에 들어가는 말에는 '둥글다, 둥그렇다, 둥그미, 둥
조리(((역해), 하 19), 둥그스름하다'와 같은 말들이 있다. 다시 '동
-/둥-' 계의 자음음상에 따르는 형태들이 있으니 '똥그랗다(<뚱그
떻다), 통통하다(<퉁퉁하다)'와 같은 보기들이 그러한 예이다. 아
울러 모음교체에 따른 꼴로는 '당그렇다(<덩그렇다)'와 같은 형태
가 있다. 요약건대 '단단' 계의 말은 둥그런 원형에 꽉 차 있는 속
성을 드러내는 것이 중심이라면 '동(ㄱ)-/둥(ㄱ)-' 계는 둥그런 모
양 곧 원형 자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 두고자 하는 것은, 모음의 바꿩에 따라 '돔(ㄱ)-/둠(ㄱ)'
은 '담(ㄱ)-'계의 말로도 발달하여 갔다는 것이다. '담다, 담기다.
담그다, 담다(닮다 ; 동일한 틀 속에 넣어 같은 사물의 모양을 빚어
냈으니까)'와 같은 낱말겨레가 그러한 예이다.
시가 음악적인 상태를 그리워하듯, 모든 사물은 원형에의 지향성
을 가진다. 그러한 지향성은 언어에 되비치어 낱말의 겨레들로 가
지를 벋는다. 가지는 더욱 많은 잎새로 번져 가서 말의 숲을 이룬
다. 그 청정한 빛으로.......
11-5. 두께와 양면성
'두꺼비의 꽁지만 하다'는 말을 쓴다 두꺼비의 꽁지란 얼핏 보
아서는 알아 볼 도리가 없다. 사람의 배움이나 솜씨가 아주 짧은
경우를 이르고 있다. 때로는 게의 꽁지만 하다고도 한다.
두꺼비는 겉모양으로 보아 두꺼운 개구리와 같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의 동물이나 식물 이름 가운데
는 이렇게 모양이나 소리를 흉내내고, 그 뒤에 동작이나 상태의 주
체가 되는 행위자 '이 '를 어울러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
컨대 '따오기 (따옥十-이>따오기), 부엉이 (부헝 +-이>부헝이>부
엉이), 두꺼비 (두껍 +-이>두꺼비)'와 같은 것들이 있다. 이렇게
상징적인 의성어나 의태어를 이용하는 동식물의 이름은, 언어 형성
이란 관점에서 볼 패 매우 생산적임은 이미 누누이 말한 바이다.
한 면과 그에 나란히 가는 맞은 면과의 사이에서, 감각적이든 구
체적이든, 인식되는 넓이를 '두께' 라고 하며, 그 두께가 많은 상태
를 '두껍다'고 한다. 옛말을 찾아 보면 '두껍다'는 '듯겁다((삼역)
9-10), ㄷ텁다((소해) 5-22), ㄷ겁다((월석) 17-53), 두텁다-((훈
해) 와 같은 형태들로 드러난다. 여기서 어간의 기본이 되는 것은
'ㄷ'으로 보인다. '둘-' 은 '둘(ㅎ) ((석보))' 의 표기적 변이형이 아
닌가 한다.
한 면에 맞서는 다른 면과의 사이에 생기는 공간을 두께라고 하
였다. 결국 두 면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사이에 생기는 공간이 존
재함을 요구하는 공간개념이라고도 하겠다. 점심 도시락이라는 말을
쓰거니와 '도시락'은 옛말 '두스락'에서 비롯되었는데, 서재극은 이
와 관련하여 향가 <두솔가(料率歌)>의 '두솔'도 '뭘 싸 둔다' 는 뜻
으로 풀이한 바 있다. 이 말은 바로 '듯'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까 가운데에 어떤 물건을 놓아 두고 다른
것으로 쌀 경우, 그 모양이 직선이든 아니면 곡선이든 심지어 원형
이든 간에 싸인 물체의 겉모양과 나란히 됨으로써 두 개의 면이 생
기게 되며, 그 사이에는 하나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 공간이 두
껍든 ㅇ든 그것은 큰 문제가 안 된다.
야단법석을 떠는 것을 '두스럭 떤다'고 하거니와, 이 말도 결국
은 하나의 물건을 다른 것으로 싸맨다든지, 아니면 갑작스런 도시
락처럼 갑자기 처리하게 됨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받침에 쓰이는 자음의 교체를 따라서 그
형태가 분화되는 일이 있다. 이를테면 '듯/ㄷ/둘' 이 그러한 보기
들인데, '듯/ㄷ'은 앞에서도 형태를 들어 보였거니와 '듯겁/듣
텁-/듣겁-' 과 같이 쓰이다가 오늘에 와서는 '두껍다'로 굳어진 것
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둘' 은 어떻게 플이할 수 있을까. '싸서 가리다, 원을 그
리며 돌리다, 사물을 이리 저리 변통하다, 사람을 마음대로 다루
다, 이치에 그럴 듯하게 하여 남을 속이다'의 뜻을 드러내는 말로
'두르다'가 있다. 이 가운데 '싸서 가리다, 원을 그리며 돌리다,
남을 속이다'와 같은 뜻은 분명 두 개의 평행되는 면을 가지고 있
음을 전제로 하여서만 가능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싸서 가
리다'는 한 믈체를 다른 물체로 가리니 두 개의 면이 생기며, '남
을 속이다'는 겉면과 속이 달라야 속일 수 있으니 이 또한 두 개의
면이 있어야 한다 '원을 그리며 돌리다'도 하나의 공간에 원을 그
리면 결국 그 선을 안과 밖으로 하여 두 개의 면이 이루어진다.
'두껍다'의 방언형으로 '두루막하다(전남 담양)' 형이 있음을 생
각해 보면 '두껍다'가 '싸서 가리다'는 뜻의 '두루막'과 상통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사람들은 앞과 뒤 흑은 위와 아래, 처음과 끝에 해당되는 공간을
인식함으로써 그 두께의 정도를 알게 된다. 다른 풀이로 '듯(듣)' 은
'뒤'와 상관이 있지 않은가 한다. 물건을 두어 둔다고 할 때, 옛말
에서는 '뒷다((월석) 21-118), 듯다((남명), 하 48)' 로 나타난다.
비교언어학적 인 풀이는 그만두고라도 우리말에서 이와 같이 실현
되는 변이형들을 통하여 그 원형태를 짐작할 수 있음은 재미있는
일이다. 이렇게 공간이나 사물을 알아차림에 있어 긴요한 것은, 가
시적인 공간에서 다음 공간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변화이다.
사람이 살아 감에 있어 양면성을 전혀 띠지 많기란 어렵다. 혼히
염치없는 이를 일러 '얼굴이 두껍다'고 한다. 염치를 잃음에 대한
양심의 감자이 무딘 사람이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겉과 속이
서로 다름을 고민하며 가슴 아파하는 사랍들이 많을수록, 우리 사
회는 밝고 좋은 세상이 된다. 양심의 두께가 염치없음의 두께에 비
해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좋은 일이다. 옛부터 '물박후정(物薄厚情)`
이라고 하였거니와, 우리는 진실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인
간다운 누리를 만들어 갔으면 한다.
12. 울림과 진실
12-1. 아리랑과 한(恨)
한국에서 널리 불리는 민요 가운데 아리랑처럼 많은 설화와 변이
형올 갖고 있는 노래는 드물 것이다. 흔히 민요는 어느 민족에서든
지 그 민족 혹은 특정한 지역이나 사람들의 정한(情恨)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다. 혹인 영가의 경우는 그 대표적인 본보기라고 하겠거
니와, 우리나라에서 남존여비, 관존민비 혹은 삼강오륜의 제약으로
빚어지는 한이나 푸념 등이 각 지역의 내방가사를 포함한 민요에서
애창되고 있음은 널리 얄려진 사실이다. 그 중에는 임진왜란이나
동학혁명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마음속에 빚어진 응어리들
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문학이나 노래로 남아 예술이란 옷을 입
기도 한다.
한 개인이 평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한의 응어리가
있겠거늘, 힘이 없고 가진 게 없는 무산대중의 한, 성의 차별에서
오는 여성의 한, 특히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에서 일어나
는 한, 남녀 간의 애정에서 말미암은 응어리진 감정 둥 실로 우리네
삶에는 응어리진 것이 너무도 많은 듯하다.
어느 누가 처음으로 아리랑을 지어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
월이 갈수록 공감대는 더하여 여러 지방에서 즐겨 불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른바 우리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민요 아리랑에서 '아
리 랑'이란 말은 어떻게 쓰인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열 사람이 열 소리 격으로 참으로 많은 풀이가
있어 그 열기를 쉽게 알게 된다. 김지연의 '알영설 (顯英說)', 김재
도의 '아랑설 (阿娘說)' 이병도의 '낙랑설 (樂浪說)', 양주동의 '아
라리설', 이규태의 '아린설', 국어국문학 사전의 '얄리 얄리설'등이
있으며, 주창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가설로서는 '아리랑(我離娘-
처와의 이별을 슬퍼한다), 아이롱(料耳聲- '나는 귀가 먹었다'에
서 유래), 아난리 (我難離-가정을 떠나기가 어렵다), 아미일영 (-
澤, 美, 日, 英을 경계하자는 데에서 유래)'의 주장이 있다. 이 문
제는 다시 정동화에 와서 간추려져 동아리를 짓게 되었는데, 조율
성과 흥을 돋우기 위한 '무의미한 나머지 후렴의 소리'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1977). 물론 아리랑은 한자어가 아니고 고유어의 계통
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선 그 기능으로 보아 고유어 계통의 말로서 음악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한 여음이 아닌가 한다. 문제는 과연 아무런 뜻도 없는
말일까 하는 것이다. 문자의 표기에서, 모든 소리에는, 그 소리가
어휘적이든 문법적이든 간에, 거기에 걸맞은 뜻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리랑의 경우, 특히 밀양 아리랑의 경우에서 '아리아리랑 쓰리
쓰리랑'은 어떤 아픔과 정한이 담긴 실제 어휘 곧 실사의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후렴구로 보인다. 이때 음운의 모음은, 입
을 벌리는 개구도가 제일 큰 아(ㅏ)와 제일 입벌림이 작은 이(ㅣ)
로 구성된다. 자음은 목청떨림 곧 가청도가 제일 큰 리을
(ㄹ)과 이응(ㅇ)으로 짜인다.
그럼 '아이랑, 쓰리랑'의 어휘 또는 문법의미는 무엇인지 ? 문법
의미는 찾아 보기가 어려우며 어휘의미가 그 중심을 이룬다. 비교
언어학적으로 보아 여진어의 '아린'이란 말에서 왔을 가능성보다는
고유한 우리말 '아리다'와 '쓰리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옛말에서 보면 아리고 쓰리다는 말로서 '알슬히다((경민) 23)' 라
는 형태가 있다. 이 말은 '알히다((법화) 2-162) 十슬히다((구급간)
1-12)' 로 이루어진 합성어로서, '알히다'는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을
맞거나 베였을 때 오는 아픔을 이름이요, '슬히다'는 너무도 추워
서 몸이 얼어붙을 때의 괴로움을 이른다.
이렇게 보면 '아리랑'과 '쓰리랑'은 그 어휘의미로 보아 님을 향
한, 이별과 꾸관심에 대한 마음의 아픔, 낙심하고 한심한 상
태를 드러내는 것이며, 소리로 보아서는 모음과 자음의 조화를 통
해 음악적인 효과를 살리는 기능을 이루어 내고 있다고 하겠다. 여
기서 '-랑'은 접속의 구실과 함께 음악성을 살리는 보람을 드러내
고 있다.
삶의 길에 있어 아픔과 낙망은 언제나 있을 수 있다. 검은 구름
같이 몰려오는 시련을 딛고, 다시 그 뒤에 푸른 하늘과 빛나는 해
를 바라서 얼마만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가 이것이 바로 큰
문제요, 풀어 내야 할 명제가 되는 것이다.
아프고 시린 계절에 피는 수선화는 자연의 부름을 좇아 이냥 피어
타는 것을. 아리랑 뒤에 서린 아픔과 시린 정한을 딛고 일어나 새
로운 사랑의 열병을 앓더라도, 우린 소담스러운 의지의 날개로 거룩
한 조물주의 영지에 몇 이랑의 밭을 갈아야 하지 않겠는가. 저 유
명한 예이츠 의 이니스프리는 아닐지라도. 아리랑 고개 곧 아
픔과 시림의 고개를 넘으면 우리가 바라는 겨레의 뜨락에 봄이 올지
도 모르니까.
12-2. 아픔과 통과제의
자신의 팔과 다리, 열 손가락을 깨물어 하나하나 아프지 않은 것
이 없을 뿐더러, 아프기도 마찬가지여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
픈 손가락 있나' 하는 속담이 생긴 듯하다 여러 형제가 있을 적에
부모의 근심은 어느 아들이나 딸에 대하여도 한가지임을 드러내고
있다.
몸이나 마음에 직접 흑은 간점으로 와닿는 괴로움을 일러 '아프
다'고 한다. 몸에 열이 나고 쑤셔서 참기 어려운 생리적인 아픔이
있는가 하면,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나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일어나는 문제, 신 앙산의 이유로 일어나는 문제 등으로 인한 심리
적인 아픔이 있다. 때에 따라서는 앞의 경우보다는 뒤의 경우가 더
윽 힘드는 때가 많이 있음을 우리는 경험하게 되곤 한다. 아픔에는
개인 또는 민족, 더 나아가서 인류의 정황에 매임 없이 뒤범벅이
되는 전쟁, 질병, 천재지변과 같은 극한 상황의 아픔도 있다. 역사
적으로 보아,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군사 등의 여러 문제로 굉
장한 시련에 부닥뜨려, 이 아픔을 슬기롭게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
은 살아 남고, 무릎을 끓고 마는 경우에는 생존의 의미를 잃고 스
스로 자취를 감추거나 다른 사람들의 다스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풀이한 바의 정신적인 아픔(고통)을 교육의 한 덕목으로
과하여서 수도자들을 특별하게 훈련하는 일은 우리의 역사에도 드
러나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 보면 '국가의 비상시에 성을 쌓게
하면서 나이 젊은 사람들을 뽑아 모두 등가죽에 노끈을 궤어 긴 나
무에 매고 날마다 소리지르며 잡아당겨도 아플 줄을 모르게 단련한
다. 이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단단히 하는 이외에 몸을 튼튼하게 하
는데 필요하다(其國中有所爲及官家捨築城郭諸年少勇健者皆쁠흠皮以
大鄕貫之以丈許木鑛之通順呼作力不爲以痛旣以勸作且以爲健)'고 기
륵되어 있다.
요컨대 극기훈련으로써 인재를 기르는 방법으로 삼았던 것이니 아
픔의 통과제의랄까. 필자도 육이오 전쟁 때 어른을 잃었다. 어렸을
때는 그 아픔이 나 흔자만의 시련인가 싶어, 남 모르게 눈물을 흘
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병드신 어머니한테 아버지를 사 오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한다. 자라 어른이 된 지금은 그리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상항으로 보아 그것은 우리 모두의 시련이요 아픔이었다.
다시 그 의미를 생산적으로 플이하건대, 그 아픔의 세월은 오히려
오늘과 내일, 나와 겨레의 삶올 보다 밝게 함에 더욱 값진 토양이
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중세어에 '아프다'는 '알파다((월인) 119)' 였는데, 오늘날의 '아
리다'가 옛말에 '알히다(법화) 2-162)' 로 확인되는 걸로 미루어 아
프다는 '알(ㅎ)+바다>알파다'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알파
다'의 어근 '알(ㅎ)' 은 조류의 알[卵] ((석보) 13-10)을 뜻하는 말
이다. 알에 대한 방언의 분화형을 보면, 히웅(ㅎ)종성이 다음 말
에 이어져 거센소리로 나는 경우로 보아, 증세어 '알(ㅎ)의 분포와
같음을 알게 된다. 알타(경북 영주, 영천, 안동, 봉화, 영양, 울
진, 청송, 대구, 군위, 의성/경남 합천, 거창, 함양, 산청, 진주
, 층무 거제 하동/충남 서천 예산 홍성/층북 제천, 청주, 영
동, 연퐁) 등. 따져 보면 알의 상태로 있다가 그 생명이 자라 더 큰
개체로 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생물은 아주 드물다. 생물학에서
이르는 수정란(씨받이 알)도 알의 상태로 있는 생명이 아니겠는가 ?
알을 낳는 어미의 경우도 그러하거니와 하나의 알에서 나오는 새끼
도 일정한 과정의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동물 중에는 어미
가 알을 바로 자신의 몸 속에다 낳고 그 속에서 까서 기르는 것도
있고, 밖으로 낳은 뒤 자신의 몸으로 품어서 부화시키는 것도 있다.
일정한 온도와 일정한 영양의 공급, 그리고 일정한 방어의 상태
가 이루어져야 그 새끼가 태어나는 것이니, 실로 어미의 엄청난 희
생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잘 돌보아 준 경우에라도 알 자체에
문제가 있으면 새로운 개체의 생명으로 태어나지 못한다. 이럴 경
우 그 어미가 감정이 있는 주체일 때, 자식을 잃어 버린 그 고통,
그 쓰라림은 참으로 작지 않은 것이다.
자신을 회생해 가면서 새끼를 부화시키는 동물도 있다고 하거니
와 자식(새끼) 올 낳아서 기르는 것, 이 모든 과정은 힘들고, 때로
는 자신의 목숨을 거는 엄청난 회생이 따르는 일이다. 어미 닭이
알을 품거나 병아리를 기를 때 가장 사나워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노릇이다.
생물체의 기초적인 본능이 바로 종족보전과 자기의 생명보전에
있음을 생자하면 알을 낳기 위하여, 알을 까기 위하여, 새끼를 기
르기 위하여 아픔과 자기희생을 감수함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
리이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그 많은 동물의 알과 고기 그 많은 새끼
를 잡아 먹고 살아야 하니 이 또한 자연의 섭리이며, 우리 또한 죽
어 땅에 묻힘으로 뭇 플과 나무의 밥이 되니 이 또한 자연의 섭리인
고로 아픔이 전제되는 삶의 과정을 운명이듯 사랑해야 한다.
12-3. 울림과 진실
이제 막 울려고 하는 아이를 잘 달래지는 많고 오히려 뺨을 쳐서
더욱 울게 만드는 것을 일러 '울려는 아이 뺨치기' 라고 한다. 문제
를 쉽게 플어 내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크게 만들어 잘못되거나 어
려운 상황을 더 나쁘게 하는 경우를 비유하고 있다.
본디 울음이라고 하는 현상은 함께 울리는 '공명 (共鳴)' 을 기초
로 하여 일어난다. 교향악의 소리를 포함해서 모든 소리는 함께 울
림으로써 귀로 층분히 듣고 느낄 수 있도록 우리들의 감각에 와닿
는다. 실험음성학적 인 보고에 따르면 한국인의 성대는 약 2센티 전
후가 된다고 한다 부아(폐)로 들어간 들숨이 호흡기를 통하여 나
오는 날숨의 바람이 성대를 울린다. 그 소리는 다시 입 안이나 코
안에서 자음, 모음으로 갈라져서 무수한 떨림을 수반함으로써 함께
울게 하며, 언어학적으로 의미 있는 변별적인 소리 곧 음성을 내게
된다. 여기서 얻어진 일정한 수의 땋소리와 홀소리가 결합하여 음
절을 구성하고 다시 형태소로 인식되어 필요한 정보가 말하는 이에
게서 듣는 이에게 전달되어 간다.
입으로 피리를 불면 소리가 나듯이 우리의 성대도 나오는 날숨을
따라 피리와 같은 작용을 일으켜 인간의 언어활동을 가능하게 해
준다. 생각건대 '울다'는 '불다'싸서 비롯하여 쓰이는 것이라고 본
다. 결국 '불다>울다'와 같이 말머리에서 비읍이 떨어져 만들어진
형태 다..울긋불긋/울며불며'에서 앞머리의 '울-' 이 '불-' 에서 말
미암은 것임을 전제한다면 비읍의 탈락은 인정하기 어렵지 않다.
서재극은 중세어에 나타난 '울다'의 단어족을 '우르다((초두해)
8-56), 울다((월석 10-3)' 로 보고 있다(l980) 이와 함께 '불다'와
관계되는 형태로는 '불다((석보) 11-16), 부르다(자세한 설명
을 하다 ; ((법화) 3-121), 불이다((법화) 7-50)' 가 확인된다. 이어
현대어로 눈을 돌리면 부들부들(>우들우들 ; 몸을 크게 떠는 모양).
부르르(>우르르 ; 갑자기 끓는소리)' 등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공명작용에는 그 바탕으로서 공감(共惑)이 따라야 할 것
으로 보인다. 공감과 공명의 관계는 어떻게 풀이되는 것인지 살펴
보기로 한다. 사람을 가리켜 흔히 감정의 동물이라고 한다. 인간의
감정 곧 마음은 인간행위의 밑바닥이 되며 구심점에 해당하는 것. 이
감정 (마음)은 손짓, 몸짓 또는 말소리 등의 여러 가지 움직임으로
드러나게 된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느낌도 뭔가 다른 모습으로 드
러나게 돼 있다. 우리가 어떠한 자극을 받았을 때 함께 느끼어 형
성하게 되는 공감대에서 비롯되는 공명이 그것이다. 지극한 기쁨이
나 슬픔, 노여움을 만날 때 사람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기도 하며
때로는 울음으로써 그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주체와 객체에 따라
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정감의 밑바닥을 흐르는 굽이에 닿아 함
께 우는 공명을 일으킨 것이라고 하겠다. 우는 아이의 경우, 만져
볼 수도 없지만 정감의 내면에서 어떤 특정한 자극에 대하여 공감
을 하였기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입에서 피 어나는 말소리나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선율이
그렇고 언어의 예술로 불리는 문학의 경우도 그러하다. 목소리는
말하는 이의 입을 떠나 듣는 이의 고막을 울림으로써 말하는 이의
생각과 느낌을 듣는 이에게 전달한다. 바이올린도 공명실을 울게 하
여 어울린 소리로 승화되어 우리들의 마음에 와닿는다. 그러면 언
어예술 곧 문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필 연적으로 싱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느낌 곧 충동을 바탕으로 하여 값진 체험을 예술적으로 처
리보존함으로써, 진실과 아름다움이 어울려 작품을 대하는 사람을
감동시켜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힘의 문학이란 용어를 쓰거니와, 여기서 힘이란 바로 앞에서 이
른바 진실과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되는 공명의 또 다른 표
현일 뿐 결코 그 밑바탕에 있어 앞의 두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의 사회를 계약사회로 규정한다. 계약은 서로가 공감하는
바로써 서로의 행위에 대해 공명에 해 당하는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실로 공감은 공명의 속알맹이가 되며, 공명은 공감의 겉모습(외연)
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다운 삶을 누리기 위하여 공감과
공명은 더욱 생산적으로 이끌어 가야 할 명제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전혀 공감대를 갖지 못한 채 살아 가기도 하며, 공감은
하지만 공명이 없는 부조리한 삶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 또한 우리
들의 마음은 공감과 공명이 있는 삶의 형태를 그리워한다. 전혀 공
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경우는 사람이 모여 사는 모둠살이에서 고
립과 독존의 관계로 나타나며 때로는 사나운 이기주의로 치닫기도
한다. 거기에는 제 스스로를 무너져 버리게 할 수밖에 없는 파멸과
중오의 늪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다. 공명이 없으면서 공감은 하는
상황이 우리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인 수가 많다. 충분히 알면서
도 함께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현실 앞에서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것이 우리네 라의 한 속성이 아닐까. 참으로 공감이 있으면서 함께
공명도 하는 갔있고 보람찬 한 생애를 누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
러나 오롯한 믿음을 향하여 함께 울고 웃으며 아끼고 바치며 애틋
하게 그 길로 가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믿는 진실에 대하여
공감하면서 기꺼이 함께 울리는 자세로써 인간에의 길을 걷는 사람
들이다. 그 길에는 그다지 아름다운 꽃이나 풀도 없다. 그러나 사람
이 가야 할 가장 아름다운 여로이기에 그들은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이와 관련지어 '울다' 와 걸리는 말겨레로는 '울남(울기를 잘 하
는 사내아이), 울녀 (잘 우는 여자 아이), 울대 (조류의 발성기관),
울보, 울부짖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가장 순수한 감정은 슬픔
이라고 하거니와 공감과 공명이 있는 '울음'이 있는 곳이야말로 정
녕 화평으로 가는 길목일 것이다.
12-4. 어이구의 변모
몹시 아플 때, 힘이 들거나 놀라고 원통할 때, 또는 기가 막힐 때
내는 감탄사로서 '아이고(아이구/아이쿠)'가 있다. 부모가 돌아가
셔서 상을 당했을 때 호곡하는 소리이기도 한데 지방에 따라서는
어이구(어이)라고 하는 수도 있다.
필자는 슬픔과 같은 감정이나 놀라움을 표현하는 이 감탄사를 블
교적 배경을 가지고 풀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불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가 이미 천 년이 넘었다. 신라 법흥
왕(514-539) 때부터 호국불교의 국교로서 14세기말까지 이어 왔고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 왔다. 지배층의 문화는 피지배층의 문화 형
성에 동화주(同化主)로서 깊은 영향을 준다고 생자할 때, 블교적인
예식의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장례를 모실 적에 승려들이 혼히 ((금강반야경) 을 읽음으
로써 죽은 자의 명복을 빈다. 49제를 올릴 때도 ((금강반야경), 을
독송하는 것을 혼히 듣게 되는데 그때마다 중간증간에 '하이고, 하
이고'하는 소리가 자주 들려 매우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된다. 불경
을 읽다 보면 어느 불경에서나 이 '하이고(何以故)' 란 말이 자주
나옴을 알 수 있다 일례로 ((금강반야경), 만 살펴보아도 전편에 걸
쳐 약 3o여 회나 나타난다.
하이고(何以故)는 주로 세존(世尊)이나 수보리와 같은 고덕한 선
사와 신도들간의 질와응담, 또는 스스로의 감탄을 드러내는 구실을
한다.
((금강경언해,, 를 보면 '하이고(何以故)' 를 '엇데어뇨' 로 뒤치고
있으니, 다시 말하자면 '어찌 합니까, 어찌된 까닭입니카`의 속뜻을
드러내어 입버릇처럼 상이고 있는 것이다. '엇데어뇨'의 '-어뇨'는
'하다(허다)'의 히웅이 떨어져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 머리에
서 히뭏(i)이 떨어지는 예는 어떠한가. 그런 가능성을 방언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오얄머니 (외할머니의 층
남 논산 방언), 엉가(형의 경남 하동 방언), 오마씨 (할머니의 경남
진주. 사천 방언), 언가(형의 경남 김해 방언)' 등익 예가 있다.
결국 '하이고>아이고~아이구~아이쿠~어이쿠'와 같이 그 모양
이 바뀌었다고 하겠다. '아이쿠(어이쿠)'의 '-쿠`는 '-고(故)'의
소리와 관련이 있는 것이니 지금도 중국어에서 '-고(故)` 는 '-쿠
' 로 읽힌다. '아이고'는 다시 음절이 축약되는 경우와 음절이
첨가되는 경우를 들 수 있으니, '아이 (아이고의 줄임)'와 '아이고
나' 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아이' 는 남에게 무엇인가를 조를 때에
쓰이는 감탄사요, '아이고나'는 어린 아이들의 재롱이나 착한 일을
보고 기특해서 내는 감탄사이다. 하나의 가정이기는 하지만 감탄의
어미 '-고나了-구나' 도 '아이고[何以故]' 에서 비롯하여 어말어미로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간혹 '아이고머니' 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아이고보다 더 간절하게 부르짖는 감탄의 뜻을 드러낸다
이상의 풀이처럼 너 찌된 까닭입니까'의 '아이고[何以故]' 가 감
탄사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예는 많지는 많으나 확인
되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에라 만수'에서의 '에라'는 실망이나
금지의 뜻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기원적으로 '에라`는 지배자
(임금)' 의 뜻으로 쓰였는데 후대로 오면서 감탄사로서 쓰이게 되었
다. (주서 (周書))의 이역전 백제조(異域傳百濟條)에 '왕족의 성은
부여의 계 통이었는데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으며 백성들은 건길
지라 하였다 '하(夏)에서는 왕으로 통용된다(王姓夫餘氏號於羅理民
呼爲鎖놈룽夏言竝王也)'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어라하'는 왕을 뜻
하는 말이었다 민요 성주풀이에서 '에라 만수'하는데 이 뜻은 '임
금님 만수무강하소서'의 의미를 갖는다. 방언에서 그 변이형을 살
펴 보면 '에라, 어라, 얼래 (월래)' 등이 있고 일본어에서도 '에라
이' 란 말이 있으니 '하이고>아이고'의 개연성을 더해 준다
고 하겠다(도수회, <백제어 지명 연구>, 1977).
이처럼 하나의 문화적인 관습이 관습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언어
에 투영되면 언어변화의 질서를 따라 음운 및 형태적으로 바뀌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언어는 그 나름의 길을
가지고 있으니까.
12-5. 쑬개와 쓸림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 때 을바르게 판단을 못하고 이성을 잃은 채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을 비유해 '쓸개 빠진 놈'이라고 한다.
원래 쏠개는 담낭이라고도 이르는바, 간장에서 나오는 담즙을
일시적이나마 담아 두는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담에서 나오는 즙
은, 간에서 만들어져 주머니 같은 담낭에 갈무리되었다가 수담관을
거쳐서 십이지장으로 흐르는 알종의 소화액아다. 지방 효소의 소화
를 도움으로써 음식물에서 얻어 낼 것은 얻어 내고 가릴 것은 가려
낸다. 말 그대로 마당의 쓰레기를 쏠어 내는 빗자루와 같다고나 할
수 있을까. 담낭의 기능을 잘 풀이한 말이 '쏠개'다. 동사어간
'쏠-' 에 접미사 -개'가 더하여 이루어진 복합어이다.
동작을 나타내는 '쓸개'는 중세어에서는 쓸다((석보) 6-6) ' 로
도 드러난다. 중심이 되는 뜻으로는 '비로 쓰레기를 쏠다[掃]'가
있고, 주변적인 듯으로는 '제 일만 깨끗이 해 치우다, 돌림병 따위
가 널리 퍼지다, 일정한 처소에 있는 물건을 모두 그러모아서 독차
지하다' 등이 있다. 흑은 낟알의 껍질을 벗기어 깨끗하게 하는 동
작도 쏠어 낸다고 한다.
쓰레기가 없어야 할 장소에 자꾸만 쓰레기가 쌓인다든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큰 불펀을 겪게 되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 혼
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정화(淨化)란 말을 하거니와 그 핵심은 '쏠
어 깨끗하게 함'에서 멀리 있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의 기
능을 독자들의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카타르시스 로 풀이
한 바 있다. 본래 카타르시스란 설사를 촉진시키기 위한 약제로 사
용하여 왔다. 그러니까 카타르시스란 소화가 잘 되지 않고 배가 아
픈 사람에게 설사약을 먹이어서 배설을 지킴으로써 소화기능의 안
정을 꾀하는 일과 같다고나 할까 ?
우리가 음식을 먹음에 불필요한 독소들이 더러 끼여 들어온다. 이
를테면 중금속처럼 받아들이면 배출할 수도 없는 것이 섞여 들어오
기도 하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어쨌거나 불필요한 물질(쓰레기)
을 '쏠개'에서, '간'에서 쏠어 내고 가려 냄으로써만 생활의 에너
지를 공급받고 살아 가게 되는 것이다. 신진대사라고 할까 ? 하여
간 벼의 껍질을 벗겨 내고 알쌀을 만들어 내듯이 쏠개는 우리 몸이
소화해 낼 수 있도록 깍아 내고 삭여서 반죽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원적으로 보아 '쏠다' 는 중세어 '슬다((능엄), ((원각)) 에서 비
롯한 것으로, 그 표기적인 변이형으로서 '쓸다(증두해), 쏠다(왜
해))' 가 있는데, 이들은 좀더 후대의 표기형태이다. '-슬다'는 원
래 '사라지다. 스러지다'의 뜻으로 쓰이었다.
'쏠다'는 있던 형체가 없어져 버리거나 블필요한 것을 없애 버림
을 뜻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니까 '쏠개'가 소화작용과 관계가 있
음을 생각할 때 음식물이 소화되어 곧 사그라져서 몸의 일부가 되
어 가는 작용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하여 크게 잘못됨은 없을 듯하
다. 원천적으로 소화는 느린 산화, 다시 말하자면 연소작용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으니 본래의 모습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슬다'와 방점표기는 다르지만 같은 꼴에 '슬다(슬퍼하다 ; ((용가),
((두해))' 가 있음도 어느 정도의 상관성을 보이는 예라 하겠다. 바라
고 믿던 것이 무너져 내 리거나, 의지하여 따르며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이 돌아갔을 때 우리는 '슬프다'란 표현을 하는데, 결국 사라
져 감'의 뜻이 그 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슬다'
는 '실다사르다[燒]'의 교체형으로 보인다. '쏠다'를 중심으로
하는 낱말겨레에는 '쏠개, 쏠개머리 (소의 쏠개에 붙은 고기), 쏠개
진 (담즙), 쓸리다, 쏠어들이다, 쏠어 버리다, 쏠음질(물건을 줄로
쓰는 짓), 쓿다(곡식의 껍질을 벗겨 깨끗하게 하다)'와 같은 꼴 들
이 있다.
대표적인 민속 경기인 씨름의 열기가 대단한데, '씨름'도 '쏠다'
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17세기의 문헌자료인 ((박통사언해),
증간본에 '시름'이 씨 름'의 뜻으로 실린 예가 보인다. 짐작하건대
시름'은 '슬다'가 모음의 바찝에 따라 '실다'가 되어, '실-十으十
-ㅁ'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말로 보인다 이후 'ㅅ>ㅆ' 의 변화
에 따라 오늘날의 씨름'이 되 었으리라. 방언에서는 지금도 '쏠개'
를 '씰개 (경기, 강원, 충남 경남 경북, 제주 일원)' 혹은 '씨레
(경기, 강원 층북, 전북, 전남, 경북, 경남의 일부 지역)'라고 말
하는 것을 보면 '스(쓰, 즈,츠,쯔)>시 (씨,지, 치,찌)'의 과정
을 층분히 짐작할 수 았다. 이른바 모음 '으(-)' 의 전설음화라고
부르는데, 이 밖에도 우리말의 발전과정에서 많은 보기를 찾을 수
있다.
그런즉 '씨름'은 '쏠다'에서 비롯한 형태라고 볼 수 있게 된다.
두 사람의 맞수가 붙어 힘을 겨루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쓰러뜨
리면 이기는 것이 씨름이다. 힘과 꾀의 대결에서 강한 쪽이 약한
쭉을 공격하여 이기는 자연의 섭리를 승화시킨 경기라고 하겠다.
언제나 힘이 약한 편은 강한 편의 지매를 받게 되어 있으니 다시
어떤 설명이 필요없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우리들의 쓸개
의 쏠어 내는 힘을 길러 주고 북돋울 일이다. 지나친 허욕과 낭비
나 향락은 건강에 그리 도울이 되지 않을 것이니 삼가할 수밖에 없
는 노릇이다.
12-6 삶과 사름
보통 때에는 서로 잘 모르지만 노름을 함께 해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하여 '사람은 잡기를 해 보아야 그 사람
의 마음을 안다'고 한다. 특수한 한계상황에 부딪뜨려 보면 사람의
마음을 바로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목숨이 있는 사물이 그 목숨을 이어 나아가려고 움직이는 모든
동작을 '살다' 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생물이 존재하는 목적은 자신
의 생명과 종족보존에 있다고 한다. 생명현상은 어떤 면에서 에너
지의 이행과정으로 볼 수 있다. 움직임 자체가 에너지 없이는 아무
런 의미를 갖지 못하고 바라는 바 번영을 약속할 길이 없다. 에너
지는 태양에서 비롯되는바, 태양은 예로부터 불의 상징으로, 삶의
바탕인 대지를 생성시키는 '화생토(火生土)' 의 본거지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대지 (땅)는 용암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부딪혀
쪼개지고 다시 갈라진 부드러운 흙.모래와, 식어서 굳은 바위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화산작용을 따라 용암이 끓어오르다가 물이
흐르듯 엄청난 흐름을 이루고, 거기서 피 어오르는 구름과 같은 수
증기가 공기중에 방울져 엄청난 비가 되어 그 위에 내 림으로.써 삶
의 고향 곧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이 땅에 윤기를 더하고 끝없는 생
명을 너울거리게 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불이 타오르는 화산
을 살아 있는 화산(활화산 ; 活火山)이라고 하거니와, 언어적인 상
상력의 밑바탕은 연소작용 곧 불을 사르는 현상이라고 본다. 불사
름의 현상을 유추하여 살아 있는 생명현상도 그렇게 설명한 것 이다.
꽃이나 얼굴이나 형편이 '핀다'고 표현하는 것도 불이 타올라 환해
지는 현상을 유추한 데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다' 라는 말은
원초적으로 보아 불이 타고 에너지가 정지상태에서 운동상태로 옮
아간다는 뜻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젊음을 불사른다' 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난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살다((원각), 상 2-1 :48)' 가 확인되는데
'살아가다'의 뜻을 드러내는 '살다(生, ((석보) 10-3)' 와 같은 낱말
겨레에 넣을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사람`도 '살다/살다'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이다. 표기적 인 변 이형태로 보이는 말은 '사 람 (석
보, 6-5), 싸람 ((석보, 19-5), 사름((정속), l)'등이 있는데, '사람 `
이 그 중심을 이룬다_ 결국 '사람'은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인데,
어찌 사람만이 살아가는 존재이겠는가. 인간은 만물 중에 가장 보
배로운 존재로 일컬어져 왔거니와, 어찌 보면 이는 철저한 인간중심
의 이기주의적 사물인식이며 독선적인 판단일 수 있다. 그러나 사
람만이 냉 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데에서 그러한 인식의 출발점을
찾아 본다. 거친 음식을 먹고 거친 입성을 걸치더라도 자유로이 살
것인가, 아니면 정신적 고통과 억압을 받을지라도 물질적,풍요를
누리며 살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냉각하는 갈대' 라고 하여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
올 표현한 것일까. 일면 정신적으로, 일면 물질적으로 어떻게 조화
로운 삶을 이루어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
람에게 공통된 과제라고 하겠다.
사람의 속성을 잘 드러낸 몇 가지 전래되는 속언 또는 성구를 찾
아 보면 들쭉날쭉하다.
'사람 살 곳은 골골이 있다'는 착한 사람을 알아주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음을,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태
어날 때부터 인간 모두는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가짐을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
긴다' 는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데에 삶의 목적
을 두었음을, '사람은 키 큰 덕을 입어도 나무는 키 큰 덕을 못 입
는다' 는 큰 인물이 줌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표
현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 자주 변함을 일러 '사람의 마음은 하루
에도 열두 번' 이라 하며, 환경의 중요성을 일컬어서 '사람의 새끼
는 서울로 보내고 마소 새끼는 시골로 보내라'고도 한다.
고등어는 고등어 냄새가 있고 꽁치는 꽁치대로의 냄새가 있기 마
련이다. 참다운 마음과 행실에서 비롯하는 인격의 향기. 그것은 사
람의 내음으로서 가장 찬사를 받아 마땅한 냄새일 것이다.
어원으로 보아 '살다' 는 연소현상을 뜻한다고 하였거니와 '사르
다'에서 음절 사이의 모음이 떨어지고 리을(ㄹ)이 앞음절 받침으로
붙어 '살-' 이 된 것이라 하겠다. 중세어에서 '살다[生]' 는 '사로다
(<동문> 상 63)' 인데, 이 말을 중심으로 하는 낱말겨레에 드는 말
로는 'ㅅ다((석보) 11-43), ㅅ다(生 ; (계초) 26), 삶다(<능엄>
1-81), 살(ㅎ)(<능엄> 8-7)' 과 같은 형태들이 있다.
땅은 화산작용에 따른 과정에서 만들어겼다고 하였는바, '살/할
(흙)'은 같은 말이었다고 본다. 시옷(ㅅ) ~히읗(ㅎ)의 넘나듦은 혼
히 볼 수 있는 예이기 패문이다. 의미상으로 보아도 지구의 살은
흙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살~살'은 표기적인 변이형태로, 점차 다른 뜻으로 분화되어 쓰
이기는 했지만 이들 모두는 '불사름'이라는 같은 속성을 드러내는
말들이다. 한마디로 '살' 은 연소현상 곧 음식을 먹고 마신 그 결과
로 얻어진 것이요 '사르다/살다'는 그 과정을 이르는 것이다.
죽었던 블이 다시 타오르는 것도 '살아난다'고 하며 시들어 메마
르던 플이 단비를 머금고 소생하는 것도 '살아난다' 고 한다. 반대
로 꺼져 가는 것을 '사라진다'고 일컫는다. 물론 보이던 모습이 눈
앞에서 보이지 않음도 '사라진다'고 한다. 이러한 뜻의 전이는 여
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림이나 글 등이 효과적인 인상을 줄 때에도
그 글이나 그림이 살아 있다고 말하게 된다.
'살다'에 연상되는 속담이나 성구들이 있으니, '산 닭 주고 죽은
닭 바꾸기도 어렵다(상대방이 필요로 할 때에 참다운 가치가 드러
난다)라든가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랴',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쉽사리 죽지 않는다)' 또는 '산 호랑이 눈썹
(도저히 얻을 수 었는 것)'과 같은 조상 전래의 말들이 있다.
.살다'와 같은 뜻으로 이루어지는 말의 무리로는 '살려 내다, 살
려 주다, 살맛, 살아가다, 살아나다, 살아 생전, 살아 오다, 사로
잡다, 살잡다(삽러져 가는 집 등을 바로 잡는 것)'와 같은 꼴들이
있다.
혼탁해 가는 우리의 영흔 속에서 살아 오르는 듯한 모습과 목소
리가 차츰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 보아야 하
겠다.
12-7. 사랑과 연소(燃燒)
'믿음이 없는 곳에 사랑의 신은 살 수 없다' 고 하며, '아모레
는 프시케를 버린다'는 서양의 신화가 있다.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가장 값진 인간의 가치는 사랑에 있다고까지 힘주
어 말하는 종교가 있음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의 사랑이 있다. 부모와 형제간의 사랑, 이웃
과 민족에 대한 사랑, 친구간의 사랑,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
절대자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등 참으로 다양
하다. 우리말의 사랑이란 말은 그 밑바탕이 무엇일까 ?
필자는 '사랑'이란 말이 한자어가 아닌 우리 고유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첫째 '사랑 애(愛) ((유합),
하 3)',사랑할 ㅌ((훈몽), 하 33)' 에서와 같이 훈과 음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좀더 자세하게 풀어보자. 한자에 대해 풀이말
(훈)과 한자음(음)을 밝척 적을 때 '하늘 천(天), 돌 석(石), 고마
경 (敬)'등에서와 같이 풀이말과 한자음의 표기가 서로 다르면 풀이
말은 대체도 우리 고유어 계통이며, '군사 군(軍), 공경 경 (敬)'에
서와 같이 풀이말에 한자음이 포함되어 있으면 풀이말은 대체로 한
자어 계통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경우는 고유어 계통이라고 보아
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말의 조어법을 보면 용언의 어간에
'-앙/-엉'이 붙어 명사를 이루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는 점이다.
니 랑 고랑, 노린, 거멍'등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을 '생각하다'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지만 필
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우리 조상들은 '사르다' 란 말을 써 왔다. 불태워 없앰을 이르는
말이다. 혼히 젊음을 불태운다든가 블사른다고 한다. 근원적으로
생명현상은 그 무엇을 불태움으로써 생겨나는 에너지를 통해 가능
해진다. 사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도 일종의 불사르개를
우리 몸에 제공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의 밥통은 변형된 불아궁
이라고나 할까. 소화작용은 느린 산화로서, 갑작스런 파열음이나 순
간적인 고열과 및을 내지 않을 뿐 연소와 매한가지다. 불사름이 끝
나는 날, 그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 어두운 영계로
돌아간다.
필자는 생명현상을 반영하고 있는 이 '살다[燒]' 에서 '사랑'이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살-+-앙>살앙>사랑'의 과정을 거쳐
'사랑' 이 된 것이다. 즉 사랑이란, '불을 사르는 것' 이라는 본래의
의미에서 '애틋이 여기어 위하는 마음'의 뜻으로 승화된 것이다
자신을 불태움으로써 말미암을 수 있는 것이니 사랑은 참으로 숭고
한 마음이 아닌가. 또한 블사름은 생명현상의 본질이니, 사랑은 삶
의 가장 큰 명제라 할 것이다 누가 사랑을 일러 차갑다, 어둡다,
고깝다 할 수 있으리오.
12-8 옷과 위
몸에 걸치는 옷은 새것이 좋아 보이고 사람은 오래 사귀어 정이
두터울수록 좋다 하여 '옷은 새옷이 좋고, 임은 옛임이 좋다' 고 한
다. 흉하지만 않다면 때묻은 옷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때가 종종 있
기는 하지만.
피륙과 같은 천 따위를 몸에 걸침으로써 추위와 더위를 다스리거
나 몸뚱이를 가리기 위하여, 사람이 입는 물건을 '옷'이라 일컫는
다. 옷을 입는 까닭이 몸을 보호하려는 실용적인 측면에 있든, 아
니면 보다 멋있게 꾸며 보려는 인간의 심미적인 자기표현 욕구에
있든 '옷'은 그 위치로 보아 본래의 몸 위에 덧붙여 입는 물건이라
고 하겠다. 옷은 그 옷을 입는 사람의 몸 자체는 아니라고 하더라
도 그에 버금가는 중요한 꼼의 종속물이라 할 것이다. 누가 감히
옷을 걸치지 않고서 거리를 다니고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장소와 시간에 따라서 입는 옷이 다르듯이, 예의를 생각하는 사림
들의 의식은 그 의식만큼이나 여러 가지의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웃을 만들어 낸다 요컨대, 옷은 우리의 몸 위에 걸쳐 따라붙이는
종속물로서의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옷은 어떤 말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떻게 갈라져 나아갔
는가. 우선 중국 자료 몇 가지를 살펴 보기로 하자.
1) 공회의 의복은 비단에 금. 은으로 장식을 했다. (其公會衣服붐
銃憲金銀以 自飾 ; ((三國志,,)
2) 백제의 언어는 고구려와 거의 같았다. 모자를 관이라 하였고 소
매를 복삼이라 했다. (今言語略與高麗同呼帽日冠嬌日複떴, ((梁
書),)
3) 신라어는 백제어와 비슷했다.-증략-모자를 고깔, 소매를 우개
라 부른다. (新羅言語待둠濟而後通-中略-冠日遣子禮儒日射解 ;
(梁書))
1)에서는 고구려가 복식에서 상당히 앞서 있었음을, 2)에서는 복
삼,관 등의 복식 용어가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
면 3)의 신라조에서 '遣子禮'는 '고깔' 을, '射解'는 '옷(방언
형으로는 우티/우치/오티)'을 나타내고 있다. 이로 보아 오늘날
의 '옷'은 신라말 계통이 아닌가 추정된다(김동윽, <한국 복식사
연구>, l973). '옷'이 신라어 '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생자을 뒷받침해 주는 증빙자료로서는 오늘날 각 지방에서 쓰고 있
'옷'의 방언형들을 들 수 있다.
'옷'과 관련한 방언 분포
1) [ㅇ/옷]-우리나라 전역
2) [우티]-경기 연천, 김포, 강화, 가평/강원 강릉,명주 삼
척, 원주, 횡성, 원성/횡남 순천.
3) [우테]-황해 장연 은율, 안악,재령,서홍/평남 중화.
4) [오트이]-황해 연안,해주
5) [우트이]-경기 개성, 장단/강원 양양/황해 김천, 옹진, 태
탄, 황주, 신계, 수안, 곡산/함남 신고산,안변, 덕원 문천,
고원, 영흥, 정평, 함흥 오로, 신홍, 흥원, 북청, 이원, 단천,
풍산 갑산 혜산/함북 성진, 길주, 명천, 경성, 나남, 청진,
부거, 부령, 무산, 회령, 경성, 경원, 경흥, 웅기/평북 박천,
영변, 회천, 구성, 강계, 자성, 후창, (김형규, ((한국 방언 연
구), 서울대출판부, 1986.)
위 자료들을 미루어 볼 때 오늘날의 '옷'은 '射理[우(ㅎ)>옷]'
과 '우티 (오티)'의 형태들에서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우티
(오티)' 의 변이형들은 어말모음의 탈락과 함께 '옷'으로 굳어진 것
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맙에서도 지적한 바 '몸 위에 걸
치는 물건'이라는 옷의 속성을 잘 나타내 주는 보기라 하겠다. 방
위로서의 위 를 드러내는 방언 가운데서도 신라어의 '射解[우
(ㅎ)/위개]'와 서로 통하는 말들이 쓰이고 있다.
'위' 와 관련한 방언 분포
1) [위]-우리나라 전역.
2) [우]-경기 연천, 파주, 강화, 용인/강원 속초, 양양, 강릉,
명주 삼척/충북 층주 층원, 괴산, 옥천 영동/층남 서천/경
북 울진, 영주, 청송, 영덕, 예천, 상주, 의성, 포항, 군위, 영
천, 금릉, 경산, 경주, 청도/경남 양산, 울주, 함안, 진주, 합
천, 하동, 사천, 고성, 통영, 층무, 동래 김해, 부산, 창원
3) [우 :]-경북 봉화, 안동.
4) [우이]-경기 김 포.
5) [우그]-전북 익산, 부안, 고창, 정읍.
d) [우구]-전북 전주.
7) [우게]-전북 익산, 고창, 순창/전남 영광 장성, 담양, 곡
성, 구례, 광주, 함평, 목포, 나주, 화순, 순천, 광양 여수, 장
흥, 강진.
'위'의 _방언 형태를 통하여, 신 라어에서 '옷' 을 가리키는 '射解 '
가 방위로서의 '위' 의 변이형 '우게/우구/우그'와 그 형태가
서로 비슷함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서 다시 한번 '옷' 이라
는 말이 '몸 위에 걸치는 것'이라는 특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게
된 다.
일본어 자료 가운데 상고어인 '오스히'도 우
리 옛말 '오티 (우티)' 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학계의 지적도 있다.
몸 위에 걸치는 것이면 모두가 '옷' 이 었지만, 차츰 분절되어 바
지 ((역해보), 저고리, 치마 등의 기능화된 하위 범주로 갈라져 나
아가게 되었다. 김동욱에 따르자면 '저 고리'는 몽고어 '져거덕치'
에서 나온 말로 고려 이후의 형식으로 보이며, '두루마기'도 몽고
어 '쿠루막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치마[裳]' 는 중국어 계
통의 말일 것으로 보고 있다.
'옷[衣]' 과 '옻[漆]' 을 중세어에서는 다 같이 '옷'으로 표기하고
있다. 성조적 (聲調的)인 차이는 있었지만 두 말은 동음이의어였던
것이다. 가구에 칠하는 도료로서의 '옻'은 어떤 일정한 물체 위에
색을 더함으로써 시각적인 효과를 얻어내기 위하여 사용한다. 우리
몸 위에 걸쳐 입는 '옷'이나 가구에 칠하는 '옻'은 모두 원래의 물
체에 덧붙인다는 속성을 갖고 있으니, 그 형태의 비슷함도 결코 우
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즉 '옷'에서 '옻[漆]'으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옷'이 '옻'으로 된 것과 '옷'이 '옻'의 한자음
인 칠 (漆)'로 된 것 둥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옷'
과 '옻'과 '칠'의 중세어와 현대어 자료들을 통해서 그러한 가정들
을 확인해 보도록 한다.
'옷[衣]' 의 낱말겨레
1) 중세어 옷爲衣((훈례) 종성해), 옷ㄱㅇ(衣料 ; ((역해보), 40),
옷ㄱ외 (衣裳 ; (초두해), 7-5), 옷가숨((초두해) 20-45), 옷거
리 (衣架 ; ((동문), 하 15), 옷거족(衣面 ; ((동문), 상 56), 옷것섭
((역해보), 40), 옷고흠(옷고름 ; ((사성), 상 39), 옷긋(
(유합), 하 16), 옷길(옷길이 ;(역 해) 하 6), 옷단(衣料擇 ; ((한청)
330 a), 옷자락((한청), 330 C), 옷홰 ((소해), 2-50), 옷ㅅ매 ((유
합) 하 14) 등.
2) 현대어- 옷, 옷가슴(가슴에 닿는 옷의 부분), 옷가지(몇 가지
옷), 옷감, 옷갓(윗옷과 갓 ; 衣冠), 옷걸이, 옷고름, 옷기장(옷
길이), 옷깃차례 (시작한 사람의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차례), 옷
단(옷의 자락, 소매, 가랑이의 가장자리를 안으로 붙이거나 감친
부분), 옷매무시, 옷보(옷을 싸는 보), 옷섶 (저고리나 윗옷의
섶), 옷솔, 옷엣니 (옷에 있는 이), 옷자락(경상도 말로는 오지
랍 또는 옷질앞). 옷치레 (종은 웃을 입고 옷을 가꾸는 것) 둥.
'옷[衣]'에 관한 말들 중, 중, 근세 어의 자료에서는 보이나 현대
어 자료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몇몇 있다. '옷거족(옷것), 옷
것 섶, 옷홰'등이 그것이다 '옷홰'의 경우는 '옷걸이'와 같은 뜻으
로 쓰인 말이었으나, 동의충돌의 결과, 죽은말이 되어 버린 경우이
다. 한편 형태는 음운변천에 따라서 조금 바뀌었으나, 같은 뜻으로
쓰이는 보기도 확인되는바, '옷가ㅅ>옷가슴, 옷가ㅇ>옷감, 옷거
리>옷걸이, 옷골흠>옷고름, 옷긋>옷깃, 옷쟈락>옷자락'과 같은
형태들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옷가둠'은 원래는 옷소매의 뜻
으로 쓰이었으나, '옷가ㅅ'에서 발달한 형태로 보이는 '옷가슴'이
현재는 가슴에 닿는 옷의 부분'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니, 뜻이
바뀌어 오늘에 이른 형태라고 하겠다.
새로이 만들어져서 상이는 것들로는, '옷가지, 옷갓, 옷매무시,
옷보, 옷섶, 옷치레, 옷장, 옷좀, 옷좀나방' 등이 있다. 여기 '옷
갓'의 경우는 '의관(衣冠)'을 뜻하지만 그 싱임은 아주 제한적이어
서 찾아 보기 어렵다. '옷치레' 는 겉만 꾸미는 '겉 치레`와 같은 뜻
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겉 치레'가 더 많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
인다. 옷과 관련하여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으로는 경상도 방언에
'오지랖 넓다' 라는 것이 있다. 실속도 없이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보이며 선심을 쓰는 경우를 이르는데, 바로 '옷자락'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제 '옻[漆]' 과 관련하여 중근세어 자료와 현대어 자료를 살펴
보기로 한다.
옻[漆]'의 낱말겨레
1) 중,근세어-옷(漆 ; (법화), 1-219, (초두해), 8-31), 옷것 (옻
칠한 물건 ; (소해), 6-10), 옷곳ㅎ다(향기롭다 ; ((남명), 하 7),
옷나모((훈몽)상 1O), 옷칠((번소), 10-32), 옻((태산집요), 53)
등.
2) 현대어-옻(옻나무 진이 피부에 닿아 가렵고 부풀어 오르는
피부중독의 한 가지), 옻기장(검은 기장), 옻나무(약용 및 염료
로 쓰임), 옻칠, 옻타다(살갗이 옻의 독기를 타다) 등.
형태 변동으로 볼 때 '옻'은 옷>옻'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말이다. 중근세어의 옷은 '漆' 곧 검은 칠을 하는 염색의 뜻으로 쓰
이었으나, 현대어의 '옻' 은 옻나무의 진으로 말미암는 '皮膚中壽'
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결국 '옷>옻[皮膚中毒]`
이 된 셈이다. 지금은 쓰이지 않으나 중세어 자료에 보이는 것으로
는 '옷것, 옷곳ㅎ다' 가 있으며, 현대어에서만 쓰이는 말로는 '옻기
장, 옻나꾸, 옻타다' 등이 있다. 결론적으로 볼 때 '옷'파 '옻' 모
두 '겉에다 더 입힘'이라는 속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 하
겠다.
'옷, 옻'과 함께 중세어.현대어에 나타난 '칠 (漆)'의 낱말겨레를
살펴보도록 한다.
'칠 (漆)'의 낱말겨레
1) 중세어-칠ㅎ다(옷칠 한것, (번소), 1O-32), 漆은 오시라((법화),
1-219), 옷칠((유합), 상 26) 등.
2) 현대어- 칠 (도료로 쓰는 물질), 칠공(칠장이), 칠그릇(칠기)
칠독(옻의 독기), 칠립 (옻칠올 한갓), 칠목(옻나무), 칠물(옻칠
을 한 기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칠박(칠올 한 함지박), 칠붓
(옻칠을 한 부채), 칠실 (어두운 방), 칠야(캄캄한 밤), 칠일 (칠하
는 일), 칠장(칠을 한 옷장), 칠전 (옻나무 밭), 칠창(급성 피부
병), 칠판(혹판), 칠포(칠을 한 헝겊), 칠피 (에나멜을 칠한 가
죽), 칠함(칠을 한함), 칠화(옻칠로 그린 그림), 칠흑같다 등.
현대어의 경우를 볼 때, '옻' 보다 '칠'의 낱말겨레가 횔씬 많옴
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색깔에 관계없이 '칠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검은색'을 뜻하는 '칠'이 색칠의
원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칠서 벽경 (漆晝壁經)'이라고 하여 오래
된 경전을 옻진으로 써서 보존한 까닭에 생긴 말이다. 지금도 고급
스러운 옷장에는 옻칠을 한다. 색깔도 뭏거니와 향기 또한 좋아서
가구에 많이 사용하게 된다. 겉만 보기 좋게 꾸민 것올 겉치레'라
고 한다. 이 표현 역시 컬만 보기 뚱게 색칠을 하다 에서 '겉을
칠하다' 로. 다시 '겉치레'로 바젼 것으로 보이나, 속단하기는 어렵
다.
이제까지의 줄거리를 추려 본다면, 중세어의 '옷'은 '衣. 漆'의
의미를 다 드러내는 말이었다. 이 형태는 문헌 또는 방언의 분포로
보아 방위를 드러내는 위의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쓰였옴을
알 수 있었다. 뒤로 오면서 의복은 '옷'으로, 칠울 하는 재료, 혹
은 피부질환은 '옻' 으로 갈라져 쓰이게 되 었다. 이와 함께 주목할
형태는 '칠 (漆)'로서, 이는 '옻'을 훈(뜻)으로 하는 한자어이다.
오늘날 '검은색'이나, 검은색과 관계 있는 사물을 드러내는 말의
대표적인 꼴로 쓰이게 되 었다. 이러한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면 그
결국 '옷을 입다'나 '옻칠을 입히다'나 '칠을 하다'나 모두 '어
떤 사물(사실) 위에다 무엇인가 다른 것을 입힘'을 속성으로 하여
발달해 나아간 말들이라 하겠다. 형식과 내용의 관계가 매우 가까
운 것이라고 볼 때,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의식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들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겠다. 자칫하면 속과 겉
이 다른 가치를 드러내기 쉬운 일이니까. 그래서 칼라일은 그의 '의
상철학'에서 사람은 가면을 벗는 데에서 삶의 진정한 실마리를 찾
게 된다고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옷을 중심으로 하여 꾸미는 정도
에도 적절성을 부여할 수만 있다면, 그 또한 우리 인간들의 삶을
너그러이 빚어 낼 수 았을 것이다.
담 대신에 풀이나 나무 등을 얽어서 집을 둘러막거나 경계를 가
르는 것을 '울(울타리)'이라고 하는데, 이 말도 옷과 같은 낱말겨
레에 드는 분화어로, '위' 의 뜻을 의미소로 하는 형태이다. 짐
승을 가두기 위하여 둘러막은 공간을 '우리' 라고도 한다. '소 우리
, 돼지 우리, 염소 우리'가 바로 그러한 이 름들이다.
'울/우리'는 한정된 공간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었
다고 하겠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운명지워진 공간과 시간에서 실
고 있다. 너와 나를 함께 뭉뚱그린 복수의 개념으로서의 '우리' 또
한 소 우리의 '우리'와 같은 말에서 발달하여 다른 뜻으로 갈라져
나간 형태라고 하겠다. 물론 우리말의 인칭대명사에 나와 너를 함
한 호펑이 없어 이른바 보충법에 따른 공간을 가리키는 '우리'가
인칭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니까 특정한 공간을 바탕으로 하
여 특정한 공간에 사는 사람들을 합쳐서 그냥 '우리' 라고 했으니,
마치 당호(棠號)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나 같다고 하겠다
'우리' 와 관제를 보이는 말에는 '우리구멍 (논물이 빠지도록 뚫은
구멍), 우리네, 우리다(특정한 공간에서 짐승을 기르듯이 물건을
물에 담가 맛. 빛이 물에 플리게 하는 것), 우리들, 우리말, 우릿
간(우리로 사용하는 간)' 둥의 형태들이 있다.
한편 '울/우리'와 관계된 증세어 자료를 들어 보면, '울(ㅎ) ((훈
례) 용자례), 울밋((청구), p. 63), 울섭 ((역해보), 14), 울히다(
(송강) 2-12)' 등이 있다. 이때 '울'은 형태론적으로보아 히웅(ㅎ)
특수곡용을 하는 명사로 확인된다. 한편, 현재 쓰이고 있는 방언형
을 보면 '울-'계가 장형화하여 쓰임을 알 수 있다.
'울-' 계의 방언 분포
1) [우리]-경북 선산, 문경, 상주, 김천
2) [우타리]-경남 하동/전남 장성,나주
3) [우따리]-경남 거창, 양산
4) [우딸]-경북 영주,청송,청도
5) [울다리]-경남 함안, 창녕
6) [을타키]-경남 대부분 지역/충북 영동,옥천, 층주,제천/
전남 여수, 순천, 광양, 진상, 구례, 장성, 나주, 광주, 완도
장흥 영암, 영광, 함평, 목포, 해남, 진도, 강진, 화순, 보성,
고흥/강원 영월, 정선
7) [을따리]-경북 포항, 대 구/경남 합천, 밀양, 창왼, 창녕, 김
해/층북 음성/제주 전역
8) [울딸]-경북 안동,영천
9) [웃다리]-경남 거창
'울타리'가 폭넓게 쓰이고 있으며, 경상도 지역에서는 '울'의 '리
을(ㄹ)'받침이 탈락하여 쓰이는 경우도 눈에 뜨인다.
우리는 한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배 달 겨레이니, '우리'는 배달
겨레의 정신을 지키는 공동체 의식의 공감과 공명의 현주소이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아들과 딸들이 겨레의 울타리(우리) 안
에서 아주 탐스럽고 그윽한 향기가 있는 영흔의 누리를 빚어 나아
갈 수 있으리라.
12-9. 집과 플
거처하는 집이나 재산도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님을 일러 '집
도 절도 없다'고 한다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집은 동물이나 사
람에게 삶올 이어 가는 중요한 장소가 된다.
사람이 거처하는 장소나 동물의 보금자리, 흑은 겨레붙이의 한
떼나 물건을 담아 두거나 끼워 두는 도구를 통틀어 '집'이라고 한
다. 이 가운데에서 '보금자리'는 새가 깃들이는 둥우리를 뜻하는
말로서 비유적으로 지내기가 매우 포근하고 핑화로워 아늑한 곳이
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 가면 집의 형태는 대체
로 굴이나 나무숲과 같은 곳에 자리잡은 보금자리의 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서 (辰書))의 기록에 따르면 동이(東夷)는 여름에는 둥
우리(보금자리)같은 나무 위에서, 겨울에는 굴에서 살았다(夏則眞
居冬則穴處)고 한다. (삼국지)에는 그 굴의 깊이가 사다리 아홉 개
가 들어갈 정도의 큰 무덤과 같은 집이 있엇다고 전해 오기도 하
며, (후한서)에는 흙으로 방을 만들었는데 마치 무덤과 같았으며,
그 위에다 문을 만들었다(作土室形如뭄閑戶在上)고도 한다.
이상의 기록에서 집 '과 연계지을 수 있는 것은, 숲 속 나무 위
의 둥우리 모양의 집 (보금자리)이 아닌가 한다. 한마디로 '집'은
'김'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김'은 홍조류의 바다플로서 종이처
럼 얇게 떠서 말려 가지고, 불에 구워서 먹는 반찬의 한 가지이다.
동음이의어로서의 '김 '은 '기음'의 준말로, 논밭에 나 있는 잡플을
말한다. 보통 농가에서 '김을 맨다' 고 할 때의 김이나 먹는 김이나
본질이 풀임에는 모두 같다. '김'에서 '집 ' 에 이르는 국어학적인
풀이는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김'이 입천 장소리되기를 따라서
'짐 '이 되었다가 음절의 끝소리가 같은 입술소리 계열에 따른 자음
교체를 함으로써 '집 '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집'은 음절의 끝소
리가 바뀌어 '짚'이 되기도 한다 지금도 지역에 따라서는 '김'을
'짐 (쓰인 예 ; 짐 먹는다)'이라고 하는 것을 그 근거로 들 수 있으
며, '집/짚'의 관계는 '짚'이 중세어에서 '집 ((유씨명)' 으로 기
록된 것으로 보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결국 '김'에서 비롯한 '짐/집/짚'은 모두가 하나의 낱말겨레인
데. '풀'로서 그 기본적인 의미소를 가정할 수 있겠다.
그러면 '김'은 풀로서, 거처하는 집과 관련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떤 형태에서 발달한 말일까 ? 우선 방언분포를 살펴 보도록 한다.
'김'의 방언을 알아 보면, 기음(층청, 전북 강원), 기 임(강원
호산), 거울(경남 거창), 기심 (경북 안동, 봉화, 영양, 청송, 영
천), 김 (경북 청송 영천, 군위, 왜관/전남 영광, 함평, 목포, 나
주 광주), 지슴(경상, 전라, 제주), 지섬 (경남 진주), 지심 (경상
, 전라, 제주), 풀(경북 문경/경남 밀양, 울산 양산, 마산, 층
무), 풀(경남 부산 김해), 짐 (충남 예산, 논산/전북 진안, 장계
, 이리/전남 헤남, 장흥) 등과 같은 꼴이 있다.
방언의 보기에서 '김' 은 '기 음, 기임, 기심, 김, 지슴, 지섬, 지
심, 짐 풀, 품'의 변이형으로 실현되고 있다. 여기서 '기심(>지
심,지슴,지섬)-기 임(기음)-김 (>짐)'으로 발달해 왔을 가능성
을 엿볼 수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기심'이 '깃'에서 발달한
말이 아닌가 한다. '새가 깃들인다' 는 말이 있거니와 이때 '깃 ' 은
둥우리 보금자리가 있는 풀숲(둥우리)으로 풀이할 수 있다 '깃'은
'굿' 의 부분에서 보인 바와 같이 '굿(>궂)/굳/굴/곳(>곶)/곧
/골, 깃/긷/길'의 대립 체계를 이루는 낱말의 떼로 이어져 나아
간 것이다. 중세어에서 기둥을 '긷((내훈) 서 4)' 이라고 하거니와,
'깃/긷/길' 은 하나의 말 겨레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지금도 짐
숭을 가르쳐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부리기 편하게 함을 '길들이다'
라고 하는데 이때의 '길'도 그 바탕은 거처하는 곳의 개념에서 멀
지 않음을 드러내 주고 있다. 거처하자니까 오고 감이 있기 마련이
고, 특히 씨족사회와 같은 혈연성이 강조되는 집단생 활에서는 서로
단합해야 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서의 길이 있어
야 함은 물론이다.
재료를 들여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건물 따위를 세우는 것을 씻
다'라고 하는데, 이때 '짓-'도 깃>짓'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
르러 상이고 있을 가능성이 보인다. 증세어 자료의 '깃깃다(등지를
틀고 살다 ; ((초두해), 15-7), 깃다(풀이 무성하다, ((남명) 하 35),
깃다(깃하다, (남명), 하 16), 깃(羽 ; (삼역) 9-15)' 등을 보면 결
코 '깃_>짓-'의 '짓-' 이 집의 개념과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집
을 세울 때 믈론 여러 가지 재죠가 드는데 그 증의 하나가 '깁'이
라고 본다. '깁'은 비단의 뜻으로 쓰이었으나, 원래는 풀을 의미하
는 '김/깁/깊'의 낱말겨레에서 발달한 말이니 결국 '김'은 '깁/
집_' 계로 나뉘어 발달해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형용사 '깊
다'도 수풀과 연관을 지어 풀이할 수 있을 듯하다.
숲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식물의 서식처(보금자리)였으며, 삶
을 이어 가는 바탕이었으니 집이란 말이 풀숲을 뜻하는 말에서 말
미암았음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삼국유사)의 단군에 대한
기록을 보면 '소도(蘇塗)' 가 나오는데 이는 제사를 모시는 제단이
있는 숲(나무)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성경)의 창세기에도 에덴
동산은 생명을 만든 거룩한 숲속이었고, 석가모니가 해탈득도한 곳
도 숲속의 보리수 아래였다. 또한 우리의 '소도'도 박달나무로 전
해 오는 신단수(神壇樹)가 있는 숲속이었음을 돌이켜 볼 때, 집과
수풀(나무)과의 관련성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소박한 의미에서 모든 식량은 풀의 열매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때,
풀과 나무로 뒤덮인 수풀은 목숨살이의 상징이라 하여 지나침이 없
다. 초식성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육식성 동물의 경우도 마찬가
지다. 초식을 하는 동물을 먹이로 해야 하니까. 동물이 먹고 사는
의미는 풀(수플)이 있음으로 해서 살아난다. 이를테 면, 먹고, 입고,
사는 그 모든 팥동과 과정이 수풀에서 말미암았다면 어떨지. 정말
숲은 거룩한 곳인 반면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이 더 탐스러운 열매를 얻기 위하여는, 숲이
있는 자연과 함께하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생활화해야 한다. 숲은
생명의 고향이니까.
'집 '과 관련이 있는 낱말에는 '집, 집가시다(사람이 죽은 집을,
무당으로 하여금 악기를 물리치게 하다), 집가축(집을 매만져서 잘
거두는 일), 집다(물건을 집 속에 넣게 하니까), 집게, 집게손가
락, 집팽 이, 집구석, 집나다, 집내다(살던 집을 비우다), 집다, 집
더미, 집세, 집사람(자기 아내를 겸손하게 일컫는 말), 집들이, 집
알이 (집구경 겸 인사로 찾아 보는 일)' 와 같은 꼴들이 있다
'집'과 같은 낱말겨레에 드는 '짚/짐'을 증심으로 하는 말들에
는, '짚 (이삭을 떨어낸 줄기), 짚가리 (짚의 더미), 짚나라미 (새끼
등에서 떨어지는 너더분한 부스러기), 짚다('깊다' 의 경상, 전라,
충청, 함경 강원도 방언), 짚단, 짚등우리, 짚등우리 타다(못된
판원을 백성들이 짚둥우리에 태워 몰아 내는 것), 짚믓(짚단), 짚
북더기, 짚신 (함경, 강원도에서는 짖세기), 짚볼/짐장('김장'의
경산, 강원 함경도 방언), 짐짝, 짐치 ('김치'의 경상, 강원, 제주
, 전라, 층청, 함경도 방언)' 등이 있다
우리는 영원한 삶의 집을 바란다. 그러기 위하여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견고한 숲을 이루도록 마음을 모아 자연과 함께하는 더
불어 살기를 힘써야 한다. 풀로 만든 숲 속의 집이 이제 완전히 바
위굴의 변형된 짐으로 바뀌어 사는 세상이니 우리의 정서가 점차
메말라 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생명이 살아 숨쉬는 그런 집을
가꾸어 나아가야 한다.
12-10. 웃음과 드러냄
농담으로 한 말이 잘못되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다 하여 '웃느
라 한 말에 초상 난다'고 한다. 함부로 말을 하지 말고 말은 지극
히 삼가야 됨을 강조하고 있다 반대로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는
말은 적절한 때와 장소를 가려서 다른 사람에게 해 주는 것이 횔씬
생산적일 때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음이 기쁘거나 즐거울 때, 또는 기가 막힐 때, 그러한 감정의
변화나 상태에 어울리게 밖으로 드러내는 생리적인 동작을 '웃는다
/웃다'라고 한다. 외형상으로는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며 기뻐하
기도 하며, 사람을 조롱하거나 같잖이 여겨 코웃음을 치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행동과학으로서
의 심리학은 언제나 사람의 행동을 통하여 심리적인 모습을 알아
낸다. 해학과 같은 웃음은 사람의 마음에 일어난 긴장이 해소될 때
에 정신적인 반옹으로 일어나게 된다(시라사, <문학에 있어서의 웃
음의 개념>, 국어국문학 51, 1971). 우리는 어떤 불안이나 불만족,
블쾌감을 주변 어더에서나 경험하며 살아 간다. 이러한 불안이나
블쉐감이 풀어질 때 즐거움이나 안락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바로
이때 웃음이 따라붙어 겉으로 드러나게 티는 것이다(배해 수, <현대
국어의 웃음 동사에 대하여>, 1982). 결국 웃음은 내적인 감정의
'드러남'을 의미적인 바탕으로 한다고 할 것이다.
말의 짜임을 보면 '웃다'는 '웃十-다>웃다'로 쪼온 수 있는데,
이때 '웃' 은 위아래의 때 ' 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마음의 여러 가지 감정이나 생각을 위로 드러내는 셈 이다. 마
칭내 얼굴의 모양이나 입으로 소리를 내서 시각 또는 청각적인 표
현으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 한다.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가 있는 인
간상이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주듯이, 진정한 뜻에서의 미소를 머
금은 자신의 모습을 추구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
것이 모나리자나 성모마리아 혹은 고마성모의 미소와 같지는 않을
지라도.
그럼 그 소리나 얼굴의 표정과 모습 또는 신체의 다른 부분에 따
른 양태의 변화가 어떻게 웃음의 낱말겨레와 관련되는지를 알아보
도록 한다. 먼저 소리에 따른 웃음의 표현에 대해서 살펴 보자. 웃
음 소리가 기냐 짧으냐, 작냐 크냐페 따라서 몇 가지로 표현된다
'길게 웃다'는 뜻으로 '장소하다'가 있다. 그러나 그 반대되
는 '단소(短笑)하다'는 말은 십이지 않는다 웃음소리의 크기에 따
라서 내 소(大笑)하다, 굉소(柰笑)하다, 폭소(爆笑)하다'는 말들이
있는데 내 소<굉소<폭소'에서 보는 것처럼 폭소는 폭발적인 웃음
소리를 연상케 함으로써 가장 큰 웃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말들은
웃음의 크기에 따라서 단계적인 대립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
소리의 상징의 크기가 곧 감정의 단계를 변별적으로 드러낸다고 하
겠다. 내 소(大笑)하다' 에 다른 말을 더하여 그 모양을 드러내는
일이 있으니, 입을 크게 벌려 웃음을 '흥연대소(峽然大笑)하다', 즐
거운 표정을 '간간대소(澤澤大笑)하다', 하늘을 바라보는 웃음을
'앙천대소(仰天大笑)하다'고 한다 아울러서 손뻑치며 웃는 웃음은
'박장대소(拍掌大笑)하다'고 하며 깔칼대며 웃는 것을 보고 '가가
대소(阿阿大笑)하다'고 한다. 이 밖에 웃음에 대한 소리 증심의 표
현으로는 '방소(放笑)하다(방자하게 웃다), 소쇄 (笑殺)하다(웃어
넘기 다)'와 같은 말들이 있다. 주로 한자어 계통의 말이 근간을 이
루고 있으며, 눈에 띄는 점은 소리의 크기가 작은 경우에 대한 표
현은 찾아 보기 어렵다는 점 이다. 물론 양태적인 것이긴 하지만 소
리 없이 입을 약간 벌리고 웃는 모양을 '빙그레'라고 함은 고유
어계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상에서는 소리에 따른 웃음의 낱말겨레를 알아 보았거니와 양
태 (모습)의 변화에 따른 갈래를 알아 보도록 한다. 먼저 얼굴의 모
양을 중심으로 한 표현을 살펴 보면, '환소(歡笑)하다(즐겁게 옷
다), 담소(談笑)하다(이야기하며 즐겁게 웃다), 언소(탐笑)하다(이
야기하며 웃다)'와 같은 말들이 있다. 이 밖에도 얼굴 모습의 변화와
연관한 표정을 드러내는 말로는 '교소(嬌笑)하다(요염하게 웃다),
교소(巧笑)하다(사랑스럽게 웃다)' 와 같은 꼴들이 있다.
얼굴 표정의 변화와 함께 입 모양의 변화를 중심으로 하는 낱말
겨레에는 어떤 표현들이 있는가 알아본다. '부드럽고 가벼운 입 모
양의 변화'와 '소리가 없는 의미특성' 을 드러내는 말에는 '신소(
笑)하다(약간 입을 벌려 웃다), 미소(徵笑)하다(소리 없이 웃다)'와
같은 한자어 계통의 말이 있고, 고유어 계롱의 말로는 '방긋하다,
방글거리다'의 쿄현이 있다. '방긋하다' 는 일회성의 동작을 드러내
고, '방글거리다'는 반복성의 의미 특성을 갖고 있다.
입 모양의 변화와 함께 눈 모양이 달라지면시 짓시능을 하는 말
이 있는바, '상긋하다(일회성)/상글거리다(반복성)'가 그것이다.
한편 입과 눈 모양의 달라짐을 따라 드러내는 웃음의 낱말겨레에는
'상긋방긋하다(일회성)了상글방글하다(반복성)' 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웃음의 정도가 좀더 심해지면, 신체의 특정한 부분의 달라짐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넬소(絶笑)하다(아주 지지러지게 웃다),
배꼽잡다{배에 통중을 느껀 양으로 웃다), 요절복통(腰絶腹痛)하다
(허리가 굽어진 양으로 옷다)'와 같은 것이 그러한 예다.
앞에서 풀이한 웃음은, 겉과 속을 의도적으로 두들겨 맞추는 식
의 것이 아닌 자연발생적 인 경우이다. 하지만 혼히 복선이 깔려 있
거나 정상이 아닌 웃음을 일컫는 말들이 있다. 배해수는 이를 내면
과 외면의 어긋남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나(1982), 이를 뭉뚱그
려 소개하기로 한다. 이런 경우 의도성이 있고 없음에 대한 풀이는
주관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에 객관성이 결여될 가능성이 높다. 다
만 정상적인 웃음이 아니라는 점을 떠올리면서 낱말겨레란 관점에
서 간추려 가기로 한다.
웃는 사람의 마음 속에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전제 아래 비정상
적 인 웃음으로 보이는 경우에는 '실소(失笑)하다(웃지 않아야 할 적
에 자신도 꼬르게 웃는 것), 가소(假笑)하다(거짓으로 웃다), 습소
(濕笑)하다(어쩔 수 었이 웃다), 헛웃음치다(겉으로만의 표정으로
웃다). 등의 표현이 헤 당된다고 본다. 그러나 정확하게 그 개념을
가려 내기란 쉽지 않다 이 밖에도 웃는 소리나 모습을 강조하여 드
러내는 웃음에 대한 말이 있으니, 히 소(怪笑)하다(괴상하게 웃다),
광소(狂笑)하다(미친듯이 웃다), 치소(燒笑)하다(바보처럼 웃다),
빈소(傾笑)하다(찡그려 웃다)' 와 같은 표현들이 있다 서시빈목(西
施微 目)이라고 하거니와 서시란 월 (越)나라의 미인이 여러 사람 앞
에서 얼굴 한번 찡그린 것이 계기가 되어 이런 고사가 생겼다. 미
인의 껑그린 듯한 웃음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웃음이라니 (속이 좋
지 않아 찡그릴 수도 있을텐데)
웃는 사람 자신이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젖어 그것을 웃음으로 드
러낼 수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본래 웃음이란 개념이 갖고 있는
마음 속의 기쁨이나 즐거움은 배제된다. 먼저 열등감에시 말미암은
웃음의 말겨레를 찾아 보면, '검소(劒笑)하다(원한 어리게 웃다),
첨소(請笑)하다(아첨하는 웃음을 짓다), 간소(好이)하다(간사하게
웃다), 미소(媚笑)하다(아양을 떨며 웃다), '선웃음치다(미숙하게
웃다), 매소(賣笑)하다(술자리 등에서 웃음을 팔다), 눈웃음치다
(눈으로 웃다)'와 같은 표현들이 있다.
반면에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웃음에 드는 형태로는, '치소(뺍
笑)하다(악의 있게 웃다), 회소(誠笑)하다(실없이 놀리는 양으로
웃다), 비웃다(업신여기는 양으로 웃다), 조소(빼笑)하다(비웃다의
한자어)' 등이 있으며, 업신여김의 의미를 드러내는 표현에는 앞에
든 것 밖에도 비 소(鄧笑)하다, 암소(暗笑)하다, 고소(苦笑)하다
(쓴웃음짓다), 비소(鼻笑)하다(코웃음을 치다), 기소(欺笑)하다(남
을 업신여기고 웃다), 냉소(冷笑)하다(찬 웃음짓다)' 등이 있다. 이
와 더불어 자기만 못한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경소(理笑)
하다(가볍게 여기다), 일소(一笑)하다(일회성), 민소(憫笑)하다(민
망히 여겨 웃다), 비소녕F笑)하다(비난하는 듯 웃다], 저소(認笑)하
다(잔소리격으로 웃다), 비소(排笑)하다(비방하듯 웃다), 기소(謙
笑)하다(헐뜯듯이 웃다)'와 같은 표현이 있다.
웃는 동작은 그 내용의 감정이 어떠하냐에 상관없이 안에서 느'?1
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 감정에
옷을 입히는 동작이 웃음일진대 그 옷의 본체 (몸)는 웃는 사람의
기뿡이나 즐거움, 노여움, 의향과 같은 감정과 사고라 할 것이다
옷의 필요성이 실용과 심미적인 측면 모두에 있듯이 웃음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말미암음에서 비롯된다.
오손도손 서로가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는 데서 오는 화합의 웃
음이 드러내는 소리나 그 모양은 분명 우리들의 삶에 큰 위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12-11. 비와 돌림
보통 비가 오는 날에 어린 모종을 내면 잘 살아 난다고 하여 '비
오거든 산소 모종을 내라'는 속담이 생겼을까. 한마디로 산소를 뭏
은 곳에 모셔서 자손을 번영할 수 있도륵 하라는 교훈적인 말이다.
공기중에서의 수증기가 대기권의 높은 곳에서 찬 기운을 만나
방울이 되 어 내리면서 다른 물방울과 합쳐서 떨어지는 물방을을 우
리는 비 ' 라고 한다. 비의 본질은 물방을(물)이요, 그 속성은 바다
에서 하늘로 다시 하늘에서 바다로 돌아가는 순환성 곧 돌림에 있
다고 하겠다.
순풍우조(順風雨調) 란 말이 있듯이 비가 적절하게 내리지 않으면
큰일이요, 너무 내려도 큰일이다. 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고리에 고리가 걸리어 하나의 줄올 잇듯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치로 플이할 수 있다. 바다와 강에서 그 많은 수증기(김)가 피어
올라, 기압의 골짜기를 따라서 구름의 바다를 이루게 된다. 실상
우리들이 눈앞에 바라다 보이는 바다와 강의 믈이 땅 위에 흐르는
물의 모습이라면 비는 땅 위의 물이 구름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있
다가 다시 이 대지에 내리는 물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살아 가는 삶의 현상 자체가 먹고 먹히며 살고 죽으며,
죽고 다시 살아가는 삶과 죽음의 연쇄적인 현상이라고나 할까 알
종의 돌림현상이라 해도 될 것 같다.
피는 우리 몸속을 흐르는 동맥과 정맥의 통로를 따라 돌아가면서
골고루 필요한 영양을 대어 주며, 필요없는 찌꺼기를 거두어 간다
이러한 돌림현상 곧 신진대사가 활발하게 계속됨으로써 우리의 목
숨은 늘 힘을 얻으며 할기차게 움직일 수 었게 된다. 앞에서 '똥'
이 '뒤'에서 비롯되었음을 얘기하였저 니와, 원천적으로 순환파정을
마무리하는 끝내기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결과 즉 '뒤`에서
비롯한 말인 '똥' 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리라.
비나 피, 모두 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다. 그러니까 니 피'는
물이 존재하는 하나의 변이형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비 '가 무생물
로서 우주 공간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라면, '피'는 생물의 몸 속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돌아다니는 물인 것이다.
옛말에 '물'은 땅 이름이나 사물의 이름으로써 니 (꾀)'와 같은
형태로 쓰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삼국사기) 권 37 에 나오는 '미
추흘(柰鄕忽). 내미 (內米)' 둥이 그러하다. 히 (海柰 ; ((제중), 미
더덕 (바다의 더덕), 미나리 (((초두해) l5-7), 미 역 (미 +역괴>미 역 ;
(박해), 미여기 (>메기, (시해)' 와 같은 어휘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물은 '믈/끼/미/되'와 같은 여러 가지 변이형으로 실현
된다. 이 가운데에서 '미 (뫼)'는 소리의 느낌으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뜻을 가진 형태로 실현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비'와 '피'가
아닌가 한다. 한마디로 'ㅁ/ㅂ/ㅍ'이 다를 뿐 나머지는 같은 모
음 이(ㅣ)에 그 터를 대고 있다.
소리의 느낌으로 보면 미음(ㅁ)은 예사스런 소리이니 보통 땅 위
에서 예사롭게 존재하는 물이요, 비읍(ㅂ)은 무성파열음으로서 두
입술이 닫혔다가 먹 '하는 소리가 나니,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져
부서지는 비 '인 것이다. 한펀 피읖(ㅍ)은 미음(ㅁ), 비읍(ㅂ)과
같은 두입술소리로서 파열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더 거센 느낌을
준다. 예컨대 허 가 괄찰 솟는다'는 표현이나, 심장으로부터 혈관
을 흐르는 피의 박동 소리 등은 확실히 거센 느낌을 준다.
땅 위에 내린 비는 마치 피가 혈관을 따라 흐르듯이 냇물에서 다
시 강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이떻게 흘러야 할 비가, 그리고 피
가 흐르지 않고 괴면 그곳에는 정지와 부패와 죽음이 있을 따름이
다. 지구가 밤과 낮의 가림 없이 돌아가듯 비도 땅 아래에서 땅 위
로 돌며, 피도 온 몸을 똘아가는 것이다.
강물이 흐르는 곳에 마을이 셍겨나고 다시 한 부족과 국가가 이
루어지며 사람들의 삶의 본거지가 만들어진다. 피 또한 온몸이 살
아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강물이요 뿌리깊은 샘뜰인 것이다. 이
러한 곳에 삶의 가능성은 실현되고, 사람은 인식과 사랑에 눈올 뜨
게 된다. 비는 지구에서 살아 가는 생물 모두에게 피요, 피는 우리
개개의 동물에 있어 비가 된다. 지역에 따른 비 `의 방언형을 보
면 '바이 (평북 연풍), 비 (우리나라 전역), 빙이 (경남 밀양, 김해,
합천. 거창), 줄삥이 (강원 춘성). 흐림 (합남 풍산. 갑산/평북 후
창)'의 형태들이 있 다.
비와 상관을 보이는 낱말겨떼로는 빗믈, 빗밑 (오던 비가 그치어
날이 완전히 개기까지의 파정), 빗방울, 빗소리' 등의 형태들이 있
다.
비가 식물성의 색깔이라면 피는 똥물성이다. 동물은 식물을 바탕
으로 하여 살아 간다. 비와 피의 원형 은 '미' 라고 하였거
니와, 온 누리를 뒤덮는 모든 생명의 샘은 하나로되, 그것은 이 지
구를 감싸고 도는 물이다. 그래서 배 달겨레의 뿌리인 단군은 물과
땅의 신인 '고마(곰)'에게 정성어린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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