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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장영훈] 영남의 풍수

by Casey,Riley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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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의 풍수-장영훈
 


  낙동정맥-금정산, 몰운대, 그리고 백두대간-지리산에 걸쳐 펼쳐지는 지형, 산맥, 인걸, 
문벌...  영남풍수의 일대 파노라마!
  영남의 풍수는 형상론, 형기론, 형파등으로 표현되는 풍수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산세, 
혈장(=흔히 명당이라고 함), 우백호, 좌청룡, 물의 흐름 등의 형상을 육안으로 파악하는 
특성을 지닌다. 이것은 중국의 풍수에서 보이는 두 가지 유파(강서파와 종묘법 혹은 
복건파) 중 지형과 지세를 강조하는 강서파와 논리에 접근되어 있다.
  이책은 이러한 영남풍수의 특징을 글쓴이 특유의 직설적인 문체로 잘 풀어나가고 있다.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줄기를 찾아서 금정산 몰운대 중심의 부산풍수를 읽고, 
백두대간 지리산, 동래 양산 울산을 비롯한 영남지방의 풍수까지 답사와 자료수집을 
통하여 지형, 산맥, 인걸, 문벌에 이르기까지 이 지방 풍수와 관련하여 다양한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낙동정맥을 찾아서-
    영남의 풍수

    머리말
  풍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또한 풍수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풍수의 관심있는 사람의 경우 풍수서 몇 권 읽고 나면 자연히 눈길을 산에 맞추어 
본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발생한다. 산은 산대로, 책은 책대로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어버린다. 마치 '산은 산이요. 책은 책이다'라는풍수 법문을 듣는 듯하다.
  자동차 운전 면허를 취득했다 해서 바로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초보운전자의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움직이는 황당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럴 때 노련한 
연수탑승자가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운전실무를 받고 난 연후에 그나마 혼자서 거리에 
차를 몰고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풍수실무의 경우는 연수탑승자의 역할을 해줄 사람이 없다. 단순히 전설따라 
삼천리식 흥미위주의 책들과 현장풍수를 들먹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서일 뿐이다. 
바둑 이론을 잘 안다고 바둑을 잘 두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하루에 몇 판씩 몇 
십년 계속 둔다고 바둑 실력이 좋아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돌파할 수 있을까.
  우선 이런 난관을 풀어볼 수 있는 풍수서 한 권쯤은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의도에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것이다.
  영남지역에 살았던 독자의 경우는 더없이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고 영남의 
지형을 전혀 모르는 독자라고 책에 실린 그림과 맞춰가면서 읽어가다보면 자연스럽게 
풍수에 눈이 트이고 현장이 보일 것이다.
  제목이 (영남의 풍수)라 해서 영남에만 국한된 풍수서는 절대 아니다.
  풍수의 현장에 적응하려는 독자를 돕기 위하여 부산과 영남이라는 지역을 추출해서 
풍수현장을 담았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현지지침서 격인 이 책이 어떻게 해서 지금의 독자를 만나게 되었을까. 그것은 
<부산일보>으 연재물이었기에 가능했다. 1993년 4월 2일부터 첫회가 연재된 이후에 매주 
1회씩 나갔고 1994년 8월 9일에 총 64회로 일단락지었다.
  <부산일보> 박정인 편집국장(당시 부국장)과의 조사 기획 기간까지 참작하면 일년반 
동안 필자는 모든 일상생활을 전폐하고 현장에서 생활했다.
  매달 나오는 원고료만으로 작업과 생활을 충당하면서 산장에서도 자고 토굴이나 움막, 
텐트에서 촛불과 씨름하는 동안 금정풍수학회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으며 현장에서 직접 
느끼면서 원고를 메워나갔다. 풍수는 현장에서 보아야만 보인다는 철칙이 있기에 한 
행동이었다.
  또한 신문 연재물이어서 관공서에 협조를 요청하면 필요한 자료들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는 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신문 연재물을 한 권의 책으로 엮느라 중복된 부분이 많을 것이다. 가능한 한 중복을 
피해보려고 했지만 아직도 부족함이 눈에 뛴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1995.10
  장영훈

      영남의 풍수
    머리말
  부산광역시 지도

    제1부 부산의 풍수
  형과 세
  금정산, 부산엔 '유정' 양산엔 '무정'
  산줄기
  바다로 향하는 대단한 인걸지령
  동래의 형국
  백두산 정기 서린 영구하산형
  동래의 입지
  동헌중심 좌 충렬사 우 사직
  동래의 지명
  해 뜨는 아침의 나라 신선 사는 곳
  영도의 형국
  봉래산 신선기상 서린 신선승학형
  봉래산과 식민풍수
  민족발복 꺾으려 고갈산으로 개명
  영도
  조도, 조봉의 학소포란, 대대손손 발복
  사하의 형국
  용세의 낙동정맥 끝 학소포란
  사하(1)
  금정산에서 뻗은 기 몰운대에서 마무리
  사하(2)
  선인무수 명당도 매국노에게는 화
  해운대(1)
  장산 세 두갈래로 뻗은 옥녀격고형
  해운대(2)
  옥녀 선인 조화 이룬 와우적초안
  반여, 반송
  가뭄 들지 않는 비옥한 장군대좌형
  금정
  구름 타고 온 금빛물고기 놀던 천혈
  고당 
  산왕대신, 고모영신 위패 모신 곳
  원효, 의상봉
  우부봉귀 품새 간직한 수려한 산
  범어사
  금정의 계시로 의상이 창건한 선찰
  범어사 기세
  천, 지, 인 산세 휘감은 태명당
  범어사와 지기
  금정 정기 받은 '천거북 만자라'
  범어사와 의상
  터잡이 지리학 원조 명산에 대찰 창건
  금강암
  금정산 정중, 인물 풍부한 장풍 명당
  마애여래
  낙동의 득수 금정 장풍에 담아 지기 왕성
  산성마을 
  금정 지기 껴안은 옥녀금반형
  공해마을 
  떠날 듯하면서 안 떠나는 행주형 발복
  금정구
  낙동정맥 첫 관문 계명봉 지령기세
  금정구 형국
  부발복 상징하는 와우적초안
  금정구 지명
  팔송 중심 좌대룡 우청룡 발복
  부산대학교
  박물관은 지세 발복 열쇠
  부산대 가상
  남동쪽 신정문 본관은 복위택
  정묘
  하지산 지령 받은 야자형 명당
  정묘의 세
  화지산 기세로 부보다 인걸 발복
  유엔 묘지
  천리가 열어준 천장비지 대명당
  금련과 유엔 묘지
  옥녀가 헌화한 연꽃에 이국수호신 영안
  마하사
  부산 최초 명당발복한 진호사찰
  민속의 집
  영의 세만 보고 연의 형을 놓져버린 허화
  동구
  산 많고 한적한 갯마을 배 닿은 첫 자리
  동구의 형국
  왼쪽 수정산 오른쪽 구봉산 단봉함서형
  동구의 인물
  봉귀 함서 기세로 좌부우귀 발복
  구포와 만덕사지
  신구의 '많은 덕' 구포에서 발복
  만덕사의 신구
  구지봉 오행상생 위력 일제가 단맥
  낙동강과 북구
  백두대간의 정맥 어울린 생존의 혈맥
  구포
  상계봉 기세 삼거리 장터로 발복한 북구의 혈
  구포의 지명
  불웅령 정상에 대무출성형세 위엄
  사상의 지명
  사천의 윗마을이라는 지명
  중구와 지리산
  실상사 혈 삼아 민족정기 발원 
  고원견산
  엄광산 창씨개명 백두정기 끊겨
  중구의 형국
  자리잡은 용이 여의주와 노는 모양
  중구의 지명
  기세좋은 명당 터 밟을수록 발복 더해
  부산의 원형
  양기 풍수 배제한 식민도시형
  서구의 형국
  아미산 중신 좌 시약 우 장군
  서구 형국발복
  아미산 군왕지지 옥녀단장형
  서구의 지명
  복병, 사병 부민 발복처로 완벽한 대장군 형국
  강서구
  칠점수룡 발복 가락문화 융성
  강서구 형국
  노적봉 밀면 성산마을 화 자초
  강서구의 지명
  수룡 덕분에 오봉산 봉황 먹거리 풍성
  강서의 우백호
  굴암산 고사독서형 발복
  부산진구
  지금 부산은 진에서 분가한 것
  부산진의 형국
  백양산 맥세 백호출림형
  진구와 부산
  진성 축성으로 지역진호
  남구의 형세
  금련산 진산 앞의 연화부수형
  남구와 부산
  신선대는 선인이 등공하는 형세

    제2부 영남의 산하
  영남의 산하
  김해시는 낙동강 수구 발복
  양산의 형국
  옥녀가 거문고 타는 형
  기장의 형국
  옥녀가 비단 짜는 형국
  통도사와 양산
  물통구조 닮은 꼴
  통도사의 형국
  여의주봉 향한 쌍룡이 절 감싼 모양
  울산의 형국
  Y자형 합수머리에 터 잡은 명당
  문수산과 문수사
  젊은 여자가 꽃 바치는 모양
  울산 왕생
  문수산 뿌리로 부 발복
  울산과 처용설화
  천신이 학 타고 백두산 내려와 창읍
  처용설화
  신라 왕권 수호룡에서 유래
  풍운의 지리산
  천하명당 청학동은 낙동 향리의 탯줄
  청학동과 지리산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
  지리산 청학동(1)
  성철스님 출가 인연 담긴 영산
  지리산 청학동(2)
  청학동은 신선의 거처
  네 군데의 청학동
  마음 속에 간직된 낙토, 청학동
  지리산의 세
  한국인의 기상 영원한 영산
  지리산의 기상
  금강산 머리, 월출산 꼬리로 떠 있는 배
  지리산과 남명
  대쪽 같은 엄부 기품 산세에서 유래
  지리산의 기개
  태산교악 웅장함이 국란극복
  지리산의 대명당
  남명문하 발복시킨 완사명월형
  지리산의 여기
  우리 민족 살리는 삼신할매 탯줄
  지리산의 여색
  옥녀개화형으로 변강쇠설화 발복
  지리산 비목
  민족 생명의 맥 쥔 지모의 통곡
  지리산 풍류
  신선 노니는 듯한 달 아래 불일폭포
  지리산의 인걸(1)
  백두대간 지령따라 반만년 인재발복
  지리산의 인걸(2)
  봉황이 기개따라 유불선 거목 발복
  지리산의 인걸(3)
  지령 넘쳐 목민관 풍류에 백성 태평
  산청풍수(1)
  산청과 하동, 음양조화 발복
  산청풍수(2)
  덕유산의 세, 지리산의 형 조화
  낙동 향리
  소백, 지리산의 정기 농축된 물줄기

    제1부 부산의 풍수

  금정산, 부산엔 '유정' 양산엔 '무정'--형과 세

  통도사, 취서산과 거리 둬 '장풍'자리
  '만물의 기의 형성이며 활기로 활동한다'고 동양사상에서는 설명한다. 하늘에 있는 
기는 천기며 땅의 기는 지기가 된다. 지기 중 특히 땅 속으로 흐르는 기를 생기라 
부른다. 풍수는 생기를 얻자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기에 기사상인 것이다.
  '기세좋게 잘 생겼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힘 좋고 모양도 좋다는 표현으로 풍수에서는 
형과 세로 생기의 품질을 판단한다. 즉 산의 세가 용틀음치고 있다면 기세가 좋다 하고 
그러한 생기의 세를 받아들이는 그릇을 형이라고 한다.
부산에 백두정기를 이어주고 있는 낙동정맥의 형세를 부산근교 산줄기에서 보면 통도사를 
품고 있는 취서산, 내원사가 자리한 천성산 그리고 범어사를 감싸고 있는 금정산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취서산은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는 산세를 이루고 있어 풍수의 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생기를 얻는 것이 풍수의 목적이라 착각하여 세가 좋은 취서산의 낙동정맥 바로 위 
명당에 눈이 어두운 자가 욕심을 부렸다간 날벼락을 맞는다. 이는 사람이 물을 마시려고 
직경 2미터짜리 송수관을 뚫었다가 물벼락을 맞는 꼴이다.
  이러한 풍수원리에 의하여 통도사 역시 취서산의 세에서 적당한 거리, 2천 5백미터 
떨어진 나지막한 산들의 형인 '장풍'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또 일주문 앞을 흐르는 
물줄기로 득수를 겸하고 있으니 이는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의 
줄임말인 풍수의 원리이다.

  극락암, 법당 앞에 연못 만들어 '득수'
  통도사 뒤편에 있는 극락암을 평지의 한들못에서 바라다보면 이곳이 형과 세를 겸한 
풍수의 명당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가 있다. 극락암의 경우에는 인공적인 연못을 법당 
앞에 조성함으로써 득수를 삼고 있는데 풍수에서는 이를 비보라 한다.
  취서산의 세는 천성산으로 이어져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효산과 천성산을 찾을 때 
많이 혼동한다. 그 주위에서 원효산이 가장 높고 천성산은 원효산보다 1백여미터나 낮은 
능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산경표의 기록에서 보듯이, 왜 천성산을 중요시하고 원효산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까. 이러한 의문을 풀어줄 열쇠 역시 풍수에 있다. 통도사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양산읍 쪽으로 가다가 하북면 삼수리에 이르면 휴양단지의 큰 간판 앞에서 
정확히 7백미터 정도 지나 원효산을 보라. 북쪽 능선을 따라 사선을 이어가노라면 
가로막은 앞산 다음 능선에 툭하니 튀어나온 바위 서너개가 있는 봉우리를 볼 수가 있다. 
그곳이 천성산이다. 그 자리에서 천성산과 취서산을 번갈아 보면 의문이 풀린다.
  풍수에서는 산을 용이라 한다. 특히 생기를 품은 용을 생룡이라 한다. 생룡은 
움직인다는 의미와 통한다. 이점에서 취서산의 움직이는 세와 천성산의 꿈틀거리는 
능선의 생동이 통한다. 취서산으로 이어진 낙동정맥을 천성산이 직계로 이어받고 있다. 
그래서 산경표에 천성산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낙동정맥의 맥세를 이어받고 
있는 것이 금정산이다.

  부산 쪽에서 바라본 금정산은 '유정'
  금정산은 생동하는 세에 형까지 빼어난 잘 생긴 산이다. 양산 쪽에서 바라보면 
만물상과 같은 봉우리를 보여주고, 온천장 부근에서 보면 부산을 포근히 감싸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즉 낙동정맥의 세에 힘입은 금정산의 형은 만물(부산)을 생성시킨다.
  그렇다면 바로 옆에 있는 양산읍도 금정산의 기를 받고 발복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금정산은 오직 부산만 발복시켰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금정산의 명당자리에 부산 
광역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양산 쪽에서 금정산을 바라보면 마치 병풍을 친 듯 등을 
돌리고 있다. 이를 풍수에서는 '무정'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산 쪽에서 바라보면 
금정산은 포근하게 보인다. 이를 '유정'하다고 한다.
  유정한 쪽은 생기를 받아 발복하나 무정한 쪽은 발복할 수 없다는 풍수의 원리에서 
금정산은 부산의 진산이 될 수 있으나 양산의 진산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낙동정맥에서 살펴본 풍수적 판단의 원리를 토대로 4백만 부산 시민들의 
삶터인 현재 부산 안의 형세도 살펴볼 수가 있다.
  (그림설명: 백두산의 정기가 태백으로 이어지는데 태백에서 시작되는 낙동정맥의 기는 
양산 통도사 뒤 취서산이 받는다.
  ---------------------------
  낙동정맥: 강원도 태백산에서부터 부산의 금정산 그리고 다대동의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태백산맥을 말한다. 이러한 낙동강의 물줄기에 의하여 구분되기에 낙동강의 '낙동'과 
산맥의 '맥' 그리고 백두산에 근원을 두었다는 '정'자를 합하여 '낙동정맥'이라 부르는 
것이다.
  비보: 풍수적으로 명당을 이루는 데 있어 자연적인 형상에 결함이 있을 때 그 부족한 
점을 인공적으로 보충한 것을 말한다.
  진산: 음택풍수(죽은 자의 묘 자리)에서는 그 중심되는 산을 주산이라 하지만, 
양기풍수(산 자의 터자리)에서는 마을과 도시를 진호한다 하여 진산으로 부른다.

  바다로 향하는 웅장한 거북 모습--산줄기

  금정에서 몰운대로 이어진 현자는 생룡
  "바람이 이곳을 이르러 산줄기의 흐름과 마름이 낙동의 수에 어울리는 현묘함에 
다다르자 지의 리에서 현자를 붙잡아 초서의 달인 양 붓끝에 적실 적 아직 살아남은 
한줌의 기가 오묘함에 먹물로 튀었으니 이를 일러 봉래산이라 할거나 낙동정맥의 끝은 
엄광의 획이 흐른 몰운대이거늘 첫획부터 금정의 기는 붓자락을 해탈한 산라작인 양 
하산함에 동래를 이루는지라 이를 아뢰던 다음 획마저 화지산 칠백년 명당을 음색으로 
단청하고 솟을 듯 용틀임에 머릴 조아리는 황령으로 부복함이니 정녕 천풍의 산줄기가 
이러하거늘 지수의 감응마저 물줄기로 풍수에 손짓함은 이를 일러 천지의 조화라 함이며 
옛 자연 그대로 어딜 감히 명당이라 이르겠는가!"
  풍수화의 검은 획은 현자의 초서체가 된다. 이는 금정산-->엄광산-->몰운대로 이어지는 
부산의 낙동정맥 산줄기를 표현한 것이다. 필자의 풍수 시와 그림의 산자락들을 이어보면 
부산의 형국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풍수에서 산은 살아 움직이며 기를 호흡처럼 내뿜는 
용으로 상징하고 그 중 현자와 지자는 기의 생동으로 꿈틀거리는 생룡으로 보고 있다. 
이는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의 4대문을 축성할 때 동대문 부근의 산줄기(우백호)가 
허약하다 하여 지자 하나를 끼워넣어 흥인문을 흥인지문으로 하였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화지산, 구월산, 황령산 일지맥 이뤄
  산경표에 기록된 엄광산이란 오늘날 부산의 구덕산, 고원견산, 구봉산의 얼안을 
가리키는 것이다. 내친 김에 덧붙이자면 부산에는 풍수상 중요한 여섯 산이 있다.
  낙동정맥 선상에 위치하여 세가 좋은 금정산, 엄광산(구덕산), 몰운대와 낙동정맥에서 
일지맥을 이루며 형을 이룬 화지산, 구월산, 황령산을 합한 여섯 산이 바로 그것이며 
이러한 풍수상 산줄기의 중요성은 부산의 뿌리를 알아보는 데 귀중한 출발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낙동정맥의 세를 금정산의 한 자락에서 잡아 구월산으로 형을 이루고 국을 
황령산까지 펼쳐서 외명당으로 삼고, 내명당을 온천천까지 그리고 명당의 중심점에 
동래동헌을 두어 그 주위를 감싸듯 동래읍성을 축성하였던 것이 바로 오늘날 부산의 
뿌리다.
  이는 풍수의 형국으로 영구하산형이다. 이와 같은 양기 풍수의 법칙들은 죽은 사람의 
묫자리를 보는 음택풍수에 있어서도 그 원리는 같다.
  낙동정맥의 세를 금정봉에서 잡아 화지산의 형을 받으며 야자 형국의 중심에 위치한 
묘가 바로 동래 정씨의 정묘다. 풍수 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묫자리나 잡는 걸로 알고 
있으나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지금부터 약 3천년 전 주나라 시절, 오늘날에 비유하면 도시계획 예정지구 선정이나 
국토이용관리법상 지정하는 도시지역, 취락지역 등 주거의 터를 선정하는 양기풍수와 
건축법 역할로 비유될 수 있는 양택풍수가 있었다. 그후 1천5백년이 지나 동진 때 세상이 
혼란하여 16개국으로 분열된 난세가 있었다. 이때 흔히 볼 수 있는 말세 사조가 유행, 
풍수도 산 사람 중심인 양택풍수에서 정감록의 도피사상처럼 땅 속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고려라는 뜻은 산이 높고 강이 수려한, 즉 금수강산이란 뜻이며 이는 풍수와도 통한다. 
풍수지리는 헌법이라 할 수 있는 훈요십조의 기본정신이었으며 당대 고려의 석학 집단인 
승려들이 선종을 중심으로 풍수를 담당했다. 이러한 전통지리학이 조선개국과 더불어 
밀어닥친 숭유배불정책으로 풍수의 정통이 끊어지고 갑자기 밀어닥친 신종사업(?)으로 
묫자리 보기가 성행한 것이다(고려시대는 국교가 불교였기에 국가의 기념비석인 왕릉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화장을 하였다). 호랑이 끊긴 곳에서는 여우가 왕 노릇 한다는 
속담처럼 이때부터 우후죽순 얼풍수 설풍수 나타났고 그 중 입심 센 사람은 명풍수가 
되기도 했다. 이것이 5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진 얼룩진 풍수의 역사이다. 여기에 
식민풍수까지 끼여들었고 부산에도 아직 그 잔재가 남아 있어 이를 하나씩 밝히려 한다.

  풍수의 진정한 의미는 천인합일 사상
  그러면 풍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동양사상에 있어서 근원적 주체는 천, 지, 인 
세 가지이며 천은 천시를, 지는 지리를 인은 인화를 뜻한다. 인간의 운명은 하늘이 내린 
것(천명)이니 천시를 알 수 있고, 인간이 이에 순행하여 조화를 이룰 줄 알아야 하니 
그것이 인화요, 땅은 천시(계절의 변화)에 따라 씨 뿌리고 거두어 수확하니 이것이 바로 
지리가 된다. 이러한 의미들은 우리의 의식속에 잘 어우러져 있다. '철들었다'는 표현은 
바로 철(계절을 안다: 시)에 따라 농삿일 할 나이(천명)가 되었다는 뜻인 것이다. 인화 
역시 '순행하면 흥하고 역행하면 망한다'는 역의 원리와도 통하며 순행과 역행은 천시와 
인화의 조화, 즉 천인합일 사상이기도 하다.
  동양사상의 핵심에서 보자면 땅(지리)은 인간(인화)을 기르는 어미(생모)인 것이며 
풍수에선 이를 지모사상이라 이른다. 풍수의 명당은 어미가 자식을 품고 있듯 하여야 
하고 체온으로 풍과 수의 숨결을 주는 곳에 자리한다.
  섭씨 36.5도가 온도일 경우는 덮다 춥다의 개념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체온일 경우 몇 
도 차이로도 생명에 지장을 주는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많은 사람이 명당을 잘못 알고 있다. 명당은 절대 무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시신이 묻히는 자리는 혈자리일 뿐이다. 명당은 그러한 혈자리 앞을 말한다. 그러나 
명당의 중심축은 어디까지나 혈자리이다.
  오늘날 부산은 금정산을 중심점으로 하여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는 풍수적 논거를 
적용할 수 있다. 이 점이 부산을 풀 수 있는 풍수의 열쇠가 된다. 그렇다면 부산의 
중심점인 금정산은 어떠한 지모의 체온을 갖고 있을까.

  산경표: 18세기 여암 신경준 선생이 모든 산들은 하나의 근본되는 산으로부터 갈라져 
나갔고 그것은 물에 의해서 그러하다는 풍수적 원리에 의하여 우리의 산줄기를 백두산을 
중심축으로 하여 밝힌 산수고를 후학이 재정리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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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지맥: 나무줄기(낙동정맥)에서 가지 하나가 나오듯 용이 빠져나왔다는 표현.
  형국: 형은 모양을 말하고 국은 그 모양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바둑에 있어서 어떤 
정석을 선택하면 그것은 형이 되고 또한 정석은 바둑판의 4분의 1안에서 인정되기에 
4분의 1범위가 국이 된다. 즉 어떠한 형이 펼쳐진 땅 위에서 미치는 범위안의 모양을 
형국이라 하고 이를 논하는 것을 형국론이라 한다.
  영구하산형: 영령스러운 거북이가 하산하는 형국의 일종. 거북은 음양조화를 스스로 
이루기 때문에 많은 인물과 재물을 발복시킨다는 택지의 대길지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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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의 세, 위력 대단한 인걸지령--금정산

  부산의 중심축은 금정산
  '신은 자연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도시란 산업화의 산물이며 산업혁명은 서양에서 시작되었기에 서구의 지리학은 도시를 
문명의 이기로만 생각하였다.
  오늘날 도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도시란 신의 존재처럼 정의 내리기 어렵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 확연하게 모르겠다"고 푸념을 하기도 한다. 마치 짜라투스트라의 "신은 
죽었다"라는 외침과 함께 자연파괴와 도시의 실종을 초래한 서구 지리학에 대한 판결 
주문을 듣고 있는 것만 같은 요즈음이다.
  동양사상에 있어 모든 것은 중심점에서 시작되며 중심을 향한 축은 모든 활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나라 국기를 보아도 중심에 태극이 있고 태극은 음과 양의 축을 이루며 활동하고 
있다. 이 땅의 만물을 싣고 있는 지구도 23.5도의 자전축을 갖고 북극성을 중심으로 
자전운동을 하기에 천을(북극성의 힘을 가리킴)은 동양철학 핵심이기도 하다. 
사주팔자에도 천을귀인이 있으며 양택풍수에서 역으로 길한 집, 흉한 집을 따지는 
양택삼요결에서도 천을택은 들어 있다.
  이러한 동양사상의 맥락에서 볼 때 4백만 시민이 모여 사는 부산의 중심축은 바로 
금정산이다.
  가령 금정산이 현 위치에서 북쪽으로 10여리쯤 올라가 있었다면 남쪽을 향한 부산은 
자연적으로 10리쯤 더 넓어졌을 것이며 서면과 사상 사이에 금정산이 있었다면 오늘날 
거제동, 사직동 등과 금정구의 절반 가량을 합한 면적이 축소되었을 것이다.
  또한 금정산 외에는 부산에 이렇다 할 산이 없다. 단순히 휴식공간이 없다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금정산이 없으면 부산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문제가 
대두된다. '인걸은 지령이다'는 풍수적 표현은 큰인물은 땅의 힘, 즉 명산의 위력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부산의 인물과 발전은 금정산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며 이를 축으로 하여 성장한다는 
풍수의 원리에서 볼 때 금정산이 없다면 부산은 어미 없는 아이와 같다.

  동래 정씨 문민정승 최다 배출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금정산의 기의 세를 형으로 받은 중심에 뿌리를 둔 동래 정씨의 
경우, 조선시대 정승배출에 있어서 전주 이씨가 22명, 안동 김씨가 19명, 동래 정씨가 
17명으로 세번째인데 전주 이씨는 왕족이고, 안동 김씨 또한 외척의 득세로 인한 것이고 
보면 순수한 문민의 발탁으로서는 당당히 수위에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금정산의 
인걸지령 위력이다.
  인물과 도시를 발육시키는 부산의 지모인 금정산을 풍수로 감상할 때 신라의 인걸을 
배출할 경우 남산의 산색을 느낄 수 있고, 조선조 풍수대가인 남사고 선생이 넙죽 
절했다는 소백산의 세처럼 후덕하며 조선왕조를 발복시킨 북한산의 형을 감상할 때와 
같으니 금정산은 부산을 진호하는 진산이며 아울러 명산이다. 남산, 소백산, 북한산을 
접해본 독자라면 어딘가 모르게 금정산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금정산을 풍수에서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을까. 우리의 전통 지리사상에서는 모든 
산들은 하나의 근본된 산으로부터 뻗어나왔다는 원리에 충실하다.
  우리 강산의 근본인 백두산을 태조로 하여 시작되는 백두대간의 끝인 지리산에 이르기 
전, 그 중간 자락에 위치한 태백산을 종산으로 삼고 낙동정맥을 따라 흐르다 양산 
통도사를 품은 취서산을 소조산으로 하여 부산의 진산이 되는 자리가 바로 금정산이라 할 
수 있다. 백두산은 뿌리, 백두대간은 큰 줄기, 낙동정맥은 작은 줄기와 같은데, 꽃은 
뿌리나 줄기가 아닌 가지에서 피어나게 마련, 금정산은 꽃(부산)이 피어날(발복), 
받침대(지모) 역할을 하고 있다.
  금정의 주봉은 고당봉(802m)으로 도도록하니 튀어나온 바위들로 형성되어 있다. 산의 
모양이 이와같이 불길의 형상인 경우 이를 화성이라 하며 고당봉을 중심으로 금정산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토기가 윤택한 토성이다. 불이 탄 자리에는 흙이 생성된다는 오행의 
해석에 비추어서 화생토의 상생이므로 길격이다.

  음양오행 자체 활동이로 발복 주는 지모
  금정이라는 이름 역시 길격이다. 정자가 우물이므로 수가 되니 금정은 금생수의 
상생이기 때문이다. 금정산의 한 자락인 청룡동 남산은 전형적인 목성이어서 건너편 
계명봉 화성과 상생을 해 금정은 목(생)화(생)금(생)수의 오행상생의 순환을 한다. 
음양에 있어서도 금정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산에는 할배(양)산과 할미(음)산이 있다. 할배(양)산에서는 무당(음)이 기도를 
하고 할매(음)산에서는 박수무당(양)이 굿을 해야 영험이 있다. 음양조화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살감'은 할미산이며 '밝발'은 할배산이 된다. '감'은 곰, 검, 금의 발음이니 
금정은 할미산의 음이 되며 '밝'은 금정과 마주하는 백양산으로 할배산, 즉 양이 된다.
  이렇듯 금정산은 그 체온으로 부산을 품고 음양과 오해의 자체 활동을 하며 부사에 
발복을 주는 영산임이 음양오행설로도 검증된다. 이러한 영산이나 양기풍수의 진산에 
묘를 쓰거나 훼손시켜 혈맥과 음양과 오행에 해를 가할 경우 해당 마을이나 그 후손에게 
재앙이 닥친다. 풍수에서는 이를 금장처라고 한다.
  금장처인 금정이 지금 인간에 의해 시달리고 있다. 서구 지리학으로 만든 부동산공법의 
유권해석에 하자 유무만 따지는 저잣거리의 시정의 목소리가 어찌 이러한 금정의 깊은 
호흡보다 높을 수 있단 말인가.
  필자가 한때 입산한 속리산의 속리가 속세를 떠난 산이라면 마땅히 이속이어야 하거늘 
왜 뜻이 와닿지 않는 속리산이 되었을까. '귀를 씻고 건너가라'는 일주문 앞 맑은 물소리 
같은 명구가 있다. '도불원인 인원도 산비이속 속리산', 풀이하면 '진리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진리를 멀리하고, 산이 사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산을 떠나는 구나'이다.
  천자문의 첫 글자는 하늘 천이요 그 다음은 땅 지이다. 이러한 지자의 위치에 있는 
부산의 지모인 금정이 사람의 욕심으로 훼손되고 있는데 이 어찌 천지를 앞지르려 하는 
착각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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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택삼요결: 집의 구조를 보는 풍수에 있어 집의 대문은 기가 들어오는 입구가 되며 
안방은 사람이 잠잘 때 기를 받는 곳이고, 부엌은 음식처럼 기를 먹는 곳이므로 대문, 
안방, 부엌을 삼요결이라 하고 그 각각의 위치에 팔괘의 핵석을 붙여서 길한 길흉한 집을 
평가한다.
  성: 산을 성이라 한다. 하늘의 별(천문)이 땅에 이르러서 산(지리)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천문지리와 풍수의 접목을 볼수 있다. 이는 성은 기의 정이며 산은 기의 형이기 
때문에 산을 오행으로 분류할 때에는 성이 된다. 기의 움직임(더 정확히 말하면 
음양)으로 산을 볼 때는 용으로 본다. 이 또한 음양오행과 풍수의 접목임을 알 수 있다.

    백두산 정기 서린 영구하산형--동래의 형국

  속안 풍월로 보면 큰 새가 알 품은 명당
  옛날 풍수하던 사람들이 읍지가 될 만한 명당을 찾아 다니다 길지를 보고서 읍의 
후보지로 초하였다는 말이 풀 초로 변하여 초읍, 오늘날의 초읍동이 되었다 한다. 또 
어느 지역이 잡히길래 명당인가 두고보자던 뜻의 이름이 두구동인데, 이와 비슷한 경로로 
명당으로 선정된 곳이 동래라 한다. 그리고 동래의 형국은 큰 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 
즉 대조포란형으로 이야기의 끝을 맺고 있다.
  풍수에 관한 이런 풍문들은 여름밤 개구리 울음처럼 어느 곳이나 지천으로 깔려 있다. 
이런 풍문들을 '들은 풍월', 즉 풍월풍수라 한다. 아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 '뻥 
친다'는 말은 이런 풍월의 '풍 친다'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풍수를 보는 단계에는 네 
가지가 있다. 풍월만 보는 속안이 있고, 풍수의 법칙과 원칙을 가지고 현장에서 판단할 
줄 아는 것이 법안의 단계, 모든 것들을 한눈에 보아 판단해도 정확히 법칙과 원리로 
통하는 것이 도안의 경지다. 그리고 하늘이 감추어놓은 천장비지의 명당까지도 눈에 
보인다는 신안이 있다. 속안, 법안, 도안, 신안에는 각각 특징이 있다.
  속안의 경우는 자주 듣고 입심만 있으면 당장에라도 문을 열 수 있지만, 법안의 경우는 
속안에 빠지지 않고 산서인 풍수서를 연구하면서 현장답사를 부지런히 해가면 이룰 수 
있다.
  하지만 도안의 경우에는 눈이 트이는 개안이 있어야 한다. 즉 개안은 도안의 입문이며 
개안이더라도 법안을 통하지 않았다면 잡신론의 문전에 서 있는 것이 된다. 신안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산안으로 풍수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국토가 
국난과 같은 위기에 봉착했을 때를 대비하여 구국의 인물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하늘이 
감추어놓은 자리인 천장비지는 사람의 눈을 통해 잠시 보여주었다가 눈을 멀게 하는 
것으로 당대에 하나 정도 있을까 말까한 천명의 풍수윤리일 뿐이다.
  산중에서 토굴생활을 하다 보면 지기를 강하게 받게 되고 그런 신체는 신기한 정신 
현상들을 겪게 된다. 산들의 꿈틀거림이 알음알음 잡혀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들이 
곧잘 쏟아져나온다. 이는 정도를 막는 사도로 산승의 상단법좌에는 그런 잡것들을 
물리치기 위한 주장자라는 몽둥이가 꼭 있다. 풍수는 이런 잡신의 경지에서 보는 것이 
아니다. 풍수는 살아 있는 자의 집터와 마음 입지들을 선정하기 위하여 생긴 우리의 
전통지리학이며 묫자리를 보는 음택풍수 역시 이런 전통지리학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거에서 동래의 형국 역시 속안, 법안, 도안의 단계로 풀어볼 수 
있다.
  먼저 대조포란형을 보면 동래 형국에 대한 풍월이며 속안임이 드러난다. 이를 법안으로 
검증할 수 있다. 
  동래의 진산이 윤산(오늘날의 구월산)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형국이란 말 그대로 형 
(구월산)에 의한 국(금정산에서 황령산까지)을 가지고서 가장 조화를 이루는 풍수를 보는 
것이며 여기서 풍과 수의 조화는 형국론의 제1원칙이 된다. 풍월에서 말하는 대조는 큰 
새를 말하며 학수대가 있는 마안산(북장대가 서 있는 복천동 뒷산)의 산세를 중심으로 
착안한 것으로 이는 구월산(동래의 중심축)을 빠트려 아버지를 빼놓고 쓴 족보책인 
셈이다.

  마안산 아침 기 마시면 천수 누려
  법안이 생기면 풍수의 체계를 세우며 그 체계에 따른 풍수법칙을 하나씩 검증해나간다. 
동래의 경우 동래와 마안산을 '나'라 하면 구월산을 부모(진산), 금정산을 소조로, 
태백산을 종산으로, 백두산을 태조로 하는 체계를 잡을 수 있다. 이러한 법안의 경우에도 
간혹 어긋난 형국을 잡을 수가 있다.
  간룡을 하다가 금정산(802m)에서 구월산(317m)으로 5백미터가 낮아지는, 즉 땅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졌다는 뜻을 가진 낙지의 세에 널리 알려진 매화의 형을 붙여 
매화낙지 형국으로 단정해버릴 경우 법안에서는 합격점이 되지만 도안에서는 낙제점을 
준다.
  왜 그럴까? 이는 뱀을 용으로 잘못 보고 고양이를 호랑이로 보는 격이다. 개안은 
도안의 입문단계이지만 동래의 형국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동래처럼 형국이 확연한 경우 기가 좋은 명당중의 명당으로 풍수에서는 평가한다. 동래의 
형국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낙동정맥이 금정산에 이르러 영령스러운 
거북이(구월산)로 하산하는 영구하산형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께서 금정산 금강공원 뒤 케이블카 정상 부근 쯤에서 시야가 트인 
곳을 찾아 동래 부근을 살펴본다면 구월산에 바로 거북이 형상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구월산을 보면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거대한 영구(거북이)가 눈에 잡혀온다.
거북이 발복과 관련된 유명한 풍수 이야기가 있다. 경상북도의 한 촌락이 거북이의 꼬리 
같은 지세라 하여 구미라 불렀다. 거북이는 알을 꼬리부근에서 낳은다. 그 자리가 
명당이다. 이는 구미마을 전체에 거북이의 기가 몰렸다는 뜻이 된다. 거북이의 기세가 
발복하기 시작하자 공단이 들어서고 그 후 한적한 촌락이 일시에 도시가 된 곳이 바로 
구미시이다.
그러면 동래의 경우에도 거북이의 꼬리 쪽이 명당일까? 이 판단은 기의 움직임을 살펴야 
알 수 있다. 동래의 경우는 영구의 숨결인 마안산 방향이 된다. 동래 주민들은 아침에 
마안산에 올라 체조라도 하면 명당의 기를 마시면서 건강을 누릴 것이다.

  옛 온천 '구야'는 세 상징
  영구가 금정산에서 하산하여 감싼 자리에는 동래온천이 있다. 옛날에는 동래온천을 
구야온천으로 불렀다는 기록도 많다. 이를 풍수로 보자면 거북이를 뜻하는 구는 구월산을 
말한다. 이는 풍수원리인 세를 말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글자 야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바로 풍수의 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동래 안에서 명당을 찾는 신비한 야자인 
것이다. 이 글자를 푸는 것이 오늘날 동래 풍수의 골결이기도 한 선조들의 풍수 이론이며 
또한 동래입지선정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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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룡법: 형국의 중심은 혈(양기풍수는 진산)자리가 된다. 이런 중심에서 앞을 명당이라 
하고 중심의 뒤쪽으로 뻗어들어오는 산줄기를 잡아가면 생룡인지 사룡인지를 살피는 
방법으로 장풍득수정혈좌향형국으로 분류된 풍수체계 중 하나인 간룡을 하는 풍수법칙을 
말한다.

  동헌중심 좌 충렬사 우 사직--동래의 입지
  동래의 어머니, 구월산
  "구월산 맑은 정기 이어받아서..."
  구월산 자락에 있는 금사국민학교 교가이다. 구월산은 동래의 진산으로 그 발복은 
오늘날 부산의 지덕이다. 부산의 가장 남쪽인 낙동정맥의 끝자락에 자리한 다대국민학교 
교가는 풍수지리의 원칙을 잘 표현하고 있다.
  "태백산 줄기줄기 뻗어내려와 아미산 정기 받아 이룬 내 고장..."
  가히 한 편의 풍수학이라 하겠다. '태백산 줄기줄기(지자의 생룡) 
뻗어내려와(낙동정맥) 아미산(다대동의 진산) 정기(백두정기) 받아 이룬 내 
고장(양지풍수의 입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이 땅의 정기와 풍수의 정서들, 교향의 흙내음을 잊지 
못하듯 땅은 우리를 키워온 어머니이다. 동래의 어머니 이름은 구월인데 구월산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이렇다 할 지명과 관계된 주장은 없다. 다만 구월이 어떠헌 뜻이 있는 특정한 
달을 지칭한 것이 아닌 음을 빌어온 표기라는 데에만 일치를 보이고 있을 뿐. 이를 
근거로 구월을 발음해보면 '구올, 구을, 구얼' 등으로 유추할 수 있다.
  구월산을 구을산으로 적어놓은 옛 지도가 있다. 이 정도 토대에서 풍수로는 어미의 
이름을 밝힐 수가 있다. 동래의 풍수형국은 거북이가 금정산에서 동래를 향해 하산하는 
영구하산형이다. 영구는 구월산을 가리키며 이것이 풍수의 형이 된다. 어미의 이름 
첫자인 것이다. 둘째자는 풍수의 세로서 영구는 하산의 세를 이루고 있다.
  금정산에서 구월산(중심)은 갈 왕에 해당되어 하산이 되지만 풍수의 혈자리 위치인 
동래읍성에서 구월산(중심)을 보면 올 래가 된다. 이러한 지기 발복은 구월산 자락에 
있는 '오시라'(올)라는 기원에서 생겨났고, 이것은 얼마전까지 있었던 '오시게시장'의 
명칭에서도 나타난다. 풍수에서 보자면 이런 현상을 지기의 지덕이 지명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이러한 지기가 인간에게 나타날 때 지령인걸이라고들 한다.
  이는 동래에 지덕의 발복이 '오라는'(올) 진산에 발원하는 의미있는 이름인 것이다. 즉 
거북이가 오는 산 '구올산'이 구전 특유의 중얼거리는 전달방식에 의하여 구월이라는 
한자의 음을 빌려 구월산이 된 게 아닐까?
    정묘 야자는 정씨발복의 뿌리
구월산이 어미산이며 자식은 마안산이다. 마안산의 형은 야자 형상을 이루고 있다. 
명당의 명 자에는 일과 월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음과 양이 완전히 결합된 글자는 오히려 
용 자 모양이다. 만약 용자형의 집(당)을 짓는다면 명당이란 뜻에 합격되는 것이다. 이를 
천지음양일월도 합격의 명당이라 하며 풍수에 있어서 서울의 동구릉을 대표격으로 친다.
  이러한 풀이로 볼 때 동래의 야자는 어떤 풍수적 의미를 담고 있을까? 야자는 천자문 
맨 끝줄에 나와 있는 글자다 .그래서 완성과 유종의 미로 풀이되고 또한 천자문(학문)의 
끝(완성). 즉 문장배출을 뜻한다. 동래의 정묘가 야자형임은 풍수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대제학과 호당의 문장배출과 정승들이 줄줄이 늘어선 동래 정씨의 뿌리는 
바로 야자형국의 발복을 보여준다.
  야자는 장풍의 이상적 명당이기도 하다. 야자를 써보면 첫획이 좌청룡, 셋째획이 
우백호로 둘째획을 감싼 모양을 하고 있다. 이때 감싼 품안에 들어 있는 둘째획이 바로 
장풍의 명당이다. 바로 그 자리는 동래 동헌을 입지시켰던 곳이다.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는 날도 동헌 자리는 시만 바람이 밀치고 들어오지 못했다. 만약 동헌의 자리에 
바람이 심하다면 이는 오늘날 무분별한 도시개발로 동래의 어느 부분이 파괴되었다는 
말이 된다.
  정묘 역시 야의 가운데 획에다 붙여놓았고 동래 동헌의 경우에는 전주작에 해당하는 
온천천과 후현무 격인 마안산 주봉과는 조화를 이루는 중심에 입지시켰다.
  우리의 전통 도시들은 사신사, 즉 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가 입지선정시 
풍수의 원칙이 되고 일단 중심점이 잡히면 그후 지상 건축물들은 앞의 사신사의 원리에 
걸맞게 파묘 우사 전조 후시의 법칙에 따라 세웠다.
  
  구서장터이전은 후시 법칙에 따른 것
  동래 역시 이러한 풍수원리에서 세워진 읍성이다. 중심점은 동헌자리가 된다. 동헌의 
좌측에는 충렬사가 있다. 한양의 경우에는 종묘가 있는 것은 모두 '좌묘'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우사의 자리에는 사직이 들어선다. 이렇듯 종묘는 좌묘우사 원리에 의해서 
세워졌는데, 사직은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이 무너지고 한양이 위태로워지자 허겁지겁 
떠난 어가의 행렬은 종묘의 위패와 사직단의 그 무거운 돌덩이도 꼭 모시고 다녔다.
  전조란 신하들을 앞에다 둔다는 뜻으로 풍수에서 명당이라 하며 이는 해와 달이 있기에 
밝은 곳(당)을 가리킨다. 이는 왕이 신하를 밝은 곳에 두고 국사를 논하라는 뜻으로 
오늘날 밀실정치를 몰아내고 공개적 민주정치를 하자는 의도이  이고 바로 명당의 본래 
뜻이기도 하다.
  동래의 경우 전조의 명당 자리에 백성의 주출입문인 남문을 두었으며 후시인 동헌 뒤에 
장터를 입지시켰다. 동래읍장의 터는 동래구청 부근으로 후시의 법칙에 걸맞는데 오시게 
시장으로 밀려났으니 더욱 후시 방향의 입지가 되었다가 거기서 구서시장으로 이전한다고 
하니 더더욱 후시의 자리가 된다.
  동래성은 입지방위를 설정하고 나서 읍성을 축성하기 시작한다. 성벽이란 우선 유사시 
적에게 대항하는 용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높은 곳인 산능선을 따라 축성하는 
것이 마땅하다. 동래읍성 역시 산능선을 따라 축성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동래향교 산자락 1백 50미터 못 미쳐서 갑자기 능선 아래로 어슷하게 
성을 쌓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자리는 바로 야자의 마지막 획인 꺾어진 자리에 
해당한다. 이렇듯 지기의 힘을 빌려 명당의 완성을 기원하였던 선조들의 뜻이나 학생들이 
산의 정기를 교가 첫구절로 잡아 힘차게 노래하는 맥락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모두가 
낙동정맥이라는 풍수적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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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신사: 조상들은 풍수를 가르칠 때 모래 위에 산과 물 모양을 곧잘 만들어 사라 
했는데 이는 주위의 산과 물을 칭한다. 혈자라인 중심에 서서 바라보는 앞쪽이 전이되며 
뒤쪽은 후가 된다. 또 좌측에 있는 사를 좌청룡, 우측에 있는 사를 우백호, 앞에 있는 
사를 전주작, 뒤쪽에 있는 사를 후현무라 한다. 이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칭하여 
사신사라 한다.
  좌묘유사전조후시: 우리의 전통적인 풍수지리로 도시를 세울 때 도시의 
중심점(중심점은 사신사 원리로 잡는다)을 잡은 후 다음 그  중심점으로부터 좌측에는 
종묘(왕족의 재실), 우측에는 사직(토지신과 곡식신), 앞쪽에는 전조(조정대신), 
뒷쪽에는 후시(시장)를 두고 주위를 돌아가면서 성벽을 축성했다. 이 전통 성곽도시의 
기본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해 뜨는 아침의 나라 신선 사는 곳--동래의 지명
  천기, 지기이동 학수대에서 발복
  산 높고(고) 강이 수려하다(려)는 표현은 금수강산을 말하는 것이며 '고려'가 된다. 
고려 다음 시절이 조선으로 아침 조, 아름다울 선자로 이루어진 조선은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란 뜻이다.
  아름다운 아침과 금수강산을 함께 표현한 문자가 있다. 바로 해동이다.
  풍수에는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이 있다. 영주산, 방장산 그리고 봉래산과 같은 말이다.
  동래! 동래를 풀이하면 해동의 봉래산이 되고 의미로서는 해 뜨는 아침의 나라의 
신선들이 사는 곳이 된다. 신선의 옷자락을 잡고 동래를 더듬어보자.
  신선들을 표현한 그림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신선놀음에 시가가는 줄 모른다는 
바둑판이 자주 등장하고 공간초월을 나타내는 구름도 나온다. 이러한 그름 위를 누빌 때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것이 학, 더 정확히 말하면 청학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풍수에도 
청학이 없다. 삼신산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산이며 청학은 신선 전용 교통수단이다.
  지금으로부터 6백년전 무학이 풍수를 보고 있었는데 어느 산의 산세가 학이 날고 
신선이 탄 형세를 보이길래 붙인 이름이 승학산이다. 승학산 바로 옆에는 신선이 
내렸다는 강선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신선의 흔적은 어디서 찾는가.
  인간이 보기엔 먼 거리인 영도에 봉래산이 있고 탈것인 청학동이 있다. 영도 봉래산에 
가서 올라가는 길을 40대 주부에게 물어보니 입에 아주 밴 발음으로 '고갈산'이라는 
무서운 이름을 댔다. 말라 비틀어져 죽어버리라는 욕설이 바로 고갈이다. 이렇게 
망하라고 축원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일본 제국주의자들밖에는 없다. 일제 때 부산의 
정기를 꺾어놓기 위해 고갈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시 말해 식민풍수의 잔재이다.
  영도의 청학동 바로 건너편에는 신선대가 있다. 신선의 옷자락인 승학, 강선, 봉래, 
청학, 신선대를 보며 백양산 아래에서 원을 그려보면 C자 형을 이루면서 정확히 동래의 
학수대로 들어간다. 동래가 온통 학판이다. 바로 옆에 학소대. 건녀편 영산동에 학암, 
거제동에 학표, 이러한 학이 동래온천을 안고 있으며 동래학춤도 낳았다. 동래학춤을 
보고 있노라면 천문을 바라보다가 천기를 잡는 듯하고 이곳에서 눈을 돌려 구월산을 
이어보면 지기 거북이가 오듯 백두정기가 금정에 닿는 자리다. 이것이 바로 동래의 
천문지리며 풍수지리인 것이다.
  동래에 있어서 풍수지리는 어떤 지명으로 발복하고 있는 것일까? 이를 위하여 풍수의 
원리를 눈여겨보아둘 필요가 있다. 풍수에서는 먼저 찾아야 하는 중요한 중심점이 있다. 
무덤의 경우 시신이 묻힌 곳이 중심점이 되며 이를 혈자리라 한다. 혈을 중심으로 하여 
앞쪽과 뒷쪽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뒤쪽을 좌라 하고 앞쪽을 향이라 하며 이를 좌향이라 한다. 그러니까 시신이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남쪽으로 다리를 펴고 누워 있다면 이는 북좌남향이 된다. 풍수용어로 북은 
자가 되고 남은 오가 되니 북좌남향을 자좌오향이라고도 한다. 성묘 때 고인의 
기호품이라고 담배에 불을 붙여 상석이 있는 쪽 봉분에 놓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는 
고인의 입이 아닌 발가락에 담배를 놓는 꼴이 된다.
  그런 경우 시신의 좌측(왼쪽팔)이 바로 좌청룡이니 좌묘니 하는 좌가 되며 우측이 
우백호 우사할 때의 우가 되는 것이다.

  칠산과 복천 합쳐져 복산 생겨 이것을 기초로 동래동헌을 중심(혈자리)에 두고 동래의 
지명들을 살펴보면 풍수의 발복이 지명으로 확연히 드러난다. 즉 동헌의 머리 쪽에 복천, 
칠산, 복산동이 있고 향이 되는 다리쪽에 수안, 수민, 낙민동, 좌측에 안락동, 우측에 
사직동이 있다. 먼저 동헌 뒤쪽은 풍수원리상 생기가 들어오는 자리이다.
  복천이란 발복인데 그것도 샘처럼 쏟아진다는 뜻이다. 생기를 필요로 하는 고분 역시 
복천동에 있다. 칠산의 칠자에 물 수가 두 개나 들어 있고 더욱이 칠수라는 유명한 
강이름으로 수를 나타내는데 이는 산수와 통하며 산수는 장풍득수의 작용으로 풍수라는 
말이다. 복산은 칠산과 복천이 합쳐진 지명이다.
  이번에는 앞쪽을 보자. 이는 전조에 해당하는 명당을 가리킨다. 전조란 맨백성이 
안녕을 누리도록 국사를 논할 신하들을 세워놓은 자리를 뜻한다. 백성을 잘 다스려 오래 
살게 하고(수민) 모두 즐겁고(낙민) 번영고 안녕이 오래도록(수안) 계속되라는 지명이 
바로 수민동, 낙민동, 수안동이다. 좌측은 좌묘의 자리로 이곳에 충렬사의 터를 잡았고 
안락서원을 세웠다. 거기서 따온 지명이 바로 안락동이 된다.
  명장동은 새가 자리를 품고 있는 그곳의 지형을 나타내는 풍수적 의미로 조선개국 
직후인 1393년부터 불려진 오래된 지명이기도 하다. 동래의 우측은 우사의 자리로 
사직단이 1709년에 온천천을 건너가서 오늘날 사직동이 된 것이다. 명륜동은 동래향교 
명륜당 현판에서 따온 것으로 풍수원리로 보자면 좌묘의 위치에 명륜동(서울의 명륜동은 
경복궁 좌측에 있다)이 있어야 하는데 우사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기록 역시 좌측에 
있다가 우측으로 건너온 것이 동래향교라 적고 있으므로 동래의 중심에서 볼 때 '물건너 
간 곳이 사직동이며, 산넘어 건 곳이 명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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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향론: 풍수에 있어서 방위를 따져 좌향의 길흉을 논하는 것. 이러한 길흉의 근거는 
음양오행설에 두고 있다. 유교가 송나라 때 통치사조의 성격을 띠며 갑자기 이기론이 
날카로워지자 그때까지만 해도 소박한 풍수지리에 나경(포라만가경륜천지에서 따온 말)이 
파고들어와 좌향론을 도식화시켰다.
  이러한 나경을 패철 또는 뜬쇠라고도 부르며 그것으로 좌향을 잡는다. 그러므로 
주자에서 변화하여 퇴계 선생에 이르는 이기의 맥을 모르고 산서의 글줄로 이기를 
파악하면 패철의 해석은 자가당착이 되어버린다. 이런 점이 오늘날 풍수지리를 
잡신론으로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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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래산 신선기상 서린 신선승학형--영도의 형국

  영도는 '명마를 배출하는 섬', 절영도에서 유래
  음력 5월 10일에는 반드시 비가 오는데 이를 태종우라 일컫는다. 조선 태종 집권시 
팔도에 가뭄이 극에 달하자 자신의 부덕함에 대한 하늘의 징벌로 받아들인 태종은 
충녕대군(세종)에게 보위를 양위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가뭄은 멈추지 않았고 태종은 
세종 4년 5월 10일 임종을 맞으며 한맺힌 유언을 남겼다.
  "과인이 죽어 만약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이날만은 비를 내리게 하리라."
2백년이 지난 선조 때의 문헌 (연려실기술)에는 5월 10일에는 매해 비가 내렸다고 적혀 
있다. 단지 신묘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불길했다는데 그 다음해에 과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태종우가 내리는 해는 풍년이 기약된다 하여 태종우만은 흠뻑 맞았다는 
농가풍습도 전해온다.
  영도에는 태종대가 있다. 신라 29대 태종 김춘추가 행차한 연유로 붙여진 지명이다. 
또한 태종대는 이 지역에 가뭄이 들 때 동래부사가 직접 기우제를 지낸 곳이라고 
동래부지는 밝히고 있다. 이는 신라 태종(태종대)-->조선 
태종(태종우)-->동래부사(기우제)의 맥락을 갖고 있다.
  태종대의 기록을 다시 살펴보면 '태종대 재부남 삼십리 절영도지동해수...'. 풀이하면 
'태종대는 동래부에서 남쪽 30리 되는 절영도 동쪽에 있으며 바닷물이...'라는 말에서 
보이듯이 절영도라는 표현이 있다. 영도는 예부터 유명한 목마장이었다. 이곳에서 길들인 
말은 질주할 때 마치 제 그림자마저 끊어버리듯 빠르게 달린다 하여 명마를 배출하는 섬. 
즉 절영도가 되었다. 해방후 절영도란 발음이 편의상 영도가 되었고, 오늘날의 영도라는 
지명이 된 것이다.
  만물은 땅의 힘을 받는다는 풍수의 원리에서 볼 때 절영도가 명마의 섬을 뜻하고, 
따라서 절을 떼낸 영도는 느린 말이나 나는 곳이라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곳 절영도 명마 이야기가 나온다.
  "고려 태조 7년 8월에, 견훤이 사자를 시켜 절영도 산 말 한 필을 헌납하였는데 뒤에 
절영도 명마가 넘어가면 백제가 망한다는 참언을 듣고는 태조 9년에 사람을 시켜 그 말을 
돌려보내 달라고 청하자 태조는 웃으면서 허락하였다."
  이 책의 기록 전문을 후일의 역사를 통해 반추할 때 절영도의 명마가 고려로 넘어가고 
후백제가 고려에 의해 멸망하였다면, 왕건에게서 다시 명마를 돌려받은 견훤은 멸망 
후에도 살아남아 왕건의 배려로 식읍을 받고 살았다는 역사의 기록은 또다른 바를 
시사해준다. 만일 절영도 명마의 반환마저 없었다면, 견훤은 살아남았을까. 더군다나 
왕건은 풍수에도 도통한 승려 보양을 군전략가로 삼아 청도에 있는 견성을 격파할 정도로 
풍수를 신봉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반환시 절영도 명마는 왕건에게는 '트로이의 
목마'가 아니었는지...

  영도풍수 해석엔 '학맥설'이 가장 타당
  필자의 이러한 의문들은 영도의 풍수를 풀어가는 데 있어 단서가 되기도 한다. 명마를 
배출한 영도는 풍수에서 말하는 땅의 힘, 즉 명당의 길기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영도의 
길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는 풍수의 체계인 간룡법(길기의 공급선을 찾는 법칙)의 
문제인 것이다.
  제주도의 경우는 임맥설이 있다. 호남정맥이 전남 해남군 땅끝마을 앞바다로 
잠룡(길기가 바다로 들어감), 청암을 타고 흐르다 숨쒸기 위하여 고개를 한 번 쳐든 곳이 
추자도가 되었고 다시 잠룡하여 바다 저편에서 이내 솟구쳐 승룡(완전히 몸을 내민 
길기의 세)하니 한라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도의 경우에는 학맥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낙동정맥이 이곳에 이르러 한자락의 
일지맥을 이어주므로 학의 모양을 한 봉래산이 되었다는 학맥설은 지극히 타당한 
이야기다. 그러나 학맥설을 제외한 영도의 풍수설들은 모두 허황된 것들이다. 영도의 
봉래산에 올라 멀리 금정산을 바라보면 산정이 머리를 의젓이 드리우고, 금정산에서 
봉래산을 굽어보면 주작이 나래를 펴고 날아오는 형세가(주작상무) 확연히 잡힌다. 
이러한 풍수원리에서 음양조화를 이룬 금정산과 봉래산 사이의 부산시가 명당의 발복으로 
번창하고 있다.
  만약 봉래산이 남쪽을 향해 날아간다면 부산의 풍수 해석은 어떻게 변할까. 이는 
남주작(봉래산)이 북현무(금정산)에게 등을 돌리는 배역세가 된다. 이러한 배역세는 
풍수에서 음양조화가 깨어지는 흉지로 본다.
  봉래산이 없어지라는 것은 부산이 망하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배역세에 덩달아서 
액운설이 영도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것도 걱정이다. '영도의 원주민은 타처로 흩어질 
것이고 외지에서 영도로 이주한 자는 20년을 넘기지 못하여 절영도는 그림자 없는 섬이니 
손이 끊길 것이다.' 이 또한 영도 망하라는 저주가 된다. 앞서 설명한 절영에 관한 
풍수해석을 제대로 못한 무지의 소치로 쓸데없는 액운설과 배역세가 영도의 향토지나 
영도의 풍수지에 버젓이 소개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이런 잡풍수들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부산 망하라는 배역세는 일제 식민풍수의 잔재이고, 산인지 
물인지도 모르고 입심으로만 풍을 치는 얼풍수, 반풍수들이 그 장단에 놀아난 것이다. 
식민풍수의 잔재는 이처럼 무섭다.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차원에서도 영도의 풍수형국은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

  선인승학형, 지명발복으로도 입증
  영도의 풍수형국은 학맥설에 입각한다. 낙동정맥과 이어진 봉래산의 주봉(395m, 
조봉이라고도 부름)에 신선의 기상이 서려있는 형상, 즉 선인이 학(봉래산)을 타고 있는 
선인승학형이다.
  필자가 밝히려는 선인승학형은 인걸지령의 풍수원리가 되기도 하는 지명발복으로도 
검증이 된다. 학(봉래산)을 타고 있는 선인(주봉)을 중심으로 흘러내리는 
지명발복(영도의 경우)에는 봉래동이 있다. 또 선인의 선자락을 받아 신선동이 있다.
  신선은 영주산에 살며 청학을 타고 다닌다는 풍수 이야기가 있다. 영선동은 주인이 
제집을 찾은 격이며 청학동 역시 풍수 발복 이름이다. 동삼동의 동은 동래의 천기 조화인 
것이다. 나머지 대교, 대평, 남항은 풍수의 발복지명이 아닌 지리적 이유로 붙여진 
것이기에 선인승학형의 주변에  걸려 있다.
  절영의 길기답게 영도의 지명 역시 절색으로 수를 놓은 듯하다.
  (그림설명: 봉래산은 선인승학형으로 부산을 수호하는 금정산을 향하고 있다. 금정산과 
봉래산의 이러한 음양조화로 부산은 명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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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무수두, 주작상무: 이는 풍수서의 원전인 (금낭경)에서 나온 말로 현무는 의젓하게 
정지하여 있는 것이 좋고 주작은 현무를 환영하듯 춤을 추며 다가가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만일 주작이 현무에게 배역세를 취하여 배역세를 취하여 날아가버리면 이는 
파멸의 흉지라고 원전은 설명하고 있다.

  민족발복 꺾으려 고갈산으로 개명--봉래산과 식민풍수

  '뼈대 있는 집안', 풍수에서 유래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이란 말은 풍수에서 유래된 것이다. 명당에 조상의 묘를 쓰면 
살은 썩어 흙이 된다. 그러나 뼈는 썩지 않고 남아 명당의 길기를 받고 후손의 뼈로 
전달되어 발복을 준다는 뜻이다. 이러한 풍수의 뼈 사상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깊숙이 
박혀 있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흔들릴세...' 뿌리 깊은 집안의 자손임을 표방하는 태조 
이성계의 족보 내력이 되는 <용비어천가>는 '해동 육룡이 날으샤...'.로 시작된다. 
여기서 육룡은 조선 3대 태종에서 태조의 4대조가 되는 목조까지 여섯 왕을 일컫는데 
태조 집안의 뼈대들이다.
  태조의 근본줄기인 목조를 풍수로 살피면 깊숙이 박혀 있던 부리가 나타난다. 목조 
이안사의 증조부는 이양무다. 태조 이성계에겐 7대조에 해당하는 이양부의 유택은 강원도 
삼척군 비로면 활기리 준경묘이다. 이곳이 천하의 명당 군왕지지로서, 왕을 발복시키는 
뿌리가 된다. 군왕의 길기를 준경모에서 받은 이양무의 뼈가 7대째에 이르러서 발복하니 
태조 이성계였다는 풍수적 풀이다.

  고려, 조선에 유력한 힘 발휘한 규봉설
  이성계는 조선조의 큰왕(태조)이지만 고려조에서 본다면 큰도둑이 된다. 이런 헤아림에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늘뿐이다. 천명이 없다면 이성계 역시 큰 도둑욱임을 면치 
못하고 역성혁명에서 역성 판결로 밀려난다. 이러한 천명은 땅에 숨겨져 인간에게로 
옮겨진다는 풍수의 인걸지령은 그 당시 무엇보다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명인 
군왕지지의 지령을 받은 준경묘의 발복이 바로 태조 이성계라는 천명의 인사장을 
발부하였다 할까.
  그런데도 뿌리 깊은 나무에 불어오는 바람들이 있었다. '이씨 왕조는 언젠가 망한다'로 
시작한 (정감록)적 저항이, 문자를 모르는 민초들의 바람을 만나자 특유의 구전방식을 
택하게 됐다. 어찌되었건 '망한다'는 말만 들어도 (정감록)을 들먹였고 이에 맞서 
정도전까지 어용 (정감록)을 펴내니 5백년 전에 죽었던 도선도 벌떡 일어나 (정감록)을 
집필. 도용 (정감록)까지 합세한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저항, 불량, 어용, 도용 
(정감록)들이 이 손에서 저 입으로, 그 입에서 저 손을 거치며 6백년간을 흐물거리며 
내려온 오늘날, 한국사람치고 (정감록) 모르는 사람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 (정감록)에 대한 적절한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풍수는 이런 (정감록)과는 전혀 별개이다. 풍수지리는 고려, 조선 양대 왕조의 
개국에 있어 수도의 입지와 임금의 옥좌자리부터 일개 촌부의 뒷간자리까지 잡아준 
우리의 전통지리학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 양대 왕조의 멸망과 개국에 유력한 힘을 발휘했던 풍수설이 있다. 바로 
규봉설이다. 엿볼 규, 봉우리 봉, 규봉은 말 그대로 엿보는 봉우리를 뜻한다. 단순히 
엿보는 정도가 아니라 훔쳐보아야 한다. 게다가 훔치는 도둑처럼 험상궂다면 최상의 
효험을 갖는다.
  고려왕조의 명당인 송도의 남동쪽 산능선 너머에 엿보는 산봉우리가 있었다. 찌를 듯한 
각을 험상하게 풍기는 백운, 국망, 인수봉의 세 봉우리가 있어 삼각산이라 하며, 
풍수에서는 이를 삼각규봉이라 말한다. 삼각산의 삼각규봉이 고려왕조의 왕기를 훔쳤던 
까닭에 고려가 망했다는 풍수의 규봉설에서도 규봉의 효력을 알 수있다. 같은 논리에서 
묘를 쓸 때 규봉이 보이면 그 자리에 정혈 할 수가 없다.

  식민풍수의 잔재, 고갈산
  이를 염두에 두고서 부산의 풍수를 살펴보자. 그림에서 보듯이 부산은 말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말머리가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이런 형상을 풍수에서는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려 한다는 '갈마음수형'으로 분류한다.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면 말의 기가 
생동한다. 이는 부산의 발복을 말함이다. 이를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정기의 회복, 
즉 독립운동을 뜻함이 된다. 이러한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도용된 식민풍수가 
점찍은 곳이 바로 영도의 봉래산이다.
  봉래산은 말의 입자리에 해당하는 감천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봉래는 신선을 뜻하기 때문에 도둑의 규봉이 될 수 없다. 이에 이르자 일제는 
갈마음수형의 갈자를 훔쳐오고 더욱 악랄한 글자인 마를 고자를 붙여 고갈산이라는 
무서운 규봉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지명의 효력은 청도 운문사의 호거산을 
지룡산으로 비보한 풍수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말라비틀어져 죽어버릴 산'이라는 험상스러운 뜻의 규봉 고갈산은 감천만으로 
들어오는 부산의 기들을 모두 훔쳐버린다.
  이렇게 험악한 이름을 우리 선조들이 붙여놓은 예는 조선팔도 어디에도 없다. 영도의 
향토지인 절영지에서도 고갈산의 지명은 우리의 봉래산을 일본인들이 창씨개명한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갈의 해석은 모두 악랄한 저주의 뜻이 된다.
부산의 민족정기를고갈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봉래산을 일제가 개명한 고갈산! 오늘날에 
있어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부산 시민들이 이러한 식민풍수의 음모를 모르고 아직도 
고갈산이라고 부르는데 있다. 식자들의 학술지에까지 고갈산이라는 표지가 등장한다.
  혹자는 봉래산을 용두산 쪽에서 볼 때 고깔모자 모양과 같아 고깔이 변음되어 고갈이 
되었다는 억측도 한다. 이 땅의 정기말살에 혈안이 되었던 일제가 민족정서 가락인 
고깔을 빌어 개명을 해주었을 리는 천부당 만부당하다. 아무리 개방의 바람이 불더라도 
수입개방 못하는 것은 바로 민족의 얼이다. 얼은 민족정기에 뼈대를 두고 민족정기의 
뼈대는 백두산을 뿌리로 뻗어나간다.
  풍수의 큰 뜻은 우리 강토에 발을 딛고 뿌리에서 번져가는 체온을 느끼는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흔들릴세...'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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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혈: 묫자리를 보는 음택풍수에 있어서 시신 묻을 곳을 정하는 것. 이때 정확한 
혈자리를 찾아야 한다. 혈자리를 못 찾으면 풍수의 모든 것은 헛수고가 되어버린다. 혈은 
생기를 주사 바늘처럼 시신에 꽂아주기 때문이다. 정혈이 완벽해도 규봉이 있으면 그 
지역의 땅 기운을 모두 훔쳐가기 때문에 역시 흉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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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도, 조봉의 학소포란, 대대손손 발복--영도

  절경, 절영 간직한 선인승학형국

  "백두 정기가 낙동정맥을 타다가 다대의 몰운대로 절할 적 잡아 끈 영이 봉래산이던가 
봉래의 신선이 태종과 노닐적 흘려논 주전자가 절영을 따름인가! 시인묵객의 붓자락을 
예부터 잡아논 절영이 풍수마저 무심함에 이 또한 절영되던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경치를 절경이라 한다. 절경에 낀 옥의 티마져 터럭 삼자로 
털어버리면 절영이라는 형상을 갖추게 된다. 뜻은 그림자마저 끊어짐이 된다. 절경이 
눈에 비치는 경치를 말함이라면 절영은 자연에 녹아들어간 마음을 말한다. 이에 이르면 
'소리내어 글줄만 읽지 말고 문리에 통하라'는 선학의 호통소리가 들리는 듯하며 '산서의 
글자락과 뜬쇠의 바늘에 매이지 말고 풍과 수에 마음과 눈을 뜨라'는 개안풍수의 한 
소식이 들리는 듯하다.
  필자가 지도하고 있는 금정풍수학회에서는 현장답사를 중심으로 낙동정맥, yy도시분석, 
묫자리 풍수의 역사, 각종 산서를 공부한다. 그래서 패철실무도 하고 정회원의 선대 
묫자리까지 답사하여 혈 찾는 법부터 형국분류까지 직접 지도하다 보니 회원 중에는 덜렁 
패철 하나만 들고 전국을 손가락 돌리며 다닐 정도의 이론과 실무를 갖춘 이도 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뜨이지 않을 경우 절대 인정해주지 않는다. 자칫 산도깨비 한 마리 
만들어버린 격이 되기 때문이다. 기를 잡지 못하면 물에 뜬 연꽃을 땅에 떨어진 
매화꽃으로, 땅에 떨어진 매화를 물에 뜬 연꽃으로 판단하여 버린다. 기의 흐름을 모르면 
꼬리를 머리로 보고 머리를 꼬리로 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아치섬은 와치의 변음
  과거 절영도였던 영도의 끝자락에는 태종대가 있다. 태종대 매표소에 못 미쳐서 서쪽의 
선착장에서 봉래산을 가로막는 나지막한 야산(165m)을 볼 수가 있다. 새꼬리 형상처럼 
펼쳐져 있는 산이다.
  능선의 흐름이 부채처럼 흔들려보인다면 독자 여러분도 풍수감상에서 일단 합격점 
수준은 된다. 느낌만 와닿는다면 그런대로 평균점이다. 영도의 학은 북쪽을 향해 
날아간다. 학맥설에 의한 영도의 학은 봉래산이며 이는 금정산과 음양조화를 이루고 있는 
풍수의 원리를 보아서도 그러하다. 학맥설을 근거로 하는 영도의 풍수는 관심을 끄는 두 
섬이 있다. 아치섬과 주전자섬이 바로 그것이다. 해양대학교가 자리한 아치섬은 
'와치'에서 변음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을 점령했던 왜적들이 깃발(치)을 세웠는데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 
해전에서 왜적들을 격파하고서 깃발을 뽑아 뉘여(와)버렸다는 와치섬은 조도라고도 
부른다. 그러니까 와치에서 아치로 발음되다 조도가 된 섬인데 이를 풍수로 풀어보면 퍽 
재미있다.
  풍수에는 조(조상)와 조(후손)가 있다. 조(조상)는 조상, 주인, 임금이 되며, 
조(후손)는 후손, 손님, 신하로 풀이된다. 봉래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조봉(395m)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도가 선인승학형임은 이미 밝힌 바 있다. 선인과 학의 
관계에 있어서 학을 타고 있는 선인은 임금 또는 주인 격인 조(주인)가 되므로 선인을 
태운 학은 신하로 당연히 조(신하)가 된다.
  조(주인)는 봉래산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조도 역시 학이 되는가? 조도는 선인승학형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기 때문에 풍수상 사가 하나 더 붙는다. 조신사, 즉 조(주인)는 
선인을 , 조(신하)는 봉래산을, 조도는 사가 하나 더 첨부되어 '학의 알'이 된다. 조도의 
모양도 알처럼 생겼다. 풍수에서는 이런 자리를 학이 알을 품는다는 학소포란형이라 하며 
대대손손 발복의 터로 친다. 바로 이곳의 품안에 동삼동 패총이 있으니 신석기 때 것이 
대대손손 내려와 오늘날 우리와 연결된 학소포란형의 반만년 발복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형국에는 석물을 세우지 않는다. 무거운 석물들이 발복할 알을 
깨어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세운 깃발을 뽑아버렸다는 뜻인 와치와 조도가 여기서 만난다. 아치섬은 와치섬의 
변음이므로 와치섬, 아치섬, 조도가 같은 의미를 갖는다.

  동우섬에서 남녀 정 나누면 재난 당해
  이제 주전자섬으로 건너가보자. 주전자섬에서 불을 피우거나, 청춘남녀가 정을 
통하거나, 용변을 보았다간 꼭 재난을 당한다는 전설은 영도는 물론 부산 사람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를 풍수로 풀어보려고 양기풍수의 이론들은 모두 
동원하였으나 전설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절은 태종의 태종우로 이어지다 동래부사 기우제에 이르러 영으로 떠올랐다. 모든 
발원에는 신성한 중심점이 있는 것이다. 이곳 태종대는 동래부사 정현덕의 (봉래별곡)을 
읽다 보면 이곳의 중심점은 관청대와 동우섬(유분도)으로 나온다.
  동우섬이 바로 주전자섬이 된다. 주전자는 물을 따르는데 쓰이며 비를 부른다는 기우와 
서로 통한다. 주전자섬은 기우제의 중심점인 것이다. 여기서 주전자는 물과 관계된다. 
이곳에서 불을 피우면 화가 되어 수극화의 흉이 된다. 또한 기우제는 운우의 기를 부르는 
기우인데 청춘남녀가 이곳에서 운우지정을 나눈다면 기우할 운우를 미리 빼앗아가는 
행위로 풍수에서는 이를 기의 누설로 친다. 이곳에서 용변을 보는 일은 더더욱 
신성모독이 된다. 이러한 조화들이 어긋날 경우 풍수에서는 흉살을 맞는다고 한다. 
주전자섬은 이런 풍수에 걸려 있다.
  (그림설명: 영도의 끝자락 태종대에서 보이는 야산의 흐름이 부채처럼 흔들려 보인다면 
독자의 풍수감상 점수는 일단 합격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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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신사: 풍수의 형국 안에서 중심점의 되는 혈자리의 주위에 흩어져 있는 산과 물들을 
사라 한다. 조신은 혈 앞쪽에서 신하가 조회하는 것처럼 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또 
혈 뒤에서 생기를 공급하는 산줄기들은 조상이라 해서 조종산들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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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세의 낙동정맥 끝 학소포란--사하의 형국

  용세의 끝은 다대동 몰운대
  풍수에서는 산을 용이라 부른다. 몽고의 침략에 시달리던 송나라 말년, 황제는 남쪽에 
있는 아홉 마리 용을 찾아야 한다는 풍수적 계시를 듣고 용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용은 여덟 마리 뿐이었고 이에 좌절한 황제는 그만 바다에 몸을 던져버렸다. 그것이 
실수였다. 못 찾은 한 마리 용은 다름아닌 황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홍콩에 있는 구룡반도라는 지명의 유래이다. 산의 모습은 날아오를 듯 엎드리다 
곧장 튀다가 옆으로 꿈틀거리는 천태만상을 보여준다. 이를 낙타의 머리와 사슴의 뿔, 
뱀의 몸,독수리의 발톱 등으로 상상되는 용의 갖가지 상과 견주어서 산을 용이라 하는 
것이다. 폭풍우는 용의 싸움이고 가뭄은 용의 잠이며 일식과 월식은 용이 해와 달을 
먹어버린 것이라는 등은 용의 위력을 말해준다. 황제 역시 인간에게 그만한 권력을 갖고 
있기에 황룡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용의 세(용세)를 부산에서 볼 때, 몰려오는 것이 낙동정맥이며 시작은 금정산, 
끝은 사하에 있는 다대동 몰운대가 된다. 낙동정맥의 끝점답게 사하의 풍수는 형들이 
만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날개를 펼친 학에서 시작하여 심지어 콧김을 내뿜는 정력 
좋은 물개까지 갖춰놓고 있다.
  무수한 풍수의 형들 중 사하의 중심 진산은 단연 승학산이 된다. 승학은 6백년 전 
무학이 붙였다는 풍수적 지명으로 사하의 형국이 학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사하의 
산들은 모두 올망졸망하며 알처럼 봉긋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는 국에 해당하며 
난형이다. 그러므로 승학산은 학이 알 모양의 산들을 품고 있는 형국이고, 사하의 형국은 
학소포란형인 것이다.

  '단정한 마음' 하단은 교육장으로 제격
  사하구의 범위는 당연히 알들의 보금자리인 소가 된다. 이를 지명발복으로 검증해 보면 
학이 되는 승학산 바로 밑에 학의 집이라는 당리동이 있다. 학의 집은 구체적으로 나무를 
말한다. 바로 옆 괴정동의 괴는 회화나무를 말하며 회화나무는 학술상 잎이 난(알)형의 
우(깃털)이며 이는 학의 날개처럼 잘 지어 놓은 정지라는 뜻의 괴정동이 된다. 이러한 
나무는 많을수록 다복하다. 나무가 많아 숲을 이룬 장림동이 있다.
  그러나 집만 많으면 무엇하겠는가. 집은 첫째로 안전성이 문제가 된다. 장림동 앞에 
신평동이 있다. 신평은 옛적에 망후촌이라 불렸다. 임경업 장군이 역적으로 몰려 9촌까지 
몰살당한 상황에서도 임장군의 조카 임중생만은 이곳으로 피난와서 무사하였다는 
망후촌의 전설에서 보듯 이는 구사일생의 안전성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안전하다 해도 
제대로 키우려면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다. 바로 고개 하나 넘으면 구평동이 된다.
  이곳의 옛 지명은 독지리이다. 대머리 독은 미끈한 알을 가리키며 지는 맛있다는 
뜻으로, 즉 알 앞에 잘 차려진 밥상쯤 된다. 바로 옆에 맛있는 물인 감천동까지 갖추어져 
있다. 조건만 잔뜩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알이 부화되는 확률이 낮으면 아무 소용이다. 
이를 보장해주는 것이 남쪽에서 낙동정맥을 갈무리해주는 다대동이다. 크고(대) 
많이(다), 부화발복된다는 뜻도 되지만 다자는 용자 야자와 함께 풍수에 있어서 명당을 
가리키는 글자도 된다.
  그러나 자식만 많으면 또 무엇하겠는가. 잘 가르쳐야 한다. 학소포란형인 사하의 
형국에서 학들이 출입하는 문쪽이 철새 도래지가 보인다는 하단 방면이 된다.
  하단. 품행을 단정히 하고 스스로 낮추는 마음(하심)을 지니라는 뜻과 통하는 하단은 
바로 가정교육의 지침을 보여준다. 이에 걸맞게 그곳에는 부산 사학의 명문인 동아대학교 
하단 캠퍼스가 있다.
  이러한 개개의 지명발복들은 사하의 풍수에 있어 전체적인 음양조화까지 갖추고 있다. 
사하의 진산인 승학산과 음양조화를 일으키는 주작은 다대동이 된다. 춤을 추며 날아드는 
주작상무를 풍수에서는 최고의 길격으로 쳐주는데다가, 다대동 몰운대를 돛을 펼친 
배모양으로 끼고 도는 솔섬, 고리섬, 쥐섬의 삼도귀범이야말로 주작상무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사하의 풍수는 부산 전체의 풍수와도 조화를 잘 이룬다.
  부산의 풍수는 갈마음수형이다. 물을 마시는 말의 입자리가 바로 감천동이다. 말의 
입자리 옆에 천마산도 있지만 음식(독지: 구평동)과 단물(감천동)이 말의 입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된다. 목마른 말(갈마)이 물을 마시면(음수) 물의 기를 얻어 부산 전체가 
발복한다. 물을 마시는 그곳, 말의 입부분에는 감천 화력발전소가 있다.
  감천 화력발전소에서 송출하는 전기는 부산시에 광명의 혜택을 주니 제 복 따라 제자리 
찾아들어간다는 풍수 격언이 맞는 듯하다.
  이를 달리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목마른 말에겐 물이 필요한데 
불(화력발전소)이 있으니 수극화의 흉에 해당하는 게 아니냐는 풍수적 해석들이다. 
이러한 해석은 전체적인 본을 모르고 부분적인 말(끝)에 사로잡힌 자가당착으로 오늘날 
이 땅 풍수지리의 커다란 병폐이기도 하다. 필자가 직접 지도하고 있는 회원들에게 
패철의 오행적 해석은 말(끝)에 해당된다고 강조하고 본(근본)을 목적으로 하는 
풍수해석을 언제나 강조하고 있다. 산을 보지 않고서 어찌 방안에 앉아 패철의 바늘로 
풍수를 논할 수 있겠으며 설령 산을 보더라도 눈이 트이지 않아 가슴으로 와닿지 않는 
풍수를 풍수라 할 수 있겠는가.

  몰운대 삼도귀범은 주작의 극치
  그런데 사하의 풍수 중 가슴이 아픈 대목이 있다. 무분별한 개발로 삼도귀범의 하나인 
솔섬의 앞머리가 심하게 날아가버린 것이다. 사하의 풍수에 있어서 주작상무의 훼손도 
되지만 다대동 자체의 문제도 되는 것이다. 다대동 옛 첨사영 자리를 
잡아보고(자좌오향), 패철로 솔섬의 방향을 논하니 오황살방(진방손방) 자리에 해당됨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솔섬이 없어지면 다대동은 풍수상 흉지가 되며 해풍이 그곳으로부터 
밀어닥쳐 다대동의 자연을 망쳐놓는다.
  자연이 조화를 이뤄놓은 땅인 사하의 풍수에 이러한 자연훼손으로 부조화를 일으키고 
있으니 큰일이다. 풍수적으로 이 같은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림설명: 사하의 풍수는 낙동정맥의 끝점답게 세보다는 형을 잘 이루고 있고, 마을의 
지명도 전체적인 풍수의 조화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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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좌오향: 향은 바라보고 있는 앞쪽을 말하고 좌는 향에 반하여 180도 뒤쪽을 말한다. 
자는 북쪽을 가리키고 오는 남쪽을 뜻하니 자좌오향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진방손방: 남동쪽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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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산에서 뻗은 기 몰운대에서 마무리--사하(1)

  낙동정맥의 여기로 몰운대 앞바다 섬 형성
  "백두의 운이 낙동의 우에 지정할 적 정운의 절마저 부여잡은 한 점의 몰운대여."

  부산의 3대는 해운대, 태종대, 그리고 몰운대이다. 4대일 경우는 용호동의 신선대가 
끼여든다. 8대의 경우에는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지만 흔히 오륜대, 의상대, 겸효대, 
강선대를 말한다.
  그 중 강선대는 네 곳이나 된다. 북구의 하강선대, 상강선대, 사하구 하단에 있는 
강선대, 남구 문형동의 강선대가 그것이다. 동래 8대를 논할 때는 또 달라진다. 그 
중에서 몰운대는 풍수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안개와 구름이 찾아드는 날에는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아 붙여진 몰운은 임진왜란 
먹구름에 정운 장군이 구국의 선혈을 뿌린 곳이기도 하다. 또 운무의 백두정기가 낙동의 
물자락과 장단을 이루던 6백리 정맥의 춤이 운을 몰한 풍수의 한 점 몰운.
  운우지정의 끝점답게 이별 앞에 펼쳐진 손수건마냥 그 앞으로 열 개의 섬들이 
눈물자국처럼 떨구어져 있다. 이를 풍수용어로 여기라고 한다. 몰운대는 낙동정맥의 끝이 
되지만 여기가 넘쳐서 그 앞에 열 개의 섬들을 이루어놓았다는 것이 풍수적 해석이다. 
음택(묫자리)에서 몰운대는 순전에 해당하고 이러한 증혈이 있어야만 그 아래 무덤을 더 
쓸 수 있다는 것이 풍수의 법칙이다.
  이렇듯 명당의 절색을 갖춘 몰운대의 길기는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필자가 
답산해보았는데, 금정산 계명봉에서 고당봉으로 기를 상생시키던 낙동정맥은 금정봉에서 
일지맥을 정묘의 주산인 화지산으로 뻗어있고, 일단 백양사에서 기를 모으고 있다. 
백양산 정상에 올라본 사람은 소백산 능선과 흡사함을 느낄 것이다. 두산 모두 기를 
후덕하게 뿜는 산이다. 그래서 서로 이름이 '밝'이라는 백자가 붙어 있다.
  이어서 구덕산에 이른다. 구덕산을 중심으로 볼 때 이 곳의 기는 부산 지역에 
퍼져나가는 형세를 띤다. 시약산에서 금치산 그리고 봉화산을 이어 다대동 아미산을 거쳐 
몰운대에서 마무리가 되는 게 확실하다. 이는 우리 고유의 산경표의 원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승학절개 꺾으려 산불량이라 호칭
  사하의 당리동과 괴정동의 경계에 있는 산을 산불량으로 부르는데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태백의 줄기가 이곳에서 끊어졌기에 몹쓸 산이라는 망발의 해석과 더불어 
아직까지 이렇게 부르고 있다. 단언하건대 우리 선조들은 우리 강토에 그런 치욕적인 
이름을 붙인 적이 없다. 자신의 부모인 강산에 작명하여 불량자로고 부르는 자식이 
세상천지 어디 있겠는가. 설령 부모에게 흠집이 있더라도 오히려 비보로서 절을 짓고 
당간과 당산으로 흠집을 없애려 하였다.
  이는 분명히 남의 집 자식의 소행이다. 임진왜란 때 명의 이여송이 경주 부근 
치술령까지 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나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일제 
식민풍수의 장난질이라고 볼 수 있다.
  산불량이라는 그곳은 장막을 개장하면서 지자의 출마에 대마출성형이다. 한 폭의 
군마도와 같은 명당인데 얼과 설의 풍월에서조차 감추려했던 저의는 무엇이었을가.
  바로 옆에 있는 사하구의 진산인 승학산의 기세를 끊기 위해서였다. 승학의 기가 살아 
신선이 타고 온다면 해방의 경사이며 승학이 퍼덕임은 만세운동이 된다. 때문에 저들은 
승학의 공급선 위치 바로 앞산을 죽이는 '산불량' 행위를 자행했다. 두 산의 조화를 
없애려는 것이 '산불량'인 것이다.

  동매산 호복구도 호도된 풍수설
  이는 승학산 바로 앞산인 동매산에서도 검증이 된다. 동매산의 이름을 이곳 향토지에서 
찾아보면 동뫼에서 나왔고 동뫼는 독산이다. 동매산 부근에 독산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동매산과 독산을 혼용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습관을 볼 수 있다.
  문제는 독산에 있다. 풍수지리의 원천인 (장경)에 아주 나쁜 대표적인 흉산 다섯 개가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독산이다. 해석(청오경의 주)을 보자면 독산은 음양조화가 
끊어져 새로운 흉액이 생기고 이미 누리던 복마저 사라진다(독산...능생신흉 능소기복).
  이러한 독산, 즉 동매산을 호복구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 전통의 풍수형국 분류에서 
복호나 와우는 있어도 호복이나 우와는 없다. 호랑이가 엎드려 있다면 복호가 되며 한문 
문법에도 맞는다. 호복이라면 원래부터 드러누워 있는 호랑이를 말하며 풍수의 
해석에서는 죽은 호랑이를 가리킨다.
  게다가 구는 왜 끼여들었을까. 양택풍수에 있어서 마당에 큰 나무가 있는 집을 흉가라 
한다. 이는 상식적으로 알 수가 있다. 큰 나무는 뿌리가 땅 속으로 파고들어가다 건물의 
주춧돌을 감아버려 그 집의 기초를 흔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풍수에서는 이를 담에 갇힌 
마당 모양의 형상인 구 자에 나무 목자가 들어간 곤자는 곤란한 곤자가 되니 흉가라고 
풀이한다. 호복은 죽은 호랑이고 여기에 구자는 호랑이를 묻는 관이 된다.
  사하의 풍수상 식민풍수의 악의가 깔린 두 지명이 승학산 앞과 뒤에서 포위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땅의 지명들은 70퍼센트가 풍수지리에 의하여 
붙여졌다는 주장이 있다. 필자 역시 충분히 동감한다. 풍수적 견해를 배제한 지명풀이는 
가끔 언어의 폭력이 되기도 한다. 우리 강산을 함부로 '산불량'이라 덩달아 부를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식별불량'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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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전: 무덤 아래쪽에 입술을 내민 듯한 지표의 형상을 말한다. 생기가 혈자리에 
사용되고 남은 기운을 걸러내는 현상에서 생긴다. 이에 반하여 무덤 위쪽에 매미날개처럼 
혈자리를 감싸는 지표의 현상을 선익이라 하는데 혈은 선익과 순전의 사이에 있다. 
이것을 찾는 것을 정혈법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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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인무수 명당도 매국노에게는 화--사하(2)

  명당에도 주인 있다는 '소주길흉론'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을 빠르게 발음하면 '한님'이 되고 한님을 한자로 표기할 때 
환인이 된다. 한님은 바로 우리 민족을 하늘에서 내리신 분이다. 반만년 전 우리 민족이 
내려온 곳을 청구라 이르고 밝은 땅이라는 뜻의 밝땅이라고 한다고 (한단고기)는 적고 
있다.
  그후 밝땅은 '배달'이라는 말과 통하여 우리 민족을 배달민족이라 한다.
한님은 우리 민족을 덜렁 빈 몸으로 내려보낸 것이 아니라 먹고 살만한 의식주 보따리도 
함께 보냈는데 이를 하늘 아래 두루 지켜주는 것이 천하대장군이며, 지하에서는 
지하여장군이 그 임무를 맡고 있다.
  처음 배달민족은 하늘 뜻 그대로 평온하였다. 그러나 산에서 들로 내려오자 비옥한 
배부름에 취해 밭이랑을 다투게 되었고, 활이 만들어지자 전쟁을 일으켰고 승자는 
양반이라는 감투를 썼다. 이에 반대계층으로 상민이라는 차별이 생기고, 이젠 배 다른 
민족처럼 되어버렸다.
  마을 동구에서 이를 지켜보던 지하여장군은 허덕이는 민초들에게 다른 땅을 
가르쳐주었다. 이것이 바로 도참사상의 십승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승지의 특징은 
빼앗은 양반이 찾지 못하게 입구가 호리병처럼 첩첩산중에 둘러싸여 있고 일단 기어 
들어가면 활개칠 수 있는 민초에게는 명당이지만 하늘 뜻을 거스리는 양반에게는 흉당이 
된다.
  풍수에 소주길흉론이 있다. 발복의 욕심에서 흔히 하관일시와 분금에 망자와의 운을 
맞추는데 급급하지만 이는 짧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배달민족의 터전인 밝달의 명당을 
정하는 데 하늘을 거역할 때 밝달의 강토는 이를 거부한다. 이를 천리지행이라 한다. 
하늘의 뜻을 땅이 집행한다는 뜻으로 흔히들 땅과 인간의 관계를 따지는 소주길흉론의 
대원리이기도 하다.
  후손대대로 이어지는 부귀영화 발복에 선인마저 춤을 주는 선인무수형의 천하 명당터에 
팔도의 명지관을 모조리 불러와 좋다는 것은 다 맞추어 1926년에 묘를 쓴 곳이 있었다. 
그러나 발복은 커녕 1979년 후손에게 폐묘당하고 시신의 뼈는 강물에 뿌려지는 욕을 
당하였다.
  왜 그랬을가. 그 묘는 바로 배달민족을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의 것이었다. 그곳은 
전북 익산시 낭산면 내산동으로 폐묘 당시 아카시아 뿌리들이 관을 파고 들어가 시신을 
감고 있었다.

  다대동 박영효 묘 이장된 사연
  이와 유사한 무덤이 사하 아래인 다대동에도 있었다. 이완용 내각에서 궁내부 대신을 
지내면서 일제의 녹을 받아먹은 박영효의 무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역시 1958년에 손자에 의해 폐문, 이장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박영효 생전에 전국의 
풍수사들을 동원, 조선팔도를 답산하여 선정된 명당답게 누가 보아도 음택의 명당임이 
확실하다.
  삼도귀범의 조신사는 명당을 더욱 발복시킬 조화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왜 발복은커녕 
폐묘, 이장당하였는가. 이를 배달민족의 시각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곳 부산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의 첫 상륙지였던 만큼 격렬한 저항지였고 처절한 
전장이기도 했다. 3대 순절신의 최후는 장엄하기가지 했다. "나는 마땅히 이 성의 귀신이 
되련다"라고 한 부산진 첨사 정발 장군의 서슬 퍼런 혼백과 함께 동래부사 송상현의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전사이 가도난)는 민족혼이 서려 있다.

  윤홍신공 구국항전은 천리지행
  나머지 순절신은 바로 이곳 다대포 첨사 윤홍신이다. 구사맹의 조망록을 살펴보면 
윤홍신이 왜적을 한 번 물리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임란 초기의 최초의 승리인 
셈이다.
  이로서 왜적의 공격은 복수전 양상에 돌입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튿날 대부대와 
합세한 왜적에게 윤홍신의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외친 구국항전은 처절한 
살육으로 막을 내린다. 필자의 견해로는 그때의 상황과 이곳의 지리적 여건상 이곳 
다대포 사람들이 모두 몰살당한 것 같다. 이곳 향토지의 기록으로는 다대포진의 정확한 
함락 날짜가 어느 문헌에도 없고 윤홍신 이전의 참사 인명록은 전혀 알 길이 없으며 
순절신 윤홍신마저 임란 이후 170년이지나서야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하니 참으로 
변방에서 외롭게 싸우다 함락된 다대포진이었다.
  하늘에서 점지한 밝달의 땅에서 벌어진 살육전을 보고 있던 지하여장군과 배달민족을 
길러왔던 낙동정맥은 자신의 혈맥이 끊기는 아픔을 당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4개월 보름 
뒤 몰운대의 바다 위에 아침 안개를 뚫고 대전단이 나타났다. 배달민족의 대설욕전을 
치를 이순신 함대였다. 녹두만호 정운 장군을 선봉으로 하여 이곳 몰운대에서 치고 
들어간 이순신 함대의 위력은 왜적의 턱밑인 부산포까지 몰려가서 그들의 함선을 장작 
패듯 통렬히 날려버린다. 이 부산포에서 한산대첩에 이어 겨우 남아 있던 왜적의 
숨통마저 끊어놓아 임진왜란의 승패를 사실상 갈라놓았다. 이 부산포 해전은 1592년 음력 
9월 1일이었고 이를 오늘날의 양력으로 계산한 10월 5일은 바로 부산 시민의 날 제정 
유래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산포 해전 몰운대 전투에서 민족의 용장 정운 장군은 희생되고 말았다. "나는 
이미 적과는 맹세코 같이 살지 않기로 하였다"는 항전 유언을 남긴 채 장렬히 
산화해갔다. 이러한 배달민족의 얼, 배달은 밝달이며 밝달은 밝은 땅, 밝은 땅은 명당과 
이어진다.
  박영효는 명당을 찾기는 했다. 하지만 배달의 얼이 서린 윤홍신의 산자락을 좌청룡으로 
삼았고 밝달의 몰운대와 정운 장군의 충렬을 신하로 삼으려는 풍수 말단의 좌향을 잡은 
격이 되었다. 박영효의 무덤 앞에 정운의 넋은 무릎을 꿇지 않았을 것이며 윤홍신과 
다대의 선열들은 박영효를 품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풍수법칙으로 검증하면 좌청룡의 
거부와 주작의 배역세는 흉지가 된다. 그래서 박영효의 무덤은 폐묘당한 것이다.
  "그곳은 이 충무공이나 안중근 의사가 묻혀야 발복한다"라는 밝달의 천리지행이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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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주길흉론: 아무리 명당이더라도 그곳에 묻힐 자격이 있는 자가 아니면 발복의 길흉이 
땅의 거부로 바뀌어버린다는 뜻이다. 권력에 눈이 어두운 자가 함부로 권세의 자리에 
앉는다면 그 자리가 화가 되어 패가망신하듯이 땅에 있어서도 폐묘의 욕을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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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산 세 두 갈래로 뻗은 옥녀격고형--해운대(1)

  해운대의 중심은 오늘날 중동
  5리면 된다기에 다 왔구나 싶어 물으면 아직도 10리 더 남았다는게 한국인의 
현문우답이라 할까. '익으면 오리요 설면 십리쯤 된다'는 이러한 정서는 아리랑고개에 
꼬부랑 모퉁이를 돌아야 하는 우리 산천의 곡선자락을 직선거리로 판단하는 데서 오는 
것이니 오히려 현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거리가 해운대에도 있다. 예부터 이곳에는 신선들이 있었으니 최치원, 김겸효, 
소가 선생이 그들이다. 향토지의 기록에 따르면 최치원의 동백섬 근처에 겸효대가 있었고 
소가 정 역시 부근에 자리했다고 한다. 두 신선이 바둑을 둘라치면 거기에 못 낀 신선 
하나가 자기 집 창문만 열면 바둑판이 보일 듯한 곳에 앉아 있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이를 옛 기록 (승람 동래부지 봉래별곡)을 검증하면 겸효대는 배산 허리에 
있었으니 동백섬에서 십오리나 떨어져 있고, 소가정은 북쪽으로 삼십리를 더 가야 있으니 
우문에 현답이 된다.
승람의 기록에 소가 선생이 흰 사슴을 타고 금거북을 탄 선인과 놀았다는 구절이 
있다(소가상승백록흥금구선인...).
  이를 학계나 식자들은 사슴과 거북은 신선놀음 타령쯤 되겠지 하지만 풍수로 풀면 
확연한 의미가 잡힌다.
  금거북은 금정산의 금과 구올산(구월산)의 거북 구다. 그리고 백록이란 동래온천(옛 
지명 백록온천)을 가리킨다. 선인은 당연히 소가 선생이 된다. 물론 검증에서도 
동래온천과 구월산 자락 근방인 장전 2동 부근에 소가정이 있었음이 밝혀진다. 
구(구월산)는 이곳 지역의 중심점(승람에 진산으로 기록됨)이 된다. 풍수의 세가 구이며 
형은 야자라서 좌회전하여 품은 그곳을 구야온천이라 하기도 구월산의 남쪽 방향에 있는 
해운대 온천을 옛적에 구남온천이라 부른 기록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해운대의 중심은 구남온천을 중심으로 한 바로 오늘날 중동인 것이다. 중동 
좌측의 좌동과 우측의 우동 역시 풍수의 좌청룡, 우백호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해운대를 소쿠리터라 하여 이곳의 향토지에 잘못 소개되고 있으니 이는 등잔 밑에서 어둠 
타령하는 우문현답쯤 된다.
  소쿠리는 곡물을 담았다가 가득차면 퍼내는 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소쿠리답게 
양기풍수상 고작해야 가옥 50여채 정도의 범위를 한정할 때 논하는 것이지 수십만호가 
들어설 해운대의 대지를 소쿠리터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는 묫자리나 쑤시던 콩알 
만한 풍수쟁이의 눈에 대지가 소쿠리로 보여 '설풍수 해운대 잡네'식이 된 것이다.

  중동 사람들의 낭만, 개방적 특성
  이제부터 해운대의 정확한 풍수형국을 밝혀보기로 하자. 먼저 낙동정맥은 취서산을 
거쳐 천성산에서 금정산으로 연결된다. 금정산에서 빠져나온 일지맥이 동래를 이루었고 
이에 앞서 천성산의 세가 원효산을 거치면서 덕계리의 용천산 그리고 백운산과 함박산의 
줄기를 타고 이곳 장산에 이르러서 해운대의 형국을 이뤄놓으니 장산은 해운대의 진산인 
동시에 부산의 좌청룡이기도 하다.
  장산의 기세는 한마디로 너무나 좋기 때문에 해운대의 형국을 두개나 만들어놓았음을 
볼 수 있다. 앞서 살핀 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형국과 또 하나는 반여동을 중심으로 하는 
풍수가 그것이다. 그런 반여동을 중심으로 하는 그곳의 주민들이 보수적이며 
전통적이라면 중동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낭만적이고 개방적인 특질이 있다. 이는 
백두대간 자락을 경계로 하여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달라지듯 이곳의 
풍수형국이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중동을 중심으로 한 풍수의 형국을 살펴보자.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장산을 
쳐다보면 장산 중간허리 부근의 산형들이 봉곳하게 튀어나온 것이 보인다. 그러한 산형을 
풍수에서는 옥녀(젊은 여자)형이라 한다.
  이곳 풍수의 형은 옥녀가 된다. 그렇다면 이곳의 국은 어떻게 해석이 될까. 옥녀의 
좌측 팔에 해당하는 산자락에는 구곡산이 있다. 이는 곡의 '곡조'이고, 부흥산의 흥은 
'박자'라 할 수 있다.
  이어 와우산이 엎어진 모양을 보면 '북'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북을 치려면 북채가 
있어야 한다. 북채는 옥녀의 오른팔에 있다. 바로 동백섬이 '북채머리'에 해당된다. 
이러한 형국은 옥녀가 북을 친다는 옥녀격고형에 해당한다.

  동백섬도 옥녀의 북채에 해당
  젊은 여자가 북을 치면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피서철에 백만 인파가 
해운대로 몰려드니 부산하면 해운대가 연상된다고 외부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대중가요 
가사에도 들먹여지는 동백섬 역시 옥녀의 북채에 해당된다. 이는 바로 해운대 풍수형국의 
발복인 것이다.
  그러한 발복의 힘은 마땅히 북채에 해당하는 동백섬의 지세에서 시작된다. 북이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북채가 움직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동백섬에 서린 해운 
최치원의 이름에서 오늘날 해운대가 지명 발복되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동백섬에 서린 해운은 이곳 풍수의 첫 출발점답게 마을발복과 인물발복에 
장단을 넣어주었다.
  동백섬에서 불과 7백여미터 떨어져 있는 곳에 운촌이란 마을이 있다. 옛날에는 그곳을 
그냥 갯부락이라 불렀다. 그곳에 살던 김기원이라는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갯부락 
출신이라는 신분이 탄로나면 낙방시킬까 봐 시험관에게 해운의 장단에 맞춰 "운촌이요" 
한 것이 오늘날의 운촌이 되었다. 이러한 지명 타령은 산너머 송정으로도 곡을 이었다. 
갈대를 한자로 가래라 한다. 즉 갈대가 많은 갯마을을 유식하게 부르자면 가래골이 된다. 
그곳 가래골 선비 노영경 역시 가래골 출신이라는 게 탄로나면 자격이 박탈될까 
고심하다가 앞의 운촌 선비의 기지를 발휘하여 지천에 깔린 소나무를 끼워 
"송정이요"하였던 것이 오늘날에 이른다. 그는 조선말기 호조참판의 벼슬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발복을 주었던 장본인 해운 최치원은 벼슬과 명예를 모두 버리고 무심한 
해운대를 신선처럼 거닐었으니 풍수로 해운 최치원을 더듬어보기로 하자.
  (그림설명: 동래의 진산인 구월산 남쪽의 구남이 바로 해운대의 중심점인 중동이 
되는건 풍수의 이치이다.)
  백두대간: 백두산에서 시작, 지리산에 이르는 큰 줄기 산자락을 말한다. 얼마전 필자가 
금정산장에 머물 때 만난 부산 산악인들이 백두대간은 잘 알고 있어도 낙동정맥은 모르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백두대간의 한자락이 낙동강이 시작되는 강원도 황지못과 그 근처 태백산과 어우러져 
시작된 산줄기가 낙동정맥으로 남쪽으로 천리를 내려와 금정산을 이루고 다대동 
몰운대에서 낙동강과 끝을 마무리하는 우리 고유의 산명이다.
  항간에 태백산맥, 금정산맥, 금련산맥의 하는 것들은 식민정책상 광물적인 분포도를 
기준으로 한 일제의 1903년 고토 창씨개명 때의 명칭이다. 그러므로 우리 산을 사랑하는 
산악인은 떳떳한 우리의 이름인 '낙동정맥'을 사용하기 바란다.
  아울러 혹자가 풍수서에 낙동정맥 대신 태백산맥의 기록을 나열한 명칭이 있다면 
거의가 식민풍수사관이든가 풍월풍수로 보면 정확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산이다.

    옥녀, 선인 조화 이룬 와우적초안--해운대(2)
  
  해운대 절경에 취한 최치원 '해운'으로 호 바꿔
  선인은 풍수에서 주연급으로 자리매김된다. 선인독서형, 선인대좌형, 선인무수형, 
이러한 선인 둘이서 바둑을 둘 때는 이선대기형이 되고 주위에 훈수꾼까지 있으면 
오선위기형이라 이른다.
  남과 북이 6.25 대국을 하는데 미국, 소련, 중국이 훈수를 두었다고 하여 우리나라를 
오선위기형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선인이 해운대 풍수에서 실존적 인물로 
등장했는데 그가 고운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이곳의 절경에 취해 자신의 호를 해운으로 
부르며 머물렀다. 이것이 오늘날의 해운대의 유래이다.
  목전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현실적 출세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도 있다. 누가 소인이고 대인인지 모르지만 이러한 대나 소를 
모두 속의 티끌로 보고 산으로 들어간 사람이라면 가히 선인이라 할 수 있다.
  최치원은 왜 그 당시의 현실을 속의 티끌로 알고 고운, 해운속으로 몸을 겼을까. 이를 
유추하면 풍수의 뼈 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있어 흥미롭다. '뼈대있는 집안의 자손'이란 
말은 풍수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와 유사한 성골, 진골 등의 뼈대를 가리는 골품제도는 
신라 말기 국운쇠약의 원인이기도 했다. 최치원 같은 유능한 인재도 소위 반골이라는 
이유로 관직 등용에 한계가 있었고 이는 인화단결을 저해하는 불씨였으며 마침내 신라를 
멸망위기로까지 몰고갔다.
  그 시기 등장한 사람이 고려의 왕건이다. 최치원은 마지막으로 최선책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재등용에 뼈대를 논하지 말자는 그의 시무책 진언은 골품세력에 의해 
저지당하고 만다.
  계림황엽 곡령청송이라는 풍수적 예언이 바로 최치원이 남긴 문구라고 일반적으로 
얘기되지만 근거가 희박하다. 계림황엽의 계림은 경주의 계림숲을 가리키니 곧 신라다. 
그러면 곡령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왕건의 세력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갖가지 해석이 
살을 붙이고 있으나 곡령에서 밑받침만 빼면 '고려'가 된다. 그러므로 고려청송으로 
문맥이 연결되긴 하는데 이러한 발상은 한글이 창제된 5백년 이후에나 가능한 파자이다. 
이는 후세 사람이 해운의 심정을 헤아려놓은 풍수 문구로 보인다.
  이러한 심정이던 해운은 가야산에서 선이 되니 이는 신선을 말하는 것이며 신은 천과 
통한다 하여 천부경 81자를 남겼는데, 오늘날 천부경을 풀었다는 이상한 사람들도 있다.
  해운은 하늘을 가리켰을 뿐인데 이를 풀었다면 그것은 해운의 손금을 열심히 푼 
꼴이다. 천부경은 푸는 것이 아니라 통하는 것이다. 그런 수준의 천부경이라면 
어지간하면 줄줄 풀린다. 가장 난해하다는 마흔두번째 글자인 생과 성, 운과 환을 같은 
문리로 놓으면 나머지는 불경 자락만 잡아본 사람이면 풀 수 있다.
  그러나 천부경은 이러한 방정식도 신비한 주문도 아니다. 가섭의 미소가 어찌 연꽃 
하나에 매달렸겠는가. 설령 달마의 짚신 한짝인들 어찌할 것인가. 하늘의 현묘지도에 
통하였던 해운도 이곳의 풍수로 선인이었으며 더욱이 젊은 여자인 옥녀의 자락에 맞춰 
거닐 때 이곳 특유의 운무는 북채인 동백섬과 북인 달맞이고개를 휘감고 돌았을 것이다.

  봉림과 오산은 같은 뜻
  달이 뜰 때 달은 산에만 걸린 것이 아니라 바다를 적신 해월이다. 오륙도 저편의 
밤바다 또한 월광에 취하니 이 아니 절경인가. 춘원 이광수는 이렇게 노래했다.
  '앉으면 해월이요 누우면 산월이라 오륙도 돌아가는 배도 달을 싣고 간다네.'
선인의 풍류와 옥녀의 풍수에 걸맞게 해운대에는 봉황도 있었다. 달맞이고개 아래쪽에 
있는 오산마을을 옛날엔 봉림마을이라고 불렀다.
  봉황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 말기 풍수설에 의하여 지형이 오동잎처럼 
생겼다 하여 오산으로 개명되었다고 이곳 향토지는 적고 있는데 봉림의 개명된 것은 
아니다. 오동나무에 깃든 봉의 형(오동봉루형)에서 볼 수 있듯이 봉황이 사는 나무, 
봉림은 바로 오동나무를 가리키는 때문이다. 즉 둘은 같은 뜻이다.
  그런데 오산마을을 한참 들여다보노라면 봉황의 기는 없고 집만 덜렁 남아 있는 
모양이다. 혹 해운이 가야산으로 갈 때 청학보다 더 높은 봉황을 타고 가버린 것은 
아닐런지.

  신도시 개발로 오산의 발복 꺾을가 우려
  하늘이 열리고(개천) 이 땅에(청산) 사람(인)이 내려왔으니 '신-->선-->인'이다. 인의 
속에 살아가자니 티끌이 싫어 해운은 천부경의 한 수를 보여주면서 '인-->선-->신'으로 
거슬러올라갔던 것인가. 덜렁 남은 봉황의 집이지만 마주하는 와우산과 기막힌 풍수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소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꼬리 부근에는 미포라는 지명이 있다. 
오산은 이런 와우형에 있어서 소의 먹이라는 적초가 된다.
  이를 와우적초안형이라 한다. 요즘 한창 진행중인 신도시 개발로 오산이 밀려 없어질 
경우 소의 발복인 와우적초안이 파괴될까 걱정이다.
  이를 현대 지리학에서는 흔히 완충공간으로 풀이한다. 해운대에 기를 주는 산은 
해운정사 뒷산인 150미터 고지가 된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해운대고등학교 쪽까지의 
선이 바로 해운대의 공급선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선상에 오산이 안산 역할을 하고 
있다. 신도시가 들어서면 해운대는 주거단지와 관광단지의 혼합형이 된다. 그럴 때 
피해는 주거단지에 쏠린다. 그러나 오산을 보존하면 주거와 관광단지의 경관을 녹여주는 
순화작용을 해 주거의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된다.
  이를 풍수 특유의 해석으로 표현하자면 안방(주거)의 밥상(오산)을 식객(관광단지)이 
먹어치운 격이다. 벅수나 장승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또한 오산이다. 앞으로의 신도시는 
구곡산을 중심으로 좌를 삼고 이를 축으로 향을 잡는다면 이는 금계포란형이라는 
풍수형국의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해운대에 형국이 하나 더 생기게 되니 이 또한 선인의 조화라 할까.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인 해운대 형국의 또 다른 풍수는 어떤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 장산 서쪽에 위치한 반여동으로 넘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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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우적초안: 형국이 길지가 되려면 이와 조화를 이루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안이라 한다. 즉 와우형-적초안(소 앞의 풀더미). 복호형-면견안(호랑이 앞에서 
조는 개)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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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뭄 들지 않는 비옥한 장군대좌형--반여, 반송

  반여동의 혈자리 '천장비지' 명당
  곰이 마늘을 먹고 여자가 되어 한웅과 결합하여 단군왕검을 탄생시켰다는 '곰타령'이 
있다. 또한 우리나라 모양이 토끼같이 생겼다는 '토기타령'이 있다. 이런 이야가들은 
곰같이 미련한데다가 토끼같이 힘도 없다며 민족의 기를 죽이려는 식민주의자들의 
농간이었다. 전자를 식민사관이라면 후자는 식민풍수가 된다. 이러한 '토까타령'은 
'88올림픽 때 호돌이 마스코트로 불식되었으며 '곰타령'의 허구는 민족사학자들에 의하여 
밝혀졌던 것이다.
  한웅의 '한'은 '하늘'이며 '곰'은 '땅'을 가리키니 이는 천지의 조화를 뜻한다. '검, 
곰'은 신과 통하여 구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오늘날 문제는 그것을 마치 만병통치약인 양 남발하여 사용하는 데 있다. 
구포는 신이 와서 닿은 곳, 구야온천은 신의 샘, 감천은 신의 물, 당감은 신의 집, 
구봉산은 신의 봉우리, 부산의 지명들이 이렇듯 '신'의 굿판처럼 되어버리자 항간에서는 
주창자들마져 주춤거리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풍수에서도 패철을 만병통치약인 양 사용할 때 이런 덫에 걸린다. 이런 언어의 장난은 
자신의 맥락과 체험을 갖지 못한 자가 권위있다는 문헌들의 여기저기 짜집기한 
손놀림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런 와중에서 얻은 박석현 씨의 (윤산문화)라는 작은 책자는 
소박하지만 향토적 냄새가 물씬 풍겨 반가웠다.
  해운대의 풍수 중 동편은 옥녀격고향이지만 서편인 반여동 일대는 반자로 시작되는 
형국이 된다. 풍수에 있어 반자는 특별한 형을 가리키며 그 대표적인 예가 금반형이다.
  금반형은 36대를 두고 장상을 발복시킨다는 소문을 들은 명나라 이여송은 그의 외손자 
두사충이 조선에 가서 살겠다고 할 때 소개한 풍수의 형국이기도 하다.
  구체적 지점은 경기도 여주군 홍천면 외사리를 말하는데 그곳은 필자가 자주 갔던 
곳이기도 해서 여주의 금반형과 반여동의 풍수 감상은 다르다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또한 반자형의 풍수에는 옥녀격고형도 있다.
  이러한 반자형들은 지세가 선명하여 물난리가 들지 않고 두부를 자르듯 질퍽한 
비옥함에 가뭄도 들지 않는 득수이기도 하다. 여주가 그러한 반자의 풍수형국이라면 
반여동은 반자에 기운이 서린 여자가 하나 더 붙는다. 즉 대라는 자리(반)에 장군(여)이 
앉아 있는 형국이 바로 반여동 일대이다. 이를 장군대좌형이라 하며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를 근거로 하여 그곳을 살피면 좌청룡 자락에는 재송(솟대)동이 있고 우백호 
자락에는 반송(벅수나 장승)의 지명 발복으로 호위하고 있다. 이는 혈자리보다 국면의 
개념인 형국이 기세좋게 살아 있음을 뜻한다. 이를 풍수에서는 대지라 하며 이런 자리에 
혈이 있다면 하늘이 감추어놓은 천장비지가 된다.

  군도산, 군량대, 군량소 갖춘 투구봉 기세
  옛적 이곳으로 혈자리를 찾던 풍수들이 몰려왔다가 모두 실패했던 까닭은 대지에 
개안하지 못하고 혈자리는 하늘이 감추어놓았으니 입은 벌어지고 눈은 막혀서 그런 
것이다. 이러한 반여동 풍수의 신비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면 이곳 사람들이 
흔히들 투구봉이라고 하는 곳은 오히려 장군대좌형이라 해야 맞다. 그 옆에 
군도산(칼집)이 있고 관사 자리에 병락갓(연병장), 군량대(보급식량), 인반석(장군의 
인장) 그리고 군량소(식수)가 있으니 이쯤 되면 일국의 대회전도 치를 만한 풍수의 
기세가 된다.
  게다가 오봉의 가야금, 진중 위문대까지 갖춘 명당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를 
알아보려면 주위 형국의 범위로 눈을 넓혀야 한다. 바로 앞면에 중군진산이 있다. 진중을 
지휘할 장군이 필요하기에 이는 장군대좌형의 형국이 된다. 북서쪽에는 말이 급히 
뛰어오는 추마산이 있는데 이를 풍수상으로 보면 치마산(장경에 고마지치와 치마형이 
나온다)이 옳은 표현이 된다.
  더구나 동래의 형국이 야자이기에 전체적인 풍수의 조화를 이를 수 있다. 이는 
장군출진형의 기세인 것이다. 북쪽에는 깃발이 나부끼는 기치산이 있다. 이는 
장군전기형의 형국을 이룬다.
  이로서 반여동의 명당은 세 곳임을 알 수 있다. 그 중 장군대좌와 전기형은 
양기풍수적인 발복이지만 치마산은 한 필의 명마에 명장 하나이기에 혈자리, 즉 
천장비지의 명당이 된다.

  치마산의 천장비지 폐혈된 이유
  이를 토대로 하여 더욱 접근해보자. 장군대좌형국으로는 장군(조병청장) 깔고 앉은 
격이니 제대로 발복된 셈이다. 다음으로 치마산과 연유된 천장비지의 명당 주인은 
누구인가. 먼저 천장비지는 폐혈되었음을 밝힌다. 그것은 1582년에 폐혈되었는데 그 
사연은 이러하다.
  선조 9년 동래 객달리(명륜동)에서 나이든 여인이 유복자를 낳았는데 아이가 어릴 
때부터 삼성대(대동병원과 해바라기 맨션 일대)에서 밤마다 신병을 훈련하는 것이었다. 
소문은 조정까지 알려졌고 조정은 겨우 7세된 어린 아이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사형집행시 아무리 칼로 쳐도 아이는 죽지 않았다. 그 연유를 묻자 김장군의 칭호를 
내리라는 것이었다. 김장군의 현판이 내려지자 김장군은 힘금을 향해 통곡을 하였다. 
"소인이 죽은 10년 후에 상감께서는 소인을 생각하시리라."
  김장군이 죽은 10년 후에 임진왜란이 터졌던 것이다. 아직도 김장군의 제사는 동래 
경로당에서 지내주고 있다. 장군이 죽으면 명마혈도 폐혈됨은 당연한 풍수의 법칙이다.
  박석현 씨의 (윤산문화)를 읽다 보면 치마산의 혈이 폐혈되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기록에 있는 말발굽 혈자리는 풍수의 원리와도 일치한다. 동래부사 순절도를 보고 
있노라면 동래를 지켜야 할 장군인 경상 좌병사 이각이 줄행랑을 치는데 그가 탄 백마를 
보면 억울하게 죽은 김장군과 폐혈된 치마산의 명마가 비교되곤 한다.
  마지막 남은 장군전기형의 명당은 아직 남아 있다. 아마도 세월이 더 흐르고 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림설명: 장군대좌형을 완벽하게 갖춘 반여동의 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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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마지치: 풍수서인 (장경)에 보면 '기의 세는 와야 하고 형은 머무는 데 
있다(세래형지)'라 하였다. 이중 기가 몰려오는 모양이 말이 용맹하게 질주하듯 하야 
명당이라는 표현이 고마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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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타고 온 금빛물고기 놀던 천혈--금정

  금정산에 담긴 전설
  금정산의 아침은 계명봉이 홰를 치자 열리고 서녘 개구리 울음소리가 하루를 
거두어간다. 새벽 산 위에서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머니 같은 산의 
품안에서 생명들이 보채는 웅얼거림을 듣는 것만 같다. 조손지간의 정겨움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금정은 범어사를 안고 부산을 등에 입은 배산임수를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배산은 위치를 지정하는 지리적 개념일 뿐이다. 한 3일 정도의 여정으로 
금정산장에 짐을 풀고 금정산을 깊이 안아보았다. 금정산장을 11년간 지켜온 김진동 후배 
산악인들, 미륵암 주지 백운스님까지 부족한 필자의 애독자임을 알게 되었다. 범어사 
교무스님 큰방스님들까지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종무소에 단 세 권 남아 있는 
(범어사지,1989년)를 선뜻 필자에게 기증한 범어사의 성일영 과장, 이런 도움들은 태산과 
같은 짐이 되었고 필자는 이 짐을 지고 금정산의 풍수를 넘기로 작정하였다.
  당초 3일로 예정되었던 여정이 30일을 넘어서고 매일 20킬로 돌밭고 잡목더미를 메고 
지고 누비다보니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를 걸어간 작업이 되어 버렸다. 그 동안 찍은 
금정산도 명산을 뛰어넘어 영산의 풍수로 가슴을 열어주었다.
  이제 금정산의 영산과 범어사의 신비가 나눈 그 풍수 이야기를 최초로 밝히려고 한다. 
이러한 풍수는 금정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부터 시작된다.
  "산마루에 3장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자이며 깊이는 
7치 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차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 하여 그 산 
이름을 그렇게 지었고 연하여 절을 짓고 범어사라 불렀다."
  이러한 승람의 기록을 상세히 살펴보면 세 가지의 계시를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첫째 돌샘의 계시, 둘째 마르지 않는 황금빛의 물, 셋째 금빛 물고기가 바로 그것이다. 
금빛 물고기는 범어를 말함이니 계시에 따라 범어사를 지은 것이다.

  지혈 범어사, 금샘에서 유래
  돌샘은 사진 (1)에서 보듯이 고당봉 산마루(동쪽 200m)에 높이 9미터(3장), 둘레 
3미터(10여자), 깊이 20센티미터(7치)이니 기록과 맞아 떨어진다. 사람들이 금정 또는 
금샘이라 부르는 돌샘, 금정의 물은 기록과는 달리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아닌 
빗물이 괸 건수다.
  그렇다면 두번째 계시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를 밝히는 데에 필자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떤 계시가 필시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루 두 번씩 범어사와 
금정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마침내 그 실마리를 잡았다. 금정에서 찍은 사진 
(2)를 보면 산마루가 중앙 아래쪽으로 휘어들어간다.
  그 능선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독자 여러분은 그 길을 찾지 못한다. 길이 없기에 풍수 
특유의 흔적으로 필자는 더듬어 내려간 것이다) 정확히 범어사 대웅전 뒷벽에 부딪힌다. 
기맥이 완연히 살아 있는 생룡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를 풍수의 원리로 분석할 때 
대웅전은 혈자리가 된다.
  그러면 금정은 풍수상 무엇이 되는 것일까. (승람)을 다시 더듬어 볼 때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금정)에서 놀았다(들어갔다)'란 의미와 통한다. 이번에는 금정도 혈이라는 
계시가 된다. 즉 금정은 풍수상 천혈을 말한다. 풍수상 이러한 세 가지의 계신는 혈자리 
세 곳을 가리키는 천, 지, 인 3혈(삼세정혈법)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범어사는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지혈에 해당한다. 금정은 해발 750미터에 있고 범어사는 해발 
350미터에 위치한다. 두 혈의 차이는 400미터이다. 천, 지, 인 3혈의 특징은 각각 일정한 
높이에 있다.

  원효, 의상봉은 인혈
  둘째 계시는 바로 인혈을 가리키며 그것도 해발 550미터에 위치하며 범위는 금정산 
내에 있다는 계시인 것이다. 그러나 그 넓은 금정산 해발 550미터를 샅샅이 뒤지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오직 풍수의 원리를 이용하면 방향을 알 수가 있다. 삼위일체란 
말이 있다. 3혈이지만 일체(금정산)란 뜻과 통한다. 서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신호를 감지하는 것이 풍수인 것이다. 사진 (2)에서 보았듯이 천혈(금정)과 
지혈(범어사)은 산능선 줄기로 서로 교감하낟. 이 역시 풍수의 원리만 터득하면 쉽게 
찾는다. 바로 향배정혈법이 그것이 된다.
  금정 사진 (1)을 보면 금정이 어딘가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이렇게 특이한 모습이 
금정의 특징인데 금정산을 많이 다녀본 사람이라도 대개가 금정을 잘 모른다. 왜냐하면 
금정의 모습을 다른 곳에서 보면 전혀 특색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사진 (1) 
각도에서만 그 모습이 이렇게 보일 뿐이다. 이러한 금정이 유독 시선을 보내는 곳은 
사진에서 보듯 원효봉과 의상봉(사진 저쪽으로 보이는 높은 봉우리) 방향이 된다. 
그렇다면 승람의 계기인 인혈은 원효와 의상봉 방향이 되며 해발 550미터 높에에 있는 
것이 된다. 필자는 그곳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인혈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도무지 발 디딜 틈도 없이 펼쳐진 비경이었다. 
밀림 지대의 연속이었고 이러한 조건에서 인혈을 찾는다면 1년 정도는 시간을 보내야 할 
정도였다. 그때 금정사은 필자에게 백이라는 성을 가진 산인을 보내주었다. 금정산에서 
10여년 넘게 약초 캐며 산을 누빈 그는 이인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금정이 풍수적으로 진짜 금정산의 혈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말없이 웃고 있는 
필자에게 그는 진짜 혈을 알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이었다.
  산에는 도깨비들이 많이 있어 이말 저말 듣다보면 길을 잃어버린다해서 그게 어디쯤 
되느냐고 비웃듯이 물었는데, 의상봉 넘어서라는 것이 아닌가. 둘은 숲속을 헤치며 
금정산에서도 깊숙히 있는 토굴 속으로 들어갔다. 금정산에 깊숙히 서려있는 인혈을 찾기 
위해.
  (사진설명(1): 금정이 낙동정맥 선상인 원효봉과 의상봉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설멸(2): 금정 옆에서 바라본 모습. 왼쪽 중간 능선이 계명봉 방향으로 꺾여 
들어간다. 능선 끝에 범어사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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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 지, 인혈: 풍수의 혈을 위치로 말할 때 가장 높은 곳을 천혈이라 하며 중간을 
인혈, 가장 낮은 곳을 지혈이라 한다. 이를 기의 세로 분류할 때 혈 깊이의 측정원칙이 
된다(삼세정혈법).
  향배정혈법: 산의 모양(사) 등이 혈자리를 향하고 있을 때 이를 유정하다 하며 배하고 
있을 때 무정하다고 하여 혈을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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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왕대신, 고모영신 위패 모신곳--고당
  금정산 주봉 이름은 고당
  금정산으 주봉(802m)을 흔히 고담봉이라 하는데 이는 틀린 발음이며 틀린 뜻이다. 
정확한 발음은 고당봉이며, 1947년 범어사 안내서에서도 고당(높은 두건)이란 풍수적 
표기가 나오지만 고당(할매 집)이란  표기가 맞다고 본다.
  금정산을 지리산의 마야 고라는 우리 민속적 접근에서 볼 때 여신산이다. 그래서 
고자가 옳은 곳이며, 당자는 우리 고유의 산신당의 바로 그 당산을 말하는 것이다.
  고당에 차려진 위패 하나는 산왕대신이라 쓰여 있고 또 하나 있는 고모영신 위패는 
지금으로부터 2백년 전 밀양 박씨 할매라는 실제인물을 가리킨다.
  또 고담을 고담(높은 못), 고담(할매 못)이라 표기하는데 금정의 샘 또는 못의 착상을 
주봉바위에서 찾으려고 억지로 끼워 맞춘 발상이다. 실제의 금정이 발견되었고 주봉에서 
5백미터나 떨어져 있으므로 담의 착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금정은 천혈이며 범어사는 범어라는 지혈이다. 나머지 하나의 인혈을 밝히려고 필자는 
토굴에서 날이 밝자 산능선을 돌고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서 운무 자욱한 바위를 타고 
올라갔다. 동굴 깊숙히 자리하고 있는 샘은 천적의 용틀임인 양 신기하게 바위 틈에서 
생수를 흘려 보내고 있었다.
  주위에는 황금빛 서기마저 감돌았다. 혈자리 특유의 기가 감지되었다. 인혈을 감추기 
위하여 내부촬영만 하였다. 천장비지는 하늘이 감춘 곳이기에 인간인 내가 드러낼 수는 
없다. 그날은 운무가 자욱하였기에 금정산의 인혈을 전망하기 적당한 장소에서 이틀을 
기다렸다.

  인혈 중심 좌 계곡, 우 입석 형상 줄 이어
  드디어 비경은 햇빛 아래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먼저 용의 머리부터 비추더니 이어서 용의 세가 다섯 굽이의 파도를 일으키듯 내뿜고 
있었다.
  좌측으로는 계곡의 혈자리들이 곳곳에 길을 이루었고, 우측으로는 입석의 형상들이 
도열하듯 줄지어 서 있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인혈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속들도 발걸음을 딛지 못하는 자리다. 얼마전 청춘남녀가 바위에 볼트를 박고 자일을 
타다가 난데없이 볼트가 빠져 둘 다 떨어져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용이 꿈틀거리니 그럴 수 밖에... 천장비지는 하늘이 지켜주는 자리이다.
  명산에 명당 없다'는 풍수 속담이 있다. 이는 한 개인이 욕심낼 자리가 아니라는 
뜻에서의 명당을 말하는 것이다 .하물며 영산인 금정산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곳에서 한참을 내려가던 일맥을 또 다시 저 아래로 떨어뜨린 곳에 조그마한 무덤이 
있다. 그 정도의 자리가 인간이 차지할 대명당이 된다. 바로 동래 정씨 정묘가 위치한 
곳이다.
  천혈인 금정은 용의 뿔 자리에 있다. 지혈인 범어사는 용의 배꼽 바로 아래에 있고 
인혈은 정중의 자리인 금정산 혈맥에 해당한다. 이 정도의 인혈이라면 범어사는 물론이고 
부산에 천만명 이상을 발복시킬 수 있는 기세라는 것을 북한산에 견주어 비교해 보았다.
  이곳 산중에서는 마른 옷을 제대로 입어볼 겨를이 없었다. 이는 산 특유의 변덕스런 
기후 때문이다. 지난 단오날도 이슬에 젖은 옷을 걸치고 산길과 능선을 살피며 아침의 
고당봉에 올랐다.
  일년에 한 번 범어사에서 이날 고당제를 지낸다. 이때가 당사자에게 직접 알아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고당제의 내력
  고당봉 정상으로 몰린 비구, 비구니, 필자 그리고 고당할매 당집도 모두 신선이었다. 
짙은 운무 때문에 바위인가 보면 사람이고 사람인가 조심하면 돌덩이였다. 고당봉 
위에서의 조화다. 바람이 불면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다. 대화 도중 운무가 끼여들면 
신선처럼 되는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인 범어사 교무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시집 가서 소박맞은 밀양 
박씨가 범어사에서 여생을 보냈지요." 늙어서 할매가 될 때까지 많은 불사를 했기에 
사부대중들까지 칭송이 대단했다한다. 임종 때 큰절스님에게 범어사 가까운 곳에 
묻어주면 영혼이라도 남아 범어사를 지켜주겠다고 했단다.
그런 원력을 세운 할매 당산을 이곳에 세워 일년에 한 번씩 단오날이면 위령제를 
지내주던 것이 2백년을 이어온 것이 바로 오늘의 고당제라는 것이다.
고당에는 위패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이승 저쪽 세계의 질서를 이해한다면 높은 
쪽에 산왕대신. 낮은 쪽은 고모영신이 놓여져 있다.
이를 마구잡이로 읽어내린다면 '이 산의 큰 산신은 할매의 신령이다'가 되지만 
민속학자가 책상 위에서 풀면 '남성신과 여성신의 일렬세움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학자가 이곳에 와 모든 걸 알고 난 뒤 푼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본디 금정산의 산신인 자연신이 산왕대신이고, 고모영신은 박씨할매의 원력을 
인식계통의 군웅신 위패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내원암 큰 스님과 고당 아래서 이 바위 저 바위 하며 산신놀음하고 있는데 저 아래서 
올라온 두 여인네가 깜짝 놀라며 "고당 할매가 약사여래불이 아닌가요"하고 묻는 
것이었다. 전혀 상관없다고 하자 풀이 죽어 미륵암으로 불공 발길을 돌렸다.
  안타까운 것은 고당봉을 비롯한 금정산이 아직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금정산을 오염시키는 신종 쓰레기도 많다. 그것은 철판으로 '의상봉'에도 세워져 있다. 
금정산을 알지도 못하는 방안 풍수가 국토순례 안내판에 '원효봉'이라 써서 올려보냈던 
것 같다.
  정작 원효봉에 오니 온통 바위투성이인지라 떠메고 올라온 인부들이 펑퍼짐한 명당 
'의상봉'에다 세워놓고 내려간 듯하다.
  어린 학생들이 땀흘리며 올라와 배우는 국토순례 교육장의 원효봉과 의상봉의 번지수가 
이렇게 바뀌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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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산: 풍수에서 마을을 진호하는 진산과 민속에서 마을을 수호하는 주신을동네에 
모셔놓은 곳(당). 이러한 맥락은 산신당과 통하며, 당산은 또한 동신신앙의 대상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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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
    우부봉귀 품새 간직한 수려한 산--원효, 의상봉

  범어사, 의상이 창건
  "어허! 그것이 왜 거기 붙어있던고!"
  필자의 설명을 듣던 범어사 한 선승의 일갈이다. 사진으로 보아도 영판 해골처럼 생긴 
바위를 보고 한 말이다.
  서기 650년 원효와 의상은 입당구도하러 요동땅에 이른다. 한밤중 심한 갈증에 
시달리던 두 사람은어둠 속에서 바가지의 물을 달게 마신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그 
바가지는 해골이었으며 물은 시체가 썩어 괸 물임을 알고 마구 구역질을 해댄다. 순간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일체유심조를 터득한 원효는 그때 불이문을 통과하였기에 
당입문이 필요없게 됐다. 그러나 의상은 입당의 문을 향하여 계속 걸어간다. 이러한 
광경을 금정산은 영산답게 풍수로 보여주고 있다.
  금정산의 풍수에서는 해골바위가 원효봉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원효는 해골바가지 
물맛에 득도를 하였고, 의상봉은 저편에서 물끄러미 물맛만 구경하였기에 입당하였다고 
전해진다.
  더욱이 금정의 영산 기운은 인혈로 원효봉과 의상봉을 감싸고 있다. 의상봉은 인혈에 
가가운 쪽으로 위치해 있어 이곳 금정산에서는 의상이 먼저 발복하였다. 즉 지혈자리인 
범어사를 의상이 창건한 것이다.
  원효봉 자락에는 원효암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풍수에 더 접근하기 위하여 사흘간 
그곳을 오르내렸다.
  풍수에서 기를 감지하고자 할 때는 현장을 발로 밟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원효봉은 석산으로 아름다우며 빼어나다. 그러나 의상봉은 이렇다 할 자락도 없는 그저 
밋밋한 토산이다. 의상봉과 원효봉의 풍수적 풀이는 다음과 같다.
  우부봉귀. 의상봉은 우부이고 원효봉은 봉귀라 할 수 있다. 소는 농경사회에 있어서 
재물을 모으는 원동력이었다. 때문에 우부인 것이다. 봉황은 귀한 신분을 나타낸다.
  의상봉은 토산이며 후덕하게 엎어진 모양이 꼭 소와 같다. 이러한 지세라서 그 
뒷자락에 행글라이더 이륙장과 같은 것이 있다. 이에 반하여 원효봉은 석산을 이룬다. 
정상부터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바위들이 줄줄이 이어져 봉황의 자락처럼 꿈틀거리며 자리를 잡을 듯하다 돌아가던 
곳에 원효암이 있는데 이를 살피면 봉황의 기세가 오다가 멈춘 자리이다. 세래형지를 
이룬다. 그 형은 형여연소, 즉 제비집터형이다.
  이런 곳의 발복은 부보다는 귀를 말한다. 얼마전 이곳으로부터 부를 산정상으로 
연결하려다 철회했던 일이 있다. 원래 그곳은 귀터인 까닭에 부는 격에 안 맞는다. 
우부인 의상봉의 부는 지혈자리인 범어사 터가 된다. 그래서 범어사는 풍수적으로 부의 
발복을 실어 담는 전형적인 행주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부를 직접 체험하였다. 
풍수자료 수집과 취재답사 도중 무상공양을 범어사에서 몇 번 받았는데 반찬 가짓수가 
일고여덟 가지나 되었다. 먹는 걸 약 먹듯이 하라는 불가의 격언에 비추어 보면 이 또한 
부가 아니겠는가.
  한편 이와 같은 인간세계의 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넉넉함이 금정산에는 어우러져 
있다. 곳곳에 꿀 같은 생수가 흐르고 큰바위 아래 생수 옆에는 촛불의 흔적과 함께 
제철을 만난 참외와 토마토가 정갈하게 차려진 곳이 눈에 자주 띄었다. 일반 등산로가 
아닌 금정산의 기맥 자락만 찾아다니니 그럴 수밖에...
금정할매(고당)의 베풂에 사양치 않고 필요한 만큼 적당히 먹었다. 제불보살 불전 
보시보다 더 큰 것이 중생공양이라 했다. 금정산은 언제나 그 넉넉한 품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고 베풀어준다.

  금정산장의 하수도관 묻자 개구리 울음소리 끊겨
  이러한 금정산에 문제가 생긴 것은 사람들 때문이다. 금정산장의 김진동 씨 말에 
따르면 산 아래부터 산장 앞까지 도로를 놓이면서 그 언저리에 하수도관을 묻자 개구리 
울음소리가 일시에 끊어지더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환경론자들의 반대여론이 있어 
하수도관을 철거하자 개구리 울음소리가 다시 되살아났다 한다.
  풍수로 그러한 현상을 조사해보고 싶었다. 고당봉 쪽 수맥은 대개 범어사쪽으로 흐르고 
원효봉의 수맥은 개구리 울음소리 들리는 그곳을 지나서 화명동 쪽으로 흐른다.
  
  금정산의 물 퍼가면 범어사 망해
하수도관들이 이러한 수맥을 끊어버리니 개구리 울음소리가 실종된 것이다. 이러한 
자연파괴가 저 아래로 이어지다 화명동 아파트 단지에 이른다면 또 무엇이 사라질까. 
이러한 인간사 문제들은 반대편에 있는 범어사 쪽 수맥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범어사 무비 스님의 말 "금정에서 누가 자꾸 물을퍼가요. 범어사 망하라고 하는 
소행인지... 왜 금정의 물을 퍼갑니까." 범어는  금정에서 움직이는 물고기다. 천혈인 
금정에 물이 없으면 지혈 자리에 있는 범어사는 망한다. 그러나 금정의 빗물을 퍼가도 
범어사는 망하지 않는다. 금정의 영산은 천장비지인 인혈에서 무진장한 물을 용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금정의 물을 퍼다 마시면 아들 낳는다고 해서 퍼간답니다." 빗물 퍼다 
마셔봤자 아들은커녕 배탈만 날 게 아닌가.
  거구의 무비스님께서 "금정 옆에 남근석이 있는데 얼마전 제가 여근석도 
발견했습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범어사 뒤편 숲속으로 뛰어 들어 돌밭에서부터 기맥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장대같이 퍼붓기 시작한 비에 필자는 기맥을 놓쳤다. 산짐승의 
흔적으로 실가닥 같은 길을 뚫다 지척을 가리는 운무로 그것마저 놓쳐버렸다. 산중에서 
이런 상황을 만나면 도리가 없다. 어느 한 방향을 정해놓고 계속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운동을 하다 제풀에 지쳐버린다. 두 사람은 위쪽으로만 올라갔다. 3시간의 사투 
끝에 우리를 가로막는 바위 앞에 섰다. 거기서 다시 이동하여 원효봉에 이르자 한탄이 
절로 나왔다.
  "의상의 발복은 되었음인데 정작 필요한 원효여, 어디에 있는 풍수자락인가!"
  (사진설명:원효봉에 있는 해골 형상의 바위. 사진 위쪽 높은 봉우리가 의상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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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래형지:기의 세는 와야 하며 형은 춘듯 해야 한다. 이렇듯 기가 와서 춘 듯 모이는 
곳에 혈이 있다.
  형여연소:산의 자락이 제비집과 같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형에서는 귀한 인물이 
발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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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의 계시로 의상이 창건한 선찰--범어사

  산과 절의 관계, 고려 때 각별해져
  가야산 해인사, 영취산 통도사,천성산 내원사, 가지산 석남사 그리고 금정산 범어사. 
유명 사찰을 말할 때 그 앞엔 언제나 명산들이 붙어 있다. 또한 가야산 범어사. 금정산 
해인사. 이렇게 부르자면 어색하기 이를 때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명산과 
사찰은 둘이 아닌 하나가 되어 있다. 그래서 범어사에 들어서면 이미 금정산에도 발을 
들여놓은 셈이 된다. '범어사 금정산'이라는 순서매김은 어디에도 없다. 이는 명산에 
명사가 있음을 뜻하며 산이 절을 품고 있음을 말한다.
  산과 절의 관계에 있어 풍수는 각별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 
제2훈을 보면 "모든 절들은 도선이 산수의 순, 역(풍수)을 보아 정하였으니 그곳에만 
지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후 거의 모든 절들은 이에 따라 창건되었다. 즉 도선이 
풍수로 풀어놓은 명산을 다시 풍수로 풀어 가람 배치를 하였던 것이다.
  도선 이전에는 어땠을까. 먼저 산과 절의 밀접한 관계는 그로부터 겨우 2백년 정도를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초기 모든 절들은 서라벌 언저리에 집중적으로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불교와 왕실의 밀착관계를 그대로 드러내보인 것이며 이로써 신라불교는 
귀족불교라는 한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불세출의 두 
인물이 나타났으니 바로 원효와 의상이다.
  원효는 자신의 높은 신분부터 요석궁 이부자리에 던져버리고 중생들이 덮는 거적때기 
속으로 묻혔다. 대중불교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의상은 이러한 대중불교의 거점들을 
마련한다. 불성은 누구에게나 있고 불국토 또한 서라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전국 각처 명산에 절을 짓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산과 절은 밀접한 연계성을 갖게 
되었다.

  천, 지, 인혈과 불, 법, 승 상응
  범어사는 금정의 계시로 의상이 창건한 화엄 십대사찰 중의 하나이며 그 인연으로 
금정산 범어사가 되었다. 이에 이르러 산과 절의 인연을 한번쯤 생각해보듯 금정산수의 
맥을 따라다니다 풍수가 범어사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범어사 
대웅전 뒷벽에서였다.
입수처 금정산의 풍수혈은 3혈, 즉 천혈, 인혈, 지혈이 각각 높이 2백미터의 간격으로 
있다. 이는 천, 지, 인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절집, 즉 불가의 상징적인 
3보는 불, 법, 승이 된다. 이러한 불, 법, 승, 즉 불가의 3보가 범어사에서는 금정산의 
천, 지, 인과 조화를 이루어가는데 천, 지, 인은 금정산의 풍수를 말하는 것이다. 즉 
범어사는 금정산의 풍수에 따라 창건되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천(불), 지(법), 인(승) 이렇게 순서대로 배열하면 그 의문은 
모두 풀린다. 풍수에 있어서 가장 높은 혈을 천혈이라 하고 가장 낮은 혈을 지혈이라 
부르며 그 중간에 인혈이 들어간다. 당연히 천, 인, 지의 순서가 맞는다. 그것은 산이 
절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어사의 열쇠는 천(불), 인(승), 지(법)의 
나열이다.
1990년 (범어사)라는 책자를 펴낸 무비스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범어사는 
금정산 산세에 따라 하단, 중단, 상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어산교에서 불이문 
뒷계단까지가 하단이며 그 계단을 오르면 중단이 되고 여기서 계단을 그만큼 또 오르면 
상단이 된다."
  그 상단에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 있다. 이는 불의 자리가 되며 금정산 풍수로 볼 때 
천혈에 해당한다. 중단에는 스님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요사채를 배치하였다. 
중단자리가 바로 금정산의 인혈에 해당하며 범어사의 승보인 까닭이다. 마지막 하단은 
법보로 금정산의 지혈자리가 된다. 이 지혈의 터는 중단의 스님들과 상단의 부처님을 
싣고 있는 가장 기초 부분이기에 풍수형국 중 배모양으로 널리 알려진 행주형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풍수상 지기를 왕성하게 하는 대표적인 석물이 서 있다.

  대웅전 뒤 입수처, '천 거북 만 자라' 형상 뚜렷
  이렇게 모든 것이 와닿자 필자에겐 꼭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생겼다. 대웅전에 풍수의 
기맥이 성립되는지 여부였다. "여보시오. 거긴 뭣하러 가오." 한걸음 내딛기가 무섭게 
예사롭지 않은 스님들의 눈초리가 쏠렸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대답을 
아니 해 줄 수도 없는 처지라 카메라에 필요도 없는 2백밀리미터 망원렌즈를 거창하게 
끼워 목에 걸고서 "거기 들어가는 처사님" 하면 "예. 부산일보요"하자, "아, 
그러세요"했다. 기자로 알았던 모양이다.
  대웅전 뒤쪽은 풍수상 확연한 입수처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 암맥설의 그것이다. 계속 
바위들로만 연결된 그곳을 다람쥐마냥 타고 오르니 한참 후에 바로 금정산의 천혈인 
금정을 볼 수 있었다.
  금정의 천혈이 범어사 대웅전 뒷벽으로 어김없이 연결된 바윗덩어리들을 보고 있노라니 
"천 거북 만 자라예요!"하는 이곳 교무스님의 설명이 생각났다. 금정산의 세는 천여개의 
거북이에 만개나 되는 자라 바위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곳 스님들의 성격이 
활달하지요. 이는 범어사의 기가 세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일까. 대웅전 뒤편 바위가 거북 형상을 하고 금정의 마지막 기를 넣는 듯한 것은 
범어사 관련서적을 들춰보면 의상이 계명봉에서 범어사 터를 관산하고 잡았다는 데 
일치하고 있으며 계명의 작명도 직접 하였다고 전해진다. 더욱이 계명암 창건주 문서에도 
의상으로 되어 있다. 계명암을 수차례 오른 후에 계명암 주지 명교 스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곳 범어사의 형국은 고당, 계명 그리고 남산쪽이 봉황이 되지요. 이곳에서 보이는 
대마도가 지네형이며 일본열도 역시 지네인지라 봉황의 밥이 됩니다."
  대마도까지 국면을 확장하지 않더라도 바로 발아래 있는 두구동의 낮은 산들은 푸짐한 
지네의 형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사천(실개천)마저 사천(뱀개울)으로 보였다.
  "계명암 불사 때 법당 터에서 알같이 생긴 돌이 일곱 개나 나왔지요" 귀가 번쩍 트이는 
명교스님의 말씀이다. 계명은 계명견폐라 하며 풍수서인 (청오경)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지만 풍수의 오명계에 깊은 의미를 두고 있다. 즉 계명봉은 금계포란형을 나타내고 
일곱 개이 바위는 바로 금계의 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의상대사가 풍수지리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직접적인 확증이 있어야 했다. 이를 밝힌다면 우리의 풍수 역사는 이제껏 
원조로 알려진 도선보다 2백여년을 앞지르는 셈이다. 그날밤 토굴 속에서 밤새도록 
촛불에 의지하며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선을 그어보니 고당, 계명, 남산 봉황의 중심점에 
범어사가 입지하고 있지 않은가. "의상의 풍수를 드디어 잡았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991년에 풍수를 분석한 가야산 해인사의 분석방법과 동일한 원리였다. 물론 
해인사도 의상이 창건하였다. 그것은 천심십도정혈법의 변형으로 하늘에 따르는 대명당의 
혈자리를 찾는 풍수법칙이다. 이제부터 의상대사의 풍수 세계로 직접 들어가보자.
  (사진설명:낙동정맥의 능선을 타던 용 한 마리가 머리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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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명계:닭이 다섯 번 운다는 표현이 되지만 하늘에 있는 금계가 다섯 번 울면 지상에 
있는 닭들이 새벽을 알리며 이에 인간사가 움직인다는 풍수적 의미로, 그 대표적인 
풍수형에 금계포란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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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 지, 인 산세 휘감은 태극 대명당--범어사 기세

  범어사는 태극운동 자리에 떠 있는 배 모양
  우주 만물의 근원을동양사상에서는 태극이라 한다. 그래서 풍수서인 (인자수지) 
정혈법에서는 태극정혈이 가장 먼저 적혀 있고 ,다음이 음양정혈 그리고 천인지의 순서를 
갖춘 삼세정혈로 이어진다.
  범어사는 고당봉(801.5m), 계명봉(601.5m), 남산동(403m의 삼각형 안에 터를 잡고 
있으며 이는 고당(천), 계명(인), 남산(지)의 산세를 휘도는 산 태극의 호위도량이 된다. 
이러한 태극 현상이 반대편에서도 이루어져 있다. 천혈(금정, 750m), 인혈(550m), 
지혈(범어사, 350m)이 그것이며 이와 같은 삼세정혈은 모두가 200미터의 표고차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범어사는 산태극과 혈태극의 마지막 조화터인 지혈자리에 위치한 태극의 
대명당터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넓은 국면인 태극운동 자리에 배모양을 한 행주라는 풍수적 형으로 가람의 
배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범어사 매표구에서 50미터 앞에 있는 범어사 
안내도를 보면 누구나 범어사가 배 모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산교의 어산은 산수회포 의미
  범어사 종무소에서 기증받은 현황실측도(1:1500)를 토대로 모든 자료들을 
정리해보았다. 범어사 가람배치의 비밀들이 풍수로 풀렸다. 범어사는 행주형을 하고 
있으며 뱃머리는 어산교가 된다.
  금정산과 범어사의 이름을 합한 어산을 풍수로 보면 합수머리에 해당되는 의미있는 
산수회포이다. 이러한 어산교의 뱃머리에서 행주형의 중심점이 되는 대웅전과 일직선을 
그어보았다. 이는 범어사의 중심축이다. 즉 배를 건조할 때 이러한 중심축 위에 돛대를 
세워야 배의 균형이 잡힌다.
  어산교와 일주문의 중간지점에 지방문화재 15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일반적으로 
깃발이 되는 당을 세우는 장대(간), 간을 받치는 돌기둥(지주)이라고 모두들 말하며 
문화재 안내서에도 역시 그렇게 쓰여져 있다. 더욱이 출처도 그러하다.
  그러나 범어사의 돌기둥은 당간지주 역할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신라말이나 고려초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되는 지방문화재 15호는 범어사는 
배의 돛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배에는 인물(승선인)과 재물(화물)을 싣는다. 만선이 
되면 돛을 펼치고 떠나버린다. 배가 떠나면 그곳은 명당의 지기가 쇠퇴하여 망한다. 
그러므로 행주형의 완성에서 돛대를 세우되 돛을 펼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깃발을 달면 큰일난다.
  이것에 대한 최초의 논증은 1천3백여년 동안 창건과 중창, 실화와 재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른 범어사의 가람배치와 돌기둥의 형태를 볼 때 깃발을 달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산교에서 돛대(돌기둥)까지의 거리는 83미터이고 돛대에서 정확히 83미터 떨어진 곳에 
일주문이 있고 다시 일주문에서 83미터 떨어진 곳에 보제루 앞계단이다. 바로 그곳이 
범어사 하단 부분의 끝자리가 되며 하단은 풍수적 지혈 자리에 해당하기도 한다. 지혈의 
지기를 완성하기 위하여 돛대를 중심점으로 하여 문(일주, 천왕, 불이문)을 세웠고 부도 
등을 세웠던 것이다.

  금정산과 범어사, 자연과 인공의 조화 이뤄
  이러한 중심축을 대칭으로 하여 일주문에서 대웅전 들어가는 길과 해행당 쪽으로 가는 
길이 엇비슷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위각을 물줄기들이 합수머리인 어산교를 
향하여 양쪽에서 흘러들어돈다. 범어사의 가람배치는 천여년 동안 물줄기의 행주혀에 
따라 돌기둥인 돛대를 세우고 이에 따라 길을 놓고 요사채를 배치하였던 것이 된다.
  하단 구조 위에는 보제루 앞마당을 중심으로 하여 중단 구조가 이루어져 있는데 인혈 
자리에 해당한다. 이 인혈은 의상봉을 감싸고 있다. 의상이 발복하자 풍수적 기운이 
범어사를 창건하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1300여년 전 범어사를 창건하였던 인물이 바로 
의상대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혈자리에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요사채가 모두 배치돼 
있다. 큰방, 선방, 주지실, 원주실, 객실 등.
  중단 바로 위는 상단으로 천혈자리가 된다 해서 대웅전을 중심으로 불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풍수적 구조가 이러하므로 대웅전 아랫계단에 박힌 타일조각이 엇비슷하게 놓아져 
있다.
  이는 대단히 잘된 공사다. 그러나 근래에 공사한 어산교에서 해행당에 이르는 앞길은 
문제가 있다. 뱃머리의 균형을 손상시켰기 때문이다.
  금정산의 천, 인, 지의 풍수와 범어사의 상단, 중단, 하단의 조화는 산자락과 물줄기의 
순행을 잡아 풍수적 배치로서 자연과 인공을 융화시키려 했던 우리 전통지리학, 
풍수지리의 한 편을 보는 것 같다. 더욱이 돛대인 돌기둥은 금정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정산은 여신상인 할매산이 된다. 그후 실조인물 고모영신에서 금정산의 
주봉(801.5m)을 따라 고당봉이라 부르며 국립지리원 표기로는 노인봉이라고도 한다. 
할매나 노인이나 같은 의미다. 이러한 노인형에는 지팡이를 세워야 노인이 걸어갈 수 
있어, 지기가 왕성하다는 풍수 비보책이 있다. 범어사의 돌기둥은 돛대가 되지만 
금정산에는 지팡이가 되어 금정산, 범어사에 모두 길한 풍수 비보책임을 알 수 있다.
  (그림설명:범어사는 지혈자리로 행주형을 이루며 돛대를 중심으로 배치한 
풍수사찰이다.)
  (사진설명:범어사 당간지주(지방문화재 15호)는 풍수적 비보인 돛대로 해석된다.)

    금정 정기 받은 '천 거북 만 자라'--범어사 지기

  양택의 명당, 대부분 사찰이 차지
  "금정의 물과 범어라는 물고기에 걸맞게 이곳 범어사에서 생활하다 보면 금정산과 
조화된 숨결을 충분히 느낄 수 있지요." 현재 범어사 교학의 대표 격인 무비스님의 
첫마디였다.
  "흔히들 사사한다고 말들을 하지만 이절 저절에서 한 철씩 공부하는 선객들에게는 유독 
자신에게 맞는 장소가 있지요." 이곳 선종 인각 스님의 직관적인 경험이다.
  참선의 선정에 접한 선승들에게는 일반인들보다 몇십배에서 몇백배로 증폭된 
기감응으로 예민해지나. 여기서 풍수의 요체가 되는 기감응과 참선의 수행이 만난다 해서 
신라말부터 나오기 시작한 풍수사들이 도선국사, 선각대사, 대경대사 등에서 무학에 
이르기까지 선승들의 차지가 된다.
  그 결과는 명산에 큰 절이 있는 오늘날의 현상을 초래하였다. 부연하자면 음택의 
명당은 왕릉들이 자리했고 양택의 명당은 대부분 사찰이 차지하고 있다. 범어사의 이러한 
지기현상은 여러 군데에서 감지되었다.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에서도 그러했지만 금정산을 
누빌 때 유독 대웅전 옆에 있는 관음전 뒷벽에서 곧잘 쉬었던 기억이 있다.
  "범어사에서 유독 관음전 기도에 들어가는 스님들의 목탁 소리는 신명나고 경쾌해요. 
관음전 기도는 다른 곳보다 지치지 않아 철야기도까지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이곳 교무(수불)스님의 증언이다. 바로 지기의 조화인 것이다. 또한 금정산의 지기를 
받는 범어사의 풍수 맥세는 천 거북 만 자라의 강한 길기이기도 하다. 이를 이어보면 
신기하게도 범어사 대웅전 뒤편 입수처에 거북바위가 있고 이러한 바위들은 금강암, 
내원암, 청련암, 안양암, 원효암 등 각 암자마다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중 
금강암의 거북이 단연 걸작이다. 아예 금강암 전체를 일주문 격인 금강문에서 떠받치고 
있다. 그러니까 거북 등 위에 금강암이 터를 잡은 신비로움과 풍수적 장풍국의 명당이다. 
금강암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신장의 호위 받은 의상대사
  이어 수불스님에게 고당봉, 계명봉, 남산봉으로 이어지는 산태극을 이야기하자. 
"신장의 호위입니다. 신장기도가 끊어지지 않는 범어사를 예로부터 신장도량이라고들 
했습니다"고 했다.
  풍수가 성행했던 그 당시, 당나라에서 공부하던 의상대사를 당나라 승려인 도선율사가 
공양에 초청했다. 도선율사는 천공을 받는데 유독 그날 천공이 도달하지 않아 초청받은 
의상은 빈 바리때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의상대사가 그 자리를 떠난 뒤 늦은 천공을 
들고서 하늘의 사신이 도착하는 것이 아닌가. 늦은 이유를 묻자, 의상대사를 호위하는 
신장들이 이곳 절을 지키고 있어 못 들어오고 결국 의상과 함께 사라지자 그제야 왔노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상이 창건한 범어사를 신장이 호위하는 도량이라고 할 때, 이를 풍수로 풀면 
산태극의 상징과 접목될 수도 있다. 고당봉, 계명봉, 남산봉으로 이어지는 산태극의 한 
자락이 청룡동에서 범어사로 오르는 길에 지장암이 있다. 이 부근은 여름철에 매미소리가 
유난히 시끄러운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을 지나야 범어사 특유의 산 냄새가 난다. "하루를 나무 위에서 지낼 날짐승도 
터를 살피는데 하물며 일천삼백여년의 이곳의 터를 무심코 잡았겠느냐"고 부주지 스님도 
말했다.

  백운, 청산과 이판, 
  풍수에서는 좌측을 청룡, 우측을 백호라 하는 사신사 배정을 한다. 또한 불가에서는 
선을 하는 승려를 이판승이라고 하고 살림하는 승려를 사판승이라 한다.
  여기서 이판사판은 우리가 흔히 쓰는 '이판사판'이다.
  구름같이 떠돌아다니는 선객을 백운이라 하며 산에 있는 절집을 지켜야 하는 사판을 
청산이라 칭한다. 범어사 대웅전을 중심으로 풍수적 좌향을 배치하자면 좌측은 구름타는 
청룡격인 흰구름(백운)의 자리가 되며 우측은 백호라 이르는 호랑이가 푸른 산처럼 
엎드려 있어야 명당이 되기에 '청산'이다. 이러한 백운자리에 선방이 배치되어 있고 
청산자리에 원주실 등 살림방이 배정되어 있다. 더욱이 예불 때에도 백운자리에 이판승이 
자리하며 청산 자리에 사판승이 자리한다.
  아침 안개가 휘어들어올 무렵 금정산과 범어사의 구분이 없어져 버린다. 금정의 
산자락과 범어사 요사채 자락선의 흐름이 닮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수적 조화에 따라 범어와 금정은 그 속에 녹아 들어 있다. 이렇듯 둘의 
맥락은 중요한 선상에 놓여 있는데 원주(석공)스님의 독창적인 해석은 단연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삼국유사)와 (승람)의 기록에서 말하는 금정에 사는 범어의 
표현은 하늘에서 떨어진 분진의 형태에서 살필 수 있다는 추측이었다. 그에게 다시 
금정에 올라가 촬영한 금샘 속의 범어 그림자를 보여주자 "가을철 석양에서 보면 
물색마저 황금색으로 보입니다"고 말했다.
  원효암에 주석하였던 원효대사의 해석에 의하면 하늘이라는 범천세계 중생이 
이곳(금정)에 내려왔다는 비유가 범어라는 화엄사상 특유의 그릇으로 금정을 법명처럼 
삼았는지도 모른다. 하늘의 중생이라면 땅에서는 보통 중생이 아닌 신선으로 
자리매김된다.
  한데 금정 주위에는 풍수적으로 두 개의 청학형이 있다. 하나는 원효봉을 등으로 하여 
북문에서 5백미터 동쪽을 머리로 한 청학인데 바위로 학의 눈까지 이루어놓고 있다. 다른 
한 마리는 미륵암을 등으로 하여 의상봉 방향을 머리로 하는 청학인데 금정산장에서 보면 
용머리처럼 이목구비까지 갖추고 있다.
  청학은 신선이 타고 다니는 탈것으로 풍수적 전용물이다. 그렇다면 범어사는 금정이 
연유가 되고 금정의 그러한 해석은 풍수상 미륵암에서 화명동 산자락까지 해당한다. 
이러한 범위로 환산할 때 범어사의 풍수형국은 기실 백오십만여년을 이어왔으니 이러한 
국면을 잡은 의상대사에 다시금 놀라게 된다.

    터잡이 지리학 원조 명산에 대찰 창건--범어사와 의상

  금정범어는 풍수적 표현
  앞에서 밝혔듯이 금정산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678년) 시절에 의상이 창건하였다. 
(삼국유사)에 금정범어라는 표기가 나오는데 이는 금정산 범어사를 가리킨다. 그러나 
금정범어라는 표현은 다분히 풍수적 맛을 풍긴다.
  금정이 물(기)을 말한다면 범어는 물고기(세)가 되니 한목에 어울리는 제짝에 제이름이 
되는데 배 모양의 형(행주형)에다 절(사)을 세워 기, 세, 형의 풍수 삼박자가 조화를 
이룬 것이 범어사의 풍수라 할 수 있다. 금정의 풍수를 밝히다 보면 누구나 범어의 
풍수에 이를 수밖에 없지만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부대중의 체험 역시 금정범어의 풍수적 
기감응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창건 당시 의상이 붙인 지명 계명봉과 계명암은 풍수적으로 널리 알려진 계명이라는 
오래된 풍수용어가 들어간 말이다.
  범어사의 형을 살펴도 그렇다. 돛대(돌기둥)를 중심으로 가로 세로의 균형 배치가 
범어사의 법당이요 요사채요 일주천왕 불이문의 자리인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금정산 범어사는 의상이 풍수에 기반하여 창건한 사찰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도선이 최초의 풍수사라는 통설은 잘못된 것
  그러나 단언하기에는 커다란 걸림돌이 있다. 흔히들 도선(827--898년)을 풍수의 원조로 
보기 때문이다. 만약 의상이 범어사를 풍수에 근거하여 터를 잡았다고 하다면 통설을 
2백년이나 앞당기는 셈이다. 사실 도선을 풍수의 원조로 보는 통설은 근래에 신세대 풍수 
연구가들에 의하여 이미 깨어졌다.
당나라에 가서 직접 풍수를 전수받았다는 일행(712--756년 활동)과 도선의 생존 연대가 
백여년에 달하고, 그 당시 불가에서 엄격히 따지던 법통의 계보를 봐도 그렇고, 도선의 
전기에 당나라에 간 사실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통설들이 왜 여지껏 통용되었을까. 그것은 도선의 풍수를 정치적으로 
활용한 고려 왕건의 배경도 작용하였지만 (도선비기)라는 정감록적 참위설이 조선 
5백년간 음택풍수를 통해 와전된 것이 주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근대의 풍수 
역시 식민사관에 묻힌 탓에 이를 밝히기는 역부족이었다.
  정작 도선은 풍수를 이인에게서 배웠다는 기록(옥룡사선각국사비명)도 있고 "풍수 역시 
중생구제에 필요한 보살행..."이라는 표현을 참작해볼 때 이인은 다름아닌 국내의 선종 
계통 승려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는 필자의 사견이 아니라 오늘날 풍수지리 재평가에 
따른 풍수학계의 새로운 정립과 그 축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선은 누구에게 풍수를 전수받았으며 당시 풍수계보는 어떠한 승려계통과 
맥을 이어왔는가. 그러한 계통의 시작점에 있는 그 인물이 우리나라 풍수 원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상에 오르내린 인물들은 무수히 많다.

  의상을 한국풍수의 원조로 보는 근거
  의상 바로 앞시대 인물이 자장율사(636년, 황룡사 구층탑의 해석)까지 거론된다. 
그러나 의상을 우리 풍수의 원조로 보아야 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의상은 불국토의 신념에서 당시 서라벌 위주의 절배치를 전국토 명산으로 확장시켰으며 
의상이 당나라에서 8년간 화엄의 교리를 전수받을 무렵이 풍수가 가장 왕성하였던 시절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태백산 부석사, 원주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지리산 화엄사, 공산 
미리사, 가야협 보원사, 계룡산 갑사, 계람산 화산사,모산 국신사, 부아산 청담사 그리고 
금정산 범어사 등이 의상과 그의 제자들로 인해 활발히 창건되었다. 이렇게 활발한 대찰 
창건에 풍수라는 터잡이 지리학을 빼놓을 수 없었다.
  이렇듯 의상으로부터 절터와 부도의 입지들이 잡히고 그 풍수계보의 한 줄기가 2백여년 
뒤를 내려오다 그 맥 하나가 도선과 이어졌고 직접 관계된 인물이 바로 이인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범어사 창건과 의상의 풍수 관련성의 논증을 찾기 위하여 범어사 
자료를 모으던 중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바로 범어사 석무비 편저(1990년)의 안내서 
6쪽이다. 
  창건 당시 직책을 묘사하는데 '지관 의상스님'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지관이란 
풍수사를 말함이 된다. 그러나 시대적을 빗나간 표현이다. 관은 벼슬의 품계로 
조선시대의 풍수표기니 타당성이 없다. 이에 대한 출처의 근거를 범어사 
창건사적문(범어사지:1989년 발행)에서 찾아보았다. 창건사적기는 조선시대 동계라는 
인물이 편찬한 탁본이다.
  탁본 말미에는 "나라에 표훈내덕이 쓴 유사가 있어 후세에 귀감이 된다"라 되어 있다. 
표훈내덕이란 의상대사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으로 범어사 창건 당시 직접 참여했던 
의상과 동시대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계의 탁본에는 상지관 예공화상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이 흥미로웠다. 예공은 문무왕이 의상대사에게 내린 봉호이다. 
그러므로 '예공대사'라야 옳다. 화상이란 조선시대적 표현이다. 또한 상지여야 옳다. 관 
역시 조선시대의 풍수적 용어이다. 즉 관과 화상은 표훈의 유사에 주관적으로 첨부시킨 
조선시대 동계의 표기이다.
  여기서 상지란 신라시대 풍수사를 가리키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감여 또는 상지는 
풍수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상지술의 발달이 풍수지리였다는 풍수학적 사료를 
보더라도 신라시채에 살았던 표훈의 유시에는 '상지사 예공대사'였을 것이다.
  또 조선시대 동계가 풍수의 품계는 올리고 불가의 품계는 내렸던( -> 배불정책)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한편으로 의상대사가 풍수지리를 하였다는 범어사 창건 당시 
확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1990년 범어사 석무비스님 역시 상지관이란 어휘가 
낯설자 그냥 지관 의상스님했던 일례에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이렇게 지관에서부터 거슬러올라가 의상대사가 풍수를 하였다는 고증을 상지기록에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금정산 정중, 인물 풍부한 장풍 명당--금강암

  천심풍수의 현장, 금강암
  낙동정맥 천성산 자락에 걸친 풍수를 회원들과 함께 살필 기회가 있었다. 정맥의 
기세답게 형에 대한 풍수적 견해들이 분분했다. 언저리에서 계자가 붙은 마을에 사는 
그곳 사람들은 금계포란형이라 했고 음택풍수 하던 사람은 옥녀세발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따라서 국면의 조화를 종합해볼 때 호승예불형에 더 가까웠다.
  이 경우 어느 것이 옳은 풍수의 형이 되는가. 엄격한 차이가 눈에 띄지 않는 한 옳다 
그르다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이 풍수의 단점이 되기도 하고 장점이 되기도 한다. 
그곳을 금계포란형이라 할 때 마을을 번창시키는 지기의 명당터가 되지만 옥녀세발형이라 
이를 때에는 마을보다는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 혈자리들을 찾아 묫자리를 잡는 
음택자리에 걸맞다.
  호승예불형의 경우는 사찰 터에 알맞는 풍수이다. 하지만 호승예불형에다 묘를 쓰거나 
옥녀세발형에 절을 입지시키면 풍수적 발복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처럼 금정산의 세를 
논할 때 산태극의 형(고당봉, 계명봉, 남산봉)의 위치적 중심점이 있다면 어떤 풍수적 
의미를 가질까. 천심십도정혈법에서 그 원리를 찾아보면 천심풍수가 된다.
  그러면 천심풍수의 현장은 어디인가. 그곳은 범어사에서 북문길로 접어드는 계곡을 
조금 오르다 오른쪽 숲속에 자리한 금강암이다.
  금강암 원주 정목스님의 환대는 정말 뜻밖이었다. 자신 역시 풍수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날 밤 스님으로부터 7년전부터 품어왔다는 질문을 받았다. 명산대찰에서 보듯 대찰이 
명산의 지덕을 받으려는 의도로 세운 삼성각, 산신각은 이해가 되는데, 보지도 듣지도 
못한 북극전이 금강암 법당 우측에 있다고 했다. 지금은 종각이 세워졌지만, 이것이 
풍수로 풀이할 수 있는 문제냐는 질문을 받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음을 던진 
사람에게는 단수한 질문이었지만 질문을 받는 사람에겐 천심풍수의 증험이었기 때문이다.

  금강암 북극전, 천심풍수의 상징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 언저리에 칠성바위가 있다. 예로부터 그곳에서 기도를 했던 
무속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바위는 북두칠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북극성 역시 
존재해야 한다. 더욱이 북극성은 하늘의 중심을 상징한다. 그런데 북극전은 계명암과 
원효암에도 있다. 계명암의 북극전은 창건주 의상대사를 상징하고 원효암의 북극전은 
원효대사를 중심축으로 상징한다. 금강암의 북극전은 천심풍수의 상징이다.
  이러한 북극전은 금정산 안에 세 암자에만 있다. 즉 금정산 품안에 자리한 암자들의 
풍수적 조화이다. 이를 토대로 풍수상을 정리할 때 금강암은 튀어오른 곳에 입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람을 맞는 지리여야 한다. 그러나 산태극의 중심인 천심자리에 
있는지라 바람을 감춘다는 장풍의 명당을 이루고 있다. 금정산을 800미터로 볼 때 중심이 
되는 해발 400미터 언저리인 점 역시 정중이 되어 있다. 흠이라면 득수였다. 풍수에서 
물(수)은 물(물체)이며 인물과 재물을 의미한다. 금강암은 유독 물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금강암은 장풍의 명당이어서 천심의 득도로서는 좋으나 물의 부족함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금강암은 날로 번창하고 있으며 인물 역시 풍족한 암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03년 창건 당시 영남 최초의 선원이었던 점이 그러하고 범어사 여러 암자 중에서 
유일하게 <설해목>이라는 월간지를 발행, 통권 42호를 이어오는 대단한 인물들의 
풍족함을 말해준다.
  왜 그럴까. 이러한 풍수적 의문은 다음날 여명 속에서 밝혀졌다. 금강암 일주문 격인 
금정문 앞길이 S자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풍수에 있어서 물과 길(도로)은 같은 작용을 
한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풍수적 해석에서 길은 인물을 얻는 통로이다.

  종각 옆의 거북 돌 단연 명작
  흔히들 금정의 세를 천거북 만자라라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곳 종각 옆에 있는 거북 
모양 돌은 단연 명작이다. 그런데 그 보다 더한 걸작품인 거북이 있음을 발견했다. 
금강암, 금강문 바로 아래 용도폐지된 낮은 계단에서 보면 금강암을 등판에 지고 불쑥 
튀어나온 거북머리 형상을 볼 수가 있다. 안타깝게도 머리부분이 깨져 있었다. 이럴 
때에는 풍수 비보로서 본맥의 돌로 채우면 된다.
  자연과 인공물이 어우러질 때 산의 자락에 인공으로 모양새의 장단을 맞추어놓으면 
산속인지 마당 속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바로 명당에 명작의 
조화이다.금강암의 요사채들은 법당을 북현무로 하여 좌청룡에 자혜동, 우백호에 선혜당, 
남주작에 금강문을 앉혔다. 마치 새로 지은 청와대 건물과 흡사한 풍수적 배치이다. 이 
경우엔 딱딱한 맛이 흠이 되는데 자혜당과 선혜당의 추녀 끝에 법당 쪽과 금강문 쪽으로 
서로 다른 멋을 부려 경직성을 완화시키고 있다. 이런 곳이라면 한번 안겨서 노독을 풀고 
싶어진다.

    낙동의 득수 금정 장풍에 담아 지기 왕성--마애여래

  태풍의 눈 자리에 위치한 마애여래상
  바람을 감춘다는 뜻인 장풍과 물을 얻는다는 의미인 득수, 즉 장풍득수를 줄인 말이 
바로 풍수이다. 이러한 장풍과 득수라는 뜻을 빌리면 마애여래 풍수의 신비로움은 쉽게 
풀린다. 마애여래는 바위에 새겨진 불상을 말한다.
  가산리 마애여래는 금정산 고당봉 너머 북서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바위들로 둘러싸여 
있는 해발 727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바위들이 C자형을 이루며 주변의 바람을 감추는 장풍의 풍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서 보내던 날 밤 바람이 태풍처럼 울부짖었는데도 마애여래상 바로 앞에 있던 
촛불은 미동조차 없었다.
  장풍에는 또한 걸맞는 득수가 있어야 한다. 이런 국면에 걸맞는 득수를 찾아보자. 
마애여래 석불이 음각되어 있는 바위를 정점으로 컴퍼스를 돌릴 경우 중앙원이 C자형의 
바위들이 되며 뒤쪽에서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능선들이 중간원이고 가장 뒤쪽의 물결치듯 
병풍을 이룬 산들이 큰 원이 된다. 즉 마애여래 장풍 국면은 뒤쪽의 큰 원으로 비교되는 
곳까지 연장됨을 알 수 있다. 산세들을 태풍으로 비유하면 마애여래는 태풍의 눈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큰 원에 해당하는 산능선은 금정산 장군봉 자락으로 금정산의 최북단이다. 이러한 
풍수형국의 국면을 다시 사진 앞쪽으로 연장시켜보면 산성마을 남단에 있는 상계봉까지 
닿는다. 여기서 장풍의 중심을 이룬 마애여래의 영향권은 금정산 전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정산의 장풍 국면과 걸맞는 득수 범위는 낙동강뿐이다. 현장에서 풍수를 
감상해보면 이러한 관계는 직감할 수 있다.

  낙동강 득수의 세, '천광하림'격
  금정 장풍국에 굽이쳐요는 낙동강 득수. 부산에 있어 낙동강은 득수, 금정산은 장풍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낙동정맥의 '낙동'은 바로 낙동강 물줄기를 말하며 '정맥'은 
낙동강의 근원이 되는 강원도 황지못 근처 태백산부터 동해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산자락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곳에서 헤어진 산자락과 7백리에 이르는 물줄기가 
이곳 금정산에서 최초로 만난다.
  낙동강 득수의 세를 장풍국을 이룬 마애여래 위치에서 쳐다볼 때 풍수이용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이를 감상해보면 낙동강 좌우에 도열한 용들이 
머리를 충분하였다. 이를 감상해보면 낙동강 좌우에 도열한 용들이 머리를 내밀며 강물에 
기를 쏟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도 강물이 빛을 발하고 하늘에서 빛이 쏟아진다.
  "천광하림 백천동귀 진룡소퇴..."(하늘빛이 내려오고 온갖 물들이 함께 모이면 진룡이 
근처에 있는 것이다)라는 (청오경)의 풍수적 명언이 확연히 드러나는 곳이다. 이러한 
기세가 치고 들어오다 방향을 남쪽으로 돌린다. 그후 낙동강의 물줄기는 풀어져 아늑하고 
부드럽게 부산의 젖줄을 이룬다. 하지만 꺾이기 전의 기세는 어느 한 곳으로 밀치고 
들어오는데 마애여래상 위치가 그곳이다. 그래서 그 부근의 바람은 엄청난 위력을 
갖는다.
  이곳에서 35년간 마애여래를 모셔왔다는 현규봉(여, 67세) 씨의 증언을 듣자면 "하늘의 
빛이 수정처럼 내려오다가 돌아 강물과 어울려 춤을 추며 떨어졌다"고 한다. 또 
마애여래상의 바위와 입석들이 그믐밤을 전후로 발광을 하는데 영험하다고도 한다. 
필자는 그건 바위에서 나오는 인 때문이며 흔히 말하는 도깨비불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풍수상의 천광하림은 역력하였다. 천광과 득수가 어울려 밀치고 들어올 때 장풍 
형국이 그것을 담고 C자형을 이루는 그 끝부분에 마애여래가 있는데 석불의 시선은 
금정산의 고당봉을 향하고 있다.

  은둔처였을 거라는 추측
  이상으로 낙동의 득수와 금정의 장풍이 조화를 이룬 것이 마애여래상의 풍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화를 향해 호승예불의 증험을 볼 수 있다. 일찍이 최치원이 
칠언절구를 남겼다는 유명한 오봉산 제1봉(530m)의 자태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앞 
종고개 야산은 목탁으로 예불 때 오봉산 제1봉이 장삼자락을 모으며 절을 하려고 막 
엎드리려는 순간이다. 그 앞 증산리 야산(133m)은 전형적인 거북이로 다산하는 거북의 
알처럼 배 언저리와 꼬리 부근에 집들이 몰려 있는 것도 보인다.
  명당 주위에는 걸맞는 형국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애여래상은 낙동의 득수를 장풍에 담아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의 지기를 왕성하게 한다. 
이어 금정산은 부산을 발복하게 한다.
  마애여래의 제작시기를 추측해보면 범어사 창건 이후에서 고려시대 이전으로 보인다. 
이는 풍수 전래 이후라는 요건과 금정범어사라는 풍수상 지기 관련들을 충족시켜야 하고 
고려 왕건 정책상 도선국사를 빌미로 한 지덕설의 허가조건이 못된다는 견해에서 
그러하다. 어찌 보면 십승지 같은 은둔처처럼 한때 숨어사는 자들의 거처이기도 했다는 
설도 있다.

    금정 지기 껴안은 옥녀금반형--산성마을
  '기분좋다' 혹은 '안 좋다'라고 흔히들 표현을 한다. 기의 분포를 기분이라 하며 또한 
분포된 주의의 기를 바로 분위기라 칭한다.
  오늘 하루의 시작이 분위기 좋은 사무실에서 기분까지 좋았다면 바로 그 자리가 오늘의 
명당인 것이다. 명당이라 함은 풍수에서 기를 받는 곳을 가리킨다.
  월요일의 근무는 대개가 활기가 없고 주말에 가까운 근무일에는 기분이 좋다는 
통계자료가 있다. 이러한 기분의 리듬을 발복시점과 정지시점으로 따지는 것은 풍수의 
휴수기간에 비유할 수 있다. 기와 사람의 관계, 그 중 땅의 기(생기)와 인간의 
상관관계를 풍수에서는 지인상관설이라 한다.

  금정산의 지기를 가장 많이 받는 마을
  금정산의 지기를 가장 밀접하게 받는 지인상관의 마을이 있다면 단연 산성마을이다. 
산성마을의 행정지명은 부산시 금정구 금성동이다.
  금성동은 죽전마을, 중리마을, 공해마을이라는 자연부락 3개가 모여 이루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 어느 곳이 산성마을의 풍수 중심점일까. 이는 선조들이 붙인 
자연부락 지명으로 밝힐 수 있다.
  산성마을 산 너머에는 두구동이 있다. 두구동에도 죽전마을이 있는데 산성마을과 같이 
죽전으로 표기한다. 게다가 둘 다 바로 옆에 각각 중리마을을 두고 있다. 그러면 중리가 
두 마을의 풍수 중심점일까. 그렇지 않다. 십리, 오리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중리란 
중간쯤 떨어진 곳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중리 옆에 붙은 마을이 바로 풍수중심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두구동에서 중리 다음 마을은 대두마을이다. 이를 대두라 보면 
우두머리라는 뜻을 갖는다. 대두마을은 현재 두구동의 행정중심지이기도 하다.
  산성마을에서 중리마을 다음은 공해마을이다. 공해란 관청을 뜻하므로 예부터 이곳은 
관청이 들어선 산성의 중심이기도 하다. 그러면 공해마을과 금정산록의 어울림을 가장 잘 
보여주는 원효, 의상봉에서 산성의 풍수형국을 감상해보자.

  옥녀는 대체 어디에?
  금정산록은 산색으로 풀어지며 치마폭의 수를 갖춘 추임새로 바로 옥녀금반형임이 
한목에 느껴진다. 산상마을의 풍수형국은 젊은 여자인 옥녀가 받쳐든 소반 위에 차려진 
풍수마을이다. 금정의 지인상관설에 의하여 소반은 바로 금반이 되어 옥녀금반형을 
이루고 있다.
  어느 누가 보아도 옥녀금반형임이 분명한데 문제는 옥녀에 해당하는 옥녀봉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옥녀의 기감응은 확연히 뿜어져 나오고 있다. 관상을 볼 
때 눈을 감으라 한다. 이는 눈의 강렬함이 얼굴의 상을 감추기 때문이다. 산성마을에서 
강렬한 산기를 내뿜는 봉우리는 단연 파리봉이다. 그래서 파리봉이 없다는 가상을 하고 
산성마을을 관산해보았다. 옥녀의 치마폭처럼 주위의 산들이 부드러웠으나 옥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금정산을 관리하는 최승만 씨와 산성마을에서만 10대째 이어온 토박이 
이춘지(65세) 씨의 증언을 토대로 산성풍수에 접근하여 보았다.
  파리봉(600m)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엇다. 갖가지 이설이 있지만 파리는 팔이의 
변음으로 팔방에서 볼 때 각각 다르게 보인다 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명이 가장 
타당성이 크다. 실제로 영남의 인걸지령인 금오산과 부산의 영산인 금정산 고당봉은 각각 
보는 방향에 따라 그 생김새가 특이하다. 파리봉 역시 기가 세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파리봉 아랫능선 자락에 나지막한 동산 하나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청소년 
수련장 뒷산으로 안산이라는 이춘지 씨의 설명에 바싹 다가왔다. 안사을 말안장의 뜻 
안산으로 풀이할 때 배후에 있는 파리봉 장군의 무기를 형으로 하여 말안장을 사로 잡을 
때 이는 장군전마형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취재결과 장씨 성을 가진 육군준장 한 명이 산성에 있었을 뿐 지인상관설로 
보아 장군전마형은 산성의 풍수발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산은 결국 
풍수에서 사신사를 논할 때 사용되는 안산이 되는 것이다.

  자연보호해야 옥녀금반형 풍수발복
  이에 이르자 산성풍수의 단서가 잡혔다. 산성풍수의 중심은 앞서 밝혔듯이 
공해마을이다. 그리고 풍수법칙상 안산은 이러한 중심점 앞에 있는 것이다. 또한 중심의 
배후에서 진산(음택에서는 주산이 된다)은 으레 양쪽으로 각각 15도 안(30도 범위)에 
있어야 한다는 경험이 떠올랐다. 이는 그곳에 옥녀의 비밀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곳은 산성의 공해마을 뒤편, 즉 남문 주변을 말한다. 그래서 남문 부근을 집중적으로 
탐문했다. 남문 근처에 생기산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기산은 옥녀봉의 형상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생기가 일어난다(기)는 뜻에서 풍수상 기세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옥녀의 자태는 보이지 않고 치마폭을 이룬 산들로 둘러싸인 산성의 풍수. 그럴수록 
옥녀의 살내음은 더욱 강하게 풍겨왔다.
  그런데 "생기산 아래쪽에 이상한 형상의 바위가 있는데 궁바위로 흡사 자궁과 같아 볼 
때마다 야릇하다"는 얘기가 들렸다.
  지체없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여근 아래로는 물줄기가 흐르는데 
공해마을을 우측으로 끼고 도는 원류가 되어 음수까지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옥녀의 
강한 기를 느낄수 있었다. 산성마을의 옥녀는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 형상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풍수발복은 물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곳 주변의 자연경관이 파손되거나 
물이 흐르면 여자들이 음탕해지고 남자 자손들이 정신박약자로 태어난다는 풍수설이 
있으며 이를 잘 관리하면 자손이 번창하고 또한 재가가인과 인기인 그리고 정치가가 
태어난다는 지인상관설이 알려져 있다.
  "산성마을은 서북천이 흘러 9대 이상 있어야 발복한다"라는 풍수설은 우리 민족을 
욕하는 것이 된다. 중국 북경에서 북동쪽은 고구려 영토에 해당한다. 옛날 고구려가 
중원을 공략할 때 이에 시달린 중국사람들이 북동쪽(고구려)은 귀신(신출귀몰하는 
기마전투술)과 도깨비(용감무쌍한 전투력)라 하여 붙인 풍수풀이다. 서북천 발생 역시 
중국 중심의 아전인수격 풍수술인 것이다.
  이어 산성마을을 조리설로 설명하는 얼풍수 와전도 있었는데 행주형을 이룬 공해마을을 
들여다보면 50년을 주기로 하여 휴수 때 발복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용이 역력하였다. 
이런 현상은 필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림설명:산성마을은 공해, 죽전, 중리라는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금정산록이 
감싸는 옥녀금반형.)

  떠날 듯하면서 안 떠나는 행주형 발복--공해마을
  물과 관계되는 형국은 의외로 많다. 물(수)은 물(인물, 재물)의 발복을 제공하고 
인간에게는 이러한 터에 자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물에 뜬 연꽃 모양의 터를 연화부수형이라 하며 일례로 안동의 하외마을을 들 수 있다. 
발복은 수면선상에서 한다. 연꽃의 꽃심은 수면상과 같고 꽃심의 작용을 발복의 힘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에 뜬 거북형은 꼬리 쪽이 명당을 이룬다. 거북이 알을 낳은 꼬리쪽은 
다산을 상징하며 다복의 발복터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북형에 기댄 마을들을 
한결같이 꼬리 쪽에 형성되어 있다.
  북구에서 양산읍을 가다가 보이는 물금 앞쪽의 나지막한 야산이 거북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 역시 거북의 알처럼 촌락들이 꼬리 쪽에 붙어 있다. 그곳 사람들에게 내력을 
물어보면
  "글쎄요.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왔고 오늘날까지 마을이 번창했다면 바로 이곳이 명당 
아니겠어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들이다.
  산성의 공해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배모양, 즉 행주형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행주형, 인물발복과 물질적 풍요 의미
  행주형은 떠나갈 듯하면서도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데 풍수적 의미가 있다. 배 
모양이라면 그냥 주형이라 하여야 하는데 행자를 앞머리에 붙여 행주형이라 한다. 게다가 
그럴 듯하게 돛대를 달아 외견상 완벽함까지 갖추었다. 이렇게 꾸며진 행주형 위로 
승객과 화물들이 채워진다.
  여기서 승객은 인물발복을 뜻하고 화물은 물질적인 풍요를 말한다. 이는 곧 행주형의 
풍수발복이다. 그러나 행주형의 배가 떠나버린다면 타고 있던 인물과 재물이 떠난 격이 
되니 마을은 망해버린다. 그러므로 행주형 앞머리에는 떠나지 못하게 배의 닻을 묶어두는 
선창시설이 필요하게 되며 돛대를 세우더라도 돛을 세우더라도 돛을 절대 펼쳐서는 
안된다. 이 점이 떠날 듯(행자와 돛대)하면서도 떠나지 않는(닻과 선창 그리고 펼치지 
않는 돛) 풍수 비보책이다.

  비보책 잘못 사용 50년마다 불운
  공해마을 역시 배의 앞머리 3백미터쯤 되는 곳 우측에 소나무밭(4백여평)이 있어 배를 
묶는 선창시설 구실을 한다. 그러나 공해마을 두곳에 쌍돛대를 달아 풍수격에 맞지 않은 
결과를 빚었다.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나무가 무성하자 돛을 펼친 격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50년 주기로 나타난다고 한다. 구한말(1900년)에 공해마을은 공장이 
3개나 들어선 부촌이었으나 쇠락했고 또한 1950년께 윤모라는 천석꾼이 발복하였다가 
금세 망해버렸다. 그래서 차면 쏟아지는 조리(소쿠리터)형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행주형이 비보(돛대)를 잘못 세운 까닭으로 풀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늘날 이곳에서 일어난 현상은 현상은 심각성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예로부터 
공해마을의 단합은 유명하였다 한다. 한데 1988년부터 음식점의 수도세 절약 방안으로 
우물을 파기 시작해 금세 10여개가 생겼다. 이는 행주형의 배밑창을 뚫어버린 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989년 문중의 재산권(4필지, 약3천여평)문제가 대두되더니 결국 세 
파로 갈라지고 1991년부터는 법정문제로 번져 이제는 어느 쪽이 승소하더라도 소송비용도 
못 건지는 승자 없는 소모전이 되었다고 이곳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땅은 거짓을 모른다. 모든 탓은 인간에게 있다. 앞의 사례보다 심란한 현상이 금정산에 
있다. 이곳 산성에서 북문 중간쯤 되는 곳에는 건물의 잔해들이 널려 있어 대낮에도 
으스스하다. 많은 사람들이 몰살당한 곳이라 하는 근거없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한밤중이면 곡소리가 나고 달밤에 귀신이 나타나며 마귀가 살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역시 사람들에게 있다. 곡소리는 바람과 물소리의 어우러짐이고 
마귀 불 역시 산고양이들이 건물 잔해들을 누빌 때 내뿜는 발광체였다. 모두 풍수의 
파괴에서 오는 자업자득인 것이다.
  옛날 금정산에는 금정산 특유의 나무가 무성했다. 그런데 목장이다 뭐다 만든다고 
나무를 마구 베어버렸던 것이다. 물길과 바람길은 그 작용에 있어 습성이 닮았다. 
그러므로 금정산을 넘던 바람들이 모조리 이곳으로 몰려든다. 바로 장풍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게다가 무분별한 벌채로 초목의 뿌리가 황폐해지자 물길마저 직류수로 
되어 득수의 흉이 되어버렸다.
  득수의 파괴는 모든 풍수의 파괴로 이어진다. 풍수의 고전인 (청오경)과 (장경)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구절 "기승풍즉산 계수즉시"(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춘다)라는 발복의 명언을 깨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곳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고 물길을 씻어내리고 재물마저 파내는 흉지가 된다.

    낙동정맥 첫 관문 계명봉 지령기세--금정구

  인류는 물을 얻을 수 있는 강변에 모여 살았으나 우물 파는 기술을 터득하자 먹거리를 
찾아 자연 속으로 퍼져나갔다. 산업혁명으로 우후죽순 공장들이 세워지자 먹거리를 찾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어 도시를 이룬 것이 고작 몇십년 전의 일이다.
  금정산 의상봉에서 금정구를 잡은 사진을 볼 때마다 자연이라는 밑그림에 큰크리트 
물감을 칠해놓은 것이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다시 자연으로 눈길을 주면 땅은 그 넉넉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회동수원지의 
물줄기는 수태극을 이루며 저 아래 도시를 안아주고 있다. 이렇듯 금정산 자락과 해동의 
물줄기에 끼어 있는 것이 금정구이다.
  자연과 도시는 수평관계일 수 없고 도시를 상위로 자연을 상위로 하는 수직관계는 
더더욱 될 수가 없다. 당연히 자연을 위로 도시를 그 아래로 하는 수직관계가 자연과 
도시의 균형이고 조화인 것이다. 이러한 수직의 조화를 논하는 학설이 풍수지리다.
  땅의 이치란 땅에 의하여 모든 것이 자랄 수 있다는 지모의 체온을 느끼는 것이며 
이러한 체온은 생기를 말하는 것이다. 어미의 숨결, 그것은 산자락에 둘러싸인 
바람(장풍)이며 물줄기라는 젖줄의 부드러움을 그곳에 멈추게 하는(득수) 것이 풍수이다.

  금정구의 관산자리 계명봉
  금정구의 자리에서 숨결과 풍수로 한목에 잡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 이를 관산자리라 
한다. 한양의 터를 잡던 무학이 관산자리를 지나쳐 오락가락하였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 
왕십리인 것처럼 풍수에서 관산자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계명봉 중턱의 계명암을 지나서 10여분 정도 오솔길을 오르면 봉수대가 보인다. 그곳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좌측 능선 덤불을 헤치고 약 5백미터 정도 계명봉의 주봉 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바위들을 만난다. 한쪽에서는 금정구 전체가 보이고 
조금 위쪽 바위에서는 낙동정맥의 대간룡들이 시야에 꽉 차온다.
  무릇 1천3백여년 전 의상이 바로 이곳에서 범어사 터를 관산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관산자리의 명당이다. 이곳 계명봉은 낙동정맥이 부산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긱도 
하지만 더욱이 이곳에서 잡히는 취서산, 천성산(원적산) 그리고 금정산의 연봉들은 
낙동정맥의 기세를 여실히 보여주며 풍수적 지령까지 널리 알리고 있다.

  삼수를 배출한 계명봉의 지령발복
  이 지령의 발복은 양산군 하북면 삼수리에서 시작된다.
고려말께 이전생이란 사람이 이곳에 명당의 길기가 뭉쳐 있음을 알고서 1380년 정착을 
한다. 그후 세 아들을 이곳에서 얻는다. 큰아들 징석의 태몽에서는 취서산이 나타났다 
하여 취봉이라 불렀고, 이어 둘째아들 징옥(조선초기 여진족을 정벌한 이징옥 장군)은 
원적산(천성산) 그리고 세째아들 징규는 금정산이 태몽으로 나타났다 하여 각각 원봉, 
금봉이라는 아호를 붙였다.
  이후 세 아들은 각각 자신들의 정기가 점지된 산중에 들어가 글공부와 무예를 
연마한다. 그리고 모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의 품계가 종1품(오늘날 부총리급)까지 
올랐다. 그 때문에 이곳의 지명도 삼수리로 바뀌었으며 그 세 장수의 아비인 이전생은 
태종대왕으로부터 양산(당시까지 지명은 양주)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아비는 군명을, 
자식들은 마을명을 지명발복시킨 오늘날의 양산군 삼수리, 이후 이전생은 99세의 
장수까지 누리니 명당의 발복치곤 대단한 것이다.

  금정구의 구조를 까치로 지정한 건 적절한 선택
  계명봉은 또한 주위의 지명도 잘 갖춰놓고 있다. 계명이란 닭울음 소리를 말한다. 닭은 
때를 알린다. 제사 지낼 시간에 우는 축시의 닭이 있고 새벽의 소식을 알리는 인시의 
닭이 있다.
  더욱이 60회갑자에 한 번 나온다는 오명계는 풍수에서 말하는 하늘의 닭인 천계며 
금계를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계명봉인지라 곧잘 봉황에 비유되기도 한다.
  계명봉 앞에는 노포동의 사배야산이 있다. 새배려의 발음표기인 사배야는 현대어로 
풀면 새벽이다. 따라서 계명봉은 새벽에 우는 오명계를 상징하는 것이 된다. 새벽의 
소식에 걸맞게 금정구의 구조를 까치로 지정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다.
  계명봉을 거친 낙동정맥의 지령은 부산의 골격들을 잡아가는 산자락으로 지모의 넉넉한 
품안을 실감하게 한다. 본맥은 고당봉에서 백양산 그리고 구덕산을 거쳐 몰운대에 
이른다. 이 본맥이 오늘날 부산을 이루는 골격이 되었고 계명봉에서 빠져나간 일맥이 
동쪽으로 돌아가서(회동) 회동동 수태극과 음양조화를 이루다가 멈춘 곳에 동래읍성이 
발복하였으니 이는 부산의 맥이 된다.
  얼마전 어떤 사람이 금정산록을 더듬어 내려가다가 오늘날 금정구의 형국을 눈치채고 
앞산이 발복시킨다는 관산자리에 터를 잡았다. 그 관산자리를 문창대라 이름하고 
입지시킨 것이 부산대학교이다. 그러면 금정구의 풍수형국이 어떠한지 밝혀보기로 하자.
  (그림설명:낙동정맥은 취서산과 천성산에 이어 계명봉으로 들어온다. 계명봉은 부산에 
새벽을 알리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부 발복 상징하는 와우적초안--금정구 형국

  금정산은 부산이라는 나무의 뿌리
  부산의 금정, 범어, 동래, 부산이라는 지명들은 북쪽에서 남쪽 순으로 유래되었다고 
한다.
  풍수서에 익숙치 못한 사람이 흔히 겪는 혼돈 중의 하나인 남쪽을 위로 하고 북쪽을 
아래로 하는 혈자리와 같은 방위도의 그림이다.
  이러한 풍수 방식에 따라 부산지도를 금정산에서부터 돌려놓고 쳐다보면 한 그루의 
나무가 연상된다. 즉 금정산은 부산이라는 나무의 뿌리인 것이다. 삼국유사에 전하기를, 
금정은 금악으로 불려지다가 신라 문무왕 시절 신인의 계시로 금정이 되었다고 한다.
  이어 678년 범어가 바로 옆에 자리잡는다. 뿌리인 금정과 범어사에서 뻗어나간 가지 
하나가 동쪽에서 80년간 자라다 윤산(구월산)을 꽃받치대로 삼고 그 당시 거칠산군 
자리에 동래라는 꽃을 피운다. 그때가 757년이다. 부산이라는 나무는 몰운대까지 자란다. 
이 나무숲이 오늘날의 부산인 것이다. 그 중 좌천동 뒷산(지금 금성중학교가 있는 
봉우리)이 가마솥을 닮았다 하여 부산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부산포에 있는 작은 산 
하나인 부산, 그때가 1470년이다.
  그런데 좌천동 뒷산인 부산을 보면 경주의 진산인 낭산처럼 풍수의 세가 와닿지도 않고 
양산의 진산인 성황산처럼 풍수의 형이 만발되지도 않는 그저 묫자리 몇 개 정도로 
굶기나 면할 형편이다. 이런 산을 부산의 진산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식자들도 있으니 
한마디로 풍수에 대한 무지에서 나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에 우리의 산자락과 풍수적 명산을 모조리 정리한 신경준 선생의 산경표에도 
부산이라는 산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낙동정맥의 정맥항렬에 당당히 금정산을 
천명하고 있다. 부산의 진산은 금정산임이 여기서도 검증된다.

  금정구는 '복'형
  금정구는 부산의 뿌리인 금정산 본맥의 줄기와 동쪽가지인 윤산(구월산)자락 사이에 
자리한다. 이러한 지형을 풍수에서는 뱃속에 들었다 하여 '복'이라고 하며 우리가 흔히 
산자락 중턱에 놓인 도로를 산복도로라 부르는 것과 같은 발상이다.
  풍수에 있어서 뱃속인 복(배)은 복(행복)을 주는 자리를 상징한다. 뱃속은 따뜻한 
자리가 되며 이는 지모의 체온인 생기가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형 중 최고는 
소의 배라는 우복을 친다. 속리산에 있다는 우복동은 지리산 청학도, 가야산 만수동과 
함께 3대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금정구의 형국을 언뜻 보면 대조포란형으로 넘겨짚을 수가 있으나 그것은 국부말단적 
형국이다.
  금정구가 기댄 금정산 자락 속에서 평화스럽게 엎드려 있는 소, 즉 와우이고 
부산대학교 터는 소의 뱃속에서도 위에 해당한다.
  소의 위는 여러 개가 있으며 되새김질을 한다는 특징이 있다. 질겅질겅 씹는 것은 
풍수상 득수의 현상과 유사하다. 그리고  발복은 부의 축적을 말하며 그것도 오랫동안의 
발복을 가리킨다.
  그런데 소에게는 먹을 수 있는 풀더미, 즉 적초가 필요하다. 그것도 엎드린 소 앞에 
밥상처럼 차려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책상이라는 뜻의 안자를 붙여 이를 적초안이라 
부르며 이러한 명당의 형국 조건들을 모조리 갖출 때 와우적초안이란 일컫는다.
  와우적초안 형국을 낙동정맥 선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취서산 아래에 있는 
통도사가 바로 그것이다. 양산군수 권만이 그곳의 풍수형국이 와우형이라는 것을 알고 
주위에 발복시킬 안과 사들을 정한 것이 1748년이다.
  소가 먹을 풀이라는 초산의 지명을 정하고 또 지산리로 명명하니 글자 그대로 초지가 
된다. 이어 소가 마실 물이 필요하다 하여 순지라 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초산리, 순지리가 통도사를 감싸고 있으며 소를 묶어두는 역할을 
하는 통도사 사찰에 서 있는 돌들을 쇠말뚝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낙동정맥에서 찾은 풍수로 금정구의 풍수형국이 검증되며 지명풀이까지 할 수 
있다.
  먼저 와우의 위에 해당하는 부산대학교에서 안(안산)이 되는 구월산을 쳐다보면 유난히 
불쑥 튀어나온 봉우리가 있다. 나락더미를 쌓아놓은 듯한 노적봉이다. 문창대는 
부산대학교의 관산자리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교가에 나오는 문창성은 
풍수서에 나오는 천문이다. 그것에 관해서는 부산대학 풍수편에서 다시 살피기로 하자. 
여기서는 구월산이 적초안이 되며 이어 금정구의 형국은 바로 와우적초안이라는 것을 
밝힌다.
  금정구의 와우와 구월산의 적초로 지기가 발복하는 금정구의 풍수는 적초인 구월산 
자락의 동네지명들이 자연스럽게 풀리게 마련이다.
  (금정구지)를 보면 그 유래를 알 수 없다는 '공수물'이란 자연부락 지명과 함께 부곡 
그리고 오시게가 모두 구월산 적초 자리에 놓여 있다.

  부곡은 쇠죽 끓이는 가마솥에 해당
  부곡은 가마실에서 연유되었다. 그래서 뜻 그대로 쇠죽 끓이는 가마솥이다. 쇠죽을 
끓이려면 물이 있어야 한다. 공수란 공수전에서 나온 말로 외부인사들을 접대하는 비용을 
충당하는 밭으로 '접대'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물은 말 그대로 물이다. 즉 공수물은 
쇠죽 끓이는 물이라는 풍수적 의미가 된다.
  공수물은 또한 금양이라고도 불렸다. 양은 풍수에서 물을 가리킨다. 금은 적초더미인 
구월산 너머에 있는 금천(금사동을 가리키며 회동수원지 근방의 물을 말한다)이다. 
이렇게 구월산의 적초와 공수물의 물을 부어서 부곡이라는 가마솥에 쇠죽을 끓여놓고 
나서 와우를 부른다. 어서 오시게 하면 오시게의 지명발복이 끼여든다.
이로써 낙동정맥 선상의 취서산과 금정산의 풍수가 동색임을 알 수가 있다.

  팔송 중심 좌대룡 우청룡 발복--금정구 지명

  개똥, 쇠똥 하는 이름이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어린 생명들은 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 언제 어떤 운명에 직면할지 모르기 때문에 천한 이름을 지어 부르면 액땜이 된다고 
믿었다. 쇠똥, 개똥같이 천한 것을 어느 운명이 탐을 내 훔쳐가겠느냐는 착상에서 나온 
귀한 자식의 애칭이다. 인간을 키우는 지덕의 뼈대가 되는 낙동정맥 선상에는 
고헌산(1,030m)이 있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지만 대찬 기세는 가히 주위의 어떤 
산령보다 압도적이다.
  이 고헌산 자락에 쇠동골이 있다. 어찌 보면 쇠똥을 엎어놓은 것 같은 형상의 자리로 
보이지만 풍수로 보면 와우형국의 꼬리 부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헌산의 기세가 
워낙 엄청나 용변에 해당되는 물줄기도 만만치 않다. 이 물벼락을 쇠동골이 맞으니 늘 
물반 벼반의 농사가 되어버린다. 그 지방 부근이 한 3년 내리 가뭄과 한발이 들어서야 
비로소 이곳은 정상이 되며 쇠동골 농사만 흉년 속에서 대풍작을 이룬다. 그래서 
울산장날 쇠동골 사람들의 통성명은 유독 힘이 들어간다. "쇄통꼴 싸요!"하지만 다른 
모든 곳이 풍년 들면 쇠동골 사람들은 "소동고을..."하며 통성명마저 소쩍새 
절반울음처럼 기어들어가는 소리다.

  뱃속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 배냇골
  여기서 낙동정맥에 걸린 가지산 준령들만 잘 넘으면 뱃속 모양을 한 지리적 형상이 
길게 뻗어 있다. 이곳 사람들은 보통 붙여서 배냇골이라 부른다. 배냇골은 무척 길어 
아예 위쪽을 울주배내, 아랫쪽을 양산배내라 부른다.
쇠동골이든 배냇골이든 먹고 사는 것은 별반 다를 게 없다. 이곳의 지명들이 모두 뱃속을 
뜻하는 복형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모두들 풍수적 발복을 믿는 강한 신념에서 물반 
벼반의 고향들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 금정구의 풍수도 역시 복형이다. 어찌 보면 
울주배내처럼 산과 산 사이에 끼여 있다. 그러나 금정구에는 와우형에 걸맞는 
적초안(구월산)이 있기에 부를 누릴 터가 된다.

  지명의 발복, 지라라는 토양 위에서 싹튼 풍수
  풍수를 풍수지리라고도 하는데, 풍수와 지리는 구별된다. 지리는 거리, 경계 등의 
위치적 상황과 지표 위의 현상에 착안점을 둔다. 이에 비하여 풍수는 땅이 갖는 지리적 
착안이 되며 산자락의 물줄기를 따라 흐른다면 풍수적 발상인 것이다. 지명의 발복은 
당연히 풍수에 의하여 싹이 튼다. 그러나 그 씨앗은 지리라는 토양 위에 뿌려진다.
  새벽산(사배야산)과 닭울음산(계명봉)은 서로 붙여 있고 그 경계에는 지경고개가 잇다. 
말 그대로 지리의 경계라는 뜻이다. 한데 그 지경고개로 낙동정맥이 들어오고 있다. 이 
점이 바로 풍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옛날 금정구도 지리적으로 동래 동헌 북쪽에 있다 
하여 북면이라 불렀다. 이런 지리적 씨앗이 금정구 토양 위에 뿌려져 풍수적 지명의 
발복을 보이고 있다.
  지경고개부터 와우를 발복시키는 적초인 산자락까지 풍수로 살펴보자. 지경의 새벽산 
밑에는 작장마을이 있다. 까치의 손바닥같이 생겼다는 지리적 형상에서 붙여진 
풍수지명이다.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계명)이나 소식을 전하는 까치나 동색인데 까치는 오늘날 
금정구의 상징새이다. 또한 계명봉을 계룡이라고도 한다. 이 용이 팔송 쪽으로 내려와 
우측에 청룡동이 되고 좌측에는 대룡 마을이 된다.

  팔송 근처의 화장막 문제
  산에서 평지로 내려온 용은 사방을 한번 휘둘러본다. 팔송은 소나무 여덟 그루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지천에 깔린 것이 소나무일진대 고작 소나무 여덟 
그루가 지명발복이 되었겠는가. 여기서 팔은 팔괘를 상징한다. 이것은 사방팔방이란 
의미와 통한다. 그러므로 사방팔방이 소나무로 둘러쳐진 곳, 바로 오늘날의 부산시를 
말한다. 오늘날 부산시 동서남북의 끝지점을 볼 때 동쪽 끝에는 해운대구 송정동이 있다. 
서쪽 끝에는 강서구 송정동이, 남쪽에는 송도가 있다. 북쪽 끝지점 경계에까지 송정리가 
있는데 <양산군지>에서 밝힌 바를 보면 그 유래가 소나무 송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방이 
통하면 자연히 팔방에 도달한다. 즉 팔송은 부산의 터를 발복시킨다는 기운이 된다.
  이러한 풍수현상은 서울에도 있다. 6백년 전 무학이 한양의 터를 잡을 때 북한산을 
진산으로 하고 남주작을 관악산, 좌청룡을 용마산 그리고 우백호를 덕양산으로 하는 
외사신사를 잡았다. 이 네 산이 오늘날 서울특별시의 경계가 되었다.
  6백년 전 서울의 풍수 예언, 부산 팔송의 풍수적 발복들은 지기의 체온을 느끼고 그 
온도를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팔송풍수 근처에 화장막을 세운다는 것은 태워버린다는 
의미와 통하고 이는 부산의 발복지기를 태운다는 대흉이 된다. 생각해봐야 할 풍수적 
문제이다.
  팔송 다음에는 구월산을 중심으로 하여 우측에 구서동이 있고 좌측에 회동동이 있다. 
구서동에는 거문고 모양이란 의미에서 금서마을이 있고 그 아래에는 구야마을이 있었다. 
구서동의 유래를 구세동거에서 구세가 구서로 되었다고 밝히는데 별로 와닿지 않는 
문자풀이다. 이러한 지명들은 토양 위에서 자랄 수가 없다. 구올산의 거북이가 
계명봉에서 내려와(영구하산형) 좌측 동쪽으로 돌았으니 회동동이며 구올산 너머 우측은 
서쪽이 된다.
  그래서 구서라 이르면 거북(구올산) 서쪽 동네가 되고 금서라 붙이면 구올산 서편에 
자리하는 거문고 풍수형의 마을이다. 구야는 구월산의 거북세를 잡아 야자형국을 이루고 
있는 동래읍성의 풍수 지칭이다.
  우리의 풍수 지명들은 고상한 문자풀이가 아니며 우선 쉬워야 한다. 그 때문에 한자에 
우리말이 불규칙하게 섞인 지명들을 자주 보게 된다. 금정구 금사동에 돌아올 회를 붙인 
회천마을이 있다. 쉽게 우리말을 섞어 돌회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박물관은 지세발복 열쇠--부산대학교
  
  최근 우리 것을 찾자는 움직임과 더불어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신토불이이다.
  청산의 산색을 물에 절이면 녹수와 어우러지는데 그 청산자락에 기대어 녹수까지 
품는다는 배산임수는 이 땅의 전통 마을입지를 이룬다.
  배산은 장풍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고 임수는 득수로 젖줄이 되니 풍수는 우리의 
신토불이 지리학이라 할 만하다.
  삼천리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이어진 이 땅의 맥들이다. 그래서 정맥을 이루고 가락국 
동쪽 녹수의 이름인 낙동에서 매듭을 얽어 낙동정맥이라 일컫는 것이다.
  여암 신경준 선생의 산경표와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에서 낙동정맥의 
윗대항렬인 백두대간의 큰줄기가 언제부터인가 다서토막(마천령산맥 함경산맥 낭림산맥 
태백산맥 노령산맥)으로 잘려나갔다. 이는 지하자원 수탈정책에 혈안이 되었던 일제가 
고토분지로(소등문차랑)의 1903년 발표를 근거로 산맥이름도 창씨개명한 부끄러운 
이름들이다. 마식령, 멸악 같은 섬뜩한 광물성 명칭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금북정맥이라는 우리 고유의 이름으로 부른다면 녹수인 금강 북쪽에 걸린 청산줄기가 
한눈에 잡혀오면서 금강을 따라 여행할 때 눈길 한 번이라도 더 줄 텐데 차령산맥이라니 
어디를 말함인가.

  부산대풍수의 관산지점
  우리의 산자락과 어우러짐 속에서 신토불이의 장단이었던 풍수를 찾자는 바람에서 젊은 
지성들이 숨쉬는 부산대학교를 찾았다. 부산대의 한 교수를 만나 수소문하였으나 
풍수자료는 물론이고 설립 당시 증언자 역시 전무한 상태였다.
  이럴 경우엔 언제나 그랬듯이 부산대 뒷편 금정산 자락에 매달려 하루를 보내고 또 
하루를 앞쪽 건물 위에서 종일토록 풍수감상을 하는 수밖에. 세 군데의 풍수착점이 눈에 
들어왔다. 학생회관 뒷편의 봉곳한 봉우리(212m)와 박물관 그리고 문창대가 바로 
글것이다.
  이에 접근해보면 부산대에서 구서동 방면의 산록들은 마냥 풀어져 산자락이라 할 수 
있으며 형을 뜻하기도 한다. 이어 온천동 방향은 본맥(낙동정맥)의 줄기로 세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형세가 품고 있는 부산대 터에서 학생회관 뒷봉우리는 금정산 
세의 줄기를 잡았고 문창대는 앞산(구월산)에서 형의 자락을 삼고 박물관은 좌향의 
중심점을 이룬다.

  학생, 교수회관 본관이 일직선으로 위치
  세를 살펴볼 때 먼저 6백년 전 풍수로 정도한 서울을 풍수교과서로 삼고 부산대를 
비교하면 재미있는 입지임을 알 수 있다.
  서울의 풍수기세가 밀려들어오는 곳은 주산인 북악산이다. 북악산 바로 밑에 오늘날 
청와대가 자리한다.
  서울의 북악산을 부산대학회관 뒷봉우리에 비긴다면 대학회관은 청와대 자리이다. 이어 
교수회관은 오늘날 광화문 건너 정부종합청사쯤 되고 대학본관은 서울시청 자리쯤으로 
밀려나 있다. 대학당국과 교수들이 학생들의 기세를 휘어자비기 어려운 풍수입지라 할 수 
있다. 특히 뒷봉우리와 학생회관, 교수회관, 대학본관, 건물들이 정확히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 학생들의 기세는 직격탄처럼 원색적이며 타협성이 없게 된다. 이러한 일직선상의 
풍수기세는 서울의 북악산과 현 중앙박물관(일제 때 조선총독부), 서울시청의 
입지점들이기도 하다. 이런 점을 일제가 식민풍수로 이용하였던 것이 밝혀져 오늘날 
여론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총독부 건물을 일자형, 시청건물을 본자형으로 건설했다. 북악산은 풍수상 
대자형임이 예부터 전해져왔다. 따라서 일직선상을 차례로 읽어내려가면 대일본이 된다.
  이러한 흉계가 서린 풍수잔재가 오늘날에도 많이 널려 있으며 부산도 예외는 아니다.

  박물관, 부산대의 중심점
  이제 부산대학교의 좌향을 살피기 위하여 박물관을 분석해보면 박물관은 부산대의 
중심점이며 북극성 자리로 건물들이 뭇별들마냥 박물관을 축으로 돌며 뻗어나가고 있다.
  온천동 방면의 산줄기처럼 우측 건물들은 대학본관을 포함해서 굽이굽이 구월산을 향해 
내려간다.
  이어 좌측 건물들은 구서동 방향의 산자락을 닮은 듯 법학관, 상학관, 사회관 등이 
박물관 앞에서 멈추고 있다. 그러므로 박물관의 방향은 부산대 좌향의 중심정을 이루고 
있다.
  풍수에 있어서 좌향은 발복의 열쇠가 된다. 부산대학교 풍수의 문창대에서 확연히 
풀린다. 문창대는 부산대 입지 때의 관산자리로 이미 알려져 있다.
  문창대는 풍수상 문성을 뜻하며 문성은 바로 태양을 상징한다. 이는 부산대학교 교가의 
별자리 구절도 뒷받침을 하고 있다.
  창은 창성하다는 뜻으로 문창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곳을 가리키므로 박물관의 좌향이 
구월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풍수이기론인 좌향이 이런 점을 더욱 북돋워주고 있다.
  문창대에서 정동쪽(강렬한 태양) 지점과 약간 동쪽에서 남쪽으로 좌향을 틀어잡은 
박물관이 구월산 어느 지점에서 정확히 만나고 있다.
  유독 봉곳하게 튀어오른 그곳은 풍수상 노적봉에 해당한다. 앞에서 밝혔듯이 부산대는 
와우형의 금정구 풍수형국 중에서도 소의 위(밥통)에 해당하니 쌓아놓은 노적은 소의 
먹이인 적초인 것이다.
  부산대는 풍수발복의 조건들을 보고 터를 잡은 것이다.
  (그림설명:문창대에서 적초를 잡고 우복의 중심점(박물관)을 발복시키는 부산대학교 
풍수.)
    남동쪽 신정문, 본관은 복위택--부산대 가상

  길택과 흉택의 가상
  공도생활의 터를 살피는 것을 양기풍수라 하고 개인 가옥을 보는 걸 양택풍수라 한다.
  가상학이란 바로 가옥의 상을 역학으로 풀어보는 것을 말한다. 세상 모든 것에는 
각각의 상이 있기에 관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듯이 가옥은 가상으로 길흉판단이 가능하다.
  대문은 기의 출입구가 되니 눈에 해당하고 안방은 잠을 자면서 기를 마시니 코에, 
식당은 기를 먹는 곳이기에 입에 비유된다. 이러한 대문, 안방, 식당을 가리켜 
양택삼요라 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기를 가지고 가상의 길흉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얼굴은 
이마에서 눈, 코, 입 순서로 붙어 있다. 그런데 눈 다음에 입이 자리한다면 그 관상은 
단번에 흉상임을 지적할 수 있듯이 가상에 있어서도 양택삼요가 제격에 제짝을 이루어야 
음양조화가 잘된 길한 집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대문, 안방, 식당의 구조라면 기가 
막히는 흉한 집이 되는 것이다.
  가상학에 있어 음양조화는 네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큰 양(태양), 작은 양, 큰 음(태음), 작은 음(소음), 이렇게 4개로 분류되는데 큰 것은 
큰 것끼리 조화를 잘 이루고 작은 것은 작은 것까리 음양조화를 이룰 경우 길한 집이라 
한다.
  예를 들어 큰 양과 작은 양이 각각 대문과 안방의 기에 배정된다면 조화를 못 이뤄 
흉한 상의 집이 된다.
  그런데 각 상에는 2개씩의 쾌가 자라하여 8쾌가 되고 이를 팔택가상학이라 한다. 
이러한 4상과 8쾌는 우리의 태극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건쾌의 효(음양부호들)는 모조리 양이 된다 하여 큰 양이 되고 이는 큰 음과 
음양조화를 가장 잘 이룬다. 전부 음효로 구성된 큰 음곤쾌와 조화를 이룰 때 매년 길한 
집이라는 연년택이 되고 팔택가상학에서 보는 최상의 길한 집이 된다.
  만일 건쾌(북서쪽에 대문이 있다)인 큰 양과 작은 음인 이쾌(남쪽에 안방)가 배치되는 
가상의 경우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조화를 못 이뤄 기가 막히고 끊어진다는 절명택으로 
흉택 중의 흉택이 된다.
  길택에는 연년택과 생기가 왕성한 생기택, 천의가 보살펴 아픈 사람을 낳게 해주는 
천을택 그리고 초년의 발복이 불같이 일어나는 복위택이 있다.
  흉택의 가상 역시 네 가지가 있는데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액운들이 
작용한다. 화살을 맞으면 아프듯이 병을 얻는 육살택이 있고, 주색잡기에 패가망신의 
피해를 보는 화해택, 관재 구설과 송사 등이 귀신 옴 붙듯하는 오귀택 그리고 기가 막혀 
대가 끊기는 절명택이 그것이다.

  부산대, 여학생 기 살고 남학생 기 시들
  이를 토대로 부산대학교의 가상을 살펴보면 그림에서 보듯 중심점은 박물관이 되고 
대문(신정문)과 안방(본관)은 모두 손방(남동쪽)에 자리한다. 이렇듯 똑같은 쾌가 
중복되는 것을 복위택이라 한다.
가상을 분석해보면 신정문 건립 초창기에는 불 같은 발복을 이루나 차츰 기운이 약해져 
이후에는 대인이 나와서 부산대학교를 이끌어가야 계속 번창을 누릴 수가 있다.
  손쾌는 아래 효에 음이 받치고 있어서 장녀를 말한다. 학창시절 여학생의 기는 차츰 
살아나고 남학생은 그 반대가 된다.
  각 단과대학 중 최고의 길상은 진쾌 방향으로 부산대 손쾌와 음양조화(두 쾌의 효들을 
보면 음양조화에 갯수와 위치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를 가장 잘 이루어 연년택이 
되는 건물은 미술관과 물리관이다. 생기택은 손쾌와 함께 같은 4상의 짝을 이룬 감쾌로 
북쪽의 법학관과 상학관이며 활기찬 대학생활이 보장된다.
  천을택은 작은 양(부산대의 손쾌)과 조화를 잘 이루는 작은 음(진쾌, 이쾌) 중에서 
연년택(진쾌)을 제외한 이쾌가 된다. 이곳 배정에는 약학관과 한국문화연구소가 있는데 
약대의 경우는 천의라는 해석에 걸맞아 안성맞춤이고 특히 여학생의 경우에는 어질고 
총명해 빼어난 인재가 되니 최상의 명당이라 할 수 있다.
  부산대는 동쪽(동사택)의 상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남동을 뜻하는 손쾌는 바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동쪽에 자리한 공대계열(화공관, 전기관, 기계관)과 체육관은 
복위택에 속하며 초기에는 재산(학문)의 바람을 탄다. 그러나 바람이 휩쓸고 간 후에는 
여자를 조심하고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한다.

  부산대 가상, 사범관이 문제
  이상으로 부산대의 길상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부산대의 상 중 풍수적으로 특히 두 
가지가 걸린다. 풍수형세로 볼 때 박물관 좌측 편에서 그대로 직통하는 물길이 그것이고 
가상으로는 사범관이 문제된다. 북동쪽은 간쾌가 되는데 이는 화해택에 속하기도 하지만 
사범관은 좌청룡 우백호로 보호해줄 좌우 건물마저 없는 환경이다.
  제2사범관의 경우도 남서쪽인 곤쾌로 오귀택이 되는데 주위에 주위에 양로원, 
정신병원들이 산지해 있다.
  그러나 일찍이 기의 성현 율곡선생은 풍수를 묻는 임금 앞에서 이렇게 갈파하였다. 
천시불여지리며 지리불여인화라고. 즉 타고난 운명보다는 지리가 중요(이 부분을 
음택술사들은 탈신공개천명)이라고 현혹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풍수보다 인화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부산대학교는 젊음들의 인화가 넘칠 듯하고 더욱이 이곳 터전을 잡은 설립자는 혜안이 
있었기에 일찍이 문창대에서 묏자락과 물줄기로 갈무리하는 터전을 잡았다. 이어 
문창성에 좌향을 맞추고 또한 와우적초의 발복 풍수형국을 정했는데 어찌 말단의 뜬쇠 
하나 매달릴 풍수자락이 걸림돌이 되겠는가.
  영도의 옛이름이 절영으로 명마의 길기를 뜻하는데 절명택 하나만 알던 반풍수가 영도 
주민들은 후대가 끊어질 것이라고 함부로 떠드는 처사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금정산 자락에서 구월산 적초를 잡은 풍수 개안소식이 부산대학교에 젊은 지성들과 
함께 어우러짐이 보이지 않는가!
  (그림설명:부산대학교 팔택가상)

    화지산 지령 받은 야자형 명당--정묘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나야 면장자리라도 앉을 수 있다고 풍자되어온 풍수의 인걸지령을 
묘자리 지령인걸 발복에 모든 것을 맞출 때에는 문제가 생긴다.
  숭생기는 생기를 얻는다는 풍숭의 목적이 되는데 우리나라 주기론의 최고봉이었던 
율곡은 풍수를 (성학십요)에서 밝혔다.
  "신이 살피건대 명당이라 함은 오직 바람을 막을 수 있고 양지가 바르며 흙이 많고 
물이 스며들지 않음이지 방위득파 등을 논하는 풍수설(음택풍수)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역장은 흉이 되고 그래서 화를 당한다고 열을 올리며 주장하던 말단의 지관들, 하지만 
역장은 어떤 풍수서에도 나와 있지 않는 풍월풍수일 뿐이다. 율곡은 역장자리에 당신의 
신후지지 잡지 않았던가.
  죽은 자의 뼈가 산 자의 뼈에 감응하여 발복을 준다는 음택술사들의 논거는 동기감응의 
일반적 주장이다. 그러나 풍수고전을 눈을 씻고 보아도 학리상 논거가 될 수 없는 
두루뭉실한 이론일 뿐이다(시이동산서붕 영종동응). 그런 식의 음택발복이라면 잘되면 제 
탓이요 못되면 조상 탓이니 인화의 장애물밖에 되지 않는다.

  정묘의 주산은 화지산
  정묘는 분명히 풍수발복하였다.
  문민발탁에서 당당한 1위로 조선 역대 조정들을 채웠던 역사적 사실을 한갓 무덤이 
씌워준 도깨비 감투로만 볼 수 없다는 판단이 정묘풍수에 접근하게 된 동기ㅇ. 먼저 
정묘가 왜 명당인지를 풍수지리학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부산 진구 양정동 469번지에 자리하는 정묘는 고려말 정문도의 묘를 가리키며 화지산 
자락에 기대어 있으므로 정묘의 주산은 화지산이 된다. 풍수에 있어 산줄기는 살아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의 족보를 논하듯 엄격한 조종항렬을 살펴야 한다(간룡법).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고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다"라는 익숙한 노랫말은 
풍수서 (인자수지) 제2절 태조산을 인용한 것이기도 하다.
  (인자수지)를 근거로 정묘의 뿌리와 새암을 살펴보면 정묘는 금정봉(397m)을 소조로 
하고 금정산(802m)을 태조산으로 삼으므로 적잖은 의미가 있다(이에는 다른 설도 
존재하고 있음).
  금정산에서 일지맥이 동으로 빠져 구월산에 이르러 진산이 되어 동래를 발복시켰고 
본맥(낙동정맥)은 남쪽으로 내려오다 금정봉을 소조로 삼아 부모인 화지산에 기댄 정묘는 
금정산 봉우리 그리고 화지산의 지령에 있어 손자며 자식인 것이다. 이어 정묘의 
태조산(금정산)은 동래를 일지맥으로 잡아 발복시키니 신라 6촌의 하나였던 정씨가 
오늘날 동래 정씨가 된 것도 그러하지만 이 새암인 동래읍성과 정씨의 뿌리인 정묘의 
풍수형국이 모두 야자형을 이루고 있다. 즉 조종항렬의 뼈대를 이은 정묘의 세는 풍수 
합격점이다.

  야자형의 정혈 자리는 중간획
  그런데 그러한 세를 담을 수 있는 형이 있어야 비로소 명당이라 할 수 있으며 
형안에서도 정확히 자리를 잡아야 승생기라는 풍수목적에 도달한다. 형을 알기 위해서는 
부모산인 화지산을 살펴야 한다. 세를 전달하던 산줄기가 산자락으로 떨어졌다는 낙지에 
걸린 매화의 형이 널리 알려진 명당이듯 산자락을 살파라는 격언과도 통한다.
  화지산의 산자락은 정묘 주위를 야자형으로 감싸고 있다. 여기서 첫획은 좌청룡이, 
마지막 획은 우백호가 되어 힘차게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중간획을 품고 있으니 
야자형에서 정혈자리는 바로 중간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묘 역시 중간획 
끝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정묘는 형과 정혈자리 역시 명당풍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 항렬 윗대가 되는 금정봉(소조산)에 올라 화지산(부모)과 정묘(자식)를 보다가 
정묘풍수의 한 소식을 잡았다.
  예부터 화지산은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으로 알려졌고 정묘가 유독 정혈된 
부근의 산자락에 기가 맺혀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연꽃(화지산 부모)이 맺힌 열매의 
무게로 고개를 숙이고 물 밑을 바라본다는(정묘 주위의 산세) 연화도수형은 정묘의 
형국이기도 하다.
  화지산이라는 연꽃의 열매를 야자형의 그릇에 담고 있는 풍수가 되는데 주산인 
화지산의 이름이 풍수걸작으로 떠오른다.연꽃을 가리키는 꽃 화자에 바람을 감춘다는 
장풍형인 야자형에 득수라는 삼수변이 모조리 들어간 이름이 바로 화지산이 아닌가. 곧 
연꽃풍수형이라는 풍수산도를 주산의 이름에 올박아놓은 것이 정묘풍수의 특색이며 
화지산이 된다. 따라서 화지산의 명칭은 정묘발복을 더욱 북돋워주려는 발원으로 동래 
정씨 문중에서 어떤 인물일까 하는 추측마저 가능해진다.
  이제는 삼수변이 가리키는 정묘의 득수를 알아보기로 하자. 풍수에 있어 물은 좌향을 
간잡이해주는 것으로 발복의 길흉과 방향을 예견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그림설명:정묘와 동래읍성의 풍수가 물길까지 같은 것을 볼 때 양기, 음택풍수의 
원리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지산 기세로 부보다는 인걸 발복--정묘의 세

  음택풍수의 목적은 시신이 생기를 얻는다는 승생기에 있다. 정묘 역시 생기를 뼈대 
있는 조종항렬로 받고 잇다. 금정산에서 금정봉에 이르는 낙동정맥의 산줄기가 바로 
그곳으로 세에 해당한다. 또 이러한 생기가 멈추지 않고 그냥 통과할 때 이를 과맥이라 
부르며 과맥에는 묘를 쓸 수가 없다. 따라서 생기의 멈춤을 필요로 하게 되고 산자락과 
물이 그 역할을 한다.
  '명산에 명당 없다'는 격언이 가리키는 것은 명산들은 유난히 꿈틀거리는 산줄기와 
과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묘도 이러한 풍수원칙에 어긋남 없이 금정봉 
산줄기가 아닌 그 아래 화지산 자락에 이르러 정혈되고 있다.
  생기는 물을 만나면 멈춘다(계수지지)는 풍수의 원리가 있다. 낙동정맥의 기세를 닮아 
힘차게 달리다 화지산 자락 야자형의 중간획에 뛰어들고 이어 물 앞에 이르면 멈추는 
듯한 정묘, 바로 화지(야)를 감추는 세이기도 하다. 물은 흐르는 것으로 양이 되어 
발복에 강한 힘이 된다 하여 좌향(묘자리의 방향을 잡는 것. 정묘는 정남방인 
자좌오향이다)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선결과정이다.

  정묘-조선 17명의 정승 발복
  조선의 왕릉장법이기도 하고 필자가 연구, 응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 
사대국포태법)으로 정묘의 발복을 짚어보았다.
  사진의 연못은 곤신방이 된다. (실제 파구가 연못에 가려 있을 때는 연못의 파구로 
삼는다). 이것은 사대국의 미파구에 해당한다. 손마디의 미를 짚어서 역으로 한 단계 
건너서 포태법을 돌려가면 정묘의 좌향인 자좌자리에 관이 잡힌다. 그러므로 정묘의 
발복은 부보다는 벼슬에서 된다. 이러한 풍수발복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정묘의 
지령인걸은 엄청난 위력으로 발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작 정묘의 주인 정문도는 고려 말 지방 아전에 불과하였다. 그의 시신이 이곳에 
묻히자 당대 발복으로 그의 아들 정목은 중앙정계에 진출한다. 이를 필두로 하여 역대 
조선 조정에 정승만 해도 17명을 배출한다.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정치의 안동 김씨 파벌 역시 광해군 때 김극효가 
좌의정 정유길(동래 정씨)의 사위가 되면서부터 다져졌다. 여기에 이르면 정묘의 지령과 
동래 정씨의 인걸발복은 분명해져 음택풍수 발복을 부정할 수만은 없게 된다.

  음택풍수에 있어서 인걸과 지령의 관계
  하지만 기존 음택술사들이 주장하는 만병통치약 같은 음택발복은 받아 들일 수 없는 
풍월이다. 한 대를 살아가는 풍수사가 몇 대에 이르는 가문발복을 어찌 체험할 수 
있겠는가. '전설의 고향' 같은 풍월풍수는 양기풍수와 양택풍수로 제자리를 잡아가는 
우리 전통지리학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흔히 명당하면 무덤부터 떠올리는데 무덤은 혈자리를 말하고 명당은 그 후손들이 제사 
지내는 무덤 앞의 터를 가리킨다.
  음택에서 말하는 명당 발복이란 혈자리의 지리가 씌워주는 도깨비 감투가 아니라 산 
사람들이 인화를 이루는 곳을 가리킨다는 것이 더 정확한 풀이일 것이다.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 집권층이었던 사대부들은 집성촌(양반촌)을 이루며 문중을 
중심으로 기세를 뻗어나갔다(안동 하회촌과 버들 류씨 문중 등). 이러한 문중들이 모였던 
곳이 바로 선대 묫자리였다.
  충효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이러한 무덤 앞에서의 효도 행사를 장려하였고 
묻힌 자가 충신일 경우에는 불천지위까지 내려 문중에 가장 큰 영광을 안겨주었다. 그런 
반면 가장 심한 형벌은 문중의 뿌리를 뽑는 부관참시(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찢는 
형벌)였다.
  문중 모임의 장소가 명풍수가 잡은 대명당일 경우 주위에 펼쳐진 산수의 절경과 함께 
지기의 음덕을 받는다는 풍수신념도 문중들이 모여들게 하는 큰 이유이다. 그리고 
문중들은 명당에서 한솥밥(잿밥)을 먹으면서 인화를 더욱 다져갔던 것이다. 문중은 
현대의 어떤 사업조직보다 더 위력이 있었다.
  명당은 그런 문중의 생사여탈권마저 쥐고 있다. 선대 묘 앞에서 웃어른은 어린 
종손에게 문중의 명당을 자랑스럽게 일러준다.
  "저 앞의 삼태봉이 이곳을 감싸고 있으니 우리 문중에서 후일 큰 인물 셋이 
발복된다"는 풍수신념은 어린 종손에게 그대로 전승되고 어떠한 역경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여기서 인걸과 지령의 풍수적 역학관계를 찾아볼 수도 있다. 진정한 음택발복은 
산사람을 중심으로 한 인화에 땅의 지령을 명당에 연결한 탯줄과 같은 것이고, 이러한 
음택발복에 대하여 일찍이 밝혔던 율곡 이이의 깊은 뜻, 풍수지리보다는 인화단결이 더욱 
중요하다는 개안풍수 소식을 음택발복에서도 들을 수가 있다.

    천리가 열어준 천장비지 대명당--유엔 묘지
  
  "우리는 풍수와 상관 없소"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천리지행이란 말이 있다. 땅은 하늘의 뜻을 행할 뿐이라는 뜻이다. 하물며 인간이 어찌 
하늘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서울 명동성당이 대명당이라는 풍수적인 평가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성당건물은 
남산자락을 그대로 살려 앉혀놓아 아래쪽 입구에서 보면 실측 높이보다 더욱 하늘에 
가까운 듯하고 통치권의 주산격인 백악산의 맥세를 주시하고 있는 형상이다.
  삼권분립에서 정부견제라는 국회기능을 생각하면 이곳에 국회가 들어섰다면 오늘날의 
민주화는 더욱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한때 국민과 국회가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을 때 민의의 바리케이드가 명동성당에 설치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그래서 이곳을 군왕지지라 일컫기도 했다.
  풍수 최상의 대명당인 이른바 천장비지는 인간의 눈으로는 식별하기가 쉽지 않고 
천리에 의해서만 열린다. 또한 지행의 흔적마저 감추어오다 때가 되면 풍수를 전혀 
모르는 범부의 눈을 통해서도 보여준다고 한다.

  금련산과 황령산에 숨겨진 천장비지
  금련산과 황령산을 샅샅이 훑어보는데 한 곳 천장비지가 때가 되었음인지 지행을 
드러냈다.
  황령 봉수대에서 남쪽을 보면 산능선이 다시 살아서 솟구치는데 그곳 정상에는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묘에 기세를 넣는 금정봉의 용세를 닮은 용두 모양의 바위가 
웅장하게 서 있다. 이어 기세는 동쪽으로 틀어져 백50미터를 곧장 내려가다 50미터 가량 
솟아올라 입수의 세를 이루고 있다. 그 형이 명당풍수에서 알아주는 옥녀헌화형이다. 
못골(대연 5동), 뒤산(갈미산, 270m)이 바로 그곳이다.
  옥녀의 왼쪽 팔은 다섯 봉우리를 넘실대며 멀리 경성대학교 자리까지 끌고 가고 있어 
헌화의 명당은 이곳에서 멀리 있음을 암시해준다. 또 오른쪽 팔은 대연여상 뒷산에서 
멈칫하면서 꽃을 이루고 다시 풍수 특유의 산자락인 회룡고조로 섬섬옥수가 누비듯 다섯 
봉우리의 수호를 받으며 들어가는 자리가 나타난다. 바로 지금의 유엔 묘지자리이다.
  금봉포란형으로 잡은 동작동 국립묘지와 독립기념관의 오룡쟁주형보다 더한 대명당 
터임을 알 수 있다. 이 유엔묘지는 인간의 풍수가 아닌 천지가 열어준 천장비지이다.
  이곳 관리사무처 차장 전태홍(62세) 씨의 증언과 자료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문화회관 영기가 발복 가세
  유엔 묘지는 풍수로 잡은 땅이 아니다. 42년에 이르는 오늘날까지 어떠한 풍수형도 
거론된 적이 없다.
  6, 25당시 오늘날 대연동 부산공고 주변에 유엔군이 주둔했다. 중국군이 개입하자 
지금의 유엔 묘지 터에 잠시 노상 안치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18일 시작된 임시변통의 
묘지가 8년 뒤인 1959년 11월 6일 유엔과 한국정부간의 정식협정 체결로 유엔 묘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옛날 입에 풀칠하기도 바빠서 인동 장씨 문중산에 아무렇게나 시신을 팽개쳤던 
곳이 바로 천장비지의 금오탁시혈이었던 고박정희 전대통령 3대조 상모리 유택의 상황과 
유사하다.
  유엔 묘지의 중심혈에 유엔기가 자리하고 있다. 주산 격인 옹곡산(문화회관 뒷산)의 
기맥이 구릉을 이루면서 곧장 유엔기 혈자리로 들어가고 있다. 여기에 문화회관 구조가 
유엔 묘지에 영기를 더욱 북돋워 감싸주고 있어 풍수상 선익을 보여준다. 문화회관 설립 
직후 우리나라의 오랜 숙원이었던 유엔 가입이 이루어지니 천장비지의 발복이라면 
아전인수격 해석일까.
  다섯 용도 이국의 수호신을 감싸며 하늘에 축문을 고하고 있는 것 같으니 
오룡축문형이라고도 하겠다. 산을 풍수에서는 성(천문) 또는 용(지리)이라 일컫는다. 
아이젠하워 오성장군이 이곳에 고개숙여 참배하기도 했으니 오룡축문형에 걸맞는 인간사 
아니겠는가.
  이러한 천장비지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황령이 세를 잡고 금련이 
형을 이루고 1600년 전 마하사 풍수가 옥녀를 앉혀서 오늘날 한국방송공사 터까지 
마름질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설명:영-세-형-오룡-명당을 갖춘 유엔 묘지는 천장비지를 밝히고 있다.)

    옥녀가 헌화한 연꽃에 이국수호신 영안--금련과 유엔 묘지

  영은 산마루 고개를 지칭하지만 풍수에서는 생기라고 본다. 영이 동서로 통할 경우에 
생기는 대체로 남북으로 흐른다.
  조선시대에 서오릉 뒷고개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자 지맥 보호상 박석을 깔아놓았는데 
그때부터 박석고개라 불렸다. 박석을 깔아도 옆의 고개에는 효험이 없어 아예 
통행금지령을 내렸고 이를 위반할 땐 매를 때렸다고 해서 '벌고개'라는 이름도 생겨났다.
  이에 비해서 연은 풍수발복처인 복을 의미한다. 해발 765미터에 달하는 산도 경주의 
경우 풍수상 생기의 통로가 되므로 치술령이라 불렀고, 고작 100미터 남짓한 낭산은 
탐랑이라는 풍수명당인 복(칠성 중 생룡)이 되기에 경주의 진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산시 남구의 배산에는 황령산(산경표에는 황령으로만 표기돼 있음)과 금련산이 
자리한다. 줄기와 꽃의 관계가 되어 황령에서 금련으로 풍수의 생기가 흐르고 있다. 
생기있는 산줄기들은 대동여지도에도 화지산과 함께 황령으로 선명히 그려져 있다. 
현장에서 살펴보면 부산교육위원회 우측 화지산 자락이 양성국교로 가고 황령줄기는 
동의중고 근처를 잇는 평지의 세를 보여준다.
  이 황령산을 줄기로 삼은 금련산은 수영강과 만나고 있어 우리 전통지리학으로 볼 때 
하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일제가 이것을 칼질하여 화지산과 황령을 
잘라버렸다. 그후 금정산맥과 금련산맥이라는 일제의 창씨개명 냄새가 나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각 구의 향토지마저 이를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있다.
  칠 감자와 오랑캐 만자로 된 감만동은 예부터 불러온 우리의 지명이다. 고려말 무민공 
최영 장군이 왜구를 쳐서 거둔 승리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무민사당을 세우고 감만포라 
일컬었다. 이러한 지명을 일제가 그냥 둘 리 만무한 일, 작은산 만자로 이름을 바꾸고 
무민사당의 주산인 태성산을 삽질하여 없애버렸다(1939년).

  육, 해, 공군 모두 영기의 축문 받아
  남구 향토지 1백 32쪽을 보면 태성산의 유령 이야기가 상세히 나온다. 당시 일인들도 
놀라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이곳의 영기가 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태성산은 
홍곡산으로부터 생기를 받는 자리에 놓여 있다. 태성산이 없어진 10년 후에 홍곡산의 
지맥은 반대편으로 영기를 흘려보내니 바로 그곳이 유엔 묘지가 되며 따라서 그곳은 
홍곡산을 주산으로 삼고 있다. 여기에 옥녀가 바치는 연꽃이 자리를 잡는데 금련산이나 
황령 어디에서 보아도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유엔 묘지가 잡혀온다.
  또한 그 주위의 이름들도 물판(대연동, 남천동) 아니면 용판(용산, 용마산, 우룡산, 
신룡산)이다. 여기에 또 용판과 물판이 합세까지 한다(용호동, 용당동, 용소).
  유엔 묘지 자리는 당곡이라 불렸다. 삼가 천장비지의 천명은 천자만손 
여국운향화부절지지를 비추고 있다. 공군(비룡산), 육군(용마산)에 이어 해군에 해당되는 
지명인 전선등까지 자리하는 이곳에는 육해공 3군 모두가 영기의 축문을 받는 자리랄까.

  길방래 흉방거 득수원리에도 부합
  이 땅 어느 곳에도 이곳처럼 지명이 조화를 이룬 곳을 일찍이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이러한  천장비지를 어찌 인간이 논할 수 있겠는가.
  이곳 직원들의 안내와 자료들로 좌향을 짚어보니 "건좌손향 오득수 묘파구 산자곤"이 
잡혀졌다. 이를 묫자리 보듯 음택풍수로 풀면 진파구에 속하니 건좌는 생방으로 길하다. 
또 양기풍수의 국면을 따져보면 우선룡을 이루는 곤맥세는 통의 국면에 속하게 되니 
오득수는 무곡성의 길기를 가져다주고 묘파구는 흉을 가져가는 거문성으로 사라지니 
길방래 흉방거의 득수원리와도 부합된다. 결과적으로 이곳은 유택이든 사당이든 집터든 
마을이든 가릴 것 없이 명당임을 알 수 있다.
  저만치 눈에 들어오는 금정산 고당봉에 첫점을 찍고 긴 획을 긋는다면 이는 낙동정맥이 
된다. 마지막 점은 저 아래 떠 있는 영도이 봉래산에 이르는데 그 중간의 한 점이 바로 
금련산이며 이는 마음 심자를 이루고 있다. 또한 금련산 한 점에 들어와 살펴보면 황령과 
금련이 한데 왕자형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마하사의 1천6백년 묵은 점을 왕자에 
찍어보면 이는 옥자가 된다. 마하사와 금련은 바로 옥녀헌화형이다. 1천6백년 전 풍수의 
소식이 들리는 듯하다.

    부사 최초 명당발복한 진호사찰--마하사

  문헌적 전래가 없는 시대를 선사시대라 하고 문자의 기록으로 확증할 수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 할 때 오늘날 부산지방은 역사시대 초기 거칠산국과 가락국에 속했다.
  거칠산국의 거칠 황은 황령산이라는 산명이 되었고, 가락국 동쪽을 흐르는 물줄기를 
낙동강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뱃길 7백리 낙동강을 득수로 삼은 얼안에서 장풍으로 갈무리하는 산줄기 하나가 바로 
낙동정맥인데 이것은 부산의 풍수를 논할 때 골격을 이룬다.
  
  금련산 혈자리에 입지한 마하사
  이어 부산 내부의 풍수를 들여다보면 금련산은 중심점이 되며 황령은 낙동정맥의 
정기를 이어준다(혹자는 금련산을 일제 때 생긴 지명으로 보지만 1740년 동래부지에 
금련산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바로 잡기 바란다).
  금정산을 첫획으로 잡고 백양산에서 몰운대까지를 둘째획 그리고 금련산을 중간점, 
봉래산을 마지막점으로 마감할 때 마음 심자가 된다.
  여기에 황령의 한 일자 줄기와 금련산의 일자 자락 사이에 십자형의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어 왕자 형의 골격이 심자의 중간점을 나타낸다.
  왕심을 인걸이 품을 때 지령은 바로 왕기가 된다. 왕기를 전달하는 산줄기인 황령 
옆에는 군왕지지로까지 거론된 정묘풍수가 붙어 있다.
  역사를 반추하면 왕기의 산자락에 위치한 거칠산국을 꺾기 위해 신라는 탈해왕(서기 
57--79년) 시절 대공습에 성공했지만 이곳의 왕기는 가락국쪽으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95년 신라 내물왕의 묵인하에 아도화상이 금련산의 명당자리에 절을 지으니 바로 
동래구 연산도에 입지한 금련산 마하사가 그것인데 그 자리마저 점을 찍으면 왕심은 
옥심이 된다. 이후 가락국은 서서히 왕기를 잃고 법흥왕 때 신라에 합병된다(523년).

  마하사, 연소형 아닌 금학포란형
  이는 필자의 독창적인 풍수 각본이지만 다음과 같은 역사적 추론에서 밑받침이 되고 
있다. 첫째 아도화상이 중국에서 올 무렵 (장경) 등으로 그곳의 풍수가 체계화되었던 
시절이라는 점, 둘째 최초로 아도화상이 터를 잡은 도리사가 영남 인재 절반이 나온다는 
선산지방이라는 점, 셋째 내물왕 때 잡은 옥자의 효력이 서서히 무르익었던 법흥왕 
시절에(528년) 불교가 정식공인된 점이다.
  이 중 가장 큰 수확은 현장답사를 통해 마하사는 풍수로 입지시켰으며 그것도 우리 
고유의 풍수인 형국론의 모범답안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마하사는 부산풍수에 있어 
명당 발복이 가장 오래된(1600년 발복으로 범어사보다 3백년을 앞섬) 부산 터의 
진호사찰이라는 점이다.
  마하사 주지 김경민 스님과의 면담은 흔한 차 한 잔 없이 이루어졌는데 명당을 담을 
대기마냥 대범하였다.
  마하사 풍수가 어떤 것이냐고 단번에 연소형이라 한다. 왜 제비집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검증하는 건 필자의 소관이라 하자 결판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대뜸 조용한 별채를 
잡아주었다.
  그래서 연소형 풍수를 검증하였으나 그 흔한 검은 돌마저도 없었다. 이로써 연소형이 
아님이 분명한데도 전래되어온 이야기 탓에 요사채를 제비집처럼 앉혀놓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법당 앞 양쪽 돌사자에서 마하사 풍수의 화두를 잡았다고나 할까. 법당을 
중심으로 우측에 숫사자, 좌측에 암사자가 놓여 있는데 이것은 음택배열이다. 마하사는 
시야가 좁은 음택의 와혈에 견줘 연소형이라 잘못 전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럴 경우는 시야를 넓혀야 하는데 그 각도는 기감응으로 잡는다. 새ㅂㄴ에 접한 
기감응은 나한전(실제로 마하사 나한전 기도가 효험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과 
산신각 그리고 일주문(여기서 마하사 범종소리를 들으면 그 울림의 신비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세 곳을 부여잡듯 흐르고 있었다.
  날이 밝자 기맥이 들어오는 산줄기 뒤편 경사를 따라 올라가 한 목에 마하사 
풍수형국을 잡았다. 그림에서 보듯 마하사는 천상의 학이 알을 품고 있는 금학포란형의 
선명한 명당을 펼치고 있다.
  학은 오른쪽 포란자리가 더 명당이 되는데 마하사는 바로 오른쪽, 그것도 부여잡는 
학의 손(학장) 자리였다.
  이러한 학장의 위치를 모르고 올라탄 무덤 2기는 학의 종기인지라 금학이 털어버린 
흔적으로 누가 보아도 물이 찬 수렴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풍, 수, 화의 피해 닿지 않는 삼재불입의 터
얼마전 황령산에 불이 났는데 마하사를 3백미터 앞에 두고 불길이 돌아간 흔적을 타다만 
나무숲에서 살필 수 있었고 왼쪽 포란자리에 위치한 연산 2동 산동네 역시 피해가 전혀 
없었다. 이렇듯 풍(살풍), 수(피수), 화(화재)의 피해가 닿지 않는 곳을 십승지에서는 
삼재불입의 터라 하는데 해남 대흥사를 일컫는다.
  이렇게 해서 아도화상이 형국론 풍수로서 마하사를 잡았던 것이 입증되었다.
  옥녀를 쫓다 금학을 만났는데 여기에 연꽃을 매듭지으면 바로 금련산의 지명 소식이 
아니겠는가. 또 연꽃처럼 떠 있는 금련산의 연이 저 아래 물을 찾아 풍수발복에 닿으려는 
듯하여 발길이 저절로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림설명:금련산 마하사는 1600년 전에 금학포란형으로 잡은 명당이다.)

    영의 세만 보고 연의 형을 놓쳐버린 허화--민속의 집

  득수로 여문 곡식을 장풍으로 지켜주는 풍수가 농경사회에서는 무척 자연스러운 
생활과학이었다. 도시경제로 넘어온 오늘날 풍수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앞에서 밝혔듯이 왕자 형을 이루고 있는 금련과 황령의 산줄기에 진호점(마하사의 
입지)을 찍는다면 이는 옥자가 된다.
  이러한 진호점과 왕줄기의 중심을 그어보면 금련산은 발복처인 수면선상을 찾아 산자락 
기슭으로 흘러가는데(남천동) 이곳은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와 연계되며 석굴암과 불국사의 
위치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러한 풍수 일직선 위 첫점에는 오늘날 최고라고 자처하는 풍수사가 
잡았다고 알려진 지방청와대(현재 민속의 집)가 자리하고 있다.

  생기 밑으로 흘러 KBS에 발복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지방청와대에 들어가 검증한 결과, 건방의 산자락에 맞춘 
건좌손향의 건물과 입수를 북돋우는 조경시설에 미사의 장풍을 위한 좌우 선익을 
50미터를 넘게 잡고 있으며 앞길로 득수를 삼아 S자를 이루고 있었다.
  음택풍수의 술법과 처리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였다. 그러나 지방청와대는 치명적인 
풍수적 실착을 하고 있다.
  첫째, 지방청와대는 음택이 아닌 양택풍수로 봐야 한다. 같은 연꽃풍수라 하더라도 
음택 정묘처럼 높게 잡을 것이 아니라 안동 하회마을의 류씨 종갓집 양택풍수 입지점과 
같이 낮게 잡았어야 했다.
  기실 금련산이라는 지명보다는 황령산이란 지도표기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지방청와대 
뒤편인 금련산 자락에 위치한 유원지까지 황령산 유원지로 명명되었다. 영의 세만 보고 
연이라는 형을 놓쳐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방청와대 앞쪽 정원의 지표현상이 여기가 아닌 과맥으로 꿈틀거림이 확ㅇ 눈에 
잡힌다. 지방청와대 자체는 허화일 뿐인데 지방청와대를 통과한 생기가 모조리 그 아래쪽 
KBS 부산방송본부 건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지방청와대를 입수처로 삼은 명당에 
KBS건물이 자리한 격이 된다).
  KBS 건물은 도중에 설계가 변경되어 11층 건물인 사무동이 지금처럼 삐딱하게 놓이게 
되었다 한다. 이유는 KBS 뒤편 청남대에서 바다가 안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변경된 오늘날의 KBS 방송본부 건물이 결과적으로 풍수형국론의 명당이 되었다. 
이를 두고 모사는 인간이 꾀하지만 성사는 재천이라고 하는 것일까.

  KBS건물 행주형
  KBS건물을 앞쪽에서 보면 함교(11층 사무동)마저 오른쪽에 위치하여 항공모함(공개홀은 
갑판)을 방불케 한다.
  금련산이 연의 발복처로 수면선상이 되는데 남천이라는 수면 위에 떠 있는 배도 최첨단 
장비를 갖춘 항공모함이니 명당 위에 세워진 명작 풍수다.
  KBS건물은 행주형의 풍수형국을 갖추었다. 여기에 닻모양의 상징물을 갖춘다면 
오랫동안 명당 발복이 될 것이다.
  KBS건물의 우백호 격인 옆건물을 보면 물어뜯을 듯한 흉상이 있는데 바로 옆에서 더 
위력적인 사무동이 막고 있어 풍수 엽승이 되어 흉을 제거해준다.
  팔택가상으로 살피면 가장 길한 곳은 공개홀이다. 그래서 공개홀 근무자들은 남동쪽에 
위치한 정문을 통하여 출퇴근하는 것이 좋으나 사무동과 방송동 근무자들은 서쪽 
출입문을 사용하면 좋다(이렇게 하면 사무동은 복위택, 방송동은 생기택 작용을 한다). 
혹 사무동 근무자 중에 무기력증을 느낄 경우는 정반대인 공개홀 북동쪽 주차장에서 
심호흡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좋다.
  (그림설명:KBS 부산방송국은 남천이라는 물 위에 행주형을 이루어 연이 발복한 
명당이다.)

    산 많고 한적한 갯마을 배 닿는 첫자리--동구

  우리 풍토, 풍속, 고향 등을 떠올리면 우리 것이라는 줄기가 잡히고 그 뿌리는 마땅히 
이 땅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땅을 가장 잘 알고 오랫동안 지켜온 것이 
풍수이다.
  그러나 무덤발복으로 혹세무민하는 풍월의 부류들은 오늘날까지 풍수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조선 중엽부터 일기 시작한 실학운동에서도 음택풍수의 허구성과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반면 양기풍수의 과학성과 가치는 밝혀져 갈채를 받았다. 
이러한 예를 잘 보여준 이중환의 (택리지) 발문에서 다산 정약용도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택리지) 중 삶의 터를 논하는 복거총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풍수지리라 
주장하였으며...".
  또한 (택리지)는 전형적 풍수용어이기도 한 수구의 활용가치를 으뜸으로 쳤다.
  흔히 구는 입을 가리키지만 풍수에서는 입과 반대되는 배설구를 말한다. 부산의 풍수에 
있어서는 낙동강 유역 중 하단이 수구에 속한다. 하단의 하구언을 잘 조절하는 것이 
부산의 생활과 공업용수의 활용가치를 창출하는 것이고 양기풍수에서는 발복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풍수의 과학성은 2백40여년 전 우리 선조들이 밝혀낸 우리 것이므로 오늘날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고 지킬 가치가 있다.
  풍수는 또한 농민들의 향토에도 묻어 있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이름마저 
질박한 주둥개산이 있는데 이를 한자로 옮기면 견구, 즉 개의 주둥이처럼 생긴 산이라는 
뜻이다. 개는 집을 지켜주지만 소리내 짖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주둥개산 양쪽 마을이 
말다툼으로 자주 시끄러웠다.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 주둥개산의 주둥이를 막아야 한다는 풍수적 처방이 나왔다. 
말(언)과 연관되는 식구(구)들의 수만큼 밥그릇을 들고 나와 주둥개 자리에 묻고서 
흙으로 덮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말무덤(언총)이다. 그후 양쪽 마을 
모두가 조용해졌다는데 이것은 믿거나 말거나 풍수적 정서에 기인한 풍속이라 할 수 
있다.

  부형산 아래의 동구, 부산항과 내륙의 관문
  부산의 첫 관문이기도 한 동구 풍수의 지명과 인물발복을 밝히는 데 보다 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부산의 지명 유래부터 살펴야 한다.
  먼저 부산의 옛 지명은 부산부곡 그리고 부산포였다. 이것은 산이 많고(다부산) 
한적한(부곡) 갯마을(포)로 풀이된다. 한적한 갯마을이 삼포개방의 첫주자(1423년)로서 
조선팔도에 알려지고 이어 왜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 당시 배닿는 자리는 오늘날 
좌천동 뒷산인 증산 아랫녁의 부산진성 언저리에 있었다. 먼바다쪽에서 이곳으로 접근할 
때 항해술보다는 확실한 식별물이 필요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향로잡이에 걸맞게 가마솥 엎어놓은 모양(형)처럼 생긴 산 하나가 있었다.
  삼포개항 60년이 지난 1486년의 (동국여지승람) 기록을 보면 부산은 삭제되고 부산으로 
등재되어 오늘날까지 줄곧 내려온다.
  항해표시 같은 부산이라는 지명 탓에 임진왜란의 첫 목표물도 되었지만 근대 역사를 연 
개항에 있어 중추적인 관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부형산(좌천동 증산)이 자리하는 동구이기 때문에 오늘날 항구 부산의 첫 
관문(부산부두)이기도 하지만 내륙 부산의 관문(부산역, 부산진역)도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힘, 즉 동구의 맥세(땅의 힘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풍수의 
형국론으로 풀이가 가능해진다.

  발복하라는 뜻에서 산복 도로로 명명
  동구에는 오래전부터 유래되는 풍수형국이 있다. 부산 구덕산과 천마산 줄기들의 
산세를 엎드린 소에 견줘 소가 먹을 풀(초)과 뛴다는 뜻의 량(량), 즉 초원이라는 지명인 
초량동에 연관시킨 와우적초안이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동구의 산중턱에 있는 도로는 산복도로라 불린다. 우복처럼 
풍수발복하라는 의미있는 형국이지만 결론적으로 소의 형국이 동구의 형국은 아니다. 
왜냐하면 옛 초량의 범위는 오늘날 서구의 초장동 경계까지였기 때문이다. 반면 오늘날 
초량이란 고장 절반의 반도 못되므로 여기서 와우형은 남의 집 마당에 차려놓은 밥상일 
뿐이다.
  동구향토지 68쪽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풍수고백이 적혀 있다.
  "동구의 지형을 남구 우암동 뒷산에서 바라보면 구봉산과 수정산을 치맛자락으로 삼은 
중앙부두와 제3부두가 각각 오른발, 왼발 자리가 되니... 아마도 이러한 장면은 오랜 
세월 수없이 명터를 잡아온 시골 노풍수를 모셔보아도 똑같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이는 옥녀뢰돈형을 말함인데 안목은 높이 살 만하나 따져보면 풍수형세론에 맞지 않아 
결국은 속안일 뿐이다.
  동구의 풍수, 법안으로 형국을 잡아 동구를 들여다 보면 부산과 재계 인물들의 발복에 
어떤 법칙성까지 알 수 있으니 이제 이러한 동구의 개안소식을 하나씩 들여다보기로 
하자.

    왼쪽 수정산 오른쪽 구봉산 단봉함서형--동구의 형국

  풍수에 처음 입문한 사람이 풍수서만 계속 읽다보면 풍수를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큰 맘 먹고 입산해 들여다 보면 산은 산대로 책은 책대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산자산 서자서라는 말이 생겼다.
  그러한 탁상 풍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은 눈이 트인다는 개안의 
문제로 우리의 옛이야기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산 속의 도인을 찾아 배움을 청했는데 도는커녕 물통질 3년, 지게질 3년 부엌데기 노릇 
수년을 합해 십년 가깝던 어느 날 몽둥이로 머리 한 방 치며 더 가르칠 게 없으니 그만 
하산하거라 했다 한다.
  개안은 스스로 하는 것이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다. 스승은 사랑스러운 제자가 
무르익은 십년의 세월이라는 울타리에서 도망 못 가게 감시 역할만 맡았던 것이다. 
개안한 제자의 하산에 앞서 스승은 몇 권의 풍수서를 전해줄 뿐이다. 이를 법통전수라 
하는데 책의 문자를 거꾸로 읽든 뛰어 읽든 개안한 제자는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로 법통과 통해 버린다.
  이에 앞서 스승이 섣불리 풍수 훈수를 하였다간 개안한 제자가 더 큰 법기일 수 
있는데도 고작 얼풍수 하나 늘린 꼴이 된다.
개안을 뒷받침하는 법안이라는 풍수종합이론이 갖추어졌을 경우에 인간 최상의 풍수인 
도안에 이른다. 이러한 풍수 안목을 염두에 두고 동구의 형국을 잡아보자.

  단봉서함형 발복으로 정, 재계 선각자 다수
  이 형국을 두고 와우형과 옥녀의 치마로 보는 것은 속안에 지나지 않는다. 동구의 
산세로 다가오는 낙동정맥은 바로 뒤에서 잡힌다. 이 산에서 오륙도를 잇는 선의 흐름이 
풍수의 세가 된다.
  오던 세가 형에 머물러야 한다는 세래형지는 풍수 원리이기도 하다. 형지의 머무름을 
좌측 수정산, 우측 구봉산으로 펼치는 것이 바로 동구의 형세판단이며 이는 법안풍수 
수준이다.
  동구의 풍수는 언뜻 보아도 커다란 새가 날개를 펼친 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게 학이냐 닭이냐 하는 구체적 판단에 이르면 개안의 문제가 대두된다.
  필자의 개안소식으로 볼 때 동구의 형국은 봉황새가 편지를 물고 있다는 단봉함서형 
바로 그것이다. 개안의 문제가 걸린 형국의 판단을 일반인들이 어찌 하겠는가. 이것은 
풍수의 비논리성이라 할 수 있지만 이를 검증해보면 퍽 흥미롭다.
  단봉함서형에서 함서란 편지, 소식 등을 말한다. 이에 걸맞게 동구에서는 정계와 
재계의 인물발복이 있어 선각자들이 많았다.
  먼저 편지를 물고 있는 봉황의 입 자리는 날개으 중앙점인 동구청과 부산진역 부근이 
된다. 동구청은 동구 주민들의 소식을 전하는 함서 자리에 있고 부산 시민의 편지와 
화물은 부산진역을 통과하고 있어 이 역시 단봉함서형에 걸맞지 않는가.
  게다가 부산 소식의 1번지 격인 신문사(부산일보)도 함서 자리에 어울리게 잘 정돈되어 
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KBS 방송국도 동구에 있었는데 위치가 함서자리에서 약 1백미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남천동으로 이전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봉황 붙드는 비보풍수, 오륙도
  이 함서의 명당을 연결해 보면 단봉은 정확히 오륙도를 향하고 있다.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예를 진주 안씨 본관이기도 한 진주 비봉산에서 찾을 수 있다. 비봉산은 원래 
대봉산이었다. 봉은 봉귀로 귀인을 뜻하는데 대봉은 임금을 가리킨다.
  더욱이 진주 강씨 선대조인 강구만의 집에는 대봉의 알까지 있었으니 우리 고유의 난생 
신화에 견주어도 필히 전주 강씨에게 왕기가 서려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풍문을 접한 왕궁에서는 대봉이 날아가버리라고 봉황의 알을 깨어버린다. 더불어 
대봉산까지 비봉산으로 고쳐버렸다. 이렇게 대봉풍수가 비봉풍수로 바뀐 이후에는 진주 
강씨의 인물발복은 기세를 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동구의 풍수 역시 봉황이 편지를 물고 날아가버린다면 비봉풍수와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당연히 동구의 풍수 발복도 끝나고 만다.
  하지만 그럴 염려는 없다. 봉황을 날아가지 못하게 붙잡는 비보풍수가 동구 저편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봉황은 알을 다섯 개 낳는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다섯 섬으로 구성된 오륙도가 
바로 봉황의 알 수와 같지 않은가. 그러므로 단봉함서형은 계속 동구를 떠나지 못하고 
동구의 발복풍수는 계속 이어진다는 해석이 성립된다.
  그런데 오륙도는 대여섯 개라는 뜻으로 알 수도 왔다갔다하고 단지 섬에 불과한 눈속임 
비보풍수에 가깝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만약 봉황이 이것을 알아차리면 
미련없이 떠나고 그렇게 될 경우 동구는 비봉풍수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큰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봉황의 머리인 산정에 올라 오륙도를 보면 오륙도는 섬이 
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 바로 앞 용호동 산 하나가 오륙도를 감추고 있는데 이것이 곧 
신선대가 아니겠는가. 신선의 조화로 동구의 봉황은 떠날 수 없다. 그래서 동구의 발복은 
계속되는데 이를 인물발복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그림설명: 단봉함서형국)

    봉귀, 함서 기세로 좌부우귀 발복--동구의 인물

  맹모삼천지교, 어린시절 맹자의 어머니는 교육상 세번이나 이사를 했다 한다.
  태아는 뱃속에서부터 주위의 영향을 받고 출생한 후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 가정, 학교 그리고 직장, 사회 순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곧 대인관계라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대인관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는 힘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한국인은 한국의 맥이 흐르는 사람을 가리키며 미국인은 그들의 대륙에서 자란 사람을, 
사막민족은 사막을 그들의 토대로 하는 집단이다. 이렇듯 각 민족에게는 고유한 풍토가 
있고 풍토에서 풍속이 전래되어 계승, 발전된다. 민족집단의 근원에는 풍토라는 바탕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풍토는 다시 지역풍토로 세분된다. 우리가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하는 것들인데 곧 경상도풍수, 전라도풍수, 경기도풍수라는 지역풍수를 가리킨다. 
여기서 경상도풍수를 세분하면 낙동정맥의 끝부분에 걸린 부산의 풍수가 나온다. 부산의 
풍수 중 동구풍수, 즉 동구라는 지역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풍수의 힘은 무엇일까.

  초량동, 정계 인물 발복의 산실
  이것은 앞서 밝혔듯이 동구의 형국인 단봉함서형으로 설명된다. 먼저 봉은 봉귀라는 
발복을 한다. 여기서 귀는 귀인, 즉 재물보다는 인물, 특히 정계인물을 발복시킨다.
  이에 걸맞는 동구의 인물로서는 초량 출신인 허정 국무총리가 있었는데 4, 19 직후 
대통령권한대행에까지 그 귀가 이르렀다. 초량에는 또한 김석관 교통부정관의 귀도 
있었다. 양성봉 농림부장관은 좌천동 출신이지만 초량동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성명에 
양자까지 인연이 되니 초량은 정계발복의 산실임을 알 수 있다.
  함서는 소식을 뜻하는데 초량의 봉귀는 최초라는 소식에 걸맞게 위세 인물을 
발복시켰다. 그들은 최초의 과도정부(허정), 초대 부산시장(양성봉) 그리고 역 
검표원에서부터 교통부장관까지 오른 최초의 입지전적 장관(김석관)이다. 이러한 함서의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인 박순천과도 인연이 닿아 4,5대 지역구가 바로 이곳이었다.
  한편 단봉함서형의 재계 인물발복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앞에서 보듯 
정계인물은 초량동과 인연이 있는데 재계인물은 모조리 그 반대편 범일동과 좌천동으로 
몰려 있다. 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날까. 부산지도를 들여다보면 그 의문이 풀린다.

  범일동, 재계 인물의 산실
  부산역은 중구에 있어야 마땅할 텐데 왜 중심에서 벗어난 동구에 있는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부산진구 부산진역이 아니라 동구 부산진역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구풍수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주변을 끌어들이는 기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범일동이 걸작이다. 동구의 범일동은 부산진구의 범전동, 부전동, 전포동, 
범천동과 함께 풍수상 같은 항렬이다.
  부산진구 풍수편에서 상세히 밝히겠지만 부산진구의 형국은 맹호출림형이다. 현재 
범전동, 범천동이 과거에는 호전동, 호천동이었다. 범일동 역시 호랑이 앞에 쌓인 
재물인데 동구풍수가 이를 부산진구 풍수에서 빼앗아와 좌천동의 보물격인 수정산과 함께 
차림상이 되었다. 따라서 이곳을 중심으로 한 재계 인물 발복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재계집단 역시 소식(함서)이라는 선각자적인 성향이 있다. 구한말 부산의 대표적인 
선각자였던 사업가 박기종(좌천동), 최초의 지방은행이었던 구포은행의 초대 지배인 
문상우(좌천동)는 금융계의 귀재로 명성을 날렸다.
  부산 재계를 대표하는 부산상의의 초대회장 김지태(좌천동), 대선주조를 오늘날 
향토기업으로 올려놓은 박선기(범일동) 등이 몰려 있는 이곳은 부산의 재벌이 불같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강석진의 동명목재도 1925년 좌천동 동명제재소에서 시작했으며 양정모의 국제그룹 
역시 1949년 범일동에서 발판을 잡아 그 유명한 왕자표 고무신이 온 강토를 누비게 된 
것이다. 여기서 동명, 왕자의 상호는 이곳 동구풍수와 걸작을 이루는 작명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곳 동구를 떠난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하게 침몰하고 말았으니 풍수상 이곳을 
버리지 않았다면 피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도 든다.
  동구의 풍수는 집단적인 정계인물과 재계인물을 펼쳐놓은 특징과 아울러 모든 길은 
동구로 통한다는 말을 낳을 정도로 교통의 요충지다. 이곳에 대표적인 3개의 도로가 
있다. 산복도로, 자상로, 충장로가 그것이다. 산복이란 풍수상 발복을 추구하는 우복을 
뜻하므로 풍수적 도로를 상징한다.
  자성로는 부산진성을 모성으로 삼은 아들성이라는 자성을 뜻하는 지리적 발상이다.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 이곳을 지키다 순국한 충장공 정발 장군을 기리는 곳이니 인물적 
인연이 된다. 이러한 길들은 산복도로에서 바다 쪽으로 나아가며 풍수, 지리, 인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림설명: 봉황풍수인 동구는 좌측으로는 부발복, 우측으로는 귀발복의 터를 보여주고 
있다.)

    신구의 '많은 덕' 구포에서 발복--구포와 만덕사지
  
  예부터 명당은 거북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3천여년 전 중국 문왕 시절 낙수 유역에서 등에 무늬가 박힌 거북을 발견하고 이를 
낙서의 계시라 하였다. 여기서 낙은 낙수를, 서는 거북의 무늬를 뜻해 낙수와 신구의 
관계를 가리킨다.

  낙수 마주한 거북 모양의 명당
  물길 천삼백리에 뱃길 칠백리인 낙동강을 옛날엔 낙수라고도 했다. 영남의 인걸을 
절반이나 발복시켰던 경북 선산의 풍수 역시 이 낙수의 허리쯤에 있다. 정확히 
발복지점은 거북 꼬리인 구미가 된다.
  바로 이곳에서 야은 길재, 창랑 장택상과 인동 장씨 양반촌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왕기까지 발복하였으니 우연은 아닌 것 같다.
  또 구미의 아랫줄기인 낙수에 구천까지 합세한 현풍의 풍수는 현풍 곽씨 집성촌과 
곽재우 장군의 뼈대를 잡고 있다.
  김해 구지봉은 김해 김씨 발복의 뿌리로서 신구 풍수의 절정을 이룬다. 바로 그 옆에 
자리하는 구포, 이곳도 낙수를 마주한 신구풍수의 지명이다.
  그렇다면 구포의 신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문헌으로는 양산군지에 유일한 기록이 
있다. "범방산 낙수일맥 두대석상여구". 범방산 한 줄기가 낙수를 향해 머리에 돌을 이고 
있는 거북의 모습과 같다는 뜻이다('재'자는 실은 '재', 일 '대'의 두 가지 음을 가지고 
있으나 원문해석에 비춰볼 때 '머리에 이다'의 뜻이므로 '대'로 읽어야 하는 것으로 
판정됨).
  그런데 부산공업전문대와 낙동강 사이에 끼인 범방산에서는 신구의 기세는커녕 이고 
있다는 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또 지명풀이 첫점을 범방산이 있는 구포동에 두면 
언제나 덕천동과 만덕동에서 막혀버린다. 그렇지만 신구가 많은 덕(만덕동)을 이고서 물 
따라(덕천동) 흐르다 닿는 곳을 구포라 풀이한다면 비로소 뜻이 통한다. 이러한 맥에서 
만덕동을 첫점으로 볼 때 만덕의 지명 유래가 되는 만덕사는 당연히 신구풍수의 원류가 
된다.

  만덕사, 고려 때 도선풍수에 의해 창건된 사찰
  먼저 만덕사 주지 금산스님을 만나 현장풍수를 알아보았다. 이곳 만덕사 풍수는 널리 
알려져 향토지 등에 시려 있으나 풍수법칙상으로 볼 때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많다.
  반면, 행주형이 만덕사의 풍수라는 것이 현장검증으로 밝혀졌으나, 행주형 풍수에 
대해서는 어느 구석에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행주형의 만덕사나 뜰 범에 배 방자를 붙인 
범방산 모두 뜬 배가 아닌가. 그렇다면 양산군지의 기록인 낙수일맥의 뒷구절인 
두대석상여구를 이곳 만덕사 신구로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신구를 밝히기 위하여 행주형 풍수로 만덕사지를 상세히 들여다보았다. 배가 물에 떠 
있으려면 무게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이러한 중심선에 돛대, 선장실, 키나 노를 
장착한다.
  고려 사찰풍수의 원조인 도선국사는 우리나라는 동쪽(산악지대)이 무겁고 서쪽(평야 
지대)이 가벼워 서편에 해당하는 전남 화순군 운주사에다 천불천탑을 설치하여 행주형의 
균형을 잡았던 것이다. 이를 국역진호설이라 하며 이와 같은 원리로 행주형 중심선에는 
돌기둥(돛대), 금당(선장실), 산신각(키 또는 노) 등이 배치되었다.
  만덕사 역시 고려 초(태조 10년)에 도선풍수에 의하여 창건된 사찰로 위 가람배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돌기둥 앞에서 만덕사의 중심선을 그어보았다(당간지주로 고시된 부산 유형문화재 
제14호는 범어사 제15호와 같이 돌기둥일 뿐이다). 역시 행주형 중심선 끝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산신각터가 걸렸다.
  그렇다면 옛 만덕사 금당도 중심선 어디엔가 걸려 있다는 얘기인데 1990년에 발굴단이 
발표한 금당터와는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그곳은 풍수적으로 승방 혹은 대중요사채로 
풀이된다).
  만덕사 주지와 함께 행주형 중심선을 따라가다 금당터를 발견하였는데 그곳에는 무덤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옛 절터와 처형장, 사당터 등에는 풍수상 무덤을 쓸 수 없다. 그런데 왜 풍수원리를 
무시했을까.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식민풍수의 농간인 것이다.
  문제의 무덤을 살펴보면 식민풍수의 흉계가 더욱 분명해진다. 일제 치하인 1940년 
5월에 이장한 점고 좌향까지 제대로 잡았던 걸 보면 풍수사를 동원한 무덤이다.
  또 무덤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석축에서 천여년의 세월을 읽을 수 있음에 옛 
만덕사의 금당터에다 그대로 무덤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훼손된 석축의 흔적에서 찾은 옛 만덕사의 금당 정면 계단은 정확히 돌기둥을 향하고 
있었다. 이것을 중심선 중의 중심점으로 삼을 때 행주형 풍수의 특징인 떠 있는 배의 
이물과 고물이 서로 균형을 맞추어 요사채와 탑들이 자리잡는다.
  이렇게 되면 옛 만덕사가 눈에 들어온다. 이때 팔각좌대 역시 중심선 위치에 있으므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있는 것이 된다. 앞쪽 삼거리에서 발견되었던 글자 한 자 
없는 국장생표는 행주형 발복을 붙잡아 두는 닻인 것이다.
  이 땅에서 최고의 풍수안목을 갖추었던 고려풍수사들의 작품이기도 한 만덕사. 그런데 
오늘날 만덕사는 철저히 파괴되고 왜 역사에서까지 삭제되어야 했을까.
  그것은 신구를 밝히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그림설명: 구포의 유래가 되는 만덕사는 고려시대 풍수사찰이다.)
  (사진설명: 만덕사에 있는 배 모양의 바위.)

    구지봉 오행상생 위력 일제가 단맥--만덕사의 신구

  새벽녘, 펼쳐진 광경은 영물은 거북의 기세가 산에서 내려오는데 마치 김해 구지봉의 
형을 보는 듯했다. 구포의 신구는 김해 신구와 또 같은 영구하산형이었다.
  만덕사에서 신구를 잡자 구포풍수의 비밀들이 한목에 풀려나갔다. 머리에 돌을 이고 
있는 거북형상에서 구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양산군지는 밝히고 있다.
  두대석상여구의 석자 대신 금자를 끼워넣으면 이는 두대금상여구가 된다. 만덕사의 
금당은 신구의 머리 위에, 만덕사풍수는 아랫녘 범방산에 걸린 격이 된다.

  구포동은 수구막이에 입지
  이 주위에 지명들도 하산형의 그림을 그려놓고 있다. 만덕사 터라는 사기부락 옆에는 
상리가 있고 차츰 중리 하리 마을로 하산하다가 만덕을 이고 있던 신구는 물을 만난다. 
물 따라 흐르던 신구가 닿는 곳에 구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포동은 풍수상 
수구막이(내려오는 땅기운을 막는 작용)입지다.
  화양읍과 이서면의 광활한 평야지대를 잠그는 곳간 열쇠자리에 입지한 청도, 자궁과도 
같은 천황산의 산세와 수세를 옥새처럼 죄고 있던 입지점 밀양, 이렇듯 수구막이 
입지점에 자리한 청도, 밀양, 구포는 옛 장터로도 이름났던 곳들이다. (천안삼거리) 
노랫가락에서 표현되고 있는 우리 고유의 삼거리장터 풍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수구막이 입구에 축성되었던 옛성 구포와 의성 역시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구풍수의 위력, 재기와 상생의 힘
  또한 신구풍수의 위력은 단연 재기와 상생의 힘에 있다. 가락국이 멸망했어도 후손이 
크게 번창한 김해 김씨 문중이 그 예다. 이것은 거북의 다산이라는 상생과 연관된다.
  만덕사 신구풍수의 경우에도 고려 패망 때(1329년) 이곳에서 왕씨들이 모여 변성(왕, 
금, 마, 전, 김 씨 등으로 바꿈)의 터로 삼았던 사실에서 상생의 터임을 짐작케 
한다.(산성마을 사람들은 만덕사 주산을 생기산이라고 부른다). 그림에서 보듯 만덕사는 
오행상생 산들이 감싸고 있다.
  고려 28대 충혜왕에게 사기그릇 팔던 집안에서 태어난 임씨라는 애첩이 있었다. 이 
애첩에게 은천옹주라는 왕족의 칭호를 내리자 사기그릇 잘 판 사기옹주라고 세상 
사람들은 비웃었다. 후일 왕자를 낳자 혈통을 중시하던 왕족들이 사기아들 석기왕자라고 
조롱하였다.
  석기는 숙부 공민왕에 의해 이곳 만덕사로 강제 출가당한다(1351년). 그러나 석기는 
이곳에서 재기의 힘을 받는다(1356년 원나라는 석기왕자를 고려왕으로 책봉하라는 
소환령을 내렸다).
  유학자들의 저항으로 왕권에 연루된 중신들이 몰살되거나 몰락하나 당사자인 석기는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긴다.
  근대사에 있어서 일제는 신구풍수의 이러한 위력을 식민풍수로 끊어버렸다. 오늘날 
김해시 대성동 국도가 그 당시 신구풍수를 단맥질한 현장이다.
  그들이 만덕사 신구풍수라고 그냥 두었겠는가. 만덕사의 기록들이 오늘날 일본에 
있다(조선정벌기)는 점에서도 이 같은 혐의는 더욱 짙다.
  이런 자료들을 근거로 현장답사한 결과 만덕사지를 무덤으로 황폐화시켜서 신구풍수를 
단절시키려는 식민풍수의 흉계를 알 수 있었다.
  절터에서 무덤을 쓰는 것을 기피하는 우리의 풍수를 음해하기 위하여 만덕사지 
기왓장에 땅귀신 기와 도울 비를 적어서 묻어놓았다. 기비는 전통풍수가 아니다. 우리 
풍수용어에는 비보가 있을 뿐이다.
  그 당시 식민풍수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던 촌산지순은 (조선의 풍수)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고려시대 사찰들의 불교비보란 한갓 지덕비보에 불과하다." 이는 땅귀신 풍수론의 
망발이 아닐 수 없다. 그가 고위로 그런 발언을 했다면 그것은 동양철학의 천지인합이나 
풍수의 소주길흉론도 모르는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 셈이다. 아무튼 그들은 만덕사지에서 
기비라는 기와를 찾아오면 엿값 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이 고장 노인들의 증언).
  이로써 절터에 무덤을 써도 음택발복된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만덕사지는 무덤들로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심한 경우에는 한 집안의 무덤 3기가 금당과 부도 터에 1940년 5월 
몽땅 이장된 일도 있었다.
  신구풍수의 재기와 상생의 위력은 식민풍수의 음해대상이기도 하였지만 만덕사의 
경우는 조선 역사에서 음지가 되기도 했다. 석기왕자의 재기의 힘과 충돌했던 사대부 
세력들이 후선 조선왕조를 세웠고 이어 고려왕족들의 상생으 피난처였던 곳이 지금의 
만덕사지가 갖는 신구풍수이다. 조산왕조에겐 이곳이 배역의 땅으로 비쳤을 것이 충분히 
짐작된다([동국여지승람]의 양산군 산천조에도 이곳의 물줄기를 배역세라 기록하고 
있다).
  만덕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활동지로서 소서행장에 의해 잿더미로 변할 때까지 
대가람의 터였다(1594년). 그러나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철저히 역사 세탁마저 당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풍수해석을 종합할 때 만덕사의 신구풍수는 그 아래 '범방산 낙수일맥 
두대석상여구'로 와전되어 왔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당시 배역의 터를 
거들먹거렸다간 조선왕조에 역적으로 몰리기 십상이었으므로 풍월로 전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풍월풍수도 잘 털어보면 깊은 뜻을 잡을 수도 있지만 이를 털지 않고 그대로 믿었다간 
"얼풍수 사람 잡는 격"이 된다.

    백두대간의 정맥 어울린 생존의 혈맥--낙동강과 북구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도 했다. 백두산에서 흘러온(유) 두류산까지가 이 땅의 큰 
줄기를 이루며 백두대간이라 일컫는다.
  대간의 허리에는 태백산과 황지못이 자리한다. 백두의 맥에 천지라는 혈이 있듯 
황지못과 태백산은 혈맥이다. 낙동강은 황지못에서 발원하여 대간의 허리 아래로 흐른다. 
그래서 낙동강이라는 혈줄기가 중독되면 이 땅은 하반신 마비로 주저앉아버린다.
  백두대간의 허리에는 조령과 죽령이 있고 영의 남쪽이기에 이곳을 영남이라 한다. 
낙동강은 영남의 산줄기와 어울리는 혈맥이기도 하다. 낙동강의 혈줄기가 백두대간의 
정품인 일맥과 어울러 놓은 낙동정맥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정맥 한줄기가 낙동강 
남쪽을 품어줌에 낙남정맥이라 일렀다.

  영남인물의 산실
  낙동강은 풍수의 세와 형 그리고 혈의 발복에서도 단연 뛰어나다(여기서, 작은 
지도라도 있다면 펼쳐놓고 보라. 이 글을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중기의 풍수사 남사고가 그 세를 보고 넙죽 절을 하면서 "이 곳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다"라고 했다는 대간의 허리 낙동강이 최초로 수룡의 형상을 드러낸 곳이 
안동호다(안동시 부근을 머리로, 도산서원 방향을 꼬리로 잡고서 안동호를 들여다 볼 
것). 안동호 수룡의 세가 영남북부의 거대한 거북이 형과 입을 맞추고 있다. 먼저 안동을 
목으로 잡고, 점촌과 상주를 왼쪽발로, 의성과 군위를 오른쪽 앞발과 뒷발로 연상하여 
보자. 그때 그 중간에 놓인 평야지대는 토실토실 살진 거북의 배부위가 되고 낙동강은 
혈맥처럼 펼쳐져 있다.
  낙동풍수는 세와 형에 이어서 혈자리 발복까지 정확히 보여준다. 풍수상 거북의 
발복지점은 다산을 상징하는 알 낳는 자리, 즉 꼬리부근이다. 거북이 뒤쪽은 선산 아래쯤 
되는데 거기에는 거북의 꼬리라는 구미가 자리한다. 구미풍수 발복은 널리 알려졌고 이 
책의 앞부분에서도 여러 번 언급하였으니 새로운 풍수발복으로 낙동강풍수를 밝혀보자.
  먼저 구미의 혈이 되는 풍수명산은 금오산이다. 백두대간의 한 지점인 덕유산에서 
들어오던 맥세를 가야산과 나누어 가진다. 이러한 금오, 가야산과 풍수맥세를 겨룰 수 
있는 주위의 산은 낙동강 건너 팔공산뿐이다. 구미를 혈로 잡은 금오산과 가야산 그리고 
팔공산의 정상들을 이어보라. 정확히 이등변삼각형을 이룬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발복일까. 금오산에서 3, 4공화국 대통령이, 가야산(합천)에서 5공화국 대통령이, 그것도 
같은 삼각형(군부출신)에서 이등분된 듯이 나뉘어 발복하였다.
  합천에서는 황강이, 대구에서는 금호강이 흘러 낙동강 본맥으로 합류한다. 모두 구미의 
남쪽에 자리하고 각각 동서의 합류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합류점과 남향자리 끝 
부근에는 남강이 있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남강은 황강과 금호강보다 수량이 풍부하기에 권력보다는 재물 
발복에 강하다. 이러한 남강의 물줄기가 진주를 벗어나면서부터 S자형의 수태극에 
나지막한 산세들을 이룬다.
  바로 그 곳에 솥 모양의 바위 정암이 있다. 일찍이 이곳에서 풍수사는 예언했다. 이곳 
정암 위쪽과 아래쪽 삼십리 안에서 국부 두 명이 발복한다고, 지리산 물줄기의 정곡을 
잡았다고나 할까. 그후 지수에서 LG그룹 구인회, 정곡에서 삼성그룹의 이병철이 각각 
탄생한다.
  낙동강풍수는 영남인물의 산실로서 귀와 부라는 부귀영화의 원천이고 계속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낙동강의 혈맥이 오염된다면 그 독기가 
영남지방으로 확산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누가 낙동강 수룡을 죽이려 하는가 
한갓 음택풍수머저도 명당 발복을 잡을 때 물이 빠지는 파구를 중시하는 법인데 말이다.

  양기풍수에서 수구는 발복의 근원
  양기풍수에서의 수구는 발복의 근원이 된다. 낙동강 혈맥에는 이러한 수구가 두 개 
있다. 거북의 꼬리라는 구미와 낙동강 수룡의 끝인 하단의 하구가 바로 그것이다. 
수구에서의 풍수는 위력적인 길흉작용을 한다. 1991년 구미 수구에서의 페놀방류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던 흉이 되었지만 수구막이의 위력은 6, 25 때 북한군을 막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를 넘자고 구미공단을 그곳을 세운 것까지는 낙동강 
수룡이 견뎌주었다. 그러나 인간의 짧은 안목은 낙동강 물을 양수장 물로밖에 보지 못해 
수룡의 배설구를 낙동강 하구둑으로 막아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낙동강의 공포는 거대한 수룡이 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앞서 수구의 거북이라는 구포의 열차 참사 역시 낙동강 수룡의 고통스런 
꿈틀거림이었을지도 모른다.
  풍수로 본 낙동강은 다름 아닌 생존의 혈맥인 것이다.
  (그림설명: 영남풍수는 백두대간을 골격으로 하고, 낙동강을 혈로 어울러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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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구: 수구는 물이 빠져나가는 출구를 이른다. 명당을 감싸주는 물은 발복의 기운을 
모아준다. 이런 연유에서 물이 처음 들어오는 발원처를 풍수에서는 오히려 수미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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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계봉 기세 삼거리 장터로 발복한 북구의 혈--구포

  득수의 필요성에서 인류는 문명의 터전을 강변으로 잡았다. 그런데 4대 문명의 
발상지인 강들이 명당보다는 흉지였다는 점이 관심을 끈다. 나일강 하류의 평야에는 
해마다 홍수가 덮쳐 이삭 한 톨도 남김없이 쓸어갔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던가. 사람들은 물과의 싸움에서 뭉쳤다. 마을과 마을이 
도시와 도시가 결국은 큰 나라로 세워졌던 것이다.
  득수를 위한 치수는 중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하의 황토는 매서운 바람과 함께 
생존마저 위협해왔다. 일찍이 황하의 낙수에서는 왕(문왕)이 치수공사에 직접 참여했다 
한다. 그로부터 삼천년이 지난 1958년 중국 당국은 일시에 1백여만명을 동원하여 홍수 
위협이 있던 황하를 감시하기까지 하였다.
  흉지인 나일강 문명에서는 측량기술과 기하학이 발달했고, 황하문명에서는 풍수가 
탄생했다. 황토바람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장풍과 치수로서의 득수의 필요성에서 온 필연적 
결과였다.

  혈자리에 해당하는 구포가 북구의 중심
  낙수(낙동강) 꼬리부분에 자리한 구포의 홍수는 지금도 유명하다. 오죽했으면 '마른 
하늘 아래서 물난리를 치렀다'고 향토지에 기록하고 있을까.
  멀쩡한 날의 홍수처럼 구포는 행정변경이라는 난리마저 겪는다. 고작 한 인간의 생애에 
해당하는 74년 동안 양산군에서 동래부, 부산부, 동래군, 부산진구를 거쳐 북구로 
변경된다. 이러한 난리 중에서도 요지부동했던 것은 구포라는 지명이다. 여기서 북구의 
중심(풍수상 혈자리에 해당됨)은 구포라는 것이 짐작된다.
  얼마전 하산길에 기증받은 양산군지 중에서 구포의 기록을 보면,
  "창남진유혈...창의 남쪽에 혈이 있는데 이를 구식진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창이란 세금으로 거둬들인 공물을 보관하던 조창을 가리키고 구포의 신구풍수에 합당한 
구혈(구식진을 가리킴)이다. 여기서 혈자리는 구포 고가도로로 진입로 부근(구포역 
방향에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북구의 혈이 잡히자 북구청 좌향의 의문이 풀렸다. 현재 부산의 12개구청의 좌향 중 
10개는 모두 진산과 조화를 이루며 있다(중구청의 경우는 회룡고조형이며 강서구청은 
칠점산을 잡고서 수룡풍수의 걸작을 이룬다). 이에 비해 남구청과 북구청 좌향이 
미심쩍었는데 그 중 하나인 북구청 좌향 조화가 풀린 것이다.
  자료보충을 위해 북구청과 낙동향토문화원에 들렀을 때 들은 답변들은 북구청 건축 
당시 부지의 형상과 남향 입지의 경제성에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들뿐이었다. 
그런데 북구청의 좌향을 그어보면 구포의 구혈과 조화를 이루는 각도 안에 들어온다. 
이제 구포풍수의 골격이 드러난다. 북구청을 명당으로 잡으며 이에 풍수의 힘을 넣어주는 
혈처는 구혈이 되고 구혈과 연결된 덕천동은 중개 역할지로 만덕동으로 이어진다. 만덕동 
만덕사의 신구는 상계봉에서 풍수의 힘을 받는다. 상계봉은 구포의 진산이다. 부산의 
새벽은 계명봉이 홰를 칠 때 오는 것이라면 구포의 새벽은 상계봉이 가장 먼저 
받아들인다.
  새벽산이라는 사배야산이 계명봉 바로 옆에 있듯 상계봉 옆에도 새벽고개라는 사비현이 
있다(사비현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그것은 (사)변이 탈락되었기에 기비현으로 보아야 
한다는 최해군 씨의 주장은 옳다. 직접 두 산을 감상해보면 형과 세가 같다).

  수재 피해 목 기운 센 날 장 열려
  구포풍수에 잇어 문제점이라면 금장처인 만덕사지가 무덤화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흉들을 막아보려 했던 옛 구포 사람들의 풍수 비보를 밝혀보기로 하자.
  구포는 만덕사의 신구가 덕천을 따라 내려와서 낙동강 수룡과 만나는 전형적인 삼거리 
풍수이다. 우리 고유의 길목은 삼거리, 거리다방 등의 상호가 유독 많고 또한 장사도 
제법 잘된다. 이렇듯 삼거리 풍수 지형은 시장터로 발복한다(옛적 구포를 도회지지라고도 
했다). 구포장은 경상북도 안동까지 이르는 교역의 배후지를 두었으며 장이 서면 
하루에도 10만여명이 북적거릴 정도였다.
  5일장은 우리 고유의 장이다. 오행풍속에서 온 것인데 이 장날의 날짜와 풍수숫자의 
의미가 만난다(1일, 6일은 수, 2일, 7일은 화, 3일, 8일은 목, 4일, 9일은 금, 5일, 
10일은 토).
  예부터 구포의 재난은 물난리였다. 물은 오행 중 수에 해당한다. 이러한 수를 
흡수해버리는 것은 나무, 목이며 3과 8의 숫자가 된다. 10만명씩이나 몰린 구포장날에 
사람들이 목기운을 내뿜고 다니게 하려면 3일과 8일날 장이 서면 된다. 구포장은 
17세기부터 오늘날까지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에 서는 소위 3, 3일장이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장터마을의 진산이 화형일 경우 이는 불을 뜻한다는 데에서 물이 필요했고 
수는 1과 6으로 1일, 6일에 장이 섰다. 이것을 증명해주는 듯한 사건이 북구 향토지인 
불가사의한 점으로 기록되어 있다(북구향토지 2백67쪽).
  1914년 구포시장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모두 터버렸는데 남창만 멀쩡했다는 것이다. 
구포의 진산은 상계봉이며 불 같은 바위 형상인지라 화에 속한다. 즉 불(상계봉) 앞에 
나무(구포장)가 되어 대화재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상계봉 역시 자신의 
자손(구혈은 남창에 있다)만은 태울 수 없었다는 뜻이 아닐는지.
  낙동강 수룡풍수를 살리는 것이 영남의 생존권 문제라면 구포의 신구풍수는 구포지역의 
발복과 직결된다는 것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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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장처: 금장처는 시신을 묻지 못하는 장소를 말한다(옛 절터, 처형장, 옛 무덤 등). 
마을을 진호하는 진산에다 무덤을 쓸 경우 그 마을에 재앙과 난리가 터진다. 아직도 경남 
산청의 경우(꽃봉우리 진산) 온 동민들이 이를 철저히 금기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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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웅령 정상에 대마출성형세 위엄--구포의 지명

  목포 비행기 추락, 격포(위도)의 배 침몰 등과 함께 삼포재란이라 할 수 있는 구포의 
열차전복사고.
  인간에게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사고를 인재라 하는데, 구포대참사는 인재라 하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풍수로 구포의 지명들을 밝혀가다 역시 그것은 천재지변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구포 열차사고 현장이 구포풍수 중 가장 중요한 혈맥자리였다는 
점에서였다.

  구포 삼거리의 중심이 열차사고 지점
  구포 삼거리 풍수인 Y자 형상 중심이 바로 사고현장이다. Y자의 한 줄기는 신구풍수의 
흐름이고 다른 한 자락은 매화낙지형이다. 나머지 획 하나는 바로 구포의 혈인 구혈로서 
사고현장인 중심점에서 불과 3백미터 이내이다. 이를 상세히 밝혀보자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쉽게 첫머리를 잡을 수 있다.
  금오산을 서쪽에서 보면 곡식을 쌓아놓은 노적봉 형상을 띠고 있는 반면 북쪽으로 
치우쳐서 보면 도적처럼 생긴 적봉 모양이 눈에 들어온다. 서쪽에는 김천 지방이 있는데 
예로부터 김천에는 큰 부자가 많았고 적봉처럼 보이는 개령에서는 길삼봉 같은 유명한 
도둑이 발복하였다. 이런 풍수 이야기는 땅기운이 모양에 따라 달리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말한다. 즉 세(금오산), 형(노적봉, 적봉), 혈(김천, 개령), 발복(부자, 도적)을 
가리킨다.

  만덕 세 덕천 형이 구포 혈로 발복
  구포삼거리 풍수의 한 줄은 만덕동의 세(복구)가 덕천동의 형(하산)을 따라 혈(구포)에 
닿는 풍수의 세, 형, 혈 관계가 된다. 나머지 한줄은 금곡동--화명동--구포로 이어지는 
풍수지명에서 밝혀진다.
  먼저 금곡동은 금정산 골짜기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산에서 땅에 떨어졌다는 
낙지이며 세에 해당한다. 금곡동의 낙지 곁에는 화명동이 있다. 화의 유래가 옛 부락 
지명인 화잠, 즉 꽃봉오리에서 나왔듯이 이것은 꽃 형이다.
  풍수에 잇어 명당은 꽃에 비유된다. 그러므로 화명은 명당꽃을 가리키며 용당부락까지 
걸맞게 자리한다(풍수에서 산을 용이라 하며 세를 말하고, 당은 형을 나타낸다). 
화명동의 명당화는 매화이다. 그리고 금곡동과 화명동의 매화낙지형이 닿는 곳에 
구포동이 있고 그곳은 혈자리에 해당한다.
  이러한 동서촉 신구하산형(만덕동--덕천동)과 남북축 매화낙지형(금곡동--화명동)이 
만나는 풍수지맥점에서 구포 열차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그 지점에서 구포의 
구혈(구식률, 양산군지 기록)은 불과 3백미터 남짓하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구포역 쪽 대마 출정하는 형
  먼저 이러한 세, 형, 혈의 풍수발복 관계를 알아보자.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에서는 
대마출성형의 풍수가 있다.
  대마의 기세에 출성의 형마저 몰린 혈자리에 화수 마을이 있는데, 예로부터 마씨가 
화수마을에 이주해오면 혼자서 지기를 독점발복한다고 하여 오늘날까지 마씨 이주를 
금기하는 풍속이 전해져온다.
  구포교에서 불웅령을 바라보면 정상의 모습이 성벽처럼 되어 있다. 이어 구포역 쪽으로 
대마 한 마리가 쑥 빠져나오는 형상이 잡힌다. 바로 대마출성형이다. 그런데 건너편 
산줄기 하나를 이곳 사람들은 말등고개라고 불렀다. 그래서 구포의 대마출성은 안장을 못 
챙긴 출정이 된다.
  이 출정이 몰린 혈자리 구포역의 발복을 더듬어보자. 구포역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군들의 출정역이 되었다. 전쟁 말년에는 우리 민족이 강제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갔던 망국의 한이 서린 곳이다. 안장을 챙기지 못하고 출정한 비운의 
발복이었던 것이다.
  땅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기운은 세로 형을 만나면 그에 걸맞게 혈자리에서 
발복한다는 것이다. 장풍으로 감싸도는 산줄기의 아랫자락에는 득수인 물줄기가 
어우러지고 거기에 길이 놓여 있다. 그 길을 따라 마을들이 자리하고 결국 우리들은 
산자락 아래서 생명들을 키운다. 물론 물줄기와 회포하는 바로 그곳이 장풍득수의 
명당이다.
  이렇듯 풍수의 세, 형, 혈은 지리라는 산, 물, 마을의 혈맥인 것이다. 산과 물을 
풍수를, 길과 마을은 지리를 뜻할 때 이러한 지리는 생리를 말한다. 조선 말엽 
실학자들은 생리보다는 풍수우위를 주장하였다. 묫자리 발복을 혹세무민으로, 음택풍수를 
망국의 병으로 날카롭게 비판한 실학사상, 실학은 음택풍수의 문제성과 양기풍수의 
가치성을 정확히 보았던 것이다.
  생리는 오늘날 경제성을 말하며 양기풍수는 환경자연론자의 시각이었다. 오늘날 풍수의 
문제는 풍수의 가치까지 싸잡아 무덤 속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풍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고가도로를 올리고 철도를 놓고 지하차도를 파고 터널까지 뚫으려 
한다.
  얼마전 나타난 낙동강 수룡이 차츰 썩어가는 현상은 부산 시민들을 공포로 몰고갔었다. 
이 땅은 살아 있다고 풍수는 아직도 말하고 있다.
  (그림설명: 구포풍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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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형, 혈: 불타는 화력의 힘을 세라고 할 때 형은 이를 받아 활용시키는 부뚜막 
구조이며 온돌은 혈에 해당한다. 또 온돌 위에 사람이 있다. 이러한 비유로 풍수 목적인 
승생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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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의 윗마을이라는 지명--사상의 지명

  봉이 김선달은 거금 4천냥에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 믿기 어려운 이 사건의 배후에는 
풍수가 있었다는 혹 아는지...
  대동강 위에 떠 있는 평양은 행주형이다. 떠날 배의 형에서 우물을 파는 건 배밑창을 
뚫는 격이다. 그러니 평양 사람들은 식수를 대동강에서 퍼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풍수 물목에서 김선달은 한몫 챙겼던 것이고 행주형을 몰랐던 한양 상인들에게서 
봉을 잡았던 것이다.
  '소 파고서 망할 집안'이라는 말이 있다. 우물 잘못 파서 혈맥이 끊어질 경우 흉가로 
변한다는 연유에서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땅에 있어서 물이란  식수 이전에 생명체와의 
조화였음을 알 수 있다.
  바람의 독기를 풍독이라 하고 한방에선 이를 중풍이라 한다. 인간의 생명을 
풍독으로부터 감춘다는 장풍과, 득수로 생명에 젖줄을 물린다는 뜻인 장풍득수의 
줄임말이 바로 풍수이다. 풍수가 우리 몸의 혈맥이라면 지리는 근육을 뜻한다. 근육질의 
노동력은 경제적 산출이 되지만 혈맥이 중독되면 모든 것은 정지된다.

  구포지역의 지리적 지명이 사상
  풍수와 지리. 부산 북구의 구포지역이 풍수적 지명이라면 사상은 지리적 지명이다. 
신구풍수가 와닿는 곳이 구포라면 사상은 사천이라는 곳의 위쪽이라는 지리적 유래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따라서 삼거리풍수 혈맥이 구포장으로 흐른다면 사상의 지리는 근육의 
노동력으로 사상공업단지를 세웠던 것이다.
  두 지역의 이러한 현상은 산세의 흐름에서 잘 나타난다. 금정산에서 백양산 주봉까지 
등지고 있는 구포지역의 산세는 산줄기를 보여주지만 백양산 남쪽과 서편 아랫녁에 
자리한 사상은 산자락에 기대고 있다. 풍수에서는 이것을 세와 형으로 한목에 
판별해버리고, 지명으로 밝혀가면 또한 선명히 드러난다.
  먼저 구포의 지명들은 앞서 밝혔듯이 만덕이 덕천을 흐르다 닿은 곳(포)이라는 신구의 
구포, 금곡에 낙지한 매화인 화명의 혈 역시 구포이므로 구포지역은 모두 삼거리풍수의 
지명들로 짜여져 있는 셈이다.

  상부상조하는 두레에서 주례동 유래
  이러한 지명들이 사상에 이르면 지리적 일련성을 갖춘다. 사상의 지리적 유래인 사천을 
토대로 한 지명들이 있다. 삼락동, 덕포동, 괘법동이 그것이다.
  낙동강 물길이 옮겨진 사력으로 형성된 삼각주 위에 삼락동이 있다. 자갈 력자에서 
돌(석)을 가려내면 즐거울 락자가 되고 삼각주라는 뜻을 덧붙인 것이 바로 삼락동, 
삼락동 사람들은 공맹의 일생과 군자삼락이라는 옥석의 발복을 원한다.
  언덕, 둔덕의 발음을 빌어온 덕포동은 언덕 위에 있는 포구로 강촌마을이라는 지리적 
지명이 된다. 물이 괸 곳, 즉 '괸 내'가 괘내가 되고 이어 괘법동이 덕포동과 이웃하고 
있다.
  이러한 사천의 지형 위에 마을이라는 지리적 지명들이 몰려 있는 것도 사상풍수의 
특성이다.
  마을, 말, 몰, 모라로 변음되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지만 마을의 옛말에서 온 모라동. 
마을은 이웃사촌의 협동이 중요하다. 그것이 품앗이, 두레인데, 이것이 주례동의 
유래이다. 여기서 품앗이를 감미롭게 나눌 터전이 감전동이라 할 것이다.
  신바람 나는 사상의 지명들은 학성이라는 기반시설에 장문이라는 유통구조까지 갖춘 
학장이 학장이라는 말로 마무리해준다.
  전통지리서인 [택리지]는 풍수, 생리, 산수를 명당 마을의 조건으로 쳤다. 이곳은 
모라동, 학장동, 주례동 그리고 덕포동이 걸맞게 자리한다. 뿌리 깊은 마을로 가장 
오랫동안 발복의 번영을 누리며 옛 지명을 그대로 간직한 모라동은 풍수에 속한다.
  이어 경제라는 생리는 학장동의 장문인 장터와 관련될 수도 있고 오늘날 구덕터널을 
학장동에서 볼 때에는 학장터널이라 해도 진배없다. 이는 장문이 문을 열어놓은 발복이 
된다. 인심을 주례동에서 찾고 산수는 덕포동에서 볼 수 있었다. 이렇듯 북구의 
풍수지리에서 구포는 풍수지명을, 사상은 지리지명으로 특징을 보여주는데 이에 사촌 
격인 지명이 끼여들어 북구풍수를 마무리한다.

  엄궁동, [정감록]의 십승지 지명
  북구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엄궁동이 바로 그곳인데 [정감록]의 십승지 지명이다. 
극락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나 확실히 아는 사람도 없다. [정감록]이 그렇고 십승지 
지명 역시 그렇다.
  십은 10개를 말하나 정감록에 나온 십승지만 헤아려도 60개는 족히 된다. 아홉이 
인간사라면 열(십)은 하늘의 뜻이고 이를 방해하는 기운을 막는 염승의 땅이 십승지가 
아닐까. 아무튼 십승지의 신비를 풀려 할 때는 파자에 궁이란 글자가 들어간다(궁궁촌, 
궁묘 등).
  또한 십승지의 땅 모양은 호리병처럼 입구의 목이 좁은데 엄궁동 지형이 이를 닮았다. 
후천개벽에 이르는 청학이 내려와 신선이 된다는 십승지의 정서.
  좌측에 승학산과 강선대 에덴공원가, 우측으로는 학장동과 덕포동의 강선대를 끼고 
있는 엄궁, 여기서 엄은 봉래산 기슭에 놓인 봉래동처럼 엄광산을 가리키는 것인데 
엄광산도 궁기인 십승지로 밀려났다. 고원견산이라는 치욕적인 식민풍수의 
창씨개명으로부터 엄궁산의 광명천지를 개벽시키기 위하여 지리산 풍수부터 실마리를 
풀어보자.
  (그림설명: 사상풍수는 지리지명의 발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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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리지: 이중환이 1750년께 이 땅의 인간지리를 적은 책. 양기풍수의 수구를 중요시한 
점과 이곳의 수구가 최초로 기록된 점. 황산강이라는 이곳과 같은 지명에서 첫 집필을 
밝힌 점에 미루어 역사에 남을 [택리지]의 고향은 바로 북구 유역의 풍수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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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상사 혈 삼아 민족정기 발원--중구와 지리산

  풍월에 의하면 진해시 천자봉에 명당혈 두 개가 있었는데 들숨구멍을 천자혈로, 
날숨구명은 왕혈이라 불렀다 한다. 이씨 양반이 하인에게 이장 일을 맡겼더니 주라는 
종은 자신의 선친뼈를 천자혈에 몰래 도장하고, 정작 주인 것은 왕혈에 매장했다고 한다. 
들숨이 먼저 발복했는데 이것이 명나라 천자 주원장이며 24년 두 날숨 발복으로 조선의 
왕인 이성계가 등장했다고 한다. 2백년 후 주인의 나라가 임진왜란을 당할 때 천자의 
군대가 도와주었던 역사는 종이 도장의 빚을 주인에게 갚은 것으로 풍수는 해석하고 
있다.
  청나라 태조도 김수로 왕릉의 발복인 김해 김씨 후손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것은 
김해지리지 88쪽에 한 자락 실려 있기도 하다. 때때로 전설따라 삼천리식의 풍수도 
적절한 역사적 배경을 만나면 설득력 있는 민족족보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만 보아도 그렇다. 대마도가 버젓이 우리 
땅으로 전도 안에 자리잡고 있다. 더욱이 대마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대마도에서 거제도까지의 바다가 특이하게 그려져 있다. 후일 대마도 
영토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우리 민족에게 유리한 판결에 일조하라는 깊은 뜻일까. 마치 
대마도가 지리산에서 떠내려온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실상사를 혈로 삼아 일본 땅으로 건너가
  우리나라 풍수에 있어서 지리산을 모르면 민족의 맥을 헛짚는 격이 되고 실상사를 그냥 
지나치면 혈을 놓친 격이 된다. 이 땅의 맥인 백두정기가 지리산에서 갈무리되고 실상의 
혈로 삼아 다시 일본땅으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상사 혈자리에 암장이 성행하는 것은 음택발복의 문제상을 여실히 드러낸다. 
여기에는 널리 알려진 매화낙지형이라는 형국까지 한몫을 한다.
  그러나 백두정기가 흘러온 산이라 하여 두류산이라 했던 민족풍수마저 사장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필자가 밝히고자 하는 지리산의 풍수형국은 다음과 같다.
  필자는 천마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바람을 가르는 천마시풍형이라 본다.
  그림에서 보듯 덕두의 머리에 꼬리를 하봉 자락으로 삼을 때 촛대(남근)봉을 찬 
삼신봉이 뒷다리고, 앞다리는 땅(토지면)을 박차는 마산면이 되고 천마의 등에 
마천(하늘)이 얹혀 있다. 이러한 천마의 형에 백두정기라는 세는 다음과 같이 연결된다.
  운봉의 입망치를 타고 고리봉(1,304m)을 연결하여 영신봉에서 제석천왕을 보여주고 
삼신봉을 벗어나면서 갈마와 말치로 낙남정맥을 일으켜놓는다.
  이러한 천마형과 백두의 세를 담은 지리산은 시풍의 위력으로 산태극의 장엄함까지 
보여준다.
  마천, 주천, 휴천을 함양이라는 하늘에 견줄 때 백운 운봉이라는 구름을 타고 
천마(654m)는 깃대(691m)를 흔들며 또다시 천왕(695m) 아래인 갈미봉에서 갈무리한다. 
그래서 지리산(천마)이 울부짖을 때 이 땅은 풍란(풍)에 시달렸다는 풍수소식이 
아닐런지.
  삼각고지를 중심축으로 삼고 천마시풍을 돌려보면 전체의 균형이 잡힌다. 그 태풍의 
눈인 풍수가 힘차게 치고 나가는 곳이 바로 삼정산 줄기이며 임천강의 물을 만난 
아랫녁의 땅(낙지)에는 실상사가 피어 있다(매화). 그러므로 실상사는 매화낙지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 지기가 일본땅으로 건너간다.

  민족풍수의 실상을 보여주는 실상사
실상사는 민족풍수의 실상을 보여준다. 무쇠철불과 일본열도를 그려놓은 특이한 보물 
제41호 범종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땅에 살던 왜구는 주변국가를 노략질하던 
쌀도둑이었다. 신라 문무대왕은 동해의 용이 되어 이들을 삼켜버리려 했고 범어사 역시 
봉황풍수를 보여준다(대마도와 일본열도가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봉황의 먹이가 되고 
금정산은 이를 감시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풍수에서 쌀도둑의 뿌리를 뽑고자 일본정기에 
못질해놓은 것이 바로 무쇠철불이다(828년).
  그런데 임진년(1592년) 쌀도둑 떼거리가 몰려와 분탕질을 치고 도망가자 일본인 모두 
정신 차리라고 일본열도를 박아놓은 종을 매달고서 아침 저녁 예불 때마다 두드리기 
시작했다(1667년부터 시작).
  실상사 승려들과 풍수 관계자들 모두는 철불과 지리산 천왕봉, 일본 후지산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눈짐작일 뿐 정확히 측정해보면 
후지산과는 삼천리나 어긋나는 일본 남단 후쿠오카와 연결된다. 이것은 풍수좌향론 
해석에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가령 무쇠철불은 그렇게 두들겨댔는데 일본은 왜 망하지 않았을까. 후지산은 일본본통 
있지만 후쿠오카는 남단의 작은 곳에 불과하다. 즉 실상사 민족풍수의 정조준을 여지껏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상사 범종이 타격이 정조준 오차로 인해 겨우 지진정도를 
발생시켰다고 가상해보면 무쇠철불에는 어떤 해석을 덧붙일 수 있을까.
  실상사 조준선 정열에 후쿠오카가 있고 그 옆에 바로 나가사키가 있다. 나가사키에서 
터진 원자폭탄을 끝으로 쌀도둑 제국주의자들은 무조건 항복했다. 어찌 보면 통쾌함마저 
드는 실상사 민족풍수이다.
  실상사 조준선 정열과 각도를 같이하는 식민풍수가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 다름아닌 
부산에 고원견산이라는 수치스러운 창씨개명적 지명이 바로 그것이다.
  민족풍수인 지리산에 견줘 식민풍수인 고원견산의 음해를 중구풍수와 함께 벗겨보기로 
하자.
  (그림설명: 지리산은 천마시풍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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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마시풍형: 바람을 가르며 나는 말. 우리민족이 말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악귀나 병마를 내쫓는 수호신이었다. 승천하려는 말 등에 탄 실상사 역시 앞발 
뒷발에 자리한 화엄사, 쌍계사 역시 명당혈이다. 그런데 성삼재를 넘는 횡단도로가 
천마의 목을 자르는 형상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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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광산 창씨개명 백두정기 끊겨--고원견산

  우리 강산의 족보인 산경(1769년경 신경준 제작)에는 부산의 맥 네 개가 기록되어 
있다. 금정, 화지, 엄광, 몰운, 더욱이 금정, 엄광, 몰운은 백두민족의 얼이 흐르는 
낙동정맥이라는 것을 대동여지도(1861년 김정호 제작)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금정산을 머리로 몰운대를 꼬리로 삼을 때 엄광산은 부산의 허리가 되는데 일제 때 
고원견산으로 왜색되어버린다.
  이러한 창씨개명 뒤에는 언어말살, 문화말살, 나아가 민족정기 말살이라는 식민풍수 
음해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광, 으뜸으로 해가 비치는 곳
  먼저 우리의 산명인 엄광산의 위치를 오늘날 부산 동구 초량동의 구봉산에서부터 
고원견산 언저리라고 학계에서는 추측한다(일부는 구덕산까지라고 보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이 풍수는 옛 엄광산의 주봉까지 밝혀준다.
  풍수용어인 속기처는 산줄기인 내룡이 땅기운을 생성시키려고 뭉친 지점을 가리키는데 
그 모양이 벌의 허리처럼 잘록하게 생겨 봉요처라 이르기도 한다.
  낙동정맥 선 위 부산의 맥에는 이러한 봉요처가 세 개 있다. 지경고개(노포동). 
만덕고개(만덕동). 냉정고개(개금동)가 그것이다. 지경고개 옆에는 사배야산이, 
만덕고개는 사비현에 있는데 모두 '새벽'이라는 뜻을 가졌다.
  엄광이란 엄비치, 즉 으뜸으로 빛이 비치는 곳을 뜻하므로 역시 새벽을 가리킨다. 
따라서 오늘날 고원견산 자리가 바로 옛 엄광산 주봉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이다. 
그곳이 냉정고개 봉요처와 맞닿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원견산이라는 식민산명을 
풍수로 풀어가면 일제의 침략근성이 드러난다.
  예부터 한, 중, 일 각 민족에게는 각각의 태조신이 있었다. 그런데 대륙풍수에서는 
중국(곤륜산)에서 한국(백두산)으로 이어졌고 일본(후지산)은 이러한 내룡의 말단에 걸린 
것으로 친다. 이어 한국풍수 역시 지리산 실상사에서 건너간 백두정기가 일본을 
생성시켰다는 내룡체계를 주장한다.

    일제 대륙침략하려 식민 풍수 자행
  대륙침략을 욕망하던 일제가 이러한 내룡의 열세에 몰리자 내세웠던 것이 바로 
풍수이다. 신작로를 낸다는 이유로 김해 김수로 왕릉을 끊어놓은 단맥풍수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보다 공격적 성향을 갖춘 침략풍수도 허다하다.
  부산에도 그러한 예가 있는데 오늘날 부산 시청자리가 옛날 용미산이었고 부근에는 
용두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용두산과 용미산을 일직선으로 그려보면 용의 꼬리는 정확히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하고 있다. 용의 머리가 향하고 있는 곳은 대륙침략의 
심장부인 북경부근이다.
  일제는 용두산에 신사를 짓고 용미산에 시청을 세웠다. 일직선상에 놓인 서울의 
침략풍수 거점처럼 오늘날 부산시청 건물은 새가 날아오는 형상인데 출발점은 일본 
동경으로 정확히 잡히며 전신인 부산부청사 역시 그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이 용미를 글자로만 풀면 식민풍수에 발목잡힌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해석이 된다. 
수룡의 입을 수미라 하는 전통 풍수용어와 더불어 용두산 내룡 앞에 있는 용미산의 
경우는 여의주를 뜻하는데, 어떤 식자는 바다에서 용이 올라와 경사났다고 책에 
기록까지 하였단다. 더불어 부산의 진산이 고원견산이라고 대중에 발표한 사례들..., 
모두가 풍월풍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당시 용두, 용미라는 식민풍수의 유포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러한 식민풍수에 걸림돌이 되는 두 지점이 있다. 침략풍수 일직선상을 가로막고 
있는 이 땅의 신선산명인 봉래산. 그래서 목이 말라비틀어져 죽는 산이라는 고갈산으로 
창씨개명 당한다.
  그림설명:일제는 민족의 내룡을 음해하려고 부산 중구에 식민풍수를 퍼뜨려 놓았다.

    고원견산은 신사를 의미
  나머지 한 지점이 엄광산이다. 이곳은 민족내룡이 직접 와닿는 곳이다. 
민족내룡[엄광산](내룡:산줄기가 와닿는 근원을 밝히는 풍수체계로 백두산, 태백산, 
천성산, 금정산을 부모로 할 때 태는 백양산, 식은 냉정고개, 잉은 엄광산, 육은 
용두산이다. 이러한 민족내룡의 숨을 끊고 핏줄마저 창씨개명하며 노렸던 것은 용두산의 
육, 즉 식민침략풍수를 키우려는 음해였다.)이 용미산을 꼬리로 잡는 침략적 
사이비풍수를 백두정기로 눌러버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창씨개명이 고원견산.
  풍수원전인 {장경}의 기감편 중 풍수를 정의하는 주문에 내룡고원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높은 기개를 보이며 멀리[백두산에서부터 엄광산까지]서부터 오는 민족내룡의 
당당한 기상이라 할 수 있다.
  한데 내룡을 뺀 고원에 볼 견을 붙인 고원견산이란 무엇을 뜻하는 걸까. 풍수상 
고원산이란 민족내룡의 조상인 조산을 뜻하지만 고원견산이라 하면 조신사, 즉 신하가 
되어버린다. 여기에 풍수좌향의 해석을 가하면 일본 각하나 폐하를 부르는 위치며 그 
대상인 침략풍수의 출발점은 일본의 발끝인 시모노세키가 된다.
  민족내룡이 일본땅 발 끝에 엎드려 "천황폐하"하는 식민산명이 바로 고원견산인 
것이다.

    식민풍수의 증거-철탑들
  현장답사 때 낙동정맥의 혈맥을 알고 있는 필자에겐 충격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개금동 개화국민학교 뒷산을 타고 엄광산으로 와닿는 백두의 혈맥자리마다 무수한 
철탑들이 못질하듯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지난해 유독 엄광산 앞부분에서만 발견된 
의문의 일제시대 비석들 역시 이러한 의도일 수 있다.]
  이 사실을 K통신 사장에게 알리자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전력은 
남선전기를 인수한 것이고 남선전기는 일제철탑계획 등 그들의 기술을 그대로 이전한 
업체라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마땅히 엄광산인 우리 산명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백두정기는 우리 
민족의 얼이니까.

      자리잡은 용이 여의주와 노는 모양: 중구의 형국

  중구의 서편을 감싸는 물줄기는 보수천이고 중구를 펼쳐주듯 다가선 산줄기 역시 
보수산이라 부른다. 그곳 사람들은 보수동을 차려놓고 보수동 산신각까지 세웠다.
  보수천은 산수회포를 이루는 보수산 우측을 흐른다. 풍수에서 우수는 음수가 되므로 
보수천과 음양조화를 이루려면 보수산은 양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보수산 산신각 
초상에는 할매가 아닌 산신령 할배가 그려져 있다.
    용두산을 잡고 있어 중심이 된 중구
  이러한 산수회포의 장단과 음양조화의 자락은 생명들을 품어주고 길러주었다. 
그러므로 풍수에서는 산과 물을 살아 있는 용으로 삼아 산룡, 수룡이라 부른다. 오늘날 
부산의 12개구 중에서 중구가 중심이 된 것은 산룡의 머리인 용두산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수소식을 들어보기로 하자.
  그림에서 바다에 접한 바깥선이 오늘날 부산이다. 가운데의 선은 1909년 12월에 
작성된 부산매립지도다.
  맨 안쪽선이 1877년 중구지도로 그 이전에 매립공사 기록이 없으므로 여기까지가 
중구풍수의 생토임을 알 수 있다[중구지 141쪽에 실린 1910년도 부산하전도 사진은 
원판이 뒤집혀 있다. 부산의 귀한 옛 자료이니 바로잡기 바란다.]
  중구의 생토인 V자 형상의 가운데에 있는 용두산의 기운은 사방이 막혀 있어 모두 
중구의 힘에 사용될 수밖에 없다. 용두산 앞녘, 현 부산시청터에는 1933년까지 용미산이 
있었다.
  그림설명: 중구의 풍수는 옛 동래읍성과 같은 반룡롱주형이다.
    용미산은 용의 귀에 해당
  혹자는 용미산을 용의 꼬리라 하는데 이것은 책상머리에서 옥편 놓고 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구풍수에 있어 용두산이 자물쇠라면 용미산은 열쇠다.
  물이 들어오는 입부분에 입구자를 쓰지 않고 꼬리 미자를 붙여 수미라고 하는 
표현방식은 풍수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고, 풍수 고전{장경}의 형세편에 용두, 용미 
이야기가 직접 나와 있다.
  "...용의 꼬리를 이제 머리라 하니 어찌된 것인가"
  또한 원문에는 산세가 다할 때 일어나는 것이 용미가 되니 용두에서 명당[혈]을 찾을 
때 똑바로 알아야[세워야] 한다고 나와 있다.
  이것은 용두산에서 용미산을 푸는 지침이 되는데 여기서 용미산은 용의 꼬리가 아니며 
오히려 용머리 앞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때 용미산은 구체적으로 용의 어떤 부위를 
말하는가.
  그 실마리를 푸는 방법에는 용두산을 중심으로하여 방위로 찾는 방법과 현장답사를 
통하여 산모양을 감상하며 푸는 형국론이 있다. 먼저 용두산의 남동쪽 언저리인 진방 
위에 용미산이 있는데, 용두산의 내룡은 북쪽에 있는 복병산에서 들어온다. 북쪽은 
감방위가 되며 여기는 다음과 같은 풍수법칙이 맞물린다.
  이감위수에 갑각진이, 북쪽에서 내룡이 들어오는[용두산] 경우 갑은 뿔[찔리는 
자리므로 흉단이 된다]이고 진방위는 귀[귓속처럼 품어주니 명당혈이 된다]라는 풍수 
격언, 즉 용미산은 '용의 귀'라는 것이다.
  귀의 발복(땅기운에 의해 복이 발한다는 말인데 엄동설한 보리밭은 밟을수록 이듬해 
풍년이 든다. 이런 까닭으로 중구는 인파의 발길로 상권이 번창하나 놀이터 아이들로 
조상의 무덤이 밟혀 납작해져도 이상하지 않는 사회적 문제도 야기되며 중구의 병원이나 
경찰서 입지 역시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으로서는 좌명천자가 되는데 이것은 나라를 
받드는 입지를 말하는 것이며 결국 1933년 풍미산은 시청터가 되었다.
  이번에는 형국론으로 중구청의 풍수소식을 들어보자. 용머리 뒤쪽 줄기에 있어 
토실토실 살진 부위를 용의 배에 견주는데 복병산이 이에 해당하고 산복도로 역시 
여기부터 시작된다.
  복병산을 주산으로 삼고 조산인 엄광산을 바라보며 앉아 회룡고조형을 이루는 
중구청은 용의 배 중에서 배꼽에 해당한다. 이곳은 만사형통의 발복자리다. 이렇게 
시청과 중구청을 모두 명당에 잡아준 것은 바로 용두산이다.
  중구청의 경우 남포동 6가에서 중앙동 5가, 중앙동 4가를 거쳐 오늘날 용의 
배꼽자리에 있다.
  이러한 이전경로가 용두산을 중심으로 7시 방향에서 4시 그리고 2시 방향인 반시계 
방향으로 그리다 12시 명당에 들어온 것이 오늘날 대청동 1가 1번지.
  용두산을 형국론으로 풀면 왜 중구가 부산의 중심이 되었는지가 확실히 정리된다. 
용두산 앞에 놓인 용미산 봉우리를 형국론으로 감상하면 여의중에 해당한다. 그런데 
보수산은 펑퍼짐한 접시 같은 형상을 보여준다. 자리잡은[보수산] 용[용미산]이 
여의주와 노는[용미산]모양, 즉 반룡롱주형이 중구의 풍수형국이다.
  그런데 동래부지 옛기록에 농주산(현 동래경찰서 자리)이 나온다. 동래읍성의 
주산[마안산]이 반룡지형이라 그 앞을 여의주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엄궁동, 조산인 엄광산에서 지명발복
  그러면 옛 부산의 중심인 동래나 오늘의 중심인 중구가 똑같은 반룡롱주형이라는 
풍수형국론의 발복이었다는 말이 된다. 중구의 산룡에 힘을 주는 조산은 바로 
엄광산(504m)인데 일제가 수치스러운 산명인 고원견산으로 내몰자 십리도 못 가서 
주저앉아버린 엄광산(382m, 현재 엄궁동 뒷산). 그곳에 십승지 풍수인 궁자를 붙인 
피난처 지명발복된 곳이 바로 엄궁동
  이곳을 감싸는 낙동강 밑바닥의 재치(재첩)을 건져내어 지천에 널린 소풀[정구지]을 
넣고서 푹 끓인 국 한동이씩을 엄궁동 사람은 머리에 이고 꼭두새벽이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닌 대티고개를 넘어 빼앗긴 옛 엄광산 아랫녘인 보수동과 대신동에 모여들었다.
  부산 새벽을 일깨우는 소리는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재첩국 사이소." 
  "민족정기여, 잠을 깨라"는 엄광산의 풍수 목소리처럼 중구소식에 귀를 더욱 
기울여보자.


      기세 좋은 명당터 밟을수록 발복 더해: 중구의 지명

  부산 중구풍수 좌측에는 신선 선자가 붙은 영선산이 1912년까지 있었다[오늘날 
중부경찰서 근방]. 사람들은 기왕 발복하려면 확실히 하라고 삼신산 지명인 영주산을 
끌어와 아예 영주동을 차려버렸다.
    영선산 쌍봉, 어부의 발복장소
  이곳 영선산은 봉우리 두 개인 쌍봉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풍수가 성행했던 당, 송시절 
높은 관리들이 물고기 모양의 장식을 차고 다니자 이것을 부러워하던 사람들은 그와 
흡사한 쌍봉을 어대라 하였다. 어대는 금을 상징하는 서쪽에 있어야 제격이다. 그래야 
금어대의 발복이 되고 만약 동쪽의 상징인 목에 걸리면 목어, 즉 목탁발복으로 중이 
되니 자식을 잃는다고 풀이했다.
  영선산 쌍봉은 중구풍수 혈자리 용두산 북쪽에 자리한다. 북은 수로 영선산은 수어, 
즉 어부의 발복 장소이다.
  1912년 영선산은 흔적도 없이 허물어져 버린다. 그러나 쌍봉의 토석들이 오늘날 
중앙부두 매립지를 받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수어대의 발복이라 할 수 있다.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
  예부터 이곳 쌍봉 좌우에 어장 두 개가 있었는데 이를 논치어장이라 불렀다. 영선산 
쌍봉자리를 가리키는 '논치'가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히 푼 학설은 아직까지 없다. 
하지만 풍수의 지명으로 풀면 '논치'라는 낚싯줄에는 중구지명의 월척들이 줄줄이 
걸려나온다.
  먼저 '논치'의 '치'자는 고개를 뜻한다[대신동 대치고개, 다대동 홍치고개 등]. 이어 
'논'이란 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놀다, 놓다, 머물다라는 뜻으로 풍수상 반이나 
주와 통한다. 
  결국 논치란 신선이 노니는 고개, 즉 쌍봉인 영선산을 가리키며 영주동 발복을 담는 
뿌리이다[동광동은 해방 이후 광복동 동쪽이라는 발복지명이다].
  영주동 사람들은 논치의 발복이 오랫동안 이어지라고 '한태'라는 지명으로 
묶어놓는다. 한태공원은 중구청 앞 메리놀병원 삼거리에 있었다.
  한태는 소의 등에 연장을 묶을 때 사용하는 줄로 왼쪽에 묶어서 오른쪽으로 건다. 
왼쪽에 이싸던 논치를 오른쪽 등줄기[복병산 고개]로 넘기니 용도까지 통한다.
  한태의 지명에 걸린 영선고갯길은 그 당시 남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풍수에 
있어 도로는 물길로, 사람의 왕래를 득수로 삼으니 한탯줄[영선고갯길에서 남포동까지] 
발복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탯줄 끝에는 자갈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영선산이 허물어져 부산 곳곳이 매립되자 한탯줄 끝녘인 자갈마당에서 논치시장, 
논치어장 풍수들이 발복한다. 논치의 지명발복으로 자갈마당시장이 아닌 자갈치시장이 
된 것이 그 일례이다.
  이 한탯줄에는 국제시장을 위시하여 깡통시장, 국집골목에 먹자골목까지 매달려 옛 
논치시장의 기세를 잘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은 중구풍수의 발복 특성을 잘 보여준다. 
자갈치시장이 보수천 아랫녘에 걸려 있다면 국제시장은 한탯줄에 직접 매달려 있다.
  보수천은 중구풍수의 혈인 용두산 우측 음이 되고 논치와 한태는 예부터 용두산 
좌청룡 등이라 했듯이 양이다.
  그러므로 음기의 물줄기를 받는 자갈치시장은 자갈치 아재보다 자갈치 아지매가 
발복하며 양기가 강한 한탯줄에 직접 걸린 국제시장에선 남자상인이 유리하다.
  '양이 올 때 음으로 받고, 음이면 양으로 맞추라'는 음양조화에 견줄 때 자갈치시장은 
여자상인에 남자손님이 더 많고, 국제시장은 남자상인에 여자손님이 더 유리하다는 
풍수의 거래소식이다.
  음인 보수천은 부산 수도시설의 1번지[1894년], 한탯줄의 양 역시 부산 포장도로의 
1번지[6, 25전쟁 때 유엔도로]였다.
  이렇게 센 음양은 추운 겨울 보리밭 밟듯 꼭꼭 밟아주어야 그 이듬해 봄에 잘 자란다. 
실제로 민족의 역사가 추웠을 때 귀국동포와 월남 피난민들이 꼭꼭 밟아준 이곳 터가 
명실상부한 상권 1번지가 되었다.
    국제시장의 빈번한 화재 - 장풍의 문제점
  기가 센 탓에 자갈치시장에선 어느 누구라도 목소리가 한 옥타브 더 올라가는데 
국제시장에선 불도 자주 났다. 이 점이 득수로 모은 기를 장풍의 문제점 때문에 
날렸다는 풍수의 지적이기도 하다.
  국제시장은 마치 이 땅의 풍운을 축소해 놓은 감마저 없지 않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광복동이 생겼는데 바로 그곳에서 전시비축물자들을 팔았던 장터가 1948년 4월에 
자유시장이란 명칭을 내건다. 그해 7월 자유당을 창당한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한다. 
이어 1950년 5월에 불현 듯 국제시장이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두어 달도 채 못 되어서 6, 
25전쟁이 발발하고 명실상부한 국제물품들이 거래되었다.
  이렇듯 중구풍수는 밟을수록 발복하는 특성을 보이면 그 대상 범위를 이땅 전체로 
삼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잤다 하면 불'이라는 폐허속에서도 '화재는 곧 건설이다'는 
기질을 낳았다. 결국 오늘날 부산 곳곳의 대로들은 대화재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구포의 풍수가 득수에 의한 물난리를 겪었다면[득수의 문제에서 토박이는 구포보다는 
객지에서 더 잘 발복한다] 중구의 풍수는 장풍의 결함에서 온 불난리를 겪었다.
  이것은 동래를 축으로 한 우리 전통 풍수도시를 말살하고 이곳 중구를 중심으로 
매립지 덧붙이기 식으로 꿰맨 일제의 식민도시화 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 전통이었던 성곽도시 풍수로 중구의 때를 벗겨보자.

      
      양기 풍수 배제한 식민도시형: 부산의 원형

  "한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한과 정이 밴 우리의 노랫말이다.
  풍수의 시작이었던 황하유역은 거친 풍토로 인해 기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사조들이 
발생했다. 그 중국풍수가 우리 풍토에 뿌리를 내리자 한과 정이라는 우리 고유의 풍수가 
전개된다. 정이 없는 산이 어찌 발복을 가져다줄 것이며 명당 역시 산과 물이 정답게 
안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특유의 정서이다.
  우리 풍수는 방향을 보고 기의 향방을 논하은 것보다는 산세의 유정과 무정을 더 
중시한다.
  가령 관에 끌려가 물볼기 맞는 것을 관살이라 한다. 살기가 오는 방향만 걸려도 이를 
관실방의 화로 잡아주는 것이 중국풍수의 논리다. 그러나 우리 풍수는 이러한 
관살방이더라도 유정만하다면 높은 벼슬에 오른다는 복으로 푼다. 벼락이더라도 정만 
있으면 돈벼락 발복으로 보는 정서이다.
  풍토의 연줄은 지연과 혈연의 바탕도 되었다.
  "어느 곳에 사는 과객이라 여쭈어라"고 지연만 들먹여도 혈연적 통성명이 되었던 
시절. 논두렁의 지연에는 농민이 살았고 양반은 명당에 양반촌을 입지시켜준다는 신념이 
있었다. 농민보다 낮은 신분의 경우에는 지연마저 없어 읍성의 저잣거리를 생활의 
근거로 삼았다.
  결국 지연과 혈연은 이 땅의 풍토에 도시를 세우는 바탕이 되었다. 이름하여 
성곽도시인데 동헌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성을 쌓는 양식을 가리킨다.
    성곽도시, 사신사 배정에 따라 축조
  우리 전통의 성곽에는 풍수 사신사 배정에 따라 남문, 동문, 서문, 북문을 
축조하였다. 이 중 남문은 명당방위로 가장 중요시했던 반면 북문은 풍수의 흉살이 
들어오는 문이라하여 언제나 꼭꼭 잠궈 두었다가 흉을 만난 전쟁시 출병할 때만 
이용하게 했다.
  옛 도시 흔적은 오늘날 도시구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서울의 경우 남대문구, 
동대문구, 서대문구는 있으나 북대문구는 없다.
  그러면 오늘날 북구라는 행정 지명은 어찌된 것인가. 그것은 서양 지리학 개념에서 
나온 것이지 우리의 전통도시 개념이 아니다.
  옛 성곽도시 흔적인 성과 문의 지명은 아직도 남아 있다. 예컨대 대구의 경우 동성로, 
남성로, 북성로가 있고 동문동, 서문시장, 남문아파트란 명칭이 있다.
    옛 부산의 중심은 동래읍성
  부산의 경우에는 이러한 성곽도시 지명들이 없다. 산성마을, 토성동, 문현동이 있으나 
그것들은 성곽도시 지명들과는 별개이다.
  부산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대륙침략 거점도시였으므로 우리 전통의 성곽도시 원형을 
타고 발육한 곳이 아니다. 성곽도시의 원형을 가진 대구에 비해 부산은 6, 25전쟁으로 
도시 기능의 마비현상이 더욱 두드러졌고 오늘날의 교통체증을 유발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부산의 원형을 찾아볼 필요성을 느끼며 이것은 또한 풍수의 
존재의의이기도 하다.
  가령 중구를 중심으로 한 성곽도시를 선조들이 세웠을 경우, 진산은 엄광산, 주산은 
보수산, 동헌은 남일국교 자리며 용두산은 안산이 되고 조신사는 봉래산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산줄기의 풍수적 해석에 따를 경우 그림과 같은 지명들의 발복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어디까지나 중구를 중심으로 한 아전인수격 풍수에 
불과하다. 선조들의 풍수관은 옛 동래읍성을 중심으로 펼쳐나갔으니까.
  그렇다면 수정동과 문현동에 여객과 수산물 유통에 필요한 주거 중심의 항만개발을 
하였을 것이다. 이어 낙동정맥의 한 축인 중구와 서구 그리고 사하구와 영동구는 
전원도시 지역으로 남았을 것이다.
  풍수 특성상 상공업 개발은 가장 늦게 대두되므로 결국 남아 있는 가덕도 저습지를 
매립[이는 생토의 불필요성에 의해서도]하여 철도 역시 낙동강변을 따라 부설하였을 
것이며 이는 오늘날 항만도시의 물동량을 효과적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면 부산은 
켄테이너 차량과 승용차가 서로 끼여들기에 신경쓸 일도 없었을 것이며 낙동정맥을 따라 
조성된 공원과 전원풍경은 쾌적한 도시기능을 갖게 됐을 것이다.
  도시개발과 풍수는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양기풍수(여러 사람이 살수 
있는 터전을 풍수로 보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서울이 세계적인 대도시로 눈부신 발전을 
보일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바로 6백년 전 양기 풍수로 그 터를 잡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부산의 경우는 이러한 양기풍수를 배제한 일제의 식민도시 골격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풍수원형 없는 부산의 도시계획은 계속 모순을 거듭하고 있다.)의 
적극적인 경향마저 품고 있다. 적극적인 풍수로 한양에 입지한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할 
수 있었고 오히려 적극성이 넘쳐 묘청의 난같은 것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는 
개발이냐, 풍수로 보호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대두된다. 우리의 명산에는 어김없이 
고풍스러운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말 도선 풍수가 터를 잡고 이에 따라 
축조하였기에 명산과 사찰은 절경절생의 풍악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명산에는 산장이라는 건물들이 역시 빠지지 않는다. 그것도 하나같이 철근 
콘크리트에 마구잡이 돌덩어리들로 개발해놓은 몰골을 보고 있노라면 절경절단 부러지는 
소음을 듣는 듯하다.
  오늘날 이 땅의 풍토에 도시를 세울 때 어떤 장단을 선택해야 하는가 다시 생각해볼 
때다.

      아미산 중심 좌 시약 우 장군: 서구의 형국

  {삼국유사}에 의하면 약 2천여년 전 한 젊은이가 토함산에 올라 펼쳐진 서라벌을 
내려다보고 명당을 발견하였다 한다. 그곳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재치를 
발휘하여 명당을 차지한 젊은이는 훗날 왕으로 등극하니 그가 바로 신라 탈해왕이다.
  이때 명당이란 군왕지지를 가리키는데 탈해왕은 그것을 어떻게 알아차렸을까.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땅 모양이 초승달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한다. 초승달은 차츰 
보름달로 변해가니 발복을 뜻하며 3이란 숫자는 역에서 동쪽의 태양을 상징한다. 이렇게 
하늘과 땅 그리고 태양과 달의 음양조화의 합격을 풍수에서는 천지음양일월도합격이라는 
대명당으로 친다.
  오늘날 경주시 반월성이 바로 그런 자리다. 그리고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에도 
반월성이 있었고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도 반월성지가 있었다.
  그림설명: 군왕지지의 기세를 닮은 서구의 아미산.
    서구의 아미산, 반월성의 길지
  부산의 풍수도 이러한 반월성과 삼일월형 길지가 있는데 그것은 서구의 아미산이다.
  아미산에는 옛날 반월성이 있었고 흙으로 축성된 성이어서 오늘날 토성동과 아미동의 
유래가 된다. 아미란 미인의 눈썹을 가리키는데 가느다란 초승달 모양과 유사하다.
  이러한 아미산의 발복은 서구의 도시계획을 재미있게 펼쳐놓았다. 먼저 명당이 
발복하려면 탯줄과 같은 생명선이 필요한데 아미산에서 대치터널까지 산복도로가 있다. 
여기서 복은 뱃속을 가리키는 풍수용어다. 서구의 주요 건물들은 부산대학병원, 
아미전화국, 아미우체구, 부산고등법원, 부산지방법원, 검찰청, 서구청, 서부경찰서, 
서부세무서 등인데 이것들이 모두 산복도로 아래쪽에 나란히 매달린 격이 된다.
  흔히 사람들은 구덕로라는 대로 덕분에 서구가 발전했다고 하지만 실상 서구의 뱃속을 
풍수로 풀면 산복도로의 발복이다. 그래서인지 구덕로 건너편에는 이렇다 할 주요건물이 
전무한 상태다. 이러한 산복도로에 직접 매달린 부민동 22번지는 바로 
임시수도기념관이다. 한때[1950년 8월 18일-1953년 6월] 이곳은 대통령이 집무했던 
곳으로 군왕지지와도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명당발복은 여지껏 
미뤄져왔다.
  1909년 일제는 군왕지지인 아미산 주변에 화장장을 세우고 주변을 공동묘지로 
초토화시켜 버린다. 화장장은 1957년 철거, 이전되지만 그보다 10년 전인 1947년 
완월이라는 동네 이름이 걸림돌로 등장한다.
  풍수형국에 완사명월형이 있다. 달빛 아래 펼쳐놓은 비단이라는 뜻인 완월이었다면 
군왕지지의 발복은 안동군 임하면 김씨 문중[완사명월형의 대길지로 영남의 4대 명당 중 
하나임]처럼 줄줄이 발복했을 테지만, 달을 희롱한다는 완월은 풍수에서 가장 피하는 
맥없는 지명이다. 1982년 이러한 완월동 지명이 행정말소로 충무동으로 흡수된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군왕지지의 위엄을 갖춘 아미산
  이렇듯 인간의 잘못으로 풍수발복이 막힌 아미산이지만 군왕지지라는 위엄을 갖춘 
형국들을 좌우로 거느리고 있다. 먼저 우측의 산세로는 천마산과 장군산이 있는데, 산을 
풍수로 풀면 장군산은 혈과 명당을 가리키고 천마산은 사(장군산이 있으면 병졸에 견줄 
산이 있어야 하는데, 이때 병졸을 사라고 한다. 어머니, 처, 며느리 모양을 한 세 산에 
알맞는 어린아이 사가 없을 경우에는 세 과부 꼴이 된다는 비유에서 보면 형국 완성에 
있어 사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를 거느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장을 못 만난 명마는 잡마만도 못하고 명마를 얻지 못한 명장은 필부만도 못하다는 
격언이 있다. 그래서인지 장군산이나 장군바위가 있는 삼십리 이내에는 꼭 천마나 용마 
또는 치마라는 명칭의 산이 있다. 부산의 경우 해운대 반여동에 장군혈이 있고 북서쪽 
십리 안팎에 치마산이 있다.
  또한 장군혈과 명마혈은 그들 중 어느 하나가 파혈되면 필부와 잡마의 비극을 
막아주려는 의도에서 풍수는 나머지 혈도 파혈시켜 버리는데, 이것은 이 땅을 지켜주는 
호국지지이기 때문이다.
  구평동 매립지에서 장군산과 천마산을 감상하면 일전을 치렀거나 앞둔 장군이 
천마산의 고삐를 잡고 감천만의 어떤 발복이 있는지 알아보자. 이것은 군왕지지 좌측의 
형국들을 살펴보면 드러난다.
    서구청 앞의 시약산, 옥녀상징
  서구청 앞길에서 보면 구덕산과 대치터널 사이에 유난히 봉곳한 모양의 산이 보이는데 
이를 시약산이라 부르며 풍수상 목형에 인물로는 옥녀(젊은 처녀)에 견주어진다.
  여기에서 시약을 문자 그대로 풀면 약초의 향이 된다. 향은 풍수에서 발을 뜻한다.
  또한 이에는 걸맞는 사가 있어야 하는데 1947년 부용동이라는 지명이 갖춰진다. 
부용화는 생명력과 다산을 뜻하며 풍수형국에서 부용형은 복을 가리킨다.
  여기서 발복이란 옥녀[시약산]의 향기를 말하는데 젊은 처녀가 향기를 내뿜으면 뭇 
남자들의 시선을 끌 듯, 인기인이나 대장군 또는 정치가로 적격인 발복터가 된다. 
옥녀가 너무 노골적이면 거리의 여자가 되나 병풍 등으로 사를 갖출 때에는 
귀격발복으로 변한다. 구덕산이 옛날 병풍산이었으므로 옥녀는 귀격으로 발복함을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군왕지지 발복은 이 정도의 사로 부족하다. 그런데 1961년 준공되어 1988년에 
더욱 단장된 부산터널을 옥녀가 오른손 엄지를 끼고 산등성이를 움켜잡을 때 구봉산이 
무엇이 되는지를 알면 군왕지지의 풍수발복이 보인다.

      아미산 군왕지지 옥녀단장형: 서구 형국발복

  부산 서구풍수에 있어 1988년 더욱 단장된 부산터널을 살펴보자. 건너편에 있는 
시약산이 오른손 엄지를 터널구멍에 쏙 밀어넣고 산등성이를 움켜잡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보수산은 영락없는 손잡이 끝부분이며 구봉산은 원형의 거울이 된다.
  이러한 구봉의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시약산은 풍수상 무엇이 될까. 유독 단정하게 
앉아 있는 자태는 젊은 처녀, 옥녀가 되는데, 시약을 문자로 풀면 향기가 되고 우측편 
아미산의 아미는 미인의 눈썹을, 사병산(구덕산의 옛 지명)은 병풍을 가리킨다. 게다가 
부용화라는 부용동까지 갖췄다. 이 정도면 서구의 형국이 드러난다. 바로 옥녀가 화장을 
한다는 옥녀단장형(화장을 한 젊은 처녀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이러한 형국은 
풍수발복시 선망의  대상이 되어 대중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끈다. 서구 풍수의 경우는 
반월형이라는 군왕지지를 갖추고 있어 대권승리 발복의 예시를 알 수 있고 발복인물에 
있어서 유창한 화술구사는 불리하다. 말 잘하는 여자는 인기에  반비례한다는 
풍습에서.)이다.
    서구 - 잉자형국
  이러한 서구형국의 운을 넌지시 띄우면 대부분 그 때문에 완월동이 서구에 있나 
생각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속안일 뿐이다. 사면이 병풍이라는 사병산이 있으므로 
옥녀는 거리의 여자가 아닌 규방규수가 되어 귀격발복을 보장해준다.
  이어서 서구의 산줄기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글자 형국을 하고 있는데 바로 자식을 
밴다는 잉자형국이다. 여기서 내자는 임신부의 배 모양을 그리고 있으며 그 속에 품고 
있는 아들 자자는 아미산의 위치가 된다. 하지만 아미산은 지금껏 발복을 미루어온 
군왕지지였다. 잉자가 서구에서는 엎어진 모양을 하고 있어 군왕지지의 발복은 여기서도 
순산이 아닌 고역을 치러야 했다.
  거제도의 대계마을 산이어서 거자를 따고 정치적 뿌리는 부산에 내렸기에 산자를 붙인 
호가 거산. 부산의 청정기를 받는 산은 금정산 계명봉.
  이렇게 볼 때 큰 닭이 운다는 풍수가 되고 거산 발복이 되는데 군왕지지인 아미산 
발복은 난산이 되고 말았다[6, 25사변 때 임시정부로서 군왕지지의 난산]. 이렇게 되면 
결국 시약산의 옥녀단장형에서 발복된다는 논리가 선다.
  이러한 풍수형국의 서구는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 1번지였다. 민주투사로서 숱한 
고초를 겪은 30여년은 바로 난산의 고통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양부모 발복설
  풍수의 목적은 발복에 있다. 발복은 명당에서 이루어진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발은 
혈(유골을 묻는 자리며 양기풍수상 서구의 경우는 시약산)에서 그리고 복은 
명당(후손들이 모여드는 무덤 앞인 서구의 전체 터)에서 받는다.
  이때 복은 발이 있어야 하는데 발은 생기를 타야 가능하다. 풍수의 원저인 {장경}의 
첫구절은 장자승생 이야기로 시작된다. 묫자리 풍수들은 발복에 대하여 대부분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부모의 뼈가 친자에게 발복된다는 외곬 풍수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양부모가 기른 양자는 발복과 인연이 없으니 피와 땀으로 기른 정이 뒷날 양자에겐 아무 
영향도 못 미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결국 양부모의 무덤은 버려지고 생부모의 무덤만 
보살펴진다면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 풍수는 그 반사회적 기능으로 지탄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것을 반박하는 측의 유일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출가한 딸은 출가외인이기 때문에 친정을 발복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비록 소박맞고 
쫓겨난 경우라도 시댁을 발복시켜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거 역시 양부모 
발복설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첫째 출가외인이란 글자 모양에서 보듯 계집 여자가 있어 
남자에겐 해당될 수 없고, 둘째 가부장 사회에서 남자 위주로 여자를 예속시키는 
어용풍수 논리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풍수의 원전인 {청오경}과 {장경}에 양부모 발복설은 한 구절도 없고 모조리 친부모의 
뼈에서 친자의 뼈로 발복된다고 쓰여 있다. 그러면 양부모 발복설은 전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풍수에 있어 양부모의 발복설은 성립된다. 양자로 입적되어 
양부모의 기른 정을 듬뿍받고 자란 경우 훗날 양부모가 명당에서 발복한다고 가정할 때 
발복은 양자에게 미치고 이에 반하여 인연을 끊은 생부모의 발복은 불발된다. 제아무리  
{청오경} {장경}에 '자승생기'라는 대원리를 세웠더라도 외통수 풍수에 불과하다. 
중국인들은 단순히 기만 보고 따진 것이다.
  중국인의 기는 조선시대 퇴계선생에 의하여 그 원리가 선명히 드러났다. 기는 반드시 
이와 더불어 있는데 기가 발하더라도 결국 이의 도리를 따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의 
길은 바로 양부모 발복설의 풍수논리가 당연하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이러한 풍수발복을 적절히 설명해 주는 것으로 우리 고유의 현장풍수론이 있다.
  중국에서는 패철을 보고 혈을 해치는 방향을 무조건 관살방(관재구설로 흉방)이라는 
기로 해석해버린다.
  반면 우리 풍수는 관살방이라 하더라도 유정한 산이 있을 경우 높은 관직에 오른다는 
발복해석을 한다. 또한 아무리 좋은 방향이더라도 무정할 경우는 흉이 되기에 복은 
불발된다고 본다. 이것은 유정한 양부모는 양자에게 발복될 것이고 무정한 
친부모[양자로 자식을 보낸 부모]는 불발된다는 풍수소식이 아니겠는가.
  양부모격인 부산 역시 유정이기 때문에 군왕지지 발복을 해주었던 것이 서구의 풍수라 
하겠다.

      복병, 사병, 부민발복처로 완벽한 대장군 형국: 서구의 지명

  강서구에는 뱀머리라는 사두가 대동여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행정관청은 지리적 
이유에서 모래 위, 즉 사두로 작명하였으나 정작 그곳 토박이들의 옹고집은 한술 더 떠 
용머리라고 줄기차게 불러온 오늘날의 용두마을. 한갓 모래더미보다는 풍수발복인 
용사류 지명이 백번 낫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강서구에서 낙동강 건너 강자 한 자 넘기면 바로 서구. 이곳 지명들 역시   살아 
움직이는 땅을 보여주는데 그럴 때 인간의 관심사는 항상 두 가지로 요약된다.
  어느 곳에서 어떠한 기운이 발복되는가 하는 이 의문점들은 결국 풍수의 목적과도 
통한다. 이름하여 명당발복.
    장군 형국의 위력
  서구 풍수에서 명당을 잡아보려 할 때 단연 두드러지는 지명은 천마산과 장군산이다. 
마치 암남동에서 장군을 부르자 초장동에서 멍군으로 되받아치는 듯한 절묘한 풍수 한 
수를 엿볼 수 있다.
  풍수에서 명마 없는 장군혈은 강도가 발복한다는 악수로 친다. 그래서 우리 산천에는 
장군혈이 있을 경우 근처에 장군혈에 견줄 천마나 용마 혹은 비마 혈의 지명들이 놓여 
있는데, 이러한 서구 풍수판국의 짜임새를 더 넓게 살펴보면 천마산 앞에 토성이란 
지명이 있다. 장군과 천마의 포진에 끼여든 토성은 진중의 짜임새가 된다.
  서구 장군형국의 위력은 역사와도 인연이 있다. 강토가 마구 유린당했던 1592년 9월 
1일. 이곳 서구 송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은 함대의 전열을 장사진으로 가다듬고 
전원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꼬리에 꼬리를 문 함선들이 일시에 부산포 깊숙이 밀고 
들어가 통쾌한 대승을 거두었던  부산포해전. 바로 그 출발점이었던 곳이다. 당시 
순절한 정운 장군의 유래로 장군산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장군산의 지명은 풍수상 혈자라이며 천마산 역시 장군멍군의 묘수라는 점에서 
볼 때 그것은 와전된 지명 유래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장군산은 아직 
발복하지 않았다.
  이순신 함대의 위력과 정운 장군의 기세에 필적할 만한 역사적 장군이 이곳 
서구에서는 탄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장군 발복자리는 복병산
  그러면 장군 발복자리는 서구풍수 중에서 어디일까. 먼전 음택 풍수발복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음택발복은 거들먹거릴 적혈장이란 고작 한평 남짓하다. 
그러나 장군발복의 국면은 저 멀리 복병산[현중구청 뒷산]에 이르는 수십만평의 국면에 
달한다. 이때 풍수발복의 인물은 당연히 양기, 양택 발복을 뜻한다.
  복병산. 지명 그대로 병사들이 엎드려 부복한다는 것으로 장군이 탄생하면 그 휘하에 
들어가겠다는 사졸의 사다. 건너편에 사병산(보수산 혹은 구덕산을 가리킴)이란 지명도 
있다. 사면의 병풍이란 장군이 머물 진중의 막사를 친 격이다. 여기서 우리는 명당 
발복처를 짐작하게 된다. 바로 보수산, 구봉산, 엄광산[고원견산] 그리고 구덕산으로 
품어놓은 울안이 되는데 그곳은 대신동이다.
  더욱이 대신동 입구에는 부민동과 보수동이 있는데 부와 보는 재보, 즉 장군의 
군자금, 민은 국민의 지지를, 수는 천마산이 있는 초장동과 짜임새가 갖춰진 군량미와 
연병장, 가히 완벽한 장군형국을 갖추었다는 풍수의 한 소식이다.
    천마, 금치산 전함 3척 형상
  이때 동대신동, 서대신동 중에서 어느 곳이 장군의 발복처일까, 필자가 이 풍수소식을 
접한 것은 작년 가을 황령산 봉수대였다. 그곳에서 부산의 남쪽을 바라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형상들이 보인다.
  먼저 영도의 봉래산을 보면 함장실까지 갖춘 웅장한 전함이 연상된다. 이어 서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봉래산 전함 형상과 똑같은 산이 있는데 바로 천마산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서쪽에 전함이 나타나는데 이는 금치산이다. 바로 그곳이 장군발복처가 
되는데 세 산의 정상에 올라가서 풍수법칙으로 풀어보면 명당지점은 더욱 좁혀진다. 이 
같은 풍수 형상은 너무나 선명하여 이십리나 떨어진 보수산 뒷녘에 있는 대청공원 
부산탑에서 관망하여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천마산의 지명에서 천은 공군을, 마는 육군을, 전함 형상은 해군에 견줄 수 
있으니 세 산 역시 3군을 뜻한다.
  그러면 풍수원칙상 그곳은 어디일까. 바로 동대신동을 향하고 있다. 여기에서 
구체적인 지점을 찾는 작업을 중단하였다.
  풍수에서 3정도 되는 힘을 지리에서 얻는다면 인화는 5의 힘을 갖는다. 아무리 천하의 
대명당이더라도 인화나 인간의 노력 없이는 무용지물이 된다. 자칫 잘못 판단하여 3의 
힘만 맹신하고 생활 속의 5의 힘을 소멸시킬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십승지로 현실도피한 {정감록} 맹신주의자들이다.
  동대신동의 젊은이들이 생활의 힘인 5를 최대한 발휘하면 하늘에서 3이라는 명당의 
힘을 주는 소주길흉론적 발복을 더 권장하고 싶다. 풍수의 시작 역시 3천여년 전 풍토에 
적응하려 했던 생활에서 시작되었으므로 결국 생활풍수(양기, 양택풍수를  가리킴. 
주위환경이 원인이 되어 직접 산 사람에게 발복시키는 것이 특징으로 풍수는 
생활풍수에서 출발했다. 음택풍수는 생활풍수에서 그 원리를 도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풍수의 대원리이다.

      칠점수룡 발복 가락문화 융성: 강서구

  "칠점산 저녁안개 가로지르나/삼짇날 건너줄 강물은 일고 있구나/이른 2월 봄바람 
앞에 이곳 나그네는/정녕 강남길 떠난 제비 소식 기다리고."
  김해와 관련된 고서에는 칠점산을 읊은 포은 정몽주의 시조가 실려 있다.
  대다수 부산 시민에게 칠점산은 익숙한 지명이 아니다. 오늘날 칠점이 부산 어디에 
있냐는 질문을 받으면 고작 가리키는 것은 한 줌 흙더미인 반점뿐이다.
    칠점은 북두칠성 상징
  그런데 칠점산은 옛날 우리 민족에게 널리 알려진 명산이었다. 조선팔도를 한폭에 
담은 대동여지도의 지면 사정상 부산지역의 산명은 고작 두 개가 허용되어 있다. 
금정산과 칠점산이 바로 그것이다.
  풍수로 칠점산을 밝혀보면 영남지방을 발복시키는 수룡으로 곁에는 용두라는 지명이 
걸맞게 자리한다. 칠점풍수는 오늘날 강서구의 뿌리가 되므로 강서구 역시 
수룡풍수이다.
  산이 일곱 점처럼 널려 있다해서 붙여진 칠점산. 일제시대 낙동강 삼각주의 지반조사 
결과 이곳 칠점의 위치가 가장 오래된 지질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판정이 나왔다. 
풍수적으로 보면 생토로 생룡을 뜻하는데 생룡의 수난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처음 세 개를 허물어서 해군비행장 활주로로 덮어버린다. 해방 이후 비행장 확장으로 
나머지 네 개도 허물어지고 오늘날 그 자리에는 김해국제공항이 있다.
  아주 오래전 이곳 낙동강 하구에 칠점의 수룡만이 살고 있던 시절, 굳센 일곱 용은 
하류로 흘러내려온 토사를 막아서 낙동강 삼각주를 발복시켰다. 일곱 수룡은 
삼차수(오늘날 평강천 등 세 줄기 물길을 말함)를 바로잡아 기름진 김해평야를 
펼쳐주었고 가야문화는 이를 토대로 꽃피웠다.
  이러한 발복에서 생겨난 낙동강 삼각주를 풍수에서는 나성(수구에서 물결을 조절하여 
명당발복을 북돋워주는 역할을 한다. 음택풍수의 경우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산이 두렵게 
생겼을 때 북신이라 하는데 그 주위에 군왕지지의 혈이 숨겨져 있다고 전한다.)이라 
하는데 서울의 여의도도 여기에 속한다. 한강의 기적이 여의도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처럼 칠점풍수의 위력 역시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강서구의 탄생 또한 칠점풍수의 삼각주 발복이지만 강서구청의 입지 방향선을 
그어보면 칠점산을 배후의 축으로 하고 있다. 풍수상 칠점이란 북두칠성을 상징하고 
이것은 민속신앙에서 칠성의 예언적 점과도 통한다. 대동여지도에는 아예 칠점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예로부터 가장 신성한 점술은 거북점으로 보았다. 낙서 역시 거북의 
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칠점 바로 옆에는 낙수에서 올라왔다는 거북, 즉 등구마을도 
있다. 이러한 풍수소식에서 우린 김해[구지가]본래 뜻을 밝힐 수도 있다.
  구지란 풀이 그대로 거북을 가리킨다. 즉 거북의 예언인 구점의 의미이다. 그러면 
구지가의 뜻은 시원스럽게 풀린다.
  거북아 거북아/머리를 내밀어라/내밀지 않으면/구워서 먹으리라.
  여기서 '머리를 내밀어라'는 점괘를 보여주라는 뜻이다. 또 머리는 수, 즉 수로왕의 
점괘를 말하며 만약 점괘가 안 나오거나 틀리면[내밀지 않으면] 용도폐기 처분[구워서 
먹으리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 칠점풍수의 수룡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현장답사 결과 얻은 결론은, 칠점산은 
덕계마을 뒷산을 이어받았고 뒤이어 봉림마을 뒷산 그리고 명법동 뒷산과 용두산을 거쳐 
용지산에 닿는다. 칠점수룡은 낙남정맥의 적통인 용지산에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뻗어내린 생룡이다. 또 지명발복에서도 진행방향이 드러난다.
  용지산-->용두산-->칠산-->용두-->칠점산-->용두마을.
    백두산룡이 낙동강 물고 잡아 칠점수룡 발복
  모두 생칠룡을 가리키는 지명들이다.
  칠점풍수의 모습이 차츰 드러나자 가장 중요한 풍수소식이 궁금해졌다. 칠점을 천문의 
북두칠성과 결부시킬 때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북극성의 존재다. 과연 칠점풍수의 
북극성은 어디를 말하는가. 먼저 북극성이란 북쪽의 중심을 뜻하므로 칠점산의 북쪽을 
살펴보았다.
  널리 알려진 신어산이 눈에 들어왔으나 이는 칠점산을 허물고 앉아 있는 김해비행장의 
항공기들이 그쪽을 향해 이륙하는 현상만 잡힐 뿐 북극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 신어산을 서쪽으로 둔 칠점풍수 북쪽 시오리. 그곳에 버티고 있는 백두산!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서 발원된 백두정기가 백두대간을 타고 지리산에서 또다시 
낙남정맥을 일으키니 산천의 정기는 동쪽으로 치닫다 결국 한 점에서 마무리가 된다. 
바로 그 지점. 김해 대동면의 백두산이 칠점풍수의 북극성이다. 곧 백두산룡이 낙수의 
물꼬를 잡아주자 그 아랫녘 칠점수룡이 발복시킨 넉넉한 가야문화의 터전이다.
  불현듯 이곳 칠점풍수 출신[대저 1동] 음악가 금수현의 불후의 선율이 '제비'소식처럼 
시원한 강서구 들녘을 휩싸는 듯하다. 
  칠점풍수를 뿌리로 하는 강서풍수에는 옥색치마 펄럭이는 풍상산도 있고 그네 타는 
젊은 처자인 옥녀봉도 자리한다. 이제 그 댕기를 힘껏 당겨서 가장 높은 곳에서 
강서풍수를 관망하기로 하자.

      노적봉 밀면 성산마을 화자초: 강서구 형국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제비도 
놀란양 나래 쉬고 보더라"
  부산 강서구 대저1동에서 태어난 금수현 씨가 작곡한 [그네]의 노랫말이다.
  르네상스 삼대 거장 중 한 사람인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창작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에게서 작품의 영감이 떠올랐다면 그것은 내 고향 아레노조 지방의 풍토 
덕택이다."
  지중해 풍토의 영향권인 프로방스 지방을 다녀온 화가들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정신착란적 색체라고 몰아붙였던 고흐의 해바라기 역시 그곳의 강렬한 태양 아래선 
사실적인 묘사에 불과하다."
  그림설명: 강서풍수의 형국은 강서구의 마을 지명을 발복시켰다.
    천재지변 종소리로 예견해 명지
  강서구의 풍토에는 '미음'이라는 지명이 있다. 미음마을 주위에는 풍수지명들이 
펼쳐져 있는데 이것들이 마치 가곡 [그네]의 노랫말처럼 조율되어 있다는 것이 
이채롭다.
  그네 타는 젊은 처자에 견줄 옥녀봉 아래쪽에는 바람에 치마가 펄럭인다는 풍상산이 
있다. 금박 물린 댕기라는 치장에 어울리는 금병산도 있고 그 아래 분즐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는 가사는 풍수형국상 천마시풍형과 흡사하다. 
미음마을에서 오리 건너편에 바로 천마시풍형국이 있다.
  천마산 오른쪽에 입지한 중곡마을에는 예부터 풍물놀이를 금기시하는 풍속이 
전해져온다. 쇳소리가 나면 천마가 놀라 달아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반면 왼쪽에 
자리한 마을의 경우는 천마의 울음소리를 듣고 발복하겠다는 바람에서 마음마을이라 
부른다.
  강서풍수는 앞에서 밝혔듯이 칠점풍수를 그 뿌리로 하고 있다. 칠점아래에는 명지동이 
있는데 명지 역시 점괘같은 지명이다. 이곳에 큰 비나 가뭄 등 천재지변이 닥쳐올 때 
미리 섬 전체가 북소리나 종소리를 내어 가르쳐주었다해서 붙인 지명이 울 명에 가리킬 
지이다.
    명지동과 마주한 노적봉, 풍수명작
  다리 가운데 명지동과 마주하는 곳에는 노적봉이 있는데 노적봉은 바로 풍수명작이다. 
이곳 녹산동은 본래 녹산이었다. 굶주린 사슴 한 마리가 들판을 달린다는 
기록주야형에서 온 말이다. 또한 굶주린 사슴이 달릴 곳은 곡식을 쌓아놓은 
노적더미쪽이 분명하니 노적봉 앞에 기가 몰려 발복할 수밖에, 이에 걸맞게 녹산동에서 
가장 번창한 성산마을이 바로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 성산마을을 노적봉 근처에서 
풍수로 감상해보면 새로운 풍수소식이 잡혀온다.
  산 모양이 북쪽 낙동강을 향해 물을 마시고 있는 어미쥐를 닮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노서음수형이 되는데 흉당과 명당이 한눈에 판가름된다. 물을 마시는 쥐의 입 부근은 
기를 빨아들이기 때문에 김빠진 땅, 즉 흉당이 되고 만다. 그곳에는 보기에도 
을씨년스러운 폐가 두 채가 덩그렇게 남아 있다.
  어미쥐의 특성은 다산이라는 발복을 가지므로 기를 쏟아주는 엉덩이 부근이 명당이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 성산마을의 입지점이다. 그러나 물을 마신 어미쥐가 떠나면 발복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노적봉이 성산마을의 풍수명작이라 보는 것이다. 
쌓아놓은 곡식더미를 두고 떠나는 쥐는 세상천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산마을의 발복은 지속되는데 좌향으로 풀어도 역시 노적봉은 풍수 걸작임을 
알 수 있다. 성산마을 가옥들은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입지해 있으므로 대표적인 
좌향은 건좌손향이다. 풍수법칙상 성산마을의 살은 오, 병, 을 방향이 되는데 그 중 
병오 방향의 흉살을 노적봉이 막아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서 오늘날 생활풍수의 가치성과 자연과 사람의 조화인 역학[역학으로 
봐도 무방하며 역학으로 보아도 좋다]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노적봉 없애면 성산마을 발복 끝나
  만약 녹산을 개발한다고 노적봉을 오늘날 칠점산처럼 밀어버린다면 성산마을의 발복은 
끝난다. 역이 아닌 역에서 보아도 마찬가지다. 서낙동강을 타고 올라오는 해풍을 
노적봉이 막아주는 각도에 바로 성산마을이 자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발복지점에서 서쪽으로 산 하나만 넘으면 지사동이라는 곳이 있다. 기개 높은 
선비가 책을 읽는다는 풍수형국 고사독서형에서 유래되었다. 선비와 책상 사이에는 
등불을 밝힌다는 괘등형과 명동 마을도 있다.
  연구하는 학자가 주야로 진리를 밝힌다는 지명인데 그곳 2백만평에 달하는 지사동 
전체가 부산첨단과학산업단지로 착공단계에 들어갔다.
  결국 과학도 자연실서를 역학적 입장에서 추출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과학에는 
언제나 문제가 따라다니지만 자연에는 문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에게 
자연에 조화를 맞춘다는 의무감이 존재할 뿐이다.
  역학적인 부산첨단과학단지 개발에 풍수가 역학적 조언을 하자면 절대 풍상산을 
훼손시켜서는 안된다.
  지사동 입구에 있는 풍상산은 높은 선비가 읽고 있는 책인 옥책안(여기서 안은 안산, 
즉 책상을 뜻한다. 주옥 같은 책을 읽는 지사동의 경우 풍상산을 훼손시킬 때 외부와 
내부 공간이 뻥 뚫려 연구단지로서의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없음이 현장에서 
보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FF
     수룡 덕분에 오봉산 봉황 먹거리 풍성: 강서구의 지명

  고려 숙종 때 음양가 김위제의 주장은 국가 정책의 토대가 되었다. 개성은 저울대요, 
평양은 저울접시에 그리고 저울추는 서울에 해당한다는 풍수적 해석이 그것이었다. 즉 
1098년 고려 조정은 저울의 접시에 해당하는 곳에 서경(평양)을 잡고 추에 해당하는 
남경(서울)에 궁궐을 세웠으며 중경(개성)을 저울 손잡이로 삼아 접시와 추 사이 지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왕의 행렬이 수시로 거동했다(국역진호설: 풍수 범위 중 가장 넓은 
터가 되는 국가에 풍수로 난리를 진압하거나 난리가 나지 못하게 지키는 것. 우리나라는 
배 모양인데 동쪽이 무겁고 서쪽이 가벼워서 균형상 뒤집히는 난리가 날까봐 서쪽에 
해당되는 전남 화순군 운주사의 와불 2기를 무겁게 땅에 매어놓은 것은 진호책에 
해당한다).
  그로부터 9백년이 지난 오늘날 이런 주장을 반복한다면 잡신론쯤으로 몰리기 십상일 
테지만 심심파적으로 대입해본다. 이러한 풍수타령이 근래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남북환계에 어떤 묘수를 담고 있지나 않을까해서다.
  해방 후 남과 북은 평양과 서울을 저점으로 한 한국전쟁을 치렀는데 접시와 추에 
해당되는 두 곳의 휴전협상을 저울질했던 곳이 바로 저울대인 개성의 판문점이다.
  초반 평양의 무력남침의 무게를 못 견딘 서울은 저울막대 끝지점인 부산까지 
임시수도가 이동했다. 이렇게 추가 막대 끝으로 옮겨지자 이번엔 무게에 못 견딘 접시의 
내용물(김일성 정권)들이 튕겨져 저멀리 함경북도 산골까지 날아가버렸다.
  이러한 과거사를 비추어 현재의 남북관계를 달아볼 때 서울과 평양 어느 쪽이 
유리할까. 풍수적 역학관계로 따져보면 평양이 백만대군의 무게에 핵의 압력까지 합쳐져 
접시에 올려놓더라도 추의 조절에 따라 좌우될 운명이니 아무래도 접시 쪽이 불안할 것 
같다.
  또 풍수가 들려주는 미래의 남북관계를 보면 평양, 개성, 서울이란 저울대의 끝에 
해당하는 곳이 부산이다. 저울추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저울막대 끝점인 부산을 
견실히 할 때 대북관계는 더욱 유리해진다. 그러므로 오늘날 부산경제 활성화의 필요성은 
국가를 위해 너무나 타당하다고 본다.
    죽림^5, 25^봉림동은 봉소포란형 명당
  부산의 풍수, 그 중 강서의 지명들을 살펴보면 봉림동에 붙어 있는 오봉산에 대단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작 30여미터 남짓한 나지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대동여전도에 당당히 표시됐으며 옛 지명은 죽이다. 이곳은 낙남정맥의 힘이 강서 
수룡풍수의 힘줄이 되어 전달되는 용의 등줄기에 해당한다. 용등이라는 지명도 붙어 
있지만 이러한 용의 힘을 대나무 죽자를 써서 보여준 우리 선조들의 풍수소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오봉산 곁에는 죽림동도 있지만 정작 죽을 차지한 지명은 봉림동. 대나무잎은 봉황의 
먹거리를 가리키고 그 옆에는 마실 물인 고정의 지명도 있다. 이는 봉황의 밥상이 되는데 
여기에 봉림, 죽림이라는 푸짐한 명칭은 곧바로 진수성찬을 뜻하게 된다. 봉황의 
진수성찬 상다리 옆에는 밥이 가득 담긴 그릇이라는 식만이라는 지명도 있어 넉넉한 
여유를 보여준다.
  이러한 차림이라면 가히 봉황이라도 흥이 났을 것은 자명한데 아랫자리에 대흥이라는 
지명이 입맛 동하게 장단을 넣어주고 있다. 결국 봉황은 이런 대접에 한살림 차리고 
알까지 낳아버렸는데 바로 그 알이 죽이 발복한 오봉산.
  봉황은 다섯 개의 알을 낳는다는 풍수격언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면 봉림동의 봉황은 
어떤 형국을 하고 있을까.
  우리 마을과 집터풍수에 있어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형국지명은 용자이다. 산을 용이라 
하니 산이 많은 우리 지형상 용자가 지명 속에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 다음 소와 봉자 
지명이 많은데 봉자보다는 우자 지명이 약 세 배 더 많다.
  봉은 벼슬발복을 뜻하고 소는 재물발복을 한다 해서 우부봉귀라 하는데 이것은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양반보다는 지게를 짊어지고 태어난 농인의 수가 많았던 과거 
신분사회의 반영이라 하겠다.
  소의 경우는 서 있는 형국일 때에는 부림을 당해 힘이 빠진다 하여 흉당으로 판정되고 
엎드려 배를 채우고 있을 때에 명당으로 친다.
  반면 봉은 날아도 명당발복하고 땅에 깃들어 있어도 명당 판정을 받는다. 다섯 개의 
알(오봉산), 마실 물(고정), 먹거리 풍성(죽림동)으로 한살림 차린 봉림동 봉황은 땅에 
깃든 봉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봉이 둥지(봉림동)에서 알(오봉산)을 품고 (죽림과 봉림의 위 아래를 
감싸준다)있는 봉소포란형이된다. 지명으로도 밝혀지는 봉림풍수의 형국이다.
  이렇게 땅에 깃든 봉에 비해 나는 봉은 발복의 힘은 좋지만 안정감이 문제된다.
    동리산 비봉귀소형 발복
  도선에게 풍수를 전수해준 스승 혜철이 개창한 전남지방의 태안사(원래 대안사였음)의 
산세가 비봉세라서 안정을 취해주는 지명이 곳곳에 있다. 죽곡면 동계리 대안사라든가 
아예 봉황의 집이라는 동리 지명을 주산의 명칭에 붙인 곳도 있으니 바로 동리산 태안사. 
이곳의 형국이 바로 비봉귀소형이다.
 3 백5십년 전쯤에 이러한 봉황풍수의 균형점을 모르던 얼풍수 하나가 봉림에서 20리 
떨어진 주촌면 내삼리로 찾아들었다고 한다. 나무로 깎은 기러기 하나를 내놓고선 
기러기가 날면 왕이 된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 말에 솔깃해 그곳의 주산은 봉도 아니고 
암컷 황(황새봉 273m)인데도 불구하고 역모를 일으키려 한 사람이 있었다. 그후 그의 
몸은 갈가리 찢겨져 팔로에 뿌려졌다.
  김자겸, 인조의 외척이며 그 당시 봉황풍수를 물알로 황천 보내버린 곳으로 오늘날 
주천면 소재 학교앞 소류지다.
  이렇듯 인간발복에 있어 풍수의 균형점도 중요하지만 부산 전체에 힘을 작용하는 
풍수의 균형점 하나가 이곳 강서풍수에 있으니 다음은 그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굴암산 고사독서형 발복: 강서의 우백호

  낙남정맥(백두산에서 흘러온 정기가두류산(지리산)에 이르러 백두대간을 갈무리하는데 
불쑥 영신봉에서 산룡 하나가 고개를 쳐들고서 동해바다의 태양을 삼키려는 듯 동진하여 
김해 구지봉과 분산에 그 기운을 쏟아부으니 가락문화의 원동력이 된다.
  필자의 개인답사 결과 낙동정맥 발원의 물줄기는 풍수상 세석평전의 산장 바로 아래 
세석천으로 판명되었다.)과 낙동정맥을 인간사에 비추어보면 파는 다르지만 그 맥은 
낙동강 문중들이 모두 백두산을 태조로 하여 시작되었다고나 할까.
  이 땅의 물줄기와 산줄기. (동의보감)에서 허준은 사람의 살과 뼈는 땅(산줄기)에 
속하며 정액과 혈액은 물(물줄기)에 속한다고 하였다. 서양의학 역시 혈액이 뼛속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우리 풍수에서도 오래전부터 산줄기, 물줄기를 부창부수관계로 파악하였다.
  대동여전도는 바로 그러한 산줄기와 물줄기로 삼천리를 그려놓고 있는데 이러한 혈과 
맥들이 풀어주는 곳에는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아울러 풍수에서는 그곳을 명당이라 
부른다.
  사람에게는 족보가 있다. 산줄기 역시 살아 있는 것이므로 엄연한 항렬이 있다. 산경 
족보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 이르는 산줄기. 백두대간은 삼천리 강산의 
종가와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종가 항렬 83대손이 태백산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낙동의 물줄기 동편을 
본관으로 삼는 산줄기가 낙동정맥이다.
  이곳을 기일세로 낙동항렬 29대손에 백두종가의 뼈대 111대손이 바로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 명당발복의 세를 갖춘 북현무이다.
  백두종가는 지리산에 이르러 낙동강 남쪽을 본관으로 삼는 일파를 형성시키는데 바로 
낙남정맥이다.
  낙남파 18대손인 구지봉은 가락왕조를 발복시켜주었고 19대손 분산은 오늘날 김해시의 
명당터를 잡아주었다.
그림설명: 부산을 수호하는 사신사들은 그 주위에 송자 지명까지 발복시켜놓고 있다.
    부산풍수의 우백호는 불모산
  부산의 풍수에서는 북현무 금정산, 남주작 봉래산, 좌청룡 장산으로 삼을 때 부산을 
품어주는 팔 하나가 아직까지 밝혀져 있지 않다. 그것은 부산의 우백호이다. 우리 전통의 
산경 항렬로 셈하면 확연히 드러난다. 낙남항렬 17대손은 불모산이다. 이를 인간사로 
비유하면 불모는 세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장자가 김해의 구지봉이다. 막내는 태산으로 
천자봉과 장복산을 퍼뜨려 진해시를 발복시켰다. 둘째는 화산이고 화산의 외동이 
굴암산이 된다.
  낙남항렬의 당당한 19대손인 굴암산(662m)이 바로 부산의 우백호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굴암산에 관한 이렇다 할 기록은 눈에 띄지 않는다. 지명유래 역시 웅천 쪽에 
굴암이란 암자가 있어 그렇게 본다는 것이 김해지리지의 유일한 기록이다.
    문인의 품격 지닌 풍상산 지명
  하지만 굴암산을 풍수로 들여다보면 인품에 견줄 산격과 발복들이 밝혀진다. 굴암산 
왼손은 옥녀봉(360m)이 되는데 풍상산(252m)을 책으로 삼아 잡고 있다. 보개산(479m)을 
오른손으로 하여 등불을 비추며 책을 읽고 있는 형상이 되는데 오른손 아랫녘에 예부터 
등잔을 가리키는 괘등혈이 있다 하여 유명한 곳이다. 괘등혈과 책인 풍상산 사이에는 
밝다는 명동이 자리한다.
  책 읽는 선비의 목소리가 어찌나 낭랑했던지 책 넘어 동네가 바로 미음동이다. 
짜임새가 이러하니 예부터 이곳을 고사독서형이라 했던 것이다.
  이렇듯 부산의 우백호는 문인의 품격을 갖추고 있는데 반하여 좌청룡 격인 장산은 
예부터 장산국의 무인 기질이 널리 알려졌던 곳이다. 그래서 부산의 좌우는 문무를 
겸비함과 동시에 균형의 조화까지 6백고지를 맞추고 있다(굴암산662m, 장산 634m).
  이는 서울의 사신사(좌청룡 용마산 348m, 우백호 덕양산 129m)에 비해 안정적 품새로 
하극상의 불운을 피할 수가 있다. 또한 부산의 북현무인 금정산은 8백고지(802m)이다. 
이와 음양조화를 이룰 남주작 봉래산이 4백고지(395m).
  이러한 음양의 조화를 품어줄 좌청룡과 우백호가 6백고지에 자리하니 삼세정혈천지인의 
발복을 약속해준다.
  강서구의 편입에서 이뤄진 굴암산은 인혈과 문의 기질을 낳아 문민정부의 인물발탁과 
부산문화에 이바지할 인물발복을 예견하게한다. 땅은 살아 있고 살아 있는 것에는 생명을 
기를 체온과 정이 자리한다. 
  서울의 진산은 삼각산(북한산)이며 주산은 북악산이다.

     지금 부산은 진에서 분가한 것: 부산진구

  부산의 12개구 중에서도 부산진구는 군계일학 같은 이름이다. 부산 사람에게는 입에 밴 
발음이지만 다른 지방 사람에게는 생소하게 생각되는 지명. 이를테면 우리나라 어느 
곳에도 도시 고유 지명의 면전과 맞대는 식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는데 유독 부산에만 
그런 지명이 있는 것이다.
그림설명: 풍수의 지명과 터잡이로 볼 때 오늘날 부산진구는 부산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유서 깊은 지명 부산진구
  어찌 보면 물음 속에 답이 있는 듯한데 실상을 찾아보면 오히려 하극상이 아닌 
풍수발복적 지명이 바로 부산진구다.
  산이 유난히 많은 이곳을 옛날에는 다부산이라 하였다. 그렇게 풍성한 산들 중에서 
가마솥 모양(가마골)의 산에다 진을 칠성을 축성한 것이 바로 부산진성이다.
  이 부산진성이 자식을 낳으니 자성(오늘날 자성대)이고 그후 모성인 부산진의 지명이 
남쪽으로 분가하여 문패를 단 것이 오늘날의 부산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볼 때 부산 진구는 부산에 맞댄 하극상이 아니라 오히려 유서 깊은 
빼어난 지명이다. 부산진구에는 몇 대를 살아온 토박이들이 의외로 많다. 이러한 토박이 
기질은 이곳 지명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부산의 제 2번화가인 그곳을 
아직도 서면이라고 부른다.
  누가 어찌 보아주든 토박이 기질에는 터를 지키는 철옹성 같은 옹고집이 있다. 
부산진구의 진 자 역시 '지키다' 라는 진호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맥이 이곳 부산진구 한 마을로 흐르자 온동네가 떠들썩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직도 
2천년 전의 가야국 지명을 지키고 있는 가야동의 이야기다.
  지금부터 90여년 전인 1903년, 흉년이 극심한 때 떼거지들이 가야마을에 몰려와 행패가 
아주 심했다고 한다. 이에 노심초사하던 마을 사람들 앞에 나타난 걸인도사(아마 
풍수행각으로 몰골이 초라했던 것 같음)의 책략이 채택되었다.
  마을의 출입구인 동네 개천 앞에다 돌탑 두 개를 세우면 거지떼의 행패가 없어질 
것이라는 압승책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흉년 탓에 뱃가죽마저 등에 
붙어버렸는데도 마을을 지킨다는 일심에서 무거운 돌들을 날라 거창한 석탑 두 개를 
순식간에 세웠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거지떼의 출입이 없어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마을에 불이 
나고 흉년에 흉년이 겹치니 이제는 마을의 생사가 오락가락하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다시 모였다.
  이번에는 용하다는 지관의 의견이 채택되었는데 원래 이 마을은 배모양의 행주형으로 
탑을 세워 배를 꼼짝 못하게 하니 마을에 흉이 들었다는 번복 판정이 그 요지였다. 마을 
사람들은 몰려가 이번에는 석탑을 일시에 허물어버렸다.
  오늘날까지 이곳을 탑골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곳의 촌로 한 분이 필자에게 물었다. 그 
당시 어떤 풍수판정이 옳은 거냐고.
 90년전 가야마을의 확실한 지형을 알 수 없어 정확한 풍수판단은 불가능하지만 용하다던 
지관이 엉터리인 것만은 확실하다. 행주형은 매어두는 것이 옳다. 그의 말대로 배가 
떠난다면 마을은 곧 거덜이 난다. 이에 반해 걸인도사의 논리는 자못 경주 감은사지의 두 
탑(용의 어금니로서 흉을 입구에서 씹는 압승책)의 착상으로 심증이 간다.
    개금은 옥녀가 유혹하는 형
  이러한 풍수소동을 벌인 가야동은 가얏고라는 이름의 유래에 줄을 달고 튕겨보면 
소리는 옆동네에서 들린다. 바로 개금동.
  임진왜란 당시 우국지사가 이곳에서 아리따운 여인의 가야금 곡조의 유혹에 심금을 
털어놓고 정착하였다는 전래를 향토지는 밝히고 있다. 개금동은 젊은 여인(옥녀)가 
유혹한다는 풍수상 옥녀개화형에서 개, 그 유혹을 가야금 소리로 하였기에 옥녀탄금형의 
금 장단을 매듭지은 것이다. 이러한 풍수 장단에 어찌 풍류가 빠질 것인가. 인간사로 
따질 때에는 구별되지만 산세로 치면 이어지는 북구의 학장동. 탄금대 백결 선생과 
풍류를 즐겼다던 학도있고 시인 묵객의 글월도 있는 것이다.
  옥녀개화형의 경우 젊은 여자가 옥 같은 각선미로 교태를 부리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들을 부하로 삼을 때 그것은 장군발복이 된다. 다시 말해 유권자로 삼아 
정치적 기반을 다질 수 잇는 명당이다. 그런데 옥녀의 치마폭은 청결하여야 한다. 그곳의 
자연이 청결할 때 흐르는 물색이 좋고 절색이 발복되는데 이런 연유로 물맛 보고서 
명당터를 잡는 풍수사도 있다.
  부산진구 중에서도 가장 강기(풍수에서 모든 만물의 뿌리기운을 정기(민족)라 하며 
기운이 땅 속을 흘러다닐 때 생기라 하는데 강기란 강한 기운으로 좋은 방향으로 
발복하면 대명당이 되고 나쁜 쪽(살기, 살풍, 황살방)을 택하면 걷잡을 수 없는 흉당으로 
변한다. 이것은 서면 로터리 도시계획에 신중을 기하라는 풍수의 예시이기도 하다.)가 
몰린 곳은 바로 서면 로터리다. 그 어딘가에 그곳을 아주 기세 있게 발복시켜주는 형국이 
있다. 이러한 부산진구의 전체 형국소식을 살펴보자.

     백양산 맥세 백호출림형: 부산진의 형국

  부산 부산진구의 지명들을 풍수로 풀어보면 흥미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가야동과 개금동의 경우, 가얏고의 가야금을 개화한 옥녀가 치는 옥녀탄금형이다. 이와 
반대편의 지명들은 초읍^5, 25^연지^5, 25^양정에다 화지까지 초록 동색으로 피어 있다. 
그 중간에 끼인 범천동^5, 25^범전동^5, 25^전포동^5, 25^부전동^5, 25^부암동들은 마치 
끝말잇기를 해놓은 듯하다.
  누가 일삼아 붙인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이 점이 풍수 
지명발복의 신비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콩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아주 자연스런 이치이고, 
이때 풍수에서 따지는 형국이란 결국 콩밭이냐 팥밭이나를 식별하는 것이다. 이런 콩밭, 
팥밭들이 이곳 부산진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리산 부근의 지명들은 천마에 관련된 
마천, 마산, 질마재, 말치재 발복들이 지천에 깔려 있는데 반해 물길 하나 건넌 진주시에 
다가서면 말에 관한 지명은 없고 유독 봉바람을 일으킨다. 봉계, 황새, 상봉, 옥봉, 
관봉, 비봉, 대봉 등
  풍수상 지리산은 천마시풍형의 형국이고 진주 지역은 비봉포란형의 형국이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도 보이듯이 진주의 진산의 진산인 비봉산에 견쥐 포란, 즉 품어놓은 
알들이란 바로 아기자기한 진주 시가지의 집들을 말한다.
그림설명: 백양은 백호출림형을 가리키는데 이 국면 앞에는 백호의 밥상을 암시하는 
지명들이 발복되어 있다.
    부산진구의 진산은 백양산
  이러한 풍수현상으로 볼 때 부산진구의 형국은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초록동색의 형국이 우세하였다.
  줄잡아 8백년의 기세가 화지산의 정묘를 중심으로 동래 정씨 문중 앞에서는 감히 
말에서 내려야 했던 하마비 일양정 이초읍으로 그 기세를 손꼽던 옛 동래읍성 시절.
  그러나 오늘날 아랫녘에 자리한 형국이 더욱 발복세를 탄다. 풍수에서 물길은 가장 
강한 발복 작용인데 도로에 비견한다. 서면 로터리가 골격을 차츰 드러내다가 일시에 
사통팔달로 뚫렸는데, 바로 그곳이 오늘날 자타가 인정하는 미래 부산의 중심부까지 
발복개세로 치닫고 있다.
  이 서면로터리에 기세를 넣어주는 풍수의 위력은 어디에서 시작될까.
  부산진구의 노랫말은 "황령봉, 백양봉 힘찬 묏부리..."로 시작되지만 풍수적으로 보면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낙동정맥을 볼 때 백양산은 부산진구에 기를 넣어주는 입구이지만 
황령산은 기가 빠져나가는 출구 격이다. 이를 품는 새로 보아도 식별된다.
  백양산에 올라 황령산을 보면 부산진구에 등을 돌리고 앉아 그 반대편 대연동을 품안에 
당겨주는데, 황령산에 올라 백양산을 바라볼 때 마치 병풍을 펼친 듯 유정(유정이란 
쓰임은 우리나라 풍수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산악국가 특성상 올망졸망한 산들이 포근히 
품어주는 곳에서 생명들을 키워왔던 우리 풍토의 촌락입지들. 산이 등질 때 그곳은 
무정하다 하여 보따리를 쌌던 우리 선조들의 현명한 지리관. 물론 산세가 유정할 때에는 
보따리를 그곳에 풀고 정을 붙이고 살았다.)하게 부산진구를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백양산(642m)은 의심할 바 없는 부산진구의 진산이다. 이러한 우열은 역사에서도 판가름 
난다.
  황령을 등지고 일어난 세력은 거칠산국이며 백양산을 엎고 발복한 지명이 대증현. 
거칠산국은 고작 몇십 년을 못 채우고 사라졌으나 대증현은 동평 터의 뿌리가 되어 이곳 
부산진구와 약 1천4백년의 인연을 갖게 된다.
  이 백양산 맥세 한 줄기가 정확히 어느 지점을 향해 기어오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을 풍수감상으로 한목 잡아내면 머리와 배 그리고 꼬리를 갖춘 영락없는 호랑이다. 
여기에서 아직까지 학계에서조차 그 유래가 설왕설래하는 백양산의 지명소식이 와닿는다. 
백양에서 백은 백호를, 버드나무 양자는 숲을 가리키니 백호출림형이 부산진구의 
풍수형국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전포동은 범의 밭에 물 말아놓은 격
  이 백호가 기세를 쏟아주는 바로 일직선상에 부산진 구청이 정확히 자리잡고 있고, 
서면 로터리의 경우는 백호의 기세가 뭉친 대단한 발복지점이 된다. 서면 로터리는 
호랑이의 밥상 중에서도 가장 중심점이 되는데 밥상의 차림새를 보면 말잇기식의 
지명들의 의문이 모조리 풀린다.
  호랑이를 우리말로는 '범' 이라고 하고 한자로는 호라 쓴다. 여기서 글자로는 누구나 
읽기 쉬운 무릇 범자를 써서 발음은 '범' 하고, 그 뜻은 '호랑이' 를 연상했던 것이 우리 
민초 특유의 전달방식이다. 이런 까닭에서 범천동에는 호천의 물줄기가 나란히 흐른다. 
범천은 호랑이 물그릇 차림새요, 범천이란 호랑이 밥을 뜻한다.
  또 백호출림형의 현장은 바로 부암동으로 부전이 밥을 뜻하는데 전포의 포는 천과 
마찬가지로 호랑이 밭에 물말아놓은 격이다. 부암이란 의미가 풍수의 마음으로 감상하면 
백호를 가리킨다.
  부는 금이라서 서쪽 방위와 백색을 뜻하기도 하지만 풍수에서는 흔히 좌청룡 우백호라 
한다. 우리나라 산색은 청과 백이 뚜렷할수록 명산으로 친다(금정산을 상상해볼 것). 
청색은 소나무의 푸른빛과 청룡의 기세에 견줄 때 백색은 화강암 특유의 바위색깔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웅크린 자태의 바위 형상과 업드린 백호의 길격까지 통하는 
부암과 백호의 산색이 되는데 윗녘에 걸린 초록풍수 점색에는 또 무엇이 걸려 있을까.

     진성 축성으로 지역진호: 진구와 부산

    부산진구는 부산의 허리에 해당
  부산진구는 지리적으로 부산의 중간에 놓여 있다. 부산을 한 그루의 꽃나무로 비유하면 
뿌리에는 부산의 묘체였던 동래구가 해당되고 꽃은 남쪽에 매달려 발복한 
중구(부산시청)와 서구(군왕발복)가 된다. 이러한 자리매김에서 줄기에 해당되는 게 바로 
부산진구다.
  식물에 있어 줄기는 동물의 허리뼈와 같다. 허리가 꺾이거나 허리 샅바를 잘못 잡으면 
제아무리 천하장사라도 힘 한 번 못 쓰고 당해버린다. 이허리 부분에 부산을 진호하는 
성을 축성했는데, 그것이 부산진성, 임진왜란 때 첫 전투가 벌어진 부산진성에서 충장공 
정발 장군을 구심점으로 한 군민들과 생명 있는 모든 것이 순국으로 맞섰다.
  그 당시 격전을 치른 왜장들까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부산진성 첫 전투에서 크게 좌절하였다. 조선 출병 전엔 저항이 이렇게 심할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흑의장군(정발 장군의 갑옷색깔)이 가장 두렵고 
무서웠다."
  그런데 허리가 꺾이고 뿌리(동래읍성)마저 파헤쳐지자 경부역전 마라톤대회를 치르는 
듯한 파죽지세로 침공은 별다른 저항없이 이루어져 한양입성까지 불과 16일 걸렸을 
뿐이다.
    고당봉의 용머리
  부산진과 더불어 부산을 진호하는 산은 금정산이다. 그래서 우리는 금정산을 부산의 
진산이라 부른다.
  진성과 진산. 진성을 유래로 삼은 지명인 부산진구는 앞에서 밝혔듯이 풍수상 
백호출림형이다. 백호는 백수의 왕으로 그 기세를 당할 수 없다. 있다면 상상의 영물인 
용을 유일하게 들 수 있는데 풍수에서는 산을 용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진을 보자. 지난해 단오에 필자가 발견하여 찍은 사진으로 주둥이, 코, 입, 눈까지 
뚜렷이 박힌 영판 용머리 바위.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에서도 가장 높은 고당봉 바위더미 
아랫녘에서 머리를 들이민 용두다. 금정산을 수십년 드나들어 금정산 백과사전이라고 
자처하던 사람마저도 펄쩍 뛰며 그런 용머리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 금정산 정상에는 
숨이 목까지 차오르는 산행길 오른쪽 지점에 용머리가 있는데 고당보에서 내려오다 
인간사에 바빠서 휑 하니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줄지어 몰려가는 우리들이기에 여태껏 
하산길 왼쪽 바로 옆에 두고도 몰랐던 것이다. 이 또한 인간사에 대한 금정산의 묵시로 
받아들여지더라도 부산의 진산에 용이 있고 부산의 진성이 호랑이라는 풍수 소식이 
아닐까.
  인간사에서는 흔히 용호상박이라 이르지만 천기에서 이는 뇌풍상박(우주의 체(모양)를 
선천팔쾌로 나타내는데 그 중 천지정위^5, 23^수화불상충^5, 23^민택통기^5, 
23^뇌풍상박의 네 가지는 가장 길상이 된다. 주로 생활의 터를 보는 양택의 가상판단에 
사용되며 이는 네 가지 전부 연년택이라는 최상의 길한 집에 속함.)이 되어 최고의 
명당인 4대 길상중에 하나가 된다. 이제 부산진구의 백호를 살펴보기로 하자.
    양정동은 백호가 쉴 집
  백호가 나온 숲은 백양산이 되는데 이는 버드나무 양 자니 양정동은 백호가 쉴 집이다. 
동래부지 기록(1740년)에는 이곳을 염소 양 자로 기록, 양정리라 했다. 이때 양정리라는 
염소역시 백호의 먹이가 되니 오히려 풍수상 더 좋은 지명이 된다.
  부암동에 자리한 백호의 오른쪽 허리녘에 있는 당감동은 맛있는 통이 되니 백호가 
허리춤에 찬 도시락이 되고 연지동과 초읍동의 지명들은 백호의 운동장 격이다. 이 
초읍에는 신라시대 성지라는 풍수승이 이곳 골짜기에서 명혈을 찾았다 하여 유래된 
성지곡도 있다. 얼마전 연지동 산등성이에 지은 절집자리가 대단한 명당이라고 소문이 
났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헛맥을 짚었을 뿐 아니라 백호의 왼쪽 목을 짓밟아놓은 
격이었다.
    양기풍수에서 자연은 환경의 신
  양기풍수에서 보는 자연이란 인간의 옷과도 같은 것이다. 도시에 습도와 온도를 
조절해주는 환경의 신,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자연에 대하여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다. 
자연이 자연스럽게 베푸는 덕목 앞에 단지 의무만이 있을 뿐. 이를 저버릴 경우 인륜의 
불효보다 더 큰 천륜의 패륜아가 된다.
  앞에서 귀중한 문화유적(부산시 지정문화재3호와 14호)인 북구 만덕사가 무덤풍수로 
황폐화(일제 식민풍수)되었음을 현장답사로 밝힌 바있다. 그 주장에 관한 점잖은(?)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였고 혹 잘못 검증되었나 싶어 수차례 
만덕사 현장을 다시 확인해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상시밖의 일이 터졌다. 만덕사 풍수의 
우백호 격인 용을산 목이 잘려지면서 시멘트 포장도로가 흉물스럽게 생겨났다. 이렇게 
이런 행위가 가능할까. 더구나 문화재 지정구역인데도 말이다. 모든 길이 그곳으로 
통했던 로마가 멸망한 것은 황금의 욕심이 길에 뿌려졌던 까닭이고,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몽골제국은 문화의 뿌리기 없어 넘어졌다고 역사는 결론짓는다.
  남구풍수를 들여다보면서 뿌리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금련산 진산 앞의 연화부수형: 남구의 형세

  이 땅의 50년대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생명을 부지해야 했다. 60년대의 하늘 아래는 
보릿고개가 있었다. 70년대는 어떠했는가. 인간의 욕심이 목적과 뿌리를 잃고 부의 
축적에만 혈안되었다. 적어도 80년대에 우리는 부를 잘 활용하고 우리의 뿌리를 견실히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지 않았는지. 그건 그렇고 이건 무슨 조화인가.
  90년대에 이르자 이상한 '세대현상' 들이 터져나왔다. 본고장 미국에서조차도 근원이 
확실치 않아 비판받는 'X세대' 라는 정체불명의 단어가 이 땅의 과소비 장삿술에 
과장되어 남발되는 풍조가 그것이다. 부모 죽으면 빈 껍데기가 될 오렌지족들은 이제 
중국땅 북경까지 진출해 대한민국을 먹칠하고 다닌다는 목격담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식농사가 가장 큰 농사라는 격언처럼 이 땅의 뿌리를 찾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농사의 토양이 아닐까. 부산에 있어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는 남구의 뿌리를 풍수로 
접근해보자.
  50년대의 남구는 전쟁중에 유엔군 주둔지였던 곳이다. 그래서 남구의 대 연동에 유엔군 
묘지가 현존하고 있다. 60년대의 남구는 보릿고개를 넘기려는 수영로 개통으로 엄청난 
땅부자들을 산출했다. 70년대에 들어서자 대단지 아파트가 건립되고 남구는 복부인의 
대명사로 불렸다.
    남구의 중심지는 사룡
  이곳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속 빈 강정 같은 경제적 실상을 해부한다. 80년대 
속 빈 강정과 70년대 복부인 그리고 60년대 졸부들의 행진이 계속되었던 남구의 중심지는 
남구향토지에도 버젓이 올라 있는 민둥산이다. 이것은 풍수상 죽어버린 땅의 힘, 사룡을 
뜻한다.
  서울풍수의 경우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와 오렌지족과 과소비의 문제를 명당수인 
정계천의 혼탁함이 찌르듯 공격하고 있어 부패되어 간다고 풀이하고 있다. 부산 남구의 
경우는 사룡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남구청까지 그곳에 자리하기에 문제는 더욱 가중된다. 90년대에 이르러선 폭주족들이 
등장했다. 생산성 있는 땀은 흘리지 않고 에어컨 틀어 놓은 지하실에서 양주에 취해 있는 
아들^5, 23^딸들이 너무 많다.
  본래 남구의 진정한 뿌리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왜적의 침략을 막으려고 세웠던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에서 오늘날 수영동이 생겼고, 아직도 수영동 229번지에는 
왜색첩자를 막으려 눈을 부릅뜬 박견도 있다. 민락동에는 보리쌀 몇 됫박이라도 팔아 
식솔들을 먹여살리려 매를 맞았던 선조들의 설움이 서린 보리전이라는 지명도 있다.
    남구의 흉사를 막을 수 있는 처방-연화부수형
  여기서 남구의 흉사를 막을 수 있는 풍수상을 분석해보자. 남구의 진산은 금련산이다. 
이를 단순히 형세로 볼 때 세는 148번지 일대를 통해 남구청으로 오는데 그곳이 향토지가 
지적하고 있는 민둥산, 즉 사룡으로 흉지가 된다. 또한 남구청의 앉음새인 형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있다. 이때 세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치고 올라오고 있어서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풍수적 처방은 무엇일까. 영도 봉래산 중턱에서 남구를 감상해보면 다음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금련산과 황령산을 위시하여 그 앞에 낮은 산들이 마치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형상이다. 풍수상 연와부수형이다.
  이러한 형과 세는 각각 독립되어 남구청은 흉당이 아닌 연꽃의 꽃심을 차지한 명당이 
되고 남구의 오염은 오히려 연꽃처럼 정화되어 피어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령산유원지' 라는 몰지각한 지명을 없애야 한다.
  그곳은 금련산이며 연화부수형에 명당의 발복을 도와주는 곳이기에 구화 역시 연꽃으로 
지정하면 더욱 좋다.
  그러나 어떤 풍수적 처방보다 민족의 뿌리였던 백범 김구 선생께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구절이 금과옥조로 와 닿는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신선대는 선인이 등공하는 형세: 남구와 부산

  여름, 폭염 속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남구에 있는 선선대를 찾아간 것은 남구 
향토지의 기록 때문이었다.
  "...신라시대 유명한 지사 최선확의 무덤이 신선대 동쪽 서말도 절벽위에 있는데 
최선확의 유언에 의하면 시체를 절벽 위에서 이곳 신선대 만장절벽 밑에 있는 아담한 
포구인 서말도에 던져 수장을 해달라고 했다는데 자식들은 차마 선친의 시체를 물에 못 
던지고 서말도 위 절벽끝에 멀리 대마도를 향하여 묻었다고 한다.
    최선확의 유언
  그날 역시 바람 한 점 없었지만 병봉대에 오르니 신선의 장난인 양 영도에 붙어 있는 
아치섬은 의외로 크게 보였다.
  관리인에게 서말도 최선확 무덤과 그밖의 무덤들을 물어보았다. 금시초문이라며 
초장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하기야 무덤이라면 입구에 있는 천주교 공동묘지에서부터 
신선대 내에도 수십기가 눈에 띄는데 천여년 전 무덤을 식별한다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이럴 때 방법은 한 가지. 더위 속에서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등산화 끈을 단단히 
매며 신선대에 절벽은 몇 군데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절벽은 단 한 군데밖에 없다고 했다. 
곧장 그곳으로 다가갔다.
  절벽이 너무 위험하니 누구를 막론하고 접근하면 안된다는 으름장 같은 표지판이 
너무나 고마ㅇ다. 그곳은 신선대 동편에 위치하고 있고 더구나 저 아랫녘에 아담한 포구 
같은 모래무덤이 있어 서말도라 할 수 있으니 최선확의 기록과 일치하는 게 아닌가. 
풍수의 대가 최선확은 왜 자신의 시신을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라는 유언을 남겼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그 당시 최선확과 같은 풍수적 눈높이에 맞춰보는 수밖에 
없다. 최선확은 이곳을 혈자리로 보았음에 틀림없다. 이 혈을 감싸는 주위의 산세를 보니 
신선대 중간에 위치한 약수터 뒷봉이 봉황의 머리에 해당되는 게 준에 보였다. 왼쪽 
날개는 동편의 산줄기며 오른쪽 날개는 맞은편에서 동쪽을 향해 뻗어 있었다. 오른쪽 
날갯죽지 부분에 바로 병봉대가 자리한다.
  여기서 대를 신선이 마땅히 차지할 자리로 떼어주고 나면 남는 건 병봉, 즉 봉황의 
날개를 뜻하게 된다. 여기에 이르자 최선확의 풍수 소식이 한눈에 잡혀왔다. 신선대라는 
신선이 병봉대라는 봉황의 날 갯죽지를 의지하여 하늘로 올라간다는 선인등공형이 바로 
이곳의 형인 것이다. 따라서 이곳 벼랑 아래로 최선확이 자신의 시신을 던지게 하면 
봉황의 날개짓에 의하여 자신이 신선처럼 승천할 수 있다고 읽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인간사로 헤아려 그 위에다 묻고 말았으니 등룡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된 격이라 
안타깝다. 그 주변에 누군가가 별장 같은 양옥을 지어놓았는데 그 역시 흉가다.
    U자형 이룬 용호동은 말의 발자취
  향토지에는 신선의 자취를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신선대에는 신선의 발자국과 백마의 발자취가 있다고 전해져온다."
  그런데 용호동의 지형을 보고 있노라면 U자형, 즉 말발굽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말의 발자취라고 할 수 있으며, 발굽의 동쪽은 신룡산, 서쪽은 비룡산, 남쪽은 
백운포가 된다.
  신선을 신룡에 견줄 때 비룡은 용마다. 이것을 백운에 짝지우면 백마가 된다. 이를 
뒷받침하듯 신선대가 있는 산이 바로 용마산이다. 이때 말발굽이 땅에 찍히니 그곳의 
힘에 의하여 터는 세다고 한다. 터만 세다고 모두 명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뒷받침할 형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동명불원 설립자의 음택은 무덤 쓸 자리가 아닌 곳으로 보여진다. 신선과 대작할 
풍류가객이 아닌 사람이 제아무리 천만금이 있다 한들 신선세계에서는 터럭만큼도 힘을 
못쓸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곳 말발굽과 대칭을 이루는 곳에 어떤 한량이 기녀 둘과 놀다 
그 둘을 붙여놓았다는 이 기대가 오히려 어울리는 격국이다. 이렇듯 신선대의 경관이 
빼어나므로 오륙도까지 가깝게 보이는 것이다.

      제2부 영남의 산하
     
     김해시는 낙동강 수구 발복: 영남의 산하
    낙수는 가야 문명의 탯줄
  영남을 가로지르며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옛적에는 낙수라했다. 가락국의 물이라는 
낙수는 가야 문명의 탯줄이라는 뜻을 담고 있고, 오늘날 영남의 향리에 있어서도 역시 
낙동강은 젖줄의 대물림이 된다.
  일찍이 청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살기 좋은 향리의 조건들을 상세히 밝힌 바 있다. 
첫째 조건을 풍수로 잡았는데 그 중에서도 수구, 즉 물줄기의 흐름을 으뜸으로 쳤다. 
이러한 수구의 자리매김과 직접 관련된 향리를 살펴서 몇 대까지 번영을 누릴 수 
있는지까지 (택리지)는 밝히고 있다.
    낙동강 하구언, 부산시 발복
  각종 문헌들과 고지도들을 들춰보면 옛 낙동강의 수구는 지금보다 훨씬 윗쪽임을 알 수 
있다. 즉 김해시가 옛날 낙동강 수구가 발복한 향리인 것이다. 가락문화의 융성지이며 
김해 김씨들의 번영지가 바로 (택리지)풍수의 발복 지점임을 알 수 있다.
  (택리지)가 저술된 해는 1751년이다. 그로부터 어림잡아 2백50년이 지난 오늘날 
하구언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 곳이 바로 낙동강의 수구다.
  결국 수구의 이동은 김해시 아랫녘에 있는 부산이라는 대도시를 일시에 발복시켰다는 
검증에서 볼 때에도 (택리지)는 오늘날에도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이렇듯 낙동강은 과거와 현재에 있어 주위향리들을 발복시켜주는 탯줄과 젖줄이기도 
하지만, 일찍이 영남의 지명들을 태동시켰던 산실이 되기도 했다.
  낙수 동편에 있는 정품의 산맥을 낙동정맥이라 불렀고 낙수 남녘을 감싸는 산줄기를 
낙남정맥이라 하였다. 낙남과 낙동정맥에 둘러싸인 터가 바로 영남지방이 되는데 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물줄기가 낙동강이다.
  이러한 산줄기의 구조로 영남의 물줄기가 모두 낙동강으로 모이듯, 그곳에 자리한 낙동 
향리의 인간사 역시 낙동강과 함께 흘렀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진주 기생이 한양에 있는 기둥서방을 만나러 가건, 동래 선비가 알성문과로 임금을 
알현하러 가건, 어쨌든 움직였다 하면 낙수라는 물줄기를 거슬러오를 수 밖에 없었도 그 
길은 치마와 저고리처럼 정확히 조령에서 만난다.
  임금의 자리에서 영남을 볼 때 낙수 왼쪽에 해당되는 지역을 경상좌도라 했고 오른쪽은 
경상우도라 했다. 
  좌도에서는 부추(정구지)로 감칠맛 나는 김치를 담가먹었던 반면 우도에서는 이를 
쇠풀이라 불렀으며 주로 국을 끓이는 데 사용하였으니 입맛마저 달랐다.
  물맛은 입맛을 변하게 하고 짠맛과 단맛은 혈중염도에 영향을 주어 생리적 변화를 
일으킨다. 또한 신맛과 쓴맛은 정서적 영향을 끼친다. 집단의 생리와 정서는 풍속 또는 
풍습의 원초적 형성요인이라 할 수 있으니 낙동강의 물맛을 모르고서 어찌 영남의 향리를 
논할 수 있겠는가.
  영남과 호남의 색다른 풍속도 백두대간의 가름에서 비롯된다. 풍수사상에서는 이러한 
원리를 오래전부터 갈파했다.
  산은 물을 가름하지만 물줄기는 산줄기라는 울타리를 넘을 수 없다는 산자분수령이 
바로 그것이다. 즉 영남의 낙동강 물은 한 방울도 호남지방으로 흐르지 않는다. 때문에 
풍수에서 명당을 잡을 때 산자분수령은 그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산자분수령 무시한 가장-양산 합병은 잘못
  근래까지 동래군이었던 기장 주변의 향리를 양산군에 합병시켜 오늘날 심각한 
동서갈등으로 문제가 생겼는데, 이것은 바로 산자분수령을 무시한 서구의 그린벨트 
행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부 양산을 흐르는 상산천의 물맛과 동부 향리들의 
젖줄인 좌광천 물맛의 차이만큼 풍속의 맛과 멋의 흐름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영남학파의 거두 점필재 김종직과 호국불교의 선봉 사명대사의 향리인 밀양. 이러한 
거목들의 정사를 제쳐두고 야사로 전해오는 일개 여자에 불과한 아랑을 기려 밀양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아랑제를 거창하게 치른다.
  그 이유를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뚜렷한 답변은 없다. 지역정서란 이런 것이다. 이를 
음양조화상 밀양과 음인 수의 발복설로 볼 수도 있고, 천황산의 산세를 큰 시야로 살필 
때 근본 원인이 풍수에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영남의 향리를 예부터 풍수로서 논하길 조선팔도 인재 절반은 영남에 있고, 그 절반은 
영남북부의 선산지방에서 배출된다고 했다. 이 같은 인걸지령이 들먹여져왔으나 필자는 
오히려 영남남부인 이곳 경남풍수에 더 큰 흥미가 생긴다. 민족의 영산인 지라산이 있고 
풍수 3대 명당 중 만수동과 청학동이 이곳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대도시 부산과 당대 제일의 재벌 그리고 2명의 대통령까지 발복시킨 낙동 
향리의 풍수를 옛적 이곳 경남에서 신선이 된 고운 선생의 옛마당까지 들어가 찾아볼 
작정이다. 이제 낙동강을 따라 고을 고을을 기웃거리면서 풍수와 인걸과 풍습의 특징을 
잡아보자.

     옥녀가 거문고 타는형: 양산의 형국

    성황산은 옥녀탄금형
  경남 양산의 진산은 성황산이다. 백두정기가 태백산에서 낙동정맥을 타고 남으로 
치닫다 취서산에 이르러 몸을 한번 틀더니 정맥의 뼈대를 천성산으로 잡았다. 이러한 
천성산의 맥세에 걸린 것이 성황산의 족보이기도 하다.
  낙동정맥 남쪽에 여유분의 기운이 몰린 자리의 지명들을 일렬로 세워보면 양산군 동면 
여락리, 남락부락이다. 풍수 발복들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그러면 양산 향리의 진산인 성황산은 어떤 풍수발복을 하였을까, 이는 성황산의 형을 
정확히 알아야 가능하다.
  흔히들 성황산을 소가 엎드려 있는 형상인 와우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답사 결과 
와우형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한나절을 살폈지만 명당은커녕 흉당에 가까웠다. 더더욱 
그곳 지명에는 호자가 붙어 있으니 소의 뱃가죽에 호랑이가 붙어 있다면 흉당 중의 
흉당을 의미한다.
  다시 산을 타고서 관산지점을 멀리서 잡아보았다. 그러자 옥녀탄금형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옥녀가 거문고를 탄다는 옥녀탄금형에는 예부터 다음과 같은 풍수발복설이 
전해지고 있다. 과거급제와 인재의 배출 그리고 부자의 발복이 그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발복설로 양산풍수를 잡아보자.
    백결 선생 양산 출신
  양산 군지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곳의 옛날 지명은 양주였다. 고려 말에 
이전생이란 사람이 이곳 향리에서 명당을 발견하고 입향했다. 그후 세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출중한 장수로 종1품의 품계에 이르자 그곳 지명이 삼수리가 
된다. 이전생은 양산부원군에 책봉되고 태종13년인 1413년에 오늘날 양산으로 명칭이 
굳어진다.
  이러한 역사의 기록에서 볼 때 옥녀탄금형의 과거급제 발복이 양산의 지명을 낳았음을 
알 수 있다. 옥녀의 인재배출 소리에 귀기울여보면 더욱 낭랑한 음률이 들린다. 옥황상제 
앞에서 타는 옥녀의 거문고 소리를 천문에 견줄 때 지리에서 당당히 맞설 사람이 있다면 
백결선생쯤 된다. 신라시대 백결선생이 바로 양산 출신이다.
  옥녀의 거문고에 해당하는 자리는 북정리다. 근대에 들어서 그곳에서는 또 하나의 
이재발복이 음률을 타고 터져나왔다. 이 땅의 향리를 대표하는 노래라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을 들 수 있다. 이를 작사한 이원수 
선생의 출생지가 거문고 자리인 바로 북정리다. (고향의 봄)을 겨우 15세 때 작사했다니 
이 어찌 옥녀의 인걸지령이 아니고서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옥녀의 인재배출은 오늘날까지 대물림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성악가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는 테너 엄정행 교수도 고향이 바로 양산이다.
  부자발복을 밝히려 성황산에 올라 앞산을 보니 학 한 마리가 춤을 추는 듯한 산세가 
잡혀왔다. 백결 선생의 (방아타령)을 듣고 학이 춤을 췄다는 장면을 산들이 재연하는 
것만 같았다. 궁핍으로 옷조각을 백결로 걸쳤고, 가난을 위로하려 (방아타령)이 나왔다는 
점에서 보듯 이곳 향리는 예부터 지독히 못살았던 곳이다.
  향리풍수의 원전인 (택리지)를 들춰보면 가난의 흐름을 밝혀놓고 있다. 인물발복은 
산에 있지만 재물발복은 물에서 연유된다고 한다. 재물을 살필 때는 강 하류를 
중요시하는데 풍수에서는 이를 수구라 이른다. 수구가 복스럽게 생겼으면 그곳 향리 
사람들은 배불리 먹지만 엉성할 경우 입에 풀칠도 못한다.
    양산을 와우형으로 바꿔놓은 권만 군수
  양산 향리의 젖줄인 양산천 수구는 엉성하게 펼쳐저 있다. 이런 풍토에서 가난을 
물리치려고 불철주야 노력했던 인물은 조선 영조 23년 1747년에 부임한 권만 군수였다. 
가난을 더욱 가중시키는 봉산 4개를 상소를 올려 없애버렸던 권만의 치적은 오늘날까지 
높이 칭송받고 있다.
  이중환과 동시대 사람이기도 한 권만은 풍수 신봉자였다. 그런 까닭에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양산 향리 풍수를 모조리 배불리 먹는 와우형으로 고쳐놓았다.
  양산천의 발원지인 통도사 얼안을 중심으로 지명들을 보면 신평^5, 23^순지^5, 
23^초산^5, 23^지산^5, 23^목자동 등 소가 배불리 먹도록 만든 이름들이다.
  그로부터 2백40여년이 지난 오늘날 이러한 발복을 검증할 때 새로운 감회가 교차된다. 
이중환의 풍수가 적어도 양산의 옥녀에게는 희롱당한격이 되었고, 권만 군수의 와우발복 
풍수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 꼴이 되었다.
  이 무슨 소리인가. 양산 향리의 부자발복 역시 물이 아닌 산에서 솟아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황산의 옥녀탄금형 자리에는 경부고속도로가 나 있다. 이는 거문고의 질긴 줄에 
비유된다. 성황산이 거문고 줄(경부고속도로)로 구색을 갖추자 밀양 군수 곁에는 앉지도 
못한다던 양산 군수와 양산 향리는 불길 같은 기세로 도약, 재정 자립 80퍼센트라는 전국 
2위의 부자발복 주인공이 된다. 이 또한 옥녀의 발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산의 옥녀와 기장 향리 옥녀가 오늘날에도 서로 풍수상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왜 그런지 기장의 옥녀를 직접 만나서 들어보기로 하자.

     옥녀가 비단 짜는 형국: 기장의 형국

    옥녀가 쓴 베틀, 기장
  예부터 조선팔도에 뼈대있는 인물들이 태어날 때는 기장 미역을 붙잡고 탯줄을 끊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산후조리에 전국적으로 소문난 별미음식은 여전히 기장 
미역이다. 이러한 기장이 정작 풍수에서 유래되었다는 소문은 이곳 사람들만 알고 있다. 
기장의 민요인(차성가)는 풍수의 생김새마저 분명히 밝혀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옥황상제의 딸이라는 옥녀가 비단을 짜고 있는 모양새다.
  "읍기를 그어보니 옥녀직금 분명하다..."
  옥녀가 비단을 짜려면 베틀이 차려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장이라 불렀던 것이다. 
(차성가)는 옥녀의 차림새 또한 보여준다.
  "...수령산이 주봉이요 연화봉이 안산이라. 좌청룡은 모산이요 우백호는 성산이라..."
  그런데 문제는 (차성가) 또한 어디가 옥녀에 해당되는지를 지적하지 않고 있다.
  그림설명: 옥녀가 비단을 짜려고 베틀을 차린 모양새 때문에 기장이라 명명되었다.
    셋드산이 옥녀(혈)에 해당
  평소에 체계적인 향토학에 관심이 컸다는 이 고장 언론인 공태도 씨를 만나러 
기장향토문화연구소를 찾아갔다. 여러 가지 논증과 의견들을 종합할 때 풍수용어로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셋드산'이라 부르는 곳이 옥녀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 증언과 필자의 현장경험을 종합해볼 때 '사오갓'은 '삿갓'. '셋드'는 '새터'를 
연상시킨다. '삿갓'은 '솟아오른다'는 모양새의 표현으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꽃봉오리산으로 부른다.
  '새터'는 주위에서 품어주는 산세가 있을 경우 자주 눈에 띄는 지명이다. 대표적인 
일례가 청학이 품어주는 산세라 일컫는 지리산 청학동에 새터가 있고 그 너머인 
중산리에도 새터가 있다.
  사오갓, 셋드, 삿갓, 새터, 꽃봉오리 모두가 풍수상 혈(땅기운의 중심점)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따라서 기장의 셋드산(136m)이 옥녀(혈)임을 알 수 있는데 (차성가)에 나오는 연화봉 
모산, 성산을 셋드산과 이어보면 흡사 가오리연을 닮은 모양이다(오늘날 독립기념관도 
가오리형으로 설계되었다).
  기장 가오리연의 중심을 잡아보면 정확히 옛 동래군청(현 기장국교)자리와 일치된다. 
옥녀형국상 국면의 중심적인 동래군청은 문을 닫고 지난 1973년 옛 동래군은 문패마저 
양산군에 넘겨졌다.
  중심점을 잃은 가오리연은 높이 오를수록 치명상을 당한다. 더욱이 옥녀형국의 발복 
특성은 인물발복에 영향을 주는데 얼마전 대권후보까지 치솟던 박태준 씨나 청문회 
스타가 된 김동주 씨는 항리 출신이다. 모두 높은 곳에 이르러 정치바람을 맞자 줄 
끊어진 가오리연처럼 되어버렸다.
    기장과 양산의 차이
  매년 10월 5, 6일이면 양산 향리에서 열리는 삽량문화제에 기장 향리 사람들을 초대, 
함께 어울리게 하려고 하지만 물과 기름처럼 서로 동화되지 못하는 게 오늘의 실정이다. 
양산군과 향토색이 전혀 다른 기장 향리에는 다음과 같은 풍습이 오래 전부터 내려온다.
  "기장 처녀가 동래 북문 쪽으로 시집가면 소박맞거나 과부가 되고, 기장 동문 쪽으로 
시집가면 잘산다."
  뿌리없는 개화사상에 물든 자들은 이런 풍습은 미신이며 단지 실향을 우려해 퍼트린 
정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풍수로 볼 때 이런 풍습에서 오늘날 기장과 양산, 즉 동서간 
갈등의 근본을 밝혀볼 수 있다.
  기장 향리를 흐르는 물줄기는 동쪽으로 흐르는 신천천에 합류하였다가 모조리 동해로 
빠져나간다. 그런 까닭에 동래 방면에 사는 사람들은 기장의 물이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물을 먹고 살던 사람들이었다. 물맛은 입맛에 영향을 끼치고 입맛은 음식맛을 다르게 
하니 기장 물맛에 익숙한 처녀가 동래 시집살이에서는 소박맞을 소지가 크다.
  반면에 얼굴이 잘난 여자는 소박맞더라도 음식솜씨 좋은 여자는 소박맞지 않는다는 
격언도 있듯 한물 먹는 기장 동쪽에서는 입맛이 맞으니 명당이라 할 수 있다.
  '산 설면 물 설다'는 표현도 이런 풍습에서 나온 말이다. 풍수에서는 그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산자분수령(산은 물을 만들기도 하지만 다른 곳으로 못 넘어가게 가두기도 
한다는 뜻)의 원리라고 한다.
  산자분수령의 원리에서 풍토색을 가장 심하게 가르는 산줄기란 대간과 정맥들이다. 
백두대간 남부를 가름으로써 옛날엔 신라와 백제라는 국가가, 오늘날에는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풍토가 구분되었다.
  그런 정맥 중의 하나인 낙동정맥은 취서산에서 친성산을 거쳐 금정산으로 이어진다. 
취서산과 친성산, 친성산과 금정산 사이에는 산자분수령이 되는 지점이 있다. 이를 
우려하여 선조들은 경계적 지명을 일찍이 세워놓았다. 지리의 경계라는 그 두 곳은 
지경고개다.
  취서산과 천성산 사이의 지경고개에서 울산군과 양산군이 갈라지고 물길들도 서로 다른 
흐름을 갖는다. 더불어 천성산과 금정산의 지경고개는 옛적 동래군과 양산군의 경계였던 
것이다. 이를 무시한 양산군의 기장 향리 합병은 시간이 갈수록 골이 깊어가기에 빨리 
풀어버려야 서로 발복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정사에는 기장의 진산을 탄산((차성가)에서는 수령산으로 
표현했으며 옥녀의 우백호로도 잡는 등 풍수적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으로 기록했다.
  그렇게 보면 기장 향리는 두 집안으로 갈라진다. 옥녀직금형의 발복과 완사명월형의 
발복설이 그것이다.
  수령산을 진산으로 삼은 기장 향리의 선조들은 풍수의 달인들이었다.
  수령산을 진산으로 삼아 비단이 줄줄 나오듯 선비가 많이 펼처질 터의 발복에서 
사라리, 대라리라 붙였고, 이를 더욱 깨끗이 씻어(완사: 완산교는 기장 입구에 
있다)달빛(달음산과 일광산)에 말린다는 완사명월형이 분명하다. 이런 형국에서는 
재물보다 인물발복이 두드러진다.
  양기풍수의 대명당 격인 완사명월형과 비교하면 옥녀직금형은 무덤풍수의 발복처일 
뿐이니 오늘날 그곳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받은 차릉이 버티고 있다.

     물통구조 닮은 꼴 : 통도사와 양산 

  통도사의 통도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1 출가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이곳과 통한다.
  #2 만법을 회통하여 중생을 제도한다.
  전자를 상구보리, 후자를 하화중생의 '불교통도'라 할수 있다. 그러면 나머지 하나의 
통도는 무엇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풍수통도'가 아닌가 한다.
    취서산, 독수리 둥지라는 뜻
  이곳 산의 형세는 석가의 설법치였던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 영축산을 일반 간행물들과 
행정기관에선 취서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취서산이란 이름을 즐겨 
쓰지 않는다. 대부분 영축산 통도사로 부르고 있다. 영축산이란 지명만 '풍수통도'의 
맥과 통하기 때문이 아닐까.
  영축산과 취서산의 산명들에는 독수리 취 자가 들어간다. 봉황새 둥지라는 봉소는 
풍수적 지명이다. 보금자리 서 자가 있는 취서산이란 독수리 둥지를 가리킴이니 그 역시 
풍수 맥세에 물린 격이다. 영축과 취서의 자리다툼은 아랫녘 물줄기에 이르러 불교풍수와 
유교풍수의 충돌까지 몰고왔던 역사가 있다. 이를 밝히기 위해 한국 불교계의 가장 
큰어른이신 종정 월하스님을 찾아 통도사로 들어갔다.
  영축산의 물통은 양산 향리의 탯줄이 된다. 또한 자장율사는 양산의 젖줄 부위에도 
통도사 자리를 선정하였다.
    불교에서 영축산은 '야지명당'
  먼저 불교에서 생각하는 풍수관에 대해 여쭤보았다.
  "풍수란 자연스러운 것이다" 고 말문을 연 종정스님은 불교풍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바람과 물이 변화하고 흐르듯 자연의 변화와 흐름에 인간이 적응해 가는 것이 풍수의 
법도"라 했다. 덧붙여 산중명당은 금강산 유점사이며 야지 명당은 이곳 영축산 
통도사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를 화두로 잡고 바람과 물의 변화를 거슬러올라가 보기로 했다. 그 변화 속에는 
1350년 전의 통도사 풍수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론}에는 창건 당시 이곳의 지형을 추측케 하는 구룡지의 유래가 
적혀 있다.
  "...나라 남쪽 산기슭에 독룡이 거처하는 신지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의 독해로 
비바람이 심하니 곡식들이 상하고 백성들은 괴롭힘을 당하여..."로 돼 있다.
  용은 풍수에서 물과 관계된다. 더군다나 통도사 용은 독룡들이다. 이를 참작할 때 그 
당시 이곳은 명당은 커녕 독해의 흉당, 즉 수리시설이 취약한 저습지였음을 알 수 있다. 
문헌에서 말하고 있는 괴롭힘을 당하는 백성들이란 통도사 물줄기 하류에 있는 양산 향리 
사람들이다.
    물꼭지점에 터잡아 가뭄, 홍수 조절
  여기서 통도사 입지 선정과 양산 향리의 홍수와 가뭄이 맞물러 있다. 이를 풍수로 
풀어보기로 하자.
  왜 통도사를 지금 그 자리에 입지 시켰을까. 그것은 풍수로 풀린다. 농경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자연스러운 풍수사상이란 산자부수령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물은 산에서 흘러나오지만 물의 흐름은결코 산줄기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 산자 
분수령이다. 이를 생각하면서 옆의 풍수그림을 참고해보기로 하자.
  영축산 주변 산세의 형국은 산줄기로 인해 영락없이 물통처럼 생겼다. 이 영축산 
물통은 6백만평이나 되는데 독자 여러분이 생각할 때 이들산에서 흘러나와 보인 물등이 
어디로 빠져나가겠는가. 흐르는 물은 산줄기를 넘지 못하니 당연히 통도사 지점을 모조리 
통과한다. 바로 산자분수령의 현상이다.
  이번에는 주전자를 상상해보자. 주전자의 주둥이가 헐렁하면 물을 마시려고 입을 
댔다간 물벼락을 맞는다. 양산 향리의 홍수가 그 이치다. 주둥이가 부실한 물주전자는 
물이 고갈되기 때문에 결국 마실 물마저 없게된다. 이것이 양산 향리의 가뭄이다.
  홍수와 가뭄의 피해를 조절할 수 있는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원리에서 
자장율사는 영축산 물통의 물꼭지점에 통도사를 입지시켰던 것이다 (엉성하게 펼쳐졌던 
저습지는 사찰의 축대공사로 제방효과를 겸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지은 사찰을 풍수에서는 비보사찰이라 하는데 다음과 같은 역할도 겸해 
인명피해도 막아주었다. 영축산 물통이 홍수로 넘칠 때는 가장 빠른 수위 측정지점이 
통도사 자리다. 주야로 상주하던 승려들은 사찰의 대종을 크게 쳐서 하류 사람들이 미리 
홍수에 대비하게했다.
  이번에는 양산 향리 시야에서 이곳 풍수를 살펴보자. 양산천 하류인 물금면에는 증산이 
있다. 곡식을 쌓는다는 증산은 헐렁한 양산천 하류의 유일한 수구막이로 양산천 상류의 
물통 꼭지 통도사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양산 향리 사람들은 증산이 발복하면 
'들천석' (천석이 들어온다)이라고 쾌재를 불렀다.
  들천석 건너편에 갈산(나가라는 뜻)의 기분 나쁜 지명이 있다. 갈산은 양산 군청 바로 
옆에 붙어 있는데 오늘날 양산군 의회에서 갈산풍수가 거론됐다는 풍문이 떠돈다. 어쨌든 
현재 갈산은 절반 가량 허물어지고 거창한 도로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양산 향리에 2백50년 전 부임한 권만 군수 역시 풍수의 신봉자였다. 그러나 그는 
유교사회 신분상 묫자리 발복을 중시하는 유교풍수의 신봉자였다. 권만은 묫자리 발복에 
집착하여 배불리 먹는 와우형국 일색으로 통도사 일대를 초토화시켜 버린다. 초산, 지산, 
순지, 신평, 목자동이라는 지명이 이를 잘 말해준다.
  현 통도사 주지 태응 스님이 이에 대해 일갈했다.
  "그게 다 소같이 미련한 중들이라는 유교맹신주의자들의 욕이여! "
  유교풍수에 대한 비판이다. 이제 통도사 풍수의 진면목을 살펴볼 차례다.

     여의주봉 향한 쌍룡이 절 감싼 보양 : 통도사의 형국

  본래 통도사에는 아홉 마리 독룡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지금으로부터 1350년 전 자장율사가 독룡들의 서식지를 메워버렸을때 방출당한 독룡 세 
마리가 자리잡은 곳이 삼곡동이다. 또한 다섯 마리가 도망친 남동쪽은오룡동이라는데 
오늘날 이곳 사람들은 오룡골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면 한 마리 용의 행방은 어떻게 됐는가. 이 용은 자장율사에게 제도되어 통도사 
대웅전 바로 옆 조그만 연못에 살게 됐다. 이 연못을 구룡지라 일컫는다. 그러면 통도사 
터줏대감인 용들과 연관된 지명의 발복을 보자.
  용에 관한 풍수형국은 무수히 많다. 우선 여의주의 유무관계와 몇 마리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그 다음 머리와 꼬리를 식별해 분석하는데 이에는 형세이론의 깊은 논리와 
현장풍수 경험이 요구되는 까닭에 반풍수와 온풍수가 여기서부터 갈라진다.
  일례를 들자면 부산풍수의 경우 용두산과 용미산, 삼천포풍수의 진산인 와룡산에 관한 
용주사와 용두마을의 논쟁이 그것이다. 이는 삼천포풍수 편에서 자세히 볼 것이다.
    통도사의 여의주봉은 수구막이에 해당
  통도사 주지 태응스님에게 여의주의 유무를 묻자 들머리에 여의주봉이 있다는 게 
아닌가, 들머리란 사람의 발길이 들어오는 입구를 말하는데 물길은 이와 반대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풍수에서는 들머리를 물꼬리로 잡지 않고 오히려 물머리로 친다는 점이 묘수다. 
그래서 물머리(입은 머리부위에 있다)의 표현인 수구는 들머리의 발복과 같은 역할을 
한다. 통도사 경내로 불자들이 많이 출입하고 이들에게 마시게 할 풍부한 약수와 식수는 
발복 조건이 된다. 통도사의 여의주봉은 들머리 격인 수구에 수구에 놓인 동산(물길을 
막아 경내 수량을 풍족하게 하는 역할). 즉 수구막이며 용의 입 앞에 놓인 여의주가 되니 
모든 것이 합리적이다.
  통도사 용의 명칭에는 농주나 쟁주가 붙게 되는데 여의주봉 주위의 산세가 부드러워 
희롱한다는 농주가 제격이다.
  다음의 관심사는 용의 짝을 찾는 것인데 용은 두 마리며 쌍룡롱주형이 바로 통도사 
형국이라는 것이 태응스님의 답이다.
  시살등에서 내려와 삼수리 쪽에서 진입하는 용 한 마리, 영축산에서 통도사를 감싸며 
들머리의 여의주봉을 향한 쌍룡이 있는 통도사 풍수.
  그러면 통도사는 용의 어느 부위, 즉 어떤 혈자리가 되는가를 묻자 스님은 그렇게만 
보지 말라며 답변을 회피해버렸다. 얼풍수, 반풍수들은 혈자리 파악에 무책임한 풍수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논리적인 역풍수에 관심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태응스님의 풍수는 터가 센 자리에 5층석탑을 2년 전에 세웠고, 일영교와 월영교로 
물줄기의 흐름을 희롱시킨다는 음양조화의 작품에서 잘 나타나고 있었다. 통도사의 
일영교와 월영교는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남성적인 직선과 여성적인 곡선을 
보여준다.
    용복지혈 - 석가 진신사리 봉안된 곳
  통도사의 전경 앞에서 필자는 감상에 젖어들었다. 영축산과 시살등의 풍광이 순식간에 
8백미터의 높이를 밀어내린 아랫녘에는 한들 잔방배밭전이라는 고만고만한 지명들이 
햇살에 졸고 있었다. 그 중 들머리에 여의주를 발견한 용 한 마리가 흥겨운 몸짓으로 
옮겨가자 산줄기는 출렁거리다가 봉곳이 솟아오르는데 올망졸망한 품새에는 통도사가 
앉아 있었다. 산서의 한 귀절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완이 중축왈용지복' 구릉들로 둘러싸인 곳에는 길기가 축적되는데 이를 용의 배라 
한다는 뜻이다. 결국 통도사는 용지복이란 명당에 있는 셈이다.
  명당은 복을 받는 자리다. 받는다는 것은 주는 곳이 있어야 한다. 복을 주는 곳, 즉 
발하는 곳이 바로 혈이다. 이렇듯 혈과 명당, 조상과 후손, 발과 복의 관계들이 풍수 
발복구조인 것이다.
  그렇다면 통도사에 복을 발해주는 용복지혈은 어디를 가리키며, 어떤 발복을 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용복지혈은 단 한 곳인 배꼽자리뿐이며 통도사의 경우에는 
석가 진신사리가 봉안된 곳임에 틀림없다.
  그 때문인지 이 곳에는 잡새와 잡충들이 접근하지 않는 현상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음택의 혈에도 곤충과 나무뿌리가 접근하지 못하는 현상이 생긴다).
  취재 도중 통도사 경내 성보박물관에 걸린 조선시대 작가 미상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얼어붙은 듯 서버렸다. 통도사 전경도였다.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해 
범어사에서는 재무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과 같은 필치인 통도사 전경도는 아주 뛰어난 
풍수였다.
  그러면 통도사 발복 소식을 들어보자.
  쌍룡롱주형의 발복에는 묘당에 설 대관이 난다고 전해진다. 묘당이란 조선시대 
의정부를 칭함이니 정승 배출을 뜻한다. 용복지혈의 발복은 부귀가 되는데 부가 먼저 
발하다가 차츰귀로 옮겨간다는 특성이 있다.
  불가와 속가의 풍수말복에는 해석이 다르지 않겠느냐는 월하스님의 풍수 고견을 
들었다. 그러나 속가, 불가를 풍수 불이문에 견줄때, 과거에 창건주 자장율사는 흉당의 
이곳 터에다 부를 이룩하려고 물막이 공사를 한 것이다.
  근래에 들어 통도사 극락암과 경봉대선사의 귀품의 서체가 나타났다. 월하스님과 
통도사, 불가의 귀격들이 통도사하고 있는 것이 통도사 풍수다.

      Y자형 합수머리에터 잡은 명당 : 울산의 형국

  영남의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신라와 가락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신라보다는 가락국의 
문화가 먼저 움텄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가락국 동녘을 흐르는 물줄기라는 뜻에서 
낙동강이라 불렀다.
  이는 물줄기 풍수인 수룡체계에서 본 것인데 산줄기 풍수, 즉 산룡체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낙동정맥이란 낙수 동편의 산줄기를 지칭한 것이다. 아울러 낙수 남녘의 
산룡체계는 당연히 낙남정맥을 의미한다.
  낙동정맥과 낙남정맥은 영남의 양대 산룡체계이기도 하지만 둘은 모두 백두대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낙동 향리 중에서 부산, 양산, 울산은 모두 산룡체계인 낙동정맥에 
걸린다. 지리산 품에 안긴 것은 산청이고, 거창, 함양은 백두대간의 버팀목에 의지하고 
있다. 낙남정맥은 하동에서 시작되어 사천, 고성, 함안, 창원, 김해에서 마무리된다.
  여기까지가 산룡풍수며 수룡풍수는 밀양, 창녕, 의령, 진양, 합천을 싸고 흐른다. 
남해, 통영, 거제는 이색적인 해양풍수라 칭할 수 있다. 이러한 낙동 향리의 차림새가 
경남풍수 길잡이다.
    산의 울타리로 둘러싸여 울산
  울산은 어떠한가. 울산의 울자는 깊은 뜻이 없다. 정확한 표현은 그냥 울산이다. 울은 
울타리라는 의미며 산의 울타리에 둘러싸인 향리가 바로 울산이라는 것이 산룡체계로 본 
울산이다.
  울타리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되는 산은 울산의 진산인 무룡산(453m)이다. 옛 기록에는 
무리룡산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도 무나 무리의 글자 풀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이라는 발음을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산룡, 수룡 어우려져 발복하는 형세
  울산의 산룡과 물산의 수룡이 마치 산수회포하듯 한바탕 어우러지는데 이 점이 울산 
향리가 발복할 수 있는 형세임을 알려준다.
  울산의 진산인 무룡산은 낙동정맥에서 한 줄기가 뻗어나온 것으로 울산군 두서면 
백운산 정상에서 1천미터 거리를 둔 북쪽 능선에 해당하는 해발 880m 봉우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곳에서 천마산 그리고 치술령을 거쳐 토함산 남녘 15리 아래의 
조항산(경주군 양남면) 기슭을 휘돌아 남녘 70리에 이르러 무룡산을 이룬다. 이러한 
산룡의 줄기는 1백 50리를 휘돌아오니 울산의 울타리 규모를 알 만하다.
  산룡의 울타리 끝지점에 땡바위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울산시 동구에 있는 
울기공원으로 갔다. 땡바위는 한눈에 보아도 바위 전체가 수중룡의 꿈틀거림이었다. 
이러한 기세이기에 문무대왕의 수중릉으로 삼았던 경주군 양복면 대왕바위 수중룡을 
영락없이 닮은 듯했다.
  그래서 울산 땡바위에서 시작하여 경주 대왕암까지 70리 바닷가를 모조리 
답사해보았다. 결과는 용비늘은 커녕 뱀비늘을 닮은 바위들이 조금있을 뿐이었다.
  문무왕이 호국룡이 되겠다고 유언하여 대왕암에 수정되자 왕비 역시 이곳 울산에 
혼백이 수장되었을 거라는 전래풍습으로 땡바위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무룡산 수룡의 줄기는 70리다. 이번에 답사한 수중룡의 두 지점 역시 70리다. 수룡이 
시작되는 지점에 수중룡이 있다 (대왕암과 조항산의 위도가 같다). 또한 수룡이 끝나는 
지점은 수중룡 땡바위다.
  울산의 수룡인 무룡산의 70리 월척을 바다에도 낚은 격이 된다. 이러한 울타리 산룡과 
수룡의 기세를 살피는 것이 바로 울산 향리 풍수발복을 밝히는 길이 된다.
  울산군 상북면에서 발원하는 태화강은 동진하는데 이를 막아주는 울타리가 바로 
무룡산의 위력이다. 또한 무룡산은 70리 수룡의 몸짓으로 조항산에서 발원하는 물길을 
물려주니 바로 동천강이다. 태화강과 동천강은 그림에서 보듯 Y자형의 합수머리를 이루고 
있다.
    울산의 창읍설화
  울산의 창읍설화로 계변설화(계변설화은 울산의 옛 지명이다)가 있다. 계변설화와 
풍수가 여기서 확연히 접목된다. 계변설화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는 {홍려박씨세보} 에는 
풍속승 도선이 답사하여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되어 있다. Y자 모양의 합수머리가 명당이 
된다는 점은 풍수의 기초다.
  학성에서 천신으로 추앙되었던 박윤웅이 학을 타고 내려왔다는 승학하강형의 
풍수형국을 보여주는 것이 계변설화다. 그러므로 학성은 울산 향리의 첫 발복지점이 
되는데 그러면 박윤웅이 타고 왔다던 학은 어느 지점이 될까. 바로 함월산 (200m) 이다.
  그런 까닭에 함월산을 울산 향리 사람들은 풍수의 주산이라고 부른다. 학의 깃털이 
무수히 뻗어 있기 때문에 함월산 백양사 주지스님은 부채살 형국으로까지 잡고 있었다.
  이곳이 얼마전부터 시작된 택지개발공사로 인해 부챗살이 찢기고 또한 학털이 
 뽑혀 흉칙한 몰골로 변해버렸다. 이에 울산 시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고 어떤 
풍수학자는 울산발복은 끝났다고 한마디로 모질게 일축해버리기도 했다.
  정말 울산은 함월산의 함몰로 인해 망해버리는 걸까. 4백여년 전 남사고의 풍수 기록도 
읽고 현장을 직접 밟아볼 필요가 있다. 이를 살피기 위하여 먼저 문수산 문수사 현장부터 
가보기로 하자.

    젊은 여자가 꽃 바치는 모양 : 문수산과 문수사
  설악산 미시령을 넘을 때 높이가 1백여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가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멈추게 한다. 이것을 치워버린다면 설악의 풍광도 별 게 아니다 싶을 만큼 웅장한 
바위의 자태는 설악의 백미를 보여준다. 그 바위가 울산에서 금강산을 향해 가다가 
설악산에서 발목이 잡혔다는 설화를 간직한 울산바위다.
  속초시에 울산바위 전설이 있다면 울산시나 울산군에도 울산바위를 떠나보낸 전설이 
있어야 할 게 아니냐는 생각에서 울산군청 관계자들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자 웬 어리석은 질문이냐는 시선만 받았는데 문수사에서 기거하는 스님들과 
신도들은 울산바위가 바로 문수사 벼랑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재차 군청과 문화원을 찾아가 울산바위가 떨어져나간 근원지를 문수산의 문수사로 할 
때 울산 향리 전설과 설화에 오류와 색다른 주장이 없겠는가 물었다. 그렇다는 흔쾌한 
유권해석을 들었다.
    울산바위는 문수사에서 옮겨간 것?
  문수사 동쪽에는 법당이 있고, 서쪽에는 주지실을 겸한 보현대가 있다. 법당 마당과 
보현대 마당을 번갈아 오가면서 천길 벼랑의 바위를 쳐다보노라면 과연 울산바위가 
이곳에서 찢어져 설악산으로 간 것이구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문수사는 천길 벼랑 위에 걸쳐 있는데 이곳이 초행길인 사람들은 두번 놀란다고 한다. 
첫째는 절벽 위에 법당과 요사채를 얹어놓은 이색적인 가람배치에 놀라고, 둘째는 숨가쁜 
산길과 산중절벽에 누가 불공을 드리러 오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평일에도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니 이에 또다시 놀란다고 한다.
  바로 이런 대목들이 문수사 풍수를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낙동정맥의 맥세를 잡고 
있는 정족산에서 산룡 한 줄기가 북서쪽으로 기어가는데, 그 걸음은 삼동면과 웅촌면의 
경계선을 그대로 타고 흐른다. 이러한 흐름의 끝지점에 남암산이 있는데, 이 산은 문수산 
남쪽과 맞닿아 있다.
  문수사 법당 앞에서 남암산을 바라보면 남암산 정상이 젊은 여자인 옥녀인데 활짝 펼친 
왼팔은 다소곳이 있지만 오른팔은 길게 뻗어 무언가를 문수산에 전해주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풍수형국상 젊은 여자가 꽃을 바친다는 옥녀헌화형이다.
  그런데 젊은 여자의 꽃을 받아들이는 문수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남암산과 마주보는 
문수산의 문제지역이란 다름 아닌 울산바위가 빠져 나갔다고 하는 움푹 꺼진 부분이다.
  풍수에서 움푹 꺼진 부분을 결 이라 부르며 이는 흉상을 의미한다. 풍수로 문제되는 
부분은 풍수로 푸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에 문수사풍수의 묘수가 있다.
  문제의 천길 벼랑을 처마 끝으로 삼아 제비가 집을 짓듯 법당과 요사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제비집, 즉 연소형 풍수의 묘수를 보여준다. 문수사에 접근할수록 제비집의 
형상이 확연해진다. 흙으로 발라놓은 흙담은 영락없는 제비집 공법을 보는 것 같다.
  제비는 3월 3일 삼짇날과 9월 9일 중양절에 강남길 출타가 이뤄진다는 길조다. 제비는 
흥부를 부자로 만들어주었고 해충들을 잡아먹는다. 둥지에는 노란 입을 활짝 벌린 
새끼제비의 합창은 생명력이 물씬풍긴다. 재물과 액땜 그리고 건강 장수가 제비집 
풍수발복임을 엿 볼 수 있는 전설, 습성, 광경들이다.
    문수산의 산신은 변재천녀
  그런데 문수사의 풍수발복 묘수가 문수산 산신의 신통력과 같은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유수씨의 저술인 {울산지명사}을 보면 문수산 산신은 변재천녀인데 재산을 늘게 해주고 
원수를 쫓아주며 목숨을 늘려주는 신통력이 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풍수소식이 오늘날에도 있어 관심을 끈다. 문수산자락에는 보잘 것 
없는 둔기마을이 있다. 이곳 궁촌에 살던 아낙네가 제물 복 있는 아들 낳게 해달라고 
문수산 문수암(그 당시 문수사는 아주 작은 암자였다)에 빌어 득남했는데, 그 아이가 
자수성가하여 세계적인 재산가로 손꼽히는 롯데그룹의 신격호회장이다.
  이런 연유로 은공보답하라는 노모의 간청에 신회장은 1985년 대대적인 불사 시주를 
하여 오늘날 문수사 가람이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문수산과 문수사의 관운발복 안개정국
  문수산 남녘에 한때 승승장구했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출생지인 오복마을이 
있다. 문수산과 문수사의 발복에는 관운이 없다. 그래서 그럴까. 울산 향리 정객들은 
처용설화가 서린 이곳 개운포 날씨처럼 안개정국을 곧잘 만나기도 한다.
  울산 시민들은 제10 법운지 중의 하나로 신성시 하는 곳을 문수산이라 부른다. 그러나 
정착 이곳에 사는 스님들과 2만여 가구를 헤아리는 신도들은 청량산이라 부른다.
  본래 이곳은 불교적 산명인 영축산으로 불렸다. 이곳은 신라 원성왕 때 연회 국사가 
변재천녀와 문수보살을 보았던 곳으로 {삼국유사}는 밝히고 있다.
  문수보살과 청량산의 인연에 관한 불교설화도있다. 연회국사가 이곳에 문수사를 창건한 
후 사람들은 청량산으로 즐겨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문수사라는 사찰명이 널리 
통용되다 보니 산명이 절 이름을 따라 불리게 된 것 같다.
  문수산 문수사라 하면 문수보살만 두 번 반복되어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그러나 
청량산 문수사라 하면 이는 명당이 주인 만난 격이 된다. 이 때문인지 정착 영축산은 더 
낮은 봉우리에 문패를 단 것이 오늘날 영축산(351m)이 아닌가 하는 필자의 견해에 이곳 
문수사 주지 본원스님도 정확한 설명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청량산은 오늘날 청량면을 지명발복시켰는데 이제부터 더 큰 시야로 울산시 발복설에 
관한 풍수를 이곳에서부터 왕생이 들판까지 밝혀보기로 하자.

     문수산 뿌리로 부 발복 : 울산 왕생
  눈먼 사람은 코끼리 다리 하나 더듬고 나서 나무기둥으로 단정해버린다는 속담이 있다. 
모든 사물들은 관찰하는 방향에 따라서 제각각 다르게 보인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격언이다.
  풍수에서도 명당을 관찰하는 방향, 즉 관산 지점은 매우 중요하다. 관산지점은 명당을 
쉽게 잡아주는데, 경남동부 산줄기에서 볼 때 명당은 두 군데가 있다.
  범어사풍수와 계명봉 정상, 울산풍수와 문수산 정상이 이에 해당한다. 계명봉은 
천삼백년 전 의상대사가 범어사풍수를 잡았던 관산지점이며, 문수산 정상은 국풍 
남사고가 4백년 전에 오늘날 울산의 풍수발복을 미리 예언한 곳이기도 하다.
  남사고는 어떤 원리에서 4백년 전에 오늘날 울산을 예언했으며 또한 울산의 장래는 
어떻게 발복될 것인가. 이를 하나씩 밝혀보기로 하자. 먼저 그림과 비교해가면서 
출발해보자.
  문수산 정상에서 울산 향리를 관산하던 영축산 능선을 따라 남산 십이봉을 거쳐 
은월봉에 이르렀다.
  풍수의 꽃은 명당이다. 남사고의 발걸음이 시작된 문수산은 뿌리요, 영축산은 줄기며 
남산 십이봉들은 가지가 된다. 꽃은 가지에서 피어남이 자연의 원리다. 그런 까닭에 남산 
십이봉의 가지 끝에 걸린 은월봉을 명당이라고 해서 은월혈 이라고 남사고는 판단했던 
것이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울산 향리 사람들은 은월혈에 너도나도 덩달아서 무덤을 
썼다.
  남사고는 그 당시 이러한 명당을 세 군데나 지적했는데 그 중 또 하나 한림혈에는 이런 
연유에서 울산 도박이는 아직도 남사고의 예언은 신통하다고 믿고 있다.
  은월혈과 한림혈 그리고 마지막 남은 또 하나의 대명당은 왕생혈이다. 한데 아직까지도 
왕생혈의 발복은 오리무중이다.
    문수산, 노적봉형으로 재산 발복
  이제는 왕생혈의 정체를 밝혀보자. 왕생을 이곳 사람들은 왕생이라 표기하며 
군왕지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코끼리를 나무기둥이라고 단정하는 것과 같다.
  왕생이란 풍수용어 중에서 기운이 왕성하게 생긴다는 방향인 생왕방에서 온 말이다. 
왕생이란 말은 풍수용어에도 없지만 사전과 옥편에도 없기에 왕생이 확실하다는 걸 재차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울산 왕생이 들에는 어떤 기운이 왕생하다는 것일까. 뿌리가 
되는 문수산을 살피면 알 수 있다.
  문수산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봉곳이 솟아오른 나락더미의 형상을 하고 있어 풍수상 
노적봉에 해당하는데 이는 귀 보다는 부 발복을 뜻한다.
  앞에서 밝혔듯이 문수산의 산신 변재천녀는 재물을 늘려주었고, 문수산 자락의 
둔기마을에서는 재벌이 탄생했다.
  또한 왕생이 들에 재물발복이 서서히 개운되기 시작했던 것은 1962년 2월 3일 
울산공업지구 선언을 지점으로 잡을 수가 있다. 30년 전만 해도 황무지에 갯마을과 
저습지투성이였던 그곳 주변은 문수산에서 삼산의 방향축을 잡고 부를 왕성하게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울산시청과 고속터미널, KBS방송국의 문화회관을 위시한 각종 상업용 
건물이 들어선 이곳은 명실상부한 울산 경제의 중심지이다.
  이러한 발복들을 4백년 전 남사고는 어떤 풍수원리에서 알아차렸을까? 남사고의 
풍수형국을 자세히 살펴보자.
  왕생이 들 경제지점에는 삼산이 있다. 삼산을 {동국여지승람} 의 울산편에서는 자라를 
닮았다 하여 오산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큰 바다거북을 뜻하기도 한다.
  남사고가 관산하던 때 삼산은 늪지대 위에 떠 있는 형상이었는데, 이는 진흙탕에 
빠졌다는 풍수용어 몰니에 해당한다. 거북이가 진흙탕에 빠진 모양을 금구몰니형이라 
한다.
    왕혈에 부친의 묘 이장한 김재규
  이제는 금구몰니형, 즉 왕생혈의 발복소식을 들어보기로 하자. 이에는 울산발복의 
장래가 달려 있기도 하다.
  금구는 금과 몰니는 진흙, 토를 뜻한다. 오행상 토생금(흙 속에서 금을 캔다) 은 
상생의 왕성한 발복으로 재물들을 차려놓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남사고의 왕생혈에 
대한 입증이 되기도 하는데 울산 향리 사람들은 군왕지지의 왕생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친의 묘를 군왕지지인 왕혈에 이장한 김재규가 몇 개월 후에 10. 26 사태를 
터트렸다는 설에, 그 당시 합수부 수사관들은 무덤풍수들을 앞세워 문제의 묘를 감정했던 
사례가 있었다. 혹시 왕혈을 믿고서 시해사건을 터트린 것이 아닌가 해서 그래서 
그랬을까, 울산 출신 HR이 3공시절 대권운운에 박대통령에게 심하게 꺾인 점도 있지만 
울산에다 경제왕국을 건설한 J씨가 대권선거에서 나섰을때 그룹의 직원들은 한결같이 
그를 왕생이라 칭하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이곳 울산은 풍수상 왕과 인연은 없으나 부의 왕성한 기운이 문수산을 
뿌리로 하여 발복할 향리인 점은 확실하다.
  울산시의 당면과제인 울산시 승격과 통합 문제는 경제적 부와 재물발복을 가져다줄 
왕생이 들이 있어 시간문제일 뿐이다. 즉 그러나 정치와 인연이 없는 향리이기에 정치적 
난관이 안개정국이다.
  언제 안개와 구름이 개운되는지는 하늘에 맡겨두고 개운포로 가서 던져놓은 낚싯대를 
건져보기로 하자. 거기에 처용설화 월척이 걸려 있을 테니까.

      천신이 학 타고 백두산 내려와 창읍 : 울산과 처용설화

  "동경 밝은달에/밤새 노닐다/들어와 잠자리를 보니/가랭이 넷이로다/둘은 내 
것이지만/둘은 뉘 것인고/본디 내 것이지만/빼앗긴 걸 어찌할꼬. "
  울산은 '처용가' 의 주인공인 처용을 출산한 향리다.
  고려 때 일연이 쓴 {삼국유사} 는 처용설화의 첫머리를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 있다.
  신라말 현강왕의 행차는 갑자기 밀어닥친 구름과 안개속을 헤매게된다. 그래서 동해 
용의 조화로 풀던 일관의 조언에 따라 용을 달래려 근방에 절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자 구름과 안개는 걷히고 이윽고 동해 용은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서 나타나 그 중 한 
아들을 왕에게 바쳤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다.
  그 당시 구름이 걷혔다는 개운포가 울산 남쪽에 있는데 오늘날 상개동이며 하개라는 
지명도 있다.
  또한 개운포 하고에는 처용암도 있고, 그 당시 왕명에 의해 창건됐다는 망해사는 
오늘날 망해사지로 남아 있다.
  울산의 처용설화는 육당 선생, 양주동 박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학자들의 무수한 
연구사례를 발표되었다. 이제는 더이상 새로운 학설이 나올수 없을 것이라고 천명한 
학자도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풍수로 처용설화를 풀어놓은 학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처용설화의 풍수적 해석
  이 글을 쓰기 위한 현장답사 도중 다음과 같은 처용설화의 해석을 알게 되었다. 
처용설화를 풍수로 볼때 지금까지 발표되지 않았던 새로운 해석을 담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삼국유사} 의 구성과 맥락이 비슷하지 않은가.
  처용과 풍수 그리고 일연의 설화적 구성, 울산 향리 지명들의 집단행동은 무엇을 
뜻하는지 밝혀보기로 했다.
  {삼국유사} 는 처용을 동해 용의 아들, 즉 용이라는 상징으로 못박고 있다. 신라 때 
용은 풍수상의 용을 상징했다. 선덕왕 14년에 자장율사는 경주 황룡사에 풍수진호를 위해 
구층탑을 세웠다. 황룡은 왕을 뜻한다. 35년 후 문무대왕은 용이 되어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대왕암 수중릉에 스스로 안장케 한다. 아들 신문왕은 선왕인 
왕룡에 보답하고자 감은사를 세웠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가 나라를 수호한다는 
권력통치에서 나왔던 것임을 두말할 나위도 없다.
  불교국가였던 신라의 왕들은 부처와 같았다. 그러므로 역적은 종교파문(부처인 왕에게 
대항했기에)도 겸하게 된다. 이런 점이 완에게는 대단한 통치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처용은 울산의 수호룡
  통일신라 직후 당나라에서 귀국한 유학승들에 의하여 풍수의 위력이 널리 알려지자 
이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군림할 수 있는 권력의 상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신라 왕은 황룡까지 겸하게 되었다. 대왕암과 감은사는 풍수의 용과 불력의 
위력을 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처용은 비록 왕룡은 못되지만 울산 향리의 수호룡 이었음을 
충분히 짐각된다.
  그런데 헌강왕은 왜 이곳 울산 향리에 처용설화를 유포한 것일까, 경주와 이곳 울산은 
인접지역이다. 쉽게 말해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경우 병력이 동원될 수 있는 수도 
인근사단의 남부거점에 울산 향리가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그 당시는 역모가 성행했던 
시절이었다.
  고려개국에 풍수입지를 잡아주었던 도선의 생애는 827년에서 898년이다. 처용설화가 
등장했던 때 왕인 헌강왕은 875년에서 885년 사이에 재위했다. 공교롭게도 헌강왕이 
즉위한 875년은 도선이 풍수를 통해 고려 개국왕인 왕건이 태어남을 예언하던 해이기도 
한데, 이미 도선 풍수가 전국에 퍼졌을 때 비로소 처용설화가 전개되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 {삼국유사} 에서는 헌강왕 때가 태평성대라 하난 모든 것을 종합해볼때 이미 
국운쇠약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이곳 울산 향리에는 도선 풍수가 고려개국 공신의 터를 
미리 잡아주었다는 문헌도 남아 있다. 울산 창읍설화 주인공인 신학성 장군의 학성을 
도선이 잡아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풍수 이론으로 검증해보았다.
    함월산 - 신인승학하강형
  현재 태화교 남쪽에서 함월산과 울산 MBC방송국이 위치한 동산과 학성공원의 산을 보면 
다음과 같은 형국이 자연스레 잡혀온다.
  함월산은 납작하게 엎드려 날개를 펼친 학의 몸체며 MBC가 자리한 동산은 함월산에서 
길게 내민 학머리다. 이때 학성은 학을 타고 내려온 신인에 해당한다. 이는 신인이 학을 
타고 내려왔다는 형국인 신인승학하강형이다.
  결국 울산 창읍설화 중 천신이 학을 타고 신두산(학성공원을 가리킴)에 내렸다 는 
표현은 도선풍수 형국의 그림을 기록한 것이 된다. 이러한 학성풍수를 중심으로 고려 
개국의 기틀이 점점 갖춰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울산 북부의 지명들은 학성, 학성동, 학산동, 학남 등 학 자 지명들로 일괄되어 
있다. 이를 그 당시 도선풍수의 선공격이라 가정할때 이를 진압하려는 신라측의 처용풍수 
주변의 지명은 어떤 배치를 하고 있을까? 역시나 처용암을 중심으로 용암리, 용연동, 
용산, 용암 등 용 자 진영을 펼치고 있다.
  나말의 용과 여초의 학세력에 대한 시대적 풍자가 서두에서 소개한 처용가는 물론 
{삼국유사} 를 지은 일연의 문체에도 배어 있다.
  밤새노닐다(신라 말의 향락부패상)/웬 다리 두개가 남의 자리를(견훤 왕건 등의 
활동)/본디 내 것이지만(이들을 토벌해야 마땅하지만)/빼앗긴 걸 어찌할꼬 (국운 쇠약을 
탄식함). 이렇게 볼 때 처용가의 가사는 고려 때 작사된 것이라는 현용준씨의 학설에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처용풍수 해석은 뒷부분까지 풍자로 이어짐을 알수가 있다.
  "내가 공의 아내를 범했으나(왕건이 신라 땅을 차츰 확장해갔으나)/성난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항전하지 않고 결국 항복하니)/이제부터는 공의 화상만 보아도 그 문을 들어가지 
않겠소(신라귀족들에게 식음의 기득권을 인정한 고려 왕건의 정치적 배려). "
  그 당시 고려에 국운을 놓쳐버린 경순와의'헐 수 없구나'라는 탄식에서 유래된 
헐수성과 놓쳤다는 무기에서 나온 무거동이라는 이름도 울산 향리에는 있다.
  {삼국유사} 는 이 처용풍수를 마지막 대목으로 장식하고 있는데 무엇때문일까?
@FF
     신라 왕권 수호룡에서 유래 : 처용설화

    대왕암과 처용암
  임금이 입던 정복을 곤룡포 또는 용포라 하듯 용은 왕의 상징물이었다. 신라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문무대왕은 사후에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유언마저 남겼다.  
유언에 따라 수장을 한 곳이 오늘날 경주군 대본리 바닷가에 떠 있는 문무대왕 
수중왕릉이다. 사람들은 그 수중왕릉을 대왕암이라 부른다.
  울산 향리에는 처용암이 있다. 대왕암과 처용암. 대왕암을 위해 신문왕은 감은사를 
창건했다. 처용암의 처용설화로 인해 헌강왕은 망해서를 세웠다. 감은사 주변에는 
이견대가 있는데 망해사에도 망해대가 있었다.
  이렇듯 대왕암과 처용암은 같은 시대에 걸린 똑같은 짜임새인지라 대왕암을 열쇠삼아 
처용설화의 자물통을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대왕암은 두 개의 열쇠를 갖고 있다. 대왕암의 풍수열쇠와 감은사의 불교열쇠가 바로 
그것이다. 문무대왕이 유언에서 밝힌 용은 바로 풍수상의 용이며 감은사는 당연히 불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국가였던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가 불교신도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왕권에 
도전했다면 이는 역전일 뿐 아니라 종교파문마저 당함이니 왕즉불은 국권수호에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이에 견주어 왕즉룡은 국토수호에 정책적 힘을 발휘하였다. 풍수와 불교의 만남으로 
후일 고려는 불교풍수에 의한 풍수사찰(운주사)양식을 보리기도 했고, 태조 왕건은 
풍수헌법을 만들기도 했다(훈요십조). 신라풍수의 장법인 대왕암 서쪽에는 이를 지켜보는 
석굴암도 있고 불국사와 불국토인 서라벌이 있다.
  울산 처용암 서쪽의 지명들 역시 온통 불국토 지명들로 펼쳐진다. 본디 청량산은 
문수보살이 살았다는 산이다. 영축산은 석가의 설법처였던 인도의 산을 말한다.
  문수산의 원래 이름은 청량산이었는데 문수사라는 절 이름을 따라 문패를 잘못 달아 
생긴 이름이다. 문수보살의 문패가 뒤집혀진 수문 마을도 있고 청량산이 와전되어 표기된 
지명이 청량면이다.
    헌강왕, 울산에 '왕즉룡' 정책 시행
  마을 이름이 절 이름에서 유래된 청송, 영축, 망해도 있고, 승려 이름인 지통이란 
지명도 있다(지통은 의상대사의 제사다).
  민초들도 알아 듣기 쉬운 절골이란 지명도 한 자리 차지했다. 현장답사를 종합할때 
처용암은 비록 대왕암 같은 왕룡은 아니지만 울산 향리를 수호하고 왕룡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신라의 국운은 쇠약해져가고 고려의 태동이 점점 왕성해져가는 나말여초에 불교는 두 
파로 나뉘어 졌다. 귀족 중심의 교종은 신라를 따르고, 대중불교인 선종은 고려 개국의 
주축이 된다.
  이에 이르자 왕즉불이라는 신라국권정책은 점점 힘을 잃어간다(후일 궁예는 자기가 
생불이라고까지 선포한다).
  그러자 왕즉룡이라는 풍수정책이 차츰 필요했던 헌강왕은 이곳 울산향리에 왕권을 
보좌하는 정책을 시행한다. 그래서 개운포 하고의 용머리를 닮은 바위섬은 처용암이 
되었다. 이를 중심으로 그전부터 전해 내려온 풍습인 용신제에서 신라 왕권의 수호룡으로 
격상된 것이 처용설화다. 이 결론은 필자가 풍수로 풀어서 밝힌 새로운 처용설화 
해석이다.
    골품제 폐지 주장한 최치원
  한데 이런 처용풍수를 토대로 하여 처용설화의 출처인 {삼국유사} 기이편 처용랑과 
망해사 조를 읽어보면 마지막 대목이 매끄럽게 구성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결국 신라는 망했다. 풍수입지(경주는 한반도 동남방에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다)의 
불리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귀족 중심의 골품제가 인재등용을 가로막아 결정적으로 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으로 일연은 처용설화의 마지막 대목을 다음과 같이 구성해놓고 
있다.
  " ... 산신과 지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는데 지리 다도 파도파 라는 말들이 있었다. 
이는 슬기로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미리 알고 몰래 도망가니 이 도읍이 장차 깨질 것을 
일러준 것이라 한다... . "
  인재등용을 가로막는 골품제 폐지, 즉 시무책을 주장했다. 그러나 왕족과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신라는 망했다. 최치원 역시 입산해버렸다. {삼국유사} 
가 야사라면 김부식의 {삼국사기} 는 정사에 속한다. 최치원이 입산한 곳은 지리산이다. 
그런데 정사에서는 지리산이라 표기하는 반면 야사는 지이산으로 적고있다.
  앞구절 지리 다도 파도파,  ,  ,  의 지리란 표기는 정사의 리와 야사의 지가 각각 
한자씩 합쳐진 것이다. 지금 우리들도 지이라 써놓고 읽을 때는 지리산으로 발음한다. 
이는 야사로 쓰고 정사로 읽는 격이 된다.
  왜 그럴까?
  청학동은 지리산에 있다. 최치원의 풍수가 바로 청학동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사일까. 
야사일까. 지리산으로 가서 직접 알아보기로하자.
@FF
      천하명당 청학동은 낙동 향리의 탯줄 : 풍운의 지리산
  용은 바람과 그름을 일으킨 후에야 비로소 등천할 수 있다.
 신라 말기의 용이란 단연 고려를 세운 왕건이다. 왕건의 풍운조화에는 역사적인 
인물들이 버티고 있다.
  풍은 도선을 가르킨다. 도선이 왕건의 탄생을 풍수로 점지해주었고 또한 도선은 고려 
왕조의 훈요십조를 잡아주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운은 최치원을 말한다. 자는 고운, 
해운인데 고운은 계림황엽곡령청송이란 글귀로 고려의 개국을 미리 왕건에게 알렸다고 
{삼국사기} 는 적고 있다.
  도선은 전라도 영암에서 827년에 태어나 898년까지 스쳐간 바람이었다. 고운은 857년 
경상도 경주에서 탄생하여 951년의 구름 속에서 살다가 흔적을 감춘 신선이었다. 바람과 
구름은 40년을 같은 하늘 아래 살았건만 직접 만남 적은 없다.
  그러나 이곳 지리산에서 풍과 운은 자신들의 하늘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풍운의 지리산'이란 제목을 붙여보았다.
    지리산 야사의 백미 - 청학동
  종이가 귀했던 옛날엔 풍수그림을 흔히 모래 위에 그렸기 때문에 풍수화를 사도라고도 
했다. 지리산 노고단 서편 자락에는 사도리가 있다. 865년 도선이 이곳에서 풍수의 
도문에 통하였다. 하여 그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쌍계사는 지리산 영신봉 남녘에 있다. 고운은 이곳에 신선의 문을 새겨놓았다. 
여기까지가 문헌에 기록된 지리산 풍운의 정사다.
  산하를 햇볕에 말리면 정사요 달빛에 절이면 야사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리산 야사의 
백미는 무엇일까. 단연 청학동일 것이다.
  낙동 향리 이상향의 탯줄이 청학동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풍운의 야사를 붙잡으며 
지리산으로 들어가본다.
  "입산한 산 속에서 나는 실종되고/돌아설 쯤에는 하산한 산만이 국밥집으로 
들어갔다/경상도 물에 전라도 양념을 담은 뚝배개/언뜻 섬진강 물길이 터 보이고/저 빛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림 속에/오천년을 흘러온 어미의 살갗과도 같아라. "
  보름동안 강행했던 지리산행의 첫날은 쌍계사 본당 앞에는 진감선사대공탑비가 
천여년의 풍운을 되새기고 있었다. 탑비의 문장은 887년(진성여왕)재위 고운이 새긴 
것이며 본래 이곳은 샘처럼 맑은 물이 솟는다는 옥천사였다.
  더욱이 눈덮인 겨울에 칡꽃이 피어난 곳에 절터를 잡았다 하니 가히 설상화개요 
화개동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화개동천이란 말은 오늘날 화개동의 지명과도 맥이 
통한다. 
    쌍계는 청학동 입구인 석문 의미
  이곳 지형을 도선풍수로 살피면 화개천의 물줄기 두 개가 절 앞에서 합쳐지니 이는 
합수다. 합수의 언저리에 내민 부분은 머리라 이르니 결국 옥천사는 합수머리라는 명당을 
차지하고 있는 격이다. 합수는 양편의 물줄기가 흐르는 계곡의 그림이 되므로 886년 
옥천사는 쌍계사로 명칭이 변경된다. 한데 고운은 계자의 물 수 변을 돌 석으로 
바꿔버렸다. 그후 오늘날까지 줄곧 지라산 쌍계사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고운은 경내의 들머리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쌍계라는 각자까지 해놓았다. 고운은 
어떤 연유에서 이런 행위들을 한 것일까?
  청학동 안마당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맨처음 쌍계의 열쇠를 풀어야한다. 쌍계는 두 개의 
바위를 뜻하는데, 이는 청학동의 출입구인 석문을 가르킨다. 쌍계석문은 청학동 대문에 
해당하는데 청학은 중국이나 일본풍수에도 없는 우리 고유의 풍수용어이다. 청학은 
신선이 타고 다닌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청학은 옥편에도 올라 있지 않은 용어이기에 
청학동은 두말할 것 없이 야사적 지명이며 상상의 동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야사가 
정사의 기록에 버젓이 본적을 올려놓고 있어니 무척이나 흥미롭다.
  조선시대의 {동국여지승람}에 청학동이 기록돼 있고 그것도 실지 측량해 놓은 것 처럼 
나와 있다.
  "청학동은 지리산에 있다. 진주읍에서 서쪽으로 1백47리 떨어진 곳에 있다. "
  식복, 색복, 수복과 함께 재산복, 자식복은 누구라도 마다않는 오복일 게다. 
농경사회에서 우리 선조들은 복전을 일구는 동물로 단연 소를 으뜸으로 쳤다. 또한 소를 
부를 때는 개나 돼지처럼 취급하지 않고 '생구야'라고 불렸다. 소의 뱃속은 강한 
생명력을 발한다고 해서 그곳에서 복을 받으려는 발복풍습이 바로 우복정서다.
  이 땅의 산천은 모두 백두산에서 시작되고 백두의정기는 백두대간을 등뼈로 해서 뻗어 
있다. 이러한 백두대간의 중간 아랫녘에는 자궁자리가 있는데 그곳이 속리산이다. 그래서 
우복동은 속리산에 있다고 전해온다. 우복정서와 산천의 어우러짐이다.
  천하의 3대 명당인 청학동, 우복동, 만수동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풍수지명이다. 
지리산의 청학동은 도선풍수가 결코 아니기에 옥룡자청학동결은 위작일 뿐이다. 최치원의 
신선마당이 바로 청학동이기에 고운은 쌍계석문이라는 문패까지 달아놓지 않았던가.
  이제부터 청학동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껏 쌍계 석문을 밀어보자.
@FF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 :청학동과 지리산
  배부른 자들이 백성들의 등골마저 빼먹으려 하던 동진 말엽의 무릉지방, 고기를 잡던 
어부가 막다른 계곡에서 복숭아꽃이 계속 떠내려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쳐다보고 
있었다. 막혔다고 생각되던 계곡은 석문처럼 출입구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를 기어서 
통과하자 홀연 별천지가 펼쳐졌다. 그곳은 진나라 때 난세를 피하여 들어온 사람들이 몇 
백년간 동안 평화롭게 살고 있었고 며칠 환대를 받으며 묵다 돌아왔다. 이런 소문을 들은 
무릉태수는 세금 징수에 혈안이 되어 별천지를 찾게 했으나 석문마저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도연명의 쓴 {도화원기} 의 줄거리다. 여기서 별천지란 무릉도원을 가르키는데, 
이상향의 향리를 뜻한다. 도원명 자신도 탐관오리들의 작태가 아니꼬와서 벼슬마저 
팽개친 채 [귀거래사]를 읊으면서 낙향해버렸다.
  당나라에서 과거 준비를 했던 고운 최치원이 도연명의 명저들을 접한건 당연한 일 
도연명과 고운, 그들이 살았던 동진 말엽과 신라 말기는 똑같은 난세였다. 또한 두 사람 
모두 벼슬길을 박차고 낙향, 입산한 나이가 각각 불혹 직후였다.
  무릉도원은 전원시의 개조인 도연명의 이상향이었고 한문학의 조종인 고운의 이상향은 
청학동이었다. 무릉도원의 입구에는 석문이 있다. 그런 까닭에 고운은 쌍계사 입구 
바위에다 쌍계석문이란 문패를 새겨놓았던 것이다. 고운의 석문을 밀고 들어가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고개를 든다. 왜 청학동이란 명칭을 붙였을까.
    청학동 고운의 출생설화와 연관
  이는 고운의 출생설화를 보면 짐작이 간다. 최치원은 잉태시 불길한 변을 당했다고 
전한다(금돼지의 변). 그래서 치원이 출생하자 무인도에 버렸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학들이 보호하여 살렸다고 고운의 출생설화는 기록되어 있다. 청학은 천상의 학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고운의 수호신은 청학이 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쌍계석문에서 
불일폭포 중간녘에는 환학대도 있다.
  도연명과 고운은 모두 유교를 공부했다. 이러한 유학자들의 이상향의 근본은 단연 
요순의 태평시절이다. 요순시절 요임금은 허유에게 천하를 넘겨주려고 했다. 이 소식이 
허유의 귀에 이르자 허유는 물가에서 귀를 씻어버린다. 이를 보고 있던 소부가 그 연유를 
물어보자 세상에 더러운 말을 들었기에 귀를 씻어버렸다고 답한다. 그러자 소부는 아래 
물가에 있던 소를 대뜸 위쪽으로 끌고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그 이유를 허유가 
물었고 소부가 답하였다. 
  "자네의 더러운 귀를 씻은 물을 어찌 내 소에게 먹일쏘냐" 고. 
  지리산 화개천에는 고운이 세속의 시비를 들었던 자신의 귀를 허유와 같이 
씻어버렸다는 세이암이 있다.
  신흥 왕성국민학교에서 이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귀를 씻은 허유보다 
소를 끌고가버린 소부의 경지가 한 수 위라는 또 고운은 허유의 맞수일 뿐
  소부보다 한 수 아래에 불과함이다. 고운을 우리는 신선에 견준다. 그런데 신선이 고작 
소부의 발 밑에 있다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어긋나버린 게 아닌가.
  이는 가야산 만수동에서 풀린다. 내친김에 한 수 풀어보자.   
  "미친 듯 바위에 부딪치는 물에 싸이니/사람의 말은 가까이 있어도 듣기 어렵네/시비 
소리 귀에 이를까봐/흐르는 물 소리로 산을 감싸버린다. "
  이제는 세속의 시비마저도 들리지 않는 별천지에서 신선의 경지에 놓인 고운의 모습이 
떠오른다.
    쌍계사 풍수 - 선인무수형
  고운이 흔적을 남긴 지리산 쌍계석문과 쌍계사 부근을 풍수형국으로 감상하려고 앞산에 
올랐다. 삼신봉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는 그 기세가 신선의 얼굴같다. 이를 얼굴로 하여 
쌍계사를 품었다고 볼 때 신선의 왼팔은 신촌마을 뒷산(637m)에 다소곳이 멈춰져 있다. 
한데 신선의 오른팔은 그 옷깃을 펄럭이면서 신흥, 화랑, 용강마을을 수놓듯 펼쳐놓고 
있다. 그래서 선인이 춤을 춘다는 선인무수형이 이곳 쌍계사의 올바른 풍수형국이다(흔히 
전해지는 이곳 운운설은 묘지풍수 수준의 억지춘향적이다). 선인은 바로 신선인 고운을 
뜻함이고 무수는 국사암의 발복에서 드러난다.
  이곳 선인은 오른팔에 춤의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데 오른 소매 끝 가장 안쪽에 
국사암이 자리하고 있다. (오른 옷깃 바깥 자락의 계곡은 선인이 노닌다는 선녀동천도 
있다).
  예부터 국사암은 진감선사 전수로 유명하였고 오늘날까지 불교예술이 유독 번창한을 
누린 곳이기도 하다.
  전국에서 수천명씩 모이는 불교음악제가 바로 이곳 국사암에서 매년 열린다. 가히 
신선과 풍류가 어우러진다 해도 손색이 없을 이곳을 이조 때 사관 김일손과 남명 조식은 
청학동이라 단정했었다. 이에 반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악양면 매계를 청학동이라 
밝힌 바 있다.
  오늘날 지리산 묵계리에는 상투를 올린 세칭 '도인촌'이 있는데 매스컴은 물론 
대중들은 물론 대중들도 무턱대고 거길 청학동이라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인촌 산줄기 담장 하나만 넘으면 이름이 고운동이라는데 이곳 
사람들 역시 고운동이 청학동이라고 주장한다.
  천하의 명당은 하나뿐이라는 풍수 원칙을 무시하고 불쑥 튀어나온 4개의 청학동이 
지리산에 있다니 어찌할 것인가. 과연 어느 곳이 진짜 청학동일까.

     성철스님 출가 인연담긴 영산 : 지리산 청학동

  '그 사람 삼장 갔다' 하면 찾지 못하니 단념하라는 말로 지리산 동부사람들은 알고 
있다.
  남의 처첩을 희롱했다든가, 오라에 묶일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일단 삼장으로 
입산하면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는 격이 되어버린다.
  삼장은 지리산 동쪽의 산청군 삼장면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대원사가 자리한 
유평계곡이 도피처의 압권이다.
  그곳 깊숙한 숲속에서 야영을 해보았다. 요즘이야 이곳은 천왕봉에 오르려는 사람들의 
동쪽문이 되어 도로공사까지 한창 벌어지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3명이 사살되었고, 정순덕이 생포되었던 계곡이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노동법상 황견계약을 불법행위하고 천명하고 있다. 지리산을 
이보다 더 기분 나쁜 색깔로 먹칠한 역사가 근래에 있었다. 빨갱이의 개라는 적구산이 
그것이다. 2만여명의 사상자를 낸 지리산은 적구산에나 어울리는 악산일까.
  그림설명: 지리산은 그 넉넉한 품으로 민족의 혼과 생명들을 감싸안고 있다.
  
     성철스님을 배출한 삼장
  1912년 2월 19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한 생명이 탄생하였다. 그의 
청년시절은 사상범으로 몰려 잡히면 목숨마저 부지하기 어려웠다. 그당시 산청군 
매촌면에 살던 그의 동료는 잡혀서 목숨을 잃었고 그는 삼장으로 도망쳤다. 삼장은 그를 
보호했고 대원사는 그를 출가하게 한 인연이 되었다. 오늘날 생불의 자리까지 올랐던 
성철 큰스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다. 이렇듯 지리산은 생명을 살리는 영산이지 이를 
악산으로 타소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악령을 뒤집어 쓴탓일 게다

  도선, 무학과 청학동은 무관
  어제와 오늘의 변화를 시운이라 할 때 땅 속의 시운에서 내일을 예견하는 것이 
도참사상 이며 대표적 저작물 (정감록)을 꼽는다. 이러한 (정감록) 곁가지에 지리산 
청학동이 걸려 있다. 소위 옥룡자 청학동결, 무학선사 청학동결 등 수십 가지나 나와 
있다.
  옥룡자는 신라 말 풍수승 도선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때 도선이 청학동결을 쓴걸까? 
이는 한마디로 언어도단이다. 청학동은 고운 최치원이 작명한 이 상황을 가리키는데 
고운이 지리산으로 입산한 해는 900년 후다. 더욱이 청학은 도선도 몰랐던 용어였다. 
굳이 욕룡자가 이를 적어놓았다면 황학이라고 이름을 달아놓았을 것이다. 그래서 옥룡자 
청학동결이 가짜라는 지적은 오늘날 (정감록)에 오르는데 이것이 바로 무학선사 
청학동결이다.
  (정감록)은 한마디로 고려왕조를 멸족시킨 조선왕조에 대한 원한을 담은 책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 괴문서 낱장 하나라도 소지했다. 발각되는 날이면 그대로 처형했다. 이러한 
문서를 개국공신인 무학이 목숨 걸고 썼을 리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오늘날 매스컴에 알려져 모두들 지리산 청학동으로 알고 있는 도인촌의 행정지명은 
경남 하동군 묵계리 학동마을이다. 하동군청 문화공보실 실무자와 하동읍 주민들에게 
그곳이 청학동이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고개를 젓는다. 불일평전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담소하던 산사람 변규화 씨는 거긴 '매스컴 청학동' 이라며 허허 웃었다.
  그런데 묵계리 도인촌 사람들은 어떤 논거에서 그들의 터전을 청학동이라 하는지 자못 
궁금해졌다. 이를 직접 들어보기 위하여 묵계 도인촌에서 여장을 풀고 일박했다.
  그곳의 버스 종점에는 매점도 있고 그 옆에는 한옥 한채가 매끈하게 지어져 있는데 
건너편에는 돈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공중화장실이 초화판 통나무집으로 세워져 있었다. 
한옥의 벽면에는 이곳이 청학동임을 논증하는 지리산청학동도 가 안내 유리판에 끼워져 
있었다. 들여다 보니 한눈에 조작된 청학동 지도임이 확연히 드러났다. 문제의 그림은 
화개, 악양, 묵계 등의 지명들이 뚜렷히 적혀 있고 현위치가 청학동임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는 삼장 갔다고 해놓고서 삼장 어디에 숨었다고 상세히 알려주는 것과 같다. 명당의 
혈을 그려놓은 풍수도 역시 감출건 감추고 숨길건 숨기며 그려 놓는다. 하물며 천하의 
대명당이요 '정감록'에 실린 청학동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니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굳이 몇 자 적어놓아야 하는 상황일 경우 '정감록'특유의 파자가 등장하는 게 보통이다. 
하나 문제의 도면은 파자는 눈에 띄지 않고 정자로 아주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의 청학동도는 조선왕조 멸망후 불과 일백년 안팎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다.
 필자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신분을 밝히고서 청학동을 주장했던 현재의 인물들을 
수소문하여 정신 인터뷰를 시작했다.

      청학동은 신선의 가치 : 지리산 청학동
    지리산 청학동도는 조작된 것
  세심한 담사 끝에 지리산의 속칭 도인촌이 두 가지의 유래에서 청학동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지리산 청학동도의 그림과 무학선사 청학동결이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런데 동도의 그림은 앞장에서 밝혔듯이 조작된 지도일 뿐이다. 또한 조선 
개국공신이었던 무학의 조선은 망한다는 '정감록'의 반열에 목숨 걸고 끼여 들었다는 
행위는 도저히 상상조처 되지 않는다. 따라서 청학동결 역사 위작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이 두가지 외에는 도인촌을 청학동으로 밝히는 문헌상 논증은 없다고 이곳 사람들은 
말한다. 이 발언을 토대로 할 때 이곳을 청학동이라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현장답사 결과 시각을 같이 하는 발언이 다른 곳에서도 눈에 띄었다. 오늘날 십승지 
연구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인 최어중의 저서 '현장풍수' (1992년 동학사)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이 갑자기 생긴 도인촌을 그 당시 어떤 등산객이 우연히 보고서는 그곳이 
청학동이 아니겠느냐고 떠들어댄 것이 그만 그 마을이 청학동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어떤 등산객을 수소문한 뒤 그 중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한 등산객을 
알아냈다. 진주 사람이었다. 한 걸음에 진주시로 달려갔다.
  진주시에서 '산 산 산'이라는 산악 장비점을 경영하는 민기훈 씨 (47세)가 바로 
그사람이다. 정말로 도인촌이 청학동이냐는 질문을 단번에 던져보았다. 이에 대한 민기훈 
씨의 대답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그곳은 청학동이 절대 아니다. 70년대 초의 어질고 순박했던 그곳의 생활상을 
청학동으로 단정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물장사의 관광지로 변해버렸고 
더욱이 돈 때문에 고소, 고발까지 일어난 그곳을 어찌 청학동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학은 천년을 산다고 알려져 있고 더욱이 푸른 빛은 하늘의 색이다. 이런 뜻을 담고 
있는 청학은 우리 민족의 이상이었기에 천민 박대를 받던 도공의 혼애까지 스며들었고 
상감청자의 하늘빛에는 흰구름과 청학이 그려져 있다.
  더불어 청학동은 지리산에 있다고 알려져 이를 찾으려는 발걸음이 천여년 동안 끊이지 
않았다.
  그림설명: 풍수, 생리, 인삼, 산수를 이상항의 조건으로 삼은 이중환은 악양면 매계를 
청학동이라 주장했다.

    이중환의 청학동은 현재 악양면 매계리

  그 중에 한사람인 이중환은 2백50여년 전에 그의 저서 '택리지'에 다음과 같이 
청학동을 단정하기에 이른다.
  "청학동이 있다는 말이 예전부터 전해온다. 청학동은 지금의 매계다."
  필자는 매계를 찾아 다시 지리산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동군 악양면 매계리가 바로 
'택리지' 청학동의 현장이다.
  매계의 산 속을 헤매다 청학사라는 표지판을 발견하고서 제법 깊숙이 자리잡은 산사로 
들어섰다. 청학사에는 스님이 한 분 있었는데 산속에서 불쑥 내려온 필자의 산행 차림을 
보고서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나타냈다.
  청학의 문패가 걸린 이곳의 연유를 물으니 돌연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환대했다. 모처럼 
제대로 찾아온 객이라며 운치있는 연못 한켠에 자리한 정자에 다담을 내왔다. 향긋한 차 
향기가 감도는 산사에서 청학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청은 푸른 소나무, 학은 하늘의 
새를, 동은 동굴을 뜻함이니 결국 청학동은 신선이 노니는 거처를 말한다는 논리를 
펼쳐보였다.
  이에 비해 도인촌 사람들의 청학동은 언젠가 때가 되면 개운되고 그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발복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전자가 이상향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도참식 
발복에 매달린 것이다.
  
     이중환의 청학동은 생활풍수로 본 최상의 생활터전

  사실 이곳에서 '택리지'의 사상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택리지'에서는 사람이 
살기좋은 터는 네가지의 구비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첫째가 풍수인 지리며 다음은 먹거리인 생리, 그 다음은 살맛나는 인심, 마지막 
충족조건은 볼거리인 산수를 들고 있다. 오늘날이야 먹거리 경제를 최우선으로 
당연시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풍수를 더욱 중요시했다. 이는 지금 보더라도 통계학적인 
동양의 지혜라 할 수 있다. 걸출한 인물은 과소비 생리보다는 환경적 풍수에서 탄생하고 
풍수가 뒷받침되지 않는 생리는 절대로 대물림되지 않는다는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기초와 지반이 부실한 경우 제아무리 거대한 경제공법의 다리라도 순식간에 주저 앉는 
오늘날이 아닌던가.
  이중환은 이를 미신적인 무덤풍수에서 찾지 않고 생활풍수로 밝혀 최상의 생활터전을 
청학동이라 불렀던 것이며 매계는 앞서 말한 네가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예부터 이곳 악양팔경은 유명하였기에 산수의 구비조건이 충분함을 알 수 있고 인심 
역시 효자와 열녀비가 유독 많은 이곳이기에 가히 짐작이 된다.
  섬진강의 교역과 악양천의 풍요는 이를 배경으로 약노국의 도읍지로 일찍이 자리잡았던 
이곳의 생리는 한눈에 보아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또한 악양을 풍수로 살필 때 청학동 구조로 짜여진 지명들이 드러난다. 무릉도원과 
청학동이라는 이상향의 공통점은 입구에 석문이 있어야 한다. 악양의 들머리 격인 곳에 
입석리가 있다.
  무릉도원을 흐르는 물줄기에는 복숭아꽃이 흘렀다고 전해지기에 '도화원기'라 부른다. 
입석리를 지나면 계곡에 매화꽃이 흐른다는 매계리다. 게다가 매화꽃이 흐른다는 계곡 
원류의 지명이 바로 청학골이다.
  그렇다면 이곳 매계가 이중환의 지적대로 진짜 청학동일까. 이를 철저히 밝히기 위해 
지리산 쌍계 석문의 청학동, 도인촌 청학동 그리고 이곳 '택리지' 청학동을 답사하던 
발걸음은 마지막 하나 남은 고운동 청학동을 찾아 계곡 깊숙이 접어들었다

      마음 속에 간직된 낙토, 청학동 : 네군데의 청학동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 언덕으로 머릴 향하듯 사람에겐 살아 생전에 금의환향할 
이상향이 있다. 과부촌은 홀아비에게는 명당이나, 정작 과부에겐 흉당이듯 이상향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도 보인다.
  동양에선 이상향을 흔히 무릉도원이라 불러왔다. 낙동 향리 중에서 가장 동쪽 언저리에 
자리한 울산의 진산인 무룡산. 울산읍지 (1894년)는 이 산을 일명 무릉산이라 기록했고, 
옛날 이곳에는 도원서당도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무릉도원을 
뜻하며 울산 향리의 이상향으로 자리매김된다.
  지리산은 낙동 향리의 서편에 있는데 이곳의 이상향은 청학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 대다수가 청학동을 잘못 알고 있다. 청학동은 신라 말엽인 900년께 고운 
최치원에게서 유래되었기에 고려시대 이인로 (1152--1220)의 '파한집'에 무릉도원과 함께 
상세히 설명돼 있다.
  십승지는 '정감록'의 이상향으로 조선은 망한다는 내용에 비춰볼 때 어림잡아 1400년 
이후에나 유포된 이씨왕조에 대한 저주서다. 그러므로 500년이라는 시차의 모순과 함께 
'정감록'에 실렸다는 십승지 투의 청학동 기록들이란 한마디로 언어도단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도인촌의 청학동은 이러한 정감록의 논거에서 주장되었던 것인데 그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고운동은 수몰지로 명당으로선 부적객
  고운동 계곡의 배바위 근처에서 강아지 댓 머리를 끌고 가던 고운동 사람을 만났다. 
굳이 이름을 밝히길 꺼려하던 젊은이에게 고운동이 왜 청학동이냐고 물어보았다. 고운 
선생이 이곳에서 공부를 했기에 고운동이 되었고 또한 고운동은 청학동이라 했다.
  하기야 서로 청학동이라고 주장하던 도인촌과 매계 그리고 불일평전 언저리에도 고운의 
공부방은 있다고들 한다. 이런 주장을 다 들어보면 청학동은 4동으로 공중분해되어 
버린다.
  이를 시쳇말로 행정분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번지수를 부여할 수도 있다. 고려 때 
이인로는 신흥계곡에서 청학동을 못찾았다고 실토했으니 이를 제쳐두면, 김일손 
(1464--1498)이 최초로 발표한 불일폭포 부근이 청학1동이 된다.
  그후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매계가 청학동이라고 1751년에 발표했으니 청학2동은 
악양면 매계다. 우리가 흔히 청학동으로 알고 있는 도인촌은 고작 20여년 전인 
1973년부터라는 하동문화원의 기록을 참작할 때 여기를 청학3동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주장되고 있는 고운동은 청학4동이 된다.
  이러한 청학 1.2.3.4동의 들머리녘에는 모두 청학동의 대문격인 석문이 버티고 있다. 
1동의 경우는 쌍계석문이며 2동은 입석리라는 지명이, 3동은 장재부락에 있는 석문이 
있으며 고운동은 집채만한 배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닮은 꼴은 석문 안에서도 다시 펼쳐진다. 쌍계석문 윗녘인 불일폭포 근처에는 청학봉이 
있는데 입석리 지명 윗쪽이 청학이골이다. 3동과 4동의 경우는 학이 감싸고 있는 산세인 
학소포란형을 이루고 있다.
  이 4개 청학동 중에서 어느곳이 진짜 청학동일까?
  10여일에 걸친 필자의 현장답사 결론도 그러하지만 천하의 명당인 청학동이 고운동처럼 
수몰지구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그곳은 명당이 아니라는 자백과 다름없다. 또한 청학동이 
물장사와 백숙 파는 관광지로 탈바꿈 했다는 것은 대명당에 대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므로 3동과 4동은 청학동일 수가 없다.

     정신적 청학동, 현실적 청학동

  그렇다면 청학동은 불일평전 부근과 악양면 매계로 압축될 수 있는데 예서 보이는 
시각에 따라 이상향이 다르게 드러난다.
  이중환은 조선팔도를 보고 듣고 나서 산맥과 수세, 풍토와 민속, 재물의 생산과 운송에 
관하여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각의 책을 썼다. 마땅히 살 곳을 가려서 택하라는 
의도에서 책 제목도 '택리지'가 붙였다. '택리지'는 오늘날까지 베스트셀러인데,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내용을 베껴갔다.
  한데 실세한 양반이 시야에는 조선팔도의 낙향서로 보였던지 제목을 '팔역가거지'라 
붙여버렸다. 산수유람을 즐기는 시인묵객의 눈에는 해동의 명승지 안내서로 비쳤던지 
이를 '동국산수록'이라 칭했다.
  또한 상인들의 상술에서 볼 때 돈버는 책으로 보이자 '동국총화록'으로 탈바꿈했고 
한술 더 떠 풍수쟁이들은 집터 잡는 풍수책으로 단정하고서 이를 '헝가요람'이라고 
나름대로 명칭을 붙여버렸다.
  낙향서건 돈버는 책이건 풍월놀음하는 책장이건 이는 모두 '택리지'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다. 즉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낙토적 이상향의 시야에서 이중환은 이곳 악양면 
매계를 택리한 것이며 이를 일러 청학동이라 했던 것이다.
  불일평전 부근을 청학동이라 주장했던 사람들은 김일손과 남명 조식등 강직한 사람의 
거유들이었다.
  따라서 정신적 청학동을 숭상하는 그들에겐 불일폭포의 가상이 이상향이었으며 현실적 
향리를 추구한 쪽은 당연 매계가 이상향의 청학동이 될 것이다. 결국 청학동이란 우리 
마음 속에 간직된 낙토며 이상향이다. 단지 정감록적 발복에 오염되었던 지리산은 풍수의 
세로 더 접근해 보자.

  
      한국인의 기상 발원한 영산 : 지리산의 세

  등산하는 사람과 풍수하는 사람이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면, 행동은 같을지라도 
생각들은 각각 다르다. 등산의 경우는 정상정복이라는 목표가 있지만 풍수에서는 감히 
정복이라는 두려운 말 자체를 생각하지 못한다. 천왕봉에 이르러 종주 산행길로 접어들면 
행동거지까지 달라진다. 등산가는 노고단에 이르면 하산을 시작하지만 풍수가는 
20킬로미터 더 지난 정령치 너머 고리봉에서 덕유산을 쪽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행동이 달라질까. 거기 산이 있기에 간다는 서양식 등반 정복로론은 
천왕봉과 노고단을 잇는 45킬로미터의 종주 산행을 유행시켰다. 이러한 땀빼기식 기록 
목표인 노고단에 이르면 대부분이 하산기로 접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풍수쟁이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천왕봉. 노고단. 고리봉은 직접 지리산에 와 
닿는 맥 바로 백두대간이기 때문이다.
     백두산정기 흘러와 두류산
  백두산의 큰 줄기라는 의미가 서린 백두대간.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는 백두산이 
이곳에 흘러왔다고 밝히고 지리산을 두류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세는 한반도 
가장 남단에 이르기 까지 풍수적 의미가 되는데 일직선으로 오십리를 굴러가다 남해 
앞바다로 빠져버리는 현상을 이루고 있다. 그러다 바닷길 이백여 리를 달려 또 한 번 
솟구치니 제주도 한라산이 되었다는 풍수학설을 국토풍수론이라 한다.
  지리산은 국토풍수의 영산이기에 보다 넓은 시야로 세를 잡아주어야 한다. 세란 힘을 
말하고 원초적 기운을 기라고 부른다. 가령 기운이 하늘에 있을 때는 천기라 하며 땅의 
기운은 지기요, 사람에게 붙을 때는 인기다. 천기를 받은 백두대간은 지기로 전달, 우리 
민족 모두에게 인기를 넣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이치다.
  우리는 백두정기를 이어받은 배달민족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러한 배달민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민족신화가 단군신화이고 또한 하늘의 정기를 내려 받은 산인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족보며 뼈대요 혼이다. 백두산은 이러한 천기를 백두정기라는 지기에 담아 
백두대간을 타고 흐르게 한다. 낭림산, 금강산을 거친 백두대간은 태백산과 소백산에 
이르러 그 동안 소진했던 지기를 다시 모은다.

     덕유산--지리산의 소조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의 풍수 체계를 세운다면 백두산은 태조며 태백과 소백산은 
종이 되는데 지리산과 가장 가까운 덕유산은 소조가 된다. 덕유산을 살펴보면 거대한 
흙더미가 마치 창고나 뒤주 더미처럼 육중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는 백두대간 중에서도 
덕유산이 백두정기을 가장 잘 가둔다는 풍수상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수현상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비교하면 확연히 드러난다.
  명산에는 큰 사찰이 있다는 격언이 있다. 지리산과 덕유산은 백두대간 중에서도 유명한 
산들이다. 그래서 지리산에는 화엄사, 쌍계사, 살상사라는 유명사찰뿐만 아니라 기라성 
같은 사찰과 암자들이 발복되었다.
  그런데 덕유산에는 유명사찰이 하나도 없다. 단지 창건연대마저 무명한 백련사가 
초라하게 서 있을 뿐 더 찾아본들 지리산 암자들 축에도 못끼는 폐사 직전의 
빈대절뿐이다. 덕유산은 지기를 빨아들여 가두는 산이기 때문이다.
  옛날, 고단수의 풍수승들이 어찌 이런 소식을 몰랐겠는가 기운을 빨아들이는 덕유산에 
불사의 터를 잡는 행위를 했을 리는 만무한 것이다. 이렇게 간직한 지기를 덕유산은 
지리산을 향해 엄청난 세를 불어 넣어주는 소조산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지리산의 기상 받은 인물 -- 남명 조식
  백두의 세는 덕유산 육십령. 백운산 운봉의 덕치리를 거쳐 지리산의 고리봉에 와 
닿는다. 고리봉에 천왕봉에 이르는 주능선 65킬로미터는 확연히 백두대간의 세다.
  천왕봉 가장 높은 곳에는 돌표지석이 있는데 그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한국인의 기상이 여기서 발원된다."
  천왕봉에 이른 지기가 인기로 발원한다는 맥락을 적절히 보여준 표현이라 하겠다.
  지리산의 기상을 받은 인물 중의 인물이라면 단연 남명 조식이다. 지리산의 기상은 
남명 선생의 혼이며 이는 백두 민족의 기상이며 혼이기도 하였다. 퇴계와 똑같이 
1501년에 출생한 남명의 학문은 그에 못지 않았으나 조정의 녹을 사양하고 지리산에 묻혀 
후학들을 길러냈다. 좁쌀도 없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궁핍 속에서도 지리산은 선비정신을 
이어주었다. 지리산은 워낙 장중하기에 하늘이 울려도 꿈쩍도 않는다는 남명의 깊은 뜻은 
백두대간의 무게와도 같은 거대한 선비정신이다.
  남명이 별세한 지 20년이 지나 하늘을 울리는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의 제자 60여명은 
남명의 선비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였기에 모두 의병을 모집하여 출전하였다. 그중 저 
유명한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 정인홍이 그이 제자이며 이들의 기세는 진주대첩과 
진주관민 6만여명이 목숨을 내던진 국란 극복의 민족정신으로 발원하였다.
  백두산과 지리산은 이땅의 백두대간을 붙잡고 있는 기세다. 이러한 무게를 실은 
지리산이 기우뚱거릴 때 이땅은 흔들렸고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지리산이 크게 울었던 
것이 이땅의 역사였다.
  오늘날 세상에서 섬뜩한 일들이 터질 때마다 실천 유교인 남명학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과연 지리산은 어떤 민족혼을 갖고 있는지 풍수로 그 기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금강산 머리, 월출산 꼬리로 떠 있는 배 : 지리산의 기상

  예부처 한국. 중국. 일본에는 뼈대있는 민족정서가 있었다.
  모든나라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중국 그러기에 중국인들은 자기들이 천자의 나라에 
산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일본은 태양의 중심이니 하늘의 아들보다 더 높은 하늘의 임금 
즉 천황의 나라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그들을 버릇없는 꼬마란 
의미로 왜라고 적당히 불렀다.
  일본은 무사의 나라다. 전투 때 말을 탄 사무라이의 등에는 깃발이 꽂혔고 졸개들은 그 
뒤를 졸졸 뛰어다녔다. 오늘날 어느 곳에서도 일본 관광객 행렬 앞에는 깃발을 든 사람이 
꼭 있다. 깃발이 없을 적에는 여왕벌을 잃어버린 일벌들처럼 불안해하는 정서가 
일본인들의 민족정서다.
  우리의 민족정서는 다르다. 깃발 세워 놓으면 오히려 모이질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은 어디에 모일까. 임진왜란 당시 왜의 깃발부대들이 이 땅을 헤집고 다닐 때 
임금은 피난가고 정승 판서들은 줄행랑을 쳤다. 평소에 말 잘하고 똑똑하던 양반들과 
서슬 퍼런 벼슬아치들마저 꼬리를 감춰버린 세상에서 힘없는 민중들에겐 믿을 곳이라고는 
한 구석도 없었다. 이러한 국란 앞에서 지리산은 백성들을 모이게 했고 이 땅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그림설명: 백두대간은 지리산에 기상을 주었고 국란이 닥쳤을 때 그 기상으로 낙동 
향리와 나라를 구했다.

     임진왜란과 지리산의 기상

  영, 호남 지방의 중간에서 지리산의 웅장한 산세가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이순신 장군의 
전투력은 승승장구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군은 해전에서 참패했더라도 
개전 초부토 육로로 쉽게 접근하여 호남의 곡창지대를 손아귀에 넣었을 것이며 그 경우 
이순신 장군은 양편으로 싸워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남의 곡창지대를 점령하지 못한 
왜군들은 주린 배를 움켜잡고 장기간 버틸 수 없었으니 결국 패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차츰 무르익자 왜군들은 혈안이 되어 대부대를 편성. 호남의 길목인 지리산 
자락의 낙동 향리를 공격하였다.
  지리산은 백성들을 모이게 했다. 일찍이 남명 조식은 지리산의 기상을 터득했고 이를 
선비정신과 접목시켰다. 이러한 선비 정신은 남명의 문하로 모여든 후학들에게 흘렀다. 
이들은 줄행랑친 유학자들과 달랐다. 60여명의 남명문하 선비들이 책을 덮고 칼을 잡자 
백성들은 순식간에 모여들었고 모두들 의병이 되어 왜적과 싸웠다.
  그 중에서도 현풍 선비 곽재우는 의령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주위의 낙동 향리들을 
신출귀몰하게 지키니 왜군은 홍의 장군이라면 지레 겁먹고 두려워했다. 합천 향리에서 
일어난 선비 정인홍은 성주 향리까지 왜적을 무찔렀다. 우리 민족정서는 사무라이 깃발이 
아닌 선비일지라도 결국 지리산의 기상 앞에서 우리 민족이 뭉쳤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국파산하재. 나라는 망해도 산천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표현이다. 이땅에서 우리 민족을 
지켜주었던 것은 권력을 쥔 왕조나 나라가 아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건 백제나 
고구려가 통일했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었건 그것이 민중들에게 무슨 
상관이었단 말인가. 난세에 모병과 부역 그리고 강제징수가 더욱 기승을 부렸을 뿐이지 
그러나 이땅의 산하는 의구했고 물길은 언제나 도도히 흘러 생명들을 품고 적셔주었다.
  삼천리 금수강산의 큰 줄기를 잡고 있는 자랑스러운 지리산. 이태조가 쾌씸죄로 전라도 
귀양을 명했을 적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요지부동의 지리산 일찍이 풍수승 도선은 
국역진호설에서 지리산을 다음과 같이 펼쳐보았던 적이 있다.
  "금강산을 머리로 하고 전라도 월출산을 꼬리로 할 때 둥둥 떠 있는 배모양이 
우리나라인데 지리산은 노에 해당한다.
  지리산의 기상이 우리민족 정서를 활기차게 노젓듯 저어주어야만 민족이 발복한다는 
풍수소식이 아닐는지.
  오늘날 잘나가던 경제가 성수대교 무너지듯 어이없게 내려 앉았다.
  세금포탈, 공무원의 부정이 꼬리를 물고 소비풍조는 도를 지나쳐 심각한 사회적 병폐가 
되고 있다.
  남명은 유학자지만 부정을 척결할 칼을 언제나 차고 다녔다. 그것은 유교의 
경의정신이었다. 서슬퍼런 칼날은 곧 지리산의 기상이었으며 오늘날 우리에겐 이러한 
기상과 남명의 정신적 칼이 필요하다. 민족정서를 썩게 하는 한국병을 시원스럽게 도려낼 
테니까

     지리산은 천마사풍형

  지리산의 풍수형국은 부산의 풍수를 다루면서 밝힌 바 있다. 하늘을 향해 천마가 
바람을 가르는 천마사풍형의 형국이다. 말 형국의 발복비결은 힘에 있다. 하늘을 향해 
바람까지 가르는 왕성한 힘의 기세. 이 기세에 지리산의 가상 남명 선생의 정신을 매단 
노를 저을 때 우리 민족정서는 힘차게 행진할 것이다.

      대쪽같은 업부기품 산세에서 유래 : 지리산과 남명
  옛날 전쟁에서 풍수가는 정보참모 역할도 하였다. 전장의 지리적 형세를 파악하여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고자 할 때 풍수가 특유의 관찰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막하에는 풍수가 나학천이 있었다. 그는 경상도를 
책형, 즉 산줄기들이 둥우리처럼 두르고 있다고 했다. 오늘날 지도책으로 살필 때 그의 
관찰력은 정확했음을 알수 있다. 태백산에서 지리산까지의 산줄기 (백두대간의 일부)와 
지리산에서 김해 분산까지의 산줄기 (낙남정맥) 그리고 태백산에서 부산 몰운대에 이르는 
낙동정맥들 이렇게 백두대간 낙동, 낙남정맥들이 울타리 처럼 가둔 그곳이 바로 
경상도이며 낙동 향리들인 까닭이다. 그중 낙동향리를 품은 산들 중에서도 지리산과 
소백산은 풍수상 중요하다.
  오늘날에도 당당히 국립공원 제1호라는 명칭 부여에서도 알 수 있지만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이다. 소백산은 품새의 압권으로 인해 당대 풍수가 남사고도 큰절을 올렸고 
'정감록'의 십승지가 절반 가량이나 몰려 있는 국보급 풍수요지이다.
  그림설명 : 덕유산이 탄생시키고 지리산이 완성시킨 인걸이 남명이다.

    소백산의 퇴계와 지리산의 남명
  인걸은 지령에 있다는데 어찌 이러한 산세에서 인걸이 없을 쏘냐. 1501년 소백산과 
지리산은 우리 민족에게 큰별을 두 개나 내려주었다. 하나는 소백산하의 안동 향리에서 
탄생한 퇴계 이황이요 또 하나는 지리산하 삼가 향리로 내려준 남명 조식이다.
  퇴계와 남명. 퇴계학은 설득력으로 품어주는 자모와 같아 소백산의 품재며 남명학의 
직선적이고 대쪽 같은 엄부의 기풍은 지리산의 기세를 닮아 있다.
  사람들은 두 문하를 물줄기로 구별짓기도 했다. 낙동강 왼쪽에 자리한 까닭에 
퇴계문하는 강좌 학파요 또한 낙동강 오른쪽에 자리한 남명문하를 강우학파라 칭했다.
  이렇듯 산줄기의 기풍과 물줄기로 학파를 드러낸 인걸의 탄생에는 전래되어 오는 
풍수설도 있었다. 옛날 풍수도인이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 있던 어떤 집 한 채를 두고 
큰별이 태어나는 대단한 명당이라며 인걸은 유년에 태어난다고 예언을 하였다. 다음 해가 
바로 신유년으로 6월26일에 남명이 탄생했다.

     남명의 생가 --옥토 망월형

  풍수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것을 지나칠 수 있겠는가 지리산 천왕봉에서 삼가면 
토동의 현장으로 잠시 하산해보았다. 주위의 산세가 아직도 백두대간의 험준함을 못벗고 
있는데 유독 토동만은 부드럽게 감싸는 물길에다 순하디순한 형을 보여준다. 토끼를 
뜻하는 토동의 지명과 그처럼 순한 지령의 세 한눈에 옥토망월형임이 잡혀왔다
  남명이 학문을 논했던 뇌룡정의 총관리자인 이길영 씨를 만났다. 이곳에 토끼에 관련괸 
풍수설이 없냐고 물었다. 옥토망월형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한 이씨는 그것이 남명의 
출생을 풀어내는 직접적 열쇠라는 것은 정작 모르고 있었다. 남명의 생가는 토끼의 어느 
부위에 해당하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배부위쯤이라 것이다. 이 정도면 풍수도인이 아니라 
기초만 알아도 쉽게 풀 수 있다. 땅에 있는 옥토끼는 암컷이니 이 옥토끼가 망월 즉 달을 
쳐다본다는 형상이다.
  달에는 계수나무 밑에서 떡방아 찧고 있다는 옥토끼 전설이 있다. 이 경우에는 하늘에 
걸린 것이므로 수컷이 된다.

    명종의 병폐와 직언으로 지적한 남명

  이러한 예언이 있었던 1년후 남명이 탄생했고 인걸은 뇌룡정에서 우레와 같은 직언을 
용상에 터뜨렀다. 당시의 왕인 명종이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등극하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어졌고 외척들이 득세하여 을사사화로 선비들을 무수히 죽였던 
암흑기였다. 바른말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자 탐관오리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짰다. 그러자 난세의 병패를 지적한 직언의 상소문이 남명에게서 
터져나왔다.
  "... 왕대비는 세상물정 모르는 일개 과부에 불과하고 임금은 한갖 어린아들이니... 
제아무리 성현이 정승 자리에 있다해도 국사를 바로 잡을 수 없다...
  이렇듯 대쪽 같은 남명의 기품은 지리산의 가상과도 같았다.
  "봄산 어딘들 꽃과 풀이 없으리오/ 천왕봉이 하늘에 닿는 듯 자랑스럽다/ 빈손으로 
자리잡아 먹을 거야 없겠지만/ 맑은 물이 십리나 흐르니 마시고도 남겠네."
  남명은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덕산의 물줄기 앞에 산천재을 짓고 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질산 물줄기로 마음을 씻고 정신은 천왕봉처럼 우뚝 솟아 남명학의 기풍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천석의 거대한 종은/ 큰 것으로 치지 않으며 울리지 않듯/ 지리산의 기상인 천왕봉은/ 
하늘이 울지라도 울리지 않는다."
  하늘이 울지라도 울지 않는다는 지리산의 기상 그리고 남명 사후 20년 하늘이 무너지듯 
국란이 터졌다. 남명의 제자들은 모두 의병장이 되어 일어섰다. 천왕봉의 칼을 잡고 
지리산을 방패로 삼아 기고만장한 왜적들을 지리산하의 낙동 향리에서 쓸어버려 지리산의 
장렬한 기상을 드러내었다.


     태산교악 웅장함이 국란극복 : 지리산의 기개

   웅 몰린 천왕봉에서 경상도 기질나와

  조선 정도 때 규장가 학자 윤행임은 경상도 사람들의 기질을 웅장한 기개라는 듯인 
태산교악으로 평가했다.
  낙동향리에 있어 태산의 장과 교악의 웅을 겸비한 웅장한 산이라면 지리산 뿐이다. 
태산의 장이 지리산 자체라면 교악의 웅은 단연 천왕봉이다.
  남명 조식이 천왕봉이 바라다보이는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자 
남명 문하에는 자연히 태산교악이 흘렀다. 지리산의 기상 남명문하의 기풍, 낙동향리의 
기질들이 한 살림을 차린 것이다. 이렇듯 웅장한 기풍이기에 주자 제일주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았다. 더욱이 과거시험에 매달린 세속의 선비들과도 달랐다. 삶을 위한 앎을 
가르쳤기에 지행일치을 중요시했고 이를 경의로 수행하게 했다.
  경의를 고담준론이 아닌 쉬운 말로 하자면 경은 올바른 마음가짐이며 앎이요 지라 할 
수 있으며 의는 올바른 행동이며 삶과 행인 것이다. 삶에 필요없는 앎은 오히려 병폐가 
된다.
  진주시에 있는 남명학연구원에 들렀다가 남명연구집의 장서와 자료들을 십여권이나 
기증받아 현장답사 도중 틈틈이 읽어보았다. 과연 지리산의 기상과 함께 남명학의 정신은 
국란시 왜병 20만명이 당해낼 수 없었던 웅장함 그것이었다.
  그림설명: 태산인 지리산과 교악인 천왕봉은 웅장한 기상으로 국난을 극복한 
현장이었다.
     남명정신 저력 발휘한 의병

  선조18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곽재우라는 선비가 있었다. 난세의 조정에서 낙향한 그는 
의령향리에서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임진년 4월 14일 국란이 터졌다
  개전 초부터 부산지역이 왜군에게 함락되었고 수많은 이가 순국하였다. 그러자 낙동 
향리의 수령방백들과 장수들은 두려움을 느껴 식솔들을 이끌고 도망쳐버렸다. 낙동 
향리는 텅 비게 됐고 왜군들이 침공했을 때 민초들에겐 죽음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곽재우는 앎의 책장만 넘기는 세속의 선비와는 달랐다. 개전 8일만에 민병조직을 
최초로 일으켰다. 이는 지행일치를 지체없이 실행함이며 남명학의 경의를 따랐기에 그 
조직을 의병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에 자극받아 뒤늦게 일어난 소백산하 의병들은 의자는 지리산하의 남명문하를 
지칭함과 같다하여 향리를 지킨다는 향병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한다. 6월로 접어들자 
의령 정암률에서는 함안, 의령, 함양을 거쳐 전라도 곡창지대로 진출하려는 
고하야카와군단의 왜병과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이 일대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의병전투 중 가장 큰 대전이었다.
  일시에 모인 오합지졸에다 의병장마저 글줄밖에 모르는 선비로 여긴 왜장은 의병을 
향해 집단 선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남명문하의 선비들이 보통 선비였던가. 무예는 
물론 용병술과 정보작전을 위한 풍수지리까지 폭넓게 남명에게 배운 당대 최고의 
전략가들이었으며 지리산의 기상까지 꿰뚫고 있던 선비들이었다. 왜병은 정암률 전투에서 
곽재우 의병에게 풍비박산 나고서야 도망쳐 버린다. 승승장구하던 군단이 한 번 패하면 
전열이 흐트러지고 이르 재정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곽재우 
의병장은 과감한 공격전을 펼쳤다. 설마 의병인 주제에 공격까지 하겠는가 하는 왜병들의 
생각은 여지없이 깨졌고 의병들은 현풍, 창녕, 영산 향리들을 점차 수복시켰다.
  선조6년에 토정 이지함과 더불어 5대 선비 중의 하나였던 정니홍은 남명문하의 고제다. 
환갑을 앞둔 5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국란이 터지자 남명의 칼을 잡고 지리산을 
방패로 삼아 의병을 일으켜 선두에 섰다.
  정작 관군이 왜병에게 쫓겨다니던 조선팔도에서 유독 지리산의 낙동 향리만은 오히려 
왜병이 의병에게 도망 다니는 진풍경이 개전 초부터 벌어졌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였던 진주대첩의 승리도 정인홍, 곽재우 등의 의병들이 
응원을 해주었기에 왜병 3만명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본다. 이러한 국란국복의 저력을 
선비정신이 살이 있었기에 또한 지리산의 웅장한 기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정에는 지리산에 있던 선비들이 요직으로 진출했다. 정인홍의 
경우는 영의정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정치판에 생리는 대쪽 같은 남명문하에 오히려 
치명상이 되었다. 이후 식민지 시절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때 자신들의 선조를 가장 많이 
죽인 남명정신을 탄압(사리에 흔적이 있음)했고 그 정신을 사장시키고 몰락시키려 했다.
  지금 대낮에 도시가스관이 폭발하여 안방에서 날벼락을 맞는다면 이건 생활의 난세다. 
군인들이 하극상을 벌이는 판국은 분명히 국방의 난세다. 과소비와 자존심은 
정비례한다는 판단은 정신의 난세다. 이러한 각종 난세일수록 국란까지 국복한 남명의 
정신이 우리에게 더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빈수레가 더 요란하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빈머리를 채울 남명정신을 찾던 중 
4백50여년 전 남명의 새로운 비밀이 드러났다. 그것은 풍수로 이를 밝히기 위해 산세들을 
살펴보자

     남명 문하발복 시킨 완사명월형 : 지리산의 대명당
  본래 풍수는 무덤자리나 찾아 다니는 것이 아닌 생활에 활력을 주는 동양 철학의 한 
학설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해와 달의 영향을 받는데 해와 달의 모양새는 명자 
속에 갖춰져 있다. 그러므로 명당이라 함은 해와 달의 조화 즉 음양조화의 길지라 할 수 
있다.
  음양학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겐 필수과목이었기에 퇴계와 율곡 역시 음양학에 있어선 
대가들이었다. 지리산의 기상인 남명조식의 음양학은 실로 방대한 것이어서 풍수쯤은 
한손으로 주무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것이 남명의 풍수와 지리산의 산세에 눈길을 주게 
된 이유이다 지리산은 워낙 커서 행정적으로도 3개 도로 나뉘어져 있지만 사람들 또한 
3등분 시켜놓는다.
  드라이버들은 전라북도 성삼제로, 관광객은 대개 화개에서 화엄사로 몰린다. 나머지 
등산을 하려는 사람들은 경상남도 중산리로 몰리는데 이때는 반드시 덕산마을을 통과하게 
된다.
  그림설명: 남명문하가 발복했던 터는 완사명월형의 대명당임이 드러난다

   남명 정신의 핵심은 경의

  이곳 덕산에는 신천제가 있고 남명이 생전에 안거했던 자리는 현재의 가묘자리며 그 
윗녘에는 남명의 묘소가 있다. 산천재, 가묘, 묘소 이 세가지가 모두 한 줄 위에 놓인 
격이다. 그곳의 지명 또한 줄을 뜻하는 사리다. 옛적에는 낚싯줄 륜자까지 붙인 
사륜동으로 불렸다는 것을 떠올릴 때 남명은 무얼 낚으려고 이곳의 입지들을 일련선상에 
배열 시켰던 것일까
  일제시대 때 일인들은 이러한 일련선상을 가위질하듯 경찰지서와 면사무소로 가로 
막아버렸다. 이에는 분명히 풍수소식이 서려 있을 것이다.
  남명이 어떤 인걸이었던가, 어릴 때 풍수책을 이미 독파하고 노장사상에다 음양학까지 
통한 독보적인 거목이다. 이러한 거목이 풍수를 밝혀 보려고 사리를 3번씩이나 찾아갔다.
  묘소와 가묘 그리고 산천재를 혈로 삼아 흐르는 강을 쳐다보면 좌측에는 수양산이 
우측에는 검음산 (진양지에 실린 기록을 토대로 하면 비룡산으로 추정된다)이 있다. 양은 
해, 음은 달이 된다. 음양학상 왼쪽이 양이고 오른쪽이 음이라는 원칙에도 부합되고 두 
글자가 밝히고 있는 것은 명이 된다.
  그러자 눈길은 자연스럽게 세심정으로 옮겨졌다.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인 세심정은 
남명 사후 2년 뒤에 제자 최영결이 중심이 되어 세웠다.
  남명 문하의 요체는 단연 경의다. 그 중에서도 경 공부를 얼마나 중요시 했던지 남명은 
유언에서까지 신신 당부했다고 한다.
  올바른 마음가짐이라는 의미로서의 경이나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은 일맥상통한다. 경과 
세심을 표현하는 풍수용어로서는 완자가 있다. 이제 풍수형국 하나가 선명히 드러난다. 
완사명월형 깨끗이 빤 비단 위에서 달빛이 비치듯 빛나는 인물들이 발복한다는 뜻이다. 
이는 경북 안동군 임하면에 터를 잡은 의성 김씨의 형국이기도 한데 소백산하의 4대 명당 
중의 하나다. 이곳에서 6부자가 모두 과거에 등과 발복하니 그 중에 하나가 저 유명한 
김일성이다.

    소백산의 지령과 동일한 완사명월형

  인걸은 지령과 통한다 했다. 소백산의 완사명월형과 이곳 지리산의 지령도 서로 통한 
듯 남명 문하 곽재우가 역적으로 몰렸을 때 김성일이 위기를 넘겨주었고 거창에서는 
남명의 고제 정인홍과 김성일은 머리를 맞대고 왜적을 물리칠 작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이러한 대명당의 지리산에 있다는 사실은 실로 남명과 같은 대가가 아니면 갈파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성현이 아닌 자가 차지하려들 때는 지리산의 날벼락을 맞았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사자를 검증하고자 사천 면사무소에 가 이곳 지형에 밝은 사람들 
수소문했더니 철물점을 경영하는 조온환씨를 소개해 주었다. 조씨에게 사자 지명 유래를 
물었더니 남명 선생 묘소가 자리한 산이 누에 같아서 실처럼 발복하리라는 의미에서 사로 
전해 진다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의심할 바 없이 완사명월형임이 분명해졌다. 남명은 누에가 뽑는 실 위에댜 
생전의 안가와 제자들을 놓고 앞으로 흐르는 물로 빨기 위해 산천제를 덕천 강녘에 바짝 
붙여놓은 것이다.
  남명이 직접 잡았던 묘소에 올라 패절을 대고 짚어보니 그 당시 왕가에서 최고라고 
지관들이 사용했던 왕릉장법도 훤히 꿰뚫어보았음을 알수 있었다.
  그런데 풍수법칙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위에 남명묘소가 있다. 누에의 발복처 부위에 
있다. 누에의 발복처 부위가 아니라 정수리 격에다 덜렁 올려놓았다. 그렇게 하면 직계 
발복과는 인연이 멀어진다.
  이를 심인으로 음미해보면 이 땅의 큰 별이 바로 남명이었음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1572년의 하늘에서 처사성이 빛을 서서히 잃자 당대의 풍수사 남사고가 음양의 달인 
토정 이지함에게 이를 우려하자 "어찌 내가 감히 하늘의 점지를 받았겠는가. 하늘이 
내리신 인물은 틀림없이 남명선생이다."고 토정은 말했다고 한다.
  그해 4월 큰 별은 떨어졌고 지리산 자락은 남명을 포근히 품어주었다.


     우리민족 살리는 삼신할매 탯줄 : 지리산의 여기

    뿌리 깊은 산악숭배사상
  산은 인류사의 출발지였다. 올림푸스 산과 그리스 신화의 탄생. 히말라야 산맥과 
불교의 법구경 (히말라야의 지혜라고도 함) 태산과 중국 황조의 봉선의식 등 하나같이 
산과 관련되어 있었다. 산이 없던 이집트 사막에서는 산더미 같은 피라미드를 쌓고 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산악국가인 우리나라에서의 산악숭배는 유별났다. 그러기에 입시철, 이사와 
개업,혼사와 득남, 심지어 올림픽 금메달에서 송사까지 툭하면 산에다 촛불 켜놓고 밤샘 
기도하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민족정신의 바탕을 흔히들 유불선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정신의 줄기와 뿌리가 
되었던 것도 산악숭배 사상이다. 영남 유가의 종조인 김종직도 의관을 정제하고서 지리산 
산신에게 절을 했고 불가에도 산신령을 모신 산신각이 있다.
  선가의 한 갈래였던 중국풍수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우리 특유의 산악풍수인 형국론이 
생겨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산이 험준하면 물길 또한 거칠어 그곳 향리 사람들의 억양 역시 억센 
반면, 산 모양이 올망졸망할 적에는 고즈넉한 물길의 흐름이 발음에 장단이 되어주었다.
  전자가 억센 영남의 산과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라면, 후자는 호남의 산수와 전라도의 
질편한 육자배기다. 영남 안에서도 낙동강 상류는 급류인 까닭에 경북 억양은 경남보다 
거칠지 않은가. 동편제, 서편제로 대별되는 호남의 판소리도 결국에는 산따라 물따라 한 
가름이다.
  산간지방 (운봉. 순창. 구례)의 메아리 처럼 내지르는 소리가 동편제의 특색이라면, 
평야지방 (광주, 보성)의 간드러지는 흐름이 서편제다. 이렇듯 우리 민족정신의 뿌리는 
산이며 그 위에서 풍습의 꽃들을 활짝 피웠던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의 발원은 백두산이며 마무리는 지리산이기에 양 산은 우리 것의 
종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리산 종가에선 어떤 가풍이 전해지고 있을까.
  우리는 목숨이 오락가락할 때 삼신할매나 단군할배를 뜻하는 할배 할매를 곧잘 찾는다. 
할배산은 남기가 넘치고 여기가 흐를 때 할매산이 된다. 지명풀이로서도 그것은 
드러난다. 태양의 빛인 백자가 들어간 것은 할배산이다. 봉황은 하늘이 새로서 수컷은 
봉새라 한다. 태봉이나 봉길이면 남자이름이요 황숙이는 여자이름이듯 천황, 천왕 이란 
유사한 발음은 모두가 할매산이다.
 그런 까닭에 백두산은 할배산인데 그곳에는 단군할배 신화가 전해온다. 지리산에는 
천왕봉이 있기에 할매산이며 삼신산 쌍계사 (옛 지리산의 지명은 삼신산 중에서도 
방장산이었다)라는 쌍계사 일주문 문패에서 보듯 이는 삼신할매 산임을 밝히고 있다. 
백두산과 지리산은 각각 단군할배와 삼신할매로서 이 땅의 조화를 보여준다.

    천여년 전부터 있어온 천왕봉의 성모석상
  할배나 할매에 사람들은 명치을 붙이고 전설을 연결시켰다. 우리 무속신앙에서는 
영험하다는 중국의 마고를 지리산에 입주시켰다.
  원래 지리산에 순진무구한 토박이 반야도사가 살고 있었다. 반야와 마고 사이에는 
어찌된 판인지 딸만 여덟이나 생겼다. 게다가 여기가 센 마고의 등살에 반야는 
가출해버렸는데 아직도 무소식이다.
  '1도 1딸 원칙' 에 따라 조선팔도로 배치된 이들이 무당이 되어 삼신할배의 영험을 
점지한다고 하니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어린것들을 살리는 삼신할매의 탯줄이기도 하다.
  지리산 여기의 치마폭에 오늘날 백무동이 있는데 옛날엔 백무동이었다고 전한다. 
지리산 여기로 두 지명을 검증하자면 둘다 이 빠진 밥그릇쯤 된다. 풍수소식상을 올바른 
표기는 백무을 뜻한다. 예부터 정통무당은 할배산에 박수는 할매산에 치성을 드려야 
음양조화를 이루고 신이 내렸다. 오늘날에는 이도저도 아니다. 아무리 백명의 무당들이 
백무동 계곡을 뒤덮고 강산 굿판을 벌인다 하더라도 신이 내리지 않을 것이다.
  가출한 박수 반야를 부르는 마고의 메아리가 백무이기에 여자들이 나서게 되면 마고의 
약만 올리는 행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산악숭배에서 할매는 성모다. 이런 연유에서 천왕봉에는 천여년 전부터 성모석상이 서 
있었다. 몰지각한 일부 종교집단이 자기들의 성모 명함과 같다고 산아래로 밀어버렸으니 
마치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린 격이다.
  지리산 여기에는 왕조의 부흥을 기원했던 역사가 있다. 신라 왕조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모신 제단이 지리산에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매년 봄, 가을에 국고로 제사를 지냈고 지리산 기상에 화랑 정신을 함양시켰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기실 2천여년이 훨씬 넘은 선도성모는 꼬부랑에 꼬부랑쯤 되는 
노고다. 노고의 제단이 있던 그곳이 오늘날 지리산 노고단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지리산 할매는 산 아래에 자리를 잡은 남원에도 여기를 발복시켰다. 이것이 우리 
국문학상의 걸작인 춘향전이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이제 지리산 여기의 치맛자락을 들춰만 보기로 하자.

      옥녀개화형으로 변강쇠 발복: 지리산의 여색

  삼천리 금수강사는 백두산과 지리산을 부모로 삼은 백두문중의 식솔들이다. 
백두대간이란 결국 백두문중의 뼈대를 일컫는 것이다. 백두문중은 한갖 단풍놀이의 
산색만이 아닌 그 자락에 놓인 향리와 사람들의 풍습도 함께 물들여서 백의 민족이라는 
문화색을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산기와 향리색의 유래에서 우리는 할매산인 지리산 자락에 깔린 여색들의 
발복들을 들춰볼수 있을 것이다.
  지리산 주능선 65킬로미터에 이르는 전북 고리봉에서 경마 천왕봉까지가 바로 
백두대간의 뼈대다. 그런 까닭에 이곳에 걸려 있는 여기의 명칭들은 성모 마고의 품격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아랫녘자락에는 여색적인 명칭인 춘향전부터 용녀의 치맛자락과 
함께 변강쇠의 바짓가랑이가 발복되어 있다.

    춘향전과 아랑의 전설

  지리산 자락에 매달린 남원은 매년 춘향제가 성대히 거행되는 지리산의 향리다. 낙동 
향리에 속한 밀양은 해마다 아랑제를 거창하게 치른다. 지리산에는 천왕봉이 있고 
밀양에는 천황산이 잇다. 천왕, 천황은 모두 할매산의 명칭으로 이는 여기를 뜻한다.
  게다가 남원과 밀양 사람들은 그들의 기질에 걸맞은 색조를 선택하였다. 춘향과 아랑을 
똑같은 절개의 여인상일지라도 각기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 된다.
  밀양 향리의 기질은 대쪽같다. 생각도 모나지만 행동 또한 모나다. 영남학파의 대표인 
점필제 김종직은 이러한 밀양인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남원을 대표하는 인물은 황희 정승이다. 생각은 모나지만 행동은 둥글게 했던 
황희였기에 두문불출의 72현 중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훗일 역사상 최고의 
정승으로 추앙된 황희 정승은 춘향전의 무대인 광한루를 세웠던 장본인이며 나중에 
남원에 뿌리내린다.
  버들잎 늘어뜨린 광한루에서 한들한들 그네 타던 춘향인지라 오락가락 끝에 매듭짓던 
상봉이 남원인 기질에는 맞아 떨어졌을 것이다.
  춘향전의 맥락도 결국 역사에 기록 ({삼국사기} , {고려사},  {동국여지승람})된 
지리산녀의 맥락이니 결국은 지리산 여기에 여색발복함이다.
  흔히 춘향은 미모의 여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한 이설 춘향전도 있다. 원래 
춘향은 추녀였는데 술취한 이도령이 어둠 속에서 동침하였으나 날이 밝자 줄행랑을 
쳐버렸고 일평생 이도령을 기다리며 지쳐서 죽었다는 신원설화의 일종이다.
  이어 오뉴월에도 서릿발이 내린다는 한맺힌 추녀의 원망에 액땜을 하고자 미인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 춘향전이란 이야기가. 신원설화도 결국에는 지리산 할매인 마고 
(춘향역)가 반야 (이도령역)에게 평생 버림받았다는 구성과 일맥상통 한다고나 할까
  지리산 여색에는 씨받이 여인들이 살았다는 종녀촌 이야기도 들먹여지나 압권은 단연 
등구마천에 있는 칠선계곡이다. 장터묵에서 내기 장기 하다가 하동에 빼앗겼다는 
하동바위가 있는 함양군 창암산의 줄기를 보고 있노라면 거대한 남근을 연상케 한다. 
그것의 왼쪽은 박수를 뜻하는 백무동 계곡이고, 오른쪽은 여색들이 수놓은 칠선녀의 
칠선계곡이다.
  물줄기와 산줄기는 짝을 이루어 음양조화를 이루게 마련이다. 벽송사가 자리한 그곳은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옥녀개화형이다. 터가 센 자리에 음양의 물건들이 있는데 혹시 
이것들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날벼락이 터져도 크게 터진다. 벽송사는 옥녀의 형국 
중에서도 꽃술에 자리하고 있고 뒷녘을 받쳐주는 대밭은 꽃받침에 해당된다. 꽃에는 벌 
나비가 날아와야 음양조화를 이룰 수 있다.

     벽송사의 목장승, 사찰비보의 하나

  벽송사 꽃형 앞에 민속자료 2호 인목장승 두 개가 버티고 서 있는데 이것들이 풍수걸 
작품이다. 그 중 호법대신의 목장승은 우뚝 선 물건 중에서도 뭉툭한 물건이다. 이러한 
사찰비보는 봉황풍수로 알려진 전남 곡성의 태안사 입구에 쌓아놓은 학란의 돌무더기 
비보책과 비슷하다.
  벽송사의 목장승 풍수 결국. 일은 변강쇠에서 터져버렸다. 옹녀와 변강쇠 전원본에는 
지리산의 등구마천 지명들이 뚜렷이 적혀있다.
  파란만장한 불상사의 곡예 끝에 둘은 찰떡궁합임을 확인하고 살림을 차렸다. 밤일 
때문에 낮살림이 기울자 팔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을 찾던 중 결국은 지리산의 
등구마천으로 이사오게 된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천하의 한량 변강쇠는 난생 처음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요령을 피우느라고 목장승을 뽑아 걸머지고 내려왔다. 장승을 도끼로 
패서 아궁이에 불 땐 그날 따뜻한 온돌방 위에서 웅녀와 음양조화 놀이를 하다가 그만 
오장육부 한 곳 성한 데 없이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변강쇠전의 대마는 
등구마천을 그 현장으로 삼고 있다. 이 내용은 마천향토지에도 당당히 실려 있다.
  천왕봉을 이곳 칠선계곡에서 보면 옥녀개화형이다. 결국에 천왕봉 옥녀의 고쟁이를 
우리는 칠선계곡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쟁이 속으로 여기가 잔뜩 몰리자 여색은 힘찬 변강쇠를 끌어들였고 옹녀를 
두둔한 장승 (특히 대방 장승이 설쳤다.) 들의 시샘에 급살한 변강쇠일 진데 이 어찌 
산줄기와 물줄기 그리고 벽송사의 목장승 또한 전래전설들까지 뒤엉킨 지리산의 한마당 
풍수가 아니겠는가.

     민족 생명의 맥쥔 지모의 통곡: 지리산 비목
  지리산은 이땅에서 생명을 점지하는 삼신할매의 산이다. 삼신산이라고 불렀던 지리산은 
할매라는 뜻이 노고 마고 등의 명칭들이 남아있다.
  지리산은 우리 민족을 먹이고 입혀주는 지모였다. 조선팔도에서 남원과 구례를 최고의 
기름진 땅으로 자리매김했던 이중환의 '택리지' 더불어 지리산 곁은 모두 볍씨 한말이면 
자그마치 일백마 흔말을 거둔다고 감탄하며 적어놓고 있다.
  그 자락의 동녘엔 우리 민족에게 솜옷을 입혔던 산청군 단성면 바로 문익점 선생의 
목화 시배지가 있다. 또한 지리산은 우리 계레의 민족정신을 가르쳤던 교육자였다. 남명의 
산천제가 천왕봉 아랫녘 덕산의 물줄기며 불가인 서산대사의 출가처는 화개동천을 낀 
의신사 신선 고운의 입산처도 지리산이 아니었던가
  이런 지리산에는 풍수소식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노고단 줄기가 와 닿는 형제봉 자락에는 사도리라는 행정지명이 있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에 풍수그림을 모래 위에다 그렸기 때문에 유래한 이름이다.
  이곳 모래밭에서 옥룡자 도선풍수가 개안되었기에 유래된 풍수지명 사도리 사도리 
옆에는 오리에서 변음된 오미리가 있고 삼남의 3대 길지라는 운조루도 있다.
  그림설명: 2만여개의 생명들을 끌어안고 몸부림쳤던 지리산 비극의 첫 총성은 
문수계곡에서 시작되었다.

     해방 후 금가락지 터에서 좌, 우익 충돌 격렬

  새와 오리뿐만 아니라 기러기도 평지로 내린다는 한 폭의 사도는 평사낙안형이다. 
풍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이곳에 와보면 누구나 알아차린다. 그러나 천여년 전 
도선이 이곳에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져 있다고 갈파했다. 금환낙지 소식은 아직까지도 
오리무중이다.
  주먹을 쥔 다음 집게 손가락만 펴면 이는 목이 긴 기러기와 모양새가 유사하다. 
오미리의 기러기 형국을 무심히 쳐다보면 영락없이 주먹에서 집게손가락을 편 형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집게 손가락에 해당하는 산줄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셋째마디에서 
떨어져 땅에 묻혀 있다는 일천여년 전 도선풍수 금환낙지의 소식이다.
  그렇다면 금가락지가 떨어진 그곳은 어디일까.
  문화 류씨들은 운조루라고 단정짓지만 이도 한갓 인간들의 욕심일 게다. 게다가 이 
대명당에 둥근 금가락지 대신 M1 둥근 총구를 들이 밀었던 것도 인간들이었다. 지리산의 
최대 비극이었던 광란의 첫 총성이 금가락지 터에서 시작되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해방직후 민족정기를 바로 잡지 않았던 그 당시 친일행위도 실무경력으로 인정되었고 
심지어는 고문기술자들의 육모방망이까지 날벼락을 치고 다녔다. 친일 전과자들은 
극우라는 튼튼한 밧줄을 붙잡았고 반일 감정에 고조된 민중의 장정들이 입은 군복은 
좌경의 색체로 물들어졌다. 
  여순사건이 터지자 좌경의 군복들은 망나니 춤을 췄고 우익은 우익대로 포악성으로 
줄달음질쳤다. 그 당시 AP종군기자는 이를 좌익과 우익의 사상대립이라기보다 집단적 
히스테리가 발작한 광란이었다고 평했다. 우리 민족이 어처구니 없는 이러한 칼부림의 
근본원인을 지리산 민족정기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에 
지리산은 침묵하였뿐.
  지리산에서 총부리를 서로 겨누었던 두 사람의 체험적 저술인 두 권의 책이 눈길을 
끈다. 한 권은 빨치산 출신 작가 이태의 '천왕봉' 또 다른 한권은 토벌꾼 총수였던 
백선엽의 '지리산'이란 제목의 책이 그것이다. 서로 정반대의 시각에서 저술한 책들이지만 
합쳐보면 '지리산 천왕봉'이 된다. 더군다나 서로의 주장들이 일치되는 지점까지 있어 
흥미로 있다.

     지리산 아흔 아홉 골에 있는 비목

  그렇다면 왜 칼부리과 총부림이 그토록 광란에까지 이르렀을까 역시 지리산 천왕봉은 
그와 같은 민족의 맥을 짚고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지리산은 우리 민족 생명의 맥을 
쥐고 있는 삼신할매산이 아니던가.
  이땅의 생명들을 낳고 먹이며 입히고 가르쳤던 지리산. 그러한 지모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당시 생사를 갈랐던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것도 한 핏줄을 이어받은 왼팔 오른팔에 
불과하다. 어느 하나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없다.
  그런데 제 손 잘랐다고 영웅이니 선봉이니 하며 제살 뜯어먹던 못난 손들이 서로 
해코지했을 때 지모인 지리산은 가슴이 미어지며 자신이 키웠던 민족의 생명들을 
부여잡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미처럼 통곡하였으리라.
  그후 8년간 초연이 휩쓸고 갔던 지리산 아흔아홉 골에는 비목들이 어미의 가슴을 
저미듯 세워졌다.


     신선 노니는 듯한 달 아래 불일 폭포: 지리산 풍류
  영남학파를 발복시켰던 낙동 향리 그 풍수적 진산은 지리산이다. 김종직 (밀양), 김일손 
(청도), 정여창 (함양), 조위 (김천), 유호인 (고령), 조식 (합천) 등 영남의 거목들이 줄을 
잇듯 지리산 천왕봉을 순례했다.
  그 중 김일손, 정여창의 등반답사를 기록함 '두류산기행록'은 오늘날의 등반일지에 
견줘도 단연 백미다.

     두 선비의 지리산 유람

  부산에서 출발해도 하루만에 등반이 가능한 오늘날이지만, 오백년 전 함양에서 출발한 
두 선비의 지리산은 유람은 꼬박 16박 17일이 걸렸다. 두사람은 지리산록에 싸인 곳에서 
여행의 대미를 맺고 있는데 풍류에는 벽창호라던 정여창이 청풍명월의 풍류담을 
터뜨렸다.
  "청풍과 명월 이 둘은 다 맑지만 청풍은 명월에 이르지 못한다."
  정여창이 명월 풍류를 시원스럽게 내뱉은 이곳은 그 소리마저 후련한 불일폭포 지리산 
10경 중에 하나다.
  사람이 산으로 들어서면 신선이 되고 풍류을 즐기게 된다. 그러기에 입산은 불가의 
출가며 선가의 입문이요 사림들의 낙향처였다.
  일찍이 최치원은 이러한 유불선을 담은 그릇을 풍류라 갈파했다. 이러한 풍류그릇을 
구워냈던 곳은 신이다 흐르는 물로 풍류의 질그릇을 반죽하고 있는 곳이 지리산의 
불일폭포다.
  눈에 묻은 세 속의 티를 물로 씻고 귀를 막은 속진마저 소리로 털어버린 정여창의 
마음인들 어찌 청풍명월에 동하지 않았겠는가.
  김일손도 감회에 젖었던 불일폭포 어떻게 하면 청학을 이곳에 오게해서 거문고와 함께 
벗할 것인가.
  불일폭포에서 서쪽 능선 하나를 넘으면 직전 풍수가 새롭게 밝혀지는 피아골이다. 
흔히들 직전에서 피아골이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피를 재배하던 밭, 피밭 골짜기가 
피아골로 변음되었다는 것이다.
  그림설명: 지리산 10경중의 하나인 직전단풍은 사직신 앞에 차려놓은 풍류 풍수임을 
알수 있다.

     지리산의 사직

  이런 이론과는 색다른 풍수소식이 드러났다. 예부터 조선 왕실은 종묘에 국토의 국운은 
사직에 빌었다. 사직의 사는 토지의 신을 직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이러한 사직단은 
통일신라 선덕왕 때부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세워졌다.
  이런 연유에서 사직동은 서울과 부산에 있고 오늘날 우리 지명 중에 흔한 것이 
사직공원과 사직동이 되었다.
  이 땅의 국운을 쥐고 있는 지리산 중에서 유독 이곳에만 사직단 문패들로 풍수발복되어 
있다. 곡식 신의 밭이라는 직전도 그렇고 토지면에 속하니 토지신의 교지라는 맥락과도 
통한다.
  사직의 풍수소식을 유심히 둘러보면 아예 사직단의 형국을 차려놓은 이곳 산천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직단 제례시에 제주가 있어야 하는데 지리 10경 중에서 청정한 섬진청류가 이를 맡고 
있다. 제주 다음은 당연히 촛불자리 섬진청류와 마주하는 동쪽의 촛대봉과 서쪽의 
봉애산이 그것이다.
  촛대 다음은 제물자리 촛대봉 다음이 황장 (노루고기)산이며 봉예전 뒤편이 왕시루봉(큰 
시루떡)이다.
  사직단의 대에는 토지신의 중앙을 상징하는 황색을 중시하는데 재물의 색깔 또한 
황장산이다. 이 정도 구색이면 위패을 세우고 축문을 읊조린다면 그 정성은 하늘과도 
통한다.
  위폐는 왕시루봉 뒷녘의 문바우등이 하늘에 통한다. 함은 통꼭봉(하늘 꼭대기와 통한다) 
이 축문은 그 아랫녘에 엎드린 당재며 당치가 맡고 있다. 축문의 읊조림앞에 놓인 
직전이란 제수의 메요 갱이며 시접이다.
  이러한 대사를 받아들이는 지리산 사직인 토지신과 곡식신은 어느 연봉의 영험들일까
  먼저 토지신은 삼도의 지리를 관장하는 삼도봉 (경남, 전북, 전남의 갈음점)으로 
통꼭봉 줄기의 지리연봉이다. 곡식선은 이 땅의 생명들을 풍요롭게 가꾸는 삼신할매인 
노고로서 문바우등 윗녘 지리연봉의 노고단이다. 이쯤 되어야 풍류와도 노닐 수 있는데 
직전단풍과 함께 칠선계곡은 지리산에 절색을 수놓는다.

    섬진강의 풍류

  지리산 풍류를 감고도 섬진강의 저 맑디맑은 물줄기 이를 지리 10경의 하나인 성진 
청류라 일렀다.
  지리 청산, 섬진녹수에 은어가 살았고 매천 황현이 목숨을 끊어 국치를 씻어버린 이곳 
산과 물과 사람이 별개가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산줄기와 물줄기의 흐름을 따라 국운박탈 (한일합방)에 자결한 절개는 서슬퍼런 매천이 
천류다. 이와 반대로 매천의 매풍을 아직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서정적 풍류며 그의 
문장은 한 폭의 산수도 이다.
  "향리마다 차가운 기운 감돌 적/ 철 바뀐 타향길을 가는 나그네/ 바람 일자 나귀는 
마냥 바쁜데/ 봄비 젖은 새들은 더욱 고와라/ 다사하던 복사꽃 주막 에우니/ 호랑나빈 
날따라 배에 올랐다/ 눈에 차던 맑은 강 삼십리 폭엔/ 비단 같은 쏘가리 가득하더라."

     백두대간 지령따라 반만년 인재발복: 지리산의 인걸(1)
  우리 산천에 일제가 박아 놓은 쇠말뚝 소행들은 이곳 지리산록에 묻힌 국밥집에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인걸은 영험한 땅의 힘인 지령에서 발복한다는 풍수사상 
인걸 지령을 음해하려고 저지른 만행이었다.
  한일합방으로 국토의 주권을 박탈한 저들은 정신마저 굴복시키려 했다. 이러한 
식민정책에서 자행된 것이 언어말살, 국어말살, 창씨개명과 함께 신사참배의 대두였다. 
그러나 민족정신이란 신사참배 때 숙이던 머리처럼 그렇게 굴복되는게 아니가. 오히려 
우리민족의 굴욕에는 다음과 같은 응어리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이땅을 지켜온 지령이 살아 있는 한 인걸들은 계속 발복될 
것이고 우리는 해방된다. 그러므로 너희들에게 굴복할 필요도 없다. 잠시 아주 잠시동안 
시운의 고갯길을 넘기기만 하면된다."

     일제의 단맥 풍수 소행

  상투를 자르던 단발령이 단맥 풍수의 한 예다. 맥(지령)을 절단시키려는 단맥풍수에 
앞잡이 노릇을 했던 매국노들은 다음과 같다. 소위 국풍이라 하던 구한말 왕실의 
풍수쟁이들과 총독부 이왕직 부서의 관리들이었다. 이들의 길잡이를 받아 일제가 신작로 
개설로 단맥했더니 그곳이 김해시 14번 국도며 김수로 왕릉이다.
  또한 철도부설을 핑계로 삼아 양동마을 (성현 한 명이 풍수발복될 것이라고 널리 
알려졌던 곳)에 음해를 자행하려 했다(그 당시 문중들의 결사 반대로 양동마을은 
단맥에서 피할 수 있었다)
  신작로와 철로부설로도 단맥할 수 없는 곳들이 있다. 산정상의 웅장한 바위가 그것이다. 
풍수 단맥의 차선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쇠말뚝이라는 풍수장난질이다. 아직까지 
여기서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할 풍수적 진단이 있다. 풍수원리에서 기껏해야 2미터 안팎인 
쇠말뚝으로는 민족정기가 단맥되지 않는다. 아직까지 쇠말뚝의 단맥을 믿는다는 건 
무덤풍수 수준의 안목일 뿐이다. 어쨌든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 쓰레기는 꺼림칙한 
일이라 3일간 부산의 맥점들을 직접 조사해보았다. 그 결과 부산에는 쇠말뚝 소행은 
없었다. (금정산과 구월산을 답사함)
  그럼 일제가 부산에는 단맥질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구월산 남쪽 들머리에 1939년 개설한 공동묘지 그리고 동래경찰서와 현 부산시청이 
바로 단맥풍수의 압승(맥을 눌러서 기를 죽여버림)술 책이다. 그 중 동래경찰서와 
부산시청 터는 두 개의 여의주에 해당한다. 용두산의 여의주 (용미산)을 뭉개 누른 것이 
시청이며, 마안산의 여의주 (농주산: 이는 동래부지 기록에도 나와 있다)를 헐어버리고 
잡은 것이 저들의 경찰서다. 한갓 무덤풍수 법칙으로 보자면 이러한 식민풍수의 단맥질로 
이땅은 무너졌어야 했다. 그러나 고작 이러한 술수에 인걸 지령이 놀아나지 않았다.

     땅의 힘 받아 민족정기 끊이지 않아
  천기누설에 해당될 수도 있지만 이땅의 인걸 발복의 아직까지 순항하고 있음을 부득불 
밝혀보겠다.
  제 1공화국 인걸은 이승만과 백범 김구라 할 수 있다. 황해도 평산 (이승만) 
해주(김구)로 지령이 걸린 곳은 모두가 38도 선상이 된다. 이러한 인걸 지령이 제2공 때 
좀더 남하해서 대통령 (윤보선 :아산)과 내각수반(장면:인천)들이 37도상에서 발복했다. 
제3공에서 제6공까지 이르는 군부 삼인방은 박정희(구미), 전두환(합천), 노태우(대구), 즉 
36도가 되는데 현재 제7공화국 대통령과 대선 때 맞수였던 김대중까지 정확히 1도 가량 
남하한 35도 선상에서 발복한 인걸들이다.
  우리는 다음 인걸을 이 땅의 지령원기로 예측할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진짜 
천기누설이될 것이므로 밝힐 수 없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될 점은 다음과 같은 
진리다. 35도까지 남하한 인걸지령은 역으로 또다시 1도 안팎의 운동의 사정권에 드는데 
이제 좌회전하느냐 우회전하느냐가 최대의 관견이다. 좌회전에는 경상도 인걸이, 우회전 
시에는 전라도 인걸이 대권 발복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령을 좌우로 돌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민심뿐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강조 하고 싶다.
  지리산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걸쳐 있는데 단순히 영호남의 지령산만은 아니다.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 중에서 천삼백여년을 떠메고 있는 인걸 지령이다. 삼국통일 이 고작 
한반도로 축소되고 게다가 외세인 당나라까지 간섭하게 하고 또다시 골육상쟁을 일으키려 
했을 때 이런 못난 자석에게 회초리를 들었던 지리산이다.
  그당시 지리산의 지령에 의해서 못난 자식들이 바다 건너 세웠던 것이 일본국이다. 
일본이란 명칭은 해가 뜨는 방향을 그리고 있는 글자다. 여기서 본이란 풍수원리상 혈을 
의미한다.
  어디에서 볼 때 해가 떠오르는 일본이라는 의미의 바른 방위를 갖게 될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한반도인 이 땅이다. 그러므로 이 땅은 바로 본이 되는데 그 중에서도 지리산은 
혈이 된다. 지리산의 본혈이 바다를 건너가 일본 후지산을 이루워 놓았다는 풍수전의 
옛날부터 있어왔다. (실상사의 범종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 전도를 유심히 보면 대마도는 
지리산에서 흘러가는 형상임을 쉽게 눈치챌 것이다.
  풍수란 본디 무덤이나 다루는 것에 매달리지 않았다. 타락한 풍수에 오염된 우리였기에 
일제의 얄팍한 장난질에 오금이 저린 것도 사실이었다. 더욱이 구원발복에 매달린 습성 
때문에 최근에는 '정감록'을 이용한 혹세무민적 영생교 사건 마저 터져나왔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눈을 크게 떠야만 민족정신을 되찾을 수 있다.

     봉황의 기개따라 유불선 거목발복: 지리산의 인걸 (2)
  우리나라 대통령의 문장은 봉황이고 중국인들은 그들의 황제를 황룡으로 비유했다.
  봉황과 용은 드넓은 대륙에서 수천년을 대결하였는데 그때마다 봉황이 단연 압승을 
거뒀다. 서기 597년과 647년에도 용들은 수백만의 대군을 이끌고 봉황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군의 10분의 1도 안되던 봉황의 후예들은 안시성과 살수에서 이들을 몰살시키니 봉황은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이며 황룡은 수양재와 당태종이다.
  이렇듯 자랑스러운 봉황을 고작 용(당나라)들의 철장 속에 가둔 삼국통일의 공신 
김유신은 마땅히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 아울러 철장에 가둔 봉황을 용 아래 놓인 닭처럼 
사대주의로 먹칠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사기가 아니라 민족사기라 해야 되지 
않을는지...
  봉황을 무지렁이에게 닭장 값만 받고 팔아치운 매국노 이완용도 있다.
  해방과 더불어 철장을 되찾았는데 그마저 분단된 반쪽이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그 
반쪽에는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이 있다.
  언젠가 글을 쓰기 위해 무수히 찾았던 지리산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일깨워주었다. 
지리산의 기세로 봉황의 나래가 또다시 만주벌판을 뒤덮을 때 바로 그것이 민족과 
민족정기의 풍수발복이라고...
  그렇다. 그래서 용의 정복 (요동정벌)을 기피한 (위화도회군) 이성계가 고작 
철장(한반도) 속의 왕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을 때 유독 지리산만 정면에서 반대하지 
않았던가.
  그림설명: 지리산의 봉황풍수 형국

    최초의 유교풍수 하륜

  후일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지리산을 전라도로 귀향보냈고 불복산, 반역산이란 칼을 
채웠다. 그러나 봉황의 지령이 시린 지리산이 어찌 일개 인걸에 불과한 이성계와 다투고 
있겠는가.
  그당시 이성계에 불복했던 대표적 인물은 정몽주다. 그래서일까 정몽주의 사림들을 
무수히 발복시켰던 지리산의 인연 그리고 남명에 이르러서는 사존관비 왕일지라도 
선비정신에 따르라는 기개는 어쩐지 지리산이 이성계에게 호통치는 날벼락으로 들린다.
  그렇다고 지리산이 그저 한반도에 눌러붙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비록 이성계는 
한심했지만 우리 민족의 기틀을 잡으라고 하륜을 한양으로 보냈는데 그가 지리산 지령의 
발복 인걸이다. (진주 향리 출생).
  하륜은 '정감록'적 주장에서 나온 계룡산 천도설의 무학풍수를 조리있게 누른 최초의 
유교풍수사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그가 오늘날 서울인 한양을 잡게 한 인걸이다.
  태종 때는 각 향리마다 향교를 세우게 했고 세종대왕의 사부이기도 했던 하륜. 
이쯤되면 과히 어디다 견주겠는가 이로써 지리산의 품새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운동 서원 연 주세붕

  지리산은 묘한 산이다. 과거공부하던 15세 소년을 입산시켜 저 유명한 서산대사로 
발복시키기도 하고 선비정신의 꽃인 도학의 인걸 정여창의 넋을 빼앗기도 했던 산이다.
  일두 정여창은 풍류마저 담을 쌓은 인물이었는데 그를 몇 년 간이나 지리산에서 헤매게 
만든 산이다. 정여창이 태어난 함양 향리에서 지리산 연봉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렇듯 
깊은 산이기에 그토록 심오한 도학이 개화될 수 있었겠구나 하고 어림될 뿐이다. 관학도 
정여창의 도학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는 못했다. 이에 지리산 지령은 이를 담을 수 
있는 인걸을 발복케 했는데 이가 합천 향리 출생의 주세봉이다. 주세봉의 백운동서원은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도학은 비로소 서원을 중심으로 발복하기 시직했는데 이것이 바로 낙동 향리의 
학맥이며 인맥이 영남학파다. 영남학파의 정점에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 우뚝 솟아 
있는데 두 인걸의 성품과 문하의 기풍을 후세 사람들은 소백산과 지리산에 곧잘 견준다. 
지리산 지령은 인걸들을 발복케하여 한반도의 중심인 서울을 잡고 선비정신을 발효시켜 
오늘날까지 이 땅의 정신을 떠메고 있다.
  지리산 지령의 힘을 받은 어느 선비가 연달아 세 번씩이나 장원급제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삼장계곡, 지리산 삼장계곡은 생불로 추앙받았던 성철 스님의 인연처이기도 
하니 이를 불장이라고 해야 될지...
  지리산은 현묘한 산이다. 유가에서 볼 때는 지리산이라 부르고 불가에선 방장산이라 
한다. 두류산이라 부르는 건 선가의 소식도 된다. 현묘하기에 유불선의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인간사에선 지리산 천왕봉의 여신을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라 하지만 불가에선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라 한다. 이러한 설왕설래도 민족풍수로 들여다보면 천왕봉 
문패는 어긋나 있다. 정확한 번지수는 천황봉이라는 풍수소식이다. 수컷인 봉과 암컷인 
황의 찬조인 봉황의 문패가 우리 민족의 정확한 번지수다.
  여기서 봉은 백두산이고 황은 두류산에 걸렸다. 여기서 백두나 두류는 같은 항렬임을 
알 수 있다.
  두류산의 번지수에 천황봉이란 문패가 민족지령이다. 이러한 민족지령이기에 지리산은 
국란이 생길 때마다 무수한 인걸들을 발복시켰던 것이다.
  지리산의 줄기와 경호강의 흐름이 어우러지는 산청 향리에는 필봉이 우뚝 솟아 있는데 
여기에서 덕계 오건이란 인걸이 탄생되었다. 그는 산청의 필봉산을 붓으로 잡고 경호강 
물줄기를 적신 시 한 수를 남겼는데 필자가 보기엔 지리산 지령이 흥건히 배어 있음에 
다음과 같은 운으로 풀었다.
  "지리산 내린 줄기 경호강에 잠겼어라/ 노을 실은 돛대에도 돌아갈 줄 모르더니/ 
명월마저 배에 올라 더 놀자 권하더라."

     지령 넘쳐 목민관 풍류에 백성 태평: 지리산의 인걸 (3)

  반풍수일수록 무턱대고 좌청룡 우백호 타령만 잔뜩 늘어놓는다. 우리 역시 명당 
발복에는 좌측에 청룡이 있어야 하고 우측에는 백호가 자리를 해야 한다는 상식쯤은 알고 
있다. 이와 같은 풍수상식에 다음의 원리를 덧붙여서 이해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풍수 
안목은 반풍수의 굴레를 벗어난 것이다. 좌측의 산줄기(청룡)는 꿈틀대듯 출렁거려야 
한다.
  용의 힘은 승천하는 데 있다. 승천 못한 용은 이무기며 이는 사룡을 흉하고 꿈틀거리는 
생룡이 길격이다. 우측의 산줄기(백호)는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 청룡처럼 날뛰는 
호랑이는 호환의 흉을 몰고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수원리에서 향리지명에는 청룡동은 
있으니 백호동은 없다. 향리 발복이 욱일승천하듯 뻗어나가야지 백호처럼 웅크리고만 
있다면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
  땅의 힘인 지령에 으하여 인걸이 발복된다고 믿었던 우리네 풍습에는 다음과 같은 
속담도 있다. '하다못해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나야 면장질도 할 수 있다.'고 논두렁 
정기부터 국운의 정기까지 몽땅 짊어진 지리산의 지령 산의 지령이 뱃속까지 들어가서 
어린 생명들을 지켜주니 세간에서는 지리산을 삼신할매산이라 하기도 하고 훗일 하늘까지 
열어주리라는 청학의 지령도 믿고 있다.

    지리산 청학에 걸맞는 인걸 ---최영경

  지리산 청학에 걸맞은 인걸 이라면 단연 지리산 산림 선비인 최영경이 떠오른다. 
훤칠한 키에 청학고도 같은 자태와 학풍은 오늘날까지 진주 향리를 설레게 하는 구전들로 
남아있다.
  "최영경이 걸어가면 진주가 훤했고 절개 높던 진주 기생들도 그 어른 가까이 가기만 
해도 원도 한도 없겠다고 했다."
  이러한 최영경의 풍모에는 당대의 이항복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여립 역보 때 최영경은 가공인물인 대역적 길삼봉으로 몰려 국청으로 끌려왔다. 낡은 
베옷과 떨어진 신발을 걸치고 오랏줄에 묶인 몰골로 국청에 들어섰을 때 문토 담당관인 
백사 이항복이 넋을 잃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오늘 이 노인을 보지 못했던라면 일생을 헛지낸 것이 될 뻔했다."
마치 하늘에서 청학 한 마리가 사뿐히 옥사로 내려온 듯한 풍채에서 백사는 단번에 
최영경이 무고하다는 심증을 굳혔다. 그러나 지리산 청학의 자태에 빛을 잃은 
시정잡배들은 끝까지 최영경을 물고 늘어졌다.
사후 최영경은 무고로 밝혀졌고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시정의 서류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지리산의 영험을 어찌 세 속의 푼수로 어림잡을 수 있겠는가

    연산군과 표연말

  말이 없는 지리산의 인걸 중 백마는 단연 표연말 (함양 향리)였다. 표연말은 한강에서 
폭군 연산군과 위태로운 뱃놀이를 하였다. 왕이 기녀들과 황망하게 추태를 부리자 당장 
그 자리에서 기녀들을 호통친 표연말은 왕에게 간곡한 충언을 한다.
  연산은 표연말을 한강에 처박아버리게 했다. 그리고 다시 끌어올리게 했다. 물에 젖은 
표연말의 몰골을 보고 비웃듯 연산이 물었다.
  "왜 멀쩡한 물에 빠졌다가 지조없이 또 다시 배에 탔느냐?"
  "예 중국 초나라 때 충신 굴원을 만날 생각에서 물에 들어갔나이다."
  "그럼 굴원을 보았는가?"
  "예. 만나기까지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
  "나는 우둔한 왕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으나 더 좋은 일 많이 하고 오게나 해서 다시 
이렇게 배에 올랐나이다."
  이러한 표연말의 익살에 폭군 연산마저 한바탕 웃고 말았는데 표연말의 충언이 또 다시 
시작되었을 한 폭의 한강수가 눈에 선하다.

    청렴결백했던 지리산 인걸들
  옛날에는 요즘처럼 정해진 세율이 아니라 향리 수령들이 눈짐작이 세율의 잣대가 됐다. 
눈이 큰 탐관오리를 만나면 민초들의 배는 움푹 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영남학파 출신의 목민관이 부임한 향리의 백성들은 무사했다.
  사람출신들의 유일한 낙은 풍류였고 풍류의 멋은 본래 재물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남 사람 중에서도 지리산 인걸들은 더더욱 청렴결백했다. 그들에게는 지리산 지령이 
풍족했고 만에 하나 목민관 재직시에 치부했다간 서슬 퍼런 남명 문하에서 소인배로 
파문시켰다.
  차라리 왕명을 거역하고 귀향갔으면 갔지 지리산의 파문은 사형선고보다 더한 
후대까지의 치욕이 되었다.
  지리산은 지령으로인걸들을 발복케하고 이들은 백성들을 풍족하게 했다. 이땅에 국란이 
닥쳤을 때 지리산은 무수한 인걸들을 배출시켰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의령 향리 출신인 
망우당 곽재우다.
  임진왜란 때 20만의 왜군이 이땅을 물밀 듯이 유린했을 때 곽재우는 의령 향리에서 
북을 치고 이불 호청을 뜯어 깃발을 만들었으며 가재도구를 팔아 군량미를 마련했다.
  처음 모집된 의병의 수는 고작 열명 뿐이었다. 그러나 열 명의 의병으로도 당당히 
출전하여 왜선 세 척을 물리쳤다. 이틀 후 의병은 13명으로 늘어났다. 한 달 후 
정암진에서 기세좋게 왜군의 군세를 꺾자 하룻새 곽재우 휘하의 의병은 수천명에 
이르렀다. 비록 초전 출병 때 군세가 10명에 불과했으나 이들에게는 신령스러운 지리산과 
인걸 곽재우가 있었기에 훗일 국란 극복의 밑거름이 된 의병활동의 선봉이 되었던 
것이다.

      산청과 하동, 음양조화 발복: 산청풍수 (1)
    하동은 재물발복, 산청은 귀격발복

  지리산을 사이에 둔 하동과 산청.
  하동은 섬진강을 젖줄로 삼고 동편에 자리하기에 유래된 것이다. 풍수상 물줄기는 재물 
발복을 뜻하는데 역시나 하동 갑부는 널리 소문이 나 있다.
  산청의 문패는 청산이다. 산은 발복에 있어 귀에 속한다. 산청의 경호강은 그 흐름마저 
부와는 인연이 없는 직류로 흐른다. 게다가 세상에는 산청 갑부라는 말이 회자된 적도 
없다. 재물과는 인연이 없지만 산청의 귀격발복을 풍수로 밝혀보기로 하자.
  풍수를 역으로만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방위와 택일 그리고 패철을 신주단지 
모시듯하지만 결국 음양조화가 중요하다.
  이와는 달리 산수의 모양새로 풍수를 판단하려는 자들이 있다. 이런 집단의 장광설을 
다 듣고 나면 종국엔 산수회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음양과 
산수는 똑같은 뜻이다. 물은 움직이나 동이고 양이다. 산은 멈춤이니 정이며 음이다 
아울러 조화와 회포는 같은 맥락인 것이다.
  결국 역 풍수의 음양조화와 산수회포의 형국론이 하나라는 풍수 격언 입증되는 
대목이다.

    산청의 지세는 매화낙지형

  역풍수인 음향조화로 산청에 접근할 때 옛지명 산음에 눈길이 간다. 일천 여년동안 
산음으로 불리던 이곳이 무슨 연고에서인지 1767년 산청으로 개명되었다.
  백두산은 단군할배의 양산이고 지리산은 삼신할매인 음산이다. 산음이란 지리산의 
정기를 탯줄로하여 발복된다는 명당을 가리키는 지명이 된다. 더욱이 이곳을 둘러싼 
향리들은 함양, 진양, 곤양, 광양 등 한결같이 양자가 들어간 지명들이다.
  기실 역사에서 반추하더라도 이곳 향리가 산음이었을 때 경상우도의 정신적 기둥이 
되기도 했던 까닭에 우리는 이를 음양조화의 발복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산청군청과 산청문화원에 들렀다. 그러나 산음의 왜 산청으로 
탈바꿈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을 애매했다. 일곱 살의 여아가 임신을 한 음사에서 산음이 
산청으로 개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국론으로 산청을 살펴보았다. 지리산 줄기가 내려온 자락에 산청이 자리한다. 
줄기에서 내려온 자락이란 표현과 같은 풍수적 용어로 낙지가 있다. 낙지라는 세에 걸린 
형은 무수히 많다. 재물의 형상인 금가락지. 금비녀로부터 시작하여 꽃의 형상인 복사꽃. 
배꽃. 앵두. 매화. 칡꽃 그리고 버드나무 등등.
  산청은 어떤 형일까. 이를 정확히 붙잡았을 때 장래의 산청의 발복까지 우리는 예견할 
수 있다. 산청읍의 진산은 읍터에서 자리한 꽃봉산이다. 여기서 산청은 금가락지나 
금비녀가 아닌 꽃형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꽃봉산과 회포하는 물줄기, 경호강에는 
낙지된 맥락과 통하는 평촌이 있다. 평촌 옆이 바로 매촌이다. 산청의 형국은 매화낙지의 
발복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매화의 풍수발복은 어떤 것일까 매화는 사군자 중에서도 엄동설한을 뚫고 가장 먼저 
개화하는 꽃이다. 지조 높던 산청의 남명 문하에 어울리는 꽃이다. 또한 매화는 
뭇꽃들보다 이른 계절에 피어나 독특한 향기가 두루 퍼진다. 그러므로 매화낙지형을 
무덤풍수에서는 일개 가문의 자손 발복의 명당으로 삼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향리풍수에선 인걸들의 대물림 길지로 치준다. 또한 삼베옷을 걸쳤던 우리 민족의 
엄동설한을 솜옷으로 발복케 한 목화의 시배지가 바로 산청이 아니던가.
  산청의 발복은 남명정신의 전승과 목화의 전래만이 있었던가 그렇지만은 않다. 그보다 
더 큰 풍수 발복이 있었다. 앞으로 산청의 발전마저 거머쥘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산청에 낙지를 만들어준 지리산을 흔히 생명의 산으로 부르고 있다. 어찌보면 이것도 
예매한 표현이다. 이땅의 산과 강줄기 어느 곳도 생명과 연관되지 않은 곳이 없기에 
그러하다. 지리산은 삼신할매의 산이기에 생명의 산이라면 수긍이 갈 것이다. 같은 
지리산의 생명력을 공급받는 함양의 탯줄과 산청의 탯줄이더라도 서로 다르게 해석된다. 
산청의 생명줄은 함양의 백무동처럼 무녀의 푸닥거리가 삼신할매 탯줄을 잡은 강신굿과는 
결코 다르다.
  지령은 산청안에서도 다르다. 가령 남명문하의 기상이 천왕봉의 무계라면 문익점의 붓 
대롱(여기가 목화씨를 숨겨왔다)의 발복은 산청 필봉산의 저울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게와 저울질에 지리산의 생명력을 직접 매단 산청의 발복이 분명히 
있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모두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
  더불어 앞날의 산청발복까지 열어줄 발복의 힘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덕유산의 세, 지리산의 형 조화: 산청 풍수(2)

  옛 지명이 산음이었던 산청은 다른 향리에서 들어볼 수 없는 특이한 발복 전래들이 
구전되어 온다. 그 중 하나가 초객탕 이야기다.
  조선시대 산음에는 초객이란 호를 가진 명의가 살고 있었다. 금강산 유람길을 떠난 
초객이 강원도 산골 어느 집에서 펄펄 끊는 약탕기에서 초객탕이란 글자를 발견한다. 
평생 처음 보는 처방문인지라 약탕기의 주인을 불러 초객탕의 연유를 물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딸아이가 불치의 병에 걸렸는데 이곳 의원들은 오직 산음에 있는 명의 초객만이 고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불원 천리의 산음땅을 찾아갈 처지가 못 돼 이렇게 초객탕이란 
처방문을 적어놓고서 탕제를 달이고 있다고 했다.
  그러던 중 초객 앞에서 어떤 사람이 호들갑을 떨었다. 자기 처가 난산 분만할 거 
같다며 걱정이 태산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초객은 대뜸 무얼 하나 집어주면서 기왕에 
달이던 탕제에 이걸 가미하면 순산하리라고 일러주었다. 결과는 순산이었고 사람들은 
초객의 신기한 처방술에 귀를 모았다.
  초객은 장기알 중 졸 하나를 들고 입을 열었다. 바로 이걸 집어주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라. 장기알의 졸이 앞으로만 가지 뒤로 가는걸 보았는가 이렇듯 신의로 회자되는 
전설들이 유독 산청에만 퍼져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동의 보감 저술한 허준 발복시킨 산청
  산청의 옛 지명인 산음에서 이러한 풍수발복의 탯줄이 건져진다. 산음은 음신이란 
맥락이다.
  우리 강산에서 대표적인 음산은 바로 지리산이다. 그러기에 지리산을 우리는 이 땅의 
지모산이라 하는데 정확한 지칭은 삼신 할배산일 것이다. 삼신 할매는 생명들을 관장한다.
  또한 산청 향리의 발복 형국은 매화낙지형이다. 이러한 발복은 전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오늘날까지 한방에서 불후의 대각으로 삼는 '동의보감'의 저술자 
허준은 평양북도 용천 태생이다. 기구한 처지에서 이곳 산처에 정착하게 된다. 젊은 시절 
그는 호구지책으로 지리산 지천에 널리 약초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 허준이 
덕유산 지령을 타고난 유의태(신안면 문대)를 만나자 역사적 거목으로 발복하기 시작한다. 
이 점 산청풍수의 독특한 발복 비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산청향리는 덕유산의 세와 지리산의 형이 경호강을 사이에 두고 자리잡고 있는데 이런 
형과 세가 조화을 이룰 때 여지 없이 발복이 드러난다.
  유교의 거목 남명 (삼가면 토동)과 불교의 거목 성철 (단성면 묵곡리)의 탄생지 모두가 
덕유산 세를 생가로 삼고 있다. 그런데 두 거목이 지리산 형인 사리 (남명)과 
삼장(성철)에 각각 인연을 맺자 여지없이 대발복을 터뜨렸다.

     생초면, 오부면 등의 지명 풍수 걸작
  이곳의 지명 역시 걸맞게 장단의 추임새를 갖추고 있다. 경호강이 산청 향리에서 
첫흐름을 이루는 곳이 생초면이다. 생은 명의 풀은 약초를 말함인데 이를 달이려면 
약탕기가 있어야 한다. 바로 잎이 오부면으로 가마솥 부자. 약탕기를 가리킨다. 여기서 
오는 오동나무인데 오동나무는 가야금에 적재적소가 된다.
  이러한 오동나무 처방에 걸맞게 경호강 서편에 가야금(일제 때 무의미하게 금자로 
사용된 표기는 바로잡아야 된다.)을 가리키는 금서면 약탕기에 약초를 달이던 그 소리마저 
조화를 이루는 장단의 효험은 금서면 아랫줄에서 터져나온다. 일설에 어느 선비가 내리 
세 번씩이나 장원급제하여 이름 붙였다는 삼장면을 약호에 대한 감탄사라 할 수 있다. 
  쾌차의 효험을 본 아랫녘이 시천면. 본디 시천은 살천이었다. 예서 살은 보살을 
뜻함이니 이는 간호사가 아니겠는가
  이쯤 되면 산청의 지명들이 한방으로 한 살림을 차렸다고 할 만한데 경호강이 
빠져나가는 그곳의 지명은 더더욱 걸작이다. 신약의 단자를 갖춘 단성면 게다가 윗녘 
주산이 웅담에 비견되는 웅석봉이다.
  풍수로 산청 향리를 예견하자면 이곳에 한방연구소와 약초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면 
대단한 발복을 할 것이다.

     대통령 절반 이상 득수국에서 발복

  낙동강의 물줄기를 젖줄로 하고 있는 이곳 낙동 향리에는 어떤 산천국운이 
발복되어왔을까.
  낙동정맥에는 단석산이 있다. 그곳에서 낙동정맥은 삼십리를 남행하다가 동쪽으로 
일지맥 하나를 이어주니 이러한 용맥(산줄기)은 다시 북으로 치닫더니 토함산에 이르러 
용두로 단석산을 쳐다보고 있다.
  이를 풍수에서는 용이 몸을 틀어 조상을 돌아보므로 회룡고 조형이라한다. 여기서 
회룡한 용머리는 토함산이며 단석산은 토함산이 돌아보고 있는 조상이다.
  용머리와 조상의 품안은 풍수발복터임이 정설이기도 하지만 단석산에서 토함산에 
이르기까지 유턴한 자리를 장풍국이라 한다. 즉 산줄기가 감싸돌고 있는 경주는 풍수상 
장풍국인 것이다.
  일찍이 (택리지)에서 이중환 역시 이를 밝히고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결국 장풍국의 
발복이라는 것이 풍수사들의 일치된 결론이다.
  그러나 신라의 장풍국만으로는 한반도의 국운을 걸머지기에 지력이 부족했다. 이 점이 
신라가 통일 이후에 쇠망의 길로 접어든 원인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국운을 걸머질 수 
있는 풍수형국은 장풍국이 아닌 득수국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울이 세계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것도 한강의 물줄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통일 이후 신라는 경주에서 낙동강 물줄기 쪽으로 천도를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신라의 국운은 더욱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실 경주는 낙동강 물이 
한방울도 섞여 있지 않은 터다.

       소백, 지리산 정기 농축된 물줄기: 낙동 향리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정서에 깊숙이 농축된 민요다. 그러나 유래의 뿌리는 밝혀져 
있지 않다. 밀양 향리의 아랑에서, 혹은 신라시대의 알영에서, 심지어는 불교의 보살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난무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은 어쩐지 우리 정서에 자연스럽게 와닿지 못한다. 민족정서를 
발효시킨 것은 이 땅의 산천이다. 산천 정서를 가장 잘 아는 것은 풍수다. 그러기에 
풍수로 아리랑의 뿌리를 더듬어보면 강줄기에 걸린 우리 민족의 정서가 드러난다.
  기실 우리 옛말의 '아리라' 는 강줄기를 뜻하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의 서정민요 태동 
역시 강줄기를 무대로 한 '공무도하가' 였다는 문헌상의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아리랑고개란 강산의 거울이다.
  이렇게 볼 때 경주의 장풍국보다 득수국인 낙동 향리의 발복이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고 
본다. 장풍국에 뿌리를 둔 경주 김씨보다 득수국의 발복인 김해 김씨가 두 배 이상이나 
된다.('85년 국세조사에는 남한에 경주 김씨 152만, 김해 김씨 376만으로 집계돼 있다.')
  더욱이 조선시대 조정반열을 이루었던, 영남학파의 인걸들 역시 낙동향리 출신이 
압도적이었고 오늘날까지 대통령의 절반 가량이 이곳에서 발복되지 않았던가.

     득수국 이룬 낙동 향리 발복 계속될 것

  앞으로 들어닥칠 세계화란 무한경쟁시대라는 것이지 결코 세계 인종의 단일화란 말은 
아니다. 이런한 세계화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민족은 당연히 뿌리가 굳건한 
민족임에는 의심할 바 없다. 더불어 이 땅의 뿌리 중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터는 단연 
낙동 향리라는 것이 풍수적 예견이다.
  우리 국토에는 풍수상 대단히 중요한 산들이 있다. 지리산과 소백산이 바로 그 중의 
하나다. 지리산은 도선풍수를 개안시켰고 소백산은 당대의 풍수사 남사고까지 넙죽 절을 
했던 산이다. 오늘날 민족정신의 거두인 퇴계의 발복을 소백산문하라 하고 남명문하를 
지리산문하라고도 하지 않던가.
  낙동 향리는 바로 두 산의 정기가 농축된 물줄기를 젖줄로 한 득수국이기에 낙동강이 
오염되지 않는 한 계속 발복할 것이다.
  오늘날 세계화 대열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일본. 그 곳은 이곳 낙동향리에서  전래된 
민족일 뿐이다. 그런 그들이 바로 얼마전 이곳 부산에 왔다. 도시오 타지마를 단장으로 
한 동경도시계획국 공무원과 오키나와 도시계획 담당자, 그리고 일본 풍수사까지 10명 
가량이 몰려왔다.
  그들의 도시계획에는 풍수가 반영된다고 한다. 그들의 풍수답사에 중요한 현장풍수와 
오키나와 요미 땅 도시계획 풍수 분석을 필자가 직접 담당하였다. 그들은 한국풍수의 
우수성에 대해서 격찬했고, 이를 도시계획에 반영하겠다는 말과 함께 현지초청설까지 
나왔다.
  한데 부끄럽게도 이 땅의 현실은 어떠한가. 무덤이나 파헤치는 반풍수가 대다수다. 
풍수의 본모습은 우리 민족정서의 뿌리에서부터 미래의 도시계획까지 활용될 수 있는 
우리의 값진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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