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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장정일] 펠리컨

by Casey,Riley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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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리컨 ]                                                 ' 장정일 '          


  


  나는 철장에 갇혔다. 부조리하게도  나는 철장에 갇혀, 철장밖으로 나는 

새를 본다. 이제 곧 나는 죽으려는데 너는 푸른 하늘 아래를 날아가는가?

  방금 나는 부조리라는 말을  썼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사형선고를 받

게 된 까닭은 펠리컨이라는 한 마리 새 때문이다.



  폘리컨 : 펠리컨과  새의 총칭. 사다리새라고도 한다. 물새로  발은 짧고 

네 발가락  사시에 물갈퀴기 았다.  부리 아래턱의 신축성 있는  주머니가 

특징이며, 이것으로 물고기를  떠서 먹는다. 세계의 온대, 열대  지방에 분

표하며 8종이 있다. 날개의 일부가 흑색이고 나머지 전신은 은백색이다.

 

  펠리컨에 대한  위의 지식은 내가  교도소에 수감되고 나서, 나의  담당 

변호사에게 차입해 달래서 읽은 세계조류도감에서  얻은 것으로서, 교도서

에 수감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펠리컨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지식

이래 봤자 어린  시절에 보았던 만화영화에 가끔씩  등장하던 입이 큰 새 

정도로만 알고 있는 터였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아

니라면 적어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당

신은 펠리컨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새  한 마리 때문에 만물의 영장인 인간

이 교도서에 갇히게 된 영문을  궁금해 할 것이고 펠리컨 때문에 한 인간

이 사형선고를 받게 된 사실을 아무래도 납득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즉 펠리컨이,  사랑도 되고 미움도 되면 육법 혹은 민중

이나 혁명같은 것으로 수시로 얼굴을 뒤바꾸며 나오는 은유며 상징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 펠리컨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국내 굴지의  맥주회사인 C맥주주식회사  정예사원으로서 직장  동료나 

이웃, 친척으로부터 앞날을 촉망받던  엘리트인 내가, 이런 꼴로 패가망신

하게 된 자초지종은 이렇다. 

  그날 아침. 여느때와  꼭같이 일곱시에 일어나 중풍에 걸려 근  십 년간 

운신도 못하시는 어머니의 침상에 가서 문안인사를 여쭌  다음, 크고 작은 

정원수가 몇 포기  늘어선 작은 앞마당을 지나  용변을 보러 화장실로 갈 

때였다. 검은 깃털에  싸인 낯선 물체가 사철나무 둥치 아래  있길래 자세

히 살펴보니, 닭 비슷하기도 하고 오리비슷하기도 한, 그러나 닭이나 오리

보다는 훨씬 커보이는 새 한 마리가 화장실 앞에 웅크리고 있는 거였다.

  머리를 날개깃 속에 집어 넣고 잔뜩 웅크리고 앉은 그놈의 모습을 보니 

무척 고단하고 피곤해 보였는데, 원래는 희고 윤기가  있었을 듯해 보이는 

그놈의 날개는 온통 폐수와 오물로 뒤덮여 악취가 진동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나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대가리를 쳐든 그놈의 

면상 또한 가관이었다. 가물거리며 반쯤 내려앉은 눈엔 온통 눈곱이 끼고, 

입과 코로부터는 고름인지 타액인지 분간 할 수 없는 누런 액체가 흘러나

왔다. 그러고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놈의 눈동자라니!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용변을 보면서, 아닌 밤에  홍두깨마냥으로 나의 

집 담장을 넘어 들어온 이놈을 어떻게 처리할까, 궁리했다.

  궁리라고는 하였으나  사실은 이 불청객을 보는  순간부터 나는 이놈을 

어떻게 쫓아낼까 하는 방법에다 나의 사고력을 모으고 있었다.

  한참을 낑낑대며 쉽사리  나오지 않는 용변을 본  후 나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 날개깃  속에 제 머리를 파묻고 웅크린 그놈의  옆구리를 냅다 

걷어찼다.

  이상하게도 나는 어린애라든가 애완동물 또는 보통 사람들이 흔히 애정

을 가지고 돌보는 화초따위에  대하여 아무런 감흥이나 관심을 느끼지 못

하는 터였다. 그런  이유로 이놈은 지독히도 운수가  나빠, 하필이면 나의 

집 담장안으로 날아 들어와, 이렇듯 아픈 발길질에  허리를 채이는 것이리

라.

  놈은 어디선가  날개를 상하였는지,  왼쪽 깃으로 땅바닥을  빗자루처럼 

쓸면서 한두 발쯤 걷다가  다시 쿡, 쓰러져 웅크렸고, 약간은 더 잔인스러

워진 심정으로, 나는 다시 그놈의 배때기를 걷어찼다.

  네놈이 날지 못하였으면 어떻게  2미터나 되는 담장을 넘어 들어왔겠느

냐?

  나는 그놈이 잔뜩 꾀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

놈은 나의 두번째  발길질을 받고서도 날개를 펴, 자신이 온  곳으로 되돌

아갈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놈이 어디서 날아왔든지간에  그것은 나와 상

관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어디로든 내 집 밖으로 날아가  주기만 한다면 

나로서는 흡족할 일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놈은 그때, 아예 나를 망치려고 물샐틈 없는 작

전을 짜놓고 나의 집으로 침투해 온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그 놈은 내가  걷어찰 때마다, 적의로 번뜩이는 눈망울을 굴리며  꼭 이

웃집의 구원을 청하는, 매맞는 아내같이 꽥꽥거렸었다.

  나는 그렇게  큰 소리로 울어대는,  천박스런 놈의 엄살이 더욱  미워져 

자꾸만 거세지는 발길로 그놈의 허리를 도리깨질하고 있었는데 그때 조금

이라도 주의를 해서, 그놈의 비명을 들은 많은 이웃들이  내 집 주위의 이

층 베란다 혹은 높은 옥상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것을 눈치 챘다면 아

예 나는 처음부터 놈을 마당 한복판에서 발길질할 것이 아니라 은밀한 지

하실이나 연탄창고 같은 곳으로  데려가 원치 않았던 태아의 목에 탯줄을 

감아 죽이듯 아무도 몰래 그놈의 목에 빨랫줄을 감아  죽였거나, 한 달 전

에 새로 샀던 신형 냉장고의 마분지 박스로 그놈의 등판을 내리눌러 죽였

을 것이다.

  후회란 무엇인가?

  그때 이렇게  했었더라면, 지금은......,  하는것이 바로 후회가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와서 그런 넋두리를 하는 것보다, 그  후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 여러분의 동정을 사기에 더 나으리라.





  나는 그놈의 허리를 발길로 내지르다가 출근시간 때문에 다시 방으로 

들어와 늘상 하던 식으로 토스트를 구워 우유와 함께 먹고 부랴부랴 출

근을 했다.  어머님의 식사는 내가  출근한 다음 시간제 파출부가  와서 

먹여 줄 것이었다.

  나는 대문을 나서며 그놈에게 소리쳤다.

  내가 회사에서 퇴근하여 돌아오기 전에 썩 꺼져버려, 알겠지?

  그러면서 다짐이나 하듯 그놈의 배때기를 몇 번이나 광나는 구둣발로 

걷어차 주었다.

  나는 자가용이 없다.  까짓, 자동차 하나 마련할라치면 아버님이 유산

으로 남기신 저금통장에서  약간의 금액을 되찾으면 되겠지만,  벌써 10

년간을 중풍으로 꼼짝못하시는  어머님을 두고, 나만의 편의를  위해 자

가용을 살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나는 바쁜  출근시간에 택시를 잡는다고 헐레벌떡거리며 아스

팔트 위를 춤추거나,  아니면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를  두번씩이나 갈아

타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한 번은 집에서 역까지, 또 한번은 역에서 회

사까지 꼭 두 번씩 복잡한  버스를 갈아타는 일은 매일 나의 어깨를 땅

으로 처지게 했고, 그때마다 마이카 생각은  간절히 내 눈앞을 어른거렸

다.

  그날도 나는 내  집앞에서 버스를 타고 역 앞에 내렸다.  그리고 두번

째 버스를  바꾸어 탈 양으로  육교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침의  산뜻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육교 계단을 오르는 것은 언제나 즐거

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그  기분 좋은 육교 위에서  기분 잡치는 것을 만나고 

말았다. 어디서 굴러왔는지  앳된 거지 소년이 육교의  중간쯤에 앉아있

었는데, 그놈은 새까만 얼굴에  잔뜩 깁고 기운 누더기를 걸쳐 입고, 마

치 도시의 덫처럼 육교 한 모서리에 놓여져 있었다.

  눈에는 눈곱이 끼고 콧물이  연신 흘러내리는 걸로 보아 놈은 감기에 

걸린 것이 아닌지나  몰랐다. 당국은 왜 저런 것을 시민의  눈앞에 보이

도록 함부로 방치하는 것일까?

  평소부터 나는 육교나  지하도 계단에서 웅크리고 구걸하는 걸인들에

게 일종이 피해망상 같은것을 느기고 있었다. 나는 그놈들을 미워했다.

  배불리 먹고  든든히 내복을 껴입은  다음, 턱 엎드려 있기만  한다는 

말이지? 내가 아침은 토스트와  우유로 때우고 죽자살자 회사로 뛰어갈 

때, 너희들은 느긋이 깡통 하나와 돗자리  하나만을 가지고서 포근히 엎

드려 있기만 하면,  우리는 애써 번 돈을 네아가리에 던져  넣어 주어야 

한다는 말이지?

  그들은 우리  호주머니에서 백원짜리 동전 하나만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알량한 가난으로 우리의 양심마저 검사하고 있지나 않은 

것일까? 나는 그놈이  웅크리고 있는 지점을 피해  바쁜 걸음을 재촉했

다. 그런데 재수  옴붙듯이 그놈은 피해 가는 나의 발치로  기어와 자석

처럼 나의 바짓부리를 움켜잡는 거였다. 꼭  움직이는 덫같이 그놈은 나

의 발목을 두 손아귀로 꽉, 물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당황하여 그  소년의 얼굴을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내 눈동자

를 맞받아 보는  그 소년의 눈은 한없이 가늘게 떨리며,  동정을 구하는 

애원으로 번뜩였다. 그것을 보자 나는, 울컥, 구토증이 치밀었다.

  그렇게 내가, 그 소년에게  발목을 잡혀, 오도가도 못하게 된 틈을 타

서 다른 시민들은  재빨리 육교를 오르내렸다. 흘끔흘끔, 길거리에서 더

럽게 흩례붙은 두  마리 개를 쳐자보는 것처럼, 이 아침의  해프닝을 바

라보면서 사람들은 빙글거리기조차 해대었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놈은 그런 줄도 모르고 점점 더  세게 나

의 바짓가랑이와 발목을 흘켜 쥐었다.

  [한푼 줍쇼, 동정합쇼]

  줄을 잘 세운, 먼지 하나 없는 나의  바지는 그 소년의 새카만 손으로 

더러워졌다. 이런 개쓰키!  나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뇌인다음, 나지막히, 

놔!하고 말했다.

  나는 소년의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놈은 꼭 펠리컨 같

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 소년이  더는 인간같이 보져지지 않았

고, 필시 이놈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 깊숙이서부터 솟

아오르는 자신감을 가지고,  결단성 있게, 자꾸만 들러붙는 그놈의 얼굴

을 나의 무릎으로 슬쩍 밀어, 낙지발 같은  놈의 두 손아귀를 떼어 놓았

다.

  그렇게 세게  밀지 않았는데도 흡사 그놈은  나의 구둣발에 차이기나 

한 듯  과장스레 벌렁 뒤로  나자빠졌는데, 뒤로 나자빠지며 놈은  놈의 

동냥그릇을 엎질러 버렸다.

  나는 놈이 다시  일어나 나의 바짓가랑이를 잡기 전에, 다시  한번 내 

스타일을 구기기 전에 총총히 육교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그  소년의 아버지가 아니다.  주인도 아니고, 보호자도  아니다. 

하므로 동정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나는 이런 재수 옴붙은  일을 당하

지 않기 위해서라도 빨리 자가용을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출귀몰, 펠리컨은 입이 크다.

  모든 일은 펠리컨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보다 훨씬 뒤에  법정에 서

서야 천천히 깨달은 일이지만  그날 있었던 일들은 꼭 완벽하게 씌어진 

시나리오처럼 나를 곤경으로 밀어 넣는 일들로 점철됐다.





  내가 근무하는 C맥주에서는 매해 캘린더를 만들곤 했다. 그것들은 어

느 회사의 달력보다 대형으로 만들어지곤 했는데,  이름 난 여배우나 여

탤런트들이 반라의 옷차림으로  선정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들이어

서 엉큼한 남자들에게 우리 회사 달력은 꽤나 인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열두 장의 캘린더, 열두 명의  미녀. 열두 달, 한 해. 나는 동료사원들

과 함께 새로 나온 캘린더를 넘기다가  팔월달 달력장에 눈이 멈추었다. 

팔월의 모델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 중의 하나였고 항간에는 모 

항공사 사장으로부터  백지수표를 받았다는  구설수로 유명해진 배우였

다. 나는 그녀를  무척이나 좋아해 그녀가 출연한  영화라면 수소문해서 

찾아볼 정도로 열광적인 팬이었다.

  달력 속의  그녀의 포즈는 묘했다.  금빛 백사장 위에 거의  실오라기 

하나 같은 슬림형 수영복을 입은 그녀는  놀랍게도, 개처럼 엎드리고 있

었다. 그것을 같이  보던 남자직원들을 그 포즈가 상상케 하는  성적 이

미지를 유추해내곤, 하나같이 킬킬거렸다. 

  나는 성욕을 느꼈다.  나는 오랫동안 찾던 사냥물을  발견한 사냥꾼같

이, 두 다리 사이에 달린 방아쇠가 잔뜩  당겨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

다.

  폘리컨의 아가리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날 점심시간이 지나서였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창생 녀석이 찾아왔다. 그놈은  고등학교 때

부터 예수쟁이로  유명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높은 점수에도  불구하고 

신학대학을 지원했던 놈이다.

  이제 놈은 어엿한 목사가 되어 있었는데, 놈의 방문 목적인즉, 크리스

마스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으니 굶주리는 고아들과 양로원의 외로운 노

인들을 위하여 자선기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놈의  설명을 들으

며, 이놈도 꼭 펠리컨과 같은 놈이로군하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그 목사 친구에게 한 푼의  기부금도 내지 않았다. 그 친구

는 두터운 안경 밖으로 자꾸만 반짝거리는 눈빛을 쏟아내며 한 푼의 은

전을 구했지만 나는 자동차를 사야 하기 때문에 가외로 덜어낼 돈이 없

다고 냉정이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충고를 한마디 덧붙였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그런 맹목적인 동정이, 그들을 스스로의 불행 속

에 영원히 던져 넣는것이야] 

  그러자 그 친구는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던가 어쩌겠다던가 하며 힘없

이 뒤돌아서 갔다.

  퇴근하자마자 나는  참기름처럼 잘  굴러다닌다는 H자동차  전시관엘 

들렀다. 자동차들은 장난감처럼  예쁜 모습으로 잘 전시되어  있었고 나

는 이것저것 기종이  다른 여러 승용차들의 특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런다음, 하얀색 소형 승용차를 하나 사기로 하고 계약금을 물었다. 앞

으로 육교 계단에서  거지의 손에 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는 능욕

당하지 않을것이다.

  H자동차 전시관에서 흰색 포그니 한 대를 사기로  계약을 한 다음 나

는 천천히 육교를  건너 역 앞의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이때쯤이면 언

제나 성의 사냥꾼인 듯 검은 창녀들이  지나가는 남자들을 붙잡곤 했다. 

나는 한 번도  역전의 창녀들과는 관여란걸 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더

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낮에 보았던 캘린더  생각이 나자 불현듯 아랫도

리가 무쭐해지는것이었다.

  그때 한 창녀의 두손이 캘린더를 끼고 있는 나의 겨드랑이를 잡았다.

  [같이 가세요, 잘해드릴께]

  나는 순순히  그녀가 끄는 대로  따라갔다. 이제 마이카족이 되면  이 

옆전 앞에서 창녀들과 더러운 실랑이를 벌일  일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

는 창녀와 자더라도  고급 창녀를 살 것이고, 함께 드라이브도  즐길 것

이다.

  나는 흔쾌히 숏 타임에 응했다.

  집에는 십 년 동안 운신도 못하시는  어머님이 계시다. 분명코 펠리컨

은 입이 크다.

  나는 키가 작고 눈이 커다란 그녀에게 듬뿍  돈을 건네 줬다. 아마 그

만큼의 돈이라면, 긴 밤을  자도 사나흘은 잘 수 있는 금액일 것이었다. 

나는 놀라 입을  벌리는 그녀 앞에 C맥주주식회사 달력을  꺼내 팔월달

장을 펼쳤다.

  [이런 식으로 포즈를 취해 줘]

  그녀는 웃으며 방바닥에 펼쳐진 달력을 봤다.

  [이 포즈를 원하시는 거에요, 백지수표를 받았다는 정계령을 원하시는 

거예요]

  [둘 다]

  그녀는 웃으며, 엎드렸다.

  [당신은 정계령의 지독스런 팬이군요. 혹시 그녀가  주연한 <목요일은 

목욕을 하세요>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그리고 <금요일의 금도끼>는?]

  [그럼, 봤구말고.  나는 <토요일의 토끼사냥과>과  <일요일밤의 일각

수>도 벌써 봤는걸]

  나는 개처럼 엎드린 그녀의 샅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남자들은 그런 체위, 그런 삽입에 대하여 정복감을 느낀다.

  여자들은 그런 체위, 그런 삽입에 대하여 수치감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수치감을 상쇄할 만큼의 돈을 치렀다.

  [참 예쁜 항문이군]

  이 여자는  이렇게  예쁜 항문으로 몇번이나 용변을 보았을까를 나는 

생각했다. 이  여자의 나이를 27세쯤으로 잡고,  하루에 한 번씩 용변을 

봤다면, 27X365가 되고...... 그러면...... 그러면...... 9855가..... 된다.

  방바닥엔 여배우의 사진이  펼쳐져 있었고, 나는 그  여배우를 간하듯 

창녀의 목을 안았다. 정말이지, 그때, 나  한사람의 정욕은 두 사람의 육

신을 향해 불타올랐다.

  사정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집에 돌아오니, 아직 펠리컨이  있다. 왜 이 놈은 자신을 사정해 버리

듯, 쉽게 죽거나 사라지지 않을까?

  나는 후들거리는 하반신을  날려, 그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너의 보

호자는 누구냐, 그리고 너의  집은 어디냐? 나는 너의 보호자가 아니다. 

하므로 여기는 너의 집일 수가 없는 것이다. 제발 꺼져 다오!

  그놈은 나의 발길질을 이기지 못하고, 몇  걸음을 비실비실 일어나 걷

는 듯하더니  또다시 대가리를 날개  속에 묻으며 쭈구려 앉았다.  나는 

다시 쫓아가 차려다가 그만두었다. 피곤했다.

  안방으로 들어가서 어머니께 인사를 한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는 허연 눈을 뜨고 아무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계셨다.

  어머니는 입이 크고 날지 못하는 펠리컨만  같구나. 천장의 쥐오줌 얼

룩을 바라보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주루루 눈물을 흘리셨다. 아, 어머니

는 눈물을 흘리시며  얼마나 오래 사시려는 것일까? 나는  안방을 나와, 

파출부가 네 발 달린 식탁 위에  차려 놓고 간 저녁을 네 발 달린 의자

에 앉아 먹는다. 그리고 티브이를 보거나  전축의 턴테이블 위에 레코드

를 올려놓고 시간을  보낸다. 언제나처럼 평범한 저녁을, 당신들이 보내

듯이.

  나는 철창에 갇혔다. 부조리하게도 나는 철창에 갇혀, 철창 밖으로 나

는 새를 본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펠리컨을 상면한다. 그 놈은 어제보다 더 많

은 눈곱이 끼었고 더 많은 콧물을 흘린다.  그리고 분명 어제보다 더 힘

이 없어 보인다.

  나는 그놈을 몇 번  발길질한 다음, 세수하고 남은 물을 퍼부었다. 펠

리컨은 꼼짝도 않은 채 온몸에 비눗물을 뚝뚝  흘리며 누워 있다. 그 꼴

을 보자 내가 뿌린 뿌연 세숫물이 온통 펠리컨이 몸 속에서 쥐어짜이듯 

흘러나온 그놈의 콧물, 눈물인 듯 느껴졌다. 더럽다.  나는 다시 한번 꼼

짝않는 그놈의 몸 위에 세찬 발길질을 한다.

  이놈이 여기서 죽으려나?

  죽으려면, 나가서 죽으라고  나는 더 세찬 발길질을  퍼부었으나 놈은 

바위처럼 꼼짝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놈은, 얄밉게도, 꽥꽥,  소리를 질

러댔다. 방 안에는  어머니가 병들어 누워 계시다.

  출근에 쫓긴 나는, 세상의 온갖 더러움과  위악을 뿌리째 뽑아내기 위

해 얼마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그릭 그것들은 얼마나 철면피

하게 끈덕진 것인가를  생각하며, 콩나물 시루같은 버스를 탔다. 그러면

서 나는, 앞으로 일주일만 참으면, 마이카족이 될 꿈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굿바이 버스!  굿바이 콩나물 시루! 굿바이 육교 거지!  나는 세

상에 잔뜩 묻어  있는 자질구례한 귀찮스러움을 향해  끝없이, 굿바이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펠리컨은 입이 컸다. 나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의기양양 

세상의 온갖  구태의연함을 향해  굿바이를 중얼거리고 있을때,  그놈은 

그 크고 컴컴한 목구멍으로 나를 슬슬 밀어넣고 있었다.





  내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 왠지 회사의 분위기는 이상했다. 기획실 문

을 열고 들어갔을 때 미스 양은 나를 보자 다급히 눈을 내리 깔았고 미

스터 김에게, 일찍  왔군, 하고 말했을 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상하

다고 느끼며 내 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평보 보지 못했던  낯선 두 남

자가 과장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도 잠시, 자리에  앉은 나를 향해 과장이 턱짓을 해보이자  그 두 

사람은 뚜걱뚜걱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서, 나는, 체포되었다.

  그들은 모기관에서 왔다는  증명을 슬쩍 꺼내 보이더니,  나의 이름을 

확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만......]

  그러자 늙수그레하게 보이는 자가 젊은 동행에게 말했다.

  [이 작자군, 수갑 채워]

  하얀 쇠고리는 금새  두 손을 덜컥 물며, 간단히 나의  자유를 구속했

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바짝 쫄았지. 하지만 행정상의 착

오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겠어? 나는 태연히 미소를  띠며, 그들에

게 말했다.

  [아침부터  수고하시는 줄은  알지만, 무언가  착오를  하신 모양이군

요...... 곧 아시게 될 테죠]

  그러자 젊은 사내가 뺨을 정확히 두 번 연거푸 갈겨댔다.

  [아구 닥쳐, 그것마저 수갑 채우기  전에....... 임마, 너 같은 놈은 국사

범으로 다룰 수도 있어]

  사원들은 내 뺨이 그  젊은 사내의 우악스런 손바닥과 부딪치며 정확

하게 두 번을 철떡, 철떡, 내는 소리를 듣고서는 나를 정확히 한 번씩만 

쳐다본 다음 곧바로  자신의 눈을 책상 위에  수북히 쌓여 올려져 있는 

서류뭉치에 꽂았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내 잘못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

러니까 곧  풀려날 기대를 하고  있었지.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순진한 

착각이었고 순진한 희망이었다.  불시의 체포를 당한 후, 하루하루의 시

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 죄를 차츰차츰 깨달아갔고 내게 대려진 벌을 달

게 받겠다는 쪽으로 각오를 굳혀 갔다. 펠리컨은 입이 크다.

  나는 수갑을 차고 양쪽에  두 명의 보디가드를 거느린 채 엘리베이터

를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빌딩 앞에 주차해  둔 검은 지프에 실리듯 올

라탔다. 좌석에 앉자마자 시동이 걸리고 사이렌이 울렸다.

  지프 속에서 늙수그레한 자가 담배를 내밀었다.

  [자, 피워. 이게 마지막 담배가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이자들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하고서, 내심으로 웃었다. 그

러나 그자가, 마지막이라고 일별하는 데 놀라 저절로 손끝이 떨렸다.

  내가 담배를 받아 물자 젊은 사내가 성냥불을 켰다.

  [참, 차대위님은 인정이 많아 탈이십니다. 이런 악질놈에게  담배를 권

하시니 말입니다]

  차대위란 늙수그레한 사내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안 그러면 나나 자네나, 이 작자와 다를게 뭐 있겠나?]

  지프는 도심의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어느 가정집에 다다라 시동을 

멎었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한번 이름과 주소를  확인하고 지문을 찍거나, 소

유물을 보관하는 등의 절차를 밟고 난  후, 곧바로 공안조사원이라는 자

에게서 조사를 받았다.  그는 대뜸, 집에 '날아온' ---이것은, 나의  표현

이다. 그  조사관은, 집에 '감금한'이라는 표현을  썼다---펠리컨에 대하

여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은 연약하고 갈 데 없는 펠리컨을 감금,  학대했습니다. 인정합니

까?]

  [아닙니다. 감금이라뇨?  그놈이 저의 집으로  날아 들어왔을  뿐이고, 

저는 집주인으로서의 저의 권리를 행사했을  뿐입니다. 펠리컨은 주거침

입자입니다. 저는 펠리컨을 고발하려 합니다]

  그러자 조사관이 책상을 탁, 하고 쳤다. 나는 죽을 듯이 놀랐다.

  [고발? 캬, 이 쓰키 봐! 야 차대위. 나 삼십 분 동안 휴식하겠어]

  그러면서 그 조사관은 지하실의  철문을 소리 나게 닫으며 밖으로 나

갔다.

  차대위라는 자는 삼십 분간 나를 휴식시켜  주지 않았다. 그는 야구방

망이를 들고 내가 앉은 의자 앞으로 다가와 섰다.

  [고발? 캬, 이 쓰키 봐! 너 여기  들어와서 윽, 하고 죽은 사람들이 얼

마나 많은 줄 아니?...... 엎드려 뻗쳐!]

  그 삼십 분 동안 나는 이상한 휴식을 취했고 조사관이 다시 들어왔을 

때 나는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수 없게 됐다. 조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휴식시간이 짧지는 않았나?]

  [아, 아닙니다]

  [너는 기소됐다. 죄명은 펠리컨 학대. 인정하냐?]

  [......]

  [묵비권 행산가? 너 이제 보니 아주 지능범이야]

  [법, 법대로 합시다. 이 나라엔 법도 없습니까!]

  [법? 캬, 이 쓰키   봐! 너 같은 놈한테는 법 필요없어. 야, 차대위 나 

내일 와서 다시 조사해야겠어]

  조사관은 지하실의 철문을 소리 내며 열고  나갔고, 차대위는 내가 앉

은 의자 앞으로 다시 다가왔다.

  [법? 캬, 우리는 법 필요없어!]

  펠리컨은 입이 크다. 펠리컨은 입이  크고, 무섭다. 펠리컨은 야구방망

이를 들었다

  다음날 정오. 조사는 다시 시작됐다.

  [너, 힘없고 갈데 없는 펠리컨만  골라 마구 학대하고 착취했지? 민중

의 피를 빨아먹었지? 맞지? 인정하지? 그렇지?]

  [예...... 합니다]

  나는 진술서를  쓰면서 몇번이고 까무러칠 만한  휴식을 치르어야 했

다. 요컨대 내가 받은 조사란 것은 범죄행위의  진위를 밝히는 데 그 목

적이 있는 게 아니었고, 먼저 범죄행위를  인정한 다음 범죄행위가 이루

어진 동기와 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었다. 그  자세한 동기와 과정이란 이

를테면, 내가 언제부터 펠리컨을  학대하기 시작했는가? 펠리컨으로부터 

부당하게 착취한 살과 피와 부리와 깃털은 얼마나 되는가? 또 펠리컨을 

학대하기 위한 어떤 정교한  이데올로기가 있는가? 그리고 펠리컨을 학

대하는 다른 동조세력이 있는가? 등등이었다.

  결국 나는 백이십여 마리의  펠리컨을 학대 -> 착취 -> 학살 -> 암

장한 것으로  자술서 쓰기를 마쳤다.  그리고 그 자술서가 다  씌어지자 

비로소, 나는 정식재판에 회부되었다.

  내가 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는 동안, 신문, 티브이 등의 매스컴은 나

의 범행을 연일 대서특필해대고 있었다.

  ---제일 처음 이웃이 목격! 시민제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해!

  ---동물애호협회에서 모기관에 진정! 사건화되는 계기 마련!

  ---백이십여 마리의 불쌍하고  갈 데 없는 펠리컨만 골라  죽인 사디

스트!

  ---펠리컨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절실 요망!

  대량 언론 세례를 받은 시민들은 분노했고, 연일 성토대회가 열렸다.

  ---누가 펠리컨을 학대하는가?

  ---펠리컨보다 못한 인간은 펠리컨보다 못한 인간이다!

  ---펠리컨은 바로 나다!

  ---시대의 어둠을 뚫고 일어나 펠리컨!

  나는 체포되었다. 그리고 철창 속에서, 철창 밖을  나는 새 본다. 여론

은 용암같이  들끓고, 시민들은 화산같이 분노한다.  펠리컨은 무엇이고, 

누구냐? 나는 날것으로 잡혔다.





  조사를 마친  나는, 최후의 법정이란 곳에  서게 됐다. 이 법정에서는 

지금까지 재판을 받은  일천구백팔십칠 명 가운데서 일천구백팔십육 명

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최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지  않은 유일한 

피고는 재판기간중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혀를 깨물어 자살했던 어

떤 목수의 아들뿐이었다.

  검사는 나의 비정과 포악함을 입증하기 위하여 여러 증인들을 불러냈

다. 맨 머저 육교의 거지가 증인석에 올랐다.

  [증인은 저 사람을 아는가?]

  [네, 알구말구요. 그는 매일 아침 출근시간에 제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는 증인에게 적선을 베푼 적이 있는가?]

  [적선을 베풀다뇨? 그는 아침마다 제 동냥쪽박을 걷어차곤 해서  그가 

올 시간이면 언제나 동냥그릇을 뒤로 숨겨야먈 했습니다]

  방청객들은 우, 하고 나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두번째는 목사 친구였다.

  [증인은 저 사람을 아는가?]

  [네, 압니다. 그는 저의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당신은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성금을 모으기 위해 저자에게  간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는 단 한  푼도 내지 않았습니다. 승용차를  사야 한다고 뻐기면서 

불우이웃을 위한 몇 푼의 성금을 낼 돈은 없다는 거였죠]

  [예, 그랬습니다. 저자는  불우한 거지나 고아들을 위해 쓸 돈은  없었

지만 자신의 편의를 위한 사치스런 자동차를  살 돈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보이는 이 용지가 그날 오후에 자동차 매매계약을 했던 그 계약서

입니다]

  검사가 종잇장을 팔랑거려  보이자 방청객들은 다시 우,  하는 야유를 

나에게 퍼부었다.

  세번재 증인이 나타났을 때  나는 약간 놀랐다. 그 증인은 바로 그날, 

내가 샀던 창녀였다. 그녀는 까만 선글라스와  하얀 마스크로 얼굴 전체

를 가리고 있었다.

  [여기 이 아가씨는 역전에서  길손을 사랑하는 직업을 가진 분으로서, 

숙녀의 명예나 인격을 내동댕이칠 각오로, 오늘  이 법정에 나와 주셨습

니다. 정의를 위해  어려운 결단을 내려 주신데 대하여 우리  모두 박수

를 보냅시다]

  법정의 방청객들을 일제히 기립 박수를  쳐댔고, 재판장마저 힐끔힐끝  

감탄의 시선을 보내며 박수를 쳤다.

  [아가씨는 저자를 아십니까?]

  [네, 압니다. 저자는  매일 저녁 저에게 와서 저를 요구하곤  하였습니

다.]

  [그는 당신에게 아주 특별한 체위를 요구했다는데..... 말씀해 줄 수 있

겠습니까?]

  [예...... 그는 항상 저에게 엎드리길 요구했습니다.]

  [엎드리다니? 개처럼?]

  [그런..... 그건......]

  그리고 나서 그  창녀는 용감히 울먹이기 시작했고,  방청객들은 함부

로 숙연해지기 시작했다.

  [네 알겠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자는 악마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

여 타인의 고통은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극히 이기적인 인간이었습

니다. 더욱 놀랄만한 사실은,   피고의 어머니가 십 년 동안이나 중풍에 

걸려 운신도 못하는 매일매일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거리

낌없이 사창가를 드나들며 야비한 말초적 즐거움을 즐겼다는 사실은 우

리를 경악케 합니다]

  그 후, 내가  모 여배우의 사진을 펼쳐 놓고 정사를  즐겼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 여배우는  정신적 간음을 당했다느니, 자신의  인기에 금이 

갔다느니 하면서 정신적  피해보상을 강구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느나 

그런 야사적인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해도 좋으리라.

  나는 철창에  갇혔다. 나는 전 재산을  압류당했고, 가슴 아픈 사실은 

재산을 압류당하기 전에, 그보다 먼저, 이 집에서 일하는 것이 수치스럽

다며 파출부가 오지 않는 바람에 어머니는 자리에 누워 계신 채 굶어죽

고 말았다.

  내가 갇혀 있는 동안 그 펠리컨은 시민들로부터 '위대한 펠리컨' 혹은 

'박해받은 자'  '되찾은 인류애'등의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 펠리컨은 벤츠를 타고 다니며 자신의 경험담을 팔고 다닌다.

  재판은 오래 끌지  않았고, 피고에겐 사형이 언도되었다. 나는 울부짖

었다.

  [이건 재판도 아닌 개판이야! 이건 타살이야!  이건 타살이야, 이 개쓰

키들아!]

  재판장이 나지막히 중얼거리며 퇴장했다.

  [목수의 아들처럼 자살이나 하지 그랬어]

  내 가슴의 한쪽은  펠리컨에 대한 증오로 타들어갔고,  앙금과도 같은 

원한이 한 숟가락의 소금같이 내 심장에 쌓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펠리컨에 대한  증오를 차츰차츰 달콤한 설탕처

럼 녹여 갈 수 있었는데, 그것은  교도소를 출입하며 사형수에게 마지막 

구원의 은혜를 베풀던  신부님의 말씀에서 한 줄기 빛과도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을 받아들이시오. 펠리컨을  받아들이시오. 그리스도 또한 한  마

리 연약하고 핍박받던  펠리컨이셨소. 아무도 그를 안다고  말하지 않았

고 나의 주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던 그분이 바로 당신이 박해했던 펠

리컨이었소. 본디오 빌라도와 같이 되지 마시오. 그는 자신과는 상관 없

는 일이라고 손을 씻지 않았소? 그 때문에  그리스도는 죽어야 했소. 당

신이 펠리컨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하는 것과도 

같소.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해서, 당신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

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법이요]

  나는 내 가슴속에  날아든 펠리컨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민중이든 노

동자 농민이든, 나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었던 듯이 느껴 

온 펠리컨의 실체를, 나와 상관 있는 것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 내 가슴은 후회로  찢어질 듯하다. 나는 내일 죽어야 한다. 어쩌

면 죽음도 나와는 상관없이 나의 가슴속 안뜰에 웅크리고 있는 한 마리 

펠리컨이었을까? 필시 죽음 또한 거대한 펠리컨의 입속으로 빨려들어가

는 일에 다름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그만  죽어야 겠다. 한 마리 펠리컨은  당신에게 주면

서. 그러면 안녕히, ---윽!


[ 신라의 푸른 길 ]                                         ' 윤대녕 '          


   <자문위원 추천의 말>



    [신라의 푸른 길] 작품소개:윤대녕은 [신라의  푸른 길]에서 길 위

  의 상상력과  신화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접합시키고  있다. 주인공은 

  경주에서 강릉에  이르는 동해안 해안도로를 여행하면서,  아득한 먼 

  옛날 바로 그  지역의 역사적 무대였던 신라시대의  신화적 상상력을 

  등장시키고 있다. 도시적 일상사에 지친  현대인이 여행과 신화를 통

  해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과정이 인상적으로  부조된 소설이

  다.







   혹은 내가 투구게처럼 갑갑하게 느껴지고  이 한 줌 하찮은 삶도 

  갑자기 자잘밭을 갈고 있는   보습처럼 못 견디게 더워져서, 마침

  내 삶의 화두가 뻗쳐 올라와 물집  투성이인 얼굴이 되었을 때 다

  시금 나는 떠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석굴암 본존불상 아미타불과 경주에서 강릉까지 가는 7번 국

  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불현듯 행장을 꾸리고 나는 정말  투구게 같은 모습으로 남 몰래 

  어깆어깆 길에 올랐다.

   나는 경주에 가서 석굴암 본존불을  알현한 다음 동해로 가서 삼

  촌을 만나볼 셈이었다. 삼촌은  내게 있어서 하나의 생불(生佛)이

  었다. 나는 그렇게  두 개의 부처와 그  광배(光背)를 참견해야할 

  것만 같았다. 또한 그 두 개의 부처 사이를 잇고 있는 7번 국도를 

  조선 사람 김정희처럼 짚어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경주

  까지 가는 길이 내게는 하행(下行)이 아니라 되레 상행(上行)이랄 

  수밖에 없었다. 경주는  내가 기어 올라가고자 하는  길 오르막에 

  있는 중도 불국(中道佛國)이었으니 말이다.

   밤차를 타고 경주로 내려가는 동안  나는 하나의 소리에 귀를 기

  울이고 있었다. 그것은 얼마 전  어느 지방 문화재 행사에 우연히 

  참석해 보게 된  사물 놀이패의 <삼도농부가락> 소리였다.  그 네 

  개의 타악기가  격렬하게 혹은 유장하게 빚어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게도 하나의 뜨거운 얽힘,  말하자면 옹이 같은 맺힘이 마

  음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선연히 깨닫고 있었다.  사물 놀이패의 

  소리는 얽힘에서  풀림으로 뒤채며 서서히 잦아들었지만  나는 그 

  맺힘의 화두 하나에 옭매인 채 그저 전율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때 내가 경주에서 포항을 거쳐  강릉까지 바다를 끼고 가는 7번 

  국도를 타고 있었다면 가슴에 맺힌  시퍼런 멍이 녹두빛으로 넉넉

  히 풀어졌으리라. 어쨌거나 그 <삼도농부가락>이 내게 던져준 <맺

  힘>은 나로 하여금 석굴암 본존불을,  그 <풀림>은 7번 국도의 풍

  광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길은 사방 어디서나 몰려오고  또 사방 아무 데로나 뻗

  어 있었으나,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아무도 눈치챌 리 없는 

  그 첩첩 천리(千里) 신라의 길에 다름아니었다.

   1285년 경에 고려 중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경주를 <절은 하늘의 별처럼, 탑은 기러기떼처럼 솟아> 있는 곳이

  라 적고 있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경주를 두고 <땅 위의 극락>, 

  <동방에서도 아침 햇빛이 맨먼저 닿는  땅>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

  다고 한다. 아무려나 그 달[月]의 고도 경주에 도착한 것은 밤 아

  홉시가 좀 넘은 시각이었다. 나는  불국사역에 내려 어둠 저 앞에

  서 흐르고 있을, 형산강의 한 줄기인 남천의 물 소리를 들어볼 요

  량으로 목을 늘이고 있다가 곧장 토함산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나는 한국관 옆에 있는 식당에서  산채 반찬으로 식사를 한 다음 

  근처 경남여관에다 여장을 풀었다.  거기서 버스로 동산령을 넘어

  가면 석굴암까지는 불과  한 시간 남짓한 거리였다.  경주에 오면 

  누구나 신라인이  되고 누구나 불자가 된다는  말을 되새김질하며 

  나는 이 밤에도 저 노송의  뿌리가 내리뻗어 있는 석실에서, 연화

  문이 새겨진 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아미타불의 나

  발 두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 어둔 산자락 아

  랫녘에 당도해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개펄이었던 마음에 벌써

  부터 시퍼런 바닷물이  달겨들고 있는 듯싶었다. 자리에  끙 하고 

  눕자 어디선가  <삼도농부가락>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으나 나는, 

  동경명기월량(東京明期月良) 하는 [처용가(處容歌)]의  첫 구절을 

  외다 그만 혼곤한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올 적마다, 경주에서의 잠은 신혼의 밤처럼 설레는 꿈을 꾸게 만

  들었다. 그러나 아침녘에 외진 처소에서의 잠에서 설핏 깨어나 이

  불 속을 소경처럼 더듬어 보았으나 그 아사녀를 닳았을 신부는 좀

  처럼 손에 닿지도 만져지지도 않았다. 아마도 신새벽에 일어나 나

  보다 먼저 7번 국도를 따라 갔으리라, 하고 웅얼거리며 나는 허청

  웃음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갈하게 목욕을 하고 나와 나

  는 산자락을 한번 휘둘러본 다음 소를 몰고 가듯 이랴, 이랴 하며 

  동산령을 넘어갔다.





   아직도 수두(手痘)에 걸린 듯한 앍은  얼굴로 나는 신라 사람 김

  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는  석굴암에 들어가 무려 천이

  백여 년 동안이나 한자리에 웅자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본존불 아

  미타불을 친견했다. 거기서 나는 잔잔히 무릎 밑으로 밀려오는 천

  이백 년 전 신라의 숨결에 발을 빠뜨리고 삼도(三道)와 자비와 영

  원과 미타정토(彌陀淨土)  따위의 말들을 곱씹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뒷전에서 은은한 목탁 소리가 귓전에 울려오고 있었다. 그 

  앞에 붙박여 서서 오래 눈을 감고 있자니 몸이 홧홧하게 달아오르

  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어진 내  몸뚱이 앞에 창망한 동해의 환영

  이 나부끼고 있는 게 보였다.  그처럼 온갖 비의에 휩싸여 비틀거

  리다가 나는 내 몸도 그만 돌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 어기적어기적 

  뒷걸음질을 쳤다.

   돌아나오는 내 등에다 대고 이  서방 정토의 돌부처는 바닥에 꽃 

  한 송이가 떨어졌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허나  그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석실 바닥엔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미열에 들떠 중앙동 시외버스 터미털로 나오니 어느덧 정오가 가

  까워져 있었다. 나는 강릉행  직행 버스의 동해까지 가는 표를 끊

  고 가까운 찻집에 앉아 차가 출발할  시간을 기다리며 녹차 한 잔

  을 주문해 마셨다. 그때서야 나는 [삼도농부가락] 한 매듭이 어느

  덧 느슨하게 풀려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남은 시간 동안

  에 나는 서울에  있는 누군가에게 엽서를 써서  터미널 앞에 있는 

  우체통에다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곧 7번 국도, 신라의 저 푸른 길로 가리라, 동해에 내

  려 이번에는 오십년생 젊은 생불을  보리라, 가는 동안에 이 붉디

  붉은 마음은 푸른 포말로 흩어져 바다에 섞이리라, 이 엽서 한 장

  을 쓰기 위해 내가 혹 여기 온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하는.

   출발 시간에 딱 맞춘다고 딴에는 요령을 부렸던 것인데, 차에 올

  라타고 보니 운전사 바로 뒷자리밖에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바

  다를 옆구리에 제대로 껴안고 가려면 오른쪽 창가에 앉아야 할 텐

  데 싶어 나는 다음 버스를 탈까  망설이다가 그나마 앞 창이 트여 

  있다는 걸로 마음을 수습하고 그  자리에 가 앉았다. 그런데 버스

  가 막 출발하려는 참에 웬 젊은 부인이 승강구로 허겁지겁 올라왔

  다. 그러더니 아까 나처럼 남은 자리를 찾느라 뒤꿈치를 들먹거리

  며 몸을 갸웃갸웃 했다. 나는 옆  자리에 놓여 있던 내 여행 가방

  을 집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무심한 척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행을 하면서 기차나  버스를 타게 되면 옆이  허전한 채로 다만 

  혼자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고, 한편으론 누군가 옆에 

  와 앉아주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이것은 다분히 그날의 기

  분에 좌우되는 것이긴 하나 후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상대가 누구

  냐에 따라 마음이 또 달라지는 수가 종종 있다. 적어도 거북한 마

  음까지는 들지 말았으면 싶은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하늘

  에서 우연히 별이 떨어지는 식의 기대 같은 건 아예 안 하고 사는 

  사람이므로 그때그때의  형편이야 어떻든 혼자 앉아서  가는 것을 

  바라는 편이다. 하지만 무려 천 리를 달려가야 하는 만원 직행 버

  스에서 그 같은  바람을 갖는다는 건 어쨌거나  지나친 욕심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음인지  그녀는 주춤주춤 내 옆에 

  와 앉았다. 이따가 바닷길이 나오면 아무래도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려야 할 텐데 싶어 나는  벌써부터 거북한 생각이 들었다. 포항

  쯤 가서 버스가 승객을 갈아태우기 위해 정차를 하면 그때 뒷자리

  로 옮기리라 생각하며 나는 슬그머니 왼쪽 창가로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버스가 나원, 사방을 거쳐 포항  쪽으로 한 이십 여 분 달

  려가고 있을 때 마침내 나는 다리를  바꿔 꼬기도 여의치 않아 점

  점 더 불편하다는  생각이 치밀기 시작했고 아직  빈 자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뭐 그리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기차와 달리  옆 

  사람과의 공간이라는 게 전혀 없다는  게 버스의 큰 단점이다. 내

  가 뒤를 흘끗거릴 때마다 그녀도  또한 몸을 들썩거리기는 마찬가

  지였다.

   아무튼 그러는 사이에 그녀의 행색이랄까 뭐 그런 게 내 눈에 슬

  쩍슬쩍 비쳐들었다. 가방 안에  박용숙이 쓴 {한국의 미학사상}이

  란, 어제 읽다 만 책이 들어  있었으나 그걸 꺼내 읽을 기분도 아

  니어서 나는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 대한  제멋대로의 상상 같은 

  것에 잠시 빠져 있었다. 기혼? 물론 기혼이겠다. 서른다섯살쯤 돼 

  보이니 말이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여자? 글쎄, 그건 아닌 것 같

  다. 나이에 비해 손가락에 아직 길죽한  선이 남아 있다. 여자 나

  이 서른다섯쯤 되면 누구나 손마디가 굵어지게 마련이다. 직장 여

  성? 그렇다면 서른다섯살의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장이란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공무원,  피아노나 미술 선생, 어디  협회 소속의 

  카운셀러, 옷가게나  화장품점 아니면 문구점 따위의  주인? 이런 

  답답하고 고지식한 생각을 하며 나는  그녀의 얼굴을 곁눈질로 훔

  쳐보았다. 몰랐는데, 새삼스럽게  눈여겨보니 드물게 우아하고 아

  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왜 오늘 아침 선

  잠 속에서 소경처럼 헛손질을 하며  찾고 있던 아사녀가 떠올랐는

  가는 나도 모르겠다.

   그녀는 둥그런 단발  머리에 채송화 무늬가 듬성듬성  박혀 있는 

  살구빛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쥐색 핸드백과 양산, 

  그리고 희한하게도(그렇게 보였다) 아베  코보의 소설 {모래의 여

  자}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운전사 앞 차창으로 

  달려오는 7번 국도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버스는 편

  자처럼 생긴 영일만에 닿는가 싶더니, 오른쪽에다 냉큼 버리고 포

  항 시내를 거쳐 바닷길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갔다. 삼척 거쳐 동

  해에 닿으면 좋이 여서일곱시는 되리라. 나는 병풍 속의 여인처럼 

  미동도 않고 앉아 있는 그녀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분 냄새를 맡으

  며 감자꽃 도라지꽃 하는 말들을 허황하게 읖조려대고 있었다.

   마침내 먼 빛으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는 덕성, 광천쯤에 이르

  러서인가. 그리도 오래 기다렸던  가쁜 셀레임으로 모가지를 빼고 

  청람, 창망 하며  시선을 전짓불처럼 창 밖으로  휘두르고 있는데 

  오른쪽 어깨가 무슨 수박을 올려놓은 것처럼 묵지근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웬일인가 싶어  옆을 쳐다보니 단발 머리가  비스듬히 내 

  어깨에 떨어져 있었다. 거북하고 안  하고를 떠나 순간 나는 얼굴

  이 확 달아올랐다. 솔잎 냄새가  나는 머리칼 밑으로 곤하게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내 목덜미까지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어떻게  낯모르는 남자의 어깨에 이렇듯 

  태연히 기대 잠이  들 수 있단 말인가. 남들이  보면 필시 부부인 

  줄로 착각했으리라. 핸드백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손가락 열 

  개도  그  살빛  긴장을  잃고 마디마디가  힘없이  풀어져  있었

  다......하지만 내 몸에 쓰러져 있는 그녀의 몸에서 내가 느낀 것

  은 어떤 추함이 아니라 묘하게도  측은하고 고단한 아름다움 같은 

  것이었다. 더위에 지쳐 처마 아래서 줄기를 늘어뜨리고 있는 채송

  화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아침이 되면  이슬을 툭툭 털고 다시 생

  생하게 피어날 밝은 빛의 어여쁨.





   "저는 대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 이 동해 바닷길을 맨발로 일주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거꾸로 강릉에서 경주를  향해 내려갔었

  죠. 경포대에 갔는데 이상하게 에밀레  종소리가 견딜 수 없이 듣

  고 싶어지는 거예요."

   "마음도 참 젊었군요."

   "젊기도 했지만  그땐 하루하루가 뭔가  사무쳤더랬어요. 아마도 

  그리움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한데......하긴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니 경포대가 낙산사 해수관음상으로, 에밀레 종소리가 석굴

  암 본존불로 바뀌긴 하데요."

   "몇 살이신데요?"

   "우리 나이로 서른넷예요. 아내는  서른둘이고 지금 동경에 있는 

  광고 스쿨에 다니고 있죠. 그 계통에서 몇 년간 직장 생활을 했는

  데 말하자면 늦공부를 시작한 거죠."

   "그럼 선생님은요?"

   "저야 뭐  보시다시피 처용가를 부르며 신라를  떠돌아다니고 있

  죠."

   "......부럽네요."

   "누가요? 제가요, 아니면 제 아내가요?"

   "네?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바다 쪽으로 돌리며 픽 하고 웃었다. 밖을 내다보니 대진 지나 명

  사이십리의 풍경이 관광엽서 한 장처럼 펼쳐져 있었다. 내게 기대 

  있던 그녀가 정신이 든 것은 버스가 영덕 시외버스 정류장에 잠시 

  정차했을 때였다. 그리고  잠에서 깨는 순간에 그녀는  그동안 내 

  어깨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달았음인지 얼굴이 홍옥 사과처럼 붉어

  져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잠시  자리를 피해주는 게 좋다 싶어 나

  는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을 다녀온 다음 주스캔 두 개를 사가지고 

  올라와 괜찮으시다면  하는 얼굴로 그녀에게 그중  하나를 내밀었

  다. 그녀는 여전 민망하고 쑥쓰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가 

  고마워요, 하고 눈인사를 하며 겨우  손을 내밀었다. 싫지도 좋지

  도 않은, 어쩐지 조금은 경계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주스캔을 무

  슨 트로피처럼 들고  염불은 외는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어쨌거나 그녀의 목소리에선 웬지 노래를 많이 불렀

  다거나, 시집 따위를 많이 읽었다거나 하는 기묘한 음조(音調) 같

  은 게 배어 있었다. 나이 이름 따위를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

  는 친정이 있는 경주에 갔다가 시댁이 있는 강릉으로 돌아가는 길

  이었다. 좀더 지난 다음에  알고보니 남편은 무슨무슨 공사(公社)

  에 다니는 공무원이었고 그녀는 아니나다를까 어느 여학교의 음악 

  교사였다. 그래, 음악 선생님. 갑자기 무슨 얘깃거리라도 생긴 것

  처럼 나는 끝간데 없이 담록색으로  밀려오고 밀려가고 있는 바다

  를 내다보며 두서없이  이런 말을 늘어놓았다. 정말  빨래를 해서 

  널었으면 좋을 듯싶은 맑은  날씨였다. 아침에 석굴암에서 부처가 

  내 발 밑에  떨어져 있다고 말한 그 꽃이 저  먼빛 바다 어딘가에 

  피어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바다는 그냥 푸른 게 아녜요. 코발트빛에서 연두빛 사이를 그야

  말로 밀물과 썰물처럼 왔다갔다  해요. 사람의 목소리로 따지자면 

  아마도 마리아 칼라스가 그렇지 않을까 싶군요."

   "아, 아세요? 마리아 칼라스!"

   내가 아까 그녀의 무릎에 놓인  아베 코보의 소설책을 보고 희한

  하다고 느꼈던 것처럼, 그녀도 그와  비슷한 표정으로 내 눈을 쳐

  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그때까지 내내 감추지 못하고 있던 경계

  심 같은 게 얼마간 누그러져 있었다.

   "그래요. 특히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에 나오는 [오 다

  정한 나의 아버지]를 듣고 있으면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사무쳐요. 

  그러고 보니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이 7번 국도를 가고 있다는 느

  낌이 들기도  하네요. 푸르디푸르게 엉켰다가  이따금씩 풀어지는 

  목소리를 따라서 말이죠. 그녀를  두고 누가 <오페라의 성녀>라는 

  말을 했다죠?"

   이미 찬 기운이 가셨을 텐데 그녀가 주스캔의 뚜껑꼭지를 따려고 

  했다.

   "제가 따드릴게요. 잘못하면 손톱이 상하더라구요. 제 아내는 이

  런 음료캔에 대한 일종의 강박을 가지고 있죠."

   "재밌네요."

   그녀가 주스 두  모금을 마신 다음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닦아내며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이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두고 <목소리의 얼굴>이라고 했

  대요. 하지만 불행한  여자였어요. 재클린 케네디에게 오나시스를 

  뺏기고 말년에는 파리에서  고독하게 살았으니까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3막중에 나오는 [지나간 날들이여 안녕]처럼 말이죠. 

  하지만 신라를 유랑한다는 분이 마리아  칼라스라니 좀 안 어울리

  네요."

   "그럼 뭐 제가 가짜란 말입니까?"

   그러자 그녀가 다시금 내 얼굴을 외면하며 흥 하고 웃었다. 그리

  고 버스가 명사이십리가 끝나는 병곡  휴게소에 다다를 때까지 그

  녀는 무슨 생각인가에 깊이 빠진  얼굴을 줄곧 바다에다 들이대고 

  있었다. 휴게소에서 약 이십 분  쉬는 동안 그녀는 버스에서 내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서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었고 나는 

  하릴없이 버스에 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사녀가 아닌 신라 여인 아무개를 생각하고 있었던가.

   이번에는 그녀가 비스킷과 초콜릿을 사들고 올라왔다. 버스는 이

  내 백석 해수욕장을 지나 내처 바다를 몇 미터 곁에 두고 평해 쪽

  으로 내닫고 있었다. 만회하려는  심사는 아니었지만 줄줄이 이어

  지고 있는 푸른 길에 홀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꺼냈다.

   "이 길은 신라 전설에 나오는 삼화랑(三花郞)들이 다니던 길이었

  답니다. 또 스님들이 노래를 읊으며 지나다니던 길이기도 하구요. 

  물론 다 듣고 읽은  얘깁니다만......어쨌거나 이 길은 신라의 길

  이면서 또한 땅과 바다가 만나는 영원의 길이라는 겁니다."

   듣는지 마는지  그녀는 대꾸없이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귀가 열려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나오는 대로 또 내뱉았다.

   " [헌화가(獻花歌)]에 나오는 수로부인(水路夫人)도 경주에서 강

  릉까지 이 바닷길을  따라갔다고  하죠? 그러니까 남편 순정공(純

  貞公)이 강릉 태수가 되어  종자(從者)를 데리고 경주를 떠나는데 

  수로부인도 동행했던 거죠. 아마도 그런 이야기가 있어서 이 길이 

  더욱 아름답게 생각되는 걸 겁니다."

   "저도 학교 때 배운 것  같네요. 그게 어디 {삼국유사}에 나오는 

  얘긴가요?"

   "그렇다고 합니다. 정사보다는 야사가 많아 뭐 사료적 가치 운운 

  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대신 {삼국사기}보다는 훨씬 문학적이잖

  아요."

   아까 내 직업을 물어올 때  얼버무렸던 탓인지 그녀의 얼굴에 다

  시 그런 궁금증 같은 게 무늬져 올라왔다.

   "언제 그런 걸 다 읽으셨어요?"

   "맨발로 이 길을  일주할 때 {삼국유사}를 배낭에  넣고 다녔죠. 

  군에 있을 때도 훈련을 나가게 되면 컴컴한 동굴에서 전지를 켜놓

  고 읽곤 했어요. 그러다 기합도 받긴 했지만요."

   "......어디 국어 선생님이세요?"

   그렇게 묻기가 그래도 편했던 모양이었다.

   "정년퇴직 하시고 지금은 시골에 가 계시는 제 아버님이 그랬죠. 

  저는 뭐 그냥 신라 밀렵꾼예요. 가끔 뭘 쓰잘까도 하지만 잘 되질 

  않고 현실적으로 말하면 어디  시사 주간지의, 그것도 기획특집부

  의 말단 기자예요. 주간지의  기획특집부란 사실 기업체의 총무부

  와 같은 곳이죠."

   아, 네......하고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제서야 뭘 알겠다

  는 얼굴이었다.

   "그럼 취재 여행중이신가 보죠?"

   "취재요? 그렇지 않아요. 사실은 무단결근중예요."

   "그래도 돼요?"

   언젠가 내가 또 무단으로 제주도를 쏘다니다 돌아왔을 때 아내가 

  내게 하던 말투로 그녀가 물어왔다. 걱정이 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안 되죠. 실은 얼마 전까지 육 년 동안이나 문화부에 있었

  는데 일방적으로  기획특집부로 발령을 받은  거예요. 무단결근은 

  일종의 농성에 속하는 걸 텐데 이런 투정이야 받아들여질 리 만무

  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져 있어요. 나름대로 애정과 

  소신을 갖고 열심히  일했거든요. 사실 이건 좌천도  뭣도 아닌데 

  웬지 참담한 생각까지 드는 거예요.  사람이 제가 있어야 할 적당

  한 자리를 찾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고래를 어항

  에다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금붕어를 바다에 키울 수도 없는 

  거잖아요."

   그녀는 또 아, 네......하는 표정으로 내 눈을 잠깐 사이나마 똑

  바로 응시했다. 순간 나는 그녀의 눈빛이 청와빛으로 변해 말갛게 

  빛나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강진 어디 바다에 가면 고

  려 때 청자, 청와를 싣고 중국으로 가던 배가 난파해 바닷물이 청

  와빛으로 보인다지? 이런 생각에 빠져 상대의 눈을 맞받아 응시하

  고 있는 나를 그녀는 화닥 잠에서 깬 얼굴을 하며 아래로 눈을 내

  리깔았다.

   "아무튼 이  바닷길을 수로부인과 함께 여행하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하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예요?"

   뭘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닌데 그녀가 깜짝  놀라며 얼굴을 확 

  붉혔다. 그저 말머리를 돌리고자 하는 뜻으로 무심코 지껄인 말이

  었는데 말이다.

   한 삼십 분이나  그녀와 나는 싸우다 지친  아이들처럼 비스킷과 

  초콜릿을 먹는 일에만 열중했다. 어쩌다  툭 튀어나온 헌화가, 아

  니 수로부인이란 말을 듣고 나서부터  그녀는 못내 좌불안석인 눈

  치였다. 어색한 기분에 빠져 그녀를  보니 손 끝까지 투명한 분홍

  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그 흔하디흔한 안인숙이란 성과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나

  이는 나와 동갑인 서른넷이었다.  올해 유치원에 들어간 혜란이라

  는 이름의 여섯살 난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남편은 술담배도 잘 

  안 하는 그야말로 청백리인데다  지극히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

  녀는 그것에 대해 어딘가 모르게  행복한 것만은 아닌 어조로, 반

  쯤은 남의 집안 얘기를 하듯 말했다. 사람이 산다는 게 어쨌든 완

  전할 수도 또 완전하지도 않은가  싶다. 만약에 그렇다면 왜 세상

  에 그렇게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노래가 있고 또 예깃거리가 있으

  랴.

   버스가 평해를 지나갈 때쯤에 그녀와 나는 어느덧 달뜬 마음으로 

  [헌화가]에 대한 얘기를 길게 주고받고 있었다. 마치 교실에 앉아 

  늙은 선생님한테 {삼국유사}를 배울 때처럼 혼곤한 표정들로 말이

  다.





   "신라의 시가(詩歌)는 대개가 이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지점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요. [처용가]도  물론 마찬가지구요. 그러니까 뭐 

  천리 해안선을 따라 생겨난 노래들이랄까요."

   "듣고보니까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수로부인을 두고  신라인의 영원한 애인이다 라고  말한 학자가 

  있어요. 단지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니라 강릉까지 가는 바닷길에서 

  퍼레이드를 벌인 미세스 신라였다는 말이지요."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죠?"

   버스는, 구비구비 틀어진  길을 가마처럼 흔들거리며 오르락내리

  락 하고 있었다. 뒤에는 하나둘  빈 자리가 나기 시작했고 시계는 

  오후 세시 삼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살구가 자꾸 익어가고 있었다.

   그때에도 바다는 겁없이 길섶으로 양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던 도중  수로부인이 절벽 위에 있

  는 철쭉꽃을 꺾어달라고 하자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그 꽃을 꺾

  어 바치며 읊은 노래라고 합니다. 임해정이란 곳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고 하죠 아마."

   "......"

   "붉은 바위 가에,  암소를 잡은 손 놓으시고,  나를 안 부끄러워 

  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하는 거죠.  아무튼 수로부인이 

  절세미인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인 모양입니다."

   "왜 남편도 있고 종자들도 있는데  하필이면 노인네가 꽃을 꺾게 

  놔뒀을까요?"

   "그렇다면 우선 헌화가란 향가가  나오질 않았겠죠. 순정공은 아

  마도 절벽에 올라갈 만큼 용기가 없었던 사람 같습니다."

   "하지만 노인네도 올라가잖아요."

   "옛날 시가는 오늘 날의 시보다  훨씬 더 상징적이라고 해요. 그

  러니까 그게 꼭 노인네인가 하는 것은 여러가지 의심할 점이 많아

  요. 노인이란 학식이 깊었던 현자를 일컬을 수도 있다는 거죠. 또

  한 소 얘기가 나오잖아요? 소는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그 심우(尋

  牛)의 소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러니까  소에게 풀을 먹이고 있

  던 현자란 웬 젊은 스님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이쪽에서 보면 불륜, 저쪽에

  서 보면 파계 뭐 그런 거네요."

   "수로부인은 정절을  강요받은 조선의 춘향이  하고는 다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요. 신

  라 사회의 분위기는 의외로 제도나  도덕보다도 미를 우선 가치로 

  삼았는지도 몰라요. 또 미라는 건  구경꾼이 있을 때 비로소 완성

  되는 거잖아요. 창밖의 여자, 창  안의 남자 하는 식으로 말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 노래는 그

  런 점에서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굉장한 억지에 제가 속고 있는지도 모르지

  만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와 나는 잠깐 동안 파안대소 했다. 운전

  사가 그동안 우리가 하는 얘기를 엿듣고  있었다는 걸 안 것은 그

  가 함께 따라 웃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리 거슬리는 웃음 소

  리는 아니었다.

   "수로부인은 강릉까지 가는 동안 여러  번 수난을 겪었다고 합니

  다. 바다 용에게 납치되었다가 돌아오기도 하구요. 굉장히 아름다

  웠던 모양입니다.  스님이 파계를 하고, 바다의  주관자이자 신물

  (神物)이라는 용까지 덤벼드는 걸  보면요. 하지만 수로부인은 끝

  까지 남편 순정공을 따라 강릉까지 갑니다. 정절도 지키고 바람도 

  피운 거죠.  그렇지 않았다면  헌화가가 아닌  창부타령이 됐겠지

  요."

   "보기보단 입이 꽤 거칠으시네요."

   그러고 보니 정말  내 입이 거칠어진 것  같았다. 그만큼 긴장이 

  풀려 있다는 증거일 거였다. 그닥 불쾌해서 한 말이 아니란 걸 알

  고 있었으나 나는  얼마간 입을 다물고 맹한  눈으로 바다, 바다, 

  바다를 바라보며 동경에 가 있는 아내 생각에 빠져 있었다.

   벌써 한  달째 그녀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냉정하고 또 그만큼 상대에 대해서도  냉정한 성격을 가진 아내는 

  결혼이라는 일상성에 자신이 마모되는 것을 거의 무서워할 정도로 

  경계했다.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 때문이 아니라 아내는 오직 자기

  자신 때문에 불임을 주장했고, 직장에서 꽤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스스로가 벌어  저축한 돈으로 유학을 떠

  났다. 나를 사랑하고 있었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안쓰러울 만큼 

  이기적이고 또 그  이기적이란 것 때문에 끊임없이  초조해 했다. 

  내 탓도 있었으리라. 걸핏하면 영혼이 길 위에 있기 때문에, 라는 

  같잖은 말로 아내의  입을 막으며 휑하니 어디로  떠나곤 하는 내 

  기질 말이다. 우리 부부는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어서 깊이 

  사랑하고 있기도 했지만, 똑같은 이유로 서로를 구속하는 힘을 행

  사할 수가 없었다. 일본행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아내와 나는 정말

  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물론 나는  반대하는 입장이었

  다. 나이 서른넷에 아이 하나  없이 산다는 건 그렇다치고 아내까

  지 섬나라로 보낸다는 게 무슨 이혼을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끝까지 내가 수긍을 못하자  아내는 이혼 

  운운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천둥이  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삼 

  년의 유학 기간을 이 년으로 한다는 조건으로 그녀의 뜻을 받아들

  였다. 일 년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끝까지 남편임을 주장하고 싶었고 또한 아내가 그

  걸 수긍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시대와 문화가 바뀌어서 그런지 사는 방법도 사랑하는 방법도 이

  렇게 달라졌다. 그러나 역시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남자라는 건 

  아내에 대해서 늘 보수적이게 마련이라는 거다.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가 때로는 너무 힘이  든다. 사랑하지만 사랑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역시 사람은  늘 혼자인 모양이다. 아니, 혼

  자라는 사실부터 먼저 깨달아야  하는 모양이다. 아내는 애초부터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버스는 울진을 지나 양정, 봉평 해수욕장을 지난 다음 죽변에 있

  는 휴게소에서 다시 십여 분 간 정차했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 그

  녀와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각자의 생각들에 골몰해 있었다. 간혹 

  차가 길을 틀 때마다 몸에 몸이  닿는 느낌을 빼놓고는 옆 자리에 

  누가 앉았는지조차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침묵도 그때가서는 별로 부담스럽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

  다. 차가 멈추자 나는 그녀에게 같이  뭣 좀 드실래요? 하고 말했

  고 그녀는 그러마고 핸드백만 챙겨들고  휴게소 안으로 나를 따라 

  들어왔다. 가락국수 두 그릇을  주문하고 그게 나오길 기다리는데 

  그녀가 계산대에서 지불을 하면서 뭘  또 주섬주섬 챙기는 눈치였

  다.

   "집에서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인데 길을 가다 먹으면 제법 

  입맛이 느껴진단 말예요. 그렇지 않아요?"

   한 스무 가닥이나 되는 퉁퉁 불은 국수에 허연 단무지 서너 개가 

  양념 대신으로 같이 섞여 있는 그걸  먹으며 나는 아무 뜻도 없는 

  그런 말을 했다. 그냥 국수만 빨고 있기가 뭣해서였을 것이다.

   "배고플 시간이잖아요. 그런 데다 차  타고 다니는 것도 좀 힘든 

  게 아녜요. 거의 보름마다 강릉에서 경주까지 이 길을 왕복한다고 

  생각해봐요. 또 그때마다 처용이나 파계한 스님을 만나는 것도 아

  니잖아요. 저도 악장 구분없이  단조로운 것보단 띄엄띄엄 바다를 

  완상하며 쉬었다 가는  게 좋긴 하지만 아무리  신라니 뭐니 해도 

  매번 길이 아름답게 보일 리는 없죠."

   어두운 낯빛으로 그녀가 국물까지를  깨끗이 비우며 그렇게 혼잣

  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좋잖은 일이라도 있나  보죠? 그렇게 자주 내려가시

  게요."

   묻지 말 것을, 이라고 생각한 것은 말이 나오고 난 다음이었다.

   "네, 말하자면 병간(病看)차 왔다갔다 해요."

   더듬더듬 하며 그녀가 하기 싫은  소리를 할 때의 표정으로 그렇

  게 말했다.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으므로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실은 그게 힘든 게 아녜요.  친정 아버지 병간이 왜 힘들겠어

  요."

   "!......"

   그때 밖에 서 있는 버스가 빵빵 하고 경적을 울렸으므로 나는 급

  히 캔맥주 몇 개를 되는 대로 달라고 해서 그녀와 함께 차로 뛰어

  갔다.



   길 끝에 길이 있다. 때로는 게처럼 짜디짠 눈을 달고, 숯불 같은 

  마음이 되어 바다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거적대기를 벗고, 

  닫혔던 모든 문을  열고, 사랑이라는 것도 훌렁  벗어버리고 때로 

  길 떠나자 하는 마음을 어찌 하랴. 이렇게 불현듯, 실종되고자 하

  는 울울한 마음인들 어찌하랴. 오늘, 저 바다는 시작도 끝도 없이 

  출렁이고 있다. 누군가  길 끝에서 처용무를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상대가 받으리란 생각도 없이 나는  캔맥주 하나를 권했다. 그녀

  는 역시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그냥 으례적으로 그랬다

  는 걸 그녀도  짐작으로 알았을 터이고 또  술까지는 받아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버스는 조팝나무가  지천으로 무리져 있는 희디흰 

  들녘을 막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캔맥주 두 개에 벌써 취기를 느

  껴졌고 나는 코를 킁킁거리면서 두  번쯤 자세를 고쳐 앉았다. 경

  주에서 그녀와 처음 합석할 때보다는 자리가 많이 편해진 게 사실

  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느낌이 썩 달라진  거북살스러움 같은 

  게 느껴져 나는 몸이 뻗뻗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

  내 이마의 땀을 꼭꼭 찍어낸다  싶었던 그녀의 손동작이 심상찮다

  고 느낀 것은 차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조팝나무 길을 내

  닫고 있을 때였다. 얼른 곁눈질로  보니 그녀의 손은 웬일인지 눈

  께를 더듬고 있었다. 뭘 물어보고자 해도 괜한 참견으로 생각할까

  봐 어물적거리고 있는 사이 그녀가 내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보았던

  지 코가 부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눈이 부시네요. 오후 햇살을 받아서 더 그런 걸 거예요."

   산엔, 햇빛에 투명하게 젖은 꽃들이  정말 신라의 넋처럼 무성히 

  피어 바람에 서걱이고  있었다. 그런 데다 바로  건너편에는 예의 

  옥빛 바다가 여태도 떠나가지 않고  끝간데 없이 너울거리고 있었

  다.

   "몇 년 전인가 불영사 계곡을  들어갔다가 아카시아가 저렇게 무

  더기로 피어 있는 걸 보았더랬어요. 그때도 지금처럼 까닭없이 눈

  물이 나데요."

   "......"

   "근데 저 꽃 이름이 뭐죠? 어려서부터 많이 봐오긴 했는데."

   그녀가 그렇게 묻는 순간에 조팝나무  길이 뚝 끊어져 뒤로 달아

  나버렸다. 엉겁결에 나는 고개를 홱 뒤로 돌리며 말머리를 잡느라

  고 머릿속을 헤적거렸다.

   "우리 나라에 아주 흔한 꽃예요. 조팝나무라고......멀리서 보면 

  쌀밥을 엎질러놓은 것 같죠?"

   이제 삼척,동해까지 한 시간  반쯤 남았다. 오래 왔다. 인연이든 

  우연이든 수로부인을 만나서 오래 함께 왔다, 라는 사실조차 문득 

  잊어버린 채 말이다. 그러한 동안에 그녀와의 스침이 점점 잦아지

  고 그때마다 희번덕 하니 놀라 말을  잃고 짐짓 몸을 비틀기도 하

  면서 말이다.

   "그럼 동해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죠?"

   울고 난 뒤라 그녀의 목소리엔  아직도 하얀 소금기가 남아 있었

  다.

   "생불을 보러요. 경주에선 석불을, 동해에선 생불을......"

   "생불이라뇨?"

   "몇 년 전부터는  매번 코스가 같아요. 서울에서  경주 석굴암으

  로, 경주 석굴암에서 동해 생불에게로,  동해에선 기차 타고 도로 

  서울로, 그리고 또 어느 날엔가는  서울에서 불쑥 다시 경주로 향

  하겠지요."

   "아니, 생불 말예요."

   겨우 핏기가 가신 눈으로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정말 궁금한 듯 

  재촉했다.

   "실은 삼촌이 거기 살아요. 삼척에 있는 대학에서 영언가 영문학

  을 가르치고 있는데 집은 동해에 있죠."

   "그분이 그럼 생불예요?"

   "제게는 그래요. 쉰살이 다 됐는데  아직 독신인 데다 동자꽃 같

  은 사람이죠. 환생한  처용 같기도 하구요. 몇  년 전까지 서울에 

  있는 모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짐을 꾸려서 동

  해로 가데요. 동해에다 뼈를 묻겠다구요.  바다 앞에다 율무를 심

  겠다구요."

   "율무라뇨?"

   "염주를 만드는데 쓰는 거요. 죽을 때 바다 앞에 앉아 염주를 목

  에 걸고 있겠답니다. 그럼 나중에  그 자리에서 다시 율무가 자란

  다는 거죠. 무슨  책인가를 보니 율무는 육십 년  내지 칠십 년을 

  목에 걸고 다니다가 땅에 떨어져도  싹이 튼다고 해요. 그래서 스

  님들은 산길을 가다가 율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을 보면 걸음

  을 멈추고 {반야심경}을 왼 다음 지나간다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

   "삼촌은 속세에 있지만 사실은 탈속한 사람예요. 자기 말로는 고

  등학교 땐가 길을 가다가 햇빛 속에서 우연히 마음에 벼락을 맞았

  답니다. 쉽게 말하면 존재에 대한 뭘 깨우쳤다는 얘기 죠. 아무튼 

  머리가 뒤숭숭하고 마음에 피멍이 도졌단 느낌이 들 때면 휘이 찾

  아가서 마주앉아요. 그럼 이상하게도  저 창밖의 바다처럼 마음이 

  조용히 풀어져요. 그러니 제겐 생불이랄 수밖에요."

   "그렇겠네요. 저한테도 어디 그런 분 안 계신가 모르겠네요."

   "사실은 모든 것이 다 제 마음 안에 있는 거겠지요. 그걸 모르고 

  저도 때없이 이러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나빠 보이진 않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부럽기도 하구요. 

  문을 열고 나가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요. 아무리 영혼이 길 

  위에 있다고 해도 말예요."

   "글쎄요......길 가다 뭘 보고 또 누굴 만나느냐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겠죠."

   또다시 그녀의 귓불이 여태 함께  술을 마신 것처럼 붉어지고 있

  었다. 그녀의 몸이 단추가 하나  풀린 것처럼 가갸거겨 하며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버스가 원덕을 지나  오후 다섯시가 가까워졌을 때  나는 그녀와 

  내가 애초에 앉았던 마음의 자리가  아닌, 어딘가 이슥한 곳에 와 

  있다는 것을 환하게 깨닫고 있었다. 말하자면 서로가 예기치 못했

  던 곳에 이미 발을 들여놓고  있음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

  가 내려야 할  동해가 불과 한 시간 남짓한 거리  앞에 와 있다는 

  묘한 절박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  또한 그녀와 나는 교신하듯 

  뚜렷이 알고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와 나는 어떤 말도 먼

  저 꺼내지 못하고  부러 딴 데로 시선을 두고  있을 밖에 없었다. 

  이 무슨 어이없는  수작들이란 말인가. 아까부터 뒤가  텅텅 비어 

  있는 자리를 놔두고 어찌하여 한자리에  붙박여 앉아 꼼짝들을 못

  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들릴 듯 말 듯한 파도 소

  리에 오래오래  귀를 던져두고 있었다. 생각에서  놓여나기 위해, 

  이  어이없음을 스스로  꾸짖으며,  애초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

  해......그리고 내가 이런 생각에  골몰해 있는 동안에 그녀도 나

  와 똑같은 생각에 빠져 있다는 걸 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버스가 삼척에  도착하고, 아 이제는 어지간히  마음이 수습됐다 

  라고 느끼며 눈을 번쩍 떴을 때  그러나 나는 내가 고장난 시계의 

  태엽을 억지로 감고  있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내 옆에, 아주 

  현실적으로, 여전히 한낮의 채송화처럼  앉아 있는 그녀를 보자마

  자 나는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고 말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

  녀가 이미 타자일 수 없다는 집요한 유혹에 갑자기 나는 시달리기 

  시작했다. 고단한  날들에도, 아침에 눈을 뜨면  어김없이 세상이 

  눈에 밟히듯, 오늘 어쩌면 그녀를 거부할 수 없다는 체념 같은 게 

  강박처럼 내게 달겨들었다. 뭘 어쩌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아

  니었다. 다만 몇 시간 동안이나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그녀와 나 

  사이에 어느덧 매듭 같은 게 생겼다는 걸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어떤 경우엔 이렇듯 기이한 힘에  팔다리가 묶여 자신을 향해 두 

  눈을 부라리게 되는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된다. 더욱이 상대 또한 

  나와 같은 상태라고 믿게 되면 그건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가 없다. 입을 굳게 다물고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얼

  굴에서도 나는 비슷한 그 무엇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이제 동해까지는 약 십오 분밖에 남지 않았다.

   동해까지 다 왔다.





   나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죽은 채 돌처럼 버티

  고 앉아 있었다. 그녀와 내가  타고온 버스는 곧 강릉으로 출발할 

  터였다. 그녀 또한 가쁜 숨소리를 토해내며 마네킨처럼 앞만 똑바

  로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 가벼운  작별의 인사조차 구하지 않고, 

  어쩌면 이러고 있는 나를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그녀와 내 손이 수갑 같은 것에 한 짝씩 묶여 있다는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때로 그게 사랑이라는 것은  아니어도, 어스름한 

  저녁에 깨어나 지붕에 후득이는 빗소리를  들을 때처럼 마음이 간

  절하게 사무치는 때가 있다. 벽  구석에 몸을 말아붙이고 앉아 손

  가락 하나로 아무렇게나 건반을 꾹꾹 눌러보고 싶은 순간이 있다.

   나는 바람 속의 장작불처럼 사납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뜨거움을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순간에 돌연 내 마음을 번개처럼 

  밝히고 지나가는 생각......,

   그래, 그러나 다시 멋쩍은 타인으로  돌아가 서로 건너편에 서서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에 어른거리는 당신의 더운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있는 게 더 좋을 때가  있다. 불러도 서로 들리지 않는 멀찍

  한 거리에서 우리는 만난다.  가끔은 팽팽해지기도 하고 느슨해지

  기도 하는 그 거리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두가 

  타인이며 또한 이렇게 모두가 타인이 아니다. 그래, 나는 자주 부

  싯돌 같은 마음을  꿈꾼다. 겨우 환해졌다가는 이내  눈귀를 막고 

  단단한 어둠으로  스스로 돌아갈 줄 아는......이러한  생각 끝에 

  나는 조금은 다급한 마음이 되어 먼저 이런 말을 꺼냈다.

   "오는 동안에 임해정이 어디란 걸  알았다면 내려서 철쭉꽃을 꺾

  어드렸을 텐데요."

   미수(米壽)인 노인네의 목소리도 이렇게 보리 대궁처럼 껄끄럽진 

  않으리라.

   "!......"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바다에 떠  있는 살구나무 채송화가 눈에 

  보일 거예요."

   그러자 가뭄처럼 쩍쩍 갈라진  수로부인의 목소리가 저쪽 어딘가

  에서 들려왔다.

   "그래요, 바다는 해안선이 있어서  아름다운 걸 거예요. 땅도 아

  닌 물도 아닌."

   이번엔 내가 말을 받았다.

   "7번 국도엔 언제까지 버스가 지나다닐까요?"

   "사람들 기억 속에서 헌화가가 완전히  잊혀질 때까지는 아마 운

  행을 계속하겠죠?"

   그녀의 목소리가 겨우 가까이 와 있었다.

   "나중에 그 막차를 놓치지 않고 탈까 싶네요. 용(龍)도 태워준다

  면요."

   돌연한 그녀의 웃음 소리가 까치떼처럼 귓전으로 날아왔다.

   "그럼 버스에서 내려 바닷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와야겠네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가 다시 웃었다.  나는 까악까악 귀가 가려웠

  다.

   "그때까진 임해정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놓겠습니다."

   운전사가 올라왔으므로 나는 천천히  수갑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

  났다. 다리가 저려 아랫도리가 사뭇  떨려왔다. 그러고 나서 그녀

  와의 마지막 눈길의 마주침. 마주쳐오는 그녀의 눈빛 속에서 문득 

  나는 짜디짠 바닷물 한 방울을  보았던가. 불현듯 나는 석굴암 본

  존불이 석실 바닥에  떨어져 있다고 말한 그  꽃이 그녀의 구석진 

  가슴 어디에 떨어져 있었다는 걸 확연히 깨달았다. 제대로 인사말

  을 할 겨를도 없이 마침내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뒤를 돌

  아보며 달아나듯 승강구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밤이 오기 시작했고 나는 허수아비마냥 거기 길모퉁이에 서서 버

  스가 사라진 어둠 속에다 대고 손을 흔들었다.





   삼촌의 집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며 나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

  고 있었다.

   길에 끝이 어디 있으랴. 혹은, 가다 말고 아무 데서나 천막 하나 

  치면 되지. 너를 어디 가서 만나랴.  거기 천막에 혼자 들어가 문

  을 닫고 앉아야겠지. 허리를 곧게 펴고 눈을 감으면 보이겠지, 마

  침내 푸른 사랑도 바다도.   목에서 염주들이 우수수 떨어질 때쯤

  이면.****





[ 나의 자기 진술, 당신의 심문에 의한 ]                     ' 이인성 '          


    이인성:1953년생이며, 경기고와 서울대 인문대 불문과와 동 대

  학원을 졸업했고, 서울대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계간 

  <문학과지성> 1980년  봄호에 <낯선 시간  속으로>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을 실험적

  인 문체와 독자적인  의식 속에 드러내는 첫  작품집 <낯선 시간 

  속으로>(1983)이 있으며, 소설의 본질과 의미를 철저희 해체하고 

  추궁함으로써 '나'와  타인, 개인과 우리 사이의  참다운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 놓으려는 치열한  작가정신을 보여준 두번  작품

  집 <한없이  낮은 숨결>(1989)도 주목할만한  소설집이라고 하겠

  다.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해체주의적인 정신을 본격적으로 보여

  준 소설가로서 이인성은 가장 첫자리에 놓인다.







  새삼스레 무엇인가를  미리 권하지는 않겠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당신에게. 이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어나가기에  앞서 두 눈을  지긋이 

감고 당신만의 속어둠  속에 침잠해보든지 말든지, 반대로 두  눈을 부

릅떠 이 책을 앞에 둔 당신 자신의 겉모습을 샅샅이 흙어 보든지 말든

지, 혹은 폐활량을  가득 채워 숨쉬며 갑갑한 가슴을  조금 뚫어보든지 

말든지, 또  혹은 빈혈의 머릿속에  가득 핏물이 고이도록  물구나무를 

서든지 말든지....   시작부터 자유롭게, 그리하여 이 뒤를  잇는 어디를 

어떻게 읽든지  당신의 마음 堧 따라....   그렇게, 모든 걸  마냥 당신 

뜻대로!



  .........새삼스레, 당신 뜻대로?



  글곬이 이렇게 터져버렸으니 말인데, 이 글줄기의  연원을 거꾸로 거

슬러올라가자면, 실은,  애당초 이 소설 자체가  당신 뜻대로 씌어지기 

시작했었다. 당신 뜻대로 읽혀지고  있는 지금에 앞서. 그러니까 이 소

설이 바로,  당신이 나에게 오랫동안 추궁해온  그 소설이다.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당신 뜻에 따라, 이 소설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 무슨 까닭

인지 아직 불확실한 당신 뜻대로, 당신에 의해  내가 나를 자백하는 형

식으로.  彫?『壙 당신은 나에게서 이 소설적  자술서를 받아내려 애

써왔었다. 집요하게, 나로 하여금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이 지경에 이

르도록.



  그런데 혹시(그렇다면 필경), 당신은(나는), 그러한 당신 자신을 스스

로 의식치  못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당신에  의해 씌어지는 이 소설을 

실제로 쓰기는 내가 쓴다는 문제를  의식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래

서(그러나), 위의 몇 줄만을 읽은  당신은(위의 몇 줄만을 쓴 나는), 그

것을 어이없는 속임수로 받아들여(그것을  당신 뜻에 대한 내 뜻의 갈

등으로 여겨), 당신  뜻이 내 뜻에 의해 조작되고  있음을 주장할 법도 

하다(슬그머니 뒤섞어 얼버무리고 싶은  유혹을 안 받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당신은(그래도 나는), 끝내 그러한 판단을 뒤엎을 어떤 이유도 찾

을 수 없을 때(이 어쩔 수 없는 갈등과 정직하게 맞설 때), 이 또한 당

신 뜻대로(이것만은 내 뜻대로), 내가 공연히 자기 진술에 당신을 연루

시켜 자기 합리화의 근거를  삼으려 한다고(이 자기 고백 속에는 필연

적으로 당신이 함께  살아 얽혀 있노라고), 나를 이  지면의 벽 너머로 

흘켜보고 꾸짖거나 남들 앞에서 비난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당신과 당

신의 남들인 다른 당신들을 이  지면의 문 안에 열린 당신 뜻 밖의 혼

돈으로 끌어들여야겠다는 집념을 느낀다). 독자로서의 당신에게 내재된 

원천적인 권리로서(작가로서의  내게 의도적으로  부여한 한 책임으로

서). 하지만 역설적이게도(하지만 도리어), 그 권리의 정당한 행사는 이 

소설의 끝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리라(내 외로운 자존심이 홀연 당신과

의 관계를 더 깊이 다져줄 수도 있으리라).



  아!, 이제, 내 뜻을 당신 뜻으로 수락해,  당신은, 내가 억제되어 있던 

괄호를 열어주는가? 일단 작가로서의  내 몫을 실천할 기 만 주기 위

한? 동시에, 독자로서 계속 읽어나가기로 한  결심의 증거로서? 아마도 

이게 당신과 나 사이에서  되어가는 한 과정이겠지만, 그러나, 당신 뜻

을 내 뜻으로 받아 조심스럽게 당신 배면에  괄호를 빠져나온 나는, 불

현듯, 내 뜻밖의 어떤  불길함에 휩싸인다. 아무래도 지금의 이 문장과 

문장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 철자와 철자 사이, 자음과  모음과 받침 

사이로 깔린 백지의  공간에는 예기치 못했던 늪이  숨겨져 있는 듯싶

다. 모든 것을 허무 속에  삼켜 무화시키는 늪, 막 맺어져가는 이 언어

의 인연도 삽시에 지워버릴.



  어쩌면 당신은, 나를 풀어줌으로써 오히려 나를  내 뜻대로 내버려둔 

채, 당신 뜻대로 훌쩍 나를 떠나버리려는 게 아닐까?  텅 빈 관계 없음

으로, 당신과 나  사이에 단절의 늪을 깔고. 나는, 당신이  당신 뜻대로 

어디서든 이  소설 읽기를 마감해 버릴  수 있음을, 그리고 그에  대해 

내가 손쓸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음을, 미처 가늠하지 못했다. 뜻만 정

한다면, 당신의 끝내기는  한마디로 족하다 : "재미없군."  재미가 없다

구 뭐, 재미가? 뭐, 재미가? 벌써?  하기야 이 있을 수 있는 당신의 태

도를 미리  추출했다고 한들, 기껏, "재미가  도대체 뭔 줄이나  알어?" 

하고 독기를 뿜어내는 것 이외에 어쩐단  말인가. 지금, 여기서, 오로지 

이런 소설에  봉착해 있는 내가. 바로  당신에 의해 몰리다 못해  적기 

시작한 이 언어들마저 당신의 부재에 의해 늪가에서 부식되어버린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그렇지만 기어이  그렇게 된다면? 이 소설  첫머리서부터 때 이르게 

닥쳐올 수도 있는 그런 파국을 어떻게 맞이할  참인가? 담담히, 비굴하

지 않게,  실패를 예감하며 무대  위에 선 마술사처럼? 신통력을  잃어 

싱싱하게 피어나는 장미꽃 대신 추레하게 구겨진 종이꽃이 펼쳐지리라

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관중을 향해 얼굴 가득 웃음을 띠는 

마술사처럼, 나도 당신을 향해 손을 내밀어보일까?



  나 자신을 향해서는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며.  당신이 어쨌든 이토록 

재미없는 소설을  일단 여기까지 읽었다는  사실을 빚어, 감동이  아닌 

초라한 물음표 몇 개를  : 만약 당신이 이 순간에 이  읽기를 끊어버린

다면, 그것은 적어도 이제껏 읽어온 읽기 행위에  대한 배반이 아닐까? 

그건 당신이 또 다른 당신으로  옮겨가 그 당신 뜻대로 독자이기를 멈

추는 것 訣, 그 이전의 당신 뜻에 의해  이미 시작된 독자로서의 당신 

뜻을 뜻대로 따라온 것은  아니지 않을까? 아뭏든 읽는 자만이 독자니

까, 독자로서 자유롭다는 말도 이 글을 자유롭게  다루고 다툴 수 있다

는 의미에서지 원래 이 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의미에서는 아니

지 않을까? 결국  당신이 독자로서의 숙명을 선택함은,  작가로서의 숙

명을 선택함을써 당신 뜻을 내  뜻에 맞아들여 더불어 살게 하며 미움

도 싸움도 함께 품어 우리-아뿔사, 당신의 허락없이 이  어휘를 함부로 

쓰다니-의 자식으로 잉태시키고  싶다는 내 육 셈 정신을, 지금  이곳

의 한 모습인  그 꼬락서니가 아무리 흉하더라도, 마찬가지  당신 뜻으

로 되맞아들여, 속 뜨겁게 달아오른 서로의 침묵을 섞기까지, 정성스런 

언어의 애무로 땀흘리껫다는 결단이 아닐까?

  결정적으로 당신 뜻에, 대답의 마침표를 맡기겠다....





  .......결정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끗 저 건너에서  여기를 훔쳐 읽지 않았더라도  잘 알고 있었겠지

만, 들리지 않는 당신의 대답을 한없이 기다린다는  것은 나마저 이 소

설 쓰기를 포기하겠다는 뜻과 다름없다.  그러나, 빌어먹을, 글쟁이에게 

그런 자폐의 끝은 발광일 뿐이 아닌가. 그러니, 당신의 뜻이 어디로 기

울러지든, 마지막  당신인 나 잣니에 대한  의무감만으로라도, 나는 내 

자백을 위한  이 소설을 이어가야겠다.  아니, 과장은 말자. 나  자신인 

마지막 당신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아직 있다. 앞서의 ' 營'과는 다른 

'당신'일지 모르나, 당신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새삼스레 지적해, 당

신은 당신들이니까. 당신들은 모두 나의 당신이니까. 당신들 전체가 하

나의 존재인 듯이  나는 써왔지만, 각자의 당신들 뜻대로  읽는 당신들

은, 나의 '당신' 속에서,  누군가는 존재를 지우고 누군가는 존재를 이

어가며 누군가는  새로이 존재를 마련한다. 그때,  그 무수한 겹쳐짐과 

비껴감을 통해, 나의  '당신'은 당신들 곁에서 자신의 삶을  사는 존재

처럼 움직인다.  극단적인 가정이도, 아무 당신도  읽지 않는다 하더라

도, 이 소설밖에 내가  있게 하고 이 소설 속에 나를 있게 하는  당신-

이 존재는 결코 마지막 당신인 내가  아니다-만으로서라도. 그렇게라도 

당신은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 그  '당신'이 모든 당신들의 수레가 

되기를, 나는 은밀히 꿈꾸는 바.



  확신에 차 있는 듯한 적어놓았으나, 사실 나는  이 전환점을 찾는 데 

살을 갉아내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내 글쓰기의  시간적 양을 새겨넣지 

못하는 인쇄 양식 탓에 그저  한 줄의 빈 행간일 뿐인데, '마침표를 맡

기겠다...'면서 앞  문단을 띄우고 난  오랜 후(어느정도 자유로와진 내 

표현의 이 자발적인 괄호에 삽화를 집어넣자면, 그  사이 나는 다른 아

무 일도 못하고 그저 원고지  앞에 묶여 머리만 쥐어뜯으며 꼬박 아흐

레를 지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발광의 범람 직전에, 하여튼  써야 

한다는 본능적 손놀림으로, 여기서는 삭제된 욕지거리-그런데  그건 내

가 다른 소설에서  이미 썼던 구절의 복습이었다-를 휘갈겨대자,  거기 

거의 자동적으로 '당신'이란  어휘가 새로운 당신을 향해  튀어나왔고, 

그제야 비로소, 위의  깨달음이 트여온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위험 수위까지 차올랐던  발광이 내 의식의 벽 너머로  출렁대고 있다. 

가라앉지 않는 발광은 자꾸 의식을 탐한다. 그 발광은, 홀로 떨쳐진 자

의 난폭한 충동으로,  내 욕망의 단면을 한칼에 잘라  드러내보이고 싶

어한다. 욕망의 몸통이 갈라져 욕망의 피가  분수처럼 갈래갈래 치솟도

록. 그리고 그 핏줄기를 채찍으로 거머쥐고 싶어한다. 그것으로 보이지 

않는 당신을 마구 후려치고 싶어한다. "네가 내  자백을 원하지 않았다

구? 기억해봐, 네가  내 정체를 캐고 싶어한  적이 없단 말이냐?"하는, 

다그침과 함께. 내 앞의  허공 속에 기체로 스며 있던 당신이  억억 비

명을 지르며 뛰쳐나와 피멍울 터뜨리려 실토할 때까지. 실제로는, 당신

이 유령처럼 내 머릿속에 뛰어들어 파란 눈을 흡뜨고 낄낄대는 것만으

로도 흐늘어져 삭아버릴 무모한 채찍인데.



  간신히, 나는 발광을 참고 있다. 욕망이 욕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음

을, 내 의식은,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해서 소설이 써지지는 않는다는 체

험으로 안다. 하지만 정 그 발광이 가라앉지 않는다면, 욕망이 제 욕망

의 길을 모색토록  하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그 채찍을  당신에게 건네

주는 편이 낫다. 그리고  스스로 들이대야 한다. 내 등판을, 아픔을, 가

슴을, 따뜻함을, 머리를,  명철함을, 눈을, 분노를, 입을, 부끄러움을, 허

리를, 슬픔을, 성기를, 기쁨을, 무릎을,  절망을, 발바닥을, 희망을.... "내

가 네 자백을  원했다구? 대봐, 뭣 땜에 내가 네깐  놈을 파헤쳐야지?" 

하는, 당신의 고함 속에서. 내 힘으로는  삭여버릴 수 없는 채찍이르로, 

그때 나는  버텨내는 수 밖에 없다.  이 소설로 이어질 대답을  굽히지 

않으며. 물증은  없다고, 소설은 물증을 들이대는  삶의 양식이 아니라

고, 당신이  채찍보다 더 가혹한  침묵으로 나를 고문해왔다는  심증은 

굳다고. 그래, 공기인 당신은 또한 내  숨결이라서, 내 가슴으로 들어와 

내 안에서 들끓으며 나를  심문하곤 했음이 틀림없다. 없는 듯이, 부드

러운 듯이, 때로은 다가올 행복한 포옹의 예감으로, 그러나 돌연 내 정

신의 구석구석을 한꺼번에 들쑤셔대는 고통으로. 이제야  나는 내 불면

과 두통과 헛구역질과 줄담배와  폭음을 이해할 것 같다. 바로 지금도, 

나는 그렇게 당신을  겪고 있는 모양이다. 심장이 뛰고  호흡이 거칠어

지는 증세를, 나는  자각한다. 머릿속이 웅웅거린다. 그것이  당신의 못

소리가 될 것이다. 당신이  묻지 않더라도, 나는 당 탓“ 물음당할 것

이다.



  - 사이,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아득하다, 이런 관계가 과연 언제나 황홀한 정사를 엮을지.

  - 사이, 머릿속에 어둠이 차오는.

  욕망의 성급함이 이  현실을 더욱 캄캄하게 한다. 우리는  모두 발디

디고 있는 암중모색의 언어 공간을.

  - 사이, 머릿속에 마른번개가 치는.

  이 소설로 한  발자국이나마 내디딜 수 있다면. 읽혀서  자백하는 나

와 씌여져서 심문하는 당신이  부딪겨 일으키는 번개빛에 흠칫 건너다

보이는 저 어둠의 먼 밖으로.



  ......그러나, 어떻게?



  닥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성실하게! 당신과 나는 무수히 가능한 '당

신'들과 '나'들 중의 한 예일 따름이다. 당신과 나는 스스로 실험당하는 

것을,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정 속의 모든 것은 파기

되어야 한다.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당장,  당신의 소환

에 응하겠다. 당신도 다시 한번 당신의 뜻을  굳혔는가? 그렇다면 나를 

기다리는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대답 없음의 함정에 거듭  빠져들지 않기 위해, 훌쩍, 나는 자진해서 

이 소설 속의 허공으로 뛰어든다. 어둠의 허공  속에 어둠의 풍경이 추

상적으로 펼쳐져 있다. 내  시선이 풍경 속을 주의깊게 뒤적인다. 그러

자 어느 순간, 풍경의 한 모퉁이가 부르르  떨리면서 탄식 같은 소리가 

들린다. 곧, 낮은 중얼거림이  어둠의 형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하나

가 아니다. 컴컴한  당신의 형체가 세포분열처럼 증식한다. 중얼거림은 

웅성거림이 된다.  순식간에 어둠의 군중이 내  앞에 가득찬다.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당신들이 저마다 뭐라고 말한다. 말들이  한꺼번에 뒤

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거대한 합창이 된다. 서서히, 당신들은 흉흉한 

음색으로 나를 짓밟을  듯이 무리져 다가온다.  ご 뒷걸음질친다. "안 

돼! 왜들 이러는 거야?"  나는 넘어진다. 기체인 당신들이 한없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나는 점점  아른히 기진해져서 맥을 잃는다. 의식이 꺼

진다. 

  암흑.

  뒤척이는 꿈도 없이 얼마나 깊이 잠들었었나,  어둠의 바닥에 엎어져 

있던 나의 옆구리를  누군가가 툭툭 차댄다. 부시시 몸을  일으켜 주위

를 둘러보니, 어둠의 방인 것 같다. 형체가 분별되지 않는 기척이 뚜벅

뚜벅 내 주위를  맴돈다. 당신인가? "자, 시간이 됐어. 이제  말해보게." 

보이지 않는 당신이  딱딱하게 말을 꺼낸다. "무엇을?...."  構,  얼떨떨

하게  내가  되묻는다. "너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뭘?..." 나는 여전히  막연함을 주체치 못한다. "그럼 먼저 이렇게  시작

해볼까? 넌 누구지?" "누구라니?..." 당신의 발자국 소리가 등뒤에서 멈

춘다. "계속 이렇게 불성실한 태도로..."  하다가, 당신은 목소리를 억제

하며 다시  묻는다. "이름은?" "이인성" "생년월일은?"  "천구백오십삼

년 십이월 구일." "출생지는?" 나는 서울이라  대답해야 좋을지 진해라 

대답해야 좋을지 잠시  헛갈린다. "그냥 쓰기는 서울이라  그러는데 진

짜는 경남 진 慢×. 피난중에 거기서..." "사족은 필요 없어." 하고, 당

신이 말을 저지한다.  당신에게 내 출생지는 어디일까? "본적은?"  "서

울 종로구 누상동..." "원적은?"  "평안북도 정주군, 아, 무슨 면이더라.

.." "됐어. 현주소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을 대다가,  나는 여기가 

경찰서일까-하는 첫 의혹을 느낀다. "학력은?" "대학 졸업..." 깨름직한 

기분으로,  지겹다는 기분으로,  나는  우물쭈물 완결어미를  생략한다. 

"직업은?" "소설가." "소설이 주수입원인가?" "아니요. 하지만 제 직업

은 소설갑니다." 속이려고가 아니라 내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나는 말 

뒤끝에 힘을  준다. "뭐야?" 하고  짧게 끊어지는 반문이 돌연  긴장을 

몰고왔으나, "흥!" 하며,  당신은 의외로 쉽게 추궁을 포기한다.  "좋아, 

멋대로 해. 이번엔 병역 관계를 대봐." "보충역 필." "군별은?" "육군." 

"계급?" "일병."  "군번?" "구육구공칠팔삼구."  "그러면 키는?"  젠장. 

"백칠십센티." "몸무게?" "오십 킬로." "육십 킬로?"  "아니요, 오십 킬

로." "어디 아픈가?" "아니요, 전혀." "보이진  않지만 지독하게 말라깽

인 모양이군. 그  다음, 종교는?" "없습니다." "취미는?"  취미? 갑자기 

나는 이  문답을 비틀고 싶은 충동이  뻗힌다. "술마시기요." 의외였는

지, 당신 질문의 리듬이 멈칫한다. "예,  그럼, 그 다음...., 특기는?" "술

취하기." 쿡쿡, 당신은  뜻밖의 웃음을 참는 태도가 완연하다.  때를 놓

치지 않고, 내가  불쑥 속마음을 토해낸다. "아니예요. 이게  아니지 않

아요? 이런  공문서식 인적 사항을 심문하고  심문받으려는 게 말이에

요. 도대체 우리  상상력이라는 게 왜 이 모양이지요?"  무심코 '우리'

를 또  내뱉은 나는 당신의  눈치를 살핀다. 당신의 묵묵부답.  갑자기, 

당신은 깊은 한숨을 몰아쉰다. 그리고 다시 오랜 침묵 끝에, 훨씬 부드

러워진 어조로 묻는다.  "그럼 자넨 어떤 진술 방식을 원하고  있는 거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건..."  당신은 어둠 속에서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며 곤혹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왠지 그런 느낌

인데, 아니나다를까 당신은 그런  느낌을 토로한다. "그러면 먼저 이걸 

대답해보게. 나는 독자로서 성실하기 위해 계속  읽어오다 보니 마지못

해 심문자의 역할을  떠맡은 셈인데, 그러나 내가 왜  자네를 심문해야 

하는거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킨다. "글쎄요, 그건 애  당신 뜻이었는

데... 하지만,  제 입으로 말하자면, 거꾸로  제 경우도 마찬가지겠는데, 

이런 인식  아닐까요? 당신이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당신도 드러나지 

않고, 결국 '우리'를 드러낼 수 없다는,  소설을 통해서 말이에요." '우

리'라는 어휘를 가지고, 나는  조심스럽게, 어떤 추상적 실체를 그려본 

셈이다. "어렵군,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선은, 작가란 삶을 이야기하

는 데 있어 더  이상 전능한 신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즉 당신

은, 작가란 자들을 당신이나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허둥대며 살아가

는, 동등한 인간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떤 사

람이며 세계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는 게 숨김없이 드러

나야, 그와 참다운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 의사 소통

이 이루어져야, '우리'라는 집단적 얽힘이 올바르게 구성될 거고요. 물

론 늘  하듯이 단순한 이야기꾼인 척  어떤 소재를 다룰 때도,  당신은 

그 작자의  사람됨을 대충 추측해낼  수 있겠지요. 이른바  분석이라는 

걸 통해서.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왠지 부족하다는  것이 당신의 욕구라

고, 저는 풀이합니다. 모두가  제각각 자기 정당성만을 내세우는 이 미

친 시대가  그걸 요청한달지, 때로는  굴욕스럽기조차 한 자기  검증과 

반성이 필요해진 거지요.  예컨대 이때까지는 어떤 이야기를  독자들이 

정당한 것으로 느끼게끔  꾸며온 작가들부터가, 자기가 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이 세상의 허위를 함께 드러낸다든지... 

이젠, 이 시대의 정서적  바탕을 바꿔야 합니다. 그거야말로 작가가 종

사할 일이지요. 그래서 당신의  심문이 제게는 이렇게 울립니다. 네 꼴

을 똑똑히 봐라, 너 자신부터 바뀌거라." 채 정리되지도 않은 생각들이 

어쩌다 이리도 두서없이  솔아져나오게 되었는가? 대꾸하지 않는 당신

에게, 내가 다시 낮게 중얼거린다. "사실은, 겁이 납니다...." 이때, 당신

이 결연하게  말을 받는다. "일단  돌아가게.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자네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다시 시작해보게." 나는,  엉뚱하게, 

"거기선 당신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묻는다. 대답 없는  당신은 이

미 사라졌다.



  보다 구체적으로 내 속을.... 당신 말이 옳다.  내 작품을 통해 당신이 

보는 나는, 당신이 읽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이인성이라는 작가다. 

지금 이것도 내 작품이니까, 여기서의 나는, 아무리 보편적으로 여겨지

는 작가의 처지를  늘어놓을 때조차, 내 진술의 특수성에  입각하지 않

을 수 없다. 따라서 그  나다움을, 그 나다움의 한계를 보편적인 양 들

먹인다면, 그게 곧 나를 은폐시키겠다는 짓이 될 것이다. 그 전에 당신

이 용서하지 않을 테지만.





  지금, 나는 이 소설 속에서-동시에  이 소설 앞에서이기도 하다-, 내 

생활의 근거인 내 집의 내 방에 있다. 나는 이 구절을 쓰면서, 어서 당

신이 나를 찾아주기를  기다린다. 얼굴을 보여줄 당신은  누구인가? 그

런데,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이인성씨?' 하는 글자가 이어 적히

면서, 그게  매우 감이 먼 전화기의  목소리로 읽혀진다. '전 독잔데요. 

할 말이 있어서요.' 언젠가  나는 낯모르는 당신들의 편지와 전화를 받

은 적이 있다. '독자의  심문에 응한다는데, 글쎄, 당신이 이 소설을 쓰

고 있는 현재와 시공을 달리해  읽고 있는 독자를 직접 심문자로서 만

나려는 시도가 실현될  수 있을까요?' 예전의 당신들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당신들의 옛말이 지금 그렇게 고쳐져서 들린다. 

'당신이 심문자로  의식하는 독자란,  실제로는, 당신이 살아오는  동안 

접했었고 접하고 있는-직접이건 간접이건-수많은  사람들 뒤에 그림자

마냥 깔려 있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 그림자 밑에 이중으로 겹쳐진 

그림자인, 당신이 만나고  싶고 만나야 할 미래의 어떤  사람들이 아닐

까요? 아마도 그들이  시간을 되돌리거나 앞질러서, 바로  당신의 당신

인 우리를 송신기로 삼아  통신을 보내고 있을 거라는 뜻이지요.' 나는 

당황한다. 방금 나는 당신을 걸어, 슬쩍 진실을 우회하려 했던 것일까? 

'심문의 내용은 결국 당신의  기억 속에서 뼈저리게 되새겨지는, 또 다

다르고자 하는 미래가 요구하는 어떤 질문들일  테니까요. 심문은 독자

가 하지만, 그걸  상상적으로 받아쓰는건 당신임이 확실하거든요. 그러

니 더 이상 도식적으로 독자를 이 소설 속에 개입시키려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젠, 우리의  심문이 내재된 자기 진술서의  형태로, 고백

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된거 熾.' 나에게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당신의 

당신 읽기는 그대로  이어진다. '여기서 미리, 심문자의  권리로서 당신

에게 진술  범위를 정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우리는 이  소설이 

잡다하고 장황한 당신의 인간사가 되지 않기를  요구합니다. 그건 이런 

식의 소설과는  격이 맞지도 않을  테고요. 당신이 우리를  독자로서의 

대상으로 한정시키듯, 작가로서의  당신과 결부된 삶의 문제들을  들추

도록 하십시요.' '당신'에게서  빌어온 이 받아쓰기 속에  '나'가 속해

있지 않은 '우리'가 거리낌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뒤늦게 발견한 나는 

잠깐 아연해한다. '하긴  어디까지가 그 영역인지 하는  것부터 당신의 

문제일 수 있겠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궁극적으로 당신이 감당

해야 할 문젠데. 그런  의미에서, 어떤 물음들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교묘한 묵비권에  대해 스스로 경계하기 바랍니다.'  나는 찔끔

한다. 그 함정을 내가 명백히 피해가겠노라고 확언할  수 있을까? 암담

한 기분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휘저어보는데, 뒤늦게  당신의 말이 덧붙

여진다. '이걸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작가로서의 당신이 당신에 대해 

무얼 숨기려 해왔는 .'



  정말이지, 어쩌다가 이  지경의 이런 소설에 이르렀을까?  이것도 과

연 이 시대의 한 사랑법인가? 대답은 지금 이곳에  없다. 대답은 그 언

젠가 그 어느 곳에 있을 것이다.



  독자로서의 당신은 이미  저 침묵의 자리로 되돌아갔는가,  작가로서

의 나는 아직 작가로서의 나에 대해 무엇부터 진술을 시작해야 하는지 

조차 가늠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데, 무슨?  작가로서의 내가 작가로서

의 나에 대해? 작가로서의 나? 문득, 당신이  한정시킨 내 진술의 범위

에 물음표를 낳는다.  나여, 너는 과연 작가인가? 나여,  작가로서의 너

와 작가가 아닌 네가 따로 있는가?



  작가로서의 나? 나는  내가 작가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나는 태어나

면서부터 작가는 아니었다. 나는 내 삶이 어느 정도 성숙해진 이후, 그 

언젠가부터 작가가 되었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작가로 만들었으며, 또

한 무엇이 나를 작가로 보장해주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작가가 된 것

은 아마도 문학에의 무의식적 열망과 의식적 결단이 결합된 결과일 것

이다. 그렇지만  그게 언제 어데게 초래되었는지  자백할 근거가 없다. 

공식적으로 나는 한 문학지에  작품이 발표되면서 그 문학지의 수준을 

인정하는 사람들에 의해 작가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스물일곱 살 때였

다. 나는 쓰고  싶었고 썼다. 그렇게 나를  작가로 만들어준 그 작품은 

그러나 3년 전부터 씌어졌고, 그 최초의 단서가  되는 메모들은 6년 전

부터 마련되었다. 그 6년전  스물한두 살 무렵, 나는 오로지 한 사람의 

'당신'을 위해 연애시를 썼었고, 가능한 한  많은 독자를 기대하며 소설

과 희곡을 써서  내가 속한 작은 공동체-학교  말이다-내의 문화 매체

에 발표했어다. 똑같이  스고 싶었고 썼던 그때는 내가  작가로 존재한 

것이었을까 아니었을까? 그러면 내가 첫 소설을 썼던 열여섯 살 때는? 

그때는 더 요란스럽게 나는 작가가 되겠노라고  떠벌리고 다녔는데, 결

심만은 확고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 스스로가  그 수작을 

그리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혹시, 내가 작가가 된 것은 내가  한 개

인으로 독립해가는  과정에서 다른 가능성들이  사라져갔기 때문일까? 

커오면서, 나는 정치를  하고 싶지 않았고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았으며 

법관도 외교관도  공무원도 회사원도 싫었다.  나는 화가가 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고, 음악가도  배우도 될 자질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남는  것으로서의 작가? 아무래도 물음의  고리가 잘못 얽혔나보

다. 여태껏  나는 '작가'를 단순히  한 직업으로 지칭해왔었던가?  그와 

관련하여 부득이, '작가'는  내 생활의 경제걱 근거가  아님을 떠올려야

만 하겠다. 내  밥벌이 일은 따로 있다. 얄궂은 오기로,  터무니없게 그

것을  부업이라 치부해왔지만  말이다(지금에 밝혀졌는데,  작가로서의 

나는 그 '부업'을 지독히도 숨기고 싶어했다).



  작가로서의 나? 그렇다면 이건 다분히  심정적으로 설정된, 작가로서

의 내가 아닌 나의 대립항인가? 작가는  ♣徘求  사람이다, 고로 창작

할 때의 나는 작가다, 그러나 창작하지 않을 때의  나는 다른 나다? 이 

명제는 틀리 것 같기도  하고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을  쓴다고 해

서, 그때 내가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도 나는 밥

을 먹고 배설을 하고 섹스를  하고 친구를 만나고 신문을 읽고 직장에

서 주어진 일을 하며, 그  모든 것들이 내 소설의 소재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느끼고 사유한 것들을  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분리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생활만으로 충

족 프 않는 무엇인가를  향해 소설을 쓴다. 나는 삶이  바뀌기를 꿈꾸

며 소설을 쓴다.  습관적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는 사람에게  침을 뱉고 

싶어서, 또 반대로 감각적으로 혐오하는 사람을 친구로 만들고 싶어서. 

이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나는 그저 생활에 묶여 있는 나와 다르다. 

그러니까..., 아니,  이제 보니,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는 듯싶다. 

문제의 핵심은 그러니까,  작가로서의 나라는 겉모습이 아니라, 작가로

서의 나와 작가가 아닌 내가  내 전체 속에서 화해롭지 못하다는 점이 

아닐까? 둘의 대립은  사실 너무  팽팽해, 서로  만만치가 않다. 나는 

이 세상을 싸그리 뒤집어버려야  한다는 듯이 언어의 음모를 꾸미다가

도, 어는새 매우 소중한 일을 처리하듯 위에서  시키는 대로 직장의 승

진 절차를 밟으며 혹시나 그  동안 잘못한 일이 없었던가 걱정하고 나

서, 다시 후회의 언어로  탄식한다. 바뀌어야 한다는데, 바뀌지 않는다. 

나부터. 그 내 안에서, 그러나 바뀌어야 한다는 욕망 또한 바뀌지 않으

므로, 작가로서의 나와 작가가 아닌 나의 균열은 커져 온 것일 터이다. 

그런데, 생각을 키우는  과정에서, 문제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생 걋

으로서의 나는 생활을 통해 이 세상과 이 세상 속의 삶을 바꾸고자 원

하지 않을까? '작가로서의 나'를 가정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상기해보며? 

또, 독자로서의 당신들과 비교해보면?....





  독자여, 먼저 이 사실을 분명히하겠다. 작가로의 내가 무엇보다도 지

워버리고자 했던 것은  작가가 아닌 나의 모습이었다. 내  부모의 아들

로서의 나,  내 자식의 아버지로서의  나, 내 아내의 남편으로서의  나, 

내 스승의 제자로서의, 내 친구의 친구로서의  나...., 월급장이 나, 예비

군에서 민방위에 이르는 나,  물건값을 흥정하는 나, 버스나 택시 승객

인 나, 술집 손님으로 거드름피우는 나, 다른 작가의 독자가 되어 엿보

는 나....  그 모든  것이 내 소설 속에 스며 작가로서의 나를 구성한다

는 사실을, 나는 굳이 의식치 않으려 했다. 나는 내가 작가여야 한다는 

당위론적 위지에만 너무 매달렸고 시달렸다. 나는  내가 원고지 앞에만 

앉아 있기를 바랐으며, 또 다른  내가 되기를 게을리 했다. 더 많은 내

가 됨으로써 오히려 내가 성숙해지고 그것을 통해 보다 근본적으로 내

가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도외시했다. 바뀐다는  것이 곧 다른 내가 

된다는 것임을 모른  척했다. 작가가 아닌 다른 내가  되려고 애씀애도 

불구하고 숙명처럼 작가로  되돌아와 또 다른 작가로서의  내가 될 때 

비로소 내가 지금의 나를 뛰어넘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논리 , 나는 

기피해 왔던 것이다.  왜? 지금의 나를 버리기 아까와서? 지금의  나는 

어떻길래?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작가로서의 나를 부각시키려 전념한  것은, 

어쩌면 작가가 아닌 내가 위기 없는 삶을 사는 데 너무 능란하기 때문

인지 모르겠다.  나는 주어진 생활에 너무  익숙하다. 이것도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지만, 내  생애를 너무 잘 아는  부모와의 관계를 제외하면. 

나는 딸에게 적당히  장난감을 사주고 환심을 구한다. 나는  아내와 적

당히 영화 구경을  즐기며 부부애를 다진다. 나는 친구들과  적당히 세

상사를 비판하며 지식인다움을  과시한다. 나는 스승들에게 적당한  야

단맞음으로써 제자의 구실을 한다. 나는 웃분들께  적당히 예의를 차리

며 고민을 털어놓아  호감을 받는다. 나는 택시 운전사의  짜증을 적당

히 위로하고, 식당 종업원에게 적당히 다정하게  대하면서도 적당히 신

경질을 내, 그리고 이웃에 적당히 깍듯해,  사회인의 도리를 지킨다. 나

는 나를 도와준  사람을 적당히 대접하며, 급히 필요한  경우엔 적당히 

봉투를 건네주면서, 적응력을  확인한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적대자들

에게조차, 도저히  참지 못하면 화를 낼  수 있다는 내 면모를  보여줄 

필요가 없는 한, 그의 가시돋친 말을 적당히  경청하며 내 겸손과 교양

을 전한다. 내가  그럴 만한 여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그 여건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그 여건을  잘 써먹으면, 절대 그런 

내색을 안  보였지만, 더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은근한 확신과  욕심 

때문에?



  실제로 나는 내 안전한 삶을 위해 너무도  치밀하다. 나는 그런 생활

의 포기를 설득하는 명분에 대해 포기할 수  없는 명분을 계산한다. 그 

치밀한 계산에 의해, 내가 독립해야 할 나이에 도달했을때, 나는 내 안

락한 미래에 대해 주저했었다.  계산상 나는 내 고민을 토로했고, 내가 

계산했던 조언을 구한 뒤에야,  세상일이 다 내 뜻 같지 않다는  듯 안

락함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안락함을 선택할 구실로  가정을 꾸리기 위

해, 나는 3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났던  연애조차 계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나는 안락함에 대해 회의하는 내  모습을 보

여주기 위한 계산으로, 폭음을 한다. 계산에 의해 감당하기 힘들어보일 

정도로 외상값을 쌓아가며, 계산에 의해 취하고  주정하고 자학하고 울

고 욕하고 싸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므로 이렇게  진술해야 한다는 

내 지금의 심정도 그렇다면 계산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불행이  없었다. 철들기 전에 억지로 공부해야 

했던 고생과 철들고  나서 스스로 문학에 얽매여  소설 쓰기의 의무에 

시달린 고생 외에는. 나도 당신들처럼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

가 만나 삶의 씨앗이 되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을 지내고-고상

한 시체소리로, 아무래도 그 시절이  참 행복했었던 것 같다-, 나는 밖

으로 나와 이인성이라  이름붙여졌다. 그래서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속한 단순한 생명체였던 나는 이인성이라는 개별체로 자라나기 시작했

다. 그 과정에서,  나는 확률이 반인 행운을 잡았다. 내가  성장해온 환

경은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또는 불행의 체험을 차단당했다. 나에게는 

가난과 불화가 없었다.  또는 내 삶이 가난하지 않고  불화롭지 않다고 

인식되도록 느낌을 조정받았다. 실제로 내 성장  배경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스무  살이 넘은 후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지만, 어쨌거

나 적어도 나에게는  불행의 의식이 심어지지 않은 게  분명하다. 나는 

줄곧 주어진 삶의 틀 안에서 편안했던 것이다. 가령, 머리가 커진 반항

기에, 나는 일부러 어머니가 보도록 어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일기

를 쓰고, 몇 끼씩 굶고 대들고 말썽을 피웠으나, 집을 뛰쳐나가지는 않

았었다. 그 벌로 대학에 떨어져 참회의 재수 생활을 했을 뿐이다. 내일

의 의지를 위한 경험으로서.  대학의 시우에서도, 중간쯤 서 있던 나는 

잡혀가지 않을  정도로 내 젊음을 발산했다.  추억을 위한 경험으로서. 

그러면서도 왜 체중은 자구 빠져갔는지, 나는  군복무 마저 보충역으로 

출퇴근하며 치르는 행운을  누렸다. 특이한 소설소재를 위한   戀窩막

서. 그러고 보면, 그 모든 것은 지금의 나에 이르도록 치밀하게 예정되

어 순조롭게  실행된 각본 속에 곱게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불행이 

없는 나!



  불행이 없는 나를 감추기 위해, 나는 작가로서의  나로 나를 덮어 쒸

우고 싶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우선,  불행이 없다는 것을 감춰야  할 

까닭이 어디 있었을까? 아, 이 친구야, 지식인이라는 게 고뇌를 팔아먹

고 사는 거 아냐?  먹고 사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좀더 고차원적으로 

명성을 벌기 위해? 다시 계산되는 미래의 각본속의 일부로서? 불행 없

이도 잘 사는 내 삶의  장식으로서? 그러나 왜 하필 소설인가? 고뇌하

는 내 모습이야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도 수식할  수 있을 텐데. 하, 

참, 그거야 문학  그러면 뭔가 더 그러듯하잖아? 문학이 더  그럴 듯하

다? 하기야, 나도 어느 땐가는 문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작가라는 

존재 방식을 흉내냈었지. 하지만, 그건 직접  써본 사람이면 안다. 허구

한 날들을 낮이고  밤이고 계속 원고지와 싸우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그럴 거라면 시인을 자칭하는 편이 낫지. 맙소사, 나는 또 나를 과장하

려 드는가?  그래도 그건 말하겠다.  이 진술의 진실성 여부는  당신의 

판단에 맡기며. 나는, 작가로서의 내가 다른 나를 숨기려 한 것이 일종

의 허위 의식임을 자인하겠다.  그러나 뒤집어, 그 다른 내가 작가로서

의 나를 완전히 누르지 못하고 있는 데서, 뭔가  내 속에 더 캐내야 할 

꼬투리가 박혀 있다고 느껴진다. 그것이 뭔지는 나도 아직 모르겠으되.



  불행하게도-하하, 불행하게도라고?-, 나는 내  생애에 처음으로 발음

한 완전한 단어는 '열쇠'라든가 '꿈'이라든가 하는,  문학적 재능의 징

후를 보여주는 말이 아니라, 그저 '엄마'였다. 내 언어 습득은 그리 빠

른 편이  아니었고, 다른 누구나와 비슷비슷하게  철자법을 익혔다. 만 

여섯 살에서  열한 살까지, 나는  국어시간의 과제와 방학숙제로  나온 

일기와 일선 장병에게  보내는 위문편지나 썹을 뿐이다. 열서너  살 시

절, 내 뜻대로 썼던 일기는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하기 위해서였다. 열

대여섯 살 때, 나는 처음으로 시나 소설을 습작했지만, 그건 단순히 나

를 과시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읽은 것을 적당히 베낀  것이었고, 단순

히 내  나쁜 성적의 이유를  부풀려 공부벌레들을 비웃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보면, 그런  이야기들은 사실 내게 문학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

았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내게 문학은, 그  이후로 모호하게, 문학에 대

한 자신도 의욕도 없어지고 내가 무엇을 해야 좋을지 막막해져서 그저 

헤매고 다닐 스무 살 전후 언젠가 슬며시 기어들어왔다. 어느 날, 나는 

나도 모르게 뭔가를  자꾸 끄적이는 나를 발견했다. 내  머릿속에는 허

공 속을 부유하는 먼지 같은, 이해할 수  없이 자욱한 말들이 웅성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초점은  그 모호함이다. 그 후로 나는  문학에 대

한 명료한 인식을 획득하려고 노력했고, 그  인식은 되풀  수정되어왔

지만, 내가 내 손으로 소설을 써야 한다는  모호한 충동은 선명하게 자

각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당신에게 내 치밀한 각본의  수치스런 수행

을 고백했다. 어떻게 보면, 이제 한 단계의 각본은 끝났다. 나는, "나도 

한때 소설을 썼었지."하고  헛몸짓을 보일 증거로 소설집까지  이미 간

행했다. 그러니  이제, 지금까지의 각본이 한  부분으로 편입될 새로운 
각본이 또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이때이 각본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

려 치면, 나는  내 가면으로서의 작가를 다른 형태로  화려하게 변신시

키는 일이 필수적이다. 가령 내가 전공한 영역을  더 파고들어 연극 연

출가로 변신할 수도  있으리라. 그는 문학의 한계를 깨우치는  순간 과

감히 작가로서의  자신을 버렸다, 그느  개인 대신 공동체를  택했으며 

집단 예술로서의 연극으로  뛰어들었다...., 말해놓고 나니까, 연극에 대

한 내 관심도 꽤  오랜것이어서, 내가 정말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하

는 복선 같은 의심이 든다. 특히 나같이  음흉한 사람은 미래를 함부로 

예언하는 법이  아니다. 제 도끼에 발등을  찍히기 쉬울테니. 불구하고

(와따), 지금의 나로서는(와 자꾸  이런다요), 발악 溝 지금도 이 소설

을 쓰고 있는 나로서는(워매 징한  거), 여전히 쓰지 않으면 발광할 것 

같은 나를 그 각본 속에서  어떻게 설득력 있게 처리해야 좋을지 참말 

모르겠다(참말 그라요 잉?). 아주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바, 그럴 때면, 

작가로서의 내가 작가가  아닌 나의 가면이 아니라, 작가가  아닌 내가 

작가로서의 나의 가면이 아닐까 되뇌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몽상은 쉽게 비약한다. 나는 어둠 속의 당신의 심문중에, 내 직

업이 소설가라고 고집한  적이 있다. 물론 나는 소설  쓰기가 밥벌이까

지를 감당하는 작가로서의  나를 지향하며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영감이란 애당초 고갈될 것조차 갖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광부가 노

동하듯 캄캄한 머릿속에서 말을 캐내고 또 일일이 다듬어야 하는 정도

의 어눌한 글솜씨를 가진  나는, 그 속도야 양에 있어서 전혀  그럴 만

한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스스로  잘 안다. 그런 의미와는 달리, 내 몽

상은 속삭인다.  그때 그 고집은  하나의 역설이 아닐까? 교환  가치에 

의하지 않는 그  무상의 작업에 더 의미를 두겠다는.  이때까지와는 완

전히 반대로, 생활의 계략인 일상의나 밑 심연  속에 진실된  뺐 있다

는.  일상의 나를 적셔 허물지도 못하면서 가슴속 깊이 패인 우물처럼.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는데,  어느 날 드디어 그 작가로서의  내가 일

상의 나를  이겨낸다면 어떻게 될까? 전적으로  작가로서의 나만 사는 

꼴, 작가로서의 내가 곧 일상의  나인 꼴, 웃고 울고 걷고 말하는 것이 

그냥 글쓰기가 되는 꼴,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쓰고 싶은  것만 쓰

는데 글쓰기가 동시에 밥벌이를 행해주는 꼴....  희한한 공상이다. 그리

고 그건 필시  모순된 전제의 소산이다. 나는 걸어가는  행위를 글쓰는 

행위와 동시에 행할   없다. 글쓰기는 삶쓰기이나  삶 속의 독립된 자

기 시간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더구나 그  공상의 세계는 유토피아적이

다. 그런데 지금처럼  현실의 그늘 속에서 갈증을 적셔주는  우물이 문

학이라면서, 그늘  없는 유토피아에 존재하는  '작가로서의 나'라니. 하

면, 작가로서의 나는 필연적으로 작가가 아닌 나를 상정하는 것? 하면, 

나는 내 안에  화해시킬 수 없는 두 적을  끝까지 맞물려 데리고 사는 

것?





  이 순간, 내  귀에는, 내가 황당한 요설로 초점을 흐린다는,  어떤 당

신들의 빗발치는  비난이 따갑게 꽂힌다. 정직한  척하더니 어느틈에.... 

어느 틈에, 나는 내 의식이 다스리지 못하는 몽상을 털어 놓았다. 내친 

김에, 나는, 그 적들이 서로  헤어질 수도 없고 싸우지 않을 수도 없을 

때, 그 사움을  사랑 싸움으로 접붙일 수는 없을까?-로 이어진  요설까

지 해벌리겠다.  나중에 더 독하게 당하더라도,  내가 규명하지 못하는 

속마음이라고 진술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소설을 써오면서 얻은, 양보

할 수 없는 내 깨달음 중의 하나는,  소설에는 계산하려 해도 계산되지 

않는 내가 나도 모르게 씌어진다는 사실이다.



  들어보라. 이 소설이 써지지 않아 허우적대던 어느 날, 나는 그냥 방

바닥에 엎어져 잠이 들었는데,  아주 희귀한 꿈을 꾸었다. 결혼하기 전

까지 내가 20여 년을 살던 옛집은 입구가 터널처럼 뚫린 높은 축대 위

에 세워져 있다. 꿈속에서, 나는 그 축대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축

대 위를 올려다보면  나는 소스라쳤다. 담쟁이가 가득 얽힌  축대에 어

마어마한 달팽이가 보라빛  껍질을 빛내며 달라부터어 있었던  것이다. 

비 온 다음날   말게 개인 아침인 듯 햇살이  푸른 담쟁이와 그 안에 

담긴 달팽이 껍질에 영롱하게 어리고  있었다. 나는, "신기하지도 하지, 

저럴 수가..."하고 중얼거리며 잠을 깼다. 



  꿈에 뜻이 있다면,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내  어떤 무의식의 재현일

까? 나는 해석하지 못한 채 그 꿈을 간직하고  있다. 드물게 꾸는 천연

색 꿈이었고, 뭔가 의미가 들어  있는 것만 같아서. 그렇듯 내 글 속에

도 내가 모른 내가 스며들  수 있으리라, 스며들 수 밖에 없으리라. 나

는, 그 내  모습을 당신이 해석해주기 바라고  있다. 더 철저하게 내가 

 藥さ돈. 하지만 지극히 조심하기를. 나도 무의식이니 정신분석이니

에 대해 귀동냥해 들은  게 있다. 그러니 진짜 내 무의식이  조작된 무

의식을 어떻게 장치해놓을지 모를 일이니까(위의 꿈만은 정말 꿈꾼 대

로다).



  내가 모르는 것은, 그런,  한꺼풀을 흙어내도 언제나 더 깊이 패이는 

내 무의식만이 아니다. 내가 모른  것은 내 밖에 더 많다. 바로 당신에 

대해서는, 나는  당신의 의식조차 모른다.  '당신'이라 불리는 당신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며, 얼마나 다른 사람들인지 모른다. 당신들이 얼

마나 달라서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며 얼마나 다르게 살고 있는지를 모

른다. 당신들에게 불행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떤 불행들인지 모른

다. 당신들의 살림살이를,  당신들의 삶의 역사를, 당신들의  꿈을 모른

다. 당신들도 당신들 자신이,  당신들이 살고 있는 새상이 바뀌글 바라

는지 어쩐지를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런데도 왜 내가 당신들을  '당신'이라 마주 부르게 되

었는지. 처음엔, 나는 나를 읽는 당신들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나는 쓰

는 것이 읽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었다.  그게 아니라

면 필요하지 않았었다. 나는 또   당신들이  나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몰랐었다. 나는  오로지 나 홀로 작가

였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였을까, 는 당신들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는 모른다,  왜 내가 당신이라 불러도  당신이 될 수 없는  수많은 

그들을 의식하게 되었는지. 처음엔,  나는 나를 읽지 않는 그들이 그들

대로 펀펀히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또  다른 그들은 코앞의 밥

과 잠에 당장 급급해 읽는 일에 틈을 낸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

지 모했었다. 또는  깨달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또 그들이 나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몰랐었다.  나는 오로

지 나 홀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결국 나는 모른다, 왜 당신들과 그들이 내  소설 쓰기에 관여하는 것

을 허용케 되었는지.  불행이 없었던 나는 관계다운 관계의  경험이 없

었다. 나는  내 뜻대로  밀착하거나 무심했으며, 존경하거나  경멸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관계를  끊었다. 관계의 어려움은 

기껏해야 내 뜻을 위해 내 뜻에 의해 겪은 부모와 친구와 애인과의 갈

등이 고작이었 . 관계 속에서  고통이 없었으므로, 내 모든 관계는 적

당한 역할을  주고 받는  것으로 족했다. 동생은  '동생'이었고, 선생은 

'선생'이었으며, 노래 잘  부르는 친구는 '카수'였고, 시쓰는  친구는 '시

인'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소설을 통해  당신들과 그들을 만나려 

하게 되었을까?  내가 당신들과  그들을 만나려 했다기보다,  당신들과 

그들이 나를  만나려 했다는게 옳을지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하여간 

이제 나는 내 뜻대로 타인들을 회피해버리지는  못한다. 실제로는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  머리로만 그러는  짓이  틈毬캅? 그럴지는  모른다. 

하지만 머리로나마  그렇게 된 이유를,  나는 스스로 이해해보고  싶은 

것이다. 머리로 받은  교육과 머리로 읽은 책들이 서서히  인식으로 굳

어서? 나일 뿐이 나를 쓰려던 소설 속에서, 쓰다  보니 내가 나인 것은 

어떤 관계 속에서라는 진실을  거꾸로 터득해서? 체험이 적어 작은 체

험에도 민감하기 때문에 부딪칠  수 있었던 어떤 계기를 통해서? 어른

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사회 생활을 겪으며 내 삶의 각본을 짜는 과정

에서? 내 이기적인 삶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이 세상이 온통 바뀌어

야 하겠 藪, 할 수 없이 그 속의  남들을 생갈하게 되었느지도.... 아무

래도모르겠다. 머릿속이  캄캄한 게, 혹시 뭔가가  이 자백을 방해하는 

건 아닌지.  다만 한 가지, 타인들도,  문학처럼, 회심의 전환점을 통해 

내 존재를 바꿔준 것이 아니라, 서서히 조용히  내 마음의 공간 속으로 

스며들어와 자리잡게 되었다는 짐작이 들 뿐이다.



  그래서 나는  또한 모른다,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당신들이  나와 

함께 무엇을 하고자  하며 시선을 비킨 그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지. 그러나 이제,  나는, 때때로, 그 시선들 사이에  흐르  무엇인가를, 

몸으로, 느낀다. 나날의 예사로운 생활 속에서  어는 날, 날씬한 스키가 

얹힌 자가용 안에  목 전체를 'PRO-SPECS'라는 대자상표를 둘러치고 

자신만만하게 투덜대는 갓 스물짜리 매끄러운 얼굴들과  마주칠 때, 벽

촌을 기웃거리다 만난 어느  문제 학생의 학부형이던 늙은 농부가 "내

가 보기에도 우리  자식 하는 짓이 옳소만." 하고 대번에  말을 매듭질 

때, 산사태의  위험 때문에 주거지인  움막이 철거되는 날에도  훈련에 

불려나온 막노동자  예비군이 대낮부터 술에  취해 다짜고짜 중대장의 

멱살을 움겨잡는 것을  뜯어말릴 때, 세상이 더러워 못  살겠다고 아우

성을 치다가 시위에 길이  막히자 "저 빨갱이놈의 새끼들 다 잡아처넣

지 않고 뭐하노!" 라고 버럭 성을 낼 때, 어디론가 끌려갔다 돌아온 실

업자 친구가 비오는  날이면 뼈에 스민 아픔을 호소할  때, 종합무역상

사에서 외국 구매자들을 상대하는 대학 동창이  "내가 포주냐, 내가 포

주야?" 투덜대며 그  외국 구매자들을 대접하는 고급 술집으로 데려가 

회사 돈으로 술을 사줄 때, 동네 꼬마가  고급 관리인 자기 아버지에게

는 선물 가져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자랑할 때, 성냥갑   걋 아파트촌

을 벗어나고 싶다면서도 아이 학군 때문에 참자고 결심하는 나 자신에 

눈감고 싶어질 때, 차마 수위치를 끌 수  없어 밤새도록 따라 울먹이며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보았을  때, 제 몸에 불을 지른 어느  청년 노동

자의 일기를 읽으며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멍

멍하게 가슴이 넓어질  때, 뭔가 쓰려던 이야기를 문득  멈추고 섬쩍지

근한 기분으로 이런 걸 쓰면  졸지에 칼부림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주

저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계속 모른다,  무엇이 당신들과 그들과 나들의 모여-삶을   ゾ

왔는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직  스쳐지나가본 인연조차  없었으므로 

내 존재가 전혀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때의, 한 분의 삼촌을  묻고 한 

분의 삼촌을 남겨둔 채 우리  가족을 월남하게 만든 해방과 분단을 모

른다. 내가 태어나기 직전에 끝난, 평안도의 아버지와 함경도의 어머니

가 남쪽 막다른 곳에서 나를 낳게 만든  전쟁을 모른다. 구구단만이 머

릿속을 맴돌던 내  한 자리 숫자의 나이에 스쳐간,  다혈질의 할아버지

를 만세부르게 만들었던 학생  혁명과 아버지를 무표정하게 화단에 물

만 주며 한숨짓게 했던  군사 쿠데타를 모른다. 신문도 잘 안  읽고 시

험 때문에 구헌법을 외우던 재수 시절에  홍두깨처럼 지나간, 어머니마

저도 "어쩔려구  이러지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신음하게 만들었던 

10월 유신을 모른다. 정치, 사회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던 나이였으나 

서울에 멀리 살았던  탓에 그저 불안과 초조  속에 소문만을 추적했던 

광주의 5월을 모른다. 그 무형의 시간들은  뒤섞여, 안개처럼 자라나며, 

당신들과 그들이 들어와 있는 내 마음의 공간을 갈수록 자욱이 뒤덮는

다. 뒤덮어 시야를 흐린다. 뿌옇게, 습하게, 불투명하게, 모두들 사이를. 

그러나 그 안개를 어떻게 거둘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이제, 알고 싶다. 모르기 때문에.





  한 사회적  구성체로서의 '우리'를 더듬어보던 어떤  때(그러나 그때, 

어떤 응집 개념인  '우리'가 한쪽으로만 묶으면서 한쪽으로는 때어놓는 

한정된 관계의 틀은 아니었던가), 나는 지극히 추상적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문학은 칼이 되어야 한다고. 문학은 읽힐 때만 그 무엇이 되는 

법이니까, 적에게 읽히도록 잘 조준하고 깊이  벼르다가 결정적인 순간

에 그의 가슴을 찌르는  단 한 번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다

른 어떤 때는, 또 지극히 추상적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문학은 서럽

고 약한 자들이 지친  마음을 끌고와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또 죄지

은 자들이 숨어들어 저  혼자 속죄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또 죄지은 

자들이 숨어들어 저 혼자 속죄할  수 있는 은밀한 방이 되어주어야 한

다고. 현실에서의 패배가  꼭 패배는 아니며 삶을 저렇게가  아니라 이

렇게도 볼 수 있다는 위안을 주어야 한다고.  그 희망들이 지극히 추상

적이었던 까닭에 이제는 적이 아니라고 나눌 수  있는 건지, 적이 있다

면 그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문학이 어떻게 그런 적들에  대한 

칼이 될 수  있으며 그 칼이 어떤  상처를 줄 수 있는  건지...., 반대로 

문학이 단지 울음이나 속죄의 밀실이 된다면 삶을 바꾸고자 하는 욕망

은 어디로 가는 건지, 보다 근본적으로 삶을  바꾼다는 것이 대체 무엇

인지, 바뀐다면 어떻게 바뀌기를  바라는 것인지..., 나는 알고 싶다. 앎

을 향해 뻗치고 싶다. 이 역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가? 나는  내가 모른 것들을 

모른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 또, 무엇인지는 모르나, 무

엇인가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어떻게인지는 모르

나, 그 어떻게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소

설을 쓴다? 의식과  감각과 상상의 더듬이로 암중모색하듯,  다른 체계

로 공부하듯, 더듬어 앎으로  가며 삶을 바꾸어보려고? 그러므로(!), 나

는 당신을 부른다? 소설적으로 내가 모르는 것을  되묻고, 그것이 당신

에게도 소중한  물음인지 확인하고, 서로  모르면 같이 뒤져보기  위해

서?... '소설적'이란 정녕  어떤 것일까? '철학적'이나 '경제적'과 다름은, 

하다못해 '생활적'과도 다름은? 내가 모르는 나와 당신들과 그 밖의 모

든 이들을, 그리고  그 모두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함께 언어로  ? 

밀고 나갈 수  있다는 것? 총체적 언어로 면모를 드러내고,  허구적 언

어로 변모를 시도하는? 언어  자체의 탐색인 까닭에 한 구조적 전복의 

가능성을 실험해볼 수 있다는 빌미로, 그러면서도  언어를 통한 탐색인 

까닭에 그 실패가 치명적이지 않다는 담보로?....



  그러나 그 아득한 첫걸음 앞에, 사무치는  암담함이 있다. 다시금 '우

리'를 응시해보는 지금(지금이라고 이 '우리'라는 틀이 무한정의 포용력

을 지닐 수 있느가), 그 우리 총체의 실제 삶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으

리라는 예감. 생각을 설득하기는 쉽다면 쉬워도, 정서를 설득하기는 어

렵고 몸을 설득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것도 이제는 알 듯싶다. 입는 

옷과 먹는 음식과 읽는 책과 듣는 음악과 보는 그림과 노는 오락과 하

는 일과 그 모든  것에 대한 해석이 동시에 바뀌는 것.  그렇게 바뀌려

면, 그러나 또한 관계의 바뀜이  있어야 한다. 내가 바꿔 입는 옷을 만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며, 내가 음악을 바꿔 들으려면  다른 음

악을 작곡하고  연주하고 노래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니까. 그  모든 

것이 어느 날 폭풍처럼 한꺼번에 휘몰아칠 수 있을까? 삶의 온 체계의 

혁명? 하지만, 혁명이  습관마저 대번에 바꿔줄 수 있을까?  습관이 바

뀌지 않았는데 사람이, 삶이 바뀐 것일 수 있을까?



  막판에 오니, 다시 슬그머니 내 현실주의자가  고개를 쳐드는 모양이

다. 그런데 지금의 그 현실주의자는 작가가  아닌 나로서의 현실주의자

인지 작가인 나로서의 현실주의자인지 애매하기 이를  테 없다. 전자라

면 이미 보았듯  지금의 안전한 삶의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인즉, 당장 어쩌랴, 내  후자가 그와 살을 섞어 변모시켜주기만 기다

릴밖에. 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우리는 당혹스런 문학적 현실을 직시

해야 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쓴다. 당신은 그 언젠가 그 어느 곳에서 

읽을 것이다. 수많은 당신들이  그렇게 따로따로. 그러면 그 다음 언제 

당신들은 하나의 입지점으로  모여 하나의 '당신'이 되고,  그래서 언제 

나와 다음 단계의  이야기를 나누고, 언제 실천의 새로운  장을 모색할 

것이며, 언제 삶의 다양한  영역들과 손잡을 것인가. 물론 그 움직임이 

순차적인 건 아니다. 때로는 동시적이며 때로는 병렬적이다. 그래도 이 

언어의 유통이 너무도 더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으리라. 예컨대 

'문학은 더다'는 내 조금 전의 판단이 언제 당신들에 의해 공감이나 반

감으로 응집되고 언제 그 극복이 토론될 것인가, 모두의 문제로서.



  그것이 절망의  진술이 아니다. 더구나  당신이 보았듯 얼마든지  더 

속물스러울 수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나마 문학은  스스로를 직

시하게 해주고,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가능성을 꿈꾸게 해주지  않았는

가. 그러니 '말로만'이라고 말하기보단, 먼저 '말로나마' '말로부터' '말과 

더불어' 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되뇌이지만, 나에게  문학은 위대

한 영감도 소박한 도구도 아니다. 그건 삶의  약한 활 쳄㎱堅 해도 강

한 버팀대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 문학은 희미하게나마  '우리'를 의식

시키고, 그 속에서 보다  뚜렷한 '당신'을 주었다. 그 당신 뜻은 어떠한

가? 이 소설을  쓰게 해주고 읽어주었기에 고맙게 되묻는 바,  이런 언

어 행위가 아무리 치열하더라도  삶이라는 대설 앞에서는 역시 쓰잘데 

없는 소설에 불과한가? 언어란 그다지도 삶에 밀착해 있으면서 그다지

도 허약하거늘,  그렇다면 당신은 언어를 훌쩍  뛰어 넘는 무슨 더  큰 

복안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아아, 독자여, 용서하라.  내 자기 진술의 마무리가  어 紵臼 당신에

게 글자의 침을 옮겨 튀게 하는지. 그런데 뭐, 마무리? 마무리라고? 이

걸로 끝낸단 말인가? 도대체 내가 자백다운 자백을 얼마나 했길래? 당

신의 심문은 더  쌓여 있는데. 그리고도 또  쌓이고 있는데. 나는 아직 

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자세히 자백하지 않았고,  무엇을 사랑하며 무

엇을 증오하는지도 아직 제대로 진술하지  못했는데.... 나는 아직, 그러

니까, 그..., 그런데, 그래도, 이건, 그냥, 이대로....



[ 시인과 도둑 ]                                            ' 이문열 '          

       이문열:

       1948년 경북 영양에서 출생했으며, 서울사대를 중퇴하였다. 1977
       년 대구매일신문에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입선되고 1979년 동아
       일보 신춘문예에 <새하곡>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를 비롯한 수많은 소설집이  있으며, 그 
       대부분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의 현역소설가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소설가이다.


         시인이 길을 간다.  사람의 자취 끊어진 그윽한 산길을 시인이 
       훠얼훨 간다.  바람이 불 때는 바람에 밀리듯이, 구름이 흐를 때
       는 구름따라 흐르듯이.  들꽃을  만나면 들꽃 찾아 나선듯이, 산
       새가 울면 산새에 불려온 듯이.

         그는 긴 세월을  허비해 두개의 상반된 세계와  인식을 거쳐왔
       다.  쓸쓸하고 슬퍼 오히려 아름답게  보이는 유년과 불 같은 젊
       은 날의 태반을  바쳐 먼저 그가 건너야 했던  것은 긍정과 시인
       (是認)과 보수(保守)의 세계였고 그 인식이었다.  그 세계에서의 
       삶은 이겨  살아남고 이룩하고 누리는 것이  본모습으로 상정(想
       定)되어 있었으며, 인식의 주류는  <지금>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 
       옳으며 <여기> 있는 것은 모두 존중되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인도한 일탈(逸脫)의 별은 그를 그같은 세
       계와 인식속에 안주할 수 있도록 놓아두지는 않았다.  그의 젊음
       도 스산하게 저물어갈 무렵 새로운 세계와 인식이 뒤틀린 운명에 
       피흘리던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억눌리고  빼앗기고 괴로움 
       속에 던져진 시간을 때워야 하는 목숨들의 세계와 <지금> 이루어
       지고 있는 모두가 틀렸으며 그르고, <여기> 있는 것은 모두가 부
       숴져 거듭 나야한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어두워 더 치열한 열정으로  그 새로운 세계와 인식에 자
       신을 내던졌다.   하지만 그 또한 그  안에서 늙어갈만한 세계도 
       그 믿음속에서 죽어갈 수 있는 인식도  아니었다.  그늘 없는 양
       지가 어디 있고 속 없는 겉, 뒤 없는 앞이 어디 있는가.  세계도 
       인식도 겹이었고, 그 시비는 <지금>과 <여기>에서의 하염없는 노
       래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 그는 한동안  적막같은 양비(兩非)와 양시(兩是)의 세월
       을 보냈다.  때로는 우주와 인생을 다 이해한 것처럼 그 두 상반
       된 세계와 인식을 한꺼번에 꾸짖었고, 때로는 그 둘을 아울러 껴
       안고 아파하며 뒹굴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것은 답이 아니었으
       므로 스스로도  막막했으며, 두 세계와 인식은  너무도 완강하게 
       등을 돌려 그는  외로웠다.  극단으로 대립되어  있는 두 세계와 
       인식 사이에서 중용이나 조화를 추구함은 시비의 끝이 아 灸 시
       작이었다.  양비일 때는 어김없이 양쪽 모두가 적이 되면서도 양
       시일 때는 모두가 벗이 되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가 새로운 기대로 찾아나선  것이 자연이었다.  그
       의 적막함은 결국 사람들의 시비에 끼어든 데서 비롯되었음을 깨
       닫고 사람들의 마을과 저잣거리를, 어느  쪽이든 편이 되지 않으
       면 허전하고 불안해 못 견뎌하는 그들의 의식을 벗어났다.  그것
       은 또한 세상의 시비에 상처입고  비틀거리는 그의 시를 위한 떠
       남이기도 했다.

         오래된 지혜는 모  앎 모든  아름다움 모든 참됨 모든 거룩함
       의 원형으로 곧잘 자연을 암시해왔다.   실은 그도 그러한 옛 지
       혜를 따라 앎을 길렀고 아름다움과 참됨과 거룩함을 그렇지 못한 
       것들과 분별해왔으며 시에서는 진작부터 그 흉내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자연에  이르는 오래된 길인 관조(觀照)라든
       가 자기침잠(自己沈潛)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반복학습에 의해 강요된 전범(典範)
       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내면의 절실한  요구에 따른, 모든 가치
       의 이상태(理想態)로서의 자연 속을  그는 추구하며 헤메는 중이
       었다.  그와 그의 시가 아울러 이르려했고 종당에는 아마도 이른 
       것으로 보이는 자연에의 귀일(歸一)  내지 합일과는 여전히 멀었
       지만, 공리적 효용에서 점차 떠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경험
       과는 또다른 세계의 인식으로 접어들고 있는 셈이었다.

         계절은 이미 가을도 깊어 산기슭은 불타는 듯한 단풍으로 덮여 
       있었다.  만지면 묻어날 듯한 파아란 하늘과 어우러진 눈부신 단
       풍을 바라보던 그는 그곳이 기억에  獵 곳임을 깨달았다.  아련
       한 유년의 어느 날에 지금은 둘  다 가고 없는 형과 아버지와 함
       께 넘은 적이 있는 구월산(九月山)의 한 자락이었다.

         그 무엇에 이끌렸는지 그는 금강산 다음으로 자주 그산을 찾았
       다.  길은 달라도 거의 해마다 지났는데 그해는 공교롭게도 유년
       의 기억이 묻어 있는 그 기슭을 지나게 된 듯 했다.  

         산은 언제나 옛 그대로인데 자신은 어느새 여덟 살의 아이에서 
       귀밑머리 히끗한 중년으로 변한  게 새삼 비감(悲感)을 불러일으
       켰다.  그러나 뒷사 宕湧 가장 감탄하는 그의 특질 중에 하나가 
       자신의 비참과 고통을 일순에 빛나는 시정(詩情)으로 바꾸어놓는 
       기지와 해학이었다.  그날도 그는  갑작스레 밀려든 비감을 이내 
       한 편의 희시(戱詩)로 지워버렸다.

         지난해 구월에 구월산을 지나고(昨年九月過九月)
         올 구월에 또 구월산을 지나네(今年九月過九月)
         해마다 구월에 구월산을 지나니(年年九月過九月) 
         구월산 풍광은 언제나 구월이네(九月山光長九月)

         그가 단풍 그늘에서 땀을 식히며 동음이의(同音異意)인 구월을 
       일곱번이나 되풀이해 그런 칠언(七言) 한 구절을 얽고 있는데 으
       슥한 숲 속에서 누군가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이놈, 게 섰거라.  꼼짝하면 머리통을 뚫어놓을 테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소리나는  곳을 보니 화승총을 겨눈 장
       정을 중심으로 환도며 창을 꼬나쥔 화적패가 천천히 그에게로 다
       가들고 있었다.  그런 후미진 고갯길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도
       둑떼로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여러 이름의 도둑떼가 깊은 골짜기마다 득
       시글 킹홱.  흔히 화적으로 뭉뚱그려 불리는 명화적(明化賊) 선
       화당(宣火黨) 녹림당(錄林黨)이  있었고, 좀  거창하게는 활빈당
       (活貧黨) 살주계(殺主契)같은 옛  도당의 후인(後人)을 자처하는 
       무리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조선조 후기의  세도정치와 가뭄과 역병으로 대
       표되는 재해에 희생된 유맹(流氓)들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
       보면 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그 노리는 바
       가 다만  재물이고, 주장하는 바도 기껏해야  스스로의 도둑됨을 
       발명하는 것에  惻ち 않는 작은  도둑이고, 다른 하나는 노리는 
       바와 주장하는 바가  그와 다른 큰 도둑이었다.   비록 흔하지는 
       않았지만 그 큰 도둑중에는 세상을 노리고, 사민(四民)의 평등과 
       공영(共榮)을 외치는 무리도 있었다.

         일생을 떠돌며 산 그에게는 그런 패거리들과의 만남이 그리 드
       문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어느  부류이든 그들과의 만남을 
       두려워해야 할 까닭은 많지 않았다.  이름이 항간에 알려지기 시
       작한 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
       절 〉 본질적으로는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유맹인 그라 대
       개는 별일없이 놓여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그를 덮친 패거리는 그가 삿갓과 대지
       팡이를 앞세우고  시인으로서의 이름을 대도 아는  체를 않았고, 
       실은 그들과 다름없이 가난하고  힘없음을 밝혀도 그대로 놓아주
       지 않았다.  어르고 윽박질러 그를 기어이 산채로 끌고 갔다.

         그가 말로만 듣던 큰 도둑을  만났음을 직감한 것은 오봉산(五
       鳳山) 쪽 후미진 계곡에 자리잡은  산채로 끌려간 뒤였다.  지키
       기는 쉽고 치기는 어려운 계곡 막장 험한 곳에 제법 돌성까지 쌓
       아 만든 산채부터가 길가는  나그네의 봇짐이나 터는 좀도둑떼의 
       소굴과는 달랐다.  망보기의 배치며 저희끼리의 규율도 어지간한 
       관아보다 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상찮은 느낌을  주는 것은 그들의 우두머
       리되는 자였다.  희면서도 어딘가  음침한 얼굴의 그 중년사내에
       게서는 흔히 그런 산채의  두령들에게서 보이는 허세나 거드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짐승의  털가죽을 덮은 교의 따위도 없었고, 
       호위 求 졸개도 없이  토막 안 삭자리에 앉아  있다가 떠들썩한 
       보고를 듣고서야 가만히  뜰로 나왔는데 크지 않은  키에 근골도 
       힘을 쓸 수 있는 사람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졸
       개들이 보여주는 우러름의 자세였다.  그가 나서자 백 명이 넘는 
       범 같은 장정들이 일시에 굳은 듯 서서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그는 표정없는 얼굴로 가만히 시인을  살폈다.  볼을 찔러오는 
       듯한 강렬한 눈빛이 까닭 모르게 시인을 압도해왔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의 생김과 거동 어디에선가 짙게 배인 먹물기가 있어 
       시인을 다소간 안도하게 했다.


         "나는 가진 것  없는 길손이오.  앗아가봤자  두령께는 아무런 
       쓸모없는 목숨뿐이니 그냥 보내주시오."   비로소 섬뜩해진 시인
       이 그렇게 입을  떼자, 곁에 있던 졸개들이  험한 눈길로 주의를 
       주었다.    "두령이 아니라 제세선생(齊世先生)이시다.   우리를 
       하찮은 화적패로 보고 선생님을  망령되이 부르면 용서치 않으리
       라!"

         그러는 졸개들의 목소리가 꽤나 높았으나 제세선생이라 불리는 
       그 두령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대로 한
       동안을 그 믄 시인만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받았다.

         "우리 젊은 동무들이 멀리까지 나가  길목을 지키는 것은 다만 
       재물을 바라서만은 아니다.  때로는  목숨을 거두기 위해서도 나
       간다."  나지막하면서도 뒷골에 찬바람이 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남의 목숨을 앗아 어디에 쓰려는 것이오?"  "쓰임이 있어서가 
       아니라 쓸데없으면서도 세상의 물자를  축내는 목숨을 줄이려 함
       이다."  "어떤 목숨이 그런  쓸데없는 목숨이오?"  "일하지 않고 
       먹는 자, 생산하지 않고 쓰는 자다.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는 
       들에 나가 일하는가? 스스로 먹을 것은 스스로 거두는가?"

         그같은 물음에 시인은 벌써 그 우두머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
       지 알 듯  했다.  산 속 깊이 자리잡고  있어도 장안 저잣거리에 
       선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 시인이 오래전에 지나온 시비의 한 극
       단에 자리잡은 정신을 뜻 아니하게 만난 것이었다.  시인은 문득 
       치솟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그를 살펴보았다.  그 표정의 깊은 물 
       속 같은 고요함이 오랜 세월에  걸쳐 닦아  자신의 이념에 대한 
       확신을 싸늘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그게 까닭 모르게 오기를 건
       드려 시인을 정직하게 만들었다.

         "아니오.  나는 오랫동안 일하거나 거두어본 적이 없소."  "그
       러면 그대는 베를  짜는가? 그 베로 남을  따뜻하게 해주고 밥을 
       빌어먹는가?"  "그렇지도 않소.   나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남자
       는 아무도 베를 짜지 않소."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라.  그러
       면 그대는 공장(工匠)이인가?  후생(厚生)에 이용되는 도구를 벼
       리거나 만들 줄 아는가?"  "그렇지도  않소.  나는 풀무 곁에 앉
       아본 적조차 없소."  

         "가진 봇짐으로 보아 재화를 고루고루 나누어주고 이문을 뜯어
       먹는 장사치도 아닌 듯하고 생김을 보니 백정도 아니겠다.  그렇
       다면 그대는 바로 선비겠구나."   "그렇지도 못하오.  벼슬을 해 
       그 녹으로 사는 대부(大夫)를 꿈꾼 적도 없고 학문으로 빌어먹는 
       사(士)되기를 바라지도 않았으니 선비라고도 할 수 없을 게요."

         시인의 대답이 거기에 이르자 갑자기 두령의 목소리가 차고 매
       서워졌다.  어쨌든 너는 일하지  않고 먹고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쓰는 자다.  우리가 목숨을 앗으려 하는 것은 바로 너 같은 도둑
       이다."

         진작부터 예상해온 진행이라 시인은  그대로 준엄한 선고가 될 
       수도 있는 그의  말에도 놀랍지가 않았다.   오히려 덜된 양반을 
       상대로 골계(滑稽)라도 던지는 심경이 되어 물었다.

         "구차하게 목숨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금해서 묻는 것이니 
       대답해주시오.  그럼 선생은  무얼 생산하시오? 무얼 생산하시기
       에 먹고 입고 쓰실 수가 있소?"  "나는 민초들이 믿고 의지할 꿈
       을 생산했고, 참고 기다릴 앞날을  생산했다.  그리고 장차는 보
       다 나은 세상을 생산하려 한다." 

         "그렇다면 나도 생산하오.  나는  시(詩)를 생산했소."  "시를 
       생산했다고?"  "선생 같은 분에게 시 그 자체가 바로 생산이라고 
       말하지 않겠소.  그러나 꿈도 생산이  되고 기대도 생산이 될 수 
       있다면 시도 생산이 될 수 있을 것이오.  시도 꿈과 기대를 생산
       할 수 있기 때문이오.  하지만  보다 나은 세상을 생산하기 위해
       서는 어쩌면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할지 모르겠소.  꿈과  穗 
       외에 다른 감정들도.  그런데 그같은 감정의 생산에는 시도 유용
       한 도구일 수가 있소."

         시인의 짐작대로  그는 먹물 출신임에 틀림없었다.   선비로서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룬 뒤에  그 길로 접어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적어도 시의 외면적인 효용은 알고 있었다.  다시 한동
       안 말없이 시인을 살피다가 물었다.

         "틀림없이 보다 나은 세상을 생산하는 데는 더 많은 것이 필요
       하다.  좋다.  그럼 그대는 시를 통하여 공포와 무력감을 생산할 
       수 있는가?"  "아마는 있을 것이오."  "용기와 믿음도 생산할 수 
       있는가?"  "그것도 될 것이오."

         "그렇다면 너는 생산하는  자다.  살아서 입고 먹고  쓸 수 있
       다.   그러나 여기에 남아  우리를 위해 생산해야 한다.  공포와 
       무력감은 우리의  적들을 위해 생산하고, 용기와  믿음은 이곳의 
       동무들과 산 아래의 우리 편을 위해 생산하도록 하라."

         시인은 물론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들었다.  어떤 이는 그
       걸 공리적 효용이라 말하지만 시인은 이미 세속적 효용으로 치부
       하여 내던진 시의   기능을 그 큰 도둑은 지금 자신의 최종적인 
       생산을 돕는데 쓰고자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인은 왠지 불현듯한 의욕을 느꼈다.  비록 한때 민
       중 시인으로 떠들썩하게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닌 적은 있지만 시
       의 그같은 효용은 속속들이 시험해 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때
       의 시는 기껏해야 가진 자, 누리는 자를 빈정거리거나 비꼬고 웃
       음거리를 만들었을 뿐 두려워 떨게하지는 못했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도 그저 동정과 연민을 보내었을 뿐 용기와 믿음으로 새 
       세상을  ?졀 떨쳐 일어나게 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나는 그
       때 그 세계와 인식의 껍데기만을 훑고 지나쳤는지 모른다.  나는 
       부정과 거부의 열정에는 충실했지만 그 세계와 인식의 핵심은 거
       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소홀히 했던 파괴와 재창조
       의 의지에 있는지도 모른다.  낡고 부패한 세상을 무너뜨리고 살
       기 좋은 새 세상을 여는 것-만약 나의 시가 그 일의 한 모퉁이라
       도 맡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큰 쓰임이다.  그리고 그같은 큰 쓰
       임은 내가 지금 자연 속에서 찾고자 하는 몽 朗 그 무엇에 갈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그렇게 때늦은 기대까지도 품어  보았다.  하지만 시인
       에게는 그 큰 도둑이 요구하는  생산을 약속하기 전에 먼저 풀어
       야 할 궁금증이 있었다.  

         "자발적인 회개를 생산해보는 것은 어떻겠소? 위로부터 스스로 
       고쳐나갈 의지는?  그것들을 생산하여 선생의 적들에게 나눠준다
       면 힘들고 험한 싸움 없이도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
       겠소?"  시인이 조심스레 그렇게 묻자 제세선생이 처음으로 안색
       을 바 毛駭.

         "그런 것들을 생산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생산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생산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은 수천 년의 세월을 통해 
       이미 증명된 바다.  언제 가진 것들, 힘있는 자들이 스스로 회개
       하고 고쳐나갔느냐?  세상이 열리고 수천 수만 년, 조금씩이라도 
       고쳐지고 나아졌다면 세상이 어찌 이  모양이겠느냐?  그들은 다
       만 더 버티수 없을 때에야 비로소  고쳐나가는 척할 뿐이다.  아
       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주던 도토리를  아침에 네 개 주
       고 저녁에 세 개  獵  걸로 바꾼다고 배고픈 원숭이들에게 무엇
       이 달라지겠느냐?"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듯싶소.   예를 들면 공자나 맹자 같
       은 이의 생산은 틀림없이 세상의 실질도 고쳐나갔소.  그들은 힘
       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참고 고개 숙이기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힘
       세고 가멸한  자들에게 스스로 돌아보고  고쳐나가도록 권하기도 
       하지 않았소? 그리하여 그들의 생산이 존중받던 시절에는 세상도 
       분명히 그전보다 나아지지 않았소?"

         "그래서 나는 그들 높은 갓 쓰고  긴 수염 기른 선 宙湧 미워
       한다.   그것들이 공맹(孔孟)을 추켜세우며 이천  년을 보냈지만 
       과연 세상이 얼마나 나아졌느냐?  공맹의  생산은 다만 그 개 같
       은 선비들이 힘있는 자에게 빌붙는 길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그
       것들은 민초사이에 있을 때는  제법 그럴듯한 말로 왕도(王道)를 
       논하고 다스리는 이의 인의(仁義)를 따지나 한번 조정에 들면 그 
       하는 짓은 오직 각기 그 주인을 위해 짖어대는 것 뿐이다."

         제세선생은 격한 어조로  그렇게 받더니 칼로 베듯  말을 받았
       다.   "우리는 이제 더 기다릴 수 없다.  힘센 자들과 가진 축이 
       스스로 뉘우치고 고쳐갈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세상은 혁명 없
       이도 나아질 수 있다는 주장이야말로  어쩌면 이 세상이 지금 이
       대로 충분히 훌륭하다고  믿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해로울 수도 
       있다.  얼마나 기다려온 우리냐?  그런데 아직도 그 가망없는 주
       장에 홀려 더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냐?"

         그때 시인이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산채에 남아 그 기이한 생산
       에 한동안을 바칠 수 있었던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가 있다.   이직은 함부로 던져버리고  싶지 않은 목숨이 
       그 까닭이었을 수도 있고, 제세선생의  논리가 한 신선한 충격이 
       되어 일으킨 산 아래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심 탓이었
       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한 시인으로서
       의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기실 시인에게는 제세선생이 신념으로  제시한 시의 자리와 쓰
       임이 그리 낯선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 시론(詩
       論)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고 관찰함으로써 그 진정성을 확인
       해볼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시인으로서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일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시인은 그 산채에 남았고, 기꺼
       이 그의 시를 그들의 용도에 바쳤다.


         곧 겨울이 오고 산채는 두터운 눈  속에 파묻혔다.  눈 때문에 
       크게 무리를 지어  산채를 내려가기도 나쁘고 길이  끊겨 길목을 
       지키는 일도 얻을 게 없어  정탐을 위해 은밀히 고을을 나다니는 
       발빠른 장정 몇과 높고 사방이 트인 산채 뒤 봉우리에서 망을 보
       는 한둘을 빼고는 모든 식구가 산채에 웅크린 채 긴 겨울을 보내
       었다.

         제세선생이 생산하여  그들 모두에게 나누어준  꿈은 생각보다 
       훨씬 원대하면서도  세밀했다.  공화(共和)  대동(大同) 정전(井
       田) 균수(鈞輸)  따위 오래된 이상과 제도들로  정교하게 짜여진 
       세상이 바로 그 꿈을 바탕해서 생산하려는 보다 나은 세상이었는
       데, 그대로 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듯싶었다.  게다가 
       얼른 보기에는 그 생산의 방식과 과정도 실제적이고 일관되게 구
       성되어 있었다.  먼저 물고기가  놀 물을 마련하고, 다음에 물고
       기를 길러  늘이며, 마지막으로 뭍에 올라가  쓸어버린다는 것으
       로, 이미 그들은 첫번째 단계로  돌입해 있었다.  본거지는 그대
       로 구월산에 두되, 인근의 고을들을  들이쳐 나라의 다스림이 미
       치지 못하는 곳을 넓힘으로써 그들이 놀 물을 되도록이면 넓혀둔
       다는 단계였다.


         제세선생이 맨 먼저 나라의 다스림이 미치지 못하는 구역을 삼
       으려고 노리고 있는 곳은 신천(信川)이었다.  그는 봄이 되는 대
       로 그곳 관아를 들이쳐 인뚱이를 빼앗은 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면서 고을 전체를 위압해 뒷날에도  그들이 놀 수 있는 물을 
       만들어 두려 했다.  경사(京師)의 관군이 내려와 다시 고을을 내
       어주고 산채오 물러나더라도 그  고을의 인민들은 한번 자기들을 
       다스린 적이 있는  세력을 쉽게 무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
       다.  


         제세선생과 그의 젊은 동무들이 이듬해 봄을 위해 스스로를 다
       그치고 단련하는 동안 시인도 그들에게 약속한 생산에 전념했다.  
       주제가 결정돼 있고 목적이 뚜렷한 그러한 종류의 생산은 어쩌면 
       그 이전에 경험한 어떠한 생산보다 쉬웠을 것이다.  그가 고심해
       야 되는 것은 어휘의 선택이나  운율의 조정 따위 기교의 문제로
       만 축소되기 때문이었다.

         오래잖아 시인의 생산이 쏟아지기  시작하고 제세선생은 그 중
       에서 자신의 생산을 가장 효율적으로  도울 수 있는 것들만 골라 
       미리 정해둔 대로  분배 했다.  산채의  젊은 동무들은 동짓달로 
       접어들면서부터 새로운 노래들로 적개심을 높이고 용기와 믿음을 
       길러갔다.   그때 시인이 생산한  노래는 그 뒤 거의가 산일되었
       으나 더러는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구월산에 눈 내린다.
         창칼을 들어라, 출전이다.
         원수의 칼날에 쓰러진 동무여,
         그 원수는 내개 갚으리.

         높이 올려라, 의(義)의 깃 像
         그 밑에서 싸우다 죽으리라.
         비겁한 자여, 갈 테면 가라.
         우리들은 이 깃발을 지킨다.

         원수와 싸우다 목숨을 던진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흘린 피 방울방울 꽃송이 되어 
         살기 좋은 세상으로 피어나리라.

         시인이 생산한 또 한 갈래의 노래는 몰래 산 아래 고을을 정탐
       가는 젊은 동무들에 의해 그곳의 적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적
       들이 부르는 노래로서가 아니라 듣게 되는 노래로서였다.

         정월달에 접어들면서 신천고을에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괴이한 
       노래들이 퍼졌다.  젊은 종놈은 쇠여물을 썰면서 웅얼거렸다.

         저문 날 등불 걸고 여물을 썬다.
         나뭇짐 무지게에 무거운 팔다리로  
         싹둑 싹둑 썬다, 여물을 썬다.
         부자놈들 흰 손목을 작두로 썬다.
         탐관오리 굵은 목을 싹둑 싹둑 썬다.


         백정은 버둥거리는 돼지에 올라타고 그 멱을 따며 신명나게 불
       러 젖혔다.

         오늘은 너희를 위해 돼지를 잡는다만
         너희 부른 배를 더 불리기 위해
         주린 배를 움켜잡고 돼지 멱을 딴다만 
         언젠가는 이 칼로 너희 멱을 따리라.
         기름껴 두터운 그 배때기를 도리리라.

         늙은 작인(作人)의 아낙도 밤새워  길쌈을 하다 말고 난데없는 
       김매기 타령을 한 가락 뽑아 냈다.

         어화, 동무들아 김매러 가세.
         가라지 도꼬마리 매자기 어수라지
         밭곡식 아니어든 모두 뽑아 태우세.
         밭은 그렇다손 세상 김은 누가 매나.
         양반나리 부자나리 누가 모두 없애주나.
         바이 걱정마소. 구월산이 있지 않나.

         구월산 동무들이 세상 김을 매준다네.
          濚 없고 부자 없는 좋은 세상 만든다네.


         제세선생이 알아본  바로 시인의 생산은 매우  효과가 있었다.  
       새 세상을 만들 열정에 들뜬 산채의 젊은 동무들은 봄이 더디 오
       는 것을 한탄했고, 더러는 제세선생을  찾아와 눈속의 출진을 졸
       라대기도 했다.  드들은 한결같이  원수를 향한 불타는 증오심과 
       목숨을 돌보지 않는 용기와 승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충만해 
       있어 노래 속에서 죽이고 노래  속에서 죽고 노래 속에서 이기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했다.

         산아래 고을에서의 효과도  대단했다.  아무리 아랫것들  사이에서 은밀
       하게 불려지는 노래지만 윗사람들 중에도 귀밝은  이는 있게 마련, 정월도 
       가기 전에 정월도  가기 전에 신천고을의 양반과 부자들에게는  물론 관아
       에게까지  그 노래는 흘러들어갔다.  그  엄청나고 끔찍한 내용에 놀란 부
       사(府使)는 사람을 풀어  내막을 캐는 한편 엄하게 그  노래들을 금지시켰
       지만 소용없었다.  노래는 막을수록 훨씬 더  빨리 퍼져 나갔고 뒤따라 공
       포와 무력감이 무슨  모진 전염병처럼 번졌다.  겁을 먹은  부 悶 양반들 
       중 더러는 아예 짐을 싸 성벽이 높고  든든한 인근의 대처(大處)나 임금과 
       경군(京軍)이 있는 서울로 옮겨 앉기도 했다.

         그같은 생산의  효용 덕분에 시인은 산채에서  군사(軍師)나 막빈(幕賓)
       에 못지않게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한동안은 차고 엄하기만  하던 제세선
       생도 누그러져  마침내는 시인을 참된  동무로 받아들여 주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어느  것도 기쁘거나 즐겁지가 않았다.    자신없는 시권(試券)
       을 내고 과장(科場)을 나서는 선비의  그것과 흡사한 불안감과 초조함만이 
       그 겨울을 난 정서의 전부였다.

         이윽고 언제까지고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도 가고 봄이 왔다.    앞뒷
       산에 첩첩이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산 아래로 길이 열리고  막혀 있던 먼 
       데 소문도  전해져왔다.  이월  들면서부터 이따금씩 걸려 드는  길손들에 
       따르면 삼남(三南)은 민란이 일어 시끄러웠고,  관북(關北)에는 괴질이 돌
       아 민심이 흉흉하다는 내용이었다.

         겨우 산  아래로 내려갈 수 있을  만큼 길이 열리면서부터  시작된 젊은 
       동무들의 성화를  억 値 누르고 있던  재세선생도 그같은 소문들이  거듭 
       확인되자 출전을 결정했다.  춘궁기를 기다려  시끄러운 지방이 더 많아지
       면 움직이려 했으나  들리는 소문만으로도 이미 넉넉하다는 판단이  선 듯
       했다.    

         산채의 젊은 동무들이  고대하고 고대했던 출전의 날이 왔다.   겨울 동
       안 벼린 창칼과  쌓은 훈련, 그리고 시인이 생산해준 용기와  믿음으로 단
       단히 무장한 이백 가까운 병력은 삼월 삼짇을  날로 받아 진작부터 노려오
       던 신천으로 밀고 내려갔다.  전에도 여러  번 고을을 들이쳐 재미본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준비도 그 어느  때보다 세밀해 기세는  그지없이 높았
       다.

         "창칼을 들고  싸우지는 못하겠지만, 그대도  가야 한다.  가서  그대의 
       생산을 확인하고 뒷날의  보다 효율적인 생산을 준비하라."    제세선생이 
       그같이 권해와 시인도  그들 무리의 뒷줄에 섰다.  살륙하고  파괴하는 그 
       자체는 시인의 몫이  아니었으나 그에게도 불안한 대로 자신의  생산을 확
       인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어쩌면  자신을 몽롱한 자연으로부터 결별시
       켜 확 피  시비의 세계, 사람들의  거리와 마을로 되돌릴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까지도 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낮에 산채를 떠난 그들은  다음날 새벽녘에 신천고을 뒷산에 
       이르러 거기서 하루 낮을 쉬었다.   밤새 걸은 피로를 씻은 다음 
       다시 어둡기를 기다려 불시에 관아를 들이칠 작정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벌써 차질이 났다.  그들은 전같으면 숲속에 죽
       은 듯 숨어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겠지만 그날은 그렇지 못했다.  
       제세선생의 생산에다 시인의 생산이  더해져 그들이 당연히 유지
       했어야 할 조심성을 줄여버린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실
       세와는 무관하게 관념적으로  생산된 근거없는 감정들로 그들이 
       숨어있던 산골짜기는 공연히 웅성거렸고, 그 기척은 나무꾼과 이
       른 봄나물을 캐러  나온 아낙들에게 감지되어 날이  저물기 전에 
       이미 관아에 알려지게 되고 말았다.  피로하더라도 그 새벽에 그
       대로 관아를 치는 것보다 훨씬 못하게 되고만 것이었다.

         시인이 생산해 적들에게 내려보낸  공포와 무력감도 반드시 제
       세선생이 기대한 대로의 효과만 낸 것은 아니었다.  고을의 가진 
       자들과 벼슬아치며 아전바치들 중에는  그 겨우내 어디선가 흘러
       든 섬뜩한 노래들과 상민들 사이를 떠도는 심상찮은 분위기에 겁
       먹은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또한 틀림없이 그것은 구원을 
       바라기 어려운 썩은 중앙 정부로 인해 무력감과 패배감으로 자라
       가기도 했다.   도성이나 방어사가 있는 큰  성안으로 옮겨 앉은 
       자들이 바로 그랬다.

         그러나 지킬 게 너무 많아  아무래도 자신의 땅을 버리고 떠날 
       수 없는 자나 어떤 연유에서건 결국은 그 사회 그 체제와 운명을 
       같이 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은  달랐다.  곧 방어본능이 되살아난 
       그들은 이제는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처절한 결의로 
       그 예사 아닌 도둑떼의 내습에 대비했다.  그들은 그동안 버려두
       었던 녹슨 무기들을 꺼내 손질하고 무너진 성벽을 수리했다.  불
       만에 찬 향무(鄕武)들을 다독거려  다시 자신들의 칼로 기능하게 
       해 두었고, 철이른 기민(饑民)까지 먹여 양빈들의 흔들림도 어느 
       정도는 막아 두었다.   거기다가 조심성없는 행군 때문에 동정까
       지 미리 전해지니 고을의 대비는 그야말로 철통 같았다.

         이경 무렵 해 산패들이 어둠을 헤치고  遠 내려가보니 관아에
       는 횃불이 대낮같이 밝고 역졸  토졸에 적잖은 인근의 장정이 가
       세해 수백이 넘는  군사가 관아를 에워싼 채  진을 치고 있었다.  
       그 뜻밖의 사태에 제세선생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저게 어찌된 일인가?"  처음 알 수 없기는 시인도 마찬가지였
       다.    어떤 썩은 체제라도 어쩔 수 없이  지켜야만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는 공포가 오히려  절망적인 용기와 
       결의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것  - 아무리 시인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미묘한 이치를 한순간에 알아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때
       까지도 제세선생은 그 같은  사태를 자기편에 유리하게만 해석했
       다.

         "저것들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  허장성세에 속지 마라!"  
       제세선생이 그렇게 영을 내리자 아직도 자기들의 노래에 취해 있
       던 젊은  동무들은 기세도  좋게 그 어림없는  공격에 들어갔다.  
       함성과 함께 화승총을 놓고 창칼을 휘두르며 밀고들 때까지는 좋
       았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관아 담벽에 이르기도 전에 벌써 여남
       은 명의 동무들이 화살에 다치고 담벽에 이르러서는 다시 지키던 
       군졸들의 창칼에 앞선 대여섯이 짚단처럼 쓰러졌다.

         거기다가 그들의 패배를 한층 결정적으로 만든 것은 그들 자신
       의 질적인 변화였다.  미래에 대한  전망도 보다 나은 세상에 대
       한 환상도 없던 시절의 그들은  용감했다.  자포자기적인 흉폭성
       과 막연한 울분에 차있던 무식한 산도둑떼에 지나지 않던 그들은 
       그런 싸움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내다랐으나 제세선생의 이치와 
       시인의 감정으로 겨우내 세례받은 그때는  달랐다.  이치를 따지
       게 됨으로써 스스로의 목숨까지  따지게 되었고 시인의 생산으로 
       감정을 다스리는  동안 어느새  문약(文弱)이 스며든  것이었다.  
       그 겨울 내내 말로 너무도  많은 부자와 탐관오리를 죽여와 그동
       안에 얻은 대리만족도 전같은  용감성을 이끌어내는 데는 방해가 
       되었다.

         "젊은 동무들, 어찌 된 일인가?  지난날의 용기와 투지는 어디
       로 갔는가?"   한바탕 싸움에서 형편없이 져서  쫑겨온 패거리를 
       보고 제세선생이 불안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적이 너무 강
       합니다.   산채로 돌아가 힘을 더 기른 뒤에 쳐야겠습니다."  젊
       은 동무들은 그렇게 이치로 대답했다.  이미 겁먹은 눈치가 완연
       했으나 한사코 그것만은 부인하려들었다.

         "모두 달려나가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하지만 그리  되면 새 
       세상은 누가 엽니까?  도탄에 빠진 저 민초들은 누가 구합니까?"  
       그러는 사이  관아 근처에는 적잖은 백성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제세선생은 문득 그들에게로 기대를 옮겨 소리쳤다.  "여러분 무
       얼 하고 계시오?  우리를 도와 썩은 벼슬아치들과 조정을 몰아내
       고 새 세상을 엽시다!  여러분이 주인 되는 나라를 만듭시다!"

         하지만 백성들의 반응도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전에는 드러
       내놓고 돕지는  못해도 은근히 편들어주던 그들이었다.   거기에 
       제세선생과 시인의 생산이 더해졌으니  이제는 당연히 팔 걷어붙
       이고 나서야 하건만 그렇지가 못했다.  그들도 이미 감정과 이치
       로 배불러 있었다.  그 겨우내  노래 속에서 그 미운 양반놈들과 
       벼슬아치들을 수없이 멱을 따고 배를  가른 뒤라 실제로 칼을 들
       고 일어날 마음은 전보다 오히려 줄   있었다.  대신 구경꾼 심
       리만 발달해 오히려 멀찍이서 눈만  멀뚱이며 이제 또 어떤 재미
       난 일이 벌어지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제세선생은 거기서 거의 젊은 동무들을 내몰듯하여 한번 더 관
       아로 돌진했지만 백성들의 가담이 없는 한 머리 수부터가 모자랐
       다.   다시 여남은 명을 잃고 그사이 자신을 되찾은 관군에게 오
       히려 쫑겨 십리나 물러나서야 겨우 대오를 수습했다.

         "이제는 하는 수가 없구나.   외딴 부잣집이나 털어 산채로 돌
       아가자.  가서 더 힘을 기른  뒤에 뒷날을 도모하리라!"  제세선
       생은 그렇게 방향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쪽도  뜻 같지가 못했
       다.  겁을 먹고 대처로 나가버린  부자들의 집에서는 쌀 한 가마 
       비단 한 자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고 움직이기에  너무 몸이 큰 
       부자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대비를 해놓고   있었다.  건장한 머
       슴들을 수십명씩 배불리 먹여 파수보게 하는 한편 인근의 소작인
       들에게도 연통을 놓아  그들이 저택을 에워쌌을 때는  그 방비가 
       관아에 못지 않았다.  거기다가 잘 닫는 말을 여러 필 놓아 가까
       이 있는 다른 부자며 관아에  구원을 청하니 도무지 어찌해볼 수
       가 없었다.        

         한군데 부잣집에서 허탕을 치고  또다른 외딴 부잣집을 찾아나
       서면서 제세선생이 탄식처럼 물었다.  "어째서  저것들까지 맞서 
       싸울 생각을 하게 됐을꼬......?"  "어차피 물러날 곳이 없는 까
       닭이 아닌지요.  우리의 노래가  그걸 일깨워......"  시인이 씁
       쓸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그들이 두번째로 덮친 부잣집은 첫번째 집보다 규모가 작고 지
       키는 사람의 머리  수도 적었다.  구원을  청하는 말이 빠져나간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담 안에서 날아오는 화살의 수나 횃불의 밝
       기로 보아 젊은 동무들이 조금만 더 거칠게 밀어붙였으면 관군이 
       오기 전에 털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번이나 져서  쫑긴 뒤라서 그런지 그들은  그 허술한 
       담조차 넘지 못했다.  함성만  요란하고 저희끼리의 목소리나 높
       을 뿐, 막상 돌진을 하다가도 화살 여남은 대만 날아오면 허둥지
       둥 물러나고 마는 것이었다.  그사이 기별이 닿았는지 멀리서 구
       원오는 군사들의  횃불이 버얼겋게 다가오고 있었다.   "틀렸다.  
       물러나라!"  제세선생이 괴로운 듯 소리쳤다.   

         그들이 모든 추적을 따돌리고  산채로 접어드는 산기슭에 이르
       렀을 때는 날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한군데 후미지고 바람없
       는 산자락에 밤새껏  소득없는 싸움에 다치고 지친  무리를 쉬게 
       한 제세선생이 문득 시인을 돌아보고 말했다.

         "그대는 이제 떠나도 좋다.   애초에 그대가 약속한 생산은 반
       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목숨은 부지하고 떠
       날 수 있는 생산은  껴꼐坪 했다.  그게 무언지 아는가?"

         "혁명을 꿈꾸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무릇 혁명하려는 자는 
       실질없는 혁명의 노래가 거리에서 너무 크게 불려지는 걸 경계하
       여라.   온 숲이 다 일어나야  날이 새는 것이지, 일찍 깬 새 몇
       마리가 지저귄다  해서 날이  새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일찍 깬 그들의 소란은 숲의  새벽잠을 더 길고 깊게 할 
       수도 있다.  선잠에서 깨났다가 다시  잠들게 되면 정작 날이 새
       도 깨나지 못하는 법."  그러면서 번질거리는 두 눈을 소매로 씻
       은 제세선생이 차갑게 덧붙였다.  "어서 떠나거라.  이번 실패의 
       연유를 그대에게 전가할 유혹이 일기전에."  
          


[ 푸른나무의 기억 ]                                        ' 김형경 '          




    김형경: 1960년 강릉에서 출생하였으며, 강릉여고와 경희대 국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83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공모에 시

  가 당선되었으며 1985년에는  <문학사상> 신인상에 중편소설 <죽

  음잔치>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는 <모든 절망은  다르다>가 있

  고, 소설집으로는 <단종은 키가 작다>가 발간되었다. 1993년 <국

  민일보>에서 한국소설 사상 최고액  1억원을 책정한 장편소설 공

  모에서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로 많은 기성문인들과 패

  기찬 신인들을 물리치고 당선됨으로써 작가생활의 커다란 분 誰

  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전동차가 오기로 약속되어 있는 지하 철도의 검은 입구를 바라

보고 있다. 검은 입구는  완만하게 휘어져, 원형의 통로가 한쪽으로 찌

그러지면서 좁아진다. 그러나  끝까지 볼 수는 없다. 어두워서,   그 안

에서 살인이 일어난다고 해도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살인, 폭력 따위의 어두운 이미지를 금방 지워낸다.



  삐리리 하는 경보음이 울리고 어두운  굴 속에서 이마에 불을 켠 전

동차가 달려나온다. 그는 전동차의 이마에 켜진  불빛을 희망이라 생각

한다. 누구나 그것으로 제 앞길을  밝히는 꿈이나 희망 같은 것.  전동

차는 마치 태초부터 달려온  듯하다. 그리고 영원 속으로, 광속으로 달

려갈 듯하다. 그건 희망이다.  광속으로 달려 지구의 종착역에 가면 그

는 그 역에 내려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혹은 두 그루.



  맞은편 의자에는 일곱  사람이 앉아 있다. 여자 셋, 남자  넷. 그들은 

화단에 나란히 심어진 키 작은 사철나무 같다.  그는 그 사람들을 하나 

하나 바라본다. 꼼꼼하게. 희박해지는 공기를 조금이라도 더 마시기 위

해 바쁘게 오르내리는  횡경막, 내리누르는 중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하기 위해 꼿꼿히 세우고 있는 허리. 외부의  소음을 완전히 차단한 채 

제 속으로 함몰해 들어가  있는 이어폰. 그는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고,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 그런 다음 그들에게 다가가 아무 이야기나 털어

놓게 하고 싶다. 함께 소주를 마셔도 좋을 것이다. 물론 소주를 공짜로 

얻어 마실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첫 단계부

터 벽에 부딪치고 만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바로  앞에 앉은 젊은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한

손으로는 옆이 트인 긴 스커트  자락을 여미고 다른 손으로는 책을 펼

쳐들고 있다. 그는 알고 있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녀도 드디어 자

신을 바라볼  것이라는 것을. 그것은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물리적인 

현상이다. 그가 보내는 시각 에너지가 상대방에게 닿는 것이다. 드디어 

여자는 책에서 고개를 든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자를 향해 목례를 한다.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여자는 그의 행동을 물끄러미 건너다보더니  아무런 표

정의 변화도 없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묻는다.  그녀는 그를 보지 못했

을까? 보고서도 자신을 향한  인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는 여자

가 자신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다. 친절한 마음으로, 호의를 가지고 접근해도 타

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계하고  달아난다. 그건 인간의 특성이  아니라 

동물의 특성이다.



  아침 식사를 거르고 이 전철을 타신 분께.



  고개를 들다가, 그는  천정 근처에 붙어 있는 길죽한  광고판에서 그 

글과 부딪친다. 길을 걷다가  오래된 채권자를 만나는 기분이다. 그 밑

으로는 조금 더 작은 글씨로, 내리시는 역마다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씌어 있다. 호박색  호박죽과 팥죽색 단팥죽이 투명한 유리  그릇에 담

긴 사진까지 곁들여져서, 그는 옆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입

안의 괸 침을 삼킨다.  위장에서 찌르르한 통증이 지나간다. 그러나 어

떤가, 아침 한 끼 거르는 일이 무어 그리 대수라고.



  그는 여자로부터, 광고판으로부터, 위벽을 갉아대는 허기로부터 시선

을 거두어 자신의  내부로 돌린다. 지하철의 속도감에 몸을  묻고 지하

철의 속도로 뻗어나가는 제 상상력을 따라가며 몇 가지 사업 아이디어

를 생각해 본다.



  바다에 잔디 깔기는 과연 실현 가능한가. 그건  그가 어제 저녁 텔레

비전에서, 마당에 풀장을 갖춘 호화 주택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보다

가 생각해 낸 것이다.  집 안 마당에 수영장을 만들 수  있다면 바다에

도 잔디구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집 안의 수영장에 수돗물을 

넣는다는 결함이 있듯이 바다에 까는 잔디도 인조 잔디라는 결함은 있

을 것이다.



  그는 어제 저녁에  했던 생각을 구체적으로 발전시켜 본다.  우선 축

구장만한 대형 나무판을 짠다. 그 밑에는 큰  나무통을 달아 부력을 더 

많이 받도록 하고 나무판 위에는 스티로폴을 한 겹 깔고 그 위에 인조

잔디를 깐다. 멋지다!  그리고 낭만적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축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다 위에서 축구를 한  아이들이 자라 나중에 월드

컵에 나가면, 그들은 4강에  들고 그 인터뷰를 말할 것이다. 저는 어린 

시절, 바다 위에서 축구를 했습니다. 사방에서 바다가 너울거리고 머리 

위에는 갈매기가 날고, 관중들은 보트를 타거나  튜브에 엉덩이를 끼우

고 앉아 축구를 관람했습니다. 골이 터지면  다들 바닷속으로 물장구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그 강렬한 인상이 제 축구 인생의 핵심입니다.



  축구는 농구뿐 아니라 바다에서  수영하다 지친 사람들이 굳이 해변

으로 나가지 않고도 잔디밭 위에서 쉴 수 있을 테고 그 위에서 식사도 

하고 선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고민에 빠진다. 사용료

는 어떻게 거두지? 그는 그쯤에서 생각을 중단한다.   어느 날 문득 혹

은 하룻밤쯤 자고 나면 또다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이다.





  그는 다른 아이디어를  생각한다.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돈

벌이가 될 사업이  하나 있다. 건강 은행을  설립하는 일, 그건 불법은 

아니다. 다만 건강 진단  제도의 허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뿐이다. 일

반인들이 개인적으로  종합 진단을 받으려면  30만 원이 든다.  그러나 

회사 단위로 병원과 단체 계약을 맺으면 10만 원 내지 12만 원에 종합

진단을 받을 수 있다.  진단 내용은 똑같은데 다만 개인이냐, 단체냐에 

따라 비용이 달라진다는  건 제도가 안고 있는 허점이다.  그걸 이용하

는 사업이다.



  우선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들을  묶어 단체를 만든다.  소규모 

사업장들을 주요 공략  대상으로 하여 30만 원짜리  건강 진단을 20만 

원에 해준다는  조건으로 사람을 모은다. 그런  다음 병원을 섭외한다. 

물론 그들도 맨입으로는  안 된다. 그 일을 담당하는  관리에게도 돈을 

집어 주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병원에서도 일반  할인 손님보다 비

싼, 14만 원에 단체 손님을 끌어다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들도 빈손으로

노는 것보다야 손님을 한 명이라도 더 받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손님은 10만  원, 병원은 3만 원 내지 5만  원 그

리고 그는 5만  원의 이익을 보게 된다. 그건 모두에게  이로운 사업이

다. 세상에 이렇게 정당하고 유익한 사업이 있다니!



  그는 오직 자신만이 그런 사업을  창안할 수 있는 거라고 가슴 뿌듯

해 한다. 언젠가,  사무실을 내고 전화기를 두  대쯤 놓고 전화를 받을 

여직원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돈만 모이면,  그는 당장 그 사업을 시

작할 것이다. 그때까지 이  사업 계획은 대외비이다. 그러다가 그는 마

음을 바꾼다. 당장 시작해야  하는 거야.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누군

가가 분명 이런 사업을 시작할 거야.



  그는 늘 이 세상에  늦게 태어난 것을 개탄해 왔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은 이미 오래 전부터 누군가가 해오고  있었다. 고급 음식점, 이발소, 

목욕탕 심지어 구두  닦는 일까지. 그런 문화가 없던  시기에 태어났더

라면 그는  분명 음식점, 이발소,  영화관 등을 경영했을 것이다.  너무 

늦게 태어났어. 그러니 여기서 더 시간이 흐르도록  내벼려둘 수 는 없

어.



  그는 자금을 끌어올 만한 줄을 생각해 본다.  이 사업에 관심을 보일 

만한 투자가를  찾아내야 한다. 누가  있을까? 가을 인사 때에는  정년 

퇴임하는 사람은 많을 姆...



  분명 승산이 있는 사업이다. 건강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현대인들

에게 그건  좋은 건강 상품이 될  것이다. 건강 은행은 나날이  발전할 

것이다. 암 검진만을 전문으로, 에이즈 검진만을 비밀리에 그렇게 대행

해 주는 업무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속 기관으로 정자  은행을 세

울 수도 있다. 어쩌면  장기 은행도 좋을 것이다. 부랑자들에게 생계비

를 지원해 주고 대신 그들이  죽었을 때 장기를 넘긴다는 계약서를 받

아둔다. 눈알이나 신장을 사기 위해 목숨을 걸고  기다리는 돈 많은 환

자들이 많다는 건 이미  다 아는 일이다. 그것도 분명 남는  장사가 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말하지 말라. 그는 차라리 나무의 존엄

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펼친다. 거기, 어젯밤에 적어둔 바다에 

잔디 깔기라는 메모 밑에 한 줄 더 첨가한다. 건강 은행 설립.



  지금까지 그가 메모해 둔  사업은 백 가지쯤 된다. 그중 열  건 정도

는 투자가를 잡아 사업을 구체화시켰다. 그러나  투자가들의 조급증 때

문에 언제나 중도에서  파토가 나고 말았다. 그들은 어떤  사업이든 투

자할 각오를 한다는 사실을  참지 못했다. 십 원만 더 투자하면  백 원

의 이익을 볼 수 있는 목전에서 언제나 그들은 지금까지 투자한 십 원

을 버리는 셈치겠다고 하면서 물러섰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사업 계획이 많다. 구

체적인 사업 계획서를 짜고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둔 사업은 열 개쯤 된

다. 그중 하나를 구체화시키는 날이다.





  종각 지하철 역에  내리니 아홉시 오십분이다. 약속 시간이  열시 반

이니, 광화문까지 걷는 시간  15분을 빼도 시간이 20분쯤 남는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를  뒤지며 복권 판매소를  향한다. 복권 판매소의  창구 

옆에는 금주의 당첨 번호가 신문에서 오려진 채로  붙어 있다. 그는 열

장의 복권을 부채꼴 모양으로 펴들고 5등부터 차례차례 번호를 대조해 

나간다. 5등에서는 적어도 두 장은 맞게 되어 있다. 그는 늘 끝자리 수 

0번부터 9번까지 한 장씩 골고루 사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는 2번과 8

번이 당첨되었다.



  4등, 3등,  2등, 당첨번호들을 차례차례 맞춰본다.  이럴 때는 언제나 

가슴이 벅차다.  몸 안의 피톨들이 갑자기  빨리 돌고 발 끝에서  머리 

끝까지가 팽팽하게 부풀어오른다.  그 벅찬 느낌은 번호를  맞춰나갈수

록 점점 더 고조되어 1등을 확인할 때는 머릿속의 퓨즈가 벌겋게 달아

오르는 듯하다. 그러다 마지막까지 다 확인하고  나면 언제나 머릿속의 

퓨즈가 헉 끊어지고  만다. 이어 풍선의 바람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듯

한 탈진감이 온몸을  휩싼다. 풍선이 바람의 힘으로 그  자리에서 뱅글

뱅글 돌듯히 그도 얼핏 현기증 같은 것을  느낀다. 그가 늙는다면 아마 

그런 때일 것이다.



  그는 나머지 여덟 장의  복권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5등 당첨된 복권 

두 장과 열 장을 살 수 있는 돈을 창구로 들이민다.



  "즉석식 두 장하고, 추첨식 열 장 주세요. 추첨식은 끝자리 수 0번과 

9번까지 한 장씩 주되, 각 조 번호를 골고루 섞어주세요"



  창구에서는 손만 불쑥 나와 열두 장의 복권을  놓고 간다. 그는 열장

의 복권을 지갑에 고이 간직한  다음 주머니에서 십 원짜리 동전을 꺼

낸다. 사람들이  공중전화를 걸기 위해  십 원짜리를 준비하듯이  그는 

복권을 긁기  ㎸ 항상 주머니에 십 원짜리 동전을 휴대하고 다닌다.



  즉석식 복권에는 이  층짜리 아담한 전원 주택 그림이  있다. 오른쪽 

하단에는 <집 없는 이웃에게  꿈을!>이라는 구절까지 적혀 있다. 그렇

지, 집 없는 이웃에게 집이 아니라 그저 꿈을 줄 수 있을 뿐이지. 더구

나 그 꿈이 악몽이거나 백일몽이라는 데 문제가  있지. 그러나 그는 또 

얼른 생각을 고쳐 먹는다. 꿈만으로도 충분하다. 꿈마저 없다면 무엇에 

기대어 이 땅을 건너겠는가. 복권 당첨 확률처럼, 그 꿈이 실현될 확률

이 3백 60만 분의 1이라 해도 꿈이 있다는 건 좋  일이다.



  그는 지하도 기둥에 즉석식 복권을 대고 진지하게 무궁화 그림을 긁

어본다. 즉석식 주택 복권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무궁화 꽃 그림 밑에 

숫자가 숨어 있어, 꽃 그림을 긁어 드러나는  숫자와 하단에 명시된 숫

자를 서로 맞추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디자인이 바꾸어 <나>와 <상대방>의 겨루기 형태

로 되어 있다.  <나>의 숫자가 <상대방>의 숫자보다 많거나  나의 가

위 그림이 상대방의 바위  그림을 이겨야 그 뒤에 명시된 5백만  원, 1

천 원 혹은  카세트 등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각박한   堧 

사회에서 경쟁 의식을 심어주는 복권이다.



  한 장은 꽝!이다. 물론  그도 알고 있다. 도심에 즐비한 복권  판매소

와 그 안에  앉아 있는 판매원들의 수익을  제하고도 주택공사가 날로 

번성하는 이유.  그러나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지구의 종착역에 

가더라도 그는 복권을 살 것이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은 다음에.



  복권에 당첨된다면.....   두번째 복권을 긁으며  그는 생각한다. 우선 

구상해 둔 사업 중 한두  가지를 가동시킬 수 있다. 집을 사고, 결혼을 

하고, 승용차를 사야지.  젊은 그에게는 포텐샤가 어울릴  것이다. 그리

고 아내와 함께 해외 여행을 떠날 것이다.  미국에 가면 블랙잭이나 크

랩스를, 영국에 가면 프루트  머신과 슈멘 드 페르를, 프랑스에서는 트

랑데카랑트 게임에 돈을  걸 것이다. 방문하는 나라마다 그  나라의 복

권을 사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그러다가......  돈이  다 떨어지면? 그러나 무슨 걱정인가.  복권은 앞

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고 당첨금은  더욱 오를 것이고 그 종류도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이미 여러 종류의 복권이 등장하지 않았는가. 은행에

서 발행하는 복지 복권, 문화체육부에서 발행하는 체육 복권, 과학기술

처에서 발행하는 엑스포  복권.......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내무부에서 

발행하는 치안 복권, 통일원에서 발행하는 통일 복권, 외무부에서 발행

하는 비자 복권 그런 것들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들은 언제나 

예산이 부족하거나 돈 쓸 일이 생기면 언제나 수시로 아무 거리낌없이 

복권을 발행하지 않았는가.



  두번째도 역시 꽝!이다. 그는 즉석식  복권 두 장을 쓰레기통에 처넣

고 지하도를 빠져나온다. 하늘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은행나무

다. 은행나무는  이파리마다 먼지가 앉아  다소 피로한 기색을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푸르고  꿋꿋하게 거기 서 있다. 먼지조차  정겨워 보인

다. 그는 도심의 나무들이 공해에 메말라가고  행인들에게 시달리고 있

다는 사실에 대해  개탄하는 사람들을 또 이해하지 못한다.  나무는 저

렇게 꿋꿋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말이다.



  그는 종로의 은행나무들도  열매를 맺었을까, 유심히 바라본다. 다섯 

그루를 지나칠 때까지는  모두 수나무다. 여섯번째 은행나무는  암나무

가 분명하다. 여자들  엉덩이처럼 펑퍼짐하게 옆으로 벌어진  가지들이 

수나무에 비해 한결  탐스럽다. 그는 암나무 아래 멈춰서서  고개를 거

의 90도로 젖히고 은행나무 가지들을 살펴본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햇

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반사적으로 실눈을 뜨면서도 그는 찾아낸다.



  은행잎의 겨드랑이쯤에 동글동글하게 매달린  은행알들을. 일곱 가지 

태양광선 중에서 초록색만 모아 동그랗게 간직하고  있는 그 열매들을, 

처음에 한두  개 눈에 띄는 것과는  달리, 오래 보고 있으니  은행알이 

점점 불어난다. 다 털면 적어도 두세 되는 될 만한 양이다.



  은행나무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는 그 나무가 슬금슬금 자

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의 기억  속에 깃들어 

있는, 언젠가 그가  나무였던 시절의 마음이 두 팔을  벌려 은행나무를 

맞아들이고 있다. 은행나무는 그의 마음속에 이미  뿌리내리고 있는 다

른 나무들과 어우러져 숲의  일부가 된다. 그는 해산을 마친 산모처럼, 

온몸에서 힘이 빠진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하늘을 

향해 키를 높이는 포플러, 버즘이 가득 핀  피부를 아직도 풍욕으로 치

료하고자 하는 플라타너스, 인간이 구부리는 대로  자라주지만 그 다채

로운 모습  실은 본래부터 간직된 내부의  아름다움인 소나무, 자잘한 

손바닥을 가득 기르며  세상을 향해 얼마든지 악수를  청할 수 있다고 

말하는 느티나무. 그것들은  대학로나 을지로, 보험회사 현관이나 예술

의 전당 앞마당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몸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제 그는 가슴속에 점점 넓어지는 숲을 데리고  다닌다. 그 숲의 토

양이 안정된 지반을 다지고  나무 뿌리마다 물을 간직하고 이파리마다 

대기를 깨끗하게 청소해 주는 걸 느낀다. 그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세

계인지.



  그는 자신의 몸속에 위장이나  창자가 아니라 물관부나 체관부가 들

어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요즈음은  몸 어디에서든 나무의  기억을 

찾아낸다. 언젠가 자신이  나무였던 흔적기관을. 나날이 허리가 늘어나

는 것은 해마다 나이테가 늘어나던 기억의  흔적이다. 가을이면 머리카

락이 듬뿍듬뿍  빠지는 것은 가을에  낙엽을 떨구던 기억의  흔적이다. 

발바닥이나 팔꿈치에 자꾸 각질이  생기는 것은 표피의 각질화도니 세

포를 떨구어내던 기억의 흔적이다. 그는 행복이다. 허리가 굵어져도 머

리카락이 빠져도 발바닥이 각질이 되어 갈라져도.





  광화문에 있는  선배의 사무실은 첫눈에도  넓고 깨끗하다는 인상이

다. 그는  단박에 그 깨끗함이 불편해진다.  반짝반짝 빛나는 자동문이 

불편한 것은  그것의 배면에 감추어진  더럽고 냄새나는 구석,  그것에 

대한 선병질적인 신경증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사무실에는  세 대의 컴

퓨터와 그것을 다루는 직원 셋 그리고 부속실의 여직원과 남직원이 전

부다. 그는 부속실의 여직원에게 사장님과 약속이  되어 있다고 말하고 

이름을 알려준다. 아가씨는  그에게 응접용 의자를 손짓하고는  인터폰

을 든다. 그는 의자에 앉다가 제  링罐 본다. 구두코의 가죽이 벗겨져 

희끗희끗하다. 이런  줄 알았다면  구두약이라도 칠하고 오는  건데......  

그러나 그는 많이 낙담하지는 않는다. 구두  따위야 아무려면 어떻겠는

가.



  그가 원하는 최고의 사업은 바로 이런  종류이다. 은행이나 보험회사

나 신용카드 회사 같은  것. 그 일은 생산 시설이 필요하지도  않고 많

은 직원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저 고객의  돈을 맡아서 다른 고객

에게 빌려주고 그 중간에서 커미션을  먹는 일 혹은 카드 사용자와 백

화점 사이에서 양쪽이  편리하도록 연계해 주며 커미션을  都  일, 고

객의 물건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손해를 입었을 때는 보상해 주는 조건

으로 매달 일정 금액의 돈을 받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다. 그는 다시 

한번 너무 늦게 태어난 것을 후회한다.



  1688년 무렵의 런던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는 세계 최초의 보험 사업

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에드워드 로이드도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었

다고 생각한다.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어디 출신이고  결국 

어디로 갔는지 사람들은 그런 것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선

장과 선원을 중심으로 배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 幣舊 못했을 때

를 대비해서 돈을  거두었을 때, 모두들 그에게 서슴없이  돈을 맡겼다

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가 원하는 사업은 바로 그런 거였다.



  "나는 너무  늦게 태어났어.  최소한 1920년 미국에서만  태어났더라

도....."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제 구두코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려본

다. 너무  늦게.......   그 말은  언제 발음해도  가슴이 아프다.  최소한 

1920년 미국에서만 태어났어도 그는 신용카드 사업을  했을 것이다. 그 

무렵에 석유 회사와 백화점에서 처음으로 신용카드를 사용했다고 전해

진다.



  "너무 늦게 태어났어......  그 말을 할 때 그가 진정으로 마음이 아픈 

이유는 단지 17세기나 20세게 초엽에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더  일찍 태어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쑥과 마늘

을 먹으러 동굴에 들어갈 수도  없고 돌을 갈아 돌도끼를 만들거나 청

동을 녹여 창을 만들 수도 없다. 해시계나  금속활자를 발명할 수도 없

고 거북선을  진수시킬 수도 없다.  심지어는 한글까지 이미  개발되어 

버린 것이다. 너무 늦게  태어난 것이다. 적어도 혜초의 시대에만 태어

났더라도 그는 천축국으로  떠났  것이다....... 아무튼 그는  너무 늦게 

태어났다.



  그의 선배는 문을 열고 나오면서 팔을 뻗고  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것을 아주 잠깐  쥐었다가 놓는다. 팔을 뻗으며 다가올  때의 기세로 

봐서는 한 시간이라도 그의 손을  잡고 있을 듯했으나 어느 틈엔가 얼

굴의 웃음마저  단정하게 마무리되어 있다.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경영학을 이수하자마자  외국 카드 회사에 입사했고 본

사 근무 3년 만에 한국 지사장으로 파견되었다고  했다. 그는 선배에게 

이끌려 사장실 곁에 달린 응접실로 들어간다.



  "그래, 좋은 사업 아이디어라는 게 뭔가?"



  말을 꺼내는 순간, 선배의  해사한 낯빛에는 웃음이 가득 담긴다. 그

는 선배의  웃음을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젊기 때문일까, 노회한 

경영자의 여유 같은  건 없다. 앉자마자 용건부터 꺼내는  태도는 숙련

된 협상 태도가 아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하다가 그는 생각을 바꾼

다. 단도직입적이고 간단명료한  태도는 선배가 미국에서 터득한  서구

적 합리주의일지도 모른다.  그는 응접 테이블 위에 깔린  불투명한 유

리 밑으로 자신의  구두를 본다. 구두는 아무래도 이런  거래 〈 어울

리지 않게 더럽다는 인상이다. 구두를 닦고 나오는 건데....



  "일종의 출판  사업인데..... 정확히 말하면  잡지를 만드는 일입니다. 

회사 홍보지 같은 건 아니고, 판매용 책자를 만드는 거죠"



  "출판사업이라...... 그렇지만 내가 그만한 능력이 있나? 사장이라고는 

해도 나도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인데"



  부속실의 여직원이 찻잔에 차를 받쳐들고 들어온다.  커피 냄새를 맡

자 다시 위장에 찌르르 통증이 온다. 그는  위의 통증을 감안해 그리고 

아침 대용이라는 생각으로  커피에 프림 세 숟가락, 설탕  세 숟가락을 

탄다. 커피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공연히 빈 스푼으로  찻잔을 저으며 

그의 선배는 그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건너다  본다. 그렇지만 그는 개

의치 않는다.



  "자금 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선배 회사, 이 카드 회사에 소속된 회원이 몇 명쯤 되죠"

  "글쎄, 약 5백 만 명쯤 될 걸"



  "카드 회원들에게  매달 청구서와 함께 상품  카탈로그나 공지 사항 

같은게 우편으로 우송되고 있죠?"

  "그렇지"

  "그때 나간 상품 카탈로그를  보고 물품을 주문하는 회신 비율은 얼

마나 됩니까?"



  "약 1퍼센트 정도 되지"

  "모든 상품에 대해 그 정도입니까?"

  "물품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평균 그 정도라고 말할 수 있지"

  "그럼 5만 명 정도가 되겠군요. 됐습니다. 이 사업은 다된 거나 다름

없습니다"

  

  "무슨 얘긴가? 자세히 설명해 보게"

  "카드 회원들을 상대로 하는 생활 정보 잡지를  만드는 겁니다. 일단 

회원들에게 보내는  청구서 우편물에 이런  잡지가 창간된다는 안내용 

플라이어와 정기 구독 신청서를 함께  보냅니다. 회신율이 1퍼센트라면 

적어도 5만  명은 정기 구독을 신청할  겁니다. 그럴 경우 1년치  정기 

구독료를회원들의 카드 구좌에서  결제하는 거죠. 정가 5천  원짜리 책

을 1년 정기  구독자에게는 5만 원에 줍니다. 카드  회원에게는 특별히 

10퍼센트 할인 특혜를  준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요. 5만 명  곱하기 5

만 원, 그러면  25억입니다. 25억만 일단 손에 쥐면, 그  다음은 저절로 

굴러가게 되죠"



  그는 그 지점에서 말을 중단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찻잔을 내

려 놓으면서도 선배를 바라보지 않는다. 선배가, 회색이 가득 퍼져 있는 

자신의 표정을 수습하기 위해 애쓰지 않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푸른 빛이  도는 창 밖으로는  하늘이 어둡다. 플라타너스가  어두운 

하늘에 머리를 묻고  있다. 하늘의 습기, 하늘의 공기, 하늘의  빛을 그

대로 머리로부터 받아들이고  있다. 플라타너스가 푸르른 것은  플라타

너스의 꿈이고 희망이다. 플라타너스는 저 혼자의  힘으로 이렇게 높은 

3층 창까지 키가 컸고 매년 푸르른 힘을  보여준다. 누가 플라타너스에

게 푸른 기운을 주사해 넣은 게 아니다.



  "그렇지만, 생필품도 아니고,  평범한 잡지를 그렇게 많이 사보겠나? 

잡지야 지금도 얼마든지 있는데"



  "사보도록 만들어야죠. 세련되고  고급스럽고, 무엇보다 독자들의 허

영심을 만족시켜 줄 만한 책을 만들면 됩니다. 지큐나 보그처럼요. 2백 

페이지 정도를 올  컬러로 하고, 지질도 고급으로 쓰고  서구적인 세련

된 분위기로 뽑아내면 됩니다. 일단 외형이  다르다는 것으로부터 차별

을 둬야죠. 내용면에서는 모든 생활 정보를 망라하는 거죠. 백화점이나 

도매상, 상설 할인 매장이나  지방 특산물의 쇼핑 정보에다가, 금융 상

품 정보, 의학 및 건강 정보, 여행 및  교통 정보, 문화 예술 행사와 관

련된 정보까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겁니다. 보

는 사람이 첫눈에 유익하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현재 국내 잡지계에

는 아직 이 같은 성격의 전문 정보 잡지가 없습니다"



  "글쎄,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울까?"



  "간단한 일입니다. 전문 잡지  제작자를 스카우트 하는 겁니다. 똑똑

한 놈 세  놈만 있으면 됩니다.  편집, 광고,  영업 파트에 각 한 명씩. 

그러면 그 밑의  나머지 직원들이야 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오는 

거죠"



  "글쎄....."



  이건 나쁜 사업이 아니다.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음모도 아니다. 다

만 보유하고 있는 기존의 시스템을 이 淪漫 또 하나의 유익한 사업을 

벌이는 일일  뿐이다. 정기  구독료 1년치를 미리,  한꺼번에 받는다는 

것, 그게 뭐 그리 나쁜 일인가? 그러나 그는  선배에게 그런 설명은 하

지 않는다.  그런  말은 자칫 잘못 꺼내면 의혹의 실마리나  되기 십상

이다.



  "이 사업을 하면  구독료 수익 말고도 많은  어드밴티지가 있습니다. 

일단 지사의  광고를 무료로 게재할 수  있다는 점, 둘째 광고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점.  특히 이 카드 회사와 계약을 맺고  있는 기업체들

로부터 광고를 받기 쉽죠. 셋째,  매체를 가지고 할 수 있고 매체를 이

용해 문화 행사를 개최할 수도 있고 그것도 모두 수익 사업이죠. 넷째, 

플라이어나 책을 우송하는 우송료도 거의 들지  않습니다. 이미 나가는 

통신망이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매체를 하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한국 같은 사회에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십니까? 이런 사업은 카

드회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사업입니다"



  그의 선배는 말없이 커피만 마시고 있다. 새처럼, 한 모금 마시고 찻

잔을 들여다보고, 다시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들여다본다. 이제 그는 

자신이 입을  다물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한다. 여기서 더  설명하고 

매달리고 하면 상대가  질리거나 의심을 품게 되기 딱  알맞다. 이쯤해

서 입을 다물고 등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느긋하게 앉아 그가 머리 

굴리며 잡다한 생각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럴 때, 가끔 상대

가 고개를 들어 의견을 더 묻는 눈치를 보낸다 해도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건 인간 관계의 시소의 원리다.



  보고, 보이기. 긴 의자의 양끝에 마주 앉아,  자신이 앉은 한 끝이 올

라갈 때는 상대편을  보고, 의자가 내려갈 때는 상대편에게  자신을 보

여 주고, 그건 그리 기분 좋은 단어는  아 求.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모든 관계는 그리고 이 세상은, 바로 시소의 원리에 의해, 눈높이의 법

칙에 의해 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묘한  트릭, 은밀한 작전, 정당한 

사업에서조차.



  "고려해 볼 만한 아이디어군.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냈나?"



  "자유로운 생활과  거침 없는  상상력이 아이디어의 근본이죠.  물론 

세상을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 알고  있는 다양한 지식들을 비상

식적으로, 반사회적으로,  탈도덕적으로 혼합, 접합, 교배해  보는 거죠. 

그게 바로 인류 발전의....."



  그는 말을 중단하며  웃는다. 그의 선배는 시종 진지하게  그의 이야

기를 듣고 있다. 그의 바람든 농담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혹

은 긴장하고 있거나, 이제 일어나야 할 때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런데 처음 몇 달이 어려울 겁니다. 정기  구독료를 일괄 결제하려

면 적어도 창간호가 나간 다음에나 가능한데,  그러자면 창간 비용까지

는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바로 그 점이 선배의 문제점입니다"



  "음...... 그러면 자네는? 그  사업 아이디어를 넘기는 대신 자네가 원

하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선배는 아마   萱岵막 이름이 등록되는 다른 사업

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발행인을 제  이름으로 등

록하는 것, 그 정도입니다.  제작 실무나 경영을 넘겨주신다면 더욱 좋

겠죠"



  그의 선배는 눈을 감고 잠깐 말이 없다. 그는 3, 4초쯤 시간을 준 다

음 볼 일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럼 검토해 보십시오. 마음이 정해지면 연락주시구요"

  "그러지. 참, 내가 자네 연락처 가지고 있던가?"



  그는 속으로 슬그머니 웃는다. 연락처를 확인한다는  것은 마음이 80

퍼센트 이상 움직였다는 증거다. 그 다음에는, 상대방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는 일뿐이다.  그는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는다.



  "일주일 안에 연락 주십시오. 선배님이 안 하시겠다면  다른 카드 회

사와도 섭외를  해봐야 하니까요. 결정이  된다면 그때 사업  계획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선배의 사무실을  나오다 현관에 걸린  시계를 보니 11시  30분이다. 

그는 광화문에서 시청으로  가는 방향을 잡아 걷기 시작한다.  잊고 있

었던 허기가 되살아나며 허공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다. 속이 헛헛한

것은 오직 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루지 못한 꿈 때문이다. 너무 늦게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도, 이  땅에서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조금만 다른 

부모를 만났어도.......   그러다 그는 고개를 젓는다. 나무들은  다 지금, 

이곳에, 혼자, 서 있다.





  빈 속에 마신 커피가 몸 안 어디로 흐르는지 걸을 때마다 몸에서 꾸

르륵꾸르륵 소리가  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의 몸속에  위장이나 

대장이 아니라 물관부나 체관부가 들어 있다고  느껴진다. 특히 오늘처

럼, 한 잔의 커피로 아침  끼니를 때운 때는 그렇다. 커피는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가 머리카락 끝까지 퍼져나갈 것이다.  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본다. 머리카락에 흔들리는  주변 공기에서는 매연과 마른  먼지

냄새가 난다. 그래도 그는  그 냄새 속에 숨어 있는 커피향을  맡을 수 

있다고 믿는다.



  광화문에서  쳉 쪽으로 가는 길의 가로수는  플라타너스다. 그는 플

라타너스의 피부병  걸린 것 같은  다리를 하나하나 살피며  지나간다. 

갈색으로 변한 가장  바깥의 각질이 벗겨지면서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연두색 속살이  드러나 보인다. 그는 나무의  속살을 만져본다. 부드럽

다. 마치  연인의 속살을 만지고  있는 기분이다. 그러다가 그는  본다. 

무엇엔가 힘껏  찍힌 듯 패여 있는  나무의 상처를, 나무가 제  상처를 

감싸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붉은 진물을 흘려내고 있는  모습을. 붉은 

진물은 패인 상처 주변을 버섯구름처럼 감싸고  있다. 바이러스의 침입

을 받은 신체가 백혈구를 내보내 바이러스와 싸우게 한다는 사실을 알

았을 때 그는 백혈구가 가여웠다. 플라타너스의  백혈구를 바라보며 그

는 위장이 쓰리다.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 위에서 검은 바탕에 빨간 글씨의 전광판이 빛

나고 있다.  현재의 대기오염도,  그런 글자  밑으로 아황산가스  0.034 

PPM, 일산화탄소 10PPM,  오존 0.018PPM 그렇게 적혀  있다. 아황산

가스나 일산화탄소 같은 것들이 일제히 눈 안으로 몰려드는 듯한 느낌

이다. 왜 그럴까.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는 몇 차례 눈을  깜빡이고 걸

음을 계속한다.



  시청 앞  법원 골목에는 변호사,  세무사, 계리사, 공증인 등의  작은 

사무실이 밀집해 있다.  그의 선배도 그중의 한 군데에  사무실을 가지

고 있다. 전화기 두 대와 여직원 한 명, 여직원은 소설책 같은 걸 읽고 

있다가 그가 들어가자 방긋, 접대용 미소를 띤다.



  "혼자 계셔?"

  "네, 들어가보세요"



   그는 칸막이 된  사장실로 들어간다. 선배라고는 해도  학교 선배도 

고향 선배도 직장  선배도 아니다. 그저 이런저런 일로  부대끼다가 만

난 동업자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나이   많고 경력도 

많으니 선배임에는  분명하다. 선배는 신문을 보고  있다. 그는 선배로 

부터 신문 보는 법을 다시 배웠다. 기사보다는  광고를 세밀히 봐야 한

다는 점,  광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유령 회사나 사기성이  보이는 

회사를 가려내는 법, 광고를 이리저리 분석하고  연결해서 새로운 사업

을 구상하는 법.



  선배는 그를  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다. 잘 되었느냐고  묻는 

모양이다. 그 역시  지금까지는 잘되고 있다는 의미의 웃음을  지어 보

이며 선배의  맞은편에 앉는다. 그러나  1분도 못 되어 선배는  신문을 

펼쳐둔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점심 식사나 하러 가지"



  그는 선배의 굵은 허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멜빵을 바라본다. 선

배는 옷걸이에서  겉옷을 떼어내다가 잠깐  망설이더니 다시 옷걸이에 

건다. 와이셔츠 위에 멜빵을 맨 차림으로 그냥 나갈 모양이다.



  그는 선배를 따라  일어서며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

지. 머리카락이 약간씩 희끗희끗해지면서 저렇게 배가  많이 나온 사장

의 풍모를 갖추게  되겠지. 그러면 말에도 한층 공신력이  붙을 것이고 

외모만 보고도 사람들은 나를 신뢰하게 되겠  그렇게 되면 사업도 한

결 손쉬워질텐데....... 이만한 사무실 하나 마련하는거야 식은 죽 먹기 

일텐데.....  그는 공연히 자신의 마른 몸을 내려다본다.



  선배를 따라 들어간  집은 한정식집이다. 마당이 넓은  가정집이었던 

곳을 음식점으로 개조한 것  같다. 자갈이 잘 깔린 마당 한  켠에는 식

탁이 대여섯 개쯤 놓여  있고 그 위로는 푸른 천막이 쳐져있다.   그는 

천막 위로 줄기를 뻗으며 올라가는 등나무를  잠깐 바라본다. 그러다가 

그 곁에 서있는  포도나무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포도나무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파리 밑으로 동글동글한  푸른 열매들을 보고서

야 그것이 포도나무임을  깨닫는다. 줄기를 따라가보니 포도나무는  대

문간에 뿌리를 박고 있다.  두 그루다. 그는 포도나무들도 제 가슴속에 

옮겨 심고 싶다.



  "뭐 해, 거기서?"



  현관으로 올라서며 그의  선배가 그를 부르고 있다. 그는  선배를 따

라 방으로 들어간다. 네  개쯤 되는 방과 마루를 터서 홀을  꾸미고 앉

은뱅이 밥상들을 다닥다닥 붙여놓은 식당이다. 선배는  한갓진 곳에 자

리를 잡는다.



  "그래, 저쪽 반응은 어때?"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결과는 

두고 봐야 알죠"



  "사업 자체는 좋은데 말이야,  외적인 요인들이 변수야. 지금은 워낙 

경기가 전반적으로 침제되어 있어서"



  식당 아주머니가  물 두 잔과  한정식 밑반찬을 날라다놓는다.  그는 

숟가락 통에서 수저 두 벌을  꺼내 선배 앞에, 자신 앞에 각각 놓는다. 

그리고 시금치 나물을 한 점 집어먹는다. 허기를 참을 수가 없다.



  "내가 바람 좀 잡아볼까?"



  그는 어떻게? 하는  눈빛으로 선배를 건너다본다. 입  안에서는 시금

치 나물을 우물거리면서,



  "줄 닿는 사람  옜幣漫 구미가 동하도록 유인하는  거지. 다른 카드

사에서 탐내고 있다는 정보도 좀 흘리고"



  그는 이번에는 두부 부침을 집어먹는다. 그는  물관부와 체관부로 이

루어진 나무는 아닌 모양이다. 위장이 달린  윈간임에 분명하다고 느껴

질 때  그는 우울하다. 그의 선배는  등을 꼿꼿히 세우고 앉아  있다가 

그가 대답이 없자  물컵의 물을 꿀꺽꿀꺽 마신다. 아직도  아무도 개입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건 바람을 잡을  필요도 없

는 정당한 사업인 것이다.



  "참, 지난 봄에 우리랑 동업했던 교장 선생님 말야, 기억 나나?"



  그는 이것저것 지분거리던  젓가락을 식탁위에 내려놓는다. 그  일은 

철저하게 마이너스  사업이었다. 그도,  그의 동업자도, 그의  고객들도 

모두 손해를  보았다. 그 자본, 그  시간, 그 노력들이 다  어디로 증발 

했을까?



  "요즈음 서당을  냈다더라. 그때 퇴직금  다 털어먹고 병 얻어서  한 

달간 병원에 입원에 있어잖아. 요즈음 코흘리개들이랑  하늘천 따지 하

고 있다나 봐. 어제 부동산 김씨한테 들은 얘기야"



  그 일은  다시 생각해도 가슴  아프다. 날려버린 자본, 시간,  노력이 

가슴 아픈 게 아 灸  그 실패가 가슴 아프다. 그건 그가  생각한 사업 

아이디어 중에서도 아주 명쾌하고 비전 있는  사업이었다. 기계에 약하

고 시간에 쫓기는 오너드라이버들을 회원으로 모아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가 나더라도  모든 걸 해결해  주는 서비스업이었다. 차  수리에서 

보험 처리, 따뜻한 문병에 이르기까지. 회원은 1천 명에 이르렀고 기본 

회비만도 1억 원쯤 걷혔다.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물론 소정의 수수료

도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3개월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선생님께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동업을  하다가 

실패한 거니까 그분도 우리에게 유감은 없을 겁니다"



  그는 이제 그 사업이 실패한 이유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낼 수 있다. 

카 서비스  센터와의 연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자신이 카 서비스  센터를 가지고 있거나 누군가, 계약으로  사람 말고 

누군가 더 가까운  사람이 그런 시설을 경영하고 있어야  했다. 아무튼 

그 일은 실패했지만, 그  일로서 그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투자가를 

잡을 때는 좀더 배포가 크고  뒤가 든든한 사람 그리고 되도록이면 관

련 업종을 운영하는 사람을 선 쳬 것.





  밥과 국과 찌개가  날라져 오자 그는 공기밥 하나를  더 추가시킨다. 

그리고 묵묵히 밥을 먹기 시작한다.



  "참, 산업 재해와 관련된 일이 있는데, 한번 해보겠어?"



  조기에 두 사람의 젓가락에 동시에  닿았을 때 선배는 그런 말을 꺼

낸다. 그는 조기의 몸으로 살점을 집어내며 선배를 건너다본다.



  "사업주들이 모두 도둑놈들이어서  프레스기에 손가락이 절단당해도 

손가락 하나에 10만  원밖에 배상해 주지 않아. 그걸  법정으로 가지고 

가거나 노동부에 제소하면  적어도 5백만 원은 받을 수 있찌.  그런 일

을 대행해 주는 거야. 5백만 원 배상 받으면  그중 20퍼센트 정도의 커

미션이 떨어지지"



  "일종의 해결사군요. 그런 일, 한 달간 골머리 앓으며 뼈빠지게 뛰어

봐야 고작 1백만 원 안팎 아닙니까"



  그는 볼이  미어지게 밥을 넣고 있어서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고갯짓으로 명백하게 거부의 의사를 나타낸다. 그에게는  구상해 둔 사

업이 많다. 그  사업을 구체화시키는 일이 더  급하다. 그의 꿈은 남의 

뒤치닥거리나 해주는 게 아니다. 당장은 좀 어렵다라도  더 크고 먼 미

래를 위해  오늘의 불편쯤은 참을 수  있다. 선배가 아직  자신을  잘 

모른다고 생각을 하니 조기가 입맛에 짜다.



  "요즈음은 부동산도  매물이 없어. 집값도  내리고. 선거철이나 되어 

야지 돈이  풀리지. 내년부터는 매년 한  건씩 선거가 있으니 이제  곧 

이런 침체에서 벗어날거야. 조금만 기다려"



  그는 자신을  염려해 주는 선배의  마음에 대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러나 그는 인천에 들어오는 배  따위는 기다리지 않기로 한 지 오해

다. 자신이 배가 되어  인천항으로 들어설 것이다. 마스트에 초록 깃발

을 꽂고 느리게 그리고 웅장하게.



  그와 그의 선배는  더는 말없이 식사를 한다. 중간에  시금치 나물을 

한 접시 더 시켜  그걸 다 먹었다. 마지막으로 숭늉을 한  대접 마시고 

일어난다. 계산을 끝내고 나오는 선배에게 그는 확신에 차서 말한다.



  "다음에는 제가 사죠"



  그의 선배는 빙그레  웃기만 한다. 그는 함께 식사할  때마다 그렇게 

말했지만 한번도 점심을 산  적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선

배를 호텔  라운지에 모시고 가든지,  멋진 프랑스 요리집으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기만 하면.



  선배에게 차까지 한  잔 얻어먹고 나오니 거리엔  비  내리고 있었

다. 길가의 가로수들이 비를  맞으며 몸을 흔들고 있다. 기쁨의 표시일 

것이다. 비닐 우산을 사기 위해 지갑을 꺼내 돈을 확인한다. 비닐 우산

은 천 원. 지갑에는 달랑  천 원짜리 한 장뿐이다. 그는 지하도 입구까

지만 비를 맞으며  걷기로 한다. 일단 지하도로 들어서기만  하면 지하 

보도를 이용해 어디까지고 갈 수 있다.



  그는 비를 맞으면서  양복과 구두를 버릴까 봐 걱정한다.  이건 그의 

단 한 벌밖에 없는 비지니스 정장이다. 사업상  사람들을 만날 때에 만 

입고 평소에는 고이  모셔두는 옷이다. 조금이 捉 비를 덜  맞기 위해 

그는 걸음을 빨리 한다. 거리는 그에게 세상을  익히게 하고 새로운 사

업 아이디어를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상실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렇

게 느닷없이 비가  올 때는 그렇다. 그는  쇼윈도에 진열된 좋은 양복, 

어깨를 감싸안고 지나가는 연인들,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귀에는 이어

폰을 꽂고 지나가는 비구승에게 느닷없는 박탈감을  느낀다. 그는 비구

승이 되지 못한 것을 잠깐 후회한다.



  그러나 그는 빗방울을 털어내듯 얼른 그런  생각들을 지운다.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생각한 . 빛나는, 화려한,  이마에 불

을 켠 듯한 새 아이디어! 그것들 중 한 건만, 단 하나의 사업만 성공적

으로 실행된다면...... 그러면 그도 구두와 양복을 새것으로 개비하고 결

혼을 하고 집과 포텐샤를 사고 아내와 함께  해외 여행을 떠날 것이다. 

세계의 모든 카지노를 돌아볼 것이다.



  지하 도시를 건설하는 건 어떨까? 아니지, 그런  어렸을 때 만화에서 

본 얘기지, 그럼, 해양 도시는? 참, 그건 이미 일본에서 추진중이라 지. 

자동 샤워 기계는   어떨까. 들어가 눕기만 하면 위 아래서  스펀지 타

월이 나와서 비누칠을  해주  물로 행궈주고, 그건 잘하면  가능할 것 

같다. 자동 세탁기나 자동 식기 세척기의  원리에 비데와 헤어드라이어

의 원리를  조합하여 그 크기를 다섯  배 정도 확대화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발명되어야 할  게 있다. 샴푸, 린스, 세숫비누, 보디 클

린저의 기능을 한꺼번에 취합한 다목적 액체 세제가 필요하다.



  자동 샤워 기계에는 다양한 선택 코스를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액

체 비누의 양, 물의 온도, 물 줄기의  세기, 헹굼시에는 샤워 코롱을 사

용할까요, 그냥 맹물로만 행굴까요? 그런 걸 구분하는  기능을 넣을 수 

있다. 또 있다.  헹굼 다음의 선택 코스로는 보디 오일을  바를까요. 보

디 로션을 바를까요, 그런  코스를 거치고, 그 다음에는 타월로 닦아드

릴까요, 바람으로  말려드릴까요? 바람으로 말린다면 따뜻한  바람으로 

할까요, 찬 바람으로 할까요? 그런 기능들을 추가할 수 있다.



  바람으로 말리면 머리카락까지 완전하게  말려서 샤워를 끝낼 수 있

다. 특별 옵션으로  안마나 맛사지 기능도 첨가할  수 있다. 안마의 세

기, 맛사지의 종류도  선택할 수 있다. 진흙 맛사지로 할까요,  야채 맛

사지로 할까요?



  모든 코스가 끝 じ 목욕  기계에서는 음악이 나오고 그러면 사람의 

손으로 하는 일이란, 귀에 들어간 물기를 면봉으로 닦아내는 일뿐이다. 

아무리 섬세한 기계라도 면봉으로  귓속의 물기까지 제거해 달라고 부

탁할 수는 없다.  물론 샤워 시간도 짧아야  한다. 10분을 넘겨서는 안 

된다. 현대인은 누구나 바쁘므로, 그 조급증을 만족시켜 주어야만 상품

으로서의 매력을 가질 수 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수첩을 꺼낸다.  그리고 건강 은행  설립이라고 

적힌 밑에 추가로 적어넣는다. 자동 샤워기.



  그도 알고  있다.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 허황한 환상기의  무분별한 

낙관주의, 대책  없는 승부사의 위태로운  한탕주의 그런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엇에  기대어 살아

야 한단 말인가. 밀가루  반죽처럼 뒤죽박죽인 이 세상에서, 밀가루 반

죽처럼 수시로  모양이 바뀌고, 밀가루  반죽처럼 무력하고 무미한  이 

세상에서.



  그는 아무래도  너무 늦게 태어났다.  이제 문명의 이기들도  발명될 

만한 건 다 발명되었다. 혁명도, 할 만한 혁명은 누군가가 다 해버렸고 

이론도, 학설도 나올  만한 건 다 나왔다. 문화도, 고대  신 鰥【 올리

던 제의에서 분리되어 더 이상 나눌 수 없을 만큼 여러 장르로 미분되

었다. 더 이상  찾아나설 신대륙도 없고 정복해  볼 만한 변방도 없다.  

니힐리즘도, 시니시즘도,  아나키즘도 모두  지나갔다. 이제 그는  무슨 

일을 하며 무엇에 기대어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관계와  관계의 고리를 비틀어, 혹은 거대한 제

도의 구멍을 찾아내어, 인간의 허영기와 세기말적  소비 성향을 이용하

여 무슨 일이라도  해보려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거 말고

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건 우울한 일이다.



  우울한 일이지만, 그는  지구의 종착역에 내리더라도 여전히  새로운 

사업을 구상할 것이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고  몇 장의 복권을 산

다음에.





  증권사 객장은 언제  들러도 기분이 좋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전광판에서 빠르게 바뀌고 있는 주식 시세표를 보면 혈관의 피톨

들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느낀다. 살아 있는 기분이 든다. 그는 전광

판앞에 세 줄로 배치된 소파 제일 뒷자리에  앉는다. 소파에는 늘 보는 

중절모의 노인 외에도  일주일에 한번씩 보는 젊은 친구도  보인다. 가

슴이 많이 패인 셔츠에 굵은  금목걸이를 하고 머리에 무스를 바른 청

년이다. 그는 그들에게 원인  모를 친근감을 느낀다. 아마 전광판의 피

돌기를 함께 나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느낌은, 실내 경마장이나  게임룸에서도 느낄 수 있다. 곁에 앉

은 사람의 호흡과  피돌기가 고스란히 제게로 옮겨져 오는  듯한 느낌, 

그래서 그 안을 감도는 긴장과 흥분과 그리고 약간의 퇴폐적 분위기까

지의 서로서로 감염 되는 느낌. 그건 기분 좋고 혼곤한 일체감이다.



  그는 전광판에서  삼구 건설 주식 시세표를  찾아본다. 15,400원이다. 

그러나 그가 지켜보는  동안에는 15,398, 15,397..... 계속 숫자가 떨어져 

내린다. 주당 1만 5천원에  샀던 주식이다. 한때는 4만 원 이상까지 올

랐으나 지금은  거의  뼈鰥 가깝다. 그때  팔았어야 했는데..... 주식은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왕이면 머

리 꼭대기에서 팔고 싶었다. 그러다가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그는 전광판을 지켜보다가 열람용  컴퓨터 쪽으로 가서 컴퓨터를 열

람해 본다. 그가 50주를  가지고 있는 저 건설 회사 주식은  며칠째 하

락세를 보이고 있다. 오늘도 역시 아침부터 단  한 차례의 변동도 없이 

완만한 하강곡선을  보여준다. 그는 컴퓨터를 떠나  다시 소파로 온다. 

어쩔까, 저 건설주를  팔고 금융주를 살까? 사실,  지금이  笭 투자의 

가장 적기일 것이다. 돈이 조금 더 있다면........  그러나 그는 그다지 낙

담하지 않는다. 계속 숫자가 바뀌는 대형 전광판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오늘은 저 제과 회사  주식에 투자하는 게 좋겠군. 저게 한  달째 바

닥을 기더니 사흘 전부터 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오랜 침체 후에 회복

되는 주식은 그 반대급부로 오랫동안 올라가게  마련이다. 돈이 조금만 

더 있다면....... 그는  또 신규 자동차 회사에도 투자해 볼  만한다고 생

각한다. 정부에서  내년쯤에 저 자동차  회사의 승용차 진출을  허락할 

것 같은데, 지금이 적기인데.......



  그는 전광판을 바라보며 오래 앉아 있는다.  시원하고 쾌적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저런 배팅 연습을 한다. 지금은 비록  적은 돈을 가지고 이

리저리 상상만 하지만, 언젠가  큰 돈이 쥐어지면, 그는 단기 차액으로 

수백 수천의 이익을  보는 전문 투자가로 변신할 것이다.  그것도 그의 

꿈 중 하나다.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간다. 전광판

의 빠른 피돌기를 바라보며 그는 행복하다.



  증권 회사를 나왔을 때는 비가 개어 있다.  비를 맞아 물관부와 체관

부를 팽팽하게 채운  나무들은   세수를 끝낸  아이같이 맑은 낯빛을 

하고 있다. 아이처럼 몸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제 몸속의 나무가 흔

들리는 듯, 그는 내장이며 가슴 근처가 가렵다. 양복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긁으며 그는 게임룸에 가볼까, 실내 경마장에 가볼까 생각한다. 



  실내 경마장도  괜찮은 곳이다. 대형  스크린을 통해 말들이  달리는 

시원한 경주 광경을 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마권에 돈을 걸  수 있다. 

오늘은 실내 경마장에나 가볼까? 그러나 주머니에 손을 넣자 단 한 장 

남은 천 원짜리, 집으로  돌아갈 차비가 만져진다. 그는 주머  속에서 

천 원짜리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잠깐 걸음을 멈춘다.



  숲으로 갈까? 남산이나  덕수궁이라도 마음속에 있는 나무의 기억이 

자신을 부르는 듯하다. 차도가 휘어지는 한쪽 모시리의  빈 땅에 몇 그

루 나무를 심어 화단으로 가꾸어놓은 손바닥만한  공간이 보인다. 무심

히 고개를 드는데 눈앞에서 무언가 반짝 빛난다.  다시 한번 유심히 보

니, 그건 사과다. 목련과  라일락과 섞여 세 그루의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다. 세 그루의 사과나무 중  두 그루가 열매를 맺고 있다. 애들 주먹

처럼 작고 연약한 열매를.



  주변으로 차들이  질주하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소음과 매연을 뿜어 

내는 도로  한가운데서 사과 열매가  자라고 있다.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고 아무도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아도 사과나무는 저 혼자 자라 열매

를 맺고 있다. 그는  사과나무를 오래 바라본다. 그 푸르름, 그 의연함, 

그 인내심을,  사과나무가 자신의 마음  속으로 걸어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 그는 사과나무 곁에 멈춰 서 있는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는 거기서 오래 머

물렀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여자는 권총처럼 생긴 긴 마이크를  들고 있고 남자는 어깨에 

이엔지 카메라를 메고 있다.



  "저희는 큐비시 방송인데요,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리포터는 첫눈에도  아름답다. 저런 여자와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 

복권에 당첨되기만  하면, 사업이 하나만 성공하면,  주식이 조금만 더 

오른다면...... 그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카메라 이마에 빨간 불이 

켜진다.



  "지금 이곳의 공기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대기 오염 상태에 대

해서 말입니다"



  그가 방금 보고  있던 사과를 떠올린다. 사과  지금  이곳의 공기가 

어떻다고 생각할까. 종로 2가의  은행나무에 열린 은행알, 한정식집 정

원에 매달려 있는 탐스러운 포도송이도 생각한다.  그 유실수들은 매연

과 배기 가스와 차량 소음과 아스팔트의 지열 사이에 서 있는 것에 대

해 어떻게 생각할까?



  "저 사과나무를 보십시오. 저 사과나무가  위태로운 승부사나 허황한 

몽상가로 보입니까? 설사  그렇다 해도, 저렇게 열매까지  맺으며 잘살

고 있지 않습니까? 사과 속에  환상의 빈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

황산가스나 일산화탄소가 함유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 생각은 저 

나무와 같습니다"



  예쁜 리포터의 오똑한 콧날에 살짝 주름이 잡힌다. 저런 여자를 아내

로 맞으리라. 그는 태연한  얼굴로 나무를 한번 올려다본 후 그들을 비

껴 지나간다. 가슴 속의  나무들이 바람을 맞아 일제히 솨와, 흔들린다.




[ 푸른기차 ]                                               ' 최  윤 '          
       본명은 최현무로  1953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1978년 <소설의 

       구조분석-허윤석 연구]로 <문학사상>에   비평가로 등단하고, 10

       년 후인 1988년에는 <문학과사회>에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 잎

       이 지고>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 잎이  지고](1993)이 있으며, 1992년에는 <회

       색눈사람>이라는 작품으로 제 2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현

       재 서강대 불문과 교수로 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한 충분

   하고도 만족스런 어떤 자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은 아닐 것이다.  그의 삶은 흔적 없고 매끄러우며 

   아무에게도 이해되지 못할 것이며  어쩌면 이해 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

   다.  그는 삶의 애호가도 아닐 것이며 그렇다고 염세가도 아닐 것이다.  

   그는 고함치지  않으며 흥분하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불행해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으며 눈물을  보이지  않지만  호들갑스럽게 웃지도  않

   는..... 그는 살 뿐이며 되도록이면 잘, 살고 있음을 잊을 정도로, 잘, 

   살려고 할 뿐이다.



     군악대가 전자북을 두드리기 훨씬  이전부터 그는 눈을 뜨고, 침대옆

   으로 늘어진 팔을 남의 것인 양 내팽겨쳐둔 채 빛이 새어들어오는 쪽에 

   빈잠이 덜 깬 동공을 고정시키고 있다.   한 시간 혹은 그보다 훨씬 전

   부터.  그의 동공을 되비치는 거울이 있다면 그는 그 속에서 욕구나 몽

   상, 무서움이나 놀람 같은 것이 제거되어 있는.... 부피도 체적도 감정

   도 없는, 수많은 선이 가운데의 검은 점 주위로 모인, 수정체라는 말  

   주는 느낌만큼이나 요원한 물체의 벽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군악대의  북장치를 꺼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

   로 군악대의 북소리는 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울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



     복도로 면한 창문 쪽에서는 늘 그렇듯이 그가 다가가기 위해 어떤 움

   직임을 보이기 전에 세상이 먼저 그에게 다가온다.  사무실 임대용으로 

   지어진 이 건물을 향해 걸어오는 바쁜 발걸음과 각자 문 뒤로 사라져버

   리기 전에 던지는  짧고 부산한 인사말들, 혹은  전동차 시간에 맞추어 

   출근을 서두르는 똑같이 바쁜 발자국  소리, 밤새 억눌려 있던 강한 수

   압의 수돗물 소리,  이미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의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이제 그만.



     아직은 자제된 초여름의 열기가 그의 상체와 침대가 닿는 그곳에서부

   터 시작되고 있지만 그는 일어나지도, 커튼을 젖히지도, 창문을 열지도 

   않는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하는 첫번째의 몸짓, 너무 자동적이어서 

   몸짓이라고 할 수도 없는 FM라디오의 버튼을 누르는 그 동작을 그는 하

   지 않는다.



     방안으로 스며들어 오는 빛은  희미하게 침대와 창문 사이에 놓인 사

   물들을 어슴프레 비치고 있지만 그 사물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 그는 빛

   이 필요하지도 눈을 돌려 그곳을 볼  필요도 없다.  몇 개의 씻지 않은 

   식기와 커피 잔, 그리고 펼쳐진 책과 이국의 방언처럼 모호한 글자들이 

   장식해 놓은 종잇장들, 벗어놓은  속옷과 꺼진 화면, 구겨진 휴지와 꺼

   진 담배, 이 모든 색바랜 것들의  목록을 그는 보지 않고서도 볼 수 있

   다.  시계를 보지 않고도 시간을  알 수 있듯이.  시간을 알 필요가 없

   듯이.  시간은,  무엇을 위한 시간이건,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  이제 

   그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는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전화를 걸  수가 있다.  그는 구체적인 이

   유를 대면서 --- 예를 들면  치통이나 안질 같은 이유, 구체적이고, 일

   상적일수록 그리고 적나라한 이유일수록 설득력이 있다 ---- 학기 마지

   막 주일의 이 토론회에는 참여할  수 없노라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시

   간이 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일주일에 두 번, 지하철까

   지 가는 버스를 계산에 넣고 지하철 시간표를 꺼내어 알맞는 열차의 출

   발 시간을 확인하고 그 시간에 맞추어 모든 것을 준비했음에도 늘 빠듯

   해지는 짧은 여유 시간에, 어딘가  조금은 비린 냄새가 나는 잔에 커피

   를 풀어 마시고 지하철 안에서는 전날 준비한 강의나 발표 노트를 훑어

   보는 일들을 단지 머릿속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차분히 떠올릴 뿐.  일

   주일에 한두  번, 대여섯 시간씩, 사회적인  활동과 비사회적인 활동을 

   구분하는 목록과 통계와 숫자에  대해 말하는 남자를, 불확실한 지식을 

   확실한 어조로  말하며 주관적인 견해를 그럴  듯한 이론으로 객관화하

   며, 민감한 이권을 저마다  대변하며 첨예하게 나뉘어지는 특정 분야의 

   계파에 대해 외울 정도로  빠삭하며, 침대에 누워 빛이 들어오는쪽으로 

   막연히 고개를 돌린 그곳에서  외출 준비를 하는 신경질적인 몸짓의 그 

   남자를 그는 그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바라보듯이 비스듬히 솟아올

   라 오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다.



     그는 최소한 전화를 할 수도 있었다.  그의 예기치 않은 부재를 아무

   런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고지하며, 다음주의 보충 토론회를 대비한 과

   제를 전달하거나,  자유 토론의  주제를 즉흥적으로  제의하기 위해서, 

   <복제물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거나  <대중화 사회에서의 극우의 

   정당화 경향>, 또는 <종말론과 계층 의식> 같은 모호하게 광대하고, 허

   망하게 게으른, 위선적으로 선동적이며,  현학적으로 은어적인 이런 주

   제를 제의함으로 당장 그를  사로잡는 이상한 힘의 사보타주를 한 주일 

   정도 연장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한 주일 후에는?  그는 전화하지 않는

   다.  그것이  어떤 것이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수월한 일이기 때문에.



     그는 침대의 경계를 넘는  지역으로 그의 몸을 이동하지도 않으며 이 

   아침,  세상이 그에게 보내는 어떤 유혹, 세상이 그에게 가해오는 어떤 

   도전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거의 습관적으로 그가 육체 가까이 끌어다 

   놓은 책들, [현대성의 비판], [주체의 개념에 대한 몇가지 문제]....는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말리는 속옷처럼 껄끄럽게  달라붙어 있을 뿐이

   다.  그러나 그것은 몸을  일으켜 옆으로 젖혀놓을 정도로 불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점점 더  강한 빛을 들여보내는 창문, 그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에 시선을 준 채 누워  있다.  빛과 소리 사이에 상관 관계가 

   있는 것처럼 문 밖의 소음도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한다.  건물에 들어찬 

   무수한 사무실에도 끝도 없이 울려오는, 어쩌면 단 일순간의 휴식도 없

   이 촘촘히 시간, 분, 초를  채우는 전화 소리, 응답하는 웅얼거리는 목

   소리들, 다시 의자를 끄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에게도 전화가 한 번 울렸다.   그는 전화에 대답하지 않았으며 아

   마도 그때, 그의 부주의한 발동작에 걸려 전화 코드가 빠진다.  전화의 

   울림은 멎는다.  그것은 진정 그의 의도적인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다행스러운 부주의였다.  그는 그러므로 전화 코드를 제자리에 다시 꽂

   지 않는다. 70킬로그램의 그의 몸무게로 침대에 패인 불편한 자국에 점

   점 더 깊이 살덩이를 묻을  뿐이다.  서너 번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 중의 한 사람은 고집스러우며 필사적이다.  구성진 목소리를 금지당

   한 쎄에탁소  직원, 절대 사절  신문 대금, 아니면 못생긴  교회 천사.  

   그는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그는  가끔 침대 옆에 놓인 

   물을 마신다.  가끔은, 미지근해진  물에 탄 커피도.  커피의 미지근한 

   바로 그런 속도와 그런 색채로  시간이 지나가고 그는 그 뒤를 따라 뛰

   지도 그것을 앞질러가고자 허덕거릴 필요도 없다.



     그는 숨을 쉴 뿐이다.   그의 숨결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다.  그는 

   균형 잡힌 이음보의 숨을 쉰다.



     그는 점점 커지고 복잡해지는  밤의 소음을 죽이기 위해서 혹은 어떤 

   다른 상태로 이전하기 위해서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놓아둔 오디오의 

   작동 장치를 누르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켜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그의 방까지 새어 들어온다.  얼

   마 전부터, 혹은 기억도 할  수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서히, 그는 다

   른 것에 앞서, 먼저  음악에 대해서 변덕스러워지며 까다로워지기 시작

   한다.  음악이 그에게 해를  입힌 적이 한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음

   악이 한 것이  있다면 그를 행복하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뿐이다.  

   음악은 그를 사랑한다.



     그런데도 그는 맨 먼저, 부당하게, 음악에 대해서 까다로워진다.  그

   는 한 곡을 끝까지 듣는 일이 점점 힘겨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가 참을 

   수 있는, 그의  상태에 정확히 답변하는 음악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확인한다.  그가 한 소절  혹은 두 소절까지 듣는 일이 아주 드물

   어진다.  어떤 날은 한 시간에 서른여섯 장의 판을 바꾼다.  그의 방에 

   쌓여가는 음악의 종류는 점점 더 다양하고 많아지지만 그가 부분적으로

   나마 참을 수 있는 곳의  숫자는, 열서너 곡에서 대여섯 곡으로 대여섯 

   곡에서 한두 곡으로 대폭적으로 줄어든다.



     그는 더 이상  그에게 알맞는 곡을 찾지 않는다.   그는 이제 음악을 

   듣지 않는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그는  아무 음악이나 들을 수 

   있다.  열어놓은  어떤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곡이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방에 스며들어 오듯이.   그는 어쩌면 한번도 진정 막 음악

   을 좋아하지 안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다.  그는 뒤척이고 눈을 감고 뜨며 창

   문을 보고 커튼 주름의  불규칙한 간격을 수없이 쫓아가고 밖에서 다가

   오는 소리의 멀고 가까움을 구별해 보고 다시 돌아눕고 눈을 감는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침대 위의 수평의 자세에서 침대 가의 

   수직의자세로 이동하는 데는,  생물계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시간만큼이

   나, 혹은 인류가  태어나서 죽음을 깨닫고 장례  절차를 고안해 내는데 

   걸린 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는 연필을 깎는다.  여섯  자루의 연필을.  정성 들여 뾰족하게 선

   정적으로.  꽃을 화병에 꽂듯이  먼지 낀 유리컵에 깎인 연필들을 꽂는

   다.  그는 보풀이 일어나는  싸구려 양탄자 위에 흩어져 있는 빨랫감을 

   바닥에서 주워올린다.  서너  점의 더러운 옷가지들을.  그는 세면대의 

   하수구를 막는다.   세면대에 물을 채운다.   세제를 풀고 속옷을 담근

   다.  양말과 수건과 팬티를.  자, 트라이.



     그가 세면대 위에 걸려 있는 거울을 보지 않으려고 해봐야 소용이 없

   다.  게다가 거울을 피할 이유  딱히 없다.  그 속에는 과잉으로 자란 

   수염과 플라스틱처럼 결연하게 무관심한  동공, 무정부 상태로 뻗친 머

   리카락과 거부적인 몸짓으로 구겨진  속내의가 그를 마주보고 서 있다.  

   그는 자신의 신원을  확인한다.  그렇다.   그는 대낮에 무수한 얼룩이 

   방향 없는 지도를 그려내고  있는 거울 속에서 모호한 의문부호를 양미

   간에 그려내는 스물여덟의 남자.  세상을 기쁘게 해주려고 고생하면 고

   생할수록 세상은 그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그런 수많은 사람 중의 하

   나.  서툴고 미지근한 방식으로  삶에 아  인사를 하고 저녁마다 영혼

   의 과장된 신음 소리를 내는 한 남자, 그는 그런 사람에 불과하다.



     설탕을 질료로 하는 몇몇  상품을 둘러싼 욕구의 다원구조를 통해 현

   대성을 고찰하고자 한 그의  논문, [현대적 주체의 비판적 고찰]은, 지

   금은   꺼진  컴퓨터   속에   SUGAR.HWP,  SUGAR1.HWP,   SUGAR2.HWP, 

   SUGAR3.HWP.....로 잠들어 있다.   갑자기 부상한 유행성 주제인 설탕, 

   그것은 거울 속에서 드러난 또 다른 화면, 지금은 꺼져 있는 컴퓨터 화

   면 저쪽에 녹아 있다.   이렇게, 설탕에 대해 논문을 준 舟求, 일주일

   에 세 시간의 강사 월급과 설탕을 근간으로 하는 회사 부설한 연구소가 

   특정 자료와  함께 지급하는 경향성 소액  장학금을 이끝에서 저끝으로 

   이어봐도, 월세 지급일을 맞을 때마다 일곱 평의 공간이 무한히 넓어만 

   보이는, 그런 사람이 하나 거울 저편에 서 있다.



     세면대의 거품이 다 꺼지기  전에 그는 양말과 수건과 팬티를 주무른

   다.  수건과  팬티와 양말의 순서로.  역시 같은  순서로 그는 한 개의 

   수건과 두 벌의 팬티, 역시 두 켤레의 양말을 여러 번 물을 갈아주면서 

   헹군다.   걀 양말의 보풀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여러 번, 오로지 

   오후의 한가한 시간에  속옷을 빨기 위해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

   럼.  그는 막 빨래를 마치고 얼굴을 든 남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

   은 행복한가?



     늦게, 아주 늦게  저녁 열시나 열한시쯤 그는  허기를 느낀다.  그는 

   침대 바로 옆에 허물로 벗어두었던 청바지를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간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현기증이 뒤통수를 당기기도 하지만 그 현기증은 그

   에게 처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오

    ÷煥壙 병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몸 속에 잠복 기간이 일 

   년 혹은 이 년 정도가 되는 그런 불치의 병원균이 오래전부터 서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후두암이나, 악성 간염, 최초로 그에게 옮겨붙은 전

   대미문의 전염병.  그러기나 하라지.   차라리 그러기나 하라지.  불치

   의 병에 대한 가능성은 그를 오히려 안심시키는 쪽이다.



     그렇지만 현기증은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  미증유의 병에 걸리지도 

   않은 그는 조용히 문을 나선다.  문 밑에 떨어져 대낮의 분주한 발길에 

   밟혀온 아무도 줍지 않은 신문을  그도 주워들지 않는다.  그는 밖으로 

   나간다.  그는 신문지가 되고  수많은 사람이 그를 밟고 지나간다.  밟

   을테면 밟아라.  끽소리 없이  밟아주리.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는 역 

   쪽을 향해 걷는다.  어쩌면 시간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를 수

   도 있다.  세상이 비쳐 울렁거리는 유리를 통해, 안이 환히 들여다보이

   는 카페와 편의점, 그는  편의점에서 주간 시사지와 담배와 샌드위치를 

   사고 카페에서는 레귤러 커피 한 잔을 마신다.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무

   르지 않는다.  그는 어는  곳에서도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다시 그의 

   방으로 돌아온다.  일종의 관성의  법칙으로.  버려둔 더러운 식기, 읽

   히지 않은 채  며칠을 열려 있는 책,  구겨진 종이와 와이셔츠, 코드가 

   뽑혀진 벙어리 전화, 정리되지  않은 빈약한 통장, 이제는 생산되지 않

   는 구형 오디오, 아무런 기억도 없는 침대....옆으로.



     그는 다시, 전화를 허락하지 않는 청바지 허물을 벗어놓고 조금 전과 

   동일한 자세로, 패인 자리에 몸을  맞추기 위해 서너번 뒤척여 그의 몸

   에 알맞는 자세로 돌아간다.  그는 눈을 감는다.  멀지 않은 곳에 생긴 

   고속도로,  도시 외곽을 끼고 도는 일종의 간선도로, 그는 고속으로 달

   리는 자동차 바퀴가 시멘트  바닥에 내는 파찰음의 고속도로 음악을 듣

   는다.  한밤중에,  두 세시쯤?   시멘트 침묵의 사막 위에 생겨난 일종

   의 묵시록적인 음악을.   그는 눈을 뜨고  있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눈을 감고 또다시 잠을 청하지도 않는다.  잠이 그에게 스며들 뿐이다.



     이튿날, 그 이튿날도.



     그는 아무 때나 눈이 떠질 때 일어나고 아무런 목적 없이 대중에

   게서 버림받은 시간의 거리를  돌아다닌다.  다음날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약속도 없이 해가 뜨고 다시 기울 때까지 잠을 잔다.  혹은 

   기다릴 것도 놓쳐야  될 것도 없으면서 밤새  내내 깨어 있기도 한

   다.  그의 머릿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이제 

   헛된 가능성의 기대로  ----오, 제발!----흥분하는 일도 없으며 그

   가 꼭 그래야  되리라고 믿는 일이 마치  공동 연대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또는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더 이상 소리를 차지도, 가

   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꼭 그

   래야 되리라고 믿는 이리 더 이상 그에게는 없는 것처럼 한다.  꼭 

   그래야 되리라고 믿는 일은 이제 없다.



     그의 논문, SUGAR.HWP....로  입력되어 있는 현기증 나는 액정상

   태의 글자들은 유령처럼 끝없이 떠돌 뿐, 끝내 종이 위에 사정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단 몇 번의 손놀림으로 그것을 단번에 지

   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기까지 이르는 여러 단계의 육체의 움직임

   이 번거롭기 때문이다.  수없이 수정된 문장들, 수없이 덧붙여지고 

   지워진, 어쩌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갈 미미한 용어와 

   표현들을 좀더  나은 것으로, 좀더 적합한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단 하나의 토씨나, 엇비슷한 두 음절짜리 단어를 세 음절짜리 단어

   로 바꾸기 위해 한밤중에  일어나는 일은 이제 그에게 일어나지 않

   는다.  그것은 이제 더이상  그의 숨쉬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

   를 한밤중에 깨어 있게  하는 것은 더 이상 설탕이 아니며, 그에게 

   소리지르지 않을 제어의 힘, 분노하지 않을 무관심의 힘, 괴로움을 

   무화하는 무감각의  힘을 기르라고 종용하는 것은  더 이상 설탕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그의 부재는 이토록 소박하게 이토록 무심하

   게 아무런 환상없이 열심히 계속된다.



     한 잡지에 그가 쓰기로 약속한, 동인지 형식의 변변치 않은 잡지

   에서 특집으로 부탁한 <부스러기 사회의 생리>라는 제목의 글도 그

   러므로 그는 영원히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부스러기를 던지는 사

   회와 부스러기에 달려드는 사회, 부스러기에서 제외된 사회적 주체

   의 생리학.  부스러기  지구와 부스러기  酉, 부스러기 국가의 생

   리학.  그 엄청난 것을 요구하는, 그가 눈을 껌뻑거리며 약속한 그 

   글을 단연코 씌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인류라느니 미래라느

   니 진리라느니 하는 얘기를 만들어 달라는 멍청하고 불쾌한 사람이 

   있다니!  어떻건 그 글의 마감 날짜가 이미 한 주나 혹은 세 주쯤, 

   어떻건 회복 불가능한 시간만큼 지나가 버렸다.  그는 중얼거릴 뿐

   이다.  원고 마감 날짜까지 지나가 버렸군.



     그의 예고  없는 부재의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그의 전화번호를 

   돌렸을 O의, Y의, P....의 전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두 

   번이나 그들 중의 서너 명은 그의 방문 앞에서 그의 이름을 외쳤으

   며 문 밑의 좁은 틈으로 메모를 밀어넣거나 문 위로 끼워놓고 가기

   도 한다.  누군가의 결혼식, 시시껍적한 술자리나 기껏해야 여남은 

   명을 위한 인쇄물의 출판 기념을 그와 함께 하기 위해.  그들이 임

   의로 결정한 많은 약속들을 그는 지켜줄 수도 없으며, 그의 부재에 

   대한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만한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그를 보러 지방에서 올라오는  C, 한 달에 한 번  ㅅ 주말

   에, 토요일 저녁쯤에 올라와  월요일의 출근을 위해 마지막 버스에 

   올라타는 C, 그를 형이라고 부르며, 그에게서 사랑과 미움을, 안정

   과 자극을, 행복과 미래를, 유년과 노년을, 형제와 정부를, 애인과 

   동지를 찾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다른 

   방법에 대한 확신의 부재로, 한 달에 한 번쯤 저녁을 같이 먹고 같

   이 외출을 하며 같이 침대에  눕고 같이 등에 있는 점이나 세며 시

   시덕거리기도 하는, 그가 늦게  들어오는 비 오는 저녁, 어느 만화 

   영화의 주인공처럼, 그의  疫  앞의 추운 복도에서 오래오래 기다

   린 후, 독감에나 걸려서  죽어버렸으면 하고 비장하게 말하는 그녀

   를 그는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영원히,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러

   나 그보다 더 영원하라는  단어가 남기는 여운은 그에게 아무런 멜

   랑콜리도 전해주지 않는다.  적어도 이제 영원은 없다.



     그에게 도착한 무수한  우편물을 며칠씩 지나서 무작위적 선택에 

   의해 뜯겨지기도 하지만, 예고하고 촉구하고 명령하고 요구하며 독

   촉하고 광고하고 비판하고   ㎸霞構, 그러다가는, 다시 바라고 싶

   어하고 감사하며  원하고 명령하는 그 어떤  우편물도 그의 행동을 

   유발하지 못한다.  그는 그 현란한 다양성의 일원화 현상에 식욕을 

   잃는다.  식욕을 잃을 것까지도 없다.  현란한 다양성의 일원화 현

   상을 볼 것조차 없다.  그는 아직도 식욕을 잃을 여지가 남아 있는 

   자신에 가벼운 실망을 표시한다.  너, 정말 한심한 너....



     그는 극기훈련을 한다.  가시나무 덤불 숲을 벌거벗고 지나간다.  

   절벽 위에서 몸을 던진다.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린다.  달리는 

   기차 밑의 철로에  눕는다.  달리는 모든  것에 뛰어든다.  해고된

   다.  체포된다.  강요된다.  구타당한다.  죽는다.  매장된다.  그

   것은 그에게 덧없는 웃음조차 유발하지 않는다.  그는 때려눕힌다.  

   고발한다.  고소한다.   성숙한 시민적 양식에 호소한다.  뺨을 갈

   긴다.  침을  뱉는다.  타락시킨다.  강간한다.   죽인다.  매장한

   다.  어느 것도 그에게 조금만큼의 흥분을 일으키지 않는다.  정말 

   한심한, 너무도 한심한 너....



     혹은 좀더 미묘하고 악의적이며 의도적으로 파괴적인 이런 건 어

   떤가.



     그 어느 날, 어둡고 차가웠던 어느 날, 그가 낮잠에서 깨어 일어

   났을 때 세상은 비어 있다.   일곱 살.  여덟 살.  그것이 무슨 상

   관인가.  방과  부엌과 마당과 동네, 그의  협소한 천지는 비어 있

   다.  그는 밖으로  나간다.  집에서 멀어지며 식구에게서 학교에서 

   멀어지고 세상에서 멀어진다.  그의 첫번째 가출.  세상이 그를 버

   리므로 그도 이렇게 세상을 버린다.  너의 그 불치의 감상성.



     어떤 모임에서 그가 피력한 <담론의 정치 의존과 그 해탈의 필요

   성>에 대한 견해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용이 문제되

   는 경우가 드문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다.  쉽사리 분류될 수 없

   는 그의 모호한 신상과  모임에 대한 당근적 채찍을 아끼지 않았던 

   그의 평소의 태도 때문에,  전망 부재적이며 대중 모독적이며 자기 

   비하적이라는 수식어로  통렬히 반박된다.   그는 반박의 반박문을 

   뒤늦게 작성하나 그것은 우송되지  않는다.  너무 진지한 너, 한심

   한.



     그가 진정한 열정으로,  분명한 소유욕에 부추겨져 무조건적으로 

   사랑한 동네의 여학생이 어느 날 사라져버린다.  그녀의 집을 강타

   한 가스 폭발로 그녀의  식구와 함께.  그리고 그가 보낸 연애편지

   와 함께.   이튿날 교실에서 그에  앞서 변성기로 외래인이 돼가고 

   있는 친구들은 폭발 사고  현장을 찍은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를 보

   았다고 떠들어댄다.  그에게도 변성기가 닥쳐온다.  그때부터 그는 

   [변신], [날개], [구토],  [백경]....같은 작품에서 성적인 장면만 

   골라 읽기  시작한다.  그것은  본격적인 에로물의 에로티시즘보다 

   한층 예리한 감각을 제공한다.  가스 폭발은 너무....



     또 어느 날 고교  동창회 모임에서 그는, 한때  냠 문턱을 열심

   히 같이 넘던 친구를 만난다.  간헐적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헌금통

   에서 현금을 훔쳐 그를  술집에 데려갔던, 사업가가 된 그 친구는, 

   그의 공모의 미소에 조소를 되돌려준다.  정말 너는....



     또 어느 날은.... 또 어느 날은....



     그는 이제 백지를 꺼내놓고, 손을 씻고 잘 깎인 연필을 집어들고 

   쓰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의 목록

   을, 그를 화나게 하는 것과 그를 우울하게 하는 일, 그를 실망시키

   는 일과 절망시키는 일,  그를 슬프게 하는 것과 무섭게 하는 일의 

   완전한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엄살 많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지 

   않는다.  그는 이제 그런  식으로 자위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필

   요가 없다.



     어떤 일화도, 어떤 망각의 뒷전에서 건져내 온 기억의 조각도 그

   의 혈액 순환의 속도나 호르몬 분비의 양을 변화시킬 수 없다.  어

   떤 기억도 그의 기쁨이나 분노, 감격이나 후회, 욕구나 구토, 불편

   함이나 우수....를  유발하기는 커녕, 어떤  미묘함도 어떤 악의도 

   어떤 파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누워서 이렇게 오래, 충분한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방수 처리를 한다.  무엇의? 하다 동사는 자

   동사인가, 타동사인가? 골치가  아픈 이런 질문은 던지지조차 않는

   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잠시 눈을 뜬

   다.  빈  복도에 울리고 있는 C의 목소리.   주말?  아마도.  그는 

   창문 쪽으로 돌아누으며 혀를  입천장에 살짝 부딪친다.  아아, C.  

   이름을 부르고 방문을 두드리면 없는 사람이 나오리라고 생각할 정

   도로 우둔하다니.   교양 있고 세련된  그녀가 저렇게 결례를 하다

   니.



     비가 온다.  그는 이제 편지함을 비우기 위해 일층까지 내려가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어떤 기적도 편지 형태로 그에게 다가온 적

   이 없다.  더욱이  열 개의 사은품이 증정되는 수입 카메라 광고나 

   늘 회원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함에도 다섯 이상을 넘지 않는 이

   름뿐인 무슨 연구회의 모임 날짜를 알리는 갱지라니.  게다가 그가 

   기다리는 기적은 없다.  기적은 커녕 그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다.



     그는 삼십 분을 걸어서 은행에 간다.  땅따먹기 놀이처럼 조각조

   각 부서지던 통장의 돈을,  간헐적인 과외 수업, 남의 이름으로 출

   판되는, 갑각류의 생태나 에스페란토의  기원 또는 암 퇴치의 비결

   에 대한, 저자를 알 수 없는 글들의 조각난 번역비.....  몇 달 동

   안의 저금을  그는 모두 현금으로 찾는다.   밑부분이 겨우 채워진 

   누런 봉투를 들고 다시  삼십 분, 빗속을 걸어 그의 방으로 돌아온

   다.  인스턴트 요기거리 몇  점, 담배와 함께.  그는 카펫 위에 비

   에 젖은 지폐 몇 장을  늘어놓아 말리고 침대 가에 앉아 삶은 달걀

   을 먹으면서 담배를 피운다.  그는 샤워를 한다.  살이 물렁물렁해

   질 정도의 더운물에.  그는  녹지 않았다.  그의 뼈는 액체로 변하

   지 않았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그는  다시 침대 가에 앉는다.  그는 다시 

   담배 한대를 피운다.  딱히 채울 거리를 찾지 못한 무료함은 긴 담

   배에 불을 당기지만  담배가 타들어가는 만큼 무료함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침대와 책상, 열려진 채  잊혀진 서너 권의 책과 이제는 제법 두

   꺼운 먼지가 덮힌 사물들.   씻지 않은 식기와 커피 잔, 깎여진 연

   필을 꽂고 있는 유리잔이 놓여 있는 식탁 겸 책상.  책상의 반대편 

   벽을 반   채우고 있는 사층의 책장.   책장이라기보다는 약 사십 

   센티미터 정도의 높이로 간격이 벌어진 넉 장의 널빤지.  널빤지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끔 놀라운 균형으로 책장의 기둥 노릇을 

   하고 있는 책더미들.



     이미 오래전에 폐기처분했어야 할, 여러 시간대를 거쳐오면서 누

   적된, 그에게 달라붙어 있던 약간의 기우 ---- 언젠가는 한번쯤 쓰

   일지도 모른다는 미신  ----와 결단력의 부족으로 시골에서 하숙집

   으로, 하숙집에서 누나네 집으로  누나네 집에서 이 방까지 따라오

   게 된,  물론 책의 내 類릿募 책의  크기와 두께에 의해 분류되어 

   정연한 더미를  만들면서 얇고 좁은  널빤지를 받쳐주는, 언제라도 

   눈에 띄기를 기다리며 제목을 앞쪽으로 내보이며 정연하게 꽂혀 있

   는 수직적 투자 가치  전문서적과는 구별돼, 수평으로 무더기로 뒤

   죽박죽 쌓여 있는 책더미들을 그는 위에서 아래로 따라간다.  교과

   서와 잡지들, 교양 서적과  소설류, 한번도 읽히지 않을 것이 분명

   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끼어들게 된 자서전류와 사전류, 충동으로 

   구입되어 한두 장 넘겨진 후 폐기처분되기 전에 그의 방에 임시 주

   차하고 있는, 심령과학,  경제 정보, 육법전서....같은, 그의 방에 

   들어왔기 때문에 받침대 구실을  하는 책들의 제목을 그는 읽지 않

   은 채로 보고 있다.   방심한 그의 시선은 아래층까지 내려오고 두

   드러지는 두께와 짙은 표지의 <치신 지리부도>에 잠시 머무른다.



     그는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기차나 버스로.  비행기를 탈 수

   도 있다.  산간지방이나  제주도, 홍콩과 마카오, 대만이나 하와이 

   정도까지는.  혹은 배를  타고 일본의 큐슈난 오사카까지는.  거리

   에 따라, 이박 삼일 정도, 혹은 삼  사일, 최대한 사박 오일 정도

   까지는 문제없이.  당일이라면  어디든 비행기로 편도 여행 정도는 

   할 수 있다.  칸느나 뉴욕, 블라디보스톡이나 통부크투까지.  그는 

   언제든지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야자수 밑을 반바지를 입고 거닐

   며 호텔의 수영장에서 마시지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호화 호

   텔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카지노에서 일확천금을 벌 수도 있다.  안

   내서를 펴들고  박물관을 거닐고 접는 의자를  들고 공원의 녹음을 

   바라보며 신문을 볼 수도  있다.  혹은 호텔 방안에서 모르는 나라

   말을 텔레비전 앞에 누워 지구 어디에나 풍성한 멜로드라마를 보면

   서 야자수 열매를 깨물어 먹을 수도 있다.



     딱딱한 장정과  크기 때문에 맨 밑층으로  가게 된, 책장 전체의 

   무게를 받고 있는 그 책을 꺼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

   일까.  그는 정화된 집중으로, 놀라운 체계를 동원해 그 방법을 생

   각하면서 담배를  핀다.  한층 한층  비우면서 맨 밑층의 책더미에 

   다다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널빤지가 약간 왼쪽으로 기울 

   것을 감안하면서, 좀 힘이  드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무릎으로 널빤

   지를 받친 후, 그 책이  끼어 있는 맨 밑의 더미에서 그 한 권만을 

   빼낼 수도 있다.  혹은, 그보다 나은 방법도 있다.  아래층의 널빤

   지를 메우는 책의 높이보다  약간 ---- 일이 센티미터 정도 ----더 

   높은 책더미를 바로 옆에 준비해 밀어넣은 다음 그 책이 끼어 있는 

   더미를 빼내  절망적으로 밑에  깔린 그  책을 손에 넣을  수도 있

   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그 모든 해결책은 그를 설득하지 못한

   다.  그는 어떤 것도 하지 않으며, 지리부도를 꺼내는 일을 포기한

   다.  설령 애를 써서 그  책을 꺼냈다고 치자.  이미 십 년이 넘은 

   출판년도를 가진 그 지도가  지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사

   이 너무도 많은 국경이 변경되었고 지금도 변경중이다.  게다가 꼭 

   필요한 장소는 늘 지도에 나와 있지 않다.



     여행이라니.  그는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야 할 것이다.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구입해야 할 것이며 여행 가방을 꾸리고 도시를 가

   로질러야하며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고 여행지의 공

   항에서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며 호텔까지 이동해야 하며.... 결정

   적으로 그는 모든 절차를  해낼 정도의 참을성이 없다.  야자수 부

   근에는 벌레가 많을 것이며,  2등급 호텔로 지정된 그의 호텔 목욕

   탕의 수도에서는 그의 방의  수도꼭지와 다를 바 없이 아무리 잠가

   도 약간의 물이 샐 것이며, 해변의 모래에는 발목이 걸리는 해초가 

   널브러져 있을 것이며 자세히  보지 않아서 그렇지 이름도 알고 싶

   지 않은, 암수 한몸인 지렁이 강의 크고 작은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수영을 하기에 물은 너무 깊을 것이다.  카지노에서

   는 양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간을 넘기도 전에 쫓겨날 것이

   며 박물관에서는 문명 초기의 상상력의 빈곤을 알려주기 위해 끝도 

   없이 나열되어  있을 수렵과 농경의 지루한  기구들.  타제 석기와 

   마제 석기, 활촉과 절구,  투박한 유리 귀걸이와 즐문토기, 유인원

   의 해골과 잠견이나 잠지를 닮은 옹관....



     그는 당장이라도, 어디라도 떠날  수 있는 여행을 포기한다.  밖

   에는 비가 오고, 여전히 요기 거리와 담배가 남아 있는 한, 그리고 

   비에 젖은 지폐  몇 장이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시 빗속을 

   걸어 여행사를 찾아, 더 싸고, 더 우아한 코스의 패키지 상품에 대

   한 정보를 입수하러 빗속을  돌아다니는 그런 일을 그는 하지 않는

   다.  설령  비가 오지 않는다 해도.   설령 여행사가 그의 방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사무실에 있다고 해도.



     어느 날 아침,  그는 한 벌 있는  여름 양복을 220볼트 다리미로 

   다린다.  그를  늘 지하철 역까지 내려다  놓던, 지하철 역 정류장 

   이상 더 멀리까지 타본 적이 없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까운 곳까

   지 간다.  버스  안은 거의 비어 있으며 운전사가 켜놓은 라디오에

   서는 정류장 이름을 알리는 낡아서 궁글려진 녹음된 목소리 사이사

   이로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차창 밖으로는 개발에 뒤쳐진 지역이 

   지니는 표시들을  나열하며 거리들이 스쳐  지나간다.  보라색이나 

   하늘색의 타일로  드믄드믄 복(福)자나  수(壽)자를 새겨넣은 건물

   들, 오층 혹은 육층 정도의 건물속에 볼링장과 목욕탕과 치과와 호

   프집이 뒤섞인  건물들, 상가 사이에서 우뚝  가릴 것 없는 하늘을 

   가려버리는 준공중인 건물들, 상가 사이에서 우뚝 가릴 것 없는 하

   늘을 가려버리는  준공중인 아파트 건축장,  기사 식당과 노점상과 

   시들한 고무나무, 벤자민,  오 藍犬す 사이에 분홍 리본이 나부끼

   는 신장개업 다방 <개미>.  사람들이 버스를 올라타고 점점 혼잡해

   지는 거리의 차량이 그의 시야를 가리고 유행가가 뉴스로 바뀌면서 

   시간은 한가하게 지나간다.



     그는 충무로쯤에서 내린다.  그리고 걷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끔 풀려나가는  운동화의 끈을 다시 

   매기 위해서만 멈추면서.   무수한 사람들이 그의 뒤에서부터 걸어

   와 그의  앞 저쪽으로 멀어져 가고,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먼산의 

   나무들처럼  앞에서 다가온  사람들은 그를  스치고 사라져버린다.   

   그는 걷는다, 충무로에서 명동  쪽으로 명동에서 퇴계로 쪽으로 퇴

   계로에서 서울역 쪽으로.   가끔 그의 운동화 뒤축을 밟으며, 거칠

   고 무딘 표정으로 그의 어깨에 부딪쳐오는 사람들, 앞을 보고 빨리 

   걸으며 어떤 사건에도 무심하게  그만큼 빨리 멀어져 가는 사람들, 

   가족과 돈과 탄생과 죽음에는 이의 없이 감격하며, 이권 권력과 민

   족과 핏줄에 대해서는 세 줄을 넘지 않는 논의 끝에 무조건 동의하

   는 사람들, 선과 악, 상과 하, 전과 후, 안과 밖에 대해 불변의 지

   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그는 그를 스쳐  지나가는 그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그가 모르는 모든 거리를  그는 걷는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타

   성으로 가두 신문 판매대에서  주간지, 일간지와 주머니에 넣기 좋

   을 정도로 얇은 생활교양지  ----<일과 삶>, <나는 전문가>, <우물

   터> 같은 ----도 한 권  집어든다.  그는 그것을 팔 밑에 느슨하게 

   끼고 걷는다.  가끔 반투명한 유리 사이로 긴머리 여인들  다리가 

   내보이는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가서  브랜드 커피를 마신다.  시선

   의 반쯤은 밖에 부유하는  사람들을, 반쯤은 펴놓은 주간지에 던지

   면서, 사실을 말하면 아무것도 읽지 않으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

   는다.  커피전문점의 소파는  편안하며 실내는 비좁지 않고 장식은 

   쾌적하며 간단한 점심 식사 정도와 맞먹는 커피맛은 인스턴트 커피

   와는 확실히 맛이 다르다.



     그는 또 걷는다.  서울역에서 남영동 쪽으로 남영동에서 용산 쪽

   으로, 마치 이렇게 끝없이 거리를 걷는 것에 그의 운명이 바치어지

   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도시의 풍경이 그에게 미치는 심리적이며 

   육체적이고 이념적인 영향력의  미미한 정도를 시험해 보려는 사람

   처럼.  그의 사분의 사박자 걸음은 느려지지도 빨라지지도 않는다.



     그가 밖으로 나갈 때는  지폐 한 장씩을 주머니에 넣는다.  지폐 

   한장의 하루의 경영은 그에게 약간의 질서를 제공하며, 지폐 한 장

   의 한계는 선택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그를 지켜주고, 지폐 한 

   장의 자유는 하루의 일정에 리듬을 부여한다.  그는 아무곳에나 들

   어갈 수는 없으며 아무곳에서나  식사를 할 수 없다.  그는 고궁이

   나 전시장, 야구장이나  동물원, 공원이나 도서관이나 화랑 주변을 

   맴돈다.  때때로 그는 영화관이나 백화점, 레코드 가게, 오디오 상

   점이나 책방 근처를 오래  배회하기도 하지만, 어떤 기이한 발명도 

   어떤 새로운 상표도 그의 욕망을 자극하지 않으며, 어떤 서적도 어

   떤 음반도 그의 꺼진 눈빛에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며, 어떤 놀라운 

   주제의 강연도 그의 심장을  뛰게 하지 않으며 어떤 전시회의 소식

   도 어떤 영화나 음악회의 예고도 그의 내부에, 은근한 기다림이 만

   들어내는 절제된 쾌락을 지피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찾았던 책이

   나 자료가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에도 그의 손을 나른하게 주머니

   에 꽂혀 있을 뿐이다.   모든 음악은 결정적으로 너무도 늦게 작곡

   되었거나 너무  이르게 연주되었으며, 모든  발명품은 그의 욕구에 

   비해 너무 늦게 혹은  너무 빨리 발명되었음을 그는 미미하게 확인

   한다.  그에게 욕구가 있었을 때는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이 없었으

   며,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이  저기 보였을 때 그는 더 이상 욕구가 

   없어져 버렸음을 알아차린다.



     저녁 나절  그는, 일간지와 주간지,  월간지와 석간지, 안내장과 

   팸플릿, 설명서와  초대장, 정보지와 광고문,  이런 저런 인쇄물을 

   주머니에 가득  꽂고 투명으로 벽을 넘는  남자처럼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방으로 들어온다.  친구의 메모 대신 관리비 용지가, 일

   거리를 맡기는 편지 대신  월말 영수증이 문 밑에서 그를 기다리지

   만 그는 허리를 굽혀 줍지 않는다.  발로 밀어 침대 옆에 쌓아놓을 

   뿐이다.



     그는 미지근한 물에 인스턴트  커피를 풀어 덜 씻긴 찻잔에 부어 

   마시면서 무심한 손에 집히는 종이를 속삭이며 읽는다.  관리비 용

   지의 내역과 불상의 종류를  설명하는 전시회의 안내장, 관념 작업

   을 하는 민중 화가의  약력과 죽음을 이겨낸 국제적 테너의 불굴의 

   이력을.  그의 속삭임은 낮고 침착하며 그의 음독은 정확한데 부드

   럽다.  모르는 단어 앞에서 망설이지 않으며 불분명한 인쇄는 한두 

   줄 뛰어넘는다.   그의 속삭임이 음독하는  내용은 무리 없이 그의 

   머리에 각인된다.   그의 모든 세상의  활동을 모든 사회의 소식을 

   외설적으로 속삭인다.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 지루하지 않을 정

   도로, 점점 희미해지는 일조에 그의 동공이 견뎌낼 때까지.



     그는 종이 수거함이다.   그는 모든 소식을  삼킨다.  그는 서류 

   정리 파일이다.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희비애락, 모든 우여곡절과 

   삶의 부침을  묵묵히 삼킨다.  어떤  소싯곧 그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먼나라에서 날아온 대학살의 소식도, 광기로 치닫는 세계

   의 어떤 패권다툼도, 어떤 유년이 조숙하게 경험한 끔찍한 살해 소

   식도, 세상이 애통하는 어떤  지성의 종언도, 그 어떤 파국, 그 어

   떤 파괴, 그 어떤 파행 조짐도 그의 목젖을 떨게 만들지 못한다.



     머리 쳐들 때만 기다리는 모든 배덕의 기호들, 다시금 죽일 필요

   도 없는 모든 죽은  가치의 지치지 않는 부할, 무한히 반복되는 동

   일한 생존의 기교들.... 그  어떤 것도 그를, 더 이상,  ?瓚繭捉 

   입은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그를 놀라게도, 분노시

   키지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그 어떤 것도 그를 절망시키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입력할 뿐이다.  실수 없이, 누락 없이, 

   과장 없이.  그 어떤 파국의 입력도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제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는다.   이제 아무도 그에게 약속 

   시간과 장소를  알리는 쪽지를  그의 방문 틈에  끼워놓지 않는다.   

   방을 청소하고  먼지를 털어냈으며 더러운 잔과  식기를 씻고 전화 

   코드를 꽂아 놓았음에도 아무도 전화를 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의 

   부재에 지쳐버린다.  이름도 잊고 있었던 뒤늦게 군대 간 격조했던 

   친구의 짤막한 안부편지나 어떤 모임에서 만나 하룻저녁 어울린 아

   방가르드 화가의 전시회 팸플릿,  이 계절이면 얼마 전부터 심심찮

   게 도착하는 소식 끊긴 여자 친구들의 청첩장.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그의 체온보다  몇 도씩 놓은 것만 같은 열

   기가 새어 들어올 뿐,  그는 웃통을 벗고 앉아서 가상적인 구직 편

   지를 작성하고 그의 이력서를  덧붙이며 그 모든 것을 펜글씨 연습

   을 하듯 자필로 써내려 간다.  그의 주소를 쓰고 이름을 쓰고 우아

   하게 새겨진 인감도장까지 찍어  봉투에 감금한다.  그렇지만 어떤 

   편지도 우송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면담 요청이나 증빙 서류

   를 보충하라는 어떤 답장도 받지 않는다.



     장마는 멀었지만 잘  닦아놓은 투명한 유리의 저쪽 구석으로부터 

   검은 구름떼가 시야를 덮을 때도 있다.  그는 속삭이듯이 중얼거린

   다.  그는 결코 목청  높여 외치지 않는다.  번개야 쳐라.  벼락아 

   떨어져라.   그는 결코 목청  높여 외치지 않는다.   번개야 쳐라.   

   벼락아 떨어져라.  그러나 하늘에는 늘 동일한 괘도를 움직이는 단

   조로운 디자인의 엇비슷한  구도가 아침이고 저녁이고 어김없이 계

   속된다.  그는 팔층  창문턱에 팔을 늘어뜨리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실험한다.  그의 팔은 그의 어깨에  분리되어 밑으로 떨어지지 않

   는다.   그의 두부는 목에서 떨어져  창문 저쪽으로 늘어지지 않는

   다.  그는 입안에 고인  침을 둥글게 돌려서 밑으로 뱉어본다.  그

   것은 상대성원리에 따라 점점 빠르게 밑으로 내려가 희끄무레한 점

   이 되었다가 이내 공중분해되어 버린다.



     우연히, 그가 도시의 남서쪽에 위치한 공원까지 걷게 된 어느 날 

   저녁, 그는 한  아파트의 초인종을 누른다.   그의 큰 누이가 문을 

   열어준다.  그의 조카 ----글쎄 그 아이는 벌써 국민학교 일학년이 

   되었다.----는 학원에서 돌아 읒 않았으며 매부의 상점이 문을 닫

   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매부의 상점은 잘 되는 편이고 아직은 기

   반이 확실치 않아 일찍 문을 닫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누이는 행

   복하다.  그는 여러 가지 소식을 듣는다.  두 달 후에 있을 모친의 

   제사에 그녀는 ----아마도 남편 없이 혼자 ----내려갈 것이다.  고

   향의 관공서에 근무하는 큰형은 곧 진급될 예정이며 부친의 고질적

   인 관절염을 치료할 획기적인 수술법이 고안되었으며, 사람은 머지

   않아 불사의 시대로 진입할는지도 모른다.



     저녁 준비를 하면서   ㈏甄 비밀스런 인생관의 일단을 펼쳐보인

   다.  누이는 그를 정말로  아끼기 때문에.  사는 것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우울한 것보다는 명랑한 것이 좋다.  가난한 것보다는 부

   자가 낫다.  혼자 사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다.  누이는 안

   정되지 않은 동생의 장래에 대한 걱정을 아끼지 않는다.  동생이니

   까.  그는 아슬아슬한 미소를 지으며 누이의 동어 반복을 경청하고 

   누이가 식탁에 꺼내놓는 고등생선의 꼬리를 잘라준다.



     조카애가 귀가한다.  매부도  귀가한다.  조용한 가운데 저녁 식

   사가  〕ぐ 누이가 그를 위해 준비한 방이 있지만 조카가 조른다.  

   아이든 외삼촌과 나란히 한방에서  자고 싶어한다.  아이의 요구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들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녀는 자그마한 

   조카아이 방에 조카와 나란히  자리를 깔고 눕는다.  아이는 곧 고

   른 숨을 쉬며 잠이 들고 그는 누워서 벽의 보라색 꽃무늬를 따라가

   며 오랫동안 잠이 들지 못한다.   그는 돌아눕는다.  그는 다시 돌

   아눕는다.  그는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온다.  그는 네온이 켜진 

   응접실의 어항 옆에 앉는다.  그는 그의 앞에 펼쳐져 있는 먼 미래

   까지의 항로를  어항 속의 물고기의 부유만큼  투명하게 들여다 본

   다.



     물고기는 잠을 자지 않는다.  그는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일자

   리는 약간의  진부한 난항을 거치면서 어렵지  않게 구해질 것이고 

   그는 일의 종류에 관한 한 그다지 까다롭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받

   은 교육이나, 그가 쓰던, 거의 완성한 논문, 그의 관심 ----그렇지

   만 정말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이던가 ----이나, 한때 가졌을

   지도 모르는  그의 미지근하던 정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떤 

   직장.  쓰르라미 보청기회사나 제약회사 외판원 자리는 또 어떤가.  

   혹은 한 미생물 연구소  구석방에 있는 자료 보관실에서 하루 종일 

   서류 정리에 혹사하다 설명으로 순직하는 것도 괜찮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그는 굶지는 않을 것이다.  굶

   다니.  그는 지금보다  더 풍요롭고 지금보다 더 쾌적한 삶의 조건

   들을 구비하게 될 것이다.  이미 익숙해진 쾌락과 안락이 요구하는 

   최저 생계비는 매년 증가할  것이며, 세상이 제공하는 쾌락을 향유

   할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어 안타까울 것이다.



     어느 날 향유의 씁쓰름한 여운 끝에 그는 가끔 양념 같은 향수를 

   느낄 것이다.  한때 누군가를 사랑한 일이나, 한때 쓰다 만 논문이

   나 편지나 글들, 그는 그것을 옛사랑의 그림자를 들추어보듯, 무책

   임하게 애무하기 위해서 한두 번쯤 꺼내 볼 것이다.  아 내게도 한

   때는, 설탕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이토록 두툼하게 매달린 적이 

   있었군.  여가를 이용해,  혹은 다른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즐거이 

   착각하기 위해, 그는 무비  카메라나 바다 낚시, 컬트 영화나 행글

   라이더에 전문가라는  말을 들을  ㅅ돈 열중해  볼 것이다.  그도 

   어딘가에 미쳐볼 수 있다는  생각에 탐닉해 보기 위해서.  정말 그

   럴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어떤 감독의 숨겨진 실험작, 신형 무

   비 카메라에 대한 정보,  괴팍한 축구선수의 전기나 희귀 음반, 요

   절 화가의  회고전....주위로,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다.  그들 사이에는 내밀한 경탄과 공모의 침묵이 형성되고 그렇게 

   생소한 이들은 서로의 익숙한 고독을 알아볼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 속에, 아주 주변적인  것에 몰입하는 아마추어적인 정열은 한동

   안  戮 삶의 감정적인 문법이 될 것이다.



     한 해가, 두 해가 가고....그가 좀더 나이가 들어서는 지역의 환

   경정화를 위한 주말 꽃  심기 운동이나, 불우 난민 돕기 바자에 아

   내와 같이 참석하거나..... 그는  또 어항을 들여다본다.  그는 음

   악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

   는 국경을 변화시키는 외교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진

   실을 말하면 그는 그 어느  것도 애호하지 않으며 그 어는 것도 진

   지하게 되고 싶지 않다.   그것들은 애호하기에는 욕구하기에는 너

   무 거추장스럽다.   어떤 종류의 가상적인  삶도 그를 위로해 주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삶도 그의 자장가가 되어주지 않는다.  그는 

   오랫동안 어항 옆에 앉아 있다. 



     주말이 되고 그는 누이의  식구들과 고기 뷔페에 가서 외식을 한

   다.  그의 매부는 고학력의 처남 앞에서 세태 얘기를, 정치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날이나 전전날쯤 하루 종일 점포에서 듣

   는 라디오프로, 저녁 나절의  텔레비전 뉴스에서 들은 것을 반복하

   면서 질문을 던지고  아나운서만큼 흥분하며, 아나운서만큼 실망하

   며 아나운서만큼 감격한다.   조카는 졸고 누이는 고기를 뒤집느라 

   여념이 없고 그는 고기를  씹으며 아스라한 원시 시대의 소식을 듣

   듯이 매부의 얘기를 듣는다.



     외식 후에는 고기 뷔페  바로 옆의 지하 노래방에 간다.  아이는 

   <핑계>와 <겨울비>를 부르고  ---조카는 엄청 조숙하다 ----누이와 

   매부와 그는 <산 넘어 남촌에>, <목포의 눈물>과 <사랑만은 않겠어

   요>.....같은 매부가  고른 노래를 부른다.   노래방을 나오기 전, 

   식구 전체는  그의 누이의  원대로 <네 꿈을  펼쳐라>를 합창한다.   

   그들의 합창곡은 93점을 기록한다.



     이틀이나 사흘, 이렇게 그는  누이의 집에서 조금 머문다.  아무

   도 없는 아침 나절 그는 먼 거리를 걸어 그의 방으로 돌아온다.



     그는 매일 외출한다.   나가기 전에 서랍에서 지폐 한 장씩 집어

   들고.  그는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가지 않는다.  기껏해야 

   서울역이나 남산, 야구장 근처나  대공원.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

   언가를 중얼거리는 사람들, 엉덩이를 긁으면서 하늘을 쳐다보는 사

   람들, 손을  잡고 의자에서 침묵하는 연인들,  그처럼 가만히 앉아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는 그들을 바라보

   다가 돌아온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붙이지 않고, 성냥불 부탁이

   나 시간을 묻는  일 이외에 그도 그들을 말할  것이 없다.  그것은 

   야만의 시대를 터득한 그들의 철학에 어긋나는 일이다.



     어느 날 서랍을 열었을  때, 그를 바라보던 지폐의 얼굴 대신 빈 

   서랍 밑바닥의 누런 합판이 잘못 숨긴 거짓말처럼 드러난다.  그렇

   지만 그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는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굶어 죽다니.  그는 외출을  멈춘다.  그렇지만 꼭 더  鵑 지폐가 

   없어서는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그는 이제는 어떤 이유건 꼭 외

   출을 할 필요도 없으며  외출이라면 할 만큼 했다.  없어지는 일이

   라면, 하지 않는 일이라면 할 만큼 했다.



     무엇에게나 모른다고, 싫다고, 아마라고 대답하면서 이방인을 꿈

   꾸는 사람들, 완벽한 척하는 세상의 실추를 부재를 통해 증명해 보

   이려 잠자는 사람들, 천재가 되어버린 박제들, 그는 수많은 그들조

   차 되지 못했다.  그들의 길고 긴 계보는 아득히 끝이 없지만 그는 

   그 비밀결사에 업적을 할 수도 없다.  그들은 무서워했고 걱정했으

   며 경종을 울렸고 좌절하거나  이겨냈다.  그들은 너무 완벽했으며 

   비극적이었고 진지했으며 감동적이었다.



     그가 부재한  사이 세상이 개과천선을 한  것도 아니고, 그의 발 

   밑에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지도 않았으며, 그는 그 사이 더 현명

   하게 사는  법을 터득하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별을 주기는 커녕 터득할  것도, 증명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는 더 비싸지지도 않았으며 더 싸지지도 않았다.  어떻

   건 그는 살았다.  그 동안 잘, 살고 있음  잊을 정도로 잘 살았을 

   뿐이다.



     어느 날 군악대의 북소리와 함께 일어난다, 잠시 죽은 척하고 있

   다가 사 분 후면 다시 호들갑떠는 북소리와 함께.  그는 전화를 한

   다.  아무 용건도 없이.  그는 편지를 쓴다.  그는 찻잔을 씻고 책

   상을  정리하며 침대보를  갈고, 저 더운 대륙의 늙은 대령을 흉내

   내며 병 밑에 늘어붙은 커피를 긁어낸다.



      책상에 앉기  전에 그는  자동적으로 오디오의  버튼을 누른다.   

   <푸른기차>.  그가 다시 들은 음악의 제목은 이렇다.  모든 음악을 

   듣는 이유가 늘 그렇듯이, 이유없이.  어떤 음악이 있다.  처음 듣

   고 조금 좋아한다.  혹은 처음 들었을 때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남

   기지 않는 음악도  있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어쩌다 한 소절이 

   머릿속에서 돌아다닌다.  그리고  서서히, 하루를 지내는 데 꼭 필

   요한 것이 된다.  다른  곡, 다른 핑계에 매달리기 전, 잠시 동안.  

   <푸른 기차>는 그를 사랑한다.  그러니 어쩌잔 말인가.




[ 타인의 방 ]                                              ' 최인호 '          
     1945년 서울출생

     연세대 영문과 졸업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견습환자'가 당선 등단

     주요작품 : 술꾼, 무서운 복수, 처세술개론, 깊고 푸른밤등의

                단편과 별들의 고향, 가족등의 장편이 있다





         그는 방금 거리에서 돌아왔다.  너무 피로해서  쓰러져 버릴 것 같

      았다.  그는  아파트 계단을 천천히 올라서 자기 방까지  왔다.  그는 

      운수 좋게도 방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었고  아파트 복도

      에도 사람은 없었다.   어디선가 시금치 끓이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을 더듬어  문앞에 프레스라고 쓰인 신문 투입구  안쪽의 초

      인종을 가볍게 두어  번 눌렀다.  그리고 이미 갈라진  혓바닥에 아린 

      감각만을 주어 오던 담배꽁초를 잘  닦아 반들거리는 복도에 던져버렸

      다.  그는  아주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문을 열

      어 주기를.  문을 열고 다소 호들갑을  떨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

      를 맞아주기를.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마지막 남은 담배에  불을 당

      기었는데도 방 안쪽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그는 다시 그  작은 철제 

      아가리 속에  손을 넣어 탄력감  있는 초인종을 신경질적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손끝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그는 또 기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초인종이 고장난 것이   틈耐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그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아득한 저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반영되어 오는것을 꿈결처럼  듣고 있었기 때문에, 필시  그의 아내가 

      지금쯤 혼자서 술이나  먹고, 그리고는 발가벗은 채  곯아떨어졌을 것

      이라고 단정했다.



         나는 잠이 들어 버리면 귀신이 잡아 가도 몰라요.



         아내는 그것이 자기의  장점인 것처럼 자랑하고 있다.   그래서 그

      는 분노를 느끼며 숫제 오 분 동안이나  초인종에 손을 밀착시키고 방 

      저 편에서 둔하게  벨  恬? 계속 울리고 있는것을  초조하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의 방 열쇠는 두 개로, 하나는  아내가 가지고 있고 

      또 하나는 그가 그의 열쇠 꾸러미 속에  포함시켜서 가지고 있는 것이

      다.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열쇠로 방문을 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편이냐 하면 그런 면엔  엄격해서 소위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아내 된 도리이며,  적어도 아내가 문을 열어 준 

      후에 들어가는 것이 남편의 권리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

      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엔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두드렸지만 나중에는  거의 부숴 버릴 듯이 문을  쾅쾅 두들겨 

      대고 있었다.  온 낭하가 쩡쩡 울리고  어디선가 잠을 깬 듯한 어린아

      이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아파트 복도 저 쪽  편의 문이 

      열리고, 파자마를 입은 사내가 이쪽을  기웃거리며 내다보았는데 그것

      은 그 사람  한사람뿐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남의  시선을 개

      의치 않고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방의 사람들도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사뭇 경계하는 듯한 숫

      돌 같은 얼굴을 하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보세요]

         마침내 그를 유심히 보고 있던 여인이  나무라는 목소리로 말을 꺼

      냈다.

         [그 집에 무슨 볼일이 있으세요]

         [아닙니다]

         그는 피로했으나  상냥하게 웃으면서  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것을 

      계속 하면서 말을 했다.

         [그 집엔 아무도 안계신 모양인데 혹 무슨 수금관계로 오셨나요?]

         [아닙니다]

         그는 그를 수금 사원으로 착각케 한  여행용 가방을 추켜들며 적당

      히 웃었다.

         [그런 일로 온 게 아닙니다]



         [여보시오]

         이번엔 파자마를 입은  사내가 손 매듭을 꺽으면서  슬리퍼를 치륵

      치륵 끌며 다가왔다.

         [벌써부터 두드린  모양인데 아무도 없는  것 같소.  그러니  그냥 

      가시오.  덕분에 우리 집 애가 깨었소]

         [미안합니다]

         그는 정중하게 사과를  하였다.  허지만 그는 더러워서  정말 더러

      워서, 침이라도 뱉을 심산이었다.



         [사실은 말입니다]

         그는 방귀를 뀌다 들킨 사람처럼 무안해  하면서 주머니를 뒤져 열

      쇠 꾸러미를  꺼냈다.  그리고  그는 익숙하게 짤랑이는 대여섯  개의 

      열쇠 중에서 아파트 열쇠를 손의 감촉만으로 잡아 들었다.

         [전 이 집 주인입니다]

         [뭐라구요?]

         여인이 의심스럽세 그를 노려보면서 높은 음을 발했다.

         [당신이 이 집 주인이라구요?]

         [그런데요]

         그는 대답하였다.  그러자 여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뭐 의심나는 것이라두 있읍니까?]



         [여보시오]

         아무래도 사내가 확인을 해야 마음놓겠다는  듯 다가왔다.  사내는 

      키가 굉장히 큰 거인이었으므로 그는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이 아파트에 거의 삼 년 동안  살아왔지만 당신 같은 사람

      은 본 적이 없소]

         [아니 뭐라구요?]

         그는 튀어 오를 듯한 분노 속에서 신음 소리를 발했다.

         [당신이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래 이 집 주인을 당

      신 스스로 도둑놈이나 강도로 취급한다는 말입니까.   나두 이 방에서 

      삼 년을 살아왔소.   그런데도 당신 얼굴은 오늘 처음  보오.  그렇다

      면 당신도 마땅히 의심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겠소]

         그는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쨌든]

         사내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당신을 의심하는 것은 안됐지만 우리 입장도 생각해 주시오]

         [그건 나두 마찬가지라니깐]



         그는 화가 나서  투덜거리면서 방문 열쇠 구멍에  열쇠를 들이밀었

      다.  방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정 못 믿겠으면 따라 들어오시오.  증거를 뵈 주겠소]

         그는 방안으  들어섰다.  방 안은 캄캄하였다.



         [여보!]



         그는 구두를  벗고, 스위치를 찾으려고 벽을  더듬거리면서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허지만 방 안은 어두웠고 아무도  대답하질 않

      았다.  제길헐.  그는 너무 피로해서  퉁퉁 부은 다리를 질질 끌며 간

      신히 벽면의 스위치를 찾아내었고, 그것을  힘껏 올려붙였다.  접촉이 

      나쁜 형광등이 서너번 채집병 속의  곤충처럼 껌벅거리다가는 켜졌다.  

      불은 너무 갑자기  들어온 기분이어서, 그는 잠시 동안 낯선  곳에 들

      어선 사람처럼 어리둥절하게 서 있었다.   그때 그는 아직도 문밖에서 

      사내가 의심스럽게 자기를 쳐다보는 있는 것을  보았고, 그는 조금 어

      처구니없어서 방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때 그는 화장대  거울 아래 

      무슨 종이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래서 그는 힘들여  경대 

      앞까지 가서 그 종이를 주워 들었다.



           여보, 오늘  아침 전보가  왔는데, 친정 아버님이  위독하시다는 

      거예요.  잠깐 다녀오겠어요.  당신은 피로하실  테니 제가 출장 가신 

      것을 잘  말씀드리겠어요.  편히 쉬세요.   밥상은 부엌에  차려 놨어

      요.

                                                 당신의 아내가



        그는 울분에 차서 한숨을 쉬면서, 발소리를 쿵쿵  내면서, 한없이 잠겨 

     들어가는 피로를 느끼면서, 코우트를 벗고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를 벗

     는 일관 작업을 매우 천천히 계속하였으며 그리고는 거의  경직이 되어 뻣

     뻣한 다리를, 접는  나이프처럼 굽혀 바지를 벗고 그것을 아주  화를 내면

     서 옷장 속에 걸었다.   그때 그는 거울 속에 주름살을 잔뜩 그린  늙수그

     레한 남자를 발견했고,  그는 공연히 거울 속의 자기를 향해  맹렬한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제길헐.  겨우 돌아왔어.  제길헐.  그런데두 아무도 없다니.



        그는 심한 고독을 느꼈다.  그는 벌거벗은 채,  스팀 기운이 새어 나갈 

     틈이 없었으므로 후덥지근한  거실을, 잠시 철책에 갇힌 짐승처럼  신음을 

     해 가면서 거닐었다.  가구들은 며칠 전하고  같았으며 조금도 바뀌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트랜지스터는 끄지  않고 나간 탓으로  윙윙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껐다.  아내의 옷이 침실에 너저분하게  깔려 있었

     고, 구멍 난 스토킹이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다리 안쪽을 조이는 고무

     줄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루우즈 뚜껑이 열린 채 딩굴고 있었다.



        그는 우선  배가 고팠으므로 부엌 쪽으로  갔는데, 상 위에는 밥  대신 

     빵 몇 조각이 굳어서 종이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그는 무슨 고무질을 씹

     는 기분으로 차고 축축한 음식물을 삼켰다.



        이건 좀 너무한 편일 걸.



        그는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그는 마땅히 더운 음식으로  대접을 받

     았어야 했다.   그뿐인가.  정리된 실내에서 파이프를 피워  물고, 음악을 

     들어야 했을 것이었다.   허지만 그는 운수 나쁘게도 오늘밤  혼자인 것이

     다.



        그는 신문을  보려고 사방을 훑어보았지만  신문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문 볼 생각을 포기하였다.  그는  시계를 보았는데, 시계는 

     일주일 전의 날짜로  죽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내가 사 온  시계인데 

     탁상시계치곤 고급 시계이긴 하나 거추장스러운 날짜와  요일이  명시되어 

     있는 시계로 가끔  망녕을 부려 터무니없이 빨리 가서 덜거덕하고  날짜를 

     알리는 숫자판이 지나가기도 하고 요일을 알리는  문자판이 하루씩 엇갈리

     기도 했는데, 더구나 시간이 서로 엇갈리면 뾰족한 수  없이 그저 몇 천번

     이라도 바늘을돌려야만  겨우 교정되는  시계였으므로, 그는 화를  내면서 

     시계의 바늘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환장할 것은 손톱을  갓 깍은 

     후였으므로 그는 이빨  없는 사람이 잇몸으로만 호두알을 깨려는 듯한  무

     력감을 손톱 끝에 날카롭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망할 놈의 시계를 숫제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나가면서  참으로 

     무의미한 시간의 회복을 반복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윷㏊옛 그 작업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더욱 지쳐버렸다.



        그는 천천히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욕실로 갔다.   욕실 안에 불을 켜

     자, 욕실은 아주 밝아서  마치 위생적인 정육점 같아 보였다.   욕조 안엔 

     아내가 목욕을  했는지 더러운 구정물이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아내의 

     머리칼이 욕조 가장자리에 붙어 있었고,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손을  뻗쳐 더러운 물 사이에 숨은 가재 등과 같은  고

     무마개를 빼었다.  그러자 작은 욕조는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고, 매우 빠

     른 속도로 물이 빠져 나가 좀 후에는 입맛 다시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더

     러운 때의 앙금을 군데군데 남기고는 비어 있었다.



        그는 우선 세면대에 고무  마개를 틀어 막은 후 더운 물과 찬 물을  동

     시에 틀었다.  더운  물은 너무 찼다.  그는 얼굴에 잔뜩 비누  거품을 문

     질렀고, 그래서  그는 마치 분장한  도화역자의 얼치기 바보같아  보였다.  

     그는 자동 면도기가 일주일 전 그가 출장 가기 전에  사용했던 것 처럼 그

     대로 날을 세우고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면도기의 칼날 부 極 아직

     도 비눗기가  남아 있었고 그  사이로 자른  수염의 잔해가 녹아  있었다.  

     그는 화를 내면서  아내의 게으름을 거리의 창녀에게보다도 더 심한  욕으

     로 힐책하면서 수염을  깎기 시작했다.  수염은 거세었고, 뿌리가  깊었으

     므로 이미  녹슬고 무디어진  칼날로 잘라내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얼굴 두어  군데를 베었고 그 중의 하나는 너무  크게 베어져 

     피가 베어 나왔으므로 얼핏 눈에 띄는 대로 휴지  조각을 상처에 밀착시켰

     다.  휴지는 침  바른 우표처럼 얼굴 위에 붙여졌다.   우표는 매끈거리는 

     녹말기로써 접착된다.  하지만 그의 얼굴 위에선 피로써 붙여졌다.



        그는 화를 내었다.   그는 우울하게 서서 엄청난 무력감이  발끝에서부

     터 자기를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으며 욕실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우송되

     는 소포처럼 우표가 붙여진 채 부옇게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는 

     거울에 무엇인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손을 뻗쳐 그것이 무엇

     인가 확인을 했다.



        그것은 껌이었다.   아내는 늘 껌을 씹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내의 버

     릇 중의 하나였다.   밥을 먹을 때나 목욕을  할 때면 밥상 위 혹은  거울 

     위에 껌을, 후에 송두리째 뜯어 내려는 치밀한  계산하에 진득한 타액으로 

     충분히 적신 후에 붙여 놓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낄낄거렸다.  그는 그 

     껌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껌은 응고하고 수축이 되어 마치 건포도  알 

     같았다.  향기가  빠져 야릇하고 비릿한 느낌이 들었지만 좀  후에 말랑말

     랑해졌다.  아내의 껌이  그를 유일하게 위안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한

     결 유쾌해졌고 때문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 .



          나뭇잎에 놀던 새여.  왜 그런지 알 수 없네.

          낸들 그대를 어찌 하리.  내가 싫으면 떠나가야지.



        그의 목소리는 목욕탕 속에서 웅장하였다.  온  방안이 쩡쩡거리고, 소

     리가 빠져  나갈 구멍이 없었으므로 종소리처럼  욕실을 맴돌았다.   그는 

     휘파람도 후이후이 불기 시작했다.



        역시 집이란 즐겁고 아늑한 곳이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무심코 중

     얼거렸지만 그는 순간  그 소리를 타인의 소리처럼 느꼈으며 그래서  놀란 

     나머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그러나 개

     의치 않기로 하였다.



        그는 욕실 거울 앞에  확대경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그는 

     그것의 용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내가 겨드랑이에서  털이나 코 

     밑의 솜털을  제거할 때, 족집게와 더불어  사용하는 것으로 그는  그것을 

     쥐어들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

     다.  뚜렷한  형상을 가지지 않은 사내가 이상하게 부풀어서  확대되어 있

     었다.  그는  그것을 움직여 욕실의 형광 불빛을 한곳으로  모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햇빛 밑에서 확대경을 움직거리면 날개 잘린  곤충을 태

     워 버릴 수도 있다.  그는 끈끈하고 축축한  욕실에서 한기를 선뜩선뜩 느

     껴 가면서 형광  불빛을 한곳으로 모으려고, 빛을 모아 뜨거운  열기를 집

     중시키려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긴 지난 여름날의  하지(夏至)를 

     느끼고 있었다.



        지난 여름은 행복하였다.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입

     으로 중얼거리고 싶은 충돌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내었다.



        그럼 행복했었지.  행복했었구말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소리에 놀라

     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그는 좀 무안해

     졌고 부끄러워졌으므로 과장해서 웃어제쳤다.



        그는 키 큰 맨드라미처럼 우울하게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샤우어쪽

     으로 다가갔다.   샤우어 쪽으로 갈 때마다  그는 키를 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샤우어의 모가지는 사형당한 사형수의 목처럼  꺽이어져 매우 진

     지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샤우어의 줄기  양 옆에 불쑥 튀어나온 

     더운물과 찬물을 공급하는 조종간을 잡았다.  그는  더운물 쪽을 조심스럽

     게 매우 조심스럽게  틀었다.  그러자 뜨거운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

     다.  욕실바닥의 타일을  때리고 금시 수증기가 되어 올랐다.   그는 신기

     하다, 이것은 어제의 더운물이 아니라고 그는 의식한다.   그는 갑자기 오

     랜 암흑 속에서 눈을 뜬 사내처럼 신기해 한다.  그는 이번엔  찬 물을 더

     운 물만큼 튼다.  그 차가운 물은 이제 예사의 찬 물이  아니라고 그는 의

     식한다.  물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너무 뜨겁기도  했고 차갑기도 해서 그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사나운 비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그는 더운 물이 피로한 얼굴을 핥고  춤의 신발을 신어버린 소

     녀처럼 매끈거리면서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촉을 즐기고 있다.

        

       그는 비누를 풀어  온몸을 매만진다.  거품이 일어 온몸이  애완용 강아

     지의흰 털처럼 무장하였을  때, 그는 성기가 막대기처럼 발기해서  힘차고 

     꼿꼿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욕망이 끓어오르고, 그는 뜨거운  물 

     속으로 다시 뛰어들면서,  신음을 발하면서, 세찬 물줄 璲 가슴을,  성기

     를 아프도록 때리는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뜨거운 빗물은  싱싱한 정육 

     냄새 나는 발그스레  상기한 근육을 적신다.  이윽고 온몸에  비눗기가 다 

     빠져도 그는 한 참이나 물속에 자신을 맡긴 채,  껌을 씹으면서 함부로 몸

     을 굴리고 있었다.   피로가 어느 정도 풀리자 그는 물을 잠그고 몸을  정

     성들여 닦는다.  그는 심한 갈증을 느낀다.



        그는 욕실을 나와  한결 서늘한 거실 찬장 속에서 분말  쥬스와 설탕을 

     끄집어 낸다.   그는 바닥에 가루를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   하면서 쥬스

     를 타고 설탕을  서너 숟갈, 그러다가 드디어는  거의 열 숟갈도 더  넣어 

     버린다.  그것에 그는  차가운 냉수를 섞는다.  그리고 손잡이가  긴 스푼

     으로 참을성 있게 젓는다.  그는 컵을 들고  한 손으로는 스푼을 저으면서 

     전축 쪽으로  간다.  그는  많은 전축판 속에서  아무 판이나 뽑아  든다.  

     그는 그 음악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전축에  전기를 접속시키자, 전축은 

     돌연히 윙 --- 거리면서 내부의 불을 밝혀든다.   레코오드판 받침대가 원

     을 그리면서 돌기  시작한다.  그는 투원반을 가볍게 날리는  육상 선수처

     럼 얇은 레코오드를 그  받침대 위에 떠 올린다.  바늘이 나쁜 전축은  쉭

     쉭 잡음을 내다가는 이윽고 노래를 토하기 시작한다.



        그는 음악을 들으면서 소파에 길게 눕는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몇 가지 있긴 하지만 그는 안정을 느낀다.   갓스탠드의 은밀한 불빛이 온 

     방안을 우울하게 충전시킨다.   그는 마치 천장 위에서 보면  사람처럼 보

     이지도 않는다.  그는 부동의 자세로 누워 있다.   때문에 그는 가구 같은 

     정물(靜物)로 보인다.   그러다가 그의 눈엔 화장대 위에 놓인  아내의 편

     지가 들어온다.  그러자 그는 아내의 메모 내용을  생각해 내고 쓰게 웃는

     다.  아내가 그에게  거짓말을 하였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는다.   그는 원

     래 내일 저녁에야  도착하였어야 할 것이다.   그는 출장 떠날 때도  내일 

     저녁에 도착할 것이라고 아내에게 일러 두었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오늘 

     전보를 받았다고 잠시  다녀 오겠노라고 장인이 위독해서 가 보겠다고  쓰

     고 있다.  그는  웃는다.  아주 유쾌해지고 그는 근질근질한  염기를 느낀

     다.  나는  안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아내는 내가 츌장 간 날  그날부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아내는 내일 저녁  내가 돌아올 것을 예

     측하고 잘해야 내일  모레 아침에 도착할 것이다.  다소  민망하고 부끄러

     워하면서 아내는 내게 나지막하게 사과를 할 것이다.



        나는 아내가 다른 여인와 다른 성기를 가진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

     의 성기엔 작구가 달려 있다.  견고하고 질이 좋은  작구이다.  아내는 내

     가 보는  데서 발가벗고 그 작구를  오르내리는 작업을 해 보이기  좋아한

     다.  아내의  하체에 작구가 달린 모습은  질 좋은 방한용 피륙을  느끼게 

     하고 굉장한 포옹력을 암시한다.



        그는 웃으면서 스푼을 젓는다.  그때였다.  그는  무슨 소리를 들었다.  

     공기를 휘젓고 가볍게  이동하는 발자국 소리였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욕실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난폭

     하게 일어나서 욕실 쪽으로 걸었다.그는 분명히 잠근  샤우어에서 물이 쏟

     아져 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제길헐.  그는 투덜거리면서  물을 잠근

     다.  그리고 다시  소파로 되돌아온다.  그러자 이번에 부엌  쪽에서 소리

     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盧遲 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부엌 쪽으로 간다.   부엌 석유곤로가 불붙고 있다.   그는 투덜거

     리면서 그것을 끈다.   그리고 천천히 소파 쪽으로 왔을 때,  그는 재떨이

     에 생담배가 불이 붙여진 채 타고 있음을 발견하다.   그는 반사적으로 주

     위를 둘러본다.  그는 엄청난 고독감을 느낀다.



        [누구요]



        그는 조심스럽게 소리를  지른다.  그의 목소리는 진폭이 짧게  차단된

     다.  그는 갇혀 있음을 의식한다.  벽 사이의 눈을 의식한다.   그는 사납

     게 소파에 누워, 시선에 닿는 가구들을 노려보기 시작한다.   모든 가구들

     이 비온 후 한결  밝아 오는 나뭇잎처럼 밝은 색조를 띠고  빛나기 시작한

     다.  그는 스푼을  집요하게 젓는다.  설탕물은 이미 당분을  포함하고 뜨

     겁게 달아 있으나 설탕은  포화 상태를 넘어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그

     래도 그는 계속 스푼을 젖는다.  



       갑자기 그는 그의 손에 쥐여진 손잡이가 긴 스푼이  여늬 스푼이 아님을 

     느낀다.  그러자 스푼이  그의 의식의 녹을 벗기고, 눈에 보이는  상태 밖

     에서 수면을 향해  비상하는, 비늘 번뜩이는 물고기처럼 튀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힘을 다해 스푼을 쥔다.   그러자 스푼은 산 생선을  만질 

     때 느껴지는 뿌듯한 생명감과 안간힘의 요동으로 충만된다.   그리고 손아

     귀에 쥐여진 스푼은 손가락 사이를 민첩하게 빠져 나간다.   그는 잠시 놀

     란 나머지 입을 벌린  채 스푼이 허공을 나르면서 중력없이 둥둥  떠서 흐

     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온 방안의 물건을 자세히  보리라고 다짐하고는 

     눈을 부릅뜬다.  그러자 그의 의식이 닿는  물건들마다 일제히 흔들거리면

     서 흥을  돋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거실에 

     스위치를 넣으려고 걷는다.  그는 스위치를 넣는다.   형광등의 꼬마 전구

     가 번쩍번쩍거리며 몇  번씩 빛을 반추한다.  그러다가 불쑥  방안이 밝아 

     온다.



        그는 스푼이 담수어처럼 얌전하게 손아귀 속에 쥐여  있는 것을 발견한

     다.  그는 조심스럽게 온 방안의 물건들을, 조금  전까지 흔들리고 튀어오

     르고 덜컹이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기 시작한다.



        물건들은 놀라웁게도 뻔뻔스러운 낯짝으로 제자리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비애를 느낀다.   무사무사(無事無事)의 안이 속에서 그러나  비웃으

     며 물건들은 정좌해 있다.  그는 투덜거리면서 스위치를  내린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단 설탕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방안 어두운  구속구석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둠과 어둠이 결탁하고  역적 모의를 논의

     한다.  친구여,  우리 같이 얘기합시다.   방 모퉁이 직각의 앵글  속에서 

     한 놈이 용감하게  말을 걸어 온다.   벽면을 기는 다족류 벌레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옷장의 거울과 화장대의   탓岾 투명한 교미를  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벽이 출렁거린다.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방 벽면  전기다리미 꽂는 소켓의 두  구멍 

     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친구여.   귀 좀 대 봐요.  내 비밀을  들려줄

     께.  그는 그의 오른쪽 귀를 소켓에 밀착한다.   그의 귀가 전기 금속부분

     품처럼 소켓의 좁은  구멍에 접촉된다.  그러자 그의 온몸이  고급 전기곤

     로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그의 몸에 스파아크가 일고, 그는  온몸에 

     충만한 빛을 느낀다.



        잘 들어요.   소켓이 속삭인다.  마치 트랜지스터 이어폰을  꽂은 목소

     리처럼 그의  목소리는 귓가에만 사근거린다.   오늘 밤 중대한  쿠테타가 

     있을 거예요.  겁나지 않으세요.



        그는 소켓에서 귀를 뗀다.  그리고 맹렬한 기세로  다시 스위치에 불을 

     넣는다.  불이  들어오면 이 모든 술렁임이 도료처럼 벽면에  밀착하고 모

     든 것은 치사하게도 시치미를  떼고 있다.  그는 불을 켠 채 화장대로  다

     가간다.  그는  투덜거리면서 키가 크고 낮은 모든 화장품을  열어 감시한

     다.  그리고 찬장을 열어 그 안에 가지런히 빈  그릇들, 성냥통, 촛대, 옷

     장을 열어  말리우는 바다 생선처럼 걸린  옷들, 그리고 그들의  주머니도 

     검사한다.  옷들은 좀 괘씸했지만 얌전하게 주머니를 털어  보인다.  그는 

     하나하나 보리라고 다짐한다.  서랍을 뒤져 남은 물건도  조사한다.  그러

     다가 이미 건조하여  건드리기만해도 부서질 듯한 낙엽 몇 송이를  발견했

     다.



        그것은 그에게  지난 가을을 생각키우게  했고 그는 잠시  우울해졌다.  

     그는 사진틀 속의 퇴색한 사진도 유심히 들여  보았다.   책장에 꽃힌 뚜

     껑 씌운 책들도  관찰하였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석유곤로의  심지도 관

     찰하고, 낡은  구두 속도 들여다 보았다.   다락문을 열어 갖가지  물건도 

     하나하나 세밀히 보았고 욕실에서 그는 욕조 밑바닥까지  관찰하였다.  덮

     개가 있는 것은 그 내용물을 검사하였으며 침대도  들어서 털어도 보았다.  

     심지어 변기도 들여다보았고,  창 틈 사이도 들여다보았다.  물건들은  잘 

     차고 세금 잘 무는 국민처럼 얌전하게 그의 요구에  응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들여다보는  같퓽  본래 예사의 물건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어

     제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는 한층 더  깊은 피로를 느끼면서 거실로 돌아와 술병의  술을 잔에 

     가득히 부어 단숨에 들이마셨다.  그러자 그는  아주 씁쓸하고 허무맹랑한 

     고독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잔을  그득히 부어 연거푸 단숨에 

     들이마셨다.  술맛은 짜고 싱겁고, 달고도 썼다.



        그는 어디쯤엔가 피다 남은 꽁초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랍을 뒤

     지다가 말라 빠진 담배 꽁초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에  불을 붙 눼.  술

     기운이 그를 달아오르게 하고 그를 격려했기 때문에 그는  아동처럼 큰 소

     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뭇잎에 놀던 새여.  왜 그런지 알 수 없네.

          낸들 그대를 어찌 아리.  내가 싫으면 떠나가야지.

        

        그는 벌거벗은 채 온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이 일상

     사(日常事)인 것처럼 걷고,  그리고 뛰었다.  그는 부엌을 답사하였고  그

     럴 때엔 욕실 쪽이 의심스러웠다.  욕실 쪽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거실쪽

     이 의심스러웠다.   그는 활차( 즙)처럼 뛰고  또 뛰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아무런 낌새도  발견해 낼 수 없었다.  무생물에  놀란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자  그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

     다.   그래서 거만스럽게 걸어가서 스위치를  내렸다.  그는 소파에  앉아 

     남은 설탕물을 찔금찔금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가 스위치를 내리자,  벽

     에 도료처럼 붙었던  어둠이 차곡차곡 잠겨서 덤벼들고 그들은 이윽고  조

     심스럽게 수근거리더니 마침내 배짱 좋게 깔깔거리고 있었다.   말리운 휴

     지 조 ♣ 베포처럼  늘리워 허공을 난다.  닫힌 서랍  속에서 내의(內衣)

     가 펄펄 뛰고 있다.  책상을 받친 네 개의 다리가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래도 처음엔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허지만 그들의 대상이 

     무방비인 것을 알자,  일제히 한꺼번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날뛰기 

     시작했다.  크레용들이 허공을 난다.  옷장 속의  옷들이 펄럭이면서 춤을 

     춘다.  혁대가 물뱀처럼 꿈틀거린다.  용감한 녀석들은  감히 다가와 그의 

     얼굴을 슬쩍슬쩍 건드려 보기도 하였다.  조심해 조심해.   성냥곽 속에서 

     성냥개비가 중얼거린다.  꽃병에 꽃힌 마른 꽃송이가  다리를 번쩍번쩍 들

     어올리면서 춤을 춘다.  내의가 들여다보인다.  벽이  서서히 다가와서 눈

     을 두어 번 꿈쩍거리다가는 천천히 물러서곤 하였다.   트랜지스터가 안테

     나를 세우고  도립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재떨이가 박수를 치기  시작한

     다.  소켓 부분에선 노래가 흘러나온다.  낙수물이  신기해서 신을 받쳐들

     던 어릴 때의 기억처럼 그는 자그마한 우산을 펴고  화환처럼 황홀한 그의 

     우주 속으로 뛰어든 셈이었다.  그는 공범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때였다.  그는 서서히 다리 부분이 경직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

     은 우연히 느낀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이 방에서  도망가리라 생각했었

     기 때문에, 될  수 있는한 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살금  움직이라고 마음먹

     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손을 내려 다리를  만져 보았는

     데 다리는 이미  굳어 석고처럼 딱딱하고 감촉이 없었으므로 별수없이  손

     에 힘을 주어  기어서라도 스위치 있는 쪽으로 가 ?箚 결심했다.   그는 

     손을 뻗쳐 무거워진  다리, 그리고 더욱더 굳어져 오는 다리를  끌고 스위

     치 있는 곳  까지 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채 못 미쳐  이미 

     온몸이 굳어  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숫제 체념해  버렸다.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조용히 다리를 모으고  직립하였다.  

     그는 마치 부활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다음날 오후쯤 한  여인이 이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방안에 누

     군가가 침입한 흔적을 발견했다.  매우 놀라서  경찰을 부를까고도 생각했

     었지만,놀란 가슴을 누르며  온 방안을 조심스럽게 살펴 보았는데  틀림없

     이 그녀가 없는 새에 누군가가 들어온 것은 사실이긴  햇지만 자세히 구석

     구석 살펴본 후에 잊어버린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자 안심해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잊어버린 것이 없는 대신 새로운 물건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물건은 그녀가 매우 좋아했던 것이었으므로 며칠  동안은 먼지도 털

     고 좀 뭐하긴 하지만  키스도 하긴 했었다.  허지만 나중엔 별 소용이  닿

     지 않는 물건임을  알아차리고 싫증이 났으므로 그 물건을 다락  잡동사니 

     속에 쳐넣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방을 떠나기로 작정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메모지를 찢어 달필로 다음과 같이 써서  화장대 위에 놓았

     다.

        



          여보.  오늘 아침 전보가 왔는데 친정  아버님이 위독하다는 거예요.

     잠깐 다녀오겠어요.   당신은 피로하실 테니  제가 출장 갔다고  할테니까 

     오시지 않으셔두 돼요.밥은 부엌에 차려 놨어요.

                                                 당신의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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